[SKT] #001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1 날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공허하리만치 커다란 편지지 위에 쓰여 있는 문장은 단 한 줄 뿐이었다. 혼자되는 연습을 하는 거... 정말 힘드네요.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까끌거리는 종이를 매만지자 내 손가락 사이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가끔 착각한다. 그쪽은 날 잊었을 텐데 왜 나 혼자서만 계속 집착하고 있는 거냐고. 우린 그렇게 서로 4년 동안 착각했나보다.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1. “이야아아아! 정의의 검을 받아라앗! 이 극악무도하고 오만방자하며 혹 세무민하기 짝이 없는 어둠의 마법사여!” 쩌렁쩌렁 거리는 ‘용사님’의 진부한 고함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날도 없는 가짜 칼을 뽑아 들고 잘도 소리치고 계시는군. 하품이 나오긴 하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할까나. 그런데 한술 더 뜨는 쪽은 ‘악의 마법사’ 였다. “오오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강하고 정의로운 건가요. 앞으로는 악하 지 않게 살 테니 부디 제게도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세요.” 에이이! 자존심도 없는 마법사 같으니라고. 악인이면 악인답게 배짱을 가 지란 말이다! 오늘 같이 맑은 날, 이런 촌극이나 보고 있어야 하다니. 내 솟구치는 짜증에도 불구하고 용사는 기어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고야 말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본 뒤에 속주머니에서 꺼 낸 빨간 약병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던 것이다. “바로 이 용사 드링크를 먹으면 당신들도 나처럼 강하고 정의로울 수 있 다!” 광장 분수대에 쭈그려 앉은 채 그 유치찬란한 세기의 대결을 지켜보던 나 는 아주 익숙한 리듬에 실린 그 광고 대사를 중얼거리며 따라했다. 벌써 네 번이나 저 연극을 지켜본 탓인가, 싫은 대사를 외워 버렸다. 그리고 그 용사는 대뜸 힘차게 그 병을 따고는 벌컥 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아아 벌 써 저 괴상한 걸 네 병째 먹는 구나. 힘이 불끈불끈 솟고 정의감이 부글부 글 끓어오르긴 커녕 저렇게 마셔대다간 약물중독 걸리는 거 아냐? 크아아아! 하고 입을 닦으며 빈 병을 집어던진 용사의 얼굴은 그 약에 물 려버렸는지 뭐 씹은 표정을 참는 것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럼 이제 마법사 의 차례. 그는 과장된 몸집으로 용사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광장이 떠나가 라 소리쳤다. “아아니! 그런 귀한 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용사님!” “놀랍게도 이 용사 드링크는 단돈 10셀링만 있으면 누구라도 구할 수 있 노라! 그러니까 저 골목으로 들어가서 조금 가다보면 빨간 간판이 나오는 데....” 저 ‘용사님’은 무더운 날씨 덕에 비 오듯 굵은 땀을 흘리며 ‘용사 엑 기스’를 파는 만물상의 위치를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비참하게스리 정작 그런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세 명의 꼬마들과 나 하나 뿐. 그러니까 그런 시시껄렁한 연극으로는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 수 없다니까 그러네!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광고 연극은 10분 후에 시작됩니다!” 그 성분을 알 수 없는 ‘용사 드링크’를 오늘만 네 병이나 마신 덕에 얼 굴이 사색이 된 용사님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고 곧 무대 뒤로 사라졌다. 나는 문득 저 ‘용사’가 악룡(惡龍)과 싸워야 하는 진짜 용사 만큼이나 불쌍하게 느껴졌다. ‘10분 후엔 저걸 또 마셔야겠군. 그야말로 죽음의 강행군이네.’ 광고 연극이라는 것이 있다. 배너 연극(Banner drama)이라고도 불리는 그 것은 현재 모든 도시들 사이에서 대유행이다. 쉽게 말하자면 상점들이 돈 없는 연극인들을 고용해서 자기들 제품 홍보를 시키는 선전 연극이랄까. 이젠 어느 도시 광장을 가도 용사vs마법사, 기사vs드래곤, 왕자vs마왕.... 가끔은 실험적으로 공주vs변태귀족을 모델로 한 광고 연극들이 왁자지껄 판을 치는 꼴을 볼 수가 있고 - 결국 마지막에는 ‘무슨 무슨 약을 사 처 먹어라!’ 혹은 ‘이런 옷을 입어야 여자들이 덤빈다!’ 라든지 ‘오늘 식 사는 아무개 식당에서!’라는 식의 지극히 뻔하고도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멘트로 끝을 맺는다. 때로는 인기 연예인을 고용한 값비싼 광고 연극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조잡한 시설에서 급조한 티 풀풀 나는 소품들에 허 구한 날 똑같은 캐릭터에 똑같은 내용만 판치는 그렇고 그런 삼류 연극일 뿐이었다. 서글프긴 하지만 그래야만 먹고 살 수 있다는데 별로 빈정거리 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이 미온! 많이 기다렸지!” 예의 용사님이 손을 흔들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분수 근처에 기대어 있던 나도 실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주었다. “오랜만이야. 약물 중독 용사님.” “내 연기 어땠냐!” 얇은 철판으로 만든 투구까지 꿰차고 있는 친구 놈의 모습은 용사는커녕 길거리 불량배들에게조차 깔보여 두드려 맞을 정도로 유치찬란해 보였다. “아아. 정말 실감났어. 손에 땀이 다 맺혔다니까?” 난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이 친구는 고향에서 나와 같은 일을 하 던 중에 더 이상 못해먹겠다면서 때려치우고 이 수도로 올라온 녀석이다. 왕국 최고의 연극인이 되서 왕궁극장에 서는 것이 꿈이라고 했던가? 뭐 결 과는 왕궁 근처에 있는 이 광장에서 드링크 판촉 연극을 하고 있으니 그 꿈에 꽤 근접한 셈일지도 모르겠군. “너. 그 일을 그만 둔거냐?” 이 후덥지근한 더위 속에서 두꺼운 무대 복을 입고 있던 친구는 곧 다시 시작할 연극을 대비하는 듯 꾹 참고 옷을 입은 채로 내게 물었다. 일을 그 만뒀냐고?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만 둔거야. 넌 인기도 많았잖아.” “그러는 넌 왜 그만뒀냐.” “그거야 난 고객들한테 인기가 없었으니까.” “그럼 인기가 있었다면 계속 그 일을 했을 거란 의미냐?” “글쎄다. 난 정말 연극을 하고 싶었으니까 어차피 그만두었겠지.” 녹슨 동전들이 잔뜩 잠겨 있는 분수 속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그는 굳이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난 미지근한 분수물에 손을 담그며 입을 열었 다. “그래. 이제 연극 하니까 속 시원하냐?” “시끄러 임마.” 끈끈한 땀 냄새가 옷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그는 용사님의 내 뒷머리를 가볍게 때리며 다시 뜨겁게 달궈진 투구를 썼다. 슬슬 다시 광고 연극의 무대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리라. 이 녀석, 한때는 장안에서 내놓으라 하는 미소년이었는데 지금은 많이도 닳고 닳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갑자기 악 의 마법사도 벌벌 떠는 ‘용사 드링크’ 하나를 꺼내선 건네주는 것이 아 닌가. 난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받아 들이켰다. 아무래도 목이 말랐으니까. 그런데! “으아아악!! 맛없어! 내장이 끊어질 것 같은 맛이잖아 이거! 넌 어떻게 이 따위 걸 연극 할 때마다 마셔재낄 수 있는 거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오.” “쓰다고 꼭 좋은 약도 아니야! 벌꿀은 달콤해야 하는 거 아냐? 대체 어 떻게 제조하면 이런 흉악한 벌꿀음료를 만들 수 있냐!” “알게 뭐야. 한 가지 확실한 건 벌꿀같이 비싼 건 안 들어갔다는 거지.” “뭐? 벌꿀 음료라고 써 있는데?” “넌 광고를 믿냐?” “쳇. 사기꾼들.” 난 빈병을 분수대에 놓으며 투덜거렸다. 시장통에서 파는 만병통치약 같 은 것이 다 이렇게 속빈강정이지. 하지만 별 볼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광 고를 때리면 줄창 팔려나가는 이유는 또 뭘까. 그가 무대로 떠나기 전 물 었다. “야! 그런데 넌 왜 수도에 왔냐? 나처럼 연극이라도 하시게?” “아니올시다. 내 꿈은 아주 높은 곳에 있다네.” “높은 곳?” “이거.” 난 자랑스럽게 품속에서 추천장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도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는 엄청난 추천장이란 말씀. 잉? 그런데 그 녀석이 내 추천 장을 읽어보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것이 아닌가. 왜 저러는 거야 저 녀 석? “너....... 바보 아니냐!” “얼레?” “이런 추천장 달랑 한 장 가지고 될 일이냐 이게!!” “왜에. 그게 어때서.” “어떻긴! 세상에 이런 일이 추천장을 통해서 되는 경우가 어딨어!” 그가 손으로 추천장을 팡팡 치면서 소리쳤다. 난 내 소중한 추천장을 잡 아채며 말했다. “씨잉. 이거 가짜 아니다 뭐!” “아이고 황당해라. 뭐 좋아. 네 인생이니까 네 맘대로 하셔. 하하핫! 예 전부터 넌 정말 엉뚱한 녀석이었어.” 그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무대로 걸어갔다. 아니 대체 이게 어때서 그러는 거야! 라고 말을 하긴 했어도 확실히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긴 있 다. 정말 이런 일이 추천장을 통해 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난 커다란 내 가방 위에 주저앉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잠시 지난 일을 떠올려 보자면 말이지.... 2. 누님이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사표를 던진 내 팔을 부여잡고 눈물 까지 글썽이는 통에 난 한참 동안 마담 누님을 설득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누님 가게의 간판스타이자 총 수입의 절반을 벌어다 주는 보물단 지였으니까. “무슨 소리야 미온! 그만두겠다니!” “오늘부터 저도 성인이고 이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싶어서요.” “하, 하지만! 너는 이쪽 업계에서는 천부적이라고! 넌 이쪽에 있으면 크 게 성공할 거란 말이야! 그런 재능을 썩히겠다는 거야?” “미안해요. 하지만 제 꿈은 다른 쪽에 있어요.” “꿈? 대체 뭔 놈의 꿈! 이 좋은 직장 버리고 대체 무슨 직업을 구하겠단 거야!” “그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직업이 있다. 일상적인 직업으로는 한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재상부터 밤만 되면 도시의 가로등을 밝히는 점등부까지, 특이한 직업으로는 드래곤을 때려잡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드래곤 슬레이어부 터 뒷골목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소매치기까지. 모르긴 해도 이런 직업 저 런 직업 다 합치자면 아마 수천 개는 가볍게 넘어갈 것이다. 물론 나도 그 런 직업들 중에 하나를 선택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제로 선택 받 았다. 누님은 여전히 날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다시 생각해 볼 수 없겠어? 응? 넌 평민이 벌 수 있는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고 그 재능에 맞는 직업을 선 택하면 인생의 절반은 행복하다고. 적어도 나는 나의 재능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 아 칭찬을 아끼지 않은 나의 희귀한 재능 두 가지는 바로... 1. 남자도 반할만한 미남자 2. 어떤 여자와도 5분 안에 친해질 수 있는 말재주 결국 위의 두 가지 장점을 조합하여 나올 수 있는 나의 천직을 심각하게 고심하신 부모님께선, 내가 열네 살 되던 날 그 직업을 점지해 주셨다. 뭐 확실히 내 재능에 어울리는 직업이기도 하고 이쪽 업계에선 일류라고 자부한다. 그러니까 내 직업은 호스트다. “흐응. 너 미온이라고 불러도 되지? 맘에 드는데. 어때 내 별장으로 놀 러오는 건.” “저는 출장은 가지 않습니다, 미안해요 누님.” “어머 꽤 까다롭네. 그래도 귀여워어.” 그러니까 대충 고객들과 이런 소름끼치는 대화가 오가면서 술을 따라주거 나 과일을 깎거나 아주 간드러지는 춤을 거뜬히 출 수 있는 것이 바로 나 엔디미온 키리안! 방년 20세다. 뭐 이 직업에 전혀 자부심이 없는 것도 아 니고 (자랑은 아니지만) 사방에서 스카웃 제의가 올 정도로 실력도 좋다고 자부하지만....... 문제는 이건 내 꿈과는 우주의 끝에서 끝만큼 거리가 있 다는 것. 귀한 아들의 직업을 호스트로 못 박으신 부모님도 상식 밖이지만 (아니 열네 살짜리 자기 아들이 촛불 밑에서 재롱떨며 술 따르는 것이 그 렇게도 흡족하셨습니까!) 나로서도 제 정신이 박힌 청년인 이상 이 바닥에 서 뼈를 묻어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심은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화 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사는 게 다 그렇듯이 나도 언젠가는 늙고 신이 내린 이 미안(美顔)도 시간의 풍파 속에서 끝없이 깎여 나간다. 아름 다움이란 지혜와 달리 품고 있을수록 허무해 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라는 어려운 말 꼭 쓰지 않아도 이 직업은 솔직히 지긋지긋하단 말이야! “널 보려고 오는 고객만 수백 명이야! 죄다 팁으로 금괴를 내놓을 정도 로 갑부들이고! 그런데도 그만두겠다는 거야?”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꼭 동일한 건 아니니까요.” 난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대로 내가 중년이 되면, 난 내 가게를 열고 마담이 되어 내 후배 호스트들을 관리하는 ‘고위직‘으로 올라가야 되는 데 내 미래의 꿈을 호스트 바 관리자로 끝내버리는 것의 어디가 슬기로운 인생설계란 말인가! 세상을 살다보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좋아하는 일을 선택이라도 해보고 실패하는 것이 옳지 않 을까. 인생에 실패할 시간은 있어도 주저할 시간은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래서 결정했다. 2. 그러니까 나는 베르스 왕국 출신 목수의 아들이다. 즉 베르스 시민이며 평민이라는 의미. 그리고 다 아는 사실이지만 평민은 귀족이나 왕족이 특 별히 허가해주지 않는 이상 고귀한 성당 묘지에 묻힐 수 없다. 평민들에겐 화장(火葬)을 장려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 돈이 많다는 건 편한 거다. 난 10대에 보통 평민이 평생 벌 돈을 너끈히 모았고 그 돈의 절반을 성당 에 기부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성당 묘지 안에 안치시킬 수 있었다. 부모 님께선 1년 전 마차 전복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잘 쉬고 있으세요? 아버지 어머니.” 내 직장 ‘미소년의 숲’(이 이름, 굉장하지 않은가?)에 사표를 던진 뒤 난 부모님이 쉬고 있는 커다란 석비(石碑) 앞을 찾아 무릎 꿇었다. 성당에 서 팔고 있는 향(香)단지를 하나 사서 돈 있는 자만이 초대 받을 수 있는 무덤 앞에 놓은 뒤에 잠시 눈에 밟히는 삐쭉한 잡초들을 뽑아냈다. 쯧! 묘 지 관리 좀 제대로 하지! “저....... 반항하려고 이런 말 하는 건 아니지만요.” 잡초들을 솎아내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솔직히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내 결정에 찬성할 리가 없다.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 뒤에 살기를 드러내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단다.’라는 협박어린 격언을 들려줬을 것 이 뻔하다. 그러나 부모님, ‘인생은 한번 뿐’이라는 격언도 있답니다. 그러니까... “전 기사가 되겠습니다!” 나무 위의 하얀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오싹. 난 갑자기 부모님이 날 확 쏘아보는 것 같은 기분에 몸을 움찔했다. 알고 있어요. ‘기사’라는 것 평민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다가 꽃미남 같은 건 조금도 기사가 되기 위한 장점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이번에는 좀 봐 달라구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예? “......라고 중얼거려봐야.” 난 부모님께서 더 이상 대답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새삼 눈가에 물 이 고였다. 그냥 부모님께서 어쩔 수 없이 내 소원을 들어준 셈 치자. 허리 끝까지 내려오는 내 금발이 바람에 휘날려 귓가에 간질거렸다. 부모님은 분명히 내 결정을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나의 재능과는 별로 관계도 없는 '모험'을 시작한 것이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날 믿어준다고 믿자. ‘어째서 넌 항상 그렇게 엉뚱한 거니!’라고 푸념을 늘어놓으시면 서도 지금 고향을 떠나는 내 옷깃을 다듬어주고 잘 다녀오라며 머리를 매만져 줬을 것이라 믿 자.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그러셨을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 거다. 난 예법대 로 단도를 꺼내 머리칼을 조금 잘라 손에 쥐었다. 마치 금실을 움켜쥔 듯 밝은 머리칼이 한 뭉치 손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을 무덤 한켠에 고이 놓 은 뒤 성당을 빠져나왔다. “다녀올게요.” 돈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성당의 꼭대기에서는 신도들을 부르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3. 내 나이 열세 살이었을 때 이 도시에 왕립 기사단 소속의 젊은 기사님 한 분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물론 난 그때도 도시최강 미소년으로 수많은 유 흥업소가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진부한 이야기긴 하지만 가지런한 은발 에 그림 같은 눈썹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그 기사님은 (부모님의 손에 의해) 여장을 한 채 길거리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 내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분명히 말했다. 아직도 그 목소리는 또렷이 기억이 날 정도다. “귀여운 꼬마로구나. 네가 성인이 되면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오지 않 겠니? 너라면 입단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스왈로우 나이츠! 뭐 꼭 야구단 이름 같지만 어쨌든 그것은 왕립 신전기 사단의 명예로운 명칭이었다. 그리고 그 분은 내게 성인이 되면 왕궁으로 오라면서 추천장을 하나 건네주었다. 평민인 내게 이런 과분한 관심을 보 여주다니. 게다가 내게 호스트가 아닌 다른 직업을 권해준 건 하늘에 맹세 코 지금까지 그 분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그 추천장을 소 중하게 간직하며 성인이 올 날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굉장히 순진하고 단 순무식한 녀석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 없지만, 세상사람 중에는 어렸을 때 동경한 것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그런 녀석도 있는 것이다. “뭐? 그러니까 기사? 기사가 되기 위해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예.” 마담 누님은 무척이나 당혹스런 눈초리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의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뀌더니만 갑자기 날 쏘아보는 것이 아 닌가. “화 안낼 테니까 사실을 말해. 다른 업소에 스카우트된 거지 너!” “지, 진짠데!” “웃기지마! 기사를 꿈꾸는 호스트가 어딨어!!” “......여기요.” 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폭 숙였다. 아니 이거 뭔가 대단히 무시 당한 기분이다. “어째서 기사 같은 걸 원하는 거야! 그건 귀족들이나 하는 거라고!” “하지만 어려서부터 꿈이었으니까요!” 너무 솔직해도 오해 받는다. 누님은 세게 뒷머리를 강타당한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큰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편히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 단지 창피 하게스리 어른 주제에 '꿈'이라고 말해 버렸다. 그런 꿈을 쫓아가며 살기 에 세상은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또 그렇기 때문 에 고집을 부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어느 업소야! 거기서 얼마 부른 거냐고!'라며 내 팔을 잡고 광분하는 누님을 진정시키느라 난 수도 아스말 행 열차를 놓칠 뻔 했다. -Blind Talk 우욱. 연재 첫날부터 숙취에 시달리다니...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SKT] #002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2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4. 이 시대의 ‘열차’라는 놈이 좀 웃기는 원리로 움직이다. 역에 정차할 때마다 플랫폼에 서 있는 마나인젝터(Mana-injector)라 불리는 직업인들로 부터 마나를 주입받는 이 열차는 - 그러니까 생체 에너지를 연료로 달리는 마나엔진인 것이다. 당연히 철도국은 길드나 아카데미 소속의 마법사들을 마나인젝터로 고용했고, 그들은 열차가 도착할 때마다 엔진과 연애라도 하 는 냥 뜨거운 열차 엔진을 꼬옥 포옹한 채 마나 연료를 불어넣어 줘야 했다. (보는 사람 민망하니, 이 연료주입 방식 좀 해선해 줬으면 한다.) 한 구간을 달릴 때 필요한 마나의 양은 황소 열 마리에서 추출할 수 있는 생체 에너지라고 한다. 그래서 결론은....... 덕분에 열차표가 무지하게 비싸다는 것이다. 평민이 열차 한번 타려면 일년 벌 돈을 한 방에 투자해 야 할 정도로! 열차표는 아무나 살 수 있긴 했지만, 솔직히 귀족들 외에 누가 그런 값비싼 열차를 탈 수 있을까. 웃기지 않은가? 마차와 비슷한 속 력으로 달리고 마차처럼 지름길로 빨리 갈 수도 없는데도 값은 마차 삯보 다 몇십배나 비싸다니. 그런데도 요상한 점은 이 마나 열차를 타는 귀족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귀족들은 운송수단에게서 운송수단 이상의 무언가를 만끽하고 싶은 모양이다. ‘젠장. 마차탈걸 그랬나.......’ 아 이런 말 해놓고 창피하지만 사실 나도 지금 마나 열차를 탔다. 솔직히 난생처음 수도에 가는 것이니 기분 좀 내고 싶었다. 평생소원이 열차 타고 대륙 일주 한번 해보는 것인 사람들도 많으니까 말이야. 나 역시 이 쇳덩 이가 말이나 소도 없이 혼자서 척척 움직인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긴 하지만, 이거 한번 타느라고 내 한달 벌 돈을 모조리 날려버린 것을 생각 하면 머리가 다 멍해진다. 게다가 승객들 대부분이 귀족들이니 이거 원 송 구스러워서....... “자네 말이야.” “예?” 내 앞의 노신사가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 특급열차는 식당 칸을 제 외하면 모두 1인용 특실과 2인용 일반객실로 이뤄져 있다. 1인실은 상급 귀족 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니까 난 당연히 2인실이다.(물론 2인실 역시 모조리 호박빛 향나무로 벽 장식한데다가 푹신한 시트 천은 호사스런 주단이었다.) 나와 같은 객실에 들어온 노신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뜯어보 고 있었다. 바짝 마른 몸에 외알 안경, 손에는 하얀 장갑에 검은 턱시도까 지. 새하얀 백발을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깨끗이 넘긴 모습마저 정말이 지, 온 몸에 '권위'와 '위엄'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 노인이었다. 분명 히 커다란 분수가 딸린 정원까지 있는 대저택에 살며 저녁 식사 때엔 밥상 을 뒤집어엎으며 '난 오리고기를 싫어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라며 요리사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모범적인 귀족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 꼬장 꼬장해 보이는 노귀족이 대뜸 입을 열었다. “자네는 호스트지?” 어! 뭐, 뭐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난 내 가슴에 ‘전 호스트입니다.’라 는 이름표라도 붙어 있는지 한참 동안 내 몸을 훑어보았다. 이 할아버지, 어떻게 안 거지? “호스트로군 그래. 흥흥.” 그의 깡마른 얼굴에 약간의 멸시를 첨가한 비웃음이 드러났다. 아니 왜 비웃는 거야! 호스트의 고객 대부분은 당신들 같은 귀족들이라고! “수도까지 가서 몸을 팔려는 건가. 이런 말하면 기분 나쁘겠지만....... 역겹군. 아무 노력도 없이 운이 좋아 얻은 그 얼굴로 장사를 해먹는 짓이 부끄럽지 않나?” 난 이 노인네의 이름도 모른다. 그러나 만난지 1분 만에 이 사람이 세상 에서 가장 싫어졌다. 수도까지 가는데 반나절이나 걸리는데, 반나절 동안 저런 소리 듣다간 달리는 열차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이 노인네를 집어 던 질지도 모를 일이니, 난 이쯤에서 기선을 잡기로 했다. “그래요. 노익장의 말대로 전 방금 전까지 호스트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만으로 초면에 역겹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요? 제 얼굴은 부모님이 내 려주신 선물 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선물을 모독하는 언사는 그만둬 주 세요. 그리고 예쁘장한 얼굴만으로 장사를 할 수 있을 만큼 호스트가 만만 한 직업도 아닐 뿐더러 전 몸을 팔지 않습니다.” 난 내 보라색 눈빛으로 도발적인 광선을 뿜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장기 상대라도 만난 듯이 도전적인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었다. “자존심인가? 너희 같은 족속들에게도 자존심은 있나?” “당신이 자존심이라 착각하고 있는 아집과 권위는 없습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서로 이름도 모르는 나와 노인네가 살기 어린 두 합을 겨루며 스파크가 터졌다. 보통 이 쯤에서 혈압이 오른 귀족이 '이런! 건방진 평민 놈이!'라면서 본색을 드러내야 보통인데 이 노인은 오히려 재 미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잖아? 설마 나 지금....... 말싸움 의 달인을 잘못 건드린 건 아닐까. 그가 주머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지금 내가 이 안의 금화를 다 준다면 이 열차가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날 위해 봉사해 줄 수 있겠나? 어때. 횡재 아닌가? 지금까지 자네에게 이 정도 황금을 제시한 고객은 없을 텐데?” “싫습니다!” “흥흥. 돈이 부족한가? 아니면....... 그 알량한 자존심?” '지랄한다.'라는 육두문자가 목 끝까지 끓어올랐다. 내가 사람(대부분 여 자) 기분 달래주는데 이력이 난 사람이라면, 이 이름 모를 양반은 사람 신 경 긁는 기술을 배우는데 한평생을 바친 것 같다. 난 솟구쳐 오르는 짜증 을 참아내려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린 채 길고 밝은 금발을 연신 쓸어 올렸다. 자,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좋아요! 봉사해 드리죠.” “응?” 난 순간 그의 묵직한 돈주머니를 낚아챘다. 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난 진짜 자존심이 센 호스트라서 몸을 팔지도 않고 거만한 변태 늙은이 에게 애교도 부리지도 않아요. 게다가 이걸 어쩌죠? 여긴 술도 없는데요. 대충 내 얼굴 보는 것만으로 봉사 받은 셈 치세요. 그럼 이 금화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아! 이제 어쩔 테냐 짜증 늙은이! 결국 얼굴이 일그러져선 이 돈주머니 를 다시 빼앗아 가려고 천박하게 덤벼들겠지? 그럼 나의 승리다. 점잔 떨 려고 이 황금을 포기해도 내 승리고 말이야. 그런데 그는 껄껄거리며 호탕 하게 웃어재끼는 것이 아닌가. 얼레? 뭔 수법이야 저건. “크하하핫! 당돌한 녀석이로다. 그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성깔이 제법 있구먼.” 난 내 긴 눈썹을 꿈틀거리며 엄청난 금화를 냉큼 빼앗긴 노인네가 어째서 웃고 있는지 생각했다. 아차, 설마! 난 황급히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으악! 이건! “뭐, 뭐야 이건!”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작고 둥그런 납덩이들이었던 것이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농담이라도 금이라고는 못할 것들이잖아! 이 노 인네가 처음부터 날 가지고 논 것이었다. 난 1차전 패배를 인정하며 노인에 게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그런데 주머니를 돌려받은 저 노인이 큭큭 웃으 며 품속에서 금빛의 쇳덩이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저건 또 뭐지? “그, 그건.......” “들어는 봤겠지? 이건 권총이야. 그리고 이 주머니에 있는 게 바로 총알 이지.” 대체 뭐야 이 노인네의 정체가! 노인은 시커먼 총알을 넣어 장전을 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 장전된 권총을 내 이마에 겨누는 것이 아닌가! 자, 잠깐만! 갑자기 상황이 왜 이렇게 되는 거냐고! “이 방아쇠만 누르면 그 예쁘장한 얼굴에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귀족이 평민에게 모욕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평민을 쏴 죽여도, 그건 죄가 아냐. 무슨 의민지 알겠지? 자아. 1분 내로 내가 어째서 이 총을 거둬야 하는지 날 설득해 봐라.” -Blind Talk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더 연재가 진행된 이후에 하겠습니다. [SKT] #003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3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이거 진짜 위험한 논쟁을 즐기는 사람이잖아! 이 사람 예전에도 말싸움에 서 진 사람은 총으로 머리를 날려 버렸을까? 젠장! 비싼 돈 내고 열차 타 자마자 이런 식은땀 나는 상황이라니. 난 최대한 울렁울렁 두근대는 내 가 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전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나리의 성함을 물어도 될까요?” “흥흥. 난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 50초 남았다.” 공작? 어째서 그런 대귀족이 2인실에 탄 거지? 라는 궁금증은 일단 뒤로 미루자. 내 이마에 다가온 총구가 불을 뿜는 순간 난 열차 살인 사건의 피 살자가 되어 다음 역에서 시체가 된 채 하차해야 할 테니까. 나는 갑자기 닥쳐온 이 뜬금없는 죽음의 위기를 제한 시간 1분 내에 해결해야 했다. 침착 또 침착. “아이히만 나리. 지금 저를 죽이려는 이유가 뭔지 다시 한번 말씀해 주 실 수 있나요?” “난 평민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그들은 이 나라의 노동력이니까 말이지. 그러나 너희 같은 호스트들은 죽어도 상관없다. 노동자가 없으면 세상은 무너지지만 호스트는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 40초 남았다.” 아주 간단명료한 철혈의 논리였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죽어라 삽질하지 않는 인간 외엔 숨 쉴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 나리. 나리의 말씀대로 전 이 세상의 빵이 아닙니다.” “주제를 아는군. 넌 이 나라의 기생충이다.” 으아아아악!!! 죽여 버릴 테다! 그러나 당장은 내가 죽게 생겼으니 저 쭈 글쭈글한 목을 쥐고 흔들고 싶은 욕구는 잠시 보류하도록 하자. “하지만 나리. 나리는 빵만 먹고 삽니까? 태어나서 한번도 노래를 부른 적도 없고 광대를 보고 웃은 적도 없으며 연극도 보지 않고 술을 마신 적 도 없고 맘에 드는 여성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그런 인생을 사셨나요? 만약 그렇다면 당장 절 쏴도 좋습니다.” “계속 말해봐.” “주린 배를 채우고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옷을 입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드는 것은 인간 생활의 가장 절실한 부분이지만 그것만으로 왕국이 돌아 가는 건 아닙니다. 경제라는 것은 그것보다 좀 더 넓은 범위를 가집니다.” “허헛. 지금 호스트가 내게 경제학을 강의하려는 건가? 20초 남았다.” “우아아 너무 빠르잖아요!! 끝까지 들어 보세요 좀!! 만약 그 방아쇠를 당기실 거라면 수도에 도착하신 뒤에, 그 턱시도 앞주머니를 장식하고 있 는 은장식을 세공한 사람도 쏴 죽이십시오. 은장식이 없어도 나라는 얼마 든지 돌아가니까요. 그리고 그 외알 안경에 연결되어 있는 값만 비싼 금줄 을 당신에게 판 사람도 찾아내서 꼭 죽이셔야 하구요. 더불어 먹고 사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고급스런 턱시도와 목에 매고 계신 호화로운 실크 밴드를 만든 자들도 세상에 없어도 되는 기생충들이니 놓치지 말고 찾아내 서 죽여 버리세요! 아차! 지금 당장 이 열차 운전석으로 뛰어 가셔서 이 아무짝에 쓸모도 없고 값만 비싼 부조리 열차를 몰고 있는 건방진 운전수 도 잊지 마시고 처리하시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빵도 옷도 아닌 이 값비싼 권총으로 절 위협하고 있는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 나리께서도 그 총 으로 자살하시길! 정말 하실 일 많으셔서 좋겠습니다! 그 총알들 가지고는 턱도 없이 부족하겠네요! 흥!” 으아아아 망할!!! 내가 뭐라고 한거야 지금! 화가 치밀어서 끝도 없이 쏘 아 붙여 버렸다. 어쩌지. 이러다간 나 같아도 쏴 버릴 것 같은데. “흐흐... 흐하하하하하하!!” 잉? 그런데 이 노인은 네 머리에 구멍을 내는 것 대신 크게 웃다가 아예 소파에 널브러져선 배꼽이 빠져라 웃어재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통쾌한 듯이 말이다. 아, 아니 분노가 극에 달해 미쳐버린 건가? 이봐요 노인 양반! “우하핫! 이거 재미있군! 아주 오랜만에 유쾌했어. 꽤나 어설프고 과격 한 경제학 강의....... 아니 이데올로기 강의긴 했지만 말이야. 자네 참 재밌군, 호스트들은 그런 화술도 배우나?” “아 글쎄 호스트 그만 뒀다니까요!” 굉장히 어려운 이름을 가진 이 노인이 갑자기 막 친한 척을 하는 게 아닌 가. 난 얼떨떨했지만 당장 내 눈 앞에서 그 흉악한 금장 권총이 사라진 것 만으로도 어쨌든 좋았다. 그가 속주머니에서 다른 가죽 주머니를 꺼내선 내게 던졌다. “자아. 봉사료다.” “더 이상 총알은 사양이에요! 어?” 난 주머니의 감촉이 심상찮은 것을 느끼고는 주머니를 열었다. 진짜로 반 짝거리는 금화가 가득 들어간 주머니였던 것이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렇 지. 사람 애간장 녹인 대가로 이런 엄청난 돈을 퍽퍽 줘도 되는 건가! “요즘에는 귀족이라면 자존심도 없이 간 쓸개까지 내놓는 한심한 젊은이 들이 참 많아. 유치한 광고에 휘둘리고 조작된 유행 따위에 청춘을 낭비하 는 주제에 자신들은 젊음을 즐기고 있다고 착각하지. 그런 놈들은 흡혈귀 같은 장사치들에게 놀아나는 밥이야.” “뭐....... 좀 속아줘야 상인들도 먹고 살죠.” 성격한번 고약한 노인네로군. 하지만 뭐 나도 이 짓궂은 공작이 조금씩 맘에 들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이 열차가 도착하면 다신 만날 일이 없을 사람이지만 말이다. 나는 이 완고한 노익장에게 관심이 생겼다. “나리께선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공작이라는 직위라면....... 잘은 모르지만 굉장한 거잖아요 그거?” 사실 이 사람이 진짜 공작이라면 난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경죄다. 그가 장난스런 표정을 얼굴 한 가득 담으며 말했다. “난 왕족이야. 이 나라의 재무대신이지.” 푸하하핫! 난 이 노인이 또 장난치는 줄 알고 커다랗게 웃었다. 재무대신 이라면 한 나라의 재산을 총책임지는 국왕 다음가는 이인자란 말이다! 그 런 거물 중의 거물이 2인실에 타? 열차를 통째로 빌려도 시원찮겠다. 날 놀리나 정말! 그런데 이 노인이 얼굴을 무섭게 찡그리기 시작했다. “사람 말을 안 믿는 호스트로군!” “저, 정말이에요?” “아이히만. 철혈대신(鐵血大臣)이라는 내 악명을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까 내 고객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던 것 같다. 이 베 르스 왕국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재무대신이 살고 있는데 까닥하면 불벼락 이 떨어지는 괴팍한 노인네라서 사람들은 그의 몸에 강철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그는 사격의 명수라는 말도 들었 다. 난 머리 속이 하얗게 질려선 최대한 애교를 떨며 말했다. “저....... 안 죽이실 거죠오?” “징그럽다.” “옙.” 무안하게스리.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군. 아무튼 상대의 피를 쪽쪽 빨아 서 한방울도 남기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사람을 상대로 목이 성한 내가 대 견하다. 그가 천장의 줄을 잡아당겨 룸서비스를 부르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청명한 종소리가 울린다. “그러는 자네는 왜 수도에 가는 건가. 호스트는 그만뒀다니까 그건 아닐 테고 말이야.” “전 기사가 되려고 합니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 노인은 정색을 한 내 말을 듣자마자 또 자 지러져라 웃기 시작했고 난 얼굴이 죽상이 되어선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철혈대신이 원망스런 내 표정을 바라보며 진짜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니 정말인가?” “예. 추전장도 있어요.” “추천장? 장난하나. 기사 작위를 받는데 추천장 같은 게 어디 있어!” “하, 하지만 진짠데. 멋진 기사님이 저보고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오라 며 줬어요.” “스, 스왈로우! 우하핫, 크하하하핫!” 아, 아니 이런 젠장! 이 망할 노인네가 스왈로우라는 말을 듣자마자 또 죽어라고 웃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이봐요! 강철의 재무대신 나리! 뭐 가 그렇게 일일이 웃긴다는 거야? 난 심각한데 말이야. 아이히만 공작은 정말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아아아 자네 정말 사람 웃기는데 재능이 있군. 아무튼 뭐 좋아. 자네라면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예?” 어떻게 내 검술도 한번 안보고 그걸 판단할 수 있는 거지? “아아 이거 진짜 재밌구먼. 이틀 뒤의 자네 표정을 꼭 보고 싶군 그래. 어쩌면 왕궁에서 다시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군 그래.” “아 예. 그렇게 된다면 진심으로 영광일........ 에이 씨잉!” 강철의 피가 흐른다는 괴물 같은 양반에게 이렇게 웃음이 많은지 몰랐다. 뭐가 그리 웃긴지 또 다시 웃음보를 터트리는 그 노인을 바라보며 난 예를 올리다가 발칙하게 스리 짜증을 터트리고 말했다. 그리고 가무잡잡한 피부 에 하얀 유니폼을 입은 검은 피부의 시녀가 룸서비스를 위해 객실문을 열 고 들어왔고 그와 함께 마나 충전을 마친 열차가 긴 경적 소리를 내며 움 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 보며 난 기묘한 낭만을 느꼈다. 다시 고향에 돌아올 때는 아마도 낙엽이 지고 그 위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길 몇 번이나 반복한 뒤겠지. 플랫폼의 나무들이 하나 둘씩 뒤로 지나갈 때마다 난 20세, 내 성인의 나이가 초침 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새삼 느껴졌다. 5. 수도 아스말의 중앙역에 열차가 도착했을 때 어느 새 태양은 흔적도 없이 숨어 버린 짙은 밤이었다. 난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옷가지가 든 가방을 들고 명검(대장장이가 세상에 둘 도 없는 명검이라고 해서 구입하긴 했는 데 암만 생각해도 속은 것 같다.)을 허리춤에 차고 여관을 찾았다. 역 근 처에는 확실히 여관들이 많다. 고향보다 거의 2배는 비싼 살인적인 숙박비 가 짜증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아 참 그리고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 은 진짜 재무대신이 맞긴 맞는 것 같았다. 열차가 역에 도착하자마자 관리 들로 보이는 자들이 서류더미를 잔뜩 들고 한밤중인데도 아이히만 공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그들을 보마자마 '밥벌레들!', '내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나!' '죽어!' 등등의 무시무시한 폭언을 내뱉으며 괴수처럼 잡아 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것이었다. 두 얼굴의 노인네....... 실수라도 적 만 들면 안 될 양반이다. ‘......그건 그렇고 말이지.’ 뭐지 이건 대체. 겨우 겨우 찾아낸 싸구려 여관의 1층에서 야채 스프를 떠먹고 있던 나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여관 손님들의 뜨거운 시선에 식은땀 이 다 흘렸다. 하긴 탈색된 듯한 얇고 결이 좋은 금발이 엉덩이까지 내려 오는데다가 다이아몬드보다 더 희귀한 보라색 눈을 가지고 뽀얀 살결까지 지닌 미남자가 머리칼을 쓸어 올려가며 홀로 스프를 떠먹고 있는 광경은 수도에서라도 그리 흔한 모습은 아니겠지만....... 아니 이 양반들이! 나 는 분명히 남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 털북숭이 아저씨들까지 '꿩 대신 닭'이라고 쓰여 있는 눈빛으로 쳐다보냔 말이야! 내가 발그스레한 입술을 열어 스푼을 입에 넣을 때마다 꼴딱 꼴딱 숨넘어가는 목소리만이 들려오는 그야말로 정적의 여관. 오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이 적막 속의 긴장이라니. 나는 이 순간 독무대에 올라간 댄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망할. 이러다 체하겠군. 그때. “이봐 귀여운 종달새.” “......!” 듣던 중 우주최악의 비유가 갑자기 내 귓가를 엄습해 오며 곧 뜨거운 입 김이 목덜미를 덮쳤다. 게다가 이 입김의 주인공은 꼭 저 산 위의 설인 (주 - 雪人, Abominable Sonwman 히말라야 고지에 살고 있다는 전설의 인 간형 괴물)을 닮았다는 것이다! “무, 무슨 짓입니까!” “이리 와보라니까!” 결국 나는 졸지에 설인의 습격을 받아 정조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산악인 이 되어 버렸다. 이런 망할! 대체 어떻게 이런 막 되어 먹은 경우가! 우악 스런 설인의 손에 잡힌 내 가는 팔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도 주변 사람 들은 흥분된 표정들을 감추지 못했다. 본능에 충실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나는 이 시점에서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수도 아스말의 치안이 개판이라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이대로 가면 난 설인의 아내가 되어 기사 입단 전날 밤에 순결을 잃게 된다는 것. 그러나 불행이도 내 잘 난 명검은 2층 객실에 잠들어 있었다. “이, 이 손 놓으세요!” 앗차 실수! 설인의 억척스런 포옹을 완강히 거부하는 내 간드러진 목소리 가 도리어 설인의 전투 본능을 더욱 자극하는 불행을 초래했다. 낮에는 생 명의 위기더니 밤에는 정조의 위기냐! 내 일생일대의 위기 상황이 이름 모 를 여관에서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헐떡거리는 설인의 인간을 닮은 목 소리가 혼미한 정신 속에서 들려왔다. “흐흐. 앙탈부리는 것도 귀엽군. 그런 모습으로 혼자 앉아 있으면서 유 혹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진 않겠지.” 아니 내 모습이 어때서! 무엇보다 교태가 흐르는 내 태도는 나도 어쩔 수 가 없이 몸에 베어버린 직업정신일 뿐. 요리사가 모든 걸 식재료로 보는 것 마냥 이것도 단지 직업병이란 말이야! 인간의 마을로 내려 온 이 설인 놈아 산 속으로 돌아가 어서!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냉정해서 난 발정기가 된 설인과 무제한급 레슬링을 한 끝에 티끌 하나 없는 어깨가 다 드러나는 몰골이 되어 버렸다. 엄마 아빠 미안해. 나도 이제 더 이상....... “적당히 하시지.” “윽.” 이 커다란 여관에서 날 도와준 분이 딱 하나 나타났다. 얼어붙은 듯한 푸 른 눈동자가 멋진 분이었다. 그 분의 은빛 칼날이 어느새 무자비한 설인의 목 언저리에 다가와 있었으며 그것으로는 나는 '죽음과 같은 위기'에서 벗 어날 수 있었다. 그 분이 멸시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를 할까 했는데 보기 역겨워서 입맛이 떨어지는군.” “어어! 당신은!” “결투를 원하는 건가? 원한다면 저 남자 대신 내가 상대해 주지.” “그, 그럴리가요!” 벽안(碧眼)의 사내가 뿜어내는 차가운 눈빛에 기가 죽은 그 설인은 어슬 렁어슬렁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감히 인간의 술을 마시 기 시작했고 아무 말도 없이 내 맞은편 테이블에 털썩 앉은 그는 나를 훑 어보며 테이블 위에 검을 올려놓았다. 검 한번 휘두르지 않고 상대를 제압 하다니 무진장 멋지잖아! 게다가 긴 흑발에 청색의 눈동자라. 차갑기는 해 도 꽤 미남자였다. 나보다 한 두 살쯤 많아 보이는데 이 바닥에선 상당히 유명한 검객인 것 같았다. “저어, 감사합니다. 저는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냥 미온이라 고 불러주세요.” “이상한 이름이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저, 검객님의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나는 옷깃을 여미며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지만 내 목소리가 도통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어쨌는지 그 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카론'이라고 짧게 대답한 뒤에 말했다. “너 남자 아냐? 그런 꼴을 당했으면 목숨을 버리더라도 싸웠어야지.” “별로 싸우는 거 좋아하지 않아서요.” 난 베시시 웃으면서 그렇게 둘러댔다. 솔직히 누구라도 기사 입단 전날 밤 여관 중앙 특설링에서 종족번식 본능을 엉뚱한데 발휘하는 설인 사촌과 검도 없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카론이 말했다. “수도에는 처음 인 것 같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날 모르고 있으니까.” 카론이 피식 웃으며 도착한 와인 잔을 들었다. 얼레? 이 카론이라는 사람 이 수도에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 하긴, 저 정도 외모라면 어떤 의 미라도 유명해 질 수는 있지만. 표범 같은 날카로움이 왠지 보는 사람 오 싹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스말엔 뭣 하러 왔나.” “기사가....... 되려고요.” 망할. 또 웃네. 그렇게 웃기다면 내가 왜 기사가 되려는 지를 상세히 적 어 책으로 출판이라도 할까? 이 시대 최고의 우스개 모음집으로 베스트셀 러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는 얼음 같은 미소를 품다가는 알만하다는 듯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스왈로우 나이츠. 그렇지?” “어떻게 알았죠 그걸!” “내 이름은 카론 샤펜투스. 왕실 근위 기사단 헬스트 나이츠의 부기사단 장이다.” “기, 기사? 정말이요?” 아 정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째서 오늘은 한번 위기 끝엔 꼭 거물을 만 나게 되는 걸까. 스왈로우 나이츠가 신관 기사단이라면 헬스트 나이츠는 왕실 근위 기사단이다. 즉 이 베르스 왕국의 양대 기사단 중 중 하나의 2인자 라면 굉장한 거잖아 정말! 그런데 너무 젊잖아.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전 올해로 20세.” “32세다. 뭐 잘못되었나?” 잘못되다 말다! 노화 기능이 정지된 건가 이 카론이라는 남자는?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 정도인데 어째서 30대? 하지만 이런 시시한 것 가지고 속 일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난 그냥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 를 접한 기분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보다 궁금한 건 따른데 있다. “스왈로우 나이츠란 정확히 어떤 야구단...... 아, 아니 기사단인가요.” 솔직히 난 스왈로우 나이츠가 뭐하는 집단인지에 대해서 추천장을 받았다 는 것과 평민도 입단할 수 있다는 것 외엔 잘 알지 못했다. 카론이 복잡한 표정으로 와인잔에 담긴 백포도주를 단번에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테이블 위에 동전을 툭하고 던지고는 모호한 대답을 꺼냈다. “말을 타지 않는 기사(騎士).” “예?” “어떤 의미로는 왕실에 꼭 필요한 기사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는 그리고 곧 망토를 펄럭거리며 검을 든 채로 밖으로 나갔다. 아니 카 론 경의 저녁 식사는 와인 한잔인가? 난 그가 넘긴 말이 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그가 테이블에 떨구고 간 동전들을 바라보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동전에 새겨진 성왕(聖王) 하킨의 옆모습까지도 날 보고 키득 키 득 웃는 것 같잖아! 이러다간 노이로제 걸리겠군. 아무튼 기사단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왕족을 호위하고 전쟁의 선봉에 나서며 밤마다 기사도를 맹 세하는 기도를 올리는....... 뭐 이런 것일까? -Blind Talk SKT는 사실 1년도 더 전에 북박스와 계약을 맺고 쓰기 시작한 글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백랑전설보다도 더 일찍 시작한 셈이로군요. 게다가 L님과 함께 원안을 짠 것은 그보다도 몇년전이니까 드래곤 레이디를 중반 쯤 썼을 때부 터 준비해 온 것일지도요... 그렇게 무던히도 오래 끌어오던 글이라서 그런 지 이렇게 연재를 시작하게 되니까 기분이 참 묘하네요. 얽힌 이야기는 많지만 지금은 시작이니 SKT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더 연재를 올린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행이도 당분간은 매일 매일 올릴 수 있을 듯 하군요. 어쨌든 이렇게 스타트를 하게 되었으니 새삼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계속 봐주시길 기대하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SKT의 표지 그림은 이곳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http://www.bookbox21.com/fantasy/bbsdata/bbsread.asp?pNum=&tbnm=Tbl_bbs_data&seq=962&page=1 관련 사이트 커그홈 www.fancug.net 드래곤 레이디 카페 cafe.daum.net/dragonlady 백랑전설 링크 게시판 http://nine.compuz.com/zboard/zboard.php?id=bakrang 리즈의 그댄 행복에 살텐데, 를 들으며. (최근 귀를 간지럽히는 노래입니다.) #004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4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6. 과거 회상은 이것으로 끝이다. 요 근래 며칠 동안 참 별일도 다 있었군. ‘슬슬 가볼까나.’ 난 무대 위에서 또 ‘용사 드링크’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죽고 싶은 표정의 친구에게 혼자만의 눈빛으로 작별을 고하며 광장을 떠났다. 베르스 건국 이후 백여 년의 시간 동안 증축(增築)을 반복하여 마치 암석 생명체처럼 점점 커져가고 있는 왕궁 ‘세아스말’은 수도 아스말의 중심 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 나의 조국인 베르스는 이 세계에서 강대국이 아니다. 아니 도리어 주변 나라 눈치 깨나 봐야 하는 약소국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감긴 넝쿨들이 주름살처럼 연륜을 보여주는 세아스말의 자태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일면 신성한 느낌까지 들었다. 인위적인 건축물도 오랜 시간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다보면 제법 자연과 어울릴 수 있나 보다. ‘이거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난 왕국의 정문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당연히 평민의 신분으로 왕궁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내 추천장에는 어디에 가서 이걸 제출하라는 말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난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왕성 정문 근처에 있는 민원상담소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그곳은 평민들의 하소연을 담은 탄원서를 받거나 그 외의 잡다한 평민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처리하는 공 공기관이었다. 하아. 이토록 사연들이 많은 걸까? 이 콩알만한 민원상담소 는 저마다 사정이 급한 평민들의 행렬로 인산인해, 만원사례였다. “밀지 좀 말아요!” “젠장! 나도 어제부터 기다렸다고! 줄 서!” “또 서류가 부족하다고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할 거야! 정말이라고!” '억울한 사정의 평민'들로 구성된 인산인해를 보자마자 난 졸도할 것 같 았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이 추천장 제출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작렬 의 햇빛 속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말 그대로 전투적이었고 세치 기라도 하는 날엔 살인이 날 것 같았다.(진심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행렬 옆에선 왕실에서 파견 나온 상인들이 (무척이나 비싼 값으로) 얼음이 나 물 따위를 팔고 있었다. 망할! 그럴 힘이 있으면 접수창구라도 좀 늘려 달라고! “기다리세요!” 벌써 네 시간이나 기다렸건만 감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접수창구의 여자 로부터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말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는 것뿐이었다. 난 앞으로 누가 인내심을 수련할 장소를 찾는다면 주저 없이 이곳을 소개할 것이다. 난 결국 수건 하나가 흥건해 지도록 땀을 닦으며 자그마치 여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고 그때서야 돈을 더 내면 빨리 민원을 처리 받을 수 있다는 요상망측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틀이나 기다리고 있다던 내 옆의 아저씨가 점점 석화(石化)되고 있는 것을 보자 위기감이 엄습했다. ‘여기까지 와서 망부석이 될 수는 없어!’ 결국 난 피눈물을 흘리며 '급행료'를 지불하고 나서야 그 잘난 민원접수 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긴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 예전 내 마담이 격언처럼 입버릇 삼던 그 말을 투덜거리며 난 접수창구 앞에 설 수 있었다. 머리를 뒤로 땋은 감색 제복의 여자는 날 바라보며 생 긋 웃었다. 그럼 나도 생긋. “예쁘게 생긴 분이시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솔직히 나는 '은화 10전을 내야만 볼 수 있는 접수창구 아가씨가 바로 너 였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경비병들 곤봉에 두드려 맞고 곧장 왕실 감옥 구경하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난 직업병에 가까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추천장을 건네주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내 추천장을 받아든 그녀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스왈로우 나이츠....... 네요?” 얼레? 이 의미심장한 웃음은 대체. 그녀 역시 아이히만 노인네와 카론이 보여줬던 '우후후후' 미소를 보이면서 추천장을 내게 돌려주었다. “이건 이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그럼 어디서!!” 나도 모르게 절박한 비명이 나왔다. 여섯 시간 기다리고 은화 10전을 내 서야 겨우 겨우 통과되나 싶었는데 여기가 아니라니! 그럼 대체 어디야! 왕실 화장실인가! 당장 말해라 이 못된 마녀! 그때 그녀가 입술을 쭉 빼며 가리켰다. “조오쪽.” “네?” “조오기 작은 문 보이시죠?” “네. 보이기는...... 합니다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문이 하나 있긴 있긴 하다. “저 문을 열고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작은 사무실 같은 게 나와요. 거기 가면 키스 님이 계실 거에요. 그 분께 추천장을 전달하세요. 아참! 그리고 키스님에게 어젯밤 재밌었다고 전해주시구요.” “......” 그녀가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내게 속삭였다. 기, 기사단 입단이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은밀한 거였나? 민원실 뒤편의 작은 문을 열고 한참 동 안 걸어가서 이름 모를 사무실 안에 있을 키스라는 사람을 만나라고? 아니 그리고 어젯밤 재밌었다는 건 또 뭐냐고! 마약 거래도 이렇게 복잡하진 않 을 꺼다. 하지만 난 그녀가 '다음 분!'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불안한 표정으 로 그 '작은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장미정원 사이의 긴 샛길이 눈에 들어왔다. 7. 난 결국 비밀문을 통해서 왕성에 첫발을 내딛은 은밀한 인간이 되었고 한 참 동안 인적 없는 붉은 장미정원 사이를 걸어갔다. 두 손에 커다란 가방 을 들고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긴 금발을 내린 채 장미정원 속을 지나가고 있는 내 모습이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영 궁상맞아 보인다. 무엇보다 불안하 다! 갑자기 사방에서 험악한 놈들이 튀어나와 '우하하하! 잘도 속았구나! 네깟 놈에게 작위를 줄 성 싶냐! 이제 넌 왕실 소유의 몸종이다!'라고 덮 쳐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란 말씀이야. 난 침을 꼴깍 삼키 면서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고 그녀의 말대로 한참을 가서야 작은 나무집 이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집 간판에는....... “스왈로우 나이츠 사무실? 뭐야 이거.......” 아니 기사단 사무실이라는 것이 이런 장미정원 속의 통나무집이라는 것도 웃기고 무엇보다 길드나 아카데미도 아니면서 무슨 사무실이람? 난 떨떠름 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렸다. '저어. 기사단 면접 보러 왔는데요?'라고 말 하려고 했지만 굉장히 한심한 대사 같아서 그만두었다. “계, 계세요?” “들어오세요오오.” 화들짝! 분명 방금 집안에서 간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몸이 마 구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힘겹게 내뱉은 듯한 그런 목소리. 설마 요가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키, 키스라는 분을 만나러 왔는데요.” “저에요오오오 들어오세요오오오.” “.......” 솔직히....... 들어가면 잡아먹힐 것 같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으므로 난 결국 용기를 내서 문을 열었다. 쫘악하니 펼쳐지는 사무실 의 풍경. 그런데 어디에도 키스는 없다. 얼레?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는데? “키, 키스 님?” “여기에요오.......” “허억!” 키스는 내 발 밑에 뒤엉켜 있었다. 오른 팔이 왼쪽 다리 밑으로 들어가고 왼팔이 오른쪽 밑으로 들어간 채 바닥을 뒹굴며 내게 방긋 웃는 미남자 키 스는........ 정말 무서웠다. 데굴데굴 굴러서 내 앞까지 다가온 키스 씨 가 나를 올려보며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해요! 라는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했고 난 나도 모르게 외계 생명체 같은 키스를 걷어차 버렸다. 결국 몸이 공처럼 엉켜 있는 그는 저쪽 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어! 몸이!” 무섭고도 얼빠지는 희귀한 기분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가 버린 키스는 무시무시하게 엉켜 있는 자신의 몸을 풀며 난감한 웃음을 보였다. “아아 역시 이런 식의 인사법은 아직은 너무 앞서가는 것인가. 하지만 50년쯤 후에는 분명 대유행이 될 꺼야!” 50년 후에 그 따위 인사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난 앞으로 49년까지만 살 거다! 우주멸망과 다를 바가 없는 요가 인사법에 심취해 있는 이 키스란 사람이 대체 스왈로우 나이츠와 뭔 관계람! 키스는 뒤늦은 의연한 태도로 '정상적인' 인사를 청했다. “스왈로우 나이츠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아 예. 저는.......” “난 키스 세자르. 스왈로우 나이츠 기사단장이에요.” “웃기지마! 이 요가 인간아!” 엇. 나도 모르게 소리쳐 버렸다. 신체가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요가 인간 이 기사단장이라니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키스는 서운한 표정으로 차를 준비하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진짠데.......” (첫인상이 하도 경악스러워서 그렇지) 확실히 키스는 상당한 미남자였다. 28세 쯤 되었을까? 큰 키에 산들거리는 발걸음이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체 구.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귀엽고 붉은 눈망울까 지 꼭 수사슴을 의인화시켜 놓은 것 같은 남자였다. 여간한 마스크로는 어 울리기 힘든 보랏빛 우단(羽緞) 옷을 단정하게 입은 모양새까지 보통 센스 가 아니다. 하지만 장검은 커녕 단도 하나 차고 있지 않았다. 단지 아주 능숙하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두 잔의 차를 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결 론은....... 어디가 기사단장이라는 거야? “전 동부 리튼에서 온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목소리 예쁘네요?” “예?” “이름도 예쁘고.” “........미, 미온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만.” 뭐, 뭐야, 저 질투어린 시선은! 왜 흘겨보는 거냐고. “아! 민원실 아가씨가 재밌었다고 전해달라는데요? 그러니까 어젯밤에...” “이히히히.” 오싸악. 키스가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히죽 웃었다. 난 이 사람이 어렸 을 때 머리를 크게 다쳐서 이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예상을 하며 추천서 를 꺼냈다. “입단 추천서인데요.” 이제야 조금 가슴이 뛴다. 추천서 한 장 만으로 기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얼마나 많은 의심을 했던가. 굉장한 입단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숲 속에 혼자 던져 놓고 하루 안에 백 마리의 몬스터를 잡아 오라고 시킬지도 몰라. 혹은 책 한질의 '기사도 입문'을 다 외우라고 시킬 지도 모른다. 과연 나 같은 놈이 그런 시험에 통과할 수가....... 응? 키 스가 날보고 또 히죽 웃으며 차를 건넸다. “당신은 이미 통과되었습니다. 미온 씨.” “얼레?” 내, 내가 뭘 했다고? 여기가 무슨 꼬마들의 여름캠프도 아니고 그냥 통과 라니. 우아한 포즈로 차를 마시던 키스가 말했다. “이제 슬슬 숙소와 동료들을 소개해........” “자, 잠깐만! 통과라니요!” “통과의 의미를 모르세요?” 키스가 친절한 얼굴로 '통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기.사.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렇게 간단한 거냐고요!” 작위식은 고사하고 최소한 내 기사도 맹세 정도라도 들어 달라고! 십수년 동안 기사수행해서 겨우 겨우 작위를 따내는 다른 기사들은 바보들인가! 키스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스왈로우 나이츠는 특.별.한. 기사단이니까요. 아 참 그리고.” 키스가 드르륵 서랍 문을 열더니 화려한 글씨체로 빽빽이 문장이 들어차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여기 사인하세요.” “이게 뭔데요?” “기사 계약 증명서랍니다.” “......이봐.” 계약서 쓰는 기사도 있던가. 잘 나가는 길드 매니저나 호스트의 경우에는 독점 계약서를 쓰기도 하지만, 이게 무슨 가게 인수하는 것도 아니고 어째 서 기사가 되는데 계약서 같은 게 필요한 거지? 그런데 그 계약서에는 아 주 의미심장한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계약일 이후 10년간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으로서 성실 봉사를 해야 합니다? 뭡니까 이건?” “말 그대로 10년간 의무적으로 기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 의무 봉사 시간? 기사라는 거, 본래 작위 몰수당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하 는 거 아닌가? 이거 뭔가 불안한데... 그때 키스가 내 어깨를 으스러지도 록 꽉 잡으며 날 쏘아보는 바람에 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빨간 눈동자에 서 무서운 광선까지 뿜으며 말이다. “설마.......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결심이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니겠 죠? 미온 씨?” 사, 사소한 문제라니!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지 마! “분명히 미온 씨는 기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그렇죠?”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토록 되고 싶었던 기사를 이토록 쉽게 시켜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요?” “아?” “그렇죠오?” “아아?” “사인 하실 거죠오오?” 아, 아프잖아! 어깨뼈가 부서져 버릴 것 같다! 무시무시한 위압감 덕분에 난 결국 홀린 듯이 이 '괴문서'에 사인을 해 버렸다. 그리고 계약서를 잽 싸게 품속 깊숙이 넣는 키스가 포옥 한숨을 내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하아. 요즘에는 사람 뽑기도 힘들어서....... 순진한 녀석이라서 다행 이야.” 이봐. 지금 그거 무슨 의미야! -Blind Talk ...음악에 대해서는 잡식성이라고 자부한다. 깊게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냥 하염없이 음악들을 듣는 편이니까 말하자면 '에잇. 어제는 스파케티을 먹었으니 오늘은 오향장육이 좋겠어.'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속물적인 식탐가(아니 음탐가)라고나 할까. 그리고 스토리를 구상할 때는 뛰면서 하는 편이니 (사실 밀레니엄 타워 스카이 카페에서 1만원이 넘는 커피를 마시며 구상하고 싶지만 그럴 돈 없으니 패스.) 뛰면서 음악을 들으려면 CDP도 MP3겸용 CDP도 곤란하다. 대충 몇년간 파악한 내 음악 감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원할 때 원하는 곡을 곧바로 듣지 않으면 안된다.(워크맨 X) 2.뛰거나 운동하면서 듣기 때문에 쇼크에 강해야 한다.(CDP X) 3.매체를 자주 바꿔 끼우거나 녹음 시간이 길면 질색이다.(MD X) 4.음질 따윈 노이즈만 없으면 되니까 너무 비싸면 안된다.(idp X) 5.음악이 아주 많이 많이 들어가야 한다.(MP3플레이어 X) ...내가 생각해도 참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구사항이다. 위의 기기들 중에 idp 빼고 다 써 봤는데 하나 같이 위의 문제점들 중에 하나가 걸렸다. 가장 최근에는 iFP-190TC(아이리버 256M MP3플레이어)를 구해서 썼는데 정말 굉장히 편리한 물건이긴 했지만 256M로는 내가 요구하는 음악저장용량에 턱도 없이 모잘랐다. 그렇다고 USB로 자주 음악을 바꾸자니 이것도 정말 귀찮은 일. 이 정도 귀찮음이야 예전 실로 거지같 은 산요 구식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던 내 고생에 비하면야 천국이지만 사람 욕심 끝도 없다고 뭔가 더 좋은 휴대용 기기는 없을까,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아이리버에서 iFP-195TC라는 굉장한 물건이 나왔단다. 이것은 516M이고 안전성이나 편리함은 아이리버 답게 상당히 좋고 디자인도 이노디자인의 것으로 훌륭한데다가 번들 이어폰 역시 이번에도 젠하이저 MX300이라는 꽤 고급스런 것이고 데이터 전송속도 도 빨라진데다가 암밴드도 준단다. (더욱 최근에는 IFP-395라는 놈도 나왔다.) ...그런데 값이 36만원이던가. 실로 피를 토하는 고가다. 어째서 MP3플레이어 주제에 이런 값이 나온 거냐!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국내에 거의 유일무의한 516메가이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금단의 선을 넘어 버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람들로부터 '저걸 사는 놈은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오던 그 유명한 컬트상품 애플 ipod였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휴대용 쥬크박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용량은 종류별로 5기가, 10기가, 20기가라는 말도 안되는 용량이고 (마이크로 하드 탑재) 인터페이스 역시 애플 특유의 독자적인 노선 인데다가 디자인도 실로 의료기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고... 뭐든지 상식을 넘어선 수준이다.(불행하게도 무게도 그렇다.) 주변에 이것을 구입한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 친구는 나와는 달리 무섭게 잘 사는 녀석이니 뭘 사도 상관 없겠지만.) 지금 내가 아이포드를 구입하면 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리는 셈이 된다.(일단 파는 곳도 거의 없고 할인도 안되고 카드무이자는 더더욱 없고 무엇보다 그 살인적인 값은 보는 것 만으로도 공포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IFP-195TC가 36만원이라는 것을 예상할 때 아이포드 5기가가 48만원이니까... 후자가 이익이 아닌가! ..라는 말도 안되는 자기정당화를 나는 해버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이포트 5기가 IBM용은 국내에 매물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가죽케이스(5만5천원)도 없고 리모콘(5만5천원)도 없단다. 하지만 아이포트 10기가(56만원)는 그것들도 모두 주고 자그만치 10기가 짜리 이동식 하드 겸용 MP3플레이어란다! 이것은 실로 궁극의 머쉰이다! ..라는 뻔한 대리점 직원의 감언이설에 나는 넘어가 버렸다.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는 이 저주 받을 아이포트 10기가가 들려 있었고 한 손에는 영수증이 꼬옥 쥐어져 있었다. 대체 10기가를 mp3로 채워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라는 본질적인 의문이 든 것은 이미 물건을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올 때였다.(늦었어!) 이것은 그 무시무시한 firewire를 지원한다. 즉 CD한장을 담는데 40초도 안 걸린다! 혁명적이다! 그러나... 그 잘난 firewire를 쓰기 위해서는 슬롯카드를 별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아이포드 값을 지불한 직후 들었다.(그런 건 일찍 말해!!!) 결국... 5만5천원에 달하는 랜카드를 피눈물을 흘리며 구입한 나는 (어째서 애플의 푸품들은 모조리 5만5천원일까. 잭필드와 비슷한 이유인가?) 현재 인스톨과 충전을 하면서 애플이라는 회사가 얼마나 디자인에 대해 결벽증과 난독증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놀라고 있는 중이다. 이건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다. 현재 가지고 있는 CD들을 모조리 mp3로 바꾸고야 있지만 10기가를 모두 mp3로 담아봐야 다 들을 일도 없으니 나머지 분량에는 18금만화 디빅동영상이나 넣어 볼까나... 물론 액정이 흑백이고 동영상 지원 따위는 되지도 않으니 단지 저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으음. 게다가 마이크로 하드라도 하드는 하드니까 충격 받으면 금방 고장나고 고장나면 DHL이라는 놈을 통해 싱가포르까지 보내서 고쳐야 한다고 하니까 ...앞으로 나는 이것을 상전 모시듯 고이고이 가방안에 넣고 들으면서 머슴처럼 일해서 이 돈을 값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스스로 만든 지옥... 갑자기 카이지가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 일까. 후후후. 그래도 앞으로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기쁘군요. ...사실 이 글은 얼마 전에 모 비밀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오늘은 딱히 할말이 없어서 재탕해 봅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중으로 한편 더 올려보려고 합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길 기원하며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SKT의 표지 그림은 이곳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http://www.bookbox21.com/fantasy/bbsdata/bbsread.asp?pNum=&tbnm=Tbl_bbs_data&seq=962&page=1 관련 사이트 커그홈 www.fancug.net 드래곤 레이디 카페 cafe.daum.net/dragonlady 백랑전설 링크 게시판 http://nine.compuz.com/zboard/zboard.php?id=bakrang EGO-WRAPPIN'의 색채의 블루스, 를 들으며 (시부야계 음악들을 얼마전부터 자주 듣고 있는데, 에고레핑은 그쪽에선 유명한 그룹이긴 하지만, 저도 참 좋더군요. 초기앨범이 더 좋긴 하지만...) #005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005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8. 왕궁 세아스말 내부는 하나의 작은 도시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많은 건물 들과 시설이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키스를 뒤따라 졸래졸래 따라가고 있는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왕립 기사들의 수련터였던 것이다! 이런 것마저 왕궁 내부에 존재하는지 미처 몰랐지만 드넓은 평지 위에는 마상 수련을 위한 정교하고도 으리으리한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고 격투술과 검술을 위한 가죽인형들이 쭉 설치되어 있는데다가 중앙에는 기 사들의 대결을 위한 이른바 ‘특설 링’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켠에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궁중의사들도 상주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리고 그 안에서 수십여명의 어린 수련생들이 서로 검을 치고받고 있었고 나이 지긋한 기사가 내지르는 강한 억양의 호통소리도 간간이 들여왔다. 이쯤이면 이 베르스 왕국에서 최고로 호사스런 수련터라고 할 수 있지 않 을까? “여긴가요! 앞으로 제가 기사의 의무를 다할 곳이!” 난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슴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나 내 격양된 목소리를 들은 키스의 표정은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냐.’였다. “이런 땀내 나는 곳에서 흙먼지 뒤집어 쓸 일은 영원히 없습니다. 미온 경.” 별명에다가 멋대로 '경'이라는 근엄한 칭호 붙이지 말아주세요 키스 단 장님. 그런데 검술을 수련할 일이 없다고? 그럼 뭘 하겠다는 거야. 곧바로 실전? “스왈로우 나이츠는 그보다 좀 더 은밀하고 고상하며 아름다운 일을 합 니다.”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은밀하고 고상하며 아름다운 일이 뭐냐 대체! 은밀 하게 적국의 무도회장에 침투해서 고상한 댄스로 적들의 눈을 현혹시킨 뒤 에 아름다운 공주를 납치해 오기라도 하는 건가........ 라는 발상은 내가 생각하고도 민망하군. 아무튼 그런 단서만으로는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 었다. 속 시원히 좀 알려달라고 키스! “가보면 알게 됩니다.” 키스가 그 화사한 미소를 다시 보이며 다시 산들 걸음으로 앞장서기 시작 했다. 게다가 그 손에는 어느새 화관(花冠)이 엮어져 있었다. 남정네가 그 런 것 만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역시 왕궁은 수도 아스말의 4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넓었다. 수련터의 가장자리를 한참 걸어가며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때 즈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입단했군. 스왈로우 나이츠에.” 어?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멋지게 넝쿨진 건물에서 걸어 나오던 카론 샤펜투스, 내 순결의 수호자였다. 시력이 나빴는지 차가운 눈매에 살 짝 안경이 걸쳐 있었고 손에는 두꺼운 책까지 들고 있었는데도 확실히 기 사다운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진다. 그것도....... 무척이나 냉혹한 기사 같다고나 할까? 카론을 보자마자 산딸기를 발견한 아낙네처럼 환하게 웃는 키스가 종종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같은 기사인데....... 저렇게 차 이가 날 수가 있다니. 마음 참 울적해 지는군. “와아. 여전히 만지면 얼어버릴 것 같은 얼굴입니다 카론 경.” 그, 그게 안부 인사? 항상 새로운 인사법에 몰두하는 키스의 무례하다면 무례한 인사치례인데도 카론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안 경알 너머 저 차가운 시선은 정말로 이 햇빛 속에서도 얼어붙을 것만 같다. 키스가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며 '역시 당신에겐 왕관이 어울려요,'라 고 하자 카론은 아무 말 없이 화관을 벗어재껴 꾸깃꾸깃 접어서는 쓰레기 통에 처박아 버렸다. '아아 겨우 만든 건데!'라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키스...... 경. “너무하네요. 남의 성의를......” 키스가 화관을 털며 투덜거리고 있을 때도 카론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 해 있었다. “저 녀석, 쓸만해?” “오호호. 이제부터 이리저리 굴려봐야 알겠죠오.” 그런 음흉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지 마라 요가 인간 키스! 카론은 알만하 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옆을 지나쳤다. “이제...... 엔디미온 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뭐 아무래도 좋아. 한 가 지만 명심해라. 왕궁은 거만한 돼지들의 사육장이야. 짓밟히고 싶지 않으 면 짓밟고 올라서는 수밖에 없다.” 그 무서운 말은 또 뭡니까! 카론은 '치졸한 전쟁터에 온 걸 환영한다.'라 는 분위기의 말을 남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서곤 키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키스 세자르. 너 같은 녀석이 어째서 이런 광대들의 놀이터로 돌아온 거지?” “전 지금이 좋습니다아.” “씁쓸한 농담이로군.” 얼레? 이건 또 무슨 분위기지. 카론은 시선을 거두며 다시 걸어가기 시작 했고 키스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웃음으로 카론을 마중했다. 그 런데 이 인간이 내 옆에 와서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이 아닌가. “미온 경. 카론 경을 알고 있었어요?” “예. 절 설인의 손에서 구해주신 분이에요.” “설인?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설인과의 달콤한 추억 따위는 빨리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난 무거 운 가방을 들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9. 수련터를 지난 뒤에 왕국 최강 미녀(혹은 미소녀)들의 집합소라는 무녀(巫女) 들의 탑 '펠리오스'를 지나서 30분이나 걸어서야 스왈로우 나이츠의 본부 '리더구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 본부는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 에 좀 설치하란 말이야! “자아! 여깁니다아! 멋지죠?” 키스가 팔을 쫙 펴며 마치 무슨 고급 사교장 같은 분위기의 고풍스런 저 택을 바라보았다. 리더구트라...... 확실히 멋지긴 한데 말이야, 이거 기 사단 본부 아니야? 약간은 검을 휘두르는 소리라든지 기사도를 읊는 소리 라도 들려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 드넓은 꽃밭은 또 뭐냐고. 산들바 람까지 불어오는 이 발랄한 분위기 어디가 기사단이란 말이야! “키스...... 경. 당신, 지금 나 속이고 있지....... 요?” “속이다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아?” 이봐 키스 씨. 그렇게 시선을 피하면서 말하면 설득력이 없잖아. “아무튼 계약이 되어 있는 이상 이제 와서 돌아가겠다는 말은 곤란합니 다아.” “역시 속였구나! 요가 인간!” “아니라니까요.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됩니다!” “우아악!” 키스에게 팔목이 잡힌 나는 뭔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대저택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런데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 보기와 달리 힘이 정 말 세다. 팔목 아프단 말이야! 10. 저택 안은, 그러니까 일반 대귀족의 호화스런 저택과 비슷했다. 예전에 실명을 밝힐 수 없는 타국의 모 고객 아가씨 저택에 출장을 갔을 때(인생 상담이었습니다. 정말임!) 봤던 것과 비슷한 호화스러운 구조. 그러니까 결국 피와 땀이 넘실대는 기사단과는 전혀 어울리는 구석이 없다는 의미다! 상당히 실망스런 표정의 나를 보며 키스가 근엄한 목소리로 일장훈계를 시 작했다. 역시 뜬금없는 사람이다. “현실의 기사단이라는 것은 영웅담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교양과 우아 함을 추구하는 집단이에요. 칼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는 것만이 기사의 전 부가 아닙니다!” “그, 그런!” “이제 뭔가 아시겠습니까! 미온 경!” “그딴 억지에 속을 것 같습니까?” “쳇. 안 속네.” 이미 당신이라는 사람을 불신하기 시작했는데 뭔 말을 하던 속을 리가 있 겠냐. “어 그런데.” 순간 나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각종 룸이 한 백여 개는 있을 것 같은 이 5층짜리 거대 저택 리더구트에는 그에 걸맞게 단정한 제복을 입은 적잖은 수의 시종들이 옷이며 차(茶)수레 따위를 운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좋은데 이상한 것은....... “어째서 시녀가 한명도 없는 거죠?” 뭐 내 고객 중에는 정말로 수십 명의 시종들을 정말로 미성년의 남자들로 만 세팅한 부유한 취미의 여백작도 있었고 순결을 지켜야 하는 몇몇 공녀 들의 경우에 그녀의 주변 시종을 모조리 여자로만 도배하는 관례도 있긴 하다. 그러나 여긴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곳인데 어째서 성차별을 하는 거 지? 곧 이것에 대한 키스의 해설이 이어졌다. “그건 이곳이 금녀(禁女)의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잉? 금녀?” “일단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은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은 계약서에 없었잖아!!” “상식이잖아요 그건.” “어째서 그게 상식이야!!” 10년간 독신을 유지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말은 이 세계 어디에서도 들 을 수 없을 거다. “신관기사인 우리들은 자신의 몸을 항상 정결하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를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키스는 자못 격양된 어조로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앞뒤가 안 맞잖 아! “잠깐.” “예?” “그럼 어제 밤 만나 재.미.있.었.다.는. 민원실 여자는 뭡니까.” “그, 그건!” 위기에 내몰린 자의 표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로군. 키스는 애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 전 그녀의 육체가 아닌 영혼을 위로해 주었던 것뿐입니다.” “.......” 그런 말엔 원숭이도 안 속아 키스 경. 그때 붉은 색 비로드가 깔린 대리 석 계단에서 커다란 가방을 든 소년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승자박의 위기 탈출 기회를 노리던 키스는 재빠르게 그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와아아아! 지스 경. 이번에는 어디로 가십니까아?” “......남부의 공작령.”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충 대답한 나만큼이나 긴 머리의 '지스 경' 은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을 두 손으로 힘들게 든 채로 우리들을 지나 쳤다. 꽤 작은 키에 엷은 푸른빛이 감도는 머리칼에 그것과 똑같은 눈동자 가 꼭 인형 같았지만 얼음 방패를 몸에 두른 듯한 태도는 카론님과 막상막 하인 녀석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스의 본래 이름은 지스킬 윈터차 일드로 미성년자인데다가 검은 써본 적도 없고 말도 타본 적이 없으며 몸 도 허약하고 성격도 더러웠다. 그래도 자랑스런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이 란다. 싫은 일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지스킬의 뒷모습을 좀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키스에게 내가 물었다. “저 사람.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겁니까?” “아 지스 경? 지명(指名)받은 거에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중 이지요” “지, 지명?” 병약 미소년, 지명, 여행용 가방, 남부의 공작령, 성스런 임무, 검은 써 본 적도 없음, 기사단. 뭐냐 이 하나도 안 맞는 퍼즐들은! “아마...... 지스 경이 당신의 룸메이트가 될 겁니다.” “룸메이트?” 아니 객실도 많은데 기사한테 이인일실이라니 너무 쩨쩨하잖아! 기숙사냐! “동료애를 키우기 위해서 랍니다. 그럼 동료들에게 안내해 줄께요오.” “으아악!” 그리고 난 또 다시 엄청난 힘에 이끌린 채 이층으로 끌려갔다. 난 이렇게 우악스럽게 저택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11. 이층에 응접실을 두는 것은 지극히 북부적인 호사취미다. 겨울의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곳이라 좀 더 따뜻한 곳이 이층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 의문의 '지명'을 받지 않은 스왈로우 나이츠 멤버들 중 다섯 명이 응접 실에 몰려 있었다. 총 멤버는 나를 포함해서 열명이라고 한다.(키스 제외) 그런데 내 앞의 기사들은 모두 하나 같이........ 놀랍게도 하나 같이... “어때요? 모두 미온 경 만큼이나 잘생겼죠?” “.......” 아아 그래. 확실히 내가 있던 '미소년의 숲'에서도 스카우트 해갈만한 각 양각색의 미남자들이다. 그런데 그거야 어쨌든 캐릭터 소설이니까, 라는 핑계로 둘러댄다고 쳐도 대체 왜 아무도 기사 비슷한 사람조차 없냐는 거 야! 근엄한 중년의 스승님은 대체 어디로! “아아. 신입입니까? 내 이름은 루시온입니다. 잘 부탁해요.” 균형잡힌 몸매와 큰 키가 인상적인 루시온 경은 창가에 놓여 있는 욕조에 서 태연하게 장미 목욕 중이셨다. 이봐 응접실에서 목욕하지마! 민망하다고! “새로 오셨군요. 수치스럽고 힘들더라도 견뎌내셔야 해요. 아! 제 이름 은 크리스티앙입니다.” 분명 분명 분명히 미성년자가 확실한 이 눈 커다란 소년기사가 바로 크리 스티앙...... 경. 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애처롭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수 치스럽고 힘들더라도'를 몹시 강조하며 소개를 마쳤다. 꼭 곡마단에 잡혀 온 서커스 꼬마 같잖아! “큭큭. 얼마 견딜지 모르겠지만 이 짓도 계속 하다보면 할만하다고. 난 쇼넨베르트.” 기사 주제에 담배까지 물어 피우고 앞섬이 다 드러나게 옷을 풀어헤친 채 소파에 벌러덩 누워 있는 저 녀석의 이름은 쇼넨베르트...... 경! 여자 울 리는 게 특기인 것 같은 능수능란한 저 얼굴 어디에도 기사의 흔적은 없었 다. “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일에는 귀천이 없어. 내 이름은 레녹. 별로 친 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방해하진 말아줬으면 한다.” 첫인상부터 딱딱하게스리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던진 레녹 씨는 얼굴 전 면에 야채팩을 한 상태로 시집으로 추정되는 책을 읽고 있었다. 고지식한 공무원 같은 외모. 그런데 누구라도 야채팩을 하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 들 어본 적 있어? “이야아. 얼굴이 참 반반한데. 어이 키스 경. 대단한 물건 데려왔네. 그 런데 옷이 영 싸구려잖아! 좋아! 다음에 같이 쇼핑가주지. 난 루이블랑이 다. 루이라고 부르면 오케이. 네 동료이자 라이벌이랄까?” 멋대로 내 외모를 채점하질 않나 대뜸 내 스타일에 흠을 잡고 난리인 이 양반은 루이블랑...... 물론 경. 이런 날씨에 깃털장식 모피코트 입고 다 니는 루이블랑 씨는 정말이지 고독한 스타일리스트였다. 지금 내 앞을 스 쳐간 다섯 기사님의 공통점이라면 놀랍게도 '기사도를 수호하고 이 나라를 지키는 기사님' 과 눈꼽만큼이라도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 다는 것이다. 그보다 이 미남자들이 득실거리는 광경은...... ‘어, 어디선가 많이 본 풍경인데 이거.’ 잠깐 내 머릿속에서 추억 속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그것 은... “미온 경. 어서 소개를 해야죠?” 스왈로우 금녀 기숙사 사감(舍監)인 키스가 헤죽 웃으며 다가올 때쯤 되 자 내 머릿속에는 엄청나게 엉켜 있는 실타래가 가득 들어찬 것 같았고 내 가 분명 뭔가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음을 직감할 수 있 었다. 난 키스의 팔을 끌고 응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바보가 아닌 이 상 이런 모습을 보고 '이야아아! 예상대로 멋진 기사단이네요!’라고 말할 놈이 있겠냔 말이다! “자, 자, 잠깐 나 좀!” “아아! 아파요! 이거 놓고 말하세요!” 내 마음이 더 아파! 12. “바른 데로 말해라 이 요가 괴인아! 이거 기사단 아니지!” 난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기사 맞습니다아.” 반면 키스는 얄밉도록 태연했다. 곧 내 분노어린 목소리가 티끌하나 없이 깔끔하고도 고풍스런 복도 한복판에 쩌렁쩌렁 울렸다. “운전기사도 이것보단 기사답겠다!!” 분노대폭발! 장미 목욕과 야채팩과 미성년자 기사 소년을 보고도 이것이 자랑스러운 베르스 왕국의 왕립 기사단이라는 걸 믿으라는 거냐! 차라리 염소를 보여주면서 이것은 심해 뱀장어입니다, 라고 우겨대는 편이 더 설 득력이 있겠다! 싸움질도 못하는 미남 미소년들 긁어모아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입이 있으면 말해봐라 키스 세자르! 그러나 키스의 태도는 갑작스럽게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그가 정색을 하 며 또박또박 말했다. “미온 경. 그럼 말해보세요. 당신은 대체 기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기사란 무엇입니까.” 이 사람 정색을 하니까 좀 무섭다. 그의 빨간 눈동자가 내 보라색 두 눈 을 삼켜버릴 듯 빛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성스러운 작위식도 있고.” “전투 중에 기사가 된 자는 작위식 없이 기사가 됩니다. 그럼 그는 기사 가 아닌가요?” “그, 그리고 기사도를 수호해야 하고!” “우리 역시 우리의 방식으로 기사도를 수호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검을 쓰지도 못하고!” “검을 쓰는 것이 기사의 조건입니까? 좋아요. 그러면 지금부터 모두 검 을 차고 다니겠습니다. 그걸로 만족하십니까?” “그, 그게 아니라!” 냉큼 냉큼 척척 대답하는 바람에 도리어 내가 설득당해 버렸다. 이 사람, 외판원 했으면 대성공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역시 이건 뭔가 허전하잖아! 백마 탄 기사의 꿈같은 건 우주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고! 그때 키스가 품속에서 세 번 접혀 있는 내 계약서를 꺼냈다. “이거 받으세요.” “얼레?” 난 엉겁결에 계약서를 받았다. 키스의 고혹적인 눈매에는 안타까움이 서 려 있었다. “당신의 환상을 깨버려서 미안하군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것을 찢고 우리가 왔던 길 그대로 되돌아가서 왕궁을 나가 당신의 고향 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다시는 나를 만날 일도 없고 스왈로우 나이츠가 당 신의 인생에서 거론될 일도 없을 테니까요. 계약서로 당신을 묶어둘 수는 있어도 당신의 마음까지 묶어 두지는 못하니 이곳을 원치 않는다면 잡지 않겠습니다.” “키스...... 경.”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한 가지는 기억하세요. 과연 당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세상 어디를 가셔 도 자신의 꿈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낙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과 를 먹고 싶다는 욕심만으로는 평생 사과 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디를 가셔도 꿈을 원한다면 그곳을 자신의 꿈에 맞게 바꾸셔야 해요. 그게 바로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키스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청아했지만 뭔지 모르게 그의 모습 어딘 가에서 기사의 흔적을 발견한 것 같았다. 결국 나도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원해 이곳까지 왔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후회 없는 노력을 했다고 는 말할 수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내가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낙원 같은 것을 멋대로 기대하고 또 멋대로 실망한 것인지도 모른 다. 단지 추천장 한 장 외에는 나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 않은가. “역시 이거..... 돌려드리겠습니다.” 난 나도 모르게 키스에게 다시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노력도 없이 단지 내 기대와 다르다고 불평만 했다니, 뭔가 나 자신이 몹시 창피했다. 그런 데 키스는 그걸 받지도 않고 다시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좋은 결정이에요.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이 된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합 니다아.” “아?” “그럼 이제 미온 경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아.” “잠깐. 이 계약서는 어쩌고!” “응? 무슨 계약서 말입니까?” “아뿔싸!” 난 황급히 그 '계약서'를 펼쳐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 어디로 갔나...... 나의 파랑새? 뭐야 이거 계약서가 아니잖아!” 속았다. 속았다. 속았다. 요가 인간이 또 날 속였다아아아!! “아아아. 찢어버리기엔 너무도 예쁜 시죠? 제 자작시랍니다. 원하신다면 액자에 넣어서 미온 경의 방에 장식해드릴 수도 있......” 부우우우우욱! “너무해!!” 난 '우주최악의 시'를 아주 아주 잘게 찢어서 창밖으로 뿌려 버렸다. 결 국 처음부터 날 놔줄 마음도 없었던 주제에 꿈이다 노력이다 낙원이다 멋 대로 지껄였겠다! 아아악 창피해! 이런 저질 사기에 끝까지 놀아난 나 자 신이 창피해 미치겠다! 13. “여기가 10년간........ 내가 있을 방인가?” 키스는 '잠옷은 지급해 주지 않습니다아.'라는 괴상한 작별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고 난 그제야 이제야 숨이 조금 놓였다. 뭔가 굉장한 것이 폭 풍처럼 내 앞을 지난 것 같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새로운 보금자리와 함께였던 것이다. 내 룸메이트라는 지스킬이 '지명' 받아 여기 없는 지금, 난 의외로 꽤 소박한 이 방에 홀로였다. 키스의 말대로 사용할 물품들은 자신이 알아서 구입해야 한단다. 이곳에는 커다란 창문 두개와 책상과 의 자, 옷장과 침대 그리고 의문만점의 화장대 정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 저건 또 뭐야.” 다 큰 남자 둘을 한 침대에 던져줄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았는지 당연히 침대는 오른쪽 끝에 하나 왼쪽 끝에 하나. 왼쪽이 지스킬의 자리였다. 그 리고 그 '지스킬의 영역'에는 노끈으로 만든 경계선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노끈에는 '침범하면 죽인다.'라고 쓰여 있는 쪽지가 걸려 있었다. 어린애냐! “대단한 환영인사로군. 사교적이기도 하셔라. 쳇.” 뭐야 저 태도는. 역시 이런 건 일부러 위반해 줘야 제 맛이지! 네 놈의 침대에 내 흙먼지 묻은 엉덩이를 잔뜩 비벼줄 테다! 응? 그러나 나는 지스 킬의 노끈을 뛰어 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화장대 위에 수북이 놓여 있 는 저 유리병들은 분명 지스킬의 것이다. 그런 을씨년스러운 것들은 딱 봐 도 화장품은 아니었다. “약?” 유리병 안에는 상당히 독해 보이는 가루며 알약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 정도 양을 밤낮 먹는다면 하루 종일 배가 부를 정도일 거다. 나이도 어려 보였는데 정말로 병약한가 보군. 성격은 표독스럽다지만 말이 야. “.....불쌍하군.” 결국 난 머쓱한 표정이 되어 다시 '지스킬의 국경'을 넘어왔고 내 자리로 돌아가 여행가방을 풀기로 했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큰 키의 남자가 튀어 들어왔다. “누, 누구!” “지스 경의 룸메이트라니 너도 참 불쌍하구먼.” “당신은 쇼넨베르트...... 경?” “오 기쁜데? 이름을 다 기억해 주고.” 직업병이랄까. 난 한번 소개 받은 사람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 취미까지 잊어버리는 적이 없다. 쇼넨베르트는 이 왕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 큼 건들거리는데다가 피부도 어떻게 태웠는지 커피빛이고 얇고 검은 가죽 옷에 악취미적인 액세서리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영락없는 건달 꼴 이었지만 다행이도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가 갑자기 내 턱을 확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캬아아. 정말 계집애처럼 생겼어. 요즘 취향인가?” 역시 나쁜 놈이다 이 녀석은! “아무튼 앞으로 쇼탄이라고 불러. 그러는 넌?”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미온이라고 부르셔도.” “미온 경? 미온 경이라...... 발음 한번 이상하네.” 당신도 만만찮아. 입속에서 내 별명을 몇 번이나 이리저리 굴리며 괜히 남의 별명가지고 생트집을 잡던 쇼탄은 내 침대에 멋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미온 너는 여기 왜 왔냐. 맞춰볼까? 너 팔려온 거지!” “아닙니다!” 실례잖아! 팔려 와서 기사되는 사람이 어딨겠냐! “아 그래? 그럼 끌려온 거냐?” “절대.” 여기가 무슨 도살장인가. 끌려오게. 쇼탄은 놀란 얼굴로 내 얼굴을 뜯어 보는 것이었다. “뭐야. 너 그럼 돈 벌려고 온 거야?” “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에요!” 돈 벌 생각이었다면 내가 뭣 하러 여기 오겠어. 고향에서도 마음만 먹으 면 갈고리로 돈을 긁을 수 있었는데. 쇼탄은 굉장히 난해한 수수께끼라도 들은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너 그럼 여기 왜 온 거냐?” “그, 그거야...... 정의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죠!” “푸...... 푸하하하핫!” 그래 웃어라. 마음껏 비웃고 날 돌로 쳐라. 이제는 익숙해 졌으니까! “아아 그랬구나. 기사? 큭큭. 이제 기사 되었으니까 만족하냐?” 얼마 전 내가 누군가에게 해준 말과 비슷하군. 왠지 벌 받은 것 같다. “그보다...... 스왈로우 나이츠는 정확히 뭘 하는 곳인가요?” “기사단이야. 왕국에서 창설한 왕실 직속의 기사단이지.” “하지만 이런 모습은 전혀 기사단이 아니잖아요!” “꼭 검을 휘둘러야만 기사는 아니잖아.” “예?” “기사 작위 있는 사람 중에서 검술의 달인이라든지 마상 시합의 프로 같 은 자들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글쎄요.” “작위는 누구한테라도 부여하면 끝이지만 검술이나 마술(馬術), 지도력 같은 건 누가 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진아 같은 귀족 공자들 상 당수가 무늬뿐인 명예 기사 작위를 면허처럼 소유하곤 있다지만, 그 녀석 들...... 여자 후릴 때 외엔 그 작위 써먹는 일이 없을 걸?” 쇼탄 경은 의외로 달변이었다. 하긴 왕실이 생색내는데 작위만큼 편한 게 또 있을까. 영지를 줘야하는 것도 아니고 금은보화를 써야하는 것도 아니 고 그냥 '당신은 이제부터 기사'라고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뭐 강단에 한번도 서지 않은 정치인에게 명예 교수 자리를 준다든지 돈을 많 이 기부한 상인이 명예 관리가 된다든지...... 피차 별 노력도 하지 않고 생색내기 쉬운 일인 거다. “그럼 스왈로우 나이츠도 결국 명예직이라는 말인가요?” “절대로 아님! 우린 왕실에서 써먹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인들이지.” “어, 어디다 써먹는데요?” “잡일.” “아?” “그럼 뭘 기대한 거냐?” 그런 건 당당하게 대답하지 마세요, 쇼탄 경! “그렇게 서운한 얼굴 하지 마. 우리 밖에 못하는 일도 있어.” “우리 밖에...... 못하는 일?” 쇼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댕겼다. 하얀 연 기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를테면 '지명'같은 것?” 결국 모든 의문의 끝에는 꼭 '지명'이라는 단서가 존재하는군. “그런데 지명이란 뭐죠?” “그거야 말로 스왈로우 나이츠가 존재하는 진짜 이유지.” “지, 진짜 이유?” “곧 알게 돼.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만큼 편한 일도 또 없어.” “아아?” 쇼탄은 벌떡 일어나더니만 '여기서 담배 피웠다는 말, 지스킬한텐 말하지 마. 그 놈 정말 죽일 듯이 화를 내거든.'이라고 당부하며 기지개를 폈다. 확실히 늘씬한 몸매다. 상당히 몸 관리를 잘한 것 같은데, 검술을 배운다 면 금방 실력이 늘 것 같은 체형이로군. “그런데 쇼탄 경?” “왜 미온 경?” 역시 어색해 이런 칭호! “키스 경은 어떤 분이죠?” 솔직히 상당히 궁금했다. 조금도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요가 생명체라 는 생각이 들다가도 갑자기 확 풍겨나는 존재감이랄까, 속을 알 수가 없는 자였다. “키스 세자르 씨 말이로군.” 쇼탄 역시 그의 이름이 나오자 긴장한 얼굴로 내게 당부하듯 말했다. “그를 화나게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아.” “예?”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쇼탄은 예전의 경험이 떠오르는 듯이 두려 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키스 경은 화가 나면......” 역시 키스 경은 겉으로만 '무방비 인간'인 척하는 왕궁의 실력자가 아닐 까! 어쨌든 젊은 나이에 기사단의 리더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의미잖아. 쇼탄은 그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내 귓가 에 속삭여 주었다. “울어버리거든.” 14. 뭔가 상당히 맥이 빠져버렸다. 이층 복도의 베란다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 던 나는 저택 리더구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왕 궁에 출입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하나 같이 찬란하기 그지없는 의상에 수행원들도 너덧 명씩이나 따라다니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가 이층 창 문인 이곳까지 닿을 정도로 높다란 어떤 귀부인은 엄청나게 긴 치마 끝을 잡아주는 시녀만 둘이나 붙어 다니는 '움직이는 인간 타워'였고 대제후의 손자 정도로 보이는 한 꼬마는 말처럼 몸을 숙인 몸종의 등에 올라탄 채 채찍까지 들고 본격적으로 행차중이셨다. 아주 훌륭한 악덕 영주가 될 재 목이로군. 이런 ‘'궁 괴물'들을 보고 있자니까 차라리 스왈로우 나이츠는 꽤 정상적으로 보인다. 뭐 생각해 보면 기사답지 않다 뿐이지 말투도 옷 입은 것도 정상적이고 몸매도 얼굴도 수준급의 미남자들이 아닌가. 잠깐!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어째서 하나 같이 각양각색의 미남들로 구성되어 있 는 거지? 그리고 보니 나를 포함해서 스왈로우 나이츠 단원들의 유일한 공 통점은 그것뿐이잖아. 그 외엔 특기도 없고. 혹시 여기에 뭔가 흑막이...... “다녀왔습니닷!!” 두다다다다닷!! 복도 끝에서부터 맹렬한 발소리와 함께 밝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자기 몸만큼이나 커다란 가죽 가방을 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 앞을 쓔웅 지나가 버렸다. 우아! 나보다도 머리가 길다. 저 정도면 무릎까지 닿는 거 아냐? 게다가 저 몸에 저 얼굴에 저 치마는 분명 여자? 그런데 여긴 금녀구역이라고 했잖아! 정 신없이 달려가던 그 '소녀'는 물어볼 새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체 저건 또 뭐냐는 녀석이냐고! “설마..... 저 여자아이마저 기사라고 하지는 않겠지?”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15. 난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응접실로 다시 돌아갔다. “엔디미온 경? 전 랑시랍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안녕. 랑시...... 경.” 하아. 전개 한번 빨라서 좋군.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의 씬14에서 미친 듯 이 내 앞을 지나간 '발랄한 소녀'는 소녀가 아니고 아가씨는 더더욱 아니 었다. 그렇다면 보는 사람 헷갈리게 치마 입지 말란 말이야! 랑시가 내 눈 치를 파악하고는 자신의 치마를 들쳐 보였다. “아? 이거요?” “헉!” 랑시는 의외로 대담한 성격이었는지 사람들 앞에서 드레스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흡! 역시 가슴이 없다! 자기 입으로 남자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 하고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인지라 난 나도 모르게 '여자가 아니잖아!' 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제발 정상인을 만나고 싶다는 소박하 고도 간절한 심정에 가슴이 아려온다. '소녀 기사' 랑시는 머쓱한 표정으 로 그 작은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건 단지 지명자의 취향이니까요. 특별히 여장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지명자의...... 취향?” 얼레? 사람들의 표정이 왜 이래!? '지명자의 취향'이라는 말이 나오자마 자 스왈로우 기사님들의 표정에 불안감이 내려앉았다. 이봐요들! 누구라도 말 좀 해보라고! 지명자의 취향이라는게 대체 뭐야! 다행이도 랑시는 성격 이 밝은 소녀기사 아니 소년기사라서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이런 우중충한 분위기를 단번에 부셔 버렸다. “다녀오면서 맛있는 훈제고기 사왔어요! 오늘은 제가 요리할 테니 기대 하시라!” 이봐. 정성 고맙긴 한데 그런 말은 옷 좀 걸치고 해줘. “엣취!” 스왈로우 나이츠도 어쨌든 왕궁식구인지라 전담 요리사들 저택 리더구트 지하에 포진하고는 있지만(가본 적 없다.) 멤버들이 원한다면 직접 요리를 할 수도 있단다. 랑시가 끙끙거리며 들고 온 거대한 가방 안에는 훈제양고 기가 가득 들어 있었나 보다. 자기 몸집만한 고깃덩이와 몇 시간이나 씨름 하던 랑시는 오늘 저녁의 메인 디쉬 '맛자랑 양고기스튜'를 완성시켰고 어 린애 같은 미각인지 꽤 달긴 했지만 그래도 수도 아스말에 와서 최초로 제 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16. 다음날 꿈속을 헤매던 나를 깨운 것은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시종의 목소리였다. “기상시간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엔디미온 키리안 님.” 왕궁 사냥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노크 소리, 문밖의 미성에 부스스 일 어서며 '역시 여긴 기숙사 맞아.'라며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내 전직의 버릇이 남아 있는지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기엔 몸이 무겁다. 좀 더 자볼까? 생각하다가 기사단 생활 첫날부터 늦잠이라는 것도 무성의한 태도다 싶어 서 침대 위에서 긴 기지개를 펴고는 목을 조르는 내 긴 금발을 풀었다. 정 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위험한 잠버릇이라니깐. 예전에 동거하던 그녀도 항 상 말했지. '대체 이게 뭐야. 교수형 당하는 꿈이라도 꿨어? 머리를 자르 던지 잠버릇을 고치던지 결정해!'라고. 한번은 이 놈의 머리칼이 그녀의 목마저 휘감아 버리는 바람에 그녀가 기겁을 하며 가위를 들고 날 쫓아왔 던 적도 있었지. 그때는 그녀가 사정없이 뒤엉킨 내 머리칼을 빗어 줬는데 이제 그녀는 없고 여전한 잠버릇만 남았다. 발전한 것은 혼자서 머리 빗는 기술 뿐...... 인가. 하아. 난 발전이 없는 놈인가 보다. 싫다! 아침부터 이런 지지리 궁상은! “에이잇! 아침부터 이게 무슨 궁상! 우아악!” 기운을 내보려는 심산에 억지로 몸부림을 치다가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 져 버렸다. 아침부터 마룻바닥에 추락해 버린 이 꼬락서니, 무지하게 울적 하군. 하루치 기운이 한번에 빠져 버렸다. 게다가! “흐으으읍!” 마, 망할! 미처 다 풀지 못한 내 긴 금발이 굴러 떨어질 때 몸에 엉켜버 려 내 목을 죽일 듯이 조르기 시작했다. 사념(邪念) 머리칼이냐! 그래도 자신의 본체를 죽이려는 짓은 그만두란 말이다 이 놈의 못된 머리칼! 난 자승자박이라는 사자성어를 몸소 실천하는 기염을 토했다.(주 - 自繩自縛, 자신의 밧줄에 스스로 묶임. 스스로 초래한 나쁜 결과. 한심하고 어리석음 을 비꼬는 말. 유사어 : 자기 손으로 무덤파기. 삽질 etc). 우아악! 그런 창피한 거 일일이 설명하지 마! 어, 어쨌든 이대로는 숨이! “아아. 미온 경.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이곳이 싫었나요오.” 문을 열고 들어온 키스가 무척이나 슬픈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키, 키스 씨. 동정은 필요 없으니까 내 목을 조르는 황금빛 뱀이나 어서 풀어 주세요. 어? 그런데 그 가위는 뭡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주인도 몰라보는 그런 배은망덕한 금발 따위는 단번 에 잘라드리겠습니다아.” “자르지 마!!!” 17. “으잉? 아침부터 뭐요 그 얼굴들은?” 스왈로우 나이츠의 아침 식사는 비가오지 않을 때는 일층의 테라스를 이 용한다. 정원의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이 우아한 테라스는 랑시가 무척이나 아끼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침 일찍부터 그곳에서 비스킷과 차를 즐기고 있던 쇼탄은 나와 키스가 나타나자 눈살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교수형이라도 당한 듯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고 머리칼도 산지사방으로 삐죽거리는데다가 온 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 는 채 인상을 쓰고 있는 내 모습과 눈가에 멍이 난 채로 가위를 들고 난감 하게 웃고 있는 키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의아하겠지. 이건 순전히 평생 기른 남의 머리칼을 덥석 자르려고 했던 키스의 잘못이야! “자자. 식사하면서 들어주세요. 오늘의 일입니다아.” 호오. 이것이 아침 브리핑이라는 건가. 테라스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키스는 자신의 자랑스런 기사단원들을 훑어보며 '오늘의 노동 할당량'을 읊기 시작했다. 물론 멤버의 상당수가 의문의 '지명'을 받아 출장을 나가 있는 관계로 테라스에 모인 자들은 어제의 그 멤버 여섯명이지만 말이다. 키스가 사무적인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레녹 경. 당신은 지명 받았습니다. 한 시간 안에 자세한 지시문이 도착 할 겁니다.” 오. 꽤 진지하잖아. 레녹은 레몬을 띄운 홍차가 담겨진 찻잔을 내려놓으 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쇼탄 경. 당신, 돈 갚으세요! 오전 중으로 왕실로부터 독촉장이 도착할 겁니다.” “가, 갚으면 되잖아!” 뭐냐! 이게 갑자기 무슨 사채업자 분위기지? 왕실로부터의 독촉장이라니 그건 또 대체 뭐냐고! “그리고 랑시 경. 오늘은 일이 없군요. 푹 쉬세요.” “신난닷!” 랑시가 여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봐도 새빨간 거짓말 같다. 놀아도 좋다는 지시를 받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녀 아니 그는 분명히 스트라이프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헷갈리니까 남자든 여자든 하나로 통일 해 줬으면 좋겠다. “저, 저는요? 지명 받은 것 없나요?” 크리스티앙은 불안한 표정으로 키스에게 되물었다. 키스의 안색이 금세 안타깝게 바꿨다. “미안해요. 크리스 경. 이번에도 지명은 없습니다.” “......예.” 왜 저렇게 풀이 죽은 거지? 지스킬은 분명 지명 받아 기분 나쁜 얼굴로 나가버렸는데 어째서 크리스는 지명 받지 못해서 쓸쓸해하냐고. “그리고 미온 경!” 앗! 나다! 두근두근, 과연 무슨 명령이 내려질까. 키스는 나에 일격을 맞 아 부어있는 얼굴에 한껏 웃음을 담으며 내게 명령을 내렸다. “첫날이니까 가벼운 일을 시키도록 하죠. 두 시간 후에 왕실 수렵대회가 시작됩니다. 그곳에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자격으로 참석하도록 하세요!” 와, 왕실 수렵대회? 그건 분명히 왕족들이 모여서 사슴이나 노루 같은 것 을 사냥하는 그런 우아한 경기가 아닌가! 그런 것에 기사 자격으로 참여한 다는 것은 분명 왕족 경호? 이런 건 잡일이 아니라고. 이거야 말로 왕실 직속 기사에 어울리는 일이지! 난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키스의 명령을 받 아들였다. “임무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랄라라. 아이 좋아라. 가서 내 명검을 가지고 올까나. 갑옷도 입고 망토 도 둘러야지. 그런데 키스가 좋아 죽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왜 또 그런 표정이십니까? “지금 어디가시는 거에요? 미온 경?” “아. 검과 갑옷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요.” “아?” 순간 쇼탄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웃음을 참으며 날 바라봤다. 아, 목석 같은 레녹 마저 실웃음을 보인다! 내, 내가 지금 뭘 잘못한 거야? “아하하.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아.” “예? 그럼 경호를 어떻게.......” “경호를 맡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그럼 뭘 하는 거죠?” 18. “........왕자님. 나이스으으으으” 내 힘없는 응원소리가 사냥터에 애처롭게 울렸다. 결국 이거였군. 확실히 키스의 말마따나 난 왕실 수렵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내 꼴을 좀 보라! 멋진 판금 갑옷은커녕 하늘하늘 거리는 백색의 토가(toga)에다가 왕족들의 고상한 취향 덕분에 두 다리가 다 보이도록 개량되어 있다. 게다가 은빛의 장검은 고사하고 내 두 손에는 백화(白花)가 맺혀 있는 나뭇가지가 꼬옥 들려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키스가 '미온 경이야말로 수렵대회의 꽃입니 다아!'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런 의미의 꽃인 줄은 몰랐단 말이야! 요컨대 나는 기쁨조였다. “너! 목소리가 너무 작아! 기쁨조면 기쁨조 답게 왕자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란 말이야!” 큭, 옆에 다가온 거구의 기사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윽박질렀다. 그가 바로 왕족들의 경호 기사. 카론 샤펜투스 경이 부기사단장으로 있는 헬스 트 나이츠의 멤버였다. 어쨌거나 어쩌라고? 머리에 꽃을 꼽고 봉산탈춤이 라도 추란 말이더냐! 그때 온 몸에 '저는 간신배입니다.'라는 푯말을 걸고 다니는 것 같은 한 귀족이 잽싸게 어린 왕자에게 달려와 손바닥에 불이 나게 비벼대기 시작했 다. “이야아아아!! 페르난데스 왕자님! 역시 단번에 멧돼지를 즉사시켰사옵 니다! 전설의 명궁 헤브너마저 부러워할 명궁이시옵니다!” 이봐. 그럼 방금 왕자님의 화살을 엉덩이에 맞고 숲 속으로 도망친 멧돼 지는 뭐냐. 엉덩이에 활 맞고 즉사하는 생명체 같은 건 없다고! 그러나 아 부에는 역시 뻔뻔하게 밀어 붙이는 저력이 필요하다. 이에 뒤질세라 다른 귀족들 역시 너나 할 것이 어린 왕자에게 몰려들어 세계정복이라도 성공한 냥 게거품을 물며 칭송하기 시작했고 정작 기쁨조인 나는 그들의 등살에 떠밀려 밀려나 버렸다. “멋집니다 왕자님!” “훌륭하십니다 왕자님!” “우주최강이십니다 왕자님!” “즉위 하신 뒤에도 저의 충성을 잊지 말아 주세요 왕자님!” 이것은 이미 광기였다. 그러나 열 두 살 쯤 되어 보이는 곱슬머리의 페르 난데스 왕자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백마 위에서 아무 말도 없었다. 즉 사시키지 못한 것쯤은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머리가 좋 은 왕자라면 진정으로 자신을 칭송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 이다. 즉위 일순위의 첫째 왕자인 페르난데스에게는 밤마다 비공식적으로 십여 명 이상의 십대 여성들이 '배달'된다고 키스가 말했었다. 말하자면 귀족들 의 향응제공(饗應提供) 같은 것이리라. 침샘에서 기름이라도 나오는 인간 처럼 아부를 입에 바르고 사는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왕자의 씨앗을 받아두 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적당히 하라고! 짐승이냐? 왕자님은 아직 열두 살 이야! “이봐! 뭘 멍하니 서 있는 거야!” 귀족들의 왕자찬양이 거의 광란의 무대가 되어가고 있을 때 예의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가 내 머리를 툭하고 내리쳤다. 그것도 투박한 쇠장갑을 낀 손으로! 아파 이 자식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평생 추억으로 남을 구타를 당할 것 같아서 참아야 했다. “왜 그러세요?” “어서 가서 즉사한 멧돼지를 끌고 와!” “예? 그걸 왜 제가!” “당연하잖아. 이런 잡일은 스왈로우 나이츠가 해야 할 일이다.” 나보다 머리 두개는 더 큰 털북숭이 기사 놈의 얼굴에 거만한 비웃음이 번졌다. 그랬군. 크리스가 말한 '수치스럽고 힘들더라도'의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기사라도 다 같은 기사가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걱정 말라고. 그 무시무시한 호스트 생활도 너끈하게 견뎌온 내게 이 정도 쯤 은 치욕도 수치도 모욕도 아니니까 말이지. 배알도 없는 것이 자랑은 아 니지만 사냥개 흉내를 내면서 멧돼지 끌고 오는 일쯤은 얼마든지 참고 해 줄 수 있어.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저 그런데... 그 멧돼지 안 죽었걸랑요?” “이 놈! 어르신들께서 분명 즉사했다고 말씀하셨는데 항명할 작정이냐!” 야 이 못생긴 털기사야! 아무리 임금님이 우겨도 안 죽은 건 안 죽은 거 잖아! 그게 죽었다면 어째서 숲 속으로 도망친 거야! 좀비 멧돼지냐! 그러 나 관료주의라는 아편에 찌든 이 기사 놈에겐 인간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가.져.오.라.면.가.져.와.” 그래그래.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훌륭한 기사정신이다 정말. 그럼 이제 스마일 작전이다. “하지만 전 꽃인데요. 그러니까 아시다시피 꽃은 움직일 수가...... 가, 가면 되잖아요.” 안 통하는군. 내 얼굴만 한 강철 주먹이 내 앞에서 부르르 떨자 반사적으 로 숲 속으로 뛰어가 버리는 이런 솔직한 다리라니. 가져오면 되잖아요. 그렇게 눈 부라리지 말라고요 털기사님. 19. “어디로 갔니...... 멧돼지야아아.” 씨잉. 아무리 그래도 단검 정도는 줘야 할 것 아냐. 그나저나 사냥터의 숲 속이 이렇게 음산한지 전에는 몰랐다. 아직 오후도 안 되었건만 어두컴 컴하고 축축한 게 낮도깨비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난 절대로 즉사했을 리가 없을 멧돼지의 핏자국을 따라 점점 더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 었다. 이런 위험한 일이 '잡일'일 리가 없잖아 쇼탄 경 이 나쁜 놈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비명을 지르면 달려와 주겠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무슨 격투의 달인도 아니고 집체만한 멧돼지와 맨손으로 싸우는 일이 가능할 턱이 없잖아. 제발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기 를 강렬하게 희망했다. 아니면 찾지 못했다고 핀잔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내 첫 임무인데 포기해 버리 는 것도 좀 그렇잖아. 푹푹 꺼지는 부엽토를 밟으며 계속 핏자국을 따라 가던 중 쭉 이어져 있던 혈선이 끊어진 것을 보았다. “응? 이 놈, 어디로 갔지?” 난 순간 살기어린 시선을 느끼며 옆을 바라보았다. 풀숲 속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오 신이시여! 그 어둠 속에서 시뻘건 두 눈동자가 날 바라보 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 이다. 중요한 것은 방금 그 거대한 것이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우아악! 즉사는커녕 광분하고 있잖아! “망하아아알!!!” 수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많은 종류의 적들과 싸운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용과 싸우는 영웅도 있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마왕에게 당당히 맞서는 용사도 있고 악덕 귀족의 사병들을 홀로 물리치는 검객도 있다. 그리고 난 지금 엉덩이에 화살 박힌 멧돼지와의 처절한 사투가 그 막을 열었다. 실망 스러워 보였다면 미안하지만 이쪽은 절박하다고! “우아아앗! 떨어져라! 제발 좀 떨어져! 이 축생!” 돌덩이 같은 멧돼지의 몸에 바디 프레싱을 당한 나는 이 세상을 불살라 버릴 것처럼 이글거리는 이 놈의 증오를 온몸으로 전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총살의 위기, 정조의 위기, 그리고 지금 인간을 증오하는 짐승의 노리개가 된 이 인생의 대위기가 어째서 하루에 한번씩 찾아오는 거냐고! 기사단 첫 날 멧돼지에게 압사당하는 어이없는 죽음으로는 하늘나라 가도 부모님을 뵐 수가 없었다. 난 어떻게든 이 난데없는 위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일단은 설득. “들어봐 친구. 엉덩이에 구멍 뚫린 네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나도 피해자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우와와악 깨물지 마!” 역시 안 통한다. 말이 통할 리가 없지. 내 간절한 설득에 멧돼지는 내 옷 을 찢어발기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고 덕분에 내 어깨에 진한 혈선이 그어 졌다. 수컷 주제에 남의 살갗에 이빨자국 남기지 마! 크르르르릉! 내 얼굴에 탁한 타액이 툭툭 떨어진다. 자, 장난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사냥대회에서 사냥감에게 물려 죽은 전대미문의 얼간이가 되어 버린다. 난 두 손으로 강철 같은 멧돼지의 송곳니를 쥐고 힘겹게 밀어내며 내가 만들 어 낼 수 있는 가장 절박하고도 서글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누구라도 좀 와주세요! 당신들의 꽃이 지금 죽어가고 있 단 말이야!!”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꽃이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아아아아아아아.’라 는 공허한 메아리 뿐. 순간 머릿속엔 지금까지의 20년 추억들이 주마등처 럼 스쳐가기 시작했다. 아아 떠올려 보니까 내겐 정말 행복했던 일들도 많 았....... 잠깐! 너무 일러! 멋대로........ 멋대로 최후의 장면을 연출하 지 말아 달라고! “우어어어어!! 이 놈!! 만물의 영장인 인간님을 우습게보지 마라!” 난 그 놈의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물러설 곳 없는 영장류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려 주겠다 이 축생! 20.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뒤엔 성격이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대로라면 난 삼일동안 세 번 성격이 바꿔야 했다. 내가 끌고 온 멧돼지 를 보자마자 귀족들은 왕자님 앞에서 알랑방귀를 재방송하며 광란의 제2막 을 열었다. “이야아아! 역시 즉사였군요! 명궁이시옵시다 왕자님!” 눈을 엉덩이에 붙이고 사냐! 이게 즉사일 리가 없잖아 멍청이들! 즉사는 내가 당할 뻔 했다고! 즉사였다면 난 지금까지 도플갱어와 싸우고 왔단 말 이냐! 이게 진지한 소설이었다면 난 벌써 죽었단 말이야! 그러나 너덜너덜 해진 옷에다가 온 몸에 상처까지 입은 내 불쌍한 모습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곱슬머리 왕자님만 제외하면 말이다. 백마 위에 올라탄 작은 체구의 페르난데스 왕자는 못된 멧돼지들에게 둘러싸여 윤간이라도 당한 것 같은 내 불쌍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앳된 목소리가 신 의 은총처럼 들려왔다. “넌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인가.” “예?” 이런. 순간 깜짝 놀라서 얼빠진 대답을 해버렸다. 황공하옵게도 왕족이 직접 내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 “경의 이름이 뭔가.” “미온...... 아, 아니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난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흑! 쑤 시지만 참자. “기억해 두겠다. 엔디미온 경.” 아아 역시 왕자는 다르다. 고귀한 눈빛과 고결한 목소리, 왕자다운 근엄 함이 서려 있는 저 모습을 보라! 필시 하늘에서 내려온 어린 왕자가 아니 던가! 아니 뭐 꼭 내게 관심을 줘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고.... “보기 흉하다. 물러나 있거라.” 순간 멸시의 시선을 가득 담은 중년의 귀족 놈이 나와 왕자님의 러블리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며 날 멀리 밀쳐냈다. 지금 내 새 옷이 찢겨지고 어 깨며 다리에 짐승의 이빨자국이 나 버린 이 민망한 꼴은 모조리 네 놈들 덕분이란 말이다! 왕궁의 꽃을 넝마로 만드니까 이제 속이 시원하냐! 이 못생긴 것들! 배만 산처럼 나와서 넘어지면 일어나지도 못하는 인생 낙 오자들아! ......라는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내 몸은 내 자리로 돌아와 후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가지 를 집어 들었다. 피투성이와 하얀 꽃의 조화라니 참으로 악취미로다. 이대 로는 출혈과다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야! 이 꼴이 대체 뭐야!” 예의 털기사가 또 다시 내 옆에 나타나선 으르렁거리는 거였다. 당신 소 원대로 처절한 사투 끝에 멧돼지 잡아왔더니 이제는 내 분골쇄신한 모습을 가지고 시비다. 어쩌라고! 허공답보(虛空踏步)라도 펼치면서 잡아오길 바 란 거냐! “이런 꼴로 서 있다간 왕자님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도 모르나! 썩 사라져!” 울컥!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에도 정도가 있다고! 순간 아무리 성격 좋은 나라도 기사고 뭐고 안다리 후리기로 이 놈을 매다 꽂은 뒤에 온 몸 의 털을 하나하나 뽑아 버리고 싶다는 기분이 솟구쳐 올랐지만...... 생각 해 보니까 또 다시 사냥감이 도망쳐 버렸을 때, 이 녀석들은 또 즉사라고 박박 우겨댈 테고 그걸 찾아오는 사냥개 역할은 나라는 것을 깨달고 순순 히 털기사의 말대로 퇴장하기로 했다. 페르난데스 왕자님은 더없이 멋지지 만 활 실력만은 믿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세기의 대결은 하루에 한번으 로 족하다고. 난 결국 기사단 첫 임무에서 중상을 입고 절룩거리는 몸으로 리더구트에 돌아왔다. 21. “......돌아왔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아! 미온 경! 꼭 멧돼지의 습격을 받은 것 같군요!” “바로 그겁니다.” 테라스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팔자 좋게 낮잠을 즐기던 키스는 걸 어 다니는 시체 같은 내 꼴을 보고는 걱정스런 위로를 쏟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폭 쓰러져 잠들었다. “자지 마!!!” “아아 오늘은 날씨가 너무도 좋아서 깨어있기 송구스럽군요.” “말 돌리지 마!!!”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분명히 즉사했다는 괴물 멧돼지가 좀비처럼 부활 해서 날 덮쳤고 난 필살의 조르기로 그 놈을 기절시켜 극적인 승리를 거둔 뒤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왕자님께 치하를 받았습니다. 이상입니다.” “......” “......” “어머나. 미온 경이 간 곳은 사냥대회가 아니라 격투대회였나요?” “놀리지 마!!!” 아윽! 계속 소리를 쳤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 그러나 이대로 죽더 라도 그 전에 이 말만은 들어야겠다. “말해 봐요. 대체 이 스왈로우 나이츠가 뭐하는 집단이고 앞으로 내게 닥쳐올 대위기는 또 어떤 것인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요! 사기 계약으로 날 10년 동안 부려먹는 주제에 그 정도쯤은 알려줘야 하잖아요!” “일단.......” “일단?” “그 상처, 치료부터 하죠.” 키스가 싱긋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22. 놀랍게도 키스의 붕대 감는 실력은 대단했다. 대체 여기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내 몸에 둘러준 붕대는 맞춤옷처럼 부족함도 모자람도 없었고 소독하는 손놀림이나 마무리하는 솜씨역시 대낮부터 베실 베실거리며 잠에 취해 있는 한량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베테랑이 었던 것이다. 난 솔직히 감탄했다. 그가 새로운 옷을 던져주며 말했다. “다행이도 흉터는 남지 않을 것 같네요. 의외로 운동신경이 좋았나 봐요 오?” “운동신경의 문제가 아니었다고요! 앗!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역시 내가 이 꼴이 될 줄 알고 있었다는!”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줄도 알고 있었지요.” 너무해! 알면서 날 그런 곳에서 던져줬단 말이지! 하지만 키스를 이승과 작별하게 해주는 건 그의 설명을 들은 뒤로 하자. “자! 이제 말해 봐요! 아무짝에 쓸모없는 약골 미남들만 수용해 놓은 이 스왈로우 나이츠가 대체 뭐하자는 집단인지!” “아. 배고프지 않아요?” “말.돌.리.지.마..” 내 자색 눈동자가 번뜩이자 키스가 움찔했다. 그리고는 툭하고 대답을 던 졌다. “펠리오스의 무녀들을 경호하는 신관기사.” “엥?” “말 그대로 왕실의 무녀들을 지키는 용사님들이랍니다아.” “하, 하지만 펠리오스 탑은 분명 금남(禁男)구역인데 무슨 수로 경호를.......” 나도 모르게 납득할 뻔 했지만 순간 절세미녀라는 무녀들이 옹기종기 모 여 사는 펠리오스 타워가 분명히 남성 출입금지구역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 다. 무녀들은 성스러운 신의 종이기 때문에 남자를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파문감이란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그곳을 지키는 여궁술사(女弓術士)의 독화살이 날아들거나 여마법사의 불지옥 마법에 전신3도 화상을 입기 때문 에 실수로라도 접근하지 말라고... 키스 경, 네 놈이 말해줬잖아! 접근도 못하는 그런 적대적인 처녀들을 무슨 수로 경호를 해! 키스는 헛기침을 하 며 변명을 했다. “물론 그건 형식적인 임무입니다.” “형식적?” “그러니까 뭔가 그럴듯한 명분이라는 것이 있어야 그래도 기사단이니까 요. 펠리오스의 무녀들은 사실 아주 힘 센 아가씨들이라서 저희들이 지켜 줄 필요가 없어요. 그렇죠?” 내가 알게 뭐냐! 이 양반이 장난치나! 키스가 방긋 웃자 내 고운 이마에 혈관이 다 돋았다. “명분 말고 진실을 말햇!!” “진실은 저 산 너머에 있습니다아.” “저 산 너머에 널 묻어버리기 전에 냉큼 이실직고 못하겠어!” 내가 주먹을 부르르르 떨자 그제야 키스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며 자백 을 하기 시작했다. “스왈로우 나이츠는 삼십여년 전 왕궁에서 직접 조직한 단체입니다.” “아 그렇게 오래.......”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면 뭔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 아냐? 이런 유지비 많이 들어가는 비폭력기사단을 단지 왕궁의 잡일을 위해서 쓴 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미온 경의 예상대로 우리는 왕궁의 시중을 듭니다. 의외로 왕족들의 생 활에선 미남자를 쓸 일이 참 많아요.” “단지 그것 뿐? 그럼 처음부터 시종을 쓰면 되지 왜 거창하게 기사를 쓰 는 거에요.” “시종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 “바로 '지명'이죠.” 키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내 앞에 찻잔을 가져다 놓았다. 엷은 김이 오르는 하얀 찻잔에는 훌륭하게 블렌딩되어 있는 베르가모트 향 홍차 가 담겨 있었다. 정말이지 차 끓이는 솜씨 하나는 수준급인 남자다. 하지 만 지금은 홍차야 어쨌든 좋다고! “그러니까 지명이 뭔가요.” “그러니까 말 그대로 지명입니다아.” “그러니까 그게 뭐죠?” “그러니까 지명은 지명입니다아.” “그러니까 말 장난치지 마!!” 오똑한 코끝을 찻잔에 대고 향기를 음미하는 키스의 저 여유로운 표정...... 한대 쥐어박고 싶군. 아 그런데 지명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지 스킬은 그걸 죽도록 싫어하는 것 같았고 크리스는 그걸 절실히 원하는 것 같았다. 대체 그게 뭐냐고. 아리송하네. “세금을 제외한 이 왕궁의 수입, 사분의 일은 바로 우리들이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 세아스말 왕궁에 우리를 '입주'시킨 이유랍니다.” 키스는 내가 추리해 나가는 걸 즐기는 것처럼 하나씩 단서를 말했지만 아 직까지도 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설마 기사 작위까지 줘 놓고 술 접대부 만들어 팁 받아 돈벌이 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 아닌가. 지금 이거 읽는 사 람은 알겠어? 어째서 기사단이 돈을 벌어들인다는 거야. 그리고 기사만이 할 수 있는 '지명'이라는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때 문득 다른 생각이 났다. “아시겠지만 전 추천장으로 이곳에 왔어요. 저희 고향에 온 기사님으로 부터 받은 거죠. 그 분은 누구였습니까?” “선대 기사단장일 겁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그 사람으로부터였군!’ 결국 그 사람에게 추천장을 받은 뒤부터 정의의 기사가 되겠다는 헛된 야 욕에 불타올라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설인과 싸우고 멧돼지 와 싸우고...... 얼굴만 아리따우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이런 합바지 기사단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 '다시 만나면 두들겨 패주겠다.' 1순위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양반은 지금 어딨습니까!” “없습니다.” “예? 왕궁에 없다고요?” “아니요.” “그럼 이 나라에 없나요?” “아니요.” “그럼 뭐에요! 망명이라도 갔습니까!” “이 세상에 없습니다.” 키스의 말은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아마도 내게 추천장을 준 그 상 냥한 기사는 키스와도 관련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멍한 기분이 든다. 그 기사님이 죽었다고? “어, 어째서 그렇게 된 거죠? 설마 멧돼지와 싸우다가......” “지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에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 지명이 대체 뭐야! 어째서 사람이 죽는 거냐고! 설마 적진에 보내서 스파 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순간 심장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억울한 사정이 있는 평민 가족을 지켜주려 하셨습니다. 그 분 귀족출신 임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명령마저 무시한 채 홀로 그들을 지키려고 하셨지 요.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강렬하게 빛나는 신념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귀족이 평민을 지키다가?”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임을 명예롭게 생각하셨습니다.” 키스가 짧게 말한 그의 인생은 꼭 알려지지 않은 영웅담을 듣는 것 같았 다. 그런 기사가 현실에도 정말 존재했던가. 내가 꿈꾸던 그런 이상과도 너무도 닮은 사람이었다. 그런 분이 나한테 사기 쳤다고 욕하는 건 이제 그만두자. “당신도 그 분과 같은 기사입니다. 그 자부심, 스스로 포기하지 마세요.” 너무도 차분하며 단호한 목소리가 내 가슴을 찔렀다. 자부심이니 신념이 니 하는 것은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빼앗을 수도 없다. 단지 살아가는데 방해된다는 변명으로 스스로 버리는 것뿐이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루이블랑 경이 비틀 거리며 들어와서는 푹하고 쓰러졌다. 뭐냐 이건 갑자기! “아아앗! 루이 경! 오늘은 왜 이렇게 부상자가 속출 하나요!” 화려하지만 정신 산만한 깃털장식 가죽 코트를 입고 있던 루이 씨의 탐스 런 엉덩이엔 굵직한 화살이 박혀 있었고 마비 독에 중독 된 몸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왕궁에서 독화살을 맞다니 어떻게 된 거야 이거! 키 스가 그런 루이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무녀인가요! 무녀겠죠! 무녀로군요!” “모, 몰래 좀....... 들어갔기로서니....... 어떻게 도망치는 기사의 엉덩이에...... 활을......” 절대금남구역 펠리오스 타워에 갔다가 걸리는 날엔 기본이 독화살이라고 들었다. 아아 알겠다. 루이 경도 배짱 좋군. 그런데 그 무녀들이 독화살을 각오해도 좋을 정도로 미녀들이란 말인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루이 경 을 죽도록 사랑하는 무녀들이 참 많단다. 하긴 독화살과 불지옥 마법이 득 실거리는 철벽의 탑을 뚫고 찾아오는 기사님을 거부할 여자가 몇이나 될까. 키스는 점점 마비되어 가는 루이를 향해 목 놓아 외치고 있었다. “그러게 정 가고 싶으면 밤에 가라고 그랬잖아요! 나처럼!” “내...... 내가 가장 아끼는 코트에 구멍이...... 흐으윽.” 루이는 마비되어 가는 목을 힘겹게 돌리며 화살이 깊게도 박혀 있는 자신 의 엉덩이를 바라보곤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그는 하필이면 자신의 엉덩 이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 민망한 자세 그대로 완전히 마비되어 석상이 되어 버렸다. 이거 아주 망측한 비극이로구만. “루, 루이 겨어어엉!!!!" 자알들 논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키스는 진정한 동료애를 느끼는 듯 돌이 되어 버린 그를 꽈악 껴안으며 오열을 토했고 난 이 진땀나는 상황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심란한 마음으로 조용히 테라스를 빠져 나온 뒤에 깊 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나저나 저러다가 죽어도 전사(戰死)가 되는 걸까? 아무튼 아무것도 모르겠다. 키스에 대해서도 지명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 런 상황에서 도망칠 생각이 별로 안 드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말이다. 23. 앞서도 말했지만 이 왕궁 세아스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증축이라는 이름 의 번식을 해온 덕에 무지하게 넓다. 덕분에 왕궁의 누구도 왕궁 안에 뭐 가 있는지 줄줄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 왕궁의 건 축 책임자들조차도 구석에서 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나이든 건물들을 본다 면 '대체 저게 어디 쓰이는 건물이지?'라고 갸웃거릴 것이리라. 즉 왕궁 내부에도 신축 건물들로 이뤄진 중심지와 오래된 옛 건물들로 이뤄진 변두 리가 나눠져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놀랍게도 무료 텔레마코스 센터 같은 곳도 있었고(텔레마코스가 어떤 것인지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자.) 또 절 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그러니까 펠리오스 타워 같은!) 제한구역도 심심 찮게 존재했기 때문에 난 왕궁 곳곳에 설치된 표지판들을 눈여겨보며 헬스 트 나이츠의 본부로 향했다. 물론 카론 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흐흐. 네 놈이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신이시여! 입구에서부터 예의 털기사를 만났다. 날 사지로 내몰았던 거구 의 기사는 아직도 더 날 놀려먹을 구석이 남았는지 대뜸 내 앞을 가로 막 고서는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뭐야! 통행세라도 바라는 거냐. “어떠냐. 이 몸이 너와 특별히 대련을 해줄까 하는데. 가볍게 다독거려 줄테니 한번 재롱을 떨어보라고. 응?” “사양하겠습니다!” 정말 짜증나는 녀석이다. 그 녀석은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바라보고 는 귀가 멀어버릴 정도로 웃어재끼는 것이 아닌가. “크하하하하핫! 맞아 맞아. 네놈들은 검도 없었지 참. 이거 미안하구만.” “큭!” 내 꽉 쥔 주먹이 의지와 상관없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꼭 지나가 다가 물벼락을 맞았는데 '푸하핫! 왜 그런 곳에 서 있는 거냐!'라는 비웃 음을 들은 격이다. 하지만 키스의 '참으세요오오.'라는 목소리가 머리 속 에서 메아리가 되어 맴돌아 난 고개를 팍 숙인 채로 그의 옆을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 놈은 도통 나를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무시하면 곤란하지!” 두꺼운 손이 내 어깨를 꽉 잡아 눌렀다. 손대지마 이 자식아! “적당히 좀 해주세요.” 내 목소리가 바르르 떨려오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 턱과 엉덩이로 손이 다가왔다. “눈이 예쁜데. 자세히 좀 보자고.” “말했잖아. 적당히 하라고!” 순간이었다. 내 턱을 매만지는 손을 뿌리치면서 내 허리만한 굵기의 팔뚝 을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엄지손가락 하나만을 노려) 꺾어버렸고 그와 동 시 에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는 기사의 장검을 뽑 아 그의 목에 갔다댄 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일순간의 일이었다. 에라이! 이제 나도 모르겠다! “이, 이 이 놈이!!!” “한번만 더 내 몸을 만지면 그때는 평생 검은커녕 포크도 못 드는 몸으 로 만들어 주겠어.” “너, 너 따위 놈이 어떻게 이런........” 자신의 검으로 자기 목이 위협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일 것이 다. 수치심이라는 조미료에 잔뜩 버무려진 헬스트 기사단원의 얼굴은 당장 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게 사람 깔보지 말라고! 나도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하고 있는 몸이란 말씀이야. 그때 아주 익숙하고 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엔디미온 경. 결투를 신청하려는 거라면 좀 더 품위를 지키는 게 어떤가.” “아! 카론 님.” 얼음장 같은 카론님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훤칠한 키 덕분에 제복이 잘 어울려 보이는 카론은 그 얼음입자 같은 눈동자로 날 바 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 사람 주변의 온도는 다른 곳보다 월등히 서늘 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의 냉엄 그 자체의 분위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 론 경이 악인은 아닐 것이라는 내 직감은 아마도 틀리지 않을.... “책임을 질 수 있다면 그 자의 목을 베어버려도 좋다.” 어, 어쩌면 악인이 아닐까. “너...... 카론 경과 아는 사이였냐.” 털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이 가관 이로군. “아니 뭐 조금......” 난 그의 팔을 풀어주고 검을 돌려주었다. 카론의 말대로 ‘날 모욕하다니! 이제 네 놈과는 같은 하늘에 살 수가 없다!’라며 목을 댕강 잘라버릴 정 도로 내 기사도가 투철하진 않으니까 봐준 것이다. “쳇. 하찮은 평민들끼리 잘해보라지.” 기사 놈은 작은 목소리로 치를 떨며 후다닥 도망쳤다. 평민들끼리? 대체 무슨 소리야 그건. 내가 반가운 표정으로 카론에게 다가갔지만 도무지 이 사람의 표정은 바뀔 줄을 모른다. “의외로 몸이 빠르군. 검을 배운 적이 있나?” “특별히 본격적으로 배운 적은...... 앗!” 카론은 갑자기 내 손을 잡아채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에요. 왜 민망하 게 남자 손을 잡습니까. 한눈에도 검술에 일가견이 있을 것 같을 카론은 단번에 내 정체를 간파해 버렸다. “이건 검을 잡았던 손이다. 적어도 저 우둔한 녀석보다는 실력이 있어 보이는군. 여기 오기 전에 뭘 했지?” “그러니까 제 고객님들 중에는 검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분들도 있어서 그 분들께 간청해서 조금 배운 건데요......” “고객?” “아하하하. 아니에요. 아무것도.” '화류계의 정점 엔디미온 인사드리옵니다.'라고 다소곳이 소개하자니 좀 창피해서 말을 돌렸다. 카론도 큰 관심은 없었는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되 물었다. “이 정도 실력을 가졌으면서 그때 그 술집에서는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아아 설인 말이로군. “전 동물학대를 싫어합니다.” “난 농담을 싫어한다.” 안 통하는 남자로군 정말. “제게 검술을 가르쳐 준 아가씨가 꼭 당부한 것이 있어서요. 하찮은 일 에 힘을 쓰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고.” “음. 네겐 순결을 지키는 일이 하찮은 건가?” “아하하하핫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말했을 텐데. 농담 싫어한다고.” 대체 당신은 일년에 몇 번 웃나요. 그리고 그런 말, 당연하다는 듯이 말 하지 말아요! 누가 들으면 가진 건 몸뚱이뿐인 녀석인 줄 알잖아요! 정말 카론 경쯤이면 접대 난이도 S랭크의 고객이라고 할 수 있겠군.(물론 남자 고객이야 없지만.) 지금도 제법 화가 나서 상대를 눌러 버렸지만, 솔직히 후회하는 중이다. 그 분이 알았다면 무척이나 실망했을 거야. “왜 여기 왔지?” “물어볼 것이 좀 있어서요.” “시간이 없다. 짧게 물어보도록.” 아마 이 사람은 몇 년 만에 부모님을 만났을 때도 '건강하시군요. 다행입 니다. 그럼 이만.'이라고 말하고 휙 사라져 버릴 사람 같다. 밤마다 만년 설을 씹으며 냉기를 보충하시는지 사시사철 찬바람이 쌩쌩 부는 카론 경은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자신의 집무실로 앞장서서 가기 시작했다. 이곳의 복도에선 기분 탓인지 쇠냄새 피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오래된 갑옷과 검들이 복도 양 끝에 주욱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리라. 왠지 소름끼 치는 모습이다. 24. 난 본론부터 말했다. “지명이라는 것이 대체 뭐죠!” “모른다.” “......” 아아 봤다 봤어. '지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살짝 찡그려졌던 카론 경의 눈을. 그러나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시는군. '그러지 말고 가르쳐 줘요.'라는 내 애처로운 눈빛에 대해 카론 경은 '그런 건 키스에게 물어보 도록.'이라는 매몰찬 눈빛으로 대응해 주었다. 하긴 남의 기사단 쳐들어와 서 자기 업무에 대해 물어보는 짓도 얼간이 같군. “저어......” “본론만 말해라.” “키스 경에 대해서 말해 주실 수 있으세요?” 순간 카론의 표정이 조금 복잡하게 변했다. 분명히 키스와 카론은 예전부 터 알던 사이 같은데...... 아주 사이좋은 친구 같기도 하고 얼빠진 키스 가 일방적으로 엉겨 붙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자네는 이 왕궁을 무대로 탐정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 “헤헤. 궁금한 게 많아서 죄송합니다.” “키스 세자르는 보다시피 기사단장이다. 좀 엉뚱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 지.” “요가도 잘해요.” “요리도 잘한다.” “아! 붕대질도 잘 하던데. 그리고 또 딴청도 잘...” “그만.” “예.” 역시 뭔가 물어보기엔 상대를 잘못 고른 걸까. 이런 놀랍도록 청렴한 집 무실을 쓰는 얼음기사나리에게 사적인 걸 물어봐야 자세하게 대답해 줄 리 가 없지. 그때 카론 경이 의외의 말을 던졌다. “단서를 하나 주지.” “예? 단서... 라뇨?” “십분간 기사록(騎士錄)의 열람을 허가한다. 그럼 나가보도록.” 25. ‘이, 이걸 어떻게 십분 안에!’ 이곳은 헬스트 나이츠 지하에 위치한 기사록 보관소. 난 몇 개나 되는 거 대한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기사록을 바라보고는 기가 질려 버렸다. 기 사록이라는 물건을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사실 예전엔 이 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기사록, 즉 Knight-age란 말하자면 기사들 의 모든 정보를 기록한 데이터베이스다. 왕국 내의 어떤 기사라도 이 엄청 난 분량의 책 속에 그 이름이 올라가 있고 그가 했던 업적이나 죄명 역시 왕궁으로 보고가 들어와 기사록 안에 기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 내 이름도 (스왈로우 나이츠도 기사단으로 인정한다면) 올라가 있을 테고 키 스가 한 일에 대해서도 이곳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분 안에 어떻게 찾으란 말이냐! 이건 완전히 건초더미에서 바늘찾기 잖아. 십일이 걸려도 부족하단 말이야! “카론 경의 명령으로 특별히 열람을 허가하는 겁니다. 빨리 찾으세요.” 신경질적으로 생긴 보관소 담당자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불만스런 표정이 었다. 이 기록은 후에 기사를 평가하거나 벌을 내릴 때 근거자료로 삼기 때문에 현역기사는 원칙적으로 열람이 불가능하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유 리하게 조작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기사단 간부 급이거나 왕궁의 고위 관 리, 왕족 그리고 담당 서기(書記)만이 열람이 가능한 중요한 기록이다.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지. 십분안에 이 안에서 '키스 세자르'라는 이름을 어떻게든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카론 경의 나이가 32세고 키스의 나이도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면 4년 전의 기록부터 찾아보는 게 좋겠지?’ 기사록은 연대기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호수 밑의 퇴적층처럼 차곡 차곡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난 4년 전의 기록들을 꺼내 뒤져보기 시작했 다. 그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각지 기사들의 여러 가지 업적이나 훈위를 받은 일시와 장소, 파문당한 이유 같은 것이 정리되 어 있었고 이 안에서 키스라는 이름을 찾아내는 건 극한의 속독마법이라도 터득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해 보였다. “이제 1분 남았습니다. 슬슬 나가주세요.” 얼마 찾아보지도 못한 것 같은데 회중시계를 꺼내든 담당자가 삐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완전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로군. 이게 무슨 단서 야! 그때. “어?” 마구 페이지를 넘기고 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익숙한 이름. 세자르라는 성이 눈에 들어왔다. ‘얼레? 그런데 이름이 다르잖아.’ 적혀 있던 이름은 키스 세자르가 아닌 키릭스 세자르였다. 단지 유사한 이름일 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성(姓)이 같았기 때 문에 난 멈칫하며 키릭스 세자르에 대한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것은 지금의 키스가 행한 것이라고 하기엔 첫 문장부터 믿을 수 없는 것이 었다. ‘20기의 기병대를 이끌고 변방도시 라메즈를 악투르 왕국군 4000여명으 로부터 지켜냈다고? 그리고 도주하는 적장 투말의 목을 베는 무훈을 남겼 다?’ ‘더블린 백작가의 '피의 장미' 헤메론 경과의 결투에서 승리함? 그게 72 번째의 결투였다고?’ ‘카론 샤펜투스 경과 함께 적 도시 우르콰르트에 침투하여 악투르 왕국 에 납치된 노르펜스트 공작가의 장녀 이멜렌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다? 대체 이 기록들은 다 뭐야....’ 키릭스 세자르의 4년 전 기록은 음유시인이나 읊을 듯한 과장된 영웅담 같았다. 이 모든 것이 날조된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기사들의 여신(이런 신 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이 편애하는 무인이거나 인두겁을 뒤집어 쓴 마귀가 아니라면 이런 초인적인 무훈들은 납득할 수가 없을 정도다. 아무 리 봐도 지금의 흐늘흐늘 키스 경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길고도 찬란한 그의 기록들을 쭉 훑어 내려가고 있을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괴이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이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지만 상당히 불길 해 보이는 이 기록은... 기밀작전 '멸절사'(滅絶蛇)를 지휘함. 자국 소도시 셀른의 시민 전원 사살. 작전 성공. 26. 난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키릭스 세자르의 괴이하다고까지 할 수 있 는 과거가 완벽하게 내 오감(五感)을 잡아두고 있어 내 뒤로 다가오고 있 는 검은 그림자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십니까아아아!” 흐억! 순간 새하얀 팔뚝이 내 목을 뱀처럼 휘감는 것이다. 키, 키스다! 이 인간도 기사단장이라서 여기 출입이 가능했었지! 키스는 그야말로 석고 상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날 내려보고 있었다. 화났다 이 사람! “그, 그게 카론 경이 열람을 허가해 주셔서... 수, 수, 숨 막혀요!” “남의 뒤를 캐고 다니는 짓은 저언혀 기사답지 못하답니다아아.” 나는 말 그대로 키스의 팔에 목이 감긴 채 괴력에 질질 끌려 보관소 밖으 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키릭스 세자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을 읽지 못한 채. “이, 이것 좀 놓고 얘기해요!” “이런 좋은 날에 그런 어두컴컴한 곳에 있으면 우울증 걸립니다아.” 지금 우울증이 문제가 아니잖아! 질식사하겠단 말이다! 놓으라고 이 사람아! 27. “콜록! 콜록!” “이야아. 햇빛이 차암 좋죠?” “말 돌리지 말아요! 키릭스 세자르라는 기사와는 대체 무슨 관계죠! 키 스 경의 형인가요?” “어머나. 누구죠 그 사람은?” “도망치지 마!!!” 여우 같은 빨간 눈을 굴리던 키스는 산들거리는 걸음으로 '꺄하하하'에 가까운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저 멀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 런 일에 집착하는 나도 좀 유치하지만 확실히 저 인간은 성분이 의심스럽 단 말이야. 그때 카론이 '아직도 여기 있었나.'라는 얼굴로 나타났다. 그는 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방금 전 키스가 나한테 와서 화냈다.” “울던가요?” “무슨 소린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이 놈의 왕궁 정보는 뭐 하나 정확한 게 없군.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론 경.” “좋을 대로.” “심심하시면 놀아 드려요? 전 몸이 이 끌이 되서 오늘은 할 일이......” “빨리 가.” 항상 여름 한복판인 키스와 성격의 극을 달리는 카론 경은 특유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짧게 말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아무리 봐도 32세는 아닌 것 같은 그의 뒷모습에 인사했다. 기사들의 인사법은 아 무래도 아닌 것 같지만 키스는 왕궁 예법 같은 것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 걸. 그는 본부를 떠나는 내게 의외의 말을 던졌다. “너에게 이 왕궁은 시작이겠지?” 마음속에 서리가 내릴 것 같은 목소리. 난 문득 고개를 돌렸다. 비로드 망토를 두른 카론의 등이 보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키스에겐 마지막이야.” 28. 기사록에 기록되어 있던 키릭스 세자르라는 기사의 인생이 진정한 '기사 의 교과서'라면 그게 바로 내가 추구하는 기사의 모양일까? 아침에 집 앞 에 나서면 결투나 대련을 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밤이면 구애와 청혼 을 바라는 각양각색의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잠을 설치고 말도 안 되게 초 인적인 무훈 기록을 한달에 한번쯤은 갱신해 줘야 하고 나타났다하면 수만 명 적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그런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이 기사의 인생이라면 설사 누가 일년 정도 무료체험을 서비스해 줘도 사양할 것 같다. ‘하암. 그럼 내가 바라는 인생이라는 것이 또 뭐람.’ 처음부터 누군가처럼 살아가는 것 따위가 희망 인생 청사진 1순위라는 건 좀 서글프잖아. 불철주야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마다 정 의를 실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무엇보다 어떤 인생이든 '마음 의 여유'가 없다면 마왕을 밥 먹듯이 때려잡는 용사마저도 외로워서 미쳐 버리기 마련일 것이다. 어쩌면 기사록에는 나와 있지 않았던 키릭스 경의 인생 중에는 '오늘 잠시 쉬어 간 마을에서 이름 모를 마을 처녀가 사과파 이를 선물로 줬다. 참 맛있었다.'라든지 '남몰래 무도회 댄스를 연습했다. 오늘은 꼭 무도회 공포증을 극복할 것이다.'라는 사소한 추억이 있을 지 도 모르잖아? 그런 것도 분명히 인생의 일부라고... 라고 말하니까 꼭 키 스의 뻔뻔한 말투가 옮은 것 같다. 뭐 이런 별 시답잖은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참 왕궁의 산책로를 걸어가고 있을 때 놀라운 인물과 만났 다. 항상 그렇겠지만 그의 뒤에는 서류 더미를 잔뜩 들고 있는 사람들이 쩔쩔매며 줄을 잇고 있었다. ‘아이히만 공작!’ 아찔한 노익장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재무대신을 여기서 또 만나게 될 줄이야. 설마 이번에도 총을 겨누진 않겠지? “호오. 이거 엔디미온 군 아닌가.” “아하하하. 안녕하세요.” “인사가 그게 뭔가! 무례하게스리!” 아부의 기회를 포착한 중년의 보좌관이 번개처럼 튀어나오며 내게 소리쳤 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히만의 손바닥이 그 자의 뒷머리를 강타했다. 따악! “무례한 건 너다. 대화 중에 감히 내 앞을 가로 막다니 썩 옆으로 비켜 이 밥벌레!” 아무튼 박력만점의 할아버지라니까. 버럭 소리와 함께 얼굴이 사색이 된 보좌관이 광속으로 비켜서는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역시 사람마다 저마다의 처세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히만 공작은 내 앞으로 다가 와 붕대로 머리와 팔 등을 감은 내 꼴을 보고는 예의 큭큭큭 웃음을 꺼내 는 것이었다. “페르난데스가 나한테 오더니만 예쁘장한 기사가 멧돼지를 때려잡았다는 말을 막 신이 나서 떠들더군. 할아버지 들어보세요. 황당한 기사가 나타났 어요, 라고 막 팔을 휘두르며 흥분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역시 자네였구먼.” “아하하. 하하.... 아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화, 황당한 기사? 페르난데스 왕자님. 좋은 수식어 다 놔두고 왜 하필이 면...... 뭐 아무튼 역시 왕자님도 귀족 앞에선 근엄한 척 하지만 어린애 는 어린애였어. 귀엽기도 해라. “귀족 놈들은 네 기를 죽이려고 했던 게지. 정말로 멧돼지를 잡아온 순 진한 녀석은 이 나라가 건국된 이래 자네가 처음이야. 큭큭큭.” “아하하하” 난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난 귀족 나리들께 온몸으로 반항한 셈인 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다. 아이히만은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말했다. “왕궁은 의외로 좁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빨리 소문이 돌게 되지. 곧 알게 될 게다. 검술 같은 건 기사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몹시도 사소한 부분이라는 걸.” “그럼 중요한 건 뭐죠?” “글쎄다. 나도 그건 아직 모르겠군.” 그는 짙은 갈색의 얇고 긴 담배를 피워 물며 발걸음을 옮겼고 서류더미를 짊어진 수행원들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 시작하며 '아이히만 열차'가 다시 출발했다. “아 저 그런데....” “음. 뭔가.” “혹시 키릭스 세자르란 분에 대해 아십니까?” 난 별 생각 없이 생각난 김에 물어 봤지만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아이히만 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막 불을 붙인 담배를 바닥에 던져 버 리고는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왜 저러시는.... “그 놈은 바보다!!!” 난 순간 버럭 터지는 벼락같은 고함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왜 대뜸 화를 내시는 겁니까, 할아버지! “저어... 어째서 바보인지 자세히 좀...” “불쾌하군!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으면 내 앞에서 더 이상 그 이름을 꺼 내지 마!” 얼굴을 무섭게 찡그린 아이히만은 신경질적으로 옷깃을 여미며 성큼 성큼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어째서 키릭스 세자르라는 사람에 대해 그 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 난 아이히만 공이 있던 자리에 버려져 있는 담배 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새빨간 불씨가 말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얼레? 그런데 이거 나보고 치우라는 건가?” 29. 그 후로도 한 3시간 정도 산책을 빙자해서 길을 헤매다가 겨우 겨우 우리 들의 보금자리 리더구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쇠냄새 대신 쇳내가 흐르는 이 곳의 정원에선 크리스티앙 경이 비질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앙, 그러 니까 크리스는 갈색의 단발머리에 커다란 청색 눈동자를 가진 것이 영원히 소년으로 남아 있을 것 같은 귀여운 외모였는데, 아닌게 아니라 정말 소년 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 보였다. 저 나이에 제복 기사라니, 월반(越班)에도 정도가 있다고. “크리스 경. 여긴 청소도 직접 해야 하나요?” 그리고 보니까 시종도 있는데 어째서 기사가 빗자루를 들어야 하는지 도 무지 모르겠군. 내가 다가가자 크리스는 뭐가 창피한지 빨개진 표정으로 빗자루를 뒤로 감추는 것이었다. “아 미온 경. 몸은 왜 그렇게.......”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 살인 멧돼지와 격투를 했습니다.” “네?” “아하하하. 농담이에요. 제가 왕자님을 구했을 리가요. 눈까지 동그래지 시긴.” “역시. 멧돼지랑 싸웠다니 놀랐어요.” ‘......그건 진짠데요.’ 뭐 그렇다고 청소 중인 크리스 앞에서 시시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도 할 일 없는 짓이다 싶어서 화제를 돌렸다. “청소 하는 거 좋아해요? 기사님이 직접 청소를 다 하시고.” “아니요. 오늘은 특별히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아서요.” “일거리?” “그러니까 계속 지명도 들어오지 않고.......” “앗!!!” “왜, 왜 그러세요?” 난 화들짝 놀라며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지명'인지 뭔지는 크리 스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이었다. 뭐 하러 남의 기사단 사무실까지 찾아가 서 그쪽 사람 손가락 꺾어대는 그 난리를 쳤던가! “지명이 뭐하는 것인지 알려 줄 수 있죠? 그렇죠? 네? 어서 그렇다고 말 해!” “예? 예?” 흥분한 나머지 크리스의 어깨를 잡고 뒤흔들자 얼이 빠진 크리스는 놀란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보니까 아침 브리핑 시간에 자 신에게 '지명'이 없자 무척이나 서운해 하는 표정이었는데, 착해 보이는 크리스라면 이 미스터리에 대해 소상히 알려줄 게 분명하다. “드, 들어가서 얘기해요. 미온 경.” “예에. 그래요오.” 얼렐레. 나도 모르게 키스의 말투가 달라붙었다. 역시 전염성이 있는 인 간이야 그 양반은. “그리고. 말 편하게 해주세요. 전 이제 고작 15살인 걸요.” 15살의 소년 기사, 아무리 생각해봐도 애당초 여기는 상식과는 이별한 곳 이니까 이제 놀랄 것도 없다. 30. 크리스티앙의 방은 수많은 종이 장식들로 아기자기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룸메이트는 왠지 뻔뻔스러울 것 같은 루시온 경이었지만 지금은 자리에 없 는 상태. 난 크리스가 가져다 준 의자에 앉아서는 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종이를 섬세하게 오려내서 만든 새나 고양이, 상자 같은 종이공예품들이 크리스의 테이블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거 직접 만든 것들?” “예에.” 크리스는 좀 수줍게 웃으며 차가운 차를 건네주었다. 크리스의 종이공예 는 취미라고 하기엔 너무도 감탄할 만한 손재주였다. “지명이라는 것, 대체 뭔지 말해줄래? 위험한 거야 그거?” “아니요.” “검을 써야 해?” “아, 아니에요.” “그럼 마법이나 설마 총?” “그럴리가요. 전 검도 마법도 총도 써본 적이 없는 걸요.” “뭐야 대체 그럼.” 이십 고개의 삼 단계를 넘었는데도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나도 꽤 눈썰 미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지명이란........” 크리스는 잠시 할 말을 정리하는 듯 생각하다가 가지런한 입술을 열었다. “지방 귀족들에게 부름을 받는 거에요. 저희는 출장이라고도 부르죠.” “출장?” “예 출장” 이거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단어잖아? 그런데 평생 다시 들을 일 없을 것 같았던 그 단어가 왜 여기서 튀어 나오는 거냐고. 크리스의 친절한 설명은 다시 이어졌다. “저희는 신관기사잖아요?” “응” 뭐 솔직히 난 독실한 신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확실히 스왈로우 나이츠는 신관기사단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저희는 신관기사의 자격으로 지방 귀족들의 제사나 경사를 주관 해요.” “제사 정도는 직접 하면 되잖아. 뭣 하러 우리를 부르는 거야?” “귀족이니까요.” “......?” “자기 가문의 의례(儀禮)를 왕실에서 파견 나온 신관이 주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왕실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 는 것이기도 해요. 귀족들에겐 몹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요.” “오호라.” “하지만 다른 이유가 더 중요해요.” “다, 다른 이유?” 후루룩 차를 살짝 머금어 목을 축인 크리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왕실의 수입원이니까요.” “수입원?” “귀족들이 저희를 부를 때마다 상당 금액을 왕실에 지불하거든요.” “그러니까.... 출장비 같은 거야?” “헤헤. 그런 셈이죠.” “하아. 역시 돈이란 말인가. 낭만이 아사해 버린 세상이야 정말.” 스왈로우 나이츠는 왕실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키스의 말이 이제야 이 해가 간다. 왕실이 수입원을 늘리기 위해 신관기사단을 조직해서 출장을 보내 돈을 벌어들인다는 왕립 앵벌이 집단 같은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세속 적인 논리가.... 얼레? 잠깐만! 이거 아주 익숙한 느낌이! “크, 크리스 경! 그럼 혹시 스왈로우 나이츠의 입단 조건은 설마!” “아무래도 외모를 보죠. 스왈로우 나이츠는 큰 규모의 제사나 행사를 주 관하는 신관이라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거든요. 그렇지만 관례상 여자는 신관기사가 될 수 없고... 그러니까 귀족들의 취향에 맞춰서 이런 저런 타입의 미남자들을....” “얼굴만 보고 뽑는 거 아냐?” “헤헤 그렇죠 사실.” “저 그럼 귀족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명하지?” “왕궁에 들리는 귀족들과 친해져야 해요. 그들이 우리를 기억해주면 필 요할 때 친한 기사를 지명해 주거든요. 많은 귀족들이 기억해 줄수록 일거 리도 많아져요. 헤헤 저는 말솜씨가 워낙 없어서 불러주는 귀족들도 없지만...”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고객 같은.... 건가?” “예. 고객이죠.” 자아 정리해 봅니다. 전 지금까지 얼굴과 화술로 먹고 사는 유흥업에 종사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보람차고 멋진 일에 인생을 투자하고 싶어 서 그 짓을 그만두고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망치고 도망쳐 찾아온 이곳은 실은 왕립 호스트 바였답니다. 으아아아!!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내 인생은!! “왜, 왜 그러세요? 안색이 창백........” “그리고 그 소년은 평생을 호스트로 살았답니다. 중얼중얼.” “예? 무슨 의미에요?” “그것도 10년 의무 종사라니 너무하지 않아? 어째서 한참을 뛰어가도 돌 아보면 원점이냐고! 악몽이라면 이제 좀 깨어나란 말이야!!” “아아앗! 그러다간 그 멋진 머리카락 다 뜯겨요!” “내가 전에 무슨 일 했는지 물어봐 줄래?” “무, 무슨 일 하셨는데요?” “지금과 비슷한 일. 으히히히히힛!” 민간 호스트를 그만두고 기껏 찾은 자리가 왕립 호스트라니! 이 순간만큼 은 '광기는 인류의 가장 오랜 친구다.'라는 격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는 크리스의 베개를 냅다 창밖으로 집어던진 뒤에 평생 다시는 낼 수 없을 것 같은 자포자기 박장대소를 터트리다간 저 베개를 따라 하늘로 날아오르 고 싶다는 꿈을 꾸었지만 곧 눈물을 닦으며 침묵했다. 그리고 크리스는 이 런 내 모습이 악마의 강림 같았는지 테이블 뒤에 숨어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하아. 뭐 여기도 경력자 우대 같은 게 있나 모르겠네.” 한숨이 다 나오지만 이제 와선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곳을 그만둔 다는 것은 자그마치 ‘왕명불복’이니까 다른 나라로 야반도주할 결심이 아니라면 사표 던질 생각은 접는 게 좋다. 그리고 왕명불복이든 국가전복 이든 우주정복이든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기사'가 내 10대 내내 쭈우욱 결심하고 있던 목표였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맥 빠져 버렸다고 나 자신에 게 '이런 이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어. 승산 없어 보이니까 이쯤에서 포기하자구.'라면서 변명하는 것은 질색이니까, 왕립 호스트든 제국 접대 부든 뭐든 간에 끝까지 한번 가볼 테다! 부모님도 이런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진 않으시겠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답이 안나올 때는 머리를 비 워버리자! 가끔은 그것이 나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이다. 라는 내 고객이 해준 조언을 믿어보기로 했다.(그 고객은 지금 대륙 최고의 현자 혹은 마 녀라 불리고 있다.) “그런데. 크리스 경. 아침에 네가 지명 받지 못했을 때 무지 안타까운 표정이었는데, 왜 그랬지? 넌 지명 받는 게 좋아?” 고향에서도 출장 가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는 호스트는 없었다. 그렇게 싫 어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하고는 직원 누구도 출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크리스의 대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지명을 받아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스왈로우 나이츠는 따로 녹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영지가 있는 것 도 아니다. 결국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지명을 잘 받고 실적을 쌓아서 귀 족들로부터 수고비를 받는 길 외엔 없으리라. 그리고 크리스는 그런 '지명' 이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대륙 최강 10인의 미남자에 뽑힐 정도니 까 특별히 외모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 결국 문제는 크리스의 소극적인 성 격 때문이 아닐까. 사실 고객에게 인기를 끄는데 반듯한 외모는 의외로 크 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내가 고객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 게 해주거나 고객이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면 고객은 내게 의지하길 원하거나 내가 의지해주길 바란다. 어린 크리스는 그 단순한 시소 게임을 몰랐던 것이다. “아. 손재주가 좋네?” 내 괜한 질문 덕에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던 크리스는 조금 주저하다가 은색 종이와 가위를 들었다. 금방 그것에 몰두해 버린 크리스의 가위에 종 이가 사각사각 잘려나가며 멋진 은빛의 털을 가진 여우가 태어났다. 신기 에 손재주였다. “제 취미에요. 종이를 오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그리고 별로 돈 도 들지 않으니까.” 약간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는 크리스는 자신의 피조물을 이리 저리 바라 보다가 뾰족한 두 귀를 만들어 주었다. 종이 공예를 좋아하는 소년 기사라... 귀엽다기 보단 뭔가 서글프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집이 좀 가난했어요. 며칠 동안 한 끼도 못 먹을 때도 많았으니까요.” 그쯤이면 '좀 가난함'이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함'이잖아! 크리스 역시 나와 같은 평민출신이로군. 그것도 지독하게 가난한 극빈 평민 집안. 15살 화류계 데뷔 이후 부모님의 수익을 훌쩍 넘어가 버린 나로서는 '가난'이라 는 단어에 특별히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돈을 모은다는 것이 평생 불가능한 꿈인 상당수의 평민들에게 가난이란 지겹고 오래된 친구 같은 것이다. 가장 암울한 상황을 '소작농의 겨울'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말이다. “부모님 모두 병이 심했거든요. 제게 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항상 방 안 에만 계셨고.... 치료하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했어요. 비싼 약이 필요 하니까요.” “그러던 차에 이곳에 오게 된 것이로군.” 크리스의 말끝이 살짝 떨려오고 있었다. 그 시절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슬 퍼하고 있는 것 같다. “우연히 키스 경을 만났고 그 분이 절 여기에 데리고 왔어요. 아. 미온 경은 왜 여기에 오셨어요?” “나? 속아서.” “예?” “아하하. 농담. 기사가 되고 싶었거든. 비웃지 말아줘.” “왜요?”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귀엽군. 하긴 가난 때문에 이곳에 온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사치가 될까. 난 조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의 가난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 나는 마음의 가난이었지. 꿈을 포 기해 버리면 그 빈곤의 악순환에서 영원히 갇혀 버릴 것 같았거든.”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어.” 싱긋 웃음이 났다. 크리스티앙은 참 착한 녀석이다. 하지만 이런 성격이 면 평생가도 고객을 잔뜩 모아 지명을 받기는 힘들 것 같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아무도 마음을 몰라준다. 꽃들도 생존을 위해서 좀 더 화려한 색과 좀 더 강렬한 향기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참에 고객을 휘어잡는 기술이라도 전수해 줄까나? 하지만 처세술에 능수능란한 크리스 라는 것도 왠지 싫군. “크리스. 그런데 돈이 필요했다면 다른 일도 있지 않아? 가령.... 손재 주가 그렇게 좋다면 바느질이나 미용사나 재단사나 아니면 이 예술품들을 팔아볼 수도 있지 않았겠어?” 크리스는 측은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무도 절 써주지 않았어요. 지스 경처럼 몸이 아픈 것은 아니지만 도 무지 힘이 없어서 무거운 것을 들 수도 없고 오랫동안 일할 수도 없고... 가위질 같은 것.... 가난한 농민들이 모여 사는 제 고향에선 별로 쓸모 있 는 재주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종이 조각 같은 건 아무도 사주지 않아요. 아무리 종이를 오려도 부모님의 병은 고칠 수가 없었어요.” 결국 그런 것이다. 태어나서 한번도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해 본 적이 없는 부유층들은 유행이라거나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못생긴 돌조각 같은 것이라도 엄청난 금화를 주고 유명 예술가들에게서 사 들인다. 그리고 자신은 아주 고상한 것을 향유하고 있는 고상한 인간이라 고 착각하며 그 착각을 즐거워하고 또한 자신의 착각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천하다며 멸시하길 즐긴다. 그러나 평민들에겐 그런 걸 여유도 없고 살 이유도 없다. 이렇게 아름답고 섬세한 종이공예품도 하루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겐 결국 아까운 종이 낭비일 뿐이었던 거다. 스스로가 한심한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글썽거리는 크리스의 갈색 머리 에 손을 얹고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여우, 내가 살게.” 제1화 :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끝. 다음 화 : 아무도 모조품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제2화 : 아무도 모조품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1. 다음 날. “이, 이게 뭐죠?” 아침부터 키스의 손에 왕궁의 잔디 구릉으로 끌려나온 나는 다짜고짜 그 가 내미는 도시락을 받았다. 키스가 자신의 도시락을 열며 히죽 웃었다. “얼레? 미온 경, 도시락 처음 보세요오?” “아니. 도시락인 건 알겠는데...” “드세요. 아침 먹어야죠?” “그러니까 왜 이런 곳에서 아침을 먹어야 하냐고!” 확실히 이 구릉은 왕궁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곳이긴 하다. 아침 바람도 시원하고 햇볕도 적당히 간지럽다. 이런 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 이긴 하지만 그건 아리따운 여자가 곁에 있을 때나 그렇지, 내가 왜 얼빠진 기사단장이랑 아침부터 둘 이서 밥을 먹어야 하냐고! “일이니까요.” “일?” “조오기 보이시죠?” 미온이 포크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궁전 하나를 콕 찍었다. 왕궁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오타 양식의 건축물이다. “저게 본궁(本宮)입니다아. 전하께선 저곳에 계십니다. 허가받지 않은 자 외에 무기를 가지고 저곳에 들어갔다간 국왕암살혐의와 국가전복혐의로 당장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노, 농담이죠?” “미온 경이 열일곱 번째 희생자가 되고 싶으시다면 농담이라고 받아들 여도 좋습니다아.” 그런 무서운 말을 웃는 낯으로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또 저건 모든 행정업무가 집행되는 행정부 본당(本堂)입니다. 용무가 없는 자가 저 곳에 출입했다간 기밀문서절도혐의로 적국의 첩자로 낙인찍혀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대체 여긴...’ 장담하는데 길치는 이 왕성에서 일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화장실 찾으려고 들어갔다가 국왕암살범으로 몰려 교수형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저 높은 탑이...” “아, 펠리오스 타워?” “예 그렇습니다아. 저 무녀들의 탑 역시 금남의 구역이니 만약 들어갔 다간...” “또 교수형인가요?” “아니요. 화형 당합니다아.” ‘그게 그거잖아!’ 목 졸라 죽이나 태워 죽이나... 나는 왕궁이 이토록 인명경시풍조가 만 연한 곳인 줄은 미처 몰랐다. 키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예전에도 제가 말씀 드렸지요? 이 왕궁에서 함부로 모르는 곳에 들어갔다간 영문도 모른 채 비명횡사를 당하게 된답니다.” ‘...이게 무슨 팔괘진(八卦陣)이냐.’ 불세출의 병법가인 예전 내 고객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고대부터 이 어 내려온 진법(陣法)중엔 팔괘진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적들이 들어오면 죽는 사문(死門)이 3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는 생문(生門)이 3개 그리고 들어오면 극한의 고통을 맛보는 혼돈의 문이 2개라고 한다. 그 런데 어째서 이 왕궁 세아스말이 팔괘진의 형상을 띄고 있는 거냐고! 우리 들은 가둬서 죽일 셈이냐!(어쩌면 그녀만이 만들 수 있다는 팔진도(八陣圖) 일지도 몰라!) 왕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병법에 통달해야 한다는 결론에 새삼 한숨이 나왔다. 하긴 스왈로우 나이츠 본채(本寨)인 우리 리더구트도 금녀의 구역인지라 여자가 접근하면 경보가 울리고 시종들이 총출동해서 못 들어오게 스크럼 을 짠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엄격한 곳임에도 내가 벌써 여자 속옷을 세 번이나 발견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법과 현실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랍니다아.” 키스가 내 마음을 훔쳐본 듯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도시락을 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 왕궁 생활의 이 오묘하고도 부조리한 규칙들은 따 로 이것만 연구하는 학문이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한다.(정말 이다!) 그러니까 키스의 말에 따르면 1 더하기 1이 어째서 3이 되는지 이 해해야 하는 고도의 학문이란다. “아! 대단하네요! 이 도시락!” “그렇죠? 우리 시종들의 솜씨에는 하늘도 감동한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굉장하지 않은가. 이 베르스 왕국의 주식은 쌀이다. 기후도 좋고 평야도 충분한데다가 수없이 품종 개량을 했기 때문에 세계에 서도 알아주는 쌀을 생산할 수 있다고 예전 내 고객이 말한 적이 있다. (프라이버시 보호 관계로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 고객은 이 나라 최 대 상인 길드 조합장의 둘째 따님이다. 가끔 팁을 쌀로 줄 때가 있었는데 한번은 우마차 세 대 분량의 쌀더미가 가게에 도착해서 아주 난감했던 기 억이 난다.) 도시락에 담겨진 고슬고슬한 쌀은 한 번 더 담백한 기름에 살짝 볶아서 반짝 반짝 윤을 내고 있었고 올리브 향기가 따뜻한 김을 타고 올라와 코를 간질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짭짤한 발효 소스와 함께 볶은 밀국수가 푸짐 하게 올려져 있었고 매콤한 향신료 가루가 뿌려져 있어서 눈과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아아, 소박하지만 시종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이런 멋진 도시락 을 보고 '쳇. 뭐야. 평민 요리 따위.'라고 지껄이는 녀석은 아무리 성격 좋은 나라도 그냥두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키스가 포크를 물고 투 정을 부렸다. “하아. 솔직히 이 평민 요리, 이제 지겹긴 하네요. 해산물을 먹고 싶지 만 예산이 부족해서 당분간은...” “.....” 키스 경. 그건 극빈의 대명사 크리스가 들으면 가슴이 찢어질 발언이라 고요. 처절하게 가난한 과거를 보낸 크리스라면 이런 소박한 요리라도 눈 물이 나도록 감사히 먹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야. 흐음, 그리고 보니까 이 키스 세자르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과거를 가졌기에 이렇게나 알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을까. 특히 키릭스 세자르라는 전설 속에나 나올 법 한 기사와의 관계도 궁금하고 말이야. 기사단원 누구도 이 사람의 과거는 모르잖아? “저어 키스 경.” “예에?” “스왈로우 나이츠를 맡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죠?” 불현듯 카론이 내게 던졌던 서글픈 목소리, '너에게 이 왕궁은 시작이겠 지? 하지만 키스에겐 마지막이야.'라는 말이 떠올랐다. 입에서 밥을 오물 거리던 키스는 동그란 적안(赤眼)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가 나를 향 해 말했다. “기사의 과거를 물어보는 것은 숙녀의 몸무게를 물어보는 것만큼이나 실례입니다아.” “그럼 제 과거는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 “남자의 몸무게는 궁금하지 않습니다아.” 여전히 장난스런 말투에 진지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왠지 키스라 는 자가 흐물흐물하고 푹신푹신한 겉모습 속에 칼을 품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친해지기 힘든 자, 콱 안아버리면 그 푹신함 속에 숨어 있던 칼날이 튀어나와 내 가슴을 찌를 것 같은 사람. 모두에게 친하지만 또 모두에게 거리를 둔다.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도 않고 남의 과거를 물어 보지도 않는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객인 내 고객으로부터 들은 말인데(역시 여자다.) 목숨을 담보로 검을 쓰는 자들은 당장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 에도 정을 두지 않는다고 한다. 혹은 정을 두게 된다면 언제 찾아올지 모 르는 죽음 앞에 깨끗해 질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항상 상냥하고 친절하 지만 그건 단지 남의 목숨을 빼앗기만 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속죄의 의태(擬態)일 뿐, 정말로 정이 많고 착한 검객 따윈 절대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이 기억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키스가 그런 사람이라면 난 배신감을 느낄 만큼 섭섭할 것이다. 그때 키스가 손뼉을 치며 기쁜 듯 말했다. “아아! 좋은 실습 재료가 저기 있군요!” “시, 실습?” “저기 좀 보세요! 지금 교통사고가 일어났죠?” “교통사고?” 나는 키스가 가리키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가마 한대가 겨우 지 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었고 그곳에선 서로 방향이 다른 두 가마가 서로 비 켜주지 않은 채 현재 격렬하게 대치 중이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간 략한 개념도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림이 후져서 미안하지만 어쨌든 저 두 가마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 였다. “저거... 한명이 비키면 간단한 일 아닌가요? 뭐하러 서로 으르렁거리 는 거죠?” “후후. 다른 곳에선 간단한 일도 왕궁에선 그렇지 않답니다아.” “예?” “왕궁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자들은 세력이 센 여자 귀족들뿐이랍니다. 위세가 클수록 커다란 가마를 탈 수 있는데 저 경우에는 가마의 크기가 같 으니 같은 세력을 가진 귀족들입니다.” 국왕의 사모님, 즉 왕비님의 자가용 가마는 침대까지 있는 리무진 가마 라고 들었다. 어째서 그런 거창한 것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마꾼만 16명이 동원되는 특대 가마란다. “저런 경우에는 비켜주는 쪽이 굴욕을 당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물러설 수 없는 곳에서 서로 만났을 때는 절대 비키지 않고 심지어 는 하루 종일 서로를 노려보며 상대가 먼저 지치기를 기다립니다. 실제 저 렇게 싸우다가 탈진해서 쓰러진 귀부인들도 많답니다.” 왕궁 생활이 이토록 터프한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아니 이게 무슨 차전놀이도 아니고 어째서 서로 만나면 사생결단을 내려고 한단 말인가. 간단하게 '그쪽이 먼저 가세요.', '아닙니다. 그쪽이야말로 먼저 지나가시 죠.'라는 미풍양속을 발휘하기만 하면 간단하게 끝날 일 아니던가! “무슨 동물의 왕국 같네요. 꼭 저런 식으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해야 하 나요?” “후후. 인간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단순해지는 법입니다.” 키스 경. 귀족을 모욕하는 그런 발언은 위험하다고요. 그건 그렇고 그 런데 실습이라니? 저 진땀나는 상황이 나랑 무슨 관계람? “자, 미온 경. 어서 가서 저 상황을 해결해 주시지요.” “그런데 제가 왜 저걸...” “저런 귀부인들의 다툼을 해결해 주는 일은 기사의 몫입니다. 기사가 와서 중재를 한다면 저 분들도 납득을 하고 물러날 수 있지요. 사실 저 분 들은 누가 해결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만요.” “그래서 제가?” “예. 가보세요. 어느 쪽이 물러나야 하는지 공정하게 판결을 내려 주세 요. 이것도 왕실 기사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랍니다.” 어째서 교통정리가 기사의 몫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두 가마가 황소 처럼 으르렁거리는 좁은 길로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선 거의 살기가 뿜어 져 나오고 있었다. 2. 귀부인들의 싸움이라고 해도 그녀들이 직접 싸우는 것은 아니고(가마 속 에 있기 때문에 누군지 알 수도 없다.) 건장한 가마꾼들이 주인을 대신해 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려갔을 때는 한참 매너리즘에 빠진 세력과 시가 공방 중이었다. “어허! 이 분이 누구신줄 알고 길을 막는 게야!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 “너희들이야 말로 이 분의 한마디면 모두 오랏줄 신세라는 것을 모르냐! 그쪽에서 비켜!” “이런 무례한 작자들을 봤나! 어디서 어쭙잖은 허세를 부려!” “네놈들이야 말로 혼찌검이 나고 싶지 않으면 썩 물러가라!” 상황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이 싸움에도 규칙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먼저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상대 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의미라나 뭐라나. 덕분에 두 세력의 가마꾼들은 서 로의 정체도 모른 채 '우리 주인님이 우주최강이셔!'라고 서로 소리치는 허무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돈의 틈바구니에 내가 끼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원만한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엔디미온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오오! 기사나리가 오셨구먼! 자 그럼 어서 저쪽이 비켜야 한다고 말씀 하십시오!” “무슨 소리! 어째서 우리들이 비켜야 한단 말이야! 누가 봐도 비켜야 하 는 쪽은 너희들이라고!” ‘제발 조용들 좀 하시구랴.’ 누가 비켜야 옳은지 내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남에게 양보 하는데 옳고 그름이 또 어디 있단 말이야. 가마꾼들은 '만약 우리 쪽을 비 키라고 말한다면 네 놈을 평생 저주하겠다!'라는 눈빛으로 모두 날 쏘아 보았고 나는 어느 쪽을 비키게 하든지 그쪽과는 적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런 한심한 상황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내 청명한 목소리가 터졌다. “잘 들으세요. 보아하니 두 귀부인들 모두 높은 권세를 지니신 분들이 실 테니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내 판결은 다음과 같았다. “상대에게 길을 양보할 너그러움조차 없는 속 좁은 귀부인께서는 길을 비키지 않고 고집을 부리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위세 등등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남에게 양보할 수 있는 고귀한 여유를 지니신 분이라면 잠시 1분의 시간을 베풀어 자신보다 아량이 부족한 상대에게 길을 비켜주십시 오.” 가마꾼들은 내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 졌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나는 이 발언으로 두 귀부인 모두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화려하게 치장된 오른쪽 가마 안에서 높은 톤의 귀부인 목소리가 들렸다. “막(幕)을 걷어라.” 가마의 앞부분은 비단을 내려만든 막이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시녀가 그 비단 커튼을 들어 올리자 그 커다란 가마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핑크빛의 쿠션에 다리를 꼰 채 몸을 기댄 늘씬한 여성이 입에 긴 담뱃대를 물고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성격 사납게 생긴 누님의 모습이잖 아! 가마꾼들이 헛기침을 하며 날 바라보았다. “아!” 난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실 예법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다. 그녀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흐응. 엔디미온 경이라고 했나?” “예.”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모릅니다.” “하긴. 누군지 알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했겠지.” 그녀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깔깔거리자 난 다시 화가 울컥 올랐다. 나 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았더라도 똑같은 말을 했을 겁니다.” 순간 그녀의 웃음이 멈췄다. 얼레? 이 싸늘한 분위기는 뭐지? 설마 또 목 숨의 위기? “고개를 들라 엔디미온 경.” “......” 내가 조금 시선을 올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 긴 금발과 보라색 눈 동자를 감상하며 입 꼬리를 올렸다. “흐응. 역시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답게 아름다운 얼굴이로군. 불에 태워 그 미모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까우니 독살이 낫겠구나.” “흡!” 숨이 턱 막힌다. 지금 나 사형선고를 받은 것인가? “후후. 그 몸은 박제를 해서 내 궁전에 전시해 둘 테니 너무 서운한 표 정 하지 마라.” 이런 악취미 여자! 무서운 누님이 담배 연기를 후우 뿜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나는 또 다시 터진 이 인생의 대위기에서 탈출해야 했다. 여 기서 살아 돌아가기만 하면 키스 네 놈에게도 처절한 인생의 위기가 무엇 인지 맛보여 주고야 말겠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제게 1분의 시간을 주신다면 어째서 절 박제하면 안 되는지 증명해 보 이겠습니다!” “호오?” 아이히만 할아범에게 배운 기술이다. 귀부인께선 어떻게 한번 살아보겠 다고 발버둥치는 이런 내 모습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30초주겠다. 증명해 보도록.” 큭! 이 놈의 위기도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군. 좋아. 그럼 시작해 볼 까. “먼저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댄 그녀가 긴 손가락을 까딱하자 앳된 시녀가 긴 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분의 존함은 오르넬라 무티. 펠리오스의 무녀들을 다스리는 성녀님 이십니다.” ‘말도 안돼!!’ 이런 육체파 성녀는 들어본 적도 없다! 온 몸을 명품으로 두르고 처음 만난 남자를 박제로 만들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꺼낼 수 있는 누님이 펠리 오스 타워를 관리하는 성녀라니, 이쯤 되면 신성모독이라고! 차라리 마왕 의 딸이라고 했다면 믿겠다. “흐응. 내 직책이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로군? 키스 경이 나에 대해 말 하지 않았나? 이 붉은 가마를 보면 도망치라고 말이야.” ‘역시 키스 놈은 알고 있었어!’ 이 빌어먹을 포주 자식! 알면서도 날 이런 마녀한테 보냈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르넬라 성녀의 이 붉은 가마는 예쁜 사내들을 잡아먹는 왕궁의 비단 구렁이란다. 그리고 난 정욕(情慾)의 불길 같은 이 성녀님에 게 온 몸으로 뛰어든 눈먼 불나방이 되어 버린 셈이다. “20초 남았다. 그 창백한 안색이 마음에 드는군.” 성녀님. 당신은 낮에는 신께 이 나라를 구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밤에는 잡아온 남정네들을 박제해서 수집하시나요. 바쁘게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이 지만 제발 성녀든 마녀든 하나만 결정하시라고요! 어쨌든 난 성격파탄 성녀님의 거실 장식품으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사양이었으므로 최선을 다해 오르넬라를 훑어보며 파고들 곳을 찾기 시작했다. 오르넬라는 옆에 트인 치마 사이로 긴 다리가 시원하게 드러난 30대의 늘씬한 여인이었다. 어디보자, 청량감을 주는 이 강렬한 감귤향기 는 이오타 왕국 특산 향수인 ‘겨울이슬’이 분명하니 이 누님은 자신을 가꾸는데 보통내기가 아니시군! '겨울이슬'은 물경 황금의 무게와 같은 값 비싼 향수일뿐더러 보관법도 까다로워서 조금이라도 빛에 닿으면 변색되어 버리는 예민한 향수다. 이걸 몸에 뿌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화류계에서 주목 받을 수 있을 걸? 그리고 나비무늬가 수놓아진 저 옷감은 빨지도 못 하는 최상급 능라(綾羅)로 만든 것이로군. 장담하는데 저 옷 팔면 정원이 딸린 4층짜리 저택 살 수 있다.(마구간 포함) 게다가 오른쪽 발목에서 찰 랑거리는 저 순은 장신구 역시 이오타 최고의 장인이 세공한 것이다. 그 장인이 세공한 콩알만한 귀걸이 하나 사는데 항아리 가득 담긴 금화가 필 요할 정도라니까 말이다. 응? 그런데 잠깐만! 저것은... 내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세드릭 님께서는 여전히 괴팍하시던가요?” “응? 네 녀석이 세드릭을 어떻게 알지?” 순간 내가 꺼낸 말에 오르넬라가 적잖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그 이오타의 장인 이름이다. 물론 나는 만나본 적은 없고 세드릭 의 장신구를 가지고 있는 고객으로부터 괴팍한 성격이라고 들었을 뿐이다. “전 일개 기사일 뿐이지만 세드릭님이 세공한 예술품을 알아보는 눈 정 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호오. 대단한데? 제법 눈썰미가 있는 사내놈이로군.” 그야 고객의 겉모습만 보고도 단번에 그녀의 재산과 성격, 기분까지 파 악해야 하는 업종에 종사했기 때문입니다요. “그리고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그 발목에 감겨 있는 장신구가 세드릭 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뭐라!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내가 엄청난 돈을 주고 세드릭에게 직접 주문한 것이란 말이다!” 그녀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럴 만도 하다. 저 정도로 자존심 센 여자에게 모조품이라고 말했으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도 당연하지. “그 장신구를 언제 주문하셨습니까?” “2년 전이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세드릭님이 만든 장신구가 대륙 최고의 값으로 거래되는 이유는 그 분 이 5년 전부터 일을 그만두셨기 때문입니다. 즉, 5년 전부터 지금까지 세 간에 나돌고 있는 장신구들은 모두 모조품입니다.” “.....!” 오르넬라 성녀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냉큼 세드릭의 모조품을 거칠게 뜯어내선 길가에 집어 던지고도 분을 참을 길이 없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엔디미온! 저것이 모조품이라고 네 목숨을 걸고 말할 수 있느냐!” “...이미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만.” 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저 장신구는 아주 그럴 듯해 보이지만 오 리지널은 아니었다. 아무튼 고객님들에게 배운 지식을 이럴 때 쓸 수 있을 지는 상상도 못했다. 자신이 구입한 것이 이미테이션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성녀님의 분노는 정말이지 눈앞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만 같았다. “큭! 알려줘서 고맙다. 감히 내게 세드릭의 행세를 한 그 사기꾼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서 잡아와 고문한 뒤 박제해서 내 침실에 전시 해 놓겠다!” 무, 무섭다. 저것이 정녕코 이 나라를 수호하는 성녀님의 본모습이란 말 인가. 만약 백성들이 저 모습을 봤다면 신의 이름을 거역할 자, 그 누구도 없으리라. 예전 내 고객 중 가장 무서운 분이었던 적현무(寂玄武) 키르케 밀러스 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가공할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좋아! 그럼 네 목숨을 당분간 살려두기로 하지.” 평정을 되찾은 오르넬라는 금세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게 보였지만... 잠 깐, '당분간'은 또 뭡니까! “대신... 조만간 내 궁전에 와서 수집품들을 감별해 주었으면 해. 모조 품 따윈 질색이니까.” “전 출장은 안갑니다, 누님.” “뭐?” 아차 실수! 이 놈의 입버릇. 옛날 버릇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게 아니더 라도 미남자의 박제들로 가득 찬 공포의 궁전에 초대받고 싶은 생각은 추 호도 없.... “오기 싫다고? 그럼 박제가 되서 내 궁전을 방문하고 싶은 거냐?” “아, 아니요! 갈게요! 꼭 갈게요! 제발 가게 해주세요!” 씨잉, 가면 되잖아. 그건 그렇고 이 상황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과연 맞은편에 있는 백색 가마는 누구 것이냐는 거다. 만약 오르넬라님 만 큼이나 중후한 인덕의 소유자라면 단언하건데 난 도망칠 것이다. “저 가마에는 어떤 분이 타고 있는 거죠?” “호호. 그게 궁금한가?”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눈앞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백색 가마를 향해 말했 다. “그 막을 걷어라.” “하, 하지만!” 가마꾼들이 당황했다. 길도 안 비켜주는 콧대 높은 사람들끼리 상대 가 마의 커튼을 함부로 열어보는 일은 칼부림이 나도 무방할 모욕일 것이다. 하긴 저런 불지옥 성녀에게 덤빌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하얀색 백색 가마의 주인마님이 오르넬라와 같은 권력을 지닌 귀부인이라면 왕궁 대혈투가 그 성대한 막을 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담배를 뱉은 오르넬라 님은 히스테리컬한 목소리로 주저 없이 소 리치셨다. “냉큼 열지 못할까!!” “예, 옛!” 백색 가마의 시녀가 오르넬라의 살기에 당황하며 황급히 커튼을 열어젖 혔다. 그리고 난 그 안에 타고 있는 '지체 높은 귀족가문의 여자'의 모습 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갓난... 아이?” 나는 중얼거렸다. 그 커다란 가마 안에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여자 는 바로 아직 젖을 때지도 못한 갓난아이였다. 오르넬라가 키득 키득 웃으 며 내게 말했다. “저 아이는 공작 가문의 아이야. 저 나이에서 유모도 없이 혼자서 가마 를 타고 이동해야 하다니 잘난 고상함이 지나쳐 웃기지 않아? 아니 그것보 다 말도 못 알아듣는 저런 아이와 길싸움을 하고 있는 나야말로 웃기는 여 자로군. 하지만 그런 게 왕궁이야.” 그녀의 비웃음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상상도 못했다. 아이란 자 고로 부모의 품에 안겨 보호 받고 있어야 행복한 것이다. 커다란 가마 속 에 혼자 들어가 가마꾼들의 손에 이끌려 왕궁을 행차해 봐야 갓난아이에겐 기쁠 것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다. 오르넬라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 게 유치한 짓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도 이렇게 사는 법 밖에는 배우지 못했거든.” 오르넬라가 긴 담뱃대를 다시 입에 물며 쓸쓸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그 녀의 모습을 보며 내가 말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절 불러주세요. 저, 이래봬도 기 사거든요?” “엔디미온 경.” “예!” 나는 씩씩하게 무릎을 꿇었고 그녀의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비켜준 가마는 백색이었다. “오늘 즐거웠다. 제법 재미있는 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이 왕궁에 들어온 것 같구나. 언제 한번 내 궁전에 놀러 와라. 이 오르넬라 님의 궁전에 오 고 싶어 하는 사내놈들은 줄을 섰지만 초대하고 싶은 남자는 별로 없거든.” “하하. 박제가 되는 것은 사양입니다.” “박제 같은 흉측한 것을 수집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걱정 말고 오거라. 그리고 신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말해라. 나, 이래봬도 성녀거든.” 그녀의 붉은 가마가 무릎을 꿇은 내 앞을 지나갔고 가마꾼들은 다시 그 녀의 행차를 알리는 낮은 목소리를 화음(和音)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나. 무사히 해결하셨네요오? 얼마나 걱정했는...” “키스, 이 노오옴!!!” 나는 불쑥 나타난 키스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죽는 줄 알았단 말이 다! “폭력은 싫습니다아.” 키스는 가볍게 내 주먹을 잡아채며 방긋 웃었다. 하긴, 이런 솜털 주먹 이 통할 남자가 아니지. “아 그런데 대단하네요? 그 짧은 시간에 까다로운 오르넬라님과 친해진 남자는 처음 봤네요. 전에 무슨 일 했어요오?” “남자 몸무게, 관심 없다면서요?” 흥! 내 쪽만 과거를 말해주면 억울하단 말씀이야. 당신 과거부터 알려달 라고! 하지만 키스는 어깨를 으쓱할 뿐 입을 다물었다. 쳇. 정말 자기 방 어에 철저한 인간이다. “그런데 오르넬라 무티 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솔직히 성녀라고 하기엔...” “너무 슬퍼 보이죠?” “예?” 갑자기 키스의 입에서 '슬프다.'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녀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성녀로서의 인생을 강요받 는 분입니다. 그 분은 훌륭한 성녀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슬픈 눈빛을 가지게 된 것이랍니다아.” 슬픈 눈빛이라... 그랬던가? 억지로 원치도 않는 신성함을 짊어지고 살 아야 하는 사람이었던가. 내 시선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은빛의 모조품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반짝거려봐야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오르넬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모조품을 혐오하는 것일까. “언젠가는 혈통이나 신분 때문이 아닌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자 신의 직업을 결정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요.” 키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오르넬라의 붉 은 가마를 바라보았다. 문득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녀가 정말 불쌍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사는 법 밖에는 배우지 못했거든.’ 맞아,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더없이 슬퍼보였었다. 하지만 키스 경, 당신도 가끔 그런 눈동자라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오르넬라의 모조품을 집어 들어 흙먼지를 닦아 주었 다. 아무리 모조품이라도 말이지, 마음에 들었다면 소중히 해줘야 한다. 모조품도 모조품으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 테니까. 3. 이쯤에서 정리 좀 해보자면... 스왈로우 나이츠의 멤버는 지명 대상에서 제외되는 단장 키스 세자르를 빼면 나를 포함 총 열 명입니다. 그 중 현재 나까지 여섯 명이 본부 리더구트에 남아 있으며 내 룸메이트인 지스킬 윈터 차일드를 포함 네 명은 ‘지명’을 받아 출장 중이고요. 본부에 남아 있는 단원들은 다음 지명이 들어올 때까지 왕궁의 여러 가 지 위험하거나 은밀한 잡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으며 가끔 멧돼지와 사투 를 벌이거나 비단 구렁이가 같은 누님의 손에 박제가 되지 않기 위해 발 버둥치기도 한답니다. 왕궁이 해결해야 하는 국가적 중대 범죄를 수사하 고 범인들과 싸우고 체포하는 일은... 카론 경이 있는 헬스트 나이츠의 업무이며 왕궁의 꽃인 우리가 범죄 현장에 파견되는 일 따위는 아마도 영 원히 없을 겁니다. 쳇. 그리고 아침이 되면 테라스에 모여 우리들의 포주인 키스로부터 하루 노 동량을 할당 받으며 일과가 시작됩니다. 너는 본당에 가서 재롱을 떨어라, 너는 응접실에 가서 귀족들을 접대해라, 너는 왕궁에 놀러온 관광객 가이 드를 해라, 너는 돈 값아라! 등등. 왕궁 일을 하면서 만나는 귀족들과 빨 리 빨리 친해져야 나중에 자주 지명을 받는 간판스타가 될 수 있다고 들었 습니다. 뭔가 내가 예전에 하던 일들과 아주 비슷해서 무척 정겹... 기는 커녕 한숨이 다 나오는군요. 현재 휴가를 받아 아직도 침대 속에 파묻혀 있는 랑시를 제외한 우리는 테라스에 모여 아침식사를 하면서 키스가 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직장생활 같죠? “아침부터 뭘 그렇게 중얼 거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퀭한 얼굴로 담배를 물고 있던 쇼탄 경이 나를 보고 말했다. 남의 나레이션에 관심 갖지 말아주세요. 심란한 마음을 하소 연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참. 미온 경, 너 오르넬라 성녀님의 눈에 들었다며? 펠리오스 아가 씨들한테 들었어.” 쇼탄이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군. 어제 당신의 술 상대 는 펠리오스 타워의 무녀들이로군. 얼마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기에 그 무 시무시한 지옥의 탑에 목숨 걸고 숨어 들어가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정말? 그 오르넬라 님이 맘에 들어 한다고?” 귀가 솔깃한 루이가 대화에 끼어들어 쇼탄의 담배를 빼앗아 물었다. 뺨 에 하얀 분을 바르고 있어서 당장이라도 연극 무대에 뛰쳐나갈 것 같은 얼 굴이다. “오오! 시골 촌놈인 줄 알았는데 대단하네! 무슨 방법을 쓴 거야? 그 무서운 아줌마의 호감을 사다니.” “그냥... 교통정리 해드린 건데요.” “교, 교통정리?” “아하하. 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아아.” “왕궁에 오자마자 대단한 줄을 잡았네. 오르넬라 님은 왕궁 10대 실력 자 중 하나야. 알고 지내는 귀족들만 족히 백 명은 넘을 걸? 그 분에게 잘 보이면 잘 나가는 귀족들에게 지명 받는 일도 누워서 떡먹기겠지. 꽤 수완 좋네, 미온 군.” “별로 지명 받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에요.” “이런, 겸손할 거 없어. 솔직히 지명 때문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살벌 한 누님과 친해지고 싶겠냐.” “오르넬라 님은 그런 분 아니에요.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귀족들과 친 해지는 것, 문제도 아니라고요.” 이래봬도 난 독점 고객만 수백 명이 넘었던 화류계의 프로였다고. “호오. 꽤 자신만만한데? 지명 많이 받으면 나도 좀 나눠주라.” 누가 지명 받고 싶데! 난 몇 년 동안 그 일만 하다가 왔다고! 말을 타게 해줘! 악의 무리들을 소탕하게 해달라고! 그러니까 내 지명 다 가져가시오, 루이 경! “축하드려요.” 근처에서 스프를 먹고 있던 크리스가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앗, 본의 아니게 크리스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말재주가 없는 크리스로서는 까다로운 귀족들과 친해지기도 힘들었고 여전히 지명 받지 못해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명 받지 못한다면 큰 돈을 벌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그때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던 공무원 기사 레녹 경이 빈 정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솔직히 지명도 못 받는 녀석은 쓸모없잖아. 우리들한테 방해만 된 다고.” “죄, 죄송합니다.” 잠깐, 크리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그딴 말이 어딨어! 레녹 경! 당신이야말로 크리스에게 사과하라고! 나는 발끈 화가 나선 소리쳤다. “레녹 경! 말씀이 지나치세요! 크리스의 심정도 모르면서 말 함부로 하 지마세요!” “너야말로 우리들의 심정도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우리들의 심정?” “엔디미온 씨. 잘 들어요.” 그때 생선을 썰던 나이프를 탁 놓은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뒤로 묶은 옅 푸른 머리가 도드라진 루시온 경은 우리들과는 달리 위세 좋은 백작가의 후 계자고 유산 상속을 받아 재산도 상당하며 검술에도 재능이 있다고 들었는 데 어째서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또한 귀족 가문의 공자답게 말투도 점잖고 키스를 제외한 스왈로우 나이츠를 상대로는 '경'이라는 칭호도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지명 순위 탑이기도 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왕실에선 우리들의 실적을 가지고 우리들의 가치를 판단해요. 즉, 크리 스티앙이 자신의 몫을 다 하지 못한다면 스왈로우 나이츠의 평균 실적이 떨 어지게 됩니다.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되요.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티앙 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레녹 씨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 그래. 내가 업소에 있을 때도 벌이가 시원찮은 자는 해고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객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사람의 가치가 되고 고객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자는 남에게 방해만 되는 기생충처럼 푸대접 받았고 나 처럼 가장 많은 고객을 붙잡고 있는 자는 어딜 가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 이 되었다. 즉,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고객의 주머니에서 얼마나 많이 돈을 뽑아내느냐가 성공한 인간으로 대우 받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난 말이야... “그런 게 싫어서 거길 나온 거라고!!” 제길! 나도 모르게 커다랗게 소리를 쳐버렸다. 어째서 어디를 가도 성공 한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은 다 똑같은 거야. 어째서 기사 정도 되는 사람 들마저 그런 시시한 조건 밖에는 말하지 못하는 거냐고. 그 따위 것만이 유일하게 추구해야 할 '인간의 조건'이라면 크리스의 고향이라는 가난한 농촌이나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곳이나 다를 것이 없잖아! 나는 단지 처세 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방해만 되는 인간으로 평가 받는 크리스가 불 쌍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왜들 그러십니까아?” 어느새 들어와 있는 키스가 난감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흘낏 나 를 보며 동정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기분을 이해한다는 의 미일까? “아침부터 커다랗게 소리치면 얼굴에 주름 생깁니다아.” 역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는군. “자아, 오늘의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루시온 경, 레녹 경은 지명입니다. 지금 하고 계신 모든 왕궁 업무는 크리스 경과 루이 경에게 인수인계하시고 오전 중으로 출장 채비를 마쳐 주세요. 지명 귀족 가문의 약도와 열차표, 출장비는 항상 그랬듯이 행정부 별채에서 받아가 주시고요. 으음, 그리고...” 키스가 서류들을 뒤적거리며 말을 잇다가 눈가를 움찔했다. “쇼탄 경! 돈 정말 안 갚으실 겁니까!” “가, 갚으면 되잖아!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아아, 이제 나도 몰라요. 더 이상 미뤘다간 빚이 산더미가 된다고요! 어째서 돈을 그렇게 많이 빌려 쓴 거에요!” “나, 나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 뭐.” 쇼넨베르트는 왕궁 사채업의 피해자였다. 나라에 빚을 지다니 잠자리가 서늘하시겠구려. 아무튼 이토록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이는 이 나라가 어째 서 아직도 약소국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는군. '당신 물건, 차압당해도 난 몰라요.'라고 삐죽거리던 키스는 다음 서류 를 보며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 항상 천연덕스러운 그의 그런 당황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음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미온 경?” 응? 저 말입니까? 키스가 날 바라보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 로 입을 열었다. “지명 받았습니다.” 뭐! 난 이 왕궁에서 와서 지명 받을 만큼 친해진 귀족이 한 명도 없는데! 대체 누가 나를! 4. 키스가 날 데리고 간 곳은 1층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키스의 방에는 처 음 와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키스를 '머리 어딘가에 무서운 결함이 있 는 사람' 쯤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키스의 방에는 알 수 없는 괴이하고 위험한 물건들이나 널브러져 있을 줄 알았다. 설사 여자를 숨겨놓고 있더 라도 왠지 키스라면 이해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틀렸다. “이게, 당신의 방?” “왜요? 이상한가요?” “아뇨. 너무... 정상이라서요.” 키스의 집무실은 놀랍게도 집무실 같았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서류 더 미들이 묵직한 종이냄새를 풍기는 그런 이지적인 사무실. 오른편 서재에는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 책들이 가득 정리되어 있었고 새하얀 셔츠들과 평소 에는 절대로 입지 않는 기사단 제복도 보송보송하게 세탁되어 방 한 켠에 놓여 있었다. 고풍스런 책상 위에는 깃털 펜이 꽂혀 있는 은색의 잉크병과 봉인을 자르는 멋들어진 페이퍼 나이프가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거 뭔가... 예전 카론 경의 방과 비슷하잖아? 키스가 이런 세심하고 정상 적인 인간일 리가 없어! 난 의심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여자는 어디에 숨겼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정상이라서 대단히 놀랐다. 키스는 나의 지명허가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서 의자에 앉았고 그 동안 이리저리 집무실을 둘러보던 나는 한곳에 시선 이 고정되었다. “저 검들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아름다운 열 자루의 검들이 잠들어 있었다. 펜을 든 키스가 흘낏 그것을 보며 말했다. “예전에 왜 스왈로우 나이츠는 검이 없냐고 물어본 적 있죠? 저것이 바 로 당신들의 검입니다.” 제복을 입고 저 검을 찬다면 아무리 잘난 건 얼굴뿐인 우리들이라도 멋 진 기사처럼 보일 것 같았다. 우리들의 검을 키스가 보관하고 있었구나. 키스가 계속 멋진 글씨체로 문서를 작성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들마저 나서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이 나라에 발생한다 면 저는 당신들에게 저 검을 지급할 겁니다.” ‘우리들이 검을 뽑아야 할 일이라...’ 우리들이 싸워야 할 일이 생긴다면 우리들 외에 다른 기사들이 모조리 싸울 수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럼 장식품이나 다름없잖아?’ 정말로 아직 사용한 적은 없었는지, 우리들의 검은 결혼을 앞둔 처녀처 럼 단아한 모습 그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키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전 이 검들이 영원히 장식품이길 바랍니다.” 내 마음을 읽힌 것 같아서 깜짝 놀랐다. 가끔 키스는 남의 속마음을 물 끄러미 들여다보는 것 같단 말이야. 아니 잠깐!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당 장 중요한 것은 날 어떤 귀족이 지명했냐 하는 거잖아! 이번에도 내 마음 을 읽은 듯 키스가 먼저 물었다. “리튼 지방의 영주인 히더 남작을 알고 있습니까?” “아? 그 분이 왜요?” “아는 분이세요?” “예에.” 알다마다... 리튼은 내 고향인 걸? 그리고 고집쟁이 히더 남작님은 리튼 의 영주인데 모를 리가 있나. “그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정말이요?” 믿을 수가 없다. 히더 남작님은 고집쟁이에다가 멋을 부릴지도 모르는 시골 아저씨지만 워낙에 정정했기 때문에 난 100살을 넘게 살 줄 알았다. 착하고 격식이 없는 영주님이라서 나를 포함한 리튼 사람들은 그 분을 좋 아했는데, 왕궁에 와서 그 분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다니 가슴이 아파왔 다. “당신을 지명한 분은 히더 남작의 따님인 세리카 씨입니다. 현재 외동 딸인 세리카 씨가 가문을 이었으니 남작 부인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겠군요. 세리카 남작 부인을 알고 있나요?” “서, 설마... 세리카라면 그 세리카?” “또 다른 세리카도 있나요?” 그랬었군. 세리카님이라면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내 고객이었다. 아버지 히더를 꼭 빼닮아서 당차고 고집 세고 자존심도 남달라서 바에 와도 항상 나만 지명하고 나만 들들 볶던 그런 아가씨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또 지명을 받게 되다니, 세상 참 얄궂네. 아마도 내가 여기로 '직장'을 옮겼 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아무튼 세리카 남작 부인께서 아버지의 제사를 맡아 달라고 당신을 지 명했습니다.” 전에도 한 말이지만 스왈로우 나이츠는 귀족 가문에 파견되어 행사나 제 사를 집행한다. 뭐 어쨌든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은 꽃미남 신관 기사들이 왕실을 대표해서 제사를 진행해 준다면 귀족들로서도 체면이 설 테니까 말 이다. 물론 그 대가로 적잖은 액수의 제사 대행 비용을 왕궁에 지급해야 하지만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귀족들에게 그게 대수일까. 이런 시스템을 기획한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돈벌이의 천재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그런데 말이지, 술시중이라면 모를까 제사는 부모님 제사 외엔 해본 적 도 없는데? “키스 경. 난 제사 같은 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고요.” “간단해요. 제사 방법이 적혀 있는 설명서 드릴 테니까 거기에 나와 있 는 데로 하시면 됩니다아.” 이봐요. 이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고요! 매뉴얼 한번 달랑 읽고 곧바로 실전이라니 좀 더 성의 있게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사 도구 일체는 이 허가서를 가지고 물품 관리부에 가시면 지급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헤에. 제사 도구라...” 오오 본격적인데? 그럼 제사 도구들을 싸들고 왕궁을 대표해서 출장을 떠나는 신관 기사가 되는 셈인가. 죽은 자를 위로하는 신관 기사라, 이거 낭만적이로군. “아 참! 그리고 그 제기(祭器)들은 대여해 드리는 것이니까 만약 파손 하신다면 왕실에 변상해야 합니다. 주의하세요. 쇼탄 경도 향단지 부셔먹 었다가 엄청난 돈을 물어줘야 했으니까요.” “......” 전혀 낭만적이지 않아! “그럼 저는 제사만 지내고 오면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제사를 지낸 뒤에 사례금을 받아서 왕궁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너무 간단해서 탈이네요.” 아무리 그래도 기사인데 그 지방에 가면 잘못된 일도 해결해 주고 악당 들도 처치하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소설에서는 죄다 기사가 악 덕 상인들도 때려잡고 그러던데 현실은 뭐 이리 시시한 걸까. 그런 내 마 음을 간파한 듯 키스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물론 우리도 기사라서 수사권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수사와 처벌은 우리의 임무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카론 경 같은 무장 기사가 하는 것이 니까... 미온 경은 절대로 수사권 발동하지 마세요!” “아? 왜, 왜 그렇게 강조를...”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미온 경은 제사만 마치고 돌아오면 됩니다. 지 명자에게 정을 줘서는 안 되고 사건을 수사 하거나 검을 뽑아 범죄자들과 싸우는 일은 더더욱 안 됩니다. 제 말 뜻 아셨죠?” 나는 조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너는 정해진 일만 하고 팁만 받으면 그만이야.'라는 건가? 기사라고 해놓고 귀족들의 눈요기 외에는 아 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결국 돈벌이를 위해서 기사인 척 하는 인형일 뿐이잖아. 프로 호스트일 수는 있어도 프로 기사는 아니라고! “만약 사람들이 제게 '기사님. 제발 억울한 저희들을 도와주세요.'라고 간청하더라도 무시하라는 의미인가요.”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수사권 발동하지 마십시오.” 키스의 단호한 말은 배신감이 되어 내 마음을 할퀴었다.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기사라면 그건 기사가 아니다. 헬스트 나이츠 녀석들의 말대로 기사도도 신념도 없는 연약한 도련님 집단일 뿐이다. 몸을 파는 것 이나 신념을 파는 것이나, 그게 무슨 차이가 있지? “미온 경. 당신을 추천해 주신 분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 했었죠?” 키스의 갑작스런 말에 난 잠시 당황했다. “그러니까... 평민들을 보호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요. 지명을 받아 출장을 갔다가 산적들을 물리쳐 달라는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검을 뽑았습니다. 왕실에선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 고 그 분은 혼자서 산적들과 싸워야 했지요.” “그러다가 죽임을...” “그 분은 산적들과 홀로 싸우다가 그들의 손에 수치스럽게 목숨을 잃었 고 마을 사람들도 보복을 받아 모두 죽었습니다. 영주의 군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산적들은 도망치고 없었지요. 그건 억울한 죽음입니다. 나는 이 제 막 기사가 된 미온 경이 그런 식으로 억울하게 죽게 될까봐 두려운 거 에요.” 냉정하게 무시하라던 키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스왈로우 나이츠가 검술의 초인일 리가 없다. 왕국 최강의 검사라는 카론 경이라면 모를까 크리스 같은 연약한 소년이 단독으로 험악한 산적들과 싸울 수야 있겠는가? 또한 우리들은 왕실의 군사 지원을 바랄 수도 없다. 즉 기사라 는 직함 외엔 무방비나 다름없는 우리들은 홀로 낯선 땅으로 제사를 지내 기 위해 떠나야 하는 것이고, 그곳에서 정의감 때문에 희생되는 것을 키스 는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 분의 죽음이 의미 없는 죽음 이었을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일에... 목숨을 걸 바보는 없다고 생각해요.” 난 불현듯 무슨 생각이 들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니까 그 분은 하나 뿐이 없는 목숨을 바쳐 몇 명의 소시민들을 지 키려 했던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결심한 신념을 지키려다가 죽었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이 억울한 죽음일 리가 없잖아요. 전 평민이에요. 평민들에게 기사가 어 떤 존재인지 아세요?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유 일하게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마지막 존재가 평민들이 바라보는 기사에요. 그 분은 최선을 다해서 그런 평민들의 희망을 지켜주려 했던 것이라고 생 각해요.” 나는 고작 시골 평민 출신 호스트에 말단 기사지만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날 추천해 준 그 분의 죽음을 욕되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얼레? 키스는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숨기며 '그런 말을 한 사람도 예전에도 있었죠.'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로 키스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 참 후의 일이다. 키스는 엉뚱한 말로 대신했다. “아직까지,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없죠?” “다, 당연하죠. 제가 왜 살인을...” “전 당신이 평생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왈로우 나이츠의 열 자루 검을 바라보며 말한 키스의 표정은 이상하게 도 진짜 기사 같았다. 그는 금방 헤죽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아? 이 사람,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럼 어서 다녀오세요오. 미온 경. 돌아올 때 제 선물 사오는 거, 잊 지 마세요?” “내가 뭐하러 당신 선물을! 자기는 지명도 안 받고 펑펑 놀고만 있으면 서!” “아아 야박한 기사님이로군요. 기사도의 덕목 중에는 자비심도 있답니 다아.”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지 마세요!” 결국 나는 선물을 사오라며 집요하게 달라붙는 키스에게 치를 떨며 밖으 로 나서려고 했다. 리튼이라면 갈 길이 멀단 말씀이야. 응? 그런데 이 검 은 또 뭐지? “키스 경. 이 검은...” 서재 옆 어둑한 구석에 놓여 있어서 못보고 지나칠 뻔 했다. 상당히 훌 륭한 검 같긴 하지만 우리들의 열 자루 검과는 정 반대로 낡고 손 떼가 묻 어서 검집에 감긴 보라색 천이 심하게 헤져 있는 검이었다. 말하자면 마치 오랜 싸움을 마치고 이제는 은퇴해서 쉬고 있는 그런 검객의 모습이랄까. 키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장식품입니다아.” 거짓말. 이 낡은 검의 어디가 장식적이냐고. 그때 키스가 문득 무슨 생 각이 난 듯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아 참! 미온 경. 우리들은 신관 기사라서 모두 할례를 해야 하는데, 그거 하셨겠죠?” “뭐라고!!!!!!” “얼레? 안했어요? 정의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 그건 필수입니다. 아아 어떻게 한다. 강제로라도 해드려야겠군요.” 웃기지마! 정의를 실천하는 것과 할례가 무슨 상관이야! 그 무슨 소름 돋는 말이냐고! 싫어! 절대로 못해! 그거 무섭다고! 그때 키스가 빙글 돌 면서 말했다. “농담이었습니다아.” 언젠간 죽여 버리겠다, 키스. 5. 출장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간다.(지명자가 두 명의 기사를 부르지 않는 이상.) 멋진 시종들과 훌륭한 편자를 붙인 순혈의 명마 같은 것들은 기대 해 봐야 내 마음만 상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사스러운’ 것들 대신 제사 도구, 약도, 열차표, 출장비를 지급받을 수 있는 곳은 왕궁 행정부 본채 옆에 있는 별관 물품 관리부에서 지급받을 수 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 은 언제나 한산한 이곳이 언제나 붐비는 민원실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하다 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일이야 왕궁에 산재한 불가사의한 부조리의 빙산의 일각이니 애교로 봐주도록 하자. 내가 관리부 접수창구 아가씨에게 키스의 허가서를 보여주자 멋진 제복 을 입은 그녀가 생글 웃었다. 그럼 나도 생글. “아. 신입이시로군요.” “신입?” “이번에 스왈로우 나이츠에 새로 충원된 분이죠? 소문 많이 들었어요. 실물로 보니까 더 멋지네요.” “소문?” “멧돼지 수십 마리와 싸웠다면서요? 정말 믿어지질 않네요. 그런 곱상 한 얼굴과 가느다란 팔로 어떻게...” “저어... 수십 마리, 아닌데요.” “아? 역시 헛소문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멧돼지를 맨손 으로 잡냐, 싶었어요.” “잡긴... 잡았는데요. 한 마리. 수컷. 필살의 목조르기로.” “어머나! 정말요?” “아하하하. 나름대로 스릴 있어서 좋아요, 이 왕궁 생활.” 스릴 싫어! “와아! 오빠 멋지다! 다음에 저한테도 한번 보여줘요? 네?” “저어. 한번 보여 달라고 하심은...” “멧돼지 잡는 모습 저한테도 보여주실 수 있죠? 엄청 멋질 거 같아요!” “아... 하하. 저는 일생 한번으로 족한데요.” “피이. 재미없어.” 나는 순간 '그럼 니가 한번 해봐라! 이 여자야!!’라고 버럭 소리칠 뻔 했다. 에이이! 그때 일은 상상하기도 싫으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자. 그건 그렇고, 하아. 기사님을 보고 '신입'이라니. 이래서야 완전히 회사잖아? 그럼 키스는 중간 관리직 쯤 되는 것일까. 오빠라고 불리는 것도 즐겁지만 가끔씩은 '엔디미온 경'이라고도 불러 줬으면 좋겠다. 명찰... 달고 다닐까? 그녀는 잠시 뒤편 창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끙끙거리며 커다란 가방을 가 지고 돌아왔다. “이 안에 제사복과 제사 도구와 제사 방법이 적혀 있는 매뉴얼이 들어 있어요. 열차 안에서 제사 방법을 숙지하시고 부디 실전에서는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향을 피우기 전에 기도문을 읊는다든지 하면 안 됩니 다.” 내가 알게 뭐람. 왕궁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기사란 정의의 검을 뽑아 약자들을 수호하는 존재였는데 지금은 기도문은 꼭 향을 피운 뒤에 읊어 야 한다는 것을 숙지해야 하는 존재로 바꿔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가 이런 것일까. “그리고 이건 약도와 출장비와 열차표입니다. 삼박사일 코스에요. 그 안에 모든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셔야 합니다. 만약 늦게 된다면...” “벌금이죠?” “어떻게 아셨어요?” 왕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슬슬 감이 온다. 아아, 정의의 기사는 어디가고 슬픈 냄새나는 향단지를 부여잡고 기도문이나 읊는 쓸쓸 한 직장인이 되어 버린 건지. 뭐, 이런 거라도 배워두면 부모님 찾아뵐 때 쓸모가 있겠지. 그렇게 위안하렵니다.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요?” “왕궁에 와서 취미가 생겼거든요. 중얼거리는 취미.” 최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이해해 주세요, 접수계 아가씨. 나는 도구와 여비와 열차표 등등을 받아 수도 아스말의 역으로 향했다. 언젠가 는 고향을 찾아가 부모님의 무덤 앞에 인사드리겠다고 결심했지만 이건 너 무 빠르잖아. 리튼은 여전하겠지? 기사는 정의의 수호자라고 굳게 믿고 사 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인 세리카 아가씨... 아니 남작 부인도 여전히 맹랑하게 날 반겨줄 생각을 하니까 왜 그런지 웃음이 나온다. 올해로 열여덟 살이겠군. 제2화 : 아무도 모조품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끝. 제3화 : 시골의 기사도 “아프겠다, 이 상처.” 그녀가 내 등에 얼룩져 있는 깊은 상흔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겐 이런 기분은 사치다. 나는 그녀의 팔을 밀쳐내고 셔츠를 입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나한테는 안 보이니까.” 제3화 : 시골의 기사도 1. 열차표를 입에 문 채 플랫폼으로 향하고 있는 나는 그야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멋진 모습이었다. 소매 끝에 레이스가 달린 검은 코 트 뒤로 긴 금발을 내리고 타이트한 하얀 바지에는 그에 어울리는 반짝거 리는 갈색 구두를 신었다. 오르넬라 성녀님이 고맙게도 보내준 명품 여행 가방을 들고 한쪽에는 비싼 돈을 주고 장만한 내 명검이 (아무래도 속아 산 것 같지만) 길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코트 밖으로 반쯤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 내 모습은 이 책의 표지와 같다. http://www.bookbox21.com/fantasy/bbsdata/data/skt표지일러스트1.bmp 뒷모습뿐이라서 미안하지만 앞모습 또한 이 유행의 도시 아스말에서 한 치도 부족함이 없다고... 내 화장을 담당해 준 루이 경이 장담했다. 난 솔 직히 이토록 도시 도련님 냄새 풀풀 나는 값비싼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와아. 아저씨, 예쁘다. 어디 접대부에요?” “꼬마야. 난 아저씨가 아니란다. 그리고 접대부가 아니라 기사거든?” 아무도 날 기사로 안 본다는 것이다. 역시 명찰을 달 걸 그랬나? '신입 기사. 엔디미온. 현재 출장 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발랑 까진 계집 애는 열차를 기다리는 내 주변을 이리 저리 훑어보며 여전히 품평회 중이다. 이거 뉘 집 자식이야 대체! “어느 가게에서 일해요? 우리 엄마 취향이 아저씨 같은 얼굴이거든요?” “꼬마야. 네 엄마 취향 따위 내 알 바 아니란다.” 방긋 웃으며 말하는 내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마구 꿀밤을 먹인 뒤에 철로로 던져 버리고 싶다, 이런 꼬맹이는! “아? 우리 엄마 돈 많은데. 아저씨 보면 돈 많이 줄 걸요? 엄마 주변에 그런 남자가 벌써 몇 명이나 있다고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어느 가게냐고요!” “하아. 너희가 무슨 가문인진 모르겠지만... 아마 너희 어머니 대에서 파산하겠구나. 그리고 내가 일하는 가게 이름은 ‘왕실’이거든?” “왕실 룸 사롱이요?” “이름모를 소녀여. 열차 밑으로 던져 버리기 전에 썩 꺼져라.” “쳇. 뭐야. 뭐 이 따위 건방진 접대부가 다 있어!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접대부 아니라니까!! 아저씨도 아냐!! 그리고 이르면 공무집행방해죄 로 왕실에서 잡아간다!” 아! 계속 화를 냈더니 빈혈이! 정말이지 이런 꼬맹이도 커서 맞선을 볼 때면 '오호호호. 제 취미는 바이올린과 꽃꽂이에요.'라고 말하겠지? 쳇. 에로소녀 주제에. “자네도 같은 열차인가.” “아니! 카론 경?” 너무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서 당황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얼음장 같은 외모의 카론 경이 내 앞에 등장한 것이다. 그때 예의 여자아이가 카론을 올려다보고는 반해버린 것 같은 얼굴로 감탄하는 것이었다. “와! 기사님이다! 진짜 멋있다아! 나도 기사님 같은 분한테 시집가고 싶어요!” “나, 나도 기산데...” “아저씨는 접대부잖아.” “접대부 아니라고 했지! 그리고 아저씨도 아냐! 내가 이 사람보다 더 어려!” “흥. 질투하는 남자는 보기 흉해요.” 이, 이건 분명 악마의 자식임에 분명해! 그리고 이 아이가 이대로 성장 하면 남자에게 모멸감을 줘서 자살하도록 만드는 무서운 마녀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 내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을 대표해서 여기서 씨앗을 잘라야 해! 그때 카론이 말했다. “지금 뭐라고 중얼거리는 건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담. 그 이후 카론은 인간차별주의에 찌든 계 집아이의 애타는 구애에도 불구하고 시선한번 주지 않은 뒤에 나와 함께 열차를 탔다. 정말이지 지금처럼 더운 날씨에 카론 경과 같은 열차에 탄 것은 행운이다. 그의 옆에 있으면 온도가 10도 쯤은 내려가는 것 같으니 까 말이다. “그런데 카론 경도 이인실?” “몰랐나? 왕궁에서 주는 열차표는 모두 이인실이다. 일인실에 타고 싶 으면 따로 표를 사라.” 그랬군. 그래서 아이히만 나리도 이인실에 있었던 거로군. 왕궁의 근검 절약 정신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아이히만이나 카론처럼 부와 명예가 넘쳐 나는 사람들은 일인실 표를 사도 좋지 않을까? 열차를 통째로 빌려도 시원 찮을 사람들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카론은 돈 때문이 아닌 다른 어떤 이 유 때문에 일인실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카론 같은 객실에 들어온 나는 코트를 벗고 검을 풀어놓은 뒤에 기지개를 폈다. 이제 또 한참을 달려야겠 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별다른 짐도 없이 열차를 탄 카론 경은 제복 윗도리를 벗지도 않고 검도 차고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차가운 눈동자 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카론 경. 코트하고 검 주세요. 제가 이쪽에 정리해 놓을게요.” “그거 농담인가?” “예?” “아무것도 아니야. 난 이대로 있겠어.” 아아 그렇군. 진짜 기사는 어딜 가도 검을 남에게 맡기는 법이 없겠지. 굉장한 검객인 한 고객은 술을 마시러 가게를 찾아왔어도 항상 검을 옆에 두고 있어서 술 따르는데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반면 키스는 자기 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싸돌아다니는 사람이긴 하지만 말이야. “저어. 카론 경은 어디까지 가세요? 전 리튼으로 가거든요?” “알 필요 없다.” “...아 예.” 이 사람은 대체 연애를 어떻게 할까? 여자 친구가 '어디 살아요?'라고 물어봐도 '쓸데없는 것은 물어보지 마라.'라고 대꾸할 남자 같다. 나는 고 개를 돌린 채 '체에. 저러다간 평생 결혼도 못할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내 말을 들은 카론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난 결혼했다.” “말도 안돼!!”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론 경. '결혼'이라는 단어는 말 이지요, 그러니까 살아 있는 인간 여성과의 혼인을 의미하는 거랍니다. 가 까이 오는 여성을 단숨에 얼려버리는 냉혈마인인 당신은 절대로 결혼이라 는 것을 할 수가 없다고요!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저, 정말 결혼했어요? 설녀(雪女)가 아니라 인간 여성하고?” “이상한 것을 의심하는군.” 카론이 불쾌한 투로 대답했다. 순간 나는 카론 경의 부인을 꼭 보고 싶 다는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대체 저 냉기서린 입에서 어떤 프로포즈가 나왔는지도 궁금하다. 저런 과묵함이 넘치는 냉혈인간하고 같이 살 수 있 는 자애로운 여자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이건 정말 경이로운 기적이지 않은가. 자비의 여신이 카론 경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의 탈을 쓰고 지상에 내려온 것이 분명해! 하지만 카론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캐물어봐야 쌀쌀맞은 대꾸나 돌아올 것이 뻔하니 나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카론 경도 지명 받아 가는 건가요?” “수사다.” “수사?” “그곳 백작으로부터 수사 의뢰가 들어왔다.” “이야아. 멋지네요. 수사라니, 뭔가 기사다워서 부러워요.” “권력자들의 뒤치다꺼리야.” 그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날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품속에서 서류들을 꺼내 안경을 낀 채 묵묵히 검토하던 그는 여전히 서류들을 읽어 내려가며 말했다. “정의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진짜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지?” “아 예! 그게 제 꿈이거든요!” “진짜 기사가 되고 싶으면 이 나라를 떠나라. 충고다.” “하, 하지만! 이 나라에도 분명 카론 경처럼 훌륭한 기사가...” 나는 급히 반론하려 했지만 카론은 서류와 안경을 다시 품속에 넣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안색이 피곤한 것을 봐서 며칠 째 잠을 못잔 것 같아 보였다. “잠시 자겠다. 네 목적지에 도착하면 깨우지 말고 내려라.” “예에. 예에.” 공짜표라고는 하지만 이런 값비싼 기차 여행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버리다니, 조금도 두근두근 거리지 않는 건가? 나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 고 잠이 든 카론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기사가 되고 싶은 이 나라를 떠나라고?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별로 알고 싶은 의미도 아니 지만 말이다. 2. 그러니까 나는 당황하는 중이었다. 역무원이 내게 말했다. “여기가 리튼 입니다. 안 내리세요?” “여기가 정말... 리튼이라고?” “예. 리튼 맞아요. 여기가 리튼이라니까요.” 그럴 리가! “이런 곳이 리튼이라고?” 제3화 : 시골의 기사도 “이런 곳이 리튼이라고?” 열차에서 내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고향 리튼은 풍류가들의 은밀한 휴양 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걸인이나 싸움꾼 따윈 찾 아볼 길이 없고 어디를 봐도 활기에 찬 사람들이 삼삼오오 노니는 그런 곳 이었다. 내가 지금 과거형으로 말한 이유는 바로 - 현재 내 앞에 세 명의 걸인들이 몰려와 돈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고 역사 왼쪽에는 용병으로 보 이는 험상궂은 자들이 모여 음탕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으며 또 오른쪽 에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박한 호객꾼들이 여행자들을 사창가로 끌고 가기 위해 사기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만에 찾아온 고향 리튼은 천국에서 아귀지옥으로 바꿔 있었다. “저어, 엔디미온 기사 나리시죠?” 조심스럽게 다가온 여인이 내게 속삭이듯 물었다. 입고 있는 행색을 보 아하니 세리카님의 시녀 같은데 호신용으로 보이는 칼까지 차고 있다니 예 전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이곳의 치안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단번에 느 낄 수 있었다. 내가 떠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자 가시죠. 세리카 남작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사실 세리카님이 플랫폼에서부터 날 기다리며 내가 오면 그 도도한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날 꽉 껴안아 주리라고 예상했다. 남의 시선에 아랑 곳하지 않는 당당한 그녀답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풍경하게 변해버린 플랫폼에서라면 그런 낭만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난 빨리 이 험악한 플랫폼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손에 이끌러 가면서 다 급하게 물었다. “대체 여기가 왜 이렇게 된 거죠! 불과 며칠전만해도...” “엔디미온 님!” 그녀가 날 확 돌아보며 두 팔을 잡았다. 불안감에 시달린 듯한 눈동자로 그녀가 간청했다. “제발 세리카 님을 도와주세요. 이제 저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분은 기사 나리뿐이에요!” 대체 이 리튼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3. 그런데 시녀가 날 데리고 간 곳은 세리카의 아버지 고(故) 히더 남작의 거처였던 고풍스런 대저택이 아니라 리튼 변두리에 있는 을씨년스런 싸구 려 회백색 건물이었다. “자, 잠깐. 세리카 아가씨가 이런 곳에 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곳에 피신해 계십니다.” “피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피신은 또 뭐란 말인가. 하 지만 시녀는 말없이 나를 세리카가 있는 개성 없는 방으로 안내할 뿐이었 다. 문 앞에서 그녀가 말했다. “세리카 님. 엔디미온 키리안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너는 돌아가라.” 문 안에서 들려오는 초라한 목소리에 나는 몸서리쳤다. 저게 그 맹랑한 세리카 아가씨의 목소리라고? 믿어지질 않는다. 그건 며칠 만에 모든 생기 가 다 빨려나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시녀가 공손하게 문을 열어 나를 들여 보냈고 다시 문이 닫혔다. 먹구름 가득한 날씨였다고는 해도 방안은 너무도 어두웠다. 또한 달콤한 것과 화려한 것을 사랑하는 그녀의 방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칠이 벗 겨진 잿빛의 벽과 낡은 침대,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소파, 그 어느 것도 도도한 아가씨 세리카다운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세리카 님?” “미온, 와줬구나. 아니... 이젠 엔디미온 경이라고 불러야겠네?” “그냥 미온이라고 불러주세요.” 어둑한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섞여 있었 다. 당장이라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소리쳐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그녀는 소리치면 깨져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길게 숨을 내 쉰 뒤에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들었습니다. 히더 남작께서 어쩌다가...” “네가 신전 기사단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불렀어. 아버지의 제사를 미온이 담당해 주면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어둑하게 잠겨 있는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왠지 가까이 다가 가서 그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섭다. 한번도 세리카님의 슬픈 표정을 본 적 이 없는데 지금이 그런 표정일 것 같았다. “미온. 저어..." “말씀하세요. 세리카님.” 그리고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나, 이제 돈이 없어. 왕실에 낼 수 있는 제사 비용을 줄 수가 없어. 하지만 미온이라면 왠지 아버지를 위해서 제사를 해줄 것 같아서 부른 거 야. 뻔뻔한 부탁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달래줄 수 있겠어? 이제는 돈도 권력도 없는데 불러서 미안해.” 울음 섞인 말을 들으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떠난 며칠 만에 모든 것이 바꿔 있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내 평생 최악의 악몽이리라. 그녀가 울음을 참으며 애써 웃으려 하는 것이었다. “미안. 괜한 말을 했네. 너도 무료로 일 해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억지를 써서 미안해. 차 마실래? 이제 고급 홍차 같은 건 없지만.” 나는 뚜벅거리며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점점 그녀의 모습이 드 러나면서 내 표정도 굳어가고 있었다. 아끼던 빨간색 드레스는 관리하지 못해서 형편없이 이지러져 있었고 항상 깔끔하게 말아 올리고 다니던 금발 도 빛을 잃고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얼굴이! 나는 나도 모 르게 소리쳤다. “누가... 누가 이렇게 한 거에요!” 눈을 꽉 감으며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에는 빨간 상처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짜내듯이 말했다. “상관하지 마. 이건 우리 가문 문제야.” “상관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너는 제사만 지내주면 돼. 그것만 부탁할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사 비용은 갚을게.”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대체 당신과 이 리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 해주세요!” 속이 넘어올 것 같은 울화가 치밀었다. 세리카님 은 남자들을 우습게 아 는 자신만만한 아가씨였지만 이 지경이 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사를 지내줄 수 없다면 왕실로 돌아가. 네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 니야.” “그러지 말고 사정을 말해주시면... 그러니까 저도 기사걸랑요?” “어서 꺼져!! 호스트 주제에 누굴 동정하는 거야!” 그녀가 빽 소리를 내고는 예전에는 절대 입에 대지 않았을 담배를 물었 다. 나는 조용히 그것을 빼앗은 뒤에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방긋 웃으며 말 했다. “여전히 고집은 남아 있는 것 같아 기쁘네요. 걱정 마세요. 제사는 이 일을 해결한 뒤에 꼭 해드릴 테니까요.” 그녀의 놀란 얼굴에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키스 경, 미안하지만 돌아가는 날짜는 조금 늦어질지도 모르겠네요. 벌금 은 각오하고 있으니까 화내지 마세요. 방에서 나오자 예의 시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이상 돈이 없는 세리카님을 모시는 것을 보니까 믿을만한 시녀임에 분명하다. “아! 마침 잘됐네. 내게 말해줄 수 있어요? 리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저, 정말 도와주실 건가요? 아가씨는 더 이상 지불할 돈이 없으실 텐 데...” “이곳은 내 고향이고 세리카 님은 몇 년 동안 내 고객이었어요. 그런데 도 모른 채 할 만큼 형편없는 기사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괴수가 나타나서 불이라도 뿜지 않는 이상 단 며칠 사이에 낙원 같던 리 튼이 이토록 산산조각 나는 경우는 나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내 미소 에 화색이 돈 시녀가 기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일주일쯤 전에 북부에서 유명하다는 한 상인이 히더 영주님을 찾아왔 어요.” “상인?” “예. 자신이 이 리튼을 발전시키겠다면서 영주님께 큰 돈을 기부했거든 요.” ‘사기꾼이다!’ 나는 직감했다. 상인이라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지극히 계산적인 종족들 이다. 발전이니 복지니 하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자기 돈을 턱턱 내주는 마음씨 좋은 장사꾼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실제 왕실에 복지기금을 내는 상인들도 세금을 감면받기 위해서일 뿐,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그런 착한 짓을 하는 자들은 한명도 없다.) 그러니까 장사꾼이 이유 없이 친절하다면 그건 십중팔구 사기꾼이다. “그 돈! 안 받았겠죠?” “아... 아니요. 영주님은 무척 감동 받아서 그 상인을 손님으로 맞이하 고 리튼의 상권 일부를 내줬어요.” “큭!” 잠시 잊고 있었다. 히더 남작은 완고하지만 사람이 순진하고 착해서 사 기를 당하기 쉬운 표적이라는 것을! “그 상인, 처음에는 물건을 아주 싼 값에 뿌렸겠죠?” “어머나! 어떻게 아셨어요!” “사기꾼 2단계. 경쟁자들을 없애라.” 나는 미간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것도 국내 최대의 길드 조합장의 딸인 고객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말도 안 되는 헐값으로 상품을 마구 뿌려 서 자신 외의 다른 상인들은 장사가 안 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결국 다른 상인들이 모두 이곳을 떠난 뒤에 자신만이 리튼을 독점하게 되었을 때부터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상거래법이 철저한 대도시나 힘 있는 길드가 버 티고 있는 상업도시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짓을 할 수 없도록 막고 있지만 이런 전원도시 리튼에서는 영주의 환심만 사면 가능할 일이리라. “상인은 결국 영주님의 자문인이 되었고 영주님은 그 상인에게 이 리튼 에 대한 상권과 교역권을 넘겼어요.” “넘기지 마!!!”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째서 그런 뻔한 속임수에 속으신 겁니까, 영주님! 그 정도로 바보인 줄은 몰랐어요! “상인이 영주님께 마약을 먹였다는 소문도 있어요. 증거는 없지만.” “마약!” 이 정도면 단순 사기가 아니다! 사기꾼에게도 룰이라는게 있는데 해도 너무 하잖아! 카론 경은 이런 곳으로 수사를 와야지 대체 어딜 간 거냐고! 아 참, 세리카님은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니지. “결국 영주님은 그 상인에게 모든 권리를 넘긴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 어요.” “잠깐! 아무리 마약을 먹였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에 호 락호락 넘어갈 영주님이 아니잖아! 세리카 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런 계약 을 한 거야!”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무리 영주님이 착하고 세상사를 잘 모른다고 하 더라도 도도한 아가씨 세리카가 있는 이상 리튼을 말아 먹는 그런 계약을 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시녀의 대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그게... 그 상인이 세리카 아가씨를 납치하고 있어서... 영주님은 어 쩔 수 없이....” “......!” 그녀의 상처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나. 사실 귀족들이라면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딸의 목숨 정도는 버리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히더 남 작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딸이 위험하다면 순순히 무릎을 꿇을 인간적인 남자다. 아버지의 사랑을 악용하다니 이런 극악무도한 장사치들이 있나! “그 상인에게 반대하는 다른 리튼의 유지 분들과 상인들도 모두 암살을 당했어요. 그리고 히더 영주님도 곧 화병으로 괴로워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요.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계약이었으니까 왕실에서는 움직이질 않 았고... 그래서 부탁할 수 있는 분은 기사님뿐이에요.” 그녀는 이윽고 울음을 터트렸다. 일주일 만에 이런 짓을 끝낼 수 있었다 면 이건 철저하게 계획된 범죄임에 분명하다. 영주님의 순진함을 알고 처 음부터 리튼을 집어 삼키기 위해 접근한 것이다. 독점을 하고 있는 상인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영지를 멋대로 휘젓는 것은 일도 아니다. 세금을 올리 고 폭리를 취하고 용병들을 사모아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왕실에는 적당히 공물을 바치고 중간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여 환심을 산다. 사기의 마지막 단계. 독초가 뿌리를 내려버린 것이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억울하게 죽은 영주님이 너무 불쌍해서...” 또다시 키스의 말이 떠올랐다. 왕실은 절대로 도와주지 않으니 제사 외 에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말라고. 그것이 신전기사단 스왈로우 나이츠가 지켜야 할 의무라고. “걱정하지 말아요. 꼭 이 영지를 되찾아 올게요!”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아아아!!'라는 키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정말이지 난 건실한 기사가 되긴 글러먹은 것 같다. 4. 나는 바르도라는 상인 놈의 소굴이 되어 버린 영주님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내 기분은 고객이었던 적현무 키르케님에게 당장 연락해서 '악당 죽이는 거 좋아하시죠? 여기 막 때려죽여도 될 놈이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지만 그랬다간 외교문제로 번질 테고, 무엇보다 이 일은 나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나는 저택 정문 앞에 서서 커다랗게 외쳤다. “문을 열어라! 나는 왕실 기사 엔디미온 키리안이다!” 역시 왕실 브렌드. 왕실 기사라는 말에 흠칫 놀란 문지기들이 황급히 안 으로 들어가더니 곧 우악스러워 보이는 거한 한 명과 함께 나타났다. 이곳 경비책임자 정도 되려나? “와, 왕실이라고 하셨습니까?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고양이는 개다래열매에 약하고 인간은 권력에 약하다. 나보다 몸집이 두 배는 됨직한 덩치가 왕실이라는 말 한마디에 쩔쩔매는 꼴을 보고 있자니 한심스럽기도 하고 조금 쾌감이 일기도 했다. “네 놈에겐 볼 일 없다. 바르도라는 녀석을 만나러 왔으니 문을 열어!” 보라색 눈동자를 차갑게 치켜세우며 잠시 카론 경의 흉내를 내봤다. 이 게 통한 것인지 어쩐 것인지 그는 조금 주저하더니만 굳게 닫혀 있던 창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무서울 정도로 얼굴이 커다란 작자가 뛰쳐나오며 아양을 떠는 것이 아닌가. 권력의 힘이라는 것 이 이런 것이었군. “아이고! 기사 나리!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시다니, 소인 몸 둘 바 를 모르겠습니다! 이 목숨을 바쳐 접대할 테니 부디 편히 즐기시다가 가시...” “네 놈이 바르도냐?” “그, 그렇사옵니다만.” 바르도는 상당히 콧구멍이 커서 숨쉴 때마다 하마를 연상케 하는 녀석이 었다. 이런 기형적인 콧구멍을 가진 놈이 감히 내 고향 리튼을 묵사발로 만들어 놨겠다! 잘 걸렸다 이 자식!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 영주님... 아니, 아니 히더 남작의 영지 인 이 리튼을 사기공갈로 빼앗은 죄, 어떻게 사죄하겠느냐!” 아아, 이 대사를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다고. 바 르도는 내 말에 거의 자지러지는 것 같았다. “사기공갈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 못된 세리카 년이 거짓말을 늘어 놓던가요?” “감히 내 고객... 아니! 그게 아니라 세리카 남작에겐 죄가 없다! 네 놈이 속인 것 아니더냐!” “절대로 아닙니다! 이 바르도, 목숨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사치의 말을 무슨 수로 믿겠는가. 증거를 보여라.” “증거라고... 하시면...” “계약서가 있지 않겠나!” 자아. 어서 계약서를 깨내라, 이 콧구멍 인간아. “무, 물론 있사옵니다.” 바르도는 주저하다가 갑자기 바지 벨트를 풀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뭐 하는 거야 이 변태 자식! “네 물건에는 관심 없어! 계약서나 보여주지 못하겠나!” “아니 그게 아니라... 계약서는 워낙에 중요한 것이라서 이곳에 넣어둬 서...” 그는 황급히 비단 바지 속 어딘가 음침한 곳에 손을 넣어 몇 번이나 접 혀 있는 계약서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런 민망한 곳에 계약서 넣지 마, 이 자식! “여기 있사옵니다.” “다, 다음부터는 금고라는 적합한 도구를 이용하도록 해라.” 만지기 싫다. 만지기 싫다. 만지기 싫어!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무시무시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계약서로 손을 옮겼다. 그때였다. 갑자기 바르도가 계약서를 뒤로 감추는 것이 아닌가. “무슨 짓이냐!” “이거 정말 실례되는 부탁이오나... 혹시 어디의 기사이신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바르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왕실의 기사라고 하셨는데 종자도 말도 수행원도 없이 그런 치렁치렁 한 옷을 입고 이곳까지 오시다니... 좀 이상한데요? 어디의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수, 수사 중에 혼자 다니는 게 뭐 어때서! 카론 경도 그런단 말야!” “그 곱상한 얼굴도 기사의 것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만... 기사를 사칭 하면 무슨 꼴을 당하는지는 알고 있으시겠죠?” 내가 기사가 아니라고 확신한 바르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퍼졌고 위 험하게 생긴 놈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며 칼집에 손을 옮기고 있었다.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이 기분이 괜한 착각이길 빌며 소리쳤다. “나는 왕실 신전 기사단 스왈로우 나이츠 소속 기사 엔디미온 키리안이 다! 진짜야!” “스왈로우... 나이츠?” 바르도가 그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때 심복 정도로 보이는 놈이 그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바르도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헬스트 나이츠가 아니라 이거지!” “얼레?” 잠시 후, 나는 생에 최초로 하늘을 날았다. 용병들의 우악스런 손에 대 문 밖으로 집어던져진 내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낙하해 데굴데굴 굴렀고 '스왈로우 나이츠 주제에 기사 흉내 내지 마!'라고 소리친 용병들 은 문을 쾅 걸어 잠갔다. 1차 작전 실패. “하아. 역시 쉽게 않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예의 시녀가 다가와서는 동정어린 눈빛으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주는 것이 아닌가. 기다 리고 있었던 모양이로군. 아이고, 민망해라. “기사님. 약하네요.” “무, 무슨 소리야. 기사에겐 힘이 전부가 아니라고!” ...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그래 약해서 미안하다, 쳇. 솔직히 카론 경처 럼 광풍을 휘날리며 저택을 쑥대밭을 만들 수야 없어도 저런 아류 용병들 이랑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다. 이래봬도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준 분은 그 찬란히 빛나는 명주작(明朱雀) 알테어님이란 말씀이야. 하지만 수틀린다고 검으로 상대방을 회쳐버리면 그건 악당들과 다를 바가 없다. 시녀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리카님 말씀대로 이제는 무리인지도 모르겠네요.” “섭섭하네. 난 이제 시작이라고. 벌서 계약서가 어디 숨겨져 있는지 알 아냈는걸?” “정말요? 어디에 숨어 있는데요?” 눈을 동그랗게 뜬 갈색머리 시녀의 모습은 꽤 귀여워 보였다. 그리고 이 귀여운 여자에게 계약서가 고이 보관되어 있는 그 민망한 장소를 굳이 알 려줘서 정신적 충격을 주긴 싫다. “아무튼 그런 곳이 있어. 멋진 방법으로 되찾아 오는 것은 글러먹은 것 같으니까 이제부턴 내 나름대로의 방법을 써볼까나.” “나, 나름대로의 방법?” “후후. 카론 경은 절대로 못쓸 방법이지. 혹시 화장도구 있어?” 그녀가 그걸 왜 찾느냐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협잡꾼 바르도! 내가 곧 그 계약서를 쏘옥 꺼내서 세리카 양에게 전달해 드릴 테니까! 5. 일단 퇴각해서 작전준비를 한 뒤에 다시 저택 입구를 찾은 것은 하루 후 저녁이었다. 의외로 그럴 듯한 마차를 구하는 일이 쉽진 않았단 말씀이야. 결국 예전 마담 누님의 도움을 받아 마부와 마차 한 대를 빌려오게 되었다. 2차 작전 개시. “어디서 온 놈들이냐!” 역시 입이 험악한 용병 문지기들이로군. 마부가 연습한데로 잘 해줘야 할 텐데. “무, 무엄하다! 마, 마, 말을 삼가라! 이것은 시노아 자작님께서 바르도 님께 보내신 선물이니라.” 60점주겠습니다. 역시 아마추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덜덜 떨면서 마부가 말을 마쳤지만 60점도 안되는 둔감한 문지기는 슬쩍 마차 안을 훑 어본 뒤에 마차를 통과 시켰다. 대문 진입 성공. 마차 안에 같이 타고 있 던 시녀가 불안한 듯 속삭였다. “잘 될까요?” “믿으세요. 악당치고 호색한이지 않은 놈이 없으니까.” 역시 내 고객이었던 당대 최고의 밤손님에게 들은 말이다.(별명만 들어 도 알만한 사람이니 프라이버시 보호차원에서 밝히진 않겠다.) 그녀가 지 금까지 악덕관리들의 집들을 터는 동안 단 한번도 미녀 거부하는 놈 하나 없었다고 한다. 자식에게도 안 보여주는 보물창고를 요염한 추파를 던지는 그녀에겐 다 보여줬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병법의 이름 하여 미인계다. 시녀가 신기한 듯 내 뽀얀 뺨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예쁘네요.” “칭찬으로 듣죠.” 이 작전은 현대의 화장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 회가 되겠군. 다행이도 난 본래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긴 편이고 얼굴선도 가늘어서 내 성별을 바꾸는데 몇 시간이면 족했다. 그리고 행인지 불행인 지 직업 덕분에 여성들의 성격이나 말투,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려! 너만 바르도 님에게 데려가겠다! 나머지는 돌아가!” 저택 앞에서 용병이 문을 쾅쾅 치며 말했다. 그러나 내가 곧 문을 활짝 열고 나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자 금방 침을 꿀떡 삼키며 내 터질 듯한 가슴(물론 가짜입니다.)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이 가슴의 정체가 사과 두개와 밀가루 반죽이라는 것을 알면 더욱 놀라게 될 거다. (물론 놀란 뒤엔 날 죽이겠지만.) “어서 바르도 씨에게 날 안내해요.” 특별히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홉 가지 정도의 여자 목소리를 흉 내 내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 그리고 이번 선택은 도도한 요녀의 콧소리였 다. 그런데 이 놈이 대뜸 내 왼쪽 가슴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뭐 이런 짐승 같은 놈이!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따귀를 때렸다. “무, 무슨 짓이에요! 자꾸 만지면 반죽이 뭉개진단.... 아니, 아니 아 프단 말이에요!” 라고 말하는 동안에도 나는 열심히 팔뚝으로 찌그러진 밀가루 가슴을 펴 고 있었다. “흐흐. 목소리도 귀엽네. 어차피 먹을 것, 미리 좀 맛보면 뭐 어때.” 이 가슴이 무슨 시식코너인 줄 알아! “당신이 맛볼 일은 영원히 없을 테니 바르도 씨에게 안내나 하세요!” “흐흐흐. 과연 그럴까?” ‘얼레?’ 저 의미심장한 웃음의 근원은 뭐지? 권력자가 친선의 뜻으로 보내온 여 자를 이런 졸병한테 넘겨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계속 웃는 거야, 저 자식! 6. “흐음. 시노아 자작께서 널 보냈다고?” “그렇사옵니다. 이미 이 리튼 지방은 바르도 님의 것이나 마찬가지, 그 에 따라 앞으로의 친분의 성의로서 저를 보냈사옵니다. 부디 저를 받아주 시옵소서.” 내 간질거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아주 큰 바르도가 대단히 흡족한 듯 그 머리를 울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 귀족들마저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찌 짜릿하지 않을까. “크하하핫! 좋아! 좋아! 내 받아주도록 하지! 시노아 자작도 꽤 머리가 비상하구나. 하하!” 후후. 멍청이. 건너편 영지의 시노아 자작은 올해로 열 살 되는 소년이 다. 지금쯤 엄마 품에서 잠들어 있을 걸? 그리고 너는 잠시 후 내 정권 찌르기에 정신을 잃고 계약서를 빼앗기는 신세가 될 테고! “그래. 네 이름이 뭐냐.” “미오니아라고 하옵니다.” 꼭 비누 이름 같지만 떠오르는 이름은 이것뿐인 걸? “흐음. 그래.” 커다란 소파에 앉아 포도알을 따먹고 있던 바르도는 예상대로 내 몸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나는 부끄러운 듯 몸을 틀었다. 그리고 마무리로 아이 보리 색 스타킹을 신은 긴 다리에 고혹적인 굴곡을 주며 내밀었다. 레이스 달린 가터벨트와 뽀얀 속살이 살짝 살짝 드러나자 근처의 용병들의 침 넘 어가는 소리가 응접실을 메운다. 후후, 이 짓도 계속 하니까 되게 재밌네. 남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온 몸으로 내던진 이 뇌살적인 모습에 안 넘어올 인간이 없다! 자아, 어서 부하들을 내보내고 그 민망한 금고를 열어... “됐어. 나가봐.” “엥?” 뭐, 뭐야 너! 어째서 이런 모습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거냐고! 자존심 상해! 그러나 바르도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연신 포도알만 까먹고 있었고 용병들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희죽 희죽 웃기 시작했다. “두목. 이 여자는 우리들이 접수해도 되겠죠?” “그렇게 해라. 죽이지만 마.” “크큭. 가자. 미오니아.” “꺄아아악!” 나는 용병들의 우악스런 팔에 잡혀 짐승처럼 밖으로 끌려 나갔다. 설마 바르도가 오직 한 명의 부인만 두는 청렴한 악당? 웃기지마! 그럴 리가 없 잖아! 악당이면 악당답게 색욕을 밝히란 말이다! 이거 놔라, 이 짐승들아! 7. “큭큭. 바르도님이 너한테 관심이 없어서 놀란 모양이로구나.” 용병이 내 허리에 억센 팔을 휘감으며 말했다. 그래, 궁금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건 알아야겠다! 나는 비참하게도 그의 털 난 품속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들어야 했다. “세상 남자가 꼭 여자를 좋아하란 법은 없거든.” “......!” 신이시여! 나는 어부 손에 잡힌 물고기처럼 바동거리다가 쏙 빠져나와 뒤로 물러섰다. “나, 남색?” “그렇다니까? 세상 어떤 여자 불러다 놔도 두목은 관심이 없다고. 뭐 우 리야 좋지. 너 같은 미녀를 언제 한번 품어보겠어? 그만 내숭떨고 어서 이 리로...” 머리 속이 하얗게 되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악당 두목의 성적 취향 따위 알게 뭐냐! 이제라도 눈물을 흘리며 뛰어 들어가서 '와하하하! 저는 실은 남자랍니다!'라고 해볼까? 아니야. 그건 자살행위야. 어쩌지. 어쩐다! 어서 생각해라! 이 가슴이 밀가루라는 것이 들통나는 순 간 대분노한 용병들의 칼에 잘게 다져져 이 저택 나무들의 영양분이 되거 나 바르도의 노리개가 되어 영원히 저택 지하에 감금될 것이 뻔해! 어느 쪽도 곤란하다고! “너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이리 와!” “자, 잠깐만. 저는 사실 지금 돌아가야 하거든요?” “앙? 무슨 헛소리야!” “그, 그러니까 종교상의 이유로 해가 진 뒤에는 여자... 아니 남자를 품지 말아야...” “개소리하지 마!!!” 웁스. 자극했습니다. “그 허연 다리를 다 내놓고 유혹하다가 이제 와서 빼면 안 되지. 예전 남작 딸내미도 끝까지 앙탈부리는 바람에 애먹었...” 순간 마음속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상대에게 살의를 품을 때는 열 번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자식들은 열 번 스무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절대로 용서 못해! “그만 멈추세요.” 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예전 업소의 주인인 마담 히르카스였다. 누님이 여긴 왜 온 거에요! “응? 넌 또 뭐야.” “이 아이는 우리 가게에서 보낸 겁니다.” 히르카스 누님이 내 어깨를 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깨에 느껴지는 힘의 의미는 '참아라.'였다. 용병들이 짜증 섞인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 다시 가져가려고 합니다.” “무슨 개소리냐. 보냈으면 끝이지, 사람 잔뜩 애간장 녹여놓고 다시 가 져가는 법이 어딨어! 못줘!” “용기 있으신 분은 어디 한번 이 아이를 품어 보시죠.” 누님의 입가에 비웃음이 올랐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려는 겁니까! “설마... 그 계집애가...”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성병에 걸려 있습니다.” “아냐!!!!” 라고 나도 모르게 소리칠 뻔했지만 누님이 잽싸게 엉덩이를 꼬집는 바람 에 나는 후끼야아아아악! 하는 괴상한 비명으로 대신했다. “보셨죠? 이미 말기라서 이렇게 실성한 상태입니다. 에잇! 발칙한 년! 지금까지 잘도 숨기고 있었겠다!” 짜악! 리얼한 연기를 위해 하르카스 누님은 주저 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손끝 에 힘이 들어갔어요, 누나! 이 즉흥연극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이것이었다. “게다가 이 아이의 몸도 이미 흐물흐물해졌어요. 보세요! 이 가슴을!” 갑자기 누님이 내 밀가루 가슴을 당수로 내리치자 반쯤 굳어 있던 가슴이 조각나며 와르르 붕궤되어 버렸고 용병들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이 허엇! 하고 놀라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쯤 이면 성병이 아니라 좀비라고요. “어때요! 그래도 이런 천하고 가증스런 계집아이를 품으시겠다면 데려가 지 않겠습니다! 오호호호!” 누님. 오버에요. 이런 일 가지고 즐기지 마세요, 좀! “데, 데려가! 썩 데려가! 에이, 기분 다 잡쳤네! 아니 어떻게 저 지경이 될 때까지 갔데! 아주 오늘 못 볼 꼴 봤네!” “다른 가슴도 마찬가지랍니다! 보세요! 이얍!” 와르르르르. ‘그만해!!!!’ “자아. 어서 가자꾸나. 아무리 억울하다고 저 남정네들을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니.” 누님은 내게 찡끗 윙크를 하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산산이 무너져 버린 두 가슴을 부여잡고 그녀를 따라갔다. 8. “도와줘서 고마워요. 누님.” “네가 엉뚱하다는 건 알았지만 고향에 돌아와서 기껏 한다는 일이 여장 일 줄은 몰랐구나.” “일이라구요, 일.” 나는 투덜거리며 문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문 밖 수풀 근처 에는 세리카 아가씨가 서 있었던 것이다. “...세리카 님.” “미안. 깜빡하고 얘기 못했어. 바르도 취향, 남자라는 거.” “빠, 빨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리카는 마담의 옷을 빌려 여장을 한 내 모습을 보며 손을 가리고 어울 린다며 큭큭 웃었다.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돌아 와서 처음으로 웃는 모 습을 보니까 기분은 좋군. 그런 끔직한 일을 당했는데도 그녀는 마지막 자 부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긴 담배를 피워 문 히르카스 마담 이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너 찾는 고객들이 아직도 많아. 하지만 다시 가게로 돌아올 생각은 없 겠지?” “예. 없습니다.” 나는 나도 놀랄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고 누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다시 볼 일 없겠네. 잘 지내. 가끔 편지하고.”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검은 코트를 입은 히르카스 마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딜 가도 하는 일은 다 비슷한 거 같아요.” “어머. 그럼, 아닌 줄 알았어?” 항상 느끼는 거지만 히르카스 누님의 눈웃음은 매력적이다. “아 그리고. 미온. 지금 손님이 와 계셔.” “손님이요?”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기사라고 하기에 미온 얘기를 했더니 당장 데려오래.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고 전해 달라던데?” “저 설마.... 그 기사의 이름이...” “카론 샤펜투스.” 털썩, 무너진 내 가슴이 와르르 치마 밑으로 쏟아졌다. 9.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여간하면 웃어주는 사람과 여간해선 웃 지 않는 사람. 카론 경은 후자다. “와아! 카론 경!” 예의 세리카 피신처에 와 있는 사람은 역시 만년설 카론 경이었다. 그리 고 그의 뒤에는 부하 정도로 보이는 젊은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다. 반가운 표정으로 방에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카론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제사에 그런 복장이 필요한가?” “아? 아하하. 임무 중이거든요. 임무.” 이런 민망해라. 나는 곱게 차려입은 여성용 드레스를 팔락팔락 거리며 생 글 웃었지만 카론의 표정은 여전히 영하 15였다. 소파에 앉아 있는 카론은 여전히 수사자료 쯤으로 보이는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키스가 제사 외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왕궁도 조직사회다.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으면 기사 작위 반납해.” 매정하구만. 하지만 이미 저질러 버렸는걸요? 그건 그렇고 불철주야 바쁜 카론 경이 여긴 왜 온 것일까. 설마 세리카 님을 도와주려고? 라는 기대는 품어봐야 상처 받으니까 하지도 말자. 카론이 서류를 테이블에 탁 내던지 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 “시, 싫어요.” “세리카 남작 부인은 이미 제사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무료로 제 사를 지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른 귀족들이 반발하게 돼. 지명은 취소다. 왕궁으로 귀환해라.” “내가 돈을 내면 되잖아요!” 순간 세리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지만 나는 괜찮다며 손을 내 저었다. 지금까지 모아둔 돈도 있으니까 그쯤이야 내가 내면 된다고. 하지 만 지금 문제는 그 잘난 제사가 아니란 말이야! 카론은 서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가 조금 골치 아프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입을 열었 다. “내가 여기 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절 돌려보내려고...” 카론 뒤에 서 있던 기사 한명이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그런 하찮은 일에 카론 경께서 직접 올 리가 없잖나!” 그래. 하찮아서 미안하다. 카론이 말했다. “근처 대영주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고 왔다.” “사건 의뢰?” “이 리튼이 바르도라는 상인의 손에 장악되었으니 리튼의 안정을 위해 그 상인을 처단해 달라는 의뢰다.” “와아! 다행이네요! 카론 경만 도와주신다면 간단하게 바르도를 몰아내 고 세리카님을 다시 영주로...”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 정의는 살아 있구나! 하지만 카론의 다음 말을 듣자마자 이 기쁨은 산산이 깨져버렸다. “착각하고 있군. 바르도를 즉결처분하고 리튼의 영주가 되는 사람은 사 건을 의뢰한 대영주다.” “어, 어째서요! 그 영주가 뭔데 여길!”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카론 경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통치력을 잃은 세리카 남작 부인을 도와주고 리튼을 보호해 준다. 그게 명목이다.” 내정간섭이라는 말이 있다. 이건 결국 사자가 와서 여우를 죽이고 자기가 주인이 되겠다는 거잖아. 그럼 세리카 님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나는 이 가 갈려 커다랗게 외쳤다. “그러니까... 그 대영주라는 사람이 이 땅을 먹고 싶어서 카론 경을 부 른 거로군요. 바르도를 물리쳐 주는 척하면서 자기가 다 먹으려고! 보나마 나 왕실에 뇌물을 먹였겠죠!” 이번에도 카론의 부하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도 수사 지원을 위해 왕실 에서 급파된 헬스트 나이츠 기사이리라. “말조심해라! 그 분은 국왕 전하와도 친분이 있는 분이시다!” 신과 사촌지간이라도 나쁜 건 나쁜 거다. 어째서 카론 경은 그런 더러운 일을 거절하지 않은 것일까. 카론이 말했다. “말했잖아. 권력자들의 뒤치다꺼리라고.” “그래도 카론 경은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았어요! 들을 가치도 없는 명 령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고요!” “날 과대평가했군.” 카론은 비웃음도 씁쓸함도 아닌 차가운 눈초리만으로 날 바라보았고 나는 정말 배신감에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꾹 참으며 짜내듯이 말했다.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기회?” “바르도는 영주님과 억지로 맺은 계약서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만 되찾 아오면 이 영지는 공식적으로 세리카 님에게 되돌아오는 거에요. 도와주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내 고향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어떻게든 되찾아올 테니까!”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은 가당찮다는 듯이 외쳤다. “스왈로우 나이츠 주제에 감히 우리와 흥정을 하겠다는 거냐! 수사 전권 은 우리에게 있다. 대영주님께선 이 일을 빨리 처리해 달라고 말씀 하셨어! 네 놈은 어서 왕궁으로 돌아가!” "그럼 너희들이야말로 기사 작위를 반납 해!" "뭐, 뭐야?" 어째서일까. 한마디 한마디 마다 고상해 보이려고 몸부림치는 인간들이 어째서 괴로워 하는 리튼 사람들과 세리카 님에게는 관심도 없는 것일까. 그들에겐 권력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일까. 그리고 나는 이 따위 세상 속에서 여장까지 하고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놓고,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명령할 바에는... 처음부터 기사 작위 따위 주지 말라고!!” 어차피 이 시대의 기사 작위는 마구 찍어낼 수 있는 이미테이션 장신구라 고 쇼탄 경이 말했다. 그 말,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발버둥칠 때 - 조금은 이해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 나는 틀린 것인가? “여섯 시간 주겠다.” 카론이 짧게 말하자 갑자기 내 눈이 팍 뜨였다. “정말요?” “정확히 여섯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 계약서를 못 찾아오면 내가 움직 인다.” 감사합니다, 카론 경! 하지만 이 승냥이 같은 부하 놈들은 그럴 수는 없 다면서 다투어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카, 카론 경! 그분의 명령을 어기실 생각입니까!” “저런 녀석에게 기회를 줘봐야 왕실의 명예만 실추됩니다!” 하지만 카론은 단호하게 말했다. 역시 아군이 되면 든든한 사람이다. “명령을 어긴다는 말은 안했다. 단지 우리는 6시간 이후에 움직이는 것 뿐이야.” “왕실에 보고 하겠습니다! 이건 분명 직무유기입니다!” “어차피 스왈로우 나이츠가 여섯 시간 만에 사건을 해결할 리가 없지 않 습니까. 이건 시간 낭비입니다.” 그때 심드렁한 표정을 드러낸 세리카 님이 뜨거운 차가 담긴 포트를 들고 떠들어대는 부하에게 다가가선 그의 허벅지에다 뜨거운 찻물을 뿌렸다. “으아아악! 뭐하는 짓이냐!” “어머. 미안해요. 못난 남자들을 보면 뜨거운 물을 부어 버리는 버릇이 있어서.” “이런 발칙한 년이 감히 왕실의 기사한테 이런 모욕을!” “난 아직 남작 부인이에요. 그 더러운 입, 조심하세요.” 세리카가 날 바라보며 생긋 웃었고 나는 재빠르게 방을 뛰쳐나갔다. 이제 5시간 58분 남았다. 10. 어둠이 내린 깊은 밤, 나는 저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영주님의 저택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히더 영주님과 세리카 아가씨 둘 다 황소고집이라서 한번 싸웠다하면 몇날 며칠 동안 절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고 장기전을 벌였는데 결국 그 방에 틀 어 박혀 있는 세리카 님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자주 와야 했던 것이다. ‘바르도는 영주님의 침실에 잠들어 있겠지?’ 저택은 리튼 지방에서는 꽤 큰 편이지만 귀족의 것이라고 하기엔 도리어 소박한 4층 건물이었다. 그리고 지붕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 갈색 벽돌이 며 영주님의 침실은 지붕 바로 밑에 있었다. ‘또한 침실 천장과 지붕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지.’ 가끔 화가 난 세리카님이 여기에 숨었기 때문에 나는 이곳으로 가는 루트 를 알고 있었다. 저택 뒤로 돌아가 낮은 담을 넘은 뒤에 연통을 타고 올라 가 숨어들면 되는 것이다. 또한 천장에는 작은 비밀문이 하나 있다. 보통 은 지붕 안을 청소할 때 들어가기 위해서 쓰이는데 이번에는 은밀한 잠입 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2차 작전, 개시. 하품이나 쩍쩍 하는 용병들의 눈을 피해 저택 뒤로 숨어들어 침실 천장 위까지 도착하는 것까지는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바짝 눈을 대고 가느다란 틈 사이로 바르도를 관찰했다. ‘그런데, 왜 안자는 거야, 저 자식!’ 잠을 자야 비밀문을 열고 내려가서 계약서를 훔쳐올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 바르도 이 놈은 누가 장사꾼 아니랄까봐 세리카님의 것이었던 금화들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계속 세어보고 있었다. 게다가 금화는 몇 자루나 되었 다. 많은 금화들을 모두 세어보다간 시간 다 지날 것이 분명했다. ‘제발 잠 좀 자라! 내가 실패하면 넌 카론 경의 손에 죽는다고!’ 뭐 저렇게 성실한 악당이 다 있담! 남색가라면 남색가답게 질펀하게 처 놀다가 쓰러져 잠들란 말이다. 행복한 표정으로 꼼꼼하게 금화들을 세어 쌓아 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지루해서 내가 다 잠들어 버릴 것만 같 았다. 사실 난 고향에 온 뒤부터 한숨도 못 자고 뛰어다녔다고! ‘안돼! 자면 안돼! 여기서 잠들어 버리면 난 희대의 얼간이가 되어 버 린다!’ 전 세계에서 지명 수배 되어 있는 여괴도님의 말에 의하면(가끔 술 마시 러 찾아온다. 우리 가게는 비밀보장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잡힐 염려 따윈 없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30초 내에 미련 없이 자리 를 떠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바닥의 틈 사이에 바짝 눈을 가져다댄 뒤 다섯시간을 넘게 바르도가 금화를 세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비 좁은 공간은 밤인데도 찜통처럼 더워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온몸을 축축 이 젖게 만들었지만 여기서 물러선다면 리튼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가 능성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망할. 시간이 다 되어 간다고! 적당히 좀 세고 디비져 자란 말이다!’ 밖에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앞으로 잠시 후면 카론 경이 나타날 테고 이 저택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리튼의 모든 것은 그 대영주인지 뭔지 하는 욕심쟁이 녀석의 손아 귀에 넘어가게 된다. 그런 전개는 싫다고! “후후. 좋아. 한 푼도 사라지지 않았군. 이제 자 볼까나.” 바르도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아니, 저 놈은 밤마다 금화를 세고 있 었단 말인가. 정말이지 악당도 보통 노력으로는 할 수가 없는 거로구만. 바르도는 침대에 쓰러져 버리자마자 곧장 커다랗게 코를 골았다. 그 거대 한 두 개의 콧구멍에서 울리는 진동음은 흡사 야수의 울부짖음 같이 박력 이 있었다... 라는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좋아. 나도 이제 계약서를 가지러 가 볼까.’ 나는 침착하게 천장의 문을 열고 퇴각용 밧줄을 걸어둔 뒤에 날렵하게 톡 떨어져 내렸다. 바르도의 우렁찬 콧소리 덕에 화분을 깨고 뿔피리를 불 고 꽹가리를 두드리며 상모 돌리기를 해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거로군.’ 솔직히 세상 누구도 비대하고 얼굴도 커다란 중년 남자의 바지를 벗기는 일을 달가워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만약 있다면 그 독특한 취향에 찬사 를 보내겠다.) 하지만 나는 이 리튼의 평화를 위해서 이를 꽉 물고 벨트를 벗겨야 했다. 어째서 기사의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중년 남자의 은밀한 부 분을 뒤져야 하는 일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생겼는지 도무지 모르겠지 만 나도 더 이상은 물러설 곳이 없다! ‘일이다. 일이다. 이건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일이다.’ 라는 자기암시를 걸며 나는 바지 속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되도록 계약서 외의 다른 것은 잡히지 않길 빌면서. 그런데. ‘없다?’ 물론 계약서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다 제자리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계 약서는 없었다. 이리 저리 휘저어 봐도 계약서만은 잡히질 않았다. 그때 눈을 번쩍 뜬 바르도가 내 손목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크하핫! 네 놈이 찾아올 줄 알았다!” ‘망할!’ “며칠 전부터 영 뒤숭숭해서 계약서를 금고에다 넣어 두었지! 어떠냐! 이 완벽한 용의주도함이!” 생각해 보니까 금고를 조언해 준 사람은 바로 나잖아? 이봐. 알겠으니까 이 손은 빼고 말하자고! “흥! 스왈로우 나이츠 주제에 감히 이런 도둑고양이 짓을 해? 각오는 되어 있겠지?” “너. 계약서 주는 편이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카론 경이 와서 널 죽일 거라고!” “흐핫!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믿으라고?” “가끔은 사람 말 좀 믿어!!!”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용병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오더니 이 광경을 보고는 황망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하긴, 새벽녘에 남의 바지 춤에 손을 넣고 있는 미남자를 보다니 오해할 만도 하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거야! “뭐냐! 말해라!”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사 세 명이 저택에 들어왔습니다!” 카론 경이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기, 기사? 기사는 여기 있는데?” 미안하지만 나와는 다른 종류의 기사라오. “헬스트 나이츠입니다. 우, 우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며 들어오고 있 습니다.” “뭐라고!” 그 보고를 끝으로 용병 녀석도 황급히 도망쳤다. 바르도가 나를 잡아끌 고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거친 피 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저택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카론 경과 두 명의 기사는 4층까지 올라오며 수십 명의 용병들을 남김없이 척살하고 있었다. “...저게 카론 경.” 나는 이토록 무서운 장면을 본 적이 없다. 도끼를 들고 카론 경 앞에 뛰 어드는 용병들은 마치 종이가 깨끗하게 잘린 것처럼 조각이 나서 그 자리 에 나 뒹굴었다. 언제 검을 휘둘렀는지 어디로 향했는지 보면서도 짐작할 수가 없었고 단지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생명을 빼앗아 갈 뿐이었다. 계단 을 올라오는 동안 카론 경은 단 한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가 지나간 길에는 비명도 못 지르고 죽은 시체들밖엔 없었다. 기술이름이라도 커다랗 게 외쳤다면 정감이라도 갔겠지만 카론은 입을 꽉 다문 채 눈앞에 움직이 는 모든 것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무섭다. 어째서 왕실이 사건을 해결할 때 많은 기사들을 보내지 않는지 알 것 같다. “네가 바르도냐.” 뚜벅거리며 다가온 카론 경이 자신의 장검에 엉킨 피를 털어내며 무덤덤 하게 말했다. 바르도는 사시나무 떨 듯 하면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왜... 저희들을... 죽이시는지... 이유라도...” “즉결처분이다. 이유는 알 것 없어.” 카론이 자신의 눈동자만큼이나 차가운 검 끝을 바르도를 향해 치켜들었다. “잠깐만요! 카론 경!” “또 너냐.” 카론이 날 바라보는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계약서는 금고에 있어요! 거의 다 찾았다고요!” 그러자 카론의 부하가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미 늦었어! 이 놈을 이 자리에서 처형하고 리튼은 대영주님의 소유 로 돌아간다! 넌 어서 왕궁으로 돌아가!” “그렇게까지 해서 귀족에게 아부하고 싶냐!” “뭐라고! 이런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는 애송이를 봤나! 더 이상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냉큼 돌아가 이 천박한 놈!” 나는 순간적으로 팔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고 이 저택이 떠 나갈 듯 소리치고야 말았다. “빼앗긴 것을 본래 있던 사람에게 돌려주고 싶은 노력이 네 녀석 눈엔 그렇게도 천하게 보였냐!” 기가 질린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얼떨떨한 얼굴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그런데 잠시 생각하던 카론이 검을 집어넣으며 내게 말했다. “계약서를 가져와 봐라.” “카, 카론 경! 왜 저런 녀석을 감싸시는 겁니까! 이러다간 대영주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됩니다!” 카론은 부하의 고함에도 아랑곳 않고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말했다. “아직 2분 남았다, 엔디미온 경.” 이것은 카론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리고 금고는 침실에 있었다. 나는 바 르도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당장 열쇠 내놔!” “그, 그건 내꺼야. 줄 수 없어.” 극도의 공포심에 질려 있던 바르도는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릴 뿐이었 다. “죽기 싫으면 열쇠 내 놓으라고!” “내, 내 영지야. 얼마나 어렵게 빼앗은...” 빌어먹을! 정신이 나가서 이 놈은 아무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고 카론은 다시 검을 뽑았다. 잠깐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나는 카론의 부하에게 뛰어가서 그가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칼 좀 빌릴게요!!” “무슨 짓이야!” 나는 금고 앞으로 향했다. 침실 한쪽 구석에 있는 묵직한 금고는 시커먼 무쇠덩어리였다. 그리고 그 안에 계약서가 있다. 내가 그것을 노려보며 장 검을 들어 올리자 커다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우하하핫! 너 지금 그 강철금고를 자르려는 거냐! 그런 걸 자르려면 수십 년은 검술을 배워야 가능할 걸! 너 같은 놈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서라. 그러다가 검신이 부러지면 튀어 올라서 네 심장에 박히게 된다.” 잘라내지 못한다면 심장에 박혀도 좋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높게 들어올린 내 팔이 무의식적으로 내려갔고 손목 의 흐름을 따라 새벽빛에 눈을 뜬 칼날이 주저 없이 금고를 내리쳤다. 파카카캉! 시뻘건 불꽃, 날카로운 굉음이 내 주변을 가득 메우는 것이 느껴진다. 내리친 칼날은 금고를 둘로 가르고 바닥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당황한 부하 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어떻게 강철을...”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카론 경에게 말했다. “계약서, 찾았습니다. 비록 두 조각이 나긴 했지만. 헤헤. 아직 2분 안 지났죠?” 땀에 범벅된 얼굴에 미소를 띠운 채 계약서를 건네는 나를 보며 카론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가 묘한 빛이 담긴 눈동자로 날 바라보다 가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널 보고 있으면... 자꾸 키스가 생각난다.” ‘얼레? 무슨 소리지?’ 하지만 카론은 더 이상 긴 말없이 건네받은 계약서를 훑어본 뒤에 품속 에 넣고 곧바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리튼을 세리카 남작 부인의 영지로 인정하겠다. 수사 종료. 왕실로 귀환한다.” “카론 경! 그럼 대영주님께는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한발 늦었다고 전하면 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된다며 외치는 두 명의 기사들도 카론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아마도 카론 경은 어려서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중추가 마비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군. 카론 경, 수고했 다는 말 정도는 해줘도 좋지 않나요? 아아, 팔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네. 나는 아직 바들바들 떨며 그 자리에 굳어 있는 바르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속삭여 주었다. “너는 세리카 남작 부인에게 천천히 심판 받게 될 거야.” 11. “그럼 이 리튼을 훌륭하게 통치해 주신 고 히더 남작님의 영결식을 시 작하겠습니다.” 저택에서 벌어진 히더 남작의 제사에는 리튼 주민 수천여명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울먹이고 있는 상점 아줌마도 있었고 엄숙하게 차려입고 고개를 숙인 은행원도 있었다. 사실 세상에 숨쉬고 있는 9할은 나를 포함 이런 평 범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도 기분 괜찮군. 금 발의 머리칼을 길게 내리고 긴 소매의 새하얀 제사복을 입은 나는 비로소 신전 기사단 스왈로우 나이츠의 주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긴장된 모 습으로 나를 지켜보는 수천여명의 사람들 앞에서 우아한 걸음으로 제단 위 로 걸어 올라가 미성의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었다. 제사의 시작을 알리는 수많은 기도문 중에 나는 이것을 택했다. 신이시여. 변화시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주시고 우리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주저 없이 고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아차차! 향 먼저 피워야 하는데! “저어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처, 처음이니까 이해해 주세요. ** 위의 기도문은 리인홀트 니이버의 기도문을 유용(流用)한 것입니다. 12. 내가 실수를 하도 많이 해서 결국은 웃음바다가 되어 버린 제사를 마치 자마자 나는 부모님의 묘소를 들려 인사를 드린 뒤 서둘러 플랫폼으로 향 해야만 했다. 나를 뒤따라 온 세리카님이 아쉬운 듯 물었다. “좀 더 쉬다 가면 안돼?” “늦으면 벌금이거든요. 왕실, 사실 되게 쩨쩨하다고요.” 내 말에 그녀가 피식 웃으며 시녀가 들고 있던 묵직한 주머니를 내게 건 네주었다. “제사 비용이야. 선불로 지급하지 못해서 미안.”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아. 엉망진창이었지만 어쨌든 이로서 해피엔딩이로구나. 이 정도 되는 엄청난 돈을 내가 대신 갚겠다는 발언은 솔직히 허세였다. 만약 공짜로 제 사를 해줬다면 나는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 총살당했 을 것이 분명하다고! “다음에 또 와.” “신입기사 엔디미온, 자주 지명에 주세요.” 히히. 왠지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열차에 올라 탔다. 마나 연료를 채우고 있는 마법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엔진을 꼭 포옹하고 있었고 역무원들은 곧 출발한다며 빨간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열차를 오르는 내 어깨를 잡아 끌어 내렸다. “미온!” 와앗! 확 숨소리가 다가오는 것 같더니 기습적으로 입술을 빼앗겼다. 나 는 바동거리다가 결국 살짝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그런데 잠깐! 지금 이거 역할이 바뀐 거 아냐?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자랑스러운 맹랑함을 지닌 그녀가 베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오래전부터 고마웠어. 잘 가. 항상 기다리고 있을게.” 키스 경이 이 모습을 보면 '내가 말한 것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군요!'라 고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를 활짝 웃게 만들었으니 다른 것 은 어찌되든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온. 한 가지만 약속해. 다음부턴 이런 위험한 일 하지 마. 날 위해서만 해.” “아하하. 약속할게요.”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아. 제3화 : 시골의 기사도 끝 다음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1. 이 나라 베르스는 세계적으로 그다지 강대국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내 입으로 말하기 창피하긴 하지만) 약소국이다. 다른 강력한 왕국이나 제국 들 사이에 끼어 있는 통에 싸우지 않고 살아남는 처세술과 무기 대신 상품 으로 타국과 싸우는 상술은 제법 발달해 있다고는 해도 여러 나라들의 관 계에서 항상 찬밥신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어느 나라가 강대국이냐 하면, 일단 세계 지도의 4분의 1을 차지하 고 있는 북(北)의 마키시온 제국을 최강이라고 꼽는 것에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4대 아신(亞神)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진청룡(震靑龍) 라이오라 란다마이저가 이끄는 프런티어 뱅가드(국경전위대)의 위용만으로 도 마키시온 제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는 어리석은 나라는 없으리라. 그에 버금가는 나라로 치자면 남(南)의 신성 콘스탄트 왕국 밖에 없다. 마키시온 제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서로 붙어 있었다면 세계를 진동할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만큼 자존심이 센 군사강국이다. 게다가 이 나라는 4대 아신 중 명주작 알테어 엔시스 님과 적현무 키르케 밀러스 님이 수호하고 있다. 백만 대군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아신이 두 명 이나 있으니 어쩌면 마키시온 제국보다도 위상이 높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재 콘스탄트 왕국은 교황파와 왕당파가 내전 중이고 교황파의 신성기사 알테어 님이 이끄는 성(聖) 아우리엘레 신전기사연합과 왕당파의 여단장 키르케 님이 이끄는 ‘임모탈’ 제7무장전투여단이 남북 으로 나라를 갈라 오랜 시간 대치 중인 관계로 혼란스런 상황이다. 그리고 참고로 알테어님과 키르케님 모두 내 고객이었는데 원수지간인 둘이 만나 게 되면 국가적인 재앙이 일어나게 되므로 실수로라도 명주작 님과 적현무 님을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항상 바짝 긴장해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외에도 군사력은 약하지만 독보적인 기술력과 화려한 예술문화를 통해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선 이오타 왕국이 있다.(전설의 세공사 세드릭 씨도 이 나라 사람이다.) 이 나라 국왕도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지만 그의 제1위 보좌관인 이자벨 크리스탄센 님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재녀(才女)다. 그녀 휘하에 있는 방첩기관 인트라 무로스(intra muros - 속칭 INM)는 마키시온 제국 황제의 흰머리가 몇 가닥인지 알고 있다는 농담까지 들릴 정도다. 수 백 자루의 칼을 품속에 숨기고 있는 자애로운 여신의 모습이랄까. 이자벨 님은 가끔 가게를 찾아오던 특급 고객이었는데 아주 까다로운 와인 마니아 인데다가 쉬러 올 때까지 서류를 가져오는 분이라서 왠지 아이히만 할아범 이 떠오르는 사람이다.(물론 그 흡혈할아범과는 달리 상냥하다.) 이 나라들 말고도 그래도 나름대로 한가락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나라들 을 꽤 되지만 그 중에 절대 우리나라 베르스는 포함되지 않는다. 건국 500 여년 이래 한번도 강대국이 되어 본 적이 없다는 것도 어쩌면 전통이라면 전통이리라... 라는 말로 위안하도록 하자.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아무도 없는 거지?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텅 빈 본부 리더구트 복도 에 서서 멍하니 좌우를 바라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다. 인기척조차 없다. 대낮이지만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썰렁하다. 키스나 기사들을 고사 하고 시종들조차 한 명도 없었다. 묘한 긴장감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겁먹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도 없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라는 메아리 뿐. 설마 내가 출장간 사이에 기사단이 해체라도 된 건가? 그럴 리야 없을 것이다. 얼마 나 돈을 잘 벌어다 주는 몸종들인데 돈에 환장한 왕실에서 없앨 리가 없다. 그렇다면... ‘위기!’ 나는 지난 몇 번의 위기를 통해 뭔가 초능력에 가까운 본능을 하나 깨우 쳤다. 이름하야 '위기감지육감'(六感)인데 그 본능이 지금 이 상황을 위기 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간질이는 금발을 쓸어 올린 뒤에 허리 를 조금 굽히며 (솔직히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명검으로 손을 옮겼다. 이제 위기는 질색이야. 뭐가 튀어 나오든 베어버린다! 그때. “당신 누구야?” 우아앗! 언제 나타난 거야! 입에 커다란 사탕을 물고 있는 여자아이가 내 뒤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정말 화들짝 놀라서 균형을 잃고 복도에 쾅 엉덩방아를 찌었다. 겁 많은 인간이라 미안하지만 정말 이 아이, 유령처럼 나타났단 말이야! “한심하네. 당신 기사야?” “유, 유령이 말을 한다!” “다들 어디 간 거야? 당신 밖에 없어?” 이 검은 머리 소녀는 볼이 볼록해 질 정도로 사탕을 한껏 문 채 날 내려 다보고 있었다. 하얀 레이스가 살짝 살짝 보이는 검은 드레스의 소녀라. 좋아.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대낮에 사탕을 빨며 나타나는 무성의한 유령 따윈 없다. 즉, 이 아이는 어쨌든 인간임에 분명하며 이곳은 절대금녀구역 이니 여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 “정말이지 스왈로우 나이츠는 취향도 특이하군.” 나는 포옥 한숨을 내쉬며 10살도 안된 것 같은 꼬마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귀족들의 취향 어쩌고 해도 이런 어린아이에게 여장을 시켜서 기사 작위를 줄 정도로 뻔뻔할지는 몰랐다. 아아, 졌다 졌어. 말세야 말세. “왜 말이 없어? 다른 사람들은 어딜 가고 너 뿐이야?”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구나, 소녀가 아닌 소년이여.”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이 꼬맹이 가 내 다리를 걷어차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나 소년 아니야!” “불쌍한 녀석. 아예 성 정체성을 잃었구나.” 왕실도 잔인하지. 자기 성별도 모르는 불쌍한 꼬마를 데려다가 돈을 벌 겠다고? 불쌍한 건 불쌍한 거지만... “아프잖아! 이 꼬맹이! 버릇없이 형의 다리를 걷어차!” 내가 콩 한대 쥐어박자 이 아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날 올려다보다간 울 먹거렸다. “때, 때렸어! 아빠한테도 맞은 적이 없는데...” “남자는 맞으면서 크는 거야.” “남자 아니라니까!!” 그와 함께 이 녀석의 살인적인 로우 킥이 작렬했고 난 무릎 관절이 떨어 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으악! 그만 때려! 이 못된 꼬맹이!” “감히 날 꼬맹이라고 부르다니, 아빠한테 이를 거야!” “으이구! 사내놈이 고자질이나 하겠다고!” “난 남자 아니라니까!” “남자 아니면 뭐야!” 나는 화가 나선 이 아이의 치렁치렁한 치마를 확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떤 성별을 가진 동물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으며. 하지만. “그게... 없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남자라면, 그러니까 그 부분에... 특유의 볼륨이 랄까 굴곡이랄까 하는 것이 보여야 하는데, 이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 - 전혀 없었다. 나는 다시 치마를 내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한 채 떨리는 목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 여자였니?” 짜아아아악!! 치고 들어오는 예리한 각도를 보아하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자주 따귀 를 때려본 솜씨임에 분명하다. 그 아이는 얼굴이 빨개져선 마구 울면서 뛰 어갔다. '아빠한테 이를 거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 “대체 뭐야, 저 여자애는.” 나는 뭔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기분에 자리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설마 내가 출장을 간 사이에 이곳이 여성 관광객에게 개방되기라도 한 것 일까. 그때 창고 문이 끼이익 열리며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온 경. 그 아이는 갔어요오?” “키스!!” 나는 왜인지 굉장히 화가 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키스를 바라보았 다. 그런데 그 좁은 창고에는 키스뿐만 아니라 쇼탄과 루이, 랑시, 크리스 까지 비집고 숨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 며 줄줄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고 곧 이곳저곳에 숨소리도 없이 숨어 있던 시종들마저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 지 누가 말 좀 해 줘! 왜 내가 난생처음 보는 꼬마의 성별을 감별한 뒤에 답례로 따귀를 맞아야 하느냐고! (여자로 태어나는 편이 더 좋았을 외모의) 랑시 경이 머뭇머뭇 거리며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저어. 미온 경. 아까 그 여자아이의 치마를 들췄어요?” “으응. 그랬는데... 왜?” 갑자기 그 말을 들은 랑시가 재빠르게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 쳤다. “꺄하하하! 이제 나는 어찌 되도 몰라!” “...대체.” 그와 함께 쇼탄 경도 루이 경도 크리스마저 명복을 빈다는 표정으로 날 훑어보고는 뿔뿔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이, 이봐. 죽은 사람 보듯 하지 말라고! 키스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곤 말했다. “아까 그 아이, 누군 줄 알아요?” “누군... 데요?” 키스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 의문에 답변해 주었다. “명복을 빕니다, 미온 경. 귀하께선 공주님의 치마를 들치셨습니다아.” “고, 공주라면 국왕 전하의 따님?” “그 공주 말고 다른 공주도 있나요?” “망할!!!!” 아까 내가 했던 말이 있다.'위기감지본능'이라고. 그렇다. 나는 또 다시 왕족을 성희롱한 일생일대의 대위기에 봉착해 버리고만 것이다. 나는 발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키스 경, 이 자식아! 여기에 여자는 출입할 수 없다고 네 놈이 말했잖아!” “물론 그랬지요. 하지만 왕족에겐 모든 법이 무효입니다. 아! 그 말은 아직 안했던가요?” “그런 중요한 건 일찍 일찍 좀 말해!!” “제냐 공주님도 이곳을 자주 찾으십니다. 우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시 거든요.” “그런데. 왜 숨은 거예요!” “공주님이 좀... 터프하시거든요.” 키스가 옛 생각이 떠오르는지 눈썹을 가늘게 떨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기사들도 도망치는 그 터프한 공주님의 치마를 사정없이 들친 거침없는 쾌남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냥... 자살해 버릴까? 그때 키스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동정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미온 경. 걱정하지 마세요오.” “왜, 왜요?” “교수형은 저녁에만 한답니다아. 그러니까 아직 12시간은 더 살 수 있... 흐억!” 나는 키스의 복부에 분노에 찬 주먹을 날렸다. 내 인생 물어내라, 이 자식아! -Blind Talk 최근 반쯤은 늪에 빠져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둔감해져서 널려있 는 행복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 같아 아쉽군요. 어제도 한 서너가지 정도의 행복을 놓쳐버린 것 같습니다. E-MAIL : billiken@hanafos.com 대항해 시대 OST 중 Land of Luxury를 들으며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2. 사형 집행 시간까지 앞으로 11시간 27분. 나는 키스의 집무실 의자에 앉 아 훌쩍거리며 내 무덤의 묘비명을 정하고 있었다. '기사를 꿈꾼 한 청년, 이곳에 잠들다.'라고 써줬으면 좋겠지만 분명히 ‘파렴치한 성추행 범이 잠들어 있음. 침 뱉어도 좋음.’이라고 써줄 것만 같다. 이런 내 찢어지는 마음은 알 바 아니라는 듯 키스는 소파에 자빠져 과자 를 깨물어 먹으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오장육부를 뒤트는 듯한 그의 혼잣 말 좀 들어보라. “엔디미온 키리안. 향년 20세. 우후. 우후후후.” “.....” “아아. 미온 경이 가버리면 또 다른 희생양, 아니 새로운 기사를 충원해 야 할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귀찮아 죽겠네요오.” “아직 안 죽었어!!” 어차피 죽을 몸. 내 평생의 원수, 키스와 동귀어진 해버리고 싶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카론이 들어왔다. 아아. 하필 카론 경이 나를 질질 끌고 형틀로 데려갈 저승사자 역할이란 말인가요. 세상 참 얄궂네요. “어머나. 카론 경, 왔어요?” “키스. 나가 있어라.” “싫습니다아.” “고집 부리지 마라.” “여긴 내 방입니다아.” 카론은 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대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왕궁에 오자마자 또 문제를 일으키다니 믿겨지질 않는군.” “난 저주 받았나 봐요.” “제냐 공주님의 치마를 들친 사실을 시인하나?” 역시 수사관다운 말투로군. 내가 해줄 말은 이것뿐이었다. “죽기 전에 부모님 묘소를 가볼 수 있게 해주세요.” “너무 앞서 가지마라. 죽을 일은 없으니까.” “정말요?” 그때 깜짝 놀란 키스가 벌떡 일어나선 말하는 것이었다. “어! 왜 안 죽여!” “키스! 내가 죽는 것을 그렇게 기대했냐!!” 나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고 카론은 골치 아프다는 듯 양미간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런 일로 일일이 기사들의 목을 쳤다간 이미 키스는 열 번도 더 교수 형을 당했어야 한다.” “어머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건 너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카론은 화를 참는 표정으로 짧게 말한 뒤에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제냐 공주님께는 내가 잘 말해 두었다. 그 분께서 시녀도 없이 이곳에 온 것도 흠 잡힐 일이니까 이 일은 왕실 기록에서 삭제하겠다. 너도 앞으 로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카론 경!” 이런 창피한 일은 말하라고 고문해도 안할 겁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냐 공주님은 이상하게도 카론 경의 말이라면 잘 따른다고 한다. 아무래 도 카론 경은 소녀들에게 사랑받는 외모가 아닐까? 아무튼 이래저래 축복 받은 유부남이다. 어쨌든 카론 경의 중재 덕분에 목숨을 구해서 다행이야. 그 반면 정작 나를 보호해 줘야할 이 우라질 키스 경은... “아아. 꼭 미온 경의 무덤에 꽃을 바치고 싶었는데 아쉽다아아.” 언젠가는 정말 죽여 버리겠다, 키스! 그 날을 위해서라도 악착 같이 살아 남을 테야! 카론 경은 아직 전할 말이 남았는지 또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히만 대공께서 자네를 불러 달라 하셨다.” 우당탕탕!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벌떡 일어난 키스가 카론을 밀치고는 쏜살같이 방 밖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왜, 왜 저러는 거야? “얼레? 키스 경이 왜 황급히 도망치는 거죠?” 하지만 카론은 헝클어진 옷을 다듬으며 입을 꽉 다물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뭔가 알고 있는 얼굴이긴 한데 물어봐도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겠지. 카론은 여전히 사무적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행정부 본당으로 가봐라. 아이히만 대공께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늦 지 말도록.” 여전히 돌처럼 딱딱한 말만 남기고는 카론 역시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아 예. 어떤 거라도요.” “누구에게 검술을 배웠나.” “아 그건...”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카론 경에게는 특별히 숨기고 싶지 않다. 별로 자신 있게 밝힐 만큼 내 검술이 뛰어난 것은 아니고 그 분의 제자도 아니라서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가끔씩 알테어 님에게 부탁해서 검을 배우긴 했거든요.” “알테어? 설마 콘스탄트 왕국의 명주작 알테어 엔시스를 말하는 건가?” “제가 아는 알테어 님은 그 분 뿐인데요?” 내 말에 카론이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가 문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농담이 심하군. 밝히기 싫으면 싫다고 해라.” 얼레? 정말인데? 믿어달라고요, 카론 경! 하긴, 4대 아신 중에 하나인 명 주작 알테어 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내가 카론이라도 믿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정말이라고! 처음에는 자신은 남을 가르쳐 줄 실력이 아니라 고 거절했지만 몇 번이나 부탁했더니 조금 가르쳐 주셨단 말이야. 그리고 보니 알테어 님은 잘 계신지 모르겠네. 산천초목을 피로 물들이는 인간병기 적현무 키르케 님이 죽여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었는데 착한 알테어 님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지 걱정된다. 그건 그렇고 난 어서 아이히만 공작을 만 나러 가봐야겠다. 나는 키스가 왜 도망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철혈대신 아이히만 공 작이라는 마왕이 지배하고 있는 공포의 궁전 행정부 본당으로 향했다. 3. “이 월급도둑!!! 밥벌레들아!!! 이 따위로 밖에 보고서를 못 올리나!!!” 라는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이히만의 사자후가 문 밖에까지 울려 퍼지 는 이곳이 바로 나라의 모든 행정업무를 집행하는 그 이름도 찬란한 행정 부 본당이다.(가끔 총성도 들려온다.) 이 건물의 별명은 '용의 굴', 누구 를 용에 빗댔는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리라. “무슨 일로 왔나!” 힘이 바짝 들어간 위병이 부리부리한 눈매로 내게 창을 들이댔다. 여긴 정말 만년 봄날인 우리 본부와는 천치차이로군.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아이히만 공의 부름을 받고 왔...”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커다란 목소리에 귀가 멀어버리는 줄 알았다. 위병은 두 발을 착 붙이며 창을 가슴에 끌어당기고 힘 있게 고개를 치켜들었고 나는 얼떨떨하게 인사 하며 이 공포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이 안에선 실적이 나쁜 자는 주리를 틀고 각을 뜬다든지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비켜! 비켜! 얼쩡거리며 서 있지 마!” 들어가자마자 난 서류를 한 뭉치 들고 전속력으로 태클을 걸어오는 한 사 무원을 가까스로 피해야 했다. 이곳에선 아무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 다. 모두 적들을 향해 돌진하는 병사들처럼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서류 따 위를 들고 뛰어다니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시뻘겋게 충혈 된 눈 을 한 채 광속의 속도로 펜을 굴리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 진 수많은 책상과 그 책상들 사이를 거의 경공술에 가까운 빠르기로 날아 다니고 있는 사무원들의 모습을 보자 나는 문득 '근무지옥'이라는 것이 존 재한다면 이런 곳이리라 확신했다. “아이히만... 철혈대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째서 아이히만 공작에 대해 말했던 내 고객들 이 하나 같이 그를 가리켜 '악마에게도 세금을 받아낼 철혈대신'이라고 평 했는지 알았다. 이 수백 명의 사무원들 중에 아무도 내게 아이히만이 있는 곳을 알려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지만, 그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거대하고 위협적이며 살기가 담긴 고함소 리가 나고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말이다. “너무 늦잖아! 엔디미온 군!” 그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이히만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커다랗게 소리쳤다. 아주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는 끝없이 쌓여 있는 보고서들에 사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여기서는 1초라도 늦으면 명사수 아이히만 공작에게 총살당할 것만 같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하겠네. 지금 당장 제복을 차려 입고 왕실 본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게!” “예? 어째서 제복을...” “자네는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애송이라고 여겨서 일을 시키는 거야. 만 약 날 실망시킨다면....” 총살이겠죠. 나는 더 이상 캐물어 그의 황금보다 소중한 시간을 빼앗으려 는 우를 범하지 않고 떨떠름하게 인사한 뒤에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냉큼 기사단 제복을 차려입고 본궁 앞으로 뛰어가지 않으면 나는 오늘 중으로 아이히만 공작의 사격 연 습용 과녁판이 되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Blind Talk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제멋대로 프로파일 RETURN> Entry#1 엔디미온 키리안 키 : 늘씬하지만 장대처럼 크진 않다. 마른 체구라서 실제보다 좀 더 커보임. 눈 : 연보라색 머리 : 태어나서 한번도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다가 목에 휘감길 만큼 길다. 은백색이 감도는 멋진 금발 외모 : 아침에 통통해 보이는 것은 얼굴이 부어있기 때문. 의외로 이목구비가 샤프하지만 감정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성격이라서 쿨한 분위기를 잡기가 힘들다. 1.어때요. 왕궁 생활은 즐거우신가요? 미온 : 저 그러니까 실은... 키스 : (갑자기 나타났다.) 즐겁죠? 정말로 즐겁죠오? 그렇지요오?" 미온 : (식은땀을 흘리며) 즈, 즐겁습니다. 즐겁고 말고요. 지금 미온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살려주세요.'라고 쓰고 있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 2.앞으로의 목표는? (기쁜 표정으로) 저, 정의를 지키고 싶어요! ...촌스러. 3.생각해 보니까 다른 소설의 주인공들은 죄다 여유롭게 악의 무리를 때려 잡고 굉장한 무기나 아이템들도 너덧개 쯤은 가지고 있는데 말이죠. ...뭐, 뭘 말하시고 싶은 거죠? 당신은 뭔가요? 보시다시피... 신입사원 아니 신입기사 엔디미온입니다. 특기는 멧돼지 목조르기. ...시시해서 미안하네요! 줄리탄 : (불쑥)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미온 : 다, 당신 누구야. 줄리탄 : 결국 당신도 모진 시련을 겪은 끝에 성장하고... 요절하게 될 겁니다. 미온 : (대빵 불안해 졌음) 누, 누군데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줄리탄 : 빨간 눈을 조심하세요. 빨간 눈을 가진 사람치고 정상인이 없습니다. 선경험자의 충고에요. 빨간 눈을 조심... 조심... 조... (에코) 미온 : 빠, 빨간 눈? 키스... 붉은 눈 아니었던가요? 4.막강한 고객들이 참 많던데요, 그쪽 인맥에만 부탁해도 기사 자리 쯤은 어렵지 않았을 텐데요? 음 실제로... 키르케 님이 저한테 '원한다면 콘스탄트 왕국의 기사 자리를 주지. 대신 평생 날 모셔라.'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신성 콘스탄트 왕국이라면 당신의 베르스 왕국보다 백만배는 강대한 나라인데 왜 거절했어요? 헤헤. 그런 식으로 기사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잖아요. ...지금은 뭐 의미가 있나요? 5.지금까지 번 돈의 총액은?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10대에 번 돈의 액수가 지금부터 제가 평생 벌 돈보다 많을 겁니다. 그, 그렇게 많아요? 6.그리고 보니까 동거했던 아가씨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에헤헤헤. 10대에 같이 살았습니다.(발그레) 지금은? ...묻지 마세요.(우울) 7.키스 세자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아. 8.놀랍게도 명주작 알테어 씨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하셨는데 그 분 소개 좀 해주실래요? 알테어 님은 저보다 두살 연상입니다. 아신 중에 하나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인간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분이죠. 단정한 미모에 똑똑하고 착하고 검술도 대륙 최강이지만... 의외의 문제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죠. 마음 고생? ...프라이버시 보호상 밝혀드릴 수가 없군요. 그 분한테 배웠다고 해봐야 제가 막 조르고 졸라서 몇번 가르침을 받은 것일 뿐... 사실 어디가서 알테어 의 제자라고 말했다간 명성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당장 결투가 들어와서 죽 을지도 몰라요. 알테어 님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고요. 지금도 알테어 님 을 노리는 키르케 님 때문에 걱정이 많군요.(한숨) 9.좌우명은? 예전까지는... '언제나 진심을 보여주자.','꿈을 잊지 말자.' 지금은... '범사에 감사하자.'(절실함) 10.그건 그렇고, 노래 잘 해요? ...왜 항상 질문의 끝은 이런 것인가요. 투덜거리지 말고 대답하세요. 후후. 당연하죠. 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랍니다. 기사단 들어온 다음부터는 노래 부를 일이 없긴 하지만 예전에는 그녀 앞에서 곧장 불러주곤 했습니다. 좋겠수다. EVE의 What you need를 들으며 (feat. by dragon @ swizz beatz 입니다. 후배가 보내준 노래인데 즐겁게 듣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클럽스타일이로군요.)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4. 스왈로우 나이츠가 이름도 웃기고 하는 일도 웃기긴 하지만 제복 하나는 왕국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다. 어차피 꽃같이 보이려고 만들어 놓은 기사 단이니 제복 하나 만큼은 왕국 최고 디자이너들의 예술혼을 승화시켜 만들 어 낸 희대의 걸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평상시나 출장을 갈 때도 이 값비 싼 제복을 입을 일은 없고 왕실 공식행사 때나 입는 것인데 가끔 동료 기 사들이 이 제복을 입고 왕궁을 배회하며 귀족들에게 자신을 선전하는 작업 복으로 쓴다고 한다. 결국 영업용이라니 서글프긴 하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다. “어머. 이번에 새로 들어온 기사님 인가봐? 예쁘게 생겼네?” “잘 부탁드립니다. 불철주야 봉사하는 엔디미온 인사드립니다.” 아름다운 제복을 입은 내 모습은 나비들을 유혹하는 한 떨기 난꽃이었다. 콧소리를 내며 내 근처에 몰려든 고객, 아니 귀부인들을 보자마자 화사하 게 미소 짓는 내 입에서 이제는 입에 붙어버린 영업 멘트가 튀어 나왔다. 가증스러워 보여도 직업병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재잘거리며 날 경매에 나온 조각품 보듯 훑어보던 귀부인들은 이름을 기억 해 주겠다며 호호호 웃으면서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여기 와서도 예 전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인생무상이 다 느껴진 다. 왕실 본당 앞에서 호객행위라니 이래도 될지 몰라. 키스로부터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면 교수형 당하는 곳'이라고 들은 왕실 본당은 그 무서운 경고와는 다르게 아주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길게 늘어 진 곡선형의 건물 전체에는 파릇한 넝쿨들이 녹색의 옷을 두르고 있었고 잘 닦여진 창문들 모두 오후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어서 마치 지상에 내려 온 신성한 짐승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 나라가 약해 빠졌긴 해도 건물 하난 기가 막히게 짓는다는 사실 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엔디미온 군! 날 따라오게!” 갑자기 수많은 사무원들을 열차처럼 이끌고 등장한 아이히만 나리가 본당 안으로 들어가며 내게 손가락을 까딱 까딱 거렸다. 본래 무서울 정도로 위 엄서린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은 정말 싸우려고 안에 들어가는 듯 투지에 불타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다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고관대작들이 속속 나타나 아이히만과 같은 표정으로 본당으로 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다 모여서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일까. 쳇, 그건 그렇고 '엔디미온 경'이라고 좀 불러주면 덧나나. 이래봬도 기사 라고요. 5. 본당에 들어가자 확 트인 고급스런 로비와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그 런데 이상하게도 복도 중간쯤에 바닥에 빨간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던 아이히만은 그 선 앞에서 멈췄다. 그런데 갑자기 품속에서 대뜸 권총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저 안 늦었어요!” "이 선이 뭔지 아나, 엔디미온 군.” “예? 글쎄요.” 그런 걸 내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이건 바로 소드라인(Sword-Line)이라고 부르는 거야.” “소드라인?”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 “이 선을 넘어가면 국왕 전하의 거처가 나온다. 즉, 이 선을 넘을 때는 어떤 무기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걸세.” 아이히만은 그렇게 말하면서 비서에게 자신의 권총을 넘겼다. “만약 무기를 가지고 이곳을 넘으면 그 즉시 국왕암살기도죄로 처형되니 주의하도록.” 아아. 키스가 한 말이 이거였구나. 하지만 걱정 마세요. 우리는 어차피 검을 차지 않는 기사들이니까요. 권총을 넘긴 뒤에 아이히만은 곧장 소드 라인을 넘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나도 황급히 뒤를 따랐다. 복도 끝의 문을 열고 들어간 어전 회의실은 더욱 희한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 요한 것은 아직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전쟁이 시작될 거야.” 아이히만 공작은 도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넓은 회의실 중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어전 회의실 풍경은 대충 이랬다. 회의실의 동쪽 끝과 반대편 서 쪽 끝에 몇 열의 의자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진열되어 있었고 가운데는 비 어 있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높은 연단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국왕 폐하의 것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붉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 넓은 공터가 있는 통에 마치 무슨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이 위험해 보이는 회 의실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짐작도 가질 않아 조그맣게 물었다. “저어. 아이히만 공. 대관절 제가 할 일이...” “자네는 저기 중앙에 서 있겠나.” “예? 왜 저런 독무대에 제가...” “서 있으라면 서 있어. 이 일을 하는 사람은 기사 중에서도 선택받은 자 만이 가능하니까 영광으로 알라고.” “아 예.”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걸어가서 마치 동물원 판다곰 마냥 멀뚱하니 공터 중앙에 섰고 잠시 후 근엄한 옷을 차려입은 고위관리들이 속속 안으로 들 어오며 오른쪽과 왼쪽 자리에 나누어 앉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람.’ 좌로 수십 명 우로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이 오늘 데뷔하는 18세 여가수 처럼 홀로 서 있는 미천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식은땀이 다 났다. 게다가 더욱 무서운 것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양쪽의 고위관료들이 잡 아먹을 듯 맞은편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두려울 정도로 고요한 이 험 악한 공기의 정중앙에 내가 서있었다! 이 엄청난 중압감,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국왕 전하 납시오!” 순간 모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전하께서 나오시는 건가! 솔직히 난 지금까지 국왕 전하를 뵌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서 이 나라 최고 통치자를 볼 수 있다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두근 벅차 오는... “어이구. 모두 잘들 지냈나?” 그런데 저 아저씨는 누구? 설마 저 볼살 통통한 귀여운 아저씨가 이 나 라의 임금님? 서슴없이 왕의 옥좌에 앉는 것을 보니까 왕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만두나 생선을 팔 것 같은 저 평범한 외모의 중년은 대 체 뭐란 말인가. 왕은 멋지게 생겨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왕인데! 실없이 히죽거리는 얼굴에다가 반대머리, 볼은 너무 통통 해서 막 잡아서 늘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짤'없이 평범한 이모저모였다. 키도 작고 얼굴도 몸도 동글동글해서 툭 때리면 이리 저리 굴러갈 것 같 은 저 모습 어디에 왕의 위엄이 있냐고!! 나는 이전까지 왕은 모두 황금빛 왕관을 쓰고 붉은 비로드 망토를 휘날리며 왠지 모르게 쓸쓸한 눈빛을 가 지고 있고 한 올 흐트러짐이 없는 근엄한 수염을 기른, 키 180Cm 이상의 건장한 핸섬가이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저 만두가게 아저씨는 대체 누구 냐고! 어떻게 저런 노멀하다 못해 심플한 임금님한테서 미소년 페르난데스 왕자님과 미소녀 제냐 공주님이 태어날 수 있었던 거지! 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유전에 대한 상식이 심하게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래. 어서 회의를 시작하게나.” 만두가게 아저씨, 아니 우리의 임금님께서는 양쪽 편의 신하들을 둘러보 며 불쑥 입을 열었다. 곧장 오른쪽 편, 즉 아이히만 공의 반대편에 있던 신하 중 한 명이 일어나 말했다. 세련된 신사복에 엘리트답게 커트된 금발 머리, 안경 너머 빛나는 눈매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상대방을 깔보는 듯 한 인상마저 주는 야망에 찬 분위기의 30대였다. “법무대신 위고르, 발언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어전회의의 주된 안건은 위대한 국왕 전하의 순금상 제작에 대한 것입니다.” 와아. 저 나이에 법무대신이라, 대단한 엘리트로군. 아마 뱃속에서부터 출세 가도를 밟아왔나 보다. 그건 그러고 순금상이라니 그게 뭐지? 순금으 로 만든 조각상을 말하는 건가? 위고르라는 젊은 법무대신은 여세를 몰겠 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냉큼 말을 이었다. “소인 위고르는 지금까지 이 아름다운 나라에 국왕 전하의 위업을 기릴 만한 기념물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 역시 전하를 찬양할 수 있는 마땅한 기념물에 목말라 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중략) ...이것은 나라의 위상과도 관계 가 있으며... (중략) ...고로, 소인 위고르는 5미터에 달하는 전하의 순금 조각상을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법무대신 위고르는 장장 20분 동안 대우주의 순리와 형이상학적 타당성 까지 들먹이며 '어째서 이 나라에 국왕의 순금 조각상이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제목의 길고 긴 연구발표를 마쳤다.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 튼 확실한 것은 전하께선 그의 연설에 무척이나 흡족해 한다는 것이다. 꼭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고 싶다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우리들을 굽어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윽고 아이히만 공이 일어났다. 그가 헛기침을 한 뒤에 괄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무대신 아이히만, 발언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는 금광이 거의 없습니다. 즉, 5미터나 되는 순금 조각상을 주조하려면 엄청난 량의 금을 수입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금값은 역대 최고가로 치솟고 있습니 다. 물론 전하의 업적을 기릴 수 있는 기념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는 저도 찬성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현재 왕궁의 재정상태로 볼 때 거대 순 금 조각상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시기상조입니다. 부디 재고를 부탁드 리옵니다. 이상입니다.” 아이히만 공의 발언은 짧고 간결해서 훨씬 알아듣기 쉬웠다. 결론적으로 지금 이 나라 형편에 순금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분수도 모르는 사치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국왕 전하는 두 볼이 퉁퉁 부어서는 무척이나 못마땅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지간히 자신의 조각상을 만들고 싶으셨나 보다. 솔직히 만들어도 별로 멋질 것 같지 않은데 말이야. 별로 슬림한 몸매가 아니라서 금도 많이 들어 갈 테고. 동쪽 관리들을 대표해서 위고르 씨가 또 다시 벌떡 일어났다. “법무대신 위고르, 발언하겠습니다! 미숙한 제게 이 나라의 경제 상황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하의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한 투자로는 부족함이 없다고 사료되오며 순금 상을 주조하는데 머뭇거릴 이유 또한 없습니다. 전하의 위엄이 바로 세우 는 일에 주력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라고 할 수 있겠 습니까! 이상입니다!” 강하게 나오네, 위고르 씨. 하지만 아이히만 공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재무대신 아이히만, 발언하겠습니다. 그럼 귀공께선 순금상이 없다면 전하의 위엄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상입니다.” 흐음. 역시 날카롭게 노리는군. “법무대신 위고르, 발언하겠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아이 히만 공께선 이 넓은 나라에 전하의 기념물하나 없는 현실이 좋다고 생각 하십니까? 이상입니다.” “재무대신 아이히만, 발언하겠습니다. 누가 좋다고 했습니까! 이상입니 다!” “법무대신 위고르, 발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만들자는 겁니다! 이상입 니다!” 뭔가...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분위기는 위고르 쪽 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순금상을 만들 거다!'였고 아이히만 쪽에서는 '세상이 쪼개져도 그렇겐 못해!'라고 정리할 수 있으려나. 그때 삐죽거리며 앉아 있던 국왕 전하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번에 옆 나라 니샤에 갔을 때... 그 나라 왕은 4미터짜리 순금상을 짐에게 보여주며 자랑하더군. 그 놈 아주 나쁜 놈이야.” 좌중 침묵 “아니 뭐, 내가 꼭 그 얄미운 놈 것 보다 더 큰 순금상을 가지고 싶어 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만들어 달라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이곳에 모인 수십여 명의 신하들은 모두 식은땀을 흘리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모두의 표정에는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순금상을 만들겠다고 한 거냐!’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위 고르가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법무대신 위고르, 발언하겠습니다! 보십시오! 국왕 전하께서도 이웃 나라 니샤 왕국의 그 비열한 국왕에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이런데도 순 금상이 시기상조라고 하실 것입니까! 이상입니다!” 인내심이 바닥나 버린 아이히만 역시 벌떡 일어나며 커다랗게 외쳤다. “생략하겠습니다! 니샤는 금이 많은 나라니까 순금상을 만들든 금으로 집을 짓든 상관없겠지만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결국 그 나라에서 금을 수 입해 와야 하는데 그러면 더 큰 모욕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 이상입니다!” 그에 뒤질세라 위고르가 다시 벌떡 일어났고 그때 아이히만이 내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중앙에 서 있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쫄래쫄래 걸어갔다. 아이히만 공이 분을 삭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부쟁이 위고르 놈에게 가서 전해. 좆까는 소리 하지 말고 제발 좀 닥 치고 찌그러져 있으라고 해! 지금 이 나라 형편에 무슨 얼어 죽을 순금상이야!” 뭐, 뭐냐. 이 상스런 메들리는. “저어... 그런 심한 쌍욕을 왜 제가 전해야 하는지...”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야. 가서 그대로 전해!” 나는 머릿속으로 아이히만이 남긴 육두문자를 중얼거리며 위고르에게 걸 어갔다. 내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전했다. 그래도 귀족들끼리의 밀담이 니 최대한 완곡하게 통역하려고 머리를 짜내야 했다. “위고르 공. 그러니까 저... 국부를 가격하는 말씀은 그만두시고 침착하 게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시라고 아이히만 공께서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순간 위고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가서 전해라. 예전 당신의 탈세 혐의를 눈감 아 줬는데도 이런 식으로 보답하면 크게 다칠 거라고 전해!”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 나는 투덜거리며 아이히만에게 갔다. “아이히만 공. 공의 탈세 혐의를 봐준 은혜도 잊고 계속 반대하면 다 까 발리겠다는데요?” “흥! 증거 있으면 대보라고 해!” 역시 아이히만은 위험한 할아범이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해! 끝까지 못생긴 순금상 따위나 만들겠다고 씨 부리면 그때는 그 토실토실한 궁둥이에 총알을 잔뜩 박아 주겠다고 전해!” “저어... 그건 살해 협박인데요.” “안 전하면 네 놈 궁둥이를 쏴 버리겠다!” “전할게요. 전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맡은 일은 바로 전령'(傳令)이었다. 대놓고 서로 욕설을 퍼붓고 흑색선전과 저질 협박을 일삼을 수야 없으니까 나라는 창구를 중간 에 놓고 비밀리에 말을 전하게 하는 것이랄까. 말하자면 나는 회의석상의 핫라인(Hot-Line)이 된 셈이니 중책은 중책이로군.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안 다면 당장 민중봉기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후 나는 정말 눈썹이 휘날리도록 두 중신 사이를 뛰어다니며 난생 처음 듣는 저질 쌍욕을 이리 저리 옮겨줘야 했다. 물론 이 사이에도 둘은 고상한 말투로 거창한 명분을 들먹이면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정치의 이중성이라는 것... 일리야 없다. “위고르 공. 아이히만 공께서 개수작 부리지 마시라고...” “아이히만 공. 위고르 공께서 제 명에 뒈지고 싶지 않으시냐고...” “위고르 공. 아이히만 공께서 동거하고 있는 여자를 마누라한테 까발리 시겠다고...” “아이히만 공. 위고르 공께서 그것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위고르 공. 아이히만 공께서 알아 처먹었으면 그 빌어먹을 순금상 취소 하시라고...”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이려나. 아무튼 위와 같은 피 튀기는 공방 끝에 승 리를 거둔 자는 바로 전율의 할아범 아이히만 대공이었다. 그리고 명분과 이론으로 무장한 위고르를 꺾는데 가장 주요했던 무기는 바로 '네 놈의 불 륜을 폭로하겠다.'였던 것이다. 아아, 이런 일을 겪고 나니까 나도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 결국 위고르는 뭐 씹은 표정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마지막 발언을 했다. “법무대신 위고르... 발언하겠습니다. 재무대신 아이히만 공의 충정어린 마음에... 저도 공감하는 바가 있어... 순금상을 만드는 일은... 보류하도 록 하겠습니다. 이상... 입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하는 엘리트 관리 위고르는 죽여 버릴 듯 아이히만 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이 무서운 할아범 아이히만은 혀를 쑥 빼고 위고르를 놀리고 있었다. 아무튼 적으로 만들면 안 될 사람이다. 그리고 동쪽 관리들 의 맹주인 위고르가 주장을 굽히자 더 이상 발언은 없었고 회의는 끝났다. 그리고 불만에 가득 차다 못해 삐진 표정으로 회의를 경청하던 국왕 전하 께선 자리에서 일어나며 헛기침과 함께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흐음. 충정어린 의견들 잘 들었네. 자 그럼! 짐은 순금상을 만드는 것 으로 알고 바빠서 이만...” 뭣이! 모든 사람들이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전하께선 황급히 회의실을 떠나 셨다. 6. 결국 회의 진행과는 하등 관련도 없이 5미터짜리 대형 순금 조각상이 왕 궁 광장에 세워지기로 결정되며 회의는 끝났다. 아이히만의 분노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신하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지 멋대로 결정하시는군! 나잇살 처먹은 녀석이 애새끼처럼 고집만 세 가지고!” 아이히만 공은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벽을 걷어차며 삼족을 멸할 불 경죄에 해당되는 폭언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화가 날 만도 하다. 국왕이 잘 생기기라도 했으면 조각상을 감상할 맛이라도 날 테지만 배 나온 만두 가게 아저씨를 순금으로 만들어 봐야,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때 신경성 위경련에 시달리는 듯한 외모의 군무대신이 씩씩거리는 아이 히만에게 뛰어 왔다. “이, 이보게! 아이히만 공! 우리 예산을 줄여서 순금상을 만들면 어떻게 하나!” “몰라! 따지고 싶으면 그 잘난 국왕 전하께 가서 따지라고!” “예산이 줄어들면 올해는 꼭 장만하려고 했던 공성포 다섯 문을 살 수가 없단 말이네!” 울상이 된 군무대신의 통사정에 아이히만이 뚱한 표정으로 말을 툭 던졌다. “자네는 공성포가 언제 쓰이는 것인지 알고 있겠지?” “그거야, 적국의 성을 공격할 때 쓰이지.” “그럼 우리나라 군대가 단 한번도 남의 나라 성 앞까지 가본 적이 없다 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그, 그렇지만 나라에 공성포 하나쯤은 있어야 체면이...” “에이이! 일단 한번이라도 성 앞까지 가봐! 가본 뒤에 말하라고!” “그땐 늦어!” 이, 이게 뭐하자는 소란이람. “국경이나 잘 지켜! 남의 나라 쳐들어 갈 일은 이 왕국이 망할 때까지 없을 테니까!” 아이히만 공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 저으며 걸어가 버렸다. 진짜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할아범이다. '무기를 가지고 지나갈 수 없는 선', 붉은 색 소드라인을 넘어선 그는 다시 권총을 받아 품속에 넣고는 빳빳한 셔츠 깃을 다듬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엔디미온 군. 오늘 어전 회의 어땠나.” “아하하하. 며, 명랑한 분위기였습니다.” 악몽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시키지 말아 주세요! “개판이지. 전하는 뜬금없이 순금상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쓰고 위고르 놈 은 아부하려고 가당찮은 주장이나 펴고, 하지만 말이야.” 아이히만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실웃음을 지었다. “누구도 미워할 필요는 없어. 잘난 놈, 못난 놈, 다 이렇게 아옹다옹 사 는 거니까.”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대공. 그건 그렇고 이 순금상이 불화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왠지 모를 불안감은 나만의 착각이려나. -Blind Talk 두 편 분량을 하나로 묶어 올립니다. 이야아아아 오늘은 화창한 토요일이로군요... 라면이나 먹어야지.;;-_)y-~~~ 그 날 꾸었던 꿈들의 연속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기대도 없이 흘러가는 나날을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었어 소중한 사람을 잊지 않고서 살아가는 것도 힘들어 서로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내가 나 자신을 찾았을 때부터 계속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 ...중얼 중얼. 하라이 켄의 樂園을 들으며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7. 아이히만 공은 행정부 본당으로 돌아간 즉시 금을 수입해 올 예산을 집행 했고 며칠 뒤, 5미터에 달하는 찬란한 순금의 조각상이 엄청난 빠르기로 왕궁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여기에서도 재치를 발휘했다. 실제 순금상의 키는 3미터 정도 밖에 안 되고 높이 뽑아 들어 올린 동상의 칼 길이를 아주 길게 만들어서 약속했던 5미터를 채웠던 것이다. 자신과 꼭 닮은 순금상이 세워진 날 밤, 국왕 전하께서는 왕궁 사람들을 순금상 앞 광장에 모아 놓고 잔치를 열었다. 통통한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임금님 께선 단상에서 몸을 틀며 쑥스러운 듯 소감을 밝혔다. “에이. 뭐 이렇게 꼭 만들어 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기왕 만든 것이 니 고맙게 받도록 하겠네.” 얄미워서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심정은 아니니라. 나는 심 드렁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샴페인을 조금 머금었다. 왕궁 광장에서 벌어 진 이 연회에는 마차 수십 대 분량의 음식과 참나무통 이십 여개 분량의 각종 주류, 삼십 여명의 일류 요리사들과 그의 몇 배는 되는 시녀들이 동 원되었고 정말이지 귀빈들만 수천 명은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 들이 다 왕궁 식구였던가. 내놓으라 하는 거물급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고 있자니 뭔가 나도 덩달아 대단한 사람이 되 것 같아 어깨가 으 쓱해지는군. ‘그런데 키스 이 양반은 어딜 간 거야?’ 불철주야 노는 일에 매진하는 키스 경이 이런 일에 빠질 리가 없는데 아 까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성격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지만 그래도 외모나 몸매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단장으로 부족함이 없는 양반이라 제복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키스 세자르는 이 우아한 파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사실 키스 경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 지만 그는 공식적인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쯤 생각하고 있을 때 누가 내 뒤에서 툭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아! 죄송합.... 아? 미온 경?” “크리스? 너도 왔구나.”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해 우유를 담은 잔을 들고 파티장을 배회하던 크리스 였다.(왠지 크리스를 보고 있으면 ‘경’이라는 칭호를 붙이기가 어색하다.) 작은 체구 때문에 제복을 입어도 영 폼이 나지 않는 크리스는 어색하게 웃 으면서 말했다. “...이런 파티는 어색해서요. 리더구트로 돌아가려고...” “흐음.” 기분을 알만 하다. 현재 솜씨 좋은 루이 경이나 쇼탄 경은 그야 말로 인간 메뚜기가 되어 파티장을 날아다니며 이미 수많은 귀부인들을 공략해 가고 있었다. 이인일조로 편대비행하며 돈 많은 귀부인들만 정확하게 폭격하고 다니는 저들의 모습은 가히 절세의 무공인지라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하 긴, 귀족들과 안면을 쌓는데 이런 왕궁 파티 이상의 영업장소가 또 있을까. 게다가 지명의 슈퍼스타 루시온과 레녹 경이 없는 이상 이곳은 루이와 쇼 탄의 사냥터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묘하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랑시 경 역시 지체 높은 아줌마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특유의 쾌활함 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 경은... “가, 가볼게요.” 순진하고 소극적인 크리스는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마저 이용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이래서야 루시온 경이나 레녹 경에게 계속 핀잔만 듣게 된다고! 나는 도망치듯 파티장을 빠져나가려는 크리스의 손을 잡아챘다. “왜... 그러세요?” “파티는 이제 시작이야. 같이 즐겨 보자고.” “예?” “이제 현역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한번 움직여 볼까 해서.”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어리둥절해 하는 크리스를 끌고 귀부인들 속으로 들어갔다. 이래봬도 난 열다섯 살 때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던 프로 란 말씀. 나는 눈앞에 펼쳐진 내놓으라 하는 귀부인들 중에 입고 있는 옷 과 장신구들의 가격 총합이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 3초 만에 파악하고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녀에게 접근할 때마다 내 머리 속에는 속속 데이터 가 들어오고 있었다. 30대 중반, 반지를 낀 위치를 보면 결혼을 두 번 했음, 악센트가 강한 억 양과 리본을 묶은 스타일로 보면 높은 교육 수준의 남부 대지주, 해외여행 자주 감, 최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음, 약간의 알코올 중독과 금속 알레 르기 있음, 듣고 싶은 말은 '젊어 보이시네요.', 귀걸이가 없는 것으로 보 아 엄격한 집안 태생으로 사료됨. 의외로 미신을 믿음. 지금 들고 있는 와 인 그라스는 입술에 닿는 부분이 바깥쪽으로 굽어 있는 튤립형인 것으로 봐서 이국적 호사취미를 즐기며 과일의 풍미가 감도는 달콤한 와인을 혀끝 으로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쾌락적인 음주취향임, 말투와 꺼내고 있는 화제 를 보니 자신감 넘치는 성격에 지적 유희를 즐기는 활달한 성격. 기타 등등. 그런 그녀 곁에 멈춰선 내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이 오지 않으실 때는 스위트 와인보다는 콘스탄트 왕국 류안 지방에 있는 허브 향기를 음미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다음에 또 그곳에 가실 일이 있으시다면 꼭 그 향초를 구입하세요.” “어머나! 내가 류안 지방에 간 적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남편도 모르게 간 곳인데?” “직감입니다.” 그녀가 왼쪽 두 번째 손가락에 끼우고 있는 오팔 반지는 류안 지방에서 구한 것이 분명하다. 내전 중인 나라까지 여행을 가다니, 예상대로 대단한 여행광이로군. 대부분의 여행광들은 도전적이고 특이한 것을 좋아하며 불 장난을 겁내지 않는다. “호호. 재미있는 청년이네. 내가 요즘 잠들기 힘들다는 것은 어떻게 알 았지?” “신전기사 엔디미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크리스티앙 경. 부인 의 존함을 알려주신다면 지금 앓고 계신 불면증을 치료할 수 있는 확실한 묘안을 조언해 드리겠습니다. 어때요, 괜찮은 거래죠?” 크리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미, 미온 경.” 대체 뭐하는 사람이냐는 얼굴이로구나. 돌아가면 키스한테 물어봐야지. 경력자 우대 하냐고. 그리고 5분 만에 나와 크리스 주변에는 열 명도 넘는 세도가의 여성들이 몰려들었고 크리스는 빨개진 얼굴로 쩔쩔 매면서도 어 느 때보다 많은 귀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때 엄청난 고가의 비단 드레스를 입은 큰 키의 여성이 다가오며 말했다. “호오. 미온 경. 영업 중에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오르넬라 성녀님!” 순간 모여 있던 귀부인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더니 고개를 조아리며 슬금 슬금 뒤로 물러났다. 역시 오르넬라 님의 악명은 이미 만방에 퍼져 있구나. 하긴, 비단 구렁이를 만났을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겁이 많은 크리 스 역시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오르넬라를 보자 몸이 굳어서는 제대로 인사 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와인을 홀짝거리는 오르넬라님을 보며 내가 말했다. “저 그런데... 성녀님이 술 먹어도 되는 거에요?” “술의 고통을 느껴봐야 주색에 빠진 자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 아니냐.” “좋은 구실이네요.” “그렇지?” 오르넬라님은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크리스나 주 변 사람들이나 내가 오르넬라님과 친하게 이야기하자 신기하다는 듯 우리 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꼭 내가 무슨 마계의 여왕과 담소를 나누는 것 같아 쑥스럽구먼. 하지만 이 분은 실은 본심은 착하고 상냥한 성녀님이란... “그런데 미온. 왜 내 저택에 안 오는 거냐. 정녕코 박제가 되고 싶은 게냐.” “아하하하. 고, 곧 갈게요.” 착하다는 말 취소. 그때 크리스가 너무 긴장해서 목각인형을 연상케 하는 몸짓으로 오르넬라님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처, 처, 처음 뵙겠습니다. 스,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크리스티앙 이 라고 합니다.” 힘내라 크리스!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빨갛 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보기 위해 먼저 용기를 낸 것이었다. 아아, 눈물이 다 나오는군. 그러나 첫 상대로 오르넬 라님은 좀 난이도가 높은데... 자칫 잘못하면 박제가 될 수도! 오르넬라 님 은 코웃음을 치며 자신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크리스에게 말했다. “흐응. 크리스티앙 경. 너는 오늘밤 내 저택에 와줄 수 있느냐?” “가, 가, 가겠습니다.” 가지마!!! “호호. 널 거실에 장식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 주겠느냐?” “아, 알겠습... 예, 예? 하, 하지만 그건 조금 생각해 봐야...”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잖아!! 크리스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 를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불쌍한 소년을 가지고 놀다니 악취미 성녀님이 다 정말. 정말로 자신이 장식품이 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는 크리스를 보며 오르넬라님은 뭐가 재미있는지 커다랗게 웃으며 말했다. “왕궁에는 재미있는 아이들이 많구나. 크리스티앙이라고 했지? 기억해 두겠다.” “가, 감사합니다!” 어쩌면 크리스로서는 오늘이 첫 번째 실적을 얻는 날일지도 모른다. 오르 넬라 님은 허벅지에 감겨 있는 실크벨트에서 은색 담배케이스를 꺼내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뱃대에 담배를 고정시켜 피워 물었다. 그리고 입가에 맺힌 담배연기와 함께 그녀가 중얼거린 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어차피 나는 어떤 남자와도 잘 수도 결혼할 수도 없어. 태어날 때부터 난 성녀니까. 내 몸은 신의 것이래. 하지만 솔직히 난 신을 믿지 않아. 아 무리 믿어보려고 해도 아무리 기다려도 신은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 렇게 자기 것을 버려두고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한 신 따위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 그런데 사람들은 내게 와서 기도를 드리고 나를 보며 신의 모습을 봤데. 우습지?” 음주에 흡연에 무신론자인 성녀 오르넬라 님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내 10대를 함께 했던 그녀가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담배는 물론 술도 싫 어하고 독실한 신자였던 그녀의 어디가 오르넬라 님과 같았는지는 모르겠 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음주에 흡연에 무신론자인 성녀님이지만...” “욕하려는 거냐?” “끝까지 좀 들으세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신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훌륭함 성녀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비록 자신은 신의 구원을 받지 못 했더라도 남들에겐 그 빛을 보여주고 신을 믿을 수 있도록 구원해 줬다면... 그건 위선이 아니에요. 희생이라고요.” “흥!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희생해 준 적이 없어!” “이런. 겸손하시기까지 하군요.” 나는 슬쩍 눈웃음을 지었고 오르넬라 님은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눈썹을 좁힌 채 날 바라보다가 갑자기 파티장이 떠나갈 정도로 커다랗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미온. 너는 정말 어린아이 같구나.” 쳇. 어른이 못 되서 미안합니다. 8. 사건은 다음날 발생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왕궁의 공기가 심상 찮다는 것을 느꼈다. 왕궁 곳곳에 무장을 한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돌 아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어 있었으며 또한 왕궁 전체가 숨 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이런 살풍경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1층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마이페이스 인간 키스는 나 를 보자 내 의문을 간파한 듯 헤죽 웃으며 말했다. “왕궁 광장에 한번 가보세요오.” “광장?” 그리고 광장에 갔을 때 내가 본 것은 바로 머리가 사라져 있는 국왕 전하 의 순금 조각상이었던 것이다. 전하께선 잠옷차림으로 그 앞에 주저앉아 오열을 토하고 있었다. “어떤 놈이 훔쳐간 거야! 내 머리! 내 머리이이이!!” -Blind Talk 오늘 잡담은 쉽니다.(_ _)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어떤 놈이 훔쳐간 거야! 내 머리! 내 머리이이이!!” “.....” 전하는 정말 자신의 머리라도 잘려나간 것처럼 거의 자지러지고 있었고 곧 그 깊은 슬픔이 거대한 분노가 되어 우리들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을 충 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곧 광장에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단장이 카론 경 과 부하들을 대동하고 도착했다. 전하는 예를 갖추는 그를 보자마자 격노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사단장 블리히 경에게 어명을 내리겠네! 감히 국왕의 머리를 훔쳐간 발칙한 도둑놈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게! 왕궁밖엔 이 사실을 알리 지도 않았는데 밤사이에 훔쳐갔다면 이건 왕궁 내부의 소행이 분명해! 아 직 왕궁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니 모든 출입문을 차단하고 철저하게 조사 해서 잡아내!” 임금님의 추리력이 저토록 출중한지 처음 알았다. 저런 머리를 조금만 정 치에 써주면 좋으련만. 전하로부터 수사전권을 위임받은 기사단장 블리히 경은 핸섬함을 넘어서서 마초함에 가까운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는 거구의 사내였는데 특이하게도 진한 쌍꺼풀이 있어서 (이런 말하긴 죄송하지만) 느끼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검술은 뛰어나지만 상당히 거만하고 출세욕이 강한 인간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블리히 경은 헬스트 나이츠의 명예를 걸고 꼭 잡아내겠다는 거창한 다짐 을 한 뒤에 전하가 떠나자 근처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카론 경을 부르는 것이었다. “카론 경. 부기사단장인 자네에게 명예로운 임무를 내리도록 하지. 왕궁 전체를 이 잡듯이 뒤져서 범인을 찾아내도록 하게.” “왕궁 전체를... 말입니까?” “그래! 속속들이 뒤져서 범인을 찾아내! 못 찾으면 만들어 내서라도 잡 아와! 만약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네의 수사력을 의심하겠네. 아 그리고 범 인을 잡으면 전하께 알리지 말고 먼저 내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블리히는 그런 속 빤히 보이는 명령을 내린 뒤에 부하들과 함께 사라졌고 남은 자는 카론 경 혼자뿐이었다. 쳇. 블리히의 머릿속이 눈에 훤히 보인다. 즉, 못 잡으면 카론 경의 책임이고 잡게 되면 자신의 공으로 돌리겠다는 것 이 아닌가. 느끼한 외모만큼이나 치사한 인간이다! 하지만 카론 경은 얼굴 색 하나 안 변하고 몇 명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은 뒤에 묵묵히 머리가 잘려나간 왕궁의 명물, 순금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는 얼마나 끓고 있을까. 이럴 때는 화 내도된다고요, 카론 경! 나는 슬며시 카론 경 곁으로 다가가 같이 순금상을 바라보았다. “헤헤. 이런 것도 사회 환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넨가.” 카론은 날 흘낏 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이 사람만큼 사교성이 없는 인간도 드물 것 같다. 실력으로 치면 기사단장이 되고도 남아야 할 사람인데 조금도 융통성이 없으니 블리히 같은 정치꾼에게 미움 받고 있는 거라고. “어때요? 누가 범인인지 짐작이 가세요?” “범인은 제법 검을 쓸 수 있는 자다. 절단면을 보니 사다리도 없이 뛰어 올라 장검으로 단번에 목을 잘라냈다.” 흐음. 굉장하네? “그리고 목격자들은 밤이라서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큰 키에 긴 다리를 가진 복면을 쓴 남자라고 한다. 단독범인 것 같군.” 이 정도만 되도 수사망이 꽤 좁혀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는 해도 그 정도만으로 범인을 잡아낸다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내가 물었 다. “정말로 이 넓은 왕궁을 다 조사하실 건가요? 일손이 필요하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필요 없다.” 카론은 딱 잘라 말하며 자리를 떴다. 뭐야! 기껏 염려해 준 사람한테 저 런 매몰찬 태도는! “하아. 대체 누가 저런 것을 훔쳐갔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광장을 떠났다. 9. 다시 리더구트로 돌아왔을 때, 이곳의 화제도 단연 '누가 가져갔나, 임금 님의 머리'였다. 이러다간 한동안 유행어로 자리 잡을 것 같군. 내가 테라 스에 들어오자마자 식사 중이던 루이 경이 물었다. “오오. 미온 경. 왕궁 분위기는 어때?” “카론 경이 직접 수사하기 시작했어요. 훔쳐간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 지만, 잡히면 곱게 죽진 못할 것 같군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고 곧 시종들이 만들어 온 홍차를 집어 들었다. 대체 이 리더구트의 시종들은 분명 집안 어딘가에 숨어 사는 것 같긴 한데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음식이나 차를 내주고 스르륵 사라지는 통에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다. 현재 꽤 한가해 보이는 것 같은 루이 경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내게 다가 와 물었다. “혹시 말이지, 그 도둑 잡은 사람한테는 뭔가 포상이 있을까?” “글쎄요. 전하께서 무척 흡족해 할 테니까, 귀 한쪽 정도 떼어 줄지도?” “좋아! 그럼 찾아볼까! 도둑 잡아서 한밑천 마련해 보자!” 어째서 들 떠 있는 거야, 이 사람. 랑시 역시 괜히 신나긴 마찬가지였다. “나도 할래! 나도! 와아아! 도둑 잡자!” 순간 오늘은 브리핑할 거리가 없는지 오전부터 나무늘보처럼 소파에 축 늘어져 있던 키스 경이 팔을 흐늘 흐늘 들어 올리며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우리는 바쁜 몸이에요.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오.” 키스 경, 그런 꼴로 말해봐야 설득력이 전혀 없어! 보는 나까지 늘어지고 싶으니까 냉큼 일어나라고! 그때 이상하게 왠지 불안한 표정의 쇼탄 경이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속삭이는 것이었다. “미온, 잠시, 시간 있어?” 10. 루이가 룸메이트로 있는 쇼탄 경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쇼탄은 침대에 털 썩 주저앉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싶어서 내가 물 었다. “저 그러니까 무슨 일로... 흐어억!!!” 순간 침대 밑에서 굴러 나오는 황금의 머리통을 보자마자 난 심장이 내려 앉는 것 같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이 머리는 분명! “뭐, 뭐, 뭡니까! 이 금대가리는! 어, 어, 어째서 이게 여기에!!” “......이제 어쩌지?” 멋지게 그을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쇼탄은 발바닥으로 임금님의 머리 를 이리 저리 굴리며 중얼거렸다. “잡히면 난 죽겠지?” “쇼, 쇼탄 경. 어째서 이런 걸 훔친 겁니까!” 범인은 쇼탄 경. 범인은 쇼탄 경. 범인은 쇼탄 경.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 리고 있었다. “그게... 돈이 없어서. 최근 빚에 쪼들리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제 술에 많이 취했고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이 금덩어리를 껴안고 있 더라고.” “.....” 전날 기억이 안 나도록 술을 왕창 마시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옆에 난생 처음 보는 금발 미녀가 자고 있었다든지, 하는 일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자 고 일어나니까 옆에 임금님의 머리가 있다는 경우는 처음 듣는다. 결국 돈 이 궁하던 차에 술에 취해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로군. 하지만 어떻게 취중 에 잡히지도 않고 이런 엄청난 도둑질을 할 수 있냐는 의문은 '물러설 곳 이 없는 극빈자의 의지'라고 둘러댄다고 쳐도 문제는... 왜 이런 흉흉한 걸 집구석으로 가지고 들어온 거냐고! 쇼탄은 자기도 도무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넋두리 를 했다. “이, 이건 돈이 필요했던 내 무의식이 저지른 거야! 난 이러고 싶지 않 았다고!” “불행하게도 왕실은 쇼탄 경의 무의식만 처벌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카론 경 앞에서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실은 저의 또 다른 인격이 저질 렀답니다.'라고 말해봐야 카론으로부터 '알 바 아냐. 자네도 자네의 그 다 른 인격도 사형이네.'라는 얼음장 같은 대답만 들을 것이 뻔했다. 쇼탄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루이 그 놈은... 이걸 보면 날 신고하고도 남을 놈이고, 랑시는 아무 생각도 없고 크리스는 동정해 주겠지만 그것뿐이고... 키스는...” “반으로 잘라서 나눠 갖자고 하겠죠?” “응.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동시에 한숨을 뿜었다. 결국 리더구트에 남은 기사들 중에 이 사실을 토 로할 만한 사람이 나뿐이었단 말인가. 풍요 속의 빈곤이로고. 이럴 때 냉 정하고 현실적인 루시온 경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는 현재 지명 중... 아니야, 그 사람은 조금도 동정하지 않는 표정으로 기사단에 피해를 주지 말고 빨리 자수하라고 말할 사람이다. 이건 자수해봐야 용서 받을 상황이 아니라고! “이제 어쩔 거에요? 잡히면 죄송합니다, 라는 말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 고요.” 보나마나 사형이다. 총살이냐 독살이냐 하는 디테일한 문제들만 남아 있 을 뿐이다. “그, 글쎄. 녹여서 밀반출 시킬까?” “리더구트에 용광로가 없다는 점이 유감이로군요.” 기각! 나랏님의 금옥두(金玉頭)를 불구덩이에 녹이다가 들키는 날엔 가장 잔인한 처형방법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분명 임금님께서 뜨겁게 달궈진 철지팡이로 친히 쇼탄 경의 등짝 을 지져주실 것 것이다. 그러한 전하의 은총을 하사 받고 싶지 않은 이상 이 머리통은 최대한 원형을 보존해서 전달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그 전달 방법이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문 잠그는 걸 깜빡하다니! “숨겨!!!!!” 그 즉시 쇼탄 경과 내가 그 거대한 금머리로 몸을 날려 감추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일이었다.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오오?'라는 활짝 웃는 얼 굴로 문을 연 키스 경은 방 안의 상황을 보곤 웃는 낯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필사적으로 금덩어리를 감추려고 나와 엉켜 있는 쇼탄은 '쇼넨베르트. 향년 24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키, 키스 경. 이건 말이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 가난한 무의식이 저지른 일로...” “난 못 봤어요! 몰라요!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잡아!!!!!” 나와 쇼탄은 두 눈을 가리고 도망치는 키스에게 뛰어가서 입을 틀어막고 이곳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키스가 마구 반항하자 주먹으로 배를 때려 주기도 했다. 잠시 소란이 진정된 뒤에 허탈한 표정으로 담배를 문 쇼탄이 자포자기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키스 경... 당신도 이제 공범이야.” “어, 어째서 저도 공범입니까아!”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 부하 기사의 잘못은 기사 단장의 잘못!” 쇼탄은 어지간히 혼자 죽긴 싫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동귀어진한다 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우중충한 표정의 사내 셋이 한 방에 모여 활짝 웃는 전하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을 밖에서 시 종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서 저렇게 불쑥 불쑥 나타나는 걸 까, 저 시종들은. “카론 샤펜투스 부기사단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상황은 악화 일로였다. “키스 경! 당신이 좀 돌려보내 봐요!” “왜 내가 해야 되나요오!” “그거야 당신이 카론 경과 친하니까... 에이이! 궁시렁 거리지 말고 당 장 돌려보내라고!” 나는 키스를 문 밖으로 걷어차 버렸다. 이미 카론은 이곳 복도까지 올라 온 상황이었다. 밖에서 키스 경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카, 카론 경. 왔어요오? 수사 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내려가 서 차라도 마시죠?” “뭐냐, 키스. 왜 표정이 그렇지?”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아! 여기에는 임금님의 머리 같은 것은 절대 없 어요!” 차라리 여기 있다고 광고를 해라. “비켜라. 키스.” “와아앗! 가지 말아요! 거기만은!” 덜컥! 망할 놈의 키스가 협조해 준 덕분에 카론 경은 우리가 숨기기도 전에 방 문을 열 수 있었고 문을 열자마자 거대한 금덩어리를 부여잡고 우왕좌왕하 는 우리들과 카론 경의 눈이 마주쳤다. 3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상 황을 파악한 카론 경의 눈이 커졌다. “너희들...” 따아아악!!! 순간 청명한 타종음이 들리며 카론 경이 스르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부지깽이를 든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키스가 서 있었다. 우리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키스가 들고 있던 흉기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주저앉았다. “아아아. 나도 모르게 그만...” 내가 못 살아아아아!!! “이, 일단. 숨기자.” 쇼탄과 나는 혼절한 카론 경을 질질 끌고 들어온 뒤에 문을 잠갔다. 키스 의 전폭적인 도움 덕분에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Blind Talk 아 그리고 이 글은 읽으면서 가볍게 웃어줬으면 좋겠다... 는 기분으로 쓴 글입니다. 그런 요소들에 집중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때로는 과장도 심 하지요. 앞으로 이야기는 점점 더 심화되고 때로는 진지해 질 때도 있겠지 만... 어쨌든 엔딩의 마지막 문장을 적는 순간까지 마이페이스로 쓰고 싶 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백랑전설은 안쓰고 SKT만 쓰냐... 는 질문에는 '물론 둘 다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라는 변명으로 답하겠습니다. 다만 SKT는 현재 미리 써둔 분량들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착실한 연재가 (당분간) 가능한 것 뿐이 겠지요. DEEN의 혼자가 아니야, 를 들으며 (최근 90년대의 노래들을 듣고 있는 중.)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11. 의문의 대도(大盜)가 임금님의 금옥두를 탈취! 그리고 범인과 그의 공범 들은 수사 일일 만에 수사 총책임자를 폭행 후에 납치, 감금! ...이상이 현 사건의 진행 상황이다. 그리고 어째서 이런 대 흉악범죄에 내가 연루 되게 되었는지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암울한 꿈에 젖은 나와 쇼탄과 키스는 온몸이 묶이고 재갈까지 물린 채 정신을 잃은 카론을 퀭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활 짝 웃는 표정의 임금님 머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 이 되어 버린 것일까. “왕실 보물 절도, 국왕모욕, 요인 납치 및 감금... 이런 죄를 한꺼번에 지은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쇼탄의 말에 키스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 어쩌자고 이런 무지막지한 짓을 저질렀습니까아.” “시끄러! 지금 당신이 상황을 계속 악화시키고 있잖아!” 내 아주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어! 그때 카론이 신음소리를 내며 눈가를 움찔거렸다. “깨, 깨어났다.” 순간 정신을 차린 카론 경이 날카로운 눈매로 우리들을 쏘아 보았다. 이 런 사람이 화난 표정 지으니까 정말 무섭다. 재갈만 안 물려 있었으면 분 명 '네놈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라고 소리쳤을 표정이다. 하지만 긴장감 이라고는 전혀 없는 키스는 카론 앞으로 다가가며 씨이익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었다. “우후후후. 이렇게 된 이상 죽어줘야겠어, 카론 경." 괜히 자극하지 마! “카론 경. 소리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재갈 풀어 줄께요오.” 카론 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입이 자유로워진 카론 은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너희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고 있나.” 알다마다. 이러다가 잡히는 날엔 희대의 얼간이들로 왕실비사에 기록되겠 지. “어서 날 풀어라.” “풀어주면 우릴 죽이지 않을 건가요?” “물론 내가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사형을 당하겠지.” “......그렇게 말하고 풀어주길 바랍니까?” “거짓말을 하긴 싫다.” 정말이지 융통성 제로의 인간이라니까. 침대에 걸터앉은 키스 경이 갑자 기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카론 경. 나는 쇼넨베르트 경을 죽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잠깐의 실수 로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뉘우칠 기회도 없이 개죽음을 당하게 할 수는 없 어요. 무엇보다 전하의 천박한 어리광에 내 부하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키스의 표정에는 깜짝 놀랄 만큼 존재감이 넘쳤다. '전하의 천박한 어리광'이라니, 가끔 키스는 무서운 말을 입에 담을 때가 있다. 카론이 대꾸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거냐.” “카론 경, 우릴 도와줄 수 있지요오?” “거절한다.” “그럼 묻어버릴 테야!!” “.....” 아까 존재감 어쩌고 했던 말 취소. 어리광 부리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 나는 헛기침을 하며 카론과 다시 네고시에이션을 시도했다. “저어. 카론 경. 만약 이 머리가 아무 탈 없이 제 자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협조해 주실 수 있으세요?” 카론은 이 제안에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무슨 방법 으로?'라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리고 내 작전을 모두 들은 이들의 표정 은 경악으로 바꿔 있었다. 키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그, 그런 유치한 방법은 뭔가요오!” “고상함까지 유지하면서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재주는 없네요!” 지켜보기나 하시라고! 이 급조된 '위기탈출 드림팀'의 작전 회의 끝에 작 전의 첫 번째 목표는 엘리트 법무대신 위고르 공으로 낙찰되었다. 12. “누구냐! 아, 아니! 카론 경! 근무 중 이상 무!” 깊은 밤이 되자 카론 경을 앞장세운 우리 드림팀은 시커먼 가마니에 황금 머리통을 집어넣고 위고르 씨의 저택으로 출발했다. 밤에도 위병들이 쫙 깔 려 있는지라 이런 의심만점의 가마니를 들고 다니면 당장에 수색을 당하겠 지만 다행이도 수사 책임자인 카론 경은 모든 수색요구를 튕겨낼 수 있는 강력한 특권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후후, 수사를 책임지는 자가 공범일 줄 은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 “별... 문제는... 없나.” 창을 바짝 들고 경계를 붙인 위병에게 카론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 다. 어떤 범죄도 묵인하지 않는 대쪽같은 청렴결백의 대명사 카론 경이 이 런 중범죄에 협조하기 있으니 기분이 찢어질 지경일 것이다. 카론의 얼굴 에는 싫어 죽겠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배신을 하진 않았다. 뭐 꼭 뒤에 서 있는 키스가 단도를 꺼내 카론의 등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 라고... 믿고 싶다. “의심되는 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위병은 우리들을 흘낏 보며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이 늦은 밤에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기밀이다.” “옛!!” 그럼. 기밀이고말고. 위병은 기사의 모범 같은 카론의 모습에 감동 받은 눈빛으로 경계를 하며 주저 없이 길을 비켜주었고 우리들은 카론의 도움으 로 일차 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조금 걸어가던 카론이 걸음을 멈춰서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큭... 어째서 내가 이런 일에 동조를 해야 하는 거지.” “어머나. 이미 같은 배를 탄 동료끼리 그런 말씀하시면 정말 서운하지요오.” 키스가 단도 끝으로 카론의 등을 쿡쿡 찌르며 살갑게 말했다. 히죽 히죽 웃는 저 위험한 미소는 분명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다! 키스, 이 양반은 긴장감이라는 것을 어디다 팔아먹은 것일까. 악당이 되었으면 크게 한탕 해먹었을 위인이다. “무거우니까... 빨리 좀 가죠?” 금덩어리가 들어있는 가마니를 들쳐 업은 쇼탄 경이 낑낑거리며 투덜거렸 다. 당신이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오지만 안았어도 지금 이 난리를 피울 필 요 없단 말이야! “이번 한번 뿐이다.” 카론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곧 다시 위고르 씨 저택 행 열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가는 도중 세 번 이상의 검문을 받았지만 역시 카론 경을 보자 모 두 길을 비켜 주었다. 위고르 공의 저택은 왕궁 남쪽에 있는데, 고위 관리 상당수가 왕궁 내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 놀랄만한 사 실도 아니다.(그 무서운 오르넬라 성녀님의 궁전도 왕궁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위고르 씨의 저택에 도착하자 우리들은 근처 수풀 속에 숨었다. 내가 말 했다. “자 그럼 갖다 놓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금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검은 가마니를 들고 살금살금 저택 앞에 놓고 다시 돌아왔다. 쇼탄은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런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걱정 말아요. 병법의 기초는 허를 찌르는 단순함에서 시작합니다. 뭐, 내가 한 말은 아니지만.” 전대미문의 병법가로도 유명한 콘스탄트 왕국 '임모탈' 제7무장전투여단 장 키르케 밀러스 님이 내게 해준 말이다. 카론 경은 어떻게 그런 말을 알고 있는지? 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지 만 키르케 님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해봐야 이번에도 농담하지 말라는 오해 나 받을 테니까 입 다물기로 하자. 예측컨대 출세욕이 강하고 야심만만한 위고르 공은 분명히 누구보다 부지 런한 일벌레이리라. 곧 새벽이 밝아오자 예상대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나 온 자는 금발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위고르였다. 그는 저택 앞의 가마니를 보며 ‘이게 뭐지?’라는 의심스런 눈빛으로 툭툭 차보고 있었다. 그리고 위고르는 그 가마니를 열어보곤 흠칫! 놀라며 그 자리에 굳어 있 었다. 그 표정은 마치 곧 폭발할 폭탄을 발견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때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풀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이야아아! 위고르 공께선 아침 일찍 일어나시는군요!” “너, 너는 그 어전회의 때 봤던 아이히만 공의 똘마니!” 똘마니라니!! “우.연.히. 이곳을 지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당황하 시는 거죠?” “아, 아니다. 아무 일도!” “그런데 그.몹.시.수.상.쩍.어. 보이는 가마니는 뭔가요? 저도 한번 볼 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위고르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그 가마니를 뒤에 숨겼다. 후후, 출 세를 인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이 그런 위험한 것을 들키면 안 되겠지. 그 때 뭔가 이 부자연스런 상황을 눈치 챈 위고르 씨가 내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 이 자식! 그리고 보니까 날 함정에 빠트리려고 이런 짓을 했구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보다 그 가마니 안에 뭐가 들었기에 그러시나 요?” “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위고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흐렸다. 그래. 당황 해라. 더욱 더 당황하고 궁지에 몰려 인생 파멸에 대한 공포를 느껴라, 위고르!(물론 이 사람에게 나쁜 감정은 없다.) 위고르가 날 쏘아보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이 따위 얄팍한 함정에 빠질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곧 카론 경을 불러서 공정하게 수사해 달라고 명령하겠다!” “아아아, 그러세요?"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풀 쪽을 바라보았다. "카론 경. 위고르 공이 찾으시는데요?” 그러자 카론 경이 수풀에서 불쑥 일어섰다. 미안해요, 카론 경. 그런 무 서운 얼굴 하지 마세요. 위고르는 바닥에 나자빠질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 랄 수밖에 없었다. 수사 총책임자 카론 경이 고개를 돌린 채 정말로 더듬 더듬 말했다. 그렇게 대놓고 싫은 표정 좀 짓지 마세요! “그... 가마니...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이, 이것들이! 모두 작당을 하고 내 인생을 망치려고! 안돼! 어떻게 여 기까지 올라왔는데!” 카론마저 '한패'라는 것을 확인한 위고르 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때 내가 정중하게 위고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위고르 공. 왕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충신께 이런 결례를 범해서 죄 송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난한 기사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벌어진 일, 부디 동참해 주시겠습니까?” “도, 동참?” “한 배를 타신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위고르는 역시 머리회전이 빠른 자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 “물론입니다.” 나는 환하게 웃었고 그 무렵 키스는 잔디에 누워 '내일은 당신도 공범'이 라는 제목의 즉흥곡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에이이! 그 따위 불길한 노래 좀 부르지 마! 남은 힘들어 죽겠구만! 뭐 아무튼 좋다. 위고르라는 권력자를 끌어들었으니 이제 작전의 절반은 성공이다. 그리고 위고르가 드림팀에 합류한 이후 가마니를 든 위험한 열 차는 다음 타겟을 향해 출발했다. 위고르가 고집한 다음 목표는 그의 정 치적 라이벌 아이히만 대공이었다. -Blind Talk 방금 전... 점심으로 커다란 훈제연어 한조각을 요리해서 새콤한 화이트 소스를 뿌려 먹었습니다.(핑크빛의 연어는 꽤 싸고 맛있기 때문에 가끔 시장에 가서 사오곤 합니다.) 그런데 항상 먹고 나서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깔끔하게 먹어도 훈제 연 어 특유의 향취가 몸에 들러붙기 때문에, 현재 냄새 덕에 곤욕입니다. 이게 얼마나 지독하냐면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손의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 지 않고 실수로라도 옷에 연어조각이 떨어지면 금방 그 옷에서 냄새가 아 주 진하게 풍기기 때문에 세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맛있는 식사를 위한 대가로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저번 편은 커그홈에 깜짝 놀랄 만큼 많은 리플이 달려서 놀랐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가슴 아픈 리플은 사양합니다. 하하. Tom Jones의 Delilah를 들으며 (딜라일라. 올드팝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멋진 노래죠. 조영남씨의 번안곡도 멋지지만 역시 원곡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이토록 슬프지만 강 렬한 가사와 왈츠풍의 리듬이 어울리는 곡도 드물지요. 세익스피어의 비 극을 다이제스트로 만든 듯한 가사를 음미하며 자주 듣고 또 가끔 노래방 등에서 부르곤 합니다.) 제11장 : 전국(戰國) 14. 디온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알세스트는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급히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의 젖은 머리에선 미처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톡톡 소파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몇 분 만에 스르륵 눈을 떠 디온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 카단 칼라일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동명이인은 아니겠지요. 칼라일이라는 흉성(凶姓)을 가진 다른 자가 있을 리야 없으니까요.” 디온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쟁을 잘 모르는 시륜마저도 칼라일 가문에 얽힌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누군들 알스탄 제국 최악의 적 수였던 칼라일 왕국을 모를까. [...형.] 알세스트의 마음의 일부를 공유하는 시륜은 알세스트의 마음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세스트에게도 카단 칼라일과의 악연(惡緣) 은 상처였다. 그가 칼라일 왕국과 싸운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었다. 바르타 황 제가 서대륙 통일을 주장한 것도 바로 칼라일 왕국의 잔혹한 통치 때문이 다. 당시 알스탄 제국과 거의 비등한 군사력과 막강한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던 칼라일 왕국의 통치자 마랄은 '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로 뛰어 난 왕이며 스스로 패배를 모르는 전사였지만, 그의 가혹한 통치 방법은 바 르타 황제와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노예들을 짐승 이하로 취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능력이 없는 아들 을 부모가 죽이는 일은 쓸모없는 쓰레기를 소각하는 것과 같아 죄가 아니 라 말하던 마랄 대왕은 사람들 위에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며 절대적인 지지와 악마의 화신이라는 악명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칼라일 왕국의 군대가 알스탄 제국의 한 대도시를 급습해서 사 람들을 노예로 삼고 아이와 노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아무런 명분도 이유도 없는 침략이었지만 마랄은 '알스탄 제국은 인간이 아닌 가축들의 집단이며 눈앞에 보이는 가축을 도살하는데 이유 따윈 필요 없다.'라고 말하며 태연하게 학살을 자행했다. 그 이후 마랄 대왕은 '선혈 의 악몽'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바르타는 그 즉시 칼라일 왕국에 선전포고 를 하고 대군을 파견하여 그 도시를 수복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사실 그건 폐하의 실수였어.” 알세스트는 그때를 회상하며 냉정하게 읊조렸다. 분노한 바르타 황제가 파견한 제국군들은 마랄 대왕이 철저하게 준비해 놓은 포위망에 걸려 몇 번이나 대패했고 항복할 자들마저 모두 눈을 멀게 해서 노예로 쓰거나 잔 인하게 살해했다. 뛰어난 병법가인 마랄은 단순한 학살극처럼 위장해서 바르타 황제를 분노 하게 한 뒤에 냉정함을 잃은 제국군을 마음껏 유린했던 것이다. 불패라고 불리던 제국군이 여섯 번이나 참패하자 알스탄의 사기는 꺾일 때로 꺾이게 되었고 기세등등해진 칼라일 왕국은 아예 알스탄의 제도 아바다바트를 노 려 바르타 황제의 목숨을 빼앗아 가려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당시 알세스트는 제1군 사령관 라르엔의 휘하에 있던 만기장(萬騎將) 이었다. 사실상 이제는 제국 최강이라는 제1군이 직접 나서야 할 상황까지 왔으나 바르타 황제는 제1군을 투입하는 것에 주저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 들 알세스트가 있는 부대가 잔인한 마랄과 싸우다가 알세스트가 포로가 되 기라도 하는 날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랄로서는 황제의 아들이라는 더없는 전리품을 얻는 것이고 짐승 같은 칼라일의 군대에 잡힌 알세스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뿐이었다. 제국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흑랑 알세스트마저 잃게 된 다면 사기는 물론 제국 전체의 위상이 일순간에 무너질 일이었다. “그때 폐하가 선택한 전술은 지금도 많이들 거론되고 있지요. 열여덟 살 짜리 어린애가 짜낸 방법이라고 하기엔 너무 대담했습니다.” “그 방법밖엔 없었어.” 디온의 질문에 알세스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알세스트는 그때 바르타 황제의 허락도 없이 독단으로 군을 몰고 칼라일 왕국의 장악한 도시로 진 격했고 그곳에서 그가 처음으로 선택한 병법은 ‘패배’였다. “정말 그토록 비참하게 패배하기도 쉽지 않지요.” “그거 칭찬이냐 욕이냐?” 말 그대로 알세스트가 이끈 기병들은 강력한 칼라일 왕국의 군대를 상대 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꼴사납게 도주했고 알세스트 자신도 거의 잡 힐 뻔 했을 정도의 참패였다. 기상천외한 병법으로 칼라일 왕국을 제압하 리라 여겼던 제국군은 그런 창피한 모습에 혀를 찼고 게다가 알세스트는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이 자신의 부하들이 형편없었다고 마구 투정을 부리기까지 했다. 결국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린 알세스트는 몇 번이나 무모한 돌격을 명령했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형편없이 도주했다. 그런 일이 몇 달이나 반복되자 칼라일 왕국에서는 알세스트를 병법의 기 본도 모르는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알스탄 제국군 내부에서도 '작전에 방해만 되는 알세스트를 그만 황궁으로 돌려보내라.'라고 하면서 원성을 낼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문제는 마랄 대왕이었지. 그 놈이 직접 지휘를 했다면 내 작전이 먹혀 들어갔을 리가 없어.”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알세스트의 명예가 실추되고 늑대는커녕 고양이도 아니라는 비웃음이 지배적이었을 때도 수많은 싸움을 겪어본 마랄 대왕은 알세스트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잔혹한 왕이었지만 상대를 얕보는 법이 없었다. 그 총명한 알세스트가 갑자기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 덕분에 알세스트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디온이 실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서 잡히셨습니까?” “마랄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려면 그 방법밖엔 없었거든.” 알세스트가 방긋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말 그대로 알세스트는 황제에게 서 버림 받고 혼자 독립부대를 이끌고 어설픈 야습을 노리다가 칼라일 왕 국의 요격부대에게 생포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마랄 대왕도 '이 놈은 정말 멍청이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리 작전이라지 만 지고지순한 황자가 직접 미끼가 되어 잡히는 경우는 없었다. 누굴 위한 군대인가? 다 황제와 황족을 위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제국의 지 배자가 일부러 잡히는 일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미치지 않은 이상 구상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때 곧바로 처형당했다면 어쩌실 뻔 했어요?” “그랬다면 지금 이 향기로운 차를 맛보지 못했겠지.” 은발의 황제는 코끝으로 차향을 음미하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시륜은 그 말을 들으며 기가 찬다는 듯이 신음소리를 냈다. 전부터 자신의 형이 상당히 위험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알세스트가 칼라일 왕국에 잡혔다는 말은 일순간에 전 대륙으로 퍼졌고 칼라일 왕국은 의기양양하게 자신들이 대륙의 패자임을 장담했다. 그리고 그런 칼라일 왕국으로 제1군 사령관 라르엔이 대군을 이끌고 노도처럼 돌 진해 들어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알세스트가 이 작전을 구상했을 때 그와 상의한 사람은 아버지이자 황제 바르타와 제1군단 사령관 라르엔, 그리고 키렌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부대 뿐이었다. 그는 칼라일 왕국의 허를 찌르기 위해 아군에게조차 비난을 받 을 것을 각오했고 스스로 목숨을 걸고 미끼가 될 것을 자청했던 것이다. 마랄 대왕은 최강이자 최악의 병법가지만 단 한 가지 허점이 있다. 그것 은 바로 왕족은 누구보다 고귀한 지존이며 세상 만물은 왕족을 위해 존재 해야 한다고 믿는 그의 사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고귀한 혈통을 가 진 알세스트가 그런 모욕을 감수하겠다고 자청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예상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규모의 야습을 감행한 라르엔은 처음에는 알세스트가 잡혀 있는 도시를 공략하지 않고 먼저 그 도시와 보급로가 이어져 있는 다른 칼라일 왕국의 거점들을 빠르게 접수한 뒤에 알세스트를 구출하기 위해 진격했다. 다른 때라면 칼라일의 강군(强軍)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겠지만 그때는 승 리감에 도취되어 완전히 경계가 흐트러졌기 때문에 라르엔은 순조롭게 작 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세스트는 마랄 대왕이 외교적 압박의 수단이 되는 자신을 당장 죽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상대로 알세스트는 죽지 않았지만 잡힌 이 후부터 굴욕적인 심문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걸 꾹 참으며 버티고 있던 알세스트는 라르엔의 군대가 들이닥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감옥을 탈출 하고 키렌과 부하들도 풀어준 뒤에 곧장 지휘를 맡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진 것에 기뻐하는 것으로 끝났 겠지만 알세스트는 꾹 참았던 투기를 드러내며 그대로 부대를 이끌고 칼라 일 왕국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고 그날 이후 일주일 만에 허를 찔린 칼라일 왕국을 상대로 영토의 삼분의 일을 점령하는 대성과를 이뤄냈다. 또한 그 대승은 칼라일 왕국와 알스탄 제국의 관계를 단번에 역전시키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당시 알세스트의 '작전상 패배'는 실제 패전으 로 기록되지 않고 도리어 뛰어난 병법의 하나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그런 작전을 쓸 정도로 대범한 왕족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말이다. 디온 역시 차를 홀짝거리며 그대의 전장을 상상했다. “그래서 마랄 대왕이 직접 나선 건가요?” “다시는 상대하기 싫은 적이었지만 선혈의 악몽이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 은 놈이었지. 무엇보다...” 알세스트가 눈가를 찡그리자 디온이 그의 심정을 간파한 듯 말했다. “카단 칼라일 말이로군요.” “그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야.” 카단은 마랄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가장 뛰어난 자를 자식으로 삼아 대를 잇겠다고 공헌한 마랄은 수백여 명의 아들감들을 모아 키웠고 조금이라도 실망스럽다고 여기면 가차 없이 죽였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그의 유일한 아들이 되어 왕위계승권을 일찌감치 물려받은 자가 바로 카단 칼라일이었 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15세였다. “18세의 황자와 15세의 왕자가 전장에서 혈투라... 이거 뭔가 대단히 낭 만적인데요?” “낭만이긴 하지. 피의 낭만이었지만.” 알세스트가 곧장 대답했다. 카단은 결코 열다섯 살의 소년으로 보이지 않 는 재능을 가진 자였고 그가 성장한다면 아버지 마랄보다 더 위험한 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왕국이었다면 국토의 삼분의 일을 빼앗긴 불리한 상황에서 흑랑 알세스트를 상대로 반년이나 저항하는 저력을 보이진 못했 으리라. 또한 카단은 방어에만 머물지 않고 몇 번이나 군대를 우회시켜 알 스탄 제국에 위협적인 타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카단은 알세스트가 있는 곳으로 정면으로 뚫고 들어와 알세스트의 목숨을 노린 적도 있었다. 그의 나이가 어리고 승장(勝將)이 되지 못해 전쟁사에 크게 기록되진 않았 지만 알세스트의 평에 따르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숙적’이었다. 반년이나 투쟁을 벌여 알세스트는 마랄 대왕과 그의 아들 카단을 칼라일 왕국의 수도로 몰아세울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그들은 알세스트를 상대로 조금도 사기가 꺾이지 않는 저항을 벌였다. 마랄과 카단이 직접 지휘하는 칼라일의 수도는 그 자체가 거대한 철옹성(鐵甕城)이었고 그 안에는 700만 페트라 급 서버인 사에라리온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알세스트라 도 단시간에 함락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때 나선 자가 바로 나라카였다. “나라카가 직접 나서겠다고 말했던 가요?” “그래. 이런 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거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 더군.” 알세스트가 소파 뒤로 목을 젖히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사실 그전까지 알세스트는 나라카를 비공식적인 참모로 두긴 했어도 무장 으로서는 신임하지 않았다. 해괴한 것을 싫어하는 알세스트의 성격 때문이 리라. 그러나 나라카가 투입되자 상황은 잔혹하고도 간단하게 종료되었다. 독은 독으로 제압하라고 했던가. 나라카가 흑마법을 시전하자 곧 하늘에서 유황 냄새가 나는 검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석유 같은 비에 맞은 모든 생명체는 그 즉시 썩어가기 시작했다. 칼라일의 노더들 역시 어떻게 막아 야할지 알 수가 없었고 그 마법을 중화시키려던 칼라일 왕국의 노더들은 모두 온 몸의 살점이 보이지 않는 벌레에 갉아 먹히는 듯 참혹하게 떨어 져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갔다. 나라카는 병사들은 물론 보통 시민들마저 무차별적으로 공격했고 그 이후 칼라일의 수도는 지금까지도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오염지대가 되었다. 성안에 남아 버티고 있던 마랄 대왕은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말을 탄 채 칼을 뽑고 그 온몸을 녹이는 비를 맞으며 성 밖으로 뛰쳐나왔 다. 육신이 썩어들어 감에도 야수 같은 비명을 지르며 제국군의 진지로 혼자 뛰어 들어오던 마랄은 '선혈의 악몽'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끝까지 알세스트를 노려보며 고슴도치처럼 화살에 온 몸이 뚫려 죽어갔다. 마랄이 죽은 이후 나라카는 마법을 멈췄고 알세스트는 수도의 왕성 안으 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곳의 옥좌실에는 왕족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칼에 베어 죽어 있는 시체들 속에서 열다섯 살의 카 단 칼라일만이 칼을 뽑은 채 피의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 들을 모두 죽인 뒤에 알세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알세스트를 흑 랑이라고 말한다면 카단은 그야말로 광기 서린 혈랑(血狼)이었다. “뭐라던가요? 카단이?” “시뻘건 눈으로 날 노려보며 말하더군. 언젠가는 내 목숨을 가져가겠다고.” “그래서 뭐랬습니까?” “그럴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 뭐.” 알세스트가 조금 불편한 표정을 드러냈고 디온 역시 굳은 얼굴로 알세스 트를 바라보았다. 시륜도 숨을 멈춘 채 알세스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 었다. 세 명 모두 카단 칼라일이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단 칼라일은 그 자리에서 내 손으로 죽였어.” 나직하게 말한 알세스트는 주먹을 꽉 쥐며 디온을 바라보았다. 디온이 알 세스트의 무언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라카가 되살린 것입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로서 는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알세스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카단에 대한 그의 감정은 공포 같은 것 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가 카단과 싸웠을 때 느꼈던 감정은 동정심이었다. 마랄이라는 잔인한 조련사의 손에 뽑혀 사육된 카단 칼라일에 대해서 알세 스트는 단순히 뛰어난 적수라고만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족을 스스로의 손으로 참살한 뒤 조련사의 옥좌에 앉아 알세스트를 기다리고 있던 카단의 붉은 눈동자를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알세스트는 자신을 그 토록 증오하는 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숨이 막혀 버릴 듯한 증오심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바로 카단 칼라일이고 알세스트는 그 자리에서 15세 의 카단을 분명히 죽였다. 그리고 그런 카단을 이기기 위해 나라카의 손을 빌려 칼라일 왕국의 수도 시민들을 몰살시킨 것, 그것은 알세스트에겐 상 처였다. 그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나를 증오하는 숙적을 무덤에서 꺼내 내가 키운 군대를 이끌게 해서 나 를 친다... 이건가. 나라카가 날 괴롭힐 생각이었다면 그 혜안에 박수를 쳐주겠어. 정확히 적중하셨군. 후후.” “감상에 빠지신 건가요?” “그럴리가. 단지 내가 죽인 자를 다시 본다는 것이 싫을 뿐이야.”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알세스트가 천천히 눈을 뜨자 복잡한 빛을 담은 안광이 번뜩였다. 디온은 증오 속에서 죽은 카단을 다시 꺼내 자신의 장기말로 쓴다는 나라카의 방 식에 알세스트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 괜찮아?] [아아. 술 마시고 싶군.] [마, 마셔도 돼. 오늘 정도는 참을게.] [웬일이야? 하지만 미안. 지금 술을 마시면 독이 될 것 같아.] 알세스트가 조금 몸을 비틀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피로가 몰려오 는지 늑대를 닮은 눈동자를 천천히 감으며 중얼거렸다. “디온. 카단의 원정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이미 첩보부대를 보냈습니다.” 디온이 담배를 피워 물며 대답했다. 나라카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상황은 지독해져 가고 있었다. 분명 카단 칼라일은 지금까지의 적 들과는 격이 다른 자다. 게다가 제2차 원정군의 군세는 알세스트와 사이릭 스의 전군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총명하고 대범한 디온으로서도 대체 무슨 작전을 짜야 할지, 당장으로서는 떠오르지 않는 그런 상황이 다가온 것이다. 15. 알세스트의 육체를 가진 알스탄 제국의 황제 나라카는 옥좌실에 앉아 자 신을 찾아온 자를 접견하고 있었다. 단신으로 나라카를 찾아온 자는 이미 은퇴해서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초로의 퇴역 장군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인사드리옵니다. 알세스트 황제 폐하.” 알스탄 장군들이 다 그렇듯이 아지즈라고 불리는 이 장군 역시 나이를 역 행하는 듯한 우람한 체구와 근엄함을 유지하는 자였다. 나라카는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은 그를 바라보며 알세스트의 목소리를 빌려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아지즈. 다시 군에 복귀하고 싶어진 거라면 환 영이다.” “그것은 아니옵니다. 이제 저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퇴물, 명예로운 제 국군의 미래는 제국의 젊은이들이 이어가는 것으로 충분하옵니다.” 그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즈는 그야말로 충성스런 무장이었고 하급 장교에서부터 시작해서 항상 알세스트를 보필하던 자였으며 자신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자 미련 없이 은퇴하고 은거를 택한 흠 잡을 길 이 없는 군인이었다. 제국에서 단 한명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황제의 옥좌에 앉아 있던 나라 카는 그런 그를 굽어 내려보며 물었다. “훌륭하구나. 그러면 군을 떠난 은둔자가 이곳까진 무슨 일로 찾아온 것 인가.” “카단 칼라일이 제2차 원정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슬며시 고개를 들며 말하는 아지즈의 눈빛에는 혼돈감마저 서려 있었다. 나라카는 요사스런 눈동자로 그를 내려보며 즉시 대답했다. “그렇다. 적이었지만 사령관의 자리에 카단 만큼 어울리는 자는 없을 것 이다.” “하지만... 카단은 죽지 않았습니까. 이 늙은이는 더없이 혼란스럽사옵 니다.” “죽지 않았다. 그는 칼라일 왕국이 멸망할 때 생포되어 지금까지 지하 감옥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광기 어린 마랄의 아들은...” “그렇게 궁금하다면 지금이라도 배를 타고 가서 카단을 만나보도록 해라.” 나라카의 말에 아이즈가 몸을 움찔했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것이다. 초로의 퇴역 장군 아지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아지즈.” 나라카의 입가에 조소가 올랐다. 아지즈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 었다. “나는 알세스트 전하께서 카단의 심장을 꿰뚫을 때 그 분의 곁에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있는 너는 대체 누구냐.” “이 모습을 보고도 누군지 모르겠다는 건가? 오랜 시간 은거를 하다보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아지즈.” “네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알세스트 님이 아니다. 어서 썩 정 체를 밝혀라!!” 그렇게 고함을 내치는 순간 사방에서 근위대가 검을 뽑으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지즈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뛰어난 무장이었다. 가장 먼저 달려오는 근위대의 팔을 잡아 꺾어 빠르게 검 하나를 빼앗아 들며 커 다랗게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누구도 함부로 아지즈 근처로 다가올 수가 없었다. “이 요사스러운 놈!!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알세스트 님을 어떻게 한 거냐! 죽었던 마랄의 아들이 어떻게 되살아났다는 거냐!” 쩌렁쩌렁 외치는 아지즈의 노기에 찬 음성이 옥좌실을 커다랗게 울렸고 곧바로 옥좌실 안으로 미늘창과 장검을 든 수비병들과 궁수들이 쏟아져 들 어오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근위대는 단순히 미쳐버린 아지즈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근위대는 아지즈를 몇겹으로 둘 러싼 채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나라카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지즈, 왜 죽음을 자초하는 거냐. 그 검을 거두고 조용히 너의 은거지 로 돌아가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이 아지즈의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자극하지 마라! 네 놈의 배를 갈라 진실을 확인하겠다!” 아지즈는 곧바로 검을 꼬나 쥐고 나라카를 향해 뛰어 들었다. 앞을 막아 서는 두 명의 근위병을 단숨에 해치우며 도약한 아지즈였지만 곧바로 그의 등을 석궁의 화살이 뚫고 지나갔다. 균형을 잃고 바닥을 뒹구는 아지즈에 게 근위대가 몰려들어 칼을 들고 있던 팔을 잘라내고 허벅지며 등을 찔렀 지만 아지즈는 계속 나라카에게 향하는 계단을 기어오르며 뭐라고 중얼거 리는 것이었다. 그 지독한 모습에 근위대마저도 질려버렸지만 나라카는 태연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불쌍한 아지즈를 편하게 해줘라.” 그와 함께 근위대의 칼날이 지나가며 아지즈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계단 밑으로 떨어져 나가며 길게 핏줄을 긋고 있는 아지즈의 머리는 잘린 뒤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라카가 비웃음과 함께 중얼거 렸다. “인간이란 참으로 귀찮은 존재야.” -Blind Talk 여재가 자꾸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으음, 사실 백랑이나 SKT나 쓰는 속도 는 거의 같은데... SKT는 비축분이 있고 백랑은 없다는 것이 그 차이겠지요. 어쨌든 읽는 분들 너무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쓰는 사람으로 할 짓이 아니 니까 사죄의 의미로 두 편을 하나로 묶어 올립니다. 이번 편은 서술이 많아서 읽기 힘드실 수도 있지만... 가끔은 진행을 느릿 하게 해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에요. 현재 대립구조는 알세스트, 시륜 VS 알렉산더 사이릭스 VS 카단 칼라일 이겠군요. 그 능력으로 따지자면 누가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가 없는 상황 이고... 현재로서는 어쨌든 모두 나라카의 장기말입니다만, 빨리 빨리 그 장기판에서 뛰쳐나와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편이나 다음 다음 편 쯤 의외의 인물이 하나 튀어나오게 될 듯 합니다. 이번 3파전이 정리될 쯤에는 점점 스토리도 클라이막스로 올라가게 될 것 같네요. 슬슬 백희도 변신을 해야 하고... 여러모로 이거 머리가 복잡 하군요. 자 그럼 다음 편에서~ 아 저 그런데요, 저는 이번에 제게 온 메일을 모두 답장을 다 드렸는데 혹시 못 받으신 분 계신가요? 최근 제 메일계정이 엉망진창이라서 보내도 못 받으신 분이 있을 것 같아 걱정이로군요. 김도향 조영남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들으며.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13. “음?” 역시 부지런한 아이히만 공 역시 문을 열자마자 집 앞에 놓여 있는 가마 니를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깨끗이 넘긴 백발이 차가워 보이는 아이히만 은 말없이 가마니를 열어 보았고 그 안을 들여다보곤 역시 말없이 굳어 버 렸다. 그때 우리와 함께 수풀에 숨어 있던 위고르가 커다랗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우하하하하!! 아이히만 공! 그 가마니가 대체 뭡니까? 소인에게도 좀 보여...” 타아아앙!! “으아악!” 순간 위고르가 몸을 날리며 아이히만이 쏜 총알을 피했다. 세상에! 다짜 고짜 총을 쏘다니 대체 저 노인네는 대체! 엄청난 빠르기로 총을 뽑아 쏴 버린 괴물 할아범 아이히만이 무서운 미소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위고르. 이 불쌍한 친구. 이런 저급한 함정에 내가 꿈쩍이라도 할 줄 알았나?” “초, 총을 쐈어! 나한테 총을 쏘다니!” “자네를 죽인 뒤에 총성을 듣고 병사들이 도착하면 이 머리통을 가지고 도망치려고 해서 죽였다고 말하면 간단한 일이지. 가만히 서 있게.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 저런 미친 할아범! 설마 저 정도의 냉혈한인 줄은 몰랐다고! 나는 황급히 밖으로 튀어나가 아이히만 앞에 무릎 꿇었다. 아이히만이 날 보고는 얄밉 도록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말했다. “응? 엔디미온 군이 아닌가. 허허. 이거 뭔가 재밌게 돌아가는군.” “아이히만 대공. 결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죄송하면 목숨으로 갚아라.” “자, 잠깐만요! 그 총 좀 치우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결국 나는 아주 짧고 간결하게 어째서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야 했는지 를 설명했고 이윽고 아이히만은 곧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카론 군마저 설득했다 이거지? 의외로 자네, 어설프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수완이 있군. 마음에 들어. 자고로 일이란 그렇게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거야. 법이니 권위니 눈치 보다간 몸 사릴 줄이나 아는 능력 없 는 공무원이 될 뿐이라고! 밥벌레 같은 내 부하 놈들에게도 좀 본받으라고 하고 싶군.” 다, 당신 정말 이 나라의 괸리 맞습니까? 어쩌면 이 사람은 무정부주의자 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다 흘렀다. 그때 총성을 들은 병사들이 황급히 뛰어 왔다. “아이히만 공!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니 가보게.” “하지만 총성이 들렸는데...” “한번 더 듣고 싶지 않으면 가봐.” 아이히만이 확 쏘아보자 병사들은 흠칫하며 자리를 떴다. 역시 박력의 노 인네다. “그럼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러나 아이히만은 키스가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럴 수가! 저런 키스의 표정은 처음 봤다. 키스는 말 그대로 시뻘건 두 눈으로 죽여 버릴 듯 아이히만을 쏘아 보고 있었다. 그 적대감에 소름이 다 끼칠 정도 다. 어째서 이 둘의 관계가 이렇게 험악한 거지? 아이히만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난 범죄를 도와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 하지만 아무것도 못 본 것으 로 해두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 내 밑에 들어올 생각 없나?” “예? 아하하하. 그, 그건 좀... 무서운데요.” “흥. 아쉽군. 저 따위 못난 단장 밑에서 썩기엔 좀 아까운데 말이야.” 아이히만과 키스의 눈초리가 부딪쳐 불똥이 튀었고 곧 아이히만은 문을 쾅 닫으며 들어가 버렸다. 대관절 모를 일이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 기에 서로를 죽여 버릴 듯 대하는 것일까. 14. 결국 이 황금 대가리 열차는 며칠에 걸쳐 군무대신과 외무대신, 과학국장, 의학청장 등등을 거치며 착실하게 승객들을 불려나갔고 4일 후에는 왕궁 고위 관리의 삼분의 이 이상이 가담한 엄청난 범죄 커넥션이 되어 있었다. 쇼탄이 내게 물었다. “이봐, 미온. 어째서 이렇게 일을 크게 불리는 거야?” “숨기기 힘든 일이라면 차라리 크게 불려라. 지금 가담시킨 중신들은 모 두 왕궁에서 발언권이 강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공범이 된다면 나중 에 문제가 생겨도 쇼탄 경을 보호해 줄 방어벽이 생기잖아요.” “대, 대단해. 너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거야?” “아니 뭐, 이것 역시 제가 터득한 것이 아니라...” 실은 이오타 왕국의 제1위 비서관이자 세계 최고의 방첩기관 '인트라 무 로스'의 국장인 이자벨 크리스탄센 님의 가르침이랍니다. 그녀가 군사강국 마키시온 제국으로부터 군사력이 약한 자신의 조국을 지켜냈을 때 쓴 방법 이 바로 상대방이 공격하면 자신도 큰 피해를 입도록 정략적으로 엮어 놓 은 것이지요. 전쟁도 어차피 이익과 손해의 저울질이기 때문에 치는 것보 다 놔두는 편이 이익이라면 칠 리가 없다, 라고나 할까. 뭐 이런 어설픈 내 작전을 그 분이 봤다면 '뭐하고 있는 거니, 미온 군.' 이라면서 난감하게 웃으실 테지만... 나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요. “고마워.” “예?” “고맙다고.” 나는 항상 질 나쁘게 껄렁거리기만 했던 쇼탄이 눈물을 글썽거리자 적잖 게 놀랐다. “내가 왜 스왈로우 나이츠가 되었는지 말했었나?” “아뇨.” 사실 우리들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별 다른 문제없이 부유하게 자라 자신의 인생에 불만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기사가 될 리가 없을 테니까, 괴로운 과거 따위 서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이다. 쇼탄은 담배를 물며 말했다. “폭력조직에게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그 자식에 자식까지... 끝까지 따라가.” 나도 알고 있다. 고객 중에 한 명이 꽤 유명한 폭력조직 두목이 따님이었 는데 그녀가 했던 말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조직의 돈은 빌리 지 마.'였다. 업계 관계자들마저 그런 말을 꺼낼 판국임에도 쇼탄은 그 빚 을 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나한테는 10만 셀링에 달하는 빚이 있었어. 아버지는 나 를 낳고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했지. 빌어먹을. 자기만 도망친다고 그 빚이 사라질 리가 없잖아. 나를 낳지 말든지 아니면 죽지 말고 악착 같 이 그 돈을 갚든지 해야 했을 거 아냐!” 쇼탄은 말을 끊으며 눈물을 훔쳤다. 크리스 역시 가난에 시달리긴 했지만 산더미 같은 빚은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빚에 시달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나는 솔직히 실감할 수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빚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서 자랐어. 살인적 인 이자 때문에 빚은 갚을 엄두도 안날만큼 산더미처럼 불어난 상태였고 아무리 도망을 쳐도 조직에선 끝까지 찾아내서 우리를 괴롭혔지. 그러다 가 어머니가 과로로 돌아가신 것이 내가 일곱살 때야.” 가슴이 아렸다.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사시다가 하늘로 가셨다는 것에 언제나 위안을 삼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에 대한 추억이 모조리 고통뿐이라면 그건 분명 평생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상처 를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리라. “조직에선 나를 데려다가 일을 시켰지. 안 해 본 것이 없어. 평생 몸으 로 갚으라는 협박을 매일 매일 들으면서 나는 절대로 자식을 낳지 않을 거 라고 다짐하며 벌레처럼 돈을 벌 뿐이었어. 영원히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하루 종일 탑을 쌓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흔적도 없이 무너져버려 또 다시 처음부터 탑을 쌓아야 하는 그런 나날을 보내며 성인 이 된 거야. 난 한번도 내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어. 어른이 될 때까지 내 가 배운 것이라고는 취객의 주머니를 털고 노인들에게 공갈을 쳐서 돈을 뜯어내고 싸움질을 하고 여자들을 즐겁게 하는 밤기술... 그런 것들만 배 웠어. 그러다가 키스 경을 만난 거야.” “키스 경?” “하하. 그 사람, 보기보다 굉장하다고. 우연히 만난 키스에게 공갈을 치 려다가 도리어 내가 그 사람에게 당해서 이곳으로 끌려오게 되었지.” “공갈과 사기가 전문인 인간이라고요, 키스는.” 내가 당한 것만 봐도 키스가 악의 화신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키스 경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어. 그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나는 뒷골목 에서 더러운 돈이나 벌고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찔려서 죽었겠지.” “그런데 그 조직에게 빌린 돈... 이제 안 갚아도 되는 거에요?” 10만 셀링이면 실로 엄청난 돈이다. 귀족도 뭣도 아닌 한 개인이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닌 것이다. “당연히 조직에서 날 잡으면 죽이려고 들겠지. 하지만 여긴 안전해. 설 마 왕궁까지 들어와서 빚 독촉을 하는 배짱 좋은 조직이 있겠냐? 하하하.” 듣고 보니 그렇군. 이 세상 어디로 도망쳐도 쫓아오는 폭력조직이라도 왕 궁만은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쇼탄이 입을 쩍쩍 다시며 자신도 한심한 듯 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왕궁의 돈을 빌려 빚 독촉이라니, 이것 참. 우리 가문 내력 인가봐.” “아하하.” 쇼탄은 고개를 떨군 채 물기 어린 눈을 꽉 감으며 자신의 심정을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20년 동안 내내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이미테이션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기사까지 되었는데, 결국 도둑질로 잡혀서 죽게 된다면 내 천박한 혈통이 바뀌질 않는 것 같아서 너무 비참하잖아. 그래도 어머니는 이런 내게 '하하. 너도 제 버릇 남 못주는 녀석이로구나.’ 라면서 위로해 주겠지만... 가난도 도둑질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 도 이제 질렸다고.” 울먹이며 내뱉는 투박한 말들에는 솔직함이 서려 있었다. 이제 슬슬 쇼탄 경이 어째서 왕의 머리를 잘라오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런 불쌍한 사람들 앞에서 순금 조각상 같은 거 만들어 서 자랑하면 안된다고요, 국왕 전하! 자꾸 흐르는 눈물이 창피한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쇼탄에게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이 작전도 마무리해 볼까요?” “이번 타겟은 어디지?” “종착역은 블리히 경입니다.” -Blind Talk 어제 술이 과했는지... 오늘 간만에 출판사로부터 대접받은 맛있는 스테이 크를 먹으면서도 영 육질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업자득입니다만 굉장 히 손해본 것 같아 아쉽습니다. 게다가 안심을 미디엄레어로 주문하는 바람에... 속이 울렁거리는데 우걱 우걱 생고기를 씹는 기분이 참으로 테러블했지요. 그건 맞은 편에 있던 홍정훈씨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요.(어제 같이 마셨음.) 식사를 마치고 서점에 들렸는데... 더 이상 후루야 미노루의 두더지(원명 :HIMITZU)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는 기분이 무척 쓸쓸해 졌 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써둔 분량들이 슬슬 사라지고 있으니... 이거 대위기로군요. 어떻게든 빨리 빨리 써야... 또박또박 아스팔트에 새기는 구두소리를 내딛일 적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이고 싶다, 그렇게 바랬지. 엇갈린 마음들이 보여서 견디기 힘든 밤을 세며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속에서 오늘도 잠든체하네 죽고싶을 만큼 동경하던 꽃의 도시, 대동경. 얄팍한 여행용 가방을 들고 북으로, 북으로 향했지 버쓱거리는 쓴 모래를 씹으면, 강제로 뒤엎여진 정직함이 이제 와서 묘하게 뼛속 깊이 스미네 내일부터 또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거야 그래도 염치없이 버티며 살아가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 하지 맨 발 그대로면 추워서 얼어붙을 듯한 밤을 세며.. 하지만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 도시를 미워했지 죽고싶을 만큼 동경했었던 망할 놈의 도시가 모르는 척하고 입다문 채로 우두커니 서 있어 엉덩이 붙이기 나쁜 도시에서 분노의 술을 들이키면 성숙하지않은 나의 뼛골에 스미네 ...비록 일본 노래지만 멋진 가사의 명곡이라서 자주 중얼거립니다. 나가부치 쯔요시의 Hold Your Last Chance를 들으며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15. 그렇다. 왕실의 수많은 고위 관리들이 연루된 이 대형 범죄의 끝은 바로 헬스트 나이츠의 단장 블리히 경이었다. 자신의 저택 앞에 놓인 가마니를 열어 본 블리히는 그 매스껍게 생긴 얼굴에서 핏기가 단번에 사라지며 가 마니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역시, 아무리 거만한 척 해도 카론이나 아이히만처럼 대범한 위인이 되긴 글러먹은 녀석이로군. 그때 대본을 받고 대기 중이던 카론 경이 내 큐 사 인을 받고 뻣뻣한 자세로 무대 위에 나타났다. “허억! 카론 경! 여, 여긴 무슨 일로...” “그 가마니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카론 경이다. 이 짓을 몇 번이고 했건만 연기가 물이 오를 기미는 없고 여전히 교과서 읽는 듯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연기'하고 있었다. 성의 있게 좀 해 달라고요, 카론 경! 그러나 연극이었다면 극단을 말아 먹고도 남았을 어 설픈 연기에도 블리히는 화들짝 놀라서는 당황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니네!” 후후, 시나리오 대로군. 카론 경은 내가 만들어 준 대본대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카론 경은 진땀을 빼며 교과서를 읊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블리히 경.” “무슨 말인가.” “블리히 경처럼 명예로운 분께서 황금에 눈이 멀어 불경죄를 저지를 리 야 없겠지요.” “무, 무 물론이네! 내가 뭐 하러 그런...”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그 가마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여주시지요.” “이, 이, 이건 내가 훔친 것이 아니야!” 후후. 그렇게 당황하면 범행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고요. 아무튼 아부 하는 능력은 훌륭해 보이지만 카론 경보다도 키가 큰 거구의 머슬바디 주 제에 기사의 위엄이나 당당함 같은 것과는 조금도 인연이 없어 보이는 기사 단장이다. 자아, 카론 경! 조금 더 밀어붙여서 끝을 봐 주세요! “저도 블리히 경이 그것을 훔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블리히는 애원을 하다시피 카론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카론 경은 내 시나리오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하께 보고할 때 블리히 경의 저택 앞에서 이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면 공연한 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내가 훔친 것이 아니래두!” “그럼 이렇게 하죠. 전하께는 왕실 사냥터에 숨겨져 있던 것을 발견했고 근처에 있던 정체불명의 범인은 추격을 따돌리고 왕궁 밖으로 도주했다고 보고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블리히 경이 괜한 혐의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게 좋겠군! 내 얘기가 그거네! 굳이 여기에 있었다고 말해서 공연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고맙네! 자네는 도무지 정치를 모르는... 아니 아니 청렴결백한 기사라서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 게 도와줘서 고마우이.” “벼, 별 말씀을.” 블리히가 이제야 세상사는 법을 이해했냐는 듯 카론의 어깨를 잡으며 고 마워하자 카론은 찡그린 얼굴을 돌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물론 이것이 쇼 탄 경의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블리히 경은 일말의 동정도 없이 쇼탄 경 을 사형대로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처지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결국 블리히 경은 자신이 직접 임금님의 머리를 들고 전하를 찾아갈 것이 며 블리히 경과 이 일에 연루된 신하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 사건 은 무사히 끝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괴상한 순금상 따위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난리를 피울 일도 없잖아!! 상황이 종료되자 키스가 기지개를 펴며 중얼거렸다. “아아. 엉망진창이었지만 어쨌든 해결된 것 같군요오.” “엉망진창이라서 죄송하군요!” 울컥! 그리고 보니까 네 놈이 한 일이라곤 카론 경의 뒷통수를 후려쳐서 상황을 악화시킨 것 밖에 없잖아! 그때 카론이 키스에게 다가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는 것이었다. 얼어붙 은 듯한 파란 눈동자로 키스를 바라보던 카론은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입 을 열었다. “키스. 일을 왜 이렇게 끌고 간 거지?” “무슨 말이십니까아?”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키스가 방긋 눈웃음을 보였지만 여 전히 카론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능청 떨지 마라. 네 녀석이 마음만 먹었으면 이런 소동 없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얼렐레?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거지? 동그란 붉은 눈동자를 이리 저 리 굴리며 장난스런 미소를 보이던 키스는 대뜸 카론의 귀에 대고 뭐라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하도 작아서 내게는 들리지 않았 지만 카론이 눈살을 크게 찌푸린 것을 봐도 뭔가 무서운 말이 아닐까 추측 해 볼 뿐이었다. 키스는 나와 카론을 번갈아 보며 헤죽 웃었고 카론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 다. “그 가면,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건가.” “어머나. 전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데요?” “거짓말 하지 마. 설마 너는 아직도....” 그때였다. 갑자기 키스가 카론의 턱에 주먹을 살짝 갖다대며 생긋 웃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안개 같은 웃음 속에서 보이는 눈동자의 기묘한 빛 무리에 왠지 소름이 돋았다. 카론은 씁쓸한 표정으로 한동안 우리들을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 겨 사라졌다. 역시 뭔가 이 사람들 사이에는 위험한 과거가 있는 것이 분 명해! 나는 '내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라고 난감하게 웃으며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키스에게 다가갔다. “저 그런데 키스 경.” “왜 그러시죠오?” “아이히만 대공과는 왜 그렇게 사이가...” 두다다다다! 이봐! 그렇게 전력으로 도망칠 것 까진 없잖아! 16.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온 다음부터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것 같아.’ 이제 겨우 20세인데 삭신이 다 쑤시는군. 왠지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사지 멀쩡하게 30세를 맞이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진다. 용을 때려잡는 영웅도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는 용사도 아닌 공무원 주제에 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지만 - 나도 나름대로 터프 한 인생을 보내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내가 정의감이 용솟음치는 액션 기사라도 오늘은 제발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졸려.’ 나는 부스스한 금발을 다듬을 생각도 못한 채 눈을 부비며 터벅터벅 2층 복도를 걸었다. 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쇼탄 경은 이 기쁨을 아가씨들과 함께 해야 한다면서 루이 경과 함께 펠리오스 타워로 월담을 했다. 또 밤중 까지 진탕 술 마시고 기어 들어오겠지? 얄미워 죽겠구먼. 맘대로들 하시구 랴. 오늘은 특별히 할 일도 없는 것 같으니 나는 잠이나 자련다. 나는 길 게 하품을 하며 내 방의 문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덜컥! 덜컥! “잉?” 문이 닫혀 있잖아! 난 항상 열어놓고 다니는데! 덜컥! 덜컥! 덜컥! 몇 번을 확인해 봐도 어째서인지 문은 닫혀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나는 투덜거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때 방안에서 날카로운 목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마!!!” “뭐, 뭐야.” 분명 남자(그것도 소년)의 목소리임에 분명한데 - 그 히스테리컬한 고함 소리에 담긴 적대감은 거의 살기에 가까웠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내가 내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야! “누구야 너! 이 문 열어!” “꺼져! 들어오면 죽여 버릴 꺼야!” 뭐 이런 막 되어 먹은 놈이! 내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크리스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온 경. 지스 경이 지명에서 돌아왔어요.” “지스?” “지스킬 윈터차일드. 미온 경의 룸메이트에요.” 크리스가 조금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 잠시 잊고 있었다. 스왈로우 나이츠의 숙소는 모두 2인 1실이며 내 룸메 이트는 약병을 산더미처럼 쌓고 사는 지스킬이라는 녀석이라는 것을. 어쨌 든 룸메이트라면 '아이고. 처음 뵙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반갑 습니다.', '요즘 하시는 일은 잘 되시고요?', '하하. 덕분에.'라는 대화 정도가 오가야 모범적인 것 아냐? 어째서 상견례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면 사살한다.'라는 엄포나 놓고 있는 거냐고! 이쯤 되면 아무리 상 냥한 나라도 지스킬인지 지킬 박사인지 하는 놈을 끌어내서 누가 이 방의 왕인지 확실히 일깨워 주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하다. 그때 키스가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후후후. 미온 경. 정원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 당신 것 아닌가요?” “뭣이!!”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정원에는 내 제복과 가 방과 일기장과 세면도구와 잠옷과 속옷까지 모조리 늦가을 낙엽마냥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분명 지스킬이라는 놈이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 버린 것 이리라! 내 뒤를 따라 나온 키스가 난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지스 경만은 미온 경이 오기 전까지 룸메이트가 없었어요. 지스 경 자체가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고 다른 동료들도 그와 는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요.” 오라, 그런 사자우리에 날 집어넣었다 이거냐, 키스 이 놈! “지스 경은 자기 아픈 모습,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거에요. 벌어들인 돈 거의 전부를 약값으로 쓸 정도라서...” 아아 그랬구나. 그런 슬픈 사정이 있었구나. 그랬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앞으로는 그런 불쌍한 지스킬을 동정해 주면서 나는 복도에서 자야겠다... 라고 할 줄 알았냐!!! 누군 마냥 인생 핑크빛인 줄 알아! 일년 삼백육십오 일 사시사철 행복에 흠뻑 젖어 세상을 살아가는 줄 아냐고!! 도저히 못 참 아! 이 약물중독 꼬맹이! “...이제 전쟁이야.” 나는 이를 부득 갈며 2층을 올려다보았다. 제4화 : 사라진 왕의 머리와 기사의 눈물 끝 다음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Blind Talk 최근에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음 편 내용과도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자주 떠오르게 되는군요. 하지만 역시 어 렵습니다. 박혜성의 '도시의 삐에로'를 들으며 (창고에서 찾은 박혜성 씨의 오래전 테잎... 잊고 있던 노래를 듣다.)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1. 나는 내 물건들을 집어 들고 한걸음에 2층까지 다시 뛰어 올라왔다. “문 열어! 지스킬! 참는데도 한도가 있어!”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냐고! 나 는 눈을 부릅뜬 채 소리쳤다. “좋아아아아아!!! 안 열고 버티시겠다 이거지! 이제 너와는 같은 하늘에 서 살 수가 없다! 당장 나와서 내 결투를 받아라! 너도 기사라면 피하지 않겠지!” 속옷을 품에 안고 결투를 신청하는 꼴이 민망하긴 하지만 나는 지금 절실 하다고! 내 보금자리를 돌려줘! 그러나 지스킬은 나오지 않았다. 나와야 결투를 하든지 닭싸움을 하든지 할 것이 아닌가. 한 시간 동안 혼자 처절하게 소리친 끝에 결국 목이 쉬어 버리고 탈진한 끝에 복도에 드러눕고 말았다. 아아 대체 이게 혼자 뭐하자 는 오두방정이람. 스스로 한심해진 나는 훌쩍거리며 복도에 웅크리고 앉아 서 중얼 중얼거렸다. “....겨, 결투 좀 받아줘. 지스킬 경. 문이라도 열어 달라고. 응?” 후후후. 이것이야 말로 비장의 '눈물의 애원 작'전. 남자 자존심 다 팔아 넘긴 치졸한 방법이지만 어린애에겐 잘 통한단 말이야. 나오기만 해봐라! 평생 잊지 못할 구타의 추억을 남겨줄 테다! 그러나 또 한 시간이 지나도 지스킬은 나오지 않았다. 2층 복도에는 소박 맞은 아녀자 마냥 훌쩍거리는 내 울음소리 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스킬 은 자고 있는 것 같았다. “.....” 정말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우어어어어! 이 망할 놈의 백발 소년! 이젠 문을 부셔서라도 뚫고 들어 가겠다! 마지막 경고야! 삼 초 주겠다! 하나! 둘! 세...” “...미온 경.” “잉?” 갑자기 찾아온 사람은 1층 입주자인 랑시 경이었다. 길게 내린 머리 위에 커다란 모자를 쓰고 펑퍼짐한 잠옷까지 입은 모습인 완전히 자그마한 소녀 인 랑시는 베개를 든 채 눈을 부비며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잠 좀 자자고요. 그렇게 떠들면 민폐라고요.” “미, 민폐는 이 방 안의 질 나쁜 새끼 고양이가 저지르고 있다고! 난 피 해자야!” 눈물이 쏟아질 만큼 억울하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하 지만 뭐든 일을 깊게 생각하는 법이 없는 랑시 경은 후아아암 하품을 하면 서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스 경은 놔두면 알아서 나와요.” “어, 언제쯤!” 랑시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한... 일주일 쯤?” “너무 길어!!!” 랑시는 '어쨌든 좋으니까 조용히 좀 해결해 달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자 기 방으로 돌아갔다.(랑시의 룸메이트는 공무원 기사 레녹 경이다.) 거 한 솥밥 먹는 이웃사촌끼리 되게 비협조적이로구먼. 그때였다. “엇!” 내가 랑시에 시선이 팔려 있는 사이 지스킬이 조금 문을 열고는 빤히 날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역시 안 자고 있었어, 저 녀석! 문틈 사이로 물끄 러미 날 바라보던 지스킬이 속삭이는 듯 조그맣게 말했다. “나.가.죽.어.” “이 노오오오오옴!!!” 死! 生! 決! 斷! 나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내공을 끌어 모아 부웅 뛰어오르며 분노에 찬 플라잉 바디 어택을 감행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문이 닫히며 내 반듯한 이마 가 문과 거창하게 충돌한 뒤에 바닥에 추락했다. 흐흐흑. 어째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아?” “키, 키스 경!” 키스는 온 몸을 내던져 문에게 박치기를 한 내 꼴을 보고는 깜짝 놀란 얼 굴로 서 있었다. 죄다, 당신 때문이야! 저런 질 나쁜 동물은 처음부터 격 리시켜 놔야 했단 말이야! 기숙사 사감이면 사감답게 입주자들의 권익을 책임져 달란 말이다! 키스가 손가락 끝으로 뺨을 긁적거리며 씁쓸하게 웃 었다. “미안하군요. 미온 경. 지스 경이 막 지명을 끝내고 돌아와서 아주 날카 로운 것 같네요.” “아? 아 뭐... 미안할 것 까진...” 갑자기 저렇게 나오니까 내가 할 말이 없군. 키스가 사뿐거리는 걸음걸이 로 문 앞으로 걸어가선 노크를 하는 것이었다. 그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 소리로 말했다. “지스 경? 문 열어요.” “그런다고 열 녀석이 아니....” 덜컥! “아, 아니! 열었잖아!” 어째서 키스 경의 말은 듣는 거냐! 사람 차별하는 거냐, 너! 지스킬은 고개를 돌린 채 문가에 서 있었고 키스는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 다가 그의 푸른 빛이 감도는 하얀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에 1층으로 내려 갔다. 문은 얕은 바람에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계속 열려 있었고 지스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왜, 왠지 들어가면 죽을 것 같군.’ 소년답지 않은 지독한 쓸쓸함이 묻어나는 녀석이었다. 크리스와 비슷한 나이 같은데 -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마치 반쯤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처럼 보여서, 나는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나 들어 간다아?” 슬쩍 안을 바라보니까 지스킬은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돌 리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백색에 가까운 머리칼이 조금 보였다. 어째서 저렇게 사람을 경계하는 걸까.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방 저편 에 있는 지스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난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해. 저 그러니까...” “......” 카론과는 다른 의미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군. 이거야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적막해 졌잖아. ‘에라. 모르겠다. 일단 피곤하니까 자자.’ 나는 주섬주섬 들고 온 내 물품들은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제자리에 놓은 뒤에 옷을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몸이 녹아버릴 정도 로 피곤했는데도 간간이 지스킬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와서 잠을 설칠 수 밖에 없었다. 저 녀석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남과 함께 있는 것을 싫 어하는 것일까, 하지만 아직 소년이라면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같이 있어 달라도 떼를 써도 괜찮잖아. 나는 병약했던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려보며 베개를 꼭 껴안고 겨우 겨우 잠을 청했다. 이곳에 와서 가장 쓸쓸한 기분 이 드는 밤이다. 2. 가끔씩 꿈을 꾸면 - 내가 연극을 보는 것처럼 나 자신의 과거의 추억을 또 다른 내가 되어 지켜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내가 지켜보고 있는 16살의 내 모습은 지금의 나보다 좀 더 가늘고 앳된 얼굴이 동그랬고 붉게 칠한 입술이 꼭 계집애 같았다. 그리고 그런 과거의 내가 집 마당의 울타 리를 고치고 있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내가 일하는 곳까지는 제법 멀었기 때문에 나는 근처에 작은 집을 하나 구입해서 혼자 살았는데, 주변 일에 무관심하던 나는 그녀 와의 동거가 시작된 이후부터 집을 좀 더 그럴 듯하게 꾸미는데 신경을 썼 던 것 같다. 목수였던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지 못해 울타리를 고치는 일 에 진땀을 빼던 나는 그녀가 옆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망치에 찍힌 손가락 을 빨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다쳤어?” “아, 아냐!” 나는 깜짝 놀라선 빨갛게 부은 손을 뒤로 숨겼다. 그때는 나는 내가 남자 답지 못하고 고작 울타리 하나도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꽤 열등 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변에 친구 하나 없던 내게 가족 외 에 처음으로 아주 가깝게 다가와 버린 그녀에게는 매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녀가 치마를 살짝 접어 무릎을 굽히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몽환적인 눈동자다. “치료해야 하는 거 아냐? 너 손가락이 고운데, 상처라도 나면.” “괜찮대도. 별로 곱지도 않아.” 나는 빨개져선 말꼬리를 흐리며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동갑이었던 그녀는 당시 나보다 확실히 어른스런 구석이 있었고 가끔 그것 때문에 괜 한 질투심이 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16세의 어린애였으니까 별의 별 치 기 어린 욕심에 꿍해 있을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녀가 내 금발을 귓바퀴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머리, 이렇게 넘기는 편이 더 멋져.” “그, 그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나의 꽤 사소한 것까지도 지켜보고 있었 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날 도와줘서 고마워. 며칠 있다가 나갈게.” “으응.” “며칠 지나면 기억이 돌아오겠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라는 어린애다운 욕심이 마음속에 확 퍼졌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나는 확실히 그녀에게 매혹되어 있었다. 내가 좀 더 어렸다면 가지 말라고 울며 그녀를 껴안을 수도 있었 고 내가 좀 더 성숙했다면 그녀의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눈치 채고 감싸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도 저도 아닌 16세라서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단 지 '계속 있어도 되는데...'라며 그녀가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꿈은 보통 흑과 백이라는데 이상하게 지금까지도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와 내 빨간 입술과 엉성한 울타리의 모습만은 원색으로 떠오른다. 그만큼 집 착이 많았던 탓이리라. “학교 안가?” “오늘은 안 갈 거야.”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금 고집을 부리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학교라기보 다는 역사나 기본적인 지식들을 가르치는 사립 교육 기관에 부모님이 등록 하긴 했지만, 고객들에게 생생한 이야기들을 듣는 것보다 시시했기 때문에 그다지 가고 싶진 않았다. 가봐야 대부분이 귀족 가문의 아이들이고 그들은 이상하게도 자신들은 평민과는 다른 고귀한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 그런 그들에게 이런 저런 놀림을 당하는 것도 창피하고 싫었다. 그리고 그 녀가 요정처럼 나의 집에 자리 잡게 된 다음부터는 정말로 학교를 가야겠다 는 마음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래도 가야지.” 그녀의 부드러운 말에 굉장히 서운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숙였다. 16세 의 나는 사실 나를 찾아오는 고객들도 별로 없었고,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 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고집을 부려서라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 같다. 덕분에 자주 어린애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학교... 갈게.” “식사 곧 준비할게. 먹고 가.” 그녀가 미소 지으면 꼭 풀냄새가 확 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향기에 취하니까 더욱 더 학교가기가 싫어졌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뒤쫓아 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꿈이라 는 것이 다 그렇듯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또 어디쯤에서 끝났다고 말할 수 가 없이 내 몽롱한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엉켜갔고 나는 곧 이것이 꿈 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로부터 4년이 지났다는 것도 깨달았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재잘거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던 거지? 눈가에 물기가 촉촉한 것을 보면 또 그녀의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어?” 옆에는 먼저 일어난 지스킬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단장을 했는지 곱 게 내린 옅푸른 단발머리가 아침햇살에 반짝거리고 있었고 비슷한 색의 눈 동자 역시 건드리면 빠져 들어갈 것처럼 투명했다. 목 끝까지 채운 감색 단추가 돋보이는 상아색 반팔 셔츠에 아래에는 얇은 검은색 타이츠 그리고 그 위에 하얀색 트렁크호스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혼자 차려입었다고 하기에는 꽤 완벽한 옷매무매가 아닌가. 몸도 안 좋을 텐데 어쨌든 자기 관리를 깔끔하게 하는 모습이 제법 대견해 보이는 녀석이로군. 그런데 이 녀석이 어제의 일을 사과하려는 건가? “아! 잘 잤어? 좋은 아침이... 얼레?”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질 않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내 몸에 엉켜 있는 것을 보자 너무도 황당해 서 믿을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이건!!!” 내 몸은 굵직한 동아줄로 침대에 꽁꽁 묶여 있었던 것이다. 누간 한 짓인 지는 보나마나 뻔 한 사실이리라.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자 지스킬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어젯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잤어.” 뭐, 뭐시라! “평생 그러고 있어라. 잠탱이.” 그리고는 휭하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뭐 저런 뻔뻔한 생명체가! 적 반하장도 유분수지, 나 때문에 잠을 못 자? 그건 내 대사라고! "너, 어디 가는 거야! 이거 풀어줘! 임마! 야! 이봐! 어이! 여보세요!” 그러나 지스킬은 대꾸도 없이 1층으로 내려갔고 곧 아침 식사와 함께 키 스의 브리핑이 시작될 터였다 그러나. 이 놈의 노끈을 얼마나 철저하게 묶 어 놨는지 아무리 바동거려도 풀릴 기미가 없다. 한 1분 정도 진땀이 나도 록 발버둥치다 보니까... 갑자기 내 마음 한 귀퉁이에서,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강대한 악의 포스가 온 몸을 장악해 가기 시작했다. “너 이 놈! 액션 기사를 화나게 했겠다!!” -Blind Talk へ( ˚∇˚)ノ아하하하하핫~~ 최근의 나는 말 그대로 Nirvana Machine, 멍한 상태로 침몰하고 있습니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짧은 여행을 다녀올까 합니다. 본 기억 있는 레인 코트. 황혼의 역에서, 가슴이 떨려왔어. 빠른 발걸음으로 따라가보니, 틀림없이 예전에 사랑했던 그 사람이었네. 그리움의 일보직전에서 북받쳐오르는 괴로운 추억에 할 말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 당신이 없어도 이렇게 건강히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2년의 시간이 바꾼 것은 그의 시선과 내 머리모양, 제각각 기다리는 사람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거군요. 눈치도 못챈 채... 한칸 옆 전차에 타서 고개숙인 옆모습을 보고있으니, 무의식적으로 눈물이 넘쳐날 것 같아. 지금에서야 당신의 마음, 처음으로 알겠어, 가슴아프도록. ...사실 이건 꽤나 오래된 노래지만 여전히 중얼 중얼. J-WALK의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던, 여름... 을 들으며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3. “아, 지스 경. 미온 경은 아직도 자고 있나요오?” 브리핑을 시작한 키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걸음씩 테라스로 걸어 가고 있었다. “몰라. 일어날 생각이 없나보지.” 그래. 지금 마음껏 떠들어 둬라, 지스킬. 잠시 후엔 분노에 영혼을 판 이 몸이 널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려 줄 거니까! 한걸음. 또 한 걸음. “하아. 미온 경도 못 말리는 잠꾸러기로군요. 뭐 그럼 벌금으로 대신합 시다아.” 벌금 매기지 마!!! “자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겠...” 순간 키스는 말을 멈추며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불지옥에 서 기어 올라온 듯한 내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테라스에 있던 다른 기 사들 역시 2층에서 내려온 날 바라보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미, 미온 경!” “...지스킬 ...우후후후 ...유언은 써 뒀겠지?” “너, 너 지금 뭘 들쳐 업고 있는 거야!” 침대였다. 인간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가면 이렇게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나는 이 거대한 침대와 한 몸이 된 채 싱글 베드와 이인삼각을 하며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다. 침대를 십자가처럼 짊어 진 지금 내 마음 속엔 저 저주받을 룸메이트에게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고 싶은 일념 하나뿐이었다. 나는 한껏 숨을 들이 킨 뒤에 번쩍 눈을 뜨며 소리쳤다. “우아아아아!! 내 필살기를 받아라!” “피해!!!!” 이미 나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침대라는 질량병기를 등에 업은 채 전 속력으로 지스킬에 달려들자 아침을 먹던 기사들이 산지사방으로 도망쳤고 지스킬 역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긴, 성난 침대인간이 달려드는데 겁이 안날 리가 없겠지! “그래에! 도망쳐라!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혼쭐을 내줄테다!” “저, 저리가!” “이젠 후회해도 늦었어!” 하지만 나는 모르고 있었다. “미온 경! 지금 당신 등에!” 멈출 수 없는 속력으로 뛰어가던 중 내가 무언가 테이블을 하나 뒤집어 엎었고 “미, 미온 경! 멈춰요! 지금 당신 침대가!” 하필 그 테이블 위에는 스튜를 데우던 작은 화로가 하나 있었으며 “빨리 멈추라니까요! 미온 경!” 또 하필이면 그 화로의 불씨가 내가 짊어진 침대의 시트에 떨어졌고 “불이야!!!!” 또한 그 덕분에 침대가 불길을 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우아아악! 뜨거!” 나는 이글거리는 불가마를 짊어진 채 비명을 지르며 채 뛰어다녀야 했고 지스킬은 그런 모습이 정말로 무서웠는지 키스 경 뒤에 숨어서 몸을 떨었 다. 노, 농담이 아니다! 묶인 것이 안 풀려! 이러다간 죽는다고! 이런 내 모습을 본 키스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지하게 한심하네요오.” 당신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강 건너 불구경 하지 말고 누구라도 불 좀 꺼 주세요! 으아아! 엉덩이 가 익어 버릴 것 같아!” 나는 마녀사냥으로 억울하게 화형당해 죽은 성녀의 심정을 온 몸으로 느 끼며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우애 깊은 스왈로우 나이츠의 동료들은 하나 같이 오랑캐 만난 양민들처럼 산지사방으로 도망치며 나를 피하고 있었다. 오직 크리스 만이 물 컵을 들고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고맙다, 크리스! 하지만 그 정도 양으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때 키스가 소리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미온 경!” 순간 귀가 번쩍 뜨이며 나는 급커브를 돌려 키스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방긋 웃는 키스가 정문을 연 채 서 있었다. “자아. 문 밖으로 나가세요.” “그, 그 다음엔?” “일단 나가세요오.” 그리고 나는 키스의 가이드를 받으며 쏜살같이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러자 키스가 쾅! 소리를 내며 뒤도 안 돌아보고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아 닌가. “우아아! 너무해.... 으악! 뜨거! 뜨거! 뜨거워!!” 키스를 잠시라도 믿은 내가 바보지! 나는 불타는 침대와 일심동체가 되어 리더구트의 정원을 질주했고 곧 눈앞에 작은 연못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주저 없이 그곳을 향해 날아올랐다. 풍덩! 우아한 동작으로 입수에 성공한 순간 불길이 치이익 소리와 함께 꺼지며 나는 새 생명을 얻었다. 하아아아. 이제야 살 것 같... ‘아뿔싸!’ 눈앞에 위기가 닥치면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내 가 '침대는 물에 뜨지 못한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침대에 묶인 내 몸은 이미 연못의 밑바닥을 향해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다. ‘엔디미온 호....... 침몰.’ 나는 연못 밑바닥과 얼굴을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Blind Talk 오늘은... 짧습니다. 그건 그렇고 영화 보고 싶습니다. 살인의 추억, 엑스맨2, 메트릭스2... 등등등등등. 최근 이런 저런 일에 정신이 없어서 '봐야지. 봐야지.'라는 말이나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담당 편집자님이 빌려준 단편집을 읽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지만...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결심하긴 했지만, 지금 떠나면 어쨌든 나는 도망치 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습니다... 는 허울좋은 명분이고 마침 카드가 한도액을 넘어서 꼼짝할 수가... ;;;-_) 리사 오노의 my cherie amour를 들으며 (동생이 빌려준 CD를 듣고 있는데, 참 좋네요.)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4. 소사(燒死)와 익사(溺死)의 위기를 동시에 겪은 나는 질식 일보직전에 구 출되어 키스의 사무실로 실려 오게 되었다. “리더구트에 방화를 시도한 사실을 시인하나?” 쫄딱 젖은 금발을 늘어트리고 윗도리를 벗긴 등에는 화상에 특효라는 향 유를 바른 채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쭈그려 앉아 있는 내 앞에서 카론 경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심문했다. 왕실 내에 범죄로 보이는 문제가 생기면 카 론 경이 출동한다. 그리고 카론 경은 방금 전 '스왈로우 나이츠 본부에 방 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되었으나 곧 진화되었다.'라는 보고를 받고 이 곳에 온 상태였다. 그리고 더 설명할 것도 없이 그 방화범이 바로 나였다. 키스는 완전히 기가 꺾여 고개를 꺾은 채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내 모습 을 보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소파에 누워서 흘낏 흘낏 내 꼴을 보며 쿡 쿡 웃음을 참고 있었다. 쳇. 얄미워 죽겠네. 카론이 골치 아프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매를 찡그리며 말을 이 었다. “키스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불이 붙은 침대와 함께 연못에 뛰어 들었다고?” “와하하하하하!! 당신 정말 걸작입니다아!” 키스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지러지다가 소파에서 떨어져 버렸다. 발끈! 그렇게 웃기냐! 라고 화가 나긴 했지만, 사실 이번에는 내가 할 말 이 없는 것이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결국 나 혼자 난리를 친 것이니까 - 게다가 익사 직전의 나를 구출해 준 사람이 바로 키스였다. 그것도 한 팔 로 나와 침대를 확 연못에서 끄집어냈던 것이다. 설마 저 인간, 과거에 차 력사였던 것일까, 별로 근육질도 아닌 것 같은데 뭐 저리 힘이 세담. 카론은 별로 길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고 키스의 사무 실 밖으로 나가며 짜내는 듯한 말을 남겼다. “나한테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은.... 키스 하나로 충분하다.” 으아아아! 최악이야! 키스와 비교가 되다니! 이번 일로 카론 경에게 점수 가 확 깎여 버렸다. 혹시나 해서 이런 일도 기사록에 기록 되냐고 키스에 게 물었더니, 이런 일은 왕실 기사의 수치라서 기록하지 않는단다. 수치라 서 미안하군요! 키스는 내게 하얀 수건을 던져주고는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자 그럼 지스 경에 대해 말해보죠.” “아! 정말 그 녀석은 왜 절 그렇게 싫어하는 거죠!” “....글쎄요.” 키스는 이상하게도 지스에 대해 말할 때면 흡사 보호자의 모습 같았다. 그가 툭하고 내게 말을 던졌다. “지스 경이 여기 어떻게 왔는지 알아요?” 그걸 내가 알 리가... 나는 대충 추측해서 대답을 했다. “쇼탄 경이나 크리스 경처럼 당신이 데려온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아.” “그럼 나처럼 속아서?” “미온 경처럼 자발적으로 온 것도 아니에요오.” 누가 자발적이라고! 하지만 울컥, 하는 것은 키스의 대답을 들은 뒤로 미 루자. 나는 정말 지스킬이라는 성격 나쁜 소년이 왜 스왈로우 나이츠에 입 단하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스의 대답을 이해하기 까지는 몇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스 경은 팔려왔습니다.” “파, 팔려오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그 이후 키스가 조심스럽게 말한 지스의 과거는 마치 불행한 소년에 얽힌 비극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지스킬이 태어난 곳은 아주 추운 곳이었다고 한다. 그를 낳던 중 어머니 가 죽었고 지스킬 역시 곧 죽을 것이 분명하다고 의사들이 말할 정도로 병 약했다. 그리고 방탕한 귀족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곧장 재혼을 했고, 곧 죽을 것이라고 믿었던 지스킬이 5살이 되도 10살이 되도 죽지 않자 계모는 몇 번이나 지스킬을 죽이려 했다고 한다. 지스킬은 저택 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면서 항상 병과 자신을 귀찮게 보 는 혈육들과 홀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그가 13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급사했다. 지스킬은 유산을 노린 계모가 독살했다고 믿었지만 증거는 없었고, 그해 겨울 계모의 강요 로 병원에 입원되어 격리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원 안에서 14살이 되었을 때 스왈로우 나 이츠의 소문을 들은 계모가 지스킬을 데리고 왕궁에 와서 그를 팔았다고 한다. 명목상으로는 '아들을 왕실에서 수련시킨다.'였지만, 분명 거금을 받고 팔아넘긴 것이며 그 이후 뇌물을 써서 지스킬을 윈터차일드 가문의 호적에서 지워 버렸다고 한다.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한 치졸한 짓거리리라. “노, 농담 하시는 거죠?” “사실입니다.” “어떻게 자식을 파는 부모가!” 애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부모라니! 나는 내 일처럼 분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지스 경은 지명으로 번 돈의 대부분을 약값으로 쓰고 있어요. 하 지만 왕궁의사들도 지금 몸 상태로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요.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혼자였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남들보다 몇 배는 짧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지스 경은 남과 친해지 는 것을 겁내는 겁니다.” “....그랬군요.” 이쯤이면 차라리 크리스티앙의 과거는 천국이었다. 그런데 키스는 좀 미 심쩍은 점이 있는지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네요오.” “예? 뭐가요?” “예전에는 저 정도로 날카롭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미온 경은 정말 싫 어하는 것 같아요.” “왜, 왜 그럴까요.” “글쎄요.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도통 알 수가....” 설마 내가 지스의 아버지와 닮은 얼굴인 것 아닐까. 그럼 이거 되게 억울 한데. 나도 그렇게 매정한 사람과 우연이라도 닮은 얼굴인 것은 사양이라고! “아무튼 미온 경이 원하신다면 새로운 방을 주겠어요. 이번에도 싸움에 나서 침대에 불이 붙거나 하면 카론 경도 진짜 화낼 거라고요. 그 사람, 화나면 정말 무서워요오.” 분명 화나게 만든 적이 있구만. “그럼 지스 경은?” “예전처럼 룸메이트 없이 지내야 겠지요.” “그럼 그냥 계속 같이 있을래요.” “네에?” 키스가 적잖게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다간 방긋 웃으면서 허 락해 주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지스는 분명 외로움에 익숙해진 부류일 것이다. 뭐 내가 그렇게 온정이 넘쳐흐르는 성자는 아니지만, 그런 녀석에게 짜증나서 같이 못 있겠다고 고집 피우는 짓은 미안해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계속 같이 있다보면, 그래도 미운정이라도 들고, 그때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 르잖아? 그러나 부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번에는 지스킬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오싹하기도 했다. “자아! 그럼 침대 값은 미온 경의 일당에서 깎겠습니다아!” 으이구! 쩨쩨한 인간! 5. 키스의 셔츠를 빌려 입고 터벅터벅 그의 사무실을 걸어 나와 로비를 걸을 때 남색의 유니폼을 입고 동그란 모자를 쓴 사내가 서 있었다. “혹시, 엔디미온 경이십니까?” “그런데요.” 이 사람은 누구야? 그가 내게 편지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오르넬라 무티 성녀님께서 보내신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침대를 짊어지고 뛰어다닐 정도로 허리가 튼튼할 줄은 미처 몰랐다고 감탄하고 계 십니다.” “아하하. 쑥스럽게 뭐 그런 일로 감탄까지...” 칭찬이냐 욕이냐! 그는 보라색 비단에 쌓여 있는 하얀 편지지를 꺼내서 정중하게 전해 주고 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런 옷을 입은 자는 왕궁 배달부다. 왕궁이 워낙에 넓다보니까 저런 사람을 시켜서 물건 을 배달한다고 한다. 운동 삼아 스스로 좀 전해주는 편이 좋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화장실 갈 때도 가마를 탈 것 같은 사람들이니 그런 투 정은 그만두자. 그건 그렇고 소문 참 빠르구나. 내가 불이 붙은 침대와 함께 연못에 다이 빙한 뒤, 한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오르넬라 성녀님의 위문품까 지 도착할 줄이야. 분명히 아이히만 할아범도 이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웃고 있을 거라는 걸 상상하니까 치가 떨렸다. “그런데 이건 뭐람.” 나는 오르넬라 님으로부터 배달된 편지지를 이리 저리 보았다. 향수 냄새 그윽한 얇은 봉투였다. 뜬금없이 위로의 메시지라니, 오르넬라 님 답지 않 네. 그래도 성녀라 이건가. 하얀 봉투를 열자 그 안에서 나온 메모지에는 오르넬라 님의 우아한 필체로 그 분의 성은이 담뿍 담긴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바보 -오르넬라로부터 기분 최악이다. -Blind Talk 어제 회를 먹었습니다. 얻어 먹은 것이니... 기쁨은 두배. 아주 간만의 돔 회였는데... 예전 우럭회를 예찬하던 제가 이런 말을 하 자니 좀 표리부동하지만, 역시 회는 돔입니다. ...아 뭐 꼭 비싸다고 이런 말 하는 것은 아니고...(사실 저는 갈치회를 가장 선호합니다.) 돔을 시키니까 돔의 비늘을 얇게 뜯어내서 살짝 얼린 '쯔키다시'가 나왔 는데, 오랜만에 맛보는 쫄깃한 이 맛이 또 즐거웠습니다. 약간 비릿하긴 하지만 이것 또한 풍미라면 풍미겠고. 회에는 금가루까지 뿌려져 있었는데... '후후. 이거 속물적이군.'이라고 말하면서도 기분은 좋았던 것을 보면 역시 저도 속물적인 인간이로군요. 놀라운 일이지만, 저는 복어와는 정말로 인연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태어 나서 한번도 복어를 먹어본 적이 없고, 복어를 먹어보려고 마음을 잡고 가 보면 꼭 무슨 일이 생겨서(제철이 아니다. 재료가 떨어졌다. 등등.) 복어 대신 도미가 나오거나 하는데... 이번에도 쯔키다시로 나온 것은 복어회가 아니었습니다.(지금은 없다고 하더군요.) 뭔가 조상님이 나쁜 일이 생길 것을 막아주고 있는 것 같아서 앞으로 제 인생에서 복어는 포기하려고 합니다. 후우 최근 글이 전혀 써지지 않는다고 막 투정을 부리고 벽에 머리를 들이 받고 하다 보니까, 아는 형님이 위로차 사준 것이지만... 먹는 내내 '고작 그런 일로 투정을 부려서 글을 쓰겠냐!'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맛있었답니다. ;-) 그나저나 다음 편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겠군요. 조금은 비극적이라서 현 재 머리 속은 어떻게 표현해 볼까로 NOW LOADING입니다. 리사 오노의 문라이트 세레나데, 를 들으며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6. 방에 돌아왔을 때 지스킬은 없었다. 항상 떠날 때를 대비하는 듯 결벽증 적으로 깔끔히 정리해 놓은 그의 책상과 침대 그리고 ‘침범하면 죽인다.’ 라는 푯말을 써놓은 ‘국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 나는 문득 그 ‘국경선’을 넘어갔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흔적에 호 기심을 느낀 탓이리라. 다가가자 이번에도 약냄새가 확 풍겨왔다. 책상 위 에 수북이 쌓여 있는 약병들은 장난감 병정들을 대신해서 사열해 있었고 그 옆에는 물이 반쯤 담겨 있는 물병이 놓여 있었고 또 그 옆에는 깨끗이 닦아놓은 약사발이 놓여 있었다. 혼자 약을 갈고 있었나 보다. 식은땀에 젖어 기침을 하면서 침대에서 겨 우 겨우 기어 나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런 저런 독한 약들을 섞어 억지 로 삼켰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을씨년스런 그의 자리를 둘러보 고 있었을 때 여기저기서 그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왜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지. 밤마다 침대 속에서 혼자 되씹었을 것 같은 지스의 혼잣말이 들려오는 것 같아서 가슴이 쓰라렸다. 침대 밑에는 그가 지명을 받았을 때 들고 나가는 여행 가방이 삐쭉 나와 있었다. 자신의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을 들고 홀로 먼 곳까지 가서 죽은 자의 제사를 지내주고 돌아오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혼을 꿈꾸거나 여자를 사귀려고 하거나 혹은 작은 취미 라도 붙일 길이 없이 조금씩 세상과 자신을 단절하는 방법을 터득해 갔으리라. 세상으로부터 항상 상처만 받았으니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나는 내가 소중하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끝없이 소리치면서 이런 세상으로부터 격리되 길 원했던 것이리라. 어째서 난 살아 있어야 하는 거야? 누구라도 그 이유를 말해줘. 자꾸만 등 뒤에서 그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아서 눈물이 흐를 것 같 았다. 그때였다. “계십니까?” “응?” 문 밖에서 낮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 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 커다랗고 길쭉한 상자를 짊어지고 온 그는 땀범벅이 된 손바닥을 바지에 아무렇게나 닦은 뒤 조끼 속에서 서류를 꺼 내 내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누구야, 이 사람은? “택배 길드에서 배달 왔습니다.” “.......” 세상에는 수많은 상인연합이 존재하고 있지만 택배 길드가 있을 줄은 미 처 몰랐군. “의뢰하신 물품을 배달했으니까 운송비 결제해 주세요. 1천3백 셀링 입 니다.” 뭐야 이거! 난데없이! “자, 잠깐만요!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이런 것 주문한 적 없거든요? 게다가 뭐가 그렇게 비싼 거에요!” “분명히 이 서류에는 리더구트 본부의 6호실로 적혀 있습니다. 보이시죠? 그리고 이오타 왕국에서부터 배달 온 거니까 천삼백 셀링이라면 싼 편이라 고요. 이거 속달 주문이라서 정말 배달하는데 힘들었어요!” “이오타 왕국?” 이자벨 크리스탄센 님이 계신 그 예술강국에서 여기까지 대체 뭘 가져왔 다는 거지? 나는 혹시나 하는 기분에 이 건장한 짐꾼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그 서류의 수취인이 누구로....” “지스킬 윈터차일드 씨로 되어 있는데요?” “전 엔디미온이걸랑요?” 지스킬!!! 이런 엄청난 국제 주문을 해놓고 어디로 사라진 거냐! 그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뻐근해 보이는 어깨를 매만지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운송비 주세요. 오늘 중으로 본부에 지불해야 해요.” “아 글쎄, 전 지스킬이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아 당신들, 기사 아니에요? 그런 호사스런 직책을 가졌으면서 쩨쩨하게 택배비도 못 주겠다 이겁니까?” “전혀 호사스럽지 못해요! 이인일실에 빨래도 우리가 해요! 당신 이상으 로 우리도 뼈 빠진다고요!” “아 몰라요! 돈 줘요 쫌!” 옥신각신 실랑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한 10분 동안 난리를 쳤지만 이 택 배맨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발 빨리 좀 돌아와라! 지스킬! 모자를 눌러쓴 그가 결국 투덜거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쳇. 그럼 이거 돌려보내겠수다. 이렇게 되면 이 서류에 나와 있는 데로 벌금을 물어야 하는 거 알죠? 윈터차일드 씨 돌아오면 벌금 물 각오 하시 라고 전해주슈. 전 세계에 운송망을 가진 우리 택배 길드를 뭐로 알고 이 러는 거야 정말!” “....잠깐만요.” 진짜 진짜 억울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물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오타에서 여기까지 운송해 왔을 정도면 중요한 것일 텐데, 돌려보낼 수 야 없지. “기다려요. 돈 가져올게요. 금화도 받죠?” 터덜터덜 방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여는 내게 예의 택배 길드원이 빈정거 렸다. “금화도 가지고 있는 걸 보니까 역시 기사는 돈 많구먼 뭐.” “....맘대로 지껄이세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피 같은 금화를 꺼내 계산해 주었고 택배맨은 '앞으 로도 저희 천리마 택배를 애용해 주세요.'라는 영업 멘트를 남기고 사라졌 다. 다신 오지 마! ‘뭐어. 지스킬이 오면 받으면 되니까.’ 그렇게 위안을 삼은 나는 허리 아픈 몸으로 끙끙거리며 괴 상자를 방안으 로 끌고 들어왔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확 번졌 다. “좋아. 열어보자.” 부욱! 역시 대형 택배 길드답게 포장은 완벽했고 매듭의 끝자락을 뜯어내자 촘 촘히 엉켜 있던 매듭이 한번에 풀어지며 상자가 열렸다. “으아아아악!!” 나는 그 안을 보고 나도 모르게 뒤로 넘어졌다. 이런 걸 왜 주문한 거야!!!! 그때 마침 방 안에 들어온 지스킬이 '어?'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그의 피부는 찬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창백했다. “벌써 도착했네.” “이봐. 룸메이트. 이건 대체 뭡니까?” “보면 몰라?” 지스킬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자리로 끌고 간 그 물건은 바로, 관이었다. (관棺 - 토장(土葬)할 때 유해(遺骸)를 넣는 장구(葬具). 무덤의 주체를 이룬다.) “왜 관짝을 주문하고 난리야!!!!!” 이 녀석! 나를 장사지내고 싶을 만큼 미웠던 거냐! 하지만 지스킬은 뻔뻔한 태도 그대로 시커먼 관을 열어 보더니만 아예 그 안에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흐음. 역시 이오타 것이라서 그런지 안락하네. 뭐, 죽은 자에겐 필요 없는 배려지만.” “......” 신이시여. 막 오한이 돌고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하얗게 질려 버렸다. 나 는 관 속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지스킬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저어 지스 경. 그거.... 내가 택배비 내줬거든? 관 속에 있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나, 천삼백 셀링 냈는데....”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지스킬이 끼이익 소리와 함께 관 뚜껑을 닫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내래?” “야!!! 뚜껑 열어!!!” 정말이지 이대로 묻어버리고 싶은 녀석이야! 7. 상황은 최악이었다. 침대는 불살라 버려 나는 노숙자처럼 맨바닥에 누워 자야 했고 그것도 등을 다쳐서 얼굴을 바닥으로 향한 채 거꾸로 누워야만 했다. 게다가 낮에는 팔자에도 없는 관짝 운송비를 냈고 밤이 된 지금, 가 방을 베게삼은 내 옆에는.... 음산한 기운을 뿜고 있는 관이 덩그러니 놓 여 있었다. 그 안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거 미치겠군.” 관속의 미소년과 맛보는 하룻밤이라. 남의 일이라면 그래도 제법 낭만적 이잖아? 라면서 웃어줬겠지만, 이게 내 현실이 되니까 이보다 더 비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빙글 바닥을 뒹굴다가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아파서 입을 꽉 막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우우우 진짜 아프군. 키스 가 방 바꿔준다고 했을 때 그냥 말 들을 걸, 하는 비겁한 후회가 밀려왔지 만 이제 와서 말 바꾸자니 그것도 치졸해서 어찌되었든 나는 잠을 청해 보 기로 했다. 하지만 나 이젠 정말 저 녀석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다음 날 아침, 요리사의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 된 악몽을 꾸던 나는 '회치지 마! 차라리 찜을 해줘!'라고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허억. 뭐 이딴 꿈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던 칼질에 내 몸을 어루만지던 나는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 역시나 관이 어제 그대로 놓여 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지스의 평상복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잠옷 차림으로 (강조하긴 싫지만) 관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곧 키스의 브리핑이 시작될 텐데, 이번에는 당신 이 벌금이구려. 나는 눈을 부비며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데도 아직까지 지스는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래도 깨워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왜 깨웠냐며 되레 욕을 먹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머쓱한 표정으로 관짝 앞으로 다가가 톡톡 노크와 함께 조용히 속삭였다. “저어. 지스킬 씨. 계세요?” 남의 관짝에 노크하는 짓, 되게 한심하긴 하지만 남의 관을 여는 일은 더 욱 꺼림직하니 어쩔 수가 없다. “계신다면 문 좀 열어주실래요? 그러니까 곧 브리핑이 시작하...” 진짜 바보 같은 짓 같아서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셨다. 아침부터 남의 관에 노크하면서 이게 뭐하는 짓이람.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문 밖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당장 죽을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잠깐.” 나는 말을 흐리며 조금씩 내딛던 걸음을 멈춰갔다. 이상한 기분에 등골이 오싹해 왔다. 지스가 이상할 정도로 날카롭다고 키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 다. 저 녀석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어제부터 눈에 띄게 안색이 창백했다. 그 리고 마치 곧 사라질 것 마냥 단정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자신의 관을 주문하고.... “바보! 어째서 눈치 채지 못한 거지!” 나는 나 자신을 자책하며 다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의 이름을 소리치며 관을 덜컥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붉은 피에 얼룩진 상의를 입고 있는 지스킬이 혼수 상태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내, 내 말 들려? 정신 차려! 대답해, 지스!” 황급히 그의 상의를 벗기자 투투둑 단추가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피가 흐르는 가슴팍에는 빨갛게 부어오른 상처가 있었고 그 상처 의 모습은 마치 예리한 흉기에 여러 번 찔린 것 같은 창상(創傷)처럼 보였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사람들을 불러 올게!” 8. 황급히 1층으로 뛰어 내려가 키스에게 이 상황을 알리자마자 그는 놀라운 침착함을 보여 주었다. 차가운 물과 얼음, 다량의 소독한 수건을 준비하라 고 명령한 뒤에 자신은 재빠르게 왕실의(王室醫)에게 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은 중년의 의사가 키스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것은 10분 후의 일이었다. “...이건” 침대에 누인 지스의 상태를 이리저리 조사하던 의사가 난색을 표하며 키 스에게 말했다. “혈액독이야. 뱀독이네.” 키스는 곧바로 의사를 밀쳐내며 단도를 뽑아 물린 부위에 세로 1자로 베 어낸 뒤에 입을 대고 피를 빨아냈다.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것을 지켜보던 의사가 측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응급처치는 이미 늦었어. 이게 어떤 상태인지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키스는 피 묻은 입가를 닦아내며 지스에게서 물러났다. 그가 차가운 눈빛 으로 의사를 보며 물었다. “냉수요법도 소용없습니까?” “알면서 왜 물어보나. 상처를 보아하니, 4일 전에 물린 거야.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 중독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라면, 어떤 독사에 물린 건지 자네 도 알걸세. 단순한 용혈사독(溶血蛇毒) 같은 것이 아니야.” 그 말에 키스가 눈을 감았고 문 밖에 있던 다른 기사들 역시 낮은 신음소 리를 냈다. 나는 키스의 어깨를 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4일 전에 물린 것이라면 지스가 지명에 갔을 때인데, 대체 무슨 독사에 물린 거죠! 아니 그보다 물렸다면 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거냐고요!” 키스는 내 팔을 걷어내며 짧게 말했다. “반시(飯匙), 그 중에서도 글룸허츠(Glumhearts)라고 불리는 반시뱀이 있습니다.” “...글룸허츠?” 내 물음에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해 준 자는 루이 경이었다. “그 독사에 물린 자는 사흘 후부터 고열에 시달리며 천천히 심장이 죽어 가. 그리고 보통 보름 후엔 심장이 차갑게 식어 죽게 돼. 그렇게 죽은 자 는 마치 피부가 얼음처럼 보여서, 살아 있을 때의 미모가 그대로 유지되게 되지. 그래서 누군가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을 때, 그 독사에 물리게 만드 는 거야.” “...말도 안돼.” 그렇다면 지스가 지명을 갔을 때 누군가 일부러 그 독사에 물리게 만들었 다는 것인가. 루이가 벽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 지스 경은 정말 고집이 세거든. 원하는 것 은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제후의 귀부인들이 그런 지스를 곱게 돌려보냈을 리가 없겠지. 그 독에 죽은 스왈로우 나이츠가 지금까지 세 명이야.” 갑자기 울분이 터졌다. 독살이라니! 어떻게 그런 일을 뻔뻔하게 저지를 수 있는 거야! “어쨌든 독에 중독 되었다면 일단 해독제를 먹어야 하잖아요! 아직 기회 가 있잖아요!” 그러나 왕실의는 자조의 쓴웃음을 보이며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베르스 왕국이 마키시온이나 콘스탄트처럼 뛰어난 의술을 가진 나라 인 줄 아나? 그걸 해독하는 법을 알 고 있는 의사는 이 나라에 없을 걸세.” 나는 다리의 힘이 풀려버리는 것 같았다. 다 농담이었다고 누구라도 말해 줬으면 좋겠다. 왜 지스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혼자 있고 싶어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 다. 지스는 그 독사에 물린 뒤에 자기가 15일 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태연하게 관을 준비하고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 던 건가. 아무에게도 독사에 물렸으니까 구해달라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혼자서 주변을 정리하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다가오는 것조차 부담 스러워서 내게 화를 내고 - 평생 혼자 살아 왔으니까 마지막까지도 철저하 게 혼자서 끝내려고 시침을 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게 어딨어! 그 따위 시시한 마지막이 어딨냐고!” 내가 커다랗게 소리치자 사람들이 모두 동정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키스를 바라보며 애원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해독제가 있는 곳을 아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이라면 알고 있을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나한테 찾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나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분이라면 분명히 알 고 있을 것이다. 제발 지금까지도 연락이 가능하기만을 바라며 나는 왕실 텔레마코스가 있는 곳을 향해 죽을 힘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진 이제 11일 남았다. -Blind Talk 먼저 말씀드릴 것은, 부디 뱀독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말아 주세요. 뱀독에는 신경독, 용혈독, 응고독이 있다는데... 사실상 15일 동안 상대를 들들 볶다 가 죽이는 독은 SKT의 세계에서만 존재합니다. 게다가 반시뱀의 독은 보통 응고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이번 스토리에 어울리는 실제 사독은 발견할 수가 없어서 어리숙한 머리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음... 어쨌든 이번 편은 늦게 올린 사죄의 의미로 길게 써서 부랴부랴 올리지만 덕분에 거친 문장이 많고 오탈자도 많은(본래 많았지만...) 반쪽자리 글이 된 것 같아서 좀 씁쓸하네요. 하지만 더 이상 늦장부렸다간 일일연재가 끝난 다는 묘한 중압감에 올리게 됩니다. SKT를 처음 쓰면서 상투적이라도 좋으니까 네거티브한 것은 되도록 피하려고 했지만 성격이 성격이라서 뭔가 또 독살이네 죽음이네 하는 소재들이 튀어나 오고 말았습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우중충하게 가고 싶은 생각은 없고... 어쨌든 마이 페이스로 특히나 이번 편은 사건 규모를 조금 크게 해서 가보려고 합니다. 부디 동참해주시길. 그럼 다음 편에서. 카산드라 윌슨의 Darkness on the Delta를 들으며 中國의 月 Chinese moon 중국 전역을 여행하고 있을 때 난 허베이 성 옌산 산맥(燕山山脈) 부근의 만 리장성을 들릴 기회가 있었다. 누구도 없는 밤...나는 홀로 6400Km에 달하는 중국의 역사에 감탄하며 인류최대의 건축물과 동화되어 보려 애썼다. 내가 만 리장성에 특별한 애착을 갖는 것에는 남 다른 이유가 있다. '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지구의 건축물은 이 것 뿐이라지...' ...나는 달을 사랑한다. 달이 품은 매력은 대충 봐서는 쉽게 건질 수 없는 것임 에 분명하지만 저 까마득한 과거부터 지구를 지켜본 달을 난 몹시도 사랑한다. 달도 지구를 사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구를 떠나지 않고 29.5일 동안 지구 를 쭉 둘러보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지구의 중력 때문에 달이 떠나지 못한다는 슬픈 생각 따위는 하고 싶지 않고 지구의 기분 때문에 달이 계속 표정 을 바꾼다는 남성 우월적인 생각 또한 하고 싶지 않다. 달은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달도 그런 이유 로 몹시 아름답다. 난 영원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수시로 바뀌는 달의 표정 은 무한한 영원의 한순간 정도로 여긴다. 화난 표정...웃는 표정...나름대로 아 름다운 것이지, 난 한 표정만 특별히 사랑하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는다. /따르르릉/ ..? 이 시간에 이곳에서 전화가? 어디선가 희미하게 전화소리가 울렸다. 분명 오른쪽 어딘가에... 달렸다. 분명 저기 저 망루에서 들리는 전화일 것이다. 그 래, 내 예상은 맞았다. 아무도 없는 망루에서는 분명 다급하게 들리는 전화벨 소리가 요동치고 있었다. -가끔 난 전화벨 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 같다는 생 각을 한다. "여보세요?" "...거기선 달이 보이나요?" "여보세요? 누구세요?" "...거기선 달이 보이나요?" "...?" 나직한 여자의 목소리. 왜 이곳으로 전화를 걸었는지, 또 '...거기선 달이 보이 나요?'라는 당연한 말을 무슨 의미로 한 것인지 나는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대 답했다. "예...달이 보입니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눈을 희미하게 뜨고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달은 첫날밤 의 처녀처럼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無形의 베일을 치고 까다롭게 자신을 가린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달을 볼 때엔 살짝 바라보 는 것이 버릇이다. 그러면 달은 적어도 내게는 자신의 알몸을 보여주기를 꺼리 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달이 보이지 않아요. 달은 아름다운가요?" "그곳은 낮이에요?" "달은 아름다워요?" "...그럼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달은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과연 누구일까...보다는 왜 이런 질문을 할까...라는 생각이 앞선다. 내가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달 의 아름다움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거나 가식된 말로 치장할 뿐이다. "그곳은 낮이에요?" "아뇨. 낮이 오려면 7일 남았어요." "...??" 퍼뜩 나는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그녀가 달에 있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결국 달에서는 '달'의 모습을 볼 수 없지 않은가. 허탈한 웃음이라도 나올 법한 생각 이지만 그렇게 생각이 드는걸... "...당신은 지금 달에 있습니까?" "...예" 장난 끼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전화가 달과 연결되어 나는 누군지 모를 그녀와 전설처럼 대화 하고 있다는 사실에... "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물론 입니다." "망원경으로 달을 보시면 아마 절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망원경? 내 옆에는 마치 전화기가 있었던 것처럼 고성능의 망원경이 있었 다. 난 어깨로 수화기를 잡고 망원경을 이용해서 달을 봤다. 난 평소에는 망원 경으로 달을 보는 게 마치 지하철에서 자는 척 하면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름 다운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을 좋 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자세히 볼 수 있 게 허락한 것 같아서 난 별 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어디 있어요?" 그녀를 잘 찾을 수가 없었다. 망원경으로 보기에는 달은 너무도 넓다. "비의 바다를 찾아보세요. 거기에 있어요." '비의 바다...' Mare Imbrium...천문학자 G.B. 리올리치가 'Almagestum novum'(새로운 알마게스트)에서 이름 붙인 아름다운 달의 바다중 하나이다. 실제로는 물 한 방울도 없고 공기가 없어 파도 소리도 들릴 리 없는 sea가 아닌 mare지만 지 구의 어떤 바다보다도 더욱 바다 같고 겸허한 아름다움이 즐비하다. 물이 있어 야 바다라는 억지는 생각하기 싫다. "보여요. 당신의 모습이..." 보였다. 드넓은 '비의 바다' 한가운데에 태초부터 존재한 것처럼 보이는 전화 박스 안에서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망원경 속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봐 온 것 같이 - 그렇게 느껴졌 다.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 확실하게 보여요." "당신은 제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1.53초 전의 제 추억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떨어져 있어요. 당신과 나는...서로의 1.53초 전의 추억만을 공유할 수 있는 거리에..."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제가 1.53초 전의 당신의 추억을 엿볼 수 있기 때문 에...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랑이라는 말. 나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긴 했지만 운명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달에는 12개의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바다는 전부 지구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그녀가 서있는 달의 바다도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자 꾸만 우연처럼 언제나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는 12개의 바다는...지금을 위해 존 재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내가 그녀와 대화하는 지금을 위해서. "..."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1.53초 전의 그녀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가슴이 콱 막혀오는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계속 그 녀의 추억을 바라보다가 지금 이 시간, 이렇게 망원경으로 언제보다도 확실하 게 느껴지는 1.53초 전의 추억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뭘 느꼈는지...지금까지 달의 추억에 빠져 느껴오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오늘 밤 나는 무엇을 느꼈는지... ...달은...그러니까 그녀는 계속 내게 같은 추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 이다. 마치 계속 계속 같은 신호만을 보내는 길 잃은 작은 배의 구조신호처럼 - 조금도 변치 않는 슬프고 상처받은 추억의 모습을 나는 오늘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적어도 1959년 이후에 태어났으니까 말이다... "절 볼 수는 없겠지만 제가 있는 곳은 볼 수 있을 꺼에요...중국이 보이세요?" "..."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픈 미소만을 보였다. - 망원경, 작은 동그라미 속에서 바라본 1.53초 전의 그녀의 모습은 그랬다. "...? 그럼 만리장성도 안보이세요?" "볼 수 없어요." "볼 수 없어요?" "...보지 못해요." "..." 언제부터 그녀의 눈이 어둠 외에는 볼 수 없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1959 년 이후에 태어난 나로서는 그전의 그녀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내 가 50년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장님이 아닌 그녀의 다른 모습, 다른 추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동전이 다 되었어요. 그만 끊을 시간이네요." "잠, 잠깐만요!" "...오래 전부터 당신과 대화하고 싶었어요. 안녕. 날 계속 지켜봐 준 사람." "다시 전화할 수 있을까요?" /찰칵/ "여보세요!" "..." 그녀가 끊은 것이다. 동전이 다 되었다는 말은 변명인지도 모른다. 망원경으 로 전화가 끊어진 이후에도 계속 그녀의 모습을 -정확하게 말하면 1.53초 전의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나는 그녀가 전화를 끊은 뒤 확실하게는 보이지 않 지만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미 보는 기능을 상실 한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 - 비의 바다. 물 한 방울 없는 비 의 바다 한 가운데서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왜 눈물을 흘리는 거지. 나는 뭔가 불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조심해!" 두 눈이 확대되었다. 분명히 본 것이다. 그녀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그것은 어깨에 성조기가 새겨져 있는 강철같은 우주복을 입고 있는 자였다. 그 리고 그의 손에는 비명처럼 번뜩이는 칼이 들려있었다. "피해요! 어서 피해!" 나는 미친듯이 외쳤지만 이미 전화가 끊어진 지금 아무리 크게 외친들 달까지 목소리가 들릴리가 없다. "제발 피하라니까!" 난 발을 세게 구르며 외쳐댔지만 그녀는 계속 전화박스에서 눈물만을 흘리고 있고 그 음침한 우주복은 어떤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칼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뭔가에 인기척을 느꼈는 듯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장님인 그녀가 우주복 을 볼 수는 없었다. 자기 앞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녀의 심장은 그 지독히도 날카로운 칼날에 뚫린 뒤였다. 나는 망원경에서 눈을 때었다.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리곤 구토했다. 토해버 리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나는 중국의 위대한 건축물위에 내 모든 것을 쏟아버렸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달이 이미 동쪽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을 때 나는 다 시는 달을 볼 수 없다는 불안감에 다시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대고 비의 바다 를 찾았다. '없다..' 한참을 찾았지만...전화박스도 앞을 못 보는 그녀의 모습도 칼을 든 우주복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연극을 끝내고 배우들이 내려간 막을 보는 기분 이었다. 난 뭔지 모를 공포에 휩싸여 그곳을 떠났고 다음날 중국을 떠났다. 지금도 나는 망원경으로 달을 보지 못한다.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다. 망원경으 로 달을 보면 자꾸만 심장이 파 해쳐져 죽은 그녀의 모습을 볼 것 같기 때문이 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녀가 죽지 않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지금도 내 창 옆에서 푸르스름하게 - 달은 계속 내게 자신의 추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Epilogue 내 대학시절에 천문학을 강의하던 교수가 학생들에게 달의 알베도(albedo) 는 0.073 밖에 안 된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도 달의 본질의 0.073% 밖에 모른다는 말도 덧 붙였다...그 당시 나는 그 말을 농담 정도로 들 었지만 어쩌면 정말로 사람들은 달의 0.073%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은 지구에게 자신의 뒷면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지구에서는 절대로 달 의 한쪽 면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 달도 남에게 보여주고 싶 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지구를 보면서 느낀 자신의 아픈 기억들 따위를 달은 자신의 뒷면에 감추어 놓는다. 지구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그런데 인간들은 중력을 벗어나고 달에 접근해서 결국 억지로 달이 보여 주기 싫은 아픈 기억들을 끄집어냈고 달의 눈동자에 성조기를 꼽아 달에게 지 워지지 않을 생채기를 남겼다. 인류가 처음으로 달의 뒷면을 본 것은 1959년이었다.... The End -Blind Talk 그래도 뭐라도 올려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서 재탕이긴 하지만 단편 하나 올립니다.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9. 리더구트 본부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텔레마코스 센터로 달려가면서 내 머리 속에는 19세 쯤에 적현무 키르케님과 나눴던 대화가 계속 떠돌고 있 었다. 명주작 알테어 님과 숙적인 그 분은 큰 싸움이 끝나면 종종 내가 있던 업소를 찾아오곤 했다. 한번은 내가 이렇게 물었다. "싸우는 것, 무섭지 않아요?" 이 한심하고도 솔직한 질문에 다혈질적인 키르케 님은 의외로 진지하게 생각한 뒤에 대답해 주었다. "난 싸움 속에서 태어나고 싸움 속을 살아 가는 여자야. 이제 와서 날 낳 은 싸움이 날 다시 거둬간다고 무서울 것도 소란 피울 것도 없겠지." 그건 그녀의 서슬퍼런 미학 같은 것이었다. 현무의 별자리 밑에서 태어난 이상 그녀는 곱게 죽지 못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그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키르케 님조차 내 꿈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던 것이다. "사람들을 돕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힘들게 살기로 각오한 것이 아니라 면 어설프게 착한 척 하지 마. 이런 세상 속에서 뭐가 옳고 그른지 너는 판단할 수 있겠어? 네 가슴이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정의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 내 꿈에 대해서 그녀는 냉정하게 평해 주었다. 세상 강자들의 꼭대기에 서 있다고 평가 받는 그녀에게 조차도 '정의' 에 대해서는 비웃을 수도 추앙할 수도 없는 곤혹스러운 단어였던 것이다. 모든 선행에는 희생이 따른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희생이 두려워서 입으로만 남들을 걱정해줄 거라면 애 당초 '정의'라든지 '선행' 같은 단어 입에 올리지 말라고 그녀는 경고했고 - 나는 지금 정의를 각오했다. "당장 텔레마코스를 쓰고 싶습니다!" 나는 텔레마코스 센터의 문을 열어 젖히며 소리쳤다. 그야말로 총알 주파 로 달려온 나는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숨을 가쁘게 몰아 쉬고 있었다. 문가에 앉아 화장을 고치는 일에 여념이 없던 센터 아가씨가 이런 나를 보 곤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쓰세요." 왕궁의 매력적인 점이라면 그 값비싼 텔레마코스가 무료라는 것이리라. 이곳에는 칸막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네 명의 여성이 있었고 그 중 세 명 은 현재 '텔레마코싱'중이라서 나는 네 번째 있는 대기 중인 아가씨에게 걸어갔다. 갈색 단발머리를 깔끔하게 내리고 있는 유니폼의 아가씨는 '이 렇게 긴 금발을 가진 남자는 처음 봐.'라는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급한 일이신가요?” “저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신관기사 엔디미온 키리안 입니다. 지금 이용 할 수 있죠?” “예에.”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테이블 앞에 놓여 있는 은색의 서클릿을 머리에 착용했다. 으읍!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편 뒤에 눈을 꽉 감고 정신을 집중 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지역코드를 불러주세요.” “지역코드는... I27041" "접수되었습니다. 지역코드 I27041” 그녀가 눈매를 좁히며 머리 속으로 ‘연산’을 시작하자 곧 머리에 쓰고 있던 서클릿이 파르스름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여성들을 사람들은 텔레-레이디(통칭 TL)라고 부른다. 눈을 감은 그녀는 풍부한 표정으로 이리 저리 얼굴을 귀엽게 찡그리며 지 역코드 I27041과 10분 째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1분이면 접속이 되었다는데. 의외로 성능이 나쁜... 아니 경력이 부족한 텔레-레이디로군. 10여분간의 시도 끝에 지역코드 I27041과 연결되자마자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확 뜨더니 날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 었다. “저, 정말 여기와 연결하실 생각인가요?” “물론입니다. 연결해 주세요." "하지만 여기는..." "이오타 왕국의 인트라 무로스 맞죠?" "알면서도 INM과 연결하시겠다는 건가요. 여긴 보안구역이라고요! 이런 위험한 곳과는 연결해 본 적이...” "괜찮으니까 계속 진행하세요." 이오타의 방첩기관 인트라 무로스(INM)는 지정된 자들이 아니라면 접근할 수가 없는 보안구역이다. 즉, 외부인이 함부로 접속을 시도했다가는 당장 접속이 끊어지는 것은 물론 텔레-레이디마저도 타격을 받는 위험한 곳이다. 물론 나도 그 사실은 INM의 국장 이자벨 님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지역코드를 알려주겠지만, 꼭 할 말이 아니라면 접속하지마. 네 목숨이 위 험해 지니까.'라는 무서운 경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 말에 용기를 낸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 다. 전류 비슷한 것이 전해져서 손끝이 찌릿했다. 그녀가 숨을 고른 뒤 눈을 감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접근암호를 불러주세요." "접근암호는..." 나는 이자벨 님이 내게 은밀하게 알려주었던 INM의 비공식 접속암호(back- -door)를 불러주었다. "세-상-뒤-에-존-재-하-는-것" 그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녀의 몸 속으로 화악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고 곳 내 머리 속에 뿌연 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머리 속에서는 말끔한 모양새의 이오타 군 제복을 입은 사내가 날 바라보고 있 었다. 접속은 성공이었다. 이제부터는 손을 잡은 텔레-레이디의 눈과 귀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하게 된다. [넌 누구냐. 소속을 밝혀라. 어떻게 이 라인을 아는 거지!] [전 엔디미온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어떻게 이 접근암호를 알고 있는지 말해라!] 역시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 인트라 무로스의 기관원답게 나 만큼이나 젊 은데도 위압감이 넘치는 번뜩이는 눈매를 가진 엘리트였다. 기밀보호가 인 생의 전부인 것 같은 그는 계속 고압적으로 '넌 뭐하는 작자냐!'라고 물었 고 나는 그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간결하고도 빠르게 대답했다. [이자벨 크리스탄센 님께 미온이 애타게 찾는다고 전해 주세요.] [네 놈이 국장님을 알고 있다고?]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머뭇거리자 나는 조금 화가 나서 편법을 쓰기로 했 다. [급한 일이에요! 빨리 바꿔주지 않으면 당신 목이 날아갈 거라고요!] 역시 그는 움찔하며 난색을 드러냈다. 물론 허세긴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그가 인트라 무로스 쪽 텔레-레이디의 손을 놓자 갑자기 영상이 끊어 졌고 2분쯤 지난 후에 다시 영상이 머리 속에 확 떠올랐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엔 1년 만에 다시 보게 된 이자벨 님의 이지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예전처럼 최고급의 회색 빛 여성용 슈트로 몸을 두르고 멋진 은테 안경에 진한 은발의 머리칼도 이마 위 일자로 가지런히 자른 모습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여자'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완벽한 캐리어 우먼의 모습이다. 현대판 예언자의 모습이라고 할까나. 항시 차분한 표정 위에 반가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온 군.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가봤더니 일 그만 두었다고 하던데?] [미안해요. 제가 알려드렸어야 하는 건데...] [아니야. 정보국 국장이면서 그런 정보도 먼저 알아내지 못한 내 잘못이 지. 후후.] 지적인 향기가 온 몸에 가득한 그녀는 재치 있는 말장난으로 슬쩍 넘기며 눈웃음을 보였다. 확실히 이자벨 님은 세상 최고의 엘리트면서도 권위의식 이나 부담감 같은 것은 조금도 느낄 수 없는 대단한 여자다. 물론 그 상냥 함 뒤에 숨겨진 냉정함으로 지금까지 몇 명의 정적(政敵)들을 제거했는지, 그건 알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데 미온 군.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가 되었다며? 벌써부터 지명도 한번 다녀오고, 일도 멋지게 해결하고... 훌륭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네.] [아하하... 역시 알고 계셨군요.] 역시나 내가 뭘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아마 내 속옷이 몇 개고 어제 내 가 침대를 태워먹었다는 사실까지 알지도 모른다. 저 상냥함에 방심해서 이자벨 님을 우습게 본 작자들은 그날부로 자신도 몰랐던 사소한 과거까지 모조리 까발려지게 될 것이리라! 정말 무섭지 않은가? [저 이자벨 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부탁? 으음, 뭘까?] 설마 오늘 아침 지스킬이 중독증세를 보였다는 사실까지는 아직 모르겠지, 라는 생각에 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글룸허츠라는 독사의 뱀독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해독제라고?] 그녀도 의외의 부탁이라는 듯 안경 너머로 조금 놀란 눈빛을 보였다. 세 계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인트라 무로스라면 그 해독제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자벨 님이 모른다면 그건 세상 누구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그녀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혹시 네가 물린 거야?] [아, 아니에요.] [그럼 왜 그 해독제를 찾는 거지?] [제 소중한 동료가 죽어가고 있어요. 베르스 왕국의 힘만으로는 해독제를 구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예상대로구나. 네 동료가 귀부인의 저급한 장난에 당한 것이로구나.] 역시 이자벨 님은 순식간에 무슨 상황인지를 유추해선 대답했다. [부탁 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보답할게요! 무례한 요 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앞으로 11일 안에 지스 경은 죽습니다. 제 룸 메이트에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손으로 혼자 목숨을 접겠 다면서 15살 주제에 관까지 준비한 그 불쌍한 녀석에게... 꼭 해독제를 먹 여서 되살린 다음에 왜 그렇게 혼자 살아가려고 하냐고 멱살을 잡고 화를 내고 싶어요. 평생 그 녀석이 날 미워하더라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 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싶진 않아요!] 이자벨 님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미온 군은 여전하구나. 어른이 될 생각은 없는 거니?] [...발전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독물학(毒物學)에 정통한 교수는 알고 있어. 그 여자라면 희귀한 뱀독이라고 하더라도 해독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을 거야.] [누구죠!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 여자라고? [흐음.] 그녀가 처음으로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물며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미온 군이 갈 수가 없는 곳일 텐데...] [말씀해 주세요.] [마키시온 제국의 황실 직할 과학 아카데미 소드람에 있는 독물학 상위 교수 메데이아가 전 세계 최고의 권위자야. 그 사람이라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거야.] 머리 속이 그 자체로 거대한 정보 데이터베이스나 다름 없는 아자벨 님은 타자기로 쳐내는 것처럼 주저 없이 내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길 한 첨언을 붙였다. [미온 군. 이 일, 그만 둘 수 없어?] [왜, 왜요?] [메데이아 교수에게서 해독제를 받는다는 것은... 아니, 그만두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은 뒤에 진지하게 내게 충고하는 것이었다. [너 같은 타국인이 소드람에 들어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야. 그곳도 여기와 같은 보안구역이거든. 설사 메데이아 교수를 만난다 하더라 도 해독제를 얻기는 쉽지 않을 거야.] [괜찮습니다. 제게 그 정보를 알려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나 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직접 너를 도울 수가 없어서 미안하구나. 공식적으로는 나는 너와 얘기 하면 안 되는 입장이야. 그리고 지금 이 말, 아마 곧 다시 듣게 될 꺼야.] 다시 듣는다고? 그런 의아한 말을 남긴 이자벨 님은 먼저 연결을 끊었고 곧바로 머리 속의 영상이 사라져 버리며 나와 손을 잡고 있던 텔레-레이디 와 순식간에 분리되는 현기증을 다시 느꼈다. 연결이 끝난 뒤에 그녀는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 듯, 땀방울이 맺힌 얼굴 을 손바닥으로 꼭 누르며 헤헤 웃는 것이었다. "와아아. 오늘은 참 대단한 날이네요. INM과 연결해 봤다니. 그것도 크리 스탄센 국장님과 통화하게 될 줄이야. 예상대로 정말 아름다운 분이야. 국 왕 전하조차도 그 분과 만날 수는 없을 거에요!"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신이 나서 말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신위를 제외한 여성으로서 최고의 출세를 한 캐리어 마스터 이자벨 님은 전 세계 여성들에게는 추앙의 대상이었고 공식적인 자리에는 모습을 드러 내지 않은 채 수많은 소문과 추측인 무성한 분이기 때문에 - 그녀로서는 텔레마코스를 통해 지켜본 것만으로도 흥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신 정말 누구에요? 어떻게 이자벨 님과 그렇게 친한 거죠?" "그건..." 나는 난감한 웃음을 보이며 길게 늘어트려 말했다. "비밀입니다아." 여기서 내 장미꽃 날리던 10대를 자랑해 봐야 뭐 하겠나. "하아. 하지만 이 감동도 곧 끝이로군요. 그녀가 서랍에서 작은 약병 앰플 하나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것을 보자 심하게 인상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저 앰플은 자꾸만 그 녀의 눈물을 기억나게 만든다. 그녀는 꼭 피를 닮은 물약이 들어 있는 앰플을 따며 씁쓸하기 그지 없는 미소와 함께 읊조리는 것이었다. "당신은 모를 거에요. 이 약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알아요."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그 약을 입 속에 털어 넣는 모습을 지 켜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동안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나는 그런 텔레-레이디를 바라보며 내 10대를 함께 했던 그녀가 떠올라 가 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이 엷게 떨리며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 다. 어째서 인지 모르겠지만 저 약을 먹으면 눈물이 흐른다고 한다. 그리 고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녀가 손가락으로 계속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이것으로 텔레마코싱이 끝났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했다. 그 약이 무엇인지 궁 금한가? 그녀가 말했다. "몇 백번을 해봐도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는다는 것은 끔찍해. 아 죄송합 니다. 혼잣말이에요." 그건 지금까지의 통화내역을 모조리 그녀의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는 약이 었다. 텔레마코스를 통해서 사람들은 아주 비밀스러운 통화를 할 때가 많 고 그 때문에 그것을 연결해 주는 텔레-레이디들은 기밀유지를 위해 통화 가 끝난 직후 약으로 통화 기억을 머리 속에서 지워야 했다. 정확한 그 약 의 명칭은 기억이 안나지만 굳이 내가 이름을 붙여준다면 '없는 편이 나았 을 망할 놈의 약'이라고 붙여주겠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이자벨 님을 봤다는 것도, 내가 동료를 구하기 위해 곧 마키시온 제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모두 망각했으리라. 그때 그녀가 말했다. "저어. 저는 지금 기억이 지워져서, 당신이 땀 투성이로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까지만 기억하지만요. 당신 참 멋진 사람이네요." "예? 그걸 어떻게 알죠?" "이것 보세요. 이 손가락." 눈물에 얼룩진 그녀가 왼손을 보여주며 방긋 웃었다. 그녀는 새끼 손가락 부터 세 개의 손가락을 굽히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죠?" "저는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마시기 전에 이렇게 표시를 해둬요. 제가 텔레 마코싱 해드린 사람이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면 하나를 굽혀 놓고 제법 멋진 사람이라면 두 개를 굽혀놓고 아주 마음에 들었다면 세 개를 굽혀 놓 거든요. 그래서 정신을 차린 뒤에 제 손가락을 보고... 아아, 이 사람은 세 개나 굽혀 있으니까 대단히 멋있는 통화를 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에 요. 당신이 무슨 통화를 했고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 지만 최소한 제가 통화를 연결해 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고 싶 은 거에요. 보세요. 이렇게 당신은 세 개나 굽혀 있으니까 아주 좋은 사람 인 것 같아요." 그녀가 약의 후유증으로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말했다. -Blind Talk 오늘은 두 편 연속으로 올립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10.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왕궁의 마구간이 있는 곳을 향해 줄기차게 내달리는 와중에도 내 머리 속은 예의 텔레-레이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 다. 지금까지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녀 역시 텔레-레이디였다. 그녀가 했던 말이 있다. "기억을 지우는 약 따위는 없어." 그녀 역시 그 앰플을 몇 천번을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건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아니라 기억 위에 덧칠을 해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검은 물감이라는 것을. 즉, 분명히 머리 속에 그 기억은 남겨져 있지만 떠오르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텔레마코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한참 동안 소리 없이 눈물 을 흘렸다. 그 약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시고 엉켜버린 머리 속이 제자 리를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마치 부분 기억상실증을 겪 는 것과 비슷한 일이 아닐까. 텔레마코스를 통하는 통화라는 것은 사실 대부분이 은밀하거나 역겹거나 잔인하거나 음탕한 것들이 많다고 한다. 남들에게 밝혀서는 안 되는 추한 비밀을 사람들은 텔레마코스에서 속삭이는 것이다. "모르겠어. 아주 끔찍한 것을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게 파고들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껴안고 위로해 주 었다. 강제로 뒤엎어진 자신의 기억들이 밤마다 무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 를 때마다 그녀는 내게 - '나를 껴안고 절대 놓지 말아줘. 해가 뜰 때 까 지만 내 곁에 있어 줘.' - 그렇게 애원했다. 텔레-레이디는 보통 20대에서 그만두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약의 부작용 때문에 10년 이상 텔레마코싱을 계속 하면 정신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붕괴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불행하게도 너무 일찍 정신이 붕괴되었다. 그녀가 기억을 잃고 방황하다가 날 만났을 때도 - 그 부작용 때문이었다. 아직도 내 몸 구석 구석에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아, 이제 기억이 났다. 그 약의 이름은 므네모시아(Mnemosia)이며 그 어원은 '소중한 기억'이라고 한다. "아니 당신!!!! 지금 뭣하는 거요!!!!" 내가 말을 묶어둔 줄을 풀고 말 위에 올라타자 관리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황급히 뛰어오며 소리쳤다. "당장 못 내려요! 함부로 왕실용 말을 타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내가 헤헤 웃으며 어떻게든 빨리 좀 말을 빌려 보려고 말을 꺼냈다. "저 기산데요. 기.사. 그러니까 말 타는 직업이라서..." "아 기사고 수의사고 간에 당장 내려요!" "우씨! 여기 말도 많은데, 같은 왕실 식구끼리 하나 빌려간다고 왜 그래요!" 도둑놈이 되래 성낸다고, 나는 발칙하게 화딱지를 냈다. 정말로 이 '왕립 마구간'에는 수백여 마리의 말들이 가지런히 묶여 한가롭게 건초더미나 씹 고 있었다. 이건 소가 아니야! 달릴 때 쓰라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티끌 하나 없는 제복을 입은 모습이 역시 왕실 마구간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관리인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아 왕실의 말을 빌리고 싶으면 절차를 밟고 오란 말입니다!" "...절차요?" "일단 행정부 별채에 가셔서 일차 승인을 받으시고 그 서류를 가지고 본 채에 가셔서 말을 잃어버리면 손해 배상을 하겠다고 계약서를 쓴 뒤 뒤에 왕궁에 가셔서 연대 책임을 질 수 있는 관리 나리의 도장을 받으시고 그 다음엔..." "...그거 하루 안에 끝납니까?" 그 전에 지스 경이 죽겠다!! 에라이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고삐를 확 끌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 놈도 오랜만에 달리는 것 이 좋은지 히이잉! 콧소리를 내며 확 앞발을 들어올려 본 뒤에 관리인을 뛰어 넘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거, 거기 서라!!! 이 말 도둑 기사 나리!!" 거 참으로 복잡하게도 부르시는군. "돌아와서 처벌 받을게요! 엔디미온 이름으로 달아 놓으세요오오오오!" 나도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담. 아무튼 정신없이 변명을 늘어 놓으며 나는 미친 듯 내달리기 시작한 말과 일체가 되어 왕궁 정문으로 향했다. 긴 금발을 첨병의 깃발처럼 길게 흩날리며 귀족들이 오가는 왕궁의 대로 를 죽자 살자 돌진하고 있는 내 모습은 단숨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 았고 몇몇 귀부인들은 이 모습이 멋지다면서 꺄아아, 반색하며 내달리는 내 쪽으로 손수건을 꺼내 던지는 것이었다. 느긋해서 좋으시겠습니다. 이쪽은 힘들어 죽겠구만요! 이대로 마키시온 제국까지 논스톱이라는 결심으로 한참 왕궁 정문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다. 투아아아앙!!! 갑자기 총알이 앞을 홱 지나가며 엄청난 총성이 들리자 놀란 말이 몸을 틀었고 나는 그대로 낙마할 뻔했다. 역시나 대뜸 날 쏴 죽이려던 자의 정 체는 아이히만 대공이었다. 그가 권총의 총구를 훅, 불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봐. 엔디미온 군. 자네 그렇게 어딜 급히 가나?" "아, 아니!! 아이히만 대공! 대공께선 항상 사람을 부를 때 총을 이용하 십니까!!!"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니 정말로 죽을 뻔 했다고! 동료를 구하러 가다가 시작 지점부터 낙마해서 사망이라면 천국에서 지스킬을 만나도 창피해서 도망칠 수 밖에 없다고요! 그러나 폭력 관리 아이히만 할아범은 뭐 대수냐는 듯이 시큰둥한 표정으 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불렀을 때 멈췄어야지." 못 들어서 죄송하군요! 그때 나를 추격하던 병사들이 달려와선 내게 창을 들이대며 말에서 내리 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망할! 그런데 아이히만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내저으며 병사들을 물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리. 이 놈은 말도둑이라서 체포 해야..." "나 재무대신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의 이름을 걸고 엔디미온 군에 게 말을 빌려주었네. 불만 있나?" "아,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아이하만의 싸늘한 눈초리에 바짝 얼어버린 병사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가 버렸다. 아무튼 아이히만은 절대로 적으로 돌리면 안될 위험인물 1순위였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아이히만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팍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이히만 대공!" "후후. 뭔가 또 말썽을 피우려는 겐가, 자네. 황궁에서 허가 없이 말을 내달렸다간 사형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나 보군." "마키시온 제국에 가려고 합니다! 비록 스왈로우 나이츠의 임무는 아니 지만... 한시가 급합니다. 처벌은 돌아와서 받겠습니다." "마키시온? 그 먼 나라까지 뭣하러 가겠다는 건가.: "소드람에 있는 메데이아 교수를 만나려고 합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히만이 흠칫 놀란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 던 것이다.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자 나는 의아하고 또 불안해 졌다. "왜, 왜 그러세요?" "아니 뭐... 자네 얼굴을 보는 것이 지금이 마지막인 것 같아서 잘 기억 해 두려고. 그래도 자네, 꽤 싹수가 있는 애송이였는데 아쉽군, 그래." 이미 죽은 것처럼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능숙한 솜씨로 주머니칼을 꺼내 시가를 커팅한 뒤에 입에 물고 순 금의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는 하얀 연기를 뿜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쯧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인간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었구먼."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봐요! 아이히만 대공!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강철노인 아이히만의 입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 괴(怪) 메데이아 여사는 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뭔가 더없 이 무시무시한 위기 속으로 제 발로 뛰어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그때 키르케 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힘들게 살기로 각오한 것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선한 척 하지마. "에잇! 힘내자! 미온! 목표는 메데이아!" 나는 다시 말고삐를 다잡으며 왕궁 밖으로 달렸다. -Blind Talk 미온 : 안녕하세요. 미온입니다. 디온 : 안녕하세요. 디온입니다. 미온&디온 : ............(우리 어째 막 만들어진 캐릭터 같다는 기분이.) 미온 : 흠! 아무튼 이번 편에 나오는 텔레마코스를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 겠습니다. 텔레마코스가 뭔지는 아시죠? 디온 : 그것은 오딧세우스와 페넬로페아의 아들! 미온 : 여, 여기서는 그게 아닌데요.;;; 디온 : 얼레? 그럼 뭐야? 미온 : SKT의 세계에서 나오는 일대일 통화 수단이랍니다. 디온 : 그거... 백랑전설의 서버와 같은 거 아닌가요? 미온 : 아닙니다. 그건 서버 클라이언트 방식으로 하나의 서버에 다수의 클라이언트가 접속하는 것이지만 텔레마코스는 오직 1대1로 연결 이 가능한 통화수단입니다. 게다가 마력 전달 같은 건 못합니다! 디온 : 후졌군요. 미온 : ...사용하는 용도가 다를 뿐입니다. 디온 : 그럼 전화와 같은 겁니까? 미온 :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화국과 같은 중간 매개체가 없이 직접 텔레-레이디 간에 직접 연결이 되기 때문에 차라리 굳이 비교하자면 무전기와 비슷합니다. 서로의 지역코드를 찾아서 연결되니까요. 디온 : 그런데 그 텔레-레이디...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혹시 OL? 미온 : 노코멘트 디온 : 그렇다면 텔레-레이디가 쓰고 있는 서클릿이 바로 그 지역코드를 가지고 있는 안테나인 셈인가요? 미온 : 자세한 것은 따지지 말아주세요. 어차피 소프트한 소설입니다. 디온 : 그런데 호스트 출신인 당신이 그런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왕자 출신인 나도 모르는데? 미온 : 그건... 여기 대본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디온 : ...한심하군요. (퇴장한다.) 뭐 시시껄렁한 강좌는 이쯤해 두고... 아무튼 돌아왔습니다. 먼저 늦게 올 린 것 죄송합니다. 회사에서 지금 집에 돌아왔거든요. 그건 그렇고 이번 편은 좀 복잡한 면도 있고 어두컴컴해서 걱정이네요. 뭐 다음 편부터 다시 난리 부르스겠지만... 이빨을 뽑고 나니까 기분이 침 울해져서 그렇게 나온 것일지도, 물론 후반 스토리 진행의 열쇠가 되는 중요한 부분이라서 어떻게든 쉽게 표현해 보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부디 어둡다고 짜증내지 마시고 다음 편도 쭉 봐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어째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들은 모조리 여자냐? 라는 질문을 제법 받았는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미온이 고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굉장한 여자가 자주 나오는 것 뿐입니다. 이거 1인칭 주인공 시점입니다. 미온의 생각과 시선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미온 중심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잘 보시면 항상 '의문의' 남자가 그녀들 위에 서 있습니다. 가령 이자벨 크리스탄센 같은 경우는 그녀가 모시는 이오타 국왕이 있고 명주작 알테어도 그 위에 교황이 있고 키르케도 그 위에는 콘스탄트 국왕이 있습니다. 진청룡 라이오라 란다마이저는 어차피 남자고... 견백호 무라사 랑시는... 나중에 나오겠지만 뭔가 설명하기 껄끄러운 남자고. 아무튼 그녀들도 결국 조직사회의 직업우먼들이고 지배계층이든 피지배계층 이든 뭐든 남녀는 공존합니다. 그나마 남녀가 분리된 사회는 스왈로우 나이츠 와 펠리오스 무녀들 정도겠지요. 그럼 기다려 주시고 읽어주시고 리플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물 러가겠습니다. 아 참, 캐릭터 그림 그려주신 분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백랑전설은 내일쯤 올릴 것 같습니다. EGO-WRAPPIN'의 PARANOIA를 들으며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11. 보통 북쪽에 있는 마키시온 제국까지는 가려면 쉬지 않고 말을 달려도 열 흘은 족히 걸린다. 하지만 그건 포장도로를 달렸을 때의 경우고 험악한 산 길을 지름길 삼아 달리기를 감수한다면 5일이면 가능할 것이다, 라고 유명 한 모험가이자 지도제작자인 고객이 말했었다. 그리고 내가 마키시온 제국으로 향한지도 4일이 지났다. ‘...이렇게 힘들다는 말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4일 동안 잠 한숨 안 자고 달린 나는 이미 극도로 지쳐 있었다. 잠깐씩 마을에 들려 말을 바꿔 탈 때마다 ‘서라! 말도둑!’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거친 산길을 전속으로 달리며 끝없이 들썩거린 탓에 두 허벅지는 피 멍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입술을 바짝 마르고 나뭇가지에 할퀴어지고 모래 바람에 뺨에 긁힌 탓에 곳곳에 생채기가 늘어가고 있었다. 아아 이 티 없 이 고운 얼굴에 이런 가혹한 풍화작용이라니! 나는 그야말로 세상 풍파에 말라 찌들어가는 난초였다. 그때였다. 으슥한 한밤중의 오솔길을 내달리던 내 귀에 한 여자의 간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응?” 나는 말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늘한 달빛만이 가득한 산 중이라서 시야는 아주 나빴다. 내가 소리쳤다. “어디에요! 어디에 있어요!” “여기에요! 도와주세요!”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으슥한 산길에서 애원의 목소리를 들었 을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와주는 것이고 다 른 하나는 무시하고 가버리는 것이다. 내 머릿속도 괜한 자비를 베풀 겨를 없으니 후자를 택하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갈게요!” 나는 말에서 내려서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런 산속에서 여 자 혼자 조난이라도 당한 것이라면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친 탓이다. “이쪽이에요! 이것 좀 풀어주세요!” “자, 잠깐만요.” 피멍이 든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걸어가는 내 꼴이 꼭 조난당한 쪽은 내 쪽 같았다. 한 1뿐쯤 찾은 끝에 나는 나무에 묶여 있는 어스름한 여자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다 찢겨져 나간 옷에 희미한 달빛을 받은 얼굴이 고작해야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여자는 근처 마을 사람 같았다. “너, 설마 강도들한테 당한 거야?” “어서 풀어주세요! 잠시 후면 그 놈들이 올 거에요!” “알았어. 금방 풀어줄게.” 나는 사실 좀 더 주의해야 했다. 칼 한 자루 없는 내가 이런 낯선 산길에 서 생면부지의 여자를 구하려고 작정했다면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 당연한 생존수칙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를 묶은 매듭을 풀고 있는 내게 험악한 사내들이 서넛 나타나 날 둘러싼 것이다. 망했다! 그 사내들은 내 모습을 상품처럼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했다. “뒷모습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남자네. 꼴을 보아하니 과부 마나님 의 애첩 같은데, 견디다 못해 도망치던 길이셨나?” 어째서 그런 상상을 하는 거야, 이 놈들아! “이거, 이거 오늘 일 공치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구만. 우리도 직업인인 데 일 좀 빨리 처리하고 싶거든? 후딱 가진 거 다 내놓으셔. 협조해 줄 거 지?” 그들은 들고 있는 칼이며 창으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협박을 하기 시작했 다. 산속을 영업장으로 삼은 강도로서의 프라이드가 있는 자들이라면 말이 통 할 것 같아서 내가 애원했다. “동료가 죽어가고 있어. 급하게 소드람으로 가던 중이었다고. 그러니까 제발...” “아아. 우리도 급하긴 마찬가지야. 마키시온 제국 령에서 강도 짓한다는 건 목숨 걸어야 하는 일이거든? 그러니까 가진 거 다 내놓으면 보내준다니까. 알아들었으면 냉큼 꺼내봐.” 큭! 칼은커녕 돈 한 푼도 안 들고 왔다. 나는 너무 서둘렀던 나 자신을 자책하며 짜내듯이 말했다. “돈이... 없어. 아무것도 없어.”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몸뚱이로 대신해라.” 그들이 노끈을 꺼내 내 앞에 던지며 다리를 묶으라고 말했다. “이, 이럴 시간 없어!” “이봐 예쁜 친구. 칼 든 사람 앞에서는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부모님이 안 가르쳐 주시든?” 고객으로부터 무기든 사람을 제압하는 호신술을 배운 적은 있다. 실력이 몇 수 위가 아니라면 위험하니까 반항하지 말라는 경고도 들은 적 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굵직한 노끈을 집어 들었다. 주변은 어두컴컴하다. 조금만 도망쳐도 잡아내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말은 1분 거리에 있다. “이야앗!” 고개를 굽혔던 나는 순간적으로 나는 노끈을 채찍삼아 맨 앞에 있는 자의 얼굴을 때렸다. 휘잉 소리와 함께 억센 동아줄이 강도의 눈을 긁고 지나갔 고 얼굴을 감싼 그가 칼을 놓쳤다. “이, 이 놈이!” 다른 강도들이 당황하는 순간 나는 칼을 주워들고 여자를 묶고 있던 밧줄 을 단번에 끊은 뒤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도망쳐요!”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내 손에 이끌렸고 ‘이런 썅! 잡아!’ 라는 고함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내 판단대로 숲 속으 로 숨어든 우리가 숨을 죽인 채 엎드려 있자 그들은 금세 우리의 흔적을 놓쳐 버린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이 새끼, 어디 숨어 있는 거야!’ 라든가 ‘잡히면 배를 갈라 버린다!’라는 등등의 험악한 욕설들이 들려오다간 멀어져 갔다. 제법 잠잠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슬쩍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휴우. 살았다.” “...당신 대체.”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날 구해준 거 에요? 혼자 도망치는 게 좋았을 텐데.” “혼자 도망쳤을 바엔 처음부터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이래 뵈 도 나 기사라고요.”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그녀가 쓴웃음을 지 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착한 사람이네.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요.” “아, 뭐가요?” 그 순간 그녀가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내 목에 가져대 대는 것이었다.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말했다. “혼자 도망치지 그랬어요.” 12. “...아야야야야.”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는 뒷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신음을 토 해냈다. 한패였던 그 여자에게 위협 당한 직후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에게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데, 이후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기는? ...아앗!” 나는 흡사 감옥처럼 보이는 이곳을 둘러보곤 사색이 되었다. 주변에는 나 외에도 여러 남녀들이 몰려 앉아 있었고 그들도 나처럼 발에 족쇄가 채워 져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청년. 정신 차렸소? 하도 식은땀을 흘려서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 뭐요.”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죠! 여기는 어딘가요!” 나는 황급히 그에게 되물었고 뱃사람처럼 우람한 체구를 가진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을 했다. “족히 반나절은 쓰러져 있었지 아마?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정말 모르오?”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키시온에서 가장 큰 노예상의 저택 지하요. 요 위층이 노예 시장이지. 잠시 후면 경매가 시작되겠구만.” “겨, 경매라뇨?” “우리들을 경매한다고. 이 나라 사람 아니오? 마키시온 제국이 노예제도 를 인정하고 있는 걸 모르나 보지?” 그는 놀랍게도 아주 담담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제길. 나는 힘이 풀 려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한 나 자신을 책 망했다. 보나마나 그 강도 놈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긴 것이리라.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40대 정도로 보이는 모피 코트의 여자와 건장한 경호원들이 들어왔다. 그녀는 제법 정중한 목소리로 이 방에 모여 있는 노 예 후보들에게 말했다. “자아. 곧 경매가 시작된다. 족쇄를 풀어 줄 테니 목욕 준비해라.” 그리고 얼굴선이 남자처럼 굵은 그 중년의 여자는 내게 다가와 날 훑어보 더니 허헛, 웃는 것이었다. “산속 패거리들이 말한 청년이 바로 너로군. 두목한테 말 들었어. 자기 를 구해주려고 했다고 막 웃더구나.” “그럼 설마 그 두목이라는 것이...” “네가 구하려고 한 그 여자가 바로 그 패거리들의 두목이야. 2대째지.”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어쩌자고 강도 두목을 구하려고 그 난리를 피웠 던 거지. 아무리 피곤했다지만 그것조차 간파하지 못한 나 자신이 창피했다. “말 들은 데로 굉장한 미남이구나. 씻기고 꾸미면 꽤 값을 받겠어. 이름 이 뭔가.” “......” 나는 좌절감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마키시 온 제국의 노예로서 내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 따윈 싫다고! 제기랄! 경호원들이 내 이름을 불게 만들려는지 내게 다가오자 그녀가 손을 내저으 며 무릎을 조금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마주했다. “그 두목도 넌 괜찮은 녀석 같으니 너무 거칠게 대하지 말라고 부탁 하더군.” “병 주고 약주는 군요! 당신들 때문에 내 동료가 죽게 생겼다고!” 나는 노예상인들의 우두머리 같은 그녀를 확 노려보았다. “우리 제안하나 할까. 이대로 널 경매에 내보내봐야 결국 밤이 외로운 여자들에게 팔려갈 뿐이겠지. 너도 그런 건 싫지?” 그걸 좋아하는 남자가 있겠냐! “내 밑에 들어오는 거 어때. 마침 고관대작들 접대할 때 필요한 청년이 필요했거든. 돈 많이 주고 행동도 자유롭게 해 줄게. 마키시온 어딜 가도 내 밑에 있다고 말하면 어깨 펴고 살 수 있어. 노예도 아니고 정식 직원이 라고. 이 정도면 최상의 대우 아냐?”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부러움의 눈초리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노예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길 자청한 것이라고 한다. 마키시온 제국의 법률은 의외로 공정해서 노예라고 마구 짐승처럼 다루고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돈을 많이 번 노예라면 자신의 값을 지불하고 다시 평민으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은 노예가 되길 자청한다는 것이다. 자유를 팔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노예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런 노예 들을 다루는 상인이 바로 이 여자였다. “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 제안 저한테 의미 없어요.” 내 반듯한 눈빛을 본 노예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네. 뭔가 사연이라도 있나 봐?” “당장 소드람에 가야만 해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소드람? 대 아카데미 말인가? 정말 그곳에 가고 싶어?”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내 눈이 확 뜨였다. “가게 해 주실 수 있나요?” “소드람에서도 노예들을 사가긴 하지만 거긴...” 그녀의 말을 끊으며 내가 소리쳤다. “부탁드립니다! 메데이아 교수를 만나야 해요!” “거긴 어떤 노예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이야. 솔직히 우리도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받아도 팔고 싶지 않다고. 게다 가 메데이아 교수라면 그 중에서도 위험천만한데.” “상관없어요! 제가 받을 돈 다 드릴게요! 메데이아 교수를 만날 수만 있 다면!” “희한한 청년일세. 좋아. 아깝지만 선심을 쓰도록 하지. 널 소드람으로 보내주겠다. 그것도 마녀 메데이아에게.” 그녀가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는 듯이 상당히 위험한 미소를 보이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째서 메데이아라는 이름이 나오면 다들 이렇게 되는 거지? “이제 이름을 말해줄 수 있어?” “엔디미온 키리안. 미온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미온 군. 정 소원이라면 할 수 없지. 신체포기각서에 서명하러 가자고.” “아 예. 뭐든지.... 뭐라고요!!!” 신체포기각서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Blind Talk 어제 못 올린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오늘도 연속 두편입니다.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13. 결국 나는 그날부로 아카데미 소드람에 '배달'되었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보안구역에 들어간 것이니 내 계획의 절반은 성공인 셈이다. 그러 나 문제는 나머지 절반이었다. “지금부터 각종 독극물에 대한 신체 반응과 그에 따른 해독과정을 실습 하겠습니다.” 이곳은 소드람의 대강당. 이곳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리고 있었다. 바로 저 젊은 여자가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 던 메데이아 교수였다. 예상을 깨고 30대를 안 넘긴 것 같은 여성이다. 인 트라 무로스 국장 이자벨 님을 이지적이고 상냥한 분이라고 평가한다면 메 데이아 교수는 거기에서 '상냥함'이라는 것이 쏙 빠져버린 모습이었다. 이보다 더 정숙할 수는 단정한 흑발에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고 아무 장 식도 없는 치마 밑으로 미색의 편물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저 눈동 자는.... ‘카론 경을 여성화시키면 딱 저거로군.’ 절대영도처럼 차가운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오늘의 실험재료는 몇 분이나 버틸까.'였다. 예전 도마 위의 생선이 되었던 악몽 이 오늘 이 위기를 경고하는 예지몽이었던 것일까! 대 소드람 아카데미의 임상실험재료 14호가 되어 일으켜 세운 수술용 침 대 위에 묶인 채 수천 명이 넘는 의학도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나는 '어째서 최근에는 이렇게 자주 침대에 묶이게 되는 걸까.' 라는 울적함을 되씹었다. 분명 이번 달 점괘를 봤다면 '화상 조심. 익사 조심. 강도 조심. 무엇보다 침대 조심.'이라고 나왔을 것이다. 나는 겨우 겨우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저어. 메데이아 교수님. 이런 민망한 모습으로 만나 뵙게 된 것은 참으 로 유감이지만 제가 교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실험재료에겐 말할 권리가 없어.” 그녀가 날 돌아보지도 않고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교가 끌고 온 손수레에는 뭔가 위험천만해 보이는 약물들이 담겨져 있었 고 그걸 이리 저리 준비하던 메데이아가 자신의 학생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 었다. “이제 실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그녀가 뿌연 액체가 들어 있는 약병을 하나 꺼낸 뒤에 그 약병에 적혀 있 는 이름을 읽는 것이었다. “비소(砒素)부터 시작합시다.” 하필이면 비소! 그녀가 묶여 있는 내게 그 무시무시한 약병을 들고 걸어 오더니 입을 벌리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진짜 무섭잖아, 이 여자! “메데이아 교수님. 저는 뱀독에 물린 동료를 구하기 위해 베르스 왕국에 서부터...” “한번만 더 내게 말을 걸면 이걸 먹인 뒤에 해독제를 주지 않겠어. 입 벌려.” 아아 냉정한 여왕님. 한 마디라도 끝까지 좀 들어주실 수는 없나요. 결국 내 식도를 타고 약물이 들어갔다. 그녀가 몸을 돌려 젊은 원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비소화합물은 백색 분말의 형태로 존재하며 지금 이 실험재료에게 투약한 것은 희석액입니다. 대 마키시온 제국에서는 곡식을 해치는 곤충들 을 박멸하기 위한 농약으로 이 비소를 이용하며 그에 따른 농민들의 중독 에 대처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해독제를 개량해 왔습니다.” 내가.... 해충이냐. 이런 건 벼멸구나 메뚜기에게 먹이라고! 나는 대 마키시온 제국의 의학 발전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는 꼴이 되었 고 원생들은 내게 몰려와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내 상황의 변화를 필기하 기 시작했다. 메데이아는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내 하얀 목덜미를 가리키며 차가운 어 조로 말했다. “비소제를 이렇게 다량으로 마신 자는 가장 먼저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 한 작열감(灼熱感)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의 말대로 펄펄 끓는 스프를 단숨에 꿀꺽 삼켜버린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물 좀 줘! “그 이후 위부의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며 구토, 현기증, 토혈, 하혈의 증세를 동반하게 되고...” 어, 어떻게 사람한테 독약을 먹여 놓고 저렇게 태연하게 설명할 수가 있 는 거냐고! 그녀는 지휘봉으로 내 그곳을 가리키며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심한 자궁출혈도 생기게 됩니다.” 남자입니다만!! “그리고 계속 방치하게 되면 마비 증세와 더불어 의식장애를 일으켜 사 망에 이르게 됩니다.” 알고 있으면 어서 해독제를 달라고! 라는 말은 그녀 말대로의 통증 덕에 입 밖으로 나올 구가 없었다. 잠시 내 상황을 체크하며 좀 의아한 표정을 보이던 그녀는 해독제를 가져와 마시게 했다. 내 입에 쓰디쓴 액체를 털어 넣던 그녀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거야. 실험재료가 될 걸 각오하고 여기 온 거잖아.” 비소가 온 몸을 헤집어 놓아 가슴이 깨질 듯한 나는 겨우 겨우 짜내어 입 을 열었다.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날 만나러 왔다는 건가.” “전 베르스 왕국의 기사입니다. 제 동료가 독사에 물려 죽어가고 있어서 당신을 찾아 왔습니다. 당신 밖에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알 바 아냐. 관심 없어.” 메데이아는 차갑게 내게 등을 보인 뒤에 학생들에게 입을 열었다. 우아아 아! 너무해! “그럼 다음 독극물을 투여해 보겠습니다.” 실험재로 14호의 기구한 운명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그리고 실습은 1시 간이 넘게 이어졌고 그 동안 나 실험재료 14호는 '실수로라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각양각색의 독극물을 먹었다가 또 해독제를 먹었다가 하며 천국과 지상을 오르락내리락 해야만 했다. 덕분에 내가 거의 실신일보직전까지 갔을 때도 그녀는 계속 '다음 독극물은...' 이라고 말하며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강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감정이 퇴화해 버린 맹독의 마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솔직히 당장이라도 졸도해 버리고 싶은 기분이 가득했지만 나는 이런 상황 에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입을 꽉 담은 채 긴 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기절해 버리면 메데이아와 대화할 기회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종이 울리며 수업은 끝났고 메데이아는 정말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눈물에 얼룩진 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절하지 않은 실험재료는 네가 처음이야. 덕분에 오랜만에 실습을 충실하게 할 수 있었어. 고맙군.” “이제.... 지스 경을.... 도와주실 수 있는 건가요.” “말했을 텐데. 관심 없다고.” 순간 어떤 독을 삼켰을 때보다도 가슴 속에서 불이 일었다. 나는 그녀를 쏘아보며 커다랗게 소리치고 말했다. “당신.... 독에 중독 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런 연구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정작 독사에 물려서 당신 외에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당신의 존재가치는 뭔가요! 한 사람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뭐가 위대한 교수냐고!!!” 밖으로 나가던 학생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메데이아는 여전 히 차가운 시선으로 날 응시할 뿐이었다. 이윽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14. “....으음.” 꿈을 꿨다. 이번 꿈속의 나는 얼음 같은 빙해(氷海) 속에서 방황하고 있 는 열대어였다. 그리고 겨우 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오자.... 뭐야, 이 꼴은! “그 안에 가만히 있어. 잔독을 빼는 중이니까.” 저 멀리 의자에 앉아 서류를 읽던 메데이아 교수가 날 흘낏 보고 말했다. 여기는 연구실 같았다. “뭐, 뭐에요,, 날 왜 이렇게!” “오해하지 마. 해독처치일 뿐이야.” 나는 속옷만 빼고 모조리 발가벗겨진 채로 커다란 실험용 욕조 안에 들어 가 있었다. 물은 턱까지 차올라 있고 얼음이 가득 차 있어서 살갗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속에 있다 보니까 내 긴 금발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어서, 내 모습은 기다란 황금 촉수를 가진 거대 해파리였다. 하얀 가운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메데이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실험보고 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기적적이군. 네 몸에 별 문제는 없는 것 같아. 때로는 후유증으로 말을 못하거나 팔다리를 못 쓰게 되기도 하거든.” 그런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 꺼내지 좀 마세요! “또 실험재료 14호가 되는 것은 사양입니다.” 나는 온기를 싸악 빼앗아 가는 듯한 추위에 떨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실험계약은 한번 뿐이니까. 해독치료가 끝나면 넌 다 시 노예상에게 가게 될 거야.” “그럴 수는 없어요. 전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에요!” “또 그 소리.” 역시 교수라서 그런가. 놀라울 정도로 젊은 나이인데도 그녀는 상당히 완 고하고 보수적인 냄새를 풍겼다. 그녀가 날 지그시 보며 입을 열었다. “베르스의 기사라고? 그런 신분으로 실험재료를 자처했다니 믿어지질 않 는구나. 그것보다 타국의 기사가 이 소드람에 들어오다니, 배짱도 좋군. 사람들이 네 신분을 알게 되면 넌 당장에 끌려가서 이곳에 침입한 이유에 대해 고문에 가까운 심문을 받게 될 거야. 그때는 동료를 구하겠다는 그런 허망한 이유 따위는 믿어주지도 않을 거다. 그걸 알고 들어온 거냐?” “그걸 각오할 만큼 중요한 일이니까요.” 그녀는 계속 되는 내 부탁에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동료라니, 오랜 친구인가 보지?” “아니요. 이번에 처음 만난 녀석이에요. 성질도 나쁘고 날 싫어하죠.” 내가 쓴웃음을 짓자 그녀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이상한 녀석.” “글룸허츠라는 뱀에 물렸어요. 교수님이라면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약한 독이로군. 하긴, 너희의 형편없는 의학수준으로는 고칠 길이 없 겠지.” 그 형편없는 의학수준을 가진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 소년 기사가 당신을 애타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학생들 앞에서만큼 차갑게 굴지는 않았다. 남들 앞에서 빈틈 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녀의 처세술이었던가. 대충 성격이 짐작이 간다. “베르스 왕국이라... 아이히만 공작과 오르넬라 성녀님은 잘 계신지 모 르겠네.” “그 분들을 아세요?” “물론 알지. 그들 모두 여기 명예 교수야. 몇 년 전 초빙되어 와서 정치 학과 신학을 강의한 적이 있거든.”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었군.’ “아직도 기억나. 권총을 꺼내들고 정치야 말로 전쟁이다! 라고 학생들에 게 소리치며 강의하던 아이히만 공작과 숙취에 찡그린 표정으로 담배를 피 워 물고 들어와서는 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너희들 자유니까 알아서들 자습해, 라고 한 마디 던진 뒤에 나가버린 오르넬라 성녀님의 모습을. 별 볼일 없는 줄 알았던 베르스에도 저런 괴팍한 사람들이 있었구나, 라고 깜 짝 놀랐었지.” “아하. 아하하하. 그 분들, 괴팍하죠. 좀.” 당신도 만만찮아! “후후. 이상하게도 그때 오르넬라 님의 그런 모습을 봤을 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생겼어. 저런 사람도 신의 은총을 받는데 그렇다면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 내가 왜 네 녀석이랑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왜 저한테 화를 내시는 겁니까! “그런데 저어...” “응?” “아까부터 의아했는데, 어차피 절 얼음물 속에 담가 둘 것, 이렇게 홀딱 벗길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이런 꼴, 민망하다고요.” 아무래도 이거 뭔가 이상해! 그러자 그녀가 쓰윽 고개를 돌려 서류를 집 어 들면서 중얼거렸다. “실험재료에겐 말할 권리가 없어.” “...이보쇼.”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저 젊은 나이에 소드람의 상급 교수가 되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가능한 것일까. 천재성은 기본이고 거기에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노력과 더 불어서 남들을 동정하는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냉정함도 필요했겠 고 무엇보다 자신을 시기하는 경쟁자들에게 흠 잡혀서는 안 되는 완벽한 자기방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흔한 반지니 목걸이 하나 차고 있지 않은 모습이 왠지 애처로워 보였 고 또한 메데이아 교수와 왜 독물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궁금해 졌다. 내 심장이 멈춰버릴 정도로 몸이 차가워져가고 있을 때 그녀가 강의 다녀 올 테니 옷 갈아입고 떠날 준비하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해독제, 만들어 주실 거죠?” “너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거니.”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씁쓸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난 너와 대화를 나누면 안 되는 입장이야.” 이자벨 님의 예언대로.... 나는 그 말을 또 들었다. -Blind Talk 소설가이자 국문과 교수인 스승과 대화를 하던 중에 이것과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설가라는 것은 기본 적으로 자신이 세상을 보며 느낀 감정을 글로 기록 하는 자들이야. 훌륭한 소설가의 조건은 그 감정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사회를 대변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거야. 소설가는 서비스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냐. 독자의 기호에 고개를 숙 이고 굽실거리다간 평생 가도 자기 감정에 충실해 질 수가 없어." 솔직히 나는 이렇게나마 소설의 형식을 빌려 내 생각을 서술한 것도 몇년 안된다. 사실상 모든 불분명한 묘사를 금하는 시나리오를 써왔고 시스템에 따라 통제되는 게임 스토리다 기획이다 뭐 이런 것들을 (별로 금자탑을 이 뤄본 것도 없이) 해왔던 녀석이고, 몸은 국문과지만 국문학에 대해서도 열 정을 보인 적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창피하게도 장편 소설을 거의 읽지도 않고 주로 읽는 것이라고 해봐야 비소설 교양서나 인문서적, 잡지, 수필, 칼럼 같은 것들이니, 사실상 나는 소설을 잘 쓰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또한 환타지에 대해 내 글을 읽는 분들보다도 아 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리 속을 괴롭히 고 있다.) 이런 내가 평생을 소설에 바쳐온 그 교수님의 말을 듣고 뭔가 깨닳았다고 생각했다면 십중팔구 '착각'이리라. 하지만 최근들어 그 분이 말한 '길'과 내가 생각한 '길'의 괴리감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는 기분에 마음이 아프다. 내가 독자의 기호에 상관 없이 (보잘 것 없는 필력임에도) 글을 쓸 때는 단편을 쓸 때 뿐인 것 같다. 장편을 쓰던 중에는 드래곤 레이디를 썼을 때, 내 멋대로 하겠다고 출판사에게 말했던 '공극어' 편 밖에는 없는 듯 하다. 이 SKT도 출판사와의 기획 하에 시놉시스 단계부터 준비했던 것이고 사실상 기호와 무관하게 내 감정대로만 쓰고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이건 참으로 묘해서 자랑스럽고도 창피한 일이리라. 물론 나는 지금도 소설가가 서비스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에는 동감한다. 하지만 독자의 기호에 무관하게 자신의 생각만을 읊는 고 상한 모습이 이 대중문학의 올바른 길이며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일까. 이제 막 시작한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으며 누구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답이 나올리도 없을 것이다. 이 장르 문학 시장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완숙해 질 것이며 좀 더 성숙 한 작가와 좀 더 성숙한 독자들이 자리잡은 안정적인 시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십여년 후에 그 시장 속에 내가 여전히 서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뭐가 좀 더 현명한 길이었는지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일랑 일주일 내내 했으니 이제 좀 접고 자고 싶습니다. 지금 무척 피곤한 상태라서 미온을 묘사하는데도, 이거야 원 진짜 불쌍하게 써 버려서 쓰면서도 '이건 정말 고통의 강도가 제법 센 걸?'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메데이아 교수는 그렇게 유명한 여자인데도 미온과 모르는 사이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불철주야 연구만 했기 때문에 잠시라도 화류계에 몸을 담을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제가 가끔 만나는 메데이아 교수의 실제 모델 역시 그녀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돈은 참 많지만 연구실에서 사라져 버린 20대는 어딜가도 보상 받을 길이 없으니... 그것도 불쌍하죠 사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비탈리 - 샤콘느 G 마이너를 장영주 씨의 연주로 들으며 (정확히 어떤 곡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듣기 좋군요.) ps:축구 이겼군요! 안정환 선수가 골을 넣자 순간 동네가 엄청난 환성으로 떠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아아 이런 날은 정말 시원한 맥주을 마셔야... 쿠엘류 감독이 한국음식을 즐긴다면서 전복 버터 구이와 옥돔튀김을 예찬했는 글을 읽고 '그런 비싼 것을!!'이라면서 괜히 분노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15. “아우우우. 추워라!” 메데이아가 연구실을 나간 뒤, 나는 벌떡 욕조 안에서 일어났다. 그야말 로 '냉동 미온'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직 몸 안에 남아 있는 독기(毒氣) 의 현기증과 피부가 하얗게 질려버린 추위 덕에 휘청휘청 거리면서 나는 젖은 속옷을 벗은 뒤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확실히 메데이아의 빈틈없는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랄까, 마른 수건 과 내 체구에 꼭 맞는 남성용 옷을 욕조 근처에 준비해 놓아두었던 것이다. 백색의 고급스런 옷이었는데 주름이 없는 긴 바지에 품과 소매가 넓은 장 삼(長衫)이라서, 내가 입으면 긴 금발을 가진 이국적인 수도승쯤으로 보일 것이다. 신발 역시 시누아 블루 풍으로 물을 들인 고풍스런 것이었다. 덜컥! 바지 쯤 입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와앗! 사람 있어요!” 깜짝 놀라 돌아본 내 시선에는 큰 키의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제복이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짧은 머리의 군인으로 날 노려보는 눈빛이 마치 자비심이라고는 없는 이단심문관 같았다. “저어 지금 메데이아 교수님을 찾아온 것이라면....” 퍽! “아악!” 다짜고짜 이 녀석이 커다란 주먹이 내 명치로 날렸고 난 짧은 비명을 뱉 으며 몸이 꺾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이 콱 막혀 와서 나는 가슴을 쥐고 겨우 겨우 숨을 뱉어내야 했다. ‘설마, 메데이아 교수가 날 고발한 건가.’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기계인간 같은 이 거한은 내 긴 머리채를 잡고 날 억지로 들어 올린 뒤에 몇 번이나 같은 곳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 이었다. 그럴 때마다 엄청난 충격에 내 몸이 심하게 들썩였다. 꽉 깨문 이 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세어 나오고 눈앞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 이 자식. 진짜로 날 죽이려는....’ 만약 메데이아가 내 정체를 정부에 알린 것이라면 난 지금 이 자를 어떻 게든 쓰러트리고 한 시 빨리 도망쳐야 했다. 마키시온이 첩자를 어떻게 다 루는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까. 사람을 때리는 일에 아주 익숙한 것 같은 이 자는 내 몸이 더 이상 반항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잃자 벽 쪽으로 날 집어 던졌다. “크윽!”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등이 연구실 벽과 충돌하며 비명과 함께 피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바닥에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겨우 추스르며 고개를 들어 그를 쏘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뚜벅거리는 군화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내 앞에 다가와선 처음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처음 네 놈이 이곳에 올 때부터 널 눈여겨봤었다. 아무래도 수상해. 신 원을 밝혀라, 노예.” "보시다시피 실험재료 14호... 입니다만.” 나는 입가에 빨갛게 고인 피를 닦아내며 중얼거렸지만 곧바로 그의 군화 발이 내 다리를 찍은 뒤에 균형을 잃은 내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세차게 때 렸다. 몸속에서부터 밀려올라 오는 충격에 다시 내 입에서 피가 쏟아졌지 만 거한이 내 팔을 잡아채고 있었기 때문에 축 늘어진 몸은 바닥에 쓰러지 지 못했다. 이런 단순한 공격 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나는 피하 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예상에게 물어보니 자청해서 왔다고 하더군. 이곳에 실험재료로 오는 노예들은 모조리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는 병신들뿐이야. 그런데 너 같이 젊고 잘 생긴 놈이 다른 일거리를 놔두고 여기를 자청했다고?" “좋아하거든요... 독 마시는 거.” “수작 부리지마! 이 첩자 새끼!” 그가 내 뺨에 손찌검을 하며 윽박질렀고 순간 내 왼쪽 주먹이 그의 무방 비 상태의 관자놀이로 치고 들어갈 뻔 했지만, 나는 겨우 겨우 주먹을 풀 고 분을 삼켰다. 그가 내 목을 쥐고 그대로 들어 올리자 겨우 겨우 가다듬은 호흡이 다시 막혀오기 시작했다. 찡그린 내 표정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그가 비웃음을 드러냈다. “네 놈이 메데이아 교수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취조실에 가서 차근차 근 알아보도록 하겠다. 일주일 정도는 짐승처럼 다뤄줄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아.” 일주일이라니! 그랬다간 지스 경이 죽는다고! 난 내 목을 조르는 팔을 잡 고 몸부림을 쳤지만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내 두 발이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내 실험재료에게 뭐하는 짓이야!”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며 이 망할 놈의 고릴라가 날 바닥에 다시 떨어트렸다. “메데이아 교수. 강의 중이 아니었소?”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멋대로 남의 연구실에 들어와!” “교수. 나는 아무래도 이 노예가 의심스러워서...” “모욕적이군. 그 말은, 나 메데이아 상급 교수를 의심하고 있다는 말로 들어도 좋은가!” 메데이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거구의 사내를 쏘아보았고 그는 불만 스러운 표정으로 메데이아를 바라보다가 결국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메데이아 교수. 당신의 애국심을 의심하진 않겠소. 하지만 당신의 모든 것이 마키시온 제국의 소유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도록 하시오.“ 그녀가 제국의 소유라고? 나는 놀란 표정으로 겨우 겨우 쓰러진 몸을 일 으켜 벽에 기대었다. 구타의 화신 같던 그가 사라진 뒤에 메데이아가 내게 다가와 내 몸을 잠 시 훑어보더니만 힐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반격하지 않은 거야!” 그거야... “저 사실 평화주의자거든요. 싸움 같은 거 못한답니다.” 나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쥐고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웃었다. 하지만 그 녀는 역시 교수님, 속지 않았다. "내가 상급 교수라는 사실 잊었어? 지금까지 수많은 몸뚱이를 다뤄봤어. 그건 훈련 받은 체형이야. 그런 잘 다듬어진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싸움을 못한다는 헛소리는 장님도 믿지 않을 거야." “반격했다간... 당신이 의심 받았을 테니까요.”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구급상자 같은 것을 들고 오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 앉아. 치료해 줄게.” “아. 고마워요.” “자. 입 벌려. 조금 쓸 거야.” 그녀가 자신이 제조한 것 같은 무지하게 쓴 진통제를 먹여 주고 내 눈가 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와중에도 그녀도 나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메데이아는 내 시선을 피하며 부산하게 손을 놀려 붕대를 감아주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녀도 보통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표현할 기회가 없 었을 뿐이다. 그녀가 반창고를 잘라 내 눈가에 붙여주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살짝 떨 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 말해 줄 수 있어?”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미온이라고 불러주세요.” 나는 헤헤 웃었지만 그녀는 곧 내 시선을 피하며 구급상자를 닫았다. 그 녀가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던 신체포기각서를 돌려주며 일부러 빠르게 말 했다. “엔디미온. 너와의 계약은 이걸로 끝이야. 이제 여길 떠나줘. 베르스로 돌아가든 노예상에게 돌아가든...” “갈 수 없어요.” “너도 봤잖아. 이러다간 모두 위험해 져.” “해독제... 부탁드립니다.” “날 보고 매국노가 되라는 거야?” 그녀가 파란 눈동자를 내리깔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떨어진 옷가지들을 내게 던져준 뒤에 바닥을 어 지럽게 굴러다니는 약병들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내가 이런 나이에 남들은 평생 도달할 수 없다는 소드람의 상급 교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생 마키시온 제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계약을 맺 었기 때문이야. 내 모든 연구 성과는 제국의 소유이며 내 인생도 제국의 것이야. 난 내 연구 결과를 이 소드람 밖으로 유출해선 안돼. 아까 그 남 자봤지? 그 자가 내 감시원이야." “......” “그리고 계약 위반의 대가는 사형이야.” 메데이아 교수가 자신이 만든 독약이 들어 있는 약병들을 원래 자리에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괴롭게 만들어서.” 메데이아가 해독제를 내게 준다는 것은 바로 그 계약을 어긴다는 것이다. 나는 내 동료를 살리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권리가 있을까? "그때 나한테 소리쳤었지? 남의 목숨을 구해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뭣하러 해독제를 만들고 있는 거냐고.“ 그녀는 일부러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고 나는 살짝 떨리고 있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어려서 남동생이 하나 있었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네 나이 쯤 되 었겠군. 독버섯에 중독 되어 죽었는데, 그 독버섯을 내가 실수로 스프에 넣었거든. 난 그냥 허약했던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스프를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메데이아는 실수로 약병을 놓쳤고 바닥을 또르르 굴러가는 약병을 바라보 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정말로 미안하다면서 울고 있는 내 손을 잡고 너무 아프다고 울먹거리 면서 죽어가는 동생을 보면서 처음으로 독물학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거 야.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통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뿐이었지. 하지 만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는 소드람에 들어와서 군사적으로 쓰이는 치명적인 독약이나 만들고 있더군. 가장 적은 양으로 가장 빠르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약이 무엇이냐고, 제국은 나한테 그런 것만 요구해.” 그녀는 몸을 숙여 떨어진 약병을 다시 집어 들다가 툭툭 바닥에 눈물을 떨어트렸다. “누군... 사람 살리고 싶지 않은 줄 알아?” “미안해요.” “네가 내게 그렇게 소리쳤을 때, 너무 억울해서 울어버리고 싶었어. 왜 날 찾아온 거야. 어째서 날 자꾸 죄인으로 만드는 거냐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 얇은 손가락 이 조심스럽게 메데이아의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울지 말아요. 강요해서 미안해요.” 나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동료를 구하고 싶다는 생각 하 나로 눈치 채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는 머리를 긁 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시, 실험재료 14호. 한번, 더 하라면 할게요. 의외로 독약도 먹을 만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바보.” 일부러 웃어 보인 내 농담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책상으로 걸 어갔다. 그리고는 깃털 펜에 잉크를 찍어 하얀 쪽지에 뭐라고 빠르게 쓴 뒤에 그걸 봉투에 넣고 밀랍으로 봉인한 것을 내게 건 내 주었다. “이것이 면죄부가 되진 않겠지만 가끔은 위선도 좋겠지. 어서 가져가.” “...이건 설마.” "해독제를 만드는 공식이야. 글룸허츠의 해독제는 만든 즉시 투약해야 해. 이걸 너희 의사에게 보여주면, 아무리 형편없는 베르스의 의사라도 만들 수 있을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는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이러면 당신이 위험해 지잖아요!” 내 걱정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놀라울 만큼 간단했다. 그녀가 흑발의 머 리칼 사이에서 빛나는 청색의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안 들키면 되잖아.” 얼굴도 모르는 다른 나라의 타인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건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그래도 좋다고 결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애써 태 연한 척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가슴이 꽉 메어왔다. “고마워요. 절 믿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네게 해독공식을 알려준 적이 없고 우리들이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없어. 너는 그 공식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서 우연히 얻은 것일 뿐이야. 또한 우리들이 우연이라도 평생 다시 만날 일은 없다는 것도 명심해. 이제 실험은 끝이야. 어서 가."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는 논문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일부 러 내게 고개를 돌린 메데이아를 보며 내가 말했다. "아! 혹시 스왈로우 나이츠가 해외까지 지명을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는 꼭 절 지명해 주세요. 언제라도 달려갈게요.“ "다시 만날 일은 없다니까!" "무슨 말이세요. 우리는 아직 만난 적 없잖아요." 나는 고개를 숙여 메데이아에게 작별을 인사한 뒤에 연구실을 빠져 나왔다. 멋들어지게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만이 살아갈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항상 자신의 신념을 시험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를 배신하 진 않다는 오래된 말을 나는 ‘어른 주제에’ 여전히 믿고 있다. 16. 문제는 로비에서 발생했다. 소드람의 정문으로 나가는 로비에서 나는 예 의 '구타 고릴라'를 다시 만났고 그는 아예 작정을 하고 있었는지 기사로 보이는 사내 네 명까지 대동한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망할!’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180도 돌려서 아무렇지도 않게 반대 방향으로 걸어 가려 했지만 곧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잠깐. 너 어딜 가는 거냐.” “메데이아 교수님이 실험 끝났다고 절 내쫓았습니다만. 이후에는 어딜 가든 내 맘이잖아요?” “건방 떨지 마! 아까는 메데이아 때문에 물러섰지만, 역시 넌 의심스러 워. 취조실로 가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내 품속에 해독공식이 있는 것이 들통 난다 면 나는 물론 메데이아마저 위험에 빠진다. 게다가 독단으로 이곳에 온 것 이기 때문에 베르스 왕국의 입장마저 난처해지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실을 궁리해 봤지만 곧 날 둘러싼 기사들의 억센 손이 내 두 팔을 잡았다. “반항하면 이곳에서 즉결처분하겠다.” ‘...끝장이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때 갑자기 낭랑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당장 멈추지 못하겠나!” 기사들은 놀란 얼굴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고 나 역 시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봤다. “당신은...”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잖아!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훤칠하게 생긴 큰 키 의 청년이었고 입고 있는 군청색의 화려한 마키시온 제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사내였지만.... 문제는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다. 그를 보자 나보다 더 당황한 사람은 바로 날 취조실로 잡아넣으려던 거 한이었다. 그와 기사들은 그 청년을 보자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몸을 빳빳 이 세우고 경계를 붙이는 것이었다. “리젤 경께서 이런 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리젤 경이라고 불리는 그 청년은 내게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한 뒤에 날 잡으려던 자들을 확 쏘아보았다. “네 놈들, 이 분께 무슨 짓을 한 건가!” 당신 누구야? “이, 이 녀석은 의심스런 노예로 지금부터 취조를 하기 위해...” “미련한 놈들! 이 분은 대 마키시온 제국군의 비밀 요원이시다! 현재 베 르스 왕국 국적으로 신분을 숨기고 이곳에서 극비 임무를 하시던 중이시다. 네 놈들이 손을 댈 분이 아니야!” 얼레? 비밀 첩보원? 극비 임무? 이게 무슨 소리람? 하지만 나는 이 분위 기에서 '저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 첩보원 아닌데요.'라고 말할 수야 없는 노릇이라서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마구 꾸짖는 리젤 경의 호통에 그들은 당장에 당황하며 내게 고개를 조아 리는 것이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임무 중이시라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것도 모르고 우둔한 제가 그만...” “아,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업무상 과실치사도 있을 수 있는 거 고...” 뭐가 뭔지 몰라서 횡설수설하는 내 팔을 리젤 경이 잡아끌고 밖으로 나가 는 것이었다. 정문을 나가자 그가 방긋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곱슬거리는 밝은 금발을 가진 사내였다. “정말 위험했습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정체가 탄로 날 뻔 했군요.”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전 176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내가 누구보고 '임상실험재료 14호 입니다.'라고 소개해봐야 알아들을 턱 이 없지 않은가. 주변을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린 후에 그의 속삭임이 계속 이었다. “전 이자벨 크리스탄센 국장님의 연락을 받고 당신을 돕기 위해 온 것입 니다. 저는 이곳의 상급 장교로 위장 첩보활동을 하고 있는 인트라 무로스 소속 고정간첩 176호 입니다.” “이자벨 님께서!”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자벨 님은 날 걱정해서 이 사람... 그러니까 176호 리젤 경에게 알렸단 말인가. “당신이 국장님의 지령을 받고 이곳에서 첩보 작전을 하시던 중 정체가 드러날 위기라는 급보를 받았습니다. 메데이아 교수를 유혹해서 소드람의 연구 자료를 빼내려고 하셨다지요? 나라를 위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신다 니, 존경스럽니다." “아하하. 유, 유혹이요? 아하하... 하하.” 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소개하신 겁니까, 이자벨 님! 리젤 경은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계속 바라보면서 말을 마쳤다. “당신은 인트라 무로스 첩보원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은 일 급 첩보원이라고 들었습니다. 크리스탄센 국장님의 총애를 받고 계시다니, 이거 주제넘게 질투심이 생기는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오타 왕국에 영광 있기를!” “아하하. 영광... 있으면... 좋죠.” 나는 차마 내 입으로 '저 사실 이오타 왕국 첩보원 아닌데요.'라고 밝힐 수는 없어서 뭐라고 우물거리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그리니까 정리하자면 이자벨 님은 날 위기에 빠진 인트라 무로스의 첩보원 이라고 리젤 경에게 말한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 정체는 '여자를 후려서 연구 자료를 빼내는 일급 스파이'. 전직 호스트를 돕기 위해 인트라 무로스의 힘을 동원할 수야 없는 노릇이 니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만, 이거 뭔가 대단히 우울해 지는군. 그건 그렇고 176호라니, 대체 이자벨 님은 스파이를 몇 명이나 전 세계에 뿌려둔 거야! 설마 베르스 왕국에도 첩자가 있는 거 아냐? 가령 키스라든지... 아냐. 그 인간은 절대로 아냐. 밤낮 퍼질러 잠만 자는 걸? “그건 그렇고....” 나는 소드람의 정문 앞을 걸어가며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말 이 없다. 이제 남은 시간은 5일 뿐인데, 말도 돈도 없다니! 어째서 이걸 생각하지 못한 거지! 그때였다. 내 시선에 여자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여자 들은 그 남자가 너무 마음에 드는지 꺄아! 꺄아! 소리를 내며 반해 버린 듯한 얼굴들로 깡총거리고 있었다. ‘아주 신나시겠네. 누군 힘들어 죽겠구만!’ 그런데 저 남자가 입고 있는 제복...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아! 미온 경! 여기에요!” 갑자기 그가 손을 막 흔들자 내 눈이 놀라움으로 커져갔다. 설마 저 인간 은... “키, 키스 경?”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키스는 방실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키스가 스왈로우 나이츠의 제복을 입은 모습은 처음 봤다. 솔직 히 그 제복이 키스 하나 만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눈 부 신 모습이었다.... 라는 생각은 잠깐 접고! 어, 어떻게 저 인간이 여기 있 는 거야!!! “하아. 역시 여기 있었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아.”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았죠?” 키스에겐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사이가 극도로 나쁜 아이히만 공이 알려줬을 리도 없는데, 대체 이 멀고 먼 곳까지 어떻게 알고 온 거지. 키 스가 멍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얼굴이 대체 왜 그 꼴입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아?” “강도를 당해서 노예상에 팔려간 이후 맹독을 풀코스로 마신 뒤에 얼음 속에서 목욕하자마자 고릴라에게 폭행을 당하고 방금 전에는 생판 처음 보 는 176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와일드한 인생역정이다. “아아 이번에도 파란만장하군요 미온 경. 아무튼 여기 계속 있는 건 위 험하니까 이만 떠납시다아.” 여전히 주변에 달라붙어 있는 아가씨들은 '꽃이 둘이야!'라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잠깐 조용들 좀 해주시구려. 오늘은 충격의 연속이라서 머 리가 아찔아찔 하니까. 키스는 근처에 있는 나무들 속으로 날 끌고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에게 끌려가며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키, 키스 경.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냐니까요!” “그거야 당신과 나는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는...” “농담 하지 마!” 하지만 의문의 사나이 키스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심스러운 인간이다. 이자벨 님께 물어보면 이 인간의 정체 를 알 수 있을까. “키스 경. 해독 방법 알아냈어요.” “그래요.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키스는 엷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이 사람은 뭐든지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말 가져 왔어요. 같이 타고 가요.” “자, 잠깐! 말 한 마리를 같이 타고? 그래서야 5일 안에 도착할 수가 없 잖아요!” 말을 바꿔 타 가면서 혼자 달려도 겨우 겨우 5일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 리인데 두 명이 탔다가는.... “어머나. 제가 가져온 말은 보통 말이 아니랍니다아.” “잉? 보통 말이 아니라면?” 나는 키스가 나무들 사이에 숨겨 둔 말을 보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저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마(神馬) 같았다. 태어나서 저렇게 완벽한 말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검은 갈기를 가진 늘씬한 백색의 저 명마는 군살 하나 없이 완벽하게 가 꿔져 있었으며 네 다리 또한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보통 말보다 월등히 크고 웅장해 보여 후광이 느껴지는 것 같은 저 말은 그야말로 신이 보내준 듯한 철제(鐵蹄)였다. 베르스에 저런 훌륭한 말이 있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키스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 말이라면 두 사람을 태우고도 5일 동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습니다. 베르스 왕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명마 중의 명마입니다아!” “키스 경. 대단해. 이런 엄청난 말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키스에 대한 불신이 눈 녹듯 사라지고 존경심이 마구 우러나올 찰나 키스 가 먼저 훌쩍 올라타며 말했다. “무슨 소리에요? 이건 카론 경 말입니다아.” 훔친 거냐!!! 아니나 다를까, 믿을 구석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마지막 위 기를 모면할 수 있어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키스의 뒤에 올라탔다. 키스가 확 고삐를 잡아끌며 외쳤다. “가자! 카론 주니어!” 멋대로 이름 붙이지 마! -Blind Talk 다음 편으로 이번 화가 끝납니다. 이번에는 조금 묵직한 것을 다뤘으니 다 음에는 가벼운 것으로 한번... 그럼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빌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에는 2편을 하나로 묶어서 올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말씀해 주신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저는 일단 사르트르의 사상 에 대해 크게 아는 것이 없고 그가 거론하는 지식인이나 문필가라는 것은 꽤나 체제적인 화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제가 골몰하는 문제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지만, 그걸 차치하라도 충분히 좀 더 깊게 생각해 볼만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영화 빠삐용의 메인테마 Free as the wind를 들으며 (제리 골드스미스가 만들었다는 것은 최근에 알았지만, 언제 들어도 리듬 도 가사도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특히 영화를 떠올리며 들으면 깊은 감동 에... "네 가장 큰 죄는 인생을 낭비한 것이다."라는 대사가 기억나네요.)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17. 키스가 장담한 대로 희대의 명마 '카론 주니어'는 단 한번도 쉬지 않고 4일 만에 베르스의 수도 아스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나와 키스는 그 4일 동안 한숨도 잘 수 없었지만 그래도 키스가 챙겨온 사과를 받아먹 으면서 탈진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키스는 말을 모는 솜씨를 보나 긴 여로(旅路)를 대비한 치밀함을 보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급이었다. “하하핫! 내 허리를 꼭 잡으시오! 레이디 미온!” 물론 이딴 실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뒤통수를 때리며 '나사 빠진 인간!' 이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말이다. 왕궁 세아스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일주일을 넘게 쉬지 못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리더구트로 달렸다. 그리고 키스는 정문에서 카론 경이 냉기 서린 눈초리로 기다리고 있자 잽싸게 말에서 뛰어 내려 어디론가 도주했다. 역시 그 말, 훔친 것이었군. “지스는 어떤가요!” 우당탕, 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내가 소리치자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쇼탄과 크리스 등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미온 경!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나는 지스의 얼굴과 가슴에 차가운 이슬처럼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고 있 는 궁중의에게 다가갔다. 의사는 나를 보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는 아직은 괜찮네.”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살고 싶은 의지가 없었다면 이미 죽었을 거야. 하지만 아직까진 정신력 으로 견디고 있네.” 의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스킬도 죽음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 다. 누군 죽는 것을 좋아 할까? 지스도 그것은 억울했을 것이다. 부모에게 서 버림 받고 항상 병마에 시달리며 콜록거리다가 겨울에 시드는 꽃처럼 힘없이 막을 내리는 그런 인생은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오늘 내일 중에...” “해독 공식을 가져왔습니다.” 내 말에 의사가 불쾌한 농담하지 말라며 치를 떨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이 아이를 살리고 싶은 자네 마음이야 알지만.... 응?” 초로의 궁중의는 내가 건 낸 봉투를 보고는 입을 다물며 봉인을 뜯어 내 용을 읽었다. 그가 한동안 말이 없자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에게 조심 스럽게 물었다. “그거 정말 해독 공식이 맞는...” “이, 이, 이, 이럴 수가아아아아!” “우아아악!” 그 의사가 엄청난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나와 기사들은 모조리 기겁해선 뒷걸음질쳤다. 뭐, 뭐라고 쓰여 있기에 저러는 거야? 의사는 마치 천년 묵은 산삼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공식을 어디서 얻었나! 누가 자네에게 이걸 줬어!” “그, 그건 말씀드릴 수 없는데요.” “탁월해! 아니 혁명적이야! 이런 제조 공식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니! 이걸 쓴 사람은 분명히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일 거야! 의술의 신이 분명하다고!” 베르스 최고의 의사라는 이 노인은 체통도 잊고 입에 게거품을 물며 메데 이아를 칭송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난감하게 웃었다. ‘굳이 그렇게 비교하신다면... 신이 아니라 여신입니다만.’ 메데이아 교수는 여신도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죽은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참회하고 싶은 착한 여자일 뿐이다. “저 감탄은 그쯤 하시고 어서 해독제를 좀...” “알겠네! 이것만 있다면 문제가 없네!” 궁중의는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쏜살 같이 자신의 연구실로 달려갔 고 잠시 후 해독제를 만들어 와선 힘없이 신음소리를 뱉어내는 지스의 입 가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 10분도 되지 않아 절망적으로 사그라지던 지스의 심장이 다시 생 기를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 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떨떨한 표정 으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오오오오!! 미온 경. 어디서 그런 해독 공식을 받아온 거야? 혹시 마키 시온 제국에 가서 가져오기라도 한 거냐?” 그러자 옆에 있던 쇼탄이 루이의 어깨를 툭 치며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이 눈웃음을 보였다. “농담마라 루이. 아무리 미온이 엉뚱한 녀석이라도 이 시간에 어떻게 마 키시온까지 갔겠냐. 이 나라에도 용한 의사가 있었나 보지.” 그렇게 떠들던 그들이 갑자기 우후후후, 의미심장하게 웃기 시작한 날 보 고는 놀란 눈동자로 쳐다봤다. 아아 당신들은 짐작도 못할 거야. 내가 일 주일 동안 무슨 하드코어한 오디세이를 겪었는지. “미, 미온. 너 정말 마키시온에 갔다 온 거냐?” “글쎄요오.” “정말이야?” “글쎄요오오.” 메데이아 교수와의 살 떨리는 에피소드는 평생 봉인하기로 약속 했으니 - 나는 콧소리를 내며 딴청을 피웠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떠 올려 보니까 꽤 많은 것을 느낀 모험이었지만... 또 다시 하라면 절대로 안 해! 아니 못 해!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지스 경의 은발을 쓸어 올린 뒤에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두근거리며 고르게 들려오는 맥박소리를 들으며 방긋 웃었고 - 그제 야 긴장이 풀리고 안도감이 온 몸에 퍼지며 내가 일주일이 넘게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또한 온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는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으며 헤헤, 웃었다. “....이제 끝났구나.” 졸려, 자고 싶어, 배고파, 아파, 목욕하고 싶어, 라면서 내 온 몸 구석구 석이 '제발 좀 네 몸을 소중히 다뤄 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잠들 면 정말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아아, 침대가 불 타버린 마룻 바닥이라도 좋아. 강도가 덮치지 않고 독약을 마시지 않아도 좋은 내 보금 자리에서 숙면을 취하고 싶... “잠깐만!” 나는 어떤 생각이 퍼뜩 들어선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내 모습에 차를 가지고 들어오던 크리스가 흠칫 놀라선 물었다. “왜, 왜 그러세요?”“ “아직 남은 일이 있어. 절대로 용서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고!”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리더구트를 빠져나가 헬스트 나이츠 본부로 또 다 시 뛰었다. 카론 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18. “...공작부인을 소환해 달라는 거냐.” “그래요! 그 여자는 지스 경을 독살하려고 했잖아요! 이쯤이면 왕실에서 소환조사를 할 수 있잖아요!” 원숭이처럼 빠른 키스를 놓치고 본부로 돌아온 카론 경은 지스를 독살하 려고 했던 귀부인을 왕궁으로 소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를 보곤, '쓸데 없는 짓을...'이라고 중얼거렸다. “쓸데없지 않아요! 왕실 기사를 독살하려고 한 것은 중죄잖아요! 이런 일은 그대로 놔두면 왕실이 그토록 좋아하는 명예와 권위에도 흠이 가잖아 요.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에요?” 나는 지금까지 미루고 또 미뤄두었던 분노를 한번에 폭발시키고 있었다. 꼭 기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단지 '소유하지 못 한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죽이려고 든다는 것은 짐승도 하지 않을 짓거리 가 아니던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론은 나와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쓰고 있던 투명한 안경을 벗고 그 차가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던 카론 경 이 이렇게 말했다. “그 분은 왕족이시다. 왕족은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가 심판할 수는 없어.” 공작이라면 아마 왕의 친척 쯤 되는 대제후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 베 르스의 모든 것이 자신의 장난감 정도로 보이는 되먹지 못한 왕족일 것이 분명하다. 마키시온 제국에서는 이 베르스 왕국을 '진짜 별 볼일 없는 한심한 나라' 라고 비웃던데 - 강대국들 앞에서는 자존심도 없이 굽실거리는 배알도 없 는 왕족 주제에 이 나라 안에서는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냥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꼴이 정말로 싫었다. 역겨워, 뭐가 왕족이야. 악당 축에도 못 끼는 소인배 주제에! “카론 경. 말해 주세요.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어차피 소환해 봐야 무죄방면 될 것이다.” “그건 당신의 생각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품고 있는 신념도 그런 건가요! 부당한 일에 침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거냐고요!” 나는 카론 경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말았고 카론은 그런 내 모습을 무표정 한 얼굴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나와 한참을 서로 바라보던 그가 종이를 한 장 꺼내며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소환장을 보내도록 하겠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라. 이 나라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롭지 않아.” 19. 그리고 며칠 후, 왕실로부터 소환을 명받은 공작부인의 마차가 왕궁에 도 착했다. 카론의 말대로 처음부터 왕궁은 그녀를 제대로 조사할 생각은 없 는 것 같았다. 법정은 준비되지 않았고 죄인 아닌 귀빈을 맞이하는 것처럼 마차가 들어오는 정문에 의장대(儀仗隊)를 사열시켜 놓았으며 게다가 그 마 차에서 내린 자는 공작부인이 아닌 30대의 남자였다. “...저 놈은 뭐야.” 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는 껄렁껄렁한 복장의 사내 를 보며 중얼거렸고, 곁에 있던 키스 경이 내게 귀뜸해 주었다. “미온 경. 설마 공작부인이 직접 오리라고 생각한 거에요? 저 남자는 그 녀의 대리인이에요. 보통은 이런 일에 대리인을 보낸다고요.” “대리인이라고요?” “말이 대리인이지 실제로는 공작부인에게 아양 떠는 놈팡이 쯤 되는 작 자겠지만 말입니다아.” 키스 역시 전혀 좋은 감정이 없는지 웃는 낯으로 독설을 내 뱉었다. 가장 먼저 그 '놈팡이'를 맞이한 자는 '모사꾼' 블리히 경이었다. 헬스트 나이츠 의 단장 자격으로 나타난 그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공 작부인의 안부를 걱정하더니만 속이 다 뒤틀리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하하. 우리 부기사단장이 융통성이 없는 녀석인지라, 별 중요하지도 않 은 일로 이곳까지 행차하시게 만든 점을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네 아들이 독살 당했으면 그런 말이 나오 겠냐! 이 아첨꾼! 예상대로 무죄방면은 확실한 것 같았다. 아니 수사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대 응접실로 초대받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국왕 전하를 알현했고, 그가 가져온 값 비싼 선물들을 기쁘게 받은 국왕 전하는 그에게 그 자리에서 기사 작위를 주었다고 하니까 말이다. 나는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시간여의 '접대'를 마치고 다시 마차로 돌아가는 그 대리인 앞 을 내가 막아선 것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돌발 상황이었다. “뭐냐 네 놈은.” 거만한 눈초리로 날 내리까는 그 놈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지만, 나는 화를 꾹 참으며 이 말로 대신했다. “돌아가서 그 잘난 공작부인에게 전해. 다음 지명 때는 꼭 나를 불러 달 라고. 동료를 독살시키려던 여자의 얼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고 전해!” 그때 블리히 경이 깜짝 놀란 얼굴로 뛰어 오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거기! 그 분께 뭐하는 건가! 네 놈은 뭐야!” 내 울분에 찬 말에 향수 냄새나는 이 사내는 콧방귀를 끼며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너희 같은 놈들도 동료애가 있는 거냐. 고상하지 못한 놈들은 뭐가 달 라도 다르군. 공작부인께선 그 소년 기사가 되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 척 서운해 하고 계시다. 다음 지명 때도 다시 그 녀석을 불러서 버릇을 단 단히 고쳐....” “입 닥쳐!”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아챘고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당황해선 중얼 거렸다. “너... 그 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나 알고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그는 화가 나선 나를 밀쳐내곤 칼을 뽑았다. “겁 대라기 없는 자식! 어째서 왕궁에 이런 무례한 놈이 있는 거야!” 그가 번뜩이는 검을 치켜 올리며 팔을 부르르 떨었지만 내 자색의 눈동자 는 피하지 않고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이런 놈을 피하고 싶지 않다. 그때 차앙, 소리와 함께 시퍼런 검날이 순식간에 그 사내놈의 목가에 다 가왔다. “뭐, 뭐야! 왜 나한테 칼을!” “카론 경! 뭐하는 짓인가!” 블리히가 커다랗게 소리쳤지만 뒤에서 목을 겨눈 카론 경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얼음 같은 어조로 말했다. “왕궁 내에서 허락 없이 검을 뽑으면 즉결처분 당한다는 것조차 잊었나, 대리인.” “자, 잠깐만. 검을 집어넣을 테니 이 것 좀 치워 주...” 그리고 카론 경은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남의 권력에 빌붙어서 거드름 피우는 짓이 너는 그렇게도 즐거운가. 너의 영지로 당장 꺼져라.” "도, 돌아가겠습니다. 제발 이 칼을...“ 카론 경의 기백에 눌린 대리인은 온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후, 훌륭해요, 카론 경! 멋져요! 라고 기쁜 마음에 북받쳤지만, 검을 집 어넣 은 카론 경은 나도 똑같이 꾸짖는 것이었다. “좀 더 네가 원하는 정의를 실천하고 싶다면 감정에 휘둘리는 일은 없도 록 해. 지금 그 행동은 기사로서 실격이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선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튼 카론 경은 무섭다니까. 대리인이 황급히 마차에 오른 뒤에, 살금 살금 다가온 키스가 확 카론의 등 뒤에서 올라타며 생글 생글거리는 것이었다. 카론은 기겁을 하며 몸부 림을 쳤지만 키스는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와아아. 카론 경, 멋져요오. 마누라 님이 반할 만 하다니까아? 그런데 자 식은 언제 낳을 거유? 카론 경을 꼭 닮은 얼음덩어리가 튀어 나올까봐 걱 정되어 밤잠도 못 이루고 있답니다아.” “이, 이거 놔라! 키스!” “싫습니다아.” “네 놈도 꺼져!” 결국 카론 경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게 만든 것을 보니... 확실히 키스 가 한 수 위야. 카론 경, 방금 그 대사, 기사 실격이라고요, 우후후후. 20. 내 돌발 행동은 오르넬라 성녀님이 중재해 주시는 바람에 별 추궁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권력 만세다. 후후. 그리고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에 지스 경은 침대에서 일 어났고 루시온 경과 레녹 경도 지명에서 돌아와 리더구트는 간만에 (불행 하게도) 남자들만으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절세미녀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녀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런 민원 넣어 봐야 무시당할 것 같으니 까 그만두기로 하자. 그리고 새로운 아침, 우리는 1층 테라스에 모여 아침 식사를 시작했고 어 제 뭘 했는지 졸린 표정의 키스가 들어와서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하아. 좋은 아침입니다아. 먼저 루이 경, 지명입니다. 후아아암.. 빨리 제사 도구 받아서 어디론가 사라져 주세요오.” “아, 좀 성의 있게 해주면 덧나나.” 루이가 사자갈기 같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쇼탄 경! 돈 갚아요! 몸을 팔아서라도 갚으란 말이에요!” “가, 갚으면 되잖아!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역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군. “에 그리고.... 으음. 지스 경?” “응?” 깨어난 뒤부터 아무런 말이 없던 지스가 스프를 떠먹던 중 고개를 들었다. “지명... 들어왔는데, 몸이 아프다면 안가도 좋아요.” “아냐. 갈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지스는 스푼을 내려놓으며 단번에 대답했다. 의외 로 지명자가 많은 지스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지명을 달가워 한 적이 없다 고 한다. 여전히 웃음기가 없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인생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물론 태워먹은 침대도 좀 사줬으면 좋겠지만. “에 그리고 미온 경은 난리를 피운 벌로 오늘은 신전 청소를....” “계십니까!” 그때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키스가 말을 멈추고 문을 바라 보았다. 제법 익숙한 목소리인데, 누구였더라? “엔디미온 키리안 씨, 계십니까?” “얼레? 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 정말로 평생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던 사람이 서류를 든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아이고. 또 당신이군요. 뭐 이렇게 여기로 배달 오는 것이 많나요?” 그는 예전 지스킬의 관을 운반해 왔던 '천리마 택배 길드'의 배달원이었 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라고? 난 관 같은 거 주문한 적 없어! 예전과 같은 조끼에 같은 복장을 입은 그가 갑자기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뒤를 보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봐! 어서 가지고 들어와!” “자, 잠깐! 뭘 가지고 들어오시는!” 이번에는 정말 초대형이었다. 네 명의 배달원이 끙끙거리며 안으로 뭔가 거대한 상자를 들고 들어왔고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의문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아아. 이거 가져오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서, 설마 이거 운송비도 내가 내야 하는 건가요?” 이 정도 크기라면 운송비만 대체 얼마냐고! 그리고 내가 왜 매번 이런 괴 택배를 받아야 하는 건데! 그런데 그 배달원이 서류를 훑어보더니 웃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운송비 걱정이 없네요. 운송비는 의뢰인께서 지불하셨습니다.” “의, 의뢰인이 누구죠?” “글쎄요. 이거 정말 희한하네요.” 배달원은 자신도 이런 일 처음 겪는다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 했다. “보안물품이라면서 서류에는 도착지 외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거든요? 아마 이 물건의 의뢰인은 우리 길드의 특별한 고객이신 것 같군요.” “특별한... 고객?” “아! 여기 한 줄 쓰여 있네요... I.K.로부터, 라고 쓰여 있군요.” “I.K.?"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의문의 이니셜은 대체 뭐지? 순간 난 번개를 맞은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I.K.라는 이니셜의 이름은 단 한 분뿐이었다. ‘...이자벨 크리스탄센’ “그, 그럼 설마 저 물건은?”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거대한 상자를 뜯었고 (전에도 말했지만) 역시 거 대 길드의 포장답게 단번에 매듭이 풀리면서 상자가 단번에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쇼탄 경이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저... 초대형 침대는 뭐냐. 미온.” “아하하.... 하하.” 정체는 바로 예술강국 이오타의 최고급 원목 침대였던 것이다. 반짝거리 는 그 모습이 황송할 정도로 화려했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는 작은 쪽지 가 하나 놓여 있었다. 특별히 불에 타지 않는 침대를 주문했어. 다음부터 연못을 이용할 일은 없을 거야. -이자벨 “여, 역시 알고 있었어.” 마키시온 제국 황제의 흰머리 숫자도 알고 있다는 인트라 무로스는 역시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내가 불타는 침대에 묶여 연못으로 뛰어들었다는 '정 보'를 듣고 얼마나 웃으셨을까. 하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움직이는 정보국 이라면 좀 더 유용한 정보를 모으는데 힘을 쓰시란 말입니다, 이자벨 님! 이자벨 님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적인 분이지만 가끔 재치 있는 장난기 로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난기의 스케일 이 무척이나 크다는 것이겠군. “그건 그렇고...” 키스가 내게 다가와선 속삭였다. “미온 경. 이번에는 이 침대를 업고 뛰는 일에 도전해 보시지 그래요오?" “농담 말아요. 이런 건 내 방안에 들어가지도 않는다고!!” 그렇다. 침대의 크기가 내 방의 크기보다 컸다. 이자벨 님, 저는 당신의 생각만큼 호사스럽게 살고 있지 못하답니다. 아마 이 침대는 국왕 전하의 침대보다도 클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 렇다면 '임금님보다 더 큰 침대에서 잔 괴씸죄'라는 죄목으로 형장에 끌려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농담이 아니다. 이 왕궁, 사소한 일에 목숨 건다.) 결국 나는 고심 끝에 이 타이탄 급 침대를 오르넬라 성녀님께 바치기로 했다. 물론 오르넬라 님은 '어머! 이오타 산 침대라니!'라고 무척이나 흡 족해 하시며 내 침대를 가져가 버렸다. 침대 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 의하세요. 성녀님. 그리고 모든 일이 정리된 뒤, 나는 지스 경이 그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 고 왕궁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민할 것도 없이 자명하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오해 받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더없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이후에는 그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뿐이리라. 제5화 :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 끝 -Blind Talk 제5화 끝냈습니다....... 풀썩. #043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장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1. 그야말로 찌는 듯이 더운 날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우리를 삶아 버리 기로 작정한 듯이 폭염을 토해내고 있었고 왕궁으로는 하루에도 수십여 통의 얼음이 배달되고 있었다. 어찌나 처절하게 더웠냐하면 격식 좋아하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공무원 기 사 레녹 경마저도 셔츠를 벗어던진 채 계속 땀을 닦아내며 책을 읽고 있을 정도였다. 레녹 경이 이 정도니, 다른 스왈로우 나이츠 기사들의 모습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크리스는 이미 더위에 패배해서 '크리스 찜'이 된 상태 고 쇼탄은 바보같이 일광욕을 즐기겠다고 설치다가 온 몸이 바짝 익어버려 현재 사경을 헤매고 있으며 루시온 경은 역시 돈이 많은지 얼음을 주문해 서 테라스 욕조에서 얼음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부러워 죽겠다. 그리고 루이 경은 남자 자존심 다 버리고 왕궁 이곳저곳으로 얼음을 구걸 하며 다니다가 수풀 근처에서 탈진한 상태로 발견되어 이곳으로 실려 왔고 랑시는 저번 지명 때 큰 맘 먹고 구입했다는 수영복을 입고 내 생을 마감 할 뻔한 그 연못에서 하루 종일 살고 있는 중이다. “미온 경. 같이 수영 안 할래?” “싫다. 남자끼린 안 해.” 실은 수영복이 없었다. 그리고 이 악마적인 여름 더위 속에서 키스는... “어머나? 왜 다들 그런 모습입니까아?” 얄밉게도 끄떡도 없었다. 설마 저 인간, 외계인 아냐? 라고 놀랄 정도로 키스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얇은 티셔 츠에 짧은 데님 반바지를 입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열기를 튕 겨내는 마법을 온 몸에 시전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브리핑을 하러 들어온 키스는 테라스 사방에 추욱 늘어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감상하더니 새하얀 서류로 얼굴을 가리고는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었다. “후후후. 더위에 찌든 패배자들.” 다 들려, 이 양반아! “아무튼 오늘의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기대하시라.” 솔직히 오늘 내게 할당된 노동이 신전 청소라면 난 오늘부로 다른 나라로 망명할 것이다. 그 이글이글거리는 대리석 바닥 위에서 빗자루를 들고 서 있다간 10분도 안 되서 '미온 육포'가 되어 바짝 말라 버릴 것이 분명하다. “루시온 경. 지명입니다아.” 역시 슈퍼 스타, 대단한 인기네. 얼음 욕조 안에서 혼자만의 겨울을 맛보 고 있던 루시온 경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도 지명이 많은 사 람이니 전혀 기뻐하는 모습도 없었다. “아 그리고 레녹 경도 지명이에요.” 레녹 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책을 덮고 무뚝뚝한 표정을 한 채 자신의 방 으로 돌아갔다. 두 인기인이 먼저 지명을 받은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레? 그리고 랑시 경, 쇼탄 경, 루이 경 모두 지명이네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 모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벌떡 일어났다. 이런 무더위 속에서 지명을 받아 왕국을 탈출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지옥 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밧줄'과 같은 것이리라. 지명 받아 가게 되면 아무래도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니까 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쇼탄은 당장 이 저주받은 왕궁을 떠나겠다며 환호성을 지르며 부활해서는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고, 일사병 에 시달려 헛소리까지 하던 루이도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지명을 받 았다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고, 여전히 수영복 차림을 고수하던 랑시는 꺄하하하! 웃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제 테라스에 남은 사람은 키스와 나, 그리고 크리스 뿐이었다. 크리스는 힘없이 땀을 닦아내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지명 받지 못하는 일, 그로서는 익숙한 것이니까. 보는 나까지 가슴이 아프군. “그리고 크리스 경. 당신도 지명 받았습니다.” “저, 정말 인가요!” 크리스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고 나도 눈이 커졌다. “오오. 그것도 오르넬라 님의 지명이네요?” “축하해. 크리스.” 대신 박제가 안되도록 조심하시오. 나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고 크리스는 너무 감격해서는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아, 역시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던가. 이제 크리스도 훌륭한 호스 트 아니 신관기사로서 보람찬 인생을.... 그런데 여기서 잠깐. 잘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되면 지명 받지 못한 사람은 나뿐이잖아! “마지막으로 미온 경은...” “저, 저도 지명인가요?” 내 간절한 표정에 키스는 이렇게 답해 주었다. “꿈 깨세요. 당신은 나와 함께 집이나 지킵시디아.” 으이구! 2. 이미 지명을 떠나 있던 지스 경과 함께 이번에 대규모로 지명 받은 다섯 용사까지 리더구트를 떠나자 이곳에는 나와 키스만이 존재하는 한적한 곳 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지명자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뒤에 나는 뭔가 굉장히 무안해 져서 1층 테 라스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대낮부터 하릴없이 빈 집이나 지키는 짓은 혈기왕성한 20세가 할 일이 아닌데 말이야. “...한산하네.” 나는 부채질을 계속 하며 테라스 사방을 둘러보았다. 리더구트가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던가. 창밖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내가 앉아 있다. 갑자기 이 세 상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와인 셔벗입니다.” “우아앗!”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시종이 불쑥 내 앞에 셔벗을 놓자 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맞아. 시종들도 있었지. 대체 이 시종들은 분명 저택 어딘 가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숨소리도 없이 나타났다가 발소리도 없이 사라 지는 의문의 존재들이다. 나는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잡고 스르르 어 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간 떨어지겠군. 발소리 정도는 내달라고." 그건 그렇고 고맙게도 와인 셔벗이라니! 화이트 와인에 매실 과즙을 넣고 얼린 뒤에 난백(卵白)과 함께 보기 좋게 굳힌 그야말로 여름의 친구다. 셔벗의 몸속으로 티스푼을 살짝 집어넣자 사각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 렸다. ‘그런데 키스, 이 양반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거지?’ 난 문득 그 생각을 하며 옅은 에메랄드빛의 와인 셔벗을 입속에 넣었다. 그리고 보니까 키스는 하루 종일 뭐하는 것일까. 지명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아침 브리핑 외에는 달리 하는 일도 없어 보이는데 - 하루 종일 고양이 마 냥 늘어져라 잠만 자는 줄 알았던 키스의 모습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 “좋아!” 내 마음 속에서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니까 예전 키릭 스 세자르라는 의문의 인물에 대해서도 '수사'를 멈췄었지! 나는 일단 셔 벗을 맛있게 다 먹은 뒤에 살금살금 키스의 방으로 향했다. ‘역시 문이 열려있군.’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살짝 들어갔다. 텅 빈 키스의 방은 (예전처럼) 믿을 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향수 냄새는커녕 상당히 지적으로 느껴지는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왠지 아버지의 서재에 몰 래 들어온 기분이다.(물론 내 아버지는 목수라서 서재 같은 것은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스왈로우 나이츠의 장식검 열 자루였다. 잘 손질된 보검 열 자루가 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 중에 키스의 검 은 없다고 한다. ‘음? 그런데 남은 두 명은 누굴까.’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나머지 두 명의 신전기 사들은 어디서 뭘 하기에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장기 지명자'라고 하는데 무척이나 괴롭고 고된 일이라서 그들만이 할 수 있다고 들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귀족들의 평생 시종이라도 된 건가. 그리고 다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후미진 곳에 세워져 있는 낡은 검 이었다. 칼집을 싸고 있는 천이 검은 빛이었는데 이게 본래 검은 색인지 아니면 떼를 타서 그런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검이라서 - 마 치 은퇴한 검객의 모습 같아 보인다. ‘설마 이게 키스의 검?’ 사실 키스가 검을 쓰는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왠지 불길해 보이는 이 검을 집어 드는 것이 좀 겁이 나서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대다간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피 냄새!’ 묵직한 혈향(血香)이 말없이 검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이건 칼로 소나 돼지를 도살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이 검에 깊게 배어 있는 피 냄 새는 바로 사람의.... ‘오, 오싹하네.’ 설마 키스가 이 칼로 사람들을 베고 다녔을 리야 없겠지만 이런 흉흉한 것을 자기 방에 놓아두는 짓은 또 무슨 악취미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잉크 냄새 가 풍기는 테이블 위는 실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가죽 커버의 노트가 한권 놓여 있었고 그 노트 위에는 '키스의 일기장. 절 대로 보지 말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키스가 일기를 쓰다니, 의외로군. “훗훗훗.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 나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에 슬쩍 키스의 일기장을 펴 보았 다. 일기장 첫 장에는 바로 이런 짧은 문장이 특유의 예쁜 필체로 쓰여 있 었다. 오늘 처음으로 일기장을 샀다. 이제부터는 열심히 일기를 써야지. “후후. 어린애 같아.” 나는 키득 웃으며 다음 장을 넘겼지만 다음 페이지를 보는 순간 내 표정 이 차갑게 굳었다. “이, 이럴수가!” 그리고 난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빠르게 다음 장 또 다음 장을 넘 겨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얼씨구! 그 이후 하나도 안 썼잖아! 이런 게으름뱅이!” 모조리 빈 페이지였다. 난 짜증을 내며 일기장을 팍 덮어 버렸다. 아니 어린애들도 노트가 아까워서라도 며칠은 쓰는데 다 큰 어른이 하루가 뭐 야, 하루가! 게으름의 대명사 키스 경에게 뭔가 기대한 내가 바보지! 이런 것을 뒤지고 있는 나 자신이 뭔가 굉장히 한심해 져서 슬슬 키스의 방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열려 있던 문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엔디미온 경.” “에그머니!” 나는 화들짝 놀라서는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난 내 눈앞에 서 있는 사 람을 보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페르난데스 왕자님.” 곱슬머리에 동그란 눈을 가진 귀엽고도 기품 넘치는 모습이 아버지 국왕 전하와는 전혀 딴판인 저 분은 분명 페르난데스 왕자님이었다. “경에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어 이곳에 왔소. 들어주시오.” 무, 무슨 일로 왕자님이 날 찾은 거지?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린 왕자 님을 바라보느라 그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 었다. 그 수려한 얼굴에 근심 어린 표정이 가득한 페르난데스 왕자님은 고운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베르스 왕국에 엉뚱하고도 위험한 일이 발생했소.” “어, 엉뚱하고도 위험한... 이라고 하셨습니까?” 뭔가 이상한 비유입니다만. 왕자는 조금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고 시작했다. “그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파, 경과 의논하고 싶었는데... 마침 키스 경을 만났소. 키스 경이 말하길 엔디미온 경은 지금쯤 자신의 방에 있을 거라고 해서 찾아왔소.” “아 그렇군요. 몸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라고 말하며 이제야 한쪽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추다가 난 깜짝 놀라 왕 자님을 쳐다보았다. “지금 키스 경이 그랬다고 하셨습니까? 제가 이 방에 있을 거라고?” “분명히 그랬소만. 뭔가 잘못된 거요?” “...어떻게.” 내가 자기 방에 몰래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혹시 천리안이라도 가 지고 있는 거 아닐까! 아니면 내 몸에 도청장치라도 달아 놓은 걸까! “저어... 계속 말해도 되겠소?” “아! 물론이옵니다!” 난 다시 고개를 숙였고 한숨과 함께 왕자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혹시 경에게 지금 이 나라의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묘안이 있을지 기대되오. 보통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오.” “저 그런데. 어째서 소인이 그 엉뚱하고도 위험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신 것이 온지...” “아이히만 대공이 그러더군. 엔디미온 경의 괴상한 사고방식이라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하하. 아이히만 대공께서 그러셨군요. 괴, 괴상한 사고방식이라... 과찬이옵니다. 아하하하.” 할아범!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엔디미온 경. 그대의 지혜로 날 도와줄 수 있겠소?” “물론이옵니다. 소인 엔디미온, 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없답니다. 내 말에 페르난데스는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아아, 왕자님. 그렇게 미소를 띠니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군요. 분명 청년이 되면 제 냐 공주님과 함께 건국 이래 최강의 미소년 미소녀 왕족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 분명하옵나이다. 12세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기품이 온몸에 밴 왕자님은 친히 내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맙소, 엔디미온 경. 그럼 나와 함께 아이히만 대공에게 갑시다. 모두 들 기다리고 있소.” “얼레? 모두들이라뇨?” 나는 멍한 표정으로 왕자님의 손에 이끌려 리더구트를 빠져나왔다. 이 사 건은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던 어느 여름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장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3. 내가 '끌려온' 이곳은 오만가지 은밀한 일들이 저질러진다는 행정부 본채 지하실이었다. 음침하게 만들어 보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은 굳이 비교하자면 취조실 분위기였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곳곳 에 위험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대체 저 피 묻은 방망이는 뭐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엔디미온 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게나.” 이곳으로 나를 소환한 아이히만 대공이 무거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물 며 입을 열었고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주눅 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 다. 아이히만의 뒤에는 심란한 표정의 법무대신 위고르 공과 군무대신과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서 있었다. 이들이 바로 왕자님이 말한 '모두들'의 정체였다. “'만국 무도회'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왕비 마마가 그곳에 초대 받아 다녀오셨잖 습니까.” 그 이름도 단순무식한 '만국 무도회'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하자면, 말 그 대로 전 세계의 귀부인들이 초청되는 대규모의 무도회를 일컫는 말이다. 마키시온 제국에서 1년에 한번 주최하는 이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무도 회에는 각 나라의 내놓으라 하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초청되며, 화류문화의 정점인 이 무도회에 초대 받게 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들었다. 사실 이 베르스 왕국에는 지금까지 초청 받은 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 - 이번에 왕비 마마가 초청장을 받게 되어 무지하게 기뻐하셨다고 한다. 참고로 그 무도회에 자주 초대 받았던 내 고객들의 평가를 빌리자면 '누 가 누가 더 권력이 높고 고상한지 경합을 벌이는 여자들의 무투대회'라고 한다. 아이히만은 잠시 후 내게 뭐라고 쓰여 있는 편지지 하나를 보여 주었다. 무척이나 고급스런 그 종이 위에는 놀랍게도 마키시온 제국 황실의 키마이 라 황금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 이게 뭔가요?” “오늘 마키시온 제국 황실로부터 이 편지가 도착했네. 게다가 마라넬로 황제의 친서야.” “치, 친서?” 여간해서는 황제가 직접 친서를 보내는 일은 없다. 보통 황제가 친서를 보낼 때는 무척 긍정적인 경우든지 아니면 아주 부정적인 경우일 것이다. 나는 제발 전자이길 바라며 그 친서를 훑어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친애하는 베르스의 왕에게 본론만 말하겠소. 이번 '만국 무도회'에서 나의 황비와 당신의 부인 사이 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은 황비는 물론 우리 황실과 황제인 나에 대 한 모독이었으며 나아가 내가 다스리는 마키시온 제국 전체에 대한 더없는 모욕이라 생각하오. 내 아량과 인내심이 부족하여 이대로 이 사건을 묵과할 수 없음을 먼저 사과드리오. 그렇다 하여, 내가 복수를 하기 위해 무력을 써서 나를 모욕한 당신의 작 은 나라를 피로 물들이는 무자비함은 나도 원치 않는 바요. 대신 내가 판 단하기에 가장 현명한 방법을 택하도록 하겠소. 앞으로 보름 후, 이오타 왕국의 법정을 빌려 공판(公判)을 시행하도록 하 겠소. 그때 정당하게 그 사건의 시비를 가려보도록 합시다. -마키시온 제국 황제 마라넬로 무르시엘라고 “이, 이게... 대체 뭡니까!” 나는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키시온의 황제가 우리나라 왕비 마마한테 무지하게 화가 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이히만이 다시 그 편지를 거둬가며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는 ‘만국 무도회’에서 다른 여자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많이 고심하셨네.” 하긴 그럴 것이다. 안 그래도 국력이 약한 베르스 왕족이니 무도회에 가 봐야 찬밥 신세겠지. 이 나라 안에서야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세계적으로 보면 변두리 소국의 별 것 아닌 왕족일 뿐이니까. 마키시 온 제국이나 콘스탄트, 이오타 같은 공룡 같은 강대국의 지배자들과 비교할 수야 없으리라. “그래서 왕비 마마께서 어떻게 하신 건가요? 설마 자신을 무시한다고 마 키시온 제국 황비의 따귀를 때리기라도!” “자네 바본가. 그런 짓을 했다간 당장에 전쟁이고 이 나라는 불바다가 될 거야!” “그,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진 건데요?” 아이히만 대공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그런 곳에서 튀어 보려고 주목 받을 수 있는 값비싼 옷이나 장신구 같은 것을 가져가고 싶겠지. 왕비 마 마도 그러고 싶어 했어.” “음. 그랬군요.” “그런 곳에서 가장 주목받고 싶을 때 자네라면 어떤 장신구를 선택하겠 나.” 아이히만이 시험이라도 하듯 내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특별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답은 자명한 것이다. “그거야 이오타의 장인, 세드릭 씨가 만든 장신구가 최고겠죠.” 아이히만 대공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해서 무엇 하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예술적인 가치도 엄청난 세드 릭 씨의 장신구 시리즈는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임에 분명 하다. 게다가 5년 전부터 무슨 이유인지 세드릭 씨가 세공을 그만뒀기 때 문에 이제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그의 예술 장신구들은 그 값이 천정 부지로 뛰고 있었다. 아마 작은 귀걸이 하나를 구하는데도 성 한 채의 값 은 줘야 할 것이다.(물론 그나마 운이 좋아 구입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 지만.) “그래서 우리 왕비 마마도 그 세드릭이 만든 목걸이를 걸고 무도회에 가 기로 했네.” “아앗! 왕비 마마께서 세드릭 브렌드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그런 희귀 예술품이 이 나라에 있을 줄은 몰랐어! 내 표정을 본 아이히만이 눈매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 하는 건가. 이런 왕국에 그런 국제적인 예술품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예에?” 그럼 뭐야! 있지도 않은 걸 어떻게 무도회에 가지고 갔냐고! “대신 만들었네.” “마, 만들어요?” 세드릭 씨가 이제 와서 이 나라 왕비 마마를 위해서 목걸이를 만들어 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세드릭 씨가 다시 세공을 시작했다면서 전 세계가 떠들썩해 졌을 것이다. 아이히만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이 나라의 세공사를 불러서 세드릭의 장신구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거든.” “그, 그건 이미테이션이잖아요!” “세드릭의 마지막 작품인 목걸이 ‘여름의 보주(寶珠)’는 현재 그 행방 이 묘연해서 아무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그걸 똑같이 베껴 서 걸고 나가면 사람들도 속을 것이라는 게 위대한 왕비 마마의 작전이었네.” “...세상에나.” 나는 입을 쩌억 벌렸다. 그렇게 뻔뻔할 수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튀고 싶 었단 말인가.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네.” “문제라면... 설마.” “하필이면 마키시온 제국 황비가 무도회에 걸고 나온 목걸이가 그 행방 불명되었던‘여름의 보주’였던 거지. 보나마나 그건 진품이야.”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소름이 오싹 끼쳤다. 생각해 보라. 튀는 것 좋 아하는 두 귀부인께서 서로 똑같은 목걸이를 걸고 마주쳤을 때의 그 무시 무시한 상황이란... 순간적으로 무도회의 공기가 절대영도가 되어 버리며 '둘 중 하나는 가짜다!'라는 경악이 모든 사람들의 뇌리를 때렸으리라. “그,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아이히만은 그 대파국의 충격적 결말을 말해주는 대신 손짓으로 페르난데 스 왕자를 불렀다.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온 귀여운 왕자님의 머리를 아이히만이 쓰다듬어 주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페르난데스 왕자. 잠시 나가있어 주시겠어요?” “응. 알겠소.” 저 강철의 노인네 아이히만에게 저런 부드러운 모습이 숨어 있는지 꿈에 도 몰랐다. 페르난데스가 힘없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측은하게 지켜보던 아이히만은 왕자님이 사라지자 슬슬 그 표정이 증오와 분노로 변해가기 시 작했다. “왜, 왜 그러시는...” 갑자기 아이히만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쩌렁쩌렁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런 망할 놈의 여편네가 뽀록이 났으면 냉큼 까놓고 짜가라고 밝힐 것 이지 뭘 잘했다고 부득부득 우겨댄 거야! 대체 뭘 믿고 자기 것이 찐퉁이 라고 박박 우겨댔냐고! 서방이나 마누라나 다 똑같이 지능지수가 원숭이만 도 못한 거 아냐!” 아이히만은 말 그대로 광분하고 있었다. “저 아이히만 대공. 혈압도 높으신데 고정을...” “대제국을 상대로 그딴 짓을 해놓고 돌아와서는 이제 어떻게 하냐고 비 명이나 지르고! 내 아주 그 망할 놈의 내외를 싸잡아 족쳐 버리고 싶을 때 가 한 두 번이 아니야!” 나는 당장이라도 총을 뽑아들고 전하의 거처로 뛰어갈 것 같은 아이히만 을 겨우 겨우 말리고는 말했다. “저 그런데 그 마키시온 제국에서 하겠다는 공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 죠?” “그거야 어떤 것이 진짜 '여름의 보주'인지 세드릭이 직접 와서 감별하 는 것이지.” “그, 그랬다간!” “보나마나 우리나라 것이 가짜라는 것이 들통 나겠지.” 당연한 일이다. 세드릭이 직접 자기 창작품을 감별하는데 틀릴 리가 없었 다. 나는 불안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거죠?”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이 나라는 천하에 둘 도 없는 비웃음꺼리 가 되어 자손만대까지 창피를 당할 거네. 그리고 마키시온 제국에 손해배 상을 해줘야겠지.” “손해배상이라면?” 그때 잠자코 벽에 기대어 있던 위고르가 다가오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 다. 앙숙지간인 아이히만과 위고르가 사건 해결을 위해 손을 잡다니, 정말 이 사건은 보통 위기가 아니었다. “아마도 마키시온 제국에 지불해야 할 손해배상금은 이 나라 전체의 일 년 예산을 넘어갈 것이 분명해. 지금까지 모아둔 나랏돈을 모두 내주고도 모자라서 이 나라의 세금을 1000%로 올려 전국의 돈을 긁어모아도 전액 지 불할까 말까 하는 액수야.” “마, 말도 안돼.” “말하자면 이 나라는 15일 공판 이후에 부도가 나는 것이지. 파멸이야.” 위고르의 말에 난 망연자실해선 온 몸의 힘이 다 빠져나갔다. 물론 그 커 다란 제국 마키시온으로서는 자신들의 명예를 손상당한 것에 대한 합당한 손해배상금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나라 국력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이 나라가 지불하려면 - 우리나라는 이후 수십 년간 다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각지의 귀족들과 국민들에게 알려 지는 순간 이 나라는 엄청난 폭동의 물결에 뒤덮여 자멸할지도 모른다! “그 잘난 목걸이 하나 때문에 내가 반세기를 꾸려온 이 나라가 아작 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이 나이 먹고 이게 무슨 꼴이람.” 아이히만이 손가락으로 눈가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대공의 그런 모습을 보니까 무척 마음이 씁쓸했다. 아이히만 대공이 없었 다면 지금 이 나라가 이 정도까지라도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강대 국에선 불세출의 정치가인 아이히만을 어떻게든 모셔가려고 파격적인 조 건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아이히만은 그것들을 모조리 거절하고 이 약소국 의 재무대신으로 남았단다. 입도 험하고 성격도 살벌하지만 사실은 누구 보다 이 나라가 잘 되길 바라며 평생을 분골쇄신한 분인데 - 이번 일은 그 런 그에게 가슴이 터질 만큼 어이가 없으리라.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깜빡하고 놓칠 뻔 했지만, 지금 까지의 상황을 쭉 떠올려 보니까 꽤나 의심스러운 점이 하나있었던 것이다. “저 그런데 아이히만 대공.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Blind Talk 언제부터인지 레트로(복고) 스타일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고 심오하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 풍이라 면 일단은 멋져 보이는 수준입니다. 레트로나 엔틱에 취미 들리면 돈이 많이 나간다는 지인들의 충고 덕분에 깊게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어차피 이번 달은 돈이 없어서 레트로는 커녕 레토르트 음식이나 마냥 먹고 있습니다. 이 놈의 극빈인생. 조PD의 비애를 들으며 (이승철의 원곡도 좋지만 역시 조PD의 리메이크가 더 멋지게 들립니다.) #045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장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저 그런데 아이히만 대공.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음? 뭔가.” 아이히만은 표범 같은 눈동자로 쓰윽 나를 바라보며 관심을 보였다. 지금 그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리라. 내 의문점은 이것이었다. “‘여름의 보주’의 모조품을 만들었다는 우리나라 세공사 말입니다. 아 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듯한 모조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리지널을 옆에 두고 베끼는 법인데... 수년전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여름의 보주’를 어떻 게 모조했다는 거죠?”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지 않은가? 진품이 이 나라에, 그것도 이름도 없는 세공사에게 있을 리가 없다. 아니 그 귀한 것을 본 적이라도 있을까? 그렇 다면 대체 어떻게 모조품을 만들 수 있었냐는 당연한 의문에 이르게 된다. 그 말에 답해준 사람은 위고르 공이었다. 위고르는 모조품을 만든 세공사 와 대화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그것이 의심스러워서 그 사람에 물어봤더니, ‘여름의 보주’를 본 적은 없고 단지 세공사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그 목걸이 의 모습을 상상하며 모조품을 만들었다고 하네.” 아이히만도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흐음. 실력이 꽤 좋은 친구인가 보군.” “그,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내가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 아이히만과 위고르가 ‘실력이 좋으면 그럴 수 도 있겠지.’라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실력과 경력이 있다면 들은 말만 가지고도 대충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경우가 달랐다. 내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만국 무도회'는 예술품이나 귀금속이라면 자다가도 벌 떡 일어나는 전 세계의 귀부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였습니다. 만약 조 잡한 모조품이었다면 당장에 그 사람들에게 들통이 났을 겁니다. 왕비 마 마가 아무리 우겼더라도 한 눈에 가짜처럼 보였다면 소용없는 일이었겠지요.” “계속 말해보게.” 아이히만이 눈을 반짝이며 재촉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무도회에서는 어떤 것이 진품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세드릭 씨가 직접 감별을 하는 공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자네 말은, 우리나라 세공사가 만들었다는 모조품이 여간한 사람은 구 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건가.” “그쯤이면 훌륭한 정도가 아니라 신기에 가까운 것입니다. 본 적도 없는 진품을 예술품 애호가들이 쉽게 구분해 내지 못할 정도로 복제했다는 말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세공사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해 졌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을 통해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도 생 겼던 것이다. 옆에서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던 군무대신이 멍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우리나라 세공사가 바로 사드릭이라는 소리야?” “저어... 세드릭인데요. 세.드.릭.” “응. 그래 사드릭.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었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대체 이 양반은 얘기할 때 어디 갔다 온 거야! 핀트가 전혀 안 맞는 대화 덕분에 내가 황망해하자 아이히만이 그를 쏘아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자넨 좀 빠져 있게!” “아니. 왜 그러나. 그러니까 그 사드릭이...” “세드릭 이라니까! 소원대로 공성포 사줄 테니까 저쪽에 가서 잠이나 처 자고 있어!” “어? 정말 자네 공성포 사줄 텐가? 정말이지?” “...이 나라가 15일 후에도 살아남는다면 그때 생각해 보지.” 아이히만은 총을 뽑을 듯 말 듯 겨우 겨우 화를 참으며 그렇게 으르렁거 렸고 공성포 매니아 같은 군무대신은 꿈에도 그리던 공성포를 살 수 있다 는 생각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구석으로 가버렸다. 좋기도 하시겠습니다. 15일 안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공성포고 자시고 이 나 라가 파산한단 말입니다! 아이히만은 혼자만의 핑크빛 꿈에 빠져 구석에서 헤죽거리고 군무대신을 물끄러미 보곤 '저런 망할 놈의 화상'이라고 투덜거린 뒤에 그나마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진 젊은 엘리트 위고르를 향해 물었다. “이봐. 지금 그 세공사는 어디 있지?” “음. 그 여자는 지금쯤 본궁에 전하와 함께 있을 겁니다.” 위고르의 말에 난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여, 여자였습니까?” “응. 그것도 17세의 평민이야. 평민들 사이에도 하도 재주가 좋다고 소 문이 나서 왕실에서 부른 걸세.”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그리고 보니까 난 17세에 뭐하고 있었지? 아아! 촛불 밑에서 재롱떨고 있 었구나. “여자든 남자든 지금 그게 중요한가! 자네가 가서 만나보게, 엔디미온 군! 뭐든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거리가 있으면 합법이든 불법이든 당장 내게 말해!” 역시 대박력의 아이히만 대공!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례한 뒤에 나는 급히 국왕 전하와 왕비 마마의 거처인 본당으로 향했다. 4. 본궁에 들어간 나는 붉은 색 소드라인을 넘어 전하의 거처로 향했다. 임 금님의 거처로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아이히만 대공의 이 름을 팔지 않았다면 입장할 수 없는 곳이리라. ‘우아아. 으리으리하네!’ 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임금님 전용 응접실을 보곤 혀를 찼다. 솔직 히 이건 너무 속물적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거창한 응접실이었다. 한쪽 벽에 대형 인공폭포가 있다면 말 다한 것 아닐까. 누군 이 더운 날 밥도 안 넘어 갈 정도로 고생하고 있는데, 누군 이런 궁전에서 호의호식하고 있 다니! 무리 전하의 거처라지만 조금은 빈정거리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무슨 용무로 방문하셨나이까.” 고풍스런 시녀 복장을 입은 미모의 여성이 내게 다가와 차분하게 말했다. 단정하게 넘긴 검은 머리와 정중한 존칭 그리고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는 시녀 특유의 예법이 몸에 밴 여자였다. 정말 나보다 연상으로 보이는군. 나는 그 분위기에 기가 죽어서 나도 모르게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이 며 말했다. “저어, 아이히만 대공의 명령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현재 이곳에 있 다는 세공사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 분이라면 이쪽으로....” 그녀는 정중하고도 우아한 몸놀림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에는 무슨 이유인지 은빛의 방울이 걸려 있었다. 몇 분을 넘게 붉은 융단이 깔려 있는 복도를 그녀의 방울소리를 뒤따르며 걸어갔을 때, 그녀 가 어떤 객실의 문 앞에서 고개를 숙여 보았다. “이곳이옵니다.” “아. 고마워요.” 차분한 분위기의 시녀에게 내가 인사하려고 다가가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슬쩍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난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왜 그러세요?”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소인은 천한 몸이라 이곳을 찾은 분들께 네발자국 안으로는 다가가선 아니 되옵니다.” ‘그, 그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등을 보이지 않은 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정중함이 지나치면 오히려 감동이 없다고 했다. 저 조용한 누님도 집에 돌 아가면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왕실에서 저한테 쩔쩔매는 미남을 봤어요.'라고 소란스럽게 웃을지도 모른다. 고객감동의 서비스업에 종사했던 내 기분을 말하자면 - 인간다움이 필요 없었다면 차라리 인형을 세워 놓으라고, 이 시녀들의 책임자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말 '인 형'이 있었다. “누구시죠?” 객실 중앙의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여자는 살짝 눈을 감고 있는 모 습이 그야말로 잘 빚어놓은 도자기 인형 같았다. 소녀라 불리는 것이 어울 릴 나이 같은 그녀가 바로 세공사였다. 그런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내 쪽 을 바라보며 ‘누구시죠?’라고 물었다. “엔디미온 키리안 이라고 합니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어...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가 엷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솔직히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저 세공사가 세드릭 씨의 오리지널을 보고 모조품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저 소녀는 맹인이었다. “죄송해요. 제 눈이 불편해서 예의를 갖출 수가 없습니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시력을 잃은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던 것 같다. 체취처럼 몸에 밴 가련함이 묻어나는 소녀였다. 나는 그녀 앞에 앉았고 그녀는 눈을 감은 얼굴로 살짝 내게 다가와 오똑한 코끝으로 날 ‘느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어린 사슴 같았다. “연극배우... 이신가요? 비누 향과 화장 내가 느껴지네요.” “아뇨. 저 기산데요.” “기사? 가죽 냄새와 피 냄새가 없는데요?” “아하하. 이 왕국에는 그런 기사도 있거든요.”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한번 얼굴을 만져볼 수 있을까요?” “제, 제 얼굴이요?” “예.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서요.” “헤헤, 마음 껏 만져 주세요오.” 내가 방긋 웃으며 슬쩍 얼굴을 들이대자 그녀의 두 손이 다가와 내 눈썹 1230 과 콧등과 두 뺨과 턱 선을 천천히 매만지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티 없이 부드러울 줄 알았던 그녀의 손은 크고 작은 상처들도 거칠게 얼룩 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공사의 손인가. 한 1분 정도 세심하게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엷게 웃으며 손을 땠 다. “머리 속에 당신의 얼굴이 그려졌어요. 예쁘게 생기셨네요. 목소리를 듣 지 않았으면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몰라요.” “하하. 그 정도 인가요?” 맹인에게 잘 생겼다고 칭찬 받아보긴 이번이 처음이로군.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역시 제가 만든 조잡한 모조품 때문인가요?” “조잡하지 않아요. 도리어 너무 훌륭해서 문제가 되었거든요.” “......” 그녀는 씁쓸하게 웃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보다도 몇 살이나 어린 소녀인데도 풍겨 오는 가련한 어른스러움이 마치 예전의 그녀를 떠오르게 만드는 여자다. “저어. 어떻게 그걸 만드신 거죠?” “어떻게... 라뇨?”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번도 본적이 없고 눈도 불편한데, 어떻게 그런 뛰어난 모조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다섯 살 때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것을 손으로 만져보고 그걸 느껴보는 것이 제 유일한 취미가 되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세드릭 님이 만든 반지를 만져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너 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세공사가 되어야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맹인으로서 세공사가 되겠다는 것, 그건 호스트가 기사가 되겠다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결심일 것이다. “다른 세공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작품을 만져보고 그 아름다운 곡선 과 직선들이 내 손끝에서 스쳐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몹시 행복했습니다. 세드릭 님의 목걸이는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지만 그 모습에 대해서는 다 른 세공사들에게 자세하게 전해 듣고 날마다 그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한번 만이라도 그것을 만져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모조품을...” “조금이라도 닮은 것을 만들어 보고 싶은 제 이기적인 욕심에 그런 조잡 한 모조품을 세공한 것입니다. 맹인 여자 주제에... 감히 세드릭 님의 예 술품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로 가능한가요? 본 적도 없는 것을 손끝의 감각만으로 재현해 낸다 는 것이...” “글쎄요. 전 항상 그렇게 해왔는데요.” 나는 깊이 감탄하며 두 가지를 떠올렸다. 의심할 나위 없이 둘은 사실이 었다. 1.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 우아아아! 세공의 천재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이샤라고 합니다. 빛이라는 뜻이에요. 이제 빛은 잃었지만 대신 다른 재능을 내려준 신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이샤의 모 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샤를 보고 있으면 자꾸 '그녀' 가 떠오른다. 그녀도 남들은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재능 때문에 항상 아파하면서도 '신이 내게 이런 능력을 내려 준 것을 언제나 감사히 여기고 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어째서 신은 이토록 잔인할 것일 까, 그는 하나를 내려주면 다른 하나를 가져가 버린다. “왜 울고 있어요?” 문득 이상함을 느낀 이샤가 내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냥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분도 눈이 안 보이나 보죠?” “비슷해요.” 난 눈물을 닦으며 쓴웃음을 지었고 손가락으로 내 표정을 읽던 그녀는 의 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Blind Talk 사실... 여기서 끊으면 안되는데, 더 이상 늦어지면 안되겠다 싶어서 일단 잘라서 올립니다. 자 그럼, 다음 편에서 대반전이 벌어집니다.(정말?) 쇼팽의 왈츠C단조 작품64 를 들으며 (누구 연주인지는 모르겠고... 솔직히 정확히 무슨 곡인지도 잘 모르겠군 요;;;)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장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5. 그리고 사흘이 흘렀다. 그 사흘 동안 변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더 이상 더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날씨가 도를 넘어서 이 왕 국을 지글지글 익혀 버리는 살인 무더위로 발전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 후끈후끈한 왕국의 생존 기간이 이제 11일 남았다는 것이다. 난 오늘도 행정부 지하실로 출근해서 아이히만에게 보고를 올렸다. “그래. 이샤라는 여자한테 기대할 건 없다는 말이로군.” 테이블 맞은편에서 담배를 피워 문 아이히만 공이 그렇게 말하자 난 퉁명 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기대할 것이 없다니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확실히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샤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 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이용가치로 판단하는 것 은 싫다고! 그런데 아이히만은 나와 생각이 달랐나 보다. 그는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했다. “만약 이샤를 사죄의 의미로 마시키온 제국에 넘기는 것은 어떨까.” “노, 농담이시죠?” “지금 농담할 분위기로 보이나.” “아이히만 대공!” 내가 벌떡 일어나자 뒤에 있던 위고르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지 만 아이히만은 여전히 표범 같은 눈초리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왜 화를 내는 건가. 여자 한 명 희생시켜 나라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 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지 않은가.” 설마 아이히만 대공이 이토록 비정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난 순간 머리 끝까지 달아올라서는 아이히만을 쏘아 보았다. “사람 목숨으로 장사를 하시겠다고요? 아무 죄도 없는 맹인 소녀를 방패 막이로 삼아 놓고 손해니 이익이 하는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냐고요! 대 공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신 겁니까!” “이봐! 엔디미온 군!” 위고르가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난 아이히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를 구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틀렸다면 아 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건 우주불변의 진리라고! “난 이샤에게 아무 문제도 없이 이 일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앞으 로도 계속 세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했다고요!” “자네, 그렇게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나.” “책임질 겁니다! 내 목숨이 끊어져도 책임져요! 만약 당신들이 그녀를 팔아서 위기를 모면해 볼 작정이라면, 전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 이 이샤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킬 겁니다.” 내 결심에 대한 아이히만의 답변은 비웃음이었다. “진심인가? 그런 짓을 하면 분명 사형을 면하기 어려울 거야.” “그래요. 우둔해 보이나요? 하지만 그게 내가 책임지는 방식이에요. 그 러는 당신은 어떤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죠? 결국 눈도 보이지 않는 소 녀를 희생시켜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것이잖아요!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도 망치려는 것일 뿐이잖아요! 왕비 마마나 당신이나 다 똑같아! 여자 한 명 책임져 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왕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거냐고!” 난 커다란 실망감에 소리치고 있었다. 갑자기 앞으로 나선 위고르가 내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자네! 이 상황에 대해 진지해 질 수 없나! 우리가 이 일을 해결하지 못 하면 그때는 이 나라 전체가 마키시온 제국의 속국이 되는 거나 다름없게 돼. 지금 우리에겐 그런 낭만을 찾을 여유 따윈 없어!” “그 ‘우리’에서 저는 빼주시죠.” 나는 위고르의 손을 잡아 풀며 날카롭게 눈을 치켜세웠다. 그때 아무 말 없이 날 지켜보기만 하던 아이히만이 갑자기 지하실이 떠나 가라 웃는 것이닌가. “우하하하핫! 이거 실례했군. 내게 이런 소리를 꺼낼 당돌한 녀석이 나 타날 줄은 몰랐어. 이거 오래 살긴 잘했구먼. 자넨 목숨이 한 백 개쯤 있 나 보지?”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뭔가 놀림 당한 것 같아 난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아이히만이 연륜이 느 껴지는 백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날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엔디미온 군, 자네는 카론 군의 평가대로야. 날도 덥고 마음 도 답답해서 장난 한번 쳐 본 것만으로도 그렇게 금방 속마음을 훤히 보이 다니 훌륭한 정치꾼이 되긴 글렀구만." "자, 장난친 거라고요?" "당연하지. 50년을 넘게 정치를 해온 내가 그런 치졸한 방법 밖에는 생 각해내지 못한다면 난 당장 밥숟가락 놔야겠지.” 역시 날 놀린 거였어! “지, 지금 우리한텐 그런 장난 칠 여유 없다고요.” 난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아이히만은 얄밉게도 내 표정을 즐기는지 큭큭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 다. “불행하게도 세상에 너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어. 이건 장담할 수 있지. 자신들이 세상의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마키시온 제국이 맹인 소녀 한 명을 넘겨받는다고 마음이 풀어질 리가 없겠지.” 대공은 마치 잔인한 정치의 논리를 내게 쉽게 풀어 가르쳐 주려는 것처럼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말해볼까. 마키시온 제국의 마라넬로 황제에게 자기 부인의 명 예 같은 것은 명분일 뿐이야. 난 그 늙은 여우를 잘 알고 있지. 그 작자에 게 이번 일은 털도 뽑지 않고 닭을 집어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분명 황제는 우리가 지불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강요하겠지. 그리고 힘 없는 우리는 꼼짝없이 그 황제 앞에 죄인이 되어 무릎을 꿇어야 할 테고, 그러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평생을 자라온 이 나라 베르스에게 자신의 속국인 냥 내정간섭을 시작할 테지. 마키시온 제국의 숙적인 남쪽 콘스탄트 왕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교두보로 우리를 이용할 속셈이야." “괴, 굉장해요. 그런 것까지 예견하시고 계셨다니!” 난 감탄에 마지않아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아이히만은 뭘 그런 것을 가지 고 그러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치라는 이름의 상술에서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야. 정치 장사꾼 중의 장사꾼인 마라넬로 황제가 맹인 소녀 하나 넘겨받았다고 그 시커먼 욕심을 거둘 리가 없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분 계신 것 같은데요.” 난 멍하니 지하실 구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풀이 죽은 위고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너무 기죽지 마세요, 위고르 공. 살다보면 치졸한 발상을 할 때도 있는 거죠. “그건 그렇고, 이 놈의 군무대신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이히만의 말마따나 군무대신는 어제부터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뭐, 솔 직히 있어봐야 별 도움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 나라 중신인데 - 나라 걱 정에 앓아누운 것은 아닐까? “하하하하! 여보게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갑자기 문이 열리며 군무대신이 들어오는 것 이었다. 게다가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뭐가 즐거운지 싱글벙글한 미소까지 담고 말이다. 대체 왜 저러신담. 설마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미쳐버린 것은... “우하하하하! 이제 이 걱정도 끝이네! 끝! 내가 다 해결했지!” “응? 무슨 소린가. 자네가 무슨 수로 이 일을 해결했다는 거야!” 아이히만은 놀랐기 보다는 굉장히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몸이 바짝 말 라서 마치 '멸치대신'같은 군무대신은 눈을 번뜩이며 마치 세상을 구한 용 사마냥 커다랗게 외치는 것이었다. “내 획기적인 해결법을 들어보게나!" "말해보게." "11일 후에 공판이 열리지?” “그렇지.” “그때 어떤 목걸이가 가짜인지 알아내겠지?” “물론 그렇지.” “그 목걸이를 감정하는 사람이 바로 사드릭이지?” “세드릭 이라니까!” “아무튼! 그 세드릭이 없다면 감정을 할 수도 없는 거잖아!” “그, 그렇겠지?” “자! 보게나! 그래서 내가 세드릭을 납치해 왔네!” “뭐라고!!!!!” 오 신이시여! 우리들의 표정이 동시에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며 절규를 내 질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군인들의 손에 끌려 들어오는 세드릭을 보자 우 리들의 마음은 지옥 밑바닥까지 고속 낙하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우하하하! 어떤가! 이 놈을 잡아 왔으니 공판도 없고 손해배상을 할 필 요도 없지 않나!” 군무대신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이제 우리는 죽었다.'라는 말로 자동 번 역되어 내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세드릭은 온 몸이 꽁꽁 묶이고 입에는 재갈까지 묶여 있는 상태. 이건 누가 봐도 강제 납치된 인질이잖아! 난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세드릭과 군무대신을 번갈아가면서 보고 는 입을 열었다. “저어.... 세드릭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세요?” “알다마다. 세공사가 아닌가!” 그래요. 세드릭은 이오타 왕국의 세공사입니다. 그것도 자타가 공인하는 전 세계 최고의 예술가이며 예술을 사랑하는 이오타 백성들의 신적인 존재인데다 가 이오타 왕국이 목숨처럼 아끼고 있는 보물이란 말입니다! 어쩌자고 그런 민 중의 보배를 납치해 오신 겁니까! 만약 이오타 왕국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당장 이 나라는 불바다가 되어 버 릴 것이 보나마나 뻔한 사실이다. 인내심의 한계상황에 도달한 아이히만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주 무시무 시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차라리... 납치하지 말고 죽이지 그랬나. 응?” “아. 정말 죽일 걸 그랬나?” “그리고 네 놈도 그 옆에서 자살할 것이지 여긴 뭣하러 돌아 왔어!!!” 순간 아이히만이 뽑은 총이 콰앙 소리를 내며 불을 뿜었고 분노의 총탄이 간발의 차이로 군무대신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뛰어든 위고르 가 아이히만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분명 이 곳이 군무대신의 무덤이 되 었을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군무대신이 바닥에 넙죽 엎드리곤 중얼거렸다. “왜, 왜 그러는 건가! 이제 일은 해결 된 거잖아?” 이 양반이 그래도 끝까지 잘 했데요! 이건 이미 잘못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라고! 아이히만이 다시 총알을 장전하며 살의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놈을 묻어버리기 전에 한 가지만 묻자. 세드릭을 납치해 오면서 들 키진 않았겠지?” “물론이네! 우리의 정체는 아무도 모를 걸세!” “그래? 어떻게 납치했는지 읊어봐.” 그러나 군무대신은 자신의 납치 작전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세드릭이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에 나타날 것이라는 정보 를 들은 우리 특수부대는 무대 뒤에 있는 세드릭의 뒤통수를 후려쳐서 기 절시킨 다음 말에 태우고 도망쳐 왔네! 뭐 비록 이오타 기병들의 엄청난 추격을 받긴 했지만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곳까지 왔지. 후후후. 어떤가!” “이오타 기병들이 보는 앞에서 베르스 국경을 넘었다고?” “응. 그랬지.” “잘했군. 참 잘했네. 이제 자네 소원대로 공성포를 사주겠네.” “아! 정말인가!” “당연히 그래야지. 며칠 후엔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아이히만은 장전된 총알로 군무대신을 쏴 버릴지 아니면 자신의 머리를 겨냥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젠 아이히만의 말대로 이오타와 전 쟁이 벌어져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자벨 님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지.’ 난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벽에 기댔다. 이오타와의 전쟁에서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이번에는 마키시온 제국의 협박이 기다리고 있다. 후후후, 그야 말로 듀얼 쇼크로군. 이 참에 콘스탄트 왕국에도 시비를 걸어 볼까? 어차 피 이 왕국은 자폭할 테니까 적국 하나 더 늘어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저쪽에선 바닥에 쪼그려 앉은 위고르가 종이 위에 뭐라고 쓰고 있었다. “응? 위고르 공. 지금 뭘 쓰고 계세요?” “.......유서. 자네 것도 대신 써주리?” 순간 어두컴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너,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방법이 있을 거에요!” 내 목소리에 아이히만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답했다. “뭔 놈의 방법. 이오타 국왕에게 가서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세 요.'라고 애교라도 떨어볼 텐가?” 난 일말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며 말했다. “국왕까지는 아니지만 부탁해 볼 수 있는 분이 계세요.” “응? 누구?” “그럼 이오타 왕국에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이봐! 엔디미온 군!” 아이히만의 외침을 뒤로 하고 나는 긴 금발을 날리며 지하실을 빠져나왔 다. 6.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카론 경의 집무실이었다. “또 내 말을 빌려달라고?” 카론 경이 안경 너머 차가운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예. 무척 급한 일이기 때문에 카론 주니어... 아니 카론 경의 명마가 아니라면 제 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습니다!” ‘카론 주니어’라는 말이 나오자 카론 경은 긴 눈썹을 움찔했지만 더 이 상 입을 열진 않았다. 아마 키스가 예전부터 그렇게 부르고 다녔나 보군. 카론 경은 사무적이지만 무거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세드릭이 납치 되었다면 이오타 왕국은 우리의 적국이나 다름없다. 그 런 곳에 단신으로 갔다간 죽을 수도 있어.” “무모한 일엔 익숙하거든요. 헤헤.” “.....” 카론 경은 내 표정을 바라보다가 안경을 벗곤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그러다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곁에 있던 자신의 검을 집어 드는 것이었다. “좋아. 대신 나도 동행하겠다.” “예?” 의외의 말에 난 적잖게 놀란 표정을 보였다. 카론 경은 코트를 입으며 날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네가 걱정 되서가 아니라 내 말이 걱정 되서야.” 후후. 카론 경. 둘러대는 솜씨가 서두르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어서 가요!” 카론 경은 먼저 집무실을 나가기 전 이렇게 말했다. “왠지... 네 녀석이 왕궁에 들어온 다음부터 조용한 날이 없는 것 같군. 키스 녀석을 닮아가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아니! 그런 모욕적인 비유를! 이래봬도 전 해결하는 쪽이라고요! -Blind Talk 최근 자꾸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슴 답답한 일들도 좀 있었고 말입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좀 더 열심히 쓰도록 채찍질을 해야 겠군요. 읽어주시고 고마운 리플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 편을 일찍 올라올 수 있도록 다짐을 하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047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장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7. 역시 '카론 주니어'였다. 보통 말로는 전력으로 달려도 이틀 이상 걸리는 이오타였지만 나와 카론 경은 광속의 속력으로 질주한 끝에 하루 만에 도 착할 수 있었다. 내가 말한 '목표 지점'은 이오타의 수도 페로제, 그것도 중심가의 고급 노천카페였다. 페로제 부근 숲 속에 말을 숨긴 우리는 조심스럽게 중심가 로 향했다. 카론의 말대로 현재 이오타의 분위기는 '쳐 죽이자! 베르스 놈들!'이었고 확실히 사람들 눈에 띄는 우리들은 그런 분노한 군중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무엇보다 현재 우리에 겐 이오타 시민증이 없기 때문에 검문이라도 걸리는 날엔 무척 암울한 사 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 뻔했다. “이렇게 하죠, 카론 경. 카론 경이 제 형이고 우리는 예술품 협회에서 시장 조사를 하기 위해 파견 나온 것이라고 입을 맞추지요.” “내가 너의 형이라고?” “아니 그냥 신분을 위장하는 것뿐이에요. 그렇게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 다니, 너무해요!” “알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군.” 신분을 숨기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인지 내 형 역할을 하는 것이 싫 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융통성 제로에 연기능력 제로인 카론 경은 어쨌 든 거짓말은 싫다는 투로 어린애처럼 싫은 표정을 드러냈다. 그럼 '우하하 하! 우리는 자랑스러운 베르스의 기사다!'라고 외칠깝쇼? 그 즉시 성난 백 성들의 죽창에 찔려 꼬치구이가 될걸요? “그런데 누굴 만나려는 거냐.” “그게 저.... 밝히기 곤란한 분이라서요. 죄송합니다.” “뭐 이 일만 해결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겠지.” 카론 경은 의외로 날 믿고 있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은 채 내 뒤를 따 랐고 우리는 30분 정도로 걸어서 페로제 중심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대 이오타 왕국의 상업 중심지답게 산지사방이 화려하게 반짝거리 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별로 밝지 못했다. 아니 이쯤이면 차라리 살기 가득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라. 대충 행인들의 분위기는 이랬다. “우아아아! 세드릭 님을 빼앗아 간 베르스 놈들에게 철퇴를 가하자!” “전하께서도 그 때려죽일 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게 분명해!” “인트라 무로스에서 베르스 국왕을 암살할 거야! 베르스 왕궁을 피바다 로 만들자! 우아아!” 여, 역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참으로 진취적이로군. 이건 실수로라도 신분이 들통 나면 온 몸이 꽁꽁 묶여 용암 속에 내던져질 분위 기였다. 난 식은땀을 흘리며 낫과 곡괭이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폭도들 사이를 지나쳐 노천카페로 향했다. 내가 카론 경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쯤에서 기다려 주세요.” “알겠다. 빨리 끝내고 오도록.” 카론 경은 이런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게 짧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심장 떨려 죽겠건만, 참 대단한 정신력이로군. 난 슬쩍 광장의 시계탑을 봤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세계에서 가장 시계 제작기술이 발달한 나라이니 1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자벨 님이 오셨겠군.’ 내가 9시에 이 고급 노천카페를 찾은 이유는 이자벨 크리스탄센 님을 만 나기 위해서다. 그 분은 자신을 만나고 싶으면 9시에 이곳 카페로 오라고 했었다. 젊은 여성 사업가로 신분을 숨기고 있는 이자벨 님은 항상 이때 이곳에 와서 도시 분위기를 살펴보며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고 한다. 뭐랄 까, 1분도 틀리지 않고 매일 매일 같은 장소 같은 곳을 찾을 수 있다니, 실로 숨이 콱 막혀 올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이지 않은가. “여기야. 미온 군.” “아! 이자벨 님!” 시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천카페 끝 쪽 자리에 앉아 있던 이자벨 님이 날 먼저 발견하곤 슬쩍 손짓을 했다. 내가 먼저 찾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가발 때문이었다.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기 때문에 긴 은발의 가발을 쓰고 검은 색 정장을 입고 있는 이자벨 님의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 이었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신분을 숨겨야 할 정도로 이자벨 님의 목숨 을 노리는 타국의 암살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이자벨 님 옆에 자신만만한 외모의 젊은 미남자가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잘 다듬은 긴 머리에 엷은 색안경을 끼고 입고 있 는 셔츠도 알록달록해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꼭 여자 울리는 것이 취미인 갑부 집안의 바람둥이 같은 인상이었다. “...이 분은 누구시죠?” “으응. 내 부하야. 같이 나오고 싶다고 해서.” “아 예.”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지만 이자벨 님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 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그녀가 별 이 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부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온. 잘 들어.” 그녀가 보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날 바라보았다. “우리 왕국은 3일 후 너희에게 선전포고를 할 거야.” “......!” 당장 본론으로 들어가자 난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가 내려놓은 신문 헤 드라인에는 '남은 방법은 보복뿐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문장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녀도 심란한 듯 조금 찡그린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 왕국에는 '은밀'이라는 단어가 없는 거니? 세드릭 님을 납치하려 는 발상 자체도 상식 밖이지만, 기왕 납치하기로 했다면 최대한 조용히 처 리했어야지. 백성들이 다 알아 버렸으니 이젠 은밀하게 협상할 수 있는 기 회는 지나갔어.” “죄,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은밀하게 납치할게요.” 난 너무 미안해서 엉뚱한 말을 꺼내 버렸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군무대 신의 사과를 대신 해야 하는 거냐고! 난 슬쩍 그 악의에 넘치는 신문을 치우고는 입을 열었다. “꼭... 전쟁을 해야 하는 건가요. 세드릭 씨를 돌려드리고 국왕에게 사 죄한다면...” “글쎄다. 세드릭 님은 왕족과 다름 없는 대우를 받는 분인데다가 무엇보 다 세드릭 님을 추앙하는 우리 백성들이 전쟁을 원하고 있어. 아무리 국왕 이라도 여론을 무시할 수야 없거든.” “그 말씀은... 국왕께서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건가요?”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어.” 그녀는 능숙하게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 행정부 지하실에 있을 아이히만 대공에게 가서 이렇게 전해. 세드 릭 님을 돌려주는 정도로 일을 마무리 지을 수는 없다고. 대신 우리 이오 타 왕국과 주종 관계를 맺는다면 선전포고를 철회하는 것은 물론 마키시온 제국이 제시할 손해배상금도 대신 지불해 주겠다고 전해.” “모, 모든지 알고 계시는군요.” 역시 인트라 무로스. 기밀리에 진행 중인 지하실 회의 역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세드릭이 납치되는 것을 수수방관한 것조차 그걸 이용하기 위한 계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씀은 마키시온의 속국이 되는 대신 이오타의 속국이 되라 는 말씀이시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그래.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어차피 속국이 될 지 금 상황에서, 마키시온 보다는 우리의 속국이 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어차피 곧 너희 왕실에 사신을 보낼 테지만 그 전에 마키시온의 눈을 피해 왕실과 대화할 수 있도록 비공식 루트인 너를 통해 말을 전하려는 거야.” 이자벨 님은 얄미울 정도로 차갑게 말했다. 그러니까 난 나도 모르게 이 용당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자벨 님의 도움을 받아 이 상황을 해결 해 보고자 여기 왔지만, 이자벨 님은 처음부터 날 통해서 은밀하게 아이히 만과 거래를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냥함 뒤에 서 있는 비정함이 내게 '전쟁이 싫다면 이오타의 속 국이 되어라.'라는 말을 전하라고 강요하고 있었고, 아이히만은 분명 그 말을 듣자마자 격노할 것이다. 속국 같은 굴욕을 받아들일 위인이 아니니 까. 하지만 국왕 전하는 아니겠지. 어쩌면 마키시온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는 제안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방법은 없을 까요. 허영심 때문에 가짜 목걸이를 만든 일이나 그 걸 무마해 보기 위해 세드릭 씨를 납치한 일이나, 비웃음을 받아 마땅한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키시온이나 이오타 같은 강대국이 그 걸 빌미로 우리나라를 삼켜보려는 짓은.... 너무 치졸하잖아요.” 그때 팔짱을 낀 채 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침묵하던 '이자벨의 부하'가 처 음으로 입을 열었다.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누굴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가 없었다. “후후. 다른 방법이라. 뭐, 세드릭이 다시 세공을 시작하도록 만들어주 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나라면 속국을 선택하겠어. 자존심을 챙기는 것은 강자들만의 권리고 너희 나라는 그러기엔 실격이야. 빵점이라고나 할까. 너희 같은 나라가 아직까지 이런 짐승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아 있는 건 기적이야.” “뭐, 뭐에요! 당신한테 우리나라 점수 매겨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초면에 뜬금없이 남의 나라를 욕하다니! 울컥하는 기분에 내가 그를 쏘아 보자 이상하게도 이자벨 님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의 얄미 운 미소를 보니 더욱 화가 나서 난 턱을 치켜들며 외쳤다. “그럼 세드릭 씨가 다시 세공을 하도록 만들면 속국이 되라는 협박을 거 두기라도 할 건가요? 그렇게 해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빈정거리는 거 에요!” “흐음. 아마, 해줄 걸?" “흥! 당신이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이윽고 이 재수 없는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날 바라보았다. 꼭 독수리 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자였다. “이자벨 말대로 재미있는 애송이로군. 정식으로 소개하지. 난 이 나라 첫째 왕자 쇼메 블룸버그다. 지금은 아바마마의 명을 받아 너희 베르스를 합병하려는 일을 담당하고 있지.” “저, 정말 쇼메 왕자가 당신?” 순간 몸이 꽝꽝 얼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이자벨 님을 바라보았다. 그녀 는 자신도 난감한지 양 미간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난 벼 락을 맞은 듯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선 그에게 손가락질했다. “우에에엣! 왕자가 뭐 이래!” 블룸버그 왕가의 왕태자인 쇼메 블룸버그에 대한 소문은 나도 수없이 들 어봤다. 쇼메는 그 천재적인 정치 재능 때문에 전 세계의 왕자들 중에서도 단연 튀는 존재였고 굉장한 미남에 예술적 감각도 뛰어나고 검술 실력도 상당한 자라고 들었다. 덕분에 내 머리 속에 쇼메 왕자의 이미지는 근엄한 외모에 항상 단정한 옷을 입으며 전신에 고귀함이 반짝 반짝 거리는 그런 천상의 인간이었는 데 - 이, 이건 완전 양아치잖아! 이 모습 어디에 천재의 기품이 있다는 거 야!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왕자 쯤 되는 사람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사람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서운하지.” 쇼메 왕자는 내 생각을 간파했는지 나보다 훨씬 진한 색의 금발을 쓸어 넘기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뭔가 상대를 깔보는 듯한 분위기가 배어 있는 사람이다. “아까 하던 말 계속할까? 베르스를 속국을 삼는 것과 세드릭이 다시 세 공을 시작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겠어. 베 르스는 언제라도 빌미를 만들어 속국으로 삼을 수 있지만 세드릭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내가 나서도 불가능했거든.” ‘어련 하시겠습니까!’ 우리나라 정도는 언제라도 속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쇼메 왕자는 한 눈 에 보기에도 오만방자할 정도의 자신감이 넘치는 자였다. 나라의 운명마저 이리 저리 좌지우지하는 그런 쇼메가 세공사 한 명의 마음조차 바꾸지 못 했다는 것은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런 성격이라면 평생 가도 예술가의 심정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약속하지. 세드릭의 마음을 되돌려 놓으면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철회하겠어.” “자, 잠깐만요! 저한테는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권한이....” “단! 일주일 내에 세드릭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면 넌 이런 제안을 할 가치가 없는 녀석이라고 판단하고 전쟁을 하던 속국으로 만들던 내 뜻대로 하겠어. 지금까지는 이자벨의 간청을 듣고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지만, 계 속 이렇게 미루다간 마키시온 제국에게 먹이를 빼앗길 테니까. 지는 건 질 색이거든.” “일주일 안에 세드릭 씨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 속국이 되든지. 나도 너희들이 세드릭을 설득 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 안 해.” 쇼메 왕자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 좋은 줄 알아. 이자벨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왕자인 내가 널 만날 일 은 영원히 없었을 테니까.”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쇼메는 자기 멋대로 결정을 해버리고 선글라스를 쓰며 자리를 떴다. 정말이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남의 속을 박박 긁어 놓 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떠나자 내가 이자벨 님을 바라보며 말했 다. 그녀는 여전히 난감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이자벨 님도 전쟁을 원한 것은 아니었군요.”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최후의 수단이야. 그런 소모적인 해결책을 내가 찬성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쇼메 왕자님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 사하는 성격이야. 군사강국인 마키시온 제국에게 지는 것을 죽을 정도로 싫어하시거든. 어렸을 때 마키시온 제국에 볼모로 보내졌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마키시온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어 하셔.” “어린애 같네요. 쇼메 왕자는....” 체에. 누가 왕자 아니랄까봐. 난 뾰루퉁한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차라 리 훨씬 어린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쇼메 왕자의 능력은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이오타는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강대하진 않은 나라였다. 적은 면적의 국토와 그에 따른 빈약한 인구 때문에 강대국이 되긴 힘든 조건이 었는데 - 그런 이오타를 지금처럼 키워놓은 장본인이 현재 국왕과 그의 아 들 쇼메 왕자, 이자벨 님 그리고 세드릭이었다. 그러니 이 네 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하늘을 찌를 듯 한 것이 당연하리라. “저 그런데 이자벨 님. 세드릭 씨가 왜 세공을 그만뒀는지 알고 계신가 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 알고 있었다면 나로서도 어떻게든 설득했겠지만 말씀을 안 하시거든.” 이자벨 님이 모르고 있다면 세상 모두가 모르고 있는 것이리라. 이건 정 말 난제로군. 하지만 지금은 물러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좋아요. 세드릭 씨를 설득해 보겠어요.” “미온. 쇼메 왕자님은 그걸 기대하며 네게 제안한 것이 아니야. 그 분은 처음부터 너희 나라를 속국으로 만들어 마키시온의 계획을 방해하고 싶으 셨던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세드릭 님에 대한 정보를 흘린 것도 납치하도 록 종용한 것도 쇼메 왕자님이 조작한 일이야.” “너, 너무해!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쇼메 왕자님은 이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까지 이용하는 분이니까.” “그런 사람한테 지고 싶진 않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마치 거인들의 틈바구니에 서 몸부림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무도 약자의 심정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 “미온. 정말 세드릭 님을 설득해 볼 생각이야?” “그 방법밖엔 없으니까요. 저도 지는 거 싫어하거든요.” 나는 이자벨 님께 정중히 인사한 뒤에 카페 밖으로 나가려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저 이자벨 님. 혹시 키릭스 세자르라는 사람에 대해 아시나요?” 그녀는 긴 은발의 가발을 쓴 얼굴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아는 사이야?” “아뇨. 그냥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이름이에요.” 그리고 나는 카페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자벨 님이 내게 거 짓말을 했고, 실은 키릭스 세자르라는 인물이 이자벨 님과 치명적인 관계 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Blind Talk 힘들군요. 글 쓰면서 가장 힘든 세 가지 경우 중 하나가 저 스스로 불만스 러운 상태에서 독자 분들께 글을 공개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연재물의 특성상 세월아 네월아 묵힐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장고 끝에 악수 나올 때도 있으니 어쨌든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세미 소사도 항상 홈런을 때리는 것은 아닌데 하물며 제가 어련할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풀릴 때는 자폭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사실 그런 모습 도 제 모습이니 외면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럴 때는 힘내자! 라고 스스로 소리치고 죽어라고 글에 들러붙는 것이 정석입니다. 아 그리고... 저번 편에는 리플을 보면서 무척 난감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전 소설을 쓰다가 제 판단으로 적절하 다 싶어서 한 인물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저는 깜짝 놀랄 정도로 '대체 뭐하는 짓이냐!'라는 메일과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라는 메일을 동시에 다발로 받았습니다. 즉, 서로 다른 정 반대의 말이 동시에 들린 것 이니 '역시 인간은 십인십색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난감했던 것은 어 쩔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심지어는 최근 감상 게시물 중에서 그 일을 가지고 제가 인물에 대한 애착 이 없다, 라면서 뜬금없이 제 생각을 대변해서 단정한 글도 있었는데, 이 쯤되면 무척 화가 납니다. 그럴리가 없잖습니까. 덕분에 한마디 해주고 싶 었지만 그것도 괜한 짓이라고 생각해서 그만두었습니다. 이번 경우에도 '신선하다.'와 '진부하다.' , '재치있다.'와 '쓰레기다.' '즐거웠다. 와 '짜증난다.' 등등 서로 다른 의견들이 리플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제 눈에 쭉 들어왔습니다. 먼저 번과 비슷한 심정이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하나에 집착해선 안되는 것일테고 또 어떤 것을 선택 해도 다른 한쪽은 싫어하는 상황입니다. 인간의 취향이 서로 다르다보니까 100%만족이란 없는 것이고 저는 당연히 최대 다수라고 판단되는 쪽으로 걸 어갑니다. 즐겁게 읽어줬으면 하는 기분으로 쓰는 글이니 당연히 다수가 즐 겁다고 판단하는 쪽으로 갑니다. 그게 SKT에서 제가 결심한 마이페이스입니다. 어떤 분은 코메디라서 재미있게 볼 때 또 어떤 분은 코메디라고 짜증을 낼 테고, 철학적이고 현학적이라서 즐거워 하는 분이 있는 반면 또 어떤 분은 그래서 싫어하는 분도 있고... 저는 (그리고 다른 글쓰는 분들도) 그런 독 자들의 감정 사이를 뛰어가며 글을 씁니다. 비록 별로 실력이 좋을 것도 없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뛰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당 연히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런데도 표현 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일들에 대 해서는 제 실력이 모자른 것이니 방도가 없습니다. 때로는 싫은 소리도 듣고 가끔은 아주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결국 판단 하고 뛰어가는 주체는 저 자신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해 봐 야 얻는 것은 없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제가 판단하고 제가 책임질 일이며 그렇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관심이 없는 분들은 저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니 읽어주길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도 독자의 입 장일 때 작가의 가난한 사정을 헤아려서 억지로 책을 사주는 경우는 없으 니까요. 결국 정 반대의 서로 다른 의견이 동시에 나왔을 때, 혹은 아무런 의견도 나오지 않았을 때도 저는 제 판단을 믿고 제 생각대로 그대로 가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위험한 길 밖엔 없습니다. 하하. 전 사실 이런 속내를 잘 꺼내지 않는 성격이지만, 가끔은 토로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올려 봅니다. 아 그건 그렇고 어쨌든 리플 상에서 서 로 소모적인 말싸움이 벌어지거나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럼 좀 더 기운을 차리고 고심한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더위는 질색입니다. 현재 제 기운이 빠져가는 이유의 7할은 아무래도 여름 더위 때문인 것 같네요. 작품을 만들다 보면 좋은 반응을 얻을 때도 있고, 나쁜 반응을 얻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무반응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E-MAIL : billiken@hanafos.com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메일을 이용해 주시겠어요? 이쪽은 빠 르진 않지만 저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장을 보냅니다. 단 '원고 전체를 보내라.'라든지 '이런 식으로 써라!'라는 메일은 곤란합니다.) 듣는 것이 없군요. 최근 노래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048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장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8. 카론 경의 모습은 이 혼잡스런 광장에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우 리나라에 대한 적대감이 넘실대는 이 분노의 거리에서 혼자 해탈한 듯 무 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카론 경은 임종할 때도 담담 한 표정으로 '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겠다. 그럼 이만.'이라면서 눈을 감을 것만 같다. “카론 경. 가요.” 살짝 눈을 감고 있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는 카론 경에게 내가 다가가 방긋 웃었다.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무뚝뚝하게 물어보 는 것이었다. 이거야 원, 장승과 대화하는 기분이로구만. “이야기는 잘 되었나.” “아 뭐... 잘 되었다면 잘 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데 카론 경?” “뭔가.” “아무리 봐도 카론 경이 더 왕족 같아요. 얼음나라 왕자님. 후후.” 나는 왕자의 모범과는 우주의 끝에서 끝만큼 거리가 있는 쇼메 왕자를 떠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카론과 쇼메를 한 자리에 세워놓고 아무나 불러와서 누가 왕자로 보이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카론 경일걸? “설마 이오타의 왕족을 만나고 온 거냐?” “예정에는 없던 일이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넌 대체 왕궁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던 거지?” 카론 경은 역시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답게 범인에게 추궁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보니 카론 경에게 내 과거를 숨길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난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전 사실.......” “이봐! 거기 너희들!” 그때 험악한 고함소리가 나의 진지한 '고백'에 끼어들며 몽둥이와 곡괭이 자루를 든 폭도들이 우리를 둘러싸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우리에게 굵 직한 막대기를 들이대며 외쳤다. “네 놈들, 베르스의 기사냐?” ‘아, 아니 어떻게 안 거야!’ 난 내 등에 '전 베르스 사람이랍니다. 때려주세요.'라는 푯말이라도 붙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악의 근원은 쇼메였다. “색안경을 낀 청년이 우리보고 네 놈들을 조사해 보라고 귀띔해 주더군! 이 이오타에 몰래 들어온 베르스 기사 놈들이라고 말이야! 자! 어서 정체 를 밝혀 봐라!” ‘이, 이 망할 놈의 쇼메가! 진짜 더티하네!’ 더티가이 쇼메 왕자는 정말이지 더럽게 치졸했다. 왕자 까지 되는 사람이 사람을 이런 식으로 방해할지는 몰랐다. 아니 방해라기 즐기고 있는 것 같 군.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히죽거리고 있겠지? 후후. 하지만 얕보지 마라, 쇼메 왕자. 우리는 이미 호흡을 맞춰 놓은 사이 란 말씀! 나는 성난 군중들 속에서 헤헤 웃으며 능숙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형님과 함께 이 페로제의 예술품들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협회 직원입니다. 때려죽일 베르스 놈들이라니 당치 도 않습니다! 그렇죠 카론 형?” 그러자 우리의 카론 경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나와 호흡을 맞춰 주었다. “우리는 베르스의 기사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순간 난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고 순간 이 페로제 광장에 말 못할 적 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 머리 속이 물청소라도 한 듯이 깨끗하게 비워지 고 내 영혼은 우주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카, 카론 경! 갑자기 세상이 권태로워 지셨나요! “아... 하하... 에이이. 혀엉. 농담도 차암...” 난 어떻게든 ‘의좋은 형제 작전’을 이어나가 보려고 카론 경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아양을 떨어봤지만 카론 경, 이 배신자는 고래심줄이라도 삶 아 먹었는지 고집을 꺾질 않는 것이었다. “난 내 조국과 내 신분을 숨기고 싶지 않아. 더욱이 내 조국을 경멸하는 자들 앞에서 고개 숙일 생각은 없다.” ‘진짜 협조 안 해주는군.’ 메모해 두자. 때로 카론은 키스보다 더 위험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카론 정도 되는 기사가 자신의 나라를 모욕당하고 그걸 피할 리가 없지. 죽음을 불사하고 명예를 지키려고 들 것이다. 하지만 어 째서 저까지 그 죽음에 동참시키는 겁니까! 전 빨리 돌아가서 세드릭 씨를 설득해야 한다고요! 카론의 자진납세 덕분에 상황은 놀랍도록 빠르고 격렬하게 악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난 마치 지옥행 편도열차 표를 끊은 기분이었다. “너 이놈. 지금 네 입으로 베르스 기사라고 했겠다! 빨리 병사들을 불러! 아니! 우리가 처리하자! 때려 죽여 버려!” 인간의 무서운 점이라면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평소에는 생각하지 도 못할 극단적인 흉포함을 보인다는 것이다. 정말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우리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이거 정말 당장이라도 우리를 붙잡아 광장 한 복판에 묶어 놓은 뒤에 '이오타에 숨어 들어온 얼빠진 베르스 녀석들'이라 는 푯말을 걸어 놓고 토마토나 양배추 따위를 집어 던질 것 같았다. 남의 나라 국민 단결의 희생양이 되는 건 사양이라고! 카론 경은 우리들을 둘러싼 폭도들을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내게 말 했다. “내가 모욕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내 나라가 모욕당하는 것은 넘어 갈 수 없어. 엔디미온 경. 한심해 보이겠지만 내겐 너처럼 능숙하게 세상 을 살아가는 재주가 없다.” 나는 순간 멍하니 카론 경을 바라보았고 그는 자기가 먼저 스르렁 검을 뽑아 파란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난 카론 경에게서 느껴지는 차가 운 살기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평소에는 워낙에 무덤덤한 사람이니 잘 느 낄 수가 없지만, 사실 카론 샤펜투스는 베르스 최고의 검술사다. 그리고 그 고수의 기운을 폭도들도 느낀 것 같았다. 그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 다. “거, 검을 뽑았어! 진짜 우리와 싸울 생각이냐!” “싸움을 좋아하진 않아. 하지만 명예를 지켜야 한다면 싸운다.” 나는 순간 두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어째서 카론 경이 그 뛰 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출세를 하지 못한 채 블리히 기사단장 같 은 협잡꾼에게 이용만 당하는지 알 것 같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저런 고리 타분한 기사의 고집을 부리는 카론 경이 왠지 멋지면서도 불쌍해 보인다는 기분이었다. 아냐! 아냐! 이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냐! 지금은 어떻게든 이 세기 말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야... “지금 무슨 일인가요. 모두들 진정하세요.” 그때 이오타의 제복을 입은 사내가 폭도와 카론 경 사이로 걸어오며 정중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눈동자가 유달리 흑색으 로 반짝이는 자였다. “미레일 경이시다!” 그런데 이 미레일이 굉장한 기사였는지 폭도들은 그를 보자 고개를 숙이 며 존경을 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간 카론과 미레일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놀란 표정을 보인자는 미레일이라는 부드러운 인상의 기사였다. 기사 라기보다는 꼭 학자나 선생 같은 인상이다. “설마 카론? 카론 샤펜투스?” “미레일. 오랜만이로군.” 얼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람? 미레일은 카론이 뽑은 검을 보고 는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군. 시민들을 대표해서 내가 사과하겠네. 지금 이오타의 분위기가 너무도 어수선해서 말이야. 자네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게.” 아아. 정의는 살아 있었구나. 상냥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그 말에 카론 경은 조용히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정중하게 폭도들을 해 산시킨 미레일 경은 이번에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전혀 강압적이지 않은 데도 묘한 존재감을 가진 미레일은 첫눈에도 호감이 가는 자였다. 그러니 까 쇼메 왕자와는 정 반대라고나 할까. “이 레이디는 누구시지?" "남자입니다만!" 시력이 나쁜 거 아닌가요! 비록 머리가 길다곤 해도 초면에 레이디라고 불릴 정도의 외모는 아니라고요! 카론 경은 날 흘낏 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예술품 협회 직원.” "아아 그랬군요." 아냐! 카론 경은 아까 일 가지고 삐졌는지 그런 식으로 내 소개를 했고 난 내 명예를 위해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기사걸랑요. 비록 칼은 없지만. 아하하.” “헤에? 당신도 기사라고요?” “기, 기사 맞아요! 엔디미온이라고 합니다.” 미레일의 의외라는 표정을 보자 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미레일 경, 내 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당신도 그다지 기사답게 생기진 않았다고요! “아아. 스왈로우 나이츠로군요.” 아니, 겉모습만 보고 알아채다니! 이오타 사람들은 뭐든 기똥차게 알아 맞히는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시사철 차분할 것 같은 미레일은 슬쩍 카론을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 것 이었다. “그런데 키스는 잘 있나?” “잘 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겠지.” 얼렐레? 어떻게 키스를 알고 있는 거지? 그 양반, 의외로 유명하네. 카론 의 말에 미레일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띈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윽고 좀 미안한 표정을 보이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만 편하게 지내는 것 같아 미안해. 베르스와의 전쟁은 나도 원치 않 아. 부디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어.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 기가 아니라서 아니라서 아쉽군. 다음에 만나면 오랜 만에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그럼 난 이만.” 다부지고 건장한 체구인데도 사근거리는 말투와 외모 덕에 별로 기사다워 보이지는 않는 미레일은 이오타의 심볼이 새겨진 망토를 휘날리며 사라져 갔다. “저 분과 아는 사인가 보죠?” “미레일. 우리와 같은 베르스 사람이었지. 나와 키스와 같이 기사 수업 을 받은 자다.” “예에?” 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베르스 사람이 왜 이오타의 기사가 되어 있는 거야? 카론은 내 의문에 답해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진짜 기사가 되고 싶다면 베르스를 떠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을 거다. 미레일은 진짜 기사가 되고 싶어 조국을 포기한 거야. 동료들은 모두 미레 일을 비난했지만 난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난 카론 경의 뒤를 따라가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무리 한심한 조국이라도 자신의 나라가 모욕당한 것에 죽음도 불사하는 카론 경과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나라를 버린 배신자가 되길 각오한 미레일 경, 외모나 성격 그리고 살아온 인생도 전혀 다른 두 친구 사이에서 난 무 척이나 비슷한 서글픈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키스 경은 그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또 어디쯤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불현듯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049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화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9. 카론 경의 대활약 덕분에 목숨을 마감할 뻔 했던 나는 천신만고 끝에 왕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람 속을 새카맣게 만드는 베르스 왕궁 세아스 말이 이토록 반가워 보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 이번에는 세드릭을 설득해야 한다고?” 아이히만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불만스런 표정 좀 짓지 마세요! 이래봬도 제가 얻어올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었다고요. 뭐 사실 내가 아닌 쇼메 왕자가 제시한 조건이긴 하지만. “이거야 원, 이오타에서는 우리가 실패하길 바라는 것 같군.” 사실이 그렇습니다. “쇼메 왕자, 그 녀석의 제안이겠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난 아이히만이 정확히 맞추자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히 만은 이미 내가 이자벨 님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크리스탄센 양이 그런 악취미적인 제안을 할 리는 없을 테니, 그런 터 무니없는 제안을 꺼낼 녀석은 쇼메 뿐이지. 스승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다 니, 고약한 녀석!” “엥? 스승이라고요?” “으음. 예전 이오타에서 날 쇼메 녀석의 정치학 개인 선생으로 모셔간 적이 있었지. 참 똑똑한 놈이긴 한데 자신을 너무 과신해. 경솔하게 마키 시온을 상대로 이빨을 들어내 질 않나. 그러다간 제 명에 못 죽지. 마라넬 로 황제는 아직 그 녀석이 싸우기엔 너무 벅찬 상대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다. 쇼메 왕자가 제아무리 천재라고 하더 라도 이 세상 땅덩이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거인 마라넬로 황제가 보 기엔 언제라도 목을 비틀 수 있는 어린애와 같을 것이다. 메데이아 교수 정도 되는 사람조차 그에겐 많고 많은 깃털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하아. 그런데 우리 왕비님은 그런 괴물의 부인과 싸웠단 말이지? 배짱 도 좋으셔.’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라면 설사 내 목걸이가 진품이었다고 하더라도 싸울 엄두도 안 났으리라. 아이히만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내게 말했다. “어쨌든 이오타에 가서 문전박대 당한 것은 아니니 너의 수완을 조금은 인정해 주도록 하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널 끌어들인 건데, 의외로 제 값 을 하는구만.” 의외라고요? 눈물나게 감사합니다. 체에. 난 조금 삐죽거리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세드릭 씨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자네가? 무슨 수로 말인가.” “글쎄요. 일단 그 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떻게든 답이...” “그럼 그렇게 하게나. 전하께는 내가 말해두겠네. 뭐 이제 와서 이오타 의 속국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너,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그런데 아이히만 대공이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엉뚱한 말을 꺼내는 것이 었다. “이거 재밌군.” “얼레? 뭐가요?”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즐겁다는 듯 웃기 시작한 아이히만을 보며 난 의아 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난 답답해 죽겠는데! 아이 히만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마지막 대사를 읊는 노(老) 연기자처럼 담배 연기를 뿜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어찌 재미있지 않을까. 이 왕국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가 고상 한 귀족도 용감무쌍한 군인도 아닌 전직 호스트인 평민의 손에 달려 있다 니. 어떤 예언자도 짐작할 수 없었겠지. 아무렴. 이래서 세상은 사는 재미 가 있는 거야. 안 그런가?” 난 덕분에 실웃음을 뱉었다. 일을 망치면 불같이 화를 내더라도 일단 최 선을 다한 뒤에는 어떤 악조건이라도 태연하게 그 상황을 즐긴다. 실로 지 독한 배짱이지 않은가? 이상이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아이히만 그나이제나 우 대공의 성격이다. “아이히만 대공. 부탁할 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이 연극의 끝이 베드엔딩이 아니길 바라며 그렇게 말했다. 10. 세드릭은 그늘진 눈매 덕에 미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확실히 35 세에 세계적 예술사의 반열에 오른 사람다운 고독이 몸에 흐르는 자였다. 그 고독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세드릭 앞에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내가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주일간 같이 지내게 된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 “앞으로 세드릭 님은 일주일간 저와 함께 이 방에서 지낼 것입니다. 그 리고 그 동안은 누구도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도록 조치해 놓았습니다. 무 례한 처사라는 것 알고 있지만, 부디 이해해 주세요.” “......” 대답도 없군. 소파에 앉아 날 품명하듯 훑어보고 있는 세드릭의 눈동자는 '내가 어째서 네 놈과 함께 일주일을 지내야 하는 거지?'였다.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아이히만에게 부탁해서 준비해 놓은 것들 덕분에 현재 그의 기 분은 최악일 것이다. 세드릭이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이 방을 새삼 훑어보 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날 놀리는 건가. 나를 왜 이런 쓸모없는 것들이 있는 곳에 가둔 거지.” 지금 40여 평에 달하는 이 방은 여러 가지 세공 기구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반나절 만에 어떻게든 준비해 달라고 아이히만에게 사정한 끝에 대 공이 힘을 총동원해서 전국의 각종 세공 장비를 부랴부랴 긁어모은 것이다. 물론 세공을 그만둔 세드릭으로서는 자신이 다루던 도구들을 보는 것만으 로도 기분이 불쾌하리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신체의 일부처럼 능숙하게 다루던 그리운 물건들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다시 세공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드릭이 이유를 알겠다는 듯 까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날 다시 세공을 시작하도록 만들어 보려는 거냐.”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귀찮군. 그냥 날 죽여라.” 이렇게 세드릭과의 첫 번째 하루가 시작되었다. 11. 아주 중요한 부탁이 있을 때 조급하게 그 부탁을 강요하는 사람은 어리석 은 사람이다. 상대가 냉정한 사람이라면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테고 다행히 상대가 친절한 사람이라도, 너무 조급하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들면 상대를 당황시킬 뿐이다. 그리고 이건 정치는 물론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 지다. ‘아아. 또 그녀 꿈을 꿨다.’ 난 쿠션을 껴안은 채 소파 위에서 부스스 일어나 가느다란 눈매로 주변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잠들어 있던 거지? 늦은 밤이었다. 난 의자에 앉은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기 전과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럼 몇 시간이 넘게 저러고 있었 단 말인가. 아주 커다란 무언가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면 저럴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결핍된 무언가가 아마도 세드릭이 세공을 그만둔 이유일 것 같다. “저어. 음식이라도 만들까요? 배 안 고파요?” 기지개를 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이곳저곳의 촛불에 밝히며 조심 스럽게 물었지만 세드릭은 분명 잠들어 있지 않은데도 아무 말도 없었다. 뭔가 카론 경의 무뚝뚝함과는 전혀 다른 고독 같은 것이 느껴진다. “정말 배 안 고프세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드셨는데...” “.....” “사실은 제가 배고프거든요. 늦었지만 저녁 준비할게요.” 난 총총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12. 동거 이틀 째, 지금까지 세드릭이 내게 건넨 말은 두 마디 뿐이었다. 첫 번째는 '차 끓여 와라.'였고 두 번째는 '맛없다.'였다. “......그럼 다시 끓여올게요.” “이제 됐어. 남자가 끓인 차 따위, 어떻게 끓여도 맛있을 리가 없지.” “.......” 성격 한번 아름답군. 진짜 한대 쥐어박고 싶다. 세드릭을 세공 장비들이 가득한 작업실에 가둬놓고 그를 격려하며 창작 의욕을 북돋다 주려던 내 옹골찬 야심은 초반부터 난항에 난항이었다. 세 드릭은 죽어라고 구해 온 도구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렇다고 빨리 자기 나라로 보내 달라며 화 내는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후덥 지근한 하늘이나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저 모습 어디에 예술가 의 후광이 있다는 거야. 차라리 이샤가 훨씬 예술가 같다, 쳇. 그리고 이렇게 별다른 성과 없이 오늘이 지나갔다. 13. 문제는 5일 째 되는 날 터졌다. 세드릭을 설득하는 일은 여전히 짐작도 안 갈 정도로 막막했지만 그래도 차 끓이는 솜씨 하나 만큼은 나날이 발전 하고 있어 오늘은 '그럭저럭 먹을 만 하군.'이라는 극찬을 하사 받았다. 솔직히 기뻤다. ‘아냐! 이게 아냐!’ 이쯤 되면 그래도 세드릭이 인간이라면, 화를 내든 아니면 답답해서라도 뭐라고 떠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는 조금도 자신의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난 소파에 쪼그려 앉아 말똥말똥 세드릭을 바라보다가 투덜 거렸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세공을 시작하지 말 것이지... 아차차!” 너무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도리어 내가 흠칫 입을 막았다. 내가 들어도 기분 상할 악담이었던 것이다. 그때 세드릭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보여 주었다. “네 말대로다.” “예?” “난 처음부터 세공 따위 시작하지 않는 편이 좋았어.” “노, 농담이었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예술품을 남기셨는데...” “예술품? 위선도 예술의 하나라면 예술품이겠지.” 난 그의 입가에 서린 비웃음을 보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의 감정이 처 음으로 손에 잡혔다. 그것도 무척이나 무겁고 어두운... 털컥! 덜컥! 콰앙! 그때 갑자기 무지막지하게 거칠게 문이 열리는 바람에 겨우 겨우 얻은 대 화의 기회는 중단 되었고 나는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들 어오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나를 씩씩거리며 노려보는 사내를 나는 너무 도 어이가 없어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블리히 경?” 그는 왕궁 제일의 아첨꾼, 헬스트 나이츠 기사단장 블리히였다. “이런 멍청한 놈! 당장 세드릭 님을 풀어주지 못하겠느냐!” “뭐, 뭐라고요!”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잘 나가던 분위기 다 망쳐 놓 고는 세드릭을 풀어주라니! 지금 이 나라의 미래를 분골쇄신하는 내 모습 이 안 보이냐! 이 왕궁의 독버섯 놈아! 라는 분노의 외침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 블리히가 두 두꺼운 입술을 열어 커다랗게 소리치는 바람에 내뱉지 못했다. “세드릭 님을 한시 빨리 이오타로 송환하라는 국왕 전하의 엄명이시다!” -Blind Talk 최근 보고 싶던 영화 2편이 비디오로 출시되었기에 빌려 봤습니다. 첫번째는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어댑테이션>이고 두버째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롬바인>입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를 굉장히 재미있게 본 뒤부터 스파이크 존스와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의 팬이 되었는데, 그들이 다시 만든 영화 <어댑테이션>은 보기 전부터 두근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음 감상은 뭐... 사람 기 죽이는 영화더군요. 후후. 각본가 카우프만 자신 이 주인공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 자체도 즐거운 장난이지만 여기에서 차력 에 가까울 정도로 각종 극작 기법을 뒤섞어 놓고 그걸 또 엄청나게 뻔뻔하 게 풀어나가는 재주가, 보면서 '아니 이 양반. 자신이 각본을 얼마나 잘 다루는 고수인지 자랑이라도 하려는 건가?'라는 질투심에 가까운 투정도 부리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많이 배운 영화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존 말코비치 되기> 만큼 즐기기는 쉽지 않더군요. 그리고 <볼링 포 콜롬바인>은 사실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봤습니다. 일단 르포성 다큐멘타리 영화를 표방하고 나온 영화들 중에 사람 기대를 무참히 깨버리는 한심한 '거짓 다큐'들도 많으니까요. 특히 개인적으로 지독하게 경멸하는 장선우라는 자의 <나쁜영화>를 봤을 때의 그 욕지기 가 나왔던 같은 잊고 싶은 기억 덕분에 '혹시 미국판 장선우가 아닐까?' 라는 불안감마저 들었지요. 하지만 보고 나서는 200% 만족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고 (분명 학술적 다큐멘타리와는 거리가 멀고 심층적인 분석이 들어간 것이 아님에도 불 구하고) 영화든 다큐든 르포든 간에 충분히 감동하며 봤습니다. 단지 소재주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 시청을 기피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한번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는 특히 '캅스'에 관련된 부분이 나올 때는 (그 뻔뻔할 정도의 비아냥에) 마시던 맥주를 푸욱! 하고 뿜고 웃어 버렸습니다. 또한 마릴린 맨슨이 자기 주장과 변 호를 아주 명확하게 하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고 또한 개인적으 로 팬인 사우스 파크가 나와서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편파적 일 정도의 냉소가 깔려 있는 영화이고 미국인이 아니라면 100% 공감하긴 힘든 영화이긴 하지만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상한 것은 아닐지라도) 확실히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필름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감독이라고 느꼈지요. 다큐멘타리에 관련해 제법 전문적인 지인들 중에는 <볼링 포 콜롬바인> 을 다큐멘타리적 가치로는 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째서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타리 상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 도 있었고, 시상식 발언 덕분에 큰 돈을 벌었기 때문에 '결국 돈 벌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라고 빈정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돈이야 능력이 되 고 운이 따르면 노력 만큼 버는 것이 자본주의에선 당연한 것이고 다큐멘 타리적인 가치를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 각합니다. 흐음. 이제는 '지구를 지켜라'만 보면 되는 거로군. 지인으로부터 내 취향 에 딱 맞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괜히 잡담이 길어졌군요. 그럼 다음 편에서 제6화는 끝납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050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6화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세드릭 님을 한시 빨리 이오타로 송환하라는 국왕 전하의 엄명이시다!” “어째서죠! 분명 일주일 동안 기회를 주겠다고....” “이런 경솔한 녀석!” 권력자의 명령에 충성하는 일 하나 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블리히는 마 치 자신이 국왕이라도 된 냥 거만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더 이상 세드릭 님을 잡아뒀다간 이오타 왕국은 물론 마키시온 제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는 것을 모르나! 이미 전하께서는 이오타 왕국의 속국이 되기로 결심하셨다.” “소, 속국이 되겠다고?” 세상 천지에 먼저 속국이 되겠다며 굽실거리는 배알도 없는 나라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당치도 않은 소리에 할 말을 잃었지만 블리히의 생 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는 과장된 몸집을 보이며 진심으로 ‘전하의 결단’ 에 감탄에 마지않는 것 같았다. “아아!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한 전하의 용단에 백번 탄복할 수밖에 없지 않나!” 용단이라고? 지래 겁을 집어먹고 마지막 기회조차 포기한 채 제 발로 속 국이 되겠다며 무릎 꿇는 일이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당치도 않다! 나는 순간 ‘네 놈의 나라는 내 기대 이상으로 형편없군.’이라는 쇼메 왕자의 커다란 비웃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이히만 대공은 찬성하지 않았을 거에요! 대공을 만나보겠어요!” 조금도 감동에 동참하지 않는 내 말에 블리히가 눈가를 움찔하고는 날 쏘 아보았다.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전하의 어명을 어길 수는 없어! 당장 세드릭 님을 풀어주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야!” “속국이 되는 건 모든 기회가 끝난 뒤에 선택해도 늦지 않아요! 아직 기 회가 남았잖아요!” 게다가 당신만 아니었다면 5일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세드릭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을 거라고! 하지만 블리히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상황을 이해 하고 있었다. “이, 이 녀석! 우리나라가 마키시온이나 이오타 같은 강대국들의 압력을 받아도 좋다는 말이냐! 이런 매국노 같으니라고! 게다가 지금 네 작태는 전하의 어명을 정면에서 어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나! 네 놈 때문에 내 입 장까지 곤란하게 된단 말이다!” 비겁자는 항상 안전한 경우에만 위압적으로 나선다, 난 순간 그 명언이 딱 들어맞는 자를 앞에 두고 있었다. 당신의 부하는 이 나라의 명예를 위 해 목숨까지 거는데! 순간 다 집어치우고 싶다는 자멸감이 내 마음 한 구 석에서 피어올랐다. 이런 꼴을 당하기 위해 난 모두로부터 사랑 받았던 일 을 그만두고 왕궁까지 찾아왔던 것일까. 그때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내 말을 들어주시오.” “페, 페르난데스 왕자님!” 순간 정말 의외의 인물이 이곳에 왔던 것이다. 게다가 어린 왕자님 뒤에 는 왕궁의 3대 중신들인 아이히만과 위고르, 그리고 군무대신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물론 블리히 역시 그들을 보자 곧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페르난데스 왕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가 아직 변성기에 접어 들지 않은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아바마마에게 속국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왔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내 독단으로 꺼내는 말이오.” 나는 슬쩍 페르난데스를 올려다보았다. 쇼메 왕자와는 천성적으로 다른 성격이다. 이해심이 많고 항상 양보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심한 말은 꺼내지도 못하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 그런 왕자님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쇼메 왕자에게 지고 싶지 않소.” “......!” “항상 타국에게 무시당하는 우리 왕국을 볼 때마다 어서 빨리 훌륭한 왕 이 되어 이 나라의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 고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서... 그 생각만을 하면서 지금까지 수 많은 모멸과 굴욕을 참아왔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지고지순한 줄로만 알 았던 페르난데스 왕자도 실은 자신의 마음속에 강렬한 결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왕족의 권리만 생각하고 부러워하지만 왕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이상 그 권리 이상의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페르난데스는 12살의 나이에도 그 의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속국이 된다는 것은 나의 아버지, 아바마마를 마지막으로 수백 년을 이어왔던 이 왕국과 이 왕조가 끝난다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는 잊혀진 망국의 왕자가 되어 이오타의 볼모로 잡혀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를 강요받겠지. 쇼메 왕자는 항상 나를 만나면 볼모가 될 연습을 해두라며 비웃으며 속삭였소.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절대로 지지 않 겠다고 결심했소.” “아니! 그 놈이 그런 말을!” 놀랍게도 그 말에 발끈한 자는 블리히였다. 당신도 그런 말에는 화가 나 는가 보군. “아이히만 대공으로부터 희박한 확률이지만 이오타의 속국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들었소. 엔디미온 경이 사력을 다해 힘쓰고 있다면서. 난 그 희박한 확률에 내 왕위를 걸고 지켜보고 싶소.” “하, 하지만 이오타의 속국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공판이 벌 어지면 마키시온 제국의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합니다!” 블리히는 제법 현실적인 말을 꺼냈고 그 말에 페르난데스는 씁쓸한 웃음 을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 돈이 얼마든 또 다 갚아내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설령 내가 왕 의 자리에 오른 뒤에 평생을 걸려 갚아야 하더라도 각오할 수 있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그 빚을 갚고 내 후세부 터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도록... 그것에 내 인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소. 그러니 부디 내 각오를 받아 주시오.” 나와 블리히는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2세의 소년이 이런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던가. 자신의 평생을 거대한 마키시온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싸우는 것에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나라의 이름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것만은 막겠다는 지독한 의지가 가슴을 울렸다. 괜한 정의감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은 들어줬으면 좋겠다. 자신의 평생을 걸고 이 런 말을 꺼낼 수 있는 12살의 어린애는 내가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앞으로 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을. 그리고 헛기침을 한 백발의 아이히만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뭐 어차피 속국이 된다면 난 은퇴할 생각이었네. 이 지겨운 왕궁에서 해방되어 바닷가에서 낚시나 하면서 편하게 여생을 보내는 것도 해볼만한 말년일 게야. 이미 낚싯대까지 사 놨다네.” 어, 어째서 저 할아범은 저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가 있는 거지. “하지만 은퇴라는 것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선택해도 늦지 않겠지. 앞으로 며칠 남지 않은 이 왕국이지만 난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네. 만약 그 희박한 확률이 성공해서 속국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어이없는 왕궁의 현역 재무대신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겠고, 만약 속국이 된다면 난 곧장 내 서재로 가서 내 작위와 재산을 반환하겠다는 서약서를 쓴 뒤에 낚싯대를 들고 미련 없이 이 왕궁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네. 내 능 력이 왕국의 종말을 능히 막을 수준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에 수긍하겠지만... 최소한 그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고개 숙일 생각도 피할 생각도 없네. 그 것만이 이 늙은 몸이 이 왕국과 조카 페르난데스 왕자를 위해 해줄 수 있 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러니 내 각오도 받아주시게.” 그와 함께 법무대신 위고르와 군무대신 역시 머뭇거리다가 동의한다며 고 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도 있고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인간도 있지만 -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신이 서 있는 장소에 서 도망치지 말고 책임을 질 수 있냐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은 그 누구 보다 존귀한 존재라는 왕족이나 가난한 평민 집안의 가장이나 똑같이 적용 되는 공평한 논리일 것이다. “블리히 경.” “예, 예엣!” 페르난데스 왕자의 말에 블리히가 당황하며 외쳤다. “경은 아바마마의 어명을 집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아바마마에게 가서 부디 어명을 거둬달라고 간청할 생각이오. 하지만 블리히 경에겐 지금 그 어명을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겠지. 그건 나도 명령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오.” “......” “만약 이 자리에서 블리히 경이 어명을 집행하여 세드릭을 이오타로 송 환시킨다면 모든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오. 그러니 부탁이오만 내가 아바마 마를 설득할 수 있도록 잠시 그 집행을 미뤄줄 수 있겠소.” 무리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어떤 이유든 국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대죄였고 (어차피 물러설 곳이 없는 나는 모를까) 출세에 목매달고 있는 블리히 경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알겠습니다.” “얼레?” 난 깜짝 놀라서 블리히를 바라보았다. 지금 왕자님의 ‘부탁’을 들어준 겁 니까? 블리히 경은 태어나 처음으로 어명을 어겼다는 두려움에 사색이 되어 있었지만 - 어쨌든 그는 분명 왕자의 각오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건... 모래알로 쌀을 만들고 맹물을 술로 바꿔버리는 기적 이상의 기적이다! “고맙소. 블리히 경.” 그리고 블리히는 정말로 간절하고도 떨리는 음성으로 사족을 붙이는 것이 었다. “와, 왕자님. 왕위에 오르신다면, 이 블리히, 잊지 말아 주세요!” “......” 대단합니다. 블리히 경. 이 짧은 순간, 그 정도 계산까지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처세술의 달인이시로군요. 안절부절 못하며 어명을 어긴 블리히 경의 커다란 얼굴은 솔직히 ‘내가 왜 이럴까! 예전엔 안 그랬는데!’하는 후회가 가득해 보였다. 그 역시 이번만큼은 권력이 아닌 무언가에 홀려서 '희박한 확률’에 자신의 판돈을 다 걸어 버린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꽤 위험한 웃음을 보이며 내게 말했다. “엔디미온 군. 만약 이 일에 실패한다면 자네가 책임지고 목숨을 끊어야 할 분위기로구만.” “겨, 격려는 못해줄 망정!” “후후. 그럼 은퇴 후 내 말상대로 끌고 갈까? 자네의 남은 평생을 늙은 이 시중들면서 보내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일을 해결하게나.” 아이히만은 실로 소름끼치는 협박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문틈 사이로 슬쩍 세드릭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세드릭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한 뒤에 다시 문을 닫고 세드릭이 있 는 곳으로 갔다. “잠시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내가 세드릭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그제야 흘낏 나를 바라보며 이렇 게 말하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연극이로군. 내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여, 연극이 아닙니다!” 일촉즉발의 리얼리티 라이브 쇼였답니다. “그래. 쇼메 녀석이라면 모를까 너희들이 이런 연극을 했을 리가 없지.”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말을 꺼낸 세드릭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 기 시작했다. “희한한 왕국이야. 이런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 왕국이라는 것은 제멋대 로라는 것일까, 아니면 살아있다는 것일까.” “뭐, 둘 다겠죠.” 난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그리고 나는 슬쩍 분위기를 살피다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 “저 그런데 아까 말씀하셨던....” “네 이름이 뭐지?” “미온입니다.” 처음에 소개했는데 그새 까먹다니! 대단히 서운하구만. “미온 군.” “예.” “차 끓여와.” “......예.”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또 하루를 보류해야 했다. 14. 6일 째 되는 날 오후,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마시던 세드릭이 그림자 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 본 것은 이 방을 가득 장악하고 있는 세공 도구들이었다. “난 누금세공에는 관심이 없다.” “예?” 갑자기 무슨 소리지? “또한 니엘로세공도 하지 않는다.” “예?” 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눈만 깜빡 거렸다. 그가 아직도 못 알아듣겠냐는 듯이 내게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내가 주로 했던 것은 희귀 자연은을 이용한 세선세공이야.” “그, 그런데요?” “여기 있는 도구들 중에 세선세공 장비들은 보이지 않는군. 이런 장비들 을 긁어모을 힘이 있었다면 좀 더 내 세공 방식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데 노력을 하지 그랬나.” “죄송합니다.” 사실 나는 은세공이라는 것을 한번도 한 적이 없고 세공은 세공이라고 생 각했지, 그런 복잡한 기술적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다. 아! 그 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세공을 다시 시작하실 결심을 하신 거에요?” “누가 다시 한데?” “그, 그럼.......” “그냥 한심해서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한심해서 미안하네요.” 난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누금세공과 세선세공 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면박이라니! 예술가들은 진짜 까다롭군. “저 그런데 이오타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난 이 민망한 실수로부터 빨리 화제를 돌리고 싶어 다른 말을 꺼냈다. “이오타로 빨리 돌아가서 뭘 하지?” “그러니까... 세드릭 님을 반겨줄 백성들도 있고...” “날 반겨준다고. 그들이 환호하고 있는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5년 전 의 나야.” “.......” 세드릭은 분명 세공을 그만둔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니 었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세공을 그만둔 것뿐이고 그 사정 때문 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쯤에서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다. “어제 말했던 그 ‘위선’ 때문인가요. 그것 때문에 세공을 그만둔 건가요.” 그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림자 속에서 반짝이 는 그의 눈빛은 이런 말을 한 내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고 동의를 구하 는 것 같기도 했다.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이 내게 느껴졌다. “예술가들은 다 사기꾼이지. 결국 자신이라는 잘난 세계 속에 유폐되어 있는 죄수 주제에 마치 세상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있는 냥 닳고 닳은 뻔 한 사실들을 대단한 것처럼 포장해서 추종자들에게 팔아먹는 족속들이거든. 죽은 뒤에 지옥에 가서 사람들에게 사기 친 죄로 영원히 고문을 받아도 할 말이 없어.” “그, 극단적인 말이네요.” “하지만 그 사기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저질렀을 때까지는 괜찮아. 참을 만 해. 그러나 나 자신에게 사기를 쳤을 때는 그건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위선이야.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한 환멸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이오타 의 누구에게도 심지어 쇼메 왕자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용서할 수 없는 이유’ 를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만큼은 다른 모든 계산을 접고 인트라 무로스도 모르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7년 전인가 아니면 6년 전일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내 게 제자가 하나 있었다.” “제자가?”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세드릭이 제자를 키운 적이 있단 말인가. “그 무렵 나는 세상에서 제대로 세공을 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고 어느 누구도 나를 능가하는 세공사는 이 세상이 망할 때까지 나올 일이 없을 것 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도 내 그런 생각을 깰 수가 없었고 도리어 그 말이 옳다며 모두가 날 칭송하기만 했지.” 예술가들은 교만하다지만 그쯤 되면 그야말로 교만의 지존이지 않은가. “덕분에 난 마치 공기가 희박한 산 정상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무척이 나 권태로웠고 이 세상 어떤 것도 내게 자극을 줄 수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보다 못난 이름 없는 세공사들을 이리 저리 둘러보며 거드름이나 피워볼 작정이었어. 그들은 내가 한마디 해주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며 감 격해 했으니까.” 세드릭은 자기를 변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지 자조에 가까울 정도로 솔 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다가 그걸 봤다.” “그거?” “시골의 한 야시장에서 헐값에 팔리고 있는 싸구려 은세공 팔찌였지. 내 정체를 모르는 한 노점상이 싸게 줄 테니까 가져가라고 날 유혹하면서 보 여주더군.” 그런 일은 자주 있다. 누구라도 시장에 나가보기만 하면 제대로 정제를 하지도 못해서 납 성분이 가득한 싸구려 은제품을 파는 모습을 대번에 목 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팔찌를 본 순간 나는 당장 그걸 만든 녀석이 누구냐고 외쳤지.” “왜, 왜요? 그렇게 형편없었나요?” “의외로 눈치가 없구나. 난 그걸 보고 자극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극 이라기보다는 절망감에 가까운 것이었지.” “.......절망감.” "무엇이든지 창조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조금은 더럽혀 지기 마련인데 그 세공품에는 그게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진심을 담은 세공품을 만 들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위대한 작품이 어떻게 그 더러운 시장에서 내 세공품의 1억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형편없는 가격 에 팔리고 있을까. 그건 실로 절망감이었지.” 세드릭은 눈가를 가늘게 떨며 매몰차게 다음 말을 내뱉었다. “단지 나는 운이 좋아 유명해진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만들어도 예술품이라고 칭송 받는 것뿐이고 그 팔찌를 만든 녀석은 운이 나빠 유명 하지 않기 때문에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그런 예술품을 만들었는데 도 재료비도 안나오는 헐값에 자신의 작품을 팔고 있었던 거다. 나는 사기 를 치는데 성공한 거고 그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일 뿐, 내가 가진 자긍심 이라는 것은 실로 쓰레기 같은 허상일 뿐이라는 모멸감에 자살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 분을 제자로 둔 건가요?” 나는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다. 엄청난 자존심을 가진 세드릭 스스로가 자 신을 능가한다고 평가한 자가 누구인지, 나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이 궁금했 다. “그 분? 내가 찾아가서 만난 그 녀석은 소년이었다. 목을 조르면 당장이 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가늘고 어린 13살짜리 어린애였고 제대로 먹지도 못 해서 마치 작은 들짐승처럼 보인데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서 집밖으로는 거의 나가본 적도 없는 그런 아이였지. 웃기지 않나? 그런 녀석 하나한테 내가 쌓아온 모든 자부심이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 세드릭은 쓸쓸한 눈빛으로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부모에게 상상도 못할 거금을 주고 아무도 몰래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내 공방으로 데려왔다.” “그 소년을 후계자로 키우고 싶었던 거로군요!” “아니, 그 반대야.” “예?” 세드릭은 잠시 주저하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소년이라는 존재를 사람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숨겨버리고 싶었 던 거야. 그 녀석이 있으면 내가 사라져 버린다는 지독한 공포심을 느꼈어. 솔직히 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나 외에는 아무도 그의 가치를 모르 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를 숨긴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그 녀석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 채 날 최고라고 생각할 테니까. 난 예전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결국 나라는 위선자도 그 최고라는 자리를 잃는 것이 싫었던 거 지. 스스로에게 역겨워하면서도 난 그 아이에게 홀린 듯이 매혹되었고 또 저주했다.” 난 소름이 끼쳤다. 만약 내가 세드릭을 모른 채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 장에 세드릭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게 예술가가 할 짓이야? 라고. 하지만 마치 고해(告解)처럼 내게 털어놓는 그의 이야기는 내게 묘한 동정심을 일 으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혹은 2년인가? 악몽인지 길몽인지 모를 꿈같은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 동안 나는 한번도 그 아이를 공방 밖으로 내보지 않은 채 같이 지냈다.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게 해주었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 아이만을 위한 공방을 만들어 주고 오로지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그가 신들린 듯이 뽑아낸 수많은 천상의 물건들을 즐길 수 있다는 독점욕과 더 이상 그 아이가 성장한다면 나는 그 에게 짓눌려 피 한 방울 남지 않고 죽어버릴 것이라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마치 괴물을 내 품속에서 키우고 있는 것 같은 희열과 굴욕을 같이 느끼고 있었어.”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거의 신처럼 추앙받아 오로지 빛 밖에는 없을 것 같던 세드릭의 이면에 숨겨진 어둠들 - 그걸 그에게 직접 듣고 있다는 것은 - 듣고 있는 지금도 실감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가 죽었다.” “예?” 갑자기 난 눈이 번쩍 뜨였다. “농담이 아니야. 마치 정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미친 듯이 내리던 밤에 눈을 감았어. 선천적인 병 때문인지 아니면 하늘이 불쌍히 여겨 그 아이의 목숨을 가져간 것인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는 자는 나 하나뿐이라는 거지.” “그, 그렇겠군요.” 나는 세드릭이 펼쳐놓은 자신의 5년 전 광기 속으로 뛰어든 것 같은 기분 이었다.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어.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술가가 이 세 상을 떠났음을 뒤늦게라도 알리고 그 아이가 만든 세공품을 공개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입을 다물고 처음부터 그런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다고 생 각하든지... 내가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거다.” “......” “난 그 아이의 시신을 아무도 몰래 내 정원에 묻고 그가 만든 수많은 작 품들을 하나만 빼고 모두 녹여 버렸어. 마치 악마와 계약한 듯 했다. 모든 계약에는 그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내게 있어 대가는 바로 씻을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심이었고, 그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나는 지 금까지도 세공을 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그 작품 들 중에 하나는 왜...” “난 비겁하게도 그 아이가 죽은 뒤에도 그를 질투한 거지. 내 이름으로 그 남은 하나를 세상에 발표했고 그것이 바로 내 최후의 작품이었던 목걸 이 ‘여름의 보주’다.” “그럴 수가...” 세드릭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받던 '여름의 보주'가 바로 5년 전 세상을 떠난 소년의 작품이었다는 것은 실로 충격이었다. 세드릭은 거기에서도 끔찍한 모멸감을 느꼈으리라. 세상 누구 도 그것이 사실은 누구의 것인지 감히 의심하지도 않고 세드릭이 만들었다 는 이유만으로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살 정도의 값어치로 거래되고 추앙 받 는다. 그 눈먼 추앙을 지켜보며 세드릭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죽고 싶은 심 정이었을 것이다. “이제 내 얘기는 끝났다. 지금 즉시 이곳을 뛰쳐나가 모두에게 외쳐도 상관없어. 마음속에 담아두기엔 내 마음을 찢고 나올 것 같아서 언젠가는 밝히려던 것이었고 그게 하필이면 지금 네가 된 것일 뿐이야. 세상에서 가 장 교만하던 세공사 세드릭은 미친 듯이 눈이 오던 5년 전 어느 날, 그때 죽은 거니까.” 그리고 그는 눈물조차 메말라 버린 듯한 고독한 눈동자로 들고 있던 찻잔 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지근한 차를 마셨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흐른 건 내 쪽이었다. 난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가의 심정도 모르지만, 최소한 세드 릭이라는 사람의 마음은 알 것 같았다. 그 쓸쓸한 마음의 모양이 뚜렷하게 내 눈에 보였다. “한번 봐 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가져온 가방을 열어 꼬물거리며 그 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이건 이샤가 만든 ‘여름의 보주’ 모조품이었다. 어차피 '여름의 보주' 자체가 진품은 없는 모조품일 뿐이니 그 모조를 다시 모조 한 것도 다를 바는 없으리라. 세드릭이 이샤의 목걸이를 보자마자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만든 것이로군. 용케도 그걸....” 그렇게 질투했던 소년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일까? 순간 세드릭 은 말을 멈췄다. “여, 역시 좀 조잡해 보이시나요? 그래도 제가 보기엔...” “이걸 만든 사람을 데려와라.” “예?” 15. “이샤라고 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예를 갖출 수가 없음을 용 서해 주십시오.” 내 손을 잡고 세드릭 앞에 나타난 이샤가 그 가련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 했다. 세드릭은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무엇이 말입니까.” “네가 만든 목걸이를 보고 맹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눈이 보였다면 이렇게 만들 수는 없었을 테니.” 난 순간 세드릭이 그녀의 작품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진실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존 재해. 세공이란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감정을 눈에 보이는 곡선과 직선 으로 은유해서 표현하는 예술이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권태의 모양이 무엇인지 그건 아무도 몰라. 어차피 맹인이든 아니든 볼 수 없는 것들이야.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떼를 타지 않는다, 실례되는 말이 지만 예술가로서는 오히려 축복일지도 모르겠군.” “전 예술가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이샤가 세드릭의 칭찬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세드릭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넌 그 소년과 같은 천재는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 소년도 천 재는 아니었던 것 같군. 그냥 내 좁은 마음이 만들어냈던 환상일 뿐이었는 지도 몰라.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믿는다면 난 예술가가 아니라 성직자 가 되어야 했는데 말이야.” 세드릭은 뭔가 홀가분한 듯이 웃는 것이었다. 난 그런 그의 웃음이 보기 좋아서 말했다. “살면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일뿐 이라고 하잖아요. 당신은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해왔기 때문에 때로는 잘 못을 저지를 때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는 괜한 사족을 덧붙였다. “예술가도 사람이잖아요.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보단 잘못에 고뇌하는 편이 훨씬 착한 거잖아요. 아, 아닌가?” 그리고 세드릭은 이제야 이오타로 돌아갈 마음이 생겼는지 자리에서 일어 나며 말했다. “아아, 이제 조금 알겠군.” “뭐, 뭘요?” “세공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역시 예술가라서 그런지 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16. 뭐,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했던가. 왕궁 전체를 긴장시켰던 이 일 은 놀라울 만큼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그 소년에 대해 참회할 마지막 기회 라고 말한 세드릭은 이샤를 제자로 받아들인 채 이오타로 돌아가 다시 세 공을 시작했고 나는 쇼메 왕자로부터 ‘축하하네. 운이 좋았군.’이라는 불유 쾌 하지만 통쾌한 전문을 받았다. 그리고 마키시온 제국과의 공판은 두 목걸이를 감정한 세드릭이 ‘둘 다 내 가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신 바람에 무효로 끝이 났다. 사실 실제 로 둘 다 세드릭 님의 작품은 아니니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잖아? 그 막 강한 마라넬로 황제에게 한방을 먹인 당돌한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사 실에는 박수를 쳤지만 솔직히 다시는 그런 강대국과 시비가 붙지 않으면 좋 겠다! 몇 번이나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고! 또한 아이히만은 투덜거리며 낚싯대를 다시 창고 안으로 집어던진 뒤에 다시 행정부의 괴물로 돌아갔고 위고르 공과는 또 다시 앙숙이 되었으며 군무대신은 여전히 공성포를 사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다. 국왕 내외와 페르난데스 왕자를 비롯해 왕국 모두가 행복하게 끝이 난 천 우신조의 결말이지만 이 중에 가장 행복한 자는 바로 블리히 경이리라. 그 는 자신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왕국의 몰락을 막았다며 하루 종일 왕궁을 돌아다니며 자랑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아부쟁이 기사단장을 욕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리고 나는 모든 여정을 마치고 터덜터덜 거리며 내 고향 리더구트로 돌 아왔다. “다녀왔습니다아아아아.”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여름 더위는 어느 새 한풀 꺾여가고 있었다. 편을 거듭할수록 데미지의 강도가 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난 솔직히 대체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소설이야? 라고 투덜거리면서 현관문에서 풀썩 쓰러 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소파에 앉아 있던 키스가 삐죽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나. 미온 경. 그거 아세요오?” “뭘요.” “당신 벌금입니다아.” “뭐라!” 난 벌떡 일어나며 키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뭐에요! 어째서 이런 내게 표창은 못해줄지언정 벌금이라니요!” “그거야 당신은 스왈로우 나이츠니까요. 브리핑에 참석 못하면 벌금이라 는 거 아시잖아요오?” “나, 나라를 구하느라 불참했습니다! 몸이 두 개가 아니라서 정말 죄송 하네요! 쳇!” 얄미워 죽겠다! 자기는 펑펑 잠만 처자면서! 이런 내 모습을 보며 키스가 히죽 웃는 것이었다. “농담입니다아. 수고했어요. 미온 경.” 얼레? 키스가 진심으로 날 칭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난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키스 경.“ “네에?” “뭡니까. 이 피 묻은 붕대들은...” “히히.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거든요오.” “.......” 웃을 일이냐! 소파에 누워 있어서 잘 못 봤는데 키스는 어깨며 가슴에 빨 간 혈흔이 보이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붕대 좀 갈아 줄래요오?” 그리고 나는 붕대를 갈아 주며 키스의 등을 보았다. 티끌하나 없이 매끄 러울 줄 알았던 그의 등에는 굉장히 무서워 보이는 긴 상흔들이 하얗게 그 러져 있었다. “이, 이 상처들은 다 뭐죠?” “다 계단에서 구른 거랍니다아.” 원숭이도 안 믿겠다! 하여튼 속을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런데 키스 경.” “.......?” “만약 이 나라가 사라진다면 그때는 뭘 할 거예요?” 나는 어쩌면 오늘 쯤 지도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이 베르스 왕국을 떠올 리며 말했다. 키스는 내 엉뚱한 질문에 의외로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 며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대답하는 것이었다. "으으음. 그렇게 되면 미온 경과 함께 호스트나 해볼까요?" "그, 그걸 또 하라고!!" "아? 무슨 말입니까아?" "하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아." 키스는 후후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라가 사라져도 아마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겠죠?” “해야만 하는 일?” “뭐 그런 것이 있습니다아.” 실없게스리... 키스는 자기가 말해 놓고 자기도 실없는지 헤헤 웃으면서 딴청을 피우다가 웃는 낯으로 대뜸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미온 경은 만약 이 세상이 사라지면 그땐 뭘 할 건가요?” “아하하. 그거야 뭐... 잉? 뭐요?” 세상이 사라진다고? 그 무슨 한여름에 눈 내리는 소리냐고! “그, 그럼 뭘 할 것도 없잖아요! 세상이 사라져 버리면 나도 없어지는 건데!” “그렇죠? 그러니까 이 세상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 는 거랍니다아.” “으이구! 도통 뭔 소린지...” 난 투덜거리면서 붕대를 꽉 조였고 키스는 꺄악! 하는 괴상스런 비명을 질렀다. 난 2층으로 올라가면서 또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키 스 경은 나 이상으로 뭔가 거창한 것을 상대로 외롭게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난 바보가 아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그건 칼에 배인 상처다. 제6화 : 용서할 수 없는 이유 - 끝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Blind Talk 이번 편 끝났습니다. 마음 속으로 여러가지 충돌이 일어나서 정말 어려웠 습니다. 그러니 다음 편은 좀 더 즐겁고 간결하게 꾸려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꺼내고 싶은 말이 있는데 사실 꺼내서는 좋을 바가 없는 경우가 있 을 때 참 힘듭니다. 결국 내 욕심대로 가버리는 것이 구제불능인 나지만. 음, 그리고 백랑전설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커밍 순 입니다. 현재 쓰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쓰고 있는 백랑전설 제12장 '사탄의 태양 아래'가 아마 4권의 마지 막을 장식하는 교훈이라고는 농담이라도 있다고 할 수 없는 전개가 될 듯 하군요. 뭐 어쨌든,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현재 며칠 째 계속되는 극도의 육체 노동 덕에 근육통이 심하군요. 하지만 잠시나마 날씨가 서늘해져서 아주 기쁩니다. 아 참, 이번 편은 2편 붙여서 올립니다. 한번에 이렇게 많이 올리는 것은 그다지 성실하지 못한 저로서는 자충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50회라는 뭔가 의미있어 보이는 숫자에서 끝내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50화 를 축하해 주세요. 아하하.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50화를 넘어본 적은 처 음이랍니다.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051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1. 오늘도 산뜻한 왕궁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미온 경. 지명입니다아.” “잉?” 난 국수를 먹다가 화들짝 놀라선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이 느닷없는 전개는! “에 그리고 다음으로 지스 경은...” “자, 잠깐만요! 지명이라니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난 지금 지명 받을 일이 없다. 왕궁에 와서 멧 돼지도 잡았고 신비의 해독제도 구했고 나라도 지켜봤지만 정작 스왈로우 나이츠의 주업인 ‘귀족들과 친해져서 지명 받기.’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 이다. 세리카님의 경우야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으니 그렇다고 쳐도 또 지 명이라니? “누가 절 지명했죠?” “후후후. 알고 싶은 겁니까?" “다, 당연히 알려줘야 하는 거잖아요!” 냉큼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이 포주 녀석!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키 스가 팔짱을 낀 거만한 모습으로 지명자의 성함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지명자는 바로........” “바로?” “바로 제냐 공주님입니다아.” “우아아앗!” 순간 나를 비롯한 자랑스러운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전원이 악성 빈혈 에 시달리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심지어는 항상 뚱한 표정을 유지하는 지 스 경마저 뭔가 상당히 두려운 추억이 떠올랐는지 들고 있던 스푼을 툭 떨 어트리는 것이었다. 아아, 자네도 제냐 공주님에게 시달려 본 적이 있는가 보군. “그, 그런데 제냐 공주님이 왜 저를...” 설마 그때 일의 복수인가! 지명이랍시고 불러놓고 들들 볶아서 회생불능 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9살 여자아이의 음험한 야망? 하지만 키스는 남의 일이라고 얄미울 정도로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나. 미온 경,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이네요?” “씨잉! 당연하잖아!” “제냐 공주님도 심성은 착하신 분이랍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그럼 키스 경이 가세요.” 순간 키스가 흠칫하며 말을 멈췄고 잠시 이 테라스에 진땀나는 정적이 흘 렀다. 이윽고 키스가 스으윽 뒷걸음질치기 시작하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럼 이것으로 오늘의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아아.” “이보쇼!” 2. 우리들은 보통 이것을 ‘내부 지명’이라고 부르곤 한다. 즉 왕궁 내부에 서 지명을 받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외부 출장이 아니니 열차표를 받고 여행 도구를 챙길 일도 없다. 보통은 당일 업무로 끝이 난다. 그리고 내가 받은 ‘내부 지명’은 바로 제냐 공주님의 생일 파티 행사요원이었다. ‘......말이 행사요원이지.’ 나는 꽃을 들고 환하게 웃는 표정을 억지로 지은 채 동상처럼 서 있었다. 아니 그러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도 한 시간도 넘게! 그러니까 이것은 '인 간 마네킹'이랄까. 생일 파티를 화사하게 만들 장.식.품.으로 세워 놓는단 다. 왕궁의 이 아름다운 취미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만 - 너희들은 살 아 있는 장식 인간을 앞에 놓아두고 밥이 넘어 가냐! 이쪽은 온몸에 쥐가 나서 죽을 지경이라고! ‘크윽. 국수나 마저 먹고 올 걸.’ 땡볕 밑에서 ‘꽃을 든 미온’이 된 채로 한 시간도 넘게 서 있던 나는 눈 앞에 쫘악 깔려 있는 성대한 제냐 공주님의 잔치 음식들을 보자 조건 반사 에 의해 꼬르륵 소리를 냈다. 생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때 생일 파티에 초대된 것으로 보이는 긴 금발의 여자애가 잘 나가는 귀부인을 끌고 내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엄마! 이거 나 사 줘!” 난 상품이 아니야! 가격표도 안 붙어 있다고! “호호호! 얘야. 이건 왕궁 물건이란다.” 서, 서슴없이 물건이라고 말하다니! “하지만 예쁜 걸? 갖고 싶어!” “호호. 이 녀석. 집에 벌써 스무 개나 있는데 또 갖고 싶은 거니?” 스, 스무 개? 그게 대관절 무슨 의미입니까? 순간 나는 ‘인간 동상 미온 금화 500닢에 낙찰!’이라는 환청을 들었다. “이건 제냐 공주님 것이란다. 넌 다른 것 사줄게.” “난 이게 좋아!” “참. 안된다니까 그러네.” 저 아이는 장차 우리나라 인신매매업계에 한 획을 그을 훌륭한 노예상인 으로 성장할 재목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아주머니야말로 왜 그런 위험한 눈빛으로 날 흘낏 흘낏 바라보고 있는 건가요. 글쎄, 전 비매품이라니까요! “그럼 이거 사줘!” 상당히 집요한 구석이 있는 이 꼬마 애는 이번에는 내 옆에 가더니 손가 락질을 하는 것이었다. 비참하게도 내 옆에는 쇼탄 동상이 있었다. 나 혼 자만으로는 장식품이 부족했는지 왕궁에선 한 명 더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 고 덕분에 빚이 산더미라 거절할 수가 없는 쇼탄 경은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날 따라온 것이었다. 게다가 쇼탄 경의 컨셉은 ‘막 박차고 오르려는 정열의 발레리노’였기 때 문에 - 한쪽 발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서 있어야 하니 나보다 더 괴 로울 것이다. 정말 내가 흘낏 본 쇼탄 경의 고뇌에 찬 표정은 '최근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였다. “어머나! 이 동상도 괜찮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귀부인께선 ‘정열의 발레리노 쇼탄’이 무척이나 마음 에 든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부로 쇼탄 경은 왕궁을 떠나 이 위험해 보이 는 모녀의 스물한 번째 컬렉션이 되어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흐음. 하지만 너무 비쌀 것 같구나. 이번 달에는 별장을 네 채나 사는 바람에 돈을 아껴야 해요.” “엄마는 구두쇠!” “호호호. 아껴야 잘 사는 거란다.” 알겠으니까 빨리 좀 가 주세요. 영업에 방해 됩니다! 이윽고 상당히 죽이 잘 맞는 위험 모녀가 저 멀리 사라지자 하늘로 도약하는 우아한 포즈의 발 레리노 쇼탄 경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누가 빚지래요?” 나와 쇼탄 경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각자의 포즈에 최선을 다 했다. 이런 일에 굳이 날 지명한 제냐 공주님의 심경을 알다가도 모를 일 이다. 게다가 이 파티의 주인공인 공주님은 나타나지도 않고 있은 걸? ‘얼레? 뭐지 저 사람들은?’ 심상찮은 남자들이 우르르 파티 장에 몰려들고 있었다. 저마다 한껏 거드 름을 피우고 있는 사내들의 나이는 10대에서 심지어 40대까지 폭이 다양했 는데, 무슨 심사라도 받으려는지 한곳에 옹기종기 몰려 서 있는 것이었다. 뭐야, 생일 축가라도 부르려는 건가. 그리고 잠시 후 성대한 풍악이 울려 퍼지며 드디어 주인공 제냐 공주님이 페르난데스 왕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레이스와 핑크빛 리본으 로 장식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제냐 공주와 12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에 붙는 베르스 전통 의상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페르난데스 왕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에서 내려온 반짝반짝 남매 같아서 사람들은 그 모습에 감탄 하며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물론 나는 이 시간만큼은 인간이 아 닌 동상이기 때문에 감히 왕족 앞에서도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었다.) 마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형과 같은 남매의 모습은 그 뒤에 서 있는 만 두가게 아저씨, 아니 국왕 전하만 아니었다면 어떤 화가라도 화폭에 담고 싶을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네.’ 무릎을 꿇지 않은 탓에 제냐 공주님의 표정을 볼 수 있던 나는,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음을 알고 의아해 했다. 아무래도 9살인데, 자기 생 일이라면 조금은 기뻐해야 하는 것 아냐? 그리고 나는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임금님께서 방긋 웃으시며 예의 ‘몰려 있던 남정네’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자아. 내 딸아. 저 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니?” 그러자 제냐는 단번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자세히 보렴. 너도 이제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아니니.” 그렇다. 전하는 제냐 공주님의 생일이 되는 날, 신랑감을 물색해 보려는 것이었다. 보나마다 저기 몰려든 신랑 후보들은 베르스에서 내로라하는 귀 족 자제들이리라. 그런데 저 수상한 40대 남자 말이야. 임금님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서, 설마 저 사람도 후보? 저 음흉한 눈동자를 보라고! 저런 광적인 인간에게 딸을 줄 생각이냐! “흐흐흑... 우아아아앙!” 제냐 공주님은 결국 울먹거리다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조리 사색이 되었다. “아, 아니. 내 딸아. 왜 우는 거니.” 보면 모르겠습니까. 자기 생일날 이런 엽기적인 이벤트를 당해 놓고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그러나 난 여전히 동상이었기 때문에, 이 난감 한 상황을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이거 정말 비극이로군. 전하는 무척이나 당황스런 표정으로 제냐 공주님을 달래보려고 하는 것이 었다. “이 중에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는 거니? 그럼 좀 더 많은 후보들을 모집한 뒤에...” 그때 제냐 공주가 갑자기 옆에 있던 페르난데스 왕자를 꽉 껴안고 소리치 는 것이었다. “난 오빠랑 결혼할래!” 오 신시이여! 순간 생일 파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전하께서 말을 더듬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 그쪽은 상품... 아니 후보가 아니란다.” “싫어! 오빠랑 있을 거야!” 난리도 아니었다. 제냐 공주님이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는 전 설이 있다. 떼어놓으려고 다가오는 임금님에게 가공할 로우 킥을 갈긴 제 냐 공주는 페르난데스 왕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 도 그런 공주를 떼어놓은 장본인은 바로 페르난데스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공주와 시선을 맞춘 왕자님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제냐. 아버님을 곤란하게 만들면 안돼.” “하, 하지만!” “결혼은 다음에 생각하고 오늘은 나와 함께 놀자. 오늘 계속 같이 있어 줄게.” “정말이지?” “응. 약속할게.” 느, 능숙하잖아! 될 성 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 했다. 어쩌면... 페르난데스 왕자가 성장하면 굉장한 바람둥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상상이 머리를 스쳐갔다. 후후 그야말로 응대여류(應對如流)가 따로 없지 않은가. 왕자님의 능란한 응급 처치 덕분에 제냐 공주의 폭주 사건이 폭발 일보 직전에서 일단락되자 파티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수백여 명의 초대 받은 귀족 자제들의 웃음소리로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이 생일 파티의 집행을 담당한 것 같은 예능청장이 단상에 올라와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이 ‘인간 동상’ 이라는 실로 치 떨리는 아이디어를 구상해 낸 장본인도 바로 저 고상함에 몸부림치는 예능청장이라고 한다. “자 그럼! 제냐 공주님의 아홉 번째 탄생일을 다시 한번 이 마음 속 깊 이 감축 드리오며 축하 파티의 여흥을 북돋기 위해 준비한 무대를 올리겠 사옵니다.” 호오. 의외로 잘 진행하시네? 그리고 각 지역에서 몰려 온 귀한 아들딸들 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물러설 곳 없는 두 검투사의 목숨을 건 사투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순간 나와 쇼탄은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 했다. 지금, 어린애들 경기 들리 게 만들 생각이십니까! 인형극이나 공중 곡예! 동물 조련! 성가대 축가! 그런 노멀한 것들 다 놔두고 하필이면 피바람이 몰아치는 검투사라니! 저 런 인간이 지금까지 우리나라 예술계를 담당하고 있었단 말인가. 객석은 내 예상대로 한겨울 삭풍 마냥 싸늘해졌고 심지어 당장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의 아이들도 속속 목격되고 있었다. 뭔가 아주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고 있는 것을 느낀 예술청장은 어떻게 든 만회해 보려는지 와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라는 안 해도 좋을 사족을 붙이더니 이게 진짜라는 듯 외치는 것이었다. “그, 그럼 이 나라의 전통적인 축하 무대를 선보이겠습니다.” 하아. 그래. 차라리 전통 극을 하는 편이... “한시도 눈을 땔 수 없는 목숨을 건 판크라치온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야 이 개념 없는 놈아!!! 라고 소리칠 뻔 했다. 내가 국왕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외친 뒤에 저 무능한 예술청장을 형장으로 질질 끌고 가서 총살시 켜 버렸을 것이다. 물론 무규칙 종합 격투기 판크라치온은 훌륭한 볼거리며 남성미의 상징이 다. 그건 인정해! 하지만 9살 소녀의 생일날 하필이면 오일 바른 몸으로 뒤엉켜 있는 근육 남정네들의 싸움질을 굳이 보여줘야 속이 시원하겠냐! 그때 우리들 앞에 헬스트 나이츠 기사가 쓰윽 모습을 드러내며 말하는 것 이었다. “뭣들 하고 있냐. 썩 준비하지 못하고!” ‘얼레? 준비라니?’ “당장 옷 갈아입고 무대 위로 올라가!” 우리가 그것도 해야 하는 거냐! 인간 마네킹이든 피에 굶주린 검투사든 판크라치온 격투가든 하나만 시키라고! 게다가 쇼탄 경이면 몰라도 난 근 육은 키워본 적도 키워볼 생각도 없어! 차라리 날 사자 우리에 집어 던져 라! 궁지에 몰린 내가 방긋 웃는 ‘미온 동상’의 모습 그대로 말했다. “저...... 저희들은 보시다시피 동상이걸랑요? 그러니까 동상은 아시다 시피 움직일 수가......” “이 놈! 공주님의 생일잔치를 망칠 생각이냐!” 이미 생일잔치는 망가질 데로 망가진 것 같습니다만. "냉큼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할까!" 누가 날 좀 구해줘. 갑자기 평생 동상이 되고 싶어졌어. 이제야 상아처녀 의 심정을 알 것 같아. 그러나 우리들의 처절한 애원을 깡그리 무시한 기 사들이 우르르 몰려 와서는 끝까지 동상이 되길 희망하는 나와 쇼탄 경을 번쩍 들고 무대 뒤로 들고 가는 것이었다. 시, 싫어! 그렇게 판크라치온이 하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해! 제발 제대로 된 일거리를 달라고! 순간 제냐 공주님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딴 거 싫어!!!!” 그 목소리가 어찌나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는지, 공주님의 일갈은 이 야외 파티 장의 공기를 날카롭게 찢어버리는 검기와 같았다. 가끔 나는 조물주 의 실수로 왕자님과 공주님의 인격이 뒤바꿔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소박 한 의구심이 들곤 한다. ‘사, 살았다!’ 우리들은 잽싸게 다시 원래 자리로 뛰어가선 나는 꽃을 들고 쇼탄 경은 한쪽 발을 들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냐 공주님의 대분노 앞에서 예술청장은 어찌 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그럼 더 이상은 할 것이 없사옵니다.” 그러니까 인형극을 하라고! 하다못해 노래자랑도 있는데, 어째서 네 놈의 머리는 피의 사투와 판크라치온 외엔 떠오르질 않는 거냐! 순간 나는 이 나라의 암담한 예술현실에 숙연해 졌다. 저런 인간도 미술전시회에 초대 받으면 ‘흐음. 이 그림에선 혼이 느껴지질 않는군.’이라는 말을 잘도 지껄 이겠지? 세드릭 님이 이 꼴을 봤다면 손수 만든 순은 채찍으로 등짝을 후리 갈겼을 것이 분명했다. “엔디미온 경!”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인간 동상이라는 내 신분도 모르고 고개를 번쩍 들 었다. 제냐 공주님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오빠가 널 잔뜩 칭찬을 해서 일부러 지명했어! 그러니까 날 재미있게 만들어 줘!” “흐음.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나는 생긋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산들거리는 바람 에 내 긴 금발이 흩날린다. 판크라치온에는 자신 없지만 여자 즐겁게 만드 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오. 하지만 9살짜리 고객은 없었는데... “인형극 같은 건 시시해! 그리고 악기 연주도 싫어! 광대놀이도 하지 마! 아무튼 재미없으면 그냥 안 둘 테야!” 이, 이건 마치, 내가 뭘 하든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나는 순간 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곳을 빠져나오고 싶기도 해서, 이렇게 제안했 다. “그럼 마술을 보여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마술? 어떤 마술인데?” 그녀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 고객 중에는 상당히 유명한 콘스탄트 출신의 마술사가 한명 있었다. 그녀는 앙상한 나무에 화사하게 꽃을 피울 수도 있다고 한다.(물론 모조리 눈속임이다.) 나는 그 정도까지 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배운 기본적인 마술을 선보일 수 있었고, 다 행이도 이 나라에서 아직 마술쇼라는 것은 낯선 편이라서 까다로운 공주의 취향에 어긋나지 않았다. “자 그럼 제가 한번도 본 적이 없으셨을 것이 분명한 놀라운 마술을 이 나라 최초로 선보이겠습니다! 잘 보세요?” 배경과 똑같은 색의 두꺼운 천을 들고 무대 위에 올라간 나는 어린 관객 들 앞에서 천을 앞뒤로 보여준 뒤에 그것을 두 팔로 들어 몸을 가렸다. “자 그럼 열부터 하나까지 커다랗게 소리쳐 주세요! 카운트다운이 끝나 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거랍니다!” 아이들이 일치된 목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슬슬 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내가 가렸던 커다란 천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사, 사라졌다!!!” 아이들은 깜짝 놀라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3. “하아. 돌아왔습니다아.” 난 리더구트 문을 삐꺽 열며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정 소파에 드러누워 랑시 경과 노닥거리고 있던 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 며 날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누군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아? 쇼탄 경은 어쩌고 혼자 오시나요?” “후후후. 쇼탄 경은 지금 정열의 발레리노 랍니다.” “무슨 말입니까아?” “다음부턴 제대로 된 일 좀 시켜 달라는 소리입니다! 무대 위로 끌려 나 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일 뻔 했다고요!" “어머나. 공주님 취향도 독특하시군요.” “그게 아냐!!!” 난 버럭 소리를 지른 뒤에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찌나 삭신이 쑤시 는지 하반신이 말을 안 듣는군. 슬쩍 보니 키스 곁에 있던 랑시 경은 키스 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까부터 특유의 쾌활한 웃음소리로 커다랗게 웃고 있 었다. 왠지 저대로 성장하면 건강한 처녀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오빠 아 니, 아니 형이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누군지 얼굴 한번 보고 싶군. 그러던 랑시가 내게 다가와 ‘내 얘기 좀 들어봐!’라는 말투로 소란스런 말투로 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미온 경? 그거 알아? 지금 콘스탄트에 난리가 났대!” “앙? 콘스탄트 왕국에? 무슨 난린데?” 마키시온과 함께 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양대 산맥인 콘스탄트 왕국이라 면 그 난리의 스케일도 무척이나 클 것 같은데 말이야. “드디어 적현무가 명주작을 기습했데! 엄청난 결투를 벌인 끝에 현재 명 주작은 행방불명!” “뭐, 뭐라고!” 내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자 랑시가 눈동자가 커다랗게 되어선 날 바라보 았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 아냐. 아무것도.” 진짜 난리 났다! 4대 아신 중 적현무 키르케 밀러스 님과 명주작 알테어 엔시스 님이 모두 내 고객이라는 사실은 누차 말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런데 문제는 둘이 엄청난 앙숙이라는 것이고 (솔직히 키르케 님 혼자서 미 워하고 있는 것이지만) 일년 전쯤 키르케 님이 알테어 님에게 분패한 이후, 인간병기 키르케 님은 항상 알테어 님을 죽여 버리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결국 기습 했군.’ 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상식적으로 콘스탄트 왕당파의 2인자인 키르케 님이 고작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상대를 기습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 피의 여신 키르케 님이라면 하고도 남는다! 냉정한 만큼 열 받는 것도 빠른 분이라서, 실제 키르케 님은 자신과 명주 작을 비교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마라넬로 황제의 면상에 총을 들이댄 적도 있었다. 아마 이 세상 어떤 싸움꾼도 그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달 가워하지 않을 걸? 그러니 그 곱디고운 알테어 님의 신변에 큰 문제라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는 하지만 이미 행방불명이라니. 대체 키르케 님, 무슨 짓을 한 겁니까! 4. “지스 경. 침대 사 줘서 고마워.” “고, 고맙다는 말 따위 필요 없어.” 후후. 지스킬은 부끄러운지 특유의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등을 돌 려 잠을 청했다. 새로운 침대를 선물 받은 것은 어제였다. 아마 지명자에 받은 수고비로 침대를 샀나 보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여전히 지스와는 친해지기 힘들지만, 이제는 적어도 날 침대에 묶어버리는 일은 없으니 백번 발전한 셈이다. ‘그럼 나도 자 볼까나!’ 나도 이제 슬슬 지명을 받을 수 있도록 귀족들과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당연한 위기감을 느끼며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온. 일어나.” 응? 지스 경? 뭐야 벌써 아침인가? “미온 군. 일어나 줘.” 언제부터 지스 목소리가 이렇게 높은 톤이었지? “미온 군. 제발 좀 일어나.” 이상하네. 지스가 이렇게 날 애타게 깨우다니. 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지스 경이 아니라는 거잖아!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순간 피 냄새가 확 코끝을 자극했다. “미온 이제야 일어났구나.” 만물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깊고 깊은 밤, 창문은 열려 있었고 파르스 름한 달빛을 등진 채 한 사람이 날 내려다보고 있자 난 깜짝 놀라 졸도할 뻔했다. “도둑이야!!!” 왕실에 도둑이 들어오다니! 난 커다랗게 소리치려고 했지만 갑자기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내 입을 막으며 자신의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갖다대는 것이 었다. 그러자 고운 얼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며 정체가 드러났다. 하얀 피부, 가느다란 턱 선과 가지런한 눈썹, 그리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 같 은 에메랄드 아이와 연두색으로 곱게 물들인 머리칼. “아, 알테어 님?”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입을 풀어 주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까 알테어 님의 제복은 엉망진창이었고 찢겨진 옷 사이로 보이는 속살은 크고 작은 상처들도 가득했다. 내가 꿈 속에서 이런 모습을 상상할 리가 없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대충 예상은 간다. 절대로 지고는 못사는 키르케 님에게 기습을 받았다면 이 정도 상처야 차라리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콘스탄트에 서 여기까지 이 지경인 채로 왔냐는 것이다! “불쑥 찾아와서 미안. 네 업소에 가보니까 왕실 기사가 되었다고 들어서 찾아왔어.” “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와 주신 건 고맙지만......” 오밤중에 창문을 넘어 들어오다니! “나,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 몹시 지쳐 있는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 느닷없는 상 황에 나는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녀는 그런 내게 스르르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조금만 쉴게. 부탁이야. 쉬게 해줘.” “자, 자, 자, 잠깐만요.” 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그녀와 아직 잠들어 있는 지스 경을 번갈아 보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명주작이라고 해서 마치 인간이 아닌 어떤 신성한 물건처럼 유리벽 안에 가둬놓고 숭배하고 있지만 -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알테어 님 만큼 여린 사람도 없을 것 이다. ‘그런데 이제 어쩌지?’ #052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052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그런데 이제 어쩌지?’ 5. 어쩌긴 뭘 어쩐단 말인가. 지금 내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알테어 님이 던 져준 총체적 시련은 다음과 같았다. 1) 리더구트는 절대금녀구역이다. 왕족을 제외한 여성이 ‘목격’되면 시 종들이 전투태세로 돌변한다고 들었다. 별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 2) 알테어 님은 그 유명한 콘스탄트의 명주작이다. 아무리 ‘가출’이라고 는 해도 이곳에 있는 것이 발각되면 정치문제로 돌변해 버린다. 그녀는 뜨 거운 감자다. 3) 알테어 님은 키르케 님과는 다른 의미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여자 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 온 것만 봐도 그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후후후. 시작하자마자 이런 복합적인 시련이라니, 농담이라도 '여자 복 많아 좋군.'이라고는 말 못할 상황이었다. 알테어 님. 소시민의 심정도 좀 헤아려 주세요! ‘일단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야겠군.’ 나는 안쓰럽게 찢겨져 있는 그녀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기 시작했다. 문 득 이 대단한 분이 이 넓은 세상 속에서 고작 전직 호스트의 기숙사 외엔 몸을 숨길 곳이 없다는 사실에 서글픈 기분이 들었지만 - 한 밤중에 (누가 보면 오해하게스리) 숨죽이고 여자의 옷을 벗기고 있는 내 기분도 만만찮 게 서글퍼지고 있었다. 깨끗한 물수건으로 몸에 묻은 피와 먼지를 닦아준 뒤 붕대를 감아주고 내 하얀 셔츠를 입혀주고 나서야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내 '은밀한 작업'은 끝 이 났다. 그녀는 몸을 닦아줄 때마다 간지러운지 조금 웃음을 보였지만 특 별히 눈을 뜨거나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미온이 부러워.” “왜요?” “자기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잖아.” 예전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난 내 침대 속에 파묻혀 있는 알테어 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간한 상처는 흉터도 없이 깨끗하게 아물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 데 그게 축복일까? 흉터가 지워진다고 상처받은 사실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상처들은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퇴적층이 쌓이듯 그 녀의 마음 한 구석에 침전될 일이리라. 저 상아처럼 고운 피부 위에 지금까지 몇 백번의 상처들의 지나갔던 것일 까. 그런 생각을 하며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23세의 알테어 님을 보니까 그녀의 인생도 뾰족한 가시밭길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6. ‘어, 언제 잠들었던 거지.’ 난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긴 하품을 하며 기지개 를 펴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너...... 저 여자 누구야.” 망했다! 저쪽 침대에선 경계심 가득한 표정의 지스가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벌레 보듯 하지 말라고! “지, 지스 경. 그러니까 이 분은......” “불결해. 이곳에 여자를 데려올 줄은 몰랐어!” “자, 잠깐! 그게 아니라!” “여자가 아니야?” “여, 여자가 맞긴 맞아. 하지만......” “변명은 필요 없어. 룸메이트가 있는 곳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그런 짓이라니! 뭘 상상하고 있는 거야!” 아, 아냐. 지금 내가 화를 낼 처지가 아니야! 그때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부비며 일어나선 졸린 미소를 지으며 두 팔로 내 목을 감싸는 것 이 아닌가! “미온. 덕분에 잘 잤어.” 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상황은 무럭무럭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지스는 거의 기겁을 하며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저질! 키스한테 말할 거야!” “잠깐만!!!” 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지스를 붙잡은 뒤에 나도 모르게 바닥에 패대기치 고 두 팔을 꽉 눌렀다. “무,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지스킬 윈터차일드 씨. 내 말 좀 들어 주세요. 네? 그러니까 나도 피해 자라고!” 7.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아.” 그리고 운명의 브리핑 시간이 다가왔다. 일단 한 달 치 약값을 대신 지불 하겠다는 피를 토하는 조건으로 지스의 입을 봉해 놓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아니. 미온 경? 왜 그런 표정입니까아?” “제, 제, 제 표정이 어때서요.” “그 표정은 마치 자기 방에 여자라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아냐!!!!!” “아? 농담이었습니다아. 뭘 그렇게 정색을 해요?” 키, 키스 저 녀석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냐?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쥐며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지스가 '한달 약값, 꼭 지켜.'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얄밉다, 이 녀석! “자 그럼 브리핑을 시작해 볼까요? 일단 먼저 교황청에서부터 공문이 내 려왔어요오.” ‘교황청이라면?’ 키스는 소파에 털썩 앉아 그 공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신전기사라서 교황청의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냥 본사에서 내려온 지시문 정도로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댁의 정신구조가 부럽군요. 샌드위치를 다 먹은 루이 경이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물었다. “교황청으로부터의 지령은 오랜만이네? 혹시 포상금이라도 내려주겠다는?” “후후. 루이 경. 우리가 뭐가 이쁘다고 교황청에서 포상금을 주겠습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그리고 키스는 공문 내용을 말해 주었다. “현재 아우리엘레 신전기사연합의 리더이자 콘스탄트 교황파 소속 성기 사이신 알테어 엔시스, 즉 명주작 님이 행방불명이라고 합니다.” 나와 지스는 순간 움찔했다. “뭐, 들어만 두세요오. 알테어 경을 발견하게 되면 그 즉시 교황청에 신 고해 달라고 합니다.” 루이와 쇼탄은 ‘뭐야. 그거였어?’라면서 피식 웃는 것이었다. “하하하. 명주작이 이런 나라에 있을 리가 없잖아? 굉장한 미인이라는데 얼굴 한번 보고 싶네.” “후후후. 얼굴만 보는 것으로는 섭섭하지. 만나게 된다면 같은 신전기사 끼리 돈독한 전우애를.......” 그만들 좀 하시구랴! 헐렁한 하늘색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던 지스가 퉁명스런 어조로 키스에 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만약 그 여자를 숨겨주면 어떻게 되는 거야?” “흐음. 글세요오?” 키스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방긋 웃으며 말 하는 것이었다. “교황청의 명령을 어기고 알테어 경을 은닉해 준 사람은 교황청에서 파 견한 이단 심문관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폐인이 되겠지요? 어쨌든 교황 에게 반역한 것이니까요." 순간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며 나와 지스 경 사이에 무서운 긴장 이 흘렀다. 그리고 머리색과 같은 옅푸른 눈동자로 키스를 빤히 바라보던 지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키스 경. 나, 할 말이 있는데.......” “야! 이 배신자야!!!” 순간 확 뛰어 오른 내가 또 다시 지스를 덮치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였 다. “미온. 욕실이 어디야?” 그 태연한 여자의 목소리, 경악에 찬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2층 난간으로 향했고 바로 그곳에는 내 셔츠를 입고 있는 알테어 님이 긴 다리를 드러낸 채 나를 향해 웃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정지해 버린 듯한 10초간의 정 적이 흐른 뒤에 루이와 쇼탄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여...... 여자?” 미온. 욕실이 어디야? 미온. 욕실이 어디야? 미온. 욕실이 어디야? 그녀 의 몽롱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마구 마구 돌아다녔고 내 몸에 깔려 있는 지스 경마저도 '위기감 제로 여자.'라고 중얼거리며 황망 한 눈빛으로 알테어 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몸 둘 바를 모르는 상황을 너무 뒤늦게 의식한 알테어 님이 주변을 이 리 저리 바라보다가 혀를 쏙 내밀며 자기 머리를 콩 때리는 것이었다. “아 참.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지?” 이미 늦을 대로 늦은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그와 함께 산지사방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 시종들이 그녀를 둘러 싸며 스크럼을 짜기 시작했다. 이, 이 녀석들은 무슨 여성감지센서라도 있 는 건가!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키스가 커다랗게 외쳤다. “지금 즉시 브리핑을 중단하고 경계경보 레벨3을 발령합니다!” 그 순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시종들이 리더구트의 모든 창문을 잠그고 커튼을 내리고 또한 모든 출입구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Blind Talk 계속 두 편을 붙여서 올리는 일은, 저처럼 글쓰는 속도가 떨어지는 사람에 게는 너무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최근 녹초의 나날이지만 앞으로 분발하겠 습니다. 그럼 일일연재를 목표로 전진합니다. Camel의 Luna Sea를 들으며 #053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053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8. 키스의 ‘리더구트 봉쇄령’ 이후 나는 성난 인민들 속에 둘러 싸여 자아 비판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동료들 앞에서 1시간여 동안 속속들이 변명을 늘어놔야 했다. 내 태몽부터 시작해서 어째서 내가 호스트가 되었고 또 어 째서 그 잘 나가던 직업 그만두고 신관기사가 되었으며 알테어 님은 또 왜 창문을 넘어 내게 왔는지, 나는 처절한 심정으로 군중들 앞에서 ‘간증’을 해야 했던 것이다.(간증 제목 : ‘내 인생은 이 모양이라네.’) 내 말을 다 들은 동료 기사들은 모조리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 고 있었다. 루이가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미온. 그러니까 너 예전에 호스트였다고?” “예.” “알테어 님은 네 고객이었고?” “예.” “워, 원래 호스트가 그렇게 대단한 직업이었어?” “그건 아니고. 제가 스카웃된 업소가 좀 특이한 곳이라서.......” “놀랍네. 확실히 저 녀석, 남자치곤 묘하게 색기가 있다고 생각했어. 저 런 선수라면 조만간 우리 지명을 싹쓸이하는 거 아냐? 제거해야겠어.” 루이가 의심스런 눈빛으로 날 흘겨보며 쇼탄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지 금 무슨 헛소릴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솔직히 난 지금 이 스왈로우 나이츠를 위기에 빠트린 장본인이니 할 말이 없었다. “문제는...... 이 사실을 교황청에서 알면 우리 모두 이단심문관의 노리 개가 되어 인생 종친다는 것이로군. 겨우 빚 다 갚아 가는데 이게 대체 무 슨 난리람.” 쇼탄 경이 날 원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댁도 임금님 머리 들고 들어온 적 있었잖아! 남의 잘못이라고 그렇게 냉정하게 바라보 다니! 피차일반이야! 확실히 마이페이스 인간답게 꽤나 태연한 표정으로 난감한 웃음만 보이던 키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루시온 경과 레녹 경이 없다는 것에 안심을 해야겠군요.” 확실히 그렇군. 지금 이 리더구트에 잔류하고 있는 기사들은 나를 포함 루이, 쇼탄, 지스, 랑시 뿐. 나머지는 지명 중이다. 크리스라면 몰라도 만 약 루시온이나 레녹이 있었다면 당장 고발해 버렸을 일이다. 뭐 나머지 우 리들이야 어차피 물러설 곳 없는 인간들이라서, 조금은 안심이 된다. 키스 는 나와 알테어를 한번 씩 보고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지명에서 돌아오는 것은 사흘 후에요. 교황청의 귀에 들어가면 우리 모두 무서운 지옥을 구경하게 되니까, 그때까지 은밀하게 처리해 보 도록 하죠.” 다행이다! 의외로 키스는 ‘순순히’ 동조해 주는 것이었다. 키스는 방해 가 될 때나 도움이 될 때나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위인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테어 님은 평소의 웃음을 지우고 긴장된 표정으로 키 스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무,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슬 쩍 표정을 살피자 그녀는 다시 영락없는 무방비 미소를 보이며 날 향해 눈 웃음을 보였다. 정말이지, 속을 알 수가 없구만. 루이 경은 여전히 실감이 안 난다는 듯 노랗게 물들인 사자 갈기 머리를 연신 쓸어 넘기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4대 아신 중 한 명이 지금 내 옆에 있다니.......” 물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그런데 이런 맹한 여자 였다니.’였다. “그건 그렇고 계속 그런 차림으로 다닐 수는 없을 텐데.......” 쇼탄 경이 뭔가 위험한 눈빛으로 알테어 님의 길고 하얀 다리를 훔쳐보 며 중얼거리자 난 황급하게 쿠션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가렸다. 아니! 이 양반들이 대체! “랑시 경. 옷 좀 빌려 줄래? 너, 여자 옷 많잖아.” 내 질문에 랑시가 알테어를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내건 너무 작아.” 그때 루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 없어. 내가 몇 벌 가지고 있는데, 그거 빌려 줄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어째서 당신이 여자 옷을 가지고 있는 거 유? 우리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루이를 바라보자 루이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차. 실수.” 9. 일단 지스는 '흥!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맘대로들 해!'라고 이유 없이 화 를 내면서 랑시 경이 있는 방으로 가버렸다. 왜 화가 난 거야, 저 녀석! 그리고 목욕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온 알테어는 미안한 듯 루이 경이 빌 려 준 ‘의문의 원피스’를 입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예전에 나한테 언제라도 힘들면 불러 달라 고 말했던 기억이 나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온 외엔 쉴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 그녀의 상처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아물어 있었다. 또 다시 상처를 마음 속에 삼킨 채 조그맣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몹시 슬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입장도 슬프다. “그런데 알테어 님.” “아 그냥. 우리 이제 같은 신관기사니까 알테어 경이라고 불러줘도 되는 데.” “아하하. 그렇긴 하지만......" 기사라고 다 같은 기사가 아니죠. 알테어 님은 지명 받고 인간 마네킹이 되진 안잖아요. 교황청 직할 성기사라면 우리에겐 멀고 먼 달나라 이야기 랍니다. “그런데 어째서 도망친 거죠? 키르케 님 때문인가요?” “으응. 그냥......” 그녀는 말을 흐렸다. 실력으로 따지면 키르케 님에 비해 부족할 것이 없 지만 - 장담하건데 둘이 결투를 벌인다면 알테어 님의 백전백패다. 죽여서 라도 상대를 이겨야겠다고 결심할 만큼 그녀는 지독하지 못하다. 내 주변 에는 원치 않는 것들만 있어, 그녀가 대답대신 혼잣말을 했다. 지금도 그 녀는 키르케 님이 혹시 자신을 뒤쫓을까봐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알테어 님. 이제부터 우리 뭘 할까요?” 나는 그녀의 기운을 달래주기로 마음먹으며 방긋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발각되는 순간 나는 자그마치 교황청의 명령을 어긴 중죄로 고문실로 끌려간다는 생각에 목덜미에 식은땀이 흐르긴 했지만. “미온. 예전에 나한테 내 부탁을 세 가지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했 었지?” “그, 그랬습니다만.” 분명히 생각해 보니까 예전에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는데....... 뭔가 불안하다. 혹시 ‘나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거야!’라고 말 하는 거 아냐? “지금 그 소원 말할게.” “.......뭔데요?” “먼저, 너와 함께 바닷가에 가서 빨간 노을을 보고 싶어. 콘스탄트에는 바다가 없어서 항상 바다를 보고 싶었거든.” 지극히 소녀적인 소원이로군. “아하하. 뭐 그거야 어렵지 않죠. 바닷가에 가서....... 잠깐, 바다?” “응. 바다.”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어, 죄송하지만 이 나라에도 바다는 없는데요.” 내 말에 그녀가 동그란 연두색 눈동자로 ‘그래서?’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라뇨! 지금 이 와중에 다른 나라까지 밀월여행을 떠나자는 겁니까!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집스런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정말 가자고요?” “응.” “다른 나라까지 가야 하는데?” “응.” “들키면 큰일 나는데도?” “응.” “가, 가죠. 그럼 뭐.” 난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여행 가방을 꺼냈다. -Blind Talk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작업 중에 컴퓨터가 박살난 경우는 세번입니다. 그 리고 오늘이 그 세번째였습니다. 하루 종일 패닉 상태에 빠져 복구하느라 안절부절 못했네요. 몇 시간 전에 겨우 겨우 끝낼 수 있었고 부랴 부랴 올립니다. 하지만 쓰는 중이었던 본문 일부는 날아가 버려서 허탈한 기분 으로 다시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이번 편은 분량도 작고 문장도 거칩니다만, 이해해 주시길. 감전되서 죽을 뻔 하고 메인보드의 뾰족한 곳에 손톱 밑을 푹 찔려서 숨이 멎을 만큼 아프고.... 이게 무슨 난리람. 앞으로는 돈이 좀 들어도 비싼 파워를 사야 겠습니다. 그리고 백업하는 습관을 길러야 겠습니다. 으윽, 빨리 마감을 끝내고 여행을 가고 싶군요. 현재 컴퓨터는 그야말로 간신히 돌리고 있는 상태. 듣고 있는 것이... 없답니다. #054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054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10. 알테어 님과 함께 떠나는 신나는 밀월여행이 시작되었다. 연두색 머리칼 의 미녀와 단 둘이서 떠나는 여행이라니, 이거야 말로 사나이의 낭만이지 않은가? 물론 교황청에 걸리는 순간, 감히 도주한 성기사를 숨겨주고 여행 까지 싸돌아다닌 중죄에 걸려 치도곤을 당할 생각을 하니까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설레고 엉덩이가 들썩거릴 지경이다. 조금 늦게 이인실에 들어온 알테어 님이 내 손바닥에 작은 금속판 하나를 올려놓아 주며 생긋 웃는 것이었다. “미온. 이거 받아.” “아? 이게 뭐죠?” 내 손바닥 절반만한 검푸른 금속판에는 기묘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으 음 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싸구려 같은데..... “부적이야.” “부적?” “응.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데. 플랫폼에서 하나 샀 어.” “기, 기적?”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사다니! 열차역이나 시장에 서 파는 양산형 부적 따위에 효험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우아앗! 게다가 이 부적엔 녹이 슬어 있잖아! 도리어 불길하다고요! 이런 건! “저 그런데....... 이거 무슨 돈으로 사신 거죠?” 생각해 보니까 이상했다. 가출한 알테어 님이 돈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 는데? 그녀가 손가락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응. 돈이 없어서 내 반지하고 바꿨어.” “........” 저 그러니까, 그 ‘반지’라고 하신다면 예전부터 끼유고 다니시던 무지무 지하게 커다랗고 반짝반짝 거리는 에메랄드 반지 말씀이신가요. 내 불안한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얇은 손가락에는 항상 끼우 고 있던 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서, 설마 그 반지랑 이 녹슨 부적이랑 바꾼 거예요?” “으응.” 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창밖에선 알테어 님 을 속여 반지를 가로 챈 놈으로 보이는 늙은 남자가 황급히 역 밖으로 달 려 나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우아아! 저 사기꾼! 반지 내놔!” “미온. 왜 그래?” 알테어 님. 그 반지 값만 있으면 진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요! 정원이 있는 저택 한 채를 사고도 남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걸 이 녹슨 금속판하고 바꿀 수가 있는 건가요. 그러나 굳이 이제와 알테어 님에게 세상물정을 강의하고 싶진 않았다. “아하하. 뭐... 고마워요. 이 부적, 효과가 아주 좋을 것... 같네요.” “응. 그렇지? 그렇지?” 그녀는 내가 동의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듯 에헤헤 웃으면서 고개 를 계속 끄덕거렸다. 여전히 귀엽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 알테어 님은 남들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초인적 능력을 부여 받은 대신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세상사는 방법에 서툴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했다. 마나 충전이 끝난 열차는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서서히 그 길고 거대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커피색 피부 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우리 둘에게 은쟁반 위에 놓여 있는 하얀 사탕을 건넸다. 나름대로 이 열차의 무료 서비스랄까? “고마워요.” “본 열차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신혼여행 되세요.” “아?” 사탕을 물고 있던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그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아 버리며 나가는 것이었다. 잠깐 멈춰! 사람 말을 들어! 변명할 기회 정도는 달라고! “시, 신혼으로 보였나봐.” 알테어 님이 빨개진 얼굴로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실은 사제 관계에 더 가깝지만 말이다. 그리고 15일 후. 11. 하지만 외줄타기 같던 이 불안한 행복도 여기까지였다.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어떻게 알았는지 교황청에서 파견된 기사들이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기 싫다며 슬프게 외치는 알테어 님과 나를 억지로 떨어트려 놓은 금발의 기사들은 곧바로 나를 교황의 명령을 어긴 이단자로 몰아 교황청으로 압송(押送)시켰다. 눈을 가린 채 끌려간 교황청 지하에는 피에 얼룩진 고문 도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곳에 는 이미 체포되어 온 키스 경과 동료 기사들이 이미 심한 고문을 당해 죽 어가고 있었다. 내 고문을 담당할 깡마른 심문관이 시뻘겋게 불에 달궈진 지팡이를 들고 다가오며 내 귓가에 마치 악마의 비웃음처럼 속삭였다. 성 기사와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배짱도 좋구나. 너는 이제 다시는 지상의 빛을 볼 수 없을 거야. 나는 한번만 알테어 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 지만 대답대신 다가온 것은 내 살갗을 파고드는........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거야, 미온?” 알테어 님의 목소리가 내 극단적 망상 속으로 끼어들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베드 엔딩이 떠올라서요. 아하하, 날씨 차암 좋네요.” 실은 맥 빠질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베르스를 떠나 이곳 대륙의 동쪽 라이센 공국의 해안가에 도착한 15일 동안 교황청의 기사들은 고사하고 검 문검색하나 없었던 것이다. 알테어 님은 완연한 여행 무드에 젖어서 교황 청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교황청이 살벌한 천라지망(天羅地網) 을 펼칠 줄 알았던 나는 뭔가 실망감마저 들었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베르스나 콘스탄트나 공무원들은 다 게으른 거 같아요.” “응? 무슨 말이니?” “히히. 게을러서 다행이라고요.” “흐응.”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테어 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교황청에서 가출한 성기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정말이지 주변 사람까지 느긋하게 만드는 천성적인 낙천가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어? 알테어 경! 여긴 웬일이세요?”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심장이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 들켰 다! 이제 끝장이야! 난 고문실로 끌려가서... “와아! 나스 군!” “얼레?” 나처럼 놀라야 할 알테어 님이 무지하게 반가운 목소리로 손을 흔드는 것 이 아닌가. 나스라고 불리는 말쑥한 청년은 여기로 피서라도 왔는지 나처 럼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걸어왔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에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나스는 꽤 호감 가는 외모 를 가진....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누굽니까! 저 청년은! “알테어 경.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나야말로. 만나서 반가워!” 알테어 님은 나스의 손을 잡고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난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저어. 이 분은 누구시죠?” “아 참! 소개해 줄게. 이쪽은 교황청 동료인 나스타세야. 올해로 19살 이지?” “예. 그냥 나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그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난 우물쭈물하며 악수를 했다. “예에. 전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미온이라고 불러주세요.”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교황청 동료라고? 지금 우리 들키면 곤란한 상황 아니었던가? 나스에겐 들켜도 별 상관 없는 건가? 그때 알테어 님이 스스럼 없이 말했다. “나스는 교황청에서 이단 심문관으로 일하고 있어.” “아 그렇군요......... 잠깐. 지금 뭐라고...” “이단 심문관. 뭐가 잘못되었어?”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왔다. 이미 내 영혼은 고문실로 끌려가고 있었다. 알테어 님! 지금 이단 심문관과 저를 태연하게 인사시켜 주신 건 가요! 제가 그렇게 미웠나요? 이름까지 밝혀 버렸으니 이젠 빼도 박도 못 한다고요! 하지만 도리어 주눅든 목소리로 입을 연 건 나스 쪽이었다. “저어, 알테어 경. 교황청엔 제가 여기 있는 거 비밀로 해주세요.” “응. 알았어. 대신 나도 여기 있는 거 비밀로 해줘.”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다냐. 나스가 커다랗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는 것이었다. "미온 경도 못 본 척 해주세요. 전 사실 지금 교황청에 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이 여름에 바다 한번 못가보고 끝내자니 억울해서 말이죠. 헤헤. 몰래 놀러 나왔습니다.” “........” 뭔가 이 교황청.... 내 예상보다 긴장감이 없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드는군. 게다가 아무래도 이단 심문관이라면 광신적인 두뇌회로를 가지 고 있는 융통성 없는 고문전문가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나스라는 청년은 남의 이단을 심판하기 이전에 자신의 신앙심도 별로 깊어 보이지 않는 녀 석이잖아! 알테어 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미온. 나스 군은 수도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이번에 교황청에 취직했 어. 벌써 3대 째 이단 심문을 이어가고 있거든.” “아. 엘리트군요.” “그런데 이렇게 놀러다니는 걸 좋아해서 어쩌니.” 알테어 님의 말에 나스가 ‘가문 내력이거든요.’라고 말하고는 혀를 쏙 빼 며 웃었다. 어딜 봐도 생사람 잡아다가 ‘네 놈에겐 신앙심이 부족해!’라고 주리를 틀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도리어 이교도들과 함께 어울려 이 교도 댄스라도 출 것 같은 분위기잖아! 나스가 다시 여행 가방을 들며 말했다. 알테어 님과 나보다 훨씬 키가 작 은 아담한 체구라서 정말이지 이단 심문관이라는 악명 높은 직업인이라고 는 믿어지지 않는 청년이었다. 하긴 나도 누가 기사라고 믿진 않잖아? “아무튼 알테어 경도 되도록 빨리 교황청으로 돌아가세요. 교황께서도 근심이 태산이실 겁니다.” “으응. 빨리 돌아갈게.” 알테어 님이 말을 흐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스는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 며 말했다. “미온 경. 잠시 동안이겠지만 알테어 경을 잘 부탁합니다. 나도 사정이 있어서 교황청에 보고는 안하겠지만...”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도 당신들을 바라보는 눈이 많은데다가...... 엄연히 교황청 지 하에는 고문실이 존재하니까요. 그곳을 구경하고 싶지 않으시죠?” “무, 무, 물론입니다.” “그럼 조심해서 행동하세요.” 갑자기 날 바라보는 나스의 눈빛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멍한 표 정으로 그가 룰루루 휘파람을 불며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스는 분명 날 '경‘이라고 칭했다. 내가 기사라고 밝힌 적도 없는데...... “미온. 우리 가자.” “예에.” 갑자기 이 단순해 보이는 도피 여행에 커다란 흑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알테어 님은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갔다. -Blind Talk 크으. 하루 늦어버렸군요. 그건 그렇고, 누구라도 배가 고파 허기가 질 때는 묘한 기분을 느끼죠? 그러니까 '허기를 느낀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아픈 것도 가려운 것도 아닌 이상한 기분. 예전부터 대체 어째서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 것 일까? 라고 궁금해 하던 차에... 고 칼 세이건의 저서에서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나왔더군요. 뭐 블라인드 토크가 네이버 지식iN은 아니고 아무도 물어본 적 없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어서 그 해답을 말해보자면, 몸에서 소화를 시작하게 되면 굉장한 양의 피가 소화기관으로 몰려든다고 하더군요. 뭐 이거야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식곤증이 오는 것도 다른 곳의 피가 소화기관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에 느끼는 가벼운 빈혈 같은 피로 함이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두뇌에서 소화가 다 끝났다고 판단하면 그 피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피가 본래 자리로 빠져나갈 때 느끼 는 기분이 바로 '허기'라고 하네요.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굉 장히 박식한 세이건 씨가 한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군요. 그럼 결론적으로 허기란 '피가 빠져나가는 고통'이 되는 것인가... 그렇게 상상하니까 진짜 무서운 괴로움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휴우 최근 정말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이런 망상이 떠오르는 것일지도. 백랑전설 4권 마감 덕분에 안 그래도 불안하던 컨디션이 무너져서 현재 좀 끙끙 거리고는 있지만 어제부터 비가 내려준 덕분에 조금 컨디션 회복 중입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Tanita Tikaram의 I might be crying을 들으며 (최근 자주 듣고 있습니다. 특히 방에서 혼자 블러디 메리라도 만들어 먹 으면서 듣고 있노라면 아주 기분이 편해집니다. 가사도 좋고요. 그런데 이 노래가 한국인 감독이 만든 헐리우드 느와르 영화 '컷런스딥'에 삽입 되었다고 하던데, 분명 그 영화 3 년전에 봤건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왜 일까요. 뭐 영화가 워낙에 산만했기 때문일지도...) #055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055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12. “저 그런데 미온.” “예?” “어째서 이 먼 곳으로 온 거야?” 알테어 님이 이 질문을 할 줄 알았다. 즉 어째서 가까운 서쪽 이오타의 바다로 가지 않고 두 배는 먼 동쪽 라이센 공국까지 왔냐는 의문이었다. 실제 우리 베르스에서 이오타 앞바다 까지는 일주일 안에 갈 수 있지만 여기까지는 15일이나 걸렸다. “아 그 이유는 말이죠.” 이자벨 님 때문이랍니다. 안 그래도 발각되면 끝장나는 판국에 이자벨 님 이 있는 이오타로 갔다간 그녀의 정보망에 단번에 들킬 것이 뻔하기 때문 이었다. 설마 이자벨 님이 그걸 무기로 콘스탄트와 거래할 비정한 분은 아 니리라 믿지만(믿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도 누군가에게 계속 감시당 하고 있다는 스릴 만점의 기분으로는 건전한 여행 생활을 영위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 난 이자벨 님에게서 최대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일깨워줘서 긴장감을 조성하고 싶진 않았다. “동쪽 바다가 더 멋있거든요.” “아아! 그렇구나!” 그녀는 정말 믿는 건지 아니면 속아주는 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눈웃음 을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기어코 바다에 도착했다. 역시 관광지답게 해변 가엔 적잖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햇볕에 달궈진 새하얀 모래사장 앞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염수(鹽水)의 대지! 그리고 고요하게 그러나 장중하게 공기를 울리는 파도 소리가 내 눈 과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나는 난생처음 바다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여행 가방을 백사 장에 툭 떨어트렸다. 내 표정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미, 미온. 왜 그래?” “이게 바다? 엄청나요! 굉장해! 이 정도 일 줄은! 우아앗! 대단해!” “으응. 소문대로 굉장하네. 그런데 좀 진정해.” “알테어 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이런 모습에는 좀 더 감동 받아도 된다고요!” 결국 이 거대하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에 엄청난 쇼크를 받은 쪽은 나였다. 어린애처럼 호들갑 떨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장관일 줄은 정말 몰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 그녀와 와 볼 껄 하는 후회가 뒤늦게 가슴을 찌를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알테어 님은 소원대로 바다를 봤는데도 별로 감흥이 없는 것 같았 다. 굉장히 흥분할 줄 알았던 그녀는 단지 씁쓸하게 웃으면서 백사장을 걸 어갈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만 봐도 지금 뭔가 딴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아, 알테어 님.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응? 아냐. 그냥 실감이 나지 않아서.” 얼굴에 딱 티가 나는 뻔한 거짓말, 나는 별로 기운이 없는 그녀를 보며 걱정스런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러던 그녀가 이 더운 날 서로 찰싹 달 라붙어서 주변을 지나다니는 커플들을 빤히 보다가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수영할래?” “예? 수영?” “응. 노을이 지려면 아직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하니까........” 그,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가출했다지만 명색이 교황청 직 할 성기사인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나야 상관없다고 쳐도) 알테어 님이 사람들 앞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나돌아 다니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다음날 신문에 ‘성기사. 이대로 좋은가!’라는 기사가 나올지도 모 를 일이고.... 무엇보다 수영복을 살 여유가 없거든요. 우리, 가난합니다. “농담이야. 나 수영 못해.” 우물 쭈물거리는 내 모습에 알테어 님이 그렇게 말하고는 쌀쌀맞게 혼자 인파들 속으로 걸어갔다. 되게 서운한 모양이네. 그냥 하자고 할 걸 그랬 나? 그때. “이야아. 귀여운 아가씨네. 혼자야?” 왜 안나오나 했다. 폭력배쯤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알테어 님을 둘러싸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건달들을 상대로 정겹게 웃 고 난리인 우리의 무방비 누님. 난 사태의 조기진압을 위해 달려갔다. “이봐! 그 분한테서 떨어...” 그 순간 투웅! 하는 듯 공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 그대로 뭔가 얇 은 금속판이 청명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 더 이상 아무 일 도 없었다. “얼레?” 주변 사람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작은 울림이 한번 지나갔을 뿐이고 건달들 역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그대로 멈춰 버렸다는 것이다. 동상처럼. “아, 알테어 님?” “응? 왜?” 그녀가 태연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 어떻게 하신 거예요?” “별로. 그냥 잠깐 조용히 시켰어.”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버린 건달의 가슴에 손을 얹 었다. ‘시, 심장이 멈췄잖아!’ “왜 그래, 미온? 표정이 창백해.” 누구나 시체를 보면 표정이 창백해진답니다. "죽이면 어떻게 해요!!!” “안 죽였는데... 잠시 후에 숨이 돌아올 거야.” 뭐라고! 심장 스위치를 멋대로 온 오프 시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해요?” “응.” 난 하얗게 굳어 있는 건달과 생글 생글 웃고 있는 알테어 님을 번갈아 바 라본 뒤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상에는 가끔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온. 정말 수영 안 할래?” 순간 계속 거절하면 내 심장도 잠시 멈춰둘 것 같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13. 결국 그녀가 그렇게도 원하던 수영을 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상황은 엉뚱 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결국 수영복을 나만 샀고 수영도 나만 했 으며 알테어 님은 ‘난 수영 못해.’라고 말하고는 근처 바위 위에 앉아 내 가 수영하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혼자 땀나게 물장구를 치는 와중에도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 지만........ 난 갑자기 문득 생각이 들어 잘 빠진 물개마냥 슬금슬금 바 위 위로 올라와 그녀를 뚱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알테어 님.” “응?” “실례하겠습니다아.” “꺄악!” 풍덩! 난 그녀의 발목을 잡고 스르륵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후후후, 해저 미온의 습격이다. “미, 미온! 다 젖었잖아! 왜 갑자기!” 순식간에 홀딱 젖은 그녀가 콜록거리며 외쳤다. “그냥 여기 오면서부터 계속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아서요.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 "아, 아냐." "흐음. 흐음. 흐으음." "왜,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이런 말은 실례지만, 귀엽구나, 싶어서 말이죠." "뭐?" 나는 젖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엷게 웃었다. 슬슬 차오르기 시작한 노을 빛 때문인지 그녀의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온. 나 있잖아.......” “예?” “아냐. 아무것도.” "뭔데요. 말해 봐요." "아니야. 잊어버렸어." 알테어 님은 말을 흐리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 표정을 숨기며 물에 녹아 버리는 듯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어였다. 수영 못한다는 소리는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4. 수영을 마친 뒤 해안가의 노천 주점으로 걸어오는 우리 둘의 모습은 사람 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아 등짝이 뜨끔뜨끔할 정도였다. 흠뻑 젖 은 옷에 물기 어린 연두색 머리를 내린 아리따운 낭자와 한껏 슬림한 몸매 를 드러낸 수영복 차림의 긴 머리 총각이라니, 주변 사람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보통 이럴 때라면 ‘오호호호. 미온 군. 오늘 즐거웠어.’라고 콧대를 세워도 괜찮을 텐데, 터덜터덜 걷고 있는 알 테어 님은 산지사방에서 우리들을 주시하든 말든 입가를 매만지며 맹한 목 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입 안이 짜.” “예. 바다는 짜군요.” 그녀에게 이 이상의 무드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역시 관광지답게 세련된 이오타 양식으로 만들어진 노천 주점들은 화려하 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막 무르익기 시작한 노을을 즐기려는 심산으로 바 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돈이 없어.’ 나는 심란한 시선으로 메뉴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비싸고 또 저것도..... 숙박비와 돌아갈 여비를 생각해 보니까 아무리 주판알을 튕겨도 그럴 듯한 식사와 술은 무리였던 것이다. 죄다 이 놈의 수영복 때문이야! 어떻게 이걸 다시 팔아서 돈을 마련해 볼까, 하는 궁핍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콘스탄트 산(産) 로제 샴페인입니다.” 갑자기 웨이터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정중하게 다가와선 한 눈에 보기에 도 엄청나게 값 비싸 보이는 고급 샴페인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 가. 난 앗!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시킨 적 없어요.” 지금 여비를 다 털어도 이런 비싼 거 살 돈 없어! 파앙! 그때 알테어 님이 그 샴페인을 따 버린 것이었다. 그 얇은 손가락으로 단 단하게 봉인되어 있던 코르크 마개를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 버리자 나와 웨이터 모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윗덩이도 빵 조각처럼 조각내 버릴 것 같은 실로 무시무시한 악력이지 않은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 게 아니지! “그, 그걸 따면 어떻게 해요.” 난 창백해 져선 속삭였지만 알테어 님은 ‘응? 왜? 우리 거 아냐?’라고 말 할 뿐, - 지금부터 남은 여행 기간 동안 밤낮으로 접시 닦기를 하는 것만이 이 잘난 샴페인 값을 갚을 유일한 길이었다. 그때 웨이터가 말했다. “저어. 이 샴페인은 저쪽 분께서 보내주신 겁니다. 분위기가 참 좋아 보 인다고 하셨습니다.” “엥?”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최고급 샴페인을 선물로 보내주는 알부 자가 누구란 말이지? 그리고 웨이터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내가 서서히 고 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아주 낯익은 은발의 여성이 슈트를 입은 채 날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이자벨 님!’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대륙 정 반대편에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가발 을 쓰고 은테 안경을 걸친 모습이 영락없이 성공한 캐리어 우먼의 표본인 이자벨 님이 샴페인 잔을 들고 우리를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어머. 미온. 우연히 만났네?” 우, 우연은 무슨! -Blind Talk 아아 기껏 ADSL를 깔았는데 속도가 상상을 초월해서(차라리 56k 새롬모뎀 을 달고 말지.) 개통 취소하고 다시 서비스 업체를 물색해 봐야 겠군요. CUG멤버 분들 중 몇 분은 엔토피아를 쓴다던데... 제겐 달나라 궁전 이야 기입니다. 아, 부러워라. 그럼 내일 이 시간 무렵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비축분 준비 완료) #056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056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어머. 미온. 우연히 만났네?” 우, 우연은 무슨! 그때 알테어 님이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이 분은 누구야?” “아 그러니까 이 분은... 그러니까....” 인트라 무로스 국장 이자벨 크리스탄센 님입니다. 지금 우리들을 감시하 기 위해 친히 이곳까지 오신 거랍니다, 라고 솔직히 밝힐 만큼 바보는 아 니었기 때문에(고객들의 신분은 철저한 비밀이다.) 나는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몰라서 말을 흐렸다. 그때 이자벨 님이 알테어 님에게 악수를 청하며 특유의 빈틈없는 모습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자벨이라고 해요. 저는 이오타의 별 볼일 없는 공 무원입니다만 마침 이곳으로 휴가를 나왔습니다.” “아 예. 저는 알테어입니다. 저도 콘스탄트의 별 볼일 없는 공무원인데. 헤헤.” 둘은 서로 뭔가 긴장감이 흐르는 웃음을 띠며 악수를 했고 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애써 숨기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자벨 님이 능숙하게 내 옆에 앉자 알테어 님이 잠깐 눈썹을 움찔했다. “미온 군에게는 예전 잠시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요. 그런데 이 먼 곳까 지 둘이 같이 여행을 나온 것을 보니까, 무척이나 가까운 관계인 것 같네 요.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띄더군요.” “아, 미온과 아는 사이셨군요. 그런데 굉장히 미인이네요?” “알테어 님이야 말로. 어디를 가도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분이로군요.” 이 평범한 대화 속에 뭔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기분은 내 착각이려나. 갑자기 내 자리가 가시방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자벨 님이 여기까지 왔다면 분명히 그녀의 부하들도 같이 왔을 거 아냐! 설마 아까 그 웨이터도 첩보원? 그리고 저기 저 손님들과 가게 밖의 노점상들과 흙장난을 하고 있는 소녀마저도 우리를 감시하는 요원들이 아닐까! 굉장한 불안감에 난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이자벨 님은 갑자기 알테어 님을 똑바로 바 라보면서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알테어 님의 입가에 대번 씁쓸한 미소가 올랐지만 난 불행하게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은 쓰지 않는 고대 의 사어(死語)였기 때문이었다. 사어를 알아들을 만큼 박식하지 못한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신학을 배운 적이 있는 알테어 님은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난 갑자기 촌놈이라도 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 지금 무슨 말씀들을........” 그때 이자벨 님이 잔을 내려놓고 일어나서는 내 팔을 잡았다. “그럼 미온 군을 5분만 빌려가겠습니다.” “예?” 이자벨 님은 멋대로 내 팔을 쥐고는 가게 뒤편으로 갔고 난 얼떨떨한 표 정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뒤편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원망스럽게 말했다. “이자벨 님! 너무해요! 여기까지 감시하러 오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너 하나를 감시하기 위해 내가 직접 움직일 리가 없잖아.” 날 어두컴컴한 뒤편으로 데려간 이자벨 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벌써부터 주변에는 부하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슬슬 몰려들어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난 분명히 휴가를 온 거야. 나도 월급날을 기다리고 휴가를 기다리는 공무원이라고. 일년에 한번 있는 휴가라서 쉬러 온 것뿐이야.” 노을빛이 세어 들어오는 좁고 어둑한 뒷켠에서 그녀의 안경이 유달리 반 짝거리고 있었다. “저, 정말이에요?” “응. 단지 너와 알테어 경이 이곳에 온다는 정보을 듣고 여기로 휴가를 오기로 선택했을 뿐이야.” “그, 그럼 감시하는 거 맞잖아요!” 일이든 휴가든 하나만 해 달라고요. “미온. 잘 들어. 4대 아신 중 한명이 자신의 둥지를 뛰쳐나왔다는 사건 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는 너도 잘 알 거야. 지금 너와 명주작을 주시하고 정보기관은 비단 우리 쪽만이 아니야.” 내 머리칼과 수영복에서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고 있 었다. “어차피 나나 알테어 경은 이미 수많은 나라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 는 암살 대상이니까 상관없지만, 이렇게 계속 돌아다니다간 너도 그 리스 트에 오르게 돼. 오늘 중으로 명주작을 놔두고 혼자 본국으로 돌아가.” “하지만....” “그리고 교황청에서 파견한 이단 심문관 나스타세를 조심해.” “......!” 역시 그 녀석도 휴가 나온 것이 아니었어!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요.” “또 괜한 고집을 부리는 구나.” “알테어 님을 혼자 두고 사라질 수는 없어요.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분 이라고요.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걸 다 이루고 돌아 갈게요.” “소원? 낭만적이네.” 이자벨 님은 왠지 기분이 상한 듯 조금 빈정거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럼 맘대로 해.’라고 쏘아붙이듯이 말하고는 부하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기 시작했다. “저 이자벨 님!” “왜?” “돈 좀....... 빌려 주세요.” 그,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저한테는 절박하다고요! 이자벨 님은 황망한 표정으로 잠시 날 바라보다가 ‘어째서 내가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하 는 거지.’라고 조그맣게 투덜거리면서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주는 것이었다. 보나마나 금화가 가득 찬 주머니리라. “그,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난 상관없으니까 받아.” “꼭 갚을게요.” “상관없다니까.” 내가 주머니를 잡자 그녀가 그걸 꽉 쥐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 다. “설마 한 방에서 잘 건 아니겠지?” 그, 그렇게 무서운 눈매 하지 마세요! 15. “다녀왔어?” “아 예.” 알테어 님은 돌아온 내게 더 이상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노을이 내려와 바다 위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우리는 이자벨 님이 선물한 샴페 인을 마시며 노을이 막을 내릴 때까지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술에 취한 것인지 노을에 취한 것인지 고혹적인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굉장히 행복해 하는 것 같았다. 16. 옷을 갈아입은 뒤, 우리는 슬슬 숙소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발 길을 옮긴 곳은 마치 궁전을 방불케 하는 고급 호텔 앞이었다. 알테어 님 이 온통 상아빛으로 치장된 데다가 정원에선 오색찬란한 분수가 물을 뿜는 이 호텔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저어 미온. 이런 곳은 너무 비싸지 않아?” “헤헤. 괜찮아요.” 이자벨 님으로부터 빌린(분명 빌린 거다!) 돈이라면, 지금부터 베르스에 돌아갈 때까지 황금마차를 타고 길가에 꽃잎을 뿌리며 놀러 다녀도 괜찮을 액수랍니다. 그리고 어차피 수많은 감시원들에게 쫓기면서도 악착같이 놀 기로 결심한 거! 후줄근한 여관 구석보단 개인 수영장이 있는 로얄 스위트 룸에서 노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좀 파멸적인 쾌락에 사로 잡혀 큰 맘 먹고 알테어 님을 이끌고 '궁 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대충 로 비의 상황은 이랬다. 한 눈에 봐도 ‘저는 기밀 첩보원입니다.’라는 냄새 가 풀풀 풍기는 몹시 수상한 남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우리들을 흘끔흘끔 바 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렇게 대놓고 감시해도 되는 거야? 이쯤이면 감시가 아니라 스토킹 수준이라고! 이런데도 아직 교황청 성기사들이 나타 나지 않은 것이 수상할 지경이었다. 알테어 님이 이 불유쾌한 곁눈질을 한 몸에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모두들 우리를 훔쳐보고 있는 거 같지 않아? 왜들 그러지?”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모든 사건의 근원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니, - 어째서 이 런 둔감한 아가씨가 전쟁터에만 나가면 무패의 여신으로 돌변하는 걸까. 나는 잽싸게 고급 이인실을 하나 잡아 알테어 님을 그곳에 놔둔 뒤에 총알 같이 이자벨 님에게 뛰어갔다. 17. 다행이도 이자벨 님은 여전히 예의 주점에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그녀의 주변에는 경호원쯤으로 보이는 장신의 사내들 서넛이 서 있었고 그녀는 이미 샴페인 한 병을 다 비운 것 같았는데도 표정하나 흐트 러짐이 없었다. “이자벨 님!” “미온?” 내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나자 그녀는 의외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려고 하자 단단한 체구의 경호원 한 명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막 아서는 것이었다. “괜찮아. 이리 오라고 해.” 그녀는 새하얀 거품이 이는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일년 에 한번 있는 휴가 인데, 이런 곳까지 와서 밤중에 혼자 샴페인이라니, 분 위기 있다기 보다는 너무 쓸쓸해 보이잖아. 하지만 당장은 마치 모기떼처 럼 호텔에 몰려와 있는 감시원들이 문제였다. 난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숙소까지 감시원을 보내실 건 없잖아요.”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호텔 로비에 알테어 님을 감시하는 놈들이 쫙 깔려있다고요.” 그녀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그런 짓을 할 아마추어로 보여? 타겟에게 들킬 정도로 엉성한 감 시원 따위는 내 밑에 없어.” “그, 그럼. 그 놈들은 누구죠?” “말했잖아. 내가 아니라도 너희들을 감시하는 녀석들은 많아. 그런 형편 없는 수준의 감시원들이라면 아마 어떤 멍청한 나라의 멍청한 첩보원들이 겠지. 혹은 암살자들일 수도 있겠군.” 난 눈이 커졌다. 암살자라고? “의심해서 미안해요. 죄송하지만 돌아가 가봐야겠어요.” “가봐. 나는 계속 내 28세 생일을 즐길 테니까.” “예?” 오늘이 생일이었던가. 자신의 정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가르쳐 주지 않 던 이자벨 님이라서, 나는 그녀가 오늘로 28세가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가 밖에서는 좀처럼 벗지 않는 은빛의 가발을 벗자 진한 금발이 쏟아 져 내려왔다. 그런 그녀가 날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어서 가봐.” “미안해요.”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다시 호텔로 뛰어갔다. 18. “이게 대체 뭐다냐.”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우리들을 감시하던 첩보원들이 산지사방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 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알테어 님이 이렇게? 난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지배인에게 다가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누가 이 놈들을 이렇게 만든 거죠?” “나, 나도 몰라요.” 모르다니! 당신 눈앞에서 벌어졌을 텐데! 어렵게 숨을 돌린 지배인이 두 려움에 찬 표정으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1분 전 쯤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 같았 어요.” “그리고요?” “모, 몰라요. 그냥 그 사람의 몸이 바람처럼 변하는 것 같다니........ 로비에 있던 저 자들이 칼을 뽑기도 전에 폭풍처럼 휘몰아치고는 사라져 버렸어요.” 이거 어디부터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배인의 눈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정말입니다! 앗! 하는 사이에 수십 명이 쓰러져 버린 거라고요!”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죠? 남자였나요?” “모르겠어요. 상당히 키가 큰 사람이었는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 몰라요.” 키가 크다고? 그럼 적어도 나스타세는 아니리라. 대체 누구지? 그리고 왜 우리가 아닌 첩보원들을 공격한 것일까. 이 정도의 실력자는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불안한 예상 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알테어 님이 위험할지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단숨에 알테어 님이 있는 방으로 뛰어가 문을 확 열었다. #057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057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어쩌면 알테어 님이 위험할지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단숨에 알테어 님이 있는 방으로 뛰어가 문을 확 열었다. “알테어 님!” 그러나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에서 잘 수가 있습니까.” 산지사방에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로비는 혜성처럼 나타난 의문의 존재에 게 쑥밭이 되었는데도 그녀는 죄다 알 바 아니라는 듯 실로 태평하게 잠들 어 있었던 것이다. 위기감 제로,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소파에 기대 잠 든 알테어 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침대로 옮기는 중에도 (잠 들어 있는 것인지 잠든 척 하는 것인지) 조금 웅얼거릴 뿐 눈을 뜨지 않았 다. 나는 침대에 누인 알테어 님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순간 닥쳐오는 찌릿한 기분에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조금 몸을 웅크린 채 침대 위에서 새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오만가지 여 성의 패턴에 단련되어 있는 내가 봐도 묘하게 자극적이다. 이건 마치........ “그러니까 나도 남자란 말이죠. 조금은 방어를 하시는 게......” 숙면 중인 여자 앞에 두고 혼자 중얼거리는 짓도 바보 같아서 난 쓴웃음 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날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십시오. 이래봬도 일편 단심이라고요! 아니 뭐 꼭 이자벨 님이 어디선가 감시하고 있는 기분이 들 어서 이러는 게 아니고. 나는 아무래도 침대와는 인연이 없는 인간인가 보다. 이번에도 근처 소파 에 누워 잠을 청해야 했고 직업인으로서는 자랑스럽지만 남자로서는 매우 서글픈 밤이 속절없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19. ‘아아. 더워.’ 나는 왠지 답답한 기분에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한동안 그대로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틈인가 침대에서 내려온 알테어 님이 내 목과 어깨를 껴안은 채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가지런한 속눈썹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밤새 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한 입 술은 금단의 과실처럼 날 유혹하고 있었고.......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담!’ 신이시여! 이 모진 시련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의지를 주시옵소서! 솔직 히 신이라도 이 상황을 보면 '그냥 질러 버려.'라고 말했을 것 같긴 한데, - 에이이! 그럴 수는 없지! 위로해 주기로 다짐해 놓고 자기가 먼저 부뚜 막에 올라가 버리면 어쩌자고! 난 눈을 꽉 감으며 난감한 목소리로 알테어 님에게 말했다. “저어. 알테어 님. 일어나세요.” “우우웅, 미온.” “예?” 역시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 알테어 님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외롭기 때문이야. 그냥 아침이 올 때까지만 이대로 있어 줘.” 반칙이다. 하필이면 예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여기서 또 다시 들을 줄 은. 그 순간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그녀의 상처가 단번에 가슴 속에 파고들 어 마음 한켠이 뭉클해 졌다. 그녀가 말했다. “이 세상은 폭풍이고 난 그 속에서 방황하는 보잘것없는 먼지 같아. 세 상이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데로 쓸려 다니는 것에 지쳤어. 그냥 영원히 이 대로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에요. 이 세상은 폭풍이 아니고 당신도 먼지가 아니니, 쓸려갈 일 도 사라질 일도 없습니다. 보잘것없지 않아요.” 나는 내 목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 몸을 떨고 있는 그녀를 껴안아 주 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덥다.’ 순간 어디선가 이자벨 님의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지는 것 같아 몸을 움찔 했다. 20. “미온.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알테어 님이 몇 번이나 흔들어 깨워서야, 거실 한쪽 구석에 쪼그려 잠들 어 있던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최근의 긴장감이 확 풀어져 버리 면서 완전한 숙면을 취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 내 굉장한 잠버릇 덕택에 어느 틈엔가 본능적으로 시원한 곳을 찾아 몸을 데굴데굴 굴려서 거실 구 석까지 와버린 것이다. 물론 머리칼은 전쟁이라도 치룬 것 마냥 무섭게 헝 클어져 있었다. 게다가. “...에그머니나.” 더위를 이기지 못한 내가 나도 모르게 상의를 벗어던진 상태였다. 이런 꼴로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하품을 하고 있는 얼빠진 모습이라니, 알테어 님이 별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아침 스타일을 빤히 바라보다간 말했다. “미온. 빈틈없는 줄 알았는데....... 아침엔 나보다 더 무방비네.” “헤헤. 천성이라서 고쳐지질 않네요.” 난 쓴웃음을 지으며 주섬주섬 옷을 집어 입었다. 헌신적이고 참을 성 많 던 예전 그녀마저도 내 어린애 같은 잠버릇에 대해서는 기겁을 했을 정도 였으니까 말이다. 옷을 입자마자 다시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한 내게 알테어 님이 말했다. “미온. 그 옷 거꾸로 입었어.” “아?” 그리고 우리 둘은 체크아웃을 했다. 대체 몇 명의 감시원들이 우리를 뒤 쫓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 감시원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정체불명의 실 력자가 누군지도 알 수가 없었던 아슬아슬한 하루였지만 아직까진 아무 일 도 없었다. 아직까진 말이다. 21. “눈 내리는 것을 보고 싶어.” 이것이 그녀의 ‘두 번째 소원’이었다. 라이센 공국 해안가를 떠나는 마 차 안에서 그녀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한동안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 질 않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봐야 했다. 엄청난 혼돈이 내 머리 속에서 격 렬하게 춤을 춘 이후 내가 헛기침을 하며 되물었다. “저 그러니까... 눈이라고 하신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차갑고 하얀 거, 말씀이신가요? 뭉쳐서 눈싸움도 할 수 있는, 그거요?” “응. 눈.” “저어. 지금 여름이걸랑요.” 난 뙤약볕 덕에 이마를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렇다. 눈, 즉 snow는 겨울에 내린다. 이건 하늘이 정한 이치라서 황제 할아버지가 와서 박박 우겨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삼척동자도 알고 오리너구리도 알고 있고 심지어 하루살이도 알고 있을 일이다. 하지만 알테어 님은 갑자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 이, 이렇게 눈을 좋아하는 아가씨였던가? 예전에는 분명 겨울 싫어했던 거 같은데... 그렇다고 ‘에이이! 내가 무슨 램프의 지니 입니까! 그런 초자 연적인 소원을 들어 줄 수 있게!’라고 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난 상 당히 곤혹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눈이라는 건 하늘에서 맘 내키면 멋대로 내리는 거래서 요. 보통 그런 건 여름에는 안내리더라고요. 아하하. 아시죠?” 어쩌란 말인가! 지금 이 여름에 눈이 내릴만한 곳은 눈 씻고 찾아봐도 마 키시온 제국 북쪽 끝 밖에는.... 난 설마,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알테어 님을 바라보았다. “마키시온 제국으로 가자고요?” “응. 눈 내리는 곳으로 가고 싶어.” “거, 거긴 콘스탄트 왕국의 적국입니다만.” 게다가 제가 임상실험재료 14호로 맹활약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요. 말하자 면 그곳은 사자의 아가리, 용의 굴, 괴물이 살고 있는 늪, 금화 1000냥을 받아도 가고 싶지 않은 곳,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곳이랄까. 거길 다시 가자고! “가고 싶어. 부탁이야.”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사정이 어떤 것인지 훔쳐보 고 싶다. 내가 같이 가지 않아도 그녀는 혼자서라도 갈 것 같아서 나는 그 녀의 두 번째 소원에 동참하기로 했다. 왠지 지금 절대로 그녀를 혼자 보 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리고. 25일 후. 늦여름. 마키시온 북부. 평균 기온 영하 32도. #058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058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7화 : 아아, 인생 가시밭길 25일 후. 늦여름. 마키시온 북부. 평균 기온 영하 32도. 21. 지금은 분명 여름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름 한복판에 검은 털코트를 입고 같은 색의 커다란 털모자까지 푹 눌러쓴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에취! 에취! 에그그그그, 추워!” 여름에 눈을 보겠다는 허망한 이유 하나로 세계의 북쪽 끝이라는 이 작은 마을에 도착한지도 이틀 째. 아아, 끝내주는 여름이야, 나는 코를 훌쩍이며 투덜거렸다. 지금까지 덥 다고 투정부린 거, 확실하게 보상받는구만. 나는 하얀 니트 목걸이로 입가 를 가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때 물고기를 잡으러 떠나던 마을 어부가 나를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드 는 것이 아닌가. “어이! 긴 머리 총각! 약혼자는 몸 좀 좋아지셨나?” “야, 약혼자 아니에요!” “아아! 불륜이라고 했던가!” “아니라니까!!!!” 이곳은 너무도 외진 동네라서 그런지 수년 만에 처음 찾아온 이방인이라 는 우리들은 단숨에 마을의 포커스가 되어 버렸다. 그들의 관심사는 '세계 끝까지 도망쳐 온 불륜 커플, 과연 어디까지 가나 보자.’였다. 아 글쎄! 어째서 불륜이 되길 바라는 거냐고! 이 사람들아! 어부는 마을 어기로 사라지며 정겹게 외쳤다. “애 낳을 때 되면 말하게나. 산파 보내줄게.” “그, 그럴 일 없거든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거 양반 말 고집일세! 우리는 눈만 내려주면 돌아갈 거란 말이죠! 그러나 하늘은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회색빛인데도 아직 눈은 기 별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곧 내릴 때가 되었다고는 하는데. ‘여름이 눈을 기다리는 남녀라니. 키스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웃을까.’ 난 하늘을 바라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스를 떠난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이러다간 정말 겨울쯤에야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로군. 어쩌면 근 무태만으로 해고될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을 사람들이 무료로 빌려준 오두막으로 걸 음을 옮겼다. 지금 알테어 님은 그곳에 있다. 아무래도 걱정되는 것은 그녀의 상태다. 그녀는 감기기운 때문이라고 하 지만, - 확실히 그녀는 거짓말엔 재능이 없다. 4대 아신 중 하나인 명주작 이 감기에 걸리다니, 누구도 그런 말은 안 믿을 거다. 22. 난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알테어 님. 좀 괜찮아지셨어요?” “응.” 그녀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색은 어제보다 더 나빴다. 바닷 가에 있을 때만 해도 건강미가 넘쳤던 그녀의 모습은 이제는 가련할 정도 로 파리해 보였다. 그녀가 전에 없는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당장이라 도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오늘 중으로 눈이 오지 않으면 화를 내서라도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머리칼을 길게 풀어 내린 모습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 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이 정말 눈인지 아니면 눈과 함께 찾 아올 그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알테어 님.” “응?”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 나는 그녀가 당장 ‘아냐!’라고 대답해 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잠시 날 바 라보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미온. 왜 콘스탄트 내전이 시작되었는지 알아?” “예?” 그 유명한 일화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선대 콘스탄트 국왕에겐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왕은 일찍이 온화한 둘 째 아들을 왕으로 점찍었고 친구이기도 했던 교황에게 부탁하여 그의 성사 (聖事) 때 교황을 둘째 아들의 대부(代父)로 삼았다. 그것은 차기 왕위를 이어받은 자에 대한 전통적 관습이었고 왕권과 종교가 모두 왕위를 인정했 음을 말하는 증표였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리고 알테어 님이 말을 이었다. “둘째 왕자님의 갑작스런 죽음은 지금까지도 의문이지만, 나는 지금의 국왕 폐하께서 암살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 그럴 분이 아니야.” 둘째 아들이 왕좌에 오르기 일년 전쯤 그의 형인 첫째 아들과 마상시합을 하던 중에 왕태자, 즉 둘째 아들은 갑작스런 낙마로 사망했다. 그때는 알 테어 님과 키르케 님도 서로 사이가 좋았다고 하고 둘 다 국왕과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입장이었다. 알테어 님은 교황의 수족이 되어 왕당파와 싸우고 있는 지금도 적의 우두 머리라고 할 수 있는 국왕을 증오하지 않는 것 같았다. 천성적으로 선한 그녀의 성격 때문이리라. 그녀는 창백해진 몸을 침대에서 조금 일으키며 말했다. “내전의 시작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고 신앙을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권력을 잃기 싫은 자들의 암투 때문이었어. 둘째 왕자를 지지하던 자들은 왕위를 탐낸 첫째 왕자가 왕태자를 암살한 것이라며 몰아세우기 시작했지. 이미 극도로 노쇠한 왕은 판단력을 잃어 간신들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고.” “........” 나는 어째서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다시 풀어서 설명해 주려는지 알 수 없었다. “첫째 왕자는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했고 둘째 왕자의 대 부였던 교황께선 선왕과의 약속에 의해 첫째 왕자의 왕위를 인정할 수 없 다고 공표했지. 그리고 내전이 시작된 거야. 나도 키르케도........ 서로 갈라져서 싸워야만 했지.” 누구보다 친했던 알테어 님과 키르케 님의 사이가 무슨 이유로 극도로 나 쁘게 틀어져 버린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그 내전과 무 슨 관련이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내전은 4년째야. 왕국은 돌이킬 수 없이 황폐해져가고 있고 귀족 들의 착취와 부패는 극에 달했으며 어린아이조차도 동족끼리 칼을 들이대 는 일에 익숙해져가고 있어. 이건 애국심도 신앙심도 기사도도 아니야. 이 런 끔찍한 일에 가담하기 위해서 주작이 내게 힘을 준 것이 아니야.” 나는 지금 그녀가 남에게는 애써 숨기려던 그녀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내 마음 속을 휘젓던 막연한 불안감이 점점 확실하게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째서 교황청에서 도망치신 건가요. 사실을 말해 주세요.” “난 군을 회군시키고 돌아와 교황께 통촉을 고했어. 이제 첫째 왕자의 왕권을 인정하고 내전을 끝내자고. 더 늦기 전에 그러는 것만이 피로 얼룩 진 콘스탄트를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어.” “그, 그런 말을!” 성기사에게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하물며 무늬만 신전기사인 나도 그런데 성기사연합의 리더인 알테어 님은 오죽할까. 그런데도 감히 항명을 했다는 건가.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교황께선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불같이 화를 내셨지. 평소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시던 분이니까 배신감을 느낀 건 당연했겠지. 관례대로라면 교황의 뜻을 어긴 날 당장 참수해야 했지만 그래도 교황께선 내게 50일의 기회를 줬어.” “50일?” “응. 50일 안에 내가 한 말을 취소하면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고 하셨지.” 콘스탄트 교황파의 수장(首長)이자 주교(主敎)인 교황이 그 정도의 관용 을 베풀었다는 것은 교황이 얼마나 알테어 님을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테어 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진짜 고 집쟁이다. “그리고 그 날 밤, 키르케가 날 찾아온 거야.” “그 기습을 당하셨다는.......” “갑자기 싸움터에서 내가 사라지자 굉장히 화가 난 것 같더군.” 화가 난 키르케 님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다. “키르케는 그날 내게 국왕파로 오라고 제안을 했지. 둘이 힘을 합치면 교황파를 단번에 밀어내고 내전을 끝낼 수 있다고.” 그건 굉장한 의외였다. 알테어 님은 무섭게 증오하는 키르케 님이 그런 제안을 했단 말인가. 그 분도 내전을 종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거절했어. 교황을 배신하고 키르케와 함께 교황파를 척살하는 것은 옳 은 방법이 아냐.” “......아.”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안 봐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 화가 치밀어 오른 키르케 님의 분노가 그녀를 뒤덮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온, 널 찾아온 거야. 너하고 있으면 편해지니까 50일 동안만 이라도 마음껏 어리광을 피워보고 싶었던 거지. 어린애 같아서 미안.”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 그녀는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제 그 50일이 끝나 버렸네.” 그녀는 결국 50일 안에 교황청으로 돌아가 자신의 말 취소하지 않았다. 대체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기로 결심한 것일까. “미온. 이제 세 번째 소원을 말할게.” “세 번째... 소원?” “아주 간단한 거야. 지금 당장 베르스로 돌아가. 항상 고마웠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간단하게!” 마음속이 터질 것 같아 나는 커다랗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때 나는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돌렸다. “알테어 경의 말을 들으셨죠?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세요, 엔디미온 경.” 대체 언제 다가온 것일까. 내 앞에는 작은 체구의 나스타세가 칼을 뽑은 채 서 있었다. 그 칼끝이 내 목가를 향해 있었다. “너는.......” 알테어 님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스. 미온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기로 했잖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도 시간이 부족해서요. 알테어 경. 교황께선 지금도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명주작을 잃는다는 것은 콘스탄 트 왕국 전체의 커다란 손실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건가요.” “미안. 더 이상 동족과 싸우는 일에 내 힘을 쓰고 싶지 않아.” 그녀의 지친 목소리에는 지독한 체념이 서려있었다. 나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었다. “사실 저 아직 견습이라고요. 이 칼에 피를 묻히는 일은 성인이 된 다음 부터 하고 싶었는데........ 그럼 교황청 이단 심문관 나스타세의 권한으 로 교황의 권위를 모독한 이단자 알테어 엔시스의 모든 작위를 몰수하고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하겠습니다.” “잠깐. 미온이 떠난 뒤에 해줘.” 내가 떠난 뒤에, 라고? 이런 자살 여행에 날 들러리로 동참시켰으면서 이 젠 떠나라고? 그런 소원 들어줄 수 없어! 그렇게는 못해! 난 순간 그녀에 게도 나스에게도 그리고 교황청에게도 화가 치밀어 올라 나스의 어깨를 잡 았다. “말도 안 되는 짓 그만둬!” “엔디미온 경. 이 손, 놓으세요. 지금부터는 교황청의 일입니다. 당신은 관여할 권한이 없으니.......” “사람 목숨 빼앗아 가려는 주제에 공무원처럼 말하지 마!” 그때 나스로부터 날카로운 살기를 느꼈다. “그럼 당신도 교황청의 명령을 어긴 죗값으로 죽일 수밖에!” 그와 함께 나스가 몸을 돌려 내 심장을 찔렀다. 동시에 무엇인가 섬광을 번뜩이며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내 주머니 속에서 새하얀 빛이 터지면서 나스는 그 충격에 밀려나가 바닥에 주저앉았 다. “뭐, 뭐야.” 난 설마, 하는 표정으로 주머니 속에서 부적을 꺼냈다. 예전 사기꾼에게 샀던 녹슨 부적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진짜 이게 날 지금 지켜준 건가? 나스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치밀하시군요. 알테어 경.” 부적에선 알테어 님의 힘이 느껴졌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이 속에 힘을 담아 두고 내게 준 것인가. 나스는 다시 알테어 님에게 검을 들이댔다. 알테어 님은 방어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었다. “좋아요. 당신의 부탁이니, 엔디미온 경은 죽이지 않겠습니다.” “알테어 님! 뭐하세요! 정말 이렇게 죽을 건가요! 어서 막으세요!” 그러자 나스가 날 바라보며 비웃음을 보였다.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알테어 경이 이 혹한의 땅으로 온 이유는 스스로 자신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남(南)의 수호신인 주작은 최북단인 이곳에선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평소였다면 본능적인 능력으로 이 칼을 튕겨냈겠지만 이곳에서는 단지 힘없는 여자일 뿐이지요. 그러니 이제 포기하고 베르스로 돌아가시길.” 난 경악했다. 이곳이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었다니. 이곳은 스스로 죽기 위해 선택한 곳이었단 말인가. 여기 와서 그녀의 몸이 급격하게 나빠진 이 유도 힘을 잃어가기 때문이었다.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이런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니, 이런 꼴 사나운 일이 어디 있어! 그때 나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엇인가를 느낀 그는 창밖으로 걸어가더 니 사나운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낭패의 빛이 가득한 그가 입술을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제길. 분명히 미행은 없었는데........” 창밖에서는 마키시온 제국군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 러내고 있었다. 우리를 감시하는 자들은 단지 교황청만이 아니라는 이자벨 님의 경고가 머리를 스쳤다. #060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060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1. 순간 카론 경이 뽑은 칼이 내 목 언저리에 다가왔다. 시퍼런 칼날의 냉기 가 피부로 느껴졌다. 싸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던 카론이 입을 열었다. “엔디미온 경. 마지막 경고다.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 하겠다.” “...카론 경.”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내 목 근처를 스치자 금세 내 하얀 목덜미에서 핏물 이 툭툭 떨어졌다. 난 울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눈빛으로 카론을 쏘아볼 뿐이었다. 어쩌면 카론은 정말 이 자리에서 내 심장을 찌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와 내 생각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카론 경. 어서 저 자를 죽이시오!” 근처에 몰려 있던 영주들이 날 쏘아보며 외치고 있었다. 악의에 가득 찬 이 공기에 욕지기가 몰려온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카론 경 역 시 나와 같은 심정이겠지. 난 가여운 카론 경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주일 전 브리핑 시간. 키스가 아침부터 내게 외쳤다. “우후후. 미온 경. 오늘도 어김없이 신전 청소라는 성스러운 노동에 전력 투구해 주시기 바랍니다아.” “아아! 또!” 그렇다. 최근 나는 왕실의 온갖 잡일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전에는 불지 옥처럼 달아오른 신전을 알량한 빗자루 하나 들고 깨끗이 쓸어야 했고 오후 에는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본당에 뛰어가서 왕실에 놀러온 귀족들을 접대 해야만 했다. 그리고 저녁에도 녹아버릴 듯이 피곤한 육신을 질질 끌고 예 술청에 가서 그림을 배우는 귀족 자재들의 모델이 되어줘야 했다. 내가 무 슨 시지프스도 아니고, 이런 격무에 열흘 넘게 시달리다보니 안 그래도 가 벼운 내 체중이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밤이면 무시무시한 악몽에 시달리는 한계상황에 봉착해 버린 것이다. 왜 이런 꼴이 되었냐고? 키스가 말했다. “어머나. 미온 경. 그 불만 가득한 표정은 뭡니까아? 설마 당신의 목숨을 구해준 내 은혜도 잊고 반항하겠다는 의미인가요?” “아, 아냐! 하면 되잖아! 하면!” 크윽! 난 죽고 싶은 심정으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나는 키스에게 반항할 입장이 아니었다. 지난 2달간 키스가 왕실의 눈을 속 여 줬기 때문에 알테어 님과 그 엄청난 난리를 피웠는데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 키스에게 약점이 잡혀 버렸다는 것이다. 부하의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온갖 잡일을 다 시키다니! 빌어먹을 악덕 포주! 그때 옆에 있던 쇼탄 경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 비참한 꼴을 위로해 주 는 것이었다. “미온 경. 힘내. 2달이나 기사단을 비워놓고 처벌 받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잖아.” “고마워요. 쇼탄 경.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신전 청소 좀 같이...” “싫어.” 쇼탄 경은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제기랄! 저런 비정 한 사나이 같으니라고! 난 고개를 돌려 뚱하니 날 바라보는 지스 경을 향해 방긋 웃었다. “내 친애하는 룸메이트 지스킬 경. 그러니까 오늘 신전 청소.......” “혼.자.해.” 지스는 아예 먹고 있던 스프까지 들고 방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인 간에 대한 가벼운 불신 같은 것이 모락모락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어. 크리스. 오늘 청소 좀 같이...” “미, 미안해요. 저 오늘 지명이 있어서...” “응... 축하해. 잘 다녀와." 3차 시도 실패. 난 눈물을 글썽이며 랑시에게 들려 붙었다. “랑시 경! 오늘... 얼레?” 랑시는 갑자기 고슴도치마냥 웅크리더니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렇 게 온 몸으로 거부할 것 까진 없잖아! 그때 내 곁에 다가온 루이 경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미온 경. 이런 일이라면 나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내가 도와줄게.” “루, 루이 경! 고마워요!” “대신 하루 일당은 금화 한 닢. 선불로 줘.” “집어치우쇼.” 난 손을 뿌리치며 획하고 등을 돌렸다. 이다지도 동료애가 박복했단 말인 가! 이 모습을 지켜보던 키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아아. 미온 경. 전혀 인덕이 없군요.” “닥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사람 약점을 잡아서 끝도 없이 부려먹다니! 너무해! 난 눈물이 다 핑 도는 눈을 꽉 감으며 투덜거렸다. 이제 신전청소는 지겨워! 밤마다 민망한 모델 이 되는 것도 싫어! 게다가 오늘은 누드모델이라고! 절대로 안돼! 무슨 수 를 써서라도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랄라라. 오늘은 미온 경에게 무슨 잡.일.을 시킬까나아.” 망할. 남의 고통을 즐기고 있다니! 저 얄미운 빨간 눈을 손가락으로 팍 찍 어 버리고 싶다는 살기가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내 인생은. 그때였다. 갑자기 정문이 덜컥 열리며 뚜벅 뚜벅 걸어 들어온 자는 바로 카론 경이었다. 카론이 왜 여기에? 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론 경을 바라보았다. “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아? 오신 김에 차라도 들고 가시죠?” “시간 없어. 용건만 말하겠다.” 그와 함께 그의 얼음장 같은 시선이 날 향하자 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알테어 님 일 때문에 날 처벌하려고!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엔디미온 경. 자네를 일주일 동안 빌리겠다. 이미 전하의 윤허는 받았다.” “엥?” “헬스트 나이츠는 지금 중대한 기밀 임무를 수행 중에 있고 그 임무에 자네가 필요하다. 자세한 것은 본부에 가서 말하도록 하겠다. 따라오도록.” 날 빌려가? 기밀 임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결국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아침부터 카론 경에게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날 카론에게 대여해 준 키스는 '아아! 이제부터 잡일은 누구에게 시킨 단 말입니까아!'라는 속편한 비명소리나 지르는 것이었다. 당신의 부하가 무슨 짓을 당할지는 조금도 걱정이 안 된다는 거냐! 2. 카론 경의 몸에는 냉기를 뿜는 기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집무실은 밖의 날씨와는 전혀 무관하게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밖을 가득 메우는 새들의 재재거림마저도 이 안에만 들어오면 숨을 죽일 것만 같은 엄숙함이랄 까. 뜬금없는 말이지만, 정말 카론 경의 부인을 한번 보고 싶군. 이곳에 올 때까지 한 마디도 안하던 카론 경이 둘만 남게 되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에스테반 백작에 대해 알고 있나.” “예?” “에스테반 테시테리오 백작 말이다. 소문 정도는 들어 봤겠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에스테반 백작에 대 해 들어보지 못한 베르스 사람이라면 동굴 속에서 한 십년 쯤 두문불출한 은둔자나 아직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갓난아이 정도일 것이다. 그만큼 에스테반 후작은 최근 여러 곳에서 화젯거리였다. 내가 아는 사실을 대충 읊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남자. 28세. 현재 베르스 남부의 테시테리오 백작령의 영주 2) 그곳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수도 아스말의 사람들에게까지 인기가 높은 아이돌 귀족 3) 뛰어난 전술가며 건축에도 재능이 있어서 베르스 남부 국경을 지키고 그 곳의 변방 도시들을 부흥시킨 장본인 4) 뼈대 있는 가문의 후계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대영주의 반열 에 올라선 자 5) 본 적은 없지만 꽤 잘 생겼다고 들었음, 게다가 아직 독신 에스테반 백작은 벌써부터 그에 대한 연극이나 영웅시가 만들어지고 있을 정도로 최근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는 자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본래 시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굉장히 머리가 좋고 결단력 또한 훌륭해서 자신이 물려받은 영지를 금방 크게 키우고 남부 국경까지 훌륭하게 지켜낼 정도니까, 사람들이 그의 팬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게다가 보너스로 외모가 출중하고 나이스 바디라서 뭇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는 자라 고 하니, - 말하자면 조물주의 파격적인 편애를 받은 ‘0.01%의 인간’이라 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국경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 하에 전하의 부름에도 왕 실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그를 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런 거 물이 어쨌다는 거지? “지금 에스테반 백작이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와 수사 중이 다.” “모, 모반이요?” 카론 경의 말에 난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 같 은 소리지? “그런 권력자가 모반을 일으킨다면 남부 국경이 무너지는 것은 물론 나라 전체에도 큰 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위험하게 모반을 일으킬 이유가.” “나도 자네도 그 이유를 판단할 권한은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에스테반 백작 주변 영주들의 부하들이 에스테반 백작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백작은 그 사실에 대해 변명조차 하지 않고 있어.” “......!”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베르스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떠오르는 샛별 에스테반이 무슨 이유로 다른 영주의 부하들을 죽였단 말인가? 그런데 도 일언반구 변명조차 없이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의심받을만한 일이었다. 카론 경은 감정이 배제되어 있는 냉철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직접 은밀히 에스테반 백작을 조사할 것을 명하셨다. 모반의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왕실에서는 백작을 토벌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하 지만 그 전에 백작이 눈치를 채고 먼저 반기를 들면 일이 복잡하게 되니까 우리로서는 최대한 비밀리에 백작에 대해 조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그렇군요.” 이제 남은 의문은 그런 ‘은밀한 일’에 왜 나를 불렀냐는 것이다. 카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무적인 어조로 내 의문에 답해 주었다. “에스테반 백작은 일년에 한번 영지의 번영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항상 너희 신관기사들을 불러서 제사를 진행하곤 하지. 그리고 일주일 후에 그 제사가 시작된다.” “그, 그럼 절 부른 이유는...” “왕실에서는 자네를 에스테반 백작에게 보낼 것이다. 그곳에 가서 에스테 반 백작을 감시해라. 그리고 텔레마코스를 통해서 내게 모반의 징조가 보이 는지 목격한 그대로 내게 보고하면 된다. 그것뿐이야. 왕실 기사의 일원으 로서 수사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카론은 서랍을 열어 텔레마코스 사용료로 보이는 금화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말하자면 '첩보자금'이랄까. 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뭔가, 이 왕실에 와서 가장 큰 임무를 맡은 것 같다. 적어도 누드모델보다는 커다 란 임무이리라. 난 가슴이 벅차서는 기쁜 마음으로 외쳤다. “최대한 공정하게 조사해서 왕실의 수사를 돕겠..." “그리고 한 가지 더. 만약 자네의 정체가 발각될 시에 왕실은 자네에게 이 명령을 내린 사실을 부인할 것이며 자네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구조 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발각되지 않길 빈다.” “......폭언이로군요.” 이거 뭔가, 왕실이 나를 싼 맛에 썼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어쨌든 내가 하는 일은 암살도 토벌도 아니고 단지 감시하는 것뿐이니까, 그리 위 험한 일은 아닐 거라고 최대한 나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 길로 여행 가방을 챙기고 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열차에선 의외의 파트너가 동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061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3. 본론부터 말하자면 내 파트너의 이름은 쥬디스, 연하의 여자였다. 게다가 펠리오스의 무녀였기 때문에 앳된 외모에도 불구하고 갸름한 몸매가 참으로 매력적인 아가씨다. 새카만 흑발에 하얀 피부, 키는 내 어깨 쯤 될까? 이런 미녀와 함께 열차를 탄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임에 분명하다. 딱 하나, 무릎 에 올려놓은 저 무시무시한 칼만 없었다면 말이지! “저어. 쥬디스 양. 그 칼은 이제 좀 집어넣으시는 것이...” “참견 말아요.” “아 예.” 게다가 무지하게 쌀쌀맞은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고혹적인 눈웃음 을 지으며 검은 가죽 바지를 입은 다리를 꼬는 것이었다. 다부져 보이면서 도 황홀한 굴곡을 가진 다리로군. 타이트한 가죽 바지에 상아색 블라우스를 입은 모습의 무녀라니... 누가 오르넬라 님의 제자 아니랄까봐. “당신, 성녀님의 귀여움을 받는다죠?” “아 뭐. 귀여움이라기 보단...” 오르넬라 님. 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소개한 겁니까! 그녀는 검을 매만지 며 자신의 임무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무녀의 자격으로 당신의 제사를 돕기 위해 가는 것이지만, 그건 명 목이고, 실은 성녀님의 명령을 받고 당신을 경호하기 위해 온 거예요. 그러 니까 앞으로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아요. 그리고 전 무녀에요. 엉큼한 짓 은 더더욱 안돼요! 알아들었어요?” “아하하. 예. 그럴게요. 저도 기사걸랑요.” 경호하려는 거야 협박하려는 거야? 난 쓴웃음을 지었다. “뭐, 별 일 없을 거예요. 왠지 에스테반 백작이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백작은 흉악한 놈이야!” 쥬디스가 내 말을 끊으며 너무 단호하게 말하자 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 게 떴다. 쥬디스 정말 눈을 칼날처럼 치켜 올린 채 분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 고 있었다. 왜,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백작에게 사기라도 당한 건가? “왜 그렇게 화를 나는 거죠? 백작을 알고 있나요?”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깐 흥분해서...”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황급히 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오르넬라 님. 상당 히 콤플렉스한 경호원을 보내주셨군요. 쥬디스는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듯 눈을 꽉 감은 채 커다란 목소리로 외 쳤다. “아무튼! 백작은 위험한 인물이니까 내가 잘 경호할 수 있도록 항상 내 주변에 있어야 해요! 그리고 백작이 우리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 해서 처신하세요! 아셨죠!” 예. 예.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보다는 아가씨가 먼저 들통날까봐 걱정 입니다요. 그런데 으름장을 놓는 경호원 아가씨라니... 나름대로 귀여워 보 여서 웃음이 나왔다. 4. 백작의 영지는 남부 국경 부근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저녁이었다. 그 지방의 공기는 지방의 성격을 말해준다고 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번화가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빵과 옷감, 향신료와 화장품 냄새가 적당하게 뒤섞인 그럼 냄새였다. “와아. 진짜 화려하다.” 플랫폼에 내린 나와 쥬디스는 마치 촌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탄성 을 내질렀다. 솔직히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부근의 도시라면 아무래도 좀 낙 후되고 을씨년스럽다는 선입관을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 데 이 도시는 그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화려한 불빛들이 수놓인 불 야성(不夜城)의 거리가 우리들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인구도 무섭게 많아 보였고 그들 모두 제법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 우리는 마치 축제 한복판 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수도보다 더 살기 좋아 보이는 모습이다. 쥬디스가 애써 코웃음을 치며 이 발전된 도시를 비아냥거렸다. “흥! 이딴 걸로 자신의 추악함을 감추려고 해봤자!” 아니 이 아가씨는 왜 이리 죽어라고 백작을 싫어하는 거야. 난 반대하기도 뭐하고 맞장구 쳐주긴 더더욱 뭐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빨간 등불을 들고 있는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왕실에서 오신 분들이시죠?” “아 예. 그렇습니다만.” 16세 혹은 18세 정도로 보이는 이 건강미 넘치는 청년은 상냥한 미소를 지 으며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난 이 자가 에스테반 백작이 보낸 시종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알프레도 테시테리오, 이곳의 영주이자 저의 형님이신 에스테반 백작님을 대신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죠.” 건장한 체격의 그는 내 여행 가방을 정중하게 들고는 등불과 함께 앞장서 는 것이었다. 나와 쥬디스는 상당히 놀라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 다. 시종이나 시녀가 아닌 영주의 동생이 직접 마중을 나온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극진한 대우다. 그런데도 알프레도라는 청년은 백작 가문의 일원인데도 전혀 거만을 떨지 않고 자연스레 우리들을 안내하는 것이 었다. 게다가 수행원도 없이 평상복을 입고 혼자 왔을 정도로 간편한 분위기 지 않은가. ‘묘한 곳이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 저녁녘의 시가지를 지나갔다. 알 프레도가 지나갈 때마다 주변의 상인들이나 시민들이 그를 알아보고는 이 지방 특유의 과장된 몸집으로 존경을 표했고 그럴 때마다 알프레도 역시 그 들을 무시하지 않고 손을 흔들거나 반갑게 웃어 답을 해주었다. 자고로 귀족이란 앞에 보이는 평민들이 당장 고개를 조아리지 않으면 미친 듯이 광분하며 칼을 들이대고, 고개를 조아린다면 ‘이런 지저분한 것들! 썩 내 눈앞에서 꺼져라!’라고 윽박지르는 무서운 생물이다. 그런데 이곳에선 전혀 아니었다. “좋은 곳 같아.”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쥬디스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어린 애처럼 인상을 찡그린 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쥬디스가 왜 이러는지 정 말 모를 일이지만, 에스테반 백작과 무슨 나쁜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물론 물어봐도 대답해 줄 성격으로 보이진 않지만. ‘정말 이곳에 모반의 음모가 있는 것일까.’ 나는 에스테반 백작이 주변 영주들의 기사를 죽였다는 카론 경의 말을 다 시 한번 떠올리며 복잡한 심경에 빠졌다. “도착했습니다.” 1시간 쯤 걸어 시가지를 지나가 거대한 성벽이 어슴푸레한 저녁 공기 속 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곧 알프레도가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이곳이 백작의 성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우리에게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마차를 태우지 않고 걷게 만든 것 같았다. “진짜 크다.” 난 고개를 높이 치켜들어 백작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큰 성채는 처 음 봤다! 국경을 지키는 요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백작의 성은 마 치 바위로 만든 거인처럼 웅장하고 견고해 보였던 것이다. 5. 우리는 곧바로 에스테반 백작이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역시 안내자는 백작의 동생 알프레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접견실이 아닌 백작의 침실 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의아한 기분에 알프레도에게 물었다. “저어. 지금 백작께선 주무시는 중이신가요?” “하하. 아닙니다. 형님은 항상 새벽이 되어서야 주무십니다.” “그럼 왜 침실로.......” “워낙 바쁘신 분이라서요.” “......?” 난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일단 그의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설마 너무 바 빠서 침대 위에서 거사를 치루는 중에 우리를 알현하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그런 에로 백작이면 곤란하다고! 그건 그렇고 침실을 따로 분리된 방에 두는 것은 이오타 적인 취향인데, 그걸 생각하니 알프레도 백작은 꽤나 유행을 즐 기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드는군. 복도와 계단을 반복해서 걸어 성의 3층에 있는 백작의 침실에 도착하자 알 프레도가 문 앞에서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왕실에서 파견한 분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와.” 문을 통해 들려온 에스테반의 목소리는 기운이 가득 찬 밝은 목소리였다. 이윽고 알프레도가 문을 열자 향수 냄새가 나는 침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왔다. 침실 중앙에 서 있는 에스테반 백작은 내 예상 밖이었다. 뭐가 예상 밖이 었냐 하면, 동생 알프레도를 보고 형도 그처럼 좀 순박하고 얌전하게 생겼 을 거라고 상상했지만 올해로 28세라는 에스테반 백작은 해외에서 유학이라 도 다녀왔는지 엄청나게 세련되고 온 몸에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도시 남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색도 나처럼 밝은 금발로 동생의 갈색머리와는 전혀 달라서, - 난 한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차라리 내가 더 동생 같아 보이는군. 설마 염색이라도 한 걸까? “잘 왔네. 마중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 보다시피 지금 조금 바빠서.” 에스테반은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나에게 말하며 객쩍게 웃는 것이었다. 지금 그는 세 명의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한 명은 그의 머리를 매만 지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셔츠 손목에 커프스를 달고 있었으며 마지 막 시녀는 짧은 황색 부츠의 끈을 묶어주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예전 고객을 접대하 기 전에 저렇게 부산하게 옷을 입곤 했었다. 물론 내 쪽은 도와주는 사람들 이 시녀가 아니라 동료 남자들이었지만 말이다. 이 엄청나게 부산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우리들에게 동생 알프 레도가 다가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은 지금 무도회에 갈 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워낙 노는 것을 좋아하 시는 분이시라서요.” 그 말에 에스테반은 무척 섭섭하다는 듯 볼이 잔뜩 부어선 대꾸하는 것이었다. “알프레도. 하루 종일 일한 형이 밤에 잠깐 즐기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구박하면 서운해.” “구박이라니요. 감히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장난스럽게 상대를 콕콕 쑤시는 농담이 형제 사이에서 오갔다. 어째서 에 스테반 백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저 행동이 쥬 디스의 말대로 위선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백작들보다는 훨씬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직접 맞춘 것임에 분명할 세련된 옷을 갖춰 입은 에스테반 백작은 풍성해 보이는 보라색 리본으로 자신의 긴 금발을 묶고는 나와 쥬디스에게 다가왔다. “이름이?” “아! 저는 엔디미온 키리안.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이옵니다.” “작년까진 루시온 경이 왔는데 올해는 바뀐 건가. 의외로 검을 잘 다룰 것 같은데?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너 만한 미남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내가 여자였다면 분명히 반했을 거야. 아무튼 잘 부탁해.” “아하하하. 과, 과찬이십니다.” 나는 스스럼없이 내 어깨를 매만지는 에스테반의 눈동자를 보며 흠칫 놀랐 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매였던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 고, 난 이미 에스테반이 내 속마음을 간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 아가씨는?” “쥬, 쥬디스. 펠리오스의 무녀. 제사를 돕기 위해 왔어요.” 그녀는 마치 악마를 앞에 둔 것처럼 뒤로 물러서며 더듬더듬 말하는 것이 었다. 아아아! 그래서야 당장에 의심 받는단 말이야! 하지만 에스테반은 그 녀의 그런 모습에도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잡는 것이었다. “역시 펠리오스의 무녀답게 예쁘게 생겼군. 부디 내 영지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어.” 에스테반은 큰 키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소스 라치게 놀라서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고 그 표정을 즐기는 듯 웃으며 바라보 던 백작은 곧 문 밖으로 향했다. “무도회에 늦어서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같이 식사하지 못해서 미안하 군.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라도 내 동생에게 말하도록 해. 집안일은 모두 알프레도가 알아서 처리하니까.” 성공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말투가 빠르면서도 정확한 억양을 구사 하는 자였다. 남자 몸을 훑어보는 것에는 취미 없지만, - 업무상 슬쩍 훑어 본 바로는 굉장히 옷이나 향수의 센스가 좋은 자다.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 에 하얗게 굳은살이 박인 것을 보면 펜을 많이 잡아본 것이 분명하며 다부진 걸음걸이와 습관적으로 오른발이 앞으로 나오는 버릇으로 미뤄볼 때 검술에 도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좋아하는 색은 채도가 높고 명도가 낮은 보라색. 으음, 여간한 마스크로 서는 커버하기 힘든 색이지. 향수는 모조리 이오타 산에 잔향이 몸에 남아 있는 것을 봐서 자주 향수를 바꾸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스타일이다. 봉 제 선을 보아하니 입고 있는 셔츠는 국산이지만 옷감은 최상급 콘스탄트 산에 일류 제봉사가 아틀리에에서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들었을 맞춤옷이었 고 훌륭하게 무두질된 부츠 역시 주문제작이었다. 품속에 있을 회중시계 역시 보나마나 이오타 장인이 만든 것이리라. 결론 : 빈틈없음 역시 소문대로군. 분명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을 국가대표 바람둥이 임에 분명해. 그런데 아무리 봐도 모반의 음침한 냄새는 찾아볼 길이 없는 데 말씀이야. 그렇다고 카론 경에게 ‘에스테반은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리더 며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라고 보고를 올릴 수야 없는 노릇이라서 좀 더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그때 형과는 정 반대로 수더분한 알프레도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방을 준비해 봤습니다. 궁전처럼 화려한 곳은 없지만 그래도 이 성에서는 가장 좋은 객실을 비워 놨습니다. 가시죠." 형과는 정 반대로 수더분해 보이는 알프레도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를 따라 객실로 가던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물었다. “저 그런데, 왜 이렇게 성이 큰 거죠?” 어쩌면 당연한 의문일지도 모른다. 이 성의 크기는 외성벽까지 합친다면 비상식적일 정도로 거대했다. 아무리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더 라도 이건 너무도 컸기 때문에,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답에 대한 알프레도의 대답은 상식적이었다. “당연히 그건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 영지의 사람들을 이곳으로 대피시키 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충분한 식량도 성 지하에 확보해 두고 있습니다.” 난 솔직히 그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모든 백성들을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 해서 이렇게 커다란 성을 지었단 말인가. 다른 성들도 이런 공간이 있긴 하 만 그 규모와 견고함은 이 성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낭비벽이 심하기 때문에 전쟁을 대비한 식량을 비축해 두는 일도 절대 하지 않는다. 어쩌면 상식적인 것은 에스테반 백작이고 다른 영주들이야말로 비상식적으로 방어에 허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곳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이 단단한 성벽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또 얼마나 백작을 칭송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곳 이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몰려오는 것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걸까?’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흘낏 쥬디스를 바라보았다. 아까 에스테반을 만난 뒤부터 그녀는 복잡한 심경에 빠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었다. 날 경 호해 줄 생각이 있긴 있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객실에 도착했다. #062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6. 이쯤에서 정리해 보자. 현재 에스테반 백작은 왕실로부터 모반의 의심을 사고 있고 그 증거로 주변 영주들의 기사들을 살해하고도 그것에 대해 어떤 변명도 없다. 확실히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수사 책임자 카론 경도 날 이곳에 보내 분위기를 살피도록 한 것이다.(어쩌면 무척 위험 할지도 모르는 이곳에 냉정하게 날 보내다니, 아무리 일이라지만 카론 경에 게 조금은 서운하군.)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본 바로 에스테반은 별로 모반의 위험한 냄새를 풍 기는 자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고 꽤 성격도 좋고 수완도 뛰어나서 영지도 무척 잘 관리하고 있어 보인다. 쥬디 스는 죄다 우리를 속이려는 짓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낌새는 없다. 앞으로 제사까지는 일주일가량 남았다. 그때까지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텔레마코스를 통해 카론 경에게 보고하는 것이 내 임무다. “문제는 내가 탐정이 아니란 말씀이야.” 난 텔레마코스 이용비로 카론 경이 준 금화를 꺼내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뭐 솔직히 나도 이 글의 주인공인 이상 기똥찬 추리력으로 증거를 캐내서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진실을 밝혀내겠다!'라고 멋들어지게 외치고 싶긴 하단 말이지.(할아버지는 목수였다.) 하지만 그렇게 폼 잡았다가 생사람 잡 으면 상당한 개망신이 되는 거고, - 무엇보다 비빌 언덕이 있어야 음모를 파 해치든가 해보지. 아무리 봐도 노는 것 좋아하는 백작일 뿐인 걸? 카론 경도 처음부터 내게 전문적인 조사는 기대하지 않았는지, 본 그대로 만 보고하라고 말했다. 백작도 제사 전문 출장기사 스왈로우 나이츠라면 별 로 의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내일 이곳 사람들 붙잡고 탐문 조사나 해보자.” 나는 목욕이나 해야겠다는 심산으로 웃옷을 훌렁 훌렁 벗어 침대에 집어 던지다가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응?” 무심코 주변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이 안락한 객실에서 심상찮은 부분을 느꼈던 것이다. 알프레도의 말마따나 궁전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간적인 제약이 심한 성의 객실이라고 하기에는 최선을 다해서 정성스럽게 만든 곳이었다. 썩거나 벌레가 생기기 쉬운 나무 바닥에는 기름을 발라 청결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창문이 조그맣기 때문에 을씨년스럽기 쉬운 회백색의 벽에도 풍경 화를 걸어 놓아 분위기를 살리고 테이블은 싱싱해 보이는 꽃으로 잘 장식되 어 있었다. 테이블 밑에는 충분한 여분의 양초와 깨끗한 리넨 천들이 보관되 어 있었고 옷장 안에도 잠옷이나 가운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소파와 침대의 패브릭 역시 이런 성 안에서 답답해지기 쉬운 손님의 기분을 배려해 서 화사한 색으로 선택되어 있었다. 아마도 센스가 좋은 에스테반이 직접 고 른 천이리라. 이런 것을 두고 사람들은 ‘고객감동의 서비스’라고 부른다. 남부러울 것 없는 백작이 성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이 정도로 수고한다는 것은 실로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만약 이것마저 위선이라면 에스테반은 정말 엄청나게 치밀한 악당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내 시선을 잡아두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물건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던 것 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칼이...”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장검을 향해 걸어갔다. 처음에는 단지 장식검이 아닐 까,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저 투박한 모습은 장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 가 칼집에서 뽑아보자 날카로운 검날이 번뜩였다. 분명 자주 손질해 두는 '살아 있는 검'이었다. 이토록 날을 바짝 세운 장식검 따윈 없다. 게다가 손님의 방에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이런 오싹한 흉기를 놔두는 경우도 상식 밖이다. 만약 이것이 에스테반의 ‘배려’라면, 대체 무엇을 위 한 배려인가? 자다가 쥐라도 튀어나오면 이것으로 두 동강 내라고? 농담이 라도 그럴 리는 없을 거다. 이건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검이다. ‘이런 것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난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자 기 방에 이런 서슬 퍼런 칼이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일이지 않은가! “으음. 분명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아무리 근엄하게 카론 경의 흉내를 내봐도 도무지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구 먼. 그렇다고 이 칼이 모반의 증거도 아니고 말이야. 커다란 흥신소를 운영 하던 고객님이 해줬던 ‘불륜 서방의 뒷조사든 살인 사건 수사든 오직 중요 한 것은 확고부동한 증거뿐이야. 근거 없는 추리는 겉멋 들린 아마추어나 할 짓이지.’ 라는 말이 떠오르는군. 나는 일단 탐정 흉내는 집어치우기로 하고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며 욕 실로 걸어갔다. 에스테반 백작이 굉장한 수완가라고 여겨졌던 이유 중 하나 는 바로 이 성의 수원(水原) 때문이다. 성 내부에 커다란 우물들만 너덧 개 가 넘었던 것이다. 그렇게 풍부한 물 공급원을 가지고 있으니, '성 주제에' 욕실 또한 많을 수가 있었다. 미관만 생각하며 엉뚱한 곳에 성을 짓는 대부 분의 귀족들은 누릴 수 없는 풍요로움이리라. 정말 이곳은 농성을 벌여도 족히 5년은 버틸 수 있을 듯한 철옹성이지 않은가. “아아 어쨌거나 따뜻한 목욕물이 있었으면 좋겠다아.” 나는 가볍게 흥얼거리며 긴 금발을 풀어헤친 뒤에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곳에는 마침 가슴을 감고 있는 하얀 천을 풀고 있는 쥬디스가 서 있었다. “......농담?” 아니, 정말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나와 그녀의 눈이 경쟁이라도 하듯 동시에 휘둥그레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도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그런 상황. 대체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라는 표정들이었다. “......” “......” 이건 마치 정글 속에서 살인 곰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도망치기 도 가만히 서 있기도 곤란한 입장. 억울한 일이지만 이럴 때 절대적으로 욕 을 먹는 것은 남자 쪽이다. 그녀는 경직된 표정으로 조금씩 발끝을 움직이 며 곁에 놓아둔 검으로 손을 뻗고 있었고(욕실까지 칼을 가지고 들어오다니!) 나도 막 벗어던지려던 바지로 몸을 가리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서는 최대 한 침착하게 문을 닫고 욕실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난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 문은 쥬디 스의 욕실과 통하는 디멘션 도어(dimension door)?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집어치우자. 추리해보고 자시고 답은 자명해! 그렇다! 분명 그녀는 지금 내 욕실에 들어가 있는 거다! 뻔뻔하게 스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내가 다시 욕실 문을 확 열어젖 혔다. 엉큼한 짓 하지 말라고 자기 입으로 협박해 놓고는! 이런 사악한 무녀! 욕실 안에는 검을 뽑아 든 쥬디스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와 그녀가 동시에 찢어져라 외쳤다. “야! 왜 남의 욕실에 들어오고 난리야!” 7. 내가 (자칭) 경호원의 칼에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전모는 허탈할 정도로 시시했다. 나와 쥬디스의 객실 사이에는 욕실이 하나 있으며, 그 욕실은 두 객실에서 동시에 이용하도록 만들어 졌던 것이다. 요 컨대, 내 방 욕실 문을 열어도, 쥬디스의 방 욕실문을 열어도, 똑같은 욕실 이 나오는 충격의 구조였다. “그러니까 공동욕실이다, 이거로군.” 나는 욕실 양쪽에 있는 똑같은 모양의 문을 번갈아 가며 바라본 뒤에 한숨 을 내쉬었다. 물론 항상 물을 아껴야 하는 성으로서 이런 욕실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일이기는 하다. 대부분의 성들은 기껏 해봐야 내부에 청결과는 담을 쌓은 집단 목욕시설이 있는 정도거나 심지어는 우물가에서 대충 노천 목욕을 해야 하는 무성의한 성채들이 대부분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동욕실이면 공동욕실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나는 바락 화를 냈다. 조금만 더 타이밍이 나이스 했다면 아주 민망한 꼴 을 당할 뻔 했잖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쥬디스가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다시 욕실 문을 열고 돌아와서는 그것 보라는 듯한 얼굴로 내게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이것 봐! 역시 모반을 일으킬 놈들임에 분명해!” “얼레? 왜 나한테 화를 내냐. 그리고 공동욕실과 모반 사이에 대체 무슨 심오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요?" “아, 아무튼 에스테반은 나쁜 놈이야.” 쥬디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작을 모반 쪽으로 밀어붙이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카론 경에게 '에스테반 백작은 모반을 일으킬 것임에 분명합니다!' 라고 해봐야 '그 이유가 뭔가.'라는 차갑게 대답만 돌아올 테고 '그건 바로 공동욕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보고한다면... 그때는 아무리 농담 이었다고 사정하더라도 왕성에 돌아가는 데로 참수를 당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도 쥬디스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리 박박 우긴단 말인가.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프레도 입니다.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신지요.” 아앗! 우리를 공동욕실에 처넣어 놓고 시침 뚝 뗀 장본인! 나는 뭐라고 한 마디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흡사 아수라와 같은 표정을 짓고 문을 열었지만. “아아. 역시 아직 안 주무셨군요.” 역시 천진난만하게 방긋 방긋 웃는 알프레도 군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화 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항의는 고사하고 어수룩한 목소리로 엉뚱한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돼서요.” 뒤에서는 쥬디스가 ‘확실하지 못한 남자로군.’이라면서 콧소리로 빈정거리 고 있었다. 크으윽! 어쩌라고! 백작의 동생을 한 대 갈겨줘야 속이 시원하 겠냐! 알프레도는 쥬디스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 것이었다. “벌써 형님으로부터의 선물을 받으셨나 보군요.” “선물?” “두 분의 모습이 꽤 서로 어울린다고 감탄하신 형님께서 무도회로 떠나시 며 제게 귀띔해 주셨습니다.” “뭐, 뭘요?” “욕실의 구조를 알려주지 말라고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알프레도는 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나 하는지 여전히 순박하게 웃고만 있었지만 나와 쥬디스의 마음은 이미 저 하늘로 두 둥실 올라가 버린 이후였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정말 모반을 일으킬 위험 한 놈들일지도 몰라!’라는 두려움을 참을 길이 없었다. 이런 ‘몹시 짓궂은 호의’에 즐거워할 인간은 키스뿐일 거다! 시골 청년 알프레도는 여전히 사투리가 조금 섞인 느릿한 말투로 내게 말 했다. “예전부터 이 지방에선 우호의 표시로 짝을 지어주는 풍습이 있거든요. 이미 성의 식구들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기, 기대하다니! 뭘! 그리고 힘내면 곤란하다고요!” 이러려고 온 거 아냐! 그러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벅 인사를 마친 '사랑의 전령사' 알프레도는 어느새 어둑한 복도의 끝으로 사라져 가고 있 었다. 기다려! 이 사람아!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예?” 촛불을 든 알프레도는 발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보았다. 가까이 가기만 하 면 반사적으로 미소를 띠는 사람이라서 몰랐는데, 무표정한 모습을 보니까 나름대로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게가 느껴지는 자였다. “어째서 객실에 칼을 걸어 놓은 거죠?” 그 질문에 쥬디스도 ‘어? 내 방만 그런게 아니었어?’라고 놀라고 있었다. 역시 모든 방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 질문에 알프레도는 다시 항상 똑같 은 미소를 띠며 설명해 주었다. “적들이 들이닥쳤을 때 재빨리 싸우기 위해서, 입니다.” “적들? 그러니까 국경 밖의 악투르 왕국?” “아니요. 꼭 적이 국경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알프레도는 모호한 말을 대답 대신 남기며 저 멀리서 다시 고개를 숙여 보 인 뒤에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 난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혀 그가 사라진 어둑한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정말 모반을 일으킬 자들인지는 모르 겠지만, 뭔가 이 성에는 숨겨져 있는 응어리가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을 보니, 쥬디스가 칼을 뽑아 내 욕실 문손잡이를 잘 라내 버리고 있었다. “......” “좋아! 이 정도면 들어올 수 없겠지?” “이보세요. 무녀 씨. 지금 대체 뭐하는 짓?” 내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무리 상냥한 나라도 이런 폭거마저 참을 수 가 없다! “남자와 같이 욕실을 이용하는 것 따위를 허락할 것 같아? 들어오면 죽을 줄 알아!” 우아아! 네 허락 따윈 필요 없어! 거긴 내 욕실이기도 하다고! 시간대를 나눈다든지 노크를 해보고 들어가는 슬기로운 방법들 다 집어치우고 무식하 게 문손잡이를 날려 버리다니! 그리고도 정녕 네가 베르스의 자애로운 성녀 냐! 이 여신의 탈을 쓴 포악한 마녀! 라는 외침은 그녀가 칼을 들고 있기 때문에 일단 접어 뒀다. “저어. 그럼 나는 어디서 목욕을...” “몰라. 내가 알게 뭐야. 우물가에 쭈그려 앉아 하든지!” ??"내가 그런 궁상을 떨 것 같아!" 그러나 그녀는 신경질 적으로 고운 머리칼을 확 귀 뒤로 넘기더니 빽 소리 를 치고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누가 오르넬라 님의 제자 아니랄까봐... 저 아가씨, 대체 날 경호해 줄 생각이 있긴 있는 걸까? 난 한마디도 못하고 보내주는 것은 억울해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는 그녀에게 외쳤다. “너 솔직히 말해! 실은 날 들들 볶으라고 오르넬라 님이 파견한 거지!” 그러나 그녀는 대답 대신에 문을 쾅 닫아버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 는 것이었다. 오르넬라 님. 멀리 떨어져 있다고 방심했더니만 이젠 원격조 종으로 날 괴롭히는 겁니까! 갑자기 오르넬라 님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 다. ‘난 어쨌든 성녀니까 무슨 짓을 해도 천국 가거든? 오호호호. 내 면죄부 살래?’ .......카론 경. 갑자기 이 임무의 난이도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나는 하 얀 타월을 잔뜩 들고는 '우물가. 우물가.'를 중얼 중얼거리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달도 밝고 별도 밝고 기분도 (여러 가지 의미로) 반짝 반짝 거리 는 밤이었다. #063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8. 아침이 되자 우리가 안내받은 곳은 본성 1층의 식당이었다. 말하자면 에스 테반 백작과의 조찬(朝餐)이라고나 할까. 나는 가까운 곳에서 백작을 관찰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정작 백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프레도가 지정해 준 의자에 앉은 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에스테반 공께서는 아직 주무시는 건가요?” 어제 신이 나서는 무도회에 갔으니 지금까지 잠들어 있다고 해도 그리 이 상한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단정한 옷을 입은 알프레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형님께서는 산적을 퇴치하기 위해 나가셨습니다.” “아 예. 그렇.....,.. 얼레?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적이라니? 아침부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새벽녘 영지 남부에 산적이 출몰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형님은 그 들을 토벌하시기 위해 심복들과 함께 나서신 것입니다. 저도 같이 가고는 싶지만, 아무래도 저마저 성을 비워둘 수야 없으니까요.” “백작께선 원래 직접 산적을 토벌하시나요?” “예. 무력이 필요한 일에는 항상 직접 나서십니다.” 보통 이런 일에는 사병을 파견하기 마련이고 성격 나쁜 영주의 경우에는 백성들에게 돈을 받고 병력을 보내주기도 한다. 적어도 이런 위험천만한 일 마다 일일이 직접 나서는 영주는 에스테반 외엔 없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하드코어 백작이 존재했다니! “검을 써야 하는 일은 귀족의 가장 숭고한 의무이자 천한 권리이니, 누구 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 형님의 입버릇이지요.” 알프레도는 선문답 같은 말을 남기며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난 포크를 입 에 문 채로 눈을 깜빡깜빡 거렸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 지 비장하고도 멋진 말이지 않은가! ‘아무튼 무도회로 밤을 새다가 곧바로 산적을 토벌하러 출전이라. 힘도 좋으셔.’ 역시 쥬디스는 식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도 백작을 싫어하는 것 같군. 결국 식사는 나와 알프레도 그리고 백작의 가신(家臣)에 해당하는 자들이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에서 사치스러운 대 접받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먹고 있는 이 토속적인 음식들도 평민 들의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으니까 말이다. 알프레도가 자신 앞에 놓인 스 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엔디미온 경과 쥬디스 님을 대접하기 위해 제법 음식에 멋을 부렸습니다.” 아? 이게 멋을 부린 거라고? “평소에는 아침으로 대충 찐 감자나 잡곡 빻은 것을 염소 젓에 섞어 먹는 정도입니다. 사실 별로 사치부릴 돈이 없거든요. 하하. 실망하셨나요?” “아, 아뇨. 그럴 리가.” 사실 에스테반 백작을 흠모하는 수도의 귀부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 궁핍함에 눈물을 흘리며 당장에 산해진미를 특송으로 선물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반이 정말 돈이 없어서 이러고 있을 리가 없다. 모르긴 몰라 도 재산으로 치자면 수도에서 거들먹거리는 귀족들보다 많을 거다. 그러니 까 이들은 스스로 선택한 궁핍함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구두쇠와는 다른 것이다. 예전 아이히만 대공이 해준 말이 있었다. ‘공정한 권력자는 항상 가난한 법 이지. 왕이 가난할수록 백성들은 풍요로워 지는 것이 섭리야.’ 대공의 논리 에 따르자면, 에스테반은 왕의 신념을 가진 자가 아니던가. 물론 그것이 곧 모반의 증거는 아니리라. ‘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모반의 증거라고 우겨대겠지.’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떨쳐내 버렸다. 주제넘은 판단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때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엔디미온 경. 좋은 아침이야.” 이 바리톤 억양은 분명 에스테반의 목소리? 산적을 잡으러 간 것이 아니었 나? 나는 반갑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아. 놀랐나 보군. 미안, 미안. 옷을 갈아입고 왔어야 하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말이야.” 태연하게 웃는 에스테반의 모습과는 달리 그의 옷은 이곳저곳 찢겨진데다 가 시뻘건 피에 곳곳이 젖어 있었다. 게다가 그 옷은 어제의 무도회 복이었 다. 그럼 설마 무도회 중에 산적 출몰 보고를 받고 곧바로 출진한 뒤에 옷도 안 갈아입고 지금 돌아온 것이란 말인가? 알프레도는 형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산적들은 모두 처리하신 건가요?” “응. 예상했던 대로 그 놈들은 산적이 아니라 산적을 가장하고 영지에서 약탈을 하던...” 툴툴거리며 그렇게 말하던 에스테반은 날 보더니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 고는 ‘배고파. 밥 줘.’라고 흥얼거리며 자신의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응? 지금 분명히 나한테 뭘 숨기려는 것 같았는데? 알프레도는 젖은 수건을 가져오며 형 에스테반에게 말했다. “그래도 옷은 갈아입고 오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좋고 자시고 간에 여기가 전쟁터도 아닌데 피에 절은 옷차림 그대로 밥을 먹는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냐고! 만약 이 자리에 쥬디스가 있었다면 정말 기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동생이 건네 준 수건으로 이 마와 귓가의 피자국을 대충 닦아내며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왔다가는 식사 시간이 다 끝나 버리잖아? 어려서 부터 식사는 꼭 제때 하라고 교육을 받아와서 말이야.” 참으로 실없는 소리였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농담일지 몰라도 에스테반의 몸 곳곳에 묻어 있는 산적(혹은 산적을 가장한 누군가)의 피는 농담도 장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십 명을 칼로 베어버리고 태연하게 돌 아와서 고기를 입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쥬디스가 느꼈던 위압감도 이런 것이었을까. 에스테반은 나에 비해 훨씬 선이 굵고 남자답게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러니까 속칭 ‘장모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지만, 상당한 미남은 미남이다. 물론 수도의 아가씨들은 에스테반이 카론 경처럼 파리한 살결에 빙안(氷眼)을 가진 쿨한 미청년쯤으로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다. 그들이 이 진짜 모습을 봤 다면 ‘아니! 이 떡대 좋은 머슴은 누구야!’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콤플렉스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는 밝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절대 로 적을 만들지 않을 것 같은 호감이 있는 반면 일단 적이 되면 사정 봐주 지 않고 척살해 버릴 것 같은 존재감을 지닌 자였다. (이런 말하면 곤란하 지만) 최소한 우리 만두가게 아저씨보단 왕다워 보인다. “엔디미온 경.” 식욕 좋게 고기 조각을 입에 넣던 에스테반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그가 날 바라보 자 어린애처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 왜, 왜 부르신 거죠?”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하하. 역시 옷이 이런 꼴이라서 당황하고 있었 나 보군.” 에스테반은 너털웃음을 짓다가 반짝거리는 눈매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먹고 같이 사냥 가자.” “사, 사냥이요?” “근처 산에 커다란 멧돼지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거든. 경의 사냥 솜씨 를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런데 멧돼지 잡을 줄 아나?” ........멧돼지라. 잡긴 잡아봤습죠. 나는 난감하게 웃었고 에스테반이 먼 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옷 갈아입고 출발하자고. 쥬디스 양도 참여했으면 좋겠군. 하하. 기대되는 걸?” 그리고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식당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신이시 여, 저 지치지 않는 정력의 화신이라니. 새벽 내내 파티를 즐기다가 아침에 는 산적을 잡고 오고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곧바로 사냥을 나간다는 것은, 착실하게 살고 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기대되는 걸... 이라니. ‘정말 오늘 살고 말 것처럼 바쁘게 사는군.’ 보는 내가 다 숨이 다 차서 한숨을 내쉬었다. 9. 에스테반과의 사냥에서 의외의 사실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절대 참여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쥬디스가 생뚱맞은 표정이긴 하지만 졸래졸래 뒤를 따 라왔다는 것이고(물론 ‘나쁜 백작으로부터 널 경호해야 하니까 따라가는 것 뿐이야.’라고 쏘아붙이긴 했다.) 두 번째의 의외는 사냥에 참여한 사람은 정말로 에스테반과 나 그리고 쥬디스 뿐이라는 것이다.(알프레도 조차도 동행 하지 않았다.) 보통 귀족들의 사냥이라 하면 편집증에 걸린 냥 엄청난 수의 수행원들 속 에 안전하게 둘러싸여서 귀부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너스레를 떨며 활시위를 당기는 법인데... “정말 이렇게 가도 되나요?” 난 내 쪽에서 도리어 걱정이 되어 에스테반에게 물었지만 검 한 자루에 활 하나, 가죽 배낭 달랑 찬 백작은 설렁설렁 싶은 산속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산짐승들이라는 것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내가 온몸으로 증명한 바가 있다. 잘못하면 사냥하기는커녕 그 놈들에게 사냥당할 수도 있 는 것이다. 그런데도 백작의 저 유유자적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에스테반이 내 불안감을 느꼈는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전쟁이라도 치룰 것처럼 잔뜩 무기를 들고 게다가 병사들까지 몰고 간다 면, 그건 이미 사냥이 아니지. 짐승들과의 공정한 대결이 아닐뿐더러 무엇보 다 재미도 없잖아?” 그의 성격 유형이 스릴을 즐기는 쪽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자신이 호랑이나 늑대에게 물려 죽으리라는 두려움은 털끝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셋은 별 다른 말도 없이 인적이라고는 찾을 길이 없는 산속으 로 점 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고 주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옮겼다. 활을 쏘는 것은 배워본 적도 없으니 내가 쓸 수 있는 무기라고는 칼 한 자 루 뿐이었다. 알프레도가 빌려 준 제식 장검이었다. 나무가 많은 이런 산중 에는 그리 어울리는 무기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 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 고 알테어 님이 말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산행이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에스테반은 오직 출몰했다는 멧돼지의 흔적을 뒤쫓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지 다른 사냥감은 찾아보지도 않으며 걸 음을 재촉하는 중이었고 언제부터인가 등 뒤에서부터 쥬디스의 불규칙한 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검술의 달인일지는 몰라도 확실히 체력적 으로는 남자에 비해 약한 것이다.(알테어 님이나 키르케 님처럼 여자이기 이전에 아신 급은 사람들은 논외로 치자.) 특히나 울퉁불퉁하고 발이 푹푹 꺼지는 이런 산길이라면, 익숙하지 못한 자들은 금방 체력이 바닥나기 마련 이다. 쥬디스는 산행 경험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쯤에서 쉬자고 말해도 괜찮은데도 그녀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에스테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러다간 사냥은커녕 제 풀에 지쳐 쓰러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쥬디스. 괜찮아?” “사, 상관하지 마.” “상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그녀는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검을 지팡이 삼아 가쁜 숨을 뱉어내는 것이었다. 아낙네, 거 말 고집일세.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아무래도 쉬어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고개를 돌려 에스테반에게 외쳤다. “이쯤에서 쉬어가....... 얼레?” 없다? “에스테반 공!” 이, 이 양반, 어디 간 거야! 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산속이란 본래 어디를 둘러봐도 비슷비슷해 보이는 자연이 마든 미로다. 이런 곳에서 안내자를 잃었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상황, 곧바로 조난으로 이어지고 마는 것이다. “백작 님! 같이 가요! 여기로 돌아오세요!” 내가 소리 높여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장난이 아니다. 그새 멀리 떨어져 버렸단 말인가! 그때 쥬디스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무 것도 몰라. 백작이 어떤 놈인지.” “뭐?” 난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비웃음에 찬 눈매로 날 바라보 며 입을 열었다. “너, 정말 백작을 믿고 있어?” “믿고 자시고 간에, 백작이 우릴 해치기라도 한다는 거야, 지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백작이 네 정체를 알고 있다면, 지금 이곳에서 사고를 가장해서 죽일지 도 모르지. 넌 왕실의 밀정이잖아." “사람, 함부로 의심하는 게 아냐!”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니었지만, 난 순간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녀는 지금 이 상황도 계획적이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의심하지 말라고? 당신, 차암 착한 남자네.” 대체 쥬디스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는 살기가 따갑게 다가오자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모르는 백작의 진실은.......” 그때였다. 사방에서부터 조여 오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 스럭거리는 소리, 그르렁거리는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 고 있었다. “뭐, 뭐야.” 대낮인데도 마치 동굴처럼 어둑한 숲 사방에서 샛노란 안광이 나타나 우리 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 수는 대략 잡아도 열 마리 이상. 쥬디스가 날 카롭게 눈을 치켜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테반, 이 나쁜 자식.”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내는 그 시커먼 동물의 정체는 바로 거대한 개였다. 드러낸 송곳니 사이에서 침을 뚝뚝 흘리는 송아지만한 맹견들이 사방에서 우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늑대도 아니라 개가 이렇게 떼거리로 몰려들다 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훈련받은 사냥개다!’ 군살 없이 탄탄한 근육을 키운 모습이라든지 섣불리 덤비지 않고 조금씩 조여 오는 이런 치밀한 행동은 이 개들이 인간에 의해 훈련받은 수렵견들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쥬디스의 말대로 모 든 것이 백작이 계획한 함정이었단 말인가. 키르케 님이 해준 조언이지만, 잘 훈련된 사냥개들은 여간한 암살자 이상 의 살인병기라고 한다. 본능적으로 기척을 숨기고 급소를 노리는 법을 아 는 놈들인 것이다. 실제 마키시온의 마라넬로 황제가 정적(政敵)들을 암살 할 때 즐겨 쓰는 방법이 바로 특수하게 훈련된 엽견(獵犬)이라는 말이 있 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후각을 가진 그 짐승들은 목표가 어디에 숨어 있어 도 찾아내서 죽이고야 마는 놈들인 것이다. 아무리 이런 산속에 있더라도 엽견들은 풀어놓는 순간 순식간에 자취를 추적해 와서 목표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야 만다. 나는 칼자루를 꽉 쥐며 짜내듯이 말했다. “백작이 뭐든 간에 어쨌든 지금은 이 놈들을 처리해야 겠군. 제길. 어째 서 나는 조용히 넘어갈 때가 없는 거지.” 쥬디스는 내 등에 자신의 등을 밀착하며 조금 놀란 듯이 물었다. “너, 검 쓸 줄 알아?” “유명한 분에게 조금 배웠어.” 이래봬도 명주작 알테어 님의 (비공식) 수제자다! 축생한테 죽을 성 싶냐! 그리고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에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엽견들 앞에서 촤앙! 검을 뽑았다. 그 순간. “우아아아아악! 이게 뭐야!” 칼날이 없잖아! 뭐, 뭐, 뭐야! 이 칼은! 그 순간 사냥개들이 사방에서 튀어 올랐다. #064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우아아아아악! 이게 뭐야!” 칼날이 없잖아! 뭐, 뭐, 뭐야! 이 칼은! 그 순간 사냥개들이 사방에서 튀어 올랐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내리며 눈을 감았다. 이 힘만은 끝까 지 숨기고 싶었는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내 몸속에서부터 강렬한 기운이 솟구쳐 올라와 검을 시퍼렇게 휘감으며 마법의 칼날을 만들어 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마치 고요한 검무(劍舞)를 추는 듯 기합 소리도 없이 검 기를 뿌렸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푸른 검기들은 엽견들의 몸을 순식간에 토막 내기에 충분했다... 라는 전개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아아아! 이거 어떻게 좀 해봐!” 고립무원, 사면초가, 절체절명, 사생관두. 날도 없는 이 허접한 칼로 뭘 어쩌란 말인가! 눈 뒤집힌 개들이 광분을 하며 산지사방에서 달려들고 있었 다. 이런 분위기에서 초연하게 눈을 감고 진정 해봐야 엽견들도 같이 진정 해 주지 않는 이상, 조금도 상황개선에 도움이 안 된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게 옳은 판단인지 아닌지는 모르 겠으나, 내가 이 개들의 사육사였다면 목표의 목덜미나 무기를 든 오른 팔 목을 노리도록 교육시키겠다. ‘도박이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일부러 칼을 뽑아든 오른 팔목을 들어 개들에게 노출 시켰다. 분명 이건 상대를 벨 수 없는 칼이지만 엽견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제대로 교육받은 모범적인 살인견들이라면 목표의 무기부터 무력화시 키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이 적중했는지 첫 번째 개가 내 팔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타아아앗!” 난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긴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엽견의 초점이 내 오른 팔목만을 향한 순간 곧바로 쫙 뻗은 내 다리 끝을 날아드는 엽견의 배 에 찔러 넣었다. 발끝에서부터 묵직한 감촉이 느껴진다. 깨앵! 나 자신도 놀란 필살의 발차기에 달려들던 개가 나가떨어지자 다른 엽견들 역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이 충실한 살인병기들은 곧바로 위 치를 바꾸며 다시 내게 뛰어드는 것이었다. “비켜!” 날카롭게 소리 지른 쥬디스가 내 앞으로 뛰쳐나가며 검을 내리그었다. 내 눈앞에서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고 그와 함께 달려들던 엽견 두 마리 가 연속적으로 두 동강이 났다. 정말 깔끔한 일격이다. 날 경호해 주겠다는 소리가 거짓말은 아니었군. 그러나 개들은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냥 본능을 지닌 놈들이다. 금세 쥬디스의 움직임을 파악한 엽견이 베어내기 힘든 낮은 각도로 튀어 나오며 그녀의 다리를 노리는 것이었다. 물론 카론 경이나 알테어 님이었다면 누가 어떤 각도로 들어오든 그 압도 적인 능력으로 가볍게 막아냈겠지만 불행이도 쥬디스는 그런 초인이 아니었 다. “꺄아악!” 겨우 검을 휘둘러 놈을 몰아내긴 했지만 그녀 역시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 를 찧었다. 그녀가 넘어지자마자 쥬디스의 목덜미를 노리는 엽견이 송곳니 를 드러내며 뛰어 들어왔다. 쥬디스는 창백한 표정이 되어선 눈을 꽉 감았다. “크윽!” 순간 내 왼팔에 시큰한 통증이 밀려왔다. 내가 반사적으로 팔을 내밀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이빨이 내 팔 깊숙이 박히며 핏물이 확 터졌지만 곧바로 검을 들어 엽견의 몸을 뚫어 버렸다. 아무리 날이 없다지만 송곳 대용으로 는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말이다. 그녀가 이 꼴을 보며 깜짝 놀 란 표정으로 외쳤다. “왜, 왜 막아준 거야!” “막아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왜 막았냐고 물어봐도.” 난 욱신거리는 고통에 눈을 찡그리며 숨이 멎은 엽견을 팔에서 떼어냈다. 사방에서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사형선고처럼 들려온다. 이빨을 드러낸 검은 개들이 조금씩 다가오며 우리를 조여 오고 있었다. 뭐야. 정말 여기 서 죽는 거야? 난 이번만큼은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지만 몸 은 정반대로 쥬디스를 감싸고 있었다. 사냥개들이 날 물어뜯다보면 어쩌면 쥬디스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면서. 그리고 컹! 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짐승들이 동시에 뛰어들었다. 파아앙! 두 눈을 꽉 감고 있는 내가 들은 것은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굉음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 일도 없이 주변이 고요해지자 난 떨리는 표정으로 눈 을 뜨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얼레?” 사방에 엽견들이 잘려나간 시체가 가득했고 그 가운데에는 바로 야수 같은 살기를 뿜어내는 사내가 검을 뽑은 채 서 있었다. 난 도무지 이 상황이 믿겨 지지 않아서 그 사내를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에스테반 백작.” “미, 미안.” 에스테반은 엄청나게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곧장 칼을 집어넣고는 피를 흘 리는 내 왼팔을 잡아챘다. “정말 미안해! 멧돼지를 뒤쫓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혼자 떨어졌다는 것 도 모르고...”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셔츠를 찢어 능숙한 솜씨로 내 팔을 지혈하는 것 이었다. 난 그런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엽견들을 일격에 잠재워 버리다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실력이다. 정말 방금 전 검을 뽑고 있던 그는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그는 자책하는 얼굴로 나와 쥬디스의 상태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행이야. 조금만 늦게 찾았더라도 큰일 날 뻔했어.” 만약 쥬디스의 말대로 이것이 에스테반의 함정이었다면 우리를 다시 살려 줄 이유 따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날이 없는 검과 누군가 의도적 으로 풀어 놓은 사냥개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 버렸던 백작은 어떻게 설명해 야 하지? 대체 진실은 무엇이지? 백작, 당신은 정말 악인이야? 지금 이 행 동마저 흉계를 감추려는 짓이냐고! “저리가! 나쁜 놈!” 쥬디스는 자신을 부축해 주려는 백작을 뿌리치며 두려운 표정으로 뒤로 물 러서는 것이었다. “미안해. 다 내 책임이야. 정말 미안해.” 에스테반은 그 자신감 가득한 성격에 걸맞지 않게 정말로 어쩔 줄 모르며 쩔쩔매고 있었다. 난 순간 머리 속이 복잡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0.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가장 의심하는 자의 손에 구출되는 일을 겪는다면 누구라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쥬디스는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하는 에스테 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을 내려와 자신의 객실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리고 왼팔에 붕대를 칭칭 감게 된 나는 백작을 의심할 수도 없고 그렇다 고 마음 편하게 있을 수도 없는 기묘한 입장이 되어 터덜터덜 밤의 시가지 로 걸어 나왔다. “어이구야. 대관절 뭐가 뭔지 모르겠네.” 얇은 민소매 셔츠에 알프레도가 빌려준 반바지를 입고 거리를 걷고 있던 나는 뭔가 일이 지독하게 꼬여 있다는 기분에 투덜거렸다. 만약 냉철한 판 단력을 지닌 카론 경이나 무슨 일이든 쉽게 처리하는 괴이한 재능의 키스 경이었다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볼까. ‘...적어도 둘 다 개한테 물려 죽을 위기는 없었겠지.’ 난 아직도 욱신거리는 내 팔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에스테반에게 말하지도 않고 시가지로 나온 이유는 영지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기 위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텔레마코스 센터에 들려 카론 경에 게 보고하기 위해서다. 그곳에만 가면 ‘그녀’가 떠오르기 때문에 되도록 가고 싶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일은 일이니까. 솔직히 지금 심정은 카론 경과 통화하자마자 ‘산 속에서 개밥이 될 뻔 했 어요! 날 이런 곳에 보내다니, 정말 못됐어요! 카론 경!’이라고 막 화를 내고 싶다. 뭐 그래봐야 카론 경은 ‘보고는 그게 전부인가.’라고 대꾸할 위인이지만. 쳇. ??"어머나! 저 청년 좀 봐! 뭘 먹었기에 저렇게 늘씬한 거지?” “여자 아냐? 어쩜. 살결이 여자보다 더 곱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누구라도 말 좀 걸어봐.” “와아! 귀여워라! 눈동자가 보라색이야! 여기 좀 봐 줘요!” 주변에선 사람들이 나를 보며 입방아를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가지를 걷고 있는 나는 간질거릴 정도로 주변의 시선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고개를 폭 숙이고 반바지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빠른 걸음을 옮겼지만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는 계속 내 등 뒤를 따라 오는 것이었다. “어떻게 남자가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겠어.” “맞아. 절대 잊을 수가 없어.” “저런 굉장한 미남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정말 평.생.잊.지.못.할. 것.같.아.” 제발 잊어주세요!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스파이’ 따위는 절망적이라고 요! 라고 속마음으로 소리치며 난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빨개진 얼굴로 고 개를 숙이고 텔레마코스를 향해 달려갔다. 가면이라도 뒤집어쓰고 나올 걸 그랬다. 11. 이곳의 텔레마코스 센터는 몹시 아담한 곳이었다. 워낙에 이용료가 비싼 곳이니 이런 변방도시에서 텔레마코스를 이용할 부유층이 몇 명이나 되겠냐 만, 여기는 좀 지나치게 ‘소박해서’ 텔레-레이디가 단 한 명뿐이었던 것이 다. 게다가 손님도 통 없었는지 제복도 입지 않은 텔레-레이디는 아예 테이블 에 머리를 눕히고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태평한 텔레-레이디도 보다 처음 보는군.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도 깨어나질 않자 난 결국 머쓱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저어.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아? 아?” 그녀는 잠에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한동안 ‘당신 누구야?’ 라는 표정으로 날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누구긴요. 손님입니다. “지금 텔레마코스 이용할 수 있나요?” “아 예! 물론!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가서 텔레마코스 용 서클릿과 기억말소를 시키 는 물약을 들고 와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후우 하고 입바람을 불면서 낡 은 서클릿에 묻은 먼지를 터는 그녀가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헤헤. 미안해요. 며칠 동안 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 “아 예.” 정신을 혹사시켜야 하는 텔레-레이디에겐 오히려 다행인 일이다. 뛰어난 텔레-레이디였던 ‘그녀’는 그만큼 많은 일을 해야 했고 또 그만큼 빨리 정신이 붕괴되어 버렸으니까. 쯧. 서글픈 생각은 접어두자. 그녀가 서클릿을 머리에 쓰며 날 바라보았다. “초면에 이런 말하면 실례지만, 참 미남이시네요? 이 지방사람 아니죠?” “아하하. 한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얼굴이죠?” 난 그렇게 농담을 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가씨만은 내가 누구라도 곧 나를 잊을 것이다. 저 검붉은 약을 마시는 순간 모든 것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게 될 되니까. “빨리 시작하죠?” 난 일부러 커다랗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왕실과 통화한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란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가 헬스트 나이츠의 카론 경이니까 그녀가 나를 '대체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라고 바라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잠시 후 그녀와 손을 잡고 있는 내 머릿속에 카론 경의 영상이 떠올랐다. 그의 간결하고도 사무적인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보고해라. 아아, 역시 얼음별 왕자님. ‘별 힘든 점은 없나?’라는 따스한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카론 경은 내가 이 머나먼 국경의 남쪽에서 개밥이 되든 말든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확실한 모반의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뭔가 수상한 점이 있긴 합니다. 나는 오늘 누군가가 풀어 놓은 사냥개들에게 물려죽을 뻔한 사실을 보고하 려다가 그만두었다.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항상 사람들(대부분 여자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던 나는 제법 눈썰미가 있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사냥개를 물리치고 우리에게 몇 번이나 사과하던 에스테반의 모습은 연기라고 하기에 는 너무도 솔직해 보였다. 지금은 보고하지 말자.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생각하며 짧게 보고를 끝 냈다. -아직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악당인지 아닌지... -알겠다. 계속 주시하도록. 그리고 카론 경으로부터 통신이 끊어졌다. 으이구. 진짜 매몰차구만. 그런데 갑자기 나와 손을 잡고 있던 그녀가 확 내 손을 뿌리치는 것이 아 닌가. 처음과는 정 반대의 적대적인 눈초리로 날 노려보면서 말이다. “왜, 왜 그러시죠?” “왜 그러나고요! 당신, 영주님을 모함하려는 첩자였잖아!” “모함이라니요!” 갑자기 그녀가 씩씩거리며 화를 내자 난 어리둥절해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 다. 확실히 왕실의 감시원이긴 하지만... 누가 모함했다고 그래! “왜 다들 영주님을 그냥 두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훌륭한 분인데! 항상 괴롭히고 빼앗으려 들기만 하고! 당신도 똑같아!” 그녀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절대로 사무 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텔레-레이디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본다. 나는 도리어 기회다, 싶어서 침착하게 되물었다. “누가 에스테반 백작을 모함한다는 거죠?”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정말 몰라요. 말해주세요.” “당신 같은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아요! 당장 여기서 나가요!” 윽. 이거 완전히 미움 받아 버렸군. 그녀는 약병을 열어 입에 털어 넣은 뒤에 말했다. “솔직히 나는 영주님이 모반을 일으켰으면 좋겠네요! 그런 분이 왕이 되 는 것이 좋다고요! 이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그렇게 말하던 그녀가 스르륵 눈을 감으며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약이 기억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눈을 뜨자 눈에 서는 부작용 때문에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예전 의 순진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날 바라보았다. “와아. 정말 잘 생긴 분이시네요. 이 지방사람 아니죠?” “아까 전에도 물어봤잖아요.” “기억나지 않는 걸요.”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애인과 통화하셨나 보죠?” “무지하게 얼음장 같은 상관하고요. 출장 왔거든요.” “헤에. 이런 곳까지 출장을....... 힘드시겠네요.” “힘들죠. 힘들다마다요.”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 앞에 놓고 가게를 나왔다. 12. 이 영지의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에스테반을 신임하는 것 같았다. 이런 곳 은 확실히 드물다. 내가 있던 리튼의 히더 남작 역시 영지 사람들이 좋아하 긴 했지만, 이쪽은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존경 받고 있었다. 실제 모반이 일어난다면 목숨을 걸고 에스테반을 따를 자들이었다. ‘...모함이라.’ 텔레-레이디가 날 증오하듯 외쳤던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잉?” 늦은 밤인데도 응접실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 었다. 그리고 객실로 돌아가는 참에 슬쩍 그곳을 지나치자 응접실에서는 굵 직한 에스테반의 목소리와 더불어 귀에 익숙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만있어라. 이거 어디선가 들어 봤던 목소리인데....’ 난 그렇게 생각하며 응접실 문 밖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무 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슬쩍 문틈 사이로 얼굴을 바짝 붙이고 안을 엿보 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도 안돼!’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에스테반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는 자는 바로 이오타의 첫째 왕자 쇼메 불름버그였다. #066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에스테반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는 자는 바로 이오타의 첫째 왕자 쇼메 불름버그였다. ‘저 놈이 어째서 이곳에...’ 상대를 깔보는 듯한 건방진 미소, 도저히 왕자의 초이스라고는 할 수 없는 불량스런 셔츠에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검은 선글라스(Designed by 세드릭)를 쓴 모습은 쇼메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그와 야심한 밤에 살갑 게 소곤거리고 있는 에스테반 백작.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는 쇼메가 지금 이곳에 온 이유 는 뻔하겠지! 쥬디스의 말대로 에스테반은 쇼메의 지원을 받아 모반을 일으 키려는 것이 아닌가. 일전에 베르스를 집어삼키지 못한 것에 대한 리턴매치 냐, 쇼메! 나는 에스테반에게 배신감마저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서 카론 경에게 보고를...’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하고 계신가요? 엔디미온 경?” “에그머니!” 난 흠칫 놀라서 벽에 딱 달라붙었다. 날 향해 정겹게 웃고 있는 자는 바로 에스테반의 동생 알프레도였다. 만약 에스테반이 모반을 계획한다면 이 자 도 한통속일 거 아냐! 망했다! “......알프레도 씨.” “하하. 왜 그런 표정이시죠? 뭔가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천진하게 웃으니까 더 무섭다. 저런 표정으로 ‘후후후. 이 거 곤란하게 되었군요. 차라리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요.’ 라면서 나를 찌를 셈이냐! 어쩌면 이미 쥬디스는 ‘처리’되었을지도 모른다. 난 창백한 표정으로 내 게 다가오는 알프레도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팔을 잡고는 응접실로 이끌었 다. “어서 들어가시죠.” “자, 잠깐만!” 알프레도가 문을 열고 날 밀어 넣자 에스테반과 쇼메의 대화는 단번에 끊 어졌다. 붉은 소파에 앉아 쇼메와 대화를 나누던 에스테반은 말을 멈추며 예상 밖이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는 것이었다. “........엔디미온 경.” 그렇겠지.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외쳤다. “백작! 이젠 완전 범죄를 위해 날 죽일 테냐! 좋아! 맘대로 해봐!”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말만은 해야겠어! 난 지금까지 쥬디스와 카론 경으로 부터 당신을 변호해 주고 있었는데! 저런 위선자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 하고 싶진 않아. 나는 최대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 다. “죽일 테면 죽여. 하지만 이것만 알아 둬. 내가 죽어도 네 놈의 모반을 밝혀내고 심판할 사람은 얼마든지 남아 있어. 세상은 절대 악당의 욕심대로 돌아가지 않아!” 아아, 멋진 말이다. 솔직히 ‘아, 아프지 않게 죽여줘.’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죽음에 당당하지 못한 자는 결국 자기 인생에 자부심에 없는 자야, 라는 키르케 님의 말이 떠올라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 내 굳은 표정으로 ‘유언’을 들은 듣던 에스테반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널 왜 죽여야 하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또 잠시 후 소파에 앉아 있던 쇼메가 배를 잡 으며 커다랗게 웃는 것이었다. 왜 웃는 거야, 이 자식! “하하핫! 진짜 웃겼어! 왕실의 월급도둑 광대 놈들보다 훨씬 재미있군! 이자벨이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의미였냐?” “뭐, 뭐가 그렇게 웃기는 거야! 남의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놈이!” 난 뭔가 굉장한 웃음거리가 된 기분에 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쇼메는 특 유의 비웃음 섞인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엔디미온이라고 했던가.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항상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녀석이로군. 방금 날 웃겨줬기 때문에 네 무례한 말투 를 특별히 용서해 주겠다.” 큭! 어째서 내가 너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거냐! 그가 큭큭 웃음을 참으며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모반이라. 하긴, 이런 시간에 에스테반과 수군거리고 있는 날 봤다면 그 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이 왕국의 천박한 권력자들이 에스테반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 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넌 예전에도 이 나라를 자기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었 잖아! 그런데 그런 쇼메가 날카로운 눈매로 날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모습을 보고 모반이라고 생각했다면 너도 그 속 좁은 권력자들 과 똑같아.” “뭐, 뭐라고!” “결국 너도 색안경을 끼우고 에스테반을 보고 있는 거야. 모반을 일으킬 지도 몰라, 본심은 악랄한 녀석일 지도 몰라, 그런 의심이 네 마음속에 없 었다고 장담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나와 에스테반이 대화하고 있는 것만 보고도 평정심을 잃었던 거야. 내 말이 틀렸나?” 그의 입가에 조소가 지나갔다. 뭐, 뭐야. 이 녀석. 남의 마음을 훔쳐보는 것처럼. “실망스럽구나. 이자벨과 세드릭의 말을 듣고 조금은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배짱이 있는 녀석으로 알았는데.......” 쇼메는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입었다. 난 멍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모반이 아니란 말인가? 그럼 왜 에 스테반과 만난 거야! “에스테반, 이만 가보마. 이런 나라를 위해 충성심 따위를 지키고 있다 니, 너도 참 한심하구나.” 그의 말에 에스테반은 쓴웃음을 지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는 일말 의 눈길도 주지 않고 나를 지나쳐 가는 쇼메의 어깨를 잡았다. “모반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왜 여기에 온 거야!” 쇼메는 내 손을 탁 쳐내며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런 콩알만 한 나라 쯤, 내 맘대로 요리할 수 있어. 당장 너희 왕궁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서 대놓고 네 국왕을 협박해도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 쇼메가 어째서 귀찮게 모반 따위를 꾸며야 하지?”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쇼메의 비아냥에도 난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 니까 그의 말대로, 였던 것이다. 마키시온이나 콘스탄트와도 자웅을 겨룸직 한 이오타의 왕자가 베르스 하나를 뒤집기 위해 일부러 발품을 팔 이유 따 윈 없는 것이다. 그리고 쇼메는 사람 속 뒤집어 놓는 ‘충고’를 했다. “앞으로 나와 대화할 때는 좀 더 공손한 어휘를 선택하도록 해라. 천민.” “내, 내가 어째서!” 그 순간 쇼메의 손이 내 목을 뱀처럼 잡아챘다. “큭!” 별로 힘을 준 것 같지 않은데도 강렬한 기운 같은 것이 억지로 몸속으로 밀려 들어와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를 쏘아보며 비명을 참고 있는 내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너의 목숨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절대자를 상대할 때는 공손 하게 구는 것이 장수하는 비결이니까.” 그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몸은 손가락 하나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온 몸을 휘감는 지독한 작열감에 입술을 깨물자 피가 흘러 내렸다. 쇼메의 나직한 비웃음 소리가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 지나갔고 에스테반이 날 떼어 내자마자 나는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066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13.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날 반긴 것은 깨끗하게 소독된 침대 시 트의 건조한 향기였다. 누군가 날 옮겨 놓은 것일까. “.......”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대자 따끔한 통증이 몰려와서 눈을 움찔했다. 아 직도 불에 댄 것처럼 욱신거린다. 쇼메 그 놈, 왕자라서 검술이다 뭐다 잔 뜩 교육을 받았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강한 놈일 줄이야. 그 녀석 의 말대로 손쉽게 내 목을 가볍게 꺾어놓았을 실력이었다. 아니 그보다....... ‘정말 내가 실수한 건가.’ 그때 근처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들었어? 미안. 엉뚱하게 일이 꼬여 버린 것 같아.” “에, 에스테반 공.” 난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에스테반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에 곱슬거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아. 쇼메 그 놈. 나쁜 녀석은 아닌데 워낙에 모가 나서 말이야. 냉정 한 체 하지만 실은 무지하게 다혈질인 녀석이거든.” “쇼메 왕자와....... 친구 사이인가요?” “하하. 친구라면 친구겠지.” 난 허탈하게 웃는 에스테반의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져 왔다. 자기 외의 인간은 모조리 바보, 얼간이, 천민 정도로 여기는 재수 없는 왕자병 환자가 (아, 실제 왕자이긴 하군.) 친구를 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 않 은가. 에스테반은 머쓱한 표정으로 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쇼메가 내게 모반을 제안한 것은 사실이야.” “역시 그랬어! 이런 나쁜!” 난 그럴 줄 알았다며 외쳤지만 에스테반은 손을 내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하지만 난 거절했어.” “거절?” “응. 3년 전에 처음 날 찾아왔던 쇼메가 대뜸 내게 이 나라의 왕이 될 생 각이 없냐고 말했고 난 한번만 더 그런 말을 꺼내면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에 쇼메는 한번도 내게 모반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 “저, 정말요?” “그래. 쇼메는 지는 것 싫어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어린애처 럼 화를 내는 녀석이긴 하지만 치졸하진 않아. 날 보고 쓸데없는 애국심이 라며 비웃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별로 날 이용할 생각은 접은 것 같아.” “그럼 왜 계속 찾아오는 거죠?” “그냥 놀러 왔다면서 가끔씩 찾아올 뿐이야.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는 차를 내오라며 건방지게 구는 통에....... 하하하.” ‘진짜 뻔뻔한 녀석이네.’ 왕자 쯤 되는 놈이 한량마냥 남의 나라 귀족한테 불쑥 와서 차 내와라 밥 내와라 투정이나 부리고! 하지만 이익이 되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줄로 알 았던 쇼메에게 그런 순수한 일면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쇼메와 만나면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껏 ‘친구’로서 만나온 에스테반도 무지하게 대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에스테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에스테반 공.” “응?” “어째서 쇼메의 제안을 거절한 거죠?” “하하. 무슨 의미야?” “왜 모반을 일으키지 않은 거죠.” “......” 에스테반은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쩌면 난 말실수를 한 것일지 도 모른다. 왕실의 스파이로서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의 속마음을 속 시원하게 듣고 싶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에스테반은 그 굵은 눈썹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엉뚱하게 들리 는 말을 꺼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통치하시던 이 영지는 아주 보잘것없었어.” “.......” “아버님은 이곳을 열심히 이끌어 나가고 싶어 하셨어. 돌아가실 때까지 그 생각을 버리신 적이 없지. 하지만 주변 영주들은 항상 아버지에게 말도 안 되는 공물을 요구하며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라도 사병들을 동원해서 이 곳 사람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지. 왕실과 어떤 인맥도 없던 우리 가문은 당하기만 할 뿐이었어. 나도 어렸을 때는 성에 있는 시간보다 그 놈들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니까. 하하.” 너무도 씁쓸한 말이지 않은가. 예전 이자벨님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귀족이기 때문에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있기 때문이 귀족이 되는 거야.’ 귀한 피를 받아 태어난 족속이라서 귀족이라는 말은 사전 속에나 존재할 지도 모른다. 에스테반 역시 힘도 인맥도 없는 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귀족 임을 증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내 아버님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뜩 과장된 에스테반에 대한 연극에 의하면 그 의 아버지는 타국의 암살자에게 죽었다는 설도 있고 죽은 부인에 대한 슬픔 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말도 있으며 심지어는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악룡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믿기 힘든 소문조차 있다. 하지만 에스테반의 말 은 서러울 만큼 현실적이었다. “이 영지의 폭도들에게 둘러싸여 죽은 거야.” “하, 하지만 공의 아버지는 이 영지 사람들을 위하셨다고.......” “위했지. 주변 영주들의 협박 때문에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공물을 모아서 바쳤거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땅은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피폐 해 졌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해서 사과를 하기 위해 광장에 나간 아버님을 죽였어. 아마도 뒤에서 주변 영주 놈들이 부채질 했겠지. 악 덕 영주를 죽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소름이 끼쳤다. 결국 왕실은 아무것도 모른다. 오직 권력이 있는 영주들의 보고만이 왕실까지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힘없는 자 들의 진실 같은 것은 전혀 모른 채 ‘오늘도 이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있구나.’ 라고 느긋하게 생각할 뿐인 것이다. “내가 아버님의 부음(訃音)을 들은 것이 14살 때. 다른 영주의 볼모로 잡혀 그 영주 아들??놈들의 노리개 신세였을 때야.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 을 때, 내 방 침대 밑에 숨겨 놓았던 칼을 꺼내 들고 말을 빼앗아 이곳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새로운 영주가 되었음을 외쳤지.” “그 이후 지금까지.......” “응. 지금까지 그 놈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랄까. 어쩌다보니 최근 내가 전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보니까 영주들도 작 정하고 날 찍어 눌러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야. 모반이다 뭐다 꾸며대는 것 같더군.” 그는 한쪽 눈을 찡끗 감은 채로 엷게 웃었다. 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야. 제사 때까지 푹 쉬도록 해.” 그는 내게 내준 작은 병실에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주변 영주들의 기사들을 죽였다는 소문도 지어낸 말인가요?” “아냐. 내가 죽였어.”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곧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라고 대답 할 줄 알았던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혼잣 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 놈들은 내 영지 사람들을 건드렸어. 그래서 사람들을 대신해서 복수한 거야.” 나는 한동안 그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귓가에 쇼메가 남겼 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 만약 너도 모반이라고 생각했다면 너 역시 그 속 좁은 권력자들과 똑같은 거야. 나는 뜨끔거리는 목을 쓰다듬으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14. 삼일 후, 뒤죽박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대체 카론 경에게 뭐라고 보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냥개에게 물려 죽을 뻔하고 쇼메를 만나는 광경도 목격했고 주변 영주들의 기사를 죽인 것도 사실이지만 모반을 일으킬 것 같 지는 않은뎁쇼? 라고 해야 하나? 이래서야 도리어 에스테반을 몰아세우는 격이로군. 그렇다고 보고 겪은 것을 묵살하는 것은 기사로서(혹은 스파이로서)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아아, 누구한테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아.’ 나는 그렇게 소박하지만 거창한 어리광을 부리며 밤의 시가지를 터덜터덜 지나 텔레-레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 밤중에 남의 눈을 속이며 이 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꺼림칙한 일이다. 하아, 역시 스파이라는 건 할 짓이 못돼. ‘그건 그렇고......’ 나는 흘낏 뒤를 바라본 뒤에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아까부터 미행당하는 기 분이다. 아니 아니, 분명히 모자를 푹 눌러 쓴 사내가 내 뒤를 밟고 있었다. 설마, 에스테반이 보낸 감시자? 나는 눈치 채지 못한 척 하면서 인적이 없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재빠르 게 숨었고 아니나 그는 황급히 골목 안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저씨. 남자한테 취미 있어요?” 숨어 있던 나는 그의 뒤에서 나타나 팔을 꺾으며 그렇게 말했다. 격한 고 통에 짧은 비명을 지른 그는 나를 돌아보려 애쓰며 다급하게 말했다. “에, 엔디미온 경이 맞소?” “아?” “이, 이 팔 좀 풀어주시오. 난 제헤른 영주님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이니.” 제헤른이 누구람? 난 경계의 눈초리를 하며 팔을 풀었고 그는 찡그린 표정 으로 말했다. “제헤른 공께서 경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이걸 보내셨소이다.” 그리고 깡마른 체구의 그는 내게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건내주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걸 열어보고는 입이 딱 벌어졌다. “......금화?” 그것도 스왈로우 나이츠에서 버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량이지 않은가! “이, 이걸 왜 내게......” “제헤른 공께서는 존경을 모르는 모반자 에스테반 백작을 이 나라의 안전 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어 하시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그 금화는 나라의 애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길 빌며 제헤른 공께서 내리신 선물이외다.” “아?” 애국와 금화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무슨 뜻인지 잘 아셨을 거요. 그럼 나는 이만.” 나는 황급히 빠져나가려는 사내를 잡고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백작이 모반을 일으키려한다고 왕실에 보고하라는 건가요?” “말하자면...... 그런 거요.” “그리고 이 금화는 뇌물?” “뇌, 뇌물이라기 보다는.......” 나는 헛기침을 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실웃음이 다 나왔다. 왕실의 수사에 귀족들의 입김이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아니 애초부터 제헤른인지 뭔지 하 는 귀족이 이 기밀 수사에 대해 이렇게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웃 기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왕실 기사에게 뇌물이라니. 나는 큭큭 웃으며 그 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아. 고마워요.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요?” “당신 덕분에 어지럽던 머리 속이 확실해 졌어.” “무, 무슨 말이오.” 나는 금화를 번쩍 들며 이렇게 말했다. “카론 경에게는 확실하게 보고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 금 화는 돌려 드리겠습니다아.” 그리고 촤르르르 소리를 내며 내 평생 만져보기도 힘들 것 같은 엄청난 량 의 금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황금의 폭포가 흐르는 것처럼. 아아, 나도 부자 되긴 글러 먹은 성격이야. 정말이지 사치스런 낭만이라니까. “이, 이게 무슨 짓이오!” 그는 진흙탕 속에서 산지사방으로 굴러다니는 금화를 황급히 주워대며 소 리쳤지만 난 빈 가죽 주머니를 바닥에 집어 던진 뒤에 시가지가 떠나갈 것 같은 목소리로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이러니까 이 나라가 쇼메 같은 녀석에게 비웃음을 받는 거라고!!!” 15. “으아아. 또 당신?” 이번에도 잠들어 있던 것 같던 텔레-레이디가 날 보고는 잠에 취한 목소리 로 헤죽 웃었고 나도 따라서 헤죽 웃어주었다. 카론 경과의 보고는 이번에도 간략했다. -보고해라. 검은 머리칼 하나 흐트러져 있지 않은 카론 경은 이 시간까지 사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카론 경이라면 내가 본 그대로 말해도 다른 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꿰뚫어 볼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지만 내 보고를 다 들은 카론 경의 차가운 대답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 -이제 더 이상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 -예? -너의 임무는 종료되었다. -잉?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다. 왕실로 귀환하도록. -자, 잠깐만요!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천신만고 끝에 겨우 겨우 에스테반이 모반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 제 다 필요 없다니! -그리고 널 경호한다는 그 무녀. -쥬디스요? -작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자다. -예? 그리고 통화가 끊어졌다. #067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16. 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내 마음 속에 무언가 불길함이 커져가고 있었다. 갑자기 종료되어 버린 임무, 그리고 정체를 속인 쥬디스. 성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한걸음에 쥬디스의 객실로 달려갔다. “쥬디스!” 문은 열려 있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나는 꺼져 있는 양초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방금 전까지 있었어.’ 제법 따뜻하다. 적어도 10분전까지는 이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가 촛불을 켜자 그녀의 방안이 모습을 환하게 드러냈다. 아마 평소였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안감에 가득 차 있던 나는 그녀의 방에 있어야만 하는 것 하나 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칼이 없어.” 이런 늦은 시간에 칼을 들고 사라질만한 곳은? “젠장!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는 그 즉시 방을 빠져나와 에스테반의 침실로 달렸다. 오늘은 에스테반이 일찍 잠들 거라는 알프레도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17. 작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자다, 카론 경의 그 불길한 말이 내 머리 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제발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어!’ 나는 에스테반의 침실로 뛰어가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다. 쥬디스가 돈 때문에 남을 해치는 나쁜 여자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퉁명스럽 고 자존심 세지만 그건 단지 그녀가 능숙하게 처세를 부리지 못할 만큼 순진 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나와 왕실을 속이고 에스테반을 해치려는 짓은 할 리가 없어! 그러나 현실은 내 애원을 비웃어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 어둑한 복도 속 에 침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쥬디스!’ 나는 에스테반의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긴 검을 뽑 아든 쥬디스가 내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번뜩이는 칼날, 창백한 달빛 속에서 보이는 그 어스름한 모습은 마치 현실감 없는 유령과 같았다. “그만둬!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쥬디스!” “늦었어.” 그 작은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에스테반이 잠들어 있는 침대에 검을 깊게 찔렀다. 나는 경악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제 다 끝났어.” 그녀의 그런 말을 들으며 난 머리 속이 하얗게 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 었다. 에스테반을 죽이다니. 그것도 누구도 아닌 펠리오스 무녀의 손으로! 귀족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이 이상 깔끔한 일처리는 없다며 커다랗게 웃겠 지.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그때 커튼 뒤 어두운 구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누, 누구야!” 깜짝 놀란 나와 쥬디스가 바라본 그곳에서는 알프레도가 걸어 나오고 있었 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이 성 어느 방에 가도 걸려 있다는 장검이 들려 있 었다. “큭!” 그의 모습을 본 쥬디스는 낭패의 표정을 지으며 침대의 담요를 젖혔다. 안 에 있는 것은 에스테반이 아닌 린넨 뭉치였다. 처음부터 에스테반은 이 방 에 없었다. 알프레도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아무리 어둡다고는 해도 목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은, 전문 암살자는 아니라는 의미로군요. 주변 영주들의 사주를 받은 건가요?” 그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순진한 줄로만 알았던 알프레도의 눈매에 살기가 맺히고 있었다. 쥬디스는 다시 검을 들며 소리쳤다. “에스테반은 어딨어!” “형님은 지금 축제에 가셨습니다. 혹시나 해서 오늘은 일찍 주무실 거라 고 당신들께 거짓 정보를 흘렸더니, 이렇게 걸려드는군요. 저는 처음부터 당신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알프레도가 칼을 들어 쥬디스를 겨눴다. 차가운 살기, 아무 리 여자라도 죽이고도 남을 증오심이 느껴진다. “어째서 형님을 해치려고 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결국 형님을 시기하 는 귀족들의 돈에 매수된 것이겠지요.” “아니야! 돈 따위 때문에 에스테반을 죽이려는 건 아냐!” “아무래도 좋습니다. 전 당신들을 죽이겠습니다.” 그렇다. 알프레도는 능숙하게 우리를 향한 적대감을 숨긴 채 우리들을 주 시해 왔던 것이다. 에스테반의 동생이니 보나마나 검술도 굉장할 테지. 나 는 침착하게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알프레도 씨. 쥬디스는 왕실의 무녀입니다. 실수로 이런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만약 죽인다면 왕실은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고 결국 당신을 체포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검을 내려놓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당신들을 죽이고 내일 아침 왕실에 자 수하겠습니다. 이 일은 형님도 모르는 저 단독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형님을 지킬 수 있다면 저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그의 단호함은 이미 설득의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나는 순간 입술을 깨물며 벽에 걸린 검을 집어 들고 쥬디스 앞에 섰다. “여긴 내가 막을 테니까 일단 도망쳐!” “엔디미온!” “내 말 안 들려! 빨리 이 성 밖으로 도망치라고!” “네, 네가 왜 날 지켜주는 거야!” 나는 한쪽 눈을 찡그려 감으며 투정에 가깝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항상....... 지켜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화를 내다니, 너무 하네.” 알프레도는 차가운 표정으로 조금씩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독하게 어두 운 이런 곳에서는 싸워본 적도 없다. 절대적인 불리, 하지만 쥬디스는 도망 칠 생각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고 나는 어쨌든 누가 죽는 것만 은 막고 싶은 마음에 알프레도를 막아섰다. 나는 자색의 눈동자로 알프레도를 쏘아보며 외쳤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형을 지키는 방법일 리가 없잖아. 에스테반 백작도 이 모습을 보면 그만두라고 외쳤을 거야!” “그래요. 형님은 분명 이런 나를 탓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왕실의 스파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중하게 대접한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일은 내 가 대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님을 실망시키고 의절(義絶)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더러운 흙탕물을 뒤집어쓴다. 알프레도는 그걸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 되었단 말이야! “이러면 정말로 주변 영주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뿐이야. 아무도 죽이지 않고 일을 해결할 수 있어!” “정론(正論)이로군요. 이 세상에는 통용되지 않는 너무 정직한 정론입니다.” “하지만 네 형은 그 정론을 지금까지 지키면서 살아왔어! 남들이 뭐라고 오해해도 자신이 신념을 꺾지 않았다고! 그걸 욕되게 할 생각이야!” 내 말에 반응한 그의 표정은 달빛 아래서 너무도 슬펐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유언 같은 말을 남기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요. 당신이 절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자 그럼 갑니다.” 차아앙! 격렬한 검풍이 귀를 때리며 어두운 실내에 불꽃이 터졌다. 나는 팔이 끊어 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크게 밀려나고 말았다. 욕지기가 솟구쳐 오를 정 도의 위력이다. ‘젠장! 무지막지하게 세네!’ 조금은 약했으면 하고 기대했는데, 실로 황소 같은 힘이다. 카론 경이라면 모를까 내 상대로는 황송할 지경이라고! 제길! ‘방어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하면 여간해선 뚫리지 않아.’ 나는 이 순간 알테어 님의 그 가르침을 마치 신앙처럼 믿으며 정신없이 날 아드는 알프레도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살갗이 벗겨져나간 손에서는 핏 물이 떨어져 점점 감각이 둔해지고 있었지만 확실히 알프레도도 조금씩 지 쳐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대단하시군요.” “아아아! 그래요! 난 당신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고요!” “그럴 수는 없지요.” 그와 함께 눈빛을 번뜩인 알프레도는 앞의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뒤집어진 테이블이 내게 들이닥쳤고 그 순간 잠 시 균형을 잃었다. “고통 없이 죽여 드리지요!” 알프레도는 균형을 잃은 내 몸을 두 동강 낼 심산으로 뛰어 들어왔고 난 그 순간 고집불통의 그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 커다랗게 소리치며 검을 꽉 다잡았다. “그 따위 배려 필요 없어!!” 파아아아앙! 금속이 날카롭게 잘려 나가는 굉음과 함께 빛의 조각이 공기를 찢으며 천 장에 박혀 버렸다. 그 자리에 멈춰선 알프레도는 반으로 잘려나간 자신의 검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끊는다....... 소문만 들어봤지만, 당신은 이 정도의 검술을 숨기고 있었습니까.” “.,......그것 밖에 못해. 강철 자르기.” 알테어 님으로부터 배운 비기! 라고는 하지만 반쯤은 운에 맡긴 것이고 다 시 할 힘은 남아 있지도 않다. 알프레도가 검을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나직 하게 말했다. “완전히 졌습니다. 절 죽이세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아으윽! 답답해!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충성심을 발휘할 수는 없는 거 냐! 그때 굵직한 목소리가 문 앞에서 터졌다. “그쯤에서 끝내라. 알프레도.” “혀, 형님!” 알프레도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 지였다. 축제에 갔다는 에스테반이 어째서 지금 여기로 돌아온 것일까. “아무래도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돌아왔더니만.......” 에스테반은 골치아프다는 듯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중얼거렸다. “형님. 저는......” “알프레도. 사냥을 갔을 때 엔디미온 경에게 날이 없는 검을 준 것도, 엽 견들을 풀어 놓은 것도 네가 한 일이지?” 나와 쥬디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알프레도를 바라보았다. 알프레도는 고 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날 저녁 너를 불러 절대로 경솔한 짓 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냐. 그걸 잊은 거야?” “하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죽지 않아. 그러니 너는 내 아침식사를 만들고 나의 병사들을 훈련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런 무모한 친절은 사양이야. 그것도 남의 침실에서 말이지. 하 하.” 에스테반은 여유롭게 웃으며 방에 들어와 촛불을 켰다. 정말 대범한 자다. 화를 내거나 검을 뽑는 것도 없이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고 알프레도의 마 음을 돌려놓았다. 솔직히 이런 생각하면 불경죄이긴 하지만, 왕이 되면 정 말 통치 잘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쥬디스 양. 듣고 싶어. 왜 날 죽이려고 했는지.” 에스테반은 의자에 걸터앉으며 호수처럼 깊은 눈동자로 쥬디스를 바라보았 다. 환하게 밝혀진 방안에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만약 돈 때문이 었다면, 그런 표정 보이지 않으리라. 그녀가 몸을 떨며 말했다. “착한 척 하지 마. 혼자서만 신념을 지키는 척 하지 말라고! 당신도 다른 영주들과 똑같아.” “왜 나를 미워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건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야! 기억하지도 못하겠지? 지금 까지 죽인 사람이 너무도 많으니까 말이야!” 쥬디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황망한 시선으로 에스테반을 바라보았다. 에스테반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너는 이 주변 영지 출신인가 보군.” “그래. 아버지는 너와 대적하던 영주의 사병이었어. 네가 군대를 몰고 들 어온 날, 네가 죽인 수많은 병사들 중에 한 명이지. 분명 네겐 얼굴도 이름 도 기억나지 않는 한낱 잡병일 뿐이었겠지. 하지만 내겐 날 홀로 키웠던 아 버지야. 그 이후 오르넬라 님이 날 무녀로 거둬간 이후에도 항상 다짐했어. 언젠가는 널 죽이고 복수하겠다고.” 어리광 부리지 마! 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아마 나 역시 나의 부모를 죽인 자를 앞에 둔다면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에스테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결국 나도 주변 영주들과 똑같을지 몰라. 복수를 위해 복 수를 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땅을 빼앗는다. 결국 그러다간 누군가 를 죽이게 되지. 사람들은 나를 멋들어진 귀족 정도로 보기 좋게 포장하길 원하지만 실은 그 멋진 귀족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들을 죽여 온 살인 자야. 깨알같이 많은 적 병사들이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몰아붙여 죽인 다지만, 실은 그들에게도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 분명 해. 난 그 가능성들을 신념이라면 명분으로 없앤 거야.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죄악이지. 사람들은 항상 목숨은 소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가장 결 정적인 순간 가장 하찮게 보는 것이야 말로 타인의 목숨이야. 그래. 네가 나 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에스테반의 목소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담담했지만 그 내면은 마치 자기 자 신을 채찍질하는 것과 같았다. 알프레도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형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알프레도. 왜 너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이런 무모한 일을 결심했지?” “그건.......” 백작은 동생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예전 내가 너와 너의 가족을 지켜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렇 기 때문에 너는 내게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거야. 그렇지? 하지만 만약 내 가 쥬디스에게 했던 것처럼 너와 너의 가족을 해치는 입장이었다면 지금 내 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바로 너였을 거다. 은혜를 베푼 자에게 추앙을 받고 해를 끼친 자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건 당연한 이치지.” 알프레도는 역시 친동생이 아니었다. 그리고 쥬디스와 알프레도는 말하자 면 에스테반의 양면. 하나는 그에게 구원 받았고 또 하나는 그에게 고통 받 았다. 결국 그렇게 엇갈린 감정들이 지금 여기서 충돌해서 서글픈 빛을 뿌리 고 있는 것이다. 에스테반은 자신의 검을 뽑아 테이블 위에 놓고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 다. “쥬디스. 유감스럽게도 내가 너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사실이며 또한 다 시 부활시킬 능력도 없다. 그러니 지금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 게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로군.” 그리고 에스테반은 쥬디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쥬디 스는 검을 들고 있었다. 에스테반의 목은 이미 지척의 거리. 원한다면 언제 라도 증오하는 그의 목을 자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스테반은 무거운 표정을 숙인 채 미동조차 없었다. ??쥬디스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들고 있는 칼을 떨며 말했다. “누, 누가 용서해 준데?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아버지의 원수를......” “내가 죽어야만 용서를 받아줄 텐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라.” 에스테반의 그 나직한 말에 쥬디스는 검을 쥔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걱정 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우물쭈물 말했다. “저어. 쥬디스. 있잖아. 그냥 이거 없던 일로 하면 안 될까나? 분명 슬픈 일이긴 다들 사정이라는 것도 있고, 이 사건의 출연자는 우리들뿐이니까 우 리들만 서로 이해해 주고 서로 용서해 주면 주변 영주들도 시비걸일 없을 테고,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시면서 조용히 해결을........” “시끄러!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어쨌든 누구도 악의(惡意)가 없잖아! 왜 일부러 악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거야!” 내가 커다랗게 소리치자 쥬디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소리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 “이제 됐어. 용서해 줄 수도 없지만....... 이래서는 죽일 수도 없잖아.”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검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수는 복수를 낳기 마련이다. 이 진부한 격언이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 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일들이 세상 이곳저곳에서 자주 벌어지고 있기 때 문이리라. 그러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신물 나는 연결고리를 어떻게 해서든 끊으려는 '인간다운' 발버둥이 아닐까. 비록 이 세상에 적용하기 힘 든 '정론'이긴 하지만, 만 명 중 한명 정도는 나처럼 이런 시시한 정론을 주장하는 인간도 있는 편이 좋지 않나, 싶다. 18. 또 별 다른 일도 없이 며칠이 흘렀다. 더 이상 사냥개에게 습격을 당한다 든지 한 밤중에 침실에 칼을 휘두르는 대소동은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쥬디스는 아직 오르넬라 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나 역시 아직 왕실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하아. 카론 경의 명령이야 어찌되었든 키스 경의 명령도 중요하단 말이지.’ 제사를 끝마치지 않고 돌아갔다간 키스 경으로부터 ‘아아아! 농땡이 신관 기사로군요! 오늘 저녁은 없습니다아!’라는 치졸한 보복을 당할 것이 뻔하 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직 미심쩍은 일들이 남아 있었다. ‘그 제헤른인지 뭔지 하는 영주 녀석이 수작을 부릴 것 같단 말씀이야.’ 내가 있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에스테반이 아무래도 몹 쓸 짓을 당할까 걱정이 된다. 분명 제헤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스테반 을 몰락시켜 버리기로 작정한 쩨쩨한 악덕영주임에 분명하니까 말이다. 객실 침대에서 뒹굴뒹굴 거리며 ‘그런데 저 공동욕실은 대체 언제 이용할 수 있는 거람.’이라고 투덜거리고 있을 때 복도 밖에서부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갑자기 망루에서 마구 종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와글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성 밖에서부터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냐 이거! 폭동이 라도 일어난 건가! 난 깜짝 놀라서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엄청난 수의 영지 사람들이 모두 이 거대한 성안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었 던 것이다. 에스테반의 사병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그들을 통솔하고 있 었고 이미 성벽 위에는 궁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부터 알프레도가 황급히 내게 뛰어오며 다급하게 외치 는 것이었다. “엔디미온 경! 쥬디스 님과 함께 빨리 이곳을 떠나시라는 형님의 명령이 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주변 영주들이 대규모의 사병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 다.” 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알프레도는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왕실로부터 이 영지의 토벌령이 떨어졌습니다. 죄목은 모반기도(謀叛企圖) 입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에스테반 공이 모반을 일으킬 리가......” “그들에게 진실 같은 것이 중요할 리가 없겠지요.” 알프레도는 그렇게 씁쓸한 말을 읊조리며 등을 돌린 채 돌아갔다. 카론 경이 했던 말의 의미는 이것이었나. 나를 매수하는 것에 실패하고 쥬 디스의 암살 기도도 실패로 돌아가니까 대놓고 국왕 전하를 종용해서 모반 이라고 밀어붙인 것이다. 양심도 수치도 죄책감도 없이 어쨌든 에스테반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그걸로 좋다는 거냐? ‘제헤른. 네 놈의 낯짝을 본 적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네 놈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 졌다!’ 난 피난민들이 몰려들어오고 있는 창밖을 쏘아보며 이를 꽉 깨물어졌다. #068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19. 나는 에스테반을 찾아 성탑 위로 올라갔다. 장검을 차고 두꺼운 가죽 갑옷 을 입고 적갈색의 망토를 두른 그는 계단을 타고 올라온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에스테반 공.” 나는 성밖을 주시하고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미 성밖에서는 족히 1만 명은 넘을 듯한 주변 영주들의 사병집단이 ‘토벌군’이라는 파렴치한 명분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이 성이 견고하고 또 에스테반이 아무리 명장이라고 하더라도 왕실과 권력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에서 과 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 겨우 겨우 버틴다고 하더라도 백작이 잘 가꾼 이 영지는 전쟁 통에 쑥밭이 될 것이 분명했다. 화를 참고 있는 것 같던 에스테반은 불현듯 주먹으로 벽을 때리며 커다랗 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놈들!” 난 깜짝 놀랐다. 항상 온화하고 정중한 말만 나오는 줄 알았던 그 입에서 저런 험악한 욕설이 나온 것은 처음 본 것이다. 아무리 에스테반이라도 자 신을 이렇게 대놓고 망치려는 짓거리에는 격분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 만 내가 틀렸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대체 저렇게 많은 군대를 몰고 오면 국경은 누가 지킨단 말이야!” “예?” “악투르 왕국이 호시탐탐 이 나라의 남쪽 국경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술주정뱅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런데도 날 잡겠다며 저렇게 많은 병력 을 빼오다니! 국경을 무방비로 둬도 상관없다는 거야? 바보같은 놈들!” 나는 순간 부끄러워졌다. 결국 에스테반은 이 순간까지도 국경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제헤른인지 뭔지, 하는 놈이야 이 나라 지키는 일 따위 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겠지. 되려 악투르 왕국의 뒷돈을 받고 국경 관문 을 열어주지는 않을까, 걱정스런 파렴치한이니까. “엔디미온 경. 왜 아직 여길 안 떠났나. 잠시 후면 이곳은 불바다가 될 거야.” “하지만 이대로 떠나는 것은 너무 미안한......” “아냐. 너에겐 충분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에 대해 왕실에 나쁘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 왕실에 너 같은 녀석만 있었다 면 나도 왕실에 갔을 텐데.” “아하하. 왕실에는 예상하시는 것보다....... 좋은 사람도 많거든요.” 순간 키스의 얼굴이 떠오르자 난 세차게 도리질을 한 뒤에 정색을 하고 말 했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고 있나요?” “뭘 말이야?” “쇼메 왕자의 제한을 거절한 거요.” “물론이다.” 에스테반은 웃는 낯으로 주저 없이 대답했고 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지금까지 고마웠다.” “그리고 그들을 설득하겠습니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에스테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좀 무모한 것 같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왕실의 기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인걸요. “당신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당신의 결백을 주장하겠어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왕실은 이미 내게 토벌 어명을 내렸어. 괜히 내 편을 들었다간 너까지 위험해 져. 넌 그럴 의무가 없다.” “에 그러니까....... 의무가 아니라 미덕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군 요.” 난 그렇게 말하며 성을 빠져나갔다. 부딪치면 죽을 수도 있지만 부딪치지 않는다면 애당초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는 부딪치는 길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 “카, 카론 경!” 토벌군의 거대한 지휘관 막사로 들어간 내가 가장 처음 본 것은 카론 경이 었다. 분명 왕실에서 파견 나온 것이리라. 솔직히 갑옷을 입고 있는 카론 경의 모습은 처음 봤다. 왕실 문양이 새겨진 고귀한 은빛의 갑주를 입은 그 의 모습은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로 아름답다. 이런 사람과 에스테반이 망 할 놈의 협잡꾼들 때문에 싸워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얼음의 기사 같은 카론 경이 무거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엔디미온 경. 어째서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건가.” “카론 경! 제 말을 꼭 들어주........” “네 녀석이 엔디미온이로군!” 순간 내 말을 끊으며 불에 태워도 삼일밤낮은 타오를 것 같은 비대한 지방 덩어리 인간이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오호라! 네 놈이 바로 제헤른 이로구나! 나는 순간 이 난생처음 보는 인간이 바로 제헤른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아예 내 금발까지 만지작거리며 대놓고 씨부렁거리는 것이었다. “흥! 에스테반에게 홀려서 중대한 임무마저 소홀히 한 기사의 수치가 무 슨 낯짝으로 여기에 온 게냐!” 난 울컥 화가 치밀어서 그의 손을 탁 쳐내며 쏘아붙였다. “당신이 보낸 금화는 너무 악취가 심해서 돌려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당신 몸에서도 그것과 똑같은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 니까!” “뭐, 뭐라고!” 이래봬도 나도 화나면 무섭단 말이지! 제헤른의 그 널찍한 얼굴이 당장에 붉으락푸르락 오색찬란하게 변해버렸음은 물론이다. 태어나서 이런 모욕 받 아본 적 없지? 카론 경은 차가운 말투로 내게 말했다. “입조심해라. 이 분은 전하의 어명을 받고 이 토벌군의 지휘관을 맡으신 제헤른 후작이시다.” ‘이런 놈이 대장이라고!’ 카론 경의 시선은 내게 ‘죽을 수도 있으니 제발 주의해.’라고 걱정해 주 고 있었다. 난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망국(亡國)의 대명사, 제헤른이 분을 삭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너의 그 무례함을 용서해 주도록 하지.” 최근 들어 내 무례함을 용서해 주는 사람 많아 좋네! 쳇! “대신 나 토벌군 사령관 제헤른의 권한으로 응당 네가 왕실의 기사로서 행해야 하는 임무를 내리겠다!” ‘뭐? 임무라고?’ “지금 당장 왕실로 돌아가라! 그리고 국왕 전하께 에스테반이 모반을 획 책하고 악투르 왕국에게 국경관문을 열어줄 계획을 세운 극악무도한 자라고 상소(上疏)를 올려라! 그것만이 네가 지금까지의 불명예를 씻고 애국에 매 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라!” 지,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야! 이런 뻔뻔한 자식! 귀족의 수치! 악 마의 사촌 동생! 아무리 온화한 나라도 이런 놈에겐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꾹 참으며 카론 경에게 말했다. “카론 경. 당신은 알고 있죠?” “.......” “에스테반이 모반을 일으킬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죠? 그래 서 명확하게 확인하고 싶어서 고집 세고 말도 잘 안 듣는 나를 일부러 여기 에 보낸 거잖아요. 그렇죠?” “......” “말해 봐요! 카론 경은 진실이 뭔지 알고 있잖아요! 당신은 썩지 않았잖 아!” 억울함에 터진 내 외침에 카론 경은 차가운 눈빛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입 을 열었다. “말했을 텐데. 우리에겐 진실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고.” “카론 경!!!” “제헤른 공의 명령을 들어라. 나는 이런 일로 네가 죽는 걸을 원치 않는다.” 잘못 들은 건가? 당신. 설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카론 경은 누구보다 멋진 기사잖아요. 고지식하고 웃지도 않고 출세하는 방법도 모르지만 그래도 기사가 이럴 때 뭘 해야 하는 존재인지는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썩어빠진 말을 하다니....... 자기 인생을 부정할 작정인가요?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 줘요.” “엔디미온 경. 넌 항상 나를 과대평가하는구나.” 그때 제헤른이 울분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에이이이이! 모반자를 처단하는 성스런 임무 중에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게야! 당장 이 몸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느냐! 만약 못하 겠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네 놈의 목을 자르겠다!” 기백도 대의도 없이 단지 악의뿐인 협박이 터졌지만 나는 오직 카론 경만 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실을 알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아무리 값진 진 실이 반짝거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제헤른은 숨이 넘어갈 듯이 광분을 하고 있었다. “카론 경! 뭐하고 있나! 왕실의 기사를 대표해서 이 매국노의 목을 쳐라!” 나는 카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카론 경. 진짜 기사가 되고 싶으면 이 나라를 떠나라고 말했었죠? 그걸 알면서도 왜 당신은 아직까지 이 나라에 남아 있는 건가요. 지금 저 성 안 에는 자신이 모함 받아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모반을 일으키 지 않고 귀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도 그와 같은 마 음이 아닌가요. 그렇죠? 내가 틀린 게 아니죠?” 순간 검을 뽑은 카론의 칼날이 내 목에 다가왔다. “엔디미온 경. 마지막 경고다.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 하겠다.” 21. 억울하게 죽은 자는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 라면 내 영혼은 아마 영원히 이 땅을 떠돌 것이다. “카론 경! 뭐하고 있소! 어서 저 자를 죽이시오!” “죽여! 죽여!” 막사 안에 모여 있는 영주들은 나를 향해 핏발을 세우며 그렇게 소리쳤고 카론은 내 목에 칼을 겨눈 채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칼끝 이 떨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카론 경! 왜 안 죽이고 있는 건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카론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날 죽이면 기사단장 으로 승진할지도 모르지. 제헤른으로부터 굉장한 금화를 포상 받을지도 모 른다. 훌륭한 기사! 공정한 수사관이라고 칭송받고 연극으로 만들어질지도 몰라. 그리고 그렇게 진실이 썩은 쭉정이만도 못한 진절 넌덜머리나는 세상 이라면 차라리 지옥이 더 살만할지도 모른다. “너만 보면 정말로 골치가 아프다. 악연이야. 나에겐 키스 하나로도 벅찬 데.......” 카론은 스르르 검을 내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헤른은 입이 쩍 벌어지 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지금 토벌군 사령관의 명령을 어긴 건가........ 카론 경.” “아니. 명령을 듣지 못했습니다.”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지금 내가 죽이라고 몇 번이나 명령을.......” “명령을 듣지 못했다고 하잖아!” 카론은 눈을 꽉 감으며 외쳤다. 난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 게 커다랗게 소리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아, 저런 고지식한 사람이 한 번 ‘농땡이’를 피우면 저렇게 뻔뻔해지기도 하는구나. 정말로 고맙다는 생 각이 든다. 그때 막사 문이 열리며 한 기사가 뛰어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큰일입니다! 현재 악투르 왕국군이 남쪽 국경으로 진격해 들어오고 있습 니다!” “뭐, 뭐야! 어떻게 그런 일이!” 망할! 네 놈들 머리는 진공상태냐! 당연하잖아! 국경 수비군을 이렇게 다 빼왔는데 그 승냥이 같은 악투르 놈들이 들어오는 건 밥 먹으면 배부른 것 보다 더 당연한 이치잖아! 카론 경은 차가운 눈초리로 제헤른을 바라보며 지극히 이성적인 어조로 말 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남부 국경선이 뚫린다면 전하가 계신 수도까지 위 험해집니다. 토벌군 사령관으로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자, 잠깐만 기다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란 말이야!” 아아, 대단해. 졌다, 졌어. 무능도 저 정도면 예술이지. 집신벌레도 너보 단 머리가 좋겠다! 난 너무 답답해서 누가 들어도 수긍할 만한 유일한 해결책을 말했다. “생각이고 자시고 냉큼 군대를 회군시켜 국경을 막아야 하잖아요! 그게 국경을 지키는 귀족의 의무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모반자를 놔두고 철수하란 말이냐! 그건 안돼!” 순간 나는 믿겨지지 않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내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리 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 모여 있는 잘난 주변 영주들 은 어느 누구도 ‘나라를 위해’ 자신들의 병사를 회군시키겠다고 말하는 자 가 없었다. 그때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이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에, 에스테반 백작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라! 그 더러운 모반자가 군대를 움직였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혼자 오고 있습니다.” 나 역시 믿겨지지 않는 표정으로 멍하니 막사 문을 바라보았고 잠시 후 병 사들에게 둘러싸인 에스테반이 굳은 표정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그는 정말 혼자 온 것이다. “오랜만이오. 제헤른 후작.” “큭! 이런 오만방자한........” 에스테반은 팔을 들어 제헤른의 말을 끊고는 입을 열었다. “길게 말할 시간이 없소. 지금 악투르의 군대가 이곳에서 7마장 떨어진 국경선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소.” “그, 그게 너 같은 매국노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게야!” “나와 나의 병사들이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오.” “미친 소리!” 제헤른은 거의 방방 뛰고 있었지만 에스테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 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영지를 탐했던 제헤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적군을 막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국경을 지키는 귀족으로서의 최악의 수 치가 아니겠소. 길을 열어주면 내가 그곳에 가서 악투르의 군대를 막겠소. 그리고 그 이후에는 왕실의 결정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소. 자결을 명하든 처형을 당하든 당신이 원하는 데로 내 결백을 증명할 테니 내가 이 나라의 국경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나는 가슴이 꽉 매어왔다. 지독할 정도의 신념, 이런 사내가 이 나라에 있 었던가. 그의 말에 다른 영주들마저도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이 조물주의 실패작 같은 제헤른 만큼은 코웃음을 치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었다. “흥! 모반을 일으키려는 놈의 말을 무슨 수로 믿을 수가 있어! 오호라! 네 놈은 이 참에 아예 악투르 쪽에 붙어 이 나라를 치려고 하는 구나! 내가 네 그런 간교한 술책을 모를 성 싶냐! 제 발로 여기까지 와 주었으니 내 손 으로 네 놈을 죽이겠노라!” 그리고 제헤른은 허리에 두른 커다란 검을 뽑으려고 했으나 무척이나 불행 하고도 민망하게도 그 비대한 몸집은 그 단순한 행동조차 허락하지 않아 ‘어라? 이 놈의 검이 왜 이리 안 뽑혀!’라고 떠들며 경기 일으킨 사람마 냥 요란하게 끙끙거리고 있었다. 처음과 끝이 하나같은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게 바로 제헤른 후작이시로군. 민망하고도 화딱지 나는 희귀한 상황 속에서 카론 경이 말했다. “에스테반 공. 길을 열어주겠소.” “고맙군. 카론 경.” “무슨 짓인가! 카론 경! 네겐 그럴 권한이 없어!” 카론 경은 여전히 칼을 뽑지 못해 수고하고 계시는 제헤른을 돌아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만약 국경이 뚫린다면 제헤른 공과 이곳에 계신 모든 영주님들도 국왕 전하의 진노를 금치 못하실 겁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하, 하지만 어떻게 그렇다고 이런 놈에게 국경을 지키라고 할 수가 있어!” “그럼 직접 지키시겠습니까?” 카론 경이 얼음장 같은 눈초리로 바라보자 제헤른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 다. 무섭겠지. 악투르의 강병들과 상대하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 헤른은 악투르 군과 싸우기가 무서워 그 나라 장군들에게 몰래 뒷돈을 보내 고 있었다고 한다. 하여튼 실로 치밀한 삽질이지 않은가.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하고 잡는 것이었다. 무심코 뒤돌아 본 나는 심장이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 빨간 눈에 갈색의 곱슬 머리, 이 양반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우아아앗! 키스 경이잖아!” “에헤헤. 잘 지내셨어요오? 미온 경이 하도 돌아오지 않아서 제가 걱정스 런 마음에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아.” 우리 서로, 시시한 농담은 집어치웁시다. 그런데 솔직히 이상하게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또 왜일까. “왜 여기 온 거예요!” 키스는 이 분위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품속 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눈부신 제복을 입고 (처음 보는 모습이지만) 자신의 검까지 차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가 칼 차 는 건 당연하지만, 키스가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불안하군. “전하로부터의 긴급 공문입니다. 잘 들으세요오?” “고, 공문이라고?” “이 공문을 읊는 즉시 에스테반 백작에게 내려졌던 토벌 명령을 중지하며 그와 더불어 백작의 모든 혐의를 무혐의로 처리한다. 또한 나 베르스의 국왕 은 짐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인 에스테반 백작을 잠시라도 의심한 것을 국 왕의 이름으로 사과하는 바이다. 그와 함께 하등의 증거도 없이 백작을 모함 한 제헤른 후작 이하 토벌에 참여한 5인의 영주에게 각각 400백만 셀링의 벌 금령을 언도한다. 이상입니다아.” “말도 안 되는 소리이이이이!!!” 제헤른은 절규를 하며 키스에게서 그 문서를 빼앗아 훑어보았지만 놀랍게 도 그것은 진짜였다. 정말 전하의 인장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제헤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며 중얼거렸다. “어,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때 카론 경이 키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키스. 네가 전하를 설득한 거냐?” “어머나. 카론 경. 그게 무슨 말입니까아? 난 단지 이걸 배달했을 뿐인데 요? 자 이걸 보세요!” 그리고는 다시 제헤른의 손에서 공문을 빼앗아 카론의 얼굴에 들이대는 것 이었다. “전하께서 서명하신 날짜를 보세요오. 삼일 전이죠? 이미 전하는 이 어명 을 써두고 계셨습니다아.” “하지만 어째서 그걸 지금......” “전하의 깊은 뜻은 바로 이것이랍니다아.” 그리고 키스는 방긋 웃는 얼굴로 사색이 된 제헤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작 나리. 어제까지 전하께 뇌물을 바치고 계셨죠? 토벌령을 내려달라고?” “설마......”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전하께선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싶으셨거든요. 세금도 제대로 안내던 자들이 솔선수범해서 왕실에 돈을 갖다 바치니 전하 께서도 참으로 명랑한 왕국이라며 무척이나 흡족해 하시고 계십니다아.” 만두가게 아저씨,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치졸한 돈벌이에는 정 말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아저씨였던 것이다. 스왈로우 나이츠 창단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 참, 그리고 지금쯤 당신들의 영지에는 왕실의 세금 징수원들이 들이 닥쳐 금고를 들고 가고 있을 겁니다. 아아, 용서 없는 자들이죠, 세금 징수원.” “마, 말도 안돼! 난 인정할 수가 없어!” 제헤른이 벌떡 일어나서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플라나리아만도 못한 인 간이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쬐끔은’ 불쌍해 보이는군. 공문을 훑어보던 카론 경이 제헤른을 향해 말했다. “지금 그 말씀은 전하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까요.” “그, 그건 아니지만!” “이 공문에 서약한 분은 전하 외에도 아이히만 대공과 오르넬라 성녀님 이 있군요. 전하는 그렇다 쳐도 아이히만 공작과 오르넬라 님을 상대로 싸 울 생각이신가요.” 전하는 그렇다 쳐도, 라니. 아아, 카론 경도 의외로 터프하시군요. 왕실에서 가장 무섭고 (누구도 절대로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자 제 아무리 남부의 멋쟁이 귀족 제헤른이라도 얼굴이 하얗 게 질려서는 실성한 듯이 뭐라고 중얼 중얼 거리며 막사 밖으로 흐느적흐느 적 나가버렸고 피 눈물을 흘리는 다른 영주들도 그를 따라 퇴장했다. 정의는 이긴다! 라고 그 놈들의 등짝에다가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전하의 쩨 쩨한 작태를 보면 이거 정의라고 하기에는 좀........ 그리고 키스는 그 여우같은 눈으로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쥬디스 양이 오르넬라 님을 설득해 줘서 다행입니다아. 오르넬라 님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공문은 완성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쥬, 쥬디스가!”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암살하려고 했다가 갑자기 발 벗고 도와주다니, 여 자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구먼. 지금쯤 성에 남아 있을 그녀는 대 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성녀님의 가르침을 받아 백작을 용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여전히 용서할 수는 없더라도 악의만큼은 버렸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헛웃음을 다 내던 에스테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키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의외의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당신이 바로 키스 세자르 로군. 소문은 제법 들었네만 이렇게 실제로 보 는 건 처음이야.” 얼레? 소문? “이런. 소인과 관련된 소문은 모조리 질 나쁜 헛소문이니 귀담아 듣지 마 시옵소서.” “무서운 소문들이었지. 아무튼 도와줘서 고맙네. 다음에 왕실에 들리게 되면 자넬 꼭 찾도록 하지.” “저는 지명은 안받습니다아. 에헴! 기사단장의 특권이지요!” “후후. 알겠어. 잘 있게나. 묵시(默視)의 기사.” 그리고 에스테반은 칼머리를 턱 끝까지 들어 가볍게 예를 표한 뒤에 국경 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대관절 무슨 소리지? 무서운 소문? 묵시의 기사? 일년 삼백육십오일 봄바람 난 키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잖아! 하지만 키스는 카론 경을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네가 동굴 속에서 나온 것도 참 오랜만이군. 옛날 생각이 난다.” “어머나. 저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버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아.” 카론은 딴청을 피우는 키스를 파란 눈동자로 한동안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 가는 것이었다. 나한테도 수고했다는 말 좀 해주면 덧나나. 정말이지 냉정 하다니까. 일이 이렇게 정리되자 나는 기지개를 펴며 목을 매만졌다. 정말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다니, 이렇게 와일드하게 살다간 제명에 못 죽 을 것 같다. “하아, 그럼 나도 할 일이 끝났으니 키스 경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가.......” “어머나. 무슨 말입니까아!” “예? 또 할 일이 남았나요?” “미온 경은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셔야지요. 언제나 자랑스런 스왈로우 나 이츠의 일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아.” 아 그렇구나. 제사! 이리 저리 애국하느라 본업을 잊어 버렸군. 나는 뭔가 이제야 정상궤도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포옥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참. 그런데 키스 경. 아까 에스테반 백작이 했던 말은 대체.......” “아차! 카론 주니어가 절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군요오! 그럼 왕실에서 만 나요!” 얼레? 키스가 사라져 버렸다. 저 성분한 수상한 인간에 대해 알아내는 것 은 조금은 더 기다려 봐야 할 인 듯 하다. 그건 그렇고 또 카론 경의 말을 빼앗아 타냐! 자기 승용마 하나 정도는 사라고!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백작의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실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실 같은 것은 돈도 권력도 안 되고 심지어는 방해만 된다고 귀찮게 여기기 때문에 세상 여기저기에 당연하게 존재하는 진실은 의외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음씨 더러운 놈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물체가 존재한다면, 그게 아마 ‘진실’일 것이다. 그것 말고 또 있던가? 제8화 :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 끝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069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1. 아침부터 일어나 제복을 입고 있는 내게 룸메이트 지스 경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콜록. 콜록........ 귀찮게 해서 미안.” “아냐. 아냐. 괜찮아. 뜨거운 스프라도 먹고 푹 쉬어.” “.......응.” 자존심이 센 탓에 여간해선 남에게 부탁을 하지 않는 지스는 혈색 나쁜 표 정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고 나는 피식 웃으며 하얀색 셔츠의 단추를 잠가가 고 있었다. (임금님의 훌륭한 인품으로 미뤄볼 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왕실은 우리를 신나게 부려먹고 있다. 실로 ‘뽕을 뽑고’ 들들 볶아 조금 이라도 미남, 미소년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공짜로 써먹는 것이다.(물론 모 든 노동에서 키스는 제외되며 오르넬라 마나님이 버티고 있는 펠리오스 무 녀들은 이런 인권유린을 당하지 않는다. 아아, 불공평해.) 그리고 그러한 ‘착취’의 일환으로서 우리 스왈로우 나이츠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은 순번대로 돌아가며 본궁으로 파견을 나가 이런 저런 시중을 들어야 한단다.(지명 중인 자는 제외된다.) 물론 오늘은 내가 아니라 지스의 차례지만 지스는 최근 연달아 세 번이나 지명을 나갔다 온 뒤에 안 그래도 유리 조각 같은 몸이 꽤나 나빠진 상태였 다. 그런데도 식은땀을 흘리며 제복을 입고 창백한 얼굴을 숨기려고 화장을 하 고 있는 고집덩어리 지스를 말린 내가 그의 대타로 본궁 파견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나, 착하지 않은가? ‘실은 오늘 전혀 일이 없기도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리더구트 밖으로 나갔다. 이러다간 정말 공무원 기사 레녹 씨에게 미움 받겠군. 그런데 리더구트 밖에는 나와 같이 제복을 차려 입은 쇼탄 경이 쭈그려 앉 아 담배를 물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궁상맞은 포즈로군. “미온. 준비 다 됐냐? 그럼 가자.” “얼레? 쇼탄 경도 파견이에요?” 쇼탄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를 툭툭 치며 말했 다. “헤유. 빚을 갚으려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이자나 제때 갚고 계십니까?” “아무 것도 묻지 마라아.” 알량한 추가수당을 벌기 위해 본당 행을 자청한 쇼탄 경은 ‘사는 게 다 뭔지.’라고 인생 다 산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앞장섰다. 나는 히죽 웃으며 그의 옆에 섰다. “후후. 이럴 때는 루시온 경이 부럽죠?” “아? 내가 어째서?” “루시온 경, 돈 많잖아요. 지명도 많고. 우리들 중에 가장 부자 아닌가 요?” 그 말에 쇼탄은 ‘너 아직도 모르고 있었냐?’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루시온은 돈 없어. 물론 워낙에 많이 버는 녀석이니 충분히 풍족하게 쓰 고는 있지만 자기가 번 돈 대부분은 모두 고아원이나 빈민구제기관 같은 곳 에 기부한다고. 모아 둔 돈 하나도 없을 걸?” “정말?”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얄밉고 냉정해 보이는 그 사람에게 그런 면이? “루시온은 진짜 귀족이야. 백작 가문이던가. 아무튼 가문도 좋고 예법에 도 능하고 검술 실력도 뛰어나서 헬스트 나이츠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놈인데, 왜 여기 왔는지 모르겠어. 제 발로 찾아온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재산을 모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 녀석은 거의 자기 얘기 를 하지 않아서 도통 모르겠다니까.” 쇼탄은 좀 서운한 듯이 빠른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사람들마다 사 정이 있다지만 루시온 경의 경우에도 남다른 속사정이 있는 것 같군. 지스 경보다도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라서 그 ‘속사정’을 알게 되는 것은 아마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2. 본궁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전하를 알현하러 온 분들의 코트를 받아주는 일이었다. 단순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말라. 본궁을 찾는 분들은 다들 내로 라하는 고관대작이라 실수하는 날에는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호화로운 응접실 문 앞에 서 있는 내게 가장 먼저 나타난 사람은 바로 철 혈대신 아이히만 대공이었다. 멋지게 넘긴 백발과 날카로운 눈매가 여전히 위압적으로 보였다. “이거, 엔디미온 군이 아닌가. 허허, 아직 살아 있군?” 윽, 살아 있어서 미안하네요! 오랜만에 보자마자 그런 악담을 하다니! 영 업미소를 띈 내 눈썹이 움찔거렸다. “헤헤. 제가 명이 좀 질기거든요.” 나는 그의 코트를 조심스레 벗겨주었다. 고급스런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 질거린다. “자네 그런데 정말 행정부에 들어올 생각 없나?” “전혀요.” 난 냉큼 대답했고 아이히만은 ‘후회할 거다.’라고 큭큭 웃으며 안으로 들 어가는 것이었다. 사람 불안하게 스리! 행정부는 안갑니다! 다음 ‘손님’은 오르넬라 무티 베르스 교구(敎區) 추기경 겸 성녀님이었다. 본궁 안까지 담배를 물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마 누님뿐일 겁니다. “미온 군. 오랜마안.” 그녀는 어제의 숙취에 시달리는지 조금 찡그린 표정에 미소를 담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거야 원, 애완동물 취급이로군. “그런데 아직도 내 궁전에 놀러 올 생각은 없는 거야?” “전혀요.” 뭔가 계속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는 기분이....... 나는 그녀의 붉은 색 실크코트를 벗겨주었고 성녀님은 ‘아아 정말 아침에 일어나는 건 싫어.’ 라고 투정을 부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음 타자는 법무대신 위고르 공이었다. 깔끔한 금발머리에 빈틈없는 이목 구비를 가진 엘리트의 표상. 아이히만이라는 괴물만 없었다면 왕궁 관료 중 의 넘버원이 되었을 사람이다. “엔디미온 경. 수고하네.” “감사합니다!” “응? 뭐가 그렇게 고맙다는 건가?” “아뇨. 경이라고 불어준 분은 오늘 위고르 공이 처음이라서.......” 위고르 공은 내 사소한 행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코트를 건네주었다. “조언하나 하겠는데, 아이히만 같은 위험인물과는 가까이 하지 않는 편 이 좋아.” "예에. 예에. 명심하겠습니다.” 위고르는 먼저 소파에 앉아 홍차를 즐기고 있는 아이히만의 뒷모습을 쏘아 보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여튼, 앙숙지간이라니까. 그리고 잠시 후에 도착한 마지막 손님은 놀랍게도 카론 경이었다. 카론 경 은 고위관리라기보다는 일선에서 뛰는 실무책임자라서 이곳에 오는 일은 거 의 없는 줄 알았는데. “얼레? 카론 경도 오셨어요?” “음. 전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무슨 일인데요?” “나도 모르겠군.” 전하가 카론 경을 불렀다고? 이거 뭔가 수상한데. 또 무슨 사건 일어난 거 아닌가, 싶은 기분에 불안감까지 들었다. 카론 경은 성격대로 자기 스스로 코트를 벗어서는 내게 건네주고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 모여 있는 분들에게 차를 따라주는 것은 쇼탄 경의 역할이었다. 나보다도 키가 크고 제법 근육질에 잘 그을린 피부라서 차를 따르는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빚을 갚기 위해서라면 찬밥 뜨신 밥 가릴 처지가 아니겠지. 코트 정리가 다 끝나자 나는 몸종 포지션대로 두 손을 모으고 문 앞에 섰 다. 그런데 날 흘낏 본 아이히만 대공이 손가락으로 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엔디미온 군도 들어두게. 왕실의 중대사는 사실 이런 비공식 자리에서 진행되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난 긴장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이히만, 오르넬라, 위고르, 카론....... 각 분야에서 권력의 정점에 달한 이들을 전하는 어째서 부른 것일까. 그때 아주 친근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다들 모였나? 아침부터 불러내서 미안허이.” 윤기가 흐르는 녹색의 가운을 입고 헤죽헤죽 웃으며 나타난 통통한 전하 의 모습을 보고 ‘앗! 보쌈이다!’라는 생각이 든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 니리라. 사람들은 토실토실한 두 뺨이 인상적인 임금님의 모습에 애써서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저 복스러운 모습 어디에서 그 치졸한 돈벌이를 구상하고 있는지 참으로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아, 공사다망한 귀공들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에 그러니 까.......” 사람들은 임금님이 말꼬리를 흐리자 흠칫 놀랐다. 확실히 저럴 때는 뭔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폭탄선언이 터질 확률이 농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가을도 되었고 하니까.......” 전하가 계속 뜸을 들이자 나마저 불안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전하는 초 롱초롱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본 뒤에 입을 열었다. “왕실 주최 무투대회를 여는 것이 어떻겠나! 응? 좋을 것 같지 않아?” 그 순간 응접실에 차가운 정적이 강림했다. 임금님이 실로 애처로운 눈빛 으로 동의를 구하고 있었으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시 후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한 아이히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하. 꼭 이맘때만 되면 쓰잘데기 없는 아이디어를 내놓으시는군요.” 폭언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출세를 위해 영혼도 팔 것 같은 위고르 공이 기다렸 다는 듯이 커다랗게 외치는 것이었다. “오오! 전하! 현명하신 복안(腹案)이시옵니다! 그런 일이라면 왕실의 권 위를 증명하는 것은 물론 많은 수익도 보장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나 아이히만은 괜히 옷을 툭툭 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얼레리꼴레리. 위고르는 간신배래요.” “뭐라고!” “아아, 귀찮아 죽겠군! 전하. 전 세계에 몇 개의 무투대회가 존재하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아이히만이 테이블을 탕 때리며 외치자 그 기백에 주눅이 든 전하는 거북 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엔디미온 군! 알려 드리게!” 순간 아이히만이 난 지목하자 난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무슨 행정부 수 행비서도 아니고! 나는 헛기침을 한 뒤에 예전 고객들에게 들은 ‘무투대회의 진실’을 보고 했다. “일단 가장 큰 세계규모의 대회에는 마키시온 제국의 만국무투대회가 있 습니다. 이 대회의 결승전은 제국 황제와 진청룡 라이오라 란다마이저가 참 석하는 어전시합이며 황제의 눈에 띈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황실 기사로 승 격되어 황제 마라넬로가 직접 작위를 내리게 됩니다. 물론 우승자는 제국의 영웅 대접을 받게 됩니다.” 거의 한달에 걸쳐 진행되는 굉장한 규모의 대회이고 그 수준 또한 세계 최 고라고 한다. 하긴 그 대회에서 본선에만 올라가도 황실에 입성해서 인생에 꽃이 피게 되니까,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여드는 것도 당연한 것이리라. “그리고 다른 유명 대회로는 콘스탄트 왕국의 교황청 주최 종합무투전이 있지만 지금은 내전 때문에 중단되었습니다.” 알테어 님과 키르케 님이 참관하는 곳이니만큼 이곳의 위상도 굉장했다. 말하자면 만국무투대회와 경쟁관계에 있는 행사라고나 할까. “그리고 최근에는 이오타 왕국이 주최하는 무투대회가 인기를 끌고 있다 고 합니다. 역시 우승자는 이오타 왕국의 상급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쇼메가 기획한 이 대회는 아주 상업적이라서 무지하게 화려하고 덕분에 인 기도 좋다고 들었다. 내 보고가 끝나자 아이히만이 입을 열었다. “들으셨죠? 모두 하나 같이 강대국들이나 주최할 수 있는 거랍니다. 전국 달리기 대회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이런 나라가 꿈 꿀만한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나 전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런, 이런. 자네들은 아직 틈새시장 공략이라는 것을 모르나 보군. 허허.” 순간 모두의 얼굴에 ‘어디서 주어들은 건 있어가지고!’라는 표정이 드러 났다. 숙취 때문에 속이 쓰린지 계속 고혹적인 외모를 찡그린 채로 듣기만 하던 오르넬라 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틈새시장이고 어시장이고 다 좋습니다만........ 이런 작은 왕국 에 유명한 고수들이 모여들 리가 없고 그런 ‘배우’들이 없다면 관객들도 모이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전하가 그토록 염원하시는 고부가가치창출 도 불가능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만.” 정곡이었다. 생각해 보자. 이런 작은 나라의 행사에 세계적인 용사들이 모 여들 리가 없다. 이런 곳에서 우승해 봐야 별로 얻는 이익도 없는데 무엇 하 러 이 별 볼일 없는 나라까지 와서 땀나게 싸우겠냔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자들을 ‘초빙’했다가는 그 유지비를 견디기가 힘들다. 결론 : 무투대회는 무리라니까 그러네! 그러나 전하는 그것마저 다 염두하고 있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야. 그래서 우승 상금을 걸었네!” “상금이야 다들 거는 것이고......” “100억 셀링! 그것도 일시불로!” 순간 아이히만과 위고르가 동시에 찻잔을 떨어트렸고 오르넬라 님은 찡그 린 얼굴을 쫙 펴며 놀란 입을 가렸으며 과묵한 카론 경마저도 믿을 수 없다 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전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와 쇼탄 경은 심장이 얼어버렸다. 이건 스케일이 크고 작고의 문 제가 아니잖아! 아이히만이 ‘올해는 좀 증상이 심하군.’이라고 중얼거린 뒤에 주먹을 꽉 쥐며 으르렁거렸다. “100억 셀링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시옵니까? 이 나라 일년 예산마저 사뿐히 넘어가잖아! 그걸 내주려면 이 왕실을 다 팔아치워야 한다고! 네 놈 을 백번 팔아도 부족해!” 아무리 같은 왕족이라지만 아이히만은 당장 국왕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쳐 버릴 것처럼 격분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위고르 마저도 ‘묘안이시옵 니다!’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다른 유명 대회도 상금은 1억 셀링 미만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100억 셀링이라는 돈은 마키시온이라도 심각 하게 고려해 봐야 할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인 것이다. 물론 일개 개인이 그 런 돈을 소유한 경우는 전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그 예를 찾기가 힘들 것이 다. “후후후후. 걱정 말게나. 내게 다 방법이 있으니.” 전하는 카론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카론 경이 이겨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 잠깐. 전하의 ‘음흉한 계획’이 무엇인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카론 경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무패의 검술사야. 그런 카론 경이 참여 해서 우승한다면 딴 놈에게 우승금을 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어떤가! 내 생각이!” 나는 순간 ‘이런 악당!’이라고 소리칠 뻔 했다. 진짜 파렴치 하군.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좀 더 완벽한 승리를 위해 내가 대전표도 준비해 왔네!” 그러면서 전하는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오르넬라 님이 눈썹을 가늘게 떨며 말했다. “뭔가요. 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대전표는.” 그렇다. 카론 경은 어째서인지 결승전까지 그대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흐흐흐. 상대가 결승까지 올라가느라 지쳤을 때 카론 경이 한칼에 이겨 버리면 우승은 누워서 떡먹기! 또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설사약과 독 침, 남자의 정기를 빨아들인다는 절세 요녀들까지 준비해 놨네! 어떤가! 이 러면 카론 경이 우승할 수밖에 없겠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전하의 표정은 그야 1230 말로 비열한 악당 그 자체였다. 아이히만은 전하를 한대 갈겨주려는 듯이 조용히 반지를 빼고 있었고 오르 넬라 님 역시 ‘전하의 영혼만큼은 제가 구원해 드릴 수가 없겠군요.’라고 투덜거리며 담배를 물었다. 그 때 카론 경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 비겁한 짓은 필요 없습니다.” “오오! 카론 경! 자신 있겠는가!” “명령이라면....... 하겠사옵니다만.” 카론은 짜내는 듯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스며있는 감정은 ‘웬만하면 안 하고 싶습니다.’였지만 전하는 일부러 무시하며 커다랗게 웃는 것이었다. “좋아! 그럼 진행해 보자고! 100억 셀링 상금의 무투대회를!” 아이히만은 고개를 숙인 채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카론 군이 우승하지 못한다면....... 전하, 네 놈은 세계최악의 얼간이 왕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오.” 누군가 말했다. ‘도박이란 확실한 것을 가지고 확실하지 못한 것을 노리 는 바보짓이라고.’ 그리고 전하의 간절한 소원 끝에 그 도박이 성대한 막을 열었다. #070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3. 일을 마치고 리더구트로 돌아가는 나는 옆에 있는 쇼탄 경에게 푸념을 늘 어놨다. “하아. 아무리 인생은 단발승부라지만, 이건 좀 지나친 한탕주의 아니에 요? 실수로라도 카론 경이 우승하지 못한다면 왕국의 운명이........ 얼레? 쇼탄 경?” “어? 지금 뭐라고 그랬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멍한 표정의 쇼탄 경은 100억 셀링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넋이 나가 있 는 것 같았다. 하긴, 어찌 안 그럴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거 금을 거머쥐는 자가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사상 최고의 갑부가 된다는 것 이다! 평생 마나-열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수준의 부자 정도가 아니라 아 예 열차를 마음대로 대로 사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레일을 펑펑 깔며 싸 돌아다녀도 남아도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금액인 것이다. ‘아니 잠깐! 나도 알테어 님이나 키르케 님에게 출전해 달라고 조른다면 우승금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제 아무리 천하무적 카론 경이라도 한 명의 파워가 국가의 국방력을 넘어 간다는 아신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분들을 부르면 내 인생도 핑크빛........ “아아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100억 쇼크란 대단한 것이로군. 나도 깜 짝 엉뚱한 생각을 해버릴 정도니까. 리더구트에 돌아오자, 아니나 다를까 무사태평으로 똘똘 뭉친 키스 경이 지정 소파 위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대체 저 인간은 인간의 탈을 쓴 고양이란 말인가. 나는 수면중독에 걸린 듯한 그를 깨우기 위해 퉁명스런 목소리로 커다랗게 외쳤다. “돌아왔습니다!” 키스는 부스스 눈을 뜨며 빨간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 다. “얼렐레? 쇼탄 경. 왜 안색이 그렇게 창백합니까아?” 쇼탄 경은 아직도 100억 쇼크에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키스와 랑시, 루이 경등이 바라보는 가운데 쇼탄 경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아? 무슨 말입니까아?” “저는 이제부터 무투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여러분들과 아쉬운 작별을 할 수 밖에 없군요. 100억 벌면 1억 정도는 여기에 기부해 드리겠습니다. 여러 분. 아디오스!” 아주 쇼를 해요. 가만히 차를 마시던 루이가 후르륵 홍차를 넘긴 뒤에 말 했다. “쇼탄. 그것도 개그라고 하냐. 빚에 쪼들리더니 이젠 아예 정신이 나갔구 나. 그딴 말에 이 루이님이 웃어주기라도 할 줄 알았어? 측은하기도 해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하. 정말이라니까요. 전하께서 결정했다고요. 우승금 100억의 무투대 회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돌덩이처럼 경직된 것을 느끼고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들고 있던 하얀 찻잔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루이가 유령이라도 본 얼굴로 물었다. “시, 시방 지금 백억이라고 했냐?” “100억 셀링. 현금. 일시불.” 순간 결심을 한 루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쇼탄! 내가 너의 트레이너가 되겠다! 우승 상금은 이제 우리 거야!” “필요 없어.” “아잉. 그러지 말고.” 루이는 남세스럽게 스리 쇼탄의 다리에 매달려서는 ‘그러지 말고 5:5 하 자앙. 아니 6:4도 좋은데.’라며 애걸복걸하고 있었지만 쇼탄은 거만한 목 소리로 ‘어허. 함부로 친한 척 하지 마시오. 루이 씨.’라고 거드름을 피 우고 있었다. 하아. 잘들 논다. 그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키스가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거망동 하지 마세요! 왕실 기사로서 품위를 지키세요.” 얼레? 키스에게 저런 딱 부러지는 면이 있었다니. 그리고 그는 정색을 하 며 나를 바라보았다. “미온 경.” “예?” “저 그런데 참가 신청은 어디서 하나요오?” “에이이! 잠이나 자!” 한 순간이라도 당신에게 진지함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한편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랑시 경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쿨하게 책을 읽던 루시온 경에게 달라붙어서는 꼬드기는 것이었다. 항상 출장 중이던 루시온 경은 간만에 휴식을 즐기던 참이었다. “루시온 경은 출전 안 해? 싸움 잘 하잖아. 그러니까 출전해라. 응? 그리 고 우리 둘이 함께 사랑의 도피를.......” 으이구. 아주 영혼을 팔아라. 그러나 루시온은 냉정하게 책을 턱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관심 없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100억 쇼크에 끄떡도 없었다. 가진 돈도 전부 고아원에 기 부했다고 했지? 얄밉긴 해도 확실히 기품이 넘치는 사람이란 말씀이야. 상황이 이토록 수상해지자 나는 진실을 까발려야 했다. “어차피 카론 경이 우승하게 되어 있다니까요. 전하가 100억을 내줄 리가 없잖아요. 카론 경을 이길 자신 있는 사람은 출전하세요. 단 목숨은 보장 못하겠죠?” 내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하며 쇼탄에게 매달려 있던 루이가 쇼탄을 확 밀쳐낸 뒤 자리에 앉았다. “에이.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쇼탄 따위가 카론 경에게 이길 리가 없 잖아.” “따, 따위라니! 사람 그렇게 무시하는 게 아냐!” “어럽쇼? 그럼 출전해 보시든지. 너 죽으면 네 방 물건은 내가 접수해 주지.” 루이 경은 비정한 룸메이트였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 난감하게 웃다가 문득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있어봐. 어쩌면 이거 일이 엉뚱하게 꼬일 수도......’ 생각해 보라. 100억이라는 액수 덕분에 쇼탄은 물론 나마저도 잠시 그 돈 을 거머쥔 공상을 떠올려 봤다. 왕실 기사도 이 모양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 련할까? 평생 검 한번 잡아보지 않은 백면서생(白面書生)도 출전해 보겠어! 라고 소리칠만한 액수인 것이다. 이쯤 되면 오만잡것들이 돈을 노리고 다 몰려들어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다. 깡패, 건달, 살인마, 암살자, 시골에서 힘깨나 쓴다는 머슴까지 다 모여들지도 모른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려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런 엉뚱한 일은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인간 문명이 발생한 이래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순간 왕국의 운명 을 짊어지게 된 카론 경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들었다. 4. 기대 혹은 불안감대로 100억 쇼크는 요란한 해일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갔 다. 물경 100억의 우승금을 공표한지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수도 아스말 은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든 전 세계의 관광객들과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만 사 팽개치고 달려온 세계 각지의 싸움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역 시 돈의 힘이란 때론 신의 권능마저 범접하기도 한다. 이런 하잘 것 없이 작은 나라의 대회가 이토록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 겠는가? 수도 아스말은 이미 평소 인구의 100배가 넘어가는 콩나물시루가 되어 버 렸고 발 빠른 여관주인들과 왕국에서 파견 나온 상인들은 평소 가격의 10배 를 넘는 폭리를 취하면서도 날개 돋친 듯 음식이나 시시껄렁한 관광 상품 따위를 팔아치우고 있었다. 그렇다. 수도는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전하께선 평소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열의에 불타며 직접 진두지휘를 하 며 수도 광장에 10여개의 ‘특설 링’을 실로 광속으로 만들고 있었다. 페 르난데스 왕자님이 태어났을 때도 저 정도로 기뻐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국왕이 아니라 흥행사로 태어났으면 정말 역사에 굵직하게 남았으리라. “와하하하하! 어떤가! 짐의 혜안이! 벌써 왕궁의 창고는 금화로 가득 쌓 이고 있다네! 가끔은 나 스스로 내 이런 재능이 두렵기까지 하네.” 솔직히 두려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대체 이제는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 로 불어나 버린 이 엄청난 인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또한 만약 카론 경 이 이기지 못했을 때 그 악몽 같은 여파를 무슨 수로 감당할 것이란 말인가. ‘그건 그렇고 카론 경은 며칠 전부터 나타나질 않는군.’ 얼떨결에 왕국의 흥망을 한 몸에 짊어지게 된 베르스 최강의 검술사 카론 경은 역시 이 사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며칠 전 키스에게 찾아와서 는. “키스. 연습을 도와다오.” 라고 짧게 말하고는 귀찮다고 몸부림치는 키스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사라 져 버렸다. 대체 키스가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도리어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지만) 의외로 카론은 키스에게 의지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 누구도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다는 격언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전하께서 직접 지정한 대회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누구나 예선을 지원할 수 있으며 지원비는 5000 셀링이다. 탈락한 자는 다시 지원할 수 있으며 그때는 할인해서 4500 셀링이다.(실로 피를 토하는 규칙이다.) 2) 지원자는 한 달 동안 계속 받게 되며 예선은 100조에 걸쳐서 진행되고 그 조의 우승자들이 본선 토너먼트에 올라가게 된다. 본선 진출 시 추가로 10000 셀링을 내야 한다.(집요하다.) 3) 경기는 1대1로 진행되며 장거리 무기와 화약무기는 불허한다.(누군가 저격총을 가져오면 아주 곤란하지 않겠는가?) 4) 경기 시간은 무제한이지만 상대가 경기 속행 불능 상태가 되거나 항복 을 선언했을 때는 반대편의 승리로 결정된다.(치료비는 별도 부담이란다.) 5)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주최자인 베르스 국왕이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다. 6) 관람료 : 예선 경기 무료 / 본선 경기 당 1000 셀링 / 결승전 10000 셀링 이렇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규칙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꾸역꾸역 수도 아스말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나 는 경기장을 만들고 있는 수도 광장에 쪼그려 앉아 벌써부터 흥분에 도취되 어 있는 군중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와아아! 저것 좀 봐! 이오타의 붉은 여우 베르그손 남작이 왔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에서는 별명처럼 붉게 물들인 여우 가죽 망토를 두 른 교활해 보이는 사내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접수처로 오고 있었다. 그 런데 저러면 덥지 않나? “소식 들었어? 지금 역에 니샤 왕국의 수호신이라는 랑카스트 경이 도착 했다더군!” 으음. 역시 전하의 라이벌 니샤 왕국에서도 오는구먼. “지금 콘스탄트에서도 소식을 들은 검객들이 몰려오고 있대!” 내전중인 나라가 힘도 좋아. “마키시온에서도 소식을 들은 식인곰이라는 산적 두목이 참가하려고 온다 더군. 아주 잔인한 놈이라던데.” 범죄자는 오지 마!!! 아무튼 사람들의 소문은 입에서 입을 건너 삽시간에 커다랗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진청룡이나 명주작이 올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마저 퍼질 것만 같군. 그때 훤칠한 키의 사내가 내게 다가와서는 아는 채 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동지.” “아?” 뭐야. 동지라니? 하지만 나는 그를 올려다보고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고정간첩 176호!” 그렇다. 그는 바로 예전 마키시온에서 내 목숨을 구해줬던 인트라 무로스 첩보원 리젤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금발의 곱슬머리가 반짝거리는 그는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여전히 이곳에서 첩보활동 중이신가 보군요. 수고하십니다.” “아하하. 벼, 별로 수고할 것도 없습니다.” 이 양반은 아직도 날 이자벨 님의 부하로 생각하나 보군. “설마. 그런데 리젤 경도 여기 참가하시려고?” “그럴 리가요. 저희 같은 첩보원이 이렇게 눈에 띄는 대회에 노출 되선 안 되죠.” “그럼 왜 오신 건가요?” “크리스탄센 국장님으로부터 이 대회를 조사해 보라는 명령을 받고 투입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 대회 냄새가 납니다.” “내, 냄새?” 그는 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100억 셀링의 상금이 결린 무투대회 라니. 이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이 엉뚱한 대회 뒤에는 뭔가 아주 복잡한 정치적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국장님께서 도 혼란스러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배후에 아주 치밀한 계략이 도사 리고 있음에 분명하다는 판단으로 절 보내신 거죠. 아무튼 베르스 국왕도 제법 하는군요. 이런 엉뚱한 대회를 벌여 놓고 대체 그 뒤에서 무슨 위험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지 적이고 머리회전이 비상한 이자벨 님마저도 국왕 전하의 단순무식한 사고회 로는 따라갈 수 없다는 건가. 리젤 경.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애당초 음모 따윈 없답니다. 믿기 힘드 시겠지만 이건 정말 돈 한번 주머니 터지게 벌어보자는 국왕 전하의 순박한 아이디어일 뿐이에요. 굳이 음모라고 한다면 무조건 카론 경이 이겨야 한다 는 것이겠지요. 하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말이 길어졌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오타 왕국에 영 광 있기를!” “아 예....... 영광 있기를.”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리젤 경은 발소리도 없이 골목길 속 으로 사라졌다. 이번만큼은 이자벨 님도 한참 잘못 잡고 있는 거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트라 무로스 마저도 이 대회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 이거 너무 판이 커지는 것이 아닐까. 그때 군중들 속에서 광장이 떠나갈 것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 카론 경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정말 며칠 만에 나타난 카론 경이 여전히 주변을 꽝꽝 얼려버릴 것 같은 냉기서린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 날카로운 분위기만으로도 기가 질려 버리는군. 대체 저런 사람을 누가 이길 수가 있을까.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귀엽게 생겼네. 카론 경의 시종인가 봐.” 얼씨구. 그 뒤로 키스가 산들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나서는 분위기 다 망치 고 있었다. 저 인간의 마이페이스는 아마 이 세상이 멸망할 때가 와도 무너 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기사단의 대표인데 조금은 근엄한 척 해 달 라고요! 카론 경과 너무 비교되잖아! 카론 경이 신청서에 싸인을 하자 광장은 그야말로 흥분에 불이 붙어서는 떠나갈 듯한 환호성을 내질렀고 나는 제발 별 탈 없이 이 무시무시한 대회 가 끝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5. 얼마나 수도가 붐비고 있는지 리더구트 안에 있는데도 밤낮으로 시끌벅적 한 군중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정말 수도 전체가 들썩들썩 거리는 느낌이로군. 내일이면 경기가 시작이다. 덕분에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힌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하품을 하고 있는 키스 에게 말했다. “키스 경. 정말 카론 경이 우승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아?” “걱정 할 수밖에 없잖아요. 전 세계에서 별의 별 흉악한 녀석들이 다 몰려 들 거라고요. 만에 하나 카론 경이 지거나 혹은 목숨이라도 잃게 된다면........” “후후.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니, 이 양반은 그런 섬뜩한 예측을 어떻게 그렇게 태평하게 할 수가 있 는 거야. 키스는 뽀얀 목 언저리를 긁적거리며 장난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검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이 평생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자체가 죄 악이에요. 싸우고 또 싸우다가 어느 날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쓰러지게 되 면 자신의 검을 무덤 삼아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뿐이에요.” 그가 베시시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지만 그 말 속에 담겨있는 찌릿한 위압 감에 난 가슴이 콱 막혀 왔다. “키스 경. 왜 그런 말을.......” “상식적으로 봐도 카론 경을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탈 탈 털어도 열명도 나오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열명 중 하나가 이 곳에 온다면......” “그런 일 없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아아, 내가 왜 이렇게 겁을 내는 거야. 커다란 커피 잔을 든 채로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랑시는 자신의 긴 머리를 매만지며 ‘미온 경이 걱정할 거 없어. 그런 절대무적의 존재가 그리 흔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 아니 그의 눈빛은 마치 과거를 되새기는 것 같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안색이 창백해 진 쇼탄 경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 다. 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야말로 새하얗게 질려 있는 쇼탄에게 말했다. “쇼탄 경?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네요오?” “크, 큰일났어!” “큰일?” “지금 광장은 난리가 났어.” 최근 광장은 항상 난리 통인데 거기서 뭐가 더 난리 날 구석이 있다는 거야? 그러나 쇼탄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꺼낸 말은 내 얼굴도 창백하게 만들어 버 리기 충분했다. “견백호가 나타났어.” 차아앙! 그때 랑시가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졌고 새하얀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항상 쾌활하고 낙관적이던 랑시에게 이런 표정이 있는지 몰랐 다. 떨리는 눈동자를 멈추지 못하는 랑시는 누구에게라도 할 것도 없이 커다 랗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대체 랑시가 왜 이러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십년 넘게 행방불명이었던 견백호가 어째서 지금 나타난 것일까. 세계에 네 명 밖에 없다는 아신위가 어찌 보면 천박하다고 할 수 있는 무투대회에 참 가하는 일은 역사상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이 그 첫 번째가 된다면 카 론 경의 승률은 제로가 되어 버릴 것이다. #071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6. 나와 랑시 그리고 쇼탄은 광장을 향해 뛰고 있었다. 광장에 도착하기 전부 터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커다랗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광장에 아신이 나타났다더군.” “농담이 아냐. 그런 괴물을 무슨 수로 이겨.” “실은 그 견백호는 베르스를 집어삼키기 위해 이오타에서 보냈다던데?” “아냐. 콘스탄트야. 국왕의 숨겨진 심복이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 사람은 마키시온 사람이라고. 마라넬로 황제가 예전 일의 보복 때문에 보낸 것이 분명해!” 으이구.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종당에는 ‘견백호는 국왕의 숨겨진 자식이다!’라는 어마어마한 결론까지 도출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런 가당찮은 대회를 안 열었으면 이런 불상사도 없잖아! “하아. 하아. 도착했다.” 나는 한걸음에 광장에 도달해서는 허리를 꺾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견백 호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바라본 전설의 아 신 견백호는......... “우하하하하! 이 몸이 바로 견백호이니라! 무릎을 꿇고 날 숭배하라! 와하하핫!” 그런데 대체 뭐냐 저 천박한 녀석은. 저런 놈이 정말 견백호라고?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당장 100억 셀링을 내 앞에 바치는 편이 좋을 것 이니라!”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광대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는‘견백호’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농담이 아니다. 아신은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이라 던데, 그렇다면 하늘이 이번에는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대체 어딜 봐도 얼간이 티가 줄줄 흐르는 저 떠버리의 어디가 아신이냐고! 그때 어째서인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랑시가 말했다. “그럼 그렇지. 저 인간, 가짜야.” “얼레? 그걸 랑시 경이 어떻게 알아?” 놀란 쇼탄이 물었지만 랑시는 대답하지 않은 채 ‘히잉. 괜히 놀랐잖아.’ 라며 평소처럼 돌아와서는 왕궁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촌극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놈! 감히 견백호의 이름을 사칭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저 양반은 또 누구야? 거구의 사내가 홀연히 나타나서는 일갈을 늘어놓자 ‘자칭 견백호’가 움찔하며 말을 더듬는 것이었다. “마,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몸이 바로 견백호시다!” “어허! 아직도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냐! 네 놈 따위가 견백호 일 리가 없잖아!” “흥! 그, 그걸 네 놈이 어떻게 알아!” “그건 바로.......” 그러자 그가 어깨에 힘을 잔뜩 준채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내가 견백호거든.” 얼씨구. 나와 쇼탄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매만졌다. 대충 왜 이런 웃기도 민망한 개그 대행진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이 오는군. 견백호는 벌써 십년 넘게 행방불명이다. 보통 아신들이 왕국이나 자신의 주인을 섬기는 것에 비해 견백호만은 세상에 나타나질 않는 것이다. 그를 봤다는 사람은 많지만 그 목격담은 가지각색이다. 긴 은발을 가진 아름다운 아가씨다! 에서부터 다리가 여덟 개 달리고 눈에서는 살인광선을 내뿜는 괴 생명체 라는 도무지 믿기 힘든 소문까지, 지나치게 다양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누가 그를 사칭한다고 하더라도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가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견백호의 명성을 이용해서 한탕 챙겨보자는 전 세계의 놈팡이들이 득달같이 몰려드는 것도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아. 가지가지 한다.” 슬슬 견백호들의 숫자가 십 단위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나와 쇼탄은 ‘아아. 졌다. 졌어. 더 이상은 못 보겠구먼.’이라고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왕실로 향했다. 그건 그렇고 랑시는 어떻게 한눈에 진짜 견백호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거지? 7. 그리고 화려한 전야제와 함께 하루가 지났다. “자아! 오늘 100억 무투대회가 성대한 막을 열었습니다아.” 키스는 아침 브리핑 시간에 방긋 웃는 얼굴로 그렇게 외쳤다. 사실 공식 대회명은 ‘베르스 왕립 무투대회’였지만 아무도 그렇게는 안 부르고 보통 ‘100억 쟁탈전’이라든가 더욱 줄여서 ‘100억 대회’라고 부르고 있다. 아 무리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지만 이 정도로 경박한 대회가 예전에 존재했 던가. 순수한 스포츠맨십 따위는 이미 저 우주 끝으로 날아가 버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참가자들의 두 눈동자에도 모두 ‘100억!’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이건 광기야. 원죄(原罪)라고. 아아, 관여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키스가 말했다. “할일 없는 미온 경도 이 성스러운 대회 진행을 응당 거들어야 겠지요?” “예? 저도 도울 일이 있나요?” 서, 설마 출전하라는 거냐! “당연히 잡일입니다아.” “하아. 역시.” 그럼 그렇지.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들은 참가자 경호라든지 대회 보안 관 리 같은 기사다운 일을 맡았지만 우리 스왈로우 나이츠는 (특히나 나는) 그 이름도 거창한 ‘접수원’이라는 단순노동에 투입되었다. 물론 그 우락부락 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참가자들의 시중을 들게 된 쇼탄 경보다야 덜 비참 한 운명이지만 말이다. “어째서 내가 그 짐승 같은 놈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냔 말이야.” 쇼탄 경은 자신의 서러운 처지에 진절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문 채 중얼거렸지만 키스는 그런 그를 흘낏 보며 매몰찬 태도로 대꾸할 뿐 이었다. “그거야 댁이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아.” “빚진 인간에겐 인권도 없다는 거냐!” 그때 검은 슈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루시온 경이 여행 가방을 들고 문 밖 으로 나섰다. “그럼 지명 다녀오겠습니다.” 그렇다. 인기 스타 루시온 씨는 들어오는 지명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항 상 바빴기 때문에 이런 ‘잡일’에 투입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성공 한 청년의 표상 같은 루시온 경의 뒷모습과 인생의 패배자 쇼탄 경의 우울 한 표정을 번갈아가며 바라본 뒤에 동정의 말을 읊조렸다. “쇼탄 경. 인간이 모두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마.” “헤유. 내 알게 뭐랍니까. 그럼 이 몸종, 시중들러 가보겠사옵니다.” 쇼탄 경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떴다. 쇼탄을 보자 문득 회상에 잠겼다.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10대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부유했다. 고객에게 부탁만 해도 집 한 채 얻는 것 정 도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처럼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거나 엉뚱한 일 에 휘말려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절대로 없는 꽤나 사치스러운 일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때가 더 행복했느냐? 그것도 아니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이라는 것은 흠뻑 만끽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늦 가을 마냥 어느새 사라져 버리곤 한다. 그러니까 돈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 하지 않아, 어렵지만 그렇게 다짐해 보자. 8. 수도 광장에 만들어진 10개의 경기장에서는 동시에 1차 참가자들의 예선전 이 치러진다. 워낙에 지원자가 많다보니까 경기장을 24시간 풀가동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굉장하지 않은가? 무투대회 역사상 최초의 야간경기 개 장이다. 그리고 나는 이 광란의 도가니 중심에 있는 접수처에 앉아 100억을 노리고 몰려드는 인간들의 신청서를 받고 있었다. 첫손님은 거창해 보이는 대도(大 刀)를 든 험악한 사내였다. “이봐! 어서 신청서를 내놔! 여기 참가하기 위해 일주일이나 달려왔다고!” “예에. 예에. 참가비 5천 셀링 되겠습니다.” 이래서야 완전히 분식집 종업원이잖아? “우승하면 100억 셀링 주는 게 사실이지? 만약 아니라면 이 나라를 박살 내버릴 줄 알아!” “물론입죠. 일시불로 지급할 겁니다.” 물론 댁이 카론 경을 이겼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이 무식해 보이는 사내 뒤에도 한가락 하게 생긴 싸움꾼들이 줄지어 서서 ‘앞에 빨리 좀 해!’라든가 ‘기다리게 만들면 죽여 버린다!’라는 둥의 협 박을 일삼고 있었다. 이러다간 경기 나가기도 전에 서로 멱살 잡을 분위기 로군. 아닌 게 아니라 어제도 여관에서 시비가 붙어 십 단위의 사상자가 나 왔다고 한다. 아무리 돈도 좋다지만 사람 좀 가려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 다. 한편 정당하게 싸우겠다고 말한 카론 경의 뜻대로 그도 예선전부터 참여하 게 되었다. 그의 첫 상대는 하필이면 이름만 들어도 상대가 벌벌 떤다는 악 투르 왕국 출신의 잔인한 검투사라고 한다. 지금 막 그 경기가 시작되고 있 었다. 경기장 중앙에서 카론 경과 마주 선 그는 소문답게 카론 경의 두 배 는 될 것 같은 거인이었다. 안 그래도 악투르와 우리나라는 앙숙지간인데 저런 놈을 상대로 괜찮을까 몰라. “후후. 네 놈이 베르스 최강의 기사라는 카론이냐?” “........” “흥. 상처 하나 없는 곱상한 얼굴이군. 그리고도 전사냐?” “........” “그 연한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광장에 뿌려주마! 와하하하......... 야!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싫다.” 어쭙잖은 심리전을 걸어오려던 검투사는 도무지 장승같은 카론의 태도에 자기가 되레 광분하며 커다란 칼을 뽑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경기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딱 2초 걸린 경기 내용을 자세하게 묘사하진 않겠다. 그러면 그 이름만 들 어도 부들부들 떤다는 검투사 양반이 너무 불쌍해지니까. “내, 내, 내 팔!!” 순식간에 검을 놓친 그 거한은 피가 흐르는 두 팔목을 움켜쥔 채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발도(拔刀)라고 부르던가. 뭔가 반 짝거리는 것 같더니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던 검투사의 팔 근육이 잘려나 간 것이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던 심판이 뒤늦게 카론 경의 승리를 선언했다. “카, 카론 샤펜투스 선수! 승리!” 검을 집어넣은 카론 경이 ‘조금만 더 날 모욕했다면 그 팔을 잘랐을 것이다.’ 라는 서늘한 승리대사를 읊으며 경기장에서 내려왔고 겁에 질린 검투사는 자신의 무기도 버리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역시........ 용서 없 는 사람이라니까.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에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이 뒤늦 게 광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을 내질렀고 귀부인들은 손수건까지 내던지 며 카론 경의 실력(보다는 실은 외모)를 찬양했다. 저어, 그런데 임자 있 는 몸이거든요? 얼마나 대단한 열광이었는지 다른 경기장에서 시합을 벌이던 자들마저 싸 움을 멈추고 황망한 표정으로 카론 경을 바라볼 정도였고 심지어는 아예 전 의를 상실하고 기권하는 자도 속출하고 있었다. 그런 군중들의 환호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내게 다가온 카론 경이 품속에 서 참가 신청서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승리할 때마다 도장을 찍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귀여운 규칙이지 않은가? 나는 도장을 찍어주며 흥얼거렸다. “헤헤. 수고하셨어요. 카론 경.” “힘들군.” 카론 경은 이런 분위기가 영 불편한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아 무튼 도통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야. “뭐. 일이잖아요. 이런 것도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니까요. 뭐 터무니없이 공연스럽긴 하지만.” “그렇겠지.” 그는 나라를 구한다는 것에 동의한 것인지 공연하다는 것에 동의한 것인 지 알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시합은 하루에 한번 이니까 이제부터는 또 연습을 하겠군. “그런데 카론 경.” “......?” “사모님은 안 오셨나요?” 이런 중대한 대회라면 나올 만도 하잖아? 무엇보다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별로........ 내가 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 그렇군요.” 감정을 읽기 힘들던 카론의 눈매가 잠깐이나 흐려지는 것을 보며 나는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성격대로 더 이상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몹시 쓸쓸한 향기를 가진 사람이다, 확실히 그런 기분 이 든다. 대회 초반부터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웠던 카론의 시합을 봐서 그런지 사 람들의 기대치 역시 급상승하고 있었지만 - 실은 모두가 다 카론 경인 것은 아니다. 사실 경기 대부분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에. 곧 견백호 07번 대 견백호 16번의 시합이 있겠습니다.” 몸부림치도록 한심하다! 분명 둘 다 가짜임에 분명한 그 협잡꾼들의 어설 픈 칼부림을 보고 있노라면 ‘저런 녀석들도 집에 가면 귀한 자식이겠지?’ 라는 동정심까지 일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도 스스로 견백호를 자청 하는 대 얼간이 군단들은 지치지도 않고 접수처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반나절 쯤 지나자 나도 완전히 진이 빠져버려서 ‘에잇! 될 대로 되라지. 망할 놈의 무투대회.’라고 투덜거리며 키스 경이 던져주고 간 도 시락을 꺼내 먹고 있는 중이었다. 한참 군만두를 입에 넣어 잘게 씹고 있는 와중에 접수처로 다가온 남자가 말했다. “출전하려면 여기서 신청해야 하나?” “예. 그렇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신청서를 꺼내며 말했고 그가 오늘 참 많이 도 듣는 대사를 읊었다. “견백호” “하아. 그러시겠지요. 뭐 그럼 편한대로 견백호 42번으로 기록해 두지요.” “........42번?” “그래도 당신은 다행이네요. 내일쯤이면 백 단위를 넘어갈 테니 번호 외우 기도 힘들어 질 것........” 그렇게 궁시렁 거리던 나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가슴을 후벼 파내는 듯한 위압감이 목을 조여 와 입을 열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주변 공기가 쇳덩이처럼 무거워져 온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어설픈 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서, 설마.’ 나는 겨우 겨우 고개를 들어 떨리는 표정으로 자신을 견백호라고 밝힌 자 를 올려다보았다. “재미있군. 나 외에도 41명의 백호가 존재했다니. 짐작도 못했어.” “당신은........‘ 내가 올려다 본 큰 키의 청년은 백발에 가까운 헝클어진 은발에 황금을 녹 여 만든 듯한 소름끼치는 눈동자를 가진 자였다. 검은 가죽 옷에 스스로 소 리를 내는 것 같은 검푸른 금속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 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그 41명을 내 앞으로 데려와.” 9. 백발의 청년 앞에 41명의 견백호들이 몰려드는데 까지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42번째 견백호가 자신의 보석 뭉치를 걸었기 때문 이다. 자신을 견백호라고 주장하는 자는 이곳에 와서 자신을 쓰러트리고 보 석을 가져가라, 그가 그렇게 공언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각양각색의 백호들 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경기장 밖에서 벌어지는 이 즉흥 대결에 난색을 표했다. “자, 잠깐만요! 이런 식으로는 시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나와 비슷한 나이 정도로 보이는 그가 천천히 날 돌아보며 낮은 목 소리로 말했다. “누가 이런 쓰레기들과....... 시합하겠데?” 나는 몸을 움찔했다. 왠지 야수를 앞에 둔 것 같은 긴장감이 몸을 조여 온 것이다. 소식을 들은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들 역시 이 갑작스런 싸움을 막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발끈한 자들은 바로 ‘41인의 쓰레기들’ 이었다. “이런 애송이 놈!” 그 고함소리와 함께 상대가 사방에서 달려들었고 그 순간 백발의 청년이 착용한 금속 장갑에서 섬뜩한 진동음이 터졌다. 솔직히 느낌만으로도 강렬한 기운을 가진 저 청년이 이길 것이라고는 예상 했다. 몇 명은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어쩌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다. “우우우욱!” 나는 물론 그를 말리려고 달려오던 기사들마저 이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막았다. 귀를 찢어버릴 정도로 증폭된 금속음에 비명마 저 묻혀 버렸고 피가 붉은 융단처럼 광장에 깔렸다. 이건 아예 상대를 조각 내 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잔인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완전히 거대한 압착기 계 안으로 뛰어든 것과 같았던 것이다. 마치 야수의 울음소리가 같던 진동이 가라앉아 광장에 남은 것은 정적과 피비린내뿐이었다. 피의 중심에 서 있는 그 청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1번부터 41번......... 탈락.” 그 순간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지며 군중들이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 작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내 이름 뒤에 번호 붙일 필요는 없어졌을 거다. 똑바로 기록해라. 내가 바로 견백호 무라사 랑시다. 그런데 상금, 100억이라고 했지?” 농담이 아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이 사람은 진짜다. 게다가 더할 나위 없 이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 그런데 랑시라니. 대체 그건 또 뭐야. 전하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줄 알았던 왕립 무투대회는 경기 시작 하루 만에 비극의 종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072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10. 나는 추궁하기 시작했다. “견백호의 이름이 무라사 랑시래. 랑시 경. 이 기막힌 우연 어떻게 생각 해?” 리더구트로 돌아온 내가 물끄러미 ‘긴 머리 아가씨’ 랑시 경을 바라보며 말 하자 랑시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고는 딴청을 피우는 것이었다. 더 할 나위 없이 의심스러운 모습이로구만. 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쇼탄 경. 부탁해요.” “꺄아악!” 최근 몸종 담당인 쇼탄은 랑시를 번쩍 들고 테라스 중앙으로 ‘연행’해 왔 다. 심문관을 자청한 루이 경이 무척이나 위험천만한 미소를 띠며 쇼탄의 팔 속에서 발버둥치는 랑시의 갸름한 턱을 매만지는 것이었다. “랑시 경.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어서 불어. 아니. 말하지 않아도 난 좋지.” 천직이로군. 그런데 이래서야 천진난만한 소녀를 둘러싸고 못된 짓을 하려 는 것 같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체 무슨 거창한 비밀인지 입을 꽉 다 물고 있는 랑시에게 말했다. “랑시 경. 그 무라사 랑시라는 사람이 방금 전에 견백호 1번부터 41번을 잘게 갈아놨거든? 광장은 지금 피바다야. 장난치는 거 아니라고. 대체 견백 호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말 좀 해봐.” “빌어먹을.......” 난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랑시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자 흠칫 놀랐다. 랑시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몸을 부들부들 떠는 바람에 겁을 먹은 쇼탄이 놔줘야 했을 정도다. “빌어먹을...... 형!!!” “형?” “형이라고?” “네 형?” 나와 쇼탄, 루이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지금 랑시 경 이 자기 형을 견백호라고 선언한 건가? 긴 생머리와 좁은 어깨, 치마 밑으로 보이는 얇은 다리만 봐도 쇳덩어리 같은 견백호와는 우주 끝에서 끝으로 다른 랑시는 ‘골치 아파 죽겠어.’라 고 얼굴을 가리며 입을 열었다. “내 본래 이름은 조슈아 랑시야. 여기 오면서 그냥 랑시라고 소개했어.” “그, 그런데?” “내 형이 바로 무라사 랑시. 견백호 맞아. 하지만! 그건 형도 아냐!” 나는 이 순간 깜빡 ‘왜 오빠가 아니라 형이라고 부를까?’라는 한심한 착각 을 했다. 아니 누구라도 랑시의 치마 밑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착각을 할 것이다. 의심도 많은 루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외쳤다. “하지만 너와는 전혀 달라! 눈곱만큼은 비슷한 구석이라도 있어야 믿지! 네가 형이라고 주장하는 무라사 씨는 너보다 키가 두 배 크고 몸무게는 세 배는 더 나가고 눈빛도 완전히 야수였어! 설마 배 다른 형제냐?” “아냐! 친 형이야!” “거짓말! 실은 네 애인이지! 놀라워. 그 신성한 아신의 취향이 너 같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닥쳐! 어쩜 그딴 끔찍한 상상을!” 랑시는 그 작은 손으로 루이 경의 배에 펀치를 날린 뒤에 소파에 털썩 앉 아서는 입을 열었다. “좋아. 소원이라면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말해 줄게." 굉장히 궁금했다. “형이 4살 쯤 되었을 때 선대의 백호가 찾아왔대. 형을 보고 새로운 견백 호가 될 인물이라면서 힘을 전해 주고 사라졌다고 해.” 알테어 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신이라는 것은 국가나 왕 이 주는 작위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는 힘의 흐름이라고. (어떤 이유로 선발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선대의 아신이 찾아와 새로운 아이에 게 힘을 계승하고 그는 힘을 잃는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건 마치 운명과 같 은 것이라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선대 백호가 부모님에게 말했어. 백호는 너무도 양의 힘이 강 력한 극양(極陽)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제어하지 못하면 백호의 힘 을 받은 형은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미쳐버릴 거라고.” 더없이 고전적이었다. 그러나 이 다음부터의 회상은 그다지 고전과는 거리 가 멀었다. “그걸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새로 여자아이를 하나 더 낳아 그 아이를 극음(極陰)의 기운으로 키우는 길 뿐이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태어났어. 문제는 사내아이였다는 거지." “그럼 하나 더 낳으면 되잖아.” “......애가 무슨 동전 찍어내듯 마음먹은 대로 퍽퍽 튀어나오는 줄 알아. 나 이후에는 이상하게 아이가 생기질 않았고 시간이 없었던 부모님은 날 여 자처럼 키웠던 거야. 형의 극양을 식혀줄 수 있는 극음의 아이로.” 그런데 솔직히 랑시가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여상(女相)스러운 외모이긴 하지만 성격은 별로 극음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도리어 좀 지나치게 유 쾌한 소년에 가깝지. 랑시는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그런데도 형은 12살이 되던 해에 결국 집을 뛰쳐나갔어! 날 여자로 키우 게 만든 주제에 제멋대로 나가버렸다고!” 그렇다. 랑시는 극음이 아니고 견백호를 미치지 않게 만드는 것에는 아무 런 도움도 안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여자처럼 키우면 뭐하나. 천성이 저런 데. 나도 어려서 여장을 당해 봐서 저 기분 잘 알고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쇼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랑시 경. 형 때문에 여장을 했다면........ 왜 지금까지 그런 꼴 인 거야?” “그, 그건....... 소년기의 경험이란 무척 중요한 거야. 태어나서 지금까 지 이렇게 살다 보니까 이쪽이 더 편해져서...... 하, 하지만 내가 딱히 이 상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거기까지.” 쇼탄이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사자갈기 같은 금발을 긁적거리 던 루이는 다른 쪽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랑시 경은 뭐 힘이 없어? 형이 백호라면 그래도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그 힘을 나눠 받지 않을까? 가령 리틀 견백호라든지 혹은 견백호 주니어 같은.......” 실로 조악한 네이밍 센스였다. 랑시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벽돌 한 장도 못 격파해. 가진 건 얼굴뿐이라니까. 형이 떠난 뒤 에 부모님은 곧 돌아가셨고 난 키스 경을 만나서 여기로 온 거야.” 그리고 랑시는 그 귀여운 얼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말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형 같은 거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뭐가 아신이야. 난 희생만 당했는데도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 없이 제 멋대로 떠나버리고 이제와 돌아온 형 같은 건......” 그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문이 박살이 나 버리는 것이었다. “우아악! 뭐야!” 그리고 그 매캐한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바로 극양의 사내, 인 간 압착기, 조슈아 랑시의 형인 견백호 무라사 랑시였다. 눈이 쌓인 듯한 백발이 인상적인 그는 뚜벅뚜벅 우리들에게 걸어와서는 입 을 열었다. “내 동생이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 동생을 내놔.” 그 순간 눈썹을 확 치켜 올린 랑시가 벌떡 일어나서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너는 내 형도 아냐!!” 맙소사. 보통 경우라면 감동적이 되어야 할 형제 상봉이 이 지경이 되다니 ....... 하지만 무라사는 랑시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여동생은 둔 적 없다.” “남자야!!!” 랑시가 상의를 확 찢자 뽀얀 살갗이 드러났다. 그걸 본 무라사의 눈이 커졌다. “가, 가슴이 없다니........ 이상한 소녀로군.”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견백호가 지지리도 둔감하다는 것이리라. “당신 때문에 여자로 커 왔어. 그것조차 잊어버린 거야?” “그럼 네가 정말 내 동생 조슈아냐.” “그 이름 버렸어. 그리고 나 이제 당신 동생 아니야. 꺼져.” 항상 쾌활하고 애교 넘치던 랑시는 형에게만은 쌀쌀맞기가 겨울삭풍이었다. 그러나 만만찮기는 형도 마찬가지였다. “웃기지 마. 이런 한심한 곳에서 그런 꼴로 뭐하고 있는 거야. 100억 셀 링과 함께 널 데리고 여길 떠날 거다. 그러니까 따라 와.” “싫다니까!” 하지만 무라사는 랑시의 가는 팔을 억지로 잡고 끌고 나가려고 했다. 이거 어떻게든 말려야겠다!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누군가가 무라사의 두 터운 팔목을 잡는 것이었다. “이곳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아?” 키스 경! 어느 샌가 돌아온 키스가 랑시를 끌어내려던 무라사의 팔을 잡아 챈 것이다. 이 인간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무라사는 한 눈에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눈매로 키스를 노려보고 있었지 만 키스는 여전히 마이페이스로 눈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무라 사의 팔목을 놔주지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 “오랜만이군.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뭐, 뭐라고! 무라사가 랑시의 팔을 놓으며 키스에게 으르렁거린 말을 듣자 나와 쇼탄, 루이 그리고 랑시마저 깜짝 놀라서는 키스를 바라보았다. 견백 호와 아는 사이라는 건가. “무슨 말씀이시죠? 전 당신을 모르겠습니다아.” “장난치지 마라. 그 어쭙잖은 가면, 지금 이 손으로 뜯어내 줄까?” “어머나. 저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하나도 당신이 기억나지 않습니다아.” 어떻게 아신 앞에서 저렇게 태연작약하게 굴 수 있는 거지. 도리어 긴장하 고 있는 쪽은 무라사인 것 같았다. “뭐 어쨌든 좋아. 난 내 동생만 데리고 가면 되니까.” “그건 곤란합니다아. 랑시 경이 싫어하잖아요?” “너, 지금 날 막겠다는 거냐?” 이 사람 화났다! 무라사가 끼고 있는 금속 장갑에서 섬뜩한 기계음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위압적인 공격태세를 갖춘 견백호 앞에서 키 스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자세고 자시고 지금 키스, 저 양반에겐 검 한 자루도 없잖아! 대체 뭘 믿고! 그때 키스가 가늘게 눈웃음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불운한 병에 걸려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신은 절 기억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럼 지금 저와 싸우려는 짓이 별로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라는 것을 잘 아시고 계실 텐데요?” “까불고 있군! 내가 보기엔 넌 이미 형편없이 망가져 있는 것 같은데!” “어머나. 그럼 한번 덤벼 보시든지요오.” 대체 이게 무슨 살벌한 대화람. 하지만 금방이라도 키스를 박살내 놓을 것 같았던 무라사는 곧 주먹을 풀며 나직하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좋아. 내가 아니라도 널 죽이려는 녀석은 많으니까. 오늘은 네 뜻대로 물러나 주지. 그리고 조슈아. 가족을 버린 일은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나 는 그때 떠날 수밖에 없었어.” 무라사는 그 넓은 등을 보이며 사라져 갔다. 그러자 키스가 머리를 긁적거 리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하아. 겨울도 다가오는데 문짝이 이렇게 박살나 버렸으니 빨리 고쳐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그때 랑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키, 키스 경. 형과 아는 사이였어요? 그것도 별로 사이가 좋은 것 같지 않은데.......” “어라?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니까요오.” 키스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 게 그런 그에게 외쳤다. “키스 경! 키릭스 세자르와는 무슨 관계죠!” 순간 키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헤죽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몰라요. 그런 나쁜 사람.” 왠지 몹시도 슬퍼 보이는 그의 미소를 보며, 나는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 에 키스에게 아주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스쳤다. 11.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왕궁으로 호출 당했다. 일어나자마자 호출을 받은 내가 제복으로 갈아입고 있자 아직 기운이 돌아오지 않아서 하루 종일 침대 에 누워 있던 지스 경이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미온 경. 오늘은 내가 직접 나갈게. 이제 됐어.” “아냐. 오늘은 나 지명 받은 거야.” “지명? 누구한테?” “.......아이히만 대공에게.” 지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이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참. 넌 지금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 “무, 무슨 일이 있어?” “모르는 편이 좋습니다아.” 하아.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밖으로 나섰다. 12. 이번에도 내 담당은 코트였지만, 확실히 아이히만 대공은 내게 뭔가 묘안 을 기대라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고. 내가 무슨 도깨비 요술 방망이 인가. 이런 상황을 척척 해결할 수 있었다면 내가 어째서 호스트를 했겠어. 전하의 응접실에 모인 사람은 아이히만 대공, 위고르 공, 카론 경이었다. 오르넬라 님도 호출 받았지만 ‘숙취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음. 게다가 오 늘이 그날 임. 고로 알아서들 해결하세요.’라는 쪽지가 대신 도착했을 뿐 이다. 아아, 매정한 우리 성녀님. “후후후, 다들 모였나?” 먼저 기다리고 계시던 전하께서는 무슨 이유인지 이 난감한 상황에서 도리 어 여유 만만한 것 같았다.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전혀 안 어울리는 분위기를 잡고 있던 만두 국왕님을 보자마자 아이히만이 이를 부득 갈며 하 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긴, 100억 셀링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기분 같아서 는 당장 펄펄 끓는 가마솥에 처넣고 속이 다 익을 때까지 푹푹 삶아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카론 경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나는 카론 경의 코트를 받으며 안 부를 물었다. “카론 경. 기분, 괜찮으세요?” “뭐가 말인가.” “아, 아뇨. 꼭 뭐라기보다는.......” 아니 이 사람은 견백호가 나타나서 그와 싸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렇게 표정하나 안 바뀔 수가 있는 걸까. 정말 키스의 말대로 항상 죽음을 각오하 고 사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아이히만이 카론을 보며 말했다. “카론 군. 기권하게.”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 자네는 분명 검술의 천재네.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수많은 검술사들 중에 자네의 실력을 따라올 자는 없을 거야. 하지만 아신은 달라.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의 존재가 아니야.” “........” 아이히만은 냉정하지만 세심하게 카론 경을 배려해 주고 있었다. “견백호와 싸우면 자네는 백퍼센트 죽어. 100억 셀링을 날리는 것은 저 놈 의 국왕 전하가 벌인 거창한 삽질이라고 쳐도, 자네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 “아이히만 대공. 분에 넘치는 배려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피하고 싶 지는 않습니다.” “허어. 자네, 정말 고집쟁이군. 아신을 이기는 것은 무리라니까 그러네." 카론 경 고집 센 거 내가 증명하고 키스가 증명한다. 카론은 드물게도 씁쓸 한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하지만 인간 중에서도 아신을 능가할 수 있는 자가 한 명 있기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놈을 입 밖에 꺼내지 말게!” 우악! 놀라라! 갑자기 아이히만이 대노하며 커다랗게 소리치자 카론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며 입을 다물었다. 설마 지금 키스 얘기하고 있는 거야? 위고르도 한몫 거들었다. “상식적으로 봐도 이제 와서 견백호에게 100억 셀링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럴 바에 왕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에게 100억 을 주고 대회를 끝내심이.......” 그때 안 되는 폼 잡고 앉아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계시던 전하께서 말 씀을 꺼내셨다. “자네들. 생각보다 순진하구만. 왜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이 건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아닌가.” 이게 행운이라고? 우리는 너무 황당해서 전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역시 전하의 혜안은 우리의 판단을 월등히 뛰어넘어가 있었다. “후후. 100억 셀링 따위가 별 건가?” “전하. 지금 너무 고민하시다가 대가리에 이상이 생기신 것은........” 아이히만이 욕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꺼냈지만 전하는 여전히 당당했다. 그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의 그것처럼 그 동그란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100억 셀링을 내주고 사대 아신 중 하나인 견백호를 얻는다! 이건 정말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던가!” “뭣이!” “우승을 하면 당연히 상금도 주고 짐이 직접 작위도 내려줄 것이야. 그 말은 즉! 견백호가 이 나라의 귀족이 된다는 거지! 모든 일은 장기적 안목 을 가지고 판단해야 되네. 당장은 그에게 100억을 주는 것이지만 그가 이 왕국 소속만 된다면 앞으로는 이 베르스는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강대 국의 반열에 올라간다는 의미고, 그 이후에는 옆 나라 니샤 왕국을 협박하 든 밑 나라 악투르 왕국에게 공갈을 치든 얼마든지 백억 천억 벌어들일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이오타, 콘스탄트는 물론 마키시온도 이제 두렵지 않다 고! 우하하하하하! 이 나라는 이제 꽃 폈어!” 박장대소는 임금님 혼자였다. 이 나라가 무슨 깡패 집단도 아니고....... 어쩜 사람이 저 지경으로 뻔뻔할 수가. 정치에 노련한 아이히만 대공의 표정 마저도 ‘내 미처 그딴 추잡한 미래상까진 생각하지 못했네. 망할 임금.’이었다. 그러나 기회 포착에 능숙한 위고르 공이 만세를 부르며 벌떡 일어나선 임 금님을 칭송하는 것이었다. “오오오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이 미천한 위고르, 전하의 혜안을 따 라갈 길이 없사옵니다! 전하는 정말 이 나라 건국 이래 최고의 성군이시옵 니다!” “그렇지? 그렇지? 자네가 생각해도 이거 대박이지? 좋아! 이 참에 아예 위고르 공을 이오타 총독으로 임명하겠네!” “성은이 망극 하옵나이다아아!” 그만들 좀 하시구랴. 벌써 이오타 먹었습니까? 그때 밖에서부터 비명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또 다시 문짝이 박살나는 것이었다. 누가 들어온 것인지는 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라. “여기 국왕이 누구냐. 찐만두를 닮았다고 들었다.” 하아. 견백호 무라사 씨였다. 이미 그의 뒤에는 곤죽이 되어 쓰러져 있는 근위대들이 널려 있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던 그가 날 보고 눈가를 찡그리자 내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우가 없으시군요.” “너는 어딜 가도 만나게 되는군. 이 나라 마스코트냐?” 그때 갑자기 아이히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견 백호의 머리를 겨누는 것이었다. 지금 대체 뭐하는 짓! 타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상당한 사람이라도 머리가 관통되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견백호는 조용히 얼굴을 가리던 주먹을 폈 고 그 손에 잡혀 있는 탄환을 바닥에 던져버리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망할 노인네가 다짜고짜 사람 얼굴에 총을 쏴!” “호오. 진짜 아신이 맞긴 맞는 것 같구먼.” 아이히만은 신기하다는 듯이 바닥을 떼구루루 굴러다니는 총알을 보며 히 죽 웃는 것이었다. 아무튼 대단한 배짱의 할아범이다. 도리어 놀란 쪽은 임금님이었다. “이, 이럴 수가! 내 거처에 총을 가져 들어오다니! 이, 이건 모반이야! 날 죽일 생각이었나! 대공!”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아이히만은 자리에 앉으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쩌면 정말 전하의 머리 에 총을 겨누고 카론 경을 기권시키고 이 망할 놈의 대회 끝내라고 협박하 기 위해서 총을 가지고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아이히만이라 면 그리고도 남는다. “네 놈이 이 나라의 우두머리인 것 같군.” 견백호는 국왕 전하에게 뚜벅 뚜벅 걸어갔고 그 순간 카론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막았다. “뭐냐 넌. 죽고 싶나.” “무례한 놈. 지금 내 손에 검이 없는 것을 감사해라.” 순간 둘 사이에서 불똥이 팍 튀겼다. 이거 정말 흥미진진...... 이 아니라 그 괴물과 싸우면 안 된다니까요, 카론 경! 그때 전하가 어느 때 보다도 늠름한 눈빛으로 말했다. “카론 경. 난 괜찮으니까 그 자를 이리 부르게.” 오오! 저런 당당함이 있었단 말인가. 카론은 계속 무라사를 차갑게 바라보 며 슬쩍 길을 비켰고 실로 강철을 깎아 만든 듯한 몸을 가진 무라사는 전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전하의 커다란 이마에 금속 장갑을 낀 주먹을 들이대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동생과 100억 셀링을 내놔.” “후후후. 니가 날 죽일 수 있을까?” “뭐, 뭐야?” 순간 전하께서 썩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날 죽이면 100억도 없다. 네 동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형시켜 버릴 거야! 자아. 어서 죽여보시지. 우후후후.” “뭐 이런 놈이.......” 당황하고 있는 것은 무라사 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돈 앞에서는 비겁해 진 다지만 저건 완전히 비열한 악당의 표본이잖아! “자아. 그러지 말고 여기 앉게나. 물론 나는 100억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의 동생을 줄 테니 나와 거래를 해보세.” “대체 뭘 어쩌자는 거냐.” 견백호는 왠지 범접할 수 없는 (왕의 권위와는 전혀 다른) 기운을 뿜어내 는 전하 앞에 털썩 앉았다. “어떤가. 후작을 원하나? 아니면 공작?”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우승자에게 짐이 작위를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 자네는 이미 우승한 것 과 다름 없으니 짐이 이 자리에서 자네에게 품격 높은 베르스 귀족의 작위를 내리겠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불러보게나!” 저 시커먼 속이 뻔히 보였다. 그러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꼭 커다란 개를 닮은 견백호는 머 리를 긁적거리며 되물었다. “도통 무슨 소리냐. 나보고 귀족을 하라고?” “자네는 100억을 받아 해피하고 나는 자네 이름을 팔아 돈을 뜯어낼 수 있 어서........ 아니, 아니 이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서 해피하지 않나! 서로 해피하면 된 거지. 에이이. 뭘 그래. 응?” 전하는 무라사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아양을 떨어봤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이거 뭔가 대단히 불안한 기분이....... “웃기고 있네. 불량 만두.” “잉?” 사태는 예상 밖이었다. “난 어떤 주인도 선택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너 같은 놈을 모시라고? 멍 청하긴. 그걸 기대한 거냐?” “하, 하지만 아신들은 자신이 모실 사람을 선택하잖아!” “누가 그딴 규칙을 만들기라도 했냐? 지금 다른 세 명의 아신들은 결국 그 나라 우두머리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접대부와 다를 바가 없어! 난 그런 유치한 노름에 끼어들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난 100억과 동생을 데리고 여길 떠날 거야. 알겠냐?” 순간 그의 말에 울컥해서 ‘접대부라니! 알테어 님이나 키르케 님이 얼마 나 맘고생 하고 있는지 알고냐 있냐!’라고 외치고 싶었다. 전하는 일이 생각대로 안 되자 폭발할 듯이 당황하며 거의 애원을 하는 것 이었다. “이, 이러면 어떨까! 내 딸 제냐와 결혼하는 거네! 이 나라의 왕이 되고 싶지 않나?” 댁의 따님은 올해로 아홉 살입니다만! “됐어. 더 이상 할 말 없어. 나는 대회에 나가 100억을 얻은 뒤에 동생을 데리고 갈 거야. 그렇게 날 얻고 싶다면 누구라도 날 꺾어 봐라. 네 놈의 부하 누구라도 날 무릎 꿇릴 수 있다면 널 모시도록 하지. 하지만 만약 수 작을 부려서 대회를 중지시키면 그때는 이 왕국을 아예 산산조각 내버리겠어!” 그는 무섭게 협박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다 카론과 눈이 다시 마주치자 살기 띤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호오. 네가 결승전에서 만날 녀석인가 보군. 제법 싸우게 생겼는데?” “........” “절대 기권하지 마라. 이 손으로 죽여주마.” “난 피하지도 숨지도 않는다.” 카론 경!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 뭔가 이제는 절대로 무를 수 없을 것 같 은 부정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무라사가 커다랗게 웃으며 자리를 떴 고 잠시 후 두 손을 꽉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전하가 속에서부터 끓 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전쟁이야. 땡전 한 푼 못 줘!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짐 승 놈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내리라!" 제발 누구라도 날 일주일 전으로 돌려줘! 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073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13. 하지만 저 하늘의 조물주께서 내 소원을 들어줬는지 자고 일어나 보니 놀 랍게도 시간은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전개는 될 턱도 없으니 기대하지도 말자. 당연히 결승전이라는 운명은 가까워져오고 있고 그때까지 임금님이 견백호 라는 거대한 ‘운석’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베르스는 너덜너덜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자업자득! 이라고 외쳐주기에는 그 풍비박산 나는 조각 중 하나 나 역시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악 물고 임금님의 더러운 책략에 적극적으 로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카론 경, 그렇게 금욕적이고 자기 신념에 철저하게 살아온 사람을 어이없이 죽게 만들 수야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운명의 결승전이 예상보다 좀 더 빠르게 다가왔다는 것이 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대부분의 출전자가 기권했다니!” 이제는 나의 근무처가 되어 버린 본궁 응접실로 출두하자마자 임금님의 찢 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보다도 먼저 나와 있는 아이히만이 굵직한 음성으로 전하에게 호통을 쳤 다. “당연한 거 아니야! 견백호가 나타났고 그 놈이 광장 한복판에서 41명을 조각내 버리는 몰살 쇼를 보여줬는데 어떤 바보가 그 놈과 싸우고 싶겠어!”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나 같아도 절대로 승산 없는 아신 과의 시합을 돈 내고 자청하진 않을 것이다. 어떤 바보가 5000 셀링 내고 지옥행 특급 티켓 끊고 싶겠냐! “이, 이렇게 기권자가 많아져서야......... 수입이 줄어들잖아!” 역시나 전하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화를 꾹 참기 위해 하얀 백발을 쓸어 넘기던 아이히만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100억은 이미 날린 것이나 다름없지만 결승전 전까지 어떻게든 카론 군 을 설득해서 기권을 시키든지 그게 안 되면 전하께서 왕명으로 카론 군을 이 나라 밖으로 잠시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 만약 카론 군이 이런 어이 없는 시합에서 죽게 된다면 전하, 네 녀석도 죽여 버리겠습니다.” 아이히만과 임금님 사이에서 무서운 스파크가 일었다. 설마 전하께서는 카 론 경이 일말의 가능성으로 무라사를 이길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카론 경도 막강한 검술사니까 어쩌면 이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미 미한 가능성을 믿고 충성스런 부하를 사지로 내보지는 비정한 짓은 나라면 절대로 못해! 무시무시한 아이히만 대공과 눈싸움을 하던 전하께서는 코웃음을 치며 팔 짱을 끼었다. “흥! 카론 경이 그 짐승 놈과 싸울 일은 없을 걸세. 카론 경의 몸값이 얼 마나 비싼데....... 아니, 아니 얼마나 훌륭한 기사인데 이딴 황당한 일에 잃을 수야 없지!” ‘이딴 황당한 일’을 계획하신 분이 전하 본인이라는 사실을 벌써 잊으셨 습니까. “뭐요. 묘안이라도 있는 거요?” “후후후. 내 이미 손을 써 놨지. 날 만만하게 보면 안 되네. 짐은 아주 잔인한 왕이거든.” “대체 또 무슨 짓을.......” 아이히만은 기대라기보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곧 전하가 그 ‘묘안’을 밝혔다. “경기 시작 전부터 왕궁의에게 은밀히 명령해서 특효 설사약을 만들어 놨 네. 설사에 용하다는 전 세계의 약초를 조합해서 만들었으니 그 효과는 실 로........ 강렬하겠지.” 그, 그런 지저분한 말을 늠름하게 늘어놓지 마세요! “지금쯤 내가 파견한 특수부대가 견백호 놈의 식사에 그 약을 풀어놨을 거네. 제 아무리 천하장사 아신이라도 열흘 밤낮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전설의 비약 앞에서는 저항할 도리가 없지. 내가 겪어봐서 알아! 흐흐 흐. 좀 더 효과를 가중시키기 위해 수도의 화장실도 모조리 폐쇄시켜 놨네.” 치밀하긴 한데....... 치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라도 무라사를 막을 수만 있다면...... “전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관리가 달려와서는 무릎을 꿇고 외쳤다. “작전이 실패했사옵니다!” “뭐, 뭣이!” 그럴 줄 알았다. “견백호 놈이 내가 파견한 부대를 모조리 죽였단 말이냐! 이런 망할 놈!” “아, 아니 그게 아니오라........ 지금 그 부대원들은 모조리 극심한 설 사 증세에 괴로워하고 있지만 전하께서 화장실을 모조리 폐쇄시키신 바 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음보다 더한 지옥이지 않은가. 아아, 잔인한 무라사 씨. 전하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제길! 내 비장의 계획이 통하지 않았다니........” 솔직히 그게 통했다면 난 견백호에게 무척이나 실망했을 것이다. 그때 아직 반도 안 피운 담배를 비벼 끈 아이히만이 말했다. “미온 군. 자네가 나설 차례네.” “예?” 또 나야! 어쩌라는 겁니까! 나도 무라사가 있는 곳에 잠입해서 설사약이라 도 먹이라는 겁니까! “자네. 사람하고 빨리 친해지지? 그 시시한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기 회가 왔네.” 시시해서 죄송하네요. “저어. 하지만 그건 상대가 여자일 때 얘기고.......” “그럼 여자라고 생각하고 친해져 보게. 그리고 뭐든 좋으니까 약점을 알 아내.”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나라도 무슨 수로 그런 쇳덩이 같은 남자를 여자 라고 생각합니까! 백번 양보해서 극도의 최면 끝에 그를 여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쳐도 그건 내 착각이지, 그런 짓 했다간 그 무서운 사람 성질 긁어서 죽게 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미온 군. 카론 군을 죽게 만들고 싶지 않지?” “예. 물론.” “그럼 냉큼 견백호에게 가보게. 난 두 번 말 안 해.” 비정한 할아범 아이히만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고 난 입술을 삐쭉 내밀며 본궁을 빠져나왔다. 정의를 실천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지만 내 쪽은 특별히 난이도가 높은 것 같았다. 14. 나는 망할 기분에 젖어 곱게 옷을 차려입고 견백호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최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견백호의 숙소를 찾아내는 일은 그 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문제는 전혀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는 것 이다. “응? 넌 왕궁의 마스코트?” 마침 모닥불에 구운 토끼고기를 입에 물던 무라사가 특유의 매서운 눈매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의 ‘숙소’는 수도 외각의 숲 속이었다. 이건 무슨 산짐승도 아니고 왜 이런 음산한 곳에서 노숙을 하는 거냐고! 난 이 거 대한 ‘야생동물’ 앞에서 최대한 우호적인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엔디미온 입니다. 저 그런데 마스코트가 아 니라 기사걸랑요.” “뭐든 간에.”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큼직한 고기를 물었다. 야생 에서 살았는지 대충 칼로 잘랐을 뿐인 백발에 한 주먹에 강철도 뚫어버릴 것 같은 인간병기 같은 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인간을 여자로 여긴다 는 것은 무리다. 차라리 달팽이를 내 애인이라고 여기고 평생 같이 사는 편 이 더 가능성 있겠다. “너도 그 땅딸보가 보낸 거냐? 나한테 약을 먹여 보게?” “하아. 그건 제가 생각해도 형편없는 작전이었어요.” 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모닥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라사는 노란색 눈동자를 굴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긴 맹수 같은 자신에게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솔직히 나도 무섭다고. 저 무시무시 한 쇠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나는 ‘엔디미온 키리안’에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의문의 변사체’로 변신해 버릴 테니까. “있잖아요. 무라사 씨.” “귀찮군. 너 말이다.......” “약점 좀 알려주세요.” 그 순간 우물우물 고기를 먹고 있던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 다. 한참 날 바라보던 그가 입을 닦으며 말을 던졌다. “지금 뭐라고....” “아니 뭐랄까. 왕실로부터 당신의 약점을 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거든요. 뭐 제가 어떻게 물어보든 약점을 자청해서 알려줄 리야 없겠지만 어쨌든 일 은 일이라서요.” 그는 머쓱하게 말하는 나를 ‘이상한 녀석’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 시 고기를 무는 것이었다. 탁탁 불꽃이 튀는 모닥불 앞에서 직접 구운 고기 로 혼자 저녁을 먹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사람들과 어울 리는 것에 어색해 하는 사람일 뿐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듯 하다는 생각이....... “으으 진짜 귀찮구만! 야, 마스코트. 이 고기 다 먹고 나서도 네 녀석이 내 옆에 있다면 그때는 널 집어서 이 숲 밖으로 집어던진 뒤에 조용히 누워 서 잠들 거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윽! 역시 나쁜 사람이야! 게다가 카론 경과는 다른 의미로서 사교성과는 담 쌓고 사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고기를 먹던 견백호가 날 바라보 지도 않은 채 그 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동생은 잘 있냐.” “아. 랑시 경. 물론 잘 있어요.” “......잘됐네.” 그는 먹고 있던 고기를 내려놓고는 묵묵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의 그런 모습에 문득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그렇게 동생을 아끼면서 왜 집을 나갔던 거죠?” “그거야......” 무라사는 머리를 벅벅 긁은 뒤에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눈빛에 섬뜩한 살의 가 올랐다. “마, 말씀하시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이 놈의 왕국은 한 순간도 사람 가만히 안 두는군.” “예?” 내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반짝 떴을 때 퓨숙!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 리와 함께 사방에서 비도(飛刀)들이 날아들었다. “우아악!” 숙련된 암살자가 던지는 비도는 총보다 더 신속하다고 한다. 하지만 무라 사는 이 짧은 순간 엄청난 힘으로 날 밀친 뒤에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비도 를 걷어내는 것이었다. 티잉! 티잉! 티잉! 거의 동시에 돌려오는 금속음과 함께 거짓말처럼 힘을 잃은 비도들이 바닥 에 떨어졌다. 한 몇 미터는 밀려나가 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찡그린 눈매로 주변을 훑어보는 무라사의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흐흐. 역시 아신이로군. 이런 장난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다는 건가.” 뭐야, 저 놈들은. 사방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열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이런 가까운 거리까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우리를 포위했다 면 굉장한 놈들임에 분명했다. 아니 그보다 황당한 것은 무라사 씨는 이미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초인적인 감각이다. 무라사는 정말로 짜증이 나는지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투덜거렸다. “아아 귀찮아. 또 국왕이 보낸 놈들이냐.” “흥. 우리는 견백호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여기까지 온 콘스탄트 왕국 의 암흑 10형제다! 아무리 아신이라도 우리 열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 겠지. 네 놈을 죽이고 이쪽 바닥에서 명성을 올려볼까 한다.” 암흑 10형제! 무슨 곡마단 이름 같은 유치찬란한 단체명이지만 실력은 대 단한 듯 했다. 하지만 무라사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도를 주워 들며 중얼 거렸다. “10형제라고? 그것 참. 남자만 열명 낳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와 함께 무라사의 팔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자의 얼굴 을 비도가 아예 뚫고 지나갔다. 짐작도 못한 상황이라서 모두가 깜짝 놀란 가운데 무라사가 피식 웃었다. “이젠 9형제로구나. 좀 더 줄여줄까?” 이것은 ‘모가지 성할 때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이제는 9형제가 된 콘스탄트의 암흑 형제들은 살기를 띄며 자세를 잡는 것 이었다.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형제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무라사가 입맛을 잃었는지 먹다 남은 고깃덩이를 모닥불 안 으로 집어던지며 말했다. “너희들 귀찮음이 도를 넘으면 무엇으로 변하는지 알고 있냐?”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그 순간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하듯 그들 앞에 뛰어든 무라사가 상대의 복 부에 주먹을 날렸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내장이 산산조각 났음에 분명한 상 대가 비명도 못 지르고 꼬꾸라졌다. “화가 나. 성가신 파리 떼들 봐주는 것에도 한도가 있어!” 그는 쓰러진 사내를 발로 툭 걷어차며 으르렁거렸다. “제, 젠장! 다음에 보자!” 순식간에 8형제가 된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악당의 대사를 읊으며 도망 치기 시작했지만 견백호의 생각은 그들과 좀 다른 것 같았다. “다음에 또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따라 숲으로 따라 들어갔다. 무라사 씨, 지금 설마! “자, 잠깐.......” 날 돌아보지도 않고 무라사 씨가 사라진 뒤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숲 전체에 그 특유의 기계음이 맹수의 포효처 럼 울리는가 싶더니 곧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비명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라는 비명도 들렸고 제발 목숨만은! 이라는 비명도 들렸지만 견백호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 난 이 살벌한 분위기에 기가 질려버려 묵묵히 앉아 있었다. 진짜 숨죽이고 조용히....... 한 5분 쯤 지났을까, 금속 장갑을 낀 주먹에서 피를 툭툭 흘리고 있는 무 라사 씨가 터벅터벅 돌아왔다. 그가 늑대 앞에 토끼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고기 좀 돌려놓지. 다 탔잖아.” “예? 아하하........ 그, 그러게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하지만 콘스탄트에서부터 왔다는 암흑 10형제 아니 8형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야 ‘좋게 타일러서 돌려보냈다.’라는 답이 나올 리가 만무하니 그만두도록 하자. 달빛을 받아 청회색으로 보이는 머리 칼을 한번 쓸어 넘긴 그는 내 옆에 털썩 앉아서는 조금 탄 토끼고기를 집어 들어 능숙한 솜씨로 그을음은 벗겨냈다. 그리고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 같은 낡은 배낭 속에서 주섬주섬 이것저것을 꺼내는 것이었다. “쳇. 소금, 다 떨어져 가네.” 조미료들이었다. 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기고 다니다니,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네. 아니 이렇게 항상 야영을 하는 사람에겐 당연한 필수품들이겠군. “먹어.” 적당히 간을 맞춘 고기를 대뜸 내게 불쑥 건네자 나는 흠칫 놀라서는 엉겁 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입맛 다 떨어졌어. 버리긴 아까우니까 네가 먹어.” “아 예.” 뭐랄까.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맹수들은 상대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증명 할 때 먹이를 양보한다고 한다. 이걸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나. ‘대체 지금 왜 토끼고기를 씹고 있는 거지.’ 라는 지당한 의문이 들면서도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우물우물 고기를 먹고 있었다. 대관절 무슨 생각에 빠진 것인지 멍하니 하늘의 별들을 올려보고 있 던 무라사 씨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네 녀석이 처음이로군.” “뭐, 뭐가요.” “지금까지 나한테 용건이 있는 놈들은 모두 싸움이다 결투다 외치는 작자 들이었는데, 싸우지도 않을 거면서 나한테 접근한 놈은 네가 처음이야. 신 기하네.” “아. 그런......” 참으로 괴로운 인생이로다. 나이가 25세쯤 되었을까. 이 나이 올 때까지 오로지 싸우고 부셔버리는 것밖엔 없었다는 것은 아무리 그가 압도적으로 강하더라도 지치게 만들기 충분한 일이리라. 요컨대 그는 지금까지 끝없는 무투대회를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칠 것이다. 아신이 아니라 대우주 의 조물주라도 그러면 지쳐버릴 것이다. 그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조금 넣으며 말했다. “가서 찐만두 씨에게 말해라. 그 남자, 기권시키라고. 나도 살생을 좋아 하는 성격 아니야.” “하지만 카론 경은 기권하지 않을 거에요. 그 분 성격 제가 잘 알고 있 거든요.” “그럼 죽게 되겠지.” “무라사 씨가 죽이지 않으면 되잖아요!” “적당히 힘 조절해서 죽이지 않고 끝낼 정도로 만만한 상대로 보이지는 않더군. 게다가 그 정도 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 싸워주지 않으면 대단한 모욕이야.” “뭐, 뭐가 모욕이에요! 죽으면 다 끝장인데! 사람을 죽이면서 지키는 명 예 같은 거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요!” 나는 울컥해서 그렇게 쏟아내다가 그가 나를 바라보자 흠칫했다. 화나게 만든 게 아닐까. 하지만 견백호는 감히 자신에게 대든 나를 암흑 10형제 곁으로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도리어 그 맑은 황금빛 눈동자로 날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넌 나를 이해 못할 거야. 지금 내가 너를 이해 못하는 것처럼. 이 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잘 거야. 가봐.” 그리고 그는 아무렇게나 자리에 드러누웠다. 15. “그래. 약점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한밤중까지 행정부 사무실에 있는 아이히만에게 찾아간 나는 간결한 보고 를 올렸다. 보고는 ‘무라사 씨는 세상과 어울리는 것에 서툴지만 음흉한 책략 같은 건 궁리하지 않는 착한 사람입니다. 이상이에요.’였다. 내 이런 허탈한 보고에 ‘이런 밥벌레! 그건 약점이 안 되잖아!’라고 소리칠 줄 알 았던 아이히만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좋아. 수고했네. 미온 군.” “예?” “왜. 수고비라도 기대했나?” “아니 그게 아니라.......” 보통 이 분위기에서는 호통을 쳐야 정상인 사람인데, 아무런 성과도 없는 사람에게 수고했다니 그게 더 무섭다고요! “후후. 어차피 아신위에 오른 자에게 약점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아 니 있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알려줄 리도 없지 않나.” “그, 그럼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안했다는!” “뭐 약점을 알아내면 좋기야 하지만 아니라도 어쩔 수 없지. 그런 자를 상대로 자네 목이 붙어 있는 것이 다행인 게지. 흥흥.” “그럼 왜 견백호에게 절 보낸 겁니까!” 나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대공에게 쀼루퉁해져선 퉁명스레 물었다. 아 이히만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냐는 투로 자신의 권총을 닦으며 툭 질문을 던졌다. “오늘 밤, 그 자와 만나서 뭘 배웠나?” 이거 꼭 무슨 선문답 같군. “뭐 굳이 말하자면....... 사람 봐 가면서 싸움을 걸어야 한다는 점과 역 시 사람을 제대로 알고 싶으면 멀리서 지켜보지 말고 가까이 가서 대화를 나 눠야 한다는 점....... 정도랄까요.” “그래. 그거면 됐어. 가서 푹 쉬게나.” “잉?” 대체 뭐가 됐다는 걸까. 나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머리를 긁적거리 며 행정부를 빠져나갔다. 16. 리더구트에 돌아온 나는 키스로부터 카론 경과 견백호의 결승전이 내일이 라는 말을 들었다. “뭐, 뭐가 그렇게 빠른 거에요! 아직 예선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아무도 견백호와 일대일로 싸 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유명하다는 이오타의 붉은 여우도 기권했 고 니샤의 수호신이라는 자도 견백호가 나타난 즉시 기권하고 고향으로 돌 아갔다. 그 누구도 아신과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단 한 명 카론 샤펜투스 선수만 빼고 말이다. 아아, 고집쟁이! 결국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게 된 ‘베르스 왕립무투대회’는 순식간에 결승 전에 오르게 되었다. 이건 마치 의사로부터 ‘당신은 1개월의 시한부 인생 입니다', 라고 들었는데 곧 ’아차차. 이거 실수했군요. 1개월이 아니라 1 주일입니다.’라고 들었을 때의 기분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키스는 고상한 손동작으로 홍차를 만 들고 있을 뿐이었다. “미온 경도 홍차 드실래요? 이런 청명한 밤공기에는 역시 진한 홍차가.......” “지금 홍차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 왜 그렇게 정색을 하십니까아.” “아 그래! 키스 경이 가서 카론 경을 설득해 주세요. 당신 말이라면 잘 듣는 편이잖아요.” “무슨 설득을요?” 키스가 홀짝 차를 음미하며 그렇게 말하자 내 고운 얼굴에 혈관이 돋았다. “딴청 피우지 말아요. 결승전에 나가지 말라고 설득해 달라고요!” “그럼 나는 카론 경을 모욕한 것이 됩니다아.” 순간 나는 카론과 무라사, 그리고 키스마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이! 그런 것은 지금 아무래도 좋아! “이럴 때는 모욕해도 좋잖아요! 당신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는 모욕해도 괜찮잖아요! 기사의 명예와 목숨, 뭐가 더 소중하죠. 태어날 때부터 기사인 사람은 없지만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딱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 중에 대체 뭐가 더 소중한지는 자명한 거잖아요. 결국 기사고 명예고 권 력자가 만들어 낸 규칙일 뿐이잖아요! 그딴 것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단 말인 가요?” 나는 솔직히 기사의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번 천번을 생각해 봐도 목숨은 당신들의 생각보다는 좀 더 소중히 다뤄줘야 한다고! “친구라........” 키스는 아주 낮선 단어를 들은 것 마냥 찻잔을 들고 창밖 먼 곳을 바라보 았다. 그리고는 날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정말 귀찮네요.” 마음속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그와의 이질감, 거리감, 혹 은 배신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라서 당장이라도 키스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서 실 망이라는 거냐!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때 애써 만든 차를 별로 마시지도 않고 테이블에 놓은 키스가 말없이 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갸름한 외모와 부드럽고 밝은 갈색의 머리칼 덕분에 꼭 여우가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정말 여우처 럼 가느다란 몸을 쭉 뻗으며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그리고는 그 특유의 발소리 없는 걸음으로 아무 말도 없이 리더구트 밖으 로 걸어 나갔다. 마치 안개처럼 조금도 저 사람이 잡히지 않는다. 보이고 있는 모습조차도 진실인지 환상인지 자신감이 서지 않는다. 그때 평소 같으면 항상 이 시간에 잠들어 있을 랑시가 다가와서는 조심스 럽게 물었다. “저어. 형은 어떻게 되었어?” 역시 랑시도 내심 무라사 씨를 걱정하고 있었던 게로군. “뭐랄까. 자연과 어울리고 있다고나 할까.” “무, 무슨 소리야.” “네 걱정 많이 하고 있더라.” 랑시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테라스 소파에 앉았다. 키스가 남겨놓고 간 홍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랑시의 모습은 지금만큼은 이상하게도 ‘남자로’ 보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나 있잖아. 계속 생각해 봤는데. 여길 떠나 형을 따라가려고........” 콰아아아앙! 그때 겨우 겨우 새로 달아 놓은 문이 또 다시 박살이 나며 무기를 뽑아든 자들이 몰려 들어왔다. 이럴 수가! 왕궁에서 칼을 뽑고 있다니! “뭐, 뭐냐! 너희들은!” “저기 있다! 저기 긴 머리 계집애가 견백호의 동생이야!” 남자라니까! 하필이면 키스가 없는 틈에 몰려든 그들은 랑시를 향해 단번 에 몰려들었다. 17. 여명이 밝아오자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단순히 결승전을 보기 위한 자들도 있었지만 분명 각국의 첩보원들과 기사들 또 수 많은 검객들도 견백호와 카론의 시합을 보기 위해 왔으리라. 그만큼 이 시합 은 단순한 무투대회의 차원을 넘어서 긴장감 속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슬슬 경기 시작 시간에 가까워졌을 무렵에는 광장 경기장은 아예 발 디딜 틈도 없는 인해(人海)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전처럼 커다 랗게 소리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도리어 긴장감 넘치는 정적만이 감돌아 수도는 마치 전쟁전야 같은 기분마저 느낄 수 있었다. “견백호다. 정말 나타났어.” 광장에 묵직하게 들어 찬 침묵의 덩어리에 금이 가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끝도 없이 몰아 찬 군중들이 둘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견백호 무라사 랑시가 경기장으로 걸어오고 있었 다. 근처 호수에서 목욕이라도 했는지 몸은 깨끗했고 한 손에는 그 섬뜩한 금속 장갑을 끼우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낡은 배낭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경기장 중앙에 선 그는 사람들을 흘낏 바라본 뒤에 팔짱을 꼈 다. 카론 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국왕 전하 납시오!” 광장에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가마에 탄 전하와 근위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행렬 뒤에 뭔가 이상한 것이 따라오자 사람들 이 의아해하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난 저게 뭔지 알고 있다. ‘......난 이제 몰라.’ 경기장 근처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 ‘이상헌 것’의 정체가 뭔지 파악한 견백호가 노기를 띤 고함을 질렀다. “이 불량만두! 지금 내 동생에게 뭐하는 짓이냐!” 그렇다. 저 ‘이상한 것’은 십자가이며 거기 묶여 있는 자는 바로 랑시 경이었던 것이다. 가마에서 내려온 전하께서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후하하! 어떠냐! 네 동생은 이미 내 손아귀에 있다! 동생의 목숨이 아깝 다면 당장 기권하시지! 100억은 절대 못 줘!” 으이구! 저게 국왕이 할 소리냐! 사람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웅성거림에 귀 기울여 보면 ‘어쩜 저렇게 비열할 수가!’, ‘저런 사람이 우리 왕이래.’, ‘찐빵을 닮았는걸.’, ‘견백호가 불쌍해.’ 뭐 이런 불유쾌한 소리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 분위기 속에서 가련한 인질 소녀 역을 맡게 된 랑시는 고개를 돌린 채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들으나마나 ‘될 대로 되라지.’라는 푸념일 것 이다. 그리고 누가 봐도 국왕이 악당이 되어버린 이 상황 속에서 갑자기 한 소년 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겨라! 견백호! 못된 국왕을 혼내 줘!” “뭐, 뭐라고!” 전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건 폭동에 가까웠다. “비겁한 술수에 무릎 꿇지 마라!” “꼭 100억을 받아내!” “동생을 구해!” “정당하게 싸워라! 뭐하고 있는 거냐!” 전하........ 인망이 없으시군요.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전하는 어버버버, 하고 입을 벌린 채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이.......... 왕궁이라도 함락시켜 버릴 것 같은 거친 고함소리 속에서 갑자기 인상을 찡그린 견백호가 소리쳤다. 얼마나 엄청난 포효였냐 하면 핏대를 세우고 떠 들던 군중들이 모조리 깜짝 놀라 입을 다물어야 했을 정도다. “시끄러워!!!! 난 내 뜻대로 싸워!!!”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단방에 군중의 폭주를 잠재워버린 그 는 전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만 말해두마.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자리는 내 공격범위 안이다.” 족히 200미터는 넘는 거리였다. “만약 내 동생 몸에 손끝하나라도 대면 그 즉시 네 목이 떨어져 나간다.” “마, 말도 안 되는! 어떻게 거기서 여기까지!” “못 믿겠다면 지금 시험해 볼까.” 진짜 화가 난 것 같은 무라사가 으르렁거리자 사색이 된 임금님은 뒤뚱거 리는 걸음으로 잽싸게 가마 뒤로 숨었다. 아아, 이건 정말 나라 망신이야. “그 남자는 기권했나? 왜 안 오지.” 견백호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정말 카론 경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기권 같은 거 할 놈이 아닌 줄 알았는데....... 누구에겐 다행이겠군.” 그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정확히 날 찾아내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날 향하자 흠칫 놀랐지만 내심은 역시 카론 경이 기권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 솔직 히 카론 경은 기권할 사람이 아닌......... “뭐, 뭐야! 누군가 경기장에 들어오고 있다!” 그 외침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 나 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 키스 경?’ 연두색의 평상복을 입은 키스가 설렁거리는 걸음으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 오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칼 대신 부지깽이가 쥐어 있었다. 대체 저 인간이 왜 여기에! “네 놈이 여긴 왜 나왔냐.” 견백호는 눈매를 좁히며 키스에게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키스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카론 경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당해 정신을 잃은 상태랍니다아.” 그리고 키스는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바닥에 던진 뒤에 방긋 웃었다. “그래서 제가 대타로 나왔답니다. 무라사 씨, 불만 없으시죠?” 키스가 찡긋 윙크를 하자 무라사의 눈에 살기가 돌며 주먹을 꽉 쥐었고 곧 섬뜩한 진동음이 야수의 포효처럼 광장을 울렸다. #074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그래서 제가 대타로 나왔답니다. 무라사 씨, 불만 없으시죠?” 키스가 찡긋 윙크를 하자 무라사의 눈에 살기가 돌며 주먹을 꽉 쥐었고 곧 섬뜩한 진동음이 야수의 포효처럼 광장을 울렸다. 시합 종이 울릴 것도 없었다. 거의 폭풍과 같은 빠르기로 달려든 견백호의 주먹이 키스에게 향했고 그 순간 키스는....... “기권합니다아!” 이라고 외칠 줄 알았다. 그게 가장 키스답게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 던가. 하지만 키스는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고 곧 마치 대포알과 같은 주먹이 키스의 얼굴을 때렸다. 파아아악! 귀를 찢는 진동음과 함께 아신의 찌르기에 가격당한 키스의 몸이 마치 헝겊 인형처럼 떠올라 100미터도 넘게 밀려나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나는 믿 겨지지 않는 표정으로 경기장 밖으로까지 밀려나가는 무력한 모습을 지켜보 았다. 그리고 튕겨져 나간 키스의 몸은 내가 있는 관중석 쪽으로 날아들었고 그 가 돌벽과 충돌하자 그 충격에 벽이 깨지며 관중석이 무너져 내렸다. 끔찍 한 광경이다. 나는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막으며 그곳으로 뛰어갔다. “키스 경!” 농담이 아니다. 아무리 키스라도 무방비로 저런 공격을 받았다간 죽고 만 다.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 몰라. 나는 돌무더기를 헤치며 키스의 이름을 외 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끼어들지 마라. 비켜.” 어느새 내 뒤에 나타난 견백호가 차가운 눈매로 말했지만 난 그를 막아섰 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이, 이제 당신이 이겼잖아요! 죽을 지도 모른다고요!” “죽어? 이쯤으로 죽을 수 있다면 도리어 기쁜 일이지.” “네?” 뭔가 이 세상과 아주 닮았지만 실은 전혀 다른 어떤 세상으로 한발을 내딛 은 기분이다. 뒤죽박죽, 이상야릇한 두려움이 현기증을 몰고 왔다. 그리고 견백호는 돌무더기 속으로 팔을 뻗어 키스를 끌어냈다. 상처투성이 의 몸이었다. 찢겨나간 옷이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키스는 아직 살아 있 었지만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통증이 심한지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 다. 겨우 겨우 눈을 뜬 키스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 을 집어 든 견백호를 바라보았다. “아아. 꽤 아픈 주먹이네요.” “너, 어째서 피하지 않는 거냐.” 견백호는 키스의 얼굴에 다시 주먹을 들이대며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제 어떤 녀석에게......... 목숨의 무게에 대해 강의를 들었어. 명예, 목숨, 그리고 친구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니 잊고 싶었는데, 아아 어제 기억이 나 버렸거든.” “그래서.” “갑자기 혼란스러워 졌어. 보여줘. 우리의 명예라는 것. 존재한다면 보여 줘.” 그러자 견백호는 잡고 있던 키스를 거칠게 놨고 키스는 비틀거리면서도 자 세를 잡았다. “수라(修羅)가 성인으로 돌변하기라도 한 거냐? 그래. 그렇게 죽고 싶다 면 죽여주마.” 그리고 들어 올린 견백호의 주먹에서 거친 진동음이 터졌다. 나는 내가 의 식하지도 못한 채 둘 사이를 막았다. “그만해요.” “비켜라. 마스코트.” “난 엔디미온 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달라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 만, 어쨌든 좋아요! 이제 그만두라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끼어들지 마. 널 죽이고 싶진 않아. 하지만 비키 지 않으면 죽는다.” “못 비켜.” 나는 견백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좋다. 틀린 것은 틀린 거고 막아야 하는 것은 막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키스 든 카론이든 조금도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이유 따위에 죽는다는 것은 싫다. 그런 이유 때문에 죽고 그런 이유 때문에 죽인다면 그때는 정말 이 세상이 아무리 고상해도 결국 무가치해 져 버린다. “이봐. 그쯤 해 두지?” 그때 귀에 익은 여자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 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큰 키의 여인이 서 있었다. “키, 키르케 님!” 어느새 붉은 망토를 두른 적현무 키르케 님이 내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길게 내린 붉은 머리와 고혹적인 눈매가 빛나는 그녀는 우리들을 번갈아 보 더니만 날 확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으아아! 갑자기 이런! “내 귀여운 미온이 여기까지 힘을 내는데 이쯤에서 양보해 주는 게 좋지 않겠니?” “........마스코트 치고는 꽤 거물을 알고 있군.” “싫다면 나하고도 싸울래? 나도 최근 명주작 그 계집애 덕분에 욕구불만 이 쌓였거든?” 생각지도 못했다. 엉겁결에 키르케 님의 가슴에 묻히게 된 나는 무척 행복 ....... 한 게 아니라 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잠시 키르케 님을 노려보던 견백호는 손을 풀고 혀를 찼다. “체에. 이제 됐어. 놀림감이 된 기분이군. 내가 졌다. 이제 속 시원하냐!" “그래. 그래야 착한 고양이지.” 키르케 님 특유의 콧소리에 견백호가 그녀를 확 쏘아보았지만 그것뿐이었 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고 뭐라고 투덜거리며 동생 랑시가 있는 곳으로 가 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을 번뜩한 키스가 확 견백호에게 날아들더니만....... 다 리를 부여잡는 것아 아닌가. 이 무슨 추한 짓이야! “자, 잠깐! 나, 멋진 대사 많이 준비했는데....... 이렇게 끝내시면 안됩 니다아! 조금은 제 비장한 대사를 더 들어 보고 감동을 받으신 뒤에.........” “으윽! 집어치워! 이거 놔! 바지 벗겨지겠어!” 그리고 그는 키스를 말 그대로 뻥 걷어차 버린 뒤에 매몰차게 동생이 있는 곳으로 버렸다. 사정없이 나뒹구는 키스 경. 하여튼 저 인간은 꼭 마지막에 분위기 조져요. “아아 냉정한 견백호 씨. 좀 더 놀고 싶었는데........”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키스는 빨갛게 부어오르는 뺨을 매만지며 궁시랑 거 렸다. 그리고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키르케 님을 흘겨부는 것이었다. “어머나. 적현무 씨. 지금 나의 미온 군에게 무슨 짓입니까아!” ??당신 지금 뭐라고....... “흥. 입버릇이 꽤 귀엽군.” 코웃음을 친 키르케 님은 날 놔주고는 자신의 말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 기 시작했다. 이제야 모든 일이 실감이 난 나는 그녀에게 외쳤다. “고마워요. 키르케 님!” “그렇게 고마우면 몸으로 갚으렴.” “........아뇨, 그건 됐네요.” 항상 위험한 말만 한다니까.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키스에게 다가갔다. “키스 경. 괜찮아요? 많이 다친 것 같은.........” “아아. 미온 경 때문에 이 아리따운 몸에 흠집이 나버렸으니 책임지세요오.” 자기 입으로 그런 말하면 부끄럽지 않수? 그때 키스가 방긋 웃으며 마구 손을 흔들자 난 시선을 돌렸다. ‘아이고’ 머리를 지그시 누른 채 냉기 펄펄 풍기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다가오는 자는 바로 의문의 괴한에게 습격당한 카론 경이었다. 솔직히 아무리 과묵한 카론 경이라도 당장 키스를 두 동강 낼 것 같은 분위기라서 나는 슬금슬금 그들 사이에서 피했다. 이제 뭐든 말려드는 건 질색이라고! 그런데도 키스는 능글맞게 웃으며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어머나. 왜 그런 표정입니까아. 무슨 일이라도?” “큭!” 카론은 눈을 꽉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보라! 한눈에 보기에도 ‘네 놈을 알게 된 것은 악연이야!’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지 않은가. “.......그만두자.” 카론은 짜내는 듯이 말하고는 ‘골치 아픈 놈이 둘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뒤돌아섰다. “너에겐 항상 화가 나는군. 하지만........ 고맙다.” “어머. 뭐 그런 일로 고마워하시기는.” “네 녀석에게 한 소리 아니다.” “아아! 너무해요오!” 얼레? 그럼 나야? 키스는 슬금슬금 카론의 뒤로 다가가더니만 어리광이라 도 부리는 것처럼 말꼬리를 늘렸다. “우리, 오랜만에 같이 술이나 마실까요오?” “싫어.” “냉정하네요. 간만에 카론 경의 취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닥쳐라! 이 놈!” 카론 경의 발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 이번에도 재증명되었다. 번쩍하 는 섬광과 함께 뽑힌 검이 날카로운 선을 그었고 그 즉시 키스 경의 곱실거 리는 앞머리가 한 움큼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당분간 네 녀석, 보고 싶지 않아.” 찬바람 쌩쌩 부는 말을 남긴 카론 경이 다시 머리를 누르며 사라져갔고 키 스는........ “치, 친구가 한대 후려쳤기로서니 남의 머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아 아! 이게 무슨 폭거인가요오!” 폭거는 이미 당신이 저질렀잖아! “하아. 내 머리칼. 몸 바쳐 도와준 대가가 이거라니. 이거 진짜 못해 먹 을 짓이로군요!” 혼자 쀼루퉁해져서는 바람에 날리는 자기 머리칼을 긁어모으는 궁상맞은 키스에게 내가 말했다. “키스 경. 왜 카론 경을 도와준 거죠. 검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라도 죽음 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물론 그렇죠. 당연하잖아요?” “으이구! 그럼 왜 도와줬냐고 지금 묻고 있잖아!” 이 인간의 능청맞은 태도에는 화가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어! “그거야....... 카론 경은 검술사이기 이전에 내 친구니까요.” 키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 어린애처럼 순진하고도 어색하게 웃는 것이 었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내가 지금 처음으로 진짜로 키스 가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잊은 게 있네요!” “뭐, 뭘 또 잊었다는.......” 그리고 키스는 눈썹이 휘날리는 광속으로 전하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는 것 이었다. 황급히 가마에 올라탄 전하는 키스가 달려오는 것을 보며 하얗게 질 린 얼굴로 외치셨다. “어, 어서 출발해라! 어서!” 그러나 그보다 먼저 가마를 막아선 키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100억 감사히 받겠습니다아.” 잠시 키스의 성격을 잊고 있었다. 저런 것을 놓칠 리가 없지. 전하께서는 비장한 표정으로 가마에서 내려와 키스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는 뽈록 나온 배를 들이대며 말했다. “배 째!” 그리고 대회는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18. 이번 대회 덕분에 키스 경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에 대한 소문이 ‘이 한 몸 바쳐 나라를 지키는 정의의 기사’가 아니라 ‘무섭게 맷집 좋은 귀여운 청년’이었다는 것이 다. 청년이라니! 속지 말아요! 사실 30세도 넘었을 거라고! 아무튼 이쪽 일은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니까 빨리 빨리 기억 속에서 말소시키도록 하자. 그리고 무라사 씨가 랑시와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간 이유는 그 당시 자신이 자신 의 백호의 엄청난 힘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미쳐 버린 자신이 가족을 헤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하더라도 명성을 위해 자신을 노리는 자들에게 가족이 위험해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2 세가 되는 날 말없이 집을 떠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랜 수련 끝에 자기 힘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성격은 여전히 통제불능인 듯도 싶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제야 돌아온 거야?” 랑시는 그렇게 말한 형 앞에서 눈을 훔치며 울먹거렸다. 랑시 역시 자신이 형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 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그리움이겠지만. 하지만 견백호는 동생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하나는 랑시 가 계약한 ‘10년 의무봉사 계약서’를 키스가 들이대며 ‘랑시 경은 내 소 유입니다아.’라고 뻔뻔하게 주장했기 때문이기도 하고(이때 다시 혈투가 벌 어질 뻔 했다.) 또한 무라사 씨 스스로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와 같이 있는 것 보단 여기 있는 편이 더 행복할 것 같다. 그거면 됐어.” 그렇게 말하며 랑시 경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필요하다면 다시 돌아오겠 다는 실로 불안천만한 말을 남긴 채 시 왕궁을 떠나 방랑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 “대체 100억 셀링은 어디에 필요했던 건가요!” 난 그게 너무도 궁금해서 떠나는 그에게 물었다. 설마 랑시와 나라라도 세 울 생각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대답은 역시 오직 싸움과 수련만 했던 무라사 씨 다운 것이었다. “그, 그게 그렇게 큰 돈이었어?” 지금까지 돈 주고 뭘 사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알테어 님에 필적하는 '금전감각 제로’인 인간이니 100억 셀링이 적당히 집 한 채 쯤 살만한 돈이 아닐까, 라고 막연히 생각했다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그걸 일찍 알았다면 이 고생할 필요도 없었잖아! 그러니까 그의 최대 약점은 ‘세상물정을 전혀 모른다.’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번 사건 이후 임금님은 한동안 아이히만 대공을 슬슬 피해 다녀야 했으며 어느 날인가 금동상 이마에 총알이 박혀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제9화 : 브라보, 왕립무투대회 - 끝 제10화 : 나는, 로봇(가제) #075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2 1. 소문이란 빠르다. 얼마나 빠르냐 하면 나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 가는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재빠르다. 나는 지금 그것을 실감하 고 있다. “미온 경! 당신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아!” 아침부터 브리핑 서류를 들고 화들짝 놀란 키스를 보고 난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또 왜 저러시나. 설마 너무 지명이 안 들어와 서 날 제명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였다. “지명이 산더미에요! 오늘만 십수 명이 넘는 귀부인들로부터 지명이 들어 왔단 말입니다아!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란 말입니까!” “얼레?” “미온 경. 무슨 마법을 쓰신 건가요? 하루 종일 하릴없이 밥만 축내던 미 온 경이 갑자기 이런 풍년이라니요!” 울컥! 당신보단 할 일 많았어!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지명이 많아졌는지 는 나도 도저히 모르겠다. “잠깐 지명자 명단 좀 보여주세요.” 난 당황하며 키스로부터 지명자 명단을 빼앗아 읽었다. 그리고 그 리스트 에 적혀 있는 익숙한 이름들은 다름이 아니라...... ‘......아니나 다를까' 모조리 예전 내 고객들이잖아! “아아 미온 경. 이제야 제값을 하는 자랑스러운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로서 새로이 태어나셨군요! 이 키스, 어버이의 심정으로 기쁜 마음을 억누 를 수가........” “댁이 왜 내 아빠야! 에이이! 징그러우니까 저리 가라고!” 감격한 나머지 날 껴안으려는 키스를 걷어찬 이후 난 머리를 쥐어 싸며 좌절했다. “으이구. 결국 무투대회가 문제였어.” 그렇다. 문제의 발단은 무투대회에서 내 모습이 만인들에게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비밀엄수를 철통같이 지키는 내 업소의 마담 히르카스 누님은 여간 해서는 고객들에게 내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주지 않았을 테고 덕분에 그 동 안 고객들 사이에서 나는 완전한 ‘행방불명’이었던 것이다. 설마 호스트 주 제에 왕실의 기사가 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새 인생 시작하고 싶었다고.’ 그러나 영원한 비밀 따위는 없다. 무투대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된 내 모습은 이른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남자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예전 날 귀 여워해주던 고객들의 귀에도 들어간 것이다. 날 놔둘 리가 없다. 날 놔둘 리가 없다. 날 조용히 놔둘 리가 없어! ‘이래서야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지잖아!’ 아니. 오히려 그 분들로서는 ‘어머나. 이젠 출장도 와주네?’라면서 기뻐 하실 지도 모를 일이로군. 아아, 내 인생은 대체 어디로........ “미, 미온 경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갑자기 내 지명이 폭주하자 랑시는 거의 경외감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마치 존경하는 업계 선배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 랄까. 게다가 빚더미의 화신 쇼탄 경은 ‘복 많은 놈. 부러워 죽겠다.’라는 시기심 가득한 시선을 날 흘겨보고 있었고 자존심세고 기묘한 우월의식에 휩싸여 있는 레녹 경마저도 뭔가 패배감 비슷한 것에 젖은 표정으로 날 바 라볼 정도였다. 아아, 역시 넘버원이란 기쁜 거야........ 가 아니잖아! 다 들 그렇게 보지마! 이제 난 호스트가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키스는 서류를 훑어보며 뭐가 그리도 즐거우신지 빨간 눈동자를 굴리며 콧 소리를 냈다. “헤에. 이러다간 미온 경이 루시온 경의 영업수익........ 아니 지명수입 을 넘어갈지도 모르겠군요. 역시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이네요오.” 그것은 실로 충격이었는지 동료 기사들마저도 탄성을 내지를 정도였다. 아 직까지 누구도 루시온 경의 지명 순위를 넘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뭔가 인생의 불공평함을 느낀 듯한 쇼탄 경은 퀭하니 담배를 피워 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나도 다시 태어나게 되면 호스트나 할까나.” “........닥치시오.” 사는 게 다 뭔지. 어쩌면 어린 내게 호스트를 점지해 주신 부모님의 판단 이 정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난 어쩌면 정말 평생 호스트를 해야 하는 이 른바 ‘호스트의 별’ 밑에서 태어난 것일지도 몰라. 으아아! 싫다고! 그딴 민망한 수호성 따위! 키스는 내 좌절을 보며 특유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미온 경. 축복 받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어리광부리면 안되지요오.” “이게 뭔 놈의 축복이라는!” “당신이 일을 그만둔 이후에도 사람들은 당신을 찾고 있다, 이것은 그들 에게 당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만큼 당신이 진심으로 그들을 대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만 큼 축복받은 일이 어디 또 있을까요. 미온 경은 자신이 축복을 소홀히 다뤄 서는 안돼요. 이 세상에는 단 한 명에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 도 많으니까요.” 이건 마치 짧은 시구를 읊는 것 같았다. 코끝으로 차향을 음미하며 아무렇 지도 않게, 별로 힘을 주지도 않고 읊조린 키스의 말에는 이상하게도 진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정말이지 가끔 이 인간, 말문을 막히게 만들 때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키스는 찻잔을 테이블에 놓고는 환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궁시랑 거리지 말고 후딱 돈 벌어오세요오. 어서요.” 결국 목적은 그거였구려. 2. 날 지명한 아가씨들은 지금까지 14명. 이 분들만 하나하나 진검승부로 처 리한다고 해도 올해를 꼴딱 넘어가는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게다가 나를 가 장 먼저 지명한 분은 바로 올해로 24세가 되는 줄리앙 님이었다. 나는 지금 그분의 ‘사무실’로 가고 있는 중이다. 어째서 영지도 궁전도 성도 아닌 사 무실이냐고?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합법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고 다른 하나는 불법적인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요컨대, 줄리앙 님 은 후자의 인간들을 지배하는 분이다. ‘아아아! 정말 그 분 사무실 가고 싶지 않아! 무섭다고 그런 곳은!’ 그러니까 쥴리앙 님의 직책은 국내 최대의 협사연합(俠士聯合)인 시류회(嘶柳會) 의 제7대 총수. 쉽게 말해 깡패두목이다. 말하자면 이자벨 님과는 정반대 의 세계에 정점인 분이며 당연히 둘은 사이가 좋지 않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엔디미온 님!” 신이시여.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사양하고 싶을 만큼 융숭한 대접을 강요받아야 했다. 대체 언제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플랫폼에는 실로 바윗덩어리 같은 남정네들 백여 명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들로부터 강맹하 다 못해 전의에 가득 찬 환영인사를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를 무 슨 보스의 귀한 아들 정도로 착각한 역무원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내 옆에서 슬금슬금 비켜설 정도였다. 아하하. 이것 참 기분 좋........ 을 리가 없잖 아! 왕실 기사한테 이게 무슨 망발이야! 플랫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어쩌자는 거냐! 그때 마치 카론 경의 동생처럼 보이는 장신의 청년이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엔디미온 님.” 맑은 벽안을 가진 이 사내의 이름은 하이달. 나는 이 자를 잘 알고 있다. 쥴리앙 님의 경호원으로 예전 업소에도 그녀를 그림자처럼 경호하던 사람이 다. 듣자하니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의 가문이 시류회에 엄청난 빚을 졌을 때 하이달은 9살의 나이에 자기 발로 줄리앙 님의 ‘회사’ 를 찾아와서 자기를 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일화는 이쪽 바닥에서 는 유명하단다. 당시 시류회 제6대 총수이자 어둠의 마왕쯤으로 군림했던 줄 리앙 님의 아버지는 하이달의 당돌한 태도에 웃음이 치밀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깟 꼬마를 사라고? 그래. 얼마에 널 팔겠다는 거냐.” “우리 가문이 당신에게 진 빚만큼 이다. 널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겠어. 대신 이 이후 절대로 내 가족을 건드리지 마라.” “재미있구나. 겁도 없는 녀석. 그래. 널 사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 너는 당장은 쓸모가 없으니 좀 더 널 키워서 써먹어 보도록 하겠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내가 칼을 쓸 수 없는 나이까지만 키우는 편이 좋을 거야. 칼을 잡을 수 있게 되면 그땐 널 죽여 버릴 테니까.” 줄리앙 님의 아버지는 하이달의 가문을 부셔버린 장본인이라고 한다. 하지 만 미운정이라는 것이 있던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그 이후 총수는 사나 운 표범 같던 하이달을 꽤 정성스럽게 키웠고 나중에는 아예 자신의 딸 줄리 앙의 경호를 맡겼다고 한다. 아무튼 하이달은 천운도 따른 자이지만 총수의 마음에 들었을 만큼 배짱도 실력도 굉장하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덕분에 하이달 씨는 절천야차(切天夜叉)라는 악명으로 불리는 시류회 넘버2가 되었다. 그런 하이달이 내게 말했다. “변한 게 없으시네요.” “헤헤. 하이달 씨도요.” 그때도 지금도 지금 막 타겟을 암살하고 온 듯한 표정이로군요. 시류회에 서는 웃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가 보네요. “자, 가시죠. 아가씨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하하하. 애, 애타게 말입니까?” 그러자 사방에서 조직원들이 몰려들어 나와 하이달을 몇 겹으로 둘러싸는 것이었다. “이, 이 정도까지의 철통 경호는 필요 없는데........ 여기가 전쟁터도 아니고.”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안전을 확실히 지키라 는 줄리앙 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실은 요 며칠 전부터 저희가 전쟁중이 라서요.” “......전쟁터였군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는 놈들이지만, 줄리앙 님께서 원치 않고 계셔서요. 아무쪼록 양해 부탁드립니다.” 수, 숨통을 끊어요? 그런데 저 기사걸랑요. 법수호의 대명사인 기사 앞에 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 내가 카론 경이 었다면 ‘죽어라. 범죄자.’라면서 피바람이 몰아쳤을지도 모른답니다. 당신 은 모를 겁니다. 당신을 10배로 업그레이드한 것 같은 얼음 인간이 왕실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저 이래봬도 왕실 기사인데 너무 스스럼없이 대하지 말아달란 말 이에요! 아, 자존심 상해. 이거 뭔가 대단히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 입술 을 삐죽 내밀며 하이달 씨의 뒤를 따랐지만 뼛속까지 협객인 그는 여전히 내 기분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날 뒤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076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2 3. 도시 중앙에 있는 줄리앙 님의 사무실은 테라코타 풍의 고풍스런 4층 건물 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건물은 수십 명이 넘는 거구의 ‘협객’들 이 살벌하게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이구야. 이건 마치 건물 전체를 경호하는 것 같군. 하이달 씨가 분명 ‘지금 전쟁 중’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그 ‘인간 바리케이트’들은 하이달이 오자마자 허리를 꺾으며 우렁차게 인사 를 올렸다. 실로 광장이 떠나갈 듯이 말이다. “오셨습니까! 형님!” 그러나 나와 함께 건물로 들어가는 하이달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렇게 읊을 뿐이었다. “시끄럽다. 시민들이 있는 곳에서는 소란 떨지 마.”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신지......”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험준한 그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자 나는 난 감하게 웃으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칼자국 투성이에 어 깨 너비가 내 두 배는 될 것 같은 무서운 양반들만 모여 있는 이 세계 속에 엉덩이까지 오는 긴 금발을 가진 색기 넘치는 청년이 나타났으니 다들 동물 원 판다곰 마냥 ‘신기하게’ 쳐다볼 만도 하다. 그렇다고 이런 진땀나는 분위 기 속에서 ‘후후. 만나서 반갑군. 나는 정의를 수호하는 왕실 기사다!’라고 늠름하게 소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그랬다간 당장 칼 맞을 것 같군.) 그때 하이달 씨가 툭하고 말했다. “잘 모셔라. 이 분은 줄리앙 님께서 총애하는 분이시다.” “헤에. 그런 남자였군요.” 우아아! 그런 남자라니! 대체 뭘 상상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 그 음흉한 눈빛은 또 무슨 의미냐고! 그때 하이달이 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왕실 기사가 찾아왔다는 것이 밝혀지면 아무래도 이쪽 바닥에서는 위험 한 소문이 돌게 됩니다. 그러니 왕실에서 왔다는 사실은 최대한 숨겨 주십 시오.” “며, 명심할게요.” 나는 들고 있는 제사 가방을 꼬옥 쥐며 짜내듯이 중얼거렸다. 헤효오, 후 딱 제사 지내고 한시라도 빨리 여길 뜨고 싶어라. 나는 칼도 안 들어갈 것 같은 우락부락한 사내들에게 ‘경호 당하며’ 줄리앙 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폭력조직의 경호를 받는 왕실기사라니....... 아하하하. 이걸 카론 경이 봤 다면 ‘죽어. 범죄자의 동조자.’라면서 칼을 뽑았겠군. 이런, 망할 인생. 4. 그리고 나는 자그마치 세 번의 검문 끝에 줄리앙 님이 날 ‘애타게’ 기다 리고 있다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는 또 하나의 왕궁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진정한 최상류층의 방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줄리앙 님의 방 역시 천 박한 금박 장식이나 졸부나 장식할 술병 따위는 하나도 없이 방 전체를 고 풍스런 적갈색으로 물들인 가죽으로 디자인했고 수많은 각국의 서적들이 삼 면에 사열해 있었으며 그 사이 사이에 오래된 청동 조각들이 세련되게 장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묵직한 양가죽 향기를 머금은 방 한가운데에 책을 펼쳐 든 줄리앙 님이 마치 한 폭의 유화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했다. 여전히 시류회 총수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작은 키에 귀 여운 갈색 머리를 길게 내리고 있었고 또 여전히 커다란 눈망울이 생명력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그런 그녀가 날 보자마자 (내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자 리에서 일어나 발랄한 목소리로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어머. 미온, 오랜만이야! 여기까지 찾아와 주다니 나, 정말 감동했어!” 게다가 성격 또한 여전하군. “저어, 그러니까 줄리앙 님. 제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이유는 말이죠.......” 울컥! 바로 줄리앙 님이 불렀잖아요! “예전에는 그렇게 와달라고 해도 거절하더니, 정말 이렇게 부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기뻐.” 꿈에는 그런 거 잘 안나오죠. “........지금 일하는 곳은 출장전문이거든요. 아하하하.” 기사의 자존심 저 하늘로 날아가 버리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중얼거 렸다. 그녀는 오랜만에 되찾아 온 수집품이라도 감상하는 듯이 내 몸을 이리 저리 훑어보면서 말했다. “와아. 전혀 바뀐 게 없네. 진짜 나이를 안 먹는 거 같아. 그런데 미온은 역시 엉뚱해. 갑자기 훌쩍 떠나서는 기사가 되어 버릴 줄은 짐작도 못했어.” 그리고는 내 뒤를 부드럽게 껴안으며 귀여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헤헤. 숨는다고 못 찾을 줄 알았어?” 제, 제사는....... 안 지낼 겁니까? 5. “하아. 그러니까 제사나 행사가 아니면 부르면 안 된다니까요. 이거 권력 남용이에요.” 나를 보고 뭐가 그리 좋은지 헤죽헤죽 웃고 있는 시류회 제6대 총수 앞에 서 나는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예상대로였던 것이다. 여간한 귀족 작위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녀가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날 지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완견 제사가 지명 이유라니 너무하잖아요!” “하지만 정말 아끼던 강아지였는걸?” “그,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날 부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강아지 장례식’이라니, 이거 정말 사정없이 체면 구겨지는군. 그녀는 심통이 난 내 꼴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 정말 제사 지낼 일을 하나 만들어 볼까? 마침 다른 조직과 전쟁 중 이기도 하고......”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그만두세요.” 난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줄리앙 님.” “응? 왜?” “예전에는 아버지를 이어 총수가 되는 것을 싫어하셨잖아요. 분명히 그런 것 질색이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지금도 별로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열성적으로 조직을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녀는 동그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말했다. “폭력 같은 것은 지금도 질색이야. 남을 겁줘서 돈을 뜯어낸 다는 건 결 국 어린애나 할 짓이잖아.” 줄리앙 님은 분명 총명하다. 머리 회전으로 치면 이자벨 님에게 버금가고 배짱으로 치면 세리카 님과 막상막하일 것이다. 또한 워낙 학구열이 대단했 으니 지식의 무게로 따져도 메데이아 교수와 비등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런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일, 즉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를 자청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사업을 할 거야. 아버지가 물려준 이 재력으로 말이야.” 잉? 사업? “무슨 사업을....... 말입니까?” 꼭 ‘사회적 편견’이라는 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득실거리는 폭력배들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사업이란 그다지 많지 않다. 보통은 사채업이나 밀수업 정도일 테고(이것도 사업은 사업이니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상상해 봐도 경 호업무나 육체노동의 꽃인 막노동 이상은 생각할 수가 없다. 평생을 주먹질 로 살아온 그들을 이용해서 동물병원을 연다든지 빵집을 개업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역시 상식 밖이었다. “완구를 팔 거야.” “와, 완구라고 하시면........” 그 어린애들이 가지고 노는 목마라든가 헝겊인형이라든가 팽이 같은 것? “생각해 봐. 미온도 어렸을 때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잖아?” “그렇긴 했죠.” 난 나무칼을 가지고 싶었지만 부모님께서 내 손에 쥐어준 것은 화장놀이세 트였다. 아아, 떠올리기 싫군. “그래. 전 세계 아이들 모두 어려서는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할 거야. 그런 데 어째서 어느 나라나 마을에서 엉성하게 만든 질 나쁜 장난감 같은 것이니 전부일까. 만약 좀 더 규격화된 질 좋은 완구를 대량으로 만들어 싼 값으로 전 세계에 납품한다면 충분히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이 시류회를 완구 회사로 만들고 싶은 거야.” “하하. 그건 정말 엉뚱하....... 아니, 잠깐.”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턱을 긁적거리며 곰곰이 생각 해 봤다. 사실 귀족들이야 장인들로부터 주문 생산된 무시무시하게 비싼 가 격의 도자기 인형이라든지 정교한 오르골 같은 것을 가지고 논다. 그러나 평 민들은 집 한 채 가격을 호가하는 그런 것은 구경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나 를 비롯해서 전 세계 모든 평민 아이들은 동네 대장간이나 부모님, 혹은 스 스로 만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내 화장세트는 부모님이 대도시까지 가서 사온 고가품이란다. 으윽! 더 생각하기 싫어!) “아무리 귀족이 돈이 많다고 해도 결국 평민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 나는 귀족이 아닌 평민들을 상대로 본격적인 사업을 하고 싶은 거야. 뭐, 일단 아 버지가 일궈놓은 유통망도 가지고 있고 어떤 완구를 만들지도 내 머릿속에 설계도가 들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합법이잖아?” 그녀는 도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방긋 웃었다. 대단한 장사 수완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해 왔지만 이 정도로 배짱이 좋을지는 몰랐다. 아버지로부터 이 어받은 대범함을 이렇게 건설적으로 이용할 줄이야,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 모습을 봤다면 장하다! 내 딸! 이라고 했........ 을리는 없을 테고 ‘아니! 이 명예로운 조직으로 고작 장난감이나 만들겠다고!’라면서 노발대발했겠지. 물론 줄리앙 님도 ‘깡패보단 훨씬 나아요!’라면서 맞받아 쳤겠지만. 그녀는 혼자 사업구상 때문에 흥분해서는 상기된 표정으로 ‘역시 처음은 인형이 좋을 거야. 마침 천을 싸게 매입 수 있는 루트도 알고 있고!’라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문가에 아무 표정도 없이 서 있던 하이달 씨를 보며 말했다. “하이달. 준비한 거 가져와.” 준비한 거라니? 난 고개를 갸웃 거렸지만 하이달은 역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무뚝뚝 하게 문 밖으로 나갔다. “뭘 준비했다는 거죠?” “미온. 만나서 반가웠어.” “예?” 얼레? 갑자기 무슨 작별인사 인가요? “솔직히 난 지금 너무나 바빠. 하지만 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거든. 생각 같아서는 며칠이고 계속 같이 있고 싶지만 이번에는 무사히 잘 지내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해야 겠네.” 그 말이 끝나자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금속 상자를 든 하이달 씨가 다시 돌아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이게 뭐죠?” “선물” 하이달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순금이 분명한 금괴가 가득 들어 있었다. 뭐, 뭐야! 이 엄청난 금덩이들은! “널 지명했으니까 비용을 지불해야 하잖아. 내 성의야. 가져가.” “이,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어요!” 물론 스왈로우 나이츠는 말 못하게 비싸다. 그렇기 때문에 명망 있는 귀족 이 아니라면 부를 엄두가 안 나는 것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게 엄 청난 액수를 준 사람은 없었다고요! 아예 절 사버릴 작정입니까! “괜찮으니까 받아 줘. 이래야 너도 수입이 많아지잖아. 그 대신.......” “대신?” 줄리앙 님은 내게 편지를 한 통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위고르 공에게 전달만 해주면 돼.” 난 순간 표정이 굳었다. 위고르 공은 법무대신이다. 지금 내게 우리나라의 법을 책임지는 사람에게 밀서를 전달해 달라는 의미인가? 그리고 이것은 그 수고비? “싫습니다.” 난 무척 기분이 상해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 그래. 너한테는 어떤 해도 없을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절 이용해서 이런 짓을 하실 줄은 몰랐어요! 줄 리앙 님께 엄청 실망했다고요!” 이건 결국 위고르 공을 매수하려는 짓이지 않은가! 이런 짓은 폭력조직 중 에서도 가장 질 나쁜 놈들이나 하는 거라고! 하지만 벌레를 씹은 듯이 찡그린 내 표정을 보던 줄리앙 님이 갑자기 배 를 잡고 웃는 것이었다. “정말 조금도 변한 게 없네. 귀여워, 미온은. 역시 거절할 줄 알았어.” “거, 거절할 줄 알았으면서 왜....... 앗!” 난 속았다는 기분에 황급히 그녀가 준 편지를 열어 보았다. 편지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온은 폭력배에게 뇌물을 받았답니다. 혼내주세요. -줄리앙 그라스파로사 배상 “.........대체 뭡니까. 이 무서운 문장은.” 이런 걸 위고르 공에게 전했다간 목이 날아간단 말입니다! “시험해 본 거야. 혹시 미온이 왕실에 가서 바꿨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난 돈에 휘둘리는 남자 따윈 질색이거든.” 그녀는 태연하게 말하며 웃었지만 난 오싹했다. 실수로라도 이 편지를 위 고르 공에게 전달했다간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건 말하자면 등 뒤에 ‘때려주세요.’라는 푯말을 걸고 광장을 활보하는 꼴이지 않은가! “화났다면 미안해. 하지만 다른 뜻은 없어. 그러니까 이 선물은 받아줘.” “하, 하지만.......” “안 받아주면 하루에 한번씩 지명할 테야!” “받을게요! 제발 받게 해 주세요! 갑자기 받고 싶어졌어요!” 난 사색이 되어서는 말했다. 역시 두목의 따님답게 협박의 강도가 장난이 아니로군. 그런데 이걸 받았다간 나는 단번에 ‘영업수입 넘버원’이 되어 버리겠군. 뭐랄까, 일년 내내 부평초마냥 지명을 나다니는 루시온 경에게 좀 미안한 걸. 6. “하아. 뭐가 뭔지......” 이렇게 지명을 빨리 끝내보기도 처음이다. 며칠이고 날 잡아둘 줄 알았던 줄리앙 님이 만나고 1시간 만에 날 ‘풀어줬고’ 돌아오는 길에는 금괴 한 상자를 받았다. 이렇게 쉽게 돈 벌어도 될지 몰라. 난 뭔가에 홀린 기분에 왕실 행 열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내 곁에는 나보 다 몸무게가 세배는 더 나갈 것 같은 조직원이 함께 하고 있었다. 금괴 상자의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도저히 들 수가 없다. 그래서 줄리앙 님은 금괴 운송 겸 경호 역으로 얼굴에 그려진 칼자 국이 일품인 조직원 한명을 붙여준 것이다. “헤에. 열차 타보는 건 처음이에요. 댁 덕분에 호강하네요.” 2인실에 들어온 내 경호원은 꽤나 순박하게 웃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었 다. 뭐랄까, 인상은 험악해도 실은 어린애처럼 순진하지 않은가. 그 모습이 좋아 보여서 살짝 눈웃음을 보이자 그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황급히 고 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이봐요, 왜 그런 반응을! ‘역시....... 방심하면 곤란하겠군.’ 난 옷깃을 여미며 슬쩍 소파에 앉았다. “앗! 출발한다! 이거 정말 움직이네! 이야아!” 시골출신인 것 같은 그는 정말로 신기한지 창문에 고개를 바싹대고는 연신 탄성을 내질렀고 곧 충전을 마친 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플랫폼을 떠났다. 그리고 10여분 뒤 속도가 붙은 열차 안에서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줄리앙 님과 전쟁 중이라는 조직은 뭔가요?” 하이달 씨도 전쟁 중이라서 각별히 경호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가. 내 말을 듣자마자 그는 카펫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깜짝 놀랄 정도로 화를 내는 것 이었다. 그가 토해내는 욕설 가득 한 말들을 최대한 정화해서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말도 마세요! 그 놈들은 진짜 더러운 놈들이에요! 전 총수님이 계실 때는 쥐 죽은 듯이 설설 기던 놈들이 온화한 줄리앙 님이 총수가 되자마자 별 비 열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설치기 시작하는데........”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예상도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갑자기 열 차가 급정차를 했고 소파에 앉아 있던 내 몸이 붕 날아올랐다. 끼이이이익! 금속 바퀴가 레일을 긁는 소리가 귀를 찢었고 그와 함께 내 몸이 강하게 벽과 충돌했다. 바닥을 구른 내 몸에 시큰한 통증이 몰려왔고 곧 정신이 혼 미해 졌다. ‘크윽. 대체 이게......’ 열차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충격에 창문이 다 부셔졌고 소파며 실내 장 식들이 모조리 뒤엉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으며 곳곳에서 부상당한 사람들 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열차 일부는 급정차를 이기지 못하고 아예 탈선한 것 같았다. 난 가늘게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고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게다가 흥분해서 떠들어대던 경호원은 벽에 잘못 부딪쳤는지 머리와 코에서 피를 많이 흘리며 정신을 잃은 상태였 다. “괘, 괜찮아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곧 이곳으 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구?’ 설마 구조대가 이렇게 빨리 도착했단 말인가? 그러나 실낱같던 내 기대는 완전히 오판이었다. 객실 문을 부셔버리며 들어온 세 명은 농담이라도 구조 대라는 말할 수 없는 인상이었다. “이 놈인 것 같군.” 뾰족한 수염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내가 리더인 것 같았다.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내게 다가와서는 머리채를 잡아 날 억지로 일으켰다. “네 녀석이 줄리앙 년과 내통하는 왕실 기사로군. 정말 계집애처럼 생겼 는걸.” 이 놈들은 대체 누구야. 설마 줄리앙 님과 전쟁 중이라는 조직인가. “형님. 이 놈은 어쩔까요.” 부하쯤으로 보이는 녀석이 정신을 잃은 경호원을 툭툭 차며 물었다. 뾰족 수염의 사내는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어떻게 할지 일일이 물어보냐. 멍청이.” 그러자 부하가 품속에서 칼을 꺼내 경호원의 등 깊숙이 칼을 꼽았다. 몸을 부르르 떨던 그는 컥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나는 그 광경에 정신이 확 들어 주먹을 꽉 쥐며 날 쥐고 있는 자의 얼굴을 때렸다. “무슨 짓이야! 이 더러운 놈들!” 하지만 지금 이 꼴이 된 내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을 리가 없다. 내 주먹 을 맞은 그는 피가 섞인 침을 탁 뱉으며 잔인한 눈매로 날 바라보았다. “보기보다 사납군. 사무실에 끌려간 뒤에도 그런 눈빛을 할 수 있을지 궁 금한데? 큭큭.” 그리고 그가 내 복부에 주먹을 찔러 넣었고 난 숨이 콱 막혀 오는 것을 느 끼며 정신을 잃었다. -Blind Talk 이구아나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체 어떤 경우에 자살을 결심할까. 아아, 마감으로 가는 한걸음이 너무도 힘듭니다. 몸살에 이사에 치통에 말 못할 사정까지... 뭐 이리 '장애물'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거의 끝 나가고 있답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오탈자는 미리 사과드립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박하사탕OST 중 Main theme을 들으며 (설경구 씨의 연기는 훌륭하지만 박하사탕 영화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 니다. 하지만 초록 물고기는 아주 좋아합니다. 특히 그 음악이 좋고, 마지막 의 엔딩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음악은 들을 때마다 멋졌는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의 OST 앨범은 발매되지 않아서 어딜 가도 구할 길이 없더군요. 굉 장히 멋진데... 아쉬운 노릇입니다.) ps:리플 보고 초록 물고기로 수정합니다. 이런 창피할 때가~ #077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2 7. “.........으음”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날 때의 기분을 아는가. 그것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와는 사뭇 다르다. 차라리 깊은 늪 바닥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기분에 가깝 다. 요컨대 무척 괴롭고 불쾌한 기분인 것이다. “큭큭. 이제 정신이 드셨나 보군.”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겨우 고개를 들고 가늘게 눈을 뜨자 내 눈 앞에 는 예의 뾰족한 수염의 사내가 찐득한 비웃음을 머금은 채 서 있는 것이 아 닌가. 난 곧바로 눈매를 치켜 올리며 그에게 한 방 먹이려는 심산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곧 철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온 몸을 죄어 왔다. 낭 패다. 내 온 몸은 의자와 함께 사슬에 묶여 있었다. “난폭한 행동은 그만두는 게 좋아. 아니, 잠시 후에는 비명을 내지르기도 바빠 저항할 겨를도 없을 테지만. 어떤 놈도 10분이면 고분고분하게 되지. 큭큭큭.”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가진 저 놈은 그렇게 말한 뒤에 내게 찬물을 뿌리고 거칠게 내 상의를 찢었다. 정신이 바짝 들며 잊고 있던 통증이 또다시 몰려 온다. 뼈라도 부러진 것일까, 난 입술을 꽉 깨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 문 하나 없어 습하고 어둑한 회백색의 공간과 낡은 계단, 아마도 이곳은 오 래된 건물의 지하실이리라. 주변에는 폭력배 정도로 보이는 다섯 명의 사내 들이 날 바라보며 서 있었고 바닥에는 금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는 시뻘건 불덩어리들이 들어 찬 화로가 매캐한 연기를 뿜고 있었다. “흐흐. 그럼 슬슬 즐겨 볼까.” 뭐, 뭘 즐긴다는 거냐! 그가 상의를 벋어 던지자 섬뜩한 문신이 드러났다. 그는 화로 쪽으로 걸어가서 뜨겁게 달궈져 있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가벼운 것부터 시작하자고. 자아.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큭큭.” 그리고 그가 내 귓가에 달아오른 칼날을 천천히 가져다대자 치이익 소리를 내며 머리칼 몇 가닥이 바닥에 떨어졌다. 뽀얀 어깨와 가슴 선을 타고 식은 땀이 흐른다.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다. “예쁜 비명 한번 질러봐라. 감상해 줄 테니까.”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어! 그들은 흥분된 표정으로 내 주변에 몰려드 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머리 속이 하얗게 질리는 상황에서도 도무지 이해 가 안 가는 것이 하나 있다. 고문이라는 것은 일단 상대가 숨기는 뭔가를 자백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칼을 쥔 그가 내 머리를 잡아 뒤로 꺾으며 으르렁거렸다. “지금부터 네 녀석은 고운 가슴팍에 1부터 10까지 숫자를 새겨 주겠다. 그리고도 입을 안 열면 계속 숫자는 올라간다. 네 몸뚱이가 달력이 되고 싶 지 않다면 어서 불어!” 그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러니까 뭘 불라는 거야! 그게 뭔지 나도 좀 알자!” 이거 진짜 억울하네! 대체 내가 뭘 숨기고 있다는 거냐고! “시치미 때지마.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글쎄 난 댁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뭔지 알아야 대답하든 말든 할 거 아냐! 지금 내 기분은 엄청 무섭고 답답하고 억울해 죽겠다고!” 이제 화가 난 쪽은 나였다. 그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억울해 하는 내 눈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 놈, 아주 철저하게 교육 받았나 본데? 저렇게까지 잡아 때는 걸 보니 까 보통내기가 아니야.” “저 자식, 보통 고문으로는 입을 열 놈이 아닌 것 같아. 사창가에 넘겨서 아주 병신으로 만들어 놔야.......” “글쎄 이 양반들아! 난 진짜 몰라! 문제를 알려줘야 답을 내줄 거 아니냐고!” 제길!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내가 뭘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뾰족 수염의 사내가 의심에 찬 눈초리로 말했다. “줄리앙이 네게 지시한 것이 있을 텐데. 이쪽은 다 정보를 입수했어.” “줄리앙 님이? 나한테? 뭘?” 뭔 지시? 그게 뭔지 내 쪽에서 더 궁금하다, 이 놈들! 그는 내 얼굴에 바짝 칼을 들이대며 말을 이었다. “줄리앙이 법무대신과 내통하고 있는 거 다 알아. 네 놈을 통해서 법무대 신과 거래하는 거잖아! 그리고 저 금괴는 그에게 바치는 뇌물일 테고! 줄리 앙으로부터 무슨 지시를 받았는지 말해!” “이봐요. 그러니까 나는 줄리앙 님의 강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왔다 가 저걸 사례비로 받아서........ 아악!” 그는 내 배를 발로 걷어찬 뒤에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새끼, 진짜 말로 해선 안 되겠군. 잘려나가고도 그런 말 할지 두고 보자!” 지, 지금 뭘 자른다고? 그리고 그가 갑자기 내 바지를 벗기려고 하자 난 절박하게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이 무지막지한 놈들아!” 으아아!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아! 까무러치겠어, 정말! “호오. 이제 말할 생각이 좀 드셨나?” 모른다니까 그러네! 좋아. 이제는 이쪽도 협박이다. 난 최대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난 왕실의 기사다. 만약 더 이상 내 몸에 손을 대면 왕실에서 수사가 나 올 거야. 단 한 명의 손에 네 놈들의 조직이 괴멸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이 사슬을 풀어!” “한 명? 큭큭, 허풍이 심하군.” “농담하는 거 아냐. 난 도리어 네 녀석들이 걱정이라고.” 세상은 넓고 네 녀석들 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는 초인들도 존재한다고. 가 령 카론 경이라든지 혹은 카론 경이라든지 아니면 카론 경이라든지....... 그러니까 저승사자 만나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끝내란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 속고만 살았는지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헛소리. 네 녀석이 기사라고? 이런 곱상한 기사는 본 적도 없고 칼도 차 지 않고 다니는 기사 역시 들어본 적도 없다. 허풍치고 싶으면 조금은 어울 리는 직업을 선택하는데 어때.” “그, 그런 기사도 있어!” 그가 섬뜩한 웃음을 머금으며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자 온 몸에 소름이 돋 았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네 녀석을 사창가에 팔아넘길 거야. 물론 혀와 힘 줄을 잘라서. 말도 못하고 혼자 밥도 못 먹는 병신이 된 녀석이 무슨 수로 빠져나가 신고하겠어. 큭큭. 그런 겁먹은 표정 짓지 마. 내가 네 녀석의 첫 손님이 되어줄 테니까.”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마구 몸을 뒤흔들어봤지만 단단히 묶인 쇠사슬은 살갗을 끊을 듯 조여 올 뿐이었다. 그때 금괴 상자를 뒤지던 녀석이 뭔가 발견한 듯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어!” 뭐가 있다는 거지? “큭큭큭. 줄리앙 년. 꼭꼭 숨겨놓기도 했군.” 그리고 나는 믿겨지지 않는 광경을 보았다. 금괴 상자의 바닥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을 한 장 뜯어내자 그 안에서 편지 봉투가 나온 것 이다. 난 표정을 잃은 얼굴로 그가 편지를 꺼내 읽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후후. 너도 몰랐다는 얼굴이로군? 그럼 네 녀석도 줄리앙에게 이용당한 거다. 널 통해서 법무대신에게 이 편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거지. 네 녀석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줄리앙은 가장 잔인한 조직 두목의 딸이다. 그의 피 를 이어받은 여자가 깨끗하게 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줄리앙 님이 날 이용할리가......” 하지만 그럼 저 편지는 뭐란 말인가. 설마 폭력을 쓰지 않고 완구회사를 만들겠다는 말도 모조리 날 속이려는 말이었나? 날 이용한 거야? 편지를 꺼내 읽던 그는 커다랗게 웃으며 편지를 화로 속에 집어 던졌다. “큭큭. 안되지. 이런 게 왕실에 전해지면 곤란하지.” 그리고 편지는 화르륵 소리를 내며 재가 되어 타버렸다. 기분 나쁜 뾰족 수염의 그는 내게 다가오며 흥얼거렸다. “뭐 이렇게 알아내 버렸으니 네 녀석을 귀여워해 줄 기회도 없어졌군. 하 지만 뭐 팔아넘기기 전에 잠깐 먼저 시식이라도.......” 저, 저리가! 그때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뭐야. 밖에 누구야!” 그러나 밖의 누군가는 대답 대신 계속 커다랗게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심 상찮음을 느낀 한 녀석이 철문 앞으로 걸어갔다. “누구냐니까!” 두터운 철문이고 밖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창도 붙어 있는 문이었다. 그 가 그 창 밖으로 얼굴을 들이대는 순간........ “너, 너는!” 강철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문을 뚫고 나온 칼이 곧바로 그의 등까지 꿰뚫어 버리며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경악을 하며 문과 함께 꼬치구이가 되어버린 자를 바라보았다. 콰아아앙! 두터운 철문이 단번에 박살나 버리며 모습을 드러낸 자는 바로 시류회 넘 버2 하이달 씨였다. 무슨 일인지, 그의 슈트는 이미 핏물에 젖어 있었다. “네, 네 놈이 여길 어떻게!” “.......” 과묵한 성격 그대로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사내들이 칼 을 집어 거칠게 소리쳤다. “이 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여기에는 우리들 말고도 수십 명은 더......” “이 피가 누구 것이라고 생각하나.” 하이달의 싸늘한 말에 그들의 눈이 커졌다. 막아서는 자들을 혼자서 모조 리 척살하며 여기까지 왔다는 건가. 암흑계의 카론 경이랄까. 정말 무서운 남자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는 가장 먼저 덤벼드는 자를 가볍게 쓰러트린 뒤에 그의 목을 주저 없이 그었다. 살기 서린 눈빛으로 사람들을 쏘아보는 하이달 씨가 차갑게 말했다. “줄리앙 님께서 전쟁을 결심하셨다. 지금부터 시류회에 덤비는 놈들은 모 조리 죽는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그런 짓을 했다간 정말 카론 경이 올지 모른다고! 그러나 하이달 씨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신이 꺼낸 말을 ‘실천’했다.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자들을 하나하나 냉정하게 처리하며 날 고문하려 던 사내에게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 섬뜩한 모습에 뾰족 수염의 기가 질려버린 것도 당연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오면 이 녀석을!” 그리고 그는 내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걸음을 멈춘 하이달 씨가 말했다. “그런 짓을 하면 창피하지 않나.” “큭큭. 아무려면 어때. 네 놈에게 개죽음 당하는 것보단 낫다. 그 칼 버 려!” 더러운 위협이었지만 하이달은 곧바로 칼을 바닥에 버렸다. 줄리앙 님이 날 구해주기 위해 하이달 씨를 보낸 걸까. “잘 했어. 이젠 손을 머리에 올리고 무릎을 꿇어. 어서!”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치는 그는 내게는 관심도 없었다. 나는 의자를 꽉 잡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제발.......” “뭐?” “그만 좀 하라고! 망할 놈아!” 난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의자 채로 몸을 일으켰고 곧바로 내 머리가 그의 턱을 강타했다. 온 몸에 힘을 줘서 몰아 친 내 일격은 실로 허를 찌르는 것 이었다. “아갸갸갸갹!” 괴상망측한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올라 바닥에 떨어졌다. 이 모습에 하이달 씨마저도 적잖게 놀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피 냄새가 확 풍겨온다. “괜찮으십니까. 엔디미온 님.” “아구구. 머리가 깨질 것 같네요.” 울상이 되어버린 내 몸을 하이달 씨가 풀어주었다. 그의 굉장한 힘에 사슬 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끊어지고 있었다. “줄리앙 님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금괴 상자 안에 있던 편지는 뭐죠.” 난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이미 편지는 화로 안에서 불타버려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줄리앙 님이 내게 말하지 않고 편지를 왕실에 넘기 려 했던 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나 하이달 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자켓을 벗어 내게 입혀 주며 말할 뿐이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대로 말해줘요. 대체 줄리앙 님은 무슨 일을 꾸미고......” 그때 악역은 끈질기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신을 잃었던 뾰족 수염이 갑자기 일어나 칼을 쥐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나 는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죽어라! 빌어먹을 놈들!” “우아악!” 내가 몸을 돌리는 순간 칼은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총성이 울 렸다. 타아아앙 짐승처럼 덤벼들던 그의 몸이 고목처럼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하이달은 하얀 연기를 내뿜는 총을 뽑아 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총에는 왕실의 문 장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하, 하이달 씨. 이 총은......” “가시죠. 줄리앙 님이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이달은 먼저 문 밖으로 나섰다. -Blind Talk 키보드를 바꿨습니다. 예전에 쓰던 아론 기계식을 다시 샀는데, 내츄럴 키보드라서 그런지 적응이 안되서 오타가 자주 나오는 군요. 그런 이유로 이번 편은 오탈자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런. 곧 3권 분량 삭제 공지를 올릴 예정입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77@kornet.net Kottonmouth Kings의 Kings blend를 들으며 #078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2 8. “미온!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정말 걱정했어!” 줄리앙 님은 날 보자마자 와락 껴안으며 외치는 것이었다. 눈물까지 글썽 이는 그녀의 모습. 머리 속이 혼란스럽다. 나는 그녀를 떼어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줄리앙 님. 상자 안에 편지가 있었어요.” “무, 무슨 말이야?” “금괴 밑에 편지가 있었어요. 말해 주세요.” “그 편지....... 읽어봤어?” 그녀는 떨리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팔짱을 낀 채 뒤에 서 있던 하이달 씨가 말했다. “편지를 본 자는 모두 죽였습니다. 엔디미온 님만 제외하고.” 얼음덩어리를 삼킨 것 같은 기분이다. 하이달이 가지고 있던 그 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총을 포함한 화약무기는 왕실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 되고 있다. 하물며 귀족조차도 여간한 권력자가 아니라면 손에 넣기 힘든데 폭력조직에서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더군다나 왕실 문양 이라니. 설마 시류회는 왕실로부터 총을 밀수하고 있는 것일까. 젠장!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 되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잖아! 그녀가 괴로운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았다. “......미온. 그 편지는.......” “설마. 절 이용해서 위고르 공과 뒷거래를 하려던 거였나요. 정말 그런 건가요?” “아, 아냐! 그렇지 않아!”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편지의 내용은 뭐였죠.” “그, 그건.......”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줄리앙 님.” 그러나 그녀는 물기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서도 결국 대답해 주지 않았다. “미안해.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줄리앙 님.” “믿어줘. 나쁜 짓을 하려던 것이 아니야. 널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야!”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 팔을 잡으며 절실하게 외치고 있었다. 항상 당당하던 그녀에게서 이런 표정은 보고 싶지 않다. 잠시 생각하던 나 는 밝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 믿을게요.” “정말?” 도리어 놀란 쪽은 줄리앙 님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믿기로 결심했다.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이 일을 해결하는 열쇠였다면 인류는 애저녁에 멸망했 을 것이다. 그러니까 믿자. 믿어주는 것 외에는 도와줄 방법이 없다면 믿어 주는 것이 당연하잖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니까 적어도 나만큼은 진심으로 믿어줘야 한다. “고마워. 미온. 날 믿어줘서 정말 고마워.” 그녀가 날 꽉 껴안자 예의 상처들이 욱신거려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마님, 소인 아파 죽겠사옵니다. “저어 그런데 그 조직들은 뭐죠. 절 철저하게 노리는 것 같았어요.” “이런 일에 끌어들이게 정말 미안해. 여긴 위험하니까 왕실로 돌아가.” “아니에요. 제가 도울 길이 있을 거예요.” “괜찮다니까. 무리하지 말고 돌아가.” “이래봬도 저 기사걸랑요. 아무도 인정 안 해주지만 수사권도 가지고 있 고 말이죠. 아하하.” 나와 그녀가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폭력조직을 도와주는 정의의 기사라 니........ 키스 경, 카론 경, 이번 일만 눈감아주세요. 그때 그늘진 눈매 사이에 냉광(冷光)이 서린 하이달 씨가 말했다. “그 놈들은 루치아노 패거리들입니다.” 그거 상당히 특색 없는 이름이로군. “본래 시류회의 이름을 팔아 협잡질을 하던 저급한 놈들입니다만 마약과 청부살인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저질러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더욱이 줄리앙 님이 총수가 되자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서 아예 시류회를 자 신들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내가 겪어 본 바로도 물 불 안 가리는 잔인한 놈들임에 분명하다. 하이달 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상상도 하기 싫군. 눈매를 치켜 올린 줄리앙 님이 말했다. “미온까지 납치할 줄은 몰랐어. 이제 나도 참을 수가 없어. 실력행사는 최대한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젠 전쟁 외엔 방법이 없어.” “잠깐만요! 그런 짓을 하면 안돼요!” 그것은 자멸이다. 도시를 피로 물들였다간 줄리앙 님까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완구회사는커녕 평생을 살인자로 낙인찍혀 범죄조직을 벗어나 지 못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그 놈들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질 않아. 그 놈들 은 이미 이 지방 관리들과 귀족들까지 매수한 상태야. 더 이상 싸움을 미 뤘다간 내 부하들이 위험하게 돼. 이제 스스로 조직을 지키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더 이상 살인은 안돼요!”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엔디미온 님.” 하이달 씨의 차가운 말에 난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이달 씨야 말로 줄리앙 님을 이 세계에서 구하고 싶은 거 아니었나요.” “.......” 하이달은 조금 나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전쟁을 했다간 줄리앙 님도 하이달 씨도 시류회도 모조리 더러운 피를 뒤집어쓰게 된다. 그때 건장한 체구의 조직원이 황급히 들어와서는 하이달 씨에게 뭐라고 속 삭이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하이달 씨의 눈빛이 굳어가고 있었다. 줄리앙 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하이달.” “지금 이 도시에 왕실 기사단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기, 기사단이라고! 하이달 씨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헬스트 나이츠입니다.” “이렇게 빨리.......” 아마도 열차가 뒤집혀 버린 무지막지한 사건 때문에 오게 되었으리라. 왕 실 수사관들이 파견되었다는 말에 줄리앙의 님의 표정에 난색이 드러났지만 난 도리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헬스트 나이츠에는 차갑지만 아주 공정한 분이 수사관 으로 있거든요! 그 분이 오셨다면 깨끗하게 일을 처리해 주실 것이 분명해 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아, 카론 경. 정말 꼭 필요할 때 나타나 주시는 군요. 난 기쁜 마음으로 헬스트 나이츠가 도착했다는 곳으로 향했다. 9. 나와 함께 동행한 하이달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뚝뚝 한 표정 그대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정말이지 카론 경과 만났다간 삽시간 에 주변 기온을 영하로 떨어트려 버리겠군. 하지만 둘이 만나서 서로 거울 보듯 바라보며 ‘넌 뭐하는 놈이냐.’, ‘그러는 네 놈은 뭐냐.’라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엄숙하기 보다는 되게 웃길 것 같....... “얼레?” 난 눈을 부비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 역 밖으로는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 십여 명이 그 근엄한 제복을 입고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다 카론 경은 없는 것이 아닌가. 카론 경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 대신 진한 쌍꺼풀을 가진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난 믿겨지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블리히” 신이시여. 수사관으로 펴견나온 자는 카론 경이 아닌 기사단장 블리히였다. 이건 최악이야! 저 인간한테 공정한 수사를 바랠 바엔 차라리 원숭이한테 재판을 부탁하는 게 나아! 하이달이 적대감을 참는 듯이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저 자가 공정한 수사를 한다는 기사입니까?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 다만.” “........미안해요.” “그리고 지금 저 자 옆에서 아부를 떨고 있는 놈이 바로 루치아노 패거리 들의 두목인 루치아노 빈센조입니다.” 그의 말대로 블리히 옆에서는 뱁새눈을 가진 깡마른 사내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블리히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모든 사건의 원흉이랑 어울리고 자빠졌다니 지금 제 정신이냐, 블리히! 난 그를 보며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버렸다. 그리고 블리히가 내 모습을 보자마자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었다. 난 그와 얼굴도 마주치기 싫어서 고개를 돌린 채 투덜거렸다. “카론 경은 어찌 두고 직접 행차하셨나이까.” “네깟 놈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사건이기에 이 몸이 직접 온 것이다.” 뇌물 받고 와주신 건 아니고요? 쳇! 그때 블리히 옆에서 실실 웃던 루치아노가 하이달 씨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었다. “블리히 나리! 바로 이 놈입니다! 이 놈이 제 조직원....... 아니 부하들 을 다짜고짜 잔인하게 학살한 살인마 놈입니다! 아주 흉악한 놈입니다요!” 적반하장이라는 것은 이런 것. 그러나 ‘루치아노의 든든한 친구’ 블리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게 버럭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솔한 놈! 왕실 기사가 본분도 잊고 이 따위 범죄자와 어울리고 있다니! 내 하해 같은 자비를 베풀어 이번만은 죄를 묻지 않을 테니 썩 왕 실로 돌아가라!” 대체....... 당신 언제 사람 될 겁니까. 화가 치민 내 자색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발했다. "좋아요! 그럼 나도 수사권을 발동하겠어요!" "뭐, 뭐라고? 무슨 말도 안되는!" 블리히와 헬스트 나이츠들은 물론 루치아노와 하이달 마저도 '너, 제 정신 이냐?'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도 왕실 기사에요! 수사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세요!" 물론 이 장면을 키스가 봤다면 머리를 쥐어싸며 '아아! 미온 경! 당장 왕실 로 돌아오지 않고 뭐하는 짓입니까아!'라고 외쳤으리라. 블리히는 예상치 못한 내 반격에 뺨을 씰룩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너 이 놈. 네 녀석은 지금 나 블리히와 헬스트 나이츠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네 놈이나 카론이나 둘 다 평민 출신이라 서 정말 예의를 모르는 구나!" "평민이 뭐가 어때서. 이런 상황에서 출신 같은 것을 들먹이는 짓이야 말 로 치졸한 짓거리 아닌가요! 난 독자적으로 수사하겠어요!" 블리히는 날카롭게 치켜올린 내 표정을 보며 가소롭다는 비웃음을 보였다. 좋아. 이것으로 헬스트 나이츠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된 셈인가. -Blind Talk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술은 손님을 먼저 따라준 뒤에 마지막으로 주인의 잔을 채우는 것이 예의라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은 술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의 잔을 가장 먼저 채우는 술은 바로 와인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건방지게 주인이 먼저 따르냐? 하면... 그 이유인 즉슨, 와인 은 본래 코르크 마개 밑에 올리브 오일을 발랐다고 하더군요.(지금이야 제조술 의 발달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는 해도.) 그래서 가장 먼저 따른 잔에는 그 기름이 떠 있거나 코르크 찌꺼기가 떠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주인이 그것을 먼저 따라 마시고 손님에게는 깨끗한 술을 따라준다고 합니다. 이제는 코르크가 찌꺼기나 기름층 같은 것이 생기는 와인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풍습은 남아서 와인은 여전히 주인이 먼저 따르는 것이 예법이라는 말을 들었 습니다. 모든 에티켓에는 그 이유가 있다고나 할까요. 자 그럼 3권 분량은 이쯤에서 끝내고 저는 좀 더 원고를 다듬고 에피소드들을 추가하기 위해 가보겠습니다. 이것 참, 이번 권은 정말 손볼 곳이 많군요. 게다가 결국 오늘 부로 제 XP가 미친듯이 에러를 토해내는 통해 원고가 날아 갈까봐 조마조마하고 있습니다. 그럼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4권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II <전편까지의 줄거리> 시류회 총수 줄리앙에게 지명을 받은 미온은 엄청난 금괴를 사례비로 받고 돌아오던 중에 루치아노 패거리들의 함정에 걸려든다. 그들의 아지트에 끌려 온 미온은 위기의 순간을 맞지만 줄리앙의 심복인 하이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나오게 된다. 그러나 루아치노들에게 매수된 헬스트 나이츠 기사단장 블리히가 직접 나 타나 시류회를 말살시키려고 하고 이에 분노한 미온이 블리히를 막아선다. 블리히와 대적한 미온은 왕실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지 않은 채 자신도 왕실 기사의 권한으로 수사권을 발동하게 되고 사태는 일촉즉발이 된다. 10. 블리히가 제멋대로 수사하겠다면 나도 내 멋대로 수사해 주겠어! (스왈로우 나이츠 주제에) 감히 수사권을 발동해 버린 나를 기사단장 블리 히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표정은 분노가 아니라 ‘네깟 놈이?’라는 사람 깔보는 얼굴이었다. 블리히가 마치 왕이라도 된 것 같은 거만을 떨며 말했다. “내 넓은 아량을 발휘해서 마지막 기회를 주겠노라. 지금 당장 왕실로 돌아가면 그 무례, 없던 일로 해주지.” 댁이라면 이 분위기에서 돌아가겠수? 난 팔짱을 끼며 세차게 도리질을 쳤 다. “마음대로 해보세요! 나도 기사의 명예를 걸고 블리히 경의 시커먼 욕심 대로 움직이게 놔 누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블리히가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에이이! 대체 어디까지 왕실의 수사를 방해할 생각이냐!" 정의구현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네 놈이야! 적당히 좀 하라고! 이 사회 의 독버섯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내 눈빛에 블리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당장 이 놈을 연행해라!” “얼레?” 아뿔싸! “죄목은 공무집행방해다!” 그 순간 우락부락한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들이 몰려와 내 두 팔을 잡았다. 난 그들을 뿌리치며 외쳤다. “그럼 나도 블리히 경을 연행하겠어요! 수사방해로!” “후후. 네가 날 연행해? 무슨 수로?” “에 그건 그러니까........” 생각해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내 수사본부는 나 혼자다. ‘냉큼 블리 히 경을 연행해라!’라고 외쳐봐야 기분만 우울해질 뿐인 걸. “힘도 없는 주제에. 혼자서 무슨 수사를 하겠다는 거야.” “가, 같은 기사를 체포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흥! 난 네 놈을 기사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으으윽! 네 녀석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어서 끌고 가! 내 언제 한번 네 녀석에게 맛을 보여주려고 벼르던 참이 었다. 끌고 가서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놔. 퉤!” 블리히가 침을 뱉으며 윽박지르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본래는 국왕의 명령도 없이 똑같은 수사권을 가진 왕실 기사를 멋대로 연행하는 것은 분 명 불법이다. 그러나 이런 ‘법도’를 지키는 자는 카론 경 정도일 것이다. 곁에서 묵묵히 날 지켜보던 하이달 씨가 끌려가는 내게 얄미울 만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10초 쯤 걸렸나요? 지금까지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어봤지만 이렇게 초 고속으로 체포되는 되는 경우는 처음 보는 군요." "포, 폭언이로군요." "줄리앙 님의 평가대로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하지만 상대를 봐가며 덤비셨어야죠.” “......충고 감사합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당신 정말 냉정하네요. “그리고 엔디미온 님.” 나는 울상이 된 얼굴로 하이달을 바라봤다.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이 싸움은 곧 끝납니다. 왕실로 돌아가세요.” “......!” 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말을 마친 그는 내게 등을 보인 채 멀어 지고 있었다. ‘싸움이 끝난다고? 하이달 씨는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적어도 날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리라. 난 이 어처구니없는 싸 움에 뭔가 비릿한 내막이 있다는 직감을 느끼며....... 오늘만 두 번째로 끌려갔다. 11. “또 여기야?” 하필 내가 끌려온 곳은 아까 전 루치아노 패거리들에게 잡혀 모진 고초를 당할 뻔했던 바로 그 밀실이었다. “저어......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감금되면 안 될까요? 이곳에서는 벌써 한번 신세진 적이 있......" “뭐야? 왕실의 수사를 방해한 범죄자 주제에 무슨 헛소리냐!” 범죄는 지금 네 놈들이 저지르고 있잖아! 이거 불법연행이라고!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헬스트 나이츠 녀석들은 날 의자에 억지로 앉힌 뒤에 온 몸을 사슬로 묶었다. ‘이 의자에도 아까 내가 신세진 그 의자로구만. 내가 이 지하실과 무슨 질긴 인연이 있어서 여길 벗어나질 못하는 건지.’ 난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마나 블리히와 작당한 루치아노 놈들이 제 공한 것이리라. 나를 다 묶은 기사들이 손을 탁탁 털며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널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 둬. 얌전히 있으면 곧 풀어주 겠다.” “그 ‘곧’이 언제인데요.” 콰아앙! 철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대답대신 지하실에 울렸다. 3일 후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툭툭 내 머리 위를 때리자 난 눈을 가늘게 뜨 며 고개를 들었다. 몸을 움직이려하자 날 감고 있는 사슬이 차르륵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 촛불하나 없는 지하실은 그야말로 가슴이 콱 막혀오는 어둠과 냉기뿐이다. 파랗게 질린 입술에서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나왔다. ‘........추워’ 지독한 습기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은 옷은 이미 보온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난 최대한 두 다리를 오그렸지만 몸이 떨려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내 앞에는 물 컵들이 놓여 있었다. 3일 동안 헬스트 나이츠는 오로지 물 만 줬지만 난 마시는 것을 거부했다.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다. 한번은 키스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온 경. 혹시 감옥에 갇혔을 때 분위기가 수상하다면 주는 물은 절대 로 마셔서는 안돼요.” “엥? 왜요?” “보통 그런 물에는 복통을 일으키는 독을 풀어놓거든요. 가령 감자의 씨 눈이라든가 수은이라든가......." “어, 어째서 그런 흉측한 짓을!" “그거야 밉살스러운 죄수를 괴롭혀서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죠." “헤에. 그거 잔인하네요. 그런데 키스 경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감 옥에 갇힌 적이라도 있어요?” “설마요. 그냥 생활상식입니다아.” 그런 게 상식일 리가 없잖아! “아니 그런데 잠깐! 그런 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거죠.” “그거야........ 미온 경이라면 왠지 언젠가는 감옥에 갇히게 될 것 같 은 기분이 들어서요.” 그럴 리가 있겠냐! “닥쳐!” “아아아! 자상하게 조언을 해주는 상관을 때리다니! 당신, 정말 못됐군요!” 키스가 머리를 부여잡고 울상이 된 얼굴로 흘겨봤지만 난 분노의 철권을 부르르 떨며 외칠 뿐이었다. “못된 건 댁이야! 범죄자나 배우는 그런 어둠의 지혜를 부하한테 가르쳐 주지 말라고! 게다가 내가 감옥 같은데 갈 턱이 있겠냐!" 그런데 키스가 옳았다. 그 ‘상식’을 듣고 몇 달이 지난 뒤에 난 이렇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뭐 엄밀히 말하자면 감옥이 아닌 폭력조직 의 지하실이지만.) 만약 키스가 아니었으면 난 지금 쯤 뒤틀리는 배를 부여잡고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겠지. 나는 치를 떨며 발끝에 치이는 물 컵들을 걷어찼다. 이제 는 허기지다는 느낌조차 안 든다. 자그마치 3일간을 습기만으로 버틴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가 무슨 이끼냐고! 그때 끼이익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 둠에 적응한 내 눈이 세어 들어오는 밝은 빛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다. 세 명 쯤 되려나. 그리고 그들이 내 앞에 섰다. 난 괜한 자존심이 생겨 계속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엔디미온 경” 그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카, 카론 경?”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했지만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검은 제복과 주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싸늘한 눈매는 분명히 카론 경이었 다. 난 너무 반가워서 눈이 부셔 찡그린 표정인데도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얼음 기사 카론 경은 성격대로 그 흔하디흔한 ‘다친 곳은 없나.’ 라는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단지 옆의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풀어줘라.” “하지만 아직 블리히 단장님의 허가가........” “같은 기사를 체포하는 일은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수치다. 어서 풀어줘.” “예, 옛!” 냉엄한 카론 경의 명령 한마디에 그들은 잽싸게 날 묶은 사슬을 풀었다. 몸이 굳어 움직이기가 힘들었던 나는 욱신거리는 고통에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카론 경을 올려다보았다. “카론 경. 절 구하러 와주신 건가요.” “......” 카론은 대답대신 속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닦아라. 그리고 왕실로 돌아가.” 아아. 이니셜을 수놓은 손수건이라니,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으시군요...... 라는 건 둘째 치고 왜 카론 경마저 왕실로 돌아가라고 하는 겁니까! “루치아노 놈들에게 뇌물을 받은 블리히 경이 지금 멋대로 줄리앙 님을 죄인으로 몰고 있어요. 제가 줄리앙 님을 돕게 해 주세요!” 내 간절한 부탁에도 카론 경은 얼음 같은 벽안 그대로 날 바라보며 차갑 게 입을 열었다. “엔디미온 경. 수사는 경의 영역이 아니다.” “하, 하지만!” “시류회와 내통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 어서 왕실로 귀환해. 이건 명령 이다.” 그리고 카론 경은 곧바로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항상 똑같이 냉 기서린 모습이긴 하지만 지금은 뭔가 내게 숨기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어 째서 모두 다 날 왕실로 돌려보내려고 하는 걸까. “냉큼 일어나! 역까지 감시하겠다.” 두 명의 기사가 내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키자 뒤틀린 몸이 비명을 질렀다. 4권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II 12. 날 끌고 역 앞에 도착한 헬스트 나이츠들이 말했다. “카론 경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내주는 거다. 당장 왕실로 돌아가라. 알겠 나!” “.......예” 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내 여행가방을 거칠게 내던진 뒤에 협박조로 외치는 것이었다. “정말 구제불능인 놈이야. 만약 안 돌아가고 또 나서면 그때는 정말 그 냥 두지 않겠다! 스왈로우 나이츠는 접대비나 벌면 되는 거야. 수사는 우 리 같은 진짜 왕실 기사들이 한다는 걸 똑바로 알아둬!” “.......예” 3일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던 난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가방을 들 었고 그들의 비웃음을 등 뒤로 들으며 역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수도 아 스말 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난 서글픈 표정으로 하얀 증기를 뿜는 열차를 바라보다가 벽 쪽으로 걸어 갔다. 그리고는 역 밖을 향해 힘차게 가방을 집어 던졌다. “내가 돌아갈 리가 없잖아. 난 이미 범죄자라고. 우후후후.” 내 가련한 연기에 속아 넘어간 헬스트 나이츠 놈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난 벽으로 뛰어 올라 가뿐하게 뛰어 넘었다. 그러나 “우아악!” 주물주가 날 놀려먹고 싶어 작정을 했는지 어쨌는지 하필 내가 뛰어 넘은 벽 너머에는 날 연행했던 예의 기사 두 명이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중 한 명은 내가 집어던진 여행가방을 직격으로 맞고 쓰러진 뒤에 곧 이어 뛰어 내린 내 몸에 깔려 게거품을 문 채 실신한 상태였고 다른 한 명 은 담배를 문 채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하하 ...망했네.’ 담배를 문 기사는 날벼락을 맞고 쓰러져 있는 동료와 그런 그를 깔아뭉갠 채 주저앉아 있는 내 황망한 표정을 번갈아가며 본 뒤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너, 너 이 자식, 우릴 속인 거냐!” “저어. 그러니까 일단 고정하시고........” “이 망할 놈! 죽여 버리겠어!” 순간 그가 뽑은 검이 내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차압! 그리고 괴이한 박수소리와 함께 기도하듯 모은 내 두 손이 내리찍는 칼날 을 간발의 차이로 붙잡았다.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이런 기술을!” “수, 숨을 깊게 들이쉬시고 이성을 좀 챙기세요. 이 칼 좀 치우라니까요!” “웃기지 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테다!” “같은 기사를 죽이는 법이 어딨어요!” “같은 기사라고? 날 모욕하다니! 계집애 같은 놈이!” 순간 내 인내심이 툭 끊어져 버렸다. “지금 모욕하고 있는 건 네 놈이야!” 순간 검에 실린 그의 힘을 한쪽으로 흘린 나는 휘청거리는 그에게 뛰어 올랐다. 빠아아악! 불꽃 튀는 소리와 함께 내 반듯한 이마와 그의 얼굴이 격돌했고 붕 떠오 르는 그의 거구가 곧바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난 큰 대자로 쓰러진 그에게 소리쳤다. “그만 좀 하라고 말했잖아! 안 그래도 배고파 죽겠구만!” 그런데 이렇게 시시한 실력을 가진 놈들이 이 나라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 다니, 무척이나 기분 우울해 지는군. 난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투덜거리다가 뭔가 지나치게 고요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뿔싸’ 지나가던 행인들이 모조리 숨을 죽인 채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이 보기에는 필살의 박치기로 깡패를 제압한 긴 머리 총각....... 정도겠지. 난 혼절한 기사들을 구석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며 난감한 미소로 말했다. “아,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하던 일들 하세요. 아하하하.” 기사들을 뒷골목에 쌓아 놓은 나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그들의 바지를 벗겨 숨겨 놓았다. 이렇게 하면 정신이 들어도 한동안 블리 히에게 고자질하러 갈 수 없겠지. 그 잘난 명예에 투철한 양반들이니까! 증거인멸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예의 충돌 덕에 열려버린 가방이 눈에 들 어왔다. “아아. 귀찮아 죽겠어, 정말.” 민망하게스리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셔츠와 잠옷과 책들과 화장품 따 위를 주섬주섬 줍던 나는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가련하게 울리자 헤유,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일단 밥 먹고 갈게요. 줄리앙 님.” 13. 예상대로 시류회 사무실은 엉망진창이었다. 사무실을 지키던 ‘직원’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고 어수선하다고 할까, 험악하다고 할까, 아무튼 전혀 긍정적이지 못한 기운들이 사무실에 가득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사 흘 만에 시류회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내가 돌아온 것을 본 줄리앙 님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 났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다. “미온! 무사했구나!” “헤헤.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줄리앙 님으로부터 들은 ‘블리히의 횡포’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있지도 않은 죄목을 만들어 부하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강탈해 갔으며 줄 리앙 님 소유의 상점들 역시 루치아노에게 소유권을 넘기도록 강요했다. 이쯤되면 진짜 악질 범죄자는 바로 블리히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리라. 사실 줄리앙 님은 자신이 총수가 된 이후 단 한 건의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다고 한다. 단지 자신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무참한 과거 때문에 그녀 역 시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때 하이달 씨가 방에 들어와서는 말했다. 그는 날 보고도 전혀 반가운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 차갑게 줄리앙 님에게 걸어가서는 말했다. “줄리앙 님. 지금 블리히로부터 출두 공문이 왔습니다.” 난 표정이 굳어졌다. 그 난잡하기 그지없는 블리히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본부로 혼자 오라고 합니다. 가시겠습니까?” 가면 안돼! 절대로 가면 안 된다고! 루치아노 패거리들이 득실거리는 그 곳에 혼자 가는 건 자살행위란 말입니다! 그러나 줄리앙 님은 코트를 집어 들며 말했다. “마차를 준비해 줘.” “가지 말아요!” 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소리치자 줄리앙 님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미온 군도 왕실 기사라면 알 거야. 수사관의 소환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왕명 불복 죄를 받아 군대가 들이닥치게 돼. 시 류회 사람들이 모조리 극형을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까 책 임지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해.” “어째서 아주 잘못도 없는 줄리앙 님이 다 책임져야 하는 거예요!”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내가 그 사람의 딸이니까.” 줄리앙 님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 때문에 그녀는 한번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장난감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도 범죄자의 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던 그녀가 조금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온. 내가 너에게 준 금괴 상자 속에 무슨 편지를 넣었는지 말해줄게.” “지,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한.......” “위고르 공에게 보낸 밀서야. 시류회를 해산시키고 재산을 왕실에 헌납 하는 조건으로 아버지의 죄를 사해 달라는 거래지.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하이달도 시류회 사람들도 시류회라는 아버지의 망령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그것에 널 이용해서 미안해.” “.......!” 베르스 왕국에서 대죄(大罪)는 연좌제로 다스린다. 즉 부모의 잘못도 자 식에게 이어오는 것이다. 즉 줄리앙 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이었다. 그녀는 작은 몸을 떨며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었다. “신물이 나. 벗어나고 싶다고. 그래서 위고르 공과 몰래 거래했던 거야. 그 분은 기밀을 유지할 수 있다면 도와주겠다고 말했고 이제 그 편지만 보 내면 거래는 끝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루치아노 놈들이 그 거래를 알고 방해하기 시작했어.” 루치아노 패거리들은 날 납치할 때부터 내가 줄리앙 님의 밀서를 배달하 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철저한 기밀을 유지하는 이 거래가 어디서부 터 누수 되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기밀이 깨져버리고 블리히까지 와서 설치게 된 이상 위고 르 공과의 거래도 끝난 것이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인 내가 이제와 행복하게 살겠다는 결심 자체가 무리였지.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그게 당연한 이치니까 억울한 것은 없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어요! 줄리앙 님이 죄 지은 것은 없 잖아요!” “범죄자의 딸로 태어난 것, 그게 내 죄목이야.” 그녀는 하이달 씨를 흘낏 보고 너무도 서글픈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하이달. 지금까지 고마웠어. 너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는 것 같아.” 하이달 씨는 말이 없었고 그녀는 홀로 떠났다. 그런 그녀를 뒤쫓아 가려 는 내 어깨를 잡은 자는 바로 하이달 씨였다. “이거 놔요! 왜 말리는 거예요!” 그러나 하이달은 무표정한 눈매로 날 바라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블리히에게 가면 죽을 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아마 죽을 겁니다.”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는 하이달을 보며 난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 다. 그의 팔을 걷어낸 내가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하이달 씨, 당신은 뭘 숨기고 있는 거죠.” “모든 일은 이제 곧 끝납니다.” “왕실 인장이 박혀 있는 그 총은 대체 뭐였죠. 당신은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예요!” 하이달은 충직한 경호원이다, 라는 선입관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예의 그 권총을 꺼내며 말했다. “깡패에겐 과분한 무기죠? 이것을 보고도 줄리앙 님에게 말하지 않을 줄 은 몰랐습니다. 당신의 의리에 감탄했어요.” 그다지 조롱도 그렇다고 감탄도 아닌 그의 무감정한 목소리 이면에서는 뭔가 뒤틀린 복수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이달은 그 총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에 싸늘한 눈초리로 그 반짝거리 는 금속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루치아노 패거리들에게 금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밀서의 존재를 알린 것은 바로 접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시류회는 구원받아서는 안 되니까요.” 난 소름이 끼쳤다. 날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참아 왔던 복수심이 맺혀 있었다. “내 가문을 몰락시킨 시류회를 파멸시키기 위해 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심복 노릇도 할 수 있고 줄리앙 님을 사랑하는 애인 역할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증오하는 줄리앙 님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어요! 이제는 복수할 대상도 없잖아요!” “복수라는 것은 그렇게 이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줄리앙 님은 그런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목숨을 걸고 혼자 간 거 예요! 창피하지도 않나요. 이런 짓까지 해서 당신의 케케묵은 복수를 완성 시키고 싶은 거예요? 줄리앙 님이 죽고 시류회가 파멸된다고 몰락한 당신 의 가문이 보상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엔디미온 님.” 하이달은 내 앞으로 다가오며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래 복수라는 것에는 의리도 염치도 수치심도 없는 겁니다.” 난 순간 불이 올라 그의 얼굴을 때렸다. 파악! 소리가 나고 그의 입가에 피가 고였지만 그는 피하지도 않은 채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약한 주먹이로군요. 지금까지 이런 주먹으로 매번 목숨을 걸었던 건가요.” “내가 당신의 복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당신도 내 마음을 이해 못해! 카론 경을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어! 당신은 정말 최악의 범죄자야.” 그리고 나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 가는 겁니까.”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거죠. 줄리앙 님을 구하러 갑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쏘아붙인 내가 문을 열 때 그가 외쳤다. “이 권총을 누가 줬는지 알려 드리지요! 바로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카론 샤펜투스입니다.”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잘못 들은 건가? 아니 잘못 들었길 바란다. “......거짓말” “사실입니다. 이건 왕실의 소탕 작전입니다. 블리히도 처음부터 범죄조 직 소탕을 목적으로 여기 온 겁니다. 루치아노 패거리들을 이용해서 시류 회를 말살 시킨 뒤에 곧 루치아노 놈들도 소탕할 겁니다. 그리고 난 복수 를 위해서 헬스트 나이츠와 거래한 것입니다.” “거짓말 하지 마!” “의리를 지키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이런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럼 줄리앙 님은 뭐란 말인가. 아무런 잘못도 없 는데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말살의 대상의 되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악 의(惡意)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도 조금도 누굴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혼자 책임지겠다며 떠났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잔인한 마왕의 딸로 태어난 것뿐이리라. 그것 하나만으로도 구원받을 기회는 없는 것일까. “엔디미온 님. 잘 아시겠죠? 당신이 지금 줄리앙 님에게 가면 그건 왕실 의 수사를 망치는 행동입니다.” “좀 망치면 어때.” 난 그렇게 내뱉으며 문을 열었다. 그때 찰칵 소리가 들렸다. 내게 총을 겨눈 하이달이 말했다. “카론 경이 말하더군요. 당신은 고집불통이라서 필요하면 다리를 쏴서라 도 막으라고. 그 문 밖으로 나가면 쏘겠습니다.” “그럼 쏘시든지. 난 갈 테니까.” 난 문 밖으로 몸을 옮겼고 총성이 올렸다. ************************************************************** [겨울성의 열쇠] 제235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6 *************************************************************** 4권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II 타앙!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그 순간 문 밖에서부터 검은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것이 어찌나 빨랐나 하면 내가 고개를 돌리려는 그 짧은 찰나에 이미 내 옆을 지나쳐 갔던 것이다. ‘뭐, 뭐지?’ 그리고 금속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내 등 뒤에서 시퍼런 불 꽃이 터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내 눈이 포착한 것은 푸른 잔광의 검을 뽑 은 채 몸을 숙인 카론 경과 소리 없이 흩날리는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칼이 었다. “카론... 경?” 난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질량이 없는 바람처럼 움직인 카론 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와봤다니... 자넨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군.” “서, 설마 지금 칼로 총알을 두 조각 낸 건가요?” 농담이 아니라 그런 검술은 알테어 님에게 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있나. 단지 총탄을 쳐 냈을 뿐이야.” 카론 경은 검을 집어넣으며 무감정하게 말했다. “그, 그것도 만만찮게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난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날 쏴버렸던 하이달은 들고 있던 총을 내려놓으며 못지않게 무감정한 어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엔디미온 님은 당신이 아끼는 부하인가 보군요. 이렇게 직접 행차할 줄 은 몰랐습니다.” “부하도 뭣도 아니다. 내가 온 것은 왕실 기사가 총격 당하면 일이 복 잡해지기 때문이야.” “쏴도 좋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던가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쏘라고 명령한 사람이나 쏘란다고 쏘는 사람이나! 당하는 건 이쪽이라고! 막상막하로 영하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둘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잘도 뻔뻔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어쨌든 왜 카론 경이 총기 소지 권한이 있는데도 지금까지 칼 한 자루만 들고 다니는지 알 것 같군. 닮은 꼴 형제 같은 둘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카론 경도 이 소탕 작전을 알고 있었나요. 하이달 씨에게 총을 준 사람 이 정말 카론 경인가요.” “그렇다.” 순간 내 표정이 굳어왔다. 왜 이런 더러운 짓을 하냐고 소리쳐 묻고 싶은 심정이다. 카론은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 너머, 차가운 수정 같은 눈매로 날 바라보 며 말했다. “블리히 경이 계획한 작전이다. 명령에 좋고 싫은 건 없다. 또한 자네와 내가 관여할 권한도 없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조직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옳지 않은 명령을 따르게 되면 신념이 무너지는 겁니다. 카론 경이 배운 기사도에 그런 가르침이 있던가요? 권력자의 명령은 그게 어떤 것이라도 따라야 한다고? 제가 알기로 그런 논리는 기사가 아닌 노예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기사는 노예인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줄리앙 님을 돕고 싶어요.” “범죄자를 옹호하겠는 건가.” “감싸고돌겠다는 게 아니에요! 최소한 공정한 수사를 받도록 해야 하잖 아요. 이래서야 우리가 범죄자라고요!” “이미 늦었어.” “난 포기하지 않아요!” 카론 경은 반쯤은 나를 설득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실을 직시해라. 지금 자네 혼자 블리히 경에게 가도 사태는 바뀌지 않아. 오히려 자네마저 위험해 지게 된다. 블리히 경은 마음만 먹으면 자 네에게 어떤 죄목이라도 붙일 수 있다. 경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의지와 용기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카론 경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하긴 누가 절벽으로 뛰어내리려는 짓을 보고 박수쳐 주겠는가. 하지만 나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요. 내가 무 슨 불나방도 아니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블리히 놈들에게 뛰어들 정도로 무모할 줄 알았다면 정말 섭섭하다고요. “블리히 경이 반칙을 저질렀다면... 좋아요. 나도 반칙을 쓰겠어요.” “무슨 말인가.” “이 도시에도 텔레마코스 센터가 있겠죠?” 나는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라고 외치는 카론 경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뛰어 나갔다. 14. 30여분 후, 텔레마코스 센터를 들린 나는 줄리앙 님이 잡혀 있는 루치아 노 패거리들의 지하실로 갔다. ‘.......또 여기야.’ 난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이 끝나면 벽에 기념으로 글씨라도 새겨 놔야겠군. ‘여기는 추워요.’라고. 아니나 다를까 줄리앙 님을 취조하던 블리히의 환영 인사는 황송스럴 지 경이었다. “아니! 네 놈이 어째서 아직까지 이 도시에 있는 거야! 왕실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나!” “열차를 놓쳤습니다아.” 난 딴청을 피우며 줄리앙 님에게 걸어갔다. 물론 당장에 헬스트 나이츠들 이 날 막아섰다. 블리히가 날 두들겨 팰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계속 범죄자를 도울 생각이라면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어!” “아?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무 짓도 안할 건데요?” 난 방긋 웃으며 말했다. “뭐? 무슨 소리야!”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감히 권력의 정점에 달하신 블리히 단장님을 훼 방 놓겠사옵니까. 지금까지 공정하고도 정의로운 블리히 님을 방해한 것을 맹렬히 후회하고 있습니다. 아아, 정말 제 생각이 짧았어요. 정말이라니까 요?” “이 놈. 또 무슨 꿍꿍이를........” “아니에요. 정말 저 가만히 있을 거랍니다아.” 내 태연한 너스레에 블리히는 의심스러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 했다. “흐음. 뭐 좋아. 기사도의 덕목에는 너그러움도 있는 거니까. 줄리앙이 잡혀가는 것을 보는 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저기 가만히 서 있어! 대신 허튼 짓 하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저기 가서 잠자코 구경하고 있을게요.” 난 휘파람을 불며 벽 쪽에 가서 기대어 섰다. 의자에 묶여 있는 줄리앙 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난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다시 취조를 진행하겠다.” 블리히는 테이블 너머의 줄리앙 님을 향해 거칠게 외쳤다. “줄리앙 그라스파로사! 범죄집단 시류회의 우두머리로써 지금까지 23회 의 살인 교사와 74회의 금품 갈취, 153회의 폭력행사 행위를 지시한 것을 시인하나!” 억지로 의자에 묶여 있는 줄리앙 님은 블리히를 똑바로 보며 당당한 목소 리로 말했다. “시류회가 범죄로 얼룩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버 지가 범죄자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난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고 묵인한 적도 없습니다.” “거짓말! 난 지금 너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이미 이 서류 에 그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미 너의 혐의는 입증되었어!” 블리히는 테이블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탕탕 내려치며 외쳤다. 물론 그것 들은 모조리 날조된 것이다.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들을 뒤집어씌우는 것만 으로는 부족했던 블리히는 있지도 않는 범죄들을 멋대로 만들어 줄리앙을 ‘협박’하고 있었다. 공정함 따위는 아예 땅 속에 묻어버린 이 수사에서 블리히가 사실이라고 말하면 그건 사실이 되는 것이었다. 실제 블리히 옆 에 앉아 줄리앙 님을 비웃고 있는 놈이 바로 루치아노 패거리들의 두목인 빈센조이지 않은가! ‘조금만 참으세요. 줄리앙 님.’ 난 문을 흘낏 보며 중얼거렸다. 3시간여 후. 카론 경이 돌아온 이후에도 취조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완 강한 줄리앙 님의 태도에 슬슬 지쳐가고 있던 블리히는 이제는 아예 본격 적인 협잡질을 벌이기 시작했다. “네 년이 죄를 시인하지 않겠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시류회 놈들을 모 조리 불러 족치면 답이 나오겠지!” 순간 줄리앙 님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부하들은 건들지 마! 그렇게 약속했잖아!” “흥! 왜 내가 범죄자와의 약속 따윌 지켜야 하지?” “쓰레기 같은 놈! 그리고도 기사냐!” 그녀는 살기어린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그것이 얼마나 위압적이었는지 블 리히마저도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설 정도였던 것이다. 솔직히 나도 흠 칫 놀랐다. 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무서울 만큼 강렬했다. 그녀에게 밀린 블리히는 창피한지 빠른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었다. “에이이! 그렇게 아끼는 부하들이 줄초상 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당장 범행 일체를 시인해! 선택권 같은 건 없다!” 이건 진짜 저질 협박이지 않은가.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마저 블리히의 이 런 짓이 민망한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못본 채 할 정도였다. 줄리앙 님은 입술을 깨물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래. 시인해 주마. 어차피 여기 올 때부터 공정한 대우를 받으리라고 는 기대도 안 했으니까. 나 혼자 책임지고 끝낼 수 있다면 뭐든 해주지.” 아아아! 시인하면 안돼요!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 주시라고요! 그러자 계속 썩어빠진 조소를 보이던 루치아노 빈센조가 줄리앙 님을 향 해 이죽거리는 것이었다. “뭐든 하겠다고? 그거 정말 마음에 드는 소리인데? 블리히 님. 저 년, 뭐라도 하겠다는데요? 히히히.” 호가호위(狐假虎威)에도 염치가 있지! 원님 덕에 나발 부는 저딴 녀석은 그 나발을 빼앗아서 머리를 마구 때려주고 싶다. 그때 문이 열리며 기사 한명이 황급히 블리히에게 뛰어오는 것이었다. “블리히 경. 지금 밖에 오신 분들께서 줄리앙 그라스파로사를 만나고 싶 어 하십니다.” “무슨 헛소리야! 누가 감히 취조 중인 사람을 멋대로 만나겠다는 거야! 당장 꺼지라고 해!” “그, 그게 돌려보낼 수가 없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그와 함께 문 안으로 회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검은 가방을 든 사 내 둘이 빠른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블리히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희들은 누구야.” 그러나 그들은 블리히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대신 가방에서 서류 더미를 떠내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블리히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건. 이 따위 서류 조각 따위로 뭘 어쩌겠다는........ 아, 아니!” 블리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서류와 그 사내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 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었다. “설마, 네 녀석이 이 자들을 부른 거냐. 하지만 어떻게 너 같은 놈이........” “현명한 판단, 기대하겠습니다. 블리히 경.” 난 태연작약하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역시 서류를 훑어본 카론 역시 머리가 다 아프다는 듯 양미간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말한 반칙이... 이거였나." 말했잖아요.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View Articles Name 아울 Homepage http://owlland.com Subject 제50장 눈보라 속의 탐색자 #6 ************************************************************** [겨울성의 열쇠] 제235편 눈보라 속의 탐색자#6 *************************************************************** 4권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II 세련된 회색 슈트의 사내들은 카론 경은커녕 블리히나 다른 기사들과 비 교해도 전혀 검술에 재능이 있어 사람들은 아니었다. 도리어 철저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상급 공무원 같다고나 할까. 일단 나처럼 칼 한 자루조차 안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구의 블리히는 그런 평생 펜대만 굴렸을 것 같은 그들을 당장 내쫓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렴, 내쫓으면 아주 곤란하겠 지. 그 사내들이 줄리앙 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줄리앙 그라스파로사 본인이시죠?” “그, 그런데요?” 줄리앙 님조차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이오타로 망명시키기 위해 위해 왔습니다.” “뭐라고요? 당신들은 누구죠?” “인트라 무로스입니다.” 순간 줄리앙 님이 멍한 표정으로 그들과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이것은 망명 허가서입니다. 서명하시죠. 다른 모든 교섭 절차는 저희가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 허가서에 서명하시는 순간 이오타와 베르스 간의 외교 원칙에 따라 국왕 특명에 의거, 망명 절차가 완료됩니다.” 그들은 줄리앙 님 앞에 우아한 필체로 쓰인 서류 한 장과 고급스러운 은 촉 만년필 한 자루를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 서류의 말미에는 이오타 왕실 인장과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이자벨 크리스탄센 방첩국장의 서명이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 블리히가 이럴 수는 없다며 소리쳤다. “자, 잠깐! 이 여자는 이 나라의 죄인이야! 갑자기 망명이라니! 허락할 수 없다고!” 그러자 인트라 무로스의 요원들은 곧바로 고압적인 어투로 대응했다. “당신의 허락 따윈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합법적 외교 절차에 의해 처 리되는 국가간의 외교 사항이며 이 망명에 당신이 끼어들 권한은 없습니다.” “뭐, 뭐라고?” 아아 역시 어느 나라나 권력자들은 오만하다니까. “이 시간 이후 줄리앙 그라스파로사 님의 신병(身病)은 이오타 왕실 직 속 인트라 무로스 관할로 인도되며 보안 경호 역시 우리가 담당합니다. 앞 으로 줄리앙 그라스파로사 님과 관련된 모든 사항은 우리를 통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후 조금이라도 이 분께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할 경우 인트라 무로스 측에서는 실력행사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지 해 주시고 현명히 처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는 없어! 이딴 비열한 방법으로 죄인을 빼돌릴 생각이냐!” 블리히의 입에서 ‘비열한’ 이라는 수식어가 나온 것을 보니까 상황도 갈 때까지 갔구먼. 하지만 요원들은 역시 인트라 무로스 답게 철저하게도 준비 해 온 것이었다. “죄인이라는 말이 무척 거슬리는군요. 이것은 줄리앙 그라스파로스 님의 결백을 증명하는 자료들입니다. 확인해 보시길.” 그들은 블리히가 가짜로 만든 수사자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상세한 서류 를 잔뜩 테이블에 늘어 놓았다. 그리고 또 그들이 꺼낸 것이 있다. “또한 이것은 우리 인트라 무로스가 독자적으로 수집한 당신에 대한 기 록입니다. 이 기록이 당신의 국왕에게 들어가는 것은 원치 않으시겠지요?” 블리히는 그들이 꺼낸 서류 뭉치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연한 말 이지만 자기도 잊어버린 창피한 기록들까지 모조리 적혀 있을 것이다. 블리 히는 그 문서를 황급히 품속에 집어넣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아아, 같은 나 라 사람으로 정말 창피하다고! “어, 어떻게 이런 것을 알았... 아니 그보다 감히 이런 걸로 날 협박하 려고 하다니!” 협박은 네 놈이 줄리앙 님에게 했잖아! 협박당하는 입장에 서보니까 기분 이 어떠냐! 그때 카론 경이 나직하게 말했다. “블리히 경. 이것이 외교 분쟁으로 확대되면 되면 국왕 전하께서 진노하 시게 됩니다. 이쯤에서 물러나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블리히는 고개를 꺾으며 중얼거렸다. “고작 여자 한 명 구하려고 인트라 무로스를 끌어들이다니....... 미친 거 아니냐.” 무고한 여자 한 명 집어넣어 ‘껀수’ 올리려고 이 난리를 피운 당신보단 덜 미쳤어! 그때 그 특유의 비상한 머리로 상황을 파악한 줄리앙 님이 쓴웃음을 지으 며 말했다. “미온. 이자벨과 거래한 거냐?” “죄송해요. 줄리앙 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는 없었어요.” “거래 조건은?” “줄리앙 님이 말씀하신 그 완구 회사, 그 회사의 지분 45%를 이자벨 님 이 가져가게 됩니다.” “역시 그랬구나. 이자벨이라면 거절하지 않았을 거야. 머리 좋은 여자니까.” 사실 이자벨 님이 상냥하다고는 해도 아무 이득도 없이 인트라 무로스를 움직일 분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내건 조건은 이것이었다. 완구 회사의 경영권 일부를 넘기는 대신 하루 안에 줄리앙 님을 이오타로 망명시킨다. 비록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회사지만 직감적으로 가능성을 파악한 이자 벨 님은 곧바로 내 조건을 수락했고 3시간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국 왕의 허가를 받아 망명 신청을 완료했던 것이다. 실로 무서운 추진력이지 않은가. 덕분에 줄리앙 님의 지분 절반이 날아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 보다는........ “고마워, 미온. 하지만 사양하겠어.” “예?” 난 눈을 크게 떴다. 기껏 다 준비해 왔는데, 망명을 거부하면 어쩌자는 겁 니까!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울상이 된 얼굴로 줄리앙 님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망명한다면 적어도 나는 이 놈들에게 당하지 않겠지. 하지 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거야. 내가 도망치면 내 책임은 모두 시류회 사람 들에게 돌아가게 되겠지. 하이달도 그럴 테고. 난 그들을 지키기로 약속했 으니까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난 가슴이 아파왔다. 의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기 힘들지만, 적 어도 그녀는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려하고 있었다. 자신을 배신하고 복수하려는 하이달마저도 그녀는 지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 그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외치자 난 깜짝 놀랐다. “이자벨, 그 얄미운 계집애와 손잡는 건 자존심 상한다고! 그 여자의 도 움을 받는 모욕 따위는 내 쪽에서 사양이야! 그딴 와인 중독자! 활자 중독 자! 노처녀 정보광에게는 절대 고개 못 숙여!’ “모...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예전부터 줄리앙 님과 이자벨 님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있는 것은 사실이 었다. 둘은 서로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단체에서 똑같은 직위에서 오른 분 들이니까. 서로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도 할 것이다. 예전 업소에서 도 알테어 님과 키르케 님 다음으로 서로 부딪치게 해서는 안 되는 분들이 었다. ‘어쩐지 이자벨 님이 무지하게 즐거워하시는 것 같더라니.’ 하지만 이자벨 님은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아마 줄리앙은 내 제안을 받지 않을 거야.’라고. 이자벨 님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줄리앙 님은 절대 시류회를 버리고 혼자 도망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당신의 말은 망명을 거부하겠다는 건가요?” 인트라 무로스 측에서 묵직한 목소리로 되묻자 줄리앙 님은 곧바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자벨에게 가서 전해요.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그리고 내가 못한다면 이자벨이 완구 회사를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느긋했다.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거부해 놓고 저렇게 차분할 수가 있다니. 이거 괜히 부끄러워지는군.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책임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 꼭 도와주는 길은 아니니까. 블리히 역시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줄리앙 님이 망명을 해버렸다면 욕을 하고 화를 내면서 그녀의 부하들을 모조리 잡아 처넣었겠지만 - 이래서야 화를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줄리앙 님은 블리히 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는 성격패턴일 것이다. 블리히는 ‘너 왜 그랬니?’라는 얼굴로 줄리앙 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 다. 도리어 입을 연 쪽은 그녀였다. “계속 취조하시죠. 아버지의 죄를 갚는 것이든,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 어쓰는 것이든, 나 혼자서 책임지는 것이라면 뭐든 받아줄 테니까.” 그것은 고요한 기백이었다. 블리히에게 ‘숭고함’이라는 것은 기억도 나 지 않는 유년기의 추억 같은 것이겠지만 - 어쩌면 잊고 있던 그 ‘추억’이 지금 떠오른 것일까. 당장 그녀를 윽박지를 것 같던 그가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굳은 표정으로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취조를... 중단한다.” “갑자기 무슨!” 나를 비롯해 기사들마저 놀란 표정으로 블리히를 바라보았다. 그가 일부 러 커다랗게 외쳤다. “에이이! 누가 이 여자를 풀어주겠다고 말했나! 그래, 재수사다! 처음부 터 다시 조사해주마! 아주 공정하게 말이지! 이제 불만 없지!” “후후. 당신도 조금은 기사인 것 같군요.” “흥! 범죄자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다!” 줄리앙 님의 쓴웃음에 블리히가 헛기침을 하며 외쳤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나니까 가장 ‘피해’를 입는 자는 바로 루치아 노 빈센조였다. 블리히가 수사 전면 백지화를 말하자마자 방금 전까지 천 국에서 뛰노는 것 같던 루치아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 잠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재수사라니!” 그는 거의 광분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공정하게’ 재수사를 하 게 되면 루치아노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뭐 악당의 말로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말이다. “블리히 경! 약속과 다르잖아! 시류회를 작살내는 대신 난 건들지 않기 로 했잖아!” “몰라. 생전 처음 듣는 소리로군.” 블리히는 매몰차게 고개를 획 돌린 채 거의 애원하는 루치아노를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 버림받은 루치아노가 택한 길은 실로 예상 밖이었다. “다들 꼼짝 마!” 루치아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왕실 인장이 박혀 있는 총이었다. 거친 고함을 내지르는 그는 사람들을 위협하며 문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 기사들 역시 사색이 되어 외쳤다. “어, 어떻게 저 놈이 총을!” 그때 누구보다 빨리 바닥에 엎드린 블리히가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차....... 아직 저 놈이 가지고 있었지.” 이번에도 블리히 이 양반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애당초 그런 위험한 물건을 준 것 자체가 이상한 거라고! “움직이면 쏘겠어! 다들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서 있어!” 난 흘낏 카론 경을 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조금씩 칼집으로 손을 옮기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카론 경이라면 저 놈을 깔끔하게 제압하고도 남을 것 이다. 그런데 상황이라는 것이 항상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루치아노 가 문 앞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투덜거리는 사람이 들어왔다. “자네들, 왜 이런 음침한 곳에 모여 있는 건가. 이 몸이 직접 전하의 어 명을 전하러 왔는데도 아무도 날 맞이하지 않는....... 잉?” “위, 위고르 공?” 나이스 타이밍, 이라고 외쳐주고 싶은 심정이로군! 문을 열고 나타난 자 는 바로 두터운 목도리를 두른 법무대신 위고르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황 파악이 안 되서 두 눈을 깜빡거리며 서 있는 그와 총을 들고 있는 루치아 노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위고르가 바로 앞에 서 있는 루치아노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얼레? 자네는 누군가?” “이런! 썅! 그러는 넌 또 뭐야! 이리 와!" “우아악! 사람 살려!” 위고르를 잡아 챈 루치아노가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상황은 인질극으 로 악화되기 버렸다. 뒤늦게 들어온 위고르의 경호원들 역시 갑작스런 사 태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위고르가 왔다는 것을 안 블리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위, 위고르 공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오셨나이까?” “누추하고 자시고 이 놈은 뭐야! 왜 나한테 총을 겨누는 거야!” 위고르는 죽어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위고르 공은 지금 인질이 되신 거랍니다. 본의 아니게 이 나라의 법무대신을 인질로 잡아버린 루치아노는 비열한 미소를 드러내며 우리들을 위협했다. “흥! 이 허여멀건 자식이 네 놈들의 상관이냐? 아무튼 좋아! 이 놈 머리 통에 바람구멍 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무기를 바닥에 버려! 그리 고 마차와 금궤 상자를 준비해!” 가슴을 쫙 편 블리히는 곧바로 호통을 쳤다. “웃기지 마라! 이 기사단장 블리히 님이 범죄자의 협박 따위에 꿈쩍이라 도 할 줄 아나!” 그러자 위고르가 숨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치고 무기 버려! 나 죽으면 네 놈도 모가지야!” 블리히의 대응은 빨랐다. “당장 무기 안 버리고 뭣들 하나! 위고르 공이 위험하시잖아!” 그리고는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해서 검을 바닥에 버리는 것이었다. 저렇 게 협박에 약한 사람도 드문데 말이지. 다른 기사들 역시 분한 표정으로 검을 버렸지만 카론 경만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루치아노가 짐승처럼 외쳤다. “네 놈은 왜 안 버리는 거야!” “잘 들어라, 범죄자. 그 총을 버리지 않으면 넌 죽는다.” 카론 경의 싸늘한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루치아노를 노려보는 카론 은 그에게 걸어가며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놀란 쪽은 위고르였다. “뭐, 뭐하는 건가! 카론 군!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카론 경은 마치 맹금처럼 오직 루치아노 만을 노리고 있었다. “마지막 경고다. 총을 버려라.” “버, 버리면 날 살려줄 거냐?” 카론 경의 위압감에 기가 죽은 루치아노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카론 경은 즉시 대답했다. “아니. 넌 어차피 사형이다.” 카론 겨어어어어엉!!! 그때 블리히가 카론 경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위고르 공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어! 당장 무기를 버려! 명령이야!”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카론은 입술을 꽉 깨물며 검을 내 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블리히, 이 인간아! 자기 부하의 실력 정도는 믿으 라고! 그때 인트라 무로스의 정예 요원들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어쩌면 저들이 야 말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프로페셔널....... “으음. 그럼 망명은 없었던 일로 알고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뭐? “그럼 건강하시길.” 그리고 그들은 프로답게 잽싸게 서류를 가방에 넣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문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뭐가 건강하시길, 이냐! 피도 눈물도 없 는 공무원들 같으니! 울상이 된 위고르가 그들이 나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놈들은 또 뭐야.” 한동안 그들이 떠난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리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당장 마차와 금궤를 준비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10분 내에 준비하지 못하면 이 놈의 대가리에 총알을 심어 주겠다!” “뭐하고 있어! 빨리 준비해! 어서!” 위고르 공, 루치아노와 호흡이 척척 맞으시는군요. 한 5분 쯤 대치 상황이 이어질 무렵, 이번에 이 저주받을 지하실에 입장 하신 손님은 바로 하이달이었다. 그의 손에는 루치아노의 것과 같은 권총 이 들려 있었다. 그걸 퀭한 눈으로 바라본 위고르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지방 특산품은 권총인가... 내 머리를 총으로 위협하는 놈은 아이히 만 하나로 충분하다고!”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은 위고르는 실로 처절하게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하이달을 본 루치아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루 치아노와 내통한 사람이 바로 하이달이었지. 이래서야 배신에 배신에 배신 에 배신이잖아!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하이달이 메마른 미소를 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루치아노가 외쳤다. “하이달! 날 도와주면 네게도 금궤를 나눠주겠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요.” 하이달은 곧장 맞장구 치고는 네게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내 이마를 총으로 쿡쿡 누르며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담배 끊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엔디 미온 님?” 눈에 불이 올랐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독한 배신감에 떨며 소리친 자는 바로 줄리앙 님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했던 말들은 모두 거짓말이었던 거야? 이 정도로 저질일 줄은 몰랐어! 하이달!” 하이달은 그런 그녀를 싸늘하게 내려보며 코웃음 쳤다. “범죄자의 말을 일일이 신용한 당신이 잘못된 겁니다. 줄리앙 씨.” 4권 제10화 : 의리 없는 전쟁 II - 마지막 편 “범죄자의 말을 일일이 신용한 당신이 잘못된 겁니다. 줄리앙 씨.” 줄리앙 님의 표정에 어느 때보다도 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그 모습 을 본 루치아노가 미친 듯이 웃었다. “꼴좋구나! 줄리앙!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어떠신가? 응?” 그 모욕적인 말에도 줄리앙은 고개를 꺾은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난 줄 리앙 님과 하이달 사이의 관계를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둘의 사이가 상하 관계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이달은 그런 그녀의 기분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문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마침 1층에 금궤 상자가 있더군요. 가져오겠습니다.” 어쩜 저리 파렴치 할 수가 있을까, 암흑계에서 자자한 그의 명성들은 모 조리 허명(虛名)이었다. 지금까지 속은 게 분하다고! 그리고 잠시 후 하이달이 예의 커다란 금궤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분 명 블리히에 의해 이곳에 압수되어 있던 증거품이리라. 그 상자를 본 루치아노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후하하하! 저거라면 평생 왕처럼 살 수 있겠군! 하이달! 이 놈 좀 잡고 있어!”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위고르를 하이달에게 넘기며 상자에 달라붙었다. 난 분함에 몸을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루치아노의 환호 성은 들리지 않았다. “뭐야, 이건.” 상자를 연 루치아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보였다. “왜....... 금궤가 없는 거야.” 상자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하이달이 루치아노의 뒷머리에 총을 겨눴다. “그거야 내가 가져오겠다는 것은 금궤가 아니라 금궤 상자였으니까.” 그리고 하이달은 잡고 있던 위고르 공을 놓아 주었다. 그러자마자 몸을 날린 위고르 공이 잽싸게 카론 경 뒤로 숨어 버렸다. 나이스 슬라이딩, 위고르. 루치아노는 당혹스러움과 낭패감과 절은 표정으로 덜덜 떨며 등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하이달에게 말했다. “너, 너 혼자 금궤를 독차지하겠다는 생각이냐.” “네 머리는 그런 생각 밖에는 못하는가 보구나." “그럼 왜 이러는 거야!” “이것도 복수라면 복수겠지. 넌 예전 시류회의 말단이었지? 기억할지 모 르겠지만 오래 전 네 놈은 시류회 두목의 명령으로 한 가족을 파멸시킨 적 이 있었지. 나이든 부모와 어린 아들과 그보다 더 어린 여동생이 있는 가 족이었어. 잘 생각해 봐. 네가 저지른 수많은 살인 중에 하나니까.” 하이달은 담배를 물고는 말을 이었다. “너는 아이들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부모를 죽이고 10살도 안된 여자 아이를 겁탈하고 살해한 뒤 집에 불을 질렀지만 그 소년만은 살려두었지만. 왜냐하면 한 명이라도 남아 있어야 계속 시류회의 빚을 갚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소년은 시류회에 들어와 복수를 결심했지. 그 소년이 누구였는 지... 이제 기억나나?” 한동안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식은땀을 흘리는 루치아노의 입에서 변명 이 쏟아져 나왔다. “나, 나는 명령을 받고 그렇게 했을 뿐이야. 너도 시류회의 명령으로 수 없이 살인을 했잖아!” “맞아. 너와 나는 똑같은 족속이야. 구원받을 길이 없는 파렴치한 살인 범들. 그러니까 개처럼 죽어도 할 말 없겠지?” “쏘, 쏘지 마! 날 죽인다고 네 가족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잠시 침묵하던 하이달은 찰칵 소리와 함께 장전을 하며 웃었다. “네 놈도 죽을 때까지 되니까 옳은 말을 하는구나. 유언은 이쯤으로 끝 내기로 하지.” “미... 미친 놈!! 이렇게는 절대 못 죽어!” 그 순간 루치아노가 몸을 돌리며 자신의 총을 하이달에게 겨눴다.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충분히 루치아노를 쏠 기회가 있었던 하이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그 유리알 같은 눈동자만이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 앙 님을 향해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찰나의 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하실이 떠나버릴 것 같은 총성이 울리고 시뻘건 불꽃이 터졌다. 총알은 마치 하이달이 희망한 것처럼 그의 가슴을 뚫고 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뛰어든 카론 경의 칼날이 루치아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하이달의 몸이 바닥으로 천천히 무너지면서 잘려나간 루치아노의 머리가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모습이 실감도 없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하이달!” 그녀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총성과 뒤섞여 귓가를 때렸다. 나는 반사적 으로 하이달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하이달 씨! 어서 응급조치를!” 쓰러진 그를 일으키려는 내 팔을 하이달이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 하게 또렷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로군요. 내가 죽길 바라지 않았나요.” “남이 죽는 걸 바라는 사람이 어딨어요!” “엔디미온 님."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에는 누군가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답니다.” 쓸쓸한 그 목소리가 유언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무실에서 했던 말이 내 복수의 마지막 한걸 음을 멈추게 만든 것 같군요. 고마워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이런 짓 해놓고 고맙다고 말해봐야 하나도 기 쁘지 않다고!” 하이달에게 다가온 줄리앙 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모두 복수를 위해서 준비했던 거야? 나한테 접근한 것도, 날 도와준 것도 모두 복수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신에게 했던 모든 거짓된 말들 중에 단 하나 만은 진실이었습니다. 힘들더라도 그건 믿어줬으면 합니다.” “그런데 왜 이걸 결심할 거야! 나는 너를......” “왜냐하면 사랑과 복수는 양립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복수였다. 그의 말대로 유치하고 허무하고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종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마지막 순간 줄리앙 님마저 자신의 파멸에 동참시키 는 것만은 그만둔 것이다. 그는 그녀를 향해 작별인사처럼 고개를 숙여 보이며 희미한 목소리로 중 얼거렸다. “당신도 나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숨을 들이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15. 사건은 이렇게 종료되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피가 물들 어 있는 옷을 입은 채 터벅터벅 지하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인간에게 영 혼이 있다면 아마 지금쯤 그의 영혼은 내 뒤를 따라 나와서 나와 같은 시 선으로 이 간질거리는 햇빛을 올려다보고 있겠지. “바보 같이.........” 난 그의 영혼이 들으라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중얼거린 뒤에 근처의 분수 대로 걸어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손을 넣자 엉켜 있던 피가 잉크처럼 풀어지기 시작했다. 죽은 자의 피가 씻겨나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 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사 때마다 낭독하던 기도문을 조용히 읊었다. 스왈로우 나이츠인 내가 지금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는 이 기도문뿐일 테니까.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만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의 마지막 말이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자살에 동조할 수 없는 것 처럼 복수는 찬미할 수가 없다.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행복한 죽음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가 없다. 화가 나서 마구 욕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왜일까. 과거란 도무지 현재를 자존(自尊)토록 놔두질 않는다. 줄리앙 님도 그렇 고 나도 그렇고 어쩌면 키스 경도 카론 경도 그럴 것이다. 어떤 일을 겪었 던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기억상실증 환 자와 철인(鐵人)뿐일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과거를 짊어지는 방법이 틀렸잖아! 어째서 좋은 추억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상처만 있다고 스스로 납득하는 거냐고!” 난 갑자기 분수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는 소리쳤다. 그가 내게 말했다. 세상에는 누군가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고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 가장 화가 난 다.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몰아쳐 나는 얼굴 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차가운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있었다. 1분 후 “우어어어!! 진짜 추워!” 뺨에 감각이 다 사라졌어! 아아, 폼 잡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구나! “괜찮은가.” 얼어붙은 것 같은 코를 붙잡고 훌쩍거리던 나는 나직한 목소리에 뒤를 돌 아보았다. “카론 경” 아니나 다를까 카론 경은 방금 전까지의 그 난리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능숙한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색한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수사, 다시할 건가요.” 나는 ‘당연하다.’라는 말을 예상하며 그렇게 물었지만 놀랍게도 카론 경 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어. 위고르 공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전하의 어 명을 전하기 위해서다.” “어, 어명?” 갑자기 임금님이 무슨 볼 일로? 카론 경은 설명 대신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것은 전하의 진필 문서였다. 줄리앙 그라스파로사에 대한 보고서를 검토해 본 결과, 시류회를 해체하 고 재산의 50%를 왕실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그녀 본인이 짊어진 모든 가문 의 죄를 짐의 이름으로 사한다. 또한 이 판결 이후 법무대신 위고르를 통 하여 부모와 자식 사이의 연좌제를 철폐함을 공표한다. 놀랍게도 현명한 임금님의 판결문을 읽어 내려간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씨....... 되게 못쓰시네요.” “동감이야.” 카론 경도 임금님의 친서가 해독이 되지 않아 고생한 적이 있었는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줄리앙 님에 대한 보고서라니요. 누가 이런 걸 전하에게 보냈다 는 거죠?” “누구냐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아 설마! 카론 경이?” “괜한 일을 한 것뿐이야.” 카론은 고개를 조금 돌린 채 중얼거렸다. 역시나 카론 경. 나보고는 블리히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따르라고 해서 엄청 섭섭했는데, 사실은 따로 조사를 해서 전하에게 탄원서를 보낸 거로 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처음 블리히가 여기 왔을 때 카론 경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독자적으로 줄리앙 님에 대한 수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뭐든지 비밀스러운 사람이라니까. ‘그런 좀 자랑해도 될 텐데 말이지......’ “전하께서는 그녀의 결백을 알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신 거다.” “재산 때문이 아니고요?” 줄리앙 님의 재산 절반이라면 족히 25억 셀링은 넘을 것이다. 아마 그 사 실을 알자마자 전하는 공중 이 회전을 하며 환호성을 내지른 뒤에 당장 도 장을 찍었을 거다. 뭐 어떤 이유든 임금님이 직접 어명을 내렸으니 이제 더 이상의 문제는 없... “그, 그,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처절한 비명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 블리히였다. ‘잉? 그런데 저 누님은 또 뭐람?’ 블리히 앞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20대 중반 쯤 되었을 까? 이지적이라기보다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미녀였다. 굴곡이 그대로 들어나는 새하얀 제복과 그 위에 올려진 흠집하나 없는 은빛 판금 갑주, 그리고 은실로 왕실 인장을 수놓은 검은 벨벳 망토... 보는 사람 숨 막히게 만드는 모습이로군.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블리히를 내리깔며 말했다. “말 그대로다. 전하께서는 헬스트 나이츠 기사단장의 교체를 명하셨다.” “소, 소인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댁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소설을 써도 대하역사장편이 만들어질 겁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기사단장의 교체라고? “카론 경! 저 여자 분은 누구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카론의 시선은 참으로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결국 귀국했군.” “엥? 아는 사이에요?” 그녀의 카랑카랑한 질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염치가 있다면 내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블리히 경의 주먹구구 식의 수사방식은 왕실 유일의 정예 기사단인 헬스트 나이츠의 수치다!” 유일이라니! 스왈로우 나이츠는 어디다 팔아먹고! 우리들도 다른 의미로 서 ‘최정예’란 말입니다! 라고 투덜거려봐야 나만 치졸해 지는군. “경이 기사단장으로 부임한 이후 미결 사건이 80%를 넘어간다는 것은 어 떻게 변명할 건가!” “그, 그건!” 하아. 그럼 방어율이 2할도 안된다는 건가. 어지간한 게으름으로는 도달 하기 힘든 실로 경이로운 수치로군. 원숭이한테 맡겨도 그것보단 잘 하겠다! “이에 전하의 어명의 따라 블리히 경을 기다단장에서 일반 단원으로 강 등시키고 나 헬렌 카민스키가 후임 기사단장 직위를 잇는다. 이 나태한 조 직을 철저하게 교육시켜 줄 테니까 각오해!” 아, 그럼... 저 헬렌이라는 누님이 새로운 기사단장이라는 거야? 나는 저 마초적인 블리히가 당장이라도 ‘어떻게 여자가 기사단장이 된다는 거야! 절대 인정 못해! 집에서 애나 봐!’라고 버럭버럭 소리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나 보다. “예엣! 알아 모시겠습니다, 헬렌 님! 아니 헬렌 경! 제발 자르지 만 말 아주세요!” 블리히는 대번에 넙죽 절을 하며 ‘알아 모셨다.’ 으이구. 아무튼 저 인간 은 이 세상 어딜 가도 죽지는 않겠구만. 새로운 기사단장이 된 헬렌 경은 카론을 보고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 오는 것이었다. 또깍 거리는 여성용 부츠 소리가 묘하게 자극적으로 들린다. “오랜만이로군. 카론 경. 4년만인가?” “그런 것 같군.” “정말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군. 당신은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아. 외모 도 성격도... 그 얼음 같은 성격 때문에 멈춰버린 것 일지도.” “시시한 농담이군.” “당신이 아닌 내가 기사단장이 된 것 때문에 기분이 많이 상했겠지?" “나는 전혀...” “카론 경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하께서는 날 선택하셨거 든.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 오호호.” “그러니까 나는 전혀...” “이제는 기사에게 검술이 필요한 시대는 끝났어! 기사라는 것은 하나의 조직 간부로서 체계적인 리더 교육을 받은 자가 필요한 시대야. 전하께서 도 그걸 인정해 주신 거야.” 이거 진짜 상당히 숨 막히는 누님이로군. 가만히 있어봐, 이런 패턴의 여 자를 접대할 때는, 그러니까... 아아아! 망할 직업병!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때 '숨 막히는 헬렌 경'이 날 바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보였다. “네가 엔디미온이지?” “그렇습니다만.” 쳇. 경이라는 호칭 정도는 붙여 달라고. “지금까지는 잘도 왕궁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더군. 무능한 블리히 경 이 있을 때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림도 없어. 제멋대로 행동하면 감옥에 처넣어 버릴 테니까!” 이거 벌써부터 블리히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나는 별로 비위맞추고 싶지 않아 삐죽거리며 말했다. “뭐, 난 스왈로우 나이츠 소속이니까 문제가 있으면 키스 경에게 말하세요.” “그 나쁜 자식 이름 꺼내지 마!” ‘우악!’ 헬렌이 소리를 빽 지르자 난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애써 화 를 참으려는 듯 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카론 경. 당신은 능력이 있으니 계속 부기사단장으로 날 보좌하 도록 해요. 그리고 이후부터는 기사단장인 내게 존칭을 붙이도록!” “알겠습니다. 헬렌 경.” 카은 별로 기분 나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조금 숙여 보였고 헬렌 경 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사라졌다. 어째서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 거야, 저 여자!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카론 경. 몇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말해라.” “일단... 저 헬렌 경, 왜 키스에게 화를 내는 거죠?” 아이히만 대공도 그렇고, 의외로 키스 얘기만 나오면 전투적이 되는 사람 들이 있단 말씀이야. 카론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헬렌 경은 키스를 싫어한다.” 그건 저도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만. “왜요?” “둘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해야 하겠지.” “하아?” “헬렌 경이 유학을 떠난 이유도 상당 부분은 키스 때문이었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 그럼 두 번째 질문. 카론 경과는 무슨 사이에요?” “내 제자였다.” “예? 정말요?” “나와 키스가 담당한 견습기사 중에 한 명이었어.” “역시 키스 그 음란한 인간이 직권을 남용해서 자기 제자를!” “키스에게 잘못은 없어. 그 녀석은 가만히 있었고 접근하는 쪽은 언제나 여자 쪽이었으니까.” 아 뭐, 카론 경이 변호하실 것까지야...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하니까 제 가 다 머쓱해 지잖아요. “아니 그런데 자기 스승에게 저렇게 뻔뻔하게 굴어도 되는 거에요? 기사 단장이 되었다고 저렇게까지 스승에게 무례하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네 녀석보다는 상대하기 쉬워.” “예? 지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어라. 분명 카론 경이 방금 전에 뭐라고 조그맣게 투덜거린 것 같았는데. 아무튼 블리히가 몰락하면 카론이 기사단장이 될 것으로만 알았던 나로서 는 좀 커다란 충격이었다. 어쩌면 카론 경은 스스로 기사단장의 자리를 사 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대로 처세나 정치가 아닌 검으로 살아가 는 자신은 기사단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은 아닐까. 만 약 그렇다면 무척 씁쓸하겠지만 말이다. “엔디미온 경.” “예?” “언제 한번 우리 집에 들려줄 수 있겠나.” 의외의 말이라서 난 한참동안 멍하니 카론 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아! 갈게요! 꼭 가게 해주세요!” “특별히 내가 원해서가 아니다. 단지 내 아내가 널 보고 싶어 하니까.” “헤헤. 그럼 멋지게 차려 입고 가겠습니다아. 그런데 언제요?” “시기는 곧 통보하겠다. 그럼.” 이거 뭔가 기밀작전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카론 경은 아주 쌀쌀맞게 날 초대한 이후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다. 남들이 보면 결투 신청한 줄 알 겠네! 16. 결국 줄리앙 님의 애완견 제사로 시작했던 내 지명은 하이달 씨의 장례식 를 주관하는 것으로 끝맺음하게 되었다. 줄리앙 님은 이럴 것까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일부러 자청해서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다듬고 상복을 입고 그의 장례식을 진행했다. 이래봬도 무려 왕실에서 파견한 전문 출장 기사가 집행하는 장례식이니까 죽은 하이달 씨도 조금은 뿌듯할... 리야 없겠지만, 나 스스로 그를 위해 뭐라도 해주지 않으면 계속 죄스러울 것 같 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한산하네.” 미처 겨울 상복을 준비하지 못해 얇은 옷만 입고 장례식장에 쭈그려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게 줄리앙 님이 다가와 뜨거운 차를 건넸다. 그녀의 말대로 장례식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문객이 없었다. 가끔씩 애도를 표 하러 오는 사람들 역시 평소 신세를 졌던 보통 사람들 뿐이었다. “어쨌든 배신자니까.” 나름대로 이쪽의 룰이라는 것이 있나 보다. 의리를 중시한다는 협객들 사 이에서 조직을 배신한 하이달은 변절자로 낙인찍혀 장례식조차도 외면 받 고 있었다. 하이달 씨는 이것도 예상하고 있었겠지. 자신의 이름이 ‘의리를 모르는 배신자’로 남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겠지. 참으로 쓸쓸한 죽음이지 않은가. 난 뜨거운 차를 조금 마시며 적막감이 감도는 장례식장 주변을 훑어봤다. 이틀 동안 계속 하이달 씨의 곁에 있던 사람은 나와 줄리앙 님 뿐이었다. 갈색의 모피코트를 좁은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줄리앙 님은 내 옆에 쪼 그려 앉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악인이 아니야. 단지 악역이었을 뿐이지.” “.......” “그래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평생가도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해 정도는 해주고 싶으니까.” 줄리앙 님은 단 한번도 울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기운을 내려는 것 같 았다. 확실히 강한 여자다. “미온. 이제 돌아가 봐야 하지 않아?” “아 예. 슬슬.” “그래. 잘 가. 심심하면 또 부를게.” “아하하하. 그건 좀 곤란한데요.” “농담이야. 회사를 만들면 곰 인형 하나쯤은 보내줄 테니까.” “아. 저 남자입니다만.” “어머. 전혀 몰랐어.” “아아. 역시 이 머리를 잘라야 하나.” 사소한 농담들로 어렵게 쓸쓸함을 떨쳐내고 있었다. 잠시 올해 마지막 낙엽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대뜸 말했다. “하이달에게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는 살해당한 가족, 내게 과거는 피로 얼룩진 아버지, 그리고 미온에게는... 아마도 그녀겠지?” 갑자기 꺼낸 줄리앙 님의 말에 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때 이후 그녀의 소식은 들려?” “벼, 별로 그것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금세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중얼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미안. 넌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구나. 괜한 말을 꺼냈어. 미안해.” “아, 아니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기는커녕 더욱 더 또렷해지는 과거가 있다면 그 것은 아주 기쁜 추억이거나 아니면 너무도 슬픈 추억일 것이다. 내가 주변 사람들을 돕고 싶고 지키고 싶고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은 욕 구의 근원이 ‘그녀’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줄리앙 님의 말대로라면 내 현재는 과거의 그녀에게 저당 잡혀 있는 것이리라. 다시는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기묘하게도 집착은 심해진다. 과거의 복수를 위해 파멸을 선택했던 하이달 씨를 속 편하게 욕 할 수 없는 이유도 아마 이것 때문이겠지. 난 눈매를 조금 찡그렸다. 또 다시 내 마음 속의 ‘과거’가 ‘현재’로 범 람해 와서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떠올리면 손에 잡 히는 것은 시릴 만치 투명한 외로움이 전부였다. 외톨이이기 때문에 외로운 걸까요, 외롭기 때문에 외톨이인 걸까요. 전자든 후자든 저는 지금 외롭습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을 읊조리자 내 손바닥 위로 또 다시 그 외로움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17. “아아 겨우 돌아왔다.” 난 내 보금자리 리더구트 문 앞에서 한숨을 푸욱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 찌된 일인지 꼭 이 문 앞에 설 때면 ‘오늘도 무사히’라는 케케묵은 경구가 가슴에 와 닿느냔 말이야! 난 쓰러져 버릴 듯한 몸으로 문을 밀며 말했다. “무사 귀환했습니다아아아.” 라고 인사해봐야 결국 이 놈의 집구석에는 날 반기는 인간이라고는 저 키 스뿐이로군. 으이구! 아예 대낮부터 벽난로 근처에 웅크리고 앉아 처주무시 는 저 본격적인 포지션을 좀 보라! 댁의 목숨을 노리는 헬렌 경이 지옥에서 도 돌아오든 말든 일년삼백육십오일 마이페이스로구먼. “좀 일어나시지. 응?” 난 너무도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저 모습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 입구 근 처에 있던 동그란 장식용 도자기를 냅다 바닥에 굴렸다. 타겟은 저 인간의 뒷통수였다. 떼구루루루......... 그러나 빙글 몸을 굴리며 내 분노의 롤링어택을 가볍게 피한 키스는 길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 동네 기사단장 헬렌 경과는 너무 도 비교되는 부스스한 곱슬머리부터 저 무방비한 헤실헤실 미소까지... 모 조리 마음에 안 들어! 이 자식! 부하는 납치되고 감금되고 폭행당하고 총 격까지 당할 뻔 했는데도 대낮부터 퍼질러 자기만 하는 기사단장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냐고! 키스는 내 모습을 보고 헤죽 웃으며 (상당히 늦은 감이 있지만) 날 반겼다. “아아 미온 경. 이게 무슨 꼴입니까아. 꼭 열흘 쯤 굶은 비렁뱅이 같군요!” 일부러 적나라하게 말하지 마! “미온 경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가고 싶었어요. 하지 만 그 못된 카론 경이 제 카론 주니어를 타고 가버리는 바람에 갈 수가 없 었네요오.” 그건 원래 카론 경의 말이잖아! 이 파렴치한 말 도둑아! 그때 루이 경이 휘파람을 불며 2층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나와 마주쳤다. 그런데 그의 두 팔에 뭔가 아주 낯익은 물건들이 잔뜩 들려 있는 것이 아 닌가. “저어. 루이 경. 그거... 내 물건 아닌가요?” “얼레? 미온 경! 어째서 살아 있는 거야!” 어째서 라니....... “키스가 미온 경은 살아 돌아오기 글렀다고 말해서 이거라도 챙겨보려고 했는데...” “냉큼 도로 갖다 놔!” “아 왜 안 죽고 난리야! 귀찮아 죽겠네.” “얼씨구!” 인간 하이에나 루이 경은 도리어 자기 쪽에서 궁시렁거리며 다시 내 방으 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진짜 의리 없어, 정말! 아니 잠깐. 그건 그렇고! “키스 경! 위기에 빠진 부하를 도와주기는커녕 이미 죽었다는 악소문이 나 퍼트리고!” 키스는 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엔디미온 경. 푹 쉬세요.” 확실히 키스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그가 웃으며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집에 돌아왔다.’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난 난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고생을 하고도 지금 나는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084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1. “예? 카론 경이 입원?” 키스의 말에 난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 총알도 튕겨내는 무적철인 카론 경이 어째서 입원을? “서, 설마 혼자 적국에 들어가서 수백 대 일로 싸운 건가요?” “설마요. 카론 경은 당신처럼 무모하지 않습니다아.” 무모해서 미안하네요! 쳇! “그럼 왜 입원한 거예요?” “그건 카론 경이 실은 임신 8개월... 아악! 상관을 때리다니요!” 난 주먹을 부르르 떨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시시껄렁한 농담 집어치우시지. 나 지금 심각하니까!” “한번 문병 가보세요. 그럼 알 거 아니에요.” 머리를 매만지는 키스가 쀼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문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문득 생각이 들어 키스에게 말했다. “키스 경은 안가요?” 그러나 키스는 소파에 늘어진 채 이불까지 덮으며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이미 다녀왔습니다아. 쾌차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아름다운 국화 꽃목걸이도 목에 걸어 주었지요.” “........잘 하는 짓입니다, 아주.” 카론 경에게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로군. 아무튼 대체 무슨 연 유로 카론 경이 입원한 것일까. 나는 걱정스런 발걸음으로 왕립 의료원 입 원실로 향했다. 2. 왕족을 비롯해 왕실 귀족들이 이용하는 왕립 의료원은 병원이라기보다는 우아한 정원을 가진 별장 같은 모습이었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스왈로우 나이츠는 이곳을 이용할 권한이 없단다.(의료시설 정도는 이용하게 해달라 고!) 장미넝쿨에 뒤덮인 고풍스런 울타리를 지나 입구로 들어가자 새하얀 간호사 복장을 입은 아가씨가 나를 반겼다. 단발머리에 얼굴이 유달리 조 그만 그녀의 몸에서는 향수 대신 희미한 약냄새가 풍겼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와아. 이런 분위기라면 자주 아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물론 귀 족들에게만 통용될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왕실은 우리들이 아프면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서 근처 보건소로 데려가서는 이런 상냥한 간호사는 커녕 치매에 걸린 무면허 의사의 손에 던져줄 것이다. “카론 경의 문병 차 왔습니다.” “아 카론 님을........” 아니, 이 아가씨 왜 얼굴을 붉히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은 불공 평하다. 천재적인 검술을 가진 자에게 왜 그런 미모까지 줘서 이 난리람. 뭐랄까 예전 업소의 히르카스 마담 누님도 카론 경을 봤다면 당장에 눈독을 들였을 것이다. 물론 카론 경은 그 절대영도 같은 파란 눈동자로 ‘날 모욕 하는 건가.’라면서 쌀쌀맞게 반응했겠지만 말이다. “이쪽으로” 나는 그녀를 따라 입원실로 향했다. 다른 귀족들이 입원해 있는 다른 병 실들 문 앞에는 고용된 기사라든지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유독 카론 경의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베르스 최강 기사라는 카론 경을 대 체 누가 경호하겠냐만 그래도 아무도 근처에 없는 그 쓸쓸한 모습에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노크와 함께 그녀가 조금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고 곧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놀라운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막 옷을 갈아입고 있 던 카론 경에게 가슴이?! 긴 머리를 풀어헤친 카론 경, 아니 빨개진 얼굴 의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가리며 날 바라보았다....... 라는 연예 신문 1면 기사 같은 전개는 없었다. “자넨가. 무슨 용무인가.” 무슨 용무이긴요. 문병입니다. 하도 엄숙해 보여서 웃기는 상상 좀 해 봤 습니다. “근무시간에는 근무를 해라. 문병은 그 이후라도 충분해.” 카론 경에게 ‘와줘서 정말 고맙네.’같은 상식적인 인사말을 바란 것은 너 무 무리한 기대였나. 침대 위에 반쯤 몸을 일으키고 앉아 있는 카론은 눈 을 지그시 감고는 ‘시간이 그렇게 썩어나면 일이나 해라!’라는 참으로 교 훈적인 덕담을 읊어주었다. 어?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어떻게 저라는 걸 알았어요?” 날 바라보기는커녕 눈까지 감고 사람이 어떻게 나라는 걸 알았지? “자네의 숨소리는 특이하니까, 금방 알 수 있어.” 내 숨소리가 특이한지는 나도 태어나 지금 처음 알았다. “저어.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난 그의 모습을 살피며 들어오다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국화꽃목걸이를 보고는 눈썹을 움찔했다. 이 세상에서 환자한테 저런 거 선물하는 인간은 키스뿐일 것이다.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는 카론 경은 여전히 맹인처럼 눈을 감은 채로 혼 잣말처럼 말했다. “아픈 곳은 없다. 단지 잠시 실명했을 뿐이야.” “아 예. 실명하셨........ 예에? 실명이라고요!” “왜 그렇게 소란을 떠는 건가.” “거,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잖아요!” 사람이 눈이 멀었다는데 ‘아하. 그거 별 거 아니로군요.’라고 말할 사람 이 있겠냔 말이다! 그러나 카론 경은 침대 끝에 등을 기대며 어제 오늘 일 도 아니라는 듯이 말할 뿐이었다. “조금 피로했을 뿐이다.” 피곤하다고 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납득할 수가 없잖아요, 그거! “지금 정말 눈이 안보이세요?” “조금만 쉬면 시력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걱정되는군.”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카론 경의 체격이 나와 비슷하게 호리호리 한 편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검술의 위력으로 볼 때 굉장한 근육질인 아닐까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검에 가능성이 있는 것....... 은 아니겠지. 숨소리로 상대를 알아맞히는 비상식적인 존 재와는 비교하지 말자. “피곤하면 시력을 잃는다고요? 설마 태어날 때부터 그런?” “그렇진 않다.” “그럼 뭔가 병이 있는 건가요.” “이상한 것을 궁금해 하는군. 대답해 줄 의무는 없다.” 카론 경은 쌀쌀맞게 묵비권을 행사한 이후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튼 지금 내 상태 때문에 자네가 내 임무 하나를 대신 해주게 되었다.” “아? 제가 카론 경의 일을?” 난 영문을 몰라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카론 경의 대답은 여전히 ‘용건만 간단히’였다. “임무는 키스가 말해줄 것이다. 그럼, 할 말 끝났으면 나가보도록.” 카론 경과 나는 공통분모가 별로 없는 사이다. 그런데도 나한테 대신 시 킬 수 있는 임무라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당분간 맹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카론 경에게 인사하며 나는 병실을 빠 져나왔다. “빨리 완쾌하세요. 기도할게요.” “자네가 기도하지 않아도 시간 지나면 알아서 완쾌돼.” “그, 그거야 그렇지만 말입니다.” 분명 카론 경은 나이가 들어서 손자들에게 ‘오래 오래 사세요.’라는 말을 들어도 ‘그건 너희가 원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싸늘하게 말해서 어린 소년소녀들의 마음을 멍들게 할 위인이다. 카론 경, 조금은 ‘따스한 인 간의 마음’이라는 걸 배우라고요. 안 그랬다간 사모님 마음에 동상 걸릴지 도 모른답니다. 아아, 대체 카론 경의 부인은 어떤 천사기에 저 만년설 남 자를 견뎌내는 것일까나. 3. 보통 병문안이라는 것이 ‘이런 빨리 퇴원하셔야죠.’, ‘아하하. 걱정해주 신 덕분에 금방 완쾌될 것 같군요.’, ‘퇴원하시면 꼭 다시 인사드리겠습니 다.’, ‘아이고. 뭐 그렇게 신경 써 주실 것 까진 없습니다.’라는 패턴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우리 쪽은 ‘어디가 아프세요?’, ‘실명이다.’, ‘큰일이네 요!’, ‘신경 쓸 필요 없어. 자네 일이나 잘 하도록.’... 뭐 이런 삭막한 대 화 밖에 없었다. 남들이 보면 내가 카론 경에게 확실히 미움 받고 있다고 생 각하겠군. 아무튼 사교성 제로라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원실 밖으로 나오던 중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이 의 사가 누구냐 하면, 예전 지스 경의 뱀독을 치료해 준 그 왕실의사였다. “호오. 자네는 예전 내게 해독 공식을 준 청년이로구만.” 메데이아 교수 말이로군. 그 누님만 베르스에 있었다면 베르스 의학 수준 도 한 20년 쯤 더 발전했을 텐데. 물론 함부로 스카우트하려고 했다간 마 키시온으로부터 선전포고를 받게 될 테지만 말이다. “카론 경의 상태는 어떤가요.” “으음. 안정을 취하면 시력은 돌아올 걸세.”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설마 치료할 수 없는 병인가요?” 카론 경이 사무를 볼 때 항상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을 보고 시력이 나쁘다 는 것은 알았지만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도 못했다. 일단 날아오는 총알 마저 튕겨내 버리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카론 경의 눈은 실명 직전이야. 평상시에는 그저 눈이 나쁜 정도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몸에 무리가 온다면 시력이 급격하게 저하되는 것이지.” “예?”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 왕실의사를 바라보았다. “그, 그런 병도 있나요.” “병이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후유증 같은 것이랄까.” 후유증? 카론 경이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그런 흉악한 후유증에 시달린 다는 것일까. “지금도 카론 경이 며칠 동안 잠도 못자고 일을 해서 저렇게 된 것이니 까. 소문을 들어보니 이번에 들어왔다는 기사단장 헬렌 경이 그에게 무리 하게 일을 시켰다고 하더구먼.” 역시 그 여자가! 카론 경의 제자라면 분명 카론 경의 눈에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그런 며칠 동안 잠도 못잘 격무를 명령했단 말이지! 너무 하잖아! 그거! 그리고 그렇다고 부득부득 일을 다 하는 카론 경도 너 무 고지식해! 이런 부분에서는 키스의 강력한 농땡이를 좀 배워야 한다고! “그럼 카론 경은 몸에 무리가 오면 시력을 잃는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예를 들자면, 전력으로 신체의 모든 힘을 일깨워 싸우게 된다면 카론 경은 한 시간 안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게 되고 그 이후에도 안정을 취하지 않으면....... 영원히 실명하게 될 걸세.” “여, 영원히.” 나는 경악했다. 검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시력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지 검술을 잘 모르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계속 되는 싸움이란 그에겐 독약과 같아. 그의 정신은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육체는 한 시간 안에 무너져 내릴 테니까.” “그럼 검을 쓰면 안 되는 거잖아요!” 당연한 말이다. 그렇게 몸에 무리가 가면 안 되는 사람이 육체노동의 꽃 이라고 할 수 있는 검술을 부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 알테어 님이나 키르케 님, 혹은 무라사 씨 같은 아신들은 일년삼백육십오일 싸움박질만 해도 끄떡없겠지만 카론 경은 경우가 다르다. 말하자면 검을 쓴다는 것 자 체가 생명을 깎아먹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그 우려에 대해 나이 지긋한 왕실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의사로서의 충고는 당연히 검을 쓰면 안 된다, 겠지만.... 누가 카론 경과 한 시간 이상 검을 주고받을 능력이 있겠는가. 그 전에 결판이 나겠지. 게다가 내가 검을 쓰지 말라고 한다고 검을 놓을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뭐, 그건 그렇겠지만요.” 하긴, 아신위를 제외하면 카론 경과 한 시간 이상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내가 지금까지 본 것도 10초 내에 카론 경이 압승해 버렸 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치명적인 리스크를 짊 어지고 싸운다는 것은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며 말리고 싶은 일이다. 왜 냐하면 카론 경은 자신이 실명한다고 하더라도 싸워야 한다면 그만 둘 사 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카론 경에게 그런 후유증을 준 사람은 누구죠?”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의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걸음 을 옮겨 날 지나치며 말했다. “혹시라도 진청룡을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당장 피하는 것이 좋을 걸세.” 진청룡? 마키시온 제국의 라이오라 란다마이저라고? 설마 카론 경이 그 자와 싸운 적이 있단 말인가. 프론티어 뱅가드라는 친위대의 리더인 진청룡 라이오라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나와 비슷한 금발의 남자라는 사실과 마라넬로 황제가 자식처럼 아 끼는 자라는 것 그리고 아신 중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 정도다. 그에 대한 소문들이 진실이라면 카론 경이 살아남은 것 자체가 신기한 일 일 것이다. 왜냐하면 알테어 님에게 들은 그의 능력은......... “에이, 설마. 과장된 것이겠지.”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나는 아무리 아신의 힘이라도 도무지 터무니 없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건 그렇고 내가 대신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은 또 뭐람.’ 나는 카론 경의 병실 창문을 기웃거리고 있는 예의 간호사를 바라보며 의 료원을 빠져나왔다. -Blind Talk 자아, 그럼 11화 시작합니다. 출판사로부터 '올해가 끝나기 전에 원고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2004 년의 태양을 볼 수 없을 겁니다.'라는 최후통첩이 왔습니다. 하아...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는 뭘 해먹어야 하나.-_)y-~~~ 전에 살사소스에 대해 문의하신 분이 계시던데... 엠파스 요리정보에 의하면 술집등에서 흔히들 만들어 주는 살사소스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습니다. 살사는 에스파냐어로 소스라는 뜻이다. 멕시코 전통음식인 토르티야 요리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매콤한 소스이다. 만들려면 다진 쇠고기 150g, 토마토 1개, 양파 1/2개, 셀러리 1/2대, 브라운스톡 1/2컵, 칠리소스 1큰술, 올스 파이스 1작은술, 월계수잎 1장, 정향·통후추 약간, 육수 1컵이 필요하다. 토마토는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살짝 데쳐 껍질을 벗기고 속씨를 제거한 뒤 잘게 다져 두고, 양파와 셀러리도 곱게 다진다. 달구어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쇠고기와 다진 양파를 볶다가 다진 토마토, 셀러리, 칠리소스, 올스 파이스, 월계수잎, 정향, 통후추를 넣고 육수를 부어 걸죽해질 때까지 조린다. 아주 간단하죠? ...라고는 농담이라도 말 못하게 귀찮군요! 무엇보다 저 재료들을 다 구하는 단계에서부터 살사고 자시고 진절넌덜머리가 나서 나 초에 오뚜기 토마토캐첩이나 범벅으로 뿌려서 먹고 말 것입니다. 저런 5성 호텔 주방에서나 통용될만한 오소독스한 레시피를 생활정보랍시고 올린 엠파스에게 '댁들도 평소에 저렇게 자드시나 보시죠?'라고 빈정거리고 싶 은 마음이 울컥 드는군요. 일단 제 경우에는 쇠고기 150g은 바짝 익힌 베이컨을 잘게 썰어서 넣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쪽이 좋아 보입니다. 브라운스톡은... 말하자면 정향,후추 등의 향신료로 맛을 낸 서양식 육즙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일단 몹시 귀찮고 까다롭고 짜증나는 육즙입니다. 멕시코 요리에 목숨 걸었거나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살사소스 만드는데 이 복잡한 스톡을 만드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냥 사골국물에 후추, 야채 넣으세요. 그것도 귀찮으신 분은 다시다라는 좋은 종합 조미료가 있습니다.-_) 물론 브라운스톡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사 소스는 만들 수 있습니다. 정향 즉 클로브는... '이딴 거 전혀 몰라!'라고 외치시고 무시하셔도 무방 한데 의외로 고기요리나 소스 만들때 소량을 넣으면 독특한 맛이 살아나기 때문 에 기왕이면 식품전문점에서 구입하고 쓰는 편도 좋습니다. 단 사실 정향은 라이벌 후추와는 그다지 궁합이 좋지 못하고 양이 너무 많았다간 살사 소스 가 아닌 정향 소스로 돌변해 버릴 만큼 향이 강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뭐 월계수 잎은... 대부분 말린잎을 쓰는데 구하기도 쉽고 해서 기왕이면 서서 쓰거나 뭐 싫으면 다시다도 있고... 그리고 저 의아한 재료인 칠리소스. 어째서 소스를 만드는데 또 소스가 필요해? 게다가 칠리소스를 만드는 법은 친절하게도 전혀 쓰여 있지 않습니다. 칠리소스쯤은 알아서 만들라는 엠파스의 가르침일... 리가 없겠지만 어쨌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칠리소스를 직접 만드는 것은 아주 고귀한 바보짓입니다. 그냥 상점가서 칠리소스 사세요. 좀 부족하다 싶으면 할라피뇨(절인 멕시코 고추) 를 썰어넣고 없으면 다시다를 넣고... 아무래도 좋으니까 '진정한 살사소스 의 구도자'가 되고 싶지 않은 이상 직접 만드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육계나무 껍질인 올스파이스는 정향과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황금 보다 더 비쌌던 향신료입니다. 만약 중세 유럽에서 저 살사소스를 만들었다간 집을 팔아야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뭐 그러나 지금은 백화점 식품코너 같은 곳 에 가면 있습니다. 물론 없으면 다시다로... (농담) 하지만 다른 것은 다 무시해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토마토 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절대 살사소스라고 할 수 없으니까 이것만은 다시다 로 대체하는 우를 범하지 마시고 귀찮더라도 사와서 뜨거운 물에 몇초간 넣고 (좀 더 길게 넣는 사람도 있지만) 껍질을 벗기고(데친 토마토는 훌러덩 벗겨짐) 씹는 맛이 있게 손가락 반마디 정도로 썰어야 합니다. (귀찮아 죽겠다고 토마토페이스트나 케첩으로 대체하셔도 안됩니다.) 식료품점에 가면 데친 토마토에 약간의 양념을 첨가한 통조림을 팔고는 있는데 싱싱한 토마토를 사와서 만드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맛이 떨어지므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 양파와 셀러리, 통후추는 구하기 쉬우니까 그냥 사와서 마구 난 도질한 뒤에 써먹으면 됩니다.(통후추에도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뭐 특별히 맛에 민감한 분이 아니시라면 그냥 강렬한 향을 고르셔도 무방) 다른 향신료들을 구하지 못했거나 향이 강한 것을 좋아하시면 셀러리의 비율을 높여주세요. 어차피 값도 싼 편이고 놔두면 시들어서 다음에 먹지도 못하니까 사정없이 칼질해서 넣어주세요. 이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사소스와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이 소스는 몇주일이 넘게 두고두고 먹었다간 토마토가 흐물 흐물해지고 맛이 변질되어 전혀 좋지 못하니까 먹을 때만 만들어 드시는 것이 좋겠지요. 먹다 먹다 지치면 야채더미 위에 뿌려서 맥시칸 샐러드라고 박박 우기는 것도 좋은 처리방법입니다. 물론 저 방법대로 했다가 망치셔도 저는 모를 일이랍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최근에는 왼쪽 사랑니 덕분에 또 다시 치통 의 나날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습니다. #085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4. 가을의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린 날이었다. 뜨개질로 만든 낡은 목도리를 목에 두른 나는 총총 걸음걸이로 리더구트로 돌아왔다. 막 브리핑이 시작 되고 있었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브리핑 서류를 들척거리고 있던 키스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카론 경처럼 날 바라보지도 않은 채 말이 다. “미온 경. 이렇게 브리핑에 늦으면 벌금이랍니다아.” “댁이 문병 갔다 오라고 했잖습니까.” “카론 경의 용태는 어떻던가요?” “키스 경의 목걸이를 걸고 한여름 댄스를 추고 계시더군요.” 별로 진지하게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아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에서부터 불쑥 나타난 시종들이 접 시에 담긴 아침식사를 들고 와 내 앞에 내려 주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 디 모여 서식하는 걸까. 정말이지 언젠가는 저 시종들 뒤를 쫓아가보고 싶 군. 아침 홍차로 입을 적신 키스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크리스 경. 지명입니다. 헤에. 이번에는 남쪽의 수도회에서 불렀군요. 크리스는 성직자들에게 인기가 좋은가 보네요.” “가, 감사합니다!” 베르스 교구 소속 성직자들 즉 오르넬라 패밀리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 고 있는 크리스는 지명 순위 4위까지 올라갈 정도로 인기가 좋아져서 최근 얼굴 보기가 힘들다. 성지순례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크리스는 이번에도 수도원으로 출장이로구만. 단발머리의 소년기사 크리스 군은 갈 길이 바쁜 지 먹던 빵을 입에 문 채로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랑시 경도 지명이에요.” “히잉. 이런 추운 날씨에는 나가고 싶지 않는데........”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있는 랑시 경은 코맹맹이 목소리로 계속 스프를 떠 마시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감기에 시달리는 덕에 ‘아아. 나는 병약한 미소녀랍니다.’라는 진땀나는 헛소리나 중얼거리고 다니는 중이다. 무라사 씨가 저 꼴을 보기 전에 떠난 것이 다행이지. “그리고 레녹 경도 지명입니다.” 레녹 경은 손수건으로 코를 가린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랑시의 룸메이 트인 탓에 가장 먼저 감기에 오염되어 버린 레녹 경은 랑시를 한번 쏘아본 뒤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극빈 2인조 쇼탄과 루이 경. 루시온 경과 지 스가 지명을 떠났고 나머지는 ‘장기지명’이라는 의문의 출장 중인 이상 오늘의 ‘집 보기 당번’은 아마도 쇼탄과 루이뿐일 것이다. 나는 뭐냐고? 이래봬도 올해 끝까지 지명 스케줄이 밀려 있다는 말씀. 이대로라면 출장 수익 넘버원까지도 노려볼 수 있겠군. 그다지 달갑지는 않지만 말이지. 최근 민생고를 견디기 힘든 쇼탄 경이 우물쭈물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키스 경. 나는 뭐 없어요? 잘 좀 찾아봐 줘요.” 어쩐 일인지 쇼탄 경은 여름에 지명 폭주인 ‘계절한정품’이다. 덕분에 최 근에는 전혀 지명이 없어서 크리스의 정원 빗자루를 이어받은 비참한 상태 였다. 키스가 브리핑 문서를 훑어보다가 깜빡 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리고 보니까 쇼탄 경” “앗! 역시 나도 지명이 있구나!” “돈 갚아요! 올해를 넘길 생각입니까! 슬슬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고 있 어요! 막노동을 해서라도 갚으란 말입니다!” “쳇. 뭐 일이 있어야 갚던가 하지. 하아. 나도 미온 경처럼 호스트나 할 까. 나였다면 당장 알테어 경을 꼬드겨서 돈을 빌렸을 텐데. 그 아가씨 돈 많잖아?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인생도 해피할텐데에에에. 아아, 우라질 빚 더미 인생.” 댁의 그 정신상태가 빈곤을 가속시키는 원인이라는 것을 전혀 못 느끼고 계시는군. 지명 횟수보다 공략한 펠리오스 무녀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루이 경은 쇼 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다. “어차피 자네와 나는 극빈자의 별 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니까. 아무 리 발버둥쳐도 가난에게 도망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어서 나처럼 겸허히 운명을 받아드리세오. 쇼탄 경.” 위로의 방법이 틀렸잖아! 루이 경이 지금까지 사 모은 값비싼 옷들만 아 니었어도 가난탈출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온 경의 모든 지명 예약은 잠시 중단됩니다아.” “아? 왜요?”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키스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미온 경은 오늘 중으로 저 머나먼 눈의 나라, 마키시온 제국 으로 가야 하거든요.” “내가 거길 왜 또 가야 하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마키시온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라고는 강도를 당하고 노예가 될 뻔하고 독약을 퍼마시고 한 여름에 눈 구 경하러 갔다가 몰살당할 뻔 했던 네거티브 한 기억 밖에 없다. 그런 살 떨 리는 제국으로 어째서 일년에 세 번씩이나 가야 하냐고! 지명은 원래 국내 에서만 하는 거 아니었어? 키스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대답했다. “그거야 미온 경이 카론 경의 임무를 대신해야 하니까요.” “카론 경의 임무가 뭔데요?” “페르난데스 왕자님을 보좌하는 것이랍니다아.” “어, 어째서 왕자님을 보좌하러 마키시온까지 가야 하는 거죠?” 난 눈을 깜빡거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키스를 바라보았다. 물론 왕자님을 보좌하는 것은 내가 그토록 바람에 마지않던 ‘기사다운 일’이긴 하지만 어 째서 마키시온까지 가야 하는 거지? “현재 왕자님께서는 마키시온의 교육기관인 팔마시온으로 유학을 떠나셨 거든요.” 아아 그래서 최근 왕궁에서 보이질 않으셨구나. 세계적인 교육기관인 팔 마시온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대 아카데미 소드람과 함께 마 키시온의 대표적 교육연구기관인 팔마시온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입학 연령 제한은 12세 이상 17세 미만이다. 2) 황족이나 왕족, 고위 귀족 가문의 일원만 입학할 수 있으며 자체적인 심사를 거쳐 합격한 자에 한해 입학하게 된다. 3) 기숙사 생활만 허용하며 학기 중에는 팔마시온 밖으로 나갈 수 없다. 4) 한 학기는 일년 중 4개월이며 총 3년간의 교육 과정 끝에 졸업 시험에 합격한 자만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 5) 학비 무지무지하게 비싸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팔마시온은 전 세계 0.01%의 고귀한 소년소녀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참으로 잘난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 지금 국왕 들 중에는 이 팔마시온 출신들이 참 많은데 마키시온의 황족들은 물론이고 이오타의 왕자인 쇼메 블룸버그도 이 팔마시온 출신이고 콘스탄트의 국왕 바쉐론 콘스탄틴도 팔마시온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마키시온과 불편한 사이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트 왕국마저도 이 교육기 관으로 왕족들을 유학시키는 것으로 봐서 굉장히 인지도가 높고 안전한 곳 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 베르스 같은 약소국의 왕족 들은 상대도 하지 않았던 콧대 높은 이 팔마시온이페르난데스 왕자님의 입학을 허가한 것으로 봐서, 역시 우리 왕자님이 대단하다는 것도 미뤄 짐 작할 수 있겠다. 하여튼 임금님이 자식 농사 하나는 질 지었지. “그래서 저보고 그 팔마시온으로 가라는 건가요?” “예. 카론 경의 대타로 가는 것이랍니다.” “아, 영광이네요. 그런데 말이죠.” “네?” “어째서 저에요? 카론 경이라면 왕자님의 호위 역으로 더없이 적임자겠 지만... 저는 좀 아니지 않나요?” “어머나. 미온 경 스스로도 자신이 문제 덩어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네 요오.” “그게 아냐!” 발끈해서 소리치긴 했지만 확실히 나는 내가 생각해 봐도 호위 기사로는 낙제다. 특별히 굉장한 미남이 필요한 것이 아닌 이상 검술에도 예법에도 능숙하지 못한 나를 굳이 호위 기사로 뽑은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그건 페르난데스 왕자님께서 미온 경을 지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 정말?” “예.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미온 경을 보내달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좋겠네요? 여러모로 왕자님의 총애를 받으셔서.” “그렇게 말하면서 히죽거리는 이유는 뭔가요.” “아무튼 오늘 오전 중으로 채비를 갖추시고 마키시온 제국으로 출발해 주세요. 아아, 이번에야 말로 살아 돌아오긴 글렀군요오.” “불길한 말 좀 하지 마!” 부하가 죽길 바라는 거냐! 난 화딱지를 내며 출장 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 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어 키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런 일에는 키스 경이 어울리지 않나요? 일단 저보다 힘도 더 세고 어째서인지 문제가 생겨도 곧잘 해결하고...” 키스 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양반이지만 확실히 묘하게 믿 음직한 구석이 있다. 왠지 전쟁터에서 왕자님을 맡겨놔도 잘만 지켜낼 것 같았다. 하지만 키스는 시종을 불러 차를 한잔 더 부탁한 뒤에 봄바람 난 아낙네 마냥 코웃음을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마키시온에 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아.” “가기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대체 어디서부터 진담이고 또 어디까지 농담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건 그렇고 무슨 연유로 왕자님이 콕 찍어 날 지명한 것인지 뭔가 불안 한 기분이 드는군. 나는 루이 경을 조르고 졸라 두꺼운 털코트를 빌린 뒤 에(결국 임대료를 줘야 했다.) 마키시온으로 향했다. 5. “...여기가 팔마시온” 나는 머리에 쌓이는 눈송이를 털어내며 팔마시온의 정문을 올려 보았다. 전개가 빨라서 실감하기 힘드시겠지만 이곳에 도착한 지금은 이미 12월의 초엽이다. 학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웅장한 궁전을 연상케 하는 팔마시온은 이미 반쯤 새하얀 눈에 잠겨 있었다. 마치 아주 늙고 거대한 용이 설원 한 복판에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 것만 같다. ‘이야아. 무지하게 크네.’ 이자벨 님도 이 팔마시온을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보통 수석 졸업생 은 그 이름이 새겨진 황금 명판과 초상화가 로비에 걸려 있다고 하는데 그 녀의 사진 만큼은 없다고 한다. 그녀의 이지적인 미모를 사모한 모 귀족이 거금을 들이고 몰래 구입했다는 말도 있고 이오타와 마키시온의 사이가 불 편하게 된 이후 화가 난 마라넬로 황제가 그녀의 그림을 떼어내라고 명령 했다는 말도 있지만 -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녀가 아주 몰래 없애버렸 던 것이다. 그것도 보안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어렸을 때의 모습 따위.’ 이자벨 님의 학창 시절은 그다지 좋은 추억이 아니었나 보다. 예전 업소 에서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했던 말을 떠올리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기회에 교복을 입고 있는 미모의 천재소녀 이자벨 님의 희귀 한 모습을 구경하지 못한 것이 상당히 섭섭하단 말이지. “귀하는 어디의 누구십니까.” 우앗! 깜짝이야! 내 망상 속으로 파고든 목소리는 정중하지만 이곳의 바 람만큼이나 차가웠다. 검은 털모자와 진한 남색의 유니폼을 입은 이 남자 는 특별히 눈을 피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베르스 왕국에서 온 페르난데스 전하의 호위 기사 엔디미온 키리안입니 다.” “베르스 왕국이요?” 순간 그의 입가에 미묘한 비웃음이 번졌다. 이 놈! 약소국이라고 무시하 는 거냐! “그런데 호위 기사라고 하셨나요?” “그, 그렇습니다만.” 그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뭔가요. 내 얼굴과 긴 머리와 허리춤과 여행 가 방을 흘낏 흘낏 흘낏 흘낏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말은커녕 검 한 자루도 없는 긴 머리 청년의 어디가 기사라는 거야?’였다. 마키시온 제국의 인자한 성격대로 ‘이 자식, 수상한데!’라면서 취조실로 끌려가고 싶진 않았으므로 품속에서 임명장을 꺼내 보여주자, 그제야 그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뒤적거려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엔디미온 경.”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6. 팔마시온의 드넓은 복도를 걸어가며 나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내부는 놀 라우리만큼 따뜻하고 습도도 적당했지만 어디에도 벽난로는 보이지 않았고 장작을 지피는 매캐한 냄새조차 없었다. 이것은 역시 뛰어난 기술력을 자 랑하는 마키시온의 가열증기 난방장치가 팔마시온 전체에 깔려 있기 때문... 그때, 날 안내하던 예의 남자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나라에서는 아무래도 만들기 힘들겠지만 이곳은 위대한 황제 폐 하의 은총에 힘입어 건물 전체에 뜨거운 공기를 공급해 주는 난방기관이 깔려 있습니다. 바다가 얼어버릴 추위 속에서도 이 팔마시온의 실내 온도 는 항상 난초가 자랄 정도로 따뜻하지요.” 댁한테 안 물어봤어! 마키시온의 과학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은 인정 하지만 베르스는 남쪽에 있기 때문에 이 미치도록 추운 나라처럼 난방이 발달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강대국 인간들은 사사건건 치졸한 우 월감을 과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군. “이곳이 기숙사입니다. 페르난데스 왕자님의 방은 그러니까... 오른쪽 복도 끝에 있군요.” 그는 서류철을 뒤적거리며 그렇게 말한 뒤에 내게 충고했다. “혹시 몰라 주의를 드리지만, 이곳은 본래는 유명한 국가들의 왕족 분들 만 입학할 수 있는 고귀한 교육기관입니다. 그 분들께 누를 끼치는 행동은 절대로 삼가시길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하아. 이자벨 님이 이곳을 싫어한 것도 이해가 되는군.”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뇨 다들 너무 고귀하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요.” 전 세계의 극소수 여성들만 고객이 될 수 있었던 ‘미소년의 숲’도 여기만 큼 까다롭게 굴진 않았다. 나라차별, 사람차별을 솔선수범해서 가르치는 콧대 높은 학교라니, 개미 뒷다리만큼도 정감이 가질 않는다. 이 정도로 거창한 것을 좋아하면 벽에 큼지막하게 주의사항을 써 놓으라고. ‘자기보다 강한 나라의 학생은 건드리지 말 것. 전쟁이 날 우려가 있음.’이라고 말 이지! “자, 그럼 오랜만에 왕자님이나 알현하러 가볼까나.” 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표독스러운 눈초리가 일품인 한 소 년이 날 향해 씩씩거리며 다가와서는 소리치는 것이었다. “야! 내 방 청소 상태가 왜 그 모양이야! 내가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뭐? 내가 알게 뭐야! 발끈한 내가 뭐라고 외칠 기회도 없이 날 시종 정도 로 오인한 그 녀석은 잔뜩 투덜거리며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저 꼬마도 알고 보면 잘난 나라 귀한 왕자겠지? 여러 가지 의미로 왕자의 인품이 흘러 넘치는 꼬맹이로군. 깔끔한 곳을 좋아한다면 청소도 좋아해야 한다는 당연 한 대자연의 순리를 꿀밤 한대와 함께 가르쳐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베르스 가 불바다가 될지도 모르니 그만두도록 하자. 이 팔마시온에 오자마자 ‘청소 똑바로 해!’라는 대단한 환영인사를 받은 나는 ‘장질부사나 걸려버려라. 못된 꼬맹이.’라고 투덜거리며 페르난데스 왕자님의 방으로 향했다. 이유는 대충 짐작하겠지만 왕자님의 방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창고라 고 착각할 만큼 다른 학생들의 방에 비해 작고 초라해 보였다. “잠깐, 아닌 게 아니라 이거 정말 창고...” 그때 그 ‘창고 문’이 열리며 곱슬머리의 소년이 나오다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쳤다. “페, 페르난데스 전하?” “아! 엔디미온 경” 왜 창고에 계시는 겁니까! 왕자님 너머로 보이는 방안은 대충 만든 간이 침대와 낡아빠진 나무 테이블, 그리고 교재로 보이는 책들과 노트들이 책 장도 없이 바닥에 어수선하게 깔려 있는 그야말로 ‘고학생(苦學生)의 단칸방’ 이었다. 이거 아무리 고전적인 전개라고 해도 도가 지나친 거 아니야? 게 다가 더욱 큰 문제는! “어떻게 된 거에요! 이 얼굴은!” 왕자님의 고운 얼굴에는 반창고가 두 개나 붙어 있었고 이마에는 붕대까 지 감겨 있었다. 아무리 눈썰미가 나쁜 사람이라도 이 상황만 종합해 보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다른 놈들이 괴롭히고 있는 거죠! 그렇죠!” “벼, 별 것 아니오. 경이 걱정할 것은 없소.” “이것만 봐도 충분히 별 거 아닌 차원은 넘어갔습니다만.” 만약 카론 경이었다면 당장 칼을 뽑고 교무실인지 행정실인지에 뛰어 들 어가서 담당 교사 목에 칼을 들이댔을 거다. 전쟁이고 뭐고 모욕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보복모드로 돌변해 버리는 분이니까. 하지만 지극히 온화한 나는 최대한 신사적이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해결하 고자 이렇게 말했다. “괴롭힌 놈들의 명단만 주시면 오늘 중으로 극도의 설사병에 걸리게 해 서 이 학교에서 실려나가도록 만들겠습니다.” 용서 없는 장질부사 어택으로 모조리 지옥 끝으로 보내 줄 테다! “그러지 마시오. 나는 괜찮소.” 이런 꼴을 당하고도 애써 웃음을 보이는 왕자님을 보며 난 한숨을 내쉬었 다. 아무리 약소국이라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 - 그때였다. “야! 페르난데스! 그렇게 계속 설치면 다음번엔 정말 목을 비틀어 버릴 줄 알아!” 농담이라도 순진무구한 소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협박질에 내가 눈 을 번뜩이며 돌아보았다. 남의 나라 왕자를 이지경로 만든 놈들이 바로 네 놈들이었냐! 그러나 그들을 본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레?” 왕자님과 왕자님을 쏘아보는 왕자놈들의 상태 중에 어느 쪽이 더 중태였냐 하면 - 바로 저 놈들 쪽이었다. 한 녀석은 팔이 부러졌는지 팔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또 한 녀석은 아예 목발을 잡고 있었다. 저들의 고상한 품위로 미뤄볼 때 적어도 위기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려다가 저렇게 부상 을 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서, 설마 왕자님께서 저 녀석들을 저렇게 만드시는 것은...” 이거, 의외로 터프하시잖아?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왕자님의 귀에 속삭 였지만 페르난데스 왕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오. 내가 어떻게 저런 짓을...” 역시 그렇군. 솔직히 말해서 싸움은 전혀,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재능이 없는 분이니까. 제냐 공주님이었다면 그 가공할 킥으로 전원 묵사발을 만 들어 놨겠지만 순하디 순한 왕자님이 상대의 관절을 뽑고 뼈를 분질러 버 리는 살인무공을 선보였을 리야 없지. 그럼 대체 저 참상은 누가 만들어낸 작품이려나. “엔디미온 경. 잠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겠소?” 왕자님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부탁한 뒤에 창고를 개조한 것이 분명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이 팔마시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는 것일까. -Blind Talk 이번 편의 스토리는 다 잡아놓은 상태긴 하지만... 엔딩 만큼은 현재 궁리 중입니다. 출판사로부터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아무래도 꽤 고민해야 할 것 같군요. 자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SKT와 관련하여 질문하실 것이 있다면 드래곤레이디 카페 게시판 '리더구트' 이용을 부탁드립니다. 주소는 http://cafe14.daum.net/_c21_/bbs_list?grpid=1RDr&fldid=5orb 입니다. 아 물론 다음카페라서 카페 가입을 하셔야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모짜르트의 오보에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4중주 중 1악장을 들으며
#086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7. 너무 비좁은데다가 책들까지 널려 있어 나와 왕자님 모두 무릎을 꿇고 앉 아야 했던 이 송구스러운 방구석에서, 그 총명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안 쓰러울 정도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흐리던 왕자님은, 옆에 쌓여 있 던 자신의 세탁물들을 보고는 창피한지 침대 밑으로 슬쩍 밀어 넣고는 다 시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모르겠소.” ‘잘못?’ “이런 일에는 경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라고 여겨 조언을 부탁하기 위해 이곳까지 불렀소.” ‘이, 이런 일?’ 내 지혜가 필요한 일이란 따져 봐도 그다지 많지 않다. 가령 까다로운 귀 부인을 접대해야 할 때나 화장법이나 춤추는 법이나 옷 입는 법 같은 것을 가르쳐줘야 할 때라면 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한몫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님이 말한 ‘이런 일’에는 그 어떤 것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 다. 아무튼 왕자를 돕는 것이 기사의 도리! 난 가슴을 펴며 말했다. “제게 다 말씀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사옵니다!” “응. 알겠소.” 왕자님은 내 태도에 조금 안심이 되는지 그리고 10여분 간 ‘팔마시온에서 벌어진 일’을 들은 나는 경악하고야 말았다. 아니,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 면 어찌 경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왕자님으로부터 들은 이 팔마시온 내부 의 거대한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간단한 그림으로나마 정리해 보자면 다 음과 같다. 이번에도 그림이 후져서 미안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건 완전 전쟁판이잖아!’ 소년소녀들의 꿈 많은 학창시절은 이미 요단강 건너 버렸고 이 냉혹한 현 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오직 어린 왕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뿐이었다. 이 꼬락서니를 보고 ‘왕위에 올랐을 때를 대비한 조기교육’이라는 둥 ‘이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제왕학!’이라는 둥 ‘아아 역시 왕의 자질을 가진 귀여 운 소년들이야.’라고 지껄일 사람은 없겠지? 이것은 이미 꼬맹이들의 순진한 싸움박질 수준이 아니었다. 마키시온 제 국의 왕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왕자 연합’은 자신들의 뒤에는 황실이 있 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말도 안 되는 허세겠지만) 여차하면 진청룡 라이오 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적들’을 위협하고 있었고 ‘콘스탄트 파’ 쪽에서 도 이에 질세라 적현무 키르케 님을 호출해서 다 쓸어버리겠다면서 거의 선 전포고에 준하는 강경한 태도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신흥세력인 ‘이오타 연맹’ 역시 이미 인트라 무로스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아무리 상냥한 이자벨 님이라도 이 소식을 들었다면 당장 두통약을 찾았을 할 것이다. 실제로 각국으로부터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속속 호위 기사로 도착하고 있 었고 심지어는 진짜 군 장교들로 구성된 참모진까지 불러서 전략을 짜고 있는 어이없는 녀석들도 속출되고 있다. 요컨대, 농담이라도 애들 싸움이 라고는 말 못할 지경까지 와 버린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저지른 이 세 상 모든 얼간이 짓들 중에 이것이 단연 탑이지 않은가. 뭐 남이사 나라의 전 병력을 다 끌어 모아 박 터지게 싸우든 말든 나야 전혀 관계하고 싶지 않지만 (게다가 같이 동귀어진 해 준다면 이 세계 평 화를 위해 더욱 바람직하겠지만) 문제는 역시 우리 페르난데스 왕자님이었 다. 그 위의 그림을 다시 보라. 혼자 동 떨어져 있는 1% 왕자님의 모습이 애 처롭지 않은가? 다른 나라 왕족, 귀족들은 모두 거대 세력 중 하나를 선택 했단다. 처세술이랄까 생존법이랄까 아무튼 어린애들 주제에 잘도 권력의 냄새를 맡고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도 약소국 중의 약소국인 베르스의 왕자만은 ‘서로 싸우면 안 돼.’라는 이제는 애들도 코웃음 칠 정론을 펴고 있으니, 강대국의 잘 난 왕자들이 보기에는 아주 기가 찼을 것이다. 하지만 창고를 방으로 내주 는 지독한 모욕을 줘도 전하는 자기 의지를 굽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만약 만두 임금님이었다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며 악랄한 돈벌이를 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전하! 제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답은 간단합니다!” “......?” 왕자님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고객들의 무수한 조언 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답은 자명하다. “당장 짐 싸들고 이곳을 떠나면 됩니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왕자님의 숭고한 투쟁에는 더없이 탄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곳은 그 의지를 펼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왕국으로 돌아가셔서 그 인품으로 베르스를 통치하시는 길이....... 가격 대 성능비로 볼 때 훨씬 이익이거든요.”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왕자님이 웃음을 어렵게 참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었다. “아? 왜 그러시옵니까?” “엔디미온 경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무척이나 이상하오.” “뭐, 뭐가요?” “경이야말로 항상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의지대로 행동했던 장본인이 아니 오. 내 손해 보는 장사는 엔디미온 경에게 배운 것이오. 처음 멧돼지를 잡 는 모습을 볼 때부터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싶었소.” “아하하.... 얘,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나요?” 난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항상 내게 주의를 줬던 키스 경 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 이 모습을 키스가 봤다면 ‘미온 경이나 잘 하세요오오오!’라고 외쳤을 것이다. 또한 카론 경이었다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부터 실천하지 못하는 조언이란 아무리 훌륭해도 그 힘이 없 는 법이다.’라고 충고했을 것이 뻔하다. 확실히 나처럼 남들 말을 죽어라고 안 듣는 고집불통 반동분자가 남에게 ‘안전이 제일입니다.’라고 상냥하게 조언해봐야 ‘사돈 남 말하네.’라는 대답 밖에 들을 없다. 이거 뭔가 사람 들로부터 별로 신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오는군. “하지만 저와 왕자님은 다르잖아요. 혹시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일단 아이히만 대공이 절 쏴버리거나 카론 경이 책임을 지라며 칼을 들이 댈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은 마음속으로 삼켰다. 솔직히 말이죠. 왕자님이 야 ‘하하. 괜찮소. 팔 하나 부러진 것 정도.’라고 넘어가실지 몰라도 왕실 에서는 ‘넌 대체 뭐하고 있었던 거야!’라면서 절 들들 볶을 것이 뻔합니다. 무엇보다 마녀 헬렌 경의 미움을 받는 건 조금도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그 거 되게 무섭다고요! 하지만 왕자님은 말고집이었다. "경의 걱정은 고맙지만 나는 다른 왕자들의 권력싸움에 동참하거나 도망 칠 생각이 없소. 잘못된 것을 보고 도망친다는 것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모욕을 주는 창피한 행동일 테니 말이오.” 아아 이것이 정녕 12세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던가. “게다가........“ “게다가?” 왕자님은 조금 창피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조그맣게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학비를 이미 선불로 지급하셨기 때문에 돌아갈 수는 없소.” “...그거. 실로 찢어지는 이유로군요.” 그 어마어마한 팔마시온의 학비를 이미 지불했다면 당연히 임금님은 ‘뽕을 뽑기 전엔 절대 돌아오지 마라.’라는 엄명을 내렸을 것이다. 사교육비 때 문에 나라가 흔들린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려나. 하아, 이거 대단히 울적해 지는군. 아니 그런데 잠깐만. “저어 어차피 그렇게 결심을 굳히신 거라면 왜 저를 부르신 건가요. 제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그건 다른 문제인데...” “...문제가 또 있었습니까.” 아직 본론이 아니었단 말인가. 왕자님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대단 히 당황하고 있었다. 강대국 왕자들의 핍박도 굳건히 버텨내는 왕자님을 이 토록 당황하게 만드는 문제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엔디미온 경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소.” “어, 어떤 문제죠?” 긴장감에 입이 바짝 말라왔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하는 것보다 더 해 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과연 내가 처리할 수 있을까! 만약 마키시온의 암살 자가 왕자님을 노리고 있는 것이라면? 혹은 베르스 왕국의 안전을 빌미로 다른 강대국 왕자 놈들에게 협박 받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럼 말하겠소.” 한참 동안 어찌 말해야 할지 궁리하던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한숨을 내쉬 며 꺼낸 말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것이었다. 자신과 사귀려는 여자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거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제 지혜가 필요한 문제란 그거였습니까.” 난 뒷짐을 치고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멀고 먼 마키 시온까지 불려 와서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 소년 소녀들의 연애사정이었단 말인가. 지금 흐르는 이 서러운 눈물을 결코 보여주지 않 으리라. “에, 엔디미온 경. 난 심각하오.” “아 예. 뭐 연애라는 것은 항상 심각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한 달 치 기운이 한방에 빠져버리는군. 왕실에서 내 존재가치란 이런 것? 이참에 스왈로우 나이츠 그만두고 ‘왕실 연예 컨설턴트’ 사무실이라도 열 어 볼까. 하긴 전직 호스트 따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지혜라고 해봐야... 투덜투덜. 며칠 전 마키시온 제국 내의 많은 왕국 중 하나인 작센 왕국의 공주께서 페르난데스 왕자님께 구애를 했단다. 그게 뭐가 대수? 서로 마음에 맞으면 사귀면 되잖아? 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왕족의 연애라는 것은 다 분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아직 열두 살 밖에 안 되는 왕자님도 그 사 실은 잘 알고 있어서 함부로 처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공주님, 요컨대 막무가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열여섯 살! 순진무구한 왕자님과 공주님이 우연히 만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훗날 결 혼을 약속하며 손가락을 거는 일 따위는 동화 속에서나 (그것도 8세 미만 의 미취학 아동을 위한 그림책 정도에서나) 나오는 얘기고 현실이란 전혀 연애에는 관심도 없는 12세 약소국 왕자가 강대국의 16세 공주에게 밑도 끝도 없이 시달리는 것이다. 아아, 우악스러워. 낭만은커녕 이쯤이면 스릴 러로군. 왕자님에게 죄가 있다면 저렇게 뭇 소녀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뿐이겠지만 불행하게도 그에 합당한 거만함은 전혀 없는 분이라서 대체 어떻게 그 공주님을 떨쳐 내야 할지 몰라 곤혹스 러워 하고 있었다. 천재임에 분명한 페르난데스 왕자는 엉뚱한 곳에서 낙제점이었다. “엔디미온 경. 어떻게 하면 그 공주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할 수 있 겠소?” “불가능합니다.” 난 주저 없이 대답하자 왕자님의 안색에 불안감이 스몄다. “상대의 청을 거절했을 때 전혀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한다, 그건 마치 피 를 보지 않고 심장을 찌르겠다는 것과 같군요.”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상처를 주는 것인데 어떻게 아프지 않게 상처를 줄 수가 있을까. 닳고 닳은 호스트는 물론 이 세계 위에 군림하는 최강의 권 력자인 마라넬로 황제든, 설령 아신이라고 할지라도 그 단순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평민과 똑같다. “그럼 나는 그 공주에게 어떻게 해야 하오.” “아주 간단합니다. 본심을 솔직하게 말씀하시고 정중히 거절하십시오.” “그럼 그 공주의 마음이 분명 상할 것이...” “페르난데스 왕자 저하. 그런 상처조차 각오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뜻대 로 되기만 원하는 공주님이라면 그건 그 분이 어수룩한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인간관계라는 것은 서로에 대한 기대와 믿음과 책임감으로 이어지는 것이잖아요. 정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왕자님은 신이 아닙니다. 또한 그 공주님의 기분을 눈치 보며 어쩔 수 없이 허락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왕 자님께서 그 공주님에게 아주 큰 실례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그 공주님에 대한 최선의 배려 입니다. 그 분도 왕자님의 진심이라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왕자님은 제법 날카로운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하는 나를 경탄의 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긴 왕자님께서 ‘연애개론’같은 인생수업을 받아봤을 리가 없지. “엔디미온 경. 대단하오! 난 감탄했소!” “아하하하. 황송하네요. 뭐 사실 말이야 쉽지만 역시 연애라는 것은 이 론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 것이라서...” 또다시 ‘그녀’가 떠오르자 난 잠깐 눈을 찡그렸다. 한 명의 여자도 제대 로 지켜내지 못한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마음을 정한 페르난데스 왕자님은 의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공주님에게 가려고 했다. “경의 말을 듣고 결심이 섰소. 내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거절하겠소. 지금까지는 그 공주가 자신과 사귀어주지 않는다면 베르스와 전쟁을 하겠 다고 말해서 주저했지만 경의 조언을 듣고 용기가 생겼소! 그녀도 날 이해 해 줄 것이오.” 뭐? 전쟁? “그럼 가서 공주의 청을 거절하고 오겠소.” 거절 = 전쟁 = 불바다 = 멸망 = 배드엔딩 “거절하면 안돼. 거절하면 안돼. 거절하면 안돼에에에!!!!!!!!!!!” 난 부웅 뛰어 올라 문을 열고 나가려는 왕자님을 붙잡고 나뒹굴었다. “왜, 왜, 그러시오?” 용기를 얻은 왕자님을 뜯어말리려다가 벽에 머리를 강타당한 나는 뒷통수 를 부여잡으며 벌떡 일어났다. “소인이 실수했습니다! 절대 진심을 말하시면 안 되고 거절은 더더욱 안 됩니다!” “아까는 분명히 공주가 이해해 줄 거라고...” “에이이! 제 말은 잊어버리세요! 전쟁을 빌미로 연애를 강요하는 여자라 면 이해고 뭐고 거절당하는 순간 눈이 뒤집힐 것이 뻔합니다!” “아, 아까와는 말이 상당히 달라진 것 같소.” 이건 이미 연애문제가 아닌 외교문제입니다! ‘프러포즈를 거절한 베르스 왕국, 삽시간에 군홧발에 짓밟혀...’ 같은 헤드라인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아! 내 조언 때문에 왕국이 멸망당하는 것은 더더욱 사절이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나는 ‘어떻게 보면 그 공주님과 결혼해서 사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거든요? 공주님이 연상이니 그 분의 리드에 몸을 맡길 수 있어 편하고 나름대로 터 프한 매력도 있고 전쟁을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으니 영토도 넓어질 테고... 아무튼 애국한다 생각하시고 눈 꽉 감고 사귀세요!’라고 횡설수설할 찰나 덜컥 문이 열리며 안 그래도 비좁아 터진 방에 장신의 사내가 성큼 성큼 들어왔다. 이미 충분히 심란한 상황인 나는 멍하니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댁은 뉘십니까?” “난 룽켄 남작. 작센 왕국의 왕세자 렌돌프 님의 호위 기사다!” 작센 왕국이라면 그 무지막지한 공주의 나라잖아! “아직 거절 안했어요! 진심을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온 거예요!” “무, 무슨 소리냐.” “아? 선전포고하러 온 거 아닌가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룽켄 남작은 헛기침을 한 뒤에 페르난데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약소국 베르스의 왕자 주제에 우리 왕국의 사야 공주에게 수작을 건 사 실에 대해 오빠이신 렌돌프 저하께서 무척이나 진노하고 계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수작은 그 사야 공주인지 하는 여자가 저질렀잖아! 그 것도 자기보다 4살이나 어린 소년한테! 진노해야 할 쪽은 우리라고! 라는 말은 일단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다시는 그런 무례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나 룽켄을 통해 단단히 혼을 내라 이르셨다.” 밑도 끝도 없이 전쟁광 공주에게 시달린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무례를 저 질렀다며 도리어 큰소리라. 적반하장에도 정도가 있다. 이 놈의 팔마시온 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내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자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은 룽켄 남작 역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룽켄이라는 이름 어디서 많이 들 어본 것 같단 말야. “으음. 네가 페르난데스의 호위 기사인가?” “일단은 그렇다!” “잘 되었군.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뭐! 어째서!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왕족과 직접 싸울 수야 없으니 대신 호위 기사인 네 녀석이 책임을 지고 싸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 이건 렌돌프 왕자와 페르난데스 왕자 사이의 대리 결투? 그는 내 긴 금발과 얇은 허리를 영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무게감 있는 바리톤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정말 룽켄이라는 이름 귀에 익은 걸? “베르스 왕국에는 카론 샤펜투스라는 절세(絶世)의 검술사가 있다고 들 었다. 왕자를 호위하는 너는 그 자보다도 뛰어난 기사라는 건가?” 카론 경은 지금 실명 중이라서 내가 대타로 온 거다! 라고 말해봐야 비웃 음만 한바가지 얻어먹을 게 뻔하다. 난 코웃음을 치며 두 손으로 허리춤을 잡은 채 말했다. “흥. 물론이다. 내 검술은 카론 경 이상이다!” “호오. 카론 경을 능가하는 기사가 베르스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경의 위세를 몰라보고 무례를 범한 점, 사과한다.” 헤에. 이 사람, 의외로 순진하네. 카론 경.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당 신의 유명세를 팔아서 저 수염 남작이 겁먹게 만들어야... “좋아! 결투다! 이건 렌돌프 전하의 명령 이전에 내 승부욕을 참을 길이 없군!” “잉?” 어째서 안 도망치는 거야! 당신, 카론 경보다도 더 강해? “바람보다 빠르다는 은(銀)의 기사, 카론 샤펜투스보다도 강한 자라면 나 작센의 적사자(赤獅子) 룽켄의 상대로 손색이 없지!” '...적사자 룽켄' 이제 기억났다. 룽켄 남작이 누구인지. 마라넬로 황제로부터 직접 기사 작위와 영지를 하사 받은 강철의 남작. 제국 호걸 16인 안에 들어가며 야 수와 같은 싸움 방식으로 어전 시합에서 무패를 자랑하는 그의 별명은 적 사자. 그리고 차밍 포인트는 콧수염. 아아, 왜 이제야 기억나는 거냐고! “최근 들어 전혀 상대할 자가 없어 검술이 녹슬고 있었다. 카.론.보.다. 강.하.다.는. 경의 심정도 마찬가지겠지?” 제겐 녹슬 검도 없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실력의 상대를 이런 곳에서 찾게 되다니! 결투 에 들어가기 전에 경의 이름을 듣고 싶다!” 나는 올해 최악의 자충수(自充手)에 괴로워하며 고개를 돌린 채 더듬거리 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했다. “....키, 키스 세자르.” “그래! 키스 경! 남자의 싸움에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겠지! 당장 승 부다! 따라와!” “우아아! 우리, 말로 하자고요오. 왕자님. 이 무지막지한 사람 좀 말려 줘요!” 내 애처로운 비명을 무시한 적사자 룽켄은 기대한 가득 찬 표정으로 무자비 하게 내 팔을 잡아채고는 곧 내 무덤이 될, 눈 내리는 뒤뜰로 끌고 가기 시작했 다. 그리고 순진한 페르난데스 왕자님은 ‘엔디미온 경. 경의 검술이 그렇게 뛰어난지 미처 몰랐소.’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럴리가 없잖아! 저주할 거야! 이 망할 놈의 팔마시온! -Blind Talk 12월 쯤마다 이 말을 쓴 것 같은데, 12월이 참 싫습니다. 왜냐하면 12월은 제게 '게으름을 심판받는 달', 1년 내내 미루고 미뤘던 일들이 달려드는 달이라서 남들은 연말이나 크리스마스다 망년회다 펑펑 놀 때 혼자 피를 토하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12월말 되면 '내년부 터는 절대 일을 미루지 말고 12월 내내 싸돌아 다닐테다!'라고 각오하지만 결국 내년 12월에도 이런 한심한 잡담이나 쓰고 있겠지요. 발전이 없구만. 아, 그리고 엔딩 결정했습니다. 오탈자 미리 사과드립니다. 읽어주시고 리플 달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와타나베 유이치의 Raindrops를 들으며 #087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8. 팔마시온에 도착한 첫날....... 난 카론 경보다 강한 기사가 되어 적사자 룽켄을 상대로 눈 덮인 결투장에 서게 되었다. 아니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값비싸 보이는 롱코트를 아무렇게나 눈 위에 집어던진 룽켄은 ‘카론보다 강한 자’와 싸우게 된다는 기대감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저 결투에 목숨 건 양반을 실망시켰다간 오장육부가 성하게 죽 지는 못할 것 같군. “준비는 되었나! 키스 경!” 아아, 그래. 내 유일한 위안이라고는 여기서 죽게 되어도 내가 아닌 ‘키스 경’이라는 것 정도로군. 우후후. 잘 가요, 키스 경........ 이라고 농담해 봐야 전혀 기쁘지 않아! 잠시 후면 저 우악스러운 룽켄에게 송이버섯마냥 잘기잘기 찢겨나갈 게 분명하다고! ‘망할. 아무리 자업자득이라지만 이건 너무 자멸적이야. 대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담.’ 그때 룽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기는 대체 뭘 쓰기에 보이지도 않는 건가. 설마 암기술을?” 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이런, 룽켄 경. 내가 검을 깜빡 놔두고 왔구려.” “무슨 소리냐! 기사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무기를 놓고 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흥! 겁에 질려 항상 무기를 품고 다니는 것이야 말로 남자답지 못한 행 동이 아니오!” “그, 그런!” 내 요상한 논리에 룽켄은 나름대로 납득한 것 같았다. 자아, 이제 난 무 기를 가져오겠다면서 슬슬 퇴장해 보실....... “그럼 내 검을 써라!” 얼레? 그가 내 앞으로 자신의 장검을 툭하고 던졌다. 이, 이게 아닌데. “저어 그럼 룽켄 경은 대체 무슨 무기로 싸우겠단 것인지......” 내가 알기로 룽켄은 강력한 검술을 자랑하는 자인데? 혹시 알고 보니 격 투의 달인? “후후. 평소에는 너무 상대에게 가혹한 것 같아서 쓰지 않고 있지만 너 를 상대로라면 괜찮겠지.”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설원 한복판에서 근엄한 옷을 차려 입은 룽켄 남작 께서 갑자기 벨트를 풀어헤치는 것이 아닌가. 지금 뭐하는 거야! 이 변태 남작! 난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남에게 한없이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자랑스럽고 거대한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그걸 과시하기에는 별로 어울리는 장소가 아닌 것 같소만! 게다가 그 건 다른 의미의 무기잖소! 어, 어서 거두시오!” 대체 무슨 의미의 결투를 하자는 거야! 저런 미치광이가 어떻게 제국 십육걸 (十六傑) 적사자냐고! “응? 무슨 소리냐?" 잉? 다시 고개를 돌리자 룽켄 남작의 굵직한 팔에는 벨트에 걸어놓았던 은편(銀鞭)이 말려 있었다. 게다가. “의수?” 코트와 셔츠를 벗어던진 그의 두 팔은 분명 기계장치들로 이어진 쇳덩어 리였던 것이다. 그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수가 아냐. 대 아카데미 소드람에서 제작한 기계 팔이지. 흉하지 않나? 이래서 보통 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야.” 아까 룽켄을 만났을 때 들렸던 철컥거리는 소리는 저것이었나. “황제 폐하께서는 결투에서 두 팔을 잃은 나를 측은히 여겨 이 기계팔을 하사해 주셨지. 아직도 폐하의 은총에는 감격하고 있어. 하지만... 이런 창피한 것을 달고 어떻게 진정한 기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예전처 럼 날 대접해 주지 않더군. 덕분에 나는 황실 기사에서 밀려나 렌돌프 같은 건방진 왕자의 호위 기사로 전락해 버린 거야. 검투사들을 벌벌 떨게 했던 적사자 룽켄도 이제 옛말이지.” 그의 말에 창피함으로 확 달아올랐다. 나는 룽켄에게 아주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저는 사실 키스 경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알고 있어.” “예?” 난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살기가 올랐다. “비록 비공식적인 싸움이었지만, 몇 년 전 내 두 팔을 잘라버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설마! “진청룡이 그러더군. 묵시의 기사에게 도전한 대가로 두 팔을 잃은 것쯤 은 아주 약소한 수준이라고.” 묵시의 기사? 설마 키스가 룽켄의 팔을 잘랐다고? 할 말을 잃고 있는 내 게 룽켄이 달려들었다. 그 덩치만 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검을 잡아라! 네가 누구든 결투는 속행이다!” “마, 망할!” 나는 황급히 땅에 떨어진 검을 왼손으로 집어 들었고 그 순간 내 왼팔을 룽켄이 채찍이 감았다. 함정이다! 그는 이미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감히 묵시의 기사를 사칭하는 놈 치고는 어수룩하구나!” 그가 채찍에 봉쇄되어 버린 내 왼팔을 단번에 꺾었다. “아아악!” 팔이 부러지는 고통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터졌다. 그러나 룽켄은 이쯤으 로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강철로 된 그의 주먹이 날아오는 것과 함 께 시야에 순간 하얗게 되었다. 퍼어어억!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채찍에 감긴 팔 덕분에 곧바로 바닥에 추락 했다. 그나마 쌓인 눈이 완충작용을 해주지 않았다면 머리를 크게 다쳤을 것이다. “크윽!” 갑옷조차 없이 노출된 복부를 그대로 가격당해 숨이 막혀 온다. 단 일격 에 완전히 쓰러져 버렸는데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망할! 뭐가 퇴 물이라는 거야! 충분하고도 지나치도록 강하구만! 꽉 다문 입 사이로 핏줄 기가 세어 나왔다. “아직 쉴 때가 아닐 텐데. 베르스의 기사.” 그가 내 부러진 팔을 감은 채찍을 당기자 몸이 억지로 일으켜 졌다. 한쪽 무릎을 꿇은 나는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통증에 떨리는 눈을 치켜 올린 채 말했다. “한가지만... 묻자. 내가 진짜 키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 서 결투를 하는 거지. 그 렌돌프인지 하는 왕자의 명령 때문이라고는 말하 지 마.” “사라진 두 팔이 있던 자리가 아직도 아파. 그 놈이 가져간 건 내 팔이 아니라 내 인생이다. 솔직히 남자로서 이런 말은 창피하지만, 이후부터는 베르스의 기사 놈들만 보면 죽여 버리고 싶거든. 걱정하지는 마라. 팔 하 나쯤으로 끝내줄 테니까.” “이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자애로우시군.” 키스 이 인간은 밤만 되면 어딜 쏘다니나 했더니 지금까지 이런 괴물들과 싸우고 다닌 거냐! 네 놈이 뿌리고 다닌 증오의 씨앗을 지금 내가 수확하고 있다고! 앞으로 다가온 룽켄은 내 복부를 걷어찬 뒤에 다시 억지로 일으켰다. 때 린데 또 때리지 마, 이 자식! “후후. 참 듣기 좋은 비명을 지르는군. 황제 폐하가 널 봤다면 당장 사 들였을 거다. 자아. 이제 팔이 부러졌으니 어떻게 검을 쓸까?” 그의 비웃음이 반쯤 주저앉아 있는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솔직히 내가 실수한 거 인정한다. 아아, 그래! 내가 잘못한 거니까 몇 배로 당해도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잘난 기사라면 아무한테나 화풀이하지 말라고!” 순간 나는 오른팔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룽켄의 얼굴 의 아차!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격렬한 스파크가 터지 며 그의 기계 팔이 채찍과 함께 잘려나갔다. 뒤로 물러선 룽켄이 치를 떨 며 말했다. “너 이 놈. 오른손잡이였구나.” “속여서 미안하군. 나도 마냥 서서 당할 수는 없어서 말이지.” “제법이야. 왼팔을 내주고 날 방심시키다니. 게다가 강철을 끊는 실력일 줄은 몰랐군.” 그가 잘려나간 자신의 기계팔을 보며 스스로 화가 난 표정으로 뺨을 씰룩 거렸다. 노련한 룽켄도 내가 황급히 검을 잡을 때 일부러 왼손을 선택했다 는 것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건 키르케 님이 가르쳐 준 방법이다. 그 고육지책에 대해 내가 '그럼 왼팔을 잃잖아요!’라고 대답하자 키르케 님은 태연하게 ‘싫으면 목 숨을 잃든가’라고 대답했다. 만약 지금 부러진 팔이 오른쪽이었다면 난 분 명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룽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생각이 바꿨다.” 오오! 드디어 결투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감히 황제 폐하가 하사한 팔을 잘라버리다니! 네 놈을 아예 죽여 버리 겠다!” “당신... 집요하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 아무튼 이 놈의 마키시온에만 오면 몸 성하게 끝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나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그에게서 멀어졌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화, 환장하겠네!’ 카론 경이었다면 태앵! 하고 막은 뒤에 타앗! 하고 공격했겠지만, 그건 별나라 얘기고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나는 실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파아캉! 그리고 거짓말처럼 룽켄의 쇠주먹이 잘려나가 버렸다. 깨끗하게 잘린 룽 켄의 강철 주먹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 “뭐, 뭐야!” 나보다 더 당황한 건 룽켄이었다. 그는 내게서 급히 물러나며 긴장된 표 정으로 외쳤다. “너 이 녀석! 또 무슨 기술을 숨기고 있는 거냐!” “하아? 그런 걸 나한테 물어봐도...” 설마 내게 나도 모르는 검술의 재능이? 내가 실감이 안 난다는 표정으로 다시 검을 한번 휘둘러보자 이번에도 룽켄의 기계 팔목이 툭하고 잘려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혹시, 그 기계 팔... 불량품 아니냐.” “그럴 리가 없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인데...” 나는 대답대신 한 번 더 부웅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예 그의 팔 전체 가 단번에 조각나서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와 룽켄은 힘없이 떨어진 팔 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면 이 검이 전설의 명검?” “아냐! 그건 그냥 평범한 검이야!” “.......” 그럼 남은 것은 내 실력이라는 건가! 룽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귀 신이라도 본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 몰라봤다. 은의 기사보다 강하는 말은 사실인 것 같군.” “그럴리가 없잖아.” “경에게 모욕을 준 것을 목숨으로 갚겠다. 내 목을 쳐라!” “내가 왜 살인을 해야 해!! 저어 우리 그러지 말고...” “나 같은 퇴물은 죽일 가치조차 없다는 거냐! 제발 날 죽여라!” “이봐요. 사람 말 좀 들으시지, 응?”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인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주변 모든 상황을 자기 편한 데로 해석하는 ‘우주창조형 인간’이다. 그리고 하필 그런 류의 인간이 바로 룽켄이었다. “룽켄 경!”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생각을 바꿨다. “마키시온의 황실 기사인 경의 실력은 더없이 훌륭하오! 또한 퇴물도 아 니오. 내 팔을 이렇게 부러트린 자는 경이 처음이니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 을 가져도 좋소!” 사실 나는 침대에서도 굴러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토록 하나 뿐인 목숨을 내가 거두길 원한다면, 이렇게 하겠소. 내가 다시 경에게 그 목숨을 빌려주겠으니 앞으로는 절대! 베르스의 기사 를 미워하지 말고 소중히 쓰도록 하시오. 나쁜 놈은 키스 하나요."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내가 황급하게 지어낸 이 대사에 룽켄은 감동하 고 있었다. 얼마나 감동하고 있었냐 하면 다 큰 남자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탄복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정말 새 생명을 얻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고맙소! 이토록 자애로운 기사도를 실천하는 위인을 정녕코 처음 보오! 이 적사자 룽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데 앞으로 이 속된 목숨은 오직 경 을 위해 존재하니 언제라도 내가 필요하면 찾으시오! 원한다면 즉시 베르 스의 기사가 되어 경의 곁에...” 오지 마!!!! “내, 내가 있는 기사단은 아주 특별하고 은밀해서 당신은 견뎌내기 힘들 거요.” 그런 험악한 기계팔로 향단지 잡았다간 당장에 박살나 버린단 말이야! “아, 아무튼 빨리 가서 그 팔을 수리하시오. 냉. 큼.” 두 팔이 잘려서 천만 다행이다. 만약 팔이 멀쩡했다면 당장 날 부둥켜안 고 거칠게 감격을 토했을 테고 그랬다간 내 허리가 부러졌을 것이 뻔하다. 룽켄은 결국 ‘나는 이제야 진정한 기사도를 보았네.’라는 눈물의 간증을 뒤에 겨우 겨우 사라져 주었다. ‘아아 단순한 인간이라서 다행이야.’ 나는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리며 눈밭에 주저앉았다. 이거 뭔가 요단강의 급류를 필사적으로 헤엄쳐서 되돌아 온 기분이로군. “그런데 대체 어째서 룽켄의 팔이 잘려나간...” 내게 숨겨진 힘이 있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은 일단 배제하자. 이게 아무리 소프트한 소설이라도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숨겨진 힘’이 난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카론 경 같은 검술의 천재에게 ‘어떻게 하면 당 신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봐도 ‘노력해라.’라는 검술교본 첫번째 줄에 나오는 대답밖에 들을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하아. 그럼 대체 뭐람.” 이라고 투덜거리며 부러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내 시야에 어떤 얼 굴이 불쑥 들어왔다. 날 내려다보는 그 얼굴을 5초 동안 황망하게 쳐다봤 을 때야 겨우 겨우 내 입이 열렸다. “아, 알테어 님?” “에헤헤. 우린 정말 마키시온과 인연이 있나 보네?” 그녀가 내 목가에 얼굴을 묻으며 와락 껴안자 달콤한 숙녀의 향기가 짜릿 하게 퍼졌다. 어, 어째서 알테어 님이 여기에! 그녀는 그대로 날 덮치며 쌓인 눈 속에 몸을 묻었고 내 두근거리는 마음은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취해 팔의 통증도, 싸늘한 추위도 잊고... 가 아니잖아! 중간 과정 다 빼 먹고 상황을 급진전 시키지 말라고! 나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왜, 왜 여기계신 거죠!” “그러는 미온이야 말로?”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날 바라보았다. “저야 왕자님의 호위 기사로 파견걸랑요?” “난 이 팔마시온의 검술교사로 초빙되었거든?” “저어. 마카시온은 교황청의 적이 아니던가요. 적국에 와서 검술선생이 라니... 뭔가 좀...” “교황청에서 날 친선의 의미로 보낸 거야. 날 통해서 두 나라 사이가 조 금 좋아졌으니까 난 아주 기뻐!” “아 예에.” 솔직히 말해서 교황과 황제 사이에 뭔가 아주 세속적인 모종의 계약이 이 뤄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는 사람 들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좋다며 귀엽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자 별로 그 배후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 난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옷을 훑어보았다. 늘씬한 다리가 다 드러나는 그 시원한 드레스는 또 뭔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내를 돌아다니면 남 자 열 명중 열명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그런 옷이랄까. 교황청 마크가 수놓아져 있으니까 분명 교황청에서 지급한 것 같기는 한데, 지금까지 본 성기사의 권위적인 제복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일단 춥지 않으세요? “아하하하. 더, 더위를 많이 타시나 보네요.” “이 옷 싫어?” 그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자 난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헤헤. 고마워, 미온. 나도 좋아해. 이 드레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파격적인 커스츔을 교황청에서 허락할지가...” “에? 교황께서도 내 이 옷을 무척 좋아하시는 걸?” “저어. 교황의 연세가?” “올해로 일흔” “......아 그렇군요.” 이것이야 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열린 교황청! 일리가 없잖아! 뭐야! 그 망할 놈의 에로 교황! 그런 성격의 교황이라면 신앙심에 금이 간다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저 드레스는 알테어 님의 전투복이란다. 뭐, 워낙 에 강한 분이니 갑옷 같은 것이야 귀찮기만 하겠지. 저런 복장으로 지휘를 해야 병사들의 사기가 늘어난다, 라는 중대한 문제도 있지만 스스로 마음 에 들어 선택했다고 한다. 역시 왜 결혼도 못하는 금욕의 성기사들이 명주 작 님이라면 목숨을 걸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또한 왜 키르케 님이 알테 어 님을 전투에서 만나기만 화를 머리끝까지 내는지 이제야 좀 수긍이 되 는군. '진지하게 싸우지 못하겠어!'라면서 버럭버럭 화를 내는 모습이 눈 에 선하다. 그때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아아앗!” “왜, 왜 그래?” “그 신비의 검술은 바로 알테어 님이었죠!” “으응. 화 내지마. 난 단지 미온이 위험한 것 같아서...” “제가 화 낼 리가 없죠. 덕분에 사자의 손아귀에서 살았네요오.” 그러자 알테어 님이 단호한 표정으로 내게 일침을 가했다. “제국 십육걸 중 하나인 적사자 룽켄. 만약 그 기사가 팔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면 미온은 즉사했을 거야. 어째서 그런 자와 결투한 거야! 위험한 짓 좀 하지 마! 응?” 그녀는 날 원망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이 없군. “그럼 다음에는 이길 수 있도록 좀 더 검술을 가르쳐 주세요.” “너무해. 그런 대답을 바란 게 아냐.” “농담이에요. 농담. 이제는 누가 떠밀어도 절대 안 싸울 거라고요.” 난 쓴웃음을 지으며 쀼루퉁해진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은 염색을 하지 않 아서 탈색된 밝은 금발이 겨울 태양에 반짝이고 있다. 정말이지 항상 엉뚱 한 곳에서 엉뚱하게 만난다니까. 게다가 그녀가 하얀 장갑을 낀 손에 쥐고 있는 저 흑검(黑劍)은..... “되게 기네요.” 마치 알테어 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그 검은 그녀의 키만큼 길었다. 그런데 저 긴 것을 저걸 어떻게 쓰는 거지? “아 이거?” 알테어 님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창피해 하며 자신의 검을 뒤로 숨기는 것 이었다. 그 긴 것이 좁은 어깨 뒤로 숨겨질 리가 없어 양 옆으로 삐죽 나 온 채로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어색하게 웃는 것이었다. “싸우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아 예. 그래서 숨어서 도와주셨군요.” 알테어 님은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줄 때도 자신의 검술을 직접 보여준 적 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 뛰어난 텔레마코싱 능력을 내 앞에서는 철저하게 감췄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인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는 고맙다고 속삭이며 고 개를 끄덕였고 알테어 님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팔마시온의 거대한 건 축물을 바라봤다. “나, 가봐야 해.” “같이 가요.” “하지만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 보이면 나, 혼나. 저녁에 몰래 찾아갈게.” 몰래... 말입니까? 들키면 나스 군이 기다리는 교황청 지하실로 직행인가요. “아하하. 창문 넘어 오시는 것만은 사양입니다.” 게다가 지금 분위기로 봐선 창고에서 왕자님과 같이 자야 할 것 같고 말 입니다. 하여튼 난 어딜 가도 2인1실이란 말인가. 사박사박 새하얀 눈밭 위를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 몇 분간 넋을 놓 고 바라보았다. 정말로 주작이 설원 위에 내려앉은 것만 같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적사자 룽켄을 그렇게 간단하 게 요리할 수 있단 말이지? 갑자기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괘 씸한 생각이 들자 바보 같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아앗!” 어떻게 된 거야! 부러진 내 팔이 붙어 있잖아! 그때 저 멀리 가던 그녀가 몸을 빙글 돌리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왼팔을 들어 그녀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Blind Talk 카넬리안 : 주인님. 요리사와 호스트. 누가 더 강할까? 줄리탄 : 놀리는 거야? 당장이라도 뱃속이 뻥 터지면서 페이스허거가 튀어나올 것처럼 복통이 심 합니다. 덕분에 글도 후들거리는 감이 있는데... 뭐 빙판운전과 같은 것이 라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이번 편은 후반부의 복선 정도로 납득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New Order Depech Mode의 Bizzare Love Triangle을 들으며 #087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9. 팔마시온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는 듯 따뜻해 졌다. 팔마시온은 십여 개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구름다리나 지하도 등으로 이어 져 있는 하나의 집합체로서 그 모든 건물들이 지하에 있는 거대한 난방기 관을 통해 초여름에나 느낄 법한 따뜻한 공기를 제공받는다. 또한 그 거대 한 난방기관을 움직이는 자들은 총 500여명으로 모두 평민 노동자들인데, 희한하게도 팔마시온 내부에서 그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이유는 평민들은 오직 아주 긴 지하도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 란다. 또한 절대로 귀족들이 있는 지상으로는 올라올 수 없다. 어째서 이 런 불편하고도 부조리한 설계가 되었냐 하면, 이유는 더없이 간단하다. ‘지저분한 평민’들과 지상에서 마주치는 일을 몹시도 불쾌하게 생각한 어떤 귀족 건축가의 ‘세심한 배려’ 때문이다. 나도 평민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따뜻하고 신선한 공기가 실 은 내 지하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콜록거리며 만들어낸 ‘피와 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이 팔마시온의 인위적인 온기가 아주 차갑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벽지가 조금 더러워지고 눈이 조금 맵더라도 베 르스에 있는 벽난로가 훨씬 따뜻하게 느껴진다. “왕자님. 돌아왔습니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 팔미시온에서 제공한 듯한 유니폼으로 갈아 입고 있는 왕자님이 보였다. “앗! 죄송합니다!” 난 황급히 문을 닫았다. 어떤 이유든 왕족들의 맨살을 보는 것은 사형감 이다, 라고 키스가 말했었지 아마. 정해진 시녀, 시종과 같은 왕족들 외에 는 실수로라도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 안에서부터 페르난데스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소. 엔디미온 경. 들어오시오. 다 끝났소.” “아 예.” 우물쭈물 다시 들어온 나는 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뭔가요! 그 옷은!” 내가 놀란 얼굴로 유니폼을 입은 왕자님을 바라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 저건 여름옷이잖아! 말 그대로 반팔에 반바지다. 설마 그런 옷을 입을 정 도로 여기가 더웠습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내게 왕자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옷 말이오? 다음 수업 시간에는 이 옷을 입으라는 지시를 받았소.” “무슨 실내에서 달리기라도 하는가 보네요?” “아니. 실외 수업이오.” “예?” 지금 밖의 온도는 오장육부가 얼어버릴 영하권이다. 그런데 저런 옷을 입 고 밖에서 수업을 하겠다고? 어쩌자는 거야! 팔마시온은! 노천온천이라도 가겠다는 거냐! “안됩니다! 무슨 수업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입으시고 밖에 나갔다간 동상에 걸립니다.” 나는 당장 왕자님을 말렸지만 왕자님은 고개를 저었다. “경의 걱정은 고맙지만 나는 괜찮소." “하지만...” “분명 팔마시온 측에서도 깊은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라 생각하오. 난 이대로 가겠소.” “예. 알겠습니다.” 나는 왕자님의 눈빛을 보며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설마 왕자님의 스 승인 아이히만 대공이 저렇게 교육시킨 걸까? 다른 왕자들에 비해 키도 작 고 체구도 조그맣지만 확실히 위엄이 있단 말씀이야. “그런데 엔디미온 경.” “예?” “결투에선 이겼소?” “아 그게... 뭐 이겼다면 이긴 거겠지만.”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얼버무렸다. 왕자님은 다행이라는 듯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무튼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오. 많이 걱정했소.” 아아, 어쩜 저리 자애로우실 수가. 소인은 예전 멧돼지 잡을 때부터 왕자 님의 고운 성품을 알아봤답니다. 제발 그대로 성장해 주세요. 임금님을 닮 으시면 절대로 아니 됩니다. 그리고 집합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팔마시온에 울렸다. 10. 아니나 다를까 막 눈이 그친 밖은 말 못하게 쌀쌀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괘, 괜찮소.” 이 강추위 속에서 집합 장소로 걸어가는 왕자님은 벌써 몸과 얼굴이 창백 하게 되었는데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였다면 ‘괜찮을 리가 있겠냐!’라면서 짜증을 부렸을 것 같은데, 올해로 12세가 되는 페르난데스 왕자는 무릎까지 푹푹 들어가는 눈밭을 하얗게 질린 다리로 밟으면서도 아 무런 불평도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호위 기사인 나로서는 뭔가 대단한 불 충을 저지르는 것 같아 당장 업어주고 싶긴 하지만 그래봐야 정색을 하며 거절하겠지. 그렇게 집합 장소에 도착한 나와 왕자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 에 잠시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뭐냐 이건.” 죄다 털옷? 그렇다. 한 곳에 모여 있는 수십여 명의 왕족들과 호위 기사 들은 모조리 당연하다는 듯 ‘아주 두꺼운 털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들의 시선이 얇은 여름옷을 입고 있는 페르난데스 왕자에게 집중 되었다. 난 허탈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왕자님.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모, 모르겠소. 분명 이 옷을 입고 오라고...” 그 순간 사방에서 커다랗고도 불유쾌한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바보 아냐? 정말 저 옷만 입고 오는 놈이 있다니!” “그렇게까지 학교에 잘 보이고 싶었냐?” “뭐 약해빠진 나라의 왕자에겐 저 정도가 어울리겠지. 쿡쿡. 다 들으라는 듯한 비웃음소리에 왕자님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순간 내 분노 레벨은 희대의 ‘왕족 몰살 사건’을 일으킬 만큼 급상승했지만, 나는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해서 눈을 꾹 감은 채로 내 코트를 벗어 입혀주려 했다. 하지만 왕자님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난 입지 않겠소." “전하. 참을 일이 아닙니다.” “참는 게 아니오. 지키고 있는 것이오.” 규칙을 지키는 것에 부끄러움은 없다, 왕자님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빈정거림은 끊이질 않았다. “야. 페르난데스. 워낙에 가난한 나라라서 입을 옷도 없었냐?” “네 나라는 어디 박혀 있냐? 너무 작아서 아무리 지도를 찾아봐도 안 보 이던데?”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나라를 지배할래? 응?” 지금 내 기분을 풀어 설명하자면 ‘우어어어! 곰 같은 힘이여 솟아라!’라 고 외치면서 이 악마의 자식들을 모조리 번쩍 들어 저 산 너머로 집어 던 지고 싶다. 하지만 왕자님은 차분한 말 한마디로 그들을 ‘집어 던져’ 버 렸다. “지배가 아니라 통치야.” “뭐, 뭐야?” “백성들은 가축이 아니야. 지배라니 당치도 않아.” “웃기고 있네! 너 지금, 벌레 같은 천민 놈들 편을 드는 거냐?” 앗. 왕자님 화났다. 순간 항상 온화하던 전하의 표정에 처음으로 노기가 드러난 것을 보며 난 적잖게 놀랐다. 그가 말했다. “백성들을 벌레라고 생각하면 너는 결국 벌레들의 왕이 되는 거야.” 왕자님 나이스. 그리고 그 순간 덩치가 두 배는 될 것 같은 상대가 모욕 감에 몸을 떨며 외쳤다. “한스 경! 한스 경!” “부르셨습니까.” 그 왕자 뒤에 나타난 한스는 호위 기사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였다. 둥글 둥글한 인상이 제법 순박하게 생겼군. “이 놈은 지금 감히 날 모욕했다! 이 놈과 결투를 해라!” 뭐? 최소한 어린애답게 치고받고 싸우는 것조차 못하는 거냐! 한스는 주군 의 명령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왕족에게 직접 칼을 댈 수는...” “이런 힘도 없는 나라의 왕자가 감히 나와 동급이라 생각하는 거냐! 어 서 싸워!” “여보세요? 대리 결투라면 이쪽입니다만.” 내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알테어 님과 약속한지 20분만의 일이로군. 한스라는 자는 이런 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영 불편 한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대고 있었 다. 학칙 많기로 유명한 팔마시온에서 어째서 ‘교내에서 결투 금지. 싸우 려면 나가서 싸워.’라는 그 당연한 조항을 넣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집어치워. 네 녀석이 이길 상대가 아냐.” “렌돌프 왕자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막무가내 사야 공주의 오빠이자 적사자 룽켄 을 호위 기사로 두었던 작센 왕국의 렌돌프였다. 거의 청년에 가까운 적갈 색 머리의 렌돌프는 망토까지 두른 폼이 확실히 두목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투로 눈매를 찡그린 채 말했다. “저 기사는 아까 결투에서 룽켄 경을 이긴 자다. 싸워봐야 너희들만 개 망신이야.” 얼레? “서, 설마! 어떻게 저런 애송이가!” 어, 어쩌다 얘기가 이렇게. “쳇. 룽켄 경이 그러더군. 은의 기사 카론을 능가하는 자라고. 네 녀석 의 그 허접한 호위 기사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더 이상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이쯤에서 끝내라.” 소문에 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내가 ‘베르스의 숨은 명인’이 되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내 허세가 여기에서 빛을 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날 바라보는 왕족들의 눈에는 경계심을 넘어 경외감까지 보였다. 그렇다고 이 분위기에서 진실을 밝힐 수도 없고. “하지만 렌돌프! 구겨진 내 체면은 어떻게...” “쳇. 그딴 것 내가 알게 뭐야. 그보다 감히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내게는 네 놈의 나라도 삼류 쓰레기 왕국이야.” 폭언의 달인, 렌돌프 왕자는 분을 참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와 페르 난데스 왕자님을 쏘아본 뒤에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다들 길을 비켜주 는 것으로 봐서 치 떨리는 교내 사조직 ‘마키시온 왕자 연합’의 리더가 맞긴 맞는 것 같군. 결국 렌돌프에게도 버림받은 ‘벌레들의 왕자’는 갑자기 분통을 터트리며 한스의 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그, 그만두십시오!” “네 놈이 강했다면 이런 창피도 없다! 넌 해고야! 기사작위도 몰수다! 어디 가서 뒈져버려!” 분노를 해결하는 최악의 방법을 실천하고 있는 저 꼬마는 마구잡이로 한 스를 걷어차고 있었지만 한스는 ‘작위몰수’라는 말에 하얗게 질려서는 무 릎을 꿇은 채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치 떨리는 촌극이란 이런 것이 리라.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들 두십시오.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다가오는 자는 팔마시온 소속 교사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였다. 그녀가 주 변을 둘러본 뒤에 말했다. “저는 이 수업을 담당한 마카시온 소속 상급 교사 티어스입니다. 그런데 지급된 하복(夏服)만 허용한다는 지시를 받지 못하셨습니까? 지정된 유니폼 을 제외하고 모두 벗어주십시오.” “말도 안돼! 그랬다간 당장 얼어 죽는다고!” 사방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들 모두 자기 나라에 돌아가면 ‘추위’라는 단어를 망각하고 일년 내내 지나치게 편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자들이니까 이런 강추위에 노출된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 어선 ‘공포’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항의에도 티어스 선생은 페르난데스 왕자님을 바라보며 냉 정하게 말했다. “얼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것 같습니다만. 모두 털옷을 벗 어주십시오. 만약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팔마시온 소속 교사의 권한에 따 라 퇴교조치 시키겠습니다.” 강경하구만. 퇴교라는 말에 찔끔한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지만 렌돌프는 끝까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마키시온 사람인 나도 벗어야 하는가?” “물론입니다, 렌돌프 전하. 제국의 왕자답게 먼저 모범을 보이셔야지요. 황제 폐하와 황실의 기대를 저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쳇. 일개 선생 주제에 감히 폐하를 운운하지 마라.” 렌돌프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고 있던 털옷을 벗어 집어던졌다. 그리고 티어스는 살갗이 얼어버릴 듯한 추위에 덜덜 떠는 학생들을 둘러 본 뒤에 수업을 시작되었다. 그녀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커다란 은빛 구슬이었다. 대체 뭐하자는 거지? “이것은 팔마시온의 인장이 새겨진 백금 구슬입니다. 백금, 즉 플라티나 가 상징하는 것이 ‘고귀한 승리’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 니다.” 왕족들조차 반짝거리는 커다란 백금 덩어리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것이 얼마나 값비싼 것이냐 하면 - 최소한 저런 엄청난 물건을 수업교재 로 쓰는 학교는 팔마시온 뿐이리라. “이번 수업은 바로 고귀한 승리를 얻기 위한 고난입니다.” 뭘까. 저 선문답 같은 말은. “지금 제 뒤에 보이는 산에는 백여 개의 상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 니다.” 티어스의 뒤에 눈 덮인 야산 하나가 보였다. 결코 크다고는 못하지만 그렇 다고는 해도 산의 구색을 다 갖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상자들 중 하나에는 이것과 똑같이 생긴 구슬이 들어가 있습 니다.”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멀뚱한 얼굴로 말을 이 었다. “혹은 안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요.” 어느 쪽이야! “수업은 간단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지금부터 저 산에 가셔서 그 구슬 을 찾아오시면 됩니다.” “자, 잠깐! 앞뒤가 안 맞잖아!” “뭐가 말입니까?” “구슬이 없을 수도 있다며!” “그렇습니다. 상자들 속에 구슬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구슬을 어떻게 찾아! 평생 찾다가 얼어 죽으라는 거냐!” “아닙니다. 없다고 생각하시면 포기하시고 이곳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뭐?” 티어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구슬 따위는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먼저 찾았 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그 불안감을 가슴에 지니고 이 강추위 속에서 얇은 옷 한 장만을 입은 채로 불확실한 구슬을 찾아다니시는 겁니다. 만약 구슬 따윈 애당초 없다고 의심하시거나 자신은 남보다 늦었다, 혹은 운이 없다, 라고 체념하시거나 더 이상 추위를 참을 인내심이 바닥나신다 면 당장 이곳으로 돌아오셔도 됩니다. 당장 두꺼운 옷과 모닥불과 따뜻한 스프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망할! 이런 미친 수업을 어떤 얼간이가 구상한 거야!” 렌돌프가 빽하고 화를 내자 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웃음을 보이 며 곧바로 대답했다. “이 수업을 특별히 구상하신 분은 다름 아닌 마라넬로 황제 폐하이십니다.” “뭐, 뭐라!” 렌돌프는 입을 틀어막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를 얼간이라고 부르다 니 자폭도 아주 커다랗게 하셨구려. “폐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해 통치자의 자질을 가진 자의 배짱과 판단력 과 운과 인내심과 체력을 시험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배짱이 없는 자는 금 방 의심에 젖어 구슬을 찾을 의욕을 상실할 테고 판단력이 없는 자는 있지 도 않은 구슬을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테고 운이 없는 자는 아무리 노 력해도 결코 구슬이 있는 상자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인내심이 없는 자 는 반복되는 빈 상자에 금방 진절머리를 낼 것이며 체력이 없는 자는 추위 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의외네. 공포스런 독재자에다가 더없이 잔인하고 여자 남자 안 가리고 색 을 밝히는 폭군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마라넬로 황제가 저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뭐랄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마치 맹수가 자기 자 식을 시험하는 듯한 야수적인 기운이랄까. 예전 아이히만 대공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 이오타의 쇼메 왕자는 분명 어디 하나 뒤떨어지는 면이 없는 수재지만 지금 상태로는 절대로 황제에게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참 학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토실토실하게 살이 찐 한 왕자가 추위에 덜덜 떨며 말했다. “지, 지금 포기해도 되겠나? 추워서 견딜 수가...” 네 놈은 실격. 역시 어딜가나 선구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티어스는 정중하게 말하고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옆쪽에 서 있던 조교들 이 그에게 두꺼운 옷을 입혀주고 모닥불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빤 히 보던 렌돌프가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무능한 놈. 폐하의 기대를 형편없이 저버리는구나!” 렌돌프는 다른 것은 몰라도 왕이 된다면 더없이 황실에 충성하겠군.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내가 그 구슬을 얻는다면 내게 무슨 이익이 있지?” 페르난데스 왕자님만큼 어려보이는 데도 인상은 몹시 날카로운 금발의 소 년이었다. 잠깐 저 인상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이오타의 둘째 왕자님이시군요. 원하신다면 발견한 백금 구슬을 드리겠 습니다.” “흥! 그딴 것쯤 우리나라에도 넘쳐흐른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학점 이나 특혜야.” 아니나 다를까 쇼메의 동생이었군. 저 사나워 보이는 외모나 사람 깔보는 말투나 형을 쏙 빼닮았구려. “지금 특혜라고 하셨습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특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요.” “그러니까 구슬을 얻은 자가 이 학생들의 리더가 된다든지 아니면 최소한 식사 시간에 좀 더 넓은 자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든지! 이런 고생을 해야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거잖아!" 어쩜 사상까지 쇼메의 복사판이로군. 하여튼 절대 손해 안보려고 한다니까. 그 말을 들은 티어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구슬을 찾으신다고 해도 가산되는 점수는 없 고 특혜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뭘 얻을 수 있다는 거야!”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전혀 모르겠다!” “바로 자부심입니다.” 티어스의 말에도 쇼메의 동생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흥! 그딴 자부심을 보여주지 않아도 나는 이들보다 우월한 것이 당연하 다. 그러니 난 빠지겠다. 이딴 손해만 보는 짓거리에 말려들 것 같아?” 발끈한 자는 렌돌프였다. 이오타 연맹을 거느리는 쇼매의 동생과는 당연 히 앙숙지간이겠지. “너 이 자식! 폐하의 뜻이 담긴 이 성스러운 시험을 보고 감히 뭐라고!” “그건 너희들의 황제지 내 황제가 아니야.” “내가 왕위에 오르면 네 놈의 나라부터 쳐들어가 줄 테다!” “얼마든지 와라. 쇼메 형님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거다!” 아아, 분위기 참 좋네. 이 팔마시온의 설립 목적이 ‘각 나라간의 적대감 조성’이라면 확실히 성공했군. 하지만 당장 말려야 할 티어스는 조용히 그 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쇼메의 동생은 자기 패거리들을 이끌 고 모조리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입을 연 자는 어린 나이인데도 렌돌프 만큼 키가 큰 단단한 몸의 소년이었다. 목소리도 묵직한 것이 꽤 존재감이 넘치는 왕자다. “난 콘스탄트의 왕자인 루체른 콘스탄틴이다.” 아아 교내 삼대 사조직 중 하나인 콘스탄트 파의 우두머리였군. 국왕 바 쉐론도 대단한 무인(武人)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아버지를 빼닮은 녀석이 었다. “렌돌프 왕자! 네게 조건을 내걸겠다!” 엥? 왜 갑자기 렌돌프를 들먹이지? 렌돌프가 그를 확 쏘아보자 루체른 역 시 전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넓은 어깨를 쫙 펴며 말을 이었다. “대결이다. 구슬을 차지하는 자가 이곳에 남는다. 만약 내가 차지한다면 네 놈은 여기를 떠나라.” “시건방진 놈이!” “물론 네 녀석이 자치한다면 내가 떠나겠다. 너 같은 놈이랑 한시도 같 이 있고 싶지 않아!” 마키시온과 콘스탄트 간의 험악한 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루체른과 렌돌 프는 거의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롤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 이래서야 어디가 소년들의 앙증맞은 싸움이야. 당장이라도 칼부림 나겠구만! 상황을 지켜보던 티어스가 말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퇴교 권한은 오직 팔마시온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루체른이 흥이 깨졌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그 구슬을 찾아온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로군. 실 로 무가치한 자부심이로야. 그런 것은 사냥개도 할 수 있다. 콘스탄트의 왕위를 물려받을 나 루체른이 승부할 만한 일이 아니야! 좋을 대로들 해. 난 그만두겠다.” “꽁지를 빼는 거냐! 루체른!” “너야 말로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황제의 개꼴이 되어 산속을 마음껏 뒤 져 보시지.” 불꽃 튀기는 분위기 끝에 루체른도 콘스탄트 세력의 녀석들을 몰고 모닥 불 쪽으로 사라졌다. 이리하여 남은 참가인원은 마키시온 쪽의 학생들과... 얼레? 페르난데스 왕자님뿐이잖아? 원래 몸이 가는 편인 왕자님은 힘들어하 는 표정으로 빨개진 뺨을 손으로 매만지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티어스는 절반도 안남은 사람들을 둘러본 뒤에 태연하게 주머니 속에서 회 중시계를 꺼냈다. 뭔가 저 여자, 얄미운 구석이 있군. “자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작센의 왕자 렌돌프는 황제의 시험이라는 말에 잔뜩 눈에 불을 켜며 사람 들 앞에 나서다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페르난데스를 보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너는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도전해 보고 싶으니까.” 왕자님은 파란 눈동자로 산을 바라보며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이익도 대 결도 아니라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렌돌프가 혀 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나라의 왕자라도 이름도 없는 산속에서 얼어 죽 는 것은 너무 처참하잖아. 대충 하다 포기해라.” “응. 조심할게.” “쳇. 동생에게 수작을 건 놈 치고는 제법 배짱이 있군.” 티어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자아. 출발하십시오.” -Blind Talk 엔디미온 : 아아 어쩌면 좋죠. 도와줄 수도 없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카넬리안 : 산에 불을 지르면 찾는데 훨씬 수월하지 않겠어? 엔디미온 : 그, 그럼 다른 왕자들이 타죽어 버릴텐데요. 카넬리안 : 그게 더 좋은 거 아냐? 엔디미온 : ...... 자아, 이제 왕자님이 얼어죽고 이번 편이 끝나는 일만 남았네요.(농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카론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 이 많더군요. '이번 편에는 등장 안해요?'라는 질문에는 아뇨, 카론도 키 스도 등장합니다, 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들의 모습이 조금은 충격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Mr.Big의 Wild World를 들으며
#089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11.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30분이 흘렀을 때는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1시간이 흘렀을 때는 곧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3시간, 해가 저물자 날 씨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지만 단 아직까지도 두 명만은 산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 명은 작센 왕국의 렌돌프였고 또 한 명은 바로 페르난데 스 왕자님이었던 것이다. “왕자님을 찾겠어요!” “안됩니다.” 내 부탁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티어스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보통 여자에겐 소리치는 일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등 을 보인 그녀의 어깨를 잡아 날 바라보게 돌린 뒤에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미 세 시간이라고요! 열두 살의 소년이 산속에서 방한복도 없이 세 시간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봅니까! 시험이고 자시고 이젠 구해야 해요!” “구한다는 것은 당신의 왕자님을 모욕하겠다는 겁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호위 기사라면 그 임무에만 충실하세요. 수업에 끼어들 권한은 당신에 게 없습니다.” “내가 웬만해선 이런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짜내듯이 말했다. “만약 네가 추운 산속에 속옷만 입고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 할 거냐!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와주지 않았을 때 모욕당하지 않았다며 기 뻐할 거냐고! 선생이라면 남의 입장에서 생각 좀 해 봐! 이 여자야!” 화가 나서 거칠게 소리쳐 버린 나를 티어스는 적잖게 놀란 얼굴로 올려다 보았다. “신기한 사람이로군요. 당신.” “뭐가!” “저길 보세요. 독단적으로 구하겠다고 외치는 기사는 당신 하나입니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다른 호위 기사들은 모두 모닥불 근처에서 묵묵히 대기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명령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함부로 왕족 의 수업에 끼어들었다가 자신을 모욕을 했다는 둥, 쓸데없이 참견했다는 둥 하는 불똥 튀기는 것이 싫어서 모른 척 하는 것이다. 저 기사들 중에 자신이 모시는 왕족을 진짜 아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때 이오타의 둘째 왕자, 즉 쇼메의 동생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 와 말했다. 나는 그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이봐, 선생.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냐. 벌써 저녁이야! 빨리 돌아가서 샤워하고 싶으니까 대충 끝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원 돌아올 때까지 수업을 끝낼 수 없습니다.” “쳇. 귀찮아 죽겠네.” 저 자식. 꼬맹이 주제에 쇼메보다도 열배는 더 미워 죽겠다! 티어스는 날 흘낏 바라본 뒤에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그에게 말했다. “지금 산속에 있는 분들이 걱정되지 않습니까?” “흥. 내가 왜.” 어린애에게 살의를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오타의 왕자는 도리어 죽기라도 바라는 듯 비웃음을 머금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티어스는 회중시 계를 다시 꺼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견디기엔 힘든 시간이군요. 저도 이쯤이면 포기하고 돌아올 거 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모시는 왕자는 생각보다 의지가 강한 것 같군요.” 순간 내 표정이 흐려졌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애당초 구슬은 없었던 거야?” 티어스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구슬을 넣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빌어먹을!” 설마 그렇게 잔인할 줄은 몰랐다. 황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고 귀한 승리’를 찾아보라며 아이들을 산속으로 내 몰았던 것이다. 인간은 맹 수가 아니다. 만약 이런 것도 교육이라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야수를 만 들기 위한 교육’ 밖에 더 되겠어! 나는 마라넬로 황제가 내 눈앞에 있다면 냉큼 한방 갈겨주고 싶은 기분을 꽉 참으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구하러 가겠어. 내게 진짜 모욕이란 아끼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 거니 까!” “안됩니다. 팔마시온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녀의 냉정한 말과 함께 팔마시온의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내 앞을 막아 섰다. 나는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어린애를 구하는데도 허가가 필요한 놈들이냐. 너희들은.” 난 그들을 뚫고서라도 나가려 했다. 설사 이것 때문에 퇴교를 당하고 황 제의 분노를 사더라도 상관없다. 적어도 아끼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 것 보다는 백번 낫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서 전하를 구해라. 엔디미온 경.” “카론 경!” 검을 뽑으며 내 등 뒤에서부터 걸어온 자는 바로 카론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카론은 지그시 눈을 감은 싸늘한 표정 그대로 내 옆에 섰다. “상황은 대충 알겠다. 여기는 내가 책임진다. 가라.” “누, 눈은 괜찮은 거예요?” “경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카론 경은 아직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 지만 누구도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한번 바라본 뒤에 산을 향해 뛰려고 했다. “잠깐만” 또 티어스였다. 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번엔 뭐죠? 정말 당신은 내가 본 여자 중에 최...” “저거 가져가요.” 그녀가 손짓한 곳에는 횃불이 놓여 있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본 나는 곧 바로 그것을 들어 모닥불에 불을 댕긴 뒤 산으로 뛰었다. 12. ‘망할 놈의, 망할 놈의, 망할 놈의... 황제 자식!’ 늪처럼 푹푹 꺼지는 눈밭, 산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 어붙을 것만큼 춥다. 이런 추위 속에 학생들을 내팽개쳐 놓고는 ‘그래. 뭘 배웠나?’라고 속 편하게 물어보는 황제 따위, 어디가 신성해! 몇 백번이 라도 저주해 주고 싶어! 아니야. 침착하자. 당장은 왕자님 구조가 급선무다. 황제 인형에 못 박아 주는 건 무사히 왕자님을 구출한 이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왕자님은 현명한 사람이다.’ 왕자님의 이름을 외치며 산을 올라타는 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급 한 와중에 당연한 걸 왜 새삼 생각 하냐고? 왕자님이 아무리 고집이 세고 설사 그 백금 구슬이 너무 갖고 싶어서 미 칠 지경이었다고 하더라도 - 현명한 사람이라면 얼어붙은 산속에서 방한복 도 없이 세 시간이나 헤매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럼 왜 내려오지 않았을까.’ 길을 잃어서? 그건 아닐 것이다. 어두워진 산은 확실히 방향감각을 잃기 딱 좋지만 이 산에는 첩첩산중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만큼 넓은 곳은 아 니다. 즉 마음만 먹는다면 어렵지 않게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째서 내려오지 않는 거지?’ 분명 내려오지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1) 다리를 다쳤다. 2) 맹수를 만났다. 3) 너무 배고파서 독버섯을 먹고 황홀경에 빠져 있는 중이다. 어쨌든 자력으로 산을 빠져나올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 나는 왕자님의 생각을 되짚어 가보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구조대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있을 것이다.’ 산속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경우라면 눈에 띄는 곳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나는 ‘가장 눈에 띄는 곳’ 을 찾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달리 높은 나무 한그루를 발견했다. 대체 뭘 먹고 저렇게 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곳은 꼭 ‘만남의 장소’ 마냥 사람 눈에 잘 띄는 곳이었다. “페르난데스 전하!” 왕자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난 희망을 걸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나무 밑으로 다가갈수록. “...엔디미온 경” 가느다란 왕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을 가져다대자 그 모습이 훤 히 보였다. 난 이 모습을 보며 단번에 ‘왜 왕자님은 산을 내려오지 못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엔디미온 경. 빨리 렌돌프 왕자를...” 왕자님은 정신을 잃은 렌돌프를 껴안고 있었다. 렌돌프의 다리는 얼어붙 은 피에 엉켜있었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나무 밑 눈 더미 사이에서 얼어 죽지 않도록 렌돌프에게 체온을 나눠주던 왕자님의 얼굴에는 이미 새하얗 게 핏기가 없었다. “내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소. 도저히 업고 내려갈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이 덩치 큰 렌돌프를 무슨 수로 업고 내려가겠는가. 게다가 이런 추위 속 에서 무방비로 정신을 잃어버리면 동사(凍死)는 순식간이다. 여기까지는 어떤 다른 왕자들도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과 연 렌돌프를 버리고 가지 않을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엔디미온 경. 구슬은 결국 찾지 못했소.” 내가 벗어 몸에 덮어준 코트 사이로 고개를 내민 어린 왕자님은 이제야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커다란 덩치의 렌돌프를 바라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잖아요. 역시 찾는 것보다는 지키는 게 더 값져요. 그렇죠?” 13. 상황은 의외로 별 다른 후유증 없이 종결되었다. 횃불을 보고 뒤따라온 구조대에게 무사히 구출된 왕자님과 렌돌프는 곧바로 양호실로 보내졌다. (말이 양호실이지 대 아카데미 소드람의 분점이라도 되는 냥 거의 왕립병 원 수준이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왕자님을 퇴교시킬 줄 알았던 여선생 티 어스는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상부에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 고 ‘수업은 이것으로 마칩니다.’라고 말하고는 떠나가 버렸다. 변덕스러운 것은 선생의 마음인지 여자의 마음인지, 아무튼 알 길이 없다니까. 양호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게 카론 경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다 가왔다. 아무튼 카론은 저런 상태로 벽 한번 안 부딪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할 수 있다니, 신기함의 차원을 넘어서 확실히 인간 같지 않단 말이야. “엔디미온 경. 수고했다.” 나는 카론 경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들었지만 나름대로 섭섭해 서 쀼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아. 이제는 미온이라고 불러줘도 좋은데 말이죠.” “엔디미온 경. 기사의 이름에 상처를 내서 부르는 것은 매우 심한 모욕 이네.” 그럼 우리 스왈로우 나이츠는 하루 종일 서로를 모욕하는 셈이로군, 이라 는 생각이 들자 실웃음이 번졌다. 아아 뭐, 태생부터가 근엄함과는 푸딩과 오리너구리만큼이나 연관이 없는 기사단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것은 이후 일이 었다. “전하의 용태(容態)는 어떤가.” “별 문제는 없데요. 그것보다 카론 경이야 말로 아직 시력이...” “시력은 돌아왔다.” 카론이 조용히 눈을 뜨자 속눈썹 아래로 창백한 빛 무리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손대면 곧바로 얼어붙을 것 같은 푸른 눈동자, 왠지 순도 높은 고 독의 결정체 같다는 기분이 든다... 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니 잠깐! “눈 멀쩡하게 보이면서 왜 감고 다녔던 거예요!” 난 발칙하게 화딱지를 내버렸지만 카론은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 이 무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익숙해져야 하니까.” “뭐, 뭐하러요?” “알 것 없다.” 카론 경은 대답하지 않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튼 이 양반하고는 세 마디 이상을 진행할 수가 없어요. 왠지 내가 아니라 키 스 경이었다면 좀 더 솔직하게 자기 기분을 털어놨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서운함이 드는군. 하긴 키스라면 악마의 속마음까지도끄집어 낼 인간이 니까. “언제 초대할 거예요? 카론 경 집에?” “조만간이다.” “조만간 언제입니까아?” 역시 카론은 곧바로 감은 눈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키스의 나쁜 집요함이 옮은 거냐. 조만간이라면 조만간이야!” 한 가지 확실한 건 카론 경의 무표정에 금가게 만들고 싶으면 키스 흉내 내면 된다는 것이로군. 물론 정도가 심했다간 그 바람보다 빠르다는 검에 찔리는 영광을 누리게 되겠지만. 그때 양호실 문이 열리며 건강한 모습으로 부활한 왕자님이 나왔다. 왕자 님은 우리 둘을 보고는 놀란 눈을 보이며 말했다. “날 기다린 거요?” “아 예. 물론. 이제 괜찮으신가요?” “응. 아무 문제없소.” 방긋 웃은 왕자님은 카론 경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와줘서 고맙소.” 카론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왕족들이 모여 있는 식당이라, 솔직히 싸움판일 것 같은 데. 대식당을 향해 걸어가던 중 앞장서던 왕자님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엔디미온 경. 그거 알고 있소?” “예?” “내일 정치학 초빙교사로 아이히만 대공이 온다고 들었소.” “그,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요.” 나는 불안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Blind Talk (전편에 이어서) 카넬리안 : 응? 어떻게 불을 지르냐고? 엔디미온 : 물어본 적 없는데요. 카넬리안 : 그거야 마법으로 콰앙! 나는 마음만 먹으면 공기 하나 없는 달나라에도 불지를 수 있지롱. 아! 너네 세계에선 이런 거 안되던가? 알세스트 : 아니면 서버로 100만 페트라쯤 쓰면 산 하나 날리는 것 쯤이야. 아? 너네 세계에선 이런 것도 안되냐? 엔디미온 : ...될 리가 없잖아요. 그런 것들. 카넬리안&알세스트 : 하아. 이것 저것 귀찮은 세계로다. 엔디미온 : (울컥) 당신들 세계보단 심플해요! 얼마전에 '키스가 테싱이나 나라카보다 더 강해요?'라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곤혹스러웠습니다. 이건 마치 태권V가 마징가보다 강할까? 혹은 부처보다 마호메트가 더 싸움 잘 할까? 라는 아주 난해한 질문처럼 들립니다. 아직까지 부처님의 펀치력과 마호메트의 돌려차기에 대한 고찰 같은 논문 따위는 없어서 뭐가 뭘지 알 수야 없는 노릇입니다. 글쎄요, 막 싸웠다고 친다면 어떻게든 결판이 날테고 고스란히 '스펙'을 가져온다면 또 어떻게든 설명할 수야 있겠지만 별 의미는 없겠지요? 어쨌든 '물리적 강력함'이라는 것이 이야기 상의 주요 소재로 나열되어 버리면 결국 종당에는 '드래곤볼 딜레마'를 피하기가 힘들어져서 아무래도 턱턱 '캐릭터 스펙'을 만들어 내는 일은 꺼릴 수 밖에 없습니다. 뭐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긴 하겠지만... 감당할 자신은 없군요. 아 그런데 키스와 카론의 등장에 '충격적'이라는 묘사를 쓴 것에 대해 의 외로 많은 분들께서 비상한 관심을 보여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분들 께서는 그 '충격적' 앞에 '조금은'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 주 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야채장수의 확성기 소리가 30분째 들리고 있습니다. #090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14. 식당에는 테이블도 의자도 없이 이곳저곳에 놓인 푹신한 쿠션과 카펫뿐이 었다. 역시 식당은 예상대로 ‘마키시온 스타일’이로군. 마키시온 스타일이 무엇이냐 하면, 밥을 먹으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획기적 인 식사 방식을 의미한다. 세계에서 노예제도가 가장 발달한 나라의 식사법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각 왕족들은 선택된 노예들이 음식을 가지고 따라다니며 모든 서비 스를 다해주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음식을 입에 넣는 것조차 노예가 대 신해 준다. 그거 중환자나 하는 거 아냐? 라고 당황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 이 나라에선 엄연한 권력층들의 식문화인 것이다. 실제로 마키시온의 한 귀 족이 자랑스럽게 남긴 유언이 ‘나는 죽는 순간까지 단 한번도 내 손으로 스푼을 들어본 적이 없다.’였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물론 내게 애인 아닌 다른 누가 내 입까지 음식을 가져다준다면 기분 좋기는커녕 말 못하 게 신경 쓰여서 당장 위장병에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중환자 스타일이 무척 마음에 든 것 같군.’ 나는 심란한 시선으로 식당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니 는 어린 왕족들은 저마다 호화스러운 식사를 즐기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비슷한 나이 또래의 노예들이 음식들이 담긴 은쟁반을 들고 허둥지둥 따라 다니고 있었다. 이야아, 저런 모습을 보니까 나도 왕족으로 한번 태어나고 싶다는 부러움이 무럭무럭 생길... 리가 없잖아! 밥 정도는 자기 힘으로 떠 먹어! 이 게으름뱅이들! “아 그런데..” 어째서 왕자님에게는 담당 노예가 없지? 내 표정을 읽은 페르난데스 왕자 님이 직접 쟁반에 음식들을 담으며 말했다. “노예들은 팔마시온에서 구입해야 한다고 하오. 하지만 난 사람이 사람 을 사고판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든 왕족들 중에서 전혀 노예를 구입하지 않고 스 스로 혼자 모든 일을 다 한 사람은 왕자님 하나란다. 심지어는 빨래까지도 혼자 한다. 적어도 임금님의 구두쇠 정신을 계승받았기 때문은 아니리라. 나는 무척이나 왕자님이 장하다는 기분이 들어 감히 왕자님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훌륭하십니다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식당 문이 덜컥 열리며 빠른 발걸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머리에 붕대까지 감은 작센의 왕자 렌돌프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신을 차리자 마자 뛰어온 것 같군. “페르난데스! 어딨나! 어딨어!” 렌돌프는 화가 난 건지 흥분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거칠게 소리를 치고 있었고 조금 겁을 먹은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여, 여기 있어.” 렌돌프는 왕자님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왔다. 당장 한방 먹일 듯 한 표정으로 말이다. 설마 저 자식! 자기를 구한 것이 모욕이라면서 또 생 트집을 잡으려는 거냐! 그때 차가운 눈매로 렌돌프를 바라보던 카론이 내게 물었다. “엔디미온 경. 저 아이는 누구인가.” “아. 작센 왕국의 렌돌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론 경이 왕자님 앞으로 나가며 팔을 뻗어 렌돌 프를 멈추게 했다. 렌돌프가 찡그린 얼굴로 카론을 쏘아보았다. “뭐냐! 넌! 감히 날 막아!” “나는 페르난데스 전하의 호위기사인 카론 샤펜투스 입니다. 하실 말씀 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네가 은의 기사 카론?” 카론의 싸늘한 위압감에 렌돌프는 단번에 주눅이 들었다. 확실히 세계적 으로 통하는 유명세로군. 그런데 렌돌프는 곧 황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 는 것이 아닌가. “페르난데스의 호위 기사는 네 녀석이 아니었던가!” 난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교체되었습니다.” “......” 처음부터 대타였으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주세요. “아무튼! 난 페르난데스와 할 말이 있네! 비켜주게! 카론 경!” 카론은 흘낏 왕자님을 바라보았고 왕자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는 소리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렌돌프는 잔뜩 힘이 들어간 얼굴로 왕자님에 게 다가갔다. “페르난데스!” “으, 응?” “고맙다!” 렌돌프는 페르난데스의 어깨를 꽉 잡으며 외쳤다. "마키시온 사람 외에도 이렇게 용감한 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 비록 나 스스로도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는 있었지만 네 도움이 있었기에 좀 더 수 월하게 나올 수 있었어!” 역시 왕이 갖춰야 할 3대 덕목중 하나인 ‘뻔뻔함’을 지닌 녀석이로군. “그래서 나는 고심 끝에 특별히 허락하기로 했어! 물론 아직 아바마마의 허가가 남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널 지원할게!” “뭐, 뭘?” “비록 네가 약소국의 왕자이긴 하나, 나 렌돌프는 아주 작은 은혜라도 갚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이니! 내가 특별히 사야 공주와의 교제를 허락하겠어!” 신이시여. 그때 렌돌프의 뒤에서 홍조 띈 얼굴을 숙인 드레스 차림의 아 가씨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 뜬금없는 핑크 무드는 뭐야! 너무 일방적이 지 않아? 페르난데스 왕자님의 얼굴이 저렇게 겁에 질린 것은 처음 본다. 산속에서 조난당했을 때도 미소를 잃지 않으시던 왕자님의 표정에는 그야말로 수심 이 가득했다. 허락하면 지옥, 거절하면 전쟁. 진퇴양란에 고립무원이란 이 런 것일까. 과분한 우정을 지 멋대로 베푼 렌돌프는 흡족한 표정으로 동생 사야 공주 를 바라보았다. 알테어 님 정도의 절세미녀까지야 아니지만 확실히 이목구 비가 뚜렷한 미인이고 또 가슴도 크고 왕자님보다 키도 훨씬 크고 나이도 훨씬 많고 무엇보다 저 얼굴상은 분명 ‘대책 없는 로맨티스트’였다. 너무 압도적이야. 상대가 안돼. 이건 완전 암사자 앞의 먹이감이 된 셈이로군. 어떤 버튼을 눌러도 자폭 스위치가 되어 버린 이 상황에서 쩔쩔매는 왕자 님 앞으로 사야 공주가 홀린 듯한 눈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 고는 팔을 뻗어 상대의 손을 꼬옥 잡는 것이었다. 그것도 카론 경의 손을. “귀공은 어디의 누구신가요.” 순간 이 세상이 정지해 버린 듯한 정적이 강림했다. 카론 경은 찬바람 쌩 쌩 부는 표정으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왕자님 과 렌돌프는 물론 식당 사람들 모두 이 세상의 끝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그 식은 땀 나는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정중 하게 말했다. “그쪽은 유부남입니다만.” 15. 카론 경이 최고의 호위 기사라는 것은 이번에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경호 는 물론 왕자님을 협박하던 스토커 공주님마저도 단칼에 떨쳐버려 주지 않 았는가. 물론 렌돌프는 왕국이 멸망한 듯한 심정으로 카론 경에게서 떨어 지지 않으려는 사야 공주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무튼 이 번 일은 카론 경의 가공할 수비범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 기였다. 행정실에 들리겠다며 잠시 헤어진 왕자님을 뒤로 한 채 나와 카론은 ‘창고’ 로 가고 있었다. “카론 경” “뭔가.” “어렸을 때... 누가 스왈로우 나이츠 들어오라고 꼬드긴 적 없어요?” “없다.” “애석하네요.” “뭐가 말이지.” “왕실로서는 큰 손해거든요. 인적자원의 낭비랄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뚜벅뚜벅 걷고 있던 나와 카론은 서로 무표정한 얼굴로 또 서로 뭔지 모 를 대화를 나누며 왕자님의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문을 열려고 할 때 갑 자기 카론이 내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난 깜짝 놀라서는 카론을 바라보았 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시... 흡!” 카론은 내 입을 막으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가 조그맣게 속삭 였다. “지금 이 방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있나?”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방 안에 누군가 있다.” “.......!” 그 순간 크게 망토를 젖힌 카론이 문을 단숨에 밀어젖히며 검을 뽑아 뛰 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따라 들어간 내가 본 것은 카론이 내리친 검을 두 손바닥으로 잡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키스였다. “어머나! 카론 경! 이게 무슨 짓입니까아! 고정하세요!” 당신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댁이 왜 여기 있냐고? 응? 카론은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검을 집어넣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는 키스 를 향해 뭔가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눈을 꽉 감으며 이를 깨물었다. “됐다. 관두자.” “저는 고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왕자님을 돕기 위해 여기까지 날아 온 청소의 요정이랍니다아.” “닥치라고 했다.” 카론이 파란 눈동자에서 냉기를 뿜으며 노려보자 움찔한 키스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진짜 심장을 도려낼 것 같은 살기로군. 하긴 내가 카론 경 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 ‘청소의 요정’을 자청하고 있는 얼빠진 친구를 발견하고는 ‘이야아! 이거 우연히 만났네! 반가우이.’라고는 절대 말 못할 것이다. 아마 십중팔구 죽여 버렸을 것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이봐요. 청소의 요정.” “네에?” “어째서 이 먼 곳까지 친히 행차하신거유?” 하지만 당장이라도 ‘그거야 카론 경과 미온 경이 보고 싶어서지요오.’라 고 대답할 줄 알았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여는 것이 었다. “사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왜, 왜요?” “왜냐하면 몰래 청소를 해주고 사라져야만 했지만 잔인한 사냥꾼 카론의 손에 발각되어 이제는 요정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악! 또 때렸어!” 난 분노의 주먹을 부르르 떨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키스. 살인은 이러다가 일어나는 거야. 왜 왔는지 솔직히 고백하시지. 응?" “시, 심심해서요오.” “심심해?” 누군 힘들어 죽겠구만! “하아. 두 분이 사라져 버린 왕실은 너무 심심해요오.” 방을 닦던 걸레를 꼬옥 부여잡고 우리를 바라보는 키스의 모습은... 진짜 할 일 없어 보였다. 카론이 화를 참는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키스” “예에?” “꺼져라.”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내, 냉정해요! 하룻밤만 묵고 갈게요. 네?” “번복은 없다. 내 인내심이 남아있을 때 사라져라." 키스는 의외였다. 퉁명스런 표정이긴 했지만 순순히 문 밖으로 나가는 것 이 아닌가. 설마 정말 떠나려고? “얼레? 키스 경. 진짜 청소하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뭐. 비슷한 이유라고 할 수 있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는 키스에게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오면 전쟁 난다면서요?” “그래서 몰래 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아?” “엥?”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카론은 감정을 숨긴 차가운 눈빛 그대로 키스 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돌아가. 네가 남의 걱정할 처지냐?” “헬렌 경이 당신을 여기 오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결국 부득부 득 오다니, 당신이야 말로 고집불통이로군요.” 지금 이게 무슨 대화야? 하지만 그렇게 말한 키스는 무언가에 화가 났는 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16. 행정실에서 돌아온 왕자님은 무척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청소의 요정’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큰일이오.” “무슨...” “오늘은 행정업무가 끝나 방은 내일이나 내줄 수 있다고 하오.” 그러니까 그 것은 오늘 밤에는 이 좁디좁은 ‘창고’에서 세 명이 함께 자 야한다는 의미? 이 지나치게 넓은 팔마시온의 수많은 객실들 중에 하나도 내줄 수 없다는 거냐! 이 놈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난 어떻게든 방을 받아내겠다는 의지에 불타며 행정실로 뛰어갔다. 커다란 행정실에는 20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여직원이 남아 있었다. 난 고개를 쑥 내밀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오늘 업무는 끝났습니다.” 그녀는 쌀쌀맞은 말투로 대꾸했다. 난 장난스런 웃음을 보이며 그런 그녀 를 향해 다가갔다. “업무가 끝나셨다면 제겐 더 행운이로군요.” “뭐, 뭐라고요?” 그녀가 안경을 쓴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당황하자 난 살짝 테이블에 엉덩 이를 걸치며 추파를 던졌다. “저도 지금 업무가 끝났거든요?”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초능력이랄까? 이 아가씨는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 진지 일주일 쯤 된다는 전파를 받았다. 미안해요. 왕자님의 편안한 잠자리 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가 없답니다.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흠 칫 놀란 얼굴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개, 객실이 필요해서 온 거라면 내줄 수 없어요. 제 권한이 아니라서...” 나는 그녀가 쓴 안경을 조심스럽게 벗기며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섭섭해요. 제가 온 목적은 그게 아닌데요.” 여기서부터 하략. 17. “돌아왔습니다.” 나는 열쇠를 들고 방안으로 돌아왔다. 세 개의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던 왕자님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방을 얻었소?” “아하하. 글쎄요. 온 몸으로 간청했더니 방을 내주던데요.”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답니다. “아무튼 저와 카론 경은 근처 객실에 묵겠습니다. 가죠. 카론 경.” 카론은 왕자님께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에 내게 말했다. “내가 전하를 경호하겠다. 엔디미온 경은 객실에서 쉬도록.” “그러지 말고 교대로 하죠? 카론 경도 피곤하실 텐데.” “됐어. 자네의 쓰임새는 다른 쪽에 있는 것 같군.” 그거 무슨 의미입니까! -Blind Talk 자꾸 늦어지는 것 같아서 써두었던 것을 먼저 올립니다. 물론 키스의 충격 적 모습이라는 것이 '청소의 요정'은 아닙니다.-_- 사실 최근 망년회라는 망년회는 거의 모조리 캔슬하면서 글을 쓰고는 있지 만 진행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얼마나 힘드냐 하면 혼자 멍하니 이런 노래 를 처량하게 중얼거리며 쓰고 있을 정도로 힘듭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빰이 몹시도 그리웁고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새의 사랑의 꿈 고히간직 하렸더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차중락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결국 방이 춥고 마음이 외롭다는 것일 뿐인가. 이상하게 올해는 정말이 지 끝까지 이 모양입니다. 궁상맞은 12월 신드롬의 절정. E-MAIL : billiken77@kornet.net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며... (끝까지 궁상이군.) #091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18. 결국 알테어 님은 오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카론 경과 만나지 않도록 일 부러 몰래 복도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거 바람 맞은 건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기대어 있던 나는 난 축 늘어진 모습으로 난감하게 웃었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만 역시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언제 나 처량하다. “여기서 뭐하시는 건가요? 이 시간에?” “아?” 갑작스런 발걸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티어스 선생이 램프를 든 채 다가오 고 있었다. 미운정이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던 나는 나름대로 반가워서 웃으며 말했다. “티어스 씨야 말로 뭐하고 있는 거죠?” “순찰 중이에요.” 그녀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팔마시온의 지도를 넌지시 바라보다가 조금 불만스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선생님이 직접 순찰을 도나요? 얼마든지 대신 해줄 수 있는 착 한 노예 많잖아요?” “당신은 마키시온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요.” “좋아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을 산 속으로 내던지는 황제도, 노예 없이는 밥도 못 먹는 식사법까지도.” 내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어쨌는지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는 뭔가 한방 먹여줘야겠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리며 말했다. “참 곱상하게 생겼네요. 베르스에서는 얼굴보고 기사 뽑나 보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건 베르스에서 만큼은 엄연한 사실이랍니다. “얼레? 어떻게 알았어요?” “농담하지 말아요.” “가문보고 기사 뽑는 거나 얼굴보고 기사 뽑는 거나... 얄팍하긴 피차 마 찬가지 아닌가요?” “후후. 얼굴은 고운 사람이 말하는 건 꽤 신랄하네요. 황제 폐하가 봤다 면 그 입만 제외하고 사들였을 것 같군요.” 난 눈썹을 꿈틀했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그 황제란 사람 대체...” 뭐하는 작자야! 한번도 본 적 없는데도 벌써부터 ‘만나면 도망치자.’ 리스트 에 랭크되어 버렸다고! 그녀가 곧바로 말했다. “괴물이죠.” 램프 불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담겨져 있었다. 난 묘한 위화감에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티어스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 황제 싫어하는 걸까. 세련된 외모가 인상적인 그녀는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쳐가며 또 속을 뒤집 어 놓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괴물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당신의 그 정신과 육체, 송두 리째 부서지고 싶지 않다면.” 그거 오싹 하군.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 앞에 황제가 나타나 ‘경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말하면 ‘우아아아! 죽어라!’라면서 펀치를 날리고 미친 듯이 도주해야 할 것이다. 슬슬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려는 티어스에게 내가 문득 물었다. “혹시 알테어 엔시스 경이 어디 있는 알고 있나요?” “명주작 말인가요? 설마 아는 사이에요?” “뭐 그런 셈입니다만.” 그녀는 ‘제법이네?’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녁에 콘스탄트로 돌아갔다더군요.” “예? 왜요?” 아니 말도 안하고 가버리시다니! “자세한 이유를 일개 선생인 내가 알 턱이 있나요. 뭐 들리는 말로는 교 황이 급히 불러들였다더군요.” “그, 그래요?” 또 다시 황제와 교황 사이가 틀어져 버린 것일까. 자세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그 교활한 두 살모사 사이에서 순진무구한 알테어 님이 이용당할까 봐, 걱정되는 것은 그것뿐이다. ‘아아. 시원하게 바람맞았군. 아까 일을 벌 받은 걸까.’ 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왔을 때, 카론 경은 여전히 왕자님의 방문에 기대어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은 모습 그대로 푸른 달빛에 노출된 그의 모습은 차 라리 아름다운 얼음 조각이었다. 나는 집이 아닌 곳에서는 누워서 잠들지 못해, 라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라서 저런 밀착 경호까지는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왕자님도 자신을 그렇게 경호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론 경에게 있어서 저토록 자신에게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일상이리라. “아직 안 자고 있었나.” 그리 가깝게 다가간 것도 아니었는데 가늘게 눈을 뜬 카론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살풋 잠들어 있었는지 약간 흐릿한 눈빛이다. “아하하. 잠이 안와서요.” ‘알테어 님에게 바람맞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야 없 는 노릇이라 나는 우물쭈물 둘러댔다. 실은 당장이라도 눕기만 하면 꿈나라 로 직행할 정도로 졸리다. “카론 경. 피곤하시면 저와 교대할까요?” “아니 됐다. 나는 이쪽이 편해.”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에 홀로 서서 밤을 보내는 것이 푹신한 침대에서 잠드는 것보다 편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카론은 결국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여튼 어떤 의미에서는 나보다도 더 어른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 다니까. 19. 사실 수업 시간에 (그것도 10대 학생들의 수업에) 아이히만 대공 같은 국 제적 거물을 초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이다. 하지만 또한 농담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팔마시온이었다. “엔디미온 경이십니까?” 왕자님과 함께 강의실로 향하는 내게 직원으로 보이는 자가 다가와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강의실 조교로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내가 왜 조교까지 해야 해!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께서 엔디미온 경을 조교로 쓰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그렇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히만 대공은 날 자주 애용해 주신다. 내가 무슨 부담 없이 나눠 쓰는 왕실 비품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이 영광을 거절했 다간 ‘허허, 그래?’라고 웃으시면서 총을 뽑으실 것이 뻔하겠지. 노트들 을 품에 안고 있는 왕자님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아이히만 대공이 엔디미온 경을 꽤 아끼는 것 같아 기쁘오.” “하아. 저도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 할아범은 단지 심술 맞은 것뿐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강 의실로 들어갔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들은 말은 학생들끼 리의 ‘결투 신청’이었다. 무슨 일인지 (뭐 또 시시한 이유겠지만)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 오른 렌 돌프 왕자가 콘스탄트의 루체른 왕자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네 놈과는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가 없다! 결투다!” 부하격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폼이 완전히 두목감인 루체른 왕자는 렌돌프의 결투 신청에 코웃음을 쳤다. “흥. 베르스의 왕자 따위에게 도움이나 받는 한심한 약골이 내게 결투를 신청해?” “뭐라고! 감히 날 모욕해! 야만스런 남쪽 나라의 얼간이 왕자 놈 주제에!” 모욕당한 건 네가 아니라 우리 왕자님이야! 자신의 아버지 바쉐론 국왕을 쏙 빼닮은 단단한 체격의 루체른은 거의 선 전포고에 가까운 말을 하며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 “내 콘스탄트가 이 마키시온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라. 황제의 장난감 병정 놈.” 으이구. 귀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분위기는 거의 렌돌프가 루체른의 멱살을 잡을 험악한 상황까지 가고 있었고 그 와 중에도 교활한 이오타의 왕자 녀석은 둘의 싸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 고 이 폭발 일보직전의 상황, 갑자기 굉음이 터졌다. 타아아아앙! 우아악! 뭐야! 나를 포함 학생 모두가 엄청난 총성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교단을 바라봤다. “자리에들 앉거라.” 총성의 근원은 바로 인지한 미소를 만면에 품은 아이히만 대공이었다. 그 리고 그 순간 총알에 직격당한 샹들리에가 바닥에 떨어지며 와장창 깨져버 렸다. 그러나 태연한 표정으로 시가를 꺼내 무는 철혈대신 아이히만. “앉으라니까?” 건방짐이라면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왕족 귀족 학생들마저도 무시무시 한 위압감에 질린 채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결투고 자시고 더 이상 성질 건드렸다간 송장이 되서 이 강의실을 나갈 것 같다는 설득력 있는 불 안감이 머리를 스치는군. 도저히 노인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다부진 체구를 완벽한 검은 정 장으로 감싸고 하얀 장갑에 회색 실크 타이를 두르고 백발의 머리를 하나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긴 아이히만 대공의 모습은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거나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상대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낼 위인처럼 보였다. “엔디미온 군. 뭐하고 있나. 이쪽으로 오게.” 아이히만이 날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난 졸래졸래 걸어가 교단 앞에 섰다. 명색이 왕족들 앞인데 경이라는 호칭을 써주면 얼마나 좋아. “자 그럼 수업을...” “아이히만 공작.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순간 목숨이 아깝지 않은 누군가가 아이히만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 어나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이오타의 둘째 왕자, 즉 쇼메의 동생이 었다. 아이히만은 슬쩍 그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른바 1차 경고다. “네 이름은?” “저는 베릴 블룸버그. 쇼메 형님의 동생입니다.” “호오. 그래?” “아이히만 공작 같은 분이 베르스라는 보잘것없는 나라에 계신다는 것은 세계적인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영광이로군.” 그러나 아이히만의 눈빛은 ‘죽을래?’였다. 2차 경고로군. “또한 형님께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허허. 쇼메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거 의외로구나. 나는 그 녀석이 내게 암살자를 보냈을 때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지 뭐냐. 존경하는 스 승에게 독침을 날리다니 참 기특한 녀석이야, 쇼메는.” “그, 그랬습니까?” “응. 그랬다. 그러니까 닥치고 앉으려무나.” 아아. 이것은 역시 누가 봐도 인자하고 포용력 넘치는 교사의 모범이 아 니던가... 라고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 못하겠군. 당황한 베릴 왕자가 앉은 뒤에 아이히만은 학생들을 훑어보며 담배 연기를 흘린 뒤에 다시 입 을 열었다. “난 사실 어린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니 전혀 안 좋아한다. 증오 하지.” 분위기는 갈수록 싸늘해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우리 망할 임금이 이번에 또 나랏돈 날려 먹는 바람에 그것을 메울 돈을 벌기 위해서란다.” 아이히만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폭소 사이로 자비로운 미소를 한껏 담은 대공의 짧은 한마디가 파고들었다. “닥쳐” 일순간 강의실에 누구 하나 입 뻥끗 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고요가 내려 앉았다. 하여튼 아이히만은 마키시온의 백만 대군 앞에서도 태연하게 담배 를 피워물 사람이다. 내가 다 식은땀이 나는군. 아이히만은 난감하게 웃고 있는 페르난데스 왕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이란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한다.” 누가 말했더라, 아무튼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 그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정치야 말로 전쟁의 연장이다. 국민들과의 끝없는 투쟁이지.” 지독한 논리다. 하지만 한편 반박하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유사 이래 언제나 지배층은 국민들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 신들이 하는 말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멍청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지 금 너희가 이런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은 바로 너희가 지배층이라는 의미야.” 담배를 비벼 끄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오직 하찮고 자극적이고 시시껄렁한 것에 흥분하 도록 만든다. 본질에 접근하려는 자는 모반이니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다 느니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제거한다. 결국 정치란 국민들의 눈을 도려 낸 채 지배층이 던져주는 저질스런 음식만 퍼먹도록 만들고 단순한 눈속임 에 개처럼 돼지처럼 만족하도록 유도하는 ‘전쟁’이며 '상술'이다. 어때, 쉽고 간단하지? 원숭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나?” 거의 폭언에 가까운 빈정거림에 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가끔 아이히 만이 악마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그리고 아이히만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번뜩이는 눈매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아. 이제부터 이 말에 반박하고 싶은 자는 손을 들고 말해라. 오늘의 수업은 이것이다.” 모두가 고요했다. 자신이 남을 지배하는 것은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한 것 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왕족들이 뭐라고 반박할 수가 있을까. 그때 페르난 데스 왕자님이 분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고 아이히만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해라. 약소국의 왕자.” 그리고 왕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업은 시작되었다. 20. 아이히만 대공의 강의가 천만다행으로 사상자 없이 끝난 이후, 다음 수업 의 초빙강사는 오르넬라 성녀님이었다. 본래는 콘스탄트 교황청에서 추기경 을 파견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마키시온과의 신경전 때문에 팔마시온의 수업에는 자주 오르넬라 님이 초빙되고는 한다고 한다. 약소국 베르스에서 자그마치 두 명이나 초빙되었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영광이다. 그러나. “왜 안 와?”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오르넬라 님이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였다. 오르넬라 님이 아이히만 대공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성격의 소유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모조리 긴장에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타나질 않으니 불안할 만도 하다. 하지만 그 분을 자주 겪어본 나와 왕 자님은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전 수업에서 감히 아이히만 대공과 엄청난 설전을 벌였던 페르난데스 왕자님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 았다. 그리고 한 직원이 강의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이 모두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본래 강의실에는 교사와 학생 외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 아이히만 대공의 악질적 농간에 의해 나는 계속 강의 조교로 남게 되었으니 까 예외지만.) 그 직원은 황송한 표정으로 왕족들에게 인사를 올린 뒤에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휴강 장담하건데, 강의료는 이미 받아 챙기셨을 것이다. 21. 오르넬라 님이 베푼 충격의 수업 이후, 다음 수업의 교사는 놀랍게도 국 제적인 예술가 세드릭 씨였다. 아아,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그늘진 눈매 가 여전히 좀 쓸쓸해 보이긴 하지만 다시 세공을 시작한 뒤로 눈빛에는 생 기가 넘쳤다. 그리고 이제는 세드릭 씨의 공식적인 수제자가 된 맹인 소녀 이샤 양 역시 세드릭의 팔을 잡은 채 들어왔다. 이샤의 귀에 걸려 있는 고 풍스러운 은 귀걸이는 세드릭 씨가 다시 첫 번째 복귀 작품을 선물한 것이 라고 한다. 부러워라. 난 그 고생을 하고도 은 숟갈 하나 못 받았다. 아무런 도구도 없이 몸만 온 세드릭은 예술론에 대해 강의하기 이전에 특 유의 고소(苦笑)부터 보였다. 그것도 나를 보면서 말이다. “이름이 뭐였지?” “엔디미온 키리얀 입니다.” “아아 그래. 오랜만이군.” 또 물어보면 잊지 않도록 등짝에 적어 줄 테다! 정말 예술가들은 자기 관 심 밖의 것에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니까! “말재주도 없고 사실 할말도 없지만... 속된 명성 하나 덕분에 이런 부 담스런 곳까지 끌려왔군요. 본래 최고의 예술가란 최악의 인간인데, 저 같 은 최악의 인간이 한순간이라도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역시 죄악이랄까. 하하.” 세드릭은 곁에 있는 이샤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조금 찡그리며 웃었다. 냉소적이면서도 자존심 센 말투까지도 여전하시네. 하지만 ‘최악의 인간’ 이 가르친 수업은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세드릭 씨의 말대로 그에게는 복 잡한 이론도 체계적인 논리도 없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설득력이 있었다. 비록 세드릭 씨에게 ‘강의’란 자신의 흥미 밖에 속하는 것이라서 예술가답 게 대충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인상이 팍팍 풍기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수업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사실은 ‘역시 이샤 양과 사귀고 있 군.’이랄까. 10년도 더 어린 제자와의 로맨스라니, 후후 그야말로 범죄자, '최악의 인간’이 맞긴 맞네. 22. 그리고 식사 이후 이어진 다음 강의는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로 시작되었다. “실습 없이 이론만 강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바로 독물학의 대가이자 대 아카데미 소드람의 상급교수 메데이아였다. 이것 참 무지하게 공교롭군. 그녀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 었다. 트레이드마크 같은 하얀 가운과 쌀쌀맞은 이미지의 은테안경. 그야 말로 카론 경의 여성 버전. 어디를 봐도 ‘동생에게 속죄하고 싶은 착한 여자’라는 이미지는 찾기 힘들다. 솔직히 함부로 말 걸었다간 ‘꺼져버려. 쓰레기.’라는 말을 들어버릴 것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그런 그녀가 그 차가운 시선으로 날 흘낏 바라봤다. “여기는 소드람이 아니라서 본격적인 실험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쉽군요.” 왜, 왜 날 보며 그런 말을! “마침 좋은 재료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녀가 싸늘한 미소를 보이자 난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때 즐기고 있었던 거야! 독의 마녀! 냉혈여자! 또 다시 임상실험재료 14호가 되는 건 절대 사양이다! 물론 메데이아 교수는 수업 끝까지 직접적으로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서로 알아서는 안 되는 관계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가는 그 순간까지 그때의 악몽이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 되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리며 와들와 들 떨어야만 했다. 23. “참 제미있는 수업들이었소. 엔디미온 경.” 수업을 다 마치고 나오며 왕자님이 그렇게 말했고 나도 방긋 웃으며 동의 했다. “아이히만 대공이 엔디미온 경을 무척이나 총애하는 것 같소. 좋은 기회 도 주고.” “기회요?” “어찌 기회가 아니겠소. 수업에 계속 참관할 수 있도록 해서 지식과 친분 을 넓힐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니.” “아!” 나는 악취미 할아범의 괜한 심술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런 고마운 의 도가! 하지만 난 그 초죽음 행정부에는 절대 안 갈 거다! 키스 밑에 있는 것도 고난의 연속이지만 아이히만 밑에 있었다간 정말 격무에 시달려 20대 돌연사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렌돌프와 마키시온 패거리들이 의기양양한 표정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까 루체른 왕자에게 그렇게 당해놓고 또 뭐가 저리도 기쁜 걸까. 렌돌프는 왕자님을 보자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지배자라도 된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야! 페르난데스!” “응?” “잘 지켜봐라. 내일부터는 우리 마키시온의 왕족들이 다른 놈들을 모조 리 몰아낼 테니까." “무, 무슨 소리야?” “걱정하지 마. 너는 내 밑에 있으니까 당할 염려는 없어. 하하하!” 이봐. 왕자님이 언제부터 네 녀석 밑에 있다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 대체 렌돌프에게 뭔 비밀병기가 생겼기에 저렇게 득의양양한 것인지 모르겠군. 그런데 그 ‘비밀병기’는 나로서도 의외의 것이었다. “내일부터 마카시온 황실의 직계 황손(皇孫)이신 아메데오 전하께서 이 팔마시온에 입학하시게 되었다고!” 이 세계 최고 지배자 가문인 마카시온 황족 중에서도 황제의 손자라면 그 위세는 분명 어마어마할 것이다. 지금까지 마키시온의 왕자 연합을 이끌던 렌돌프로서는 든든한 두목이 오는 셈일 것이다... 라고 말하니까 완전 건 달집단 같군. 아무튼 진청룡의 황실직속 친위대인 프론티어 뱅가드들의 호 위를 받으며 팔마시온을 활보할 아메데오를 떠올려 보니까 생각하는 것만으 로도... ‘아아. 머리 지끈거려.’ 나와 왕자님은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돌아왔다. -Blind Talk 무지막지한 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시달리느냐하면 손발이 묶인 채 무자비하게 '뚜드려맞는' 것처럼 온 몸이 아픕니다. 아아, 용서 없는 독감. 그건 그렇고... 아 그리고 저는 별로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이나 유명한 전쟁 정치론 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니고 그걸 논하는 것도 별로 즐기지 않고 또한 저 스스로가 삐딱한 인간이기 때문에 소설 안에 계몽주의적인 코멘트 넣는 것 도 싫어하는 편입니다.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할 뿐입니다. 이번 편도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군요. 오탈자 먼저 사과드립니다. 자 그럼 다음 편에서. 이번 크리스마스는 꼼짝없이 혼자 방구석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어야 겠군요. 에이이! 비나 와라! e-mail : billiken77@kornet.net 포르노 그라피티의 메릿사를 들으며 (강철의 연금술사 op송이라지요? 애니메이션은 시간이 없어 보지 못했지만 음악은 어떤 분이 보내주신 덕에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 #092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24. 마라넬로 황제의 손자가 온다. 아메데오 황손이 온다는 소식은 곧바로 팔 마시온을 뒤덮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전쟁통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본래 마키시온의 황족들은 따로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데 황제가 무슨 바 람이 불었는지 자신의 손자를 이 팔마시온에 보낸 것이다. 콘스탄트의 왕 자 루체른과 이오타의 베릴 왕자를 비롯해서 마키시온과 사이가 좋지 않은 왕족들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해진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반면 마키시 온의 왕족들은 마치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 들떠 있었다. 뭐, 나도 조 금은 말만 들어오던 황족이 어떻게 생긴 사람일지 (보나마나 눈코입 달려 있는 인간이겠지만)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황 제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폭군이라면 난 왕자님께 이 학교를 떠나는 것을 강력하게 건의해 볼 작정이다. “왔다! 왔어!” 팔마시온 앞에 황손이 탄 마차가 도착했다며 술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 와 왕자님은 문 밖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기대 반 불안 반에 찬 얼굴로 말했다. “왕자님. 한번 보러 가볼까요?” 이건 마치 서커스 구경 가고 싶어 하는 촌동네 사람 같지만, 뭐 어쩔 수 없다. 확실히 베르스는 세계 속의 ‘촌동네’니까. “응. 나도 궁금하오.” 왕자님 역시 사탕을 앞에 둔 어린애처럼 만면에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아닌가. 역시 왕자님이 아무리 근엄해도 바탕은 호기심 많은 소년이로군. “카론 경은 안 가요?” “별로” 안경을 쓰고 이 학교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을 읽던 카론은 전혀 내키지 않는 듯 날 바라보지도 않은 채 거절했다. 카론 경은 마키시온 황족을 안 좋아하는 건가? 25. 아니나 다를까 팔마시온의 정문 앞은 황족 아메데오를 ‘구경’하기 위한 학생들과 교직원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그리고 그 인파 사이를 거 대한 마차 다섯 대가 일렬로 지나가 멈춰 섰다. 그 마차에 마키시온 제국 황실의 상징인 황금 키마이라 인장이 새겨진 것으로 봐서 분명 그것이 아 메데오 황족이 탄 마차이리라. ‘기가 질리는군.’ 마차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엄청난 수의 기마 친위대도 위압적이지만 언제 봐도 소름끼치는 키마이라 문양이 박힌 시커먼 마차들은 마치 거대한 육식 동물 같았고 같은 색으로 맞춘 흑마(黑馬)들의 위용이란 - 차라리 악취미 였다. 상대방을 주눅 들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나 할까. “프론티어 뱅가드다.” 다섯 대의 마차 문이 열리며 검은 롱코트를 입은 자들이 나오자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심지어 콘스탄트의 루체른 왕자는 대놓고 적대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까마귀 깃털 장식 같은 것이 달린 코트 덕분에 저승사자를 연상 케 하는 사내들은 바로 나도 예전 알테어 님과 마키시온을 도망쳐 나올 때 부딪쳐 본 적이 있는 마키시온 군의 정수 프론티어 뱅가드였다. 그들을 지 휘하는 진청룡 라이오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모습만으로도 고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의 호위 속에서 황손 아메데오가 마차에서 내렸다. 곧바로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를 비롯해 사 람들의 입가에서 믿겨지지 않는다는 신음소리가 터졌다. ‘저, 저 아이가 아메데오?’ 미소년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확실히 평생 숟가락 한번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 곱게 자란 외모다. 실크 같은 금발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고 황족 답게 얼굴에는 옅은 화장까지 했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괴물 마라넬로 황 제의 손자를 연상케 하는 기백이랄까 광기랄까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도 리어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이 안가는 인형 같은 차림새에 병약하다는 표 현이 어울릴 만큼 툭하고 건드리면 부러질 유리조각처럼 병약해 보였다. 아 메데오와 비교하자면 페르난데스 왕자님 쪽은 ‘건강미가 넘치는’ 이라는 수식어를 써도 좋을 정도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 왕자님이 조심스럽게 내게 속삭였다. “다리가 불편한 줄은 전혀 몰랐소.”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선천적인 장애가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물 론 내 룸메이트인 지스 경도 병마에 시달리긴 마찬가지지만, 그 녀석은 표 독스러울 정도의 성격 덕에 절대로 남에게 아픈 모습 안 보여주려고 발버둥 치는 반면 아메데오는 다가가기도 미안할 정도로 가련해 보인다. 지독하게 건방진데다가 산해진미만 먹고 커서 황소 같은 몸집을 가진 황 족을 상상했던 나와 다른 사람들로서 도자기 인형 같은 아메데오의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고 좀 맥이 빠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팔 마시온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왕자님도 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독(旅毒) 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아메데오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창고’로 돌아갔다. 아메데오는 황제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저런 모습을 보 면 억지로 끌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어째서 저렇게 병약한 손자를 이곳까지 보낸 것일까. 26. 방에 돌아오니 카론 경이 잠들어 있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 눕지 않는다는 그의 신조처럼 침대 한켠에 걸터앉아 벽에 머리를 조용히 기댄 채. 깜빡 잠이든 것인지 얼굴에는 미처 벗지 못한 안경을 걸치고 있었고 두 손 은 예의 책을 잡고 있었다. 상당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항상 이렇게 조금씩 풋잠을 자는 것으로 견디고 있는 것일까. 침대에 뉘어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정색을 하고 거절하겠지. 잠들어 있는 카론을 본 왕자님이 신기한 듯이 말했다. “신기하오.” “뭐가요?” “카론 경이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오. 잠든 모습은 상상 이 가질 않았는데...” “아하하. 전 두 번 봐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지. 시답잖은 품평회가 이어지고 있을 때 슬쩍 눈 을 뜬 카론이 우리들을 보고는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 나는 것이었다. “오셨습니까.” “카론 경. 피곤해 보이오.” 시선을 슬며시 돌린 카론 경은 속상하다는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젯밤, 골치 아픈 녀석 때문에...” “골치 아픈 녀석?”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카론을 바라봤지만 카론은 성격대로 더 이상 말 하지 않은 채 긴 머리를 손 갈퀴로 쓸어내리며 매무새를 다듬는 것이었다. 항상 키스가 카론의 반만 닮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카론이 유유자적한 키스의 성격을 좀 닮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어떻게 그런 정 반대의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낼 수가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옷장을 열고 있는 왕자님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오늘 수업은 뭐죠?” “수업은 없소만, 사냥대회를 연다고 하오.” “사냥대회?” “난 정말 그런 것에는 자신이 없소.” 왕자님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아아, 기억나는군. 예전 왕자님의 화살을 엉덩이에 맞고 광분하는 멧돼지와 혈투를 벌였었지. 설마 또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27. 팔마시온의 사냥대회란 예상대로였다. 학교 측에서 지정된 사냥터에 토끼 니 여우니 하는 사냥감들을 미리 풀어 놓고 정해진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아온 사람이 우승하는 것이다. 수렵복을 입고 말 위에 올라탄 채 사냥터에 나타난 왕자님의 모습은 근엄 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귀여울 지경이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부러운 시선으 로 왕자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유는 말 때문이었다. 왕자님이 타고 있는 말은 희대의 명마 카론 주니 어였다. “카론 경.” 선두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던 나는 자신의 말을 빌려준 카론 경에게 물었 다. “이 말,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말에 대해 잘 모르는 나마저도 이 우람한 흑마는 보기만 해도 탄성이 나 올 지경이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소리는 이런 말(馬)을 두고 하는 말 (語)일 것이다. 카론 경은 푸르릉 소리를 내며 한껏 위용을 뽐내고 있는 자신의 말을 바 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은 본래 야생마였다.” “예? 그래요?” 대충 굉장한 군마(軍馬)끼리 교배해서 나온 것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의외 였다. “병영에 뛰어 들어와서 난동을 부릴 만큼 겁이 없는 녀석이었는데 키스 가 길들였지. 덕분에 지금도 이 말은 키스를 보면 겁을 집어먹고 얌전해져.” “헤에. 놀랍네요.” 충격의 연속이로군. 카론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 눈을 감은 채 중 얼거렸다. “자기는 필요 없다면서 나한테 줬다. 쓸데없는 이름까지 붙여서.” 난 ‘그래서 카론 주니어?’라고 생각하면서 풋! 하고 웃었지만 카론이 쏘아보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키스의 짓궂음이 전염된 된 것 같아 걱정 이로군. 그리고 대회가 시작되었다. 28. 다리가 불편한 황족 아메데오 까지 참여한 이 거창한 사냥대회에서 사냥 에는 별 관심도 없이 유유자적한 사람들은 아마 우리들뿐일 것이다. 사냥 을 싫어하는 왕자님은 숲 속에 들어가 다른 왕족들과 멀어지자 곧 말에서 내렸고 카론 경은 나무에 기대어 가져온 책을 펼쳐 들었다. 방한복도 없이 겨울 산 속에 들어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왕자님이지만 주최 측에서 풀 어놓은 무방비한 사냥감들을 화살로 쏘는 일은 도저히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차가운 숲 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왕자님이 예전부터 굉장히 궁금했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엔디미온 경. 왕실에 오기 전에 호스트를 했다고 했는데, 호스트란 정 확히 어떤 직업이오?” “그, 그건...” 갑작스런 기습에 난 말문이 턱 막혔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서비 스업입니다.’라고 대답해 봐야 왕자님은 호기심에 찬 얼굴로 ‘그 고도의 기술이 뭔지 말해 주시오.’라고 물어보겠지. 이건 마치 어린아이에게 ‘난 어떻게 낳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은 심정이로군. 뭔가 지원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카론 경을 바라봤지만 저쪽에서 날 슬쩍 보던 카론은 냉정하게 시선을 돌려 다시 책을 읽는 것이었다. 너무하는구만.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봤지만 사전에는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질 않았소. 오르넬라 성녀에게도 물어봤지만...” “물어봤더니요?” “나도 재능이 있을 것 같다면서 묘한 눈웃음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소.” “누, 눈웃음이요?” “응. 왠지 오싹했소.” “......” 성녀님. 그 무슨 성희롱입니까. 왕자님이 그 웃음의 이유를 알게 되면 어 린 마음에 상처받게 된답니다. “말해주시오. 엔디미온 경. 어째서 내가 호스트에 재능이 있다는 거요?” “그, 그러니까 그건 말이죠...” 왕자님의 왕성한 학구열이 엉뚱한 곳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순진한 왕자님은 모르는 신비의 세계, 그리고 훌륭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하는 지혜... 일리가 없지. “그 직업은 그러니까 15살 때 촛불 밑에서 재롱을 떨며... 아냐, 그게 아니야!” 내가 말하다가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엔디미온 경.” 한참을 고심한 나는 결국 내가 그 일을 하며 항상 다짐하던 마음을 떠올 렸다. 기사라면 기사도랄까, 내겐 나름대로 신념이랄까.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진심으로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일입니다. 적어도 제겐 그랬 습니다.” “그거, 광대를 말하는 거요?” “아뇨. 그건 아니고... 아니 비슷할지도? 아, 아닌가?” 사실 무시당하고 오해당하기 십상인 그런 직업에 애정을 갖기란 결코 쉬 운 일이 아니다. 나 스스로도 처음에는 억지로 했으니까. 그녀가 떠나기 이전까지는 그랬다. “어떤 직업이든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봐요. 청소부도 성군(聖君) 과 같은 마음으로 자기 일을 한다면 그는 훌륭하게 도시를 통치하는 것도 다름이 없고 광부도 가족을 위해 시커먼 갱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자(聖子)이니까요. 기사가 기사도를 지키는 것과 같은 것 이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내 엉뚱한 말에 왕자님은 나름대로 납득한 것 같았다. 그때 책을 탁 덮은 카론이 말했다. “기사도를 지키는 기사란 그리 흔치 않다. 엔디미온 경.” “그런가요?” “만약 누구나 기사도를 지켰다면 처음부터 기사도라는 단어가 생기지도 않았겠지. 나는 호스트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자기 직업이 아무리 하찮아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다.” 카론 경이 먼저 입을 여는 일은 아주 드물기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기뻤 다. 조금씩 그의 진심에 접근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헤헤. 하지만 카론 경이야 말로 호스트에 꽤 재능이 있어 보이는 걸요오?” “엔디미온 경.” “예?” 그는 나무에 기댄 채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점점 키스를 닮아가는 것 같아 무척이나 걱정스럽다.” “...그건 나도 걱정스럽군요.” 난 쀼루퉁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물론 키스가 확실히 전염되는 인간이긴 하지만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하실 것까지야, 정말이지 매사에 심각한 사람이라니까. 키스와 있을 때도 키스가 달라붙어서 열 마디를 하 면 한마디 정도 마지못해 받아주고는 귀찮다는 듯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 고는 하니까. 항상 입에 ‘지루해요오. 졸려요오.’를 달고 사는 키스 경과 는 정반대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랄까. 그리고 보니까 키스는 대체 뭐하러 여기 왔고 지금은 또 어디 있는 거야? 자신의 유일한 업무인 브리핑까지 내 팽개쳐 놓고 여기까지 청소하러 왔다는 말은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것이다. 뭐, 워낙에 인간의 상식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청소하러 왔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사냥대회를 가장한 피크닉’은 계속 되었다. 비록 날씨는 추웠 지만 숲 공기는 깨끗한 물처럼 질리지 않았고 우리들은 그 속에서 화살 한 번 쏘지 않은 채로 망중한을 즐겼다. 비록 야생마의 피가 흐르는 카론 주니 어가 날뛰고 싶다는 듯이 계속 푸르릉거리며 우리들을 바라보긴 했지만 말 이다. 슬슬 군것질거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할 즈음, 갑자기 거친 종 소리가 숲을 뒤덮었다. 곳곳에 있는 초소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 분명했다. “아? 이게 무슨 소리야? 사냥대회가 벌써 끝났어?” 그리고 금세 숲 곳곳에서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아우성소리가 들리기 시작 하자 카론 경은 침착하게 왕자님을 자신의 뒤에 숨긴 뒤에 주변을 둘러보 았다. “이건 경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군.” 귀를 때리는 종소리가 끊이질 않고 사람들의 고함소리도 사방에서 들려오 기 시작하자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누가 맹수에게 물리기라도 한 건가? 잠시 동안 눈을 감은 채 주변 상황에 집중하던 카론 경은 조용히 눈을 뜨며 말했다. “전하. 아마도 자객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자객이라고 했소?” 하도 태연하게 말하는 바람에 놀라는데 몇 초가 걸렸다. 왕자님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카론 경을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주변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그런 말이 들렸습니다.” 맞아, 카론 경의 청력은 내 숨소리의 특징까지 캐치할 수 있었지. 확실히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하고 싶은 사람’ 일 순위라는 것은 부정할 수 가 없다. 소리 없이 검을 뽑은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 습니다. 제게 곁에 있을 테니 안심하시길.” “응. 알겠소. 카론 경.” 왕자님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소국의 왕자를 노리는 얼 간이 자객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적의 숫자와 위치도 모른 채 함부로 움직 여서 일부러 노출당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 사람 신경을 긁어내는 듯한 경보음과 함께 사람들이 여기 저기로 몰려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다른 호위 기사들은 ‘왕자님! 진정하세요! 당장 여길 피해야 합니다!’라고 소란을 떨면서 허겁지겁 주군 을 끌고 다니는가 보다. 진정해야 하는 건 네 놈이라고. 워낙에 냉철 침착한 카론 경 덕분인지 별로 긴장감이 들지 않은 나는 이 런 혼란한 분위기에 혀를 차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범한 자객이네요. 대낮에 제국 한복판에 나타나 다니.” “도리어 이럴 때가 좋지.” 카론 경은 마치 암살 경험이라도 있는 냥 주변을 훑어보며 엷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무언가를 느낀 카론 경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 올리 며 검을 들었고 곧 이어 검은 제복을 입은 여섯 명의 사내들이 우리 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프론티어 뱅가드?’ 그들의 검은 망토에 수놓아진 황금 키마이라 인장으로도 정체는 짐작하기 충분했다. 적군은 아니지만 확실히 저승사자 같은 어두운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왕자님을 보며 간략한 예를 표한 뒤에 입을 열었다. “현재 아메데오 전하를 노리는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나타나 사냥대회가 중지된 상황입니다.” “그럴 수가...” 왕자님의 표정에 걱정스런 기색이 퍼졌다. 아메데오를 노린다면 아마도 황제를 싫어하는 어떤 단체가 벌인 일이 아닐까? 그들이 말을 이었다. “아직 암살자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저희가 안전한 지역으로 왕자님을 안내하겠습니다.” “고맙지만 경호는 나 혼자로 충분하다.” 경계를 풀지 않은 카론 경은 단번에 그들의 호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 들 역시 곧바로 대답했다. “상부로부터 왕족 분들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희도 같이 경호하겠습니다.” 카론 경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왕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 도 학생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팔마시온으로서는 그 신용도에 금이 가 는 것이니 최정예 부대 프론티어 뱅가드를 동원해서라도 안전을 지키고 싶 은 심정일 것이다. 왕자님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아메데오 황손은 안전하오?” “저희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다리를 못 쓰는 황손이 위험에 처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무 표정한 얼굴로 대답할 뿐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사냥을 시작할 때 아메데 오는 티어스 선생과 함께 있었다. 사람을 함부로 의심해서야 안 되겠지만, 확실히 티어스에겐 착실한 선생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지 않 았던가. 뿌연 불안감을 느낀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아메데오 님을 찾아보겠습니다.” “엔디미온 경. 그건 위험하오.”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한 명이라도 더 찾아보는 것이 좋을 테고. 다리가 불편하니까 혼자서는 움직이기도 힘들 테고요. 게다가 여기 는 카론 경과 프론티어 뱅가드 분들까지 지키고 있으니까 충분히 안전하니 까요.” 프론티어 뱅가드들의 전투력이 세계 최강임은 이미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특별히 마키시온 황실에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여기 있을 바엔 한 명이라도 더 찾아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허락을 바라는 표정 으로 왕자님을 바라보았고 곧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허가가 떨어졌다. “알겠소. 하지만 조심하시오.” “감사합니다. 전하.” 그때 카론 경이 말했다. “내 말을 가져가라. 그리고 안장에 검이 한 자루 있으니 필요하면 쓰도록.” “아? 이거 제가 타도되는 거예요?” “그건 저 녀석에게 물어봐라. 자존심이 센 놈이라서 여자가 아니라면 나 와 키스 외엔 등을 허락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 말에 잔뜩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카론 주니어 위에 올라탔다. 그 랬더니 이 명마는 날 떨어트리기는커녕 앞발을 구르며 좋아라, 콧김을 뿜 는 것이 아닌가. 차가운 눈매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카론 경이 말했다. “그 녀석이 널 인정했거나 혹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아마도 후자인 것 같습니다만. 에이이! 어찌되었든 지금은 좋아! 난 말머 리를 틀어 숲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9. 설마 티어스가 암살자와 한패?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난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분이 들었을 때는 열에 아홉은 안 좋은 일이 생긴단 말이야. 아직까지도 내 성 별을 착각하고 있는 카론 주니어는 내가 이끄는 대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숲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예전 키스나 카론 뒤에 탄 적은 있었지만 직접 앞에서 고삐를 잡아보니까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거의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 나는 속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폭주마를 무슨 수로 길들였 다는 것일까, 키스는. 제풀에 당황해서 숲을 헤매는 왕족들을 몇 차례나 지나쳤지만 아마데오의 모습도 암살자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의 말도 동쪽에 있다는 둥 서쪽에서 나타났다는 둥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그러던 중 나는 숲 속에 서 있는 티어스 선생을 보았다. 그것도 말이 너무나 빨리 달려서 잘못하면 놓치고 지나갈 뻔했다. 난 말고삐를 잡 아끌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멈춰! 멈추라고! 우아악!” 내 고함소리를 들은 카론 주니어가 아뿔싸! 하는 기분으로 눈을 번쩍 뜨 며 대번에 날 낙마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푸르르릉 소리를 내며 땅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를 흘겨보는 게 아닌가! ‘이 자식, 내가 남자라는 것을 아니까 대번에 태도가 돌변해 버리는군. 욕구불만이냐!’ 이 망할 놈의 말은 착각한 자신이 한심한지 나무쪽으로 다가가 머리를 들 이받기 시작했고 곧 티어스가 다가오며 실웃음을 보였다. “아주 인상적이네요. 항상 이런 식으로 말에서 내리시나요?” 내가 벌떡 일어나며 티어스를 쏘아보자 그녀는 곧 그 반듯한 눈썹을 찡그 렸다. “뭐에요. 이 정도 말에 기분이 상한 거에요?” “지금 아메데오는 어디 있나요!” “네? 그건 왜 갑자기...” 그녀는 정말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고 그것이 내 불안감을 더 자극했다. “암살자가 황손의 목숨을 노리고 있어요! 출발할 때 같이 있었잖아요!” 그녀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암살자가 아메데오 님을 노려요? 그럴 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가 점점 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 했다. “아메데오 님은 대회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서 팔마시온으로 돌아가셨거 든요. 몸이 아프다면서 말이죠. 그런데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그녀의 말이 귓가에 겉돌았다. 분명 프론티어 뱅가드들은 아메데오를 노 리는 암살자가 있다면서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았던가. 아메데오가 이미 사 냥터에 없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럼 왜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에 게 왔을까? 그것도 약소국의 왕자에게는 과분할 지경인 여섯 명씩이나. “그럼 설마 진짜 암살자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론 주니어에게 달려갔다. 그 놈은 날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몸을 틀었지만 난 억지로 안장 위에 올라타며 말 모가지를 꽉 잡아 틀고는 커다랗게 외쳤다. “지금 만큼은 여자로 생각해도 좋으니까 어서 달려! 낙마시키면 구워먹 어 버리겠어!” 내 기백에 눌린 것인지 아니면 협박에 주눅이 든 것인지 서서히 몸부림을 멈춘 육중한 수말은 곧 땅을 박차며 날아가듯 달리기 시작했다. 내 긴 금 발이 순식간에 길게 늘어졌다. 30. 20분도 되지 않아 카론 주니어는 나를 왕자님이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주 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내가 본 것은 프론티어 뱅가드를 상대로 싸우고 있 는 카론 경의 모습이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제길! 어째서 왕자님을 노리는 거야!’ 보통 경우라면 제아무리 기사라도 여섯 명이나 되는 프론티어 뱅가드를 상대로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론 경은 이미 네 명을 처리했고 나머지 두 명 역시 분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일단 후퇴한다.” 그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졌지만 카론 경은 뒤쫓지 않았 다. 그의 뒤에 있던 왕자님이 달려오는 나를 보고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엔디미온 경! 무사해서 다행이오!” “아메데오는 이미 사냥터에 없었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사방에 쓰러져 있는 제국군의 시체를 둘러본 나는 혼란스런 얼굴로 카론 에게 물었다. 네 명이나 되는 프론티어 뱅가드를 척살하고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카론 경은 싸늘하리만큼 차분히 검에 묻은 피를 떨군 뒤 에 검집에 칼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이 자들이 전하를 노렸다.” “설마 이 놈들이 암살자? 프론티어 뱅가드로 위장하고 접근한 건가요!” “아마도 그건 아닌 것 같군. 이들은 마키시온 제국의 제식 검술을 쓰고 있었다.” 그럼 진짜 프론티어 뱅가드가 페르난데스 왕자님의 목숨을 노렸단 말인가? 하지만 어째서! 나는 카론 경의 목 언저리를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카론 경! 다친 거예요?” “별 거 아니야. 조금 스쳤을 뿐이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을 뿐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채 왕자님의 팔을 잡고 말로 향했다. “전하. 일단 이 나라를 빠져나가겠습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황실에서 파견한 정예부대가 왕자님을 죽이려 들었다는 것이고 - 카론 경의 말대로 그들의 영향권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카론 경은 무언 가를 느낀 듯 곧 발걸음을 멈췄다. “왜, 왜 그러세요?” “엔디미온 경.” “예?” 카론은 날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경의 명예를 걸고 전하를 지켜라.”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십수 명이 넘는 프론티어 뱅가드들이 모습을 드러 내기 시작했다. 난 이를 꽉 깨물며 안장에 있던 칼을 집어 들었고 몇 걸음 앞으로 나간 카론 경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검을 뽑 았다. 아무리 카론이라도 이런 숫자들과 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 만 카론은 흐트러진 구석 하나 없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차가운 시선은 프론티어 뱅가드들이 아닌 다른 한 지점을 향해 있었다. 그 리고 그곳에서 곧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은의 기사 카론. 너와는 항상 안 좋은 곳에서 만나게 되어 유감이로군.” 그는 흑단 같은 제복을 입은 금발의 남자였다. 카론보다도 큰 키와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기이한 금빛의 눈동자. 그에게서 풍겨오는 신성하 다고까지 할 수 있는 기운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 나는 애써서 그 생각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카론이 입을 열었다. “진청룡 라이오라. 또 만나게 되어 나도 유감이다.” 카론 경의 푸른 눈에 처음으로 살기가 올랐다. 아직 검을 뽑지도 않은 채 다가오는 라이오라가 소름끼칠 정도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페르난데스 왕자의 사상과 행동과 판단을 지켜보시고 무척 이나 감동하셨다. 자신의 자식들 중에 그런 인재가 없다는 것을 통탄하실 정도로. 하지만 폐하께서 가장 슬퍼하신 점은 불행하게도 페르난데스 왕자 의 그러한 재능이 폐하께서 바라는 길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 “폐하는 드물게도 두려워하셨다. 자신은 언젠가는 병들고 쇠약해질 것이 며 페르난데스 왕자가 성장하게 되면 늙은 자신이 막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하셨다. 쇼메 왕자는 볼모로 잡아두는 것으로 안심하셨지만, 페르난데스 왕자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으신 것 같다. 그래 서 황제 폐하는 페르난데스 왕자의 목숨을 가져오라 명하셨다. 대신 베르스 왕국에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일종의 질투였다. 왕자님이, 아이히만 대공의 최고의 작품이 성장 하는 것이 너무도 질투가 났던 것이다. 실로 욕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치졸 한 질투가 아니던가. 아무리 돈 밝히는 우리 임금님이라도 자기 자식의 목 숨을 황제에게 빼앗긴 뒤에 국고가 넘치도록 금은보화를 받은 들 기뻐할 리 가 있겠냔 말이다! “카론 샤펜투스. 칙령에 의해서 오긴 했지만 네 목숨마저 거두고 싶지는 않다. 비켜라.” 그것은 마치 신이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차갑고 냉혹한 사신(死神)이었다. 그리고 카론은 그 사신에게 검을 들이대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덤벼라.” “내 검을 또 다시 받으면 너는 죽는다. 부인을 두고 죽을 생각인가.”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다면, 나는 처음부터 기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동안 카론을 바라보던 라이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았다. 검집 에서 뽑혀 나오는 그 검은 기이하게도 빛조차 삼켜버리는 듯한 암흑이었다. “너의 그 푸른 눈, 가져가 주마.” 예전 키르케 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전 세계에서 누구와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신이지만 단 한명, 진청룡과는 싸우고 싶지 않다고. 왜냐 하면 그의 능력은. 파아아아앙! 대지에 몰아치는 삭풍(朔風)보다도 빠른 카론이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 는 최대한의 속도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땅 위에 호선(弧線)을 그리 는 푸른 잔광이었다. 그리고 카론과 라이오라의 검이 충돌하며 마력(魔力) 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열파가 엉켜있는 두 검에서부터 터져 나왔 다. 주변의 모든 눈 더미가 일순간에 녹아내렸고 나무들마저 뿌리 채 흔들 리는 듯한 지독한 힘의 충돌. 그리고 나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섬뜩한 광경 을 목격했다. 카론 경의 몸에서 스며 나오는 붉은빛의 미립자들이 라이오 라의 그 기이한 검으로 마치 연기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와 검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을 빼앗겨버린다.’ 나는 키르케 님에게 들은 그 믿어지지 않는 말을 실제로 확인하며 눈을 꽉 감았다. -Blind Talk 아아, 너무 늦었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2편을 붙여서 올립니다만. 변명을 하자면 역시 독감의 공이 컸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기분이 나빠진 정도의 수준이라서 무시하고 일하고 훌쩍거리는 몸을 이끌고 출판사 망년 회까지 간 것은 좋았는데... 다음 날부터 마각을 드러낸 독감이 제 몸을 좀먹기 시작했고 며칠 간은 일이고 뭐고 거의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몇년만에 아주 제대로 당했군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컴퓨터 앞으로 기어가서 지금 분량의 두 배 는 넘게 작업을 하긴 했는데, 어제 다 지웠습니다. 엔딩까지 다 썼지만 모조리 지웠습니다. 실제 저는 성격상 세페이지를 쓰면 한페이지 쯤은 편집 되어 지워지는 편이지만 지금처럼 원고가 늦어지고 출판사의 인내심도 초읽 기에 들어간 이 마당에 쓴 분량을 다 지우는 것은 실로 자살행위고 다시 쓴 다고 뭐 뾰족하게 잘 된 원고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욕심이랄까, 나름 대로의 성의랄까 어쨌든 모조리 지워버리고 엔딩을 바꾸기로 결심하는 바람 에 이렇게 늦어지게 되었습죠, 네. 지금도 독감과 약기운 속에서 흐리멍텅하게 글을 쓰고는 있지만 당연히 언 젠가는 몸은 좋아지는 것이고 그걸 믿으며 계속 전진하고 있습니다. 아아, 1년 동안 게으르게 지냈던 죄값을 받고 있군요. 아마 다음 편 쯤에서 11화 가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77@kornet.net NightWish의 Walking in the air를 들으며 #093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1화 : 왕자님의 마지막 가을 31. 카론 경이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이미 그의 싸늘한 주검을 봐버린 것 같은 내 마음은 불안을 넘어선 공포였다. 나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 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카론과 라이오라의 혈투를 지켜보았다. 둘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이 숲을 갈랐고 시퍼런 불꽃이 터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시화된 카론의 생명력이 잔 인하게 뜯겨나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순간 즉사했으리라. 카론은 최대한 그의 검격을 흘리며 반격하고 있었지만 단지 몇 차례 검을 주고받은 것뿐인데도 그의 안색은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고 숨소리도 거 칠어지고 있다. 실명,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극도의 공포심에 자비를 구걸하거나 도망칠 만 할 텐데도 카론은 냉기서린 눈빛 그대로 조금도 동 요하지 않은 채 계속 그와 격렬하게 검을 주고받았다. 카아아아앙! 귀가 멀어버리는 듯한 굉음이 다시 터지며 압도적인 힘에 카론이 밀려났 고 그의 등이 나무와 격하게 충돌했다. 짧은 비명이 터지며 반쯤 시력을 잃은 눈이 가늘게 떨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간격을 좁히며 날아든 라이 오라가 카론의 창백한 목덜미를 잘라버릴 기세로 흑검(黑劍)을 크게 휘둘 렀다. 파아앙! 하는 파공음과 함께 사라지듯 몸을 피한 자리에 사신의 낫과 같 은 라이오라의 검격이 일자로 그어졌고 그와 함께 수십 그루가 넘는 나무 며 풀이 모조리 시커멓게 고사(枯死)해 버렸다. 증기가 빨려나가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듣자 나는 또 다시 소름이 끼쳤다. ‘제발 죽지 말아요.’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가에 기도문이 올랐다. 키르케 님이 라이오 라를 평할 때 그는 마치 암흑보다 어두운 무저갱(無低坑)이라고 했다. 어 떤 것을 아무리 많이 그 속에 집어넣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바닥이 없 는 낭떠러지 같은 자. 차라리 예전 무라사 씨와 싸우는 편이 덜 절망적일 것 같다는 기묘한 패배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승률 제로의 싸움 을 말릴 수조차 없다. 카론 경이 쓰러지면 왕자님도 죽고 아마 나도 살해 될 것이다. 희박한 승률에 기도들일 수밖에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이었다. 설마 아신 중에서도 가장 완벽에 가깝다는 진청룡에게 빈틈이 있었던가. 아니면 목숨을 건 신념이 기적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카론의 칼날이 스 쳐지나간 라이오라의 어깨에서 피가 터졌다. 그러자 처음으로 라이오라가 카론과의 간격을 넓혔다. 지켜보던 프론티어 뱅가드들마저 믿을 수가 없다 며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자신들의 리더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라이오라는 분노한 기색도 없이 상처 난 어깨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싸우지 않겠나.” “전하에게 손대지 않는다면 나도 싸울 생각은 없어.” “그건 곤란하다. 폐하의 칙령이니까. 네가 내 입장이라도 어쩔 수 없었 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 카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힘들게 다잡으며 말했다. “그런 천박한 명령마저 따르는 자는 기사가 아닌 노예다. 나는 내 목숨 을 바쳐 주군을 섬기기로 이 검 앞에 맹세했지만 그렇다고 노예가 된 것은 아니야.” 예전 진짜 기사란 대체 무엇이냐는 실없는 질문에 키스가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긍지를 가진 자들, 비록 돈도 못 벌고 생활 력도 없지만, 목숨은 버려도 신념은 버리지 않는 자들이라고. 비록 소파에 드러누워 얼굴에 책을 덮은 채로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나는 그때만큼은 키 스의 그 말에게서 기묘한 서글픔이랄까 솔직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카론에게 다시 들었다. 라이오라가 결심을 한 듯 검을 들며 말했다. “알겠다. 남길 말이 있나?” 그러자 카론은 그 미워할 수 없는 고집쟁이의 눈빛으로 라이오라를 바라 보며 평소와 똑같은 차갑고 짧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물리치고 왕자님을 지킨다. 그것뿐이다.” 진청룡은 전력으로 카론에게 뛰어들어 검을 내리쳤다. 벼락이 떨어지고 불꽃이 터졌으며 붉게 반짝이는 카론의 생명이 소리도 없는 눈물처럼 퍼져 나갔다. 나는 너처럼 능숙하게 세상을 사는 방법을 몰라, 예전 그가 했던 말이 머리 속에 울렸다. 용의 이빨에 참혹하게 뜯겨나간 온 몸에서 빨간 미립자들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생명의 마지막 조각마저 연소시켜 버리려는 듯, 용의 몸통 안으 로 뛰어 들어가는 카론의 모습을, 난 숨이 멎어버리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때 무엇인가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내 몸이 붕 떠올라 뒤로 밀려났다. 갑작스런 폭풍이었다.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른 나는 고개를 들었고 저 멀리 튕겨나가 있는 라이오라를 흙먼지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일격에 아신을, 그것도 진청룡을 날려버릴 수 있는 자란 이 세상에 한 명만 있어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 장본인의 모습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키, 키스 경?” “자 이제 선수교체에요. 청소의 요정 등장이랍니다아.” 예의 그 검, 그러니까 사무실 한켠에 놓여 있던 피에 물든 장검을 뽑아든 키스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갈색의 곱슬머리 사이로 보이는 귀걸이가 도드 라진 키스가 여유롭게 웃는 보자 난 무척이나 놀랍고 기쁜 마음에 목이 콱 메어왔고... 아니, 그 보다 화가 났다. “어째서 이제야 온 거예요!” 바락 소리를 질러버린 내게 키스가 검을 꽉 쥐며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그거야 뜨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니까요!” 그럼 일부러 지금 나타났다는 거냐. 순간 나와 왕자님과 카론 경을 비롯 해서 프론티어 뱅가드들마저도 할 말을 잃은 채 혼자 멋진 포즈 다 잡고 있는 저 인간을 황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뒤에 서 있는 카론 경이 눈을 꽉 감은 채 ‘망할 자식’이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강하다지만 어떻게 진청룡을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 는 것일까.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키스 경.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여기까지 온 건가요?” 키스는 나를 바라보며 가느다란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청소해 주러 왔다고.” 그때 라이오라가 키스 앞으로 걸어왔다. 불편한 기색이다. “의외로군. 너는 자기 목적 외에는 누가 어떻게 되어도 관심 없는 녀석 이 아니었던가.” 아? 키스와 라이오라가 아는 사이였단 말이야?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거든요.” 키스는 슬쩍 나를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라이오라는 천역덕스러운 그의 태도에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렇게 심하게 당해 놓고도 아직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냐. 그 때 일을 잊은 거냐.” “나 기억력 나빠요.” 눈썹을 매만지며 웃고 있는 키스의 눈매에는 증오심이 서려 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편 알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까지 들었다. 그때 프론티어 뱅가드들이 키스를 포위하며 접근하자 키스가 슬쩍 움직이 는 것 같았다. 파아앙! 오싹한 소리와 함께 시뻘건 핏줄기가 바닥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조각난 제국군의 몸뚱이가 바닥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자 심 장이 내려앉았다. 언제 검을 움직였는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피의 안개 속 에서 키스가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조금 권태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이오라 씨. 아시다시피 제 검은 카론 경의 것과는 달리 무례하기 짝 이 없는 살인검인지라 이미지 관리상 별로 뽑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당신 덕분에 다 글러 먹었네요.” 잠깐 말을 멈춘 키스는 그 붉은 눈동자로 라이오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놈이 책임져. 모조리.” 웃는 얼굴이었지만 만지면 깊게 베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착각이었을 까. 지금 키스의 모습은 꼭 억울하게 죽은 숫여우의 망령처럼 보인다. 그 때 주변에서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프론티어 뱅가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그들 한명 한명이 기사 급의 능력을 지녔다. 전쟁이 아니라면 이렇게 소집될 리가 없는 엄청난 숫자에 난 기가 질려 버렸다. 신속하게 검을 치켜 올리고 키스와 등을 맞댄 카론 경이 도리가 없다는 듯 투정을 부렸다. “네 녀석만 나타나면 일이 커진다. 네 입장을 알고 있기나 한거냐.” “어머나. 목숨 걸고 구하러 온 사람한테 그 무슨 서운한 소리인가요?” “시끄러.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 “냉정하시긴. 그보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쓸데없는 소리!” 그 말을 신호로 카론과 키스가 반대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엄청난 수의 프론티어 뱅가드들이 카론에게 몰려들었지만 키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라이오라와 검을 부딪쳤다. 지금까지 쭉 함께 지내온 키스가 저런 사람이었던가. 시퍼런 스파크가 터 지고 흙먼지가 폭풍처럼 요동치면서, 밀려난 쪽은 놀랍게도 라이오라였다. 실로 악마적인 파워, 검을 부딪칠 때마다 숲 전체가 울리는 것만 같았고 점점 속도가 빨리진 둘의 모습은 잔상처럼 길게 늘어져 - 마치 격노한 두 마리 용이 엉켜 있는 것만 같았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키스의 생명력이 뽑혀 나가고 있는데도 키스 는 괘념치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일까?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슬픈 것 같기도 한 복잡한 감정들이 섬광처럼 이리저리 스쳐지나갔다. 사슬에 억눌려 있던 광 기가 단번에 폭발해 버리는 것처럼 - 그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위험한 유혹에 홀려버릴 것만 같다. 진청룡과 계속 싸우면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숙명마저 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키릭스 세자르’ 대기를 불살라 버릴 듯 격렬한 둘의 싸움을 바라보며 난 예전 기사록에서 봤던 그 흉명(凶名)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다. 어두운 밀실의 문을 여는 열쇠 같은 그 이름.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 순간 파아악! 소리가 내 상념 속에 끼어들며 키스의 가슴팍에 일자로 검상이 그어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생명력의 입자들이 피와 함께 터졌고 그와 동시에 왕자님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키스 경!” 하지만 키스는 곧바로 라이오라의 검을 받아친 뒤에 그의 심장을 깊게 찔 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키스의 검 끝이 라이오라의 등을 뚫고 나왔다. ‘서, 설마 아신을 죽인건가?’ 프론티어 뱅가드들이 리더의 몸이 꿰뚫린 모습을 보며 움직임을 멈췄고 카론 경도 뒤로 물러서며 키스를 바라보았다. 키스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여간해선 죽지도 않는다는 것은 역시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요. 그렇죠, 라이오라 씨?”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심장이 뚫린 라이오라가 표정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고 있 었다. 그리고 검을 집어넣은 라이오라가 말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지.” “그럼 황제한테 혼날 텐데요?” “너희들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단지 오늘이 아닐 뿐이야.” 라이오라는 조용히 숲 속으로 사라졌고 프론티어 뱅가드들 역시 그를 따 라 모습을 감췄다. 피에 젖은 모습으로 라이오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키 스는 그가 사라지자 검을 땅에 꼽아버린 뒤에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아.” “키스 경!” 나는 키스에게 뛰어갔다. 처음으로 그가 무섭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 과는 별개로 걱정이 되었다. 진청룡과 싸우고 멀쩡할 리가 없지 않은가. 피에 젖은 몸으로 날 올려다보던 키스가 방금 전까지의 광기어린 모습은 오간데 없는 장난스런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또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네요.”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날 바라보는 키스의 눈빛은 '그냥 날 이해해 줘’ 정도였기 때문에 난 쓴웃음을 지으며 ‘빨리 치료나 받아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때 굳은 표정의 카론 경이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걸어왔다. “키스. 너 말이야.” “앗.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구박하지 마세요오.” “고맙다.” 한참을 망설이던 카론의 입에서 조그맣게 고맙다는 말이 나왔다. 한동안 그를 올려다보던 키스는 대답대신 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고 겨우 겨우 일어서 있을 힘만 남아 있던 카론은 곧바로 무너지며 바닥에 눕혀졌다. 집 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 라는 그의 철칙이 어이없이 무너지 는 순간이랄까. “무, 무슨 짓이야!” 키스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려는 카론의 이마를 눌러 억지로 눕힌 뒤에 이렇게 말했다. “기쁘네요. 당신과 만난지 15년 쯤 된 것 같은데 난리 피우고 칭찬 받아 보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군요.”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몰래 훔쳐보고 싶을 정도로 호기심 이 일었지만 아마도 그다지 행복한 추억일 것 같지는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키스와 카론과 나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왕자님에게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한쪽 눈을 찡끗 감은 키스가 말했다. “황제는 더욱더 시기할 테고 베르스는 여전히 약소국을 벗어나지 못하겠 지만... 그래도 지금 모습 그대로 변치 말고 성장하시옵소서.” 악담을 해라, 아주. 32.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더 이상 왕자님을 노리지 않았다. 단지 왕자님에게 갑작스런 퇴학조치가 내려졌고, 황제는 왕자님을 순순히 국경 밖으로 보내줬던 것이다. “그런데 키스 경” “네에?” 베르스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나는 키스에게 물었다. 이마와 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카론 경은 말없이 창 밖을 보고 있었고 조금 풀어헤친 셔츠 사 이로 가슴에 감긴 붕대가 보이는 키스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와중이었다. “무섭지 않았어요?”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나는 삥 둘러서 엉뚱한 것을 말해 버렸다. “아신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시룡(尸龍)에게 감히 칼을 들이대 놓고 무 섭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만약 라이오라 씨가 전력으로 싸웠다면 아마 죽었을 거예요.” “그, 그게 전력이 아니었어요?” “진짜로 자기 모든 힘을 개방했다면 아마 그 순간 숲 전체에 있는 모든 생명을 흡수해 버렸을 거예요. 괜히 진청룡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아 니니까.” “미, 믿어지질 않아요.” 그때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던 카론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네 녀석도 전력으로 싸운 건 아니었잖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진청룡은 아신들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과거 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선대의 능력자가 힘을 전수하러 왔을 때 알테어 님은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순진한 소녀였고 키르케 님은 막 부모 를 잃은 이후였고 무라사 씨는 알다시피 동생을 아끼는 건강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라이오라는 어떤 하급 귀족의 노예였고 이미 시체였다고 한다. 죽 은 자의 몸에도 아신의 힘이 깃들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한번 죽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죽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그 생명력 에 목마른 육체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생명력을 집어삼키는 것 이리라. 이미 죽은 몸으로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는 것은 키스의 말대로 잔 인한 저주일 것이다. “어째서 라이오라가 전력으로 싸우지 않았나요?" 키스는 정색을 하며 내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그거야 실은 라이오라 씨가 카론 경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 우앗! 왜 때려요!” 이 인간에 진지한 답변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소리 없이 웃으며 우리들 을 지켜보고 있던 왕자님은 곧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며 눈을 감았다. 그 위 기를 겪고 일방적으로 퇴학까지 당했는데도 왕자님은 나보다 더 차분하다. 황제에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질투심이 느껴질 정도로 영롱하게 빛나는 분이다. 하지만 황제가 왕자님에게 한 가지 배려한 것이 있다면 팔마시온 로비에 있는 현판(懸板)에 한 줄을 세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졸업생들이 남기고 싶은 말을 기록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자 님은 그곳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썼다. 자신의 혈통에 안주하는 것은 그 속에 존재하는 잔인한 장난을 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짧은 문장이 팔마시온에서 결코 깨지지 않을 최고의 명문임을 믿 어 의심치 않는다. -Blind Talk 아아, 정말... 엔딩을 다섯번인가 바꿨습니다. 하지만 장고 끝에 악수 나온 다고 했던가요. 그리고도 너무 졸문이 되어 버렸지만 계속 덧칠한다고 좋을 것도 없어서 일단 올립니다. 본래는 티어스가 실은 테러리스트로(그래서 밤에 설계도를 들고 팔마시온을 돌아다니는 장면까지 넣었건만) 난방장치를 통해서 수면가스를 살포하고 학생들을 인질로 잡게 되면서 사건이 반전... 뭐 이런 분위기에서 일부러 떠난 것처럼 모습을 감추고 있던 알테어가 나타나 라이오라와 일전을 벌이 고 키스도 키르케도 등장, 미온도 활약하고... 뭐 이런 방향으로 나가려고 했고 실제로 이렇게 다 써 놨고... 또 사실은 카론은 실명하고 왕자는 죽 는 것으로 엔딩이 나는 것이었는데... 뭐 이래저래 생각한 끝에 급히 바꾸 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되어버렸군요. 왕자 님의 마지막이 될 뻔한 가을... 정도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어째서 가 을이야? 라는 말에는 실제 이번 편이 시작된 작품 속 시간이 가을 끝 무렵 이고 또 제가 쓰기 시작한 시간도 가을이라서요. 지금은 겨울이지만...) 출판본에서는 좀 더 수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위의 저 왕자가 남긴 말은 실은 일본의 평론가인 기라타니 고오진의 말입니다. 뭐 이미 유명한 말이지만 개인적으로도 참 와닿는 말이라서요. 캐릭터에 대해 본문 밖에서 코멘트를 다는 것을 즐기지는 않지만... 애인과 함께 지하철을 탔을 때 반응 상황#1 두 명이 앉기에는 좁은 자리 하나만 남았다. 이자벨 : 일단 지하철을 탈 리가 없다. 리무진을 타도 기사가 따로 있을 텐데 애인과 지하철을 타는 것은 죽어도 거부할 사람이니까 패스 알테어 : 같이 일어서 있자고 조른다. 하지만 애인 혼자 앉으면 토라진다. 키르케 : 자신이 앉지만 '어떻게든' 옆 사람을 일으키게 해서 애인도 앉게 만든다. 카넬리안 : 당연히 자기가 앉고 애인이 먼저 앉으면 집어 던져 버리고 자기 가 앉는다. 짐도 애인보고 들게 한다. 그리고 자 버린다. 엔디미온 : 좁지만 같이 앉자고 아양을 떤다. 싫다고 그러면 풀이 죽는다. 카론 : 애인를 앉힌다. 애인이 일어나도 자기는 절대 앉지 않는다. 키스 : 자기가 앉은 뒤에 태연하게 애인을 자기 무릎에 앉힌다. 애인이 창피해 하면 '그럼 반대로 할까?'라고 말한다. 예전 캐릭터 만들 때 기록해 놨던 것입니다. 실은 저는 이런 식으로 상황 을 설정해서 캐릭터 성격을 만드는 편이에요. 반쯤 장난이긴 하지만. 최근에는 http://www.tvcf.co.kr/ 라는 사이트에 자주 가고 있습니다. 특히 수상작 CF들은 아주 대단한 것이 많으니까 시간 나시면 한번 둘러보세요. 그럼 다음 편에서. E-MAIL : billiken77@kornet.net 잉위 맘스틴의 Fire and Ice를 들으며 #094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2화 : 여왕님 만만세 1. 새해를 5일 앞두고 왕실의 모든 대외업무는 중단된다. 즉 스왈로우 나이 츠 역시 장기지명자를 제외하면 모두 출장에서 돌아와 리더구트에 모이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1년간의 업무를 결산하는 종무식... 이라고 말하니 까 진짜 회사원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덕분에 오늘 브리핑은 평소에는 보 기도 힘든 간판스타 루시온 경을 비롯해서 스왈로우 최정예 8인이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왜, 왜들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다들 사형선고라도 기다리는 듯한 굳은 표정으로 키스를 기다리고 있자 불안감을 느낀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근 머리를 기르고 있는 크리스 군이 겁먹은 표정으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새해 첫날 신년회가 열리잖아요.” “그게 어쨌다고?” 신년회가 어째서 무서워? 그러자 담배를 문 쇼탄 경이 지옥이라도 보고 돌아온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우후후후... 미온 경은 올해 처음 들어왔으니 아직 신년회가 무엇을 의 미하는지 모르겠구나.” “뭐, 뭡니까. 그 음울한 웃음은." 그때 손에 한 아름 종이뭉치를 든 키스가 방실방실 웃으며 나타나자 모두 의 얼굴은 완전히 배고픈 사자 앞의 토끼 표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좋은 아침입니다아아.” 유독 키스만은 평소보다 더욱 유쾌해 보이는군. 키스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뭔가 상당히 위험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떠올리자 나도 뭔지 모 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키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헤죽 웃었다. “새해 새벽 어김없이 왕실 신년회는 진행됩니다아. 올게 왔어요. 그렇죠?” 사방에서 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자 난 잠시 후 내게 아주 무시 무시한 시련이 찾아올 것만 같다는 선 경험적 직감을 느꼈다. 그리고 키스 는 들고 있던 의문의 문서들을 한 사람 한 사람에 천천히 나눠주는 것이었 다.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지옥에 갈 사람을 결정하는 제비뽑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괴문서의 정체는 - 그 문서를 훑어본 곳곳에서 안도 의 한숨과 동시에 모두 동정의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었다. 왜, 왜들 그래요! 이건 마치 ‘네가 죽어줘서 다행이야.’라는 눈빛이잖아! 난 황급히 내가 받은 종이더미를 바라보았고 그 첫 장에는 키스 특유의 가지런한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년회 성극(聖劇) 대본 ‘성왕 하켄의 베르스 건국 설화’ 뭐야, 신년회 연극이었잖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베르스 건국 설화라면 워낙 유명한 연극이고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어차피 물러설 곳 없는 몸, 최악의 경우 공주 역할을 맞게 되어도 크게 부끄러울 것도 없단 말이지. 난 피식 웃으며 천천히 내 배역을 보다가 숨이 턱 멈췄 다. 여전히 모두가 ‘댁이 대신 죽어줘서 우리는 행복해’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본을 들고 있는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 결국 툭하 고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니 어떻게 맨 정신으로 이런 짓을! 난 벌떡 일어 나서 키스를 향해 소리쳤다. “왜 나만 축생이야!” 그렇다. 내 역할은 바로 염소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 염소, 젖을 짜잖아!” 이건 이 나라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연극이다. 그리고 이 연극 중에는 마왕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하켄이 방랑 할 때, 훗날 하켄의 부인이 되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지친 하켄에게 자신의 집 염소젖을 짜서 대접하는 감동 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젖이 쥐어 짜이는 염소가 바로 나 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네 발로 무대에 나가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관객들 앞에 서 젖까지 짜인다. 멀쩡한 사람 젖을 어떻게 쥐어짜! 죽일 셈이냐! 아니 그보다 남자 가슴에서 젖이 나와? 백번 양보해서 쥐어짜고 주리를 틀면 개 미 눈물만큼이라도 나온다고 쳐! 하지만 새해 벽두부터 관중들 앞에서 내 가 젖 짜이는 잔혹극을 봐야 한 해가 평안하겠냐! 그러나 이 빌어먹을 키스 경은 혼자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서는 내게 말하 는 것이었다. “미온 경. 미온 경이야말로 이 연극의 핵심입니다아!” 어째서? 어디가? 이건 단지... 그러니까 단지... “날 괴롭히고 싶을 뿐이지! 이 자식!” “어머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아.” 당신, 눈이 웃고 있어! “그럼 댁이 염소 해.” “싫어요.” 키스는 방긋 웃으며 냉큼 대답했다. 이런 망할! 그때 날 빤히 바라보고 있던 지스가 뭔가를 생각해 냈는지 입을 가리고는 푸훗! 웃는 것 이었다. “상상하지 마!” 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나는 최대한의 자제력으로 테이블을 뒤집어 엎어버 리고 욕구를 겨우 겨우 억누르며 물었다. “그럼 작년에는... 누가... 염소였죠?” “작년에는 진짜 염소였습니다아.” 뭐라! “그런데 왜 올해는 나야! 염소 씨가 말랐냐!” “그건 말이다.” 쇼탄이 담배 연기를 후욱 뿜으며 그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번 신년회에선 내가 공주 역할이었는데...” 키 185센티, 구리 빛 피부의 근육질 공주라고? 각색이 너무 심해! “내가 염소젖을 짜려는데 그 염소 놈이 뒷발로 날 걷어차 버렸어. 덕분 에 무대 위에 유혈이 낭자했고 아가씨들은 비명을 지르고... 하아, 지금 도 그 생각만 하면... 그래서 올해에는 염소 대역을 쓰기로 한 거지.” 난 이를 부득 갈며 대답했다. “그럼 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내 가슴에 손대면 공주 얼굴을 후려갈겨 줄 테야!” 그런 음란한 연출을 무슨 수로 커버해! 내 젖을 먹고 힘이 솟은 하켄이 마왕을 때려잡든 말든 난 알 바 아냐! 단지 내가 바라는 소박한 소망은 염 소젖을 준비해 두는 최소한의 소도구 정도라고! 어째서 이 대본에는 ‘공주 가 있는 힘껏 젖을 짜내자 염소는 기쁜 듯이 메에에에, 하고 운다.’라는 문장 밖에 없는 거냐고! 기쁠 리가 있겠냐? 응? 그러나 다른 모든 동료들은 이제 살았다는 듯이 울상이 된 내 표정을 외 면하며 ‘아아. 올해도 잘 넘어가는구나.’라는 속편한 말이나 지껄이고들 있었다. 내 인간관계가 이리도 얄팍했단 말인가. “그런데...” 아까는 흥분해서 못 봤지만 지금 유심히 대본을 훑어보니까 이상한 점이 하나있었다. 아니,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확인하니까 이리도 화가 치밀 수가 없었다. “......키스 경” “네에?” “댁은 왜 역할이 없어?” “그거야 전 기사단장이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분기탱천! 누구는 새해 첫날부터 젖 짜이게 생겼는데 네 놈은... 네 놈은... 혈압이 올라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대로 쓰러져서 다시는 깨어 나고 싶지 않다. 인간 염소가 되어서 고문을 당할 바엔 그게 낫다고! 그때 키스가 얄밉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불난 집에 기름통 던지는 말을 꺼냈다. “미온 경도 억울하면 기사단장하세요.” “우어어어어!” 그러나 내 주먹을 손쉽게 피한 불행의 악마는 태연하게 내 팔을 꺾어버리 고는 걱정스런 한숨을 포옥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공주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서 큰일이네요오. 작년까지는 인 원수가 딱 맞았는데 올해는 미온 경이 염소 역할을 하는 바람에...” 그러니까 애당초 염소 따위는 인형 같은 걸로 노멀하게 하면 되잖아! 그 러면서까지 날 염소로 몰아붙이고 싶었냐! 이 악마! 아냐. 잠깐 이건! 순 간 눈이 번쩍 뜨였다. “날 시켜 줘! 제발!” “어머나? 어째서 공주를 하고 싶으신 거죠? 미온 경 취미가 그런 쪽인 줄은 몰랐네요오.” “그게 아니고...” 닥쳐라! 이 놈! 최소한 젖 짜이는 역할보다는 짜는 역할이 나으니까 그러 는 거다! “하지만 부탁하는 태도가 틀렸군요. 후후후.” “시, 시켜 주세요. 부탁합니다.” 그러자 키스가 화사한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싫.어.요.” 정말 이대로 열반해 버릴 것 같다. 이 놈을 묻어버리고 새 인생 살고 싶어! 그때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론 샤펜투스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시종이 열어준 문에서는 카론 경이 싸늘한 냉기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감격해서는 그에게 뛰어가는 키스 경. “아아아! 카론 경! 기다리고 있었어요! 공주 역할을 해주러 오셨군요!” 빠악! 칼부리에 맞은 키스가 쓰러진 후 카론은 내게 와서 말했다. “엔디미온 경. 내일 저녁 내 집으로 와라.” 그러면서 귀여운 천사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한 장 내게 건네는 것이었다. “난 별로 상관없지만, 아내가 널 꼭 보고 싶다고 간청해서 말이야.” 그 말 전에도 했습니다만. 카론 경의 아내가 그린 것이 분명한 이 귀여운 초대장에는 ‘엔디미온 님. 저녁 같이 먹어요.’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아아,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훈훈한 인정이란 말인가. 그러 나 세상에는 이런 따스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분도 있는 반면 “카론 경. 미온 경의 젖을 짜는 공주님 역할에는 당신 밖에는...” 빠악! 카론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키스의 머리를 말없이 내리찍은 이후에 문을 쾅 닫으며 나가 버렸다. 머리를 부여잡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키스가 도 리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 그럼 공주 역할을 누가 해야 한단 말인가요오.” “저어. 그러니까 내가 하면 되는...” “나는 정말 카론 경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내가 있잖아요! 내가!” “하아. 카론 경에게 무릎 꿇고 사정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사람 말을 들어! 날 시키려고! 이 망할! 내가 태어나서 여자 역할 하겠다 고 사정하게 될 줄은 꿈에 몰랐어! 그때 악덕 관리라는 더없이 어울리는 역을 맡은 루이 경이 말했다. “그런데 키스 경. 공주 역할이라면 저기 펠리오스 무녀들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염소도 무녀들 쪽이 더 좋지 않아?” 뭔가 위험한 말을 해버린 것 같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키스는. “안됩니다. 전통적으로 신년 성극 무대에는 남자들만 올라가게 되어 있 는...” 쳇. 어떤 망할 인간이 그런 성차별적인! “...규칙 같은 건 없지만...” 뭐! “...오르넬라 성녀님이 그런 우스꽝스러운 연극 무대에 무녀들을 올려 보낼 수 없다고 하셔서요오.” “그럼 왜 우리는 그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해야 하는 거냐!” 울컥한 기사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키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저는 여러분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답니다아.” 그러나 그 눈빛은 ‘재미있잖아요?’였다. 하긴 뭐 재미없는 일도 아닐 것 이다. 염소만 아니라면! 그때 다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론 샤펜투스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님께서 또 방문하셨습니다.” “아아! 카론 경! 결국 연극을 빛내주시기로 결심하셨...” 뿌아아악! 풀썩 쓰러진 키스를 냉정하게 밟고 지나간 카론이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 했다. “신년회는 무기한 연기다.” “만세!”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만세삼창을 부르자 카론이 굳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기쁜 거냐.” 기쁘다마다요. 카론 경이 아니었다면 키스가 각색한 악취미 연극의 희생 양이 될 뻔 했다고요.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뿌루퉁한 얼굴로 머리를 부여잡은 키스가 카펫에 주저앉은 채 카론을 올 려다보았다. 카론은 대답대신 테이블에 쪽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죠?” “예고장이다.” “예에?” “나인테일이라는 별명의 대도(大盜)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알다마다요. “그 자가 오늘 밤 금동상을 가져가겠다는 예고장을 보냈다.” “뭐라고요!” 모두는 깜짝 놀라서 카론을 바라보았지만 카론은 사무적인 어조로 할 말 을 이을 뿐이었다. “전하께서는 총병력을 동원해서라도 금동상을 지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왕실의 모든 신년행사는 연기 혹은 중단되며 엔디 미온 경이 내 집을 방문하는 것 역시 보류된다. 이 일은 전적으로 헬스트 나이츠의 소관이기 때문에 귀관들이 해야 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 사건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발견한다면 즉시 내게 연락하기 바란다. 이 상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엔디미온 경. 표정이 왜 그런가. 뭔가 집히는 점이라도 있나?” “아, 아뇨! 전혀요!” “그럼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거지." “그, 그냥 카론 경 집에 가는 게 늦어진 것이 서운해서요. 아하하.” “이상한 녀석” 예고장을 다시 품 속에 넣은 카론은 확 망토를 젖히며 문을 열고 나가버 렸고 동료들은 ‘나인테일이 금동상을 훔쳐 가면 신년 연극도 없겠네?’라는 얼굴로 묘하게 들떠 있는 것 같았지만 -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대도 나인테일. 본명은 야노 얀센. 성별 여자. 나이는 올해로 24세. 입 버릇은 30초 내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면 포기해.’ 그리고 그 분은 내 고객이었다. 콘스탄트와 이오타는 물론 마키시온 황실 까지 잠입할 수 있는 배짱과 실력을 가진 도둑들의 여왕, 전세계적으로 블 랙리스트에 올라있을 만큼 세상을 희롱하는 그 분이 어째서 이런 작은 나 라에 와서 (그 분에게는 별로 의미도 없을) 배 나온 금동상 따위를 훔쳐가 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일단 나는 왕실 기사니까 카론 경에게 그녀에 대한 정보와 수법을 말해줘야 한다. ‘하지만’ 또한 나는 고객에 대한 어떤 정보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마담과 맺 은 적이 있다. 비록 호스트는 그만뒀지만 그래도 그 계약만큼은 유효하고, 나한테도 의리가 있는데 어떻게 고객 정보를 맘대로 흘릴 수 있겠는가! ‘으이구! 어쩌란 말인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죄책감에 갈등하고 있었고 그때 키스가 투덜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아. 미온 경의 염소 연기를 꼭 보고 싶었는데, 제발 나인테일이 도둑 질에 실패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야 겠군요오. 카론 경. 그 여자를 꼭 잡아주세요!" 나는 입을 다물고 있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나인테일이 여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 -Blind Talk 이번 편은 크게 웃기거나 강렬하진 않겠지만 가볍고 소박하게 읽어내려가 는 내용이 될 것 같네요. 어째서 금동상을 훔쳐가려는지는 다음 편에서 밝 혀지겠죠, 아마도. 최근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쭉 생각하 고 있는 중입니다. 4권 원고가 끝나면 백랑전설 원고가 기다리고 있긴 하 지만... 그 전에 오랜만에 단편을 하나 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주 설레지만 또한 벌써부터 창피하기도 하군요.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휘성의 다시 만난 날, 을 들으며 (동생이 노래방에서 부르라며 추천해 준 노래. 글쎄, 나한테는 무리라니까.) #095 S. K. T. 스왈로우 나이츠 테일 The Swallow Knightz Tales 제12화 : 여왕님 만만세 2. 나인테일, 즉 야노 님의 예고장 하나로 들떠있던 신년 분위기는 단방에 살벌한 전시상황으로 뒤바꿔 버렸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순금상 가져 가도 뭐 나와는 상관없는데...’라는 아름다운 마음가짐이었지만 임금님 께서 ‘나인테일을 잡는 자에게는 신분성별나이를 불문하고 큰 포상을 내 리겠노라!’라는 선언을 하자마자 모두들 태도 돌변, 하던 일 다 집어치우 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전향해서 이른바 ‘임금님 광장’ 앞에 와글와글 몰려 들었던 것이다. 자식은 부모 성격 닮는다는데 아무래도 이 왕실 식구들도 점점 임금님 성격 닮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군. 물론 쇼탄 경 역시 올해 마지막 대박 찬스를 놓칠 수 없다며 나와 함께 광장으로 나왔다. 야노 님이 쇼탄 경에게 잡힐 리가 없건만 쇼탄은 실로 처절하게 ‘나인테일. 당신만이 내 팔자를 바꿀 수 있어. 제발 나한테 잡혀 줘!’라고 기도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지나친 열정, 건실하게 돈 버는데 투자해! 우리가 광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밤의 광장은 급조된 현상금 사냥꾼들로 인산인해였다. 이거 무슨 연말 축제라도 여는 것 같군, 이라고 투덜거린 나 는 눈썹을 찡그리고 거대 순금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으이구. 저 놈의 순금상 때문에 일년 동안 몇 번이나 난리를 치는 거 야? 아아, 추워 죽겠어!” 그러나 쇼탄은 여전히 굶주린 하이에나의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런다고 잡힐 분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난 뚱한 표정 으로 말했다. “쇼탄 경. 금옥두를 훔치기까지 했던 당신이 이러고 있으면, 죄책감 안 들어요?” “후후후. 이런 걸 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말하지.” 얼씨구... “찬밥 뜨신 밥 가릴 때가 아냐. 키스 놈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 도 나인테일은 내가 꼭 잡아서 빚 갚아야 한다고! 내가 살길은 그것뿐이야!” 진짜 처절했다. “난 말이지. 악마가 내게 와도 영혼 말고는 다 팔고 싶은 심정이라고.” “호오. 의외네요? 영혼만큼은 지키고 싶다, 이건 가요?” “아니. 안 살 거 같거든.” “......” 연말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아무튼 뭐 나는 염소만 안 되면 되니까.’라고 중얼거리면서 올해가 끝날 때까지 이 사건이 해결되지 않기만을 기원했다. 그때 두꺼운 털옷으로 온 몸을 감싼 임금님이 행차하셨다. 언제 봐도 군침 이 도는 전하는 광장 앞에 우글우글 몰려 있는 군중들을 보고는 감동에 젖 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오! 짐의 분신을 지키고자 하는 귀공들의 충성심에 감격했소!” 충성심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임금님은 아이히만 대공이 있 는지 겁을 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본 뒤에 말했다. “약속대로 나인테일을 잡은 자에게는 ‘영광스러운 포상’을 내리겠소!” 사람들의 표정은 '구체적으로 뭔데?'였다. “짐이 새로 지정한 애국훈장을 내릴 것이오! 그 훈장에는 짐의 얼굴을 새길 계획인데... 어, 어디들 가는 거요!” 사람들은 그 아무짝에 쓸모없는 포상의 정체를 듣자마자 뭐야, 그거였어? 라는 얼굴들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인덕이 없으시군요, 임금님. 당 황한 임금님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 상금도... 주겠소. 주면 될 거 아니오.” 그 순간 삽시간에 원위치로 돌아온 왕실 식구들은 칼을 드높이 뽑아들며 국왕 만세를 외치는 것이었다. 자아아아아들 한다. 아직까지 이 나라가 망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군. 그때 유학파 엘리트 헬렌 경이 기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 마녀스러운 성격만 아니라면 꽤 미인이라 할 수 있는 그녀는 국왕 전하 앞에서 예를 올린 뒤에 군중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즉시 광장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순간 광분한 왕실 식구들이 ‘너 혼자 상금을 독차지 할 생각이냐!’라면서 떠들었지만 헬렌 경은 그 특유의 고압적인 목소리로 차갑게 쏘아붙일 뿐이 었다. “경호에 방해만 됩니다. 해산하세요!” 확실히 블리히보다는 훨씬 기사단장 답다. 그녀의 용서 없는 눈빛에 움찔 한 군중들이 ‘그럼 처음부터 부르질 말든가.’라고 조그맣게 조잘거리며 쓸쓸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가난뱅이 소시민 쇼탄 경 역시 하늘이 무 너진 것처럼 탄식했다. “아아. 이제 빚을 갚을 길은 정녕코 없단 말인가!” 그러니까 일을 해서 갚아! 다들 그렇게 갚는다고!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 해서 긁어모은 ‘사냥꾼 부대’가 헬렌의 한마디에 소멸해 버리자 당황한 쪽은 임금님이었다. “헤, 헬렌 경.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많은 편이...” “아닙니다. 소인이 해외에서 배운 신지식에 의하면 머릿수에 의지하는 것은 지극히 구시대적인 발상입니다. 이제 세계적인 추세는 고도로 체계화 된 소수정예집단을 이용한 기동성 있는 용병술입니다.” 저것이야말로 신여성의 표본이란 말인가. 가차 없는 면박에 전하께서는 기가 죽은 듯이 목을 움츠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나는 헬렌 경에게 가장 어울리는 남편은 위고르 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결 혼했다면 그들의 아침 식사부터 볼만 했으리라. ‘아니 여보! 이 품위 없는 계란 완숙은 대체 뭐란 말이오! 귀족 식탁의 계란이란 대대로 반숙을 고집한다는 것을 정녕코 몰랐단 말이오? 설마 그 대가 완숙이라는 뿌리도 없는 저급한 유행에 휘둘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당신에게 진실로 실망했구려.’ ‘당신이야말로 그런 고루한 사대주의에 얽매여 있었단 말인가요? 설익은 과일과 다름 없는 반숙 따위가 귀족적이라는 편견은 버리세요! 이제 시대 의 대세는 완숙이란 말이에요! 내가 유학 생활 중에도 진보된 귀족들은 항 상 완숙을...’ ‘닥치시오! 더 듣기 싫소! 당장 이 천한 완숙을 내 눈 앞에서 치우시오!’ ‘너야 말로 입 닥치고 먹기나 해!’ ‘이 망할 마누라! 입을 닥치고 어떻게 먹어!’ 상상할수록 즐겁긴 하지만, 더 이상 상상하면 대단한 실례니까 그만두자. 아무튼 뭐랄까 지나치게 유식하다는 점에서 헬렌 경과 위고르 공의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군. 헬렌 경은 주저 없는 판단력으로 각 요소요소에 기사들을 배치하기 시작 했다. “전하께서도 자리를 피해주십시오.” “나, 나도 지키고 싶소.” “체포 과정 중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혹여 전하의 옥체 에 누를 끼칠까봐 심려되어 그러니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헬렌 경의 눈빛은 ‘당신, 방해만 돼.’였다. 신신당부를 한 전하 가 사라진 이후 마녀 헬렌의 다음 타깃은 나였다. “너! 너는 왜 남아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해도 나인테일을 막지는 못할 텐데 말이죠.” 나는 왠지 얄미워 보이는 그녀가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그게 헬렌 경의 신경을 긁었는가 보다. “내가 도둑 하나 막지 못한다고? 흥! 감히!”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카론 경이 툭하고 말을 던졌다. “엔디미온 경.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역시 날카롭다. 아까부터 날 주시하던 카론은 확실히 내 태도가 의심스러 웠나 보다. 야노 님에 대해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갈림길에서 주저하고 있을 때 헬렌이 자존심에 상처 받은 듯이 날카롭게 외치는 것이었다. “비전문가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카론 경! 당신도 내 명령만 따르면 돼!” 냉정한 그녀가 키스나 카론이라면 쉽게 무너지는 것 같다. 확실히 헬렌 경은 카론을 인정하기 싫어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려고 한다 고나 할까, 그것도 아니면 스승인 카론 경에게 진심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 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신경질적인 성격 이면에 묘하게 뒤틀린 애증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이어 헬렌 경이 조직한 정예 방어진, 이름하여 '시대의 대세'가 순금상 주변에 만들어졌다. 솔직히 아무리 나인테일 님이라도 수십여 명의 기사가 철통같이 방어하는 이런 방어선을 뚫고 엄청나게 무거운 순금상을 훔쳐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야노 님의 수법을 알고 있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카론 경 역시 무언가 ‘구멍’ 을 느낀 듯 헬렌 경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돌린 채 그를 무시 하고 있었다. 만약 헬렌 경이 카론의 말을 들었다면, 어쩌면 세계적인 대도 나인테일을 잡는 쾌거를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오지 않는 거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헬렌 경이 버릇처럼 손톱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이미 밤은 깊었지만 광장은 불안할 정도로 고요할 뿐이었다. 설마 오지 않는 거 야? 라는 표정의 기사들 역시 추위에 몸을 떨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였다. 위병 하나가 임금님의 궁전, 즉 본궁 쪽에서부터 헐레벌떡 뛰어오 며 외쳤다. “크, 큰일입니다! 도난당했습니다!” 헬렌 경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순금상은 이렇게 안전해!” 그녀의 말대로 거대 순금상에는 어느 누구도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위 병은 고개를 저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인테일이 훔쳐간 것은 순금상이 아니라 본궁에 보관 중이던 왕비 마 마의 반지였습니다! 지금 본당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뭐라고!” 헬렌 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중 얼거렸다. “하지만 분명 예고장에는 순금상을 가져간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론의 파란 눈동자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이제야 깨달았다. 애당초 도둑의 말을 믿은 것 자 체가넌센스였던 것이다. 예전 야노 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도둑질과 가장 비슷한 일은 병아리 감별이지. 1 아니면 2, 우연 따위는 없고 낭만도 없어. 빠르고 실수 없이 끝내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차가운 반복노동일 뿐이야.’ 그런 생각으로 물건을 훔치는 그녀는 사실 지금까지 예고장을 보내는 낭 만적이지만 실속 없는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야노 님으로부터 예고장 이 도착했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것조차 다른 진짜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즉, 순금상 쪽으로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입 한 헬렌 경은 말하자면 나인테일이 진짜 목표물을 훔쳐가는 것을 도와준 셈 이었다. “어서... 본궁으로 향한다.” 나인테일에게 어이없이 당한 헬렌 경은 수치심에 빨개진 얼굴로 명령을 내렸지만 기사들은 도리어 묵묵히 서 있는 카론 경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 었다. 결국 그녀가 외쳤다. “내 명령 못 들었나! 본궁으로 가라니까!” 그제야 기사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쳇. 역시 여자는 안돼.’라는 말까지 들려왔다. 안 그래도 남자들의 사회인 기 사단에서 기사단장이 된 헬렌 경은 존경 받는다기보다는 도리어 시기의 대 상인 것일까. 전대 단장인 블리히가 매번 형편없는 수사로 판을 뒤집어 놨 을 때도 아무 말 없던 기사들은 헬렌 경의 실수에는 지나치게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능숙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한 헬렌 경이 의 외의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모르자 카론이 먼저 움직이며 말했다. “헬렌 경. 경이 먼저 도착해서 지휘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 쯤, 알고 있어요.” 예전의 기억 때문일까.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와 버린 헬렌 경은 뛰 듯이 본궁으로 향했고 곧이어 카론 경이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나는 너무도 미안한 얼굴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카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텅 비어버린 광장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난 애인이라 도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미온 군. 오랜만이네?” “예. 정말 오랜만이네요. 야노 님.” 역시 그녀는 나타났다. 그녀의 목소리는 도둑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아까 울 정도로 고혹적이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순금상 뒤에서 소리 없 이 모습을 드러낸 야노 님은 역시 예의 위병이었다. 눌러 쓰고 있던 투구 와 갑주를 벗은 야노 님의 긴 머리칼이 흘러내려왔다. 아름다운 눈썹을 가 진 분, 그녀를 보면 유연한 굴곡의 물고기가 떠오른다. 밤을 타는 물고기, 그리고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도둑들의 여왕, 그런 그녀를 업소가 아닌 다 른 곳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미온 군이 내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 여전 히 귀여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헤효오. 덕분에 나, 죄인이 되어 버렸다고요. 이래봬도 일단은 왕실 기 사란 말이죠. 뭐, 염소 신세를 면한 건 기쁘지만.” “염소?”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그때 하늘에서 시커먼 물체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난 깜짝 놀랐다. “뭐, 뭐예요, 저건!” 그녀는 그것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어쨌든 예고장을 보내긴 했으니까 별 필요 없는 것이긴 하지만 훔쳐 주 는 것이 예의겠지.” 그 물체는 바로 전체를 검은색 도료로 칠한 거대 기구였던 것이다. 정말 준비도 철저하시네. 그 기구로부터 내려온 갈고리들을 능숙하게 순금상에 고정시킨 야노 님이 그 날렵한 몸으로 튀어 올라 임금님의 머리를 밟고 올 라탔다. 그녀가 밧줄을 잡고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 역시 예전과 똑같다. 얄미울 만큼 완벽하고 깔끔하며 기쁠 것도 너스레도 낭만적인 해후도 없다. 그리고 털컥 소리가 나며 거대한 기구가 이 순금상 을 들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5미터에 육박하는 순금상이 두둥실 떠 오르는 믿겨지지 않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완벽’에 금을 가게 만드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 카론 경?” 헬렌 경과 함께 본당에 갔는 줄로만 알았던 그는 중간에 되돌아 온 것이 다. 검을 뽑은 카론 경이 순간적으로 도약하며 순금상에 걸려 있던 밧줄들 을 단번에 잘라내 버렸다. 야노 님은 카론 경이 나타나는 순간 재빠르게 기 구 안으로 몸을 숨겼지만 덕분에 한참을 하늘로 올라가던 순금상은 곧바로 추락 - 게다가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져 버리면서 겨우 겨우 붙여 놓았던 머 리통이 또 다시 분리되어 버리는 망측한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다. “어이구 세상에” 해맑게 웃고 있는데다가 추락의 충격으로 한쪽 얼굴이 뭉개지기까지 한 그로테스크 금옥두가 내 앞으로 떼구루루 굴러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허억!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이 놈의 금머리는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지는군. 그 때 검을 접은 카론 경이 차가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엔디미온 경” “예, 예에?” 난 솔직히 찔끔했다. 나인테일에 대해 알면서도 함구하고 그녀와 대화까 지 한 것을 알면 엄격한 카론 경의 성격으로 볼 때, 용서 없을 것 같았다. “다친 곳은 없나.” “예?” “없으면 됐다.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이다.” 카론은 나와 나인테일의 관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이후 임금님과 헬렌 경, 기사들이 뛰어왔다. 물론 임 금님은 반쯤 뭉개진 자신의 머리를 보자마자 아들이라도 잃은 것처럼 자지 러지고 난리셨다. “어흐흐흑. 내 분신이 더 얼마나 수난을 당해야 하는 거냐.” 그러게 애당초 그런 걸 안 만들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카론 경의 활약 으로 순금상은 도난당하지 않았지만 결국 나인테일은 왕비님의 반지를 훔쳐 갔다. 기사들 모두 당신의 책임이라는 얼굴로 헬렌 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눈을 꽉 감은 채로 그 모욕을 견디던 헬렌 경이 전하 앞으로 나서서는 입을 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모두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 겠습니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적잖게 놀랐다. 그 자존심 강한 헬렌 경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먼저 말했던 것이다. 나인테일과의 싸움에서 완패한 그녀는 스스로 독을 삼킨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하신다면... 기사 작위를 반납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녀에게 임금님이 말했다. 그것도 자식을 다독거리는 듯한 인자한 표정으로 말이다. “허허. 뭐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러는가. 짐의 인덕을 과소평가하지 말게.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예?” “괜찮네. 괜찮아. 짐은 이까짓 일로 즐거운 연말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네.” 얼레? 얼렐레? 평소 같으면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서 그야말로 ‘땡깡’ 을 부리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지를 되찾아오라고 생떼를 부렸을 임금 님이 놀랍게도 ‘국왕답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설마 왕자님의 온화함 이 전염된 것? 안하던 짓 하는 게 더 무섭다. 헬렌 경은 물론 카론 경마저도 ‘저 임금 대 체 왜 저러지?’라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비를 베푸는 임금님을 바라보 았지만 전하는 다 괜찮다고 말하며 본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모래가 쌀로 바뀌고 물이 술로 바뀌는 것 이상의 기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또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야노 님이 노릴 정도의 가치를 지닌 반지가 이 나라에 있기나 했던가? 3. “미온 경. 어디가?” 한밤중 조용히 문 밖으로 나가는 내 등 뒤로 졸린 듯한 지스킬의 목소리 가 들렸다. 나는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여자 만나러.” “꺼져버려.” 으이구! 저 놈의 성격! 나는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리더구트를 빠져나갔고 곧 왕궁을 몰래 빠져나갔다. 야노 님이 있을만한 곳은 대충 예상이 된다. 하프 연주를 좋아하는 그녀 는 아마도 일류 연주자가 항상 악기를 켜는 가장 화려한 술집의 어둑한 뒷 문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아직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수도 아스말에서 그런 술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 부에게 돈을 조금 쥐어주고 ‘가장 뛰어난 음악과 가장 맛있는 술이 있는 곳’으로 가달라고 하면 되니까. 그리고 나는 네 차례 정도 수도에서 내로 라하는 술집들을 기웃거린 끝에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역시 그녀의 취향 답게 관능적인 향기가 가득한 여성전용 고급클럽이었다. 사실 맨 정신을 가 진 남자라면 이런 곳에 술 마시러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어머나. 이렇게나 귀여운 종달새라니.” 예전 어디선가 들었던 우주 최악의 직유법이 입구에서부터 내 귀에 엄습해 왔다. “정말 믿을 수 없이 예쁜 청년이네! 일자리 찾으러 왔어? 당장 계약할까?” 그렇다. 이곳은 호스트 클럽이다. 물론 내가 예전 일했던 엄청나게 비밀 스러운 클럽과는(사실 그곳은 간판도 없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로 사정없 이 색기를 풍기는 이곳에서 나는 몇 년 전까지는 남자였을지도 모르는 마 담의 손에 잡혀 버렸다. “전 사람 찾으러 왔거든요.” 그러나 마담은 연신 탄성을 지르며 내 금발을 매만지려는 것이었다. 난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뺐다. “그러지 말고 나하고 얘기 좀 해. 너라면 한 달 안에 간판스타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설마 너 다른 업소 사람이야? 거기 어디야! 나한테 와!” 왕실과 싸울 작정이라면 말라진 않겠습니다만. “아하하. 하지만 저는 이미 한번...” “겁이 나겠지만 충분히 해볼만한 직업이야. 얼마 원해?” “아니 그러니까 저는 말이죠...” 난 이미 졸업했다니까요! 마담은 마치 보물이라도 발굴한 듯한 표정으로 절대 놔주지 않으려고 했고 난 또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고향에 돌 아온 듯한 푸근함을 느꼈... 을 리가 없고! 이 나이에 이걸 또 하라고! 무 서운 농담 그만두세요, 누님! 아니, 형님인가? “미온. 이쪽이야.” 그때 예상대로 뒷문 칸막이 너머에서부터 야노 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마담은 날 풀어주었다. 그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저 손님을 만나러 온 거야?” “왜요?” “이상한 분이야. 오늘 하루 매상보다도 많은 돈을 줘서 고맙기는 한데, 아무도 지명하지 않고 혼자서...” “왜냐하면 저분은 날 지명했거든요.” 난 그렇게 투덜거리며 야노 님에게 갔다. 예상대로 야노 님은 마치 내가 오길 기다리라도 한 듯이 커다란 소파에 혼자 앉아 있었다. 늘씬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그녀는 날 바라보지도 않고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여기 오니까 옛날 생각 나?” “일부러 이런 곳에서 날 기다린 거죠!” 악취미야, 정말. 나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너무해요. 내가 왕실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왕비님의 귀중품을 훔쳐 가다니요." “이거 말야?” 그녀는 끼우고 있던 은반지를 테이블에 툭하고 던졌다. 그것을 본 내 눈 이 커졌다. 이 스타일은 분명! 아니 이게 왜 베르스에 있는 거야! “서, 설마 이건!” “여전히 눈썰미가 좋네. 그래. 이건 세드릭의 세공품이야.” “어째서 이런 게 우리 왕실에 있었던 거죠?” 그러자 그녀는 유혹적인 입술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을 말해줄까? 이건 세드릭이 미온 네게 보내준 거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자인 이샤와 공동으로 만든 거지만.” “저, 저한테요?” 그런 말 처음 듣는다고! “응. 세드릭은 세공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고마움의 표시로 너한테 이 반지를 보냈어. 벌써 몇 달은 되었을 걸?” “그런데 왜 내가 몰랐던... 아앗! 설마!” “불쌍한 미온 군. 착취당하고 있었구나.” 그렇다. 안 봐도 뻔하다. 세드릭 씨가 내게 보낸 반지를 임금님과 왕비 마마가 중간에서 슬쩍 한 것이다. 그리고 시침 뚝 떼고 올해를 넘길 생각 이었단 말인가! ‘대체 이래서야 누가 도둑인지...’라고 투덜거리던 나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도리가 없다는 듯이 웃어 넘겼다. “어머. 화 안나? 이 반지만 있으면 귀족 작위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아하하. 돈주머니 정도 잃어버렸다면 화가 치밀었을 텐데 너무 어마어 마한 것이라서 실감도 안 나네요.”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예전 가짜를 만들어서라도 세드릭 씨의 세공품을 갖고 싶어 했던 왕비님을 생각하면,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와서 따진다고 돌려줄 사람들도 아닐 테고. 쳇. 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야노 님을 찾은 이유도 이것을 물어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런 굉장한 것을 도둑맞은 전하가 어떻게 그렇게 태평한 거죠?” 당연하다. 순금상 이상으로 미쳐버렸어야 정상. 그러나 임금님은 분명 승 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야노 님이 드물게도 눈썹을 꿈틀거 리며 주먹을 꽉 쥐는 것이었다. “그 터진 만두처럼 생긴 국왕 놈... 만만하게 봤었는데, 내 실수였어.” “예?” 그 순간 그녀가 곧바로 반지를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가죽 부츠로 콱 밟는 것이 아닌가. 우직! 소리를 내며 그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세드릭의 은반지 가 박살이 나버렸다. “가짜야.” “네에?” “내가 훔쳐온 건 가짜야. 그 어수룩해 보이는 국왕 놈이 가짜로 바꿔치 기 해놨을 줄은 예상도 못했어. 그래. 인정하지. 내 패배야. 창피해서 말 도 못하겠어!” “......” 전하가 이런 쪽으로는 되게 치밀하시거든요. 도둑들의 여왕, 야노 님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그래서 다시 훔쳐올 거야. 내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엥?” 이상하다. 야노 님은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포기하는 분인데. 그런 냉 정한 분이 의외로 집요하게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저어. 혹시 훔칠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도...” “이자벨” “예?” 이자벨 크리스탄센 국장님 말입니까? “이 일은 이자벨에게 의뢰받은 거야.” “그, 그 분이 반지를 훔쳐오라고 의뢰했다고요? 정말?” “그렇다니까.” “어째서!” “어째서긴 뭐가 어째서야. 세드릭이 보낸 거니까 막을 수야 없었지만 베 르스 같은 쬐끄만 나라에 국보급의 귀중품을 주고 싶지 않아서지. 직접 돌 려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날 통해서 회수하려는 거야, 이자벨은.” “하아. 의리없네요들, 정말.” 그런데 또 의문. 자유분방하기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야노 님이 어 째서 이자벨 님의 의뢰를 수락한 걸까. 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설마, 이자벨 님에게 약점이라도 잡히신 것은...” 그러자 그녀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한 달 전쯤 인트라 무로스에 침입했었는데, 그때 이자벨에게 잡혔거든.” “......” “덕분에 내 정체가 들통 나 버린 거지.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정보의 여왕한테! 이자벨은 올해 안에 반지를 되찾아오지 않는다면 내 신 상명세를 전 세계에 뿌리겠다고 협박했단 말야! 도둑으로서 그런 수치를 당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도둑을 협박하다니, 뭐 그딴 악독한 계집 애가 다 있어! 어째서 올해에는 제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냐고! 아악! 저주나 받아버려! 올해 따위!” “지, 진정하세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잡힌 적이 없는 야노 님에게 이런 일은 엄청난 쇼크 였나 보였다. 게다가 이자벨 님은 겉으로는 상냥해도 비정하기로 따지면 늦가을 사마귀보다 더 무서운 분인데, 그런 분에게 약점을 잡혀 버렸으니, 어쩌면 평생 붙잡혀 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게 마라넬로 황제도 겁내는 인트라 무로스에 잠입한 것 자체가 자살행위라고요. 야노 님은 너무 화가 나는지 독한 술을 확 들이켠 뒤에 말했다. “그런 이유로 난 그 망할 국왕의 손아귀에서 반지 훔쳐야 해.” “하아. 힘내세요.” 뭐, 이렇게 위로하는 것은 ‘꼭 훔치세요.’라는 의미인데, 왕국 기사로 서 도둑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것도 좀... 아냐. 잠깐. 남들 걱정하느라 잠 깐 잊고 있었는데 나도 사실 이대로는 위기상황이잖아? 반지가 무사하다 => 신년회 속행 => 인간 염소 => 젖 짜이는 비극 => 대파국 한참을 궁리하던 내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야노 님!” “응?” “저도 협조할게요!” 야노 님의 눈빛은 ‘어째서?’였다. 어째서냐면 말이죠. “야노 님이 올해 안에 그 반지를 훔치지 못한다면 저도 염소가 되어 버 려요. 야노 님만이 그 망할 저주를 풀 수 있다고요!” “여, 염소? 그게 대체 뭐야?”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에 ‘젖 짜이는 염소’에 대한 심금을 울리는 사정을 털어 놓았다. 그 말을 들은 야노 님이 날 빤히 바라보며 술을 쪼옥 들이킨 뒤에 말했다. “갑자기 훔치기 싫어졌어.” “도둑으로서 프라이드를 갖으세요!” “너야말로 왕실 기사로서 도둑에게 협조하겠다는 거냐. 되게 타락했구나, 미온 군.” “전 생존의 문제라고요!” “나도 생존이야! 올해 안에 반지 못 훔치면 그 독거미 같은 이자벨이 가 차 없이 내 정보를 산지사방에 뿌릴 거라고!” “나도 악덕포주 키스 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좋아요. 그럼 합의한 겁니다!” 야노 님과 나는 살아남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눈빛으로 굳게 악수했다. 카론 경이나 헬렌 경에게는 쬐끔 미안하지만 어차피 그 반지 내거였잖아! -Blind Talk 캐릭터와 잠에 대한 상관관계 줄리탄 : 어째서일까? 카넬리안 : 잉? 줄리탄 : 잘 보면 꼭 주역급의 인물들 중에는 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자 가 있어. 케이스#1 알세스트 => 틈만 나면 잔다. 3일 동안 일어나지도 않고 잔다. 시륜이 제발 일어나라고 울부짖어도 용서 없이 잔다. 케이스#2 키스 => 미온이 그를 목격했을 때의 5할은 소파에서 자고 있을 때다. 가끔 1층에서 쾅 소리가 나면 키스가 자다가 소파에서 떨어진 것이다. 케이스#3 카넬리안 => 동면 수준. 십만년을 넘게 잠만 잤다. 몇달 동안 안 자다가도 한번 수틀리면 한달 내내 잔다. 그 이유는 저 자신이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군요. 엔디미온 : 어쨌든 깨우는 쪽도 생각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만. 줄리탄 : 이쪽은 깨울 수 조차 없다고요. 시륜 : 최소한 두 분은 생존의 위협까지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고. 이것으로 4권 분량이 끝났습니다. 물론 출판하기에는 조금 분량이 부족해서 출판본에는 미온과 키스에 대한 외전이 단편 형식으로 실릴...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방금 4권 만화 컨셉과 일러스트 스케치가 도착했습니다. 장장 2개월 을 넘게 끌어오던 4권이 이제야 나오는 것 같군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쭉 생각해 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심이 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4권 전체 분량은 토요일 새벽에 삭제됩니다. 나름대로 빨리 쓴다고 쓰긴 했지만, 결국 워낙에 늦게 나오는 4권이라서 걱정이 많이 되네요. 그럼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E-MAIL : billiken77@kornet.net 알란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를 들으며 제12화 여왕님 만만세 4 하늘도 연말 분위기에 협조해 주려는지 왕궁으로 돌아갈 때 즈음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아, 인생 가시밭길이야. 정말.' 나는 머리 위로 내려앉는 눈발을 쓸어내리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설마 내가 왕실 도둑질에 협조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새해 첫날부터 염소가 되지 않기 위해, 야노 님은 이자벨 님의 마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기사와 도둑은 서글픈 동맹을 맺어야 했던 것이다. 옛 고객과의 아름다운 재회라고 말하기엔 참으로 우울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이지 않은가. '하아, 그래도 하늘은 아름담구나 '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푸념 섞인 감탄사를 읊조렸다. 하늘은 탁 터진 밀가루 보자기 같았다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소리 없는 폭포수 밑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시원하고 아련한 기분. '왕궁까지 걸어가 볼까?' 거리는 족히 두 시간 남짓이었다. 난 피식 웃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까 십대 때는 일을 마치고나면 항상 걸어서 집으로 오곤 했지. 별을 좋아했던 까닭이다. 눈 내 리는 거리를 걸어가며 나는 오랜만에 추억에 빠졌다. 5 리더구트 앞에 도착한 내 모습은 완전 눈사람이었다. '추, 추억은 무슨...... 얼어 죽겠구만!' 천신만고 끝에 걸어서 도착한 나는 눈에 잔뜩 엉킨 긴 머리칼을 탈탈 털어낸 뒤에 몸을 부르르르 떨었다. 여기까지 오던 중 눈발이 점점 거세져서 완전 눈보라가 되어 버렸고, 덕분에 나는 '살러 주세요!' 라는 심정으로 너무도 추워서 그 누구도 없는 얼어붙은 거리를 필사적으로 뚫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게다가 오던 중, 길까지 잃었고 말이지! 조금만 더 추웠다면 '얼간이 기사, 왕궁 앞에서 얼어 죽다. 마차 삯도 없었나? 라는 신문 유머 란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따뜻한 침대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라고 이 시간에 말해봐야 아무도 없겠지." 역시나 어둑한 실내만이 나를 반겼다. 게다가 지금은 연말이라고 시종들마저 고향으로 휴가를 떠난 직후라서(난 이때서야 시종들이 정말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밤의 리더구트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뭔가 즘 이상한 것 같은.......‘ 기분 탓인가? 라고 두리번거리던 나는 곧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아니 그것보단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는 것 같기도....... 무심코 몸을 돌려 등 뒤를 바라본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우아아아앗!" 귀신을 왔어도 이보다는 별 놀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키스 경이었다. 이게 왜 놀랄 일이냐면 "키 , 키, 키, 키스 경 ! 뭐하고 있는 거예요?“ 눈에 확 들어온 것은 키스의 하얀 나신이었다 아까는 너무 어둑해서 몰랐지만 희박한 빛 무리 속에서 드러난 곡선은 분명히 그의 맨몸이었다. 어깨와 등, 종아리, 엉덩이 , 보일 듯 말 듯한 살결이 밤의 향연처럼 소파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고, 그의 셔츠와 속옷은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늘면서도 단단한 상아빛 육체가 한 여인의 나체를 마치 자신의 먹잇감처럼 품고 있었다. 소리 있이 흔들리던 그의 굴곡이 움직임을 멈췄고, 천천히 고개를 든 키스가 그 붉은 눈동자를 굴려 날 바라보자 난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순간 인식하지 못했던 살 냄새가 확 풍겨왔다. "미 , 미온 경? 언제 온 거예요!" 라면서 얼굴을 붉히고 황급히 옷을 줍는 일 따위는 물론 없었다. 단지 키스 경은 요염하기까지 한, 그러니까 사람을 홀리는 여우같은 눈웃음을 흘리며 어철 줄 모르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을 뿐이다. 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가 대체 이 빠져나갈 수 없는 범죄현장에서 무슨 말을 할지 귀를 기울였다. 그의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 "같이 할래요?' 같이 해 ? 뭘 ? 같이 해 ? 뭘 ? 같이해 ? 월? 그게 변명? 당신 지금 제정신? 결론 : 이런 미친! 죽어! 죽어버려! 제발 죽어줘! 지금 내 기분은 아이히만 대공이 내 뒷머리에 총을 갈긴 듯한 환상의 기분. 저 우주로 날아가 버린 영혼을 추스르기엔 데미지가 너무 커. 하체에 힘이 안 들어가서 흐느적거리며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아! 내가 해줄 말은 이것뿐이다! 이 사탄아! "뭘 같이해! 내가 못 살아! 이 인간아아아아아아!" "아? 싫어요?' "좋을 리가 있겠냐! 응? 기사단장이 솔선수범해서 부정을 저지르면 어쩌자는 거야!" "헤헤 , 미안해요." 얼씨구! 키스가 혀를 쪽 빼며 태연하게 웃고 나자빠지자 난 더더욱 화가 치밀어서는, 인상을 팍 쓰며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믿을 수가 없어 ! 그 여자는 대체 누구야? 아니 , 지금 누구냐가 중요 게 아니라! 에이 이 , 몰라! 카론 경에게 일러버릴 테야! 6 결국 잠을 설쳤다. 아침이 될 때까지도 반쯤 잠든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입술에 느껴지는 축축한 기분에 서서히 눈을 떳다. 그러니까 축축하고도 까칠까철한 이상한 기분인데...... 헉! '뭐? 뭐? 뭐야, 이거?‘ 고양이. 그래, 내 입술을 열심히 핥던 놈의 정체는 난생 처음 보는 새끼 고양이다. 얼룩덜룩한 갈색 무늬를 가진 혈통 없는 들고양이였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난생처음 보는 고양이 얼굴이 들이닥친 기분이란, 게다가 아직 성별도 모르는 저 고양이에게 입술까지 빼맛긴 기분이란! "우아아악! 이놈 뭐냐!"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훔치자 고양이쪽이야말로 깜짝 놀라서는 후다닥 침대 끝으로 도망처서는 겁먹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었다. 순간 휘둥그레진 나와 고양이의 눈동자가 똑같은 모양이 되었다. ‘어, 어 , 어째서 고양이가 이런 곳에!' 특별히 고양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 층까지 몰래 들어와 입주자의 입술을 훔칠 정도로 대담한 새끼 고양이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다. 나는 내 앞으로 다가와 발라당 뒤집히며 애교를 부리는 이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음, 암컷이네? 난 또 수컷에게 입술을 빼앗긴 줄 말고. 아아, 다행이다......가 아니잖아!' 아니! 다행은 무슨 얼어 죽을! 이거 대관절 어디서 튀어나온 고양이냐고! 그때 잠에서 깬 지스가 드물게도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와 잽싸게 고양이를 잡아채서는 등 뒤로 숨기는 것이 아닌가. "미 , 미안! 들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난 멍하니 지스를 바라보았다. "네 거?“ "으응." 순간 파악이 되었다. 아아, 그리고 보니까 며칠 전부터 지스가 우유나 과자 같은 것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식욕이 늘었나?‘ 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방에서 야생의 냄새 같은 것이 나기도 했고 말이지. 항상 냉소적인 태도로 날 대하던 지스는 이번만큼은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룸메이트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동물을 들고 오는 일은 아주 곤란한 것이다. 지스는 내게 안 보이도록 등 뒤로 새끼 고양이를 숨기고 있었지만, 그놈은 아침밥이라도 달라는 건지 새끼 고양이 특유의 앳된 울음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결국 지스는 아직 솜털 밖에 없는 그 새끼 고양이를 품으며 조그맣게 물었다. "고양이...... 싫어해?' "아니 뭐,특별히 싫은 건 아니지만.......“ "시,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난 이 녀석을 키울 거야!" 의외였다. 심지어는 자기 목숨마저 별로 집착이 없는 것 같은 지스킬이 이상하게도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몸이 아픈 자들은 동물에게 애착을 갖는 편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보다. 그리고 보니까 이놈의 리더구트에는 뭔가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 하긴, 나도 (내 의지는 아니지만) 명주작 알테어 님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 적도 있고 말이야. 그래, 키스에 비하면 고양이 정도는 약소하지. 내가 물었다. "어떻게 만난 거야?' "뭐?' "그놈하고." 난 어찌나 핥아댔는지 아직도 축축한 입술을 훔치며 이 사건의 장본인, 고양이를 가리켰다. 날 보고 연신 울어대는 모습이 날 어미쯤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나, 동물과 친한 인간이었나? "그건...... 그러니까 저번 지명 다녀올 때, 이 녀석이 열차 안에 있었어." '일주일 전쯤이로군. 잘도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네.' "어미가 버렸는지 혼자서 열차에 탔나봐. 식당 칸의 음식 냄새를 맡은 거겠지." 지스는 내게 동의라도 구하려는 듯이 꽤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승객들이 지저분하다며 항의를 했어. 역무원은 이 녀석을 잡으려고 소동을 피웠고, 이 녀석은 내가 있는 방으로 도망쳐 들어온 거야." 그럴 만도 하다. 마나열차를 타는 승객들 대다수는 부유한 귀족들이니까 혈통도 없는 도둑고양이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십중팔구 전염병에 걸린다며 엄청나게 화를 냈겠지. "이 녀석은 내 다리 사이에 숨어서 떨고 있었어." “......” "그래서 내 가방 안에 넣고 모른 체 한 거야. 잡힌다면 분명 달리는 열차 밖으로 던져질 테니까." 지스는 그때 그 순간 자신과 어미에게 버려져 오갈 곳 없는 고양이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난 지스와 고양이를 한번씩 바라본 뒤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잘 키워보자. 애완동물 반입불가라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 정말? 그래도 괜찮아?“ 난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찮고말고. 이 건물에는 고양이보다 훨씬 엄청난 것을 끌고 들어오는 인간도 있는데, 뭐." 그 장면이 또다시 떠오르자 난 지끈지끈 두통이 터지는 이마를 꽉 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키스는! "그럼 약속한 거다?' 지스의 간절한 목소리에 난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제야 침대 밑에서 커다란 상자 하나를 꺼내는 것이었다. 흐음, 그곳이 집인가 보군. 그런데 그 상자를 열자 내 눈 앞에 드러난 것은...... 난 눈썹을 꿈틀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봐.“ "약속했으니까 딴말하지 마." "세 마리라면 세 마리라고 처음부터 말하라고!" 상자 안에서 하얀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내 무릎이며 어깨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이봐들, 난 댁들 어미가 아니야. 일단 성별부터 다르고 말이지. 그러나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 새끼 고양이 녀석들은 내 머리 위를 점령하고는 하품까지 했고, 난 고개를 곽 숙이며 다시 한숨을 흘렸다. 나머지 두 고양이는 또 어떤 서글픈 사연으로 끌고 들어왔는지는 머리 아프니까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며 두꺼비며 장수하늘소 같은 것만 안 가지고 들어오길 빌 뿐이다. 7 올해 더 이상의 지명은 없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브리핑은 계속된다. 나는 내게 감히 젖을 요구하는 새끼 고양이들을 가까스로 달래놓은 뒤에 일 층으로 내려갔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나오지도 않는 내 젖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이도 생기는군. 쯧. '그건 그링고 아침은 어떻게 해결한다?‘ 일단 시종들이 휴가 중이다 가족들과 연말을 함께하기 위해 왕궁 밖으로 나갔다는데, '시종들, 정말 인간이었어? 라는 의문은 둘째치자. 문제는 이대로라면 아침 식사는 없다는 거다. 아니 , 하루 종일 밥은 누가 만들어! 쩨쩨한 왕실에서 우리들에게 도시락을 하사할 리도 없고 말이지.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일 층 테이블에는 꽤 호사스러울 정도의 음식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난 휘둥그레진 눈으로 계단에서 내려왔다. "이 , 이게 다 어떻게 핀 거예요?" 설마 왕실에서 보내준 음식? 그럴 리가 없다. 우리 임금님에게 그런 디테일한 성은을 바라는 것은 무리지. 그럼 대체 누가? "좋은 아침이예요오, 미온 경." 키스의 목소리가 들러오자 난 무심코 그를 바라보곤 내 눈을 의심했다. 앞치마에 국자까지 들고 있는 본격적인 요리사 무드이지 않은가! 난 꽤 상당한 수준의 음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 키스 경 이 만든 거?“ “그럼요. 제 정성이 들어간 특별요리랍니다아." "의 , 의외네요." “어머나. 서운하군요. 기사단장으로서 부하들을 위해 이 정도의 노력은 기본이에요." 그리나 부하들의 눈빛은 '일 년에 딱 한번 노력하시는군!' 이었다. 키스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아, 밤새도록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느라 잠도 못 잤어요.” "흥! 좀 다른 이유 때문이겠죠." "무슨 의미입니까아?'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키스와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한 나는 고개를 홱 들리며 대답했다. 그때 진한 브라운소스가 일품인 스튜를 떠먹던 루이 경이 수저를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눈빛은 마치 예리한 수사관이었다. "키스 경." "네에?" "여자 데려봤지?“ 순간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 어떻게 안 거야? 갑작스런 추궁의 분위기 속에서 궁지에 몰린 키스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결백한 눈빛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진땀나는 오 초간의 침묵 이후 키스가 뒷짐을 지고 면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그러나 (여자에 한해서만)슬기롭고 지혜로운 루이 경은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키스를 훑어보며 맹공을 펼치는 것이었다. "키스 경, 난 질문한 것이 아냐. 내 눈엔 이미 훤하다고. 난 말이지, 당신 체취만 맡아봐도 언제 어떤 여자를 어디서 어떻게 품었는지 알 수 있단 말씀이야!" 자랑이다. "허억!" 사람들은 루이 경의 초능력에 대해 '저건 짐승의 본능이야‘ 라는 표정들이었다. (카론 경과는 정반대지만)루이도 나름대로 고수의 품격을 가진 기사였던 것이다. 그 기술, 아주 조금만 돈 버는 쪽으로 발전시켰더라도 그는 분명 전대미문의 갑부가 되었을 거다. 키스 경은 무시무시한 루이 경의 추궁에 세차게 도리질 치며 부정하고 있었다. “새, 새, 생사람 잡으시네요오! 체취라뇨! 그걸 대비해서 이미 목욕까지 했...... 아차." 자아아알 하십니다. 자폭해 버린 키스는 입을 막은 채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드물게 보는 궁지에 몰린 쥐 꼴이로고. 사람들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슬슬 키스 경에 대한 연말 성토무드가 무르익자 키스가 우물쭈물 앞치마를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그, 그래서 요리까지 해놨잖아요." 입막음용이었냐! 그러나 루이 경은 용서 없었다. "이실직고 실토하시지 이 성스러운 금녀구역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저 인간, 여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집요하단 말이야. 그리고 결국 키스는 사람들에게 삥 둘러싸여 자아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일한 목격자인 내 얘기까지 꺼내버리면서! 배신자! 결국 나까지 공범이 되어버렸잖아! 이야기를 다 들은 루이 경이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고 말았다. "너, 너무해! 키스 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런 일이었다면......“ 그랬다면? "나를 깨웠어야지! 나라면 같이 해줄 수 있는데!" 그, 그게 아니잖아! 나를 포함한 다른 기사들은 '저 바보 대행진에 말려들기 싫어. 말려들기 싫다고!' 라는 진땀나는 표정으로 고개를 팍 숙인 채 정신없이 음식을 퍼먹고 있었고, 오직 단순 쾌활 랑시 경만이 방긋 방금 웃으면서 '응? 뭘 같이 해? 나도 끼워줘!'라는 천인공로 할 멘트를 남겨 , 결국 공무원 기사 레녹 경의 입에서 '내년부터는 기사단 규율을 훨씬 더 엄격하게 지켜줄 것을 강력하게 건의합니다!' 라는 분노에 찬 경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아아, 심란해. 방금 먹은 대구구이가 목에 걸렀다고. 체할 것 같아. 8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결국 문제는 여자도 고양이도 목에 걸린 대구구이도 아니라 반지다. 한시 발리 야노 님 에게 반지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만이 영소가 되어 내년을 맞이하는 대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다고 카론 경에게 가서 '반지가 어디 있나요? 라고 물어봐야 그 추리력 좋은 사람의 입에서 '어째서 그런 걸 궁금해 하는 거지?‘ 라며 무서운 추궁만 받게 될 것이 뻔하다. 물론 국왕 전하에게 물어보는 짓도 일종의 자살행위일 뿐이고, 이번만큼은 아이히만 대공도 오르넬라 성녀님도 키스도 조력자가 되지 못한다. 그야말로 고독한 투쟁 날 도와줄 사람은 정녕코 없단 말인가. 하긴 왕실 보물 훔쳐가는 일에 왕실 사람 도움 받겠다는 것도 얼간이 짓이로군. 쳇,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반지 본래 내 거였잖아? 내 것을 훔쳐가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 짓거리는 또 무슨 해괴한 경우람. 난 한숨을 내쉬며 뺨을 긁적거렸다. 그때. '핫! 그래! 그분이 있었어!'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고양이들을 주물럭거리며 생각에 빠져있던 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왕자님이다! 페르난데스 왕자님 이라면!' 왕실에서 가장 상식적이고 (어떤 의미로는)가장 어른스러운 왕자님 이라면 내 하소연을 듣고 도와줄지 모른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염소가 되고 싶지 않아요!' 라고 통사정하면 인간미가 넘치는 왕자님은 날 도와주실 것이다. 왕자님 에겐 얼마든지 반지가 있는 본궁에 출입할 수 있다는 강력한 권한이 있는 것이다. 뭐, 자기 집이잖아? '아마, 지금쯤 도서관에 계실까?‘ 난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고양이들을 겨우 겨우 진정시키고는 왕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9 그러나 이십여 분을 걸어 도서관 쪽에 도착할 즈음 난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심상찮은 수준이 아니라 미친 듯이 격렬한 종소리가 왕실을 가득 메우자마자 엄청난 수의 근위병들이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며 왕실 곳곳을 차단하는 것이 아닌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타종음과 거친 군홧발소리, 사방에서 터지는 고함소리가 삽시간에 왕궁에 가득 찼다. '뭐, 뭐야. 전쟁이라도 난 거야? 난 제자리에 멈춰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험악한 기세의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까지 보이는 것으로 봐서 누가 봐도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병사들과 관리들까지 잔뜩 모여 있는 본궁 앞으로 향했다. 본궁 앞은 그야말로 본격적인 아수라장이었다. 피를 흘리는 병사들이 본궁에서 실려 나오질 않나 검을 뽑아든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방을 활보하질 않나. 어elf 봐도 습격이라도 당한 것 같은 긴급 상황이었다.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게 헬스트 나이츠 기사가 다가오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너 ! 지금은 비상사태다! 냉큼 본부로 돌아가서 대기하고 있어!" "무, 무슨 비상사태라는 거죠?" "알 거 없어! 당장 돌아가지 못하겠나!" 그때 본궁을 걸어 나오던 카론 경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방금 현장 수사라도 했는지 안경을 끼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런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도 카론 경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 침착한 표정이다. 뭐랄까, 키스 경과는 정반대 의미에서의 마이 페이스라고나 할까. "카론 경!" 카론 경은 손을 흔드는 내게 대답하지 않고 걸어왔다. 순간 그의 얼음 같은 눈동자 이면에서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주 안 좋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에 살짝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엔디미온 경, 스왈로우 나이츠 본부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예?' "나인테일이 본궁에 다시 침입했다." 설마 야노 님이? 그럼 이 병사들이 부상당한 것도 야노 님이 한 짓이라는 거야?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반지를 도둑맞은 건가요?“ "반지는 훔쳐가지 못했다. 내가 발견하고 어깨에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그대로 도주했다. " “......다행이군요." "하지만." 살짝 눈을 뜬 카론 경이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나인테일을 발견한 위병들을 비롯해서 헬렌 경이 중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야. 진노하신 국왕 전하께서 내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인테일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리셨다. "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야노 님이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게다가 헬렌 경마저. 카론 경은 한참 동안 날 바라보다가 지금 이 공기만큼이나 싸늘하게 말했다. "엔디미온 경, 아직 증거는 없다. 하지만 난 자네와 나인테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수사관의 직감이라고 해두지." “......” 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경을 처벌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내통의 증거를 찾아 낸다면 내 손으로 자네를 벌할 수밖에 없어. 기사단장이 부상을 당했다. 그 죄는 내통만으로도 사형감이야." "......카론경." "내게 숨김없이 말해라. 그리고 나인테일을 잡는 데 협조한다면 자네의 형량은 최소한으로 줄여줄 수 있다." 실로 차가운 협상이었다. 난 입술을 깨물며 떨리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 순간 길게 뻗은 카론 경의 손이 내 멱살을 잡았다. 강하고 주저 없는 힘에 난 순간적으로 그에게 바짝 끌려갔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넌 왕실 기사다. 설령 나인테일을 돕지 않았더라도 연관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죄를 물을 수 있는 위치인 거다. 자기 입장을 똑바로 인식해. 자네가 처벌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줄 알아?“ 날 보호해 주려는 카론 경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카론 경이라면 남을 속이는 것에 재능이 없는 나와 야노 님의 관계 정도는 금방 밝혀낼 능력을 가진 뛰어난 수사관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다름 아닌 카론 경의 손에 의해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된다. 또한 내가 협조해 준다면 야노 님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처형당하겠지. 그러나 지금 헬렌 경을 찌른 이 흉악한 짓을 한 사람이 정말 그 야노 님일까?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괴로운 갈림길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론 경 ,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들어온 자는 진짜 나인테일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럴 분이 아니니까요." "지금 도둑의 누명 따위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하, 하지만......“ "관심 없어." 그는 내 고집을 일부러 외면하는 듯한 표정으로 최후통첩 같은 말을 내뱉었다. "진짜 나인테일이든 아니든 알 바 아냐. 왕명을 받들어 나인테일을 처벌할 것이고, 그 과정에 네가 포함되어 있다면 너 역시 처벌할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때였다. 내 멱살을 잡고 있는 카른 경의 모습을 본 부하 기사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가왔다. "카론 경, 이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뭔가 의심스러운 것이라도?“ 예전부터 날 못 마땅하게 여기던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은 카론경이 '나인테일과 내통한 놈이다. 잡아넣어' 라고 명령만 내리면 신이 나서는 날 취조실로 끌고 갈 기세였다. 그때 내 멱살을 단단히 잡은 채 날 차갑게 내려 보던 카론 경이 갑자기 날 거칠게 밀쳐버리는 것이었다. 난 균형을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고 나를 포함한 기사들 역시 카론 경의 감정적인 행동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론 경이 몸을 돌려 본궁으로 다시 들어가며 말했다. "자신이 나인테일을 알고 있다면서 내게 접근했다." "설마요! 이런 녀석이 어떻게!" "공을 노리고, 있지도 않은 말을 꺼내는 것이겠지. 내가 속을 줄 아는가." 카론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부하 기사들 역시 주저앉은 나를 흘겨보며 '네깟 놈이 나인테일을 어떻게 알아? 라고 비웃으며 카론 경을 따라갔다. 그는 나를 믿어주며 잘 하지도 못하는 연기로 보호해 준 것이었다. ‘......고마워요.' 난 본궁으로 들어가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올려보고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10 카론 경은 그 이후에도 얼마든지 나를 감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철두철미한 그의 성격과도 어울리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카론 경은 발 가만히 놔두었다. 어쩌면 나를 인간으로서 믿고 싶었던 것일까. '당신이 날 이렇게 믿어주는 것만큼 나도 야노 님을 믿고 있습니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야노 님에게 반지는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해치면서까지 반지를 훔칠 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강한 프라이드의 문제인 것이다. 예전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을 해치지 않고서는 목표물을 훔칠 수 없다면, 난 그 목표물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당장 그만둘 거야.' 그녀가 도둑들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완벽하고 깔끔한 일처리에 있다. 언제 훔쳤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무엇을 훔쳐갔는지도 모르게 일을 끝내는 그녀의 방식은 도둑질을 업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일종의 '예술'로 보일 것이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분이지만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철칙만큼은 철저하게 지쳤던 것이다. '그런 분이 헬렌 경을 찌를 리가 없어.' 하지만 만약 정말 야노 님이었다면? 그분이 나마저 속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 바보 같이 도둑을 믿어? '그럴 리가 없어!' 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다. 또 다른 마음이 '도둑을 어떻게 믿어..그녀는 널 이용할 뿐이야' 라고 비웃을 때마다 '야노 님은 달라!' 라고 애써 소리쳤다. 슬슬 그녀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진실을 알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스킬이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저 너머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오늘은 기침이 심해 겨우 겨우 잠들었던 지스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11 “......키스 경." 키스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제 어떤 여자를 품었던 바로 그 소파에 기대어 있던 그는 술잔을 든 채 계단에서 내려온 나를 슬며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드물게도 말쑥한 스트라이프 슈트 차림이었지만 하얀 셔츠는 단추가 풀렸고 보라색 실크 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목을 타고 있었다. 답답했던 것일까.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하나요?“ "그, 그냥......“ "같이 마실래요?" "의외네요. 키스 경도 술을 즐기는 줄 몰랐네요." "글쎄요. 솔직히 전 술 못해요. 그래서 마셨던 술보다는 소독약으로 사용한 술이 더 많은 것 같긴 하지만...... 가끔은 저도 부질없는 주신(酒神)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답니다." 정말 술에 약한 걸까? 촛불에 드러난 얼굴에는 약간 홍조가 올라있었다. 키스가 술을 마시는 모습은 처음 본다. 평소였다면 단단하게 감춰진 그의 과거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먼저 할 일이......" 그는 내가 이런 대답을 할 줄 이미 알았다는 듯이 허리를 조금 굽히고는 목을 길게 빼며 날 올려다봤다. 엷은 술기운이 향수냄새처럼 다가왔다. "가슴이 아플 때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주 슬픈 일이겠군요. 가보세요. 기사단장의 권한으로 미온 경의 외박을 허락하겠습니다." 그는 (인제나 그렇지만)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눈빛으로,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대답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득, 키스라면 지금 내 혼란스런 기분을 털어놔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럴 수야 없지만)너무 힘들어서 멋대로 의지하고 싶은 기분이다.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키스 경." "네에?' 난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멈춰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요." 헬렌 경이 중태에 빠졌다. 그런데도 카론 경에게 협조하지 못했다. 어쩌면 야노 님에게 이용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울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아무에게도 그럴 수가 없는 기분. 내 불안감에 키스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그렇듯 장난스러운 말투. "미온 경이 그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은 이미 결심이 섰다는 의미겠지요? 마음속으로 내린 결정에 대해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은 어른답지 못한 버릇이랍니다아." 내가 돌아봤을 때 그는 차가운 술잔을 이마에 댄 채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의 결정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에요. 선과 악에 얽매일 필요도 없어요. 미온 경은 항상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뛰어 갔잖아요? 카론 경이 뭐라고 말해도 또 자기가 원하는 길로 뛰어갈 거잖아요. 그렇죠?“ 그의 눈웃음은 내게 격려였다. 그에게 쓴웃음으로 답례한 나는 곧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밖으로 뛰어나갔다. 12 새해를 사흘 앞둔 밤거리는 악의적일 정도로 추웠다. 그 추위 속에서 나는 옷깃을 여미며 인적 드문 골목에 서 있었다. 야노 님과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오지 않는다.' 서로 정반대의 분야에 서 있는 야노 님과 이자벨 님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시간에 대해서는 철저한 수밖에 없는 '직업'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리라. 그렇기에 두 분 모두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 이 없었다. 하지만 야노 넘은 족히 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오지 않았다. '정말 날 속인 건가?‘ 라는 불안감이 시시때때로 내 마음을 찔러온다. 계산적인 생각이지만 어제 왕궁에 침입한 '나인데일' 이 야노 님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카론 경은 분명 나인테일의 어깨에 검상을 입혔다고 했다. 만약 야노 님도 어깨에 부상을 당했다면...... "미안, 늦었어." 골목으로 들어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칼을 포니테일로 묶고 있는 야노 님이었다.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부상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난 애써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이렇게 늦으신 거죠?“ "아 뭐. 별 일 아냐." 그녀는 급히 말을 돌리며 내 팔을 잡았다. "추워. 어디라도 들어가자." 13 그녀가 나를 끌고 간 곳은 연말 분위기에 흥청거리는 손님들로 북적이는 커다란 술집이었다. 은밀한 대화를 위해서는 인적 없는 곳이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미행이 없는 이상은 많은 군중 속에 뒤섞여 있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꽤 신나는 리듬이 들어찬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야노 님은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살폈다. 수상한 자는 없는지, 뒷문은 어디에 있는지, 만약 도망쳐야 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런 여러 사항들을 단숨에 머릿속에 정리한 야노 님은 곧바로 내 팔장을 끼며 마치 연인처럼 태연하게 뒷문 근처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가 내 귀에 속삭였다. "애인처럼 행동해 줘." "이 ,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나요?“ "아니. 그냥 내가 그러고 싶은 거야." 그녀는 내 허리를 감은 팔에 살짝 힘을 주며 장난스럽게 웃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계산적이면서도 즐거운 분, 이런 분이 정말 헬렌 경을 찌른 것일까? 난 또다시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도둑이라고 하기 린 믿을 수 없이 늘씬한 야노 님과 엉덩이까지 오는 긴 금발을 가진 내 모습은 어절 수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긴 했지만-날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으이구!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테이블을 잡은 뒤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그녀는 내가 말하길 기다리는 것 같았고 나는 그녀가 말하길 기다렸다. 둘 사이의 침묵이 흐르던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온, 왜 그래. 표정이 어두워." “......그런가요.” 당장이라도 ‘헬렌 경을 찌른 사람이 야노 님은 아니죠? 그렇죠?’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난 그 기분을 꾹 참았다.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라고 대답한다고 난 완전히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이상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코트를 벗었다. 그 순간 내 눈이 커졌다. 상아색 블라우스에 보이는 오른쪽 어깨의 굴곡, 분명 붕대를 많이 감아 놓은 모습이다. 그녀도 그 부분이 아픈지 오른팔을 움직일 때마다 조금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야노 님." "왜?“ "그 어깨의 검상, 어떻게 된 거죠?" "아, 이거? 별 거 아냐. 그냥 좀 다쳤어."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평소와는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별 거 아니라니까." 그녀는 곧바로 내 말을 끊었다. 그녀를 시험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야노 님이 드물게도 실수한 점이 하나 있다. 내가 '그 검상은 어떻게 된 거죠?‘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게 칼이 베인 상처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라고 대답해야 했다. 카론 경이 말했었다. 도주하는 나인테일의 어깨에 상처를 입혔다고.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그냥 날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줬다면 믿으려고 노력했을 텐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주는 걸까. "미온, 나를 봐." 특유의 빠른 직감으로 내 표정을 읽은 야노 님이 날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극도의 수련을 쌓은 사람들의 공통점이지만)그녀는 마치 독심술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마음 대부분을 읽어낸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했다. "날 믿어?“ “......” 난 입을 열었지만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나는 널 믿어. 도둑이긴 하지만 인간관계까지 거짓은 아냐. 난속여야 할 사람은 철저하게 속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가 뭐라고 말해도 믿어. 넌 내게 후자야." "저도 야노 님을 믿고 싶어요." "그럼 말해 줘 어째서 나를 불신하고 있는지." 내 몸에 흐르는 불신의 기운을 포착한 그녀는 도발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당당한 그녀의 눈빛을 보며 난 생각에 빠졌다. 나는 내가 가진 능숙한 연변으로 야노 님을 속이고 그녀에 대해 카른 경에게 말할 수도 있고, 저 어깨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고 진심을 보여줄 수도 있다. 판단이 틀렸다면 내가 처형당하거나 야노 님 이 처형당한다. 뭐가 옳은 방법일까? 내가 어떻게 해야...... 아니, 생각하지 말자, 계산하지 말자. “야노 님 , 어제 나인테일이 왕성에 침입했습니다." "뭐? 내가?“ 그녀는 ‘정말이야?’ 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상한 점은 평소라면 그런 커다란 소란을 모르고 있을 야노 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지를 훔쳐가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도주하는 도중 병사들과 헬렌 경을 찔러 중태에 빠트렸습니다." "내가 아냐!" “또한 카론 경이 도주하는 나인테일의 어깨에 상처를 입혔다고 하시더군요." “......!” 그녀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한참동안 들려오는 것은 소란스럽게 들뜬 취객들의 목소리뿐이었다. 내가 물었다. "야노 님. 그 상처, 어디서 다치신 건가요." "말해줄 수 없어." “......” “하지만 날 사칭한 놈이 누군지는 알려줄 수 있어." "예?“ 이지적인 야노 님의 표정에는 드물게도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가 상처 입은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며 입을 열였다. "내가 왜 도둑들의 여왕이 되었는지 말했던가." "아, 아뇨." 그녀가 눈앞에 있는 술잔을 툭 쓰러트리며 말했다. "그건 내가 왕을 죽였기 때문이야." "예?“ 무슨 체스 같은 이야기다. 그녀는 떼구르르 굴러가는 유리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나 왕이 있어. 도둑들 중에도 왕이 있지. 그들이 나를 여왕으로 인정하기 전에도 왕은 존재했어. 그것도 아주 잔인한 왕이었지. 또한 날 도둑으로 키운 양아버지이기도 했고." 야노 님의 양아버지가 도둑의 왕이었다고? 그런데 그를 죽였다는 것인가. "어느 날 난 그 왕에게 결투를 신청했어. 결투라고 해서 서로 칼을 뽑는 건 아니야. 그런 짓을 하는 족속은 기사만으로 충분하니까. 도둑들의 승부라면 바로 절대로 훔칠 수 없는 것을 훔쳐오는 내기가 가장 좋겠지." "절대로 훔칠 수 없는 것?“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에 입을 열었다. "마라넬로 황제의 왕관이 도난당한 적이 있었지?“ "그거, 야노 님이 훔친 거 였어요?“ 내가 깜짝 놀라서는 외치자 야노 님은 조용히 하라며 입에 손가락을 갖다 했다. 육 년 전이었던가? 마라넬로 황제의 왕관이 도난당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황제의 연설 중에. 수많은 근위병들과 진청룡까지 호위하고 있을 때 그것도 황제가 쓰고 있던 커다란 왕관이 감촉같이 사라진 사건이었다. 만약 도둑질도 '예술' 로 분류한다면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예술 행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풋내 나는 십대 계집애였고 모든 것을 가진 왕과 싸우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승부수가 필요했지. 나는 그놈에게 마라넬로의 왕관을 훔쳐올 수 있다고 승부를 걸었어." "그런 일을 어떻게......“ 분명 야노 님이 육 년 전에 성공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믿겨지지 않아 말을 흐렸다. “내 양아버지, 그러니까 도둑들의 왕은 말도 안 되는 허풍이라며 비웃었지." "그랬겠죠." “당장 조건을 걸었어. 내가 훔쳐오지 못한다면 일평생 그가 시키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지만 훔쳐온다면 당장 왕좌에서 꺼지라고." “어째서 그렇게까지 왕, 그러니까 아버지를 꺾으려고 하셨던 거죠?” 그 왕이 잔인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녀는 업End한 대답을 했다. "흥. 당연하잖아. 여왕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야. 내 위에 누가 있는 것 따윈 질색이거든." 그녀는 엄청난 프라이드와 자신감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지만 그 목소리 이면에서는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왕에 대한 증오심이 느껴졌다. "내가 훔친 마라델로의 왕관은 아직도 내 비밀창고에 보관되어있지. 그 이후 지금까지도 황제는 날 잡아 죽이겠다며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무, 무섭지 않아요?” "인생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늘었을 뿐이야."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난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보통 배짱이 아닌 것이다. 그때 난 엉뚱한 호기심이 들었다. "저어, 그런데 왕관을 어떻게 훔치신 거죠? 접근조차 불가능했을텐데......" "내 밥줄을 까발려달라고? 그것만은 어렵겠는 걸? 하지만 힌트를 하나 줄게 그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시시한 속임수였을 뿐이야." "예?' 적어도 난 그 '누구나' 에 속하지 않는 것 같다. 도통 짐작도안가는 걸.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어. 불가능해 보일 뿐이지. 기적 따위도 없어. 기적처럼 보이는 일을 내가 해냈을 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왕관을 훔쳐 와서 왕에게 보여줬지. 도둑이 편한 것이있어. 오직 실력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거든. 도둑들은 그 이후 날 새로운 여왕으로 인정했고 왕은 죽었지." "주,죽였어요?“ "난 절대 사람 안 죽여. 그놈이 밥숟가락 놓은 거야. 우리들은 그걸 죽었다고 말하지 ." 난 무슨 전설이라도 듣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간 확신의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어제 왕궁에 침입했다는 그 '나인테일‘ 이 바로 죽은 왕이야." “......!" "그 망할 자식은 끝까지 날 인정하지 않았거든. 승부에서 지면 입 닥치고 물러나야 한다는 불문율까지 어기며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어떻게 확신을......“ "한두 번이 아니거든. 아니, 그놈은 항상 내 뒤를 밟으며 나를 망치고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발악을 해왔어. 사실 이자벨에게 잡힌 것도 그놈의 훼방 때문이었어." “......용케도 그냥 놔두셨네요."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몇 번이나 그놈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놔줬지. 한심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잔인하고 되먹지 못했어도......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나는 주방을 바라보며 힘없이 읊조리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제는 내 별명까지 사칭하겠다는 건가, 하여튼 남정네의 집착은 추하다니까." “......” 그녀가 나를 향해 천천히 눈동자를 굴렀다. "하지만 그놈은 적어도 바보는 아냐. 아니 , 아주 영리해. 짐승으로 태어나는 편이 좋았을 놈이야. 먹잇감을 빼앗기 위해서는 몇 명이라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야노 님은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는지 조금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아, 믿기 힘든 얘기지? 믿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을게. 아니, 오늘 혼자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얼마든지 날 체포할 수 있었을 텐데." "믿을게요. 야노 님은 좋은 분이세요." "그래봐야 도둑년이지." "......“ 그 냉소적인 말투만 어떻게 바꿀 수 있으면 더 좋은 분이 될 텐데 말입니다. "미온, 그놈은 오늘 다시 올 거야." "예?“ "그놈의 집요한 성격을 난 잘 알고 있어. 나보다 먼저 반지를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놈이야. 필요하다면 왕도 죽일 놈이지." “그런!" 그녀의 말대로라면 터무니없는 녀석 이 싸움을 걸어온 셈이다. "서 ,설마 야노 님도 오늘 왕실에 침입하실 건가요?“ "어머? 내가 왜?“ 그녀가 눈을 깜박거리며 날 바라봤다. "초비상이 걸린 왕궁에 제 발로 들어갈 정도로 만용을 부리는 인간은 절대 좋은 도둑 못돼." '좋은 도둑' 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게다가 그 카론 경도 있겠지? 은의 기사와 정면 승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하지만 만약에 그 괌이 반지를 훔쳐간다면 야노 님이 곤란......“ "그럴 리는 없을 거야." "왜요?“ "너희들이 반지를 잘 지켜줄 거잖아?“ “......특별히 야노 님을 위해서 지킬 것은 아닙니다만." 그녀는 주먹을 쥐며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모레쯤 긴장이 풀어진 왕실에 여유롭게 숨어 들어가서 반지를 훔쳐오는 거야! 아아! 이 얼마나 작은 노력 큰 기쁨이냐고!" "하아, 왕실 기사 앞에서 범행계획 발설하지 마세요."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들었다. "걱정 마. 더 이상 널 힘들게 만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는 내 반듯한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조언처럼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로 도둑이 하는 말 믿으면 안 돼 알았지?“ "예?“ 그녀는 그 말을 남기며 뒷문으로 먼저 사라져 버렸다. 뒤도 안돌아보고. 난 멍하니 그녀가 나간 문 밖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는 반지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런데 그녀의 어깨에 난 상처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는 그것만은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14 돌아왔을 때 키스는 잠들어 있었다. 예의 헝클어진 정장을 입고 소파에 기댄 그 모습 그대로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가느다란 손가락은 호박색 술이 반쯤 남아 있는 술잔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항상 빈틈없는 키스 경의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이다. 이 사람도 뭔가 나는 모르는 어떤 일에 힘들어하고 있는 것일까 "다녀왔어요." 조그맣게 말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정말 잠들어 있는 걸까? 숨소리만 들린다. 그러니까 키스에게도 지금 며칠간은 휴가다 어쨌든 일에서 해방되는 기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금, 혼자서 소파에 잠들어 있는 모습은 불현듯 너무도 외로워보였다. 가족은 있는 것일까? 애인은? 어쩌면 카론 경보다도 더 쓸쓸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내색하지 않는 외로움은 더욱 깊고 어둡다. 하긴, 나도 동료 기사들도 이 리더구트 외에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지. 우리가 다들 무리해서라도 즐겁게 지내려는 이유는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그녀도 그랬지. 밤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녀도 때때로 찾아오는 시린 외로움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두려워했다. 난 가라앉는 기분을 털어내려고 긴 한숨을 내쉰 뒤에 키스가 들고 있는 술잔을 조심스럽게 빼내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담요를 덮어준 뒤에 촛불을 꺼주고 계단을 올랐다. "미온 경." "예?“ 뒤늦게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나도 모르게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역시 잠들어 있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너무 날카롭게 벼려놓은 그의 마음이 스스로에게 깊은 잠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잘 다녀왔나요?“ "아 예." "잘 되었군요." 그는 졸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누굴 만나서 뭘 했는지, 애당초 그걸 물어볼 성격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일정 선 이상은 상대에게 접근하지 않는 그 쿨한 성격 때문이리라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어째서 오늘은 이렇게 정상적인 대화가 진행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때 들릴 듯 말 듯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미온 경은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나요?“ "엥?“ 여, 역시 정상이 아니다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서 할 얘기야?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처연하리만큼 차분했고 짓궂은 농담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냐고? 물론 있다. 비록 과거형이지만 나는 주저 없이 '그녀' 의 이름을 꺼낼 수 있었지만 갑자기 선을 넘은 그의 심정을 훑어보고 싶은 마음에 반문했다. 상냥하지만 냉정한 키스 경에게 이토록 유치할 정도로 진지한 질문을 받는 것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으니까. "키스 경은요? 누굴 사랑한 적이 있었나요?“ 마치 갑작스러운 체스 경기 같다 게다가 그가 먼저 접근해 온 것은 이번이 처음. 아무리 집요하게 물어봐도 절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그의 속마음의 파편 하나가 지금 툭하고 내 눈 앞에 떨어졌다. 그는 이번에는 엉뚱한 농담으로 말을 돌리지 않았다. "글쎄요. 아마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네요."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리며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대는 것이었다. 슬픈 목소리인지 무덤덤한 목소리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을 그 희미한 울림은 어둠 속에서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가라앉아 버렸다 내가 엿본 그의 마음은 그것이 전부였다. 키스 경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 방으로 향하며 머리를 굴려봤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긴 외계인을 만나 세계정복을 모의하고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사람이니까, 도무지 좁은 나의 시선만으로는 설명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하아, 일단 일인칭이라서 말이지.' 뭔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 린 것 같네. 뭐, 상관없지. 15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꺼낸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지스 경, 이 고양이들 좀 어떻게 해 봐." 어째서 고양이들이 날 좋아하는지 이제야 알았다. 내 긴 금발을 실타래쯤으로 착각하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조막만한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인양 내 머리칼과 엉켜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일 리가 없다. "이게 대체 다 뭐람. 이봐요, 룸메이트 씨. 내 꼴 좀 보세요." "몰라 졸려. 알아서 해." 정작 이놈들의 양육과 레크레이션을 책임져야 할 지스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일어날 생각도 안하는 게 아닌가! 입양했으면 책임지란 말이야! "내 처참한 꼴 좀 보라니까!" 내가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서자 내 머리에 고양이 세 마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런데도 고양이들은 미이이 하고 소리를 내면서 계속 엉겨 붙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 머리가죽이 뜯겨나갈 같아! "당장 이 고양이 열매들을 수확해 가지 못하겠냐!" 그러나 이 망할 룸메이트는 이불까지 둘둘 말고 완강히 저항했고 결국 나는 아침부터 바닥에 쪼그려 앉아 투덜거리며 내 머리칼과 일심동체가 되어 있는 고양이들을 뜯어낸 뒤에야 문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16 오늘은 브리핑 이 없는 날이다. 즉 24시간 프리타임이라는 말씀 덕분에 곧바로 리더구트 지하에 있는 공동 목욕탕으로 들어간 나는 (그래봐야 시종들이 없어서 우리들이 알아서 물을 덥혀야 한다)먼저 목욕 중이던 레녹 경을 만났다. "일찍 일어났네요?" “......” 지금까지 레녹 경과 대화해 본 횟수는 손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도 책을 펼친 채 탕 속에 들어가 있는 그는 날 흘낏 본 뒤에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이거 원가 대단히 무시당한 기분이 드는데. "루시온 경은 아직 안 일어나셨나 보죠?“ "시끄럽군." 울컥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 성질 건드는 이 사람의 룸메이트는 간판스타 루시온 경. 뭔가 엘리트 이인조라는 기분이 든다. 쇼탄의 말을 따르자면 그들의 방은 '비어있는 시간이 더 많은 방' 이라고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은 출입조차 할 수 없도록 단단히 자물쇠가 잠겨 있다. 같이 김이 올라오는 탕 속에 들어간 이후에도 레녹 경은 내게 말을 건네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쳇,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카론 경의 냉정함과는 좀 다른, 그러니까 뭐랄까 레녹 경 주변에는 항상 '너 따위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라는 배타적인 오오라가 보인단 말이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받은 돈을 모두 고아원 같은 곳에 기부해 버리는 루시온 경과는 달리 상당한 돈을 축적하고 있다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레녹 경이 날 바라봤다. 탕에 들어 온지 십 분이 지나서야! 난 반사적으로 방긋 웃었다. "엔디미온 경." "예?“ "지금까지 차갑게 대해서 미안해." 라는 말은 물론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꺼낼 말은 정반대였다. "신경 쓰이니까 빨리 끝내고 나가줘." "......" 아무리 온화한 나라도 참을 수가 없어!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확 쏘아봤지만 레녹 경은 여전히 '흥, 너 따위를 상대라도 해줄 줄 알아?‘ 라는 심사가 뒤틀린 기운을 뿜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17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로 목욕탕에서 올라온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뭐라고 잔뜩 투덜거리고 있자 마침 잠에서 깬 루이 경이 하품을 하며 날 바라봤다. "뭐냐 미온. 아침부터 왜 그리 저기압이야?“ "목욕탕에서 쫓겨났어요. 아침부터 '신경 쓰이는 녀석' 이 되어 버렸네요, 쳇." "아? 레녹 경이로군 그 녀석이 있을 때는 웬만하면 들어가지마. 예전에도 목욕탕에서 서로 꺼지라면서 레녹과 지스가 대판 싸운 적이 있어. 키스 경 이 나서서 겨우 진정되었을 정도니까." "맙소사." 두 비사교성의 결정체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현기증이 이는군. "레녹 경은 어째서 그렇게 매사에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거예요? 루시온 경이나 키스 경에겐 안 그러면서!" "글쎄, 뭐 이유가 있겠지. 별 관심 없지만." "그래도 서로 인상 쓰는 것보단 친한 편이 좋지 않나요?“ "우엑 !사내놈과 친해져서 뭐해!" “......” 루이 경의 인생관이었다 "나 같은 구제불능의 친구로는 쇼탄 하나로도 충분해. 너는 멀고 먼 마키시온에 살고 있는 무스타파 씨가 널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고 화가 나겠냐?“ 누구야? 무스타파가? "나한테는 레녹 경이 바로 그 무스타파 씨야. 무시하든 싫어하든 미워하든 저주하든 날 건들지만 않는다면 서로 알 바 아니니까." 루이는 귀를 후비며 한산한 말투로 말해 놓고는 느릿느릿 테라스로 걸어갔다. '인간관계 별 거 있어?‘ 라는 후련한 마음가짐으로 적당히 즐기며 살아가는 루이 경으로서는 레녹 경이 자신을 무시하든 머리 깎고 중이 되든 전혀 신경 쓸 일도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유 없이 미움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에는 이 ! 눈에는 눈! 미움에는 미움! 이라는 소모전도 벌이고 싶지 않고 말이지. 나는 '거, 좀사이좋게 지내면 덧나나' 라고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루이 경을 따라 테라스로 나섰다. "얼레?“ 키스는 소파에 앉아 무언가에 열심이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바느질?‘ 아침부터 뭔 바느질이람? 게다가 저 한눈에 보기에도 의심스러운 얼룩덜룩한 천 조각은 또 뭐야, 게다가 표정은 왜 저리 행복만점이냐고?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슬쩍 키스 경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어, 지금 뭘 만들고 있는 거......“ "그거야 염소 의상이죠. 미온 경에게 입혀드릴 거랍니다아." 네 녀석의 목을 비틀지 않으면 해밝은 미래는 영원히 없을 것 같아. "냉큼 집어치우지 못해!" 으으윽! 아침부터 분노 3콤보야! 그러나 곁에 다가온 쇼탄 경이 내 타오르는 가슴에 기름통을 집어던졌다. "오오, 이거 타이트한데. 귀부인들에게 인기 좀 올라가겠어?“ "왕궁의 마스코트라면 이 정도는 거뜬히 입을 수 있어야지요.“ "누가 마스코트야!" "글쎄. 누굴까요오." 나를 향해 싱글 싱글 웃고 있는 키스와 쇼탄이 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것이었다. 아니 , 이것들이 정말! 내 얼굴은 아까 전 레녹 경의 표정, 즉 '상대하고 싶지 않아!' 로 변해버렸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쇼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인간은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져요!" 그러나 쇼탄 경에게 이 정도의 폭언은 간지럽지도 않았나 보다. 세상만사에 달관한 미소를 한껏 보이는 쇼탄 경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 빚만으로도 이미 사는 게 생지옥이니까."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어! 아침부터 이리저리 야무지게 치인 기분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문이 덜컥 열리며 카론 경이 들어왔다. 보통 때라면 시종들의 '안내방송' 이 들려야겠지만 오늘은 정말 예상도 못한 채 나타나서 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나 할까. 키스 경은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보이며 나와 카론 경을 번갈아 본 뒤에 아무 말 없이 바느질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 좀 그만두라고! 눈동자에서 즉사해 버릴 것 같은 얼음 광선을 내뽑던 카른 경이 내 앞에 다가오더니 사무적인 어조로 짧게 명령을 내렸다. "엔디미온 경, 따라와라." 서, 설마 취조실? 18 결과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그러나 '취조실이 아니라서 만세!' 라고는 죽어도 말 못할 상황. 몇 시간에 걸친 '준비'를 마친 나는 침대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뿜었다. "......결국 이런 것이었나요." 결국 난 공주가 되었다. 아니, 왕비지. 내 곁에서 팔장을 낀 채 날 바라보던 카론 경이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일에 적임자는 경이라고 생각했다." "하아,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렇다. 난 감히 왕비님의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긴 금발을 틀어 올려 리본을 달고 다이아몬드 귀걸이에 진주 목걸이, 검은 스타킹에 가터벨트까지 한 내 모습은 본격적인 미오니아 마크 투. 태생적으로 좁은 어깨와 갸름한 체구 덕분에 여성복도 거뜬히 소화해 낸다는 것은 내 본의 아닌 장점이긴 하지만, 왕실 기사가 된 이후에 폼 나는 갑옷 한 번 못 입어보고 여장만 두 번이라니. 대체 내 인생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거야? 하아, 이젠 느낌표 붙일 여력도 없어.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아. 그래도 염소 복장보다는 낫다는 겁니다요. 헤효오." 내가 갑갑하게 조여 오는 코르셋을 매만지며 처량한 웃음을 보이자 카론 경은 눈매를 조금 찡그리며 '일은 일이다. 불평하지 마라' 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주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해서 나인테일이 잡힐까요?“ 물론 야노 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인테일을 잡기 위해 내게 무자비하게 왕비님의 옷까지 입힌 카른 경은 자신의 추리 결과를 말해 주었다. "나인테일은 혼자가 아니다." "예?“ 난 깜짝 놀라서 카론 경을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번 나인테일이 도주하면서 근위병들과 헬렌 경을 찌른 시각과 장소를 분석해 보면 한 명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적어도 두 명 이상의 공범들이 같은 복장을 입고 동시에 왕궁이 침입한 거야." "대단해요! 어떻게 그런 추리를!" "이런 건 기본이다." 카론은 도리어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나인테일은 왕궁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일 것이다." "어째서요?“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외부인은 알 수 없는 반지의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침입했다 왕실의 움직임을 이미 알고 있는 놈이 분명해. 하지만 헬렌 경이 반지를 지킨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기 때문에 당황해서 헬렌 경을 찌르게 된 것이겠지." 헬렌 경이 반지를 지키겠다며 고집을 부린 것은 예전 야노 님에게 반지를 빼앗긴 실책에 대한 응어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헬렌 경도 자존심으로 치자면 왕실 넘버원이니까. 그녀가 갑작스럽게 반지를 지키게 되어 '나인테일' 로부터 반지를 도둑맞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녀는 큰 부상을 당했다. 헬렌 경은 카론 경처럼 검술의 달인은 아니니까. 게다가 나인테일를 저지했을 때 그녀에겐 검이 없었다고 한다. 왕실이었기 때문에 긴급 상황이 아니면 무기를 휴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망치지 않고 그를 막아섰고, 또 그런데도 그 도둑은 무방비의 헬렌 경을 몇 번이나 찔렀다. '죽일 놈.' 험한 말이 의식하지도 않은 채 새어 나왔다. "헬렌 경은 괜찮나요?“ "오늘 의식을 회복했다. 복귀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별 문제 없을 것이다. 강한 여자니까." 카론 경은 사무적으로 말했지만 그 이면에는 반드시 나인테일을 잡겠다는 집요함이 보였다. 야노 님 이 오지 않는 것은 정말 천만다행이다. 그가 단호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이것은 기밀작전이다. 반지를 경호하는 사실은 나와 자네, 그리고 잠복하고 있는 기사들 외에는 아무도 몰라 외부에는 반지는 왕비마마가 가지고 계시다고 발표했고, 내일 왕궁 밖 비밀창고로 운송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즉, 이 거짓 정보를 접한 나인테일은 오늘 올 것이다." "치밀하시군요." "경의 안전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계속 자네 곁에 있을 테니. 그리고 이 왕궁 안에도 십여 명의 기사들이 잠복해 있다. 전하의 특명으로 모두 무장을 허가받았으니 저번처럼 당할 이유도 없어." 카론 경이 날 경호해 주는 이상 안전은 전혀 문제없음이다. 솔직히 마키시온 군이 몰려와도 지켜낼 것 같은 사람이니까, 후후, 살다보니까 카론 경의 경호도 받게 되고 (물론 내가 미끼이기 때문이지만)갑자기 으쓱해지는구만. "카론경, 아까 나인테일을 '그' 라고 하셨죠?“ "그래서?“ "한 가지 밝혀내지 못하신 것이 하나 있네요." "말해라." "진짜 나인테일 님은 여자입니다." 카론 경을 날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알고 있다." "엥? 어떻게 알았어요?“ 난 깜짝 놀랐다 설마 카른 경이 지금까지 날 미행했던 것? 하지만 그의 뛰어난 추리는 다음과 같았다. "자네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여자일 테니까." “......” "아닌가?“ “......” "틀렀나?“ 아아, 역시 카론 경은...... 명수사관이었다. 19 잠복 여덟 시간째. 카론 경의 목소리가 꾸벅 꾸벅 졸고 있는 나를 깨웠다. "임무 중에는 졸지 마라." "아?“ 눈을 반짝 뜬 나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하며 고개를 바짝 들었다.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투덜거렸다. "머리 만지지 마. 애써 붙인 가발이지 않은가." "카론 경 , 배 안 고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인간의 원초적 허기에 관한 궁금증이 쓸데없는 거였던가. "하지만 화장실도 가고 싶고......“ "참아." "아하하. 하지만 그건 아시다시피 방광이 멋대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라서......“ 카론 경이 말없이 날 바라보자 난 고개를 푹 숙였다. “......참으면 되잖아요." 이거 뭘 해도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농담이 아니다. 이런 꽉 죄는 옷을 입고 자그마치 여덟 시간이나 한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고문이다. 가렵고 마렵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그런데도 카론 경은...... 난 내 옆에 있는 그를 멀End하니 올려다보았다. '아아, 이게 정녕코 인간이란 말입니까.' 맙소사! 여덟 시간 동안 미동조차 없는 것이다. 만약 키스 경이었다면 '나인테일이 오면 깨워 주세요오' 라면서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해서 잠들어 버렸을 것이다. 윽, 생각하니까 화 나내! "깨워주긴 뭘 깨워줘. 멍청이!" "무슨 말인가."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임무에 집중해라." 키스도 문제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문제. 존경심과 투정이 동시에 몰려왔다. "뭘 그렇게 바라보는 거지?“ "아뇨. 아무것도." 잘 보면 카론 경은 목걸이는커녕 그 흔한 반지조차 끼지 않았다. 유부남인데도 반지가 없는 이유는 (음흉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본래 기사는 장신구를 달 수 없기 때문이다. 청렴함과 전쟁을 상징하는 기사에게 그런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기사도의 '이론' 지만 '현실 은 귀를 뚫든 코를 뚫든 그것 때문에 기사 작위 박탈당하는 일 따위는 없다. 키스만 하더라도 수십 개의 귀걸이가 있어서 요일마다 바꿔 끼지 않던가(이건 좀 심했다). 하지만 카론 경은 아무도 뭐라고 안하는 '도리'를 혼자서 지키며 정말이지 어딜봐도 '기사의 규격' 에서 벗어나는 구석을 찾아 볼 길이 없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이뤄진 제복에서 그나마 찾아 볼 수 있는 '개인용품' 은 셔츠 소매를 잠그는 은색의 커프스 하나와 품속의 안경 정도. 그러고 보니까 지금까지 평상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못 봤다. 언제 어디서 만나든 항상 제복을 칼처럼 입고 있었다. '설마 옷장 안에도 똑같은 제복만 수십 벌 있는 거 아냐?‘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아니면 머리 어던가에 생체 감지 센서 같은 것이 있어서 누군가 접근하면 후다닥 평상복을 벗고 준비해 둔 제복으로 갈아입는다든지...... 하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아무튼 카론 경에게서 '언제나 준비 완료' 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엔디미온 경." "예?“ "이번 일이 끝나면 예정대로내 집에 와라." "예!" 난 냉큼 대답했다. 이런 것을 보면 분명 카론 경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한다는 것인데, 그 실체를 확인할 것을 생각하니 가습이 다 두근두근......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나인테일이 올지도 모르는데. 난 다리를 꼬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카론 경, 큰일입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자는 두 명의 헬스트 나이츠 기사였다. 그들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역력했지만 카론 경은 더욱 더 침착해져 갔다. "무슨 일인가?“ "나인테일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난 긴장된 얼굴로 기사들을 바라봤지만 카론 경은 여전히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자기 위치로 돌아가 작전대로 행동해." 하지만 그들의 다음 말은 카론 경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 그게 나인테일이 나타난 곳이 여기가 아니라 바로...... 카론 경의 저택 입니다." 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카론 경은 싸늘한 눈초리로 그들을 홅어보며 말했다. "그래서?" "현재 카론 경의 사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겁한! 분명 카론 경을 이곳에서 끌어내기 위한 짓거리다. 그는 비열하고 잔인한 놈이라고 했다. 카론 경의 부인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상황인 것이다. 난 다급한 표정으로 카론 경을 바라봤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말했다. "임무 속행한다."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임무가 우선이다. 집에는 대기 중인 기사들을 파견하겠다." 너무도 차가웠다. 마음이 얼어버릴 정도로. 부인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작전 속행이라는 말이 나을 수 있을까. 이런 것이 기사의 귀감이라면 감정을 도려낸 기사만이 최고의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뭐가 말인가." "정말 그래도 괜찮냐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카론 경이 더 잘 아실 텐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론 경." "조용히 해라." "반지는 제가 꼭 지키고 있을게요." “......” "목숨을 걸고 지킬게요.“ 난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뭐든지 결정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카론 경이 이번만큼은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힘을 주어 말했다. "반지보다 중요하잖아요." 옆에서 카론 경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가 명령을 기다리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희들은 엔디미온 경을 호위하도록." "예?“ 그가 자리를 떠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는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라. "경솔한 놈! 스왈로우 나이츠 주제에 설치긴 왜 설쳐! 이러다가 반지라도 도난당하면 네놈이 책임질 테냐! 나인테일의 함정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카론 경을 보내버 리면 어떻게 해!" 카론 경이 떠나자 곧바로 기사 한 놈이 내게 소리쳤다. "쳇, 카론 경도 그렇지. 지금이 마누라 지키러 갈 때야? 역시 평민 출신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귀족들의 전매특허가 또 튀어 나왔다. 그런 말은 카론 경 있을 때 한번 해보지 그러셨어. 난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당신 부인은 참으로 불쌍하군요. 자신이 죽든 말든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는 명예로운 남편을 둬서." "이놈이!" 그는 볼을 씰룩거리며 날 후려치려고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중요한 미끼인 내게 흠집을 냈다가 평민 출신 부기사단장님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빌어야 할 테니까. 그때 옆에 있던 짧은 머리의 기사가 씩씩거리는 동료의 어깨를 치며 웃는 것이었다. "하하, 그만둬. 나는 카론 경이 부인을 구하러 가서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뭐가 다행이냐 하면......“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웃고 있는 그의 소매 안에서 뭔가 튀어나오는 것 같더니 곧 단도가 투덜거리던 기사의 목을 뚫고 나온 것이었다. 입술이 유독 얇은 그가 즐거운 듯 말했다. "계획대로 진행되어서 다행 이라는 소리야." 그리고 그는 늑골 사이로 능숙하게 칼날을 집어넣어 컥컥 소리를 내는 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일순간 긴장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네 녀석 이 도둑들의 왕?“ "호오, 날 알고 있다니 영광인데?“ 칼날을 뽑은 그는 이미 절명한 기사를 밀쳐낸 뒤에 내게 다가왔다. 난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하지만 넌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인데 어떻게......“ "왕실기사라는 것이 단순해 임명장만 있으면 되거든 임명을 받고 왕실로 오고 있는 기사 놈 것을 슬쩍했지." "그, 그럼 그 기사는......“ "까마귀가 뜯어 먹든 늑대가 씹어 먹든 내가 알게 뭐야." “......!" 나인테일은 여러 명이라는 카론 경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카론 경의 집을 덮친 놈도 공범 중 하나겠지. 그리고 이놈이 바로 본체(本體)였다. 어디에서나 만날 것 같은 평범한 인상에 살인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할 것 같은 얼굴. 놈은 나를 향해서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목선이 예쁜데?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정말 여자로 착각하겠어. 죽일 맛이 나겠군." 이 자식! 도둑이야 변태 살인마야? "누가 순순히 죽어준대?“ 나는 눈을 벼리며 뒤로 물러섰다, 라고는 하지만 이놈의 치렁치렁한 옷 때문에 날렵한 동작 같은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그가 혀를찼다. "호오, 시간을 끌어보시겠다?“ "반지는 절대 못 넘겨. 너 따위 놈에게는 더욱 더!" "시간 질질 끄는 건 질색이거든? 얌전히 반지만 내놓으면 죽이지는 않으마."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사양이야.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카론 경과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야노 님을 위해서도 절대로 빼앗길 수 없어!' 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가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죽어야겠네."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다. 황폐한 눈동자란 저런 것이리라. 야노 님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긴 뒤에 복수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고 했지? 뒤틀린 흉포함이 저 태연한 표정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런 놈을 상대로 내가 해야 할 방법은...... '구조요청!' "도둑이야! 나인테...... 흐읍!" 도둑은 몸이 빠르다는 규칙 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놈은 실로 예상치도 못한 몸동작으로 내게 들이닥쳤다. 가슴이 깨져 버리는 것 같았다. 명치에 주먹이 꽂히자 허리가 꺾이며 숨이 멎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피해볼 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끄러운 건 질색 이야." 격렬한 통증에 터지는 신음소리는 틀어 막힌 입 밖으로 나오질 못했다. 단숨에 날 쓰러트린 이놈은 피에 물든 단도를 목에 들이댔다. 반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자 그가 속삭였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네 손가락 채로 잘라버릴 테니까." 미친 놈. 나는 겁에 질런 얼굴로 반지를 낀 손을 풀었다 그런 내 표정이 참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래야지. 이제야 말이 통하나 보군." 나는 어째서 야노 님이 목숨을 걸고 이 양아버지를 꺾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뿌리부터 썩어빠진 놈도 존재하는가보다. 그가 반지를 빼기 위해 손을 옮겼을 때였다. "으윽!" 그는 허벅지를 쥐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혹시나 해서 치마 속에 넣어둔 칼이 도움이 될지는 몰랐군. 내 칼이 깊게 박힌 허벅지에서는 붉은 피가 The아지고 있었다. 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항상 여자의 치마 속을 조심하라는 격언도 모르나 보지?“ "꽤 귀여운 짓을 하는군 그래." 그는 단숨에 칼을 뽑아 집어던졌다. 여기서 내가 실수한 것이 있다면 이놈의 '집착'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보통 도둑은 부상당하면 도망치지 않던가? 그가 짐승처럼 변해가는 눈으로 날 노려봤다. "이 몸에 칼을 심은 놈은 내 딸내미 이후 처음이로군. 죽을 준비해." "자, 잠깐. 당신 시간 부족하지 않아?“ "걱정 마. 널 찢어놓는 데 십 초면 충분하니까." 이 자식의 칼질도 과소평가했나 보다 다리를 찔렸다고는 믿을 수 없는 빠르기로 그가 뛰어들었고 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으윽!" 순간 칼날이 번뜩이며 단번에 오른쪽 가슴이 잘려 나갔다. 물론 밀가루 반죽이지만. "아, 이거 가짜가슴." "이런 망할!" 다시 휘두른 그의 단도에 복부가 찢겨져 나갔다. 물론 옷만 "아. 이거 강철 코르셋." “......” 거 , 여장이 의외로 도움 되네. 는 화가 치밀어 오른 표정으로 소리쳤다. “크윽! 짜증나는 놈! 단번에 심장을 도려내 주마!" "버 , 벌써 십 초 지났어! 적당히 좀 하라고!" 하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사나이였다. 야노 님, 이놈이 살인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셨어야죠! 부웅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칼날을 가까스로 피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싸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망할 하이힐 덕에 곧바로 내몸이 균형을 잃었다. '다, 당한다!'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기분. "죽이기 전에 저부터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귀에 익은, 하지만 믿겨지지 않는 목소리에 나와 이놈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우리들 뒤에는 두 자루의 단도를 뽑아든 야노 님이 서 있었다. 그녀가 경멸에 찬 표정으로 '도둑들의 왕'을 바라왔다. "오랜만이로군요, 아버지." 그가 뒤틀린 미소를 보였다. "야노.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너답지 않군." "가끔은 규칙을 깰 때도 있는 겁니다." 어째서 야노 님이 여기 온 거야. 오지 않겠다고 해놓고선 ! 위험한 것은 질색이라고 말해 놓고는! "큭큭, 오랜만에 부녀상봉이로군. 껴안아 주기라도 할 건가?“ "그 대신 죽여 드리지요." 나는 항상 이성적이던 그녀의 눈가에 맺힌 감정을 보며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사람 못 죽이는 착한 아이로 알았는데 말이야." "넌 사람이 아니니까." 지독한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야노 님이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일까. 이렇게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저자를 죽이려는 것은 분명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자벨이 정보를 하나 주더군. 나도 몰랐는데, 내 부모님은 이오타의 귀족이었대. 그리고 그 친부모를 죽인 놈이 바로 너라는 사실도 이제야 알게 되었지. 자, 이제 죽일 이유 충분하지?“ 이자벨 님이 그런 정보를 알려줬다고? 어째서? 그분은 이유 없이 정보를 발설하는 분이 아니야. "뭐? 그런 일 없어 네가 이오타의 귀족 출신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그렇게 말할 때, 야노 님 이 던진 단도가 그의 발 앞에 깊게 박혔다. 그가 이빨을 드러냈다. "너, 정말...... 날 죽일 생각이냐?“ "물론. '키워준정' 의 유효기간은 이제 끝났어." 야노 님의 파란 눈동자는 저자의 눈빛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뒤틀길 살기와 증오로 얼룩진. 이런 것은 야노 님답지 않아. 그녀답지 않다고! 먼저 발을 옮긴 쪽은 그였다. "웃기지 마. 누가 이딴 곳에서 동반자살 할 것 같아? 잠시 후면 기사들이 몰려온다고!" 도주하려는 그를 막아선 야노 님 이 단도를 들었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으면 날 죽이고 가면 되잖아? 항상 그래왔듯이 말이야."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말했잖아. 넌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아" 그리고 둘은 서로 충돌했다. 단도를 가진 싸움에서는 서로 힘을 겨루는 일 같은 것은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탐색전도 없이 전력으로 달려든다면 보통은 일합에 승부가 나버리는 것이다. '야노 님?‘ 무릎을 꿇은 쪽은 짐승처럼 달려들던 그였다. 찢겨나간 눈가를 잡은 채로. 검붉은 피가 쏟아져내려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떨고 있는 그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며 말했다. "놀랐지? 항상 칼을 쓰는 연습을 했어. 언제라도 널 죽일 수 있도록.“ “......야노." "네가 붙여준 그 이름을 가지고 지옥에나 가버려." "네 친부모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야." "치졸하네, 죽는 순간까지도 솔직할 수 없는 거야?“ "미, 믿어줘!" 난 그때 겁에 질린 그의 모습을 보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유약하고 초라하게 떨리는 모습. 그리고 순간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이자벨 님이 가짜 정보를 알려준 것이 분명하다. 아니 , 설령 진짜라고 하더라도 야노 님을 막고 싶었다. 문밖에서부터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이 몰려오는 발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노 님! 그만두세요!" "미온?“ "자기 신념을 버리는 야노 님은 보고 싶지 않아요!" "이건 집안 문제이고 여왕의 의무야. 왕실 기사면서 나 같은 도둑을 감싸주는 것도 적당히 해." 그녀는 매몰차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문제도 의무도 아니에요. 단지 야노 님은 지쳤을 뿐이에요. 애정이라고 손톱만큼도 없는 인간관계에. 아무렇지도 않게 냉정한 척하면서도 결국 당신은 항상 상처 받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렇죠?“ "웃기네. 그딴 시시한 것 포기한지 오래야." "포기했다면 어째서 저한테는 그렇게 잘해주신 거죠? 나 같이 순진한 인간,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대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목에서 칼을 때지도 않았다. 그리고 문이 덜컥 열렸다. 끝장이다. 20 "안 도망치고 뭐하십 니까아?“ 산들거리며 들어오는 키스를 보며 난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야노 님과 아는 사이였어. 키스가 다시 문을 닫아 잠그고는 문에 기대어서는 싱긋 웃었다. "어리광 대단하네요. 우리 귀여운 미온 경이 당신을 보호하려고 기사 생명을 걸고 동분서주했는데도, 당신은 고작 그딴 쓰레기 하나 껴안고 침몰할 생각인가요? 역시 세계적인 도독이라서 그런지 실망시키는 것도 수준급이네요." “......” "자기 혈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치고 변변한 인간 없다더니 그게 정말이로군요." 야노 님은 동정하는 듯 비웃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키스를 확 쏘아보며 내뱉었다. "그건 네 녀석도 마찬가지잖아." 키스는 그 의문스런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단지 당신도 나처럼 되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용서 받지 못할 구제불능의 낙오자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니까요." 무슨 소리일까. 아니, 그보다 어째서 키스가 평소에는 입에 담지 않던 말까지 꺼내며 야노 님을 도와주려는 것일까, 그리고 낙오자라니? 그때 '쾅! 쾅!' 소리를 내며 기사들이 거칠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에 어떻게 된 거야! 당장, 문 열어!" 하지만 키스는 계속 그 문에 기대어 여전히 야노 님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여왕이잖아요? 알아서 행동하세요." "야노 님." 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칼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질색이야.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은." 그리고 나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색한 미소를 보았다. 내가 조그맣게 말했다. "하지만 보기 좋아요. 능숙하게 상대를 속이는 것보다 솔직하게 진심을 보이는 편이 훨씬 보기 좋아요." 문 밖은 거 친 고함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누구야! 당장 문을 부숴버려!" 그녀는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결심한 다음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그녀의 신조였던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가 창문을 열며 그녀가 말했다. "미온, 지금까지 고마웠어." "다시는 못 만날 것처럼 발하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거의 동시에 거대한 문이 굉음을 지르며 단숨에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카른 경이 검을 칼집에 넣으며 들어왔다. "카, 카론 경. 오셨어요?“ 난 미처 닫지 못한 창문을 흘낏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21 카론 경은 구석 에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는 키스의 등짝을 보며말했다. 이봐요, 키스 경. 숨었다고 숨은 게 그겁니까?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 키스." "어머나 카론 경. 왕궁에서 길을 잃어서 그만......“ 원숭이도 못 속일 변명이었다. "알겠다." 얼레? 카론 경은 의외로 순순히 속아주는 것이었다. 키스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인은 괜찮으세요?“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역시 최고의 기사가 되는 것보다 최고의 남편이 되는 것이 훨씬 힘들죠오?“ “......결혼이나 해라." 카론 경은 눈매를 찡그리며 무릎을 끊은 채로 떨고 있는 '나인테일' 에게 다가갔다. 물론 한눈에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사, 살려주세요. 자비를." "그건 전하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넌 사형이야, 라는 말보다 훨씬 차갑게 들리는 말을 꺼낸 카론 경은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지는?“ "아, 여기 있습니다." 난 반지 낀 손을 들었다. 별일이 다 있었지만 약속대로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뭐, 본래 내 반지였지만. 그는 옷이 잔뜩 뜯겨나간 내 몸을 한동안 말없이 지켜왔다. "왕비마마의 귀중한 드레스를 버려서 죄송합니다. 의외로 호신용으로 좋던데요? 아하하." "경이 나인테일을 직접 잡은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카론 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예,그렇습니다." "알았다. 경의 노고를 국왕 전하께 보고하도록 하지." 부하 기사들은 이 상황이 영 의심스러운 모양이었지만 카론 경은 개의치 않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야노 님이 사라진 밖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사건을 종결한다." 22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신년이 되기 전에 '나인테일'이 잡히는 바람에 신년성극은 예정대로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제기랄! 그러니까 일단 올해의 성왕 하켄 역은 크리스티앙, 즉 크리스 경이었다. 단신의 키에 동그란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소년이 무슨 수로 그 무시무시한 마왕을 때려잡겠냐고? 적어도 작년 하켄 역의 레녹 경보다는 낫다. 무대에서는, 특별 주문제작한 스몰사이즈 무대 의상을 입은 크리스 경 , 아니 성왕 하켄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읊었다. "아, 아름다운 레이디. 이 보잘 것 없는 방랑자에게...... 그러니까...... 마, 마실 것을 주실 수 있어요? 아, 아니 줄 수 있겠소?“ 본래 내성적인 크리스이긴 하지만 저토록 당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훗날 하켄의 부인 되는 청순가련한 시골 처녀 역의 카론 경이 말했다. "알겠다. 주면 될 것 아닌가. 아니...... 알겠사옵니다. 망할." 저게 정녕코 비단결 같은 마음을 지닌 성모(聖母)의 대사란 말인가.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쌀쌀맞은 대사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에 크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저,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말해버렸다. 맙소사, 애인에게 주눅 든 영웅이라니! 아무리 그녀가 무서워도 왕의 위엄을 보여야지! 연극은 점점 돌아올 수 없는 곳을 향해 맹진하고 있었다. 거의 칼부림이 날 뻔 한 최후의 고집 끝에 사상 최초 바지 입은 성모 역이 된 카론 경은무대 한 편에 네 발로서 있는 내게 걸어왔다. "저는 가진 것 없는 시골 처녀, 네게 줄 것은 염소젖 밖에 없다. 아니 없사옵니다." 카론 경은 입술을 꽉 깨물며 짜내듯이 그 대사를 읊고는 화끈한 염소 복장의 내게 다가와 몸을 숙였다. 머리에 정크 리본을 달고 있는 카론 경에게 커다란 종을 목에 걸고 있는 내가 한숨을 내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카론 경 , 연초부터 수고하십니다." "가끔....... 이 왕국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는 침울하게 대꾸하며 내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키스가 베푼 단 하나의 자비라면 내 복장 안에 염소젖이 담긴 소품을 숨겨두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카, 카론 경. 그쪽이 아니거든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빌어먹을!" 결국 카론 경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고 만 이후, 진땀나는 상황 끝에 겨우 겨우 염소젖 꺼내자 난 이 연극에서 배정받은 유일한 대사를 구슬프게 토해냈다. "메에에에에에에에에!" 하늘에 먼저 가신 부모님, 올해도 잘 지내고 계신지요. 전 이렇게 힘내서 살고 있답니다. 23 "올해도 더없이 훌륭한 연극이었어!" 신년 연극이 끝난 이후 우리는 왕실 식구들의 열렬한 박수와 폭소를 선사받을 수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성극은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꾸미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하긴, 누가 새해 첫날 새벽부터 내용 뻔히 아는 지루한 연극을 보고 싶을까, 그래서 점잔빼고 하품을 참으면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은 유치하지만 신나게 웃을 수 있는 난센스를 택한 것이고 나도 그것에는 동의한다. '놀랄만한 사실은 카론 경에게 성모 역할을 하사한 분이 바로 우리 만두 아저씨라는 거지만. 역시 쇼 비지니스 감각은 하나만은 마라넬로 황제 이상이라니까.' 물론 염소 역할이라면 진절머리가 나지만, 격식에 엄격한 줄로만 알았던 왕실에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점이다. 상대를 웃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도 진리를 깨달게 해주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 염소 복장 그대로 떠밀려 극장을 나가는 귀빈들에게 인사하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 역시 내 복장이 인기 최고라나 뭐라나. 제기랄! 보좌관들과 함께 극장을 나가는 아이히만 대공이 내 어깨를 치고는 '풋!' 하고 웃음을 참는 것이었다. 체통을 지키세요! 대공! "여어. 수고했네, 엔디미온 군. 자네가 왕실에 들어온 이후 가장 어울리는 일을 맡은 것 같으이." 악담입니까! "그, 그런가요. 아하하하." "응. 내년에도 기대하겠네." 이런 즐거운 추억은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하답니다. "대충 얘기는 들었네. 나인테일을 직접 잡았다며?“ 아이히만 대공이 그렇게 말하자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예. 사투를 벌인 끝에 겨우 겨우......“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흥흥. 너무 무리하진 말게."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극장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거 뭔가, 속는 사람은 없고 속아주는 사람만 있다는 기분이 드는군. 역시 다음 타자는 연극 내내 요염한 눈길로 내 명 연기를 관람해주시던 성녀님 이셨다. 오르넬라 님 주변에 모여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펠리오스의 무녀들은 억울하게도 이 연극의 귀빈 자격으로 참여했단다. 같은 왕실 식구끼리 누군 염소고 누군 귀빈이라니, 정초부터 우울해지는군. "어머, 저 오빠가 아까 그 젖 짜던 염소야. 스왈로우 쪽 신입이래. 귀엽게 생겼어." 자기들끼리 염소 미온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소곤소곤 품평회중이시다. 몸 둘 바를 모르겠구만. 게다가 저 눈빛들은 앙코르 공연이라도 원하는 것 같잖아? 그때 붉은 색 드레스를 입은 오르델라 님이 내게 손등을 내밀며 말했다. "호호, 금발의 염소는 처음 보는구나. 키워보고 싶은 걸?“ "젖이 안 나온다는 단점이 있긴 합니다만." 나는 능청스럽게 되받아치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염소 인간이 글래머 성녀님 에게 재롱떠는 모습은 뭔가 호러하긴 하지만 키스가 특별 제작한 내 복장을 웃음을 참는 얼굴로 바라보던 오르넬라 님 이 긴 담뱃대에서 연기를 흘리며 말했다. "한번 타보고 싶어, 이 염소." 지, 지금 원가 상당히 비(非)성녀적인 발언이 지나간 것 같은...... 그와 함께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다가왔다. "신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있다면 이 착한 아이에게 가호를 내려주시길." 위험한 것인지 성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축복을 남긴 오르넬라 님은 시녀가 가져 온 새하얀 털 코트를 몸에 걸치며 무녀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무녀들은 '루이 경과 같이 와요' 라는 말을 몰래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디가 금남구역이라는 거야? 슬슬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나는 '올해도 무사하길' 이라는 뒤늦은 새해 소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포옥 내뱉었다. 그때 내 앞에 또깍거리는 발걸음이 다가오다가 멈춰 섰다. '응?‘ 고개를 들자마자 깜짝 놀랐다. 도망친 거 아니었습니까? "야, 야노 님?‘ "미온 군, 황궁에서는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호스트였을 때보다 훨씬 본격적인 걸?“ 고급스러운 파티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머리도 금발이긴 했지만 나를 향해 웃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나인테일, 야노 님 이었다. 24 "어떻게 여기 들어오신 거예요!" 야노 님을 왕궁의 후미진 곳으로 끌고 온 나는 당황해서는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뭐 그리 놀라냐는 얼굴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수백 명이 넘게 모이는 행사에 끼어드는 건 문제도 아냐 다들 나를 무슨 귀족의 부인 정도로 보던걸? 뭐, 치근덕거리는 녀석들이 있어서 귀찮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하다고요." 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키스 경을 알았던 거예요?“ "글쎄, 언제 알았느냐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지 솔직히 나는 그 남자에 대해서 하나도 몰라. 그리고 그 사람도 나에 대해 관심이 없고. 서로 원하는 것만 보고 즐기다가 헤어지면 그걸로 족한 거야."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조금 쓸쓸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그때 내 머릿속에 또 하나의 의문이 피어올랐다. "저어 그럼 설마 그때 키스 경과 있던 그 여자가 바로...... "그는 냉정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야. 테크닉도 좋고." “......” "후후, 같이 해도 좋았을 텐데." "이 소설 , 전 연령층 대상이라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이거 뭔가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그런데 정말 반지 필요 없는 건가요?“ "상관없어. 마음만 먹으면 연제라도 다시 훔쳐갈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 이 반지, 이자벨 님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야노 님의 정보가 전 세계 에......“ "내가 왜 어깨를 다쳤을 것 같아?“ 그녀가 자신의 드레스와 가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날렵한 움직임을 보장해 주는 타이트한 가죽옷과 밤의 물결처럼 고운 흑발이 드러났다. "그건 그날 내가 인트라 무로스에 다시 침입했기 때문이야." "엥? 어째서 그 위험한 곳에!" "이자벨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래도 내 성미에 안 맞으니까 거기서 이자벨이 절대로 유출되길 원치 않는 소중한 기록하나를 찾아서 훔쳐냈지 뭐, 그 과정 중에 조금 다치긴 했지만." "어째 어깨를......“ "그리고 이자벨과 협상했어. 서로 약점을 쥐고 있으니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녀는 세계최강의 방첩기관 국장답게 꽤 현명해. 즉시 내 제안에 승낙했으니까," "하아, 대단하네요. 이자벨 님을 상대로 그런 막판 뒤집기를 하시다니. 그런데 그 절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중한 기록이란 대체 뭐죠?“ 그 치밀한 이자벨 님이 곧바로 야노 님을 놔줄 정도로 중요한 기록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설마 마키시온 제국의 황실 비리? 아니면 인트라 무로스의 공작원 리스트? 그것도 아니면 아신들의 약점에 대한 보고서 ? 하지만 야노 님은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엉뚱한 말을 했다. "그녀에겐 아주 창피한 기록이지." "얼레? 창피?“ "아 정말 말해주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어서 유감이네. 하지만 이걸 발설했다간 이자벨이 인트라 무로스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날 죽이려고 들걸?“ "대, 대체 어떤 기록이기에......“ 난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대답해 주지 않은 채 순식간에 나무를 밟으며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녀는 자신이 사라져야 할 때를 잘 알고 있다. "많이 고생시켜서 미안해. 인연이 허락한다면 또 볼 수 있겠지. 그때는 도둑과 기사가 아닌 남녀로서 만나고 싶지만. 하지만 그 남자에겐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 물어봐도 전혀 모릅니다아, 라고대답할 데니까." 그녀는 그 말을 남기며 자취를 감췄고 곧바로 흥청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잘 가세요, 도둑들의 여왕이여." 나는 조그맣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리더구트로 향했다. 그녀는 잔인한 도둑들의 왕에게 남의 것을 훔치기를 강요받은 자다. 그 악취 가득한 늪 속에서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하지는 못했지만)그것도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신의 인생이라는 신념을 가지며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체 이자벨 님의 그 창피하고도 소중한 기록은 무엇이었냐고? 이자벨 님 이 소중하게 보관하는 그 기록이 바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스크랩해 놓은 '데일리 미온(Daily Mion)'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하아, 하여튼 누구에게나 의외의 성격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째서 이자벨 님이 야노 님에게 그 끔적한 거짓 정보를 알려준 것일까. 단순히 자신의 기록을 빼앗긴 것에 대한 앙갚음일까? 아니면 나는 모르는 또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13화 칼의마음 1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문을 두드리며 내 목소리가 조금 떨었다. 잠시 후면 카론 경의 아내를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이 된다. 어떤 분일까, 쾌활하고 조금은 수다스러운 도시 풍 아가씨? 아니면 매사에 상냥하고 왠지 쓸쓸한 눈웃음이 매력적인 성모님? 그것도 아니면 무서운 카론 경 마저 단단히 휘어잡을 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글래머 미인? '그건 그렇고 반응이 없네.' 어쨌든 문을 열어줘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문을 두드렸다. 카론 경 성격으로 봤을 때 당연한 말이지만 귀여운 메이드 복을 입은 시녀가 대신 열어주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어쩌면 카론 경의 사모님이 문을......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난 반사적으로 꽃다발을 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문 틈 사이에서 귀여운 얼굴이 쪽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 얼굴의 소유자가 남자라는 것이고, 더 큰 문제가 있다면 내가 아는 남자라는 것이다. 순간 내 꽃 같은 표정에 힘줄이 돋았다. "설마 당신이 카론 경의 부인은 아니겠지. 응?“ 키스는 앞치마를 두른 채 하얀 반죽이 잔뜩 담겨진 커다란 은색사발을 들고 있었다. 키스가 들고 있던 주걱으로 반죽을 무성의하게 휘저으며 볼은 잔뜩 부풀리고 투덜거렸다. "저는 무자비한 카론 경의 손에 끌려온 거예요." "끌려와요?“ "할일 없으면 음식이나 만들라면서 끌려왔어요. 헤효, 저처럼 바쁜 사람에게 식모 노릇을 시키다니, 너무한다고요오, 카론 경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보시지. 댁이 바쁜지." 나무늘보도 당신에 비하면 엄청 바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아침만 해도 브리핑 서류 읽다가 꾸벅 꾸벅 졸던 주제에! 아니지 지금은 집안일로 말다툼할 때가 아니야. 이미지 관리를 해야...... 그렇게 생각하던 내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키스 경 옆에 나타난 키 작은 아가씨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키가 (아무리 키스가 크다고 해도)키스의 허리 정도밖에 안 되는 조그만 여자였다 조금만 더 작았으면 '키스 경의 딸?‘ 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의문마저 들었을 것이다. 키스가 내게 그녀를 소개했다. "미온 경, 이분이 바로 키스 경의 아내이신 이멜렌 양이랍니다아." 이멜렌 님? 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초대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저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하옵니다." 나는 내가 행할 수 있는 최대한 우아한 몸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굽히며 그녀를 항해 정중하고도 세련된 인사를 올렸다. 좋아, 완벽해! 이 아름다운 제복부터 세심하게 고른 향수, 단정하게 긴 머리를 묶은 리본까지,(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좀 창피하지만)이건 마치 한 마리 고귀한 백학이 지상에 내려앉는듯한 모습이지 않은가! 밤새도록 연습했단 말씀! 이멜렌 님을 감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와하하하...... 하하아아아, 그런데 말이야. '아니 , 왜 아무 말도 없으시지.' 그녀는 내 입맞춤을 허락할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주셔서 고마워요' 라는 안주인 전문 멘트를 남기지도 않은 채 내가 전해 준 꽃다발을 들고 마냥 생글 생글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이거 뭔가 내가 실수한 거라도 있는 건가. 그리고 곧 그녀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제법 커다란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저 오래된 가죽 주머니, 아까부터 신경 쓰였어. 예쁜 프릴 드레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런데 설마요, 용돈이라도 주시려는 건 아니겠지. 키스는 웬일인지 열심히 주머니 속을 뒤지고 있는 이멜렌 님의 모습을 측은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곧 그 주머니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그녀가 손수 만든 것 같은 한 장의 카드였다. 그리고 마치 인형 같은 그녀가 말없이 웃으며 내게 보여준 카드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엔디미온 님. 나는 그제야 그녀가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이멜렌 님은 오랜만의 손님이 무척이나 반가운지 활기찬 표정으로 날 방 안으로 안내했다. 방안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절세의 검술사, 카론 경의 집이라서 뭔가 살벌한 장검 같은 것이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꽤 어려워 보이는 책들이 거실 한쪽 책장에 잔뜩 쌓여 있는 것을 제외하면 보통 부부의 집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이멜렌 님의 취미인지 곳곳에는 파스텔 톤의 천장식과 예쁜 조각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고, 그녀가 직접 그린 것 같은 종교적인 색채의 그림들 몇 점이 벽에 걸려 있었다. "자넨가." 카론 경이 주방에서 걸어 나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입을 가리며 감히 '푸훗!' 하고 웃고 말았다. "뭐가 우스운 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별로 웃길 것도 아니겠지만 카론 경이니까 우습다. 옆에 서 있는 이멜렌 님도 남편의 모습이 즐거운지 연신 생글생글이다. 여전히 반죽사발을 품에 안고 있던 키스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카론 경.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모습이로군요. 밀가루 좀 풀어달라는 부탁이 당신에겐 그렇게도 무리 였나요." "누,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어!" 그렇다. 나는 왕궁 입성 이후 처음으로 평상복 차림의 카론 경을 볼 수 있었다.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이는 검은 셔츠와 다크 블루의 데님바지에 맨발, 이제 어깨 밑까지 내려온 긴 머리는 방해되지 않도록 부인이 땋아 준 것 같았다. 그래, 멋 부리지 않는 카론 경다운 아주 훌릉한 스타일이다. 그셔츠와 허덕지와 두 손과 목과 턱과 눈가에 밀가루로 추정되는 새하얀 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것만 때면. 키스 경의 말대로 지금 카론 경의 모습은 밀가루와의 혈투에서 완패한 패배자였다. 키스가 그 모습을 감상하듯 훑어보다가 콧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gm응, 그러고 보니까 예전 같이 기사 수업 받을 때도 카론 경이 음식을 담당할 때면 전 부대원이 산지사방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내겐 고역이었으니까." "그걸 먹어야 하는 우리들 쪽이 더 고역이 아닙니까아? 전 처음에는 새로운 군사병기 인 줄 알았다고요." "시끄러워." 키스와의 말싸움에서도 패배해 버런 카론 경은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가버렸다. 키스 경마저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던 그 요리는 무엇이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두렵군. "의외네요. 완전무결한 것 같던 카론 경에게도 저런 면이 있다니." 그때 작은 키의 그녀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내게 다른 카드를 보여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것은 그녀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카드인 듯 모서리가 곱게 닳아 있었다. 3 주방의 패권(覇權)은 키스 경에게 넘기도록 하자. 나도 요리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얼마 전 키스가 시종을 대신해서 스왈로우 나이츠의 식생활을 책임졌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의 천하무쌍한 요리 실력과 비교되는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미온 경이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아." 키스는 내게 이멜렌 넘을 맡겼다. "미온 경은 여자 전문이잖아요?“ 뭔가 순수하게 칭찬으로 듣기에는 꺼림칙하긴 하지만, 확실히 이멜렌 님도 내게 무엇인가를 바라는지 내 뒤를 졸즐 따라다니시고 말이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저어, 뭔가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그러자 그녀의 기다렸다는 듯이 수첩에 뭐라고 빠르게 적어서는 내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엔디미온 님의 얼굴을 그리고 싶어요. "예, 영광입니다." 내가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어디론가 가서 활짝 핀 꽃들을 들고 오더니 내 머리에 장식해 주는 것이었다. '뭐 , 뭔가 본격적 인데?‘ 그리고 스케치북과 펜을 가져온 그녀가 귀여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날 이리저리 차라보더니 곧바로 내 얼굴의 윤곽을 그리기 시작했다. 얇고 섬세한 곡선이 하얀 종이 위에 이어지는가 싶더니 곧 긴 눈법과 도톰한 입술이 모습을 갖춰가는 것을 보며 난 감탄하고 말았다. 그녀의 아마추어답지 않은 그림 실력 때문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즐거워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슬퍼지기 쉬운 삶일 것이다. 체구도 소녀처럼 작고 목소리조차 낼 수 없다. 어떤 왕실 파티에서도 이멜렌 넘을 본 적이 없다. 시녀들을 거느리며 여왕처럼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한눈에 보기에도 연약해 보이는 몸은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림을 그리거나 천 장식을 하거나 조각품을 모으는 것 같은 소박한 일들 그런데도 그녀의 모습에서 그늘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감탄할 만한 일이지 않는가.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이끌고 있는 것일까. '실은 카론 경이 집에서는 부인에게 엄청나게 아양 떠는 팔불출이라든가.'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카론 경의 모습을 봤다. 상의를 벗은 채 물에 젖은 머리칼로 우리를 바라 보는 그의 눈빛은 '대체수건이 어디 있는거야?‘ 였다. '저런 사람이 아양 떨 리가 없겠지.' 그리고 나는 식사가 준비될 동안 그녀의 모델이 되어 아무 말도 없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다시 나타난 카론 경은 안경을 쓰고 근처 소파에 앉아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요리책을 읽고 있었다. 들려오는 것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키스의 콧노래 뿐. 이렇듯 너무도 조용한 초대가 되어 버렸지만 이제 가족이 없는 내게는 이런 느낌도 기분 좋았다. 4 키스 경은 크지도 않은 테이블에 오만가지 음식들을 잔뜩 널려 놓을 정도로 센스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주 밖에 나가지 못한다는 이멜렌 님을 위해 일부러 여름 소풍 분위기의 음식들을 차려놓았다. 나도 예전 그녀를 위해 곧잘 먹을 것을 만들어 주던 몸이라서 이런 것들을 보면 아무래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세련된 비네그레트 드레싱과 그린가든 드레싱을 차가운 물에 담가놓은 파릇한 야채와 향초 위에 부어 놓은 신선한 샐러드, 그리고 그것에 구운 토마토와 노란 파프리카, 가지를 곁들어 초라해 보이지 않는 풍미를 가하고 살짝 익힌 버섯으로 고급스런 향을 더했다. 바다가 없는 우리나라에선 꽤 구하기 힘든 연어를 훈제시켜 부드러운 상아빛 크림, 레몬 소스와 함께 크로와상에 넣은 이국적인 샌드위치는 상당한 손재주로 깔끔하게 손질해 놓았다. 막 오븐에서 꺼낸 특제 파이는 달콤한 과일과 몇 종류의 견과류, 벌꿀로 만든 훌륭한 수제품이었다. 일부러 한 조각의 고기도 보이지 않도록 하고 오직 비프 콘소메 스프 하나로 은은한 고기향이 입가에 머물게 만든 것 또한 쉐프로서 키스 경의 우아한 센스가 보인다. 아마 거친 육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이멜렌 님을 위한 배려이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료수는 와인 대신 과일과 허브를 이용한 핑크색 주스였다. 어려운 예법이 필요한 값 비싸고 부담스런 음식들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먹을 수 있는 편안한 요리들, 만약 껍질을 깨서 먹어야 하는 거대 갑각류라든가 반쯤 형체가 남아 있는 달팽이 요리 같은 것을 금쟁반에 내왔으면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해졌으리라. ‘......왕실 요리사 출신인가.' 나는 서빙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는 키스 경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봤다. "대단해요. 나도 요리에는 자신이 있는 편인데 이 정도면 거의 전문가 수준이네요. 대체 기사되기 전에 무슨 일 했어요?“ "미온 경만큼 독특한 일을 했던 것은 아니랍니다아." 그 말에 반짝 눈을 뜬 이멜렌 님이 재빠르게 뭐라고 써서 키스에게 보여주었다. 엔미디온 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그러니까그건...... 내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키스가 날 곁눈질로 바라보며 그녀의 귀에 뭐라고 속닥속닥거리는 것이었다. 뭔가 아주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빠르게 쓴 종이를 내밀었다. 정말 여자에게 재롱떠는 것만으로 돈을 벌 수 있어요? "그게 아냐!" 나는 나도 모르게 경악의 비명을 지른 뒤에 오호호호, 하고 웃고 있는 키스를 확 노려봤다. 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설명한 거야! 그때 카론 경이 부인의 허벅지에 하얀 냅킨을 올려주며 말했다. "이멜렌에게 쓸데없는 것 가르쳐 주지 마라." 저도 이 순진무구한 분에게 '그 화려한 세계'를 소개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요. 5 나와 키스 경 그리고 남편 카론 경에게 둘러싸여 식사를 하는 이멜렌 님은 무척이나 즐거운 것 같았다. 비록 목소리는 없지만 풍부한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녀가 카론 경 옆에 꼭 붙어 있는 것만 봐도 (내 걱정과는 달리) '부부생활 이상 없음' 이지 않은가. 멋모르고 계약한 노비문서 덕분에 앞으로 구 년간 결혼할 수 없는 나로서는 솔직히 꽤 질투가 날 정도다. 작은 입 속에 샐러드를 넣던 그녀가 키스의 어깨를 톡톡 치고는 종이를 들었다. 아주 맛있어요. 항상 고마워요. 본래 식사량이 무섭게 적은 키스는 손으로 턱을 괴고 생글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역시 저와 결혼하실 걸 그랬죠? 카론 경에게 이런 요리는 평생가도 무리랍니다아." 그 말에 그녀는 간지러운 듯한 웃음을 보였다. 하아, 결혼 같은건 생각도 없으면서 농담은 술술 잘도 나오시네요. 그때 카론 경이 냅킨에 입을 닦으며 키스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흥. 자네는 기사 수업 때도 검술 훈련은 안하고 주방에서 놀았으니까." "어머나.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아?“ "누가 질투한다는 건가!" 누가 봐도 질투하고 있었다. 키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실은 카론 경이 요리만 못하는 게 아니랍니다. 실은 춤도 전혀 추지 못해서 무도회 때도 혼자 본부에 남아 검술 훈련을 하고 있는 한심한 카론 경을 제가......“ "다 들린다, 키스." "다 들으라고 한 소리입니다아." 빠직, 카론 경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지만 그의 표정에 금 가는 소리가 분명 들렸다. 둘의 기사 수행 시절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평소에는 키스도 카론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데다가 나는 애당초 기사 수행 기간도 없었으니까 대체 기사 수련 과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턱 이 없는 것이다. 키스는 '절대 말하지 마' 라고 자신을 쏘아보는 카론의 눈빛을 즐기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보이며 2절을 시작했다. "아아, 카론 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강철 방패를 꿰뚫는다든가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두 조각낸다든가 하는 인생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기술밖에 몰라요. 저런 남자를 어디다 써 먹나요오." 순간 카론 경 이 확 쏘아보는 눈빛으로 곧바로 맞받아쳤다. "적어도 수업에 쓰일 말을 팔아서 유곽에 놀러가던 녀석 에겐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군." 결국 키스는 '해보겠다는 겁니까아!' 라는 표정으로 카론 경을 바라봤고 카론 역시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꺼내면 내쫓아 버리겠다'라는 무서운 눈빛으로 응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나는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긴장감에 소리 죽여 주스를 마셨다. 둘 다 대법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치졸한 면이 있단 말이야. 그때 그녀가 주머니 속에서 새로운 카드를 꺼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분 모두 좋은 사람이에요. 말하자면 그 카드는 둘의 신경전을 멈추게 만드는 그녀의 무기, 그리고 자주 사용했는지 그 카드 역시 모서리가 꽤 많아 있었다. 6 뭔가 박력 넘치는 식사를 마친 뒤, 카론 경은 접시들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이멜렌 님이 남편의 앞을 가로 막으며 새로운 카드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제가 할게요. "괜찮아. 이 정도는 나도......“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말없이 주장했고, 카론 경 역시 '괜찮다니까' 라면서 고집을 피웠다. 하아, 나름대로 부부싸움인가. 결국 카론 경은 머쓱한 표정으로 접시를 잔뜩 들고 주방으로 빠르게 걸어갔고 그 뒤를 그녀가 '제가 할게요' 라는 카드를 든 채 졸졸 따라다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모습에 소리죽여 웃다가 조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내 접시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모습을 보고도 앉아 있으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달려오던 이멜렌 님은 그만 내 가슴에 얼굴을 부딪치고 넘어지고 말았다. "앗! 미안해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카드 역시 바닥에 넘어지며 모두 흩어졌다. 그녀는 주저앉은 채로 황급히 자신의 카드들을 줍기 시작했고, 나 역시 접시를 내려놓고 바닥에 어지럽게 풀어져 있는 카드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항상 품고 다니는 카드들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웃어주세요. 무리하지 마세요.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요. 좋은 꿈꾸세요. 잘 다녀오세요. 눈은 괜찮아요? 낡은 카드마다 쓰여 있는 그녀의 목소리들이 소곤거렸다. 카드마다 얽혀 있는 그녀와 카론 경의 모습들이 하나하나의 단편이 되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아, 부럽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카드를 전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능숙하게 카드 한 장을 뽑아서 내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이도 당신을 좋아해요. 또 오세요. 와주실거죠? 그것은 이번에 새로 준비한 카드인지 새하얀 종이 위에 정성스런 글씨로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자, 나는 불현듯 '그녀' 가 떠올라 결국 눈물을 글썽거리고야 말았다. 7 왕궁 뒤편에 있는 카론 경의 집으로부터 리더구트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이 조금 넘는다. 덕분에 나는 같이 돌아오는 키스 경과 대화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쪽은 나였다. 왕실에서 사육하는 양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며 나는 계속 키스 경의 눈치를 봤다. 키스는 리더구트에서 가져온 전용 요리도구들을 천에 싸서 들고 있었다. "키스 경, 저 말이죠." “네에?” “......저 그러니까." "뭔가요?“ "하아, 아무것도 아니 에요." 확실히 그걸 물어보기에는 즘 껄끄럽단 말이야. 내 표정을 힐끗 훔쳐본 키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멜렌 님 말인가요? 어째서 말을 못하는지?“ 난 그의 눈치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남의 불행 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좋지 못한 호기심이다. 하지만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이라는 상당한 지위의 기사와 왕실의 은둔자처럼 파티에도 한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 사이에는 뭔가 남모를 사정이 있을 것 같다는 참기 힘든 궁금증이 생겼던 것이다 누가 봐도 일상적인 결혼은 아니지 않은가. "남의 아픈 사정을 들춰내는 일은 전혀 기사답지 못한 짓이랍니다아." "아,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뭐." 하여튼 이 양반은 뭐든 꼭 한번 꼬집는다니까. 키스는 눈을 살짝 감고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카론 경이 평민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잔잔한 바람이 1월의 숨죽인 들풀과 그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아 예, 그건 들어서." "상상도 못할 노력 끝에 기사가 되었어도 그 신분만은 낙인처럼 끝까지 따라가요. 인간은 자신보다 비천한 자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존재지요." 나는 키스가 왜 이런 서두를 꺼냈는지 알 길이 없어 그의 옆을 걸으며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이멜렌 넘은 공작가문이랍니다." "저, 정말요?“ 믿겨지질 않았다. 이 나라에서 공작이란 국왕 전하와 왕자님 다음 가는 귀족 칭호다. 특히 왕족 아이히만은 대공(大公)이라는 칭호를 받아 권력의 정점에 서 있고, 꼭 그가 아니더라도 공작가문은 대대손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멜렌 님이 정말 공작가문의 일원이라면 그녀는 소박한 이층집이 아니라 하인이 백 명쯤 딸린 으리으리한 궁전에서 살고 있어야 했다. "평민 출신의 기사가 공작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는 일은 존재할 수 없답니다." "하, 하지만 했잖아요." "그렇죠. 이멜렌 님의 가문은 카론 경과의 결혼을 허락했죠." 모순되는 키스의 두 말 사이에서 불길한 기분이 느껴졌다. 내가 물었다. "그게 이멜렌 님이 목소리를 잃은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키스는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오래 전 이멜렌 님은 돈을 노린 한 무리에게 납치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은 엄청난 몸값을 요구했고 그녀의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돈을 지불하고 싶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 잘난 가문의 이름값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출세 길이 막막한 평민 기사 카론 경을 불러서 말한 거예요." “......” "기사의 명예를 걸고 레이디를 구출해 오라고." 키스는 쓸쓸한 웃음을 보였다. 나는 그 멋들어진 말 이면에 있는 추악한 계산을 볼 수 있었다. 돈을 주기는 싫다, 하지만 모른 척하자니 가문의 명예가 추락한다. 그래서 도저히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평민 출신의 이름 없는 기사 카론 경을 부른 것이다. 십중팔구 구해내는 것에 실패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적어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의 기사가 자신이 사모하던 아름다운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그녀와 함께 장렬히 산화 하다' 라는 슬프고 명예로운 영웅담을 조작해 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카론 경은 그 제안을 수락했나요." "대 공작가문이 일개 평민기사에게 내린 영광스러운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요. 만약 거절한다면 카론 경의 기사 생명은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일 탠데요." "하, 하지만 수락하면 죽는 거잖아요!" "카론 경은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거절하고 불명예스러운 자로 낙인 적혀 기사 작위를 빼앗기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카론 경은 그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카론 경은 그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죠. 하하." 키스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가슴을 저몄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작 가문의 기대와는 달리 카론 경이 그녀를 구출해 온 거예요. 삽시간에 그 엄청난 무용담은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나갔고 카론 경은 고귀한 은의 기사라는 별칭까지 붙게 되었지요. 공작 가문으로서도 원치 않더라도 카론 경을 칭송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멜렌 님은 이미 충격을 받아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충격이 무엇이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몸값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에 격분한 악당들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할 테니까. "공작 가문의 명예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을 거예요. 인간의 정 따위는 송두리째 부숴버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꼭 지켜야 할 명예지요." “......” "이미 더럽혀진 여자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그들은 이멜렌 님을 몸가짐이 올바르지 못한 여자라며 일방적으로 의절해서 그녀의 재산 상속권을 모두 빼앗은 이후 카론 경에게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자신을 구해준 카론 경과 결혼하는 것은 아주 명예로워 보였으니까요." "속물들! 어떻게 그런 더러운 짓을!" 키스는 울분을 토하는 내 머리에 손을 및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그녀를 책임져 주는 대가로 공작가문은 카론 경의 후원자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평민 출신의 기사가 어떻게 왕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까지 올랐겠습니까." "믿겨지질 않아요. 너무한다고요." 키스는 추억에 잠긴 눈빛으로 거의 울먹거리는 날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말이 많았네요. 하긴, 세상 모든 일들이 올바르고 낭만적으로만 진행된다면 누가 소설을 보겠어요?“ 그는 공허하게 웃었다. 나는 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그녀의 카드에 적혀 있던 솔직하고 착한 목소리들이 계속 떠올라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키스 경! 그럼 카론 경은 이멜렌 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 단지 출세를 위해서? 왕실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녀를 택한 것뿐인가? 키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소리에 섞여 내 귓가에 울렸다. "아니요.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 그도 그녀도,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elf 수가 없는 겁니다." 나를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에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어렵게 웃음을 보였다. "그래요 그거면 된 거에요." 악의에 가득 찬 세상의 악취를 부정하지 말자, 하지만 목적 없이 분노하지도 말자. 그것은 단지 우리 자신을 공연히 더럽히는 일에 다름없다 얼마든지 이멜렌 님도 그 손쉬운 분노와 체념을 선택하기보다는 자신의 카드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요' 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가.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일은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일보다 수백 배는 어려운 일이 리라. '그러니까 나도 노력하자.'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키스를 뒤따랐다. 그리고 키스를 따라잡으려 잔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그런데 걸어가면 갈수록 어찌된 일인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던 뿌연 상념들이 점점 형체를 갖춰 가는가, 싶더니 결국내 머리는 '이멜렌' 이라는 이름을 어디에서 봤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그것은 예전 잠깐 열람할 수 있었던 왕실 기사록에서였던 것이다. '악투르 왕국에 납치되었던 노르펜스트 공작가의 장녀.' 그와 함께 무의식에 가라앉아있던 기억의 편린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녀를 구출한 기사는 카론 샤펜투스와...... 키릭스 세자르.' 내 의문의 끝에는 또 다시 망령의 이름과 같은 그것이 얽혀 있었다. 그러나 은의 기사를 칭송하는 그 수많은 영웅시 어디에도 키릭스라는 이름은 없다. 마치 이름 없는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이멜렌 님을 구출해 낸 카론 경의 숨은 수호신인지 아니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두를 이용하는 비정한 악마인지조차도 짐작할 수가 없다. 키릭스는 바로 앞에 서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 유령 같은 존재,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서가는 키스를 바라봤다.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 에 춤추는 자로구나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한산한 노랫소리가 귓가를 겉돌았다. 8 우리들에게도 나름대로 '유급휴가' 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출장' 이 예정보다 빨리 끝났을 때일 것이다. '으음, 하루 일찍 끝나버렸네.' 삼 일 전, 동부의 한 귀부인에게 지명된 나는 제사를 마치고 목욕을 하며 중얼거렸다. 나의 올해 첫번째 지명자는 난생 처음 듣는 중년의 백작부인인데, 아무래도 그녀 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 힘든 것이 '새치기'를 했기 때문이다. 예약을 무시하고 날 먼저 데려온 것만 봐도 상당한 권력자라는 것을 짐작은 하겠지만...... 어쨌든 이런 식으로까지 내가 빨리 필요했다고 하기에 정작 제사는 너무도 간단하게 대충 대충 넘어가 버렸다. '그 백작부인, 제사에는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아.' 그래도 명색이 자신의 아버지 제사인데, 제사 전발 날 불러놓고 파티까지 하질 않나 제사 당일 발도 참석하는 둥 마는 둥 귀찮다는 표정으로 일관하질 않나. 그렇게 명에를 소중하게 여기는 귀족이라면 조금은 엄숙한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에이, 몰라. 몰라" 최소한 나는 하루 벌어서 기뻐. 본부로 돌아가서 하루 종일 지스의 고양이하고 방바닥이나 뒹굴며 노닥거릴까나. 아니면 루이 경과 쇼핑이라도? 그것도 아니면 오랜만에 내 옛 고객들에게 편지를 쓰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괜찮겠네. 본의 아니게 생긴 휴일을 어떻게 보낼지 행복하게 고민하며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는 것까지는 좋은데 말이지.’ 엥? 어디 있는 거야, 내 옷? 침대 위에 분명히 놓아두었는데? 설마 내 옷에 자유의지 같은 것이 있어서 어디론가 방랑을 떠나 버린건...... 절대 아닐데니까 현실 가능한 생각만 하도록 하자. 그때. "오호호호, 엔디미온 군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거야?“ "흐히히히힉!" 등 뒤에서 들려오는 오싹한 웃음소리에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봤다. 그리고 내 방에선 언제 들어왔는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백작부인이 날 실로 형용할 길이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곰도 서슴없이 때려잡을 것 같은 경호원 두 명이 서 있었다. "배, 백작부인?“ "어머나. 그렇게 놀란 얼굴도 귀엽네."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위안이 되는 사실은 목욕탕을 나오며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렸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그 외에는 죄다 파별로 치닫고 있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렴." "그, 그보다 옷부터 돌려주시죠." "이리 와서 가져가, 오호호호." "......“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의 피해자는 여자 아니었나. 하지만 '냉큼 옷 내놔!' 라고 성질을 부렸다간 저 머슬 바디들에게 무자비하게 린치 당할 분위기였다. 아니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어...... 그 뒤에 있는 십자가는 뭔가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백작 아줌마 뒤에는 뭔가 고문 도구 비슷한 것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형틀이 서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런 게 방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둘째 치고 자주 사용했던 것 같은 저 흔적들은 대체 뭐냐고! "아아, 이거? 신경 쓰지 마, 오호호." 그러니까 더 신경 쓰이는군. 나는 지금 내 유일한 동지인 수건군이 떨어지지 않도록 꽉 잡으면서 말했다.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사가 끝나면 지명비용을 받아서 본부로 돌아가야 합니다만." "아? 돈? 그거라면 여기 있어." 그녀가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꺼내 내게 보여주며 입 꼬리를 올렸다. "와서 가져가." 난 곧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면 죽는다. 가면 죽는다. 가면 죽는다. 내 오감이 위험을 외치고 있었고 내 머릿속은 내가 앞으로 겪게 될 고초를 제멋대로 시뮬레이팅하기 시작했다. "작년 왕궁에 들렀을 때 꽃밭에 앉아 있던 엔디미온 군의 모습을 보고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 엥? 꽃밭? 아아, 나 그때 키스가 일 시켜서 정원 잡초 뽑고 있던 거였는데! "어서 이리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너는 아직 하루 동안은 내 소유니까 설마 거절하진 않겠지?" 이, 이건 이미 스토킹의 수준이야! 농담이라도 '와하하하. 이놈의 인기는 어elf 가도 시들 줄 모르는군!' 이라고 웃어넘길 수가 없는 상황이잖아! 키스 경, 기사로서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고객 물 관리 좀 하라고요! '쳇, 어쩔 수 없군.' 나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요염한 표정으로 백작부인을 바라봤다. "부인, 소인은 이미 부인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어머,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준 거야?“ "물론이옵니다. 저 역시 아름다운 당신을 본 뒤부터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답니다. 부인을 만나게 된 것은 제게는 운명과 같은 것이옵니다." 물론 운명이다. 그것도 아주 비참한 운명이지. 그녀는 내 사근거리는 고백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황홀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보았고, 난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좋아! 승부다!' 나는 그녀 에게 손을 내밀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자아, 이제 함께 둘 만의 장소로 가실까요." 그러자 그녀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엥?“ "얘들아, 묶어." 그리고 난 예의 십자가에 여전히 내 유일한 동반자인 수건 군과 함께 묶여 버렸다. 내 일생일대의 대실수다. 노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취, 취향이 참으로 독특하시군요." 나는 채찍을 들고 내게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눈썹을 가늘게 떨며 굴은 미소를 보였다. "엔디미온 군, 내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했었지?“ "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미 제 몸은 기사단의 소유라서 일단 기사단에 가서 허락을 받고 다시 와야......“ "호호, 재미있는 농담이네?“ 역시 '간은 지상에 놓고 왔답니다' 라는 패턴의 고전적인 트릭으로는 불타는 욕정에 사로잡힌 백작부인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 아아, 이제 어쩔 수 없이 낭만과 채찍을 사랑하는 백작부인께 이 한 몸 바칠 수밖에 없을...... 수가 있겠냐! 이런 분위기까지 왔으면 누가 와시 날 구해줘야 하는 거 아냐? 이딴 식으로 '그동안 SKT를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끝내는 것은 싫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위기의 순간, 정의의 용사가 홀연히 나타난다' 라는 전개는 여성한정 특권이라서 내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녀가 곧 과녁판이 될 내 가슴을 살짝 할퀴며 광기가 들어찬 웃음을 보였다. "엔디미온 군, 날 잊지 못하도록 만들어 줄게." 이미 평생 머릿속에 각인될 상황까지 와버렸습니다만! 순간 나는 이 위기의 상황이 뭔가 대단히 한심해져버려 고개를 겪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를 동경한 남자, 스물하나. 정초부터 십자가에 매달려 이 무슨 막 되먹은 플레이냐고. 기분 최악이야.' 아아, 몰라, 몰라. 연초부터 운수대통이야. 이제 될 대로 되라해! 그때였다. 난 기적을 보았다. "뭐 , 뭐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져 버리며 헬스트 나이츠의 망토를 두른 기사들을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지긋지긋한 놈들이 반가워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 뒤로 걸어 들어오는 자는 바로. "카, 카론 경! 절 구해주러 오셨군요!" 그러나 카론 경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라는 싸늘한 눈빛으로 날 흘낏 본 뒤에 당황하고 있는 백작부인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카론 경이 창백해진 백작부인에게 말했다. "왕실 귀중품 은닉, 탈세, 사기, 협박, 과도한 세금 징수, 명예훼손, 존속살해, 살인 예비 음모 및 교사, 이것이 너의 죄명이다." 그 말과 함께 카론 경은 그녀 앞에 두터운 서류 뭉치를 던졌다. 아마도 그녀가 저지른 수많은 죄목들이 낱낱이 기록된 문서이리라. 이제 막 사십 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인데,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있는 힘껏 범죄를 저질렀구만. 카론 경의 얼음장 같은 판결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어명에 의거, 지금 이 순간 이후 너의 작위와 재산과 영지는 왕실에 반납되며 징역 25년 형에 처한다." "어, 어떻게 네놈들이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지금까지는 아무 말도 없었으면서!" 그녀의 찢어지는 고함소리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카론 경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나라면 오르넬라 성녀를 적으로 돌리는 실수는 안했을 것이다. 체포해라."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곧바로 흙빛이 되었다. 그녀가 경호원들에게 외쳤다. "이, 이놈들을 죽여!" 그러나 경호원들은 '우리가 미쳤수?‘ 라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 볼뿐이었다. 하긴, 이제는 권력도 재산도 없는 중년 여자의 명령을 뭐 하러 목숨 걸고 따르겠는가.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억울하다고 펑펑 울기 시작했지만 카론 경은 여전히 조금의 동정도 없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사건 번호 142를 종결한다. 왕실로 귀환한다.“ 아, 아직 종결 안 된 부분도 있는데요! "저어, 카론 경. 142번 끝내시기 전에 저도 좀 풀어주시면 안될까요? 아하하하." 졸지에 십자가에 매달린 성자가 되어 버린 내가 간절하게 카론 경을 바라보자 그가 날 올려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왕실 기사 납치...... 추가." 9 "아아, 카론 경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뻔했네요." 잽싸게 옷을 입고 여행 가방과 금화 주머니를 챙긴 나는 냉정하게 먼저 저택을 빠져나가는 카론 경의 뒤를 좋아가며 말했다. 그는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특별히 자네를 구해주러 온 것은 아니야." 이, 이미 알고 있다고요! "저 그런데요." "또 뭔가." 카론 경은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봤다. 항상 그렇지만 '용건만 간단히' 라는 표정이로군. "설마 제가 오늘 당한 일까지 기사록에 쓰이는 건 아니겠죠?“ 일단 기사록이라는 것이 기사의 행적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두긴 하지만, '엔디미온 키리안, 21세, 지명 중 채찍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한 귀족에게 사로잡혀 십자가에 매달리다. 순결 잃을 뻔함' 이라는 창피한 사실까지 기록해서 대대로 남겨둘 건 없잖아요? 그러나 날 빤히 바라보던 카론 경은 '내가 알게 뭔가' 라는 듯 아무 대답도 없이 몸을 빙글 돌려 다시 걸어가 버렸다. 하긴, 이건 물어본 내 쪽도 '알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 문제로군. 또다시 휑하게 앞질러 가는 카론 경을 황급히 따라잡은 내가 물었다. "카론 경, 열차 타고 가세요? 저도 황실로 가는 중이거든요?“ "왕실은 내일 떠날 예정 이다." "예? 왜요?“ "자네는 궁금한 것이 참 많군." 결국 카론 경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스케줄을 말해주었다. "오늘은 근처의 도공(刀工)에게 가서 내가 맡긴 검을 찾아올 생각이다." "엥? 그런 거라면 왕궁에서도 얼마든지......“ 왕궁에는 검이나 연장을 만드는 대규모의 왕립 단철장이 있고 그곳에는 명성 높은 도공들도 있다. 게다가 왕실 사람들에게는 무료이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왕실 기사들은 그곳에 자신의 검을 맡기고 있다. 카론 경도 그런 줄 알았는데...... 카론 경이 조금 고집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내 검을 잘 아는 도공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아, 그렇군요." 왕궁이라고 뭐든지 최고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카론 경은 본래 평민 출신이었으니 예전에는 왕궁의 대장간을 이용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떤 도공이라도 카론 경의 칼을 손질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지금에 와서도 이런 먼 곳에 있는 단골을 찾아가는 그의 고집이 왠지 멋져 보았다. 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내 하루를 보낼 곳을 찾은 것이다. "그럼 저도 따라갈게요." "음? 자네는 맡길 검도 없지 않은가." "아하하, 그건 그렇지만......“ 사실 현재 내겐 칼이 없다. 왕실에 들어올 때 구입했던 자칭 명검마저 예전 지명 중에 만난 한 견습 기사에게 선물했다. 예전 키스 경이 내게 말했던 '칼은 건강에 해롭습니다아' 라는 조언이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았으니까. "그냥 검을 손질하는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솔직히 한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아하하." "별로 신기할 것도 없어." "그래도 보고 싶은 걸요?“ 달리 할 일도 없고, 라는 사족은 속으로 삼켰다. 그는 잠시 날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하도록." 10 물론 가난한 기사에겐 밝은 검 한 자루조차 보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카론 경쯤 되는 기사라면 가지고 있는 명검만 해도 수십 자루는 될 테고, 바쁜 시간 쪼개서 굳이 이렇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관리하지 않아도 평생 칼 걱정은 없을 것이다. 정 세심하게 관리하고 싶으면 부하들을 시켜서 도공에게 보내도 될 것을 카론 경은 직접 발품을 파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뭐랄까, 이건 나름대로 카론 경의...... '취미?‘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난 맞은편의 카론 경을 흘낏 보며 이것이 그의 드문 취미생활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했다. '하지만 표정만 봐선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는 안경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오늘자 지역신문을 읽고 있었다. 카론 경의 단골 도공이 있다는 마을로 향하는 두 시간여 동안 그는 (언제나 그렇지만)내게 말을 걸긴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하아, 지루해라아아아.' 카론 경도 너무 과묵해서 문제지만 나도 반대로 인내심이 부족한 것 같다. 결국 본능적으로 몸이 비비꼬이며 창밖을 바라보고는 하품이나 하던 차에 마침 카론 경이 신문을 다 읽은 것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질문의 요점은 '기사의 낭만' 에 대한 것이었다. "카론 경,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기분이 어때요?“ "단지 내 일일 뿐이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역시 공무원' 그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일은 일일뿐이야' 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을 지켜주면 기분이 좋지 않나요? 정의를 지키는 기분이랄까나. 에헤헤." 내 꿈이기도 한 그 말에 카론 경은 안경을 벗고 덜컹이는 소파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아니다. 귀족들이지. 그리고 나는 정의가 아닌 권력을 지키는 일을 해." "아하하, 뭐 그렇게 딱 부러지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자네는 언제나 날 과대평가하는군." 그는 꽤 서글픈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뒤에 눈을 감았다. 확실히 카론 경의 임무는 평민이 아닌 귀족들의 사건이고 정의를 수호한다기보다는 권력자들의 싸움을 해결하는 것이리라. 오늘 그 백작부인 역시 정의의 철퇴를 맞은 것이 아니라 오르넬라 님에게 찍혀서 그 꼴이 난 것이니까. 좀더 냉소적인 사람이었다면 '흥. 나는 권력자들의 사냥개야' 라고 빈정거릴 수도 있을것이다. '쳇. 그래도 아끼는 후배의 미래를 위해 농담이라도 멋진 대사 한번 읊어주면 덧나나.' 나는 금방 잠이 든 카론 경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혀를 내밀었다. 11 마차에서 내리고도 대장간이 있다는 마을까지 한참을 걸어야했다. 그것도 포장도 안 되어 있는 좁은 길을 말이다. 나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카른 경의 뒤를 따라갔다. '원래 대장간이라는 것이 이런 첩첩산중에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생활용품을 만드는 대장간이 오지에 있어서야 쓰겠냐고! 그때 힘들어하는 내 표정을 흘낏 본 카론 경이 말했다. "그래서 따라오지 말라고 한 거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쯤이야......“ 그러나 비참하게도 내 입에서는 '아아. 이제 한계랍니다' 라는 가쁜 숨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체력 훈련 좀 하던가 해야겠어. 숨소리 하나 안 흐트러지는 카론 경과 너무 비교되는군. 아니 사실 비정상은 저쪽이지.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의 말에 난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세 시간 어디가 '조금만 더' 야? 나는 카론 경의 독창적인 단어 해석방식에 속아 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험준한 산길을 걷고 또 걸어서야 그 도공이 살고 있다는 작은 촌락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론 경. 보통 세 시간은 '조금만' 의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요." "자네가 없었으면 더 빨리 올 수 있었다." "하아, 보통사람이라서 미안하네요." 쀼루퉁해진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그는 곧바로 대장간을 찾아갔다. 대장간을 본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매를 좁혔다. '이거 대장간이라기보다는 마구간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오래된 마구간을 대충 개조한 것 같은 허름한 대장간에는 투박한 굴뚝을 가진 화덕과 낡아빠진 모루 하나가 전부였다. 몇 번이나 고쳐 쓴 것 같은 너덜너별한 손풀무 역시 이 궁핍한 풍경에 일조하고 있었다. '하아, 이런 곳에서 정말 검을 벼릴 수 있기나 한 걸까.' "이런, 카론 님이 오셨구만." 그때 대장간 안에서 늙은 장인이 담뱃대를 물고 나오자 카론 경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런 존칭은 부담스럽습니다. 예전처럼 불러주시길." "안되지. 그랬다간 난 자네를 부를 때마다 불경죄를 저지르는 셈일세." 그의 입담에 카론 경은 엷게 쓴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곧 카론 경이 정색을 한 것은 노인의 표정이 전혀 밝지 못한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내 정말 자네에게 할 말이 없네." 장인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자 카론 경이 말했다. "아직 제 검을 다듬지 못하신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지요." "그게 아니고 실은......“ 장인은 말을 흐리며 자신의 대장간 안을 지그시 바라봤다. 카론 경과 나도 대장간 안을 바라봤다. 그냥 초라한 실내일 뿐인데 뭐가 문제라는 걸까. 그리고 나는 카론 경이 괜히 명수사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적 떼입니까?“ 얼레? 어떻게 그걸 안 거지? "그렇다네. 오늘 도적들이 몰려와서 자네의 검은 물론 돈이 될만한 쇠붙이들과 마을사람들의 얼마 남지 않은 곡식까지 모조리 털어갔어. 죽일 놈들." 카론 경은 도구마저 사라진 대장간 안을 흘낏 본 것만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유추해 낸 것이다. 즉, 너무 무거워 도저히 가져갈 길이 없는 저 모루를 빼고는 도적들이 모조리 훔쳐가 버린 셈이다. 이런 궁핍한 마을을 털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 치가 떨린다. "아까 신문에서 봤습니다. 최근 이 지역에 대규모 도적떼들이 출몰하고 있다던데, 이곳도 당했나 보군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노인의 한숨이 이어겼다. "게다가 그놈들은 이틀 후에 다시 온다고 했네. 가져갈 것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우리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하더군. 도망치거나 나라에 신고를 해도 보복하겠다고 하고. 뭐 어차피 신고해 봐야 이런 별 볼일 없는 마을 하나 지키려고 군대를 보내줄 귀족들도 아니지만." 카론 경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뭐하고 있어요! 카론 경!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잖아요! 나는 주먹을 꽉 쥐며 기대에 찬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인 쪽이었다. "카론 님. 아니, 카론 군. 자네가 아끼는 검까지 도둑맞은 이 못한 늙은이가 하기 엔 너무도 염치없는 말이지만...... 이 마을을 지켜줄 수 있겠는가." "죄송합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 지금 정말 거절한 건가요? “저는 왕실의 기사입니다. 평민의 개인적인 청탁으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카론 경!" 내가 커다랗게 소리쳤지만 그는 날 돌아보지 않았다. "괜찮네. 내가 항상 자네에게 신세지는 것도 모자라 무리한 부탁을 했어. 내가 미안하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기사라면 당연히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는 거잖아!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 검은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카론 경은 곧바로 마을을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해서는 그를 뒤쫓았다. 12 "카, 카론 경!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는 카론 경은 여전히 대담이 없었다. 내 목소리에는 점점 분노가 스며갔다. "이틀 후면 도적들에게 마을이 쑥밭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자신은 정의가 아닌 권력을 지키는 일을 한다,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도 그냥 떠나겠다는 건가요? 저 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잖아요!" 일은 일일 뿐,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그 말도 떠올랐다. "평민의 부탁 같은 건 들어줄 수도 없다는 거냐고요!" 왕실의 명령이 아니라면 움직일 수 없다는 기사의 원칙도 잘 알고 있다. "당신도 본래 평민이었잖아! 그 억울함이 무엇인지 당신도 겪어봐서 잘 알고 있잖아!" 내 목소리에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날 돌아봤다. “......!” 차가운, 너무도 차가운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난 항상 자네가 나를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나 역시 자네를 과대평가했군." "네“ “그렇다면 자네는 왜 그들을 돕지 않았지. 자네도 평민이고 기사이지 않은가." “......” 그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가슴을 찔러서 입술을 깨물었다.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사람들을 지키면 된다, 그 지당한 공식이 인간들의 사회에선 쉽게 통용되지 않는 것만 같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이런 저런 계산 때문에. 어른이 된 다음부터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지? 나 역시 그저 그런 어른이 편해져서 부조리에 투정부리는 일에나 익숙해지고 있는 것일까? "알려줘서 고마워요. 전 그 마을로 돌아가겠어요." 그가 날 똑바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날 따라와라." 그는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힘 잃은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13 걷는 동안 카론 경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저녁 해를 등진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확실히 이상한 것이 있어.' 뭐가 이상하냐 하면, 올 때와는 길이 다르다. 몇 시간 전에 카론 경이 엉뚱한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것도 밑이 까마득한 절벽인 산길이지 않은가. 또한 더욱 수상한 점은 이미 마차를 탈 수 있는 역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도 여전히 아슬아슬한 길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카론 경이 길을 잃은 것일까? 그때 길 굽이 너머에서부터 희미한 바퀴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마차 소리?‘ "엔디미온 경." 처음으로 걸음을 멈춘 카론 경이 날 돌아보았다. 무섭도록 침착한 모습, 항상 저런 모습일 때는 뭔가 상당히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 "마을 전체에서 빼앗은 물품을 일일이 말로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 "역시 암시장까지 운송하려면 마차가 필요하겠지.“ "그, 그렇죠." 이곳으로 오는 마차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암시장은 보통 밤에 열린다. 그리고 어떤 강도라도 장물은 빨리 팔아 돈으로 바꾸고 싶을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하늘을 보니 곧 해가 질 무렵이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관문의 감시를 피해 가장 빨리 암시장으로 갈수 있는 루트는 바로 이 길이다." “......!” 그 순간 굽이를 넘은 사륜마차가 거친 굉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카론 경은 피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카, 카론 경! 어서 피해요!" 나는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카론 경은 여전히 피하지 않았고 마부가 고함을 질렀다. "뭐, 뭐야! 네놈은!" 마차는 가까스로 카론 경 앞에서 급정거했다. 밑은 낭떠러지, 옆으로 피해갈 수도 없는 좁은 길이었다. 카론 경이 내게 등을 보이며 말했다. "명심해라. 이런 곳에서 사람을 치면 그 충격으로 마차 역시 절벽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멈출 수밖에 없어." 그, 그건 알면서도 실행하기 힘든 일이라고요! 마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얼굴로 커다랗게 외쳤다. "뒈지고 싶어 환장했어! 엉!" 칼을 차고 있는 마부도 있나? 게다가 마차의 지붕까지 잔뜩 실려 있는 저 의심스러운 물건들은? 카론 경이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엔디미온 경, 일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왕실의 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평민들의 사적인 청탁은 들어줄 수 없어. 하지만 최소한 모욕을 당했을 때 기사로서 상대를 즉결 처단할 수 있는 권리는 있어. 나는 지금 저들을 처단하려 한다." "지, 지금까지 그럴 작정으로 이 길로......“ 결국 카론 경은 이 길로 장물을 실은 마차가 지나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여기로 온 것이다. 내겐 한마디도 안하고! 하여튼 모욕을 빌미로 기사의 고유 권한을 발동하다니, 고지식한 카론 경다운 편법 이다. 본의 아니게 베르스 최강의 기사를 모욕해 버린 마부는 여전히 카론 경이 길을 비켜주지 않자 눈에 첫발을 세우며 마차에서 내려 검을 뽑았다. "이 자식이 정말 죽고 싶은가 보구나!" 그리고 마차 안에서도 네 명의 칼잡이들이 나오는 것이었다. 분명 장물 운송을 담당하는 치들이리라. (일단 칼도 없는 나는 제쳐놓고)오 대 일이라...... 너무 불리하군. 그러니까 도적들 쪽이. "이 새끼가! 우리는 발리 암시장에 가야 한단 말이다! 아차! 두목이 그건 말하지 말라고 했었지!" 별로 지능이 좋은 도적들은 아니었다. 그중 한 명이 카론 경이 뽑은 칼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그 칼 좋아 보이는데 어느 부잣집 도련님 인가 보지?“ 카론 경의 외모만 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런 말을 한다. 그런 와중에도 카론 경은 자신의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면 열차는 놓치지 않겠군." "아하하, 하하......“ 카론 경도 어떤 면에서는 키스 경만큼이나 사람 성질 긁는 구석이 있다. 지금 그의 행동은 이마에 첫발이 돋은 마부가 검을 꼬나들고 뛰어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미친놈이! 살아 돌아갈 생각하......“ 그것이 유언일 줄 알았다면 좀더 신중하게 대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공기를 및는 소리와 함께 두 조각이 나버 린 마부의 몸뚱이가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카론 경은 그제야 회중시계를 탁 닫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눈빛에 시퍼런 빛 무리가 스미는 것만 같다. "정식 수사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해라 마차를 놓고 사라지면 죽이지는 않겠다." "이 , 이런 제기랄! 왕실 기사였냐! 어째서 이런 곳에!" 그런데 당장이라도 도망칠 줄 알았던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피식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마차 안에서 라이플 한 자루를 꺼내는 것이었다. 어째서 왕실에 있어야 할 병기를 저놈들이 가지고 있는 거야! 놈은 카론 경을 조준하며 썩어빠진 미소를 보였다. "흐흐. 어때, 놀랐냐? 왕실 기사라면 이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겠지? 이거 얼마 전에 엄청 비싼 돈 주고 구입한 물건이라고!" 카론 경은 가늘게 뜬 눈으로 라이플을 바라보며 화를 참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왕궁에 돌아가는 대로 무기 관리 담당자를 심문해야겠군." 하여튼 이 사람도 진짜 마이페이스라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고 총알구멍 나기 싫으면 당장 그 칼 버려! 그리고 그 시계! 그것도 내려놔!" "날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바보 아냐? 이런 거리에서 총알을 피하시겠다?“ "물론 총알보다 빠를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조언해 주지. 너 같은 아마추어는 총구만 봐도 총알이 어디로 향할지 훤히 보인다. 칼이나 총이나 이미 적에게 움직임이 예측된 상태에서는 승산이 없어." 나 역시도 이것이 카론 경의 진심인지 아니면 허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린데 도적들은 후자로 받아들였나 보다. "크하하핫! 웃기지도 않는구만! 쏘기도 전에 어디로 나갈지 네놈이 어떻게 알아! 그딴 개소리가 이 몸에게 통할 줄 알았냐! 뒈져버려!" 그 순간 커다란 총성이 산 전체에 울렸고 카론 경의 몸이 노을빛에 녹아드는 듯 소리 없이 튀어 나갔다 그리고 나는 잘려나간 라이플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그 위로 도적들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예언대로 총알은 카론 경의 몸을 스치지도 못했던 것이다. 난 온몸에 전율이 오르는 것 같았다. '데, 대단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술을 가진 은의 기사조차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말이었다. 히이이이이잉! 불행하게도 도적들의 말은 군마처럼 총성에 적응되지 못했던 것이다. 엄청난 총성에 까무러치게 놀란 할들이 일시에 앞발을 들며 요동을 쳤고 마부가 없는 마차는 곧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폭주해 오기 시작했다. “......!” 마차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디좁은 길, 게다가 밑은 낭떠러지, 피할 공간조차 없었다. 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향해 닥쳐오는 마차를 바라봤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 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하고 있는 건가!" 순간 멍한 의식 속에서 카론 경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는 카론 경과 함께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 살았다...... 가 아니라 죽었다!" 하필이면 태어나서 본 가장 높은 절벽에서 자유낙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 이딴 건 꿈에서도 싫다고! 엄청난 현기증과 바람소리 속에서 나를 품듯이 감싸고 있는 카론 경의 얼굴이 보였다. “우아아아아! 카론 경! 이,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카론 경은 나를 주저 없이 붙잡고 절벽으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친 듯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냉정, 침착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이 방법이 최선이다 나는 마차를 피할 수 있어도 자네에겐 무리니까." "절 구해주려고 이렇게까지!" "반쯤은 후회하고 있는 중이야." “......” 십 초 후에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런 말 들으니까 열 배로 서럽군. "하지만 이렇게 떨어지면 죽기는 마찬가지잖아요! 뭔가 묘안이 있는 거죠? 그렇죠?“ 내 기대에 찬 외침에 카론 경이 날 뚱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하늘을 나는 능력이라도 있길 기대하는 건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침착한 겁니까." "당황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인간이라는 것은 보통 이럴 때 당황해야 정상 아닌가요? "지금 우리는 호수 위로 떨어지고 있다. 호수가 깊다면 아마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대신?“ "얕다면 십중팔구 죽게 되겠지."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그것보단 따뜻한 말을 듣고 싶군요." 그리고 우리는 호수로 추락했고 온몸이 땅 속으로 발려 들어가는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14 15세의 나는 키도 작고 금발은 여자보다도 더 치렁치렁한데다가 눈만 크고, 게다가 성격까지 내성적이라서 내 고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런 내게 있어서 '그녀' 는 내 십대의 전부였고 또한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주길 바랐던 여자였다. 한 번도 지명 받지 못하고 축 늘어진 어깨로 집에 돌아올 때면 항상 그녀가 집밖에 날 마중 나와 있었다. "미온, 수고했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나를 달래는 유일한 목소리. 그럴 때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같은 나이인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기대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단단히 숨기고 있는 그녀의 상처를 제대로 감싸줄 겨를도 없이 나는 유리조각 같던 15세, 내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녀에게 열중했다. 어쩌면 그것은 열렬한 사랑이 아닌 절실한 피한(避寒)이었는지도 모른다. 뭐 ,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를 놓쳤던 것일까. 그녀가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던 때는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짧은 편지 하나,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나의 오 분이 전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데 아마도 텔레-레이디들이 마시는 망각의 약물 '므네모시아' 를 내가 마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몰래 마시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내게 강제로 먹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 스스로 마셨던 것일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녀와 헤어졌던 그 오 분은 아직도 내겐 공백이라는 사실이다. 왜 그녀가 내게 이별을 말했는지, 나는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것의 열쇠가 되어줄 '오 분' 은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애써도 내 깊은 무의식 속에서 떠오르질 않는다. 미련이 많은 남자는 결코 스스로에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데...... 내 인생에 비어 있는 그 짧은 '오 분' 이 내 남은 모든 시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 순간 내 눈이 번적 뜨였다. "사, 사, 사, 살았드아아아!" 나는 커다랗게 소리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차가운 공기가 단숨에 몸속으로 몰려 들어왔다 온몸을 욱신거리는 통증이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나는 고개를 들어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억만금을 줘도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실로 무시무시한 높이다. '저런데서 떨어지고도 살아남다니, 난 악운에 강한가봐.' 나는 온통 물에 젖은 내 몸을 훑어보며 허탈한 웃음을 보이다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카론 경!' 난 주변을 두리번거렀다. 번뜩 뒤엉켜 있던 기억들이 폭발하듯 머릿속에서 터져 나왔다. 마차, 총격, 낙하, 추락. 남들이 보면 동반자살이라고 생각할 만큼 카론 경과 동시에 떨어졌는데! "카, 카론 경?“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물에 젖은 제복을 입고 있는 그가 내 옆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낸 것이 카론 경이었던가. 난 황급히 카론 경을 바로 뉘었다. 체온을 잃어가는 새하얀 피부, 얼음조각 같은 가느다란 이목구비, 숨은 가느다랗게 쉬고 있었지만 아무리 외쳐도 눈을 뜨지 않는다. 정신을 잃었다. 게다가 창백해진 입가에선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추락 시 충격으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날 감싸 안은 채 떨어졌으니까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 분명하다. "제발 눈을 떠요! 집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 눕지 않는다면서요!" 엉뚱한 소리까지 떠들면서 나는 급한 대로 목을 꽉 조이는 셔츠단추를 풀어줬다. 해는 이미 져 어둑하고 기온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젖은 옷은 보온이 될 턱 이 없고, 모닥불을 만들고 싶어도 성냥은 커녕 부싯돌 하나 없다. 카론 경을 업고 마을로 가고 싶어도 애당초 마을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내 몸도 급속도로 차가워지고 있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잃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산사람이 아닌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인공호흡이라도 해야 하나.' 으이구! 정신 차려 ! 그건 숨을 안 쉴 때나 하는 거고! 지금 필요한 것은 불이야! 불! 벼락이라도 떨어져 달라고! 난 절망적인 기분에 커다랗게 소리쳤다. "망할! 이제 어찌란 말이야!" "뭘 어쩌란 말이오?“ "으아아악!" 근처에서 들리는 대꾸에 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꾼으로 보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릿느릿한 말투가 일품인 그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우리를 바라봤다. "아니 당신들,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요?“ "사, 살았다. 아하하하하." 나는 내 악운이 무척이나 강맹하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15 나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카론 경을 업고 마을까지 왔다. '아까 그 마을.' 초라한, 게다가 도적 침공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이 절체절명 마을로 다시 돌아오게 된 우리들에게 그는 고맙게도 자신의 집의 빈 방 하나를 내주었다. 사실 방이라기보다는 천장도 낮은 이 층 창고 같은 것이지만, 따뜻한 옷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뜨거운 스프만 있다면 인테리어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음,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구먼. 절벽에서 떨어져서 이 정도면 기적 이지." 늦은 밤에 불려와 카론 경의 상태를 훑어보던 마을 노인은 예전 군대에서 하급 의무관이었다고 한다. 그는 카론 경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혀를 찼다. 가벼운 타박상 밖에 없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는 눈치였다. 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카론 경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말했다. "이것 참, 안 좋을 때 오셨구려." 그는 우리를 모르는 것 같았다 "두 날 뒤엔 도적떼들이 여길 덮칠 거유. 이 마을도 끝장인 게지." 나는 무겁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망할 왕궁 놈들은 기사 하나 보내주지 않아. 하긴 세금도 내지 못하는 우리들을 이 왕국 사람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겠지. 도적들에게 뜯기든 늑대들에게 물려죽든 알 바 아닐 테니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려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다. 귀족들은 사냥 한번 나가고 피크닉 한번 떠나도 기사들과 호위병, 의사들이 벌Ep처럼 달라붙는다. 혹시라도 여우가 달려들까봐? 소풍 중에 다리라도 접질리면 큰일이 나니까? 하지만 곧 죽게 생긴 평민들이 간청을 하면 '아 그건 말이지. 일단 영주님 에게 공문을 올린 뒤에 다시 왕실로 정식 탄원서를 보내서 절차를 밟은 뒤, 행정부에서 허가를 받고 위원회의 엄격하고도 공정한 심사를 거쳐 통과된 뒤에 국왕 전하의 최종 윤허를 받아야 가능할 거야' 라는 말이나 태평하게 지껄이는 것이다. 잘났어, 정말. 누굴 위한 나라인가? 농담이 아니라, 기사라는 것을 밝혔다가 도리어 마을사람들에게 두드려 맞을 분위기였다 나는 그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길이 있을 겁니다. 저도 도울게요." "허허, 고마우이. 안 그래도 이 마을을 지켜줄 칼잡이 한 명이 마을에 묵고 있던 참일세." 뭐? 또 다른 누군가가 이미 마을에 있었다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별로 밝지 않았다. 16 나는 널찍한 창가에 기대어 마을을 내려 보고 있었다. 내 고향인 리튼도 이곳에 비하면 '대도시' 라는 호칭이 어울릴 만큼 작은 마을,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불빛조차 찾기 힘들다. 마을 이름이라도 있을까? 세금을 낼 길이 없어 도시에서 살수가 없는, 오갈 데 없는 자들이 모여 숨죽인 채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도적들은 영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런 곳을 주로 덮치는 것이다. '지켜낼 수 있을까.' 어떤 의미로는 적국의 손으로부터 왕궁을 지키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이 마을이 앓고 있는 총체적인 시련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이틀 후 도적떼들이 마을 침공 예정 2) 현재 카론 경 깨어나지 못했음 3) 마을을 지켜줄 칼잡이 1번 사항은 도적Ep들이 갑자기 하늘의 계시를 받고 개과천선하지 않는 이상 운명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2번 역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3번은 현재 유일한 위안이지만 역시 카론 경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가상한 노력' 수준에서 끝날 것이다. 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도저도 암울하군.' 게다가 이런 마을에 텔레마코스 센터가 있을 리가 없다 즉, 왕실에 구원 요청을 할 수도 없다. 아니, 요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관료주의에 찌든 헬스트 나이츠가 이틀 안에 올 리가 없지. 게다가본의 아니게 이 지역의 영주인 예의 백작부인이 체포되는 바람에 현재 이 영지는 치안공백 상태. 뭐 백작부인이 있었을 때도 별로 다를 것도 없었겠지만. '더더욱 문제는 칼이 없어.' 카론 경이 가지고 있던 칼 한 자루마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버렸기 때문에 현재 우리는 그야말로 비무장 상태다. 이 마을에 이발 빠진 검 한 자루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보나마나 칼은 고사하고 곡괭이, 도리께, 모종삽까지 이미 도적떼들이 다 쓸어가 버렸을 것이다. 저항할 만한 무기가 없다. 희대의 전술가가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하루 만에 일기당천의 용사로 탈바꿈시켜준다면 고맙겠지만, 카론 경이나 키르케 님이라면 몰라도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역시 카론 경이 깨어나길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나는 슬쩍 담요 속에서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집밖에서 자는 것은 처음 보는군. 참 평온한 얼굴, 항상 빈틈없는 기색을 품고 다녀서 그렇지, 의모 자체로만 보면 연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이목구비에 체구도 군살 하나 없이 균형 잡히긴 했지만 나와 비슷하게 가느다랗다. 결국 온몸이 강철로 뒤덮인 괴물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인 것이다. 강제로 뒤엎여진 정직함 속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왕실 기사의 입장으로서 도와주기 힘든 상황인데도 장물이 움직이는 루트를 단번에 예측해서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게다가 죽을 위기에 빠진 나를 위해서 같이 절벽으로 뛰어내려줬고, 물에 빠진 나를 끌어 올려놓고서야 정신을 잃었다. 그런 카론 경에게 '당신도 결국 썩어빠진 귀족이잖아!' 라는 식으로 쏘아붙였던 것은 정말로 미안한 일이다. '하아, 키스 경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불현듯 지금쯤 소파에서 잠들어 있을 키스 경이 떠올랐다. 아마 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쯤 그 엉뚱한 재치로 손쉽게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아이히만 대공도, 이자벨 님도, 알테어 님도, 무라사 씨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쇼메 왕자도 이런 상황쯤은 별 위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어려울 것도 없이 척척 해결했을 것이다. 다들 반칙 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이니까. '헤엥. 나도 뭐 별로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단 말씀이야. 이 몸이 본격적으로만 나서주면 이 따위 문제는 간식거리도 못 돼!' 때로는 비웃어라. 그것이 널 지켜줄 것이다, 라는 어떤 책에서 본 말이 떠올라 따라해 봤다. 그리고 그 효과가 곧바로 발생했다. '에이이! 이게 위기가 아니면 뭐야! 코웃음 친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게다가 난 항상 본격적, 필사적이라고!'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투덜거렸다. 그때, 카론 경의 얼은 신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카론 경?“ 난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젊은 숨소리가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가느다랗게 얼굴을 찡그린 채 조금씩 몸을 뒤척이는 것이었다. 오오, 좋은 징조! "제 말이 들리세요? 제 말이 들리시......엇!" 순간 그가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 것이다. 별로 고통스럽거나 힘든 기색도 없이. 그리고는 투명하리만큼 파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봤다. 그리고는 '여기가어디? ‘ 라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난 안도의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카론 경, 다행이에요. 저는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줄로만......“ “......내 이름이 카론인가요?” "아?“ 순간 나는 웃는 표정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뭐, 뭔가 익숙한 전개로 진행되고 있다는 기분이...... "나는 누구죠? 당신은 누군가요. 그리고 여기......“ "카, 카론 경. 장난치지 마세요! 나 몰라요? 미온이라고요!“ "당신의 이름이 미온?“ “......여보세요?” 순간, 머릿속에서 말로만 듣던 의학 상식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가로 터벅터벅 걸어가 뒷짐을 지고 휘영청 밝은 달을 올려보았다. 내가 표정을 잃은 얼굴로 말했다. "어허허허. 난리 났네." 신이시여, 대체 날 어디까지 궁지로 몰아야 속이 시원할 겁니까! 17 카론 경의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붙잡고 '카론 경' 이라는 인물에 대해 늘어놓았다. '은의 기사' , '베르스 최강의 검술사' , '범죄자들이 벌벌 떠는 냉철한수사관' ,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 , '찬바람 인간' , '숨소리만으로도 정체를 포착' , '카론 주니어' , '유부남' , '시력 나쁘다.', '위크포인트는 키스 세자르‘ 를 비롯해서 기타 등등, 그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접한 카론 경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요?“ "그, 그러니까 그게 당신이라니까요." 자기가 자신을 못 믿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카론...... 샤펜투스." 그는 마치 타인의 이름을 말하는 것처럼 어색한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며 어깨를 늘어트린 채 말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요." "뭐, 뭔가 잘못된 것이라도." "슬픈 사람이로군요. 나는." 나는 적잖게 놀랐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완전한 타인으로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살면서 몇 번이나 될까. 지금 카론 경은 그럴 수 있었고 그 대답은 '슬픈 사람' 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카론 경은 겉으로는 차가워도 사실은 주변 사람들을 누구보다 걱정해 주고 있다고요." "그런가요? 카론 샤펜투스는 그런 사람인가요?“ "저어 자꾸 남 얘기하듯 하지 말아주시고......“ 결국 나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당사자의 본래 모습을 변호한다는 복잡하고도 오묘한 위치에 놓여버렸다. 그건 그렇고 카론 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존댓말을 쓰니까 기분이 참 흐뭇...... 하지 않고 무서워 죽겠어!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실은 이틀 후에 이 마을에 도적떼들이 몰려온대요. 사람들 모두 당신이 막아주길 바라고 있거든요." "하지만 난 검을 쓰지도 못하고."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뿔싸! 기억을 죄다 잊어버렸으니 검을 쓰는 방법까지 잊어버렸구나! 이래서야 카론 경은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단순한 '동안의 미남.‘ 나와 별 차이가 없어져 버린다. '어떻게든 기억을 되돌려놔야 할 텐데.‘ 하지만 어떻게? 다시 한 번 절벽에서 떨어져? 그랬다가 기억이 돌아오기는커녕 나까지 기억을 잃을지도 몰라. 아아, 최소한 텔레-레이디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몹시 피로해 보이는 카론 경을 눕힌 뒤에 울상이 된 얼굴로 창가에 기대어 머리를 뒤로 축 늘어트렸다. '하아, 정말 올해는 운수대통이야.‘ 도적 침공까지, 초하루. 18 “으으음.”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잠들어 있던 나는 부스스 눈을 뜨며 손에 엉켜 있는 긴 금발을 풀었다. 어이구, 이놈의 잠버릇은 어딜 가도 따라오는군. 나는 하품을 하며 슬쩍 카론 경을 바라봤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보통 때라면 이런 곳에서 저렇게 편한 자세로 숙면을 취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지금 쯤 제복으로 갈아입고 새파란 눈매를 번뜩이며 자신의 집무실에서 수사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으리라. '이벨렌 님도 지금쯤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겠지,' 매사에 일말의 오차도 없는 자신의 남편이 아무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나는 불현듯 영원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뱃속은 솔직하네. 나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매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거창한 소리가 나면서 문이 덜컥 열렸다. 마을사람들이 잔뜩 몰려온 것이다. 설마 벌써 도적들이 쳐들어 온 거야? 나는 눈을 크게 떴고 카론 경도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희망에 들뜬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촌장이라고 소개한 중년 남자가 대표로 내 앞에 다가와 말했다. "대장간 할아범 말을 들어보니까 나리께서 엄청 유명한 기사라고 합디다요!" "아?“ 그리고 촌장이 내 손을 꽉 잡으며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대단한 기사 나리라면 도적쯤 막아주는 것은 일도 아니 잖소이까! 안 그렇수?“ "아?“ "이런 불쌍한 마을을 보고도 그냥 지나지나치시는 않으시겠지요? 네?" 난 막 달라붙으려는 촌장을 밀쳐내며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카론 경을 가리켰다. "저어, 그 엄청 유명한 기사는 제가 아니라 저쪽이걸랑요!“ 순간 태도 돌변. "그럼 그렇다고 일찍 좀 말해!" 대, 댁이 말할 기회를 안 줬잖아! 그는 내 손을 확 뿌리치고는 이번에는 카론 경 앞에 가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태도가 빨리 변하다니...... 촌장치고는 너무 본격적인 정치 감각이로군. "나으리! 그 강맹한 힘을 조금만 베풀어 이 마을을 악독한 무리들로부터 지켜주시구려!" 하지만 카론 경은 곧바로 당황하며 대답했다. "내게는 무리에요." "그, 그러지 마시고!" 집요한 구석 이 있는 촌장이 카론 경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자 그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겁먹은 얼굴을 본 촌장의 표정이 굳었다. "당신이 정말......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는 기사가 맞소?“ 그 말에 카론 경은 도움을 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도와줄 상황이 아니에요. 칼도 없고." "결국 아무 쓸모도 없다는 거잖아!" "그, 그렇게까지 직선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기억이 곧 돌아올 수도 있는 거고!" "에잇! 괜히 기대했어, 대장간 늙은이 말 따위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너무해! 카론 경이 검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자마자 태도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우리들을 쏘아봤다. "도와줄 힘도 없다면 당장 이 마을에서 떠나 줬으면 좋겠어!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내줄 합은 없으니까!" 마을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와장창 깨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상냥한 나라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도적들을 막을 방법이 없으면 이 마을을 떠나면 될 거 아님니까! 그럼 적어도 목숨은 구할 수 있잖아요!" 솔직히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도주' 다. 하지만 촌장은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마을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쳇. 안 그래도 등골이 휘는데 나무꾼 녀석은 쓸모도 없는 놈들을 끌고 오고 난리야! 역시 기대할 수 있는 건 그 검객밖에 없겠어."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들이 와글거리며 나간 문을 쳐다봤다. 뭐야, 대체! 따뜻한 인정 같은 건 올 겨울 땔감으로 다 써버린 거냐! 자신한테 메리트가 없다고 사람 멸시하는 건 권력자들과 똑같잖아! 이건 정말 인간의 본성 같은 건가, 라는 불편한 심기가 마음속에 가득 차 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너그러움을 바라는 것도 지나친 사치다, 싶었다. 희망을 잃고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묘한 동정심이 생겼다. "카론 경 ,그래도 제가 밥은 어떻게든 구해올......“ 나는 애써 웃으며 카론 경을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축축한 자신의 제복을 처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 기사단 제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미온 씨, 카론 샤펜투스라는 남자는 저들을 구해줄 힘이 있었겠죠?“ "그렇겠죠." "그리고......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겠죠." 카론 경은 지금도 마치 다른 사람에 대해 물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예" 그가 눈을 감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군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왕실 기사로서 최강의 검술사로서 혹은 냉혹한 수사관으로서의 자신을 벗어난 그는 너무도 투명하고 연약한 보통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문밖에서 작은 소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 챌 수 있었다 여위지만 않았다면 꽤 귀여웠을 아이였다. "누구니?“ "저어, 이거 드세요." 그녀가 들고 있는 쟁반에는 굽지도 데치지도 못한 야채와 오래된 날감자가 놓여 있었다. 이 집의 딸 정도로 보이는 그 아이는 쟁반을 내게 건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이것을 받고 우리를 지켜......“ 난 순간 주저 없이 팔을 뻗었다.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을 움찔했다. 익숙한 기분, 설마 이 느낌은...... 내가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아이는 놀란 첫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야. 아무 것도."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를 만졌을 때 전해졌던 느낌은 분명히 내가 예전 느꼈던 그 느낌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아마도 부모 몰래 이것을 갖다 준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핀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주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무슨 수로? "역시 카론 경이 한시 할리 기억을 차리게 하는 편이...... 으음, 역시 그 방법밖에는." 잠시 어딘가로 갔다 온 내가 앉아 있는 카론 경 뒤에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자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걸로 뭐하시려는 건가요, 미온 씨?' “......” 난 높이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떨어트리며 털씩 주저앉았다. 역시 안 되겠어! 리스크가 너무 커! 이런 건 키스 경이나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아,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19 내가 만난 사람은 바로 도공 할아버지였다. 차가운 모루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문 채 내 사정을 듣던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군. 카론 군이 기억을 잃은 게로군." "기억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평생 쇠만 만지던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냐만,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그 언제냐가 문제이니까요." 난 검 한 자루 없는 대장간을 훑어보며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카론 군의 검을 처음으로 만들어 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아? 그렇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셨어요?“ "이래봬도 왕년에는 도시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도공이었네. 귀족 자제들이 자신의 검을 만들어 달라며 내게 왔으니까 말이야. 뭐 보나마나 평생 한 번도 뽑지 않을 장식품이 될 테니까 대충 겉만 그럴싸한 검을 만들어 주고 돈을 챙기곤 했지, 허허." "아하하하. 그, 그러셨군요." 사기꾼! "그런데 어느 날 정말 dot된 소년 하나가 내 공방에 와서는 무릎을 끊고 부탁하더군. 자신의 검 한 자루를 만들어 달라고." "그 소년이 카론 경?“ 그 노인은 대답대신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하도 당돌해서, 내 검이 얼마나 비싼지 알고나 있냐고 물어봤지." "그랬더니요?“ "싸구려 목걸이 하나를 내게 주더군. 어머니의 유품이고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하지만 누구보다 내 검을 가치 있게 쓸 자신이 있다고 주저 없이 말했어. 뭔가 복수심에 찬 것 같기도 하고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기도 했던 카론 군의 눈동자는 아직도 기억나는군." 부르는 게 값인 일급 도공 앞에 무릎 끊고 어머니의 유품과 맞바꾸면서까지 절실히 검을 부탁했던 소년의 심정이란 어면 것일까. "그래서 검을 만들어 주셨나요?“ "허허. 난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네. 당연히 삼류 대장간이나 가보라며 거절했지. 그런데도 카론 군은 일어나지 않았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공방 정문 앞, 거리에서 무릎 꿇은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아마 일주일 즘 되었을 거야." "이, 일주일?“ 안 죽은 게 다행이다. 그렇게 기다린 카론 경도 카론 경이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둔 이 양반도 정말 대단하군. "내 작업실 앞에서 어린애 송장 치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카론 군을 끌고 왔지. 그리고 검을 줘서 돌려보냈네." "엄청 바쁘셨을 텐데 대단하네요." 내 말에 그가 귀를 후비며 무슨 소리냐는 듯이 대꾸했다. "내가 직접 만들어 줬을 리가 없잖나. 대충 내 제자가 만들어 준 칼 하나를 던져준 거지," “......성격 고약하시네요." "이봐, 젊은이. 이름도 모르는 소년의 정성에 감동받아 내 주머니를 털어줄 만큼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던가?“ 그 노인은 아직도 살아 있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난 오싹 소름이 끼쳤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완고한 장인의 손에서 어떻게 명검을 얻어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며칠 후에 카론 군이 다시 찾아왔네. 내 앞에 검을 던지더니 목걸이를 되돌려달라고 하더군. 어머니의 유품과 바꿀 조금의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검이라고." 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차갑게 장인을 쏘아보는 소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절벽에서 바라보던 카른 경의 냉정한 눈동자가 그 위에 겹쳐졌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부릅뜨고 당장 최고의 검을 만들어 줄 테니 눈 똑바로 뜨고 기다리라고 소리쳤네.“ "세상, 만만하지 않다면서요." "가치를 아는 자에게 검을 준다, 이것만큼 대장장이를 들뜨게 만드는 것도 없지. 부유한 귀족들에게 파는 검은 아무리 잘 만들어줘도 십중팔구 칼집 속에서 평생을 잠들다가 죽어버리네. 그런 치들에게 칼을 팔면 평생 그 칼에게 미움을 받아." “......” "그리고 그때 카론 군에게 만들어 준 검이 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네. 그런 기분이 아니라면 도저히 만들 수가 없지." 나는 카론 경이 어째서 지금까지도 이 사람에게 자신의 검을 맡기는지 알 수 있었다. "저어 그런데, 왜 지금은 이런 곳에 계시는 건가요." 역시 노후에는 한적한 곳에서 느긋하게 살고 싶다, 라고 생각하기에 이곳은 지나친 궁핍의 결정체이지 않은가.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걸어가며 조그맣게 말했다. "내가 만든 칼에 내 아들이 죽었거든. 칼의 미움을 받은 게지." "죄,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 예약되어 있는 한 귀족의 검을 만들려고 망치를 들다가...... 그 순간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버리는 소리를 들었네. 난 그대로 뛰쳐나와서 여기까지 왔고 다시는 그곳에 돌아간 적이 없네. 그런데 카론 군은 용케도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허허." "명수사관이니까요." 난 쓴웃음을 지으며 시시한 농담을 중얼거렸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카론 군은 워낙에 정신력이 강하니까 곧 기억을 되찾을 걸세 기억을 찾으면 내 말, 전해주게. 지금까지 내 가치를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로서 너무도 고마웠다고. 그리고 이제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결국 카론 경이 항상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저 도공의 마음을 되살리고 싶었던 노력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대장장이를 위해서. 그는 언제나 남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고뇌하고 혼자 싸운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군요.' 기억을 잃은 카론 경의 쓸쓸한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20 '그건 그렇고...... 얻은 게 없네.' 난 카론 경의 기억을 되돌릴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터덜터덜 마을 거리를 걸었다. 거리라고 해봐야 일직선으로 되어 있는 질퍽한 흙길이 전부로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데 오 분도 안 걸리는, 좋게 말하자면 소박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척박한 거리. 그리고 나는 그 거리 중간쯤에서 칼잡이를 만났다. 마을을 지켜주기로 했다는 그 검객. 그가 날 훑어봤다. "엥?“ 전혀 좋은 인상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마을을 돕기는커녕 행패나 부리지 않았으면 좋을 분위기였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몸은 마른 편이지만 키가 카론 경보다도 더 커서 키스와 비교해도 될 정도였고, 몇 번이나 부러져서 매부리처럼 되어버린 코와 사람 비웃는 것처럼 비틀어진 입술은 '난 심사가 뒤틀린 사람이요' 라고 광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 묻은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사람에겐 도저히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한마디로 자신이 위험한 칼잡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과시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런 그가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침을 탁 뱉었다. "쳇. 사내놈이잖아. 계집애인 줄 알고 좋아했더만." "시, 시력 나쁘십니까?“ "아니, 정말로 멀리서 볼 때는 금발의 미녀라고 밖에는......“ "착시입니다!" 순간 나는 내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이 양반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라 느껴졌다. "아무튼 네놈은 뭐야?“ "마을 밥을 축내는 이방인2" "그럼 이방인1은 누군데?“ "은의 기사." 그러자 그가 무릎을 탁탁 치며 웃어 제치는 것이었다. "푸, 푸하하하핫! 은의 기사라고?“ "아하하하! 그럼요. 당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훌륭한...... 우악!" 어느새 뽑은 그의 칼날이 내 목에 다가와 있었다. 그가 일그러진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야, 애송이. 별로 기분 좋은 농담은 아니로구나." "서, 성격이 급하신 분이로군요." 난 슬쩍 한걸음 물러나며 목을 매만졌다. 피가 조금 묻어났다. 아무튼 도적만큼 위험한 놈이라는 것 하나는 증명된 것 같군. 그건 그렇고 분명 입만 살은 무지렁이는 아니다 언제 검을 뽑았는지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는 다시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여자도 아니고 돈도 없는 놈이라면 꺼져. 볼일 없으니까." "여자와 돈 밝히는 사람치고는 이런 마을을 잘도 도와주시는군요." 내 말에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거야 보수를 받았으니까." 뭐? "도적떼에게 빼앗길 바엔 차라리 그 돈으로 이 몸을 고용한 거지. 난 전문 칼잡이야. 보수도 없이 미쳤다고 이 짓을 해?“ "자, 잠깐! 마을 전 재산을 당신이 가져갔다고요?“ "그게 뭐 잘못되었다는 거냐?“ 그가 인상을 팍 쓰며 날 바라봤다. '그럼 그게 잘 된 거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는 나오지 못했다. 결국 마을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다. 왕실이나 기사에게 도움을 청할 바엔 차라리 이런 도적과 다름없는 자를 고용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도적들을 물리쳐주시면 좋겠군요. 마을사람들도 당신을 믿고 있으니까." "흥. 이 루스키 님을 보기만 해도 그놈들은 꽁지를 빼며 도망칠걸? 난 이미 수십 명을 넘게 죽인 몸이란 말씀이야!" "잘났네요." 나는 내뱉듯이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이 루스키인지 하는 작자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때 삐쩍 마른 개와 함께 예의 소녀가 모습을 보였다 내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 아이도 손을 흔들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걸까. 크르르룽! 그때 그 개가 칼잡이를 향해 이발을 드러내며 으르렁거 리는 것이었다. 동물들도 피 냄새가 나는 자에게는 호의적일 수 없는 것이리라. "그러지 마. 진정해." 당황한 아이의 목소리에도 그 개는 마치 자기 주인이라도 보호하려는 양 짖어대고 있었다. 그 순간 스르렁 검을 뽑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여왔다. "그, 그만둬!" 말릴 겨를조차 없었다. 루스키가 검을 뽑으며 뛰어들었고, 그 잘난 칼부림에 순식간에 조각난 개의 몸통이 바닥을 굴렀다 그가 검을 집어넣으며 일부러 기사 흉내라도 내려는 듯이 거만하게 지껄이는 것이었다. "이 마을을 구해줄 용사님도 못 알아보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잡견이로군." "무슨 짓이야! 이 자식!" 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루스키의 멱살을 잡아 틀었다. 그때 반사적으로 그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그의 주먹이 내 복부를 세게 때렸다. 나는 숨이 콱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금방이라도 피를 뱉어낼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네놈도 목을 쳐줄까? 그 금발만 잘라 팔아도 꽤 돈이 될 것 같은데?“ 난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루스키를 노려봤다. 정말 이런 어이없는 놈에게 마을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거야? 이런 방법 외 엔 정말로 다른 어떤 방법도 없는 거냐고! "호오, 좋은 눈빛이네. 아까보다 훨씬 좋아졌어." “......미친 새끼.” 난 드물게도 쌍소리를 입에 담았다. 그는 뭐가 웃기는지 빨개진 내 표정을 히죽거리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사라져 버렸다. 겨우 숨을 가다듬은 나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dig게 질린 얼굴로 주검이 되어 버린 자신의 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 나는 소녀를 살짝 감싸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야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뒤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같이 무덤 만들자." 그때였다. 나는 이번에도 이 아이에게서 예의 '익숙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아침에 준 음식은 너무 고마줬어. 너도 마을 구하고 싶지?“ 그녀는 말없이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21 "다녀왔습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무덤을 만들어 주느라고 옷은 온통 흙투성이였고, 내 고운 손가락은 화관(花冠)을 수십 개나 만드느라 왕창 벗겨져 쓰라리다. 그나마 마을 근처에 겨울 꽃이 충분했으니 망정이지. 그런데 이 판국에 뭔 놈의 화관이냐고? 어째서 남은 하루 동안 화관 같은 '평화적인 장식품' 따위나 필사적으로 만들었냐면 말이지...... 열 페이지쯤 후에 알게 되지 않을까? 우후후. "카론 경, 괜찮으세요?“ 카론 경은 여전히 기억을 되찾지 못했는지 창가에 기대어 말없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방안에 있었던 것일까. 항상 몸에 두르던 차가운 기운도 없이, 노을빛에 묻혀 있는 그의 모습은 쓸쓸한 유채화 같았다. "카론 경?“ 나는 신발을 벗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켜주고 싶어." "예?“ 평소의 카론 경이었으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말이었다. "누, 누구를요?“ "사람들을......“ "마을사람?“ "많은 사람들을......“ 그는 말을 흐렸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엷게 웃으며 마침 들고 온 화관을 머리에 얹어 주었다. 매화, 프리지아, 시클라멘 등을 엮어 만든 새하얀 꽃의 왕관은 그의 쓸쓸한 눈매와 묘하게 어울린다. "아마, 이렇게 보니까 꽃의 왕자님 같습니다아.“ "이상한 말투로군요." 카론 경이 눈썹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말했다. 여, 역시 키스의 집요함은 기억을 잃었을 때마저도 반응하는 건가! 확실히 전염되는 인간이라니까. "미온 씨, 도와주고 싶어요. 이 사람들." "어떻게요?“ 그러자 화관을 얹은 카론 경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소라도 대신해 주는 것이 어떨까요." “......” 아아! 빨리 원상태로 돌아오란 말입니다아아! 22 아침 일찍부터 몰려온 도적떼는 그 숫자가 이십여 명에 이르렀으며 몇몇은 말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을사람들은 단 한 명도 도망치지 않았다. 갸륵한 의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서글픈 것이 자신들의 판돈을 모조리 루스키에게 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잡이가 안보여." 촌장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만 들어도 도적들이 꽁지를 때고 도망칠 거라던 루스키가 사라져버 린 것이다. 젠장, 잔인한 줄은 알았지만 치사한 줄은 몰랐군. "당장 나오지 않으면 이 누더기 같은 집들을 모조리 불 질러 버리겠다!" 흑마를 탄 사내의 협박이 마을을 울렸다 창밖을 통해 밖을 보던 카론 경이 입을 열었다. "저자가 두목인가요."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무슨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커다란 흑마에 표범 가죽을 걸친 거한은 8할의 확률로 두목이거든. 그때 함께 숨어 있던 도공이 카론 경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카론 군, 자네는 이 사람과 함께 기회를 봐서 도망치게. 자네는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야. 내게 말했던 꿈도 이뤄야 하지 않은가." 꿈이라고? 그때 화가 치민 촌장이 노인을 잡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인간은! "그럼 우리는 죽어도 된다는 거야, 뭐야!“ "난 그런 뜻이 아니고......“ 난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 잘난 칼잡이에게 마을 전 재산을 바치지 않았다면 당신 소원대로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방인은 빠져!" "당신 말이야...... 남자가 한 길을 판다는 건 좋은 거지만.“ 꼭 이 판국에서도 주접을 떨어야겠냐고! "카, 칼잡이다! 나타났어!" 뭐? 루스키? 나는 황급히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야수가 있었다. 23 루스키는 처음 지붕 위에 매복해 있다가 검을 뽑아들며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명. 당황한 도적들이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오 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와중에 세 명. 말은 훌륭한 이동수단이지만 (전번에도 확인했듯이)비좁은 지역에선 상상 이상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루스키가 말의 다리를 베어버리자 마상의 도적은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도적의 목을 그어버린 뒤에 집들 사이로 숨어버린 것이다. 십 초도 안 되는 순간 다섯 명이 죽었고 거리는 피바다가 되었다. "제, 제기랄! 이런 망할 새끼가!" 도적들이 우왕좌왕하며 검을 뽑아 그를 뒤쫓으려고 했다. 카론 경은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실은 당신이 더 무섭거든요.’ 난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카론 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루스키 역시 일류는 일류다. 그 일류의 실력을 좀더 가치 있는 일에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촌장 역시 자신들이 고용한 루스키가 도적들에게 승기를 잡자 흥분한 얼굴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어떠냐! 내 판단이 맞았잖아! 내 말만 따르면 아무런 문제도 없단 말씀이야!" 난 심드렁하니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주접 외길인생, 인정해 드리죠.“ 24 하지만 상황은 루스키의 판단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두목이 외쳤다. "허둥대지 마! 어차피 놈은 혼자야. 흩어져서 뒤쫓다간 하나하나 죽는다.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마라.“ 저 녀석, 군인이었나? 다른 잡졸들과는 달랐다. 그는 순식간에 동요하는 부하들을 진정시킨 뒤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칼잡이! 난 몰슨이다! 이오타 기병대의 장교였지! 똑같이 말을 탈 바엔 이쪽 벌이가 훨씬 신통해서 직업을 바꾼 몸이다!“ 역시 군인이었다. 그런데 군인이 도적이 된 게 뭐가 직종변경이냐! 철면피! "네 녀석도 이 바닥 놈이겠지! 내가 지위하는 한, 우리를 네놈 혼자 처리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나도 널 죽이기까지 몇 명 정도는 잃을 테지." 자, 잠깐. 이건 뭔가...... 심리전? "이따위 코딱지만 한 마을을 놓고 서로 손해 볼 일 없지 않나. 조용히 물러나 주면 네가 마을 놈들에게 받은 보수의 두 배를 주지!" 나는 순간 그 루스키라는 자에게도 최소한의 의리라는 것은 존재하길 바랐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바람이지만. "흐흐. 그거 구미가 당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루스키가 히죽거리며 나타나는 것이었다. 촌장이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으이구! 내가 저럴 줄을 알았어! 처음부터 의심스럽더니!“ 그 의심스런 인간에게 마을의 운명을 맡긴 장본인이 바로 댁이잖아! 난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눈매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당신, 여기서 살아남으면 정치인 하세요. 아주적성이 있어 보이네요." "허? 정말 그래 보이나?“ "예. 욕인지 칭찬인지도 구분 못하는 점도 완벽해요. 이런 작은 마을에서 썩긴 아깝군요!" 난 한번만 더 첫소리를 하면 한 대 갈겨주겠다는 생각으로 내뱉은 뒤에 다시 밖에 집중했다. 루스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며 몰슨이라는 전직 기병대 장교와 거래를 시작했다. "마을 놈들에겐 오십만 셀링을 받았다! 두 배라면 백만이겠지?“ 그 말에 마을사람들이 치를 떨었다. "우리가 준 돈은 이십만 셀링인데!" 저런 작자가 공정거래정신을 가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철저하게 당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로군. 거대한 흑마를 타고 있는 몰슨은 두 말 없이 허리춤에서 주머니 하나를 풀러 루스키에게 집어던졌다. 그런데 저 주머니, 내 거잖아! 가방 안에 있던 긴데! "금화다! 최소한 백만 셀링은 훨씬 넘을 거다!" 주머니 속을 확인해 본 루스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거 장난 아닌 액수인데! 좋아. 그럼 나도 이쯤에서 나도 물러나주도록 하지." 지저분한 놈들의 너저분한 거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몰슨이 말했다. "이봐, 칼잡이. 떠나기 전에 이오타 기병대의 유명한 명언 한마디 들어보겠나?" "뭐? 무슨 개풀 들어먹는 소리야. 그딴 걸 내가 알게 뭐야!" 루스키가 침을 탁 뱉자 몰슨이 말했다.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러니까 그건 방심한 적만큼 손쉬운 먹이는 없다, 라는 말이지." "호오, 역시 군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럴 듯한 말을 늘어놓을 줄 아는군. 그런데 누가 방심했다는 거냐?“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리고 그 순간총성이 울렸다. 몰슨은 명사수였다. 제법 먼 거리에 있는 루스키의 이마를 단번에 관통했으니까. 핏줄기가 곡선을 그리며 몸이 붕 떠오른 루스키가 바닥에 쓰러졌다. 돈주머니를 손에 쥔 채로. "내가 이오타 기병대의 총술 교관이었다는 사실도 말해 줄 걸 그랬나." 몰슨은 연기를 뽑는 자신의 총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입 꼬리를 올렸다. 오싹한 놈이다. 루스키는 분명 검술에 대해서는 실력자다. 하지만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총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총이란 소수의 정규군 외에는 접하기 힘든 물건일 테니. 그런데 어째서 저런 이오타의 인간백정 놈이 이 베르스에 와서 도적질을 하고 있는 거냐고! "자, 그럼 이제 용기 있는 마을 분들 좀 만나 보실까." 몰슨이 우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25 물론 가장 먼저 튀어나와 몰슨 앞에 큰절을 올린 자는 바로 촌장이었다. "나으리! 저희는 단지 그 무지막지한 칼잡이에게 나리께 바칠 돈을 빼앗겼을 뿐이옵니다!" 힘내라, 촌장! 그리고 그 말 끝나면 제발 좀 어디론가 사라져 줘. 나는 도적들의 위협에 두 손을 든 채로 중얼거렀다. 도적들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칼잡이 하나 고용하는 데 오십만 셀링이나 쓸 돈이 남아 있었다 이거냐? 그럼 우리는 오백만 셀링은 받아야겠군." "그, 그런 돈은 없습니다!" "그럼 뒈져야지." 도적들은 마을사람들의 질린 표정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몰슨이 말했다. "집어치워! 그딴 푼돈 벌려고 여기 온 거 아냐!" 뭐? 그럼 어째서? 아니 , 나도 확실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몰슨 쯤 되는 거물이 뜯어먹을 것도 없는 이런 마을까지 온 것은 이치에 안 맞는다. 그가 마을을 둘러보며 말했다. "총을 만들기에 이만한 곳도 드물지 눈에도 안 띠고 베르스는 치안도 개판이니까." 여기다 불법 총기공장을 만들 작정이었구나! 총기류는 왕실의 허가 없이는 절대로 제작도 소유도 할 수 없는 특별관리 물품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르게 말하자면, 암시장에서 부르는 게 값인 물건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총기가 범죄자들에게 대량으로 납품 되었을 때의 끔찍한 상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이쯤 되면 이건 정말 국가적인 중대범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공짜 노예들과 뛰어난 장인도 있고 말이지." 몰슨이 우리들과 도공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도공이 노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그딴 짓을 도와줄 것 같아!" "후후, 대신 귀족 버금가는 호강을 약속하마." "흥! 호강이라면 젊은 시절 진절머리 날 정도로 해왔어! 살인마들의 무기를 만들라고? 내 아들이 무덤에서 웃을 일이군!" 몰슨은 자신의 조건이 먹혀들어가지 않자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래? 그럼 네 눈앞에서 마을 놈들 배를 하나하나 갈라줘 보면 생각이 바뀔까?“ "큭! 그런 소리 한다고 내 생각이 바뀔 것 같아!" “그래? 한번 해보면 알겠지." 몰슨같이 죄책감이 마비된 자는 도리어 잔인한 쾌락을 즐기는 법이다. 그가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자, 그럼 누구 배부터 갈라줄까."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렸지만 둘러싼 도적들의 칼 때문에 도망칠 수는 없었다. 저 자식, 정말 죽일 생각이야! "날 먼저 죽이세요." 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몰슨에게 다가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바로 카론 경이었다. 난 황급히 그에게 가려고 했지만 곧바로 도적의 칼이 목에 다가왔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호오, 꽤 배포가 있는 녀석이로군." 몰슨은 결심에 선 모습으로 서 있는 카론 경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카론 경! 그러면 안돼요! 그건, 마을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라고요! "좋아, 네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내가 직접 배를 갈라주지." 몰슨이 말에서 내려왔고 도공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카, 카론 군! 그만두게 ! 나를 위해 그럴 것까진 없네!" 그때 몰슨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름이 뭐라고......“ "카론 샤펜투스다."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카, 카론 경? 그의 눈가에 냉기서린 빛이 돌아온 것은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몰슨의 칼집에서 검을 뽑은 카론 경이 몰슨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몰슨을 비롯해서 우리조차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카론 경이 차가운 미소를 보이며 몰슨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방심한 적만큼 손쉬운 먹이는 없다, 나도 항상 새겨두는 말이다, 몰슨." "저, 정말 네놈이 은의 기사?“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군." 그리고 카론 경은 말에 걸려 있는 검을 뽑아서 내게 던졌다. 날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엔디미온 경!" 쏜살같이 날아오는 그 검을 엉겁결에 잡아 챈 내게 카론 경은 아무 지시도 없었다. 마치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서로 충분히 작전을 짜두었던 것처럼. 나를 믿는 것처럼. 나는 칼머리를 꽉 잡으며 크게 몸을 돌렸다. 카앙 카아앙 카아앙 연속적으로 불꽃이 터졌고 내 주변의 도적 세 명은 일격에 잘려나간 검을 든 채로 멍하니 날 바라왔다. 들고 있는 검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러진 칼 조각을 바라보던 도공이 날 바라보며 신음소리를 냈다. “......자네도 대단한 기사였나?” "사실 좀 다른 의미로 대단한 기사입니다만.“ 나는 다시 검을 꽉 쥐며 주변의 도적들을 노려봤다. 아직 검을 든 자들이 십여 명, 하지만 아무도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오지 마라. 나도 사람 베이는 꼴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고 내가 베는 건 더더욱 사양이라고! "카론 경, 대체 언제 기억이 돌아온 거예요!" 나는 기쁨 반, 투정 반을 섞어 그에게 외쳤다 카론 경의 답변은 역시나 사무적이었다. "몰슨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잊을 수 없는 이름이지. 이오타의 총기 설계도를 훔쳐서 달아난 자로 세계적으로 수배되어 있는 중범죄자다." “......직업병이로군요." 부인도 아니고 범죄자의 이름을 듣고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단 말인가. 진짜 낭만 없는 사람이라니까! 난 어이없는 웃음을 보이며 중얼거렸다. "연기실력...... 많이 좋아지셨네요." "누구 때문인데." 카론 경이 눈매를 찡그리며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몰슨이 총을 꺼냈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 동시에 총을 쥔 몰슨의 팔이 바닥에 툭 떨어겼다. "흐아아악!" "공연한 짓을 하는군." 카론 경은 칼을 접으며 비명을 내지르는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몰슨 역시 지독한 놈이었다. 그는 한쪽 팔을 잃은 채로 곧바로 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꺄아악!" 몰슨은 소녀를 붙잡고 단도를 꺼내들었다. 인질이라니! 이 자식, 끝까지 악당의 패턴에 충실한 거냐! 정도껏 좀 하라고! "오, 오빠! 살려줘요!" "별일 없어. 침착해. 저놈은 절대 널 죽이지 못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몰슨을 노려봤다. 그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명망 높은 은의 기사 나리께서 설마 이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날 죽이진 않겠지? 응?“ 카론 경은 눈썹 하나 까딱 안하고 대답했다. "착각하지 마라. 내가 널 죽이지 않은 이유는 널 생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넌 깃털에 불과해 네놈과 엮여있는 이오타의 범죄조직에 대해 듣고 싶으니까." "큭큭! 누가 말해 줄 것 같아? 닥치고 그 칼 버려! 허튼 짓하면 이 아이 목을 따주마!" 카론 경은 거절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인지 잠시 날 바라보다가 검을 바닥에 던졌다. 나 역시 검을 떨어트렸다. "크하핫! 진짜 버렸어! 이딴 천민 꼬맹이 하나가 그렇게 중요했냐! 물러터진 기사로군!" 그는 그렇게 비웃으며 부하들에게 소리쳤고, 곧 부하들이 뛰어와 나와 카론 경을 둘러왔다. 몰슨은 소녀를 옆으로 던진 뒤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미쳐버린 듯이 웃어 제쳤다. "꼴좋게 되었구나! 엉! 그 잘난 카론 샤펜투스를 내가 죽이게 될 줄을 몰랐어! 어떻게 죽여줄까? 최대한 천천히 괴롭히며 죽여주마! 용서해 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내 팔을 잘라먹은 대가를......“ "유감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카론 경이 차갑게 말하는 순간 그림자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잘 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림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어둠의 파도가 몰려오는 것처럼. 몰슨 역시 멍한 얼굴로 자신의 그림자가 솟구쳐 오를 듯이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이게 무슨 개 같은......“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도적 하나가 그 그림자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줘! 살려줘! 이게 대체 뭐야!" 그리고 순간적으로 퍼져나가며 거리를 장악한 그림자들의 망령들이 도적들을 하나둘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재빠르게 소녀를 끌어안았다. 피가 뽑혀나가는 소리,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현기증을 느껴 그 아이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렀다. "고작 이딴 놈들 때문에 날 부른 거냐, 미온. 모처 럼의 휴가였건만." 그 악마적인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바로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의 적현무 키르케 님이었다. 그 지독한 몰슨이라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오줌이라도 싸버릴 것 같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넘...... 뭐야. 악마?“ "그러는 네놈은 뭐냐. 머저리?“ 키르케 님이 눈가를 찡그리며 몰슨에게 다가갔다. 지옥을 봐버린 몰슨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괴, 괴물이야! 악마가 지상으로 올라왔어!" 몰슨과 남은 소수의 도적들은 허겁지겁 그림자의 영역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키르케 님은 '괴물이라니, 실례잖아‘ 라고 중얼거리며 몹시도 고통스러울 것이 뻔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일격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우아아아악!" 몰슨과 도적들은 더 이상 뛰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눈앞에서 거대한 빛의 날개를 펼친 주작이 강림했으니까. 너무도 밝아서 접근할 수도 없을 만큼 눈부신 영조(靈烏). “......명주작 님." "미온, 소식 듣고 급하게 달려왔어! 괜찮아? 응?“ 알테어 님은 도적 따위는 관심도 없는지 곧바로 내게 달려와서는 껴안는 것이었다. 자, 잠깐만요. 상봉의 기쁨을 나누기에는 지금 분위기가 전혀...... "야, 이 계집애야.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거의 살기에 가까운 나지막한 키르케 님의 음성이 들리자 알테어 님이 그녀를 확 쏘아봤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뭐, 오히려 잘되었네, 그럼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볼까?“ 키르케 님의 그림자와 알테어 님의 빛이 강렬하게 충돌하는 바람에 나는 사색이 되어버 혔다. "싸움밖에 모르는 마녀!" "소녀병에 걸린 백치!" 아아, 누가 좀 말려줘. 두 분 모두 분기탱천이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이, 이러다간 이 지역이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농담이 아니라고. 두 분 모두 오실 줄이야!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며 최대한 환하게 웃었다. "제가 죽일 놈이랍니다. 어쩌다보니 모든 분들에게 다 연락을 했거든요. 아하하하." 그때 이 난데없는 평평한 대결 무드 사이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런, 이런. 저희는 조금 늦어버린 것 같군요." "리 , 리젤 경?“ 그러니까 여전히 금발이 반짝거리는 리젤 경과 긴 가죽 코트를 입은 인트라 무로스의 특무대였다. 이자벨 님에게도 구조 요청을 보냈으니까 저 사람이 오게 되는 건가? 전혀 꿀리지 않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카론 경과 아신들을 바라보는 것을 봐도 역시 리젤 경도 원가 위험한 인물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는군. 리젤 경은 바닥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몰슨에게 다가갔다. "이런! 우연인가요? 우리가 애타게 찾고 있던 몰슨 씨가 이런 곳에 있다니요." "사, 살려줘. 악마도 신도 다 나타나고......“ 겁에 질려 실성한 몰슨에게 리젤 경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안하셨겠죠? 전 몰슨 씨를 믿는답니다." "자, 잠깐! 죽고 싶지 않...... 크으윽." 리젤 경의 손에 잡힌 몰슨의 목에서 '투둑'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절명했다. 나는 경직된 몸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바라보던 카론 경이 말했다. "증거인별인가." "아니, 무슨 말씀을. 하도 흉악한 범죄자라서 즉결처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 이게 무슨 대화야? 리젤 경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레일 경께도 당신의 안부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건강하고 완고하시다고요." "미레일이 너희들의 나쁜 피에 물들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걱정 마세요. 미레일 경은 아주 성실한 기사입니다. 또 순진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순간 카론 경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퍼졌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쪽지를 건넸다. "크리스탄센 국장님으로부터 전언입니다." 공짜는 없어, 미온 군. -이자벨 "어이쿠" 난 고개를 팍 숙였다. 리젤 경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존경어린눈동자로 '여전히 이자벨 님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 것 같군요! 부럽습니다! 이오타에 영광 있기를!' 이라는 긴 작별인사를 남긴 뒤에 특무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었다. 뭔가...... 나에 대해서는 계속 착각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 의외로 둔감한 건지 아니면 이자벨 님이 잘 속이고 있는 건지. 사실 그다지 착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키르케 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놈들은 망할 놈의 INM 아니냐, 미온. 이자벨 크리스탄센과는 가깝지 지내지 않는 편이 좋아. 인격마저 정보의 하나로 보는 여자니까." "좋은 분이세요, 이자벨 님은." 키르케 님은 '너 답구나' 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 뒤에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하려는 줄 알겠구나." "죄, 죄송합니다." "나는 국왕의 명령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 빚은 꼭 갚아라. 기대하고 있으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그녀는 알테어 님을 흘낏 바라보며 발길을 옮겼다. "싸울 기분이 아니로군. 오늘은 살려 주마, 명주작," 키르케 님은 무겁게 말하며 그림자 속으로 가라져 갔고 알테어 님은...... 혀를 빼고 '메롱' 이라는 성기사답지 않은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온, 나도 가봐야 해. 같이 있고 싶지만...... 성하(聖下)께서 이 사실을 알면 혼나거든." 물론 교황이 알게 되면 저는 고문실로 끌려갈 겁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알테어 님은 아신의 자비를 담아 날 꽉 껴안은 뒤에 내 뺨에 살짝 키스하고는 떠났다. 어떻게 떠났냐고? 날아서. 농담 하는 것 아니다. 나는 여전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카론 경에게 다가갔다.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카론 경." "자네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군." "조, 좋은 의미 인가요?“ "반쯤은" 그는 짧게 말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뭔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지.' 그러던 그가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외치는 것이었다. "다 알고 있으니까, 숨어있지 말고 나와!" "예?“ 난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지만 카론 경은 화를 꾹 참는 기색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건물 틈에서 헤헤 웃는 얼굴 하나가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역시 카론 경, 들켜버렸네요오." “......키스." 이젠 댁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아. 전 세계에 수만 개의 복제 키스가 퍼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걸? "여, 연락도 안했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미온 경과 저는 운명의 끈으로 연결...... 이얍! 피했습니다아." 으이구! 허공에 주먹질을 한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 인간에 대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자. 여전히 검 한 자루 없는 녹색 평상복 차림인 키스가 생글생글거리며 말했다. "아아, 일이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로군요. 하지만 카론 경은 기억을 잃었을 때가 훨씬 인간다워 보였는데 말입니다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래 쓸데없는 소리 좀...... 응? 그 말은? "대체 언제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에헴! 제가 괜히 묵시의 기사라 불리겠습니까아? 묵시, 즉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 "키스 경, 그건 묵시가 아니라 스토킹이라고 하는 거예요!" 스토킹의 기사라니, 그건 확실히 좀 우울하지만, 어쨌거나 보고 있었으면 도와줬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키스는 잘 해결되었으니까 된 거잖아요, 라고 살갑게 굴며 그 발간 눈동자로 특유의 눈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불길하기도 한 그 보석 같은 눈동자로 말이다. 카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키스. 인트라 무로스가 결국......“ 그때 키스가 카론의 입을 막으며 싱긋 웃는 것이었다. “그 일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관심 끊으세요. 우리 마음씨고운 미온 경이 들을 만한 내용도 아닌 것 같고 말입니다." 내, 내가 뭘! 카론은 '알겠다. 네게 맡기지' 라고 말하며 머리를 들어 넘겼다. 뭔가 이 사건 이면에 위험한 계산들이 오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물어봐도 대답해 주진 않겠지만. 그때 도공이 키스에게 다가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은 몰랐구먼." "앗! 오랜만이네요, 영감님." 이건 또 무슨 대화? 키스 경이 살아 있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 아니 그보다 키스 당신은 아는 사람도 참 많아. 키스가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이걸 살아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건 그렇고 언제 제 검도 한번 손 봐 주시겠습니까?“ "허허, 농담 말게. 난 그런 배장 없어." 노인은 너털웃음을 보이며 말했지만, 그렇다고 장난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카론 경이 말했다. "난 이만 가보겠다." "별써요? 하지만 제복은요?“ "집에 많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일벌레! "서두르면 열차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기차표는 키스, 네가 사라." 키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아. 찢어지게 가난하군요, 카론 경은. 역시 제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요?“ "돌아가서 갚으면 될 것 아닌가!" 카론 경은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노인이 말했다. "카론 군, 칼이 무뎌지면 언제라도 다시 오게." 도공은 어떤 이유인지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아니,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인지도. 카론 경은 걸음을 멈추고 그 노인을 바라보며 그 무뚝뚝한 얼굴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오빠!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직까지도 이름을 모르는 소녀가 나와 카론 경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나는 이 마을을 구한 주인공인 그녀를 활짝 웃으며 껴안아 주었다. 아아, 귀여운 녀석 같으니. 하지만 카론 경은 아저씨란다. 오빠가 아니 에요.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나, 빨리 와라, 엔디미온 경." "아, 갈게요. 금방." 나는 순진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너는 크면 뛰어난 텔레......“ "아냐, 아무것도." 말을 멈추고는 동그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소녀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재능이 있어서 불행해지는 직업이 있다면, 그게 바로 텔레-레이디니까. 그런 저주받은 재능 같은 건 평생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또 찾아올게. 카론 경과 함께." 26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키스 경이 물었다(2인실인데 결국 키스가 같이 있겠다고 박박 우겨서 세 명이나 들어앉았다. 못 살아). "미온 경, 텔레마코스 센터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한 건가요?“ "다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것 아니 에요." "저는 텔레마코스 쪽은 문외한이랍니다아."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그 비법을 공개했다. 카론 경은 말없이 신문을 보고 있었지만, 분명 내심 궁금해 하고 있으리라. "텔레마코싱 능력이 있는 여자들은 몸에 손을 대거나 하면 묘한 기분이 느껴져요." "아? 그런 게 있나요?“ "아니, 저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계속 반복되다보니까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묘한 기분은 '그녀' 로부터 시작된다. 뛰어난 텔레-레이디였던 그녀와 함께 있었던 몇 년 동안 나는 조금씩 그녀가 풍기는 전파 같은 야릇한 짜릿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고 훗날 그것이 텔레-레이디들이 가지는 일종의 독특한 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재능이 뛰어날수록 파장도 켰다. "그런데 그 소녀가...... 텔레-레이디의 재능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서클릿이 없을 텐데요?“ 텔레-레이디들은 필수적으로 고유넘버가 각인된 서클릿을 착용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그 서클릿에는 해당 번호는 물론 발신과 수신에 필요한 에너지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 역시 그녀 에게 들은 말이다. "서클릿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서클릿은 마나-인젝터들이 에너지를 응축시켜 놓은 것이니까 똑같이 생명력이 응축된 물질이라면 궁여지책으로 사용할 수는 있죠. 그게 바로 화관이라고 하더군요. 꽃에는 상당한 생명 에너지가 뭉쳐 있으니까. 물론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불안정해서 제대로 연결되기도 힘들고 일회용인데다가 고유 번호가 없어서 잘해봐야 이쪽에서 짧은 문장을 보내는 수준이지만요." 그녀가 했던 말이 있다. 만약 화관만으로 완벽하게 송신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상당한 재능을 가진 텔레-레이디가 분명하다고. 그런데 그 소녀는 해냈다. 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헤에, 그런 방법까지 알고 있다니, 미온 경도 참 대단하네요. 다시 봤어요." "그럼 그 전엔 대체 날 어떻게 본 겁니까." "혹시 예전에 예쁜 텔레-레이디라도 꼬드겼던 건가요오?“ “누, 누가 꼬드겼다고 그래! 난 단지!" 난 눈을 콱 감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 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꺼내고 싶지 않으니까. 키스 경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씁쓸한 웃음을 보이며 '텔레-레이디라, 슬픈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죠' 라고 읊조리는 것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는 백번 동감한다. 물론 그 재능이 없었다면 애당초 그녀와 내가 만났을 일도 없었겠지만. 그때 카론 경이 신문을 접어 옆에 두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는 저 과묵한 모습은 그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내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카론 경." "뭔가." "몰슨이 그 아이를 잡았을 때, 제가 부른 분들이 오실 줄 알고 칼을 버렸던 건가요?“ "물론이다. 거대한 힘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만약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칼을 버리셨을 건가요." “......” 카론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창밖을 바라왔다. 그리고는 '모르겠군' 이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는 기억상실에 걸린 카론 경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마을사람들을 바라보며 '지켜주고 싶어' 라고 말했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차가운 겉모습 속에 숨겨진 솔직한 마음일 것이 리라 믿는다. '지켜주고 싶어' ‘누구를요?' '사람들을......‘ '마을 사람들?' '많은 사람들을......‘ 칼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아마 카론 경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미온 경." "예?“ "여행가방 잊어버렸지요? 제사도구와 지명비까지?“ "우아아! 그랬었지!" "벌금이랍니다아 옴팡지게 일해서 갚으세요." "가, 갚으면 되잖아요! 갚으면! 못됐어, 아주!" 난 울상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마을을 구한 대가가 결국 벌금이란 말이더냐! 카론 경은 그렇다 치고 이 인간의 속마음은 대체 뭐란 말민가. 제14화 작전명! 접대 최전선! 1 "아아 싫다. 싫어." 빨랫감이 수북한 바구니를 들고 세탁소로 향하고 있는 내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다, 최근 나는 키스에게 본격적으로 미움 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명이 산처럼 쌓여 있건만 며칠 전부터 내게 계속 신전 청소라든가 귀빈 접대라든가 빨래 같은 자질구레한 노동만 줄기차게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답답한 것은 어째서 나를 괴롭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난 원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최근 키스 경에게 미움 받을 짓 한 거 있어요?" "글쎄다." 옆에서 내 두 배는 되는 빨래 바구니를 안은 채 담배까지 피워물은 쇼탄 경이 '키스의 머릿속은 귀신도 모를 거야' 라고 웅얼거렸다. 물론 이쪽은 빚을 갖기 위해 자청해서 기사단의 빨래를 떠맡은 입장이다. 쇼탄이 담배를 뱉으며 말했다. "키스 경은 기본적으로 남을 미워하지 않아. 대신 좋아하지도 않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널 미워하는 것은 아닐걸? 그렇게 손쉽게 키스의 미움을 받아낼 수 있다면 년 진짜 대단한 놈이야." 별로 그런 식으로 대단한 놈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미워한다거나 좋아한다는 것은 진심이 보일 때 가능한 것인데, 애당초 키스 경은 진심이 노출되지 않으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히만 대공 외에는 미워하지 않고 카론 경외에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지만 아니, 그럼 미워하는 것도 아닌데 바빠 죽을 지경인 나한테 이런 잡일만 시키는 건 더 이상하잖아! 즐기는 거야? 대체 뭐냐고! "알게 뭐야. 빨래나 하자." 쇼탄 경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2 왕실 세탁소에 대해 짧게 소개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왕족의 옷을 제외한 왕실의 모든 세탁물을 처리하는 곳이다. 2)이오타에서 수입한 수동식 세탁기 백여 대가 배치되어 있는 거대한 건물 3)무료지만 당연히 셀프 서비스다. 4)이용객 99퍼센트가 여성이며 그들은 거의 귀족들의 빨랫감을 들고 오는 시녀들이다. 5)뭐...... 남자는 이용하지 말라는 규칙 같은 건 없다. “......그건 그렇고." 아니, 그런데 세탁소에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았던가. 오늘은 이상하게도 세탁소가 시녀들로 만원사례였다. 설마 오늘이 무슨 '빨래의 날' 이야?(그런 날 없다) 나와 쇼탄은 빨래 바구니를 든 채 빡빡하게 들어 찬 시녀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데 이 아가씨들이 힐끗 힐끗 우리들을 바라보며 소곤소곤거리는 것이 아닌가. "봐!봐! 내가 온다고 했지? 오늘은 둘이 같이 왔어." 오싹한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우리는 세탁소에 입성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쟤가 미온이래. 머리칼 좀 봐. 무지 예쁘게 생겼어." "난 실제로 처음 봐. 진짜 피부가 뽀얘. 몸도 되게 가늘다." "귀여워. 요정 같아. 정말 눈동자가 보라색이네? 가짜 눈 아냐?' 기, 기사에게 서슴없이 '쟤' 라니! 남자에게 예쁘고 뽀얗고 가늘다는 수식어는 전혀 칭찬이 아니야! 그리고 가짜 눈일 리가 있겠냐! 뭉쳐 있는 여자들은 무섭다 나는 이 음흉한 분위기 속에서 그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사가 빨래하러 오네? 할 일 없나봐." “......” "오르넬라 님 이 밤마다 부른대." 아냐! "임금님도 부른대." 아니라니까! 키스 경, 당신이 날 괴롭히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확실히 성공했습니다. 지금 나는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에게 온몸을 적나라하게 관찰당하는 개구리의 심정, 내가 무슨 동물원 판다곰도 아니고! 아무리 수많은 여성들의 패턴에 단련된 나라고 하더라도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백 명도 넘는 빨래터 처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면 확실히 긴장된다. 의외로 나, 무대 체질 아니거든. '그런데 쇼탄 경은?‘ 후후. 전직 호스트인 나마저 몸 둘 바를 모를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분명 어쩔 줄 몰라 할 것이 뻔...... 얼레? "왜 그래, 미온?“ 쇼탄 경은 이 엄청난 공격 속에서도 끄떡없는 모습으로 당당히 빨랫감을 분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거죠?" "그거야 뭐...... 면역되었으니까." 쇼탄 경은 제발 그런 쓸쓸한 질문은 하지 말아줘, 라는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렇다. 빛을 갚기 위해 불철주야 세탁소에 들락거려야 하는 쇼탄 경은 이런 상황에 이미 '무감' 해져 버린 것이다. 세상에 찌든 불우한 젊은이 쇼넨베르트, 25세. '웃자니 슬프고 울자니 웃기는군.' 쇼탄 경은 스왈로우 나이츠 중에서 몸집이 가장 크다 건강미 넘치는 외모와 단단한 몸매 때문에 둔해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격투가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구릿빛 몸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런 양반이 한숨 폭폭 내쉬면서 색이 있는 빨래와 흰색 빨래와 속옷 따위를 구분하고 있는 궁상맞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까지 가슴이 미어진다. "미온, 뭐하고 있냐. 너도 빨리 해." "넵." 아니 뭐, 나도 남 동정할 처지가 아니로군. 기사단에 들어온 뒤 점점 훌륭한 가정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그러니까 죄다 키스 경 탓이야!' 3 뭐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대의 '세탁기' 란 그러니까...... 이거다! 세탁기그림 공포의 세탁기계 주전자처럼 생겼고, 뚜껑부분으로 빨래를 넣은 후 주전자 입구부분을 돌린다. 재질은 나무고 소리는 드르르르륵! 사실 나는 이 세탁기가 무섭다. 보통 때는 목욕탕에 쭈그려 앉아 빨래를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이 거대한 발래통에 옷을 집어넣고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들리는 그 드르르륵, 그르르릉거리는 기계음이 어려서부터 아주 소름끼쳤던 것이다. 물론 그 발단은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던 '사람을 안에 넣고 돌려도 똑같은 소리가 난단다' 라는 헛소리 때문이었지만(교육 한번 잘 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량의 빨랫감이 몰려들 때는 어쩔 수가 없는 노릇. 하루 종일 목욕탕에서 방망이질을 하다가 레녹 경에게 '시끄러워! 거슬려!' 라는 소리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그럼 해볼까?“ 나는 비누질을 한 옷들을 공포의 세탁기 안에 집어넣은 뒤에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드르르르르르륵, 하는 '사람 갈아 마시는' 소리 덕분에 이미 기분은 초긴장 상태. 어린애라고 비웃어도 어쩔 수 없어. 이거, 정말 무섭다고! 빨랫감을 손에 꼭 들고 빨개진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고 쇼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온, 세탁기한테 프러포즈라도 하게? 상냥하게 돌려주면 너한테 반할지도 모르지." "무, 무, 무섭다고요." "나 참. 훌륭한 기사라면 당당하게 빨랫감을 넣고 돌리라고!" 홀륭한 가정부겠지. 에이! 마음을 강하게 먹자! 이건 그냥 세탁기야. 고문도구도 뭣도 아니야, 나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심호흡을 하고 세탁기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드르르르륵 "흐히히힉!" 난 결국 귀를 틀어막은 채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모, 못하겠어. 듣는 것만 해도 무서워 죽겠는데 나보고 돌리라고? 사람 뼈를 갈아버리는 것 같은 감촉이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고! 그러나 주변의 아가씨들은 여전히 내 이런 모습을 감상중이셨다. "어머. 빨래 못하나 봐." "우리가 도와줄까?“ 응! 도와 줘! 제발! "아냐.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겠다." ......마녀들 "어이, 미온. 이번엔 세탁기에게 바람 맞았냐? 네가 그러니까 저 아가씨들이 더 즐거워하잖아." "즈, 즐거우라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농담 아니야. 무서워 죽겠다고! 쇼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 뒤, 다부진 팔을 걷어붙였다. 그가 손잡이를 꽉 잡고는 말했다. "잘 봐. 이런 건 이렇게 힘차게 돌리면!" 빠드득 "엉? 빠드득?“ 무연가가 갈가리 찢겨나간 것 같은 이 불안한 소리는 뭐야?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탁기를 열었고 그 안에는 너덜너덜해진 셔츠가 기계장치 사이에 끼어 죽어가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돌렸으면...... 난 그걸 꺼내들고 바들바들 떨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그, 그거 누구 건데?“ “......지스킬 윈터차일드 씨" 순간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쇼탄이 담배를 물며 중얼거렸다. "우린 죽었다." "어째서 우리야! 댁이지! 죽으려면 혼자 죽어!" "야아. 냉정하게 굴지 마! 같이 죽자아." "할말이냐!" 걸레가 되어버린 지스의 셔츠를 서로 주거나 받거니 하며 옥신각신, 아아, 싫어, 우울해, 지명도 못가고 아침부터 이게 뭐야. 집요해서 미안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게 죄다 키스 경 탓이야! 나타나기만 해봐라! 내 아주 이 인간을...... "미온 경." 아하 등 뒤에서 들려오는 키스의 목소리.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난 부르르 떨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키스 경!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 우아아아앗!" 피? 난데없이 피투성이가 된 키스가 내 몸 위로 쓰러지는 것이었다. "무, 무, 무, 무슨 일이에요! 이거!" 왕실 한복판에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나와 쇼탄 경 모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병원이 급해! 난 그를 부축한 채 소리쳤다. "정신 차리세요! 눈 감지 말아요! 죽지 말마요!" “......미온 경." “말하지 말아요! 내가 병원까지 데려갈게요! 조금만 참아요!" 키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온 경, 부탁이 하나 있어요. 들어줄 거죠?“ "죽지 않는다면 뭐든지 들어줄게요!" "다행이군요." 사그라지는 목소리,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가 내 손을 힘없이 잡으며 말했다. "제 부탁은 바로 내일도 신전청소를 해줬으면......“ 그때 멍하니 바라보던 쇼탄 경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이 피, 묘하게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아?“ 순간 정적. "그러니까 피 냄새도 안 나고. 달콤해 보이는 것이......“ 나는 굳은 표정으로 '피'를 손가락으로 쿡 찍어 입에 넣었다. 흡! 이, 이건! “......달아." 난 식은 땀을 흘리는 키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집어치우지. 응? "미, 미온 경. 실은 제가 당뇨병이라서......“ "시럽이잖아! 이 멍청아!" 빠악 "너무해요! 상관을 있는 힘껏 때릴 것까진 없잖아요!" 내 인내심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간 상태였다. "닥쳐!" 내 싸늘한 표정에 키스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하하하. 뭐,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빠악 "또 때렸어!" “시끄러워! 허구한 날 잠만 자고 속마음을 안 보여줘도 좋아! 나한테 빨래를 시켜도 좋고 심심하다고 장난치는 것도 좋아! 하지만 그런 짓만은 하지 마! 화가 나! 그런 건 최악이야!" 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얼굴로 그를 쏘아봤다. 정말 싫다 주변의 누구라도 사라지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싫어. 세탁기 소리보다도 수만 배 싫다고! "미안해요." 그가 빨간 눈동자에 난감한 눈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풀이 죽어 있는 것 같아서 재미있게 해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네요." "가까운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걸 보고 좋아할 사람이 있겠냐고!" 난 눈을 꽉 감으며 또 커다랗게 소리쳤다. 어른이 된 다음부터는 헤어지는 것에 항상 익숙해져야 한다고 다들 말하지만, 난 아직 인정하기 싫다. 중요한 것을 잃으면 화가 나고 눈물이 난다. '누구나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어' 라고 담담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걱정 말아요. 저는 이미 사라진 존재니까, 다시 사라지는 일은 없답니다. " 키스는 정말 진심을 보기 힘든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살짝 보였다. 4 "헤에. 정말 키스 경이 사과했다고? 그러는 척한 거겠지." "아냐. 진심이었다니까? 나 그런 모습 처음 봤어." 쇼탄 경은 뭐가 신기한지 빨래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시럽 난동'을 화제에 올렸고 테라스를 뒹굴거리며 놀던 랑시가 '의외네. 키스 경에게 빈틈이 있다니' 라고 맞장구 치고 있었다. 그게 어째서 빈틈이냐! '하지만 뭐 나도 의외긴 했어.' 내가 화를 낸다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도 그건 정말 심했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삼는 건 끔찍해! 그건 그야말로 자해(自害)이며 자조(自嘲)다. 아아, 덕분에 세탁소가 더 싫어져 버렸어. 아직도 머릿속에서 그 공포의 '드르르르륵' 이 울리는 것 같아. "미온 경, 내 셔츠는 다 빨았겠지?“ 그때, 지스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지나가면서 물었다. 올 게 왔다. "아 그, 그거 말이지......“ 내가 쇼탄 경을 쓰윽 바라보자 그는 빵과 차를 들고 자기 방으로 잽싸게 뛰어 들어가 버렸다. 도망치지 마! 이 배신자! "빨리 줘. 갈아입고 싶어." 미안해. 네 셔츠는 유명을 달리했어. 최선을 다했지만 살릴 수가 없었어! 그리고 그 녀석은 너와의 추억을 잊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지, 라고 개그를 했다간 정말 곱게 죽지 못하겠지? "아하하하. 보, 보고 놀라지 마아?“ 난 '짠!' 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너덜너덜해진 천 조각을 꺼내 보여줬다. 그러나 아무리 애교를 부려봐야 지스 경의 싸늘한 표정은 눈곱만큼도 호전될 기미가 안 보인다. “......주,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그러자 지스가 날 향해 방긋 웃었다.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아? 정말? 용서해 주는......“ 부욱 지스는 곧바로 내 셔츠를 꺼내 매몰차게 찢어서 내게 던졌다. "다음부터 똑바로 해." "우아아!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거 쇼탄 경이 실수한 거라고!" 부욱 그러자 지스는 주저 없이 쇼탄의 셔츠도 꺼내서 똑같이 찢어버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랑시가 쿠션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성격 진짜 아름다워. 정말 비단결 같아 같이 사는 미온 경이 존경스럽네요." "그, 그래도 잘 찾아보면 귀여운 부분도 있어." 어디가? 능지처참 당한 내 셔츠를 바라보며 볼을 실룩거렸다. "카론 샤펜투스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아?” 시종들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카론 경이 나타났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최근에는 자주 오시네요? 심심하신가 봐요?“ "그럴 리가 있겠나. 나도 오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야." 그는 특유의 기분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한 뒤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키스 경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아니, 그런데 확실히 카론 경이 여기 오면 뭔가 굵직한 일이 터진단 말이야. "키스 경 찾으세요?“ "지금쯤 자고 있을 시간인데, 어디로 사라진 건가." 으음 옛날부터 그랬나보군. 내가 말했다. "아마, 욕실에 있을 거예요. 온몸에 시럽이 잔뜩 묻었을 테니까요!“ “시럽?” "그렇게 해서라도 달콤한 인간이 되고 싶었나 보죠. 쳇." 난 아직도 화가 조금 나 있는 상태라서 삐죽거리며 말했고 카론 경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가 시종들이 내온 차를 반쯤 마시고 나서야 지하 목욕탕에서부터 키스가 올라왔다. 그가 눈을 반짝 뜨며 환하게 웃었다. "와하하하! 카론 겨엉!" 키스가 두 팔을 활짝 펴며 카론 경에게 달려갔다. "절 보러 와주셨군요오!" 확실히 키스는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반짝거리는 혜택 받은 미남자다. 특히 목욕 후에는 잘 가공된 보석처럼 청결한 빛이 난다. 솔직히 내가 봐도 조금 질투가 생긴단 말이야. 저 속옷만 입고 방방 뛰는 추태만 빼면! 머리 양 갈래로 땋지 마! 옷 입어 ! 순간 벌떡 일어선 카론 경이 검을 빼며 엄청나게 빠르게 휘둘렀고 키스를 비롯해서 나와 랑시 모두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머리 위로 '휘이잉!' 하는 강맹한 바람이 지나갔다. "주, 죽을 뻔했다!" 우아아아! 갑자기 이 무슨 암습(暗襲)입니까! 카론 경의 용서 없는 검격 안에 걸려든 꽃병이며 조각들이 두 동강이 나서는 와르르 쏟아졌다.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단숨에 검을 집어넣은 카론 경이 말했다. "키스, 기사는 그런 불량한 복장만으로도 처벌받을 근거가 된다. 주의하도록." "며, 명심하겠습니다아." 아무튼 카론 경도 유독 키스 일이라면 엄청 화를 낸단 말씀이야. 아니, 이미지 관리상 묘사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리더구트에서는 다들 '대충' 입고 다닌다. 지명 갈 때 한껏 빼입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기 때문에 누가 볼 것도 없는 이곳 '대기실'에서 까지 차려입고 다니고 싶진 않은 것이다. 특히 여름철은 죄다 흐늘흐늘해져서 대충 반바지만 입고 좀비처럼 테라스를 어슬렁거리고는 한다(루시온, 레녹 제외). 뭐, 남정네들만 있으니 별 문제될 것도 없고 그 '복장불량‘을 지적해야 할 기사단장부터 솔선수범해서 늘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는 것이지만, 왕실의 살아 있는 기사도, 카론 경이 보기엔 모조리 참수감인 불경죄인 것이다. 키스가 '조금만 늦었으면 목이 날아갈 뻔 했다고요' 라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옷 입고 오면 되잖아요. 어차피 이제부터 하루 종일 잘 테니까 잠옷으로......“ "아니, 그럴 것 없어." 다시 자리에 앉은 카론 경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외출복을 입고 왕궁을 떠날 준비를 해라." 뭐? 뜬금없이 무슨 외출복? 게다가 왕궁을 떠나라고? "아아, 절 그렇게 내쫓아버 리고 싶은 겁니까아?“ "능청부리지 마라, 키스. 무슨 의미 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카론이 슬쩍 그를 바라보자 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네에. 네에 알아모시죠' 라는 좀 토라진 표정으로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화병 조각을 치우며 물었다. "카론 경,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오늘 중으로 발표가 있을 것이다. 전 세계 평화 회담이 내일부터 수도 아스말에서 열리게 된다." "아? 세계 평화...... 회담?“ 처음 들어, 그런 말. 카론이 찻잔을 내려놓자 시종이 잽싸게 와서 뜨거운 차를 부어주었다. "말 그대로다. 실은 왕실에서 몇 달 전부터 준비해 오던 기밀 계획이야. 현재 험악해지고 있는 강대국들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키시온과 이오타, 콘스탄트의 수장들이 이곳에 모일 예정이야." "하하하, 그렇군요. 그럼 황제나 교황, 쇼메도 오겠...... 우앗! 정말입니까!" "아이히만 대공께서 직접 말하셨으니 실언은 아니겠지." 카론 경은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실은 엄청 놀랄 만한 사실이지 않은가!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가 한곳에 모이는 일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다. 이건 정말 꿈의 콘서트 아니, 꿈의 회담인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악몽의 회담이 되겠지만.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된 거죠?“ "몇 달 동안 마키시온 제국은 아이히만 대공이 콘스탄트 왕국은 오르넬라 성녀님 이 이오타 왕국은 위고르 공이 설득한 결과다. 사실 강대국 측에서도 서로 만날 만할 기회를 바라고는 있었지만, 지도자들이 직접 오게 될 줄은 나도 짐작 못했어." "그런데 어째서 이 베르스 왕국에서......" "아이히만 대공의 정치능력이라고 해야겠지." 난 눈이 번쩍 뜨였다.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이다. 우리 베르스 왕국은 교황청의 도움을 받으면서 콘스탄트 국왕과도 거래하고 있다. 또한 이오타와 무역을 하면서도 마키시온 제국과도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것이다. 즉,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중립지역. 강대국의 대표가 모여야 한다면 누구의 영역권도 아닌데다가 너무 허약해서 신경 쓸 것도 없는 우리나라가 최적인 것이다. 만약 한 군데라도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면 힘이 미약한 우리나라로서는 도저히 자립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러니까 아이히만 대공의 정치적 수완으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만들며 노련하게 국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힘만 세다고 능사가 아니다. 적을 제압할 정도의 힘이 아니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좋다, 그게 아이히만의 정치관이다. 왜 성격 괴팍한 그를 강대국들이 그렇게 모셔가려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카론 경이 말했다. "이번 회담이 성사되면 베르스는 세계적인 중립국으로 인정받겠지." "그렇겠죠. 강대국의 수장들이 모인 최초의 나라로 기록될 테니까요." 중립국으로 인정받는 것은 국력이 약한 우리나라로서는 몹시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아이히만 대공 역시 아마 몇 년 넘게 이 계획을 추진해 왔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번 회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해. 실수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 뒷감당은 베르스가 지게 될 테니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평화 회담이라고는 하지만 콘스탄트 국왕 바쉐론 콘스탄틴과 교황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이오타 국왕이나 쇼메 왕자와 마키시온의 마라넬로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 하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그들이 한곳에 모인다면 '허허! 지난 일은 다 잊고 우리 잘 한번 해보세!' 라는 구수한 상황이 연출될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물론 대군을 이끌고 오지는 않겠지만 수장들이 온다면 그들을 경호하는 아신들도 온다. 알테어 님과 키르케 님만 만나도 불꽃이 터지는 판국에 진청룡 라이오라까지 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못할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일촉즉발의 회담을 진행해야 하는 쪽이 바로 우리나라, 카론 경의 등골이 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키스가 나왔다. 난 무심코 그를 보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나를 비롯해서 랑시와 카론 경마저도 잠시 말을 잊고 키스를 바라봤다. "의, 의외네요. 키스 경," "뭐가요오?“ 그러니까 댁의 모습이. 고급스러운 회색 스트라이프 슈트에 니트로 된 겨자색 타이를 목도리 대신 두르고 손에는 오래된 갈색 가죽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항상 반쯤 헝클어진 채로 놔두던 곱슬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모습은 흠 잡을 곳 없이 샤프해 보였다.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까 뭘 입어도 커버가 되는군. 키스가 날 보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오랜만에 꺼내 입었는데." "호, 호스트 같아." “......” 아니, 정말 그렇다니까? 마담이 봤다면 당신, 그냥 안 놔줬을 거야. 카론 경이 '평소에도 그렇게 좀 입고 다니면 좋겠군' 이라고 중얼거린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담은 이 주일 후에 끝난다. 미안하지만 그때까지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와." 어째서 키스는 회담 중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하아, 난 왕실로부터 미움 받는 존재로군요오." "그게 아니야, 단지......“ 키스가 카론 경의 입을 막으며 싱긋 웃었다. "당신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조용히 사라져 드리죠." 그리고 그는 나를 보며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미온 경은 그 사자와 호랑이와 너구리들을 잘 접대해주세요. 미온 경은 그런 쪽으로는 꽤 믿음직스러우니까요." 뭐, 뭐가 '그런 쪽' 이야! 아니 잠깐. 그 말은 처음부터 회담이 진행될 것을 알고서 날 왕실에 계속 묶어두고 있었다는 거?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좋았잖아요." 키스는 대답 대신 '그럼 수고하세요' 라고 내 머리를 쓰다듬은 뒤에 웃으며 문 밖으로 나섰다. 그가 우리를 향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지명 다녀오겠습니다아." 헤에, 키스 경 입에서 저런 말 듣게 될 줄은 몰랐네. "뭐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서도." 안 해도 좋을 사족을 중얼거린 키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다가 멈칫했다. 왜 저래? 그가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느낀 얼굴로 말했다. "카론 경, 아무래도 이상해요." "뭐가 말인가." 키스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이번 권에서 제 비중이 너무 적다는 생각 안 들어요? 조금 지나면 5권도 끝나는데 난 또 시작부터 쫓겨나고...... 반면 당신은 이상하게 자주 등장하고! 서, 설마 카론 경! 혼자 튀고 싶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은!" 빠직, 빠직, 빠직. 카론 경 수명 줄어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꺼져!" 아, 욕 나왔다. "넵." 키스는 휑하니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주인공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작작 좀 투덜거리라고! 카론 경은 어째서인지 속상한 표정으로 키스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키스가 없는 동안 내가 임시로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단장 대행을 맡게 되었다." 뭐라고! 5 현재 리더구트에 남은 멤버는 나와 지스, 랑시와 쇼탄, 루이다. 나머지는 현재 지명중이며 곧 돌아와 기사단장이 바꿔버린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 키스의 소파에 앉은 카론 경이 안경을 핀 채 브리핑 서류를 넘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지명 업무는 회담 기간 이후로 보류되며 기간 중 귀관들은 진행 요원으로 임시 업무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접대다. 파티 음식을 나른다든가 길안내를 한다든가 울적한 내빈들의 말상대가 되어 준다든가. 강대국 지도자들 사이에서 회의를 주관하는 중책 따위는 때려죽어도 없을 것이다. 그때 카론 경이 말없이 서류를 넘기던 중 눈썹을 움찔하는 것이었다. "쇼넨베르트 경." "우아악!" 쇼란은 카론 경의 목소리가 너무 서늘해서 대답 대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 액수는 뭐지? 왕실에 빛이 있는 건가." 오오, 저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그것! 쇼탄 경은 한 마리 연약한 토끼가 되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고, 곧 갚을게요." "일주일의 말미를 주겠다." "우아악!" 그래, 비명이 나올 만도 하지. 댁은 잘 모르겠지만, 카론 경이 이런 일에 얼마나 박정한 인간인 줄 알아? 사채업자 뺨 때릴 냉혈한이라고. 그가 주저 없이 '사형선고'를 내렸다. "일주일 후에도 부채(負債)가 남아 있다면, 스스로 부채를 청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 그 차액분(借額分)에 대하여 경의 자산(資産)을 압류(押留)할 것이며 유동자산(流動資産)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하겠다. 이상." 그러니까 짧게 줄이자면 '거지는 인권이 없다' 정도랄까. 쇼탄 경은 이 난해하고도 가혹한 염라대왕의 판결문에 '살려주세요!' 라는 항변을 했지만 새로운 기사단장 카론 경은 '이의가 있다면 행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해라' 라고 일말의 동정도 없이 말한 후에 다음 사냥감을 노렸다. "그리고 루이블랑 경." "허억!" 루이 경은 단 한 마디에 저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오늘 새벽 두 시경 기사단장 키스 세자르의 허가 없이 펠리오스의 무녀와 접촉한 사실이 있군. 시인하나?“ "그, 그건 그냥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 "불법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벌금형에 처한다." "너, 너무해요!" "그리고 접촉 후 벌어진 모든 대화에 대해 빠짐없이 조서(詔書)를 작성해서 오늘 업무가 끝나기 이전까지 헬스트 나이츠 본부에 제출해라. 위증(僞證)이 발견될 시엔 가중 처벌하겠다. 이상." "아이, 참. 카론 경도. 남녀가 밤에 만나는데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 죄송합니다." 루이 경은 말없이 바라보는 카론 경의 눈빛에 기가 죽어 입을 다물었다. "하, 하지만 카론 경. 그걸 까발렸다간 아가씨들이 날 살려두지 않을 거예요! 제발 자비를!" 바람둥이의 말로는 비참했다. "루이블랑 경." "예?“ "나는 살려둘 것 같나?“ “......” 무서워, 압도적이다. 헬스트 나이츠는 항상 이런 브리핑을 받는 건가? 지스 경마저도 '저 사람 무서워' 라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확실히 공권력 앞에서 움츠려드는 것이 소시민의 본능이라지. 키스 경, 당신의 빈자리가 절실히 느껴져요 빨리 돌아오세요! 그리고 명이 줄어버리는 것 같은 공포의 브리핑은 삼십 분이나 계속 된 끝에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엔디미온 경" 카론 경이 안경을 벗고 브리핑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날 바라봤다. "예?“ "자네는 아이히만 대공에게 가봐라. 늦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무, 물론이죠.“ 오늘 내 운세는 무서운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기로 결정된 것 같군. 6 시침 뚝 떼고 이런 거대 회담을 준비한 아이히만 대공은 왕실 내의 고풍스런 노천식당에서 점심식사 중이셨다. "이리 오게, 엔디미온 군." 식당을 두리번거리는 내게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나를 불렸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대공 특유의 모습은 언제나 당당해 보여서 매력적이다.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식사 했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든든히 먹어두게. 이제부터 전쟁이니까." "아하하하." 그러니까 저도 그 전쟁에 동참시키겠다는 건가요? 아닌 게 아니라 아이히만 대공은 실로 대식가다. 앉은 자리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은 왕성한 식욕, 그럼에도 나이를 잊게 만드는 늠름한 체구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그 엄청난 열량을 모조리 소비해 버리는 그의 활화산 같은 행동력 때문이리라. 나는 '살 좀 찌워! 남자가 대체!' 라는 대공의 성화에 못 이겨 왕실 특제 크림 케이크를 티스푼으로 자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놀랐어요. 대공께서 그렇게 세계 평화를 걱정하고 계실 줄은......“ 이상주의 따위는 개나 갖다 주라는 식의 아이히만 대공이 대규모의 평화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할 줄이야 역시 나이가 들면 온화해지기 마련...... 그때 강철의 할아범이 말했다.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릴 하는 게야? 내가 그딴 것을 왜 신경 써?“ "그, 그딴 것이라니요?“ 평화...... 싫어하십니까? 아이히만 대공이 굵직한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그 탐욕스런 괴물들이 이 나라에 모여 맘에도 없는 평화를 운운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걸세, 물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내던져버릴 서푼 가치도 없는 평화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단지 이 나라가 당분간 평화 회담이 열린 중립국으로서 안전을 보장받기만 하면 되는 거야. 페르난데스가 성인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 까지만. 내 목표는 그거 하나야." 아아, 이것이 정녕코 평화 회담을 추진한 당사자의 입 에서 쏟아져 나오는 독설이란 말인가. 나는 이 순간 아이히만 대공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었다. "평화? 세상을 수백 번 쪼개고도 남을 군대를 키우는 정복자들이 서로의 눈을 부라리며 평화를 논해? 그렇게 쉽게 평화라는 것이 이뤄졌다면 전쟁이라는 단어는 애저녁에 세상에서 사라졌어야해. 그것 참, 사자 풀 뜯어 먹을 소리로군." 그의 거친 목소리는 이상하게 슬프게 들려왔다. 어쩌면 노련한 그에게도 평화란 갈구하기에는 너무도 희박한 소망이라서, 아예 포기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페르난데스 왕자님에게 자신의 사후(死後)를 걸고 싶은 것일지도. "그럼 평화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왜 모이는 거죠?“ “그거야 이익이 되니까." "이익?“ "서로를 탐색하고 견제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겠지. 이번 회담은." 아이히만 대공이 씨익 웃으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하지만 지도자들이 직접 올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요?“ 콘스탄트와 이오타의 국왕, 교황과 황제가 직접 대면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아이히만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후후, 얼굴도 모르는 적과 한평생을 싸워오다 보면 한번쯤은 서로의 상판을 보고 싶기 마련이겠지." 그리고 그 싸움꾼들의 심리를 자극한 자가 바로 아이히만 대공일 것이다. 그 자신도 누구 못지않은 싸움꾼이니까. “아무튼, 우리로서는 이번 회담을 성공리에 끝마쳐야만 해. 실수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서 불통이 튄다면, 이 쬐끄만 나라는 삽시간에 타 죽어 버릴 테니까." 그가 반짝거리는 나이프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요?“ “자네는 딴 건 몰라도 접대 하나 만큼은 세계 최고가 아니던가?” "아하하. 황공하옵니다." 우씨! “만찬에 참석하게. 그리고 어떤 문제라도 생길 것 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막아. 말하자면 화재감시요원이라고나 할까." "최선을 다해 접대하라...... 이건가요?“ "아니, 목숨을 걸고 접대하게. 기대하지." 그의 입 꼬리가 무섭게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이 왕실에 남아있는 이상 곱게 죽지 못할 것 같다는 운명을 느꼈다. 이른바 작전명 접대최전선(接待最前線)! 어째서 예전부터 기사도는커녕 호스트의 혼(魂)을 불태울 일만 생기냐고! 망할! 7 ‘세계 평화 회담' 은 기습적으로 발표되었다. 물론 우리 만두 임금님은 (돈을 벌기 위해서)빨리빨리 알리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겠지만, 보안 문제로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발표와 함께 아스말의 물가는 (속이 뻔히 보이는 누군가의 치졸한 상술 덕분에)다섯 배나 상승했다. 4대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이 엄청난 흥분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임금님께 가끔씩은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초지일관...... 조금만 덜 추잡한 쪽에 쓰시면 당신도 성군(聖君)인데 말이야. "뭐하고 있는 거야! 이쪽에도 나무를 심어! 빨리!" 그렇다 현재 왕궁은 그야말로 꽃단장 중. 왕궁 세아스말이 분명 베르스에서는 가장 화려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마키시온이나 콘스탄트, 이오타 같은 강대국에서 본다면 '귀여운 별장' 수준일 것이다. 뭐 , 나는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지고는 못사는 왕비 마마의 생각은 전혀 달랐나 보다. 일 년 국고를 거의 탕진할 수준의 왕궁 조경예산이 긴급 통과되었고, 제멋대로 증축되어 오던 왕궁은 현재 수만여 명의 인부들이 들러붙어 시시각각 회춘(回春)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기 벽을 허물어! 그리고 중정이 산뜻하게 보이도록 저 칙칙한 대리석들도 깨끗이 밀어버려!" "하, 하지만 저 clr칙한 대리석은 대대로 이어져 오는 왕실의 무덤......“ "에이이! 알게 뭐야! 죄다 밀어 버리고 꽃으로 도배해 버려! 정원에는 운하를 파고 배를 띄워! 하는 김에 못생긴 순금상도 치워버려!" 그 변화가 너무 무자비하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미, 미온 경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심란한 표정으로 엄청난 대공사를 지켜보고 있던 내게 여행 가방을 들고 돌아온 크리스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놀랄 만도 할 것이다. 건국 이래, 이 나라가 이토록 부지런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내가 히죽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전쟁 준비." 8 그리고 열흘 후. 반짝 반짝 재오픈을 한 (물론 그 이면에는 한곳에 쌓여 있는 선조들의 묘비가 서글픈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왕궁 세아스 말로 강대국 지도자들의 마차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물론 수도의 교통은 엄중히 차단되었으며 시민들도 깃발을 들고 거리에 동 원되는 약소국다운 환영행사까지 준비되었다. 그리고 장기지명자와 기사단장을 제외하고 전원 집합한 우리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들은 모두 제복을 차려입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입구에 사열해 있었다. 말하자면 정문 앞에 심어두는 꽃과 비슷한 기능을 담당한다고나 할까. 나 스스로도 이런 말 하는 거 싫지만 사실이 그렇다고. 왕실 장식품의 일부가 되어 정문 앞에 대기한 지 어언 네 시간이 지났을까, 웅장한 팡파르가 울리며 가장 먼저 무지막지하게 화려한 마차들과 기병대의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에, 이오타가 먼저 왔네."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우리들 앞을 지나가는 그 화려한 행렬 앞에서 랑시 경이 신기한 듯이 중얼거렸다. 사실 이오타는 늦어도 삼 일이면 왕궁에 도착할 수 있지만, 강대국들의 자존심이랄까, 모두 같은 날 도착하려고 늦장을 부렸던 것이다. 솔직히 되게 치졸하다. 끝도 없이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이오타 측의 행렬을 보며 내 옆에 있던 지스가 흙먼지에 콜록거리며 독설을 퍼부었다. "남의 집 문 앞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예의도 모르나 멍청이들!" "어쨌든 아쉬운 건 우리나라 쪽이니까 말이지." 나는 INM특무대의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입성하는 거대한 마차를 시선에 담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저 은색으로 빛나는 마차안에 이오타의 국왕 빌헬름 블룸버그와 망할 쇼메 왕자가 타고 있으리라. '설마 쇼메가 여기서도 난리를 피우진 않겠지.' 어려서 마키시온 제국의 볼모였던 쇼메가 마라넬로 황제를 죽도록 미워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그 성질머리 어elf 가겠냐만, 제발 이번만큼은 참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니면 스승 아이히만의 총알세례를 맛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와아, 이번에는 콘스탄트 국왕과 교황이네?“ 십여 분의 간격을 두고 나타난 행렬은 바로 콘스탄트에서 북상한 국왕과 교황의 행렬이었다. 국왕을 경호하는 '임모탈' 제7무장전투여단과 교황을 경호하는 성 아우리엘레 신전기사연합의 행렬이 나란히 오고 있는 모습은 의외였다. 아아, 저들도 사실은 저렇게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던...... "허헉! 경주하고 있는 거잖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두 행렬이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땅이 울리고 있었다. 이, 이, 이런 치졸한 것들! "헉! 피해!" 그들이 거의 돌격에 가까운 속도로 왕궁으로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며 우리는 슬라이딩을 하며 가까스로 정문에서 탈출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저 광란의 폭풍에 휘말려 넝마가 될 뻔했다고! 어디가 평화 회담이야! "어흐흑, 약소국이란 비참하구나." 먼지를 뒤집어 쓴 루이 경 이 털씩 쓰러진 채 중얼거렸다. 마지막 행렬은 역시 마키시온이었다. 전체를 검은색으로 도배한 마차들과 제국전위대 프론티어 뱅가드의 행렬은 웅장하다기보다는 위압적 이었고, 신성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악마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공포의 황금 키마이라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보였다. 자그마치 열 필의 육중한 군마가 끌고 있는 팔륜(八輪) 마차는 그 안에 타고 있는 자가 세계 최강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말없이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그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남색가.' 절대 막강 황제에 대한 내 유일한 감상은 그것뿐이다. 9 회담 대표들이 데려올 수 있는 경호 병력은 1천명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에게, 고작 천명?‘ 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신을 포함한 최정예 병력 1천이라면 모르긴 해도 이런 나라쯤 단숨에 집어삼킬 전투력일걸? 게다가 문제는 사이가 극도로 나쁜 그 정예부대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평화 회담을 위해 모였다고는 해도 그 일기당천의 호전성을 잠재우는 것이 쉬울 리가 없지 그러니까 이건 마치 화약고 앞에서 계속 부싯돌을 때리는 짓과 같다. '카론 경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직 업무에 복귀하지 못하는 헬렌 경을 대신해서 왕실 내부의 치안을 담당하게 된 카론 경이 아니었다면, 오늘 송장 수십 구 치웠을 것이다. 카론 경은 시비가 붙거나 결투가 생길 때마다 나타나서 특유의 침착함과 배짱으로 사태를 진정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물러서지 않는 카론 경이라도 최근 열흘 동안 수도 치안을 재정비한데다가 오늘 왕실까지 수호하다보면 지치기 마련. 그런 그가 저녁이 되어서야 삐꺽, 문을 열고 리더구트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까 카론 경, 스왈로우 나이츠 기사단장 대행도 겸직하고 있거든. "카, 카론 경.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요." "조금 피로한 것뿐이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저녁 브리핑을 위해 서류를 들었다. 아니, 정말 죽을 것 같은 얼굴인데요. 피곤이 산처럼 쌓여 보인다고요. "눈은 괜찮으세요? 너무 피로하면 또 시력이......“ "괜찮아." 그가 조금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그가 마지막 힘을 짜내 눈을 번쩍 뜨며 우리들을 바라왔다. 역시 초인은 초인이다. "그럼 지시를 내리겠다." 전원 집합한 우리들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카론 경의 자세한 임무를 하달 받았다. 누구는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고 또 누구는 어떤 지역을 수비하고 있어야 하는지, 그야말로 조직적이고 치밀한 접대다. 만약 키스 경이었다면 '올 때 맛있는 것 좀 싸오세요오' 같은 나사 빠진 소리만 한 뒤에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엔디미온 경, 자네가 선봉이다. 전하와 아이히만 대공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예!" 카론 경은 마치 출진을 앞둔 장수와 같았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막중한 기사의 임무......가 아닌 막중한 접대의 임무라는 것이 맥 빠지긴 하지만, 왕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잠시 욕실을 좀 빌리겠다." 카론 경은 당장이라도 '아! 빈혈이!' 하고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기색으로 그렇게 말한 뒤에 지하로 내려갔다. 카론 경은 보안 책임자이기도 하니까 만찬 때도 쉴 수 없는 신세, 저 모습을 이멜렌 님이 봤다면 '내 서방님 죽어요!' 라는 쪽지를 들고 울먹울먹거렸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정확히 십 분 후 카론 경이 올라왔다. 나와 모두는 카론 경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바라보지?“ "아, 아뇨. 그런데 정말 안 피곤해요?“ "끈질기군.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재충전. 완전히 평소의 단정한 얼굴로 돌아왔잖아! 딱 십 분 샤워로? 혹시 신체 내부에 충전장치라도 있어서 유사시에는 비축해 둔 힘을 개방하는 것...... 같은 공상과학이 이런 소설에 적용될 리가 없겠지만, 아무튼 불가사의로군. 하긴, 검으로 총알을 막고 눈 감고 다녀도 생활에 지장 없는 초인에게 그 정도로 능력은 사소한 부록이라고 해두자고. 10 초대형 샹들리에가 열 개도 넘게 천장 위에 군림하는 호화판 연회장은 실은 전하의 알현실을 긴급 개조한 것이다. 그럼 앞으로 알현은 어디서 하냐고? 글쎄, 나도 모르겠네. 아무튼 이번 회담에 간 쓸개 다 내줄 것 같은 임금님의 지극정성에 감탄과 불평이 동시에 몰려온다. 뭐, 회담이 무사히 끝나기만 한다면 우리나라의 위상도 꽤 올라가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강대국 비위 맞추는 짓은 좀 눈꼴사납단 말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나 같이 잘 나가는 강대국 귀빈들이 일 년 내내 먹어도 다 못 먹을 것 같은 음식과 술을 음미하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전하와 왕자님도 보이고 물론 아이히만 대공과 위고르 공, 오르넬라 님도 참석했다. '다행이다.' 나는 이들 중에 4대 권력자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아무리 봐도 교황이나 콘스탄트, 이오타 국왕, 마키시온 황제는 나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여독이 쌓였다는 핑계로 자신의 거처에 머물고 있지만-아이히만 대공의 말을 빌리자면 '이 몸이 이딴 시시한 파티 따위에 참여할 것 같아? 라는 권력자 본연의 오만함이랄까. 누군 죽을힘을 다해 준비했구만! 좀 아니꼽긴 해도 그들이 없는 편이 경호에도 접대에도 수월하니까 나로서는 행운. 만약 그 앙숙들이 한데모여 시비라도 붙어봐, 당장 분위기 싸늘해지고 말릴 겨를도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릴걸? 그러니까 나로서는 그들이 회담 직전까지는 되도록 서로 얼굴보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이봐, 홍차 한 잔 부탁해도 될까." 낮은 톤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영업용 스마일을 반짝 보이며 그를 바라봤다. "예, 잠시만 기다리시면...... 윽!" 쇼메였다. 매력적이라는 말 취소, 보자마자 기분이 나빠졌어. 어디서 구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화려한 실크 셔츠를 입고 있는 그는 날 보자마자 히죽 입 꼬리를 올리는 것이었다. 아아, 싫어. 이런 시건방진 녀석, 접대하고 싶지 않아! "여어, 오랜만이네? 잘도 안 죽고 살아 있구나, 천민," 어떻게 저렇게 아무런 주저도 없이 상대를 빈정거리는 대사가 떠오를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저 인간은 아침에 국왕문안을 할 때도 '그 왕관 언제 물려줄 겁니까? 대충 좀 해먹고 물러나시죠' 라고 말할지도 몰라. 난 장난감이라도 보는 듯한 그의 시선을 즉 피하며 삐죽거렀다. "흥. 살아 있어서 미안하네요. 천민은 본래 악운에 강하거든요.“ "여전하군. 그런데 네 녀석, 이름이 뭐였지?“ 빠직 대체 몇 번을 가르쳐 줘야 하는 거야! 가슴에 문신이라도 해줘야하냐! "또 잊어버릴 것이 뻔한 사람한테 가르쳐드릴 이름은 없네요!“ "아아, 기억났다. 엔디미온이었지?“ 알고 있었잖아, 이 자식! 그가 들고 있던 와인을 훌쩍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내빈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명령 받았을 텐데?“ 이 더티 쇼메, 남의 약점을 걸고넘어지다니. 사실 현실적으로 이녀석과 내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 게다가 특급 귀빈이기 때문에 내 태도를 빌미로 행패를 부렸다간 난 아이히만 대공에게 총살당한다. 젠장. 굴욕이란 이런 거로군. "큭. 뭐 필요하신 것이라도......“ 나는 눈썹을 바르르 떨며 안 움직이려는 얼굴 근육에 최대한 힘을 줘서 미소를 '만들었다.' "후후, 이딴 보잘 것 없는 나라에 내가 필요한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그, 그렇겠네요. 아하하." 아까는 홍차 달라며! "아 뭐, 굳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가 뜸을 들이며 나를 보고 슬쩍 웃었다. 뭐든 말만 해라. 당장 갖다 준 뒤에 사라져 드릴 테니까! "불꽃놀이." "......예?“ 지금 잘못 들은 건가? "폭죽 좀 가져와. 여기서 터트리면 아주 신날 것 같지 않아? 마키시온 놈들을 향해 한 방 쏴주면 후련하겠군." 난 허허 웃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라도 정신통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한 대 후려쳐 버릴 것만 같아. ‘그딴 건 혼자 해!'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신날 것 같긴 하군요. 연회장도 불바다가 될 테고. 하지만 공교롭게도 왕실은 화기 엄금입니다만." 내가 고개를 돌린 채 짜내듯이 말하자 그가 큭큭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농담도 못 알아듣는 거냐? 이래서 천민하고는 같이 못 놀겠어." "아...... 하하. 그렇겠네요. 고상하신 왕자님." 누, 누군 같이 놀고 싶대? 영업에 지장 생기니까 썩 홍차 처마시고 꺼져주세요!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내 손을 꼭 잡는 것이었다. 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깜짝 놀랐다. "아, 알테어 님?“ 그렇다. 교황이 왔다면 알테어 님도 오는 것이다. 그녀는 동그란 연두색 눈동자로 날 빤히 바라보며 헤헤 웃는 것이었다. 잠시 내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성하께 가봐야 해. 그럼 수고해' 라고 속삭이며 사라졌다. 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아 참. 나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아신이자 순결한 성기사인 그녀가 나와 붙어 있는 것이 목격되면 교황청으로부터 아주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녀보다는 내 쪽이...... 덕분에 지금도 잠깐 나타나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고작. 아아, 이거 뭔가 비운의 연인 같네요. 힘내세요, 알테어 님. 저도 열심히...... 흐헉! "너, 명주작과 아는 사이냐?“ "뭐, 뭐, 뭐하는 짓입니까!" 쇼메가 내 턱을 잡고 날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데 일 초도 안 걸렸다. "얼굴 값 하네." 뿌득 그래서 뭐! 정말 이 녀석에게 만큼은 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솟구친다. 하지만 권력으로는 무리고,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검술로도 힘들겠고, 머리라면...... 모사꾼 같은 이놈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고. 아 그래! 정말 미모로는 이길 수 있어! 그건 내가 우세! ‘......하나도 안 기뻐.' 난 퀭한 표정으로 이 녀석 이 명령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음식이 쌓인 테이블로 걸어갔다. 게다가 아주 취향도 고상한 것이 얇게 자른 호밀빵에 후추와 겨자씨로 향을 낸 거위간 파데(pate)를 발라 오란다. 그냥 맨 빵에 쨈이나 발라 쳐드실 것이지! '대체 이게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어.' 십대 내내 상류층 고객들을 상대하며 별의 별 요리를 다 먹어 봤지만, 사실 내 입맛은 꽤 서민적이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쉬운 맛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거위간이든 송로버섯이든 낙타의 혓바닥이든 누가 칼을 들이대고 먹으라고 하지 않는 이상은 전혀 먹고 싶지 않다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쇼메로부터 더 이상 트집잡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해 방에 핑크색 거위간을 바르고 있었다. "간이라.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지." 나직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내 옆에는 고풍스러운 정장을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백발을 길게 내리고 있었는데, 청년의 것 같이 밝은 눈동자가 빛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르긴 해도 강대국의 귀족쯤 되는 모양이다. 나는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젊게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접근한 상대를 심심하게 만드는 것은 최악의 접대다. "처음 인사드리옵니다. 헌데 의식이라 하심은 어떤 의미이신지요."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은 힘으로 충만한 생명의 상징 이지. 즉, 간을 먹는다는 것은 그 대상의 생명력을 삼키는 의식이라네. 그래서 예부터 전사들도 싸움에 나가기 전 말의 배를 갈라서 뜨거운 간을 꺼내 나눠 씹었지.“ 그는 마치 옛이야기를 하듯이 편안하게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말에는 힘이 있었다. 노인이지만 노쇠함을 찾을 길이 없는 강인한 모습은 마치 아이히만 대공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거위간을 흘낏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틀렸어. 그런 것을 즐기는 자는 결국 거위의 배짱밖에 없는 거야." "아하하하." 헤헹. 쇼메, 들었어? 거위 배짱이란다. "내게 가장 만족을 주는 간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사자? 늑대?“ "아니 , 바로 증오하는 사람의 간이야. 그걸 맛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의식으로 부족함이 없네." 오싹했다. 참 재미있는 농담입니다, 라고 받아치기에는 그의 웃음이 너무 무서웠다. 이 사람, 정말로 사람 간을 뜯어먹은 적이 있는 거야? "이름이 뭔가." "물어봐 주셔서 영광이옵니다.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군, 젊은이." 그는 내 어깨를 톡톡 친 뒤에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인상이 느껴진다. 게다가 사람 간이라니! 실수로라도 그런 것을 먹었다간 평생 거식증에 걸려버릴 거라고! "저놈이 누군지 알고나 있는 거냐?“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쇼메를 바라보자마자 난 깜짝 놀랐다. 항상 오만방자한 자신감이 가득했던 얼굴은 거의 증오에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난 그의 엄청난 살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누군데요?“ "적의 인육을 뜯어 먹고 나서야 성이 차는 괴물은 세상에 마라넬로 밖에 없지." 그의 목소리가 숨기지 못한 두려움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 마라넬로 황제?“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자가 바로 페르난데스 왕자님을 암살하려 한 바로 그 황제란 말이야?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의 곁에는 황금색의 눈동자를 가진 긴 금발의 사내, 진청룡라이오라가 서 있었다. 사람의 간을 먹는다는 농담은 더 이상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우아아! 저건 안 돼!' 나는 황제와 페르난데스 왕자님의 눈이 마주친 것을 보며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쪽을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SKT 6권에서 계속) 외전 또 다른 시선#1 : 악연(惡緣) 1 올해로 15세가 되는 건가. 사실 평민의 신분으로 기사가 되겠다는 것은 그리 환영할 만한 결심이 아니다. 귀족들로 이뤄진 견습기사들 사이에서 나는 항상 인간이 아닌 '평민' 이었다. "하, 항복!" “......” 여덟 명째. 나에게 덤벼들었던 견습기사가 바닥에 나자빠져선 손을 내질렀다. 나는 연습용 장검을 접으며 다음 상대를 위해 거칠어지는 숨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 것의 어디가 정당한 대련인가? 그들은 날 빙 둘러싼 채로 들으라는 듯이 빈정거리고 있었다. "쳇. 운이 좋아 들어온 놈치고는 끈질기네. 하긴, 평민으로서는 여기 온 것만 해도 꿈도 못 꿀 일이니까, 발버둥치고 싶겠지." "어디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 지 주제도 모르는 자식." 권세 높은 공작이 주최한 연습 시합에서 내가 우승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긴, 고머스 경도 내게 '절대 이기지 마라' 라고 충고했었지 뿌리도 없는 평민이 귀족 가문의 귀한 자제들을 꺾고 우승하는 모습 따위를 후원자인 공작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훌륭한 기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사도보다는 가문이고 검술보다는 처세술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예를 들며 삼십대 일의 악의적인 대련 같은 것이다. "다음은 내 차례다 뭐야, 벌써 서 있기도 힘들어진 거야?“ 아홉 번째 도전자가 아주 값비싸 보이는 연습용 검을 뽑아들고 걸어 나왔다 이 녀석, 백작, 아니 자작 가문의 차남이던가? 아무리 칼날이 없는 연습 검이라도 분명 철검이다. 제대로 맞으면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다. "카론, 지금이라도 우리 신발을 핥고 용서를 빌면 눈감아주겠다. 아버지에게 말만 하면 네깟 놈 정도 추방시키는 거, 일도 아니야. 네게 어울리는 시골구석 에 처박혀 조용히 살도록 자비를 베풀어 줄까?" 풋내 나는 악의가 귀를 때렸다. 나는 찢어진 어깨의 상처를 꽉 누르며 그를 바라봤다. "말이 많은 녀석이군." "이 자식! 건방지게 구는 것도 작작해!" 그가 내게 달려들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지금까지 대체 뭘 배웠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몸동작 누적된 피로만 아니었다면 손쉽게 반격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가까스로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 저 녀석의 칼이 어설프게 스치고 지나간 팔에서 뜨끔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건...... 그놈이 히죽거리며 자신의 검을 들어 보였다. "아아, 이걸 어쩌지. 깜박하고 진짜 칼을 가지고 왔네?“ "큭!“ 비웃음 소리가 터졌다.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몸을 낮게 숙인 채 곧바로 뛰어 들었다. 무방비나 다름없는 다리를 후려치려고 했다. "항복!" 나는 검을 멈췄다. 그가 히죽거리며 날 비웃고 있었다. "아아, 항복이라니까? 아무리 평민이라도 항복한 사람을 공격할 만큼 무식하진 않겠지, 카론?“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봐야 원하던 구경거리만 된다. 나는 입을 꽉 다물며 점점 통증이 심해지는 팔을 지그시 눌렸다. 그리고 열번째 도전자가 내 모습을 즐기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내 앞에 나타났다. 백작가의 장남이었던가. 2 차례대로 덤벼드는 삼십 명을 치명상을 입히지 말고 항복을 받아내야 하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나도 알고 있다. "아아, 항복. 항복." 열다섯 명째.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추슬러야 했다 좀더 체력단련을 해야 해. 몰려오는 현기증에 들고 있던 검을 나도 모르게 떨어트렸다. "와하하! 저것 좀 봐! 기사가 되고 싶은 놈이 검을 떨어트리면 되겠냐? 역시 평민은 저래서 안 된다니까." 나는 눈을 찡그리며 검을 주웠다. 그 순간 어깨에 격렬한 통증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손에 쥔 검을 그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이런. 난 또 준비가 다 끝났는지 알았지." 갑자기 검을 내리친 놈은 열여섯 번째 녀석이었다. 기습당한 어깨는 하필이면 오른쪽 크게 벌어진 상처 때문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아니, 그보다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연습 시간은 이미 끝났을 텐데."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나를 둘러싼 견습기사들 앞에 고머스 경이 나타났다. 말을 타고 있는 그는 지도기사였다. 둘러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뭐 별 거 아니고, 카론이 하도 대련을 하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숙여 고머스 경을 보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험험, 그래? 하지만 내일 연습도 있으니까 부상당하지 않는 정도로 끝내도록." 그는 말을 타고 가버렸다. 또 술집에 가는 길이리라. 나를 봤을까? 분명 그랬겠지. 하지만나는 '부상당하면 안 되는' 부류에서 제외되는 쪽이었다. 새삼 화가 날 것도 없어. "자, 그럼 계속해 볼까?“ 나는 몸을 일으키며 왼손으로 검을 바꿔 쥐었다. 점점 더 마음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바보 아냐? 왼손으로 무슨 칼을......“ 순간 불꽃이 터지며 상대의 칼이 부러져 버렸다. 바보는 네 녀석이다. 검을 쥐는 방법부터 틀렸잖아. "하...... 항복." 부러진 자신의 칼을 든 그가 기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왼손을 쓰는 방법을 연습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 지독한 자식." "슬슬 귀찮아지는데 한 번에 저 놈을 덮치자. 평민을 상대로 일일이 예의를 지켜줄 필요는 없잖아?“ "그래, 그래. 옷을 벗겨서 정문에 묶어놓자고. 그럼 제 발로 사라지겠지." 하지만 아무도 내 앞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칼을 두 통장 낸 모습을 봤으니까. 고귀한 몸을 다치고 싶지 않겠지. 나는 그런 그들 속에 칼날도 없는 검 한 자루만을 든 채 서 있었다. 계속 마음이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증오도 슬픔도 잡히질 않는 정지된 감정이 '어차피 혼자였잖아 새삼 억울할 것도 없잖아?' 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엥? 왜들 모여 있어?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순간 그들의 비웃음이 일시에 멈췄다. 난 고개를 들었다. 쪼그려 앉은 동갑의 견습기사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가 화점(火點)처럼 달아오른 자. '키릭스 세자르.' 이 녀석을 본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 세자르 가문이 그렇게 유명한 가문이던가? 공작 가문인지 후작 가문인지, 연습에 참여하지 않아도, 숙소로 여자를 끌고 와도 처벌받지 않는 녀석이었다. 도리어 고머스 경은 이 녀석에게 잘 부탁한다며 몰래 돈을 건넬 정도였으니까. 망나니! 귀걸이에 향수 냄새에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 너무도 싫은 녀석 이다. "와! 피 흘린다! 피! 저것도 꽤 어울리네? 멋져." 키릭스가 날 보고 빙글 웃으며 박수를 치자 눈치를 보던 다른 놈들도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내게 관심조차 없던 녀석인데, 지금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내 모습이 그렇게 즐거운 거냐! 멈춰있던 감정의 톱니가 확 몰아쳐 버렸다. "카, 카론! 이 자식! 지금 무슨 짓을!" 다른 녀석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난 키릭스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던 것이다. 알고 있다. 이것이 결투를 신청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견습 주제에 결투 같은 것을 했다간 당장에 추방당한다는 것도. 키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7" "카론." "성은?“ "없다. 평민이니까." 성이 있는 평민이라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내겐 그것조차 없었다. "아, 그래 카론 씨. 오해 했나 본데, 이 유치한 장난은 이 녀석들이 멋대로 꾸민 거야. 난 그냥 구경하는 거라고. 관객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건 너무 무자비하지 않아? 난 이래봬도 째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이 아니야. 너는......“ 내가 싫어하니까, 아무런 논리도 없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삼켰다. "키, 키릭스 씨. 이런 평민을 일일이 상대하실 필요 없어요. 이런 놈은 우리가......“ 키릭스는 존댓말까지 붙여가며 아부를 늘어놓던 녀석의 입을 가리며 일어섰다 그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아아, 이해하겠어, 카론. 나도 네가 싫어." 난 속마음이 노출된 것 같아 흠칫 놀랐다. 그래, 내가 키릭스를 싫어했던 것은 속을 꿰뚫어 보는 저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다. "내가 네 의지에 감동을 받아서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자...... 라고 말해봐야 그건 위선이겠지? 망나니 도련님이 하품을 하며 던져주는 그딴 싸구려 동정, 너는 싫어할 거야 그렇지?“ 닥쳐! 남의 속을 읽는 것 같은 그런 말은 집어치워! "그래, 결투하자. 결투 좋지. 인간이 짐승이었을 때부터 흑백과 선악, 옳고 그름을 손쉽게 판결해 주는 아주 편리한 해결법이거든.“ 그는 그렇게 흥얼거리며 다른 녀석의 연습용 검을 태연하게 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니까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몸으로 괜찮겠어? 톡 쳐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데?“ "하찮은 평민의 몸 따위를 걱정해 주니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아? 너 의외로 말 잘하네?“ 나도 모르게 냉소적인 빈정거림이 나와 버렸다. 이 녀석 앞에서는 화가 치민다. 차라리 다른 녀석들처럼 속이 뻔히 보이는 천박한 협박을 한다면 화가 날 것도 없을 텐데. "그럼 간다." 그 순간 그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바람이 스쳐지나간 기분과 함께 서늘한 감촉이 가슴에 느껴진다. 혼미하던 머릿속이 바짝 현실로 돌아왔다. “카론 씨, 난 이쪽입니다.”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그가 엷게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 가슴을 보았다. 찢겨나간 옷 사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마치 진검에 베인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일자를 그린 것이다. 칼날도 없는 검으로 말이다.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는데도! "아, 미안. 옷 한 벌 사줄게." 장난스런 어조로 말하는 그를 난 말없이 바라봤다 이런 수준의 녀석 이었나. 내 실력의 두 배, 세 배 쯤 될까? 진짜 기사와 싸워도 될, 아니 그 이상. 승산이 없어. 내 몸이 최고의 상태라고 해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얼레? 정말 계속 싸울 거야?“ 나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를 향해 다시 검을 들었다. 천재? 재능인가? 억울해! 화가 나! 불공평 해! 처음으로 억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애 같이 창피한 마음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보던 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화난 거야?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난 곧바로 뛰어들었다. 그가 찌르는 검 끝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칼을 그어 올렸다. 그의 옷이 일직선으로 찢겨지며 붉은 피가 방에 튀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곧바로 내 팔이 그에게 잡혔고 곧 칼머리가 명치를 깊게 찔렀다. "아악!" “바보. 네 최고의 무기는 냉정함이야. 그걸 내팽개치고 달려들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후 얼마나 더 당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보고 있는 녀석들이 기가 질릴 정도로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나는 검을 놓치고 땅에 쓰러졌다. 몸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대, 대단해." 다른 녀석들은 소원대로 패배한 날 비웃을 생각조차 못하고 키릭스의 모습에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키릭스는 가쁜 숨을 내쉬는 날 빤히 내려다보다가 머리칼을 잡아채 일으켰다. 난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쏘아봤다. 키릭스는 여전히 웃는 모습 이었다. 소름끼치는 눈동자, 다른 세상의 존재, 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거, 결투였지? 유언 들어줄게." 그가 내 심장에 칼끝을 겨누며 말했다. 결투란 패배한 자의 목숨을 승리자에 넘기는 의식이다 순간 난생처음 두려움이 몰려와 입이 열리질 않았다. “왜? 죽기 싫어? 아아, 어쩌지. 카론 군이 겁먹었나 봐. 살려줄까나." 그런데 또 화가 나 버렸다. 난 커다랗게 외쳤다. “마음대로 해! 이 자식! 그리고 내 이름 부르지 마!" 아마 태어나서 이렇게 커다랗게 소리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날 보고 피식 웃었다. "음. 그럼 죽일게." 그의 눈동자가 날 내려 보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위험스런 투명함. "다들 이제 그만 하세요." 난감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끼어든 자는 미레일이었다. 몸집은 크지만 선생에 어울리는 외모, 착한 사람이다, 강하고. 그리고 키릭스와 대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였다. “아, 미레일. 식사 준비는 다 끝내고 오는 거야?” “하아, 키릭스 씨 오늘 식사는 당신이 준비하는 거였습니다." "앗! 미안!" 미레일을 바라본 그가 내 머리를 놓자 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금방 다시 내 머리를 잡아 올리며 내게 사과하는 것이었다. “미안, 미안. 카론. 죽이려던 참이었지? 갑자기 미레일 불러서, 아하하." "......" 저, 적당히 해! 난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그를 쏘아봤다. 미레일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만 좀 두시죠? 동료끼리 할 짓이 아닌 것 같군요." 키릭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의 미레일과 잔뜩 노려보고 있는 나를 번갈아가며 본 뒤에 울상을 보였다. "너무해. 이거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잖아? 어째서야? 일 대 삼십을 대련이랍시고 하고 앉은 비겁하고 치졸한 놈들은 바로 저녀석들이라고." 그리고 키릭스는 사색이 된 견습기사들을 가리켰다. 뭐야 왜 갑자기 내 편을 들어주는 거야. 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내 머리칼 좀 놔주지 그래." "아? 죽기 싫은 거야?“ "적어도 네놈에겐!" 절대 지고 싶지 않아! 그가 나를 놓자 다시 엉덩방아를 찧어야했다. 그리고 그 순간 키릭스의 칼이 내 허벅지를 깊게 찔렸다.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다. "아아악!" 그 와중에도 나는 그를 노려보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특유의 여우같은 웃음을 보였다. "카론, 네 다리 나으면 다시 싸우자. 네 뜻대로." “......”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속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하얗게 질린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아, 이제 이걸로 장난은 끝이야. 모두 만족하지?“ 3 며칠 째, 나는 의무실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이마와 목과 가슴이며 어깨 모두 붕대와 약냄새 풍기는 거즈로 덮여 있었고, 부목까지 고정시킨 허벅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근육을 다친 왼쪽 발목마저 붕대에 감겨 있던 탓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중상. 하지만 키릭스의 힘일까, 아니면 창피한 난동이 소문나는 것이 싫어서일까, 아무도 그날의 일을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나는 자격 박탈은커녕 고머스 경의 문책도 없이 책을 마음껏 읽으며 한가하게 침대 신세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은 일은 견습기사가 되고 처음이었다. “......” 머릿속이 복잡했다 특히 그놈을 생각하면...... '역시 화가 나.'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뿜고는 눈을 감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미레일. 식사와 새로운 책을 든 그가 들어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며칠째 도와주고 있다. 평민을 간병해 준다고 얻는 것도 없을 텐데, 할 일이 없나 보다. "몸은 좀 어떤가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새 환자복 얻어왔어요. 갈아입혀 드릴까요?“ "혼자 할 수 있어." "그럼 책은......“ "미레일." "네?“ "뭣 때문에 내게 잘해주는 거야. 불쌍한 평민에게 베푸는 동정이야? 아니면 키릭스가 시켜서......“ "카론 씨." 미레일이 테이블에 식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푸근한 스프 향내가 풍겼다. "동정이 아니라 호의에요." “......” "물론 키릭스 씨가 부탁한 것도 있고......“ '그 녀석 이?‘ 그는 빈 그릇을 치우며 입을 열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섞인 그의 목소리. "키릭스 씨가 당신에게 심하게 굴긴 했지만, 당신의 다리까지 찌른 덕분에 당분간 누구도 당신을 건드릴 일이 없어졌잖아요." 알고 있다. 만약 키릭스가 다리를 찌르지 않은 채로 날 견습기사들 사이에 내던져 놓고 사라졌으면 난 그들에게 수모를 당했을 것이다. 내가 신청한 결투에서 패배하고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으니 그것만큼 그놈들이 바라는 상황도 없겠지. 하지만 아무도 소문내지 못할 만큼 일을 거창하게 키우고 부상까지 입혀 결투를 깔끔하게 끝마무리한 것은 키릭스의 뜻이었다. 그가 견습기사들 앞에서 이제 끝이라고 못을 박았으니까. "부탁한 적 없어." 조금 화가 나서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키릭스는 그렇게 단순하고 친절한 인간이 아니다. 난 직감할 수 있었다. 날 죽이려고 할 때도 도저히 농담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분명 모습은 훤칠한 15세의 도련님이긴 하지만 그 눈동자만은 소년이 아니다. 아니, 인간의 것이 아니다.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멈추지 못할 것 같은 무색무취의 광기, 두려웠다. "왜 기사가 되려는 거죠?“ 갑자기 미레일이 물었다. "그러는 너는." "부모님 이 원하니까요." “......” "그렇지만 기왕 기사가 될 것이라면 좀더 뛰어난 기사가 되고 싶군요." "가령?“ "해외로 나간다든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기사로서 그것은 일종의 매국이었다. 애국심도 모르는 자라고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할 텐데도 그는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했다. 착하고 온순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의지가 무척 강해 보였다. "카론 씨는 왜 기사가 되려는 거죠?“ "대답해 줄 의무는 없어." 어린애 같은 고집이지만 내 속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곤란하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정말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보여서...... 사실 여기 사람들 대부분은 기사가 된다는 것에 별로 의미 같은 것은 없어요. 자기 가문에서 원하니까 거부할 수 없는 것이고, 기사 작위가 있어야 출셋길에 오르기도 쉬우니까요." "나도 출셋길에 오르고 싶을 뿐이야." 나는 표정을 보여주기 싫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멋진 기사가 될 겁니다, 당신은." "넌 좋은 말밖에 못하는 거냐." "아니, 이건 키릭스 씨가 한 말이에요. 카론 씨는 멋진 기사가 될 거라고." "그 녀석의 칭찬 따윈 받고 싶지 않아!" 난 반사적으로 반응한 뒤에 얼굴을 붉혔다. 또 화를 참지 못한 것이 창피하다. "언젠가는 때려눕힐 거라고 전해. 이 침대 신세를 지는 건 그쪽이 될 거라고!" "하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금방 그 녀석만큼 키도 클 거고 몸도 검술도 훨씬......“ 난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라는 기분에 눈을 콱 감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 녀석은 이상하게 마음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미레일은 차분하게 병실을 정리한 뒤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내가 고개를 돌린 채 물었다. "......미레일." "네?“ "다시 그 녀석과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유치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견습기사 중 1, 2위를 다투는 미레일의 평가를 듣고 싶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대단해요. 키릭스 씨의 몸에 상처를 낸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뿐이 었잖아." "아니. 전쟁 중이었고 진검이었다면, 그리고...... 당신에게 사람을 죽일 각오가 있었다면 당신은 그때 키릭스 씨를 죽인 겁니다." 단호한 목소리. 나는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상냥한 표정. 하지만 무서운 말이다 사실 고작 15세의 우리들 중에 누구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죽음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키릭스와 미레일은 달랐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키릭스 씨는 본래 두 자루의 검을 씁니다. " “......!” "견습기사에겐 어울리지 않는 검술이라서 숨기고는 있지만, 두 자루를 들었을 때의 키릭스 씨는 정말 무섭죠. 하하." "역시 상대가 안 되는 건가." "카론 씨, 당신도 키릭스 씨도 나도 아직 세상을 모르는 풋내기일 뿐입니다. 조급할 것 없잖아요? 누가 더 강하고 훌륭해질지는 앞으로 긴 시간을 살아가며 지겹게 겨뤄볼 수 있을 거예요." "지겹게......라" "기사가 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무척기대가 되는 군요." 나는 말없이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칠 년 뒤, 미레일은 매국노라는 동료 기사들의 비난을 뒤로 한 채 이오타의기사가 되었고, 나는 샤펜투스라는 성을 하사 받고 헬스트 나이츠의 부기사단장이 되었으며 키릭스는 신성(新星)처럼 빛나다가 소멸했다. 그리고 그 칠 년에 걸쳐, 지도기사 고머스 경을 비롯해 같은 소속의 견습기사 중 나와 미레일, 키릭스를 제외한 34인은 모두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4 '또 기억나 버렸군. 우리 모두 몸도 마음도 어렸던 시절이야.' 덜컹거리는 열차의 규칙적인 소음 속에서 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에 비해 바뀐 것은 (여전히 그 녀석보다는 작지만)훌쩍 커버린 키와 지지 않을 검술과 사회적 위치, 왕실로 돌아가면 먼저 보고서를 쓰고 브리핑을 한 뒤에 일찍 집으로 돌아가서 그녀 에게 사과를...... "카론 경. 카론 경." 대체 뭐가 즐거운지 엔디미온은 긴 금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날 부르고 있었다. 호스트 주제에 기사가 되어버린 어이없는 녀석, 게다가 이 녀석을 도와주는 자들은 믿겨지질 않는 거물들이다. 내가 평민 주제에 기사가 되었을 때 다들 어이없다고 말했는데, 엔디미온 경을 보고 있으면 난 꽤나 평범한 것 같다. 그러니까 검술 수련만 좀 하면 좋을 텐데. 하아. "뭔가." "몰슨이 그 아이를 잡았을 때, 제가 부른 분들이 오실 줄 알고 칼을 버렸던 건가요?“ "물론이다 거대한 힘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만약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칼을 버리셨을 건가요." 항상 엉뚱한 질문이다. 엔디미온을 보고 있으면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사회를 겪어오며 그 천진난만함이 얼마나 지키기 힘든 것인지도 잘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확실히 희귀종이야. "모르겠군." 난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창에 반사된 잔상을 통해 나는 엔디미온과 말싸움을 하는 키스를 넌지시 바라왔다. 그 미소 떤 얼굴에 난 본능적으로 눈썹을 움찔했다. ‘......십오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화가 나는군.'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나를 향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겁니까아?“ "별로." 얼빠진 웃음의 키스는 '창피하게 옛날 생각 같은 거 하지 말아요' 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속마음은 항상 들키는 것 같다. 키스에게나 키릭스에게나. '키릭스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데도 미레일의 말대로, 우리는 여전히 '지겹게' 겨루고 있는 중일까? 그 끝이 어딜지는 모를 일이지만 단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비극이 아니기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부록1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제멋대로 프로파일 Entry#4 이자벨 크리스탄센(Isabelle Kristansen) 키 : 170대로 큰 편. 여성용 정장이 참 잘 어울리는 몸매다. 눈 : 빈틈이 없어 보인다는 것은 이런 것, 상냥한 웃음과 안경으로 숨기고는 있지만 차가운 청색 눈동자가 좀 무섭다. 머리 : 진한 금발이지만 밖에 나갈 때는 자주 은발의 가발을 쓰고 있다. 외모 : 긴 머리에 이목구비가 또렷하지만 한편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현모양처의 전형과는 우주의 끝에서 끝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불세출의 캐리어 우먼 스타일. 범접하기 힘든 이지적인 우수가 온몸에 흐르지만 그녀와 적대적인사람들은 '노처녀의 오오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장이 아닌 모습은 상상도 못하며 일말의 흐트러짐도 용납 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이미지가 풍겨온다. '천재' 라는 푯말을 목에 걸고 다녀도 다들 이해해 줄 것 같이 생겼다. 인트라 무로스에서도 그녀는 숭배 받는 여신이며 감히 거부할 수 없는 리더다. 하지만 타고 난 쿨한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웃는 연습도 엄청나게 했고, 남몰래 로맨스 소설도 열렬히 애독하는 귀여운 면도 있다. 1. 안녕하세요?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환하게 웃고 있지만 시선은 시계를 보고 있다. 빨리 끝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2. 인트라 무로스에서는 무슨 일을 담당하시죠? 별 거 안 해요. 유능한 부하들이 모두 해주니까요. (라고 말하지만 눈빛은 이미 '내가 없으면 망해' 였다. ) 3. 와인을 참 좋아하시던데요, 특별히 어떤 것을 좋아하시죠? 고된 일을 마치고 혼자 맛보는 와인이라면 어떤 것이든 좋군요. (물론 '하지만 싸구려는 싫어!' 라는 표정이었다.) 4. 그런데 결혼은 안 해요? 이런, 저는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힘이 들어간 눈빛은 '그딴 질문, 한번만 더 해봐' 였다.) 5. 미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후후. 바뀌지 않는 남자, 귀엽고 솔직하고 고집스럽고 항상 노력하는...... 좀 둔감하긴 하지만. (어? 처음으로 대사와 눈빛이 일치했다.) 부하로 두고 싶은 생각은? 그건 싫군요. 냉정하게 부하로 둘 수 없을 테니까 다음 질문 부탁해요. 6. 어려서부터 수재였잖아요? 그 악명 높은 팔마시온도 수석으로 졸업했고, 사실 남들은 상상도 못할 인생이잖아요. 스스로도 특별하다고 생각하나요? 전혀요. (단호하게 말했다. ) 누구나 남들은 상상도 못할 인생을 살고 있어요. 나도 그중 하나일 뿐이고.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움찔) 7. 이번 권을 보면 인트라 무로스의 '묘한 움직임' 이 살짝 언급 되는데, 그것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노코멘트 (아마 이후에 밝혀지지 않을까.) 8. 항상 정장을 입고 다니시는데요. 드레스를 입고 싶은 생각은? 그런 건 제겐 어울리지 않아요. (실은 그녀는 자기 옷장에 수백 벌의 드레스가 있다고 한다. 항상 바라보기만 하는 것일까.) 9. 미온이 프러포즈를 한다면? 전 가능한 일만 상상합니다. (말 돌리시긴) 10. 노래 잘 불러요? 어머. 벌써 가야할 시간이 되었네요! (얼레?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제14화 작전명! 접대 최전선! 11 그야말로 예고도 없이 연회장에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나를 비롯한 모두는 눈사태를 만난 산악인의 심정으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누구는 ‘죽고 싶지 않아!’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또 누구는 시한폭탄을 발견한 것처럼 천천히 뒤로 물러서서 벽에 바싹 붙었는가 하면, 심지어는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는 칼집으로 손을 옮기는 자들마저 있었다. 황제도 황제지만 일단 묵묵하게 황제 옆에 서 있는 진청룡 라이오라가 무지하게 신경 쓰여, 등짝에 ‘ 접근 금지. 목숨 보장 못함’ 이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아. ‘와, 완전 재앙이로군.’ 내 머릿속에도 사람 간을 파먹어, 사람 간을 파먹어, 사람 간을 파먹어, 라는 무시무시한 에코가 빙글빙글 캉캉 춤을 추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신체 일부를 황제의 맛있는 디저트로 기증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접대고 뭐고 당장 황제의 공격 범위밖으로 도주하고 싶다고! 그러나 세상일이 언제 뜻대로 되는 적이 있던가? ‘큭! 왕자님이!’ 하필이면 마라넬로 황제의 타깃은 왕자님! 파먹을 거면 쇼메 간이나 쳐드시란 말이다! 나는 녹슨 칼 한 자루 꼬나들고 악룡에게 뛰어드는 기분이 되어 왕자님에게 향했다. 하지만 곧 싸늘한 빛을 발하는 라이오라의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관통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차가운 칼날에 찔린 기분이다. 엄청난 위압감이 나를 막아섰다. 무형의 족쇄가 두 다리를 얽어맸다. 그리고 그 순간 황제는 페르난데스 왕자님 앞으로 다가섰다. 곱슬머리의 왕자님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황제를 한동안 말없이 올려봤고, 황제 역시 그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고, 우리들 모두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먼저 입을 연 쪽은 왕자님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왕자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 라고 합니다.” 정중한 미소, 얄미울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는 예법, 당당한 눈빛, 올해로 고작 열세 살이 되는 자그마한 왕자님의 어디에 그런 기죽지 않는 위엄이 숨어 있는 것인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분명 황제가 원했던 모습은 겁에 질려 몸을 떨거나 아니면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분노에 찬 얼굴이리라. 하지만 왕자님은 휘둘리지 않았다. 솔직히 나였다면 도저히 저럴 배짱이 없었을 것이다. 아아, 왕자님 나이스. 소인은 탄복했사옵니다. “이토록 귀여운 소년일 줄은 몰랐고. 마음에 드오.” 외모가 마음에 든다는 것인지 태도가 그렇다는 것인지(전자라면 아주 곤란하지만)황제는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죽이려고 한 주제에 저 웃음의 의미는 뭐야? ‘흥! 잘도 살아 았구나!“라고 협박을 늘어놓는 것보다 저러는 것이 훨씬 무섭다고. 한편 왕자님 곁에 다가온 우리의 임금님은...... “아이고. 이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제 자식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핫.” 시집 가냐! 아들을 팔아 치울 생각이야? 눈매가 마치 맹수 같은 백발의 마라넬로 황제는 임금님의 너스레에 엷은 웃음으로 응답하며 입을 열었다. “본인도 이 소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소이다.” “어이쿠, 이거 말씀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만 하십시오.” 손바닥을 비벼대는 저 모습은 그야말로 악덕 장사치의 모범!나는 가끔......왕자님은 다른 사람의 자식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 될 때가 있다. 황제는 곧장 회답했다. “그럼 우호의 의미로서 이 소년을 내 나라로 보내줄 수 있겠소? 물론 교육 차원에서 말이오.” 볼모! 평화 회담에서 할 얘기냐! 너무도 태연하고 뻔뻔스럽게 튀어나온 황제의 요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하의 헤죽거리는 표정이 굳어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아바마마.” 왕자님은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것은 분명 외교다. 즉, 전하가 결정할 일이지 왕자님 자신에게는 결정권이 없는 것이다. 왕국의 안전을 이유로 아들을 팔 수가 있는가? 하지만 거절한다면 세계 최강의 지배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꼴이 된다. 이오타의 왕 빌헬름조차도 굴욕을 삼키며 황제에게 쇼메를 보내지 않았던가. “자아, 어서 결정해 주시겠소?” 결정이라니!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넘기겠다는 말을 그렇게도 듣고 싶은 거냐! 마라넬로 황제는 마치 당연한 것을 넘겨받는다는 얼굴로 전하를 재촉했다. 한참 동안 황제와 왕자님을 번갈아 보던 임금님은 결심이 선 듯 당찬 눈매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키시온에 가게 되면 호화롭게 살 수 있겠죠?” “물론이오. 당신은 경험해 본 적도 없는 호사를 약속하겠소.” “미녀들도 많겠죠?” “......그렇소만.” “흐음! 그렇다면 말입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거야? “아들 녀석보다 절 데려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으이구! 순간 전력을 다해 임금님에게 태클을 걸어 넘어트린 뒤에 우어어어! 죽어라! 라고 외치며 마구 두들겨 주고 싶었다. 우리 임금님에게는 개념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걸까. 국왕이 어떻게 볼모로 잡혀간다는거야! 그런일이 가능할 리가...... 그러니깐 절대로 불가능한...... 아? 나는 조금씩 전하의 속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깐 절대 아들을 보내지 않겠다는 의미요?” “아하하하. 그렇게 들렸습니까?” 웃는 낯으로 만두를 닮은 머리를 긁적거리는 전하를 황제는 말없이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 국왕이 볼모로 잡혀가는 경우 따위는 없다. 그건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엉뚱한 말은 자신의 목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왕자님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순금상 하나에도 벌벌 떨던 전하에게 그런 용기가 있었던가? “아바마마, 제가 가겠습니다!” “괘, 괜찮다니까. 아하하.” 전하는 자신을 만류하는 왕자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을 리가 있을까? 상대는 세계의 사분의 일을 지배하고 있고 백만이 넘는 대군을 움직이는 절대자다. 그런 그의 말 한마디면 자신은 물론 이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황제는 무서운 눈빛으로 전하를 바라봤지만 전하는 통통한 두볼에 굳은 미소를 보이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황제가 곧 실웃음을 보였다. “참으로 형편없는 소국의 왕이오. 정치를 모르는군.” “아바마마를 욕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의연하던 왕자님의 눈가에 처음으로 숨길 수 없는 격한 분노가 스몄다.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솔직하고 또 위험했다. 한동안 도리어 즐거운 듯 그 표정을 지켜보던 황제가 말했다. “왕으로서는 실격이지만 아버지로서는 더없이 훌륭하오. 나와는 정반대로구려.” 그리고 마라넬로 황제는 한쪽 팔로 가슴을 감싸는 시늉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자간의 정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소. 심란케 하여 미안하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먼저 사과를 했던 것이다. 그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대신......” 엥? 대신? 아이히만 대공만큼이나 키가 큰 황제가 몸을 숙이더니 전하의 쉭사에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전하의 얼굴에 단박에 화색이 돌았다. “아아! 그쯤이야 어렵지 않습니다!” 뭐, 뭐가 어렵지 않다는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한 건데? “후후, 그럼 약속한 것으로 알겠소.”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다.” 나도 왕자님도 장내의 모든 사람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지금 무슨 ‘거래’를 한 거지? 왕자님을 포기해도 좋은 제안이라면 대체 뭐냐고? 붉은 와인으로 목을 축인 백발의 마라넬로 황제는 왕자님을 향해 의외의 말을 던졌다. “부디 그 모습 그대로 왕의 자리에 오르길 기대하오. 그래야 꺾을만한 보람이 있으니까.” 이미 노년에 접어든 마라넬로 황제가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살아 있을 수나 있을까? 하지만 그는 마치 스스로 불사(不死)를 자신하는 강인한 눈빛으로 왕자님을 내려 봤고 왕자님도 피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쯤 쇼메는 기묘한 패배감에 젖어 있으리라. 대놓고 이를 드러내는 자신을 완전히 애송이 취급하는 황제가 이상하게도 약소국의 작은 소년은 스스로 인정했으니까. 용건을 마친 황제가 자리를 뜨려던 차에 또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경배책임자인 카론 경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물론 둘이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겠지만 황제는 단번에 카론 경의 정체를 알아챘다. 확실히 카론 경 주변에는 서늘한 위광 같은 것이 있어 보이니까 말이다. “자네가 바로 그 용맹하다는 은의 기사인가.” “허명(虛名)일뿐입니다.” 청결한 제복의 매무새가 유달리 도드라지는 카론 경은 그 특유의 금욕적인 성격대로 무례하지도 옹졸하지도 않은 간결한 대답을 했다. “아니지. 잔인한 암살자로부터 자신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어찌 기사의 귀감이 아니겠다. 안 그런가, 라이오라군?” 뭐야. 카론 경을 일부러 자극하려는 거야? 하지만 황제의 악취미적인 말에도 카론 경은 도도한 눈매로 슬쩍 라이오라를 바라볼 뿐 별 다른 말이 없었다. 하긴, 저 정도 도발에 표정이 흐트러질 양반이 아니지. 그런데 다음 공격에 결국 얼음장 같은 표정에도 금이 가고 말았다. “오늘 밤 내 침소로 와주겠나?” 으아아악! 거두절미하고 수청을 들라는 거야? 직구다! 스트레이트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저런 말을 꺼내다니! 허허, 솔직하셔서 보기 좋네요,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해! 황제, 망측한 인간아! 그게 부인 있는 남의 나라 기사에게 할 소리야? 하지만 카론 경 역시 언제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일전 라이오라씨와 검을 마주한 것을 책망하시려는 의도라면 이 자리에서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도 심기가 풀맂 않으신다면 제 기사 작위를 영구히 버리는 것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진심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는 무서운 응수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또박또박 나왔다. 그것은 기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죄인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보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과인은 기사로서의 자네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네. 이런 약소국 기사의 작위 따위가 황제인 내게 무슨 가치가 있겠나. 내가 자네의 가치를 인정하는 부분은 다른 쪽이네만.” 기사로서의 카론 경에게는 어떤 가치가 없다. 물론 마키시온 제국이라면 카론 경 수준의 실력을 가진 기사가 남아돌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누구보다도 기사도에 충실한 카론 경에게 그것은 정말 지독한 모욕이었다. 사람들은 기사 중의 기사라는 카론 경이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전하와 왕자님을 바라본 뒤에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쌀쌀맞은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기사의 자부심을 접으면서 스스로 굴욕을 삼켰다. 나는 황급히 아이히만 대공을 바라봤다. 하지만 대공은 이곳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평화 회담만 성사된다면 카론 경을 황제의 손에 넘기는 것쯤 손해 볼 일도 아니라는 의미인가? 본래 냉혹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줄은 몰랐어! “자, 잠깐만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는 나도 모르게 황제 앞에 끼어들었다. 황제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 “엔디미온 군이라고 했던가. 감히 내 말을 끊을 정도로 중대한 용건이길 바라네.” 카론 경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서렸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울컥하는 마음에 일단 끼어들긴 했는데......내가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말릴 방법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아니, 하나 있긴 하지만......그런 말이지. “제, 제가 가겠습니다!” 내, 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이봐, 미온 군? 지금 자네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나 있어? 농담이라도 ‘에헤헤, 없었던 얘기로 해주세용’ 이라고는 둘러댈 수가 없는 상대라고! 내 목숨을 건 희생에 황제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뭐 그럼 같이 오게나.” “......!” 자, 자충수다! 병살타야! 호색한의 기본 마인드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것을 깜빡하다니! 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초보적인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 아니 소인의 뜻은 그게 아니라......” 망했다. 자폭 스위치를 힘차게 눌러버린 대폭발이 마음속에서 버섯구름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폐하 저를 맛보시면 다른 남자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으실 겁니다.’ 라고 교태를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닳고 닳진 못했어. 아니, 일단 경험도 없고. 으아아!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아! 대체 일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부디 용건이 있으시다면 제 선에 끝내주십시오.” 그때 카론 경이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난질도 정도껏 해!“ 라고 외치는 눈빛이다. 나는 아차 싶었다. 카론 경이 워낙 내색이 없어서 그렇지, 한번 화가 나면 키스 경이 뜯어 말려도 검을 뽑고야 마는 말고집, 황소 고집, 고래심줄이다. 설령 상대가 세계 최강의 지배자라고 하더라도. 그 눈과 마주친 황제의 입꼬리가 무섭게 올라갔다. “정말이지 이 소국에는 처세를 모르는 건방진 애송이들이 너무 많군.” 으으. 황제 화났다. 이제 ‘이 나라를 지도에서 지워버려!“ 라고 명령할 차례인가. 하지만 황제는 다른 말을 꺼냈다. “내가 태어나서 하루에 두 번이나 거절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도록 해라.” 설마 그냥 놔주겠다는 건가. 그제야 아이히만 대공이 마라넬로 황제에게 다가왔다. “어떻소. 재미있는 나라 아니오?” “자네가 아직까지도 이런 작은 나라에 붙어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네.” “본래 가장 귀중한 향수는 가장 작은 병에 들어 있는 법이오.” “후후. 악마의 피마저 짜낸다는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가 그런 낭만주의자일 줄을 몰랐구만.” “이 나이 먹고 낭만마저 없으면 죽어야지. 안 그렇소?” 대공은 빈틈없는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면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우는 것이었다. 대공과 황제가 이토록 가까운 사이라는 충격은 둘째 치고, 그럼 저토록 태연한 것은 황제가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의미? 그럼 그렇다고 말 좀 해주세요! 난 죽을......아니, 잃을 각오였단 말이얏! “라이오라 군. 먼저 갈테니 자네는 좀 더 즐기다 오게나.” “예? 하지만.......” “괜찮아. 홀로 강한 자는 결국 외로움에 굴복할 수밖에 없네. 사람과 섞이는 법도 배워두게.” 황제는 의외로 마치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인자한 말을 남기며 프론티어 뱅가드들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아니, 그전에 발걸음을 멈추며 날 바라봤다. “그런데 엔디미온 군. 자네,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난 영업 스마일을 방긋 보이며 대답했다. “황공하오나, 저 역시 처세를 모르는 낭만주의자라서 청을 받들기 곤란할 것 같사옵니다.” “후후. 입담이 제법이군.” 황제는 마치 강자의 자비 같은 웃음을 보이며 사라졌다. 아아, 위험해. 아이히만 대공을 좀더 도덕적으로 비틀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야. 딱 잘라 악당이라고 하기도 좀 묘하지만 왕자님을 암살하려 한 것만으로도 호감이 가질 않는다고. 게다가 취향의 문제도 엄청 위험천만하고! 쇼메가 황제와 대공 사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했지? 오늘 만큼은 쇼메 왕자를 동정해주고 싶었다. 12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앗따. 내가 무슨 접대전용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도 아니고, 이런 일을 당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지쳐버려서 울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허리를 꺾으며 중얼거렸다. ‘어흐윽. 무지 힘들어.’ 대공의 명령대로 목숨 걸고 접대하라니깐 하기는 하지만, 이대로라면 오늘 중으로 목이 날아가든가 순결이 날아가든가...... 하아, 쉬고 싶어라. 하지만 저쪽에서 무펴정한 얼굴로 경비를 하고 있는 카론 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푸념도 사치 같다. 아니, 확실히 비정상은 저쪽이지만. 방금 전 그런 위기를 겪어놓고도 ‘몰라. 난 일이나 할래’ 라는 표정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무척이나 경이롭다. 예전 키스가 ‘카론 경은 죽기 전에도 그걸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하기 전까지는 못 죽을 사람이랍니다아’ 라는 말이 농담만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한편 나는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이 연회에서 뭔가 너무나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이질감을 발견했다. 아니, 발견하고 자시고도 없이 그 사람 주변에는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걸? 그는 바로 황제가 남겨놓은 진청룡 라이오라 란다마이저였다. ‘으음. 솔직히 나도 가까이 가기 무서워.’ 나는 조금 찡그린 표정으로 서 있는 그를 바라봤다. (같은 금발인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순도 높은 금을 실로 뽑아낸 것 같은 머리칼에 그와 똑같은 황금빛 눈동자, 키도 크고 몸집도 사내다워 그야말로 ‘이국의 보석’이다. 만약 그가 아신만 아니었다면 당장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무형의 벽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근처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고 함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모른 체 모두 등을 돌리고 있다. 하긴 솔직히 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연회장에 있는 사람 모두의 생명력을 빨아들일 수 있는 ‘괴물’ 근처에 가고 싶을까. 공포심이라는 것은 무섭고 집요한 것이라서, 라이오라 씨가 밑도 끝도 없이 그런 흉악한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이래서야 황제가 말한 ‘사람과 섞이는 법’은 애당초 시작도 못할 판국이었다. ‘으음. 나라도 말상대가 되어줄까?’ 확실히 왕자님을 죽이려고 들었고(명령 때문이긴 하지만)카론 경의 눈에도 상처를 준 사람이라서 호감이 가지는 않았지만-그것과는 별개로 파티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는 모습은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뭐, 내 임무가 접대라서 혼자 있는 사람을 못 본 척하는 것은 업무상 죄악이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무서워.’ 키스 경과 무섭게 싸우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키스의 말마따나 그가 전력을 다했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모르긴 해도 나는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생명의 전부를 빼앗겨 버렸으리라. 나도 인간이라서 그런 상상까지 해버리니까 그를 향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람들과 섞여 보라는 황제의 조언을 실천해 보려는 것일까? 하지만 모두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음식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어차피 몇 번 본적도 없지만)의외의 모습이었다. 완전 무감정한 사신(死神)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는 그 모습에 용기를 내서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어. 기억하시는지 모르시겠지만...... 우악!"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 나온 이유는 그가 집어든 살구 때문이었다. 꿀과 향초로 마리네이드 되어 있는 살구였는데 '앗! 저걸 손으로 집으면!' 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그 주황색의 과실이 파스슥 소리를 내며 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은 마치 '살구의 인생' 이 아주 빨리 흘러가버린 것 같았다. 새, 생명력 빼앗아 버린 거야? 그런 거야? “......너는?” “아하하하. 도, 독특한 방법으로 식사를 하시네요.” “식사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이미 죽은 육체니까.” 여, 역시 말 걸지 않을 걸 그랬나. 그는 방금 전까지 살구였던 회색 재를 모래처럼 흘리며 날 바라봤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무덤속으로 제 발로 들어갔네' 라는 표정들이다. 아아, 또 상상해 버렀다. 내가 저 살구 꼴이 되어 버린 끔찍한 상황을. 라이오라 씨가 잠시 날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넌 그때 카론과 함께 있던......” 그는 왕자님을 죽이려 왔을 때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몸을 숙이며 답했다.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여자가 아니었군.” “......” 괘, 괜찮아. 화, 안 나.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 걸. “저, 이래봬도 기사네요. 못 믿으시겠지만.” 결국 콤플렉스가 발동한 나머지 삐죽거리며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항상 날 소개할 때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라든가 '정말 거짓말이 아닙니다만'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하는 것일까. 칼을 차고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좀더 나를 소개하기가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기사?” “네. 비록 말 타고 칼 쓸 일은 별로 없지만. 헤헤.” “다행이군.” “뭐가요?” “그때 네가 기사라는 것을 알았다면 죽였을 거다. 난 왕자의 시녀인 줄 알았거든.” “여, 여자로 착각 당해 참으로 다행이네요, 아하하하.”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아이고. 전 일찍 잠자리에 드는 체질이라서!’ 라고 둘러대고 연회장 밖으로 도주해 버리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누르며 애써 반짝반짝 웃어 보였다. 내 스스로 내 용기가 가상할 따름이다. “그럼 너는 폐하를 좋아하지 않겠구나.” 라이오라 씨는 회색 가루에 엉켜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아무튼 황제의 심복인 이 사람에게 본심을 말한다면 무척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것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 싫어합니다. 좋아할 수가 없잖아요.” 라이오라 씨는 적어도 옹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가. 자신의 주군을 잃을 뻔한 시녀...... 아니, 기사로서는 당연한 감정일지도.” 그는 내 긴 금발을 힐끗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의외였다. 약자의 심정 같은 것은 관심도 없을 사람인 줄 알았는데. “본래 적이 많은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페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예번부터 꺼내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그는 흘러가듯이 말했다. 그가 금빛의 눈동자를 살짝 감으며 말했다. “사실 폐하는 너희 왕자를 죽이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으셨으니까.” “예?” 난 그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하, 하지만 분명 죽이려고 당신을 보내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시험해보라고 하셨던 것뿐이야. 왕자의 마음이 진정한 용기인지 단순한 망상인지. 너희 왕자가 내게 겁을 먹고 목숨을 구걸했다면 폐하는 실망하셨겠지. 하지만 그것뿐이야 검을 겨눠 그 속마음을 알아보고 돌아오라고 하셨지.” “그런데도 카론 경을 죽을 정도로 몰아붙였어요?” “그렇게 보였나? 내가 정말 죽일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오래 끌 이유는 없었을 거다.” 나는 괜히 그에게 진청룡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럴 수가......” 황제 정도 되는 자가 아신까지 보내서 약소국의 왕자 하나를 죽이려고 한 짓은 사실 너무 치졸해서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아니 그보다 그 이후에 왕자님을 건드린 적이 없다는 점이 더 의아했지만)당사자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보다 그렇게 엄청난 싸움이 별로 죽일 생각도 없는 정도라면, 대체 이 사람의 힘은 어느 정도라는 것일까. 짐작도 안 갈 노릇이었다. “물론 그것 자체도 제법 고약한 짓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어린아이를 개인적인 질투로 죽일 정도로 그롯이 작은 분은 아니야. 그 점만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라 씨가 진짜 암살 명령을 받았을 때를 상상하니까 머리가 다 아찔했다. 아아, 봐주면서 싸워줘서 다행입니다. 응? 그건 기사에 대한 모욕? 그런 거 몰라.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해주시는 거죠?” 카른 경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라이오라 씨 또한 전혀 수다스러운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자가 어째서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사실을 토로하는 것일까.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때였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날 밀치며 거구의 사내가 끼어들었다. 아니 , 정확하게 말하면 라이오라 씨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그 험악한 표정을 보건대 최소한 안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니리라. “진청룡!” 고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리자 연회장의 모든 시선은 단번에 우리들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저 제복은 분명 키르케 님이 지휘하는 콘스탄트 ‘임모탈’ 제7무장전투여단! 말릴 사이도 없이 품속에 숨겨놓은 권총을 꺼낸 그는 라이오라 씨의 얼굴에 총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우아악! 난데없이 총이라니! 또 엄청 위험한 상황이잖아! “무슨 용건이냐.” 라이오라 씨는 눈매를 조금 찡그리긴 했지만 도리어 귀찮다는 목소리로 되묻는 것이었다. 총을 들이댔는데 어째서 살려달라고 빌지 않지? 라는 인간의 상식에서 이 사람은 철저한 예외였다. “무슨 용건?” 그의 입술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내 형을 죽인 주제에 무슨 용건? 뻔뻔한 자식!”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믿을 만한 정보통이 내게 말해주더군. 형을 죽인 놈이 바로 너라고!” 믿을 만한 정보통이라고? “으음. 형 이라......”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라이오라 씨가 그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전혀 모르겠군. 그러니까 내가 너의 형을 언제 죽였는지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겠나.” 아하하. 이제야 라이오라 씨도 황제가 말한 ‘사람들과 섞이는 법’ 을 터득했구나...... 라고 말할 수가 있겠냐! 으윽! 라이오라 씨! 그런 식으로 말하면 상대를 자극한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총을 들이댄 여단 장교는 방아쇠를 당기기 일보 직전까지 와버렸다. “크윽! 네놈이 날 무시해! 죽여 버리겠다, 진청룡!” 이미 죽어 있는 분인뎁쇼, 라는 농담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이건 커다란 문제였다. 아무리 최정예 여단 소속이라고 해도 아신을 상대로 승리할 수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누가 싸워서 이긴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험악한 외교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것도 평화 회담을 앞두고! ‘전쟁이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다' 는 케케묵은 격언을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이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난 힘들게 웃어 보이며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만 같은 장교 앞을 막아섰다. 접대로 얼룩진 십대를 보냈건만 접대가 이토록 위험천만한 것인지 오늘 알았다. “저어 일단 고정하시고......” “넌 뭐야! 시녀 주제에!” “으이구! 시녀 아니라니까!” 아차! 내가 버럭 화를 내면 어쩌자는 거야! 그때 나타난 구원의 천사는 역시 경호 책임자 카론 경이었다. 아신 중 최강이라는 진청룡 라이오라 씨와 전쟁의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임모탈' 전투여단의 장교 앞에서도 카론 경은 여전히 포커 페이스였다. “이 이상의 소란은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총을 내려 주십시오.” “은의 기사......” 장교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네 녀석도 진청룡에게 원한이 있는 걸로 아는데, 말릴 생각이냐? 자존심도 없나?” “적어도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판단력은 있습니다.” “큭!” 카론 경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 태도로 그를 바라봤고 그는 겨우겨우 분을 참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너를 같은 무인으로 존중하고 있다. 분하지만 너의 얼굴을 봐서 참아주마.” ‘다, 다행이다.’ 역시 카론 경의 명성은 글로벌 하구나. 유혈 충돌 없이 끝나서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는 찰나, 라이오라 씨가 그의 등에 말을 던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죽었다면 죽일 이유가 있어서 죽였을 것이다. 싸움에서 패배해 죽은 것을 원한으로 삼는 소인배가 함부로 무인을 입에 올리는 건가?” “뭐라고!” 맙소사! 머리끝까지 이성을 잃은 장교가 몸을 돌린 것은 순간이었다. 그와 함께 연회장을 가득 뒤덮는 총성이 울렸고 라이오라 씨의 몸에서 시뻘건 핏물이 터졌다. “초, 총을 쐈어! 가슴을 뚫었다고!” 사람들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고 카론 경은 미간을 찡그리며 칼집으로 손을 옮겼다. 총을 쓴 장교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리는 듯이 들고 있는 총을 떨어트릴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라이오라 씨는 쓰러지기는커녕 미동조차 없었다. 예전 키스 경과의 싸움을 지켜본 적이 있는 나는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아깝군. 이번에 새로 맞춘 제복이었는데......” 라이오라 씨가 총알구멍이 들린 자신의 셔츠를 바라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는 이미 멈춰 있었다. 사람들은 또 다시 경악했다. 말로만 듣던 불사의 기적을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 장교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괴 , 괴물 같은 자식!” “괴물 같은 것이 아니라 실은 괴물이지. 내가 봐도 정이 안가는 몸이야.” 라이오라 씨가 차갑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그 금빛 눈동자를 천천히 들어 올려 자신을 쓴 장교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상대의 생명력을 단번에 빼앗을 수 있는 그의 손에 자색의 빛 무리가 서서히 휘감기기 시작했다. 역시 그는 자신에게 총을 쓴 사람을 얌전히 돌려보낼 정도로 인자한 사람이 아니었다. “순순히 죽어줄 것 같으냐!” 그 즉시, 연회장에 있던 콘스탄트의 무장전투여단 소속 군인들이 칼과 총을 뽑아들고 몰려들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콘스탄트의 오합지졸들이! 감히 마키시온 제국에 총을 들이대고도 살아남을 줄 알아?” 라이오라 씨 뒤로 프론티어 뱅가드들 역시 검을 뽑으며 일렬로 섰다. 상황은 말 그대로 칼부림 일보직전, 순식간에 걷잡을수 없이 불이 붙었다. 평소부터 적대적이던 두 강대국이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카론 경조차도 말릴 길이 없었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저 멀리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 대치 상황을 지켜보는 여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이자벨 님?’ 평소와 달리 검은 가발을 쓰고 있어서 몰라볼 뻔했지만 와인잔을 들고 있는 은테 안경의 여성은 분명 이자벨 크리스탄센 님이었다. 그리고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저 미소의 의미는...... '설마 이자벨 님이 뒷조종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형을 죽인 자를 알려줬다는 믿을 만한 정보통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때 내 시선을 알아챈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깥쪽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빠져나오라는 의미다. 난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이런. 제 부하가 실례를 저질렀나 보군요, 진청룡 씨.” 고혹적이지만 위험하게 들리는 허스키 보이스. 제복을 입은 큰 키의 여성이 나타나자 콘스탄트 소속 군인들이 일시에 부동자세를 취했고 험악해지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두려움에 신음소리를 내는 자도 있었다. 라이오라 씨가 말했다. “키르케 밀러스. 오랜만이오.” “라이오라 씨. 당신은 변한 게 없군요. 하긴 시체니까.” 키르케 님의 입가에 무서운 미소가 드러났다. 라이오라 씨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섬뜩한 생광이 맺혀 있었다. 노, 농담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라이오라 씨보다도 몇 백 배는 더 위험해. 상대가 진청룡이라고 물러날 리가 없다고! 하지만 키르케 넘은 슬쩍 이자벨 님을 바라본 뒤에 나직하게 말했다. “싸움에서 물러나는 것은 내 성격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의 손에 놀아나는 것은 더욱 질색이라서 말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거요.” 라이오라 씨의 말에 키르케 님은 이 소동의 원인이 되어 버린 사내를 바라봤다. 방금까지도 난동을 피우던 거구의 장교가 그녀 앞에서는 미동조차 없었다. 키르케 님이 물었다. “각오하고 한 행동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장교의 그림자가 칼날처럼 솟구쳐 올랐고 그 즉시 잘려나간 팔이 총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흐으읍!” 그는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삼켰고 시뻘건 피가 엄청난 기세로 카펫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키르케 님은 경고 섞인 눈웃음으로 라이오라 씨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정도로 제 부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라이오라 씨.” 그녀의 붉은 입술에 퍼지는 광기어린 웃음의 의미는 ‘이래도 물러나지 않겠다면 황제고 뭐고 다 쓸어버리겠어’ 였다. 그 모습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어쩌면 그것이 이 상황에서 가장 적은 손실로 큰 난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어, 어떻게 부하의 팔을 주저 없이 잘라버릴 수가 있어! ‘그녀다운 해결방법’ 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칭찬일지 욕일지 구분이 안 간다. 라이오라 씨가 바닥에 떨어진 팔 조각을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싸움을 피하려는 것인지 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하지만 내일은 평화 회담이고 하니 그 사과, 접수하도록 하지요.” “후후. 현명한 판단이에요, 라이오라 씨.” 키르케 님의 부하들은 물론 프론티어 뱅가드들마저도 그녀의 기백에 기가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선혈의 마녀라는 별명은 정말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론 경이 심란한 기색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중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공연한 피로군요.” 카, 카론 경. 제발 키르케님 성질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호오. 당신이 바로 그 명성이 자자한 카론 샤펜투스 경이로군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 ‘누가 끼어들어도 좋다고 했지?’ 라면서 그림자의 지옥 속으로 처넣어 버렸을 키르케 님이었지만, 놀랍게도 카론 경에게는 꽤나 너그러웠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검은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뺨에 손을 댔다. “정말 남자도 반할만한 미남이로군요. 나 역시 기사로서의 당신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생기는 걸요?” 그러나 카론 경은 ‘이 손 치워’ 라는 쌀쌀맞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기, 긴장감 때문에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아. 그녀는 짓궂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후. 미온 군도 조금은 분하겠구나.” 벼, 별로 그렇지도 않네요! “하지만 기억해 두세요, 고귀한 은의 기사님. 이 세상 모든 유혈은 다 공연한 것이랍니다. 설령 그것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경고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속삭인 키르케 넘은 라이오라 씨를 향해 ‘그럼 전쟁터에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겠어요’ 라는 무시무시한 인사를 남긴 뒤에 부하들과 함께 사라졌다. 이 순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은 알테어 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이리라. 그분마저 나타났다면 키르케 님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릴 테고, 그럼 그 이후에 무슨 악몽이 벌어지게 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쉰 뒤에 살짝 이자벨 님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이 평화 회담 이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13 곱게 지나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말 이번 연회는 매시간 명이 줄어드는 것만 같다. ‘헤요오오. 설마 또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떠난 연회의 끝자락에서야 나는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남은 음식들로 대충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다. 카론 경도 슬슬 빠져도 괜찮을 텐데, 역시 철두철미한 성격답게 마지막까지 연회장에 남아 있었다. 나는 새하얀 기둥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배고프면 뭐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음식도 엄청 많이 남아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신 차 한잔 부탁해도 될까. 되도록 진하게.”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애당초 키스 경처럼 삼백육십오일 활력이 넘쳐흐르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카론 경, 정말 괜찮으세요?” 카론 경의 눈가에 '지쳤습니다' 신호가 깜빡거리는 것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일주일도 넘게 격무에 시달리고 오늘 같은 일까지 당했으니 지금 눈 상태도 좋을 리가 없다. 나였다면 ‘으아악! 망할 놈의 평화회담! 운석이나 떨어져 버리라지!’ 라고 소리치며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어 버렸을 것이다. 카론 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마치 불꽃이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쉬고 싶군.” 이 사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가끔 무패의 검술사 카론 경을 쓰러트릴 유일한 적은 과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금발의 사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라이오라 씨.” 그를 바라보는 카론 경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못했다. 사자를 닮은 샛노란 눈동자로 카론 경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프론티어 뱅가드로 들어오라는 제안은 아직도 거절인가? 페하도 자네라면 서운하지 않은 대우를 해줄 것이 분명한데......” 어? 카론 경이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니! 솔직히 마키시온 제국, 그것도 프론티어 뱅가드의 기사라면 베르스의 기사에 비해서는 하늘과 땅, 귀족과 천민, 쥐며느리와 드래곤의 차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베르스 사람으로서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마 세상 어떤 기사라도 죽었다 깨어나도 거절하지 못할 달콤한 제안일 것이다. 단 한 명, 카론 경만 제외하면. “관심 끊어 주시죠.” 카론 경은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은 괜찮은가?” 자기가 그렇게 만든 주제에 라이오라 씨가 걱정을 해주자 카론 경은 ‘흥! 관심 끊으라니까!’ 라는 표정으로 시선을 확 돌리며 저 쪽으로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 얼레? 화 난 건가? 뭐, 나라도 자기 눈을 실명 직전까지 몰고 간 사람에게 좋은 감정 가질 수야 없긴 하겠지만, 거참 지금은 묘하게 예민하네. 역시 스트레스가 누적된 탓일까? 카론 경이 사라지자 나는 라이오라 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어째서 카론 경과 싸웠던 거죠?” 내 주제에 물어보기에는 상당히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단순히 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둘 사이의 관계가 무척이나 궁금했다(솔직히 키스와의 관계는 궁금하다기보다는 정말 무섭다). “나는 싸워야 할 이유가 있어서 싸웠고 그는 막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막았던 것뿐이야.” 라이오라 씨의 대답은 간결하지만 모호했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없나?” “예? 누구요?” 하지만 나는 곧 라이오라 씨의 표정을 통해 ‘그’ 가 바로 키스 세자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예, 잠시 왕궁을 떠났어요.” 사실 떠났다기보다는 떠밀린 셈이지만. “다행이군. 아니,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무, 무슨 의미지? 설마 여기 있었다면 또 다시 사투를 벌이기라도 할 셈인가. 그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켜 볼 생각으로 말했다. “아무튼 마라넬로 황제께서 왕자님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조금은 기쁘네요. 사실 방금 전에도 카른 경과 일이 얽혀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요.” “걱정마라. 무가치한 자에게는 일말의 동정도 없는 분이지만 가치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존중하는 분이니까.” “헤헤. 설마 카론 경의 가치가 아까 말한 그것은 아니겠죠?” “......으음. 글쎄?” 아니, 왜 고민을 하는 거야! “이런 소국에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움직일 수 없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사람을 가치와 무가치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내겐 불편한 잣대지만 그것까지 뭐라고 빈정거릴 수야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라이오라 씨가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흘리듯이 말했다. “폐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실 때는 상대의 의견 같은 것은 물어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주의해라.” 예? 어, 어째서 제가 주의해야 하나요? 13 “예? 전하께서 나를?”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겨우 끝난 연회, 완전히 지쳐버려서 리더구트로 돌아가 곧바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내 간절한 희망이 산산이 깨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입금님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걸까. “나도 몰라. 빨리 가봐 졸려 죽겠네.” 용건을 전한 관리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손을 내저었다. 으이구! 나도 졸려 죽겠는데! 하지만 국왕 전하가 부르는데 ‘아아 몰라요. 아침에 찾아갈게요' 라고 말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나만 부르시는 거지?’ 설마 일을 잘 했다고 상을 주려는 것은...... 절대 아닐 테니까 기대도 하지 말자. 나는 쌀쌀한 밤을 뚫고 본궁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다. 회담을 앞둔 밤은 기이하리만큼 고요했다. 14 “오오, 왔나? 이리 오게나. 이쪽으로.” 트레이드마크인 촌스러운 녹색 가운으로 통통한 몸을 둘둘 말고 있는 전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를 올린 뒤에 그가 손짓하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앉게나.”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동석을.” “괜찮다니까. 어서 앉게.” ‘왜 이러시나 정말’ 아니, 이거 뭔가 불안한데? 갑자기 구두쇠 임금님의 성품이 후덕하게 변해버려 내게 금일봉을 하사할 리도 없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오밤중에 잠옷차림으로 건네주지는 않는다. 제냐 공주님과 나를 결혼시키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웃기니까 집어치우자. “요즘 고생 많지?” 방글방글 웃는 임금님의 표정에서 나는 ‘이거 뭔가 있다!’ 라는 직감을 느꼈다. 이유 없는 친절은 이유 없는 미움만큼이나 신경 쓰이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전하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 자식!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라고 소리칠 수도 없잖은가. “아니, 왜 그렇게 식은땀을 흘리나?” “그, 그럴 리가요. 아하하하.” 한밤중에 전하와 함께 하는 오붓한 티타임이라니, 이거 진짜 가시방석이네. 보통 회사였다면 곧바로 ‘섭섭하게 듣지 말게나.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되네’ 라는 말이 튀어나올 분위기였던 것이다. 궁녀가 와서 전하와 내게 차를 따라주었다.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마냥 어색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들게나.” “괜찮습니다.” “에이. 날도 추운데 그러지 말고 들어.” “아 예. 그럼.” 나는 조심스럽게 하얀 찻잔을 들고 진한 향기가 감도는 차를 마셨다. 전하는 그런 내 모습을 히죽 히죽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상황은 뭐야. 진짜 무섭다. “자네, 엔디메론 경이라고 했지?” “에, 엔디미온입니다.” 그럼 제 별명은 ‘메론 경’ 이란 말입니까! 부하 이름 정도는 기억해 주세요! “응. 그래, 엔디메론 경. 짐은 자네의 희생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네. 고마우이.” “예?” 아니, 뭐가 고맙다는 거야? 내가 무슨 희생을 당했는데? 그때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며 몸이 균형을 잃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나면서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난 급속도로 혼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테이블을 꽉 잡아 최대한 쓰러지는 몸을 추스르며 중얼거렸다. “차에 무슨 약을 넣은......” ......거냐! 이 망할 만두 임금아! “고맙네. 자네가 짐의 심정을 이해해 줘서 정말 다행이야.” 임금님은 지 혼자 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너무 겁먹지는 말게나. 황제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야. 허허” “......!” 순간 엉켜가는 머릿속에서 연회장에서 황제가 전하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던 장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분명 임금님은 그걸 흔쾌히 수락했고...... 그건 그러니까...... 지금 날 황제에게 팔아넘기려는 거냐! “나는 자네가 거절하면 어찌나 걱정했지 뭔가.” 거절이고 나발이고 물어본 적도 없잖아! 믿을 수가 없어. 대체 이놈의 나라에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거야? 누가 순순히 팔려가 줄 것 같아! 나는 분노로 눈을 부릅뜨며 최대한의 정신력을 긁어모아 벌떡 일어섰다. “우어어어어! 죽어라! 이 인신매매임금!” 그러나 임금님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고무 방망이를 슬며시 꺼내서는...... “허허. 자네 참 끈질기군.” 따아악 난 곧바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자네의 자발적인 애국심에 짐은 감탄하고야 말았네, 엔디메론 경.” 엔디미온이라니까! 그리고 약을 먹이고 고무 방망이로 후려쳐서 기절시킨 뒤에 팔아 치우려는 이 흉악범죄의 어디가 자발적이야! 여기까지 생각한 후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15 그래, 차라리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야야야.” 묵직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을 때 나는 제복 차림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에 새겨진 황금 키마이라 인장. 아니, 그럼 황제는 마키시온에서 여기까지 이 거대한 전용 침대를 가져왔다는 거야? 거 노인네 진짜 어지간히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게 황제의 침대라는 의미는 바로!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약 기운에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쓰러졌다. “그대로 있어. 십 분쯤 지나면 마비가 풀릴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찻잔을 들고 있는 라이오라 씨가 서 있었다. 또 만났네, 또 만났어. 이번엔 침실에서 죽고 싶은 기분이란 이런 것이로군. “소드람에서 특별히 만든 마취약이라 후유증은 없을 거야.” “하! 하! 하! 고맙기도 하네요!” 그런 것을 두고 ‘엉뚱한 배려’ 라고 한답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마취약 만든 사람이 설마 냉혈마녀 메데이아 교수.......” “맞아. 그녀는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 응? 그런데 너, 메데이아를 어떻게 알고 있지?” 아차! 실수우우우! “워, 워낙에 유명한 분이니까요. 아하하하.” 라이오라 씨는 ‘흠. 그렇게 유명했나’ 라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폭거에 울상이 되어 버린 표정을 보자 차를 조금 마시고는 쓴웃음을 보였다. “그러게 내가 주의하라고 했지? 폐하는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상대 의견 같은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고.” “네, 네. 소인의 주의력이 부족했습니다. 설마 임금님까지 한패일 줄은 몰랐네요. 쳇!” “이것도 일이라고 생각해라.” 남의 재난이라고 참으로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난 조금 울컥해서는 빈정거리고 말았다. “라이오라 씨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이건 일’ 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가 후룩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아니. 확실히 어렵지 그건.” 이 인간, 뭔가 좀 얄미운 구석 이 있어. “너무 겁먹지는 마라. 연로하신 폐하께서 몸소 무슨 짓을 하실 거라 생각하나?” “모, 몸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설마 라이오라 씨가 대신?” 난 사색이 되어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야아, 젊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라는 포지티브한 사고방식은 도저히 무리라고!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가. 보기보다 음란한 구석이 있군” 울컥! 상상의 빌미는 댁이 제공했잖아! “이제야 눈을 떴나.” 그때 문이 열리며 백발을 내린 황제가 침실로 들어왔다. ‘자,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나 ’일하는‘ 중이었지.’ 나이를 잊게 만드는 풍모를 지닌 황제는 그 맹수 같은 눈빛으로 잠시 동안 날 바라보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정사(政事)를 보고 있었는지 손에는 잉크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면 그것이 정사(情事)로 돌변하게 될 것 같다는 말장난은...... 지금 내게는 그다지 웃기지 않는군. "자색...... 신비로운 눈동자로다. 보석을 녹여 만든 것 같군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려버 릴 것 같은 색안(色眼)이야. 가끔 아름다움을 시기한 요정들이 성별을 뒤바꿔 태어나게 만든다는데,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겠어. 계집애로 태어났으면 나라를 후렸을 놈이로고.“ 그 말은 마치,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그런 눈을 가진 네놈 탓이야!’ 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래요! 나라를 후릴 눈동자라서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요! 너무 억울해서 눈물도 안 나와. 게다가 그런 내게 민망한 감상평을 늘어놓는 주제에 연회장에서는 시침 뚝 떼고 ‘좋은 이름이군, 젊은이’ 라고 했단 말이지? 나는 거미줄에 휘감긴 여린 풀벌레의 고독한 심정으로 파닥거려 봤지만 몸은 아직도 반마비 상태였다. 그때 황제가 정말 예상치도 못한 말을 던지며 침대 앞 의자에 앉았다. “그런 요사스러운 눈을 가진 또 다른 녀석을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엔디미온 군?” “......예?” 누, 누구? ‘보석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나라를 후릴 만한 눈동자’ 라면...... “지금은 자네의 상관이겠지? 그 스왈로우 뭔가 하는 기사단 말이네.” 그렇다. 황제는 키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키스에게 관심을? 아니, 카론 경에게 찝쩍거리고 나를 이렇게 납치해온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키스 경까지 손에 넣겠다는 겁니까? 어이구, 욕심도 많아요. 난 눈썹을 가늘게 떨며 황제에게 말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키스 경은 도망치는 데 선수인데다가 힘도 세요. 저처럼 이렇게 쉽게 잡혀오지는 않을......” 그때 황제의 쓸쓸한 목소리가 내 말을 갈랐다. “말해주게. 내 못난 아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순간 내 사고가 멈췄다. 그 비현실적인 물음이 내 귀를 겉돌았다. 라이오라 씨는 이미 이 내막을 알고 있었는지 찻잔을 든 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어둠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16 머릿속의 사고가 뿌옇게 되어버린 것은 비단 약 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키스 경 이 황자(皇子)?’ 이것이 황제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만 아니었다면, 이 세상 누가 이 말을 했더라도 커다랗게 웃었을 것이다. 농담도 그쯤이면 재미없어! 라고. 아이히만 대공이 실은 여자, 라는 말도 이것보다는 덜 어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말은 분명 농담도 장난도 아니었다. “저, 정말인가요. 정말로 키스 경이......” “키스? 이제는 그 이름을 쓰는 건가. 하긴, 내가 내려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죽기보다 싫을 테지.” 황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찼고, 그 표정은 내 마음을 더욱 뒤흔들어 놓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로구나. 자네가 믿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말이야.” 마라넬로 황제에게는 아들이 없다. 이것은 이 세상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섯 명이라던 아들들은 마치 가문에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혹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서) 병으로 죽거나 의문의 살해를 당하거나 실종되었고, 그나마 적자의 피가 섞여 있는 아메데오 황손 역시 제국을 이어가기에는 병약하고 유약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황제가 후계자 없이 붕어(崩御)하면 마키시온 제국이 분열될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나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키스 세자르가 숨겨진 황자라는 것인가? 치떨릴 만큼 극적이라고 그런 건! 아니, 그보다 황제는 이제 죽을 날을 손꼽아봐야 하는 고령인데 키스와는 애당초 나이대가 맞질 않는다. 눈동자 색도 다르고 기사 수업조차 베르스에서 받았다. 앞뒤를 짐작하기 힘든 퍼즐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쿡쿡 쑤시고 돌아다녔다. “그래, 건강하던가?” 황제의 그 짧은 물음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건강하다’ 라며 쉽게 입을 열수가 없었다. 키스의 싱글거리고 푼수 같고 얄밉고 때로는 무서웠던 모습들이 마치 팔랑팔랑 넘어가는 그림책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황제의 아들이 대체 어떤 잔인한 운명의 격류에 휘말려 이 작은 나라의 기사로 떠밀려 온 것일까. “......카론 경도 알고 있는 사실인가요?” “일일이 설명해 줄 기분이 아니로군. 내 물음에만 대답하게나.” “어째서 이렇게 된 거죠. 키스 경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엔디미온 군, 한번만 더 멋대로 입을 놀리면 그 혀를 자르겠네.” 나는 황제와 라이오라 씨를 동시에 바라왔다. 그와 키스 경이 사투를 벌였던 모습이 피비린내와 함께 다시 의식 위로 떠올랐다. 그때 달아오른 키스의 시뻘건 눈동자는 분명 증오였다.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적대감이 때때로 상냥한 가면을 뚫고 용암처럼 흘러나오곤 했다. 라이오라 씨가 내가 던진 시선을 끊으며 말했다. “페하께서는 그분이 건강하시냐고 물으셨다.” 그분? 그분이라고? “그래요. 건강해요. 항상 웃고...... 즐거워하고.” 내 목소리는 공허했다. ‘너에게 이 왕궁은 시작이겠지? 하지만 키스에겐 마지막이야.’ 예전 카론 경이 내게 꺼냈던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렸다. 키스가 등에 젊어진 어지러운 상흔들이 떠올랐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깊은 자상(却傷)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설마......당신들, 키스 경을 죽이려는......” “라이오라 군.” 황제가 볼 일을 마쳤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하자 라이오라 씨가 작은 약병을 하나 내 앞에 내밀었다. “마셔라.” “이것은......” “너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다. 잊어버리는 것이 좋아.” 므네모시아. 이것은 분명 텔레-레이디들이 마시는 망각의 물약이다. “시, 싫어. 멋대로 날 휘두르지 말아요!” “널 위한 폐하의 배려다. 잊지 않는다면 죽일 수밖에 없어.”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라이오라 군, 말이 너무 많아.” “예, 곧 끝내겠습니다.” 내 귓가에 ‘어서 마시세요오’ 라고 재촉하는 키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그는 그랬을 것이다. '엉뚱한 배려' 가 계속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멋대로 잡아와서 또 멋대로 엄청난 비밀을 늘어놓고 이제는 멋대로 잊어버리게 만들어 주겠다는 건가?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고함과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라이오라 씨의 황금빛 눈동자가 칼날처럼 굳었다. 그가 말했다. “분명 이것은 아신의 기운입니다. 아신 중 한 명이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설마 알테어 님? 내가 이곳에 잡혀있는 것을 알고? 오, 오면 안돼요! 알테어 님이 엄청나게 강한 것은 알지만 그래도 라이오라 씨와 싸우게 된다면 감당할 수가...... 그 순간 침실 문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박살이 나 버렸다. 난 그 장본인을 보며 믿겨지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 무라사 씨” 하얀 털 코트를 입은 회색 머리칼의 사내. 거칠게 기른 머리칼이 예전보다 더 길어진 것만 제의하면, 강철같이 단단한 몸과 위압적인 기색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니 지금 견백호 씨가 날 구하러 온 거야? 그는 동그랗게 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더니만 이를 부득 갈며 으르렁거렸다. “키스, 이 자식! 날 속였구나!” 얼레? 키스? “황제 놈이 내 동생을 납치했다고 해서 한걸음에 달려왔더니만 저건 마스코트잖아!” 도,동생이 아니라 미안하게 됐네요! 그때 검을 뽑아든 프론티어 뱅가드가 무라사 씨의 등을 내리쳤다. “조심하세요!” 라는 외침은 물론 필요도 없었다. 무라사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쳤고, 곧바로 썩은 나뭇가지를 꺾어버리 듯 툭 소리를 내며 검을 끊어버렸다.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는 광경이란 이런 것이로군. “으이구, 짜증나. 진짜 가지가지 귀찮게 하네.” 그는 부러진 칼날을 바닥에 던지며 투덜거렸다. 세계 최강이라는 프론티어 뱅가드였지만 무라사 씨에게는 완전히 기가 질려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황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놀랍도록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가 바로 견백호로군. 소문 이상이로구나.” 무라사 씨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되물었다. “뭔 소문?” “다혈질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덩치 큰 강아지 같다고 들었네만.” 무라사 씨는 '소문' 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곧바로 발끈했다. “어이, 황제 씨. 이 단순한 주먹에 쳐 맞고 싶으셔?” “허허, 말버릇까지 귀여운 녀석이로고.” 순간 '파앙!' 하고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굉음을 격하게 터트리는 그의 주먹이 황제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백발의 황제는 도망치기는커녕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곧바로 라이오라 씨가 그의 팔을 잡아챈 것이다. 그 반동으로 강철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칼이 휘날릴 정도로 공기가 역류했다. ‘무, 무라사 씨의 주먹을 막았어?’ 둘의 눈빛이 서로 부딫쳤다. “여전히 어린애 같구나, 견백호.” “너도 여전히 충실한 황제의 개로구나, 진청룡.” 둘의 기운이 부딪치며 방 전체가 격하게 울렸다. 그 강대한 투지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무라사 씨는 요동치는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았고, 라이오라 씨는 정반대로 어떤 생명체라도 잠재워 버릴 것 같은 음산한 살기를 흘렸다. 무라사 씨의 눈빛에 위험한 빛 무리가 맺혔다. “오랜만에 내 힘을 개방해 볼까? 예전에 못 다한 대결을 여기서 끝내자고. 응?” 역시 나는 어찌되든 안중에도 없었다. “감히 어전(御前)을 더럽힐 생각인가. 난 그런 무가치한 결투에는 아신의 힘을 쓰지 않아.” “저 노인네가 네 주인이지 내 주인이냐. 넌 싸움도 허락 받고 하나? 난 싸우고 싶은 곳에서 싸워!” 두 사람도 알테어 님과 키르케 님만큼이나 앙숙인 걸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라이오라 씨는 별 관심도 없는데 무라사 씨 혼자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지만. “폐하, 명령을......” 라이오라 씨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명령만 떨어지면 단번에 강대한 호랑이와 용의 화신이 엉켜버릴 것만 같았다. 무라사 씨가 희열에 찬 미소를 보이며 전의를 드러냈다. “호오. 이제야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 드는 거냐?”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 사형선고 같은 말과 함께 라이오라 씨의 황금색 눈동자가 마치 유리알처럼 불길하게 변해갔다. 그는 팔을 뻗어 근처에 있던 자신의 흑검을 집어 들었다. 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신의 힘이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무라사 씨의 주변이 막대한 에너지에 용암처럼 녹아내렸고, 라이오라 씨 근처에 있던 화초들은 모조리 생명을 잃고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두 힘이 충돌한다면 이 방은 물론 왕궁 일부쯤은 삽시간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황제는 도리어 즐거운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아신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은 최상의 여흥일 테지, 하지만 아쉽게도 장소가 어울리지 않는군. 그만 됐어. 놔 줘라.” 황제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고, 그 순간 라이오라 씨의 눈빛도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하지만 무라사 군, 저 아이의 기억을 지우는 일은 눈감아 주길 바라네. 내 아들에 대해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자네도 바라지 않겠지?” 무라사 씨가 슬쩍 날 바라보며 황제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알려준 거요?” “그 녀석이 내 아들이라는 정도만.” 그 말은, 그보다 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거야? 대체 키스 경은...... 무라사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야, 마스코트. 황제에게 협조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만...... 그래도 약을 먹는 편이 좋을 거야.” “하, 하지만!” “내 말 들어!” 난 그의 커다란 고함소리에 움찔했다. “보통사람이 끼어들 일이 아냐. 네가 알아봐야 그 녀석을 괴롭게 만들 뿐이야. 솔직히 그놈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일이 꼬이는 것만큼은 질색이거든.” 대체 어떤 것이기에 무라사 씨마저 저러는 것일까. 라이오라 씨가 내게 다가왔다. “고집 부리지 마라. 모르는 편이 좋을 때도 있는 거다.” 마비가 덜 풀린 몸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강제로 내 입에 그 끓은 붉은 물약을 흘려 넣었다. 그것은 눈물처럼 짜고 피처럼 썼다. 내가 예전에도 이 잔인한 약물을 마신 적이 있던가? “......!” 내 눈 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들이 용해되어 있는 거대한 스프였다. 그 혼돈의 바다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역전되었다.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바닥으로 침강하고 깊은 무의식 속에 ‘5분’ 이 융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까맣게 잊고 있던 일들이 벼락처럼 갑자기 떠오르는 것 같다. ‘그녀’ 가 말했듯이 므네모시아는 기억을 소거하는 약이 아니라 기억 위에 시커멓게 덫칠을 해서 스스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만들 뿐이었던 것이다. 약이 내 몸을 녹이는 순간 그 덧칠이 벗겨졌고 내가 그 ‘5분’ 동안 무슨 일을 당하고 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기억해 냈다. 역시 나는 그녀를 잃었던 그때 이 물약을 마셨던 것이었다. 그것도 내 스스로. "......믿을 수 없어." 나를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기억났다. 그래, 괴한들이 집에 들이닥쳤고, 그녀는 납치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를 납치하고 내게 물약을 줬던 자는 바로...... 순간 마음속에 시커먼 폭우가 쏟아져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잠시 열렸던 무의식의 두터운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17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술잔을 들고 있는 긴 흑발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카, 카론 경?” “정신이 든 건가.” 몽롱하던 내 의식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자, 나는 내가 리더구트 일 층 소파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그런 나를 카론 경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약을......먹은 건가.” 나는 내 입가를 매만졌다. 황제의 침실에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완벽한 망각이다.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있던 카론 경이 재차 말했다. “너는 망각의 물약을 마셨다. 몸에 이상은 없나?” “없는 것...... 같아요.” 나는 눈물을 닦으며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점점 내 사고 능력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서, 서, 설마! 황제가 나한테 무, 무슨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기억을 지워 버린 것은!” 기억나도 끔찍할 판국에 기억이 안 나니까 더 끔찍해! 이것은 완전히 거대 기업의 횡포에 불가항력으로 당해버린 소시민의 심정! 내 순결 아니 인권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어이, 그런 일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 마스코트.” 옆에서 들리는 묵직한 소리에 난 시선을 돌렸다. “얼레? 무라사 씨가 왜 여기 있어요?” “하아. 그 말, 오늘 두 번 듣게 되는군.” 바닥에 털씩 주저앉아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 덩치 큰 남자는 분명 무라사 씨였다. 그는 뭐가 불만인지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키스 녀석에게 속아서 여기까지 온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결국 라이오라 놈과 싸우지도 못하고 찝찝한 일에만 얽혀들었어, 이래저래 욕구불만이로군.” “예? 어, 어째서 라이오라 씨와 싸우려는 거죠?” 무라사 씨는 ‘싸우는 데 이유가 필요해?’ 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 그 녀석과 삼 일 밤낮을 싸운 적이 있거든.” 그게 이유?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요?” “스, 승패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무라사 씨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말을 흐렸다. 졌군...... 그가 울분을 토했다. “그 자식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흠집도 안 나는 불사신이라고! 일 년 넘게 그 녀석을 꺾을 방법만 궁리했는데, 결국 써먹지도 못했어! 제길!” 아니, 애당초 그런 무적초인과 왜 싸우려는 겁니까? 역시 싸움꾼의 심리라는 것은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아흔아홉 명보다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한 명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라. 키스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니까.” 카론 경이 한숨을 내쉬며 점잖게 꾸짖자 무라사 씨는 억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러는 댁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훠얼씬 무모하면서......’ 라면서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겉만 보면 전혀 알 수 없지만 카론 경도 투쟁심이 강한 사람인 것이 사실이다. 무라사 씨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가보마. 키스 이 자식, 만나기만 해봐. 그냥 안 놔둘 거야! 감히 날 속이다니!” (실례되는 말이겠지만)무라사 씨는 나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오신 김에 랑시 경, 보고 가시죠?” 동생의 이름에 잠시 멈칫하던 그가 말했다. “됐어. 자고 있을 거 아냐. 예전부터 그 녀석은 잘 때 깨우면 무섭게 짜증냈다고.” 아신이 두려워할 정도의 짜증이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아침에 안부나 전해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동생을 엄청나게 아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동생은 건강하지?” “아 예. 물론 건강...... 아?” “왜 그런 표정이냐?” “아, 아뇨. 조금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받은 것 같아서요.” 건강하냐고? 분명 누군가 나한테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니까. 감당할 수 없는 일은 그냥 모르고 사는 편이 좋은 거야.” 무라사 씨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남기고는 새하얀 털 코트를 몸에 두르며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늑대가 밤의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마음 한 편을 도려낸 것 같은 기묘한 공허감에 시달렸다. 황제가 대체 무슨 이유로 내게 므네모시아를 마시게 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또 다시 그녀가 떠오르자 잘려나간 기억의 상처들이 더욱 쓰라렸다. 팔이 잘린 사람은 오랫동안 없어진 팔이 있던 부위가 아프다던데, 어쩌면 나도 그런 환통(飾痛)을 겪고 있는 것일까. “닦아라.” 말없이 날 지켜보던 카론 경이 손수건을 건네졌다. “앗. 고마워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니셜이 곱게 새겨진 실크다. 이멜렌 님이 정성스럽게 수놓은 것이리라. 나는 청결한 냄새가 묻어나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카론 경을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 살짝 알코올의 향내가 느껴졌다. “왜 갑자기 술을......” 확실히 쓸쓸한 눈빛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카론 경에게 어울리긴 한다만, 안 그래도 격무에 시달려 엄청나게 피곤할 텐데도 굳이 술을 마실 애주가는 아니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조금.” 그는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짙푸른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호박색 술을 살짝 머금을 뿐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속눈썹이 감은 눈의 굴곡 위로 도드라져 보인다. 카론 경과 같이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저러고 있을 때면 표정은 평소와 똑같아도 꽤 심란한 상태라는 신호였다. 난 분위기를 일깨울 심산으로 소란을 떨었다. “아! 이 술은 키스 경이 예전에 마시던 거네요?” 예전 나인테일 사건 때 키스가 마시던 술과 같은 것이지 않은가. “키스 사무실에 놓여 있더군.” “카론 경도 이 술 좋아하세요?” “전혀” 이상하게도 부정의 억양은 평소보다 단호했다. 난 생소해 보이는 그 술의 정체가 궁금해서 살짝 라벨을 훑어봤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래봬도 직업이 직업인지라 세계의 명주들은 대부분 머릿속에 꿰차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 국산주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특이한 숙성주네요. 셀른이라는 곳에서 주조(酒槽)했군요.” 셀른이라, 으음,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 이 나라에도 양조장이 한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이제는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술이지.” “무슨 맛인데요?” “글쎄, 피 냄새가...... 조금......” 취기일까? 그는 흐릿한 시선으로 술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감상을 털어버리려는지 곧바로 차가운 눈매로 돌아와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검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헤헤, 벌써 가시게요? 심심하시면 같이 놀아드릴 수도 있는데...... 라는 애교는 확실히 입에 붙은 직업병이네요. 아하하,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혼자 히히 웃고 있는 나를 그는 차갑게 지켜봤다. 싸늘하다고는 해도 특별히 내게 불만이 있는 시선은 아니다. 왜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특별히 의식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살아온 인생 자체가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결정(結晶)같은 것. 카론 경의 눈동자는 그랬다. 그가 말했다. “엔디미온 경.” “예?” “키스가......” “키스 경?” “......미안하다는 말 전해달라더군.” “뭐, 뭐가 미안해요? 아니, 그보다 언제 그 말을......”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달빛이 녹아든 바람이 카론 경의 뺨과 긴 머리를 쓸고 지나간다. 검은 망토 때문일까. 바람이 흩트린 검은 머리칼 사이로 상아 조각 같은 얼굴이 유달리 창백해 보였다. 마치 파란 물감을 마구 짜내서 그려낸 초상화처럼. 그는 우두커니 바람을 맞으며 어둠 밖의 한 지점을 응시하다가 곧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 어쨌든 진짜 야박하다. 뒤도 한번 안 돌아보는군. 카론 경이 떠난 뒤 나는 그가 남겨 놓은 술잔을 바라봤다. 피 냄새가 난다고? 살짝 혀를 대자 곧바로 미간이 좁혀졌다. “우에에. 쓰기만 하구만.” 오늘따라 카론 경도 라이오라 씨도 무라사 씨도 나도 (어디 붙어 있는지 알 길이 없는 키스 경조차도) 무엇에 어떻게 얽혀버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난 좀더 깊게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곧 미루고 미뤘던 졸음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하자 이 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물은 이상하게도 새벽까지 멈추지 않았다. 18 “으아아악! 그만 좀 핥아! 제발! 부탁이야!” 오늘 아침에도 내 입술을 핀 포인트로 핥아대는 지스 녀석의 고양이들 덕분에 벌떡 일어났다가 사나운 잠버릇 덕에 온몸에 휘감긴 내 머리칼에 의해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새삼 화가 날 것도 없지만...... 오늘도 별로 운이 좋을 것 같지는 않군.’ 나는 작정하고 달라붙은 금발과 고양이들을 떼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지스킬 군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새근새근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네 자식들이 버젓이 날 겁탈하고 있는데 지금 잠이 오니? 응? “......” 한 가지 추측을 해보자면, 나는 전생에 늘씬한 수고양이가 아니었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 암고양이들이 죽자 살자 나한테만 달려들 리가 없...... 아니, 어쩌면 내 전생은 마른 멸치였을지도! ‘아니면 개다래나무 열매......’ 으음. 그런데 개다래나무 열매도 환생을 하던가? 알게 뭐람! 아침부터 이런 궁상도 없어요. 나는 고양이 털 덕분에 커다란 재채기를 한 뒤에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룸메이트 씨, 일어나세요. 브리핑 시간이랍니다.” 그러자 저 녀석은 몸을 뒤척이며 들리는 듯 마는 듯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마치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싫어. 좀더 잘래.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 어이, 그런 사치스러운 어리광은 고관대작이 되고 난 뒤에 댁의 집사에게나 하라고. 왕실 공식 노예 집단인 우리들에게 ‘좀더 잘 수 있는 권리’ 따위는 없단 말이다! “일어나!” “싫어” “일어나!” “싫어” “일어나!” “싫어.” “일어...... 으이구!” 나는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자명종이야? 아니, 그리고 꼬박꼬박 대꾸할 정신은 있으면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또 뭐냐. 나는 투덜거리며 잠옷을 벗어던지고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평화회담이라서 기사단 제복 착용 명령이 떨어졌거든(말이 제복이지 이거 사실 접대복에 가깝지만. 중얼중얼). “그래, 그래. 아주 푹 주무세요. 대신 오늘 브리핑은 카론 경이 주관한다는 것만 알아둬. 아마 벌금으로 끝나지는 않......”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스 경은 겁먹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옷을 입던 난 떨떠름한 얼굴로 제복으로 갈아입는 지스를 바라봤다. 확실히 카론 경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군. 이대로라면 키스 경이 돌아올 때쯤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꽤나 착실한 기사단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물론 그렇게 되면 가장 적응하지 못할 사람은 바로 키스 경 본인일 테지만). 밖에서는 벌써부터 다른 멤버들이 웅성거리며 일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루가 시작되었다. 19 역시 카론 경은 정시에 리더구트로 도착했다.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그 차가운 말 한마디에 리더구트의 온도가 4도쯤 내려간 것 같다. 팔랑팔랑 브리핑 서류를 넘기는 사무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졸음에 취해 흐리멍덩해진 눈동자로 안경을 쓴 채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고 있는 카론 경의 모습을 뜯어봤다. 완전무결이란 저런 것일까?(섬세한 외모만 보면 전혀 실감이 안 나지만)얼마나 험난한 훈련을 받아왔기에 저럴 수 있는 걸까. 얼마 쉬지도 못하고 와서 엄청 피곤할 텐데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 잡을 곳 하나 없다. 가끔 카론 경의 등에는 버튼 같은 것이 달려있어서 그걸 누르면 지금까지의 피로가 모조리 리셋되어 버리는 편리한 기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으아아, 무지 피곤해,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보, 버튼 즘 눌러줘’ 라고 말하면 보약을 먹거나 온천에 갈 필요도 없이 그 즉시 피로가 사라져 버릴 테니 그거 진짜 부러운...... “엔디미온 경.” “엔디미온 경, 내 말 듣고 있나?” “예?” 난 눈이 번적 뜨였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건가?” “예? 그러니까, 카론 경의 등에 피로 회복 버튼이 달려 있어서......” “내 등에는 아무 것도 안 달려 있다.” “무, 물론이죠!” “브리핑에 집중하도록.” “헤헤. 죄송합니다.” 카론 경은 ‘두 번 얘기할 시간 없다’ 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시시껄렁한망상’ 이라는 것은 꽤 중독성이 강해서 한번 빠져들면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멋대로 망상의 나래가 가지를 친다. 애당초 인간의 등짝에 왜 버튼이 있는 거야? 라는 당연한 의문점은 생각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가령 예전 학교에 다닐 때도 나는 포도나무에 포도 대신 오리너구리가 열린다면 그건 암컷일까 수컷일까? 하는 시답잖은 망상을 수업 시간 내내 했던 적이...... “엔디미온 경.” “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지만, 어쨌든 브리핑 이후에 해라.” “아, 예!” 에구, 집중하자 집중. 이래서야 완전 학급의 문제아 같구만. 카론 경은 서류를 탁 접으며 브리핑을 마쳤다. 그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아무튼 지시한대로 오늘은 평화 회담 당일로 스왈로우 나이츠의 공식 업무는 없다.” 만세! “단 엔디미온 경만 제외한다.” 망할! “엔디미온 경은 지금 즉시 회담장으로 가도록.” “어, 어째서 저만요!” 난 일복이 터진 건가. 어째서 나만 일해야 하는 거야! 그 이유를 카론 경이 알려주었다. “아이히만 대공의 내부지명이다. 각국 지도자들 곁에서 회담 중 시중을 들도록. 그리고 절대로 지도자들의 심기를 거스를 언행을 삼가라.” 즉, 나는 아이히만 대공의 지명 하에 영광스럽게도 회담 테이블의 접대 역을 맡게 된 것이었다. 에이이! 영광은 개뿔! 그 위험천만한 황제를 또 만나야 하다니! 아니, 이번에는 교황부터 국왕들까지 혼자서 다 접대하라고? 어째서 어제 임금님의 고무방망이에 두드려 맞고 황제에게까지 팔려간 내가 오늘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거야! 일인칭이라서 그래, 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은 하지 말아줘! 그보다 누구라도 내 등 뒤의 피로 회복 버튼을 눌러 줘! “이상으로 브리핑을 마치겠다. 나머지 인원들은 제복을 착용한 상태로 리더구트에서 대기하도록.” 카론 경이 사라지자 쇼탄 경과 루이 경이 기지개를 펴며 ‘그럼 늘어지게 잠이나 자볼까나’ 라는 말을 속편하게 늘어놓는 것이었다. 으이구! 누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구만! 한편 상당히 분한 표정의 레녹 경이 날 노려봤다. “대공이 무슨 생각으로 너 같은 녀석을 지명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실수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마라.” 지, 지금 자기가 지명 받지 못해서 화가 난 거야? 레녹 경의 눈에는 드물게도 ‘내가가고 싶어. 내가 가야 하는데! 어떻게 네 녀석이 가는 거야! 제길!’ 이라는 문장이 마구 지나가고 있었다. 제발 댁이 가 줘! 부탁이에요! 난 이런 황송한 자리, 절대 필요 없다고! 단지 자고 싶어! “두고 봐. 다음번에는 내가 이기겠어!” ...... 미치겠네. “하아, 얼마든지 져드리죠. 제발 이겨주세요.” “흥! 기세 좋군.” 레녹 경은 혼자 화가 나서는 사라져 버렸다. 아마 이것이 내가 기사단에 들어와서 레녹 경과 나눈 가장 긴 대화일 것이다. 그러나 라이벌로 여겨 줘서 정말 기뻐, 라고 말하기에는 난 애당초 ‘누가 더 일에 시달리나’ 같은 걸로 호각을 다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그리고 비정한 룸메이트 지스 경 역시 매몰차긴 마찬가지였다. “그럼 혼, 자, 서, 수고해.” “......” 이 녀석은 가끔 내게 인간은 어차피 혼자라는 진리를 일깨워 준다. “캬하하. 재있게 놀다 와. 그리고 올 때 날 위해서 맛 나는 것 싸와야 해?” 랑시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내 목을 휘감으며 애교를 떨고 난리다. 나 지금 유원지 가는 거 아니거든? “아 참, 어제 밤 무라사 씨가 다녀갔......” 순간 랑시 경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한 것을 보자 난 즉시 입을 다물었다. 소녀에서 마녀로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은 0.1초, 이거 정말 즉각 반응이로군. 내, 내가 부른 거 아냐! 그렇게 노려보지 마! “흥! 망할 형! 날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는 거야? 콱 늪에나 빠져버려!” 랑시는 신경질적으로 저주를 내뱉으며 이 층으로 가버렸다. 지금 화내는 거야 아니면 서운해 하는 거야? 거참 소녀 마음, 아니 소년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어쨌든 좋으니까 형제 싸움에 날 끼워 넣지만 말아 달라고. 내겐 둘 다 너무도 벅찬 존재니까.’ “엔디미온 경, 정말 어려운 일을 맡으셨네요. 힘내세요.” 역시 이 기사단에서 정상적인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크리스티앙밖에 없다. 내 앞에 다가온 그는 촉촉한 눈망울로 날 바라보며 따스하게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크리스 경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렵겠지만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 “......이보쇼.” 엄청 불길하다고! 그런 위로! 20 올해 1월은 특히나 쌀쌀했다. ‘으으 무진장 추워.’ 나는 총총 걸음으로 회담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놈의 스왈로우 나이츠 제복은 미(美)적 아름다움을 중시해서 만들었기 때문에(라기보다는 겉모습 외에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장인정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딱 잘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성 제로의 제복인데다가 신성한 제복 위에는 코트를 입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설원 위를 내달리는 벌거숭이의 심정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아침밥도 못 먹었다고!’ 지금쯤 다른 녀석들은 모조리 벽난로 앞에서 노닥거릴 텐데 어째서 나만! 아이히만 대공! 이제는 아예 원격조종으로 날 괴롭히겠다는 겁니까! 이렇게 혼자 세상만사를 투덜거리며 내달렸기 때문에 나는 꽤 먼 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완주할 수 있었다 후후. 돈도 희망도 없는 왕실 기사 1년차, 나름대로 얻은 남루한 비기랄까......라고 어깨를 으쓱거려 봐야 기분만 비참해지는군. ‘그건 그렇고......’ 나는 평화 회담 장소로 쓰이게 될 거대한 건축물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10여 개의 대리석 기둥과 50개의 종탑(鐘塔)과 100여 개의 금은 조각상과 500여 개의 상아 장식들과 수천 종의 각종 꽃나무들로 이뤄진 이 엄청난 건축물의 위용은 웅장함을 넘어서서 차라리 속물적이었다. 아직 아무도 입장할 수 없는 그 건물 입구는 마치 잘 포장되어 있는 선물 꾸러미처럼 굵직한 황금 사슬로 봉인되어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대체 언제 이런 것을 만든 거야.’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만드는 데 적어도 십 년쯤 걸릴 것 같은 건축물을 일주일 만에 완성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건 상당히 빠르다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광기로군. 최소한 베르스가 건물 쌓아 올리는 속도 하나 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는 엄청난 수의 악단이 줄지어 서서 평화 회담을 알리는 우렁찬 팡파르를 끝도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암살에 대비해서 참가국의 정예부대들이 건물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경계 역시 누가 담당하느냐를 두고 신경전이 대단해서 결국 결정된 포지션은 다음과 같았다. 동-알테어 님이 지휘하는 콘스탄트 교황청의 성 아우리엘레 신전 기사 연합 서-키르케 님의 콘스탄트 왕당파 임모탈 제7무장전투여단 남-미 레일 경이 지휘하는 이오타의 인트라 무로스 특무대 북-라이오라 씨의 마키시온 제국전위대 프론티어 뱅가드 대단해! 굉장하다! 유사 이래 이런 꿈의 방어벽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세상 누가 와도 암살은 불가능할 것이 분명하다. 아니, 그보다...... ‘......애당초 이런 상황에서 암살을 시도할 얼간이가 있기나 할까.’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람 기죽이는 저 철벽 방어진을 바라봤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가 다가오며 담배를 여유롭게 물고 있는 얼굴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준비는 되었나, 엔디미온 군.” “아이히만 대공!” 어째서 절 지명한 겁니까! 이 악취미 할아범! 그가 말했다. “회담이 시작되면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4대 수장과 회담 진행자인 국왕 전하...... 그리고 시중을 들 수 있는 자네뿐이네. 회담이 시작된 이후부터는 누구도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어.” “저, 정말요?” 믿어지질 않았다. 일단 4대 수장이야 회담 당사자들이니까 꼭 들어가야 하고 국왕 전하 역시 중립적인 진행자로서 필요하다고 쳐도, 어째서 나머지 한 명이 나야? 내가 그렇게 대단한...... “대단치 않기 때문이야.” 아주 딱 부러지게 말씀하시는군요. “당연히 아신들은 참석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목표를 죽일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카론 군 같은 일류 기사들 역시 참석할 수 없어. 중립국의 기사라고는 하지만 매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거든.” “카른 경은 매수될 사람이 아니라고요.” 난 좀 불쾌한 심정으로 삐죽거렸지만 대공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걸 무슨 수로 장담하지? 세상에는 너처럼 상대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아무리 사소한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경호의 기본이다." "......사람 믿는 착한 젊은이라서 죄송합니다." "즉 어떤 경호도 없는 것이 최상의 경호가 되어 버린 게다. 건물 밖에서는 아신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누구도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지. 반면 건물 안에는 상대를 암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어떤 누구도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하지만 너처럼 암살은 절대 못할 녀석이라면 시종으로 적격이다." 그렇군. 이제야 대충 이해가 간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은...... "그런데 왜 하필 절 지명하신 거죠? 다른 시종들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러자 아이히만 대공은 내 머리에 손을 없으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거야 네 녀석이 귀여우니까, 기왕이면 보기 좋은 떡으로 손이 가는 법이지." "그, 그거 영광이네요." 하필 떡...... 머리가 꽉 눌려버린 난 눈썹을 가늘게 떨며 짜내듯이 말했다.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아무런 힘도 없는 예쁜 떡이라서 뽑혔다는 겁니까! "허허, 괜찮아. 의기소침할 것 없어, 그건 카론 군에게도 없는 능력이지 않은가." ...... 있는 것 같은데. 카론 경, 알게 모르게 꽤 위협적이라고요.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이유고." "예?“ 대공이 담배를 비벼 끄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이 회담 내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는 녀석이 바로 너다." “......” “그 내용을 귀를 씻고 똑똑히 들어 뒀다가 내게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도록.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그래서 내가 자넬 저 안으로 들여보내는 거야.”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하자면 나는 대공의 밀정! 아신들조차 참여할 수 없는 초기밀 회담 내용을 캐치하는 녹음기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아이히만 대공은 나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한껏 담으며 격려해 주었다. “한마디라도 놓쳤다간 쏴 죽여 버리겠네. 알아들었지, 엔디미온 군?” “아하하하. 기,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나는 파랗게 질린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21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은 엄중한 경호와 함께 이오타의 대표가 나타났을 때였다. 나 역시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본래 나타나야 할 사람은 이오타의 국왕 빌헬름 블룸버그였지만, 저건 쇼메잖아! 여기 온 사이에 왕으로 등극이라도 한거냐! 그러나 여전히 화려한 셔츠와 선글라스로 치장한 쇼메는 당황하는 사람들 앞에서 선글라스를 반쯤 내린 뒤에 특유의 아니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몸이 좀 아프다고 해서 말이지, 이 몸이 대신 오게 되었다. 꼭 왕만 참가하라는 법은 없잖아?” 뭐, 뭐야. 저 비(非)왕족스러운 말투는! 엄청 불량해 보이잖아! 그리고 하필 평화 회담 당일 빌헬름 국왕이 아프다면서 대타를 내보낸 거야? 꿍꿍이는 알 수가 없지만 누가 들어도 믿기 힘든 거짓말이지 않은가. ‘대체 속셈이 뭐야.’ 이것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수장들의 회담이다. 쇼메 말마따나 무조건 최고 통치자가 참석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왕이 아닌 왕자라면 분명 이 중요한 자리에서 발언권이 떨어지게 된다. 나도 알고 있는 그런 간단한 외교 상식을 저 잘난 쇼메가 모를리가 없건만, 일부러 이런 해프닝을 저지른 쇼메 왕자의 저의를 알 길이 없었다. ‘......뭐 내가 알 필요도 없지만.’ 차를 맛있게 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금의 나와는 별 인연 없는 일이리라. 한편 아이히만 대공은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후후. 이런 건방진 애송이 녀석이’ 라는 노련한 눈빛으로 쇼메를 바라보고 있었고, 쇼메 역시 ‘슬슬 은퇴하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라는 시건방진 시선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분명히 예전 쇼메가 대공에게 암살자를 보낸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리고 대공은 쏴 버렸고.하아, 정말이지 지나치게 다정다감한 사제관계로군. 국왕을 대신해서 참석한 쇼메는 자신을 탐탁찮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회담장 입구로 향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내가 가장 잘났어’ 라는 저놈의 엄청난 자신감은 가끔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럼 지금부터 회담장 정문을 개방하겠습니다!” 커다란 종소리가 울리며 비둘기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입구에 사열해 있던 제복의 소년들(귀족 자제들임)이 입구를 봉인하던 황금 사슬을 풀었다. 아침 햇빛에 반짝거리는 사슬이 차르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카펫을 밟는 첫번째 입장객은 쇼메였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응?” 나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아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쇼메를 마중하기 위해 문 앞에서 걸어오는 소년의 몸이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로 늘어나고 있었다. 제복을 찢고 툭툭 근육이 터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뭐, 뭐야!” 예전 이자벨 님에게 근육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암살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실로 순식간이었다. 좌중의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변신’ 을 마친 암살자가 쇼메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가 입 속에서 꺼낸 얇은 단도는 놀랍게도 식도 속에 감춰둔 것이었다. 설마 정말로 이럴 때 암살을 노리는 놈이 있었다니! 다급한 고함소리가 터졌다. “쇼메 왕자를 보호해라!” 쇼메와 암살자와의 거리는 채 십보(十步)도 안 된다. 그것은 1초안에 단도가 쇼메의 심장을 관통할 거리, 설령 위험을 무릅쓰고 총을 쓴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쇼메는 검 한 자루 없는 무방비의 상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사람들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빛의 칼날들을 보았다. “......!” 그것은 수천, 아니 수만 개로 이뤄진 빛의 파편들이었다. 공간을 어지러이 찢어내는 셀 수 없는 광인(光刃)들이 일시에 암살자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그 칼날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키만큼이나 길고 얇은 검을 뽑아든 명주작, 알테어 님이었다. 그녀의 등에 돋은 빛의 날개는 방패처럼 몸을 감싸고 있었고, 검신은 그 자체가 시퍼렇게 불타오르는 광채였다. 그녀는 굳게 다문 입으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여, 역시 명주작이야. 불패의 여신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탄식에 가까운 경탄을 내뱉었다. 알테어 님은 가장 멀리 있었지만, 암살자를 저지하는 것에 거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그런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일순간 수만 번의 검격이 휘몰아친다는 그녀의 검술에는 사각(死角)이 없다. 어떤 검술사도 불가능하다는 완전 공격과 완전 방어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은 알테어 님이 처리한 암살자를 보며 또 다른 탄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알테어 님을 잘 알고 있는 나 역시 저분의 검술이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암살자를 죽이지 않았다. 어떤 치명상도 입히지 않은 채 움직이거나 자살할 수 없도록 심줄을 베는 것으로 완벽하게 제압했던 것이다. 실로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는 검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쇼메 전하.” 어느새 쇼메 앞을 막아선 훤칠한 사내는 예전 이오타에서 본 적이 있던 미레일 경이었다. 쇼메는 도리어 알테어 님의 검술을 본 것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후후. 명색이 세계 평화 회담인데, 이 정도 환영인사는 있어줘야 흥이 나지.” 그리고 그 순간 미레일 경의 칼을 뽑은 쇼메가 암살자의 목을 잘라버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바닥을 굴렸다. 저런 지독한! 난 흠칫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 지루함을 달래준 것은 고맙지만 감히 천민 주제에 내 목숨을 노리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군.” 난 솔직히 그 뒤틀린 기백에 주눅이 들어 눈매를 찡그렸다. 쇼메는 지나가다 벌레를 밟았다는 듯이 다시 회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통 이런 일을 겪었다면 회담이고 뭐고 당장 철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쇼메는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런 그를 막아선 것은 바로 알테어 님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빨리 죽여야 할 이유라도 있었나요?” “하하. 나는 내게 칼을 들이댄 자를 오래 살려두지 않는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분명 쇼메였다면 붙잡은 암살자는 고문을 해서라도 누가 지령을 내렸는지 밝혀냈을 것이다. 알테어 님이 곧바로 반문했다. “곧 평화를 논할 분의 변명치고는 조악하기 그지없군요.” “그 말은, 지금 내가 나를 죽이라고 암살자를 고용하기라도 했단 의미 인가?” “그건...... 모를 일이지요.” 그녀의 에메랄드 및 눈매는 항상 헤헤 웃고 다니던 순진한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서슬 퍼렇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무서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던 쇼메가 불현듯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명주작, 그 화려한 검무, 잘 감상했소. 지금까지 그 검으로 죽인 자가 수만 명은 넘을 테지요?” “이런, 실례되는 말을 한 건가요?” 이런 망할 쇼메 녀석! 그게 자신을 지켜준 사람에게 할 소리냐! 그런 상처 받을 말만 골라서 하다니! 나는 알테어 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 그녀가 검을 뽑지 않으려는 이유는 검을 뽑는다면 누군가 상처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빛 무리를 흘리는 자신의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날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저 눈빛은 분명 패턴 C, ‘힘들어, 미온 군과 같이 있고 싶어’ 잖아! ‘어, 어쩐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웃음을 보이며 조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와하하하! 힘든 일일랑 다 잊어버리고 제 품에 안기세요! 알테어 님!’ 이라고 외쳤다간 10초간의 달콤한 낭만 후에 나는 참수당하고 알테어 님은 끌려간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뭐야? 지금 명주작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라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알테어 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은 위로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요. 제 입장도 헤아려 주세요. 한참 동안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그녀는 내가 쓰윽 고개를 돌리자 실로 풀이 죽은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난 말없이 제자리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문득 그녀가 내 고객이었을 때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내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줘. 그것은 내 위로에 그녀가 꺼낸 말이었다. 그녀는 취해 있었고 가슴 아플 정도로 절실하게 내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과는 다른 것이라서 공식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믿음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나는 두 손을 입에 모아 소리쳤다. “알테어 님! 힘내세요! 절대로 혼자 아니니까! 제가 계속 같이 있을 테니 까요!” 하필 종소리도 팡파르도 사라진 정적 속에서 터진 미성의 목소리는 회담장 앞을 커다랗게 울렸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몸을 돌렸고 나는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녀의 물기어린 두 눈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와버렸다. 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뭐? 계속같이 있겠다고? 저 녀석이 명주작의 숨겨둔 남자야? 라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이제 어쩌려고 그래, 미온 군? 털썩 무릎을 꿇은 내 옆에서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 대공이 중얼거렸다. “자네 미쳤나?” “......죽여주시와요.” 엔디미온 키리안, 향년 21세, 제 발로 교황청 지하실을 선택한 의로운 청년이었다. 22 나는 그 즉시 검은 두건을 쓴 이단 심문관들의 손에 의해 교황청 고문실로 압송되었다. 사람의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가는 음습함 속에는 오래된 피비린내가 원념(怨念)처럼 떠돌고 있었다. “감히 성기사 알테어 경을 넘보고도 곱게 죽을 거라 생각했나? 빨리 걸어 !” 어둑한 복도 사방에서는 내 비극적 미래를 암시하는 비명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어떤 고문을 받기에 저리도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까. 나는 내 상상력을 도려내고 싶었다. 다리가 너무도 떨려 와서 두 팔을 잡아챈 심문관들에게 질질 끌린 나는 가장 깊고 무서운 곳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살려달라는 절규조차 부질없다는 생각에 나는 파랗게 질린 입술만을 떨었다. “당신, 결국 여길 오게 되었군요.” 하필 내 살을 발라낼 장본인은 예의 이단 심문관 나스타세였다. 여전히 작은 키의 그는 옷이 벗겨져 사슬에 묶인 나를 바라보며 은빛의 메스를 들었다. 사무적인 목소리 이면에 차가운 광기가 느껴졌다. “엔디미온 경, 그거 아십니까? 기술적으로 배를 가를 수만 있다면 내장의 절반 이상이 밖으로 나온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죽지 않는 답니다. 물론 성자조차 신을 저주하게 되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말입니다. 부디 참지 마세요. 계속 비명을 지르는 것이 조금은 견디기 수월할 겁니다.” “그, 그만워!” “그래요. 그렇게 비명을 지르세요.” 메스를 든 그의 손끝이 주저 없이 내 새하얀 가슴으로 다가왔다......는 호러한 전개는 물론 전혀 없었다. 나는 정말 죽거나 혹은 나쁜 줄로만 알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런 문책도 없이 회담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전혀 벌을 받지 않는 것도 좀 불안해.’ 갑자기 교황청이 ‘에이, 그런 남녀 관계 정도는 애교로 봐줘야지’ 라는 오픈마인드를 갖게 된.....것일 리는 없다. ‘그럼 어째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를 타며 힐끗 회담 테이블을 훔쳐봤다. 거대한 옥석을 통째로 조각해서 만든 테이블에는 이미 교황을 비롯한 4대 대표자들과 진행자인 만든 전하가 착석해 있었다. 그야말로 백화가 요란했던 회담 전과는 달리 정작 회담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긴장될 만큼 고요한 공기만이 맴돌았다. 이 넓은 회담장에 오직 다섯 명만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임금님만은 이 엄숙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뭐하고 있니, 엔디메론 경. 어서 차 가져오지 않고.” 엔디미온이라니까요! 게다가 그 오호호호 목소리는 또 뭔가요?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차를 손수레에 담아 가져와 테이블로 옮겼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차를 대접하는 내 우아한 손동작과 정숙한 예법은 그야말로 접대 예술의 결정체라서 트집쟁이 쇼메조차도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다(정말이다. 키스도 칭찬해 줬다). “자네가 바로 그 스왈로우 신전기사단의 엔디미온 경이로군.” “그렇사옵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내게 말을 던진 분은 바로 신자들이 돌아가신 부모님보다 더 보고 싶어 한다는 콘스탄트 교단의 영적 지도자이자 수석사제(首席司祭)이자 교황청의 총대주교(總大王敎)이자 남부 콘스탄트의 원수(元首)이자 교황 레오 4세였던 것이다. 나는 황송함이 묻어나오는 가지런한 미소와 함께 청명한 목소리로 나 자신을 소개하며 허리를 사뿐히 숙여 보였다. 물론 속마음은 다음과 같았다. ‘서, 설마 이제 와서 내 귀여운 알테어에게 찝쩍댄 놈이 바로 네 놈이었냐! 라면서 머리끄덩이를 붙잡지는 않겠지?’ 이 신성한 교황 성하의 찬란한 외모는 그러니까 음...... 임금님의 형님? 이런 말은 신성모독이겠지만 임금님이 만두 가게를 운영한다면 교황 성하는 그 옆에서 빵집을 운영하면 딱 어울릴 것 같다...... 라는 말을 밖으로 내뱉었다간 난 정말 이단 심문관 나스타세 군과 고문실에서 감동의 조우를 하게 될 것이다. 이윽고 빵집 아저씨 아니, 교황 성하께서 근엄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성기사는 순결한 신의 사도들이네. 그런 성기사와 함부로 접촉한 이성은 극형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알테어 경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이번만큼은 벌하지 않겠네.” “성하의 하해 같은 은덕에 탄복했나이다.” 신전기사단 소속인 내게 최고 사령관이기도 한 교황 성하에게 나는 극도의 경어로 보답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튼 교황 만세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뭐 그런 일 가지고 그래? 라고할지도 모르겠지만 오직 성전(聖戰)을 위해 존재하는 성기사들의 순결성이란 무지하게 엄격한 것이라서 명랑한 연애 생활 같은 것을 즐겼다간 당장 파문당한 뒤에 교황청 고문실을 풀코스로 체험하게 된다. 그런 집단의 리더인 알테어 님이 실은 '미소년의 숲 VIP' 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아무리 참을 인 자를 문신으로 새기고 다니는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당장에 치도곤을...... “하지만!” “예?” 갑작스럽게 교황이 날 쏘아보자 난 곧바로 표정이 굳었다. 성하께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행여나 내 귀여운 딸을 넘볼 생각은 하지 말게나. 내 거라고. 후후후.” “......” 내 존경심이 제로를 향해 미친 듯이 치닫기 시작했다. 레오 4세 일흔하나, 진짜 신앙심 없는 교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애당초 댁의 딸이 아니잖아! 그런 수상한 드레스를 알테어 님에게 줬을 때부터 정상인이 아닐 거라 의심하고 있었어! 아무리 남들 하면 불륜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지만, 그렇게 세속적인 마음가짐으로 신도들에게 교리를 설파하고 있으면 어딘가 굉장히 찔리지 않아? 이 사이비 교주! ‘분명...... 오르넬라 님의 스승이랬지?’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설상기상...... 아니, 청출어람? 항상 오르넬라 성녀님의 그 독실한 파탄적 성격이 어디에서부터 형성되었는지 궁금했었는데,그 의문이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다. “예쁘지?” “네?” “내 딸, 예쁘지 않아?” 이 눈빛, 진심이잖아! 나는 왼쪽 입 꼬리를 실룩거리며 석고상같은 미소를 지었다. “무, 물론이옵니다. 아, 아름다운 따님을...... 두셔서 참으로 행복...... 하시겠습니다.” 당신 자꾸 이러면 지옥 떨어져! “내 삶의 낙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너 같은 녀석 에게 빼앗길 수 없지. 후후.” “다, 다시는 찝쩍거리지 않겠사옵나이다, 장인어른. 아니, 교황 성하.” “특히 내가 준 드레스를 입고 정원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차 식겠습니다...... 성하.” 이 만담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나는 ‘있지도 않은 딸내미 얘기는 집어치워!’ 라고 광분하며 테이블을 뒤엎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알테어 님. 집에 돌아가시면 벽에 구멍이 있는지 꼭 확인해 보세요. 이 양반, 엄청 데인저러스해요. “평화 회담...... 오늘 중에 시작하기는 하는 건가.” 맞은 편 의자에 기대어 있던 마라넬로 황제가 자기 제국이었다면 모조리 불구덩이에 처넣어 버렸을 것만 같은 분위기로 나직하게 말했다. 교황을 바라보는 황제의 심란한 눈빛은 ‘지금까지 나와 자웅을 겨룬 놈이 저딴 나부랭이였어?’ 였다. 그러나 교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연신 ‘딸 자랑' 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그가 다른 수장들을 도발해서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이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말 무서운 분이다. “와하하핫! 역시 내 딸이 최고라니까!” 역시...... 단순한 색골일지도. 한참 혼자 수다를 떨다가 헛기침을 한 교황이 말을 맺었다. “알아두게. 자네를 처벌하지 않은 것은 자네가 예전 그 아이의 마음을 되돌린 것에 대한 보답이네.” “예?” 역시 교황은 내가 예전 알테어 님과 마키시온 제국에 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분명 아신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절대로 보통사람은 될 수가 없다네. 섣부른 격려는 그 아이에게 이를 수 없는 꿈만 꾸게 해준다네.” 이것은 조언이었고 경고였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우리 임금님에 버금가는 통통한 두 볼에 활짝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자, 그럼 회담을 시작합시다! 별로 평화가 올 것 같진 않지만.” 그 말에 황제가 섬뜩한 미소로 답했다. 난 비로소 엄청난 긴장감을 느꼈다. “그전에 잠깐.” 퉁명스런 목소리의 쇼메였다. 말없이 차를 마시던 그가 엄청 불량한 자세로 찻찬을 탕 내려놓으며 말했다. “더럽게 맛없네. 다시 타와.” 그럼 먹지 마! 여기까지 와서 시비냐! 그러나 가재는 게 편, 전하는 쇼메 편이었다. “메론 군, 어서 다시 타오지 않고 뭐하니?” “그, 그러겠사옵니다.” 이제는 화도 안 나, 나는 최선을 다해 다시 차를 타서 쇼메 앞에 바치며 다소곳이 말했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점, 사죄드리옵니다.” “흥! 사과할 필요도 없어. 너 따위 천민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왕족의 입맛을 맞출 리가 없지.” 그래요. 너 잘나셨습니다. 쇼메는 시건방진 표정으로 ‘천민의 맛없는 차’ 를 입에 담다가 ‘우악!’ 비명 터지는 표정으로 황급히 입을 가리고 말았다. 어찌 안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정성스럽게 소금을 다섯 스푼이나 넣어줬는데. 나는 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겸손의 말을 꺼냈다. “쇼메 왕자님 말씀대로 소인은 아무리 노력해 봐야 맛을 낼 수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이게!” 나는 활짝 웃으며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시옵소서. 소인이 최, 선, 을, 다, 해, 새로이 타오겠나이다.” 쇼메와 나는 서로를 잡어 먹을 듯이 쏘아보았다. 그래, 그래, 어린애 같다는 거 인정하지만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그 순간 천둥이 내리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거대한 테이블이 친동했다. 마치 누군가가 테이블을 쇠망치로 있는 힘껏 내리찍은 것처럼 그 굉음이 격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사람의 주먹으로 이뤄진 소리였다. “더 이상 장난칠 생각이라면 나는 지금 즉시 콘스탄트로 돌아가겠소.” 위압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북부 콘스탄트의 국왕 바쉐론 콘스탄틴이었다. 그의 몸에서 묵직한 노기가 풍겨왔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지켜보던 그는 단 한번의 대사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대, 대단한 무골이야.’ 예전 그의 아들 루체른이 그러했듯이 바쉐론 국왕 역시 무왕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통나무도 단칼에 서겅서겅 썰어버릴 것 같은 탄탄한 기골과 진중한 눈매의 소유자였다. 중년의 고독한 위엄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저런 성격일수록 여자에겐 쑥맥이다......라는 낭설을 지껄였다간 목이 날아가겠지? 그러나 바쉐론 국왕의 압도감마저도 간지럽다는 듯이 차를 음미하던 마라넬로 황제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인상적인 성질머리로구려. 댁의 형도 그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암살한 거요?” 바쉐론 국왕과 레오 교황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왕태자였던 형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내전이 시작된 것이고 그는 대부였던 교황에게나 바쉐론 국왕에게나 각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건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逆鱗)이었다. “자신의 아들들을 모조리 살해한 부덕한 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소.” 바쉐론 국왕은 싸늘한 눈초리로 씹어 먹을 듯이 으르렁거렀고, 황제는 ‘다 내가 죽인 건 아니오’ 라면서 오싹할 만큼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최소한 화목하게 평화를 논할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하던 임금님께서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이제부터 제1회 세계 평화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이번 회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불길함을 느꼈다. 23 평화 회담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지킬 권리와 의무가 있는 자들이 모여 평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면 ‘군비 감축’ 일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군대규모를 20퍼센트 축소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하거나 ‘그럼 우리나라도 30퍼센트 정도 줄이죠’ 라고 대답하는 것이랄까. 그러나 그건 이론이고 현 실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네 나라 군대 좀 줄이지?” “댁의 나라야말로.”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덕분에 몇 시간이 흘렸어도 회담은 원점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라고나 할까, 어느 지도자도 진지하게 평화를 논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예상과 달랐던 것은 쇼메였다. ‘왜 일부러 침묵하는 것일까.’ 아버지 빌헬름 대행으로 참석한 쇼메는 국왕이 아니었으므로 발언권은 거의 없다. 아무리 권한을 이어받았다고 하더라도 일개 왕자가 다른 왕들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야 없는 것이다. 실제로도 쇼메는 회담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즉 처음부터 아무런 말도 안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것은 자존심 강하고 싸움 좋아하는 쇼메답지 않은 방식이었다. 아이히만 대공이라면 이런 이오타 측의 속마음을 간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치에 약한 나로서는 도통 짐작할 길이 없었다. 몇 시간이나 겉돌던 회담 끝에 능글맞은 태도를 유지하던 교황 레오 4세가 말했다. “아무리 명분뿐인 회담이라고는 하지만 밖에서 우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하나쯤은 뭔가 합의해야 하지 않겠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진행자인 전하가 재빨리 묻자 교황은 인자한 표정으로 마라넬로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키시온과 콘스탄트가 서로 병력의 2할을 줄여준다면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들로서 체면이 서지 않겠소이까?” 북부 콘스탄트의 바쉐론 국왕 역시 동의한다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곧바로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의 체면이라. 그것 참으로 재미있는 농담이오.” 그렇게 운을 띤 황제는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이며 그 시퍼런 시선으로 교황을 바라봤다. 참으로 가소롭다는 기운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당신들 콘스탄트의 병력이 모두 합쳐 80만은 되오? 과인의 제국은 정규군만 100만이 넘소. 그런데 똑같이 2할을 줄이자고? 그쪽이 16만 명을 축소하고 본인은 20만 명을 줄인다는 것은 별로 공정한 ‘거래’ 라고 생각되지는 않소만.” 그렇다. 교황은 처음부터 ‘진정 평화를 걱정하는’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었다. 현재 내전 중인 콘스탄트의 병력은 남북 모두 합쳐 80만 가량이고 마키시온 제국은 무지막지하게도 100만 대군이 황제의 발밑에 있다. 똑같이 20퍼센트를 줄이자는 교활한 제안을 황제가 납득할 리가 없었다. 황제는 그 술수에 곧바로 보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과인도 세계 최강국의 지배자로서 당신네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은 뜻이 없는 것도 아니고. 뜻대로 제국군 20만 명을 줄이겠소. 어려운 일도 아니지.” 물론 진심으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 수 있었다. “단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과인의 백성 20만 명은 실업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니까 그걸 책 임져 주시오.” “지금 책임이라고 했소?” “내게 감히 그런 요구를 할 생각이라면 응당 그 정도쯤은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일인당 최소 연간 금화 열두 닢 정도는 있어야 할 테니 일 년에 사십팔만 닢을 내게 바친다면 당신들의 뜻대로 내 2할의 군대를 줄이도록 하겠소이다.” 맙소사. 이건 조공(朝貢) 요구잖아. 완전히 속국 취급이었던 것이다. “지금 장난하는 거요!” 바쉐론이 무섭게 발끈하며 소리쳤지만 황제는 도리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장난으로 들었소? 과인으로서는 꽤 자비를 베푼 제안이라 생각 했소만? 그럼 나도 평화를 위한 제안을 하나 하지. 백성들만 헐벗게 만드는 그 시시한 내전이나 한시 빨리 끝내시오. 그렇게 서로 싸우며 국력을 약화시켜서야 언제 내게 도전해볼 기회나 오겠소?”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의 나라를 조각내는 것은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야 말 테니 그 전에 늙어 뒈지지나 마시오.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당신의 황성에 입성해서 당신의 옥좌에 앉아 당신의 술을 마시며 당신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감상한 뒤에 당신의 첩들을 품에 안고 당신의 침대에서 잠들 것이오.” 무인(武人) 그 자체인 바쉐론 국왕의 눈매에 서슬 퍼런 살기가 맺혔다. ‘펴, 평화는커녕 사태만 악화되고 있잖아!’ 별로 좋은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일회전부터 험악해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쇼메는 계속 하라는 눈빛으로 비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대로라면 당장 세계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전하! 뭐하고 계세요! 진행자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중재해야 하잖아요!’ 내가 다급하게 전하를 바라보자 그는 믿음직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전하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이 상황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수장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동시에 전하를 바라봤다.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마저도 모르는 ‘묘안’ 을 전하가 생각해냈단 말인가? 나 역시 자색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멍하니 지켜봤다. 우리 임금님은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마키시온 제국은 군대를 줄이자니 자금이 필요하고 콘스탄트 왕국은 마키시온 만큼 군대를 줄일 수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라는 표정들로 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 있게 발표한 전하의 묘안은 다음과 같았다. “그럼 황제께서는 딱 잘라서 20만 명을 콘스탄트에 용병으로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들 해보세요. 황제께서는 놀고 있는 병력으로 돈을 벌 수 있어서 좋고! 콘스탄트는 안 그래도 내전 중이라 부족한 병력을 보강할 수 있어서 좋고! 아, 이거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줍고,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장사가 아니겠습니까요. 왓핫핫핫!” 오늘은 국왕 전하께서 얼간이들의 지존으로 등극하시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임금님은 이런 말을 꺼낸 자신이 무지 자랑스러운지 자지러지게 웃으며 ‘좋죠?네?’ 라고 사람들에게 아양을 떨고 있었다. 그래봤자 지도자들의 시선은 급속도로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냉랭해진 분위기에 기가 죽은 전하가 거북이인 양 어깨를 움츠리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싫으세요?” 나는 오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라는 속담이 어째서 생겨났는지 알 수 있었다. 바쉐론 국왕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희롱당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지금 나보고 마키시온의 군대를 받아들이라는 거요?” 적대국의 군대를 용병으로 받아들이라는 제안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냥 이참에 침략당하세요’ 정도랄까. 회담 중에 오갔던 많은 모욕들 중에서도 이것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던 것 이다. 아이히만 대공에게 보고할 대사는 이제 딱 하나뿐이다. 대공, 전하께서 친히 회담을 말아먹으셨습니다. ‘누가 상황을 중재하라고 했지 엿 먹이라고 했던가.’ 나는 ‘당신 지금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거지!’ 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하의 통통한 볼을 마구 두들겨 주고 싶은 강대한 살의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일개 약소국의 왕으로부터 군대를 나눠 쓰라는 조언까지 받게 되자 분위기는 채찍 맞은 말처럼 전력을 다해 파멸로 치닫기 시작했다. 전하가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애처로운 눈빛은 내게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메론 군! 어떻게 좀 진정시켜 줘!’ ‘제가 무슨 힘으로요! 그리고 메론 아니라니까요!’ 이미 이건 접대의 신이 강림한다고 해도 풀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어봐야 분노한 수장들에게 이 나라가 불바다가 되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죽고 싶은 심정으로 또 한번 목숨을 걸어야 했다. “외람되지만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테이블 앞에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바쉐론 국왕이 매서운 눈초리로 날 응시했다. “이 나라는 시종도 허락 없이 입을 놀리나! 썩 물러가라!” 무, 무섭다. 역시 키르케 님을 부하로 둔 지도자다워.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곳이 없었다는 것이 좀더 올바른 표현이겠지만. “미천하나마 제 목을 걸고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소인의 이야기를 들어주신 뒤에 목을 쳐 주시옵소서.” 카론 경에게 오염된 것일까? 나는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의연하게 말했다. 내 모습에 바쉐론 국왕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디 말해봐라. 그러나 어설프게 네 주군의 실언을 얼버무리려는 생각이라면 입을 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꺼낼 말이 전하가 했던 말보다 지배자들의 기분을 훨씬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회담을 계속 지켜본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며칠 전 아이히만 대공이 제게 말했습니다. 이런 평화 회담이 백 번 열려도 평화는 결코 이뤄지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애당초 지배자들이 평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라고.” 내가 목숨을 걸고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평화 회담이 시작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지배자님들과는 달리 겁 많고 나약한 보통 백성들은 이 땅에 평화가 찾아와 주길 기원했을 겁니다. 일거리도 없고 굶주림에 지쳐 지도자가 자신에게 조금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어느 도시의 백수가 기원했을 테고, 목숨을 걸고 전선을 지키고 있을 어린 병사가 기원했을 데고,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미망인이 기원했을 테고, 적에게 잡혀 하루하루를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을 포로들이 기원했을 테고...... 저 역시도 기원했습니다.” “무슨 발을 하고 싶은 건가.” 나는 조용히 하지만 바쉐론 국왕과 참석자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그것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명분뿐인 평화 회담이라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심으로 평화를 생각해 주길 바란 것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사람들의 공연한 기대일 뿐이었습니까?” 사실 나는 아까부터 화가 나 있었다. 평화 회담을 통해서 우리 왕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도 좋고 강대국 지도자들이 세력 과시를 하는 것도 좋다. 정치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평화' 가 빠져버린 평화 회담이라는 것은 단지 웃을 수 없는 희극일 뿐이었다. 나는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마지막 말로 이야기를 마쳤다. “지도자성들께서는 방금 전 전하의 실언에 대해 어처구니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지도자님들도 어처구니없게 보입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할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평생 한 번도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무지렁이도 할 수 있는 당연한 말,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그 당연한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말했다. 목숨을 걸고.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자는 쇼메였다. 커다랗게 웃으면서. “하하핫! 역시 천민이 꺼낼 만한 약해빠진 논리로군. 목숨을 걸고 기껏 한다는 얘기가 그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상주의였냐?” 나는 울컥 화가 나서 그를 쫓아보았다. 어째서 네 녀석은 남이 목숨 걸고 하는 말까지도...... “그래도 나름대로 그럴 듯했어. 그러니까 그 말이 아니라 의지가. 풋내기 주제에 제법 무게 잡을 줄 아는군. 동의할 수는 없지만 동정은 해 주마.” 나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쇼메가 (여전히 반쯤은 비아냥거림이지만) 내게 호의적인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또한 마지막일 것이다. 황제가 백발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엔디미온 군, 내가 단 한번도 평화를 생각한 적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그, 그건......” “나도 자네 나이였을 때가 있었네. 그리고 그때는 자네처럼 말했네.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야.” 정말일까? 평화주의자 마라넬로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지. 왜냐하면 지도자는 위험한 도박에 판돈을 걸어서는 안 되고 또한 지도자는 주저하면 안 되기 때문이야. 하지만 평화는 위험하고 또 주저하게 만든다네. 평화는 이상이고 이상은 실존할 수 없기에 이상이야. 알아듣겠나? 지도자에게 평화란 전쟁보다 훨씬 두려운 존재라네.” 솔직히 정치고 철학이고 문외한이라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교황 성하는 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엔더미온 군, 만약 자네가 죽어서 신 앞에 서게 된다면 신께서는 분명 이렇게 말씀하실 거네. 온 세상이 부조리해 보이겠지만 나도 할 만큼 했으니까 제발 내게는 설교하지 말아주게, 라고.” “아하하하.” 역시 오르넬라 님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당신이었군요! 나는 묵직하게 침묵하고 있던 바쉐론 국왕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이제 소인의 무례함에 대한 처분을 받겠습니다.” 그가 불쾌한 듯이 대답했다. “자네 비겁하군.” “예?” 내가 국왕의 따님을 납치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자네를 죽이면 나는 평화를 하찮게 아는 잔인한 폭군이 될 테고 죽이지 않는다면 자네의 말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지 않은가.” 듣고 보니 그러네? 아아, 난 정말 비열한 놈이구나......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전자보단 후자가 낫겠지.” 국왕은 칭찬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을 꺼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야 부모님에게 꾸중들은 기분이로군. 이제 됐으니까 차나 타오게.” “예!”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아, 부모님. 아들은 오늘도 살아남았답니다 역시 하늘도 불쌍한 날 도우시어 기적을 일으켜 주셨구나! 라고 막 방심할 찰나였다. “응” 나는 머리 위로 먼지가 떨어지는 것을 알고는 천정을 바라봤다. 흙가루들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그새 먼지가 쌓였나? “지금 왠지 바닥이 살짝 떨린 것 같은데......” 교황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작은 진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순간 '우지끈!' 하는 의문의 굉음이 울렸다. 그건 그러니까 잘 익은 오이를 뚝 부러트리는 소리를 한 5천 배쯤으로 증폭시킨 소리였다. “우, 우지끈?” 회담장의 지붕은 여신들을 우아하게 조각한 굵직한 돌기둥 여덞 개가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중 하나가 두 동강이 나서 우리들 앞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우리는 허리가 분질러진 행복의 여신이 굴러다니는 모습을 허망하니 지켜왔다. 진동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순간 아주 불길한 예감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부실 공사?” 아니, 뭐 이런 막 되먹은 경우가! 나는 눈샘을 가늘게 떨며 전하를 바라봤다. “전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그러나 임금님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무너진다! 모두 피해!’ 라고 고함치며 막 문밖으로 뛰쳐나가시는 중이었다. 세상에, 저렇게 다리가 빨랐던가......는 둘째 치고 정말 미워 죽겠어! 곧이어 평화의 여신과 희망의 여신과 수호의 여신이 차례대로 허리가 와드득 끊어져서는 무너져 내렸다. 나는 머리 위로 눈처럼 떨어지는 흙먼지를 맞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환장하겠네.” “왕국에 돌아가는 대로 이 나라에 대한 평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네!” 바쉐론 국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교황 성하 역시 ‘이 나이에 뛰면 몸에 안 좋은데’ 라는 맥 빠지는 말씀을 흘리시며 문을 향해 내달렸다. “허허허. 이것이 암살시도라면 계획한 녀석을 칭찬해 주고 싶군. 매몰이라니, 참으로 상큼한 발상이야.” 마라넬로 황제는 도리어 재미있는지 콕콕 웃으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짜 배짱 장난 아니었다. 한편 쇼메는 서있기 힘들 정도로 건물이 흔들리고 있는 데도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양반 왜 이래! “역시 맛없어, 이놈의 차.” 그럼 한잔 더 타줄까!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쇼메가 찻잔을 바닥에 확 집어던지며 분노 폭발한 얼굴로 일어서서는 내 멱살을 잡아쳤다. 처음으로 그의 오만방자한 마이페이스가 무너졌다. “야! 네놈의 나라는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냐!” “나, 나보고 어찌라고요!” 이 건물, 내가 안 지었어! “이 망할 놈의 부실 공사 때문에 내가 세운 계획이 모조리 물거품......” 뭐? 계획? 하지만 곧 쇼메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제 몰라. 될 대로 되라지’ 라고 중얼거리며 갑자기 내 어깨와 허벅지를 잡아 번쩍 들었다. 아무리 내가 가볍다고는 하지만, 진짜 힘 좋네. 아니 그것보다! “지,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닥쳐. 나도 지금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쇼메는 내가 전력으로 뛸 때보다도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쏜살같이 뛰쳐나가 문을 빠져나갔고, 그 순간 회담장은 완공 삼일 만에 찬란하게 붕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제1차 세계 평화 회담은 결렬되었다. 결렬 사유 : 부실공사 24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정말 별 일이 다 생기는 법인가 봐. 때로는 쇼메의 도움도 받고 말이야.’ 쇼메 왕자 덕분에 아무런 상처도 없이 살아남은 나는 제복의 먼지를 털자마자 쪼르르 행정부본채 ‘용의 굴’ 로 달렸다. 이 스펙터클한 회담을 대체 어디부터 보고해야 할지 난감해 하면서. 그러나 대공은 본채에 없었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던 대공의 비서가 말했다. “대공께서는 지금 대(大)목욕장에 계십니다. 엔디미온 경이 오시면 그곳으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예?” 근무 시간에 목욕하실 분이 아닌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목욕장으로 향했다. 나야 보고도 하고 잔뜩 흙먼지를 뒤집어 쓴 몸도 씻고 좋지 뭐. 왕실에는 수많은 목욕시설들이 있는데(리더구트 지하에 있는 목욕탕도 그중 하나다) 그중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시설을 가진 것이 바로 대목욕장이다. 수많은 목욕실들로 이뤄진 그곳은 아랫사람에게 맨몸을 보여줘서는 안 되는 왕족을 제외하고(솔직히 임금넘의 알몸은 내 쪽에서 보고 싶지 않다) 상위 귀족들과 고관대작들이 이용하는 곳이라고...... 키스에게 들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카론 경이나 키스 경 정도라면 모를까 실은 하급 기사인 나는 이용 못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높은 사람이 '초대' 한 경우에나 출입할 수 있다. “스왈로우 나이츠의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대공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향초 냄새 가득한 입구에서 나는 정장을 입은 데스크의 아가씨에게 말했다. 아니, 이거 무슨 사교 클럽에 온 것 같네. 그녀가 안경을 올려 쓰며 미심적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어, 이곳은 남녀혼욕은 안 됩니...... 어머? 실례했습니다.” 아뇨, 뭐. 이런 모습으로 태어난 제가 나쁜 놈이죠. 그녀는 서류철을 들춰보고는 말했다. “대공께서는 지금 전용실에 계십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25 대목욕장에는 수많은 별실들이 있고 대공의 것은 그중에서도 거대했다. 이렇게 외쳐야 했을 정도로. “대공! 어디 계세요!” 긴 금발을 틀어 올리고 수건을 걸친 나는 돌바닥에부터 올라오는 뿌연 증기 덕에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되어 걷고 있었다. 목욕탕에서도 조난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끼면서. “여길세. 어서 오게.” 나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탓에 대공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아아악!” 첨벙 발을 헛디뎠는가 싶더니 나는 그만 욕탕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계란이 익어버릴 만큼 뜨거운 욕탕 말이다. “우아앗! 뜨거어어어어어어!” 나는 곧바로 승천하는 용의 기세로 물 위로 솟구쳤다. 내 앞에서는 물벼락을 맞은 아이히만 대공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가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자네는 항상 이런 식으로 목욕탕에 들어오나?” “대공께서는 항상 이런 펄펄 끓는 물에서 목욕하세요?” “남자가 이런 것도 못 참는 게야?” “......어째서 참으면서 목욕해야 합니까.” 엉덩이가 홀라당 익어버릴 것 같단 말입니다! 조그맣게 궁시랑 거리고 있는 나를 대공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호오, 신기하구만.” “뭐, 뭐가요?” 난 내 몸을 훑어봤지만 신기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쪽도 같은 색이었군.” “다, 다, 다, 다, 당연하잖아요! 별 걸 가지고 다 신기해하시네요!”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는 황급히 물속에 몸을 담갔다. 항상 생각하는데, 저놈의 악취미가 대공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나는 고개를 돌린 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 소설...... 전 연령 대상이라는 것만 잊지 말아주세요.” 뜨거워 죽겠는데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 “자, 그럼 보고하게.” 금방 진지한 눈빛으로 돌아온 대공은 그렇게 말하면서 근처에 있던 담배를 피워 물었다. 세상에, 목욕탕에서도 담배를 피우다니, 그러다간 일찍 죽어요...... 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오래 살고 있지만. 나는 보고를 올리기 전에 충고부터 했다. “제가 하는 말 들으시고 절대 화 내시면 안돼요?” “응? 무슨 말인가?” “가령 전하를 쏴 죽이신다거나, 전하를 도끼로 내리찍으신다거나, 전하를.......”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지.” 나는 임금님이 오늘 중으로 유명을 달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보고를 시작했다. 26 아이히만 대공은 담배를 피워 문 채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서 결론은...... 무너져 내렸다?” “네.” 나는 한숨과 함께 대답하며 보고를 마쳤다. 이 세상 어떤 평화 회담도 ‘결론은 붕괴’ 로 끝난경우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더 있어서도 안 되고! 보고를 듣자마자 아이히만 대공은....... “내 이놈의 임금을 그냥!” 이라고 외치며 뛰쳐나갈 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천천히 담배 연기만 뿜는 것이 아닌가. “괜찮으세요?” 나는 대공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가 말했다. “엔디미온 군. 왕궁에서 네 시간 거리에 얼어붙은 호수가 하나 있네.” “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뜬금없이 호수?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곳은 겨울 낚시를 즐기기엔 제격이지.” “그, 그런데요?” “내가 할 일은 이제 끝났네. 오늘부터 일주일간 나는 휴가야.” 그는 눈을 감은 채 그렇게 말했다. 대공의 이런 태도는 무슨 이유일까. 이제 전하에 대해서는 아주 포기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뜻대로 되었다는 의미일까. “내가 왜 이 시간에 목욕을 하는지 아는가?” “모르겠는데요.”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는 이렇게 목욕재계라도 해두고 싶어서네. 물론 이런다고 부정함이 사라진다면 아무도 지옥에는 가지 않겠지만 말이야.”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뭔가 또 나는 모르는 무겁고 어두운 것이 내 앞을 지나갔던 것일까. “자네, 낚시 좋아하나? 같이 호수로 갈 텐가?” “아하하. 한번 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 묶여 있는 몸이라서.” 헤효오오. 이제부터 또 지명에 불려 다녀야 합니다요. “흥흥. 말이 기사지 노비 신세로구먼.”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그때였다. 누군가 대공을 부르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빠졌다. 첨벙 “우아아아! 뜨거워어어어어!” 내장에서 울리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물 위로 솟구쳐 오른 사람은 예의 대공의 비서였다. 그는 비싸 보이는 정장이 흠뻑 젖은 채로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아니, 난데없이 뭐야 이 사람! 대공이 황당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자네 옷 입고 목욕하는 것이 취미였나?” 역시 나만 실수한 것이 아니었군.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비서는 너무 뜨거워서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대공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 그러나 욕탕 안에서 쫄딱 젖은 정장을 입고 인사를 드리는 모습은 엄청 불쌍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대공, 무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그런 모습으로 사과해 봐야 기분만 침울해질 뿐이니까 할 말이나 하게.” “큰일입니다! 지금 마키시온, 콘스탄트, 이오타 동시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대공을 바라봤다. 그러나 대공은 이번에도 말없이 담배 연기만 흘리고 있었다. 27 급히 광장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4국의 수장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뒤였다. 비서의 보고는 정말 믿기 힘든 말이었다. 어떻게 4국 동시에 서로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1. 마키시온 제국 - 공작의 반란 2. 이오타 - 왕성 방화 3. 북부 콘스탄트 - 역병(疫痛) 4. 남부 콘스탄트 - 성물(聖物) 도난 이미 바쉐론 국왕과 레오 교황은 급히 콘스탄트로 돌아간 뒤였고 마라델로 황제와 빌헬름 국왕 역시 곧 떠날 분위기였다. 황제가 자신의 요새와 같은 마차에 오르기 전에 한쪽 무릎을 끓고 있는 라이오라 씨에게 말했다. “짐이 황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반란을 진압하게.”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오 일 주겠네. 반란에 가담한 놈들은 모두 사지를 찢어 죽이되 그 공작만은 산 채로 내 앞에 데려오게.” “분부대로 행하겠사옵니다.” 라이오라 씨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고 황제는 곧 마차에 올라탔다. 프론티어 뱅가드들이 일사불란하게 마차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끝까지 빌헬름 국왕을 보지 못했어.’ 또 다시 불길한 의문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빌헬름 국왕 대신 쇼메 왕자가 회담에 참여한 것에 대해서도 대공은 모호한 말을 남겼다. “때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큰 존재감이 생길 때도 있는 법이네.” 이 엉망진창이던 평화 회담은 단순히 강대국들의 신경전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물론 내게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접대 최전선이었지만 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혹시라도 제2차 세계 평화 회담이 열리게 된다면 이번에는 내 쪽에서 짐 싸서 도망칠 것이다. 꼭 그럴 거다! 28 폭풍이 지나간 지 이틀이 흘렀다. 나와 지명이 없는 스왈로우 나이츠 기사들은 대낮부터 추욱 늘어져서는 일 층에서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는 중이었다. 간만의 휴식에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카론 경이 내게 무려 삼 일간의 특별 휴가를 내려준 덕에 곧바로 출장을 떠나야 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녀왔습니다아아아.” 항상 그 사람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예상치 못했을 때다.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우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문 쪽을 바라봤다. 헤죽 웃고 있는 사내가 고개를 배꼼 내밀고 있었다. 빨간 눈동자나 엉켜 있는 곱슬머리나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그대로였다. 나는 이상하게도 아주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 들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들어가도 됩니까아?” 언제는 물어보고 들어오셨습니까? 손에 꽃다발까지 한 아름 들고 있는 모습은 아니나 다를까 ‘지 혼자 봄날’ 이었다. 누군 힘들어서 허리가 쪼개지는 줄 알았구만! “우아아! 키스 경! 잘 돌아왔어요!” 놀랍게도 가장 먼저 감동의 눈물을 흩뿌리며 키스에게 뛰어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쇼탄 루이 듀엣이었다. 그래, 얼마나 반가울까. 지금까지 카론 경의 호된 채찍질에 죽고 싶을 만큼 핍박받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카론’이라는 말만 들어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반사적으로 외치는 지경까지 와버린 그들이었다. 랑시 경 역시 더없이 반가운 얼굴로 키스에게 매달렸다. 물론 떡밥을 노리고. “캬하하하핫. 키스 경. 맛있는 거 사왔어? 응?” “전혀요.” 키스 경은 좌절해서 바닥에 쓰러진 랑시를 뒤로 하고 소파에 풀썩 쓰러졌다. 오자마자 잠들 생각이냐! “아아, 역시 집이 최고네요. 이제야 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아.” 당신, 지금까지도 쉬다 온 거 같은데? “키스 경,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크리스가 직접 차를 갖다 주었다. 신나게 놀다 왔으니 무사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저 꽃다발은? 키스가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레이디 미온, 이 꽃을 받아 주시오.” “닥치세요.” 귀싸대기를 한 대 갈겨줄까 보다! 남자에게 거뜬하게 꽃을 줄 수 있는 이 인간의 부모가 누구일지 심히 궁금해지는군. 나는 꽃향기를 맡으며 중얼거렸다. “꽃말이 뭐죠?” “음, 그건 말이죠오..... 에, 그러니까 꽃말은.......” 한참을 궁리하던 키스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님도 보고 뽕도 딴다, 랍니다아.”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 상대를 속이고 싶으면 조금은 성의 있는 거짓말을 하라고! “그런데 키스 경. 이 꽃, 말인데.......” “예쁘죠오?” “아니, 예쁘기 이전에.......” 이거 우리나라에 없는 꽃이잖아! 대체 어디까지 갔다 온 거야! 기사단장 키스 경이 복귀하자 스왈로우 나이츠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엄청 게을러졌고 무지하게 느긋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 딱 잘라 의욕제로였다. 키스는 돌아오자마자 황소 같은 기세로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하기는커녕 곧바로 지정 소파에 발라당 나자빠져 온몸을 부비적거리며 있는 힘껏 게으름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아아. 게을러서 너무 행복합니다아아. 아아아아. 행복해요오.” ‘...... 일 좀 해라.’ 사실 임시 단장이었던 카론 경이 예전에 밀렸던 일들까지 모조리 해왔기 때문에 키스가 당장 할 일이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 펑펑 놀다간 또 일이 쌓이게 된다고! 불철주야로 일하는 친구에게 자기 일을 죄다 미뤄놓고 미안하지도 않아? 그때였다. “카론 샤펜투스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님께서 방문하졌습니다.” “어머나 카론경? 오랜만입니다아아...... 아아아아악!” 카론 경은 들어오자마자 꼬리를 치는 키스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사무실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송골매의 형상,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순간적으로 벌어진 남치극을 지켜봤다. ‘뭐, 뭐냐 저건.’ 카론 경은 완전히 말썽 피운 고양이에게 화가 치민 모습이었다. ‘키스 경, 또 무슨 잘못 저지른 거야’ 고객들에게 밀린 편지를 쓰고 있던 나는 결국 펄펄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살금살금 사무실로 접근했다. 기사로서 할 행동은 아니지만 핀치에 몰린 키스 경의 모습이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 가 아니거든. 나는 신방을 훔쳐보는 돌쇠의 자세로 사무실 문에 귀를 댔다. 그리고 진땀나는 오 분 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둘이서 팬터마임을 하고 있는 거야 뭐야! ‘아니, 이 양반들 수화로 대화하나.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조급한 기분으로 두근거리는 그 순간! “우악!” 갑자기 문이 확 열리자 나는 사무실 안으로 두 활을 확 뻗으며 슬라이딩해버렸다. 바닥과 충돌하려는 내 머리를 탁 잡은 키스 경이 난감하게 웃으며 날 바라왔다. “어머나, 미온 경. 남의 대화를 엳듣다니요! 제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아?” 아아, 방심했다 키스 경이나 카론 경이나 내 인기척 정도는 자다가도 느낄 수 있는 초인들이었지. 참. 나는 ‘단지 당신이 궁지에 몰린 모습을 보고 싶어서’ 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거렸다. 팔짱을 낀 채 차갑게 키스를 바라보던 카론 경이 말했다. “아무튼 방금 말한 충고 잊지 마라. 아무리 너라고 해도 약점이 노출된다면.......” 응? 약점? 아니, 그보다 방금 전까지 정말 대화하긴 했어? 독심술이라도 쓴 거야? 하지만 키스 경은 여전히 딴청이었다. “아, 카론 경. 밥 먹고 갈래요?” “......키스.” 키스 경은 자신을 알아보는 카론 경을 일부러 무시하며 날 바라봤다. “카론 경은 남의 일에 너무나 걱정이 많아서 탈이에요. 그렇죠오, 메론 경?” “크아아악! 메론 아니라니까! 아? 잠깐! 당신이...... 어떻게.......” 키스는 지난 13일 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그의 셔츠 사이로 살짝 드러난 붕대를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론 경이 밖으로 나가며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던졌다. “몸이 그 꼴이 되고도 고작 한다는 말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냐. 넌 정말 뻔뻔하구나.” 그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키스는 창밖으로 리더구트의 정원을 걸어가는 카론 경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나처럼 불행한 인간은 떳떳해도 괜찮아요.” 마치 장난처럼 말하는 키스의 모습은 누구도 꺼내줄 수 없는 투명한 외로움 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제15화 똑바로 살아라 1 그러니까 이 비극의 시작은 지명을 다녀오는 열차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의 흔들림에 눈을 떴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대낮인데도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사방에는 잘 숙성된 곰팡이들의 퀴퀴한 악취로 가득했다. 춥기는 또 살인적으로 추워서 나는 여행 가방을 꽉 껴안은 채로 몸을 떨어야만 했다. 열차가 왜 이 모양이냐고? 당연하다. 여기는 화물칸이니까! 아무도 없는 커다란 화물칸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이 심정은 열차를 통째로 전세 낸 것 같은 행복의 절정...... 일 리가 없지. 나는 서커스단에 팔려가는 판다곰의 심정으로 쓸쓸히 중얼거렸다. “......시작부터 이 모양이야.” 내가 승객이 아닌 화물로 분류되어 짐짝 취급을 받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단지 그 이유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러운 눈물만 흐를 뿐. 그건 바로....... 왕실에서 사용 기간이 지난 열차표를 지급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돌아오는 날 기간이 끝나버리는 아슬아슬한 티켓을 주다니! 뭐, 남의 일에 대해서는 엄청 대충 대충 처리하는 왕실을 상대로 순진하게 ‘유통기한’ 을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면내 잘못이지만-덕분에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야 겨우 겨우 화물칸에 탈 수 있었다. 그것도 승객은 화물칸에 태울 수 없다는 역장의 완강한 거부를 ‘제발 저를 짐짝으로 여겨 주시와요’ 라는 서러운 애교로 설득한 끝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게다가 더욱 더 나의 울적함을 부추기는 슬픈 현실은, 지금 내 여행 가방 안에는 지명 비용으로 받은 엄청난 돈이 들어 있다는 사실. ‘일단 그 돈 써서 티켓을 사면 되잖아?’ 라고 생각하면 속 편하겠지만, 이놈의 공무원 사회에서 그건 자살 행위다. 어떤 이유로든 지명비에 손을 했다간 그건 ‘공금 횡령’ 이고 돈에 무섭게 쩨쩨한 왕실로부터 핀 포인트로 공격을 당하게 된다. 기간이 지난 열차표를 지급한 것에 대해서는 ‘어 그래? 그거 미안하게 됐네’ 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금으로 티켓을 구입하면 ‘법이 장난인 줄 알아? 죽어라, 범죄자!’ 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상관관계가 실은 관료주의라는 이름으로 세상 천지에 널려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계속 호스트 할 걸 그랬나.’ 나는 먹이를 달라고 격렬하게 항의하는 배를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열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다섯 시간은 더 달려야 한다. 아무리 억지로 잠들려고 해도 악독한 추위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게다가 같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커녕 날 위로해 줄 쥐며느리 한 마리 안 보여. 현실 도피를 위해 계속 ‘그녀’ 를 떠올려 봐도 들려오는 목소리라고는 ‘미온, 배고프지? 미온,춥지? 미온, 외롭지? 라는 서글픈 메아리 뿐. 헐벗고 배고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만사 다 짜증난다. “어? 저게 뭐지?” 그때 나는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나무판을 이어 붙여 만든 벽의 균열 사이로 햇빛이 어지럽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광선에 반사된 무언가가 바닥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신구?” 나는 그것을 향하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마나 열차의 화물칸에는 보통 승객들의 커다란 짐들을 쌓아 들다. 수천 벌의 옷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귀부인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부주의하게 짐을 쌓다보면 안에 있던 귀걸이나 브로치 따위가 굴러 떨어지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짝이는 작은 물체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그것은 장신구가 아니었다. “서, 설마!” 도저히 이런 곳에서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믿겨지지 않지만 눈앞에 보이는 샛노란 물체는 바로 금화였다. 그것도 성왕 하켄의 옆모습이 또렷하게 도안된 우리나라 통화(通鷺). 귀중한 금화를 화물칸에 넣어두는 바보는 없다. 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것을 들어 보았다. “정말...... 금화네.” 앞마당에서 산삼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이것과 비슷할까? 이 무슨 난데없는 돈벼락? 아아, 역시 신께서 헐벗고 굶주리고 고독해 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사 일용할 금화를 내려주...... 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흐렸다. “저것들은 또 뭐야.” 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화물칸의 한 곳을 응시했다. 떨어져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저쪽에도 금화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난 홀린 듯이 그곳으로 가서 두 번째 금화를 집어 들었다. 역시 같은 종류다. “노, 농담이겠지?” 몇 걸음 앞에 또 금화가 떨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열차의 화물칸이라는 것을 처음 타서 몰랐는데, 이렇게 금화가 바닥에 널려 있는 곳이었구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냐! 대체 뭐야! 이 정체불명의 금딱지들은! ‘설마! 함정?’ 예를 들면 이 땅에 찾아온 외계인을 초콜릿으로 유인한 뒤에 사로잡아 사육한다든가, 공짜라는 말에 홀려서 위험한 술집에 들어갔다가 엄청나게 바가지를 쓴다든가, 하는 닳고 닳은 패턴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물칸에서 헐벗고 굶주린 승객을 금화로 유인해 놓고 뭘 어쩌자는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나는 일단 왕실 기사다. 이렇게 널려 있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금화들을 못 본 척 놔둘 수가 없었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금화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는 자취를 추적해 갔다. 그것은 점점 더 깊고 어두운 화물들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컴컴한 구석에 도착했을 때 시커먼 그림자가 내 뒤를 덮치며 입을 틀어막았다! “큭큭큭! 또 걸려들었구나! 노예가 된 것을 축하한다!” 라는 몰상식한 전개는 물론 없었다. 언제 탈지도 모르는 승객을 기다리며 화물칸에 몇날며칠이고 잠복해 있을 개념 없는 인신매매범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차라리 납치범이었다면 덜 놀랐을 정도로 믿기 힘든 것이었다. 2 그것은 어찌나 반짝반짝거렸는지 빛이 거의 없는 음습한 구석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내 키보다도 큰 궤짝이었다. 그 궤짝의 부서 진 작은 틈새 사이로 가득 찬 금화들이 보였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금은 본 적도 없다. 어림 짐작으로 생각해 봐도 여간한 귀족의 영지 하나를 통째로 사고도 남아돌 정도의 거금! 나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 떨리는 손으로 궤짝을 매만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잠시 잊고 있던 불행이 찾아왔다. 빠드득 “어라?” 와르르르 “어라라?” 피할 시간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무게를 이기지 못한 궤짝이 부서지며 넘실거리는 황금물결이 나를 덮쳤다. “사람 살려!” 돈벼락이다아앗! 우아아아! 숨을 못 쉬겠어! 나는 버둥거리며 이 ‘금화 지옥’ 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짓눌린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고 가슴을 억눌렀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누가 좀.......’ 그러나 곧 엄청난 압력이 몸을 눌러왔고 나는 조금씩 의식을 잃어갔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곧 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아아아아! 멋대로 죽이지 맛!” 나는 괴수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금화더미 속에서 솟구쳐 올라 왔다.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게 틈만 났다하면 날 죽이려고......” 위험했어. 요단강에 발 담그고 온 기분이야. 원가 강대한 악의가 날 죽음으로 인도했다고! “아무튼 이 살인 금화는 대체 뭐야!” 황금으로 샤워를 해버린 나는 울상이 되어선 금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표정이 굳어졌다. “이거...... 위조?” 나는 정밀하게 제조된 이 금화가 위조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 3 유사 이래 최대의 위조 금화가 발견되자 왕실은 발칵 뒤집혔다. 제조 기술자들이 위고르 공의 지휘 아래 전문 감식에 들어갔고, 헬렌 경과 카론 경은 군무대신과의 공조 하에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으며, 아이히만 대공은 보고를 받은 즉시 전국의 금화 유통을 긴급 중단시키는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최초 목격자이자 신고 당사자인 나 엔디미온은....... “어이, 미온. 춥다. 얼른 뽑고 들어가자.” 쇼탄 경과 함께 손을 호호 불며 리더구트 뒷마당의 잡초를 뽑는 중이었다. 너무해, 나도 카론 경과 함께 수사하고 싶어. 수사는 고사하고 ‘너 숨긴 금화 있어? 거짓말 하면 알지? 라면서 취조실에서 몸수색까지 당했다(참고로 열차 삯도 못 받았다). 게다가 기진맥진해서 리더구트에 오자마자 인정머리 없는 키스 경이 ‘녹색은 다 없애버리세요오!’ 라면서 호미 하나 달랑 쥐어주며 내쫓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대체 내 인권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저어, 있잖아. 미온.” 수세미같이 억센 겨울 잡초와 씨름하고 있는 내 옆으로 쇼탄 경이 다가왔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에 내 귀에 속삭였다. “금화 챙긴 것 없어?” “.......” 할 말이 없었다. 안 그래도 서러워 죽겠구만! “있으면 좀 나눠주라. 응?” “금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도 또 당기십니까?” 나는 얼어붙은 땅을 호미로 턱턱 찍어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쇼탄 경은 머쓱한 표정으로 호미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금은 인류의 친구라고. 친구를 좋아하는 게 뭐가 어때서.......”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한편 같이 노동에 선택된 랑시는 저쪽에서 커다란 코트를 뒤집어쓴 채 정성스럽게 무언가 하고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내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잡초 심지 마!” “캬하핫! 들켰네?” 어쩐지 뽑아 놓은 잡초가 계속 사라진다 했어! 아악! 누구는 숨도 안 쉬고 일하고 있는데! 명이 줄어드는 것 같아! “일 좀 하시지, 응?” 내가 무섭게 쏘아보자 랑시가 커다란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애처롭게 나를 바라봤다. “소녀는 노동이 싫사와요.” “......소년이겠지.” 자기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좀 고민해 보라고! 그와 함께 등 뒤에서는 ‘헤유우. 나도 금화로 샤워 한번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라는 쇼탄 경의 가난에 찌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건조한 날 불쾌지수가 급상승하는 기묘한 체험을 했다. 그때였다. “저어, 엔디미온 경이십니까?‘ 나를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깔끔한 남색 유니폼을 입은 왕실 전령이 호미를 든 채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나를 얼떨떨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기사 맞아?’ 라는 표정이다. 기사라고 꼭 칼 들고 있으란 법이 있습니까? “아이히만 대공께서 부르십니다. 왕궁으로 가시죠.” 드디어 수사에 참여하게 되는구나! 나는 가습이 벅차올랐다. 4 “뭐해? 어서 차 안 타고!” “......네.” 헬렌 경의 독촉에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티스푼을 저었다. 결국 이러려고 부른 거였군. 긴급 어전 회의에는 아이히만 대공을 비롯해서 위고르 공과 헬렌 경, 카론 경, 오르넬라 성녀님까지 왕실의 중진들이 참석했다. 그만큼 이 위조 금화 사건은 중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카론 경은 이미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는지 날카로운 눈매로 두터운 사건파일을 검토하고 있었다. 역시 왕실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랄까. 세계 최강의 라이오라 씨마저 그를 높이 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문무겸비라는 것은 저런 것이리라. “국왕 전하께서 납십니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해맑은 웃음을 한껏 담은 임금님 이 뛰어 들어왔다. 임금님이 득남했을 때나 보였을 신나는 표정으로 외쳤다. “여보게들! 금화가 발견되었다며? 어이구! 봉 잡았네! 봉 잡았어!” 전하는 하나 가득 쌓여 있는 위조 금화 앞에 덩실덩실 충을 추며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금이면 다 좋은 거야? 왕실 서열 2위인 아이히만 대공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위조 금화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긴 압니까?” “응? 뭔데?” “왕실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이 높이지는 것은 물론 가장 극단적인 경우 가치의 기준 자체가 뒤흔들리게 접니다. 금은 실물가치의 척도입니다 가짜 금화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누가 대가로 금화를 받고 싶겠습니까?” “대공, 걱정도 팔자요. 그거야 백성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면 되.......” 대공의 표정이 못난 자식을 한 대 후려치려는 사자의 상으로 돌변하자 임금님이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그러자 검은 드레스 사이로 육감적인 다리 굴곡이 살짝 드러난 오르넬라 성녀님이 말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독실한 신도들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죄악의 육신을 가진 그녀다. “당연히 위조 금화들을 찾아내서 수거하고 위조범들을 잡아내는 것이 급선무겠지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될 것 아니오?” “하지만 수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야심 찬 목소리와 함께 입을 연 자는 바로 위고르 공이었다. 그는 특유의 장황한 입버릇답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문을 터트렸다. “주화를 제조하는 방식에는 주물 방식과 제분소압인 방식과 타인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베르스 왕국의 조페창에서는 제분소압인 방식으로 금화를 제조하고 있습니다.” 모두는 위고르 공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제분소압인 방식은 수력 압착기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서 소전이라고 불리는 민무늬 판금에 금화의 문양이 새겨진 틀, 즉 극인을 압인시키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다른 두 가지의 방식보다 훨씬 고품질의 금화를 제조할 수 있는 신기술로서 디테일하고 균일한 금화를 양산할 수 있으며 기계는 이오타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눈만 꿈뻑거리며 계속 지켜보던 전하가 말했다.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으니 본론만 말해주시겠소?” “아, 예.” 최소한 서너 시간 가량 자신의 지식을 잔뜩 자랑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똘똘이 위고르 공은 머쓱한 표정으로 짧게 말을 줄여야 했다. 그가 마치 수사관처럼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위조범들이 동일한 기계로 제조한 위조 금화는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도 쉽게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뭣이! 설마 나도 발견한 그 ‘결함’ 을 못찾은 거야? 전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 그렇게 정교하오?” “그렇습니다! 최정예 기술자들이 위조 금화를 녹여서 분석해 본 결과 본래 금화가 중량 33.45그램에 금의 함유량은 가장 가공하기 용이한 순도 92.5퍼센트, 약 22캐럿으로 주화당 1온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나 위조 금화는 그의 절반인 순도 46퍼센트에 다른 저가의 금속들을 혼합하여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안으로 보기에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은 질량과 크기, 굵기, 질감,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일일이 녹여서 분석해 보지 않는 이상 위조 금화를 분류해 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상입니다!” 위고르 공은 자기가 위조 금화를 만들기라도 했는지 엄청 들떠서는 결국 그 박식하고 장황하기 짝이 없는 보고를 늘어놓고야 말았다. 그냥 줄여서 ‘일반인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해도 좋을 텐데 말이지. 아니 그건 그렇고, 별의별 실험을 다했으면서도 그 ‘치명적인 오류’ 는 정말 발견 못한 거야? 위고르 공은 아예 실제 금화와 위조 금화를 하나씩 들고 전하에게 보여주었다. “보십시오! 이건 정말 누구도 구분하지 못할 위조의 예술.......” “잠깐, 위고르 공.” 임금님 이 두 금화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이 금화에 적힌 얼굴들, 서로 바라보고 있는 거 같지 않소?” “엥?” 위고르 공은 황급히 두 주화를 바라봤다. 아아, 위고르 공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믿어지질 않아. 지금 상황을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았다. 참고로 금화에 새겨진 옆모습은 이 나라를 건국한 성왕 하켄이다. 이 나라의 위대한 시조인 성왕 하켄의 고귀한 용안이 꼭 눈사람처럼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는 (누군가의) 그림 실력 때문이지만...... 어쨌든 위조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잖아! 원숭이도 조금만 교육을 받으면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 당황하는 위고르 공의 금화를 빼앗은 아이히만 대공이 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대가리가 서로 반대잖아?” 싸늘한 정적이 회의실에 내려앉았다. 참석자 모두 민망한 눈초리로 위고르 공을 바라봤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던 엘리트 법무대신 위고르 공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그냥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개그였습니다’ 라는 영 신통찮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몸 둘 바를 모르는 위고르 공을 향한 아이히만 대공의 시선은 ‘위고르 공, 저쪽 구석 에 가서 대가리 박고 있으시오’ 였다. 도통한 입술 사이로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성녀님이 ‘미온 군, 차 한 잔 부탁해’ 라고 말한 뒤에 헬렌 경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 얼간이 금화를 만든 장본인을 밝혀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헬렌 경, 수사에 진척이 있어요?” 헬렌 경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성과가 있습니다. 카론 경, 보고해.” 모두의 시선이 흑청색의 머리칼을 가진 미남자에게 집중되었다. 카른 경은 특유의 청명한 음성으로 간략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장 수사를 실시하였으나 위조범 일당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습니다. 그래서 역추적을시도했습니다.” 역추적? 나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 위조 금화는 실제 금화를 제조할 때 사용되는 수력 압착기와 동일한 기계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우리나라의 것과 같은 기계를 사용했습니다.” “으음. 계속 말하게.” 아이히만 대공 역시 원가 눈치 했다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수력 압착기는 이오타 왕국의 과학지원성(科學支援省)을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국가라면 모를까 개인에게 판매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도 그것이 의심스러워 인트라 무로스에 수사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 전 그 압착기를 구입해 간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니샤 왕국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니샤 왕국의 금화는 수력 압착기를 사용하지 않는 타인(打印) 방식의 구형 금화입니다.” 사무적인 어조와는 달리 그것은 실로 놀라운 단서였다. 나는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감탄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단서를 포착해낸 것도 멋지지만 그것을 단 하루 만에 끝냈다는 신속성은 수사의 문외한인 내가 봐도 대단했던 것이다. 아마 다른 관료에게 수사를 맡겼다면 이 사실을 알아낼 때까지 족히 일 년 봉급은 받아 챙겼으리라. “그럼 니샤 왕국이 이 위조 금화를 만들었다는 의미인가?” 아이히만 대공이 찡그린 표정으로 물었다. 답변은 헬렌 경이 꺼냈다. “현재로서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오타 역시 위조 주화를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니샤에 기계를 팔았던 겁니다.” 우아! 지나치게 뻔뻔해! 어떻게 왕실에서 직접 위조 금화를 만들 수 있단 말이야! 게다가 이오타도 그렇지! 자신들의 기계로 범죄를 저지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쩜 그렇게 입 싹 닦고 팔아치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건 국가 도덕성 문제라고! 라면서 발끈 화가 나긴 했지만 뭐 솔직히 약육강식의 국가 관계에서 티 없이 밝은 스포츠맨쉽 같은 걸 바라는 것은 분식집에서 샥스핀 찾는 격이리라(일탄 우리나라부터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대단히 치졸하게 돈벌이를 하고 있으니까). 한편 카론 경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둔 학생처럼 곤혹스러운 시선으로 계속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음. 뭔가.” “니샤 왕국에서 어째서 얼굴을 반대로 돌리고 있는 위조 주화를 만들었는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확실히 그건 미스터리였다. 저런 한심한 위조 금화는 아마 전 세계에서 위고르 공을 제외하면 누구라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자고로 위조란 ‘최대한 오리지널에 가깝게!’ 해야 정상이 아니던가? “그건 정말 모를 일이로군. 으음, 뭔가 음모가 숨어 있는 걸까.” 무서운 판단력을 지닌 아이히만 대공마저도 답답한 듯이 담배를 물었다. 카론 경과 대공조차도 짐작이 가지 않는 의문일 줄이야. 하긴 위조 주화의 모양을 거울로 본 것처럼 정반대로 만든 비상식적인 일이라면 상식선에서는 추리해 볼 도리가....... 아? 순간 어떤 예상이 반짝 떠올랐다. 이건 정말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회의 테이블 뒤쪽에 서 있던 나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어,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누가 네게 발언권을 줬나! 비전문가의 조언 따위는 수사를 방해할 뿐이야!” 아니나 다를까 헬렌 경이 날카롭게 파고들며 내 말을 끊었다. 쳇, 괜한 참견이라서 미안하게 되었네요.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뒤로 물러싫다 그때. “말해 봐, 엔디미온 군.” 암갈색 옻칠을 한 우아한 담뱃대를 까닥거리며 오르넬라 성녀님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헬렌 경은 분한 표정이었지만, (권력이라는 놈은 수직구조라서)베르스 최고의 종교 지도자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내 추측은 다음과 같았다. “혹시 오리지널 금화를 보고 그대로 직인을 조각한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가는 듯이 의아한 표정을 보이다가 점차 놀란 눈빛으로 바꿔갔다(물론 임금님은 계속 ‘무슨 소리야?’ 라는 눈빛이었지만) 아이히만 대공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말은 되는군. 그렇게 하면 금화를 찍었을 때는 좌우가 바뀌어 버릴 테니까. 거울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의도라기보다는 실수겠죠.” “설마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을까?” “그거야...... 니샤 왕국이니까요.” 순간 ‘정말 그럴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얼굴에 스쳤다. 만약 마키시온이나 콘스탄트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역시 뭔가 고차원적인 음모가 있다!’ 라고 생각했겠지만 상대가 니샤 왕국이라면 ‘그럴 만도하지’ 라고 혀를 차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옆 나라 니샤가 우리 나라와 함께 세계 서열 꼴찌에서 1,2위를 다투는 나라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대충 짐작할 일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임금님이 격노에 찬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표정은 마치 찜통에 들어간 만두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 망할 니샤 국왕이 내 나라에 위조 금화를 보냈다 이거지!” 참고로 니샤 국왕과 우리 임금님은 (예전 금옥두 사건 때도 나왔듯이) 허구한 날 시시껄렁한 일로 신경전을 벌이는 견원지간이다. 전하는 전에 없이 분노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분명 묵과할 수 없는 니샤 왕국의 도발행위요! 짐은 이 자리에서 니샤 왕국의 발칙한 만행에 철저히 보복할 것을 선포하겠소!” 그, 그럼 설마 전쟁? 하지만 전하의 보복은 좀더 끔찍하고도 지저분한 것이었다. “우리도 위조 금화를 만들어 니샤 왕국에 보내시오!” 그게 국왕이 할 말이냐! 아이히만 대공은 아주 멱을 따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전하, 네놈이 고작 하시는 말씀은 우리도 지지 말고 위조 금화를 만들자 이겁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위조에는 위조!” 전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는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한없이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명예회복의 기회를 노리던 위고르 공이 벌떡 일어서며 열렬한 박수세례를 보냈다. “적의 도발에 한 치 물러섬도 없는 초개와 같은 위엄에 소인은 탄복했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실로 성왕 하켄의 재림이시옵니다! 국왕 전하 만세!” 위고르 공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어떻게 맨 정신으로 저런 가당찮은 아부를 쏟아낼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엘리트는 달랐다. 아이히만 대공이 그의 등 뒤에 대고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아부의 프로페셔널, 그의 이름은 위고르.” “시, 시끄럿!” 위고르는 찡그린 얼굴로 대공을 확 째려본 뒤에 다시 활짝 웃으며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겠지만 위고르 공은 가끔 대단히 측은해 보일 때가 있다. 결국 우리나라는 회수한 위조 금화를 그대로 녹여서 니샤의 위조 금화를 만들어 보낸다는 이른바 ‘함무라비 프로젝트’ 에 돌입하게 되었다. 5 “......방금 회의, 대체 뭐였지?” 나는 멍한 표정으로 리더구트로 걸어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결론이 ‘그럼 이쪽도 위조다!’ 가 되는 거야? 보통은 정식 항의 서한 같은 것을 보낸 뒤에 사과를 받아내고 궁극적으로 외교적 우위를 점한다...... 라는 것이 명랑한 해결책이겠지만 우리 굳센 임금님께서는 ‘흥! 감히 이 몸한테 사기를 쳐? 누가 더 사기의 지존인지 가려보자!’ 라고 발끈해 버렸던 것이다. 혹자는 이런 것을 보고 ‘제멋에 산다’ 라고 평가한다. ‘그건 그렇고.......’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홀낏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카론 경이 서류를 훑어보며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카론 경. 저한테 볼 일 있으세요?” “아니.” 그는 그 차가운 눈빛을 하얀 서류 위에 고정시킨 채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결국 카론 경은 나와 함께 리더구트 안까지 들어왔다. 6 아니나 다를까 키스 경은 대낮부터 소파에 추욱 늘어져 있었다. 커다란 쿠션을 껴안고 꼭 감은 눈매까지 조금 찡그린 채 누워있는 모습은 완전히 감기 걸린 코알라였다. 정말 키스 경에게 유카리 나뭇잎을 주면 맛있게 꼭꼭 씹어 먹을 것 같다는 의문마저 든다. “아? 카론 경 왔어요오?” 슬며시 눈을 뜬 키스는 아직 잠에 취한 표정으로 헤죽 웃었지만 카론 경은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서는 테이블 앞에 앉아 서류를 내려놓았다. “잠시 있겠다.” 키스 경은 의아한 듯이 빨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카론 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왜 저래요오?’ ‘나도 몰라요.’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멀쩡한 자기 집무실 놔두고 여기서 사무를 보겠단 말인가? 키스 경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피해가는 사람인데? 시종이 가져온 찻잔을 든 채로 ‘위조 금화’ 서류에 열중하고 있는 카론 경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엉켜 있는 머리칼을 긁적거리던 키스 경은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헬렌 경 때문에 그러는 거죠?” 순간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카론 경의 어깨가 움찔했다. “헬렌 경에게 들들 볶일까봐 여기로 피신한 거죠오?” 또 움찔! 카론 경은 못 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를 곁눈질하는 키스 경은 ‘어쩔 수 없는사람’ 이라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순간 나도 눈이 반짝 뜨였다. 아하! 그거였구나! 전하의 결정으로 이미 종결된 위조 금화 사건에 대해 카론 경은 계속 수사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일에 시간을 보냈다간 마녀 단장 헬렌 경에게 당장 집어치우고 권력자 뒤치다꺼리나 하라는 무서운 잔소리를 들어야 할 테니까 여기로 피신해 와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아, 근무 시간에도 본격적으로 숙면을 취하는 인간도 있는데 누구는 일도 숨어서 해야 하다니, 세상 참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꾹 참고 일을 하던 카론 경은 그 무한한 인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고 싱글싱글 웃고 있는 키스에게 신경질을 터트렸다. “어째서 내가 자네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피해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까 헬렌 경의 성격이 ‘그 지경’ 이 된 것은 키스 탓이라고 들었다. 키스가 그녀를 뻥 걷어차 버렸기 때문에 남자라면 이를 가는 히스테리가 생겨버린 것이고. 결국 그 분노의 역류는 엉뚱하게도 같은 ‘직장’ 에 있는 카론 경을 덮쳤다. 그는 키스의 무분별한 연애질이 낳은 무고한 피해자인 셈이었다. 하지만 키스는 그 정도로 사과를 받아내기에는 너무도 강적이었다.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엄청 뻔뻔스런 말투로 적반하장을 늘어놓았다. “그거야 저 때문이 아니고 카론 경이 말 못하게 순진하기 때.......” 스르렁 찰나의 순간 카른 경의 칼끝이 키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녀석의 조언 따위는 전혀 듣고 싶지 않군.” 그러나 키스 경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할 노동자를 착취하는 비열한 자본가인 양 거만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로 공갈을 늘어놓았다. “제 도움이 필요 없으시다면 헬렌 경이 눈에 불을 켜고 당신을 찾고 있을 집무실로 돌아가시든가요.” “큭!” 진짜 저질 협박이었다. “어머나. 왜 그런 표정이시죠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자, 잠시만 여기 있겠다.” 오갈 곳 없는 카른 경이었다. 다시 서류 검토에 몰두하기 시작한 카론 경을 보던 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녀를 포기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시는군요...... 둔감한 사람.” ‘맙소사. 그 이유였어?’ (자랑까지는 아니지만)직업 덕택에 여자에 밝은 나는 지금 키스의 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결국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카론 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때도 카른 경의 곁엔 이델렌 님이 있었으리라. 키스 또한 얼마나 여자 마음에 능통하던가 자신에게 접근한 헬렌 경의 속마음을 알아챈 그는 그녀를 냉정하게 떨어트려 놓는 것으로 누구도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이 없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키스 경다운 방식인 것이다. ‘아니, 이쯤 되면 피해를 본 쪽은 도리어 키스 경이잖아?’ 나는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거렸고, 카론 경은 그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하다는 듯이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7 그러나 노을이 지고 해가 떨어지고 달이 솟아 오른 뒤에도 카론 경은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올라온 나는 여전히 집요하게 추리에 매달려 있는 그를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카론 경, 뭐 풀리지 않는 문제라도 있나요?” 확실히 위조 금화는 회수되었고 배후는 밝혀졌으며 엉뚱하지만 보복 방법도 결정되었다. 깨끗하게 수사는 끝난 것이다 그때 그가 말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쉬워.” “예?”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쉬운 것도 문제가 되나? “위조주화는 마치 발견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화물칸 안에 있었고, 그 모양은 누구라도 구분하길 바라는 것처럼 만들어져 있었고, 또 이오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 정보를 줬다. 이 사건은 하나의 걸림돌도 없이 너무 쉽게 흘러가고 있어, 마치...... 누군가의 시나리오처럼.” 지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노련한 수사관특유의 직감이리라. 그것에 대해 나는 뭐라고 한마디도 참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이히만 대공.” 어? 대공에게도 문제가 있나? 장작이 타들어가고 있는 벽난로를 주시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이런 문제에 대해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분이야.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지. 마치 빨리 끝내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아하하하. 분명 기분 탓일 거예요. 대공께서 딴 생각이 있으실 리가 없죠.” 카론 경은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위조 금화였다. “자네의 말대로 이 위조 금화는 본래 금화의 모양 그대로 직인에 새겨 넣었을 거다. 그래야 이토록 정확하게 좌우가 반대로 될테니까. 하지만 그게 정말 실수였을까?” “하지만 그런 어이없는 행동은 실수라고 밖에는.......” “이런 정밀한 위조 금화를 만들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장인의 수준이다. 그런 노련한 위조범이 몇 천 번이나 반복했을 일을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니샤 왕국 자체는 분명 우리나라와 용호상박으로 엉성한 부분이 넘쳐나지만 적어도 위조 금화를 만든 누군가는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베테랑이 분명했다. 내가 적어도 술 따르는 것 하나만큼은 눈 감고 해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것처럼, 그 위조범 역시 좌우가 반대가 되는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니샤 왕국에서 구입해 갔다는 수력 압착기의 가격을 알아봤더니, 화물칸에서 발견된 위조 금화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몇 배는 비싸더군. 그런 손해 보는 장사를 어째서 했을까.” “혹시 할부로 산 것이 아닐까요?” “.......” “썰렁한 농담은 자제하겠습니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온다. 이건 그러니까 답은 아는데 문제를 알 수 없는 해괴한 기분이었다. 그때 반쯤 녹은 고무 인간처럼 소파에 마냥 늘어져 있던 키스가 흐느적거리며 일어났다. 정말 저 인간은 하루 열두 시간 수면이 보장되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그런 특수한 불치병이라도 걸린 거 아닐까? 그가 요상한 자세로 스물스물 다가와서는 헤헤 웃었다. “카른 경, 제게 좋은 해결책이 있답니다아.” “그게 뭔가?” “그러니까 그건 말이죠.......” 그와 함께 키스 경이 두터운 서류들을 집어 들더니만 난데없이 벽난로 속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얇은 종이들이 순식간에 화르르륵 타올랐다. 카론 경이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키스!” “진정하세요오. 은의 기사님.” 키스는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켜 카론 경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예전 카론 경에게 이런 말한 적이 있죠? 당신 최고의 무기는 냉정함이라고. 그걸 버 리면 당신에겐 승산이 없다고.” “...... 기억난다.” 카론 경은 무슨 이유인지 조금 분한 표정으로 키스를 바라봤다. “서류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수 없는 수많은 진실들을 서류 속에서 찾으려는 짓은 카론 경답지 않은 조급함이랍니다. 그럴 바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저딴 서류는 깨끗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그 냉정한 자세로 시작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사서 고생하는 거, 당신 특기잖아요?” 가끔 키스의 말은 날카로운 바늘처럼 정곡을 찌르고는 한다. 무서울 정도로 말이다. 키스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론 경은 이미 최고의 수사관이에요. 그러나 이대로라면 최악의 남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당장 이멜렌 님에게 가세요. 그리고 홀로 외롭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 주세요. 그건 이 세상에서 당신밖에 못하는 일이니까요. 바로 그게 지금 당신이 가장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임무에요. 그녀는 당신이 다가가지 않으면 외로움에 지쳐 시들어 버릴 테지만 음모 따위는 일부러 다가가지 않아도 그쪽에서 알아서 당신을 찾아올 거랍니다아.” 마치 노래가사 같은 조언이었다. 카론 경은 버릇대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알겠다.” 그가 문밖으로 나가며 조그맣게 말했다. “고맙다.” 오오, 간만에 보는 우정 어린 장면이로고. 키스는 카론 경이 나간 문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긴요 뭘.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을 뿐인데요. 나도 내가 뭔 소리를 했는지 도통 모르겠답니다아.” 꼭 마지막 한 소절에서 망가진다니까! 그가 기지개를 늘어지게 펴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자아, 그럼 이제 한바탕 자 볼까요오.” ......하루 종일 댁이 뭘 했는지 기억은 하고 계십니까? 8 열흘 뒤 왕실에서는 큰 행사가 열렸다. 베르스 왕국 최초의 공성포 두 문이 니샤 왕국으로부터 수입되었던 것이다. 무슨 돈으로 그걸 샀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아침부터 왕실 광장에는 산더미만한 크기의 공성포 두 대가 그 흉악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요새 파괴용으로 만들어진 10캘리버 500밀리미터 최신형 구포(臼砲)라며 군무대신께서 새벽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고 다니던데 무기 쪽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내가 봐도 저 무거운 것을 언제 요새 앞까지 끌고 가느냐는 문제는 둘째 치고 일단 대공의 말마따나 우리나라 군대가 남의 요새 앞까지 갈 일이 금세기 안에 있기나 할지 강력한 의문이 들었다. 정말이지 이 나라는 곧 죽어도 겉치레에 목숨 거는 성향이 있다니까.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왜 하필 저런 걸 산 건지. 차라리 티스푼 세트나 더 사주지.’ 나는 차와 과자를 접시에 담으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화력시범을 앞두고 광장에 마련된 호화스러운 천막 밑에는 국왕 전하 내외와 페르난데스 왕자님, 제냐 공주님을 비롯해 수많은 왕실 관료들, 오르넬라 성녀님 이 이끄는 펠리오스의 무녀들까지 귀빈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었고 그 앞은 헬스트 나이츠와 근위대가 멋진 제복 차림으로 사열해 있었다. 물론 우리 스왈로우 나이츠 역시 항상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남녀평등도 좋지만 이런 건 본래 아름다운 아가씨가 시중들어야 제 맛 아냐?” 툴툴거리며 음료수와 디저트들을 나르고 있는 루이 경의 모습은 그야말로 3번 웨이터였다. ‘인생은 단순한 만큼 즐거워진다!’ 라는 낙관론을 가진 루이 경이었지만, 아침부터 불려나와 잡일을 해야 하는 것에는 도통 질려버린 모양이다. 솔직히 성별의 문제보다도 기사에게 이런 일 시키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야. 루이 경은 귀빈에게 줄 과일주스를 자기가 벌컥벌컥 마셔버리고는 쇼탄을 바라봤다. “쇼탄, 너는 억울하지도 않냐?” “말 시키지 마. 나 지금 바빠.” 쇼탄 경은 아예 머리에 수건까지 두르고 본격적으로 찻잔을 닦고 있었다. 최근 빚이 내장이라도 팔아야 할 정도로 올랐기 때문에 그 어떤 노동이든 달게 받겠다고 키스 경에게 맹세한 그였다. 루이는 손을 호호 불면서 유리잔들을 닦고 있는 서글픈 모습에 통탄을 금치 못하며 탄식을 토했다. “쇼탄, 너 진짜 타락했구나! 이 못난 녀석! 수많은 아가씨들의 외로운 영혼을 열반시켜 주었던 밤의 구도자 쇼넨베르트 씨는 어디로 간 거야! 정신을 차리고 나와 함께 착실한 인생을 살자!” 그거 착실한 난봉꾼이 되라는 의미? 그러나 이미 빈곤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쇼탄 경에게 그런 말은 들리지도 않았나 보다. “......그딴 게 밥 먹여줘?” 쇼탄은 인생의 끝을 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때 우리 옆을 지나가던 루시온 경이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중하고도 거리감 풍부한 말투였다. “이것도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우리들은 멍한 얼굴로 쟁반을 들고 귀빈들에게 가고 있는 루시온 경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막 지명을 마치고 돌아와서 엄청나게 피곤할 텐데 게으름 한번 피우지 않고 빈틈없이 일하고 있다. 밝은 청색의 머리칼과 새하얀 제복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 모습은 정말 기품이 넘치는 귀족 같았다. 아니, 실제 백작가의 자제다. 그것도 상속인! 더할 나위 없는 미남에다 평생을 방구석에서 뒹굴거려도 왕처럼 호화찬란하게 살 수 있는 천문학적인 재산이 있는데다가 검술과 예법에다 머리까지 총명한 ‘완벽한 인생’ 이 어째서 저런 일을 자청하고 있는지는, 우리 스왈로우 나이츠의 7대 미스터 리 중 하나였다. 그때 광장에 ‘안내 방송’ 이 울려 퍼졌다. “신형 공성포 애국1호와 애국2호의 화력 시범이 곧 시작되오니 참석하신 귀빈들께서는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벌써 이름까지 붙였어? 그 치 떨리는 네이밍 센스를 보아하니 분명 작명자는 임금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들도 천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 공성포의 포격이 준비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톱니바퀴 따위가 거창하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아주 서서히 거대한 포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건 마치 엄청 굼뜬 공룡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드는 것만 같았다. “애국1호 장전 완료!” 한 오 분쯤 후에 포격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직접 지휘까지 하는 열성을 보이는 군무대신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파이어!”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귀를 막을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해야 했다.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고, 마치 용의 불길 같은 불꽃이 터지며 애국1호의 긴 주둥이가 시커먼 쇳덩어리를 하늘로 토해냈다. 정말 화산이라도 터지는 것 같은 박력이었다. “오오오오!” 귀빈들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저런 것에 직격당하면 요새고 성이고 박살나버릴 것 같군. 하늘 높이 솟아오른 그 거대한 탄환은 묵직한 포물선을 그리며 사냥터에 있는 표적 위에 떨어졌다. 아니, 떨어져야 했는데....... “아니, 저거 지금 어디로 떨어지고 있는 거야?” 고개를 잔뜩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루이가 눈가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하하하. 아니나 다를까 표적은 못 맞출 것 같네요.” “그렇지? 저거 저대로 떨어지면 분명히...... 여기로......응? 여기?“ 뭣!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을 향해 수직 낙하하는 탄환의 크기가 한 시가 다르게 커져가고 있었다. 루이 경이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표적은 저쪽이걸랑요?” “다, 다들 피해요! 여기시 도망쳐! 우아악! 떨어진다!” 그 순간 애국1호가 쏘아 올린 첫 번째 탄환은 파괴의 화신이 되어 친막을 덮쳤다. 하늘과 땅이 홀라당 뒤집혀 버린 기분과 함께 있는 힘껏 나뒹군 내 온몸으로 흙더미가 쏟아졌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이놈의 나라! “에구구구. 모두 살아 있어요?” 박살이 나버린 잔해 속에서 기어 나온 나는 생존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거지상이 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휴우, 그 살인적인 폭격 속에서도 기적처럼 살아들 있구나. 리얼한 소설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마지막으로 흙먼지 속에서 고개를 쪽 내민 사람은 키스 경이었다. 아까부터 천막 구석에서 쪼그려 잠들어 있던 키스는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아직도 잠이 덜 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미온 경!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아! 누가 천막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요오!” “......애국1호.” 한편 군무대신은 태연한 표정으로 당황하는 귀빈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허허허. 별 일 아닙니다. 작은 조작 실수로 아주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얼씨구! 운석 떨어진 게 사소해? 방금 당신 눈앞에서 우리들이 묵사발이 될 뻔했잖아! 똑바로 좀 쏴! 어지간해선 그렇게 쏘기도 힘들단 말이야! 그러나 군무대신은 순식간에 걸레가 되어 버린 우리들의 처참한 모습을 가뿐히 무시하며 2막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전하는 엄청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맞출 수 있겠나?” “전하, 부디 심려 말아주십시오. 이 신형 공성포는 매우 정밀한 기계장치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절대로 엉뚱한 곳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떨어졌잖아! 줄초상 나는 줄 알았다고! 그때 상황을 파악하러 이쪽으로 온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이 우리들의 처참한 상황을 대놓고 비웃는 것이었다. 구경거리라도 났냐! “오오, 보기 좋은데? 나라를 위해 스스로 표적이 되어주다니, 애국자들이셔?” 같은 기사끼리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일일이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이놈들은 화장실 파리떼처럼 집요하기 그지없었다. “큭큭큭. 뭐 불만이라도 있는 거냐? 꼭 그렇다는 얼굴인데? 응?” 동료들의 표정은 화를 꾹 참느라 잔뜩 굳어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불만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잠이 확 달아나서 오히려 기쁜걸요?” “후후. 당연하지. 항상 목숨을 걸어야 하는 우리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문제라고.” 항상 목숨을 걸어? 어디서? 술집 에서? 아니면 침대 위에서? 아무리 상냥한 나라도 한방 먹여줘야겠다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럼요. 별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댁들도 애국하는 셈 치고 다음 표적이 되어 보세요. 대포알이 머리 위로 떨어지면 진심으로 박수쳐 드릴게요.” 순식간에 그들의 얼굴이 썩은 호박처럼 상해버렸다. 이건 진리지만, 남 비웃길 좋아하는 소인배일수록 자기 비웃음 받는 것에는 약한 법이거든. 그들은 마치 누가 규칙이라도 정해놓은 것처럼 풋내 나는 협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계집애 같은 놈이 멋대로 지껄여! 기사를 모욕하고도 곱게 끝날 거라고 생각 하나!” “그 말 그대로 되돌려 드리지요. 얼굴이 떡판이면 성격이라도 고와야 여자에게 사랑받는 답니다. 아, 미안해요. 어차피 여자도 없는 분들한테 괜한 소리 했네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 녀석은 죽여 버릴 듯이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런, 정말 없었군. 물론 나도 키스에게서 배운 ‘사람 속 뒤집어 놓는 방긋 방긋 미소’ 를 선사하며 똑바로 그들을 바라봤다. 뭐라도 한 판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탁 잡으며 그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괜한 소란은 서로의 명예만 더럽힐 뿐입니다. 이쯤에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루시온 경이었다. 그는 일말의 호감도 없는 눈초리로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를 본 기사들의 표정에 난색이 보였다 우리들 중에 진짜 귀족 출신인 루시온 경만큼은 건드리면 곤란했던 것이다. 그들을 나를 험악하게 쏘아보며 물러섰다. “흥! 앞으로 밤길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가자!” 나도 흥! 참으로 시시한 협박이로군! 그게 기사가 할 말이냐? 어쨌든 루시온 경의 중재로 주먹다짐 일보직전까지 간 상황이 해결되자 나는 그에게 고마운 기분으로 말했다. 확실히 리더다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다. “루시온 경, 덕분에 괜한 싸움을.......” “엔디미온 씨.” 그가 내 말을 끊으며 아까와 똑같은 호감 제로의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처럼 말썽 일으키는 사람이 싫습니다.” 뭐? 그리고 그는 그대로 뒤돌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너무해! 엄청 상처 받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잖아! 하긴 루시온 경은 키스 외에는 ‘경’ 칭호도 안 붙여주고 항상 ‘단지 이유가 있어서 함께할 뿐’ 이라는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이니까. 차라리 오만한 레녹 경이 좀더 인간답게 보일 정도다. 그때 머리칼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다가온 지스 경이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저런 까다로운 인간 싫어.” “......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진짜 신선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9 가끔 사람은 쓸데없는 일에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군무대신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결국 제2탄은 준비되고야 말았다. “애국2호 장전 완료!” 그거, 꼭...... 쏴야겠습니까? “파이어어어!” 그와 함께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이 광장을 가르며 포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매우 정밀한 기계장치들로 이뤄진’ 애국2호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포, 폭발한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도망치는 순간 경기 들린 사람처럼 몸을 떨던 공성포가 불길을 뿜으며 대폭발을 일으켰고, 주변에 있던 화약에 불씨가 옮겨 붙어 스펙터클한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쉽게 말하자면 불량품이었다. 나는 산지사방으로 날아다니는 파편들을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자살 대포를 사온 거냐?” 뭐 됐어. 더 이상 무고한 백성들 습격하지 말고 저렇게 사라져 주는 편이 오히려 애국하는 길일지도 몰라. 그런데 잠깐, 그럼 지금 쏜 포탄은 어디로 간 거야? 그순간 ‘푸슈우우웅!’ 하는 굉음과 함께 직각으로 떨어지던 대포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전하의 황금상을 후려갈겼다. 사람들의 눈앞에서 거대한 황금만두가 눈부시게 터졌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맙소사.......” 능지처참 된 임금님의 분신들이 우리들 앞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며 나는 이제 더 이상의 화력 시범은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저렇게 핀 포인트로 맞추는 것은 텐데 용케도 해냈군. 그 모습을 본 루이와 쇼탄이 동시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후후후. 브라보.” ......성격 나오는구만. “저, 전하께서 정신을 잃으셨다! 어의를 불러라! 당장!” “대공께서 총을 뽑으셨다! 어서 말려!” 생난리 통이 되어 버린 광장에서 군무대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화력 시범을 마치겠습니다.” 장담하건대, 앞으로 왕실에서 군무대신의 얼굴을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사기에, 사기에, 사기에, 사기가 얽힌 황금상의 대파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10 ‘이거야 사기에, 사기에, 사기에, 사기로구만.’ 상대가 위조 금화를 보냈더니 그걸 그대로 녹여서 또 다시 위조 금화를 만들어 보복하고, 그 돈으로 공성포를 왔더니만 이번에는 불량품을 보내고, 정말 위엄이 넘치는 국왕 사이의 신경전...... 이라고는 주리를 틀어도 말 못라겠군. 니샤 국왕이나 아주 천생연분이었다. 제발 그 열정 가지고 똑바로 살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군. 그때 같이 리더구트로 걸어가던 키스 경은 예의 폭격에 다친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꽃밭이었다. 세상살이가 뭐 그리 즐겁기에 항상 헤죽헤죽거리고 다니는 것일까. “아 참, 미온 경. 오늘 지명 있습니다아. 후딱 출발해 주세요.” “이, 이 꼴로 가라고요? 오늘은 쉬게 해주세요.” “안 됩니다아. 허리가 분질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돈 벌어오세요오.” 그래 맞아, 댁은 사람 괴롭히는 거 하나만으로도 인생이 즐거울 거야. 하아, 왕실 한구석에 이런 인권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알란가 모르겠군. 그때 키스 경이 내 등을 탁 치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오늘은 쉬세요.” “오오! 정말로?” “아니, 생각해 보니까 역시 늙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부려먹는 편이 좋을지도.......” “어느 쪽이야!” 나는 ‘냐하하하하!’ 하고 웃으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키스 경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세상이 파멸하는 날이 와도 저 사람 만큼은 마이페이스를 유지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치열하고도 치졸하게 충돌했던 임금님과 니샤 국왕과의 사기대전은 황금상의 대파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준 값비싼 가르침은 단 하나다. 똑바로 삽시다, 이게 이번 화의 교훈이다. 제16화 이름 없는 짐승 1 열차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아니, 아무리 밤이라고는 하지만....... “얼레? 분위기가 왜 이래?” 역에서 나온 나는 놀란 눈을 깜박거리며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서늘한 기분이 드는 것은 비단 날씨 탓만은 아니다. 수도 아스말의 시가지에는 나 외에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사람들 모두 대규모로 야반도주라도 해버린 기분이었다. ‘도, 도시 사람 모두 술래잡기라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는 상상을 해봤지만, 진짜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걸? 수도의 밤은 불야성이다. 흥청거리는 취객들과 밤을 즐기는 부유층들의 마차소리, 유흥가의 요란한 불빛들로 어둠을 찾기가 힘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온기 없는 가로등만이 아무도 없는 거리에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커다란 도시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같이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 역시 숨죽인 도시의 적막에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냐?” “설마 선전포고라도 받은 거야?” 그럴 리는 없다. 이 나라의 유일한 장점이 다른 나라가 쳐들어 올 필요가 없을 만큼 별 볼일 없다는 것인데. 그리고 전시 상황이라면 가로등도 꺼져 있어야하고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도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무, 무서워. 이런 일은 처음이야.”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설명 좀 해줘!” 승객들 모두 당황한 목소리로 아우성이었지만 아무도 역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왠지 걸음을 떼기 두려웠던 것이다 솔직히 나도 무섭지만...... 이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오늘 중으로 왕궁에 못 돌아가면 벌금이다. ‘에이 몰라. 다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로 결심했나 보지, 뭐.’ 나는 용기를 내서 발을 내딛고 역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승객들은....... “그, 그렇게 따라오지 말아요!” 내 등 뒤에 길게 붙어서 따라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무슨 기차놀이 합니까! 으음, 하지만 역시 기사로서 나 몰라라 하고 혼자 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좋아, 그럼 가 볼까. “에, 그럼 열차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순식간에 ‘미온 열차’ 의 차장이 되어 십여 명의 승객들과 함께 아무도 없는 시가지 속으로 걷기 시작했다. 항상 보던 도시 한복판에서 숨죽인 채 고양이 걸음을 하고 있는 모습도 웃기지만-이제 정말 무서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아! 경찰이다!” 골목에서부터 한 무리의 제복 경찰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지만 나는 정말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보통 단검과 곤봉만으로 무장하고 있는 치안경찰들이 지금은 제식 장검과 미늘창을 지급 받은 것이다. 나는 다급히 그들에게 물었다. “지금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당신은 누구시오.” 경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저는 왕실 기사입니다.” “기사? 그렇게 머리칼이 긴 기사는 처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지금 수도에서 연쇄 살인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 모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찰을 바라봤다. 경찰은 마치 지저분한 것을 입에 담은 듯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삼 일 동안 자그마치 스물다섯 명의 여자가 살해되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목격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 현재 수도는 살인마 때문에 초비상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사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지명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쇄 살인 사건이라니....... 나는 찡그린 표정으로 왕실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았다. “저어, 기사님?” “네에?” 나는 ‘기사’ 라는 단어에 방긋 웃으며 샤방 뒤로 돌았다. ‘어째서 그렇게 들뜬 거야?’ 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기사라고 불리면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어린애라서 말이지. 나를 기사라고 불러준 고마운 사람은 하얀 피부에 상아빛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였다. 십대 후반 정도로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반지를 보아하니 기혼자였다. “저 좀 집까지 바래다주세요. 부탁이에요.” 그녀는 혼자였다. 살인마가 출몰한다는 거리를 혼자 걷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디신데요?” “여기에서 삼십 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곧 있으면 자정, 이때까지 못 들어가면 벌금과 함께 키스 경에게 들들 볶이게 된다. 그녀를 바라다 준 뒤에 제 시간에 복귀하는 것은 지금처럼 마차도 없을 때는 도저히 무리였다. “예, 에스코트 해 드리죠.” 내가 방긋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무리 벌금이 무섭더라도 레이디를 보호해 주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기사의 의무지! 아무렴! 아니, 꼭 기사라고 불러줬다고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내 옆에 착 달라붙어 걷기 시작하자 이건 마치 연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아예 살짝 팔짱까지 끼우는 것이었다. 겨, 결혼한 아가씨가 이래도 되는 거야?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귀족도 아닌 제가 기사님의 보호를 받아 보겠어요. 기사님들이 다 이렇게 잘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요.” 카론 경이 들었으면 ‘쓸데없는 소리’ 라며 매몰차게 대꾸했으리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때로는 얼굴 보고 뽑는 기사들이 있으니까요. 헤헤.” 그녀는 이 을씨년스러운 거리 분위기 다 잊어버리고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나와 팔짱을 꼭 끼우며 얼굴을 붉히시는 것이었다. ‘이 난데없는 핑크 무드는 대체.......’ 자, 잠깐. 겁에 질려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임자 있는 분께서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몸은 멋대로 그녀의 행동에 장단을 맞추고 난리였다. 파렴치 하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이거 직업병인 걸요. 검술의 달인이 적의 기습을 반사적으로 막아 내는 것과 같은 이치에요. “기사님은 왠지 기사라기보다는...... 호스트 같아요.” 움찔! 다, 당신 혹시 직업이 점쟁이? “그, 그럴 리가요. 아하하하하.” “아니에요. 정말 호스트 하면 잘 하실 것 같아요.” “거, 거기까지 해주세요.” 내 몸에 흐르는 피는 속일 수 없다는 건가 뭔가. 결국 이름도 모르는 여인에게마저 간파당해 버렸다.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호스트가 어울린다는 말 자주 들어요’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우리는 이상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무슨 소리지?’ 처음에는 바람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명확해지는 그 떨림은 분명 인간이 아닌 어떤 짐승의 울음을 같았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늑대라고 해도 도시 한복판에 늑대가 있을 리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곧 울음소리도 멈췄다. “왜 그러세요, 기사님?” “아뇨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하지만 아무도 없는 걸요?” “그러네요. 기분 탓인 것 같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니, 걸으려고 했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오싹한 살기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 순간 뒤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피 냄새가 묻어났다. “피해요!” 난 전력을 다해 그녀를 껴안으며 몸을 움직였고 동시에 시커먼 무엇인가가 나를 스쳐가며 등 뒤에 뜨끔한 통증이 몰려왔다. 칼에 베인 것일까? 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나는 그녀를 등 뒤로 숨기며 몸을 돌렸으나 눈앞에는 인적 없는 거리뿐이었다. “......어디 있는 거냐, 이 자식.” 상처가 벌어진 등으로부터 핏물이 툭툭 떨어졌다. 난 코트를 벗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설마 활을 쓴 건가? 그건 아니리라. 하지만 다가왔던 것이라고 하기에는 카론 경보다도 빠른 움직임이었다. 나는 계속 앞을 경계하며 등 뒤의 여자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혹시 너무 겁을 먹어서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걱정하며 뒤를 돌아보던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표정을 잃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왼쪽 가슴에는 시뻘건 구멍이 나 있었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미 그녀의 드레스는 차갑게 식은 하수도의 뚜껑 속으로 시뻘건 피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를 겉돌았다. 2 “내, 내 말 들려요?” 그녀가 즉사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몇 번이나 물었다. 방금 전까지 내 팔에 매달려 웃던 아가씨다. 그녀의 정지된 표정은 끔찍한 무엇인가를 봤다는 것을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실감 없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크르르르륵 다시 들려오는 기피한 울림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앞에는 선혈이 툭툭 떨어지는 심장을 쥐고 있는 사내가 가로등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니 애당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발로 서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저것은 인간보다는 야수였다. 탄탄한 육체는 옷 대신 온몸에 길게 자란 은색의 가느다란 털들로 덮여있었고, 또 그것은 희생자들의 것이 분명한 피에 뒤엉켜 있었다. 길고 시커먼 손톱은 칼날을 닮았다. 인간이 짐승으로 퇴화했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이리라. 놈이 내게 다가오며 갈색 머리칼에 뒤덮인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나는 그를 보며 나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키스...... 경?” 내 보라색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키스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쏘아보는 시뻘건 눈동자와 수북한 털 사이로 보이는 이목구비는 지나치게 낯이 익었다. 만약 키스 경이 열 살 정도 어렸다면 저런 모습이리라. “넌...... 누구야?” 내 시선은 못 박힌 듯 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째서 키스와 많은 것일까. 그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며 나를 이리저리 뜯어 봤다.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심장이 움찔거릴 때마다 핏덩이를 바닥에 뱉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커다랗게 외쳤다. “네놈은 대체 뭐야! 이 빌어먹을 자식!” 그때 호각소리와 함께 저 너머에서부터 경찰들의 긴 그림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반인반수는 믿을 수 없는 도약력으로 벽을 타는가 싶더니 마치 유령처럼 달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살인마! 꼼짝 마라!” 검을 뽑아든 경찰들이 목격한 것은 심장을 잃고 즉사한 여인과 피투성이가 되어 서 있는 내 모습이었다. 3 다른 사람도 아닌 왕실 기사가 취조실에 잡혀 갔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 상큼한난센스에 ‘와하하하!’ 하고 웃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내가 되고 나니까 도저히 ‘와하하하!’ 는 불가능했다. “말해! 네놈이 살인범 이지!” “"절대 아니 에요!” 나는 두 시간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곳은 경찰대(警泰隊) 취조실. 취조실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담배연기로 매캐했고 지나치게 추웠으며 결코 밝지 않았다. ‘젠장. 이러고 있을 시간 없는데!’ 그녀의 시체 곁에 있던 나를 막무가내로 체포한 경찰들은 어떻게든 나를 살인마로 몰아가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억울했고 충분히 괴로웠으며 또 충분히 화가 나 있었다. “난 왕실 기사입니다! 스왈로우 나이츠의 엔디미온 키리안이라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을 것 같아! 기사는커녕 호스트 같이 생겼구만!” 움찔! 틀린 말이 아닌데도 무지 화가 나!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닙니까!” “확인할 필요도 없어! 차라리 국왕 전하라고 말해 보시지 그래? 네 녀석이 살해당한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으니까 포기하고 순순히 불어!” “그건 그녀를 보호해주기 위해서.......” “웃기지 마!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윽박지르는 것은 저쪽이 한수 위였다. 나는 한시 빨리 이 사실을 왕실에 알리고 헬스트 나이츠에 수사를 요청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장 키스 경을 만나서 그 살인마가 키스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단 나를 단단히 속박하고 있는 이 밧줄부터 풀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가죽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에 던지며 소리쳤다. “이건 네 녀석의 여행 가방에서 나온 금화야! 이 엄청난 돈은 어디서 난 거지!” “그건 수고비입니다! 지명을 다녀오고 받은 돈이라고요!“ “개소리! 이거 훔친 돈이지!” “으이구!”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애당초 수도 경찰대는 왕실과는 별개로 치안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왕실 기사의 사정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 게다가 살인마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은 이미 나를 범인으로 결정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백을 받아낼 기세였다.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잘 알 거 아니에요! 나도 그 살인마 놈에게 당해서 등에 부상을 입었다고요!” “일부러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힌 게 아니고?” “무슨 수로 내가 내 등에 상처를 입혀!” “그럼 공범이 있다는 건가!” 불행하게도 이 녀석은 내 기대 이하로 똑똑했고, 또 기대 이상으로 고약했다 나는 이를 부득 갈며 그를 쫓아왔다. 한시 빨리 여기를 벗어나 왕실로 가야만 했다. 협박은 내 특기가 아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똑똑히 들어. 왕실 기사를 가둔 행위는 중죄야. 왕실과 연락이 닿는 대로 네 녀석에게 철저하게 책임을 묻겠어! 감봉이나 직위해제 따위로 끝날 줄 알아?” 역시 권력이라는 무기를 들고 나오자 그는 당장 겁을 집어 먹었다. “정말로 당신...... 왕실 기사야?” “그러니까 아까부터 그렇다고 했잖아! 게다가 범인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뭐어어?” 그는 장모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사위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중년의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퀭한 눈매, 거칠게 기른 검은 머리와 더불어 턱은 물론 뺨까지 들어나는 까칠까칠한 수염이 경찰이라기보다는 십 년 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 정도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이, 나가 있어.” “예? 하지만.......” “꺼지라니까.” 나를 마녀사냥 식으로 취조하던 자가 불만이 차득한 기색으로 취조실을 떠나자 이 좁고 음습한 방에는 나와 묵직해 보이는 사내만이 남았다. 눈가를 찡그리는 습관이 있는 그는 담배를 물어 피운 채 한동안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 표정은 마치 의문의 소포를 받아놓고 그것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미 인내심이 바닥이 나버린 나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또 범인이라고 몰아붙일 생각이라면 내 쪽에서 먼저 웃기지 말라고 대답하겠어요.” “아까...... 짐승이라고 했소?”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정색을 하며 그를 바라봤다. “살인마를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소. 그러니까.......” 그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공식적?” “실은 몇몇 제보가 들어왔소. 그런데 그건 도저히 참고할 수 없을 증언들이라서 무시하고 있었지. 아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소. 어떻게 강철 같은 손톱을 기르고 실 한 올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늑대인간이 종마보다도 빠른 속력으로 사람을 살해하고 사라졌다는 말을...... 보고서에 쓸 수 있겠소? 그것도 도시 한복판에서.” 그는 노련한 동작으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런데 당신도 짐승이라고 말하는군. 기사의 말이니까 믿어도 좋은 거요?” “믿고 말고는 당신 자유지만, 적어도 내 눈이 착각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어요, 그놈은.” 머릿속에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반인반수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녀에게서 들어낸 붉은 심장의 맥박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절대 키스 경이 아니야!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는 벽에 기대며 음울하게 말했다. “그것 참 지랄 같군 사람인지 짐승인지도 알 수 없다니. 귀찮아.” 귀찮아? 귀찮다고?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체가 뭐든지 막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 댁이 막아 보시든가.” 그가 뿌연 눈동자를 굴려 나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막을 생각이에요!” “여자로 착각 당해 죽지나 마시오.” 비릿한 웃음에 속이 뒤틀렸다. 지금 나를 묶고 있는 밧줄만 아니었다면 한 대 갈겨줬을 것이다. 그때 달칵 문이 열리며 나를 다그치던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흘낏 본 뒤에 상관에게 말했다. “저 사람, 풀어줘야 할 거 같습니다.” 그때 취조실로 들어온 사람은 코트를 들고 있는 차가운 눈빛의 미남자였다. “카론 경!” 카론 경은 성격대로 별 다른 말없이 나를 증명해 줄 서류로 보이는 문서를 테이블에 놓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카론 경은 담배중독이 분명한 중년의 사내와 구면인 것 같았다. “이게 누구신가. 귀족들의 유능한 해결사이신 카론 샤펜투스 나리 아니시오.” 그 마른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가시가 돋쳐 있었다. 물론 카른 경은 그 정도 말에 발끈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의외의 말을 던졌다. “가프 경, 오랜만입니다.” 뭐? 저 가프라는 자가 기사라고? 가프라는 작자는 그 말에 진절 넌덜머리가 난다는 시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처럼 쫓겨난 놈한테 경은 무슨 얼어 죽을.......” 아주 말 하나하나가 섬섬옥수로군! 카른 경도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지금 즉시 엔디미온 경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왕실 기사는 설령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헬스트 나이츠에서 조사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걱정 마시오. 안 그래도 풀어줄 참이었소.” 가프는 담배를 물고 있는 얼굴로 슬쩍 턱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부하가 ‘진짜 기사나리일 줄은 몰랐수다’ 라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늘어놓으며 나를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역시 공무원들에게 권력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어서 카론 경이 도착하자마자 일은 일사천리였다. “엔디미온 경, 가자” 카론 경은 짧게 말한 뒤에 코트를 입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 벽에 기대어 있던 가프가 카른 경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건 비아냥거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감탄이었다. “의외로군 나보다 더 일찍 집어치울 줄 알았는데, 잘도 견디고 있구먼.” 카론 경은 그런 그를 향해 살짝 목례를 한 뒤에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4 카론 경의 명마...... 그러니까 카론 주니어를 같이 타고 왕궁으로 향하면서 나는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무서운 속도로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말 위에서 나는 그중 한 가지 물음을 꺼냈다. “카론 경, 아까 그 가프라는 사람이 누구죠?” “.......” 카론 경은 못들은 척 박차를 가했다. 나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 살인마 말인데요.” “엔디미온 경.” “예?” “그 등의 자상(刺傷)은 확실하게 소독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할퀸 상처는 파상풍에 감염될 위험이 크다.” 카른 경은 검이 아닌 손톱에 당한 상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찌면 그 살인마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한참 동안 거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를 눈앞에서 잃었다는 죄책감이 마음속의 돌이 되어 온몸을 짓눌렀다. 무력감에 몸이 젖어 말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왕실에 도착하자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 있었다. 5 “아아아아아! 미온 경! 백옥 같은 살결에 이 무슨 끔찍한 상처입니까아! 지명 가서 곰하고 사투라도 별였습니까아아아!” “......아니, 저 그게 아니라.......” 아니나 나를까, 소파에 잠들어 있던 키스 경은 내 상처를 보자마자 호들갑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서글픈 시선은 ‘내 비싼 물건에 흠집 났어’ 였다. 이 악덕 포주! 역시 내가 걱정스러웠던 것이 아니었구나! 키스 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의 벗어요. 치료해 줄 테니까.” 키스는 ‘아 참. 그리고 벌금입니다아’ 라는 안 해도 좋을 말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솔직히 방금 전 키스를 봤을때 뒤로 물러설 뻔했다. 아무리 봐도 살인마의 눈동자와 똑같았던 것이다. 6 키스 경은 주저 없이 내 등의 상처에 강한 냄새가 나는 물약을 부었다. 통각이 되살아나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통증이 몰려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키, 키스 경! 이거 대체 뭐 예요!” “약초들을 알코올과 향유로 우려낸 살균제랍니다아. 전쟁터에서는 자주 써요. 술보다 소독 효과가 훨씬 좋거든요. 조금 아프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지만.” 이게 조금 아픈 거라니! 등짝을 인두로 지지는 줄 알았다고! “아, 아, 아파요! 아프다니까! 조금은 상냥하게 해주면 안 돼요?” “어째서 내가 남자한테 상냥하게 해줘야 합니까아.” 엉뚱한 상처를 입고 들어왔기 때문일까? 그의 목소리에서는 미묘하게 화가 난 기색이 느껴졌다. 자기도 맨 날 다쳐서 들어오면서! 키스 경은 결국 한 병을 다 쓰고 말았고 난 완전히 진이 빠져서 울먹거리는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키스 경은 의학에 대해서도 상당히 능통한 편이었다. 그가 리듬섞인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처는 확실히 소독해야 해요. 실수로라도 감염되면 파상풍, 천형(天刑), 진홍 열병, 디프테리아, 탄저(炭疽), 감염성 황달, 라사 열병,상사병 같은 무서운 불치병에 걸린답니다아!” 마지막 하나는 아닌 것 같은데! “병원균이 우글거리는 전쟁터에서는 살짝 긁힌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어요. 감염을 막으려고 절단한 부상병들의 팔다리가 야전 병원 뒤편에 산처럼 쌓여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속담도 생겼어요. ‘두 다리를 가지고 죽든가 한쪽 다리만 가지고 살든가. 여기가 전쟁터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그렇죠오?” 장난처럼 말하는 그의 말에 꽤 현장감이 느껴져서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흉터는 안 남겠네요. 그럼 붕대를 감아줄 테니까 당분간 무리한.......” “키스 경, 이 상처 왜 생겼는지 안 물어봐요?” 이미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나마나 남을 지키려다가 생긴 상처겠죠. 미온 경이 상처 받을 일은 그것뿐일 테니까.” 상처 받을 일은 그것뿐, 키스 경의 말에는 가벼운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꽤 진지한 표정으로 붕대를 푸는 그의 손놀림은 마치 노련한 제단사의 그것 같았다. 그 뛰어난 솜씨로 내 몸에 붕대를 두르던 키스 경 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키스 경, 나...... 그 살인마 잡고 싶...... 우아아악!” 키스가 아무 말 없이 붕대를 엄청 세게 조였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부, 분명히 화난 거야 이 사람! “하지만 그 살인마는.......” 당신과 똑같이 생겼어. 하지만 절대 당신 아니지? 나는 그 말을 삼켰다. 키스 경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말할 때는 자지 마, 이 인간아.” 7 다음 날, 나는 부상을 이유로 쉴 수 있었다. 한편 룸메이트 지스 경 역시 일하기 싫다면서 막무가내로 지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우리 둘은 하루 종일 침대 신세였다(지스 군은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이런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결국 고양이들과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때 문이 달칵 열리며 지명을 다녀온 루이 경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또 어떤 귀부인이 사줬는지 오색찬란한 롱코트 차림이다. “호오. 불쌍들 하셔라 이 방은 완전히 병실이구려. 환자 커플이냐?” 꼼지락거리는 새끼 고양이들을 담요 속으로 급히 숨긴 지스 경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했다. "노크 하고 들어와! 아니, 그보다 뭐 하러 온 거야!" "당연히 이 모피 코트 자랑하려고 왔지롱." 하나도 안 부럽네요! 뚱하니 바라보던 지스가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애새끼 같긴." "허억! 이 루이 어르신에게 그런 망발을! 누가 봐도 어린애는 니쪽이야!" 그렇지. 한쪽은 외모가 또 한쪽은 정신연령이 루이가 사자갈기 같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역시 비싼 게 최고야, 명품 만세!' 라고 외치는 미소를 보였다. 가끔 저토록 단순하게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단순한 정신구조가 부러울 때가 있다. "하긴 너희들이 이런 명품의 품격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이번에는 루시온 경에게 자랑하러 가볼까나." 모르긴 해도 당신 것보다 비싼 코트 가지고 있을 걸? 등을 다친 탓에 엎드려 있던 나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알았으니까 제발 어디론가 사라져 주시와요. 황금만능주의 기사넘." 앗! 순간 눈이 번뜩 뜨였다. "루이 경! 그 연쇄 살인마 잡혔어?“ "아니." 방을 떠나며 흘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도는 지금 정말 난리야. 거리에서 여자 찾기가 힘들다니까? 에이, 빌어먹을 놈. 죽이려면 남자나 죽일 것이지." 마음속에서 또 다시 살인마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등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8 점심을 먹은 나는 힘없는 몸을 이끌고 카론 경의 집무실로 향했다. 헬스트 나이츠의 본부는 다들 수사라도 떠났는지 근무 시간인데도 제법 한산했다. 덕분에 나는 별 다른 시비 없이 집무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나무문을 노크하자 저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엔디미온 경인가." '어떻게 나라는 것을 알았지‘ 라는 의문은 이 사람에게는 접어두도록 하자. 나는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집무실 안은 청결하고 이지적인 종이 냄새, 잉크 향으로 가득했다. 그 중앙에 셔츠 차림의 카른 경이 있었다. "앉아라." 햇빛이 들어오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그는 날 바라보지도 않은 채 보고서로 보이는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새하얀 것펜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안경 너머의 흑청색 눈동자는 미동도 없었다. 옆에는 이멜렌 님이 만들어 줬을 귀여운 샌드위치들이 완초(莞草)도시락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따로 식사 시간이 없는 모양이다. "바쁘신가 보네요." "특별히 바쁜 건 아니야." 그는 멋진 필체로 능숙하게 문장을 이어나가며 짧게 대답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것이 바쁜 것이 아니라면, 바쁠 때의 광경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결국 그는 완성한 보고서 밑에 자신의 직인을 적고 그것을 세 번 접어 봉투 안에 넣은 뒤에 짙푸른 밀랍을 촛불에 녹여 봉투를 봉인하고 또 그곳에도 직인을 찍어 일을 끝마친 뒤에야 안경을 벗으며 나를 바라봤다. “상처는 잘 치료했나." “아 예. 키스 경이 도와줘서.......” “아팠겠군.” 카론 경도 키스 경에게 ‘당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역시 ’조금 아픈 정도‘가 아니었어! “그 녀석이 봐줬으면 감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나을 때까지 절대로 무리하지 마라. 충고다." 카론 경의 검은 눈동자는 빛을 받으면 사파이어처럼 푸르스름한 광채를 띤다. 그리고 그 청옥(靑玉) 같은 눈빛이 전하는 의미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분한 표정으로 카른 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그놈을 잡고 싶어요.” 카론 경은 그 말 나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엔디미온 경, 가프 경을 믿어줄 수는 없는 건가.” “그 사람은.......” 가프라면 내게 ‘여자로 착각당해 죽지나 말라는' 친절한 충고를 늘어놓은 그 작자가 아닌가. “제대로 사건을 수사할 생각도 없는 사람이에요!” 내 말에 카론 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그의 표정은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가프 경은 내게 수사를 가르쳐 준 사람이야.” “예?”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토끼가 알을 낳았다는 말 만큼이나 믿을 수 없어! “그는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였다. 사람들은 굶주린 표범이라고 불렀지. 인생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범인을 잡는 일에만 몰두했으니까. 자신의 부인이 열병으로 죽던 날에도 그는 범인과 싸우고 있었다. 가프 경은 그런 사람이야.” 카론 경이 말하는 가프의 과거는 맥 빠진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였다. 아무리 카론 경의 말이래도 곧이곧대로 믿기가 힘들다. 지금은 완전히 세상만사에 진절머리가 난 알코올 중독자로만 보이지 않던가. 카론 경은 새롭게 작성할 모양으로 보이는 서류를 한 장 꺼내며 말을 이었다. “그 살인범은 내 수사 영역 밖이다. 그리고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그 일은 가프 경에게 맡겨라.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상이다. 가보도록.” 카론 경은 다시 펜을 들며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고 나는 힘없이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가프 경을 믿으라고?’ 나는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이지만 도저히 그 사람만큼은 올해가 다 지나도 살인범을 잡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니, 노력조차 안 할 것이다. 터덜터덜 본부 밖으로 나오던 길에 나는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장검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이 대련이나 실습을 할 때 사용하는 공용검이었다. “.......” 한동안 그 검들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10 그리고 다시 밤이 찾아왔다. “미온 경, 어디가?” 살짝 잠들어 있던 지스가 방문을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잠깐 바람 쐬러.” “그런데 그거 칼 아냐? 그런 건 뭐 하러.......” 지스는 내가 들고 있는 긴 검을 본 것이었다. “아하하. 그냥 검술 연습이라도 해볼까 해서 말이지.” “바보 같긴.” 지스 경은 ‘다치지나 말아' 라고 조그맣게 말하며 다시 담요 속으로 들어갔다. 눈치 챈 건 아니겠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럽게 일 층으로 내려갔다. 키스 경은 또 어디 볼 일이 있는지 소파에 없었다. ‘만약 그놈이 정말 키스 경이라면 그때는 어쩌지?’ 답을 낼 수 없는 불안감이 목 언저리까지 스며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불안을 떨쳐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키스 경이 상식 밖의 인간이라고는 해도 뜬금없이 몸에서 은색 털이 길게 자라고 손톱이 칼날처럼 솟아나을 리가 없지! 그럼 대체 그놈은 누구란 말인가.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문을 열었다. ‘카른 경, 미안해요.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나는 정적 속에 잠긴 거리로 향했다. 10 ‘여자로 착각 당해 죽지나 말라고? 그래! 이쪽에서 착각시켜 줄테니까 올 테면 오라고!’ 나는 차가운 밤거리를 걸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것은 내 영역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기사이기 이전에 나 자신으로서 이대로 팔짱끼고 몇명이 더 죽을지 손꼽아 보는 짓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키스 경을 닮은 반인반수의 살인마, 그 기괴한 퍼즐 조각은 다시 한 번 그놈과 만나야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이 짧다면 짧은 시간 사이에 자그마치 세 번이나 순찰 중인 경찰대에 잡혀 검문을 받았지만, 역시 헬스트 나이츠의 검을 든 탓인지 기사로 믿어주고 간단하게 풀려났다. 기뻐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야릇한 노릇이다. 시내는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숨죽이고 있었다. 가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무리지어 다니는 사내들뿐. 루이 경의 말마따나 여자들은 모조리 수도를 떠나 피난이라도 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일찌감치 문을 닫은 주점을 끼고 코너를 돌아 어둑한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그때 차가운 밤공기에 섞여 예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그놈이다!’ 그건 마치 살인을 예고하는 뻔뻔스러운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도저히 인간이 내지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울음소리가 터지고 살인이 일어난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울음의 자취를 뒤쫓았다. 치안경찰의 호각소리 역시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밤을 찢어내는 것 같은 비명이 터졌다. “그만둬, 이 망할 자식!”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면서 나는 커다랗게 소리치고 말았다. 11 다행이 여자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놈' 도 아니었다. “사, 살려주세요! 이 남자가 갑자기!” “우헤헤헤. 이리 와, 베이비.” “......얼씨구?” 치한이었다. 정말 대범한 놈이다. 경찰들이 산지사방에 깔렸고 연쇄살인마가 설치는데도 여자를 덮치려는 용기가 가상할 지경이야. 훌륭해. 무적이야. 뭐 저딴 작자가 다 있담! 나는 이를 부득 갈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치한 짓거리도 상황 봐 가면서 해! 아니, 하지 마!” 여자는 구세주라도 만난 표정으로 내 등 뒤로 숨었다. 내가 손을 칼머리로 옮기자 중년의 치한은 움찔하며 멈췄다. 여자를 구한 것이 맞긴 맞지만 이거 대단히 맥 빠지네. 그때 경찰대가 우르르 몰려왔다. “저놈이다! 살인범이다!” “우아아악!” 경찰들은 곡소리를 내지르는 치한을 사정없이 밟고 있었다. ‘드디어 살인마를 잡았다!’ 라는 환호성을 내지르면서. 당신들이 보기에는 정말 그 배나온 아저씨가 바람처럼 나타나 스물여섯 명이나 되는 여자를 살해한 살인마로 보이나요? 혹시 단순 변태로 보이지는 않나요? 그때 나는 어둑한 골목 틈바구니 에서 용수철처림 솟구쳐 나오는 실루엣을 보았다. “그놈이다!” 반사적으로 소리치자 경찰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놈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 직감했다. 하지만 틀렸다. 포효에 가까운 울음과 함께 그 괴물이 내게 들이닥쳤고 나는 동시에 검을 뽑았다. 카아아앙 간발의 차이로 칼날과 길고 검은 손톱이 뒤엉켜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질렀다. 살인마의 은색 털이 창백한 달빛 아래 반짝거려 마치 그 모습은 늑대로 변해버린 인간과 같았다. "다시 만나 정말 반갑군. 미안하지만 난 엄연히 남자란 말씀이야!" 힘에서 밀리는 나는 조금씩 뒤로 물러서면서도 그를 쏘아보며 외쳤다. “말해! 넌 키스 경이 아니지! 정체가 뭐야!” 그러나 그 시뻘건 눈동자는 단지 나를 죽여 버릴 것만 같은 기세로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분노였다 분명 동물이 아닌 인간의 눈동자였다. “저, 저놈이 살인마! 모두 포위해! 놓치지 마!” 십수 명이 넘는 경찰대가 칼을 뽑아들며 우리들을 둘러쌌다. 나는 당황해선 외쳤다. “자, 잠깐 죽이면 안돼요! 물어볼 것이 있.......” 그러나 경찰들은 내 말을 무시한 채 칼을 꼬나들고 뛰어들었다. 동시에 이놈은 나를 밀쳐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포효가 거리를 울렸다. “우아아악! 이 괴물!” 그놈은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팔을 휘두를 때마다 그 긴 손톱에 잘려나간 칼날과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그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놈은 믿겨지지 않는 힘과 도약력으로 경찰들을 휘젓고 있었다. 제대로 막아볼 기회도 없이 목이 뜯겼고,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피와 비명과 포효가 동시에 뒤섞여 눈앞의 모든 것이 지옥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이 자식! 네 상대는 나다!” 나는 이미 인간의 피를 뒤집어 쓴 놈에게 뛰어들었다. 그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심장의 맥박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피 묻은 그의 얼굴은 정말 키스 경의 어린 모습이었다. 그 공허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키스의 생령(生靈)이었고 소년기의 분신(分身)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검을 휘둘렸다. 새파란 불꽃이 튀기며 손톱들이 잘려나가 하늘로 치솟았다. 손목이 끊어진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12 강철을 끊는 검술, 알테어 님에게 배운 유일한 그 기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인반수의 손톱에도 통용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마에서 핏줄기가 계속 흘러내렸다. 저놈의 손톱을 잘라내는 순간 다른 팔로 반격을 당한 탓이다.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압만으로도 이 지경이라니...... 만약 저것이 내 목으로 파고든다면 적어도 고통을 느낄 시간 따윈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손목을 다친 것 같아.’ 더불어 검날도 심하게 상했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 왼손으로 검을 옮겼다. 왼손으로는 연습해 본 적도 없지만 적어도 삐걱거리는 오른손목보다는 내 의지를 잘 실현시켜 주리라 믿으면서. 크르르륵 저놈은 방금 전 공격 때문에 긴장했는지 으르렁거리면서 쉽사리 내게 접근하지 못했다. 치한도 여자도 혼비백산 도망쳐서 주변에는 온통 경찰들의 시체뿐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죽음이 바로 내 등 뒤까지 다가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초조함 속에서 방심했던 것일까? 나는 눈가로 흘러내린 핏물 때문에 시야를 흩트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와 함께 야수가 달려 들었다. “제길!” 다급하게 휘두른 검은 그놈의 거친 공격에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내려보는 싸늘한 ‘키스 경’ 의 표정이 얼어붙은 달빛과 함께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들어 올린 손톱을 보며 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내가 여자로 착각당해 죽을 거라 했잖소?” 난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낡은 바지와 구두가 보였고, 앞에 반쯤 타들어간 담배가 떨어져 불씨를 뿌렸다. “가, 가프 경?” “근데 진짜 짐승이네? 아니, 금수 주제에 여자만 노리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고기가 연해서 그런 건가? 응?” 그는 여전히 호감가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예전과는 달리 더없이 날카로웠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어버릴 기세였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이 오라질 새끼야! 네놈을 썰어버리기 전에 스물여섯 명의 심장을 적출한 이유나 들어보자고! 염통이 특별히 입맛에 맞아서? 아니면 서커스 관장이 밥을 안 줘 미친 거냐?” 크르르릉 “왜 말 못해. 그 주둥아리는 인육을 처먹을 때만 쓰냐? 응? 어서 그 잘난 아가리를 나불거려 보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사람의 쌍욕 하나는 아이히만 대공과 난형난제라는 것이리라. 그 순간 번뜩이는 광채를 흘리며 그의 검이 낡은 칼집에서 솟아올랐고 거의 동시에 커다란 호선(弧線)을 그렸다. 카론 경과 비등한 수준의 발검이었다. 솔직히 저 정도 실력자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아마 다른 자였다면 그 즉시 몸이 두 동강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인반수는 스프링처럼 몸을 뒤로 튕겼고 또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프는 뒤쫓을 생각이 없는지 쓰러져 있는 내게 다가와 쭈그려 앉으며 반쯤 뭉개진 담배를 물었다. 그가 퉁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담배 피우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에게 건넨 첫마디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아뇨. 오래살고 싶거든요.” “그럴 거면 이런 일 하지 말아야지. 카론 군이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보다 그놈 안 쫓을 겁니까?” 그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 보며 말했다. “내가 쫓아가면 따라잡을 것 같소?” “그, 글쎄요. 솔직히 어려울 것 같은.......” “그런데 왜 쫓아. 다리 아프게.” 그는 정말 맥 빠지는 말을 늘어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부하들의 시체였다. 그가 담배연기를 뿜으며 중얼거렸다. “엔디미온 경이라고 했던가? 내기 하나 하겠소? 스물여섯 명의 여성과 열두 명의 경찰이 개죽음을 당했는데도 우리 근엄한 왕실이 움직일지 안 움직일지. 나는 후자에 이번 달 월급 다 걸도록 하지.” “.......” 그의 탁한 목소리에 나는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왕실의 유일한 지원이라면 그나마 나 하나? 귀족이라도 죽지 않는 이상 카론 경에게 수사 허가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카론 경의 스승이라고 들었어요.” “스승은 무슨 얼어 죽을. 병아리에게 걸음마 하나 가르쳐 준 것 가지고 생색내긴 싫구먼.” ‘벼, 병아리라.......’ 카런 경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어째서 헬스트 나이츠에서 쫓겨난 거죠?” 그가 나를 힐끗 보고는 툭하니 말을 내던졌다. “범인을 잡았거든.” “예?” 나는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백작 가문의 망나니 녀석이었던가? 어린애들을 고문해서 토막내는 아주 고상한 취미를 가진 놈이었지. 그런 게 그렇게 좋았으면 정육점이나 할 것이지. 쯧.” 빈정거리는 말투에는 격한 모멸감이 스며 있었다. “수사고 뭐고 할 것도 없었어, 시체를 제대로 숨길 줄도 모르는 얼간이였으니까. 그 집안에 가보니 그놈 애비가 나한테 금화를 한가득 던져주면서 마누라 옷이나 해주라고 하더라고. 내 여편네는 이미 죽고 없는데 잘도 지껄이더군. 그 금화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죽은 어린애 어머니가 내 뺨을 후려치더군. 너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그런.......” “그 순간 내가 이제 이 짓을 그만둬야 할 때가 됐구나, 라는 기분이 들어서 곧바로 다시 들어가 그 미친 자식을 흠씬 두들겨 패준 뒤에 감옥에 가둬 버렸어. 그리고 다음 날로 놈은 풀려났고 나는 쫓겨났지. 세상에는 잡아서는 안 되는 범인도 있나봐. 난 그걸 납득하기가 싫어. 납득하는 순간 나 자신에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져 버릴 것 같거든.” 쓸쓸한 눈빛으로 부하들의 시체를 살펴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왔다. “죄송해요. 제가 오해했어요.” “아냐. 괜찮아. 나 오해받는 거 좋아해. 취미야.” 그는 무성의하게 흥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톱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날카롭게 잘려나간 흑요석의 파편 같았다. 그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한 듯이 말했다. “난 동물학자는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합금으로 된 손톱이 자라는 짐승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은데?” “하, 합금이라고요?” 그 손톱이 합금이라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고강도 합금을 제련할 수 있는 나라는 흔치 않지. 마키시온이나 이오타, 콘스탄트 정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해. 최소한 이 살인마 자식이 수입품이라는 것만은 확인된 것 같군. 이젠 별 게 다 수입돼요. 이런 망할 놈의 나라.” 가프 경은 입버릇처럼 넌덜머리를 내뱉으며 또 담배를 물었다. 13 “미온 겨어어엉! 이젠 아주 떡이 돼서 들어오시는군요오!” 내 꼴을 본 키스 경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표정은 완전히 밤낮 술에 절어 들어오는 못난 서방을 원망하는 아내의 뱀눈...... 끼지는 아니더라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울상이었다. 키스 경에게 저런 표정을 끌어낼 수 있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 “키스 경. 잘못한 줄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시끄러워요! 여기가 무슨 야전병원인 줄 알아요?” “우악!” 키스가 (그 괴력으로) 나를 번쩍 들어서 소파에 집어던진 뒤에 뭐라고 툴툴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을 때는 예의 그 무시무시한 소독약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바를 곳도 많아서 한 병으로는 부족하겠군요! 각오하세요!” “자, 잠깐! 그것만은!” 당신, 나, 죽일 셈이야? 그건 카론 경도 아프다고 인정한 희대의 고문 약품이야! 그가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몸을 소중히 하세요.” 진지한 키스 경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우러나올 찰나. “그 몸은 향후 십 년간 스왈로우 나이츠의 것이며 나아가 이 단장 키스 세자르의 것이랍니다. 제 몸을 부디 소중히 다뤄 주세요오!” 같은 위로도 그렇게 하면 기분 나쁘다고! “어째서 내 몸이 당신 몸이야! 그리고 앞으로 구 년이야! 은근슬쩍 일 년씩 늘리지 말라고!” “쳇. 안 속네.” 키스가 아깝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 채 주먹을 꼭 쥐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저런 나사 빠진 인간은) 절대 살인마가 아닐 거라는 기분이 든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키스 경.” “네에?” “그 살인마 봤어요.” “아, 그래요?” 키스 경은 무관심한 어투로 말하며 소독약을 들었다. 내가 말했다. “당신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 순간 키스가 약병을 떨어트렸다. 유리병이 산산이 깨지며 극적인 냄새가 순식간에 거실을 장악했다. 고개를 숙인 키스의 등이 떨리고 있었다. “......키스 경.” 순간 몸을 확 돌린 그가 내 멱살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제가 그렇게 밉나요? 제가 그렇게 밉나요? 제가 그렇게 밉나요오!” “우아아! 이 손 좀 놓고 얘기해요! 당신 힘이 장사라고! 수, 숨 막혀!” “어쩜 그런 흉악한 살인마와 절 닮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닮은 게 아니라 진짜 똑같다니까요!” “살인마를 보고 제가 떠오를 정도로 제가 싫었던 겁니까아!” “그게 아니라니까!” 진짜 격렬한 거부반응이었다. 키스는 황제에게 버림받은 애첩인양 힘없이 바닥에 털씩 쓰러져 서럽게 울먹거렸다. “아아, 배은망덕하고도 불효막심한 미온 경이로군요. 이래서 아들새끼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니까요. 역시 딸을 낳았어야 했어요.”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 하지 마!” 실제로 내 아버지께서는 갓 태어난 나를 보고 ‘쳇. 남자잖아?’ 라면서 집어던졌다고 한다. 게다가 딸이 나오길 빌면서 여자 옷만 잔뜩 사 놓질 않나(그 옷 다 내가 입었다!). 아니지. 지금은 내 불우한 출생의 비극을 토로할 때가 아니야. “키스 경, 당신 놀리려고 비슷하다고 한 거 아니에요. 믿어주세.” “네에. 서럽지만 제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도록 하지요.” “하아. 고마워요.” 그리고 키스 경은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곧 그 망할 약병을 두 개나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오늘은 이 두 병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써볼까요오?” 여, 역시 삐졌어! “시, 싫어! 그거 바를 바엔 죽는 게 나아!” “오호호호. 카론 경도 처음엔 그러더군요. 하지만 익숙해지면 고통은 곧 짜릿한 쾌감으로 변해갈 거랍니다아.” “닥쳐! 그럴 리가 있겠냐! 이상한 데서 주워들은 소리 하지 마! 흐으윽! 누가 좀 살려 줘!” 소파에서 굴러 떨어져서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가던 중, 내 발목이 키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나는 맨땅에서 수영하는 모양새로 울먹거리며 바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심정은 포악한 악어에게 물려 늪으로 끌려들어가는 어린 원숭이의 마음. “키, 키스 경. 미온 경? 지금 뭐하시고 계시는.......” 소란스러운 생난리 덕에 눈을 부비며 나타난 사람은 크리스 경이었다. 막 지명에서 돌아와 단잠을 자고 있을 텐데 깨워서 미안해......라기보다는 좀 살려줘! 랑시와 지스, 루이, 쇼탄, 루시온 경도 일 층으로 내려와 황망한 시선으로 발버둥치는 내 모습을 바라봤다. 지스가 눈을 확 흘기며 짜증을 냈다. “한밤중에 서로 스트레칭이라도 해주고 있는 거야?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어.” 빈정거리지 마! 난 피해자라고! 이윽고 쇼탄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차 한 잔 부탁해.” 뭐? 그러자 어디선가 스르륵 나타난 시종이 뜨거운 차를 내려놓고는 다시 스르륵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저 시종, 대체 오밤중에 어디서 있었던 거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이 차 마실 때냐! 그러나 다른 녀석들도 마치 영화관이라도 온 것처럼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루이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감상해 보실까.” 난 창백해진 얼굴로 관객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너무 끔찍한 나머지 편집된) 생 라이브 하드코어 SM쇼가 그 막을 열었다. 14 다음 날, 또 다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나는 오늘도 휴일이었다. 물론 키스 경은 이 병가(病暇)위에 벌금을 살짝 올려놓았다. 아 뭐, 괜찮아. 평생 돈 벌기는 글러먹은 인생이라고 스스로도 납득하고 있는 걸? 이마에 붕대까지 감는 바람에 본격적인 환자 티를 내고 있는 나는 이번에도 카론 경을 찾아갔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뭐? 카론 경? 아마 연무장에 계실 걸?” 연무장(鍊武場)은 말 그대로 무예를 닦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까 카론 경이 연습하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군. 항상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카론 경도 검술 연습을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물론 키스 경은 절대 안할 테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삼십 분이나 걸어서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밖에서부터 카론 경이 수련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걸? 무슨 인기 배우의 공연장인 양 엄청난 수의 소녀, 아가씨, 아낙네까지 연무장 창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대성황이로군. ‘아무튼 죄 많은 유부남이라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살금살금 뒷문으로 들어갔다. 나까지 합세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연무장은 그 성격상 겨울에도 불을 지피지 않는다. 당연히 이런 날씨에는 공기가 얼어붙은 듯이 추울 수밖에 없는 장소다. 어떤 의미로서는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시 커다란 실내 연무장에는 카론 경 혼자였다. 게다가 그는 이 뜨거운 시선들과 열렬한 추파에도 눈길 하나 안 준 채 혼자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도 두 자루의 검으로. ‘엥? 두 자루?’ 나는 조심스럽게 카론 경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은 채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고요해서 보고 있는데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단지 그 모습 자체만으로 날카로운 칼날 같아 다가가면 베일 것만 같았다. 나를 발견한 여자들의 소곤거림이 더욱 커져서 나한테까지 들려왔다. “어머 카론 경 애인인가 봐. 역시 미녀네.” 남자야! 그리고 부인 있는 남자한테 애인은 또 무슨 망발입니까! “아! 저 사람 스왈로우 나이츠의 엔디미온 경이야. 정말 여자가 봐도 예쁘네.” 헤헤. 드디어 나도 왕실의 인기인이 된 건가. “그런데 카론 경과 한판 붙으려나봐.”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한 젊은이에게 그런 무서운 말 좀 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카론 경은 나를 먼저 '느끼고' 입을 열었다. “수련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그가 천천히 눈을 뜨며 날 바라봤다. “그런데 본래 쌍수검(雙手劍) 쓰셨어요?” “아니.” 카론 경은 고개를 저으며 자세를 풀었다. 그리곤 자신의 땀으로 흥건한 바닥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단지 내가 이기고 싶은 녀석 이 이런 검술을 쓰니까......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의, 의외네요.” 상대를 능가하기 위해 상대의 검술을 치밀하게 연구하는 카론 경의 태도도 감탄스러웠지만-은의 기사가 이기고 싶어 하는 검술사라니, 세상에 그런 사람도 존재하는구나. 카론 경은 붕대에 감긴 내 모습을 훑어보며 눈매를 조금 찡그렸다. “결국 어젯밤 수도로 나갔나 보군.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카론 경. 그 살인범, 키스 경과 똑같이 생겼어요.” 나는 본론을 말했다. 그러나 카론 경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다시 검을 들 뿐이었다. 그가 흘리듯이 말했다 “잘못 봤겠지.” “아니에요! 정말 똑같아요!” 정확히 말하자며 좀더 어린 편이었지만. 그러나 카론 경은 완고했다. “그럴 리가 없다.” “어, 어째서 그렇게 단정하시는 거죠?” 설마 그 뛰어난 추리력으로 뭔가 알아낸 것일까? 그가 앞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녀석은 세상에 하나로 족하니까!” “......그것 참 절절한 이유로군요.” 하여간 키스 경 이야기만 나오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입을 얼었다. “어쨌든 그건 자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수사의 아마추어가 건드려 봐야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꽤 서운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너무도 낮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카론 경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집요하구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론 경이 좀더 과격한 인간이었다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귀찮게 하지 말고 씩 꺼져!’ 라고 소리쳤으리라. “왕실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 사건은 내가 손을 댈 수 없다. 엔디미온 경도 잘 알 텐데.”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왕실의 허가를 받아내면 된다는 거죠?” 카론 경은 슬쩍 나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라는 눈빛이다. “카론 경도 실은 그 살인범 잡고 싶은 거죠? 그렇죠?” “도와주실 거죠?”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 차가운 눈빛에 순간 빛이 스민다. 카론 경은 몸을 돌려 문가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런 말은 허가를 받아온 뒤에 해라.” “예!” 나는 환한 표정으로 그의 등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15 자, 이제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 전하와의 담판만이 남았다. 하지만 세 시간이나 기다려 어렵사리 알현하게 된 전하의 곁에는 하필이면 헬스트 나이츠 기사단장 헬렌 카민스키 경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녀는 예전 블리히 경보다 더욱 더 난공불락이었다. “엔디미온 경, 자네의 뜻은 잘 알겠네만 관례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최근 뭘 드셨는지 두 볼이 더욱 통통해진 임금님께서는 내 간청에 우물쭈물하면서 흘낏 헬렌 경을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 맘에 안든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 위로 날카롭게 자른 숏컷의 금발이 캐리어 우먼의 표상과 같은 헬렌 경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엔디미온 경, 이런 문제에 대해 나 헬스트 나이츠 단장을 거치지 않고 전하께 직접 상소한 무례 역시 상식 밖이지만, 왕실에는 유구하게 엄존하는 원clr이 있다. 왕실 근위기사단인 헬스트 나이츠를 고작 이런 사건에 투입시킨 전례를 남겼다가는 그 품위가 크게 손상된다는 점을 명심해라!" 나는 곧바로 발끈했다. "고작 이런 사건이라고 하심은, 스물여섯 명의 여자와 열두 명의 경찰대가 왕실의 코앞에서 살해당한 사건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런 감상적인 말로 기사단을 움직일 생각이었다면 당장 사라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녀는 싸늘한 경멸의 말을 내뱉었다. 확실히 헬렌 경은 ‘잘못된 관례라면 바꿔야 하잖아요!’ 라고 외쳐봐야 씨알도 안 먹힐 강철의 여자다. 나는 히든카드를 꺼내야 했다. “물론 헬렌 경의 말씀대로 이 사건은 감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운을 띄우며 전하를 바라봤다. “전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이후 수도의 수익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어, 얼만데?” 전하의 눈빛이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커다랗게 뜨였다. 나는 슬슬 낚싯줄을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10분의 1 이하로 줄었습니다.” “정말인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올리겠사옵니까.” 이건 진짜 사실이다. 아이히만 대공의 연줄을 통해서 행정부 서류를 훔쳐본 결과 정말 수도의 상업 수익이 단 삼 일 만에 무섭게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밤만 되면 아무도 나오지 않는데 상업 중 심지인 수도 아스말이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나는 세계멸망을 예인하는 점쟁이의 표정으로 무게를 있는 대로 잡으며 말했다. “만약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결국 세금을 낼 수 없는 지경까지 갈 것이며, 그러면 왕실의 재정에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오게 될것입니다! 이러다간 전하의 순금상마저도 헐값에 팔아치워야 할지 모릅니다!” “그건 안 돼!” 임금님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표정은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창백했고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전하는 당황하는 헬렌 경을 바라보며 주저 없이 명령했다. “헬렌 경! 당장 헬스트 나이츠를 투입시켜 그 못된 살인범을 잡아 들이시오!” “하, 하지만 전하!” “아니, 꼭 순금상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고, 백성들이 공포에 시달리는데 관례를 깨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국왕의 의무가 아니겠소? 정말 그것 때문이라니까?” 누가 봐도 순금상 때문이었다. 헬렌 경은 이를 빠득 갈며 짜내듯이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지금 카론 경에게 일러...... 수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마녀의 상(像)으로 나를 확 쏘아봤다. ‘키스 경의 못된 재주만 배웠군! 언젠가는 꼭 쓴맛을 보여주겠다! 엔디미온 경!' 어째 이거 내가 키스를 향한 미움까지 뒤집어 쓴 기분인데?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평화를 사랑하는 소시민의 미소로 회답해 주었다. 16 가프 경이 있는 경찰대 본부로 같이 걸어가던 카론 경이 말했다. “어떻게 허가를 받은 건가?” 카론 경은 그 냉철한 추리능력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전하에게 농간을 쳤습니다' 라고는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냥 히죽 웃었다. “백성을 위하는 전하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충언을 드렸을 뿐입니다.” “자네는 가끔...... 아니, 자주 나를 놀라게 하는군.” 그는 칭찬인지 푸념인지 그렇게 말하며 내 옆을 걸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눈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는 왜 따라오는 건가!” 나도 실눈을 뜨며 뒤를 돌아봤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키스가 졸래졸래 우리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손에는 군것질거리까지 들고.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야 물가에 나간 자식들을 걱정하는 지아비의 마음 때문이지요오.” “당신이 있으면 더 위험해질 것 같아!” 그냥 심심해서 따라오는 거면서! 나와 카론 경은 동시에 고개를 획 돌려 다시 앞을 바라봤다.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 나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살인범을 꼭 보고 싶어요. 인기 있는 내 얼굴을 할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착각은 자유였다. 카론 경은 '그만 좀 조잘거리지 못할까!' 라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키스 경은 슬픈 목소리로 혼자 흥분하고 있었다. “나랑 닮은 녀석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아!” 카론 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나 역시 너 같이 생긴 녀석 이 세상에 더 있다는 사실은 상상만으로도 불쾌해.” 게다가 길고 검은 합금 손톱에 긴 은색 털에다가 벌거벗고 있다고! 만약 카론 경이 발견한다면 주저 없이 목을 날려버릴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고개를 힐끗 돌려 고구마 칩인지 감자 칩인지를 계속 와삭와삭 먹으면서 뒤따라오는 키스 경을 보고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임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 불안감이 사라지는 이유는 비단 그 가공할 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7 다들 가프 경이라고 불러서 몰랐지만, 가프의 정식 직책은 수도 치안 경찰대 총감이라고 한다. 낮은 직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왕실 기사에서 그렇게 된 것이니 서열상으로 본다면 완전히 몰락한 셈이다. 게다가 총감이 된 이후 한 번도 승진한 적이 없단다. 왠지 카론 경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투만큼은 도저히 호감이 안 가지만 말이다. 우리가 가프 경감의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그는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발을 걸친 채 신문을 얼굴에 덮고 누워 있었다. 그가 그 자세 그대로 중얼거렸다. “호오. 은의 기사께서 무슨 용무로 이 누추한 곳을 찾아오셨는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친구는 엔디미온인가 하는 애송이로군. 그런데 그 뒤의 또 한 명은 누구신가?” 나는 혀를 찼다. 점쟁이가 따로 없었다. 역시 이 양반도 카론 경과 같은 '초인' 으로 분류해야겠군. 그가 신문을 살짝내리며 우리를 바라보다가 순간 표정이 굳었다. “이런 죽일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갑자기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오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자신의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총이 불을 뽑듯 칼날이 솟구쳐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비명이 들렸다. “선량한 시민한테 이 무슨 행패입니까아아!” 역시 칼끝의 목적지는 키스 경이었다. 내가 당신 있으면 더 위험해질 거라고 했지! 가프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키스 경을 노려봤다. “너, 정체가 뭐냐?” 가프 경감이 놀란 이유는 키스가 죽을 것 같은 호들갑과는 달리 단지 두 손가락으로 그의 칼끝을 잡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가프 경감의 검술을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그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다. 서로 짜고 해도 못할 신기(神技)였던 것이다. “너 이 자식! 살인마 놈이냐!” 그러자 키스는 있는 대로 엄살을 부리며 카론 경에게 달라붙었다. “카른 경! 저 못된 아저씨 좀 혼내주세요오! 세금도 착실하게 냈는데! 아아, 지금까지 굉장히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내가 살인마였을 줄이야!” 댁이 납득해 버리면 어찌자는 거야! “덥다. 떨어져!” 매정하게 키스를 밀쳐낸 카론 경이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그냥 골칫덩이입니다. 절대 살인범은 아닙니다.” “골칫덩이? 하지만 방금 손가락으로 내 칼을 막았는데? 설마 숨겨둔 아신이냐?” “그냥...... 실력 좋은 골칫덩이입니다.” 카론 경은 단호하고도 무성의하게 키스 경을 정의해 버렸다. “하지만 너무 닮았어.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군!” “저도 그 점이 궁금합니다.” 카론 경이 얼음 같은 눈빛으로 가프 경감을 바라보자 그는 한참 찡그린 표정으로 키스 경을 바라보더니 문밖으로 나섰다. “따라와. 검시실(檢屍室)로 가자.” 18 사체가 보존되어 있는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낮에도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은 검시실은 경찰대 본부 지하 이층에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나는 점점 매캐한 안개 속에 잠겨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곧 그것이 부패한 시신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악취라는 것을 알게 되자 식사를 하지 않고 온 것에 감사할 정도로 속이 뒤틀렸다. 앞서 내려가던 카론 경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가프 경감과 대화중이었다. “검안(檢案) 소견서를 작성하셨습니까?” “물론이지. 살인이 일어날 때마다 두꺼워져서 이제는 아예 사전으로 만들어도 될 분량이네.” 이런 분위기에서도 표정 하나 안 바뀌는 카론 경이나 한술 더 떠서 쓴웃음 나오는 농담까지 꺼내는 가프 경감이나, 코와 입을 틀어막고 겨우 겨우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내게 있어서는 엄청 얄미워보였다. 한편 내 등 뒤의 키스 경은...... “미온 경도 드실래요오?” 고구마 칩을 맛있게 먹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주 미워 죽겠어! 19 검시실 풍경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새하얀 타일로 두른 넓은 공간은 마치 방치된 주방처럼 악취로 가득했고, 영혼마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중앙의 거대한 욕조에는 살인마에게 당한 시신들이 약물과 얼음 속에 잠겨 있었다.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겠지만, 정말 보고 있자니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괴로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해야 했다. 내가 지키지 못한 그녀도 지금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읽어보게.” 어느새 담배를 문 가프 경감이 들고 온 검안서는 그의 말대로 두꺼운 사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귀찮다, 짜증난다 말하면서도 저토록 정성스럽게 기록해두었다니, 가프 경감은 실은 누구보다 살인범을 잡고 싶었던 것이리라. 카론 경은 시장(屍帳-법의학적 판결문)과 시형도(屍型圖-발견되었을 때 사체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둔 그림)가 포함된 장문의 검안서를 빈틈없는 눈빛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거의 한 시간 가량 아무런 말도 없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이하군요.” “그렇지?” 카론 경은 안경을 쓰고 하얀 장갑을 끼며 보존되어 있는 사체들로 향했다. 아니 '보존' 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은 상당히 부패되어 있었지만, 그는 악취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마치 사전을 뒤지듯 알몸의 사체들을 훑어봤다. 모르긴 해도 아마 이멜렌 님이 이 모습을 봤다면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여자 사체들의 심장이 하나 같이 없다는 것이 동일법의 소행임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카론 경은 그 뜯겨나간 부위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가 기계적 손놀림으로 검시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짐승은 아닙니다.” “근거는?” “잘 아실 텐데요. 짐승이 물어뜯거나 할퀸 상처라면 그 가장자리가 불규칙하고 그 주변에 표피박탈이 수반되며 상처 속 공간의 근육과 혈관 역시 뒤틀려 있어야 합니다만, 이 사체들 모두 날카로운 흉기에 의해 깨끗하게 도려내져 있었습니다. 짐승이 이런 정밀한 위해를 가할 수는 없습니다. 감안서에 의하면 일격에 생긴 상처더군요. 인간이라고 해도 무척 숙달된 솜씨라야 가능합니다.” “검술의 달인이란 말인가?” “아니요. 이것은 일반적 도검류에 의한 자상(刺傷)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타자기를 치는 것 같았다. “또한, 사체 어디에도 디펜스 마크(Defence Mark)를 발견할 수가 없군요.” 디펜스 마크? 그게 뭐지? 내가 궁금한 표정을 짓자 히죽 웃는 키스 경이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미온 경, 그게 뭐냐 하면 말이지요.......” 그 순간 키스의 손가락이 칼날처럼 내 눈으로 향했다. 나는 기겁을 하면 소리쳤다. “우아악! 뭐하는 짓이에요!” “바로 이겁니다아.” “이거라니?” 나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가린 내 팔을 바라봤다. “상대가 흉기 등으로 공격해 오면 훈련받지 않은 인간은 반사적으로 팔이나 손으로 막게 되지요. 그렇게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사체에는 손바닥이나 손등, 새끼손가락 쪽에 상처가 남게 됩니다. 그게 바로 디펜스 마크, 즉 방어흔(防禦痕)이랍니다아.” “그, 그럼 그게 없다는 것은.......” 카론 경이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공격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상대가 면식범이거나 아니면 기습적으로 상대를 즉사시켰다는 의미지. 마치 노련한 암살자가 일격에 대상을 살해하는 것처럼. 자네도 목격했겠지?”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나 역시도 그놈이 언제 그녀의 심장을 도려냈는지 알 수 없었다. “카론 군 말대로 이건 미치광이가 마구잡이로 죽인 것이 아니야. 도리어 훈련받은 킬러가 동일한 방식으로 타깃을 살해한 것에 가깝지. 윗대가리 놈들은 그런 미친 놈 하나 못 잡고 뭐하냐고 윽박지르고 앉았지만, 이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냐.” 가프 경은 그렇게 말하며 카른 경에게 봉투 하나를 던졌다. 카론 경이 그 봉투 속에서 꺼낸 것은 바로 내가 잘라냈던 손톱 조각, 즉 검은 합금이었다. “이것이...... 흉기 인가요.” 카론 경이 자신의 눈동자 가까이 그 반짝거리는 합금 조각을 가져다댔다. “암살자였다면 굳이 그런 해괴망측한 흉기로 상대를 죽일 리가 없겠지. 그리고 손가락에서 합금 칼날이 자라나는 짐승 같은 것도 없고. 그러니까 그 살인범은 인간도 짐승도 아닌 괴물이야. 게다가 저 녀석을 닮은.......” 가프가 의혹에 가득 찬 눈빛으로 키스를 바라보자 키스는 ‘나 아니라니까요오!’ 라는 시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가프 경감은 줄담배를 피우며 투덜거렸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괴물이든 외계인이든 간에 문제는 한시 빨리 잡아 족쳐야 한다는 거야. 며칠 동안 잠을 못자서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라고.” 카론 경은 차가운 시선으로 사체들이 잠겨 있는 얼음 욕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잡겠습니다.” “그거 정말 고마운 말이로군. 그런데 어떻게?” “밤에 나타나 여자를 살해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오늘 밤, 그놈이 나타날 곳을 예측해서 잠복하겠습니다. 경찰대는 일단 철수시켜 주십시오.” 경찰대라면 수십 명이 몰려와도 시체만 늘어날 뿐이라는 것을 카론 경은 잘 알고 있었다. 가프 경감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미끼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떡밥이 있어야 고기가 몰리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지만......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여자를 노출시킨다는 것은.......” 가프 경감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너 말이다, 살인범 잡고 싶다고 했지?” “또 또 또 여장하라고!”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는 고양이처럼 온몸을 곤두세웠다. 왜 한 권에 한 번씩 해야 하는 거야! 너무 서비스가 과해! 게다가 내가 여장할 때마다 온갖 불행한 일들이 다 생겼어!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러나 가프 경감은 자기 일 아니라고 무지 태연하게 말했다. “호오. 유경험자인가 보네?” 그럼 더 잘됐구먼. 어이! 누가 드레스 좀 구해와! 아주 야시시한 걸로!“ 닥쳐! 카론 경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빠져 있던 키스가 뭔가 반짝 떠오른 얼굴로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한테 좀더 좋은 방법이 있답니다아!” 좀더 좋은 방법? 우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20 “......그래서 그 방법 이 결국 이거였나.” 카론 경이 테이블에 놓인 드레스를 바라보며 심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놓여 있는 드레스는 세 벌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키스가 낸 제안은 지극히 광적이었다. 나와 키스 카론 경 모두 여장을 하고 밤거리를 활보한다. 살인범이 나타나면 셋이 모여 단숨에 제압! 아아, 좋아, 뭐.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넌 정녕코 여장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떠오르는 거냐! 이 인간아! 카론 경이 깊은 숨을 들이쉬며 진지하게 말했다. “키스, 이것은 수사 이전의 문제다. 나는 이런 일로 내 명예를 더럽히고 싶은 생각은.......” “카론 경! 진지하게 수사하고 싶은 생각이 있긴 있는 겁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을 체포해야 하잖아요! 그렇죠오? 네?” “그, 그건 그렇지만......” 카론 경은 곤혹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키스는 집요했다. “범인을 잡기 위해 온몸을 불사른다! 이거야말로 고귀한 은의 기사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 아니고 뭐겠습니까아!” 키스 경, 당신 눈이 웃고 있어. 지금 즐기는 거지? “나, 나, 나는 그냥 잠복해 있겠다. 부탁인데.......” 떨리는 눈빛으로 말하는 카론 경의 애절한 간청을 키스는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카론 경은 정말 인간 말종이로군요! 죽은 피해자들의 원성이 들리지도 않는 겁니까!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고작 드레스 한 번 입는 것조차 못하겠다는 겁니까? 저 역시도 기사의 신분으로 굴욕을 감수하며 입기로 결심했는데!“ 아니, 당신은 입어도 별로 피해볼 것 없을 것 같은데...... 그보다 나는 어느새 당연히 입어야 하는 쪽이 된 거야? 가만히 지켜보던 가프 경이 담배 연기를 후욱 뿜으며 말했다. “한번 입지 그래, 카론 양?” “가프 경!” “이야아 자네가 그렇게 화내는 얼굴은 처음 보는군. 그런 표정 보이면 더욱 입히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카론 경은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라는 나의 전매특허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끔 기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 친구 잘못 사귀면 평생 고생한다는 그 옛날의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카론 경은 쓸쓸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진 마세요. 이제는 안 입으면 이상한 사람도 여기 있는걸요? 21 그리고 결국 한 떨기 꽃처럼 변장을 한 세 사나이는 살인마가 출몰하는 밤거리로 내몰리고 말았다. 푸른빛의 요염한 마키시온 풍 드레스에 긴 다리가 살짝 드러난 모습이 그야말로 눈부신 미스 카론께서는 누구라도 말을 걸면 당장 베어버릴 것 같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이건 결코 칭찬이 아니겠지만 저 드레스는 허리폭이 좁아서 여간한 아가씨들도 소화하기 힘든 옷이었다). 그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중으로 살인범을 잡는다. 알겠나, 키스!” “어머나. 키스 양이라고 불러주세요오!” 당신 너무 본격적이야! “그건 그렇고, 어째서 키스 경만 바지에요?” 나와 카론 경이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키스를 흘겨봤다. 왜 혼자 바지 입고 있어! 누구한테는 이런 확 터진 치마 입혀 놓고! “나한테 맞는 드레스가 없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아.” 키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확실히 키스는 우리 중에 가장 키가 크다. 제아무리 얼굴선이 곱고 화장을 잘 받아도 키 185센터미터를 넘기는 건장한 남자에게 맞는 드레스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다(카론 경은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이것마저 노리고 이딴 광적인 제안을 한 것 같다는 설득력 있는 예측이 뒤늦게 머리를 때렸다. 이제는 드레스를 입는 것에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픈 나는 각자의 위치로 헤어지기 전에 물었다. “그런데 그놈이 우리 중에 누굴 덮칠까요?” “그야 가장 먹음직스러운 사람이겠지요오?” “.......” 좀더 건전한 표현은 없습니까! 나는 불편한 기분에 말했다. “만약 나를 공격해 오면 어쩌죠? 검이 있으니까 몇 번 막아낼 수는 있어도 솔직히 쓰러트릴 자신은.......” 그러자 키스가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그럼 비명을 지르세요, 레이디 미온.”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자 때려잡도록 하지요!” 나는 눈썹을 가늘게 떨며 말했다. 22 ‘그런데 정말 그놈이 나한테 온다면.......’ 3번 미끼가 되어 혼자 걷기 시작한 나는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내 검을 보며 생각에 빠겼다. 키스와 카론 경은 달려서 일 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러니까 일 분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 손으로 잡고 싶어.’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아니면 키스 경과 닮았다는 그 의문 때문일까, 나는 과민할 정도로 살인마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때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낮고 음울한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놈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 중 누구에게?’ 긴장감이 짜릿하게 몰려왔다. 나는 인적 없는 광장으로 달려가 분수대 옆에 자리 잡았다. 주변은 가로등으로 환하고 사방이 숨을 곳 없는 개방된 공간이다. 어디서 다가오든지 먼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와라! 이번엔 놓치지 않아!’ 나는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은 얼어붙은 바람과 그 바람에 섞여 있는 울음소리 뿐이었다. 잘못 만든 장송곡 같은 그 울음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것 같기도 했고 고양이 혹은 사자가 내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점점 그 소리가 사그라지면서 상대적으로 내 심장의 고동소리가 커져갔다. 당장이라도 밤의 짐승이 붉은 눈빛을 흘리며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떨림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멈추질 않았다. 그때 나는 바로 등 뒤에서 오싹한 인기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본지 몇 초도 안됐는데! “큭! 언제!” 급히 칼을 뽑은 내 팔목이 순식간에 붙잡혔다. 난 창백해진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놈은 정말 키스와 닮은...... 아니, 똑같은...... 그러니까 정말 키스 경이었다. “키, 키스 경?” 난 믿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역시 미온 경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아. 아니나 다를까 뒤가 완전히 무방비로군요.” “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그럴 리가요. 계속 미온 경 뒤에 있었는걸요?” 난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 살인마였다면 분명 심장이 뚫려 죽었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그런데 이거 생각해 보니까 화나네! “왔으면 왔다고 말하란 말이에요! 헛갈리잖아!” 카아아아앙 그때 금속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굉음이 가까운 곳 어디선가 터졌다. 곧이어 거친 짐승의 비명이 들려왔다. “설마 카론 경이?” 나는 놀란 얼굴로 그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 키스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보는 눈이 없는 살인마로군요! 내가 아니라 카론 경을 덮치다니요!” 당신, 어째서 억울해 하는 거야. 그는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통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나도 치마를 입었어야 했어요! 그게 포인트였다고요!” 그만해 좀! “빨리 가요! 카론 경이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아아, 그래요 미온 경. 어서 가서 카론 경의 순결을 지켜드립시다아.” “제발 진지하게 일하란 말이얏!” 나는 투덜거리며 앞장서서 카론 경이 있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23 “방심했어.” 우리가 도착했을 때 카른 경은 목 언저리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그 하얀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카, 카론 경. 괜찮아요?” “스친 것뿐이야.” 그는 짧게 말하며 바닥에 떨어진 팔을 집어 들었다. 긴 손톱이 섬뜩한 그것은 카른 경이 자른 살인법의 팔이었다. 카론 경이 그 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닮았더군. 놀라울 정도로.”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키스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카론 경을 쏘아보며 비난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카른 경, 너무해요!” “뭐가 말인가?” “보통은 친구와 똑같은 모습을 한 적을 보고 주저하다가 결국 공격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해야 정상 아닙니까아!” 죽는 게 뭐가 정상이야! 카론 경은 팔을 바닥에 던지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본래 목을 치려고 했다.” “여전히 거짓말에는 능숙하지 못하시군요. 실은 주저한 거죠? 그래서 목에 그런 상처가 난 거죠? 그렇죠오?” “아, 아니다!” 카론 경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갑갑한 드레스를 찢어 행동을 편하게 만든 그는 다시 검을 들었다.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달빛과 반응해 하얀 살결 위에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그놈을 뒤쫓겠다. 너희들은 가프 경감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그 전에 치료부터 하시는.......”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카론 경은 핏자국을 쫓아 바람처럼 튀어나갔다. 키스 경은 바닥에 떨어진 팔을 들어 자신의 팔과 비교해 보면서 ‘어디가 똑같아? 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렀다. “이제 이 사건...... 정말 끝난 건가요.” “그런가 보네요. 돌아가서 잡시다아.” 이대로 끝인가. 나는 갑작스런 허무감에 사로잡혀 카론 경이 사라진 도시의 어둠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불어온 바람에 내 긴 머리칼이 높이 솟아올랐다간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정말 끝이야? 24 경찰대 본부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키스 경은 계속 잘려나간 팔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은색의 털이 길게 자란 그 팔은 마치 인형 조각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 흉측한 팔 조각을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그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 신기하네요. 합금 손톱을 그렇게 단단하게 붙였다니.” “아니 에요.” “예?” “이 손톱, 붙인 게 아니고 자라난 겁니다.” 키스 경이 손톱을 손가락 끝으로 통기자 티잉 하는 금속성이 울렸다. “설마요!”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실없이 웃었다. 손에서 금속 칼날이 자라나는 동물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키스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저, 정말이 에요?” “그런데 미온 경.” “네?” 나를 바라보는 키스의 끓은 눈동자에 천천히 살기가 서려가는 것을 보며 나는 움찔했다. “아까, 이 사건 끝난 거냐고 물어봤죠?” “그, 그랬죠.” 왜, 왜 이러는 거지?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겁이 털컥 났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피날레는 이제부터인 것 같군요.” 키스 경은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혈향에 잠긴 그 오래된 검이었다. 순간 양쪽의 건물 위에서부터 끓은 눈을 가진 야수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철판을 긁어내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사방을 포위했다. “한 놈이...... 아니 었어?” 25 자그마치 다섯 놈, 그것도 모조리 똑같이 생긴 놈들이다. 마치 틀에 넣고 적어낸 물건처럼. 키스 경은 놀라울 만큼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그들을 주시했다. “이 녀석들이 얼마나 나를 닮았는지 확인해 볼.......” 그들의 얼굴과 마주친 키스는 순간 말을 멈췄다. 지금 그의 표정은 다음과 같았다. 키스 경은 자신을 사모하던 짝사랑의 정체가 실은 임금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도 한 이백 배 정도 놀란 얼굴로 죽을 것 같은 절규를 내질렀다. “미, 미, 미, 미온 경! 어째서 저렇게 나와 똑같은 거죠! 저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아아아아!” “그, 그러니까 내가 계속 똑같다고 말했잖아요!” 어, 얼굴 치워! 무서워! 그리고 어떻게 된 건지는 내 쪽에서 물어보고 싶다고! 당신 실은 열쌍둥이였던 거 아냐? 그것도 일란성! 자신과 똑같은 ‘키스 군단’ 앞에서 겁에 질려 덜덜 떨던 키스 경의 눈빛이 순간 빛을 발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차이점을 발견했어요.” “뭐, 뭔데요?” “저 부분은 제가 더 큽니다아! 에험!” 내가 알게 뭐야! “알았으니까 닥치고 좀 싸워요!” 오리지널 키스 경보다 어딘가 좀더 작다는 그들은 전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생각 따위는 없는지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방에서 우리들을 조여 오고 있었다. 키스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불쾌해요. 무지하게 기분 나빠요. 대단히 불쾌합니다!” 나는 솔직히 제아무리 키스 경이라지만 카론 경에게도 부상을 입힌 이런 녀석들을 다섯이나 상대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내가 무슨 붕어빵입니까! 이건 초상권 침해라고요!” 진지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멘트와는 달리 그의 힘은 무서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가 첫번째 '키스' 의 머리를 잡아 벽에 내던지자 두터운 건물 벽이 단숨에 부서지며 이층집이 무너져 내렸다. 뒤에서 달려들던 녀석은 키스 경의 등을 할퀴려 했지만 어느새 검으로 긴 손톱을 튕겨내자 그 격렬한 충격에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섬특한 소리가 터졌다. 단 한번도 피하지 않은 채 붉은 눈빛을 흘리며 싸우는 키스 경의 모습은 감탄을 넘어서서 차라리 밤의 악령이었다. 나는 나도 도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공포심마저 치밀어 오르는 그의 모습을 넋 놓고 지켜봤다. 키스가 슬슬 뒤로 물러나 내게 다가오며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미온 경 이거 정말 나 자신을 때리는 기분이라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오.” “제대로 싸우지 않으면 다른 부분도 찢어지게 될 거라고요!” 저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처럼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설사 야수였다고 하더라도 본능적인 공포에 도망치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팔이 부러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키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 녀석들도...... 이름이 없겠죠? 나처럼.” “예?” “그래요. 당신 말대로 이런 건 빨리 끝내는 편이 좋겠네요.” 그때 키스가 멋대로 내 검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었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미온 경, 기사단장으로서 명령 하나 할게요.” “네?” “눈 감고 있으세요.” 그 순간 키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내 시선이 뒤쫓지 못할 속도라고 해두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두 자루의 검이 달빛 아래 번뜩이는 그 모습은 마치 두 장의 날개를 필친 악마와 같았다. 예전 라이오라 씨와 키스 경이 싸웠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라이오라 씨가 최선을 다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는 키스의 말에 카론 경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너도 전력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잖아? 능가하고 싶은 두 자루의 검, 카론 경이 그토록 집착한 사람이 바로 키스였다. 그의 몸은 악마들의 왕의 총애를 받는 것처럼 핏빛 오오라에 휘감겨 있었다. 도리어 뒤로 물러서는 쪽은 저 야수들이었다. 키스 경의 움직임은 마치 몇 십 배로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두 자루의 검이 냉혹한 빛을 뿜을 때마다 전체의 공기를 뒤흔드는 충격파가 귓속을 찢었다. 그리고 또 그때마다 검붉은 핏방울이 내 뺨을 따갑게 때렸다. 족쇄 풀린 살육이 눈앞의 모든 것을 헤집어 놓고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문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무색무취의 광기만이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 자리 잡아 멈출 수 없는 파멸의 권세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라는 상황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아! 역시 안 되겠어요오!” “아, 안 되긴 뭐가!” 키스가 절세무공을 보여주기는커녕 갑자기 칼을 떨어트리며 뜬금없이 좌절하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 와서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제 분신같이 생긴 녀석들을 제 손으로 죽일 정도로 저는 냉혹하지 못해요!” “그럼 분신한테 죽는 건 괜찮겠냐!” 지지리 궁상도 때와 장소를 좀 가리라고! 내게 달려온 키스가 손을 꼬옥 잡으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어요. 미온 경이 대신해 줘요. 네?” “으이구! 내가 할 수 있었다면 애저녁에 했다고!” 뭔가 '허탈한' 낌새를 눈치 챈 그 반인반수들은 손톱을 세우며 우리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기겁을 하며 날 붙잡은 키스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이, 이 손 종 놔! 그만 울고 냉큼 싸워!” “내 자식 같은 녀석들을 죽일 바엔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요!” “죽으려면 혼자 죽어! 왜 댁의 가족사에 나까지 끼어야 하는 거야!” 그러나 지겹게도 내 손을 안 놔주는 키스는 씁쓸하게 입 꼬리를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저들은 제가 안 죽여도 괜찮아요.” “어, 어째서?” “왜냐하면 어차피 다른 분이 처리할 것 같거든요.” “뭐?” 그때 낯익은 남자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저자는!’ 그리고 나는 그의 검술을 처음 보았다. 대단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보통 실력은 아니리라 예상하긴 했지만-설마 단번에 다섯 명의 반인반수를 쓸어버릴 수 있는 정도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지럽게 춤을 추는 그의 칼에 걸려든 살과 뼈는 마치 종잇장처럼 잘려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믿겨지지 않는 표정으로 그 훤칠한 금발의 사내를 바라봤다. ‘리, 리젤 경?’ “헤헤, 괜찮으십니까? 엔디미온 동지?” 그는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을 끝낸 것 같은 태도로 검을 넣으며 우리에게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가 키스 경을 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런. 무서운 분도 함께 계셨군요. 당신 앞에서 제 하찮은 검술을 늘어놔서 죄송합니다.” 뭐? 그게 하찮아? 아니, 그보다 키스 경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키스 경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누군데 그런 말씀 하십니까아! 난 INM 상급요원 리젤 군 같은 사람 전혀 모릅니다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알고 있구만! 곧 검은 가죽 코트와 좀 악취미적으로 보이는 마스크로 온몸을 가려 철저히 신분을 숨긴 자들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위험한 녀석들’ 이라는 이미지를 풍기는 그들은 인트라 무로스의 기동특무대였다. 리젤 경이 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이 시체들, 저희가 수거해 가겠습니다.” “자, 잠깐 그건!” 어째서 인트라 무로스 측이 사체를 가져가겠다는 거야! 내가 만류하려 했지만 키스 경은 내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왜 막는 거예요! 키스 경! 특무대들은 가지고 온 박스에 조각난 시체들을 담고 바닥에 약물을 뿌려 능숙하게 핏자국을 지웠다. 항상 해오던 일인 듯 증거를 인멸하는 데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일을 마친 리젤 경은 항상 그렇듯이 웃는 낯으로 내게 이자벨 님의 안부를 전했다. “크리스탄센 국장님께서는 항상 엔디미온 경을 총애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이오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불러주시길.” 일단 어떻게 불러? 아니, 그보다! 나는 키스 경을 밀쳐내며 화가 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항상 말해주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고! “리젤 경! 구해주신 것은 고맙지만 저는 이오타를 위해 일하는 인트라 무로스 요원이 아닙니다. 저는 베르스 왕국의 일개 기사일 뿐입니다.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멋대로 상상하지 말아주세요.” 그러자 레젤 경은 그 웃음 띤 표정 그대로 정중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엔디미온 경은 언제나 우리 인트라 무로스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분인데요. 그냥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뭐라고? 나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철수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가 대체 무슨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거지?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동하라고? 또 이건 무슨 소리야! 나는 보이지 않는 함정 속에 사로잡힌 기분이 되어 키스 경의 멱살을 잡았다. “키스 경,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당신 알고 있잖아요!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미온 경, 살인마는 죽었어요. 당신에겐 그걸로 된 거 잖아요?” 나는 성난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지만 키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채 ‘이러지 말아요. 화가 나는 건 내 쪽이라고요' 라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둠이 주관하는 벌판과 가혹한 외눈의 주시자만이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6 결국 남은 사체라고는 카론 경이 뒤쫓아 잡은 한 명의 반인반수 뿐이었다. 검시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가프 경이 담배를 피워 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사건은 해결되었군. 의문투성이지만 말이야.” 그는 의혹에 찬 눈길로 키스 경을 바라보았다. 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카론 경 역시 묵묵히 인간도 짐승도 아닌 그 이름 없는 주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들과 심각한 표정의 기사단장 헬렌 경이 들어왔다. 설마 카론 경이 이 사건을 도운 걸 보고 또 트집을 잡으려고! 나는 그녀 앞을 막으며 말했다. “헬렌 경, 이 사건은 분명 전하로부터 허가를 받은.......”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냐.” “예?” 헬렌 경이 부하 기사에게 눈치를 주자 그가 왕실의 직인이 들어간 문서 한 장을 내려놓았다. 뭐야, 이건.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가프 경감, 전하께서 특별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대충 예상은 되지만 말해보시오.” “지금 즉시 살인범의 사체와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서류를 소각해 주십시오.” 뭐라고! 헬스트 나이츠는 곧바로 가프 경감이 자세하게 작성했던 검안서와 사건의 증거가 될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맹수의 습격에 의한 사망이었다고 발표해 주십시오. 더 이상의 수사는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기사단장 나리가 직접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꽤나 다급한가 보군. 그래야 할 사정이라도 있나? 아니면 누군가 압력이라도 넣은 게야?” 가프 경감은 퀭한 눈동자 속에 경별의 빛을 담으며 물었다. “당신에게 해명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건 왕실의 명령 입니다.” “그래. 마음대로 하시게나. 정치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 헬렌 경은 눈썹을 움찔했지만 더 이상 굳게 다문 입술을 열지 않았다.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은 모조리 운이 나빠 맹수한테 물려 죽은 것이다. 음모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라고 보고서를 쓰도록 하지. 그리고 다음부터는 경찰 대신 사냥꾼을 배치해 달라고 국왕 전하께 전해주게나.” 헬렌 경도 가프 경감의 후배였던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리고 왕실에서는 이 사건을 훌륭히 해결한 노고를 치하하며 가프 경감의 직위를 경정으로 2계급 승진시켰습니다. 내일 정복을 입고 왕실로 찾아와 주십시오.” 그 불유쾌한 호의에 가프 경감은 ‘그런 말은 조용히 말하게. 피해자들의 영혼이 들으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공허하게 웃었다. “됐네. 나 같은 놈 승진시킬 여유 남았으면 죽은 내 부하 놈들이나 특진시켜 줘, 죽어서라도 출세 한번 시켜주게.” “가프 경...... 여전히 뒤틀려 있군요.” “아니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뒤틀린 거야.” 헬렌 경은 한숨을 내쉬며 문 쪽으로 걸었다. 그녀의 등에 가프 경감이 말을 던졌다. “우리들, 부끄러운 줄은 아는 거지?” 그 말에 우뚝 멈춰선 헬렌 경은 짜내듯이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누구는......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그녀는 눈을 꽉 감으며 밖으로 나섰다. 너무도 억울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건 반칙이었다. 결국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밝혀져야만 하는 진실은 누군가의 압력으로 모두 은폐되어 버렸다. 내 부족함으로 죽은 그녀의 원혼 앞에서 이젠 모든 일은 다 해결되었으니까 마음 편히 눈을 감아 달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가프 경감은 또 새로운 담배를 물어 피우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말이지...... 누가 범인을 잡든 잡기만 하면 상관없어. 무능한 경찰이라고 욕먹어도 좋아. 다만 한 가지 평생 바랐던 것은 있는 범인이 언제 왜 어디서 어떻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숨김없이 밝혀내고 처벌하는 거였어. 그런 짓을 한다고 죽은 피해자가 살아 돌아오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그들의 억울함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생각해 보니까 한 번도 속 시원히 그렇게 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차가운 시선으로 빈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던 카론 경은 이제 곧 인멸될 증거인 검은 손톱을 말없이 쥐었다. 꽉 쥔 그의 주먹 사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키스가 내 어깨에 손을 대며 위로하듯 말했다. “항상 인간은 실수하고 신은 용서하는 법이랍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인간은 반성하지 않겠지요.” 키스 경은 언제나 쓸쓸히 지켜보기만 한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악의에 너무 시달림을 당해서 이제는 신념도 영혼도 소중한 그 무엇도 부질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카론 경도 가프 경감도 베어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이 세상의 악취에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는지도 모른다. 항상 우리들의 가슴을 때리는 억울함과 분노마저도 세상은 본래 이런 거야, 라고 납득해 버리는 순간 마법의 주문이라도 외운 것처럼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버릴 감정들이리라. 그건 굴복이었다. 나는 맹세했다. "납득할 수 없어요." "미온 경." 포기 안할 거예요. 아무리 내가 무력해도, 또 아무리 내가 상처를 받아도 절대로 지켜보지 않겠어요. 내가 내 감정마저 외면한다면 그건 내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그리고 다음 날 수도를 공포로 떨게 한 연쇄살인사건은 맹수가 저지른 사고로 발표되어 신문 1면을 장식했으며 피해자의 유가족들에게는 이례적으로 거액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꽃을 바쳤다. 그리고 얼마 후 가프 경감이 승진을 거부하고 경찰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월의 마지막 날, 이상하리만큼 을씨년스럽던 밤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17화 사랑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 1 확실히 대다수의 여자들은 젊고 신선한 남자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뭐 그건 남자들도 마찬가지니까 별로 억울할 것도 없는 현실이지만, 때로는 그 취향이 약간 미묘하게 흘러가서 젊음을 넘어서서 어린 쪽이 각광받을 때도 있는 것이다. ‘덕분에 나도 이제는 늙어버린 기분이 들거든?’ 인생 선배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겠지만 올해로 고작 21세, 어른의 맛을 겨우 맛보기 시작한 나조차도 가끔은 ‘음. 이제 슬슬 위기인 걸?’ 이라는 실웃음 나올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지스 경이 열다섯 살이고 크리스, 랑시도 플러스마이너스 한 살쯤 된다. 청소년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기에도 조금 아슬아슬한 나이인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문득 '연령과 취향의 상관관계' 에 대한궁금증이 들어 소파에 시체처럼 엎어져 있는 키스 경에게 물었다(이 인간은 삼십대 초반이라지만 외모도 정신연령도 십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까 논외로 치자). “키스 경, 우리 기사단 최연소가 지스 경이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물은 것이다. 그 이하로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신비의 세계에 도달해 버리니까. 키스가 히죽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땡. 아쉽게도 틀렸습니다아.” “뭐? 더 어린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지스가 가장 어린데? 설마 루이 경이 실은 열네 살의 가공할 노안(老顔)......같은 시답잖은 예측은 집어치우도록 하자. “장기지명자 중에는 더 어린 기사가 있어요.” “아, 맞아! 장기 지명!” 아참, 깜박 잊고 있었다. 우리 기사단에는 두 명의 파견 근무가 있었지. 한 번도 못 본 탓에 전혀 실감 안 나긴 하지만. “아니, 그런데 열다섯 살보다 어리다면 대체 몇 살이라는 거에요? 열네 살?” “히히. 아립니다아.” 키스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열세 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열두 살이에요?” “조금만 더 깎으세요오.” “서, 서, 설마 열한 살이라고!” “아니요오.” 그럼 대체 몇 살이야! 이쯤 되면 광적이라고! 청소년보호법의 차원을 넘어가서 유아학대에 해당해! 더 이상은 양보 못해, 그 밑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 안 갈 유아기야! 짐승이냐? 내 표정을 보고 쿡쿡 웃던 키스 경이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걸치며 정답을 말해주었다. “올해로 세 살이랍니다.” 순간 마시던 차를 '푸욱!' 뿜어 버렸다. 지금 제정신? 내가 잘못들은 거? 나는 대자연의 기적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걸음마는 할 줄 압니까?” 왕실이 이 정도로 비인간적인 곳인지는 몰랐어! 이건 모성애 자극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옹알거리는 어린애에게 기사 작위 줘서 부려먹겠다는 거냐! 아니, 그보다 그런 아가를 지명(그것도 장기 지명)하는 여자의 정신구조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육아체험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키, 키스 경 이건 농담이 아니라고요. 당장 불러들여서 제대로 키워야 한단 말이에요! 그 부모도 혼을 내줘야 하고!" 키스는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엄청 재미있는지 배를 잡고 웃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아, 미온 경은 엄청 순진해서 항상 나를 재미있게 해줘요." 순진해서 미안하게 되었네! 하지만 나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로 돈벌이 하는 꼬락서니를 뒷짐 지고 지켜볼 정도로 닳고 닳지는 않았어! 키스 경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인간이라고는 안했답니다아.” 뭐야...... 그럼 강아지야? 키스는 어째서 그가 세 살일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믿겨지질 않는 사실이었지만, 정말 그는 세 살이었다. 2 카일리, 세 살배기 장기 지명자의 이름이다. 키스 경은 그와 관련된 일 때문에 나와 루시온 경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미온 경과 루시온 경 모두 이번에 지명 갈 지역이 같네요” 어쩌다보니까 나는 후작가의 제사에 불려가게 되었고, 루시온 경은 그 옆의 영지에 있는 공작가 귀부인의 열세 번째 결혼식에 지명되었다(권세가 높은 귀족들은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때 왕실의 대표로 우리들을 초청해서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고는 한다). "카일리 때문이로군요." 루시온 경이 먼저 눈치를 채고는 짧게 끄덕였다. “지명을 마치고 오시는 길에 두 분은 카일리 경을 여기로 데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얼레? 어째서 우리가 데려와야 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기울이면 물었다. “직접 올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나요?” “올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오지 않는 거랍니다.” 명령거부라는 건가? 키스는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명 업무가 끝났는데도 복귀하지 않고 있거든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명자가 더 이상 비용을 지불할 능력을 상실한 거죠.” 당연한 말이지만 스왈로우 나이츠는 자선단ㄴ체가 아니기 때문에 지명 비용을 받고 움직인다. 단 며칠만 지명을 해도 상당한 돈이 들어가는 판국에 장기 지명이라면(대체 무슨 이유로 몇 년이나 필요 한지는 모르겠지만) 마라넬로 황제도 깜짝 놀랄만한 거금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을 지불할 수 없다면 당연히 카일리 경은 돌아와야만 한다. 그런데 거부하는 것이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나는 그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겠습니다. 데리고 오겠습니다.” 루시온 경은 카일리 경의 사정은 전혀 궁금하지도 않은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키스 경, 하지만 엔디미온 씨는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혼자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우와! 너무해 ! 나를 전폭적으로 불신하고 있잖아? 키스 경은 무슨 생각인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같이 가세요.” 루시온 경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쳇!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 보이지 좀 말아요. 기왕 하는 일, 즐겁게하면 안 됩니까? 3 지명 업무를 마친 나는 역에서 루시온 경을 기다리며 조금 우쭐해져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제는 백 개 이상의 기도문을 외우게 되었다고요. 지명자에게도 엄청 칭찬 받았단 말이죠. 우하하하핫! ‘물론 어째서 기사가 기도문 같은 것을 많이 외워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그다지 기쁜 일도 아니겠지만 제사 전문 기사라니....... 나이 먹으면 장의사나 할까.’ 하아, 이렇게 생각하니까 맥 빠지는군. 그때 여행 가방을 든 루시온 경이 나타났다. 키스 경에게 필적할 정도의 훤칠한 키와 디고 블루로 염색한 긴 머리칼을 가진 그는 번잡한 플랫폼에서도 빛이라도 발하는 것처럼 금세 눈에 띄었다. 게다가 검까지 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음, 뭐랄까...... 기사 같았다. 만약 사람들 모아 놓고 ‘누가 더 미남이죠?’ 라는 치졸한내기를 한다면 내 우승을 낙관할 수 없을 사람이었다. “미안합니다. 늦었어요." 그가 특유의 정중하고도 거리감 있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힐끗 회중시계를 바라봤다. 딱 삼 분 늦었는데 사과까지 하면 오히려 내가 불편하단 말입니다. "갑시다" 루시온 경은 그렇게 말하며 열차에 올라탔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들고 뒤를 따랐다. 4 장기지명자 카일리 경이 있는 곳까지 가는 데는 열차로 삼십 분이면 족한 거리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루시온 경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사교에는 통 관심이 없는지 자신의 가방을 열고 옷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방 안의 옷들은 엉망으로 쑤셔 박혀 있었다. 아마 나와의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황급히 짐을 정리했던 모양이었다. 카론 경이 상대와의 거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루시온 경은 철저하게 상대와의 거리를 지키려는 사람이었다. 지스킬처럼 일부러 짓궂게 구는 것도 없이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태도가 엄청 갑갑하게 느껴졌다. "엔디미온 씨, 잠시 상의 즘 갈아입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남자끼리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셔츠를 벗은 그는 숙달된 손놀림으로 깔끔하게 접어 가방 안에 넣고 새로운 상의를 꺼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벗은 셔츠에는 웬 여자의 핑크색 루즈 자국이 묻어있었다. 이 래봬도 이런 분야에 관련된 추리력은 카론 경 이상이란 말씀이야. “헤헤. 지명하신 분이 좀 요란하셨나 보네요.”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까 루시온 경의 지명자는 신부잖아! 부, 분명히 열세 번째 결혼이라고 했던가. 그는 별로 기분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옷을 가방에 정리해 넣으며 말했다. "지명자는 오늘 이혼했습니다." “엥?” 오늘 결혼했다는 것을 잘못 말한 거 아니에요? 설마 결혼과 동시에 이혼? 지나치게 빨라! "남편의 코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얼굴에 붙어 있는 코 말입니까” “다른 코도 있습니까?” 그런 것도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전혀 몰랐어요. “아하하하. 어, 엄청 와일드한 결혼식 아니 이혼식이였겠네요.” 대체 귀부인들의 성격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코가 취향이 아니 라는 이유로 결혼식 날 이혼남이 되어 버린 남자의 심정도 좀 헤아려 달라고요. 나는 얼굴도 모르는 '전 남편' 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이 애도를 표했다. “지명자는 결혼식 내내 취해 있었고 덕분에 엔디미온 씨와의 약속에 늦은 것입니다.” 아니, 약속이야 상관없지만...... 역시 멋대로 취해서 이혼해 버리고는 루시온 경에게 주정을 부린 게로군. 하아, 성격 파탄일세. 나였다면 아무리 공작가문의 여자라도 한마디 해줬을 거야. 내 표정을 읽은 루시온 경이 정리를 마친 가방을 닫으며 짧게 말했다. “우리는 지명자의 요청을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건 비용을 받고 하는 업무에요, 엔디미온 씨.” “뭐 그거야 그렇지만요.” 그런 말하니까 꼭 호스트였을 때가 생각난다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나는 엄청 까다로운 편이었지만. “이번 카일리를 데려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일으키지 말아주세요.” “완전히 폐만 끼치는 인간으로 찍힌 기분이네요." 나는 좀 기분이 상해서 고개를 돌리며 삐죽거렸다. 확실히 루시온 경과 친해지려면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기분이야 어찌되었든 나는 복귀를 거부하고 있는 카일리 경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카일리 경 말인데요." "엔디미온 씨, 그를 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 하지만 그래도 동료인데!"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기계에게 함부로 기사의 칭호를 붙여주는 것은 다른 기사들에게 모욕이 됩니다." 그렇다, 카일리 경은 인간이 아니고 강아지도 오소리도 해바라기도 아니다. 삼 년 전 대 아카데미 소드람이 만든 인간형 기계장치.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3세의 인조인간이었다. 그런 신기한 존재가 있다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설마 장기지명자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스왈로우 나이츠의 일원이기도 하다. 나는 고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카일리 경이라고 부를래요." 루시온 경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카일리 경은 어째서 복귀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기계인간이라면 적어도 나 같은 사람보다는 더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루시온 경은 가슴에도 묻어 있던 루즈 자국을 닦고 상의를 갈아입으며 말했다. “키스 경에게 아무런 말도 못 들었나 보군요.” “무, 무슨 사정이 있나요?” 키스 경! 왜 나한테는 아무 것도 안 말해 준 거야! “카일리의 장기지명은 중병에 걸린 남작가 공녀의 간호였습니다. 그녀의 병은 금방 인간에게 전염되기 때문에 누구도 곁에서 간호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기계장치인 카일리는 예외였죠. 어차피 카일리는 그런 일 외에는 지명 받지 못합니다. 제사나 결혼식에 기계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확실히 그건 그렇다. 기계인간이 향을 피우고 기도문을 읊어주길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간호 때문에 스왈로우 나이츠를 지명한다는 것은.......” 돈이 그렇게 많아요? “항상 일 년 치의 지명비용을 선불로 보냈으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요. 하지만 올해 남작은 사업에 실패해서 파산했고 전 재산은 차압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명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런데도 카일리는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번뜩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설마 카일리 경은 계속 명령대로 공녀를 간호하기 위해 복귀를 거부하는.......” “그 공녀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예?” 나는 멍한 얼굴로 루시온 경을 바라봤다. 카일리 경이 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열차 안을 울렸다. 그와 함께 커피색 피부의 아가씨가 영업용 스마일을 보이며 문을 열었다. “마일즈 남작령에 도착했습니다. 잊으신 물건은 없으신지.......” 까지 말하던 그녀는 미소 띤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루시온 경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말했다. “저어, 죄송하지만 열차 안에서 그런 행위는 다른 승객 분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니까.......” 그, 그런 행위라니! 지금 뭘 상상한 겁니까! 나를 자세히 뜯어보던 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앗! 죄송합니다! 남자 분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왜 어딜 가도 항상....... 나는 심란한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헛갈리게 생긴 제가 쳐 죽일 놈이죠.” 이놈의 머리, 진짜 잘라버릴까. 루시온 경은 이 민망한 오해 속에서도 뻔뻔할 정도로 태연하게 단추를 잠그고 자리에서 일어나 값비싼 재킷과 긴 코트를 입었다. “엔디미온 씨, 우리가 받은 명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일리를 데려오는 것입니다. 이해했길 바랍니다.” "네에, 네에. 알아 모시겠습니다아." 정말 말썽이라도 일으켰다간 루시온 경이 저 칼로 날 찔러 죽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쀼루퉁한 표정으로 그를 뒤따라 나갔다. 5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일단 남작가의 영지로 갑시다.” “자, 잠깐 같이 가요!” 루시온 경은 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런 일로 시간 끌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해질 무렵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어가며 그가 말했다. “카일리는 남작령에 있을 겁니다. 오늘 중에 카일리와 함께 막차를 타고 수도로 갈 계획 입니다.” 그말의 이면에서는 ‘방해하면 알지?’ 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정말 방해 안 해요! 내가 일부러 일을 망치는 심사 뒤틀린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남작령?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남작령이라면 보통 넓은 곳이 아닐 텐데요?” “아마도 그렇게 넓지 않을 겁니다” “네?” 나는 잰걸음으로 루시온 경을 뒤따랐다. 넓지 않다면 어느 정도라는 거야? 한 시간쯤 걸어가자 나는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일즈 남작령 앞에 도착한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 저 울타리는 뭐죠?” “저것이 지금의 남작령 입니다.” “농담이겠죠.” “진담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한 치의 과장도 없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터 위에 사람 너덧 명이 간신히 들어갈 것 같은 손바닥만한 땅이 부실한 울타리로 둥글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고, 또 그 앞에는 늘씬한 체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농담이 아니고 그것이 마일즈 남작령의 전부다. 본래 영지라는 것은 그 안에 산도 있고, 숲도 있고, 풍차도 있고, 때로는 강도 있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점프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영지 하나를 한 번에 뛰어넘는 신기한 광경을 연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저렇게 콤팩트한 영지도 있었단 말인가! 백작가문의 상속자이기도 한 루시온 경이 말했다. “마일즈 남작은 파산했으니까요.” “진짜 파산이라는 것은 무섭군요.” 파산하기 전에는 이 지역 전체의 드넓은 땅이 전부 남작령이었으리라. 역 이름도 ‘마일즈 남작령’ 이니까. 대체 어떤 사업을 하다가 재산을 말아먹었기에 마구간도 못 지을 콩알만 한 땅밖에 안남은 거지? 그럼 남작은 저 땅 안에서 밥도 짓고 차도 마시고 잠도 자는 걸까? 영지 관리 편해서 좋으시겠습니다, 라는 농담은 미안해서라도 못할 노릇이다 아, 그럼 저기 서있는 사람이 마일즈 남작이려나? 루시온 경이 내 표정을 보고는 말했다. "마일즈 남작은 얼마 전 자살했습니다. 지금 남작령에는 카일리 혼자뿐입니다." “예?” 루시온 경은 내 놀란 표정을 뒤로 하고 성큼성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곧 무덤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짧은 은발에 영롱한 파란 눈동자와 우윳빛 피부를 가진 청년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인조인간 카일리 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는 농담이고, 인간이라면 제아무리 미남이라도 저렇게 생길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아름답고 멋지고의 차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그는 자연의 산물이라 볼 수 없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이상적인 이목구비, 그것이 너무도 지나쳐서 늙고 변해갈 모습조차 짐작할 수 없을 그런 외모였다. 조각 같다는 나조차도 카일리 경 앞에서는 ‘자연스럽다’ 라는 평가를 듣게 될 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이상적이지 않았다. 노후된 인조 피부에는 보풀이 일어나 있었고, 우리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죽어가는 별과 같았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더러워지고 군데군데 찢겨진 제복 사이사이에서는 피를 닮은 윤활유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밝고 마모된 톱니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맥박소리를 대신해서 위태롭게 들려왔다. 인간으로 치자면 시급한 치료가 필요한 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지에 서 있는 카일리 경이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거의 억양이 없었지만 묘하게도 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의 등 뒤에 있는 작은 무덤을 봤다. 분명 그것은 병으로 죽은 공녀의 무덤이리라. 그건 그냥 작은 돌무덤이었다. 권세 높은 남작가문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초라해서 묘비마저 없었다면 누구도 무덤이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야! 너희들 뭐야!” 귀를 때리는 험악한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 봤다. 서너 명의 장정들이 이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표독스러운 눈동자를 굴리는 깡마른 사내가 있었고, 건달 정도로 보이는 세 명의 거한이 그를 호위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저어, 루시온 경. 저 사람들 우리들한테 볼 일이 있나 본데요?” 최소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루시온 경은 그런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지 계속 카일리 경과 시선을 마주하며 명령조로 말하고 있었다. “기계의 사정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아. 당장 거기서 나와.” “저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완전 장군 멍군이로군!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들과 이곳으로 다가오는 건달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키스! 이게 뭐가 그냥 데려오면 되는 일이야! 또 날 이런 데 보낸 거냐!' 이 일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을 때렸다. [SKT]제7권에서 계속 제17화 사랑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 6 그러니까 처음에는 ‘장기지명 중인 카일리를 본부로 데려오면 끝나는; 누워서 떡 먹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거 떡을 먹다 체한 기분이다. “네게 선택권 같은 건 없어. 당장 리더구트로 귀환한다, 카일리!” “루시온 경,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지, 마일즈 남작령을 떠나지 않겠다고 극구 버티는 카일리 경과 하늘이 두 쪽 나도 데려가겠다는 루시온 경이 실랑이 중이었고, “야! 너희 뭐하는 놈들이냐니까!” 또 한쪽에서 정체불명의 깡패 삼인조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곳으로 다고오고 있었으며, ‘키스! 이런 곳으로 날 보내다니! 돌아가기만 하면 소파채로 연목에 집어 던져 줄테야!’ 그 사이에 끼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나, 엔디미온이 있었다. 그런데 이 험악한 공기 속에서도 루시온 경은 오직 카일리 경만 노려보고 있었다. 지나친 집중력이었다. 결국 우리 앞까지 도착한 건달들은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뭐하는 놈들이냐고 묻고 있잖아!” 나는 루시온 경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저기, 있잖아요. 이 사람들, 우리 정체를 애타게 알고 싶어하는 데요?” 그러나 깡패들은 흘낏 본 루시온 경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바쁩니다. 저런 녀석들은 엔디미온 씨가 처리하세요.” “......” 확실히 나, 이 사람에게 미움 받고 있어. 결국 나는 ‘그러죠! 뭐!’라고 입술을 삐죽 내밀며 건달들을 확 쏘아봤다. “우리는 왕실 기사입니다! 당신들이야말로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초면에 반말하고!” 화딱지 난 내목소리에 (그것보다는 ‘기사’라는 말에) 움찔한 깡패들은 곧 물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법을 우습게 아는 깡패라도 기사에게 함부로 덤벼들 수야 없을 테니까. 좋아! 이걸로 상황 해결! 이라는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차아앙 그들이 칼을 뽑아들자 나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루시온 경도 하던 말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제, 제 말투가 칼을 뽑을 정도로 거슬렸나요?” 아무리 짧고 굵게 산다지만 다짜고짜 칼을 뽑다니! 건달들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누고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역시 왕실에서도 보물을 가져가기 위해 왔구나!” “뭐? 보물?” 카일리 경이 실은 깡패들의 소중한 보물.....일리도 없고, 도시 한 복판에서 보물이라니! 그 무슨 뒷마당에서 유전 터지는 소리냐고! 그러나 건달들은 정말 목숨을 걸었는지 엄청 진지했다. “왕실이라고 해도 절대로 보물을 가져가게 할 수는 없어! 그건 우리 차지야!” “그러니까 알아듣게 좀 말하라고!” 기계인간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지와 병으로 죽은 공녀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이제는 보물까지지 추가되어 버렸다. 그때 루시온 경이 나를 밀치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몹시 불쾌하다는 표정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 하지만 어떤 이유든 기사에게 카을 들이댄 건 명백한 죄다. 당장 그 검을 버리지 않으면 나도 실력행사로 대응하겠다.” 오오, 이거 뭔가 카론 경 같은 걸? 뭐 사실 카론 경이었다면 상대가 검을 뽑는 그 순간에 신체 일부분과 불행한 이별을 시켜줬겠지만, 루시온 경도 스왈로우 나이츠 중에서는 가장 그럴 듯한 기사였다(일단 칼 차고 다니는 사람이 루시온 경 혼자다. 같이 모여 있다 보면 굉장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역시 건달들은 함부로 루시온 경에게 덤비지 못했다. 아무리 1대3이라고는 하지만 루시온 경의 ‘제대로 배운 듯한’ 자세는 확실히 위압적으로 보이니까. 그런데 루시온 경의 기백에 밀려 이도저도 못하게 된 그들은 상당히 비이성적은 일을 저질렀다. 예측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화근은 하필 내 여행 가방이 그들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에잇! 이걸 돌려받고 싶으면 보물을 가져와라!” “뭐, 뭐하는 짓이야! 내 가방!” 그들은 지명비용부터 속옷까지 내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가방을 덥석 집어 들더니 줄행랑을 쳤다. 어찌나 빠르던지 쫓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뭐 이런 먹되 먹은 경우가!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털썩 땅위에 주저앉아 좌절한 심정으로 짜내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보물이 대체 뭐냐고......” 제발 누구라도 좀 알려줘. 엄청나게 알고 싶어졌어. 그때 카일리 경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물 같은 건 없습니다.” “......” 그 말은 내 귀에 ‘당신의 가방을 포기하세요’ 라는 말로 자동해석 되어 들렸다. “저들은 마일즈 영주님에게 빚을 받아내던 폭력배들입니다. 돌아가신 영주님이 보물을 이곳에 숨겨놨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보물은 없다?” “예. 그런 건 없습니다. 제가 이곳을 지키는 이유가 보물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거죠.” 그건 서글픈 아이러니였다. 기계인간은 죽은 여자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고 진짜 인간은 보물 때문에 지키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다. 뭐가 더 인간다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루시온 경은 또 어느 쪽일까? 그가 말했다. “카일리, 더 이상의 소동은 질색이야. 네 사정에도 관심 없어. 기계인간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어쩌겠다는 거냐!” “루시온 경!” 나는 결국 불만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내가 카론 경에게서 느끼던 감정을 루시온 경에게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이유를 알았다. 누구에게나 ‘자기 일’이란 소중하다. 하지만 ‘자기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배려해 주지 않는 것을 어떻게 훌륭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루시온 경도 나를 ‘방해만 되는 녀석’이라는 찡그린 얼굴로 바라봤다. 그가 검을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내일 다시 오마. 내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데려가겠다.” 그리고 루시온 경은 자기 가방을 들고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이 커졌다. “자, 잠깐! 혼자 간거야?” 너무해! 가방까지 잃은 나를 내팽개치고 혼자 가버리다니. 나는 어찌되든 좋다는 건가! “키스 경, 어째서 저런 박복한 사람과 파트너를 맺어 주셨나이까.”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나도 뭔가 오기가 생겨서 그를 따라가 ‘저, 저도 재워주세요’ 라고 사정하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어져 버렸다. 아아, 그래 맘대로 하라고! 라는 엄청 불량한 표정으로 루시온 경이 사라진 자리를 쏘아본 나는 곧 카일리 경에게 말했다. “마일즈 남작령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카일리 경?” 카일리 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론입니다, 라고 정중히 대답했다. 7 “......” 나는 두 무릎을 가슴에 꼭 붙인 채 웅크려 앉았다. 왜냐하면 이 영지의 크기로는 도저히 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완전 맨땅이라서 (내 사나운 잠버릇으로 미뤄봤을 때) 누워잤다간 아침이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궁상맞게 쪼그려 앉아 서러운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따. 배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솔직한 소리가 났다. 옆에 앉아 있던 카일리 경이 말했다. “미안해요. 먹을 것이 없어서.” “헤헤, 괜찮아요. 별로 배도 안고픈......” 그때 다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나는 후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실은 풀이라도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야.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깡패 소굴로 뛰어들어서 내 가방 내놓으라고 한바탕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루시온 경이 도와줄 리도 없고!). 카일리 경은 기계인간이라서 당연히 인간이 먹는 음식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고 잠도 자지 않으니까 영지 안에는 그야말로 무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명분만 남아 있는 과거의 유물,. 돈을 내줄 사람도 대화할 사람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줄 사람들도 모두 죽어 사라졌다. 그런데도 귀환 명령까지 거부하면서 이곳에 남아 있단 말인가. 이건 마치 아무도 없는 고대의 무덤 속에서 몇 천년이고 말없이 서 있는 동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죽은 공녀를 그리워한다고 해도 이건 지나친 집착이었다. 카일리 경은 이제 세 살이다. 역시 ‘어려서’ 그러는 것일까? 이 점에서는 루시오 ㄴ경이 옳았다. 리더구트로 돌아가서 좀더 생산적인 삶을 사는 것이 좋다. 나는 카일리 경을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가 먼저 말했다. “제 얘기, 해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꽤 조리 있는 언변이라서 나는 마치 그가 된 것처럼 그때의 일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3년 전, 그러니까 나는 빨리 어른이 되어 정의의 기사가 되고 싶다는 (헛된)꿈을 품으며 호스트로서의 마지막 해를 열심히 살던 때였다. 그때 카일리 경은 불치병에 걸린 한 공녀에게 보내졌다. 8 내가 태어나 첫 임무를 받고 도착한 마일즈 남작령은 영지로서는 드물게도 숲과 강과 밭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즉, 그만큼 드넓다는 의미고 그만큼 부유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내 머릿속에 기록된 정보대로 플레밍 마일즈 남작 앞에서 정중한 예를 갖췄다. “자네가 카일리인가. 허어, 정말 인간과 구별이 안되는군. 잠깐 뺨을 만져 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허허. 놀라워.” 나를 지명한 마일즈 남작은 예의가 바르고 도저히 시골사람이라 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 세련된 귀족이었다. 왕처럼 머리에 작은 왕관을 올려 쓴 모습이 조금 속물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왕의 권위에 도전할 야망을 품은 야심가는 결코 아니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윤택한 삶에 만족하는 평범한 영주였다. 그의 외동딸 페니슐라만 빼면 정말 평범했다. 9 “내 딸을 만나러 가세. 따라오게나.” 내가 맡은 임무는 페니슐라 마일즈라는 17세의 여성을 간병하는 것이다. 나는 간병이 무엇인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좀더 오래살기 위한 집착’ 이라는 부분을. 풍차나 시계에게 삶의 의지가 없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정해지 ㄴ시간에 만들어졌고 또 어제 내 수명이 끝날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슬픔도 불만도 없다. 요컨대 나는 정해진 수명보다 좀더 오래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페니슐라의 방 앞에서 아무리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자 마일즈 남작은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이, 이런!” 침대에 그녀가 없는 것을 본 남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열려져 있는 창밖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그녀의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창밖에는 페니슐라가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트를 뜯어 만든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창백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화가 난 듯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줄이 너무 짧아서 바닥까지는 내려가지 못하고 힘이 없어서 다시 올라오지도 못하는 상창이라는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걸까? 이런 행동을 하면 병이 더 빨리 낫는 건가? 내 머리는 답을 내지 못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녀에게 담담하고도 정중하게 말했다. “페니슐라 님이시죠? 오늘부터 당신을 간병하게 된 카일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우리는 이렇게 첫인사를 했다 10 나는 첫날부터 남작으로부터 몇 가지 주의를 받았다. 1. 페니슐라가 병실 밖으로 도망치려는 걸 지켜보지 말 것 2. 그걸 도와주지도 말 것 3. 그 외에는 그녀의 말을 따를 것 4. 단, 부당한 명령은 따르지 말 것 아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명령이라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 기분을 좋게 할 것 같은 명령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 4번은 조금 난감했다. 아픈 몸으로 병실 밖으로 빠져나 떠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녀의 성격으로 봐서 내가 생각하는 부당함 그녀가 생각하는 부당함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이게 뭐야! 먹기 싫어 !” 그녀는 첫날부터 환자식을 뒤엎어 버렸다. 나는 바닥에 쏟아진 죽과 깨진 그릇을 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인간은 못된 것일까. 이 세상에서 그녀가 낫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해와! 제발 사람이 먹을 만한 걸로!” 그녀의 명령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부당한 명령인가? 일단 나는 어느 선부터 어느 선까지가 사람이 먹을 만한 수준인지 알 수가 없었고, 멀쩡한 음식을 다 엎어놓고 또 해오라는 심보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기분이 좀 울컥했다. “....” 나는 따끔한 가슴을 매만졌다. 처음 느끼는 감정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었다. 난 바닥을 깨끗이 치우고 남작에게 갔다. 그가 말했다. “당연히 계속 죽을 줘야지.” “하지만 그녀는 그건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거라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어리광이네.” “어리광?” “어려서부터 항상 병 에 시달려서 심술이 난 거야.” “심술?” “그래도 아픈 아이에게 술이나 매운 음식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아까와 똑같은 죽을 만들어서는 그녀에게 갔다 줬다. 페니슐라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시 죽사발을 뒤엎어 버렸다. “이런 거 싫다니까!” 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또 똑같은 것을 만들어 왔다. 나는 하루 종일 죽 만드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반복노동에서 인간이 기계를 이길 방법은 없다. 결국 완전히 지쳐버려 죽고 싶은 표정으로 죽을 다 먹은 그녀가 겨우 잠이 들자 나는 저택의 서고로 가서 사전을 펼쳤다. 심술 : 짓궂게 남을 괴롭히거나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하는 못된 마음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심술의 정의'를 읽으며 생각했다. 어째서 그녀를 낫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그녀는 모두에게 못되게 구는 것일까? 난해한 공식을 이해하려는 수학자의 심정으로 밤새도록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며칠 동안 나를 대하는 심술도 나날이 늘어가서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못된 마음을 가졌다'라는 답이 나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업무 보고를 위해 키스 경과 텔레마코스로 대화할 일이 있었다. 나는 감정에 능숙해 보이는 키스 경이라면 이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봤다. 그랬더니, “카일리 경, 그건 모두가 그녀를 위해 노력하니까 심술을 부리는 거랍니다.” “어째서....”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 없어! 라는 기분이랄까요. 사람들에게 미안한 거죠.” “미안하면 남을 괴롭히나요? 인간은 그런가요?” “남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거예요.” “.....” “모두가 정성스럽게 돌봐주는데도 좀처럼 낫지 않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어째서 난 이렇게 태어난 걸까, 라는 비참한 기분이 들지만 사람들 모두가 너무도 걱정해주기 때문에 마음 놓고 펑펑 울며 신세를 한탄할 수도 없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만약 내가 보통 인간이었다면 이 말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후후. 자랑스러운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카일리 경이라면 훌륭하게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통신을 끊었다. 11 페니슐라의 병은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금 두통이 생기고 열이 오르는가 싶더니 곧 혼자 움직이는 것이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고 불에 덴 것 같은 통증과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번갈아가면서 찾아왔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를 간병하던 시녀들마저 같은 증상에 감염되어 누구도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우연히 나에 대해 알게 된 마일즈 남작이 감염되지 않는 나를 지명할 때까지 6년간 그녀는 혼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병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은 견디기 쉬웠을까. 분명 내가 미울 것이다. 어떤 인간도 접근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엄청난 돈을 주고 데려온 나는 '그녀의 병은 위험하고 각한 것‘ 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증거일 테니까. 녀의 병실로 들어가자 페니슐라는 몸을 떨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흥. 조금만 늦게 왔으면 내가 시체가 된 꼴을 봤을 텐데!' 라면서 빈정거렸겠지만 지금은 그릴 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눈물어린 동그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쌓인 낙엽을 태우는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해열제가 필요했다. ‘금방 시장에 다녀오겠습니다. 주문해 둔 약을 만들어 뒀을 겁니다.“ 나는 코트를 입으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가지 마!" 문을 열려던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약이 필요하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이 명령은 심술은 아닌 것 같았다. “가지 마.” 그녀는 또 말했다. 이건 부당한 명령인가? 나는 3번과 4번 사이에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키스 경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밖을 서성이던 하녀에게 시장에 가서 약을 받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 곁에 앉았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이마 위에 올렸다. “너는 손이 차가워,” “기계니까요.” “....엄청나게 정교한 기계네.‘ “저도 잘 모르지만, 제 생명은 마법으로 부여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마법 ?그런 게 정말 있어?” “저를 만든 분이 말씀하셨어요. 사라진 고대의 기술 같은 것만, 설명하기 힘드니까 그냥 '마법'이라고 해두자고.” 그녀는 동화를 듣고 있는 소녀 같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쉰 입을 열었다. “그 마법이 있으면 나도 치료될 수 있을까?”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에게도 삶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도 처음으로 계산하지 않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마법이 아니라도 치료될 수 있습니다 ” 그녀는 예상 밖으로 내 말에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손을 잡은 채로 몇 번이나 울고 아파하다가 하녀가 가져온 약을 먹고서야 잠들었다. 나는 아침이 올 때까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온기 없는 손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 그녀는 책을 보고 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환자복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너는 꼭 양 같아.” “네?” 그녀가 갑자기 던진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양은 떼를 이루며 싸다니고 높은 곳을 좋아하는 초식동물이다. 어디서 나와 공통점을 찾은 거지. 내 은발 때문인가? “제가 양처럼 생겼나요?” “아니. 비슷하게 생겼다는 게 아니고, 그냥 왠지 양을 닳은 거 같아. 넌 앙으로 태어났어도 꽤 근사했을 거야.” 이번에는 내 쪽에서 조금 심술이 생겼다. 어딜 봐서 양이라는 건 아무 생각도 없이 적어도 하루 종일 멍청하게 풀만 뜯어먹는 녀석보다는 페니슐라를 위해 쾌 많은 고민을 하면서 살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양은 별로 매력적인 동물이 아니었다. “어? 불만 있는 표정인데?” “아뇨, 별로." 나는 결국 뚱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는 진짜 양 같다고 큭큭 거리면서 웃었다. 대체 어디가 닳았다는 걸까!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고 메에에, 하는 이상한 울음소리까지 흉내내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3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째서 나는 기계인간으로 태어난 것일까, 녀의 말대로 양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고래나 오소리, 혹은 세콰이어 나무로 태어날 수도 있는데 왜 나는 이런 존재로 태어난 걸까,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나 때문에 기계인간으로 태어난 거 같다고?” “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그것밖에 없었다. “제가 기계인간이 아니었다면 저는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럼 너는 나하고 있기 위해 태어났다는 거야?” “네.” 그녀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너 혹시....나한테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 “그게 뭐죠?” “아니, 몰라도 돼. 그보다 정말 엉뚱하네. 너 같은 절세미남이 나 같은 여자하고 같이 있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이상해!” 꽤 논리정연하게 말한 것 같은데, 무시당한 거 같다. 이번에도 나는 '양의표정'을 지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겁니다. ” “정말? 그럼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야?” “네.” “헤에. 주저 없이 말하는 남자네.” 그녀는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며 가볍게 빈정거렸지만 그리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저녁에 서고로 내려가 다시 사전을 펼쳤다. 프러포즈 : 혼인하기를 청함 난 빨개진 얼굴로 급히 사전을 덮었다. 14 페니슐라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진 것은 기이한 겨울비가 도시를 휩쓸던 초겨울 때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피를 쏟았고 온몸의 수분이 다 뽑혀 나오는 것만 같은 기세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염이 두려워 그녀를 만나 보지도 않은 의사는 상태만 전해 듣고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라 말했다. 마일즈 남작이 성직자까지 불러 둔 상황, 피와 땀과 신음소리로 가득한 병실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무자비한 빗줄기가 당장이라도 그녀를 데려갈 것처럼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반쯤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네 말대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너뿐이네?” 나는 내가 기계인간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런 날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처참하니까. “아니, 당신은 절대 안 죽어요.” 내 마음의 회로가 녹아 끊어져 버릴 것 같았지만, 나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절박한 표정을 애써 숨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기계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무서운 표정이네. 죽으면 너한테 혼날 것 같아.” “죽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이유가 사라져 버려요.” “이기적이네.” 그러면서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힘을 짜내서 나를 껴안았다. 껴안았다기보다는 거의 몸을 기댄 수준이지만 피부도 머리칼도 눈동자도 생기를 읽은 그녀는 필사적으로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한 번도 누군가를 마음껏 안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커다랗게 울기 시작했고 계속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아, 카일리. 난 죽고 싶지 않아. 너하고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이제 겨우 나도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는데...” 저도 그래요, 라는 말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내게는 눈물을 흘리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격렬한 감정은 나갈 구멍을 찾지 못한 채 내 메마른 눈동자 뒤로 몰려들었다. 내 차가운 몸이 그녀의 열병을 구석구석 받아들이고 있었다. 평생 같은 곳만 맴돌 것으로 알았던 내 마음이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서 지금 궤도를 이탈한 것을 느꼈다. 그 마음은 아마 영영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무서운 기세로 튀어나가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어떤 목표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15 결국 의사의 말은 틀렸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다만 그날 그녀를 덮쳤던 병마가 두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을 뿐이다. 키스 경으로부터 원한다면 귀환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계속 있고 싶다고 말했다. “키스 경은 인간이 아닌 저를 이해하실 수 없을 거예요.” “아니에요.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그럼요.” 그녀가 있는 공간 밖으로 벗어난다면 나는 이내 무의미의 수령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내 딸을 구할 연구를 시작하려고 하네.” 마일즈 남작이 그렇게 말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는 그걸 실천하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모든 명화와 조각상, 골동품 등을 팔아치워 연구원들을 불러들였다. 짐작할 수도 없는 막대한 돈이 들어갔고 언제 끝날지도 모를 연구가 진행되었다. 결국 영지도 계속 매각해서 돈으로 바꿔야 했고 더 이상 하인들을 고용할 여력도 없어서 거대한 저택에는 나와 그녀와 남작만 남게 되었다. 마일즈 남작은 자신이 한 푼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병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녀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그녀의 병실만은 조금도 손대지 않았고, 가끔 그녀를 만나러 병실에 올 때도 예전처럼 화려한 옷을 빌려 입고 들어왔다. 사실 그때부터 지명비용도 왕실에 지불할 수 없었다. 이걸 해결해 준 사람은 키스 경이었다. 원한다면 계속 남아 있어서도 좋다면서 자신이 대신 그 엄청난 지명비용을 왕실에 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그를 직접 만난 것은 태어나서 한 번뿐이지만 평생 잊지 못할 사람 이다. 그리고 1년 정도가 지났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 그녀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카일리, 넌 나보다 오래 살겠지?” “네?” 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적어도 나보다는 오래 살 테지?” “그건....” “다행이야. 나보다 오래 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말없이 그녀의 야윈 어깨를 닦아 주었다.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내 수명이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는 말은 한 달 후 그녀가 숨을 거둔 그 날까지도 말하지 못했다. 16 카일리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길게 묘사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나는(그러니까 엔디미온은) 너무도 담담하게 자신의 거의 모든 인생을 들려준 카일리의 옆모습과 그가 바라보고 있는 페니슐라의 무덤을 봤다. 그가 어째서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카일리 경은 이제 남은 시간이...” “제 수명은 이제 두 달쯤 남았습니다. 나는 결국 그녀보다 오래 살았군요.” “자, 잠깐. 루시온 경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 경을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날 리더구트로 데려가서 좀더 수명을 연장시켜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릴 방법이 없다는건 루시온 경도 알고 있을 겁니다. 남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어요.” 역시 루시온 경도 냉혈한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얘기를 해줬으면 나도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거 아냐! 하아, 자기변명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 그 엄청난 프라이드가 얄밉다. “엔디미온 경, 페니슐라의 장례식을 치러줄 수 있나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장례식도 못해줬네요.” “아, 그거야 물론 해드릴 수...” 나는 문득 키스 경이 날 이곳에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카일리 경을 데려오는 것은 생각도 않았을 것이다. 지명비용도 그가 대신 내줬다니까.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주제에 남모르게 선행도 하는구나. “아, 이런! 제사 도구가 가방 안에 있는데!”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인데, 가방 빼앗겼잖아! 으이구! “내일 되찾으러 가죠.” 그렇게 말하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 카일리 경을 보며 나는 정말 그가 어딘지 모르게 양을 닳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17 루시온 경이 묵고 있는 숙소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성격상 싸구려 여관에는 묵지 않았을 테고-무엇보다 카일리 경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시온 경이 여기 자주 왔다고요?” “자주는 아니지만 일 년에 서너 번쯤 제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러왔어요. 한사코 따로 여관에 묵겠다면서 남작의 저택에서 자는 걸 거절했지만, 덕분에 어디에서 묵는지 알고 있어요.” 의외의 사실들이 속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겉으로는 '기계인간 따위!' 라면서 엄청 모질게 굴던 루시온 경이 실은 꽤 사려 깊게 카일리 경을 돌봐주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리더는 리더라는 건가. 대단하네(그런데 내 경우에는 정말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역시 내 예상대로 루시온 경이 묵은 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청결한 여관의 가장 청결한 객실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루시온 경은 지명을 가서도 절대로 지명자가 내준 방에 묵지 않고 자기 돈을 내서 여관을 빌린다고 한다. 지명자에게는 지명비용만 받고 그 어떤 호의도 사절하는 것이다. 굉장하다. 나는 지명을 받으면 너구리인 양 밥도 얻어먹고 재롱도 피우고 때로는 하루쯤 더 놀다가 가기도 하는데, 나와 비교하면 무섭도록 자기 관리에 철저한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루시온 경이 여관에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 여관 주인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 파란머리의 미남을 찾아온 사람들이죠?” “그런데요?” 나는 그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청년 납치소. 건달들한테.” “뭐라고요!” 맙소사! 그런데 루시온 경은 검술에 상당히 능해서 쉽게 납치될 사람이 아닐 텐데? “한 열 놈 정도가 여기에 들어오더니 식사 중이던 그 청년에게 다짜고짜 덤벼들더군. 그 친구 꽤 세더구먼. 칼이 없었는데도 서너 명 정도 때려눕히긴 했는데....떼거리로 덤비는데 장사 없지.”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기습이라니 ! 카론 경이나 키스 경이 아닌 이상 열 명은 절대 무리다. “건달 놈들이 당신들이 오면 이걸 전해주라고 하더군.” 보나마나 어제 내 가방을 훔쳐간 놈들이 뻔했다. 왕실 기사를 납치하다니 배짱도 좋구나! 나는 화가 난 표정으로 여관 주인이 건네준 쪽지를 읽었다. 누가 깡패 아니랄까봐 지독하게 너절한 문장이었다. 보무를 가저오지 아느면 파랑머린 중는다. “....환장하겠네.” 또 그 망할 놈의 보물이야! 그딴 건 애초부터 없다니까! 나는 루시온 경이 묵고 있던 객실로 한걸음에 올라가 침대 위에 놓여 있던 그의 장검을 집어 들었다. 18 깡패들의 아지트는 도시 동쪽 끝 슬럼가에 있었다. 엄연히 왕실 기사 납치 사건이니 카론 경에게 연락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제아무리 바람 같은 카론 경이라도 이곳까지 오는데 족히 한나절은 걸리기 때문에 나와 카일리 경이 분연히 나서야 했다. “그런데 카일리 경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래도 단 둘이 쳐들어가는 건데 각목이라도 드는 것이....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무기 써본 적이 없어서요.” 괘, 괜찮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앞서가는 카일리 경을 보자 강렬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지트는 한 50년 전에는 술집으로 쓰였던 것 같은 낡은 이층 건물이었는데 입구에는 패거리 둘이 망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앞 골목에 숨어 염탐을 했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흐음, 어떻게 침입한다? 일단 건물 뒤로 돌아가서....” 그때 카일리 경이 바닥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뭐하세요?” 카일리 경이 찾은 것은 제법 묵직한 돌멩이 두 개였다. “설마 그걸 던져서 맞추려는 건 아니겠죠?” 건달들이 있는 곳까지는 50보 정도, 맞추기는커녕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곳까지 던지지도 못할 거리였다. 순간 카일리 경이 돌을 쥔 팔을 크게 휘둘렀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곧바로 따아악 하는 '골 때리는 소리'로 이어졌다. 저 멀리 서 있던 건달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옆에 있던 건달이 깜짝 놀라 쓰러진 동료를 바라보는 순간 또 부우웅, ·따아악이 이어졌다.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카일리 경은 엷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럼, 들어갈까요?” “와, 완전 대포알이네요.” 역시 기계인간, 양처럼 온순해서 그렇지 뿜어져 나오는 파워의 수준은 확실히 인간과 다르다. 돌팔매도 이 정도면 살인병기였다. 무기를 못 쓰는 게 아니라 필요가 없는 거였잖아! 19 잠입하는 주제에 정문으로 들어가는 호사를 누린 우리들은 아침인데도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하고 쾌쾌하기까지 한 실내에서 루시온 경이 어디에 잡혀 있는지를 판단해야 했다.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고 속삭였다. “지하실로 가죠.” “그곳에 잡혀 있을까요?”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이 소설, 누가 잡혔다하면 꼭 지하실에 가두거든요.”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거든. 그때 계단 위로 실루엣이 움직였다. “누구냐!” 그 순간 장검을 뽑은 나는 주저 없이 그에게 뛰어들어 그가 든 칼을 후려쳤다. 카아앙 소리와 함께 팔뚝만한 칼이 두 조각이 나서는 허공을 날았다 나는 곧바로 그를 벽 쪽으로 거세게 밀치고 목에 검날을 들이댔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어제 내 가방을 가져간 놈이잖아!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이 자식, 왕실 기사를 우습게 알았겠다!” “사, 살려주세요!” “당장 내 가방 돌려줘. 그리고 루시온 경도 내 놔!” 그 순간 나는 오싹함을 느꼈다. 지하실에서 뛰어 올라온 새로운 놈이 내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위, 위험해 !' 내 머리와 칼 사이에 끼어든 팔뚝을 봤다. 카일리 경이었다. 금속으로 된 그의 팔뚝에 튕겨 나온 검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대단해. 칼도 튕겨내는 합금이라니! 무기를 가져오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빠각 곧바로 카일리 경의 주먹이 얼굴을 때리자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붕 떠오르는 건달은 계단을 굴러 지하실 입구에 나가 떨어졌다. 말 그대로 쇠주먹에 맞은 거니까 아마 평생 껌 씹는 건 포기해야 하는 턱이 되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엔디미온 경?” “아하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네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먹에 엉킨 피를 닦는 그를 보며 좋은 사람인 게 천만다행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 그 이후에도 두더지처럼 나타난 몇 놈들을 가볍게 처리한 후 우리는 지하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루시온 경만 있었다. 오래전에는 기를 보관하던 곳이었는지 녹슨 갈고리며 부서진 나무상자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이곳에서 루시온 경은 목과 두 팔이 사슬에 엉킨 채 벽 쪽에 속박되어 있었다. 순순히 잡혀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입가에는 핏물이 맺혀 있었고 옷은 흙먼지와 핏자국에 더럽혀져 있었다. “루시온 경, 지금 풀어줄게요.” 그는 대담하지 않은 채 찡그린 얼굴을 돌렸다. 누가 구해주는 것조차 창피하다는 건가. 정말이지 어지간한 자존심이다. 이제는 그의 그런 모습에도 꽤 정이 든 것 같아서,나는 사슬을 풀며 농담 삼아 콧소리를 냈다. “헤헤. 항상 완벽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그는 고개를 숙이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누구나 키스 경이나 카론 경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역시 그들을 존경하고 있었군. (키스 경은 지나치게 독특한 초이스지만)카론 경은 확실히 반할만 하다. 깎아낸 것 같은 외모부터 머리도 엄청나게 좋고 고결한데다가 자타가 공인하는 검술의 대가에 심지어 아내까지 아름답다. 주사위를 열 번 굴려 무조건 6만 나온 것 같은 모습, 정말 반칙이다. 시기하는 자들이 본다면 '대체 저 얄미운 농의 약점은 뭐야!' 라면서 좌절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도 가까이에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서툴러서 쩔쩔 매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하고(요리라든가) 평민출신이라는 것에 콤플렉스도 있는데다가 피곤하면 불평도 하고 때론 질투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으음. '평범한' 은 취소. 초인은 초인이니까). “그들도 완벽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그가 다른 기사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절대로 완전무결의 결정체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루시온 경도 눈치 챘으면 좋겠다. 물론 나 같은 실수연발의 말썽 덩어리가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그때 지하실 밖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렸다. 반쯤은 변명이지만 역시 ‘확인사살’ 을 안한 것이 화근이었다. 카일리 경에게 죽도록 두드려 맞은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되살아나 밖에 있던 두목에게 우리의 침입을 알린 것이었다. 우리를 본 예의 깡마른 두목이 통쾌하게 웃어재꼈다. “후후후. 제 발로 걸어들어 왔구나!" 지하실의 출입구는 하나뿐이었고 지금 그 입구에는 다섯 명도 넘는 건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카일리 경은 뚫고 나갈 심산인지 눈을 번뜩였지만 두목은 곧 실웃음을 보이며 성냥을 그었다. “이곳이 어디냐 하면 우리가 밀수입한 고래 기름을 보관하는 곳이지.” 제길 하필이면 경유(똔fa)!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저쪽 구석에 쌓여 있는 나무통에 고래 기름이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불씨 하나만 던져도 이 안은 불바다야. 기름으로 붙은 불은 꺼지지도 않는다지?” “왕실 기사를 태워 죽이고도 성할 줄 알아?” “누가 알겠어. 뼈까지 녹아 없어질 텐데.” “이런 무지막지한 자식 !” 사람이 돈에 눈이 멀면 무서운 게 없어진다더니 ! “목숨 중한 줄 알았으면, 보물을 내놓으실까?” “그러니까 보물이라는 건 애당초 없다니까 그러네!” “흥!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군!” “그래? 그럼 대체 그 보물이 뭔지 말 좀 해봐” “나도 몰라. 아무튼 남작이 전 재산을 투자해 만든 거라니까 엄청나게 비싼 게 분명할 테지.” “으이구! 남작은 파산했어! 연구는 실패했고! 보물이 있을 턱이 있겠냐!” 내가 어떻게 말해도 두목은 절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일리 경이 말했다. “대화 중에 방해해서 미안한데....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래 기름은 불이 안 붙어.”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허망하게 성냥을 들고 있던 두목이 말했다. “정말?” “응 양초가 폭발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야.” “그, 그런가?” 그 순간 카일리 경의 몸이 움직였다. 실로 쏜살같은 빠르기였다. 이번에도 복합골절을 떠올리게 하는 둔탁한 소리가 터졌고, 기겁을 한 건달들이 칼을 휘둘렀지만 카일리 경의 어깨나 팔뚝에 맞아 모두 튕겨나갔다.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는 건달들을 모조리 지하실 구석에 카일리 경은 찢겨나간 옷을 추스르며 그 양과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나갑시다.” 지하실 문을 잠근 뒤에 내 가방까지 찾아 밖으로 나갔다. 혹시 카일리경.....군사용으로 만들어진 거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21 “그런데 정말 고래 기름은 불이 안 붙어요?” 진짜든 거짓말이든 순간적인 판단으로 적들을 제압한 건 훌륭했지만,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카일리 경은 무리한 움직임으로 기계적인 소음을 내고 있는 자신의 팔을 매만지며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마키시온 제국이 긴수염고래의 기름으로 화약을 만드는 짓은 하지 않았겠죠," “역시...불이 붙는다는 거군요." “하지만 우리가 지하실에 갔을 때 고래 기름 비린내가 전혀 나질 않았잖아요? 보통은 두통이 생길 정도의 악취를 풍겨야 정상인데도.” “그래서요?” “지하실에 있던 고래 기름은 아마 향유고래의 것이었을 겁니다. 그건 영하권으로 내려가면 경랍이라는 고체 상태로 변하고 그때는 쉽게 불이 붙지 않아요. 양초의 원료니까.” 세상에,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것까지 생각했던 거야? “또, 똑똑하네요.” “영주님의 서고에는 참 많은 책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중에 포경업에 대한 매뉴얼도 있었고요. 저는 잠을 자지 않아서 밤이면 아무 책이나 읽곤 했는데, 포경업 개론서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 저도 몰랐군요.” 음, 역시 독서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로군. 틈만 나면 책을 읽는 카론 경도 한번쯤은 콩나물 재배법 같은 책을 읽은 도움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할 때도 있을 것 같다. 한편 루시온 경은 그다지 표정이 밝지 못했다. 나는 건달들에게 잡힌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자존심 상해 있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가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카일리,무슨 보물을 숨기고 있는 거냐.” “루시온 경, 보물 같은 건 없다고.....”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카일리 경은 부정하지 않은 채 루시온 경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루시온 경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폭력배들이 기시·까지 해치려고 들면서 보물에 집착한다면, 그건 보물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는 거다. 어림짐작만으로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지. 카일리, 남작과 공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는 머리가 멍했다. 그럼 정말 보물이 있다는 의미인가. 그리고 카일리 경은 그걸 우리에게까지 숨기고 있었다는 것일까. 어째서? 그 성격에 미뤄볼 때 적어도 돈 때문은 아닐 것이다. 카일리 경이 말했다. “이틀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카일리." “그때가 되면 제 역할도 모두 끝납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카일리 경의 몸 언저리에선 수명을 다해가는 기계장치의 불협화음이 맴돌고 있었다. 22 그런데 카일리 경은 어느 날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걸 택했고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까마득히 먼 곳을 향해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수십 년을 살면서 한 번도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니, 실은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참으로 대단하다. 순간 머릿속에 키스 경이 지나갔다. 그 인간은 아예 궤도 자체가 없는 별똥별 같은 양반이라서 자기 멋대로 날아다니다가 어느 나라 양계장 같은 곳을 덮칠지도 몰라. 그러고 보면 나도 그 별똥별에 얻어맞은 사람 중 하나고. 하지만 카일리 경의 지명비용을 대신 내준 건 참 놀라웠다. 따뜻한 인간의 마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대체 그 돈 어디서 난 거야? ‘하아, 알게 뭐람. 왕실 금고에서 스리 슬쩍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인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늦은 밤인데도 루시온 경은 테이블에 앉아 뭔가를 적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요?” “다음 지명에 대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카일리 경을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지만. 나는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 그를 바라봤다. 그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한 백작가문의 계승자다. 그야말로 평생 망치질 한번 할 필요 없는 탄탄대로,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분명히 위고르 공처럼 대단한 권력을 가진 엘리트 관료가 돼서 우리들을 지명하는 입장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귀족들의 입맛을 맞춰주며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고된 일을굳이 할 필요가 없는 신분이다. “루시온 경은 왜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왔어요?” 나는 솔직히 내 질문을 완전히 무시할 줄 알았다. 그런 성격이니까. 하지만 그는 펜을 놓고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에요.” 아직 이유를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는 걸까. 하지만 카일리 경이 돈이 아닌 소중한 것을 위해 페니슐라 곁에 있는 것처럼 루시온 경이 편한 길을 포기하고 스왈로우 나이츠가 딘 이유도 아주 소중하고도 절실한 것이리라 믿는다. 23 카일리 경이 말한 이틀이 가다왔다. 대체 무슨 보물이 있는 것이지, 또 역할이 끝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하며 나와 루시온 경은 짐을 싸서 여관을 나왔다. 그는 여전히 페니슐라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오셨군요.” 가볍게 인사한 카일리의 주변에는 보물이랄 것은 전혀 없었다. 그가 말했다. “잠시 후면 그분이 도착할 겁니다.” “그분?‘ “절 만드신 분이요.” 아, 그럼 카일리 경의 창조주를 만나는 셈이로군. 그리고 그의 말대로 잠시 후 네 필의 말이 끄는 거대한 마치가 이곳에 도착했다. 카일리 경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경호원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마부가 마차에서 내려 문을 열자 ‘창조주’ 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 밖으로 쫙 빠진 다리의 굴곡이 드러나자 나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세실리 님.” “엇? 미온 군?” 내 여전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마차에서 내리려던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곧 바로 문을 쾅 닫고는 외쳤다. “어서 출발해!”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차 문을 열었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24 세실리 님은 세계적인 발명가다. (기계인간을 만들 정도인 줄은 몰랐지만) 전 세계를 어디를 봐도 그녀의 손길이 없는 곳은 찾기가 어려운 정도다. 가령 마키시온 황실과 우리나라 펠리오스 타워에도 설치되어 있는 수동 승강기가 그분의 작품이고, 내가 극도로 무서워하는 세탁기 역시 그녀가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산이 없어서 아직 쓰지 못하지만, 천공식 카드를 이용해서 인트라 무로스의 보안 시스템부터 같은 원리를 이용한 무인 오케스트라 연주 장치까지, 만물을 재해석하는 그녀의 재능은 일국의 연구기관 수준이라서 미라넬로 황제가 엄청난 조건으로 대 아카데이 소드람의 수석 연구원으로 모셔갔을 때,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던 적도 있다. 그녀가 일종의 신념 때문에 군사병기는 만들지 않았다는 것에 다른 나라에서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모범적이고 생산적인 발명품만 만든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예술가의 혼에는 확실히 괴팍한 구석이 있어서, 그녀는 도저히 어디다 어떻게 쓸 건지 짐작도 안가는 괴상망측한 물체를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 때도 있는 것이다(실은 대부분이 그렇다.) 예를 들어 그녀가 만들었던 ‘연인 측정기’는 (무슨 원리인 줄은 알도리가 없지만) 남녀가 그 기계에 손을 대면 서로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점수로 나오는 획기적인 장치였지만, 그녀의 노처녀 히스테리가 십분 녹아든 기계라서 어떤 천생연분이 손을 대도 자살하고 싶은 점수가 나오는 이른바 ‘좌절 머신’이었다(이오타에서 지원해 준 자금으로 만든 게 이거라서 이자벨 님은 지금도 세실리 님의 이름만 들으면 두통에 시달린다). 그 외에도 한 알만 먹어도 한 달 동안 배가 고프지 않은 알약이라든가(맹렬한 설사 끝에 피실험자를 사망 직전으로 몰고 간 적이 있다)물 속을 다닐 수 있는 배(그러나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벼락의 힘으로 움직이는 인쇄기(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만 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만 구입할 것이다)등등의 광적인 발명품들이 그녀의 창고 한 구석에 가득하지만 그중 으뜸은 바로 ‘자동 청소 기계’였다. 열차에나 쓰이는 마나 엔진을 도입한 그 인간형 기계는 놀랍게도 스스로 쓰레기를 판별해서 수집한 뒤에 처리한다. 물론 거대한 성한 채 값을 가볍게 넘는 그 값비싼 기계를 어느 가정집에서 쓰겠냐만, 딱 한 명 구입한 분이 있었으니 바로 예전 업소의 마담 히르카스 님이었다. 원체 은밀한 곳이라서 함부로 청소부를 고용할 수도 없는 사정이라 누님은 그 기계를 단번에 현금으로 구입한 뒤에 자신의 업소 ‘미소년의 숲’에 놓은 것이었다. 쓰레기 같은 건 그냥 손으로 주워도 되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돈 많은 분들의 머릿속이라는 것은 평민과는 워낙에 다르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데 문제는 그 경악의 머신이 업소 내부에 가득 전시되어 있는 히르카스 님의 소지품들, 그러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의 예술품들을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청소’해 버렸던 것이다. 돈 주고도 못산다는 그림들을 불태워 버렸고, 어떤 장인의 평생의 역작이라는 도자기는 아예 가루로 만들었다. 너무 크고 무거워서 도저히 손대지 못할 것 같은 조각상은 옆에 있던(역시 고가의)장식용 보검으로 사지를 잘라서 땅에 묻어 버렸다. 기계와 인간의 예술에 대한 입장 차이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돈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러운 히르카스 님마저도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방에서 총을 가져와 청소 기계를 걸레로 만들어 버렸고 남은 한 발로 세실리 님도 죽여 버리겠다면서 업소를 완전히 뒤집어 놨다. 물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실리 님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마차 안은 상당히 넓었다. 다섯 명이서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저어, 히르카스 누님과는 화해했어요?” “....”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창밖을 봤다. 발명품 하나 때문에 각국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다니,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다. 차를 마시지 못하는 카일리 경은 내가 세실리 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운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이래봬도 상당히 화려한 십대를 보냈답니다. 별로 자세히 설명하고픈 기분은 안 들지만. 세실리 님과 초면인 루시온 경은 평소와는 달리 먼저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물론 ‘만나서 영광입니다’는 절대 아니었다. “카일리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겁니까. 세실리 님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까지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할 수 없다는 의미야.” “그럼 왜 그런 불행한 생명체를 만든 겁니까?” 나는 놀란 얼굴로 루시온 경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평소와 똑같이 차갑고 딱 부러졌지만, 분명히 원망이 섞여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생명체’라니. 역시 루시온 경은 카일리 경에 대해(나보다도 더 진지하게)걱정해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사십대 초반에 접어든 세실리 님은 조금씩 주름이 지기 시작한 그 얼굴에 화장기 같은 쓸쓸함을 담으며 루시온 경을 바라봤다. “그럼 왜 신은 100년도 못 사는 우리들은 만든 걸까. 하찮은 밤나무도 100년을 넘게 사는데. 그래서 지금 신을 원망하고 있나?”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카일리를 생명으로 보고 있다면 그의 수명도 존중해 주는 것이 도리야.” 루시온 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해봐야 카일리 경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카일리 경은 도리어 자신에 대한 루시온 경의 배려가 기쁘다는 듯이 엷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세실리 님, 보물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죠.” 25 그의 ‘보물’은 플레밍 마일즈 남작이 페니슐라를 살리기 위해 만들었던 거대한 연구소에 숨겨져 있었다. 그 건물은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아서 마치 거대한 짐승의 주검처럼 대낮에도 을씨년스러웠다. 우리는 넝쿨과 반쯤 동화된 그 폐건물로 들어가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말해주는 남작의 집착 같은 것에 압도된 탓이리라. 계단을 타고 몇 층인가를 올라가서야 세실리 님이 한숨 섞인 말을 꺼냈다. “이런 걸, 정말 만들 줄은 몰랐군. 겉보기엔 멋 부리기만 좋아하는 귀족인 줄 알았는데.” “예?” “정 딸을 살려보고 싶으면 이런 걸 만들라고 내가 말한 적이 있거든. 반쯤은 귀찮아서 한 말이었는데....” 세실리 님은 이럴 줄 알았다면 좀더 성의 있게 말해줄걸 그랬나, 하는 후회스런 표정으로 카일리 경을 뒤따랐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런데 보물이란 어떤 것일까. 이제 수명이 몇 달도 남지 않고 지켜줄 사람도 사라져 버린 카일리 경이 우리들에게까지 말하지 않은 보물이란 어떤 것일까. 이제 몇 달도 남지 않고 지켜줄 사람도 사라져 버린 카일리 경이 우리들에게까지 말하지 않은 보물이란 대체 무엇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좀도둑들이 촛대 같은 쇠붙이들을 모조리 뜯어가 버린 상처투성이의 복도를 걸어 점점 보물에 근접할 때였다. 순간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주인님. 제 뒤로.” 이 덩치 좋은 마부는 역시 경호원이었는지 곧바로 검을 뽑고는 세실리 님 앞에 섰다. 나는 건물로 들어온 토끼나 너구리같은 녀석들이 돌아다니는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곧 우리의 존재를 모르는 상대가 복도 쪽에 나타났다. 나는 그 정체를 알고는 놀라기보다는 화가 났다. “네놈들은!” “흐히힉!” 정말 잊고 싶은 녀석들, 예의 건달들이었다. 여기 왜 왔는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와 카일리 경에게 당한 몸에 붕대를 감고 다리까지 절룩거리며 이런 곳까지 들쑤시고 다니는 정성은 인정해 주겠다만, 도가 지나치다고! 두목은 우리를 보고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지면서도 들고 있는 상자를 놓지 않았다. “이, 이건 우리 거야. 절대로 줄 수 없어!” 설마 보물을 찾은 거야? 나는 카일리 경을 봤다. 그는 당장이라도 건달들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그럼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정말 보물? 그때 세실리 님이 코웃음 며 말했다. “너희들, 그거 열어봐.” 건달들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자를 열었고 곧 그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세실리 님은 측은한 듯이 혀를 찼다. “금은보화라도 들어있을 줄 알았던 거냐?” “이, 게 뭐야!” 건달들은 단발마와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나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달랑 십여 장 밖에 안 되는 종이뭉치였던 것이다. 무언가 빽빽이 적혀 있긴 했지만, 농담이라도 값비싸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 서류를 충혈 된 눈으로 마구 넘기던 두목은 자멸감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곰팡이? 농축 방법? 정제 과정? 이런 건 어떤 장물애비도 단돈 1셀링에도 안 살 거야. 이딴 알 수 없는 소리나 지껄인 종이짝을 훔치려고 내가 이 고생을 한 거야? 이게 전부냐고.”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세실리 님의 표정은 경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작이 그걸 완성했구나, 카일리.” “예.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 제가 연구를 이어받아 끝냈습니다.” “놀랍군. 소드람조차 끝내지 못한 연구인데. 역시 부모의 집착이란 대단하구나. 저걸 가져와라.” 그러자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경호원이 성큼성큼 건달들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 그래도 이건 내 거야! 어떻게 훔친 건데...” 경호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세실리 님을 바라봤다. ‘죽일까요?’라는 표정이다. “나름대로 그 노력이 갸륵하니까 대충 지불해 줘.” 그러자 사내는 허리춤에서 큼직한 주머니를 뽑아 건달들에게 던졌다. 그 주머니에는 마키시온의 인장이 찍힌 금화가 가득 차 있었다. “이, 이걸 정말 주는 거야?” “왜? 더 필요하냐?” “나중에 딴 말 하기 없는 거요?” “네놈들이야말로 딴말 하지 마라.” “이런 걸 금화를 주고 사다니, 제 정신들이 아니야. 아무튼 우리는 마음 바뀌기 전에 사라지겠수. 으히히. 횡재했네.” 그들은 금화를 챙겨서는 닭을 문 여우처럼 황급히 도망쳤다. 세실리 님은 경호원이 가져온 서류를 건네받으며 비웃음을 보였다. “바보들, 이건 이 나라를 열 번 샀다 팔아도 못 구하는 거야.” 나는 물론 루시온 경마저도 적잖게 놀란 얼굴로 그 서류를 바라봤다. 어떤 것이기에 세실리 님이 그런 말까지 하는 것일까. 그녀는 카일리 경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이 약이 조금만 더 빨리 완성되었다면 그녀의 목숨을 구했을 텐데, 유감이로구나.”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그럼 말한 대로 이건 소드람으로 가져가겠다. 소드람의 시설이면 10년 안에 양산화 시킬 수 있을 거야. 황제 폐하에게 올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군.” 그리고 그녀는 카일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 병든 사람들의 절반은 네가 구한 거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카일리.” 그녀의 피조물 카일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 양과 같은 얼굴에 웃음만 보였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페니슐라입니다.” “너와 페니슐라를 기념하고 싶구나. 이 약의 이름은 페니실린으로 정하마.” 26 나는 그 페니실린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녀에게 ‘시대를 한 천년 정도 초월해서 나타난 기적’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어쨌든 그것은 앞으로 이 세상을 바꿀 것이고- 결국 카일리 경은 4년이라는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400년이 걸려도 할 수 없더 일을 이룬 것이었다. “어째서 카일리 경을 만든 거죠?” “그 말은 왜 이제는 유사인간을 만들지 않느냐는 말로 들리는구나.” 그녀가 마차에 타며 말했다. “카일리는 인트라 무로스가 준 은밀한 자료들로 만든 존재야. 과학보다는 마법에 가깝지. 총 다섯 명을 만들었는데, 마지막으로 만든 카일리는 너희 국왕과의 어떤 내기에서 져서 어쩔 수 없이 만들어 준 거야. 그 망할 놈의 찐만두는 아직도 잘 살고 있냐?‘ “그, 그럼요. 보란 듯이 생존해 계십니다.” 세실리 님조차도 전하의 비열하고 쩨쩨한 두뇌만큼은 이길 수 없다는 건가. “나머지 네 명의 유사인간은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을 읽어가서 수명이 끝날 때가 되었을 때는 감정도 말하는 법도 생각하는 법도 모두 퇴화된 동상이 되어 있었어.”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에게도 그런 변화가 느리게 찾아올 때가 있다. 점점 더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자신이 왜 숨 쉬고 있는지 그 극명한 이유조차도 생각해내지 못한 채, 죽는 것에도 사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무미건조한 궤도만 빙글 빙글 도는 것이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많이 존재한다. “오직 카일리만이 좀더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했어. 내게 와서 단 1년만이라도 더 살게 해달라며 부탁했어. 자신에게는 아직 해야 할 것이 남았다고. 자기가 먼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고. 그 녀석은 그제야 인간을 이해한 거야.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유사인간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어. 내 피조물에게 고작 4년의 시간밖에 주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좌절했거든. 하지만 카일리는 그 절망을 극복해냈지. 기쁘고 자랑스러워. 나라면 못했을 거야.” 그리고 세실리 님은 떠났다. 모든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지에는 나와 루시온 경과 카일리 경만 남게 되었다. 그 노력 끝에 보물을 지킨 대가로 카일리 경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사실 모든 생명체의 인생을 잘 보면 항상 ‘무언가를 남기는 과정’이다. 가령 똑같이 4년의 수명을 가진 송어도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떠난 뒤에 다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와서 알을 낳은 뒤에 죽는다. 그 알에서 태어난 다른 송어들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강에서, 바다에서 먹고 부대끼다가 다시 강으로 올라온다. 항상 같은 길을 다니는 양처럼 답답해 보이지만 뭔가 자기가 태어난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카일리 경도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있어서 자기가 살아 있는 이유를 느끼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카일리 경이 말했다. “엔디미온 경, 장례식 좀 부탁드릴게요.” “아, 참!” 나는 가방에서 도구들을 꺼내 간략한 장례식을 올렸다. 아직 서툰 부분이 남아 있는 터라서 노련한 루시온 경이 한 마디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어떤 기도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페니슐라의 묘비와 카일리 경을 한 번씩 본 뒤에 이것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최대한 청명한 목소리로 가장 아름다운 시 중에 하나를 암송했다. 나의 존재를 조금만 남겨 주십시오. 그 존재에 의하여 당신을 나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나의 의지를 조금만 남겨 주십시오. 그 의지에 의하여 나는 도처에 있을 당신을 느끼고, 모든 것 속에서 당신을 만나고, 어느 순간에도 당신에게 사랑을 바칠 수 있도록. 나의 존재를 조금만 남겨 주십시오. 그 존재에 의하여 내가 당신을 숨기는 일이 없도록. 나의 사슬을 조금만 남겨 주십시오. 그 사슬에 의하여 나는 당신과 영원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뜻은 나의 생명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사랑입니다. 27 장례식이 끝난 뒤에, 카일리 경이 말했다. “이제 가보셔야죠?” “아, 네” 나는 밝은 그의 표정을 보며 주저했다. 여기서 떠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왔던 것이다. 루시온 경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엔디미온 씨, 갑시다.‘ 그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일리 경, 가서 동료들에게 이 일을 모두 말해도 될까요?‘ 그러자 그는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기왕이면 멋지게 말해주세요. 그분들에게 제가 오래 기억되도록. 그리고 모두에게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살짝 내 어깨를 잡았는데 꼭 인간의 체온 같았다. 루시온 경을 따라가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카일리 경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의 무덤에 자란 잡초를 뽑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장면을 눈에 담고는 리더구트로 걸음을 옮겼다. 제 18 화 술이 몸에 나쁜 서너 가지 이유 1 잠에서 깨어나자 손바닥으로 이마를 꽉 눌렀다. “아우우....머리 아파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꺼낸 첫 대사가 신체 중요부분의 통증에 대한 호소라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쨌건 이 지독한 두통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고약한 난쟁이 수백 명이 내 머릿속에 무단 침입해서는 죽자 살자 발을 구르는 것만 같았다. ‘...대체 내가 얼마나 마신 거야.’ 나는 얼굴을 가리며 ‘누가 두통약 좀 줘’라고 중얼거렸다. 신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술을 많이 마시면 몸에 해롭다는 진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숙취’라는 시련을 내려주셨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시련이 얼마나 견디기 괴로운 고문인지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내 몸을 스치는 가느다란 머리칼마저 채찍처럼 따갑게 느껴질 지경이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술에 대해서는 책을 써도 좋을 전직 호스트 주제에 이렇게 망가져 버릴 정도로 마신 것은 수치다. 예전 현역에 있을 때도 이 지경이 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키스 경과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는 완전 암흑이었다. 일단 그 외계인을 만만하게 본 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키스는 술에 약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술이라도 그 얄미운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쩨쩨한 우월감 덕분에-키스와 술 마시지 말라는 카론 경의 충고에도 불구하고-같이 마시자는 그의 꼬드김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뭐가 가볍게 마셔요오오,냐! 그 자식!' 나는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지만 결코 약하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아니, 실은 엄청 강하다.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하늘이 내려준 말술 키르케 님과 마실 때도 내가 쓰러지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런데 키스는 금방 취할 것처럼 홀짝 홀짝 마시면서도 쓰러지기는커녕 갈수록 정신이 말짱해지는 특이체질의 소유자였다. 반면 나는(보통인간이니까!)얼굴이 빨갛게 오를 만큼 취해가고 있었다. 그쯤에서 '아아, 역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고 패배를 인정했어야 하는데 괜한 승부욕에 불타서는 루이 경이 숨겨놓은 술까지 꺼내와 연장전을 시작한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생각보다 술에 약하네요오? 라는 키스의 도발에 분해서는 ‘나는 전혀 취하지 않았어요!' 라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대사를 늘어놓은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다음은....컴컴한 암혹. 뭔가 다른 동료들도 있었고 내가 거기서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 같긴 한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아,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군,' 키스가 나를 보면 얼마나 놀릴까, 생각하니까 두통이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좋든 싫든 브리핑에 참가해야 하니까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겠지.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두 팔을 길게 벌렸다. 그건 그렇고 기분 탓인지 어째 침대가 넓은 것 같....그 순간 내 손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잡혔다. 아니, 이게 뭐지.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 “미온, 잘 잤어?” “...누구세요?' “어머, 기억 안 나?” 예를 들면 이런 패턴이 있다. 술을 진탕 먹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까 난생 처음 보는 금발 미녀가 옆에서 자고 있다는 시시껄렁한 패턴. 그러나 그것이 내 경우가 되고 나니까 진부하기는커녕 너무 놀라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는 난생 처음 보는 늘씬한 미녀와 한 침대 위에서 1박을 보낸 것이다. 신이시여! “미온, 왜 그래. 표정이 창백해.” “어, 어째서 당신이 제 침대에....”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여긴 내 침대야.” “뭐라고오오오오!” 더 큰 고통이 몰려오면 그보다 약한 고통은 싹 잊게 된다는 말이 있다. 덕분에 나는 단번에 숙취를 날려버 리며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 펼쳐진 환상의 광경은 기억나지 않던 '암흑의 영역'을 단번에 떠오르게 만들었다. 아니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았을 기억이다. 그러니까 이곳은 바로 그 유명한 절대금남구역 펠리오스의 탑 무녀 기숙사였던 것이다. 우리 리더구트와는 하늘과 땅에 가까운 이 호화찬란한 방 침대 위에는 망연자실한 내가 있었고, 그 옆에는 성스러운 무녀가 반라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고, 또 저쪽 침대에는 한 남자를 꼬옥 껴안은 채 자고 있는 흑발의 무녀가 있었고, 그녀가 껴안고 있는 낯익은 사내는 바로 자면서도 헤실헤실 웃고 있는 키스였다. 만약 신이 윤리적으로 엄격한 분이었다면 당장 이 타락의 성전에 불벼락을 갈겨도 할말이 없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범죄현장. 나는 한걸음에 키스에게 뛰어가 그를 흔들었다. 내 이 인간이랑 엮여서 좋은 꼴 당한 적이 없어! “키스 경! 난리 났어요! 일어나요! 당장 일어나!” 그러나 상황 파악 못하고 있는 키스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이불까지 돌돌 말고 난리였다. “하암. 조금만 더 잘게요. 왜냐하면 아침 수면은 미인을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왜 때려요오!” 불벼락을 맞은 키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분노의 철권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나사 빠진 소리 집어치우고 냉큼 정신 차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지 ㅇ낳으면 우린 다 죽어!” 숨넘어갈 것 같은 독촉에도 키스는 졸린 얼굴로 눈을 부비며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헤에? 여긴 어디에요오?” 어디긴 어디야!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우리 무덤이 될 곳이지! “잠깐....설마 기억 안 나는 거야? 당신 멀쩡하지 않았어?” 이제야 떠오르는데, 여기 오자고 추진한 건 바로 댁이었잖아! “실은 처음 몇 잔 마셨을 때부터 취해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사실 술에 약하거든요오. 미온 경은 참 대단하던데요. 완전히 움직이는 양조장이었어요오.“ “....” 키스는 들켰다는 듯이 혀를 쏙 빼며 웃고 있었다. 그럼 외줄타기도 가능할 정도로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날 도발했던 게 실은 죄다 술주정? 그렇게 논리정연하게 취하기도 힘든데, 술주정의 신 개념이야. 거 아주 민폐 끼치는 술버릇을 가지고 있구만 그래! “입 꽉 다물엇 !” 나는 엇허허허 !하고 웃은 뒤에 두두두두두두!하고 무자비하게 두 뺨을 갈겨 주었다. 키스는 부은 두 뺨을 부여잡고 내게 사죄했다. “아우우우.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해요오오” “에이이 ! 어쨌든 도망쳐야 한다고! 정신 챙기고 사람 말 좀 들어!” 나는 하품을 하며 다시 침대에 누우려는 키스를 일으킨 다음 달달 달달 몸을 흔들었다. 자지 마! 자면 죽어! 지금 잤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화형대에 사이좋게 묶여 있을 거라고! 반쯤 눈을 감고 있는 키스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루이 경과 쇼탄 경은 어딨나요오?” “아! 그러고 보니까!” 확실히 루이와 쇼탄도 '월담의 지존' 인 자신들을 빼놓고 갈 수 없다면서 따라왔잖아? 그런 양반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나는 탁자에 놓여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의미심장한 쪽지를 집었다. 깨워도 안 일어나서 먼저 간다. - 루이&쇼탄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쪽지 위에 툭툭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대체....개념이란 게 있기는 한 거유?” 불에 달군 인두로 등짝을 지져서라도 깨웠어야지! 충분한 수면이 중요해 아니면 목숨이 중요해? 돌아가면 그냥 두지 않을 테야! 물론 살아 돌아갈 수 있을 때 얘기겠지만! “키, 키스 경,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거겠죠?” 나는 잠에 취한 얼굴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 키스에게 말했다. 키스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단번에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설마 방법도 없이 여기까지 왔겠어요?” “하아, 다행 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셔츠 단추도 안 잠근 키스는 길게 기지개를 하며 말했다. “자아, 그럼 슬슬 떠나볼까요?” “예 ! 빨리 떠나요!” 이 위험한 곳에서 한시 빨리 도망치고 싶다고! 그런데 키스는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문을 열었다. 나는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가, 갑자기 창문은 왜?” "미온 경." 키스는 5층 창문을 내려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요?” “브리핑에 늦으면 벌금이랍니다.” 그리고 그 순간 키스는 창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10점 만점의 동작으로 바닥에 착지한 그는 무슨 경공술이라도 배웠는지 바람 같은 속도로 담을 넘어 도주하는 것이었다. 지평선 너머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나는 길 잃은 어린 양의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같이 가는 게 아니었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이 고독함. 이 지옥불에 떨어질 파렴치 한 범죄를 나 혼자 다 뒤집어쓰게 생겼다. 유령이 되어서도 원망할 거야! 밤마다 연중무휴로 나타나서 들들 볶아 주겠어! 이 배신자들! 그때 나를 타락의 길로 인도한 무녀께서 새하얀 팔로 내 목 언저리를 휘감으며 말했다. “미온 군은 키스 경처럼 못해?” “할 수야 있겠죠. 다리가 부러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평생을 반신불수로 살아야 한다는 사소한 피해를 보긴 하겠지만.” 나는 떨어지는 순간 즉사할 것이 분명한 창밖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쇼탄과 루이, 그 망할 듀엣은 어떻게 도망친 거죠?” “그야 해 뜨기 전에 살금살금 복도로 빠져나갔지.” “그럼 나도!” “이젠 안 돼. 이미 사람들 다 깨어나서 복도로 나가자마자 잡힐 걸?” “....당연히 그렇겠네요.” 정녕코 이 철옹성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죽게 되면 저승사자들이 '여자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화형당해 죽은 얼간이' 라는 명찰을 달아줄 거야. 부모님마저 날 모르는 사람이라고 피하겠지. 나는 술 먹고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헤헤. 미온 군은 술 취했을 때는 엄청 귀엽게 굴었는데 술 깨니까 완전 달라졌네?” “그럼 설마 저 술 마시고 뭔가 대단히 실례되는 짓을 저지른 것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녀' 에게 씻지 못할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아무리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나 스스로 용서가 안돼! 내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자 무녀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호스트처럼 엄청 능숙하던데? 정말 황홀했어.” “그, 그랬겠죠.” 본능으로 접대했다는 의미로군.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다년간 몸에 익힌 기술들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가. 후후. 역시 내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는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그거 말고! 혹시 제가, 그러니까....일반적 친목의 차원을 넘어 행위를....저어,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를테면, 뭐?” 무슨 의미인지 다 알면서 내 표정 즐기지 말아요! 대답 좀 해줘요! “후후, 귀엽네. 아쉽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도리어 자기에게는 소중한 여자가 있다면서 까다롭게 굴어서 서운했을 뿐이야.” “다, 다행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이 '글쎄, 과연 그릴까?‘라는 음흉한 눈빛으로 후후후후 웃고 있는 모습들을 봤다. 어느 쪽이야! “잡히면 전 어떻게 되는 거죠?” 별로 결과를 알고 싶지 않은 물음에 진한 금발의 그녀는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태워죽이겠지. 쏴 죽이든가. 아니면 교수형을....” “....지금 방법론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나는 이 무녀들을 왜 '오르넬라의 성스러운 아이들' 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성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르넬라 성녀님을 친자식처럼 쏙 빼닮은 아이들인 것은 분명했던 것이다. 그때 펠리오스의 탑 전역에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곧 사감의 아침 점호가 시작될 거라는 소리야.” 이 아름다운 종소리가 내게는 '당신이 이승과 이별할 시간' 이라는 속삭임이 되어 들려왔다. 이래죽나 저래죽나....그냥 5층에서 뛰어내릴까? 그때 옷장에서 이 옷 저 옷을 고르던 흑발의 무녀가 새하얀 무녀복을 내며 내게 보여줬다. “이거 입어, 미온 군.” 나는 이미 운명을 받아들인 자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죽을 때는 최소한 남자이고 싶군요.” “입고 싶지 않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이게 바로 미온 군이 빠져나갈 유일한 탈출구인 걸?” “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사감은 아직 우리들 얼굴과 인원 다 기억 못해, 이거 입고점호만 넘기면 그다음에 도망치는 건 누워서 떡먹기지롱. 미온 군이라면 무녀복 입고 화장시켜 놓으면 우리들도 구분 못할 정도니까.” 나는 예상치도 못한 (그러나 너무도 익숙한 방법의)해결책을 듣자 새 생명을 얻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의 계시였고 저 무녀복은 신이 내린 구원의 밧줄이었다! “아니 그런데 잠깐....이거 우연한 해결방법치고는 너무 능숙한데....” “미안. 미안. 미온 군이 죽을 것처럼 당황하는 행동이 귀여워서 일부러 숨기고 있었어. 사실 이거 처음부터 키스 경이 제안한 거야. 한 권에 한 번쯤은 입혀주는 게 규칙이라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역시 모든 악의 원흉은 키스였군요.” 철저하게 당했다는 것은 이런 것. 내 스스로 꼬리를 치며 여장을 간절히 원하게 만드는 그 치밀한 계략에는 분노의 차원을 넘어서서 찬사를 보내고 싶지만.....어째서 그 좋은 머리를 이딴 광적인 짓거리 외에는 전혀 쓰질 않는 거냐! 일할 때는 말미잘인 양 흐느적거리는 양반이 어째서 나를 괴롭힐 때만 최선을 다하는 거냐고! “.....그 옷 주제요. 카론 경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하겠습니다. 살아 돌아가야 키스를 묻어버릴 기회도 생기는 거고!” “이거 입는 법 까다로워, 도와줄까?” “혼자 할 수 있답니다. 아무렴요. 유경험자인걸요.” 나는 '리더구트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가 되어버린 무녀복을 꼬옥 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2 그리고 오늘 펠리오스 타워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뉴 페이스 한 명이 추가되었다. 청초함과 고혹적인 매력을 동시에 지닌 늘씬한 금발 미녀 , 미오니아 Z(물론 더 이상 버전 업 하는 것은 절대 원치 않지만). 누가 봐도 남자로 '오해' 받는 일이 없을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옥의 유황불과 같았다. '죽일 테다. 죽일 테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죽일 테다! 키스!' 더불어 루이와 쇼탄도 이승과 영원히 작별시켜주기로 결심한 나는 이 타오르는 복수심을 새침한 표정 연기로 완벽하게 감추며 사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예의 무녀가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미온 군은 화장품 윌 써? 역시 콘스탄트 산?” “예?” (병색을 감춰야 하는 지스라면 몰라도)건강한 청년인 내가 평소에 화장할 턱 이 없지 않은가! 호스트 때부터 업무 중에 화장을 하긴 했기 때문에 화장술에 관한한 제법 지식이 있긴 하지만-그렇다고 '평소 에 즐겨 쓰는 화장품은? 같은 실례되는 질문을 받자 침울한 기분이 더욱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피부가우리보다도 더 뽀얘서 그래. 질투 나.”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 순순히 으쓱할 수 없는 그 찬사에 나는 '피부미용은 자기 관리에요‘ 라는 말로 얼버무려 버렸다. 빨리 여기 탈출하고 싶어! 펠리오스 타워의 점호는 무녀들이 복도에 일렬로 서서 사감에게 복장상태 등을 체크 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단체 브리핑으로 끝난다고 한다. 대충 모여서 대충 식사하며 대충 브리핑을 하는 우리들에 비하면 꽤나 엄격한 편이다. 물론 카론 경이 주관하는 헬스트 나이츠의 브리핑 타임에 비하면야 장난에 가깜겠지만. 그러고 보니까 지금쯤 리더구트도 브리핑 중이겠지? 저승 가는 노자 돈 주는 셈 치고 기꺼이 벌금 내주지! 키스! “모두 조용! 점호를 시작한다.” 드디어 깐깐한 목소리와 함께 사감이 등장했다. 그녀는 뭐랄까, 이 세상 어디에다 세워놔도 '앗! 사감이다!' 라고 눈치 챌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즉 내 정체가 발각된다면 눈곱만큼의 동정도 없이 사형장으로 끌고 갈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간략한 기도문 암송과 오르넬라 성녀님에게 대한 원색적인 찬양 낭독이 끝난 후에(성녀님, 이런 식으로 세뇌교육을 시키고 계셨군요) 뾰족 안경이 유달리 오싹해 보이는 간수 아니 사감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최근 이 탑에서 남자가 보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의 신앙심을 믿고 있는 저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하지만.....만약 발각된다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시죠?” 그러자 무녀들은 동시에 '남성반입에 관한처벌 조항 을 성스러운 어조로 읊었다. “성녀님의 준엄한 가르침에 따라 화형입니다.” 물론 나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따라했다. 사감은 마치 훌륭한 병사들을 앞에 둔 장군의 표징으로 흡족해 하셨다. “그래요. 화형이에요. 태워 죽여야 합니다. 남자 따위는 악마가 지상에 보낸 신앙의 적이며 나아가 씨를 말려야 할 인류의 적입니다!” 어, 어째서 이야기가 거기까지 확장되나요! 저 무시무시한 광기는 다 뭐란 말인가 이건 브리핑이라기보다는 완전 남성 공개 성토대회잖아! 저 사감에 비하면 헬렌 경은 그래도 이성이 남아 있는 편이었다. 인류의 성별을 단일화시키겠다는 일념에 불타는 그녀의 눈을 흘낏 보자, 그냥 5층에 뛰어내리는 편이 좋았을지도......라는 후회가 엄습해 왔다. 무녀를 믿는다는 사감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 분명했다. 사감은 방들을 하나하나-심지어는 침대 밑까지-샅샅이 뒤져가며 점점 이 곳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광적인 곳까지 밥 먹듯이 숨어들어 오는 루이 경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사냥감을 한입에 찢어먹을 사자의 기세로 사감이 내게 가까워오자 무녀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걸리면 재밌겠는데? 라는 마녀들의 눈빛들이었다. 이곳의 어디가 성스러운 처녀들의 성전인지 누가 설명 좀 해주면 좋겠다. 한편 사감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내 앞에 멈춰 서고는 빤히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무자비한 사자 앞에 노출된 한 카멜레온의 심정으로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름이 뭐죠?” “미오니안 이옵니다.” 여러 패턴의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 내 하찮은 장기가 이때만큼은 이 세상 어떤 초절정의 검술보다도 내 목숨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훌륭해요! 아름답군요. 키도 얼굴도 몸매도 목소리도 신이 총애를 받을 무녀 에 가장 적합해요.'모두들 미오니아를 본받고 노력하도록 하세요!” 살다보면 '오해받아 즐거울 때'도 있는 벌이로구나. 무녀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다. 아가씨들에겐 웃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답니다! 교도소 순사를 방불케 하는 점호 끝에 사감이 말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오늘은 왕실의 기사들이 신에 대한 맹세를 재확인하는 성제(혈툰)가 있는 날입니다. 오르넬라 성녀님은 물론 국왕전하께서도 참석하시는 어전 제의니만큼 빈틈없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아참, 오늘이지, 베르스 왕실은 한 달에 한번 기사들의 서약을 재확인하는 종교행사를 한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기사의 기도‘ 같은 것을 읊는 지극히 형식적인 행사라고 한다. 나도 기사인데 이렇게 남 일처럼 말하는 이유는 스왈로우 나이츠는 대표로 키스 경 한 명만 참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모하는.....아니, 타의 모범이 되는 기사 카론 샤펜투스 님께서도 참여하시니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감의 두 뺨이 빨개진 것은 적어도 추위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충분히 흐트러지신 것 같습니다만. 분명 아까 전에는 '남자는 인류의 적'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뭔가 대단히 실례되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이 신성한 의식의 진행자로는 몸가짐이 바른 미오니아 무녀를 포함해 열명을 뽑겠어요. 영광으로 생각하고 지금 당장 준비해서 집합하도록 하세요.” 뭣이! 어, 어째서 내가! 수많은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대성당의 독무대로 가야하는 겁니까!(이유야 알고 있지만!) 내 필사의 연기로 사감을 속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 연기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는 것이다. 전하까지 참석한 그 성스러운 곳에서 '몸가짐이 올바른 모범적 무녀' 가 실은 여성이 아니고 또 무녀도 아니며 게다가 기사라는 치명적 정체가 들통 난다면, 나는 왕국 최악의 변태로 낙인찍힌 뒤에 사형장으로 질질 끌려가게 될 운명이었다. 술 한번 잘못 먹었다고 이 꼴이 되다니 어떤 중증 알코올중독자라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공포에 질려 당장 술을 끊을 것이다. “미온 군, 이거 사태가 예상 밖이야. 어쩜 좋지?” 무녀들은 명복을 바라는 측은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5층에서 뛰어내렸어야 했어. 그럼 최소한 고통 없이 죽었을테니까! 3 백여 년 전에 건축된 세아스말 대성당은 왕실의 중요한 종교행사들이 치러지는 곳이니 만큼 엄숙함과 화려함의 놀라운 조화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곳이다. 총 24개의 수려한 원형 돌기둥과 콘스탄트 고전양식의 상층부가 낸 실내는 놀랍게도 하나의 거대한 방으로 이뤄져 있으며 또한 그것은 태양이 어디에 떠있을 때라도 충분한 빛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올 수 있도록 고안되어져 있다. 야간집회를 8008개의 촛불들이 동시에 불을 밝히는 황홀한 광경을 보는 것 또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라는 관광책자 같은 묘사는 하나도 안 중요하다. 지금 내게 이 성스러운 건축물은 사형대 내지는 도살장이라는 단어로 줄여서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이렇게 뽑힌 열 명의 무녀들 가운데 포함된 나는 얼이 빠져버린 대성당을 올려다보았다. 술을 진탕 마시고 정신을 차려 보니까 어느새 무녀가 되어 기사들을 축복해주시기 위해 대성당 앞에..... 이토록 빠르게 한 남자의 인생이 몰락해가는 경우가 또 있었던가. 그때 오르넬라 님을 모시러 간 무녀가 황급히 이쪽으로 오며 보고했다. “큰일입니다! 오르넬라 성녀님께서 나오지 못하신답니다!” 뭐? 나는 믿겨지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보나마나 그놈의 숙취 때문이리라. 성찬식 날까지도 술에 취해 사경을 헤매는 성녀라니, 이 나라의 운명은 대체 어디로..... 어쨌든 성녀님이 없으면 이 성찬식도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희열에 젖은 것도 잠시, 기숙사 사감이기도 한 고위 성직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미오니아 무녀가 오르넬라 님을 대신해서 중앙에 서도록 하세요.” “잠깐만!”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뭐가 문제죠?” “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처럼 부족한 일개 무녀가 감히 성찬식을 주관한다는 것은 참석하신 분들과 이 왕국 전체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어머나. 미오니아 무녀는 마음씨도 곱군요.” 에이이! 그런 칭찬 이젠 신물이 나! 당장 이 망할 놈의 성찬식을 중지시키란 말이야! “하지만 걱정 말아요. 성녀님께서 이러시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요?” 사, 상습범 이었나요. “미오니아 무녀가 이번 성찬식을 잘 진행하신다면 금방 오르넬라 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건 모든 무녀들의 황홀한 꿈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양 말고 성녀님을 대신하도록 하세요.” 그 황홀한 꿈, 소인은 이미 이룬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정말 이상하군요.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나요?” “그,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더 이상 거절하면그냥두지 않을 것 같은 그 무서운 '사자의 눈빛' 때문이었다. 왕족도 참석하는 중요한 의식에서 그 중심에 서는 성직자가 전날 술을 오지게 마시고 불참한다는 것은 당연히 요절이 나고도 남을 중죄지만 그것이 교황청 직속 성녀인 오르넬라 님의 경우라면 '그,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라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아, 역시 권력 만세다. 그래도 성녀님. 술 좀 작작 드세요. 엉뚱한 사람한테 민폐 끼친다고요! 나는 졸지에 나를 제외한 모든 무녀들이 꿈꾸는 전율의 독무대로 ‘끌려가게 될’ 운명이 되었다. 기사들은 성당에서 죽는 것을 최고의 영광 중 하나로 여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꽤 영광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지금 나를 위로하는 것은 그 사실 하나뿐이었다. ‘.....개뿔이.’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무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카론 경이야. 일찍 오셨네? 언제 봐도 멋있어.” 제복을 말끔하게 입은 카론 경이 성당 쪽으로 걸어오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오늘만큼은 저 차가운 눈매가 사지가 떨릴 만큼 무섭게 느껴진다. “펠리오스 타워에 한번만이라도 와줬으면 좋으련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못 돌아가게 가둬놓을 테야! 옷도 입혀주고 먹이도 주고.......” 적어도 신앙으로 밥 벌어 먹는 분들의 대사는 아닌 것 같군요. “나한테 프러포즈 해주면 곧바로 무녀 같은 것은 관둘 텐데, 하아,” 심지어는 '남자를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취급하는' 사감마저도 빨개진 얼굴로 카론 경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비로소 여자들에게 남자와 미남은 서로 전혀 다른 동물이라는 냉엄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임자 있는 사람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못 먹는 감처럼 쿡쿡 찔러보는 그녀들의 짓궂은 시선에도-카론 경은 (항상 그렇듯이)도도하신 얼음나라 왕자님 이었다. 예전 '왕실유부남협회' 에서(이런 굉장한 단체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지만)카론 경에게 자신의 부인들을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정중한 서한을 받았을 때도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곧바로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은 일이 있던 그였다. 그런 커넥션이야 어쨌든 좋으니까 내 앞도 조용히 지나가주기만 바랐지만, 현실이 어디 그렇던가, 천재적인 수사관카론 경은 상당히 불유쾌한 낌새를 눈치 챈 표정으로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둘 사이에 한동안 불길한 침묵이 이어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숨소리만으로도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는 카론 경 앞에서 이런 변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가 코끝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취미였나.”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녀는 도통....” 관두자. 추하게 발악해 봐야 소용없겠지. 취미라니요! 그 무슨 망언이십니까! 단지 간악한 키스 경에게 놀아났을 뿐이에요! 나는 결백을 주장하는 사형수의 눈빛으로 속삭였다. “저어, 카론 경. 실은......” “듣고 싶지 않다.” “제가 왜 이런 꼴이 되었냐면.....” “알고 싶지 않다.” 카론 겨어어어어어어엉! 내 영혼의 외침에도 카론 경은 '변태하곤 말 안 해' 라는 표정으로 성당으로 획 들어가 버렸다. 아아, 카론 경. 우리가 남입니까. 똑같이 키스에게 당하는 사이끼리 너무 냉정 하세요! 좋아, 이제 물러날 곳도 없어. 내 자존심(아니 목숨)을 걸고 이 집회를 끝마쳐 주마! 나는 씩씩한 발걸음으로 성당으로 들어갔다. 4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나는 기도문 같은 것은 줄줄 외우는 스왈로우 나이츠이기 때문에 난생 처음 해보는 이 종교의식도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항상 해오던 일처럼 친숙하다. 심지어는 사감으로부터 '정말 능숙하군요! 미오니아 무녀' 라는 칭찬까지 받았을 정도니까(물론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가장 먼저 내 등에 칼을 꽃을 사람은 이 히스테릭 사감이겠지). 이 거룩한 성당에서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나는 다른 아홉 명의 무녀들과 함께 이 거룩한 성당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신에 대한 맹세를 읊는 기사들에게 나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축복을 내려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가수라면 다른 무녀들은 코러스였다. 그런데 여기서 굴욕적인 점은 오라질 키스 경의 맹세도 내가 들어 주고 내가 축복해줘야 한다는 것! 쥐와 고양이 같은 이놈의 일방적 관계는 지겹게도 바뀌질 않는군! 이쯤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의외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큰 키와 강인해 보이는 이목구비, 저 털털한 웃음의 주인공은 바로 에스테반 테시테리오 남작이었다. 음, 잘 기억이 안 나시는 분은 3권을 참조하시라. 기사 작위가 있는 그 역시 이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영지에서 올라 온 것이었다. 본래 왕실에 오지 않는 고집쟁이 에스테반이었지만, 그때 그 사건 이후 그의 성격도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무척 반가운 사람이지만 지금 이 꼴로 가서 '와아!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니까 나는 먼발치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아니, 그런데 에스테반 남작 옆에 있는 녀석은 설마? '저 인간은 왜 온 거야!' 저 건방진 눈빛과 비웃음을 입에 달고 사는 얼굴은 분명 쇼메였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 넘버 파이브 안에 들어가는 저 오만방자한 왕자 놈이 왜 여기에! 에스테반 남작의 친구니까 같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어쩌자고 지급 이 상황에 저 위험인물이 내 주위에서 어슬링거려야 하냐고! 만약 내 정체를 알게 된다면 절대로 입을 다물어 줄 위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약소국은 여자가 부족해서 저런 놈도 무녀로 동원하나?‘라면서 죽고 싶을 정도로 비웃을 것이 분명해!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난이도가 한층 올라가 버린 것이다. '들켰다간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러나 내 심정과는 정반대로 미녀에게 관심 많은 에스테반 남작은 무녀들이 있는 이곳으로 은근슬쩍 접근하고 있었다. 물론 쇼메 역시 뭐가 또 불만인지 뭐라고 투덜거리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또한 쇼메 옆에는 그의 경호 기사인 미레일 경도 함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그랬다간 더욱 의심받겠지. “그 유명한 펠리오스의 무녀님들을 이렇게 많이 보게 되니까 역시 왕실에 들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남쪽의 작은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에스테반이라고 합니다.” 돈 많고 지체 높은 미남이 나이 삼십 넘게 결혼을 안했다면 그건 바람둥이라는 의미다 그걸 온몸으로 증명하는 에스테반 남작은 능숙한 미소와 함께 무녀들에게 말을(수작을) 걸었다. 또한 그 인기 절정의 에스테반을 거부할 무녀들도 없을 것이다. '가, 갑자기 이 무슨 핑크 무드람!' 한편 바람둥이는 자신에게 관심 없는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법이다. 에스테반은 슬쩍 나를 바라봤다. “아름다우시군요. 레이디의 이름을 들을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참으로 집요하시군요. 나는 피할 수 없는 남성의 증표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미오니아.” “소박한 이름이로군요. 그런데 어디서 많이들은 이름 같은 데....” “저,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헉 ! 쇼메가 날 보고 있다! 이거 위험해 !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즉, 최소한 남을 위한 배려심이라는 것이 있는 에스테반 남작에게는 미오니아의 정체가 누구인지 살짝 알려줘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날 위해서 쇼메와 함께 자리를 피해줄지도 모를 일이잖아? 나는 모험수를 던졌다. ‘에스테반 남작님, 그때 이후 오랜만이네요. 동생 분은 잘 지내고 계신지요.“ 남작의 표정에 놀라움의 기색이 번졌다. 그렇다. 누가 들어도 알법한 사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우리 구면이었군요! 당신 같은 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니 제가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네요. 용서해 주시길.”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다시는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하하하.” 거 지지리도 눈치 없네! 뭐가 아름다운 레이디, 하하하! 입니까! 쇼메는 상당히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왜, 왜 그러시는데요?” 이제 나는 죽는구나. 그러나 인생은 항상 예측불허였다. “아니 이 왕국에도 꽤 그럴싸한 여자가 있다 싶어서.” “....” 다행이다. 쇼메도 더럽게 눈치 없어서. 푸하하핫! 뭐가 그럴싸한 나는 당장이라도 그의 잘난 면상에 얼굴을 들이대며 속았지! 잘난 체하더니만 꼴좋다! 이 바보 왕자! 라고 내 목소리로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뒷감당할 자신은 없어서 그냥 입을 가린 채 '오호호호, 얼간이' 라고 개미 목소리만 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예상치도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미레일 경이었다. “그런데 기분 탓이겠지만 이분은 여자라고 하기엔....” 안 돼! 다된 밥에 재 뿌릴 생각이십니까, 미레일 경! 나는 태클이라도 걸어서 저 입을 막고 싶었다. 그런데 그 입은 다른 사람에 의해 막아졌다. “호오, 기사의 근본도 모르는 매국노가 여긴 어인일이실까?” 헬스트 나이츠들이었다. 순간 미레일 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나라 출신이면서 이오타의 기사 작위를 얻은 때문에 미레일 경에게는 매국이라는 수식어가 지겹게 따라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너희들 같은 되먹지 못한 놈들에게 기사의 근본 운운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아! “오랜만입니다.” 무척이나 유순한 미레일 경은 (화를 내도 좋을 텐데)어렵게 웃으며 기사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상대는 신이 났다. “매국노의 인사 따윈 전혀 받고 싶지 않은 걸? 아아, 귀가 더러워지는 것 같아.” 뚫린 입이라고 정말 멋대로 지껄이는군! 그런데도 미레일 경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엄청 불쌍했고 또 화가 났다. 나는 이빨을 꽉 물며 주먹을 쥐었다. 정체가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한마디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더 화가 난 사람이 있었다. 차아아앙 쇼메가 뽑은 검이 곧바로 상대의 입술 앞에 멈춰 섰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기 기분 나쁘면 성당이든 황제 면전이든 검을 뽑고 마는 저놈의 성질머리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쇼메가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아니 그냥, 짜증나서 말이지.” “우리들이 누구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이 몸이 너 같은 천민의 신상명세를 일일이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역시 저놈의 입은 상대가 누구든 철저하게 깔아뭉개는군. 쇼메 왕자는 굳이 자신의 고명한 이름을 들먹이지 않았지만, 상대는 알아서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넌 지금 내 나라의 기사를 모욕했어. 평생 빛도 없는 감옥에 처박히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 봐.” “.....큭!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호오, 말과 표정이 전혀 다른 걸? 그렇게 분하면 결투를 신청해도 떼거지로 있을 때만 용감한 네놈들의 성격대로 한꺼번에 덤벼도 상관없다.” 한 나라의 왕자가 (그것도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함부로 결투 운운하는 것은 분명 경솔한 행동이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감탄했다. 아무리 쇼메라도 대여섯 명의 기사들과 결투를 벌였다간 위험할 수도 있다. 아니 , 딱 잘라 위험하다 그런데도 주저 없이 덤벼 ! 멍청이들! 이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 그건 대단한 배짱이었다. 그것만은 인정해주고 싶다. 그러나 누구도 그 유리하기 짝이 없는 결투를 승낙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사들 쪽이 '정치적' 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굉장히 권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과 감히 칼을 맞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쇼메는 그들을 향해 경멸어린 미소를 지었다. 도리어 당황한 쪽은 미레일 경이었다. “쇼메 전하, 이러실 것까진 없습니다.” “네 녀석도 한심해! 이런 허접한 놈들에게 고개 숙이는 건 이오타의 기사가 할 짓이 아니야! 네가 모욕당하면 그건 곧 이 쇼메가 모욕당한 거니까!” 쇼메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널 호위 기사로 택한 이유는 조국을 등지고 이오타로 온 네 배짱이 마음에 들어서야. 그런데 그걸 미안해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목표를 위해 힘든 길을 택한 게 뭐가 미안해! 차라리 악당이 좋아, 어깨를 펴! 넌 편한 길만 찾아다니는 저딴 얼간이들을 깔볼 자격이 있어!“ 나는 그 쏟아지는 질책에 반감과 공감을 동시에 느꼈다 역시 아이히만 대공에게 교육받아서 그런 건가 그에게서는 강철의 냄새가 났다. 에스테반 남작은 '또 시작이로군. 저놈의 다혈질' 이라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쇼메, 이래봬도 남의 나라 왕궁인데, 배려 좀 해주지?” “흥! 난 그런 거 일일이 생각하면서 살지 않아.” 으이구! 자랑이다! 그때 카론 경이 나타났다. 항상 뒷정리는 카론 경의 몫이로군. 쇼메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런 버러지 같은 부하들을 다루느라 무척 심려가 깊으시겠어, 은의 기사 씨.” 누군가 '사람을 효율적으로 깔보는 오만가지 방법' 이라는 책을 출한하고 싶다면 꼭 쇼메를 저자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카론 경은 그 능수능란한 어휘력마저 무력화시키는 가공할 무뚝뚝 베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쇼메 왕자, 귀빈으로 참석해 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만 더 이상 소동은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카론 경의 싸늘한 시선을 한동안 마주하던 쇼메는 의외로 순순히 칼을 접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나갈 참이었다. 이딴 시시한 행사는 처음부터 볼 생각도 없었어.” 쇼메는 코웃음을 치며 밖으로 나갔고 미레일 경도 카론 경에게 ‘도와줘서 고마워' 라고 살짝 웃어 보인 뒤에 그를 따랐다. 에스테반 남작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밖으로 향했다. 사라져 주는 것은 고맙지만.......그럼 애당초 이 시시한 행사에는 뭣 하러 왔단 말인가. 이건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고 정말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쇼메가 삐딱한 성격이라고는 해도 남 깔보는 것이 좋아서 일부러 약소국까지 찾아올 한가한 바보는 아니다 도리어 시간 낭비를 극도로 혐오하는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그건 그가 단순히 친구 따라 '놀러왔을' 리는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에이! 몰라! 몰라!”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이라서 나는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 치며 곧 시작될 의식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게 다가온 사람은 아이히만 대공이었다. 그 완고한 백발의 노인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내 옆을 지나갔다. '휴우. 눈치 못 채셨구나.' 그러나 나는 곧 대공의 시선을 느꼈다. “자네 말이야, 나름대로 어울린다는 것은 칭찬해 주겠네만.....그렇게 파멸을 즐기는 성격이었나?” 여, 역시 눈치 채셨군. 나는 억울한 사정을 토로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아이히만 대공 앞에서 서로를 증오하는 키스 경 얘기는 절대로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그랬다간 정말 눈을 부라리며 내 머리에 총을 겨눌지도 모른다). 대공께서는 '나도 그다지 올바른 인간은 못되지만 그래도 여긴 왕실이라는 것은 염두 해 두게나' 라는 덕담을 남기며 귀빈석으로 가는 것이었다. 아아, 천하의 아이히만 대공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 나도 참 대단해. 이거 완전히 도덕적으로 문란한 파멸형 인간이 되어 버렸구나. 키스, 내 너를 치지 않으면 이 방황하는 영혼이 고이 잠들지 못할 것 같아! 한편 말끔하게 정리한 금발이 엘리트의 표상인 위고르 공께서도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미온이 아닌 미오니아에게 말이다. 그는 속이 빤히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흠흠. 왕실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는가." 얼씨구! “보아하니 신입 무녀 같군. 여자 혼자 힘으로 이 왕실에서 출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나도 그 심정 이해하네.” 정작 본인은 아무 말도 안했는데, 지 혼자서 일사천리였다. “이런, 내 이름도 밝히지 않다니 , 이거 실례했군. 본인은 왕실에서 작은 직책을 맡고 있는 위고르라고 하네. 별 거 아냐. 법, 무, 대, 신, 이지. 와하하하!” 타락한 중년이란 바로 이런 것, 눈치 없는 위고르 씨는 안 그래도 내게 계속 수작을 걸고 난리였다. “뭐, 오르넬라 성녀도 내 말에는 함부로 거부 못하는 정도라고나 할까. 아니, 그 이전에 그녀가 내게 호감이 지나쳐서 걱정일세. 하하...” “.....그, 그렇군요.”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오르넬라 성녀님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당장신의 이름으로 주리를 틀었을 것이다. 아아, 권력자라는 것도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왜 이리들 유치찬란한 건지. 위고르 공은 전력을 다해 자폭하고 있었다. “너도 나만 믿고 있으면 이 왕실에서 출세하는 것도 시간문제인....” “위고르 공....접니다.” “응? 누구?” “여자만보면 항상 이러#7나요. 젊게 사시는 게 참 보기 좋네요.” 순간 내 정체를 파악한 위고르 공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표정은 밭에서 막 뽑은 무처럼 창백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 이후 위고르 공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본인은 이미 혼인한 몸!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줄 순 없소.” “그런 말하시기 엔 한참 늦은 것 같습니다만!” 위고르 공, 카론 경과 같은 유부남이면서 비참할 정도로 차이난다고요! “그건 그렇고....자네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취미?” “예. 취밉니다. 이제는 드레스를 입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거든요.” 나는 더 이상 일일이 변명하기도 지쳐서 그렇게 한탄을 했다. “자네는 대체 궁중의식을 뭐로 알고 있는 건가! 나는 도저히 이 사실을 묵인할 수......” “사모님께 이를 겁니다.” 순간 위고르 경의 눈매에 두려움이 서렸다. “에, 엔디미온 경 법무대신을 협박할 생각인가” “그럼 위고르 공도 모른 체 해주세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가족의 평화(혹은 마누라님에 대한 공포) 사이에 놓인 위고르 공은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어째서인지 등장할 때마다 암울함이 더해가는 공처가 위고르 씨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귀빈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의식이 막을 열었다. 5 종교의식이 시작된 성당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음악 정도는 연주해도 좋을 텐데,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엄숙해서 모두의 시선은 중앙에 있는 무녀계의 뉴 페이스 미오니아에게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헬스트 나이츠를 필두로 한 명씩 내 앞으로 걸어와 무릎을 꿇는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근엄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내려준 기도문을 큰소리를 읊는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제 용맹함을 돌봐주시는 신이시여. 제게 항상 왕국을 지키는 힘과 약자를 지키는 도리와 악을 판별하는 지혜를 내려주셔서 감사하옵니다.” 그리고 정작 약자가 들었다면 피가 거꾸로 돌았을 이 뻔뻔한 기도문은 길게도 이어졌다. 이건 마치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기꾼과 같은 촌극이었다. 지나가다 평민을 보면 ‘썩 비키지 못해! 이 지저분한 벌레들!’ 이라고 서슴없이 윽박지르는 이 녀석들의 어디에 힘과 도리와 지혜가 붙어 있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모를 것이다. 기도문을 다 들은 내가 조용히 응답했다. “웃기고 있네.” “지금 뭐라고.....”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신의 목소리를 들으셨나 보군요.” 나는 살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기사는 내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는 것으로 애당초 지켜진 적도 없는 맹세를 재확인하고 뒤돌아 늠름하게 사라진다. 예전 카론 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두가 기사도를 지켰다면 애당초 기사도라는 것을 만들 필요도 없었겠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쓰레기는 휴지통에,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복도에선 뛰지 마라, 공부해서 남주냐,등등 이 세상에 넘쳐흐르는 당연한 상식들은 실은 그만큼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성당에서 근엄하게 거들먹거리며 제아무리 이런 의식을 벌인들 결코 바뀌는 것은 없다. 어쩌면 오르넬라 성녀님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이 넌덜머리나는 무의미 때문일지 모른다. 뒤를 이어 수십여 명의 기사들이 마치 도덕 교과서의 한 구절 같은 기도문들을 의미도 모른 채 암송한 뒤에 카론 경의 차례가 왔다. 태어날 때부터 기사단 제복을 입은 것처럼 고귀한 풍모가 느껴지는 그는 내 정체를 알면서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기사단 휘장이 은실로 새겨진 망토와 검은 머리칼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그의 길고 하얀 목은 어떤 화가라도 본다면 당장 화폭에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10여 년의 기사 서임식 때도 그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솔직히 그가 선택한 기도문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기사들은(그러니까 스왈로우 나이츠를 제외한 다른 왕실 기사들은) 기사가 될 때 자신의 기도문을 선택한다고 한다. 수만 가지가 넘는 기도문 중에서 카론 경이 택한 것은 과연 어떤 것일지, 나는 순수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카론 경의 목소리가 고요한 성당을 울렸다. “이 몸과 영혼을 갈가리 찢어 당신을 위해 쓰게 하시고 제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슬슬 오후로 넘어가는 태양이 스테인드글라스에 산산이 부서져 그의 몸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너무도 짧은 그 기도문은 차라리 싸늘한 칼날이었다. 누구보다 기사다운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왜 좀 더 행복한 기도문을 선택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전신(즐옷)을 기사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희생을 의미해. 빛을 등진 그의 모습은 내겐 그렇게 보였다. 그때 옆에 있던 무녀가 헛기침을 했다. 아참! 나는 기다리고 있는 카론 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 손을 살짝 잡은 그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정반대로 무지막지하게 곤혹스러웠다. 기사의 맹세를 듣는 일을 오직 여성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조그맣게 속삭였다. “뭐, 뭐하세요, 카론 경.” “....과연 이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 기사도를 지키는 일인지 아니면 모독인지 고민하는 중이다.” “눈 딱 감고 후딱 해치우세요!” 그는 번뇌하고 있었다. (당근을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먹기 싫은 당근 주스를 이멜렌 님이 줬을 때, 지금과 비슷한 표정이지 않을까?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창. 하지만 나도 물러설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요! 여기서 머뭇거렸다간 의심받아 버린다고요! 그러나 신에게 티끌 하나까지 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마저도 이것만은 차마 할 용기가 없나 보다 아아, 실망이다. “.....도저히 못하겠어.” 안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세요! “엔디미온 경,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가 할 짓이 아니....” '에라!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나는 내 쪽에서 손을 올려 그의 입술에 탁 갔다댔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서서는 꼭 죽일 듯이 나를 노려봤다. 종교의식의 신성함 같은 것은 이미 우주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부, 분노는 기사가 버려야 할 죄악 중 하나랍니다. 아무렴요.” 나는 새파랗게 달아오른 그의 눈빛에 심장이 오그라들어서는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결국 금단의 반칙까지 써가면서 내 정체를 숨기는 것에 성공했다. 그 부작용으로 당분간 카론 경을 피해 다녀야 할 것 같지만. 내 기습공격에 '입술을 빼앗긴 카론경은이제 기사도고 뭐고 다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으로 성당을 떠났다. 장담컨대 카론 경의 기사인생 10여 년 중 오늘은 대핀치 베스트 텐 안에 들어가는 날일 것이다. 좋아, 어차피 버린 몸, 끝까지 가보자고! 애꿎은 카론 경에게 몹쓸 짓을 저질러 놓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이 진취적 기상을 본 무녀들은 '오오! 희대의 악녀 탄생!' 이라며 응원해주었다. 후후, 이런 일로 호응 얻으니까 기분 더블로 울적해지는군. 하지만 키스의 목을 비트는 그 날까지 내 몸과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살아남아 주마! 6 카론 경이라는 절대적인 스타일리스트가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곰 인형 눈알붙이는 일만큼이나 따분하고 지루한 '기사의 맹세도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내 손등을 거쳐 간 기사의 입술이 백 단위에 가까워지자 (사실 대단히 불경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은 둘째 치고) 오르넬라 성녀님이 불참한 이유가 이 허례허식의 무의미 때문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이유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요컨대 이 일은, 병약한 미소녀였다면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무지막지한 중노동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백 명도 넘는 기사들이 길고 긴 기도문을 무성의하게 읊으며 신에게 맹세(하는 척)하는 짓을 일일이 다 들어주고 또 일일이 축복(하는 척)해주는 것은 보통 귀찮고 괴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 신이 이곳을 굽어보고 계시더라도 '거 더럽게 성의 없게 하네.' 라고 투덜거릴 정도다 특히 나오르넬라 님처럼 스릴을 즐기는 도락형 인간의 경우에는 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 시시껄렁한 반복노동이리라. 나 역시도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인데도 이 물밀듯이 끓어오르는 짜증은 다스릴 길이 없었다. 이런 짓 할 시간 있으면 왕실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할머니 짐이라도 들어드려! 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랄까. 그런데도 이 지긋지긋한 퍼레이드는 끝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한 명의 기사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악의 화신 키스 경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 이런 일까지 지각이라니!' 보나마나 자고 있겠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까맣게 잊고 잠들 수 있는 그의 무신경함이 감탄스럽다. 그때 뒤에 있던 무녀들이 속삭였다. “이번에도 키스 경은 안 오나봐.” 얼레? 이번에도, 라고? “우리가 아는 한 키스 경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어 키스 경의 맹세를 들어보고 싶었는데.....역시 이번에도 불참인가보네.” 역시 그런 인간에게 신앙심이 있을 리가 없지, 라고 빈정거리려던 순간, 나는 모순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키스 경은 이 의식 때마다 항상 참석하러 간다면서 하루 종일 사라져 있었잖아!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키스는 여기 참석한다는 핑계로 어디론가 도망쳐서 놀고 있었다는 결론이다. ‘......이 농땡이 인간.' 신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놀고 싶었던 거야? 그런 사람이 대체 어떻게 기사가 됐나 몰라. 그때 문이 덜컥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아아!” 정문에는 키스 경이 서 있었다. 여기까지 전력으로 달려왔는지 상기된 얼굴에는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되는 대로 입은 셔츠는 단추가 반쯤 풀려 있고 또 절반은 옷 밖으로 나와 있는데다가 곱슬머리는 상고라도 돌리고 왔는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제복의 것도 아닌 빨간 넥타이마저 불량하게스리 대충 목에 두르고 있는 저 모습은 분명히. ‘.....자다가 왔구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망측한 꼴로 헤죽헤죽 웃으며 걸어 들어오다니!(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이 신성한 의식을 뭐로 아는 거야! 이 자식! “그, 그럼 키스 세자르 경의 기사도 암송이 있겠습니다.” 사회자 역시 혜성처럼 나타난 불량 기사에 당황하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빈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나 내 뒤에 있던 무녀들은 저 모습에 키득거리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역시 키스 경은 귀여워.” 저 얼빠진 모습 어디에 귀여움이 도사린다는 겁니까? 확실히 여성과 남성에게는 절대 서로 이해하지 못할 고유 영역이 있는 것 같다. 내 앞에 다가온 키스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을 웃음을 참고 있는 저 얄미운 면상 좀 보라! “와아! 참 어여쁜 분이시네요오.” “닥치고 무릎이나 꿇으세요, 키스 세자르 님아.” 용호상박의 공방이 오간 뒤에 키스 경은 곧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자나 깨나 부하를 사랑하는 이 착한 기사에게 상을 내려주시어요. 저는 받을 자격이 있답니다아 아멘.” '에이이! 기도문 멋대로 지어내지 마!' 키스는 악마가 들어도 학을 뗄 순 저질 기도문을 을을 뒤에 고개를 기울이며 헤죽 웃는 것이 아닌가! 네 이 노오오오옴! 지금 날 도발하는 게냐! 내 당장이라도 치마를 걷어붙이고 네게 달려가 버선발로 걷어차며 '죽어라! 이 사탄의 종자!'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그래봐야 죽는 건 내 쪽이므로 나는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불경한 티를 팍팍 내는 (일단 직책은)성기사인 키스 경에게 참석자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고, 무녀와 귀부인들은 그래도 좋다며 호의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막 잠에서 깬 국왕 전하께서는 '응? 뭐가 잘못된 거야? 라는 표정으로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가끔 이 왕실.....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키스 경은 한걸음에 내 앞에 다가왔다.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내 손을 가로채 멋대로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자아, 성녀님께서도 제 기도를 축복해 주세요.” “.....축복 좋아하시네.” 이 놀라우리만큼 뻔뻔스런 태도에 나는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키스 세자르 님, 제 신통력으로 당신이 죽을 날을 알아 맞춰보겠습니다. 당신은 바로 오늘, 긴 금발의 청년에게 살해당한답니다.” 그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웅얼웅얼 거렸다. “미온 경, 조금 장난친 걸 가지고 엄청 화내시네요오.” “키스 세자르 님,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댁이 지금 나라면 나를 이 꼴로 만든 사람을 살려둘지 안 살려둘지.” “서, 성녀라면 좀더 자비심을 갖는 편이.....” “악을 처단하는 것도 성녀의 의무랍니다! 이상이에요!” “.......돌아가는 대로 짐 싸서 도망쳐야겠군요오오오.” 내 살기에 겁먹은 키스는 흐늘흐늘 뒤로 물러서서는 성당을 빠져나갔다. 카론 경은 눈썹을 찡그린 채 팔짱을 끼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나마나 나와 키스 경 모두 싸잡아 못마땅한 것이리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카론 경이 내 꼴이 되었다면 분노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것으로 행사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그 말과 함께 졸고 있던 사람들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7 이 행사는 내가 국왕 전하 앞에 무릎 꿇고 '전하의 성은에 힘입어 이 의식을 무사히 마쳤사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실 우리 만두 아저씨는 성당에 들어올 때부터 큼지막한 베개를 가지고 들어오더니 의식이 시작되자마자 그걸 자기 앞에 놓고는 골아 떨어져 버린 것 외에는 별로 한 일도 없으신 것 같지만-아무튼 국왕이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감사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어이쿠 ,수고했네 그려. 아주 인상 질은 행사였어.” 열심히 잠들어 있느라 삐뚤어진 왕관을 바로 세우고 있는 전하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내게 말했다. 뭐 우리 임금님의 위엄 같은 것은 애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으로 대답했다. “전하의 성은에 힘입어 이 신성한 의식을 무사히 마쳤사옵니다.” “그래, 그래. 아침부터 고생 많았네, 자 이제 대충 끝내고 다들 일터로 가시게.” 그 하품 섞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희열이 퍼졌다. 그렇다 나는 이 지옥 같은 행사를 무사히 끝마친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키스에게 '복수'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 귀빈들은 (항상 성당을 나을 때 그러하듯) 나른한 기지개를 펴며 우르르 몰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환의에 젖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 몸의 '일부' 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차, 참외?” 밖으로 나가던 사람들은 내 옷 속에서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는 참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오똑하던 오른쪽 가슴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나를 바라봤다. “무, 무녀가 남자다!” 어떤 친절한 분께서 그렇게 외쳤고, 그 순간 성당 안의 모든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황급히 참외를 집어 옷 안에 넣었지만 또 실수로 왼쪽에 넣어버려서 한쪽 가슴만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괴생명체가 되어 버렸다.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고개를 푹숙인 채 돌아온 탕아인 양 손을 흔들었다. “아하하하. 모두 놀라셨죠? 엔디미온이랍니다아아. 짜잔.” 어설픈 개그는 상황만 악화시키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무녀들이 모조리 무릎을 굻으며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옵니다.” ......배신자들. 그리고 나는 신속하게 연행되었다. 8 왕실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지 않은 왕궁 시설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곳, 지하 감옥이다. 물론 ‘지하’라고 해서 불빛 하나 없고 송아지만한 쥐들이 잠든 죄수를 덮치는 생지옥까지는 아니고, 하루 종일 타오르는 횃불 덕에 공기가 좀 탁하고 바닥에 깔아둔 볏짚에서 좋지 못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러니까 별로 쾌적하지 못한 수준이다. 보통 사형수들이 수감되는 곳이라는 사실만 빼면 말이지. 그런 곳에 도살장에 끌려갈 소처럼 우울하게 앉아 있는 나는 누군가 이곳 벽에 새겨 놓은 짧은 문장을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피해자야! 이 망할 놈의 왕궁! 이곳을 이용한 선대 '숙박객' 의 방명록쯤 되는 것이리라. 그 밑에 나도 한마디 쓰고 싶군. '이하동문' 이라고. 나는 벽에 기대어 역시 참외를 단단히 고정시켰어야 했다는 한심한 후회를 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라지만 이건 분명 신성모독이다. 보나마나 텔레마코스를 통해 교황청에 처분 결정을 통보했을 테고 그 결과가 한 달간 화장실 청소나 곤장 10대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기사작위 박탈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형!’ 나는 너절하게 널려있는 볏짚들을 콱 쥐었다. 설마 죽이겠어? 라는 생각과 아마 죽일 걸?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변호사를 불러줘!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이것조차 판타지라서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 신을 모독한 죄를 집행할 때는 죄인의 사정 같은 건 들어주지 않는다고 알테어 님이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운명처럼 이 꼴이 되어 버렸다. “으이구!”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멀리 복도에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나는 몸을 움츠렸다. 공교롭게도 이곳에는 간수도 없이 현재 나 혼자뿐이었다. 분명 내게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을 가져올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자 긴장감에 목이 메어왔다 아니나다를까, 길게 이어진 그림자는 점점 줄어들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철창 밖에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말쑥한 정장에 얇은 안경을 긴 사내였다. 한 손에 들고 있는 두터운 성경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주택 임대업을 전문으로 하는 영업사원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엔디미온 키리안 씨?” 의외로 고압적이지 않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까지 보이고 있었다. 설마 그런 얼굴로 사형선고를 내릴 생각이야? “그, 그렇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교황청 베르스 영업소에서 나온 마르시엘이라고 합니다.” “.......” 나는 한동안 그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저어, 괜한 참견일지는 모르겠지만......영업소보다는 교구라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요?” “아하하. 그렇긴 하죠. 하지만 다들 영업소라고 불러서 입에 붙어 버렸네요.” “하긴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겠지만.....”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는 거두절미하며 내게 그 웃는 낮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다.....일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서류 두 장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잘 읽어보시고 서명해 주세요.” 그는 잘 부탁한다는 얼굴로 내게 펜까지 건네주었다. “이 , 이게 뭐죠?” “4급 신성모독을 시인하는 증명서입니다. 한 장은 저희 보관용이고 또 한 장은 엔디미온 경께서 보관하시면 됩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별로 종교적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내가 불평할 바는 아니지만)보통 이런 일은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 쓴 음산한 무리들이 횃불을 든 채 날 빙 둘러싸서는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진행하는 거 아니었어? 하지만 그는 들고 있던 펜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실망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저희 교황청도 이미지 개선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3차 종교 개혁 이전처럼 '거창하게' 집행할 수는 없어요. 일단 그렇게 하면 예산도 쓸데없이 낭비하는 거고 신자들도 줄어들고 말이죠. 저도 예전같이 음침했다면 베르스 영업소에 입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 입사하셨습니까.” 보통은 봉사한다고 하지 않나요? “교황청, 진짜 경쟁률이 높아요. 저도 네 번이나 떨어져서 이번에야 붙었거든요. 월급도 괜찮고 노후 보장도 잘 되고 무엇보다 콘스탄트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부도, 아니 사라질 리가 없으니까요. 다국적 업체라서 국내 회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해요.” “.......요모조모 따져보고 신을 믿으시네요.” “아하하 괜찮은데 들어가야 여자한테도 인기가 있잖아요.” “그, 그렇군요. 직장 잘 고르셨네요.” 나는 예전 ‘이교도 댄스의 계승자’인 이단 심문관 나스타세 군을 떠올렸다. 또한 알테어 님이 입고 다니는 성스러운 미니스커트도 떠올렸다. 또 ‘열린 교황청’을 주장하는 빵집 아저씨 레오 4세도 떠올렸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대체 지금 교황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되어 신입사원 마르시엘 씨가 건네 준 서류를 훑어봤다. 그것에는 내 죄목과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적혀 있었다. “향후 5년간 벌금?” 그러니까 한 달에 금화 세 닢이었다. 결코 작은 액수는 아니지만 사형이나 추방형에 비하면 거의 무죄방면에 가까운 셈이다. 설마 오르넬라 님이나 아이히만 대공께서 손을 써주신 거?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훑어본 마르시엘 씨가 말했다. “고문하거나 태워 죽인다고 얻는 이익 같은 건 없으니까요.” “저야 좋지만......이래도 괜찮나요?” “가령 예를 들어 신을 욕한 실업자를 화형 시켰다고 칩시다. 그럼 그와 그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 모두 속으로는 신을 욕하게 될 겁니다. 쳇, 신의 이름을 팔아먹고 거들먹거리는 살인마들, 이라며 불평할 테고 그런 불평은 당장은 억누를 수 있어도 언젠가는 뭉치고 뭉쳐서 폭발하게 될 테지요. 반면 우리에겐 사형시킬 수 있는데도 벌금이나 노동 정도로 끝냈다면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은총을 베푼 셈이 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익을 얻은 것이지요. 신자들은 저희의 소중한 버팀목이며 운영할 수 있는 기부금을 지불하는 수입원입니다. 아시다시피 교황청은 북부 콘스탄트와 내전 중에 있기 때문에 많은 자금이 필요해요. 그것을 스스로 잘라 버리는 초보적인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엔디미온 씨가 지불한 벌금은 이교도를 죽이는 칼이나 총알을 만드는 돈으로 소중히 쓰여 돈을 지불하시는 것만으로도 교황청을 위한 최선의 속죄를 하시는 것입니다. 목숨을 없애는 것보다는 훨씬 쓸모가 있지요.“ 마르시엘 씨는 마치 회사 방침을 말하듯이 그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 친절한 말 이면에서 확실한 불편함을 느꼈다. “물론 교황청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존재는 설령 국왕이라 할지라도, 이거 실례, 주저 없이 제거합니다만..... 엔디미온 씨는 우리 교황청에 전혀 위협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말하자면 저희의 잠정적 고객인 셈이지요. 고객에게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경영의 기초입니다.” “꼭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 같군요.” “그건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지 그 방식만 바꿨을 뿐이지요.” 그는 '괜히 말이 많았네요, 제가 좀말이 많아서' 라고 헛기침을 하며 내가 든 서류를 가리켰다. “그 위부분과 아랫부분의 동그라미 친 곳에 서명해주세요. 예, 거기요. 그리고 벌금은 일주일 이후부터 저희 영업소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회수해 갈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서로 좋잖아요. 교황청은 전쟁을 치를 돈이 필요하고 엔디미온 씨에겐 신의 자비가 필요하고 제겐 좋은 직장이 필요하고......다 그런 거잖아요?” 이러지 않으면 이제 아무도 납득하지 않아요, 오직 신을 위해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하는 성직자와 그를 마음으로 따르는 신자라는 것은 이제는 교황도 믿지 않아요. 4년의 재수 끝에 교황청 베르스 영업소에 입사했다는 신입사원 마르시엘 씨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9 그가 떠난 뒤, 나는 맥이 빠진 표정으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뭐랄까 꺼림칙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결국 싸우기 위해 돈을 모으고, 돈을 벌기 위해 싸우고, 그렇게 번 돈으로 또 싸움을 한다. 그 어디에도 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예전 오르넬라 님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신을 믿어야 하니까 신앙이 어려운 거야. 하긴, 신앙심을 갖는다고 거짓말처럼 삼라만상의 오욕칠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이 세상 온갖 고민 다 날아가 버린 채 행복에 젖어 삼백육십오일을 살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누구라도 기꺼이 신앙을 품을 테지. 하지만 그런 건 약속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다 아니 까 성직자도 신자도 갈수록 영악하게 신앙을 거래하는 것이다. “이런 일에는 좀더 순수해지는 것도 좋잖아.” 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내 손에 들려 있는 벌금 서류를 바라봤다. '4급 신성모독에는 5년간 금화 세닢의 벌금' 같은 것을 신이 본다면 제아무리 유쾌한 신이라도 우울증에 걸려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때 새로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로 봐서 두 명이었다. 나는 철창에 바싹 다가갔다.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신과 신을 믿는 사람들의 난해한 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카론, 경” 불난 집하면 소방수가 떠오르는 것처럼 왕실 식구에게 무슨 문제가 터지면 카론 경이 나타난다는 것은 일종의 공식이다. 그는 간수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횃불에 반사된 그의 눈동자는 파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내 모습에 카론 경은 조금은 진지해졌으면 좋겠다는 투로 말했다. “이곳이 사형수를 대기시키는 곳이라는 것만 알아뒀으면 좋겠군.” “헤헤. 신의 은총에 힘입어 벌금으로 끝나버렸네요.” “키스하고 술 마시는 일은 자제하라고 했을 텐데. 그 녀석의 위험한 술버릇은 감당할 도리가 없으니까?” “하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랍니다.”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야.” “......그 말은 카론 경은 더 위험한 일을 겪어봤다는 거로군요.” 엄청나게 궁금했지만, 카론 경은 절대로 대답하기 싫은지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다물었다. 키스 경이 작정하고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면 그건 일종을 재앙이겠지만.....상상이 가질 않는군. 눈을 떠보니까 실은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 있다든가, 혹은 임금님과 한 침대에 누워 있다든가 하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겪기 싫은 악몽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튼 그 인간과 십수 년을 함께 지내온 카론 경에게 무한한 동정심이 생기는 군.’ 탈칵 소리와 함께 간수가 철창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아직도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 말했다. “정말 이걸로 끝인가요?” “아니길 바라는가?” 카론 경은 특유의 과묵한 입버릇대로 툭하고 던졌지만 옛날 생각이 나는 듯이 곧 눈가를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일로 일일이 화형을 시킨다면 왕실의 장작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오 제법 센스 있으시네? 그답지 않은 농담에 나는 키득거렸다. 그는 앞장서며 말했다. “적어도 키스의 기도문보다는 덜 불경한 짓이니까” “엥? 키스의 기도? 아까 그거 말인가요?” “아니. 그 녀석의 진짜 기도문은 따로 있다. 애당초 기도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만.” “헤에. 그게 뭔데요?” “그걸 내 입으로 읊는 짓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군.” 대체 얼마나 끔찍한 것이기에 저리도 질색을 하는 걸까 나는 문득 아까 그가 읊던 기도문이 떠올랐다. 초라할 정도로 소박하지만 진심으로 지키기는 무엇보다 어려운 그의 맹세. 카론 경은 기도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왕실 기사들처럼 자신의 기사도나 신앙심을 공공연하게 자랑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뭔가 꼭 해줘야 할 말이 있을 때도 화내거나 윽박지를 것 없이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짧게 한마디 던질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특별히 종교에 관심이 없는 엘리트 사업가 정도로 착각할 정도. 물론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고 세상을 많이 겪은 카론 경이 종교의 현실에 대해서 모를 리도 없다. 그런 그에게 내가 물었다. “카론 경은 신을 믿는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엉뚱하다면 엉뚱한 물음에 계단을 오르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엔디미온 경, 믿음이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째서 저렇듯 사교성 없고 차가운 카론 경이 상냥하고 친절한 마르시엘 씨보다 가까이 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교황청의 성직자였다면 아마도 저렇게 대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0 “그건 그렇고....” 아주 배가 녹아내릴 오디제이를 겪고 리더구트의 문을 언 나는 소파 위에서 참으로 평화스럽게 잠들어 있는 키스 경을 보며 눈썹을 움찔했다. 당신, 도망친 거 아니었어? 아기천사처럼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키스 경을 보니까 내 서러운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모든 복수심도 다 부질없게 느껴질........ 리가 없고 아주 소파를 뒤엎어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구만! 잠시 잊고 있던 폭력의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런 내 살기를 감지한 키스가 천천히 빨간 눈동자를 뜨며 나를 올려다보고는 흠칫 놀라 담요 속으로 머리를 숨기는 것이었다. 거북이냐!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나는 음산한 오오라를 뿜어내며 말했다. “키스 경,저승 갈 때는 윌 가지고 가실 거요.” “미, 미온 경. 죽은 거 아니었어요?” “응. 당신 묻어버리기 전엔 절대 안 죽을 거야.” 나는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한 뒤에 가공할 리셀웨폰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키스 경은 담요 속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키스 경, 어서 일어나. 내 분노는 이 정도가 아니야. “미온 경, 우리 거래해요오.” 담요 밖으로 나온 그의 손이 하얀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키스 경으로부터 뭔가 받아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살생을 유보했다.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는 이익 되는 것을 받는 편이 좋다는 교황청의 가르침도 있지 않던가? “그럼 댁의 목숨 대신 내게 뭘 줄 겁니까, 키스 경.” “한 달 동안 신전청소 빼 드릴게요오.” “흐음. 그것도 괜찮.....아니 잠깐! 그건 처음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 빗자루만 봐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해봐서 내 일이라고 납득할 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키스가 나를 부려먹을 때 시키는 일이지 내 임무도 뭣도 아니다. 애당초 안 해도 되는 걸 가지고 생색 내지 마! “한 달 동안 지명에서 빼주는 조건이라면 생각해 보죠!” “그건 안 됩니다. 미온 경이 빠지면 수입에 막대한 지장을 받아요오.” 으이구. 어딜 가나 돈이로구만. “그러면 내 벌금 대신 내 줘요.” “전 알거지랍니다아. 침대도 못 사는 거 보면 모르겠어요오?” “당신 말이야, 거래할 생각이 있긴 있는 거야?” 새빨간 거짓말쟁이 같으니 . 카일리 경의 지명비용도 대신 내줬고, 어제 마시던 술도 엄청 고급이었으면서! 하고 다니는 귀걸이 하나만 팔아도 침대 따위 몇 개라도 살 거라고! 게다가 약값이 엄청난 지스 경이 가끔 돈이 부족할 때마다 몰래 약을 놔두고 가는 '의문의 천사' 도 실은 키스경일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거야 고맙지만, 아무튼 저런 되먹지 못한 태도로는 거래는커녕 약만 더 오른다. “그렇다면 음......아 맞아!” 나는 아까 전 카론 경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키스 경의 기도문을 들려줘요.” 얼마나 발칙한 것이기에 ‘여장하고 성당에서 무녀행세 하는 것’보다 더 질이 나쁘다는 건지 굉장히 궁금했다. 혹시 ‘내일은 당신도 공범’이란 말인가! 그거라면 제아무리 자비심 넘치는 성녀라도 듣는 순간 귀싸대기를 후려갈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키스는 내 말을 듣자 곧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 그것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조금 불안했다. “고, 곤란하면 안 해도 괜찮아요.” 한참을 침묵하던 키스가 스르륵 담요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거 아닌데......재미도 없고.” 다시 소파에 앉은 키스 경은 '하도 예전에 했던 거라서 기억이 안나요오' 라면서 기억을 더듬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10년도 더 전에 기사 작위를 받을 때 암송한 다음부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요오.” 그 말은 기사가 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당 의식에 참여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로군! 이런 부도덕한 인간이 아직까지 기사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세상 천지에 이 나라 외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기억났다면서 키스가 반짝 표정을 보였다. 헛기침을 한번 한 뒤에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암송의 첫 구절은 이러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여기까지 평범하네.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뭐?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럼 나도 이 땅위에 남아 있으리다. 이곳은 때로 이렇듯 아름다워 당신의 신비에 못지아니하니...... “그, 그만!” 점점 눈동자가 커지던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리고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듣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키스 경 , 장난하지 말아요!” “정말 이게 내 기도문인데......” “그럼 그걸 기사 서임식 때 읊었단 말이에요?” “네에.” “.....죽으려면 뭔 짓을 못해.” 나는 기가 찬 표정으로 방글방글 웃고 있는 키스 경을 바라봤다. 그건 분명 교황청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기도문일 것이다. 읽고 쓰고 말하는 것 모두 철저하게 금지된 기도문이지만 워낙 유명한 것인지라 나는 그 기도의 끝부분을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넘쳐흐르는 흔하고도 끔찍한 불행은 당신의 용병들과 당신의 고문자들과 이 세상 나으리들로 가득하고 그 나으리들은 그들의 성직자, 그들의 배신자, 그들의 군대와 더불어 가득하지만 세상에는 사철도 있고 어여쁜 처녀들도 늙은 병신들도 있고 대포의 무쇠 강철 속에서 썩어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사옵니다. 키스 경이 선택한 기도문은 예전 콘스탄트의 유명한 추기경이 선대 교황 앞에서 읊었던 처절한 기도문이었다. 그때는 한창 종교의 권력이 범람해서 왕국의 세금보다 교황청에서 징수하는 기부금이 더 많았던 시기였다. 교황청은 이례적으로 추기경이었던 그를 공개 화형시키고 그가 저술한 모든 서적을 수거해 불태우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하거나 기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교황 레오 4세기 집권한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말 그대로 교황청에게 있어서 그 기도문은 '악마를 칭송하는 주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후후후, 미온 경, 이제 당신의 상관에게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지요오? 저는 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모습을 도저히 못 본 척할 수 없어서 그 기도문을 선택한......” “"어련하시겠수.” “부, 불신의 골이 깊군요.” “키스 경, 저도 그 시가 다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도 당신은 정말 위험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전 이 기도가 마음에 드는 걸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아까 베르스 영업소 마르시엘 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황청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존재는 설령 국왕이라고 할지라도 제거한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키스 경은 이미 교황청의 제거 대상이었다. 교황청에는 천사 같은 알테어 님과 친절한 마르시 엘 씨와 나잇값 못하는 빵집 아저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를 쓸어버리는 성기사단과 고문기술자와 그 나잇값 못하는 표정 뒤에 수많은 계략을 품고 있는 교황도 존재하는 곳이다. 말 그대로 초유의 무력집단, 아무리 키스 경이 힘이 세고 검술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하다고 해도 단독으로 교황청과 대립한다는 것은 작살 하나 들고 용 앞에 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즉, 대놓고 기도문을 읊고도 살아 있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었다. '원래 엉뚱한 인간이니까' 라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교황청이 그냥 놔둔 거지?’ 아니면 아직 죽이지 못했을 뿐이거나.....나는 이런 섬뜩한 생각을 애써 물리쳤다. “하아. 정말이지, 아직까지 살아남은 게 신기하네요.” 키스는 내 말에 고개를 기울이며 헤죽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온 경, 때로는 살아남은 것이 죄악일 때도 있답니다아.”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왜냐하면 그런 무서운 말을 뱉는 그의 표정은 냉혹하거나 비장할 것도 없이, 그냥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거래 성사된 거죠? 저 살려주실 거죠오오?”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는 키스 경에게 ‘당신은 내가 안 죽여도 제명에 못살 것 같아!’ 못살 것 같아!' 라는 농담은,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아서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 같다가도 때로는 무슨 수를 써도 죽을 것처럼 위태롭다. 지금은 후자였다. 그때 거의 사냥개와 동일한 수준의 감각을 가진 키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슬쩍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누가 왔나 보네요?” 그리고 노크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소리도 없이 나타난)시종들이 문을 열어주고는 (또 어디론가 소리도 없이)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 '자동화시스템'을 바라봤다. 아니 정말이지, 구석구석 따지고 보면 이 리더구트에 사는 사람들 하나같이 다 이상해! 문 앞에 나타난 유니폼의 청년은 전에도 설명한 적이 있는 왕실의 전령이었다. “엔디미온 키리안님 , 계십니까?” “아, 전데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그가 사무적 인 목소리로 말했다. “헬스트 나이츠 본부에서 부기사단장 카론 샤펜투스 님께서 부르십니다.” 11 카론 경의 호출을 받은 나는 즉시 리더구트를 나왔다. ‘음. 대체 무슨 일로 나를......’ 카론 경의 심리 상태는 키스 경을 정반대로 돌려놓으면 답이 나온다. 즉 키스 경이 맨날 한가하고 심심해서 바쁜 사람 부르듯이, 카론 경이 부를 때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일이로군.' 최소한 식사 같이 하자고 부를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나쁜 일만은 아니길 바라며 지나치게 길고 복잡한 왕궁 세아스말의 도로를 걷고 있었다. “어머 ! 미오니아 양이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소리에 두리번거리고 나니까 어느 틈인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지나갈 때마다 주변의 귀부인이고 시녀고 나를 보며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들로 키득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왕실의 소문이란 엄청나게 빠르다. 입방아 좋아하고 남의 불행 좋아하는 왕실 식구들의 성격으로 봐서 한 몇 달 동안은 나 '미오니아'를 바라보는 눈이 음흉하게 웃고 있으리라. 제길! 누군 좋아서 한 줄 압니까! 나는 눈물을 흩뿌리며 빠른 걸음으로 카론 경에게 향했다. 마치 스캔들에 휘말린 연예인처럼 사람들의 위험천만한 시선을 피하며 노천카페 근처를 걷고 있을 때였다(거대한 왕궁 세아스말에는 왕실 귀족만 이용할 수 있는 고급스런 카페가 다섯 군데 있으며 그 중 세 개는 살롱이고 나머지는 노천이다.) 우아한 장미 넝쿨에 둘러싸여 있는 카페에서는 원두 볶는 냄새가 유혹처럼 흐르고 있었지만 귀족이 아닌 나로서는 그림이 떡이라서, 나는 심드링한 표정으로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내 등을 찔렀다. “이봐, 천민.” 비웃음 한가득한 이 소리는 분명!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세상에서 제일 잘난 '귀족의 맛' 쇼메가 선글라스를 쓴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외무대신이 아부에 눈이 먼 얼굴로 앉아 있었고, 뒤에는 큰 키의 미레일 경이 하얀 커피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엔디미온이라고 했던가? 이 나라에 올 때마다 보게 되는군. 하긴 손바닥만한 소국이니까 자주 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튀어 나오는 저놈의 빈정거림이 이젠 아주 귀엽기까지 하군! 혹시 내 인상이 쇼메에겐 '만날 때마다 한 번씩 괴롭혀주지 않으면 미안한' 유형인가? 에이이! 그딴 관상학은 아무래도 좋아! 아무튼 당신 만날 때마다 좋은 일 벌어진 적 한 번 도 없어!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인도 왕세자님의 용안을 오늘만 두 번째로 뵙는 영광을 얻은 걸요! 아아!정말 기분 째지네요!” 나도 참 대단한 게, 쇼메와 사사건건 충돌하다 보니까 이제는 감히 왕족에게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담력을 연마하게 되었다. 젠장, 달갑잖은 능력만 일취월장하는구만. (미레일 경은 원래 눈이 나쁘다니까 그렇다고 쳐도)통쾌할 정도로 둔감한 쇼메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벌레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 네 녀석을 오늘 또 봤다고?” “그 총명한 머리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길!” 나는 감히 물러가도 좋다는 명령도 없이 먼저 휑하게 걸어갔다. 블룸버그 왕가라는 순도 100퍼센트의 럭셔리 혈통에 아이히만 대공에 교육 받은 비상한 머리에 마라넬로 황제에게 교육 받은 무서운 배짱에 이자벨 님과 같은 엄청난 부하를 두고도 뭐가 불만이라서 저렇게 심사가 꼬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빌헬름 국왕에게 둔한 녀석이라면서 맨날 두들겨 맞기라도 한 걸까. ‘건 그렇고 역시 또 일하러 왔군.'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문서는 잔뜩 적혀 있는 숫자로 봐서 아마 수출입 교역서인 것 같았다. 이 작은 나라 베르스로서 이오타와의 무역이 끊어져 버리는 건 임금님이 거품 물고 쓰러질 비극이니까 쇼메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외무대신이 설설 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무적 아이히만 대공을 제외하면 사실 대외 관계에서 우리나라 관료들은 열심히 굽실거려야하는 입장이다(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토록 밑에 사람에게 거들먹거리는 것인지도 몰라.) 나는 그렇다고 (제 말마따나)이런 소국과의 무역 때문에 일국의 왕 쇼메가 직접 올 것까진 없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었지만-그가 온 진짜 목적이 다른 데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좀더 일찍 알았다면 나는 쇼메를 지금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2 집무실 앞에서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에 노크를 했다.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들어와라.” 문을 열자 차향, 잉크 냄새, 고풍스런 종이 냄새가 몸을 적셨다. 묵묵히 펜촉을 잉크에 찍고 사각거리는 시류들을 분류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조향사 같았다. 은의 기사라는 명성에 환삼을 품은 사람들은 그가 밤낮 검을 휘두르고 남자의 페로몬을 물씬 발산하며 납치된 귀부인을 구출하는 것 같은 낭만적인 일만 골라서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검보다 펜을 잡고 있는 시간이 훨씬 많고 취미는 미녀구출이 아니라 독서이며 사건이 없을 때는 그의 업무도 거의 집무실 안에서 끝난다. 딱 잘라 말해서 잡일이다. 악당 소탕은커녕 '기사들에게 말안장을 하나 더 지급하고 후문 경비 초소의 근무 시간을 연장시키라는' 보고서 같은 걸 하루 종일 써야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희대의 전략가가 될지도 모를 저런 굉장한 인재를 그런 시시콜콜한 일에 써먹는 것도 엄청난 호사취미(아니, 인력낭비)겠지만 아무튼 이토록 건성건성 넘어가는 것 같은 왕실도 따지고 보면 카론 경 같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겨우 겨우 돌아가는 셈이다. 만약 기사들이 모두 키스 경 같았다면 왕실 전체가 안락한 수면 속에 빠져 버리는 무척이나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앉아라.” 펜 끝으로 소파를 가리키는 그의 표정은 의외로 심각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하, 드레스 입고 오지 않아서 실망하셨나요? 라는 실없는 농담이라도 건넸겠지만, 카론 경에게 그런 소리 해봐야 '자네 점점 더 키스에게 오염되고 있군' 이라는 냉랭한 진단서만 받을게 뻔했기 때문에 나는 입 다물고 그의 앞에 앉았다. 나 때문에 심각한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교황청으로부터의 처벌에 불만은 없나?” “불만이 있을 리가요. 어쨌든 제가 종교의식을 망친 게 사실이고, 그 정도의 벌금형 이라면 도리어 너무 가벼운 걸요.” “가볍다고 생각하나?” “네. 솔직히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에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로군.” 엥? 다행? 카론 경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서류 중에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것에는 왕실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거, 저한테 온 건가요?” “읽어 봐라.”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 서류를 읽었다. 그 서류 하단에는 내 직책과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고 또 상단에는 분명히....나는 눈이 확 커졌다. “또 벌금형에 처한다고!” 뭐야! 벌금은 이미 교황청에서 판결했잖아! “왕실에서도 자네를 따로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킨 죄도 있으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이중처벌이라니! 엄청 쩨쩨하네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서류를 읽던 나는 그 벌금액을 확인하자마자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아니 누구라도 그럴 걸? “이, 이, 이게 뭐야아아! 십년동안 하루에 금화 10닢 씩이라고오오오오!” “그렇게 되었다.” 나는 어버버버버 하는 표정으로 벌금 고지서와 카론 경을 번갈아가면서 봤다. 1년은 365일, 그러니까 10년은 3650일, 견론은 금화 3650닢! 셀링으로 환산하는 것은 포기해도 좋은 환상의 액수! 하늘의 별이 이 정도로 많을까? 이 돈이면 나라도 세우겠어! 호스트일 때 내 몸값이 높긴 했지만, 이건 나를 열 번 팔아도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실로 하드코어한 벌금이었다. “카, 카론 경. 이거 농담이죠? 그렇죠?” “농담에 왕실 인장을 찍을 리가 있나, 전하께서 직접 내린 판결이다.” “이 망할 놈의 만두 장수!” 나는 나도 모르게 버럭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도라는 게 있다. 교황청도 한 달에 다섯 닢으로 만족했는데, 이놈의 국왕은 대체....... 이건 열심히 일해서 갚ㄱ ㅗ자시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열 닢 정도라면 '아아, 전하! 이토록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다니!' 라면서 괴로워했겠지만 하루에 열 닢이라면 '우어어! 이 망할 임금! 너라면 이걸 내겠냐!' 라면서 광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판결은 말하자면 사형선고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어처구니가 상실되어 버린 나는 충격과 공포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카론 경에게 매달렸다. “카론 경, 너무해요! 제가 이런 돈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게 누가 그런 짓 하라고 했나.” 나, 남의 일이라고 엄청 비정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아아아, 어쩌라는 건가요. 나름대로 착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여장 한번 했다고 이 나이에 삼대에 걸쳐 갚아도 부족할 벌금이라니요. 이제 어차피 몇 권 안 남았으니까 막 나가자 이겁니까? “엔디미온 경.” “.........곧 죽을 사람 왜 부르십니까.” 당신도 미워!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정의의 히어로가 이렇게 공권력에 유린당하는 소시민을 모른 척하다니! “역시 자네에게 그런 벌금은 무리겠지?” “이건 마라넬로 황제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무리한 액수라고요!” 그러자 카론 경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방법이 있긴 한데,,,,,” “예?”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카론 경은 또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왕실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전하께서는 자네가 그 벌금을 지불하는 데 힘들 것을 걱정하셔서 다른 제안을 준비하셨다.” “다른.....제안?” “아까보다는 나을 거다.” 나는 어떤 일이라도 그 가당찮은 벌금형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 전하로부터의 서류를 인어 내려갔다. 그리고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본 뒤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론 경을 바라봤다. “게 대체 무슨 의미죠” “읽은 대로다.” “그러니까 번즈 교주라는 사람에게 가서 한 달 동안 봉사하면 제 죄를 사해주겠다고요?” “그렇다.” “무, 무슨 봉사인데요? 아니 그보다 이 교주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가보면 안다.” 그러니까 그 엄청난 벌금을 없던 일로 해주는 전하의 다른 제안은 너무도 간단한 것이었다. 1. 번즈 교주에게 가서 한 달 동안 그와 함께 있을 것. 2. 그가 무슨 일을 시키든 최선을 다해 그를 도울 것. 3. 그가 무슨 일을 시키든 절대 거부하지 말 것. 피를 토하는 벌금에 비하면 너무 쉬워서 도리어 의심이 생기는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가 몹시 의심스럽냐 하면, '무슨 일을 시키든' 이라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번즈 교주라......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고객 중 교주는 없었으니까 옛 손님은 아닐 테고, 잘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봐서 최근에 만난 사람도 아니고, 왕실에 오는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교주라니, 그건 오르넬라 님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일까.... 그때 눈이 퍼뜩 뜨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억났다!”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카론 경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어찌 그 이름을 기억 못할 수가 있을까! “그 사람 사이비 교주잖아요!” “사이비라는 증거는 없다.” 아니, 사이비가 확실해. ‘내가 곧 신이니라. 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약속 받는다!’ 라는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뒤로는 다단계 따위나 하는 놈이 사기꾼 아니면 대체 뭐야! 번즈 교주란 ‘불로장생교’ 라는 센스 나쁜 종교집단의 우두머리로 겉으로는 자의식이 지나친 망상을 교리랍시고 떠들면서 사실은 한심한 불량품을 다단계로 팔아치우는, 한 마디로 나라에 민폐 끼치는 인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제법 유명해서,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계속 말 안 들으면 번즈 교주가 잡아간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협박이 이제 와서 실현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어, 어째서 전하가 번즈 교주에게 봉사하라고 저를......” 상식적으로 봐도 사이비 교주는 이른바 공공의 적! 국왕과 사이좋게 돕고 사는 사이일 수가 없다. 그 교주가 워낙 시시해서 교황청이 직접 나설 필요까지는 없다고 쳐도 적어도 국왕이 봉사하라고 왕실 기사를 파견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나는 이 해괴한 현상에 답을 바라는 얼굴로 카론 경을 빤히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나도 몸을 움직여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알고 있으면 뭔가 대답 좀 해주세요! 결국 내 집요함에 지친 그가 큭!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번즈 교주는.....국왕 전하의 동생이다.” “..........!”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지만 분명 왕실 직계 혈통을 이어 받은 분이니까 공작 대우를 받는다고 할 수 있지.” “맙소사. 만두가 또 있었어.” 두 형제가 한 명은 야지에서 또 한 명은 음지에서 서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군!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번즈 교주의 성격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번즈 교주는 예전부터 왕실 기사를 보내달라고 전하께 부탁해 왔고, 보내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전국에 알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사이비 교주가 왕족이라는 것은 왕실 권위에 큰 타격을 입을 일이라서 전하는 무척 고민하셨지.” 여, 역시 누가 임금님 동생 아니랄까봐 엄청 뻔뻔해. “그럼 그냥 왕실 기사 보내주면 되지 않나요?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지금까지 번즈 교주에게 파견나간 왕실 기사는 모두....” “모, 모두 어떻게 되었죠?” “한 명도 돌아온 사람이 없다.” 두둥 내 머릿속에서 ‘가면 죽어! 가면 죽어! 가면 죽어!’라는 코러스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결정해라, 엔디미온 경. 벌금을 낼 것인지 아니면 번즈 교주에게 갈 것인지.” “자, 자, 자, 잠깐만요!” 이건 마치 화형 당할래, 아니면 교수형 당할래? 라는 선택과 다를 바가 없잖아! 순간 어떤 확신 하나가 내 머릿속을 때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론 경을 바라봤다. “카론 경, 이거 처음부터 날 번즈 교주에게 보내려는 전한의 음모죠?”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벌금을 먹이고 이런 서류도 미리 준비해 둔 거고! 아무도 번즈에게 가려고 하지 않아서 절 선택한거잖아요!” 카론 경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난 모르는 일이다.” “너무해!” 이게 바로 공무원의 복지부동이란 말인가! 카론 경도 따지고 보면 무지 뻔뻔한 구석이 있어! “번즈 교주도 사람을 잡아먹는 미치광이는 아니다. 너무 걱정할 것은...” “그럼 카론 경도 같이 가요.” 그 순간 카론 경이 움찔 하는 모습을 나는 분명히 봤다. 마키시온의 대군 앞에서도 꿈쩍 않는 은의 기사가 번즈 교주에게는 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안경을 살짝 올려 썼다. “나는 바빠서......” “카론 경은 거기 가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고 있는 거죠? 알려줘요!” 당신마저 궁지에 모는 사람을 내가 당해낼 리가 없잖아! “너무 걱정하진 말아라. 당장 가라는 것이 아니고 몇 달 후에 가면 되니까.” “지금 죽나 몇 달 후에 죽나 뭐나 다른가요? 간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면서요!” “그러니까 애당초 키스와 술 마시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나. 자업자득이다.” 범죄자는 죽어라, 입니까! 임금님은 원래 그렇다 쳐도 카론 경마저 이렇게 비정할 줄은 몰랐어요! 예전에는 그 정도로 날 몰아세우지는 않았.......아니 이거, 잠깐만. “카론 경, 사실 내가 여장했던 것이 엄청나게 못마땅한 거죠? 그래서 이렇게 쌀쌀맞게.....” 역시 그거였다. 카론 경은 드물게 내 말을 끊으며 참고 있던 불만을 단번에 폭발시켜 버렸다. “그건 기사로서 아니 남자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대체 자네는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 건가! 구제불능의 기사는 키스 하나로 족하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는데!” 카론 경의 표정은 꼭 성경 사이에 끼어 있는 에로 사진을 봤을 때 같았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신성한 성당 한가운데서 여장하는 녀석 따위는 사이비교주에게 팔려가서 무슨 짓을 당하든 내 알 바 아냐! 쯤 되는 건가. 정말 단단히 화났군. 그러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 같이 귀여운 후배가 사이비교주에게 팔려 가는 걸 팔짱끼고 지켜보고만 있다니! 아니, 이쯤 되면 아예 임금님 편에 선거잖아! 만두 형제 사이에서 고초를 겪는 제 모습을 그리도 보고 싶었던 겁니까! 나는 카론 경의 태도에 완전히 삐쳐 버려서 빈정거리고 말았다. “카론 경도 그 남자의 수치를 해본 적이 있으면서 엄청 떳떳하게 살고 계시네요. 나야 어차피 망가진 인생이지만 고결하신 은의 기사가 그랬다는 걸 음유시인들이 알면 눈물 나게 아름다운 시가 탄생하겠군요. 흥!” “나는 한 게 아니라 당한 거다!” “게다가 분명 저보다도 훨씬 아름다우셨던 걸로......” 그러자 카론 경은 황급히 서류를 들고 딴청을 피우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기사도.....어디다 팔아먹으셨나요.” 용맹하고 도도한 은의 기사도 세월의 흔적 앞에선 한낱 방황하는 중생이구려. 하아, 이제 와 다 큰 어른 둘이서 여장을 했느니 당했느니 삿대질하면서 따져봐야 기분만 더 울적해지는군. 상상조차 끔찍한 과거가 튀어나오자 카론 경은 몹시 기분 상한 기색으로 부자비하게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럼 나는 자네가 교주에게 가는 것으로 알고 전하께 보고하겠다.” “카, 카론 경 지금 엄청 감정적이라는 생각 안 드세요?” “이상이다. 나가보도록!” “카론 겨어어어어어어어엉!” 13 나는 이미 유령이 된 모습으로 스물스물 리더구트로 돌아왔다.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아 불을 쬐던 키스가 방긋 웃으며 꼬리를 쳤다. 웃지 마! 모조리 다 네놈 때문이다! “어머나, 미온 경. 꼭 사형선고라도 받은 얼굴이네요오?” 나는 끼이이익 소리를 ㄹ내며 목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툭하고 말을 던졌다. “번즈 교주” “흡!” 카스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흑사병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와들와들 떨더니만 뒷걸음질치며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고 자물쇠까지 달칵 걸어 버리는 것이었다. 저 격렬한 반응은 대체..... “......역시 엄청 위험한 일이었어.” 나는 그냥 기사작위 버리고 야반도주할까? 라는 생각마저 품으며 흐늘흐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때 뭐가 신나는지 서로 낄낄거리며 내려오는 쇼탄, 루이 듀엣을 만났다. “오호호, 미온 군. 소식 들었다. 그 빼어난 미모로 뭇 남자들의 애간장을 살살 녹였다며? 좋아! 그 기세로 나간다면 미스 베르스가 되는 것도 문제가 아니야! 아무렴, 사내라면 큰 꿈을 가져야지.” 이것들은 정말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 이라는 신명으로 살아가고 있군. 그러나 지금만큼은 평소처럼 분노의 데들리 펀치를 날릴 여력이 없었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숨만 내쉬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누가 청혼이라도 했어?‘ “번즈 교주.” “그게 누구야?” “몇 달 후 날 잡아 먹을 사람” “엥?” 나는 이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잊고 흐늘흐늘 그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나날이 무럭무럭 커가는 고양이들과 함께 침대 속에 들어가 있던 지스 군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왜 그래? 성당 일로 카론 경에게 혼난 거야?” “지스킬 원터차일드 경.” “응?” “너는 절대로 술 많이 마시면 안돼.” “지금 약 올리는 거야? 어차피 난 몸 때문에 술 못 먹어!” 사소한 것에도 울컥하는 그는 얼굴까지 묽히며 내게 베개를 던졌다. 확실히 지스는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수많은 ‘결핍’ 때문에 뭐든지 자신은 할 수 없는 것을 질투한다. 심지어는 음주조차도. 하지만 아무리 그런 지스라도 지금 내 상황만큼은 전혀 부럽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확신한다. “못 마시면 더 좋고.....” 나는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지나친 음주가 몸에 나쁜 이유는 자명하다. 일단 건강을 망치고 정신을 망치며 창피한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는데다가....때로는 무시무시한 사이비교주에게 팔려갈 수도 있는 거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제 19화 해님달님 납치 사건 1 그녀는 애써 다듬은 손톱이 다 망가질 정도로 손을 꼭 쥐었다. 나를 쏘아보던 그녀의 눈동자에 곧 물기가 어렸다. 나는 몹시 불편하고도 귀찮은 시선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쉰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결국 저를 지금까지 이용한 거예요?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마치 걸인에게 동전을 던지듯 대꾸했다. “하아, 사랑해. 널 사랑한다고 몇 번 말해야 알아듣겠어? 단지 너만 사랑하는 것이 아닐 뿐이야?” “그런 건 사랑이 아니에요!” “저마다 사랑의 정의가 다른 법이니까. 할 말 끝났으면 이만 가볼게.” 나는 소매에 묻은 먼지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건성으로 말했다. 난 고전적인 하얀 셔츠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흐느꼈다. “그 여자에게 가려는 거예요? 결국 당신이 바라는 건 돈뿐이로군요!” 나는 곧바로 쏘아붙였다. 애인과는 결말은 항상 둘 중 하나다. 아름답거나 추한데 이건 후자였다. 결코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지만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다음에는 좀 더 사랑에 진지한 남자 사귀길 진심으로 바랄게. 그럼 이만.” 난 싸늘한 이별의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느새 그녀가 꺼낸 단도가 나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심장을 노려보는 칼끝을 바라봤다. “바,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진정해!” “당신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요. 계속 나와 함께 해주겠다고 말해주세요.” 그녀의 칼끝도 그녀의 눈동자도 그녀의 목소리도 이성 없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가, 같이 있을게. 이 칼 좀 치워줘. 네 말대로 할 테니까.....” “거짓말!” “저, 정말이야!” “어째서 지금은 평소처럼 능숙하게 속이지 못하나요. 내 눈물 앞에서도 항상 날 속여 왔던 당신이 이 보잘 것 없는 단도 앞에서는 솔직한 표정을 보이는군요. 정말 날 한번만이라도 사랑하긴 했나요?” 난 뒷걸음질 치며 애원하듯 말했다. “사랑했어. 아, 아니 지금도 사랑해. 그러니까 그 칼을.........” 그녀의 마른 뺨에 길고 투명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순수한 만큼 허망했다. “거짓말이라도 고맙군요. 조금만 더 일찍 말해줬으면 속았을지도 몰라요.” “잠깐!” 그녀는 절벽으로 내달리는 것처럼 나를 덮쳤고 파랗게 질린 칼끝 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셔츠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왜냐하면.......어차피 무대용 소품이니까! 뭐 그런 거 있지 않나. 사실은 칼날이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상대를 찌르면 속에 있는 피가 터져 나온다든가 하는 것. 좀 더 리얼한 연극을 위해 고심하던 어떤 연출가가 만들었을 법한 그런 가짜 칼 말이다. 푸아아아악 소리와 함께 과도한 양의 가짜 피가 터지는 바람에 인상을 찡그린 나는 그녀를 떨리는 두 팔로 품으며 그다지 꺼내기 싫은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이제야 당신의 사랑을 알았어. 내가 바보 같았어. 날 용서해 줘.” “괜찮아요. 나도 곧 당신을 따라갈게요.” “아아아! 에밀리!” “아아아! 시몬느!” 그러니까 어째서 엔딩이 이렇게 되는 거냐고! 라는 불만을 품기도 전에 그녀가 다리를 걸어 나를 넘어트렸고 나는 온몸으로 엎어지며 그녀 밑에 깔려버렸다. 그리고 곧 우렁찬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들렸다. “브라보! 브라보!” 그리고 연극의 끝을 알리는 장중한 음악소리와 함께 천천히 보라색 막이 내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둥이에게 버림받은 비의 여자 에밀리였던 베르스의 인기 여배우 라크르와 님은 막이 내려가자마자 평소의 성격으로 돌아와서는 내 위에 올라탄 채 내 코끝에 촉촉한 입술을 맞다. “미온, 훌륭했어. 정말 여자 많이 울려본 사람 같던데? 경험 있나봐?” “이, 이런 경험을 해봤을 리가 없잖아요.” 애인을 헌신짝처럼 차버렸다가 그녀에게 칼을 맞고 죽음 직전에 개과천선한다는 지나치게 판타스틱한 경험 같은 건 평생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지만........ 이 연극, 정말 황당해요.” “황당하니까 연극이 되는 거야,” 그녀가 내 금발을 쓸어 넘기며 짓궂게 말했다. 내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보이자 그녀는 내 가슴에 두 손을 올리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몽마가 실존한다면 분명 이런 모습이리라. 나는 정기를 빨아 먹히지 않기 위해 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가 무대 밖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박수소리 들리지?” “네.” “다 그런 거야.” 그녀는 고양이처럼 웃으며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호스트를 했던 나이에 이미 세계적인 여배우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 대중연극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의 결론이 ‘다 그런 거야’ 라면 그것도 좀 슬프지만-이상하게도 그 말은 연극처럼 황당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이제 좀 비켜주실래요?” 생각보다 무거우시네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나는 남감한 웃을음 보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박수 소리가 끝이질 않았다. 2 분장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차가운 홍차를 마시고는 훌러덩 훌러덩 무 대복을 벗어 던졌다. 실크로 된 속옷이 보여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또 그쪽에도 거울이 있어서 결국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나를 유혹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성격 자체가 ‘속옷 좀 보이면 어때?’ 라는 건 알고 있지만, 나또한 ‘다 큰 처녀가 남자 앞에서!’ 라는 성격이라서 신경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하아, 왜 저를 지명하셨나 했더니........” “후후. 내 상대 남자배우가 영 마음에 안 들던 참에 네 생각이 나지 뭐야? 아, 내 바지좀 집어 줘.” “여기요. 그런데 바람둥이 역할로 제가 떠올랐다니 뭔가 좀 섭섭하네요.” 이래봬도 일편단심인데! “본래 연기라는 건 자기와 정반대의 역할을 맡았을 때 잘 하는 거야. 어차피 아는 게 없으니까 아무 걱정 없이 질러버릴 수 있으니까.” 궤변 같았지만 한편 사실이기도 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람에겐 환상이랄 것이 없다. 에이이, 이런 건 말도 안 돼,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도저히 관객을 자극하는 판타지 같은 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일단 나도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기사란 굉장하겠지?’ 라는 ‘모두의 환상’ 을 멋대로 품었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서류더미에 묻혀 있는 카론 경만 봐도 ‘다 그런 거지’ 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아침부터 소파에서 비비적거리는 키스 경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런 거야!’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지만!). “아하하. 그럼 라크르와 님이 항상 사랑에 빠진 여자 역할만 하는 이유도 실은.....” “응. 난 한 번도 누굴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이야.” “노, 농담이었는데요.” 그녀가 주저 없이 대답하는 바람에 내가 더 무안해져 버렸다. 옷을 다 갈아입은 그녀는 남은 홍차를 모두 맛있게 마시고는 거울을 보며 얼굴을 다듬었다. 그녀의 시선은 거울에 반사된 내 얼굴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끝이야.” “네?” “오늘 공연이 내 은퇴 공연. 갑작스럽지만.” “저, 정말 갑작스럽네요.” 관객들이 이 사실을 알면 폭동이 일어날 걸요? 그런데 그 의미는 이제 누굴 사랑하게 되었다? “나 결혼할 거야. 사랑하는 남자 생겼어. 내 나이만한 딸이 있는 이혼남이긴 하지만....뭐, 괜찮아!” 아까 은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마구 두드려 맞은 기분에 가까웠다. 인기 절정의 여배우가 애인을 만나 은퇴를 하는데 그 애인이 예상컨대 최소 오십대는 넘을 것 같은 이혼남? 게다가 자기만한 딸이 있는? 만약 이게 연극이었다면 평론가들로부터 현실성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혹평을 받았을 것이다. “미온, 내게 사랑이라는 것은 사막에 내리는 눈과 같아. 평생 한번 내리는 것도 행운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어. 그런데 그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난 너무 반가워서 맨발로 눈 내리는 사막 위를 지칠 때까지 뛰어다녀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상대가 누구든 일일이 체면 지켜가면서 사랑할 수가 없는 거야. 나는 뭐라고 걱정해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평범하지 못한 사랑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꼭 모범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세상 천지에 근절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니, 사랑하는 상대가 평범하지 않았고 해서 ‘아, 남들이 보기에 창피해’ 라면서 아니 scjr하는 것이 훨씬 덜 모범적이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교감이고, 가끔 그 교감이 엉뚱한 곳과 이어진다고 한들, 어떻게 멈출 방법도 없는 것이다. 나 역시도 이제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녀’ 에게 여전히 매달리고 있지 않던가. 어른스럽지 못하기로 따지면 나나 라크르오 님이나 오십보백보다. “그래도 이렇게 쌓아 올린 연극 일을 하루아침에 그만둔다는 것은 좀 놀랍네요. 같이 병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싫어. 이제 연극 같은 건 눈에도 안 들어와.” “하아. 그러다가 사랑이 식으면요?” “그럼 그때 가서 울면 돼.” “맙소사!” 라크르와 님의 표정에는 자신의 모든 명성과 여배우의 경력을 포기하고 그 대신 자기 아버지 나이대의 애인과 대중들의 비난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 조금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비난받기 마련이야 그럴 바엔 처음부터 나한테 솔직하게 살고 싶어.” 그것은 자신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단호했다. 그녀는 입버릇으로 자기 말을 마무리했다. “다 그런 거야." 3 지명을 마친 나는 관객들이 거의 폭도로 돌변한 극장을 빠져 나 . 결국 라크르와 님은 은퇴와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숭배란 배신당했다고 생각될 때 그 숭배의 크기만큼 분노로 돌변하기 마련이니까. 비난 받는 것이 무서워서 사랑하는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계속 연극을 하는 것과 이 세상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사랑 외엔 모조리 포기해 버리는 것, 뭐가 더 긍정적인 것인지 도저히 답은 없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후자가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랑을 무서워하기보다는 무서운 사랑을 택했다. 유아적이다, 그런 건 사랑이 아냐, 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나는 그래도 그녀를 응원하련다. 순간 나는 내 등 뒤에서 엄청난 속력으로 달려오는 시커먼 마차를 보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우아아아앗!” 도대체 상식이 있는 거냐! 하마터면 치어 죽을 뻔했잖아.! 가까스로 피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파도 같은 흙탕물이 나를 덮여 깨끗한 내 바지에 잔뜩 얼룩이 생겨 버렸다. 이럴 때는 당연히 ‘이런 망할!’이라는 욕설이 나오는 게 순서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달리는 마차의 커튼 틈으로 아주 익숙한 얼굴을 봤던 것이다. 거의 부지불식간에 스쳐 지나간 터라 제대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창백한 얼굴은 분명 내가 잘 아는 분의 것이었다. 또한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분이기도 했다. “........제냐 공주님?” 나는 이미 거리 끝으로 사라져 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 창백하게 질려 있는 작은 얼굴은 분명 제냐 공주님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설마!” 잘못 본 거겠지. 이곳은 베르스 남부의 끝자락이다. 이런 곳으로 왕족이 행차할 일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없었다. 설령 온다고 하더라도 거창한 근위대가 병정개미들처럼 잔뜩 달라붙어 있어야 정상이다. 저런 마차 하나만 달랑 타고 돌아다닐 경우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나는 ‘최근 몸이 허해졌나. 헛것이 다 보이네.’ 라는 늙어버린 푸념을 늘어놓으며 역으로 향했다. 4 라르크와 님의 은퇴와 결혼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기차역마저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머리가 나쁜 여자, 돈을 너무 많이 벌어 정신이 이상하게 되었다,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계략일 뿐 등등의 멋대로 판단하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열차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 또 멋대로의 소문들을 전염병처럼 불려나갈 것이다. 라크르와 님은 이런 대중들에게 질려버린 것이 아닐까. 맘대로들 떠들어, 그래도 나는 변하지 않아, 라고 외치고는 백발의 애인고 ㅏ함께 웨딩드레스를 입고 어디론가 먼 곳으로 신나게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나는 푸념과 부러움을 섞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고는 열차에 올라탔다. 5 나는 지금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뭐가 생선 가시냐하면, 아까 스쳐 지나간 제냐 공주님의 모습이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 마차를 타고 있을 일은 절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비싼 돈 주고 왕실과 텔레마코스를 해서는 '공주님 잘 계시죠? 라고 물어보는 것도 바보 같은 짓 같아서 나는 창밖을 보며 찜찜한 기분만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뭔가 불유쾌하기도 익숙하기도 한 뜨끈한 감촉에 오싹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왕실에서 지급하는 열차 표는 모두 2인실이다. 그래서 내 맞은편에는 목이 부러질 정도로 굵직한 목걸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토속적인 중년의 귀부인께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분의 내 얼굴만 한 손바닥이 내 허벅지를 타고 맹렬하게 질주하는 중이었다. 적어도 내 허벅지에 붙어 있는 모기를 떼어주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니 리라. “자,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서서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후우. 위기일발이었어.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로 포기할 타입이 아니었다고.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면상을 후려칠 뻔했어. '뭐 잘 됐네.' '제냐 공주님' 덕분에 마음도 불편했고, 다시 방에 들어가서 건장한 귀부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나는 바람도 쐴 겸 식당 칸으로 향했다. 그런데 열차 맨 앞 량에 있는 식당칸으로 가면 갈수록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검을 차고 있는 기사들이 서로 숙덕거리며 통로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들마저 라크르와 님의 은퇴소식에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닐 테고, 일단 나도 기사라서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사내를 붙잡고 물었다. “저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입니다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기사?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역시 또 이 패턴이로군. 나는 '믿음을 가지세요!' 라고 소리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왕궁 후문에서 본당까지 표지판만 믿고 가다가는 십중팔구 길을 잃는다!” “엇! 정말 왕실 기사신가?” 그렇다. 나도 내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서 내가 이래봬도 왕실 기사라는 ‘증거’ 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왕궁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고 표지판 또한 엉망진창이라서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그 속에서 미아가 되고 만다는 끔찍한 현실은 왕실 사람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실제 본궁으로 가는 표지판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막다른 벽이 나오고, 누가 그 벽에 ‘처음 왔던 자리로 돌아가시오.’ 라고 친절하게 써 놨다. 우리 왕궁에 단 한 번도 자객이 찾아오지 못한 이유도 이것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내가 왕실 기사라는 걸 알게 된 턱수염의 남자는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왕실이 난리요. 아직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왕자님과 공주님이 악투르 놈들에게 납치되었소.” 그는 그 이후에도 뭐라고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덜컹 덜컹거리는 규칙적인 열차 소음만 이상토록 커다랗게 머리를 울렸다. 어째서 예상하지 못한 거지. 왕족이 경호도 없이 쏜살같이 달리는 마차 안에 타고 있을 경우는 딱 하나뿐인 것이다. 그는 계속 푸념 섞인 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대체 경호를 어떻게 했기에 이 나라 한복판에서 왕족이 납치될.....” 나는 어떤 힘에 이끌린 듯이 창가로 달려가 손을 뻗었다. 곧 내 손에 굵직한 줄이 잡혔다. 일일이 차장한테 가서 열차를 멈추라고 말한 시간이 없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긴급 제동장치를 힘껏 당겼다. “지, 지금 뭐하는 짓.....우아아악!” 순식간에 열차가 급정차하며 불꽃을 뿜는 격렬한 굉음이 터졌다. 뒤틀린 관성이 식당 칸 주방에 쌓여 있던 수많은 접시들을 단번에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통로에 있던 기사들은 사방으로 쓰러졌고, 고상한 귀족 나리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려야 했다. 나는 뭐라고 소리치는 기사를 뒤로 한 채 곧바로 통로를 뛰어 화물칸으로 달렸다. “여기는 출입 금지입니다.” 화물칸을 지키던 승무원이 나를 가로 막았다. 값시싼 말들은 열차로 운송하기 마련이다. 이곳에도 말 서너 필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승무원에게 외쳤다. “나는 임무를 수행 중인 왕실 기사입니다! 지금 전시체제에 준하는 긴급 상황이 발령되어 왕실 특별 명령 4호에 의거, 이곳에 있는 준마를 군마로서 징발합니다!” “특별 명령 4호! 그런 말 들어본 적도 없는데 !” 당연하지! 지금 내가 지어낸 말이니까! 에이이! 노닥거릴 시간 없어요! 나는 공권력을 빙자한 사기에 당황하는 승무원을 놔두고 말을 묶어둔 줄을 푼 뒤에 화물칸의 문을 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승무원이 말에 올라타는 나를 제지했다 “아, 안됩니다! 그 말은 백작께서 끔찍이 아끼시는 고귀한 혈통의 말입니다!” 시끄러워요! 지금은 고귀한 혈통의 인간이 납치된 상황이라고! “그건 이 말이 빠르다는 의미겠죠?” “물론 빠르죠. 경주마니까.” “백작께 전해주세요! 이 나라를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셨다고!” “잠깐만!” 나는 곧바로 박차를 가하며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백작 나리께서 알면 죽이려고 들 겁니다!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키스 세자르!”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떠나온 도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6 이름 모를 백작의 애마는 '카론주니어' 까지는 아니지만 엄청난 빠르기로 10여 분 만에 나를 도시로 데려다 추었다. 라크르와 님의 은퇴 소식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결혼취소해라!' 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겨우 텔레마코스 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감색 제복의 텔레-레이디 앞에서 두 손을 탕 내리치며 숨 가쁜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왕실과 연결해 주세요! 요금은 수신자부담!” “.......그런 것, 안되는데요.” 나는 경계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센터 주인을 향해 능숙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다면 돈 주고도 못 사는 혈통 좋은 백마에는 관심이 있으신가요?” 7 “왕실에 접속하겠습니다.” 그 백작 누군지 모르겠지만, 왕족 납치 사건 해결에 크나큰 공헌한 것으로 표창을 받게 되리라. 그러니까 일단 왕자 공주님을 구하고 나서! 내가 그녀와 손을 잡자 왕실과의 핫라인이 곧바로 이어졌다. 연결된 곳은 헬스트 나이츠 본부였다. 연결이 되자마자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카론 경을 바꿔 주세요! 이런 사태가 터졌을 때 가장 믿을 수 있고 또 가장 빠르게 사건을 추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카론 경이라는 것은 지당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그 단계였다. -넌 스왈로우 나이츠? 지금은 카론 경과 연락할 상황이 아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끊어 ! -왕족 납치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있는데도 말입니까? 커다랗게 소리치던 우락부락한 기사 녀석은 내 말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녀석이 납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에요!당장 카론 경을 바꿔줘요! -너 수상한데, 혹시 납치 사건에 가담한 거 아냐? 울컥! 그 우둔한 머리로 뭔가 추리하려고 하지 마! -아무튼 당장 왕실로 귀환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려라 네놈은 그런 기본적인 절차도 모르는 거냐! 그 짧은 말은 꽤 오래 버틸 줄 알았던 내 인내심을 단번에 고갈시켜 버렸다. -보고서 따위가 납치범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30분 전 이곳에서 검은 마차에 납치되어 있는 제냐 공주님을 봤단 말야! 지금 관문 봉쇄 명령을 내리면 잡을 수 있어 ! 닥치고 카론 경이나 바꿔! 이 머저리! -뭐? 네놈이 공주님을 봤다고? 그걸 어떻게 믿어! -그걸 어떻게 의심해 ! 흥. 공을 세우려고 있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는군. 왕자님과 공주님은 이미 납치되어 악투르 왕국에 있다는 명확한 분석을 내렸다. 거기 있을 리가 없잖아! -틀린 분석이야! 아직 이 나라 안에 있다고! -스왈로우 나이츠의 말은 신용할 수 없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확실한 현장 정보보다도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분석이 우선이라는 말인가? -그 명확한 분석, 출처가 어디지? -네놈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다! 나는 불행하게도 아이히만 대공이나 위고르 공이 해외 출국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나머지 잘난 관료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자기들끼리 주먹구구식으로 내린 결론일 것이 뻔하다. '음, 역시 지금쯤 악투르에 있지 않을까? 라는 뜬구름 잡는 말 따위를 꺼내 놓고는 '명확한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비장의 카드를 썼다. -만약 내 말을 무시해서 문제가 생기면 모조리 네 녀석 책임이라고 할 거야. 감봉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무, 무슨 협박을 하는 거냐! 공무원들은 '책임' 이라는 단어를 '해고' 라는 단어 다음으로 싫어한다. 그가 뒤로 물러서자 나는 곧바로 한걸음 다가섰다. -그러니까 당장 카론 경을 바꾸라고! -카론 경은 지금 이곳에 없다 사건 수사 때문에 왕실 밖으로.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럼 그렇다고 일찍 말하란 말이야! 화가 치밀어서 가슴이 불 타버리는 것 같았다. 지금 왕실은 편한 곳에 앉아 탁상공론을 늘어놓고 있고 카론 경은 없다. 아무튼 당장 왕실로 귀환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려라. 네놈은 그런 기본적인 절차도 모르는 거냐! 그 짧은 말은 꽤 오래 버틸 줄 알았던 내 인내심을 단번에 고갈시켜 버렸다. -보고서 따위가 납치범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30분 전 이곳에서 검은 마차에 납치되어 있는 제냐 공주님을 봤단 말야! 지금 관문 봉쇄 명령을 내리면 잡을 수 있어! 닥치고 카론 경이나 바꿔! 이 머저리! -뭐? 네놈이 공주님을 봤다고? 그걸 어떻게 믿어! -그걸 어떻게 의심해! -흥. 공을 세우려고 있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는군. 왕자님과 공주님은 이미 납치되어 악투르 왕국에 있다는 명확한 분석을 내렸다. 거기 있을 리가 없잖아! -틀린 분석이야! 아직 이 나라 안에 있다고! -스왈로우 나이츠의 말은 신용할 수 없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확실한 현장 정보보다도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분석이 우선이라는 말인가? -그 명확한 분석, 출처가 어디지? -네놈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다! 나는 불행하게도 아이히만 대공이나 위고르 공이 해외 출국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나머지 잘난 관료들이 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자기들끼리 주먹구구식으로 내린 결론일 것이 뻔하다. ‘음, 역시 지금쯤 악투르에 있지 않을까?’ 라는 뜬구름 잡는 말 따위를 꺼내 놓고는 ‘명확한’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비장의 카드를 썼다. -만약 내 말을 무시해서 문제가 생기면 모조리 네 녀석 책임이라고 할 거야. 감봉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무, 무슨 협박을 하는 거냐! 공무원들은 ‘책임’ 이라는 단어를 ‘해고’ 라는 단어 다음으로 싫어한다. 그가 뒤로 물러서자 나는 곧바로 한걸음 다가섰다. -그러니까 당장 카론 경을 바꾸라고! -카론 경은 지금 이곳에 없다. 사건 수사 때문에 왕실 밖으로.....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럼 그렇다고 일찍 말하란 말이야! 화가 치밀어서 가슴이 불 타버리는 것 같았다. 지금 왕실은 편한 곳에 앉아 탁상공론을 늘어놓고 있고 카론 경은 없다. -아무튼 당장 왕실로 귀환해! 납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정말 수상해. 내가 직접 너를 심문해서...... 나는 짜내듯이 말했다. -한 가지만 묻자. -뭐? -구하고 싶은 생각이 있긴 있는 거냐! 나는 커다랗게 소리친 뒤에 텔레마코싱을 끊었다. 첫 단추부터 엉망진창이자 나는 뭐라고 투덜거리며 테이블에 머리를 콩콩 때렸다. 카론 경이 없다. 이런 사태에 대해 왕실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 내가 너무 꽉 잡은 탓에 손을 매만지고 있던 텔레-레이디가 말했다. “정말로.......지금 왕자님과 공주님이 납치된 거예요?” “저도 믿고 싶지 않지만 사실입니다. 게다가 왕실은 완전히 헛다리짚고 있고요. 카론 경은 없고......” “마차가 어디로 갔는데요?” “몰라요. 남쪽으로 갔다는 것밖에는. 남쪽이라면 곧바로 악투르로 넘어가겠죠.” 당연한 일이다. 납치범들이 베르스에 온 김에 관광이라도 하려는 게 아니라면 곧바로 국경을 넘어 악투르로 갔겠지. 알다시피 악투르 왕국은 '적진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버리면 일단 손 쓸 방법이 없어진다. 그러니까구할 기회는 지금 뿐인데, 왕실은 '이미 넘어 갔어' 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때 텔레-레이디가 너무도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걸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제가 이곳 사람이라서 잘 아는데, 악투르 왕국으로 가는 건 낮에는 감시 때문에 힘들어요. 국경을 넘는 건, 밤에 이뤄지거든요.” “계속 말해주세요.” “그래서 몰래 악투르로 넘어갈 사람들은 일단 작은 도시에 머물게 되죠.” “거기가 어디죠?” “모르그덴. 여기보다 남쪽에 있는 도시는 그곳 하나에요.” 모르그덴...... 나는 표정 일은 얼굴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8 그녀에게 들은 남쪽 끝의 도시 모르그덴은 지도에는 없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정식으로 관리나 영주가 있는 통치구역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발생한 일종의 군락 같은 곳. 대관절 무슨 필요충분조건 때문에 그런 곳이 생겼냐 하면, 밀수, 밀매나 불법적인 노예 거래 따위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은 부지런한 범죄자들의 욕망 때문이리라. 아무리 음식점도 서로 모여 있는 곳이 더 잘 되기 마련이라지만, 뻔하게시리 범죄자들의 연합체라니 ! 그럼 앞집 이웃은 은행 강도, 집 청년은 탈옥수, 뒷집 아줌마는 사기꾼, 자신은 밀수범 정도 되는 곳이라는 의미잖아! 허허, 그것 참 보기 좋게들 옹기종기 모여 사라는 말은 때려죽여도 못하겠어! 모르그덴은 정말이지 이 나라의 치안이 얼마나 황송한 수준인지 알 수 있는 극명한 증거였다. “이 타락의 성전 어디 에 왕자님과 공주님 이 잡혀 있담.” 주인에게 사정한 끝에 예의 백마를 타고 모르그덴에 도착한 주변의 심란한 풍경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의 풍경은 어째서 모르그덴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흔해 빠진 표지판 하나 없는 거라고 궁금해 할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들은 마치 뒷마당에 제멋대로 자라난 버섯들처럼 듬성듬성 솟아 있어 애당초 도로라는 건 존재도 않았고, 그 틈바구니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낮부터 술에 부랑자거나, 소녀에 가까운 여자들을 줄로 묶고 끌고 다니는 포주거나, 한 패거리씩 몰려다니는 질 나쁜 건달들이거나, 돈만 주면 아무나 죽여줄 것 같은 칼잡이들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퀭한 눈으로 상자를 들고 다니는 노예들이 전부였다. 이 세상의 끝은 지옥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있는데,그렇다면 그 끝은 여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우리나라에 있을 줄은.' 그리고 지금 이곳에 왕자님과 공주님이 잡혀 있다니 ! 그때 히히힝거리며 등 뒤의 백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까 어떤 시커먼 놈이 내가 타고 온 말에 올라타서는 자기 것인 양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 서 !” 라고 바람처럼 달리는 백마의 뒤꽁무니를 향해 외치는 짓도 바보 같아서 나는 고개를 꺾으며 중얼거렸다. “.......백작 나리, 미안해요.” 백작이 이 사실을 알면 죽이려고 들겠구나...... 그러니까 키스 경을. 나는 문득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지금 키스 경이 옆에 있으면 정말 든든할 텐데. “에익이이 !쓸데없는 넋두리 !” 나는 세차게 도리질 쳤다. 어차피 그 인간은 지금도 자고 있을 거아냐! 하루 18시간을 잠들어야 겨우 겨우 기운이 나는 효율 빵점의 코알라한테 뭔 기대를 하겠어! 나는 괜히 화가 나서는 지도에도 없는 도시, 모르그덴으로 걸어 들어갔다. 9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축축한 도시로 몇 발자국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어슬렁거리던 녀석들이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꼭 식충식물에 갇혀버린 기분이다. 적어도 내가 온 것을 환영하기 위한 도시의 홍보 도우미들은 아니리라. ‘젠장! 이런 실수를!’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서 중대한 사항을 깜빡하다니. 엉덩이까지 오는 내 긴 금발과 하얀 피부와 가느다란 이목구비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 모조리 다 이곳에서는 '제발 날 잡아 잡수' 라는 광고판이나 다름없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도토리에 반응한 다람쥐처럼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라고 표현한다면 조금은 이 험악한 상황이 귀엽게 보일라나? 그들은 기분 나쁘게 이죽거리며 사방에서 나를 훑어봤다. “여어, 이거 너무 눈 부셔서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는데” 그럼 감고 있어! “이런 아리따운 여인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로 오셨나?” “나, 남자입니다만!” “콕콕.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둘러대면 우리가 물러갈 거라 생각했어? 귀엽기도 하지.” 이런 망할! 어두침침한 곳에 모여 살다 보니까 시력이 퇴화해 버린 거냐! “하늘이 우릴 불쌍히 여겨 일용할 양식을 보내주셨군. 감사히 먹겠습니다.” 이것들은 대책 없이 착각하고 있었다. 제길. 이곳에 오자마자 30초 간격으로 두 번이나 실수를 하다니. 뭐, 내 성별을 어떻게 판단하든 그건 지금 아무래도 좋아. 나는 일부러 무방비로 서 있었다. 그래야 칼을 뽑지 않을 테니까. 예전 카론 경에게 들은 말이 있는데,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중 하나는 자신의 무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가, 라고 한다. 만약 카론 경의 검을 빼앗으려고 한다면 곧바로 목이 날아가겠지만, 이 녀석들은 칼집을 덜렁거리며 주머니 에 손을 꽃은 채 설렁설렁 다가오는 꼴을 보니까 원숭이도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칼을 빼앗고 당황하는 사이에 팔을 꺾어 제압한 뒤 곧바로......’ 도주로 확보! 나는 슬쩍 좁은 골목길을 봐뒀다 저 어둡고 좁은 곳으로 도망치면 절대로 뒤쫓아 올 수가..... 그때 웬 길 가던 노무자들이 그 도주로 앞에 주저앉아 담배를 물어 피우는 게 아닌가! '망할! 거기서 노닥거리지 마!' 도주로 봉쇄........ 이래봬도 명색이 주인공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꼬이기만 하는 거냐고. “호오, 안색이 창백한데? 우리가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아.7' 그들은 이미 너무 바짝 다가온 상태였다.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고 험악하게 넘어트렸다. 나는 곧바로 백주 대낮 길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내 위에 올라탄 녀석이 '오랜만의 만찬 이라는 기분 나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흐흐. 그럼 나부터 시작해 볼까나.” 뭐, 뭘 시작하겠다는 거냐! 그것도 길 한복판에서 ! “으이구! 난 남자라니까!” “속이고 싶으면 조금은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지 그래?” 사실이 그렇다는 건데 더 이상 어쩌라고! 다른 녀석들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심지어는 길 가던 사람들 역시 도와주기는커녕 간만에 구경거리! 라는 표정으로 내 모습을 빤히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킨 사내놈이 거친 손놀림으로 내 셔츠를 찢었고 투둑 단추가 끊어지며 이놈들이 그렇게도 착각하던 내 성별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그 즉시 건달이 내 멱살을 잡아챘다. “이 빌어먹을 자식! 사내놈이잖아!” “그러니까 아까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아!” “감히 날 속이다니 !배짱 한번 좋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내가 속인건지 댁이 멋대로 속은 건 '관중' 들 역시 지 멋대로 격분해서는 나를 때려죽일 것 같은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꺼져 !” 엉? 나는 뒤를 돌아봤다. 이 추운 날씨에도 민소매 셔츠 하나만 입은 건장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의 손은 놀랍게도 아까 도둑맞은 백마를 끌고 있었다. 건달들 역시 그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건달 두목쯤 되는 건가? “아! 형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고 나발이고 꺼지라니까.” “하지만 이 자식이 우리를 속여서.........” 이게, 끝까지 우기네 ! 뺨에서 어깨까지 이어지는 긴 문신이 무시무시한 그 사내는 두 번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여기 완전 정글이로군. “제발 꺼져주세요. 뒈지고 싶지 않으면요.” “아, 알겠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다 이제 여섯명이 한 명으로 줄어서 다행이야. 난이도는 더 올라간 것 같지만. 나는 가슴을 여미며 내 허리만한 팔뚝을 가진 사내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역시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표정으로 보건데, 대충 무슨 대사가 나올지 짐작이 간다. "너‥‥‥ 남자였냐?“ "착각할 때가 좋았죠?”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으이구, 이제야 결혼하나 했더니만." "당신‥‥‥ 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까!" 지나치게 앞서 간다고! 그는 내게 말고삐를 건네주며 입을 쩝쩝 다셨다. "무슨 용건으로 이런 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으로 이런 확 빠진 말을 타고 다녔다간 오늘 중으로 가진 거 다 털리고 내일이면 악투르로 가는 노예 마차 안에 타고 있을 거다. 그리고 모레부터는 신나는 새 인생이 열릴 테고. 굳이 확인해 보고 싶지 당장 여길 떠, 그리고 그 머리 잘라라 나같이 불쌍한 총각 만들지 말고!" 내게 백마를 돌려준 그는 '아아, 정말 결혼해야 하는데·.‘라는 우울한 투정을 부리면서 어슬렁 걸어가는 것이었다. 뭔가 내게 엉뚱한 실망감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서 도둑맞은 물건을 찾아준다는 것 자체가 제법 믿음이 가는 사람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턱하고 그를 잡았다.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뒤돌아 봤다. "또 뭐 ?” 그러다가 그는 내 애절한 표정을 보고는 민망한 듯 말했다‥‥ "내가 아무리 애인이 없기로서니,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 "그게 아냐!" 이 작자는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뗏목을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외로운 선장이다. 나침반 하나 없는데다가 주변에는 상어들이 득실거려서 왕자님과 공주님이라는 조난자를 찾기도 전에 내가 먼저 침몰할 상황인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이 사내라는 전함에 옮겨 탈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 와중에 내가 왕족을 뒤쫓는 기사라고 밝혀봐야 머리 어딘가에 결함이 있는 사람 정도로 취급받겠지. 나는 두 손을 곱게 모으며 최대한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사실 이곳으로 잡혀 온 제 소중한 동생을 찾기 위해 온‥‥‥‥.” "싫어 ." "아, 아직 말 다 끝났는데." 아까와는 태도가 너무 다르잖아! "보나마나 납치범들한테 잡힌 인질을 되찾겠다 이거겠지?” "맞아요." 자주 벌어지는 일인지 그는 귀찮다는 듯이 건성건성 말하고 있었다. "돈은 가져 왔냐?” “예?” "인질과 교환하려면 몸값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좀 비싼 인질이냐?” 그렇고 말고. 왜냐하면 왕족이거든! 적어도 내 주머닛돈과 교환이 가능한 인질은 아니라고! "얼굴을보아하니 몸값이 없는 모양이군. 아무튼 거절이야 알아서 해결해, 내가 무슨 힘이 썩어나서 본 적도 없는 인질을 구해주겠냐?“ "그렇게 도와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단지?” "이 도시에서 가장 정보가 빠른 사람과 만나게만 해주세요." 어디를 가도 꼭 정보통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이런 아수라장 같은 곳에서 일일이 왕자님과 공주님을 찾아봐야 카론 경도 아닌 내가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범죄자의 도움을 받고 싶진 않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이, 이건 위험한 부탁도 아니잖아요!" "귀찮아서 싫어. 내가 뭐 얻는 게 있다고 널 도와줘?' "아까는 내 말도 되찾아 줬으면서 !" "그건 네가 여자였을 때 얘기지." “......” 아주 여자에 한이 맺히셨군. 나는 이제는 전가의 보도가 되어 버린 내 말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백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이 경주마는 어떤가요? 참고로 이놈은 암컷입니다." 그러자 그가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 너 미쳤구나. 내가 아무리 여자가 없기로서니, 어떻게 짐승과‥‥‥‥ "그게 아니라니까!" 우어어어! 말 귀 좀 알아들엇! "이 말을 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뭐 ?정말?"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 말인데, 날 주겠다고?” "정보통을 만나게 해주는 조건이라면 그리 아깝지 않습니다. " 게다가 원래 내 것도 아니고. "맙소사. 준다니까 받기는 하겠다만, 너 정말 이상한 녀석이구나" "하하. 얼마든지 챙길 수 있었던 이 말을 제게 돌려준 당신도 이상한 사람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건 네가 여자였을 때 얘기라니까." "......” 꼭 좋은 여자에게 장가가라고 나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10 이름을 아심이라고 밝힌 그 노총각은 나를 모르그덴 최고의 정보통에게로 데려갔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닌 아심의 두목이자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밀수업자였다. 그는 아심만큼이나 커다란 덩치 에 머리에는 좀 우스꽝스럽게 생긴 가죽 모자까지 두르고 있었다. "뭐? 납치된 남매?” "예. 오빠는 열세 살로 금발의 곱슬머리 , 파란 눈에 굉장히 귀엽게 생겼고 여동생은 열한 살, 생머리에 인형 같고 고집스럽게 생겼습니다." "으음. 얼굴보고 잡아왔나 보군. 하지만 이곳에 온 애들이 좀 많아야 말이지. 그것만으로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노예 시장 쪽에 가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잡힌 애들은 경매에 나갈 때가 많거든 " "노예로 팔리지는 않을 겁니다. " "응?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아, 아무튼 확실합니다. " 기껏 납치한 일국의 왕족을 노예로 팔 리가 없지. 아심의 부탁으로 겨우 나와 만나준 두목은 그래서야 찾을 수 없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오늘 세 시간 전에 검은 마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 "그래? 그건 좀 도움이 되는군." 그리고 두목은 두꺼운 장부를 훑어봤다. 아니 ,장부로 만들 많은 납치가 이뤄지고 있단 말이야? 나는 치가 떨렸지만 꾹 채 그를 바라봤다. 장부를 다 살펴본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세 시간 전에 이 도시로 들어온 건 아무것도 없어. 정확히 세 시간 전인가?” "예. 정확합니다." "뭔가 착각한 거 아냐? 이 도시를 오가는 모든 거래품은 모두 기록되게 되어 있어." "확실합니다. 그분들은 분명 세 시간 전에 이곳으로 납치되어 왔습니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분?” 아차! "워, 워낙에 소중한 동생들이라서‥‥‥ 아하하." 그는 양가죽으로 몇 번이나 덧댄 묵직한 장부를 턱하고 덮었다. 그리고 소파에 천천히 기대며 말했다. "네 말이 맞는다면 그 남매는 지금쯤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디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건가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큰 조직을 운영하는 이 이미르조차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딱 하나 있지." "그,그게 뭡니까?” "악투르 왕실 녀석들이 직접 움직일 때. 그것만은 나도 알 수가 없어." 역시 그랬다. 이 납치는 악투르 놈들이 처음부터 국가 차원에서 계획하고 벌인 범죄였다. 이 도시 최대의 정보통은 자신도 모르는 인질과 관련 있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그 납치 된 자매 , 보통사람 아니지?” 이미르 두목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단번에 간파했다. 나는 부정하려고 했다. 범죄자를 믿어도 되는가? 이런 자에게 정체를 밝혀봐야 도리어 돈을 노리고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그에게말했다. "그분들은 바로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 왕자님과 제냐 라스팔마스 공주님이십니다. " 시종일관 반쯤 감고 있던 이미르의 눈이 확 뜨였다. 나는 모험수를 던져야 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악투르로 넘어가기 전에 되찾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르 같은 거물의 힘이 필요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목청 높여 그를 설득했다 "이미르 님이 사회의 어두운 쪽에 몸담고 있는 분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잔인한 악투르 무리들에게 이 나라를 이어나갈 왕자님과 공주님께서 납치된 긴박한 상황! 신분과 직업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만약 이미르 님 이 도와주신다면 국왕 전하께서도 큰 포상을 내리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도 이 나라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내 웅변에 감명을 받은 이미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악투르 사람인데." 두둥! 머릿속에서 '망했습니다!' 라는혼성 3중창코러스가 장업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온몸으로 좌절했다. 신이시여, 이젠 제가 잘 풀리는 상황도 좀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 왜 울고 있나." "그냥‥‥‥ 제 인생이 좀 슬퍼서요." 왕실은 삽질하고 카론 경은 없고 키스 경은 자고 있고 두목은 악투르 사람‥‥‥‥ 왕자님, 공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소인의 힘에 부치옵니다. "으음. 왕자와 공주가 악투르에 납치되었다, 이건가? 이거 엄청난 사건이군. 그런데 이런 일에 왜 너 혼자 온 거냐. 왕실에 사람이 그렇게 없어?“ "거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죠." 이미르는 이 리저 리 머리를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 "네?' "널 잡아다가다가 악투르에 넘기면 푼돈을 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일로 그 끔찍한 악투르 왕실과 엮이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그 녀석들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널 도와줄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나는 아무 것도 못 들었고 널 만난 적도 없다, 이거야. 나가봐라." 도움을 받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미르가 좀 더 '애국심' 이 투철한사람이었다면 나를 죽이거나 악투르 왕실로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악투르 사람들은 천성이 거칠고 모질어서 강한 병사를 보유 하고는 있지만 본래 여러 부족들이 모여 만든 나라라서 그런지 잘 융합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앙숙이라고는 해도 조직적으로 침공한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소규모 부대가 산발적으로 국경을 넘 어와 약탈하는 정도다. 그건 우리나라에겐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악투르가 제대로 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쩌면 우리나라는‥‥‥ '잠깐.'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라가 베르스의 왕족을 납치했다? 일단 우리나라 한복판에서 왕족을 감쪽같이 납치한다는 것은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악투르는 예전 이멜렌 님을 납치한 적도 있지만 왕족 납치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막대한 자금, 치밀한 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납치에 문외한인 나도 안다. 그런데 머리보다는 몸 쓰는 걸 좋아하는 악투르가 이런 고차원적인 납치극을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그 방식이 너무나 깔끔했다. '혹시 여기에 또 다른 비밀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닐까?’ 헤에, 내가 여기까지 추리하다니, 이제 나도 제법 카론 경 흉내를 내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뭐하누 어디 잠혀 있는지 찾지도 못하고 있는 걸.'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아심과 함께 방을 나왔다. 11 나와 두목의 대화를 들었던 아심은 방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구석으로 잡아끌었다 "우아앗! 왜 그래요! 아파아 "너 아까 한 말 진짜야?' 그는 너무 긴장해서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꽉던 팔목을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림 여기까지 와서 농담하려고 명마 한 마리를 통째로 넘겼겠어요?” "그런 일이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엥 ?” "내,내가 도울게 ! 돕게 해줘 !" "에엥 ?' 뭡니까, 이 극단적인 변화는, 나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세상만사 귀찮아 죽을 것 같았던 그의 반응이 폭발적인 걸 보고 의아해 했다. 혹시 내 웅변을 보고 감명받아 개과천선한 것은‥‥‥ 절대 아닐 테고. 아무튼 (일단 육체적으로) 든든한 아심이 도와준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럼 납치된 곳을 찾을 수 있어요?” “그, 그거야 모르지 ." “......” 역시 육체적으로만 든든한 쪽이었군. 사실 나는 아까 전에 방을 나오면서 찾을 방법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단지 그걸 실행할 수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아심이 도와준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도와준다고 했죠?” "그렇다니까 " "그럼 두목의 장부를 훔쳐와 주세요." "뭐어?” 그는 기가 찬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야!" 난 눈을 흘겼다. "이게 지금 목숨 아껴가면서 도울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아, 알았어 해볼게 그런데 그 장부는 왜? 거기에는 아무 기록도 없다고 두목이 말했잖아." "그리고 자기가 이 도시에서 모르는 일은 악투르 왕국과 연관된 것 뿐이라는 말도 했죠."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그는 뺨에 얼룩진 문신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그러니까 장부에는 악투르 왕국의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을 테고, 이 도시에는 있지만 장부에는 없는 곳이 바로 납치 곳일 테죠. 답이 아닌 나머지를 모두 제외하고 남은 것이 답, 이 방법이라고나 할까요." "그래. 그렇다고 치자, 어쨌든 내가 장부를 가져오면 되는 거지?” “‥‥‥‥그래요." 이해하고 싶은 욕구 자체가 없는 사람 같군. 아무튼 이론이 그렇다는 거고, 현실은 애매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까보다는 더 납치된 곳까지 접근한 셈이었다. 일단 한숨을 돌리고 나서, 아심에게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도와주겠다는 거죠? 혹시 왕국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고 싶은 애국자‥‥‥‥” "결혼할 수 있잖아." "네?” 뭐,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의 표정에서는 장중한 비장미마저 느껴졌다. "경찰만 보면 나도 모르게 도망쳐야 하는 나 같은 놈하고 누가 결혼하고 싶겠어. 하지만 왕자와 공주를 구해낸 용사가 되면,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어, 언제 거기까지 계산하신 겁니까," 이상한 쪽으로만 두뇌회전이 빠르군. 아니, 그보다 모든 결론이 죄다 결혼이라니 , 혹시 올해 안에 결혼 못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는 특이 체질인가? "너는 모를 거야. 우리 같은 전과자들도 애 낳아서 행복하고 평범하고 살고 싶어 한다는 걸.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게 평범하게 사는 거야. 평범한 결혼조차 여간해선 꿈도 못 꿔. 너희처 럼 사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변두리에 있는 우리들 심정을 몰라." 그는 빠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족을 구하는 거창한 일이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평범한 결혼도 못한다는 것, 그건 결코 웃기는 농담따위가 아니었다. 그제야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꼭 좋은 여자 만날 거예요!" "네가 여자였다면 좋았을텐데......" "쓰,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장부나 찾아와요!" 역시 이상한 사람이야! 12 나는 아심이 마련해 준 허름한 창고에서 그를 기다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예의 텔레-레이디의 말에 의하면 악투르로 국경을 넘는 것은 해가 진 뒤, 대충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작된다고 한다. 일단 월경을 시작하면 국경수비대의 눈을 피해 한 번도 쉬지 않고 안전한 곳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국경 수비를 강화한다는 왕실의 명령은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이미 악투르에 잡혀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때였다. "장부‥‥‥ 가져왔어." 소중한 보물처럼 장부를 곡 껴안은 아심이 문을 밀치며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괜찮아요?' 그 활화산 같은 덩치가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입가에는 피까지 고여 있었다. "무,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일은 무슨‥‥‥‥ 그냥 운동 좀 했어." 그는 내게 장부를 던져주고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며 넋두리를 늘어놨다. "아이고 머리야 목이야 팔이야 다리야 삭신이야. 살아 있는 게 실감이 안 나. 엄마가 날 단단하게 낳아 준 걸 지금만큼 고마워 해본 적이 없네." "혹시 훔치다 들켰어요?' "뭐?” "들켜서 싸운 거 아니냐고요." "어차피 쳐들어가서 빼앗아 온 건데 들키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다, 당당하게 쳐들어갔다고요f' 나는 두 가지가 어이가 없었다. 하나는 무식 찬란하게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러고도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뚝심과 파워의 화신이었다. 이거, 왠지 무라사씨의 축소판 같군. 그는 통증에 찡그린 피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밤까지 구해야 한다면서 언제 몰래 들어가서 훔쳐. 어차피 두목은 장부와 떨어져 있을 때가 없으니까 뚫고 들어가서 뚫고 나오는 것밖에는 방법 이 없어. 이제 나 이 바닥에서 살기 글렀으니까 책임져라." "아하하하, 무, 물론이죠." 나는 그에게 새삼 감동힌다. 아무리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건달들이 지키고 있는 장부를 혼자 싸워서 가져오겠다는 결심은 단순한 혈기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심은 지금 자기 조직까지 버렸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아득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거기에 있어봐야 천천히 썩어갈 뿐이니까‥‥‥ 썩을 바엔 온몸을 던지는 게 나아." 생각보다 굉장한 사람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는 진짜 운이 나쁘다고 투덜거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역시 나는 운이 좋다. 이런 음습한 곳에서 아심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대단한 행 운아다. "하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움직이기도 힘든 것 같은데 "괜찮아. 손자만 볼 수 있으면." “......” "손녀도 좋고." "벌써 거기까지 상상하고 계신 겁니까." 이 앙반의 결혼에 대한 집착은 일종의 광기로군. 무엇보다 피투성이가 돼서도 그런 말을 개그가 아니라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무튼 이런 시시한 일로 노닥거릴 시간 따위 없으니까, 왕실을 버린 나와 조직을 버린 아심은 즉시 장부를 펼치고 이 흉악 범죄달님 납치사건' 을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를 끼웠다. 13 해가 막 떨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솎아내고 솎아낸 끝에 의심스러운 한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말 장부에 적혀 있지 않은 곳은 여기 밖에 없었고, 이미르 두목의 손이 닿지 않는 곳도 이곳뿐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미온. 이, 이곳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하지만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확실한 증거가 그앞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여기에 왕지럼과 공주님이 납치되어 있는 걸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이곳은 바로 베르스 왕국의 관문 경비대 본부였던 것이다. 새하얗고 육중한 건물이 마치 가혹한 위정자처럼 우뚝 서 있었고, 주변의 방책들은 꼭 백상아리의 송곳니 같았다. 관문을 통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곳이니까 '많이 애용해 주세요.' 라는 친절하고 상냥한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없겠지. 문제는 이런 국가기관에 왕자님 공주님이 납치되어 있다는 확신은 차마 하기가 힘들었다는 거다. 아심이 사마귀 앞의 무당벌레처럼 커다란 덩치를 움츠리며 말했다. "만약 여기 있다고 쳐도 말이지 , 난 여기 들어갈 수가 없어. 지은 죄가 좀 있어서 들어가자마자 잡힐 게 뻔해. 몰래 숨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도 아니고." 아심은 말이 옳았다. 조직원이었던 아심이 출입할 만한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들어갔다간 쫓겨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두터운 철문 앞에 쓰여 있는 '관계자 외 출입 엄금' 이라는 경고문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는 두터운 팔짱을 끼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에이 쌍. 눈앞까지 와서 또 일단 정지로군, 들어갈 수가 있어야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기라도 할 거 아냐. 씨부럴. 쌩고생 해놓고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거 참. 말투가 그러니까 자꾸 여자와 멀어지는 거라고요. 그 순간 나는 험악한 그의 표정과 문신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면 들어갈 방법 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14 그리고 우리는 당당하게 경비대 정문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초소 경비병들이 곧바로 창을 들이댔다. "정지! 이곳은 통제구역이다!신원을 밝혀 !" "왕실 기사 엔디미온 키리안." "용무는?” "국경을 몰래 넘으려던 이 녀석을 우연히 발견해서 체포했다. 이 죄인을 이곳에 넘기러 왔다. " "횃불 앞까지 걸어 와라 " 꽤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그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우리를 겨눈 채로 말했다. 나는 밧줄에 묶여 있는 아심을 끌고 다가갔다. 그들의 눈빛이 커졌다. "아심! 네놈이로구나! 언젠가는 잡힐 줄 알았지! 이 망할 자식!" 당신, 정말 저지른 일이 많은가 보군요.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군인들이 왜 저렇게 이를 가는 건가요?” "예전에 저놈들 면상을 몇 대 갈겨 준 적이 있거든 하도거만하게 굴기에 홧김에‥‥‥‥” "저 녀석들한테 넘기면 곱게 가두진 않을 것 같네요." "말했잖아. 예쁜 마누라만 얻을 수 있으면 상관없다고. 이런 짓까지 했는데 정말 결혼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왕실 브랜드를 믿으세요." 그리고 나는 군인들에게 그를 넘겼다. 아심이라는 선물을 들고 온 덕분에 그들은 경계를 푼 것 같았다. "이 무지막지한 놈을 어떻게 잡은 겁니까?” 내 호리호리한 몸을 훌어보는 그들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를 쓰면 됩니다. " 경비대 입성 성공 15 본부 내부는 생각보다 안락했다. '대흉악범 아심'을 잡은 공로로 응접실로 초대받은 나는 먼저 그곳에 와 있던 두 명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이곳에 순시를 나온 하급 치안 장교였고, 나머지 한 명은‥‥‥‥ "네놈이 왜 여기 온 거냐!" 나를 보고 대번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콧수염의 사내는, 한참 잊고 있었지만 바로 헬스트 나이츠의 블리히 경이었다. 기사단장 자리 서 밀려난 다음부터 영 보이질 않더니 하필 이럴 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블리히 경이야말로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냐!" 음,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날로 먹는 것 좋아하는 블리히 경이 좌천된 다음부터 성실하게 살겠다고 마음먹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업무를 본다는 것은, 왕실 공무원들의 유구한 복지부동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헬스트 사건 수사로 정신이 없어야 하는데 왜 이런 데서 노닥거리고 있는거지? '설마 블리히 경이·‘ 왕족 납치를 저지르려면 사전에 누군가를 매수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혹시 블리히 경이 매수된 것이 아닐까! 그때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전형적인 군인처럼 생긴 자였다. "엔디미온 경이시오. 본관은 이 지역 관문을 책임지고 있는 어니스트외다. 왕실 기사가 죄인을 손수 잡아오다니 영광이오. 내 정말 감사드리오." 말은 좋았지만 그의 얼굴은 영 탐탁찮아 보였다. 귀찮으니까 빨리 사라져 줘, 라는 표정이랄까. 나는 그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만약 이곳에 왕자님과 공주님이 납치되어 있다면 분명 그는 매수된 것이다. 어니스트는 의자에 앉아있는 블리히 경에게 다가갔다. "경께서도 매번 이런 누추한 곳을 찾아주셔서 무척 노고가 크시오. 이건 약소하나마‥‥‥‥”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서는 블리히 경에게 건네주는 게 아닌가! 설마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영양만점의 강낭콩은 아닐 테지, 블리히 경은 그걸 잽싸게 집어넣으며 느끼한 미소를 보였다. "허허 , 뭐 이런 걸 매번‥‥‥‥ 국왕 전하께서도 항상 귀관의 성실함을 높게 평가하고 있소." 믿을수가 없어. 이럴 때까지 뇌물을 받아먹고다닐 줄이야 같은 기사라는 게 창피해 죽겠어 ! 옆에서 서류를 훑어보던 퉁퉁한 치안 장교는 이 뻔뻔한 광경이 불쾌한 듯이 헛기침을 했지만 곧 모른 체하고 서류만 바라봤다. 왕실 기사를 질책해 봐야 자기만 피해보기 때문이리라. 어니스트는 너 줄 돈까지는 없어, 라는 눈치로 힐끔 나를 보더니 '차 한 잔 즐기고 가시오.본관은 바빠서 이만' 이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군인들이 준비하는 음식 냄새가 문밖에서부터 풍겨왔다. 슬슬 저녁시간, 이제 '국경을 몰래넘을 시간에가까워 지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어려 보이는 당번병이 가져온 홍차를 마시려던 찰나, 갑자기 블리히 경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이런 경솔한 놈! 뻔뻔하구나!" "뭐?” 나는깜짝 놀라 블리히를 바라봤다. 왜 광분하는 거야! "지금 시기가 어느 땐데 이런 곳에서 딴 짓 하고 있는 거냐! 근무 태만에도 정도가 있다!" 내가해주고 싶은 말은 모조리 해버려서 난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나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뇌물 먹었으면 곱게 좀 사라져 줘! 제발 방해하지 말라고! 그러나 그는 나하고 전생에 무슨 윈한이 있는지 끈덕지게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수치스러운 녀석 ! 느긋하게 차나 마시는 꼴을 도저히 봐줄 수 가 없군!따라 나와! 네놈에게 기사의 근본이 어떤 건지 가르쳐 주겠다!" 나는 환장할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다. 만약 왕자님과 공주님 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네놈 책임이야! 하지만 그는 결국 그 우악스런 힘으로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16 응접실 근처에 있는 빈방까지 끌려온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치켜 올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당신이 뇌물 먹은 걸 왕실에 보고할까봐 그러는 겁니까?” 당번병의 침실 정도로 쓰이는지 몇 개의 야전침대가 놓여 있는 이곳은 해질녘의 어스름한 빛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까지 닫았다. 이제는 겨우 서로의 윤곽만 보였다. "무,무슨 짓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어둔 방을 울렸다. "여긴 왜 왔냐." 난 그가 매수되었을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마침 테이블에는 제식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슬쩍 다가가면서 대답했다. "국경을 넘으려던 흉악범을 잡아서 왔다고 아까 듣지 않았습니까?” 블리히도 검을 차고 있다. 여차하면 선공으로 베어버린다. 그런 각오를 품었다 그가 말했다. "진짜 여기 왜 왔냐?” 나는 점점 어둠 속에 적응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를 보아왔지만 지금처럼 진지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나는 빠르게 생각한 끝에, 일종의 암호를 던졌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아주 소중한 거라서‥‥‥‥ ” 그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 사이로 슬쩍 밖을 훑어 본 후에 말했다. "나도 같은 이유야." “‥‥‥‥!"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온 황혼이 블리히 경의 얼굴을 훑었다. 아무리 폼 잡아도 결코 멋져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다. 설마 블리히 경도 이곳에 왕자님과 공주님이 납치되어 있다는 추리를 한 건가?설마! (무시하자는 건 아니지만)그렇게 똑똑했어? "어째서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가 중얼거렸다. “넌 부명히 골칫덩어리지만 적어도 악투르에 매수될 녀석은 아니니까. 난 누가 매수될 사람이고 아닌 사람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지!” 멋진 말이라고 하기엔 대단히 민망했다. 호걸이 호걸을 알아본다고, 결국 자기 자신부터 뇌물을 주고받는데 능통하다 보니까 매수가 통할 사람과 아닐 사람을 알아본다는 거잖아. 그건 정말 블리히 경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육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제와 한 가지 확실한 건 블리히는 지금 매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매수된 사람이면 굳이 그런 말 할 리가 없으니까.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헬렌, 그 여자한테 기사단장 자리를 빼앗긴 다음부터 난 기사단내에서도 철저하게 무시당했어. 그리고 지금 이 납치사건 수사에도 끼어주지 않았지." 그릴 만도 할 것이다. 블리히 경은 인덕이 좋아서 기사단장까지 오른 것이 아니니까 직책이 사라지자 기사들이 무시하고 깔보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든 이 사건을 내가 해결해서 다시 기사단장 자리에 오르고 싶은데 수사에 끼지도 못해서야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러던 차에 카론 군이 나갔다는 말을 듣고 몰래 그의 집무실에 들어갔네. 참고할 단서가 없을까 찾아보려고. 그 녀석은 도무지 응통성은 없지만 그래도 수사능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뻔뻔해! 남의 자료를 멋대로 훔치려고 하다니. 하지만 그걸 따질 때는 아니라서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카론 군의 책상에는 추리한 것을 적어 놓은 종이들이 있더군. 다른 건 뭔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지만그끝에 이곳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건 알 수 있었지. 그리고 여기로 왔네 " 역시 여기를 찾은 건 카론 경의 추리 덕분이었군 블리히 경은 굵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확실히 수상해. 아까 그 어니스트라는 작자, 매수된 게 분명해 !" "어, 어떻게 그렇게 단정을‥‥‥‥ "왜냐하면 내게 평소처럼 뇌물을 줬기 때문이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지금 말을 잘못했거나 너무 고차원적인 추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게 어쨌다는 거죠? 평소처럼 준 게 뭐가 잘못된 건지‥‥‥‥ .” "자네 참 답답하군! 예전까지는 내가 기사단장이었으니까 뇌물을 줬지만 지금은 좌천되었는데 뭐 얻을 게 있다고 주겠나. 어림도 없지! 그건 공무원의 사회의 기본 중 기본이야." 기본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자네가 봤듯이 어니스트는 내가 말도 안했는데 전보다도 많이 줬어." "그, 그게 뭘 의미하죠?” “빨리 먹고 꺼지라는 의미지. 콩고물 먹으러 온 놈은 그거 주기 전까지는 계속 눈치를 주면서 뭉그적거리거든 말하자면, 오늘 왕실 기사가 이곳에 있는 게 싫은 거지." “‥‥‥‥ !” 이럴 수가. 맨날 콩고물만 바라는 타락한 마음을 이 정도 추리로까지 승화시키다니! 놀라워. 대단해. '부패 탐정 블리히' 라고 소설하나 만들어도 되겠어. 이건 정말 카론 경도 할 수 없는 블리히 경만의 추리 스타일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정보도 제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왕자님과 공주님은 이곳 어딘가 잡혀 있는 게 분명하고 잠시 후에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 악투르로 넘어갈 겁니다." "어, 어째서 ?” 역시 뇌물 쪽을 제외하면 영 수사력이 떨어지는군. "당연하잖아요. 엄청나게 느긋한 성격의 납치범들이 아닌 이상에야 한시바삐 목적지까지 가고 싶을 거 아닙니까. 일단 이곳 관문만 넘어가면 납치는 성공한 거고, 관문 책임자 어니스트가 매수되었다면 국경을 넘는 건 일도 아니겠죠." "그렇군! 그럼 당장 막아야 해! 여기서 놓치면 내 출셋길이, 아니, 왕자님과 공주님을 구할 길이 막막해진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블리히 경과호흡을 맞추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동병상련이라고 왕실에서 무시당한 우리들은 서로 철저하게 상부상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왕자럼과 공주님을 위해, 블리히 경은 출세를 위해, 그리고 아심은 결혼 때문에‥‥‥‥ 에 이이! 이러니까 하나도 비장해 보이지 않는군! "그런데 납치범들이 원하는 게 뭘까요? 요구할 게 있어서 납치했을 텐데‥‥ 역시 돈인가?” "자네 아직 모르고 있었나?' "예?” 블리히 경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지금 악투르가 왕실에 말한 요구 조건은 우리나라 남쪽의 도시 여섯 개를 내놓으라는 거야.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 같으니라고!" "도,도시 여섯 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일단 그 규모 자체가 너무 크고, 남부의 도시들은 모두 악투르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변방 도시들이다. 그런 거점들을 집어삼킨다면 악투르는 단번에 왕도 아스말까지 밀고 들어을 수 있는 발판이 생기는 거였다. 나라를 내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왕실은 지금도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중이야." "모여서 한숨만 내쉬고 있을 바엔 한시라도 더 빨리 구하는 게 더 현명해요." "당연하지! 그래야 나도 다시 출세할 수 있고!" "모,목적이 확실해서 보기 좋군요." 나는 떨떠름하게 웃은 뒤에 말했다. "그럼 가셔서 어니스트를 붙잡아 두세요. 어떻게든." "음, 그건 어렵지 않아. 좀 더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면 되겠지?” “‥‥‥‥아 네. 그건 뭐 알아서 하시고, 저는 그 사이에 납치된 곳을 찾겠습니다. 분명 관문과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까." 나는 테이블에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밖으로 나가려던 내게 블리히 경이 말을 던졌다. "난 네놈이 싫다. " "새, 새삼스럽게 뭘‥‥‥‥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안다. 나는 카론 군처림 청렴결백하게 사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솔직히 말해서 노력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뭐가 더 중요한 건지는 알고 있어, 돈 때문에 나라를 팔 정도로 썩진 않았다. 이래봬도 난 명문가의 기사니까." 블리히 경은 긴장강 때문에 몸이 굳어 있었지만 그래도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영웅일 수는 없어도 적어도 항상 인간일 수는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카론 경과 블리히 경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7 일반 병사들까지 매수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지나치다 마주친 병사들은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귀빈으로 착각하고 경례까지 붙이는 녀식도 있었다. '어디쯤에 있을까.' 감옥? 아니 , 그건 병사들 눈에도 띄는 곳이므로 패스. 그럼 창고? 험악한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지키고 있다면 자연스럽지 못하니까 이곳도 패스. 그곳도 아니라면 어니스트의 집무실? 일일이 이곳까지 끌고 왔다가 다시 데려갈 리도 없으니까 패스. 그럼 답은 딱 하나다. '계속 마차 안에 잡아 뒀겠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본부 뒤로 나가 관문 쪽의 도로로 향했다. 그 도로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어니스트의 명령으로 관문을 열고 나갈 수 있게 만든 곳이었고, 또한 관문 너머는 악투르 왕국의 영역이었다. 태양이 자취를 감춘 관문 앞은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경비병들마저 없었다. 아마 은밀하게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병사 모두를 (무슨 이유를 붙여서)치워둔 것이리라 빌어먹을, 관문을 지키는 자가 악투르와 내통하는 배신자였다니 !화가 나기 이전에 이 나라의 국경이 얼마나 허술한지 한심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내가 찾아낸 것은 낮에 도시에서 나를 치어 죽일 뻔했던 바로 그 검은 마차였다 이제 모든 것은 확실했다 나는 소리 없이 검을 뽑아 칼집을 바닥에 살짝 내려놓은 뒤에 천천히 그곳에 다가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있다면 마차 안에 있을 감시원 정도일 것이다. '필요하다면 죽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난 태어나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그리고 카론 경이나 키스 경처럼 필요하면 냉정하게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왕자럼과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상대의 심장을 일격에 찌를 결심이 필요했다. 그 뒤에 마차를 몰아 단숨에 이곳을 빠져나간다.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끝내야만 했다. 블리히 경이 어니스트를 잡아두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시간은 별로 없다. 긴장한 탓인지 쌀쌀한 날씨인데도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검을 꽉 쥔 채로 몸을 숙이고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뻗어 마차의 문고리를 잡았다. '하나,둘‥‥ 셋!' 곧바로 문을 열어젖힌 나는 비호처럼 뛰어들었다. 감시원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왕자님과 공주님도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그때 등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큭, 내 그럴 줄 알았지." 나는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려 자세를 취했다.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통통한 남자는 바로 아까 블리히 경 옆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하급 장교였다. 블리히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신경도 못쓴 녀석인데 하필이면 저놈이 !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자들이 하나둘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쥐새끼 한 마리가 다 된 밥에 재 뿌려서야 곤란하지.” "배신자는 어니스트가 아니라 네놈이 었냐!" "어니스트? 그 우둔한 친구 말이로군 매수되긴 했지. 다만 이 마차를 타고 악투르로 갈 사람이 왕족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만.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갔기 때문이야. 참고로 말하자면 나 말고도 매수된 자들은 많아. 가령 예를 들면‥‥‥ 왕자와 공주를 경호했던 근위대 대장이랄까? 와하하하!" "더러운 놈!" 그때 관문 식당에서 불길이 오르며 요란한 굉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칼과 비명소리,폭발음, 기습이라고 고함치는 소리. 식사 중이던 경비대 병사들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쪽을 바라봤다. 매수된 장교는 그 불길을 지켜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뭐 불쌍하긴 하지만 확실한 게 좋은 거니까." "얼마에 매수된 거냐, 이 매국노!" "얼마? 내가 고작돈 몇 푼 때문에 이 일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나?” "그게 뭐든 간에 이런 짓을 정당화시킬 이유는 없어 !" 그는 죄책감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는지 연신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구역질이 나는 놈이었다. "왕자와 공주를 되돌려 받는 조건으로 남부의 도시 여섯 개를 내준다. 너라면 응하겠나?” "절대! 그건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다!" 그건 나라를 내주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아무리 무능한 왕실 관료라도 그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불가능하지. 심장을 내놓는 것과 같거든." 나는 굳은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바라봤다. 이 일에는 분명 어떤 끔찍한 내막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랑스러운 듯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될 것 같나 응?” "그건‥‥‥ 전쟁?” 베르스의 선택은 그것밖에 없었다. 악투르 왕국과의 전면 전쟁,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왕족이 잡혀갔다면 명분 또한 확실하다. "그래, 전쟁이야. 이미 에스테반 테시테리오 남작이 이끄는 부대가 이곳으로 남하하고 있으니까. 지금쯤 모든 영지에 징집명령이 떨어졌겠군." "건방떨지 마! 베르스와 전면전을 붙어서 이길 것 같아?노략질밖에 못하는 녀석들 주제에!" 솔직히 반쯤은 허세였다.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면 싸우는 방법 외엔 없고, 싸운다면 결코 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한 마디 더 해줄까? 방금 전 이오타 왕국이 이 나라에 군사 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 " “......!” 군사력 차이가 우리나라의 백배 이상인 이오타가우리를 지원한다면 당연히 악투르 왕국에는 아무런 승산도 없다. 그런데 그게 뭐가 즐거워서 히죽거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빠르기로 소문난 이오타 기병대가 국경선을 넘어 이곳에.내려올 때까지 사나흘이면 충분하겠지, 알다시피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부대야." "흥! 그럼 네 녀석들의 목숨도 이제 사나흘밖에 안 남았다는 의미로구나! 그게 뭐 신나서 웃고 있‥‥‥‥ 나는 말을 흐렸다. 눈이 흐려지고 표정이 창백해져갔다.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이런 상황을 기뻐할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제 베르스는 국경을 열고 정말 고맙다면서 이오타의 군대를 받아들이겠지. 이오타의 대군은 왕도 아스말까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갈 수 있을 거고.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생각을 바러 베르스를 치기로 마음먹는다면? 몸속에 들어간 폭탄이 터진 것과 같아. 하루도 못 버텨. 큭큭큭."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납치 사건의 배후에 있는 게‥‥‥ 이오타 왕국이었나." 그는 대답대신 커다랗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오타가 단숨에 베르스의 숨통을 끊고 우리 악투르가 침공해서 베르스를 삼키면, 나는 그 대가로 이 지역의 영주가 되기로 약속받았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배신할 만한 가치가 있지?” "하지만 어째서‥‥. 이오타는 평화 회담에도 참석한 우리 우방인데." "너는 태어나서 한 번도 친구에게 배신당한 적이 없나 보지?” "이오타에게 우리나라 정도는 보잘 것 없이 작은데, 어째서 악투르와 손잡으면서까지 이 러는 거냐!" 생각할 것도 없다. 어린애 사탕 하나 빼앗으려고 총을 뽑아드는 꼴이었다. 쇼메의 말마따나 이런 작은 나라는 원하면 다 사버려도 되는 수준이다. 납치같이 치졸한 짓은 프라이드가 강한 쇼메의 스타일이 아닐뿐더러 이런 짓을 저지르면서까지 탐을 낼 이유도 없는 것이다. "악투르는 베르스를 먹는 조건으로 이오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말하자면 악투르와 이오타는 한 나라가 되는 셈이지, 간단한 지리 공부하나 해볼까? 악투르 밑에는 어떤 나라가 있지?”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콘스탄트." "이오타의 군대는 곧바로 북부 콘스탄트를 칠 것이다! 그곳의 군 대는 남부 콘스탄트와 내전을 하느라고 북쪽에는 수비군이 별로 없으니까, 등을 찔린 기분이 들 테지. 말하자면 베르스는 북부 콘스탄트를 치기 위한 교두보가 되는 셈이야! 하하하!" 그는 자기가 이오타의 국왕 빌헬름이라도 된 양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나는 이 납치가 세계적인 분쟁의 씨앗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을 대충 지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이오타 // 베르스 악투르 북부 콘스탄트 (물론 국가 크기는 무시한 개념도지만)보는 바와 같이 이오타는 베르스와 악투르만 통과하면 곧바로 북부 콘스탄트 국경선에 도착한다. 타국 군대가 자기 나라 통과하는 걸 눈 뜨고 지켜볼 국왕은 아무도 없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이오타의 대군은 일주일 안에 북부 콘스탄트를 공략할 준비를 마칠 수 있다. 그리고 저 지도를 보면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는 믿고 싶지 않은 그 예측을 중얼거렸다. "설마, 남부 콘스탄트도 이오타와 손잡고 있는 건가." 이오타와 남부 콘스탄트가 손을 잡고 남북에서 공격해 들어오면 북부 콘스탄트는 (아무리 키르케님이 있다고 하더라도)오래 버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북부 콘스탄트가 멸망하고 이오타와 람부 콘스탄트가 연합을 하면 마키시온 제국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진다. 그건 세계대전을 의미했다. "생각이 많은 놈이로군 뭐, 어차피 죽을 놈이 머리 써서 뭐하겠어. 처리해." 그가 턱으로 날 가리키자 악투르의 특수 부대쯤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내게 다가왔다. 특히 그중에도 오른쪽 눈을 거친 상흔이 대신 하고 있는 외안의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잔인한 미소를 띤 그들은 내 머리칼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커다란 주먹이 내 복부에 꽃혔다. "아악!" 배가 뚫리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다. 눈앞이 흐려지며 다리가 풀렸다. 하지만 그들은 날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계속 주먹을 날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기가 싫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눈물이 맺혔다. 그들은 전리품이라도 얻은 양 내 머리칼을 잡아 올리며 그런 내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하하! 이런 게 기사라니, 역시 베르스의 놈들은 약해 빠졌구나!" "시간 없어. 그만 장난치고 죽여 버려." 배신한 장교는 목을 긋는 시늡을 했다. 나는 그를 죽일 듯이 쏘아 봤다. 그때 예의 오른쪽 눈을 잃은 사내가 말했다. "이 자식, 악투르로 데려갈 거요." "보르츠! 무슨 소리야!" "내 영주가 이런 곱상한 놈을 좋아해서 말이지. 뭐, 여기 온 기념품 정도랄까." 혼미한 정신 속에서 그들의 말이 윙윙거리며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넌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긴 하는 거냐! 당장 죽여!" “나한테 명령하지 마! 돈에 조국을 배신한 돼지 새끼. 목적이 같아서 돕기는 하지만, 우리 용맹한 악투르 전사들은 너 같은 썩어빠진 종자들을 가장 경멸한다. 모가지 따버리기 전에 아가리 닥치고 있어 !" 보르츠라는 이상한 이름의 남자는 질색이라는 듯이 침을 뱉고 있었다. "젠장! 맘대로 해 ! 싸움밖에 모르는 무식한 것들!" 하하‥‥‥ 살았네. 이거 내가 기뻐해야 하나. 너무도 분한 맘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다가와서는 다급하게 보고했다.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 “뭐야?” “베르스 왕실이 이오타의 군대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남하하던 에스테반 남작의 부대가 회군하여 이오타 국경선 쪽으로 전속 진군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돼. 우둔한 왕실 놈들이 어떻게 그런 예측을‥‥‥‥ ” “아이히만 대공이 돌아왔습니다.” “‥‥‥!” “지금 그가 진두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빨리 이곳을 떠야 합니다!” “빌어먹을! 어쨌든 예정대로 왕자와 공주를 악투르로 데려간다!”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요 철혈 할아범‥‥‥ 나는 고개를 꺾은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 뒷머리에 둔탁한 충격을 느꼈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18 하루? 혹은 이틀?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아심은 괜찮을까? 블리히 경은? 아심은 그 아수라장에서 어찌 보면 가장 안전한 감옥 안에 있었으니까 안전할 것 같고, 블리히 경은 몸보신에 일가견이 있는사람이라서 왠지 무사히 도망쳤을 것 같다. 그럼 왕자님은?공주님은?단편적인 상념들이 이리저리 떠다닌다. 머릿속은 오랫동안 치우지 않은 방처림 눅눅하고 어지러웠다. 줄곧 묶여 있었나 보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이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뒤로 꺾여 결박된 두 팔은 움직일 줄 몰랐다. 나는 조금씩 눈을 떴다 강렬한 햇빛이 눈을 찔렀다. “아으으윽.” 가슴이며 어깨가 너무나 아파서 신음소리를 뱉어내며 몸을 떨었다. 공기가 건조했다. 베르스에서는 맡아본 적이 없는 느낌이다. 악투르에 온 것일까. 바닥은 메마른 지푸라기로 가득했고 눈앞은 두터운 철장이 세로 줄을 긋고 있었다. 감옥이었다. “정신이 드나.” “누,누구?” 갑작스런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벽에 붙어 있었다. “카른 경!” 평소와 달리 헝클어진 머리에 찢겨지고 피에 물든 제복이 보였지만 표정만큼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차갑고 이지적인 그대로였다. “카론 경도 잡힌 건가요?” “잡힌 게 아니라 잡혀준 거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이 곧바로 내 말을 정정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괜한 허세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그는 정말 무슨 계획이 있어서 이렇게 잡힌 것 같았다. 나는 너무도 생소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감옥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죠?” “악투르 왕국. 요새 도시 우르콰르트.” “역시 악투르까지 왔군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다가 눈이 번쩍 뜨여 카론 경을 바라 봤다. 우르콰르트는 분명히 납치된 이멜렌 님을 카론 경이 구출했다던 그 도시? 이놈들은 납치했다면 모조리 이곳으로 데려오는 거야? 아니 , 그보다 카론 경은 이곳에 온 게 두 번째일 테니까-꽤 운명이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이멜렌님을 구한 사람은 카론 경과 또 한 명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론 경. 지금 물을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예전 키릭스 경이라는.......” “지금 물을 말이 아니면 묻지 마라.”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찔끔했다.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 대해 저리도 차갑게 입을 다무는 걸까, 카론 경은 다친 몸이 아파오는지 묶인 몸을 움직여 좀 더 벽에 기대어 허리를 폈다 표정과숨소리에는 변화도 없었다. 이렇게 감옥에 잡혀 있는데도 그의 모습은 완벽하게 정련된 칼날처럼 날이 서 있었다. 굉장한 정신력이다. “카론 경, 이 일에는 매수된 자들이......” “알고 있다. 이오타의 계산도. 왕실을 떠나기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어.” 역시 블리히 경이 집무실에서 봤던 기록들이 그것이었다. 나 왕실의 관료들은 카론 경의 추리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방국 이오타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은 절대로 인정하기 싫었을 테니까. 하지만 안 믿는다고 사라질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이히만 대공이 이오타의 계획을 저지하고 있어요.” “역시 노련하군.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악투르는 왕자님과 공주님을 해치지 못해.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고, 기회가 닿으면 탈출해서 그분들을 구하겠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엔디미온 경.” “예?” “만약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자네가 그분들과 함께 이곳을 탈출해라." “하,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명심해라.” “......네.” 지금은 결코 녹록한 상황이 아니다. 왕실은 저 멀리 있고 왕자님과 공주님을 구할 유일한 희망은 적 도시 한복판에 잡혀 있는 두 명의 기사뿐이다. 도와줄 사람은 없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예전부터 내가 원하던 ‘정의의 기사’가 된 것이지만 기쁘다기보다는 말 못할 중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도무지 카론 경처럼 냉정하고 침착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불안감에 몸을 꼼지락거리는 나를 슬쩍 본 카론 경이 중얼거렸다. “목표로 가는 과정에 지옥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건가.” “돌아서 갈 방법은 없나요?” “없다. 포기하고 돌아가든가 뚫고 나가든가 둘 중 하나라면.” “그럼.... 지옥을 건너겠습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가 말했다. “이곳은 적어도 지옥보다는 낫다. 안심해라.” 그 무뚝뚝한 말이 내겐 굉장한 격려가 되었다. 그의 확고한 의지를 조금은 수혈 받은 기분이었다. 손대면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카론 경을 보면서 감탄스럽다가, 곧 웃음이 나왔다. 참 묘한 배려심이지 않은가. “호오오, 그거 지금 절 격려해 주신 말인가요? 그런 무서운 표정으로?” “그, 그냥 생각나서 한 말이다. 내가 뭣 하러 자넬 격려하나!” “헤헤, 격려 감사합니다 아, 엄청 자상하시네요오.” “큭! 키스 밑에서 이상한 것만 배워서는!” 그는 빨개진 얼굴을 돌렸다. 헤에, 의외로 이 사람한테도 귀여운 면이 있어. 아무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저 절대 영도의 벽에 금을 가게 만드는 위크포인트는 키스 경이로군. 그때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서너 명의 무리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거친 음식들이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쟁반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사나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 봤지만 카론 경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맛있게 먹어두는 편이 좋을 거야. 오늘이 지나면 너희들은 사자밥이 될 테니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카론 경은 들은 척도 안하는 것 같았다. 정말 저 배짱, 무서울 정도야. 세상에는 안전할 때만 강해지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구둣 발로 묶여 있는 카론 경의 어깨를 짓밟았다. 옆에 있어서 잘 못 봤는데, 카론 경의 왼쪽 어깨에는 칼에 베인 심한 상처가 있었다. 그걸 밟고 비벼대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이 예전 이곳에 와서 보르츠의 한쪽 눈을 찢어버렸다는 게 믿겨지질 않는군. 정말 그런 가느다란 몸으로 싸움을 할 수 있는 거냐?” 보르츠라면 (그러니까 영주인가 하는 놈한테 넘기려고)나를 여기 잡아왔던 애꾸눈? 반쯤 미친 것 같은 과격한 놈이었는데-이멜렌님을 구하기 위해 왔을 때 그의 눈을 그 꼴로 만든 사람이 바로 카론 경이었던 것이다. 말을 들어보니까 여기서는 상당한 역량을 가진 잖 인 것 같았다(악투르에서는 기사 대신 전사라고 부른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카론 경은 빈정거리는 이놈들에게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도 않은지 천천히 눈을 치뜨며 새파란 빛이 서린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봤다. 특별히 쏘아본 것이 아닌데도 그들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솔직히 옆에서 보고 있던 나도 좀 오싹했다. 묶여 있는 상대의 기에 눌린 그들은 스스로 창피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흥. 보기보다 눈이 사나운 놈이로군. 조만간 그 눈에서 자비를 바라는 눈물이 흐를 거다!보르츠가 널 으깨버리려고 벼르고 있어!”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잔뜩 성질이 오른 보르츠가 철창문을 덜컥 걷어차며 들어왔다. 눈가를 일자로 긋고 있는 거친 상흔이나 바짝 깎은 머리, 흋터투성이의 근육질은 완전 카론 경과는 정반대의 인간이었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무서운 검술의 소유자라는 것일 테지. 보르츠가 들어오자 다른 자들은 곰을 만난 족제비들처럼 슬금슬금 감옥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내게는 전혀 관심도 없었고 단지 카론경 앞에 놓여 있던 식사를 내려보다가 으르렁거렸다. “먹 어.” 그는 카론 경을 본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머 오른 듯했다. “여기 잡혀 와서 한 끼도 안 먹었군 당장 먹어. 난 네가 최상의 상태일 때 결투하고 싶다.” 뭐? 결투? “내일 오전, 이곳 콜로세움에서 너와 일대일로 싸우기로 결정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널 죽이고 내가 최강이라는 걸 증명하겠다.” 상식 밖의 말이라서 나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보르츠는 상처 입은 오른쪽 눈을 손으로 가린 채 야수처럼 카론 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네놈이 날 이겼다는 것, 나는 절대 인정 못해. 제대로 다시 한 번 싸워 보자. 약속하지. 네가 이기면 널 풀어주겠다.” 엄청난 투쟁심이었지만, 카론 경은 그 광기에 휘말리지 않고 무정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날 풀어주면 네 입장이 곤란해질 텐데?” “흥! 여전히 건방지군! 어차피 넌 네 손에 죽을 테니까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 네놈과 싸우는 것은 아무도 방해 못해! 그때는그 빨간 눈동자의 악마놈이 네 옆에 있어서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네놈 혼자 날 이기는 건 절대 불가능해.” 빨간 눈동자라니, 설마 그 ‘악마’는 키릭스 세자르를 의미하는 것일까. 문득 키스 경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에게 악마라는 섬뜩한 칭호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지만. 머리가 복잡했다. 카론 경은 엉뚱한 말을 했다. “그분들은 잘 계시나?” “잘났군! 끝까지 구해보겠다 이거냐? 이런 적진 한복판에서 그게 가능할 것 같아?” “해보면 알겠지.” 카론 경은 눈앞의 음식을 발로 밀며 읇조렸다. “계속 날 무시할 생각이냐. 네 아내를 욕보인 장본인이 바로 난데도?”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그는 비웃음을 보이며 집요하게 카론 경을도발하고 있었다. 카론 경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봤다. 긴 흑발이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네놈이 싸울 생각이 있든 없든 그건 알 바 아냐! 내일 오전, 난 네 녀석을 죽여 버리고 명예를 되찾을 것이다. 죽을 준비를 해라!” 보르츠는 그렇게 쏘아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카론 경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봤다. 뭐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카론경.어쩌다저런흉포한녀석과.....” 나는 말을 흐렸다. 지금 보는 카론 경의 눈빛은 정말 무섭게 달아 올라 있었다. 그 모습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눈앞에 누구라도 태워 버릴 것처럼 격렬했다. 저토록 분노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나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해 경직된 상태로 가슴만 두근거렸다. “엔디미온 경.” “아,네” “내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자기 분노를 추스르는 주문처럼 그렇게 중얼거렸고, 두 눈동자 속눈썹 밑에 맺혀 있는 시린 살기는 천천히 슬픈 빛으로 변해 가다가 이내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는 겨우 겨우 억눌렀던 것이다. 자기 아내를 범한 자가 눈앞에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이성을 잃을 일이다. 죽여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왕자님과 공주님을 구해야 하는 기사라는 입장 때문에 그 격한 분노를 억지로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19 밤이 찾아온 뒤에도 카론 경은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았다. 사실 무척이나 배가 고팠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카론 경,정말 한 끼도 안 드신 거예요?” “먹고 싶으면 먹어라.” 그는 여전히 먹을 생각이 없는지 창밖을 바라보며 구출할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렇게 몸이 묶인 상태로 저걸 먹어야 한다는 것은 굴욕이다. 짐승처럼 직접 입을 대고 먹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론 경처럼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안 먹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가 조금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근은 토끼나 먹는 음식이야.” “엥?” 나는 의외의 말에 눈을 깜빡거리며 쟁반을 바라봤다. 정말 악투르 특산 매운 당근이 한 가득이었다. 다시 카론 경을 바라봤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 “......” 그거 알아요? 당신, 지금 굉장히 치졸해 보여! “결국, 당근 때문이었습니까?”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야. 당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상한 맛이 나." 그는 아무런 논리도 없는 말을 엄청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저, 저도 사람입니다만.” “흥. 그런 걸 먹으면 기분만 나빠진다.” “편식이 심하시군요.” 위크 포인트 하나 추가. 악투르 산 매운 당근. 카론 경을 묶어 놓고 강제로 당근스프를 먹이는 키스 경의 '냐하하하'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이거 웃어야 할지 애도를 표해야 할지...... “충분히 자둬라. 내일 움직인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나는 당근 요리가 전부인 쟁반을 한참동안 노려보며 저걸 먹어 말아, 라고 계속 고민하다가, 왠지 카론 경의 말을 듣고 나니까 나도 당근이 꼴도 보기 싫어져서 곧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졸음이 온다는 것은 나도 꽤 대담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곳, 우르콰르트에 있다 보니까나는 왠지 더 생생하게 예전 카론 경이 이멜렌 님을 구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때 카론 경은 막 이십대 였을 테고, 옆에는 나 대신 키릭스 세자르가 있었을 것이다. 그 광기어린 보르츠 조차도 치를 떨던 그 뛰험한 자는 대체 누구일까. 키스와 같은 성, 그리고 붉은 눈...... 그를 상상하자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들어 나는 생각을 멈추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카론 경.” ...... “그 보르츠라는 작자와 정말 싸울 생각이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겼으니까 지금도 이기는 건 어렵지 않을 테죠?” 카론 경이 슬쩍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혼자였다면 그때 보르츠를 이길 수 없었을 거다.” 나는 적잖게 놀랐다.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정말 키릭스라는 ‘악마’ 가 있었기 때문에 물리쳤던 걸까.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나는 몸을 웅크렸다. 악투르의 밤공기는 푸석푸석했다. 20 “엔디미온 경, 일어나라.” 카론 경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맙소사, 나는 내 몸에 칭칭 휘감겨 있는 긴 금발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적진에 잡혀 있는데다가 몸까지 묶여 있는 상황)에서 까지 이리도 자유분방한 잠버릇을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하면 묶일 수가 있지? 라고 끙끙거리며 꼼지락 꼼지락 머리를 풀고 있는 나를 카론 경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아이고, 이거 대단히 민망하네. 그때 예의 악투르 녀석들이 보르츠와 함께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죽을 시간이다!” 상큼한 아침인사와 함께 감옥에 들어온 그들은 나와 카론 경을 거칠게 일으켰다. 굳어 있던 다리에서 격통이 몰려왔다. 보르츠는 이미 갑옷까지 입은 상태였고 얼굴은 희열과 투지에 얼룩져 있었다. 그는 악인이라기보다는 광인이었다. “카론, 너도 갑옷을 입겠나?” “필요 없다. ” “오늘이 네놈의 마지막 날이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줄 용의는 있다.” “필요 없다.” 카론 경은 항상 똑같은 답을 도출하는 기계장치처럼 차갑게 거절했다. 카론 경 스스로도 혼자서는 이길 수 없었다고 말했던 보르츠라는 전사는 뜨거운 숨을 내쉬고는 앞장서서 나갔다. 인간의 것이 아닌듯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투기장으로 가자! 한시도 낭비하기 싫다!” 그때 부하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이놈은 어쩌죠?” “거기 내버려 둬. 영주한테 선물로 줄 녀석 이다.” 보르츠는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나는 곧바로 외쳤다. “나도 지켜보게 해 주세요!” “뭐?” 발걸음을 멈춘 보르츠는 몸을 돌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 봤다. “너 같은 놈이 전사들의 결투를 이해할 수나 있겠나! 닥치고 거기 있어.” “흥! 당신같은 고깃덩이가 은의 기사를 이길 수 있을까요?” “감히 이 새끼가......”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날 찢어죽일 것 같았지만 나는 계속 건방진 표정으로 비웃음을 보였다. “보나마나 비겁한 수법을 준비했겠죠. 왜냐하면 당신은 절대로 정당당하게 카론 경을 이길 수 없으니까!” “지금 나보고 비겁하다고 지껄였냐!” 그의 무서운 고함소리가 용의 포효처림 감옥을 울렸다. 나는 그 역린을 건드렸다. “좋아! 저놈도 데려와! 네놈의 눈으로 카론이 내 앞에 무릎 끔 모습을 똑똑히 확인시켜 주마! 그걸 보여준 뒤에 네놈도 내가 씹어 먹어 주겠다!” “하하하. 기대되네요!” 배짱 좋게 웃었지만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건 정말 살인 곰을 약 올리고도 살아남길 바라는 짓거리로군.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혼자 감옥 안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경기장으로 끌려가면서 카론 경이 심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엔디미온 경, 쓸데없는 도발은 자제해라. 안 그래도 벅찬 상대다.” “영주의 선물세트가 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21 악투르 인들의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투기장이다. 이 나라에서는 도시의 필수 건축물 중에 하나로, 심지어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콜로세움 없이는 못 산다’ 라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까지 존재한다. 물론 우리 베르스에도 투기장이 있긴 하지만(나도 관람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곳처럼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무규칙 사투는 아니다. 악투르 인들은 진정한 명예란 오직 목숨을 건 결투에서 얻는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었다. 투기장으로 향하는 어둑한 지하 통로에까지 관중들의 거친 환호성이 울리고 있었다. 개폐식 철망으로 막혀 있는 통로 끝에 서자 보르츠의 이름을 외치는 그 열광의 함성은 이미 전쟁과 다름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피를 원하는 맹수들 같았다. 묵묵히 걸어가던 카론 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많이 모였나 보군.” 보르츠는 입 꼬리를 올렸다 목소리는 폭력에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이지! 한 명에게라도 더 네놈이 내 발 밑에 무릎 꿇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이게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오늘로서 나는 내 명예를 되찾는 거다.” 그는 이미 승리를 음미하고 있었다. 철문이 진동하며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수천여 관중의 환호가 우리 몸을 뒤흔들었다. 카론 경은 싸늘하리만큼 침착한 모습 그대로 말했다. “그렇다면 경비병들도 다 여기에 모여 있겠군.” “그래 , 모두 소집했다.” “그거 다행 이군.” 그와 함에 카론 경은 (방금 전 풀어둔 것 같은) 포승을 바닥에 떨어 트렸다. 보르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카론 경이 격투에도 상당히 실력이 있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았다. 그와 함께 몸을 빙글 돌린 그는 팔꿈치로 옆에 있던 거한의 턱을 날렸고 긴 다리가 회전하며 당황하던 다른 녀석의 관자놀이를 찍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산사태가 난 것처럼 그들의 몸이 무너졌다. ‘세상에!’ 나는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아갈 수도 없었다. 카론은 곧바로 쓰러진 자의 검을 뽑았고, 그 즉시 제대로 칼을 뽑아들지 못한 다른 두 명의 목이 날아갔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를 묶고 있던 밧줄만 정확하게 잘랐다. 마치 마술과도 같았다. 아마도 카론 경은 어제부터 이 상황을 계속 머릿속에서 연습하고 있었을 것이다. “카, 카론 경.” “뭐하고 있나. 검을 잡아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왔던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보르츠는 괴물로 변신이라도 할 것처럼 격렬하게 몸을 떨며 소리쳤다. “카론! 네가 그리고도 전사냐!” 카론 경은 문득 발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긴 흑발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매에는 예의 시린 살기가 맺혀 있었다. “보르츠, 나는 기사다. 주군을 지키는 것만이 내가 검을 쓰는 유일한 이유다. 너의 하찮은유희에 일일이 동참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찮다고!” “하지만 잊지 마라 넌 내가 죽인다. 지금이 아닐 뿐이다.” 그리고 카론 경은 다시 달렸다. 보르츠의 성난 포효가 계속 들려왔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가장 싸우고 싶은 사람은 바로 카론 경일 것이다. 아내에게 몹쓸 짓을 한 보르츠를 처단하고 조금 이라도 그녀의 비극을 달래고 싶을 것이다. 나는 그가 그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시선만을 앞으로 향한 채 왕자님과 공주님이 있을 곳으로 말없이 달리고 있었다. 22 역시 카론 경은 10여 년 전 이곳, 우르콰르트를 침투했을 때의 기억을 완벽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두뇌는 이 거대한 성의 구조를 정확하게 레뚫고 있었고, 왕자님과 공주님이 납치되었을 곳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나라면 (설령 지도를 들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왼쪽!” “네!” 나는 그 바람 같은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성 전체에 비상을 알리는 격렬한 타종이 울리고 있었다. “누, 누구냐!” 보르츠의 말대로 병사 대부분은 지금 콜로세움에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경비병들은 카론 경을 단 한 번도 막지 못한 채 쓰러졌다. 자신의 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술은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카론 경이 예측한 곳은 나선 계단 꼭대기에 있는 첨탑 위의 밀실이었다. 문 앞에 도착해 경비병을 처치한 그가 뺨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예전 이멜렌을 가둔 곳도 여기였어.” 그렇게 말하는 눈빛에는 희미한 안타까움이 엿보였다. 그때 조금만 더 빨리 구했더라면 그녀가 그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카론 경은 두꺼운 나무문을 십자로 그었고 날카로운 검술이 단숨에 장벽을 무너트렸다. 그 문 뒤에는 떼어낸 의자 다리를 들고 우리를 노려보는 페르난데스 왕자님과 그 뒤에서 몸을 떨고 있는 제냐 공주님이 있었다. 한 모습의 왕자님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무 방망이를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카,카론 경. 엔디미온 경!”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제냐 공주님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우리를 보자마자 카론 경에게 달려가 다리를 껴안고는 커다랗게 울기 시작했다. 왕자님은 곧 평정을 찾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고맙소. 모두들.” 카론 경은 공주님을 들며 입을 열었다. “전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예의는 이후에 갖추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왕자님을 업었다. 본래 체구가 작은데다가 납치의 고초를 겪어서 그런지 별로 무게를 못 느낄 만큼 가벼웠다. 우리는 카론 경이 이끄는 대로 도주용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3 예상대로 우르콰르트의 내성 바깥, 그러니까 말과 마차가 있는 곳에는 이미 적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여길 지켜라!보르츠가 올 때까지 버터!” 야외로 나오자마자 화살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제냐 공주님을 업은 카론 경은 그걸 검으로 다 튕겨내며 혈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서너 명이 동시에 달려들자 그의 몸이 먼저 튕겨나갔다. “공주님 , 눈을 감아주십시오.” 카론 경이 착지하는 순간 그들의 손발이 날아가며 피가 터졌다 이렇게 말하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한 것 같지만 실은 나도 배후에서 몰려오는 자들을 젖 먹던 힘을 뽑아 막아내고 있었다. 이래봬도 상대방의 검을 끊는 기술 하나만은 확실하니까.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보는 왕자님은 굉장한 것이라도 목격한 듯이 감탄했다. “대단하오! 엔디미온 경의 검술이 이토록 훌륭한 줄은 몰랐소.” “헤헤. 명주작 님의 비공식 수제자니까요.” “"경들과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오.” 왕자님. 우리나라에는 저와 카론 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전과자임에도 목숨을 걸었던 아심도 있고, 빠른 판단으로 이오타의 계략을 간파한 아이히만 대공도 있고, 자신이 기사라는 사실만큼은 끝까지 지킨 블리히 경도 있습니다. 그렇게 호락호락 당 할 나라가 아닙니다. 심려치 마시길. 카론 경의 활약으로 우리는 더 많은 적들이 모여들기 전에 마차를 확보할 수 있었다. 얄궂게도 그건 왕자님과 공주님이 납치당했던 바로 그 마차였다. “타십시오. 그리고 엔디미온 경이 마차를 몰아라.” “카론 경은요?” 그는 대답 대신 성문 옆의 개폐 가동장치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마차 앞에 타서 고삐를 잡았다. 서서히 도개교가 내려오며 문이 열리고 있었다. “카론 경! 어서 타세요!” 그때 거친 함성과 함께 엄청난 수의 전사들이 통로 밖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을 잡아탔고 활시위를 당겼다. 쿠웅 소리를 내며 다리가 완전히 내려와 쭉 뻗은 길을 만들어냈다 나는 조급하게 소리쳤다. “카론 경! 어서요!” 하지만 그는 타지 않았다. 대신 그 시린 눈동자로 몰려오는 자들을 향해 걸어가며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나는 직감했다. 그의 무섭도록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투르의 기병은 빠르다. 마차로 따돌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여긴 내가 막고 있겠다 먼저 가라.” “카론 경!” “약속하지 않았나. 내게 문제가 생기면 자네가 그분들을 지키겠다고.” 카론 경은 처음부터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 저 많은 병력을 막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래도 카론 경이라도 막아낼 수가 없는 병력이다. 잘해봐야 10분 혹은 5분? 그 시간만 벌 수 있으면 충분하다면서 태연하게 홀로 문 앞을 막아섰다. “가서 키스에게 전해라. 그녀를 부탁한다고.” “지, 직접 하세요!” 그는 맹수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눈에 담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했고, 수천의 병력이 카론 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24 눈물이 계속 터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쉴 새 없이 북쪽을 향해 채찍질을 했다. 화가 나고 얄미웠다 처음부터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내색 한 번 하지 않는다. 엔디미온 경. 내게토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웃고 싶은 거, 화가 나는 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 주저 없이 포기하고 딱하나의 임무와 맞바꿔 버렸다. 훌릉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촉을 하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성과 감성이 납득의 유무를 놓고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뒤엉켜 버렸다. 그때 등 뒤의 창문을 연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말했다. “엔디미온 경, 마차를 돌리시오.” “네?” 나는 왕자님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도리어 이런 상황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침착한 모습이었다. “마차를 돌려주시오. 부탁이오.” “하지만......” “나는 나를 지켜주는 사람을 버릴 생각이 없소.” “이, 이데로 돌아가면 정말 위험합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짜내듯이 말했다. 왕자님도 이 상황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목숨을 건 것은 경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잖소.”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작은 곱슬머리의 소년이었다.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을 살았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왕족으로 태어났기에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총명한 소년이었다. “아까 나와 내 동생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경들밖에 없었던 것처럼,지금 카론 경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소. 그걸 주저 할 수는 없는 거요.” “돌아간다고 해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작은 도움은 될 거요. 물론 나는 죽고 싶지 않소. 하지만 그건 카론 경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 마음은 모두가 다 똑같은 거요.” “......왕자님 .” “우리는 죽으려고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돕기 위해 돌아가려는 거요. 마차를 돌려주시오. 엔디미온 경도 그러길 바라고 있지 않소?” “......!” 그의 표정은 기운에 차 있었다. 나는 어째서 마라넬로 황제마저 자그마한 소년에게 질투심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말고삐를 잡아끌었다. 25 이런 일이 또 있을까?바보처럼, 다시 적진으로 달린 내게는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그가 우리를 구한 것처럼 우리도 그를 구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왕자님과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많은 일들의 당연한 연장이다. 아아아! 이 얼마나 뿌듯한 기사의 의무란 말인가! “......잘났구나. 그래서 돌아온 건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카론 경의 목소리에는 화를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수많은 상처를 입고 적들에게 둘러싸인 카론 경에게 뛰어들어 그를 낚아챌 수 있었던 것은 천우신조였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북으로 도주하는 중이다. 보통 이런 부분은 아주 긴 페이지에 걸쳐 감동적으로 묘사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카론 경의 기분이 워낙에 심드렁해서 몇 줄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본래 감동받아서 눈물을 펑펑 흘릴 거라고는 생각도 안했지만 그래도 노골적으로 기분 잡친 표정 보일 것까지는 없잖아요! 카론 경은 (장시간 전력으로 싸우면 안 된다는 주치의의 권고를 무시한 탓으로) 이미 시력을 잃은 상태 였다. 그는 눈을 꽉 감은 채 나보고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대체 정신이 있는 건가. 왕자님과 공주님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일을 어째서 저지른 거냐.” “헤헤. 이유는 이미 카론 경이 알고 계실 텐데요.” “흥! 모른다!” 그는 고개를 획 돌렸다. 하여간 저놈의 성격...... “카론 경도 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다시 와줬을 거 같아요.” “"내, 내가 어째서!” “그 이유 역시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아.” “큭!” 그는 우리가 다시 온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왕실이었다면 나를 무릎 꿇려놓고 '기사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반나절쯤 설교를 늘어왔을 것이다. 뭐,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심란한 표정으로 마차 뒤를 바라봤다. “거기 서라! 이놈들! 죽여 버릴 테다!” 플투르의 기병들이 벌떼처럼 뒤쫓아 오고 있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론 경, 이제 어쩌죠? 점잖게 타이른다고 물러갈 분위기는 아닌데요.” “내가 알 게 뭔가! 알아서 해결해!” “삐, 삐치신 겁니까.” 이 장엄한 대서사시의 클라이맥스를 꼭 그렇게 치졸하게 장식해야겠습니까! 26 뭐 어린애처럼 토라져 버린 카론 경 때문에 나도 입술을 삐죽 내긴 했지만, 확실히 지금 상황은 아슬아슬하고 역시 마차로는 기병에게 곧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카론 경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적들과의 거리는?” “10분 안에 따라잡힐 거리입니다.” 카론 경은 그러게 왜 돌아온 거야! 라는 표정을 집요하게도 드러 내면서 다시 물었다. “앞에 굽은 길이 있나?” “예. 저 앞에 있습니다.” 지금 가는 코스 끝자락에 커브길이 하나 있었다. 단숨에 꺾이는 길이라서 속도를 줄여야만 했다. “그곳에 진입하면 잠시 적들 시야 밖으로 사라지겠지?” “예. 한 10초 정도.” 커브길 주변에는 높은 나무들이 빽빽해서 따라오는 자들의 시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충분하다. ” “뭐가요?” “마차를 버 린다.” “네?” 카론 경은 곧 왕자님과 공주님 에게 준비해 달라는 말을 전했다. 27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우링차게 울렸다. “우아아아! 전속력으로 쫓아라! 이제 금방 따라잡을 수 있어!” 우리는 수풀 속에 숨어서 그들이 빈 마차를 따라가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커브를 도는 순간 재빠르게 마차를 멈추고 뛰어내린 다음 빈 마차만 출발시켜 기병을 따돌린다 이건 카론 경이 고안한 오리지널도 아니고 사실 수많은 도망자들이 써먹었던 ‘원숭이도 할수 있는 추적자 따돌리기’ 베스트 텐 안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타이밍이라서 , 적들은 미처 예상치 못하고 텅텅 비어 있는 마차를 있는 힘껏 뒤쫓아 가버 렸다. 마차가 비어 있다는 걸 발견했을 때 그들의 표정을 못 보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들이 눈앞으로 사라지자 나는 그제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다행 이다. 죽는 줄 알았답니다아아.” “갈 길이 멀다 출발하자.” 인정머리라고는 콩알만큼도 없는 카론 경은 차갑게 날 쏘아붙이며 공주님을 업었다. 지금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제냐 공주님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론, 너무 아플 거 같아. 피가 많이 나.” “괜찮습니다. 더 심한 일도 많이 겪어 봤습니다.” 아무튼 저 ‘어여쁜’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짐작도 못할 과거가 넘실거리는 사람이라니까. 키스 경이나 카론 경 중 한 명만 있어도 지옥에서도 되돌아 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걸어서 국경까지 가야 한다 일단 추적을 따돌렸다고는 하지만 곧 우리가 다른 쪽으로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포장된 도로를 걸어 관문을 통과하는 건 자살행위니까 우리는 험준한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설마 이 고생을 했는데 ‘그들은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었답니다’ 라는 결말로 끝내진 않겠지? 28 그러나 우리는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오오. 미치겠어. 이건 대체......” 이거 판타지인데 이렇게까지 리얼할 필요 없잖아! 라고 알 수 없는 투정을 부리며 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어스름한 달빛밖에 없는 산중이었다. 불을 피우려고도 해봤지만 카론 경은 눈에 띌 수가 있다면서 막았다. 보온을 위해서 제냐공주님은 카론 경 품속에서 잠들어 있었고 나는 왕자님을 껴안고 있었다. “......”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이거 뭔가 불공평하다. “카론 경, 조금이라도 더 걷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카론 경은 고개를 저은 것 같았다(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코앞에서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어둡기 때문이다). “밤에는 방향감각을 잃기 쉽고 체력 소모도 크다. 바람이 없는 곳에서 최대한 체력을 보존하는 것이 현명해.” 그는 꼭 야전사령관 같았다. 나는 부스럭거리면서 낮에 옷 속에 모아두었던 버섯들을 꺼냈다. 이놈의 악질적인 산은 어떻게 된 게 그 흔한 과실이나 견과류, 알뿌리 하나 찾기 힘들어서 있는 것이라고는 버섯이 전부다. 나름대로 책에서 본 기억을 되살려서 속주름이 하얗고 울퉁불퉁하게 생긴 녀석들만 골라서 모으긴 했는데(식용버섯의 일반적 특징이란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독버섯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전문가는 아니라서 무턱대고 왕자님과 공주님을 드릴 수는 없었다. 이런 상창에서 독버섯을 먹고 환각에 빠져 까하하하,하고 산을 뛰어다니게 된다면 그 얼마나 비참한 결말이란 말인가! “어쩐다......” 그렇다고 달리 먹을 것도 없는 상황이고 물고기든 동물이든 잡아 봐야 불에 굽지도 못한다. 앞으로 사나흘은 더 걸어야 할 텐데! “에라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버섯을 찢어 입에 넣고 씹었다 왕자의 음식에 독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기사의 의무! 까지는 아니지만 어떻게든 이 한 몸 불살라서라도 확인은 해봐야 할 거 아닌가? 이걸 먹고 눈앞의 카론 경이 요정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는 걸 본다면 분명 독버섯이다. 일단은 제법 먹을 만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후. “왕자님!공주님! 이거 드세요! 아무 문제없네요!” 나는 기쁘게 말했다. 배도 안 아프고 카론 경이 요정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만세! 그러자카론 경이 조용히 대꾸했다. “엔디미온 경, 보통 독버섯의 중독 증세는 반나절 후에 나타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뭐 아침이면 알 수 있겠지, 독버섯이 이렇게 맛있을 리는 없으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야, 라는 신통찮은 위안을 하며 조금씩 몸을 떨고 있는 왕자님을 껴안았다. 왕자님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29 아침이 되었다. “버섯 드세요!” 좋아! 아무런 문제도 없어! 식량문제 해결! 하지만 공주님은 거짓말 조금 보태 자기 머리만한 버섯을 들고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이런거 싫어! 바닐라 맛 푸딩 먹고 싶어!” 무, 무리입니다. “이런 못생긴 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자 카론 경이 조용히 공주님을 타일렀다. “제냐 공주님, 버섯은 맛있는 음식입니다.” “정말?” “예.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란 없습니다. 당근 빼고.” “......” 뭔가 설득력이 없습니다만. 페르난데스 왕자님도 자상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제냐, 버섯은 영양분이 많아.” “정말?” “응. 맛은 없지만.” “......” 왕자님은 버섯을 싫어하시는군요 헤헤. 총명한 분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편식도...... 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들 설득할 생각이 있긴 있는 겁니까! 장시간에 걸친 네고시에이션 끝에 우리는 제냐 공주님의 버섯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는 데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공주님은 눈을 꽉 감은 채 버섯을 콱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보관중이던 버섯의 사분의 일을 모조리 공주님이 소비해 버렸다. 30 한시라도 빨리 왕실로 돌아가려는 왕자님의 의지는 실로 대단해서 우리는 예정보다 하루 더 빠르게 국경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악투르 왕국과 우리나라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두터운 산맥은 항상 그곳을 타고 들어오는 도적들 때문에 골치였지만 이번만큼은 우리의 좋은 도주로가 되어 주었다. 산 속을 돌아다니는 적 수색대를 몇 번이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스쳐 지나간 적도 있었지만 카론 경의 감각이라는 것은 실로 초인적이라서 우리는 한 차례도 그들과 불행한 조우를 하지 않았다. 카론 경의 시력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그는 판단력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가 말했다. “산등성이를 내려간다.” “어? 산맥을 타고 넘는 게 아니었어요?” “보르츠는 바보가 아니다. 그런 가장 확실한 루트는 지금쯤 철저하게 봉쇄시켜 놨을 거야.” 카론 경은 역시 한발 앞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외의 장면을 목격했다. “관문이 함락되었어?” 악투르의 국경 관문 하나가 뚫려 있었던 것이다. 방책들은 부서져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악투르 군의 시체들마저 산지 사방에 널려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 신음소리를 냈다. “우리나라가 공격해 들어왔나 봐요.” “국경을 두고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눈을 감고 있는 카론 경은 풍겨오는 피비 린내만으로 지금 이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 전투 탓에 지키는 적병이 없다면 다행이고 베르스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면 더욱 다행 이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접근했다. 그때 요새 근처에 있던 첨병 하나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누구냐!” 이인일조의 외각 경계병이었다 두 병사는 그렇게 외치고는 수풀속에서 뛰쳐나왔다. 우리나라 군복을 입고 있었다. “설마 왕자님 이십니까!” 그들은 페르난데스 왕자님과 제냐 공주님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이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정예대대를 투입하여 이곳을 함락시켰습니다! 내일 중으로 전하를 구출하기 위해 부대를 투입할 예정이었습니다.” 왕실도 꽤 이것저것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감탄했다. 우리는 그들의 안내로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31 이 요새를 함락시킨 지휘관이 한걸음에 왕자님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마침 식사 중이었나 본데, 얼마나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입가에는 기름기가 그대로였다. “그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이제는 걱정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소관을 따라오십시오. 따뜻한 식사와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했사옵니다.” 기분 탓인지 그 말에서 엷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왕자님과 공주님이 반가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카론 경이 말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소관은 보거스 핀치벡입니다.” “음. 수고했네, 보거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르콰르트에서 우리를 추격하던 적들이 아직까지 신경쓰이는군.” “이런! 그런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추적을 중단했...” 파아앙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보거스의 목이 스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왕자님이 깜짝 놀라서는 다시 검을 집어넣는 카론 경에게 외쳤다. “지금 무슨 짓인가!” “우리가 추적당한 걸 알고 있다면 적어도 아군은 아닙니다.” “‥‥‥‥!” “죄송합니다. 제 판단이 미숙해서 함정에 걸려든 것 같습니다.” 카론 경의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무기를 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우리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결코 우리를 도와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때 귀에 익은 (그리고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큭, 대단해. 역시 은의 기사인가 왕자를 떼어놓으려고 했더니만......” 그는 바로 보르츠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예전 관문에서 아주 불유쾌한 상견례를 했던 배신한 치안 장교도 함께 있었다. “너희들을 끌어들이려고 이런 같잖은 연극까지 한 게 헛짓은 아니었군.” 이 치 떨리는 작전을 구상한 자가 바로 그 배신자인 듯, 보르츠는 옆에 있던 퉁퉁한 장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르츠는 거대한 곡도를 들고 우리들 앞으로 걸어왔다. “검을 뽑아라,카론. 승부를 내자!” 집요하고도 광기어린 놈이었다. 카론 경은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내가 이기면 우리를 풀어줄 텐가?” “크하하!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때도 그 붉은 눈의 악마 덕에 겨우 살았던 놈이?” “다시 묻겠다. 내가 이기면 모두를 풀어줘라, 그게 결투의 조건이다.” “흐흐흐. 좋아! 들어주지! 대신 내가 이기면 죽기 전까지 내 발을 핥아라. 그리고 내게 패배했다! 이 보르츠야말로 이 세상 최강이다! 라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외쳐라!” “뭐든 들어주지.” 그리고 카론 경은 천천히 손을 옮겨 검을 뽑았다. 고요한 황혼의 정적 속에서 검 뽑히는 그 차가운 소리만이 유독 커다랗게 들려왔다. 나는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이건 카론 경에게 너무도 불리했다. 그냥 씨치도 벅찬 상대인데, 지금 그는 지쳤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 공정한 결투가 아니었다. “덤벼라! 카론! 네놈의 무력함을 알려주마?” 남은 한쪽 눈을 괴물처럼 일그러트린 보르츠는 그 덩치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속도로 달려왔다. 마치 산 정상에서 거대한 쇳덩이를 굴리는 것 같았다. 황혼을 등진 카론 경의 긴 그림자는 그 모습 그대로 고요했다. 그건 바람도 정지시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러니까 보르츠의 검날이 카론 경의 목과 닿는 순간,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정말 그렇게 보였다. “무,무슨!” 카론 경을 지나친 보르츠의 몸이 중력을 무시한 채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 잘려나간 그의 두 팔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더니 몸뚱이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카론 경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단 일합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 두 팔을 잃은 보르츠는 고통도 분노도 아닌 혼돈에 잠식된 얼굴로 몸을 꿈틀거리며 카론 경을 바라봤다. 카론 경의 모습은 차라리 얼어붙은 칼날에 가까웠다. “내가..... 어째서...... 패배한......” 간절히 답을 원하는 보르츠의 웅얼거림에 카론 경이 차갑게 대꾸했다. “연습부족이다.” 그리고 보르츠는 고개를 꺾었다. 아아아, 정말 반할 것 같은 승리 대사야......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겠어! 멋대가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방금 전까지는 진짜 멋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그 대사입니까? 아아아! 카론 경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 이제 약속을 지켜라.” “약속? 무슨 약속?” 카론경의 말에 뚱뚱 배신자는 귀를 후벼 파며 이죽거렸다. 화도 안 난다. 나라까지 팔아먹는 놈에게 성실한 약속 이행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니까! 카론 경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검을 들었다. “호오, 끝까지 해보시겠다 이거요? 후후, 훌륭하오. 그래야 은의 기사지 이건 당신의 장례식으로 부족함이 없을 거요!” 그와 함께 실로 절망적인 숫자의 악투르 군대가 사방에서 조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검을 뽑았다.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았다. 내 생명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왕자님과 공주님을 지키겠다는 의지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몸 밖으로 흘러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 아쉬운 것은...... ‘키스 경이 있었다면.’ 지금 세상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을 단 한 명 소환할 수 있면 주저 없이 키스를 선택할 것이다.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줬던가. 그러니까...... 염치없지만, 그러니까 이번에도 나타나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물론 이것이 헛웃음이 나을 만큼 뜬금없는 바람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왕자럼 앞에 서며 검을 꽉 쥐었다. 우리는 겹곁이 둘러싸여 있었다. 그 배신자는 이 상황을 너무도 즐거운 듯이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자와 공주만 빼고 다 죽여 버려!” 그 순간사방에서 그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가장 먼저 달려든 녀석의 심장을 찌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바로 막을 수 없는 숫자의 칼날이 들이닥쳤고, 내 몸이 꿰뚫리는 걸 느끼면서도 커다란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들어 다른 한 명을 깊게 찔렀다. 입 밖으로 피가 쏟아졌다. 공주님의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점점 더 내 몸이 내 의지의 통제를 벗어났고 악의적인 땅바닥이 내 발목을 잡아 놔주질 않는 것 같았다...... 라는 진행일 줄 알았던 나는 그들이 제자리에 멈춰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레. 왜들 이래? 갑자기 살생에 환멸이라도 느낀 거야?” 그들은 모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내 등 뒤의 어딘가였다. 내 뒤에는 카론 경이 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보다가 순간 검을 떨어트렸다. 기적이라면 기적인데 너무 무지막지해서 어디서부터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맙소사...... 진짜 라이오라 씨잖아.” 세상에는 단 네 명, 혼자 힘으로 국가를 멸망시킬 수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로 그걸 해낼 수 있는 자가 바로 마키시온 제국의 진청룡 라이오라 란다마이저 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무서운 사람이 우리를 도와줄 이유는 떠 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건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창연한 금발이 황혼 빛에 젖은 그는 카론 경 앞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대체 얼마나 충격적인 등장씬을 선보였기에 이 많은 군대가 멈춰 버린 것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지금 그의 모습은 그러니까...... 이 책 앞머리의 그림과 똑같았다. 프론티어 뱅가드의 제복을 입은 금발의 사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불행한 배신자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 넌 누구냐!” “말해도 안 믿을 걸?” 라이오라 씨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말이 배신자의 자존심을 긁어 놓은 것 같았다. “고작 한 명 더 늘어난 거다! 다 죽여! 악투르의 군대는 최강이지 않나!” 그러나 세상에는 단 한 명과 수천 명을 저울질했을 때 전자로 저울이 기우는 경우도 가끔 발생하는 것이다. 물러서는 것을 죽음보다 싫어한다는 악투르의 병사들은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뛰어들었고, 그 순간 접근하는 모든 적에게 재앙이 내렸다.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재앙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다가오는 자들의 온몸이 회색 먼지로 변해 소멸되는 장면을 재앙이 아니라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게다가 육신이 재로 변하는 그 순간 그들의 몸에서 뽑혀져 나온 자색의 빛 무리들이 이지러진 선으로 늘어지며 라이오라 씨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꼭 깊은 나락의 입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망령처럼 섬뜩했다. 학살이라고 조차 할 수 없는 이것은-지상에 강림한 사신이 그 거대한 낫으로 인간들의 영혼을 토막 내는 광경이었다. 지금 보고 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지, 진청룡이다! 저건 분명히 아신이야!” 정체를 알게 된 악투르의 병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거나 너무도 놀라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죽이려던 병사들의 몸이 뿌연 먼지가 되어 소리 없는 비명처럼 주변을 떠다니고 있었다. 예전 키스 경과 싸울 때보다도 훨씬 무자비했지만 라이오라 씨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몇몇 병사들은 덜덜 떨리는 몸으로도 굉장한 용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우,우,우리 악투르 군은 상대가 아신이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이오라 씨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물러서란 말 한 기억이 없는데?” 무서워. 저 사람, 진짜 무서워 ! 하지만 라이오라 씨도 더 이상 무의미한 살상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지 곧바로 그 배신자를 바라봤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우리는 마키시온 제국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소!” 라이오라 씨는 냉엄한 목소리로 자신이 온 이유를 밝혔다. “폐 폐하께서는 이런 어쭙잖은 장난질로 자신의 대결을 방해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대, 대결이라니 ! 무슨!” 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몸서리를 쳤지만,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알 수 있었다. 역시 아직까지 왕자님을 염두에 두고 있었군. 나는 저 멀리서도 이 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라이오라 씨를 보낸 그 빠른 정보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지금보다도 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했다. 하늘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졌고 그 광선이 곧바로 라이오라 씨를 때린 것이다.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굉음과 새파란 섬광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꼭 유성이 떨어진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충격파 때문에 날아가거나 바닥에 쓰러져야만 했다. “너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막긴 했지만 수십 미터를 밀려나간 라이오라 씨가 눈매를 매섭게 좁혔다. 감히 진청룡에게 그 정도의 타격을 준자는 바로 명주작 알테어 님이었다. “아, 알테어 님......” 어째서 여기 오신 거예요. 새하얀 광채의 두 날개를 접은 그녀는 너무도 괴로운 표정이었다. 일부러 나를 바라보지 않는 알테어 님은 입을 꽉 다문 채로 그 거대한 빛의 걸을 들었다. 아까까지 덜덜 떨던 배신자는 신의 사도라도 만난 듯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후하하! 역시 교황청에서 와 줬구나! 꼴좋다, 진청룽! 너와 같은 아신이다! 아까처림 설쳐보시지!” 라이오라 씨가 중얼거렸다. “역시 남부 콘스탄트도 개입하고 있었군. 하지만 명주작을 동원할 줄은 몰랐는걸.” 알테어 님을 바라보는 라이오라 씨의 황금빛 눈동자에 기이한 기운이 올랐다. 곧 엄청난 중압감이 휘몰아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는 점점 더 힘을 개방하고 있었다. “알테어 엔시스,아신끼리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겠지. 물러간다면 나도 싸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싸우겠다면......”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 중 하나가 아신들의 신성한 대결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 분명 굉장한 것이다. 산이 깨지고 강이 말라버리고 땅이 둘로 갈라져버려 하나의 힘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한 명은 죽을 것이고-특히 알테어 님이 죽는 것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 저렇게 싸우고 싶지 않은 표정인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들 자신의 굴레 때문에 슬픈 일만 강요당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도 싸우지 말아요,제발!그러나 알테어 님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교황 성하의 명령이에요.” “그런가. 그림 어쩔 수 없군......” 라이오라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알테어 님 !싸우면 안돼요! 이런 싸움을 할 필요 없어요!” “......미안해, 미온 군.”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라이오라 씨는 그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접근하는 모든 것의 생명을 앗아가는 그 절대력에 둘러싸인 채로. 그리고그는 그녀를향해 걸어가서,또 그녀를 지나쳤고......얼래? 라이오라 씨는 계속 걸었다 사람들은 표정을 잃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내 앞에 섰다. 나는 라이오라 씨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오오라에 휘감긴 흑검을 내 목에 대고 태연하게 말했다. “명주작, 계속 싸우겠다면 이 녀석을 죽이겠다.” 지,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내 미온 군에게 손대지 마!” “뭐,계속 싸우겠다면 이 방법밖에 없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라이오라 씨를 바라봤다. 아아,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항복해라, 알테어. 너에게 승산은 없다!” “비, 비겁해! 진청룡! 미온 군을 죽이지 마!” 이거 뭔가 대단히 한심해! 카론 경은 이 경악의 인질극에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은 듯이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상이 되어 몸을 떨던 알테어 님이 항복 선언했다. “돌아갈게!지금 갈 테니까!미온 군을 놔 줘!” “후후. 역시 현명하군.” 이건 현명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여러 가지 의미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서 명주작 알테어 님을 상처 하나 없이 물리친 라이오라 씨는 역시 세계최강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자였다...... 일 리가 있겠냐! 에이이이! 이게 뭐가 신성한 아신의 대결이야! 엄청 치졸하구만! 알테어 님은 날개를 팔랑거리며 내게 날아왔다. “미온, 괜찮아?” “괘, 괜찮습니다만, 기분은 왠지 무지하게 비참하네요.” “고마워.” “네?” “너를 보니까 역시 싸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알테어 님은 (허공에서) 손을 뻗어 나를 껴안고는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지금은 이런 애정표현에 적합한 장소도 아니고 그녀는 분명 교황의 비정한 명령을 수행하기 온 것이었지만-어쨌든 꼭 눈을 감은 그녀의 빨간 얼굴이 너무도 귀여웠다. 정말 그녀는 이대로 있는 것이 가장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32 알테어 님 이 언제 왔냐는 듯이 휑하게 날아가 버리자 예의 배신자는 지옥 끝에 선 듯한 심경으로 소리쳤다. “싸, 싸우지도 않고 그냥 가버리다니 !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솔직히 나도 조금은 그 심정을 동정한다. “안돼! 절대로 용납 못해!나는 곧 이 지 역의 영주가 될 몸인데!” 라고까지 말했을 때 라이오라 씨가 그를 바라봤고 그의 몸이 퍽 소리를 내며 먼지로 뒤바꿨다. “......시끄럽군.” 그리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쨌든 네가 명주작을 구한 거다. 나름대로 쓰임새가 많군.” “지나치게 다용도로 쓰이는 중입니다.” 나는 여전히 쀼루퉁해서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라이오라 씨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 치졸해서 그렇지) 누구도 피할 필요가 없는 세계 최강의 아신이 불필요한 싸움을 막기 위해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인간답다는 증거였다. 비록 육체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라 해도 말이다. 왕자님은 그런 그에게 스스럼없이 고개를 숙였다. “도와줘서 고맙소. 그리고 마라넬로 황제에게도 감사를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라이오라 씨는 제법 의외라는 눈빛으로 우리의 작은 왕자님을 바라봤다. 어쨌든 황제와 라이오라 씨는 자신을 해치려고 했던 자다(왕자럼은 그게 시험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도 묵은 감정 없이 고맙다고 말한 것이다 과연 황제가 대결을 생각해 볼 만도 했다. 한편 카론 경은 라이오라 씨가 다가오자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황제도 균형이 깨지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군.” “폐하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니까.” 역시 그렇구나, 만약 이 일이 이오타의 뜻대로 돼서 베르스와 악투르가 이오타의 남부 침공 루트로 자리 잡게 되는 건 마키시온 제국으로서도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군대를 보내기에는 너무도 먼 거리라서 마라넬로 황제는 라이오라 씨를 보낸 것이 다. 물론 자신이 인정한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이런 일에 어이없이 이용당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겠지만. 라이오라 씨는 악투르 군이 물러가서 황망하기만 한 관문 요새를 둘러보며 기운 빠진 듯이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와서 이런 일만 하고 돌아간다는 게 좀 쓸쓸하긴 하군.” 그 대단한 진청룡의 이동수단이 고작 ‘도보’라는 것에 나는 꽤 놀랐다. “정말 걸어오신 거예요?” “음. 내 걸음이 적어도 말보다 빠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명주작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적현무처럼 그림자 속을 흘러가거나 견백호처럼...... 발정난 개처럼 뛰어다닐 수는 없으니까.” “마, 마지막 비유가 참 인상적이네요.” 하긴, 나라도 시도 때도 없이 이번엔 이기겠다! 라면서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청 짜증날 것이다.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저 너머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 적이냐! 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들은 바로 (지금까지 뭐하고 계셨는지 알 도리가 없는) 헬스트 나이츠였다. 그들을 본 라이오라씨가 말했다. “이제 나는 퇴장해야 할 시간이로군. 이건 마키시온 제국의 비공식 지원이니까 되도록 나에 대한 말을 삼가주면 고맙겠어. 그리고 하나 더......” 또 뭐가 있지? “아까부터 이상한 마성이 느껴진다.” “마성? 마성 그 자체인 네가 그런 말을 하나.” “모르겠군. 아무튼 방심하지 말도록.” 그리고 라이오라 씨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니까 ‘걸어서’ 말이다. 그 이후 헬스트 나이츠가 말을 몰고 우리들 앞에 도착했고, 선두에 있던 헬렌 카민스키 기사단장과 기사들이 왕자님과 공주님을 보자마자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옥체 강녕하심을 뵈오니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헬렌 경이 선창하자 기사들도 그 말을 따라했다. 물론 눈물은 흘리고 있었다. “이토록 고생하심은 제 부덕함 때문이옵니다!” 이번에도 혼성2중창이 이어졌다. 쳇, 항상 말은 그렇게 하시지요. “이 헬렌, 이 죄를 스스로 물어 기사 작위를 반납하겠사옵니다. 저보다는 카론 샤펜투스 경이야말로 저하를 모실 적임자이옵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녀를 따라하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은 ‘당신 미쳤어!’ 라는 멍한 표정으로 헬렌 경을 흘낏 흘낏 쳐다봤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헬렌 경의 표정은 정말 자신의 죄를 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정말 이리저리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왕자님은 고개를 저었다. “죄가 아니라 실수일 뿐이오. 실수는 더 노력해서 극복하면 되는 거요. 자세한 말은 왕실에 가서 합시다.” 헬렌 경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33 국경을 넘어 왕실로 돌아가는 마차는 정말 꿈만 같았다. 달리는 마차 안에는 왕자님과 공주님, 나와 카론 경, 그리고 헬렌 경이 타고 있었고 주변은 기사들이 엄호하고 있었다. 헬렌 경은 그녀의 성격대로 빽빽하게 기록된 서류철을 들고 왕자님께 보고 중이었다. “매수된 무리들 대부분은 잡아두었습니다. 일주일 안에 왕실 최고위 재판을 열어 처벌할 예정이옵니다.” 그녀는 서류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이오타 왈국은 현재 이 사태에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침공 계획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것 같으며, 지금 쇼메 왕자가 왕실을 방문해 불행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임을 해명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나는 쇼메의 이름이 나오자 표정을 찡그렸다. “쇼메 왕자가 이 일의 배후에 있는지도 몰라요.” 납치는 쇼메의 미학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야망을 실천시키기 위해 수단을 가릴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왕자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말에 반대했다. “그건 아닐 거요.” “네?” “쇼메 왕자는 최근 우리나라와의 무역에 좀 더 투자를 하려고 진행 중이었소. 우리나라의 사업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둬서 조종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침략이라는 과격한 수를 쓸 리는 없을 거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왕세자라고 할지라도 군대의 통수권은 엄연히 국왕의 것이라 단독으로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소.” 그래서 얼마 전에도 그 일로 쇼메가 이 나라에 온 것이었나. 분명히 옆에 외무대신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쩌면 쇼메에 대해 지나치게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창피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단번에 논리정연하게 말을 정리한 왕자님의 판단력에 또 감탄했다. 그런데 이오타 왕국이 이런 음모를 진행했다는 것은 어쩌면 이자벨님도...... 그때 문득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라 와앗 소리를 질렀다. “왜 , 왜 그러시오, 엔디미온 경.” “아심을 풀어줘야 해요!” “아심이...... 누구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과자입니다. 제가 겪어봐서 아는데 우리나라는 전과자도 일자리를 얻고 결혼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 아니 이게 아니라......!” 나는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말을 황급히 막고 정리해서 아심의 공헌에 대해 왕자님께 자세히 설명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말을 경청하던 왕자님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사람이오.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돕겠소.”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한숨을 돌렸다. 지금쯤 아심은 ‘정말 그녀석이 나를 잊지 않았을까’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옥 안을 서성거리고 있겠지. 걱정 말아요. 절대로 당신을 잊지 않으니까. “아! 그리고 블리히 경도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하. 그렇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블리히 경은 정말 탈출에 성공했을까? 옆에 있던 헬렌 경이 내 말을 이어받았다. “엔디미온 경의 보고대로 블리히 경도 큰 공헌을 했사옵니다.” 얼레? 헬렌 경이 그걸 어떻게 알지? “저희가 이곳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왕실로 귀환한 블리히 경이 놀라운 판단력으로 이 사건을 추리했기 때문입니다. 소인도 블리히 경을 다시 봤사옵니다.” 역시 블리히 경은 살아 있었다. 게다가 왕실로 돌아가서 나와 카론 경이 했던 추리를 모조리 자기가 생각한 것으로 보고했던 것이다. 뭐 그 덕분에 왕실이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빨리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정이 안 간다니까! 잠자코 앉아 있던 카론 경도 감은 눈을 조금 꿈틀했다. “하아. 아무튼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사람......” 나는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크게 흔들린 몸이 붕 떠올랐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은 벽에 걸린 마차가 공중으로 치솟은 것 같았다. 왕자님은 반사적으로 공주님을 껴안았고, 카론 경은 또 그런 그들을 감쌌다. “이 , 이게 무슨 일이야!” 창밖에서 비명이 터졌고 시뻘건 피가 창에 뿌려졌다. 마차가 수없이 구르면서 땅에 내동댕이쳐졌고 주변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충격과 함께 정신이 끊어졌다. 34 나는 몸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마차는 완전히 부서져 우리는 밖으로 튕겨났고 말들 역시 온몸이 비틀려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흙먼지가 가득한 밤길 한복판에서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 단단한 것과 충돌한 건가? 아니야. 분명 비명이 들렸고...... “맙소사......” 나는 주변에 널려 있는 덩어리들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건 우리를 호위하던 기사들의 주검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즉 검의 조각이었다. 세 조각 네 조각 난 몸뚱이들이 지옥도처림 사방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검이 아니라면 이렇게 해치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검으로는 이렇게 빨리 해치울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마차 안에 있던 왕자님은 공주님을 꽉 껴안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헬렌 경도 마찬가지였다. “카론경......” 그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아요?” “조용히 해라.” 그는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앞에서 발소리가 들려 왔다. 어둑한 밤의 장막이 시야를 극단적으로 좁혀 왔지만, 그건 분명 단 한 사람의 것이었다. (이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분명한)그는 피의 응단이 깔린 시체들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 이곳은 베르스의 영토다. 악투르가 또 납치를 시도한 것은 아니리라. 아신도 아니다. 그럼 누구? 기묘한 두 개의 광채가 그의 손끝에서 번뜩거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의 모습이 내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보자 내 모든 사고는 정지하고 말았다. “당신......” 두 손에 매달린 그 광채는 바로 들고 있던 두 자루의 장검이었다. 그 끝에서 막 기사들을 도륙한 핏물이 소리도 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붉은 눈동자가 내 몸을 옭아맸다. 그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건 웃음이 아니었다. 몸이 떨려왔다. 왜냐하면 그 얼굴은 항상 내 곁에 있던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라이오라 씨가 말했던 마성이 무색무취의 광폭함으로써 내 온몸을 찢어버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거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무시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 입술을 타고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키릭스...... 세자르.......” 그는 그렇게 말하는 나를 향해 신기한 동물을 본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니 모든 것은 소름끼칠 만큼 키스와 닮았지만 또 정반대였다. “재미있는 녀석 이네. 예전에도 우리 만난 적이 있지?” 전에 나를 만났다고? 웃음 섞인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가 폐부를 찔렀다. 기억에는 없지만, 어디서 만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서히 카론 경이 눈을 뜨고 있었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그의 동공이 키릭스를 노렸다. 달빛에 얼룩진 그의 창백한 표정은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새하얀 조각이었다. 카론 경의 빠른 심장소리가 내 귓가를 때리는 것 같았다. 카론 경을 바라본 키릭스가 가느다란 눈웃음을 보였다. “오랜만이야, 카론. 키가 꽤 컸네?” 순간 검이 뽑히는 섬광과 함께 그의 몸이 키릭스를 향해 튀어나갔다. ( 『SKTr제8권에서 계속) 작가 팬 사이트 cafe.daum.net/dragonlady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제멋대로 프로파일 Entry#7 진청릉 라이오라 란다마이저(즐촐촌 layers landameizer) 키 185센티미터를 넘는 상당한 장신. 무라사 랑시를 제외하면 그 보다 큰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눈 황금빛.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의 8할은 이 눈동자 때문이다. 머리 : 엔디미온과 비교하자면 훨씬 진한 금발이다. 특별히 멋을 내지는 않지만 항상 단정하다. 외모 : 사람들로부터 미남이라는 찬사를 잘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단련된 것 같은 몸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운동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도 해서 만사가 한가하다. 날카롭고 과묵한 편이지만 가끔 상당히 뻔뻔할 때도 있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세계를 횡단해서라도 부지런히 임무를 수행하지만, 명령이 없을 때의 그는 황제도 안타깝게 생각할 정도로 무료하게 보내고 있다. 가령 하루 종일 혼자 테이블에 앉아 땅콩을 까고 있다든 가...... 그를 추종하는 부하들이 본다면 가슴이 찢어질 짓을 꼼지락 거릴 때가 많다. 제복이나 슈트가 잘 어울리는 몸이라서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수 많은 슈트가 옷장 속에 가득하지만 사실 저택에서는 티셔츠 차림으로 활보하다가 집사에게 설교를 듣기도 한다. 아직도 자기가 윌 잘못했는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물정과 군사적 지식 등에 대해서는 적현무 키르케처럼 정통하고 지적 수준도 높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임무가 아닌 일에서는 자주 헤맨다. 가령 자기는 식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식사 시간에 참모들을 찾아갔다가 다들 어디 있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한다든가. 당연한 말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위압적인 겉모습만큼이나 무서운 사람이다. 국왕들이 투표한 적으로 만나기 싫은 사람 베스트 원에 뽑혀 명예의 전당에 그 이름이 올라가 있기도 하다(거짓말). 1. 안녕하세요? 황제가 여기 오는 걸 허락하던가요? 음, 시시한 일에 꽤 열성이라고 혀를 차시더군. ‥‥‥시시해서 죄송합니다. (참고로 이 사람 말투,상당히 직선적이다. ) 2. 라이오라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 소설 최강의 캐릭터입니다. 자랑스러우신가요? 그림,나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난다면 자랑스러워하지 말아야 하나? 그,그건 아니지만. (뭔가 황제에게 잔소리 듣고온 게 분명했다. 예민하네......) 3. 아신이기 전에는 윌 하셨어요? 했다기보다는 당했지. 노예였으니까. 괘 , 괜한 말을 한 것 같군요. 응. 괜한 말이다. (‥‥‥황제에게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걸까.) 4.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당신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아무나 죽일 수 있나요? 폐하께서는 아무나 죽이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아. 만약 내린다면요? 너도 그 아무나 중 하나가 되겠지? (무, 무서워 !) 5. 견백호 무라사 씨에 대한 질문입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 어갔으면 좋겠군. 짧게라도 대답해 주세요. 무라사 씨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축생. (일말의 호의도 찾아볼 수가 없군.) 6. 몇 번이나 무라사 씨와 싸웠다고 하던데 어떻게 둘 다 멀정하네요? 진심으로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헤에. 그래도 서로를 배려하시는군요. 솔직히 잠자는 데 쳐들어와 멀정한 집 때려 부수 행패를 부릴 때는 죽여 버리고 싶긴 하지만...... ......아, 네 (사실 둘의 힘은 삼극이라서 서로 모든 힘을 개방하고 싸운다면 둘 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것이다.) 7. 그런데 진(콜)청룡인데 어째서 벼락을 못 때리죠? 적현무가 조용하든가? ...... (적현무의 적(론)은 고요하다는 의미.) 8. 아신들도 서로 모여 회의를 하고 그러나요? 음, 메를하나 들어 볼까? 네? 견백호가 나를 보면 ‘아신의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토론을 할 것 같나 아니면 발광할 것 같나. 후, 후자겠죠? 그러면 적현무가 명주작을보면 ‘아신의 올바른마음가짐’ 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것 같나 아니면 발광할 것 같나. 여, 역시 후자겠죠? 그러면 아신들이 회의를 할 것 같나 아니면 절대로 안 만날 것 같나. 후자......로군요.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 였다. ) 9. 그런데 성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란다마이저라니 ,무슨 제국의 비밀 병기 같은 느낌 인데.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성이다. 무, 무슨 의미인데요? 지면상으로는 도저히 밝힐 수가 없군. 모르는 편이 좋을 거다. (그 의미를 알고 있다면 당신도 특이한 사람!) 10. 자 마지막입니다. 그럼 질문은...... 난 노래 못해. 이 인터뷰, 애독하시고 계셨나 보군요. 황제 폐차가 시켜도 안할 겁니까? 폐하는 부하의 충성심을 자극하는 분이 아니시다. (사실 아신이 되기 전에는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제 19화 해님달님 납치 사건 35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일까....... 내 의식은 술잔 속의 얼음처럼 조금씩 현실로 녹아들었다. 난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선한 빛이 쏟아져 들어와 흐릿한 시야를 일깨운다. “여긴......” 부스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곧 이 고요한 장소가 왕실 의료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 카론 경도 입원한 적이 있는 환자실로 사실 나는 들어올 신분이 안 되는 곳이다. 무엇보다 가벼운 두통과 타박상이 있기는 해도 입원할 정도의 부상은 아닌데?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몸을 매만졌다. “정신이 들었나.” 작은 목소리에 놀라 시선을 돌리자 카론 경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괘, 괜찮으세요?”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이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카론 경이었다. 환자복 위에 제복 외투를 걸치고 있는 그는 서 있는 것이, 아니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굳이 그 모습을 묘사할 것도 없이 격하게 떨리는 숨소리와 검은 머리칼이 하얀 피부 위에 엉킬 지경으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으로도 지금 카론 경은 잔뜩 금이 가서 깨지기 일보직전의 육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 무서운 정신력을 그러모아 가까스로 추스르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뭐라 말하려고 달싹거리던 입술을 몇 번이나 다물었다. 항상 단호한 카론경이지만, 지금은 결심의 방향을 쉽사리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눈을 꽉 감으며 입을 열었다. “엔디미온 경, 일전의 사건은.......” “죄송하지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아요.” 내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마차가 뒤집힌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기억이 없는 건가.” 그는 나를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한시라도 빨리 안정을 취하길 원했다. “그것보다 카론 경, 빨리 누우세요!” “괜찮다.” 괜한 고집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창백하게 떨리는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지금 그의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강한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아슬아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내게 할 말이 남았는지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을 어렵사리 숨기며 벽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묘하게 도드라진다. 불안한 정적이 우리 둘 사이를 지나갔다. 그 속에 끼어든 건 청명한 노크 소리였다. “들어가겠습니다아.” 키스 경, 덜컥 문이 열리며 그가 우리 사이에 들어왔다. 손에는 태연히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아아, 둘이 무슨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까아?” 키스는 그 빨간 눈동자에 웃음을 담아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왜 그래요, 미온 경?”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난 뭐라고 대답하는지도 모르게 황급히 둘러대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삽시간에 내 몸을 뒤덮은 식은땀이 지금 나를 장악한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얼굴도 그 음성도 그 마성도 피비린내까지 모조리. 36 어둠을 끊는 카론 경의 외침은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키릭스!” 거칠게 충돌한 두 칼날이 섬광을 터뜨렸다. 뒤엉킨 검을 사이에 둔 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훨씬 더 차가운 쪽은 키릭스였다. “헤에.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거야?” “능철 떨지 마! 이 자식!” 카론 경이 좀더 욕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자기 기분을 훨씬 정직하게 표현했으리라. 나는 그의 그런 표정을 처음 봤다. 감정을 숨기던 껍질이 산산이 깨져버린 채 역류하는 마음,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낸 얼굴을. 안경 너머 차가운 시선으로 눈썹을 찡그리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평소의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키릭스의 대응은 지나치게 능숙했고 또 치가 떨릴 만큼 여유로웠다. “사람들이 너를 은의 기사라고 부른다며? 소원대로 긍지 높은 히어로가 되셨네. 고귀하고 용맹해. 어울려.” 조롱인지 칭찬인지도 모를 말이 키스의 목소리를 빌려 얼어붙은 공기를 울렸다. 그 새빨간 눈동자는 얼마든지 세상에 홀로 존재할 것만 같은 터무니없는 자신감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검을 마주하던 카론 경이 말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 “응? 뭘?” “너를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하하. 친절하네.”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웃음을 보며 카론 경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저, 저건 분명히 결투를 신청하는 모습? “역시 너를 쓰러트리는 길밖에 없어.” 키릭스의 미소에 엷은 살기가 서렸다. “잘못 들었길 바래.” 나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카론 경이 강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저 키릭스라는 자는 악투르를 뚫고 나오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카론 경에게는 비참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방금 전만해도 전력을 다한 카론경의 일격을 장난처럼 막아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투라니. 그건 자살과 다름없는....... 그 순간 핏줄기가 터졌다. 순식간에 서로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검술에 무지한 나로서는 보고 있으면서도 대체 누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단지 찰나의 순간 둘의 몸이 뒤섞이며 서로의 위치를 교환했을 뿐이다. “........!” 또 다시 찾아온 정적 속에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피가 흐르는 쪽은 바로 키릭스였다. “너, 정말 엄청나게 연습했구나. 목이 잘릴 뻔 했는걸?” 난공불락 같던 키릭스의 목 언저리에서 적잖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정말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으면(예를 들어 카론경의 컨디션이 최상이었다면) 치명상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예전 연무장에서 홀로 연습하던 카론 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지금을 위해 계속 준비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카론 경이 키릭스를 쓰러트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키릭스는 예상 밖이었다. “이렇게까지 날 싫어해서야 어쩔 수가 없지. 나를 찔러.” 난 눈을 의심했다. 두 자루의 검을 땅에 꽂은 키릭스가 팔을 벌리며 가슴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는 웃고 있었다. 도발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상식 밖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알 수 없는 건 카론 경 쪽이었다. “.........” 그는 키릭스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지만 키릭스가 다가올 때마다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에 심장을 꿰뚫을 거리였건만 카론 경은 입술을 깨물며 뒷걸음칠 뿐이었다. 키릭스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커다랗게 웃었다. “못 죽이겠지? 내가 죽으면 그 녀석도 죽으니까.” 내 얼굴에도 카론 경과 똑같은 낭패의 빛이 서렸다. 정말 키릭스는 키스일까? 어째서 카론 경이 주저하고 있는 것인지, 또 키릭스가 어째서 저런 말을 꺼냈는지, 혼란에 가득 찬 내 머리는 아무런 답도 내지 못했다. “이런, 이런. 기껏 기회를 줘도 소용이 없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그 속삭임과 함께 키릭스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두 칼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착시겠지만, 일그러진 빛 무리가 키릭스의 검 끝을 마치 악령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두 자루의 검이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일시에 카론 경을 뚫고 지나갔다. 그것은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그 일격은 검을 놓친 은의 기사를 공중으로 날려 보낸 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반격은커녕 방어조차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카, 카론 경!”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키릭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카론 경에게 걸어갔다. “카론, 나와 함께 가지 않겠어? 네가 필요하거든.” 간신히 숨을 내쉬는 것이 고작인 카론 경의 어깨를 짓밟은 키릭스가 무서울 정도로 키스와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몸서리 쳤다. 모든 것이 아주 실감나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다, 닥쳐.......”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는 카론 경을 무심히 바라보던 키릭스가 그를 밟던 다리에 힘을 줬다. 곧바로 어깨가 부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터졌다. “아아악!” 카론 경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커졌다. “네 녀석의 그 대단한 긍지, 어디까지 부숴버려야 좀 고분고분해지려나.” 그리고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가슴으로 발을 옮겼다. “사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검과 어울리지 않는 착한 녀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은의 기사는커녕 원래는 마음껏 책이나 읽는 것에 행복해 할 그런 얌전한 녀석이었지.” 키릭스는 가슴을 누른 발끝에 천천히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만 죽지 않았다면 말이지.” 키릭스의 발밑에서부터 조금씩 늑골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론 경은 뭐라고 소리치려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힘겨운 신음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올 뿐이었다. “네가 어째서 기사가 되었는지 잘 생각해 봐. 나와 같은 이유라는 걸 알고 있을 거야.” “.......머, 멋대로 말하지 마라.” “가짜와 놀아나면서 그걸 다 잊어버린 거야?” 계속 힘을 더하는 그의 발끝에서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갈색 곱슬머리 사이로 들어난 귀화(鬼火)에 젖은 눈동자가 숨을 쉬지 못해 가느다랗게 헐떡이는 카론 경의 표정을 무감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너를 다른 무가치한 존재들과 똑같이 보지 말게 해줘.” “아........아으으윽.” “부탁이야.” 파각 하며 잘려나간 뼈들이 폐부를 찌르는 끔찍한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시체들 속에 있던 기사의 검을 뽑아 키릭스를 겨눴다. 공포를 뒤덮는 분노가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만 해! 그만두라고! 이 미친!” 키릭스는 천천히 나를 바라봤다. 난 너무도 친숙한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역류할 것만 같았다. 그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용감해졌네. 그때보다 훨씬 나아졌어.” “날 아는 척하지 마!” 나는 그 불길한 기운을 떨쳐버리기 위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너는....... 키스 경이 아니지?” “글쎄.” 그는 키스와 똑같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럴지도, 아닐지도.” “넌 절대 키스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고 말해!” “만약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야? 또 그렇다고 한다면 믿을 거야?”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를 향해 검을 다잡았다. “어이, 내가 키스가 아니라고 확신해?” “물론! 키스라면 카론 경을 해칠 리가 없어!” 그 말을 들은 키릭스의 입가에 예의 차가운 조소가 스몄다. “그럼 증명해봐.” “뭐?” “내가 키스가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얼마든지 나를 찌를 수 있겠네? 자, 네게도 기회를 줄게. 네 의지를 구경하고 싶어.” “조, 조롱하지 마! 찌르겠어!” 피가 흐를 정도로 검을 꽉 쥐고 있는 내 두 팔이 창피할 정도로 떨렸다. 결국 그는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는 키릭스는 키스가 아니라고 확실할 수 없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내 꼴을 본 그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의 판단조차 믿지 못해? 나약하네. 그러니까 넌 지금까지 아무도 지키지 못한 거야.” 순간 머릿속에 ‘그녀’가 스쳐 지나갔다. 그 오래된 죄책감이 폭주하며 증오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순순히 키릭스가 권한 분노를 집어 삼켰다. “입 닥쳐!” 고함소리와 함께 길게 내지른 검을 키릭스는 너무도 가볍게 피했다. 곧바로 내 머리칼을 잡아 챈 그가 감상하듯 내 얼굴을 훑었다. “하하, 아까보다 훨씬 좋은 표정이네. 방금 넌 정말 날 죽이려고 했어. 남을 미워한다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해. 알겠어?” “하아, 하아.......” 내 마음은 이미 탈진해 계속 가쁜 숨이 끓어올랐다. 토악질을 할 것만 같았다. 악마에게 마음대로 유린당하는 것 같은 그런 굴욕감 또는 무력감. 다리가 떨려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키릭스는 나를 놓지 않았다. “놔, 놔줘.” 키릭스는 키스의 눈동자로, 혹은 키스가 키릭스의 눈동자로 울고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런 표정을 너무도 많이 봐 왔는지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냥 피고 지는 잡초를 보듯이. 이 잡초를 뽑아 버릴지, 아니면 귀찮으니까 그냥 지나갈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그의 차가운 눈을 도저히 직시할 수 없었다. “키릭스, 변한 건 너다.” 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카론 경이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피를 흘리는 입가를 꽉 다물고 있었지만 키릭스를 똑바로 쏘아보는 두 눈동자만은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키릭스는 몸을 돌리며 너무도 잔혹한 웃음을 보였다. “카론, 변하지 않는 건 타락이래.” “누구도 세상을 재단할 권리는 없어. 그건 어떤 변명으로도 미화 되지 않아.” 카론 경은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절대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키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아아, 옛날 생각나네. 예전에도 넌 그런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으로 몇 백번이고 나한테 덤볐지. 하하, 이제 좀 지친다.” 키릭스는 천천히 그를 훑어보며 말했다. “사실 내가 온 건 저 꼬마 왕자님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그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너와 함께 돌아가려고 했어. 그런데 바람맞은 기분이야. 여자한테도 한번 차인 적이 없는데, 이것 참 볼썽사납네.” 그렇게 이기적인 넋두리를 늘어놓던 키릭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카론, 지금부터 내가 편안하게 죽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 키릭스의 붉은 눈동자는 마치 공허한 진공의 공간처럼 아무것도 잡히질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두 자루의 검은 당장이라도 상대를 찢어버릴 송곳니처럼 곤두서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카론 경에게 피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니까. 난 키릭스의 등을 봤다. 내게는 관심조차 없다. 조금 달려가 검으로 찌르면 심장을 꿰뚫을 거리. 하지만 그 때 카론 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엔디미온 경. 이건, 자네 일이 아니야.” 나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문득, 평생을 책을 좋아하는 평민으로 평화롭게 살았을 사람이 어째서 다 그만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서 있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신이 내 앞에 있다면 마구 멱살을 잡고 제발 조금은 세심하게 당신의 피조물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때 나는 (굳이 신은 아니라도) 그와 비슷한 파동을 보았다. 그러니까 숲 너머에서부터 말이다. 그건 빛을 집어삼키며 밀려오는 초자연적인 해일이었다. 그걸 느낀 키릭스가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이런, 결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설마.......” “아주 무서운 분이 여기로 오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숲을 범람한 그 암흑의 짐승이 키릭스를 덮쳤다. 그 충격에 튕겨나간 내 몸은 한참 동안 바닥을 굴러야 했다. 고개를 드니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풀과 나무들이 중력과 시간을 무시한 채 뿌리째 뽑혀나가며 재로 변하고 있었다. 저런 절대력의 소유자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그 힘의 주인이 가공할 혼돈 속에서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싸울 상대를 원한다면 서 있기도 힘든 부상자보다는 좀더 어울리는 상대를 찾는 게 좋을 것 같군.” “라이오라 씨!” 자욱한 회색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본인은 그 섬뜩한 흑색의 검을 들고 있는 진청룡 라이오라 씨였다. 낌새를 느끼고 돌아온 것일까. 사신과 같은 그 위압감은 여전히 무섭지만, 지금은 그만큼 안도감을 느끼는 힘도 없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카론 경을 구하는 데 적어도 나보다는 천만 배는 더 도움이 될 사람이니까. 놀란 건 카론 경도 마찬가지였다. “라, 라이오라. 어째서 온 거냐!” “명령 이외의 행동을 하는 건 폐하께 죄스러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저 마성의 정체가 신경 쓰여서....... 아무래도 제거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하던 라이오라 씨는 눈앞의 사내를 확인하며 말을 흐렸다.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버렸을 자신의 일합을 막아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도 밀려나지 않은 키릭스는 몸을 막고 있던 두 검을 풀며 그를 바라봤다. “와아. 여전히 무시무시하네, 라이오라.” “너는........” 키릭스는 찡그린 얼굴로 어깨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물론 당신이 불사신이라는 것은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하하.” 무, 무슨 말이야? 라이오라 씨가 키릭스의 검술 선생? 키릭스는 짓궂게 웃으며 라이오라 씨를 바라봤다.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럽지? 네 주인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라이오라 씨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한편 키릭스는 카론 경과 라이오라 씨를 바라보며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아아, 이걸 어쩐다. 한 명은 죽이기 싫고 한 명은 죽일 수 없네.” 카론 경은 급히 내 이름을 외쳤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난 빠르게 정신을 잃은 왕자님과 공주님을 안고 뒤로 빠졌다. 키릭스가 라이오라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그리고 곧 날 모시게 될 사람과 싸우는 것도 현명하지 못한 행동일 테지.” 나는 키릭스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라이오라 씨가 자신을 모신다는 거야! 하지만 라이오라 씨는 단번에 부정하지 않은 채 무서운 눈빛으로 키릭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지는 건 섭섭하니까 오랜만에 내 검술을 한번 시험해 줘.” 내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키릭스와 라이오라 씨의 검이 충돌하는 것을 보았고, 그 순간 대지가 뒤엎어지는 것 같은 충격 끝에 정신을 잃었다. 37 “미온 경, 왜 그렇게 얼이 빠져 있습니까아?” “아?” 나는 키스 경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모, 몰라요. 말 시키지 마세요.” 난 어찌할 줄 몰라서 한심한 말을 늘어놓고는 침대에 누워 몸을 돌렸다. 마치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기도 하고 더할 나위 없이 억울하기도 한, 기묘하고 불유쾌한 기분이었다. “키스.” 등 뒤에서 카론 경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분간 왕궁을 떠나 알아볼 것이........” “그런 픽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어딜 또 쏘다니겠다는 건가요오?” “무, 무슨 짓이냐! 이거 놔라!” 갑작스런 옥신각신에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키스는 (항상 그렇지만 그 말 못할 괴력으로) 카론 경을 들고는 문을 벌컥 열고 맞은 편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엄청난 통증과 당혹감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카론 경을 내리 누른 키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얌전히 좀 계세요.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불량 기사는 저 하나로도 족합니다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놓지 못하겠나!” “하아. 결혼까지 하셨으면 이제 철 좀 드세요!” “네 녀석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큭! 힘만 세서는!” 버둥거리는 카론 경의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쿡 찍어 누르고 있던 키스는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론 경, 계속 발버둥 칠 생각이십니까아?” “그, 그만둬! 아프단 말이야!” 키스 경은 품속에서 아주 익숙해 보이는 것을 꺼냈다. 설마, 저것은! 그리고 잠시 후 매우 청명한 타격 음이 들리고는 삽시간에 병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아니 이거, 정말 누군가 죽은 것 같구먼. 그야말로 깔끔한 마무리! 라고는 농담이라도 말 못하겠군. “.......맙소사!” 키스 경은 눈물을 훔치며 내 병실로 들어와 들고 있던 부지깽이를 바닥에 던졌다. 한참 동안 키스를 바라보던 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댁은 매사에 이런 식이시오?”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아.” “웃기지 마! 겨우 살아난 카론 경을 죽일 셈이냐!” “안 죽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죽은 일이 없는 걸요.” “당신 그러다 언젠간 천벌 받아.” “친구의 절대 안정을 위해 결단을 내린 제게 그 무슨 폭언입니까아!” “카론 경 깨어나면 도망칠 준비나 하시지.” “안 그래도 짐 싸려던 참이었답니다아.” 키스 경은 피식 웃으며 아까의 카론 경처럼 문가에 기대어 날 바라봤다. 키릭스와 똑같은 빨간 눈인데, 웃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투명했다. 간호원이고 의사고 단체로 피크닉이라도 나갔는지 병실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고 숨소리는 모처럼의 햇살에 따뜻하게 녹아 있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키스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목 언저리를 가리켰다. “믿어줄 거죠?” 나는 많은 판단을 할 수 있었지만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곧 대답했다. “믿어요.” 키스 경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곧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침대 끝자락에 기대어 그가 나간 자리를 묵묵히 바라봤다. 새하얀 벽에는 그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존재란 처음부터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38 왕자님, 공주님과 헬스트 나이츠가 대규모로 ‘의문의 습격’을 받은 사건은 악투르 왕국의 습격으로 발표되었고, 그것은 한동안 베르스 국민들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기사단의 장례식은 성대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으며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강한 왕자님과 공주님께 존경을 표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수많은 인파가 수도로 몰려들었다. 이오타 왕국은 입막음의 표시로 적잖은 황금을 무상으로 보내왔지만, 어째서인지 국왕 전하는 그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되돌려 보내며 정중한 친필 서한을 이오타의 빌헬름 국왕에게 보냈다고 한다. 쇼메 왕자는 한동안 베르스와 북부 콘스탄트 왕국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카론 경과 블리히 경을 비롯한 기사들은 공로를 인정받아. 국왕 전하로부터 1급 애국 훈장을 받았으며, 특히 카론 경은 또 다시 우르콰르트에서 보여준 용맹으로 그의 무용담이 음유시인들의 목소리를 타고 왕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현재 천여 명의 배우들이 카론 경을 연기하며 전국의 무대에서 그 때의 일을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 대본에 당근은 빠져 있겠지만 말이다. “........내 얘기는 하나도 없네.” 나는 침대에 누워 신문을 뒤적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동화 밖의 세계에서는 목숨을 거는 희생에도 신분의 제약이 있는 법이다. 얼굴로 먹고 사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멤버가 왕족을 구했다는 것은 별로 보기 좋은 일은 아니라서 그런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신문을 훑어봐도 내 이름은 전혀 없다. 흥, 그런 속물적인 격려는 내 쪽에서 사양이야. 쳇. “하아. 뭐 어쨌든 상관없지만.” 나는 슬쩍 눈길을 돌려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꽃다발과 쪽지와 편지지를 바라봤다. 왕자님과 공주님이 친히 문병을 오셔서 받은 꽃다발이었다. 게다가 공주님이 직접 만든 것이고. 이런 선물은 건국 이래 나 외에는 아무도 하사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고마워요, 엔디미온 님.’이라고 쓰여 있는 쪽지는 카론 경을 간병하러 온 이멜렌 님이 선물한 것이다. 이쯤 되면 아름다운 레이디의 찬사를 받은 그럴듯한 기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비록 내 레이디는 아니라고 해도....... 뭐. 또 가끔 청소의 요정으로 컴백한 키스 경이 와서 나와 카론 경의 병실을 정리해 주고는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근무시간에 빠져 나와 농땡이 피우는 것밖에는........ 아니, 무엇보다 올 때마다 카론 경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데 말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편지지는....... ‘빠르기도 해라.’ 아심이 보낸 청첩장이었다. 정성스럽게도 그 서툰 손으로 일일이 색을 칠한 청첩장. 굉장하지 않은가? 그야말로 광속으로 결혼에 골인이라니. 상대는 결국 오래전부터 고백하지 못하고 맴돌던 짝사랑이라고 한다. 감옥에서 살아 나오자마자 한걸음에 그녀에게 뛰어가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프러포즈했단다. 아, 뭐 그럼 처음부터 기사가 되는 건 아무 상관없던 거였잖아! 나는 우후후 하고 웃으며 그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병실 안은 막 개화하기 시작한 장미향으로 가득 했다. 슬슬 봄이었다. 제 20화 먼 곳으로 가고파 1 때는 어느 화창한 아침, 오랜만에 기사단 전 멤버가 모인 리더구트는 항상 그렇듯이 브리핑 중이었다. 무지 한가한 태도로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키스 경은 허공에 다리를 동동 구르며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위험한 귀부인께 여러분을 팔아 넘길까나아아.” 봄이라서 그런지 상태가 더욱 나빴다. 아침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테라스에 모인 자랑스러운 스왈로우 나이츠의 ‘노동자’들은 올해에는 키스도 지명을 받는 평등한 세상이 오길 염원하며 토스트를 꽉 물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키스는 실로 불 여시 같은 포즈로 우리를 바라봤다. “제가 지명을 받게 되면 여러분들의 순위가 하나씩 내려가게 될껄요오.” 뭡니까, 저 엄청난 자신감은? 애당초 성실하게 일할 생각부터 없으면서! 사실 키스 경도 지명을 받는다면 독주에 가까운 ‘고득점’이 예상된다는 것이 일각의 중론이기는 해. 정체를 알 수 없는 권력자들로부터 핑크빛 연서가 도착할 때도 많고 말이지. 알게 모르게 인맥도 넓은 양반이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잘났으면 지명 좀 받으라고!’ 결국 나는 아침부터 심통이 나서는 퉁명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카론 경, 문병 안가요?” “하암, 그러고 싶어도 제가 너무 바빠서 말이죠오.” 키스는 하품을 하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저건 마치 코알라가 빈둥빈둥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씹으면서 ‘이것 참,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군.’이라고 투정부리는 것 같다. 뻔뻔하긴. “흥, 꿈나라를 방황하는 시간만 조금 절약해도 문병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실 텐데요.” 그러나 키스 경은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절약하면 저 죽어요!” “........그럼 죽어.”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화 내지 말아요. 문병은 아까 다녀왔어요.” “아, 역시! 엥? 아까라고요?” 지금이 아침인데 아까라면 언제? “오밤중에 살짝 담 넘어 가서 꼬옥 담요를 덮어준 뒤에 이마에 ‘사서 고생 레벨 100’이라고 써주고 왔답니다아.” “그게 거짓말인 이유는 댁의 목이 아직까지 붙어있기 때문이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가 없구먼. 키스 경은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환자를 자주 찾아가는 것은 매너가 아니랍니다아.” “그 중환자 머리를 부지깽이로 후려쳐 놓고 그런 말이 나와?”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카론 경 상태가 정말 걱정이에요.” 뭐 본래 기사라는 것이 (게다가 카론 경처럼 일이 터지면 가장 먼저 사건의 중심에 서는 기사들은) 라이오라 씨 같은 금강불괴만 제외하면 일 년 내내 몸 성할 날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중상은 처음 봤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붕대 풀고 집무실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펜을 굴렸을 텐데, 지금은 보름도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혼자 일어서는 것도 어려운 지경이라니. 문병 가면 ‘자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라고 딱 잘라 말하긴 하지만 신경 안 쓰일 리가 있나. 내상이 심하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시력도 더욱 나빠져서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미 죽거나 재기불능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키스 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엎어져 한가한 표정으로 서류만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면, 얼굴로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장본인은 바로 키스 자신이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나를 비웃는 키릭스의 모습이 떠오르자 숨이 막혀 왔다. 일상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재앙이 바로 옆에서 위협적인 열기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그 불안을 털어냈다. “아아, 그냥 오늘은 다 관두고 놀러 나갈까나.” 키스 경의 콧소리에 동료들의 눈이 반짝 뜨였다. 연초에는 이런저런 행사가 많아서 최근에야 지명이 폭주하는 바람에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하느라 ‘유흥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은 키스가 놀게 해 준다면 간이라도 빼줄 얼굴이었다.(물론 루시온, 레녹 경 제외) 그 순간 엄청난 고함소리가 터졌다. “모두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마!” 불법 마약 거래 현장을 덮쳤을 때나 나올 법한 대사와 함께 덜컥 열린 문으로 헬스트 나이츠 기사들이 몰려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헬렌 경의 주도하에 새로 보충된 기사들로, 예전과는 달리 꽤 스마트해 보이는(혹은 얄미워 보이는) 인상의 젊은 엘리트들이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갑자기 이 무슨 날벼락이야! 우리는 너무 놀라서 의자 위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침입자’를 발견한 시종들이 주저 없이 그들 앞을 막아섰지만 키스 경은 손을 내 저어 그들을 물리고는 헤에 웃는 얼굴로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런, 대단히 씩씩한 분들이시군요. 문짝 값은 헬스트 나이츠 본부로 청구하겠습니다아.” 하여튼 키스는 세계가 멸망하는 날이 와도 마이페이스일 인간이다.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 것 같은 기세로 우리를 에워싸고는 죄인 다루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또각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서슬 퍼런 기세의 헬렌 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헬렌 경은 미녀지만 분위기가 저래서야 완전히 우리를 통째로 잡아먹으려고 나타난 마녀라고 밖에는....... 그녀 앞에서도 키스 경은 여전히 꽃밭이었다. 긴장감 좀 챙겨! “아, 헬렌 경? 여기 금녀 구역이라는 거 모르시나요오?” “흥! 네 녀석이 그런 말 할 자격 있다고 생각해?” 키스 경, 솔직히 찔리지 않수? “카론 경이 없으니까 직접 움직이시네요. 열심히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그 순간 (안 그래도 키스를 미워하는) 헬렌 경의 눈에 화르륵 불이 올랐다. 키스 경, 적어도 우리한테 상견례 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더 이상 상황 악화시키지 말라고! “내가 온 이유는 그동안 카론 경이 묵과해 온 너희들의 죗값을 처벌하기 위해서다! 각오해 둬!” 모두는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죄라니? 우리는 부정을 저지르고 싶어도 영 권력이 없어서 곤란한 몸이라고! 그러나 헬렌 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서류를 팔랑거렸다. “너희들은 왕실 법에 의해 의무 계약 기간 중 절대로 이성과 혼인, 교제 혹은 사적인 접촉을 해서는 안 되는 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그걸 어기고 수시로 파렴치한 행각을 벌인 사실이 발각되었다.” “그, 그게 무슨!” “변명 같은 건 필요 없어! 너희들은 내 처벌을 받기만 하면 돼!” (키스 덕분에) 극도로 솟구쳐 오른 그녀의 히스테리가 우리에게 쏟아졌다. 아시다시피(누가 만들었는지 면상 좀 보고 싶은) 이른바 ‘스왈로우 나이츠 한정 순결유지조항’ 이란 계약 기간 10년간 이성과의 결혼은 물론 연애와 어떠한 사적 접촉마저 금한다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금욕법안이다. 참고로 수도승들마저 미쳐 날뛸 이딴 악법이 존재하는 인권사각지대는 전 세계를 통틀어 이곳뿐이다! “누가 법을 어겼다는 거죠?”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마음에 걸릴 만한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당당할 수 있다고. 그러자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키스 경을 가리켰다. 그 순간 소박맞은 아낙네인 양 털썩 주저앉으며 오열을 터뜨리는 키스. “억울하옵니다아! 저처럼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는 신앙심 가득한 성기사를 어찌 그리 욕보이십니까아.” 키스 경, 안 그래도 설득력 없는 당신이 심히 불필요한 사족을 붙이는 바람에 더더욱 불리해져 버렸어. “이건 누군가의 모함이에요!” 됐네, 이 사람아. 우리들은 내 저럴 줄 알았지, 라는 표정들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키스를 손가락질했다. 솔직히 당신이 결백하다는 말은 임금님이 애 뱄다는 말과 비슷한 레벨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헬렌 경의 차가운 손끝이 이번에는 나를 향했던 것이다. 어째서 나야! “나, 나, 나는 절대 아니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요! 저번 지명 때도 열차까지 따라온 후작부인을 피하느라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렸는데!” 이건 맹세코 진실이다.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안 주는 면벽수련을 했다고까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법적으로 하자가 있을 만한 짓은 절대 안했어! 아니,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고! 매권마다 죽도록 괴롭힘 당하느라 바빴는데 한가하게 연애할 여유가 있기라도 했어? 죽을 고생 하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최소한 범죄를 저지를 시간은 주고 의심하든가 하라고! 난 엄청나게 억울해서는 빨개진 얼굴로 방금 전 누군가의 대사를 따라했다. “이건 누군가의 모함이에요!” 그러자 키스가 외쳤다. “저도 그래요오!” “에이이! 댁은 좀 빠져!” 당신이 끼어들면 뭘 해도 진지할 수가 없어! 누군 마음이 찢어질 지경이구먼! 나와 키스의 대성통곡으로 울음바다가 되어 버린 장면을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던 헬렌 경이 눈썹을 찡그렸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군. 너희 둘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에게 혐의가 있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 뭐라! 나는 고개를 확 돌려 동료들을 바라봤다. 헬렌 경이 제시한 증거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들은 각양각색의 좌절 포즈를 연출하고 있었다. 자주 볼 수 없는 광경인지라, 하나하나 설명해 보자면....... “젠장, 누굴 들킨 거지?” 상습범 루이 경은 이젠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누구와의 관계가 노출되었는지 짐작도 안 갈 정도라 말이지? 동정하기엔 너무 스케일 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가로막는다는 그놈의 투철한 프로의식만 어떻게 좀 수정하면 저 지경까지는 안 될 텐데 말이야. “서, 설마 또 벌금이야?” 루이 경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쇼탄 경도 덜덜 떠는 손으로 담배를 물어 피우고 있었다. 아마 올해에도 그토록 바라던 빚 청산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할 듯하다. 그래, 이 멤버들까지는 항상 그래왔다고 치자. “..........” 루시온 경은 공연히 파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다. 헤에, 티클 만한 실수도 용납지 않는 고귀한 루시온 경에게도 부끄러운 연애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네. 아니, 그보다 상대가 누구야? “........어떻게 안 거지.” 한편 이 사람만은 절대 아닐 줄 알았던 레녹 경마저 벽에 손을 집은 채 고개를 팍 숙이고 있었다. 우아아아! 다른 사람한테는 규칙 엄청 강요하면서 어쩜 저럴 수가! 정말 레녹 경은 자결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랑시 경은 자신도 피해자라며 서럽게 외쳤다. “나, 나는 그냥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해서 따라간 건데!” 그건 유괴잖아! 뭐 이제와 걱정되는 것은 유괴범이 남자가 아니 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쪽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우니까 패스. 한편 도 놀라운 ‘범법자’는 크리스티앙 경이었다. 게다가 크리스 군과 가까운 여성들은 백이면 백 성직자! 이, 이건 너무 하드코어한데. 크리스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헬렌 경을 바라봤다. “제발 저 때문에 그분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게 해 주세요!” “그건 법이 결정할 문제야.” “하지만 그분은 몸이 불편한 80세의 고령이시신데.......” 뭐라! 지나치게 성숙한 분이시잖아! 크리스 경은 종교 행사에 지명을 받던 중에 한 수도원의 노(老)원장에게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이 시대의 수도원이란 종교서적을 만들어 팔아먹기 바쁜 인쇄소인 경우가 대부부인데, 그분은 돈 없는 부모들이 맡기고 간 미숙아들을 돌보는 것을 자신의 수행이라 여기고 왕실 지원 한 푼도 없이 수도원을 이끌고 있었다. 곧 세상을 떠날 늙은 성직자가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아이들을 품에 안은 모습에 감동 받은 크리스 경은 그 이후에도 자주 찾아가 그분을 만나고 수도원 일을 도왔다고 한다. 아니, 그런데 이 훈훈한 상황의 어디가 ‘불법 연애’라는 거야! “어쨌든 법규에는 업무 외에 이성과의 접촉을 금하고 있어. 감성적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야.” 저 마녀! 헬렌 경은 한 발도 양보하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크리스 경을 범죄자로 몰아넣었다. 마지막 타깃인 지스 경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오히려 헬렌 경에게 소리쳤다. “나는 그냥 도와줬을 뿐이야! 고객도 귀족도 아닌 그냥 평민 소녀였다고!” 생각보다도 훨씬 울분에 찬 목소리라서 나는 깜짝 놀라 지스킬 군을 바라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스 경이 약을 사러 시내에 갔을 때 돈이 부족하다며 주인에게 울며 사정하는 또래의 여자아이를 봤다고 한다. 그 여자아이가 사려고 한 것은 어머니에게 필요한 약이었다. 지스 경이 한 일이라고는 그 돈을 대신 내주고 그 아이의 간곡한 부탁 끝에 집에 초대받아 흔하디흔한 차 한 잔과 손뜨개질한 목도리를 선물 받은 것뿐이었다. 그런 것까지 뒷조사해서 증거랍시고 몰아붙인단 말이야? 세금 똑바로 쓰라고! “난 너희들에게 피해준 것도 아니야! 지명도 빠짐없이 완수했어! 그런데 왜 참견이야!” 그러나 헬렌 경의 마음속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나 보다. “그것 또한 엄연한 법규 위반이다. 법에 예외란 없어! 이런저런 이유로 법을 위반하다보면 나라가 엉망이 돼!” 그 말에 지스킬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헬렌 경이 남자였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었을 기세였다. 그런데 소리친 건 내 쪽이었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만든 법이 완벽할 리가 없잖아요!” “뭐? 감히 나하고 논쟁이라도 하자는 거냐?” “옳고 그른 게 너무 확실해서 논쟁도 안 될 것 같네요! 자신은 처벌하는 역할이니까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건가요? 그런 짓을 해놓고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변명하시는 겁니까?” 카론 경은 항상 고민한다. 완벽하지 못한 세상 속에서 자신도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판단을 맹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과 자신이 마찰을 일으킬 때마다 그 표면이 아파서 항상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 고통을 피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눈을 감고, 자신은 완벽한 세상 속의 완벽한 인간이라고 세뇌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의 모든 판단에 고뇌는 없고 어떤 행위도 정당화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모두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모두 서로 다른 사정이 있다는 걸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그걸 독선(獨善)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꾸만 헬렌 경이 그런 독단의 감옥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에 화가 났다.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아, 미온 경. 그렇게 화내면 얼굴에 주름 생긴답니다아.” 불쑥 다가온 키스 경이 내 머리를 매만지며 달래고 있었다. “키, 키스 경, 하지만.......” “전 여러분들이 자랑스러워요. 화낼 것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분노를 식혔다. 때로 그는 어른스럽다. 마치 인생을 달관한 성자처럼, 여간한 부당함에도 화내거나 감정적으로 받아치는 법이....... 그 때 키스가 일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쳇. 유부남이 사라지니까 이젠 노처녀가 와서 들들 볶네. 잘난 제가 참아야죠. 헤유.” “뭐라고!” 화르르륵 불타오르기 시작한 헬렌 경과 키스가 서로를 노려봤다. 방금 한 말 다 취소. 으이구! 뭐가 어른이야! 당신이야말로 도발 하지 마! 박해를 당한 기사단원들조차도 응원하기는커녕 ‘끼어들기 싫다네.’라는 표정들로 외면하고 있었다. “키스 세자르! 치 떨릴 만큼 음란한 네놈이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헤에? 음란하다니요? 여자와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무고한 제게 그 무슨 트집입니까?” “네, 네놈이 무고하다고!” 히스테리 컬한 그녀의 포효가 테라스를 쩌렁쩌렁 울렸다. 헬렌 경의 편을 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건 아주 진실하고도 처절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뻔뻔함의 대명사, 키스 경은 아예 해죽 웃으며 혀를 내밀고는 도발에 박차를 가했다. “제게 죄가 있으면 돌을 던지세요. 헬렌 경 스스로가 제 무고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아!” “그, 그건........” 헬렌 경은 입술을 꽉 깨물며 짜내듯이 말했다. “단지 네놈이 용의주도하기 때문이야!” 우리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 경은 억울한 목소리로 빠르게 외쳤다. “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다고? 넌 예전 내게도!” 그러자 키스가 귀를 손으로 모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에? 제가 당신에게 무슨 망측한 짓을 했는데요오?” 순간 정적이 흘렀다. 헬렌 경은 무수한 망상을 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부하들을 빨개진 얼굴로 바라본 뒤에 이를 부득 갈았다. “아, 아무 일도 없었다.” 키스 경이 헬렌 경을 침몰시키는 데는 몇 마디도 필요치 않았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왠지 위고르 공이나 블리히 경이나 헬렌 경이 악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만두 대왕님이나 아이히만 대공이나 오르넬라 성녀님이나 키스 경 같은 인물들의 밥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억울함에 몸서리치는 올드미스의 분노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각오해라, 키스 세자르! 다른 모든 일을 접고서라도 네놈의 사생활을 다 까발리고야 말겠어!” 이, 이건 뭔가 이미 ‘정의실현’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솔직히 키스 경의 사생활이라면 내 쪽에서부터 궁금하기는 해. 대체 평소에 뭘 하고 다니기에 밤낮 약 먹은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지도. 그러나 졸지에 정부의 맹 추적을 받는 부패한 범죄자가 되어 버린 키스 경은 ‘뭐, 법대로 하시구랴.’ 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아, 아무리 조사해 봐도 제 결백함만 증명할 뿐이랍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제가 법을 어긴 사실이 드러난다면 책임을 지고........” 그때 헬렌 경이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지금부터 증거 확보를 위해 리더구트 전체를 정밀 수색하겠다!” 순간 키스가 흠칫 놀라며 말을 멈췄다. (자기 사무실에 무슨 켕기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식은땀을 흘리며 자기 사무실 쪽을 바라보고 있는 키스에게 헬렌 경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위법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고?” 그러나 키스는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에. 그, 그러니까 어떤 책임이냐 하면, 전 눈물을 머금고.......”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올커니!’하는 눈빛으로 외쳤다. “미온 경의 목을 치겠습니다!” “어째서 나야!” 순간 내 주먹이 키스 경을 날려버렸다. 헬렌 경이 고함쳤다. “그딴 걸로 될 것 같나!” “우아아아! 그딴 거라니!” 내 절규에도 불구하고 키스 경을 지옥 불에 내던질 수 있는 유일한 찬스라는 것에 탄력 받은 헬렌 경은 그야말로 광소를 터트리고 있었다. “헬스트 나이츠 기사단장의 권한으로 리더구트 전체에 대한 2주 동안의 가택 수색을 명한다! 모두 여기서 당장 나가!” 우리 모두는 경악한 표정으로 헬렌 경을 바라봤지만 키스 경만은 코웃음 치고 있었다. “흥. 우리가 그런 부당한 탄압에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습니까아? 아예 왕실 밖으로 나가 드리지요!” 머, 멋대로 의견 정리해서 말하지 마! 우린 그럴 생각 없어! “좋아! 그럼 왕실 밖으로 2주간 너희들 전원을 추방하겠다! 썩 꺼져!” 결국 대 폭발한 헬렌 경의 고함소리가 대재앙이 되어 우리를 덮치고야 말았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키스가 끼어든 일치고 뭐 하나 순조롭게 되는 게 없다. 2 “그래서 2주 동안 휴가입니다아!” 가방은커녕 옷 한 벌 못 챙겨 온 채, 찬바람 쌩쌩 부는 역 앞에 내몰린 우리들은 해맑게 웃고 있는 키스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나는 바람 덕에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칼을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이거, 휴가라기보다는 쫓겨났다고 하는 편이.......” “아아, 미온 경. 그래도 간만의 휴가인데 좀더 포지티브한 사고를 하셔야죠오.” 그래도 이 양반이 끝까지 잘했대요? 한편 늦게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잠옷 차림 그대로 쫓겨난 우울한 쇼탄 경은 추위에 와들와들 떨며 울분에 섞인 포효를 터트렸다. “이, 이제 어쩔 거야. 당신 덕분에 2주 동안 리더구트에 들어가지도 못해! 빨리 일해서 이자를 갚지 않으면 왕실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와하하, 쇼탄경. 릴렉스. 릴렉스.” 키스의 미소에 대한 쇼탄 경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네놈 때문에 홈리스가 되어 버렸는데 무슨 얼어 죽을 릴렉스야! 게다가 왜 나만 잠옷이냐고! 그래! 네놈을 영원히 릴렉스 시켜 주마!” 쇼탄 경이 내지른 강펀치를 키스가 슬쩍 피해버리자 균형을 잃은 쇼탄은 싸늘한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것도 잠옷 바람으로. 개판이었다. (이자를 갚을 길이 막막해져) 흙바닥 위에서 흐느끼는 쇼탄 경을 벌레 보듯 내려보던 루이 경이 냉정하게 고개를 돌린 채 헛기침을 했다. “창피하다. 일행 아닌 척 해.”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전생에 뭐였는지가 심히 궁금해지는군. 도저히 이 사태가 감당이 안 되는 레녹 경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고, 루시온 경은 이 와중에도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고객들에게 지명에 늦게 되었다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근처에 모여 있는 십여 명의 리더구트 시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도 쫓겨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평상복도 다 똑같네. 왠지 죽을 때도 한날한시에 나란히 관에 누울 것만 같아. “시종들은 어쩌죠?” 내 말에 키스 경이 아참 하는 표정으로 시종들에게 말했다. “ 2주 동안 유급휴가를 명합니다아. 고향에 다녀오세요.” 그러자 그들은 똑같은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에 오와 열을 맞춰 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시종들한테도 고향이 있었습니까? 그전에....... 정말 인간이었나요?” “그 무슨 실례되는 말씀이십니까아. 당연히 사람 뱃속에서 나온 귀여운 아이들이지요. 게다가 모두 일란성 쌍둥이기도 합니다아. 딱 보면 모르겠어요? 상식이잖아요.” “열두 쌍둥이가 어째서 상식이야!” “네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인간과 개복치를 착각한 조물주의 실수라면 모를까........ 일단 댁하고 상식을 논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 많은 아이들이 코끼리 뱃속에서 튀어나온 건가, 하마 뱃속에서 쏟아져 나온 건가. 그들의 부모가 모두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이 세상의 신비를 한 꺼풀 벗겨낸 것 같은 과학적 현기증을 느꼈다. 한편 급히 데려온 고양이들을 품고 있던 지스 경이 폭발 일보 직전의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좋으니까 2주간 지낼 방법을 내놓으라고. 당장은 우유 사줄 돈도 없으니까!” 그 말에 우리 모두는 이 모든 재난의 시발점인 키스 경을 흘겨보았다. 키스는 하품을 하며 정차해 있는 마나열차를 바라봤다. “뭐 그럼 2주 동안 이오타 여행이라도 다녀올까요오?” “와아. 그거 신나겠네. 하지만 어떻게! 걸어서?” 우리는 땡전 한 푼 없는 신세. 말 그대로 2주 한정 알거지다. 이미 루이 경은 역에서 나오는 아가씨를 붙잡고는 자신이 마키시온에서 추방당한 왕자라면서 밥값을 구걸하고 앉았고.......에이이! 그만두지 못해! 그때 키스 경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황금빛 카드를 한 장 꺼냈다. “이 정도면 될까요?” “그, 그건!” 모두의 눈빛이 경악으로 커졌다. 나도 실제로는 처음 보는 거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이 왕실의 중신임을 알리는 최상급 증명 부적! 아이히만 대공을 포함한 여섯 중신을 비롯해서 종교 최고위 지도자, 공작가의 한 명에게만 왕실이 지급하는 이른바 꿈의 카드다(본래 명칭은 ‘왕실한정발권화폐대행증빙패’(王室限定發券貨幣代行證憑牌)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는 않는다). 그 카드를 소유한 자가 발휘하는 마법은 다음과 같다. 1) 국왕의 거처를 제외한 모든 보안 지역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됨. 2) 베르스 왕국 내의 어떠한 공공, 사설 시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신용 등급이 획득됨.(이용금액은 향후 왕실로 청구) 3) 베르스 왕국의 모든 은행으로부터 5천만 셀링 이하의 현금을 실시에 인출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됨.(물론 해당 인출액은 향후 왕실로 청구) 4) 군으로부터 5천 명 이하의 병력을 일시에 소집, 통솔할 수 있는 통수권을 얻음. 5) 어명을 제외한 모든 사법권에 대한 면책특권을 받음. 6) 본 증빙패의 소유주나 국왕의 권한 회수 허가가 있기 전까지 본 권능은 영구히 지속됨. 말 그대로 용을 부리고 불을 뿜고 바다를 둘로 가르고 앉은뱅이 일으키고 모래를 쌀로 바꾸는 대마법과 다를 바가 없는 위력을 지닌 카드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실존한다는 것도 지금 처음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키, 키스 경이 어째서 저걸 가지고 있는 거야!” 사람들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키스 경을 우러러봤다. 심지어 쇼탄 경은 저 늠름하게 희번덕거리는 카드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황홀해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대단해. 키스 경이 저토록 왕실에서 인정받는 사람인 줄은 전혀 몰랐어. “키스 경. 난 정말 당신을 다시 봤........” “이거 오르넬라 성녀님 건데요오?” 순간 우리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왔다. “후후후. 사고 싶은 거 맘대로 사라면서 주더군요. 이게 모두 밤마다 성녀님께 열심히 봉사한 대가.......헙!” 자승자박하셨구려. 키스 경은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우리들의 면박이 쏟아졌다. “아주 이젠 종교적으로 놀아나시는구만!” “당신 박제되고 싶은 거야?” “이 나라의 신앙심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아무튼 대단하셔. 다른 사람들은 고개도 못 드는 여왕님한테 그걸 받아 내다니.” “뭐 상관없겠네. 그분만은 헬렌 경이 증거를 잡아내도 어쩔 수가 없는 상대니까.” 그때 쇼탄 경과 루이 경이 비호처럼 달려와 우리들 앞을 막으며 외쳤다. “어허! 함부로 말하지 마! 키스님은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 그러셨던 것뿐이야!” 어절씨고? 키스 님? “저희는 키스님을 끝까지 따르겠나이다. 개처럼 부려먹으소서!” 비유 한번 터프했다. 그들은 키스 경 앞에서 큰절을 올리며 충성을 맹세했다. 아니, 카드를 보자마자 사람이 저리 돌변하나? 줏대 없는 짓도 저 정도로 막 나가기는 힘든데 말이지. 키스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자애롭게 토닥거렸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나의 종들이여. 우리 어서 헬렌 경의 박해를 피해 이오타로 가십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스왈로우 나이츠 내 사조직 ‘키스교’가 창단되는 순간이었다. (사이비) 교주 키스는 돈에 눈먼 종들 앞에서 황금 카드로 부채질을 하며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아아, 뭐 일등칸에 타는 건 서민들이나 하는 짓이고 우리는 그냥 열차를 한 대 사버릴까 하네요. 그리고 이참에 이오타에서 놀 유흥비도 한 천만 셀링 정도 뽑아볼까요오?” 나는 그 거대한 스케일에 기가 질려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거 결국 나랏돈인데 정말 괜찮겠어요?” 그러자 키스는 고개를 휙 돌리며 대꾸했다. “흥.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요.” 아주 제대로 미쳤다. 결국 키스는 꼬리치는 광신도들을 거느리고는 매표소 앞에 서서 금빛 찬란한 카드를 호쾌히 내밀었다. “열차 한 대 부탁합니다아!” 그리고 잠시 후, 황급히 뛰어나온 역장과 뭐라고 대화를 나눈 키스가 기대에 부푼 우리들을 향해 샤방 몸을 돌리며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머나. 이 카드 정지되었........흐억!” 그 순간 날아오는 쇼탄 경의 주먹을 황급히 피했지만 곧바로 루이 경이 키스의 뒤를 잡았다. 부귀영화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탓에 눈이 돌아가 버린 루이 경이 소리쳤다. “쇼탄! 이 비렁뱅이 녀석을 애무 쳐!” “오케이! 어금니 꽉 다물어!” ‘키스교’. 창단 1분 만에 해체. 3 우리는 이오타 행 열차를 타고 있었다. “으으, 다리 좀 치워 봐!” 그것도 2등 칸에 여섯 명이나 끼어 탄 채로! 화물칸도 이 정도로 밀도가 높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우리는 ‘꺾여’ 있었다. “제기랄! 지금 네놈의 엉덩이가 내 머리를 압박하고 있어! 이게 얼마짜리 머린데!” 루이 경의 짜증에 쇼탄 경이 곧바로 발끈했다. “네놈의 팔이야말로 내 다리를 휘감고 있다고!” 내 무릎 위에 올라타 있는 지스 경은 (가장 편한 위치인 주제에) 나름대로 불만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고양이들이 겁먹잖아!” “아아! 동물보호 실천하지 못해 미안하게 되었네! 허리가 꺾여 있는 상황만 아니라면 충분히 배려해 줬을 텐데 말이지!” 작은 체구 덕에 시트 위 짐칸에 올라가 웅크리고 있는 크리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우리를 달랬다. “조, 조금만 참으세요. 8시간만 더 가면 이오타에요.” “...........” 크리스군. 악의가 없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면 ‘8시간’ 이라는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후벼 파는구려. 그러니까 이 모든 원흉이 죄다! 우리는 모두 객실 한 쪽에 꽁꽁 묶여있는 키스 경을 노려봤다. 린치 당한 얼굴이 잘 구워진 크로와상처럼 부풀어 있는 키스가 조그맣게 말했다. “........살려주시어요오.” 회상하자면, 오르넬라 님께 하사 받은 키스 경의 카드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정지 카드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한껏 꿈에 부풀어 있던 우리들은 그 즉시 그 꿈의 질량만큼 분노로 변환시켜 키스에게 되돌려주었다.(여기서 오르넬라 님이 결코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이쯤에서 백기를 들고 왕궁으로 돌아가면 좋았을 텐데, 헬렌 경의 압제에 결코 굴복할 수 없다는 키스 경의 결의를 높이 산 우리들은 그 비싸 보이는 키스 경의 귀걸이를 팔아치워 이오타 행 노잣돈을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이것만은 안 된다고 발버둥치는 키스 경을 포박, 구타한 후 귀걸이를 탈취, 간신히 여비를 마련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그 비싼 열차 표를 인원수대로 살수야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달란 2등칸 하나 사서 몰래 몰래 꾸역꾸역 들어오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도 빈부격차라는 현실은 존재해서 부유한 루시온 경은 따로 표를 사서 현재 1등석 칸에서 극진한 룸서비스를 받으며 한가로이 독서중이시고, 지조 없는 랑시 경은 짐짝 취급 받을 바엔 차라리 정조를 버리겠다느니 하는 진땀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루시온 경의 몸종을 자처해 1등석에 함께 타는 영민함을 과시했다. (물론 쇼탄 경도 뒤늦게 루시온 경에게 알랑방귀를 끼워봤지만 ‘싫습니다. 그 덩치가 같이 있으면 갑갑합니다.’라는 싸늘한 말과 함께 버림받아야만 했다.) 아아.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아침 브리핑을 받던 내가 어째서 2주간 왕궁 출입 금지 처분을 받은 채 허리가 꺾여 이오타로 가고 있어야 해? 정신적 육체적 금전적 압박이 다시금 마음 한 편을 엄습하자 나는 물끄러미 키스 경을 흘겨봤다. 내 뱀 같은 시선에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 여행도 추억에 남고 좋잖아요.” 이봐요. 추억은 지난 일을 말하는 거고 지금은 현실이거든? 안 해도 좋은 말 덕분에 더욱 궁지에 몰린 키스 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합니다아.”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혈 소년 지스킬 군의 카운터가 날아갔다. “미안하단 말로 다 해결될 것 같으면 살인이 왜 일어나겠어?” 정신적 보디 블로를 먹은 키스 경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비를 구걸했지만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한 우리들의 해묵은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브리핑도 그래! 어째서 키스 경만 늦잠자도 벌금이 아니냐고? 뭔가 평등해야 하는 거 아냐?” “왜 그 얘기가 지금 나오나요오!” “지도도 성의 있게 좀 그려줘! 예전에는 전혀 엉뚱한 지도를 던져줘서 지명자를 찾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녔어야 했다고! 무슨 보물지도야? 코끼리가 그려도 그것보단 잘 그릴거야!” “제, 제가 원래 그림을 못 그리는 걸 어쩌라고요오!” “명색이 기사단장이라면 그림 공부 좀 하라고!” 봉사자 주) 동서남북도 표시되지 않고 길만 그려져 있는 낙서 같은 지도다. 왼쪽으로 쭉 이어지는 길 중간에 길 줄임표가 되어 있으며 다음 세 갈래로 길이 나누어져있다. 세 갈래 길 중 가장 위쪽 길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여기쯤?’ 이라는 말이 써져 있다. 어째서 결론이 그래? 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정말이지 키스 경의 그림 실력은 가공할 민폐 수준이다. 일전 지명 때 내게 줬던 지도를 일례로 들어 보자. 모두들 이걸 이계인이 이 땅에 남기고 간 표식쯤으로 생각할 테지만 이건 엄연히 키스가 그린 지도다. 대체 이 치 떨리게 미스테리어스한 상형문자는 뭐란 말인가! 어디가 동쪽인지조차 알 수가 없잖아! 내가 내린 역 정도는 표시해 줘! 멋대로 길 줄임표 그려놓지 마! 게다가 여기면 여기지 여기쯤은 또 뭐야 여기쯤은! 또 저 신용할 수 없는 물음표는 무슨 의미냐고! 가보니까 거긴 차도 한복판이었어! 어째서 지명자가 길 한가운데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이딴 거 하나 달랑 들고 지명자를 찾는 건 명수사관 카론 경조차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 모두는 수소문 끝에 찾고는 했다. 이건 정말이지 화가의 재능 이전에 기본적인 성의의 문제였다. 결국 여기서부터 시작한 걷잡을 수 없는 불평은 종당에는 모리 좀 단정히 하고 다녀! 저녁에는 스테이크를! 목욕탕을 더 크게! 오르넬라 님과의 관계를 불어! 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평불만에 8시간 내내 마구 두드려 맞는 불상사를 낳았지만, 이번만큼은 레녹 경조차도 입을 꽉 다문 채 울먹거리는 키스 경을 냉정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여행의 설렘이라고는 씻은 듯이 찾아볼 길 없는 지극히 폭발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코 잊지 못할 휴가의 첫날이 막을 열었다. 4 장장 8시간의 대장정 끝에 이오타의 휴양지 부근에 내렸을 때 우리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일단 각양각색의 미남들이 옷이며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로 비좁은 2인실에서 줄줄이 나오는 모습 자체가 진귀한 서커스였고, 노을에 물든 그 표정들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라서 사람들로서는 우리들이 대체 뭐하는 사람들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줄여 말하자면 왕궁에서 추방당해 귀걸이 팔아 휴양 온 관광객 정도가 되겠지만.) 그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바로 쇼탄 경. 접힌 허리를 펴지 못해 (잠옷 차림으로) 신음 소리를 내며 흡사 자벌레의 율동으로 열차 밖으로 기어 나오는 모습은 가히 관능적이기 까지 했다.......라고는 농담으로라도 말 못하겠군. 에이이! 창피하니까 냉큼 일어서! 한편 초호화판 1인실에서 안락한 이동을 하고 룸서비스를 제공받은 식사와 샤워까지 마친 루시온 경은 8시간 동안 고초를 당해 너덜너덜해져 있는 우리들을 말없이 보다가 ‘한심하군.’이라고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으악 얄미워! 당신이라고 이런 꼴을 당했다면 그 우아한 자태가 한 줌이라도 남아 있을 것 같아? 세련된 손길로 타이를 고쳐 맨 루시온 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호텔에 가 있겠습니다.” “루, 루시온 경? 어느 호텔? 숙박비 있어?” “뭐, 우리 가문에서 운영하는 다국적 호텔이 근처에 있으니까요.” 이보세요. 가문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며? 우리들의 허망한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갑부 루시온 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가버렸고, 그 뒤를 벨 보이를 자처한 랑시 경이 브이 자를 들어 올리며 뒤따랐다. 그걸 본 쇼탄 경이 초탈한 미소를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후후, 역시 도련님은 곤란하군. 고생 끝에 얻은 성취감이라는 걸 몰라. 역시 젊을 때는 적당히 가난한 게 제격이지.” 쇼탄 경. 그렇게 말하면서 흘리는 그 눈물은 무슨 의민데? 어느 틈에 전열을 정비한 루이는 매의 눈으로 이오타의 아가씨들을 주도면밀하게 시선에 담고 있었다. 지금의 그 날카로운 눈빛에서는 고수의 기운이 흘러 넘쳐서 당장에라도 ‘좌에 둘, 우에 넷, 후방에 셋! 내가 움직이며 너희는 뒤를 맡아!’라고 외칠 것만 같았다.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자, 뭣들 해. 어서 이인일조로 흩어지자.” “뭐? 왜 흩어져?” 지스킬의 퉁명스러운 반문에 루이 경은 ‘후후, 역시 어린애는 안돼.’라는 말투로 거들먹거렸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우리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국인들이나 다량으로 묻혀 있는 유적 따위를 관광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보다는 좀더 이 나라의 아가씨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도모하는 편이 외교적으로도 훨씬 건설적이야!” 어째서 결론이 그렇게 돼? “이보세요. 여자야말로 어디를 가도 있다고.” “어허! 이오타의 미녀와 콘스탄트의 미녀와 마키시온의 미녀 모두 제 각각의 고유한 맛을 지니고 있어. 하나하나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하아?” “무지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나 같은 전문가의 배려로 세심하게 발굴, 보존되어야 해. 모든 문화권의 여인은 그 고유의 토양과 바람 그리고 시시각각 변해 오는 태양의 움직임에 의해 창조되고 숙성된 섬세한 보물이야. 우리들은 그것을 지키고 가꿔나가 후세에 전해줘야 할 사명감을 느껴야 해. 왕실의 무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고 있어!” 뭔가 알아들을 듯하면서도 알아듣기 싫은 말이었다. “비, 비분강개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어째서 지금 헌팅이 학문적 고찰로 승화되고 있는 거야?” “뭘 모르는 우민들은 세상의 국수가 모두 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실은 한 그릇 한 그릇이 모두 달라! 미묘한 반죽의 차이만으로도 혀를 감는 촉감과 풍미가 달라진다는 걸.......우어억!” 본능적으로 루이를 후려갈긴 쇼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치를 떨었다. “하아. 하아. 미안. 더 듣고 있다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아서.” 동감. 어느새 묶어두었던 포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버린 키스 경은 기지개를 펴며 나른하게 말했다. “하암. 자, 그럼 이제 숙소로 가 볼까요오?” “무슨 숙소요?” “조오기.” 우리는 키스 경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규모의 초특급 호텔이 백두대간처럼 그 위용을 자라하고 있었다. 여전히 잠옷 차림의 쇼탄 경이 그 웅장한 건축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키스 경, 아무리 봐도, 저기는 홈리스를 위한 무료 구호소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저기가 바로 루시온 경의 가문과 쇼메 왕자가 공동 소유하고 있는 다국적 호텔이랍니다아.” “에엥? 정말?” 손가락 까딱 하는 걸로 성도 쌓을 수 있는 쇼메야 그렇다 쳐도 루시온 경의 백작 가문이 그 정도로 대단했어? “그리고 아까 루시온 경이 다른 숙소가 없으면 찾아오라고 귀띔해 줬어요. 물론 자기 호텔 아니라면서 돌아가면 투숙비 지불하라고 하긴 했지만. 굳이 뒷골목에서 주무실 분들에게는 강요하지 않겠어요.” 헤에, 역시 루시온 경. 아닌 척하면서도 리더로서 꽤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다니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루시온 경의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업적 안목이 뛰어나거나 비상하게 수학 실력이 좋다거나 학계에서 크게 인정받는다거나 하는 수재들이라고 한다. 만약 나였다면 그런 엄청난 사람들 속에 서 있다는 중압감을 도저히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루시온 경은 꽤 특출한 편이라서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를 후계자로 키우려고 점찍었단다. 결국 루시온 경도 그 혹독한 압박과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 묘한 상실감 때문에 가문을 뛰쳐나온 것이지만, 스왈로우 나이츠에 와서도 그 빈틈없는 기질은 여전히 번뜩이고 있다. 세상에는 어딜 가도 빛을 내는 그런 사람도 있는가 하면, 나는 물끄러미 키스를 바라봤다. “아아, 빨리 들어가서 자야 해요. 수면부족은 피부미용의 적입니다아.” 저런 잠에 환장한 게으름뱅이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히 밤의 용궁이라 할 수 있는 메머드급 호텔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쇼탄 경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누구는 평생 저런 곳에서 살아보는 게 소원인데 또 누구는 저걸 제 발로 포기하고 2인 1실의 노예생활을 자처하는구나. 루시온 경, 가난 체험을 하고 싶었다면 그냥 나랑 바꾸면 되는 건데!” 으이구, 이게 무슨 ‘왕자와 거지’인 줄 알아! 궁상 좀 그만 떠세요! 밥 달라고 울어대는 고양이들을 품고 있는 지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쨌든 밤까지 들어가면 되는 거지? 난 고양이 먹이 사러 갈 거야. 크리스, 너도 따라와.” “하, 하지만 나는 이곳의 성당이 보고 싶........ 같이 갈게.” 지스킬의 싸늘한 눈초리에 주눅이 든 크리스가 묵묵히 그의 뒤를 뒤따랐다. 크리스군, 모처럼의 여행 첫날을 팔자에도 없는 고양이 사료 고르다 끝내겠구려. 그리고 키스 경은 추욱 늘어진 채로 곧바로 호텔 침대 행, 레녹 경은 어디로 가겠다는 건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뭐 나도 기왕 온 거 여기 저기 구경이라도 해볼까. 사실 이자벨님을 만나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그때 루이와 쇼탄이 양쪽에서 내 팔을 잡아챘다. 엥? “그 손 놔, 쇼탄.” “어허, 댁이야말로 놓으시지.” “둘 다 놓지 못해!” 난 둘을 뿌리치고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나와 파트너를 맺으려는 그들을 바라봤다. “헌팅에는 관심도 없으니까 난 빼주세요!” “미온,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직 호스트인 너야말로 이 루이님의 파트너로 어울려. 이 넘실거리는 미녀들 모두 네 손길 한 번에 넘어올 거야.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썩히는 짓이야말로 천벌 받을 죄악이야. 지옥에 떨어진다, 너!” 어째서 헌팅을 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는 거냐! 난 한숨을 내쉬며 변명했다. “아무튼 호스트야 직업이었을 뿐 난 마음에도 없는 달콤한 말 늘어놓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상대방에게 실례라고요.” “이 녀석, 의외로 순정파네.” 이제 알았수? 순간 번뜩 떠오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럼 애당초 둘이서 다녀오면 될 거 아닙니까?” “아니, 꼭 너야만 해.” “엥? 어째서?” 그러자 그들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너는 남의 먹이를 탐하지 않잖아.” “........” 난 가벼운 빈혈을 느껴 이마를 꼭 누르고는 이를 부득 갈았다. “에이이! 여기가 무슨 동물의 왕국인 줄 알아! 이미 강호를 떠난 사람 내버려 달라고! 게다가 쇼탄 경은 잠옷 차림이잖아! 그 꼴로는 쥐며느리 하나도 안 넘어와!” 그러자 쇼탄 경은 이제는 도리어 익숙하다는 듯이 민망한 포즈를 취하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후후, 미온은 모르는구나. 이거야말로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필살의 코스츔!” “행여나.” 구릿빛 근육질의 모성본능? 당신의 공략 목표가 고릴라였어? 인간 여성이라면 백이면 백 다가오기만 해도 경찰을 부를 걸? 풍기문란으로 잡히지나 마시구려. “하아 뭐. 이오타의 감옥이 얼마나 차가운지 체험하지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저 터무니없는 듀엣으로부터 떨어져 시내를 걸었다. 세계 유행의 중심지라는 이오타의 명성에 걸맞게 해질녘의 거리는 각양각색의 등불들로 들썩이고 있었다. 5 ‘그건 그렇고 배고파.’ 다른 판타지에서 주인공은 며칠씩 먹는 장면 안 나와도 끄떡도 없던데, 어째서 나는 허구한 날 먹어대도 항상 배가 고픈 거지? 나는 이 기묘한 부조리에 의아해하며 터덜터덜 유흥가를 걸었다. 산지사방에서 풍겨오는 고기 굽는 냄새며 과일 향들이 성직자도 타락시킬 것 같은 유혹처럼 내게 다가왔지만....... 어쩌랴, 돈이 없는걸. 어여쁜 빵집 아가씨를 희롱하는 놈팡이들을 물리쳐주고 빵이라도 얻어먹었으면 좋으련만, 이놈의 도시는 지나치게 치안이 좋아 정의감을 실천할 기회도 안 주는구먼. 그때 나는 의외의 노점상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아니, 보고 나니까 납득은 하겠지만 분명 의외는 의외였다. “엥? 카론 경?” 물론 실제 카론 경은 지금 병실에 입원 중이고 내가 본 건 그림이었다. 비록 실제보다 눈이 좀더 치켜 올라가서 꽤 사납게 보이기는 해도 카론 경은 카론 경이었다. 멋대로 카론 경의 초상화들을 팔고 있는 좌판 주인이 말했다. “하나 사시려우? 주문하면 원하는 포즈도 그려 줄 수 있수.” 매일 보는 사람 얼굴 굳이 돈 주고 사고 싶지는 않군요. “어째서 이런 걸 파는 겁니까?” “어째서라니? 그야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으니까.” “........흐음.” 확실히 악투르에서 왕자님과 공주님을 구한 뒤부터 인기가 더 올라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오타에서까지 선방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나름대로 국위선양이랄까 뭐랄까. 물론 카론 경이었다면 이걸 보자마자 ‘이런 걸로 인정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라고 푸념을 늘어놨겠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그림은 좀 미화가 심한데? 카론 경의 활약이 대단한 건 알지만, 용을 잡은 적은 없단 말이야! 내 눈 앞에는 날개 달린 말을 타고 거대한 드래곤에게 돌진하고 있는 근육질 카론 경의 우렁찬 모습이 보였다. 만약 사실주의 화가였다면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더미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펜을 굴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겠지만. 뭐, 그쪽은 전혀 팔리질 않겠군. 나는 이 초상권 침해의 현장에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거 당사자에게 허락 받고 그린 겁니까?” “물론이지.” “엥? 정말?” “그렇다니까! 허가서도 가지고 있어.” “얼레?” 나는 그가 자신 있게 보여준 서류를 받아 황급히 읽었다. 그걸 읽어 내려가는 내 눈이 떨려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위조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베르스 왕실 인장이 찍혀 있으니까! “이놈의 만두 국왕! 어느 틈에 카론 경의 초상권을 멋대로 팔고 있었던 거냐!”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임금님은 이미 펠리오스의 무녀들과 스왈로우 나이츠의 초상권도 전 세계로 팔아치운 뒤였다. 이 열성 반의 반 만이라도 정치에 좀 신경 써 주신다면.......당신은 세계적인 성군이 될 거야. 베르스의 수출품, 카론 경. 뭐 이런 공식이 떠올라 비틀거리며 거리를 방황하던 내 팔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고향처럼 그리운 대사를 들었다. “아가씨, 시간 있어?” “.........”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대체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건지 가슴 아픈 사색을 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라는 결론이 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격분이 몰려왔다. “남자라니까! 이 짜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엇!” “하, 한 번 말했는데.......” 그는 야수로 돌변한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배고파서 욕구불만이 터져 버렸어. “하아, 소리쳐서 미안해요. 뭐, 애꿎은 사람 착각시키는 제가 죽인 놈입죠.” “와아. 그 정도 얼굴이라면 남자라도 상관없겠는데?” “뭐가 상관없다는 겁니까?” “공짜로 술과 음식 마실 생각 없어?” “민망한 요구 할 생각이라면 사양입니다. 이래봬도 기사라서요.” “아냐. 넌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돼.” “흐음.” 수많은 경험에 의해 나는 그가 데려가는 곳이 어딘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6 ‘물 관리’ 라는 것이 있다. 고급 살롱 같은 곳은 신용할 수 있는 귀족들이나 명성 높은 예술가 같은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다는 규정이 그중 하나다. 나름대로 품위와 수준을 맞추겠다는 정책이랄까. 그리고 그 규정을 응용하자면 빼어난 미인(99퍼센트는 여성)의 경우에는 부유한 고개들의 눈요기를 위해 공짜로 입장시켜 주기도 한다. 물론 내가 몸담았던 최상류의 클럽에의 경우에는 그런 예외란 존재하지 않지만, 뭐 대부분의 업소들은 그 방법을 쓰고 있다. 의외로 효과가 좋거든. ‘그럼 나는 움직이는 장식품 쯤 되는 셈인가.’ 나는 긴 테이블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음식을 접시에 담은 뒤에 주변을 둘러봤다. 대저택의 지하층을 개조해 만든 이곳에는 하나같이 잘 나가는 도련님이나 귀족 가문의 마나님 정도로 보이는 ‘소유한 별장의 숫자가 십 단위를 넘어갈 게 분명한’ 이오타의 부유층들로 가득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고급 사교 클럽이었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와아! 굉장해! 신세계야!’ 라고 경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보다도 더욱 기가 막힌 곳에서 10대를 보냈기 때문에 ‘아아, 인테리어가 조금 경박해.’라는 생각이나 하면서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 인형인 줄 알았네.” 가벼운 농담과 함께 아가씨와 아줌마의 미묘한 경계선에 걸쳐 있는 여성분께서 내게 다가왔다. 내가 재빠르게 입술을 훔치고는 살며시 웃으며 몸을 돌리는 것과 함께, 내 머리는 제멋대로 분석을 시작했다. 입고 있는 드레스의 원단과 목걸이를 수놓은 보석과 손톱을 다듬은 상태와 다섯 종류의 향료를 섞은 향수를 근거로 종합해 볼 때 그녀는, 재산 수준보다 많은 돈을 쓰고 있음, 최근 결혼 생활에 권태, 유행에 약간 둔감, 점원이 권하는 물건을 그대로 사는 경향, 보기보다 내성적, 자신의 매력이 부족하다는 피해의식, 현재 계속되는 우울함 때문에 작은 일탈을 꿈꾸고 있음, 듣기 싫어하는 말은 ‘붉은색은 안 어울려요.’ 결론 : 못된 남자 만나면 큰일 날 분이시네. “혼자야?”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채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다. 약간은 긴장감을 고조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예상대로 그녀는 이런 패턴의 대처법을 모르고 있었다. “미, 미안. 아니면 이만 가볼게.” 사실 이럴 것까지는 없지만, 밥 얻어먹은 것도 있고, 이분에게 조금 기운을 실어주고 싶기도 하고........ 나는 살짝 그녀의 가슴 쪽으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이 붉은 원피스, 멋져요. 당신과 어울려요.” “으으?” “혼자예요. 괜히 왔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의, 의외로 능숙한 아이네.” “제 이름은 미온입니다.” 발그스레한 볼 살 위로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7 물론 나는 사랑의 전도사가 아니다. 하지만 공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다. 밥값이랄까, 그리고 말상대가 필요한 우울한 귀부인에 대한 배려랄까. 나는 1시간 동안 그녀의 기분을 (아마도 최근 그녀의 몇 달 중에서는) 가장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뭐야, 결국 노닥거린 거잖아? 라고 빈정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이래봬도 예전에는 나와 1시간 같이 대화하는 ‘이용요금’으로 여기 테이블에 쌓여 있는 음식값 정도는 훌쩍 넘어갔다. 물론 지금이야 가판대에서 파는 막국수를 사먹는데도 무척 심각하게 주머니 속 동전의 개수를 떠올려야 하는 처지지만 말이다. “미온 군, 또 언제 널 부를 수 있어?” “헤헤. 그건 부인께서 베르스로 이민을 오신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뭐? 그런 나라에는 왜?” “제가 그런 나라 백성이라 말이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오타를 놔두고 세계적인 약소국으로 와야만 한다는 말이 가당찮게 들리시긴 하겠지만. 아직 우리에게 해외지명은 없어서 말입니다. 아쉬워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슬슬 밖으로 나가볼까 하려는 찰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설마 엔디미온 경?” “얼레, 미레일 경?”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의외의 사람이라 나는 얼굴을 확인하고도 한참을 떨떠름하게 유순한 선생 같은 미레일 경을 바라봤다. 별로 꾸미지 않은 소박한 평상복 차림은 분명 클럽보다는 대학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미레일 경은 카론 경과 비슷한 부류, 그러니까 휴일에 할 수 있는 일이 독서나 검술 연습 정도로 좁혀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는 씨익 웃었다. “헤에, 미레일 경도 이런 곳에 출입하는구나. 아직 독신이죠?” 조금은 발칙한 내 놀림에 미레일 경은 그 구김살 없는 성격대로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해 줬다. “근무 중이에요.” “아, 역시.” 하긴, 저런 착실한 기사가 이런 곳에 와서 농염한 사교의 꽃을 피운다는 건 상상이 가질 않는군. 역시 일하는 중....... 아니, 잠깐, 미레일 경의 업무라면 분명히....... “.......쇼메 왕자를 경호하는 거였죠?” 그 순간 등 뒤에 느껴지는 불유쾌한 시선 탓에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 마당에 선글라스까지 낀 잘난 왕자님이 날 내려다보고 계셨다. 아아, 왕자님.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사와요........라는 기분의 정반대야! 그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내 행복 그래프는 사정없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네가 여기엔 뭣 하러 온 거냐. 천민.” 이오타, 넓지 않았어? 어째서 초장부터 당신과 조우해야 해?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죽도록 얄미운 이 인간에게만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고 싶지 않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곧바로 반격했다. “왕자님이야말로 이런 은밀한 곳엔 어인 일로 행차하셨나요? 왕실에서 알면 참으로 기뻐하겠군요!” 사실이 그래. 만약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밤마다 시내의 환락가에 출입한다고 생각해 보라고! 아무리 보통사람들은 쇼메의 얼굴을 모른다고 해도 그렇지, 왕족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각이 있기는 한거야? 그러나 내 회심의 일격에 대해 쇼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하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어. 아빠도 엄마도.” “.......내놓은 자식이셨구려.” 분하게도 나는 이 발랑 까진 왕자님에 대해 더 이상 반격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 눈썹을 가늘게 떨며 쏘아보기만 했다. “네놈이 왔으니 이자벨이 즐거워하겠군.” “이, 이자벨님에게 말할 생각이냐.” “아니.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말도 안 되는 농담, 이라고 하기에는 이자벨님의 정보망이 지나치게 방대하다. 아무튼 계속 있어봐야 또 무슨 시비를 걸지 모르니까 이만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지. “그럼 밤의 유흥 잘 즐기시길! 소인은 이만 사라져 드리지요!” 믿을 수 없어. 마라넬로와 아이히만에게 대체 뭘 배운 거야? 언젠가는 저런 방탕한 인간도 국왕이 된다는 세상의 불합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나는 클럽 밖으로 빠져나갔다. 입구를 나와 슬슬 호텔로 향하려고 할 때. “어이, 잠깐.” 입구에 모여 있던 클럽 사람들이 대뜸 날 잡는 것이었다. “돈은 내고 가셔야지.” “아? 착각을 하셨나보네요. 전 무료를 입장했거든요.” “무슨 헛소리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얼레?”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날 이곳에 데려왔던 호객꾼 녀석을 바라봤다. 그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난 공짜라고 말한 기억은 없는데?” 아뿔싸, 당했다! 8 물론 이런 초보적인 사기에 걸려든 건 창피하지만, 이 지경까지 와서 ‘이거 정말 착각하신 건데요!’라고 통사정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억울하다며 이 덩치들과 치고받을 정도로 무모하지도 않고.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째 쇼메를 볼 때부터 일진 사나운 거 같더라니.’ 라고 중얼거렸다. 내 모습을 본 악덕 클럽 녀석들이 말했다. “하는 폼을 보니까 너도 닳고 닳은 녀석 같은데. 하긴 그 반반한 얼굴 안 써먹을 리가 없지.” 울컥! 내 어디가 닳아 헤져 보인다는 거냐! “그럼 선수끼리 피차 귀찮은 과정 생략하자고.” 난 혀를 차며 말했다. “얼마야?” “금화.......다섯 냥 정도?” 뭐라! “야! 아무리 사기꾼이라도 최소한의 상도덕이라는 게 있어!” 바가지도 유분수지! 술은 손도 안대고 식사만 했는데 금화 다섯 냥? 그거 개그야? 아무리 모럴 상실의 시대라지만, 너무 거창하잖아! “우리도 불경기라서 말이지. 조속히 갚아 줘야겠어.” 그들은 으드득 주먹을 쥐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거 된통 걸렸네. 이오타까지 와서 이 무슨 창피한 시추에이션이람. “와하하! 미온 경! 역시 이오타는 최고야!” 그때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루이와 쇼탄이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내 옆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쇼탄은 어느새 화려한 가죽 정장까지 입고 있었다. 보나마나 돈이 많은 여자가 사줬겠지. 아니, 그 의미는 그의 해괴한 ‘모성본능’이 통했다는 거? 이날 이때까지 여자 마음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나지만 아직도 여자란 미지의 존재로군.......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 좀 구해줘! “쇼탄 경! 루이 경! 도와줘요!” 금화 다섯 닢만! 그게 아니라도 격투가를 방불케 하는 근육의 소유자인 당신이라면 이놈들을 상대해 줄 수 (최소한 겁은 줄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러나 쇼탄은 내가 지금 굉장히 행복한 상황이라는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넌 남자들에게도 인기절정이로구나. 잘 해봐, 미온 겨엉.” “뭘 잘 하라는 거야! 사람 말 좀 들어!” 그러나 그들은 쾌락을 찾아 떠도는 한 떼의 까마귀들처럼 ‘행복해야 해.’라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축복을 보내며 유흥가 한복판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거 진짜 가당찮네! 얼마나 취했으면 지금 내가 이 어깨들과 연애하는 걸로 보일 수가 있냐! 건달들마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친구냐?” “.......아니 그냥 얼간이들이야.” 에이이! 어차피 몸뚱이 하나로 혼자 사는 세상! 기대한 내가 바보야! “아무튼 네 녀석 정도 얼굴로 금화 다섯 닢이라면 일주일만 일하면 벌 수 있을 거야. 일자리는 우리가 소개시켜 주마. 뭐 큰 맘 먹고 알선비용은 무료로 해주지.” “쳇, 너그럽기도 하셔라!” 누가 순순히 일해 줄 것 같아? 대충 따르는 척하다가 도망쳐 줄 테다. 뭐, 이 정도로는 내 기분은 최악이 되기에 충분한데도, 옆에서 특유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주인공이 누군지는 이젠 일일이 묘사할 필요도 없으리라. “후후, 돈도 없이 이런 곳에 들어왔던 거냐. 천민?” 미레일 경과 함께 밖으로 나가던 쇼메는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보고는 냉큼 검을 뽑아 정의를 실천.......하기는커녕 팔짱까지 낀 채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것이었다. 당신 이 나라 왕자 아니었어? 당신 나라 독버섯들에게 고초를 당하는 외국인 관광객을 보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안 드는 거야? 건달들은 쇼메를 보자 곧바로 굽실거리며 말했다. “도련님, 이 녀석과 아는 사이십니까?” 쇼메는 이곳 단골인 것 같았다.(물론 왕자라는 신분은 숨기고 있겠지만.) 보나마나 이봐란 듯이 건방지게 돈을 뿌리고 다녔겠지! 아아, 이 놈의 정경유착! 그들의 말에 쇼메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내가 저런 천민을 알 리가 없잖아.” 아, 뭐 저 인간 성격으로선 지당한 말이니까 화도 안 나. 그때 쇼메 왕자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아니, 의외라기보다는 뻔뻔한 제안이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만. “야, 천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쇼메 나리라고 부르면 네 푼돈 갚아주마.” 뭡니까, 그 지나친 자의식은. 저 잘난 왕자에게도 유치한 면이 있단 말씀이야. 나는 귀에 손을 가져다대며 그에게 기울였다. “아, 그러니까 뭐라고 불러달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쇼메 나리.” “에, 다시 한번만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귀가 멀었냐!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쇼메 나리! 라고 부르랬잖아!” “아아, 죄송, 죄송, 한번만 더 말해 주세요.” “아아,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존....... 너 이 자식, 날 놀리고 있었구나!” 그걸 이제 알았냐. 당신 둔한 건 예전에 간파했어! 와하하!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내 코가 석잔데 이런 장난쳐서 뭐하누.’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 인간하고 같이 있으면 나까지 유치해진다니까. 그런데 나는 장난으로 생각했지만 불행하게도 쇼메는 전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독수리 같은 날카로운 눈동자가 날 잡아 먹을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아, 아무튼 매사에 자존심만 높아서는! 그는 특유의 기분 나쁜 웃음을 보이며 건달들에게 뭐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건달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예에?” 대,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러나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미레일 경 역시 어색한 웃음으로 내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그를 뒤쫓았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건달들에게 물었다. “지금 저 인간이 뭐라고 한 거야?” 그러자 그들은 날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금화 오십 냥 갚아줘야겠어.” 쇼메의 더러운 성격 잘 알고 있으면서 입을 놀린 내가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9 왕족을 놀린 대가가 금화 오십 냥이라면 꽤 인심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건 진짜 치졸했다. 아니, 왕자가 악덕 상인들에게 더욱 더 바가지를 씌울 것을 지시하다니, 이 어디가 앞서가는 지역사회냐? 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이, 이보셔들. 간이라도 뽑아 줄까?” 그들 역시 오십 냥이라는 거금을 뜯어내려면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밥 한번 잘못 먹은 죄로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몸을 팔아야만 하는 어처구니 대폭발의 분위기인 걸? 이럴 때야말로 키스 경이 나타나주면 좋겠지만 그 양반은 지금쯤 아득한 호텔 침대 위에서 죽음과 같은 숙면을 취하고 계시겠지. 그들은 ‘해결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서로 쑥덕거리고 있었다. “그럼 접시 닦기 시킬까?” “2년 쯤 해야 할 텐데? 그건 좀 너무하다, 야.” “클럽 종업원은 어때? 얼굴이 이 정도면 팁 꽤 받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6개월은 해야 할 거야.” 나는 아예 주저앉아 턱을 괴고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애당초 오십 냥을 안 받으면 될 거 아냐.” “그럴 순 없어. 그 도련님 얼마나 무서운데. 우리가 명령어긴 거 알면 그냥 안 놔둘 거다.” “하아, 충직도 하셔라. 도련님이 아신다면 무척이나 흡족해 하시겠네요!” 나는 혀를 찼다. 쇼메 이 인간은 왕자 주제에 건달들을 소탕하기는커녕 그 녀석들 우두머리라도 된 거야? 아무튼 뭐든 자기가 최고라야 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니까.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50골드를 무슨 수로 갚아. 호스트라도 한다면 모를까.” 내 말을 들은 그들의 눈이 커졌다. “뭐? 호스트? 와하핫! 아서라,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아무나 못한다는 거, 예전부터 알고 있었네요. “얼굴 반반한 녀석들은 호스트하면 금방 부자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아는 녀석은 겁 없이 덤볐다가 3개월 동안 지명 한 번 못 받고 걸레질만 하다가 끝났다고.” “한 가지 약속하죠.” “뭘?” “호스트 시켜주면 오늘 밤 안에 금화 오십 냥 벌어드리지요.” 10 그래도 이 지역에서 꽤 이름 있다는 호스트 클럽으로 나를 끌고 들어온 건달이 말했다. “어이, 이 녀석, 일자리 하나 줘.” 막 오픈을 앞둔 시간이라 이곳은 청소가 한창이었다. 곧 풀어헤친 셔츠 차림의 사내가 내게 다가와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고향에 온 듯한 정겨움마저 느껴지는군. “신입입니까?” “아, 글쎄. 이놈이 오늘 밤 안에 50골드 벌어준다는군.” 그러자 이곳 고참쯤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터졌다. “큭큭, 50골드? 하여튼 신참들은 다 이렇다니까.” 여보세요. 굳이 경력을 따지자면 난 당신 할아버지뻘이야. “하룻밤에 50골드라니. 이쪽 바닥에 전설이라도 만들어 볼 참이냐. 신참이면 신참답게 우리들 보조나 해. 건방지긴. 나도 이쪽 바닥에서 일 년 넘게 있었지만....... 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물론 안 듣고 있었다. 나는 내부를 훑어보는 중이었다. 인테리어부터 소파의 배치, 주류의 종류, 플로어의 동선,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35점.’ 유행에 뒤떨어진 인테리어부터 좌석은 답답하게 모여 있는데 반해 조명은 또 너무 밝았다. 술 냄새와 화장품 냄새, 향수냄새 같은 것이 엉망으로 뒤섞인 공기는 환기가 되질 않아 입구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빠질 정도고 술도 너무 독한 종류밖에 없다. 금방 취하게 만들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건 알겠지만, 단지 술에 진탕 취하고 싶어서 비싼 돈 내고 이곳에 올 고객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최근 세 번 이상 찾아온 단골 고객이 거의 없죠?” “뭐, 뭐라고? 감히 신참 주제에 무슨 소리를? 어, 어디 가는 거야?” 나는 곧바로 지배인에게 걸어갔다. “선불로 금화 10골드 주세요.” “미친 거 아냐? 내가 왜 너한테 선불을 줘야.........” “대신 오늘 안에 100골드 못 벌면 평생 여기서 일하도록 하죠.” 어처구니 없어하는 지배인을 바라보며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11 “어, 어이. 너 무슨 생각이야!” 나를 감시하기 위해 뒤따라온 건달이 소리쳤다. “평생 일하겠다니! 나중에 농담이었다고 말한다고 통할 것 같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보다 이 지역에서 가장 초상화 잘 그리는 사람에게나 데려다 주세요.” “초, 초상화? 그딴 건 왜!” “뭐랄까, 간판 같은 거죠.” 그로부터 2시간 뒤, 시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는 최고급의 검은 정장으로 빼입은 내 커다란 전신 초상화가 걸렸고, 그 밑에는 클럽의 약도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12 오픈 4시간 후, 아까까지만 해도 나한테 청소나 하라고 외치던 예의 ‘고참’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 말도 안돼!” 그가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단 한 번도 가득 찬 적이 없는 이 클럽이 고객들로 만석이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고객들이 지명한 사람이 모두 나였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도 수십 명의 고객을 동시에 접대한다는 것은 빙고 게임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숨넘어가게 힘든 일이지만, 절대로 쇼메의 마수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내 능력을 120퍼센트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예전 히르카스 누님 밑에서 일하면서 느낌 점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나는 술을 팔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고개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술은 그것에 도달하는 수단일 뿐이다. 2)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남발하지 말자. 여성들의 뛰어난 직감은 순식간에 싸구려 남자라는 것을 간파한다. 3) 고객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기억하고 자신 없으면 메모하자. 그건 나를 선택한 고객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4) 절대로 부담감을 주지 말자. 하지만 항상 아쉬움은 주자. 호스트가 뭐 이리 거창해? 그냥 돈 받고 봉사하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의 근본은 그게 정치인이든 호스트든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새벽, 떨리는 손으로 오늘 벌어들인 돈을 계산하고 있는 지배인에게 말했다. “오늘 총 수익이 얼마죠?” “대, 대략 삼백팔십 골드.” 내가 씨익 웃으며 되물었다. “그중에서 제가 번 액수는?” “..........삼백육십오 골드.” “자, 이제 오십 골드 같은 거죠? 남은 돈은 인테리어에 투자해 주세요. 전 이만.” 나는 당당히 문으로 걸어갔다. 나름대로 이곳에 전설이라면 전설을 만든 셈이지만 별로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지는 않군. 그때 지배인의 목소리가 나를 잡았다. “잠깐! 네 정체가 뭐야!” “기사입니다만.” “기, 기사?” 황망해 하는 그의 표정을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섰다. 13 차가운 새벽 공기를 삼키자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페이지는 얼마 안 되지만 오늘 밤은 정말 전쟁을 치루는 기분이었다. 나름대로 기록을 갱신한 느낌이랄까. “하아. 이제 이걸로 족해. 나는 자고 싶어.” 나는 한걸음에 루시온 경의 호텔로 가려고 했다. 거기 가서 당장 침대에 드러누워 누가 뭐라고 하던 하루 종일 자려고 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미온?” “너, 너는?” 가게 앞에서 누군가가 추위에 떨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여명 속에서 그가 점점 더 다가오자 내 눈도 커져갔다. “타쿠르?” “와아! 정말 미온이구나!” 그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거리에서 네 그림보고 혹시나 해서 기다렸어!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나, 나야말로.” 나는 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커피색의 피부와 금발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콘스탄트 출신 청년, 타쿠르는 내 예전 업소 동료였다. 나와 동갑인 탓에 유달리 친하게 지냈는데,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면 나와 타쿠르나 지명이 없기로 업소의 쌍벽이라는 사실이랄까. 불행하게도 타쿠르는 끝까지 인기가 없었지만. 비록 키는 작지만 여전히 소년처럼 보일 정도로 귀엽게 생긴데다가 붙임성도 좋은 그가 어째서 인기가 없었느냐 하면. “아직도 술 못 마셔?” “으응, 체질이라서.” 술 한 모금만 들어가도 금방 쓰러져 버리는 비극의 육체 때문. 전혀 술을 마시지 않고 호스트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건 정말 극복하기 힘든 핸디캡이었다. 그래서 나는 타쿠르가 아직까지 호스트를 한다고 말하자 깜짝 놀랐다. “아직도 히르카스 누님 밑에서 일하는 거야?” “아니, 미소년의 숲은 사라졌어. 네가 그만두고 얼마 후에.” “뭐!” 이럴 수가. 내가 없어도 얼마든지 번창할 곳이었는데! “누님은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면서 어느 날 업소를 정리했어.” “역시 그렇군.” 히르카스 누님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워낙에 호기심이 왕성한 자유주의자라서 갑자기 어부가 되겠다고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분이니까. 그래도 정들었던 곳인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졌다는 건 꽤나 아쉽네. “그런데 왜 아직도 호스트를.......” “나는 이 일이 즐거워. 그래서 여기로 와서 새 업소에 들어갔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제법 인기도 얻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타쿠르를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결코 즐거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점점 말을 흐리던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한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래?” “미온!” “우왁!”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고개 숙인 얼굴에서는 금세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예전에도 둘 다 아무런 지명이 없어도 항상 타쿠르는 날 달래주는 쪽이었다. 그런 그의 눈물을 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타쿠르.” “부탁이야. 도와 줘. 너무 억울해서........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 “무슨 일이야?” “일 년 전 내가 일하던 곳 근처에 대형 클럽이 생겼어. 그런데 그 놈들이 비겁한 수법으로 우리를 방해하기 시작했어!” “하,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벌어지는 것이고.......” 언제나 돈벌이가 되는 곳에는 장사꾼들이 몰려들기 마련이고, 그 장사꾼들이 모두 선의의 경쟁만 할 거라는 기대는 너무 ‘환상적’이다. 이제는 나보다도 오래 호스트를 하고 있는 타쿠르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도’였다. “더러운 헛소문으로 우리 고객들을 빼앗아가고 동료들을 돈으로 매수했어. 업소에 몰래 들어와 불을 지르고 심지어는 검으로 우리를 협박까지 했어. 나도 몇 번이나 찔리고 팔이 부러졌고. 이제 내가 일하는 가게에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밖에 남지 않았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머리가 멍했다. 내가 지금 폭력배들의 세력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일까? 그 정도로 지독한 짓은 들어본 적도 없다. 일단 이오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호스트 클럽이 있는 곳이다. 남성들의 서비스업을 신에 대한 배덕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콘스탄트 왕국과 모든 사회 구성 요소가 남성 중심인 마키시온 제국과는 달리 이오타는 돈을 버는 여성에 대해 별 다른 편견도 없고 법적으로도 보호 받고 있는 사회 분위기라서(이 법안은 이자벨님이 이룩한 것이다.) 돈 많고 낭만적인 ‘화려한 싱글’ 여성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덕분에 호스트 클럽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건 ‘큰 사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선이라는 것이 있다. 이건 정말 인면수심이 아닌가! 공짜 밥에 걸려들어 50골드를 내야 했던 일도 지금 타쿠르에 비하면 꽤 ‘너그러운’ 사기를 당한 것이다. 여기가 베르스였다면 당장 아이히만 대공이나 카론 경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미온,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말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부탁이야.” 나는 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난 기사라고는 해도, 검술도 못하고 권력도 없어서 그런 녀석들을 상대하기에는....... 내키지는 않지만 내가 쇼메에게 부탁하는 편이.......” 안타깝게 말하는 나를 향해 그가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시 동안이라도 호스트로 돌아와 줘!” “커억!” 호스트로 돌아와 줘, 호스트로 돌아와 줘, 호스트로 돌아와 줘. 조상신의 부름 같은 메아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혹시 이 땅에 스며있는 호스트의 정기(精氣)같은 것이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탁할게. 너라면 우리 가게를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서.......” 하긴 타쿠르는 칼잡이를 고용해서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해칠 위인은 아니지. 카론 경과 타쿠르의 공통점이 있다면 비열한 방법으로 덤비는 놈들을 끝까지 깨끗하게 상대하려고 하는 점이리라. 뭐, 나는 이런 쪽 에서는 그들보다는 아이히만 대공이나 쇼메 왕자에 가까운 성격이지만. 나는 그 극악한 놈들로부터 어쩔 방법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타쿠르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도 그쪽으로 가면 되잖아.” “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너라면 그놈들도 큰돈을 불렀을 텐데? 그러니까 그렇게 고생할 것 없잖아. 어딜 가도 호스트를 하는 건 마찬가지 아냐? 기왕이면 좋은 대우 받고.” “미온!” 타쿠르는 당장이라도 날 한 대 후려갈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솔직한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네 입에서 그런 말 나올 줄은 몰랐어! 괜히 부탁해서 미안해! 난 이만 가볼게!” 난 거칠게 몸을 돌리는 타쿠르의 팔을 잡았다. “이, 이거 놔!” “네 기분 알았어. 도와줄게.” “뭐?” 타쿠르는 쓴웃음을 보이는 나를 당황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 시험해 본 거야?” “뭐랄까, 너나 나나 영 어른이 안 되는 것 같아.”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제 20화 ‘먼 곳으로 가고파!’ 광고 후에 계속됩니다. 14 광고 시작 CM : 내일은 당신도 공범. 미온 : 그런데 결국 키스는 키릭스예요, 아니에요? 카론 : 1권부터 7권까지 읽으면 대충 답이 나온다. 미온 : 카론 경은 어렸을 때도 그렇게 차가웠어요? 카론 : 그 이야기도 5권 보면 잠깐 나와. 미온 : 누가 일러스트를 모조리 찢어갔어요! 키스 : 그러니까 사서 보세요오. 재고 넘쳐나니까. 미온 : 저, 키스 경.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키스 : 뭡니까아? 미온 : 이 지금 광고, 예전 권들 사달라고 광고하는 거죠? 키스 : 그렇습니다아. 더 이상 재고가 쌓인다면 격분한 출판사가 누군가를 피떡으로 만들지도 모르거든요. 미온 : 그런데 지금 이 광고 읽는 사람들은 이미 예전 권은 다 읽었을 것 같은데요? 키스 :........아뿔싸. 카론 : 내 말이 그 말이다. 15 “에이이! 이 딴 광고 필요 없어!” 나는 알 수 없는 고함을 내지르며 객실 문을 덜컥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는 키스 경이 문도 안 잠가 놓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으이구, 다른 나라까지 왔으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 달라고! 물론 방을 잘못 들어온 게 아니다. 뭐, 꼭두새벽부터 멋대로 남의 방에 들어가는 건 대단한 민폐긴 하지만. 나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샤워 가운을 입은 채로 골아 떨어져 있는 키스 경은 대체 어디가 초인인지 누가 심장을 후벼 파도 모를 정도로 꿈나라를 방황 중이었다. 갈색 머리칼에 물기가 축축한 것을 봐서 막 잠든 것 같군. 즉, 누구라도 깬다면 무척 괴로울 타이밍. 나는 말없이 침대 시트를 붙잡았다. “일어나요! 키스 경!” “꺄아아아!” 이번에도 이상야릇한 비명을 내지른 키스 경이 침대에서 떨어져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못할 짓이지만, 이 양반에게는 왠지 미안한 느낌이 안 드는 걸. 나는 여전히 꿈의 수렁에 빠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키스 경을 붙잡고 건져 올렸다. “키스 경!” “미, 미안해요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용서해 주세요오!” “.........” 미안, 키스 경. 이 정도로 조건반사가 있을 줄은 몰랐어. 나는 키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키스 경, 부탁이 하나 있어요. 제 부탁 들어주면 돌아가서 신전 청소 한 달 할게요!” ‘신전 청소’라는 말에 키스 경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곤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두 달.” “큭! 집요하긴! 좋아요! 두 달!” 그러자 키스 경은 너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갑자기 호의적으로 돌변했다. “하하하, 미온 경. 힘든 일이 있으면 먼저 절 찾아오시지 그랬어요. 저 키스는 당신 부탁이라면 호스트가 되어 달라는 것만 빼고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 “.......” “.......” “.......” “.......그거예요?”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16 한 시간 전, 나는 타쿠르를 따라 그의 업소로 향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삼십여 분이나 인적 없는 길가를 걸었을까,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을 올려다보는 내가 식은땀을 흘렸다. “저어, 타쿠르. 설마 여긴 아니겠지?” “응? 여기 맞아.” 내가 올려다 본 2층 건물 위에는 눈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머리 독수리 같은 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 안에 시체라도 있는 거야? “어서, 들어와. 미온.” “아니, 여긴 좀.......” “왜?” “그러니까 여긴 호스트 클럽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굳이 표현하자면.......” 흉가잖아! 돈 받고 들어가라고 해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정도로 불길하다고! 들어갔다간 단숨에 명이 줄어버릴 것 같아! 타쿠르, 못 보던 사이에 취향이 바뀐 거야? 나는 흉흉한 오라를 미친 듯이 내뿜고 있는 이 음침한 저택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곳을 선호하는 고객이라면 내 쪽에서 피하고 싶어. 타쿠르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헤헤, 좀 이상한 곳이지? 원래 있던 곳은 그 녀석들이 불태워 버려서. 내가 가진 돈을 모아서 살 수 있는 곳은 이 집밖엔 없었거든.” “가, 가게를 네 돈 주고 샀다고? 어째서 그런 짓을!” “으응. 마스터는 이제 가진 돈이 없고 그놈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어. 하지만 나는 그런 놈들에게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아.” 솔직히 내 마음 속에서는 타쿠르, 이런 답답한 친구, 이 꼴을 봐. 이건 이미 진 거나 다름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페르난데스 왕자님이 떠올랐다. 감히 호스트와 왕자를 비교한다는 건 입 밖으로 냈다간 목이 날아갈 소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왕자님이 직접 타쿠르를 봤다면 분명 동질감을 느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벽에 쓰여 있는 저질스런 낙서들과 누가 돌을 던졌는지 다 깨져버려 통풍이 잘 된다는 것 외에는 조금도 의미가 없는 창문들을 바라보고는 이를 갈았다. ‘이건 너무 지독해. 그놈들, 관리들에게 돈 좀 찔러 넣었군.’ 믿는 구석도 없이 이런 흉악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야 없었을 테니까. 이건 정말 죽어가는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말하자면 이 놈들은 단지 돈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명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나는 그를 따라 업소 안으로 들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부 분위기는 바깥보다 더 강렬했다. 17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왜, 왜 그래, 미온.” “으응. 그냥 예상보다 훨씬 인상적이라서.” 물론 호스트 클럽이 도서관처럼 밝아서야 곤란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암적응이 필요할 정도로 어둡잖아! 밤눈 어두운 고객은 한치 앞도 안 보이겠네! “미안, 어둡지? 촛불이 부족해서. 익숙해지면 괜찮아.” “.......우리만 익숙해지면 뭐하누.” 게다가 플로어에 쌓여 있는 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상자들은 대체. “저어, 타쿠르. 혹시 돈이 없어서 여길 창고로 임대해 준 거야?” “하하. 미온은 여전히 농담 잘하네.” “으응. 나도 지금 이 상황이 농담이었으면 좋겠어.” 고객들이 오가는 플로어에 저런 거 쌓아두지 마! 그리고 사람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은 저 웅장한 거미줄들은 또 뭐냐고! 게다가 바닥에는 버섯까지 자라잖아! 이거 너무 자연친화적이야! 차라리 이곳도 불살라 버리고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편이 더 현명할 것 같다는 암울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타쿠르가 세 명의 동료를 데려왔다. 나는 그들을 한참동안 바라보고는 눈을 비빈 뒤에 다시 바라봤다. 그런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이 사람들은 호스트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뭐랄까.......사회에 불만 많아 보이는 날건달이잖아! “아, 안녕하세요. 엔디미온이라고 합니다. 미온이라고 불러주세요.” “이야아! 이거 완전 조각이네. 진짜 인간 맞아?” 그럼 인조인간입니까? “그 머리 가발이죠?” 잡아 당겨 봐? “타쿠르보다 미남은 처음 보네. 이런 양반이 이런 데는 왜 온 거야?” 그러니까 내가 왜 왔느냐 하면....... 나는 황급히 타쿠르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자, 잠깐 좀.” “왜 그래, 미온? (어차피 다 어둡지만) 어둑한 구석으로 타쿠르를 데려온 나는 양미간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저어, 내가 특별히 외모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저분들은 뭐랄까........ 좀 지나치게 와일드한데?” “그, 그렇지?” “응. 일단 호스트 클럽이란 곳이 공포체험 시켜주는 곳도 아니고.” 솔직히 지금 내 마음 속은 ‘길거리에서 만나도 피할 것 같은 사람을 굳이 돈 주고 만나려는 고객이 있겠냔 말이다!’라고 격렬하게 외치고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상냥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이끌어 내서 짜내듯이 말했다. “뭐, 좋게 말하자면 이곳 분위기와 어울리는 분들이라고 할 수도 있어.” “미안. 네 기분 알아.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다 그놈들에게 돈을 받고 가버려서.” 타쿠르는 도리어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는 무리겠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어떻게든 그놈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괜한 부탁해서 미안해.” 사실 이건 이미 진 거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는 것이나 다름없는 부질없는 노력. 아무리 나와 타쿠르가 꽃처럼 꾸미고 개인기를 펼친 들, 호스트가 두 명뿐인 흉가에는 나라도 안 온다. 싸움 자체를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그래.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응.” “그러니까 여러 명이 필요해.” “뭐?”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타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돌아올게. 원군을 불러서.” “워, 원군?” “응. 기사단.” “기, 기, 기사단?” 타쿠르의 흔들리는 눈빛은 ‘이도저도 안되니까 기사단으로 상대편을 쑥밭으로 만들 생각이야?’ 라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라. 스왈로우 나이츠는 적어도 이런 일에 있어서는 프론티어 뱅가드보다도 강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인간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거로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새벽부터 까마귀가 울어대는 ‘흉가’를 빠져나왔다. 18 눈물 없인 못 듣는 ‘타쿠르의 사정’을 가만히 경청한 키스 경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아아아! 미온 경! 또 어쩌자고 그런 귀찮은, 아니 엉뚱한 문제를 들고 온 겁니까아아아!” “그러지 말고 도와주세요! 도와주기로 약속했잖아요!” 키스 경은 그런 나를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미온 경은 얻는 게 뭔데요?” “네? 그,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본 게 없는데요.” “하아, 정말 대책 없는 정의감이로군요오.” 키스 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빨간 눈동자를 가리던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전 미온 경이 검술을 못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아.” “엥? 어째서요?” 그러자 그는 나를 바라보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다면 당신은 분명 제명에 못 죽었을 테니까요.” 나는 그 새빨간 눈동자를 바라보며 화를 낼 수 없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확연한 설득력이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벌러덩 드러누운 그의 가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매끈한 살결 위엔 어울리지 않는 상흔들이 과거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 키르케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몸에 많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 뿐이라고.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는 쪽과 저주하는 쪽. 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다. 언제라도 웃을 수 있는 남자는 시시한 남자거나 위험한 남자다. 키스는 그중 어디에 서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대로 엎어져 잠들어 버릴 줄 알았던 키스 경은 의외로 단숨에 일어나서는 하품을 하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자, 그럼 미온 경을 위해 특별 브리핑을 시작해 볼까요오.” 19 아침부터 호텔 로비에는 옷을 입다 왔는지 벗다 왔는지 심란하고도 음란한 차림새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루이 경부터 당장이라도 국왕을 알현해도 될 만큼 완벽한 정장 차림의 루시온 경까지 키스 경을 포함한 스왈로우 나이츠 전원이 집합했다. 숙취에 시달리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반쯤 타 들어간 담배를 물고 있던 쇼탄 경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키스 경이 휴가 때도 브리핑을 할 정도로 열심히 사는 사람인 줄 이제 알았어.” 아침에 억지로 일어난 게 엄청나게 불만인 지스킬은 붕 떠 있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내리면서 말했다. “휴가 때만큼은 낮잠을 자고 싶어.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난 돌아갈래.” 어쩜 이리들 비협조적일까. 이런 분위기에서 2주 동안 호스트가 되어 달라고 말했다간 당장 날 꽁꽁 묶어 달려오는 마차 앞으로 던져버릴지도 모르겠군. 역시 관건은 키스였다. ‘제발 타쿠르를 위해 희생해 주세요.’ 라고 말할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키스 경은 일부러 입을 닫고 분위기를 잡다가 대뜸 말했다. “2주 동안 큰 돈 벌고 싶은 분 있습니까아?” 그 순간 루이와 쇼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건 정말 본능이군. 손을 들어놓고도 자기들이 왜 들었는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어. 키스는 ‘후후, 두 놈 낚였군.’ 이라고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린 뒤에 다시 말했다. “그럼 2주 동안 핍박받는 약자들을 돕는 성스러운 일을 하실 분 있나요오?” 그때 크리스 경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키스는 지스 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눈빛에는 ‘지스 경은 죽어가는 어린 양을 외면하실 생각이십니까아!’ 라는 강렬한 협박이 담겨져 있었다. 일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던 지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항복했다. “쳇! 알았어! 도와주면 될 거 아냐. 무슨 일인지 말이나 해!” 좋아. 지스까지 넘어왔군. “그럼 2주 동안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재미있는 일 하실 분 계세요?” “나! 나 할래!” 아니나 다를까, 손을 흔드는 사람은 랑시 경이었다. 자, 이제 남은 사람은 난공불락의 루시온 경과 레녹 경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이 사람들에게 돈도 성스러움도 재미도 안 통하니까 그러나 의외로 루시온 경은 자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 키스 경을 따르겠습니다.” 호오, 역시 루시온 경은 키스를 존경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는 곧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어차피 안한다고 하면 끝까지 달라붙을 테니까요.” 역시 그 이유였구려. 이제 남은 사람은 레녹 경뿐.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왕궁에서 쫓겨날 때부터 기분이 엄청 가라앉아있던 레녹 경이다. 그는 정말 뭐라고 말해도 거절할 분위기였다. 그때 키스 경이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인원 모집을 끝마치고 본론에 들어가 볼까요오?” 그 순간 당황한 레녹 경이 말했다. “자, 잠깐! 어째서 저한테 안 물어보는 겁니까!” “그야 레녹 경은 필요 없으니까요.” “어째서 제가 필요 없다는 거죠!” 자존심이 상한 그가 벌떡 일어났고, 그 순간 키스 경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맺혔다. “이런, 무시해서 미안해요. 그럼 레녹 경도 참여시키도록 하죠.” 키스 경이 만장일치로 예스를 듣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20 키스 경은 10분에 걸쳐 ‘어째서 우리가 2주간 호스트를 되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돈 많이 벌면서도 성스럽고 재미있기까지 한 일이 결국 호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뱀눈이 되어 나와 키스 경을 바라봤다.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요! 이거 정말 심각한 일이니까! 그 불안한 침묵을 끊고 쇼탄 경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하하, 키스 경.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가볍게 망각한 것 같아서 말하겠는데, 우린 불법이성접촉 때문에 왕실에서 쫓겨난 거잖아! 그런데 이제는 아예 호스트를 하라고? 지금 왕실에 반항하겠다는 거야? 어차피 망가진 인생, 막 나가자는 거냐고! 왕실이 이 사실을 알면 우릴 살려둘 것 같아?” 왕실은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헬렌 경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지. 그러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쇼탄의 고함소리를 귀를 막은 채 전혀 듣고 있지 않던 키스 경은 귀에서 두 손을 떼며 생긋 웃었다. “에이이, 쇼탄 경. 용기를 가지세요.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야해요.” “뭐! 내가 그딴 걸 왜 돈 주고 사! 안 그래도 넘쳐흐르는구만!” ‘키스 경, 그 속담 묘하게 엉망진창이야.’ 한편 루이 경은 ‘용기’가 넘치는 쪽이었다. 그가 사자갈기 같은 금발을 넘기며 말했다. “난 할래. 설마 여기까지 헬렌 경이 쫓아올 리도 없고, 말도 안 되는 법에 이리저리 간섭받는 것도 사양이야. 적어도 왕실 밖에서는 자유롭고 싶어!” 하지만 당신은 왕실 안에서도 충분히 자유로웠던 것 같은데. 한편 호스트라는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크리스 경은 배신하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전 역시 안 될 것 같아요. 호스트는 왠지 신에게 천벌 받을 것 같아서....... 아앗! 미안해요! 미온 경!” “아, 아냐. 내가 모시는 신은 그런 쪽엔 꽤 관대한 편이라서.” 크리스군. 악의는 없지만 가끔씩 내 마음을 후벼 파는 폭언을 남기는구려. 쿠션들 속에 파묻히듯 들어가 있는 랑시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호스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거면 난 할래.” 저 가공할 정도로 단순한 성격을 볼 때마다 어때서 랑시가 무라사 씨와 형제인지 납득할 수 있었다. 루시온 경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절 선택한 고객에게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본래 일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사상 최초, 호스트 백작이 탄생하는 순간이로군. 물론 레녹 경은 맹렬히 반대했다. “모두들 지금 심각성을 모르는 겁니까? 지금 왕실에서는 헬스트 나이츠가 리더구트를 수색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조금은 법을 진지하게 생각해 달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당신도 그 ‘법’을 어겼잖아? 이렇게 스왈로우 나이츠는 ‘역시 호스트는 곤란’ 파와 ‘어차피 버린 몸’파로 나뉘어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아,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들. 2주 안에 타쿠르의 업소를 되살리려면 오늘부터라도 풀가동해야 한다고요. 물론 저녁 오픈 전까지 당신들에게 ‘호스트의 정석’ 기초 과정을 속성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도 두 말할 나위없고!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는 기분에 과감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 제 제안 하나 들어보실래요?” 잠시 후 내 말을 들은 기사단 전원은 모두 침묵했다. 그리고는 모두 키스 경을 바라보았다. “키스 경! 우리 기사단 전원은 미온 경을 도와주기로 결정했어요!” “아아, 저는 여러분의 따뜻한 동료애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 “단 조건!” “네에?” “댁도 지명 받아!” “그, 그건!” 그렇다. 내가 제안한 것은 ‘키스 경도 우리처럼 일해라!’라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쾌거를 이참에 달성 시켜 보자는 것이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아주 가끔 기분 내키면 밥 해주는 정도가 전부인 악덕포주 키스 경에 대한 우리들의 불만은 산처럼 누적되어 있는 상태. 그런 그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모든 리스크를 깡그리 무시해도 좋을 황홀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키스 경은 그 순간 바닥에 털썩 쓰러지면 ‘하지만 저는 일을 하면 즉사하는 체질이랍니다아.’라고 몸부림칠........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오만방자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며 가소롭다는 듯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우후후. 아, 뭐,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제가 고객들을 독차지해서 여러분들이 절망하지나 않을까 무척이나 걱정되네요오.” 발끈! 순간 우리들의 눈에 불길이 솟았다. 키스의 도발 덕분에 우리들은 단숨에 전투적으로 돌변해서는 그 즉시 타쿠르의 업소로 진격했다. 그런데 왠지 이것조차 키스 경의 계산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 21 아침부터 청소 중이던 타쿠르는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조르르 달려왔다. “와아! 미온! 설마 진짜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정말 고맙......” 타쿠르는 내 뒤로 따라 들어오는 ‘기사단’을 보고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툭 떨어뜨렸다. 어찌 광명이 아니리라. 예전 ‘미소년의 숲’에 비해서도 전혀 뒤지지 않을 최강의 미남들이 아침햇살을 등지며 나타났는데. 그런데 놀란 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황량한 가게 내부를 바라본 루이 경이 말했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 곳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쇼탄, 앞으로는 목욕탕 비좁다고 불평하지 말자.” 그때 우지직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랑시 경이 밟은 마룻바닥이 박살나 있었다. 아니, 이거 무슨 살얼음도 아니고.......랑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기가 뚫어놓은 구멍을 바라봤다. “헤에, 내 힘이 이렇게 센지 몰랐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타쿠르에게 물었다. “저어, 타쿠르. 설마 이 집, 무너지지는 않겠지?” “무, 물론이지.” 어째서 고민하고 대답하는 거야? 주변을 둘러보던 루시온 경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엔디미온 경, 오늘 오픈이 몇 시입니까?” “글쎄요? 6시쯤?” “그럼 그때까지 이곳 전체를 수리해야겠습니다.” “네?” “가문에 도움을 받고 싶진 않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군요.” 역시 백작가문! 호텔에 있는 것들만 들고 와도 여기 뜯어고치는 건 일도 아니겠지. 하지만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하지만 타쿠르에겐 수리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데요.” “괜찮습니다. 그건 제가 지불하도록 하죠.” “네에?” 난 눈이 커졌다. 루시온 경이 손 벌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감안했을 때, 직접 내기에는 결코 작은 비용은 아니었다. “고, 고마워요! 이익이 생기면 꼭 갚을게요!”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전 단지 이런 분위기에서는 일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하하, 아 예.” 쌀쌀맞게 말하는 루시온 경을 보여 엷게 웃었다. 이제 대충 그의 성격이 파악되는군. ‘자선사업가’ 루시온 경의 도움으로 민생고가 해결되자 나는 ‘교육’ 단계에 들어갔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기본적인 요점만 가르치겠어요. 복습할 시간 없이 곧바로 실전이니까 집중하고 들.......키스! 냉큼 일어나!” 으이구! 어쩌면 이런 곳에서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 수 있어! 기면증이라도 걸린 거야? 상자 뒤에 숨어 졸고 있는 키스 경을 끄집어내면서 본격적인 속성 교육이 시작되었다. 하아, 아무리 원판이 좋다고는 해도 제대로 고객을 접대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밀착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반나절 만에 가능할지....... 26 .......라는 걱정은 전혀 필요 없었다. “벌써 끝이야?” 수업 네 시간 만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는 속담을 여기서 재확인할 줄은 몰랐다. 처음 고개를 만나 자신의 인상을 남기는 법, 지루할 틈이 없도록 밀고 당기는 화술, 무리한 요구에 대처하는 비결, 아쉬움을 남기며 끝내는 방법 등등 스펀지가 물을 머금듯 순식간에 터득했던 것이다. 당신들 혹시 호스트 경험 있는 거 아냐? 랑시 경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뭐, 우리가 하던 일이랑 별 차이도 없네. 어쩐지 미온 경은 처음 기사단에 올 때부터 익숙하다 했어.”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시려오는구나. 나는 헛기침을 하며 그야말로 광속으로 끝나버린 교육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은 연애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문제 생길 수 있는 선을 넘으면 안돼요!” 그러자 루이 경이 뭐 그런 말까지 하느냐며 손을 내젓는 것이었다. “하하, 미온 경도 별 걱정을 다 해. 내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댁이 가장 걱정이네요! “그럼 저는 광고를 위해 타쿠르와 함께 거리에 다녀오겠습니다. 모두 준비하고 있으세요.” 순간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 참. 키스 경도 같이 가요.” “저요오? 제가 같이 가야할 이유라도 있습니까아?” “그야, 광고하는데 사람이 더 있으면 좋은 거고, 무엇보다.......” 여기 있어봐야 잠만 잘 거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게으름 전염시키지 말라고! 23 슬슬 사람들이 늘어가는 거리로 나온 내게 타쿠르가 물었다. “미온, 이제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찾아와 달라고 광고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지 않아? 몇 시간 있으면 오픈인데.......” 그러자 노골적으로 심통이 난 모습으로 뒤따라오던 키스 경이 투덜거렸다. “그거야 호스트 계의 신동, 엔디미온 키리안 씨가 알아서 하시겠지요오.” 으이구, 잠 못 자게 했다고 저리 비협조적으로 나오나! 나는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물론 나도 방법이 있어서 나온 겁니다.” “그 수첩은 뭐야?” “이건 어제 잠깐 호스트를 했을 때 만들었던 고객 명부. 여기 적혀 있는 고객들만 불러도 이십 명은 책임질 수 있어.” 고객의 신상명세가 빡빡하게 적혀 있는 수첩을 보여주자 타쿠르의 눈이 커졌다. “대단해! 하루 일하면서도 그런 걸 만든 거야? 역시 빈틈없어!” “아하하. 그냥 이건 버릇이라서.” 굳이 비교하자면 카론 경이 항상 자신의 검을 벼려 놓는 것이나 아이히만 대공이 별 이유 없이도 항상 총알을 장전해 두는 것과도 비슷한 경우.(후자와는 조금 다를지도.) 나 역시도 특별한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예전부터 고객이다 싶으면 사소한 것까지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직업병이랄까. 그런데 별 생각 없이 만들어 둔 게 지금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지는 나도 몰랐군. 키스 역시 놀란 듯이 말했다. “와아아, 미온 경, 교활하네요오!” “지, 직업의식이 투철한 거라고 말해주세요!” (먼저 일했던 가게에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집 주소까지 적혀 있는 수첩을 통해 어제 모셨던 고개들을 고스란히 우리 업소로 ‘인수’ 받을 수 있었다. 24 “이제 슬슬 돌아가야.......” 나는 기지개를 피며 어둑한 하늘을 바라봤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한숨도 못 잤어. 하품을 하는 날 지켜보던 타쿠르는 문득 뭔가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런데 미온. 어제 네가 걸었던 초상화는 어떻게 됐어?” “아, 맞아! 그게 있었지!” 깜빡 하고 있었다. 혹시 또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라서 우리들은 내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 전신 초상화가 걸려있던 자리에는 난생 처음 보는 녀석의 초상화와 함께 다른 호스트 클럽의 약도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저런 뻔뻔한 표절을! 타쿠르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이 녀석, 내 팔을 부러트렸던 놈이야.” “대충 그놈들 성격이 이해가 가는군!” 멋대로 내 초상화 떼어버리고 자기 것을 걸어 두질 않나, 방해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 팔을 부러트리고. 도저히 용서 못해! 나도 이 그림 떼어내 주마! 그때 키스가 내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온 경, 기분은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 행동해 봐야 미온 경 손해랍니다아.” 그리고는 은근슬쩍 내 품 속에서 펜을 꺼내는 것이었다. “가, 갑자기 펜은 왜요?” “좀더 온화한 방법도 있거든요.” 키스는 그놈의 초상화 상단에 두 개의 사선을 그려 넣었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고는 중얼거렸다. “.......영정?” 키스 경은 진지한 예술가의 표정으로 그 그림을 훑어보다가 다시 펜을 들었다. “역시 수염을 그려줘야........” “자, 잠깐. 그걸로 충분해. 더 하면 저 사람 동정할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한 사람 하나 골로 보내는 거 순식간이군.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키스 경이 적이 아니길 다행이다. 그때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네놈들! 내 그림에 무슨 짓이야!” 그와 함께 경호원쯤으로 보이는 건달들 서넛을 낀 초상화의 주인공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 사람과 그의 초상화를 몇 번이나 번갈아가며 보고는 외쳤다. “너무 다르잖아! 미화가 너무 심해!” 일단 초상화란 실물과 서로 비슷해야 의미가 있는 거 아니야? 당신과 이 그림과의 공통점이라고는 눈이 두 개라는 것밖엔 없다고! 내 괴로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괴리감의 남자’ 는 날 이리저리 훑어보며 코웃음을 쳤다. “네 녀석이 최근 새로 등장한 신인이었군. 뭐, 나보다는 못해도 제법 여자들 후려 봤을 상판이로구만. 흥, 계집애 같아서는.” “와아, 그 얼굴과 너무 잘 어울리는 입버릇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말투 거슬리네. 내가 무슨 씨름 선수야? 후리게? 그보다 너보다 못하다니! 너 같은 족제비와 비교 대상이 되는 것 자체가 모욕이야! 그러나 그 모욕의 퍼레이드는 타쿠르에게도 이어졌다. “너도 여전히 발버둥 쳐 볼 생각이냐? 큭큭. 뭐 맘대로 해 봐. 술 한 모금 못 마시는 샌님에게 어떤 여자가 넘어오겠냐만.” “닥쳐! 네놈에겐 절대지지 않아!” 나는 깜짝 놀랐다. 성격 바른 타쿠르의 입에서 저 정도 말이 쏟아질 정도로 엄청나게 미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자기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업소를 몰락 일보 직전으로 몰아놓고 팔까지 부러트린 놈인데. 무엇보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녀석이 장검을 차고 있는 저 한심한 꼴부터가 보기 싫었다. 기사 흉내라도 내려는 거냐. “타쿠르! 키스 경! 상대해 주기도 귀찮으니까 돌아가죠!” 라고 말하면서 키스 경을 바라봤을 때, 그는 기어코 저 족제비의 초상화에 수염을 그려주고 있었다. “아아. 역시 이쪽이 훨씬 개성적이랍니다아아.” 저건 나라도 눈이 돌아가 버릴 정도로 처참하군. 아니나 다를까 족제비 씨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키스 경을 노려봤다. “다, 당장 내 얼굴에서 수염 지우지 못해!” 그러자 키스가 무슨 억울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항변하는 것이었다. “수염이라니요! 이건 코털입니다아!”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결국 자지러지게 웃음보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리 쪽에서 도발해서 어쩌겠다는 거야.’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문제는 그 도발에 대한 족제비 씨의 반응이었다. “죽여 버릴 테다!” 검이 뽑히는 소리와 함께 키스 경의 머리 위로 칼날이 쏟아졌다 곧 사람들의 비명이 터졌다. “세, 세상에!” 그러나 키스 경은 어느새 반으로 부러트린 칼날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슬슬 돌리고 있었다. 나야 키스의 저런 모습 자주 봐서 이제는 별로 놀라지도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보고도 믿겨지지 않아서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막대 사탕처럼 톡 부러진 자신의 검을 들고 덜덜 떠는 ‘족제비’ 앞에서 키스 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이런 견고하지도 유연하지도 않은 잡철로 만든 장난감 칼로 사람을 때리는 짓은 하지 마세요. 그랬다간........” 키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들고 있던 칼 조각이 초상화의 이마에 박혔다. “부딪치는 순간 부러져서 저렇게 당신의 얼굴에 박히게 될 테니까.” 그의 빨간 눈웃음에 장난감 칼의 주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키스 경이 과거에는 정말 자주 검을 들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의 검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권태롭지만 또한 정중했다. 검을 바닥에 내던진 족제비 씨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무튼 이곳에서 장사할 생각은 하지도 마! 그딴 흉가에 어떤 미친 여자가 돈 내고 가겠어!” 라는 그의 말은 도망치면서 외쳤기 때문에 영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타쿠르는 아직까지 몸이 완전히 얼어붙은 채로 키스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을 하는 분이세요?” “저 말입니까아?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미온 경을 10년간 구입한........” “그냥 힘 센 게으름뱅이야!” “아아아, 미온 경. 자상한 상관에게 그 무슨 폭언입니까아.” 하아, 더 이상 말려들고 싶지 않아. 그때 타쿠르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온. 그런데 아까 저 녀석의 말도 완전 틀린 건 아니야. 우리 가게는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굳이 거기까지 찾아올 새로운 고객은 없을 것 같아.” 그러자 내가 말했다. “물론이지. 그 먼 곳까지 돈 내고 찾아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 그럼 어떻게 하지?” 나는 곧바로 초상화를 뒤집었다. 그리고 캔버스 뒷면에 약도를 그려놓고는 그 밑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그 문장을 본 타쿠르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투자라고 생각해. 자, 그럼 가자.” 금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내가 쓴 글을 보며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미소년의 숲 이오타 지점’ 오픈 행사. 오늘 전액 무료. 반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25 이를테면 나는 이 전쟁의 지휘관이었다. “키스 경! 옷 좀 제대로 입어욧!” “전 단정한 게 싫습니다!” “또한 고개들도 싫어하지!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어요!” “아아, 정장 따위 입으며 아저씨가 된 기분이란 말입니다아.” 얼굴이 반칙일 뿐이지, 나이로는 이미 아저씨야! 규칙 하나! 항상 청결하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할 것! “루이 경! 멋대로 술 따지 말아요!” “하지만 어차피 다 마실 거잖아.” “누가 댁 취하라고 사놨는지 알아?” 규칙 둘! 술을 마시는 것은 항상 업무적인 이유뿐! 대축 이러한 ‘전쟁 준비’들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위기 대처’ 능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가령 이럴 때는 지스킬 윈터차일드 군이 요주의 인물이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져 있던 지스 경은 고객이 몸을 만지자 당장 폭발해서는 소리치고 말았다. 그 순간 내가 무서운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지스 경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세요.” 규칙 셋! 불합리한 요구라면 거부 가능.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고객에게는 존칭어 사용! 26 스왈로우 나이츠 참전 후 이틀, 모든 것은 예상대로였다. 나름대로 나 자신을 명지휘관이라고 공치사해 보자면, ‘무료’라는 말에 기대감을 품고 먼 길을 찾아온 고객들은 루시온 경의 힘으로 환골탈태한 화려한 저택에서 베르스 최고의 미남, 미소년들(게다가 어쨌든 기사작위까지 있는!)에게 둘러싸여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었고, 그 만족감은 다음날 금화 1800닢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익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모든 것은 내 예상대로였다. 단 한 가지만 빼고! “.......저거 농담이겠지.” “그, 글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정말이지 여자 마음이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틀 째 일을 마친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서로 허망한 심정을 나눠야 했다. 이건 정말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니까 그 ‘무엇인가’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상황표, 즉 지명 순위를 기록하는 게시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 하나 빠짐없이 내로라하는 우리들 중에 누가 지명 넘버원이냐 하면! 우리의 모든 시선이 소파에 드러누워 잠들어 있는 키스 경에게 꽂혔다. 푸딩이라도 먹다가 잠들었는지 손에는 티스푼까지 그대로 든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전 아무렇게나 살고 있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을 어째서 저런 인간이 지명 1위? 라는 심란한 시선으로 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내가 마스터를 담당하느라 지명에서 빠졌다고는 하지만 저 엄청난 키스의 인기는 대체....... “말도 안 돼! 이건 뭔가 문제가 있어!” 쇼탄 경이 격분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바뀔 리는 없었다. (사실상 모두가 쉴 틈이 없었기 때문에 순위에 큰 의미야 없지만) 지명 꼴지는 바로 쇼탄 경이었던 것이다. ‘여름 한정’ 이라는 서글픈 징크스는 나라를 바꾸어도 여전히 찾아오는가 보다. ‘아무리 그래도 키스 저 인간은 상식 밖이란 말이야.’ 심지어 고객 앞에서 멋대로 잠들어 버리기까지 하는 제멋대로인 사람을 어째서 선호하는 걸까? 그건 큰 키라든가 훤칠한 외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때 키스 경에게는 밀렸지만 지명 3위라는 놀라운 스코어를 장식하고 있던 레녹 경이 상황표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내일도 열심히 해봅시다.” 저 나직한 말투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지명 2위를 빼앗겨 본 적이 없는 자의 은근한 분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한편 타쿠르는 순위야 어찌되었든 문전성시로 고객이 붐비는 지금 상황이 눈물나게 기쁜 것 같았다. 그는 하루 만에 가득 찬 고객 명단 부를 보며 말 그대로 폴짝폴짝 뛰었다. “미온, 이 정도로 엄청날 줄은 몰랐어. 하루에 1800골드라니.” “하하, 예전 업소에 비할 수는 없지만 첫 성과치고는 꽤 대단해. 히스카스 누님이 봤으면 분명 칭찬했을 걸?” 사실 예전 ‘미소년의 숲’은 일반적인 호스트 클럽이라기보다는 최상류 여성들의 비밀스러운 휴식처였고, 첨단 과학이나 문학에 대한 토론이 오가는 살롱이기도 했고, 때로는 깜짝 놀랄 정략(政略)이 보관되는 안전 금고이기도 했다. 덕분에 특별히 책정된 가격이라는 것은 없고 팁도 없으며 요금을 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고객들이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보내는 기부금이 전부였다.(물론 그 액수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27 문제는 삼 일째부터 발생했다. 오픈을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줄을 서서 들어와야 할 정도로 왁자지껄했던 어제에 비하면 지나치게 ‘인위적’이었다. ‘설마 그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게 아닐까!’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악소문을 퍼뜨려 고객의 발길을 끊게 만드는 짓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 한 명도 오지 않는다는 것은 수상했다. 아예 여기로 오는 길을 막아버리지 않는 이상은....... “미온! 큰일 났어!” 그렇게 외치며 가게에 뛰어 들어온 타쿠르의 안색이 창백했다. 나는 명확한 불길함에 젖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가게 앞 도로를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막고 있어.” “뭐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예상이 현실이 되자 난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놈들이 설마 정부 관리를 꼬드겨서 군인들이라도 동원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영업방해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저럴 수가!’ 타쿠르의 말대로 가게로 오는 도로 양쪽은 시커먼 제복의 사내들로 막혀 있었다. 당장 그들에게 달려가려는 나를 타쿠르가 말렸다. “미, 미온. 대화로 물러설 녀석들이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손놓고 지켜볼 수는 없잖아!”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그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최소한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적어도 ‘너희 가게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는 대답하지 못하겠지? 그런데 계속 그들에게 걸어갈수록 입고 있는 악취미적인 제복이 신경 쓰였다. 저 검은 가죽옷은 분명히....... “엔디미온 동지.” 분위기에 안 맞는 발랄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금발의 청년이 반갑게 웃고 있었다. 이 사람과는 이상하게도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군. “리젤 경?”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만약 리젤 경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백이면 백, 이 훤칠한 미남을 성격 좋은 귀공자 정도로 착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이자벨님의 심복이자 인트라 무로스 특무대 소속 장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순간 모든 의문은 풀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자벨님은 항상 이런 식으로 움직이시나요?” “소란 떨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적이 많은 분이시라서요.”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곧이어 기마대의 호위를 받는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지 않아도 알 것이다. 28 이자벨님의 농담은 항상 즐겁다. “미온, 오랜만이네. 이오타에서 호스트를 하겠다면 나로서는 환영이야.” “아하하, 하지만 정말 놀랐어요.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지 아신 거예요?”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가 관리하는 정보망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좀 황송할 뿐이었다. “괜찮은 곳이네. 소박하고 아늑하고. 미온이 있는 곳이라면 꽤 화려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녀는 와인 잔을 천천히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물론 지금 이곳에 있는 고객은 이자벨 님뿐이었다. 혼자 가게를 독차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지금 이 가게에 있는 여성이 인트라 무로스의 방첩국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른 고객들도 얼어붙어서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그녀를 차갑게 만드는 안경 너머로 그녀의 파란 시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자벨님을 처음 보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들은 ‘저 미녀가 정말 이자벨 크리스탄센이란 말이야?’라는 경탄의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운 듯이 동료들을 훑어보던 그녀의 시선은 곧 붉은 눈의 사내 앞에서 멈춰 섰다. “........” 키스 경은 일부러 관심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자벨님에게 슬쩍 등을 돌린 채 구석 소파에 기대어 있었다. 만약 이자벨님이 좀더 권위에 충실한 분이었다면 당장 특무대를 시켜 태도 불량한 키스를 잡아가뒀을 불경한 태도였다. 나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 이자벨님은 키스 경을 모른다고 했었는데? 그녀의 시선은 건조했고 고개를 기울인 채 벽만 바라보는 키스의 눈빛은 공허했다. 착각이겠지만, 이들은 마치 너무 오랜만에 만나 이제는 더 이상 공유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옛 연인들 같았다. 먼저 움직인 건 키스였다. “무서운 분은 사양입니다. 평화 만세예요.”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키스는 느릿느릿 가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대체 저 인간 왜 저러는 거야....... 그녀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온의 상관이니?” “아, 예. 키스 세자르 경이라고.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냥 귀엽게 생겨서.” 투명한 술을 넘기는 그녀의 눈빛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적어도 그녀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서로 적이 아니길 바랐다. 그녀는 내가 따라주는 와인을 묵묵히 지켜보며 알코올과 함께 가볍게 날아오르는 포도의 향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이자벨님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피곤하신 것 같아요.” “주량이 늘고 있어. 고민이 많아졌다는 의미지.” “헤에. 이자벨님이 고민해야 할 정도의 문제라면 짐작도 가지 않네요.” 작은 간지러움에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항상 공무원을 지키게 하는 건 일의 무게가 아니라 반복이야.” 그렇게 말한 이자벨님은 항상 지켜보는 이지적인 눈매로 나를 바라봤다.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예.” 나는 이자벨님의 성격을 잘 아는 편이고 그녀 역시 그렇다.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저번 왕자님과 공주님의 납치 사건......” 나는 말을 흐렸다. 그 배후에 이오타가 있고 이자벨님도 관여하고 있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더러운 물을 입에 가득 담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미온. 나는 네게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진실’들을 듣게 될 때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쪽은 나였다. “하지만 나는 너를 일개 호스트로 생각하지 않아. 때로는 동생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도 없겠지.” 그녀는 적을 속이고 적의 속임수를 간파하는 일의 달인이지만, 지금 나를 속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나로 인해 편해지는 이유는 나는 굳이 거짓으로 대하지 않아도 되는 극소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이 세상의 위험하고 추악한 진실에 접근하지 않길 항상 바래. 그걸 몰라도 세상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 그녀의 진심에 나도 진심을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제 기사에요. 그걸 못 본 체 하는 것이 절 행복하게 만들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그건 다른 곳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요!” 나보다 더욱 더 ‘위험한 진실’ 속에 접근해 있는 그녀는 연민에 찬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넌 언제나 반듯하구나. 그게 네 장점이지. 분명 나는 항상 선량한 수단만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내 목적만큼은 언제나 선량해. 사리사욕 때문에 남을 해친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이 가혹한 굴레 속에서 네가 상처받길 원치 않는다는 거야. 비록 날 미워하는 것이야 막을 수 없겠지만, 괜찮아. 미움 받는 것, 익숙하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지쳐 있었다. “........이자벨님.” “이만 가볼게. 남은 일이 많아서.” 그녀는 힘겨운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녀는 직접 검을 쥐지 않을 뿐이지 항상 모든 접전의 선봉이다. 천재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무언가 엄청나게 거대한 일을 해낼 인재로 키워져서, 그 대가로 그녀가 얻은 것은 냉혹한 정치판의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여자가 국왕의 최고 심복이 될 수 있냐고 비웃음을 받을 때도 그녀의 차가운 모략(謀略)은 차례차례 그렇게 비웃는 주국의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녀는 좋든 싫든 국왕의 숨은 칼날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칭송하는 자들은 이자벨님을 가리켜 ‘백만 대군과도 바꾸지 않을 지혜를 가진 책략가’라고 하지만 싫어하는 자들은-키르케님처럼 ‘인격조차 정보의 하나로 보는 냉혈한’ 이라고 질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곳을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느낀 점은 환상의 책략가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도 아닌, 단지 힘들고 지쳐서 어떻게든 감싸주고 싶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자벨님! 미움 받는데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 당신 미워하지 않아요! 당신이 좋은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이자벨님의 말마따나 상대의 쓰라린 구석을 후벼 파면서까지 그 ‘진실’을 알아내려는 건 너무도 잔인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누구는 장점이라 말하고 또 누구는 단점이라고 말하는 내 성격이었다. 29 어쨌든 우리의 투쟁도 계속되었다. 멋대로 업소 명을 도용해서 죄송한 ‘미소년의 숲 이오타 지점’은 나흘 만에 다른 도시에까지 소문이 퍼져나갈 정도였다. 분점이라도 낼까? 라는 농담도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적들의 공격도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한창 업소가 성업 중인 시각 벌컥 문이 열리며 들이닥친 자들이 소리쳤다. “우리는 시청에서 파견된 감찰관이다. 이 업소가 상법을 위반했다는 고발이 들어와 수색을 시작할 테니 손님들을 모두 내보내라!” 올 게 왔군. 난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법을 악용해서 상대를 해치는 짓은 처음 국가가 만들어진 다음부터 유구하게 이어져 온 악의 무리들의 전매특허, 전가의 보도다. 깜짝 놀라 주기엔 너무 시시껄렁한 협박인 것이다. ‘보나마나 저 관리 놈들 뒤에는 그 족제비 씨가 있겠지? 한 500골드 정도 쥐어준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고발이라니, 누구로부터 말입니까?” “흥, 익명의 고발이다.” “아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설마 나리들께서 나쁜 놈들로부터 더러운 돈을 받아 이런 지저분한 짓을 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속 보인다는 듯이 웃자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익명이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참으로 편리하게 상대를 찌르는 안전한 그림자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녀석들은 백이면 백 떠들기 좋아하는 얼간이들이다. 악당이라 불러주기에도 한심한 소인배인 거다.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당장 손님들을 밖으로 내보네. 그러지 않으면 공무집행방해로 즉심에 넘기겠다!” 너라면 그러겠니? 손님을 물리는 순간 이 트집 저 트집을 잡으며 하루 종일 영업 못하도록 훼방 놓을 게 뻔한데? 나는 딴청을 피우며 슬슬 약을 올렸다. “으음, 저는 말이죠. 악당들의 협잡질도 이런 구시대적인 발상에서부터 한시바삐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단순한 음모 밖에 없어서야 정의의 편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셈이잖아요? “큭!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저희가 무슨 상법을 위반했다는 건가요? 적어도 뭘 잘못했는지는 듣고 싶은데요?” “그, 그건.......그러니까.......” “이런. 아직 생각 못하셨나 보네요. 잘 생각해 보세요. 많잖아요. 부당이득이라든가 세금포탈이라든가.” 아무리 악행이라도 성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시청 감찰관이라는 자신들의 직한 하나에 당장 꼬리를 말 줄 알았던 그들은 내가 배짱을 튕기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아, 아무튼 수색을 해보면 잘못이 나와! 당장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모두 체포하겠다!” 이미 리더구트를 수색 당해서 쫓겨난 몸인데, 여기 와서 또 수색이라, 실로 징글맞은 우연이로군.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죄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무슨 죄인지는 모르겠다, 이겁니까? 공무원치고는 개그 센스가 탁월하시군요.” 그 순간 그의 눈빛에 핏발이 섰다. 번쩍 들어 올린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직격을 날리려는 찰나! 내가 품속에서 꺼낸 서류가 그의 얼굴에 들이 닥치는 게 더 빨랐다. “뭐, 뭐야. 이건.” “한번 읽어보세요. 당신도 잘 아는 분으로부터 받은 거니까.”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어내려 가던 그의 불쾌한 표정은 곧 경악으로 바꿨다. “이, 이거 위조는 아니겠지?” “어느 안전이라고 위조를 하겠습니까?” 그건 아주 간단한 증명서였다. 이 업소를 루시온 경의 백작가가 관리하는 사업에 포함시킨다는 것. 즉 이오타에서도 꽤 영향력이 이는 기업의 소유라는 의미였다. 사실 이자벨님은 그 ‘빽’이 너무 세서 도리어 곤란하다. 인트라 무로스의 보호를 받는 호스트 클럽이라는 말을 듣고 믿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거대 사업체라면 얘기가 달랐다. (물론 루시온 경의 가문으로서도 이곳의 수익성을 알고 도와준 것이지만) 설마 정계 재계에서 명망 높은 귀족가문의 사업체에 함부로 행패를 부릴 만큼 배짱 좋은 말단 공무원은 없을 것이다. 뭐, 정의로운 해결책이라고까지는 말 못하겠지만 어쨌든 모든 가치 판단의 척도가 권력인 인간에게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패배를 가장 빨리 이해시키는 방법이리라. 권력이 무기인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이니까. 가장 합리적인 답안인 것이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희가 잘못한 점은 찾으셨는지요.” “아니 그, 그건 단지 업무상의 착오........” “아하! 그러시군요. 자, 그럼 그만 얼쩡거리시고 냉큼 꺼져 주시겠어요?” 내 무례한 면박에도 감찰관들은 뭐 씹은 표정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등을 향해 혀를 내미는 내게 타쿠르가 조금 겁먹은 얼굴로 다가왔다. “미, 미온. 성격 많이 모질어졌구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 같아.”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됐네요. 1년간의 기사 생활 동안 말 못할 풍파를 다 겪어봐서 말이지.” 나는 이런 소동이 일어나든 말든 고객 품속에서 잠들어 있는 키스 경을 흘겨보며 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물론 오늘의 지명 1위도 키스 경이었다. 30 우리 중에 가장 신이 난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 경이었다. 물론 당연한 말이다. 평소에는 여자와 손만 잡아도 ‘왕실 규율 위반’이라는 거창한 범법을 저지르게 되는데, 지금은 도리어 돈까지 벌게 되었으니, 오직 여자만이 자신이 숨 쉬는 의미인 그에게 이런 환상의 직업이 또 있으랴. 세상에는 가지각색의 인간과 직업이 있는데 그중 루이 경과 호스트는 그 궁합이 상당히 좋았다. “미온! 내 인생의 로드맵을 이런 곳에서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어!” 라면서 때 아닌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루이 경이 오늘은 ‘출근’하지 않은 것이다. “얼레? 루이 경 아직 안 나왔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업소에 도착한 나는 루이 경이 없는 것을 보고 놀란 눈을 깜빡였다. 몇 시간 전부터 와서 몸치장에 여념이 없는 ‘부지런한’ 그가, 오픈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카론 경이 업무 중에 농땡이를 피웠다는 말 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표정들이 왜 그래요?” 황망함을 그대로 드러낸 동료들을 바라보며 나는 또 무슨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때 지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루이가 그놈들 업소로 스카우트 되어 가버렸어.” 나는 허허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일류를 꿈꾸는 호스트라면 좀더 자기 몸값이 높은 곳을 선택하는 것도 자유야. 좋은 프로의식이야. 그런데 루이 경, 당신 일단은 기사 아니었어? 돈과 여자라면 다 좋은 거야? 우리는 타쿠르를 돕기 위해 여기 나오고 있는 거잖아! 대체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시는 거냐고! 나는 그 모든 상념들을 한마디로 줄여 표현했다. “.........아무튼 개념 진짜 없어요.” 나는 흘낏 키스 경을 바라봤다. 기사단장으로 이 ‘황당한 배신감’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해주길 바랐지만, 본래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하는 키스 경은 ‘떠나간 철새는 때 되면 다 돌아온답니다아.’라는 신선 기지개 펴는 소리만 하고 있었다. 이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레녹 경의 목소리가 울렸다. “본래 남 생각은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화가 날 것도 없군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 경의 행동만큼이나 레녹 경의 말투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말투를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도 이번에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루이 경의 행동이 믿을 수 없이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도리어 랑시 경은 입을 삐죽 내밀며 거들었다. “루이 경이 바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동료는 소중하게 생각하는 바보라고 생각했어! 이거, 배신감 느낀다고!” 사실 랑시는 소녀 같은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직선적인 성격이라서 기분이 나쁠 때는 엄청난 폭언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린다. 형, 무라사 씨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었다. 평소부터 루이 경과는 사이가 나쁜 레녹 경이 이때라는 듯이 말했다. “제가 기사 단장이었다면 당장 루이 경을 제명했을.......” “적당히 좀 하시지, 잘난 공무원 기사 나리.” 화를 꾹 참는 소리가 끼어들자 레녹 경이 고개를 돌려 그를 쏘아보았다.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레녹 경을 노려본 사람은 바로 쇼탄 경이었다. 레녹 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친구라고 감싸주는 겁니까?” “감싸줘? 내가? 그놈을? 뭣 하러?” 쇼탄 경은 자기 쪽이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그 구제불능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인 걸. 바보지만 더럽지는 않아. 다들 말조심하라고!” 칭찬인지 욕인지 잘 구분이 안가는 쇼탄 경의 변호가 쏟아졌다. 항상 궁상맞은 오라를 내뿜는 쇼넨베르트지만 저렇게 진지하게 화를 내면 확실히 무섭다. 큰 키의 근육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조리 있게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은 없어도 빈민가에서 거칠게 자라왔던 탓인지 한번 진심을 말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를 매사에 무시하던 엘리트 레녹 경 역시 지금만큼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절대 일정은 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돈 때문이 아니라면 뭣 하러 우리에게 말도 없이 그쪽에 붙었습니까?” “몰라. 내가 바보의 속을 어떻게 알아.” 쇼탄 경 역시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상황을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바로 루이 경의 룸메이트인 쇼탄 경일 것이다. 이 거북한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마시던 루시온 경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곧 오픈이라는 겁니다. 모두 일할 준비하세요. 그리고 루이 경의 행동에 대한 처분은 전적으로 기사단장인 키스 경의 권한이니까 우리는 키스 경의 판단을 존중하면 되는 겁니다. 사적인 감정은 품지 말아주시길.” 딱 부러지는 그의 태도는 감정적으로 격해지던 레녹 경과 쇼탄 경을 진정시켰다. 푸른 머리의 백작가 청년에게는 (좋은 의미로서) 귀족다운 리더십이 있었다. 만약 이 세상이 전란에 휩싸여 있다면 루시온 경은 수천 명쯤은 너끈히 통솔하는 상급 지휘관 직책 정도는 꿰차지 않았을까? 그런데 정작 그런 유능한 기사에게 존중을 받는 키스 경이라는 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 애써 다려놓은 셔츠가 구겨질 정도로 소파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가끔 키스 경에게는 희로애락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당연한 궁금증을 품을 때도 있지만-숨 쉬는 인간이라면 (그 비율의 차이는 있어도) 희로애락은 존재한다. 단지 키스 경은 그걸 마음 속 밖으로 보여주는 것에 엄격하거나 혹은 서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 그럼 일을 시작해 볼까요.” 나는 뒷정리를 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말했다. 루이 경의 엉뚱한 행동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일을 미룰 수야 없지 않는가. 31 루이 경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돌발행동의 이유는 이틀 후에 밝혀졌다. 그것도 아주 시시하게. 루이 경 스스로가 자기 발로 우리 업소를 찾은 것이었다. 게다가 만면에 개선장군 같은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와하하하! 내가 없는 동안 잘들 지내셨나! 제군들!” “루, 루이 경!” 나는 너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설마 완전히 그놈들과 한 패가 되어서 우리를 놀리기 위해 온 거야? 그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기는커녕 돌아온 탕자 바라보듯 하는 우리들의 표정을 살피고는 요란하게 염색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이거 내가 가게를 잘못 들어온 건가.”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 온 거야!” 가장 먼저 쏘아붙인 사람은 의외로 쇼탄 경이었다. “얼레? 어째서 화가 난 거야?” “왜 화가 났냐고? 글쎄다. 나도 모르겠네!” 이틀 만에 돌아온 자신의 룸메이트 앞에서 쇼탄 경은 완전히 삐쳐있었다.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다짐을 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저래서야 덩치와 비교해서 너무 언밸러스하군. 루이 경은 그제야 히죽 웃으며 두 손을 으쓱했다. “하하하. 설마 이 루이님이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그놈들에게 매수되었다고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모두는 깊게 침묵하며 루이 경을 바라봤다. 그가 스르륵 손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의, 의심하는 거냐.” 아니,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어요. 루이 경은 방귀 낀 놈이 성질낸다고 도리어 자기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난 너희들을 돕기 위해 적진에 잠입한 건데 어쩜 이리 야박할 수가 있냐!” 그러나 평소 루이 경의 인생철학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여전히 골이 깊은 의혹의 눈초리로 그를 흘겨 볼 뿐이었다. 루이 경은 울상이 된 얼굴로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곧 무엇인가가 빽빽하게 쓰여 있는 쪽지를 꺼냈다. “짜잔! 이게 뭔지 아시겠나들?”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후후! 이건 말이지 그놈들 업소의 단골 고객 명단이야! 내가 이틀 만에 모조리 내게 홀딱 빠지게 만들어서 여기로 오도록 만들었지롱. 어때, 나 잘했지?” 우리는 커다랗게 웃는 루이 경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아니 물론 적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전술이라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그건 너무....... 비열하잖아! 내가 그놈들이었다고 해도 눈이 돌아갔을 치 떨리는 짓이라고. 지금쯤 뭐 그딴 놈이 다 있냐고 괴성을 지르며 광분하고 있을 족제비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이유’를 알게 된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명만 빼고 말이다. “고작 그딴 짓을 하려고 나와 상의도 안하고 간 거냐! 이 망할 놈아!” 무슨 일인지 분노가 폭발한 쇼탄 경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루이 경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후후후, 쇼탄. 기분은 이해하지만 천재의 재능을 질투하는 이런 짓은 보기 흉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만약 거기 갔다가 칼이라도 맞았으면 지금처럼 웃는 낯짝 보일 수 있겠냔 말이야! 넌 생각이라는 걸 하긴 하는 거냐?” 쇼탄 경은 진심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놈들은 방해하기 위해서 서슴없이 칼까지 휘두르는 놈들인데, 만약 루이 경의 속셈이 들통 났다면 그냥 놔뒀을 리가 없었다. 쇼탄 경이 이틀간 계속 초조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내심 루이 경을 가장 잘 챙겨주고 있다는 기분에 푸근한 기분이 들었지만........ “우아앗! 루이님을 때렸어!” “너같이 정신연령이 바닥을 치는 녀석은 두들겨 패서라도 교육을 시켜야 해!” “웃기시네! 난 성자와 같은 정신연력을 가지고 있어! 지명 꼴찌 주제에!” “그 바로 위가 네놈이잖아! 게다가 고객 만족도는 내 쪽이 훨씬 높아!” “흥! 이 루이님의 감미로운 손놀림 앞에서 감히 만족도를 논해?” “쳇, 고작 손놀림? 난 말이지......” 잠깐, 당신들 대체 지명자하고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거야. 싱글싱글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던 키스 경이 말했다. “루이 경. 보고는 그걸로 끝입니까아?” 그러자 순간 루이 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중단되었던 본론을 말했다. “또 하나. 아주 중요한 게 있어.” 그의 목소리는 심상찮았고 가벼운 분노마저 느껴졌다. “그놈들, 마약 팔고 있었어.” “뭐라고?” 나와 타쿠르는 놀란 얼굴로 루이 경을 바라봤다. 농담 좋아하는 인간이지만 이런 걸로 장난칠 사람은 아니었다. “후후. 누구와도 금방 융화되는 내 친화적인 성격 알잖아? 내 연기에 속은 그놈들은 나를 자신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고 나한테 마약을 보여줬어. 이 지역 범죄조직과 어울려 고객들에게 마약을 팔고 있었던 거야.” 나는 ‘마약’이라는 음침한 단어를 듣자 어안이 벙벙했다. 그와 함께 어째서 값도 비싸고 실려고 형편없는 그 업소에 아직까지 고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가를 알 수 있었다. 마약에 중독된 것이다. “더러운 놈들! 고객의 인생을 망쳐 놓는 그런 놈들은 죽어 마땅해!” 타쿠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타쿠르다. 고객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그런 짓은 자기 업소를 불태우고 팔을 부러트린 것보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거야말로 기사가 나서야 할 범죄의 현장이 아닌가! 그때 키스 경이 말했다. “루이 경.” “예?” “당분간 몸조심하세요.” “왜요?” “그런 엄청난 비밀을 들켜버린 그 친구들이 목격자인 당신을 그냥 놔둘 것 같습니까아? 길거리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싶지 않으면 항상 주의하세요.” 루이 경은 뒤늦게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키스 경의 판단은 옳았다. 마약 판매랑 이오타에서도 영업방해와는 수준이 다른 중범죄였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을 중독자로 만드는 놈들이 살인이라고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항상 헤죽헤죽 웃고 다녀도 이런 판단력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사람이 바로 키스 경이었다. 아무튼 그놈들이 하는 짓에 분개한 우리들은 이제 어찌할지 지휘를 바라며 키스 경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펼 뿐이었다. “자아, 그럼 오늘도 열심히 일을 시작해 볼까요오?” “자, 잠깐. 키스 경.” “네에?” “그놈들 그냥 놔둬도 괜찮아요? 사람들에게 마약을 파는 놈들인데 어떻게 못 본 체하고........” “미온 경.” “예?” “제가 뭐라고 대답할지 뻔히 알면서 그러시네요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다. 여기는 베르스가 아니고 우리들은 카론 경과 같은 수사 전문의 기사도 아니니까 우리는 우리의 일만 잘하면 되는 거라고. 덧붙여 괜한 일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라고. 나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키스 경.” “예에?” “그럼 제가 이제 어떻게 나올지도 아시겠네요.” 키스 경은 그런 내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에 제가 말했죠? 당신이 검술의 달인이었다면 절대 제명에 못 죽을 거라고.” “부,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요! 누가 죽는다고!” 그는 특유의 여우같은 웃음을 흘리며 내게 말했다. “말리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대책 없이 정의롭게 살진 마세요. 그런 사람은 카론 경 하나로 족하니까요.” 이거 뭔가 카론 경이 들었다면 ‘사돈 남 말!’하면서 칼 뽑을 소리로군. 아니, 내 쪽이야말로 억울해. 카론 경은 카론 경대로 내게 ‘키스에게 전염된 녀석!’이라면서 불만이고, 또 키스 경은 함부로 ‘단명할 팔자’라는 실례되는 운명을 정해버리고! 누가 대책 없이 산다는 거야? “나도 나대로 해결법이 있다고요!” 나는 울컥하는 기분에 볼이 부풀어서는 밖으로 나섰다. 32 기가 막혀, 내가 설마 그놈들 소굴로 뛰어 들어가서 ‘이 마약쟁이들아!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라고 외치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나는 그 용서 못할 범죄자들을 (내 방식대로)소탕할 방법을 찾아 예의 클럽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내게 ‘한 끼에 금화 50냥’이라는 전대미문의 바가지를 씌운 그 가게 말이다. “여어, 전설의 호스트. 최근 인기절정이시던데?” 클럽 앞에 서 있던 건달들이 나를 보고는 가볍게 빈정거렸다. 남이 돈 많이 버는 것보고 속 편할 수가 없는 게 장사꾼 마음이니까. 난 클럽 안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오늘은 안 왔나 모르겠네.” “엥? 누구 찾는 거냐?” “쇼메 왕자........아니, 댁들의 도련님.” “그분은 왜? 지금 안에 있는데?” 역시 여기 ‘죽돌이’였구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온다고 했던가. 마침 미레일 경과 함께 나오는 쇼메가 나와 마주쳤다. 화려한 모피 코트를 걸친 그는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마수에서 내가 단번에 빠져나온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놀러 다니면서 정치는 대체 언제 하십니까? 라고 비아냥거렸다간 이번에는 정말 칼 맞을지도 모르겠군. “와아, 정말 성실하게 출근하시네요. 회의실을 이곳으로 옮기셨나보죠?” 그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원래 가장 중요한 일은 회의실 밖에서 벌어지기 마련이지.” 네깟 놈이 뭘 알아? 라는 눈빛이었지만 내 코가 석자이니 만큼 일일이 반격할 생각은 없었다. 도리어 내가 활짝 웃자 그는 위험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이 슬쩍 몸을 뒤로 피하는 것이었다. “흥. 그보다 의외인 걸. 네 녀석이 날 먼저 찾아오다니 말이야. 용건이 뭐지?” 그의 날카로운 정치적 기질은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표정만 보고도 나는 용건이 있고 자신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대놓고 마약사범들을 처단해 달라고 부탁해 봐야 또 엉뚱한 조건만 내걸 게 분명하고......“ 쇼메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말을 돌렸다. “당신이 상업적으로는 굉장히 밝은 분이지만 윤리적으로는 형편없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 그렇게 자극하는 말이 나오자마자 미레일 경의 안색이 바뀌었다. 하지만 교섭에 대해서는 능구렁이나 다름없는 쇼메 왕자는 쉽사리 내 미끼에 입질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저어 주변의 건달들을 물린 뒤에 말했다. “어이, 천민. 내 시간은 네 녀석의 시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소중해. 네 재롱을 봐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만약 시시한 말재주로 내 시간을 빼앗을 심산이라면 단념하고 본론만 말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내 윤리성이 어떻다고?” 누가 아이히만 대공의 수제자 아니랄까. 역시 천하의 정치가 앞에서 어쭙잖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봐야 통할 리가 없지. 마라넬로 황제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 그의 기백에 물러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고작 시시한 마약 판매 하나 가지고 바쁜 왕자 전하를 막았군요.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누가 가도 좋다고 했어. 방금 마약이라고 했나?” 나는 씨익 웃으며 본론을 말했다. “이건 참, 왕자님은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놈들을 그냥 놔두는 걸 보고 윤리적으로 실망한 거죠.” “어떤 쓰레기들이 내 나라 한복판에서 마약을 판다는 거야. 자세히 말해봐.” 나는 쇼메의 송곳니가 번뜩이는 것을 보며 안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도시 한복판에서 마약을 파는 놈들이 뒤를 봐주는 관리도 없이 그런 간 큰 짓을 저지를 리는 없다. 보나마나 이 도시의 치안관 정도는 매수해 놨을 것이다. 그래서야 내가 아무리 이곳 공관서에 가서 그들을 고발한다고 해도 제대로 수라를 할 리가 없지. 도리어 체포되는 것은 내 쪽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 제 1왕자의 귀에 직접 고발이 들어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쇼메의 용서 없는 성격상 무자비한 기세로 뿌리를 뽑아버릴 것이 뻔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던가. 이런 일에는 쇼메 왕자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33 자기 나라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것도 하찮은 천민 앞에서) 마약 거래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쇼메의 드높은 자존심을 어지간히 긁었나보다. 그날부로 이 도시에는 대대 규모의 왕실 수사대가 파견되었고, 이 잡듯이 증거를 찾아내는 기동 수사 끝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수도로 강제 이송되었다. 비록 냄새를 맡은 그 족제비 일당이 체포 직전에 도주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발전된 치안 시스템을 갖춘 선진국답게 속이 다 후련한 조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였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적합한 서류상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느니 이리저리 미적거리다가 결국 깃털만 뽑다가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카론 경이 이오타의 기사였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아, 언제 날이 풀리는 거야.” 아침이 가까워져서야 일을 마친 나는 타쿠르, 동료들과 함께 호텔로 향했다. 겨울이 봄에게 막 바통을 넘긴 최근의 날씨는 심보가 고약해서 낮에는 땀이 날 정도로 덥고 밤이면 숨이 막힐 만큼 추웠다. 뭐, 이것만큼은 나라님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라서 나는 몰아치는 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키스 경은 결국 추운 건 질색이라면서 그냥 업소에서 잠들어 버렸다. “이런 추운 새벽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우리들뿐일 거야.” 타쿠르가 장난 섞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밤까지만 해도 북적거리던 거리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보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이 시간은 따뜻한 침대 안에 잠들어 있은 시간이었다. 나는 맞장구 쳤다. “하하. 정말 이런 시간에 돌아다닐 사람은 호스트나 강도밖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걸 난 몇 차례나 확인했던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목골목에 숨어 있던 위험해 보이는 녀석들이 우리들을 막아서는 것을 보며 난 부정적인 상황은 기똥차게 잘 맞추는 내 말에 새삼 놀라고야 말았다. 그들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런. 열성 팬들인가? 하지만 이런 우락부락한 남자들은 질색인데.” 누가 봐도 오금이 저릴 상황인데도 쇼탄 경은 제법 여유 있는 농담까지 던졌다. 나도 크게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우리 쪽 수도 적지 않고 싸움에 능한 쇼탄 경이나 루시온 경까지 있기 때문에 별일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품속에서 단도니 도끼니 하는 흉악한 무기들을 꺼내며 우리를 조여 오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이놈들! 루시온 경이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지갑을 노리는 좀도둑은 아닌 것 같군요.” 그때 어떤 생각이 퍼뜩 머리를 지나쳤다. 루이 경 탓에 족제비 일당들은 마약 혐의에 걸려 쪽박을 차게 되었고, 그들은 체포 직전에 도주했다고. “하하하. 날 이 지경으로 만든 대단한 분들을 뵙게 돼서 영광이로군.” 아니나 다를까, 저 집요한 족제비 씨가 일그러진 웃음을 보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루이 경을 보자마자 죽여 버릴 듯이 이를 가는 것이었다. “비열한 놈!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네놈이 우릴 속인 바람에 내 인생이 날아가 버렸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적어도 경쟁업소에 불 지르고 마약 팔아 돈 버는 놈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군. 루이 경은 귀를 후비며 뻔뻔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 산다는 게 다 속고 속는 과정 아니겠어? 속은 놈이 병신이지.” “이 자식! 죽여 버리겠다!” 루이 경, 일부러 자극할 것까진 없잖아. 저들은 정말로 우리를 회쳐버릴 것 같은 분위기로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루시온 경이 앞에 나서며 검을 뽑았다. 그는 묘하게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과 함께 있게 된 다음부터 편한 날이 없는 것 같군요.” “미, 미안하게 되었네요.” 아무리 루시온 경이 검술의 달인이고 쇼탄 경이 싸움에 능하다고 해도 흉기를 든 십여 명의 거한들과 싸워서 상처 하나 없이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데. 이럴 때 키스 경이 있어야 하는데 춥다면서 따라오지도 않고! 그때 갑자기 두 팔이 내 어깨 위를 휘감으며 나긋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거봐요, 미온 경. 제명에 못 죽을 거라고 했지요오?” “키, 키스 경!” 당신 언제 온 거야! 나는 화들짝 놀라서는 몸을 돌렸다. 놀란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예전 키스 경의 괴력 라이브 쇼를 목격한 적이 있는) 족제비 일당 역시 그를 보자마자 안색이 바뀌었다. 자신 같은 덩치들 수천 명이 덤벼도 하품이 나올 사람이니까 기겁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키스 경이 두 손을 호호 불며 말했다. “이런 쌀쌀한 날, 남자들끼리 옹기종이 모여 서로 배를 갈라서야 쓰겠습니까아. 자수해서 광명 찾으세요. 키스 경다운 위협이었다. 그러나 당장 꼬리를 말고 물러갈 줄 알았던 족제비 녀석은 도리어 그 신기하게 적응 안 되는 낯짝에 잔인한 웃음을 띠는 것이 아닌가. 키스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으십니까?” “흐흐, 안 그래도 네놈이 나타날 줄 알고, 널 뭉개놓을 해결사를 하나 불렀지! 죽을 준비나 해라.”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힘깨나 쓴다는 건달이든 잔혹한 칼잡이든 저 키스 경이라는 비상식적인 생물에게는 흠집 하나 못 낼 것이 뻔한데, 그런데도 저 자신만만한 얼굴은 무슨 의미지? 곧 우리는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 ‘해결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보는 순간 내 온몸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스 경마저도 고개를 꺾으며 ‘이건 반칙입니다아.’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 은발의 머리칼. 이 추운 날 가슴이 다 드러나는 가죽 옷에 위험천만한 맹수의 기운. 우리를 본 그 해결사가 외쳤다. “우앗! 네놈들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는 무라사 씨야말로........”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가린 채 ‘어째서 당신과는 안 좋은 장소에서 안 좋은 상대로만 만나게 되는 겁니까.’라고 푸념을 내뿜었다. 우리의 반응을 본 족제비 씨가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큭큭큭! 보아하니 겁을 먹은 얼굴이로군!” ‘당연하지. 저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네 명의 초인 중 하나니까!’ 어째서 저런 놈들이 아신을 데리고 있는 거야? 무라사 씨의 정신 구조로 봐서 뭔가 어처구니없는 이유일 게 뻔했지만 당장 우리 앞을 막아섰다는 것만으로도 백만 대군에 포위된 기분이었다.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족제비 씨. 저 사람이 누군지 알고는 있는 거요?” “응? 자신을 견백호라고 말하는 정신이 좀 이상한 녀석이긴 하지만 싸움은 아주 잘하는 놈이지.” 그러자 무라사 씨가 곧바로 외쳤다. “아무리 내가 아신이라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니까아!” 발끈한 건 족제비 쪽이었다. “당연하지! 아신이 왜 밥도 못 먹고 이런 곳을 헤매고 있어! 속일 것을 속여!” 세상에는 그런 궁핍한 아신도 있다오. 그때 감히 키스 경도 어쩌지 못하는 무라사 씨 앞으로 당당히 걸어 나간 도전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뒤로 물러선 건 견백호였다. “너, 너는!” “형! 왜 또 이런 곳에서 방황하고 있는 거야! 내가 창피해서 못 살아!” “아, 아니....... 난 그냥........” 우물쭈물하는 무라사 씨 앞에 자기 절반만한 동생의 무자비한 폭언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천적은 있는 법이다. 카론 경에게 키스 경이 그러하다면 무라사 씨한테는 단연코 랑시 경이었다. 맹수조련사라고나 할까. 소녀에서 마녀로 변신한 랑시 경은 이건 진짜 가족 망신이라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아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겠다고 가출해 놓고 왜 저딴 놈들 해결사나 하고 있는 거냐고!” 이건 이미 집안싸움이었다. “그, 그게 숲을 돌아다니다가 먹을 게 들어있던 배낭을 잃어버렸고, 너무 굶주려서 도시로 기어 나왔는데.......” 당신이 곰이유? 너무 처절하고 한심해서 할말이 없었다. 라이오라 씨가 이 꼴을 봤다면 ‘저딴 게 내게 라이벌 의식을 품은 것 자체가 불쾌하군.’이라며 완전히 무시해 버렸을 일이로군. “이 녀석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간신히 살았는데 밥값을 하라고 해서 말이야.” 역시 누가 봐도 아신이라고 안 믿을 짓만 하고 다녔던 것이다. 내가 설마 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혹시 그 밥값 금화 50냥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알았어?” 순간 랑시 경이 빽 하고 소리쳤다. “황소라도 잡아먹은 거야? 그걸 믿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어!” “나, 나야 돈 주고 밥 먹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형을 바보라고 부르다니!” “바보를 바보라고 부르는데 뭐가 잘못됐어! 몇 번이라도 불러주지! 바보! 바보! 바보! 밥값도 모르는 바보 천치!” 난리도 아니었다. 하긴 100억 셀링의 가치도 실감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당연할 수도 있지. 믿고 있던 ‘해결사’가 조막만한 ‘소녀’에게 쩔쩔매고 있자 당황한 족제비가 말했다. “이게 뭐야! 역시 덩치만 큰 과대망상증 환자였잖아! 자기가 아신이라고 우기질 않나! 여우같은 빨간 눈을 박살내 놓기는커녕 저딴 계집애에게.......” 의식하지도 못한 순간 벼락같은 굉음이 터졌다. 나는 도로의 타일들이 일시에 솟구쳐 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 이건?” 이미 무라사 씨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뒤였다. 뒤를 돌아보자 핏물을 툭툭 흘리는 주먹을 거두는 견백호 무라사 씨와 그 앞에 서 있는 키스 경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키스 경의 양팔은 심하게 찢겨져 나갔고, 그 충격을 그대로 받아낸 셔츠마저도 처참하게 찢겨 나간 상태였다. 하늘로 솟구쳐 올랐던 타일들이 비처럼 바닥에 쏟아지고 있었다. 족제비 녀석은 무라사 씨가 움직인 발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는 도로를 보고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진짜....... 아신이었어?” 섬뜩한 진동음으로 포효하는 강철의 주먹을 다시 준 무라사 씨가 말했다. “최근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더군. 나름대로 네 녀석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넌 내가 죽여야겠어.” 그러나 키스 경은 상처 입은 두 팔을 내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끼 밥값 벌려고 살인을 저질러야겠습니까아?” “능청 떨지 마! 네가 죽어야 할 이유는 너도 잘 알 텐데!”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은 노성에 사방의 유리창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우리는 거대한 맹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본능적인 공포심에 몸을 움츠렸다. 랑시 경만 제외하고. 그가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형! 이게 무슨 짓이야!” 무라사 씨의 목소리는 확고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아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할 거라고 말했었지? 그게 바로 이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키스 경을 죽이는 것이 어째서.......” “그게 세상을 지키는 길이야.” 그와 함께 공기를 꿰뚫는 견백호의 일격이 키스 경의 가슴팍을 직격했다. 아니, 간발의 차이로 간신히 피했지만 그 풍압만으로도 키스 경의 뺨과 가슴에는 진한 혈선이 그어졌다. 그 이후 연속으로 터지는 엄청난 공세에도 키스 경은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굳이 공격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반격의 틈을 보이지 않는 무라사 씨의 맹공 때문이었다. 제 아무리 키스 경이라도 손에 검이 없는 이상 격투에 있어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견백호를 상대로는 간신히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직도 살고 싶은 생각이 남아 있는 거냐!” 가드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격렬한 펀치에 두 손이 풀린 키스 경은 일순간 무방비가 되었고, 복부에 꽂힌 주먹과 함께 몸이 떠올랐다. 보통사람이었다면 순식간에 내장이 파열되었을 끔찍한 충격음이 터졌다. 하지만 무라사 씨는 그의 머리를 잡아채 그대로 바닥에 집어던졌다.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견백호라는 어불성설의 파워라면 경우가 달랐다. 땅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돌바닥에 내려찍힌 키스 경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몸 주변으로 적잖은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라사 씨는 스스로 동정을 버리려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런 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네 운명을 저주하는 편이 마음 편할 거다.” 그리고 그의 결정타가 쓰러진 키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몸을 일으킨 키스 경의 손이 무라사 씨의 주먹을 막아냈다. 그 충격은 도로에 방사형의 균열이 생길 정도로 엄청났지만 도리어 피투성이가 된 키스 경의 입가에서는 소름기치는 웃음이 터졌다. “이 정도로는 안 죽는다고 몇 번 말해줘야 알아들어?” 순간 머릿속에서는 광기어린 키릭스의 모습이 지나갔다. 그때 루시온 경이 검을 뽑아 키스에게 던졌다. “키스 경!” 키스가 그걸 잡아채는 순간 무라사 씨는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새하얀 섬광이 반원을 그리며 그의 몸을 노렸기 때문이다. 무라사 씨는 이를 꽉 물며 피가 흐르는 자신의 목 언저리를 닦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루시온 경의 검은 굉장한 명검이 아니었고, 무라사 씨의 몸은 강철과 같았다. 아신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자는 분명 아신과 같은 실력을 가진 자다. 검을 돌리며 자세를 잡은 키스 경은 우리들을 바라보고는 나직하게 웃었다. “지금 보는 거 모조리 다 잊어주세요오....... 라고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깨져 나가는 그의 가면 틈 사이에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와 같은 미소는 남아있지 않다. 제어할 길 없는 광폭함의 이면에는 형용할 수 없이 슬프고 여린 눈동자뿐, 외로움이 지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키스 경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붉은 핏줄기가 그의 하얀 턱 선을 흘러 추락하고 있었다. “내가 검을 들고 있는 이상 너도 팔다리가 성한 채로 내 목숨을 가져갈 수는 없어. 그래도 덤빌 생각이냐?” “내가 사지가 아까워서 결심을 포기할 사람으로 보이나, 키릭스 세자르.” 천천히 눈을 뜨는 키릭스의 얼굴은 파멸의 권세에 얼룩져 있었다. 차가운 비수가 등을 찔렀다. 모든 희망이 나락으로 내던져지고 있었다. 내가 소리쳤다. “키스 경! 나한테 믿어달라고 했잖아요! 당신은 키릭스가 아니라고!” 그러자 그는 비웃음으로 내게 회답했다. “가엽기도 해라. 그건 네가 멋대로 속은 거야.” “키스 경!” 나는 견백호에게 뛰어드는 붉은 눈의 사내를 향해 찢어져라 절규했다. “미온 경? 미온 경?” “우아아악!” 벌떡 몸을 일으키던 나는 곧 따아악 소리와 함께 다시 이마를 잡고 널브러졌다. 눈앞에는 얼굴을 부여잡은 채 쪼그려 있는 키스 경이 보였다. 그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어째서 저에게 헤딩을 하는 겁니까아! 제 백옥 같은 얼굴에 흠집 나잖아요!” “.......꿈?” 나는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옷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가게 안을 청소하던 중 나와 키스 경의 격렬한 랑데부를 목격한 동료들은 ‘아무튼 저 인간의 잠버릇은 정말이지.......’라는 심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몽이었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과격한 악몽이로군요!” 빨갛게 된 코를 부여잡고 키스 경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아직도 몽롱한 이마를 꽉 누르고는 말했다. “그럼 무라사 씨도 모두 꿈?” 그러자 랑시 경이 나를 확 쏘아보며 말했다. “미온 경 꿈속에 형이 왜 나온 거야?” “그건 그러니까.......”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형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니까.” 아직도 온 몸에 남아 있는 충격에 목을 조르는 단추를 풀러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내게 키스 경이 잔을 건넸다. 그 안에 담겨진 호박색 액체로부터 알코올 향이 확 풍겨왔다. “미온 경,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지친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내 앞에 앉아 자신도 술잔을 들었다. 천천히 목 안으로 술을 넘기는 키스 경을 나는 말없이 지켜봤다. 그 투명한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살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그냥 꿈이라서 다행이라고요.” 나는 피식 웃으며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알코올의 은총으로 그 무서운 불안감이 떨어져 나가길 기원하며. 그는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응원했다. “웃어요, 미온 경. 당신은 낙천적일 때가 가장 보기 좋아요.” 나는 문득 그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나의 형처럼 느껴졌다. 항상 누구와도 거기를 두는 키스 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솔직한 그의 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콰아아아앙!’ 터지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가게 문이 열렸다. 농담이라도 호의적인 방문객이 저지를 짓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 혹시 우리에게 원한을 품은 족제비? 아니면 쇼메가 해코지하려고 보낸 군인들? 그것도 아니면 남성의 서비스업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품은 과격 우익단체? 그러나 내 예상은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폭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제복의 사내는 모두의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론 경!” 어, 언제 퇴원하신 겁니까. 아직 붕대에 감긴 목과 이마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노려보는 싸늘한 눈빛은 완전히 칼날이 서 있었다. 그의 발밑에서는 새하얀 냉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우리를 훑어 본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화를 억누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헬렌 경의 처벌이 가혹하다 싶어서 너희들의 죄를 눈 감아 달라고 전하께 아뢰고 오는 길이다. 나름대로....... 너희들도 기사라고 생각해서 내 딴엔 명예를 지켜주려고....... 아내의 만류에도 일찍 퇴원했는데....... 인간이라면 조금쯤은 반성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키스 경이 슬쩍 소파 뒤로 숨으며 귀를 막았다. “모두들 피하세요. 곧 폭발할 겁니다아.” 그 즉시 저승사자 카론 경의 눈동자가 새파란 격분의 광선을 내뿜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런 데서 호스트를 하고 있었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이 순간 냉정한 사람이 한번 화가 나면 어떻게 돌변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수치를 안고 베르스로 돌아갈 바에는 여기서 그냥 죽어버리라며 붕붕 검을 휘두르는 카론을 피해 산지사방으로 도주했으나 그날부로 오랏줄로 묶여 베르스로 강제 송환되고야 말았다. 돌아가는 내내 우리는 카론 경으로부터 거의 노골적인 할복 권유를 받아야만 했다. 34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타쿠르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내 소중한 친구 미온에게 잘 지내고 있니? 물론 그럴 거라고 생각해. (중략) 너무 영업이 잘 돼서 새로운 지점을 곧 낼 계획이야. 이건 모두가 너와 고마운 기사단분들 덕분이야. 어떻게든 이 은혜를 갚고 싶어.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너희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어. 정말 멋진 곳일 것 같아! (하략) “.......오지 마.” 신전 벽에 기대어 편지를 읽던 나는 쓸쓸히 빗자루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목숨 걸고 친구를 위해 일한 대가로 받은 것은 일주일간의 정신교육, 2개월간의 강제 노동, 3개월간의 감봉, 반성문 50장이 전부였다. 이게 어디가 멋진 기사단이냐고! 하아, 어디라도 먼 곳으로 가고파. 이것은 격무에 찌든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절실하게 읊조리는 대사이리라. 외전 또 다른 시선#2 : 꿈의 자전 1 내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했을 때 카론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냥 열대지방 어떤 나라에서 자라는 꽃의 학명을 들었을 때처럼 ‘그렇군.’ 이라고 대꾸했을 뿐이었다. 그건 그가 다른 얼간이들처럼 호들갑떠는 속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난 이 녀석의 이런 점이 좋다. “안 믿는 거냐?” “믿어. 네가 그런 시시한 거짓말 할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조금은 놀라주길 바랬는데......” “실망시켜 미안하군.” 이 녀석은 오염되지 않은 얼음 덩어리랄까, 이 무뚝뚝한 녀석의 말도 잘 들어보면 제법 재치가 있다. 엉터리들과는 농담으로도 친해질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시시껄렁한 세상의 추파를 튕겨내는 말재주를 터득한 것이다. 이래봬도 나는 이 녀석과 통하는 점이 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기는 식당이었다. 그것도 기사나 귀족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더럽게 고상한 식당.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검을 꺼내 손질하고 있는 저 녀석은 주변의 떫은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저 무신경한 모습에는 꽤 대범한 나도 좀 기가 질렸다. “이제 소원대로 기사도 됐겠다, 뭘 하실 건가, 카론 경?” “출세해야지.” 그는 기계적으로 검을 닦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출세? 나는 피식 웃었다. 누가 들으면 귀한 집에서 태어나 정해진 인생을 걸어가는 도련님인 줄 알겠군. 하지만 같이 작위를 받는 귀족 집안 돼지들이 당연하다는 듯 한자리씩 꿰찼을 때, 이 녀석만은 지금까지도 왕실로부터 말직 하나 못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민이 성공할 기회 따위는 애당초 주기 싫은 거다. 뭐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녀석이었다. 이 세상 최강의 권력자인 아버지를 부숴버리기 위해 이런 곳으로 가출한 나와 어떻게든 권력을 잡기 위해 악의적인 세상의 멸시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이 녀석 중에 누가 미친 것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녀석은 내 목표에 도움이 될 녀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황제의 숨통을 끊는 일, 말이다. “그러는 너는 이제 무슨 일을 할 생각이지, 황태자 씨?” 저 녀석은 남을 비꼬는 데 재능이 없다. 비아냥거림의 기본은 천박할 만큼 가벼운 감정에서 시작되는데, 저 검은 머리칼의 미남은 매사에 너무 진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야 비꼬는 쪽이 도리어 얼굴을 붉힐 일이다. “아아, 뭘 할까나. 아버지의 목을 따고 그 잘난 옥좌나 가로채 볼까?”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에이, 재미없긴. 농담이라고.”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는군.” 그래, 진담이야. 대신 난 그 더러운 옥좌에 앉을 생각은 없어. 보란 듯이 산산이 부숴버려 그 조각들을 아버지의 시체 위에 뿌려 줄 거야. 권력 속을 허우적거리던 영욕(榮辱)의 종말을 장식하는 데 그 이상의 방법은 없을 테지. 한시라도 빨리 내 계획을 이 목석같은 치구와 같이 하고 싶은 기분에 나답지 않은 조급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고, 당장은 나 스스로 해야 할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작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르는 곳이 있어서 오늘 중으로 이 나라를 뜰 생각이야.” “부르는 곳? 너는 여기서도 얼마든지 큰 자리를 맡을 수.......” 그는 말을 흐리고는 다시 자기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괜한 참견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시 돌아오겠지만, 당장은 혼자 해야 할일이 있어서 말이지.” “위험하게 들리는군.” “위험하지. 매력적이기도 하고. 세상을 위하는 길이기도 해.” “아까부터 계속 말을 돌리는군.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애늙은이 같지만 실상은 항상 세심하게 상대의 속뜻을 살피고 있다. 이 친구가 웨이터가 되었다면 묵묵히 손님들을 지켜보다가 꼭 필요한 순간 가장 적절한 조미료를 가져다주는 그런 품위 있고 세련된 웨이터가 되었을 것이다. 팁이나 바라며 침도 안 바르고 아부를 늘어놓는 쓰레기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나는 남을 평가하는 데 엄격한 편이지만 이 녀석에게는 두 손 들고 말았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보물이지 않는가. 물론 난 뺏기는 것은 질색이다. 나는 되물었다. “넌 출세해서 뭐할 거지?” “무슨 의미지?” “그러니까 출세하면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야. 부자가 된다든가 권력의 정점에 선다든가 하다못해 이름도 못 외울 정도로 많은 하인을 부리고 싶다든가.” 이제는 제법 길게 자란 머리칼이 보기 좋은 검은 눈의 청년은 능청 떨며 말하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소리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단호한 말투였다. “바꾸겠다.” “뭘?” “모든 것을.” “어떻게?” “어떻게든 지금보다는 좋게.” 낭만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완고한 녀석은 이런 면에 있어서는 어린아이 같았다. 남들이라면 창피해서 차마 말 못할 순수한 꿈을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랬다. 물론 말만 그럴싸하게 늘어놓는 녀석이었다면 난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당초 그 수준 낮은 견습기사 놈들 속에서 죽든 모욕을 당하든 상관도 안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의지를 물어본 것은 일종의 ‘재확인’이었다. 나는 일부러 매몰차게 평가했다. “멋진 목표야. 하지만 너 혼자서는 바꿀 수 없어.” “.........” “평민 출신 기사가 바꿀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그게 현실이야.” 그는 화가 난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특별히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딱 한번 이 녀석과 술을 마셔본 적이 있다. 그것도 내가 반강제로 먹인 것이긴 하지만, 나는 술 취한 기색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분명한 증오를 보았다. 그 증오는 유치한 어리광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는 불만도 아니라, 소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예리하고 섬세한 그런 깨끗한 증오였다. 그건 내 증오와는 꽤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분은 같았다. 이 까다로운 친구에게 관심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내가 시원한 음성으로 말했다. “좀더 큰 것을 바꿀 수 있게 해준다면 받아들일 거냐?” 카론은 이런 말에 일일이 화를 내거나 경계할 정도로 배짱 없는 녀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다. “그건 꼭 악마가 하는 유혹 같군.” “악마도 마음에 들어 하는 녀석에겐 순수한 호의를 베풀 때가 있어.” 그는 마치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녀석이 내게 질투와 경쟁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 녀석의 기분 같은 건 어쨌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내가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성적인 매력은 아니지만 내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 순간부터 나는 이 녀석이 어떻게 나오든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좀 치졸한 방법을 동원해도 상관없었다. 그때 엉뚱한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기사 카론 샤펜투스인가.” 너저분한 향수 냄새만 맡아봐도 줏대가 없는 놈이었다. 자신을 꽤 멋쟁이라고 굳게 착각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대뜸 우리 테이블로 오더니 카론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일부러 ‘경’ 칭호를 붙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속물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버러지만도 못한 자식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대꾸하는 흑발 청년의 미성에서는 어떤 호의도 위축도 없었다. 한편 그를 바라보는 놈팡이 녀석은 카론의 앳된 얼굴이나 가녀려 보이는 체구를 노골적으로 미덥지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외모만 보고 모든 것을 지레짐작하는 전형적인 무능력자였다. 나는 은색의 포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역겨운 저치의 눈을 파버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어느 나라 왕궁을 가 봐도 귀족이 사육하는 저딴 돼지들은 썩어날 만큼 많다. “이 몸은 노르펜스트 공작가의 명으로 너를 찾아온 공작 대리인이다. 예를 갖춰라!” 나는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예를 갖추라니. 땅에 머리를 박고 절이라도 하라는 소린가? 그러나 막 작위를 딴 20세의 기사는 조용히 일어나 그 잘난 명령을 기다렸다. 귀족들이란 아랫사람에게는 언제 어느 때 어떤 명령이라도 내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는 족속들이다. “공녀 이멜렌 노르펜스트 영양(令孃)께서 악투르의 흉악한 무리들에게 납치되었다는 끔찍한 사고에 대해서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예. 들은 바가 있습니다.” “허면 조속한 구원이 필요한 처녀를 구출해 내는 것이야말로 기사의 의무이자 명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에 영명하신 공작께서는 그 영광스러운 기회를 미천한 자네에게 내려주기로 결정하셨다. 자네 또한 자네에게 내려준 이 놀라운 은총에 더할 나위 없이 감격했을 것이다.” 저 우렁찬 개소리를 요약하자면, 공녀를 구하자니 손해가 커서 싫지만 또 체면상 모른 체 할 수도 없으니까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기사 한 명 달랑 보낸 뒤에 생색을 내겠다는 수작이다. 사실 이건 갓난아이도 알 만한 사실이다. 나는 만지작거리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더 이상 들고 있다간 개같이 짖어대는 저놈의 목구멍을 찔러 버렸을 것 같았고, 나름대로 이것도 내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론은 말하자면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 이대로는 왕실은커녕 어떤 귀족도 써주지 않는 개점휴업 신세로 구역질나는 변태들이 벌이는 지하 검투 도박 따위에나 나가는 것으로 일생에 단 한번뿐인 기사의 전성기를 끝마쳐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려고 기사된 것 아니겠지만 현실이라는 것이 참 녹록치 않아서 아주 뾰족한 계기가 없이는 귀족들이 평민을 자기들 밥그릇에 끼워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이것은 그에게 찾아온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에 주변에 있는 기사들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카론은 항상 그래왔듯이 그 시궁창 속에 서 있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흑발의 청년은 곧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그 돼지를 바라봤다. 그건 정말 적을 향한 눈빛이었다. “그 명 받들겠습니다.” 어이, 카론. 그건 죽겠다는 말이야. 혼자서 그 야만적인 악투르를 뚫고 들어가서 한번 본 적도 없는 여자를 구해와? 이 세상 어떤 잘난 기사도 설레질 칠 걸? 군대를 동원해도 성공은 희박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 녀석이 그 조건에 응한 것에 기뻐했다. “음! 좋소! 그럼 오늘 중으로 채비를 갖추고 떠나시오!” 공작 대리인은 그렇게만 말한 뒤에 카론의 마음이 바뀔세라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성공한 다음에 어떻게 해주겠다는 등 하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저놈들 스스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멜렌인가 하는 여자를 구해낸다면 카론의 입지는 삼단 도약해서 왕국 최고의 명예로운 기사로 우뚝 서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그냥 자살행위의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차갑게 제련된 증오심을 품은 이 앳된 기사는 사형선고를 받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아 손질하던 검으로 다시 손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이 녀석의 마음속이 훤히 보인다. 그건 맨손으로 흉포한 거인과 싸워야하는 심정, 절망이다. 비로소 ‘악마의 순수한 호의’가 필요한 마음이 된 것이다. 나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와아, 카론 경. 축하해. 정말 멋진 기회가 아니고 뭐겠어? 여자 하나만 구하면 네 인생도 완전히 뒤바뀌는 거야. 출셋길이야. 엄청난 행운이라고.” “.......” 내 놀림에도 그의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옆모습을 훑으며 유혹처럼 말했다. “내가 말했지? 평민 기사가 혼자 바꿀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곤혹의 빛이 거울 같은 그의 칼날에 반사되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확실히 집요한 구석이 있는 남자다. 되도록 대범한 것이 좋지만 중요한 일이라면 좀 치졸해져도 상관없는 것이다. “하하, 걱정하지 마. 난 네 그림자야. 모든 공은 너만의 것이 될 테니까.” “키, 키릭스. 또 네 멋대로 결정을........” “자아, 그럼 영광스러운 기사의 임무를 즐겨볼까.” 나는 간만에 설레는 기분에 젖어 두 자루의 검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 나는 어느 날 카론을 떠났다. 우유 많이 먹어. 키 좀 더 크게. 이별의 쪽지로는 이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뭐, 직접 떠나겠다고 말했어도 붙잡을 녀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녀석은 성장할 만큼 했고 나는 나대로 할일이 있으니까 마냥 붙어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일단 내 목표의 마지막 단계라면 황제 그 자신의 목을 치는 것이겠지만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고 필요한 단계라면 그게 귀찮고 재미없는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 나는 이오타의 도움을 받아 그 단계를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자벨 크리스탄센이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나와 함께 신의 불공평성에 대해 증명해 주는 여자다. 머리가 무척이나 비상한데다가 야망도 있고 그 야망을 뒷받침해주는 냉철한 판단력까지 있다. 게다가 예술 감각도 높고 아름답기까지 하니까 주사위를 열 번 굴려 모두 6이 나온 것과 다른 바 없는 ‘조물주의 편애’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단지 사소한 문제, 남녀관계에 대해 결벽이 심하다는 점과 때때로 찾아오는 지적 우울, 만성 두통 정도가 있긴 하지만 그거야 그녀가 받은 혜택에 비하면 간지러울 정도의 문제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그렇게 놔두질 않는 그런 선택 받은 여자였다. 만약 나와 목적이 같지 않았다면 서로 가장 먼저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물론 인트라 무로스에서 일한 것은 아니다. 그런 착실하고 모범적인 단체보다는 훨씬 더 은밀하고 위험천만한 곳이랄까. 내 특기가 특기인지라 내가 주로 하는 일들은 ‘도저히 죽일 수 없을 것 같은 녀석’을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한다든가 그 암살을 다른 녀석이 저지른 것처럼 위장한다든가 그렇게 속아 넘어가서 어리둥절해 하는 녀석들까지 제거해버리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지령은 이자벨의 몫이었고 실행은 나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아신을 죽이라는 임무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이건 사실 지나치게 쉽고 짜증이 날 정도로 지루한 반복노동이었다. 자신들이 성스럽고 고귀한 족속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돼지들은 실제 자기가 죽지도 않을 거라는 이상야릇한 자신감 따위를 가지고 있고, 나는 그 빈틈을 찔러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솔직히 카론과 있을 때가 훨씬 신나고 보람도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상대의 패를 다 아는 상황에서 카드게임을 하는 것처럼 시시했다. 그런데 가끔은 다른 임무도 있었다. 임무라기보다는 실험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괴상한 짓이었다. 3 “복제?”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은 고대의 기술을 응용해 한 인간을 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막 십수 명을 죽이고 온 뒤라 좀 피곤하기도 했고, 그런 꿈같은 동화에 흥분할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이봐. 이래봬도 난 상식인이야. 너만큼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갑자기 하나가 두 개로 늘어난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어떻게 진지하게 들어주길 바라는 거지? 너야말로 언제부터 그딴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던 거야?” 난 별로 혹독한 면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한 건 내 쪽이었다. 그딴 말을 믿을 녀석은 시간이 넘쳐흘러 불로불사 따위에나 몰두하는 얼치기 귀족 놈들밖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벨은 놀라울 만큼 진지했다. 그녀는 머리회전 만큼이나 말 재주도 좋은 편이었다. “이 세상의 상식이라는 것은 권력자들이 만들어 낸 담론의 부산물일 뿐이야.” “.......” 나는 싸움에 능하지만, 그녀와의 지적 싸움에서 승리할 자신은 없었으므로 잠자코 듣기로 했다. “예를 들어 세계의 크기.” “크기?”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정확한 거리를 산출한 적이 있어 그리고 동일 경도 상에 위치한 두 지역에서의 그림자를 측정한 결과 실제의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보다 월등히 넓어. 족히 몇 십 배는 넘지.”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지 공개적으로 저 사실에 대해 연구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모독으로 금지되어 있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것을 궁금해 하거나 측정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잇지 않은 것일 뿐. 가끔 권력의 눈을 피해 저것에 대해 파고드는 학자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되고는 한다. 말하자면 권력자들은 대중들이 저것에 대해 알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사회질서유지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과학발전의 역행이었다. “사실 네 어머니도 세계 밖에서 온 여자잖아?” “어이, 부탁인데 그 얘기는 접어 둬.” 나는 불편한 목소리로 손을 저었다. 나도 카론도 누가 어머니에 대해 늘어놓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녀석은 나보다 한술 더 떠서 무심코 그의 어머니를 모욕했던 견습기사 하나를 완전히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을 정도다. 나와 그의 증오의 근원이 같은 부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은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신위도 그렇고 텔레-레이디도 마찬가지야. 고대로부터 내려온 잔재라는 것 외에는 별로 밝혀진 것이 없어. 공식적으로는 마나 열차 같은 시시한 일에나 그 힘이 이용되지만. 너도 알겠지만, 사실 우리 이오타도 콘스탄트도 마키시온도 고대 기술에 대한 복원에는 엄청난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어. 특히 마키시온의 대 아카데미 소드람의 연구 성과는 실로 엄청나. 그리고 지금 이 복제 실험도 그 연구 끝에 밝혀진 기술 중 하나야.”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더 들을 것도 없이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서 잠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이지적인 여자가 꺼낸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그걸 왜 내게 설명해주는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네가 실험체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 “날 써야 할 정도로 지원자가 그렇게 없어?” “그건 아니지만, 이 실험에는 마나 열차를 움직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양의 인간 생체 에너지가 필요한 만큼 실험 횟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어.” “아아, 그래서 셀른을........” “아이히만 대공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많은 에너지원을 단번에 구할 수는 없었겠지.”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태연하게 인간을 에너지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여자다. 내가 실험 중에 죽든 말든 상관도 안할 여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 참, 나도 꽤 이 녀석들의 도구로 충실히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군. 뭐, 내게도 목적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기왕 복제를 한다면 가장 훌륭한 샘플인 너를 늘리는 게 좋지 않을까?” “나 같은 놈이 또 생긴다고? 그러면 황제 자식을 죽이기 위한 기간이 짧아지긴 하겠지만, 그거 영 불쾌한데?” “네가 둘로 늘어난다면 아신도 죽일 수 있어.” “그거 재미있네. 하지만 무리일 걸? 특히 진청룡은.......” 내 검술선생이기도 했던 그 불사신과 정면에서 싸운다는 건 내게 생각해도 지독한 바보짓이다. 그보다 라이오라는 내 밑으로 오게 만들 거야, 라는 말은 계획이 있어서 꺼내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기꺼이 이 한 몸 받쳐주지. 대신 조건이 하나 있는데.” “뭐지?” 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걸어갔다. 여성의 애교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금발과 안경, 검은 슈트가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그녀를 잡아 의자에 앉힌 뒤에 안경을 벗겼다. 그녀는 괜한 몸부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단지 모든 것을 정보와 도구로만 해석하는 그 파란 눈동자가 날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실험을 자청하는 대가로 이 정도는 해줘야하지 않겠어?” “망나니 같군. 좋아. 허락하지.” “원래 잘난 아버지를 둔 아들은 성격이 나쁘대.” 그렇게 읊조리며, 나는 서서히 그녀의 얼굴을 핥았다. 4 복제 실험, 그러니까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도깨비놀음에 대해서는 애당초 내가 해석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니까 진지하게 설명하고 싶은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 처음부터 나는 내 눈동자처럼 새빨간 액체가 담긴 욕조 속에서 마취되었으니까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 도리가 없고, 확실한 것은 나는 열흘 쯤 후에 깨어났다는 것이다. 마치 한 백년쯤 빛 한줄기 없는 감옥 안에 처박혀 있던 기분이랄까, 내가 좀더 성격이 나쁜 인간이었다면 깨어나자마자 내게 이 짓을 시킨 녀석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버렸을 지독한 불쾌감이었다. 아니, 불쾌감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상실감? 무언가 내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만 같은 그런 공허한 통증이 사라지질 않았다. “.......이것 참.” 나는 쉽사리 놀라지 않는 편이다. 사실 마지막으로 놀랐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도 나는 이 실험의 결과를 감상하며 놀라움에 잠긴 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실험실의 침대 위에는 ‘내가’ 누워 있었다. 음산할 정도로 낮은 실내 온도 탓인지 아니면 도저히 쓰임새를 알 길이 없는 각종 실험 도구들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나와 똑같은 저 복제품 때문인지 아무튼 지금 이것이 현실이라는 실감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이 실험을 총지휘한 이자벨이 내게 다가왔다. 하얀 가운이 그녀의 차가운 인상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어때?” “엿 같군.” “기분이? 아니면 이 복제 인간?” “둘 다.”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내 기분이 도저히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내 눈 앞에 나와 똑같은 녀석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본다면 당장이라도 없애버리고 싶은 불쾌감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통증은 도대체- 팔, 다리 어디를 둘러봐도 멀쩡한데도 어디라도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내 어딘가는 끝없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내출혈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지금 실험실에는 나와 이자벨과 또 다른 나뿐이었다. 연애하기에는 적절한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다른 쪽의 조급함에 대해 물었다. “결로부터 말해줘. 실험은 성공이야?” 이자벨은 뜸을 들였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피조물을 감상하는 것처럼 나와 똑같은 저 녀석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굳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만, 저런 짓은 내가 좀 나간 뒤에 했으면 좋으련만. “결론 정도는 듣고 싶은데? 성공이든 실패든 어차피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테니까.” 그러자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주시하고 있었다. “실패야.” “........” “미안.” “조금도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닌 걸?” 나는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는 화가 나지도 않았다. 저런 위험천만한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 나도 참 대책 없는 녀석이로군. 만약 내가 죽었어도 이자벨은 똑같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부분이 실패라는 것일까. 워낙 종류의 가짓수가 많아서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는 대충 저 복제가 깨어나지 못하는 인형이 되어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녀석은 곧 깨어날 거야. 이름을 뭐로 할까?”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이 실패냐고 묻고 있잖아.” “일단 이 녀석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해. 네게 선택권을 줄게.” “대충 키스라고 해두지.” “성의 없는 이름이군.” “어차피 복제잖아? 그럼 실패한 부분에 대해서나 말해주실까.” 난 조금 짜증을 섞어 되물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입 꼬리를 올렸다. 내 초조함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니 황송하기 짝이 없군! “이 복제, 그러니까 키스는 네 능력의 약 80퍼센트 정도를 발휘할 수 있어. 물론 복제라도 엄연한 인간이기 때문에 키스의 가능성을 단정 지을 수야 없겠지만, 굳이 수치화시키자면 그렇다는 거야. 그리고 키스는 너와 똑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테고 목소리도 너와 똑같아. 하지만 기술적인 한계 상 수명은 아마 짧을 거야.” “얼마쯤?” “10년에서 15년 사이?” “자기 늙어가는 꼴 안 보고 죽어서 좋겠군.” 저 키스라는 녀석이 깨어나면 꼭 이 악담을 한 번 더 해줘야지. 그런데 그 정도로 실패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 능력의 80퍼센트라면 꽤 채산성이 있어 보이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사실 저 복제는 복제가 아니라는 거야.” 이건 꼭 선문답이었다. 대꾸할 기분도 안 났다. “키스는 네 절반이야, 키릭스.” “좀 쉽게 설명해 주겠어?” “육체는 준비한 재료를 통해 만들 수 있었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대체할 수 있는 재료가 없어.” “그래서?” “즉 육체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키스가 네게서 가져간 거야.” “예를 들면?” “감정 그리고 영혼.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달리 마땅한 단어가 없으니까 영혼이라고 해두지.” “이제는 철학에서 신학으로 넘어가셨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꼭 된통 바가지를 쓴 느낌이 들지 않은가. “잘 들어둬. 너와 키스는 영혼을 절반씩 공유해. 그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네가 죽으면 키스도 죽고 키스가 죽으면 너도 죽어.” “그거 굉장히 흥미로운 과학 상식이로군. 이게 내 얘기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감정도 마찬가지야. 키스는 네 감정의 절반을 가져갔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가져가고 있는 중이야. 곧 눈을 뜨게 된다면 너와 키스는 정확히 절반씩 나눠지게 되겠지. 말하자면 삼투압(?透壓) 같은 거야.” 이제야 내가 느끼는 통증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실험이 내 마음과 영혼의 절반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맙소사! 나름대로 빈틈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엄청난 도둑질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처음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지?” “물론, 불가능해.” 나는 별로 절망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단지 멋대로 잘려나간 내 마음의 표면이 너무나 쓰라렸을 뿐이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절반으로 잘린 내 영혼의 핏방울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것만 같았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아까 저 녀석, 그러니까 키스의 수명이 15년 정도라고 말했지?” “10년에서 15년.” “그럼 나도 마찬가지라는 거네? 저 녀석이 죽으면 나도 죽을 테니까.” “이해가 빠르군.” 나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좀더 차가운 영역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너,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던 거지?” 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적들을 모살(謀殺)시켰던 새파란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긍정을 의미했다. “난 지금 널 죽일 수도 있어.” “아니, 넌 날 못 죽여. 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니까.” 그녀의 말 대로였다.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이자벨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이런. 아버지가 지껄인 말 중에 맞는 말도 있었군.” “........” “여자란 남자를 낳는 신성한 존재고 남자에게 힘을 주는 고마운 존재고 나아가 남자를 잡아먹는 위험한 존재라고. 게다가 불 끄고 껴안으면 여자든 남자든 결국 다 똑같기 때문에 특별히 여자를 더 존중해 줄 이유는 하나도 없는 거라고.” 이딴 시시한 소리를 분노랍시고 지껄이고 있는 나 자신이 다 한심하구만. 역시 그녀는 ‘위험’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어. 남자에게 이용당하는 여자와 남자를 이용하는 여자. 난 적어도 전자는 아니야.” 그녀는 얼음 같은 미소를 지으며 실험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불현듯 웃음이 나왔다. 황제 자식을 거꾸러트리고 이 세상을 지금보다 좋게 만들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방향감각의 상실이 나를 조금 취한 감정으로 인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자벨을 포함한 이 기괴한 조직을 모조리 파괴한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카론에게 돌아가 좀더 안전한 방향을 모색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감정이 절반밖에 남지 않은 지금의 나는 이것도 좋아, 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잃어버린 감정의 절반이 무엇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꼭 지옥 끝의 유희 같았다. 나는 내게 점점 더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좋아.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결핍되어가는 과정이니까.’ 나는 그렇게 흥얼거리며 차가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내 절반에게 다가갔다. 키스라고 했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생각해서 이름을 지어줄 걸 그랬나. “어이, 들려? 우리 실패했대.” 대답은 침묵으로 돌아왔다. 나는 곧 아주 커다랗게 웃었다. 그리고 벽과 충돌한 그 웃음은 이 실험만큼이나 어리석음으로 굴절되어 나를 때렸다. 5 이자벨로부터 받은 지시는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또한 불편한 임무였다. ‘세계 밖에서 온 사람은 네 어머니만 있는 것이 아니야. 어떤 소녀가 있어. 그녀는 아주 중요한 연구 소재니까 꼭 온전한 상태로 데려와.’ 북으로 마키시온 제국 령의 험준한 산맥 너머, 동과 서, 남으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너머의 어딘가를 의미하는 ‘세계의 밖’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권력자들은 사람들이 결코 그것에 대해 알기를 원치 않았고, 그것에 대해서 파고드는 자들은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입을 막았다. 모든 아카데미의 천문, 지리학 연구에는 국가의 승인이 필요하며 허가 받은 소수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관련 서적의 배포 역시 철저하게 국가가 관리한다. 이건 어느 강대국이나 마찬가지다. 그 바깥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은 세계 권력자들의 암묵적인 합의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시시한 것이라면 이토록 최선을 다해서 막을 리가 있을까? 종교에서는 그 세계 밖을 ‘아직 조물주가 만들고 있는 미완성의 공터’라고만 정의해 두고 있는데, 장담하건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 ‘공터’에서 온 사람이 바로 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 있다고? 알고 보면 단체로 이민이라도 오고 있는 거 아냐?’ 역시 어머니에 관련된 모든 것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내 감정이 키스와 나눠지고 난 뒤에는 더욱 더. 지금 잡으러 가는 그 소녀는 본래 연구실에 잇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그 이후 계속 변화를 지켜보면서 감시만 하고 있었다는데 슬슬 그녀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자벨의 연구 재료가 되었다니 참으로 불쌍한 여자다. 그리고 이자벨은 또 다른 지시도 내렸다. 그 소녀와 같이 있는 소년은 죽이지 마. 절대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무관한 사람을 재미삼아 죽일 정도로 미친 녀석은 아니지만 만약 목격자라면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절대로 죽이지 말라니. 꽤 까다로운 주문이로군. “오늘은 특별히 검을 쓸 일이 없을 것 같군요.” 나와 동행한 녀석이 말했다.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외모, 이름이 리젤이라고 했던가. 항상 웃음을 머금은 모습은 보기 좋다만 (이자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무언가 다른 인간에게는 당연히 있는 것이 결핍된 녀석이었다. 말하자면 나무를 벨 때나 사람을 벨 때나 똑같은 표정을 짓는 그런 녀석이라서 난 이 금발의 소년이 귀엽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녀석은 날 감시하기 위한 이자벨의 심복이지 않은가. “여긴가?” 새벽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불이 켜져 있는 이 작은 집은 꼭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생활력이 없어 보였다. 나와 리젤은 어설프지만 꽤 정성스럽게 만든 울타리를 넘어 문 앞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꽃밭을 밟은 것은 정말로 미안했다. “계세요?” 리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밝은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봐, 우리 지금 납치하러 온 거야. 나는 꽤 오감이 발달된 편이고 청력 또한 그렇다. 들려오는 작은 소리만으로도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지금 방 안에서 작은 체구의 사람 한 명이 어디론가 숨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비켜.” 나는 리젤을 밀치며 문고리를 돌렸다. 그 즉시 자물쇠가 부서져 버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를 따라 들어온 리젤이 덜렁거리는 눈을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하아, 키릭스 씨는 항상 거칠군요.” “수리비라도 놓고 나갈 테니까 그만 좀 투덜거려.” 실은 나는 지금까지도 계속 잘려나간 영혼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꽤 기분이 곤두서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이자벨이 그러는데 연구실로 돌아와 달라더군.” 나는 그렇게 외치며 그 소녀가 숨은 곳을 찾았다. 아니, 특별히 찾을 것도 없었다. 벌벌 떨고 있는 그녀는 그냥 비어 있는 욕조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니까. “흐음. 너로구나. 걷기 힘들다면 업고 갈게.” 나는 나름대로 납치범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땀에 흠뻑 젖은 잠옷차림 그대로 욕조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린애라고 하기에는 제법 성숙해 보이는 편이었지만, 길고 하얀 머리칼과 부서질 것처럼 갸름한 턱, 신기할 정도로 하늘에 가까운 눈동자는 청초하기보다는 신비로웠다. 내 어머니도 이랬을까?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조차 없다. 어쨌든 위험해 보이기는커녕 납치하는 입장에서 죄스러울 정도로 가녀린 소녀였다. 감정을 온전히 갖춘 예전의 나였다면 세상을 정화하는데 어째서 이런 연약한 소녀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럼 가볼까.” 나는 욕조 안의 소녀를 번쩍 들었다. 놀랄 정도로 체중이 가벼웠다. 이 소녀는 특별히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몸을 떨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이 소녀가 나에 대해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두려움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겁에 질린 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 리젤이 말했다. “그 여자는 때때로 기억이 엉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반무의식상태예요.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극도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 있는 겁니다. 아무튼 불완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게 뭐야.” “자신의 재능이 도리어 자기 몸을 망친 경우랄까요. 불쌍한 여자에요.” “나처럼 말이군.” 나는 자조의 웃음을 보이며 ‘뭐 어떠랴, 이 세상에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놈들은 어차피 거의 없는데 말이지.’라는 시시껄렁한 자기합리화를 읊조렸다. 묘하게 이 여자에게서는 동정심이 느껴졌다. 대체 어디다 쓸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누, 누구세요.......” 처음에는 계집애인 줄 알았다. 저렇게 긴 금발 머리를 가진 녀석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곧 저 아이가 이자벨이 죽이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던 그 소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년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물었다. “이 여자애 이름이 뭐지?” “.......베아트리체.” 녀석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이름은?” “에, 엔디미온. 제발 그녀를 놔주세요. 부탁.......” “미안해, 엔디미온. 나도 사정이 있어서 그건 어렵겠는데.” “제발.......” 그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동갑으로 보이는 리젤은 똑같은 나이에 나를 따라다니며 태연하게 검을 휘두르는데 저 녀석은 여자를 지키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납치범 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다는 것, 전자도 좀 문제가 있지만 후자도 세상사는 데 꽤 문제가 많아 보이지 않는가. 나는 바쁜 몸이었지만, 조금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나는 소녀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내 붉은 눈을 올려보고 있는 엔디미온이라는 소년은 완전히 얼어 있었다. 동정이 갈 정도의 겁쟁이였다. “엔디미온, 내 이름은 키릭스다. 지금 널 죽이지 않는 것은 이자벨의 지시 때문이야.” “이, 이자벨님이? 어째서........” 더욱 더 커져버린 그의 자색 눈동자에서는 투명한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면 말을 이었다. “이렇게 대책 없이 울기만 한다면 너는 앞으로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지켜. 내게는 카론이라는 친구가 하나 있어. 너와는 열 살 차이도 안 나. 그리고 너처럼 평민이지. 그런데 그 녀석은 이미 이 나라 최고의 기사야. 반면 너는 이렇게 눈앞에서 자기 여자 빼앗기고도 어찌할 줄도 모르는 한심하고 시시한 겁쟁이로 평생을 살다가 뒈져버릴 테지.”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 녀석은 떨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가다가 검을 찬 사람만 봐도 이럴 것 같았다. “자아, 네 인생을 선택할 기회를 주마. 내 얼굴을 똑똑히 봐. 내 이름을 잘 기억해. 그리고 날 증오하고 복수해. 15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어. 증오심이라는 것은 때로는 자기 인생을 발전시킬 꽤 훌륭한 연료가 되기도 하거든. 대신.......” 나는 품속에서 물약을 하나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증오하는 거조차 겁이 난다면 다 집어치우고 이 물약을 마셔라. 지금 이 아픈 기억을 모조리 지워줄 거다. 그러면 너는 두려움과 고통에서 해방되겠지만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증오와 도망 중에서 하나를 택해라.”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에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안고 나갔다. 이 소녀는 뒤엉킨 정신 속에서도 마지막 의식을 그러모아 저 엔디미온이라는 소년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새소리 같은 울음소리와 눈물이 그녀를 안은 내 어깨를 적셨다. “뭘 구경하고 있어, 리젤. 가자.” “과연 저 친구가 물약을 마실까요?” 리젤이 날 뒤따라 나오면서 물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말했다. “너라면 마실 테냐?” “으으음, 글쎄요.” “고민할 것도 없어. 만약 저 소년이 너였다면 난 당장 죽였을 거다.” “우아아! 너무하네요!” 이런 집요하고 독한 녀석이 눈물을 흘릴 리가 없고 그러면 애당초 내가 동정심을 품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리젤이 드문 말을 꺼냈다. “왠지, 좀 미안하네요. 다음에 만나게 되면 잘 해줘야겠어요.” 자기가 죽인 사람 숫자도 기억 못하는 녀석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좀 터무니없는 위선이라서 난 떨떠름한 얼굴로 리젤을 바라봤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만약 만난다면 적일 테고.” 어떻게 보면 저 엔디미온이라는 소년의 눈물이라는 것은 나름대로의 생존본능일지도 모를 일이다. 체력도 검술도 용기도 만용조차 없는 자의 선택이랄까. 하지만 그건 먹이사슬 최하위의 동물에게나 어울리는 거라서 인간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지간히 볼품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것으로 바꾸는 편이 언젠간 시시한 승냥이 따위에게 뜯어 먹히지 않는 길이리라. ‘과연 저 녀석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지.......“ 뭐, 남 걱정할 때는 아니다만,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생물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다. 단지 그를 죽이지 말라고 지시한 이자벨의 그녀답지 않은 판단이 좀 신경 쓰였다. ‘의외로 취향이 그런 쪽이었군. 그래서 나한테 그토록 쌀쌀 맞았던 건가.’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그런 여자에게 사랑 받는 건 어떤 의미에서 미움 받는 것보다도 더 오싹하니까. 그것보다는 이 통증, 벌어진 상처가 곪아가는 것만 같은 이 해괴한 고통만은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다. 영혼의 통증이라니, 이딴 것에는 진통제도 없을 것 아닌가. 6 나는 자주 키스를 보러 갔다. 그것은 내 잃어버린 감정의 절반을 돌려받고픈 부질없는 욕구였다. 어쩌면 그 실험 이후 키릭스 세자르라는 존재는 나와 키스로 나눠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 키스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 둘이 키릭스 세자르의 부서진 감정과 부서진 영혼을 나눠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 역시도 이제는 더 이상 키릭스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항상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 나는 이젠 이 세상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건 나 혼자뿐인지도 모른다. “어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놈은 내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바로 내가 됐어.” 나는 그의 등에 그런 말을 던졌다. 나와 똑같이 보기 좋게 발달된 등이다. 노을에 젖어 있는 키스는 창가에 붙어 있었다. 역시 나와 똑같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로 피를 지운 단정한 그는 하얀 타월 차림이었다. 그 붉은 눈동자는 창 너무 하늘과 같은 성분이었다. 살의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런데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버리기 때문에 살려둬야 한다는 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야.” 나는 거울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키스에게 던진 살의는 그대로 내게 돌아왔다. “당신은 악의에 찬 인간 같군요.” “당연하지. 악의를 제외한 다른 감정은 네 녀석이 다 가져가 버렸으니까.” “고맙다고 기뻐해야 하나요?” 이건 정말 내가 겪어 본 모든 일 중에서도 가장 해괴한 것이었다.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내가 나와는 정반대의 감정을 가진 채로 한 방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이 뒤틀린 세계 때문에 괴로워하지요.” “........” “하지만 나는 그런 당신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어요.” 똑같은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정말 개 같은 일이다. “내 머릿속에 좋은 기억은 별로 없어서 미안하군.” “그런데 카론이라는 사내가 누굽니까.” “너 따위 가짜가 신경 쓸 이름이 아니야.” 내 목소리는 신경질 적이었다. 그는 창을 등지고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석양에 잠긴 그의 모습은 나조차도 나와 구별할 수 없었다. “이제는 당신도 나도 모두 가짜야.” 키스의 텅 빈 웃음을 보며 저 녀석도 나처럼 반쪽짜리 감정에 고통 받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하나로 존재해야 하는 인간이 강제로 둘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둘 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극단으로 치달아 소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결국 내 부서진 감정과 부서진 영혼은 ‘그것도 괜찮아. 그것도 괜찮아.’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네 녀석과 서로의 심장을 찌를지도 모르겠어.” “그것도 괜찮아.” 우리는 중얼거렸다. 외전 또 다른 시선#3 : 36.5 1 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새카맣게 말라붙은 냄비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어이, 카론. 이거 안 그래도 힘든 시험이야. 굳이 이런 짓까지 해서 난이도를 높일 필요는 없잖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와아, 뻔뻔해라. 하루치 식량을 모조리 날려놓고 어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어?” “어, 어쩔 수가 없잖아! 난 너처럼 요리 같은 거 못하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키릭스, 네가 했으면 되는 거잖아!” “이게 그래도 끝까지 잘했대.” 나는 어디를 봐도 스튜라기보다는 숯 검댕에 가까운 냄비를 뻥 차버리고는 모닥불 쪽으로 돌아누웠다. 카론은 자기도 화가 났다는 듯이 반대편 모포로 가서는 드러누웠다. 우리는 항상 이 모양이었다. 지금 이것은 견습기사라면 꼭 통과해야 하는 오리엔티어링이다. 말하자면 삼인일조로 일주일 분의 식량과 지도 한 장만 달랑 가지고 산맥을 뚫고 나가 정해진 목적지까지 도달해야 하는 생존 시험. 물론 일주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탈락, 중도에 기권해도 탈락이다. 파티를 구성하는 것은 누구와 짝을 이루든 자유라서 견습기사들은 친한 녀석들끼리 알아서 뭉쳤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그 이름도 찬란한 평민 카론을 파티에 넣어줄 마음씨 좋은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팀을 구성해서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던 검은 머리칼의 소년은 결국 죽고 싶은 표정으로 내게 찾아왔다. 나는 이래봬도 꽤 인자한 편이라서 나와 미레일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카론을 받아주었다. 그런데 그 은혜도 몰고 왜 자기가 화딱지를 낸단 말인가! ‘맙소사. 불 조절조차 못하다니, 이건 기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문제가 있는 거 아냐? 떨어지는 낙엽을 검으로 네 조각을 만드는 녀석이 어째서 당근을 자를 때는 밤낮으로 손을 다치는 걸까. 미치겠어, 정말.’ 식사당번은 아침은 나, 점심은 미레일, 저녁은 카론으로 결정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항상 저녁을 굶어야 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참았다. 애써 싸움을 말리는 미레일의 얼굴을 봐서라도 말이지. 그러나 결국 오늘, 하루치 식량을 모조리 투입한 ‘카론 스튜’가 날 돌아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악마조차도 그걸 먹었다간 즉사했을 거다! 내가 조금 더 성격이 나쁜 녀석이었다면 살인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묵묵히 냄비를 닦고 있는 미레일의 표정이 저토록 우울해 보이는 것도 처음이로군. 배고파.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끝마칠 수 있는 이딴 시험을 어째서 굶어가면서 헤쳐 나가야 해? ‘게다가......’ 나는 쓸모없어진 지도를 모닥불에 집어던졌다. 사실 이 시험은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귀한 집 자제들을 정말로 첩첩산중에 내던져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훈련에 열성일 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를 보면서 안전한 루트를 따라가다 보면 일주일 안에 별 무리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미리 길을 닦아 놓았다. 말하자면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아무리 조난당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녀석 덕분에 식량이 급속도로 줄어들어서는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아사할 운명이었기 때문에 결국 지도에도 없는 지름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문제는 정해진 루트가 아니라면 산행(山行)이란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부분이 위험 하느냐 하면....... “고, 곰이다!” 미레일이 깜짝 놀라서는 벌떡 일어났다. 우리 눈앞에는 콧김을 뿜으며 침을 흘리고 있는 집채만 한 야생 곰이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포효할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나는 심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지름길은 위험하다니까.” 카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검을 뽑으며 뒷걸음질쳤다. 창백해진 저 녀석의 얼굴을 보니까 조금은 내 뒤틀린 기분이 풀리는 것 같군. 물론 나는 일어나지 않은 채 비스듬히 누워 초대형 식인 곰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레일이 다급하게 말했다. “키, 키릭스 씨. 도와주셔야겠는데요.” “싫습니다만?”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곰의 위력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숲에서 만날 수 있는 오만가지 위험 중에 가장 수위가 높은 것 중 하나가 바로 허기진 곰과의 조우다. 저 굵직한 팔에 한 대라도 얻어맞았다간 팔이나 목이 날아가고 갑옷조차도 찢겨져 나간다. 게다가 바위덩어리 같은 몸뚱이는 어지간해서는 칼날도 안 들어간다. 그렇다고 느리냐고 하면, 세 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쳐도 세 명 모두 뒤쫓아 차례대로 숨통을 끊어놓을 정도로 빠르다. 나무 위로 올라가도 따라 오고 죽은 척 해봐야....... 정말로 죽게 된다. 즉, 곰은 영악하고 포악한 최종포식자였다. 차라리 늑대나 호랑이를 만나는 편이 생존확률이 높을 정도다. 나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내가 그 거대한 살인병기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런데 곰 고기를 맛있을까?”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저 검은 곰이 몸을 일으키며 포효했다. 땅이 다 울릴 정도였다. 우리를 다 잡아먹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을 것처럼 배고파 보였다. 그런데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 카론의 엄청난 요리 실력 덕에 우리도 죽을 지경이라고. “카론, 아까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야. 저놈을 요리해 줘.” 내 말에 카론이 나를 쏘아봤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야!” “도와주고 싶어도 배가 고파서 힘이 없네요.” 나는 느릿느릿 말하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한쪽 눈을 찡끗 감았다. “정 원한다면, 내가 잡아줄 수는 있지만....... 넌 혼자서는 곰 한 마리도 못 잡아?” 카론은 곧바로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괴롭히는 맛이 나는 녀석이야. 그는 검을 꽉 다잡으며 당장이라도 돌진해 올 것 같은 곰을 노려보았다. 살짝 다리가 떨리는 것이 보였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분명 미레일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론은 아직 모르겠다. 나는 저런 것 잡는 데도 일일이 남의 도움이 필요한 녀석이라면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그런 고약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미레일이 기가 찬 목소리로 말했다. “키릭스 씨, 이건 연습용 검입니다. 이걸로 곰을 잡는 것은 무리......” 그 순간 시커먼 맹수가 카론에게 달려들었다. 카론의 살기를 감지한 탓이다. 저런 거대한 근육덩어리를 찌를 때는 일격이 아니면 곤란하다. 뭉쳐진 근육이 검을 뽑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즉사시키지 못한다면 승산은 없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칼날 같은 발톱이 카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그 순간 카론은 몸을 숙였다. 잘려나간 그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와 함께 그 탄력 있는 작은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실력이 또 늘었군.’ 나는 꿰뚫린 곰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정확히 심장이 뚫렸다. 마치 술통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여기까지도 쏴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구릿빛이 될 가망이 없는 그 새하얀 피부에 인간과 똑같은 새빨간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카론은 달아오른 눈동자로 계속 곰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저 녀석이 앞으로 내게 필요한 녀석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비록 요리 실력은 형편없지만 말이다. “좋아, 이것으로 식량 해결.”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누웠다. 이제 사람만 죽이면 되겠네. 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견습기사 중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실감하며 작위를 받는 녀석은 거의 없다. 물론 진짜 기사가 될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귀부인이나 꼬드기는 엉터리가 아닌 임무를 받고 전쟁에 나가는 진짜 기사가 된다면 그때 죽고 죽이는 것은 피해갈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카론은 그걸 각오하고 있을까? 각오가 되었다면 나와 같은 길을 가도 좋아. 나는 거대한 곰의 시체에 깔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평민 소년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적어도 죽는 쪽보다는 죽이는 쪽이 나으니까.’ 나는 될 대로 되겠지, 라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2 이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대충 17살 때였을 것이다. 곧 18살이 되면 1년간 지정된 영지로 가서 실제 기사의 시종이 되는 ‘실습’을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수업은 거의 끝난 한가한 때, 그런데도 카론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본래 매사에 심각한 녀석이긴 하지만, 우울증이랄까 내가 툭툭 건드려도 예전 같은 격렬한 거부반응도 없고, 항상 몰두하던 검술 연습도 안하고, 하루 종일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제 실습을 떠나면 그렇게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머저리들과도 이별이기 때문에 도리어 기뻐해야 할 텐데 도무지 왜 저러는지, 눈치가 빠른 나로서도 도저히 짐작할 길이 없었다. ‘아아, 궁금해.’ 긁기 힘든 부위가 가려울 때처럼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던 (그보다 달리 할일이 없어서 매우 심심했던) 나는 한참 머리를 굴려봤지만 과묵한 17세 소년을 저토록 우울하게 만든 사건이 무엇일지는 끝까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녀석이었다면 십중팔구 이성문제였겠지만, 카론이라는 이성에게 절망적일 정도로 무관심한 생물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문제였기 때문에 나는 도무지 실마리를 잡을 길이 없었다. 미레일에게 물어봐도 ‘하하, 글쎄요. 혹시 사춘기가 아닐까요?’ 라는 영 신통찮은 대답밖엔 들을 수 없었다. 결국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 쪽에서 직접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 마음마저 있었다. “어이, 카론.” “........” 역시 좀 이상하다. 예전에는 등 뒤에서 다가오기만 해도 전력으로 달려들 기세로 경계했는데, 지금은 풀이 죽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내일이면 노예로 팔려갈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장녀가 저런 표정이지 않을까. “술 마실래?” “싫어.” 으음, 이건 너무 어른스런 접근법이었군. 남의 숨은 아픔 따위 다독거려주는 건 내 전공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체 왜 이러는 거야’라고 푸념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건 카론 쪽이었다. “저어, 키릭스. 상의할 것이 있는데.........” “으응?” 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깜짝 놀랐다. 첫 번째는 카론이 내게 고민을 털어 놓은 건 지금이 최초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내게 말을 거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곰도 때려잡은 녀석이 엄청나게 절실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난 간섭하는 것도 간섭받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지금만큼은 정말로 이 불쌍한 친구를 돕고 싶다는 동정심이 우러나왔다. “뭔데. 말해 봐.” 나는 드문 친절을 베풀며 그의 옆에 앉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고민을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꺼냈다. 카론의 표정은 거의 절망이었다. “난……. 변성기가 찾아오지 않는 걸까?” 순간 눈앞이 흑백으로 보였다.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내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 나는 헛기침을 하며 되물었다. “저어, 그러니까 그 변성기라 함은 목소리가 굵어지는 그거?” “그거 말고 다른 변성기도 있어?” “설마 그게 고민의 전부?” “난 심각해!” 나도 심각했다. 나는 간만에 살의를 느꼈고 그것을 겨우 겨우 억누르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그럼 계속 심각하셔. 난 가볼 테니까.” 죽어 버려! 발성긴지 발정긴지 내가 알 게 뭐야! 견습기사 생활이 되게 즐거운가 보지? 그딴 시시껄렁한 고민 할 여유도 있고! 카론이 빨개진 얼굴로 일어나 외쳤다. “비, 비웃지 마! 다른 녀석들은 다 지났는데 어째서 나만 아직 변성기가 안 오는 거야. 이러다간 나는 평생.......” 겁에 질린 그의 얼굴 앞에서 해 줄 말은 이것뿐이었다. “에이이! 그걸 낸들 알아? 네가 여잔가 보지!” 아차, 실수. 해서는 안 될 말을! 발끈한 그가 부웅 휘두른 칼을 피한 그는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미안, 미안. 알았어. 네가 왜 변성기가 안 찾아오는지 알려줄게.” “뭐, 뭔데?” 그의 표정은 절실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거 바로 네가....... 동정이기 때문이야.” 자, 덤벼라! 나도 이제 더 이상 진지하고 싶지 않아! 몸을 부들부들 떨던 카론은 검을 집어던지고는 나한테 달려들었다. 나는 나대로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으이구! 잠시라도 너 같은 녀석을 걱정해 준 내가 다 한심해! 평생 계집애 같은 목소리나 가지고 있어라!” “네놈 걱정 따윈 필요 없어! 금방 너보다도 훨씬 멋진 목소리를 가지게 될 테니까!” 내가 왜 그딴 걸로 질투 당해야 해! 짜증이 솟구친 나는 카론의 면상을 후려 갈겼고 카론은 곧바로 맞받아쳤다. 결국 이건 주먹 싸움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그날 밤, 기숙사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미레일은 눈가에 멍이 든 나를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국자를 까닥거렸다. “아? 키릭스 씨도 맞고 다닐 때가 있나요?” “당분간 카론 녀석에게 접근하지 마라.” “예?” “발정기야. 사나워.” “네?” 나는 투덜거리며 테이블 앞에 놓여 있는 당근을 들어 아무렇게나 씹었다. 목소리 따위 아무려면 어떻단 말인가. 그 망할 놈의 콤플렉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론과 미레일은 기사 실습을 위해 지정된 각 영지로 흩어졌다.(나야 뭐 대충 얼버무린 뒤에서 수도에서 1년 동안 놀았지만, 은 거짓말이고 몰래 이오타에 있었다.) 서임 식을 위해 다시 돌아왔을 때 카론은 그토록 바라던 변성기가 지난 뒤였다. 그는 내가 그걸 눈치 채 주길 무척이나 바라는 기색이었지만 난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왜냐하면 내가 듣기엔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던 것이다. 3 ‘........카론이라.’ 살짝 잠들어 있던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내 머리는 그를 아주 친한 친구로서 기억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키스 세자르.” 나는 키릭스가 던져준 내 이름을 틈이 날 때마다 읊조렸다. 그럼에도 이 이름이 어색한 이유는 내가 나 스스로 나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타인의 기억을 이식 받은 내 마음은 까칠까칠하고 인공적인 맛이 났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은 키릭스의 기억과 그가 가진 절반의 감정과 절반의 영혼이 전부였다.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후훗.” 그 고집 센 검은 머리칼의 친구를 떠올리자 또 웃음이 나왔다. 키릭스의 수많은 기억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때로는 내가 직접 겪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분할 수 없이 명확했다. 그것이 내 것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분명히 키릭스가 아닌 키스였다. 기억과 실제가 다르다는 이 부조리는 마치 잘 뭉쳐지지 않는 반죽처럼 계속 겉돌아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키스 씨, 크리스탄센 국장님이 부르십니다.” 등 뒤에서 리젤의 목소리를 들었다. 또 임무다. 나는 사육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4 스트라이프 슈트를 입은 늘씬한 몸으로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에 걸터앉아 서류를 넘기는 이자벨의 모습에 나는 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키릭스의 기억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하얀 나신을 끄집어 낸 것이다. 이건 정말 창피할 정도로 생생한 기억이라서 나는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 와서 앉아, 키스.” 그녀의 은은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조직의 고위 간부이자 나와 키릭스의 직속상관인 그녀가 내게 사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없었고, 도리어 싸늘할 정도로 차가운 쪽이었다. 그녀는 임무가 적혀 있는 서류를 내게 보여주었다. 이번 임무도 암살이다. 나는 이미 키릭스의 분신으로 열 번 정도의 암살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적이 있었다. 확실히 키릭스의 재능은 천재적이다. 나는 단 한번 읽는 것만으로도 세 장에 달하는 명령서를 완벽하게 암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서류를 벽난로에 넣어 소각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부탁?” “그녀의 입에서 ‘명령’ 이 아닌 다른 단어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혼자 지내기 외롭지?” “특별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바꿔 말하자면, 나는 누구와 같이 있어도 외로울 것이다. “여자가 한 명 있는데 16살 정도야. 너와 같이 사는 게 어때?” 뜬금없는 말이었다. 내가 아는 이자벨은 내 외로움을 걱정해서 여자를 소개시켜 주는 성격이 아니다. 애당초 그런 자상한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나를 암살만 전문으로 하는 장기 말로 사육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떤 여자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여자.” 그녀는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는 말을 부드럽게 바꿔 그렇게 말한 뒤에 말을 이었다. “골치 아픈 여자는 아니야. 정신이 뒤엉켜있긴 하지만.” “정신이 뒤엉켰다?” 나처럼 말인가? “어차피 우리와 오래 같이 있어야 할 여자라서, 너와 같이 지내면 좋을 것 같아. 서로 같이 식사도 하고 말이야.” 그녀는 나를 그 여자의 감시 역으로 쓰려는 것이었다. 솔직히 흥미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절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5 마치 오래된 도자기 같은 마을이었다. 기가 찰 만큼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가치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길 없는 그런 을씨년스런 퇴물, 다 허물어져가는 집 몇 채가 고작인 이런 폐촌(廢村)에 그나마 변변한 것이라고는 이유 없이 돌아가는 풍차가 고작이었다. 밤이 찾아오고 나니까 이건 그 자체로 거대한 무덤이었다. 이런 곳을 일부러 찾아올 인간이라면 지저분한 정치적 뒷거래 끝에 몸을 숨기려는 정치가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뒤쫓아 온 나 같은 녀석 외엔 없을 것이다. 창고 앞 풀숲에 몸을 숨긴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거칠게 불어대는 바람에 몸을 실었다. “누, 누구!” 커다란 창고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비명을 입에 문 채 바닥을 굴렀다. 막 검을 뽑으려던 그의 몸은 흉한 꼴로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걸어가 창고 문을 찔렀다. “으아아아악!” 묵직한 감촉이 느껴진다. 창고 안, 문가에 기대어 있던 놈의 심장이 단번에 뚫렸다. 검을 뽑자 빨간 핏물이 흘러나왔고 창고 안은 고함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 숨어서 숨바꼭질이나 하고 있다니, 타락한 정치인이란 하나같이 유치한 법이다. 난 단숨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이오타가 보낸 거냐!” 날 노려보는 녀석들 속에서 단번에 타깃을 찾을 수 있었다. 늙은 도사견처런 생긴 뚱보 녀석은 솔직히 나라도 단번에 두 조각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비대했다. 역겨움이라는 것이 뭔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개자식이었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분명 키릭스의 성격이겠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오타는 이 일에 아무런 관련도 없어.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목표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인상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거 뭐야. 설마 너 혼자 온 거?” 그럼 성대하게 군대라도 몰려올 줄 알았던 거냐? “장난치나! 너, 혼자 우리 전부를 해치우겠다고!” “나야 목표만 제거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목격자를 살려둘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던 나는 피로를 느끼며 말을 흐렸다. 이 피로감은 십수 명이 넘는 놈들을 혼자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좀더 본질적인 것, 이런 일의 반복이 가져오는 그런 환멸감이었다. 나는 이들이 왜 나한테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이들을 죽임으로써 이자벨에게 어떤 이익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이건 마치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는 거대한 기계의 나사를 끝도 없이 조이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죽여!” 내 눈 앞에서 춤추는 칼끝의 궤적에 나는 기꺼이 따라주었다. 내 몸을 간발의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칼날들은 목표를 잃고 동료를 찌르는 추태까지 보여줬다. 이런 좁은 곳에서 저렇게 검을 크게 휘두르다니, 이런 오합지졸의 용병들을 고용한 저 정치인도 별 볼일 없는 녀석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암살 타깃들은 키릭스가 직접 처리하는 편이다. “어, 어째서 찌르지 못하는 거야!” 나는 키릭스와 똑같은 이 몸을 마음껏 굴렸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검들은 예민하게 발달된 감각과 극도로 달련된 유연한 육제의 탄력 속에서 번번이 흩어져 나갔다. 방어에만 집중하다면 아신의 일격조차도 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고속으로 회전하는 부서진 감정이 나를 계속 폭주로 몰아넣고 있다. 이건 내가 제어할 수가 없었다. “끄으으윽!” 칼날의 파도 속을 헤치던 나는 그 비좁은 공백을 포착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몸이 나갔다. 어느새 내 칼끝은 상대의 목을 뚫고 있었고 그걸 본 순간 마음속의 폭주가 나를 뒤덮었다. 양 옆에 있는 녀석의 팔과 다리를 잘라버린 나는 곧바로 공세로 바꿔 당황하는 적들의 급소를 본능적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수백 년 전부터 이런 일을 해왔던 것처럼, 이 일은 내게 끔찍할 만큼 익숙하게 느껴진다. 키릭스가 내게 심어 놓은 증오는 강제로 나를 취하게 만들었다. 새로 형성된 내 가느다란 마음이 항체처럼 그 증오의 덩어리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당해낼 수 없었다. 지금 이 공간에서 나를 제외한 모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을 살육하며 나는 쾌감과 불쾌감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하아, 하아.” 내 거친 숨소리가 휘몰아치는 강풍과 함께 이 허술한 창고를 통째로 날려버릴 것처럼 뒤흔들고 있었다. 냉정을 잃고 극한까지 몸을 움직인 탓이다. 참을 수 없는 굴욕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보이지 않는 사슬들이 내 팔다리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키스인지 키릭스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마음의 현기증이 나를 때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검을 놓쳤다. “크윽!” 평소였다면 눈치 챘을 것이다. 몰래 내게 다가온 용병 놈이 입속에 품고 있던 가루 같은 걸 뿜었고 그건 무방비로 서 있던 내 얼굴을 덮쳤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몸이 굳어왔다. 어처구니없는 잔기술에 당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비 독?’ “뭐야, 이 자식. 아까는 귀신같더니, 별 것도 아니잖아!” 조롱과 함께 강한 충격이 턱에 느껴졌다. 얼굴을 걷어차인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돌처럼 굳어버린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앞이 어두컴컴했다. “이 개자식! 내 부하들을 모조리 죽여?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꼼짝도 못할 거다. 그리고 그 시간은 네놈이 잊지 못할 고통 속에서 죽어갈 시간이 될 거야. 큭큭큭.”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보다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쪽이 훨씬 힘들어. 솔직히 그것이 내 기분이었다.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배를 가르고 내장이라도 꺼내려나?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수치스럽지만 이렇게 죽는 게 마음은 편할 것 같다는 패배적인 상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그 정치인이 끼어들었다. “잠깐, 죽이는 건 미뤄 둬.” “뭐요?” “저놈, 그 이자벨 년이 보낸 암살자가 분명해. 내가 그년 밑에 있었기 때문에 들은 적이 있어. 엄청난 암살자가 있다고.” “이게 엄청난 걸로 보이슈? 이놈,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아무튼 이놈을 산 채로 콘스탄트에 바치면 망명하려는 내겐 좋은 선물이 될 거야. 힘줄만 다 끊어 둬. 죽이지는 말고.” “큭큭, 이 녀석 진짜 불쌍하게 됐구먼.” 나는 그 소리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죽이는 편이 좋은데....... 파멸적인 아쉬움이 마비된 몸을 적혔다. 눈앞은 계속 캄캄한 암흑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이 피비린내 가득 찬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는 들리는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내 힘줄을 잘라내려던 용병의 입에서 흔들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너는 뭐야. 어째서 이놈과 똑같이 생긴.......” “어이, 키스.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그러니까 네 목숨, 조금은 소중하게 다뤄줄래?” 키릭스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의 조롱은 나를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용병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콱 뚫려버리는 굉음이 터졌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창고를 가득 메웠다. “야, 쓰레기. 지금 나한테 뭘 뱉으려고 한 거야?” 분명 키릭스가 찌른 검이 그의 입을 뚫고 밀고 들어가 머리가 두 쪽 났을 것이다. 쿵 소리와 함께 용병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정치인은 다가오는 키릭스를 피해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눈도 몸도 정지된 나는 소리만으로 이 참혹 극을 또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잠깐! 제발 살려줘! 돈은 얼마든지, 으아아악!” 다리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추한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나, 나는 죄가 없어. 도리어 너희들이 날 이용해 놓고는 이제 와서.......” 키릭스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죄가 있어서 죽는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될 것 같아? 넌 그냥 부주의해서 죽는 거야.” 칼날이 몸을 찢는 소리가 수차례나 귀를 때렸다. 나는 정말 이대로 증발해 버릴 것 같은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리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이거 일일이 피를 지우려고 했다간 밤샘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철야는 질색이니까 다 태워버리는 쪽으로 하죠.” 리젤이 주로 맡는 일은 나나 키릭스가 처리한 시체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거하고 그 증거를 인멸 혹은 조작하는 일이다. 이제 고작 16살 소년이 가진 직업치고는 꽤나 터무니없었다. 그는 대게 다가와 말했다. “이런, 키스 씨. 이런 시시한 신경 독에 걸려들다니요. 당신답지 않네요.” 리젤은 내게 무엇인가를 주사했고 잠시 후 심연 밑바닥에서 곧바로 낚여 올리는 기분과 함께 몸과 시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를 키릭스가 내려보고 있었다. 요요(妖妖)와 요요(寥寥) 사이에서 빛나는 그 빨간 눈동자는 내가 봐도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곳에서 두드려 맞고 있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냐?” “.......” “세상은 영원한 외로움이야. 왜 그걸 의심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웠다. 저것은 폭력과 공허로만 창조된 광기의 집합체였다. 그는 허물어져가는 자신의 감정을 도리어 즐기고 있었다. 외로움도 절망도 돌이킬 수 없는 파멸도 그에게는 유희였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는 또 다른 마음의 유혹처럼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 공허의 나락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그것이 두려웠다. 6 나는 임무 외에는 검을 잡고 싶지 않다. 이유야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기분이 흉(凶)해지기 때문이었다. 이것 역시 키릭스의 감정 때문이라면 원래 그도 그다지 검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덕분에 이번에도 리젤에게 검을 맡기고 숙소로 돌아온 내 손에는 야채와 찬거리 같은 것이 잔뜩 들려 있었다. 얼굴은 반창고투성이에 목에는 붕대까지 감은 주제에 무와 당근, 아티초크 따위를 들고 집에 들어오는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병원에는 가기 싫고 배는 고프니까 방법이 없다. 나는 숙소로 쓰는 작은 집에 들어와서는 언제나처럼 야채를 던져 놓고 옷을 벗었다. 그런데 막 셔츠를 벗어던지려는 찰나, 나는 그대로 굳어버려야 했다. “.......” 누가 지금 날 봤다면 아마 놀란 토끼 눈이라는 진부한 비유를 꺼냈을 것이다. 내 빨간 눈은 침실 문에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소녀를 향해 있었다. “아, 이자벨이 말했던 여자가 바로......” 인형처럼 작은 얼굴에 파란 눈동자가 도드라진 그녀는 빤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머쓱해진 나는 다시 옷을 입고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속옷을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는 것은 그게 일국의 왕자든 복제품에 암살자든 하나같이 난장판인 법이다. 그녀는 세탁물이며 검이며 굴러다니는 야채들을 구석에다가 처박아두고 있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이건 꼭 내가 감시당하는 것 같잖아! 그저께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까지 났다. “.......밥 먹을래?” 나는 이 난데없는 방문객에 대해 별로 호의는 없었기 때문에 서로의 이름을 나누며 티파티를 즐길 기분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2인분의 샐러드를 만들 용의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기는커녕 침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어린애 같은 여자였다. “미안한데, 난 술래잡기 놀이하기엔 너무 피곤해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그녀는 어둑한 침대 한켠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지? 수많은 여자들로 점철된 키릭스의 기억 속에서도 저런 패턴은 없었으므로 나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내 이름은 키스야.” 대답도 없었다. “뭣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식사할 거다. 그러니까 배고프면.......” 나는 말을 흐렸다. 근의 눈에 드러난 공포를 본 것이다. 그건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지옥을 보고 온 사람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굴 달래는 건 자신 없지만 내 침대 위에서 난생 처음 보는 여자가 떨고 있는데도 태연하게 식사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무신경한 인간은 아니니까. “있잖아.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큭!” 얼굴에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뺨을 닦자 피가 묻어났다. 맙소사, 날 할퀸 것이다. “미치겠군!” 난 침대를 걷어차고는 거실로 나갔다. 이자벨! 이게 어디가 골치 아픈 여자가 아니야? 차라리 포악한 도둑고양이를 주워와 키우는 편이 낫겠어! 난 당장 이자벨에게 가서 저 위험천만한 여자를 ‘반송’ 하겠다고 말할 작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너와 같은 여자야. 잘 지내 봐. -이자벨. ‘나와 같은 여자?’ 나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전언을 읽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어디가 같다는 걸까. 정신이 불안하다는 것? 둘 다 눈동자가 이상한 색이라는 것? 아니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는 거? 난 쀼루퉁한 표정으로 쪽지를 구겼다. 왠지 이자벨에게 필요 없다고 소리쳐도 소용없을 것 같았고, 나와 같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더 이상 날 할퀴거나 물지만 않는다면 같이 있어도 별 상관없겠지, 하는 무책임한 기분도 들었다. ‘그럼 며칠 정도 지켜보기로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갔다. 키릭스로부터 받은 기억 중에 딱 하나 고마운 것이 있다면 엄청난 요리의 실력자라는 것이다. 덕분에 어떤 식재료를 봐도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음식들이 떠올랐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그런 놈의 취미가 요리라니, 이건 나름대로 악취미였다. 나는 능숙하게 아티초크의 밑 둥을 잘랐다. 그리고 은은한 향기가 나는 꽃받침을 찜통에 넣어 삶았다. 달궈진 팬 위에 설탕을 녹이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것에 오렌지를 짜 넣었다. 능숙하게 연둣빛 치커리를 한입 크기로 자른 뒤에 빠른 손놀림으로 갈색 거품이 부글거리는 설탕물에 신선한 향유를 부었다. 키릭스의 기억도 기억이지만 나도 요리 외에는 별 다른 취미거리가 없었으므로 이 작은 집의 주방은 의외로 충실했다. 수십 명을 불러 파티를 열어도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는 음식들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아직까지 누구에게 무언가를 만들어 준적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2인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 나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어느새 침실에서 나온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멋대로 내 침대 시트를 찢은 천 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여자였다. “하아, 이번에는 그걸로 날 목 졸라 죽이려고?” 나는 칼등으로 내 머리를 톡톡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집에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게 되었군. 그런데 그녀는 무언가를 하려는지 내게 팔을 들어올리려 발돋움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녀가 그 천으로 내 얼굴을 감았다. “이게 무슨.......” 나는 서툰 손놀림으로 내 얼굴을 감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할퀸 내 뺨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행동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덕분에 내 얼굴은 침대 시트 조각으로 장식되어 버렸다. “고맙기는 하지만 이래서야.......” 반창고 쓰는 법 모르나? 정말 지능이 극도로 낮은 것인지 아니면 태어나서 교육이라는 것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됐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뺨을 만지고는 다시 침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이름이 베아트리체이고 얼마 전 키릭스에게 납치되었으며 그 다음부터 계속 저런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나는 찜통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증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와 같은 여자라고? 7 6개월 후. “이, 이 괴물 자식! 너도 언젠가는 비참하게 뒈지게 될 거다! 저 세상에서도 저주하겠어!” 내 손에 죽는 상대에게 좋은 말 듣길 기대했다면 바보겠지만 그래도 내 ‘비참한 최후’라는 걸 멋대로 운명 지어 버리는 저주는 좀 너무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스스로도 편안한 마지막을 장식할 거라는 상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어차피 내 수명은 15년도 안되는데다가 그 기간 중에도 암살에 실패해서 죽든지 아니면 이성을 잃은 키릭스와 함께 동반자살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으니까. 이런 것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내가 둔감해진 건지 아니면 염세주의에 심취한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내 결말이야 내가 두려워하지 않아도 어차피 언젠가는 어떤 형태로든 찾아올 것이고,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빨리 집에 돌아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새벽에 음식을 만들어 놓고 오긴 했는데 제대로 먹었을지 영 불안한 마음이었다. “네가 바로 키릭스냐?” “누구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에 나는 자세를 다잡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나는 이 여자의 정체를 직감했다. 시체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에서 검은 가죽 제복의 여자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강대한 중압감이 가슴을 때렸다. 그건 정말 명계(冥界)에서부터 소환된 암흑의 사도 같았다. “키르케....... 밀러스.” “어머나, 우리 초면인데 내 이름을 알고 있네? 영광인데?”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매력적이었지만 또한 위협적이었다. “4대 아신 중 적현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후후, 마음에 드는 아이인 걸?” 아신을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4대 아신위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교황청의 명주작 알테어 엔시스와 행방불명 중인 견백호 무라사 랑시, 키릭스의 검술스승이자 최강 최악의 수호신 라이오라 란다마이저,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선혈의 마녀 키르케 밀러스, 바로 저 위험천만한 여자였다. 나는 그녀 주변의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키릭스였다면 비웃었을까? 하지만 나는 공격 범위조차 짐작할 수 없는 아신 앞에서 극도의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아신과 싸워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주변 모두를 시야에 담으며 계산했다. 그녀가 그런 내 표정을 즐기며 조금씩 다가왔다. 그림자 위를 떠다니는 모습은 정말 악몽 같았다. “대답해. 네가 황제의 숨겨둔 아들 키릭스냐?”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아직 키릭스와 내가 나눠졌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그 실험에 대해 늘어놓고 내가 키스라고 소개할 정도로 친절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말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귀엽게 생겼네. 착한 눈동자야. 그 미친 늙은이와는 닮은 데가 하나도 없어.” 만약 키릭스를 봤더라도 저렇게 말했을까? 아니, 그의 광기어린 눈빛은 분명 다른 평가를 내리게 했을 것이다. 착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미치지 않았다는 말은 좀 고마웠다. 그보다....... 지금 적현무와 싸운다면 승산이 있을까? 나는 도주로를 살폈다. “겁먹지 마라.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야. 나도 이 배신자들을 처리하러 온 거니까.” 그녀는 깊은 갈색의 눈동자로 내가 죽인 시체들을 둘러봤다. “네가 귀찮은 일을 대신해줘서 어쨌든 고마워. 지금 널 찢어버려도 내가 손해 볼 건 없지만, 그 예쁜 얼굴을 보니까 굳이 죽일 마음은 안 생기는구나.” “고, 고맙군.” 아신은 다 저렇게 악취미인가?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훌륭한 원판을 넘겨준 키릭스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하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나와 적이 아니길 기도해야 할 거야. 계속 이자벨 밑에 있다가는 언젠가는 너도 내 그림자의 먹이가 될 테니까.” 키르케는 그 말을 남기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다듬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지독한 존재감이었다. 그리고 숨어있던 리젤이 슬며시 나타났다. “헤에. 엄청난 분이 왔다가셨군요.” “.......” 나는 뒤처리 담당인 리젤이 숨어있던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죽으면 이 시체들과 함께 내 시체 역시도 인멸해 버리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얄밉지만, 그게 그의 임무였다. 그는 어쨌든 임무를 마친 내 검을 넘겨받으며 말했다. “어때요? 다시 만나면 적현무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의 일이라고 엄청 쉽게 말하는군! “다시 안 만나길 기도해야지. 만난다면 또 미인계를 써서 넘어가든가.” 나는 팔자에도 없는 농담을 지껄이며 자리를 떴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이제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은 시장에서 사야할 목록을 뽑아내고 있었다. 별로 결정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는 내 단순한 인생에서 베아트리체는 꽤 여러 가지로 날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 제발 할퀴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베아트리체?”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 지금 뭘 찾고 있는 거야?” 그녀는 내가 옆에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뒤쫓았다. 온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그녀는 절실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어디 있어? 어디 있어?”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그녀는 가느다란 새소리를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칠 때까지 그것을 반복했다. 나는 그녀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8 그리고 또 1년이 흘렀다 “다녀왔어.” “.......키이스.”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있던 베아트리체는 내 이름을 길게 늘여 부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물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음식을 만들겠다며 멋대로 야채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었을 때는 좀 화가 나기도 했지만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녀와 대화 없이 교감하는 법을 제법 터득해 나갔다. 그녀는 피 냄새를 씻은 뒤에 안아주면 좋아했고, 가끔 몰래 같이 산책을 나갈 때는 꽃이며 하늘같은 것을 지치지도 않고 바라보며 빠져들기도 했다.(사실 그녀는 원칙적으로 이 집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감금되어 있다가는 멀쩡한 여자도 미쳐버릴 것이다.) 나는 그녀가 두 손에 들고 있던 식어버린 찻잔을 살며시 빼서는 주방으로 갔다. 끓는 물에 새로운 찻잎을 넣자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향기를 맡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찻잎을 바라보는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는 항상 무언가를 회상하는 모습이었다. 난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납치되었을 때 같이 있던 소년이 있었다고 한다. 베아트리체는 그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지만 가끔씩 그녀는 혼미한 정신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며 이제는 곁에 없는 그 소년을 애타게 찾고는 했다. 그 녀석은 그녀와 현실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난 그게 싫었다. 그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소년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어떤 녀석이지.’ 그 녀석이 있다면 베아트리체의 정신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기분까지 들자 내 불쾌감은 질투로 발전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놈을 형편없는 녀석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었다. 자기 여자를 놓치고 지금 이렇게까지 만든 건 다 그놈이 못났기 때문이라는 치기어린 질투심이 들었다. 임무와 관련된 모든 기록에 대해서는 절대 발설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알아낼 길도 없었다. 아니, 이제와 알아낸다고 내가 한 방 후려쳐 주는 것 외엔 뭐가 달라지는 것도 없겠지만. 나는 예전 정신이 온전할 때의 베아트리체를 상상하고는 했다. 분명히 순진하고 상냥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묘한 조급함이 몰려왔다. 이건 여담이지만 나는 최근 이자벨이 베아트리체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나 키릭스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냉정한 여자가 말이다! “배고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샤워를 마치고 온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분위기 좋게 술을 마시기는커녕, 밖에 나가 근사한 저녁을 먹을 수도, 연극을 보러갈 수도 없는 우리 사이에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식사나 같이 책을 읽을 때가 고작이었다. 여자라면 이골이 난 키릭스라도 두 손 두 발 들었을 정도로 엄청 삭막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나마 현실적으로 내가 짜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항상 다른 요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고기를 전혀 먹지 못하기 때문에 졸지에 나까지 채식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맛있어.” 최근 들어 혼자 포크를 쓸 수 있게 된 그녀는 상점 주인에게 부탁해서 구해 온 마키시온 산 죽순을 서툰 손동작으로 먹고 있었다. “웃어. 보기 좋아.” “응?” 갑작스런 말에 나는 달칵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웃으라니? 그러고 보면 난 웃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야 사람 죽일 때 웃고 있었다간 미친 놈 취급받기 십상이고, 하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웃을 일도 없으니까. 아니, 커다랗게 웃는 게 어떤지 짐작도 가질 않는다. 그녀는 물기 어린 하늘색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눌한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도 항상 웃었어. 그런데 키스는 슬퍼 보여. 키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덥혀 놓은 물이 다 식어버릴 때까지 욕조 안에 들어가 있던 나는 슬며시 거울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서 나를 노려보는 저 새빨간 눈동자는 도통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흉안이었다. 하긴, 내 머릿속에서의 키릭스는 때때로 매력적인 웃음을 보였다. 여자를 꼬드길 때라든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카론이나 미레일 속을 긁어 놓으며 장난칠 때....... 그 웃음의 감정은 내게 온 것일까 아니면 키릭스에게 간 것일까.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조금씩 웃어 봤다. 이건 정말 창피하고 진땀 빠지는 훈련이었다. “하. 하. 하.” “후. 후. 후.” “허. 허. 허.” 제기랄, 이런다고 웃음이 터질 리가 없지. 이건 난생 처음 보는 복잡한 기계 앞에서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몰라서 쩔쩔 매는꼴이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내 얼굴은 무섭게 굳어갔다. 도무지 발전이 없는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곧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제 됐어. 웃는 것 따위 알게 뭐람.” 나는 투덜거리며 욕실을 나왔다. 게다가 나오면서 문 앞을 굴러다니던 커다란 무를 밟고 부웅 날아올라 거창하게 엎어지기까지 해서 내 기분은 최악이 되었다. “헤헤헤, 키스는 재미있어.” 촛불 앞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그녀는 뒷머리를 부여잡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뭐, 뭐가 재미있다는 거야! 나는 아파 죽을 것 같.......”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입가에 맺힌 웃음은 정말 어색했지만 이상하게도 멈춰지질 않았다. 9 그리고 우리 위로 또 1년이 흘렀다. 키릭스가 건네준 불완전한 영혼과 불완전한 감정 속에서 나의 새로운 인격은 그녀를 통해 만들어져갔다. 마치 싹이 돋은 담쟁이가 오래된 건물을 감싸는 것처럼 내 마음 속에서 심어진 그 격렬한 증오는 새로 태어난 감정들에 감싸 안겼다. 이자벨이 나를 부른 건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결코 악한 여자는 아니다. 하지만 악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자이기도 했다. “베아트리체를 데려오라고요?” “응.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모처럼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해서.” 차가운 눈매와 고혹적인 입술을 가진 그녀는 엷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죠. 식사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래. 키릭스와 함께 준비하면 재미있겠네.” “........” “미안. 놀릴 생각은 아니었어.” 나는 그녀의 집무실 밖을 나서서 숙소로 향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키스? 왔어?” 내 옷들을 널고 있던 베아트리체가 즐거운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이제 그녀는 내게 요리도 제법 배워서, 주방에서는 그녀가 만든 야채 스프가 끓고 있었다. “키스, 왜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그녀의 방을 열고 들어가 가방을 꺼냈다. 뒤따라 들어온 베아트리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등을 때렸다. “왜, 왜 그래? 내가 잘못한 거 있어?”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사방을 열고 그녀의 옷을 아무렇게나 접어 넣고 있었다. “옷이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을 거야.” “뭐?” “지금 여길 떠날 거야.” “키스, 왜 그러는 거야.” “날 도와줄 녀석이 하나 있어. 그 녀석이 있는 데까지 데려갈게.” “키스!” 나는 오늘 중으로 그녀가 어떤 실험에 끌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험이 완료되면 그녀는 결코 처음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와 키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실험이 이 세계에 무슨 도움이 될지는 쥐뿔도 관신 없다. 사실 나는 1년 전부터 지금 상황을 아무도 모르게 대비해 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시간 없어. 가자.” “키, 키스! 멋대로 이런 짓 하지 마!” “갑작스러워서 미안하지만 설명할 시간 없어.” “난 가지 않아! 이거 놔!” 그녀가 고함을 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리고 나도 처음으로 소리쳤다. “네 기억 돌아온 거, 다 알고 있어!”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닌 척 해도 다 기억하고 있는 거 알아. 그리고 그 녀석 때문에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네가 도망치면 그 녀석이 피해를 볼까봐 어떤 요구도 다 들어준다는 거 알아.” “아, 아니야. 그건.......” “지금 물어보고 있는 거 아니야. 네 마음 정돈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결국 베아트리체는 아직까지도 그 소년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정말 화나게 만들었다. “그딴 녀석 알 바 아냐!” 나는 아주 커다랗게 외쳤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널 지키기는커녕 다시는 만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네 인생만 망치는 그런 머저리 따위, 뒈지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 미워해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지금만큼은 내가 널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만약 이 여자와 관계가 끝날 때가 온다면 최대한 부드럽고 낭만적으로 장식하고 싶었는데, 결국 어처구니없는 바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10 나는 나름대로 면밀하게 준비했다. 감시를 피해 인적이 드문 변두리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미리 텔레마코스 센터를 통해 연락해 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큰 키의 그는 긴 코트를 입은 채로 말에서 내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본 그가 다가왔다. “키릭스, 아니 키스.” “미레일.” 내 머릿속에 있던 키릭스의 기억 중에서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년 전 나는 이오타의 기사가 된 미레일을 몰래 만나 모든 일을 말했고 그에게 부탁했다. 때가 되면 베아트리체를 숨겨달라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키스, 정말 괜찮겠어?” “난 상관없어. 그보다 베아트리체를 이자벨의 정보망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겨줘.”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니까 숨을 곳은 있지만....... 이제 너는.” 모든 것을 잃게 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난 신경 쓸 것 없어.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는데, 뭘.” “.......이성적이지 못하군.” “괜찮아. 사람은 때로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니까. 어차피 내가 애당초 그리 이성적인 녀석도 아니었고. 너야말로 조심해. 이 사실이 밝혀지면 키릭스는 가장 먼저 널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미레일은 말없이 그녀를 넘겨받았다. 그는 선생처럼 착한 성격 이면에 꽤 남자다운 면이 있는 녀석이다. 고작 복제에 지나지 않는 나를 돕기 위해 키릭스를 놓기로 결심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어디에 숨길 건지 알려줄까?” “모르는 편이 좋아.” 나는 그렇게 말한 뒤에 그녀를 바라봤다. “키스. 키스. 왜 나한테.......” 눈물에 얼룩진 그 얼굴을 바라보며 불현듯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안녕.” 11 “와아. 대단하네. 내 절반이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어. 나도 예전에는 꽤 낭만적인 녀석이었나 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사슬에 묶여 있는 내 머리채를 잡아 올리며 키릭스가 웃었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이자벨을 피해 도망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잡힌다고 해도 그녀가 숨은 곳 따위 애당초 모르니까, 이제 잡혀도 상관없는 것이다. 게다가 도망친다고 달리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널 죽이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네.” “큭!” 내 턱을 잡아챈 키릭스의 얼굴에서 결핍의 그늘이 그대로 드러났다. 잘려나간 감정이 그 때 이후 계속 허물어져 그 속에서 뒤틀린 증오심만이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 그가 두렵지 않았다. 도리어 느껴지는 건 동정심이었다. 뒤에 있던 이자벨이 말했다. “이제와 베아트리체가 숨은 곳을 말하라고 한들 말할 너도 아닐 테고, 뭐 어쩔 수 없네. 처음부터 다시 찾는 수밖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조물주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세였다. 정말 미레일이 잘해줬으면 좋겠다. 그녀의 거미줄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세상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나도 알고 있는 사내가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모스, 꼭 거인을 연상시키는 모스는 자신의 근육질을 사랑하는 시시한 나르시스트였다. 예전 내 앞에서 그녀를 비아냥거리다가 화가 치밀어 오른 내게 된통 당한 적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이자벨의 장기 말 중에 졸(卒)에 해당되는 진화가 덜 된 머저리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내 얼굴을 때렸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곧바로 입 안에 피가 고였다. 키릭스가 말했다. “미안, 미안. 내가 직접 상대해 주는 게 예의지만, 내가 손을 댔다간 널 정말 죽일 것 같거든.” 물론 저 괴물 같은 키릭스보다야 이 모스란 놈이 육체적으로는 훨씬 덜 괴로울 것 같지만, 아무튼 이놈도 내게는 좋은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 “꼴좋구나, 키스!” 곧바로 새로운 펀치가 겨드랑이를 강타했다. 사슬에 두 팔이 묶여 있는 나는 아주 손쉬운 표적이었다. 신음소리를 뱉는 내 얼굴을 모스가 이마로 내리찍자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찢어진 눈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시시껄렁한 복수심에 흥분하고 있었다. “네가 나에게 이런 꼴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응?” 나는 고개를 들며 히죽 웃었다. “아아, 정말 생각도 안 해 봤어. 상상력 낭비니까.” 사실이 그랬다. 그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스를 절벽 밑으로 던져버린 다음부터 지금까지 이 녀석이 생각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게 모스는 그런 내 태도가 영 거슬렸나 보다. 그는 날 잡아 올려 몇 번이나 복부를 후려쳤다. 그리고는 내 오른 팔목을 잡아 힘껏 부러트렸다. 감전된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뒤덮었다. “아악!” “기분이 어때? 이제 시작이니까 아직 기절하면 곤란하지.” 앞으로 쓰러지는 나를 안은 그가 속삭였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키릭스가 흘낏 우리를 보고는 말했다. “모스, 기껏 기회를 줬는데 지금 연애라도 하려는 거냐? 너한테는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좀더 확실하게 했으면 어.” 모스는 그의 새빨간 눈동자에 찔끔해서는 표독스러운 눈매로 나를 바라봤다. 확실히 키릭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임무를 수행하는 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정말 파멸의 권세였다. 나를 벽 쪽에 몰아붙인 모스의 주먹이 내 온몸을 때렸다. 무척이나 비효율적이고 원시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내 몸이 강철은 아니었기에 삼십여 분쯤 지나자 난 일어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고분고분해질 생각이 전혀 없는 나 때문에 조급함이 치민 모스는 내가 정심을 잃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저질스러운 모욕들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쓰러질 때마다 강제로 일으켜져 손찌검을 당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나는 꽤 자제하기로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좀 적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그러니까 내 인내심도 이제 바닥이라고!” 순간 내 몸이 붕 날아올랐다.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내 무릎이 모스의 옆머리를 찍었다. 뼈가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소음과 함께 모스는 비명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계속 목을 타고 올라오는 피를 뱉으며 벽에 기대어 숨을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키릭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고 있었다. “이자벨,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부탁? 뻔뻔하네. 말해봐.” 이자벨은 모스의 죽음에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다. 그녀의 성격상 이미 모스라는 이름을 자기 머릿속의 리스트에서 지워버리고 완전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여자에게 부탁했다. “베아트리체와 같이 살았다는 소년, 해치치 말아줘. 부탁이야.” 그게 그녀가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걸 일언지하에 비웃으리라 예상했다. 그런 자비를 기대할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꽤나 이타적이 되었네, 키스.” 그렇게 말하는 이자벨의 눈빛이 처음으로 흐릿해진 것을 보았다.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자벨이 그 소년에게 손대지 않을 기미라는 걸 느꼈다. 뭐 그녀로서도 이제와 힘없는 애송이 건드려봐야 얻는 것도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상관없지. 자, 그럼 이걸로 내 역할은 모두 끝인 것 같군. 나는 이자벨의 처분을 기다렸다. 나와 키릭스는 생명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사지를 잘라 자살도 못하고 목숨만 부지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을까?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네. 그녀가 선고했다. “풀어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나는 짐짓 놀라서는 그녀를 바라봤다. 키릭스가 말했다. “어이, 예상도 못했는데? 파격적인 훈방 조치라니. 우리 조직, 자선 단체였어? 갑자기 성녀라도 된 거냐, 너?” 그러나 이자벨을 그 싸늘한 비웃음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이젠 쓸모없어. 갖다 버려.” 저 냉정한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키릭스가 말했다. “키스, 넌 이 조직을 떠나면 차라리 죽는 게 좋을 정도로 괴로울 거야. 세상에는 날 싫어하는 놈들이 많고 그들에게 네가 키릭스가 아니라고 말해봐야 소용없을 테니까. 내 영혼, 잘 관리해. 내가 죽이러 갈 때까지.” 나를 바라보는 그 붉은 눈동자는 이 음습한 고문실을 태워버릴 듯이 달아올라 있었다. ‘하하. 의외로 나, 질긴 목숨인지도 모르겠네.’ 나는 쓸쓸하게 웃었다. 12 왕실 카페를 찾은 카론은 붕대 투성이에 팔에는 부목까지 대고 있는 의외의 방문객에 적잖게 놀란 얼굴이었다. 기억 속의 그는 또렷하지만 실제로 그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억 그대로 그는 얼음 같은 외모를 가진 미남자였고 나를 만났다고 큰소리로 소리치거나 껴안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말하자면 키릭스의 기억대로 되게 재미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은 확실했다. 내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와아, 카론 경?” “키릭스.......세자르?” “아니에요. 키스랍니다.” “무, 무슨 소린가. 게다가 그 이상한 말투는 대체.......” “돌아온 탕아입니다아.”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팔을 버렸고 카론은 ‘못 보던 중에 몹쓸 병이라도 걸린 건가.’라고 경계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든 것을 숨길 생각이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단지 키릭스의 기억 속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카론이라는 자를 한 번 보고 싶은 생각 때문에 찾아온 것뿐이었다. 그건 나의 기억은 아니었지만 내게도 굉장히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앉아 차를 마시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키릭스.” “키스인데요.” “아무튼.......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별 일 없었습니다아. 이제는 키스라는 것과 여자한테 차였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도 필요 없어졌다는 것 정도?” 카론은 나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를 죽이겠다는 목적은 포기한 건가.” “그건 키릭스의 목적이에요. 난 알 바 아니랍니다아.” “.......” 그는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나를 집요하게 노려봤다. 그건 꼭 연민 같은 눈빛이었다. “말해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상처투성이의 내 몸을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차가운 물을 단숨에 삼킨 것처럼 속이 아팠다. 뭔가 고맙기도 하고 슬픈 기분이 맴돌아 눈을 찡그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꽤 시시하고 긴 이야기입니다만.” “상관없어. 말해라.” 정말 카론은 날 묶어놓고서라도 듣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 이렇게 집요한 성격이었던가? 나는 삐죽거리며 딴청을 피웠지만 카론은 도통 날 떠나지 않았고 결국 한숨을 내쉬며 키스와 키릭스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적잖은 시간 동안 그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듣기만 했다.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이건 꼭 장승을 상대로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는 기분이었다. 긴 회고 끝에 나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서 저는 키스가 되었답니다아. 이야기는 여기서 끝. 그럼 건강하세요, 카론 경.”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게 카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단호한 말투는 내 기분 같은 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매몰찼다. “키릭스, 일주일 안에 네 자리를 마련해 놓겠다. 지금 스왈로우 나이츠의 단장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쪽이 좋겠지.” “.......아하하. 자, 잠깐만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저는 키릭스가 아니라니까요?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도와주려고.......” “어리광부리지 마라. 넌 여전히 키릭스다.” 순간 몸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나는 화가 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고 그는 피하지 않았다. “키릭스의 영혼을 가지고 있고 키릭스의 육체를 가지고 있고 키릭스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키릭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키릭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왜 너답지 않게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거냐.” 그는 칼을 뽑으면 받아칠 것처럼 물러서질 않았다. “하지만 키스라고 불리길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주지.” 나는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카론 경, 나와 계속 관계 맺어봐야 당신만 피곤해질 텐데요?” “예전에는 안 피곤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이제는 헬스트 나이츠의 부기사단장이 된 그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대꾸했다. “카론 경.” “뭔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눈을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들어둬라. 스왈로우 나이츠의 단장 자리다. 게으른 네 녀석에겐 딱 어울릴 한직이다. 눈을 피하기도 쉽고.......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이런, 이런. 당신 참 속이 좋네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어쩔 수 없는 착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제 명에 못 죽는데.......” “흥. 쓸데없는 말버릇은 여전하군.” 그는 신경질적으로 코트를 입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견습기사들이 뛰어다니는 카페 밖 연무장을 지켜봤다. 분명 키릭스도 행복한 결론을 원했을 것이다. 동료들과 함께 좀더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실험이 있었고 두 개로 분열된 우리들은 궤도를 이탈해서 자신도 모르는 어디론가 날아간 것이다. 나는 키릭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카론 경. 우리 참 악연이죠?”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나는 카페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한참동안을 소파에 파묻혀 생각했다. 키릭스는 언젠가는 날 찾아올 것이다. 그 전까지는 이렇게 좀 폐 끼치며 미적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염치없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마치 천년도 더 전의 일만 같았다. 일생에 해야 할 모든 일을 죄다 끝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자 굉장한 나른함이 온몸을 뒤덮었다. 운명이고 사랑이고 꿈이고 이젠 죄다 지긋지긋하니까 이대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체온을 가진 인간이 되어 흔해빠진 인생을 살고 싶다는 뻔뻔스런 게으름이 짓궂은 전염병처럼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거짓말투성이의 인생이라도 좋으니까 언제까지나 그러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이 흘렀는데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소파에 기대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흥얼거렸다. 항상 노래하던 조그만 남자 내 머릿속에서 춤추던 조그만 남자 청춘의 그 조그만 남자가 구두끈을 끊어 버렸네. 축제의 모든 오두막들을 부수었네. 문득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축제의 침묵 속에서 축제의 폐허 속에서 난 네 행복한 목소리를 들었네. 찢어지고 연약한 순진하고 비탄에 잠긴 그대의 목소리가 멀리서 다가와 날 부르는 소리를 내 가슴에 손을 얹으니 별빛 같은 네 웃음의 일곱 조각 난 거울이 피투성이가 되어 흔들리네. 이대로 심장이 멈춰 버릴 것만 같은 피로가, 도저히 떨어뜨려낼 길이 없는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13 “어이구! 키스 경! 자면서까지 뭘 그렇게 헤실헤실 거리고 있어요? 그만 자고 청소 좀 하라고요!” 내 앞에 널려있는 서류들을 치우던 미온이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참 귀여운 녀석이다. 자기 일도 아닌 것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용기 있는 녀석. 사소한 것에도 감동 받고 펑펑 우는 녀석. 하지만 불행하게도 깜짝 놀랄 정도로 약하기 때문에 보고 있자니까 꽤나 불안하다. 가급적 진지하게 살기 싫은 나지만,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되도록 다치지 않도록 은근슬쩍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전혀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는 계속 귀를 막고 청소 방해하지 말고 좀 비키라는 미온의 잔소리를 듣는 쪽을 택했다. 소파에 엎어져 있던 나는 내게 얼굴을 들이댄 그의 금발 머리에 턱 손을 얹고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렸다. “꿈을 꿨어요. 옛날 꿈을.” “옛날에는 정말 행복했었나 보죠? 꿈꾸면서도 웃고 있는 걸로 봐서.” “헤헤. 미칠 만큼 행복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우는 것보다 웃는 편이 좋지 않나요? 아주 예전에 어떤 여자가 그랬어요. 웃는 게 보기 좋다고. 그래서 엄청 연습했거든요.” “에에.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웃고 있었을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사람은 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거랍니다아.” 나는 그렇게 말한 뒤에 다시 잠들어 버렸다. 흔해빠진 인생을 찾고 있었지.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같은 자리를 맴돌며 용서받고 있는 현실이란 무섭구나. 키릭스와 공유하고 있는 영혼, 이래서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지만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그것을 속죄할 날은 오게 될 것이다. 나는 조금씩 다가오는 내 운명 앞에서 일부러라도 최선을 다해 게으름을 피우기로 결심했다. 뭐랄까, 이제 기다리는 것밖에 남지 않은 내게 이 이상의 행복이란 없으니까. 작가 팬 사이트 cafe.daum.net/dragonlady 소속 사이트 www.fancug.net 작가 이메일 billiken77@kornet.net 작가 블로그 blog.naver.com/blindtalker 제 21화 모든 개들은 천국으로 간다. 1 “아? 카론 경?” 지명을 마치고 역으로 들어간 나는 신문을 펼친 채 플랫폼에 서 있는 긴 흑발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제복 차림에 안경너머의 무표정한 눈매. 아니나 다를까,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의 아가씨들이 카론 경 주변을 맴돌고 있었지만 역시 카론 경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여러분들, 속지 마세요. 저 사람, 유부남이에요! 라고 외치고 싶은 광경이로군 그래. 나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와아. 카론 경,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그러나 그는 나를 흘낏 보고는 못 본 척 신문을 접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너, 너무하네! 반가워서 손 흔드는 사람을 전염병 환자 취급하다니! 나는 울컥하는 기분에 그의 망토자락을 잡았다. “어딜 도망치십니까.” 그러나 왕고집 카론 경은 계속 걸음을 옮겼고 나도 포기하지 않고 그의 긴 망토를 잡고 종종 걸음으로 뒤쫓아 가는, 그러니까 결혼식장에서 목격할 수 있는 신부와 들러리의 양상이 되어 버렸다. 이 스타일 망가지는 민망한 추격전에 카론 경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패배를 인정했다. “.......놔라.” “같이 카페 가요.” “일단 놔라.” “놔주면 같이 차 마시겠다고 약속하세요오.” 생글생글 웃는 나를 뒤돌아 본 카론 경의 두 눈썹은 정말 초승달처럼 불만으로 휘어 있었다. “자네는 어째서 점점 더 키스를 닮아가는 건가. 나쁜 현상이다.” “처음부터 카론 경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이러지도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최근 나를 대하는 카론 경의 태도가 키스 경을 대할 때와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어. 뭐랄까 ‘앗! 집요한 생명체다!’라며 전력으로 도망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는 그 인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고 있고 또한 상식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키스에게 전염된 오염물질’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대단히 서운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망토 끈을 다시 묶은 카론 경이 시계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수사 중이다. 자네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할 여유 없어.” “낭비라니요! 마시기도 전에 어떻게 그런 폭언을!” “흥. 안 봐도 뻔해.” “시, 실로 무서운 선입관이로군요.” 이거야 마치 못된 남편에게 이혼당한 여인이 ‘남자 따위는 다 쓸모없어!’ 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수준의 확고한 선입관이로구만 그래. 그러니까 이미 카론 경의 머릿속에는 ‘나=키스’라는 불유쾌한 공식이 각인되어 버린 듯 하다. 나는 입술을 쭉 뺀 채 ‘그럼 쓰잘데기 없는 이 몸은 물러가겠습니다.’라고 투덜거리며 사라지려고 했다. 카론 경은 조금 미안하지 한숨을 내쉬며 드문 사족을 붙였다. “같이 마시고 싶어도 곧 내가 탈 열차가 도착한다. 차 마실 시간은 없.......” 그때 플랫폼의 확성기를 통해 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시 30분 도착 예정이던 열차가 현재 연료 부족으로 도착이 늦어지고 있사오니 탑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지나치게 나이스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자, 그럼 시간 낭비 좀 해볼까요?” 2 역 안에 위치한 라운지는 거북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마나-열차를 이용하는 거의 모든 승객이 귀족들이니까 저렴한 변두리 카페 분위기는 아무래도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환한 대낮부터 수백 개의 램프에 불을 붙이고 커피에 금가루까지 뿌리는 천박한 호사취미는 카론 경으로부터 ‘이게 낭비가 아니라면 뭔가!’ 라는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어지니까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차가운 얼음물 한 잔만을 시킨 카론 경은 안경 너머 시선으로 창밖의 플랫폼을 바라볼 뿐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들이 본다면 굉장히 화가 나 있는 것이라고 오해하겠지만 사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담당한 사건의 추리가 광속으로 이뤄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통 카론 경처럼, 그러니까 목석처럼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시선뿐이라면 상관 안하겠는데- 일단 우리 테이블 앞에는 십여 개가 넘는 커피며 홍차며 초콜릿 같은 것들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올라와 있었다. 물론 이것들은 모조리 다 주변 귀족 집안 아가씨들과 귀부인들과 심지어는 취향이 의심스러운 남정네들로부터 무료 배달된 선물이었다. 그런데 보통 카페에서는 이런 추파 잘 안 던지지 않나? 나는 심란한 시선으로 끝도 없이 도착하는 차들을 바라봤다. “하아. 본의 아니게 우리가 이 가게 매상을 올려주고 있네요.” “......” “카론 경, 이거 마시면 왕실 기사로서 금품수수 행위에 저촉되기 때문에 안 마시고 있는 건가요?” “......” “쳇, 재미없어라.” 그러나 죄 많은 유부남 카론 경은 이런 노골적인 공세 속에서도 나 홀로 독야청정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쩜 저리 무신경할 수가 있담. 그런데 그런 매몰찬 태도가 상대를 더 애간장 태우게 만든다는 거 정말 모르십니까? 아무튼 저 고 퀄리티의 마이페이스, 때로는 키스조차 경탄할 때가 있어. 어른스러운 건지 어린애 같은 건지....... 나는 다섯 잔째 금 커피를 마시며 혀를 찼다. 카론 경은 한 마디도 없이 오직 자신이 주문한 얼음물로만 살짝 입을 축일 뿐 무표정한 시선으로 창밖만 보고 있었다. 나는 슬쩍 그를 바라봤다. 수려한 그의 표정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제 열차가 도착할지? 지금 수사 중인 사건? 아니면 이멜렌 님과의 추억? 그것도 아니라면....... 키릭스 세자르.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자 또 심장이 두근거렸다. 키스와 똑같은 모습을 한 그가 카론 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광경은 내게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충격이라서, 가끔 키스를 보면서도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정작 당사자인 카론 경은 그 이후 조금도 내색하지 않지만- 어쩌면 저 무심한 시선 이면에서는 그때의 일들을 되새기는 중일지도 모른다. 지금 저 사람은 가슴 아픈 상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 “잠시 자겠다.” “네?” “삼 일 동안 한숨도 못 잤어. 어차피 열차가 금방 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자네는 먼저 가도 상관없다.” 그러더니 그는 안경을 벗고는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이 없던 이유는....... 그냥 졸렸던 겁니까?”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몸 어디엔가 수면 스위치라도 있는지 대기 시간도 없이 곧바로 스위치 오프였다. 아아.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 카페 와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 ‘난 잘 테니까 먼저 가버리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예요? 에이이! 사교성 제로 같으니라고! ‘그건 그렇고 이놈의 커피들은 어떻게 처분을.......’ 나는 내게 가장 많은 금 커피를 보내온 귀부인을 바라봤다. 그녀가 육감적인 미소를 보이자 나는 난감한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아하하. 저만한 아들 있을 분께서 많이 무리하시네요. 그때였다. 사람들의 불쾌한 수군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막 라운지에 들어오는 추레한 옷차림의 사내들이 보였다. 농담이라도 부유층으로는 보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귀족들은 감히 ‘이런 고상한 곳’에 들어온 저 ‘하층민’들을 향해 노골적인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종업원이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모두 움직이지 마! 허튼 짓 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들 중 한 명이 그렇게 고함치며 권총을 꺼내는 순간 다른 한 명은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었다. “맙소사! 강도! 게다가 총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머리에 구멍을 내주겠어!” 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나는 깜짝 놀라 카론 경에게 속삭였다. “카론 경, 지금 강도가.......” .......주무십니까? 나는 실로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그를 보며 말을 흐렸다. 삼 일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했지? 헤에, 아무리 은의 기사도 세상모르고 잠들 때가 있구나.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네....... 가 아니라 이럴 때 자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은 악을 소탕할 시간이라고요! 나는 작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깨웠다. “카론 경, 일어나세요. 어서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나라였다. ‘으이구. 당신이야말로 키스에게 전염된 거 아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상대는 총이다. 단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다. 그보다 어떻게 저런 변두리 강도들이 총을 구했지? 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총 한번 못 보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단 한 발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그 위력만큼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라운지를 지키는 경비병은 총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해서 무기를 버리고는 손을 들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한다.’ 헬스트 나이츠라면 이런 상황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위대한 단장 나리 키스 경께서는 그딴 거 하나도 안 가르쳐 줬거든? 한편 강도들은 강도들 나름대로 트러블이 생긴 것 같았다. “어서 금고 열어! 당장!” 중년의 강도는 종업원의 머리에 총을 들이댄 채 고함을 치고 있었지만, 종업원은 절박하게 몸을 떨면서도 금고를 열지 않았다. “주, 죽고 싶어? 당장 열라니까!” 하지만 종업원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절대로 금고를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건 고용주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다. 평민 종업원이 귀족 고용주의 돈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생명 줄과 같은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것은 물론 성격이 나쁜 고용주라면 그 돈을 모두 물어내라는 협박을 들어도 평민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평생 그 돈을 갚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순순히 금고를 열어줄 것 같은가? 어수룩한 이 인조 강도들도 뒤늦게나마 그 사실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황급히 도망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상은 빗나갔다. “제길! 저리 비켜! 금고를 부숴버리겠어!” 나는 강철 금고를 들어 벽에 집어 던지는 꼴을 보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다고 금고가 깨질 리가 있겠냐! 배달부와 강도의 공통점이 있다면 시간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저들은 이미 시간을 너무 끌었고 또 이미 도망쳤어야 옳았다. 아니나 다를까, 금고와 뒤엉켜 있는 사이 라운지 앞에는 경찰들이 깔렸다. 유일한 출구인 정문 밖에 몰려든 그들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감히 평민 놈들이 이곳을 털 생각을 해? 살려두지 않겠다! 더러운 놈들!” 순간 나는 ‘야! 이 얼간이들아! 네놈들은 교섭이라는 단어도 모르는 거냐!’라고 소리칠 뻔했다. 진짜 바보들 아냐? 궁지에 몰려 있는 강도들에게 죽이겠다는 위협을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어서 죽여주세요, 라면서 환영하겠냐, 아니면 인질을 잡겠냐! 이곳은 네놈들이 굽실거리는 고귀한 양반들로 넘쳐흐른다고! 꼭 아버지와 아들 같은 나이의 강도들은 탈출로가 차단된 것을 알고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고 아니나 다를까, 인질을 고르기 위해 떨리는 눈으로 우리들을 훑어봤다.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깜짝 놀라며 내게 총구를 겨눴다. “뭐, 뭐하는 짓이야! 움직이지 마!” “절 인질로 잡으세요.” 나는 놀라울 정도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무, 무, 무슨 수작이야! 인질을 자청해?” “인질 되는 게 취미거든요.” “헛소리 하지 마!” 내가 생각해도 헛소리였다. 나는 좀더 고차원적인 미끼를 던졌다. “보세요. 전 귀족에....... 여자입니다. 어때요. 가장 이상적인 인질 아닌가요?” 속아 넘어가라. 속아 넘어가라. 속아 넘어가라. “여, 여자? 넌 가슴이 없는데! 게다가 바지를 입었잖아!” “바지 입은 가슴 빈약한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는 건가요? 지독한 성차별 발언이로군요! 그런 발상 때문에 이 나라가 선진국이 안 되고 있는 거야! 닥치고 날 인질로 잡으라니까! 난 한 달에 한 번씩 인질이 안 되면 발작이 일어나는 특이체질이라고! 사람 좀 살려줘!” 나는 생각나는 대로 소리치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이상한 기백에 눌려 당황하던 강도는 황급히 내 목을 휘감고는 머리에 총을 겨눴다. 좋아, 이제 문밖으로 나가면 팔꿈치로 복부를 찍은 뒤에 엎어치기로....... “뭐하고 있어! 어서 금고 열어!” 뭐? 나는 아들 강도에게 소리치는 아버지 강도를 보고는 환장할 것 같았다. 저 금고 안에 불로불사의 물약이라도 들어 있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금고가 중요하냐 아니면 목숨이 중요하냐! 왜들 이러는 거야 정말! 나는 목이 졸린 채 말했다. “저어....... 강도질은 다음에도 또 할 수 있지만 목숨은.......” “닥쳐! 너희 귀족들은 몰라! 우리한테 저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 돈이 필요하단 말이야!” 나는 말을 멈췄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절대로 전문 강도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항복해라. 지금 항복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카론 경!” 어느새 일어난 카론 경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세요. 우리가 깨웠나 보네요.”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 내가 자네 같은 줄 알아?” 아니, 그렇다고 강도들 앞에서 개망신을 주십니까. “흥분한 강도들을 자극해 봐야 인명피해만 생겨. 그래서 돈을 훔쳐 도주할 때 체포하려고 했지만....... 강도도 경찰도 그리고 자네도 모조리 엉망진창이로군.” “시, 실망시켜 죄송합니다.” 흥! 살신성인한 사람에게 폭언이시네요! 강도는 카론 경의 싸늘한 태도를 보고는 더욱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장 그 칼 내려놔! 안 그러면 이놈을 쏜다!” “너야말로 항복해라.” 우아아아! 카론 경! 자극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잖아! 하지만 카론 경은 내 목숨 따위는 알바도 아니라는 듯 도리어 검을 뽑는 것이었다. “포기해라, 범죄자. 정말 죽고 싶은 건가.” 카, 카론 경. 왜 자꾸 이 양반 심기를 건드리는 겁니까. “저, 정말 쏘겠어!” 그러나 카론 경은 무서울 정도로 주저 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럼 쏴라.” 카론 겨어어어어어어엉! 그렇게 절 죽이고 싶었습니까? 이참에 귀찮은 녀석 하나 처리하자, 라는 건가요? 그러나 이자는 내 머리에 들이댄 총을 떨고 있을 뿐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잘 보니까 방아쇠를 못 당기는 게 아니라....... 아예 방아쇠가 없네? “못 쏠 테지. 가짜 총이니까.” 카론 경이 말했다. “엔디미온 경, 상대의 무기를 파악하는 주의력은 기사 자질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어떻게 가짜 총인지도 모른 채 인질이 될 생각을 했나. 자네의 무모함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카론 경은 도리어 나한테 화를 내고 있었다. 미, 미안하게 됐네요! 가짜 총인지도 구분 못하는 무지한 어린애라서! 나는 울컥하며 강도의 팔을 잡아채 바닥에 메쳤다. 정말이지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을 힘없는 강도였다. 그와 동시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구석에서 벌벌 떨던 경비원이 뛰어가 다른 젊은 강도에게 주먹을 날렸다. 쳇, 안전해지니까 갑자기 용기가 용솟음치나 보군. 카론 경은 한숨을 내쉬며 문으로 걸어가 자물쇠를 열었다. 동시에 경찰들이 몰려 들어왔다. “저 더러운 평민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경찰들은 마치 폭도처럼 쓰러진 강도들을 짓밟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가짜 총을 쓸쓸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나무로 만든 정교한 모형이었다. 꽤 괜찮은 실력이다. 이 실력으로 총 말고 조각상을 깎았다면 아주 멋졌을 것이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경찰서장쯤으로 보이는 자는 이제 저항도 못하는 강도들을 끝도 없이 걷어차고 있었다. “미천한 놈들이 감히 이분들을 인질로 잡을 생각을 해?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 아예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순간 카론 경이 소리쳤다. 미성이었지만 또한 굉장히 위압감을 지닌 목소리였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처벌은 너희들이 하는 것이 아니야!” 서장은 몹시 불쾌한 시선으로 카론 경을 노려봤다.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엉?” 당신이야말로 저 흑발의 남자가 누군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카론 경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마자 서장의 태도는 그야말로 ‘획까닥’ 바뀌어 버렸다. 평생을 연극에 바친 대배우도 흉내 내지 못할 모습이었다. “맙소사! 그 고귀한 은의 기사 나리께서 이런 천한 무리들을 손수 체포해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당장 시장님께 연락해서 접대 준비를.......” 얼씨구.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는 게 바로 저런 거로구만. 그때 포박 된 강도가 고함쳤다. 그것은 정말 가슴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핏덩이 같은 울분이었다. “웃기지 마! 뭐가 은의 기사야! 결국 다 똑같은 이 더러운 왕국의 하수인일 뿐이야!” 순간 경찰봉이 그의 얼굴을 때렸지만 그는 계속 무서운 표정으로 카론 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몰라. 이 나라가 평민을 어떻게 다루는지. 당신은 절대 몰라!” “이, 이놈이 미쳤나! 입을 틀어막아!” 경찰들이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짓밟는 장면을 바라보던 카론 경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 나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알고 있다. 지겨울 만큼.” 연행되어 끌려 나가던 내 나이 또래의 강도는 나를 보자 절박하게 외쳤다. “저는 죽어도 됩니다. 하지만 동생만은 살려주세요! 병원에서 살리고 싶다면 돈을 더 가지고 오라고 해서, 제가 감옥에 가면 아무도 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제발!”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어서 걷지 못해!” 결국 저들은 부자(父子)였다. 병에 걸린 자식이자 동생을 고칠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짜 총 따위를 들고 무작정 이런 곳을 덮쳐 금고를 열기 위해 발버둥치던 어수룩한 저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평민이기 때문에 가난한 평민이 한번 몹쓸 병에 걸리면 (그것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고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 역시 ‘지겹도록’ 알고 있는 것이다. 서장은 카론 경 앞에 와서 굽실거렸다. “추한 꼴 보여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당장 편히 쉬실 수 있는 곳을 마련.......” “그보다 저들의 신상명세가 알고 싶다.” “예? 저 강도들 말입니까?” 서장은 영문을 알지 못해 두 눈을 껌뻑거렸다. 3 병원에 도착한 카론 경은 왕실 기사 앞에서 잔뜩 긴장한 원장에게 말했다. 마치 무도회장을 들어온 것 같은 호사스러운 원장실이었다. 아까 라운지가 커피 맛보다 커피 잔에 더 신경을 쓰는 곳이었다면 이 병원은 환자 건강보다는 환자 주머니에 더 신경 쓰는 곳이라는 인상이 역력했다. “이 서류에 있는 소년, 지금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걸로 안다.” 카론 경은 서장이 제출한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졌다. 황급히 그걸 읽어본 원장은 소년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겨우 중병에 걸린 자기 환자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아! 이 아이 말이십니까! 혹시 평민을 받아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당장 내쫓겠습니다. 보호자가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해서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입원을 시켜줬을 뿐입니다.” 맙소사. 저렇게 스트레이트하게 타락하는 사람도 드물지. “그게 문제일 리가 있겠나. 길게 말 안하겠다. 그 소년 고쳐라.” “예? 예?” “정확히 한 달 후에 다시 오겠다. 그때도 지금과 같다면 이 병원의 의료수준을 기준미달로 간주해 왕실에 병원 폐쇄를 요청할 것이다. 알겠나. 네가 의사라면 치료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라 믿는다.” “아, 아, 알아 모시겠사옵니다.” 카론 경의 무시무시할 정도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질려버린 원장은 이유도 모른 채 어떻게든 고치겠다며 맹세했다. 돈 없으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며 아버지와 아들을 강도로 만든 인간이 말이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던가. 너무나도 쉬워서 욕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치료비는 내게 청구서를 보내라.” “아, 아닙니다! 어떻게 소인이 감히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님께 청구서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카론 경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굽실거리는 원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렇겠지. 네게는 목숨을 걸만큼 절실한 돈이 아닐 테니까.” 그는 드물게도 독설을 내뱉었다. 4 병원을 나온 카론 경은 곧바로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와아, 카론 경.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무조건 고쳐 놔! 라니, 아까는 완전히 폭력배 같던데요?” “말조심해라. 누가 폭력배라는 거냐!” “헤헤, 농담이에요. 정말 은의 기사 같았어요. 그 부자도 이제 인정할 걸요?” “시끄럽군. 나는 단지 일을 공정하게 처리했을 뿐이야.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없다.” “네에. 물론 그렇겠지요오.” 나는 ‘키스의 미소’를 보이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 카론 경의 뒤를 따랐다. 역 앞에 도착한 우리는 카론 경이 타야 할 열차가 방금 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가여운 카론 경. 또 꼼짝없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 짜증의 불똥은 내게로 튀었다. “다 자네 탓이다.” “엥?” “자네와 있으면 안 좋은 일만 생겨. 자네는 재앙을 부른다.” “우아아아! 너무해요!” 내가 들어본 폭언 중에서도 실로 엄청난 레벨이지 않은가! 재앙이라니! 재앙을 부르는 인간이라니! 하지만 카론 경은 나와는 더 이상 얘기도 하기 싫다는 투로 저 멀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아, 이제 확실히 알겠어. 저 사람은 너무 어른스러운 것이 아니라 너무 어린애 같은 거라고! 5 “재앙이나 부르는 인간........ 지명 다녀왔습니다.” 나는 반항기에 접어든 십대 소년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리더구트의 문을 열었다. 어차피 나는 몸 바쳐 일해 봤자 카론 경에게는 지진이나 우박과 동급으로 취급받는단 말이지. 쳇. 쳇. 쳇. 다음부터는 같이 놀아주나 봐라. ‘그건 그렇고.......’ 나는 뚱한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솔직히 이제는 저 양반이 무슨 짓을 하든 궁금하지도 않은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저건 또 무슨 신선한 삽질이란 말인가. “아아, 미온 경. 돌아왔어요오?” “보시다시피. 그런데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라는 뒷말은 속으로 꾹 삼켰다. “보면 모르겠어요?” “봐도 모르겠는데요.”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러니까 지금 키스 경은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로 이리저리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두 손에 쇠막대기 같은 걸 들고! 당신 지금 동족(그러니까 외계인) 과 교신이라도 하려는 거요? “수맥 찾고 있답니다아.” “아아, 그러시겠지. 항상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네요!” 생긋 웃는 내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누구는 재앙 인간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누구는 퍼질러 자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집구석에서 수맥을 찾아? 강대한 육갑자의 증오가 단전으로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고도의 인내력으로 주화입마를 다스린 나는 투덜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키스 경을 지켜보던 랑시가 말했다. “키스 경, 아침부터 저러고 있어. 잠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결리는 게 아무래도 수맥 때문인 것 같다고.” “하아. 그것 참 독창적인 해석이네. 하지만 하루 열네 시간씩 잠들어 있으면 천하장사라도 허리가 아플 것 같군!” 이쪽은 허리가 끊어질 만큼 잠들어 보는 게 소원이라고! “허리는 남자의 생명이라면서,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수맥을 찾아 없애야 한대.”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 부하들의 허리까지 풍수지리학적으로 고민해주시고! 단장님의 디테일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 정말! 입에 쿠키를 문 랑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못난 아들을 둔 부모의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키스 경, 최근 증세가 더 심각해.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저런 시시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건 고양이나 가능한 짓이라고.” “하루 종일? 한 번도 쉬지 않고?” “응. 키스 경은 시간을 가장 무의미하게 죽이는 방법을 찾아낸 거야.” 랑시는 자못 걱정스런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헤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은 랑시도 시간의 소중함을 느낄 때가 있....... 아니, 잠깐. “이봐요, 랑시 경.” “응?” “하루 종일 키스가 저러는 걸 봤다는 말은 너도 하루 종일 같이 노닥거렸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 “당신, 키스 경과 다를 바가 뭐요?” 랑시는 ‘어머나, 들켜버렸네.’ 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만 곧 자기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머그 컵을 들고는 자기 방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는 것이었다. “미온 경, 너무 빡빡하게 살면 정신 건강에 해로워요. 아무튼 심심하구만.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치마 입은 괴소년 주제에 머릿속은 아주 묏자리 봐둔 노인네로구만! 대체 이놈의 기사단은 언제쯤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거야. 나는 시종들이 가져온 차가운 홍차를 홀짝거리며 엘로드인지 뭔지, 라고 부르는 작대기를 들고 돌아다니는 키스 경을 지켜봤다. 나조차도 부러운 훤칠한 키에 매끈한 피부, 장난기 가득한 귀여운 미남 형, 우락부락하지도 가녀리지도 않은 다부진 체형, 나처럼 툭하면 여자로 오해받을 일도 없는 저 완벽한 하드웨어로 기껏 하는 일이 수맥 찾기라니....... 전력을 다해 인생을 낭비한다는 것은 바로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그때 키스의 환호성이 터졌다. “아아앗! 찾았습니다아!” “하아?” “반응이 와요! 분명 이 밑에 수맥이 있어요!”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 밑은 우리 목욕탕이니까.” “이, 이럴 수가! 제 허리가 결리는 것이 목욕탕 때문이었단 말입니까아!” “얼씨구?” 어째서 결론이 그래? 잠시 가만히 있던 키스 경은 내 머리 위로 불쑥 쇠막대기를 들이댔다. “아앗! 미온 경 머릿속에도 수맥이!” “으이구! 남의 머리가지고 풍수지리 하지 마!” 키스 경은 이 짓도 흥미를 잃었는지 들고 있던 쇠막대기를 휙 던지고는 소파 위에 벌러덩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진짜 산만하기가 애새끼 같았다. 한 대 쥐어박고 싶구만. “오면서 카론 경 만났어요.” “뭐래요?” “나보고 재앙이래요.” “적절한 비유로군요오.”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자기야말로 재앙 그 자체잖아! 우박 주제에!” “미온 경이야말로 대지진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울컥. “당신은 호환, 마마야!” “그럼 미온 경은 흑사병.” “시끄러워! 이 전염병!”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냐하하하’하고 웃고 있는 키스 경의 머리로 쿠션을 집어 던졌다. 으이구! 이 인간이랑 대화하면 나까지 정신연령이 하락한다니까! 6 지명을 다녀오면 다음 지명까지는 보통 하루 정도는 쉴 수 있다. 휴가도 방학도 없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황금 같은 개인 시간이라고나 할까.(사실 빨래나 쇼핑도 이때 몰아서 한다) 이때도 브리핑에는 참석해야 하지만 업무는 없기 때문에 지명을 다녀온 기사들은 대충 자다가 일어난 모습 그대로 머리손질도 안하고 어슬렁어슬렁 다음 날 브리핑에 나타나기 마련이다.(스왈로우 나이츠의 화려한 모습만 보던 귀부인들이 본다면 피를 토할 광경이겠지만 사실 우리들도 귀찮은 거 싫어하는 평범한 20대 남정네들이라 어쩔 수가 없다. 아! 여기서 루시온, 레녹 경은 제외다.) 오늘 하루 종일 쉬게 된 내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오전 내내 수면 2) 키스 경을 들들 볶아 점심을 만들어 먹는다. 3) 오후 내내 수면 4) 이멜렌 님의 저택을 방문해 초상화 모델이 되어 준다. 5) 카론 경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대로 저녁까지 얻어먹는다. 6) 거실에서 동료들과 노닥거린다. 7) 지스의 고양이들과 장난치다가 잠든다. 에이이! 이런 맥 빠진 청춘 같으니라고! 라고 비난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격무에 시달리고 난 다음 날까지도 페르난데스 왕자님처럼 도서관을 간다거나 카론 경처럼 검술훈련을 하고 싶은 욕구가 전혀 생기질 않는 발전 없는 소시민이라서 말이지. 적어도 휴일만큼은 게으름의 정점을 보여주는 ‘키스 경 라이프’를 체험하고 싶단 말씀이야. 아무튼 이런 기대를 품고 반바지 차림으로 촐랑거리며 브리핑에 참가한 내게 키스 경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졌다. “미온 경. 내부지명입니다아.” “뭐라고오오오오오!” 나는 브리핑이 끝나는 대로 거실에서 잠들기 위해 가져온 베개를 툭 떨어뜨렸다. 동료들은 ‘너 재수 더럽게 없구나.’ 라는 표정들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하필 오늘의 나야! 이 왕실의 법이라는 것이 꽤 냉혹하다. 귀족이나 왕족들이 행하는 내부지명은 절대 거절할 수 없고 또한 내부지명 했다고 다음 날 쉬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모처럼 목욕을 하려고 온몸에 비누거품을 묻혔는데 마침 단수가 되었다든가, 벼르고 벼르던 그녀와의 데이트 날 백만 년만의 초대형 태풍이 몰아쳐서 극장이고 동물원이고 모조리 박살나버렸던가 하는 그런 끔찍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대체 어떤 악마야? 내 달콤한 하루를 산산조각 낸 장본인이! 나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어떤 분께서 휴가 중인 소인을 애타게 찾으시는 건가요.” “오호호호호. 그렇게 알고 싶어요?” “냉큼 말하지 못할까!” “바로 우리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오르넬라 성녀님이십니다아.” “오. 맙소사.” 나를 포함한 동료들은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성호를 그었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차라리 아이히만 대공 쪽이 생환 확률이 높다고! 내 표정을 본 키스가 히죽 웃었다. “만약 휴가라서 가기 싫다면 미온 경이 지명을 거부했다고 전할게요.” “아니요. 가야 해요. 다리가 부러지고 이 세상이 지옥 불에 타올라도 무조건 가야 한다고요.”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만두 전하한테 반항하면 했지, 이 젊은 나이에 박제가 되어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때 나와 같은 반바지에 아예 윗도리까지 벗을 꼴로 육체미를 자랑하던 쇼탄 경이 뭘 그렇게 걱정 하냐는 듯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괴로워하지 마. 그냥 오늘 하루 신에게 바쳤다고 치고 다음에 푹 쉬면되잖아.” 그러나 지금의 나는 꽤 삐뚤어져 있었다. “쳇. 쇼탄 경은 어차피 맨 날 쉬잖아요.” 지명이 없어 오늘도 휴일인 쇼탄 경은 내 말을 듣는 순간 등에 칼을 맞은 것처럼 ‘헉!’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그런 모진 말을!” 다른 동료들은 물론 지스킬마저도 ‘너 성격 정말 나빠졌구나.’ 라는 떨떠름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휴가를 잃고 아무에게나 마구 투정부리는 어린애가 되어버린 나는 두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휙 돌리고 있었다. 쇼탄의 눈에서는 서러움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다들 두고 봐! 곧 여름이 오고 있어! 복수해 줄 테야!” 여름한정 쇼탄 경은 처절하게 외치며 리더구트 밖으로 뛰쳐나갔다. 브리핑 서류를 부채 삼아 팔랑 팔랑거리며 무심하게 쇼탄을 바라보던 키스 경이 말했다. “그 전에 빚을 못 갚아 어디론가 팔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만.”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쇼탄 경이 진심으로 불쌍해진다. 늘씬한 몸을 소파에 길게 기댄 키스 경은 고양이처럼 하품을 한 뒤에 말했다. “자아, 그럼 이것으로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아. 그리고 미온 경은 오르넬라 님과의 화끈한 시간 갖게 된 것 축하드려용.” “만약 내가 죽으면 ‘범인은 키스 경’이라고 써 놓을 테니 기대하세요!”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방으로 향했다. 7 왕실을 찾은 권력가들은 성당에 기부금을 바치고 감사의 표시로 오르넬라 님을 만나 축복을 받는다. 그러니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까놓고 뇌물을 바치기는 좀 껄끄러우니까 저런 파렴치한 ‘돈세탁’을 거치는 것이다.(이 말을 한 장본인은 놀랍게도 오르넬라 님이다.) 그리고 이 세탁 과정의 도우미로 지명 받은 사람이 바로 나 엔디미온 키리안. 음,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범죄에 연루된 기분마저 드는군. 붉은 가마를 타고 성당에 도착한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딴 일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짜증 만점의 표정에 담배까지 물고 있었다. 게다가 걸치고 있는 옷은 입고 있던 중이었는지 벗고 있던 중이었는지....... 으음, 민망하니까 묘사하지 말도록 하자. “미온 구운, 잘 있었어?” 그녀는 콧소리를 내며 제복을 입은 내 허리를 휘감으며 뺨을 비볐다. 일순간 풍겨오는 그녀의 체취가 마약처럼 짜릿하게 엄습해왔다. 가늘게 눈웃음을 보이는 오르넬라 님의 표정은 ‘노골적인 유혹’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뜨겁게 달아오른 욕정을 참지 못하고 나의 본능이 그녀를 와락 껴안게 만들었다.......라는 에로 소설 같은 전개는 없었다. 이래봬도 이 몸은 프로란 말이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두통약 준비했습니다. 궁중 의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특효약이랍니다.” “어머, 고마워라. 역시 미온 군이야.” 그녀는 내가 준비해 온 약을 크리스탈 잔에 담긴 물과 함께 마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글픈 판단이지만, 오늘도 분명히 숙취에 시달리며 나타날 거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거든. 뭐랄까, 호스트 생활 때 몸에 밴 준비성이 지금 꽤 쓸모 있는 처세술로 재탄생한 거라고나 할까. 농담이 아니라, 오르넬라 님은 아무리 육감적인 매력을 풍기고 다녀도 분명 성녀다. 예전 어떤 멍청한 관리가 성녀님을 ‘자신에게 홀딱 빠진 헤픈 여자’라고 멋대로 착각해서는 그녀의 침실로 숨어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불쌍한 인간은 오르넬라 님을 덮치려는 순간 두 다리 사이가 폭발해 버린 것 같은 무시무시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 재산을 압류 당한 뒤 국경선 밖으로 추방당한 뒤였다. 팜프 파탈이 따로 없었다. 성녀님에게 어설픈 수작을 걸 바에는 차라리 독거미가 가득한 방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는 쪽을 추천해 주고 싶다. 둘 다 똑같은 자살행위지만, 최소한 후자가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성의(聖衣)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가는 오르넬라 님에게 내가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절 지명하신 거죠? 보통은 무녀님들이 하지 않나요?” 이 일이 특별히 여성한정은 아니지만 무녀들 놔두고 왜 일부러 스왈로우 나이츠에 출장을 의뢰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후후, 가끔은 색다른 맛도 즐겨보고 싶거든?” “아하하. 벼, 별미였군요. 제가 원래 가끔 먹으면 맛있죠. 네.” 신앙심에 금가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뭘 새삼스럽게 정색해. 왕실 모든 기사의 맹세를 들어준 미오니아 자매께서.” “그때 일은 가급적 떠올리고 싶지 않네요.” 벨벳 커튼에 가려진 탈의실에서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이 나라는 콩가루니까.’ 라는 무척이나 위험한 발언을 흥얼거리던 오르넬라 님은 곧 성의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와아.” “왜 그런 눈으로 봐, 미온 군?” “아니 뭐랄까.......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요.” 성의는 말하자면 그녀의 ‘전투복’이다. 즉, 성직자로서의 업무를 할 때 입는 옷인데 (그녀는 거의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성의를 입은 모습은 지금 처음 봤다.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는 새하얀 드레스는 엄숙할 정도로 좁은 치마폭이 쫙 뻗어 있었고 가터벨트가 살짝 드러난 새카만 스타킹은 금욕적인 백색 슈트와 극명한 조화를 이뤘다. 항상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시켰던 머리칼은 단정하게 풀어내려 어깨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엄격한 것인지 관능적인 것인지 구분할 도리가 없었지만 아무튼 방금 전까지 비틀거리며 숙취에 시달리던 여왕님이라고는 짐작도 못할 대변신이었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지? “아하하. 카리스마 넘치시네요. 뭐랄까....... 성직자 같은데요?” “흥. 이렇게 안 입으면 누가 돈을 내겠어.” “이런. 말투는 여전하시군요.” 꽉 조이는 성의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투덜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8 오르넬라 님이 기부자를 만나는 일은 응접실에서 이뤄진다. 본래는 성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축복을 받는 것이 정식 절차지만 귀족은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고상하기 그지없는 탄원 덕분에 이런 식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3천만 셀링의 기부금을 낸 루코스 백작이라는 중년의 남자는 첫인상부터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엄청난 기부금을 냈으니 왕실이 귀빈대우를 해주는 거야 당연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르넬라 님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의 가슴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루코스는 최근 자기 영지에서 광맥이 발견되어 벼락부자가 된 졸부였다. “이거, 이거 푼돈을 좀 냈다고 성녀님이 직접 소인을 접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국왕 전하라도 된 기분이로군요. 와하하핫!” 나는 곧바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접대가 아니라 성사(聖事)입니다.” 귀족이라면 그에 걸 맞는 품위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라는 다음 말은 겨우 삼켜야 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대접하는 만두 전화의 신신당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오타 왕국은 이 인간의 광산을 높은 값에 사겠다고 제안한 상태. 그런 식으로 광물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왕실에서 사들이기 위해서는 이 재수 없는 루코스 백작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 접대가 맞았다. 내 말을 들은 루코스는 마치 모기를 쫓아내듯 손을 휘휘 젓는 시늉을 하며 오르넬라 님에게 치근덕거렸다. “생각보다 훨씬 미인시구려. 지금까지 만난 여자 성직자들은 모조리 할망구에 박색이라 실망했는데 성녀님 얼굴을 보니까 신앙심이 절로 생깁니다, 그려. 하하!” 평소 같으면 당장 대폭발했을 오르넬라 님은 끓어오르는 살기를 웃음의 가면으로 숨기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최대한 잘 대접하라는 전하의 명령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루코스는 더욱 기가 살아 날뛰었다. “이 루코스, 애국심에 충만한 이 나라 귀족이자 신앙심으로는 첫째가는 독실한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왕 전하와 베르스 교단을 위해 제가 가진 광산을 바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지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뭐가 바치는 거야? 제값 다 받고 파는 것이면서! 게다가 우리 왕실에서 이오타가 제시한 돈과 똑같은 액수를 주고 사겠다는데도, 이오타에 넘길 수도 있다는 발칙한 으름장이나 놓으면서 거들먹거리는 꼴은 정말 봐줄 수가 없었다. 강대국 이오타에게는 푼돈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로서는 허리가 위는 액수랄 말이다! 이건 완전 양심을 발바닥에 붙이고 사는 놈이 아닌가! 루코스는 마치 자기가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말했다. “왕실에서도 최소한의 성의라는 것을 보여줘야 소인의 체면도 살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성녀님?” “최소한의 성의라 하심은......” 오르넬라 님은 피로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루코스는 썩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소인은 오늘 이 왕실에서 하루 머물다 가기로 했습니다.” “그거 잘 되었군요. 오신 김에 부근의 관광지들도 둘러보고 가시면.......” “결혼도 못하는 성녀님이라 욕구불만이 대단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인이 오늘밤 성녀님의 그 아쉬움을 기꺼이 달래드릴까 합니다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동자가 커졌다. 이것은 저 뻔뻔한 호색한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순수하게 저자의 목숨을 걱정하는 위기감 같은 것이었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망쳐.” “뭐라고? 무슨 헛소리야?” “살고 싶으면 닥치고 도망치란 말이야!” 아무리 속된 목숨이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내 절박한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오르넬라 님의 만면에 죽음의 미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루코스는 여전히 상황 파악 못한 채 그녀와의 달콤한 망상에 젖어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이런, 이런. 급하시군요. 성녀님. 밤이 올 때까지 참을 수 없는 겁니까?” “어머, 잘 아시네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방긋 방긋 웃음꽃이 핀 오르넬라 님의 표정을 보자 내 머릿속에서는 ‘우아아! 폭발한다!’라고 외치며 화약고에서 뛰쳐나오는 난쟁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르넬라 님은 그야말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코스 남작 나리께서는 어떤 취향의 여자를 좋아하시나요?” “흐흐, 취향이라....... 나는 역시 화끈한 여자가 좋아.” “어머, 그거 다행이로군요.” 새빨간 그녀의 입술에 퍼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 이후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활짝 웃는 그녀가 고위 성직자용 지팡이(통칭 ‘신앙 봉’)를 테이블 밑에서 꺼내는 모습과 그녀가 그 신앙 봉을 4번 타자의 타격 감으로 풀 스윙하는 모습과 또한 그 신앙 봉이 미처 웃음도 거두지 못한 루코스의 거대한 머리통을 후려치는 모습과 박 깨지는 효과음과 함께 박달나무로 만든 신앙봉이 와지끈 두 동강 나는 모습까지 내 눈 앞에서 슬로우로 진행되고 있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나날이 파워-업 되고 있는 그녀였다. 영혼마저 박살내 버릴 것 같은 그녀의 홈런 성 타구에 루코스는 구어어어어! 하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나가 떨어졌다. 오르넬라 님은 돈 빌려달라고 십 년 만에 찾아온 전남편을 대하는 시선으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루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까불고 있어. 뒈지려고.” 다, 당신. 무슨 지옥에서 올라온 성녀입니까! “오르넬라 님. 이 무자비한 폭력은 대체.......” 나는 완전히 기가 질려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잘 대접하라고 전하께서 신신당부한 사람을 호쾌하게 날려버리시다니요!” 오르넬라 님은 자신의 발밑에서 움찔움찔 하고 있는 루코스와 나를 번갈아가며 보더니 내게 부러진 신앙 봉 밑동을 건넸다. “잠깐 이것 좀 들고 있어 봐.” “이, 이건 왜요?” 내가 잡자마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어머나! 미온 군! 아무리 화가 났기로서니 귀족 머리통을 후려길기면 어떻게 하니! 이 누님은 가슴이 아프구나! 비록 너는 화형당하겠지만 네 정의감만큼은 영원히 기억해 줄게.” “성녀님. 지금 개그 할 땝니까!” 나는 밑동을 집어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근래 키스 경과 만나는 것 같더니 이쪽도 전염된 거 아냐? 이 여왕님 성격 뻔히 알면서 어떻게든 말렸어야 하는 건데, 하는 후회심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왔다. 그녀는 답답한 성의를 풀어헤치며 담배를 물었다. “신께서 너무 바쁘셔서 내가 대신 천벌을 내린 것뿐이란다.” “이 인간은 그렇데 납득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보나마나 광산을 이오타에 넘기겠다면서 생난리를 칠 게 뻔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깨어나기 전에 묻어버리는 편이 좋겠지? 아니면 박제를 해 버릴까나.” “왠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농담은 그만해 주세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흥, 그까짓 광산.’ 이라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응접실을 빠져나가며 말했다. “미온 군, 잘 들어. 광산 하나 잃는다고 망하는 나라는 없어. 하지만 자존심 하나 잃는 나라는 망하는 거야. 사내자식이 그것도 몰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루코스를 후려친 것은 최선의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실은 결코 품위를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든 귀족들에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알려준 것이었다. 적어도 앞으로는 이런 시시껄렁한 공갈로 왕실의 인내심을 시험할 귀족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이 좀 점잖지 않았다는 점은 오르넬라 님의 취향 탓으로 넘기기로 하자. 아무튼 항상 술에 취해 왕실 일에 관심도 없는 것 같은 그녀도 실은 상당한 결단력을 지닌 정치가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오르넬라 성녀님 외에도 아이히만 대공이나 페르난데스 왕자님, 카론 경, (그 놈의 아부근성만 어떻게 좀 한다면) 위고르 공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있는데도 이 베르스 왕국이 약소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시시껄렁한 공갈이나 치고 다니는 이 루코스 남작 같은 소인배들이 이 나라 권력층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강산과 함께 이오타로 사라져주세요. 그게 이 나라를 위한 길이니까.”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루코스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부탁했다. 9 “아, 대체 뭐가 뭔지.......” 나는 터덜터덜 리더구트로 돌아가고 있었다. 결국 정신을 차린 루코스 남작은 급히 달려온 헬스트 나이츠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잔뜩 겁에 질려 ‘무, 무조건 광산을 교단에 기부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하느님을 깔보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였다. 하긴, 누구라도 신앙 봉으로 장쾌하게 얻어맞는다면 오욕칠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단숨에 개과천선할 것이다....... 라기보다는 오르넬라 님도 카론 경도 가끔 수틀리면 꽤나 흉포해질 때가 있다는 사실에 ‘성질 건드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어쨌든 박력 넘치는 종교 체험은 이걸로 충분하다. 신앙 봉을 부우우우웅! 휘두르는 오르넬라 님의 섬뜩한 미소와 구어어어!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루코스의 우울한 표정이 트라우마가 되어 내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으니까. 남은 소중한 반나절은 모조리 수면에 투자할 것이다! 라고 생각할 때였다. “저기요. 여쭤볼 것이 있는데요.” “네?”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상대는 초라해 보이는 반대머리 아저씨였다. 그는 내 화려한 제복을 보고 귀족으로 착각했는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분명 평민이었다. “저어, 본국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아, 본국이요?” 나는 이 사람이 새로 온 잡역부라는 것을 알았다. 왕궁에 출입하는 평민들은 모두 고용된 자들이다. 청소라든가 세탁이라든가. 보수도 상당히 괜찮고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는 계속 일할 수 있는 평생직장이라서 왕실에 고용된 사람들은 평민 여성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대상 중 하나다.(어린 나이에 시종으로 들어와 노인이 되어 귀족 저택의 집사가 될 때까지 일하다가 자기 손자에게 대를 물려주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있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온 사람들은 십중팔구 길을 헤맨다는 것. 이곳에서 일 년째 생활하고 있는 나조차도 가끔 길을 잃을 정도로 이놈의 왕궁은 지나치게 제멋대로 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이곳은 표지판 믿고 가다가는 하루 종일 헤매다가 홀린 듯이 처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본궁이라.......” 나는 설명해 주기가 난감해 말을 흐렸다. 왜 이런 것 있지 않나. 두 번째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셔서 십 분 정도 쭉 가시다보면 다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 계단으로 계속 올라가셔서 빨간 벽돌집이 나오면 또 거기서 좌측으로....... 라는 식으로 설명하다보면 듣는 상대가 패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고 말하는 나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뭐, 어차피 지금부터는 휴식 시간이니까, 하는 생각에 나는 방긋 웃었다. “따라 오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한참을 걸어가는 동안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왕실에 ‘입사’한 거라면 좀더 들떠도 좋을 텐데 말이지. 무료해진 내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본궁에서 어떤 일을 맡으셨나요? 청소 쪽? 아니면 목수?” 제법 눈썰미가 좋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이번에는 짐작하는 족족 틀렸다. 계속 되는 내 물음에 그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냥 만날 사람이 좀 있어서.......” “예? 본궁에요?” “.......네.”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평민이 본궁에 만날 사람이 있을 리가? 아니,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거부당할 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본궁은 국왕 전하를 비롯한 왕족들이 기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기 때문이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드님 만나러 오셨나 보네요?” “네? 아, 네. 제 아들을 만나러.......” 슬쩍 그를 시험해 본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왕실이 가족 면회를 위해 평민에게 본궁 출입을 허가할 리가 없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출입 허가증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때였다. 사방에서 경비병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저놈이야! 무단침입자다! 잡아!” 뭐? 무단침입? 그 순간 이자는 품속에서 칼을 꺼내 내 목을 겨눴다. “가, 가만히 있어!” “얼레?” 나는 곧 그에게 위협 당하며 근처에 있는 붉은 벽돌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익숙한 분위기는 분명 어제도 느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나 또 인질된 거야? 10 “당장 인질을 풀어주고 항복하라! 도망칠 곳은 없다!” 집밖에서는 근위대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손발이 묶인 채 왕궁 한복판에서 인질이 되어 버린 나는 문득 어제 읽은 신문이 떠올랐다. 이 달의 운세 나서지 말라. 뭘 해도 안 된다. 노력한 만큼 욕만 먹을 운세다. 허나 정열적인 모험의 신이 당신을 총애하니 한 달 내내 지루할 일 없어 좋겠구나. “......좋긴 개뿔이.” 나는 울상을 지으며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날 인질로 지명해 주신 아저씨에게 말했다. “있잖아요. 지금 큰 실수 하시는 거거든요?” “시, 시, 시끄러워!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하지만 난 여기서 잡힐 수 없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래, 이유 없이 감옥 가는 사람 어디 있을까. 다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강도도 되고 인질극도 벌이는 거지.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훈계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내가 ‘실수’라고 말한 것은 그게 아니고....... 나는 쓸쓸한 미소를 보이며 중얼거렸다. “저는 인질로 가치가 없걸랑요.” 그 순간 밖에 도착한 헬렌 경의 서릿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딴 것 인질로 잡든 말든 상관 안 해! 아니, 그 놈은 죽여도 죄를 묻지 않겠다! 절대 문제 삼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좋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쓸쓸히 미소 짓는 내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저 아줌마, 지금 인질범한테 인질을 죽이라고 종용하고 있어. 이게 말이 돼? 길 잃은 아저씨를 바래다 준 대가가 뭐 이래? .......아아, 이제 됐어. 어차피 난 불행해지기 위해 태어난 대재앙이니까. 안에서는 칼로 위협 당하고 밖에서는 ‘죽여도 범죄가 안 되는 녀석’ 취급당하니 기분이 아주 하늘을 날아올라 그대로 열반해 버릴 것만 같았다. 몰라, 몰라. 이번 달도 운수대통이야. 이대로 가면 내일쯤에는 이 나라 공주로 오해 받아 흉악한 테러리스트들의 인질이 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겠어! 내가 몸을 들썩거리자 곧바로 그의 칼이 들이닥쳤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죽여 버릴 거야!” .......내일을 볼 수나 있을까. 그런데 내 목덜미로 다가온 칼끝을 보는 순간 의문이 생겼다. 이것은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생각해 보라. 차라리 어제의 강도들은 그 범행 동기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자는 어떤가. 돈을 위해서? 감히 왕실을 털려는 좀도둑은 들어본 적도 없다. 게다가 이런 엉성한 칼 한 자루 품에 안고 필사적으로 본궁을 가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국왕 전하께 문안 인사드리고 싶어서는 아니리라. “어째서 그렇게 본궁을 가려는 거죠?” 절박한 표정으로 창밖을 힐끗 힐끗 쳐다보는 그는 처음에는 대답조차 없었다. 내가 몇 번이나 물어보자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놈에게 말하면 뭐가 달라져?” “하지만 들어줄 수는 있잖아요. 지금 당신 사정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하나뿐이에요.” 그의 떨리는 눈빛은 이 무모한 행동이 결코 속된 욕심 때문에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어제의 강도처럼 이 사람도 어떠한 강대한 불가항력에 의해 인질범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었다. 악행을 동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동정할 수 있는 것이다. 감상적인 인간이라고 욕해도 좋다. 하지만 분명 나는 지금 내 목에 칼을 들이댄 자에게 연민을 느꼈다. 이윽고 주저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지극히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또한 솔직한 목소리였다. “내 딸이....... 위험해.” “예?” “반년 전 왕실의 고위관리라는 자가 찾아와 딸아이에게 말했어.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울먹임과 함께 꺼낸 이 아버지의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자기 딸을 왕실 관리가 우연히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그녀에게 값비싼 보석들을 선물했고, 나중에는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단다. 자신을 거부하면 가족들 모두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다고. 흔해빠진 귀족의 폭력이었다. 결국 열여섯 살의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러나 그 이후 그녀에게 들이닥친 것은 당장 아이를 지우라는 협박이었다. 그것을 거부한 그녀는 도망쳤지만 지금까지도 그 왕실관리는 그녀를 뒤쫓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평민은 귀족에게 어떤 고소도 할 수 없고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그녀는 귀족을 꼬드겨 한몫 잡으려 한 음란한 여자로 몰려 같은 평민들에게도 멸시를 당하고 있다고 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위해 그 관리를 죽이기 위해 왕실에 몰래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그래서 본당에 가려고 했습니까.” 경비가 철통같은 그곳에 저런 녹슨 칼 하나 가지고 들어가 고관대작을 암살하겠다고? 그것도 대낮에 본당이 어딘지도 몰라 헤매는 주제에? 정말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니, 자신도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게 또 평민인 것이다. 법도 왕실도 그 무엇도 평민의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그때 공기를 찢어버리는 굉음과 함께 두터운 문이 무너져 내리며 곧바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 들어왔다. 순식간에 이 무모한 인질범이 들고 있던 칼이 불꽃을 튀기며 바닥에 떨어졌다. “카론 경.” 단 일 초 만에 인질범을 무력화시킨 카론 경은 자신의 검 끝을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얼굴에 겨눈 채 일말의 동정심도 없 는 눈매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론 경이 나를 바라보며 심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자네인가. 믿어지질 않는군. 인질이 될 곳만 골라서 찾아다니는 건가?” “.......저도 저 자신이 신비롭네요.” 애당초 어차피 프로 중에 프로 카론 경을 상대로 (게다가 나처럼 가치 없는 인질을 잡고서는) 한순간도 버텨낼 수 없는 인질범이었다. 그는 뒤이어 들이닥친 근위대에게 포박당한 채 끌려 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는 꽉 다문 입술로 침묵하고 있었다. 너무도 억울해서 커다랗게 울 수조차 없었던 것이리라. 나는 집밖으로 끌려 나가는 그에게 물었다. “그 왕실관리가 누구입니까. 말해주세요.” 그는 충혈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저주어린 목소리로 그 이름을 말했다. “.......법무대신 위고르.” 지, 지금 누구라고? 나는 무력하게 끌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표정을 잃은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1 이건 왕실로서는 대수롭잖은 사건이었다. 경비병 몇몇이 문책 당하고 경비 병력을 좀더 증강시키는 것으로 사건은 끝이 날 것이다. 아마 전하께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하겠지. 하지만 결코 내게는 그냥 흘려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인질범의 마지막 말이 끝없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위고르 공이라고?’ 그 파렴치한 인간이 바로 이 나라의 법을 관장하는 위고르 공? 본래 위고르 공에게 바람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유부남이긴 하지만 제법 근사한 얼굴에 이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엘리트 관리니까 카론 경처럼 금욕적으로 사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테지. 물론 주책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책바가지라고는 해도 최소한 여자를 존중할 줄은 아는 사람이라 믿었다. 그런데 어째서! 복잡한 기분을 안고 리더구트를 돌아가던 나는 우연찮게 카페에 있는 위고르 공을 볼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련된 슈트에 금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그는 또 어떤 젊은 아가씨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컨대 작업 중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를 지켜보던 나는 곧 결심을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먼저 반응을 한 쪽은 위고르 공이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어, 엔디미온 경. 여긴 무슨 일인가.” “.......위고르 공.” 맞은편의 아가씨는 나를 보자마자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정말 기사? 조각 같은 분이로군요. 여기 앉으세요.” 위고르 공은 헛기침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험! 이거 엔디미온 경을 괜히 부른 것 같군요. 하하! 아니, 그보다 자네는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둡나?” “저어....... 위고르 공, 드릴 말씀이.......” “뭔가? 자네답지 않게 정색을 다 하고.” “따로 말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럴 것 없어. 지금 말하게나.” 위고르 공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손을 내저었다. 정 그러시다면....... 나는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평민 소녀를 임신시켰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푸우우우우우우욱 힘차게 차를 뿜는 분출 음과 함께 뒤이어 따귀를 갈기는 아픈 소리가 터졌다. ‘이런 짐승!’하고 소리치곤 씩씩거리며 사라져 버린 아가씨를 뒤로 한 채 졸지에 축생으로 전락한 위고르 공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뺨을 부여잡고 있었다. “위고르 공,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아악!” 순간 위고르는 내 어깨를 잡고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아이히만인가? 아이히만이겠지? 아이히만이로군!” “예? 예?” “그런 괴소문을 뻔뻔하게 퍼트리고 다닐 인간은 그 괴물 같은 늙은이밖에 없어! 그렇지? 응? 그 악마가 시킨 거 맞지! 아이히만은 자신의 위협적인 라이벌인 나를 제거하기 위해 그 따위 흑색저질비방전을 하고 다니는 게 분명해!” “그, 그, 그건 아닌데요.” 위고르 공. 아이히만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거의 공포로군요. 하지만 아이히만 대공은 당신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만약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좀더 무시무시한 방법을 동원했을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나는 이 격렬한 반응을 보며 위고르 공은 절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교활한 척 하지만 본래 거짓말에 재능 없는 사람이다.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렇게 얼굴이 빨개져서 중구난방 당황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인질범이 내게 한 말에 대해 털어놓았다. 입을 쩍 벌린 채 내 말을 들은 그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지금 관리하는 아가씨들만으로도 벅찬 내가 뭣 하러 그런 짓을 해!” 이, 이미 벅찬 상황이었습니까? 그거 납득할 수 있는 이유긴 하지만 참으로 듣기 민망하군요. 어쨌든 오해가 풀어지자 나는 안도의 웃음을 보였다. “역시 위고르 공이 아니었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이게 다행이야? 이게?” 위고르 공은 퉁퉁 부어오른 뺨을 들이대며 피눈물을 흘렸다. (나름대로 착실하게 살아온) 그에게 정말 난데없는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12 위고르 공이 아니라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인질범이 겪은 그 억울한 사연마저 거짓말이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누군가 위고르 공을 사칭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피해자인 소녀를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정을 다 들어놓고 이제와 못 들은 척 할 수는 없었다. “못 들은 척 해라.” 카론 경이 말했다. “하지만 카론 경!” 그 인질범과 만나기 위해 카론 경의 집무실로 찾아간 나는 (예상대로) 냉담한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다. “관계자 외에는 죄수를 심문할 수 없다. 돌아가.” 소녀가 있는 곳을 알고 싶다는 내 부탁을 카론 경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카론 경도 같이 들었잖아요. 누군가 위고르 공을 사칭하는 놈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겁니다!”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수사는 내가 한다. 너의 영역이 아니야. 나가라.”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서류를 넘기며 내뱉은 그의 말투는 차분한 미성이었지만 또한 내 앞을 가로막는 두터운 얼음벽 같았다. 그 이후 자그마치 두 시간이 넘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쳐다봐주지 않았다. 내가 저 사람 귀에 무슨 말을 집어넣어도 저 입에서는 ‘돌아가!’ ‘나가!’ ‘꺼져!’ 라는 결과만 나올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 그 험악한 공기를 뚫고 문이 덜컥 열렸다. 들어온 사람을 본 카론 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고르 공이었던 것이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침울한 표정의 위고르 공은 오른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리자 나는 물론 카론 경조차 놀란 얼굴을 보였다. “그건 대체.......” 위고르 공의 오른쪽 눈에는 시퍼런 멍이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누군가 무자비한 정권을 날린 흔적이었다. 그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누라 님이 알아 버렸다네.” 설마 위고르 공의 사모님이 그 소문을 들은 거? 위고르 공은 이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보다도 열 배는 더 비분강개하며 소리쳤다. “지금 왕궁에는 내가 평민 여자 건드렸다는 그 망할 소문이 산불처럼 퍼지고 있어! 집에 들어가자마자 여편네가 죽창을 들고 덤볐다고! 조금만 늦게 피했으면 심장이 뚫렸을 거야. 게다가 도망치는 나를 괴성을 지르며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이야!” 위고르 공의 사모님은 바바리안이었던가....... 상상만 해도 오싹한 광경이었다. “아무튼 이대로는 내 생명이 위태로우니까 당장 나에게 경호원을 붙여줘! 한둘로는 마누라님한테 어림도 없으니까 완전무장한 군인들 일개중대가 필요해! 그리고 감히 내 이름을 사칭한 쳐 죽일 놈이 누군지 찾아내서 내 앞으로 데려와! 지금 당장!”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위고르 공. 저도 어떤 놈이 겁도 없이 제가 존경하는 위고르 공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지 찾아내고 싶습니다. 돕게 해 주십시오!” 자길 존경하는 말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단순한) 위고르 공은 그 즉시 내 부탁을 허락했다. “좋아. 그 충정어린 자세 아주 마음에 들어. 카론 경과 함께 수사하도록!” 나는 헤헤 웃으며 카론 경을 바라봤다. “이거 어쩌죠, 카론 경? 위고르 경께서 같이 수사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카론 경은 당장이라도 ‘아앗! 짜증나!’라면서 쓰러질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백옥 같은 손으로 이마를 쿡 눌렀다. “.......알겠습니다. 즉시 수사에 착수하겠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서리가 내릴 것 같은 시선으로 노려보는 카론 경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아아, 무서워! 13 위고르 공의 엄명을 받은 우리는 피해를 입은 소녀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임산부인 그녀가 있는 곳은 소도시의 불결한 여관이었다. 하수도의 악취로 가득한 이런 곳에 혼자 몸을 숨기고 있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엔디미온 경, 탐문 수사는 내가 하겠다. 자네는.......” “예, 예. 쥐죽은 듯 잠자코 있겠습니다.” 나는 눈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 경은 낡아빠진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헬스트 나이츠다. 문 열어.” 방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들어가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밀었다. 너덜너덜한 자물쇠는 이미 불청객으로부터 입주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더러운 침대 위에 앳된 소녀가 누워 있었다. 측은할 정도로 마른 몸과 헝클어진 금발 머리칼이었지만, 그녀는 뜨거운 빛을 품은 눈빛으로 우리를 말없이 쏘아보고 있었다. 그것이 베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14 베스는 예전에는 분명 상당한 미소녀였을 것이 분명하다. 못된 남자들의 표적이 될 만큼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초췌한 모습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런 그녀를 제대로 된 병원으로 옮겨주고 싶었지만 카론 경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업무에 감정을 배제시키는 것은 모범적인 수사관의 자질이지만,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속상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네 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너를 임신시킨 자가 위고르 후작을 사청했다고 했다. 왕실 관리를 사칭한 것은 중죄다. 그가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지독한 명령조였다. 하지만 그녀는 비웃음만 보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사소한 부분이라도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모두 말해.” “카, 카론 경. 그렇게 강압적으로 말씀하실 것 까지는....... 아,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카론 경이 흘낏 보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베스는 나이에 비해 꽤나 대범했다. 아니, 이런 일까지 당하면 극단적으로 모질게 된 것도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카론 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내 뱃속에 있는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관심도 없으신가보죠? 기사 나리.” “그건 지금 사건과 별개의 문제다.”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찮은 문제겠지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니까. 그래도 나는 이 아이를 낳을 거예요.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이제 나도 어른이 된 것 같네요.” 의외로 달변가였다. 그녀는 볼록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냉소적으로 웃었다. 이제 겨우 임신이 가능한 나이일 것 같은 소녀가 어쩌면 저런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카론 경이 말했다. “증인으로서 수사에 협력한다면 왕실은 너와 그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약속하지. 그러니 네게 피해를 입힌 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협조하기 바란다.” 그녀는 순간 커다랗게 웃으며 카론 경을 올려다봤다. “그 사름을 체포하겠다고요? 글쎄.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이 나라 국왕이라도 불가능할 걸? 나중에 날 죽이려 들지나 말아요.” 단숨에 코웃음을 치는 베스를 보며 나는 섬뜩한 불안감을 느꼈다. 더 이상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도움도 침묵으로 거절한 그녀는 우리가 떠날 때까지 침대에 누워 눈을 뜨지 않았다. 15 카론 경은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별 다른 단서도 찾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대체 베스를 저 골로 만든 놈은 누굴까요.” 카론 경은 ‘정말 모르겠나?’ 라는 얼굴로 슬쩍 나를 바라보고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그럼 카론 경은 누군지 알았다는 건가요?” 대단해! 역시 수사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범인을 간파한 카론 경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여관 복도는 무척이나 좁았다. 나는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사내에게 길을 비켜준 뒤에 계단을 내려왔다. 반쯤 내려오던 카론 경이 걸음을 멈춘 것은 그 사내가 지나가고 오 초쯤 흐른 뒤였다. “왜 그러세요?” “정말 그 여자 말대로....... 보통 놈은 아닌 것 같군.” “네?” 그렇게 중얼거린 카론 경은 갑자기 검을 뽑으며 나를 밀치고는 베스의 방으로 달렸다. 설마 아까 우리를 지나친 남자가! 뒤따라 방에 들어온 나는 뒷걸음질치는 예의 사내와 칼끝으로 그를 겨누며 한 걸음씩 내딛는 카론 경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상대의 한쪽 손은 깨끗이 잘려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잘린 손에는 짧고 예리한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살인청부업자였다. “누가 고용했나. 말해.” 카론 경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몸을 돌려 창밖으로 달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카론 경이 검을 그었으나 그는 등이 깊게 베인 상태로 그대로 뛰어내려 근처에 있던 말을 타고 도주했다. 카론 경은 뒤쫓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진 암살자의 손을 집어 들었다. 피범벅이 된 살덩이에 나는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지만 카론 경에게는 그냥 ‘증거물’이었다. 칼날을 유심히 살펴보던 카론 경이 혀를 찼다. “인조 혈액독이라....... 이건 스치기만 해도 십 분 안에 사망한다. 일반인은 제조할 수 없는 화학 물질이지. 평민 소녀 하나 죽이려고 동원했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거창하군.” 그는 그걸 다시 바닥에 집어 던지며 베스를 바라봤다. 방금 전 저 칼에 심장이 뚫릴 뻔 했던 그녀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같이 왕실에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노골적인 불신의 눈초리였다. 카론 경은 강제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지는 않았다. “다시 오겠다. 그리고 그동안은 시청에 말해 경비병을 붙여 주지. 한 번 더 말하지만 네 목숨을 위해서라도 왕실에 협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카론 경은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섰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론 경, 아까 그 남자 어떻게 암살자인 줄 알았나요?”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로군.” “그러지 말고 알려주세요. 대답해 준다고 실력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단숨에 한 소녀를 암살자의 손에서 구해낸 검은 머리의 사내는 귀찮은 듯 지나가는 말로 대꾸했다. “자네는 지나가는 여자만 봐도 그 여자가 어떤 기분인지 알아챈다고 들었다.” “그,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거하고 비슷한 거다.” “.......” 이상하게 납득하기 싫은 답변이었다. 16 열차를 타고 왕실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카론 경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니, 어둡다고는 해도 본래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양반이니까 살짝 안색이 나쁜 정도지만-분명 아까 베스를 탐문 수사할 때 그의 마음에 걸린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칭범의 정체라든가. 제 아무리 만년설 같은 은의 기사라도 덥기는 더웠는지 항상 단단히 잠가두는 하얀 셔츠 끝 단추를 풀고 창 바람에 날리는 검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는 그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론 경, 그 범인의 정체가.......” “엔디미온 경.” “네?” “왕실에 도착하는 대로 경은 본래 임무로 돌아가라.” “역시 제가 방해만 됐나요.” “그게 아니야. 이건 자네가 감당할 사건이 아니다.” “예?” 카론 경은 상당히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카론 경이 베스를 그렇게 만든 놈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나를 설득하려는지 카론 경은 자린의 추리를 털어 놓았다. “범인은 국내 거주 중인 1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자.” “에....... 그거야 당연하겠네요.” 그는 타자기를 두드리는 듯 주저 없이 말하며 가능성을 좁혀 나갔다. “그리고 부유한 외국인 거물.”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국왕 전하조차 막을 수 없을 거라는 베스의 말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 나라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국왕의 명령권 안에 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전문 암살자를 고용할 만한 재산과 권력을 가진 자다. 그럼 설마 다른 나라 귀족? 하지만 카론 경의 다음 말은 그런 내 막연한 상상을 깨버렸다. “적어도 귀족은 아니야.” “예? 어째서?” “귀족이라면 남을 사칭하면서까지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또한 자기 아이를 낳더라도 그걸 살인청부업자를 동원하면서까지 막을 필요도 없다. 귀족에게 평민이란 도구에 지나지 않아.” 슬프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귀족의 특권이란 실로 치 떨리는 것이라, 뻔뻔하게 평민을 겁탈해도 법적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국왕 전하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가진 자가 어째서 위고르 공을 사칭한단 말인가. 또한 집요하게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이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카론 경이 말했다. “그녀가 아이를 지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범인은 그녀까지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즉 범인은 그녀와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외국인 권력자야.” “그, 그렇겠군요.” 그의 막힘없는 추리에 감탄하던 내 머릿속에 순간 믿고 싶지 않은 결론이 하나 나왔다. 추리를 바탕으로 범인의 정체를 좁혀보자면 다음과 같다. 1) 15세에서 50세 사이의 국내 거주 남성 2) 부유한 권력가 3) 외국인 4) 정체가 밝혀지는 안 되는 자 5) 자신의 아이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 자 6) 잔인한 놈 자, 이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답이 무엇일까. 하나뿐이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범인은 성직자로군요.” 카론 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직자는 결혼할 수 없다. 이성과의 관계가 드러나면 직위를 박탈당하고 심한 경우에는 교황청 심판대에 선다. 여자를 유린하고 아이까지 낳은 경우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건 교황을 포함한 어떤 고위 성직자라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철칙이었다. 이제는 범인의 이름까지 알 수 있었다. 일 년 전 참사관(參事官) 자격으로 교황청이 국내에 파견한 대주교(大主敎) 보탕. 그자밖에 없었다. 17 왕실로 돌아온 나와 카론 경의 보고를 들은 위고르 공은 이미 나머지 왼쪽 눈두덩마저 사모님으로부터의 핵주먹에 폭격당한 상태였다. 울적한 판다곰의 표정으로 보고를 듣던 위고르 공은 ‘보탕’ 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뭐라고! 그럼 날 사칭한 놈이 대주교 보탕이란 말이야?” “예.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합니다.” “이런 망할 놈! 성직자가 어떻게 그런 너저분한 짓을!” 위고르 공은 실로 격노하고 있었다. 그 역시 속물기질 있다고는 해도 도덕성 없는 사람은 아니다. 고위 성직자가 신분을 감추고 소녀를 강제로 탐했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하아, 알겠네. 세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위고르 공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위고르 공, 그 보탕을 그냥 두실 건가요?” 그는 잘 다듬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평민 여자를 능욕하고 살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남부 콘스탄트 교황청에서 파견 나온 대주교를 잡아들이라는 건가?” 노련한 정치가인 위고르 공은 ‘세상물정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는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건 심각한 외교문제가 돼. 일개 대주교라고 해도 교황청 직할 관리야. 그런 거물은 국왕 전하도 함부로 못 건드려.” “하지만 그는 분명 성직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습니다!” “그래? 그럼 보탕에게 가서 말해 봐. 자기 딸아이 정도 되는 소녀를 임신시킨 적이 있으시냐고. 예, 그렇고말고요. 라고 할 것 같아? 보나마나 보탕은 신의 충실한 노예인 자신을 모욕한다면서 길길이 날뛸 테고 자신을 모욕한 대가로 왕실에 엄청난 배상액을 요구할 게 뻔해. 전하께서 직접 사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 그렇지만.......” “엔디미온 경. 정치란 힘의 저울이네. 힘이 큰 쪽으로 정의도 기울어버리기 마련이지. 교황청이 뒤를 봐주는 보탕을 상대로 우리 같은 약소국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눈감고 못 본 척 하는 게 전부야. 정의감으로 권력을 꺾는다는 것은 소설책에서나 가능한 일이네.” “그럼 우리 백성이 당하는 것을 왕실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지켜보지 말라니까 그러네! 눈 감고 있어! 언젠가는 너도 익숙해질 거야.” 위고르 공은 고개를 돌려 일부러 모질게 내뱉은 뒤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일에 익숙해지는 게 정치인가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나는 너무 분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나중에 날 죽이려 들지나 말아요.’ 라는 그녀의 조롱이 떠올랐다. 어쩌면 왕실은 ‘원만한 사건 해결’을 위해 솔선수범해서 베스의 입을 막으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정치’였다. 카론 경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여기 오면서부터 계속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는, 이런 상황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이대로 사건이 종결되면 베스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그의 아버지는 암살 미수라는 거창한 죄명으로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 모두가 약속한 듯이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는 것으로 그들의 비극은 손쉽게 세상에서 잊혀져 버릴 것이다.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찮은 문제겠지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아니니까. 그래도 나는 이 아이를 낳을 거예요.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이제 나도 어른이 된 것 같네요.’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던 베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존심을 잃은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는 오르넬라 님의 말도 점점 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카론 경! 정말 보탕을 잡을 방법은 없는 건가요?” 카론 경은 슬쩍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위고르 공의 말이 옳은 거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야.”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왕 전하도 건드릴 수 없는 보탕을 잡을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보탕 스스로 자기 죄를 시인하면 되는 거죠?” 보탕은 타락한 성직자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교황청의 법률을 지키는 성직자다. 그것만큼은 피해갈 수 없기에 보탕은 타락의 유일한 증거인 베스의 아기를 죽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카론 경은 회의적이었다. “불가능해. 그걸 인정한다는 것은 보탕 스스로 자기 직책을 버린다는 의미야. 그걸 알면서 시인할 거라 생각하나?” “해보면 알죠.” “엔디미온 경, 무모한 짓 하지 마라. 보탕은 교황청이 대표로 보낸 성직자다. 그런 자를 잘못 건드리면 자네는 물론 왕실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오게 돼.”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어떤 악행에도 면죄부를 달아주는 그 잘난 전가의 보도(傳家寶刀)는 이제 신물이 난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한 마디면 혼자 힘으로는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소녀를 모른 척 해도 죄가 안 된다는 의미입니까. 정말 굉장한 마법의 주문이로군요!” “혼자서 성인군자인 척 지껄이지 마!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참아야 하는 것뿐이다. 일일이 말해줘야 알아듣나?”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카론 경도 어제 역에서는 사람들을 도와줬잖아요. 악투르에서는 왕자님과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놨잖아요! 그건 뭐였죠?” 카론 경은 주저 없이 말했다. “그건 나 혼자의 희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짓을 신념만으로 저지르는 것이 너의 정의인가. 그런 것 역겹다.” 자기 힘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한다? 이 일은 수월하니까 도와주고 저 일은 위험하니까 포기한다는 의미인가. 도와주는 이유도 도와줄 대상도 모두 가치로 판단하고 치밀하게 저울질한 뒤에 희생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계산하지 못하겠다. 그건 참으로 ‘차가운 희생’이었다. “카론 경.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의와 싸워야할 이유는 하나도 남지 않아요.” “맘대로 생각해라. 그리고 또 다시 그 서툰 정의감으로 설친다면 경의 작위를 몰수하고 왕실에서 추방할 것이다. 경고다.” 나는 카론 경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맘대로 하세요!”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안전한 자리에서 불의를 욕하는 짓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힘들고 위험해서 곤란하다는 이유로 모른 척 넘어간 뒤에 ‘가슴 아프지만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라고 스스로 납득하는 짓도 또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논리를 들먹여 납득하더라도, 모두에게 외면당한 피해자의 상처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모른 척한 사람도 공범인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 강하지도 야무지지도 못한 녀석이다. 내 힘이 부족해 속 시원하게 도와주지 못하는 것은 백 번이고 사죄할 수 있지만 그 무력함을 방패로 보탕의 범죄에 입 다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8 다음날, 지명을 받고 왕실을 나온 나는 역으로 향했다. 내 손에는 지명자의 영지로 향하는 열차표가 들려 있었다. 한숨도 잠들지 못한 두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물론 결심을 하기 위해 고민한 것이 아니다. 단지 결심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나는 지갑을 열어 금화를 꺼냈다. 그리고 베스가 숨어 있는 소도시로 향하는 열차표를 구입했다. 지명자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녀는 꼭 내가 아니라도 대신할 사람이 있으니까. 으음, 그런데 리더구트를 나오기 전에 키스 경이 내게 했던 말. ‘미온 경, 스왈로우 나이츠도 여러 가지로 위험한 직업인 거 같죠?’ 그 말이 신경 쓰이는데-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아냐? 괜히 ‘묵시의 기사’가 아니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알면 좀 도와 달라고! 베스가 있는 여관에 도착한 나는 그 앞에 검은 마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차에는 헬스트 나이츠 기사단 인장이 그려져 있었다. “.......!” 나는 입구에서부터 제지당했다. 입구에 서 있던 기사 두 명이 날 가로막았다. 내가 허튼 짓을 하면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다. “카론 경이 말하더군. 네 녀석이 여기 올 거라고. 왜 왔는지는 대충 예상이 되지만 돌아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큭!” 내 행동패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 이건가? 나는 퉁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네놈에게 대답할 이유는 없어.” 그때 헬렌 경이 여관에서 나왔다. 그녀 뒤에는 거의 죄인처럼 포박당한 베스가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나오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베스는 차갑게 웃는 낯으로 ‘날 죽이지나 말라고 했었죠?’ 라고 입 모양을 만들었다. 헬렌 경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못 본 척 지나쳤다. “헬렌 경! 지금 베스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그녀는 경멸의 어조로 말했다. “카론 경이 말 안했던가. 또 문제 일으키면 네놈을 아예 이 나라에서 추방시켜 버릴 거야. 기억해 둬. 나는 널 주시하고 있어. 카론 경이 또 감싸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그녀가 날 왕실에서 내쫓아 버리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건 아무래도 좋아! 베스를 어떻게 할 거냐니까! “그녀의 입을 막으려는 겁니까? 보탕의 죄를 우리 쪽에서 덮어두려는 건가요. 그 잘난 외교 문제 때문에?” “멋대로 지껄이지 마! 증인을 보호하려는 거다. 이 아이는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왕궁에서 안전하게 지내게 된다. 그러니까 너도 신경 끄고 네 일이나 해! 평민 주제에.......” 그녀는 괜히 사족을 붙였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삼키며 베스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마차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때 누군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투덜거리며 여관에서 나왔다. “에이, 망할 놈의 세상. 이 몸이 왜 이런 잡일을 해야 해?” 문득 뒤를 돌아본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눈매를 좁혔다. “블리히 경?” “엥? 또 네놈이냐?” 블리히 경의 손에는 베스의 것으로 보이는 잡다한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말 그대로 뒤처리 담당. 기사단장 자리에서 좌천 된 이후 엄청난 노력(그러니까 로비) 끝에 다시 기사단에 복귀하긴 했지만 헬렌 경이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때는 내가 새도 떨어뜨리는 실세였는데, 참 처량해 보이는구만. 블리히는 황급히 들고 있던 옷가지들을 뒤로 숨기며 헛기침을 했다. “허엄! 이 몸은 증거 확보를 위해 이러고 있는 것뿐이다.” “아, 예. 그러시겠지요.” 나와 블리히 경은 벤치에 앉아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묘한 동질감이었다. “블리히 경, 그래도 왕실이 베스를 보탕에게서 보호해 주겠죠?” “뭐? 베스가 누구야?” 아니, 이 양반이....... “아까 헬렌 경이 데려간 소녀예요.” “아, 그 평민 여자? 이름이 베스였구만.” 돈 안 되는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저 단순한 정신구조가 때로는 부럽다. “그런데 왕실이 기사단을 동원해서 평민을 보호한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네.” “그, 그럼 어째서.......” “어째서긴 뭐가 어째서야? 당연히 베스라는 여자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워버리려는 거지.” “........!” “내가 뭐 예전처럼 수사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 머리를 굴리면 왕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있어. 보나마나 왕실과 교황청은 서로 얘기가 끝낸 상황이야. 고위 성직자가 평민 여자를 임신시켰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면 교황청 위신은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덮어두려는 거야.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딨긴. 지금 벌어지고 있잖아. 네놈 코앞에서.” 블리히 경은 ‘몰랐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라고 중얼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왕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야. 생각해 봐라. 흔해 빠진 평민 여자 하나의 원통함을 갚아주기 위해 강대국의 심기를 건드릴 약소국이 있겠냐? 왕실 욕할 거 없어. 현실이 다 그런 거니까. 네 녀석은 아직 어려서 신념과 생명과 종교와 정치 모두 값을 따질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테지. 하지만 틀렸어. 사실은 모두 값을 매겨 거래할 수 있는 것들이야.” “그렇지 않아요. 자기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지키는 국익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 페르난데스 왕자님이라면 인정하지 않았을 거예요!” 블리히 경은 ‘그렇게 화가 나면 왕족으로 태어나지 그랬냐.’라면서 엉뚱한 말을 꺼냈다. 아니, 엉뚱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말 이었다. “불경한 말이지만....... 솔직히 왕자님이 국왕이 되면 오래 못 살 것 같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떨어지지 않는 끈끈하고 음습한 것들이 온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보탕을 잡겠어요.” “뭐? 예전부터 미친놈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너 진짜 미쳤구나.” “잘못한 사람을 잡는 일이 미친 짓인 세상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죠? 난 그렇게 편리한 인간이 될 수 없나 봐요.” “세상 모두가 입 다물려는 일을 너 혼자 까발리시겠다? 허허, 영웅 나셨네. 네놈 얼굴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구나.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니?” 그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말로 향했다. 문득 걸음을 멈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왕실에 가서 지금 네가 한 말 보고하면 그걸로 넌 추방이야. 난 실적이 오를 테고.” “.......!” “그러니까 앞으로는 제발 입 좀 조심해! 나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멍청하긴.” 그는 나한테 하는 소린지 자신한테 하는 소린지 멍청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말에 올라탔다. 19 대주교 보탕은 말하자면 ‘이 나라에 신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파견된 자다. 만약 그가 말하고 싶은 신의 메시지가 ‘항상 긴장하지 않으면 파렴치한 악당에게 걸려 인생을 망치게 된다.’ 였다면 온몸으로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갸륵한 놈이다. 성직자라고는 하지만 외교관 권한으로 면책특권이 있다. 즉, 죄가 있어도 교황청이 수사하지 우리 왕실은 직접 손 댈 수 없는 자, 직책상으로는 추기경 급인 오르넬라 성녀님 밑이지만 교황청 직속이라는 이유로 오르넬라 님의 영향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거물이다. 약소국의 서러움이랄까. 우리나라에는 각국에서 파견된 이런 ‘신성불가침’의 존재들이 제법 있다. 가령 이오타에서 파견된 무역 관리 감독관이라든가 마키시온 외교통상부 소속의 공사 같은 자들. 그들 자체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이 나라는 항상 ‘공정한 해결’ 대신 ‘원만한 해결’ 을 해왔다. 감추고 덮어두고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 굽실거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그렇게 처리해 왔다는 사실을 베스도 알았던 것이다. 그녀의 차가운 조소가 그걸 의미했다. 아무튼 이런 ‘언터처블’을 잡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이다. 보탕은 교황청에서 파견한 성직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 신자들에게 신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신’ 이 한 소녀를 겁탈했다고 아무리 외쳐봐야 믿어주기는커녕 뭇매 맞아 죽을 것이 뻔했다. 나는 신의 이름을 팔아먹는 그 범죄자 앞에 당당히 서서 그의 죄를 낱낱이 고하는 정공법 대신 왕실은 절대 하지 못할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주문하신 물건 배달 왔습니다.” 나는 보탕이 기거하는 주교공관 뒷문에 도착해 노크했다. 곧 문이 열리며 하품을 하는 경비병이 나타났다. “뭐야. 이 밤중에 뭔 놈의 배달을.......” 그렇게 말하던 그는 내 옆에 서 있는 아가씨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꼭 면사포를 쓴 신 부 같은 여자였다. 그는 헛기침을 말했다. “그분이 주문하신 물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목 언저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아, 진짜 그 양반 아주 밤낮을 안 가리누만. 뭔 놈의 성직자가 그리 힘이 좋대.”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우리를 안으로 들였다. 나는 한숨을 돌렸다. 일단 진입 성공이다. 그러나 그때 경비병이 문을 걸어 잠그며 말했다. “어이, 그런데 너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번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암호 말해봐.” 그는 천천히 창끝을 겨누며 내게 말했다. “이런 일에는 보안이 철저해야 하니까 이해해 주겠지?” 나는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암호까지 물어보다니 꽤 성실한 경비병이었다. “이 자식 설마....... 모르는 거냐?” 그는 굳은 표정을 보이며 창을 들었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한 겨울에 수영하는 금발 미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그는 곧 탄식했다. “알고 있었잖아! 왜 불안하게 뜸을 들여?” “하하하, 하도 이상한 암호라서 말하기 민망했어요.” 나는 커다랗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 괴상하다고, 그 암호! 보탕 정도 되는 호색한에게는 항상 여자를 제공하는 포주들이 붙어 다닌다. 나는 보탕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 타락성직자와 매춘조직 사시의 불유쾌한 커넥션부터 조사했다. 꽤 정직하게 살아온 나지만 이래봬도 이런 암거래의 생리에 대해서는 제법 잘 알 고 있는 편이다. (시류회의 전 총수인 줄리앙 그라스파로사 님의 가르침이 컸다.) (피 같은 내 돈이지만) 금화 오백 닢과 말재주, 그리고 밤거리에서 닳고 닳은 사람인 양 행세할 수 있는 연기실력만 있다면 몇 시간 안에 보탕의 포주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다. 또한 암호마저도. 그들은 돈이 된다면 국가 기밀도 팔아먹을 자들이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철통같이 보호 받는 보탕에게 접근할 개구멍을 찾은 셈이었다. 경비병은 간단한 몸수색을 한 뒤에 말했다. “그분은 이 층 침실에 있으니까 가 봐. 혼자갈 수 있지?” “물론이죠.” 가볍게 경비를 통과한 우리는 보탕 거처로 향했다. 내 옆에 있는 ‘물건’ 역의 아가씨는 힐더, 미리 부탁한 동료였다. 고맙게도 힐더는 꽤 위험할 수도 있는데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다. 예전 지명 때 억울한 사정이 있던 그녀를 도와준 적이 있 었는데, 이렇게 도움 받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평소 같으면 내가 직접 여장을 했겠지만(어차피 망친 몸이다.) 지금 내 계획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힐더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새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속삭였다. “미온, 이거 되게 재미있다. 꼭 스파이 놀이하는 것 같네.” “조, 조금은 긴장하라고!” 나는 그녀의 대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작전이 실패할까봐 사정없이 두근거리는 쪽은 나였다. 이 층까지 가는 동안 서너 명의 경비들을 만났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들였으면 당연한 손님처럼 생각할까. 나는 기가 질릴 정도였다. 보탕의 화려한 침실 앞에도 완전무장한 두 명의 경비병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뚱뚱한 중년 남자가 반쯤 발가벗은 꼴로 앉아 있었다. 두 눈은 술에 취했는지 마약에 취했는지 기분 나쁜 광채를 뿜고 있었고 기괴한 숨소리와 이상한 냄새가 침실 끝에 있는 우리한테까지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저자가 바로 대주교 보탕이었다. 저 모습 어디에도 ‘신’의 흔적은 없었다. 차라리 오래된 짐승의 우리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불쾌감과 기묘한 공포심이 나를 옭아맸다. 그가 장난감이라도 본 어린애처럼 히죽거렸다. “뭐야, 오늘도 온 거야?” “특별 서비스입니다.”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면사포 안의 시선으로 보탕을 훑어본 힐더가 중얼거렸다. “켁. 구역질 나.” “조용해.” 나는 다급히 속삭이며 그녀의 등을 슬쩍 찔렀다. 손을 내저어 경비병들을 내보낸 그는 우리를 불러들였다. 희번덕거리며 우리를 바라보는 저 지저분한 시선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 교황청에 보내주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솟구쳐 올랐다. “흠. 오늘은 두 명인가?” 나는 본능적으로 발끈했다. “전 남자입니다만!” “아아, 그래? 뭐, 그 정도면 상관없어. 둘 다 침대 위로 올라와.” 에엑? 남색? 악마숭배와 남색은 성직자의 죄악 중에서도 구제할 수 없는 대죄악이다. 즉 교황청 지하실의 최첨단 고문을 풀코스로 체험하게 되는 지옥행 티켓이었다. 지금 그런 위험천만한 취향을 대차게 커밍아웃하셨다, 이거냐? 좋아. 기대 이상으로 협조적이시네? 나는 힐더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대주교님. 그 전에, 최근 아주 불쾌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요?” “뭐? 소문?” “예. 한 베스라는 계집아이가 대주교님의 아이를 가졌다고 떠들고 다닌다던데 말입니다.” 그 말에 보탕이 버럭 화를 냈다. “정말이냐! 역시 내가 직접 그년 입을 틀어막았어야 했어! 왕실 놈들도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니만, 천 한 계집애 입 하나 못 막아? 뭐하나 똑바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군! 무능한 놈들!” 나는 이가 부득 갈렸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서 베스를 직접 손봐주실 작정이십니까?” “흥! 신경 쓸 것도 없어. 그깟 년이 죽어라고 떠들어봐야 누가 감히 이 대주교 보탕의 신앙심을 의심해? 내 신도들에게 맞아 죽을 게 뻔하지.” 그는 커다랗게 웃다가 곧 우리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왜 이런 자리에서 그런 지저분한 화제를 입에 올리는 거냐. 아니, 그보다 그 여자는 갑갑하게 왜 그딴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 좀 보게 벗어!” “예에.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나는 힐더가 쓰고 있는 커다란 면사포를 벗겼다. 그 순간 보탕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그 여자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설마.......” “예쁜 아가씨죠? 게다가 텔레-레이디랍니다.” 힐더는 씨익 웃으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지금 그녀가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텔레마코스용 서클릿이었다. 나는 상황 파악 못해 의아해하는 보탕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더불어 지금 이 아가씨는 교황청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랍니다.” “뭐, 뭐라고?” 교황청 이단제보 센터라는 곳이 있다. 종교적으로 큰 죄악을 저지른 자를 고발하는 창구인데, 면사포 안에 서클릿을 숨긴 힐더는 이 곳에 들어오면서 그곳과 연결했다. 즉, 보탕이 방금 자기 입으로 시인한 모든 범죄가 실시간으로 교황청에 접수된 것이다. 카론 경이 말했지? 보탕 같은 거물은 스스로 범죄를 시인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고. 결국 그걸 위해서 이런 연극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뭐 나름대로 과학수사라고 봐 줬으면 좋겠다. 사태를 파악한 보탕은 오색찬란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리를 노려봤다. “가, 감히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아, 우리도 죽이시게요? 그랬다간 범죄가 또 하나 추가될 뿐일 텐데요?” 나는 차가운 미소를 보이며 그를 바라봤다. 자, 이제 ‘정의는 승리한다!’라는 마무리 대사를 읊어줄 때가 왔.......는데, 보탕, 이 인간 표정이 왜 이래? “흐흐흐, 천한 놈들이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보탕은 미친놈처럼 큭큭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의아했다. “결국 너무 놀라 실성한 겁니까?” “날 교황청에 신고하겠다고? 이 보탕을? 정말 순진한 놈들이로군.” 그 순간 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힐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온. 연결이 끊어졌어.” “........!” 결국 교황청도 똑같았다. ‘못 들은 척’ 한 것이다. 보탕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나를 때렸다. “이거 실망해서 어쩌나. 하지만 계속 노력해 보게. 신께서는 뜻이 있는 자에게 시련을 주기 마련이니까. 크하하핫.” 그는 그렇게 웃으며 침대 근처의 밧줄을 잡아 당겼다. 종소리와 함께 곧바로 경비병들이 뛰어 들어왔다. 나는 순간 힐더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나는 왕실 기사다! 우리를 죽였다간 너도 골치 아플 거다.” “아, 왕실 기사? 그랬구먼. 신을 섬기는 내가 기사를 죽일 수야 없지. 암. 그건 곤란하지.” 그리고 그는 뒤틀린 미소를 보이며 조롱했다. “하지만 불운한 사고로 죽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예를 들면....... 정의감이 넘치는 젊은 기사가 강도들에게 둘러싸인 한 텔레-레이디를 구하려다가 안타깝게도 모두 죽임을 당하다, 명예로운 왕실 기사의 최후로는 이 정도가 적당하겠군. 어때, 맘에 드나?” 이윽고 우리는 경비병들에게 끌려가 살인청부조직의 손에 넘겨졌다. 20 “아........으윽.” 저항하다가 죽을 만큼 두드려 맞은 나는 일어서기도 힘든 상태였다. 반쯤 실신해 있던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눈을 떴다. 힐더였다. “미온. 정신이 들어? 괜찮아?” “........으응.”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어두컴컴한 구석을 둘러봤다. 이 눅눅하고 냄새나는 곳은 꼭 고래뱃속 같았다. 창고를 개조한 감옥일까,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가득했다. “미온, 움직일 수 있어? 난 정말 네가 죽는 줄 알았어!” “으응. 난 괜찮아.” 나는 말을 흐렸다. 힐더를 볼 낯이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그녀를 끌어들여 놓고는 이제는 목숨마저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나마 나름대로 살인청부업자의 프라이드인지 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행은 무슨 다행! 어차피 아침이면 죽게 될 텐데!’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현장을 조작하고 우리 시체를 사고로 위장해 놓을 것이다. 주도면밀한 카론 경은 조작되었다는 것을 간파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보탕을 살인교사죄로 체포할 수는 없을 테고, 죽은 우리가 되살아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째서 힐더 까지 위험하게 만든 것일까. “........결국 나는 카론 경 말대로 서툰 정의감에 도취되어 감당도 못할 짓만 저지르는 골칫덩어리일 뿐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애당초 보이지도 않았다. 그보다 움직일 기운 자체가 없었다. 내 몸에 남은 것이라고는 메마른 우물 같은 무력감밖에 없었다.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해, 힐더. 나 때문에 이렇게 돼서 정말 미안.......” 짜아아악! 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어두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친 것이 분명했다. “화가 났다면 계속 때려도 좋.......” 짜아아아아아악! 방금 전보다 열 배는 더 아픈 충격이 또 터졌다. 그녀가 소리쳤다. “이제 정신 좀 들어?” “뭐?” “너 바보야? 여자 마음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딴 말밖에 못해? 자기 때문에 죽어서 미안하다고 훌쩍거리면 내 기분이 좋아져 하늘을 날아오를 줄 알았니?” 나는 뺨을 매만지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도리어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목소리였다. “너 못지않게 나도 내가 원해서 이 일을 도와준 거야. 멋대로 나를 억지로 끌려 온 희생자 취급하지 마!” “미, 미안.” “그리고 내가 지금 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어떻게든 탈출할 테니까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야! 허세라도 좋아! 기꺼이 속아줄 테니까! 최소한 질질 짜면서 죽기 전부터 죽어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평소의 미온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속사포 같은 힐난에 두드려 맞았다. 힐더가 무슨 알테어 님처럼 무적의 파워를 가지고 있어서 얼마든지 철문 따위 동강낼 수 있는 초인은 아니다. 당연히 나보다도 힘이 약하고 가녀린 여자다. 그런 그녀가 지금 두렵지 않을까? 나보다도 몇 배는 무서울 것이다. 그런데도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쳐 준 그녀가 너무도 고마웠다. 나는 떨고 있는 그녀를 느끼며 슬며시 웃었다. 힐더의 말대로 용기를 내는 것은 초인의 전유물이 아니니까. “좋아, 힐더! 어떻게든 탈출해 보이겠어!” “웃기시네. 뭔 재주로?” “.......거 자꾸 사람 민망하게 할래?” 그녀는 흥!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으이구! 단지 성격 나쁜 여자일지도! 나는 주변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이곳이 완전한 암흑이 아니라는 것은 어딘가 빛이 들어오는 곳이 있다는 의미다. 나는 곧 작은 창문을 찾아냈다. 불행하게도 그 창문은 높은 벽 위에 뚫려 있었지만. ‘젠장. 창문 닦기도 어렵게 왜 저딴 곳에 만들어 놨담!’ 치밀한 살인청부업자들이 특별히 우리를 묶지도 않고 이곳에 가둔 곳은 그만큼 이곳은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라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출입구로 보이는 두터운 철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전력으로 몸통박치기를 해봤자 열릴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열어봤자 곧바로 감시원에게 붙잡혀 게임 오버일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배가 아프다고 소리쳐 볼까?” “얼씨구. 범죄자들이 ‘아니, 배가 아프다니! 이런 안타까운 일이!’라고 슬퍼하며 우리를 성심성의껏 치료해 줄까봐서? 실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 그렇게까지 무안 줄 건 없잖아!” 나는 삐죽거리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텔레-레이디인 힐더의 능력을 살려 왕실과 연결만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서클릿은 이미 빼앗겼다. 5권에서처럼 꽃이라도 있다면 대용으로 쓸 수 있겠지만, 이딴 곳에는 버섯밖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바닥을 뒤지다가 구부러진 철심 하나를 발견할 수는 있었다. 좋아, 아이템 하나 획득. 나는 다시 창문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곧 윗도리와 바지를 벗었다. “힐더, 너도 옷 벗어.” “뭐! 야, 이 짐승 놈아! 지금 상황에 그럴 기분이 생겨?” “으이구! 착각하시네요. 밧줄과 갈고리를 만들려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옷가지를 길게 엮어 끝에 철심을 장착한 급조 갈고리를 빙글빙글 돌려 창문으로 던진다. 운 좋게 갈고리가 걸리면 내가 올라가서 그녀를 밧줄로 끌어올려 준다. 그리고 감시가 없는 틈을 타서 탈출. 내가 그런 계획을 말해주자 그녀가 대답했다. “아무리 심플 이즈 더 베스트라지만....... 그거 너무 조악한 거 아니니? 게다가 올라가다 떨어지면 너 뇌진탕으로 죽을 텐데?” “어이. 너 자꾸 아까부터 초치는 소리 할래? 날 믿는 사람 태도가 뭐 그래? 게다가 어차피 해 뜨면 우린 다 죽어! 지금 뇌진 탕으로 죽는 게 대수야?” “흐음. 뭐, 그럼 먼저 한 번 해봐. 너 떨어져 죽으면 난 다른 방법 궁리할 테니까.” “네 말을 경청하니, 있던 자심감도 다 사라지는 것 같구나.” 나는 뭔가 내부의 적을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옷가지를 엮어 밧줄과 갈고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조금 뒤로 물러서서 빙글빙글 돌리다가 가뿐하게! “.......” 창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갈고리는 벽과 충돌해 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힐더가 말했다. “풋. 거 되게 못하네.” 저 여자....... 지금 자길 위험에 빠트린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거 아냐? 나는 그녀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끝도 없이 갈고리를 던져야 했고 점점 더 목표에 접근하던 갈고리는 백번 대에 이르러서야 창틀에 걸렸다. 나는 너무 기뻐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됐다!” 그 순간 갈고리는 다시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자알 한다. 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나 보네?” “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아니, 이거 정말 절박하지만 짜증나는구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또 다시 갈고리를 던졌고 그녀의 모진 핍박을 배가 터질 만큼 듣고 나서야 갈고리를 걸 수 있었다. “좋아, 이제 됐어!” 나는 팽팽한 밧줄을 확인하고는 벽에 발을 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밑에서 작은 목소리로 나를 응원했다. “뇌진탕! 뇌진탕!” 하하. 역시 힐더는 위기의 순간에도 위트가 넘치는 매력적인 아가씨다....... 가 아니라 위험한 저주 걸지 마! 나 죽으면 넌 무사할 것 같아? 공동체 의식 좀 가지라고! 기운이 샘솟는 힐더의 응원을 들으며 사력을 다해 거의 창문까지 올라간 나는 갑자기 철문 쪽에서 분주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 온 몸이 경직되었다. 설마 들킨 걸까! 그녀는 벌떡 일어나 철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온, 그대로 도망쳐. 내가 막고 있을 테니까.” “남의 대사 멋대로 빼앗아 가지 마!” 여자를 남겨 두고 혼자 도망칠까 보냐?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밧줄을 놓았다. 단숨에 다시 바닥으로 돌아온 나는 그녀 앞을 막아섰다. 힐더가 삐죽거렸다. “얼씨구, 동반자살하려고?” “아니, 어떻게든 탈출할 테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마.”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들킨 것일까. 아니면 벌써 우리를 죽이려고 문을 열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절망이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있는 힘을 다해 그녀가 도망칠 길을 들어 준다, 그 생각밖에는 없었다. 이윽고 덜컥 문이 열렸다. 그 앞에는 아까 나를 즐겁게 때리던 거구의 살인청부업자가 서 있었다. 나는 숨이 콱 막혀왔다. “네, 네놈들.......” 그 순간 옆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의 머리를 거칠게 잡아챘다. 흠칫 놀란 내 눈 앞에서 덩치 큰 사내의 머리가 장난감처럼 끌려가 벽에 찍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창고 벽에 들이받은 그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그리고 실로 믿기지 않는 괴력의 장본인이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미온 경. 이 야심한 밤에 옷 벗고 뭐하는 망측한 짓입니까아!” “키스 경!” 달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모습은 컴컴한 실루엣이었지만 새빨간 눈동자만큼은 스스로 빛을 내는 듯 또렷했다. 분명히 키스였다. 그는 문가에 기대어 우리를 바라봤다. 그의 근처에는 십여 명의 거한들이 쓰러져 있었다. 키스는 피식 웃으며 그들을 둘러봤다. “일단 제가 밤잠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세요.”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뜻밖이라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우리에게 그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몇 시간 전에, 내 하나밖에 없는 과묵한 친구가 술에 취해서는 내 방에 왔어요.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안하고 내가 아끼는 술까지 그 친구 힘들게 만들 인간은 저하고 당신밖에 없거든요?” 키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솔직히 타락한 돼지가 뭐라고 짖어대든 그래서 이 세상이 절망과 부조리에 물들든 말든 알 바 아니에요. 그보다는 이멜렌 님에게 가서 별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줘야 하고,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갈 친구에게 스프도 만들어 줘야 하고, 세일 끝나기 전에 새 소파도 사야하고....... 내가 참 바빠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안 그래도 바쁜 저를 이런 시시한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주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아.” “아, 알았어요.” 솔직히 하나도 못 알아들을 소리였지만 그의 이상한 위압감에 질린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했다. 어스름한 달빛 속에 파묻힌 그의 음영은 꼭 망령 같았고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키릭스 같았다. “그래도 제 귀여운 미온 경이 큰 흠집 없이 멀쩡한 것을 보니까 좀 안심이 되네요. 왕실까지 혼자 올 수 있겠죠?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아참. 그리고 당신 지명자 진짜 열 받았어요. 그래서 벌금이랍니다아.” 그 말과 함께 키스는 흩어지는 안개처럼 모습을 감췄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고 또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내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지금 우리를 도와준 것이 너무도 고맙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힐더가 멍한 얼굴로 나는 쿡쿡 찔렀다. “방금 그 미남 오빠 누구야?” “누구긴. 나사 빠진 내 상관........” 순간 그가 내게 보여줬던 수많은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말을 끊고는 중얼거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야.” 21 왕실은 내가 겪은 일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는 것 같았다. 국왕 전하 일가족께서 이웃 나라 니샤 왕국을 친선 방문하러 떠난 상황이라 왕실은 한가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일단 주인이 없으니 아무래도 한가해지는 것이고 또 주인이 없는 동안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물론 아이히만 대공께서 국왕 전하의 대행을 맡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일은 훨씬 더 잘 돌아가고 있다는 기분도 들지만....... 어쨌든 베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드넓은 왕궁에서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오후가 되어서야 리더구트에 도착한 나는 안도와 서글픔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며 문을 덜컥 열었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곰 인 형 눈알 붙이던 쇼탄 경은 내 꼴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내 옷은 걸레나 다름없었다. “미, 미온! 그 비렁뱅이 컨셉은 대체 뭐냐! 너도 나처럼 재산 다 거덜 난 거야?” “탈옥 체험 좀 하고 왔습니다.” 나는 잠입과 발각과 감금과 탈출로 이어진 어제의 모험담을 일일이 서술해 줄 기운도 없어서 누더기가 된 옷을 질질 끌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소파에 누워 나를 힐끗 보던 키스 경은 여우같은 눈웃음만 보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는 소중하게 보관해 놓은 스왈로우 나이츠의 제복을 꺼내 거울 앞에 섰다. 셔츠를 벗은 상반신에는 어제 당한 상처들이 쓰라리게 남아 있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나는 옷을 입으며 힐더가 떠나며 남긴 말을 떠올렸다. ‘미온. 나는 네가 멋들어지게 보탕을 체포할 영웅이라고는 기대 안 해.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패배자도 아니라고 믿어. 구제불능에게는 구제불능의 의지가 있는 거니까, 날 실망시키지 말아줘. 알겠지?’ 제복 단추를 채운 나는 곧바로 카론 경의 집무실로 향했다. 실로 비장한 표정으로 말이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곧바로 싸늘하게 타오르는 카론 경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제의 숙취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날 한 대 후려갈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디까지 문제를 일으킬 생각인가.” “사과는 일이 해결된 뒤에 하겠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예. 사람이 저지른 일은 사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카론 경은 일말의 동의도 보이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말했다. “베스가 잡혀 있는 곳을 알려 주세요.” 그녀는 분명 이 넓디넓은 왕궁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으리라. 카론 경이 곧바로 대답했다. “모른다.” “카론 경, 베스는 지금 도움이 필요해요!”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카론 경은 알려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딱 잘라 알려줄 이유 없다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사람이다. 모른다고 둘러댈 성격이 아니었다. 즉, 카론 경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카론 경도 이 사건에서 제외된 건가요.” 그는 대답 대신 내 시선을 피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결국 왕실은 가장 유능한 수사관인 카론 경마저 이 사건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아마 어제 그는 좀더 보탕에 대해 수사해야 한다고 왕실에 건의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치가 떨렸다. “카론 경! 오히려 잘 되었는지도 몰라요. 이제는 카론 경도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잖아요! 마음껏 움직일 수 있어요. 이렇게 된 이상 저와 함께 단독으로 수사해요!” “.......” “중요한 건 권력이 아니잖아요.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바꿀 수 있어요!” 카론 경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난 그런 것 안 믿는다.” “무, 무안하게스리!” 그는 역시 숙취가 심한지 머리를 지그시 누른 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 베스라는 피해자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게 뭔데요?” “지금쯤 왕실은 그녀의 아이를 낙태시켰을 것이다.” “.......!”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뜨거운 것을 단숨에 들이켠 기분이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정치적 결단? 국익을 위해서? 인간성보다 중요한 어떤 대단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 모두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던 베스의 힘없는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카론 경, 보탕을 잡아야 해요. 이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제발 절 도와주세요!” “이미 늦었다.” “예?” “교황청은 보탕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오늘 중으로 이 나라를 떠난다.” “그, 그런!” “자네가 어제 보탕을 뒤흔들어놓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다.” “큭!” 나는 나의 미숙함을 또 한 번 자책했다. 보탕이 국경선을 벗어나면 그를 체포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급히 집무실을 떠나려는 내게 그가 말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건가.” “보탕을 잡겠어요?” “무슨 수로. 그의 마차를 가로막기라도 할 생각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이 국경을 빠져나가는 것만큼은 막을 겁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로군. 일개 기사인 네가 대주교를 막는 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카론 경은 잔인할 정도로 냉혹하게 말했고 난 원망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봤다. 22 “엉? 저거, 뭐하는 놈이야?” 멈춰버린 마차의 선두에 있던 기병이 소리쳤다. 교황청 마크가 새겨진 그 거대한 사륜마차는 우리나라 근위대의 엄중한 호위를 받고 있었다. 또한 그 뒤로도 수행원들이 타고 있는 마차들이 세 대나 줄지어 있었다. 국경을 빠져나가려는 그 긴 행렬을 지금 나 혼자 막아선 것이었다. 국경을 떠나는 유일한 도로를 몸으로 막아선 내게 당황한 장교가 고함쳤다. “이런 무례한 놈! 당장 비키지 못할까! 지금 이 안에는 어떤 분이 타고 계신 줄 알고는 있는 게냐!” “흥. 성스러운 대주교 보탕이시겠지.” “감히 그걸 알면서 이런 짓을!” 그때 마차의 창밖으로 낯익은, 하지만 역겨운 면상이 고개를 내밀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정의롭고 또 목숨도 질긴 왕실 기사 아니시오.” 나는 즐거운 듯 이죽거리고 있는 보탕을 노려봤다. 그가 말했다. “성스러운 임무를 마치고 교황청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이 청렴한 성직자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려는 거요?” 나는 커다랗게 외쳤다. “대주교 보탕! 교황청의 교리를 어기고 이 나라의 백성을 욕되게 한 죄로 체포하겠다!” 내 말에 근위병들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들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보탕은 여전히 그 꼴도 보기 싫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나를 조롱했다. “이거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로구려. 허나 당신은 면책특권이 있는 이 몸을 체포할 권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나도 오해를 풀고 싶지만, 법이 그래서 어쩔 수가 없구려.” “........” “본래 이런 모욕은 죄를 묻는 것이 원칙이나, 당신의 용기를 높게 여겨 성직자의 아량으로 눈감아 주도록 하겠소.” 그의 말대로 이유도 없이 고위 성직자의 공무(公務)를 방해하는 일은 중범죄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비키지 않았다. 곧 보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퍼졌다. “이런, 이런. 굳이 교황청의 고문실을 방문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내가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 너부터 이 나라의 감옥을 방문하게 될 거야.” “뭐?” 그 때 검은 머리의 사내가 보탕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곧 차가운 목소리가 터졌다. “대주교 보탕. 왕실 근위기사단 헬스트 나이츠의 권한을 발동하여 너를 체포한다.” 일그러진 보탕의 얼굴에 영장을 들이댄 장봉인은 바로 카론 샤펜투스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카론 경. 보탕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다들 미친 거 아니냐. 네놈들은 나를 체포할 권한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국내법에는 왕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이상의 직책을 가진 자는 외교특사를 체포, 구류할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뭐라고!” 보탕이 그런 법에 신경썼겠냐만, 어쨌든 법은 법이다. 제아무리 보탕이라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면을 벗어던진 보탕은 지옥 불에 불타는 마귀처럼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겁 대가리를 상실한 새끼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예상대로 쌍욕에 능한 놈이었다. 그는 마차 문을 박차고 튀어 나와서는 카론 경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이 날 체포하겠다고? 이 보탕을 감금해? 오냐. 그렇게 해라. 기꺼이 체포당해 주지!” 그의 핏발 선 눈빛은 거의 카론 경을 도륙할 기세였다. “하지만 똑바로 들어.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천한 놈아. 네놈들의 국왕조차 날 재판할 권한은 없어. 판결은 오직 교황청이 내린다! 만약 교황청에서 날 무죄로 판결한다면 네놈들에게는 이 대주교 보탕을 모욕한 죄를 물을 것이다. 내가 직접 고문실에 처 넣어 주지. 제발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네놈들의 비명을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 주겠다. 이제 뒷감당 할 준비나 하시지.” 보탕은 실로 끔찍한 광소를 보이며 나와 카론 경을 바라봤다. 그를 보며 나는 마치 악의로 똘똘 뭉친 괴물을 마주한 것 같은 생리적 공포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카론 경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의 손을 조용히 풀며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할 말은 그걸로 끝인가. 그럼 체포하겠다.” 항상 느끼는 사실이지만, 평소 냉정하던 사람이 막나가기 시작하면 진짜 무섭다. 23 왕궁으로 돌아온 우리들의 손에 보탕이 잡혀 있는 것을 보게 된 왕실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전쟁이 일어났어도 이것보다는 덜 놀랐을 것이다. 그래, 나는 대재앙이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우어어어어어어어어! 이, 이,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오랏줄에 묶여 있는 보탕을 본 위고르 공은 우리가 뭐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괴성을 내지르며 왕궁 밖으로 뛰쳐나갔고, 막 무 도회를 마치고 돌아온 군무대신도 보탕을 보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게거품을 물고 바닥을 굴러다녔다. 심지어 어떤 관리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먼 나라로 이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궁 전체가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헬렌 경이었다. 자다가 이 충격적인 보고를 들은 그녀는 잠옷차림에 머리도 정리하지 않은 ‘마녀의 자태 ’ 그대로 한걸음에 우리에게 달려왔다. 장소는 보탕을 구류하고 있는 왕실 감옥이었다. 긴 머리를 흩날리며 백발마녀처럼 부웅 날아 들어온 그녀는 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고함쳤다. “카로오오오오오온온!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카론 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보탕에게 죄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모른다고 우기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기사이기 때문에 행했던 그 ‘멍청함’을 카론 경은 그녀에게 납득시켜준 것이다. 그녀도 같은 기사였다. 헬렌 경은 깊은 숨을 몰아쉰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저지른 일이겠지만, 교황청이 파견한 특사는 우리가 재판할 수 없어. 교황청 재판관이 도착할 때까지 잠시 가둬 두는 게 전부야.” “알고 있습니다.” “삼 일 정도 후에 재판관이 올 거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보탕의 유죄를 입증시킬 증거를 찾아 내! 이 구제할 수 없는 멍청이들아!” 그리고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사라지자 카론 경은 비장하게 말했다. “엔디미온 경.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헬렌 경의 말대로 삼 일 후에 도착할 교황청 재판관에게 보탕의 유죄를 증명 하지 못한다면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명예와 목숨도 사흘 후에 끝난다.” “미안해요, 카론 경. 저 때문에.” “나도 나의 의지로 행한 것이다. 분명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고마워요.” “이제 나는 너를 따르겠다. 계획을 말해라.” “예?”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도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계획 말이다. 이렇게 보탕을 잡은 것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나?” “네?” 카론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계획....... 없나?”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 카론 경은 감옥 구석에서 묵묵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암울한 오오라가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순간이라도 자네를 믿은 내가 바보다.” “우아아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후회 안한다고 해놓고는!” “닥쳐라. 계획도 없이 문제만 일으키는 너 같은 녀석을 돕다니, 내가 다 한심하군.” “와아아아! 아까 전까지는 자기 의지로 도왔다고 해놓고는!” “흥. 난 빠지겠다. 동반자살에는 취미 없어. 기사 작위 반납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카, 카론 경!” 그러나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은 내게 끈적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감옥에 갇혀 있는 보탕이 비아냥거렸다. “큭큭. 믿고 있던 사람에게 버림 받았군. 이제 어쩌실 텐가, 정의의 기사 양반?” “.......” “아무 방법도 안 떠오르지? 그럴 수밖에. 재판도 판결도 교황청이 하는데, 너 같은 잔챙이가 뭘 어쩌겠어.” 나는 분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보탕은 그런 나의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겁날 것 없다는 듯 떠들고 있었다. “그 따위 넘쳐흐르는 평민 계집애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감동의 눈물에 빠져 익사할 노릇이야. 흐흐, 같은 버러지들끼리 감싸주는 거냐?” “닥치지 못해!” “삼 일이 지나면 넌 죽을 목숨이야. 벌써부터 네놈들을 어떻게 고문할까 기대돼서 참을 수가 없어. 그래, 포기하지 마라. 희망을 갖고 줄기차게 노력해 봐. 삼 일 후면 그 희망이 고스란히 절망으로 바뀌게 될 테니까. 우하하핫!” 보탕의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13 이틀 후. 나는 감옥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또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보탕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런 미친 놈! 밥은 줘야 할 것 아니야!” 온몸이 묶인 채 감옥 안에 갇혀 있던 보탕은 실로 미친개처럼 짖어대고 있었다. “네놈이 고작 생각해 낸 계획이 날 굶겨 죽인다는 거냐?” “이틀 굶은 정도로는 아무도 안 죽어. 특히 너 같은 놈은.” 나는 쇠창살 너머에 있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도망치던 베스의 앙상한 얼굴이 떠올랐다. 청렴한 성직자의 체형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저 지방덩어리 뱃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참에 살도 빼고 좋잖아.” “이놈이 멋대로 지껄이는구나! 내가 굶어 죽으면 교황청이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해? 교황 성하께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이딴 약소국 따위 단숨에 뭉개버릴 수 있어.” “그러니까 이 정도 굶은 걸로는 안 죽는다니까 그러네. 하긴, 평생 단 한 끼도 굶어본 적이 없는 네놈에게는 이것조차 공포겠지.” 보탕, 41세. 그가 대주교가 된 것은 딱히 신앙심이 돈독해서가 아니다. 아니,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아무론 노력도 없이 고위 성직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부 콘스탄트 후작가의 차남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아들이 보통 그렇듯이 보탕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성직자로 결정된 자다. 소위 말하는 선택받은 자. 내가 지금 선택받았다는 것 자체를 욕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축하할 행운이다. 하지만 그 행운을 낭비하고 악용하는 모습에 경멸할 뿐이다. 대충 수도원에 가서 시간을 때우다보면 알아서 직책을 내려주고 가만히 있어도 해마다 승진한다.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고 재산을 긁어모아도 누구보다 빠르게 대주교가 되는 것이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실천하는 진짜 성직자들을 짓밟고 말이다. 남의 인생을 장난으로 망쳐버리는 놈이 이틀 굶은 걸로 죽을까 두려워 벌벌 떠는 꼴을 보자 차라리 측은한 심정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기사들과 함께 붉은 드레스의 여인이 감옥에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넬라 님!”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나와 보탕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리고는. 짜아악. 그 매운 손으로 내 뺨을 후려친 오르넬라 님이 소리쳤다. 아아, 이번 편에서만 두 번이나 따귀 맞는군. “당장 대주교님을 풀어줘!” “.......오르넬라 님.” 나는 표정 잃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대답 대신 병사들에게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명했다. “으윽!” 내게 다가온 병사가 칼머리로 내 어깨를 때려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다른 자들이 보탕을 가둔 자물쇠를 풀기 시작했다. “오르넬라 님! 자존심을 잃은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셨잖아요!” “주제넘은 소리 지껄이지 마. 너 같은 별 볼일 없는 녀석이 이 나라의 흥망을 걱정해 준다고 뭐가 달라져?” 실로 냉혹하게 쏘아붙인 그녀는 감옥을 나온 보탕에게 고개 숙였다. “제 불찰로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보탕의 눈동자가 커졌다. 서열상으로는 추기경 급인 오르넬라 님은 분명 자신보다 윗줄인데도 이 자존심 강한 여자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는 놀라면서도 분명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허허, 이런. 이 나라 왕실에도 제대로 된 사람이 있군요. 하지만 같은 교황청의 가족인 오르넬라 자매님께서 이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다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그는 재빨리 ‘성자의 가면’을 꺼내 쓰며 주절거렸다. “아닙니다. 교황청의 실세이신 대주교 보탕님이 이런 고초를 겪으시다니요. 좀더 빨리 조치를 취하지 못한 제가 백번 사죄할 일입니다.” 속박에서 풀려난 보탕은 성녀님이 자신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자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흡족해 했다. 특히 그녀의 입에서 ‘교황청의 실세’라는 말을 들을 때는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형용할 길이 없는 속물이었다. “성녀님의 겸허하고도 올바른 태도에는 신조차 감동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평생을 신앙으로 살아온 제게 얼토당토않은 죄를 뒤집어 씌워 모욕한 저놈만큼은 내 확실히 벌하겠습니다!” 보탕은 무릎 꿇은 나를 내려다보며 예의 썩은 미소를 지었다. 오르넬라 님은 그를 정중히 감옥 밖으로 안내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재판관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제가 모실 테니 푹 쉬시길 바랍니다.” 그녀는 자신의 엉덩이에 슬쩍 손을 대려는 보탕의 팔을 치우며 그렇게 말했다. 25 약속의 삼 일 후, 어느 때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화창한 오후였지만 왕실은 그야말로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 불미스러운 사건을 판결하기 위해 교황청으로부터 파견된 상급 재판관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는 재판관들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존재로 악명 높은 대심문관 루터였다. 이단 심문관이자 악마학자인 그의 별명은 ‘검은 추기경’이었다. 지금 우리 왕실의 누구도 이 문제가 베르스에 유리한 방향으로 끝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삼척동자가 봐도 이 종교재판이 공정할 거라고는 생각 안할 것이다. 교황청 소속의 대주교를 교황청 소속의 재판관이 판결하는데다가 유죄를 입증할 증거조차 없다.(여기서 증거라고 하면 보탕 본인이나 그 이상의 고위 성직자가 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의 증거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러니까 어떤 법률전문가라도 이미 패배한 재판이라고 단정 지을 상황이었다. 대심문관 루터가 주관할 재판은 본궁 접견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굳이 정식 재판소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이 재판이 아주 빠르고 간결하게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가 들고 온 서류에는 이미 ‘피의자 보탕 무죄’라는 판결문이 쓰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먼저 접견실에 도착한 나는 잔뜩 목을 움츠린 채 루터를 기다리고 있는 왕실 관리들과 그 안에서 태연자약하게 담배를 물어 피우고 있는 아이히만 대공을 볼 수 있었다. 국왕 전하가 왕실을 떠난 현재 국왕 대리인을 맡은 아이히만은 접견실에 나타난 나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언제나 느끼지만 왕족이라기보다는 범죄조직의 우두머리쯤으로 보이는 분이다. 그는 표범 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승산은?” “확실히 있습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는 백발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뭐, 본래대로라면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자네 같은 문제아를 쏴 죽여 버리는 게 정상이지만.......” 그, 그게 어째서 정상입니까! “카론 경의 간청도 있고 해서 누구도 자네에게 손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네.” “감사합니다.” “대신 일이 잘못된다면 교황청보다 먼저 내가 자네 머리에 총알을 심어줄 게야. 한번 시작한 싸움은 절대 지면 안 돼. 분하지만 열심히 싸웠다는 둥 마음만큼은 승리했다는 둥 하는 말 따위 다 개소리야. 패배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무조건 이겨. 무슨 의민지 알겠지?” 그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협박에 가까운 덕담을 들려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니다. 이 재판에 패배하는 순간 내 머리를 겨냥한 총구가 불을 뿜을 것이다. “와아, 엔디미온 경. 오랜만입니다.” “나스타세 씨.” 또 만났네, 또 만났어. 그런데 당신 만날 때마다 위험한 일만 생기던데....... “어쩌자고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셨어요?” “아하하하. 어, 어쩌다 보니까........” 가장 먼저 접견실에 도착한 자는 작은 키의 청년, 이교도 댄스의 계승자 나스타세였다. 그는 대심문관 루터의 보좌관 역할이었다. 소년 같은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의심만점의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런데 설마 저 가방 안에 휴대용 고문 도구 같은 게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의 뒤로 대심문관 루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자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체할 시간 없으니 곧바로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묵직함을 넘어서 위압적인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자리에 앉은 루터의 입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나스타세로부터 받은 서류를 훑어보는 그의 무심한 표정에 시선을 집중했다. 나 역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루터를 보는 순간 어째서 사람들이 그를 ‘검은 추기경’이라고 부르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먼저 말해두겠는데, 재판은 1차로 종결되며 판결에 번복은 없습니다. 만약 제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을 교황 성하와 교황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피의자 보탕을 불러오십시오.” 혹독한 게임의 룰을 설명하는 도박사처럼 그렇게 말한 루터는 보풀이 일어났을 정도로 낡은 사제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그의 외모에 비춰볼 때 청렴함보다는 일종의 괴벽(怪癖)으로 보일 정도였다. 대심문관이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나이는 이십대 후반 가량의 젊은 남자였다. 키스 경보다도 큰 키에 무라사 씨에 육박하는 탄탄한 체구는 새카만 사제복에 그대로 그 윤곽이 드러났고, 그에 얽힌 끔찍한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등에는 수많은 상흔들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얌전하게 다듬은 흑발과 뿔테 안경을 쓴 것만 보면 모범적인 성서 연구가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경 너머의 무표정한 눈매에는 숨길 수 없는 또렷한 살기가 맺혀 있어- 마지못해 신의 힘에 굴복한 거대한 늑대 같았다. 무라사 씨를 보고 ‘강하다’라고 느꼈다면 이쪽은 ‘위험했다.’ 대범한 사람이라면 루터를 보고 ‘와하하하! 이 사람, 한 천 명쯤 죽여 본 것 같은 분위긴데?’라며 웃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농담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농담’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천이백여 명의 귀족을 맨손으로 죽인 살인마.’ 어째서 이런 흉포한 자가 교황청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판결하는 대심문관이 되었는지는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중요한 것은 그런 위험한 자가 지금 이 사건을 심판한다는 사실이다. 거드름을 피우며 접견실에 들어온 보탕은 루터를 보자마자 안색이 바뀌었다. 꼭 사자우리에 들어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루, 루터 사제께서 직접 담당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루터는 무심한 투로 말하며 보탕을 힐끗 쳐다보다 보탕은 ‘흠칫!’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사도좌법원(使徒座法院) 소속 신부인 루터는 직책상으로는 대주교 보탕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그는 교황이 특별히 선택한 사도(使徒)로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추기경 이하의 모든 성직자를 심판할 수 있는 집행인의 권한, 사람들이 일개 신부인 그를 ‘검은 추기경’이라 부르는 이 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는 저승사자가 될 수도 있는 루터를 보고 어깨를 움츠리던 보탕은 곧 가슴을 폈다.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경이 로울 만큼 뻔뻔스러운 제스처였다. 또한 죄가 드러난다고 해도 교황청은 자신을 절대 처벌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하긴, 교황청도 한통속이니 저렇게 양심에 털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도 한 점 부끄럼 없으리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편파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카론 경이 제출한 서류, 그러니까 보탕의 죄목이 낱낱이 기록된 고발장을 훑어 본 루터가 서류더미를 책상에 툭 던지며 말했다. “협박, 추행, 살인교사, 범죄 은폐....... 여기 적혀 있는 죄들을 인정합니까.” 보탕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신의 이름에 맹세코 아닙니다!” 하도 당당해서 화도 안 났다. 그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그 얼토당토않은 거짓 기록들은 제 충직함을 시기한 무례한 이단자들의 모함입니다! 신과 교황 성하께 이 목숨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된 제 신앙심은 루터 사제께서도 익히 아실 겁니다. 곧 저를 모욕한 것은 레오 3세 성하를 욕되게 한 것과 마찬가지! 그런 고로 한시 빨리 루터 사제께서 이단의 무리들로 가득 찬 이 왕국에 교황청의 권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셔야.......” 삼 일 내내 암기라도 했는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헛소리를 루터는 투박한 목소리로 끊었다. “난 알 바 아닙니다. 당신 신앙심.” “예?” “그리고 내가 물어본 말 외에는 입 닥쳐 주시길 바랍니다.” 보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루터는 분명 위험한 자였지만 적어도 보탕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공정하리라는 기대를 해도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루터는 서류 끝자락을 그 상처자국투성이의 굵직한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 고발장에 서명한 자는 카론 샤펜투스 경 그리고 엔디미온 키리안 경으로 되어 있는데, 피의자 보탕은 이들을 알고 있었습 니까?” 보탕은 카론 경과 나를 번갈아가며 바라본 뒤에 질문 자체가 불쾌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당연히 몰랐습니다. 제가 왜 이런 저급한 자들과 친분이 있겠습니까?” 곧바로 루터가 되물었다. “그럼 전혀 모르는 자들이 당신을 모함했다는 의미입니까? 쉽게 이해가 안 가는군요. 당신을 모함한다고 이들에게 득이 되는 일이 있을까요.” “그건.......” 루터는 모든 일을 폭력으로 해결할 것만 같은 인상과는 달리 꽤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추궁에 보탕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 쭈물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이건 처음부터 모함이 아니니까! 결국 그의 변명은 지리멸렬했다. “제, 제가 이런 무례하고도 신앙심 부족한 놈들의 머릿속을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루터는 그렇게 말하는 보탕을 그 ‘늑대의 시선’ 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보탕은 무죄라는 자기 말 한 마디로 순식간에 끝날 줄 알았던 이 재판이 생각 외로 길어지자 당황하고 있었다. 루터의 그 시선이 이번에는 카론 경을 향했다. “카론 샤펜투스 경.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둘이 시선을 마주치는 모습은 이 재판과는 별개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입 한 번만 잘못 놀려도 당장 저 흉기 같은 주 먹을 대포알처럼 날릴 것 같은 루터와 그렇게 주먹이 날아와도 하나도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맞받아칠 것 같은 카론 경의 모습은 꼭 링 위에 오른 서로 전혀 다른 타입의 격투가처럼 보였다. 고요해서 더 살 떨리는 긴장감. 정말 누가 땡! 하고 누가 종을 울리면 곧바로 오늘의 메인이벤트의 막이 오를 것만 같았다. 루터는 (적어도 이번에는) 주먹 대신 말로써 포문을 열었다. “피의자 보탕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접견실에 참관한 모두는 침묵했다. 보탕마저도 말이다. 이것은 정말 주먹보다도 아픈 말이었다. 증거? 이미 산지사방에 널려 있는 것이 증거다. 보탕이 직접 죄를 인정하는 말을 교황 청에 들려주기까지 했는데도 그것조차 증거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것이 ‘증거’란 말인가. 이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카론 경의 패배였다. 모두는 단정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카론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곧 그 입술이 열렸다. “없습니다.” 왕실 사람들은 ‘뭐!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이냐!’라는 경악의 눈초리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은 카론 경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무시할 작정이었을 루터마저도 의외인지 카론 경의 말에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럴 만도 하다. 이 고생을 해서 기껏 보탕을 잡아 놓고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말하다니, 솔직히 말해서 지금만큼은 카론 경이 보탕보다 더 뻔뻔했다. 루터는 두꺼운 안경을 벗으며 카론 경을 다시 바라봤다. 그 표정은 꼭 이상한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 같았다. “카론 샤펜투스 경. 저는 당신이 꽤 유능한 수사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발언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교황청의 고우 성직자를 체포, 감금했다는 의미로 들립니다만.”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안보여줍니까?” “그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순간 루터의 뺨이 실룩거렸다. 카론 경은 그 프라이드 강한 성격대로 루터가 때린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증거를 보여줘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되먹지 못한 당신에게 내가 귀찮게 보여줄 필요가 있겠느냐, 라는 의미의 면박 이었다. 카론 경은 드물게도 한 마디를 더 했다. “나는 시간낭비는 질색입니다.” 그 차가운 조롱에 루터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영 긍정적이지 못한 웃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귀족들을 맨손으로 해부할 때 저런 웃음을 보였을까, 그 소름끼치는 미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카론 샤펜투스 경, 괜한 말로 제 인내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 무서워. 이러다간 재판 끝나기도 전에 살인부터 나겠어. 솔직히 저 교황청의 야수와 맞상대할 사람은 무라사 씨 정도밖 에는 안 떠오른다고! 루터는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일 분 안에 요절낼 것 같은 기세였지만- 마치 뜨겁게 과열된 엔진이 천천히 식어가는 것처럼 그 는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직 제 수행이 부족해서 험한 말이 나온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루터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고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럼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이 사건에 관해 피의자 보탕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아, 보탕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보탕의 기쁜 비명보다도 먼저 루터가 말을 이었다. “또한 카론 샤펜투스 경과 엔디미온 키리안 경은 교황청 대주교의 신성한 임무를 방해하고 그를 모함해 명예를 더럽힌 죄를 물어, 그 죄를 고통으로 씻을 때까지 고문을 행한 이후 화형으로 그들의 더러운 육체와 정신을 정화하겠습니다. 그리고 베르스 왕실 역시 국왕 본인의 정중한 사과와 함께 교황청의 권위 훼손에 대해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 흉악한 판결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깜짝 놀라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판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보탕이 의기양양해서는 지껄였다. “저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왜냐! 제 결백함은 이미 신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께서 올바른 결과로 저를 인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이 추잡한 모함에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신의 권능도 모르고 설친 저 이단자들을 제가 직접 고문실로 끌고 가 회개시키는 것으로 이 고마움을 갚겠나이다.” 자랑스럽게 소리치던 보탕은 곧 말을 흐렸다. 곧 악명 높은 교황청 지하실에 끌려갈 텐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우리의 표정을 본 것이다. 카론 경은 준비해 두었던 새로운 서류를 꺼내 루터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루터가 눈매를 찡그리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대주교 보탕에 대한 또 다른 고발장입니다.” “다른 것도 있었습니까? 다음부터는 되도록 한 번에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던 루터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의 얼굴을 석고상처럼 굳어버리게 만들 일이란 세상에 도 그리 흔치 않으리라. 다 읽은 서류를 내려놓은 루터는 아까와도 비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내며 카론 경을 노려봤다. “아까 경고했을 텐데요. 제 부족한 인내심을 자극하는 짓은 결코 좋은 판단이 아니라고요.” “제가 왜 당신을 조롱하겠습니까. 단지 사실을 고발했을 뿐입니다.” 그 순간 루터의 커다란 몸이 용수철처럼 일어났다. 마치 산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사실? 대주교가 악마를 숭배했다는 소리를 사실이라고 지껄여?” 그의 엄청난 고함소리가 커다란 접견실을 거짓말처럼 뒤흔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카론 경의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그의 두 배는 되는 몸집의 루터가 내려보자 카론 경은 완전히 그의 그림자에 잠길 정도였 다. 그런데도 은의 기사는 미동도 없었다. 만약 카론 경이 이토록 당당하지 못했다면 루터는 재판이고 뭐고 그대로 뭉개버렸을 것이다. 물론 순순히 뭉개질 은의 기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종교재판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점잖게 물러설 검은 추기경도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신앙’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추종하는 사내였다. 내 옆에 있던 나스타세는 기가 질린 모습으로 소곤거렸다. “대체 왜 이래요? 지금 루터 사제 폭발하면 아무도 못 막아요.” “역시 폭발물이었군요.” 그것도 이 왕실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위력을 지닌 폭탄이지. “당신들, 정말이지 내 생각보다도 훨씬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었군요. 교황청이 이 일을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아마도 그냥 넘어가게 될 겁니다.” 내 의미심장한 미소에 나스타세는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황제의 만찬에 꿀꿀이죽을 올려놓고 살아남길 기대하냐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끼어든 자가 있었다. 그 이름하야 보탕. 그는 다람쥐가 고래를 낳는 걸 봤을 때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 아, 악마숭배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를! 루터 사제, 다른 건 아니라도 정말 이 일만큼은 결백합.......” 아주, 굴착기로 무덤을 파라. 원숭이도 안 할 말실수를 해버린 보탕은 황급히 입을 가렸다. 파렴치범의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저능 한 녀석을 루터가 으르렁거리며 쏘아봤다. “쓸데없는 소리 나불거리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루터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는 사자처럼 말했다. “대주교 보탕이 악마를 숭배했다. 그거 정말 믿을 수 없이 추잡한 죄악이로군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보탕의 심장을 몸에서 뽑아 버리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는 당신의 심장이 뜯겨져 나갈 테니 각오하시길.” “교황청은 즉결처분을 선호하는가 보군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살기를 내뿜는 대심문관 루터 앞에서도 카론 경은 얄미울 정도로 싸늘했다. “자 그럼,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단주대의 칼날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고위 성직자의 악마숭배란 교황청 설립 이래 단 한 차례도 벌어지지 않은 최악의 범죄다. 즉,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교황청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모욕이 되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만약 못한다면 루터가 들어 올린 단두대의 칼날은 우리를 찍어 내릴 것이다. 대답을 기다리던 루터 앞에 선 카론 경은 말없이 뒤돌아서서 자리에 앉았다. 그 행동에 두 눈을 부릅뜬 루터는 화가 정점에 달한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카론 경의 배짱을 절반만이라도 빌려달라고 신에게 기원하며 (솔직히 이런 일만 아니면 우연히 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루터 앞에 섰다. “엔디미온 키리안입니다. 증거 제시하겠습니다.” “시간 끌지 마십시오.” 흠칫. 한시 빨리 네 머리통을 몸에서 분리해 주고 싶어! 라고 외치는 저 눈빛은 뭐냐고!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악마숭배자들은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그래서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 즉시 대주교 보탕의 엉덩이를 공개할 것을 요청합니다!” 순간 좌중이 크게 웅성거렸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아아, 루터 사제님의 뜨거운 눈빛에 이대로 녹아 버릴 것 같아! 루터는 신성한 종교재판에서 엉덩이를 까라니, 죽고 싶어 환장했냐는 의미로 내 머리만한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저 성스러운 주먹에 한 대라도 맞으면 내 예쁜 얼굴은 누구도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고깃덩어리로 변신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 이 거대한 맹수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증거를 원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들의 태도에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군요.” 루터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으며 화를 꽉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의자 보탕, 바지를 벗어주십시오.” “예?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독특한 성적 취향을 가진 자를 제외한다면 남들 다 쳐다보는데 바지를 내리는 일은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평민들도 그러한데 고귀하신 성직자님께서는 어련하실까? 사색이 된 보탕은 대체 뭔 놈의 재판이 이러냐며 하소연을 했지만 루터는 당장이라도 저 바지를 내려 이 빌어먹을 재판을 끝낸 뒤 나와 카론 경을 손수 요절내 버리고 싶은 욕망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당장 벗으라니까!” 그 고함에 깜짝 놀란 보탕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바지를 내렸다. 그의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만천하 공개되는 순간, 사람들은 엷은 신음소리를 냈다. 보탕은 인상을 찡그릴 대로 찡그리며 말했다. “자, 보라고! 내게는 아무런 표식도 없.......” 루터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는 것을 확인한 보탕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표식이 있습니까?” 그때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겨우 겨우 참고 있던 위고르 공이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와 보탕 앞에 놓았다. 민망한 자세로 엉덩 이를 거울에 들이댄 보탕은 목을 꺾을 대로 꺾어 (평생 확인 한번 안 해봤을) 자신의 볼기짝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 이, 이게 뭐야아아아아아!” 그의 광활한 엉덩이에는 악마를 추종하는 역 오망성의 문양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그 밑에는 ‘이런 막 되먹은 세 상! 교황 뒈져라!’ 라는 쳐 죽일 카피멘트까지 정성스럽게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보탕은 당장 바지를 끌어 올리며 소리쳤다. 평생 남을 모함하기만 해봤지만 모함 당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인간이기에-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억울해 하고 있었다. “루, 루터 사제! 이것은 분명한 모함입니다! 저는 이런 문신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바윗덩이로 찍어 버릴 것 같은 분위기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보탕은 경망스러운 몸부림을 치며 오르넬라 성녀님을 노려봤다. “네년이지! 네가 날 유혹해서 술을 먹였잖아! 그 술에 약을 탄 게 분명해! 내가 잠든 사이, 내 엉덩이에 이런 짓을.......” 그러나 오르넬라 님을 상대하기에 보탕은 비참할 만큼 무력했다. 그녀는 ‘난 몰라, 당신 같은 사람.’ 이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며 담배연기를 후욱 뿜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사근사근하던 그녀의 태도가 180도로 돌변하자 보탕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냐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쪽이 본모습이지만. “어머나, 보탕 대주교님. 지금 교황 성하께서 직접 선출한 성녀인 제가 저. 보. 다. 직. 책. 도. 낮. 은. 데. 다. 가. 매력이라 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당신을 뭣 하러 유혹해 술을 먹이고 또 뭣 하러 제가 당신의 지저분한 엉덩이를 까봐야 합니까? 아니, 그보 다 누구보다 신앙심을 깊다는 대주교님께서 같은 성직자인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기는커녕 도리어 유혹을 당해 술을 마시고 동침하셨다고 고백하신 겁니까?” 이래도 지옥 저래도 지옥이었다. “우아아아! 이런 뻔뻔한!”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비웃음이 올랐다. “이 오르넬라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수작인가요? 하지만 평민 소녀를 괴롭혔을 때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 같군요.” “이, 이제 보니까 이 왕실 놈들이 다 서로 짜고 날 죽이려는 수작이로군! 이건 함정이야!” 그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 ‘심판의 미소’를 보였다. “그럼 이게 함정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시지요.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증거 말입니다.” 보탕은 정말 엉엉 울 것 같은 얼굴로 오르넬라 님을 바라봤다. 누구라도 자신이 모함당한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심장이라도 꺼 내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신론자 성녀님에게 신의 자비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그녀가 요염한 눈웃음을 보이며 보탕을 토닥거렸다. “보탕 대주교님. 당신은 누구보다도 신앙심이 투철한 모범적인 성직자이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결백하다면, 아무것도 두려 워할 것이 없습니다. 신께서는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요.” 아아, 여왕님. 진정으로 즐기고 계시는군요. 가만히 지켜보던 루터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그는 재판 과정을 기록하던 서기를 향해 말했다. “기록 중지해.” “예? 하지만 규칙이....... 아, 알겠습니다.” 서기는 어깨를 움츠리며 펜을 내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신과 함께라면 만사가 당당하다고 떵떵거리던 보탕은 어째 신의 권능이 영 미덥잖게 되었는지 신을 내팽 개치고 루터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루터 사제, 제가 결백한 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이, 이런 놈들의 협잡질에 교황청이 물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뭐가 문제인지도 아직도 모르십니까?” 루터의 말에 보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 중에 이 상황을 이해 못한 자는 보탕 한 명뿐일 것이다. “지금 당신의 결백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주교의 엉덩이에 신과 교황 성화를 모욕하는 악마의 표식이 새겨 져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저들이 나를 함정에 빠트려서!” 루터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게 됐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 “지금 당신에게 그 죄를 묻겠다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그러나 신을 섬기는 몸으로 자신의 육체에 그런 추잡한 표식이 있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일 것입니다. 목숨을 버려서라 도 그 더러운 표식을 지우고 싶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예? 예?” “저희가 기꺼이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나스타세를 불렀다. 나스타세는 보탕의 팔을 힘껏 잡으며 말했다. “자, 가시지요.” “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설마 그런 불경한 엉덩이와 함께 교황청에 귀환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사태를 파악한 보탕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나스타세는 몸집만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힘으로 보탕을 끌고 가며 말했다. “엉덩이 한쪽이 사라진 정도로는 앞으로 대주교님께서 신앙을 펼치시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을 겁니다.” “내 엉덩이를 도려내겠다고? 그럼 난 죽어!” 입막음을 위해 눈 하나 깜작 안하고 아이를 도려내려고 한 자가 자기 엉덩이를 도려내는 것은 눈물을 흘릴 만큼 두려웠나 보 다. 참 정직한 비겁함이었다. 불행하게도 보탕의 애원 따위 나스타세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지요. 출혈도 있고 고통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확고한 신앙심을 가진 당신이라면 이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 믿습니다.” “사, 살려줘. 내가 평민 하나 때문에 왜 죽어야 해! 인정할게! 그 계집애를 임신시킨 사실을 인정할게! 용서를 구하고 빌 테 니까 제발 나를.......” 처절하게 소리 지르는 보탕을 말 그대로 질질 끌고 간 나스타세는 바닥에 내려놓은 자신의 가방을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역시 저 가방 안에는 아주 위험한 것이 들어있었군. 당연한 결과였다. 보탕도 결국 교황청에는 깃털 하나다. 교황청과 대적하는 북부 콘스탄트나 마키시온 제국에게 군침 도는 정보가 될 악마표식이라는 ‘증거’를 남겨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누가 피해자인지, 누명인지 아닌지, 그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보탕은 평생 자기가 휘둘러 온 잔인한 칼날에 자신이 찔 린 것이었다. 보탕이 사라지자 루터는 그 커다란 손을 깍지 낀 채 한동안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 무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최소한 나와 카론 경을 마음대로 고문할 희열에 젖어 있는 것만 아니라면 좋겠다. 아무리 늑대 같은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겉모습은 인간이잖아. 누가 봐도 보탕의 유죄가 확실한데 이것마저도 ‘증거’가 아니 라고 우기진 말아 달라고! 악명 높은 재판관 루터에게도 인간의 마음이 한 조각 정도는 남아 있길 바랐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바라봤다. 그런데 그가 눈을 마주한 자는 놀랍게도 카론 경이나 내가 아닌 아이히만 국왕 대행이었다. “원하는 것이 뭡니까.” 굵직한 담배를 피워 문 채로 계속 아무 말도 없던 아이히만은 그제야 특유의 노련한 눈매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먼저 자네가 원하는 것부터 말하게나, 루터 군.” 커튼이 쳐진 창문을 바라보던 루터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사건을 함구해 주십시오.” “하긴 대주교의 엉덩이에 악마의 표식이 그려져 있다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안 그래도 약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적대국 들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원치 않을 테지. 마라넬로 그 친구가 들으면 당장 박장대소하며 세계 방방곡곡에 광고할 게야.” “뻔뻔하시군요. 당신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루터의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마저도 산전수전 다 겪은 아이히만에게는 귀여웠나 보다. 대공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또한 자네는 보탕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 루터는 더 이상 ‘모른다. 증거를 가져와.’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대공에게는 그런 위엄이 있었다. “이보게, 루터 군. 갓난아이란 신이 아직도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네. 보탕은 그런 아이 를 죽이려고 했다네. 보통 사람도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범죄를 성직자이기 때문에 용서받는다면, 우리는 죽어서 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거네. 안 그런가?” 교섭의 달인인 아이히만은 악마숭배를 다른 나라에 알리겠다는 위협으로 루터의 입을 막지 않았다. 도리어 가장 인간적인 말로 그 맹수 같은 사내를 길들였다. 나는 어째서 아이히만 대공이 마라넬로 황제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가라는 찬사를 받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루터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정말로 그 평민 소녀 한 명을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아이히만은 빙긋 웃었다. “후후.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런 모험 질색이네만....... 우리 왕실에는 아직도 이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하룻강아지가 하나 있어서 말이지.” 대공이 나를 보며 눈을 찡긋하자 나는 난감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요! 이자벨 님이나 키르케 님이었다면 훨씬 멋들어진 방법으로 해결했겠지만 제 머리로는 이게 한계였습니다. 루터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명주작의 애인이라고 해서 누군가 했더니, 의외의 애송이군.” “예?” 갑자기 알테어 님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깜짝 놀랐다. “명주작이 그러더군. 널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흥! 내가 너 같은 피라미나 괴롭히며 즐거워할 한심한 놈으로 보였나 보지.” 아아, 역시 알테어 님이 보고 계셨군요. 고마워요. 아니, 잠깐 그건 그렇고....... “저어, 그런데 애인이라니요?” “그녀가 직접 그러던데. 자기 애인이라고.” “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하하하.” 알테어 님! 제발 보안 유지를! 신성한 아신에게 수작 걸었다는 이유로 성기사단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길 정녕코 바라시는 겁니까? 곤란하게 되는 건 제 쪽이라고요! 루터는 무거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대공께서 약속을 지킨다면 저희도 지키겠습니다. 대주교 보탕은 성직자의 도리를 어긴 죄로 작위를 박탈하고 죗값을 갚기 위해 영구히 개척 교회의 노동자로 보내는 한편 피해자에게 사과토록 지시하겠습니다.” 딱딱한 목례와 함께 밖으로 향하려는 루터에게 아이히만이 말했다. “상식을 지키기가 참 힘든 세상이야. 안 그런가, 루터 군?” 루터는 문을 열고 나가며 중얼거렸다. “동의합니다.” 모든 재판이 끝나자 그제야 접견실에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 아이히만 대공이 카론 경에게 물었다. “카론 군.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 말이네만, 만약 전쟁터에서 저 루터를 적으로 만났다면 어쩔 텐가?” 카론 경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럼 아군으로 만난다면?” 카론 경은 드물게도 쓴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역시 피하고 싶군요.” 루터는 본래 몰락한 귀족 가문의 소년이었다고 한다. 또한 불행하게도 자신의 친누나와 서로 사랑했다고 했다. 유망한 귀족의 네 번째 부인으로 팔려가듯이 시집을 간 그의 누나는 단지 아이를 낳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얻어맞아 살해 당했고 몇 푼의 위로금과 함께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누나를 보고 루터가 결심한 것은 복수였다. 그 이후 일 년 동안 루터는 천 명이 넘는 귀족들을 학살했다. 그것도 맨손으로 말이다. 군대도 기사단도 막지 못했던 그 엄청난 살육 극은 결국 알테어 님이 직접 나선 뒤에야 막을 내렸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단 한 명의 성직자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누나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성직자였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야수와 같은 그를 거둬들였다. 사실 교황에게 루터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으리라. 도리어 눈엣 가시 같던 지방 귀족들의 목을 알아서 비틀어 준 루터가 내심 기특했을 것이다. 이토록 두려운 공포의 상징이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 광기의 짐승을 감화시킨다면 자신의 권능이 또 얼마나 위대해 보이겠는가. 그래서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죽은 누나를 위하는 일이라고 감언이설로 그에게 목줄을 채우고 자신의 사도로 임명해 귀족을 사냥할 맹수로 키운 것이다. “루터 군도 일종의 피해자인 셈이지. 나는 죄를 동정할 정도로 감상적이지는 않아. 하지만 속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이용만 당하는 것만큼은 측은하기 짝이 없지. 이런, 나도 나이를 먹으니 남의 인생에 훈수 두는 곰팡내 나는 버릇이 생겨버렸군, 후후.” 아이히만 대공은 그렇게 말하며 점잖게 넥타이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서 기지개를 펴는 위고르 공도 환하게 웃으며 퇴장했다. “이제야 내 누명이 풀렸군! 마누라님에게 맞아 죽기 전에 해결되어 정말 다행이야.” 가끔 보면, 위고르 공도 참 소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럼 그동안 못 만났던 레이디들에게 가보실까!” 또한 참으로 발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미온 구운, 수고했어.” 등을 톡톡 두들겨 뒤돌아보니 오르넬라 님이었다. “오르넬라 님이야말로 정말 고생하셨어요.” “응? 나는 즐거웠는데?” “.......아, 예. 즐거우셨습니까?” 성녀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무래도 성녀님은 직업을 잘못 선택하신 것 같아요. “뭐 아무리 그래도 오밤중에 너저분한 중년 남자 바지 벗기는 일은 신께서 용기를 내려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알코올의 용기가 아니고요?” 그녀는 내 짓궂은 농담에 부채를 쫙 펴서 얼굴을 가리며 ‘오호호호, 아무려면 어떠니?’라고 웃으시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앞으로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적으로 돌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묵묵히 흩어진 서류들을 정리한 카론 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 카론 경! 도와주셔서 감사합.......” “왕실을 담보로 도박하는 녀석과는 할 말 없다. 사라져 버려.” 그는 찬바람 쌩쌩 날리며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아아, 완전히 미움 받고 있어! 그때 울상이 된 내 등 뒤로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헬렌 경.” “베스를 보고 싶다고 했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미 왕실은 베스의 아이를 유산시켰다.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그것만큼은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와. 만나게 해주지.” 헬렌 경은 앞장서서 나갔다. 26 놀랍게도 베스를 숨겨둔 곳은 헬렌 경의 집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베스는 아직도 배가 불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는 헬렌 경을 바라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아이를 뗐다고 하지 않았나요?” “흥. 그렇게 했다고 보탕에게 말했을 뿐이야.” “예?” “보탕 같은 놈이 일일이 확인할 리가 없잖아. 대충 얼버무려 놓고 사건이 진정되면 돌려보낼 생각이었어. 보호도 해주고 육 아비도 주고, 아무리 힘없는 왕실이라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아이를 뗀 것이 아니었군요. 고마워요!” 내 말에 헬렌 경은 도리어 화를 내며 대답했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나도 여자야. 내가 정말 그런 흉악한 짓을 할 거라 생각한 거야? 실례야!” “하하, 미안해요.” 빨개진 얼굴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뭐 알았으면 됐어.’라고 말하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쓴웃음을 보이는 내게 베스가 말했다. 그녀는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다. “아직 당신 이름도 모르네요.” “아! 엔디미온 키리안이에요. 미온이라고 불러주세요.” “후후. 기사답지 않은 이름이로군요.” “제게 이름을 주신 분들이 절 기사로 키울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에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헐렁한 잠옷 위로 보기 좋게 솟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더니, 모두들 그 남자에 대한 복수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더군요. 미온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왜 포기하지 않은 거죠?” 그녀는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당신도 알고 있는 이유 때문이에요.” “그렇군요.” 나는 당연히 평생 아이를 잉태할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정성스럽게 자신의 배를 매만지는 그녀의 심정을 공감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물기어린 눈동자로 웃으며 소곤거렸다. “지켜줘서 고마워요.” “에헴! 당연한 기사의 의무죠.” 나는 비록 사람들 골치 아프게 만드는 ‘왕실공인 대재앙’ 이지만, 이 정도의 거드름은 눈 감아 주지 않을까 싶어서 팔짱을 끼며 콧대를 세웠다. 뭐, 그녀는 도무지 기사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웃어버렸지만 말이다. [제 2부] 제 22화 타락 천사의 詩 1 쇼메 블룸버그, 즉 이오타 제1왕자를 노리는 여성들은 그 수가 백 단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그가 금발의 미남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마음을 빼앗는 순간 이오타의 차기 왕비 자리가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떤 여자가 전력을 다하지 않을까. 물론 쇼메가 아직 왕세자로 책봉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오타이 차기 국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전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애당초 가장 확실한 혈통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성질까지 사나운 쇼메와 왕위를 놓고 다투려는 경쟁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쇼메가 왕실에 오는 날이면 내로라하는 귀족가의 영애들이 먹잇감을 노리는 대머리 독수리 떼처럼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일쑤였다. 그녀들의 머릿속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쇼메를 포획하고 말리라는 책략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작 쇼메는 손톱만큼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보통사람이라도 최음제 같은 것을 치마 속에 숨기고 접근하는 광기의 여자에게 호감 생길 남자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왕실에 갇혀 있는 것을 싫어하는 쇼메는 일 년 대부분이 출장 중이라서 귀족 아가씨들은 쇼메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에이, 망할.” 오랜만에 왕실로 돌아온 쇼메는 자신의 책상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종이 무더기를 보고는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카론 경이 었다면 당연히 서류 더미였겠지만, 쇼메의 경우는 연서(戀書)였다. 오래 전부터 사모했다는 둥 오늘 밤 무도회에 꼭 참석해 달라는 둥 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 러브레터의 산은 쇼메가 없는 와중에 도 차곡차곡 쌓여 운하 밑의 진흙처럼 웅장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못 본 여자한테 연애편지 받으면 기분 좋을 것 같아? 미레일, 치워 버려.” 쇼메는 이 여자들 자존심도 없어? 라고 투덜거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뒤따라 들어온 미레일은 그 좋은 힘으로 자기 몸집만한 ‘폐품’을 번쩍 들어 벽난로 근처에 쌓아놓았다. 일일이 버리는 것도 귀찮으니까 겨울에 땔감으로나 쓰자는 쇼메의 고약한 제안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뜨거운 연서였다. 미레일은 겨울 내내 사용해도 될 것 같은 ‘땔감’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진한 향수냄새가 배어 있어 꽤나 향기롭게 타 오를 것 같았다. “어쩐지 제가 모시는 분들은 항상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군요.” “그래? 나 만나기 전에는 누구하고 있었는데?” 매사에 심드렁한 쇼메는 드물게도 흥미를 보였다. 저 유순한 인상의 경호기사가 자기 과거사를 꺼내는 일은 꽤나 드문 경우였기 때문이다. 가끔 지난 일을 물어봐도 ‘자신은 평범한 귀족 가문의 평범한 장남’ 이었다는 것이 그가 대답하는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데 그게 사실이다.) 미레일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붉은 눈의 친구가 떠올랐다. 세상에 오직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빛나던 위험한 신수(神獸)였다. 영원히 그를 모시며 그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지켜보고 싶었다. 자신은 매사에 둔하고 욕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그 두근거리는 기대감만큼은 키릭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그 ‘실험’이 모든 것을 산산이 부숴버리기 전까지 는 말이다. 미레일이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주우며 말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 “흐음, 그래?” 쇼메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로 순진한 인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캐물을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금 쇼메의 신경은 온통 다른 쪽을 향해 있었다. “미레일. 나를 노리는 놈이 누굴까.” “글쎄요.” 쇼메가 꺼낸 이 말을 결코 농담이나 비유가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자신이 죽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한 그걸 실천 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에 걸쳐 쇼메는 여러 종류의 암살 시도를 경험했다. 그것도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배를 찌르는 식의 어설픈 위협이 아니라- 독살, 저격, 살인 가스 등등의 효과적이고 치명적이며 결코 암살자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의 짓이었다. 24시간 쇼메의 곁에서 밀착 경호하는 미레일이 없었다면 제아무리 쇼메라도 지금쯤 무덤 속에 있었을 것이다. 정보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해박한 이자벨조차도 감히 이오타 제1왕자의 목숨을 노리는 자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니, 마키시온 제국이 움직인 거라고 생각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당장 노이로제에 걸려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자살했겠지만 쇼메는 ‘혹시 저 편지들의 주인공 중 하나가 애증을 품고 날 노리는 거 아냐?’라고 웃어넘길 정도로 대범했다. 물론 그렇다고 속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불안감이 아니라 자신을 노리는 자를 꼭 찾아내 그냥두지 않겠다는 분 노였다. “일단 상대는 날 잘 알고 있는 놈이야.” 쇼메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왕실만이 쇼메가 어디로 움직일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마다 암 살자가 따라붙는다는 의미는 자명했다. “암살자는 왕실 식구 중 하나라는 거지.” 쇼메가 오랜만에 왕실에 들른 것도 그 왕실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여기까지는 파악하기가 쉬웠다. 문제는 동기였다. “대체 날 죽이려는 이유가 뭘까?” 솔선수범해서 빗자루를 들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방을 청소하던 미레일은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하, 글쎄요. 죽은 이유가 너무 많아 탈이로군요.” “넌 말이지, 가끔 태연한 얼굴로 꽤 모진 말을 해.” 쇼메는 혀를 차며 테이블에 두 다리를 걸쳤다. 미레일의 말대로 자신이 죽길 바라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해도 잔뜩 있었다. 쇼메에게 왕위를 빼앗긴 외척들로부터 시작해서 쇼메에게 권력을 빼앗긴 관료들, 쇼메에게 영지를 빼앗긴 가문들, 쇼메에게 순결 빼앗긴 공작가 귀부인까지-온통 빼앗고만 살아온 인간이니 누가 적이 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 생각에 잠겨 있던 쇼메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내가 죽길 바라는 인간이 이다지도 많았나? 하는 불만의 표정이었다. 꽤 열심히 살아 왔다고 자부하는데, 그 노력의 대가가 모두가 죽길 바라는 사람이 된 거라니, 허무하기 짝 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상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엄연히 달라. 누군가를 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미움보다 더 확고한 이유가 필요해.” 그건 자기정당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국의 왕자를 살해한다는 것은 살해하는 쪽에서도 목숨을 걸어야 할 중범죄다. 단순히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라는 미적지근한 앙심 정도로는 동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암살 정도는 밥 먹듯이 해내는 상당한 전문가가 분명했다. 어쭙잖은 보복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의 정체는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국왕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린 시녀가 말했다. 쇼메는 이불에 지도 그린 걸 들킨 소년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 호출이로군. 또 결혼하라는 독촉이겠지. 효자 노릇하기 되게 힘드네.” 쇼메는 완고한 아버지와 반항적인 아들의 역학관계란 왕족이든 평민이든 차별 없이 똑같다고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2 “미레일. 밖에서 기다려.” 쇼메는 하품을 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아버지이자 이오타 국왕인 빌헬름 블룸버그의 거처, 즉 본궁에 들어섰다. 본궁 내부는 경호 기사인 미레일조차 출입할 수 없는 곳이고 심지어 쇼메마저 무기를 반납해야 출입할 수 있는 편집증적인 보안시설이었다. 왕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보안이지만 쇼메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쇼메도 본궁에서 생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에게 본궁이란 단지 ‘화려한 감옥’일 뿐이었다. ‘감옥은 탈출해야 제 맛이지.’ 갑갑한 본궁을 싫어하는 것은 쇼메에게 방랑벽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기를 마라넬로의 손아귀에서 볼모가 되어 보냈던 쇼메는 어린 시절 항상 감시 받고 갇혀 있기 일쑤였다. 그 유년기의 경험은 이 자신만만해 보이는 청년에게 폐소공포라는 정신적인 흉터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의사와 상담하기는커녕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말하지 않았다. 단지 갑갑한 곳에 갇혀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할 때마다 마라넬로를 향한 무한한 증오심을 일부러 키워나갔다. 쇼메는 그런 남자였다. 지금도 좁고 긴 복도를 걸으며 기분이 침울해진 쇼메는 애써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놈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얼간이 같은 귀족들은 아닐 테고.......’ 쇼메는 그들이 품위고 자존심이고 없는 족속들이라 평가했다. 대대로 이어져 오는 특권을 지당하다는 듯 누려오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기능이 퇴화된 생물들. 그런 하등한 무리들에게 자신을 해칠 배짱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군부(軍部)?’ 이오타 군대의 장성들이라면 그럴 능력도 있고 배짱도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쇼메는 철저히 그들을 자신의 편으 로 만들어 두었다. 쇼메는 권력이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무식한 격언을 믿는 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총부리를 하찮게 보는 고상한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군대를 적으로 돌린 지도자의 종말이 항상 비참하다는 사실은 역사책을 몇 번만 뒤적거려도 알 수 있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쇼메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군대를 ‘품위 없는 야만인 집단’ 정도로 치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좋 은 조건을 내놓는 자가 없는 이상 군 당국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댈 일은 없었다. ‘귀족도 군부도 아니라면 누굴까.’ 쇼메의 머릿속에는 이지적인 미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이자벨 크리스탄센, 무소불위의 방첩기관인 인트라 무로스의 국장이라면 아무리 쇼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 버릴 수 있는 파워가 있었다.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그녀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에 대해 조금도 단서를 못 잡고 있다는 사실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 니까 암살자의 정체가 그녀라면 자신의 위치를 항상 파악하고 있는 것도, 치밀한 암살방식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은밀한 움직임 까지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하지만 쇼메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설령 왕위를 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쳐도 해칠 수는 없다. 인트라 무로스는 국왕 직 속 기관이다. 아무리 그녀가 국장이라고 해도 국왕의 허가 없이 단독으로 자기 나라 왕족 암살을 감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말 그대로 역모였다. 게다가 이자벨은 어차피 왕족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계승권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또한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여왕 자리를 노리는 속 시커먼 야심가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제는 실없는 상상마저 들었다. ‘하하. 그럼 아빠가 이자벨에게 날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말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걷던 쇼메는 걸음을 멈췄다. 보안을 위해 일부러 좁고 길게 만든 복도였다. 그런데 자신의 앞뒤로 검은 옷 의 남자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 칼을 차고 있었다. 무장이 엄격히 통제된 본궁에서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는 국왕 본인과 국왕이 직접 선출한 근위기사들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중 누구도 아니었다. 쇼메를 노리는 자객이 분명했다. “.......농담이겠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는 겁 없는 암살자들이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본궁까지 들어와 쇼메를 노렸다는 가정과 두 번째는 국왕의 명령으로 쇼메를 죽이기 위해 매복해 있었다는 가정. 지금 쇼메는 경호기사 미레일도 없고 무기도 없는 혼자이며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막 본당에 온 상태다. 그의 아버지 빌헬름 국왕 외에는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없다. 그러니까 둘 중 어느 쪽이 가능성이 높을지는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으리라. 쇼메는 방금 전 자신이 했던 ‘실없는 상상’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는 당혹 감에 젖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아버지가 나를........” 이것은 분노 이전의 문제였다. 그 명석한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아버지가 자신을 죽여야 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왕위 를 물려주기 싫어서, 라고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과격했다. 풀리지 않는 당혹감이 쇼메의 몸을 뒤덮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떨던 쇼메는 커다랗게 소리쳤다. “날 죽이려고 했다면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아버지!” 그 순간 쇼메를 향해 암살자들이 달려들었다. ‘제길!’ 쇼메는 분명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졌지만 전문적인 암살자 무리를 맨손으로 처리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 쇼메의 팔과 다리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겼다. 빠른 움직임으로 날아드는 칼날을 피해 즉사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예상 외’였지만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 다. “큭!” 깊게 베인 팔을 꽉 잡은 채 벽 쪽으로 뒷걸음질치는 쇼메를 자객들이 서서히 조여 오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그들을 노려보는 쇼메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국왕에게 영문도 모른 채 암 살당한 왕자에 대해 역사책에서 읽는다면 형용할 수 없는 얼간이라는 평가 외에는 아무 할 말도 없을 것이다. ‘한심해. 하하. 진짜 시시한 죽음이로구나.’ 쇼메는 눈을 감으며 주먹을 내렸다. 저항하는 것조차 한심했다. 그때 텅 비어 있는 쇼메의 머릿속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터졌다. “쇼메 전하!”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기사가 뛰어 들자 쇼메를 찌르려던 자객들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단신으로 이 복도까지 밀고 들어온 자 는 바로 미레일이었다. 그는 단숨에 쇼메의 손을 잡아끌고 당황하는 암살자들에게서 떨어졌다. “미, 미레일?” “아무래도 수상해서 무단으로 행동했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했다고? 쇼메는 실 웃음이 나왔다. 상황판단이 좋다고 칭찬하기에는 지나치게 대범하지 않은가. 쇼메는 자기 앞을 지키며 달려드는 자객들과 맞서 싸우는 미레일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질렸다. 분명 다른 경호기사였다면 주군이 살려달라고 고함을 쳤더라도 절대로 본당에 무기를 들고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기사 작위 박탈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반역이다. 미레일은 차기 왕실 기사단장감이라는 말을 듣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타국 출신의 기사로서는 이례적인 출세, 그 탄탄하게 보장된 미래를 이렇게 단숨에 포기했단 말인가. “베르스 녀석들은 다 너처럼 무모하냐? 내 목을 아버지에게 갖다 바치는 편이 좋지 않겠어?” 쇼메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미레일에게 괜스레 빈정거렸다. 키릭스도 인정한 무서운 검술로 자객들을 처리한 미레 일이 검을 집어넣으며 방긋 웃었다. “전 꽤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흥.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군.” 쇼메는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미레일은 대답 대신 자신의 타이를 풀러 그의 상처를 지혈해 주었다. 사실 미레일은 카론 이상으로 완고한 면이 있는 사내였다. 권력이든 명예든 그를 움직이지 못했다. 항상 그를 매료시키는 것은 지켜 야 할 가치가 있는 광채, 키릭스가 그랬고 카론이 그랬고 쇼메가 그랬다. 미레일은 호감 있는 여자 앞에서 마냥 얼굴만 빨개지는 숙맥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거는 단호한 남자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고전적 기사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3 “이제 쫓아오지 않는군요.” 본당 밖으로 도주한 쇼메와 미레일은 아무도 자신들을 쫓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하지. 아버지에겐 아닐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왕자야.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왕자를 찔러 죽이면 뒤처리가 골치 아플 테니까.” 쇼메는 특유의 비웃음을 보이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긴장감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어물쩍거리다가는 꼼짝 없 이 죽게 될 것이 뻔했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미레일은 현명했다. 말이 더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이런 경우에는 눈을 속이기 위한 마차가 좋았다. 게다가 왕실 인장까지 찍혀 있는 마차라면 거의 모든 관문을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일단 군 사령부에 가서 군권을 잡으시는 것이........” 그 역시 현명한 판단이었으나 쇼메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허술했음을 인정했다. “아니. 이젠 군부도 내 편이라고 할 수가 없어.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이미 내 팔다리는 모두 잘라낸 다음이라는 의미 니까. 이오타에 우리가 있을 곳은 없어.” 미레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은 왕국의 주인이다. 집주인의 눈 밖에 난 자는 집밖으로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설령 그 것이 주인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일단은 베르스로 가자.” “예? 하지만.......” 미레일은 쇼메의 판단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확실히 다른 권력자에게 몸을 의탁해서 힘을 키우는 것이 순 서지만, 기왕 그럴 바에는 콘스탄트 같은 강대국이 좋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쇼메의 정치 감각은 미레일보다 한 수 위였다. “너무 큰 짐승에게 가봐야 내가 먹힐 뿐이야.” “.........!” 쇼메는 자신의 혈통 외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세다. 군대라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혈혈단신으로 거래하기에 콘스탄트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지금은 도리어 적절히 제어할 수 있는 만만한 동반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베르스는 또 너무 약해서 문제이긴 한데........’ 그는 아이히만 대공을 만나 자신의 몸값을 부를 생각이었다. 다른 나라 왕자가 몸을 의탁한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이익이다. 말 그대로 다른 나라의 왕위 계승권을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쇼메를 감당한 여력이 되는 나라일 때 얘기지, 베르스가 과연 쇼메를 받아줄 배짱이 있을지는 쇼메 스스 로도 알 수가 없었다. “에이이. 몰라. 될 대로 되겠지.” 무사안일주의를 싫어하는 쇼메였지만 이 지경이 되고 나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미온에 게서 배운 말투를 투덜거렸다. “그런데 전하.” “어이, 이제 그놈의 전하 소리 좀 집어 치우지?” “전하, 권력이 사라졌다고 혈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쇼메는 ‘그건 그렇군. 혈통이란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물건이지.’ 라며 웃었다. “국왕 전하께서 왜 왕자님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 “나도 그게 의문이야. 모르긴 해도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라면 나는 짐작도 못할 만큼 대단한 이유일 테지!” 쇼메는 냉소를 퍼부었다. 미레일은 속이 까맣게 타버렸을 주군의 마음을 걱정했지만, 쇼메는 자기 상처를 보여주고 위로를 갈구하 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프다고 외쳐봐야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쇼메는 차가운 눈초리로 본궁을 올려다봤다. 하늘 높이 치솟은 저 거대한 궁전 안에서 지금 자신의 아버지가 있으리라. 그와 싸우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도 참을 만 했다. 하지만 왜 자신을 죽이려는지, 그 이유만큼 도저 히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통증과도 같았다. 분명 피가 흐르는데,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는 혈액과도 같은 것이다. 어쩌면 키릭스의 통증과 비슷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쫓기는 신세가 된 이오타의 제1왕자는 새파란 눈동자로 아버지의 궁전을 바라봤다. 4 빌헬름 국왕의 집무실 문이 열리며 회색 스트라이프 슈트를 입은 금발의 여자가 들어왔다. 인트라 무로스 국장 이자벨 크리스탄센이 었다. 국왕은 쇼메와 똑같은 날렵한 눈매로 이자벨을 바라보았다. 그는 뾰족 수염을 기른 매력적인 외모의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그 눈 동자는 당당하지 못했다. 이자벨이 말했다. “그런 주눅 든 표정 보이지 말라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이 광경을 누가 봤다면 당장 기절초풍을 했을 것이다. 부하에게 굽실거리는 국왕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이자벨은 피로 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국왕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쇼메 왕자는 놓쳤습니까?” “미레일이 끼어들 줄은 예측 못했어. 하여튼 남자들이란.” “이대로 쇼메 왕자를 보내줘도 괜찮을까요?” “적어도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니까 넌 국왕 역할이나 잘 하고 있어.” 이자벨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빌헬름 국왕, 즉 빌헬름 블룸버그의 역할을 맡은 남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다물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쇼메의 아버지 빌헬름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국왕이 이자벨에게 암살되고 감쪽같이 가짜로 바꿔치기 된 것 은 벌써 육 년 전의 일이었다. 키릭스를 분열시키는 실험에도 성공한 이자벨이 국왕과 똑같은 외모의 가짜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녀가 이런 발칙한 찬탈행위를 저지른 이유는 여왕이 되려는 야욕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자기방어였다. 처음 상대를 제거하려고 한 쪽은 이자벨이 아닌 국왕 빌헬름이었던 것이다. 이자벨의 힘으로 확고한 왕권을 장악했을 때까지만 해 도 빌헬름 국왕은 누구보다 그녀를 신임했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이자벨을 이용해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한 빌헬름은 이제는 오른팔인 그녀 가 자신을 노릴까 제풀에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충성스러운 이자벨은 털끝만큼도 모반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의심이라는 감정은 아무런 증거 없이도 상대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괴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자벨의 천부적인 재능은 국왕을 두렵게 만들었고 그녀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만들었다. 의자에 기댄 이자벨은 눈을 감은 채 그때 일을 떠올렸다. 차라리 국왕의 제거 명령을 몰랐다면 마음은 편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트라 무로스라는 막강한 정보망을 소유한 그녀는 주군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리 간파했고, 둘 중 하나를 택 해야 했다. 충성을 지키며 주인의 손에 기꺼이 죽든가 아니면 선수를 쳐서 주인을 죽이는 것이다. 결국 이자벨의 배신감은 후자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항상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리지만 일단 결정을 내린 일을 추진하는 것은 누구보다 빠르고 냉혹하다. 이자벨은 인트라 무로스 특무대를 동원해 잠들어 있는 빌헬름과 왕비마저 모두 암살하고 완벽하게 가짜로 바꿨다. 아무리 잘 만들 어진 가짜라도 아내는 속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쇼메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 그가 마키시온 제국의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마라넬로가 쇼메의 목 숨을 살려준 셈이다. 볼모에서 벗어나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 와 재회한 쇼메는 부모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제는 쇼메가 왕위에 오를 나이가 된 것이다. 이자벨은 그를 제거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쇼메는 내버려두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났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모두 밝혀낼 만큼 말이다. 그녀는 쇼메를 제거하고 그의 범상한 남동생을 국왕으로 옹립시킬 생각이었다. 쇼메에게는 잔인한 처사였지만-차라리 이유를 모르고 죽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키릭스도 나도 이젠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일지도 몰라’ 빌헬름 국왕(으로 위장된 사람)은 본래 국왕처럼 똑똑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일로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발각될까 안절부절못하며 이자벨에게 물었다. “저어, 이제 어쩌죠? 어떻게든 쇼메 왕자를 잡아서 죽여야.......” 이런 우둔한 남자. 이자벨은 눈매를 찡그렸다. 사실 그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육 년 넘게 연기를 해온 이자가 아직까지도 믿음 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답답하게 찔찔거리는 물줄기처럼 말을 이었다. “이제 왕실 사람들도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술렁거리고 있고.......” 피를 흘리는 왕자가 마차를 타고 급히 왕실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은 현재 왕실을 뒤흔들고 있었다. 조용히 쇼메를 제거하기에는 이 미 늦은 것이다. 물론 이자벨은 이것도 대비하고 있었다. “도리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예? 어째서요?” “쇼메를 공개적으로 처형할 명분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는 이자벨의 미소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금발머리의 청년이 들어왔다.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인 그는 이자벨의 심복인 리젤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아까 본당에 들어오면서 맡겨두었던 쇼메의 검이 들려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는 ‘빌헬름’ 앞에서 이자벨이 말했다. “쇼메 왕자는 왕위를 놓고 국왕 빌헬름과 다투던 중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주했다. 지금부터 이십 분 후에 밝혀질 사건이야.” “........!” 그 순간 리젤이 든 검이 번뜩이며 국왕의 목이 떨어졌다. 리젤은 피에 젖은 쇼메의 장검을 시체 옆에 놓으며 말했다. “왕비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이자벨의 말에 리젤은 싱긋 웃으며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릭스가 이자벨의 살수(殺手)라면 리젤은 증거인멸과 조 작의 프로다. 게다가 위험천만한 키릭스와는 달리 이자벨의 명령이라면 자기 손으로 자기 심장을 꺼낼 수도 있는 충견(忠犬)이기도 했다. 시계를 꺼내 관리가 올 시간을 확인한 이자벨은 피로 물든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리젤은 죽은 자의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고 있었다. 5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대로를 질주하는 쇼메의 마차는 곧바로 베르스를 향하고 있었다. 방금 국경을 넘었지만 추격대는 따라오지 않았다. 쇼메 자신도 맥이 빠질 정도로 도주는 쉬웠다. 그러나 쇼메의 기분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무겁기 그지없었다. ‘대체 아버지가 날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의 부모 자체가 가짜였다는 것까지는 차마 예상하지 못한 쇼메였지만 그래도 그의 영민한 감지력은 이 암살 극이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자벨이 이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단순한 아버지의 손발 이상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상한데. 이자벨이 날 이렇게 쉽게 놓아줄 리가 없는데........’ 이자벨은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한 여자다. 만약 죽이기로 결정했다면 결코 자신이 도망치도록 봐줄 리가 없는 여자다. 쇼메는 손으로 턱을 괜 채 노을에 물든 창밖을 바라봤다. 그 순간 폭음이 터지며 마차가 날아올랐다. ‘제길! 역시 이거였나?’ 미리 매설되어 있던 폭약은 마차가 지나가는 순간 폭발했고 마차는 삽시간에 전복되어 수차례나 바닥을 굴렀다. 마부 역할을 하 고 있던 미레일 역시 하늘로 날아올라 땅으로 추락했다. 그와 함께 매복해 있던 수십여 명의 사내들이 검을 든 채 사방에서 나타났다. 이자벨은 처음부터 쇼메가 베르스의 국경을 넘은 뒤 에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쇼메가 베르스로 가리라는 것도 간파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폭약을 설치했던 자들은 박살난 마차를 둘러싸고 서로 수군거렸다. “흐흐. 이 자식. 이미 죽은 거 아냐?” “그런가본데? 싱겁게 스리.” 참혹하게 부서진 마차에 다가온 괴한들은 이자벨이 파견한 인트라 무로스 요원들이 아니었다. 용의주도한 그녀는 특무대를 이용하 지 않았고 대신 잘 훈련된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돈만 충분히 준다면 양심의 가책도 없이 민가에 불을 지를 수도 있는 자들이 니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일을 의뢰한 자가 인트라 무로스 방첩국장이라는 사실도, 죽이려는 자가 이오타의 왕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물론 이자벨은 용병들이 일을 마치면 그들 역시 제거할 계획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체는 확인해야 하니까.......” 용병 중 하나가 비참하게 부서진 채 뒤집혀 있던 마차에 다가가 문을 뜯어냈다. 그때 마차 안에서부터 손이 뻗어 나왔다. 그 손 끝에는 금장 권총이 들려있었다. “뭐, 뭐야?” 이마에 바싹 붙은 총구가 불을 뿜는 순간 그의 머리가 꺾이며 핏줄기를 뿜었다. 머리가 뚫린 채 즉사한 용병의 시체 위로 날카 로운 눈매의 청년이 걸어 나왔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수인들 앞에서 도리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 떨거지들은. 날 죽이겠다는 놈들이 고작 이딴 것들이야? 이자벨이 날 깔봐도 어지간히도 깔봤나 보구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덜덜 떨며 살려달라고 빌 줄 알았던 쇼메가 도리어 자신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자 용병들은 기가 막혔다. 뻐근한 팔을 빙글 돌린 쇼메가 말했다. “이봐, 이오타의 왕자로 살아간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결코 착하게 살 수 없다는 의미야.” 그 순간 다시 한 번 쇼메의 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이 심장을 꿰뚫는 순간 검을 뽑은 쇼메가 이미 그들 속에 뛰어 들었다. 주저 없이 그들의 목과 팔을 잘라내는 쇼메의 표정은 더없이 냉혹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믿던 몇 안 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울분은 싸늘한 증오심으로 이들에게 돌아갔다. 그거 검을 내지르며 차갑게 웃었다. “뭐해? 살고 싶으면 덤벼야지.” 용병들은 머릿수로 몰아붙이기로 했지만, 곧 다른 쪽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미레일이었다. 아까 전 낙마의 충격으로 한쪽 어깨가 부서지긴 했지만 미레일의 검술을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의 검술은 카론마저도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했을 정도다. 압도적인 기세의 미레일과 맞선 용병들은 자신들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결코 흠집 하나 낼 수 없다는 자라는 것을 알았다. “나 저놈 본 적 있어! 분명 쇼메 왕자야!” “맙소사! 이런 놈들이라고는 말 안했잖아!” “돈이고 뭐고 이러다간 다 뒈지겠어!” 공포에 질린 용병들은 의뢰를 포기하고 도주하려고 했으나 미레일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미레일은 깔끔하게 청소된 방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는 가정적인 남자였지만 눈앞에 적을 동정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미레일은 도주하는 용병들의 목숨을 빈틈없이 끊어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했다. 이윽고 피비린내 내는 고요함이 젖어들자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검을 거둔 미레일은 멀뚱하니 서 있는 쇼메에게 다가갔다. “전하,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보면 몰라? 없잖아.” 쇼메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경호기사 덕분에 손쉽게 난관에서 벗어났는데도 퉁명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미레일은 조금 당황해서 자 신의 주군을 바라봤다. “미레일, 앞으로 내가 있을 때는 나보다 더 잘 싸우지 마라.” “예?” “명령이야.” “네?” 쇼메는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미레일의 검술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항상 그런 고약한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주군의 말버릇에 익숙한 미레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미레일.” “예.” “저쪽에서 오고 있는 놈은 또 뭐냐.” 미레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이 기척을 못 느꼈단 말인가. 그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가장 믿기 싫은 상황이 펼쳐졌다. 곧이어 새빨간 두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입 꼬리 가 살짝 올라갔다. “오랜만이야, 미레일. 정말로 반가운데?” “........키릭스 씨.” 신음소리를 내던 은발의 기사는 자신의 옛 친구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순수한 의미의 공포였다. 만약 죽은 자가 무덤에서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이보다는 덜 놀랐으리라. 쇼메는 눈매를 좁히며 키릭스를 바라봤다. “너, 분명 예전 엔디미온이라는 녀석 옆에 있던........” 그 말에 키릭스는 방긋 웃었다.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웃음이라 소름이 끼쳤다. “보는 눈이 없으시군요. 왕자님. 그 따위 복제품과 저를 착각하시다니.” “복제? 알게 뭐야. 그보다 너........ 인간이 맞긴 한 거냐?” 쇼메는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키릭스에게 풍겨 오는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에 질려 있었다. 악마에게도 숨결이 있다면 바로 그것과 같을 것이다. 미레일의 얼굴을 저 정도로 위태롭게 만드는 자는 세상에 거의 없다. 쇼메는 그자가 바로 미레일이 예전에 모셨다고 말했던 ‘여자에게 인기 많고’ ‘지금은 세상에 없다던’ 장본인이라는 것을 단숨 에 알아챘다. 미레일은 쇼메의 앞을 가로 막고는 키릭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 피하십시오.” “뭐?” “어서 도망치세요! 늦기 전에!” 쇼메는 그 즉시 얼굴을 붉혔다. 미레일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알고도 남았지만 쇼메는 거부했다. “웃기지 마! 내가 왜 도망쳐?” “여긴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늦기 전에 어서!” “우리 둘이 싸우면 이길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쇼메는 스스로도 자신감이 없었다. 얼마나 강할지 짐작도 안 가는 자를 마주한 것은 아신 외에는 처음이었다. 그런 괴물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먼지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보호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쇼메는 목숨을 방패로 자신을 지키려는 자에게 ‘나를 위해 죽어라.’ 라고 말할 수 없는 성격 인 것이다. 그것은 자존심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쇼메는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레일의 성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리광 부리지 마! 남은 목숨을 걸고 있는데!” “.......!” 쇼메는 감전된 것처럼 흠칫 놀랐다. “쇼메 전하, 당신이 고작 이런 곳에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전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을 지키지 않겠습니다. 그런 시시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디 절 실망시키지 말아주십시오.” 무서운 으름장을 늘어놓은 미레일을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쇼메는 마음을 굳혔다.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기사였다. “맙소사. 난 주군을 협박하는 기사를 데리고 다녔었군. 알았다. 대신 너도 멋대로 죽지 마라. 부탁이야.” 그제야 미레일은 웃음을 보였다. “무리한 부탁이지만, 최선을 다하지요.” “흥. 누가 상전인지 모르겠군!” 일부러 차갑게 쏘아붙인 쇼메는 베르스를 향해 뛰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으리 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 목숨은 이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키릭스가 느릿하게 박수를 쳤다. “와아, 감동적이야. 이거 좀 억울하네. 왜 난 항상 방해하는 역할이지?” “.......” “아니, 그보다.......” 그 순간 키릭스의 칼끝이 미레일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믿겨지지 않는 빠르기에 피하지도 못한 채 찢겨진 미레일의 뺨에서 핏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키릭스가 눈웃음을 보였다. “너도 화낼 줄 알았구나. ‘전하를 지키는 것도 이제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안녕히 가시길.’ 미레일은 마음속으로 쇼메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6 미레일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큭!” 키릭스의 검을 받아낸 그는 몇 미터나 튕겨나가 바닥을 굴렀다. 반면 키릭스는 막 집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기적적인 정신력으로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는 미레일의 가슴팍을 키릭스는 무표정하게 그었다. “으윽!” 반사적으로 다시 간격을 넓힌 미레일은 계속 흘러내리며 눈을 가리는 피를 닦아냈다. 미레일은 떨리는 두 팔로 고집스럽게 검을 들 며 말했다. “참 이상하지요?” “........” “당신도 나도 이런 결말 바란 적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요.” 키릭스는 그렇게 말하는 미레일의 푸른 눈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목초지 위의 가을하늘처럼 쓸쓸했다. 그 적막한 슬픔 에 키릭스가 회답했다. “미레일, 왜 겨울이 되면 꽃이 질까.” “........” “겨울도 꽃도 원한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한 키릭스는 피에 젖은 그의 목에 칼을 댔다. 미레일은 막지 않았다. 아니, 키릭스가 다가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강철 같은 의지에 힘입어 동상처럼 서 있을 뿐, 그의 육체는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예전 네가 했던 말이 기억나네. 사람은 남을 미워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그 말 아직도 유효해?” “물론입니다.” 평생을 증오로 살아온 키릭스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 미레일이었다. 둘을 그 상반된 서로의 세계에 호기심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야자나무와 빙산처럼 결코 만날 수 없는 곳에 서 있었다. 키릭스는 이런 자 신을 미워하지 않는 미레일이 미웠다. 그건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유형의 증오였다. “미레일, 검을 내려놔. 쇼메는 이제 안전하니까.” “키릭스 씨.” “내려놔, 제발.” “키릭스 씨!” 순간 미레일이 키릭스에게 뛰어 들었다. 그것을 태어나서 그가 보여줬던 가장 강렬한 기세였다. 또한 심장을 그대로 드러낸 무모 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혼신의 공세는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키릭스의 칼끝이 미레일의 다리를 그었고 그는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니까 키릭스는, 미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럴 수 있는 그가 미웠던 것이다. 또한 미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일을 당한 자 신이 미웠던 것이다. 검을 놓치고 쓰러진 미레일은 바람속의 모래 탑처럼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검술이 미숙한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좀더 강했다면 당신의 증오 를 멈추게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어째서 너도 카론과 같은 말을 하는 거지? 아니, 그러고 보면 난 언제부터인가 모두에게 같은 말만 들어왔던 것 같아.” 키릭스는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감정은 바라보는 모든 것을 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 실험 이후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실험을 겪은 다음부터 자신은 계속 꿈속을 자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키스라는 자신의 환영(幻影)이 꿈속에 유폐된 자 신을 대신해 현실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었다. 절반의 감정은 그 꿈속을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는 시커먼 증오 외에는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아, 이거 또 곤란하게 되었네요.” 특무대를 이끌고 온 밝은 금발머리의 청년은 키릭스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들고 있던 그의 장검에는 핏물이 흐 르고 있었다. “하아, 쇼메 왕자님 참 대단하더라고요.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결국 놓쳤네요.” 상당한 운동신경의 소유자인 쇼메는 매복하고 있던 리젤마저도 따돌렸던 것이다. 물론 리젤의 일격이 중상을 입혔지만-리젤은 다잡 은 물고기를 놓쳤을 때처럼 쀼루퉁한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뭐, 미레일 씨를 잡았으니까 조금은 수확이 있다고나 할까요.” 리젤은 그렇게 말하며 쓰러진 미레일을 일으켜 무릎 꿇렸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상냥했지만 그 상냥함 어디에서도 동정심 같은 것은 찾을 길이 없었다. “미레일 씨, 당신이 베아트리체를 숨겼죠?” “........” “물어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오갈 데 없는 키스 씨가 의지했을 사람은 당신이나 카론 씨 정도일 테니까.” 리젤은 묵묵부답인 미레일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우리가 찾게 되겠지만, 서로 괜한 수고는 덜고 싶네요. 어디 있는지 말해 주시겠어요?” 미레일은 리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외면하는 키릭스를 향해 있었다. 도리어 미레일을 피하는 것은 키릭스였다. 리젤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뭐 저도 당신 정도 되는 분이 냉큼 알려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키릭스 씨,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미레일은 자신을 떠나는 키릭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카론과 함께 있던 때가 떠오르네요. 이대로라면 꽤 행복한 미래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우리 모두 뭔가 가치 있는 일 을 하게 될 거라고.......” 키릭스는 발걸음을 멈췄다. 리젤이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미레일 씨. 누구라도 자백을 하게 만드는 약물이 연구됐고 그걸 당신에게 실험할 계획이니까요.” 그 순간 키릭스가 몸을 돌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동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본 미레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왠지....... 당장이라도 그 날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키릭스의 검이 뽑히며 그 차가운 칼날이 미레일의 목을 지나갔다. 그것은 갈대숲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미레일은 평생 단 한 번도 남을 미워하지 않은 믿음을 지키며 숨을 거뒀다. 그 순간 리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키, 키릭스 씨!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미레일 씨를 죽인 걸 알면 이자벨 님이.......” 리젤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키릭스의 칼끝이 그의 코앞에 들이닥쳐 있었던 것이다. 천성적으로 공포라는 감각이 희박한 리젤이었지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증오의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키릭스에게서 리젤은 본능적은 공포를 느끼고 만 것이다. 그 지옥의 보주와 같은 눈동자는 리젤의 온몸을 두려움으로 마비시켰다. 키릭스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환청, 거대한 건물이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에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 악몽은 자신을 영원히 놔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7 피를 흘리며 베르스 왕궁에 도착한 쇼메는 왕을 만나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냉큼 버선발로 뛰어나온 베르스 국왕이 쇼메를 영접 했겠지만-지금은 ‘병색이 짙어 옥체를 거동하기 불편함’이라는 속이 뻔히 드러나는 문전박대를 들어야 했다. 게다가 리젤에게 당한 뒤 셔츠를 찢어 대충 지혈했을 뿐인 쇼메의 팔을 적잖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베르스 왕실은 치료조차 해 주지 않고 그를 왕실 입구에 세워두었다. 그게 지금 쇼메의 위치였다. 받아들이기 불편한 존재. 아무도 입에 넣고 싶어 하지 않는 뜨거운 감자 같은 것. 다른 귀족 같았다면 자존심을 뭉갰다고 노발대 발 했겠지만 쇼메는 그런 천박한 자존심은 키우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한 태도로 요구했다. “나도 너희 국왕에게는 용무 없어. 아이히만 대공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얼마 후 쇼메는 대공에게 안내되었다. 경호를 가장한 근위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응접실에 들어간 쇼메는 그 거대한 응접실 에서 홀로 소파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는 대공을 만날 수 있었다. 깨끗하게 넘긴 백발에 검은 정장과 짙은 자주색의 자단(紫檀) 지팡이를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치가라기보다 영혼을 받고 소원 을 들어주는 품위 있는 악마의 모습 같았다. 그는 지팡이를 들어 소파를 가리켰다. “이리 와 앉지, 쇼메 군.” 쇼메는 굳은 표정으로 그 앞에 섰다. 아이히만의 재떨이를 흘낏 본 쇼메는 대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재 떨이에는 이미 담뱃재가 수북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자리에 앉았다. 이건 일종의 카드게임이었다. 속살이 다 보일 정도로 찢겨진 쇼메의 셔츠와 그 셔츠 조각으로 간신히 묶어 지혈한 상처를 훑어본 대공이 말했다. “쇼메 군, 거래할 때 유리한 위치에 서려면 항상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 한다고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정장을 입고 도망치도록 하지요.” 쇼메는 대공의 뜬금없는 농담에 일부러 태연하게 응수했다. 대공이 본론은 안 꺼내고 짓궂은 말로 시간을 잡아먹는 것은 단순한 악취미일 수도 있고 지금 쇼메의 마음속을 떠보기 위한 미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말려드는 건 질색이었다. 사실 쇼메는 당장이라도 응급조치를 하지 않으면 출혈과도로 정신을 잃을 상황이었지만, 정신력을 그러모아 대공을 직시했다. 이 런 곳에서 쓰러지는 나약한 모습 보이면 미레일에게 비웃음을 들어도 싸다. 쇼메는 그렇게 다짐하며 입을 꽉 물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와 함께 스왈로우 나이츠의 제복을 입은 긴 금발의 청년이 차 세트가 담겨져 있는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엔디미온이었다. 그는 쇼메를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갑자기 아이히만 대공으로부터 내부 지명을 받아 아무 생각 없이 온 것인데, 밑도 끝도 없이 쇼메라니? 게다가 잔뜩 상처 입은 모습을 보자 미온은 분명 엄청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정도로 눈치 없지는 않았다. 미온은 표정을 관리하며 몸에 밴 우아한 동작으로 그들 앞에 섰다. “엔디미온 군, 내 홍차에는 설탕은 빼고 레몬즙을 세 방울 넣어 주게.” 아이히만은 그렇게 말했지만 쇼메는 미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온은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차를 준비했다. 이윽고 쇼메가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아이히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니 이오타의 국왕 빌헬름 블룸버그로부터 요청이 와 있습니까?” “허어. 무슨 요청 말인가?” 대공은 전혀 모르는 척 너스레를 떨었다. “제1왕자 쇼메 블룸버그가 도착하는 대로 붙잡아 자신에게 넘기거나 혹은 죽여 달라는 요청 말입니다.” 순간 미온은 준비하던 티스푼을 달그락 떨어트렸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라는 요청을 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미온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썼다. 반면 아이히만은 태연했다. 그는 비참한 꼴로 돌아온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며 참으로 즐거운 웃음을 보였다. “그래,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기분이 어떤가?” “역시 이미 알고 있었군요.” ‘이 망할 늙은이!’ 이라는 뒷말은 사정상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네 아버지로부터 요청이 온 것은 아니네. 하지만 다른 소식이 들어오긴 했지.” “어떤 소식 말입니까.” “그러니까, 자네가 왕위 계승 때문에 아버지 빌헬름 국왕과 왕비를 죽이고 이오타에서 도망쳤다는 소식 말이지.” 그걸 듣는 순간 미온은 가져가던 찻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맙소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미온은 얼이 빠진 얼굴로 조각난 찻잔을 치웠다. 하지만 쇼메는 차가웠다. 격노하기는커녕 끝없이 차가워지는 표정으로 아이히만을 바라봤다. 쇼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건 이자벨이 계획한 짓이었군요.” “글쎄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시침 떼지 마세요! 이 일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아이히만은 성냥을 댕겨 새 담배를 물어 피우며 대답했다. “난 아무 것도 몰라.” “........!” “라고 말하면 믿을 텐가? 하지만 자네 질문을 들으니 자네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라는 것은 알겠구먼. 소득 없는 질문을 하는 건 상대에게 빈틈만 보인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었나.” “빌어먹을 할아범!” 태연함을 유지하던 쇼메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어쩌면 아이히만조차 적일지도 모른다! 라는 불안감이 생겼지만 쇼메는 그 동요를 애써 억눌렀다. 여기서 결심이 흔들이면 안 된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다그쳤다. “스승님 아니, 아이히만 대공. 제가 왕위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도망칠 정도로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계속 말해 보게나.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습니다. 베르스에 제 몸을 의탁하고 싶습니다.” “의탁?” “그러니까 베르스에 제 혈통을 팔고 싶습니다.” “뻔뻔하기도 하군!” 아이히만이 혀를 찼다. 이미 그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래서 이 베르스로 왔다 이거냐. 웃기는구나. 널 받아주면 이 나라는 이오타의 적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 네가 이오타의 왕좌를 되찾는다면 우리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애당초 이런 시시한 나라가 이오타와 싸워 이길 가능성이 손톱만큼이라도 있 다고 생각하나? 도리어 널 이오타에 팔아 넘겨서 환심을 사는 게 이익이겠지! 정치는 도박이 아니다. 스승으로서 충고 하나 하지. 지금이라도 콘스탄트로 가라. 너에게 평생 왕좌에 오를 기회는 없어. 콘스탄트에 가서 네 피를 팔고 목숨이나 지켜라! 그게 이제 네놈이 할 수 있는 전부야.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왕들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왕족이 혈통이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즉 이오타의 순혈(純血) 왕자가 몸을 의탁했다는 것은 이오 타 왕조를 소유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만약 이오타와 전쟁을 하게 되어도 왕족의 혈통이란 마치 옥새(玉璽)처럼 확고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억울하게 밀려난 왕자를 왕위에 올려주겠다는 명분만큼 알아듣기 쉬운 이유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쇼메는 약소국 베르스를 택했다. 왜냐하면 콘스탄트는 자신이 거래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가면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자신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고 혈통을 훔쳐갈 것이 뻔했다. 즉, 쇼메는 안전보다는 기회를 택한 것이다. 이자벨을 무너트리고 다시 이오타 왕궁에 입성할 기회 말이다. 많은 피를 흘려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추스른 쇼메가 말했다. “전 왕좌를 되찾을 자신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협조해 준다면 말이지요.” “그래? 그렇게 잘난 놈이 왜 뒤통수를 맞아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어?” 쇼메는 아이히만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대꾸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 아니었다. 만약 자존심을 챙길 요량이었다면 처음부터 콘스탄트로 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어쨌든 평생 망명한 왕족 대우를 으며 호화롭게 살 수 있었을 테니까. 도리어 지금 이런 멸시를 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쇼메가 태어나 처음으로 자존심을 꺾으면서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어떤 굴욕도 참을 수 있다고 다짐했다. 아이히만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녀석이야. 맘대로 해라. 나는 국왕 전하의 판단을 들으러 갈 테니. 대신 기사들이 와서 네 목을 쳐도 절대 로 날 원망하지 말아라.”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는 눈이 틀렸을 뿐이니까요.” 쇼메의 말투는 무서울 정도로 또렷했다. 아이히만은 그 의지를 코웃음 치며 자리를 떴다. 이제 이 거대한 응접실에 남은 사람은 쇼메와 미온뿐이었다. 이미 깨끗해진 바닥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닦고 있는 미온은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자벨 님이 국왕과 왕비를 죽이고 쇼메 왕자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 분은 분명.......’ “야, 천민. 비웃으려면 지금 비웃어.” 미온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쇼메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추락한 날은 앞으로 결코 없을 테니까.” 쇼메의 그 지독한 프라이드에 미온은 얼굴을 흐렸다. 저것이 모두에게 배신당한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 눈물 한 방울 없었다. 너무 당당해서 도리어 슬픈 일이었다. 평소처럼 말싸움을 할 수도 없었다. “치료....... 받아야 해요.” “흥. 이 따위 상처쯤.” “출혈이 너무 심하다고요!” “닥쳐! 누가 멋대로 동정하래!” 쇼메는 자제력을 잃고 벌떡 일어나 미온을 쏘아봤다. 하지만 곧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 앉아야 했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려 현기증이 일어난 탓이었다. 그의 파에서 흘러나온 출혈이 너무 컸다. 항상 건강미가 넘치던 쇼메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의 찢겨진 옷과 앉아 있는 값비싼 소 파마저 모두 그가 흘린 피에 젖어 있었다. 마치 피의 옥좌에 묶여 있는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모습. 하지만 쇼메는 스스로를 벌주기라도 하듯이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곧 다가올 자신에 대한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고집 부리지 말아요!” “너야말로 날 좀 내버려 두지 그래? 항장 빈정거리던 건방진 왕자가 죽는다면 너도 속 시원하지 않겠어?” “항상 느끼는 거지만, 당신 진짜 삐뚤어졌어!” 미온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완전 어린애지 않은가. 결국 가족에게 배신당한 격분이 아무런 논리도 없는 이런 투정으로 표현한 것 이다. 이런 짓 외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울분을 표현할 수도 없었고 표현해서도 안 됐다 그것이 모든 것을 잃은 지금 쇼메의 위치 였다. 쇼메는 베르스 국왕이 자신의 처분을 결정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기세였다. 그 모습이 너무 단단해 보여 도리어 손가락으로 쿡 찌르기라도 하면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미온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공께서 왜 절 여기로 불렀나 했더니........” 미온은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시커먼 작대기 같은 것이 쇼메의 뒷머리를 냅다 후려갈겼다. 안 그래도 실신 일보직전이던 쇼메는 눈을 부릅뜨며 미온을 노려봤다. “이게....... 지금 뭐하는!” “하아, 환자의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답니다아.” “주, 죽여 버릴 테다!” 라는 말과는 달리 쇼메는 테이블 위에 스르르 쓰러졌다. 미온은 부지깽이를 바닥에 던지며 투덜거렸다. “에이, 일일이 귀찮게 하고 있어. 애새끼 마냥.” ‘가끔은 키스 경의 심정이 이해되는군. 그건 그렇고, 이 양반을 어떻게 데리고 나간다?’ 자기보다 무거운 쇼메를 예전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번쩍 들어서 데려갔다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안 그래도 위태로운 쇼메와 함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고민하던 미온은 커다란 차 수레 위를 깨끗이 치운 뒤에 쇼메를 태우고 응접실을 빠져 나갔다. 정치적으로 몹시 불편한 입장의 쇼메를 치료해서 이오타의 심기를 거스를 왕실 식구는 없을 것이다. 미온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미온이라면 이오타가 뭐라고 하던 쇼메가 뭐라고 하던 눈앞의 부상자를 못 본 척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대공은 미 온을 지명했던 것이다. ‘영감님, 아닌 척하면서도 결국 자기 제자라 이건가요.’ 실로 따뜻한 교활함이지 않은가. 미온은 이자벨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쇼메를 병실로 배달했다. 8 아이히만 대공이 본궁 어전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국왕 전하를 포함한 왕실 관료들은 모두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만큼 쇼 메의 처분은 긴급하고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특히 항상 즐기는 촌티만점 연두색 가운차림의 베르스 국왕은 그 통통한 두 볼을 홍시처럼 붉힌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쇼메를 만나고 돌아온 아이히만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전하, 정신 사나우니까 옥체 좀 그만 방황시키고 앉으시지요.” “이, 이보게. 대공! 이제 어쩌나?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쩝니까? 댁이 결정해야 할 일이잖습니까.” 아이히만 대공은 특유의 말투로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리고는 첨언했다. “전하께서 쇼메를 받아들이라면 받아들이고 이오타로 돌려보내라면 돌려보냅니다. 주사위를 굴리든 동전을 던지든 그건 마음대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쇼메를 돌려보내면 그 녀석은 죽는다는 거지요. 아무튼 민폐만 끼치는 녀석이 라니까.” 그때 법무대신 위고르 공이 말했다. “전하, 외람된 간언이오나 쇼메는 이미 이오타 국왕 내외를 살해하고 도주한 자, 그런 자를 받아들인다면 오랜 우방국 이오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노련한 정치인인 위고르는 쇼메가 정말 자신의 부모를 죽였을 리는 없을 거라 판단했지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럼 돌려보내자는 말인가?” “쇼메 왕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관료들은 위고르의 말을 침묵으로 동의했다. 국왕을 죽인 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약소국 베르스로서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안 그래도 ‘안전제일주의’가 정치 철학인 베르스로서는 결코 짊어지고 싶지 않은 리스크였다. 하지만 쇼메를 돌려보내면 베르스는 국제적으로 이오타의 속국임을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와 의탁 을 부탁한 왕자를 매몰차게 돌려보내는 것만큼이나 ‘알아서 기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안 그래도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베르스 의 위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이번에는 이오타와 대립하고 있는 콘스탄트와 마키시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게다가 이 사실을 콘스탄트 왕국이나 마키시온 제국이 알게 된다면 쇼메 왕자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그러니까 억울한 왕자의 누 명을 자신들이 풀어주겠다는 명분으로) 베르스를 협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즉, 베르스로서도 이도 저도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막 찜통에서 꺼낸 만두와 구분하기 힘든 체형을 뽐내는 베르스 국왕은 정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 같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어쩌자고 쇼메 왕자는 이런 누추한 나라로 왔누. 오르넬라 성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오르넬라는 긴 담뱃대 끝을 재떨이에 톡톡 떨며 말했다. “전 이래봬도 성녀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온 자를 다시 사지로 내모는 일이 옳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군요.” 그 이후 관료들 돌아가면 입장을 말했지만 누구 하나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만 이래야 하지 않을까’ 혹은 ‘그래도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나’ 라는 미적지근한 논쟁이 전부였다. 다들 못마땅해 보이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아이히만 대공은 잠자코 자신들의 구석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이 혼란스러 운 회의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곱슬머리 소년은 바로 베르스의 왕자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였다. “왕자님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 아이히만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였다. 어린 아이에 물어볼 일이 아니라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어떤 정치인도 대답하지 못한 그 골치 아픈 선택을 페르난데스는 단숨에 결정했다. 별빛 같은 눈동자에 단호한 의지를 담은 채로 말이다. “쇼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순간 좌중은 ‘역시 어린애다운 정의감’ 이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히만만 ㅈ외하고 말이다. 이 불세출의 정치 가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장 어린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 소년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나왔다. “이오타 왕국은 싸워야할 적이기 때문입니다.” 국왕마저 깜짝 놀란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온화하기 그지없는 그 소년의 입에서 딱 잘라 ‘싸워야 할 적’이라는 말이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세계 3대 강국 중에 하나이자 자신들의 오랜 우방인 이오타를 적으로 단언 한 것이다. “페, 페르난데스야. 그건 너무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이미 이오타는 우리를 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페르난데스 왕자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관리들은 너무 감정적인 말이라며 속으로 혀를 찼지만 평생을 정치에 투자한 아이히만이 보기에는 그것이 가장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는 저 작은 소년이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가장 똑바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 저와 제 동생이 악투르에 납치되었을 때, 저는 그 납치의 배후에 이오타가 있으며 또한 쇼메 왕자가 획책한 모략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때 저는 제 납치를 사주하고 그것을 통해 이 땅을 침략하려 했던 자가 빌헬름 국왕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번 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배후 인물은 이오타의 2인자인 이자벨 크리슨탄센 방첩국장이고, 쇼메 왕자를 모략으로 제거하려고 한 자도 그녀입니다!” 소년의 목소리는 다부졌다. 마지막으로 이익을 보는 자가 범인이라는 논리는 꽤 타당성이 있다. 국왕도 왕비도 쇼메도 제거된 이상 남은 자는 바로 이자벨이었다. 도리어 베르스를 우방으로 여겼던 자는 쇼메였지 그녀가 아니었 다. 페르난데스는 지금 쇼메에게 누명이 씌워진 것을 보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이오타의 모든 것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즉, 이오타는 완전한 적입니다. 우리가 쇼메 왕자를 돌려보내 든 돌려보내지 않던 이오타는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베르스를 침략할 것입니다.” “치, 침략이라고!” “이런 상황에서는 쇼메 왕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면에서 이익입니다.” 위고르 공을 포함한 정치 관료들은 물세례를 당한 사람처럼 휘둥그런 눈으로 자신들의 왕자를 바라봤다. 페르난데스는 쇼메 왕자 본인보다도 더 확실하게 베르스가 쇼메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낸 것이다. 영원한 우방은 없다. 권력의 흐름이 바뀌면 우방도 손바닥 뒤집히듯 적국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베르스의 관리들은 이오타 가 오래전부터 우방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우방일 것이라는 비논리적인 안일주의에 눈이 멀어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착각은 이오타라는 강대국을 적으로 돌리기 싫은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오타는 베르스가 인정하든 안하 든 분명 적국이었다. 아무리 싸움이 싫어도 상대가 싸움을 원한다면 방법은 하나뿐, 맞서 싸우는 것뿐이다. 그리고 베르스와 쇼메는 같은 배를 타고 있 었다. 힘을 합치길 원하는 쇼메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관리들은 단호한 논리를 펼친 페르난데스를 아무 말도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히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허허. 이걸로 결정이 난 것 같구먼.” 아이히만 대공은 이곳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그의 어린 제자는 아직 ‘철저하게 이용하는 법’은 모른다. 쇼메라는 막강한 카드를 이용해 콘스탄트나 마키시온을 끌어들이고 뜯어먹는 정치적 기교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결단을 내리는 ‘왕의 기세’였다. 페르난데스에게는 그게 있었다. ‘내가 저 녀석을 가르쳐 줄 날이 좀더 남아 있다면 좋았을 텐데. 좀더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지금이 태어나 처음인 것 같구먼.’ 대공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문 밖으로 나간 대공을 뒤따라오는 자가 있었다. 바로 카론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카론 군?” “다름이 아니라.......” 흑발을 단정하게 내린 은의 기사는 답지 않게 주저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게나.” “쇼메 왕자가 혼자 왔습니까?” “음?” 대공은 그 비상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카론이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조금 기울인 대공이 말했다. “그래, 혼자 왔더군.” “........알겠습니다.” 대공은 이 청년의 수려한 얼굴이 한순간 흐릿해지는 것을 포착했다. 하지만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고개를 숙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묵묵히 되돌아가는 카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공은 자신도 쇼메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죽어 있는 자는 잠들고 살아 있는 자는 움직이고 있었다. 9 “반란?” 마키시온 제국의 제6대 황제 마라넬로 무르시엘라고에게 ‘반란’이라는 단어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역대 황제 중 가장 위대하고 가장 뛰어나며 또한 가장 두렵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자신의 영토에서 감히 반란이, 그것도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격노하기보다는 단지 신기해했다. 예전에도 몇 차례도 산발적인 반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 만 지금은 그 규모가 제법 거셌다. 그는 그 불경한 단어를 음미라도 하는 듯 들고 있던 깃펜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눈을 감았다. 그것은 마치 자기 집 현관을 흙발 로 더럽힌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를 대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허허, 반란이라.......” 어떤 지도자도 가장 듣기 싫어할 보고를 올린 늙은 신하는 이 무서운 황제가 혹시라도 자신에게 벼락을 떨어트릴까 두려워 몸 둘 바를 몰랐으나 마라넬로는 충성스러운 부하에게 화풀이를 하는 한심한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그는 장기 말을 움직이듯 지극히 이성 적으로 명령했다. “라이오라를 불러라.” 황제는 주저 없이 가장 강력한 카드를 꺼냈다. 반란이란 사과 상자 속에 피어오르는 곰팡이와 같아서 최대한 빠르고 단호하게 도려 내지 않으면 삽시간에 전체를 오염시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버릇을 모른다면 알려줘야 한다. 그것도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그 과정에 자비란 필요 없었다. 제국에 반기를 든 자 들은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처형되거나 유폐될 것이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지 한 시간도 안 되서 진청룡 라이오라는 황제 직속의 정예부대인 프론티어 뱅가드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 기 위해 황궁을 나섰다. 10 라이오라를 반란 지역에 파견하고 일주일 뒤, 알현 실을 서성이던 마라넬로는 상한 음식을 먹은 것과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상한 음식은 목으로 넘길 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지만 일단 뱃속에 들어가면 온몸을 더럽히고 내장을 썩게 만든다. 꼭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라이오라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한 것은 아니었다. 황실을 수호하는 그 과묵한 사내는 분명 빈틈없이 반 란을 진압하고 반란자들을 처형할 것이다. 이건 세상 누구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불쾌한 점은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반란을 일으켰나 하는 것인데.......’ 황실 밖은 폭우였다. 시커먼 밤풍경은 온통 비에 젖어있었다. 그런데도 가끔 번개가 치는 것 외에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하늘이 앞으로는 소리를 내지 않고 방류하기로 결정했든지 아니면 자신의 귀가 빗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노후(老朽)되었는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마라넬로는 생각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거라 착각했던 자신의 육체도 슬슬 힘겨워 한다는 것을 그는 인정해야 했다. 그는 주름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몇 번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때였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마라넬로는 몸을 돌렸다. 벼락이 떨어지는 어두컴컴한 옥좌를 등진 채, 자신의 어머니를 꼭 빼닮은 붉은 눈동자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가 어디서 숨어 들어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의 온몸은 흠뻑 비에 젖어 있었다. “키릭스로구나.”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마라넬로는 근 이십 년 만에 만난 아들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근위기사들의 시체들을 보고도 결코 놀라지 않았다. 단지 이런 일이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낡은 감각이 안타까웠다. “그렇군. 반란은 라이오라를 내 곁에서 떼어놓으려는 수작이었군. 허허, 이 마라넬로도 늙은 건가. 예전의 나였다면 어림도 없었 을 잔재주야.” 마라넬로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던 장기의 한 수를 알았을 때처럼 말했다. 아무리 키릭스라도 진청룡 라이오라와 프론티어 뱅가드 가 황제를 지키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자벨이 수년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해 온 이 반란은 마키시온 제국을 효과적으로 붕궤시킬 수단이었다. 독재라는 것은 일면 단단 해 보이지만 실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정치체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독재자가 갑자기 죽는다면 그의 명령만 받던 자들은 부모 잃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왕국들이 마키시온 제국에 충성한 이유는 마라넬로 황제라는 불세출의 독재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자벨은 그 구심 점이 사라질 때 제국도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라넬로의 노예들에게 유혹의 속삭임을 들려주면, 주인을 잃은 그 들은 이제는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며 서로를 찌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어떤 군대로든 흠집조차 내지 못했던 철옹성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이 내분은 이자벨 혼자 실행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공작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남부 콘스탄트의 교황 레오3세, 키릭스 세자르, 그리고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대공이라는 강력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인코그니토(incognito)' 라는 비밀결사의 간부들이었으며 그 은밀한 조직은 ’인트라 무로스‘라는 껍데기로 위장되 어 있었다. 그 모든 자들의 표적이 된 마라넬로는 자신의 옥좌로 걸어가 앉으며 말했다. “나는 내가 제법 괜찮은 황제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제국이 건립된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만들었고 가장 많은 군대를 보유했으며 또 가장 부유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제국의 황금기를 이룩한 대제(大帝)로 내 이름을 기록할 것이라는 감상에 빠지곤 했는데....... 이제 역사가들은 내 이름을 제국 마지막 황제로 기록하겠군.” 황제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죽는다면 제국도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라넬로는 도리어 그러길 원했다. 자신이 죽었는데도 제국이 유지된다는 것은 일종의 불충(不忠)이라는 독재자의 광기 같은 것이 었다. 그때 황금 키마이라 인장이 새겨진 거대한 문이 거칠게 열리며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몰려온 근위기사 들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마키시온의 기사들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고는 해도 과연 키릭스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들은 황제의 죽음을 지켜보게 될 ‘관중’ 일 뿐이었다.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기사들은 분통터지는 얼굴로 외쳤다. “폐하!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곧 라이오라 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황제는 혀를 찼다. 만약 자신이 살아남게 된다면 저 머저리의 목을 쳐버리겠노라, 생각했다. 버티라고? 이 늙은 몸으로 단도라도 뽑아 자기 몸을 지키란 말인가? 게다가 라이오라가 오고 있다는 말을 키릭스가 들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까? 그보다는 더 빨리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되고 나니까 정말 세상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옥좌에 앉아 있던 마라넬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 참 위안이 되는 소식이로구나.” 그 순간 키릭스의 칼끝이 스며들었다. 마치 토굴 속으로 들어가는 은비늘의 뱀처럼 미끄러지듯 천천히 마라넬로의 몸속으로 들어가 고 있는 얇고 긴 칼날의 모습에는 정말이지 스며들어간다는 묘사가 어울렸다. “폐, 폐하!” 결코 있을 수 없는 모습을 본 제국의 기사들은 절규했다. 도리어 그들이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옥좌에 앉아 있던 황제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장을 파고든 칼날을 바라볼 뿐이었다. 붉은 점처럼 물들기 시작한 피가 점점 더 커다랗게 원을 그려나갔다. 아프다기보다는 씁쓸했다. “제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별로 기쁜 얼굴이 아니로구나.” 아들의 표정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도 모르는 증오뿐이었다. 자신을 죽인다고 그 불길이 사라질까, 마라넬로 는 아들이 겪은 ‘실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키릭스의 생명이 일 년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또한 키릭스의 ‘인공적 인 쌍둥이’ 키스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들, 모두가 자신의 죄업이다. 마라넬로는 생의 최초로 후회를 했다. 키릭스가 천천히 밀어 넣은 검은 옥좌를 뚫고 나와 형벌처럼 마라넬로의 몸을 관통했다. 마라넬로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 “당신의 입에서 비명을 짜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이 정도로 끝내도록 하지.” 키릭스는 짜내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평생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맨 보물 상자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 같았다. 증오에 마지않던 이자를 죽이면 모든 저주에서 풀려나 공허도 미움도 사라질 거라 믿었다. 그것은 참으로 허망한 믿음이었다. 마라넬로는 슬픈 표정으로 그런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아, 착하고도 우둔한 나의 아들아. 나의 거울아.” 마라넬로는 전 황제의 막내아들이었으며 그것도 서자(庶子)였다. 미련하고 탐욕스러운 황실을 바꾸겠다는 결심으로 그는 자신의 모든 형제들을 죽이고, 부모마저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세상을 적어도 지금보다는 좋게 바꾸려고 노력했고 그것에 인생 을 걸었다. 자신의 길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던 것처럼 자신도 아들에게 똑같이 죽임을 당하는 운명을 겪게 하는 것으로, 그가 바꾼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려주었다. “이 모든 행동으로....... 우리가 바꾼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그렇게 말한 마라넬로는 긴 한숨을 내쉰 뒤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키릭스도 이 추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아버지와 무서울 정도로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문득 미레일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당신도 나도 이런 결말 바란 적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요.’ 키릭스는 차갑게 식어가는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말했다. “끝까지 아픈 곳만 찌르시는군요. 아버지.” 입 꼬리를 올린 키릭스의 표정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 감히 폐하를 시해하다니! 용서치 않겠다!” 황제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기사들은 이성을 잃고 키릭스에게 뛰어들었다. 키릭스는 유리알처럼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눈동 자로 중얼거렸다. “그래, 용서하지 못하겠지. 나도 날 용서할 수 없어.” 어디서부터 뒤틀린 것일까, 키릭스는 마음속의 증오가 이번에는 자신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알았다. 곧이어 키릭스에게 뛰어드는 기사들의 몸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뒤따라오던 기사들은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키 릭스의 검술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뭐, 뭐냐, 저놈은!” 키릭스는 두려움에 굳어버린 그들을 지나쳐 알현 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금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보고를 받고 급히 돌아온 라이오라였다. 그가 들고 있는 흑색의 검은 위압적인 오오라에 휘감겨 있었다. 키릭스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어쩌지, 네 주인은 이미 죽었는걸.” “.......!” 라이오라는 옥좌에 앉아 절명한 마라넬로를 보며 두 눈을 떨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키릭스를 죽여 버릴 것 같은 기세로 검을 들어 올렸다. 키릭스는 자신의 검술스승이기도 했던 라이오라에게 말했다. “라이오라, 넌 제국이 처음 생길 때부터 지금까지, 480년이라는 끔찍하게 긴 세월 동안 황실을 지켜왔지. 황실의 피를 물려받은 자를 주인으로 섬기며 황제가 바뀔 때마다 너는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그 옆에 서 있었겠지. 늙지도 죽지도 않는 망령처럼.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이 황가의 핏속에 흐르는 광기야.” 라이오라는 검을 내려놓았다. 대신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찔린 사람처럼 무서운 눈빛으로 키릭스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사실 그 눈빛은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자아, 이제는 내가 저주받는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자다. 나의 망령이 되어라. 걱정하지 마라. 난 그리 오래 살지 못할 테니까. ” 키릭스는 서서히 무릎을 꿇는 라이오라를 바라보며 커다랗게 비웃었다. 제 23화 파멸의 공식 1 보르츠는 납치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그는 스스로를 악투르 최강의 전사라 자부했다. 납치 따위는 그런 전사가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특히 무장한 사내들이 몰려가 계집애 하나를 납치해 오는 일이라면 더욱 더 명예롭지 못했다. 아무리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 이 군인의 의무라고 해도 그는 지나가던 개를 발로 쳐 죽인 것처럼 입이 떫었다. ‘베르스 따위는 그냥 전쟁으로 짓밟아 버리면 되잖아!’ 망루에 올라 밤공기로 몸을 씻던 보르츠는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게 자른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이멜렌인지 뭔지 하는 계집애를 납치해 와서 몸값을 요구하는 치졸한 돈벌이의 어디가 악투르라는 용맹한 무장집단에 어울린단 말인가. 차라리 자 신에게 병력을 주고 노르펜스트 가를 흔적도 없이 박살내 버리라고 명령했다면 흔쾌히 수락했으리라. 그는 침을 뱉으며 망루를 내려왔다. 보르츠는 용맹과 폭력과 육체적 완벽함을 숭배하지만 정치나 책략이 하는 것에는 어울리는 자 가 아니었다. 만약 지금보다 1만 년 정도 일찍 태어났다면 훨씬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를 자였다. 2 “카론, 나 배고파요.” “조용히 해라.” 이멜렌이 납치되어 있는 우르콰르트 요새 밖에는 두 청년이 수풀에 숨어 있었다. 덤불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둘은 꼭 수박 서리를 나온 아이들 같았다. 기사의 시중을 들며 그의 말이나 관리하는 것이 어울릴 앳된 얼굴들. 단 한 차례도 뚫린 적이 없는 무지막지한 요새에 잠입해 공 녀를 구출할 용사들로 보기에는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그런데 나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키릭스가 카론의 목을 콱 잡으며 소리쳤다. “배고프다니까!” “시끄럽다 그랬지!” 손발이 극도로 안 맞는 이인조라는 사실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키릭스를 뿌리친 카론은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대체 이 녀석은 긴장도 안 된단 말인가? 그보다 도와주겠다고 말해놓고 어째서 이러는 거지? ‘방해만 할 거면 돌아가!’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곧 이곳으로 다가오는 보초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어이! 거기 누구야!” 카론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발각이라니- 한심하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키릭스를 쏘아봤다. 하지만 ‘도시락을 준비 안한 네 잘못이야!’ 라는 뻔뻔한 표정으로 응수하던 빨간 눈의 키릭스는 놀랍게도 차고 있던 두 자루의 검을 내려놓고는 덤불 밖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카론이 말릴 겨를도 없었다. 오밤중에 수풀 속에서 이국적으로 생긴 미소년이 툭 튀어나오자 아무리 용맹스런 악투르 군인이라도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난데없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야! 너 뭐하는 놈이야! 여기서 뭐하고 있던 거냐!” “보시다시피 길을 잃은 어린 양이랍니다. 아아, 이 나라 당근에 홀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무슨 헛소리야!” 악투르 같은 살벌한 나라에 관광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당근에 홀려? 보초는 곧바로 ‘맙소사! 실성한 놈이잖아!’ 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키릭스가 무기를 들고 있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한밤중에 당근 찾아 방황하는 녀석 따위, 미친 놈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도망치면 즉결처분하니까 잠자코 따라와.” 키릭스는 악투르 군인이 베르스 군인보다 복무규정을 잘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초는 거동이 수상한 자신을 요새 중심에 있는 감옥까지 알아서 데려가 줄 것이다. 키릭스에게 이런 녀석 몇 명 쯤 숨통을 끊고 감옥을 탈출하는 것은 하품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리라. 키릭스는 덤불 속에서 숨어 있는 카론을 흘낏 보며 ‘이제 알아서 해.’라는 짓궂은 미소를 보였다. 카론은 눈썹을 확 찡그리며 주먹을 쥐었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면 먼저 말을 하란 말이야!’ 키릭스는 자신이 미끼가 되어 잡혀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감옥을 탈출해 적들의 시선을 끄는 역할도 키릭스의 몫이었다. 그때 카론이 혼란을 틈타 이멜렌이 잡혀 있는 첨탑에 잠입하면 된다. 카론은 위험천만한 역할을 자청한 키릭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그에게 불안감을 느꼈다. 게다가, 당근 이라니, 무슨 비유가 그래? 카론은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3 도통 잠이 오지 않았던 보르츠는 이멜렌이 감금되어 있는 첨탑으로 향했다. 별 일이야 있겠냐만, 일단은 인질은 감시하는 것도 자신의 임무였던 것이다. 첨탑은 요새 우측면에 높이 솟아 있는 시설로 평소에는 망루로 사용되지만 지금은 꼭대기에 이멜렌을 잡아두고 있었다. 그만큼 감금에 어울리는 장소였다. 오직 좁은 나선 계단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한 그곳은 인질구출을 원천 봉쇄시키는 이상적인 구조인 것이다. 횃불을 들고 그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던 보르츠는 의외로 많은 병사들이 첨탑 위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에서부터 병 사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지금은 취침시간이 아닌가. 갑자기 애국심이 넘쳐흘러서 잠자는 것도 마다하고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일 리도 없 고- 순간 불쾌한 예감을 느낀 보르츠는 빠른 걸음으로 첨탑 위로 올라갔다. “야, 이 갈아 마실 새끼들아! 지금 뭣들하고 자빠진 거야?” 악투르 병사들은 성질을 꾹 참는 기색이 역력한 보르츠가 나타나자 기겁을 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들의 상관은 들고 있던 횃불로 자신들을 다 불 싸질러 죽여 버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보르츠 특무 상사님!” “닥쳐.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 입속에 불덩어리 처넣기 전에.” 보르츠는 입에 손가락을 댄 채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적어도 이놈들이 악투르의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리라. 규정을 어기고 감옥 문까지 열어놓은 꼴부터 바지를 입고 있던 중이었는지 벗고 있던 중이었는지 허벅지를 다 드러낸 사내들의 모습. 이미 혼절한 것 같은 인질은 반라의 모습으로 감옥 한구석에 내팽겨 쳐져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보르츠는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아주 이것들이 오늘까지만 살고 싶은가 보구만?” 폭력배들에게나 어울릴 인질극을 벌인 것 자체로도 이미 기분이 극도로 나빠진 보르츠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부하들은 어디서부터 손 봐줘야 할지 짐작도 안 가는 보르츠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보르츠의 기세에 눌려 미처 바지도 추슬러 입지 못한 병사가 더듬더듬 말했다. “사, 상사님. 저희는 그러니까........” “아가리 닥치라고 했지!” 순간 보르츠의 굵직한 다리가 그의 가슴을 찍었다. 늑골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공처럼 튀어나간 병사가 벽과 충돌해 쓰러졌다. 보르츠의 괴력은 실로 살인적이었다. “너희들 군인 맞냐? 상부에서 인질을 저 꼴로 만들어 놓으라고 시키든?” 사람 머리만한 주먹이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때렸다. 무서운 소리와 함께 피가 터졌다. 딱히 보르츠가 인질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 었다. 아니, 오히려 인질은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는 전쟁 광이다. 또한 성적으로도 엄숙한 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군기를 지켜야 할 병사들이 짐승인 양 달려드는 꼴은 별개의 문제였다. 게다가 지금은 인질협상이 진행 중이지 않은가? 보르츠는 아침이 되면 부하들을 집합시켜 반 죽여 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때 더 이상 맞았다가는 죽는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병사가 피를 흘리며 말했다. “어차피 베르스가 저 계집애 몸값을 지불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뭐?” “이건 처음부터 저 여자 가문이 돈 주고 사주한 거 아닙니까. 인질로 데려가라고 말입니다.” “........” 사실 이 인질극에는 더욱 더러운 뒷거래가 있었다. 노르펜스트 가문의 상속 녀들은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을 예정인 이멜렌 노르펜 스트를 이런 지저분한 방식으로 없애버리려고 머리를 썼다. 악투르를 사주한 자는 다름 아닌 노르펜스트 공작가였던 것이다. 즉, 이멜렌이 몸값을 받고 풀려날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죽든 창녀가 되던 악투르에서 영원히 잡혀있길 원했다. 그래서 병사들은 어차피 버림받은 여자, 자신들이 품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작당을 한 것이다. 이미 돈을 챙긴 상부로서도 인질을 어떻게 다루든 묵인하 고 있는 입장, 그러나 보르츠의 입장은 달랐다. “그걸 누가 너보고 판단하래?” 보르츠의 커다란 손이 그의 얼굴을 잡아 단숨에 들어올렸다. 생쥐 한 마리 잡아 올린 것처럼 단숨에 대롱대롱 들어 올린 엄청난 악력이었다. 끔찍한 고통에 병사는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보르츠의 불쾌감은 자비를 베풀 기분을 말끔하게 없앴다. “인질이 뒈지든 창녀로 팔려가든, 어쨌든 지금 너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 버림받은 인질을 감시하는 거야. 명령받은 대로만 움직이는 게 군인이다. 그런데 네놈들은 그 명령을 어겼고 나는 그걸 처벌하고 있는 거다. 또 말대답할 새끼 있으면 혀 한번 놀려 봐. 아주 그 혀를 길게 뽑아 모가지를 졸라버릴 테니까.” 겁에 질린 병사들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보르츠 앞에서 입을 꽉 다문 채 부동자세를 취했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라는 소리를 꺼냈다간 내일부터 평생 틀니를 끼고 살아야 할 것이 뻔했던 것이다. 그때 첨탑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과 함께 시꺼먼 밤을 뒤집어엎는 섬광이 터졌다. 깜짝 놀란 보르츠는 창밖에 다가가 밖을 바라보 고는 신음소리를 냈다. 화약고 쪽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쳐 오르며 연쇄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맙소사. 이건 또 뭐야.” 기습! 전쟁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박식한 보르츠는 적의 기습임을 직감했다. 그는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신호탄을 꺼내 창밖으로 쏘았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신호탄이 새파란 불꽃을 터트렸다. 그것은 부대 내에 1급 전투태세를 발령하고 주변 도시들로부터 지원 군을 요청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파랗게 타오르는 섬광을 보며 희열에 젖었다. 제발 인질을 구하기 위해 베르스 군이 기습해 온 것이기를 기원했다. 보모처 럼 인질이나 돌봐주고 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거야말로 원하던 일이었다. “그래,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지.” 그는 잔인한 웃음을 드러내며 서슬 퍼런 장검을 뽑았다. 4 요새 밖에 숨어 있던 카론은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오르는 화약고의 불기둥을 올려다보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넌 은밀이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는 거냐.” 사방에서 고함소리와 비상을 알리는 거친 타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보다 적들의 이목을 끌기에 좋은 방법도 없겠 지만, 이랬다간 키릭스는 완전히 적들에 둘러싸이게....... ‘쳇, 내가 왜 그 녀석 걱정을!’ 카론은 지금 남 걱정해 줄 처지가 아님을 알고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첨탑으로 이동했다. 훗날 그는 이 정도 일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은의 기사’로 성장하게 되지만, 지금은 그 이전의 시기다. 아직 제복이 잘 어울리지도 않는 어린 카론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누구냐!” 카론의 검에 목을 뚫린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키릭스의 의도대로 대부분의 병력은 화약고 쪽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카론이 첨탑과 이어진 복도를 뚫고 나가는 것은 수월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복도를 지키는 병사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멜렌이 갇혀 있는 꼭대기에 도착하려면 족히 이십여 명의 완전무장한 병사들을 상대해야 상황, 게다가 조금이라도 늦장을 피우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지원 병력이 몰려오게 된다. 다른 기사였다면 결코 첨탑으로 발을 내딛지 않았을 철통같은 방어였다. 카론은 한동안 쓰러진 적의 시체를 바라봤다. 이것은 최초의 살인이고 또한 최초의 실전이다. 물론 실패는 죽음과 직결된다. 키릭 스는 적들의 시선을 끄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상황, 이제는 카론이 오직 혼자의 힘으로 첨탑을 점령해야 했다. 그는 길게 이어진 복도를 차가운 눈동자 속에 담았다. 자신을 향해 악투르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한번 긴 숨을 몰아쉰 카 론은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창밖은 불길에 뒤덮여 있었다. 5 카론은 문득 자신들을 괴롭혔던 견습기사 녀석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대일로만 싸우는 편안한 기사수행을 했다면 지금 이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했으리라. 마치 밀가루 포대가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악투르 병사들은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카론은 커다랗게 벌린 상어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구하고 출세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 얼음처럼 차가운 목적을 삼킨 카론은 달려드는 적들을 본능적으로 베어버리며 첨탑 꼭대기를 향해 나아갔다. 살아보면 인생을 뒤바꿀 커다란 기회나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지금 자신에게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쯤 자신 보다 훨씬 더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키릭스에게 비웃음 당하지 않겠다는 묘한 경쟁심리도 그를 자극했다. 악투르의 강병(强兵)들은 얼치기 귀족 사병들과는 격이 달랐다. 사정없이 밀려드는 칼날에 팔을 베이고 목 언저리에도 깊게 상처 를 입어야 했지만 카론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파해 나갔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그는 계속 검을 막고 찔렀다. 그리고 어느 샌가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끝난 건가.’ 첨탑 하부에 도착한 카론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과 핏줄기를 닦아내며 나선계단을 올려다봤다. 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횃불들 외에는 음산할 정도로 고요했다. 등 뒤에는 자신이 처치한 병사들의 시체가 이 첨탑을 집단영안소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니까 첨탑 위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거 농담이겠지?” 계단을 내려오던 보르츠는 자신을 향해 검을 들이댄 피투성이의 미남자를 보고는 말했다. 아니, 아직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외모였다. 일단 저런 애송이가 어떻게 이런 곳에 단신으로 올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정말 저 녀석 혼자서 모든 병사들을 처리했단 말인가. 그 모든 의문을 함축시켜 그는 ‘농담’이라고 표현했다. “너 같은 어린애를 보내야 할 정도로 베르스에는 기사가 부족했냐? 개나 소나 기사가 되는 나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 카론은 보르츠의 비아냥거림을 일일이 상대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가 느낀 것은 위압감이었다. 도리어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자 신을 바라보는 보르츠는 키도 몸집도 자신을 훨씬 압도하는 거구다. 탄탄한 구릿빛 근육은 칼도 튕겨낼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 까지 불러 일으켰다. 단지 덩치만 믿는 얼간이라면 곧바로 승부를 걸었겠지만- 카론은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보통 장검보다 몇 배는 무거워 보이는 보르츠의 검이나 자신의 두 배는 되는 그의 넓은 어깨 때문은 아니다. 직감적으로 이 요새에서 가장 강한 적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보르츠는 거들먹거리는 척하면서도 결코 카론의 공격 범위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은 채 조금씩 간격을 좁혔다. “흥. 계집애같이 생긴 녀석이군. 그 꼴로 용케도 기사가 되었구나.” 카론의 생김새가 검술과 안 어울린다고 해도 딱히 여자로 오해 받은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다. 도리어 준수한 귀공자 같았지만, 보르츠의 편협스런 시각으로 보면 흉터투성이의 근육질 정도가 아니라면 모조리 주방 허드렛일이나 하는 약골로 치부할 것이다. “어이, 도련님. 설마 이곳에 혼자 온 건 아니겠지?” “혼자다!” 카론은 주저 없이 말했지만 보르츠는 ‘누가 속겠냐?’라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후후, 그러시겠지.” 올해로 서른 살에 접어든 보르츠는 막 기사가 된 카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실전을 경험한 자다. 그가 보기에 카론은 막 걸음마를 마친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후후, 그러시겠지.” 올해로 서른 살에 접어든 보르츠는 막 기사가 된 카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실전을 경험한 자다. 그가 보기에 카론은 막 걸음마를 마친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카론이 온 신경 집중해 보르츠를 노리고 있어도, 반대로 보르츠가 보기에는 허점투성이였다. 어떤 부분이 허점이었냐 하면 - 카론은 아직 기 싸움에 약했다. ‘뭘 꾸물거리나!’ 라고 소리치며 보르츠가 크게 한 발자국 내딛자 갑자기 좁혀진 간격에 당황한 카론은 필요 이상으로 크게 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도 정직하게 휘두른 칼끝을 본 보르츠는 느긋하게 피했고 갑자기 계단 밑으로 밀려난 카론의 발뒤꿈치는 자신이 죽인 시체의 머리에 걸렸다. 주변 상황을 철저히 이용하는 것도 실정을 통해서만 쌓을 수 있는 스킬이다. ‘제길!’ 다리가 걸려 균형을 잃은 카론에게 보르츠가 검을 내리쳤다. 그런 엄청난 파워의 일격은 막기보다는 흘려버리는 게 옳지만 지금 카론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커다란 스파크와 함께 두 칼이 충돌했고 그 덕분에 완전히 균형이 무너진 카론은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한참이나 계단을 굴러 떨어졌다. ‘큭! 한심하게!’ 단순한 위협에 계단을 나뒹군 자신의 꼴에 화가 치민 카론은 빠르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과 싸우면서 생겼던 상처가 크게 벌어져 제복은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피에 젖어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카론에게 다가간 보르츠가 망토를 잡아챘다. 굴욕적으로 망토를 잡힌 카론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드러났다. 망토를 끌어당긴 보르츠가 말했다. “네놈들은 왜 항상 이딴 걸 두르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다음부터는 이런 거추장스러운 망토는 벗고 싸워라. 그러니까....... 그 다음이 존재한다면 말이지.” 동시에 보르츠의 쇳덩이 같은 주먹이 카론의 얼굴과 복부를 연타했다. 카론도 격투에 재능이 있는 편이긴 하지만 교과서대로 권 투나 레슬링 따위를 연습해 본 게 고작인 카론과 맨손으로 수많은 적들의 숨통을 끊은 ‘경력’ 이 있는 보르츠에게는 (게다가 망 토가 잡혀 있는 상황에서는)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일방적인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풀린 카론을 보르츠는 거칠게 걷어차서 계단 맨 끝까지 굴려 떨어트렸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긴 흑발의 청년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 보르츠의 생각은 다른 쪽에 가 있었다. ‘다른 녀석은 어디 있을까.’ 그는 처음부터 카론이 혼자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베르스의 정규군이 기습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그것은 아니 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이런 풋내기 기사 혼자서 온 것은 절대 아니라 믿었다. 일단 누군가 화약고 를 터트리지 않았던가. 빨리 그 겁 없는 놈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 일어날 것 같지는 않군.” 보르츠는 카론을 툭툭 걷어차 봤지만 그는 엷은 신음소리만 낼 뿐 미동도 못했다. 보르츠는 그런 카론을 묶어둘까 생각하다가 그만 뒀다. 일단 묶을 만한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실신한 상태에서도 칼을 꽉 잡고 있는 카론의 모습을 보고는 조금 기가 질렸다. 단순히 공적에 눈이 멀어 만용을 부린 하룻강아지라 폄하하기에는 상당히 표독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 제법 의지가 있군. 계집애라 부른 건 사과하지. 만약 네가 십 년쯤 더 성장할 수 있었다면 꽤 그럴 듯한 기사가 되었을지 도 모르겠다.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만.” 보르츠는 악투르의 관례상 내일 곧바로 이 청년을 고문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짜낸 뒤에 가차 없이 처형시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그렇고........’ 검을 집어넣는 보르츠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했던 것이다. 아무리 화약고가 터졌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기에 한 놈도 안 오다니! 혼자서 여길 지키라는 거야 뭐야? 그렇게 훈련을 받아 놓고도 아직도 불길을 못 잡 았단 말인가. 전투태세대로 움직이지 않는 부하들에게 화가 치밀어 오른 보르츠는 호통을 칠 요량으로 복도를 향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 고 긴 복도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넌 또 뭐냐.” 보르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두컴컴한 복도는 악투르 군의 시체가 피의 융단이 되어 늘어서 있었다. 하나같이 목이나 팔이 잘려나간 채 뒤섞여 있는 몸 조각들은 악취미적인 예술작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체들 가운데 서 있는 청년은 핏방울을 떨어트리는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었고, 귀화(鬼火)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붉은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빛내고 있었다. “카론, 지금 거기 있지?” 키릭스는 소름끼치는 눈웃음을 보였다. 악투르는 국민성 자체가 모질어서 괴담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지만, 보르츠는 이 순간만큼 은 악마에 얽혀 있는 기괴한 전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 인간이 이렇게 많은 자들을 학살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걸....... 네놈이 다 죽인 거냐?” “아? 이거 다 네 친구들이었니? 미안, 미안.” “말해! 네놈이 혼자 처리한 거냐!” 키릭스는 차가운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겁나면 도망쳐도 좋아.” 보르츠는 살기를 드러내며 검을 뽑았다. 단 두 명에게 우르콰르트 요새가 쑥밭이 되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정도로 겁쟁이는 아니다. 게다가 자신의 신호탄을 본 주변 지역에서 대규모의 지원군을 이곳으로 출격시켰을 것이다. 그들이 도찰할 때까지 버텨야 했다. 키릭스는 자신과 싸울 기세의 보르츠를 보고 방긋 웃었다. “저기 미안한데, 나하고 싸우기 전에 네 동 뒤의 녀석부터 상대해야 하지 않겠어?” ‘뭐라고!’ 보르츠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봤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카론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동자였다. “........아직 안 끝났어.” “지, 집요한 놈.” 보르츠는 아까 이 청년을 살려둔 것을 후회했다. 정보를 얻을까 싶어서 생포했지만, 이런 독한 녀석인 줄 알았다면 묶고 자시고 간에 기회가 생겼을 때 심장을 뚫어버렸을 것이다. 카론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크고 작은 상처는 물론 방금 전 보르츠에게 당한 탓에 서 있는 것도 힘든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보르츠는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죽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카론의 기세 때문이었다. 또한 더 큰 문제는.. ..... ‘저 악마 자식.’ 그는 키릭스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독하게 불안했다. 그때 카론이 외쳤다. “키릭스! 끼어들지 마!” 그것은 키릭스와의 오랜 경쟁심이 발현된 것이었지만, 애당초 키릭스도 그럴 생각이었다. “물론이지. 저런 녀석 하나 혼자 해결 못한다면, 넌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어.” 마치 뜨겁게 달군 못을 가슴에 후벼 넣는 것 같은 말투에 발끈한 자는 도리어 보르츠였다. “감히 이 애송이들이!” 맹렬한 투지로 불안감을 떨쳐낸 보르츠는 카론에게 뛰어들었다. 단숨에 이 비실거리는 녀석의 숨통을 끊고 곧바로 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악마를 상대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보르츠의 검술은 정교하기보다는 강렬하다. 바꾸어 말하면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검술. 단지 그 엄청난 힘과 노련한 판단력이 그 단순함을 보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르츠는 판단력이 흔들린 상태였다. 반면 카론은 절대로 보르츠처럼 전차 같은 근육질이 될 수는 없지만 타고난 치 밀함에 빠른 움직임이 그 단점을 보안하고 있었다. 게다가 때로는 교활하기까지 했다. “이, 이런!” 카론이 내두른 망토가 자신의 검을 휘감자 보르츠의 안색이 뒤바뀌었다. 피에 잔뜩 젖은 망토는 예상보다 훨씬 악착같이 검을 옭 아맸다. 단숨에 카론을 죽이겠다고 별렀던 보르츠는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얼마나 상실했냐 하면 카론이 망토 끈을 풀러놨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한순간에 보르츠의 검이 봉쇄되었다. 카론은 힘겨운 표정에 드물게도 조소를 머금었다. “망토, 어디다 쓰는지 물어봤었지?” ‘이 따위 잔재주를!’ 악투르의 전사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검을 놓았다. 칼을 뽑으려고 발버둥쳐봐야 단숨에 팔이 잘려나간다. 대신 무기를 버린 그는 몸을 숙이며 곧바로 카론에게 태클을 걸었다. 마치 투우 소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거구의 상대에게 카론이 검을 그었다. 목을 노렸던 칼날은 대신 보르츠의 오른쪽 눈동자를 완전히 찢어버렸 다. 그것은 영원히 치료될 수 없는 상처였지만 보르츠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카론을 덮쳤다. “아윽!” 상대적으로 작은 카론의 몸은 붕 떠오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황소에 치인 것 같은 격렬한 충격이 가신 뒤에야 쓰러진 자신의 몸 위를 보르츠가 짓누르고 있으며, 검을 쥐고 있는 오른팔이 그의 손에 단단히 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체구나 힘이나 격투나 카 론은 보르츠의 상대가 안 된다. 일단 뒤엉키게 되면 승산은 제로였다. 카론의 하얀 얼굴 위로 눈동자를 잃은 보르츠의 핏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그의 남아 있는 왼쪽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보르츠는 남은 손으로 카론의 목을 잡아챘다. 돌조각도 부숴버릴 것 같은 무서운 악력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큭!” “감히 악투르를 기습하고도 살아남길 바라냐! 죽어라! 네 무모함을 저주해라!” 당장이라도 목뼈가 부러질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 카론은 필사적으로 왼팔을 움직여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 내지 르는 주먹이 효과적일 리가 없었다. 그것은 단지 보르츠의 가슴을 툭툭 때리는 수준이었다. 보르츠는 비웃음을 드러냈다. 키릭스는 그 절망적인 몸부림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당장이라도 보르츠의 목을 잘라버리고 카론을 구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대일의 대결에서 끼어들면 안 된다, 라는 고상한 배려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은 좀 다른 의미의 ‘배려’였다. “추하군. 아직도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거냐?” 질식 직전인데도 포기하지 않는 카론의 주먹질이 보르츠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주먹은 의외로 잘 부서진다. 필사적으로 내지르는 주먹을 보르츠는 머리로 들이받았다. 그와 함께 카론의 손가락뼈가 으스러졌다. “.......!” 그것은 상대의 주먹을 깨트릴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이렇게 주먹이 부서지면 상대는 십중팔구 패배한다. 그러니까 경기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카론은 곧바로 자신에게 다가온 보르츠의 머리를 잡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까 자신이 찢어버린 그의 오른쪽 눈가를 후벼 팠다. “으아악!” 보르츠는 카론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강인한 육체라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눈을 쥐며 비명을 질렀고 그 순간 카론은 상체를 일으키며 팔꿈치로 보르츠의 얼굴을 몇 번이나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보르츠의 두터운 턱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그에게서 빠져나온 카론은 거친 숨을 내쉬며 검을 잡았다. 결정타를 먹이려고 했으나 그는 곧 칼을 거뒀다. 보르츠는 일어나지 못했다. 아까의 타격이 그의 머리에 강한 충격을 줘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하아, 하아........” 곰과 같은 덩치가 침몰한 것을 확인한 카론은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댔다. 체력은 이미 제로였다. 몸을 심하게 얻어맞은 탓인지 계속 피를 토하는 입을 손으로 꽉 막은 채 카론은 고개를 꺾었다. 눈을 감으면 이대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첫 실전에서 만난 상대로는 지나치게 강했다. “카론, 넌 어째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이기냐? 보는 내가 다 조마조마 하네.” 기적적으로 승리한 카론에게 혹독한 말을 던진 키릭스 덕분에 카론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키릭스를 사납게 노려봤다. 물론 대 단하다면서 축하를 했어도 그게 키릭스의 입에서 나왔다면 조롱으로 들렸겠지만 말이다.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보르츠는 말이 안 듣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키릭스는 그런 보르츠의 머리를 짓밟아 다시 주저앉혔다. “추하게 왜 이러실까.” 그렇게 흥얼거린 키릭스는 검은 머리의 친구를 흘낏 바라봤다. 안 죽여? 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카론은 고개를 저었다. “헤에. 널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 그거 정말 기사 같은데?” 키릭스는 씨익 웃으며 카론을 놀렸다. “하지만 네 자비가 이자에게는 굴욕이야. 그것도 몰라?” 보르츠는 솜털 같은 애송이에게 자기 목숨을 구걸 받고 기뻐할 성격이 아니었다. 키릭스의 발밑에 깔린 그는 남아 있는 한쪽 눈 동자로 카론을 쏘아봤다. 그가 피를 토하며 고함쳤다. “건방진 놈! 어서 죽여!” 하지만 카론은 차가운 눈빛으로 응수할 뿐 칼을 들지 않았다. 보르츠가 외쳤다. “네놈들이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곧 지원군이 도착한다! 수천 명은 될 거야! 너희들이 그걸 뚫고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하아. 별 걱정을 다하시네요.” 키릭스는 혀를 차며 보르츠의 머리를 바닥에 짓눌렀다. 단숨에 코뼈가 부러졌다. 보르츠는 쇳덩이가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아무리 자기 힘이 바닥났다고 해도 이자의 괴력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날 죽여. 동정 따위 필요 없다.” 키릭스는 으르렁거리는 보르츠 앞에 칼을 꽂았다. “죽고 싶으면 알아서 죽어. 죽음에 품위가 있어? 늑대에게 물려죽든 사자에게 물려죽든 죽음 그 자체는 다 똑같아. 승자에게 죽음 을 구걸하는 것으로 너의 패배가 정당화될 거라 착각하지 마라. 패배자.” 그건 보르츠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수치였다. 키릭스의 발밑에 눌려있던 보르츠는 쇠사슬에 묶여 포효하는 야수처럼 외쳤다. 그건 순수하게 증류된 분노였다. “지금 날 안 죽이면 후회하게 될 거다! 카론! 이 애송이, 똑바로 들어! 언젠가는 널 죽이고 말 거다!” 그의 저주는 증오의 열기가 되어 첨탑을 울렸다. 하지만 카론은 보르츠를 죽이지 않았다. 시체의 산을 만들며 여기까지 온 사람의 발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감상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갈색 곱슬머리 사이로 드러난 빨간 눈동자로 가쁜 숨을 내쉬며 주저앉아 있는 카론의 모습을 바라보던 키릭스는 곧 첨탑의 관리 실을 뒤져 술병을 하나 집어왔다. “악투르 사람들이 독한 술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내 특효 소독약을 안 가져온 게 아쉽긴 하지만.” 키릭스는 칼에 베이고 피에 젖어 누더기나 다름없는 카론의 셔츠를 벗겨낸 다음 그 위에 술을 모두 쏟았다. 희뿌연 통증이 온몸을 적셨다. “카론, 여기서부터 갈림길이야. 네 운명의 갈림길이지.” “.......” 카론은 지친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저 계단을 올라가든가 아니면 포기하고 베르스로 돌아가든가, 선택해.” 잠시 후에는 엄청난 수의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인질을 구할 여유는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인질까지 데리고 베르스로 무사 귀환할 가능성은 계산해 볼 것도 없이 희박하다. 기적에 기적에 기적이 필요한 가능성이다. 이것을 도박이라 말한다면, 아무리 돈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라도 판돈을 걸지 않을 그런 확률이다. “.......시끄러워. 누가 포기한대?”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쏘아붙인 카론은 벽에 몸을 기댄 채 두 다리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피와 땀이 뒤섞 여 소나기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디뎠다. 피에 물든 발이 계단을 밟을 때마다 붉은 발자국이 또렷이 찍혀갔다. 평민은 출세할 수 없다. 이런 터무니없는 기회라도 없으면 말이다. 카론은 피에 젖은 얼굴로 나선계단을 올려다봤다. 그것은 끝도 없어 하늘로 이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참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구해야 할 여자의 이름이 떠오르질 않았다. 오직 저 끝에 도달하는 것만이 어머니가 죽은 이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던 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뱀처럼 자신을 휘감는 나선 계단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미 몸의 모든 온기를 이 계단이, 이 첨탑의 악의적인 기운이 모조리 빼앗아간 것 같았다. 그는 계속 계단을 올라갔지만 또한 아무리 올라가도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문득 울어버릴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 때마다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6 키릭스는 카론을 부축하지 않았다. 부축해줘도 당장 자신을 밀쳐 낼 카론이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시시한 우정 따 위로 좋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키릭스는 곧 들이닥칠 악투르의 지원군을 막을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다. ‘이젠 터트릴 화약고도 없고. 어쩐다.’ 아무리 키릭스라도 만능은 아니다. 족히 천 명은 넘게 몰려올 것 같은 적들을 막을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은 키릭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시체로 가득 찬 복도를 걸어갔다. 7 지금쯤 승냥이 떼처럼 이곳에 도착했어야 할 악투르의 지원 병력이 말발굽소리는커녕 기별조차 없자 키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르스라면 모를까 악투르는 주변 도시가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주저 없이 달려올 나라다. 그런 강인한 기질 때문에 뭘 심어도 자라는 것이라고는 매운 당근 말고는 볼 것도 없는 황량한 나라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안 왔다니? 가자기 악투르 인들이 베르스의 이기주의에 감명 받기라도 했단 말인가? 눈썹을 찡그린 채 시꺼멓게 물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키릭스는 묘한 것을 발견했다. 요새 부근에서 대량의 먼지 같은 것이 흩날 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으로 간 키릭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보통사람이었다면 보자마자 졸도했을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맙소사!” 뼈만 남은 수많은 사람과 말의 뼈가 온 사방에 늘어져 밤바람에 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그 지원군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도 없으리라. 마치 그대로 멈춰선 채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만 같았다. 키릭스가 바싹 마른 두개골에 손을 대자 그것은 파삭하는 소리를 내며 먼지처럼 흩어졌다. 운석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것보단 덜 비참할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자는 전 세계에 하나뿐이었다. 키릭스는 잿더미를 털며 쓴웃음 을 지었다. “이거야 원 황송해서.......”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라 이건가? 키릭스는 곧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북쪽을 쏘아봤다. ‘제발 내가 가기 전에 뒈지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8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꼭대기에 도착한 카론은 흐릿한 두 눈으로 감옥 문을 바라봤다. 의외로 마지막 관문은 쉬웠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첨탑 위의 감옥에는 간단한 덧문 하나만 설치되어 있었다. 카론은 그것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팡파르도 꽃발이 휘날리는 축하도 없었다. 소녀에 가까운 작은 키의 아가씨가 상처 입은 몸을 떨며 구석에 숨어 있었을 뿐이다. 카론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계단 어디 쯤에 흘리고 왔음이 분명했다. 그녀가 겁을 먹고 카론을 피했다. 카론은 그런 그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는 카론....... 샤펜투스라고....... 합니다. 기사도를 지켜....... 당신을 구출하기 위해서.......” 기사도? 가증스럽다. 자신도 이 불쌍한 소녀를 이용하는 수많은 속물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뒤늦은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카론은 두 눈을 꽉 감은 채 짜내듯이 자신의 낯선 성(姓)을 내뱉었다. 이제는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저와 함께....... 베르스로.......” 거기까지 말한 카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런 짓을 하려고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여기까지 왔던 말인가, 그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자신도 목적을 위해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소녀를 납치하는 거라는 자기모멸을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증오해 마지않는 돼지들의 어디와 다르단 말인가. 더러운 수단으로 숭고한 목적을 이룬다고?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가식은 없지 않은가.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 없었던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는 입을 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 꼭대기에 도착하면 모든 괴로움을 보상받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황무지의 냉기 같은 공허감뿐. 기억나지 않은 것은 이 소녀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소녀를 데리고 베르스로 돌아가 돼지들에게 내키지 않은 칭찬을 받고 속 보이는 훈장을 받고- 그 다음엔 또 뭘 해야 한단 말인 가? 그 지독한 무력감은 필사적으로 버티던 그의 의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카론의 몸이 스르르 기울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9 카론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도 한참동안을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아무것도 실감 하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이 살아있는 것일까? 만약 여기가 악투르 군 고문실이라면 나름대로 납득을 했겠지만 이곳은 고문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안락했다. 장식 하나 없이 연녹색의 벽지로 둘러싸였을 뿐인 소박한 방이지만 적어도 고문실이었다면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과 푹신한 침대를 마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여전히 악투르였다. 벽에 걸려 있는 악투르의 붉은 국기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오, 정신 차렸네? 오늘도 혼수상태였으면 내버려두고 나 혼자 가려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키릭스였다. 카론은 키릭스를 보고도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왜 살아 있는지 엄청나게 궁금하다는 표정이네? 안타깝게도 여긴 천국이 아니야. 악투르의 저택이지.” “뭐? 저택?” 키릭스는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고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헛기침을 했다. “혹시나 해서 첨탑에 올라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너 기절해 있더라. 공주를 구하러 간 왕자가 진한 키스는커녕 그 앞에서 쓰러져 버리다니, 그게 뭐냐, 창피하게스리.” “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어째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야?” 그는 들고 온 빵을 한입 물더니 ‘으악! 맛없어! 독약이냐?’라고 소리치며 창밖으로 집어던지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악투르 사람들도 돈을 밝힌다는 사실에 감사해라.” “뭐라고?” “아무리 나라도 너와 그 여자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베르스로 뛰어갈 수야 없지 않겠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공녀를 구하는 정의의 용사는 내가 아니라 너여야 해. 너와 그녀는 만신창이가 돼서 기어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백마를 타고 늠름하게 입성해야 한 고.” “제발....... 본론만 말해주겠어?” “뭐 그래서 너희들을 마차에 태우고 이 도시로 왔지.” “배짱도 좋군. 우리 수배령이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으이구. 공주 앞에서 기절한 왕자 주제에 잔소리 늘어놓기는. 수배령이 떨어질 리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온 거지.” “어째서?” “일단 우리는 베르스로 돌아간 줄 알 테고, 애송이 둘에게 자랑스러운 악투르의 요새가 쑥밭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체면이 왕창 구겨질 테니까. 수천 명의 악투르 병사들과 싸워 인질을 구한 용맹한 두 명의 베르스 소년들을 체포하라는 치욕적인 수배령을 내릴 거라 생각해? 어느 나라나 정치인은 교활하면서도 우둔하기 마련이야.” 카론은 키릭스의 판단력에 상당히 놀랐다. 자신이었다면 어떻게든 기를 쓰고 베르스로 돌아가려고만 했을 것이다. “뭐, 너 치료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부족할 것 같고 그래서 이 집을 샀어.” “.......집을 샀다고?” 카론은 살짝 골치가 아팠다. 그렇다고 집까지 살 건 없지 않은가. “금화 한 주머니 주니까 두 말 않고 집을 내주더군. 대신 너 치료한 건 모조리 내가 했으니까 고맙게 생각해. 엄청 귀찮다고, 그 거.” “누가 치료해 달래.......는 됐고, 금화는 어떻게 구한 거야?” “적어도 한푼 두푼 저금해서 모은 건 아니니까 캐묻지 말아줘. 내가 건전한 방법으로 구했을 리가 없잖아?” “그런 말 자랑스럽게 하지 마라.” 카론은 기가 질렸다. 이건 치밀함 이전에 일종의 생활력이랄까. 키릭스의 능수능란함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기사 수행을 열심히 해도 터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서, 고지식한 카론은 모든 일을 얼렁뚱땅 해치우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키릭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가 마술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부조리해. 어떻게 수업 한 번 제대로 받지 않은 녀석이 나보다 더........’ 라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투덜거리던 카론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내 머리가!” 카론은 부러진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더듬거렸다. 꽤 길게 길렀던 자신의 머리칼이 단발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목숨을 부지했 는데 머리카락이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서 카론은 그야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그거?” 키릭스가 손가락으로 가위질 하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내가 잘랐어.” “어째서!” “검술 연습은 그만하고 이제 문화 상식 좀 쌓으시지? 악투르에서 성인 남자가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몸 파는 사람이라는 걸 의미 해. 네가 우락부락한 고릴라였다면 의심 받을 이유도 없었겠지만 그 얼굴로 긴 머리하고 다녔다간 애꿎은 남녀노소 죄다 홀리고 다 닌단 말이지. 그걸 원해?” “원할 리가 있겠냐!” “그래서 잘랐어요. 잘했지?” “.......잘났구나.” 카론은 이를 부득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딱히 긴 머리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키릭스가 잘랐다니까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 카론이었다. 물론 카론도 그 괴상망측한 ‘악투르 생활 상식’을 알았다면 자기 손으로 잘랐을 테지만 말이다. 키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흘이나 사경을 헤맨 녀석에게 스테이크 같은 건 무리일 테니까 죽이라도 만들어 주마. 아아.” “당근 넣지 마.” “아아아악! 귀찮아! 아무거나 처 드셔 좀! 미레일이 있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왜 내가 환자식이나 만들어야 해? 솔직히 이럴 때면 황궁 뛰쳐나온 게 후회스러워.” 키릭스가 괜히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카론이 말했다. “저, 키릭스.” 키릭스는 영민할 정도로 눈치 빠른 사내다. 단순하고 정직한 카론의 마음속쯤이야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야 본론을 말하는 거냐? 라는 표정으로 카론을 바라봤다. “그 여자....... 그러니까 이멜렌 님은 상태는 어때?” 이제야 이름을 기억해 낸 카론은 창피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조그맣게 말했다. 첨탑의 꼭대기에서 눈물을 흘렸을 때부터 생 겨난 죄책감은 가실 줄 몰랐다. 혈육에게 배신당해 악투르까지 끌려와 모진 꼴을 당한 가녀린 소녀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용하려 했다는 죄책감은 지금 그의 온몸을 들쑤시는 통증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키릭스가 말했다. “옆방에 있어. 데려올까?” “아냐! 괜찮아!” 카론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을 해놓고 어떻게 얼굴을 마주한단 말인가. 키릭스는 그 표정을 보고 정말 도리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아. 카롱. 카롱 샤펜투스 기사 나리. 베르스에는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기사들로 넘쳐흘러. 그런데 그 넘쳐흐르는 기사 나리 들 중에서 적국에 납치된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든 기사는 너 하나야. 어쨌든 네가 아니었으면 이멜렌은 죽었어. 중요한 건 네가 목숨을 바쳐 구했다는 거라고. 좀 교활하면 어때? 속물적인 이유 때문이라도 목숨 바쳐 살려준 것과 고상한 소리나 지껄이며 뒷짐 지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 중에 뭐가 더 훌륭하지? 내가 보기에 지금 너는 왜 자신이 백점이 아니냐고 슬퍼하는 범생 같아.” “어, 얼렁뚱땅 말하지 마라!” 키릭스의 말을 분명 냉소로 가득 찬 독설이었지만 그로서는 가장 상냥한 위로이기도 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카론은 달리 받아치지 않았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녀석, 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렸을 뿐이다. “아참. 그리고 이멜렌이 너 깨어나면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구해줘서 너무도 고맙다고.” “저, 정말?” 카론은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멜렌은 이후 11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려는 키릭스를 카론은 다시 불렀다. “키릭스.” “아니, 답지 않게 왜 자꾸 불러 세우실까.” 카론은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는 방을 둘러보며 물었다. “나와 이멜렌 님을 데리고 우르콰르트를 빠져나오기도 버거웠을 텐데, 금화에 이런 집까지 구하다니 대단해. 솔직히 나라면 전혀 못했을 거야.” 칭찬에 재능이 없는 카론은 꽤나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릭스는 혼자 서도 얼마든지 이멜렌을 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자 짐이 되고 있다는 미안함마저 들었다. 사실 키릭스에게 항상 화를 냈던 감정의 상당부분도 질투심이었던 것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의 편애를 받는 천재를 시기 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 같은 것이었다. 카론은 예전 미레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키릭스 씨는 무슨 일이든 해낼 것 같지 않아요?’ 라는 격앙된 어조. 항상 침착하고 품위 있는 미레일을 들뜨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키릭스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위험한 매력이 일종의 마성처럼 자신과 미레일을 홀린 것이라는 생각에 괜히 화가 났던 것이다. “아아, 네가 칭찬해 주니까 가슴이 다 벅차오르네. 좋아. 그 보답으로 평생 맛본 적도 없는 미쳐버릴 만큼 맛있는 죽을 만들어 주도록 하지. 대신 그거 먹고 일주일 안에 걸을 수 있어야 한다. 계속 누워 있다가는 결국 또 머리가 길게 자라서.......” “닥쳐!” 웃으며 말하는 키릭스의 눈매는 무표정했다. 밑도 끝도 없이 금화 같은 것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사실 그는 카론과 이멜렌을 데리고 우르콰르트를 빠져나온 뒤에 지나가던 마차를 잡았었다. 산적을 만나 이 꼴이 되었다면 특유 의 능숙한 언변으로 마차에 탄 가족들에게 동정을 얻었고 그 마차가 도시로 가는 하루 동안 그들과 대화하며 말하는 모든 것을 암 기했다. 이름과 나이, 직업, 살고 있는 집, 친한 이웃 등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그리고 도시에 도착하기 전 가족 모두를 살해하고 그들이 살고 있고 있는 집으로 가서 카론과 이멜렌을 눕혔다. 자신을 집주인의 친척이라 태연하게 속이는 키릭스를 이웃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키릭스는 카론 역시 속였다. 굳이 진실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저택의 지하실에 그 가족들의 시체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알려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푹 쉬도록 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키릭스는 그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문을 닫았다. 10 “카론 군, 내 말 듣고 있나?” “아, 죄송합니다.” 딴 생각에 젖어 있던 카론은 고개를 돌려 주치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십 년 전의 앳된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수많은 악당들과 싸워온 베르스 최강의 기사라 하기에는 여전히 곱상했 고 올해로 서른한 살이 되는 유부남이라고 하기에도 반칙에 가까울 정도로 동안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아무도 그를 평민이라 무시하지 못하다는 것과 십 년 전보다 훨씬 더 침착해진 성격 정도일 것이다. 사실 키스와 미온만 없다면 그를 화나게 하거나 두통약을 찾게 만들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것은 십 년 동안 몸에 누적된 상처였다. “농담하는 게 아닐세. 자넨 지금 심각한 상태야.” “시력이라면 항상 주의하고 있습니다.” “시력만이 아니야.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자네 몸은 애당초 격렬한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아. 엄청난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하 고 있지만, 그렇다고 매일 매일 목숨을 거는 일에 몸을 내던져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야. 자넨 지금 한계 상황이네. 대체 지금까지 병원신세를 몇 번이나 졌지? 자네에게 감았던 붕대를 길게 펴면 왕궁을 몇 바퀴나 돌고도 남을 걸?” “재미있는 농담이로군요.” “농담이 아니라니까! 상처는 치료되더라도 그때 받은 충격만큼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몸에 누적돼. 그게 지금 자네 몸을 갉아 먹고 있어.” 국왕의 어의이기도 한 늙은 의사는 카론 경의 몸 상태가 기록되어 있는 차트를 탁탁 때리며 혀를 찼다. 이런 흉악한 기록은 본 적도 없었다. 부상을 당한 부분은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몇 장을 넘겨도 새빨간 기록들만 가득했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지금까지 걸어 다니는 것이 신비로울 지경이었다. 천년만년 끄떡없이 악당을 소탕하는 정의의 히어로는 어린애 연극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란 분명 한계가 있고 주치의가 판단하기에 카론의 육체는 잔뜩 금이 가 있는 도자기, 즉 한계 일보 직전이었다. “처방을 내려주겠네. 쉬게나. 일 년이든 오 년이든 그 칼은 금고 속에 처박아두고 세상이 불바다가 되더라도 다 무시하고 무조건 쉬어!” “예. 참고하겠습니다.” 카론은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으로 의사의 경고를 피하며 새하얀 셔츠를 입고 단추를 잠갔다. 안 그래도 마라넬로 황제와 빌헬름 국왕 갑작스런 붕어(崩御) 이후 세계는 초비상 사태다. 이런 위험천만할 때 휴가를 낼 수는 없었다. 이번 진찰도 주치의가 제발 진단을 받으라고 집까지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자신의 제복을 들었다. 장승보고 혼자 떠든 기분에 한숨을 내쉰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론 군. 아니, 카론 샤펜투스 경. 생각 같아선 침대에 꽁꽁 묶어 놓고 강제로라도 쉬게 만들고 싶지만, 그 몸은 자네 몸이니 내가 더 이상 강요할 수야 없네. 하지만 한 가지만 묻지.” “어떤 걸 말입니까?” “왜 그렇게 조급해 하나.” “예?” “모른 척하지 말게나. 자네는 곧 다가올 대재앙을 대비하는 예언가처럼 항상 조급하고 있어. 지나치게 일하고 지나치게 연습하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어. 내 말이 틀렸나?” “........” “자네는 이미 그 나이에서 도달할 수 있는 권력의 정점에 올랐고 얼마든지 부유할 수 있고 또한 훌륭한 부인까지 있지 않나. 거기다 더없는 미남이기도 하지. 자넨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키는지, 의사로서가 아니라 계속 자네를 관찰해 온 사람으로서 궁금하네.” 카론은 그렇게 말하는 의사 뒤에 놓여 있는 수많은 약병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멜렌과 키릭스, 키스와 죽은 미레일, 엔디미온과 쇼메 등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이대로 가면 자신의 몸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 버린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얄궂게도 단 한 번도 검을 쓰는 것이나 싸우는 것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가 엷게 웃으며 걱정스러워하는 주치의를 바라보았다. “제가 검을 쓸 일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지나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다시는 검을 잡지 않을 겁니다.” “아니, 기사를 그만두겠다는 건가?” “은퇴 후에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항상 그때가 올 수 있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못 본 척해 주십시오 . 고집 부려 죄송합니다.” 카론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가 처음 기사가 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지켜봐 온 주치의는 카론이 남긴 그 말에서 이상한 불길함을 느꼈다. 뭔가 무서운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11 그런데 쉴 수가 없다는 카론의 결심은 그날부로 무너지고 말았다. 같이 여행가고 싶어요. 집에 돌아온 카론에게 이멜렌은 그렇게 쓰여 있는 쪽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몸이 약한데다가 정신적인 상처 때문에 밖으로 나 가는 것을 겁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 사실 거의 집에만 있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갑자기 여행을 가자는 ‘말’을 하자 카론은 두말없이 행정부에 가서 난생 처음으로 열흘간의 휴가 신청서를 제출했고 (카론의 휴가신청을 받은 담당자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신청서를 다시 읽었다.) 그 날로 짐을 싸서 이멜렌과 함께 왕실을 떠났다. 죽어도 쉴 수 없어! 라고 말하던 사람의 행동력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재빨랐다. 물론 여행이라고 해봐야 왕실에서 제공한 한적한 여름별장에 가서 쉬는 휴양이 전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론은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아내의 용기 있는 제안을 거부할 정도로 냉혹한 남자가 되지 못했다.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왕실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무도회에 나가는 것조차 꺼리는 그녀가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한 이유는 카론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쉬게 만들 겠다! 라는 일종의 의지였지만- 이런 일에는 절망적일 정도로 둔감한 남편은 그녀의 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여행을 떠난 것 이다. “아앗! 카론 경이 휴가?” ‘은의 기사 전격 휴가!’ 라는 빅뉴스는 호외처럼 삽시간에 왕실을 뒤덮었다. 이 일은 ‘국왕 임신’, ‘아이히만 성직자 되다 ’, ‘이오타 베르스에 무조건적 항복’과 비슷한 수준의 충격이었다. 그 예상치 못한 휴가를 두고 열흘 동안 이 나라의 치안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하며 비분강개하는 관리도 있었고 사실은 이멜렌 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라든가 카론이 마키시온에 스카우트 된 것이라는 식의 근거 없는 억측들도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심지어는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헬스트 나이츠 본부를 방문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헬스트 나이츠는 헬스트 나이츠대로 패닉 일보직전이었다. 평소 카론 경이 얼마나 많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 했던 그들은 열흘 동안 카론의 업무를 대신하기 위한 열 명의 기사들을 긴급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렇다. 카론 경의 부재는 곧바로 왕실 업무의 정지를 의미했다.......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의 공백은 ‘카론 경도 인간이 었구나!’라는 의미에서 충격적이었다. 그중 누가 가장 충격을 먹었냐 하면 바로 키스였다. “아아아아아! 나한테는 말도 안하고 가버리다니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아아아!”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는 키스를 민망한 얼굴로 바라보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들은 ‘말할 리가 있겠냐.’라고 중얼거 렸다. 분명 카론은 키스가 따라간다고 들러붙었다면 칼을 휘둘러서라도 막았을 것이다. “어째서 나는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까아!” “그거야 카론 경 떠날 때 댁은 꿈나라에 있었으니까.” 미온은 홍차를 후룩 마시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라넬로 황제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차피 살 만큼 산 사람이잖아요? ’ 라는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던 인간이 카론이 휴가 갔다는 말에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다니- 미온은 ‘일 좀 해라 , 게으름뱅이’라고 등짝에 써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키스가 미온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나도 따라갈 겁니다아!” “자, 잠깐! 그럼 앞으로 브리핑은?” “지금 그런 게 중요합니까?” “아아. 중요하고말고. 댁한테는 시시껄렁해도 우리한테는 엄청 중요해! 밥줄이잖아!” “난 몰라요! 그딴 거!” 기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홱 돌린 키스를 바라봤다. 어쩜 인간이 저리도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마치 전투 중이던 사령관이 ‘이거, 집에 가봐야겠는 걸?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야. 부부의 행복만큼 소중한 건 없지 않겠나?’ 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향해 해맑게 웃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격분한 부하가 총으로 쏴 죽여도 할 말이 없는 그런 상황. 그러나 불행하게도 물리적인 하극상으로는 승산이 없었던 미온은 제대로 미쳐버린 키스에게 논리적으로 현실을 일깨워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현실은 다음과 같았다. “키스 경, 당신이 가면 카론 경이 좋아할 것 같아?” 보나마나 사생결단이 날 거다. 미온은 자신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고 믿었지만 키스 경의 망상은 그것마저 튕겨내고 말았다. “물론입니다아. 제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거랍니다아.” 그럴 리가 있겠냐! 라는 경악의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빠진 단장을 바라봤다. 저 천진난만한 얼굴로 무슨 흉악한 민폐를 끼칠지 안 봐도 훤했다. 랑시는 ‘치료 불능’이라는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상황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낙관주의를 신봉하는 랑시에게 이런 말 들으면 볼 장 다 봤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키스는 결코 (쓸데없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어쨌든 저는 가고 말 겁니다! 저도 휴가를 신청하겠어요!” “댁은 어차피 삼백육십오일 펑펑펑펑 놀잖아! 주치의도 그랬다며? 더 이상 게으름 피우면 나무늘보나 코알라 비슷한 걸로 진화하 게 될 지도 모른다고!” “저 한 몸 편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지금 카론 경과 이멜렌 님은 물가를 뛰노는 어린아이 같은 무방비 상태! 어서 제가 가 서 치명적인 위협으로부터 그 연약한 커플을 지켜줘야 합니다!” “댁이 바로 그 치명적인 위협이잖아! 아직도 자기 포지션을 모르겠어?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가정파괴범은 바 로 당신이야! 현실을 받아들여! 그럼 마음이 편해질 거야!” 심리 스릴러물에서나 나올법한 대사와 함께 (민폐인간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혼돈에 빠진 키스 경은 머리를 쥐어뜯으 며 괴로워하다가 처절하게 자각하고 말았다. “아니에요오! 난 청소의 요정이에요!” “.......죽어버려.” 키스의 정신세계는 이미 사바세계로 떠나 있었다. 말기 정신분열환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기분에 미온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 이제 알게 뭐야. 될 대로 되라지.’ 라고 투덜거렸다. 사무실로 들어간 키스는 곧 여행 가방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노, 농담 아니었어? 당신 진짜 갈 거야? 잉꼬 같은 부부 마음에 어떻게든 대못을 박아줘야 속이 시원하겠냐고!” 가정파괴범과 동급으로 추급당한 키스는 뭐가 들었는지 엄청나게 커다란 가방을 들며 손수건을 휘날렸다. “여러분, 지금까지 정말 즐거웠어요. 저는 이제 새 인생을 찾아 여러분과 아쉬운 작별을......” “으이구! 아예 돌아오지 마!” “너무하시네요오.” 키스는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며 서럽게 훌쩍였다. 소박맞은 아녀자처럼 리더구트를 나가는 키스에게 미온이 외쳤다. “키스 경! 정말로 가면 어쩌자는 거예요? 당신 지금 가면 이 소파 치워버릴 거야!” 그러자 키스는 그 장난스러운 눈매를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것도 괜찮겠군요. 이젠 자리만 차지할 테니까.” “네?” “그럼 안녕히.” 키스는 무대를 내려가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집으로 인사를 올린 뒤에 밖으로 나갔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로 막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12 카론 부부가 도착한 곳은 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여름 별장이었다. 사실 이 별장은 국왕이 사 년 전에 카론에게 하사한 ‘선물’ 이었지만, 그는 그걸 받고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왔기 때문에 이 별장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 층으로 된 이 별장은 값비싼 실크 벽지로 마감된 내벽과 최고급 대리석으로 도배된 바닥, 푸른 벨벳 융단으로 덮여 있는 일 층 로비는 대낮부터 불을 붉힌 샹들리에로 반짝거렸고, 이 층의 침실은 자신들이 원래 살고 있는 집이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드넓었다. 광활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커다란 삼 층 식당은 공중에서 식사하는 기분이 들도록 사방에 크고 작은 창문들을 만들어 주변 경 관을 모두 드러내게 만들었고 그 식당 중심에는 서로 대화가 힘들 정도로 길고 넓은 식탁이 놓여 있었다. 말을 타고 달려도 될 장미 정원은 정원사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머리손질 하듯 세심하게 다듬어 놨고 그곳에는 상아빛 조각상 이 즐비한 대형 분수까지 있었다. 수영장 역시 작은 호수로 착가할 만큼 넓었는데 그 많은 물을 다 어디서 끌어 왔는지 짐작도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수십 여 명의 하녀와 관리인들과 집사가 상주하며 가꾸고 있었다. 그들은 평생 안 올 것이라 생각했던 이 집 의 주인 카론 부부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이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집 앞에 나와 일렬로 사열해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한 번도 오지 않은 주인을 위해 이 거대한 저택을 사 년이나 관리해 온 것이다. 카론은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결례를 범한 셈이었다. 그런데 정작 주인인 카론은 이 호화찬란한 자신의 별장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눈초리로 ‘예산낭비’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들뜬 이멜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곧 ‘길을 잃지 않으려면 안내인이 필요할 것 같군.’ 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대체 했다. 왕실 관료들이 다들 이런 별장을 서너 개 이상 꿰차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그는 골치가 다 아팠다. 당신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싶어요. 여간한 레스토랑은 비교도 안 될 것처럼 거대한 주방을 발견한 이멜렌은 종종 걸음으로 카론에게 다가와 같이 저녁 준비를 하자고 졸랐다. 다른 사람 부탁 같으면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카론이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멜렌에게 끌려가다시피 어정쩡한 발걸음으로 주방에 간 카론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요리사들 앞에서 식칼을 들었다. 정말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 그런 무시무시한 얼굴로 양파를 썰고 있는 사람 근처에 가고 싶어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멜렌이 씌워준 조리 모자까지 쓰게 된 카론은 침울한 오오라를 풍기며 주방 구석에서 묵묵히 양파를 썰고 있었다. 써는 굵기가 모조리 다르며 볶아내기에는 너무 굵고 굽기에는 너무 얇아서 어떻게 하더라도 버릴 수밖에 없게 양파를 자르는 카론 의 칼솜씨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런 성의 없는 칼놀림으로 애꿎은 양파를 열다섯 개째 난도질하던 카론은 결국 손을 베고 말았다. “........” 이럴 줄 알았지, 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핏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던 베르스 최강의 기사는 흘낏 자신의 아내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리사들에게 둘러싸여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요리에 홀딱 빠져 있는 이멜렌의 모습은- 남편은 칼에 찔려죽든 말든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 아내의 뒷모습을 쀼루퉁한 얼굴로 바라보던 카론은 베인 손을 뒤로 숨긴 채 슬금슬금 주방을 빠져나왔다. 그나마 이 거북한 호화저택에서 그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다면 서재였다. 한 번도 읽지 않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을 보자 카론은 이 집에 대한 평가를 30점정도 올려주었다.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책장을 바라보던 카론은 ‘당신도 은의 기사가 될 수 있다!’ 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그걸 꺼내 벽난 로 속에 집어던진 뒤에 다른 책 서너 권을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는 장미로 가득 찬 정원에서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저택 안은 너무 거대해서 너무 갑갑했다. 13 비록 키가 너무 작아 야채 상자를 밝고 요리를 해야 했지만, (카론에 비하면 신기에 가까운) 능숙한 손놀림으로 남편의 저녁식사 를 완성한 이멜렌은 곧 남편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그녀는 거대한 저택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다가 카론이 정원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말이 정원이지 전체 넓이를 짐작도 할 수 없는 ‘미로’ 속에서 그녀는 길을 잃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목청 높여 소리쳐 자기 위치를 알렸겠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한 이멜렌은 그야말로 말없이 아름다운 장미 정원 속을 헤맸다. 지나치게 호화로운 귀족주의가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꼴이었다. 병약한 몸 때문에 오래 걷지 못하는 이멜렌은 (평소에는 누가 앉을지 궁금한) 정원 속 벤치에 앉아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이었다. “여기서 뭐해요, 이멜렌 양?” 곧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웃고 있는 남자에게 재빨리 글씨를 써서 보여주었다. 놀랐어요. 어떻게 여기에 오셨어요? “카론 경 찾아 왔답니다.” 키스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고 그녀는 자신도 지금 찾고 있다는 시늉으로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그럼 같이 찾아볼까요? 저도 몹시 보고 싶으니까.” 키스는 정중하게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 벤치에서 일으켰다. 키스는 그녀의 몸에 배어있는 달콤한 초콜릿 향기와 메밀 냄새, 야 채 냄새 등을 맡으며 엷게 웃었다. “오늘 저녁의 메인 디쉬는 꿩고기를 넣은 갈레뜨와 아티초크 리조또로군요.” 이멜렌은 들고 있는 카드를 단번에 알아맞힌 마술사를 보는 것처럼 동그란 눈동자로 키스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왕실 요리사조차 울고 갈 실력인 키스에게 그 정도 추리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키릭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멋진 요리를 먹지 못할 것 같아 아쉽군요.”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붉은 눈의 남자에게서 서늘한 낯설음을 느꼈다. 얼굴도 목소리도 똑같은데도 마치 함정을 직감한 고양이처럼, 이자는 키스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자아, 카론을 어서 만나러 가볼까요. 이멜렌 양.” 키릭스는 몸을 떨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14 “으음.” 천천히 눈을 뜬 카론은 얼굴에 덮어두었던 책을 치웠다. 수영장 안락의자 위에 잠들어 있던 카론은 몸을 일으켰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은 붉은 파도가 몰려와 만조(滿潮)였다. 정원의 장미들은 불길하리만큼 아름다운 일몰에 젖어 있었고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수영장에는 거위가 새끼들을 달고 떠다니며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 대체 언제부터 잠들어 있던 것일까. 항상 억눌렀던 피로가 단번에 흘러넘쳐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것이다. 카론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별장을 바라봤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식사 준비를 마쳤는지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삼 층 식당은 불이 꺼져있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훑어봤다. 적막하리만큼 고요한 나무들 위로 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불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카론은 의자 밑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검을 꺼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론이 이멜렌을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마치 준비된 무대처럼 카론은 금방 자신의 아내와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무에 묶여 있었고 그 하얀 목에는 칼날이 다가와 있었으며 그 칼은 키릭스가 들고 있었다. 카론과 키릭스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서로 검을 들고 있었고 또 서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고전적이었다. “미안, 카론. 이런 방법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 아가씨가 이렇게 된 것에는 너한테는 조금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 해.” 키릭스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 태연함 뒤에서 존재하는 제어불능의 광기를 카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카론,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야. 첫 번째, 나를 따른다. 두 번째, 아내를 잃는다. 간단하지?” 어떤 카드를 뒤집어도 패배가 결정되는 지독한 선택문 앞에서 카론은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그 긍지 높은 자태 그대로 키릭스 를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세 번째, 널 죽인다.” “........” 키릭스의 표정이 굳었다. 아신 정도가 아니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는 키릭스를 카론이 쓰러트릴 확률은 사실상 제로다. 고 집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멜렌까지 잡혀 있는 상황. 그런데도 카론은 키릭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가장 완강한 방식의 거부였다. 싸우면 안 된다고 눈물을 흘리 는 그녀의 입에서는 목소리 대신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절박한 숨소리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난 네가 고집이 센 줄을 알고 있었지만, 멍청한 줄은 몰랐어.” 키릭스는 카론의 모습을 훑어봤다. 길고 검은 머리칼, 푸른빛을 머금은 맑은 눈동자, 어디 하나 뒤틀린 곳 없이 반듯한 모습, 또 렷한 인상, 은의 기사- 검술을 좋아하기는커녕 평생 남에게 주먹 한 번 안 휘둘러보고 소박하게 살았을 평범한 소년이 성장한 모습 이라고 하기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광채로 빛나지 않는가. 그 고귀한 광채가 키릭스를 화나게 했다. 악마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빛줄기처럼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 키릭스의 칼날이 이멜렌의 다리를 관통했다. 물론 즉사는 아니다. 하지만 키릭스가 칼을 뽑자 온몸의 혈액을 뽑아내는 것만 같은 핏줄기가 쏟아졌다. 키릭스의 입가에 번진 미소에는 장미 같은 가시가 돋아 있었다. “어쩌지? 빨리 구하지 않으면 네 아내는 죽을 거야.” “키릭스!” “화내지 마.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 건조한 목소리에는 파멸적인 조롱이 스며있었다. 키릭스는 증오로 더럽혀진 카론의 반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검을 들었다. ‘그 표정으로 죽어라.’ 키릭스는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카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15 키스가 죽으면 키릭스도 죽는다. 이것만큼 완벽한 파멸의 공식도 없을 것이다. 만약 이자벨이 키릭스의 인생을 망쳐놓기 위해 그런 공식을 설정해 놓은 것이라면 상당히 영악한 판단이었다. 키스도 키릭스도 카론도 그 공식을 알고 있었다. 키스는 항상 생각했다. 카론은 자신이 죽어주길 바란 적이 있었을까? 정답은 너무 뻔했다.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옛 친구의 복 품에 불과한 자신을 위해 그는 항상 희생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마움을 넘어서서 괴로움을 만들었다. 키스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죄악이었다. ‘이걸로 그 빚을 다 갚을 수야 없겠지만........’ 별장에 도착한 키스는 가방을 열었다. 대체 뭘 집어넣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길고 커다란 가방 안에서 그의 검이 나왔다. 아무런 무늬도 조각도 없이 단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엉켜 있는 무명(無名)의 검이었다. 키스는 예전 이자벨의 암살자로 있을 때부터 사용했던 그 흉검(凶劍)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검을 칼집에서 꺼내 칼 집을 버렸다. 다시 넣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키스에게 있어서 키릭스와 싸운다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온 수많은 싸움 중에서도 가장 괴이한 것이었다. 누가 이기든 모두 죽는다 . 단지 서로 죽어 소멸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싸움에는 승자가 없다는 케케묵은 격언을 가장 직설적으로 증명하는 예가 있다면 바로 자신일 거라며 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자살 같았다. ‘미온 녀석들에게 조금은 제대로 인사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키스는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서서 왕궁 쪽을 돌아봤다. 좋은 시간이었다. 과분할 만큼 말이다. 복제품에게도 다시 태어날 권리가 있다면 다시 한 번 베르스 왕실의 별 볼일 없는 기사단장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기대를 품었다. 참 부질없는 넋두리지만 말이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키스는 오래전 자신이 키스이기도 했고 키릭스이기도 했던 그 시절에 읽었던 시의 마지막 구절을 작별인사로 남기며 완전한 소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쨌든 자신이 카론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키릭스를 끌어안고 같이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때 그의 앞을 가로막은 자가 있었다. 키스는 그를 보자 웃음이 다 나올 판국이었다. “이젠 맘대로 죽지도 못하게 막는 거냐, 라이오라.” “........” 진청룡 라이오라, 흑검을 들고 있는 금안의 사내는 말없이 키스를 바라봤다. 키스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젠장. 저 인간을 무슨 수로 이겨? 이젠 정말 자살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키스는 그가 키릭스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는 황가의 피를 지키는 불사신이니까. 아무리 키스라도 라이오라를 쓰러트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갑작스런 장애물이라고 하기에 진청룡은 반칙이지 않은가! 키스는 운도 지지리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주저할 시간 없어!’ 키스는 엄청난 도약력과 함께 라이오라의 왼편으로 튀어 나갔다. 그대로 따돌리고 카론에게 갈 결심이었다. 아신과 정면으로 싸우 는 바보는 없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더! ‘마, 망할!’ 키스는 라이오라를 쓰러트리지 않고서는 결코 그를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휘두른 검이 암흑으로 가득 찬 아가리를 벌리며 자신을 때렸다. 그가 검을 휘두른 방향의 정원에는 말 그대로 죽음의 길이 닦였고 잿더미로 뒤바뀐 수풀이 소용돌이쳤다. 키스는 전력을 다해 겨우 겨우 그걸 막아냈지만 그대로 뒤로 튕겨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치 폭풍을 검 한 자루로 막아내는 것처럼 키스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힘에 계속 밀렸다. 키스의 검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울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쓸려나가는 키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키스는 깜짝 놀라서 자신을 들어 올린 자를 바라봤다. “엥? 무라사?” “야! 네가 키릭스가 아니라고 왜 말 안했냐.” 라이오라의 검기를 맨손으로 받아친 견백호는 키스를 다시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키스는 의외의 원군에 안도하면서도 그 질 문에는 코웃음을 쳤다. “남자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 법이랍니다아.” “그건 여자잖아! 아무튼 너 세상 그렇게 깔보며 살다보면 언젠가는 큰 코 다친다.” “살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잔소리는 접어주시지요.” 무라사가 나타난 것을 보자 라이오라는 눈을 꽉 감으며 뭐라고 조그맣게 투덜거렸지만 곧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키스는 라이오라의 일격에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옷을 털며 말했다. “이봐요, 무라사 씨.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저 불사신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요?” “흥! 나 혼자서도 가능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둘이 합쳐 30분 정도 걸리겠지.” “30분 안에 라이오라를 쓰러트린다?” “아니. 30분 안에 우리가 쓰러진다.” 무라사는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무라사로서도 라이오라는 일생 최대의 목표 같은 것이었 다. 480년 묵은 망령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전력으로 싸운다면 치명타를 입힐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승산은 라이오라 쪽이 압 도적이었다. 그때 그들을 지켜보던 라이오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귀찮군. 둘이 같이 덤벼라.” 무라사와 키스는 동시에 자존심 상한 표정을 드러내며 라이오라에게 뛰어 들었다. 선공은 무라사였다. 견백호 역시 아신을 제외 하면 어느 누구와 싸워도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강철 장갑의 펀치가 라이오라의 검을 후려쳤다. 눈부실 만큼 엄청난 스파크가 터지며 두 아신의 힘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키스는 기가 질렸다. 뒤엉킨 두 힘을 견뎌내지 못한 지반이 그들을 중심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원형의 파장을 만들며 퍼져나갔다. 붕 떠올라 그걸 내려다보던 키스는 무라사의 머리를 밝고 다시 도약했다. 화들짝 놀란 무라사가 자신의 머리를 쥐며 소리쳤다. “야! 뭐하는 짓이야!” “행운을 빕니다아. 전 바빠서 이만!” “우아앗! 이런 배신자! 거기서 이 자식!” 키스는 무라사에게 라이오라를 넘겨주고 내빼버렸다. 그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배신이었다. 그런데 그걸 몰랐단 말인가? 라이오라는 하도 한심해서 자신들을 붙여놓고 저 멀리 달아나는 키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무라사.” “뭐!”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넌 평생 이용당할 팔자인 것 같다.” “우, 웃기지 마! 나 혼자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으니까 보내준 거야!” “개뿔이.”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흥.” 라이오라는 어련하시려고, 라는 표정으로 검을 집어넣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야! 어디가! 날 피하는 거냐!” “그래, 피한다. 귀찮아서.” 라이오라는 누구와도 싸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 때문에 키스를 막긴 했지만, 어쨌든 도망쳐 버렸으니까 끝난 일이었다. 뒤쫓아 간다면 못 잡을 것도 아니었지만-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찰거머리 같은 무라 사에게서 자신도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뭐 귀찮아? 이 몸의 주먹을 맞고도 그딴 말이 나오나 보자!” 빠아악 “빌어먹을! 저리 꺼지라니까!” 마라넬로가 죽은 뒤부터 계속 가라앉아 있던 라이오라는 무라사의 주먹을 맞자 결국 험한 소리를 뱉어내고 말았다. 어떤 의미에서 무라사는 라이오라라는 불사신의 천적인 셈이었다. 16 미온은 키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키스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미온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정말 키스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까지 카론의 휴가에 끼어들 사람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전혀 달랐다. 도리어 그는 카론에게 무관심한 쪽이었다. 아니, 누구에게나 무관심했다. 키스 세자르는 사소한 장난 외에는 남의 인생에 끼어들거나 남이 자신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미온은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제 키스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었다. 그것은 어떤 근거도 없는 불안이었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또렷하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응어리지는 차가운 호박처럼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 줄 몰랐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키스와 카론, 이자벨과 쇼메,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념들을 정리하지 못한 미온은 문득 키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키스의 사무실은 키스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항상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묵묵히 그 사무실을 바라보던 미온은 항상 있던 것이 하나 없어졌다는 것과 없던 것이 하나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벽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던 키스의 검이 없었고 테이블에는 처음 보는 편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To. 엔디미온 From. 키스 “.......이건?” 미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편지를 꺼냈다. 달빛에 얼룩진 그 편지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미온은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미워했는지 모를 겁니다. 베아트리체를 지키지 못한 당신을. 라는 첫줄로 시작하는 키스의 작별편지를 미온은 떨리는 눈동자로 읽기 시작했다. 작가 팬사이트 cafe.daum.net/dragonlady 소속 사이트 www.fancug.net 작가 이메일 billiken77@kornet.net 작가 블로그 blog.naver.com/blindtalker 도서명: SKT10 저자: 김철곤 출판사: 북박스 초판발행: 2006.01.31. 입력일: 2006.05. 봉사자: 서울여자대학교, 방희진 차례 인물소개 제 25화 왕자님과 나 제 26화 돌아오지 않는 날들 제 27화 여왕님과 함께 제 28화 죽어 마땅한 제 29화 또 다른 시선 #4 나는 불타는 덤불이로소이다 주석 부록 인물소개 1. 엔디미온 키리안 21세. 수많은 고객들에게 총애 받았던 유명 호스트였으나 기구한 운명 끝 에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가 된다.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솔직하고 다정 다감한 성격이지만 왕실에 온 다음부터는 고난의 연속이다. 세상에 둘도 없 을 것 같은 보라색 눈동자와 엉덩이까지 오는 긴 금발의 소유자다. 그에게 있어서 베아트리체는 가장 소중한 과거의 추억이자 상처다. 별명은 미온. 2. 키스 세자르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단장으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귀여운 미남자. 단순히 나사 빠진 성격의 소유자 같지만 나름대로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보기와는 달리 무서운 검술을 구사하지만 깜짝 놀랄 만큼 게 을러서 특별히 써먹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엄청난 동안에 귀를 덮는 갈 색 곱슬머리와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3. 카론 샤펜투스 키스와 친구 사이지만 성격은 정반대로 금욕적이고 완고하다. 융통성 없 는 성격에 평민 출신이라서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헬스트 나이츠의 부기사단장으로 온갖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없을 정도의 동안이다. 흑청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졌으며 일년 중 9 9퍼센트는 제복을 입고 있는 성실한 공무원. 그 청교도적인 고귀함 덕에 다 른 사람들로부터 ‘은의 기사’라고 불리고 있다. 4.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베르스의 대공으로 재무대신이다. ‘철혈대신’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전투적으로 정치를 하는 다혈질의 깐깐한 노인이지만 그 정치수완만큼은 세 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왕실의 몇 안되는 뛰어난 정치가이며 사격의 달인 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인지 키스와는 사이가 극도로 나쁘다. 5. 오르넬라 무티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베르스의 성녀지만 육체파인데다가 사치스럽고 애연가에 술 좋아하고 남자 좋아하고 무신론자인 카리스마 성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성녀다운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는 크 리스티앙을 조금 위험한 쪽으로 총애하고 있다. 6. 지스킬 윈터차일드 14세.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이자 미온의 룸메이트이다. 몹시 불우한 과 거를 가지고 있는 병약한 소년이며 쉽게 친해지기 힘든, 실로 경계심 많은 성격의 소유자다. 최근에는 고양이까지 키워서 엔디미온을 들들 볶고 있다. 별명은 지스. 7. 쇼넨베르트 24세. 가무잡잡한 피부가 매력적인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지만 항상 빚 에 시달리는 지독한 가난뱅이기도 하다. 가난에 지쳐 임금님의 금옥두를 절 도한 전과가 있다. 별명은 쇼탄. 8. 크리스티앙 15세. 천성적으로 내성적인 스왈로우 나이츠의 소년 기사. 세상 물정을 모르는데다가 도가 지나치게 착한 성격 때문에 가끔 주변 사람들을 당혹케 하지만 불시에 폭언을 날리는 면도 있다. 최근 오르넬라 성녀의 총애를 받 아 주가가 상승중이다. 취미는 종이 접기. 별명은 크리스. 9. 랑시 16세. 풀 네임은 조슈아 랑시.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로 긴 생머리에 항 상 여장을 하며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좋았을 외모의 소유자다. 그러나 성 격은 섬세하기는커녕 위험할 정도로 낙천적인데다가 지나치게 쾌활하다. 외 견상으로는 믿겨지질 않지만 견백호 무라사 랑시의 동생이다. 10. 루이블랑 24세. 쇼탄의 룸메이트로 화려한 것과 여자에 인생을 바친 인간으로 틈만 나면 무녀들과 놀기 위해 담을 넘는다. 순간을 즐기는 쾌락주이자이고 명 품족이지만 저축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기 때문에 쇼탄과 함께 비렁뱅이 이 인조다. 별명은 루이. 11. 루시온 25세. 가장 많은 지명을 받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인기인으로 예법에 능하 고 고상하지만 상대와 항상 거리를 둔다. 명망 있는 백작 가문의 상속인이 고 검술의 달인이기도 하지만 그런 귀족가문의 속물근성이 싫어 스왈로우 나이츠에 자청해서 들어온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12. 레녹 26세.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엘리트다운 성격의 소유자다. 뻣뻣한 태도 덕에 ‘공무원 기사’라고도 불리며 루시온을 제외한 동료들과는 친 하지 않다. 루시온 다음가는 지명도를 자랑하는만큼 반듯한 외모의 소유자. 13.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 베르스의 왕자. 곱슬머리의 미소년으로 어린 나이에도 놀라운 왕의 재능 을 보이는 천재다. 온화하고 지적이며 심지가 굳은 성품을 가졌지만 불행하 게도 검술과 궁술에는 재능이 없다. 아이히만을 스승으로 두고 있지만 성격 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14. 제냐 라스팔마스 9살. 베르스의 공주로 페르난데스의 여동생이다. 귀여운 인형처럼 생겼지 만 실은 주저 없이 로우킥을 날리는 터프한 성격의 공주님이다. 자신의 이 상형이 오빠라는 곤란한 가치관을 가졌다. 15. 베르스 국왕 통칭 만두 국왕. 악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어쨌든 돈벌이에 대해서는 광기에 가까운 치졸함을 구사한다. 그의 부인인 왕비 역시 만만찮 은 성격의 소유자인 듯하다. 일 년에 한번쯤은 멋진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다른 부분은 엉망진창이지만 자식 농사 하나는 잘 지었다는 평을 듣는다. 16. 이자벨 크리스탄센 세상엥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여자. 이오타 왕국의 방첩기관 인트라 무로스의 국장. 상냥하고 이지적인 재녀지만 한편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 이고 때론 비정할 정도의 결단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의외의 위트 있는 장 난기를 가지고 있다. 미온의 VIP 고객 중 하나였다. 또한 독신주의자에 와 인 마니아다. 전 세계 직업여성들의 우상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는 인코그 니토라는 비밀결사조직을 이끌며 위험한 실험을 통해 키스를 창조한 장본인 이기도 하다. 17. 알테어 엔시스 사대 아신 중 명주작으로 콘스탄트 왕국의 교황파 아우리엘레 신전기사연 합의 리더라는 높은 직책을 가진 여자. 이 세상에서 검술로 견줄 자가 없다 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녔지만 성격은 투명할 정도로 순수하고 또한 꽤 위험 한 수준으로 맹한 구석이 있다. 옛 친구 키르케와는 현재 적대관계이며 미 온과는 매우 위험한 관계...를 원하고 있다. 18. 키르케 밀러스 사대 아신 중 적현무로 콘스탄트 왕국의 왕당파 제7무장 전투여단 ‘임모 탈’의 여단장. 고혹적이고도 고압적인 외모와 몸매로 뭇 남성들을 휘두르 는 그녀는 알테어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한다. 어둠과 그림자를 수족처럼 부 리는 막강한 힘을 가졌으며 (여러가지 의미로)미온을 귀여워해 주고 있다. 엔디미온이 바라보는 그녀는 반은 존경 반은 공포. 19. 쇼메 블룸버그 아오타 왕국 블룸버그 왕가의 첫째왕자.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로 비상한 머리를 지녔지만 성격에 심각한 모가 난 사내. 프라이드가 무척 강하고 야 망이 커서 자주 미온과 대립하게 되지만 비열한 악당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미학을 가졌다. 어린 시절 마키시온 제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마키시온 제국 황제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 현재는 이자벨에 게 배신당해 베르스에 몸을 의탁한 상태. 아이히만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20. 무라사 랑시 사대 아신 중 견백호로 아신 중 유일하게 아무도 섬기지 않고 방랑을 하 고 있다. 격투술에 대해서 누구보다 뛰어나며 마치 야슈와 같은 싸움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동생 랑시를 끔찍하게 아끼는 좋은 형이기도 하지만 가끔 그 형제애가 엉뚱 한 소동을 만들기도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주 속고 있다. 21. 헬렌 카민스키 블리히의 뒤를 잉ㅅ는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단장. 검술보다는 머리를 우 선시하는 유학파 신세대 기사로 출세하겠다는 욕망이 남다르다. 본래 키스 와 카론에게 기사수업을 받았지만 키스에게 버림받은 이후 남자라면 이를 갈게 되었고 괜히 카론 경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론 중심적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곤경에 빠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왕실에 충성하는 유능한 기 사다. 22. 위고르 베르스 왕국의 법무대신.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오른 만큼 단 한 번도 출셋길에서 밀려난 적이 없는 불세출의 야심가다. 자신은 아이히만을 라이 벌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히만은 놀려 먹기 좋은 애송이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부에 대해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의외로 착한 구석도 있 다. 공처가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23. 마라넬로 무르시엘라고 마키시온 제국의 황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진 지배자로 강압 적인 지도력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외경의 대상이다. 한편 남자 여자 안 가 리는 호색한이라는 말에 미온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와들와들 떨게 되었다 아이히만과는 옛 친구이자 정치적 호적수다. 숨겨진 아들 키릭스에게 암살 되었다. 24. 라이오라 란다마이저 4대 아신 중 진청룡. 최강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자. 결코 죽지 않고 누 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로 평가되는 인물로 검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상대 의 생명력을 거둬가는 사신과 같은 힘을 지녔다. 잔혹한 성격은 아니지만 마라넬로 황제의 명령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완벽하게 수행하는 충성심 덕에 사람들로부터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서 마키시온 제국 전위대 프론티어 뱅가드를 맡고 있다. 취미는 땅콩 까기. 주 군 마라넬로가 암살된 이후에는 키릭스를 따르고 있다. 25. 이멜렌 카론의 아내. 작은 키에 인형같은 외모를 지녀서 마치 소녀처럼 보인다. 악투르 왕구에 납치되었을 때 카론이 구해낸 일이 있지만 그때의 상처로 말 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항상 자신이 할 말을 적어 놓은 카드들을 가지고 있 으며 거의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카론을 더없이 사랑하는 착한 아가씨. 취미는 초상화 그리기. 26. 미레일 예전 키스, 카론과 함께 기사수업을 받았던 그들의 친구. ‘미레일 선생 ’ 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유순하고 착한 성격의 소유자로 평민출신 인 카론과도 허물없이 지내던 드문 귀족이다. 뛰어난 검술과 교과서적인 기 사도로 장차 베르스의 왕실 기사가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훗날 이오 타의 기사가 되어 베스르 기사들로부터는 매국노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 쇼메를 경호하는 기사지만 그를 이오타에서 탈출시키고 자신은 키릭스와 싸우다 전사한다. 27. 라젤 인트라 무로스의 비밀요원. 반짝거리는 금발에 인상이 좋아서 겉으로 보 면 착하고 사근사근한 청년으로 바이지만 실제로는 테러와 암살, 증거인멸 의 프로다. 국장 이자벨의 명령을 받아 때때로 미온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하고 감시하기도 한다. 이자벨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 다. 28. 키릭스 세자르 마라넬로 황제의 숨겨진 아들. 황실을 도망쳐 나와 카론, 미레일과 함께 기사수업을 받은 그는 이자벨의 암살자로 활동하던 중 자신의 복제인 키스 와 영혼을 공유하게 된다. 이후의 키릭스는 제어할 수 없는 증오로 치닫고 있다. 29. 카일리 스왈로우 나이츠의 아홉 번째 기사로 올해로 세 살이 되는 인조인간이다. 양처럼 유순하고 자상한 성격의 그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페니슐라를 위해 마일즈 남작령을 지켰다. 은발에 파란 눈을 가진 온화한 미남. 30. 베아트리체 미온과 키스의 옛 애인. 세계 밖에서 온 여자로 막강한 텔레마코싱 능력 을 지닌 여자지만 그 힘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하다. 키스의 부탁을 받은 미레일이 숨겨 주었지만 이자벨이 추적하고 있다. 제 25화 왕자님과 나 1. 쇼메 왕자의 망명 아닌 망명 이후 베르스 왕실 공기는 놀랍도록 싸늘해졌 다. 사리사욕에 불철주야 매진하는 관리들마저 늑대와 마주한 너구리들처럼 몸을 사리는 것이다. 부정부패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지 , 당장이라도 이오타와 전쟁이 일어나 이 조막만한 나라가 멸망해 버릴지도 모르는 이 판국에 평소처럼 속 편하게 세금이나 착복할 수 있겠는가? 그렇 다고 천문학적인 뇌물과 로비로 겨우 얻어낸 자기 직위를 버리고 다른 나라 로 망명하는 것도 아까운 노릇이라서 왕실 관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돌아가는 분위기만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기침 한 번만 크게 해도 깜짝 놀라 책상 밑으로 숨어버릴 것 같은 그런 긴장된 분위기. 이런 살 떨리는 무드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페 르난데스 왕자님을 비롯해서 아이히만 대공, 오르넬라 성녀님과 같은 왕실 중신 일부, 그리고... “하아아, 미온 경. 최근 제 백옥 같은 피부가 거칠어져서 고민이네요오. ” “...” 저기 저 소파에 허구한 날 널브러져 있는 거대 코알라, 키스 경밖에 없을 것이다. 아아, 그래요? 피부 미용의 적신호라 이겁니까? 그거야 환절기니까 당연 하겠지요. 그거 큰일이네요. 그런데 당신의 고민은 그것뿐? 최근 나라 분위 기 때문에 지명이 모두 취소되어 리더구트에 대기중이던 나는 한숨을 내쉬 며 말했다. “키스 경, 피부 미용 말고 다른 걱정거리는 없수?” “흐음, 글쎄요오오.” 키스는 길게 하품을 하며 졸린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뭔가 떠 올랐는지 눈을 반짝 떴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제부터 땅콩을 전혀 수입하지 않겠다고 국제무역 부가 발표했어요! 이제는 땅콩도 밀수해야 한다니! 이런 막되먹은 세상이 어디있냐요오!” “아아, 그거 심각한 문제로군요. 땅콩 마니아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악법이네요!” 아니 저 인간은 정말 여우나 고양이 비슷한 것이 둔갑한 게 아닐까. 자기 만의 ‘오호호 파라다이스’ 같은 데 서식하면서 사바세계의 흥망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없는 그런 생명체 말이다. 나는 그 놀라운 무신경에 경탄 을 보내며 되물었다. “저어, 있잖아요. 피부나 땅콩 말고 다른 걱정은 없는지 잘 생각해 보세 요. 예를 들면 이오타와의 전쟁이라든가, 이 왕국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걱정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닙니까? 당신 은 피부만 촉촉해지고 땅콩만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이 나라가 불지옥에 떨어지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거야? 응?” 그러자 키스 경은 가느다란 눈웃음을 보이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뭐 , 뭐야 그 애완동물 대하는 것 같은 미소는! “헤에, 미온 경. 전쟁 통에 제가 다칠까봐 걱정하는 건가요? 귀엽네요. ” “귀엽긴 개뿔이!” 지금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 정신 상태야! 누군 노심초사 밥도 안넘어 가 는데! 내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저었다. “하지만 미온 경, 제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저는 전쟁이 일어나도 괜 찮아요.” “어째서?” “왜냐하면, 전 이미 짐 다 싸뒀... 꺄악! 또 때렸어! 왜 허구한 날 절 박해합니까아!” 내 쇠주먹을 맞은 키스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냉랭하 게 말했다. “아아, 땅콩 수입 안 되는데 화가 나서 말입니다! 저도 땅콩 좋아하거든 요!” “...고,고정하시어요오.” 키스는 슬며시 쿠션으로 얼굴을 가리며 대답했다. 으이구! 당신도 어쨌든 직책은 기사단장 아냐? 그런 주제에 준비성 좋게 피난 보따리 미리 싸놨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지금 백성들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왕실만 믿고 있는데, 이놈의 왕실은 하나같이 왜 이래? 그때(평생 못 갚을 빚이 적혀 있는) 장부를 계산하던 쇼탄이 심각한 표정 으로 말했다. “저 있잖아, 전쟁 나면 이 빚, 안 갚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전쟁 일어나도 괜찮은데...” 순간 리더구트에 우울한 정적이 내려왔다. 어째서 저 화상은 이 와중에도 빚 같을 걱정밖에 없단 말인가. 루이 경의 의견은 부정적이었다. “어허. 쇼탄, 안이하구나! 국왕 전하의 성격상 전쟁 끝나면 다시 빚 갚 으라고 독촉할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럼 나라가 멸망하는 편이 좋을지도...” 우물쭈물거리며 말하는 쇼탄을 보며 나와 루이는 어허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빚이 싫어 조국의 멸망을 간절히 소망하는 극빈청년 앞에서 해줄 말이 없었다. 쇼탄 경, 그 발상은 말이지요, 집에 홀라당 불타버렸으니 이 제 청소할 필요 없어 좋구나! 라는 것과 비슷한 레벨의 낙천주의입니다요. 한편 성직자 지망생 크리스 군은 (쇼탄의 희망과는 달리) 두 손을 모은 채 이 나라의 안전을 기도하고 있었고, 루시온 경은 왕실 사정상 지명을 가 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지명자들에게 쓰고 있었고(정말이지 대 단한 프로페셔널이다), 레녹 경은 금화로 교환한 전 재산을 묵묵히 세고 있 었으며(전쟁이 나면 이 나라의 통화가치는 땅에 떨어지지만 금값은 그대로 니까), 지스 경은 일 년치 먹을 약을 모조리 구입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 으로 분류하고 있었다(보기만해도 배가 부를 만큼 많았다.). 뭐랄까, 다들 자기 스타일대로 전쟁을 대비하고 있군. “응?”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미소녀’ 랑시 경만은 태평스럽기 짝이 없게 차와 쿠키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래 위험할 정도로 포지티브한 녀석 이긴 하지만 저건 지나치게 초연하잖아? “이봐, 랑시 경. 넌 아무 걱정 없어?” “나? 캬하하하. 난 아무 문제 없지롱.” 랑시는 손을 내저으며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전쟁나면 형이 달려와 보호해줄 테니까 난 운석이 떨어져도 끄덕없어요 .” 이거 정말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구만. 나는 헛기침을 하며 되물었 다. “저어, 랑시.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서 얘기하는데, 너 형 싫어하잖아 ?” “뭐랄까. 바보 형이란 비상식량 같은 거지. 평소에는 맛없어서 집어던지 지만 조난당했을 대는 꽤 쓸모 있잖아? 이럴 땐 형이 아신인 게 자랑스러워 .” 지조 없기로는 숙주나물 버금가는 랑시 경이었다. “갑자기 무라사 씨가 무지하게 불쌍해지는구나.” ‘비상식량’ 견백호 씨가 근육질의 옥체를 이끌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 려와 드레스 입는 게 취미인 발랑 까진 남동생을 온몸으로 구출해내는 비주 얼 나쁜 형제애를 떠올리자, 이놈의 브라더즈는 뭘해도 개그라는 서글픈 생 각마저 들었다. ‘하아,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무라사 씨가 와준다면 좋을 텐데.’ 동생에겐 비상식량일지 몰라도 어쨌든 무라사 랑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 한 네 명 중 하나다. 게다가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은 자유로운 몸. 그런 사 람이 이 나라를 지켜준다면 제아무리 이오타라도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일부러 막아두었단 묵직한 불안감이 산사태처럼 쏟 아졌다. 그러니까 이지벨 님에 관한 것 말이다. 지금 나의 마음은 분노도 배신감도 아닌 혼돈 그 자체다. 이 모든 참극들을 그녀가 만들어낸 것이 사 실이라면 - 그 때 내가 어찌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니게는 ‘어쨌든 악은 처단’ 이라고 냉정하게 다짐한 뒤에 주저없이 상대를 징벌 할 수 있는 정의로움 같은 것은 없다. 무르고 감상적이라고 지적받곤 했던 내 마음이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은 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괴로운 상황 중에 하나였다. 그때 지명자에게 보낼 편지들을 하나하나 편지 지에 넣어 차분하게 마무리한 루시온 경이 내게 물었다. 정말이지 내일 세 상이 멸망하든 말든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남자였다. “엔디미온 경, 쇼메 왕자의 상태는 어떤가요.” “아...그게.” 처음에는 왜 루시온 경이 쇼메에 대해 궁금해 하는지 의아했지만, 생각해 보니까 이오타에 있던 특급호텔도 쇼메 왕자와 루시온 가문의 공동소유이 고, 여러 가지로 인연이 있을 법했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쇼메는 사업적 안목이 뛰어난 루시온 경의 재능을 탐내 그 자존심 센 성격에도 몇 차례나 친필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물론 루시온 경은 항상 그 편지 말미에 ‘고사합니다’라고 써서 그대로 돌려보냈단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음, 좋아지길 빌어야죠.” 이 말만큼 ‘중환자’에게 적합한 말도 없을 것이다. 사실 쇼메의 외상은 예상외로 큰 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사경을 헤맸겠지만 입원 이틀 만에 정신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야’ 라며 혀를 찼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의 상처일 것이다. 강대국의 왕자에서 하루아침에 부모 살해의 누명을 쓴 도망자가 된 것은, 나로서는 짐작도 안가는 절망이 다. 제아무리 쇼메라도 그 상처를 회복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 “아? 카론 경?” 그 때 소파와 한 몸이 되어있던 키스가 몸을 일으키며 동그란 눈으로 문 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 아니 저 양반, 대체 무슨 꿈 꾼 거야? 뜬금없이 은의 기사님은 왜 찾아?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문이 덜컥 열리며 카론 경이 들어왔다. 우리는 경탄 의 눈초리로 키스를 바라봤다. “아니, 키스 경...예지 능력이라도 있는 거?” “에헴!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랍니다아!” 잘났수. 그 피나는 노력, 조금만 업무적인 부분에 투자했다면 당신 굉장 히 훌륭한 기사단장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카론 경은 아예 키스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꼬리를 치는 키스 옆을 냉담하게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난 불안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보통... 이 사람이 찾아오면 좋은 일 안 생기는데. “임무가 있다.” ”아?“ ”쇼메 왕자는 곧 니샤 왕국응로 떠날 것이다. 목적은 비공식 회담.“ ”아?“ ”쇼메 왕자가 그 회담의 수행원으로 자네를 지목했다. 나는 경호원으로 동행한다.“ ”아?“ ”쇼메 왕자가 자네에게 명령할 권한은 없다. 거절해도 좋다.“ 뭔가 속사포처럼 주문서가 날아왔다. “아니... 거절하기 이전에, 어째서 하고 많은 왕실 식구들 중에 저에요? ” “나도 모른다.” “니샤 왕국에 가서 무슨 회담을 하는 거죠?” “말할 수 없다.” “전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요?” “알려줄 수 없다.” 아니 이거 뭔가 기계 버튼을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인데. 누를 때마다 ‘모 릅니다’, ‘내 권한 밖입니다’, ‘알려줄 수 없습니다’ 같은 불친절한 답변만 계속 내뱉는 ‘공무원 머신 Ver. 1.3' 같은거... 아니,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 “쇼메 왕자가 입원한 지 열흘밖에 안 되는데, 벌써 일을 시키다니 너무 하시네요! 아무리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중환자한테 어떻게 !” 물론 난 쇼메를 좋아하지 않는다. 못 견디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 엄청 난 성격 덕분에 나와는 궁합이 맞질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좋고 싫고의 문 제가 아니지 않은가? 몸도 마움도 엉망이 되어서 긴 휴식이 필요한 사람을 니샤 왕국에 보내다니, 국왕 전하가 그리 매정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카론 경은 내가 그 말 할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쇼메 왕자가 자청한 것이다. 아니 고집 부렸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 도 리어 왕실은 반대했다.” “예?”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그 녀석. 아무리 불굴의 의지라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쇼메 왕자의 요청은 명령이 아니다. 원치 않는다 면 거절해도 좋다. 솔직히 나는 자네가 거절했으면 한다.” 아니, 이거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 적거렸다. 2. 흥. 내가 왜 쇼메의 말을 따라야 해? 나는 그 불유쾌한 부탁을 일언지하 에 거절했다, 는 거짓말이고 주섬주섬 가방을 싸서 카론 경을 따라나섰다. 일단 모든 지명이 취소되어 딱히 할 일이 없는 탓도 있었고 이것은 엄연한 왕실의 업무니까 기사의 신분으로 돕는 것이 당연했다. 절대 성격 나쁜 쇼 메가 나중에 보복할 것이 두려워서 거절 못한 것이 아니다. 정말이다. “아아, 왔냐. 천민.” “...” 역시 거절할 걸 그랬다. 사륜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쇼메는 손톱을 다듬으며 그의 전매특허 대사 ‘나 외엔 모두 천민’을 읊어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자극은 반복에 둔감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마차 지붕에 가방을 얹을 뿐이었다. 경호역인 카론 경은 마차를 둘러봤다. 바퀴살의 상태가 좋은지, 말과 연 결된 죔쇠에 녹이 슬지는 않았는지, 인트라 무로스 특무대가 마차 구석 잘 안 보이는 곳에 시한폭탄 같은 것을 철치해 놓은 것은 아닌지 빈틈없이 체 크한 뒤에야 카론 경은 마차에 올라타 쇼메 옆에 앉았다.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쇼메는 외교 서류로 추정되는 종이 뭉치를 훑어보고 있었고 카론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호위할 왕실 기마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 서로 할 말이야 있겠냐만, 묘하게 싸늘한 느낌이다. 나는 가증스러운 영업 스마일을 보이며 물었다. “쇼메 왕자님, 그럼 제가 할 일이 뭔가요?” “잡일.” 입술 끝이 실룩 였다. 야! 그런 건 아무나 시키면 되잖아! “아아, 너무 보람찬 일이라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왕실에서 잡일 시 킬 사람이 저밖에 없었나요?” “응.” 울컥! 우길 걸 우겨! 쇼메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계속 서류를 넘기 며 말했다. “네 녀석은 덤벙거리고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내가 마실 차에 독을 넣지는 않을 테니까.”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면 더 생각하지 마. 그냥 내가 시키는 일만 해.” “...” 모를 리가 있나.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쇼메 왕자에 게 있어서 이 커다란 왕실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카론 경과 나뿐이었던 것이다(한 명 더 있다면 아이히만 대공 정도지만 아무리 쇼메라도 그분이게 잡일을 시킬 정도로 배짱 좋진 않다). 누구라도 이오타의 첩자일 가능성이 있다. 갑자기 암살을 당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뭘 봐, 천민.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자.” 쇼메는 힐끗 나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가 서류를 넘기기위해 손목 을 움직일 때마다 정장 소매 끝에 살짝 살짝 붕대가 드러났다. 그 짧은 시 간에 상처가 다 치료되었을 리 없다. 억지로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아물지 않은 상처에 붕대를 칭칭 감고 검은 정장으로 감춘 것이다. 그리고는 아픈 숨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그런 남자였다. 나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고 생 각했던 쇼메 왕자와 카론 경 사이에서 부정할 수 없는 공통분모를 느꼈다. “아, 그리고 네 얼빠진 기사단장 녀석 말이야. 그 빨간 눈에...” “어? 키스 경?” “이름이 키스였던가.” 나는 적잖게 놀랐다. 쇼메가 발이 넓은 건지, 키스가 유명한 건지, 쇼메 의 입에서 키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 말하려고 복잡한 표정을 드러낸 쇼메는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 다. “됐어. 너같이 우매한 천민에게 물어봐야 알 리가 없지.” “아아! 뭔 소리예요!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뭘 실망하는 거냐고오!” “시끄러. 입 다물어. 한 마다도 하지 마.” 아니 이거 대체! 무시당하는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쇼메 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기분이 상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카 론 경은 키스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우리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무표정한 얼 굴로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뿌연 불안감을 느꼈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3. 국경선을 넘자 기이한 일이 생겼다. 우리를 호위하던 베르스 기마대가 방 향을 틀어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지만 카론 경은 이미 알 고 있는 듯 태연했다. “왜 우리 호위병들이 돌아가는 거죠?” “니샤 왕국에서 직접 우리를 호위하겠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카론 경이 말했다. 그 말을 얼핏 들으면 니샤가 우리를 꽤 환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만큼 홀대하는 것도 없다. 즉 베르스의 군대는 들어올 수 없다는 의미였다.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하네요. 갑자기 니샤의 태도가 엄청 쌀쌀맞아졌군요.” 출발하자마자 서류를 얼굴에 덮고 잠들어 있던 쇼메가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를 성대하게 맞이했다가 이오타가 기분 상하면 어쩌나 쩔쩔매는 거지 . 배짱도 없는 놈들이야.” 역시 쇼메답게 곧바로 독설이 나왔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 자존 심 긇힌 흔적은 없었다. 도리어 언제라도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역력했다. 하아, 아무튼 여러 가지 의미에서 굉장한 사람이다. “뭐야? 저게 우리 호위병?”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우리를 니샤 왕 실까지 호위할 기병들이 오고 있었다. 아니, 이거복수형을 쓰기도 송구스러 운 게, 고작 둘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경이로울 만큼 대충 대충 우리를 호 위하는 꼴이 무슨 파트타임 병사들 같았다. “으으, 이거 진짜 대놓고 괄시하네. 하급 귀족한테도 이것보단 호위가 충실하겠다!” 나는 이를 부득 갈았다. 확실히 외교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다. 조 금만 이익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해버리는 것이다. 지 금 우리를 향한 니샤의 태도는 ‘친한 척하지 말아줘’였다. 나는 문득 쇼메가 왜 굳이 이런 나라의 외교 특사를 자청한 것인지 궁금 했다. “나이 먹은 데릴사위 대하는 분위기의 니샤에는 무슨 일로 가는거죠?” “니가 알아서 뭐해. 넌 잡일이나 해.” “똑같이 괄시 당하는 입장인데, 적어도 이유 정도는 알려줘도 좋지 않아 요?” 내 말에 쇼메는 피식 웃었다. 궁금한 것도 많은 녀석, 이라는 표정이다. “이 나라가 정말로 베르스의 우방국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가는거다. 이 제 속 시원해?” “엥? 정말 그것뿐?” “그럼 더 뭘 바래?” 그거야말로 잡일이잖아! 그까짓 일에 쇼메가 직접 간단 말이야? 난 당황 해서는 되물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도 많잖아요. 가령 북부 콘스탄트와의 동맹이라 든가.” 솔직히 니샤는 동맹이라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당초 너무 약 해서 이노타가 쳐들어오면 누구보다 먼저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자물쇠를 걸 어 잠글 그런 새가슴 왕국인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니샤가 아니라 적현무 키르케님이 계시는 북부 콘스탄트다. 원래부터 이오타와는 사이가 나쁜 그 강대구과 군사동맹을 맺는 게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패인 것이다. 그런 내 질문에 쇼메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아, 북부 콘스탄트와의 협상은 이미 결렬되었어.” “네?” 그게 무슨 소리야! 벌써 결렬이라니! “내가 병상에 있을 때, 멍청한 베르스 왕실 관리 놈들이 멋대로 북부 콘 스탄트와 협상을 했거든. 나같이 위험한 녀석에게 그런 중대한 일을 맡길 수 없다나 뭐라나. 물론 진짜 이유는 굴러들어온 내가 협상을 성공시키면 자기들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너네 나라 정치인들을 보고 있으면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맙소사.” “그런데 외교다운 외교 한 번 못해본 베르스 관리 놈들이 그 까다로운 북부 콘스탄트의 무왕 바쉐로늘 구워삶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당연히 보기 좋게 실패했지. 협상의 협자도 못 꺼내보고 문전박대 당했대. 그래놓고는 긴 시간이 걸리는 협상이니까 예산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나 나불거리고 있 다더군. 장담하건데, 우리 나라 같았으면 쏴 죽였을 거야.”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장 중요한 협상이 그토록 허무하게 날아가 버 리다니. 결국 이놈의 왕실은 끝까지 밥그릇 싸움하다가 폐업하겠구나. 그래 놓고 전쟁 나면 짐 싸들고 다른 나라로 피신해서 호의호식하며 강 건너 불 구경 하겠지. 이건 정말이지 싸우기도 전에 자멸하는 꼬락서니였다. ‘이거 도저히 ’하하하. 우리나라 특산품은 관료주의랍니다아‘라고 농 담할 상황이 아니야.’ 문득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우리와 북부 콘스탄트의 군사 동맹이 결렬되었다는 사실을 니샤가 알고 있다면, 그들은 왜 지금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를 만나려는 것일까. 혹시 이오타의 사주를 받고 쇼 메 왕자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닐까? 우리측 호위 병력을 못 들어오게 한 것 부터 수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적진 한복판에 제 발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카론 경을 바라봤다. 사실상 지금 우리의 경호 병력이라고는 카론 경 혼자뿐이지 않은가. 물론 예정 악투르에서 왕자님과 공주님도 구출 한 적이 있는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론 경이 무슨 천하무 적 히어로도 아니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적들을 막아내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새삼 잘 부탁드립니다, 카론 경.” “...?” 내가 고개를 숙이자 카론 경의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하아, 이럴 때 든든한 조력자가 한 명만 더 있다면 얼마나 안심이 될까. 가령 키스 경이라든가 미레일 경... 아? 그러고 보니까 원래 쇼메의 경호 기사는 미레일 경이잖아? “쇼메 왕자님, 미레일 경은 어디 간 거죠?” 내 질문에 쇼메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난 그것이 참 순진한 질 문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침묵 속에서 점점 더 내 심장이 두 근거리기 시작했다. 쇼메를 바라보는 두 눈이 떨려왔다. 아까부터 나를 괴 롭히던 뿌연 불안감이 확실한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설 마 미레일 경이... 나는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자, 장난치이 마세요... 이오타에 남아 있는 거죠? 그렇죠?”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안하던 쇼메는 내가 아닌 카론 경을 바라봤다. 그 리고 말했다. “어이, 카론. 넌 알고 있지? 미레일은 나 때문에 죽었어. 그러니까 날 욕해도 돼.” 정말 미레일 경이 죽었다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홈미했다. “그렇게 참을 거 없다니까? 화 안 나? 친구였잖아?” “그, 그만하세요!” 나는 도리어 조소를 보이며 자극하는 쇼메를 말렸지만, 카론 경은 창밖으 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지독한 임무였다. 4. 비는 곧 폭우가 되었다. 우리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 되어서야 니샤 왕실에 도착했다. 벼락을 등에 업은 왕실은 죽은 자들의 궁전 같았다. 우리 를 성대하게 맞이하는 인파 따위는 없었다.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삼엄한 감시와 함께 곧바로 회담장으로 안내될 뿐이었 다. “아이고, 이거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소이다. 그런데 먼저 식사를 마 쳤으니 이거 미안해서 어쩌오?” 우리 임금님이 만두라면 이쪽은 펭귄이었다. 그것도 자기 머리만한 왕관 을 눌러쓰고 있는 빅 헤드 펭귄. 뒤뚱거리며 나타난 펭귄 국왕은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우리에게 치졸한 견제를 인사말로 던졌다. 아무리 외교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 싸움이 있다고는 해도, 먹는 것 가지고 견제하는 우스꽝스러운 인간은 거의 없다. 펭귄의 도량이 어느 정도인지 한눈에 보였다. 쇼메는 펭귄의 쩨쩨한 공격을 활짝 웃으며 반격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니샤에 변변한 음식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 “이런,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전 배가 고프면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오는 성격이라서요.” “흥. 그것 참 안 좋은 성격이로군.” “우호국이 보낸 특사를 병사 둘이 호위하게 하는 것보단 좋은 성격 같습 니다만.” “쓰, 쓰, 쓸데없는 말 그만두고 본론만 말하시오!” 전초전은 쇼메의 압승이었다. 사람 빈정거리는 걸로 쇼메 왕자 이길 사람 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쉬운 입장인데 이렇게 과격하게 나 가도 괜찮을런가 모르겠네. 상대편 국왕 앞에서 무례하게 다리까지 꼬고 있 는 쇼메는 고개 숙일 생각은 콩알 반쪽만큼도 없어 보였다. 제발 베르스를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던 펭귄 국왕은 쇼메의 시건방진 태도에 적 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쇼메가 멀뚱하게 서 있는 내게 말했다. “야, 천민. 차 가져와.” “제가요? 그건 왕실 측에서 하는건데요?” 그걸 왜 내가 해! 게다가 여기에는 차를 끓일 도고도 없잖아! 회담실 한 가운데서 불을 지피란 말이냐? 하지만 쇼메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이유는 갑 자기 홍차 생각이 간절해서는 아니었다. “그럼 나보고 뭘 넣었는지 모를 위험한 홍차를 마시란 말이야?” 왕실에서 내주는 것은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겠다, 그런 쇼메의 모욕 에 니샤 국왕의 만면이 흙빛으로 변했다. “설마 우리가 독살이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 거요? 귀공은 짐의 왕국을 적대국으로 여기는 것 같소!” “그럼 국왕께서는 베르스를 우호국으로 여기십니까?” 곧바로 쇼메가 치고 들어왔다. 능숙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는 칼이 담겨져 있었다. 우호국이라 고 대답한다면 이오타의 적이 되고,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오랜 우방이었던 베르스에게 등을 돌린 옹졸한 국왕이 된다.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고민하던 국왕은 그 중간을 택했다. “흠, 그건 베르스의 태도에 따라 다르오.” “태도라... 하하, 제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우방으로 인정해주겠다는 의미입니까? 그것 참 국왕의 품격에 어울리는 제안입니다.” 그 때 참다 참다 못한 니샤의 관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말하는 게 무례하기 그지없구나! 감히 어전에서 그 무슨!” “입 닥쳐!” 쇼메의 싸늘한 눈빛을 본 관리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쇼메가 계속해서 악화시킨 분위기는 격노한 국왕이 우리 모드를 참형시키라는 어명 을 내릴 지경까지 갔지만... 훤칠한 금발의 왕자는 깍지를 기고 의사에 깊 숙이 기댄 채 재미있다는 듯 국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국왕의 인내 심이 한계점에 닿는 것을 포착한 쇼메가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가본데, 나는 니샤와 동맹을 맺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 뭐? 그럼 왜 왔어! 쇼메의 말에 국왕과 주변 사람들은 물론 카론 경마저 적잖게 놀란 얼굴로 쇼메를 바라봤다. 쇼메 왕자는 도리어 그 분위기를 즐 기며 말을 이었다. “도리어 당신들이 우리와 동맹을 맺을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왔습니 다.” “뭐라고!” 펭귄 국왕은 체통도 잊고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코가 석자인 쪽은 베르스인데, 베르스가 니샤와 동맹을 맺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대체 쇼메 왕자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나 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쇼메는 곧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국왕 앞에 놓았다. 금테를 두른 것만 봐도 보통 문서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면 저 문서 뒷면에 찍힌 인장은 분명히... “잘 읽어보고 현명하게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이, 이게 뭐요.” 당황하며 서류를 펼친 국왕의 안색이 바꿨다. 그가 비명같이 외쳤다. “말도 안 돼.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직접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판단에 이 왕국의 운명이 결정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베르스가 북부 콘스탄트와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이 종이 한 장만으로 믿을 수가 있단 말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 한 장의 문서를 향했다. 나는 그것에 찍혀 있는 새파란 두 마리의 사자를 보며 온몸이 굳었다. 왜냐하면 저 청사자 인장은 마키시 온 제국의 황금 키마리아, 이오타의 눈 먼 여신, 남부 콘스탄트의 신성 철 십자와 더불어 세계 최강국의 지도자 중 한 명만이 찍을 수 있는 것이기 때 문이었다. 즉, 저 문서는 북부 콘스탄트의 국왕 바쉐론의 친서였으며 그 내 용은 베르스와의 군사동맹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숨이 막힌 이유는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다 른 이유가 더 컸다. ‘위조다!’ 베르스는 이미 북부 콘스탄트와의 협상을 실패하지 않았던가. 아까 마차 에서 쇼메가 자기 입으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저건 분명 위조 문서였다. 물론 니샤를 강하게 밀어붙이기 위해 저것보다 더 좋은 카드는 없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려고 저러는지 내가 다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 었다. 그러나 정작 쇼메의 눈빛은 ‘이제 알았으면 무릎을 꿇어, 천민!’ 이라는 오만방자함 그 자체였다. 저게 가짜라는 게 들통나서 내가 죽으면 죄다 네놈 책임이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분명 그건 바쉐론 국왕의 친필 문서입 니다. 군사동맹을 증명하는 문서 한 장이 1개 군단과 같은 힘을 갖는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소. 이게 진자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 시오.” 니샤 왕국에 북부 콘스탄트 국왕의 진짜 필체와 인장을 알아볼 수 있는 위서 전분가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국왕의 요청에 쇼메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회답했다. “그럼 당신 확인시키기 위해 바쉐론 국왕을 여기로 불러야 합니까?” “누, 누가 그러라고 했소!” “뛰어난 사람과 우둔한 사람을 구분하는 기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 로 판단력입니다. 언제나 확실한 것만 선택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세상은 그걸 허락할 만큼 녹록하지 않습니다. 때 로는 자신의 판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대도 있는 겁니다. 바로 지금처럼 말입니다.” 쇼메는 식은땀을 흘리는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저 악마 적인 기백에는 나도 질릴 정도였다. 아이히만 대공의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국왕은 짜내듯이 말했다. “어떻게 베르스 같은 소국이 북부 콘스탄트와 군사동맹을 맺을수가...” “참고로 북부 콘스탄트는 빠른 시일 내에 적현무 키르케가 지휘하는 ‘ 임모탈’ 제 7무장전투여단과 사단급 병력을 베르스로 급파할 것입니다. 당 신에게만 호의로 알려주는 기밀 정보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쇼메의 입 꼬리가 위협적으로 올라갔다. 아신 중 한 명인 키르케님 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국왕의 안색이 크게 바꿨다.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 러낸 쇼메 왕자는 갑작스런 혼란에 안절부절못하는 국왕을 마구 할퀴고 있 었다. “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베르스의 동맹국이 되겠습니까?” “다, 당장은 결정할 수가 없소. 짐에게 시간을 주기 바라오.” 그 말에 쇼메의 눈썹이 미묘하게 꺾였다. 그것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어 린애를 바라보는 짜증 섞인 표정이었다. “시간? 한 일 년쯤 드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이오타와 싸워야 할지 도 모르는 우리보고 당신의 잘난 생각이나 마냥 기다리고 있으라고? 주제를 모르기는!” 쇼메는 테이블을 쾅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말 했다. “야! 천민! 마차 준비해. 당장 이 어리석은 왕궁을 떠나지 않으면 나한 테까지 멍청함이 전염될 것 같으니까! 동맹은 결렬이다. 그리고 니샤 국왕 은 베르스를 적국으로 돌리겠다고 말했다.” 국왕이 깜짝 놀라 같이 일어섰다. “내가 언제 베르스를 적국이라고 말했소! 단지 결정할 시간을 달라는... ” “전쟁 중에는 아군 아니면 적이야. 너처럼 잔머리 굴리는 얄팍한 동맹은 우리 쪽에서 사양이다!” 국왕은 왕관이 떨어질 정도로 온몸을 떨었다. 그의 고함소리가 회견장을 갈랐다. “더 이상의 모욕은 참을 수 없다! 저 시건방진 놈들을 지금 당장 하옥시 켜라!” 아니 왜 나까지! 으아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런말을 지껄여 놓고도 이곳을 몸 성히 떠날 줄 알았느냐!” 분노 펭귄으로 변신한 국왕의 노성과 함께 회담장 문이 거칠게 열리며 근 위병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카론 경의 손이 검을 잡았지만 아직 뽑지는 않 았다. “하하, 우릴 죽이시겠다?” 쇼메 왕자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커다랗게 웃는 것이었다. “그게 당신의 결정이라면 존중하지. 죽여라. 하지만 당신과 당신의 왕국 도 그리 오래 이 땅에 남아있지는 못할 거라는 걸 알아두도록.” “...!”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과연 베르스는 자신들이 보낸 특사를 죽인 왕국을 그냥 내버려둘까? 북부 콘스탄트로부터 도착한 대군이 가장 먼저 진 군할 목표는 바로 여기다. 당신은 자기 병력의 열배가 넘는 대군과 절망적 인 전쟁을 벌여야 할 테지. 이 시시한 왕국은 거인에게 짓밟힌 개미 새끼처 럼 순식간에 무너져 갈 거야. 모든 도시가 불길에 잠기고 사람들은 당신을 원망하며 죽어갈 거다. 다급해진 당신은 이오타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할 게 분명해. 그런데 그 냉정한 이자벨이 이 별 볼일 없는 약소국 하나 구하려고 군대를 움직여 줄까? 축하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은 왕으로 역사 에 기록되게 될 테니까.” “감히 그런 협박을...” “내 목과 이 왕궁의 멸망을 맞바꿀 생각이라면 날 죽여도 좋다. 그리 손 해 보는 장시는 아닌 것 같군.” 쇼메의 위협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나라면 수백 번 넘게 연습을 했어도 저토록 잔인하게는 못했을 것이다. 국왕의 침 넘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가 곧 자리에 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짐의 무례를 용서하게. 도, 동맹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겠 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그 넓디넓은 전하의 도량에 탄복했사옵니다.” 쇼메는 곧바로 사근사근하게 표정을 바꾸며 국왕 앞에 앉았다. 저 악마.. . “하지만 짐에게 내일 아침까지 말미를 주게나. 왕실의 중신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대를 품고 기다리겠습니다.” 쩔쩔매며 말하는 국왕 앞에서 쇼메는 무서울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 다. 아이히만 대공은 자신의 제자 쇼메 블룸버그를 평할 때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의 자신감이 그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주저 앉힐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예언’이 잘못된 것이길 바라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죽어 도 주저앉는 시간이 지금은 아니길 기도했다. 5. “어이, 쇼메 왕자님아.” 배정받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목소리를 깔았다. 기분 아주 저기압이 다. 그러나 그런 내 기분을 깡그리 무시한 쇼메는 으리으리한 객실에 들어 오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투덜거렸다. “으이구. 이 나라나 저 나라나 순 바보들밖에 없어서 짜증나네.”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주시죠?” “제길. 배고파. 야, 천민. 주방에 가서 햄이라도 훔쳐와. 야채는 싫어. ” “어째서 외교 특사가 햄을 훔쳐야 하는데!” 숨 쉬듯 자유자재로 사람 성질 긁는다는 점에서 키스와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결국 나는 계속 딴청을 피우는 쇼메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지만 쇼메는 그야말로 뻔뻔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대 답하는 것이었다. “그야 그게 바로 네 일이니까. 잡일.” “아니, 그 전에 할 얘기가 있는데 말입니다...” 아까 전에 어떤 사기꾼이 우리 임금님이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 초대형 사기를 치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주방에 숨어 들어가 햄을 훔칠 의욕이 전 혀 생기지 않아! “어째서 스런 감당 못할 거짓말을 한 겁니까!” 카론 경도 침묵으로 내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표정은 ‘보호해야 할 골칫덩이가 둘씩이나...’ 였지만 말이 다.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져. 참견쟁이 따위 필요 없어.” 누가 참견쟁이야! 다만 당신 목이 날아가면 내 목도 도매금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이러는거야! 라는 말은 겨우 겨우 되삼켜야 했다. 쇼메는 몸을 일 으키며 말했다. “그보다, 모두 잠깐 나가줘.” 혼자 있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하겠지만, 일단 대답부터 해달라고! “안 나가?” 쇼메가 묻자 카론 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안됩니다.” 그는 경호기사로서 단 한순간도 쇼메를 자기 시야밖에 둘 생각이 없었다 . 물론 그토록 철저하게 밀착 경호를 하는 이상적인 기사는 거의 없지만, 세상에 딱 한 명 있다면 그건 카론 경이었다. “하아, 책임감 넘치시는군. 맘대로 해. 남자 옷 벗는 거 보는 게 취미라 면 어쩔 수 없지.” 한숨과 함께 쇼메는 검은 정장을 벗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하얀 실크 셔츠가 새빨간 피에 염색되어 있었다. 셔츠가 미처 흡수하지 못한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질 정도였으니 그 출혈은 말 다한 것이다. 쇼메는 몸에 달라붙 어 벗기 힘든 셔츠를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단추들이 바닥에 투둑 떨어졌 다. 그는 아무리 빨아도 절대 핏자국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해진 옷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 그의 몸을 감고 있는 붕대는 이미 제 기능을 잃 은 지 오래였다. “아아, 미치겠다. 상처 다 터졌네.” 쇼메는 아무렇지도 않게 투덜거렸다. 그것은 이오타를 탈출하면서 얻은 검상이었다. 미처 아물기도 전에 무리하게 움직이니까 다시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겉으로는 너스레를 떨고 있었지만 통증을 참는 그의 안색이 급격 히 창백하게 변해가는 것은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은 병상에서 일어나서도 안 될 몸이었던 것이다. “야. 햄 훔쳐오는 김에 붕대도 같이 훔쳐 와. 되도록 많이.” “그러지 말고 여기 의료원에 가서 치료 받는 편이...” 내 안타까운 목소리에 쇼메는 곧바로 쏘아붙였다. “너 바보야? 아니 바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엄청난 바보였어? ” “네?” “내가 어째서 장례식장에나 어울리는 이 두껍고 멋대가리 없는 정장을 선택했을 것 같아? 이 상처를 숨겨야 하니까. 내가 어째서 최대한 빨리 회 담을 끝내고 객실로 왔을 것 같아? 이 상처를 숨겨야 하니까! 그런데 제 발 로 의사한테 가서, 이런 꼴인데도 어쩔 수 없이 니샤에 올 수 밖에 없는 절 박한 상황이랍니다, 라고 광고하라고? 너 대체 어느 나라 편이냐?” 너, 너무해!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나는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 봤다. 쇼메는 집어치우자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너하고 말싸움 한다고 뭐가 달라져. 가서 붕대나 구해와. 가능하 면 진통제도.” 그 때 카론 경이 자신의 여행 가방을 열었다. “여기 있습니다.” 카론 경의 가방 속을 빤히 들여다 본 쇼메가 기가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 렸다. “... 혹시 부업으로 의원하고 계십니까?” 클래식한 여행 가방 안은 각종 붕대나 치료제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 외에는 필기구와 세면도구, 안경, 셔츠 두 벌, 속옷 정도가 전부. 향 수 따위는 일절 없다. 의무병도 울고 갈 본격적인 치료도구만으로 가득한 이 삭막한 여행 가방에 그나마 이멜렌님이 손수 만든 아기천사 장식 안경집 에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겠지만 애처가’ 라는 사실을 조그맣게 증명하 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당신과 있으면 다칠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서.” 뼈가 있는 카론 경의 말을 코웃음으로 받아친 쇼메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 “이제부터 바지 벗을 건데 계속 구경하실 분?” 결국 나와 카론 경은 방을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 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정말 쇼메 왕자, 어쩌자고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알 수 없지. 하지만 회담은 쇼메 왕자의 몫이다. 베르스에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겠지. 어쨌든 저 사람도 우리와 같은 배에 타고 있으니까.” 역시 카론 경답게 짧고 명료한 논리였지만, 쇼메를 대하는 거리감만큼은 확실히 느껴졌다. 쇼메는 일만 저질러 놓고 나 몰라라 하는 사고뭉치가 아 니다. 아니, 오히려 빈틈없고 치밀한 쪼이다. 그러니까... 이자벨 님도 인 정했을 정도로 말이다. “니샤가 딴 생각 품고 있는 건 아니겠죠? 가령 우리를 해치려고 하거나. ” “국왕의 태도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방심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야.” 펭귄 국왕이 그릇이 큰 군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뒤에서 음모를 꾸밀 야심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유형이든 내일 2차 회담 전에 동맹 서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챈다면, 적어도 우리가 산 채로 베르스 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카론 경은 계속 여기 있으실 거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니샤 왕실은 나와 카론 경에게도 따 로 객실을 배정해 주었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이 방문 앞을 떠나지 않을 것 이 분명했다. 무례만 아니라면 쇼메의 침대 옆에서 서서 경호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니까. “아, 저 그리고...” 나는 미레일 경에 대해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카론 경의 시선이 막고 있었다. 아무 말도 꺼내지 말아달라고.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에게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슬쩍 쇼메의 방문을 열고 훔쳐봤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저런 몸으로 어떻게 혼자 치료를 해? 쇼메는 붕 대를 감는 둥 마는 둥 대충 칭칭 감은 몸으로 잠드어 있었다. 침대 주변에 는 카론 경이 준 진통제가 흩어져 있었다. 쇼메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옥으로 떨어트린 사람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트린 이자벨을 원 망하지도 않는다. 남의 괴로움을 동정하지 않고 자기 괴로움을 하소연하지 도 않는다. 원래 그런 별 아래에서 태어나서 그런 것인지, 강대국의 왕자이 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키시온의 볼모로 소년기를 보냈던 상처가 그를 그렇 게 만든 것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어쨌든 얄밉지만 안타까운 그 런 존재였다. 나는 관두라는 카론 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완전 히 탈진한 쇼메는 내 인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꽉 감은 그 의 얼굴을 바라봤다. 식은땀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결혼이라 해라, 멍청이.’ 고맙다는 말도 못들을 호의를 베푸는 일은 누구라도 하기 싫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투덜 거리면서도 붕대를 들었다. 이래봬도 붕대질만큼은 키스의 수제자라 자부하 면서. 6. 2차 회담은 예정대로 아침에 열렸다. 카론 경은 미리 마차를 준비해 놓았 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도주로는 항상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 부상당했냐는 듯이 활기찬 쇼메와 함께 당당히 회담장에 들어섰다, 는 거 짓말이다. 나는 응접실로 쫓겨났다. 어젯밤 나의 극진한 간호를 눈곱만큼도 고마워 하지 않는 쇼메에게 ‘주방에 가서 차나 만들어, 천민’이라는 짜증만점의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역시 도와주는 보람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할 녀석이었다. ‘에이이이! 재수 없는, 재수 없는, 재수 없는, 재수 없는 녀석 같으니라 고!’ 나는 입술을 길게 내민 채 응접실 주방을 찾았다. 마대자루로 열심히 바 닥을 닦던 어린 시녀는 내 긴 금발과 멋진 제복을 보자 ‘상당히 고귀한 분 ’으로 착각했는지 곧바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실 은 똑같이 혹사당하는 입장인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어, 차를 끓여야 하는데 도구 좀 빌려주세요.” “네?” “회담장에 차를 가져가야 해서요.” “그런 일은 저희에게 시키시면...” “아니, 어떤 편식이 심한 양반이 제가 만든 차만 먹겠다고 고집을 피워 서 말입니다. 아, 그리고 소금도 빌려주세요.” 그녀는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하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쇼메, 굳이 소금맛 미네랄 홍차를 마시는 게 그토록 소원이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지. 나는 치졸의 여신에게 지배당한 채 이글거리는 화로의 불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분명 시가지만 검술보다 다른 쪽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가 없다. 그러니까 배우는 데 상당히 힘이 들지만 별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그런 스킬들 말이다. 가령 완벽한 술 따르기라든가, 바느질, 화장,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백가 지 방법 외에도 이오타 산로제 화인의 최적정 온도가 9도이고 그것의 그파 클링은 7도, 강렬한 마키시온 산 레드는 16에서 17도, 그것을 증류한 브랜 디는 취향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실내 온도에 근접한 23도, 녹차는 그 종류와 분쇄정도에 따라 따르지만 보통 60에서 80도 사이의 신선한 물을 쓰고 발효의 진행에 따라서 온도도 높아진다. 나는 그 온도를 살짝 손가락을 대보거나 눈짐작만으로 1도의 오차 없이 맞출 수 있다. 기사만 아니었으면 명인소리 들으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펄펄 끓는 물이 필요한 홍차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100도에서 온 도가 최대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정확한 분량을 정확한 시간에 우려 내는 것이 포인트다(물론 그 피날레로 소금을 한 큰술 넣어 줄 것이다). ‘그런데 찻잎은 어디 있는 거야?’ 나는 정작 홍차 잎이 없는 것을 알고는 이리저리 선반을 뒤졌다. 하지만 찻잎은(소금도) 어디에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예의 그 시녀에게 다시 물 어보려고 주방을 나왔다. 그리고 시체를 보았다. “...!” 이상하리만큼 적막한 응접실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시체는 아까 그 소녀 였다. 날카로운 흉기에 목을 베인 그녀의 시체는 눈을 뜨고 있었다. 결국 피하고 싶었던 사태는 벌어지고 말았다. “그 여자, 너 때문에 죽은 거야. 그리고 너도 곧 쇼메 왕자 때문에 죽을 것이고.” 건조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시종의 유니폼을 차려입고 있었지만 그 옷에는 핏방울이 묻어 있었고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 가 들려 이었다. 농담이라도 진짜 시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조 금씩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 니샤 국왕이 보낸 암살자냐.”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려.” 적어도 암살자라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럼 니샤가 아니란 말인가! “천국에 가서 잘 생각해 봐.” 그와 함께 그의 손이 움직였다. 카론 경에게 들은 말이 있다. 암살자의 비수는 총알보다 빠르다. 그리고 대부분 심장이 아닌 목을 노린다. 왜냐하 면 심장은 늑골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큭!” 나는 몸을 틀며 왼팔로 목을 가렸다. 칼은 예쌍대로 목을 향해 날아들었 다. 팔목에 암기가 깊게 박히자 통증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가 또 다른비수를 꺼내는 순간 나는 주방으로 다시 뛰어갔다. 기억하기는 싫지만 , 카론 경의 다음 말도 떠올랐다. ‘그런데 그 비수에 독이 묻어 있으면 어쩌죠?’ ‘해독제도 함께 있길 빌어야겠지.’ 주방에 들어간 나는 팔에 박혀 있는 비수를 뽑았다. 설마 독은 없겠지. 분명히 오늘은 깜빡하고 독 바르는 걸 잊었을 거야. 내가 미덥잖은 기대를 늘어놓으며 배수진을 칠 때 주방 문 밖에서 암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큭큭. 마침 독이 다 떨어졌을 때 찔리다니 운이 좋은 놈이야.” 제법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암살자였다. “하지만 도망칠 곳도 없는 주방에 숨은 것은 실수야. 네놈이 던지는 어 설픈 비수는 눈 감고도 잡을 수 있으니까.” 나는 뚱한 눈으로 들고 있는 비수를 바라봤다. 호스트 양성 과정 중에 ‘ 단도 던지기’는 없으니까 당연히 던저본 적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트 나 연습해 둘걸. 내 비수 따위는 아무런 위협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암살자는 주저 없이 문을 걷어차며 뛰어들었다. 물론 그와 함께 내가 던진 비수는 암살자 는커녕 엉뚱하게도 벽을 맞고 튕겨나갔다. 다만 내가 문 위에 살짝 올려놓 은 펄펄 끊는 차 주전자가 암살자를 덮쳤을 뿐이다. “우앗! 뜨거!” 그가 얼굴을 쥐는 순간 뛰어든 나는 그의 안면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외 마디 비명과 함께 나자빠진 암살자를 뒤로 하고 나는 밖을 향해 뛰었다. 문 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소녀의 주검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눈을 감겨주는 것 외에 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테이블보를 찢어 피 흘리는 팔을 동여 매며 밖으로 나왔다. 7. ‘나한테 암살자가 왔다는 것은 지금쯤 쇼메 왕자와 카론 경에게도...’ 니샤가 아니라면 이오타가 보냈단 말인가? 어쨌든 암살자가 덮치기 전에 회담장으로 가야 했다. 나는 일단 복도를 걷던 근위병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 팔을 보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맙소사! 이 상처는 뭡니까!” “미안해요.” “네?” 내 기습 펀치에 턱응ㄹ 맞은 병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의 칼을 뽑 은 뒤 회담장으로 뛰었다. “쇼메 왕자! 지금 암살자가 있습니다! 어서 피신을!” 나는 회담장 문을 박차며 뛰어들었다. 그와 함께 널부러져 있는 네 구의 시체들과 검을 뽑은 카론 경, 그리고 총을 들고 있는 쇼메 왕자가 눈에 들 어왔다. 쇼메는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야, 그 얼굴은. 내가 살아 있어서 실망이라는 표정이네?” “아아, 그렇고말고요!” 살해당하기 일보직전이길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죽을 각오로 뛰어왔는데 이렇게 손쉽게 제압한 것을 보니까 맥이 다 빠지는군. 하긴 나는 몰라도 저 두 명은 그리 손쉬운 먹잇감이 아니니깐. 쇼메는 하얗게 질린 펭귄 국왕의 이마에 총을 들이대며 비아냥거렸다. “기왕 암살할 거면 돈 좀 더 써서 괜찮은 놈들을 고용하지 그랬어." "자,잠깐! 쇼메 왕자! 진정하시오! 이건 나도 모르는 일이오!” “내가 알 게 뭐야. 집에서 생긴 문제는 집주인이 책임지는 법이잖아?” 쇼메 왕자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총구를 거뒀다. 그 역시 이게 니샤 국 왕이 계획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국왕이 암살을 계획했 다면 굳이 서로 대면하는 회담장을 그 무대로 선택하지는 않았으리라. 카론 경은 수사관답게 암살자의 시체를 조사하더니 곧 그의 목 뒤에 새겨져 있 는 작은 문신을 발견했다. “철십자 표식입니다. 남부 콘스탄트에서 보낸 것 같군요.” “오, 교황청이? 황송해라. 나도 꽤 거물인가 봐?” 나는 교황청이 쇼메를 노린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지만 쇼메는 ‘나는 적 이 많아 참 행복해요’라고 비웃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덜덜 떨고 있는 국 왕을 향해 방긋 웃었다. “외람되오나, 지금 굉장한 분들이 제 목을 노리고 있어서 이만 도망쳐야 겠사옵니다. 동맹 건은 조만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완전히 얼어버린 국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8. 확실히 니샤 왕국은 암살에 관여하지 않았다. 제발 빨리 떠나달라는 식으 로 당장 왕궁 문을 열어줬으니까. 결국 교황청이 쇼메 왕자를 노리고 니샤 왕실에 숨어든 것이다. 베르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쇼메 는 뭐가 즐거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으로 확시히 교황청은 내 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군. 뭐 교황은 날 잡아 이오타의 혈통을 빼앗고 싶을 테니까. 하하, 덕분에 니샤와의 동맹도 보류되고 여기 온 소득이 하도 없구만.” 소득이 없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표정이 밝았다. 카론 경은 침묵하고 있었다. 긴장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마음 깊숙이 참고 있는 것 같았 다. “어이, 카론. 수고했어. 하늘에서 미레일이 보고 기뻐할 거야.” 미레일의 이름이 거론되자 카론 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쇼메를 바라 보는 그의 눈빛은 싸늘했고 또 격렬했다. “쇼메 왕자.” “응?”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겁니까.”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는데?” 나도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그러나 카론 경은 확신에 찬 어조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못 알아들으시겠다면 좀더 자세하게 말해 볼까요? 당신은 처음부터 암 살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을 남부 콘스탄트에서 보냈 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도리어 일부러 자신을 암살토록 유도했습니다. 틀렸습니까?” “헤에, 수사관이 증거도 없이 그렇게 몰아붙여도 되는 거야?” 카, 카론 경. 쇼메 왕자가 일부러 자신을 죽이라고 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카론 경은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공문서를 읽는 것처럼 차갑게, 하지만 확고한 어투로 추리했다. “니샤 왕실을 나오면서 제가 처리한 암살자들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오 일 전 왕실 청소부로 위장 취업했더군요. 암살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니 샤 왕실에 잠입할 리는 없습니다. 그너니까 오 일 전부터 장신이 오기를 기 다린 것이 분명하지요.” “호오, 그래서?” “당신은 이틀 전 즉흥적으로 니샤에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요. 즉, 그 전까지는 누구도 당신이 니샤를 방문하리라는 것을 아 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청은 어떻게 당신이 니샤에 오리라는 사실을 오 일 전에 알고 암살자를 보냈을까요.” “...” “그건 바로 그 정보를 교황청에 알려준 사람이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론 경의 추리는 틀림이 없었 다. 나는 황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카론과 쇼메를 번갈아가며 쳐다봤 다. 곧 쇼메가 커다랗게 웃어젖히며 박수를 쳤다. “와아, 대단해. 멋져. 감탄했어. 괜히 은의 기사가 아니네? 솔직히 미레 일이라면 눈치 못 챘을 거야.” 하지만 카론 경은 결코 웃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 이유에 대해 숨김없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 의 행동이 베르스의 국익과 어긋난다면, 절대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쇼메는 ‘그거 충성스러운데?’라는 비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일주일 전 교황 레오 3세에게 익명의 투서가 도착했지. 교황이야말로 이 세계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응원하는 베르스 왕실의 어떤 광 신도로부터 말이야. 그 투서의 내용은 쇼메 왕자가 외교 특사로 니샤를 방 문할 것이라는 정보였어. 교활한 교황은 그 사실을 백퍼센트 믿지는 않았지 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니샤 왕실에 부하들을 심어두었지.” “왜 몰래 그런 투서를 보낸겁니까.” “이유는 아까 내가 말했잖아?” “...?” “정치에는 의외로 둔하군. 한 가지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교황은 날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납치하려고 했다는 것이야. 이오타의 순혈 왕자 인 나를 잡으면 이오타의 왕권을 차지할 명분이 생기니까. 나는 교황이 그 런 짓을 하고도 남을 탐욕스런 자라는 것을 알고 날 미끼로 던진 것이고 예 상대로 교황은 나를 물었어. 그 사실을 증언해 줄 증인이 바로 니샤 국왕이 지.” 카론 경은 쇼메의 수를 읽은 듯 움찔했지만 나는 아직도 뭐가 뭔지 파악 할 수 없었다. 쇼메는 말을 이었다. “반면 이자벨은 내가 죽어주기를 바라지.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내가 살 아서 다른 권력자가 날 소유한다면 자기 계획대로 이오타의 왕권을 장악할 수가 없으니까. 교황과 이자벨이 뒤에서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대충 예상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잡고 있을 뿐 서로 신용하는 사이는 아니지. 무 엇보다 교황이라는 작자는 탐욕덩어리야. 기회만 온다면 언제라도 이자벨을 밟고 이오타를 집어 삼킬 놈이지. 그런 교황이 몰래 날 납치하려고 한 걸 이자벨 섭정이 알게 되면 어떻겠어? 여왕님 심기가 무척 불편해질 테지. 이 번 일로 교황과 이자벨의 밀월 관계에도 금이 가게 될 거야. 우리는 그만큼 시간을 버는 거고. 어때? 베르스의 국익과도 별로 어긋나지 않지?” 쇼메의 속마음을 알게 된 나는 감탄스럽기보다는 소름이 끼쳤다. 처음부 터 니샤 같은 약소국에 굳이 직접 가서 동맹을 맺겠다고 고집피운 것 자체 가 연극이었다. 정말 미친 것이 아닐까. 물론 전략적으로 이오타와 교황청 을 분열시키는 책략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목숨을 미끼로 던진단말 이야? 교황청의 암살자들은 결코 허술한 자들이 아니다. 만약 카론 경이 쇼메를 지키지 못했다면 쇼메와 우리 모두 죽거나 납치되고 베르스는 멸망했을 것 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암살자가 나를 죽이려고 했고 나 때문에 아무 런 죄 없는 여자까지 죽지 않았던가! 이건 계략이라기보다는 도박이었다. 그것도 몹시도 위험천만한. 이런 일에 이유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나와 카론 경을 동참시켰다는 것 을 알게 되자 쇼메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멋대로 북부 콘스탄트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는 사기를 치질 않나! 주변 모든 사람들이 자기 계략의 도구 정도로만 보인단 말이냐! 정말이지 한 대 갈겨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카론 경은 말없이 쇼메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말에는 서리 가 내려 있었다. “미레일도 이런 위험한 당신을 지켜주다가 죽은 겁니까?” “와아, 사나워라. 엄청 무서운 눈빛이네? 뭐 그렇게 말 안 해도 처음부 터 날 원망하는 줄 알고 있었어.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아니었다면 미레일 은 죽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날 미워해도 좋다고 말 했잖아?” 도리어 뻔뻔하게 대꾸하는 쇼메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자길 위해 죽은 사람 이름 따위 일 분이면 잊어버리는 냉혈한은 아니다. ‘흥, 주군을 위해 죽는 게 기사의 당연한 의무지’ 라고 일부러 커다랗 게 떠들면서도 실은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가 이토록 무리하 는 이유도 어쩌면 죽은 미레일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쇼메 왕자는 카론 경을 향해 말했다. “너는 검에 능한 자는 검으로 상대하고 머리에 능한 자는 머리로 상대하 지. 비겁함을 모르는 고결한 긍지. 그래, 그게 네가 사는 방식이지. 하지만 나는 검에 능한 자는 머리로 상대하고 머리에 능한 자는 검으로 상대해.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야. 결국 그렇게 살다가 미레일을 잃은 나를 너는 결 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네가 너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듯이 나도 나처럼 살 아갈 수밖에 없는 거다.” 긴 흑발의 기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회답했다. “당신은 꽤 영악하게 살아가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나만큼 이나 요령 없는 사람 같군요.” “신기하네. 미레일도 똑같은 말을 하던데.”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혹자는 그것을 ‘신념’이라고도 부른다.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사는 그것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이해해 주길 기대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사는 사람을 요령 없다 말하고 필요에 따라 손쉽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을 영 악하다 말할 뿐이다. 그 중 누가 올바른지는 아무도 모른다. 9. 마차가 멈춘 것은 도시 한복판을 통과할 때였다. 우리는 습격을 예방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의 눈이 많은 시가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교황청의 집요함을 당해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부가 떨리는 목 소리로 말했다. “경, 아무래도 계속 가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마차 밖을 보았다. 석궁과 라이플, 철퇴 같은 살벌한 무기들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또한 어느 틈인가 퇴로도 차단되어 있었다. 족히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군대가 앞뒤를 가로막았다. 곧 묵직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쇼메 왕자! 벌집에 되고 싶지 않다면 당장 마차에서 나오시오!” 설마 저들이 통행세를 안낸 것에 화가 난 이 나라 불량배일 리는 없고, 보나마나 교황청의 병사들이다. 설마 도시 한복판에서 이럴줄이야. 골치가 아파온다. 카론 경이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내려야겠습니다.” 역시 쉬운 일이란 없는 법이다. 목적을 달성하고 우아하게 니샤를 빠져나 가고 싶은 욕망을 접은 우리들은 순순히 마차에서 내렸다. 전속력으로 마차 를 몰아 저들을 뚫고 나가고 싶어도 마부부터 도망쳐 버렸으니까 달리 방도 가 없었다. 쇼메는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수의 병사들을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아니 이거 암살자가 아니라 군대를 보냈네?” 그래. 교황 성하가 스케일이 좀 크지. 그들은 최후통첩 같은 말을 던졌다 . “쇼메 왕자. 우리는 당신을 교황청으로 모셔가기 위해 온 병사들이오! 얌전히 따라준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소.” “... 이젠 신분을 숨기지도 않는구먼.” 쇼메 왕자가 투덜거리자 나 역시 짜증이 치솟았다. “어차피 납치 음모를 들킨 마당에, 교황청이 눈치 볼 것 없이 달려들 거 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슈?”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지금 그러고 있잖아! 현재진행형으로! 쇼메는 교황청 병사들에게 잡상인 내쫓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 바쁘니까 포교 활동은 다른 데 가서 해 주겠어? 이제부터 교 회 꼬박꼬박 나갈 테니까.” 응답은 총성이었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우리 발밑에서 불꽃이 튀었다 . 쇼메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 농담을 모르는 녀석들일세.” 일부러 자극하지 마! 이 와중에 개그가 나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태세의 카론 경은 뭐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고 있 었다. 어쩌면 ‘미레일, 이런 주군 모시느라 정말 짜증났겠구나’ 였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쇼메가 납치되어 버리면 계획이고 자시고 다 끝장이다. 여 기서 살아 돌아가 봐야 아이히만 대공이 내 이마에 손수 총알을 심어 줄 것 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포위망을 어떻게 뚫고 도망친단 말인가. 나는 고립무원의 사 방을 둘러보며 빈정거렸다. “위대하신 쇼메 나리. 이제 왕자님의 뜻대로 교황청의 꼭지가 돌아버리 셨으니 아주 흡족하시겠습니다?” “음, 교황청이 예상보다 터프한데? 다음부터는 주의해야겠어.” 과연 그 ‘다음’이 오기나 할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만. “도망칠 길도 없는데, 이제부터 어쩔깝쇼? 네? 어쩔 거냐고! 이 푼수 왕 자야!” 버럭 짜증을 낸 내 머리를 툭 때린 쇼메가 말했다. “어쭈. 천민 주제 말투 한 번 아름답네. 왕실 가서 보자.” “왕실에 못 간다는 쪽에 전 재산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분위기입니다만! ” “사내자식이 쫄기는. 일단 둘 다 내 옆에 붙어. 저놈들은 나한테 총 못 쏴.” 쇼메의 말대로 나와 카론 경은 쇼메 곁에 바짝 붙었다. 저들이 쇼메 왕자 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저녁에 죽였다. 하지만 목적은 납치니까. 쇼메를 방패로 쓰는 기묘한 전술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이 다음엔?” 그러자 쇼메가 곧바로 품속에서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역시 쇼메는 명사수였다. 총에 맞은 병사 하나가 허수아비처럼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꽤 먼 거리의 목표를 단 한 발로 명중시키다니 정말 대단...한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붜하는 짓이야! “하지만 나는 저놈들을 쏠 수 있지.” 쇼메가 히죽 웃었다. 이제 확실히 알겠어. 어째서 이 사람이 아이히만 대 공의 수제자인지! 격분한 교황청의 병사들이 철퇴와 검을 뽑아들며 우리에게 몰려왔다. 카 론 경은 ‘내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짜증의 18번 을 내뱉으며 그들에게 뛰어 들었다. 쇼메는 내게 총을 건넸다. “야, 천민. 너한테 검은 무리니까 이거 써라. 그리고 항상 내 근처에 있 어. 혼자 떨어져 있으면 죽게 된다.” “아?” 엉겁결에 내가 총을 받자마자 쇼메도 검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이것을 수적으로는 절대 불리한 싸움이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절망적이지 않았다. 쇼메를 산 채로 잡아야 하는 교황청으로서는 총이나 활 같은 치명적인 무기 는 겨눌 수가 없었고 온몸을 동원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쇼메를 제압해야 만 했다. 그러나 쇼메는 분명 검술의 달인, 그리 쉽게 잡힐 위인이 아니다. 게다가 적이 머뭇거릴수록 더욱 더 기가 살아서 사정없이 검을 휘두르는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혜택은 쇼메의 경우고, 나는 얘기가 달랐다. “으아악!” 산지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은 내 목숨을 보존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 어 보였다. 나는 들이닥치는 검이나 철퇴를 가까스로 피하며 도주하고 있었 다. 게다가 자신을 방패로 쓰라고 자상하게 말한 쇼메는 지 혼자 저 멀리 가버려서 눈곱만큼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네놈이 짠 치밀한 계획이 이거였냐! 어디가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거야?” 피눈물을 흘리며 쇼메를 쏘아본 나는 마차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수많은 칼날을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나는 결국 적이 깊숙이 휘두른 검을 피하다가 바 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곧바로 병사 하나가 쓰러진 나를 뀌뚫을 기세로 검 을 높이 들어올렸다. “다, 당한다!” 내가 반사적으로 총을 겨누는 순간 병사가 기겁을 하며 나른 찌르려 들었 다.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찰칵 “엥?” 찰칵 찰칵 “설마...” 나는 황급히 약실을 살펴봤다. 그리고 저 멀리서 날뛰는 쇼메를 향해 애 처롭게 외쳤다. “총알이 없잖아아아아! 이 바보 왕자야!” 그러자 쇼메는 상대의 검과 엉켜 힘겨루기를 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아! 깜빡했다. 이리 와서 가져가!” “...이 자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아아, 쇼메 왕자, 당신이라는 인간은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개같... 이제 됐어. 다 짜증나. 내가 죽으면 유령이 되어서 네놈 모가지를 힘껏 졸라 줄 테야! 나는 들고 있던 총을 상대의 얼굴에 집어던지며 몸을 굴렸다. 그러나 키 스 경에 이어 나의 ‘싫은 자식 리스트’ 베스트에 등극되는 기염을 토한 쇼메 왕자에게 한 대 먹여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지않겠다! 라고 다짐한 지 일 분 만에 나는 다시 걷어차여 바닥을 굴렀다. 어째서 카론 경처럼 싸우지 못하냐고 비난하지 말아 달라. 중무장한 군인 들을 상대로 ‘보통 기사’가 십 분 이상 견딘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우니 까. “이 미꾸라지 같은 새끼가!” 아까 내게 ‘총을 맞은’ 병사는 시퍼렇게 부은 얼굴로 칼을 내리찌르려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멈칫했다. 이제 내게는 총도 없는데 말이다. “뭐, 뭐야 저건.” 이 남자가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이 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엄청난 수의 병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예의 펭귄 국왕이 말을 타고 있었다. 그가 지휘봉을 휘두르며 외쳤다. “동맹국의 외교 특사를 보호하는 것은 짐의 의무다! 돌격!” 아니, 저 사람이 저렇게 의리가 넘쳤던가? 엄청난 함성과 함께 니샤의 군 대가 밀려왔고 상황은 반전되었다. 제 아무리 교황청의 군대가 강병이라고 는 해도 세 배를 넘는 니샤의 군대에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쇼메와 카론 경 역시도 예상 밖이라는 표정으로 가슴을 쫙 편 펭귄 국왕을 바라봤다. 혼 란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와하하! 어떻소! 이제 짐도 베르스의 동맹으로 자격이 생긴거요?” 자랑스럽게 말하는 국왕 앞에서 쇼메는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베르스와 니샤가 영원한 혈맹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사옵니다.” 제 아무리 약소국의 새가슴 국왕이라지만, 분명 왕은 왕이다. 자기 홈그 라운드에서 버젓이 외교특사가 납치되는 것을 참기에는 너무도 분통이 터졌 을 것이다. 물론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국왕은 이게 본론이라는 눈빛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에, 그리고... 북부 콘스탄트의 뱌쉐론 국왕께도 동맹을 위한 짐의 이 아름다운 의협심을 잘 좀 말해 주시길 바라오.” “...” “꼭 말해야 하오!” 하아, 1절만 하지, 하긴, 방금 교황청을 적으로 돌린 이상 북부 콘스탄트 를 꽉 잡지 않으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겠지. 이러다 북부 콘스탄트와의 동 맹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아마 저 불쌍한 국왕은 첨탑 꼭대기에 서 뛰어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에이, 몰라. 다 쇼메가 알아서 하겠지. 천민 은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얼레?” 그 때 병사 한 명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니, 정말 비유나 은유 따위가 아니고 말 그대로 인간 대포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라 3층 건물 옥상 에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병사들도 줄줄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쇼메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미스 터리를 지켜보고는 신음소리를 냈다. “뭐냐 저거. 저놈들 왜 갑자기 중력을 위반해?” “당장 피해야 합니다!” 카론 경이 날카롭게 외치며 쇼메의 팔을 잡았다. 곧 그 ‘현상’의 원인 이 드러났다. 단 한 명이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이곳으로 다가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자의 정체를 보는 순간 나는 졸도할 것 같았다. “이단심문관 루터.” 짧은 머리에 낡은 신부복을 입은 그 거인은 예정 보탕 사건 때문에 신세 진 적이 있었던 교황청 사도좌법원 소속 ‘검은 추기경’ 루터였다. 쇼메를 꼭 납치하고 말겠다는 교황청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저 산더미 같은 양반의 출현만큼 확고한 증명은 없으리라. 대담하기 짝이 없는 쇼메마저도 적잖게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저 덩치로 숨어 있기도 힘들었을 텐데.” 말 그대로 대포알도 튕겨낼 것 같은 거구를 낡고 검은 신부복으로 감싼 루터는 쇼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긴 말 안하겠습니다. 당신을 죽여서라도 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 다.” “자 자식, 되게 무서운데?” 쇼메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딴청을 피우면서도 날카 로운 눈매는 재빠르게 도주로를 찾고 있었다. 쇼메가 아무리 겁이 없다고 해도 루터 같은 괴물과 정면으로 싸울 만큼 철딱서니 없을 리는 없다. 그건 물론 나도 카론 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루터가 누구인지 모르는 펭귄 국 왕은 상대가 ‘고작’ 한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자지러지게 웃는 것이었다 . “하하하! 쇼메 왕자! 뭘 그렇게 걱정하시오. 짐의 군대를 믿으시오!” “저도 믿고 싶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쪽수로 못 이기는 녀석도 존재합.. .” 하지만 말릴 겨를도 없이 국왕이 호기 좋게 공격을 명령했다. 공을 노린 병사가 창을 꼬나들고 루터에게 뛰어든 순간 둔탁한 소리가 터 졌다. “맙소사!” 루터의 커다란 손바닥이 투구를 눌러 쓴 병사의 머리를 내리쳤을 뿐이었 지만, 마치 망치로 못을 박은 듯 병사의 머리가 몸속에 박혀버렸다. 그 ‘ 차력’은 단번에 상대의 사기를 꺾었다. 루터를 포위한 다른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모두 뒤로 물러섰다. 비명이 터지긴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 저 괴물은 대체 뭐요!” 쇼메가 굳은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교황청 넘버 투.” 루터는 별 시답잖은 것들이 다 덤벼든다는 투로 국왕을 향해 말했다. “교황 성하께서 당신에게 무척이나 실망하셨습니다. 곧 처벌이 있을 테 니 각오하시길.” 비로소 루터의 정체를 파악한 국왕은 저승사자라도 본 듯 당장 낙마할 것 처럼 당황하기 시작했다. “쇼, 쇼메 왕자... 확실히 바쉐론 국왕이 우릴 지켜주는 거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 관건은 오 분 후에도 우리가 살아 있을지에 대한 것입니다만.” 그 냉정한 대답에 국왕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왕실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펭귄 국왕이 외쳤다. “조, 조만간 지원군을 끌고 다시 오겠소! 그럼 짐은 이만!” 점이 되어 사라지는 국왕을 바라본 쇼메가 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 한 십 분 동맹했나?” 루터는 예상대로 그리 인내심이 많은 자가 아니었다. “쇼메 왕자, 이자벨에게 잡혀봐야 죽은 목숨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교황 성하의 권유를 거절하면 역시 죽은 목숨이라는 것도 잘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쳇.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루터를 향해 걸어가는 쇼메에게 내가 외쳤다. “어, 어디 가는 겁니까!” 어쩌라고. 저 살육머신과 싸워서 이길 자신 있냐? 없다면 이 방법밖에 없잖아.” 항복하겠다고? 쇼메는 잔뜩 짜증을 내며 루터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리 장전해 둔 총을 꺼냈다. 역시 항복할 양반이 아니지. “싸워 못 이기는 적이라면 줄행랑이 최선이지.” 총성이 울렸지만, 마치 마술쇼처럼 루터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든 총 알을 손으로 막았다. 상식적인 경우였다면 총알은 손바닥을 뚫고 머리에 명 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반중력의 세계로 보내버리는 환상의 인간에 게 상식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쇼메 왕자. 지금 아주 큰 실수를 하셨군요.” 납작해진 총탄을 바닥에 떨어트린 루터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번졌 다. 으르렁거리는 맹수의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만 같다. “젠장. 역시 항복할 걸 그랬나.” 라고 말하면서도 쇼메는 이미 산길로 도주하고 있었다. “뭐해, 천민! 죽고 싶지 않으면 뛰어!” “당신이 말 안해도!” 나와 카론 경도 죽고 싶은 심정으로 그 뒤를 따라야 했다. 나는 도망치면 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두 눈에 핏발이 선 루터가 지축을 울 리며 쫓아오는 모습을 보면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 이었다. 10. 우리는 일반적인 인간은 다닐 리가 없는 첩첩산중에 숨어서야 가슴을 쓸 어내릴 수 있었다. 만약 도망치던 중에 카론 경이 검을 뽑아 거대한 물탱크 를 넘어트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괴물 성직자의 밥’이 되었을 것 이 뻔했다. 루터라는 작자의 몸 구조는 대체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지 곰과 같은 덩치 에 치타 같은 스피드를 뿜어내니까. 그야말로 폭주 기관차였다. “에이. 올해는 날 노리는 괴물들이 뭐 이리 많아. 그래도 이오타에서 만 난 놈보다는 지금 녀석이 조금은 덜 최악인 같아 다행이지만.” 뭐 누구? 쇼메는 다시 찢어진 상처를 꾹 누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카론 경은 예의 암살자에게 당해 피를 흘리는 내 팔을 보고는 근처의 넝쿨을 잘 라 능숙하게 지혈해 주었다. “다행히 동맥이 끊어지진 않았군. 힘껏 누르고 있어라.” 내 팔에 묵묵히 넝쿨을 감아주던 카론 경이 한숨을 내쉬며 사족을 달았다 . “이럴 것 같아서 따라오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했던 거다.” “하하, 후회하고 있습니다.” 으으, 온몸에 안 쑤시는 곳이 없군. 빨리 리더구트에 가서 쉬고 싶... 그 때 땅이 파이며 몸이 떠올랐다. 폭약이 바로 옆에서 폭발한 것만 같은 강렬한 충격이 몸을 덮쳤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른 내가 몸을 일으키 자 어느새 눈앞에는 검을 뽑은 카론 경과 루터가 대치하고 있었다. 쇼메 역 시 허를 찔린 눈빛이었다. 우리들을 어떻게 찾아낸 거일까! 정말 루터에게 는 짐승의 본능이 있는 것 같았다. “카, 카론 경!” 나는 입술과 코에서 피를 흘리기 시작한 카론 경을 바라보며 외쳤다. 한 쪽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루터의 기습에 옆얼구을 세차게 얻어맞은 흔 적이 역력했다. 루터가 피에 젖은 주먹을 풀며 말했다. “뇌에 곧바로 충격이 갔을 거야. 서 있기도 힘들 거다.” “...” 카론 경은 피를 뱉으며 그를 쏘아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루터는 마 치 나약한 미물을 조심스럽게 다루듯 말을 이었다. “내 목적은 쇼메를 데려가는 것이다. 널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 그래서 나름대로 힘을 조절해서 때렸는데... 네게는 조금 과했던 것 같군.” 단 일격에 비틀거리는 카론의 다리를 보며 루터가 말했다. 그것은 죽기 싫으면 물러나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카론 경은 숨을 고르며 회답했다. “전력을 다하지 그랬나.” 그 순간 루터의 허리춤에서 핏덩이가 쏟아졌다. 카론 경도 자신을 노리며 습격한 루터의 일격을 받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의 복부를 베어버릴 것이었 다. 당한 루터마저도 눈치를 못 챈 순간적인 공방. 크게 잘려나간 루터의 옷 밖으로 내장이 흘러나왔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이거 상대를 얕본 대가로는 꽤나 가혹하군.” 루터는 그 말을 유언으로 스르르 땅에 쓰러졌다, 가 되어야 정상인데, 아 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내장을 손으로 밀어 넣으며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 이 아닌가. “자, 그럼 계속 싸울까.” 뭐, 뭐, 뭐 저딴 게 다 있어! 그 때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막지 못한 총알이 루터의 어깨에 박혔다. 물론 쓰러진다거나 아파한다거나 하는 일은 조금도 없이 단지 무서운 눈으 로 쇼메를 바라볼 뿐이었지만 말이다. “뭐 간지럽게 해서 미안한데, 나도 구경만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니라 말 이야. 설마 군대까지 끌고 온 주제에 지금 이걸 비겁하다고 말하진 않겠지 요, 신심 깊은 성직자님?” 총을 바닥에 던진 쇼메가 검을 뽑으며 빈정거렸다. 솔직히 여럿이서 거대 한 공룡을 사냥한다고 비겁하다 말할 사람 없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 루터 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오래 전에 멸종했던 어떤 거대한 육식 동물에 가까웠 다. “그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입매를 비튼 루터와 카론 경의 발이 움직였고 거의 동시에 카론 경이 등 지고 있던 바위가 산산이 부서졌다. 둘의 움직임이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끊이질 않았다. 뒤를 잡은 카론 경의 일격을 루터가 튕겨 냈고 그와 함께 날아든 강렬한 펀치를 카론 경은 허리를 틀어 간발의 차이로 흘려버렸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장면이지만, 카론 경과 쇼메의 검은 번번이 루 터의 팔뚝에 튕겨나가고 그 때마다 칼이 울리는 금속성의 소음이 터졌다. 그런 뒤에는 여지없이 내 머리보다도 커다란 주먹이 운석 같은 속도로 들 이닥친다. 단련된 근육은 강철과 같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 그게 사람에 따라서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았다. “큭. 이런 빌어 처먹을 괴물이!” 찌르는 공격마다 강렬하게 튕겨내 버리는 루터에게 기가 질린 쇼메가 욕 설을 퍼부었다. 어처구니가 없기로는 카론 경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라면 뱃속이 드러날 정도의 중상에 쓰러지거나 하다못해 움직임이라도 둔해져야 하는데, 이쪽 은 어떤가 하면 도리어 더 날뛰고 있지 않은가. 카론 경도 머리를 크게 맞 은 쇼크 상태라서 이대로라면 누가 먼저 쓰러질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루터가 우세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의 변수는 바로 나였 다. ‘나한테는 관심도 없으니까.’ 루터는 내게는 아예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싸움과는 인 연이 없어 보이는 몸집의 비무장 청년이 자신에게 정권 찌르기를 한들 간지 럽기나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래봬도 알테어님에게 강철을 끊는 검술을 전수받은 몸! 나 는 단 일 초라도루터의 움직임을 훼방 놓을 수 있기를 빌며 근처에 있던 목 검 같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실패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루터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나도 루터의 공격 범 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저 주먹에 맞는 순간 내 머리가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인간의 목숨이란 참으로 속된 것이라서 나는 루터의 커다란 등 을 보면서도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룡 씨, 제발 날 무시해줘!’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며 등을 보인 루터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일 생일대의 힘을 모아 그의 어깨를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굵직한 나뭇가지가 쪼개졌고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루터가 나를 노려봤다. 그건 정말 악귀의 눈빛이었다. “... 망했다.” 나를 향해 날아드는 펀치를 보며 나는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바위고 성벽 이고 단숨에 부숴버릴 것 같은 루터의 주먹에 그 풍압만으로 머리칼이 날리 고 몸이 밀려나고 뺨이 찢어졌다.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 내 코앞까지 다가 온 주먹이 멈추자 그의 그림자에 눌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 성가신 놈. 네놈부터 죽이는 건데.” 나를 내려다보는 루터는 목 끝까지 피가 끓어오르는 소리로 그렇게 말했 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몸을 두 자루의 칼날이 꿰뚫고 나와 있었 다. 카론 경이 찌른 칼날은 폐를 관통해 가슴을 찢고 나왔고, 쇼메 왕자의 칼날은 강철 같은 복근을 뚫고 나왔다. 그 두 자루의 칼이 악룡을 사냥한 성검처럼 빛났다. “죽었어?” 쇼메는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멍한 얼굴 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터는 미동도 없었다. 이러고도 죽지 않는다면 온몸 을 네 조각으로 잘라서 세계의 네 귀퉁이에 뿌려놓지 않는 이상 안 죽는 생 물체라 여겨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방정맞은 망상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었다. “세, 세상에!” 움찔거리던 루터의 손가락 끝이 곧 품속에서 어떤 약병을 꺼냈고 그는 그 것을 통째로 입에 넣어 씹었다. 그 거대한 몸에 박힌 칼을 뽑을 겨를도 없 이 루터는 팔을 휘저으며 쇼메 왕자와 카론 경을 후려쳤다. 둘은 검을 놓치 며 튕겨나갔다. 그리고 어떤 야수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끔찍한 포효를 내지르며 카론 경에게 달려들었다. “카론 경! 피해요!” 하지만 몸을 일으킨 카론 경의 얼굴로 루터의 주먹이 날아들었고 카론 경 의 목이 꺾이며 몹시도 불길한 소리가 터졌다. 처참하게 쓰러진 은의 기사 를 잡아 올린 루터의 모습은 유황불로 이뤄진 날개만 있었다면 그 자체로 악마였다. 루터는 반 쯤 실신한 카론 경의 목을 부숴버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그르 렁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피에 절어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인트라무로스 놈들이 재미있는 약을 하나 주더군. 전쟁이 일어나면 병 사들에게 지급할 거라던데... 온 몸이 부서져도 심장이 멈출 때까지 싸우게 만든다더군. 네놈 때문에 이따위 걸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인정함. 싸움은 네가 이겼다. 하지만 목숨은 내가 가져간다.” “그만 둬! 항복하겠다. 날 데려가.” 쇼메가 루터를 노려보며 워쳤다. 그러나 루터는 곧 광기어린 웃음을 내뱉 었다. “이미 늦었어.” “아아, 늦은건 나다.” 불현듯 들려오는 바리톤의 음색에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매력 적이고 중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여성을 나는 딱 한 명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녀의 목소리란 말인가? 곧 루터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가죽 제복을 입은 큰 키의 여자가 솟아올 랐다. 루터는 자신의 온 몸을 넝쿨처럼 옭아매기 시작한 그림자 때문에 카 론 경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약물의 부작용 때문인지 두 눈동자가 새빨갛 게 터진 루터가 거칠게 고함쳤다. “적현무. 키르케 밀러스. 북의 마녀가 여기는 왜!” “네가 여기 온 이유와 정반대의 이류라고 할 수 있지.” 저, 정말로 키르케님? 검은 군모를 눌러쓴 그녀는 새빨간 입술의 끝자락을 미묘하게 틀어올리며 말했다. “이봐, 교황의 사냥개 씨. 이쁜이들 그만 괴롭히고 네 개집으로 꺼지렴. ” 물론 그렇다고 물러날 루터가 아니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할 키르케 님도 아니었다. 그의 대답이 없자 키르케님이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 “이런, 내 말이 잘 안들리는가 보구나.”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림자가 칼날처럼 솟구쳐 오르며 루터의 귀가 바닥 에 떨어졌다. “이제 좀 들리니?” “큭!” “자비를 베풀 때 받아두려무나. 자주 오는 기회 아니니까.” 루터는 당장이라도 키르케님을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을 보였지만 - 거 기까지였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급히 카론 경을 부축 한 쇼메가 성질을 쏟아냈다. “야! 이 여자야! 왜 이제야 온 거야! 조금만 늦었으면 다 죽을 뻔 했잖 아! 나를 경호하는 기사마다 죽게 만드는 저주의 왕자로 만들 셈이냐?” 카랑카랑한 고함소리에 키르케님은 눈썹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사내놈이 칭얼거리기는. 아신이 움직이는 데는 여러 가지 절차가 필요 한 법이야!”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아는 키르케님은 인정이라든가 정의 같은 불확실 한 것에 이끌려 누굴 도와줄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모든 일이 ‘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쇼메 이 인간은 대체 어디까지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냐! 그 때 쇼메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뜬 카론 경이 키르케님을 보고는 복잡 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쇼메 왕자, 북부 콘스탄트와 동맹을 맺은 것이 사실이었습니까.” “아아, 그렇게 됐어. 이 나이 먹고 뒷감당 안 될 사기 칠 리가 없잖아? ”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씀하셨으면!” 카론 경은 드물게 화를 내며 자신을 부축한 쇼메의 팔을 뿌리쳤다. 나도 얄미운 수밖에 없는 것이, 배고파 죽기 직전에 ‘실은 음식이 있었 지롱’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쇼메는 도리어 억 울한 건 자기라는 투로 팔목을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아니, 모두를 구한 내가 왜 멸시를 당해야 해? 미레일이었다면 날 칭송 했을 거야. 존경스런 눈빛으로 우러러봤을 거라고.” 그래, 한탄해라.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후비적거리면서 마음껏 칭얼거려!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밉살스런 왕자라는 사실은 결코 변치 않는답니다. “야! 하등한 천민! 너도 날 찬양해!” “닥쳐. 왕자." 이제 저도 막 나가기로 했습니다. 어쩐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우리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키르케님이 쇼메에게 말했다. ”이오타의 왕자여, 우리는 약속을 지켰다. 나의 주군께서는 열흘내로 나 아신위 적현무와 제7무장전투여단을 베르스로 급파할 것이며 뒤이어 군단 급 병력을 추가로 지원할 것이다. 나는 아직 너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주 군의 명령이 있는 이상 나 키르케가 너와 베르스를 도울 것임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만약 지키지 않는다면... “ ”귀가 잘려나가겠지.“ “과연 귀뿐일까? 아주 중요한 부분을 잘라 주겠어.” “어, 어디?” “궁금하면 약속 어겨봐.” 의미심장한 협박을 쏟아낸 키르케님은 위험한 윙크를 남겼다. 그리고는 쇼메 왕자와 카론 경과 나를 훑어보고는 어쩔 수 없는 녀석들이라며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왕자와 기사도에 몸을 던진 기사와 정의를 믿는 애 송이라... 낭만은 남정네들이 다 차지한 것 같군. 어쩐지 손해 보는 느낌이 네. 후후.” 그리고 군모를 깊게 눌러쓴 그녀는(정말 마녀처럼) 그림자 속으로 사러져 갔다. 쇼메는 그런 키르케님의 모습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여자 말 들었어? 어딜 자르겠다는 건지 끝까지 안 가르쳐 주네.” 안궁금해! “그런데 무슨 약속을 한 겁니까?” 나는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다. 바쉐론 국왕이 소국 베르스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보내겠다는 의미는 드디어 이오타와 교황청을 비롯한 자신의 오랜 원수들과 싸울 칼을 뽑았다는 의미다. 우리 베르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지만 - 대관절 어떤 약속이기에 쇼메가 북부 콘스탄트를 움직일 수 있었단 말인가. ‘천민이 알아 뭐해’ 라면서 무시할 것 같던 쇼메는 이번에는 의외로 순 순히 말해주었다. “첫 번째, 이오타와 교황청의 사이를 갈라 놓는다. 그건 방금 지켰고. 두 번째는... 에, 그러니까 두 번째는...” “두 번째 약속이 뭔데요?” 어째서 말을 못하고 우물거리는 거야? 쇼메가 에라 모르겠다며 커다랗게 외쳤다. “내가 이오타를 되찾으면 바쉐론 국왕의 둘째 딸고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 제기랄!” “와앗!” 나는 물론 카론 경도 깜짝 놀란 얼굴로 쇼메를 바라봤다. 원래 독신주의 자인 쇼메는 정말 먹기 싫은 시금치를 억지로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의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나중에 대충 얼버무리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아까 키르케 분위기 보니 까 그랬다간 내 엄청 소중한 부분 하나가 절단날 것 같고. 아아, 내 인생도 끝장이군.” “결혼이라... 아하하하.” “뭐가 웃겨. 망할 천민아!” 그것은 분명 정략 결혼이다. 이오타를 되찾고 왕위에 오른 쇼메 국왕과 북부 콘스탄트의 공주가 결혼해서 두 왕조의 혈통이 뭉치게 된다면, 마키시 온 제국이 분열된 지금 세계 최강의 혈맹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차가운 계산에 의해 바쉐론 국왕은 자신의 둘째 딸과 결혼할 것을 동맹의 조건으로 깔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평생 이 여자 저 여자 울리고 다닐 것 같던 바람 둥이 쇼메 왕자가 결혼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쩐지 정말 엉뚱한 소리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를 무서운 사실 하나. “아니, 잠깐. 그런데 그 둘째 공주 나이가 분명히...” “아아! 괜찮아! 나 연상 취향이야! 내 수비 범위라고!” 쇼메는 그 말 나올 줄 알았다면서 일부러 커다랗게 말한 뒤에 도망치듯 산을 내려갔다. 이런거 밝히면 정말 미안하지만, 그녀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까지 시집을 못 갔는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아무튼 쇼메는 이 전쟁에서 지든 이기든 앞으로의 인생이 그다지 순탄치 는 않을 것 같다는 서글픈 예감이 든다. 나는 이것 참 대단하다 싶어서 카 론 경에게 물었다. “카론 경이라면 나라 되찾으려고 이모뻘 되는 분과 결혼할 수 있...” “싫어.” 카론 경은 ‘흥, 목에 칼을 들이대봐라’ 라는 단호한 입장을 보이며 산 을 내려갔다. 으음, 은의 기사조차 타협할 수 없는 문제란 말인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쇼메의 처절한 결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11. 몇 가지 첨언하자면 베르스 왕실 역시 쇼메가 뒤에서 북부 콘스탄트와 동 맹을 맺은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쇼메는 일부러 욕심 많은 왕실 관리들이 겉으로 동맹 협상을 망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그래야 이오타를 방심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의미에서는 베르스 관리들도 꽤 쓸모가 있지 않은가 . 그야말로 허허실실이다. 그리고 쇼메는 ‘잡일’이라고 할 수 있는 니샤 외교 특사를 자청해서 일 부러 교황이 자신을 납치하도록 유도한 뒤 이오타와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키르케님이 굳이 루터를 살려 보낸 것도 알타어님을 제외하면 교황청 최강 이라는 ‘검은 추기경’이 납치에 실패하고 ‘은의 기사’라는 별 볼 일 없 는 소국의 기사에게도 패배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한 책략이었다. 교황청의 사기는 떨어지고 이오타와 관계가 흔들린다. 그리고 그 사이, 북부 콘스탄트가 군대를 움직인다. 모두 쇼메의 계략이었다. 정말이지 쇼메 왕자는(41세의 농염한 여성과 결혼을 언약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여러 가 지 의미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대단한 인간이다. 베르스에 도착하자 마자 카론 경은 병원으로 향했다. 루터의 주먹을 두 번이나 받아낸 카론 경의 상태를 본 주치의는 은의 기 사라고 목숨이 열 개 쯤 되는 줄 아느냐며 그야말로 펄펄 뛰었다고 한다. 더 이상 몸 망치기 전에 검을 놓고 별장에서 몇 년쯤 쉬라고 했다는데 - 그 럴 사람이었다면 애저녁에 그랬으리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쇼메는 병원에 가기도 전에 베르스의 마신 아이히만 대공에게 불려갔다. 역시 이 모든 ‘음모’의 근원에는 그 충격의 할아범이 버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쇼메는 절대 인정 안하지만 확실히 쇼메 완자의 성격은 그의 스 승인 아이히만 대공을 닮았다(툭하면 총 쏘는 것까지도). 그리고 나는? 국왕 전하로부터 용맹스런 기사 표창을 받았다, 라면 얼마 나 좋겠냐만 그런 일은 절대 없고 단지 간단한 치료만 받은 뒤에 오븐 속의 치즈처럼 흘러내리는 육신을 질질 끌고 내 마음의 고향 리더구트로 향했다 . 뭐, 달리 갈 곳도 없지 않은가. 박복한 인생 같으니. “하아아. 다녀왔습니다아아... 아아앗!” 리더구트 생활 이 년차에 접어드는 나는 더 이상 키스에게 놀라지 않을 자신이 이었다. 지금까지 관찰한 키스의 믿겨지지 않는 생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혼자 시 쓰고 혼자 훌쩍 거린다. (다들 슬슬 피한다.) 2. 삼일 밤낮 브리핑도 안하고 겨울잠을 잔다. (소파를 뒤집는다.) 3. 요가 연습하다가 사지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아 괴로워한다. (걷어 차준다.) 4. 이상한 음식 만들다가 재료 다 날리고 실패한 뒤 도주한다. (잡아서 때려준다.) 5. 지명나간 사람에게 엉뚱한 지도 던져주고 매우 즐거워한다. (응징한다 .) 6. 요상한 아가씨 몰래 데려와 놓고 들키면 어릴 때 헤어진 여동생이라고 우긴다. (동생과 함께 추방한다.) 7. 갑자기 사라져서는 며칠 후에 엉망이 되어서 돌아와 끙끙거린다. (매 우 구박한다.) 8. 양기를 흡수해야 한다며 속옷만 입고 돌아다닌다. (카론 경에게 이른 다.) 9. 오밤중에 정원 앞 나무 위에 올라가 달보고 술 마신다.(갈고리로 끌어 내린다.) 이쯤 되면 기사단장이고 아니고의 차원을 떠나서 인간이냐 아니냐에 대한 심각한 고찰이 필요한 수준이다. 이런 혈압 오르는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 해 온 나는 설령 키스가 우주선을 타고 저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고 해도 ‘ 그럴 수도 있지’ 라면서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나의 허를 찔렀다. “키, 키스 경.” “아? 오셨습니까아?” “어째서...” “네?” “다, 당신, 어째서 일을 하고 있는거야!” 나는 경악에 찬 고함소리를 내질렀다. 그렇다. 키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소, 내 분신과 다를 바 없는 마대자루를 들고 리더구 트를 정성스럽게 닦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필시 키스 경이 저지른 기괴한 행동 중에서도 베스트 원이다. 물 론 평범한 사람에게 청소란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지만 - 이 인간이 이러 고 있으면 엄청 불안하다고! 랑시와 쇼탄도 키스 경의 ‘평범한 모습’에 두려워하며 구석에 숨어 와 들와들 떨고 있었다. “어째서라뇨? 그야 전 청소의 요정이니... 때, 때리지 말아요.” ”당신, 또 뭔가 음험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분명 그 걸 거야.“ ”아아, 제 이미지가 그것밖에 안되었습니까아!“ ”그것조차 안 됩니다.“ 내 퉁명스런 대답에 키스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음침하게 대꾸했다. “후후후. 지금 제 모범적인 봉사 활동을 질투하고 있는 거로군요. 아아, 남자의 질투는 보기 흉합니다아.” 오 초 후. “누가 누굴 질투한다는 거야! 이 코알라 단장! 내가 토 나올 정도로 지 겹게 하고 있는 게 청소라고! 노닥거리는 당신 앞에서 허구한 날 걸레 들고 뛰어다니던 총각 기억하지? 그게 바로 나야!” 그러나 역시 키스는 두 손으로 귀를 꼭 막고 ‘오호호호. 그렇게 질투하 시면 제가 미안해 지잖아요’ 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과, 관두자. 이 악마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패배하는 거야. “게다가 그 머리는 뭐야! 엄청 튄다고!” 키스 경은 그 갈색 곱슬머리를 나만큼이나 환한 금발로 염색한 채였다. 게다가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사파이어 귀걸이에 새하얀 제복까지 입고 있 으니, 희미하게 웃는 빨간 눈동자와 어울려 벚나무 분백색 꽃무리처럼 아름 다워 보였다... 라는 건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 대체 왜 이래! 어째서 제정신인 거야. 당신도 결혼 상대 잡혔어? 키스는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살피고는 빨간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아, 뭐랄까요. 그래도 명색이 여러분의 보스인데, 한 번쯤은 청소해 주 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말입니다아.” “하아. 그런 일은 한 번이 아니라 자주 좀 해달라고요.” “네. 저도 그러고 싶군요.” 그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마치 다시 는 청소할 기회가 없는 것처럼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말이다. 그 날 키스 경 은 1층과 2층, 욕실까지 반짝 반짝 청소한 뒤 십 년은 먹어도 될 분략의 땅 콩 잼을 만든 다음에야 잠이 들었다. 물론 그 날 이후 다시 원상태로 돌아 갔지만 말이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12. 안하던 짓 하는 것도 전염되는가 보다. 며칠 후 나는 또 굉장한 뉴스를 들었다. “뭐? 카론 경이 휴가를 가? 이 시기에? 정말?” “그렇다니까. 이멜렌님과 함께 별장으로. 신기하지?” “신기하네.” 왕실 소식통 랑시 경으로부터 카론 경의 휴가 소식을 듣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그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둔 유금 휴가만 다 써도 일 년은 놀고먹을 수 있지만(게다가 누가 감히 헬스트 나이츠 부기사단장이 쉬겠다 는데 말리겠나) 주치의가 반 협박조로 쉬라고 사정해도 무시하던 카론 경이 갑자기 제 발로 휴가라니? 키스 경을 비롯해서 깜짝 놀랄 충격의 연속이었 다. 물론 놀란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아아아아! 나한테는 말도 안하고 가버리다니, 이를 수가 있는 겁니까아 아아!” 왜 그랬는지는 평소 행실을 보면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지. 그러나 키 스는 멋대로 카론 경을 ‘사랑의 배신자’라며 단정한 뒤 입에 담기도 민망 한 말들을 퍼붓고 있었다. 천만다행이다. 만약 카론 경이 있었다면 리더구트에 피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어쨋든 저는 가고 말 겁니다! 저도 휴가를 신청하겠어요!” “댁은 어차피 삼백육십오일 펑펑펑펑 놀잖아! 주치의도 그랬다며? 더 이 상 게으름 피우면 나무늘보나 코알라 비슷한 걸로 진화하게 될 지도 모른다 고! 자꾸 인간이길 포기할래?” “저 한 몸 편하자고 이러는게 아니예요. 지금 카론 경과 이멜렌님은 물 가를 뛰노는 어린아이 같은 무방비!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몰라요! 어서 제가 가서 치명적인 위협으로부터 그 연약한 커플을 지켜줘야 합니다!” “댁이 바로 그 치명적인 위협이잖아! 아직도 자기 포지션을 모르겠어?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가정파괴범은 바로 당신이야! 현 실을 받아들여. 그럼 마음이 편해질거야.” “아니에요오! 난 청소의 요정이에요!” “으이구!” 그런데 키스 경은 정말 여행 가방을 꾸리고 나타난 것이었다. 장난이 지 나치다.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을 향해 키스는 작별 인 사를 남기며 문을 열었다. “그럼 안녕히.” 어느 날 그가 떠났다. 13.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돌아오지 않는 키스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처음부 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 같은 그곳에는 향기 없는 달빛과 새하얀 편지지 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집어 들며, 어쩐지 운명 같은 것이 있다고 직감했다. 처음 이곳에 와서 그를 만난 것부터 그와 헤어지기 까지의 모든 순간이 이 편지를 펼치는 아주 짧은 시간, 머릿속을 지나갔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미워했는지 모를 겁니다. 베아트리체를 지키지 못한 당신을. 당신은 절대 모를 겁니다. 술에 취해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는 당신 의 순진한 얼굴을 애써 태연한 척 바라봐야 했던 내 마음을. 하지만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그 비극을 기억조차 못하는 당신을 미워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것 도 기억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붉은 커튼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궁금해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저처럼 그것을 보게 된다면 기꺼 이 목숨을 바칠 불행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머릿속에 망각으로 덧칠된 그 오 분을 영원히 잊고 평안하 시길 기도합니다. - 당신을 미워했던 키스 세자르가 제 26화. 돌아오지 않는 날들 1. “어쩌지? 빨리 구하지 않으면 네 사랑스런 아내는 죽을 거야.” “키릭스!” “화내지 마.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키릭스는 이멜렌을 찌른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웃었다. 증오를 제외한 그 무엇도 믿지 않는 새빨간 눈동자는 악마가 달아준 의안 같았다. 무자비한 침묵 속에서 카론은 키릭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 눈동자 속의 불길은 업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도망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카론 은 알고 있었다. 둘의 검이 충돌하는 순간 압도적인 힘에 밀린 카론의 몸이 흔들렸다. 파 고 들어온 키릭스의 팔꿈치가 얼굴을 대리자 얼마 전 루터에게 받은 충격이 더해져 균형을 마비시켰다. 키릭스는 휘청거리는 카론의 복부를 걷어차 이 멜렌에게서 멀리 떨어트려놓았다. “억울해?” 키릭스는 몸을 일으키는 카론에게 말했다. “아무 것도 억울할 것 없어. 네 검술과 네 여자와 은의 기사라는 네 이 름까지 모두 내가 만들어 준 거잖아? 나와 같은 길을 가는 대가로 말이야. 이제 그걸 내게 돌려줘야 한다고 억울해 하면 안 되지.” 입술을 꽉 깨문 카론은 긴 흑발을 날리며 표범처럼 튀어나갔다. 다시 검 이 충돌했다. 은비늘의 뱀처럼 얽힌 둘의 칼날이 서로를 삼키기 위해 움직 일 때마다 시퍼런 스파크가 터졌다. 그 ‘매듭’이 억지로 풀어졌다가 다시 엉키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그것은 결코 키릭스가 동정을 베풀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머릿속에 두 자루의 검을 그리며 수도 없이 연습했던 카론의 검술은 키릭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 덕분에 수십 차례의 팽팽한 공방이 오갔다. 놀랍게도 먼저 금이 간 쪽은 키릭스였다.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찰 나의 빈틈을 카론이 파고들었다. 키릭스의 움직임이 뒤틀렸다. 그 수많은 대결 중에서 카론이 키릭스의 균형을 깨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론은 철벽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피에 젖은 검을 다잡았 다. 다시는 오지 않는 기회,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 마지막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온다. 카론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느꼈다. 당황한 키릭스는 황급히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카론은 곧바로 그에게 따라 붙었다. 카론과 키릭 스의 검이 서로를 물었다. 검과 검은 충돌하지 않았다. 둘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카론의 칼날이 키릭스의 목덜미에 닿은 그 순간이었다. 조금만 더 파 고들었으면 제아무리 키릭스라도 절명했을 일격 직전에 카론은 검을 멈춘 것이다. 완벽한 카론의 승리였다. 목 언저리에서 피를 흘리는 키릭스의 표정이 창백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자신의 패배 때문이 아니었다. 카론이 자신을 살려주었기 때문도 아니 었다. 그가 짜내듯이 말했다. “카론... 이게 네 결심이냐.” 그 말과 함께 키릭스의 칼에 잘린 카론의 오른팔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기사로서의 자신을 포기하며 얻은 그 일격의 마지막 순간에 검을 멈춘 것이 다. 키릭스를 죽였다면 기사의 생명과 같은 오른팔을 잃을 일은 없었으리라 . 하지만 주저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단호한 의지였다. 카론의 얼굴과 목 덜미에는 땀과 피에 젖은 머리칼이 엉켜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키릭스 세자르. 네가 준 검술과 은의 기사, 지금 이렇게 돌려준다. 그 러니... 이제 내게서 사라져라.” 그 목소리의 울림은 증오도 원망도 아니었다. 키릭스는 알았다. 이 남자는 결코 강제로 길들이거나 증오로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사실 때문에 집착했고 그 사 실 때문에 포기했다. “내가 졌다.” 키릭스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문득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 존재하는 인생이란 부러 울 수밖에 없었다. 송두리째 망쳐버리고 싶을만큼 말이다. “잘있어라. 다시 만날 일은 없을거야. 약속하마.” 그들의 긴 결투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카론은 그렇게 결별하며 떠나는 키 릭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와 함께 했던 과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마웠다. 항상 키릭스를 대하는 그의 마음은 언젠가는 능가 하고 싶은 위험천만한 녀석이었지만 - 그가 없었다면 귀족 출신의 견습 기 사들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고, 설령 기사가 되 었다고 하더라도 악투르에서 보르츠와 싸우다 기사가 된 첫 해에 전사했을 것이다. 이멜렌을 만날 수도 없었고 은의 기사는커녕 평생 관직도 얻지 못 한 채 외딴 시골의 검술 선생 정도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항상 무리하는 카론의 고집을 현실로 인도한 사람이 키릭스였다. 그는 선 과 악을 불문하는 마법이었다. 용의 등을 탄 것처럼 단 한번도 멈추지 않고 구름 위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이 순간 그 질풍의 시간이 지금보 다도 더욱 더 거대한 페허 속으로 걸어가는 키릭스의 뒷모습과 함께 막을 내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멜렌!” 카론은 머릿속을 아득하게 만드는 고통을 억누르며 이멜렌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눈에서는 의식하지도 못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미, 미안. 조금만 기다려.” 카론은 불안했다. 이미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출혈이 더 심해지 기 전에 어떻게든 줄을 풀고 그녀를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키릭스가 단단하게 매듭 지워둔 굵직한 밧줄을 한 팔로 어떻게 풀 수 있단 말인가. 역시 검으로 잘라야 할까? 그때 카론은 의외의 것을 보았 다. “매듭이...” 키릭스는 누구라도 줄을 당기기만 하면 손쉽게 풀 수 있도록 매듭을 묶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멜렌을 찌른 것도 일부러 맥을 피해 생명에는 지 장이 없어 보였다. 카론 정도 되는 기사라면 출혈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키릭스는 이멜렌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건가.’ 그것은 키릭스의 잔혹한 성격에 비춰보면 기대하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싸움이 끝난 뒤 쉽게 데려갈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는 카론에게 죽기 위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미레일에게 했던 말마따나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때 카 론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카론.”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 이멜렌의 목소리를 모른다. 악투르의 첨탑 위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까. 그러니 이것이 이멜렌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가냘프게 울 먹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카론은 놀란 얼굴로 이멜렌을 바라봤다. “...나 때문에...” 그녀의 작은 입에서 나온 울먹거림은 태어나 처음으로 꺼내는 목소리처럼 작고 여리고 촛불처럼 흔들렸지만, 카론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나 때문에...” 그리고 그녀도 처음으로 보았다. 물기 어린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 의 모습을. 그런 순진하고 착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다행이야. 목소리를 되찾아서 정말 다행이야.” 카론은 단지 책 읽기를 좋아했던 평민 소년이었다. 검술에 관심도 없었고 애당초 어울리는 체격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검을 잡은 이유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떤 젊은 귀조이 길거리에서 과일을 팔던 카론의 어머니 를 검으로 찔러 죽인 것이었다. 굳이 그 잔인한 살인의 이유를 들자면, 그 귀족이 그날 그냥 기분이 나빴고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어머니를 잃은 다음날,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울음을 멈췄다. 어떻게든 가장 높은 위치의 기사가 되어 복수하기 전까지는 어떤 일에도 슬퍼하지도 기뻐 하지도 않기로 다짐했다. 시간이 흘러 그는 기사가 되았지만, 복수는 이뤄 지지 못했다. 어머니를 살해했던 그 귀족은 또 다른 귀족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고 자살한 지 오래였다. 세상에는 미워할 것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미워하고 경멸해 봐야 바뀌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오직 증오만이 켜켜이 누적되어 갔다. 어차피 복수심이란 자신의 심장을 향해 시위를 당긴 화살과 같은 것이기 때 문이다. 그가 이멜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역시 키릭스처럼 자신에게 화살 을 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곁에 있어줘. 당신에게 하고 싶은 부탁은 그것뿐 이야. ” 카론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 허무한 세상은 여간해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뿌연 안개 속에서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유혹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이런 세상에서 이토록 또렷하고 확실하게 존재하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 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그는 한 여자의 죽음으로 들게 된 검을 한 여자를 구하면서 내려놓았다. 후회는 없었다. 2. “유능하더군요. 카론 샤펜투스란 사람은. 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후후후. 이 나라의 보물이지. 게다가 욕심도 없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 어서 권력자들도 좋아해. 동화에나 나올 법한 기사 아닌가?” 쇼메의 너스레에 아이히만이 농담으로 회답했다. 쇼메는 병상에서 일어나 자마자 아이히만 대공과 만났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카론의 이름을 꺼냈다. 그러니까 니샤 왕국에서 그가 자신의 계략을 단숨에 간파한 사실을 말이다 . “은의 기사가 적이 아니길 다행이네요. 검술만큼이나 무서운 머리를 가 졌더군요.” 드물게도 허심탄회하게 카론을 칭찬하는 쇼메를 아이히만은 말없이 바라 보기만 했다. 백발을 무색하게 만드는 다부진 체구를 가진 그 불세출의 정 치가는 담배 케이스에서 굵직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에 입을 열었다. “슬슬 본론을 말하지 그러나, 쇼메 군. 설마 세상에서 가장 잘난 자네가 갑자기 카론 군을 칭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져서 병원을 박차고 나 와 날 만나자고 했을 리도 없고.” 쇼메는 방긋 웃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 라는 표정이다. 그런데도 쇼메 는 또 카론을 입에 담았다. “일반적으로 피해자가 범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하지 만 카론은 그런 선입관에 휘둘리지 않았고, 그래서 제 계략을 알아챌 수 있 었던 것이지요. 이런 나라에서 썩고 있기엔 아까운 인재더군요.” “2절까지 하는 건가?”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카론의 그런 추리를 듣고 나니까 저도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더군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대 공은 과연 누구 편이냐 하는 의문입니다.” “내가 누구 편이냐고? 너무 아파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스승님이 제게 ‘공짜로’ 준 고급 정보들은 아주 유용했습니다. 그 덕 택에 쉽게 계략을 짤 수 있었고 이자벨에게 선수를 쳤다고 생각했지요. 그 런데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는데, 대체 대공은 그 정보는 어디서 얻었냐 는 것이지요.“ 아이히만은 코웃음을 쳤다. “건망증이라도 걸린 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북부 콘스탄트 정보부에 서 빼냈다고.” ”이런, 그럼 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는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 사실 을 바쉐론 국왕은 모르고 있을까요? 설마 정보부가 그 중요한 정보를 중요 하지 않은 정보라고 판단해서 국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걸까요?“ 쇼메는 독수리 같은 눈매로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지금 아이히만 대공께서 거짓말을 하고 계신 걸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별 거 아닙니다. 단지 제게 준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 솔직하게 알려주 시면 됩니다.“ ”...“ 아이히만은 언변의 달인답지 않게 침묵을 지켰다. 곧 쇼메가 입을 열었다 . ”말할 수 없겠지요. 그건 이자벨 크리스탄센 인트라 무로스 방첩국장이 준 정보니까.“ 쇼메가 카론에게 계략을 간파당한 뒤에 그도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이히 만 대공은 다른 누구도 모르는 그 정보를 어디서 구해서 자신에게 알려주었 을까? 아무리 그가 뛰어난 책략가에 방대한 연줄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 런 상황에서 오직 이오타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 아 이히만이 이자벨의 측근과 내통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이자벨의 측 근이라는 결론 뿐이다. 쇼메가 말했다. “처음에는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신은 베르스를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정치가이자 저의 스승이며 이오타에서 도망친 저를 거둬주 셨고 또한 제가 움직일 수 있도록 많은 정보를 알려준 분이니까요. 그런 가 장 믿을만한 조력자가 첩자라고는 아무래도 의심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바 꿔서 생각해보면 당신만큼 첩자일 때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당신은 언제나 마술처럼 알아내는 정보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지요. 우리 모두가 당신에게 정보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내 마술이 불쾌했나?” “아닙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술사의 비밀이 궁금하기 마련이 지요. 개인적으로 그 신기한 마술의 비법은 바로 이자벨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우리들은 우리들도 모르게 이자벨의 각본 대로 움직여 준 셈이지요. 제가 틀렸습니까?” “이런, 이런. 오로지 불유쾌한 추측들 뿐이로군. 부모를 잃은 슬픔이 지 나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설령 그 망상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증 거 없는 추리란 감상에 빠진 시 나부랭이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정보의 출처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그걸 대답 못하는 게 바로 증거입니다.” “흥. 존경심을 모르는 제자로군.” “먼저 존경 받을 가치가 있는 스승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쇼메는 차갑게 대꾸하며 품속에서 총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만약 제가 이자벨의 첩자였다면, 그때 저를 카론이 어떻게 했을 것 같 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이자벨의 첩자라면, 지금 제가 당신을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참 쉬운 질문입니다.” 쇼메에게 있어서 아이히만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존경하는 스승에게 배반당하는 경우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비상한 머리를 가진 쇼메라도 그것만큼은 감히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말 아이히만이 첩 자라면. “전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쇼메의 두 눈에는 부모를 잃었을 때도 드러내지 않았던 섬뜩 한 분노가 맺혀있었다. 쇼메는 누굴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의 메마른 유년기는 아무 에게도 정을 주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배신하고 배신당하는 일에 일일이 유감 따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쇼메에게도 아이히만 대공만큼은 예외였다.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단지 마라넬로 황제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볼모로 남 았을 테니까. 상처투성이의 소년을 이자벨이 위협을 느낄 만한 차기 이오타 국왕의 재목으로 키운 자가 바로 아이히만이었다. 그런 그가 실은 자신을 마음껏 이용하기 사육했던 것뿐이라는 사실은 쇼 메의 마음을 찢어놓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담배연기와 함께 나온 아이히만의 대답은 무겁고 건조했다. “그래. 사과하지. 난 이자벨의 첩자라네. 그럼 이제 어쩔 텐가. 스승을 쏠텐가?” “대공!” “아니면...” 아이히만은 순간 재떨이에 암회색 담뱃재를 털었다. 그렇게 팔을 뻗은 그 가 일순간 쇼메의 손목을 잡아챘다. 쇼메의 첫 번째 실수는 적을 앞에 두고 제대로 총구를 겨누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 실수는 당당한 체구를 가진 아이히만의 완력을 과소평가했 다는 것이며 그리고 세 번째 실수는... 아이히만이 잡아챈 쇼메의 팔을 꺾 어 그의 등 뒤로 돌며 말했다. 이미 쇼메의 총은 아이히만의 손에 들려 있 었다. “정체가 발각된 첩자가 순순히 잡히는 경우를 본 적 있나?” 아이히만이 쇼메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그가 부러질 정도로 팔을 뒤로 꺾자 미처 아물지 않은 쇼메의 상터에서 피가 터졌다. 분명 기절할 정도의 통증인데도 쇼메는 입을 꽉 다문 채 죽여 버릴 것 같은 눈매로 자신의 스 승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 쇼메답지 않은 실수 역시 끝까지 아이히만을 첩자라고 믿기 싫은 마음 의 빈틈 때문이었다. “쇼메 군, 자넨 여전히 감상적이야.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 다시 한 번 첩보의 기본을 알려주겠네. 상대가 첩자라는 것을 알았다며 입을 다물 고 철저하게 역이용해야 하네. 이렇게 계집애처럼 대놓고 원망해도 상대는 결코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아, 이 어리석은 애송이.” “스승을 믿은 것이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찢어지게 외치는 쇼메의 목소리는 분노가 아닌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아 이히만은 강철을 녹인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다. “인간적인 마음이란 때에 따라서는 죽어 마땅한 잘못이 되기도 한다네. 특히 전쟁에선.” 무서울 정도로 담담하게 쇼메의 입을 막은 아이히만은 권총의 격철을 당 겼다. “그러고 보니 사격술도 내가 가르쳐 줬군.” 찰칵! 하는 장전음이 접견실을 울렸다. 분명 쇼메는 모두가 자신을 믿게 만들되 자신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위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이 그 사실을 가르쳐 준 사람을 믿은 것에 대한 당연한 죗값이라 평가한다면, 그 것은 너무도 가혹한 처사였다. “그래, 당신 말이 전적으로 옳아.” 쇼메가 중얼거렸다. “이번 달에만 두 번 배신당했어. 밥벌레 무지렁이도 이 정도는 아니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이것밖에 안 된다면 베르스 녀석들에게 더 피해 주기 전에 죽는 편이 낫지. 그러니까 어서 죽여.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을 테 니까.” 아이히만은 말없이 제자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처음 볼모로 잡혀있을 때 봤던 그 공허한 눈동자, 부모와 왕국 모두에게 버림받아 원망하는 것조차 진력이 난 지친 눈동자였다. 그가 처음 쇼메를 제자로 택한 것도 그 눈 때 문이었다. 그것은 뭔가를 채워 넣어주지 않으면 미안할 정도로 텅 빈 구멍 이었다. 아이히만이 장전을 풀며 말했다. “정말 제대로 배운 게 하나도 없는 녀석이야. 내가 그렇게 빨리 포기해 도 좋다고 가르쳤나?” “또 무슨 꿍꿍이야.” “스승을 대하는 말버릇부터 고쳐라, 고얀 놈.” 그 말과 함께 아이히만은 쇼메의 꺾은 팔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일단 내가 첩자라는 걸 알아낸 건 칭찬해주마. 하지만 언제라도 베르스 를 전복시킬 수 있는 첩자가 어째서 아직까지도 너희들을 도와주고 있는지 는 궁금하지 않던가?” “...” 평생을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며 살아온 아이히만의 시커먼 속을 어떻게 알겠냐만, 분명 그는 언제라도 쇼메를 납치하거나 죽일 수 있었고, 원한다 면 베르스 전체를 이자벨의 손에 쥐어줄 수 있는 힘이 능히 있는 자였다. 쇼메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어써 그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어떤 이유’가 무엇인지는 추리해 보지 않았다. 솔직히 스승이 자신을 배 반했다는 사실에 감정적이 된 탓이었다. 순간 그 ‘이유’가 떠오른 쇼메의 표정이 바꿨다. 아이히만의 속을 알아 챈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쇼메의 예상이 맞는다면 아이히만 은 엄청난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서, 설마 당신!” “쇼메 군. 난 태어나서 남에게 단 한 번도 부탁을 해 본 적이 없어. 지 금도 부탁이 아니야. 자네의 그 눈을 다시 한 번 믿어보게. 과연 내가 첩자 라는 사실을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득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 판단해 보게나.” 하지만 쇼메는 벼랑 끝에서 던진 아이히만의 밧줄을 밀쳐버렸다. 이 판국 에 뭘 믿고 뭘 판단한단 말인가. “제 머리에 총을 겨누고 꺼낼 말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자 아이히만은 놀랍게도 들고 있던 총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쇼메의 팔도 풀어 주었다. 하지만 쇼메는 구석에 몰린 맹수처럼 계속 아이 히만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이히만은 노구를 움직인 것이 부담되는지 어깨를 휘휘 돌리며 말했다. “이제 좀 공정해졌나?” “흥.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 노친 네. 으아악!” 아이히만이 무뚝뚝하게 다시 쇼메의 팔을 잡아 꺾었다. “쇼메 군. 왕자에겐 왕자에 어울리는 말투가 있다네.” “이, 이것 좀 놔요! 으윽!” 성질 나쁘기로 따지면 연륜으로 보나 내공으로 보나 아이히만이 한 수 위 였다. 항복을 선언한 제자를 풀어준 아이히만은 그야말로 ‘대공의 말투’ 로 점잖게 입을 열었다. “쇼메 왕자여, 선택하시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믿고 입을 다물 것인지, 아니면 그 총으로 날 쏠 것인지. 이게 자네에게 내주는 마지막 과 제네.” 쇼메는 한동안 자신의 스승을 바라봤다. 그가 이자벨의 첩자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나 자신을 죽이기는커녕 총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 것조차 음흉한 계략을 일부일 수 있다. 아닐수도 있다. 그 어느쪽도 가능성 이 있었다. 그는 마지막 카드 한 장을 남겨놓고 모든 판돈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 은 도박사처럼 아이히만이라는 존재에 대해 철저하게 계산했다. 만약 죽이 는 게 옳다는 결론이 난다면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리라 마음먹었다. 잠시 후 계산을 마친 그는 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 넣었 다. “좋습니다. 대공을 믿도록 하지요.” “그쪽인가? 후후. 과연 어떻게 될지.” “하지만 이제 당신은 제 스승이 아닙니다.” 사제관계를 끊는 쇼메의 말투는 단호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그 발칙한 반항에 도리어 즐거워했다. “어미는 새끼가 자시 품을 완전히 떠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대견해 한 다지. 그래, 우리의 인연은 끝났네. 그리고 이것으로 내 수업도 끝이네.” 아이히만은 그의 멋진 정장을 점잖게 다듬으며 밖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내가 준 정보의 출처가 북부 콘스 탄트 정보부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그쪽에서 자네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만.”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모르겠군.” 쇼메는 대답 대신 이제야 저 철벽같은 늙은이를 이겼다는 시건방진 미소 를 보이며 아이히만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아이히만의 표정이 흐려졌 다. “그거였나. 하찮은 잔재주에 당했구먼.”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아이히만의 말마따나 북부 콘스탄트가 쇼메에게 자신들의 정보를 까놓을 리가 없다. 그런데 쇼메는 어떻게 알았을까. 실은 알지 못했다. 단지 ‘찔러본’ 것이었다. 그런 유도심문이란 닳고 달아서 이제는 쓰기도 창피한 잔재주지만,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고수에게 도 통하는 법이다. 접견실을 떠난 아이히만은 문득 담배 케이스를 놓고 왔 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늙은 탓일까, 칠칠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은퇴해도 좋은 정도로 말이다. 다시 들어가 가져올까 하다가 그냥 행정부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쇼메 군. 자넨 이런 날 이해할테지. 어쩌면 앞으로 나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지도 몰라. 하지만 키스 녀석만큼은 영원히 날 미워할겠지. 설령 내 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해낸다고 해도 그 녀석은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 을 거야. 어차피 악당의 인생에 남는 것이란 아쉬움 뿐이라지만, 솔직히 그 것만큼은 좀 섭섭하군.’ 그는 복도를 걸었다. 거인의 퇴장이었다. 3. 키스는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기대지 않으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해가 떨어진 목초지는 남으로 충만했고 풀도 땅도 방목양도 모조리 쪽빛이었다. 꼭 가난한 화가가 부족한 물감만으로 그려낸 풍경화처럼 이것도 저것도 제 색깔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내일이 와도 원래 색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키스는 고개를 들어 별들의 천정을 바라봤다. 이른 별들이 점멸하 고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마법의 붓이 있다면 스스로 기준점이 되어 이 세상을 영원 히 멈추게 만드는 불변의 자오선을 하늘 위에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 은 무심히 흐르는 것이고 그래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앞을 바라봤다. “와아. 날 기다려주고 있었던 거야, 키스 세자르 씨?” “이러다 바람 맞는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키스 앞에 나타난 사내는 마치 거울 같았다. 밝게 물들인 키스의 금발만 아니었다면 누가 가짜이고 진짜인지 아무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 다. 인공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키릭스가 말했다. “궁금해 죽겠어. 카론이 날 죽이지 않은 이유는 나 때문일까 너 때문일 까?” “모르죠. 하지만 나 때문이었다면 견딜 수 없을 겁니다.” “또 궁금한 게 있는데, 어째서 넌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도와주지 않았지 ?”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키스에게 있어서 키릭스를 죽이거나 혹은 죽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다. 오히려 원하던 바.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전력으로 막아주는 자에게 죽음으 로 보답할 수는 없었다. 그것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순간 섬광처럼 뽑힌 키릭스의 송곳니가 키스를 찢었다. 검조차 뽑지 않은 키스는 담담하게 말 했다. “성격 많이 너그러워지셨군요. 키릭스 세자르는 마음에 안 드는 건 주저 없이 베어버리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키스의 얼굴을 타고 핏물이 흘렀다. 키릭스의 검 끝이 수 려한 키스의 얼굴을 사선으로 할퀸 것이다. 깊게 패인 그 상처는 영원한 흉 터로 남겠지만 적어도 목숨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키스는 칼끝에 뭉친 핏방을을 털며 조롱 섞인 미소를 보였다. “네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누가 진짠지 헷갈려서 그렇게라도 구분을 해 놓으려고.” “편리하네요. 진작 이러지 그랬습니까.” 키스는 눈을 감기는 핏줄기를 닦았다. 키릭스는 흥이 깨진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을 죽이라고 가슴을 들이대는 것 같지 않은가. 인형을 찔러봤자 솜털만 휘달린다. 즐거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가상 소중한 부분을 건 드리기로 했다. “베아트리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순간 키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자벨 옆에 있어.” 키스의 마음이 커다란 진동을 울리며 흔들렸다. 다시 키릭스가 칼을 휘둘 렀을 때 키스는 검을 뽑아 그것을 막고 있었다. “와아.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눈빛이네? 착하기도 해라.” “거짓말 하지 마! 네놈들이 그녀를 찾았을 리가 없어!” 커다랗게 소리치는 키스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키릭스는 그제야 만 족스럽게 웃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잖아?” 그 말과 함께 키릭스가 키스를 몰아붙였다. 평정을 잃은 키스의 균형은 손쉽게 깨졌고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그를 덮쳤다. 새파란 불꽃이 터지며 키스의 검이 유리조각처럼 깨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키스의 몸이 튕겨나 가 흙바닥을 굴렀다. 키릭스는 얼마든지 키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편하게 죽는 것은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좀더 절망에 빠트릴 필요가 있었다. “키스. 더 재미있는 사실 알려줄까?” 키스는 분노에 얼룩진 눈동자로 키릭스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베아트리체 말이지. 정신이 완전히 붕궤되었어. 이자벨이 그 여자 머릿 속에 자철광을 심었거든. 그 장치가 그나마 남아 있던 정신을 부숴버렸어. 이제는 너도 알아보지 못해. 그냥 인형이더라고.” “닥쳐! 그런 말에 속지 않아!” 하지만 키스의 목소리는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 천연자석이 뇌에 무슨 영 향을 주는지는 모른다. 이자벨이 정말로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절개하고 그 런 알 수 없는 장치를 집어넣었는지도 알 수 없다. 미레일이 애써 숨겨 준 그녀를 인코그니토가 다시 찾았는지조차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다. 모두 다 키릭스가 꺼낸 말일뿐이니까. ‘그럴 리가 없어. 베아트리체를 찾았을 리가...’ 하지만 단지 그 ‘가능성’만으로도 키스를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키스마저도 베아트리체가 숨어있는 곳은 모른다. 또한 유일하게 알고 있던 미레일은 이미 죽었다. 그러니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이자벨에게 돌아가 는 수밖에 없었다. 키릭스는 그것을 원했다. 베아트리체를 구하려고 찾아온 키스를 마름껏 조롱하며 죽이고 싶었다. 더 이상 원래의 모습으로는 돌아 갈 수 없는 부서진 영혼을 공유하는 자신들에게 그 이상으로 어울리는 파멸 은 없다고 생각했다. “빨리 와야 해. 기다리고 있을께.” 그들은 똑같은 눈동자로 서로를 바라봤다. 4. 카론은 홀로 누워 있었다. 임시 병상이 된 침실 문에는 ‘절대안정’이라 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한 팔로 이멜렌을 안고 별장까지 온 그는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떳을 때 그를 반긴 것은 진통제가 억누른 희뿌연 통증과 익숙한 암흑이었다. 시력을 잃은 탓이다. 또 며칠간 눈은 그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팔을 잃은 사람은 한동안 없어진 팔이 계속 붙어 있다는 착각을 느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카론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겪고 나니까 자 신이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힘들었다. 평생 일하던 직장을 은퇴한 다음 날이 이런 기분일까, 육체적 고통에는 익 숙한 그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시녀를 불러 진통제를 더 달라고 고함칠 아픔마저도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격한 통 증을 참아내는 그 이지적인 이목구비는 식은땀에 젖어 있었지만 일그러지기 는커녕 도도할 정도로 반듯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다. 소식을 듣고 단숨에 왕궁에서 달려온 왕실 주 치의였다. “카론 군. 참을만한가?” “제 아내는 괜찮습니까?” 늙은 의사는 혀를 찼다. 기가 질린 첫 번째 이유는 팔까지 잘린 주지에 그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맑다는 것, 두 번째는 가장 첫마디로 이멜렌을 찾 았다는 것이다. 수많은 환자를 만나봤지만 이렇게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사 람도 없었다. “이멜렌 양은 지혈을 마치고 지금은 잠들어 있네. 워낙 몸이 여려서 고 열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것도 오늘 밤 안에 회복될 거야. 장검에 찔려 그 정도면 기적이나 다름없는 걸세.” 사실 왕실 기사나 그의 부인을 ‘군’ 이니 ‘양’ 이니 호칭해서야 안 되겠지만, 국왕과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을 모시는 의사다 보니까 그 이상의 존대는 도리어 어색했다. 게다가 노의사의 눈으로 보기에 둘은 여전히 소 년 소녀들이었던 것이다. 어려보이는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권력이 아닌 무 언가에 집중하는 그 모습이 그랬다. 카론은 눈을 감은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런 그가 돌연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돌아왔습니다.” “뭐?” “그녀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 참...” 주치의는 찡그린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물론 그녀의 목소리가 돌아 온 것은 기적 같은 선물이지만, 덕분에 팔까지 잃은 사람이 뭘 그렇게 기뻐 하고 앉았단 말인가! 그는 쏟아내고 싶은 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봐라, 내 경고를 마이동풍으로 듣다가 이 꼴을 당하니까 기분이 찢어지게 좋냐? 자넬 보고 있으면 또 무슨 사고를 칠까 겁나서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아! 이러다 시력까지 영원히 잃는 수가 있어! 카론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치의는 마구 인상을 쓰며 소리 없이 투덜거렸지만, 곧 평온한 그의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 건 의사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자의 얼굴이었다. 그런 행복한 사람한테 “당신은 내 말을 따르지 않아서 그 꼴이 된거야!” 라고 소리쳐 봐야 자기 압만 아플 것이 뻔했다. 게다가 더 이상은 검을 잡 을 일도 부상을 당할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말했던 ‘은퇴’가 바 로 지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이멜렌 양이 목소리를 되찾아 정말로 다행이로군. 적어도 의학으 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수고했네.” 결국 주치의는 이 세상 제멋대로 사는 젊은이에게 역정을 내기는커녕 엉 뚱한 소리를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반생도 살지 않은 어린 기사에게서 묘한 질투심을 느꼈고 또 한편으로는 ‘내 자식 아니길 다행이 지’ 라는 안도감도 느꼈다. 그는 이멜렌의 상태를 보러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촛불을 끈 뒤 방을 나 섰다. 간간이 들려오던 밤부엉이 소리도 잦아든 병상은 그야말로 고요했다. 카론은 조금 고개를 돌려 하얀 베갯잇에 뺨을 묻으며 잠을 청했다. 상처가 아무는 대로 긴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말하 지 않았지만 카론이 견습기사 시절부터 머리칼을 기른 이유는 자신의 뽀얗 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감추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단련 한 몸이라서 엔디미온처럼 ‘여자로 착각할 정도’는 분명 아니지만, 검술 로 먹고 사는 기사의 것이라 하기에는 분명 가느다란 편이라 그걸 드러내 적에게 얕잡혀 보이는 것이 싫었다. (물론 머리를 기르면 기르는 대로 생겼 던 문제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잘라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멜렌이 잘라주면 더 좋겠다는 느긋한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복도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다고 해도 카론의 청각은 정교한 기계처럼 민감해서, 나무 복도가 삐걱거리는 희미한 소리만으로도 자신의 방으로 다 기오는 자의 정체는 의사가 아니며 150파운드에서 180파운드 사이의 몸무게 에 크고 발달된 몸을 가진 왼손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암살자는 아닐 테지만.‘평소 같으면 곧바로 검을 들고 기척을 숨겼겠지만 - 지금의 자신에게 찾아올 킬러 따위는 없다. 아니, 설령 킬러 라고 하더라도 이런 몸으로는 어찌할 방도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카론은 그 체격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을 두 명이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일 것이 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자 키론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키스.” “정답입니다아.” 평소였다면 오밤중에 남의 침실에 불쑥 찾아온 키스에게 ‘나가! 나가!’ 라는 고성으로 반응했겠지만, 지금은 서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카론은 자 신이 키릭스와 싸울 때 키스가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 다. 그리고 도와주지 않은 이유도 알고 있었고 지금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 있는 키스가 말했다. “꼴 좋습니다아.” 만약 카론의 시력이 정상이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키스의 얼굴도 상처를 감싼 붕대가 감겨 있었다. 키스의 조롱에 코웃음을 친 카론은 거의 십여 분이나 입을 다물었다. 묘 한 정적의 대화였다. 그런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키스. 난 사라졌던 네가 갑자기 왕실로 돌아왔을 때, 그래서 ‘당신이 바로 카론이란 사람이로군요’라고 말했을 때... 넌 내가 짊어져야 할 업이 라고 생각했다.” “맙소사. 그런 고약한 생각을 했단 말입니까?” “업이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룬 것에 대한 대가야. 그것은 피하거나 부정한다고 사라지지 않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채 끝없이 마음 한구석을 불태워.” 만약 키릭스가 없었다면 카론은 은의 기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카론이 없었다면 키스는 세상 모두와 단절되어 소멸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슬처럼 연결된 업의 연속이다. 그리고 이제 키스에게 남은 일은 키 릭스를 잠재워 자신들을 둘러싼 업의 고리를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으로 되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인간관계의 끝맺음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미안해 할 것 없어. 내가 시작한 일을 내가 끝마친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한 카론은 키스에게 추호의 원망도 없었다. 키스를 받아들인 것 , 키릭스와 결별한 것, 그 대가로 팔을 잃은 것, 그 모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마음의 온기를 느낀 키스는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신 눈이 안보여서 다행이에요. 제가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 “거짓말.” “아. 아니 진짠데.” “속일 생각 하지 마. 너 지금 웃고 있지?” 웃고 있었다. 뭐랄까, 분명 카론이 꺼낸 말은 제법 감동적이었지만 그것 도 그럴 듯한 표정으로 했어야 멋지지, 첫사랑 고백하는 어린애처럼 빨개진 얼굴로 두 눈까지 감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산전수전 다 겪은 키스 로서는 안 웃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눈치챈 카론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남이 진지하게 말하면 반의 반 정도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란 말이야!” “...애늙은이.” “닥쳐! 난 어렵게 속에 있는 말을 꺼냈는데!” 카론은 ‘그래 됐어. 난 어차피 재미도 없는 애늙은이니까!’이라고 쏘아 붙이며 고개를 돌렸다. 결국 키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바보로구나. 그 말을 받아들이면 난 정말 나쁜 놈이 되는 거다.’ 키스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벽에 기댔다. 모두 내 가 원해서 선택한 거니까 넌 조금도 신경 쓸 것 없어, 라는 말만큼 사람 미 안하게 만드는 소리가 또 있을 까. 참 잔인한 말이다. 키스는 자신이 꽤 뻔 뻔한 인간인 건 사실이지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철면피는 아니라 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의 상처입은 몸을 바라보며 쓰린 웃음을 보였다. “이렇게 가슴 아플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않았을텐데.” “그래도 악연은 아니야. 분명히.” 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연일 리가 없다. 도리어 과분했다. 시시한 인 연은 결코 상처주지 않는다. 하지만 소중한 인연이기 때문에 그것을 끝내야 할 때 마음이 쓰라린 것이다. 지금 카론의 눈이 보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 이라고 키스는 생각했다. 카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별입니다, 카론. 그녀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길.” 키스는 그렇게 떠났다. 카론은 멀어지는 키스의 발걸음을 못들은 척 머리 를 돌렸다. 그는 키스가 왜 떠나는지 알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 고 있었다. 그리고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별을 고하는 그에 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마디라도 꺼내면 그 때는 정말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마웠어.’ 카론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작별의 인사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5. 키릭스에게 있어서 키스란 몸속에서 떼어낸 종양 같은 존재다. 자기 일부 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바꿔 말하면 키 스 역시 키릭스를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증오할 명분은 충분했 다. “그런데 저건 또 뭐야.” 키릭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라이로라의 ‘상태’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라이오라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는 부하라지만 자신을 돕기는커녕 이런 데서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나 하고 있단 말인가. “이도 저도 안 되니까 자연의 친구라도 되어보려는 거냐?”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있는 라이로라의 어깨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 었다. 생김새로 봐서는 야생 문조쯤 되어 보였다. 밀밭에 뛰어들다 그물망 에 걸렸는지 아니면 독수리 부리에 찍혔는지 어쨌든 날개가 부러진 그 새는 어미라도 대하는 양 라이로라의 창백한 목덜미에 파고들기 위해 파닥거리 고 있었다. 필사적이었다. 키릭스가 카론과 죽도록 싸우든 키스를 죽이든 말든 찾아와 보지도 않은 라이로라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셨습니까.” 키릭스는 전에는 몰랐는데 자신의 검술 선생이 실은 엄청 뻔뻔하다는 것 을 느꼈다. 그는 라이오라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작은 새를 바라봤다. “그 넋 나간 새는 뭐야. 새로 사귄 숲의 친구?” “글쎄요. 멋대로 와서 이러고 있습니다만.” 키릭스는 코웃음을 쳤다. 조금만 더 살면 자그마치 5세기를 생존하게 되 는 전대미문의 괴물과 체온도 없는 그의 차가운 몸을 어미로 착각해서 얼빠 진 새끼 문조라니. 더없이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라고 키릭스는 기가 차서 빈정거렸다. “이 녀석에게 저는 고목으로 보였을 겁니다.” 라이오라는 새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며 말했다. 어쩌면 그 문조는 춥고 습한 밤공기를 피해 몸을 숨길 나무 구멍을 찾아 라이오라를 발견한 것인지 도 모른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결코 죽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가진 라이 오라에게 고목은 제법 어울리는 비유였다. 라이오라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오백년 가까운 긴 시간동안 사람들이 변함없이 해왔던 말이 뭔지 아십 니까?” “옛날이 좋았지.” “...” “틀렸어?” “아니, 그 말도 있긴 있었습니다만... 영원히 살 수 있다면 행복할 거라 는 말은 변치 않고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제가 영생을 얻어서 행복 하겠다고 말했지요.” “원래 인기 없는 남자가 남의 여자보고 이러쿵 저러쿵 평이 많은 법이지 .” 그건 분명 아주 오래된 테마였다. 고대 유적 벽화에서도 영생을 찬양하는 그 시덥잖은 글귀를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이 얼마나 발전 없는 존재인지 증명하는 헛소리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신가?” 키릭스의 웃음은 자조였다. 영생의 라이오라와 단생의 키릭스 사이에는 ‘불행’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여튼 인간의 고뇌는 모조리 시간 때문이라니까. 너무 오래 살든가, 아니면 너무 빨리 죽든가. 모든 인간의 수명이 똑같다면, 가령 왕이든 거지 든 모든 인간이 무조건 50년만 살다 죽도록 하늘이 정했다면 인간의 근심은 절반 이하로 줄었을 꺼야.” 키릭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숙여 라이로라의 손에 담겨 있는 새를 바 라봤다. 날개가 부러져 어차피 곧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그 새는 이제 야 자기 공간을 찾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몸을 부비며 손바닥을 부리로 콕콕 쪼고 있었다. 키릭스는 그 모습이 어쩐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헤에. 널 좋아하는 거 같네?“ 라이오라는 그 새를 천천히 두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엷은 빛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손을 폈을 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한 줌의 재였다. 라이오라는 말없이 하늘로 그 재를 날렸다. 바람에 날리는 먼지를 바라보 며 키릭스가 말했다. “행복해졌군.” “오밤중에 이런데서 연애질이라도 하냐? 이 자식들아.” 라는 불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부분 합법적인 직업인이 아니다. 불량 배라든가 도적 혹은 강도 같은 부류 말이다. 지금 라이오라와 키릭스를 에 워싸는 여덟명의 남자들도 전혀 건실한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얼굴만으로도 귀공자 티가 나는 키릭스와 몹시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라이오라를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물론 불행한 사실은 그 고급스러운 옷이 실은 프론티어 뱅가드의 리더만 입을 수 있는 제복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것이리라. “흐흐. 꽤 있어 보이는 놈들이잖아? 니놈들 납치하면 니들 애비가 돈 좀 주려나?” 키릭스는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이 금발 남자의 아버지는 수백 년 전에 죽었고 내 아버지는 얼마 전 내가 죽였기 때문에 돈 받긴 힘들 거야.” “...” 강도들은 멍청한 표정으로 방긋 웃는 키릭스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쌍심지를 켰다. “이게 실성했나! 어디서 헛소리를! 달랑 칼 두 자루로 우릴 상대하겠다 는 거야 뭐야!” “미안하지만 세 자룬데? 난 두 개 쓰거든.” “아무튼!”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강도들이 검과 도끼를 치켜들었다. 찍어 죽이고 돈이나 빼앗자는 심산이었다. 키릭스는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너절한 간식거리를 바라보는 눈으로 그들 이게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를 알려줄게. 참고 해.” “뭐?” “첫 번째, 상황이 안 좋았다.” “무슨...” “두 번째, 상대가 안 좋았다.” “이런 미친 새끼!” “나라면 좀 더 길고 점잖은 대사를 선택했을 거야. 왜냐하면 그게 네 유 언이니까.” 그 순간 강도의 두 다리 사이에서 치솟은 키릭스의 검이 머리끝까지 몸을 정확히 절반으로 갈랐다. 웅장한 분화구처럼 시뻘건 액체가 터졌다. 그 기 이한 ‘분수’를 목격한 강도들은 방금 자신의 동료가 두 조각으로 분열되 었고 곧 자신들도 같은 상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키릭스가 환하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자아, 모두 행복하게 해줄게.” 제 27화. 여왕님과 함께 1. 이야기를 모두 들은 쇼탄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심란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키스 경과 카론 경의 사랑의 도피? 어째서 결론이 그래?” 그러나 랑시는 진지했다. “아니 이건 확실해.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어느 쪽이 먼저 고백했냐는... 꺄악! 왜 때려!” “고장 난 기계는 때려야 정상으로 돌아온다지?” “난 원래 정상이야! 지극히 노멀하다고!” “드레스 입고 그런 말 해봐야...” “남의 취향 간섭하지 마! 남의 취향 간섭하지 마! 남의 취향 간섭하지 마!” 쇼탄은 빽빽거리는 랑시를 손바닥으로 밀어버렸다. 하늘이 형 무라사에게 막강한 힘을 내려준 대가로 그 뒤에 태어난 조슈아에게는 부작용만 선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쓸쓸한 생각마저 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키스 덕분에 쇼탄은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 에 없었다. “아아, 정말 키스 경 왜 안돌아오는 거야? 왕국이 안팎으로 어수선한 이 판국에!”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쇼탄을 빤히 바라보던 루이가 툭 말을 던졌다 . “걱정돼?” “당연하지!” “정말로?” “아무리 무책임에 게으름뱅이라도 어쨌든 대장은 대장이야.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 “그래? 잘 생각해 봐. 네 차용증서, 키스 경이 가지고 있어. 키스가 사 라지면 네 빚도 사라지잖아?” “...!” 순간 움찔한 쇼탄의 귀에 루이가 음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방금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네 눈이 더러운 탐욕으로 반짝이는 것을 봤어.” “차, 착시입니다아.” 루이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쇼탄의 두 뺩을 잡아 강제로 돌렸다. “날 똑바로 보고 말해, 이 저주받은 영혼.” “자아아들 논다, 얼간이 듀엣. 네놈들은 세계 멸망의 날에도 그러고 있 을 거다!” 키스 경의 소파 위에 올빼미처럼 웅크려 있던 지스는 춤바람 난 며느리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눈빛으로 그들을 흘겨봤다. 쇼탄을 손바닥을 비비며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안건을 꺼냈다. “농담이 아냐. 이 상태에서 전쟁 나면 우리 모두 전방으로 끌려간다고! 어쨌든 우린 아쉬울 땐 기사니까! 적어도 왕실이 우리한테 위문 공연을 시 키진 않을 거야. 다 죽을지도 몰라!”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크리스가 두 손을 꽉 쥔 채 말했다. “슬퍼하실 것 없어요. 신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가볍게 여겨 천국으로 인 도하실 겁니다.” “저어 크리스티앙 신부님. 우리 아직 안 죽었는데요?” “언젠가는 죽잖아요!” “... 가끔 난 니가 진짜 무서워.” 오르넬라를 만난 뒤부터 묘하게 위험해진 폭언의 성직자, 크리스티앙이었 다. 이 와중에도 혼자 속세를 떠난 분위기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루시온을 본 루이가 살짝 빈정거렸다. 아무래도 서만들은 이런 모습에 심사가 뒤틀리기 마련이다. “루시온 경은 좋겠네. 집안도 빵빵하니까 전쟁이 나도 가문응로 돌아가 면 되잖아?” 그러자 루시온 경은 귀찮은 파리 내쫓듯 대꾸했다. “전 이미 입대 신청했습니다. 전방으로.” 루시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었다 . 말하자면 ‘난 너희와는 달리 진짜 기사란 말씀이야!’라는 귀족의 얄미 움이랄까. 루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재수없는) 귀족의 표본 루시온을 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아니 그냥, 눈부셔서.” 또한 루시온 옆에서 말없이 ‘군사학 입문’을 읽고 있는 레녹 역시도 입 대 신청을 했다. 빛나는 그들 맞은 편에 있는 쇼탄과 루이 주변에서는 어쩐 지 조잡한 오오라가 쓸쓸히 흐르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넌 왜 며칠 전부터 넋 나간 사람 얼굴 하고 있는 거야, 미온 경?” 생각에 잠겨있던 미온은 쇼타이 어깨를 툭 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덕분에 더 깜짝 놀란 쇼탄은 뒤로 슬금슬슴 물러서며 미온을 응 시했다. “전쟁나면 살길이 막막해져서 고민하는 거냐? 걱정하지마. 넌 다시 호스 트 하면 갑부가... 미안.” 농담이라도 해보려던 쇼탄은 미온의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것을 알고는 입 을 다물었다. 쇼탄은 자신을 바라보는 미온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것을 알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키스가 남긴 편지를 읽은 다음부터 미온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있다는 것을 쇼탄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동료들에게 항상 기운차던 미온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곧 루시온이 책을 내려놓고 말했다. “엔디미온 씨.” “...”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름에 반응한 미온이 이번에는 루시온 경을 쳐다봤 지만 빛이 없는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작은 불씨 하나 남지 않은 벽난로 의 냉기 같았다. “엔디미온 씨. 제 말 들립니까.” “...” 결국 보다 못한 지스킬이 그에게 소리치며 다가갔다. “뭐라고 말 좀 하란 말이야! 멍청아!” 루시온은 한 대 후려치려는 지스킬의 팔을 잡아챘다. “이거 놔! 저런 바보는 내가...” 그 순간 지스는 흠칫 놀라며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소리와 함 께 루시온의 주먹이 미온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었다. 모두는 난생 처음 보 는 진짜 귀족 루시온의 ‘폭행’에 입을 쩍 벌렸다. 루시온은 주저앉은 미온의 멱살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잡아 일으켰다. “엔디미온 씨, 잘 들으세요. 지금 당신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말하기 싫다면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게 무엇이든 체념하진 말아 주시기 바랍니 다. 당신은 언제나 그래왔지 않습니까?” “루시온 경.” 미온은 며칠 만에 처음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루시온은 그를 잡은 손을 풀며 말했다. “하지만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언제라도 말하세요. 기다리고 있 겠습니다.” “...고마워요.” 미온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를 지켜 본 루시온은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아 책을 들었다. 쇼타이 소곤거렸다. “박력 있는데?” “역시 백작님이셔.” 루이가 맞장구치며 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의지를 잃지 않았던 동료 미온 에 대한 걱정은 매한가지였다. 이들 중 누구라도 미온이 도움을 원한다면 전력으로 도와줄 것이다. 설령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하더라도 거절할 사람 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미온 스스로 해결할 수밖 에 없는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것이 엔디미온의 업이었다. “야! 키스!” 그 순간 문이 박살나며 거구의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리고는 주변 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를 부득 갈았다. “역시 안 돌아왔군. 이 망할 놈.” 그 사람을 본 랑시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 나 아직 안 위험해졌는데?” 견백호 무라사 랑시는 당장이라도 키스를 두들켜 패버릴 것 같은 기세로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들을 바라봤다. “그 여우같은 자식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한 겨울인데도 탄탄한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새하얀 늑대가죽 옷을 입은 모습부터 범상치 않은 근육질의 남자가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처럼 으르렁거 리고 있으니 모두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신의 기백이고 나발이 고 다 소용없는 사나이가 한 명 있었다. “우리도 그게 궁금하다! 그리고! 사회에 불만 있어? 왜 멀쩡한 문짝은 때려 부수고 난리야!” 랑시가 빽 소리를 치자 뱀 앞의 개구리처럼 움츠려든 무라사가 머리를 긁 적거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아니, 나는 그냥 툭 쳤는데 문이 멋대로...” “자꾸 곰탱이 같은 소리 할래?” “... 미안.” 인간의 먹이사슬이 꼭 힘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 었다. 본전도 못 찾은 무라사는 또 헛걸음을 했다고 투덜거리며 리더구트를 나갔다. 그 때 뭔가 결심한 랑시가 그를 뒤따라갔다. “형!” 무라사는 의아한 얼굴로 동생을 바라봤다. “부탁이 있어.” “부탁?” 4대 아신위 중 하나이며 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견백호 무라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동생을 바라봤다. 자기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형 따윈 꼴 도 보기 싫어! 집에서 나가!’라는 강렬한 ‘부탁’ 이후 동생이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 “뭐든지!” 이 일을 계기로 드디어 동생과 화해할 수 있다는 들뜬 기분에 무라사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비유는 아신에게는 실례지만 - 조슈아에 겐 꼭 거대한 강아지가 꼬리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동생의 ‘부 탁’을 들은 무라사는 예정과는 달리 당장 ‘예스!’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 다. 설령 조슈아가 ‘날 이 나라의 여왕으로 만들어 줘!’라고 했더라도 신분 과 성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만들어 줬을 정도인데 말이다. “미, 미안하지만 그 부탁만큼은...” “이것만 들어주면 형을 따라 갈게. 왕국을 떠나도 좋아.” “정말?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부탁은...” “절대 안 된다는 거야?” “그것만은...” 조슈아는 작은 주먹으로 무라사의 복부를 퍽 때리며 소리쳤다. “됐어! 형 따위는 다시는 안 볼 거야!” 무라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동생을 울상이 되어 바라봤다. 2. 지금 베르스 왕실의 분위기를 딱 두 글자로 표현하자면 ‘개판’이었다. 전쟁을 앞둔 어전 회의의 출석률이 절반도 안 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 다. 그나마 참석한 절반도 그리 충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게 쇼메를 받아준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이미 전 재산을 타국으로 빼돌린 관료가 소리쳤다. 피둥피둥한 살집 덕분 에 가만히 있어도 씩씩거리는 그 남자는 채무자를 대하는 빚쟁이처럼 만두 국왕을 흘겨봤다. 예전 같으면 삼족의 머리가 날아갈 불경죄였지만 도리어 쩔쩔매는 쪽은 국왕이었다. “조,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이번에는 다른 관료가 화의 석상을 쾅 때렸다.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이오타가 당장이라도 쳐들어 올 마당에 교황청까지 등을 돌렸으니,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이들이 뭍에 오른 생선처럼 펄펄 뛰는 이유는 교황청의 발표 때문이었다. 니샤에서 쇼메가 저지른 일로 기분이 상할 때로 상한 교황은 일방적으로 베스르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베르스 교구의 철수와 더불어 오르넬라 성녀의 교황청 귀환을 명령한 것이다. 지금 오르넬라는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교황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것은 교황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이러니 평생 강대국의 눈치만 보고 살라온 베르스 관리들이 세상 무너진 듯 발광하는 것도 당연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지금이라도 쇼메를 이오타에 돌려보내고 이자벨 섭 정과 레오 3세에게 국왕 전하께서 직접 가셔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사과하 는 것! 이 나라가 살아날 길은 그것 뿐입니다.” 치욕을 해결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 그 관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묘안 이라도 생각해 낸 듯 스스로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더 한심한 주장도 있 었다. “차라리 이 참에 왕권을 포기하고 이오타에 복속되는 게 현명합니다! 우 리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인다면 현명한 이자벨 섭정도 자비를 베풀어 우리 를 용서할 겁니다.” 이쯤 되면 일종의 광기였다. 한없는 무지와 추한 생존욕구가 한데 뭉쳐 고약한 악취를 뿜어대는 흉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두 자로 줄여 ‘매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고르 공! 위고르 공도 한 말씀 하세요!” 관리들은 무사안일주의의 상징이자 처음부터 쇼메를 싫어했던 위고르를 부추겼다. 여기저기서 채근당한 위고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위고르, 전하께 소견을 올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소인은 위험 한 상황을 싫어합니다. 가능하다면 이 나라의 국권을 바쳐서라도 목숨을 부 지하고 싶습니다. 굴욕저이라도 좋으니까 이 나라를 살릴 묘안이 나온다면 그걸 지지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합리적인 사고예요!” 저마다 위고르의 말을 거들고 있었다. 위고르를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바 라봤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봐도 댁들의 한심한 머리로는 그 묘안이 안 나올 것 같습니다.” “지금 뭐라고...” 관리들은 귀를 의심했다. “우리가 백기를 들고 제발 쳐들어오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들 이오타가 받 아들일 것 같습니까? 아니오, 들은 척도 안할 겁니다. 왜냐하면 원하면 언 제라도 이 나라를 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오타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 해도 쓰러트릴 수 있는 약골, 그게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이 나라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의미입니까!” “가치야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남부와 북부로 뻗어나갈 수 있는 교두보 로서의 군사적 가치입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이오탄가 이 나라를 침 략하려는 이유는 이 조막만한 나라에서 뭔가 뜯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를 발판으로 삼아 세계전쟁을 벌이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와 화평을 맺고 물러설 것 같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철저하게 부숴버린 다음 이 위에 전진기지를 세울 겁니다.” 위고르는 얼마 전 이오타가 준비하고 있는 군수물자를 확인하고 졸도하는 줄 알았다. 그 엄청난 수치의 전쟁자원은 약소국 베르스와 싸우기 위한 준 비로는 너무도 거창한 양이었던 것이다. 이오타는 분명 세계와 싸울 기세였 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베르스는 ‘그냥 지나가는 길목’ 정도였던 것이다 . 하지만 멍청한 인간일수록 최악의 상황을 무시하기 마련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 설마 세계를 상대로 싸울 리가 있겠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내걸고 불가침 조약을 제안한다면 분명 이오타도 받 아들일 것이외다.” “조건이라. 이오타의 군홧발에 이 나라가 짓밟혀도 좋다는 조건 외에 다 른 조건은 안 될 것 같습니다만.” “그건 과대망상이오!” 관료들의 기이한 낙관론에 위고르는 기가 찼다. 이자들은 지금까지도 미 키시온 제국이 분열되고 쇼메가 권좌에서 밀려나고 교황청이 우리나라를 적 으로 삼은 일련의 사건들이 모조리 ‘불행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발이 네 개고 꼬리를 흔들며 멍멍 하고 짖는 동물이 뭐냐고 물어봐 도 답을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위고르는 만두 국왕과 페르난데스 왕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주장을 정리했 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무사안일 주의는 바로 죽을 힘을 다해 맞서 싸우는 것뿐이라는 게 소인의 결론입니다 . 이상입니다.” 관리들은 위고르의 ‘배신’에 길길이 날뛰었다. “이 유서 깊은 왕국을 불바다로 만들 작정이오? 귀공의 애국심이 그리 부족한 지는 꿈에도 몰랐소!” “그런 거창한 건 꿈에 잘 안 나오지요.” 일일이 진지하게 대꾸하기도 지쳐버린 위고르가 ‘꺼져! 밥벌레!’ 라는 아이히만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땅이고 집이고 가족이고 모두 해외로 보낸 뒤라 자기 몸만 떠나면 가뿐한 관료들은 갑자기 애국지사로 돌변하며 땅을 쳤다. “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는지! 무능한 왕에 사리 분별도 모르는 간 신이 나라를 망치려 들다니!” “말조심하세요!” 앳된 목소리가 터졌다. 떨리는 페르난데스 왕자의 외침에 관료들은 도리 어 콧방귀를 끼었다. “왕국이 망하면 국왕 자리에 앉을 수 없어서 노하신 거니까? 따지고 보 면 왕자님의 감상주의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 아닙니까! 처음부터 이 럴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쇼메를 받아들인 일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서 가장 짜증나는 인간이 평소에는 눈곱만큼도 도움이 안되다가 꼭 문제만 터지면 ‘내 이럴 줄 알았어!“라고 지껄이는 유형의 인간이다. 이런 인간 에게는 밥도 먹이지 말고 하루 종일 구석에 세워둬야 한다는 것이 아이히만 의 지론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 람은 있었다. “이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신하가 왕한테 막말 해도 살려두고 말입니다.” “감히 누가!” 라고 관리가 돌아보는 순간 그의 말문이 막혔다. 그 정체는 예전 평화회 담 때 베르스에 온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자벨 섭정의 눈을 피하느라 예정보다 조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타이트한 검은 가죽 군복을 입고 있는 키르케 밀러스는 만두 국왕을 향해 정중하게 경례를 붙였다. 국왕은 그야말로 ‘버선발’로 키르케에게 뛰어 가 그녀를 영접했다. 국왕의 키가 그녀의 가슴에도 못 미친다는 점이 시각적으로는 그리 감동 적이지 못했지만, 북부 콘스탄트와 베르스 사이의 밀약을 전혀 모르고 있던 관료들에게는 실로 ‘감동’ 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감히 어전회의 중에 멋대로 여자가 들어오다니! 무례하구나! 썩 나가라!”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일갈을 날린 어떤 관료의 입을 위고르가 황급히 틀어막았다. “제발 그 무식한 입 좀 다무세요!” 관료는 위고르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대체 저 가슴 큰 여자가 누군데 이러는 겁니까!” “제가 당신이라면 4대 아신 중 하나인 분의 가슴을 품평하는 말은 꺼내 지 않았을 겁니다.” “...!” 국제 정세에는 초연할 정도로 무관심한 베르스 관리가 모르는 것이 당연 하다면 당연하겠지만 - 아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럼 저 여자가 바로 명주작?” “적현무야! 이 바보 자식아! 자꾸 그러다간 네놈 예언대로 이 나라가 쑥 밭이 된다고!” 혈압이 치솟은 위고르가 쩌렁쩌렁 소리치고 말았다. 순간 키르케의 눈썹 이 움찔했다. ‘가슴’과 ‘명주작’ 이라는 두 단어만으로도 당장 능지처 참을 당해 마땅했지만, 그녀는 바닥을 흘낏 보고는 꾹 참아냈다. 제법 괜찮 아 보이는 카펫이 피로 물드는 것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왕실에 나타난 자가 적현무라는 것을 알게 된 관리들은 실은 국왕이 엄청난 빅카드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북부 콘스탄트와 밀약을 성사시킨 장본인은 쇼메와 아이히만이었지만 국왕과 페르난데스, 오르넬라, 카론, 엔디미온을 제외 한 모두에게 비밀로 했기 때문에 이제야 그 기적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관료들은 방금 전 자신들이 쏟아냈던 폭 언들을 어떻게 주워 담을 수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거 가만있어 봐라?’ 순간 금발 머리를 한 올 흐트러짐도 없이 깔끔하게 넘긴 엘리트 관료 위 고르의 머릿속에 커다란 그림이 그려졌다. 그는 분명 머리회전이 빠른 자다 . 최근 뭔가를 뒤에서 꾸미는 것 같던 아이히만과 어쩐지 조급해 보이던 쇼 메 그리고 갑작스러운 교황청의 변심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전하! 어째서 전하의 가장 믿을 만한 충신인 제게 이 사실을 숨기셨단 말입니까!” 위고르는 버림받은 애첩처럼 처절하게 국왕에게 매달렸다. 다른 것은 몰 라도 아이히만은 알고 있는데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참 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허허허허. 이런,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귀공을 의심한 건 아니오. ” 그렇게 말하는 국왕의 눈은 분명히 의심하고 있었다. 악명 높은 제 7무장전투여단의 제복을 입은 부관으로부터 공문서를 넘겨 받은 키르케가 국왕에게 그것을 건넸다. “이것은 제가 북부 콘스탄트 국왕 바쉐론 전하의 전권대리인임을 증명하 는 서류입니다.” 국왕은 긴장감에 몸이 굳었다. 말 그대로 북부 콘스탄트의 우두머리가 자 기 앞에 서 있는 것과 다름 없었다. 본격적인 군사동맹의 긴호탄이었다. 키 르케는 딱 부러지는 군인의 말투로 말했다. “그럼 예정대로 나 키르케 밀러스 북부 콘스탄트 왕국군 중장이 베르스 국왕으로부터 북부 사령부 합동작전국 합참지휘본부 총참모장의 권한을 인 계 받고자 합니다. 또한 베르스 국왕과 왕족을 제외한 모든 관리와 귀족, 평민, 군인에 대한 통제권과 생사여탈권을 위임 받고자 합니다. 이의 없으 십니까?” 그 거창한 직책은 사실상 국왕의 모든 고유 권한을 그대로 이양받는 것이 다. 그걸 위임하게 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키르케의 명령이 곧 베르스 국 왕의 명령이 된다. 바쉐론 국왕은 결코 의라나 정의 때문에 베르스를 돕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눈엣가시 같던 교황청과 이자벨 섭정을 이 기회 에 꺾어버리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오타가 베르스를 점령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또한 본국이 있는 남부 사령부는 바쉐론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북부에는 키르케를 파견해 지휘토록 함으로써 철저하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 든 것이다. 분명 동맹국끼리 공평한 위치는 아니었지만 베르스는 그걸 투정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 “만약 거부하신다면 즉시 동맹을 철회하고 모든 병력을 본국으로 회군 시킬 것입니다.” 키르케의 말에 만두 국왕은 무거운 표정으로 왕관을 벗었다. “짐은 이 전쟁이 끝나는 대로 왕위를 내놓을 생각이오.” 그 난데없는 발표에 관료들은 물론 키르케마저도 놀랐다. 국왕은 오래 전 부터 준비해 둔 말을 또박또박 꺼냈다. “그리고 나의 아들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에게 이 왕관을 씌워줄 것이오 . 난 비록 우둔하여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왕이 아니었지만, 나의 아들은 분 명 이 왕국을 국민들이 갈망하던 모습으로 바꿀 것이오. 모든 나라에게 존 경받아 마땅한 왕국으로! 그러니 짐에게는 내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마음 껏 통치를 할 수 있도록 이 나라를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소.” 그 말을 마친 국왕은 키르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두 가지 의지가 보 였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의지와 전쟁이 끝난 뒤 결 코 왕권을 북부 콘스탄트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 그것은 일평생 다른 나 라에 고개만 수이고 살아온 국왕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짜낸 일생일대의 용 기였다. “이의는 없소. 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베르스를 지키고 싶소!” “그럼 확실히 인계 받았습니다.” 키르케는 짧게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 총을 꺼냈다. “무, 무슨 짓이오! 동맹하자마자 배신이라니 너무 빠르오!” 방금 전까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멋있어 보일 수도 있었던 만두 국왕은 총을 보자마자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키르케는 ‘역시 이놈 의 나라는 뭘 해도...’ 라고 눈매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첫 번째 업무를 시작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항상 총을 들고 업무를 하시오? 아이히만이 좋아하겠구려.” 국왕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키르케는 총을 들고 관료들이 모여 있 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잠시 후 국왕은 정말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키르케의 총구가 불을 뿜었 는데 그 목표물이 아까 전 자신의 가슴 크기를 측정하고 명주작과 착각했던 그 관료의 머리였기 때문이었다. “우아아아아악”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이마에 구멍이 나는 것을 보자마자 위고르가 용수철처럼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왕가슴이라고 했다고 쏴죽이다니! 그건 칭찬인데!” 그러나 곧 키르케의 짜릿한 눈빛과 마주친 위고르는 ‘열 번 죽어 마땅하 지요. 그럼요’ 라고 웅얼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키르케는 골치가 지 끈거리는 듯 총신으로 미간을 툭툭 치다가 말했다. “가슴 때문이 아닙니다. 뭐 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부관이 건네 준 종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자는 이오타와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에서 배신은 즉결처분 대상입니다. 그리고 정보부가 조사한 결과, 이 사람 외에도 적과 내통하는 분들이 또 계시더군요.” 그녀는 서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그 쥐새끼들의 명단입니다. 아시다시피 방금 전 저는 여러분들 의 생사여탈권을 인계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여기 이름이 적혀 있는 분들을 차례차례 쏴죽이겠습니다.” 관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첫 번째 업무가 처형이라니! 뭐 저런 무지막지한 여자가! 라는 표정들이 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엔디미온이 있었다면 어째서 키르케를 ‘피의 마녀 ’라고 부르는지 좀더 무서운 예를 들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매정하니까, 죽이기 전에 기회를 드리도록 하지요. 자수해서 광명 찾으실 분께서는 조용히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그야말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이어 숨 막히는 침 묵이 몰려왔다. 그 정적 속에서 눈치를 보단 관료들이 하나 둘 씩 손을 들 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위고르는 입이 쩍 벌어졌다. 도합 여섯 명! 전체의 반수에 가 깝다. 생각보다도 훨씬 많았던 것이다. 마치 옷장을 뜯어 냈더니 그 안에서 수백 마리의 바퀴벌레가 튀어나왔을 때의 느낌이랄까. 위고르는 왜 자신에게 북부 콘스탄트와 동맹 맺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믿을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면 우리 계획을 이자 벨이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위고르는 이 정도의 인 원을 구워삶은 이자벨 섭정의 위력에 소름이 끼쳤다. 또한 무엇보다 자신은 손을 들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런, 여섯 마리나 되는 줄은 몰랐네요. 이토록 잘 협조해주시리라고는 미처 예상 못했습니다.” 키르케는 매력적인 웃음을 보이며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에 놨다. 그것 을 본 내통자들의 표정이 또 한 번 바뀌었다. 그 새하얀 종이 위엔 아무것 도 적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끌어내.” 키르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애꾸눈 안대를 한 부관이 손짓을 했고 곧 바로 무장전투여단 소속의 기계덩어리 같은 병사들이 그들을 잡아 일으켰다 . 관료 중 하나가 질질 끌려가며 애절하게 말했다. “야, 약속대로 우린 살려주시는 거죠?” 그러자 키르케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약속?” “이 마녀어어어어!” 키르케가 온 지 십 분 만에 이곳의 인구밀도가 절반으로 줄게 되었다. 키 르케는 배신이나 하는 쓰레기들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어투로 부관에게 명령했다. “총알도 아깝다. 손발을 묶어서 모조리 생매장해 버려.” 물론 키르케가 그런 잔인한 처형 방식을 택한 것은 취미가 아니라 본보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고관대작 여섯 명이 전염병 걸린 되재처럼 파묻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오타와 내통할 용기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반대했다. “잠깐 기다려주시오, 이자벨 공.” 키르케는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홍안의 미소년이 자기 앞에 나서자 태도가 돌변했다. “무슨 용무이십니까. 어여쁜... 아니, 총명하신 왕자님.” 키르케는 분명 이 작고 귀여운 왕자가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될 거라 확 신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잔혹한 처사요. 재고를 부탁들이오.” 물론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키르케는 ‘햄을 만드는 일은 돼지의 정수리를 커다란 망치로 후려치는 것부터 시작해. 망치질을 하기 싫다면 최소한 먹으면서 불평은 하지 마!’ 라고 삭막하게 쏘아붙였거나 아니면 따 귀를 날렸겠지만, 미소년 왕자님에게는 확실히 대우가 달랐다. “어머나, 왕자님. 그건 그냥 위협이었습니다. 제가 진짜로 그럴 리가 있 겠습니까?” 키르케는 페르난데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부관에게 ‘빨리 가서 생매장시키라니까!’라는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직속상관의 성추행을 지켜 보던 애꾸눈 부관은 왕자의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다면 진짜 먹혀버렸을지 도 모른다는 무서운 상상을 하며 회의실을 나갔다. “키, 키르케 공. 방금 뭔가 신호를 보낸 것 같은데...” “착각입니다! 그럼 다음 업무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르케는 짜증을 터트 렸다. “혹시 이 왕실 앞에 철로가 깔려 있나요, 왕자님?”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잊을 만하면 다시 시끄러워져서 말입니다.” 그 순간 거창한 굉음과 함께 박살난 문짝아 날아올랐다. 그리고 키르케의 바닥난 인내심은 그 문에서 걸어들어 오는 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게 만 들었다. 키르케의 특제 탄환이 발사되었다. “우앗! 따가워!” 총알은 정확히 무라사의 이마를 맞고 튕겨나갔고 무라사는 얼굴을 부여잡 고 바닥에 쪼그리고 앚아 신음소리를 냈다. “아우아우우. 이게 무슨 난데없는...” 점점 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무라사는 벌떡 일어서며 고막이 찢어 져라 고막을 내질렀다. “어째서 여기는 들어올 때마다 총을 쏘는 거야! 이 나라 인사법이냐?” 키르케는 뜬금없이 나타난 무라사를 보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문짝 부수고 들어오는 놈한테 팡파르라도 울려줄까? 그러니까 네 가 짐승인거야. 발정기 맹수의 행동패턴과 뭐가 달라?” “으이구! 왜 여자들은 나만 보면 똑같은 잔소리를... 아니, 하난 남자지 . 됐어! 내 사회성이 이 모양이라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나! 마녀.” “먹을 거 구걸하러 온 거면 볼기짝을 때려주기 전에 썩 꺼져. 축생.” “내가 무슨 거지냐!” “진청룡이 했던 네 이야기 들어보면 비렁뱅이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단 어가 없던데?” “그, 그자식이 하는 말은 아무리 사실이라도 거짓말이야!” “... 너 언어 장애 있냐.“ ”닥쳐! 너하고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없어!“ ”나도 질 나쁜 강아지하고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 꺼져!“ ”흥! 나가라고 안 해 도 내 발로 나갈 생각이었어!“ 무라사는 콧방귀를 끼며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키르케가 팔짱을 끼며 미 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저 자식 왜 온거야?” 그리고 잠시 후 무라사가 뛰어 들어왔다. “아아, 깜박했다! 내가 여기 왜 왔냐면!” “...” 키르케는 제발 다음 아신위를 뽑을 때는 지능도 심사 기준에 넣어줬으면 좋겠고 생각하며 심란한 얼굴로 무라사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표정도 바뀔 수 밖에 없었다. “베르스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너 지금 너무 굶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단! 이 싸움이 끝날 때 까지만! 전쟁이 끝나면 난 주저 없이 동생과 함 께 이 왕국을 떠날 거야.” 키르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만년필의 뭉툭한 끝으로 붉은 아랫 입술을 콕콕 찌르던 그녀는 곧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 었다. “솔직히 말할게. 네가 돕는다면 나야 두말없이 환영이야. 제 지능지수는 네발짐승과 비슷할지 몰라도 어쨌든 전투력만큼은 확실하니까. 하지만 궁 금한 것은, 평생 어떤 나라도 선택하지 않겠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치 던 네 녀석이 갑자기 이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나섰냐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마키시온 제국 외에도 견백호 무라사 랑시를 자기 나라 에 두기 위해 러브콜을 보낸 나라는 많았다. 이오타와 콘스탄트 역시도 마 찬가지였다. 4대 아신 중 유일하게 누구도 섬기지 않는 그를 탐내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라사는 그 어떤 엄청난 제안도 일언지하 에 거절했다. 결코 권력의 도구로 자신의 힘을 쓰지 않겠다는 강철같은 철 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는 머리 좋은 키르케마저도 짐 작할 수가 없었다. 무라사가 빨개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헤헤. 그냥 내가 누구보다 동생을 사랑하는 형이라는 것만 말할게. 그 이상은 묻지 말아 줘.” “...” 베르스가 북부 콘스탄트와 적현무 키르케 밀러스의 전폭적인 지원과 더불 어 견백호라는 뜻하지 않은 막강한 전력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쟁의 양상 은 예측불허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3. “잡초가 뽑혔습니다.” 보고를 받은 이자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케가 예상보다 훨 씬 빨리 베르스 왕실에 심어둔 ‘도청장치’들을 제거한 것에는 조금 놀랐 지만, 이미 이용할 만큼 이용해 먹은 녀석들이었고 게다가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는 허섭스레기들이었으니 오히려 키르케가 내버려뒀으면 이자벨 쪽에 서 그 속물들을 제거할 요량이었다. 그러니 화가 날 일도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녀의 허를 보기 좋게 찌른 칼날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쇼메였다. 그 녀는 그가 권좌에서 밀려나면 힘을 못 쓰게 될 것이라 과소평가한 것을 후 회했다. 좀더 단호하게 제거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자책했다. 설마 베르스로 가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눈을 속여 북부 콘스탄트와 밀약 을 맺고 교황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물 론 당장 그것이 치명적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곪아버린 상처처럼 내 버려두면 둘수록 점점 더 커다란 독소가 될 것이 분명했다. 소독이 필요했 다. "대공으로부터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그녀의 또 다른 두통은 아이히만이었다.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은 마라넬로 황제를 몰아네고 제국이 붕괴되어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으로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 협력해 왔다. 비밀조직 인코그니토 역시 아이히만의 도움 이 없었다면 만들 수 없었다. 베르스 소도시인 셀른의 시민 전체를 키스를 만들기 위한 생체 에너지로 제공한 사람도 바로 아이히만이 아니었던가. 아 이히만이 확고한 조력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악마 같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 이다. 그 이후 이자벨도 아이히만을 신뢰하게 되었지만, 최근 그런 그에게 이상 한 조김이 보이고 있었다. 딱히 무슨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쇼 메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자벨의 의심을 받기에 는 충분했다. 아직까지 쇼메는 아이히만의 상대가 되질 못한다. 속을 다 꿰 뚫어보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쇼메의 계략을 막 지 못했다는 것은 그 강철 같은 노인이 노쇠했거나 방심했다기 보다는 일부 러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긴 것이다. 이자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 십여 년에 걸쳐 자신을 도와준 것 이 모두 그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예감이 들었다. 단지 지나친 비 약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게 사실일 때의 피해였다. 아이히만이 이중 첩 자라면 사태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도리어 이쪽이 노출된다. 뱃속에 독 을 키운 격이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자벨은 안경을 벗은 뒤에 의자에 깊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이히만 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어지면 이 싸움의 승률을 적잖게 하락한다. 하지만 그의 힘이 강한 만큼 적이 되었을 경우 역풍은 상상할 수도 없다. 무엇보 다 그는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떴다. “지금 리젤은 어디 있지?” “베르스 근교에 잠복 중입니다.” 이자벨은 결정을 내렸다. “리젤에게 타전해라. 임무는...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와 쇼메 블룸버그 암살.” 부하는 적잖게 당황했다. 쇼메는 그렇다 쳐도 대공은 조직의 간부 중 하 나였다. 그런데 제거라니? “그리고 ‘그것’을 회수하라고 전해라.” “그것... 이라니요?” “그렇게만 말하면 알 거다. 지금 당장 실행해.” “아, 알겠습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경례를 붙인 뒤 리젤에게 지령을 내리기 위해 텔레마코스 센터로 뛰어갔다. 잠시 후 집무실 구석 소파에 누워 있던 키릭스가 뱀처럼 말했다. “이젠 아무도 못 믿나 보네?” “처음부터 아무도 믿지 않았어.” “죄가 클수록 의심도 커진대.” “흥. 네가 그렇게 윤리적인 인간인지 몰랐군. 하지만 난 죄를 짓고 있는 게 아니야. 인류를 진화시키려는 것뿐이야.” 키릭스는 그 말에 커다랗게 웃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새빨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손을 댄 것 자체가 죄악이야. 몰랐어?” 4. 쇼메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댕겼다. 테이블 옆에는 오래된 흔적이 역 력한 아이히만의 담배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담배를 문 뚱한 모습이 무척 이나 어색했다. “켁. 뭐야 이거. 이딴 걸 피우면서 잘도 오래 사는군!” 목구멍에 불덩이가 들어간 것 같은 지독한 이물감에 놀란 쇼메는 대번에 담배를 뱉고는 콜록거렸다. 본래 엽궐련은 연기를 삼키면 안 되는데, 생전 처음 담배를 피워보는 쇼메가 그걸 알 리 없었다. 아이히만이 옆에 있었다 면 ‘넌 사탕이나 물어라’ 라면서 박장대소 했을 것이다. “제기랄 늙은이. 끝까지 함정을 파놓는구만!” 멋대로 대공의 담배를 훔쳐 핀 주제에 애꿎은 화풀이였다. 사실 돌려줄 생각이었지만 자기 입으로 사제의 연을 끊어 놓고 금방 또 찾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머쓱한 노릇이다. 그래서 이참에 담배나 배워볼까? 라고 피워봤지 만, 근심걱정을 단번에 날려버린다는 광고 회사의 광고와는 전혀 달리 깜짝 놀랄 정도로 맛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딴 걸 피우니까 속이 시커먼 생각만 하지!“ 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심술만 늘어났다. 쇼메는 다음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낡은 가죽 담배 케이스를 서랍에 넣었다. 그는 왕실에서 마련해준 작은 사무실에 혼자 있었다. 어전회의에 는 참석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키르케가 주도하고 있을 테고, 그걸 손가락 빨며 지켜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잠시 쉬고 싶었다. 예전처럼 신분을 속이고 유 흥가를 들락거릴 수야 없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단 한 시간만이 라도 마음을 놓고 잠드는 것으로도 족했다. 일면 시건방져 보이는 외모의 미남자는 테이블 위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 았다. 누가 쓰던 책상이었는지 해묵은 잉크 냄새가 코끝을 적셨다. 딱딱한 의자에 딱딱한 책상이었지만, 이 왕국에 온 뒤 가장 편안한 안락감에 사로 잡힌 그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쇼메 블룸버그님 계십니까.” “에이 씨!”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쇼메는 테이블을 쾅 때렸다. 이 방에 달라붙 어 있는 '격무의 정령‘ 같은 것이 자신의 휴식을 어떻게든 방해하고 있다 는 망상마저 들었다. “머야! 들어와!” 이오타의 왕자일 때나 여기서나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어째서 다짜고짜 성질을 내는지 영문을 알 수 없던 시종은 황망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저어, 이것을 블룸버그님께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아이히만 공작 나리이십니다.” 대공이? 쇼메의 굳은 시산이 시종이 들고 있는 검은 봉투에 꽂혔다. 단단 히 밀봉한 봉투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적어도 지금까지 자신을 속인 것을 사 과하는 눈물의 편지는 아니리라. “가져와.” 그 봉투를 받은 쇼메는 한동안 열어보지 않고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고대 유적을 발굴하던 중에 나온 의민의 상자를 대하는 것 같았 다. 뭐가 들어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그랬다. 수십여 장의 서류가 들어있음 직한 그 검은 봉투 위에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설마 열면 폭발하진 않겠지.’ 어쨌든 열어보지 않으면 영원히 모른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봉투를 뜯 었다. 예상대로 그것은 글씨로 빼곡히 덮여 있는 스물다섯 장의 서류였다. 어떤 도장이나 사인도 없는 것으로 봐서 공문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쇼메는 그 품위 있는 필체가 아이히만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 다. 낭비하는 시간이라고는 1초도 없는 아이히만이 스물다섯 장이나 되는 종이에 손수 빽빽이 채운 기록이란 대체 무엇일까, 쇼메는 불길한 동굴을 탐험하는 기분에 사로잡혀 그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몇 장을 넘겼을 때 쇼메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설령 봉투 안에 진짜 폭탄이 들어 이었어도 지금보다는 덜 놀랐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쇼메는 말을 흐리며 종이를 떨어트렸다. 그 종이 위에는 ‘인코그니토’ 라는 생소한 단어가 유달리 많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아이히 만에게 가야만 했다. 그의 멱살을 잡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자기가 믿을 줄 알았냐고 고함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이히만이 결코 스물 다섯 장에 달하는 장대한 허풍이나 늘어놓는 한가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5. 쇼메에게 서류를 보낸 아이히만은 자신의 사무실을 나와 부하들이 자신에 게 ‘공포의 결제’를 받기 위해 수만 번도 넘게 오르내려야 했던 낡아빠진 계단을 내려와 행정부 본채 1층에 도착했다. 퇴근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업무의 열기가 끓어오르는 그곳은 시장통을 넘어서서 전쟁통에 가까웠다. 추상같은 비상근무 발령 이후 행정 부 소속 전원이 주말도 휴일도 없이 매일 매일 철야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다. 피를 토하는 강행군이지만 전쟁을 앞둔 시기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들 수고하네.” 아이히만의 드문 격려에 백여 명의 행정요원들은 일시에 하던 일을 멈추 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실 내에서 가장 악명 높은 부서로 통하는 행정부는 일종의 군대 같았 다. 아이히만이라는 카리스마적 사령관이 지휘하고 펜과 서류로 전쟁을 벌 이는 베테랑 부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결코 도망 치고나 투정부리는 사람이 없는 이유가 ‘철혈대신’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 때문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그 충성스러운 ‘전사’들은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자신들의 사령관을 바 라봤다. 보통 이렇게 나타났을 때는 실로 굉장한 명령을(앞으로 한 달간 집 에 갈 생각 하지 말게, 같은) 꺼내기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은 슬쩍 달력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한 번도 쉬질 못했지? 자네 아이들이 날 미워하는 것도 이해가 가.” 그는 답지 않게 농담으로 시작했다. “특별 휴가를 내려주지. 지금 이 시간 이후 24시간 동안 무조건 쉬게.” 행정요원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 말도 짓궂은 농담으로 들었던 것이 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히만 밑에서 십 년 넘게 일한 사람 조차 그의 입에 서 ‘휴가’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이 회중 시계를 꺼내며 말했다. “지금부터 딱 5분 주겠네. 5분 안에 모든 정리를 마치고 전원 행정부 밖 으로 나가게. 그 시간 이후에도 여기에 남아 있는 녀석은 평생 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알고 죽을 때 까지 가둬놓고 일을 시킬테니까. 자 4분 52초 남았네.” 요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럼 정말 이게 농 담이 아니란 말인가? 설마 그걸 믿고 나갔다간 일하기 싫은 놈으로 찍혀서 행정부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4분 31초 남았네.” “...!” 그제야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요원들은 어린애처럼 행복의 비명을 내지르며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온 손가락을 뒤덮은 잉크 자국 닦 을 새도 없이 일해 왔다. 그들이라고 쉬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휴식’인 것 같은 자신들의 상관이 대체 무슨 바람 이 불어 뜻 모를 휴가를 내줬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정리하고 나가라니까... 이것들이.” 아이히만은 서류만이 흩날리는 텅 비어버린 행정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 그리고는 씁쓰레 웃었다. “잘들 있게나.” 다시 자시의 방으로 돌아온 아이히만은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최고 급 나사로 지어놓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흑색 테일 코트였다. 그리고는 반듯이 꺾인 칼라에 새하얀 보타이를 매고 똑같은 색의 실크 장갑을 끼고 토끼털 펠트로 안감을 댄 검은 모자를 품위 있게 눌러썼다. 마지막으로는 금줄로 이어져 있는 회중시계를 재킷에 걸고 서랍을 열어 백금과 루비로 이 뤄진 결혼반지를 꺼내 왼손 중지에 끼웠다. 그리고 그는 그 반지 옆에 놓여 있던 작은 초상화를 꺼내 바라봤다. 당찬 얼굴의 미녀였다. 그녀가 죽은 지도 벌써 오십 년이 지났다. 그녀는 아이히만과 마라넬로가 마키시온의 황실교육기관 팔마시온에서 공 부할 때 그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던 선생이었다. 젊고 아름답고 진보적이며 더할 나위 없이 자신만만하던 여자였다. 명망 높은 귀족들과 수재들만 모인 팔마시오에서도 아이히만과 마라넬로는 가장 뛰어났으며 또 가장 위험했다 . 그리고 둘 다 위험한 자들의 여신 같은 그녀에게 빠져 있었다. 어떤 부분 에 있어서도 둘은 라이벌이 아닐 때가 없었다. 심지어는 애인에 대해서도 말이다. 분명 학생과 선생이 연인이 되는 일은 낭만적이지만 퇴학당하는 지름길이 기도 하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둘은 퇴학 따위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 었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게다가 자신의 얄미운 라이벌에게는 절대 빼 앗기고 싶지 않아서) 무슨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년여에 걸 친 필사적인 공략 끝에 그녀는 아이히만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 히만은 퇴학당했고 그녀는 해고당했으며 마나렐로는 천한 신분과 염문이 생 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황실로 끌려갔다. 아이히만이 베르스로 돌아온 지 일 년 후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그 때 나이 18세와 34세였다. 그리고 오년 후 그녀가 사망했다. 사인은 패혈증이 었다. ‘당신은 항상 나한테 말했지. 황후를 포기하고 날 선택했으니까 확실히 책임져야 한다고.‘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잉라는 마카시온의 황족인데다가 더없이 매력적 인 마라넬로의 열렬한 구애를 뿌리치고 자신을 선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히만은 항상 미안해했다. 그녀가 죽은 이후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은 적이 없지만, 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마누라쟁이. 그만 좀 웃어.” 아이히만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사진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 어 어느새 집무실에 들어와 있는 금발의 청년을 바라봤다. 놀란 기색은 없 었다. “늦었구만. 서류는 이미 나한테 없다네.” “...” 리젤은 눈가를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기분이 무척 안 좋을 때 보 이는 버릇이었다. 아이히만은 리젤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특무대를 보며 혀 를 찼다. “늙은이 하나 잡는데 두 명씩이나 끌고 오다니, 인력 낭비야. 내가 그렇 게 가르쳤던가?” “아이히만 대공. 전 당신을 크리스탄센 국장님 다음으로 존경했습니다. 어째서 배신한 겁니까.” 인코그니토의 간부이자 이 전쟁을 이자벨의 승리로 이끌어 줄 수도 있었 던 아이히만은 마지막 순간 그녀를 배신했다. 아니, 마지막이라기보다는 처 음부터 이중 첩자였던 것이다. 긴 시간에 걸쳐 그녀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그는 철저하게 숨겨져 있 던 인코그니토의 중심부로 파고들어서 키스와 키릭스, 마라넬로와 소드람, 베아트리체와 실험에 얽혀 있는 위험한 비밀을 알아냈고, 방금 전 그 모든 정보를 쇼메에게 넘겼다. 그런 자신을 이자벨이 살려둘 리가 없었다. 그녀 의 칼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되지도 않게 피할 바에는 그녀의 손에 죽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편 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셀른의 시민들을 몰살시켜야 했고 친구였던 마라넬 로를 죽이는 데 일조해야 했고 또 수많은 뒷공작들을 해야 했다. 그 시민들 을 죽여서 짜낸 에너지로 태어난 키스는 아이히만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설령 이자벨에게 의심 당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이히만은 후회하지 않았 다. 이상주의자들에게는 변명일 수도 있겠으나 현실이란 분명 이상과 달라,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더러운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누군가는 자기 손을 더럽혀야 하는데, 아이히만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건 자기 혼자로 족하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녀가 죽은 날 그렇게 결심했다. 그것은 숭고한 성찰도 지고지순한 정의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 남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관철하 는 신념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 배신했느냐 하면...” 아이히만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내가 그거라고 했거든.” 리젤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총을 꺼냈다. 아이히만은 점잖게 옷의 매무새 를 훑어본 뒤에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자, 끝내세.” 그 자신만만한 얼굴에는 추호의 후회도 없었다. 아이히만 그나이제나우 공작, 베르스 재무대신, 향년 73세.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인생이었다. 6. 쇼메는 서류를 든 채 행정부 본채로 뛰어가고 있었다. 불길한 직감이 엄 습했다. 그 서류에는 스승을 죽음을 예고하는 어떤 문장도 없었지만, 쇼메 는 아이히만이 죽음을 결심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망할 늙은이! 자기 혼자 폼 잡으면서 죽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내가 보란 듯이 당신을 능가할 때까지만 살아 있으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자기 목숨을 스물다섯장의 서 류와 맞바꾼 그 정신 상태를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비웃어주 려면 어쨌든 살아 있어야 한다며, 쇼메는 숨이 목끝까지 차도록 달렸다. 하 지만 아이히만이 항상 그에게 해왔던 말마따나 시간은 언제나 사람들의 사 정 따위 봐주지 않고 흘렀다. 쇼메는 행정부에서 불꽃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리젤이 혹 시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를 ‘정보’를 없애기 위해 저지른 방화였다. 그는 테러와 인멸의 전문가다. 시한장치가 작동하자마자 솟구친 불길은 삽시간 에 건물을 집어삼켰다. 죽을힘을 다해 뛰던 쇼메는 그것을 보며 조금씩 발 걸음을 멈춰갔다. 사방에서 터지는 사람들의 비명과 이리저리 뛰며 내지르 는 고함 소리 속에서 우두커니 선 쇼메는 화염에 잠겨 무너져가는 아이히만 의 성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는 처음으로 이자벨에게 분노했다. 7. 몰려든 인파들 속에서 쇼메를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데님 유니폼을 입고 깊게 눌러쓴 남색 모자 밑으로 풍성한 금발이 반짝거리는 그 청년은 너무 미남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왕실 노역부였다. 리젤에게 그런 변장 은 몇 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사냥감을 노리는 그 푸른 눈동자에는 살기조 차 없었다. 십대 초반부터 서류에 도장 찍듯 아무렇지도 않게 암살을 해온 리젤에겐 살인이란 죄책감도 흥분도 아닌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 장 쇼메를 제거하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무분별한 살인마도 아니었다. ‘지금은 무리로군. 게다가 아이히만이 죽은 것을 봤으니...’ 보나마나 이자벨이 자신도 노린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리젤은 주저 없이 쇼메를 포기했다. 암살자를 대비하고 있는 목표를 제거하기란 무척이나 힘 든 일이다. 게다다 쇼메처럼 직감이 뛰어난 자가 목표라면 암살은 거의 불 가능에 가깝다. 리젤은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경비가 더 삼엄해지기 전에 이자벨이 명령한 ‘회수’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가자.” 복잡하기 짝이 없는 왕실 지도를 완전히 암기하고 있는 리젤은 리더구트 를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리젤과 같은 복장의 특무대 두 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야! 너희들!” 리젤은 멈칫했다. 덩치 좋은 기사가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헬스트 나이츠였다. 리젤은 태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체가 발각 될 일은 전혀 없 었다. “행정부에 불이 나기 전에 총소리가 났다던데, 보거나 들은 것 있으면 남김없이 말해!” 그 기사의 정체는 바로 블리히였다. “초, 총소리 말씀입니까?” “그래, 총소리! 불이 나는 바람에 현장 검증이고 자시고 못하지만, 아이 히만 대공은 누군가에게 피격되었고, 또한 증거 인멸을 위해 불을 지를 것 이 분명해! 불길의 방향만 봐도 자연발화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어. 테러범들의 흔해 빠진 수법이야. 흥. 이 명수사관 블리히의 눈은 속일 수 없지!” ‘이것 봐라?’ 리젤은 블리히라는 자가 ‘동전 한 닢에 울고 웃는 속물’ 이라는 인트라 무로스의 데이터와는 달리 논리적이라는 데 놀랐다. 게다가 자신이 아이히 만을 쏜 총에는 소음기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총성을 들었다는 것 일까? 설마 눈치 채지 못한 목격자가 있었나? 아니면 일부러 떠보는 것일까 ? 리젤은 내심 당황했다. 그는 블리히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죄송하지만, 저희는 총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흥! 거짓말!” “...!” 리젤의 눈빛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지? 리젤은 슬쩍 소매 속에서 비수를 꺼내 잡았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여차하면 목을 그어버리고 도주한다! 블리히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쨌든 또 누가 물어보거든 총소리를 들었다고 말해라.” “예?” “에이이! 무조건 들었다고 말하란 말이다! 알겠나!” 그러면서 블리히는 당황하는 리젤의 윗도리 주머니에 금화를 집어넣고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꼭 말해야 해. 안하면 죽어?” “...” 그러니까 블리히는 어떻게든 이 일을 ‘의문의 암살’ 이라고 보고서를 올려 실적을 내고 싶을 뿐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애당초 총소리고 방화고 블리히가 혼자 꾸며낸 말이었다. 그 ‘ 깊은 뜻’을 알 턱이 없었던 리젤은 어떻게 이 우둔한 베르스의 기사가 자 신의 행동을 속속들이 알았나 싶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던 것이다. “험험. 이 몸은 바빠서 이만.” 리젤과 특무대는 이번에는 저쪽 일꾼에게 가서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는 블리히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어째서 이런 나라가 아직까지 안 망할 걸까요.” “... 그러게요.”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암살의 베테랑들을 이토록 기가 질리게 만들 수 있 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8. 미온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팔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키스가 남긴 편지의 단어 하나하나가 차가운 빗물처럼 떨어져 온몸을 적셨다. 키스와 자신이 한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이, 키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다는 것이, 그래서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미워했다는 것이, 그러면서도 마지막까 지 웃는 척 자신을 대했다는 그 모든 사실들이 마음속을 뚫고 들어갔다가 다시 뚫고 나오길 반복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미온, 안에 있지?” 쇼탄이었다. 미온이 문을 열자 쇼탄은 당장 화장실이 급한 것 같은 표정 으로 말했다. “아 저어 미온, 있잖아. 지금 1층으로 좀 내려와 줄 수 있어?” “나중에 내려가면 안 될까요.” 쇼탄은 급하게 달려간 화장실에 아주 길고 긴 줄이 이어져 것을 봤을 때 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내려가기 싫다면 어쩔 수가 없네. 대신 랑시가 죽겠지만.” “...네?” 그리고 미온이 내려갔을 때 1층에는 리젤이 있었다. 미온을 본 그는 랑시 의 목을 위협하던 단도를 치우며 방긋 웃었다.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엔디미온 동지.” “... 리젤 씨.” “국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같이 가시죠.” 그 때 루시온이 미온 앞에 섰다. “엔디미온 경은 우리 동료다. 순순히 내줄 것 같아?” 다른 기사들도 미온을 에워쌌다. 리젤은 눈매를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였 다. “엔디미온 씨. 당신만 현명하게 처신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습니다.” “미온! 따라갈 것 없어! 곧 있으면 형이 올 거야. 분명히 와줄 거야. 그 러면 저런 놈들 따위는...” 랑시는 잔뜩 겁먹은 얼굴인데도 미온 앞을 지켰다. 리젤은 어쩔 수 없다 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단도를 들었다. “그래요. 견백호라면 일 분 안에 절 죽이겠죠. 하지만 저도 일 분 안에 당신들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그것은 허세가 아니었다. 루시온이 아무리 검술에 재능이 있고 쇼탄이 아 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프로 암살자가 보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밀집인형과 다를 바가 없다. 미온이 말했다. “리젤 씨, 베아트리체는... 거기 있죠?” 리젤은 애매한 대답을 했다. “절 따라오시면 알 수 있습니다.” “가겠어요. 대신 잠시만 그 칼을 빌려주세요.” 리젤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어깨를 으쓱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미온에 게 선뜻 단도를 넘겼다. 자신을 해치려고 하거나 자살하려 한다면 단숨에 다시 빼앗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미온은 바짝 날이 서 있는 단도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칼을 잡았다. 일순간 엉덩이까지 오던 엔디미온의 긴 머리칼이 잘려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귀 부근까지 깨끗하게 자른 미온의 단아한 모습은 마치 소년 같 았다. 그는 단호한 보랏빛 눈동자로 리젤을 바라보며 단도를 돌려주었다. “자, 이제 가요.” “무서운 얼굴이네요.” 리젤은 미온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분명 리젤은 죄의식 이 희박한 ‘사이코패스’지만 도리어 그런 만큼 극단적으로 좋은 사람인 미온에게는 묘한 호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온이 지금 무엇인가 결심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결심이 이자벨에게 해가 된다면 주저 없이 죽 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엔디미온 씨. 부디 이 단도가 당신의 동맥을 끊어야 하는 상황은 만들 지 마세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리젤의 말은 협박이 아닌 진심어린 부탁이었지만 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 대신 몸을 돌려 동료들을 바라봤다. 그는 최대한 힘을 내서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꼭 돌아올게요.” 9. 오르넬라는 즉각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교황청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 전과는 달리 마차는 교황청 정문이 아닌 인적 없는 후문 외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그녀는 블라인드 사이로 밖을 훔쳐보고는 코웃음 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음침한 냄새를 풍기 는 이단심문관과 그의 ‘독실한 추종자’들이었던 것이다. 베르스에 있었다 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감시대상이었다. “오르넬라 성녀. 마차에서 내려주십시오.” 적갈색의 벨벳 캡을 눌러 쓴 심문관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극도로 사무 적이었고 손에는 양파처럼 생긴 쇳덩이가 달린 메이스까지 들려 있었다. 그 들은 오르넬라가 내리기도 전에 그녀의 여행 가방을 꺼내 거칠게 열어젖혔 다. 사방으로 옷가지들이 흩어졌다. 명분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험물 수색’ 이었다. 오르넬라는 융단도 안 깔려 있는 흙바닥에 발을 내딛고는 혀를 찼다. 이 몸으로 육탄돌격이라도 할 것을 대비해서 무장병력을 깔아두었단 말인가? 아니면 곧 있을 심문을 위한 기선제압? 어느 쪽이라도 한심했다. 심문관이 예리한 눈초리로 오르넬라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목에 걸고 있 는 철십자 목걸이를 제외하면 어디에도 성직자의 흔적은 찾기 힘든 인상이 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피로하시겠습니다, 성녀님.” “잘 아시네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 피로를 덜어주기 위한 환영인파로 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녀의 수색을 책임진 심문관은 당장 옷이 벗겨져 고문을 당할지도 모르 는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는 오르넬라를 보며 내심 놀랐다. 소문대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잠시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몸수색? 나를? 여기서? 당신이?” “양해해 주십시오.” “...!” 오르넬라는 자신이 허락하기도 전에 그가 어깨와 팔에 손을 대자 눈썹을 움찔했다. 다른 때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이 가슴 언저리를 지나 잘록한 허리로 내려갈 때쯤 오르넬라가 싸늘한 목소리 로 말했다. “신의 이름을 걸고 단언컨대, 더 밑을 만지고 싶다면 먼저 당신의 목숨 부터 맡겨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추기경급 대우를 받는 성녀의 몸을 만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단지 분위기가 어수선한 관계로 수색을 강화한 것뿐입니다. 성녀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토록 명확하게 증명하는 말도 드물 것이다. “제가 아끼는 옷들을 흙바닥에 집어던지는 게 단순한 수색이라 이 말이 로군요.” 오르넬라의 가시 돋친 말에 그 남자는 손짓으로 수색을 멈추도록 지시했 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네깟 놈이 사과한다고 내 기분이 달라질까?” “예?”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오르넬라의 뱀눈에 그가 움찔했다. 누가 뭐래도 그녀가 자신보다 하늘처럼 높은 직책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당장 융단을 깔아. 나와 교황 성하까지 직통으로 이어지는 최고급 붉은 융단을 깔란 말야! 냉큼!” “그, 그런 무리한 말씀을...” “하급 성직자 나부랭이 주제에 뭘 주절거리는 거야! 종교도 계굽순이야. 까라면 까. 십 분이 지나도 내 앞에 융단이 안 깔려 있다면, 그 땐 정말 네놈에게 신의 가호가 필요하게 만들어 주겠어. 이 버러지 같은 자식아 !” “아, 아, 알겠습니다!” 여왕님 특제 매운맛을 선보인 오르넬라 앞에서 그 심문관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융단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아무리 명령이 있었 다고 해도, 성질 사나운 성녀를 상대로 끝까지 뻣뻣한 태도를 고수 할 배짱 은 없었던 것이다. 10. “오오, 잘 왔소. 오르넬라 성녀.” 세계 주교단의 단장이자 교황청의 최고 사목자이자 남부 콘스탄트의 지배 자 레오 3세는 (백미터에 달하는 융단을 밟고) 자신 앞에 나타나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오르넬라를 구김살 없는 미소로 맞이했다. 수많은 신도들이 기 꺼이 목숨을 내놓게 만든 바로 그 미소였다. 하지만 오르넬라는 개미새끼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그 티클 없는 미소 뒤에 숨겨진 진짜 마음이 적어 도 ‘진정한 신앙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귀환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 지만 베르스가 신의 가르침을 어기고 스스로 이교도임을 주장하여, 본인은 성녀의 안전이 걱정되어 급히 부른 것이니 이해해 주길 바라오.” 오르넬라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자기 안전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이 없는 교황이 왜 자신을 불러들였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보기 좋게 포장된 쇼일 뿐이었다. 교황은 ‘진짜 이 유’를 말했다. “이 사태를 이대로 묵과할 수 없는 본인은 북부 콘스탄트와 베르스를 이 교도의 무리로부터 정화시키고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기위한 성전을 선포하 려 하오! 오르넬라 성녀께서도 베르스가 멸망해야 마땅한 죄악의 집단임을 국민들에게 알려 주시기 바라오.” 성전 선포는 그야말로 국가총동원령이다. 교황청을 위시한 남부 콘스탄트 국민 전체가 이교도 말살을 위해 투입되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베 르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이 있어야 했고, 베르스의 성녀였던 오르넬라가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만큼 좋은 명분은 없었다. “오르넬라 성녀께서는 본인을 지지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그녀는 슬쩍 교황의 주변을 훑어봤다. 무장한 광신도들, 이단심문관과 성 기사단이 사열해 있었다. 이것은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거절할 수가 없 다. 교황의 청을 거부한다면 그는 어떤 이류를 들어서라도 오르넬라를 ‘순 교’ 시킬 것이다. 아까 그녀의 소지품을 수색하던 자들이 이미 증거조작을 마쳤으리라. 교황이 그녀를 베르스에 동조하는 이교도로 만드는 것은 손바 닥 뒤집는 것보다 쉬은 일이었다. 오르넬라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베르스 왕국이 이미 구제할 길이 없는 배덕의 무리 임을 소녀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사옵니다. 교황 성하의 신성한 의지로 타라한 베르스와 북부 콘스탄트를 신의 품에 복속시키길 언제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오오! 그대의 신앙심에 가슴이 벅차오.” 교황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오르넬라를 일으켜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한기를 느꼈다. 함박웃음을 보이는 교황의 얼굴 속에서 광기를 목 격한 것이다. 11. 사실 모든 국민들이 교황을 추앙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가 신의 이름을 팔아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어떤 선 지자들은 교황이 마라넬로 황제보다도 더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어 한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교황청 지하실을 방문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게 만들고 모르는 사람들은 떠들게 만드는 것이 교황의 효과적인 통치 방식이었다. 모든 문제는 이교도의 탓이고 그 죄악을 정화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교황밖에 없었다. 적어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 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만 명의 신도들이 교황 청 앞 광장에 몰려들었다. 잠시 후 있을 교황 레오 3세의 성전 선포를 환호 하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물론 교황청은 이들에게 빵과 바꿀 수 있는 교 환권을 나눠주었다. 교황청에서도 오르넬라 성녀를 비롯해 추기경들과 총대주교, 수도대주교, 각지 교구의 고위 성직자들이 교황의 부름을 받아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교황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을 지지하기 위한 종들이었다. 법률 상으로 그들은 교황을 보좌하고 경우에 따라 그의 결정에 거부 권리를 행사 할 수 있는 자들이었으나 실상 남부 콘스탄트 소석의 그 어떤 성직자도 군 통수권을 단단히 쥐고 있는 교황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거부는 즉시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새하얀 법의를 입고 보석으로 치장된 긴 지팡이를 든 교황이 추기경들과 함께 교황청 본궁 3층 베란다에 나타나자 곧바로 우루짖음에 가까운 신도들 의 함성이 터졌다. 의례적인 기도가 끝나자 교황은 왜 자신이 수많은 국민 들이 죽어나갈 성전을 찢어지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를 모조리 이교도의 탓으로 돌려 강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연설이 논리 에 맞고 안 맞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광장에 모인 시민 대부분에겐 교황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또 무슨 소리를 하든 열 광적 지지를 보낼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앞에 사열해 있는 성 아우리엘레 신전기사연합의 빛나는 백색 잡주 도 그들을 도취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인간은 뭐든 반짝거리는 것에 취하 는 법이다. 그들의 맹신에 흡족한 기색을 드러낸 교황은 연설을 마치고 오 르넬라를 바라봤다. “자, 그럼 베르스의 성녀이자 베르스 교구의 수장이었던 오르넬라 자맦 서 죄악의 소굴이 된 베르스를 정화시켜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하시겠습니다 .” 백색과 황금색이 조화된 법의 덕분에 흡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인상을 주는 오르넬라는 살짝 교황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뒤 국민들 앞에 섰 다. 그러자 마치 누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곧 바로 환호성이 울렸다. 설령 이 자리에 그녀 대신에 원숭이가 서 있었어도 똑같은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서푼짜리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연극에서 자신의 역할이 천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낙원으로 인도 해 줄 것처럼 장담하는 천사들은 이미 역겨울 만큼 널려있지 않은가? ‘이 오르넬라에겐 악역이 어울려. 그렇고 말고.’ 훗! 하는 코웃음을 친 그녀는 돌연 긴 치마를 젖히며 긴 다리를 낮은 난 간 위에 당당히 올렸다. 수만 명의 ‘관중’ 앞에 새하얀 실크 스타킹을 입 은 성녀의 다리가 눈부시게 대공개된 것이다. 기억자로 굴곡진 그 다리의 자태는 그야말로 뇌쇄적이었다. 진짜 천사가 내려왔을 때 보다도 더 경악한 시민들은 좀더 자세히 보겠다며 괴성을 내지르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허어어어어어억!” 교황과 추기경들의 숨이 넘어간 이유는 단지 가터벨트가 보일 정도로 훤 히 들어난 그녀의 육감적인 허벅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은 그곳 에 숨겨져 있던 작은 권총으로 향했다. 오르넬라는 그것을 뽑아 교황의 툭 튀어 나온 이마에 겨눴다. 단 한 발이 들어가는 소구경 권총이기 때문에 조 금이라도 거리가 멀어진다면 교황을 죽일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감시원이 끝까지 제 몸을 수색했다면 아마 전 이곳에 있지 못했겠지요. 이 모든 것이 다 신의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오르넬라 성녀!” “교황 성하, 제가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저 국민들 앞에서 성전 을 취소하십시오.” 교황은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베르스와 친한 오르넬라를 의심 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대담하게 나오리라고는 예상 못한 것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뭘 의미하는 줄 알고 있나. 날 죽이려는 죄는 아무리 성녀라 도 화형을 면치 못해!”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불타고 있을 때 교황 성하께선 이미 이 세상을 떠녀셨을 겁니다.” “단단히 미쳤군. 베르스의 독에 취한 거냐!” “아니. 당신의 독에서 깨어난 것뿐입니다.” 이것은 아이히만이나 쇼메의 계략이 아니었따. 오르넬라가 단독으로 결심 한 것이다. 그녀는 성녀이면서 단 한 번도 신의 계시를 듣지 못했다. 그리 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지금 이 못된 행동만큼은 신께서도 눈감아 주실 거라 믿었다. 아니, 용서받지 못해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교황을 막을 방법은 이것 뿐이니까. “루터! 루터 어딨나!” 당황한 교황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의 무시무시하나 경호원인 루터라면 오르넬라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그녀의 목을 비틀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사냥개는 지금 입원중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카론에게 당한 ‘검은 추기경’ 루터는 죽지 않았다. 보통사람이었다면 열 번 죽고도 남을 중상이었지만, 그의 가공할 육체와 광기에 가까운 정신 력은 죽음일보 직전에서 그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그런 루 터라도 당분간은 일어날 수조차 없는 상태다. 교황은 항상 자기 곁을 지키 던 흉포한 사냥개가 지금만큼은 누워 있다는 사실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다. “당장 성전을 취소하십시오! 그리고 북부 콘스탄트와 화평을 맺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세요! 내전은 이미 육 년을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 지친 백성들이 계속 당신을 추앙하는 이유는 당신이 언젠가는 행복한 낙원 으로 자신들을 보내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그 믿음을 악용할 생각이십니까, 성하!” 그녀의 격한 목소리에 교황은 얼굴을 씰룩였다. 마치 사기가 들통 난 도 박사 같았다. 그는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겨눈 총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르넬라 성녀. 자네의 말에 십분 공감하네. 하지만 자네는 이미 천국 행이 결정된 신분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짓을 한다면 신의 분노를 사서 지 옥에 떨어질 걸세. 그러니 진정하고 일단 이 총을 내리...” “성하” 오르넬라는 측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태어나면서 누구는 성스럽고 누구는 천 한 사람으로 나누는 권력자들의 신은 믿지 않습니다. 설령 제가 지옥에 떨 어진다 하더라도 제 옆에는 당신이 있을 테니 그리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 그녀가 항상 품어 왔던 가장 큰 의문은 왜 자신이 성녀냐는 것이었다. 단 지 예언에 기록된 장소와 시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성녀였고 그녀 옆집에서 태어난 자는 마구간지기의 자식이라는 이유 만으로 천민이었다. 오르넬라는 그 ‘신의 섭리’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 것은 모조리 서푼가치도 없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히 교황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금 , 그녀는 신이 왜 자신에게 그런 고뇌를 내려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 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자가 바로 성자라고 생각했 다. “어서 국민들에게 말하십시오. 이제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종교가 종 교로서 사람들을 구원토록 노력하겠다고.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 그 때 청명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황 성하!” 순간 교황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오르넬라의 표정이 굳었다. “오오! 알테어!” 연두색 긴 머리 여성이 베란다에 나타난 것이다. 알테어가 예정보다 빨리 전선에서 귀환하는 것까지는 오르넬라도 예상하지 못했다. 교황이 ‘진심 ’을 말했다. “알테어! 당장 이 미친년을 죽여라!” 빛의 검술을 가진 명주작 알테어 엔시스는 당연히 루터 이상이다. 눈 깜 짝할 사이에 오르넬라의 심장을 뚫을 수 있다. 오르넬라는 그것을 알면서도 알테어에게 온화하게 말했다. “너도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신이 되었지? 마치 자고 일어났더니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선물처럼. 그 선물을 거절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기왕 받 은 거라면 가치 있게 써야지. 어떻게 쓰는 것이 가치 있을지 잘 생각해 봐. ” “성녀님.” “알테어! 저 악마 년의 유혹에 속지 마라! 넌 교황청을 수호하는 주작이 다! 그게 네가 태어난 이유야! 만약 내가 죽으면 교황청도 무너진다. 이 나 라는 멸망할 거야! 그러니 어서 오르넬라를 죽여!” 강압적으로 외치던 교황의 목소리는 점점 다급해지더니 곧 애걸로 바꿔갔 다. 알테어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교황 주변에 있던 교황청 간부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르넬라를 덮쳐 교황을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교황은 입 안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자신이 고작 한 여자의 장남감 같은 권총 하나에 목 숨을 잃어야 하다니! 그는 결국 체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겠네. 내가졌어. 국민들에게 말하겠네. 성전을 취소하고 내전도 끝내 겠다고. 그럼 된 거지?” 오르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은 오르넬라의 총구에 자신의 머리가 겨눠진 채 웅성거리는 국민들 앞에 섰다. 그는 억지로 짜낸 목소리로 성전 이 취소되었음을 알리며 힐끗 오르넬라를 바라봤다. ‘은혜도 모르는 년! 기껏 성녀를 만들어줬더니 되레 날 협박해? 갈기갈 기 찢어 주겠다. 고만하고 또 고문해서 자비를 구걸하게 만들어 주마. 너 따위 계집이 이 레오 3세를 막겠다고? 어림도 없지!’ 교황은 오르넬라가 시킨 대로 성전을 취소했다. 그러니까 당장은 말이다. 그런 것은 나중에 얼마든지 다시 바꿀 수 있었다. 체면에 흠집이 나고 뒤 에서 수군거리는 국민들도 생기겠지만, 술과 음식을 뿌리면 그들은 언제 그 랬냐는 듯 다 잊어버리고 또 자신을 따르게 될 것이다. 국민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것은 빵과 서커스뿐이라는 그 ‘현명한’ 사육 방식을 교황은 추호 도 의심하지 않았다. 교황의 입에서 성전을 취소하고 북부 콘스탄트와도 평화조약을 맺겠다는 폭탄선언이 나오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했다. 하지만 예상했 던 비난의 고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교황이 지금 흉탄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오히려 일부는 안도하고 있었다.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싸움이 계속될 때 피를 흘리는 쪽은 국민들 이지 교황이 아닌 것이다. “보셨습니까? 성전을 원하는 자는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교황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맘대로 생각해. 어쨌든 약속을 지켰으니 이 망할 총을 치워!” 교황은 당장 오르넬라를 고문실로 보내고 다시 성전을 개시하기로 결심했 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총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야, 약속과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측은한 눈빛으로 새하얗게 질린 교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 레오 3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 잠깐. 설마 너 처음부터 날 죽이려고...” 교황은 이제야 그녀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았다. 지금 자신이 성전을 취소 하고 죽게 되면 당분간 다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없다. 취소된 그대 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하긴, 비상한 머리의 오르넬라가 절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교황의 속마음을 몰랐을까. “교황 성하.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평화를 원했다면 전 분명 이 총을 거 뒀을 겁니다.” “거짓말! 대체 뭐가 탐나서 이러는 건가! 차기 교황이 되려는 거냐? 아 니면 키르케나 이자벨이 사주한 거냐? 사실을 말해!” “...성하.” 그녀의 얼굴은 연민으로 가득했다. 교황을 존경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 다. 자신을 성녀로 지목하고 정성스럽게 신앙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교 황이었으니까. “10초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 ”그 시간 동안, 신 앞에 서기 전에 자신의 죄를 참회하시기 바랍니다.“ ”오, 오르넬라. 교황의 자리를 주겠네. 교황청도 넘기고 난 물러나겠네. 그러니까 제발 날 살려만 주게.“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는 교황에게 오르넬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교황 성하. 당신이 제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 기 억하십니까?“ 인파로 몰린 광장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녀는 숨죽인 채 자신을 지켜보는 국민들을 눈에 담으며 읊조렸다. ”설령 악마가 신의 모습을 흉내 낸들,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다. 광장 가득 총성이 터졌다. 12. 교황을 시해한 오르넬라는 그 자리에서 긴급 체포되었다. 긴 교황청의 역 사에도 내부 성직자에 의해 수장이 암살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이 초 유의 사태에 어쩔 줄 모르던 추기경들은 일단 전국의 성직자들과 신학자들 을 불러 콘스탄트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율령에 의해 차기 교황을 선출하며 성전의 법도를 위배한 오르넬라의 성직을 박탈하고 화형에 처하기로 의견 을 모았다. 알테어는 병사들의 손에 끌려가는 오르넬라에게 달려갔다. 물론 명주작 알테어 역시 교황 수호의 임무를 저버리고 시해를 방치한 죄가 컸지만 - 교 황이 죽은 이 마당에 대체 어떤 간 큰 성직자가 아신에게 죄를 물을 수 있 겠는가? 도리어 그녀를 소유하는 자가 차기 교황이 될 수 있는 계산에 간부 들은 그녀의 죄에 대해서는 ‘근거 없음’으로 일관했다. “오르넬라 성녀님!” 알테어를 바라본 오르넬라는 온몸이 꽁꽁 묶인 상황인데도 차분한 미소를 보였다. “알테어, 새장이 열렸으니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라.” “하지만 당신은!” 오르넬라는 가장 처참한 방식의 처형을 면할 길이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 든 교황을 죽인 대죄는 교황청 최고형으로 집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르넬 라는 슬며시 입 꼬리를 올렸다. “난 별로 장수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불 속에서 죽고 싶 지는 않아. 이 우둔한 간부들이 공의회를 소집해 내게 화형을 언도하기까지 는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릴거야. 그 안에 베르스가 승리해서 세상이 바뀐다 면, 어쩌면 나도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지.”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감옥으로 향했다. 오르넬라에 의해서 알테어는 처음으로 교황청이라는 새장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서는 고위 성직자들이 자신들 중 누가 임시로 교황의 직책을 맡아야 하는지 큰소리로 다투고 있었고, 광장에서는 병사들이 검을 뽑아 휘두르며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어디에도 신의 흔적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알테어는 교황이 하사했던 성 아우리엘레 신전 기사 연합의 백금 철십자 휘장을 옷에서 떼어내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 르넬라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길러주었던 레오 3세의 빈 옥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교황청을 떠났다. 제 28화 죽어 마땅한. 1. 전쟁이란 백번의 계산 끝에 한 번 움직이는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특히나 이자벨 같은 적을 상대해야 할 때는 더욱 더. 그런 의미에서 키르 케는 군의 선봉이 아닌 황실에 마련된 통합작전실에 있었다. 사람들은 ‘피 의 마녀’인 그녀가 당장 선두에 서서 적의 성벽을 허물 것이라 기대했지만 , 그런 마술은 없었다. 그녀는 북부 콘스탄트에서 온 엔지니어와 수학자들을 조병창으로 보내 베 르스는 만들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최신식 공성기계를 제작토록 명령했다. 또한 휘하의 믿음직한 지휘관들에게 오합지졸과 다름 없는 베르스 군대를 강도 높게 훈련시키도록 명령했고 페르난데스 왕자의 청을 받아들여 곧 전 쟁터가 될 변방의 국민들을 대피시켰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하루에도 수백 건 넘게 도착하는 보고서 속에 파묻혀 이자벨과의 수싸움에 몰두했다. 마치 한 땀 한 땀 침착하게 수를 놓는 것 처럼, 그녀를 뛰어난 사령관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런 데 있었다. 밤이 깊어 졌는데도 키르케는 지휘 데스크에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긴 속눈썹 아리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는 테이블 앞에 놓여 있는 서류를 향했다. 그것은 쇼메가 자신에게 준 아이히만의 서류였다. 처음 그 서류를 읽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만약 아이히만이 죽음으 로 진실을 증명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상식적인 선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하긴, 이자벨이 전쟁을 선택할 이유는 이것밖에 없겠지.’ 키르케는 그렇게 생각하며 까칠까칠한 종이 위 를 손톱 끝으로 긁었다. 그녀는 이자벨이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 을 때, 꺼림칙한 이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사실 사건 해결의 수단으로 전 쟁이라는 카드를 선호하는 쪽은 이자벨이 아닌 키르케다. 예전 이자벨이 미 온에게 자신은 전쟁을 싫어한다고 했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극도의 현실주의 자인 이자벨에게 막대한 물량을 소비해야 하는 전쟁이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선택하지 않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의 방대한 정보를 무기로 하는 외교나 정략 때로는 암 살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게다가 이자벨은 ‘세계 정복’ 같은 뜬구름 잡는 야망에는 관심도 없는 여자다. 분명 얼음처럼 차가운 성격이지만 그렇 기 때문에 전쟁과 정복이라는 뜨거운 흥분에 도취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키르케는 인격마저 정보의 하나로 판단하는 얼음칼날 이자벨에게 좋은 감 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 점만큼은 높이 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섭정이 된 다음부터 갑자기 전쟁광으로 돌변해서 침략전쟁을 시작할 리가 없었다. 전쟁을 시작한 이유, 키르케는 계속 그것이 의문이었다. ‘차라리 전쟁광이 덜 광적일지도 모르겠군. 이 서류에 비하면 말이지.’ 이 서류의 내용은 왜 이자벨이 전쟁을 계획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전쟁 을 통해 그녀가 무엇을 얻고 또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 말이다. 하 지만 그 목적은 독재자나 폭군들이 자행하는 탐욕스런 정복욕보다도 더 거 대한 광기의 덩어리였던 것이다. 대범한 키르케라도 오싹한 한기를 느낄 만 큼. ‘이자벨, 네 눈에는 이 세상마저 정보의 집합체 정도로 보이는 거냐! ’ 키르케가 손으로 서류를 콱 쥐자 옆에서 힐끗 힐끗 그녀의 눈치를 보던 위고르가 흠칫 놀라 물었다. “커, 커피가 맛이 없었습니까?” 키르케의 커피를 타주는 당번은 다름 아닌 위고르 공이었다. 한 나라의 법무대신 쯤 되는 양반이 그게 뭐하는 궁상이냐고 혀를 찰 노릇이었지만, ‘권력 탐지 레이더’ 같은 것이 장착되어 있는 위고르는 키르케에게 조금 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것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출셋길이 라는 것을 간파하고 주저 없이 앞치마를 두른 것이었다. 남들과 똑같이 아 첨을 떨면서도 밉살스럽다기보다는 불쌍해 보이는 것이 위고르의 개성이라 면 개성이었다. ‘대체 저 서류에는 무슨 내용이...’ 위고르 역시 그녀가 지금 저 의문 의 서류 때문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 서류의 내용 이 궁금해 죽을 것 같았지만 어쩐 이유인지 키르케는 그 내용을 절대로 공 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몰래 훔쳐보다가 걸리면 자신의 그림자에 자기 목 이 날아가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위고르는 키르케가 단 것을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각설탕 단지를 앞에 놓고 고뇌할 뿐이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며 훤칠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를 보자마자 위고르는 또 한 번 놀랐다. “에스테반 공! 당신이 지금 여기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는 바로 남부에서 악투르를 막고 있는 베르스의 몇 안 되는 명장 에스 테반 남작이었다. 악투르는 지금도 베르스의 두통거리 중 하나다. 강대국은 아니지만 용맹스런 강병을 거느린 그 호전적인 부족국가는 빈틈만 보이면 언제라도 베르스를 침략할 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 그 침 략을 저지할 장본인이 현장을 떠나 왕궁에 왔다는 것은 도둑에게 뒷문을 열 어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에스테반의 얼굴은 밝았다. 키르케는 그가 어떤 ‘선물’을 가지 고 왔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키르케 장군. 그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에스테반 테시테리오라고 합 니다.” “명성이라기보다는 악명이겠지요. 그래도 미남에게는 너그러운 편이니까 겁먹진 마세요.” “저도 미녀를 좋아합니다. 가시가 있는 미녀라면 더욱 더.” “가시가 아니라 칼날일 겁니다. 따끔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아요.” 그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고 키르케는 짓궂은 농담으로 답례했다 . 그녀는 들고 있던 만년필로 테이블을 톡톡 때리며 말했다. “만약 저한테 수작을 걸고 싶어서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 하신 거라면, 실망한 미녀의 가 시에 찔려 이 전챙의 최초의 전사자가 되실테고, 악투르라는 두통을 해결해 줄 진통제를 가져오신 거라면 그 미녀가 당신을 무척 귀여워해줄 겁니다. ” 여자라면 키릭스 못지 않게 경험해 본 에스테반마저 그녀의 도발적인 입 담에는 기가 질려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아신응ㄹ 상대로 카다랗게 웃을 수 있는 그가 더 대단한 쪽일지도 모르겠지만. 에스테반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악투르가 아군이 되었습니다.” 키르케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정정하지요. 그 오랜 원수가 갑자기 우리와 친구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전쟁만큼은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키르케는 이 에스테반이라는 남자를 처음 보지만 적어도 실없는 호언장담 이나 늘어놓는 놈팡이로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 딱 감고 믿을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믿기 힘들 정도의 희소식이로군요. 하지만 그런 만큼 확실한 근거가 필 요합니다.” “근거라 하신다면...” 그는 문가에 있는 병사를 향해 손짓을 했고 곧 험상궂은 거한 한 명이 들 어왔다. 여기서 ‘험상궂은’ 이라는 수식어는 꽤 온화한 표현이다. 윤기가 흐르는 대머리에 안면을 도마로 이용했는지 얼굴 전체에 흉터가 가득하고 한쪽 눈동자는 아예 금으로 된 의안을 박아 넣은 그 모습은 대체 인간의 얼 굴이 어디까지 살벌해질 수 있는지 도전하는 것 같았다. 하루라도 싸움과 전쟁이 없다면 지루해 죽어버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 “소개하겠습니다. 악투르 국왕의 아들인 마살라 왕자입니다.” 페르난데스와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마살라는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원래 가장 큰 부족의 우두머리가 통치하는 악투르에 왕과 왕자란 없 지만 굳이 호칭을 붙이자면 왕자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얼굴만으로는 왕 자보다 도살자에 가깝지만 말이다. 키르케가 심란한 그의 얼굴을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인상적인 분이시로군요. 아버지의 교육이 참 엄했나 봅니다?” “몹시 인자하신 분이오. 이 황금 의안도 아버님께서 직접 달아주셨소.” “하아, 그래요. 참으로 따뜻한 어버이시군요.” 고릴라 사촌 같은 아들의 얼굴에 아버지가 금덩어리로 된 가짜 눈을 달아 주는 ‘훈훈한’ 풍경을 떠올리자 절로 속이 메스꺼워지는 키르케였다. 그 리고 이런 싸움박질로 똘똘 뭉친 악투르를 상대로 지금까지 잘도 버틴 베르 스가 참 용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키르케는 대담하게도 적국 베르스의 왕실에 홀로 나타난 마살라 왕자에게 말했다. “악투르의 후계자를 혼자 보낸 것만큼 확실한 증거도 없지요. 베르스와 휴전을 하겠다는 악투르의 뜻을 의심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 런 결정을 내렸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비겁함은 전사의 수치이기 때문이오!” 마살라는 스스로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쫙 폈다. 이번에도 키르케는 고개 를 기울였다. 어차피 법도 정의도 없는 전쟁판에서 따로 비겁할 게 뭐가 있 단 말인가? “먼저 강대국 이오타와 싸우기로 결정한 베르스의 용맹에 경의를 표하오 . 솔직히 겁쟁이라고 생각했던 베르스에게 그런 굉장한 용기가 있을 줄은 몰랐소.” ‘겁쟁이 맞아. 하지만 안 싸우면 죽으니까...’ 하지만 ‘용맹’과 ‘결 투’라는 단어를 빼면 대화가 안 되는 악투르 사람들이 보기에 강대국과 당 당히 맞서 싸우는 약소국 베르스의 모습은 꽤나 감동적이었던 것이다. 문학 과 담쌓고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었 다. “물론 우리 악투르와 베르스는 오랜 숙적이며 친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나 이오타와 싸우는 빈틈을 노려 베르스를 침공할 정도로 비겁하 지도 않소. 그러니 당신들과 이오타 사이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중 립을 지킬 것이오.” ‘왜 악투르가 아직까지 베르스를 점령하지 못했는지 알 것도 같군.’ 키 르케는 악투르가 국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국가라기보다는 명분에 살고 죽 는 전사집단에 가깝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이 용맹에는 나름의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오타가 베르스를 점령한다면 악투르는 이오타를 대적해 야 하는 안좋은 상황에 처한다. 예술에 대한 결벽증 같은 것이 있는 이오타는 야만적이고 예술에는 개똥 만큼도 관심이 없는 악투르를 오래 전부터 업신여겼다. 물론 악투르도 잔꾀 를 부르는 이오타를 싫어했다. 이오타는 베르스를 점령하는 대로 악투르와 손을 잡기보다는 아마도 그들을 ‘청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로 니컬하게도 악투르는 베르스를 응원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적의 적은 친 구 였다, 라는 것이 에스테반 남작이 마살라 왕자를 설득한 논리였다. 키르케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조건은 뭡니까.” 조건 없는 거래는 없다. 적어도 외교에서는 말이다. 키르케는 악투르가 ‘공짜로’ 물러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마살라는 슬쩍 에스테반을 봤다. 에스테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마살라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악투르가 베르스 국경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대가로 에스테반 남 작은 자기 영지의 3분의 1을 우리에게 넘기기로 약속했소.” 키르케는 심란 한 얼굴로 에스테반을 바라봤다. 아무리 자기 땅이라지만 독단으로 이런 거 래를 했단 말인가? 그것도 지휘관이? 군법으로 따지면 내통과 동조를 적용 하여 당장 총살을 해도 무방한 중죄였다. 그 때 에스테반이 한 마디 거들었 다. “농지를 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침략 억제 수단입니다.” 이것은 에스테반이 오래 전부터 누누이 강조하던 주장이었다. 악투스가 메르스를 침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름진 베르스의 농지를 탐냈기 때문이 다. 고작해야 매운 당근이나 자라는 척박한 악투르 땅은 국민을 먹여 살릴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었다. 배고픈 자는 사납기 마련이다. 베르스가 그런 악투르에게 적절한 농지를 제공한다면 악투르의 침략과 약탈은 확실히 줄어든다. 그 유화정책이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악투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병사를 쏟 아 붓는 것에 비해 훨씬 저렴한 해결책이다. 에스테반은 오래전부터 악투르 를 상대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왕궁에서 안전하게 노닥거리기나 하는 관료들은 그런 에스테반의 주장에 ‘어떻게 야만인들에게 왕국의 땅을 내줄 수가 있나!’ 라는 입바른 애국론을 펼치면서 일축시켰다. 도리어 에스테반을 위험한 사상을 지닌 매 국노로 몰아 몇 번이나 제거하려고 했다. 에스테반은 탁상공론이나 늘어놓 는 그런 관료들이 사라진 지금, 다시 한 번 그 주장을 꺼낸 것이다. 물론 키르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에스테반은 죽은 목숨이 다름없다. 전적으로 그녀의 판단력에 달린 문제였다. “빵을 주고 칼을 막는다...” 키르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국와의 허가 없이 이 ‘거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작전 수행에 관련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그녀니까. 키 르케는 반짝 반짝 빛나는 마살라 왕자의 대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조건을 하나 걸겠습니다.” “음?” “이오타와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키르케의 조건은 바로 ‘인질’이었다. 악투르의 후계자가 베르스에 묶여 있다면 악투르도 딴 생각 하기 힘들 것이다. 결혼할 여자가 불쌍할 만큼 무시무시하게 생긴 싸움꾼이지만 악투르에서는 분명 추앙받는 ‘보물’일 테니까 말이다. 이쪽은 농지를 저쪽은 왕자를... 마살라는 자신의 배짱을 시험받은 듯 주저 없이 대답했다. “흥. 원한다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상호불가침 조약이 성립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 이것으로 키르케의 두통은 사라졌다. 골치 아픈 악투르가 침묵하기로 한 이상 남쪽의 병력을 이오타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잇게 된 것이다. 마살라 를 보낸 그녀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단순한 놈이라 다행이네.’ 한편 그녀는 에스테반 남작에 대해 내심 감탄했다. 이런 위험한 시기에 자기 목숨을 걸고 악투르와 담판을 지어 단 한 명의 병사 피해도 없이 침략 을 저지한 지혜와 배포는 베르스에서 썩기에는 참 아까운 노릇이었다. 만약 북부 콘스탄트에서 태어났다면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도 괜찮을 인재라고 생각했다. 물론 전쟁이 끝나는 대로 군법을 어긴 죄를 빌미로 여러 가지로 괴롭혀 줄 테지만 말이다. 키르케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도 오래 가진 못했다. 부관이 황급하게 들고 온 이오타 로부터의 급전이 그녀의 즐거운 망상을 산산조각 내 버린 것이다. 긴급전문 을 읽은 키르케는 무거운 표정으로 부관에게 말했다. “이 첩보, 믿을 만해?” 부관은 어둡게 고개를 저었다. “첩보가 아닙니다. 이자벨 섭정이 직접 발표한 내용입니다.” 키르케는 눈을 꽉 감았다. 최악의 상황 중 하나였다. 그녀는 묵묵히 자신 의 테이블 옆으로 가서 그 밑을 내려다 봤다. “야. 일어나.” 그녀의 발 밑에는 곰 가죽을 뒤집어 쓴 청년이 엄청나게 불쌍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무라사였다. 몸을 웅크린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무라 사의 얼굴을 키르케는 군화발로 쿡쿡 눌렀다. “어이. 비명이 나올 정도로 즐거운 소식이다. 일어나!” 하지만 무라사가 입맛을 다시며 빙글 몸을 돌리기만 하자 키르케는 허허 허 웃고는 사정없이 그의 복부를 걷어차 버렸다. “크헉!” 아신의 힘이 실려있는 강력한 킥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무라사가 소스 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야 이 무식한 여자야! 내장이 터지는 줄 알았잖아!” “누가 이런데서 퍼질러 자래?” “언제 전투가 시작될지 모르니까 항상 가까운 데 있으라고 바로 그 입으 로 말했잖아!” “그 가까운 곳이 꼭 내 책상 바로 옆일 필요는 없잖아? 정말 네 녀석의 머릿속에는 상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냐. 나는 죽도록 일하는데 옆에서 행복하게 처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장을 터트려주고 싶은게 당연하지 않겠어?” “... 그게 네 성격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닥치고 이거나 봐!” 키르케는 부관으로부터 받은 전보를 무라사의 얼굴에 던졌다. 무라사는 그 서류를 퉁명스럽게 훑어봤다. “...!”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이 날카롭게 굳었다. 늑대 같은 눈동자에 맺힌 감정은 거의 살기였다. “이거 진짜냐?” “나도 가짜였으면 좋겠다만.” “젠장! 그 멍청이가!” 무라사는 그 종이를 힘껏 구겨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옷깃을 세우 며 성큼성큼 문 밖으로 나섰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왜?” “생각 좀 하게” 그가 나간 이후 키르케는 바닥을 구르는 종이를 집어 들어 펼쳤다. 그 종 이에는 단 한 줄의 문장만 적혀 있었다. 이오타 군 총사령관 라이로라 란다마이저로 결정됨. 마라넬로 황제의 붕어 이후 라이오라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은 자신도 알 고 있었다. 그리고 가급적 이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길 원했다. 라이오라는 마키시온 제국에서는 신과 같은 존재다. 480년 동안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이 없는 전대미문의 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그 이름만으로도 프론티어 뱅가 드는 물론 마키시온 제국의 적잖은 왕국과 기사들이 이오타에 가담하게 만 들 명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무라사, 알테어까지 힘을 합쳐도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불사의 괴물이다. 그런 진청룡이 이자벨이라는 막강한 조 력자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지휘한다면 베르스가 승리할 확률은 계산하기도 싫을 만큼 낮아진다. 세상에 겂나는 것이 없는 키르케마저도 가장 상대하 기 싷은 난적이 바로 라이로라였다. ‘역시 키릭스를 따라갔군.’ 그녀는 라이오라가 황제의 피를 이어 받은 키릭스를 EK라서 이오타에 가 담햇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키르케는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라이오라가 황실에 충성을 맹 세했다 해도 이오타의 군총사령관직을 수락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지 금 그의 성격에 어울릴 결정은 ‘방관자’였다. 그가 이자벨의 이상에 동조 하기 때문에 돕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키르케는 그가 이 전쟁에 끼 어든 명확한 이유를 예측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마키시온 황가에 족쇄가 채워져 끌려 다니던 라이오라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던 무라사는 이번 일로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라가 완전히 권력의 하수인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둘 은 전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 었지만, 라이오라도 무라사도 피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2. 왕실에서 마련해준 키르케의 침실은 국왕의 것보다도 화려했다. 고작 하 루 네 시간 정도밖에 사용 못하는 사실이 죄스러울 만큼 말이다. 전시 중 그녀의 수면은 네 시간으로 그것도 하루걸러 한 번 정도다. 아무리 아신이 라도 잠을 계속 못 자면 피로해지기 때문에(심지어 라이오라도 그렇다.) 지 금 그녀에게 절실한 것은 충분한 수면 시간이지 실크 레이스 달린 거대한 침대나 보석 박힌 잠옷 따위가 아니었다. ‘이 왕실 녀석들은 내가 사춘기 소녕닌 줄 아는가 보지?’ 키르케는 온통 소녀취향의 장식들로 민망하게 반짝반짝대는 자신의 침실 을 보고는 혈압이 상승했다. 어차피 아신이 되기 전에도 사춘기 같은 호사 스러운 시기는 겪어본 적 없는 그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주렁 주렁 달린 ‘나잇값 못하는 귀부인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장실들을 죄다 뜯어내 쓰레기통에 처박은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고는 부츠를 벗어 집어던졌 다. “호오?” 그녀는 테이블을 바라봤다. 이 방에서 딱 하나 마음에 든 것이 있다면 제 법 괜찮은 술을 갖다 놨다는 것이었다. 잠들기 전 십 분 정도 주어진 꿀맛 같은 휴식을 탐닉하기 위해 테이블 위의 술병을 집어든 키르케는 곧 그것을 다시 내려놔야 했다. 점점 자기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탓이었다. ‘젠장. 이놈의 왕국은 술 한 잔도 못하게 하는군.’ 일단 키르케는 한 번도 경비병을 둔 적이 없다. 아신을 누가 보호하느냐 는 웃기는 문제도 있었지만 주변에서 어설픈 기척들이 느껴지는 것이 거슬 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새벽 세 시에 국왕이 격려를 하겠다며 찾아올 리도 없다. 그렇다면 인기척의 정체는 급한 보고를 위한 부관이어야 하는데 ... ‘그러기엔 너무 강한 기운이야.’ 키르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림자만으로도 강철 을 조각내는 그녀가 무기를 들었다는 것은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였 다. 그리고 그토록 키르케를 긴장시킬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세 명밖에 없다. 그런데 분명 무라사는 아닐 테고 라이오라도 아닐 테니(그는 사령관 끼리 결투로 승부내자고 찾아올 정도로 감상주의자가 아니니까) - 키르케 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알테어!’ 명주작과 앙숙인 키르케로서는 상상만으로도 불쾌한 일이지만, 지금 자신 의 침실로 다가오고 있는 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테어밖에 없었다. 인 기척이 문 앞에 멈추자 그녀는 주저 없이 엄청난 무게의 합금 채찍을 휘둘 렀다. 칼날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두꺼운 감나무 문짝이 어지럽게 잘려나갔 다.예상대로 문 앞에는 알테어가 서 있었다. 키르케는 다시 한 번 채찍을 후려치려던 팔을 멈췄다. 그녀가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테 어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왜 질질 짜고 난리야!” 키르케는 오밤중에 남의 침실 찾아와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는 알테어의 모습에 기가 차서 싸울 생각도 안 들었다. 저런 대책 없는 여자가 어째서 전쟁 중에는 ‘무패의 여신’으로 돌변하는지 너무 오묘해서 짐작할 길이 없었다. “너 지금 교황이 죽었다고 슬퍼하는 거라면 정신 차릴 때까지 이 채찍으 로 후려쳐 주마!” “... 떠났어.” “뭐?” “미온이 가버렸어.” “아하.” 키르케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베르스에 오자마자 미온의 침실을 뒤적 거리고는 그 녀석이 자리에 없자 엉엉 울면서 자신을 찾아왔다 이거지? 이 런 어린애와 지금까지 죽기 살기로 싸웠다 이거지? 중증의 소녀병 환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쯤 되면 할 말이 없었다. “교황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네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예상했 지만...” 알테어와 키르케와 본래 친구 사이였다. 둘 다 콘스탄트를 수호하는 아신 들이었고 위험할 정도로 사람을 잘 따르는 알테어와 무서울 정도로 사람을 잘 휘두르는 키르케는 나름대로 궁합이 잘 맞는 동료였다. 그러다 콘스탄트 의 후계자를 놓고 교황과 국왕이 갈라서서 내전이 발발했을 때 알테어는 키 르케를 떠나 교황청에 섰다. 독실한 신자였던 알테어는 키르케를 떠나 교황 청에 섰다. 독실한 신자였던 알테어는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교황을 배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키지 않는다면 교황청과 신도들이 국왕파에 몰살당할 위기였기 때문이었다. 온화한 알테어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알테어와 키 르케로 나눠진 힘의 균형은 내전을 장기화시켰고, 그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 이 패를 갈라 서로를 죽였다. 또 아신이 둘이나 있으면서도 미키시온 제국 에게 세계 최강대국의 자리를 넘겨줘야했다. 키르케는 그것이 알테어의 우 둔한 동정심 때문이라고 비난하며 그녀를 미워하게 된 것이었다. ‘알테어. 좋든 싫든 넌 아신이야. 남자 하나 떠났다고 울고 있으면 널 따르는 사람들 기분이 어떻겠어?’ 키르케는 참 너답다, 라는 표정으로 훌쩍거리는 알테어를 멍하니 바라봤 다. 뒈지게 때려주고 싶엇어 미칠 것 같았지만 한편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 도 들었다. 그녀는 곧 주먹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친구에게 조 언했다. “사랑하는 여자엥게 목숨을 걸 줄 아는 남자가 제대로 된 남자야. 그러 니까 그 남자가 선택한 여자가 네가 아니라고 슬퍼할 것 없어. 그냥 돌아오 면 따귀나 한 대 때려줘.” 키르케도 알테어도 미온이 베아트리체라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자기 발로 이자벨에게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테어가 슬퍼하는 진짜 이 유는 미온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미온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알테어는 그녀의 조언이 고맙긴 했지만 받아들 일 순 없었다. 그렇게 딱 잘라서 감정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물 을 닦으며 말했다. “키르케, 난 너처럼 살 수 없어.” 키르케는 크리스털 잔에 술을 따르며 대답했다. “그거 다행이구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아신이 된 다음에도 언제나 자기감정에 충실하게 살 아온 알테어를 향한 키르케의 솔직한 시선은 분노도 조롱도 아닌 질투였다. 3. 다음 날 베르스 왕실은 발칵 뒤집혔다. 물과 기름이라고 할 수 있는 키르 케가 알테어가 나란히 나타난 것이었다. “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전히 키르케의 지휘 테이블 옆에 주저앉아 아침응ㄹ 먹던 무라사는 그 모습을 보고는 물고 있던 빵을 툭 떨어트렸다. 키르케와 알테어가 화해하는 것은 자신이 라이오라와 한 편이 되는 것보다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명주작 알테어가 베르스를 돕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무적인 이유는 일국의 군사력을 상회한다는 무서운 ‘화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키르케만큼이나 신망이 두터운 그녀가 베르스를 수호한다는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 다. 사람들에게 아신은 인간 위에 서 잇는 신화적 존재다. 그만큼 베르스는 신의 가호를 받는 정당성을 부여받는 셈이다. 게다가 교황청이 당분간 움 직일 수 없도록 만드는 쐐기가 되기도 했다. 이것은 이자벨조차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한 나라를 세 명의 아신이 수호하게 된 이 확 실한 승기에도 불구하고 키르케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유는 라이오 라였따. 그는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불사신이었다. “라이오라는 분명 빨리 승부를 결정지으려 할 거다.” 키르케는 라이오라를 상징하는 검은 장기말을 작전 지도 위에 놓으며 말 했다. 상대적으로 물자가 풍족한 이오타가 베르스보다 덜 조급할 것이라 예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라이오라에게도 상대해야 할 아신이 셋이라는 압박 감은 분명 크다.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압력은 전염병처럼 군대에 퍼져 사기를 찍어 누를 것이다. 사기가 바닥난 군대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라이오라는 초반에 자기 손으로 다른 아신들 을 꺾어 승기를 잡을 것이 분명했다. 이 이상의 선전은 없었다. 라이오라 한 명에게 다른 세 명의 아신들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이오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눈치를 보며 중립을 지키던 다른 왕국 들도 이오타에 붙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렇게 한다.” 키르케는 자신과 알테어, 무라사를 상징하는 세 개의 장기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라이오라 앞에 놓았다. “삼 대 일?” 알테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키르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주작 은 적잖게 놀랐다. 분명 아신 세 명을 일시에 투입해 라이오라를 제압하겠 다는 전법은 초전에 적의 예봉을 꺾는 데 효과적이지만 프라이드가 강한 키 르케가 선택했다고 하기에는 의외의 전법이었따. 키프케 스스로 라이오라에 게 한 수 접은 셈이었다. “자존심 챙길 상황이 아니니까. 개인적인 결투라면 얼마든지 진청룡과 혼자 싸우겠지만... 우리의 승패가 전쟁을 좌우한다면 얘기가 달라져. 지금 당장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의 상징인 라이오라를 꺾는 게 중요해. 이 중에 누구라도 라이오라와 일 대 일로 싸워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녀석은 없으리라 생각해. 지금쯤 라이오라도 우리 셋이 같이 치고 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있을 거야.” 이론적으로 아신의 힘은 균등하다. 하지만 기이한 계기로 불사의 몸이 된 라이오라에게도 그 이론이 통용될지는 미지수였다. 키르케가 예상하기에 동등한 조건에서 싸웠을 때 라이오라를 꺾을 가능성은 3할 미만이다. 사령 관으로서 승률이 30퍼센트도 안 되는 작전은 실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셋 이 뭉친다면 8할 정도의 확률로 라이오라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 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무라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셋이 모두 라이오라와 싸우는 데 투입되면 다른 곳은 어떻게 지킬 건데?” 무라사의 지적에도 타당성이 있었다. 베르스가 아무리 키르케의 제7무장 전투여단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이오타에게 규모나 화력 에서 턱없이 밀리는 게 사실이었다. 그 차이를 보완해 주는 존재가 아신인 데 라이오라와 승부를 내는데 세 명의 아신을 투입한다면 다른 지역은 보호 받지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벽’이 허물어져 이오타의 군대가 베르스 로 밀고 들어올 수도 있다. 판단은 둘 중 하나였다. 라이오라를 막든가 아니면 라이오라를 제외한 모 든 것을 막던가. 둘 다 막을 수는 없었다. 키르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소의 피해는 각오해야 해. 우리가 라이오라를 꺾을 때까지 다른 부대 는 최선을 다해 수비하는 방법밖에 없어.” 하지만 무라사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기가 직 접 장기말을 들어 재배치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키르케는 무라사가 배치해 놓은 말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군의 우측 선봉은 키르케가 지휘하고 좌측 선봉은 알테어가 지휘한다. 그리고 무라사 혼자서 라이오라를 막는 것이다. 키르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농담할 기분 아니야. 네가 라이오라와 싸우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 지만...” “나도 농담이 아니다.” 무라사는 나직하게 말했다. 평소였다면 키르케는 ‘시끄러! 한 번도 이긴 적 없는 주제에!“ 라고 쏘아붙였겠지만 지금만큼은 정색을 하며 그를 바 라봤다. 단순한 투쟁심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를 이길 묘안이라도 있는 거냐?” “없어.” “장난해?” 무라사가 수도 없이 라이오라와 싸운 끝에 나온 결론은 ‘절대 이길 수 없음’ 이었다. 솔직히 그는 아신 셋이 덤벼든다고 하더라도 라이오라를 완 전히 잠재우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했다. “대신 사흘쯤은 묶어둘 수 있어.” “혼자 라이오라를 사흘 동안 묶어둔다...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말하는 거냐?” “알아.” “아니. 너는 몰라. 그건 죽겠다는 의미야!” “알고 있다니까!”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사투는 일반적인 결투와는 경우가 다르다. 특히 대상이 아신이라면 더욱 더. 제아무리 진청룡이라도 목숨을 걸고 마지 막까지 싸우는 무라사를 단숨에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알테어와 키르케가 이오타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사흘 동안 라이오라를 잡아둘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무라사가 죽게 된다는 결론만큼은 피할 수가 없 었다. 말하자면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견백호의 목슴을 바쳐야 하는 셈이었다. 키르케가 말했다. “내가 허락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렇게 할 거지?” “물론.” 키르케는 한동안 무라사의 눈을 바라봤다. 하나뿐인 목숨을 건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무라사 랑시는 분명 과격하고 승부를 좋아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자기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한심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 도라어 아신으로서의 의무감을 가장 잘 느끼고 있는 자였다. “왜 그렇게까지 라이오라와 싸우려고 하는 거냐? 그 녀석을 쓰러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그 바보 자식이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 어. 웃기지 않아? 480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니. 내가 막지 않으면 그 녀석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자기가 만든 감옥 속에 처박혀 있을 거야. 그 렇게 삐뚤어지다가 결국에는 대마왕이 되어서 이 세상을 암흑천지로 만들 게 분명하다고! 난 그걸 막아야 해!“ 삼천포로 빠진 무라사가 주먹을 불끈 쥐자 키르케가 눈썹을 움찔했다. “그래, 장하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구나. ” “내겐 그 음침한 마왕으로부터 미래의 인류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어! 하하하!” “호호호. 지랄하... 그래, 뭐 좋아.” 그녀는 서로 맞붙어 있는 라이오라와 무라사의 장기말을 지그시 바라봤다 . 그리고 입을 열었다. “허가하지. 라이오라를 사흘 동안 묶어라.” “키르케!” 알테어가 다급히 외쳤지만 키르케는 고개를 저었다. “제 발로 죽겠다는 놈을 무슨 수로 말려. 하지만 무조건 사흘이야. 그동 안 나와 알테어가 책임지고 이오타를 공략할 테니까. 뭐, 사흘 후에는 죽어 도 좋아.” “누, 누가 죽겠대? 똑똑히 지켜봐! 보란 듯이 그놈을 때려눕혀 주고 돌 아올 거야!” “퍽이나.” 키르케는 아무렇지도 않게 코웃음을 쳤지만 굳어가는 표정은 어쩔 수 없 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라사가 살아 돌아올 확률은 제로였던 것이다. 4. 이틀 후, 라이로라가 지휘를 맡은 이오타의 사령부는 작전회의에 여념이 없었다. 베르스 쪽보다도 월등히 많은 수의 참모들이 지도와 보고서를 들고 다니는 분주한 사령부 한가운데서 황금빛 눈동자의 총사령관, 라이오라는 묵묵히 참모진의 의견을 들었다. “적 수뇌부는 분명 라이오라 각하께서 선두에 서는 것을 예쌍하고 있을 겁니다. 또한 각하가 지휘하는 제1군단의 돌파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2인 이 상의 아신을 투입하리라 확신합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 2군단과 3군 단을 양익으로 기동하여 일거에 적 본대를 포위 섬멸하는 것과 함께...” 라이오라는 이오타와 프론티어 뱅가드의 우수한 인재들로 이뤄진 참모진 의 작전 계획을 무표정한 얼굴로 경청했다. 지도 위로 어지럽게 장기말들이 놓이고 있었다. 참모진들이 예상한 베르스의 전술은 놀라울 정도로 처음 키르케가 계획한 것과 맞아 떨어졌다. “전쟁의 승기는 사흘 안에 결정되리라 예상합니다.” 알테어가 베르스 군에 가담한 사실은 키르케가 직접 공표했다. 어차리 얼 마가지 않아 인트라 무로스의 첩보망에 그 사실이 알려질테고, 그럴 바엔 먼저 터트려서 선저효과를 얻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3인의 아신이 모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오타의 사 령부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모두 라이오라는 최강의 아신에 대한 굳센 믿 음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오타의 참모진도 키르케가 최우선으로 라 이오라를 꺾을 거라는 사실을 예측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아신을 투입 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게 상식이었다. 그 때 라이오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한테는 무라사 혼자만 올 것이다.” “예?” 참모들은 모두 말을 멈추고 사령관을 바라봤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 냐는 당혹의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각하, 적현무가 그런 무모한 작전을 계획할 거라고는...” “전쟁과는 상관 없어. 무라사는 그런 녀석이다.” 라이오라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단지 견백호를 상징하는 은색 장기맒을 주시할 뿐이었다. 어쨌든 사령관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참모들은 견백호 혼 자 선두의 라이오라를 막아선다는 조건 하에서 다시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견백호가 하루 정도 각하를 저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십 분이면 된다.” “...!” 그들은 이번에도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진청룡이라도 다른 아신을 십 분 내에 일방적으로 이길 수는 없다. 참모들은 존경하는 사령관이 갑자기 자 기 힘에 도취되었거나 혹은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무례한 추측마저 했다. “내가 그 녀석을 죽이면 진격을 개시해라.” “아, 알겠습니다.” 금발의 지휘관은 그 간단한 명령을 끝으로 얼떨떨한 표정의 참모들을 놔 두고 자리를 떴다. 5. 이자벨 섭정이 있는 곳은 이오타 왕실이 아니었다. 또한 작전사령부에 있 지도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시골 마을로 위장되어 있는 지하 기자 속에서 텔레마코스를 통해 왕실에 지령을 내리는 한편 인코그니토의 궁극적 목적이 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시스템을 완성시켜 나가고 있었다. “아, 어떤 여자를 좀 찾아왔는데요.” 호창한 오후, 그 마을 입구에 나타난 한 청년의 말에 입구를 지키던 특무 대원들은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외부인이 거의 오지 않는 외딴 마을이지 만 가끔 넋 나간 여행객들이 찾아올 때도 있는 것이다. “뭐? 네가 찾는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마을에는 없으니 까 당장 꺼져!” “헤에, 엄청나게 친절한 마을이로군요. 하지만 분명 여기 있을 텐데요. ” 귀걸이를 한 곱슬머리 남자였다. 얼굴에 붕대만 감지 않았다면 꽤 귀여워 보일 인상이었는데도 그는 배짱 좋게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집요하게 물어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마을 경비병으로 위장하고 있던 특무대원은 귀찮으니까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겉으로는 집과 작은 술집 따 위가 늘어서 있는 흔해빠진 마을이지만 실은 그럴싸하게 위장되어 있을 뿐, 건물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이, 아무튼 이 마을에는 못 들어가. 죽기 싫으면 돌아가!”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굉장한 거라도 지키고 계시나 보죠? 이런 작은 마을에 경비병까지 있고 말입니다.” “그, 그게 어쨌다는 거냐!” “뭐랄까요... 속아주기엔 너무 어색하다고나 할까?" 순간 그의 손이 특부대가 차고 있는 검을 잡았다. 그 검이 뽑히는 것과 동시에 상대의 팔이 잘려 날아갔다. “으아아악!” 하늘로 날아오른 팔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의 몸이 유연하게 튀어나갔다. 칼날이 호선을 그리며 근처에 있던 특무대의 머리가 잘렸다. 남자는 곧 그 의 칼도 뽑아 들었다. 비무장이던 남자의 두 손에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자 루의 칼이 들리자 다른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마, 말도 안 돼!” 그들은 황급히 총을 집어 들었지만 방아쇄를 당길 수는 없었다. 눈앞엥서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는 순간 숨이 끊어진 것이다. 단 삼 초 만에 네 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한 명은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며 그 ‘귀신’을 쐈 다. 그러나 제대로 조준도 하지 못한 총알은 슬쩍 고개를 기울이는 것만으 로도 빗나가 버렸다. 곧 피싯! 하는 소리와 함께 긴 라이플이 두 동강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흐이이익!” 그는 거짓말처럼 잘려나간 총을 집어던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특무대의 체면도 잊고 덜덜 떨고 있는 그에게 아까와는 전혀 다른 ‘본래의’ 눈빛을 드러낸 붉은 눈의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는 붕대를 벗었다. 얇고 긴 상흔이 콧등을 지나고 있었다. “가서 그 여자한테 말해라. 키스 세자르가 돌아왔다고.” 키스는 두 자루의 검을 든 채 그렇게 말했다. 외전. 또 다른 시선 #4. 나는 불타는 덤불이로소이다. 1. 무엇이든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사랑하겠다. 꿈의 끄트머리에서 기억나는 말은 그 한 마디 뿐이었다. 꿈이란 항상 불 친절하다. 여간해서는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도 없고 때로는 내게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사람을 창피하게 만든다. “...”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마자 하얀 셔츠에 검은 목면 에이프런과 같은 색 의 조끼를 두른 청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청년이라기보다는 아직 소 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나는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올리며 잔뜩 긴장한 그 아이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라이오라 각하, 황제 폐하로부터의 서신이 도착했사옵니다.” 그는 마라넬로 황제로부터의 친서를 감히 자신이 만지고 있다는 것 자체 가 죄스럽다는 듯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느릿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 으킨 뒤에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이 착실한 갈색 머리칼의 청년 - 나의 열한 번째 집사를 바라봤다. 벌써 오전 10시였다. “왜 날 안 깨웠지.” “...” “너 설마, 그 편지 들고 계속 거기 서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 집사는 그렇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코끝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다음부터는 날 깨워라.” “하지만 어떻게 제가 아신, 아니 각하를 감히...” 가끔 사람들은 아신을 무슨 신의 사도쯤으로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늘을 날고 담숨에 성을 부숴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우리들은 ‘끔찍한 전략병기’라는 비 유 정도가 적당한 괴물일 뿐이다. “늦잠 하나 막지 못하는 집사라면 내 쪽에서 곤란한다. 이제부턴 깨워. ” 하지만 이 소년은 여전히 ‘고귀한 아신도 늦잠을 자는 줄은 꿈에도 몰랐 다.’ 라는 당혹의 표정을 숨기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늦잠 을 잔 이유를 ‘일주일 동안 황제의 칙령을 받아 남부 변경에 내려가 반군 1만 5천 명을 척살하고 곧바로 돌아와 잠들었기 때문’ 이라고 솔직하게 고 백해서 이 아이를 첫날 근무부터 겁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나 는 잠자코 황제로부터의 친서를 받았다. 난 이 편지에 담긴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한밤중이라도 나를 호출하는 황제가 어째서인지 유독 자신의 숨겨진 아들 키릭스에 대한 지시만큼은 이렇게 서신을 이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친 왕 키릭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는 나도 모른다. 내 아들을 가서 보고 오게나. 만약 죽어 있다면 시체는 놔두고 오도록. 편지의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다. 마치 누가치한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차 가운 황제의 명령을 읽은 나는 편지를 집사에게 건네줬다. “태워라.” “예?” 왕이 노예와 같이 식사하는 모습을 봤을 때 이런 표정을 지을까? 어떻게 감히 위대한 황제가 직접 쓴 편지를 하찮은 자신이 태울 수 있겠냐는 얼굴 이었따. “아무도 볼 수 없게 태우라고 말했다.” “아, 알겠사옵니다.” 앞으로 일일이 가르쳐 줄 것을 생각하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아이였다. 이 아이는 얼마 전 죽은 선대 집사의 손자로 ‘직장’을 물려받아 오늘부터 ‘출근’한 셈인데 - 나는 이런 식으로 이 집사 가문을 400년 넘게 곁에 두었다. 이 가문의 유규한 전통이 있다면 변함없이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 “그리고 내 집은 황궁도 아니고 나도 황제 폐하가 아니니까 그 황실 말 투는 쓰지 마라.” “알겠사옵니다. 아, 아니 알겠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셔츠가 아직 어울릴 나이도 아닌 그는 붉어진 얼 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400년 넘게 군인도 장사꾼도 아니고 남자는 오로지 집사만 되었다는 점도 이 녀석 가문의 전통이라면 전통일 것이다. 이 집안 은 세상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집사만 키울 것 같다는 의외의 설득력에 가 벼운 현기증마저 생길 지경이다. “내 제복을 가져와라.” “이미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끔하게 다려서 정리해 놓은 내 검은 제복을 바라보며 자랑 스럽게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다림질 이었다. 분명 할아범은 이 손자에게 제복 다림질의 비법과 창틀 청소의 묘 수 같은 것을 전수한 후에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으리라. 사실 말이 집사지 이 집안의 청소부터 세탁까지 모든 일을 혼 자서 담당하니까 - 내 나이와 비슷한 이 오래된 저택의 붙박이 역할과 다름 없다. (물론 나는 자주 외출을 하고 식사도 하지 않으니까 못 견딜 정도로 일이 많은 것은 아니리리라.) 처음에는 꽤 많은 하녀들과 정원사까지 고용했지만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 는 노골적인 ‘권력싸움’을 보고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기분에 모두 해고하고 ‘다용도 집사’ 하나만 남겨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긴 인생 과 함께 하는 것은 이 오래된 저택과 융통성 없는 집사 가문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입가에 쓴웃음이 스몄다. 순식간에 소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제, 제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말씀해 주신다면 당장 고치겠습니 다.” “아니, 수고했다. 다음부터는 이보다는 덜 수고해도 괜찮아.” 이제 이 아이와 또 수십 년을 같이 살아야 할 테지. 쏜살같이 자라는 담 쟁이처럼 금방 어른으로 성장할 테고 그리고 또 늙고 늙어 나를 모시게 되 어 영광이었다는 유언을 남기고는 새로운 핏줄을 내게 던져 주고 자신은 편 안하게 눈을 감을 테지. 보람차게 일생을 살고 만족스럽게 쉴 수 있을 테지 . “앞으로 잘 부탁한다.” 다들 참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이 격렬한 폭풍에 보통사람이었다면 이미 하늘 끝까지 날아갔을 것이다. 아니면 시시각각 방문자들을 노리는 기이한 맹수들의 습격에 온몸이 뜯겨나 갔을 가능성도 있다. 세계의 북쪽 끝은 항상 이렇게 악의적이었다. 내가 지 금 걷고 있는 이곳은 나침반도 통하지 않는다. 밤과 낮이 120일마다 한 번 씩 바뀌고 지독한 독초 외에는 자라지도 못한다. 계속 가봐야 나오는 것이 라고는 얼어붙은 산맥뿐이다. 나는 이곳을 한 달 정도 계속 뚫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 결국 아무리 가 도 황무지밖에 나오질 않아 포기하고 돌아왔었다. 이토록 아신조차도 기가 질릴 이런 지독한 곳에,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던져놓았다. 키릭스를 미워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지 나는 역시 알 도리가 없다. 아무리 진청룡이라고 불리는 나지만, 이 끔찍한 곳에서 키릭스를 찾아내 는 데는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쓸모없이 광활한 곳이었다 . 참고로 지금 키릭스 황자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전하, 그곳에 있으십니까.” 키릭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서 외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정말 죽 은 것일까? 맹수들의 털가죽으로 얼기설기 지어놓은 텐트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조금 불안해져서 다시 물었다. “전하, 살아계십니까.” 그리고 잠시 후 그 텐트 속에서 얼어붙은 곱슬머리의 소년이 고개를 내밀 었다. 초췌한 얼굴에 온몸은 말라붙은 짐승의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 새 빨간 눈동자만큼은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도 귀신불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 아침에 내가 본 집사와 동류의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아, 라이오라 선생. 미안, 미안. 잠깐 잠들어 있었어.” 태연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졸린 얼굴로 하품을 했다. 텐트 주변에는 뼈 를 발라 널어놓은 맹수들의 고기가 얼어붙어 있었다. 이것은 식량이기도 했 고 다른 맹수들을 끌어들여 사냥하기 위한 키릭스의 덫이기도 했다. 황제가 아들을 이곳에 던질 때 준 것이라고는 단 검 한 자루와 물 한 통이 전부였 다. 나는 되물었다. “지낼 만하십니까.” “하하. 지낼 만하냐고? 선생도 의외로 웃기는 말을 잘 한다니까.” 키릭스는 그렇게 응수한 뒤에 맹수에게 물려 다친 것으로 보이는 다리를 질질 끌며 텐트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빙판 위에 털썩 주저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보였다. “응. 지낼 만해.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전해 드려.” “...” 이 차가운 웃음 속에서 나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추위가, 이 척박함이 그 분노를 점점 더 순수하게 증류시키고 있었다. “아, 그런데 라이오라,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지났지? 이런 곳에오면 아무래도 시간에 무뎌져서.” “43일 지났습니다.” “그래? 헤에. 난 십 년쯤 지난 줄 알았는데.” 키릭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커다란 눈동자로 어둠과 고독 외에는 아무것 도 없는 사방을 둘러봤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널 왜 보낸거야?” “전하께서 살아 계신지 확인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키릭스의 얼어붙은 눈썹이 움찔거렸지만 곧 예의 무료한 표정으로 돌아왔 다. “이렇게 보란 듯이 살아 있으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실감하고 있으니까, 아들 걱정은 하지 말고 편안히 발 뻗고 주 무시라고 전해 드려.” 나는 말없이 이 불행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넘어 왔다는 기이한 산맥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라이오라 선생,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나, 죽여줄래?” 지친 목소리가 바람 속에 흔들거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황족을 해칠 수 없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아신도 이래저래 고민이 많겠 구나.” 그렇게 말한 키릭스는 다친 다리를 끌며 다시 텐트로 들어갔다. 400년을 넘게 살며 나는 수많은 인간의 모습을 지켜봐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40 0년 동안 이런 모습을 지켜봐야만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나는 텐트를 향헤 고개를 숙였다. “전하, 저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 등 뒤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텐트 안에서 터진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냥... 잠깐만 같이 있어줘.” 키릭스도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태연한 척을 해도, 그 놀라운 육체적 강인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곳에서 죽지 않을 수는 있어도 소년의 것이 분명 한 정신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황량한 공간은 점점 키릭스의 마음을 미쳐가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 라이오라, 아직 거기 있어?” “네. 폐하께서 부르기 전까지는 언제까지라도 이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제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하, 그것 참 좋네. 하지만 그건 곤란해. 네가 거기에 서 있으면 맹수 들이 다 도망쳐 버릴 거야. 그럼 난 굶어죽는다고.”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키릭스는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계속 대화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받아주었다.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민 키릭스가 말했다. “라이오라,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아.” “말씀하십시오.” “불사란 어떤거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이지? 이 질문에 가 장 확실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너 하나 뿐일 거야.” 사실 그것은 나 자신도 계속 고민하던 질문이었다. “불사란...” 나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맹수의 털가죽으로 만든 텐트를 바라봤다. 그리 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권태입니다.” “뭐야. 그것뿐이야?” “사랑도 슬픔도 이 세상을 태워버릴 것 같은 증오마저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는 언젠가는 새벽녘 벽난로의 불씨처럼 사그라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무엇을 사랑했고 또 제가 무엇을 증오했는지조차 시간이 지날수록 희 미해져 갑니다. 왜냐하면 제가 사랑한 것들과 절 증오케 만든 모든 것들이 항상 저보다 먼저 시간 속에서 사라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하 지 않고 증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커져가는 것은 헤아릴 수 없 는 별들의 숫자와 같은 권태뿐입니다.” 어째서일까. 나는 이 짧은 생명의 소년에게 진심을 말했다. 잠시 후 키릭 스가 회답했다. “쳇. 무슨 소리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늙은이 같은 소리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농담이었어. 그래, 그것이 400여 년을 살아온 자의 고독이구나. 만약, 용이 실존했다면 지금 너와 같은 말을 했을까. 어렵지만 약간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면, 네 고독에 대한 실례가 될까. 하지만 나도 이런 황폐한 곳에 있다 보니까 널 조금은 공함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린 키릭스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그렇지만 이해하려고 노력 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고독은 이해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것 이다. 이 세상에 오직 나 외에는 겪을 이유도 없는 황무지 같은 권태일 뿐 이다. “라이오라, 너는 마키시온 제국이 있기 전부터 살아왔다며?” “그렇습니다. 본래 노예였습니다.” 내가 없었다면 마키시온 제국도 없었을 것이다. 제국은 피로 세워졌다. 이것은 허세도 자랑도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의 숫자 가 백만 단위를 넘어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현실일 뿐이다. “그때 이야기를 해줘.” “예?” “어떤 역사책을 읽는 것보다도 네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확하겠지. 이 멸망해야 마땅한 제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네가 어떻게 아신이 되었는 지 말해줘.” “이제는 희미한 기억입니다만.” “상관없으니까 말해. 똑바로 들어줄 테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희미한 기억이라는 소리는 거짓말이다. 나는 뚜렷이 기억한다. 아니, 누구라도 자신이 살해당하는 순간은 잊지 못할 것이다. 3. 이상한 일이지만 살해되기 전에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조금도 기 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인생이었기 때문이리라. 모든 노예의 인생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여긴...’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두운 밀실 안에 묶여 있었다. 이 회백질 의 공간을 밝히는 것이라고는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램프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램프 옆에는 돼지의 살점을 뼈에서 발라낼 때나 쓰는 칼 한 자루 가 놓여 있었다. 내 몸은 도르래 같은 장치에 연결되어 있었고 발가벗겨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내 입이 비명을 토했지만 그것은 곧 단단하게 물려진 재갈에 의해 되 삼켜졌다. 지금 내게는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자유도 박탈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바라보면 정말 죽을지도 모 른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 그때 죽을 수 있었다면 죽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기묘한 후회도 든다. “자, 확인해 보시지요.” 그것은 분명 내 주인의 목소리였다. 그가 다가와 내 머리채를 잡고 강제 로 고개를 들렸다. “어떻게, 아드님과 닮았습니까?” 상냥한 주인의 말과 함께 중년의 귀부인이 나를 뜯어봤다. 저 여자는 누 구지? 내가 저 여자의 아들과 닮았냐고? 나는 이 기이한 상황에 몸을 떨었 다. 잠시 후 귀부인이 말했다. “제법 비슷하네요. 좋아요. 이 노예를 사도록 하죠.” 그녀는 주머니를 꺼내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그 주머니 안이 금화로 가득 하다는 것을 확인한 주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마치 낡은 가구를 비싼 값에 팔아치운 것처럼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귀부인과 함께 이 방을 나갔다.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곧 이 방에는 나와 더러운 가죽 앞치마를 두른 근육질의 남자만 남게 되 었다. 그는 담배를 물어 피우며 말했다. “먼저 말해두겠지만 내가 너한테 감정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니까, 원망 하진 말아라.” 원망?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담배를 비벼 끈 그는 가지고 들어온 향유단지에 손을 집어넣어 그 값비싼 기름을 내 몸에 발랐다. 나는 그 오싹하고 끈적거리는 감촉에 몸을 틀었지 만 마치 염습처럼 기계적인 그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의 눈빛은 시체를 향한 것이었다. 한 병의 향유를 모두 바른 그가 단지를 놓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참 희귀한 풍습이 많아. 특히 귀족들의 고매한 풍습이란 참으 로 이해하기 어렵지.” 그는 탁자 위의 칼을 들어서 자신의 거친 가죽 앞치마에 날을 갈았다. “널 구입한 부인의 아들이 지금 몹시 아파. 돈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 라더군. 막막해진 부인이 점쟁이한테 가서 신탁을 받으니까, 아들과 똑같이 생긴 자를 죽이면 아들의 병이 낫는다는 대답을 들었대. 아들과 똑같이 생 긴 네가 대신 고통을 짊어지면 아들은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거지.” “...!” “그래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일수록 그 효과도 크다고 하더래. 웃기지? ” 두려움에 피가 멎는 것 같았다. 그런 되지도 않는 이유 때문에 내가 죽어 야 한다는 건가. 귀족들에게 있어서 우리 노예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물건과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걸 실감한 것 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웃긴 거 가르쳐 줄까. 내가 그 여자 아들을 본 적이 있는데, 같은 금발이라는 것 말고는 너하고 전혀 닮지도 않았어. 너처럼 멋진 몸을 가진 미남이기는커녕 작고 뚱뚱하고 신경질적인 흉물이더군.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 아들과 네가 똑같이 생겼다며 널 선택한거야. 참 대단한 모성애야.” 그 순간 몸이 굳었다. 그의 칼날이 내 배를 가른 것을 본 것이다. 통증은 의외로 느리고 둔탁하게 찾아왔다. 그러나 쏟아지는 핏물을 보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심한 죽음이다. 세상에 이런 의미 없는 죽음 이 또 있을까. 마치 어떤 단년생 곤충처럼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태 어나 잠깐 동안 세상을 기어 다니다가 지나가는 사람의 발에 밟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어버리는 인생 말이다. 내 배를 찌른 놈은 기술자였다. 천천히 피가 뽑혀 죽도록 만든 그는 내 발 밑에 피를 받을 단자를 놔두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네 삶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래서 네 죽음에도 가 치가 없는거야.” 그는 그렇게 내 인생을 채점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노예로 태어나지 마라. ” 그 말은 이상한 방식으로 지켜졌다. 나는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4. 나는 선대 진청룡이 내게 아신의 힘을 넘겨준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 나는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기억이 돌아온 것은 그 힘을 얻는 내가 흑요석처럼 새까만 검을 들고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서 있 을 때였다. 일주일 동안 나는 이 왕국의 모든 도시를 파괴했다. 겁먹은 국 왕은 도주했고 당시 가장 강대한 왕국이었던 내 조국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사라졌다. 이것이 꿈이라면 참 달콤한 악몽일 것이다. “지, 진청룡님이십니까.” 갑옷을 입은 자들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들 은 신흥 왕국 마키시온의 기사들이었다. “부디 우리의 왕국을 지켜 주소서!” 나는 내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5. 라이오라는 잠시 회상을 접고 키릭스에게 말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마키시온을 수호하게 된 것은. 당시 작은 왕국이었던 마키시온은 주변 강국들의 침입으로 멸망해가고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나 포악한 왕국을 단숨에 멸망시킨 저는 신이 내린 사도쯤으로 보였겠지요. 어쨌든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호오. 이 잘난 제국도 그랬을 때가 있었어?” 키릭스는 꽤 흥미로운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책에는 하늘의 계 시를 받고 태어난 아이가 현명한 왕들의 도움으로 마키시온을 건국한 것이 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사람들도 꽤 영악해져서 그런 허 무맹랑한 설화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 사실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신에 범접하는 힘을 가지게 된 내가 다른 왕들을 모조리 굴복시켜 제국으로 만들었으니까. 방법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던 것이다. 6. 지금도 아신은 아신 외에는 대적할 수 없는 불가침의 존재에 가까운데 40 0여 년 전에는 어련했을까. 진청룡이라는 수호신을 얻은 마키시온 왕국이 멸망해가는 군소왕국에서 다섯 개의 왕국을 거느린 거대한 제국이 되기까지 는 채 30년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차가운 크림처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제국은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아신인 내가 ‘인간 세상’ 에 관여했다는 것에 있었다. 사실 그때는 아신위라는 ‘절대적 존재’ 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아신들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신성한 존재라서 아신 이 되는 순간 인적이 없는 산이나 섬으로 가서 은둔하며 세계적인 재앙이 닥쳤을 때나 나타나 도왔기 때문이었다. 참 전설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힘을 받는 순간 한 왕국을 날려버리 는 바람에 그걸 지킬 겨를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마카시온을 수호했으 므로 다른 아신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힘을 얻고 50년 쯤 지났을 때 다른 아신들이 나를 찾아왔다. “아신이 이 세상에 관여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엉망이 됩니다. 당장 이 탐욕스런 제국을 떠나세요.” 정말 무슨 여신 같은 어조로 그렇게 경고한 사람은 바로 명주작. 가련한 외모의 맹인 아가씨였다. 저 여자 이후 수많은 명주작이 힘을 이었지만, 알 테어만큼 멍한 여자는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미쳐있었다. 내가 결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사실이 날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아니, 지금도 미쳐 있는 것 같지만 그때는 과격하게 미쳐있었다. 난 그녀를 조롱했다. "세상은 예전부터 엉망진창이었던 것 같은데. 아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되먹지 못한 세상이야. 그렇게 세계를 구하고 싶다면 자살 이라도 하지 그래.“ “명주작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건방진 놈아!” “네가 견백호냐.” 견백호는 솜털이 가시지 않은 소년이었다. 저런 조그만 어린애가 아신이 되질 않나, 나 같은 시체가 아신이 되질 않나 신이 무슨 의도가 있어써 이 러고 있는 거라면 그 악취미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어린애답지 않게 긍넘한 말만 골라서 하는 견백호에게 툭하고 대꾸했다. “앞으로 누가 백호를 이어가든 하나같이 짜증나는 녀석이 될 것 같구나. ” 솔직히 이 말은 후회힌다. 말이 씨가 된다고, 실제로 나는 백호의 힘을 이어받은 아신들과는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사이가 좋지 못하다가 무라 사에 와서는 그 절정을 이루었다. “마지막 경고예요. 아신의 신분으로 계속 인간사에 관여하겠다면 우리의 힘으로 당신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소리로 봐서는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탓에 생김새를 알 수 없었던 그녀는 바로 적현무였다. 대대로 적현무는 이 름 그대로 고요한 노와 같았지만 키르케에 와서 이미지 개선에 성공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때가 좋았다. 결국 아신들의 말은 내가 사람들을 떠나 자신들처럼 홀로 은둔하길 원하 는 것이었다. ‘그것 참 이기적이로군.’ 당신들이야 그렇게 신성하게 살다가 후계자에게 힘을 물려주고 이 세상을 떠나면 끝나겠지만... 그럼 죽지 못하는 나는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영 원히 혼자 살라는 의미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것이리라. 나는 그들을 향해 조롱 섞인 웃음을 보였다. “제발 부탁인데 날 죽일 수 있다면 죽여줘.” 결국 나는 세 명의 아신들과 싸웠다. 그 싸움은 한 달도 넘게 이어졌으며 도시 하나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분화구를 남기며 끝이 났다. 7. “그래서 누가 이겼는데?” 키릭스는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졌다면 지금 여기 있지 않겠지요?” “아, 그렇겠군.” “하지만 그때 저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십여 년 동안 움직일 수 없었 을 정도로.” 나는 그때를 떠올렸다. 내게 패배한 아신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들을 동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마저 죽이면 정말로 세상에 혼자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이후 점차 아신들이 인간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신들이 나라를 수호하는 게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명주작 의 예언대로 세상이 엉망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내 잘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 “마라넬로 황제 폐하 말입니까.” 당신과 닮았다, 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확실히 내가 모셨 던 다른 황제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8. "아아, 네가 라이오라인가?“ 건방진 자세로 황제의 옥좌에 걸터앉은 젊은 마라넬로는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의 발밑에는 처참하게 살해된 황가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 마라넬로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나를 본 적도 없었다. 황제의 수많은 서 자 중에서도 특히 신분이 낮았던 그는 아버지인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실에 들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추운 지방 도시로 보 내진 마라넬로는 황가의 피가 섞였음에도 멸시를 당하는 비천한 신분이었지 만 조각 같은 미남이었고 엄청난 야심을 지닌 천재였다. 그런 그에게 아버 지가 감시하기 힘든 먼 땅에 있었던 것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마라넬로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외척들과 힘을 합쳐 쿠테타를 일으켜 아 버지였던 선황을 살해했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는 황가 내에서 벌어지 는 일들은 관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마라넬로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네 주인이다.” 그는 놀라울 만큼 천박한 말투로 그렇게 말한 뒤 내게 다가왔다. “성이 있나?” “없습니다” “하긴, 자식도 낳지 못하는 녀석이 성이 있어 뭘 하겠나만 그래도 제국 의 수호신에게 성도 없다는 것은 좀 초라하지 않은가?” “상관없습니다만.” 마라넬로에 대한 첫인상은 몹시 불쾌한 녀석이었다. 마라넬로는 손가락으 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뭔가 깊이 생각하더니만 뜬금없이 새로운 성을 ‘만 들어’ 냈다. “란다마이저.” “네?” “그냥 갑자기 떠올랐어. 그걸 하사하겠다. 앞으로 네 성은 그거야.” 가슴 아플 정도로 무성의한 네이밍이었다. 나는 불편한 얼굴로 조용히 고 개를 숙였다. 그는 갑자기 그런 내 어깨를 두 팔로 감았다. 그리고는 묘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하나 물어볼게. 넌 영생이라지? 너와 몸을 섞으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처음으로 충성심을 자극 받았다. 마라넬로는 예전 부터 남자 여자 안 가리고 침실에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선황에게 ‘더러운 피’ 라는 멸시를 받았는데 - 더러운지 안 더러운지는 모르겠지만 미쳤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니,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황제 중에 안 미친 사람 이 있긴 했던가. “농담이야. 그 따위 저주는 거저 줘도 피할 거야. 황가의 조상들은 모조 리 네 영생을 탐냈다지? 하지만 나는 달라. 죽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저 주야. 너도 동의하지?” “...” “넌 참 불행하겠구나.” 이 광기 어린 자에게 묘한 호기심이 생긴 것은 이때부터였다. 마라넬로는 단호한 어조로 내게 명령했다.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는 있지. 나는 너를 이용해서 마음껏 행복하게 살다 죽을거다. 약 오르지? ” 나는 그 어처구니 없는 말에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웃음이 나왔 다. 하지만 그래서 과연 마라넬로가 행복했냐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 다. 9. 그 이야기를 들은 키릭스는 기가 찬 표정으로 먼 산맥을 바라보며 중얼거 렸다. "... 미친놈이었군.“ 이 말은 폐하에게 보고하지 말아야겠다. 키릭스는 텐트 안으로 다시 들어 가며 말했다. “생동감 넘치는 역사 강의 재미있었어. 이제 가 봐.” “그럼 평안하시길.” 나는 문득 불긴한 기분이 들었다. 제국 탄생 이래로 켜켜이 누적 되어 온 광기가 이 소년에 이르러 폭발하여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지 않 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럼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황실 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10. 석양이 지는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내게 집사가 빗자루를 들거 나타났다. 이미 스무 살을 넘은 그는 착실한 집사가 되어 있었고 그 착실함은 때로는 내게 스트레스였다. “또 땅콩 까고 계십니까!” “뭐가 어때서.” 나는 손을 털며 대답했다. 그는 투덜거리며 바닥에 흩어진 껍질들을 닦아 냈다. 처음 이 녀석이 왔을 때는 나를 그렇게 겁낼 것 없다고 부탁했지만 지금 은 조금은 겁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아신 앞에서도 바락바락 소리 지를 베짱이 있으면 장군하지 왜 집사는 하고 난리란 말인가. 집사 가문의 이단 아 같은 녀석이었다. “좀 다른 취미도 갖지 그러세요. 가령 승마라든가 사냥 같은 것도 있잖 아요. 적어도 멍하니 하늘 보며 땅콩 껍질 흩날리는 것보다는 재미있을 겁 니다.” 이 녀석이 지금 수백 년 동안 전쟁만 한 사람한테 승마와 사냥을 즐기라 고 말한 건가. 그것은 마치 하루 종일 숫자만 보고 사는 수학자에게 ‘심심 하면 방정식을 푸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언하건데, 그것보단 땅콩 까기가 더 재미있다. 나는 여자도 집사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폐하에게 건의할까 , 하고 심각하게 궁리하여 들고 있던 땅콩을 창밖으로 던졌다. 눈을 반짝거 리며 기다리던 새들이 그것을 멋지게 낚아챘다. 그런데 내 결벽증 집사는 이번에도 난리였다. “먹는 거 창 밖으로 던지지 좀 마세요!” “적어도 새들은 맛있게 먹잖아.” “그 새들이 지붕에 갈긴 새똥을 치우는 사람이 바로 저라고요!” 그러나 나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창밖으로 땅콩을 날렸다. 최소한 땅 콩을 맘대로 던질 수 있는 자유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1층에 무라사 씨가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 이 이상의 스트레스는 없었다. “피해는?” “정원수 세 그루. 문짝 하나. 테이블 두 개. 도자기 한 개.” “약소하군.” “난동을 부릴 것 같아 밥을 먹였더니 얌전해졌습니다. 결투를 받아줄 때 까지 안 가겠다는데요? 라이오라 님을 이길 방법을 알아냈으니까 각오하래 요.” “그 말만 들어도 사지가 떨려서 항복하겠다고 전해줘라.” “... 안 통할 걸요.” “그럼 내 제복 가져와.” “아아! 또 도망치시게요! 저 혼자 무라사 씨를 어떻게 막습니까!" “배고프면 밥 주고 졸리면 재워.” “하아, 알겠습니다. 그럼 잘 도망치세요.” 집사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내 제복을 가지러 나갔다. ‘네 삶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어. 그래서 네 죽음에도 가치가 없는 거야. ’ 나는 수백 년 전 나를 죽였던 도살자가 남긴 말을 중얼거리며 마지막 남 은 땅콩을 창밖으로 던졌다. SKT11 제29화 높은 탑 위의 남자들 제30화 나약한영혼 제31화 용과 호랑이 제32화 사탄의 태양 아래 제33화 긴 복도 제34화 영혼이 잠드는 곳 최종화 THE END OF SWALLOW KNIGHTS TALES 제29화 높은 탑 위의 남자들 1 단신으로 이자벨의 기지에 뛰어든 키스는 논앞의 광경을 바라 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웃을 일이 아니었다. 벌집이라도 건드린 양 쏟아져 나오는 특무 대의 무리가 삽시간에 키스 앞에 벽을 만들었다. 그들의 일사불란 한 총구가 키스를 향했다. "목표 조준!" "하아, 이거 지나치게 성대한 환영인사로군요오." 라고 키스는 엄청나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괜 히 폼 나게 정면으로 들어왔다가 이게 무슨 꼴인가, 하는 후회가 역력했다. 그가 몸을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여러분, 이런 화창한 날 박 터지게 싸우면 기분만 울쩍해진답 니다아. 그러니까 좋은 제안 하나 할게요. 여러분이 저를 못 본 척 해주면 저도 여러분들을 못 본 걸로 하고 끝내는 거예요. 평화만 세랍니다아." 활짝 웃는 키스의 얼굴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전원 발사!" "어머나?" 주저 없는 총성이 터지며 초석 900미터의 납탄들이 키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2 10대 시절 카론의 기억을 들춰보면 즐거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평민은 귀족에게 설설 기는 것이 지당한데 도 카론은 항상 그 룰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야! 평민!" 견습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검은 머리칼의 소년을 둘러쌌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일전 카론이 흠씬 때려준 흔적이었다. 카론은 검만 없다면 계집애나 다름없다고 착각한 게 불행이었다. 커다란 덩치만 믿고 카론에게 먼저 맨손 겨루기를 강요한 주제에 도리어 떡이 되게 당했으니 백작 가문의 자존심이 이만저만 뭉개진 게 아니었다. "한시도 가만히 놔두질 않는군. 그렇게 할 일이 없는가?" 카론은 눈매를 찡그렸다. 이곳은 실내 연무장이었고 카론은 한 참 저녁 훈련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토마토 얼굴'은 땀에 젖은 카론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이기죽거렸다. "이거 어쩌지? 지금은 네 보호자가 외출 중이야. 오늘 중엔 안 올 걸? '보호자'는 바로 당연히 키릭스였다. "그 자식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순신간에 화가 솟구친 카론이 버럭 소리쳤지만 그를 둘러싼 견 습 기사들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카론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지 만, 키릭스와 미레일이 그의 '생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 은 사실이었다. "키릭스 따위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덤벼. 대신 죽을 각오로 덤벼라." 카론은 자신의 연습용 검을 들며 그들을 노려봤다. 다가오는 늑 대들을 내쫓는 듯 격렬한 기세였다. 그들은 슬쩍 두로 물러났다. 성인 기사에 필적하는 카론의 검술 실력은 익히 잘 알고 있다. 떼거리로 몰려든다면 어떻게든 카론을 쓰러트릴 수야 있겠지만 그랬다간 자신들의 팔과 다리도 성치 못 할 것이다. 귀족 가문이라고 느슨하게 때려줄 카론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견습 기사들은 좀더 영악한 방법을 택했다. "진정하라고, 카론. 설마 고귀한 우리들이 품위 없이 집단으로 덤벼들겠어? 단지 재대결을 청하려는 것뿐이야. 어디까지나 일대 일로." "일대일?" 카론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들에 입에서 그런 공평한 말이 나 왔다는 것 자체가 더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일대일이라면 질 리가 없다. 견습 기사 사이의 검술 실력 이 1위 키릭스, 2위 미레일, 3위 카론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바뀌 어본 적이 없는 일종의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역시 단서가 붙었다. "이번에도 검은 놔두고 맨몸으로 붙는거야. 무기를 쓰면 다치 잖아?" "흥.같잖은 배려심이로군." 카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들고 있던 검을 내던졌다. 검을 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일대일이라면 패배할 이유가 없었다. 상대는 덩치만 있을 뿐 격투의 기본도 모르는 느림보였다. "좋아. 덤벼라." 카론은 상의를 벗고는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러자 상대는 걸려 들었다는 미소를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내가 아니야." 그 말과 함께 연무장에 나타난 자는 거구의 사내였다.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에 카론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단단한 몸을 가진 싸움 꾼. 자세하게 소개하자면 백작 가문이 보낸 경호원이었다. 이런 의미의 일대일이었단 말인가. 귀족다운 보복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도 유치해서 치가 다 떨렸다. 카론은 다시 옷을 집어 들 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직접 붙을 용기가 생기면 다시 찾아와." 카론은 그렇게 내뱉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큭큭. 겁먹었냐? 키릭스 씨가 없으니까 꽁무니를 빼는 꼴이라 니." 이 한심한 도발에 대해서 은의 기사였다면 '맘대로 생각하도록. 머저리들' 이라고 차갑게 쏘아붙인 뒤에 자기 갈 길 갔겠지만 불행 하게도 17세의 카론은 '키릭스'라는 이름에 몹시도 민감했다. 몸을 돌린 카론은 그들을 사납게 쏘아보며 상의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누가 겁먹었다는 거야!" 3 "....이게 다 뭐람. 카론,너도 진짜 어지간하다." "키릭스 씨, 이번엔 너무 심한데요." "심하고 자시고 간에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싸운 놈이 병신이지. 얜 어떻게 허구한 날 이러냐?" "싸웟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습니다만." 흐릿하게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카론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 다. 눈앞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키릭스와 미레일이 있었다. 카론은 싸늘한 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단정하게 뒤로 묶던 긴 머리칼은 어지럽게 풀려 있었다. 온몸은 몇 시간 동안 이곳에서 무슨 끔찍한 고문이 벌어졌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카론은 입을 꽉 다물며 고개를 돌렸다. 키릭스에게 이런 꼴 보이 는 것 자체가 싫었다. "나도 보고 싫어." 키릭스는 이번에도 카론의 속마음을 읽은 듯 그렇게 내뱉고는 근처에 떨어진 상의를 집어 카론의 얼굴 위에 떨어트렸다. "기분 좋게 술 마시고 오자마자 이 무슨 아마겟돈이냐고." 키릭스는 피를 흘리는 카론이 이리저리 끌려 다닌 흔적이 역력 한 연무장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항복 같은 거 받아줬을 리가 만 무했다. 미레일은 드물게도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키릭스 씨, 이 정도면 카론 씨가 안 죽은 게 다행입니다. 그 녀 석들에게 확실하게 주의를 줘야....." 키릭스는 드물게도 화가 난 것 같은 미레일의 입을 막으며 고개 를 저었다. "됐어. 신나게 때렸으면 죽도록 맞을 때도 있는 거야." "하지만 이건 너무 불공평한....." "원래 세상이란 불공평한 일들로 가득하지."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취기로 얼굴이 벌게진 견습 기사들과 예 의 그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 엉망이 된 카론을 내버려두고 술을 마시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해서 다시 온 것이리라. 살아 있 다면 좀더 괴롭힐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키릭스와 미레 일을 보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 키릭스 씨.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알코올이라는 묘약은 참으로 대단해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평소였다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키릭스를 어쩐지 지금은 대등 하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놀라운 착각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들의 꼬락서니를 훑어본 키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일이 상대해 주기에 너무 저열한 놈들이었다. "내일까지 여기 알아서 청소해. 네 녀석들이 싫어하는 평민의 피로 칠갑이 된 곳에서 훈련 받고 싶지는 않겠지?" 키릭스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니, 떠 나려고 했다. 자랑스러운 경호원을 거느린 백작가의 후계자가 말 실수만 안했다면 말이다. "언제까지 저 평민 놈을 감쌀 겁니까? 혹시 카론이 당신 애인이 라도 됩니까?" 사방에서 쿡쿡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매사에 온화한 미레일 역 시 이번에는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키릭스만은 그 정도로 화가 나겠냐? 라는 표정으로 대꾸 했다. "그렇고 말고. 밤마다 침대 위에서 만나는 사이인 걸? 내년쯤에 는 청혼할까 해." "키릭스 씨, 제발 좀....." 미레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지하게 주의를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단 말인가? 카론과는 달리 영 휘둘려지지 않자 그들은 좀더 자극적인 도발 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또 할 말이 있는데, 대체 세자르 가문이라는 것 이 있기는 한 겁니까? 나름대로 조사를 해봤지만 누구도 당신 가 문을 모르더군요. 혹시 사기 치는 거 아닙니까? "뭐, 네놈들은 당연히 모르겠지. 우리 집안은 공작가도 후작가 도 아니니까." 제국의 로얄 패밀리였다. 게다가 키릭스의 아버지가 베르스쯤 은 손가락 하나로도 벌레처럼 으깨버릴 수 있는 마키시온 제국의 황제 마라넬로라는 것을 이들이 알게 된다면 당장 땅에 이마를 박고 눈물로 목숨을 구걸할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말해봐야 특급 정신병자 취급만 받을 뿐이었다. 물론 사실을 밝힐 생각도 없었다. "호오, 그럼 귀족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귀족이 아닌 황족이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키릭스는 생 각했다. 하지만 그의 무시무시한 혈통을 알 턱이 없는 견습 기사 들의 표정에는 가학적인 미소가 번졌다. 지도 기사의 비굴한 태도와 높은 신분이 분명한 미레일이 그를 따른다는 점과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 때문에 제풀에 키릭스 세 자르가 대단한 권세가의 후계자일 거라 지레짐작했지만,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랐다. 남을 깔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밑에 깔리는것은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그들로서는 항상 자신들 꼭대기에 서 있던 키릭스가 내 심 불만이었던 것이다. "키릭스 세자르, 당신도 내 경호원과 대결해 줘야겠어." 그 말과 함께 카론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거구의 남자가 키릭스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각진 얼굴에는 반창고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은 카론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들은 제아무리 키릭스라도 이런 '어른'을 이길 거라고는 상상하 지 못했다. 키릭스가 귀족이 아니라면 카론과 똑같이 취급해도 상 관없는 것이다.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미레일이 둘 사이에 끼어들자 견습 기사들의 얼굴에 낭패의 빛 이 서렸다. 미레일은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귀족가의 공자다. 미 레일을 카론처럼 만들었다가는 그 즉시 가문대 가문의 전쟁이 되 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 귀족들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반면 미레일이 대신 나선 이유는 사실 키릭스나 카론 때문이 아 니라 견습 기사들을 위해서였다. 모처럼 너그러운 키릭스를 더 이 상 화나게 했다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 훤하기 때문에-오 늘 밤 20구의 시체를 치워야 하는 상황은 절대 경험하기 싫었다. "일을 커지는 것은 싫습니다. 단지 겨루는 것일뿐, 다쳐도 본가 에는 알리지 않습니다." 미레일은 그렇게 말하며 셔츠를 벗었다. 매끈하면서도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미레일은 카론은 물론 키릭스보다도 키가 크고 몸집도 좋다. 아무리 소년이라고 해도 결코 왜소해 보이지 않았따. 물론 그렇 다고 전문적인 싸움꾼을 상대로 승산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때 키릭스가 싱긋 웃으며 미레일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됐어." "키릭스 씨." "그냥 내가 할게." 그 말과 함께 키릭스는 미레일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그 리고 섬광처럼 칼날이 궤적을 그렸다. 아무리 날이 없는 연습용 검이라고 해도 키릭스가 쥐면 진검과 다를 바 없다. 원한다면 바위도 자를 수 있다. 뼈는 말할 거도 없 는 것이다 "우아아악!" 경호원의 두툼한 팔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상상도 못한 기습 에 사내는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제 말로 끝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미레일은 황급히 문으로 뛰어가 자물쇠를 걸 었다. "비, 비겁하게 칼을 쓰다니!" "뭐? 칼 쓰지 말라는 말 못 들었는데?" 키릭스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당황하는 견습생들에게 목덜미 를 보여줬다. "게다가 지금 내 몸엔 분홍빛 사랑의 꽃들이 만개해 있어서 벗 기 창피하다고." 키릭스가 도시로 가서 술만 먹고 올 리는 없었다. 견습 기사들은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주저 없이 팔을 자르다 니! 아무리 귀족 이외의 인간은 가축 취급하는 족속들이라고 해 도, 쇠고기를 먹는 일과 소를 도살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이제 고작 10대 중반을 넘어선 철부지들에게 키릭스의 잔혹함 이란 기겁할 일이었다. "아! 미안, 미안. 이거 네 재산이지? 맘대로 부숴서 미안해." 키릭스는 덜덜 떠는 경호원의 이마를 칼끝으로 쿡쿡 찌르며 말 했다. 혈청 같은 황금빛을 흘리는 키릭스의 불길한 눈매는 예전 카론이 허벅지를 찔릴 때 봤던 그것과 같았다. 바로 광기였다. 키릭스는 주머니를 꺼내 금화 한 닢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보상해줄게. 이거면 되겠지?" 금화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커다랗게 들려왔다. 그리 고 잠시 후 키릭스는 다시 한 잎을 떨어트렸다. 그 순간, 검이 번뜩이며 남은 한쪽 팔이 날아갔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터졌지만 키릭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 맙소사!" 견습 기사들의 얼굴은 결핵이라도 걸린 것인 양 창백했다. 누 구는 성호를 그었고 또 누구는 토악질까지 했다. 이런 짓은 악마 나 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인간, 그것도 17세가 저지를 일이 아니 었다. 키릭스는 그 오만한 눈빛으로 그런 그들을 내리 깔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점점 입가의 웃음만 사라져갔다. 이자들 이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키릭스는 들고 있던 주머니를 천천히 뒤집었다. 무수한 금화들 이 촤르를 쏟아져 어지럽게 바닥을 굴렀다.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 게 울렸다. "아버지라..... 그래,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했지. 벌레들을 설득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왜냐하면 애당초 인간의 말을 이해하 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득할 시간 있으면 한 마리라도 더 밟아 죽여라." "키, 키릭스 씨. 저희들이 잘못....."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마라, 버러지들." 견습 기사들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서렸다. 알코올이 준 만 용은 후회로 변해갔다. 평소에는 칼조차 들지 않는 키릭스의 입에 서 죽이겠다는 말이 나올 때는 절대로 장난이나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그만해!" 날카로운 미성이 실내를 갈랐다. 키릭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 다. 그곳에는 기적처럼 몸을 일으킨 카론이 부서진 어깨를 움켜쥔 채 자신을 바로보고 있었다. 그것은 겁에 질린 눈빛도 화가 난 눈빛도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 었다. 키릭스는 지금만큼은 카론의 속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이 돼지들을 경멸하기로는 자신보다도 저 친구가 더 하리라. 그런데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준 이자들을 왜 죽이지 말라고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비로 충만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그만 둬, 부탁이야." 키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에게 부탁이라고는 절대로 안 하는 놈이 이런 일로 부탁을 해? 그것이 키릭스의 심기를 건드 린 것이다. "누가 네깟 놈보고 동정해 달래? 지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키릭스는 카론을 만나 처음으로 고함쳤다. 그 누구도 자신의 절 망에는 손댈 수 없었다. 용이 품은 보물처럼. 설령 누가 구해주겠 다고 설쳐봐야 같이 수렁 속으로 빠져버릴 뿐이다. 모두가 겁을 먹고 키릭스의 섬뜩한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도 카 론은 피하지 않았다. 카론을 집어 삼킬 기세로 노려보던 키릭스는 결국 자기 쪽에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누가 신경이나 쓸까봐? 쳇, 맘대로 해보라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칼을 던졌다. 어째 오늘은 자신이 말려든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아아, 미안하게 됐군. 취해서 좀 흥분한 것 같네. 자, 그럼 모두 들 굿나잇." 키릭스는 남의 옷에 술을 쏟은 정도의 대수롭잖은 미안함으로 말하고는 하품을 하며 문 밖으로 나갔다. 마치 방금 전까지 파티 를 즐기다가 피곤해서 먼저 떠나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말이다. 성격에 모가 났다거나 자기중심적이라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키릭스에게는 무엇인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 야 할 성분 하나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카론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세상을 향한 맹목적 증오였다. 마치 지상으로 추락한 신수(神獸) 처럼, 악취로 가득한 이 세상의 공기로는 숨 쉴 수가 없어서 죽어 가는 비운의 생물 같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다가오는 모든 손길 을 물어버리는 그런 생명체. 카론이 키릭스에게 연민을 느낀 것은 이때부터였다. 아무튼 이 난리 이후 그 누구도 키릭스의 뒤를 캐려는 용감한 시 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의문의 사고'로 견습 기사들 모두가 숨질 때까지 말이다. 4 "아아, 이런 꼴로 어쩐 일입니까아!" 키스는 멋대로 자기 사무실에 들어온 카론을 보고는 머리를 쥐 어뜯었다. 이렇게 취한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구겨진 셔츠에 흐트러진 머리칼, 단정하던 용모는 불게 달아올 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용케도 여기까지 온 것이 신기할 정도 다. 카론은 몸을 가누기도 어지러운지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중얼 거렸다. "이대로는 이멜렌에게 갈 수가 없어서..... 술 깰 때까지만 부 탁한다." 천성이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해서, 제법 또박또박 말하고는 있 었지만 잔뜩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거 왕실 뉴스에 다 나올 일이로군요. 고귀한 은의 기사가 취 해 비틀비틀....." "흥, 누가 취했다는 거....아앗!" 카론은 '역시 취했습니다'라는 의미의 변명을 늘어놓으며 소파 에 앉으려다가 휘청거리며 엎어져 버렸다. 거창한 소리를 내며 꽃 병과 컵들이 날아올랐다. 키스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네에. 전혀 안취하셨네요오." "미, 미안." 카론은 황급히 몸을 이르키고는 빨개진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대 체 얼마나 마신 거야, 술도 잘 못하면서. 키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검술로 살아가는 자는 술에 만취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살행위 다. 완전 무방비가 되어 버린다.(아무리 검술이라는 것이 자물쇠 따 기처럼 머리보다는 손끝으로 기억하는 '학문'이라고는 해도)재수 없으 면 얼치기의 무딘 검에도 죽게되는 것이다. 지겨울 정도로 검을 다뤄본 카론이나 키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창 취해서 평소 같으면 아무리 오라고 불 러도 마다하는 키스의 사무실에 와서 쓰러졌다는 사실은, 엄청난 자제심으로도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 있다는 의미였고 또한 그 괴 로움의 원인제공자는 아마 자신일 거라고 키스는 간파했다. 그 괴 로움이 무엇인지도 대충 알 수 있었다. "....키스." 한참 지나서야 카론이 말했다. 키스는 상대의 어깨를 토닥거리 며 힘내라고 위로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키릭스가 남긴 파편 때문 일까. 그는 상대가 위로받길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술을 따라주고는 말없이 웃으며 바로볼 뿐이다. 카론은 술 깨러 온 주제에 결국 키스가 아껴둔 술까지 다 마시고 나서야 처음으로 입을 연것이다. 키스는 부드럽게 그를 응시했다. 결국 자신 때문에 생긴 괴로움 일 테니 위로해 줄 자격은 없어도 들어줄 수는 있었다. 순간 카론이 그를 확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부하 관리 좀 똑바로 해라." "네?" 난데없는 힐책에 키스는 눈을 동그렇게 떴다. "엔디미온 경 말이다! 네가 전염시켜서 완전히 구제불능이 되어 버렸잖아!" 울컥!키스는 볼을 부풀렸다. "아니, 그게 왜 나때문입니까아! 내가 무슨 장티푸스입니까! 전 염시키게!" 위로로 나발이고 이쯤 되면 키스도 억울한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미온 경이 그 지경이 된 것은 솔 직히 카론 경 탓이 크다고요!" "뭐? 그게 어째서 내 탓인가!" 카론이 벌떡 일어났다. 난리도 아니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항상 문제가 생긴 땐 당신하고 있었잖아? 정 의는 타협하지 않는다느니 진실은 살아있다느니 그런거 죄다 카 론 경에게 물들어서 타락한 거란 말입니다아!" "모함하지 마라! 어딜 봐서 날 닮았다는 거지? 나와 같다면 문제 있을 리가 없어!" 결국 사고 친 자식 놔두고 '당신 닮아서 애가 그 모양이지!'라고 서로 고함치는 부부 꼴이 되어버렸다. 미온이 듣고 있었다면 '삐 뚤어질 테야'라고 중얼거리며 구석에 가서 땅바닥을 후비적거렸 을지도 모를 일이다. 완전히 삐쳐버린 키스는 눈을 흘기며 금단의 과거사를 들춰내 고 말았다. "아아! 이런 뻔뻔한 사람! 당신이 문제가 없다고요? 견습 기사 때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박 터지게 싸우질 않나, 주방을 다 태 워먹어서 기숙사 전체를 패닉 상태로 만들질 않나, 한번은 술에 떡이 된 당신을 몰래 기숙사로 데려오느라 나와 미레일이 얼마나 고생한 줄이나 알아요?" "그때는 내가 싫다는 걸 키릭스 네 녀석이 강제로 마시게 한 거 잖아!" "생사람 잡지 마요! 난 키릭스가 아니라 키스에요! 전혀 몰라요, 그런 사람!" "....너 참 편리한 인격을 가졌구나." 귀 막고 눈 감고 지 혼자 마구 떠들어대는 키스 앞에서 카론은 이를 부득 갈았다. 어쩌다 엔디미온의 정의중독에 대한 책임추궁 이 서로에 대한 원한관계의 재확인으로 끝나버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애당초 자신의 검을 몰래 팔아치워 유곽에 놀러가 놓고 '무기 따위는 없애 버리는 것이 세계 평화의 지름길' 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정신구조를 가진 인간에게 상식을 요구한 것 자 체가 잘못이었다. 카론은 엄청나게 못마땅한 얼굴로 술잔을 비우고는 테이블에 내 려놓았다. 일시에 둘의 대화가 끊어졌으므로 모든 것이 고요했다. 때마침 바람도 멈춰, 이제는 서로의 숨소리 마저 들리 것 같았다. 촛불마자 켜지 않은 방에는 달빛밖에 없었다. 키스의 방은 항상 그랬다. "....키스." 카론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책상 모서리에 컬터앉은 키스는 창밖만 바라봤다. "하나만 약속해 줘." "....." "만약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이멜렌을 보호해줘." 키스는 창백한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빗물에 쏠린 청동조각처럼 처연했다. "대신 당신도 나랑 하나만 약속해요." 키스는 달과 어둠밖에 남지 않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절대로 내 걱정 하지 말아요. 날 완 전히 잊어버리세요.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이 약속 지키면 나도 당신 약속을 지켜줄 테니까." 그 붉은 눈동자는 달빛에 녹아 유달리 슬픈 색이었다. 키스는 고 개를 돌려 카론을 바라봤다. 카론은 술에 취해 전혀 듣지 못했다 는 듯 눈을 감은 채 잠든 척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키스가 피식 웃 었다. "교활하기는." 그는 담요를 가져와 카론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밤을 가르는 그의 입가에 아무도 모르는 진 심이 맴돌았다. 나 이 세상 떠나도 내 죽음일랑 서러워 말고 그저 침울하고 음산한 조종마냥 흘려보내시오. 나 녹아서 진흙이 되었을 때 내 가엾은 이름일랑 부르지 말고 그대의 사랑이 나의 생명과 함께 썩어 버리게 하시오. 현명한 세상이 그대의 슬픔을 꿰뚫어보고 나 하직한 뒤에 그대까지 비웃으면 어찌 합니까. 키스가 스왈로우 나이츠를 떠나기 20여 일 전의 일이었다. 5 카론은 눈을 떳다. 꿈에서 깨어난 그의 눈동자는 투명했다. 더 이상 왕실부기사단장도 아니건만 몸에 익은 성실함은 정확히 5시 에 그를 깨웠다. 카론은 눈가를 뒤덮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안경을 쓰며 옆 을 돌아봤다. 자신의 가슴에 작은 손을 얹은 이멜렌의 잠든 어굴 을 잠시 지켜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내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더 자고 싶어도 몸이 잠을 허락하지 않는 재미없는 근 면성 덕분이었다. 새로 구한 작은 별장에는 하녀도 수영장도 으리으리한 분수대 도 없었다. 이멜렌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틀리에와 카론이 베르 스 연대기를 집필할 서재밖에 없었다. '큭!' 몸을 옮기던 카론은 무의식적으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되삼 켰다. 붕대에 감겨 있는 오른팔은 아직 완치되자 않았다. 치료에 만 반년이상이 걸리며, 아마 평생 통증이 따라올 것이다. 모든 결심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카론은 그걸 후회할 인 간이 아니었다. 숨을 고른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새 하얀 셔츠를 꺼내들고 거울 앞에 섰다. 팔을 잃은 대신 복잡한 제 복을 입을 일이 사라졌다. 하지만 기사수행 때부터 이어져 온 오랜 버릇이랄까. 일을 할 때 는 깔끔하게 다림질 된 순백의 셔츠를 입었다. 그는 곧 서재로 가서 깃펜에 잉크를 찍을 셈이었다. 창피하게도 베르스는 건국 이후 제대로 된 역사서가 편찬된 적이 없다. 각 왕 들마다 자신들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날조한 엉터리 실록이 전 부였다. 어려서부터 카론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가 집대 성하려는 베르스 연대기는 분명 그의 평생을 투자해야 할 대 작업 이다 "....." 아직 한 팔로 옷을 입어야 하는 처지에 익숙하지 않은 카론은 결 국 셔츠를 떨어트렸다. 그는 그것을 잡으려다 문득 거울을 봤다. 은테 안경을 쓴 학자풍의 인상에 귀밑으로 자른 머리칼 덕분에 고 운 목덜미가 드러나긴 했어도 분명 어떤 화가라도 당장 화폭에 담 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몸이다. 베르스 최강의 검술을 만들어 낸 은의 기사의 육체. 사라진 오른 팔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전쟁터 한복판에 서도 좋을 그런 몸 이었다. 그것이 유혹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야 할 것은 펜이 아닌 검이 고,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아내 곁이 아닌 전쟁터라고. 그곳에서 공 을 세우는 것이 네 인생의 의미가 아니었냐고 집요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곧 국가의 운명을 건 큰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은 카론도 알고 있 었다. 최초로 연대기를 편찬하는 것도 분명 베르스를 위하는 일이 라고는 해도-기사가 전쟁을 앞두고 칼을 버렸다는 것은 분명 죄 책감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희열.....' 기사라는 족속은 본능적으로 피 냄새에 반응한다. 카론도 그 본 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됐어." 카론은 셔츠를 집어 들며 그렇게 내뱉었다. 싸움에 반응하는 자 신의 육체를 애써 외면하며 서재로 향했다. 거실을 지나 서재 문을 잡은 카론은 문득 희미한 기척을 감지 했 다. 굳이 표현하자만 야생 동물의 냄새 같은 것이었다. '.....' 라이오라에게 시력을 손상당한 다음부터 다른 감각은 더욱 더 날카로워진 카론이었다. 그 감각이 분명 위험을 경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안에 곰이나 호랑이가 들어와 있을 리는 없 었다. 일단 집안 어디에도 흐트러진 건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암 살자를 보낸 것도 아니리라. 팔을 잃고 낙향한 기사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카론은 소리 없이 뒷걸음질 치고는 벽난로 근처에서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키스가 걸핏하면 휘두른느 우스꽝스러운 막대기라 고는 해도-분명 쇳덩어리다. 카론 정도의 남자가 잡으면 강도 서 넛쯤은 단번에 쓰러트리는 무기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들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짐승의 냄새였다. "큭큭. 그 팔은 어찌된 거냐." 6 "아아, 이게 무슨 꼴이람." 키스는 기지 내부의 복도를 걸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은 자잘한 상처들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털끝하나 안다치고 훈련 된 군인들을 뚫고 나가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코그니토 최강의 암살자였던 키스를 막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 마을 한복판에는 백여 구의 시체 들이 흩어져 있었다. 키스는 짜증이 치밀었다. 어째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누 군가를 죽여야만 하는가. 나름대로 평화주의자를 자청했는데, 이 래서야 누가 봐도 지옥행 티켓 일순위가 아닌가. 그것조차 복제 에게도 지옥에 갈 권리가 있을 때 얘기겠지만. 키스는 그게 다 자신의 팔자가 사나운 탓이라고 건성으로 납득 하며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갔다. 문득 외로웠다. 소파에 몸을 누인 그 촉감이 그리웠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 아늑함. '지금 이 꼴을 녀석들이 보면 깜짝 놀라겠지?' 키스는 눈을 감으며 피식 웃었다.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진한 핏자국이 그의 발밑을 따라가고 있었다. 7 "....루터." 카론은 자신의 서재에 앉아있는 신부복의 그를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헝클어진 터럭 사이로 잘려나간 귀의 헌적이 그대로 드러 난 루터는 지옥이라도 다녀온 듯 더욱 섬뜩해진 모습이었다. 본래 집요한 성격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여기까지 복수하기 위해 찾아올 줄은 카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게 다가 이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불행 한 것은, 왼팔로 휘두르는 부지깽이 정도로는 '검은 추기경' 루터 에게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카론은 빠른 눈길로 침실 쪽을 훑어봤다. 그걸 본 루터가 피식 웃으며 조롱했다. "왜 그래? 내가 네 아내를 잡아먹을까봐 걱정인가?" 카론은 싸늘한 눈초리로 대꾸했다. "싸움을 원하다면 피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아내는 건드리지 마라." 루터는 그 태도가 재미있는지 굵직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다가 말했다.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 "네가 이겼다고. 승부는 그때 끝났다. 이제와 은퇴한 기사 모가 지 비튼다고 뭐가 달라져." 못마땅한 목소리였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루터는 분명 무자 비한 인간이지만 승패를 인정할 줄 아는 도량은 있다. 구차한 복 수심에 불탈 만큼 옹졸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복수가 아니라면 뭣 때문에 찾아왔단 말인가? 설마 루터 가 카론과 화해의 술잔이라도 기울이겠다며 병실에서 뛰쳐나와 달려왔을 리도 없었다. 단정한 흑발의 미남자는 들고 있던 부지깽 이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그럼 왜 온거냐." "주인을 잃은 개가 갈 수 잇는 곳이란 그리 많지 않지." 카론에게 패배해 교황청으로 돌아온 루터가 병실에 있는 동안 교황이 살해당했다. 더할 나위 없이 흉포한 도사견이 주인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 자리를 노리는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에게 있어서 돈이나 권력으로 매수할 수 없고, 그렇다고 애국심도 강요 할 수 없는 루터라는 존재는 방해만 되는 괴물이었다. 결국 그들은 병상에 있는 그 광견을 '안락사' 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틀린 판단이라면 루터의 괴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병사들을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 며 도주한 루터가 찾을 자는 놀랍게도 키르케였다. 방금 전까지 적이었던 자에게 몸을 의탁한 루터도 비상식적이었지만 키르케 역시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통 지휘관이라면 통제 불능에 가까운 루터를 부하로 두는 위 험은 감수할 리가 없지만, 키르케는 기꺼이 루터를 자신의 종으로 삼은 것이다. 능히 그럴 힘을 가진 마녀였다. 예전 카론은 '루터는 아군이 되어도 피하고 싶은 존재'라고 단 정한 바가 있다. 그말이 떠올라 눈매를 찡그리며 대꾸햇다. "살육을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주인이라도 상관없다는 건가?" "여전히 고운 얼굴로 입은 거칠구만.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생 각해서 죽이거든. 이래봬도 성직자야." 그 섬뜩한 미소에 카론은 특유의 매몰찬 어투로 대응했다. "흥. 살인마에게도 철학이 있는가? 귀 기울여 듣고 싶지 않다." 태생적으로 카론과는 친해질 수 없는 루터였다. 루터는 상대의 비난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 산더미 같은 거구를 일으키며 말했다. "키르케가 널 찾는다. 왕실로 가자." "나를....." 카론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사양한다. 더 이상 기사로 살아갈 생각은 없다. 그러자 루터는 묵직한 어조로 되물었다.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국왕의 전권대리인이 이 왕 국의 기사를 소환한 것이다.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 냐." "난 기사 작위를 반납한 몸. 더 이상 기사도의 맹약을 지킬 이유 는 없어." "이런, 이런. 나는 지금 기사도 나부랭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단지....네 아내의 신변에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긴 다음에도 그런 반듯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지." 카론은 안경너머 살기 어린 시선으로 루터를 쏘아봤지만 거구 의 성직자는 가져 온 기사 제복을 카론에게 던질 뿐이었다. "갈아입어." 물론 키르케가 이런 무례한 방식으로 카론을 데려오라고 명령 하지는 않았으리라. 역시 카론과 루터는 아군이 되어도 조금도 가 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다. 8 키스가 베아트리체가 있을 연구실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단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 았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앞서 많은 군인들을 해치웠다고는 해도, 더 이상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이 기분 나쁜 적막 감은 도리어 키스를 긴장시켰다. 연구실 문 앞에 선 키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검을 들었다. 그의 예민한 육감은 문 너머에 있는 덫을 직감했다. 이자벨은 결 코 순순히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해 줄 호인이 아니었다. '또 무슨 함정으로 날 반겨주려나.....' 키스는 눈매를 날카롭게 뜨며 문을 열었다. 누가 자신을 가로막 든 주저 없이 베어버리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 결심은 눈앞의 광경을 보자마자 흔들리고 말았다. "....!" 역시 베아트리체는 없었다. 대신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그를 본 키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키스는 쉽게 놀라거나 당황하는 사내가 아니다. 암살자로 살아 온 그의 차가운 심장은 그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냉정을 지켜왔 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미레일." 키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큰 키에 푸른 눈동 자를 살짝 가리는 반짝이는 은발, 미소가 어울리는 유순한 얼굴, 절대 그럴 리가 없지만 분명 미레일이었던 것이다. 미레일은 마치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미소 로 키스를 맞이했다. "오랜만이로군요, 키스 씨." "미레일은 이미 죽었어." "그래요. 저는 죽었지요." 그러면서 미레일은 턱을 들어 목덜미를 보였다. 목둘레를 봉합 해서 이어붙인 섬뜩한 상흔이 드러났다. 분명 목이 잘렸던 흔적이 었다. "설마 그 여자가 너를.... 되살린 거냐." 키스는 짜내듯이 말했다. 믿을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도 되살릴 수 없다. 아무리 이자벨이라도 그것만큼은 할 수가 없 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미레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미레일의 목소리는 예전과 같았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품은 냉 소는 달랐다. 그토록 싸늘한 미레일의 표정을 키스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키스 씨, 당신은 제가 죽길 바랐지요? 베아트리체를 영원히 찾 을 수 없도록."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럼 어째서 저를 도우러 오지 않은 건가요." "그건....."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 을 위해 키릭스를 배신했던 미레일의 죽음은 키스에게 있어 마음 속을 가득 채우는 죄책감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원망을 듣더라고 키스는 변명할 수 없었다. "....미안해." "그렇게 미안하다면 이번에는 당신이 죽어주면 되겠군요." 미레일은 검을 뽑았다. 만약 눈앞의 상대가 미레일만 아니었다 면 키스는 분명 눈치 챘을 것이다. 일렁이는 미레일의 그림자가 큰 키에 비해 너무 작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전에 미레일의 칼끝이 키스의 복부를 관통했다. 칼날 이 뚫고 둘어오자 키스는 검을 떨어트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셔츠가 시뻘겋게 물들며 소나기처럼 핏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곧 가래 낀 목소리를 들었다. "큭큭. 죽은 친구의 환상이라도 본 거냐." 지저분한 손이 고개 숙인 키스의 금발을 잡아챘다. 키스는 고통 으로 흐릿해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가학적 웃음으로 가득 찬 사내의 얼굴에 미레일과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넌....." "이제 좀 정신이 드시나?" 이것은 덫이었다. 제아무리 이자벨이라도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까지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다. 키스는 실험실로 오며 자신도 모르게 무색무취의 환각가스를 흡인한 것 이다. 아무도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스가 불러일 으킨 환각이 키스의 죄책감을 실체화시켰다. 인트라 무로스가 군용 병기로 이런 가스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키스는 뒤늦게 떠올렸다. 검은 가죽 옷의 남자는 칼끝으로 천천히 키스의 목덜미를 그으며 조롱했다. "죽은 친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암살자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크리스탄센 섭정께서 너 따위를 조심하라고 말한 이유를 모 르겠다." 그러나 그러 말을 들으면서도 키스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는 것 이었다. "다행이야." "뭐?" "네가 정말로 미레일이었다면.... 너무 괴로웠을 테니까." 그 순간 무릎 꿇은 키스의 두 팔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칼날이 끊어졌다. 맨손이라고 하기에는 믿겨지지 않 는 힘과 예리함이었다. 그와 함께 자신의 머리칼을 잡고 있던 상대의 펄을 키스의 두 손 이 뱀처럼 휘감는가 싶더니 곧바로 모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섬 뜩한 소리가 실험실에 터졌다. "우아아악!" 가죽 옷 사내는 산산조각난 뼛조각들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이,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키스는 배를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은 똑똑한 정의의 용사가 재치를 발휘해서 힘센 악당을 물 리치는 전개가 되어야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악당이라서 힘도 세거든." 키스를 조심하라는 이자벨의 조언을 무시한 것이 실수였다. 키 스는 무기가 없어도, 심지어 중상을 입었어도 눈앞의 목표물은 순 식간에 제거하는 인코그니토 최고의 암살자다. 그런 자 바로 앞에 서 방심하며 떠들어대는 짓은 일종의 자살행위였다. 순식간에 사냥꾼에서 먹잇감으로 전락한 그는 다가오는 키스를 향해 마구 손을내저었다. "자, 잠깐만! 죽이지마! 난 명령에 따랏을 뿐이야!" "나도 명령 때문에 참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그래서 그 사람들 이 날 용서했을까, 아니면 더 미워했을까." 키스는 그렇게 말하며 손바닥으로 상대의 얼굴을 잡았다. 그의 악력이라면 두개골쯤은 분필처럼 부숴버릴 수 있었다. "질문이다. 베아트리체는 어디 있나." "모, 몰라! 그런 이름!" "그럼 이자벨은 어디 있지?" 보나마나 베아트리체는 이자벨이 데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상 대는 이번에도 실망스러웠다. "거길 갈 생각이냐? 완전히 미쳤구나! 그분을 만나기도 전에 처 참하게 죽고 말 거다!" 이자벨이 무슨 마왕이냐? 키스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잡은 손 에 조금 힘을 줬다. "으아아악! 그, 그만!" "그래. 나도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너보다는 오래 살 것 같은데? 닥치고 질문에나 대답해 줄래?" "몰라. 정말이라고! 그분이 계신 곳은 특급기밀이야. 나 따위는 알 수도 없어!" "그래? 그럼 살려줄 이유가 없군." "아, 안 돼! 살려줘! 제발 살려 주세요. 부탁....." "남의 몸에 구멍 뚫어놓고 살려주길 기대하다니, 너도 어지간히 뻔뻔하구나. 하긴, 뻔뻔함이야말로 악당의 미덕이지." 그 말과 함께 키스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와 함께 얇은 도 자기에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키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상대의 사지 가 힘을 잃고 늘어지자 키스는 그를 놔주었다. "큭!" 키스는 출혈이 심각한 복부를 꾹 누르며 격한 통증에 눈매를 찡 그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피가 흘렀다. 조각 같은 코끝을 타고 식은땀이 뭉쳐 떨어졌다. 아무리 키스가 쉽사리 죽지 않는 초인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는 위험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베아트리 체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걸 알 아낼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제길, 대체 어디에....." 그때였다. 키스는 등 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런 꼴로 베아트리체를 만날 때까지 살아 있을 수나 있을까?" "키릭스!" 키스는 황금히 몸을 돌렸다. 키릭스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자신 을 훑어보며 웃고 있었다. 피에 얼룩진 키스와는 정반대로 검은 셔츠에 같은 색의 말끔한 슈트를 입고 있는 키릭스의 모습은 사신 처럼 엄숙했고 또 도발적이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트레이드마크와 다름없는 두 자루의 검이 걸 려 있었다. 하지만 그 칼을 뽑지는 않았다. 이런 곳에서 키스를 죽 여 봐야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모든 죽음에는 그에 어울리는 무 대가 필요한데 적어도 이곳은 아니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네놈이 죽으면 나도 죽어. 그러니까 조금 은 그 몸뚱이를 소중하게 다뤄주겠어?" "베아트리체는 어디 있지?" "후후. 글쎄." "....." "뭐,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죽은 거냐." 그 말을 들은 키릭스는 곧 커다랗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 증오로 가득한 미소와 함께 키스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게 행복할 리가 있겠어?" 키스의 감정이 폭발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평생 마음을 숨겨오 던 새빨간 두 눈동자에 솔직한 분노가 맺혔다. "말해! 베아트리체는 어디 있어!" "그래, 알려줄게. 와서 절망해라." 그렇게 말하며 키릭스는 키스에게 걸어왔다. 발끝과 얼굴이 마 주 닿을 정도로 맞닿은 키릭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베아트리체는 말이지, 널 태어나게 해준 곳에 있어." "....!" 키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곳은 바로 베르스의 소도시 셀른이었던 것이다. 그 지역 사람들 전체의 생체 에너지를 짜내서 자신을 만들었던 죽음의 도시. 지금은 폐허 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 베아트리체가 있 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이자벨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자벨은 베르스 한복판에 숨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범한 키르케조차도 이자벨이 설마 그토록 가까이에 숨어 있으 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무방비의 등 뒤를 노 리는 비수가 될 것이다. "셀른. 우리의 생명을 마감하기에 어울리는 무대라고 생각하지 않아?" 키릭스는 자신이 상처를 낸 키스의 콧등을 매만지며 그렇게 중 얼거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지. 가 장 화려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잖아." 멀어지는 키릭스의 뒷모습을 또 다른 키릭스가 바로보고 있었 다. 둘 사이에 있어서 가학은 피학이었다. 키스는 이 끔찍한 형벌 이 어쩐지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시한 인생이 끝나기 전에 하나쯤은 가치 있는 것 을 남길 수 있겠지.' 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죽음 에 두려움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 마 련이고 자신이 남들과 다른 점은 조금 빨리 죽는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과 대면할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키릭스를 만나는 것도, 그와 함께 소멸되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이 목숨을 정리하 기 전에, 살아오며 유일하게 용기를 냈던 결심-베아트리체를 구 하는 일을 끝냊고 싶을 뿐이었다. 그 이유가 사랑이든 집착이든 위선이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는 피가 멈추질 않는 배를 다시 눌렀다. 이대로 몸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와 돌아갈 곳을 잃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키스. 순간 키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착각이었을까. 베아트리체의 목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9 겉으로는 버젓이 베르스 왕실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 안에서 미 온은 리젤에게 물었다. "국경을 넘어 이오타로 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리젤은 방긋 웃기만 했다. 그 호의로 가득 찬 특유의 미소. "리젤 씨, 지금은 전시 상황이라서 국경이 차단되었....." "걱정 마세요. 국경을 넘을 필요는 없습니다." "....?" "여왕님께서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 다." "설마!" 미온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아니, 도시라고 는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살지 않는 죽은 도시였다. 공식적으로는 수년 전 영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아 주민 전 체가 몰살된 저주 받은 곳이었다. 아무리 전염병이라지만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고 단 한 구의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은 등 의심스러 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아이히만의 압력에 의해 더 이상 이곳에 대한 조사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후 이곳은 정지해 버 렸다. "여기는....." 미온은 묘비처럼 이어져 있는 음침한 폐건물들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도시 입구의 녹슨 간판에는 푸른색 글씨 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평화로운 도시 셀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차는 시청 앞에서 멈췄다. 밤에 젖어든 셀른에는 불빛 하나 없 었다. 10 같은 시각, 카론은 왕실에 도착했다.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제복 차림의 미남자를 본 왕실 사람들은 '은의기사'의 귀환에 환호했 지만 곧이어 충격으로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그 모습 속에 오른팔이 없었던 것이다. 왕실에는 카론이 결투에서 패배해 낙향했다는 굴욕적인 헛소문 이 파다했다. 물론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제3자들이 멋대로 지어낸 루머였지만 사라진 카론의 오른팔은 그 헛소문을 사실로 믿게 만 들기에 충분한 증거였다. 하지만 카론은 그런 불쾌한 수군거림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곧바로 키르케가 지휘본부로 쓰고 있는 알현실로 걸음을 옮 겼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놈이야.' 뒤를 따라가던 루터는 오는 내내 말 한 마디 없고 여기서도 싸늘 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호적수를 보며 혀를 찼다. 저렇게 쌀쌀맞은 주제에 별장을 떠나기 전에는 일일이 아내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진지하고 사려 깊은 얼 굴로 그녀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출발하다니, 그런 남자를 두 말 없이 껴안으며 '잘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하는 여자도 여자였지 만 그렇다고 어쩔 줄 모르며 미안해하는 남자도 루터의 성격으로 는 이해범위 밖이었다. 저런 물렁한 녀석에게 패했다는 것이 어쩐지 불쾌해서 루터는 귀가 떨어져 나간 자신의 섬뜩한 흉터를 공연히 긁적거렸다. 화려한 치장 따위는 일절 없이 걷어낸 기능적인 지휘본부는 분 주한 전쟁의 냄새로 가득했다. 그 중심에서 지시를 내리던 가죽 장교복 차림의 키르케는 카론의 사라진 오른팔을 보자마자 사무 적인 태도로 말했다.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을 테니 늦을 수밖에 없었겠군, 카론 경." "전 이미 기사작위를 반납했습니다." 키르케는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에 던지며 코웃음을 쳤다. "기사작위는 유원지 자유이용권이 아니야. 신나게 쓰고 원할 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귀관의 작위를 받고 말고는 내가 결정 해, 카론 샤펜투스 경." 선혈의 마녀는 무서울 정도로 딱 부러지는 특유의 말투와 함께 카론을 바라봤다. 그녀의 계급을 증명하는 북부 콘스탄트 중장의 계급장이 어깨에서 반짝거렸다. 카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작위를 내리는 것도 그것을 걷어가는 것도 국왕의 권한이며 또한 국왕의 권리를 대행하는 키 르케의 권한이다. 반납을 허락하지 않으면 카론은 영원히 베르스 의 기사인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단지 가혹할 뿐이었다. 카론은 수많은 참모진들과 병사들로 부산한 이곳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째서 더 이상 검을 쓸 수 없는 기사를 부른 겁니까." "예전 내가 말한 적이 있었지? 내가 귀관에게 관심 있는 부분은 기사가 아니라 다른쪽이라고." 솔직히 그때 했던 말은 카론의 육체적인 부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긴 했지만..... 물리적 대결로 전세계에서 능가할 자가 없는 적현무 키르케에 게 있어서 카론에게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란 검술이 아닌 그의 뛰 어난 지적 능력이었다. 키르케는 보고서를 가져온 부관에게 짧게 지시를 내린 뒤에 말을 이었다. "북부 콘스탄트의 지휘관들은 유능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지역 지형에는 능숙한 사람이 없다. 이지형을 꿰뚫고 있는 이오타 군 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로선 묵과할 수 없는 약점이지. 하지만 아 무리 베르스의 장교들을 뒤져봐도 전술의 기본도 모르는 머저리 들밖에 없더군. 그래서 귀관이 필요한 거다. 지형에 익숙하면서 전쟁에도 조예가 깊은 인재가." 무능한 지휘관일수록 자신만의 이론에 도취되어 현실성을 무시 하는 법이다. 예를 들자면, 전술이론 교수 출신인 어떤 장군은 늪지 전투를 할 때 방충망을 지급해 달라는 병사들의 요청을 묵살했다. 때는 여름 이었다. 밤이 되자 엄청난 모기떼가 병사들을 덮쳤고 모기들은 열 병을 퍼트렸다. 장군은 뒤늦게 자신의 병사들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곳으로 적들이 밀고 들어왔고 허를 찔린 왕국은 함락되었다. 고작 방충망 하나 때문에 말이다. 만약 늪지대 전투에 경험이 있는 졸병의 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그런 어이없는 패배는 없었으리라. 키르케가 카론을 부른 이유는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 만 카론은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시군요. 그러나 저 역시 전쟁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일개 기사일 뿐....." 기다렸다는 듯 키르케가 말을 끊었다. "귀관이 기술한 전쟁 논문을 읽어봤다. 칼 한 번 안 잡아 본 군 사이론가 나부랭이들보다 훨씬 낫더군. 솔직히 감탄했다." 순간 당황한 카론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귀엽다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평소의 그 엄청난 업무량을 생각 하면 믿을 수없는 일이지만, 카론은 최신 전술에 대한 논문을 집 필한 적 있다. 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된 것인지 군대의 전술 교본조차도 모조 리 외국에서 수입하고 국내에는 제대로 된 개론서 한나 없는 것이 갑갑해서 쓴 것이었지만, 당연히 귀족 출신의 베르스 군 장성들은 평민 출신이 쓴 논문 따위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그것을 희대의 전략가라고 할 수 있는 키르케가 읽 을 줄은 몰랐다. 키르케는 그것을 증거로 삼아 카론을 선택한 것 이다. "카론 샤펜투스 경, 귀관을 제1군 참모장에 임명한다. 지형을 최 대한 활용할 수 있는 계략을 만들어라.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국경으로 가서 중앙을 지켜라. 직접 검을 뽑을 일은 없을 것이다. 지휘관이 칼을 뽑을 상황이 된다면 어차피 그 전쟁은 패배한 거니 까. 하지만 불안하다면 자네에게 루터를 붙여주지. 적어도 어이없 이 암살될 일은 없을 거다." 카론은 묵직한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갑자기 중책을 맡은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장교들이 많을 겁니다. 어쨌든 저는 약소국의 기사니까." "귀관은 자신의 명성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군. 하지만 복 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내 이름으로 처행해라. 충성하지 않는 아군은 증오에 찬 적들보다 위험하다." "무자비하군요." "자비가 필요한 전쟁은 이미 전쟁이 아니야." 냉소적인 웃음을 보인 키르케는 곧 평소의 칼날 같은 눈초리로 돌아와 말했다. "아내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 하지만 이 것만은 알아둬라. 기사의 생명인 팔을 포기한 것은 그대의 의지고 나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너를 전쟁터로 보내는 것은 나의 의지며 그대는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 이상이다." 카론은 묵묵히 그 강철 같은 논리를 받아들였다. 키르케의 마음 을 이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베르스는 무 너지며 그러면 자신의 아내도 위태로워진다. 지금 카론을 움직이 는 신념의 근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었다. 부관의 안내를 받아 떠나는 카론에게 키르케가 문득 말을 던졌다. "아, 그리고 가는 길에 의무실에 들러라." "....?" "우리 군의 진통제는 세계 최고다. 도움이 될 거다." 키르케는 엷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카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냈다. 지금 팔의 통증은 보통사람이었 다면 당장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 정도로 극심했던 것이다. 카론이 사라지자 루터가 키르케에게 다가왔다. "당신 정말 독한 여자로군. 카론을 보낸 곳은 진청룡 라이오라 를 상대해야 하는 곳이잖아. 아마 그곳은 생지옥이 되겠지. 아내 를 두고 온 남자를 태연하게 사지로 보내다니 지독하기로 따지면 내 전주인보다 더하구만." "아아, 원래 결혼 포기한 여자는 독하거든?" 다시 보고서를 읽기 시작한 키르케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 했다. "만약 그가 라이오라와 싸울 것을 알았다면 도망쳤을까? "아니." "그가 도망칠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를 필요로 했을까?" "아니." "흥.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군." 키르케는 보고서를 탁 덮으며 자신의 데스크로 걸어갔다. 그러 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루터를 획 돌아봤다. "그리고 너! 주인을 대하는 말투부터 바꿔. 내 애완견 주제에 한 번만 더 반말했다가는 그 못생긴 입술을 도려내서 푹푹 삶아 저녁 식사로 먹어 주겠어. 그리고 카론이 죽으면 너도 내 손에 죽는다. 똑바로 보호해." "큭큭.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왕마마." 루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11 "으음....." 쇼메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입에 물고 있던 펜을 까딱거 렸다. 뚱한 표정이었다. 작은 방 안은 정리하지 않은 서류들로 산 을 이루고 있었고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안 팔리는 사립탐정의 사무실이 이렇지 않을까. 미레일의 부재 가 절실히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때 쇼메 옆에 쌓여 있던 서류 의 탑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쇼메에게 쏟아졌다. "망할!" 의자째 서류더미에 묻혀 버린 쇼메는 두 팔을 버둥거리며 그 속 에서 빠져나왔다. 투덜거리며 다시 의자를 세워 앉고는 책상 위에 긴 다리를 걸쳤다. 금세 예의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쇼메의 일터라고는 달랑 이 작은 사무실뿐, 일국의 왕자인데도 정리를 도와줄 비서 하나 없었다. 찬밥도 이런 찬밥 대우가 없었 던 것이다. 왕자라는 혈통에 재능까지 뛰어난 쇼메를 이토록 따돌 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키르케였다. '망할 놈의 마녀.....' 키르케가 쇼메를 괄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쇼메는 안 심하고 믿어주기엔 지나치게 머리가 비상하다. 마음껏 움직일 수 있도록 놔뒀다간 언제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 모르는 것 이다. 그래서 키르케는 쇼메에게 '나라에서 쫓겨난 가련한 왕자' 이 상의 역할은 주지 않았다. 게다가 뒤를 봐주던 아이히만이 암살된 후에는 아예 안전을 빌미로 왕실 밖으로는 나갈 수조차 없도록 감 금했다. 전쟁이 끝난 뒤 쇼메를 이오타의 꼭두각시 왕으로 앉혀놓 고 마음대로 조종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쳇. 잘난 내가 참아야지.' 라고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쇼메는 혼자 낑낑거리며 정보들 을 긁어모아 살 길을 찾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력으로 힘을 합쳐 도 시원찮을 판국에 이토록 '치사하게' 나오는 북부 콘스탄트 국 왕 바쉐론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똑같은 흙탕물에 몸을 담근 사람들끼리 서로 더럽다느 니 비열하다느니 손가락질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생판 남한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또 있겠냔 말이다. "계십니까." 문 밖에서 들리는 딱딱한 목소리만으로도 쇼메는 그가 군인이 라는 것을 알았다. 콘스탄트 군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는 쇼메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터무니없이 무례 한 처사다. 쇼메는 곧바로 인상을 쓰며 빈정거렸다. "내가 권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줘서 고맙군." "쇼메 왕자님, 왕자님에 대한 신변보호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 았습니다." "강화? 이미 내가 잠자는 것까지 감시하면서 뭘 어떻게 더 강화 하겠다는 거지? 네놈들 예의나 강화해라, 천민들." 그들은 그 '강화'가 대체 무언지 말하지 않았다. 대신 위협적으 로 쇼메에게 다가갔다. 쇼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말하는 가장 확실한 보호방 법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콘스탄트 왕국으로 송환해 안전하 게 보호하라는 바쉐론 국왕 전하의 어명입니다." "호오, 언제부터 보호라는 단어가 감금과 동의어가 된 거지?" 쇼메를 아무 짓도 못하도록 새장 속에 가두는 방법은 간단했다. 콘스탄트로 끌고 가서 국왕이 보는 앞에 가둬놓으면 그만인 것이 다. 마라넬로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유년기의 끔찍한 공포가 떠오르자 쇼메는 눈매를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나는 너희 우두머리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다!" "하지만 거부할 힘도 없지요." "....!" 금발의 왕자에게는 이제 단 한 조각의 영토도 단 하나의 기사도 단 한 명의 백성도 없다. 속이 빤히 보이는 이 폭거에 저항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군인들이었다. 저항하는 쇼메 를 잡아 팔을 꺽은 뒤 머리채를 잡고 책상에 얼굴을 찍어 눌렀다. 찢겨진 입술에서 핏물이 흘렀다. 상대의 속내를 알게 되자 쇼메는 도리어 커다랗게 웃었다. "어이, 이러다 내가 혀라도 깨물고 죽으면 네놈들의 왕이 엄청 나게 낙담할 텐데? 너희 목숨도 성치 못할 테고. 그러니 귀중품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지 않겠어?"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편이 좋을 겁니다." 말 그대로다. 바쉐론 국왕을 비롯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은 쇼메의 혈통. 그러니 죽으면 아주 곤란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살할 쇼메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쇼메를 풀어주었다. 그는 꺾였던 팔을 휘휘 저으며 눈웃음을 보였다. "그거 알아? 최근 몇 달 동안 내가 평생 얻어맞은 것보다 더 많 이 맞고 있다는 거?"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그냥 분풀이 좀 하려고." 그 순간 쇼메의 주먹이 상대의 턱에 꽂혔다. 동시에 몸을 돌린 그의 팔꿈치가 다른 사내의 얼굴을 찍었다. 설마 왕자가 품위 없이 주먹을 휘두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미레일이 가르쳐 준 격투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살았다면 난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거다, 머저리 들." 쇼메는 입술에 고인 피를 닦으며 문 밖으로 나섰다. 12 건물을 나와 왕궁을 걷기 시작한 쇼메의 머릿속에 짜증이 차오 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낀 그 감정은 목이 긴 호리병 속 을 차오르는 물처럼 처음에는 조금 답답한 것 같더니 금세 목 끝 까지 차는 것이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제길' 쇼메는 돌처럼 굳어가는 가슴을 콱 움켜줬다. 유년기에 다쳤던 마음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태어날 때부터 그의 주변에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평민들 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그 당연한 인간의 체온을 쇼메는 실감 한 적이 없다. 자신을 볼모로 넘긴 부모와 그런 자신을 관상용 금 붕어처럼 사육했던 괴물 마라넬로와 그 괴물을 증오하는 또 다른 괴물 이자벨, 그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기질의 벽뿐이 었다. 페소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그런공간. 쇼메는 세상 어디에 서 있어도 그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도 눈물 이 흐르지 않는 것은 그래봐야 아무도 손 잡아주지 않는다는 사실 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쭉 혼자였다. 13 "야!천민!" 쇼메가 리더구트를 찾은 것은 지극히 엉뚱한 행동이었다. 스스 로도 바보 같다는 거 알고 있었다. 이 와중에 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미온을 만난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하지만 적어도 숨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엔디미온 말고는 권 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 정말 삐뚤어졌어!'라는 특유의 순진무구한 타박을 들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도 같았다. 그런데. "뭐? 떠났다고?" "음, 잡혀갔다고 하는 편이 옳은 표현일까요? 하지만 엔디미온 경은 자기 의지로 따라간 거니까....." 쇼메는 루시온으로부터 긴 금발의 순진덩어리가 리젤을 따라갔 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서 한 명 없는 쇼메로서는 미온이 사라진 소식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미온의 금발을 묵묵히 바라봤다. "제법이군." "네?" 쇼메와는 이미 구면인 루시온은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보였 다. '안타깝군'이라든가 '무사할 거야'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꼴좋다!'라는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난데없이 뭐가 제법이란 말 인가. 쇼메는 그러고는 또 갑자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대책이 없다는 듯. "보나마나 이자벨을 설득하러 갔겠지. 그 냉혹한 여자를. 구제 해 줄 길이 없는 천민이야. 포기라는 걸 할 줄을 모른다고,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흥. 평생 그렇게 살다 죽으라지." 루시온은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참으로 험악한 칭찬이로군요." "너, 귀가 어떻게 된 거냐? 내가 그딴 천한 녀석을 칭찬해?" 쇼메는 끝까지 그렇게 둘러댔다. 그때 리더구트 밖에서 소란스 러운 고함소리가 들렸따. "이 부근으로 쇼메 왕자가 왔다! 당장 찾아!" "도망치지 못하게 주변을 봉쇄해!" 창밖을 힐끗 본 루시온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수 있었다. 쇼메의 혈통을 독차지하려는 권력자들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루 시온은 쇼메에게 말했다. "숨겨드릴까요?" 쇼메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세상에 숨어서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서류를 꺼내 장작불 속으로 던졌다. "그게 뭐죠?" "내 생명줄"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것은 아이히만이 보낸 인코그니토의 서 류였다. 쇼메는 아이히만이 왜 자신에게만 그 중요한 정보를 보냈 는지 알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죽은 이후 쇼메가 감금될 거라는 사실을 예측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쇼메에게 이 서류에 담긴 정보는 콘스탄트 와 거래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쇼메는 스물 다섯 장에 달하는 서류의 모든 내용을 암기한 뒤에 태워버린 것 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이 값진 정보를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자신뿐이 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바쉐론 국왕을 뜯어 먹을지 궁리하자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쇼메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벌 컥 문을 열었다. "난 여기 있다, 천민들!" 쇼메는 밖으로 나서며 루시온에게 말했다. "잘 있어라. 다음에 볼 때는 난 왕좌에 앉아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적어도 지루하진 않겠군요." "천민이 오면 전해라. 내가 왕이 되면 나의 기사로 임명하겠다 고." "후후. 아마도 사양할 것 같습니다만." "흥. 거절할 권리 같은 거 없다고도 전해." 금발의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군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스승을 꼭 닮은 얼굴이었다. 제30화 나약한 영혼 1 만약 어떤 심약한 행정관이 현재 이오타 연합군의 내부를 보게 된다면 뭘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 다. 눈앞에 돌아다니는 장교들의 군복만도 마치 남성복 패션쇼를 연상케 했다. 이오타 왕실 근위대에 긴급 소집된 정예 기병대, 격문(檄文)을 받고 모인 이오타 귀족들의 사병,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인트라 무 로스 특무대, 라이오라를 신처럼 추앙하느 프론티어 뱅가드, 혈통 을 따라 가담한 마키시온 제국군, 명예 혹은 이익으로 참전한 군 소 왕국들의 기사단, 돈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용병들까지 한 곳 안에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내로라하는 그들 모두 다른 부대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교통정리가 시급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 혼돈 속에서 라이오라의 사령관실로 초로의 노장이 걸어 가고 있었다. 그는 반세기를 군인으로 살아온 '살아 숨 쉬는 전 설' 같은 자였지만 이번만큼은 명장의 지도력마저도 통하지 않 았다. 승냥이 같은 용병무리들이 자신들의 군량고에서 멋대로 식량을 훔쳐 먹질 않나 마키시온 제국군과 이오타 기병대 사이의 해묵은 앙금이 폭발해 싸움을 벌이질 않나-라이오라 총사령관에게 '누가 보스인지' 확실히 해주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대폭동이 일 어날 거라고 경고할 작정이었다. "누구십니까! 관등 성명을 밝혀주십시오!" "이걸 보면 몰라! 감히 누구한테 그런!" 노장은 라이오라의 방 앞을 지키고 있는 프론티어 뱅가드들에 게 자신의 계급장을 들이대며 호통을 쳤다. 그들을 확 밀치며 사 령관실로 들어가자 그 노인은 더욱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 하고야 말았다. "....넌 또 뭐냐." "아? 그러는 할아버진 누구세요?": "하, 할아버지?" 솜털도 가시지 않은 것 같은 사내 녀석이 신성한 사령관의 집무 실에서 군복도 안 입고 앞치마까지 두른 채 당돌한 눈빛으로 이오 타군 총지휘관인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당장 목 을 치고 사지를 찢어도 할 말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어린애가 얼쩡거리고 있는 거야!" "전 라이오라 각하의 집사입니다!" "뭐? 집사?" 군대에서 당번병이면 당번병이지 집사는 또 뭐란 말인가? "그리고 어린애 아닙니다!" 막 쏘아붙이는 집사의 기세에 평생을 군인의 절도로 살아온 노 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주저 없이 칼을 뽑으며 고함쳤다. "이런 건방진꼬맹이! 라이오라 사령관님은 어디 있나! 냉큼 모 셔와!" "우아아아아! 라이오라 님! 이 할아버지 미쳤어요!" "저 여기 있습니다만." 내실의 문이 열리며 라이오라가 걸어 나왔다. 다짜고짜 뽑은 칼 에 놀란 집사는 라이오라의 뒤로 가서 숨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라이오라는 머리를 타월로 두르고 있었 다. 게다가 허벅지까지 덮는 커다란 티셔츠 한 장에 맨발차림. 그 런 주제에 무덤덤하게 두 눈만 깜빡거리는 라이오라의 모습을 본 노장은 결국 검을 떨어트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망측한 꼴입니까! 수십만 정예군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총사령관이시라면 좀더 체통을....." 라이오라는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게 하나 남은 제복을 집사가 빨아버려서....." 마키시온을 떠날 때 여분의 제복은 가져오지 못했다. 뼈아픈 실 책이었다. "그럼 새 제복을 달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새로 맞추려면 시간이 좀 걸리더군요." "그, 그러면 일단 군복이라도 입고 계셔야....." "싫습니다. 불편합니다. 그런데 그거 물어보려 오셨습니까?" "....." 그 집사에 그 주인..... 논리 정연한 것 같으면서도 반성을 모르 는 뻔뻔함에 노장은 피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바로 적현무 키르케조차 한 수 접는다는 아신위 진청룡 의 본모습이란 말인가. 군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불패의 명장'이 '단순한 푼수' 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그 단순한 푼수가 말했다. "이것이 장군님의 두통을 해결해 준다면 좋겠군요." 그는 책상 위에 있는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자필 서류였다. 떨떠 름한 어굴로 '두통약'을 받아든 노장은 그것을 읽자마자 안색이 바뀌었다. "이, 이건!" "장군님에게 제 권한 일부를 대행시킨다는 위임장입니다. 이런 식으로 전달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시간이 시간이니 이해해 주 시리라 믿습니다." 이오타 군 사령관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 서류는자신을 군 내부의 2인자로서 인정하는 문서였다. 진청룡이 직접 허가했으니 불만을 가질 자는 아무도 없다. 사실 장교들 사이에서는 라이오라가 자신의 직속부하를 2인자 로 앉힐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그는 보기 좋게 그 의혹을 깨 버린 것이다. "이, 이거 의외로군요." "벅찬 자리라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책임을 완수하겠습니다." 노장은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저어, 사령관 각하. 그래도 일단 군복은 차려 입으시는 게....." 노장은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그, 그럼 한시바삐 세탁이 끝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소장 은 이만."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부하였거나 하다못해 나이라도 어렸다면 호통을 쳤겠지만-이쪽은 480년 묵 은 푼수에다 계급도 높고 힘도 좋아 사람 만들 방법이 없었다. 하긴, 세계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볼 만큼 지독히도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 옷차림 따위가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나가자 라이오라가 의아한 얼굴로 집사에게 물었다. "저 사람, 어째서 체념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걸까." "....저도 3년 전까지는 라이오라 각하가 일부러 이런다고 생 각했습니다." 본래 라이오라의 정신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집사가 알게 되었 을 때부터 라이오라는 그에게 '완전무결한 존경의 대상'에서 '하 나하나 챙겨줘야 하는 피보호자' 가 되어 버렸다. 잔소리가 늘어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역시 자신이 아니라면 안 된다며 마키 시온을 떠난 라이오라를 쫓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덕분에 그는 수뇌부 최초의 집사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가꾸고 신경만 쓰면 황홀한 빛을 뿜는 주인님인데 아무리 자연인이 좋아도 최소한의 체통은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청년 집사는 삐죽거렸다. 그 표정을 본 라이오라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불행하게도 체통을 지켜 승리한 전쟁은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단다." "왜요?" "왜냐하면 전쟁이란 가장 비천하고 체통 없는 무리들이 가장 야 만적인방식으로 서로의 권력과 재산을 빼앗는 과정이기 때문이 야." 그 차분한 목소리 뒤에서 불어오는 냉기에 집사는 침을 꿀꺽 삼 켰다. 이것이 정녕 수백여 년 동안 승리만을 반복한 불사신의 입 에서 나온 말인가. 승리와 패배, 즐거움과 슬픔, 희열과 고통의 모든 가치는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측정 가능한 가치다. 언제까지나 죽지 못하는 진 청룡에게는 체통도 권력도 빛나는 명예조차 땅콩 까기만도 못한 허무한 인간본성일 뿐이었다. 그 황금빛 눈동자 속에 맺혀있는 것 은 언제나 지독한 고독이었다. 집사는 문득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전쟁을 혐오하면서 왜 언제나 전쟁만 하는 거죠." "그야 나 겁쟁이니까." "네?" 아주 짦은 시간, 그의 진심이 자나갔지만 집사는 눈치 채지 못했 다. 만약 그가 더 나이가 들었다면, 혹은 전쟁을 겪어 봤다면 그 엉 뚱한 대답 속에 숨겨진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때 집사처럼 라이오라를 따라 마키시온을 떠난 프론티어 뱅 가드의 귀족청년이 불쑥 들어왔다. 잡사에 비해 고작 두 살 많지 만 이미 세 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천 명을 부하로 둔 어엿한 지휘 관이었다. "각하, 실례하겠습니다."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고 화낼 상관도 아니었고, 상관의 '너무 편안한' 차림에 경악할 부하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기강이 잡혀있 었다. "카론 샤펜투스가 적 진영에 가담했다는 정보입니다." 그의 보고는 조심스러웠다. 라이롸가 오래 전부터 카론을 자 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런 카론을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라이오라의 심 기를 건드릴까봐 그는 조심스러웠다. "그래?" 하지만 라이오라의 반응은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마치 먼 친척 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그래?'라고 되물을 뿐이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그를 모셔온 집사는 알고 있었다. 직선적인 그가 이런 식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울 때, 그의 심정은 무 척 복잡하다는 것을. 말 그대로 전면전이다. 누구든 적으로 만나면 항복시키든 죽여 야 한다. 하지만 카론은 항복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라이오라는 용 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라사의 힘에 카론의 지능을 합친다면 라이오라라는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해답은 보고를 올리는 청년의 한숨에 있었다. "....훌륭한 기사 하나를 잃겠군요." 라이오라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다. 480여 년 동안 단 한 번 의 패배도 없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설령 베 르스 측에 세 명의 아신이 밀집해 있어도 그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장본인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화제를 둘렸다. "그보다 이자벨 섭정이 있는 곳은 찾았나?" "죄송합니다. 아직까지는....." 놀랍게도 총사령관 라이오라조차도 이자벨과 그녀의 인코그니 토가 셀른에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단지 텔레마코스를 통해 명령을 전달받을 뿐이었다. 그녀의 위치를 알고 있는 자는 키릭스뿐이었지만 키릭스 역시 며칠 동안 나타나질 않았다. 안전을 위해 최고 통수권자가 은신하 는 일이야 종종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우두머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기이함이 라이오라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안감을 자아냈다. 황금빛 눈동자의 아 신은 타월로 자신의 젖은 머리칼을 닦아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단순히 영토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라이오라는 지금껏 자신이 모셔왔던 황제들이 보여줬던 패턴, 영토 확장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이자벨에게는 없음을 알 았다. 그녀는 다른 생물이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좀더 거대하고 차 가운 영역에 있었다. 그러나 이자벨 섭정이 숨기고 있는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라이오라는 그런 그녀에게 서늘함을 느꼈다. 그녀의 인생을 내 걸고 거머쥐려는 집념에 온기란 없었다. 자신보다도 낮은 체온을 가진 여자. 하지만 그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췄다. 그녀가 뭘 노리든 나는 내 가 해야 할 일을 행할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라이오라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2 엔디미온이 이자벨을 만나기까지는 30여 분이 걸렸다. 그는 두터 운 강철로 이뤄진 네 개의 격벽문을 통과해 옷이 모두 벗겨져 몸수 색을 당한 뒤 어떤 주머니도 없는 새옷을 받아 입은 후에야 이자벨 을 만날 수 있었다. 제아무리 키스라도 예전처럼 정문으로 쳐들어 와 이자벨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라고 할 수 있었다. "미온, 머리를 잘랐구나. 아까운데." "이자벨 님." "이런 식으로 만나서 미안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엔디미온을 맞이한 이자벨은 예의 이지적인 미소를 보였지만 그 웃음은 지쳐 있었다. 그녀의 주변을 십여 명의 텔레-레이디들의 테이블이 원형으 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통신을 연결하 고 또 연결 받고 있었으며 중앙의 이자벨은 그 모든 정보를 받아 들여 분석하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데이터를 빨아들이 는 것처럼. 이 모습은 어떤 불길한 마법 같았고 또한 기계 같았다. "이자벨 님, 전에 저한테 얘기하지 않았나요. 항상 선한 수단만 쓸 수는 없어도 목적 자체는 선하다고, 분명히 그랬잖아요."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해?" "적어도 전쟁으로 그 결심을 실천하는 건 잘못된 거예요!" "전쟁이란 개가 벼룩을 털듯 세상이 인간을 털어내는 자연스런 과정이지." "....!" "세상을 구원하려는 내 신념을 굳이 이해해 주지 않아도 돼. 넌 그냥 살아남으면 된다." "전쟁을 통해서 이렇게 세상을 구원한단 겁니까!" "그래서 날 미워해도 좋다고 말했잖아." "이자벨 님!" 그는 전쟁과 그녀를 둘러싼 이 모든 기이한 장치들이 세상을 구 원하는 데 왜 필요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미워하지 도 않았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없이 슬픈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해 주세요." 돌처럼 굳은 엔디미온의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 다. 그것은 처음부터 베아트리체를 알고 이용했던 그녀에 대한 배 신감이었고 그녀의 안부에 대한 불안감이었으며 이곳에 온 목적 에 대한 결심이었다. "안 만나는 편이 좋아." 이자벨은 차갑게 대꾸했다. 순간 그는 불안을 느꼈다.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거죠?" "그 여자의 성능을 극대화시켰을 뿐이야." "무, 무슨 말을! 베아트리체는 기계가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 불길한 뉘앙스를 담아 되물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엔디미 온의 심장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자벨은 무서울 정도로 담 담하게 말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너도 키스도 그녀를 만나자마자 별 다른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된 것일까. 둘 다 여자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 도로 능숙한 사람들인데도 말이야. 매력적이기 때문에? 운명? 보 호본능?"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사랑하는 이유 따위!" 엔디미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꺼낼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베아트리체가 너와 키스를 조종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어떨까." "제발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엔디미온의 목소리가 가엽게 떨려왔다. "텔레마코스...., 단순한 통신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사실 그 힘의 본질은 상대의 생각 속에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이야. 알다 시피 그건 방패로도 벽으로도 막을 수가 없지." "그게 베아트리체와 무슨 상관이에요." "모른 척하지 마. 베아트리체가 엄청난 텔레-레이디였다는 사 실을 알고 있잖아. 자신의 능력을 제어할 수 없어서 정신이 붕괴 될 정도로 말이야. 그 가공할 힘으로 너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거 라면? 마치 말총벌이 숙죽의 몸속에 알을 낳듯, 그녀의 힘이 네 사 념속에 파고들어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고 자신을 지켜주도 록 각인시켜 놓은 거라면 어떨까. 그 여자는 키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인간일까.. 그리고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만해요!" 엔디미온의 고함소리가 울음에 젖었다. 언제나 밝은 엔디미온 의 마음에도 약점은 있다. 그녀는 작혹하게도 그의 가장 소중하고 확실한 부분을 뒤흔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격분하거나 미치지 않았다. 단호한 눈빛으로 돌아 와 이자벨을 바라봤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이네?" "만약 그게 사실이라도 그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진짜니까 요." "후후, 그렇군.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그녀는 또 다시 불길한 여운을 남기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베아트리체의 힘으로 세상을 정화해도 넌 이해하 겠네?" "네?" 엔디미온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가 계획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긴 시간과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을 들여 그녀의 능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지. 기계의 이름은 멘토(Mentor), 일종 의 증폭기랄까. 그 기계를 그녀에게 연결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 들의 마음속에 침투할 수 있어." "지금 무슨 말을....." "멘토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공격성과 이기심, 불신, 탐욕, 나 태, 교만, 분노를 지워버릴 거야. 그리고 그 빈자리에 겸손과 성실 함, 절제와 이해심, 인내와 사랑을 심겠지. 내 머릿속도 마찬가지 로 바꿔 놓겠지. 너의 희망대로 전쟁도 싸움도 없는 세상이 올 거 야." 엔디미온은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분명 광기였는데, 그렇게 말 하는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그게 섬뜩했다. "하지만 풍차가 그렇고 마나열차가 그러하듯 모든 기계에는 동 력원이 필요하지. 멘토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생체 에너지가 필 요해. 키스를 만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막대한 양이. 계산 상으로는....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정도가 필요해." 그 말은 다섯 명 중 한 명은 이번 전쟁으로 죽어야 한다는 의미 였다. "그, 그런 이유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건가요!" 전쟁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수천만 명의 원혼을 모 아 평화를 만든다. '평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전쟁' 이라는 권력 자들의 논리가 가장 끔찍한 형태로 완성되고 있었다. "이자벨 님! 제발 그만두세요! 소수를 죽여 얻는 다수의 행복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미온, 내가 살아오면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아? 인간에 대 한 체념이야. 폭군을 쓰러트려도 결국 쓰러트린 자가 다시 폭군이 되어 군림하지. 아무리 막으려고 노력해도 인간의 추악한 본성은 지긋지긋하게 싸움을 벌여. 네 정의감으로도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계속해서 느끼는 것은 실망과 환멸뿐이지. 결국 세상을 구 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악성 그 자체를 본질적으로 바꿔버 리는 수밖에 없어. 그럴 수만 있다면 희생은 감수해야지." 엔디미온은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괴롭게 바라봤다. 그 기이한 기계가 제대로 작동할지, 윤리성에 어긋나는 문제는 부차적 인 것이다. 그는 짜내듯 말했다. "하지만 이자벨 님, 그 희생을 감수하는 쪽은 당신이 아니라 왜 희생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갈 죄 없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야." "유사 이래 명분 없는 학살은 없었습니다!" 종교가 다르니까, 원래 나쁜 사라드리니까, 혹은 불순분자들을 제거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심지어는 본래 열등한 민족이 라는 이유 등 학살에는 언제나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명분을 인정하는 쪽은 언제나 가해자지 피해자가 아 니었던 것이다. 이자벨의 말마따나 인간의 본성이란 타인의 고통 에 너그럽기 마련이다. "미온, 혁명에는 피가 따르지. 구구절절 옳은 말만으로는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해. 도덕성이라는 자기 최면의 노예가 될 뿐이야. 난 신이 아니라서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불확실 한 모두를 위해 주저할 바에는 확실한 일부를 위해 행동하겠어." 그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미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도 존경에 마지않던 그녀가 긴 인생을 싸워오며 내린 결론이 이토록 초라하다는 것에 그는 슬퍼했다. 영문도 모른 채 누구는 불행하고 누구는 행복한 세상이 '낙원'이라면.... 순간 엔디미온의 격렬한 통증이 느꼈다. 감시하던 이자벨의 부 하가 그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쓰러진 그를 잡아 올린 사내가 고함쳤다. "누가 네놈의 의견 따위 듣고 싶다고 했나! 너 따위가 여왕님의 심정을 알기나 해!" "그만 둬! 무슨 짓이야!" 처음으로 이자벨이 소리쳤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소스 라치게 놀란 남자가 엔디미온을 놔주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놈이 감히....." "닥치라고 했지!" 엔디미온의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주눅 들 지 않은 채 이자벨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분노가 아닌 동정이었 다. 그것은 본 이자벨은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감금해." "이자벨 님!" "베아트리체는 못 만날 거다. 아니, 안 만나는 편이 좋을 거야." 이자벨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는 곧 병사들에게 끌려 방을 나갔다. 묵묵히 지켜보던 리젤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엔디미온 씨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리젤은 엔디미온이 이자벨을 따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에게 이자벨은 항상 옳은 존재다. 그리고 엔디미온은 항상 옳은 쪽을 택한다. 그게 리젤의 논리였다. 왜 엔디미온이 이자벨의 손길을 뿌리쳤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게도 베아트리체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 야."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3 카론이 숲 속에 들어간 무라사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목과 바위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한겨울인데도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얼음보다 차가 웠다. 감색 레인코트를 입은 카론은 묵묵히 그 비를 맞으며 무라 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뺨에 닿은 빗방울이 하얀 목덜미를 타고 내려 셔츠와 매듭진 넥타이를 서늘하게 적셨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가 되기 전 에는 우산이 비싸 쓸 수 없었고, 기사가 되고 나서는 규정상 쓸 수 없었고, 기사를 은퇴한 지금은 한팔로 우산을 펼 수 없어 쓸 수 없었다. 그에게 비는 항상 맞는 것이었다. "...." 무라사를 발견한 카론은 한동안 멈춰 서서 그를 바라봤다. 홀딱 젖은 몸으로 웅크리고 있는 덩치 큰 사내는 마치 막 시동을 끈 증 기기관처럼 온몸에서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두 주먹은 피투성이였고 그의 주변은 폭탄이 터진 듯 잘게 부서 진 바위와 나무의 파편들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주먹 을 내지른 것이 분명했다. 무라사가 인기척조차 못 느끼자 카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연습이라기보다는 자학이군." 그러자 무라사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 다. 비에 젖은 회색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인간이라기보 다는 늑대에 가까웠다. 눈빛은 섬뜩했고 격정적 본능에 사로잡혀 있었다. 낮게 울리는 경고의 울음소리가 카론의 몸을 진동시킬 정 도로 묵직했다. 당장이라도 긴 송곳니를 드러내고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았 지만 카론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반듯한 얼굴로 무라사의 이성 을 되찾는 주문을 읊었다. "정신 차려라, 멍청이."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 올린 무라사의 표정에서 점점 균열이 사 라졌다. 조금씩 바뀌는가 싶더니 곧 예의 순진한 얼굴로 돌아왔 다. 그리고는 카론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그 몸에서 뭔가 허 전한 부분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우아아아앗! 너 그거 왜 잘린 거냐!" 카론은 물어볼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팔 잘린 게 경사도 아닌데,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대답해 주기 도 귀찮은 노릇이었다. "내 팔은 은퇴 기념으로 왕국에 헌납했다 해두지." 그러자 무라사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아니, 난 머리카락 말한 건데, 어라? 그러고 보니까 팔도 잘렸 네? 아프겠다." "......"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지만 팔은 그렇지 못하다. '어라? 팔도 잘 렸네?'가 아닌 것이다. 상식적 우선순위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에 대해 한다디 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너 그런데 머리 그렇게 곱상하게 자르니까 여자 같다. 그것도 성질 사나운 아가씨 같....." "머리 얘긴 그만해!" 결국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카론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짧게 물었다. 특유의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라이오라를 쓰러트릴 방법은?" "하늘이 도울 거야." "없단 말이로군." 그러자 무라사가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무시하지 마. 이 지옥훈련으로 나날이 실력이 상승하고 있으니 까." "흥. 여전히 믿음이 안 가는 놈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둘 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신은 애당초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 받은 자들이다. 네 명이 각 성한 힘과 특성은 이미 정해진 것이며 연습한다고 그 힘이 늘어나 지 않고 펑펑 논다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훈련이니 노력이니 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 밖의 문제인 것이다. 카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신위 견백호처럼 산을 때려 부수지 는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너도 싸움에 참가할 줄은 몰랐네." "기사의 업은 그리 쉽게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 카론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쿠라사는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훈련을 했는지, 총알로도 흠 집 하나 나지 않는 몸은 온통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였다. 그가 말 했다. "불안해서 찾아온 거냐? 걱정 마라. 너 죽게 만들지 않을 테니 까. 내가 어떻게 해서든 라이오라를...." 카론은 그의 말으 끊으며 대답했다. "난 안 죽는다. 살아서 이멜렌에게 돌아간다. 그렇게 약속했어." 그것은 꽤 허망한 소원일 수도 있었지만, 그의 싸늘하리만큼 단 호한 목소리가 설득력을 만들었다. 무라사는 마치 늑대처럼 몸에 젖은 물기를 털고는 대꾸했다. "그래, 너도 네 아내도 내 동생도 안 죽어. 내가 안 죽게 할 거 야." 카론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유능한 수사관이다. 무라사가 결심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론은 조용히 떠나려다 결국 한 마디를 던졌다. "무라사 랑시, 넌 이 나라의 기사도 군인도 아니다." "....." "그런데 어째서 희생을 자처하는 거냐." 무라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딴청만 피웠다. 한동안 그 를 바라보던 카론은 몸을 돌려 빗속으로 사라졌다. "뭐야, 내가 뭘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거야? 똑똑하기도 하셔라." 무라사는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분명 다혈 질에 책략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비책도 없 이 세계 최강 진청룡과 맞설 만큼 바보는 아니다. 예전처럼 싸웠다간 백이면 백 패배한다. 단순한 결투였다면 승 패야 어쨌든 상관없지만 지금만큼은 경우가 다른 것이다. "이것이 먹히리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라사는 자신의 손을 감싼 강철 장갑을 바라봤다. 평소 어떤 아 신도 자신의 힘을 100퍼센트 끌어내서 싸우지는 않는다. 고작해 야 삼분의 일 정도다. 보통 전쟁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 기도 하지만, 모든 힘을 개방한다면 인간의 것인 육체가 견뎌내질 못한다. 그는 며칠 돌안 그걸 시험해 봤지만 50퍼센트에 이르기도 전에 끔찍한 고통과 함께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걸 견딘다면 분명 라이오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쓰 러트릴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사흘 정도는 못 움직이게 할 수 있 을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무라사의 죽음이었다. 그토록 과열된 힘은 결국 자신을 덮치게 되는 것이다. 무라사는 누구보다 이 사 싱을 잘 알고 있었다. "왜 희생하냐고?" 무라사는 카론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말했다. "나도 너처럼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 말이 쏟아지는 빗물에 잠겨 흩어 져 갔다. 4 키스는 눈을 떴다. 빛을 머금은 붉은 눈동자는 한동안 낯선 천장 만 응시했다. ".... 안죽었네." 온몸을 뒤흔드는 통증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했 다.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피 흐르는 배를 움켜쥔 채 셀른으로 향했다. 자그마치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없이. 그러다 출혈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정신을 잃었는데....이 지 겨운 생명은 또 자신을 깨웠다. 매번 고통을 주면서도 또한 끝없 이 살아남게 만든다. 운이 좋다고? 이만한 불운이 또 있을까. 키스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아픈 표정을 베갯잇에 묻었다. 누가 자신을 구해 줬는지, 이곳이 어딘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우아아아아아앗! 눈을 뜨다니!" 문이 열리며 들어온 여자가 들고 있던 물통과 수건을 떨어트리 며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자기가 간호한 주제에 자기가 놀라면 어쩌란 말인가. 키스는 뚱 한 얼굴로 대응했다. "눈 떠서 미안하게 됐네요오." "아, 미안해요. 너무 의외라서." "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던 거죠?" "음, 보름 정도?" ".....보름." 키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자기 생명력이 이토록 끈질긴지 처 음 알았다. "그럼 그동안 당신이 간호를?" "헤헤." 그녀는 뭐가 좋은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박한 리본 으로 묶은 검은 머리칼에 쿡 찌르면 귀여울 것 같은 두 뺨, 길게 뻗 은 뽀얀 목덜미는 관능적이기까지 했지만 반대로 목소리는 정숙 함과 거리가 멀었고 행색이나 거친 손으로 봐서 결코 접시 한 번 안 닦아본 귀족 아가씨는 아니었다. 키스의 노련한 시선에 의하면 23세 정도에 화장품 살 돈으로 빵 을 하나 더 사는 실용적인 성격이며 짐승의 피를 보는 '남자의' 직업을 가졌고 현재 애인 없음. 또한 혼자 살거나 부모가 없을 것이다. 부모가 있는 집으로 피투 성이가 된 낯선 남자를 끌고 와서 간호할 정도로 막 나가는 여자 로는 안 보였으니까. 그녀의 이름은 데네브였다. 어느 도시나 수십 명은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이름의 그녀는 키스의 말을 듣고는 독심술에라도 당한 사 람처럼 또 감짝 놀랐다. "어떻게 제가 도축업을 한다는 걸 알았어요?" 데네브는 날마다 여기서 몇 킬로나 되는 도축장으로 걸어가 돼 지나 닭, 양을 죽인다. 물론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다. 누군가 가축 을 죽이지 않으면 스테이크는 먹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99퍼센트의 여자라면 꿈에서도 하기 싫을 도축업을 하 고 있다는 사실을 키스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 마술의 비밀 은 간단했다. "당신 몸에서 피 냄새가 나니까요." '하지만 낯럼 사람 피 냄새는 아니더군요'라는 말은 삼켰다. 그 설명에 데네브는 당황했다. "이런. 그래서 항상 몸을 깨끗하게 씻는데...." "피 냄새는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원한 같은 것이 지요." "아하하, 아픈 말을 하시네요. 얼굴은 귀엽게 생겼으면서." "네. 이 귀여운 얼굴로 많은 사람 아프게 만들었답니다." 키스는 난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데네브는 그 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쩐지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뭐가 그렇게 즐겁죠?" "뿌듯해서요." "그러니까 뭐가....." "키스 씨는 내 덕분에 살았잖아요. 내가 살려낸 사람과 이렇게 대화하고 있어서 기뻐요. 아아, 이런 게 의사의 마음일까." 의사의 마음? 키스는 말없이 이불을 들쳐 자신의 배를 보았다. 검에 완전히 관통되었던 복부는 붕대에 감겨 있었다. 엉당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중상에 약 뿌리고 붕대만 칭칭 감는다고 치료될 리가 없다. 뿌리 잘린 나무에 물 뿌린다고 되살아나지 않 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었다면 백이면 백 과다출혈이든 폐혈증이든 파상풍 이든 걸려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으리라. 의사했으면 큰일 낼 여 자였다. 키스는 침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 보답으로 오늘 저녁 만들어 줄게요." 5 키스가 키릭스에게 물려받은 재능 중에서 단 하나 싫어하지 않 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요리 실력이다. 테네브가 도축장에서 얻어 온 몇 점의 양고기와 돼지비계, 근처 텃밭에서 따온 토마토와 허 브로 스튜를 만들었다. 달걀은 반숙으로 삶고 샬롯은 갈색으로 볶고 흰자를 풀고 적당히 발효된 양젖을 뿌려 샐러드를 만들었 다. 감자를 얇게 썰어 굽고 잘게 썬 돼지를 소금을 뿌려가며 바작 볶았다. 긴 손가락이 악기를 연주하듯 재료를 썰고 자르는 모습을 테네 브는 멍한 얼굴로 지켜봤다. 설마 이거 우렁각시 아니, 우렁신랑? 자기가 구한 사람은 요리사 였던가? "자, 드세요오." 순식간에 요리를 마친 키스는 앞치마를 풀며 여우같은 눈웃음 을 보였다. 테네브는 여자 많이 홀렸을 남자라는 의심을 감출 수 가 없었다. "정확히 이곳이 어디죠?" 키스가 스튜를 한 스푼 물며 말했다. 보름이나 굶어 지독한 허기 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는 거의 먹지 않는다. 리더 구트에 있을 때도 키스의 식사량은 지스킬보다도 작았다. "여기서 한 시간 정도만 가면 셀른이에요." 그녀의 우물거리는 대답에 키스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저의 무의식중에 걷고 있었는데 역시 셀른으로 향하고 있었던 건가. 그 곳에는 베아트리체가 있다. "그런데 왜 혼자 살죠?" 질문이 이어졌다. 확실히 이곳은 젊은 여자 혼자 살기에 어울리 지 않는 곳이다. 주변에는 마을은 커녕 불빛 하나 없는 숲 천지다. 산적도 출몰할 것이고 늑대나 곰도 주의해야 한다. 남의 사생활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키스였지만, 소녀티도 가 시지 않은 예쁜 아가씨가 가축을 잡으며 혼자 살아가는 모습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테네브는 대답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원래 전 셀른에 살았어요." 키스는 스푼을 떨어트렸다. 셀른에 살던 사람은 모두 죽지 않았 던가.그러니까 자신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말이다. 그녀는 그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계속 말했다. "어느 날,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거예요. 테이블 위의 책은 책장 이 펼쳐진 그 모습 그대로, 가마솥 안의 음식들도 그대로, 어린애 들의 목마도, 줄에 걸린 빨래와 금고 속의 반지까지 모두 그대로 놔두고 천 명이 넘는 사람들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아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죠? 안 믿어도 좋아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키스의 질문은 뻔뻔했다. 어디에 있냐하면, 지금 자신이 되 어.... 그녀의 부모도 이 육체에 포함된 어딘가가 되어 지금 그 녀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그녀는 고개를 저였다. "모르겠어요. 그 이후 왕실을 비롯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며 수소문해 봤지만 단지 전염병이 돌아 모두 죽었다는 믿을 수 없는 말만 들었어요. 하지만 분명 어딘가에 살아 계실 거 예요. 그래서 이곳에서 돌아올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희망을 가지고!" 키스는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를 잃은 여 자에게 목숨을 구제 받아 지금 이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가. 이것 도 인연이라면 분명 악연이었다. 사라진 부모가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자 신도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다는 변 명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신이 앞에 있다면 그 멱살을 잡고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려놓으라고 고함치고 싶은 생각뿐 이었다. "미안해요." 키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 지금 울고 있어요?"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에고. 남자를 울리다니, 제가 너무 감상적인 소릴 했나요. 그런 데 다른사람들에게 이 얘기 하면 그 소릴 믿을 줄 알았냐며 다 웃 던데. 키스 씨는 참 잘 우는 사람인 것 같아요." 하지만 우습게도, 이것은 키스가 태어나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 었다. 6 스왈로우 나이츠의 업무는 중지되었다. 하지만 왕실로부터 '에, 이제부터 지명 업무를 마치고 왕국을 위해 검을 들기 바랍니다' 라 는 공문 따위는 내려오지 않았다. 철 지난 장난감 대하듯 그냥 단순한 방치, 아무도 관심이 없었 다. 전쟁에 정신이 팔려 이런 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도 나름대로 불쾌한데?" 당장이라도 전쟁터로 끌려갈 줄 알고 겁에 질렸던 쇼탄은 위로 부터 적막하리만큼 아무 말도 없자 테라스 소파에 기대어 투덜거 렸다. 가죽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입으로는 담배를 까딱거리고 있는 그 옆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이곳을 떠날지 말지 고민 중인 것이다. "키스 경과 미온 경은 언제 돌아올까요." 이제는 완연한 성직자 소년의 기품이 묻어나는 크리스는 성경 책을 품은 채 물었다. 곧바로 지스가 표독스런 목소리로 되받아쳤 다. 커다란 의자 속에 파묻힌 작은 체구가 애처로울 정도였다. "됐어! 그딴 녀석 돌아온다고 누가 받아준대? 그리고 키스는 우 릴 버린 거라고! 한 마디 말도 안 하고!" "버려? 키스는 처음부터 우리와는 계약 관계였을 뿐이야. 이렇 게 사라져주면 그놈의 노예 계약도 무효가 되는 거니까 나야 좋 지!" 루이는 일부러 차갑게 빈정거렸다. 본래 그의 신조가 '너는 너, 나는 나'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편이 차라리 속이 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가방을 들고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자유다. 아무도 붙잡지 않 는다. 지금까지 쌓아둔 귀족과의 인맥만 이용해도 몸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그들은 이곳에 남아 찬밥 신세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쩌면 이곳이 그들의 고향이며 이들이 유일한 가족일지도 모르 기 때문이다. 한편 랑시는 평소의 수다스러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없 었다. 굳은 눈매로 숲이 보이는 창밖만 바라보는 랑시의 얼굴은 지금만큼은 앳된 소년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형 무라사로 가득했다. 자신이 고집을 피워 무라 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 나라를 위해 싸우게 만들었다. 형은 랑시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센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 리 그래도 다치진 않을까. 자신에게 돌아올 수 없을까, 랑시는 서 툰 손으로 몇 번이나 도시락을 만들었다가 결국 형을 찾아가지 않 았다. 단지 최선을 다해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높은 사람' 이 들어왔다. 전쟁을 앞둔 이 마당 에 호화스런 보석과 실크로 치장한 옷을 입은 것만 봐도 그 사람 의 무신경을 짐작할 수 있는 중년 남자였다. "도련님." 그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일부러 시선을 파하던 루시온은 계 속되는 재촉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는 서리처럼 냉랭 했다. "어쩐 일입니까. 더 이상 가문과 저는 볼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요." "각하께서 심려가 깊으십니다." 여기서 각하란 백작을 말하는 것이며 백작이란 루시온의 아버 지였다. "보시다시피 무사합니다. 아버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시 길." "곧 전쟁이 시작됩니다. 각하께서 안전한 별장을 마련했으니 그 곳으로 가시지요." "왕국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지금, 기사인 이 몸을 별장에 숨기 겠다는 겁니까. 귀중품처럼? 그게 정녕 이 나라의 관료인 아버님 의 머리에서 나온 발살입니까." "참으로 훌륭한 부성애입니다." "아들에게 굴욕을 강요하는 것이? 물러가십시오. 저는 이미 전 쟁터를 지원했습니다." "그 지원서라면 이미 각하께서 찢어버리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루시온 님, 전쟁은 천한 것들의 몫입니다. 귀족은 고귀한 피를 진창에 뿌려서야 쓰겠습니까!" 그는 지당한 진리라도 말하는 어조로 훈계했다. 루시온은 대꾸 하지 않았다.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헛소리가 너무 엄숙해 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각하께서는 아직도 도련님께 기대가 큽니다. 도련님은 장차 명 예로운 백작가를 이끌어 큰일을 하실 분입니다." "당신은 전혀 모르고 있군요." 루시온은 흐릿하게 중얼거렸다. 나라가 사라진다는 의미도 모 를 정도로 타성에 젖은 머저리, 왕국이 멸망하면 그 잘난 귀족 가 문도 사라진다.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결론적으로는 자신 의 가문을 지킨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 이상 큰일이 또 있겠냔 말이다. "설령 이 왕국이 멸망한다 하더라도....." 그 불경한 말로 운을 띄운 남자는 주변을 둘러본 뒤 조그만 목소 리로 말했다. "각하께선 이미 이오타의 유력 귀족과 협상을 마친 상태입니다. 가문은 아무런 손해도 없이 이오타로....." "닥쳐라!" 루시온은 커다랗게 소리쳤다. 얼마나 컸냐하면 사람이 왔는지 도 모르고 정신이 팔려있던 랑시마저 깜짝 놀라 루시온을 바라볼 정도였다. 그 청색의 눈동자는 마치 적을 대하듯 살의로 타올랐다. 실제로 적이었다. 본래 루시온의 가문이 이오타와 친분이 돈독하다는 것 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관리가 전쟁을 앞두고 적국과 뒷 거래를 한단 말인가? 만약 지금 루시온의 허리에 검이 있었다면 필시 뽑았으리라. "제가 왜 가문을 나왔다고 생각합니까?" 루시온에게는 네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가문의 남자들이 모두 그렇듯 그의 형도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 루시온도 존경할 만큼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백작가의 후계 자였다. 그런 아들에게 엄청난 기대를 품은 아버지는 그가 성인이 되는 해, 이오타 남작가의 어린 여자와 걸혼시켰고 그 인맥으로 아들 을 이오타 행정부에 집어넣었다. 강대국의 관료가 된다는 것은 최고의 출세 코스였기 때문에 루시온은 자신의 형이 끝없이 부러 웠다. 그는 다시 물었다. "형이 왜 죽었다고 생각합니까?" 2년 후, 루시온의 형은 자살했다. 어느 맑은 날, 현기증 날 정도 로 높은 행정부 상층 자신의 사무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가 남긴 짧은 유서에 의하면 그는 고아원에서 일하고 싶어 했 고 약한 심장을 숨기고 있었고 난독증이 있었으며 동성애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천재인 줄 았었던 그는 어떤 것 하나도 할 때마다 남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단 한 번도 자 신의 일을 좋아한 적이 없었기에 그 노력은 고통이었다. 후계자가 되는 것도 관료가 되는 것도 결혼도 원치 않았다. 단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두려워서 하기 싫은 일을 견뎌냈 던 것이다. 언제나 당당하다고 생각했던 루시온의 형은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형의 자살 소식을 접한 루시온은 곧바로 아버지의 분노가 터질 거라 예상했다. 완벽한 줄만 알았던 형이 실은 결함투성이의 낙오 자라는 사실에 격분할 것이 당연했다. 모두 다 그를 욕할 거라 생 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강력한 최면에 의해 모두 그의 존재를 망각한 것처럼.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형의 커다란 방이 말없이 치워지고 그곳 이 루시온의 방으로 바뀌었으며 자살 다음 날로 루시온이 새로운 후 계자로 지명된 것이 전부였다. 모든 것은 풍차가 곡식을 갈아내듯 기계적이었고, 그 과정에 눈 물은 단 한 방울도 없었다. 형의 흔적은 마치 더러운 얼룩을 세척 제로 닦아낸 듯 가문 전체에서 지워졌다. 형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내가 왜 가문을 나왔냐면....." 루시온은 자신을 다시 그 늪 속으로 끌고 가려는 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내게 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 다." 상대는 수치스럽게 자살한 형이 거론되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악마의 이름을 읊거나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형을 그렇게 만든 아버지를 증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도 아버지 인생의 대리인이 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니 이만 물러가시길." "그 말을 각하계서 들었다면 얼마나 낙담하셨을 줄 아십니까. 하지만 각하는 여전히 도련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강제로라도 끌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루이가 벌떡 일어났다. "귀 먹었어? 루시온이 안 간다잖아! 돈도 권력도 다 필요없다잖 아! 그거 진짜 엄청나게 아까운 거지만.... 아무튼 지가 싫으면 그만이니까 돌아가라고! 진짜 아깝지만...." 어쩐지 '나라면 갈 텐데.....'라는 궁상으로 들렸지만, 예전부터 루시온을 얄밉게 생각한데다가 남의 인생 알 바 아니라는 정신으 로 살아온 루이로서는 의외의 간섭이었다. 하지만 사자는 귀찮다는 듯 흘낏 루이를 바라봤을 뿐 전혀 물러 날 기미가 없었다. 루시온이 말했다. "절 데려가려는 이유가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문을 위해서라 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남자는 저 하나뿐 이니까요." "가문을 위하는 것이 도련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고 루시온의 반듯한 얼굴은 일그러 지고 말았다. 인간을 위해 가문이 존재하는 게 지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가 문이라는 괴물은 숙주가 된 인간들의 머리에 대롱을 박고 그들의 인생을 빨아 먹으며 점점 더 비대해져 간다. 마치 혐오스러운 해 충처럼. 그 혐오감이 불러오는 현기증에 루시온은 눈을 감았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불쾌한 눈초리로 갑 작스런 방문객을 쏘아본 귀족가의 사자는 곧바로 표정이 굳었다. "이곳은 키스가 없어도 언제나 소란스럽군. 기사라면 품위를 지 키도록 해라." 냉기가 흐르는 것 같은 눈매의 카론이었다. 카론은 고개를 조아 리고 있는 낯선 남자를 바라봤다. 물론 그는 카론을 모른다. 설마 한쪽 팔이 없는 자가 그 유명한 은의 기사일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카론이 입고 있는 위압적인 콘스탄트 장교복만으로도 그는 마치 정복자를 대하는 식민지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였다. 사 실 카론으로서는 전혀 입고 싶지 않은 군복이었지만, 이럴 때는 아주 편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루시온은 굽실거리는 사자를 보며 쓴웃음이 다 나왔다. 참으로 고상한 가문의 고상한 생존방식이지 않은가. "너는 뭐냐." 카론의 싸늘한 목소리에 그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때 쇼탄이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아아, 이 근처에 이오타와 손을 잡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 이 있다던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자는 쏜살같이 리더구트를 빠져나갔 다 그건 그가 유일하게 현명하게 처신한 행동이었다. 만약 카론 이 내통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잘난 가문 전체가 쑥밭이 될 테니 까. 카론은 '대체 뭐하는 놈이지?'라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린 채 잠시 문가를 바라보다가 다시 기사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 시간 이후, 왕실 신전기사단 스왈로우 나이츠는 해체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카론은 말을 이었다. "해산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서류상으로 해체될 뿐이 야. 너희는 교황청 소속이다. 이대로 놔두면 적 소속이 되어 체포 될 수도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기사단을 이어가든 말든 그건 너희가 알아서 전하를 설득해라." 그들은 그제야 카론의 배려를 알아채고는 감탄했다. 카론은 이 번에는 키스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그 사무실 문을 열자 그의 시선에 검들이 들어왔다. 단 한 번도 쓰지 않아 반짝거리는 칼날들이 잠들어 있 었다. "너희는 기사다. 검을 들어라. 그리고 왕실을 지켜라." "예!" 카론은 처음으로 스왈로우 나이츠들을 기사로 인정해 주었다. "흥. 죽을지도 모르는데 뭐가 그리 좋은가." 흑발의 기사는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빈정거렸지만 그리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카론은 잠시 엔디미온의 검을 바라봤다. 그도 지금 어딘가에서 자신의 검을 들고 있으리라.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카 론은 그렇게 믿었다. "명령은 이상이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보도록 하자." 그는 망토를 젖히며 리더구트를 나갔다. 7 베르스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물가는 치솟았고 생필품이 동 이 났다. 계엄령이 떨어진 거리에선 군대가 불온분자를 색출하고 폭도들을 처형했다. 모든 전쟁물자는 징발되었으며 도로 곳곳에 방책과 검문소가 세워졌다. 눈치 빠른 상인들은 이미 모든 재산을 금으로 바꿨으며 권력이 있는 자는 베르스에서 도망쳤고 용기가 있는 자는 베르스로 귀국 했다. 국경 밖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피난민들의 행렬이 방 낮으로 줄을 이었다. 모두가 전쟁이라는 폭풍이 몰고 올 황폐를 실감했다. 그런 이때 키스는 뭐 하고 있었느냐 하면. '에이, 소금이 부족하네.' 생선을 굽고 있었다. 데네브의 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키스는 물가에서 잡아온 생선을 작은 풍로 위에 올려놓고 멍한 얼굴로 부 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직장에서 돌아오면 이것으로 저녁을 만들 생각이었다. 벌써 이런 식으로 일주일째다. 지금쯤 셀른에서 기다리고 있을 키릭스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키스를 증오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 을 정도의 게으름이지만, 키스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다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한 몸도 몸이지 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죄의식이었다. 키스는 본래 정이 없는 사내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주 가끔씩 그 감정이 움직일 때는 어쩔 줄 모르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때 갑작스 런 발길질이 풍로를 걷어찼다. 건달들이었다. "호오라. 남의 집에 사는 주제에 이제는 사내자식까지 들여놨 네?" 키스는 떼굴떼굴 굴러가는 풍로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아아아! 낚싯대도 없이 생선 잡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아 아!" "생선이고 지랄이고 집어치우고 집세나 내놓으시지." "집세라니요오?" 이곳은 도시도 영지도 아니다. 세금 따위가 있을 리가? "여긴 우리들 땅이야." "누가 그렇게 정했는데요?" "우리가!" "아항." 키스는 이들이 도적들이며 데네브가 이곳에 살기 위해 매번 자 릿세를 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부모를 기다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 계집애가 없으니까 네놈이 내면 되겠군." "하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키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스의 그림자가 그들을 덮었다. 생각보다 키가 훨씬 크다는 걸 알게 된 건달들은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이것 참 다행이네요. 당신들 덕분에 데네브를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으니까요." "괜한 수작 부리지 마! 여긴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를 곳이니까." 그들은 품속에서 칼을 꺼내며 위협했다. 키스는 주변을 둘러보 며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오. 여긴 누가 죽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곳 이로군요." 키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올렸다. 8 "전쟁 끝나면 음식점 차려도 되겠어요. 저 낡은 화덕으로 이런 요리르 만들 수 있는지 처음 알았네요."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온 데네브는 키스가 차려 놓은 음식을 잔뜩 입에 넣으며 말했다. 건달들이 생선을 날려 버린 덕분에 키스는 부랴부랴 버섯 샐러드와 포크 파이를 만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야 채는 바삭거렸고 갓 구운 파이 속에는 얇게 저며 메콤하게 간을 한 갈빗살이 가득했다. 키스는 문득 미온 녀석들에게 파이를 구워주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기사단 해체되면 레스토랑을 하자는 농담을 나눴다. 미온이 손님을 끌고 루시온이 지배인을 하면 제법 괜찮을 것 같다며 웃었다. 그리 오래전 추억도 아닌데 전생의 일처럼 까 마득하게 느껴졌다. "저 그런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상한 사람들 안 왔어요?" "이상한 사람이라니요?" "그러니까 다짜고짜 들이 닥쳐서 집세를 내놓으라든가...." "전혀 모르겠습니다아." 키스나 키릭스나 시침 떼는 시늉은 경지에 올랐다. "흐음. 안 올 리가 없는데, 아무튼 없어져 주면 나야 좋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데네ㅂ의 시선이 이번에는 키스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자 비명을 질렀다. "아아앗! 키스 씨! 당신 귀걸이가 없어요!" "아, 이거요?" 도리어 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드러운 귓불을 매만지며 대 답했다. "수영하다가 잊어버렸어요." "엥? 수영? 이런 날씨에?" 숨소리도 얼어붙을 한겨울에도 헤엄치는 존재는 펭귄이나 바다 표범이지 인간은 아니다.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낚싯대도 없이 생선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아니, 그보다 그거 엄청 비싸 보이던데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그녀가 호들갑을 떨자 키스는 난감하게 웃으며 손을 내져었다. "아하하. 걱정 말아요. 이제 별 필요 없는 거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키스의 혀끝이 씁쓸했다. 어쩐지 죽음을 앞 두고 가진 것을 정리하는 기분이었다. 데네브는 납득하기 힘든 표 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호수 밑바닥을 뒤져 다시 찾을 수도 없었으 므로 아깝다는 듯 말을 흐렸다. 그때 그녀가 말한 '이상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오후와 차이가 있다면 그 인원이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족히 십여 명은 넘는 불청 객들의 난입은 오븟한 저녁 무드를 산산이 부숴놓기에 충분했다. "저놈입니다!" 낮에 키스를 만났던 도적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손가락질을 했다. 두목쯤 되어 보이는 퉁퉁한 남자는 키스를 보자마자 침ㅇ르 꿀꺽 삼켰다. 키스는 확실히(입만 다물고 있다면) 이상적인 미남이다. 얼굴은 남자로서는 놀라울 만큼 요염한 기색을 풍기지만 큰 키에 몸도 다 부져서 엔디미온이나 카론처럼 여자로 착각 받는 얼굴이나 가녀 린 체구에 콤플렉스가 있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 보통사람에게 서는 보기 힘든 붉은 눈동자도 그의 희귀성에 한몫을 한다. 비록 콧등에 키릭스가 남긴 상처가 있긴 했지만 그것조차 매력 에 흠집을 내지는 못했다. 솔직히 데네브가 정신을 잃은 키스를 어렵게 끌고 온 이유도 꼭 자비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조각 같은 외모의 키스를 홀린 듯 바라보던 두목은 곧 흥분 했는지 손가락 끝을 움찔했다. 아무래도 그런 취향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는 엔디미온의 첫 지명 때 정의의 심판을 받았던 자 칭 거상 바르도였던 것이다. 감옥에서 탈옥한 후 현재는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두목? 왜 그런 얼굴로....." 정신을 차린 바르도가 놀란 얼굴로 고함쳤다. "응? 아아, 그래! 귀걸이는 잘 받았다만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손해라서 말이지! 남은 것도 모조리 내 놔!" 매우 솔직하고 무식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공갈에 키스는 한숨 을 내쉬었다. "그거 말고 또 남은 귀걸이가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아. 보통 사 람 귀는 두 개라는 생각 안 해보셨나요?" 낮에 찾아온 건달들의 협박에 대처한 키스의 방식은 무척이나 평화적이었다. 두 팔을 부러트리고 평생 목발 신세를 지게 만드는 대신 데네브의 집 정도는 수십 채도 넘게 살 수 있는 값비싼 보석 이 달린 귀걸이를 넘긴 것이다. 이것을 받고 다시는 그녀를 괴롭 히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그런데 상황은 키스의 기대처럼 고상하게 끝나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 이런 보석을 차고 다니는 놈이라면 분명 가진 게 많을 게 뻔하지!" 키스는 아차 했다. 바보에게는 바보만의 논리가 있는 법이었다. 데네브는 당황한 얼굴로 키스와 두목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두 목이 말했다. "뭐, 없다면 몸으로 갚아야지. 저년은 사창가에 넘기고 저놈은 잡아서.....에, 그러니까...." 바르도는 부하들의 표정을 흘낏 살피며 말을 흐렸다. 이상한 부 분에서 소심했다. 그때 키스가 딴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옛날 옛적에 게으른 들쥐들이 살았대요. 성실하게 먹고 사는 게 귀찮았던 그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남이 열심히 구한 먹이를 훔 쳐 먹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분별없게도 호랑이의 먹이를 훔치 려고 했대요. 호랑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쥐떼들을 보고 어처구니 가 없었지만 이미지 관리도 있고 해서 자기 먹이 일부를 던져줬대 요. 그런데 들쥐들은 호랑이가 자신들에게 겁을 먹은 거라고 착각 한 거예요. 그래서 아예 가죽까지 다 내놓으라면서 호랑이를 협박 했대요. 호랑이는 탄식했어요. 자비를 베푸는 것과 겁먹은 것도 구분 못하는 자들에게 너그럽게 대한 것 자체가 실수라고 생각했 어요. 그리고는 엄청나게 귀찮았지만 몸을 움직여 쥐떼들을 모조 리 다 죽여 버렸답니다." 9 난장판이 되어 버린 집안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거친 숨 소리만 들려왔다. 신음은 당연히 턱뼈가 부서지고 팔 다리가 완전 히 반대로 꺾여버린 도적들의 것이었고,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 채 새어나오는 숨소리는 데네브의 것이었다. 키스는 맥박조차 기계처럼 흐트러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도 적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세등등하던 거한들이 바닥을 구리기 까지는 단 1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제가 당신들을 안 죽인 이유는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며 썩어갈 당신들의 시체를 일일이 묻어야 하는 게 귀찮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게으른 인간이라는 사실에 감사하세요." 키스느 오싹할 만큼 상냥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또 다시 얼굴 볼 일이 생긴다면 서로 기분 상할 테고 당 신들은 몸도 상하겠지요? 그러니 내 귀걸이 팔아 멀리 멀리 사라 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퀴벌레의 빠르기로 기어서 도 망쳤다. 바르도는 실수로라도 키스에 대한 자신의 뜨거운 욕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그랬다면 '귀찮음을 무 릅쓰고' 땅속에 파묻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탈옥까지 해서 도적질 외길인생을 살아왔는데 스왈로우 나이츠에게 두 번이나 걸린 것만 봐도 지지 리도 운이 없는 악당이었다. "제길." 키스는 드물게도 험한 소리를 뱉으며 콧등의 상처를 매만졌다. 그것은 이미 아물었지만 항상 막 베인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고 개를 돌려 데네브를 바라봤다. "....." 그녀는 흠칫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키스에게서 물러섰다. 마치 위험한 맹수를 대하듯. 키스의 표정이 씁쓸했다. 그가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유는 그 뒤의 진짜 얼굴은 키릭 스의 것이기 때문이다. 매정하고 냉담하며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증오하는. 눈을 감으면 셀른의 시민들을 해체실로 내몰던 키릭스의 얼굴 이 떠오른다. 자신은 아무리 키릭스가 아니라고 소리쳐도 결국 그 기억은 섬뜩할 만큼 또렷했다. 키스는 그것으로부터 한없이 도망쳤다. 가짜 얼굴이라도 상관 없으니까 더 이상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10 "그런 부상을 입고도 죽지 않는 걸 보고 보통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데네브는 뜨거운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눈빛은 여전히 키스 를 피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많이 진정되어 보였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키스 씨는 셀른의 실종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죠?" 그녀는 직감했다. 아무리 감상적인 사람이라도 어느 날 도시 사 람 모두가 사라졌다는 황당한 소리에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또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도적들에게 전 재산을 주면서까지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자를 지켜주지는 않는다. 특히나 키스처럼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더욱 더. 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와 '당신의 부모는 결코 돌 아오지 못해'라고 대답해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을 꺾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신 이렇게 말했다. "계속 같이 있어줄게요.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 도....." 이렇게 한다고 죄가 갚아질까. 가장 무서운 죄는 태어날 때부터 짊어지는 죄라고 한다. 세상 일이 다 그렇다. 누구는 천한 종족으 로 태어났다는 죄로 학살당하고 누구는 빚더미에 앉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죄로 노예가 된다. 누구는 지능이 낮은 죄로 비웃음 받으며 누구는 부모가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났다는 죄로 버려져 굶어 죽는다. 또 누구는 수많은 사람의 피를 뽑아내 태어났다는 죄로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태어난 죄만큼 끔찍한 죄는 없다. 데네브는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꺼내려던 말은 '당신은 내 부모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부모님은 어떻게 된 거냐',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 올 수 있는 거냐' 라는 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키스 를 바라봤다. "키스 씨, 불행도 제 권리에요." 그녀는 그토록 궁금해 하던 사실을 물어보지 않는 이유를 말했다. "당신의 그 입에서 속사정을 듣게 된다면 분명 난 당신을 미워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당신을 증오한다고 내가 행복해질까요. 당 신에게 죗값을 치루라고 소리친다고 사라진 부모님이 돌아올까 요. 그건 무리겠죠." "....."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요. 나쁜 사람은 결코 당신처럼 말하지 않아요. 죄가 있다 는 이유로 괴로워하지도 않고 그런 눈동자로 상대를 바라보며 눈 물을 흘리지도 않아요. 그런 사람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웠어요. 이제 떠나세요." 그녀는 작은 자방으로 가서 접시를 닦았다. 키스는 말없이 그녀 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쩌면 신은 인생 끝자락에 이토록 커다란 자비를 베풀어 고해 (告解)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기대어 놓은 검을 집었다. "어째서 제 주변에는 착한 사람들만 있을까요.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꽤 과분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키스의 머릿속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 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째서인지 추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키스는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섰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의 검을 향해 있었다. "....실없는 약속은 안 한는 성격이라서."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씻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째서일까, 인연 의 마지막은 항상 쓰라리다. 그는 문밖으로 나섰다. ....키스 또 머릿속에서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31화 용과 호랑이 1 그의 긴 머리칼이 흩날렸다. 랑시는 달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토록 가슴이 터질 듯 빨리 달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전 쟁의 을씨년스런 기운이 내려앉은 베르스의 왕궁을 단 한 번도 쉬 지 않고 가로질렀다. 흑사병이 창권한 도시처럼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잿빛의 거리를 분홍빛으로 머리를 물들인 작은 소년이 내달리는 모습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나가던 관리들의 대화를 듣게 되면서였다. "견백호가 드디어 출전한다지?" "그런데 상대가 진청룡이야. 도저히 승산이 없어. 어떻게 마키 시온의 수호신과 싸울 생각을 다 했대?" "들리는 말로는 적현무에게 속아서 전쟁에 나가기로 했다는데. 아무튼 죽음을 자초하다니, 소문대로 엄청나게 순진한 놈이야." "누가 아니래? 완전 바보라니까. 그러니까 아신이면서도 지금가 지 방랑이나 하고 있지. 내가 아신이었다면 벌써 나라 하나 꿰차 고 앉았을 텐데, 즛쯧. 그런데 그건 그렇고, 베르스를 떠날 준비는 다 했나?" "물론이지. 이미 짐 다 꾸려두었....으헉!" 우연히 엿들은 랑시는 그 즉시 무라사를 비웃던 녀석들의 등짝 에 점프킥을 갈겼다. 앞으로 나동그라진 그들에게 울먹거리는 고 함소리가 쏟아졌다. "똑바로 들어! 형은 말이지! 바보가 아니야! 네깟 놈들에게 속아 서 싸우는게 아니라고! 그건 모두... 모두 다 나 때문이라고!"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온 랑시를 보고 무라사는 어쩔 줄 몰라 했 다. 평소 동생을 대할 때의 위압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 진정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싸움 그만두라고!" "아니 왜? 네가 싸워주길 바랬잖아." "에이이! 시끄러워! 이제 됐어! 다 그만둬."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랬다저랬다 고집만 부리는 돼먹지 못한 동생이라고 생각할 만도 하지만, 그 속마음은 분명달랐다. 지금 까지는 자신의 형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 떤 싸움이든 패배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무슨 고집 을 부려서라도 가로막으려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매국노 라고 비난받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랑시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형이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같이 이 나라를 떠날게!" "정말?" 무라사의 눈빛이 커졌다. 동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 야. 이거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소원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알았지? 절대 싸우지 마! 멋대로 싸우다가 죽기라도 하면 죽여 버릴 거야!" 뭔가 앞뒤가 안 맞는 협박이었지만, 아무튼 동생의 말을 한 번도 거부해 본 적이 없는 무라사는 커다란 덩치를 움츠렸다. "내일 오전에 짐 사서 여기로 올게. 같이 떠나. 알았지!" 랑시의 날카로운 '경고'에 그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2 "이제 시작인가." 키르케는 검은 가죽 장갑을 끼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전선으 로 향하는 마지막 증원군의 끝없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지평선 끝까지 그어놓은 굵직한 흑선이 꿈틀거렸다. 표독스러운 눈초리의 군인들 사이에선 성격이라든가 개성, 인 간성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복제된 것 같 았다. 어째서 생판 모르는 권력자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 라는 의 문 따위는 충성심이라는 지우개로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것 을 보고 잘 훈련되었다고 말한다. 키르케는 자신이 훈련시킨 그 병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중 상당수는 필시 죽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훈장을 받을 것이고 나쁘다면 이름 없는 들판 위에 쓰러져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죽음 을 맞이하리라. 죽기 직전 목이 터져라 국왕 만세를 외치는 자도 몇몇 있겠으나 국왕은 그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리라. '결국 전쟁이란 왕들의 도박.' 그녀는 그렇게 읊조리며 적갈색의 실크 브라우스 위에 양가죽을 발라 만든 검은 제복을 입었다. 키르케를 위해 특별히 제봉된 그 가 죽옷은 얇고 타이트해서 아슬아슬한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콘스탄트 중장의 은빛 계급장이 도드라진 군모를 눌러썼다. 군복이란 여자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옷인데 도 키르케가 입고 있었을 때는 유달리 아름다웠다. 그런 모습이라 면 전장의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며 긴 채찍을 휘두르는 것조차 당연해 보였다. 선혈의 마녀. 그녀가 아신의 힘을 받고 얻게 된 악명이다. 그때 달칵 문이 열리며 알테어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왠지 부끄 러워하는 얼굴로 한 바퀴를 돌며 말했다. "어, 어울려?" "......" "별로야?" 키르케는 난데없이 나타나 쇼를 하는 알테어를 심드렁한 눈빛 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판금을 곡선형으로 다듬은 뒤 새하얗게 도 색한 갑주를 입고 있었다. 마치 강철로 짠 웨딩드레스 같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전 성기사단 제복처럼 맨다리와 어깨가 훤히 드러나서 적을 홀리는 목적 외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였 다. 물론 몇 톤을 짊어지고도 하능르 훨훨 날 수 있는 명주작에게 갑 옷이란 장식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만- 그래도 왜 하필이 면 저딴 것을 입는단 말인가! 정신 사납게 달그락거리며 돌아다니는 알테어에게 키르케가 말 했다. "....그거 니가 디자인한 거지?" "헤에. 어떻게 알았어?" "척 보면 알아! 이 노출증 푼수야!" "왜 화를 내!" "왜 내냐고? 누군 잠도 못 자면서 작전을 세우는데 넌 그딴 쓸데 없는 양철쪼가리나 만지작거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할 일 없으면 국경을 날아다니며 정찰이라도 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이렇게 예쁘게 입고 있는 걸 미온이 보 게 될지도!" 죽여 버릴까? 키르케는 눈을 감고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마음의 불을 다스렸다. 내가 어째서 이런 백치에게 졌을까.... 키르케는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어디라도 좋으니까 제발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는 간곡 한 표현이었다. 그 순간 키르케의 눈빛이 번쩍 뜨였다. "그건 그렇고.... 무라사. 이 망할 강아지는 왜 안 나타나? 야! 부관!" 그 순간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애꾸눈의 부관이 득달같이 뛰어 들 어왔다. 그는 일단 알테어의 '심장에 무리를 주는' 코스츔을 보고 는 흐어어억! 하고 놀란 뒤에 키르케에게 경례를 붙였다. 곧바로 키르케의 서릿발 같은 추궁이 쏟아졌다. "출진이 코앞인데 견백호는 어디 처박혀 있어? 대체 어디서 또 퍼질러 자는 거냐?" "그, 그게 사방으로 찾아보고 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찾아와. 못 찾으면 네놈도 행방불명으로 만들어 버릴 테 니까!" "예, 옛!" 부관은 더 이상 불동이 튀기 전에 부리타케 밖으로 내뺐다. "....이놈의 전쟁, 이길 수 있을까." 키르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신 중 하나 는 손수 철판 드레스를 만들어서는 좋아라고 폴짝폴짝 날뛰고 또 다른 하나는 어디서 동면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고, 키르케는 내 평생 최악의 부대라며 데스크에 머리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3 "견백호는 아직인가?" 카론의 나직한 물음에 부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케 의 기대 이상으로 움직여주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바로 카론 이었다. 벌써부터 전선에 도착해 그 냉철한 두뇌를 십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곤란하군." 카론은 그 차갑게 맺힌 눈매로 전술 지도를 바라보며 짧게 내뱉 었다. 부관들은 카론의 도도한 외모를 감상이라도 하는 듯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베르스의 거만한 장교들이었다면, 은퇴한 기사의 명령 따위 들 을 것 같아? 라며 또 지긋지긋한 권력 싸움을 시작했겠지만 최정 예 큰스탄트 군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카론을 거부할 경우 상상 하기도 싫은 키르케의 응징을 받게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은 의 기사'라는 명성은 우습게도 베르스보다 베르스 바깥에서 더 인 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소국의 보석', 강대국의 권력자들은 카론을 그렇게 부르곤 했 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곤란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견 백호 무라사 랑시였다. 모든 작전은 그가 라이오라를 묶어둔다는 전제 하에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엉뚱한 곳에서 구멍이 생길지도.' 카론은 지도 위로 손가락을 뻗어 무라사와 라이오라가 맞붙을 지역을 지그시 눌렀다. 주변에는 들풀만 드문드문 있는 드넓은 분 지였다. 분지 양 끝에는 서로의 요새가 대치하고 있다. 싸움이 시 작되면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는 그런 곳. 마치 자연이 만들어 놓 은 경기장 같았다. 이곳에서 무라사는 라이오라를 4일 이상 묶어둬야 했다. 아무도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설령 루터라고 하더라도 라이오라를 상대 로는 단1분도 견디지 못한다. 즉, 무라사가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전쟁은 시작하기도 전 에 패배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작전을 바꿔야 할까.' 카론은 황혼에 물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 직까지도 총사령관 키르케에게서는 아무런 명령도 없다. 분석에 의하면 내일이나 모레쯤 이오타 군의 공격이 시작되리라. 그때까 지 무라사가 나타나야만 했다. 4 랑시는 새벽녘에 슬며시 눈을 떴다. 겨울 해는 게을러서 아직도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그는 미리 짐을 꾸린 여행 가방을 침대 밑에서 꺼내 들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 뒤를 돌아봤다. 룸메이트 크리스의 새근거리는 숨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처럼 털모자를 눌 러쓴 채 잘들어 있을 것이다. 랑시는 그가 자신에게 종이를 접어 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미안해. 잘있어.' 자신의 책상 위에는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는 편지를 올려놨 다. 랑시는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캄캄한 테라스를 지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일말의 호의도 없는 말투였다. "어디 가는 거지." "흐이이익!" 랑시는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다 입을 틀어막았 다. 그 순간 촛불이 켜졌다. 단 한 개의 양초였지만 충분히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 큼 밝았다. 상대를 확인한 순간 랑시는 인상을 찡그렸다. 레녹이 었다. '젠장! 하필이면!' 붙임성 좋은 랑시가 스왈로우 나이츠에서 유일하게 서덕한 사 이가 있다면 바로 레녹이다. 물론 레녹도 랑시를 좋아하지 않는 다. 터무니없이 상대를 무시하는 성격 파탄자가 그나마 좋아하는 상대는 루시온 정도였다. 그에게 랑시는 '성적정체성이 불분명한 수다쟁이 소녀' 일 뿐이다. 그 소년은 늑대에게 발각된 코끼처럼 잔뜩 긴장한 채 웅얼거 렸다. "에, 내가 뭘 하려고 했냐 하면, 그러니까....덩치만 크고 바보 같은 녀석에게 지명을 받아서 가보려고....." 랑시는 뭐라고 얼버무리려다가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꺾었다. 저 깐깐한 공무원 기사가 앞으로 저지를 일은 뻔하다. 모 두를 깨운 뒤에 랑시가 도망치려고 했다고 고발하고는, 역시 그는 쥐뿔도 기사도를 모르는 비겁자라며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레녹은 말없이 쥐덫에라도 걸린 양 어쩔 줄 모르는 랑시 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바람을 불어 다시 촛불을 껐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어두워서." "....레녹 경."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고마워." "쳇." 문득 레녹이 전 재산을 자선 단체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해 냈다. 좀 더 노력해서 친해지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잘있어." 랑시는 우둠 속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레녹을 향해 작별 인사 를 남기고는 리더구트를 나갔다. 5 막 동이 틀 무렵의 어슴푸레한 산길을 헤치며 뛰어가는 일은 결 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커다란 여행 가방과 음습하고 싸늘한 공 기, 질척거리는 흙길도 랑시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뚫고 도착한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랑시 는 약속 장소가 틀렸나 싶어 몇 번이나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확 시히 이곳이었다. 그는 형의 모습 대신 나무 그루터기 위에 접혀 있는 쪽지를 발견 했다. 랑시는 그것을 펼쳤다. 어색하고 삐뚤거리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있잖아. 꼭 해야 할 일이 생겨서 금방 다녀올게. 돌아오면 같이 떠 나자. 추신:화내지 않을 거지? "이...이...머러지가...." 랑시는 쪽지를 꽉 구긴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산 전체가 쩌렁쩌 렁 울릴 정도로 소리치고 말았다. "으이구! 그럼 쪽팔리게 리더구트로 다시 가야 하잖아!" 랑시는 엉뚱한 쪽으로 화를 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형이 요령 좋게 베르스를 버리고 자신과 떠날 리 가 없다는 것을. 그러기엔 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랑시는 무릎을 꿇고 말 지지리도 안 듣는 바보 같은 형이지만 제 발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러던 중에 눈물이 흘렀는데,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한 속삭임이 끊임 없이 등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6 "역시 견백호는 진천룡이 무서워 꼬리를 내린 거?" "하긴 누가 그 불사신과 싸우고 싶겠어?" "그럼 견백호에게 전쟁의 핵심을 맡기고 있던 우리는 어떻게 되 는 거야?" "설마 이런 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되는 건 아니겠지?" "장난이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아!" 전방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견백호가 도망쳤을지도 모른다는 루머는 점점 더 확신으로 변했고, 그 불안감은 전염병처럼 퍼져가 며 군대를 병들게 만들었다. 모든 전쟁 준비를 마쳤지만 가장 중요한 무라사가 행방불명이 면 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마치 메인디쉬가 빠진 저녁식사처럼 파티를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아야 할 장교가 먼저 당황해서 어쩌자는 건 가." 첨모장 카론의 질책이 장교들을 때렸다. 견백호 없이 전쟁을 치 러야 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도 카론의 얼음 같은 외모는 냉정 그 자체였다. 장교들은 거의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쩌면 사람이 저토록 침착할 수가 있는가. 카론은 드물게도 제법 긴 격려를 했다. "애당초 견백호느 예상 밖의 지원군이었다. 키르케 사령관은 무 라사가 없을 때도 전쟁을 치를 생각이었어. 그것은 제군들을 믿었 기 때문이야. 이 전쟁의 주역은 너희다. 그러니 견백호가 나타나 지 않는다고 불안해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승리를 의심치 마라." 이런 격려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표정이 조금 어색했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전쟁과 종교 의 공통점이 있다면 누군가를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더 없이 당당한 카론을 믿는 콘스탄트 군 장교들의 얼굴에서 불안감이 가 시기 시작했다. 카론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그들을 둘러본 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흐음?" 집무실에 있던 루터가 안경을 벗으며 심상찮은 표정의 카론을 흘깃 바라봤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고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 이지만 루터는 성격을 읽고 있었다. 희생양에게 읊어줄 구절이라도 찾고 있는 거냐고, 평소 같았으 면 차갑게 쏘아붙였을 카론이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데스 크로 향했다. 그리고는 펜을 들어 지도 위에 뭐라고 기록하다가 너무 힘을 준 나머지 펜대를 부러트리고 말았다. 부하들 앞에서 애써 참던 짜증이 폭발한 탓이었다. 그 어쩔 줄 모르는 얼굴에 루터는 큭큭 웃어버렸다. "견백호 때문이로군. 하긴 속이 타겠지." "닥쳐!" 카론은 켤코 성격이 좋은 사람도 낙관적인 사람도 아니다. 무엇 보다 그는 자기 맘대로 행동하는 막돼먹은 인간에 대해 신경질적 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자다. 그것은 키릭스로 시작해서 키스에 이르기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온 악연의 역사였다. 키스가 사라지니까 이번에는 무라사가 난리 였으니 카론의 심기도 이만저만 뒤틀리는 게 아니었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며 참모가 뛰어 들어왔다. "견백호가 나타났습니다." 카론은 부하가 나타나자마자 평소의 냉정 침착한 가면을 썼다. "그런가. 이곳으로 불러라." "그, 그런데....그게 좀 곤란합니다." "곤란?" 카론은 당혹스러워하는 참모의 얼굴에서 지금 무라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싸늘한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부하 앞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무라사! 그 바보 천치가!" 견백호는 곧바로 라이오라에게 간 것이었다. 7 새하얀 가죽옷을 입은 큰 키의 사내가 흙먼지가 날리는 분지를 걷고 있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자살을 하려는 거라고 생 각할 것이다. 그는 홀로 라이오라의 진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사장권 안으로 들어오자 요새 안에서 수천여 발의 화실이 발사되었다. 호선을 그리며 하늘로 가득 메운 화살들이 소낙비처 럼 그를 향해 쏟아졌다. 가소롭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 본 그는 두 다리로 땅을 누르며 포 효했다. 곧이어 라이오라 측의 병사들은 난생 처름 보는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고막이 찢겨져 나갈 것 같은 괴성과 함께 그를 노리던 화살들이 힘을 잃고 모조리 튕겨나가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사자후(獅子吼)! 주변의 모든 것이 폭풍에 휘말린 듯 쓸려 나갔다. 그는 회색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뒤 요새를 향해 주 먹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나와! 라이오라!" 무라사의 고함소리는 양 진영의 모든 군인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투지로 가득 차 있었다. 주먹을 감싼 강철의 장갑이 시뻘겋게 달 아오르기 시작했다. 8 팔짱을 낀 채 적의 요새 앞에 동상처럼 버티고 있는 견백호 무라 사의 모습은 아신이 어떤 존재인지 단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화살 조차 날아오지 않았다. 도리어 긴장하고 있는 쪽은 요새 안에 있 는 수만 명의 병사들이었다. 아신은 아신으로밖에 상대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이게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역시 또 자고 있는 거냐?" 요새로부터 아무런 기척도 없자 무라사는 짜증을 터트렸다. 항 상 자신이 싸움을 걸어오면 몰래 도망치기 바쁜 라이오라였다. 뒤 쫓아 간 무라사에게 덜미를 잡혔을 때만 어쩔 수 없이 싸웠다. 물론 결코 약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였는데- 이번에도 그러면 곤란했다. 그래서 무라사는 교활한 책략을 쓰기로 했다. "야! 라이오라! 난 다 알고 있다! 황실 파티 중에 구석에 쪼그려 앉아 땅콩만 깠지! 말 못하는 땅콩은 왜 괴롭혀. 이 음침한 놈아! 집에서느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바닥에 누워 잠들잖아! 480년 동안 발전이 없어! 뭐가 제국의 수호신이냐! 네 집사가 불쌍하지도 않 냐!" 치졸한 저질흑색선전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문제는 무라사 의 목청이 너무 좋아서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다 듣게 되었다는 것. 특히 '바닥에 누워 잠든다'는 폭로 부분에서는 라이오라를 신 처럼 떠받들던 프론티어 뱅가드의 탄식이 이어졌다. "치사하게 내가 가면 밥도 안 주고! 옷장 속에 숨어 있으면 누가 모를 줄 알..." "무라사." "우아아아악!" 등 뒤에서 라이오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무라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그곳에는 어느샌가 라이오라가 서 있었다. "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냐!" "아까부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귀를 막던 손을 내리며 조용히 말을 이 었다. "내가 하려고 했다면 이미 널 찔렀을 거다. 경솔한 놈." "흥! 이 몸이 그깟 이쑤시개 같은 칼에 뚫릴 것 같아? 아니, 그보 다...." 무라사는 라이오라가 자신의 그 가공할 흑검을 들고 오지 않았 다는 것을 알고는 성질을 냈다. "경솔한 건 네놈이잖아! 싸우러 오는 놈이 칼도 잊고 나와? 냉큼 들어가서 가져와!" 그 엉뚱한 배려와 자존심에 라이오라는 도리어 귀엽다는 듯 소 리 낮춰 웃었다. "일부러 안 가지고 왔다." "뭐?" "너 따위는 맨손으로도 충분하니까." "이 자식이!" 노골적으로 무시당한 견백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의 온몸을 격렬한 기운이 감싸는가 싶더니 곧바로 주먹이 라이오 라를 향했다. 음속의 벽을 꿰뚫리는 굉음이 귀를 찔렀다. 실로 어마어마한 파괴력. 라이오라는 슬쩍 비켰지만 그 정권의 풍압만으로 라이오라가 크게 밀려나가 버렸다.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냐!" 한 대 더 먹여 주려던 무라사가 주먹을 풀며 소리쳤다. 라이오라 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혀를 찼다. 사실 육체적 파워만 따진 다면 모든 아신 중에 무라사가 단연 최강이다. 제아무리 진청룡이 라고 하더라도 맨손으로는 강철 같은 무라사를 쓰러트릴 수가 없 다. 아니 그렇다고들 믿었다. "사람들은 내 가장 무서운 힘이 검으로 상대의 생명력을 빨아들 이는 능력이라고들 하지." 라이오라는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특이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생긴 힘일 뿐 이야." 라이오라는 이미 죽은 뒤에 아신의 힘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 못하고 늙지 못하며 자신의 텅 빈 공간으로 상대의 생명 력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뭐, 뭐라고? 그럼 또 다른 힘이 있다는 거냐? 하지만 난 한 번도 그걸 못 봤는데!" "너한테는 보여줄 필요도 없었으니까. 내가 살아오면서 그 힘을 쓴 것은 단 한 번뿐이다. 바로 세 명의 아신을 쓰러트렸을 때." "....!" 무라사는 긴장감에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전에는 느껴보 지 못한 새로운 위압감이 온몸을 감쌌다. 예전의 라이오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거대한 구덩이처럼 공허했는데 지금만큼은 그 구덩이 밑바닥에서부터 엄청난 불길이 끓어 올라와 치솟는 것처 럼 강렬했다. 라이오라의 손바닥 위에 새하얀 에너지 덩어리가 응집되기 시 작했다. "이것이 내 진짜 힘이다. 옛날 사람들의 눈에는 아마도 벼락이 내려치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 말하자만 나는 마법사에 가까운 존 재다." 라이오라의 손 위에 뭉쳐진 작은 에너지 구체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키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대지 위의 서 리 결정이 녹아 증발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풀과 땅이 불타올랐 다. 격렬하게 방전(放電)하는 전격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무라사는 견디기 어려운 빛과 열기에 양 팔뚝으로 얼굴을 가리 며 버텼지만 그 구체가 커질 때마다 점점 더 몸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아신인 자신조차 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강대한 힘. 그 에 너지의 폭풍 속에서 라이오라가 선고했다. "무라사, 너는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라이오라가 손을 내리자 거대한 빛의 구체가 무라사에게 날아 들었다. 9 엔디미온이 셀른의 지하로 잡혀온 20여 일 동안 특별히 험한 꼴 을 당한 적은 없었다. 이자벨은 그를 고문하거나 치명적인 약물을 주사해 강제로 마음을 돌려 놓을 수도 있었지만, 냉혹한 그녀가 엔 디미온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다. 단지 세 평짜리 방 안에 감금해 둘 뿐이었다. 미온은 전쟁이 일어나면 분명 위험한 임무를 자청할 생각이다. 이자벨이 바라는 것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가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미온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자벨이 했던 말 이 씨앗이 되어 머릿속에 뿌리를 내렸다. 자신이 베아트리체를 맹 목적으로 사랑하게 된 이유는 단지 그녀의 강력한 사녕이 자신의 마음속에 침투했을 뿐이라고. 그것은 일종의 염력(念力)이었다. 그렇다면 키스도 마찬가지일까? 또한 그런 것마처 사랑의 한 방 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편 그 힘을 극대화시켜 이 세상 사람 들의 마음을 '정화'하려는 이자벨의 시도는 불순한가? 그것이 불 순하다면 자신과 베이트리체 사이의 사랑도 불순하다. 결국 그녀는 상대의 마음에 침투해서 자신을 사랑하고 지켜주 도록 조작했을 뿐인가. 자신도 키스도 결국 그녀의 숙주 중 하나 였을 뿐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실을 견뎌낼 수 있을까? '큭.' 미온은 찡그린 얼굴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지하 어디엔가 베아트리체가 있다. 멘토라는 기계에 연결된 일종의 '부 속품'이 된 상태로.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해주고 싶다는 갈망과 그녀를 만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는 공포가 동시에 몰려와 그를 짓눌렀다. "젠장! 제기랄! 빌어먹을!" 그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고함쳤다. 지금만큼 자신이 나약하 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베아트리체를 향한 마 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제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의심하고 있는가. 전에는 겪 어본 적이 없는 무력감이었다. '이자벨 님은 애당초 인간의 본성에 체념했기 때문에 그런 무서 운 생각을 한 것일까. 강제로 머릿속을 뜯어고치는 것만이 올바른 구원의 방식이라고. 그러면서도 왜 베아트리체를 미워하는 걸까.' 어떤 강대한 힘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머릿속에 침투해서 감정 자체를 뒤바꿔 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전쟁도 슬픔도 없는 세계 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천국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자기도 모르게 평화를 강요당한 사람은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 할까. 그가 그녀를 사랑항 이유가 그녀의 염력 때문이라면 그것도 진 심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아무것도 답할 수 없었다. ㅁ온은 반듯한 이마를 꽉 눌렀다. 끈 적거리는 상념의 찌꺼기들이 당장이라도 흘러나와 온몸을 적실 것만 같았다. 탁칵 문이 열렸다. 미온이 감금된 방문이 열리는 것은 하루 다섯 차례다. 세 번은 식사를 위해서고 나머지 두 번은 세탁과 청소다. 그 시간은 언제 나 정확하게 지켜졌는데 지금 열린 문은 어느 시간에도 속하지 않 았다. 미온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다부지다 봇해 험악한 인상 의 군인이 들어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음식도 세탁 물도 없었다. 단지 칼을 차고 있었다. 미온과 그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는 바로 처음 이 자벨을 만났을 때 미온을 폭행했던 '여왕의 광신자' 였다. "네놈 때문에 여왕님이 흔들리고 계신다." 대뜸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울분에 차 있었다. "이자벨 님은 네 녀석만은 예외로 대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예 외가 그분의 신념을 흔들고 있어 네까짓 놈 하나가 이 신성한 계 획을 뒤흔들고 있다고! 대체 넌 뭐하는 놈이야?" 미온은 왕실에 있을 때 카론이나 헬렌으로부터 많이 듣던 질책 을 여기서 또 듣게 되자 쓴웃음이 다 나왔다. 나름대로 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어디를 가도 조직을 망치는 불순분자 소리만 듣는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는 질책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 이다. "이자벨 님은 이 타락한 세상르 정화시킬 여신이야. 실로 완벽 한 분이시지. 너만 없어진다면 말이야. 완벽에 예외는 없어야 해!" 그 서늘한 말과 함께 그는 칼을 뽑았다. 미온의 눈동자가 커졌 다. 변명하고 설득할 여유조차 없었다. 곧바로 내려친 칼날이 미 온을 덥쳤다. "가, 갑자기 무슨!" 미온은 날렵하게 몸을 피했고 대신 자기 자리에 있던 베개가 두 동강이 났다. 사방으로 날리는 솜털을 바라보며 기가 질렸다. '이 자식 정말 날 죽일 생각이야!" 광기가 무서운 점은 어떤 행동이라도 정당하게 만든다는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위해 엔디미온을 살해한다, 라는 말도 안되는 공식조차 성립된다. "더 이상 여왕님을 괴롭게 만들지 마라. 네놈만 죽으면 그분의 마음도 편해져." "그, 그럴 리가 있겠냐! 정신 좀 차려!" "이건 내 독단적인 행동이지만 후회하진 않아! 여왕님을 위해 희생할 것이다!" 말이 통하질 않았다. 크게 휘젓는 칼날이 당장이라도 미온의 목 을 잘라버릴 듯 계속 다가왔고 그때마다 그는 선반과 책상을 넘어 트리며 저항했다. 물병이 깨지고 펜과 잉크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좁은 방이라 피 할 공간조차 마땅치 않았다. "윽!" 상대는 불행하게도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자였다. 칼날을 피하 느라 균형이 무너진 미온의 가슴에 굵직한 다리가 꽂혔다. 미온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재빨리 일어서려는 미온의 얼굴을 군화발로 짓밟은 그는 비웃 음으로 미온을 내려다보며 칼날을 들었다. "그 반반한 얼굴로 지금까지 몇 명의 여자들을 홀렸냐? 죽어라. 나약한 놈." 어째서 자신이 세계 평화를 가로막는 사악한 악마 정도의 대우 를 받아야 하는가? 문득 순수한 짜증이 몰려왔다. 미온은 독살스 런 눈빛으로 그를 쏘아봤다. "됐으니까 이제 죽여. 그만 지껄이고." "호오. 체념한 거냐?" "그래, 난 나약하니까." 그의 얼굴에 희열이 퍼졌다. 그는 미온의 새하얀 목덜미를 노리 며 칼날을 내리꽂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발목이 잘려나가는 것 같은 통증이 터졌다. "크아아악!" 미온이 자신의 얼굴을 짓누른 그의 발등에 펜을 힘껏 찔러 넣은 것이다. 큼직한 강철펜촉이 달린 그것은 송곳 같은 흉기였다. 미온은 일부러 책상을 뒤덮어 펜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걸 집을 수 있도록 빈틈을 만들었다. 그는 카론이 해줬던 말을 기억한 것이다. '검의 달인들조차 상대를 이겼다고 확신할 때는 빈틈이 생긴 다.' 무게를 지탱하던 다리가 풀리자 이번에는 그의 균형이 무너졌 다. 미온은 그의 다리를 잡아 넘어트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뛰 어들어 그의 턱을 전력으로 걷어찼다. "당신, 짝사랑에 빠진 중년 남자의 어리광으로 참아주기엔 지나 치게 과격하다고!" 꺾여버린 머리에서 덜컥하는 소리가 나며 그는 곧바로 기절했 다. 미온은 거친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장난 하냐. 죽는 쪽은 난데 뭐가 희생이야?....얼레?" 미온은 앞을 바라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이 열려 있었다. 이 자가 미리 손을 써 놨는지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도 없다. 베아트 리체를 구하려한다면 기회는 지금뿐이리라. "...." 하지만 저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목숨은 보장받지 못한다. 이 넓은 지하 기지는 인코그니토의 조직원들로 우글우글하다. 키스나 카 론이라면 모를까, 한 명 한 명 상대할 때마다 기적이 필요한 자신 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베아트리체를 어떻게 찾아내서 구할 수 있 을까. 명백한 자살행위였다. 미온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 을 잃은 군인의 손에서 검을 빼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곧 갈게." 어쩌면 이것조차 그 염력이 불러일으킨 최면일지도 모른다. 하 지만 상관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으니까 지킨다. 그것만 큼은 명확했으니까.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밖으로 나섰다. 10 얼마 되지 않아 엔디미온이 탈주한 사실이 발각되었고, 곧바로 이자벨 섭정에게 보고되었다. "그래?" 라이오라와 무라사의 접전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이자 벨은 그 보고를 받자 냉담한 표정으로 되물을 뿐이었다. 하지만 곁에 있던 리젤은 자신이 존경하는 여왕의 조각 같은 손 끝이 떨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평생 그녀를 사랑한 남자는 없 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죽여." 그녀는 짧게 명령했다. 리젤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 라봤다. 하지만 이자벨은 떨려오는 목소리를 최대한 억누르며 평소보다 도 더욱 더 싸늘하게 명령했다. "찾아서 죽여."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슬픈 점은 자신은 절대 상처 받지 않는 여자라고 믿는 것 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실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이자 벨이 엔디미온을 사랑했던 이유는 그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상처 를 위로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명령, 실행하겠습니다." 리젤이 문 밖으로 나오자 얼굴에 붕대를 감은 사내가 서 있었다. 엔디미온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를 놓친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리젤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리젤이 쑤셔 넣은 칼 날이 그의 기도를 뚫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리젤은 쏟아져 나오는 피거품을 바라보며 예의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당신 때문에 제가 미온 시를 죽여야만 하잖아요. 그러니 죄송 하다는 말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겠어요?" 순진함과 진인함으로 뒤틀린 리젤의 광기에 그는 고통도 잊은 채 온몸을 떨기만 했다. 리젤은 목을 꿰뚫은 칼날을 천천히 비틀 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뒈져버려, 쓰레기." 잘려나간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엔디미온을 척살하기 위해 모인 병사들은 절대 정상이라 할 수 없는 리젤의 행동을 보고는 기가 질렸다. 형소 항상 상냥하게 대 해준 상관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긴, 리젤의 '순진무구한 잔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 마 어린아이뿐일 것이다. 병사들은 리젤의 미소 띈 시선을 애써 피하며 입을 열었다. "수, 수색을 시작할까요?" 리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독액이 든 약병을 꺼내 단도에 묻히며 말했다.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고 계습니까?" "몰라요. 하지만 도착할 곳은 알고 있어요." 리젤은 청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천진한 눈웃 음을 지으며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1 "아아....으으으으......" 단 한 차례의 공격일 뿐이었다. 그것조차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무라사는 무참하게 쓰러져 일어서질 못 했다. 총알과 대포조차 흠집 낼 수 없던 무라사의 온몸은 상처로 가득 했다. 라이오라가 쏘아 보낸 에너지 구체를 받아친 무라사의 강철 장갑은 검게 녹아 버렸으며 부서진 주먹에서는 피가 흘렀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구덩이 가운데 파묻힌 무라사는 라 이오라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도 일어서지 못했다. "맙소사." 요새 위의 망루에서 거대한 빛의 폭발을 지켜본 카론은 표정을 잃었다. 직감적으로 저것이 진청룡 라이오라의 진짜 힘이라는 것 을 느낀 것이다. 루터마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한순간에 도시 하나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설령 남은 모든 아 신들이 라이오라를 막는다고 해도 절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절망 적인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라이오라의 진영이라고 해서 환호성이 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 들 역시 공포에 질린 것이다. 라이오라는 무정한 황금빛 눈동잘로 쓰러진 무라사를 내려다봐 다. 그의 돌조각 같은 목소리가 신음을 흘리는 무라사의 얼굴 위 로 떨어졌다. "10분이다. 10분 안에 너는 죽는다. 하지만 그 전에 기회를 주겠 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라. 그럼 살려주마." 그 모습은 흡사 검은 날개를 펼친 사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희생 자의 목에 낫을 들이대는 것 같았다. 무라사는 뭐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오라며 힘없이 손짓을 하자 라이오라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 순간 무라사의 눈이 번쩍 뜨이며 주먹이 날아들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라이오라가 높이 떠올라 바닥 을 굴렀다. 무라사는 언제 쓰러졌냐는 듯 곧바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하하! 지금까지 이런 힘을 숨기고 계셨다 이거지? 이제야 이 몸의 상대로 어울리는군!" "이 망할 잡견이!" 라이오라도 그 즉시 일어나 무라사를 쏘아봤다. 상처 난 이마에 서는 피를 대산해 재가루가 흩어졌으나 곧 원래대로 치유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무라사의 허세 는 너무 속이 보였다. 무라사는 당장이라도 다시 쓰러질 것처럼 절룩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건방진 눈빛마저 애처로워 보였다. "또 공연한 무리를 하는군. 이런 곳에서 죽는데 의미가 있나. 넌 좀더 살아도 될 놈이다." "신이라도 된 것처럼 지껄이지 마! 결국 너도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고민하고 외로워하는 인간일 뿐이야." "인간? 인간은 피를 흘리지. 난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무라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이 먼저 라이오라에게 뛰어들며 소리쳤다. "궁상떨지 마라! 어쩌다 신기한 능력 하나 얻었다고 네가 인간 이라는 사실까지 달라지겠냐! 네놈의 그 삐뚤어진 성격을 이 몸이 뜯어 고쳐 주마!" 검을 놓고 온 라이오라는 방어로만 일관했다. 그럼에도 혼신의 힘을 다한 무라사의 공격은 몇번이나 라이오라에게 적중했지만 그 시도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라이오라의 상처는 단지 몇 줌의 재를 뿌렸을 뿐 곧바로 치유되었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무라사는 메마른 모랫더미 속으로 연신 주먹을 찌르는 심정이 었다. 하지만 그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 문 채 불사신 라이오라와 싸우는 무라사의 모습에는 승부를 향한 욕구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하지만 라이오라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지쳐가는 무라사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자비가 싫다면 죽음을 주마." 라이오라의 손에 다시 빛이 뭉쳤다. 12 인간이라면 누구나 숨을 쉰다. 악인이든 선인이든 공기가 없으 면 곧 죽는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지하 기지 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 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모든 지하 기지에는 필연적으로 지상과 이어져 있는 환풍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흐음, 여기로군.' 키스는 건물 잔해로 위장되어 있는 환풍구를 찾아냈다. 얼마나 철저하게 감춰져 있는지 언뜻 보기에는 영락없는 페허였다. 미세 한 냄새와 소리까지 간파하는 그의 예민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육 안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오타의 섬세한 손재주가 엉뚱한 곳에서 꽃을 피웠구먼.' 키스는 두꺼운 철조망을 손쉽게 뜯어낸 뒤에 비좁은 환풍구 속 으로 들어갔다. 허리가 얇아서 다행이었다. 전번에 이자벨을 얕잡 아보고 정문으로 들어갔다가 호되게 당한 다음부터는 체면이 구 겨지더라도 몰래 들어가기로 결심한 키스였다. "이거 대단하군." 경사가 심한 미끄럼틀 같은 환풍구를 내려오던 키스는 이 지하 기지가 예상보다 훨씬 깊고 방대하며 탄탄한 구조로 건축되었다 는 사실에 사심 없는 경탄을 뱉었다. 정말이지 이자벨은 대단한 재녀였다. 아무리 베르스가 소국이 라고 해도 남의 나라 한복판에 아무도 모르게(심지어 아이히만조차 도 모르게) 이런 시설을 만든 그녀의 대담성과 결벽에 가까운 치밀 함에는 질려버릴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이자벨이 이런 놀라운 재능을 좀더 납득하기 쉬운 이상을 실현하는 데 바쳤다면 키스도 그녀를 존경했을지 모른다. '아니, 애당초 그랬다면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만.' 키스는 환풍구의 자욱한 먼지를 쓸고 내려가며 이자벨을 만나 면 꼭 청소비를 청구하리라 투덜거렸다. 지하로 떨어지는 과정은 쉬웠다. 하지만 모든 추락이 그러하듯 문제는 착륙이었다. "얼레?" 도착 즈음에서 환풍구가 직각으로 꺾여버렸다. 중력에 멍하니 몸을 맡기던 키스는 순간 환풍구 덮개를 부숴버리며 기지 안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하필 그 착지 지점은 서슬 퍼 런 장검들이 세워져 있는 무기 보관소였다. 추락하던 키스는 그것을 보자 눈동자가 커졌다. 함정도 아니고 그냥 가만히 있는 칼날에 몸을 던져 꼬치구이가 되는 것만큼 한심 한 죽음이 또 어디 있겠나. "으이이익!" 극도의 유연성을 발휘해 가까스로 칼날을 피한 키스는 그대로 바닥을 내뒹굴었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에 시작부터 사정없이 바 닥을 나뒹군 키스는 엄청나게 민망했다. 나름대로 목숨을 버릴 각 오로 나타났는데 도무지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젠장. 보통 이런 경우에는 소리 없이 착지한 뒤 마침 지나가던 보초의 목을 꺾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게 패턴 아냐? 왜 나는 하고 많은 곳 중에 칼날 위로...." 그렇게 궁시렁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키스의 몸이 그대로 굳었 다. 눈앞에는 막 스프를 떠먹으려던 찰나의 병사가 스푼을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꼼짝 마! 라든가 누구냐! 라는 말조차 없었다. 누구라도 굉장한 미남이 갑자기 천장에서 뚝 떨어져 바닥을 나뒹구는 모습을 목격 한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둘은 한동안 멍하니 서로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미온의 불운이 나한테 옮겨온 것 같군.' 키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째서 계속 사태 가 악화만 된단 말인가. 키스는 순간적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계산했다. 단번에 뛰어 상 대의 목을 비틀 수 있는 거리였다. 아니면 옆에 쌓여 있는 칼을 집 어 정확하게 상대의 모가지로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키스는 좀더 고상한 방법을 선택했다. "여기서 뭐하고 있나."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들이 봤다면 기겁을 했을 냉담한 목소 리. 게다가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눈동자마저 싸늘 하게 얼어붙었다. 어리둥절하던 그 병사는 화들짝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시, 식사 중이었습니다!" 키스는 속으로 혓바닥을 내밀었다. 설마 그토록 싫어하는 키릭 스 흉내로 위기를 모면할 날이 올 줄이야. "저, 그런데 키릭스 씨. 그 상처는..." 병사가 의아해 하는 이유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광기 가득한 눈매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던 키릭스가 갑자기 금발에, 콧등 에 상처까지 나서는 환풍구에서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키스는 당 당하게 대꾸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이렇게 되었다." "그,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키스 스스로도 엄청나게 한심한 변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만- 상대는 도저히 정체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상식적인 인간이 라면 키릭스와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키릭스를 죽이기 위 해 나타났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안 하니까. "그런데 왜 환풍구에 들어가셨습니까?" "조사 중이었다. 환풍구로 암살자가 들어올 수도 있잖아." "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있어. 지금 진행형으로 그러고 있어.' 키스는 뚱한 얼굴로 그를 보며 다가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 자 병사는 흠칫 놀라며 키스를 바라봤다. "전쟁 중이라 잠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하지?" "예?" "수면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행복이야. 그러니까 푹 쉬어." "예?" "아참, 대신 옷 좀 빌릴게." 키스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후려치자 그의 몸이 키스의 가슴팍 으로 스르르 무너졌다. "깨어나면 엄청나게 화날 테지만, 그때 난 이 세상에 없을 테니 까 복수는 포기해 주세용." 키스는 그를 바닥에 눕힌 뒤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이도 서로 체 격이 전혀 달라 억지로 입다가 바지가 찢어진다든가 옷 벗는 중에 또 새로운 병사가 들이닥친다든가, 하는 민망한 경우는 더 이상 없었다. 인코그니토 병사로 완벽하게 변신한 키스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 고는 밖으로 나갔다. 물론 기절한 병사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옷장 속에 넣어 두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정말 리젤 씨 혼자 잡을 수 있을까?" 잡담을 늘어놓으며 다가오는 두 명의 병사들을 키스는 태연하 게 지나쳤다. 괜스레 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이는 아마추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임무에서나 일상에서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뻔뻔함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키스는 잘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키스는 안도했다. 만나 는 상대마다 성실하게 목을 치며 뚫고 나가기엔 이곳은 너무 넓었 고 그는 너무 게을렀던 것이다. "물론 잡겠지. 리젤 씨가 좀 성격이 이상하긴 해도 보통사람이 아니잖아?" "하긴. 그런 사람이 사냥감으로 찍었으니 그 금발 녀석도 편하 게 죽긴 글렀군." 키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쳤지만 속마음은 복잡했다. '역시 미온도 여기 왔군. 뭐, 잡혀 왔겠지만.' 이자벨이 미온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알았다. 미 온을 이용해 이자벨을 함정에 빠트릴 궁리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미온의 단순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키스는 악운에 강한 그 가 여기 잡혀와 탈출해서 또 무슨 난리를 피우고 있을지 훤히 보 였다. 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평생 안 보려고 했는데, 정말 이지 지독한 악연이었다. '사람 한 번 죽여본 적 없는 녀석이....' 이런 일에는 반드시 피가 따른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열 명을 죽인다는 위선도 얼마든지 통용된다. 과연 그 착한 녀석이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리젤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이코패스를 상대로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키스는 새하얀 무명천이 핏물에 더럽혀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황 당할 정도로 연약한 놈이다. 문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고 해봐야 어디 있는지 알아야 지켜주든가 말든가 하지." 키스는 삐죽거렸다. 그때 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스. 머리를 울리는 베아트리체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단순한 환청이 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접근할수록 점점 강해지는 울림은 단 순한 자기 망상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또렷했다. 키스는 그녀 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다는 이물감에 이마를 꾹 눌렀다. "가고 있어. 지금 가고 있다고." 그녀의 목소리에 중력처럼 이끌리며 키스는 계속 발걸음을 옮 겼다. 13 라이오라의 두 번째 공격이 무라사의 가슴에 작렬했다. 게다가 팔이 잡힌 무방비에 가까운 몸에 맞은 것이라 그 강렬한 충격은 그대로 몸속에 파고들었다. "아아아악!" 비명을 뱉은 무라사의 입에서 곧 피가 흘렀다. 탄탄한 육체도 내 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쓰러지는 무라사의 팔을 라이오라 는 놔주지 않았다. "말해라. 항복한다고." "우, 웃기지 마!" "....미련한." 더욱 격렬한 에너지가 무라사를 때렸다. 거짓말처럼 요새까지 날아간 그의 몸이 성벽과 충돌한 뒤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돌 과 철근으로 만든 두터운 외벽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요새 안은 침묵했다. 아무도 구하러 나올 수 없었다. 실로 악마 적인 진청룡의 힘에 짓눌려 버린 듯했다. 라이오라의 몸도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무라사에게 걸어가는 라이오라의 등 뒤로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재가루가 안개처럼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육체가 소실되어 죽게 되는지, 잿더미로 이루어 진 그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것은 라 이로라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바보스럽게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무라사를 바라보는 라이오 라의 황금빛 눈동자는 그저 권태였다. 자기가 살아온 길고 긴 인 생과 지금 눈을 깜빡이고 있는 명확한 생존의 증거조차 무가치하 게 느끼는 그런 지독한 권태로움. '어째서 그토록 고집을 피우는 거냐.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 다.' 라이오라는 벽을 붙잡고 어렵게 몸을 일으키며 그 늑대를 닮은 눈동자로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무라사에게 일종의 경탄 같은 것을 느꼈다. 살아있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하지만 곧 무심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라이오라의 손에 또 다시 빛이 뭉쳤다. 아까보다도 몇 배는 더 거대한 힘이었다. 14 "진청룡이 견백호를 죽였다는 보고입니다." 이자벨의 귀에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창백한 피부에 얇게 찢 어진 눈매가 잔인해 보이는 인코그니토의 간부였다. 그 보고에도 이자벨의 빨간 입술은 웃지 않았다. 다만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정확하게 보고해." "그, 그게 견백호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상대는 짐짓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이 소식을 누구보다 반길 줄 알았던 여왕의 심기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자벨을 힐끗 눈길을 돌려 구석에 앉아 있는 붉은 눈의 사내를 바라봤다. 그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밝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고생하시는군 그래." "....." "이 음침한 지하에서 말이지." 키릭스의 나직한 웃음소리는 악령의 조롱처럼 오싹했다. 하지 만 이자벨의 마음은 그것에 겁을 먹기에는 너무도 차가웠다. "뭘 그렇게 웃고 있지? 숨기는 거라도 있나." "아니, 그냥 즐거워서." "키스가 올 것 같아서?" "글쎄.... 이미 왔을지도." 주변을 훑어보는 키릭스의 입 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똑똑히 들어. 이곳은 너와 키스의 해묵은 감정을 푸는 싸움터 가 아니야." "왜 그렇게 매정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장본이면서." "그래서 날 원망하나?" "감히 내가 널 원망할까. 넌 전 인류를 평화로운 바보로 개조할 여신님이잖아." 그때 보고를 올렸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지극히 눈치 없는 아부 였지만 키릭스는 떠들도록 내버려뒀다. "그렇습니다! 여왕님이야말로 이 세계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실 분! 여왕님과 여왕님을 따르는 우리 충실한 종들이 이 세계의 인 류를 지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자벨은 털 달린 벌레라도 본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말 했다. "새로운 세상에 지배자는 없다. 나도 너희들도 아니야." "예? 하지만...." "우리도 멘토에 의해 정신이 개조될 것이다. 예외는 없어." "....!" 사내의 표정은 거의 경악이었다. 왜 애써 잡은 세계 지배의 기회 를 스스로 포기한단 말인가. 제 정신인가? 여왕에게 빌붙어서 초 식동물처럼 온순하게 개조된 인류를 마음대로 굴리려던 그는 달 콤한 권력의 꿈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자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남의 탐욕을 비난하는 자들에게도 자신의 탐욕은 소중하다. 이 자벨처럼 인간 본성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낀 사람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바로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세상을 바꾸려는 거다. 눈앞에서 사 라져!" 이자벨의 면박에 그는 안 그래도 창백한 피부가 거의 새파랗게 되어 밖으로 나갔다. 키릭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 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인간에게는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세 가지 본성이 존재하 지. 그건 바로 경쟁, 불신 그리고 명예야. 네가 그토록 없애려는 그것들이 왜 절대 사라지지 않는 줄 알아?" "....." "필요하기 때문이야." 지금만큼은 키릭스의 표정 어느 구석에도 비웃음이 없었다. 15 라이오라를 무생물로 비교하자면 공략이 불가능한 거대요새에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대포에도 흠집이 나지 않는 두터운 외벽은 타고 올라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까마득히 솟아 있으며, 설치된 수백문의 주포는 접근하는 모든 것을 일격에 산산 조각 낸다. 내부에는 영원히 식량이 떨어지지 않는 논밭과 우물이 있고 콘 크리트로 만든 건물 안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이 나온다. 이 요새 가 적에게 베푸는 유일한 자비는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는 것뿐 이다. 그러니 어떤 지휘관이라도 그냥 모른 척 놔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런 요새를 일대일로 함락시키겠다며 나선 도전자는 480년에 걸쳐 무라사 랑시가 유일했다. '무모하다.' 라이오라는 자신의 손아귀에 가득 들어차고 있는 강렬한 힘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마지막 일격만 가하면 지독하게도 귀찮게 굴던 무라사ㅡ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 버린다. 그런데도 기쁘거나 혹은 슬 픈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단지 자신을 쓰러트리려는 무라사에게 희미한 죄책감 정도만 느꼈을 뿐이다. "....!" 라이오라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상처 입은 늑대처럼 피투성이 가 된 채 헐떡거리던 무라사의 몸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인 것이 다. 필시 자신의 마지막 힘을 짜낸 것이었다. 날아오른 무라사의 긴 다리가 라이오라의 팔을 찍었다. 그와 함 께 라이오라가 만들어 내던 에너지 구체가 그의 몸속으로 역류해 폭발했다. "크윽...." 라이오라의 몸이 격렬한 전격에 휘감기며 옷과 망토가 타올랐 다. 내폭(內爆)의 여파로 상처 입은 라이오라의 얼굴에선 반짝거 리는 미립자들이 피를 대신해 흩날렸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라사를 쏘아봤다. 무라사는 드디 어 라이오라를 뚫었다며 어린애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와하하하! 네 힘에 네가 당하니까 기분이 어떠냐, 라이오라! 이 무라사 랑시가 똑같은 패턴에 몇 번씩이나 당할 거라 생각했냐!" ".... 뭐가 그리 신났나, 축생." 라이오라는 조금 자존심이 상한 듯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강력 한 총알도 발사되어야 그 위력을 발휘한다. 라이오라가 '마법'을 시전하려는 그 찰나에 그를 흐트러트린다면 그 불안한 힘은 방출 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해 도리어 라이오라를 덮치게 된다. 그게 무라사의 필승전법이었다. 라이오라가 말했다. "그래, 네 무모함을 친찬하마. 상으로 하나 가르쳐 주지." 라이오라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상처는 이번에도 말끔 하게 사라졌다. 역시 라이오라에게는 어떤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결 심하며 무라사를 바라봤다. 그의 손에 다시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이 힘의 근원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몰라 그딴 거!" "생명력이다. 이것이 480년 동안 내가 죽여 흡수한 자들의 고통 과 욕망이다." "으, 음침한 소리만 골라서 해요!" 무라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몸이 굳었다. 라이오라의 손 위에서 뭉쳐가는 그 새하얀 원혼의 덩어리느 하늘이라도 가릴 듯 거대했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격렬하게 빛났다. 가까이만 가도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런 압도적인 절망의 에너지. 라이오라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빛의 덩어리 속에서는 고 통에 일그러진 사람들의 얼굴과 팔과 다리와 절단된 몸뚱이 같은 것들의 실루엣이 끝없이 우글거리며 나타났다간 사라졌다. "뭐, 뭐야 저건!" 무라사는 소름이 끼쳤다. 그 모든 것이 라이오라가 죽여 축적한 사람들의 생명력이라면 그것은 필시 '원혼'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자들의 원한을 몸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 이오라의 업이었다. "무라사 랑시, 말해라. 이것을 받아낼 자신이 있느냐. 내 480년 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무라사는 처음으로 라이오라의 황금빛 눈동자에 맺힌 감정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원망과 고통이었다. 무라사는 라이오라의 몸속에서 빠져 나온 그 거대한 고통의 정 수를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다 는 얼굴로 저런 것을 품고 있었던 거냐. 그가 팔을 뻗으며 외쳤다. "와라. 내가 부숴 주마!" 무라사는 카론이 있는 요새를 등지고 있었다. 라이오라의 일격 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무라사는 물론 요새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 지고 마는 상황. 하늘을 뒤덮은 에너지가 뿜어낸 열기에 구름이 증발되고 성벽이 녹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빛 속에 잠긴 무라사 의 등 뒤로 끝없이 그림자가 뻗었다. 무라사는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개방했다. 육체 안에 가둘 수 없을 만큼 달아오른 그의 힘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두 눈은 붉게 물들 어 갔고 으르렁거리는 숨소리가 점차 격해졌다. 그의 주먹이 새파 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발끝이 대지를 울리며 튀어 올랐다. "라이오라!" 그와 함께 극한까지 증폭된 라이오라의 생령(生靈)이 당장이라 도 폭발할 듯 요동쳤다. 둘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친 것은 찰난의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확인했다. 격분에 타오르던 무라사의 눈에 당혹이 서렸지만 라이오라의 표정은 담담했다. 마 치 아침 산책을 나온 것 같은 그런 얼굴. 무라사는 자신의 주먹이 라이오라의 몸을 꿰뚫은 것을 알았다. 커다랗게 뚫린 상처는 더 이상 치유되지 않은 체 메마른 눈물처럼 회색빛 재만 흘렸다. 폭풍이 멈춘 공기는 속삭임마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축하한다. 처음으로 날 이겼구나." 그 순간 라이오라가 뽑아냈던 그 모든 힘이 삽시간에 다시 몸속 으로 역류해 들어갔다. 그것은 곧 눈이 멀어버릴 듯한 폭발을 일 으켰다. 그 힘에 튕겨나간 무라사가 고개를 들어 라이오라를 바라 봤다. 조금씩 부서져가는 라이오라의 몸속에서 빛줄기가 새어나 오고 있었다. 무라사는 표정 잃은 얼굴로 휘청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너, 넌 불사신이라며!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며!" "그래. 나의 영혼은 이미 죽어 있어 나는 늙을 수도 죽을 수도 없다. 하지만 너와 나의 힘을 합친다면 적어도 이 저주 받은 육체 를 소멸시키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처음부터....이러려고 작정한 거냐." "아니. 만약 네가 도망쳤다면 난 또 다시 끝없는 시간을 살아야 했을 테지." "그래서 생각한 게 고작 자살이냐! 이 바보 자식아!" "살아 있음에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때론 죽음에서 그 가 치를 찾기도 하지." 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진한 금발이 조금씩 먼지가 되어 흩어져 갔다. 예의 강렬한 열기 때문이었을까.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렵게 라이오라의 새 제복을 구해와 다림질을 하던 집사는 문 득 창밖을 보았다. 소리 없이 창문에 달라붙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그는 어쩐지 자신의 주인이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홀로 아주 긴 여행을 떠난 것 같았다. 집사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라이오라가 떠나 기 전 자신의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둔 편지였다. 나는 자살한 황제를 보았다. 가족의 품속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는 가난한 병사의 얼굴도 보았 다. 황금을 쌓아두고도 볼안에 시달리는 귀족을 보았으며 모래 위에 시를 쓰며 행복해하는 노예도 보았다. 그러니 인생의 행복을 증명하는 것은 분명 직위나 재산이 아닐 것 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번의 인생이다. 너도 네 인생의 가치가 무엇일지 고민해라. 아마도 답은 없겠으나 분명 의미 있는 고민이 될 것이다. 나도 같이 고민해 주고 싶지만 아마도 그것은 무리일 것 같구나. 라이오라는 무라사를 응시했다. 이제 그의 모습은 거의 부서져 흘러나오는 빛의 입자들에 휘감겨 있었다. 세상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는 진청룡의 몸은 이제 실바람에도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네가 싫어하는 전쟁도 잠시나마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리 고 너는 동생을 만나 짧지만 멋진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울고 있는 거냐."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럼 죽어가는 친구 앞에서 웃으라는 거 냐!" 울먹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라이오라는 방긋 웃었다. 무너져 가는 그의 표정은 거의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분명 태어나 처음으 로 보인 편안한 웃음이었다. "웃어라. 인생은 짧다. 그러니까 웃으라." 그리고 그는 슬어가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처음으 로 자신은 축복받은 것이라 느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삶을 살 았기 때문에 죽음에도 가치가 없다는 도살자의 말에 처음으로 반 박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소리 없는 바람이 불었다. 라이오라는 황무지의 바람 속으로 흩 어져갔다. 480년의 시간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제32화 사탄의 태양 아래 1 "지, 진천룡.....소멸!" 요새로부터 급전을 받은 부관은 자신이 잘 못 들었나 싶어 몇 차 례나 재확인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패배도, 하다못해 사망도 아니고 소멸이라 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견백호와의 대결 중 그 육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 확실함을 알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소멸'이라는 단어만 반복해서 되뇌었다. 이대로 폐전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장작 이자벨의 표정은 변화 가 없었다. 오똑한 콧날 끝에 서리가 내릴 것 같은 그 얼굴 그대로 였다. 이 전쟁에서 지면 그녀는 분명 전범(戰範)으로 체포되어 사형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역시 표정은 지금과 같으리라. 그런 여자 였다. "키릭스,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이자벨의 차가운 시선이 키릭스를 향했다. 서서히 소파에서 몸 을 일으키며 그가 입을 열었다. "라이오라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한테 그러더군. 내가 허 락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뜻대로 쓰고 싶다고." 라이오라에게 있어서 황실의 혈통을 이어 받은 키릭스는 거역 할 수 없는 주인이었다. 하지만 키릭스는 누구보다 그 피를 저주 하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답했지. 이제 널 풀어주겠다고. 그리고 나도 곧 따라 가겠다고." 키릭스는 두 자루의 검을 들었다. 슬슬 키스가 나타날 때가 되었 다고 느꼈다. 손님이 왔으면 나가서 맞이하는 게 예의 아닌가. "잘 있어라. 이자벨. 네 뜻대로 완벽한 세상 만들길 바란다. 하 지만 솔직히 말하지. 너나 나나 이 세상의 공기와는 어울리지 않 는 족속이야." 키스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키릭스의 등 뒤로 이자벨이 일어섰다. "키릭스, 그럼 나도 마지막으로 하나 말해주지." "날 사랑했다는 그백이라면 사양할게. 눈물나니까." "그것보다 훨씬 낭만적인 얘기니까 잘 들어." 그리고 그녀는 키릭스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아 주 짧은 속삭임이었지만 마치 맹독의 비수처럼 키릭스의 심장을 찔렀다. 키릭스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어차피 승리는 그녀의 것. 곧이어 웃음이 터졌다. 너무도 허망해서 웃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증오조차 품을 자격이 없어졌다. 키릭스는 자조에 가득 찬 얼굴로 차가운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넌 진짜 나쁜 여자야." 2 "힘이.... 사라졌다?" 키르케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 가 끝까지 무라사를 믿고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단지 무라사에 대 한 신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것 하나에 전군의 목숨을 걸 수 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라이오라는 세 아신이 모두 상대해도 쓰러트릴 확률이 희박한 불사신이었다. 그런데도 무라사는 그와 혼자 싸우 기로 결심했고, 분명 라이오라도 무라사가 혼자 올 것이라 예상했 으리라. 무라사는 단순하지만 라이오라는 속을 알 수 없는 자다. 키르케 는 그런 그가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느 예상을 했고 그것에 희망을 걸고 지켜본 것이었다. 설마 그 '무엇'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는 것으로 전쟁을 막는 거창한 결론일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키르케의 도박은 성공했 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예상치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아신위 의 소실(消失)이다. '아신위의 균형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군.' 아신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신 스스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하 지만 4대아신이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말 정도는 유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진청 룡이라는 기둥이 무너지면서 다른 세 개의 기둥도 같이 무너져 버 렸다. 즉, 모든 아신의 힘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라이오라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480년의 세월이 그에게만은 알려줬으리라. 자신이 무라 사를 죽이면 알테어와 키르케는 힘만 잃겠지만 자신은 아신의 힘 으로 유지되던 육체가 허물어져 소멸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 리라. 하지만 무라사를 죽이기 싫어 자신만 소멸되는 방법을 궁리했 으리라. 실로 라이오라다운 해결법이었다. 키르케는 라이오라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때 그녀의 막사로 알 테어가 뛰어왔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은 언제라도 잘 알 수 있다. 주변의 모든 잡다한 것에 다 걸려 넘어지고 걷어차며 달려오니까. 엄청나게 어수선한 소리를 들으며 키르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키르케! 키르케!" "야! 이 여자야! 왜 멋대로 작전 지역 이탈해! 지금은 전쟁 중이 야!" "하지만 내 힘이...." "알아. 입 다물고 있어." "왜?" "바보냐? 지금 아신들의 힘이 사라진 걸 이자벨은 몰라. 이쪽에 서 알아서 약해졌다고 소문낼 필요 없....." 그렇게 말하던 키르케는 무라사를 떠올리며 아찔한 기분이 들 었다. 그 떠들썩한 녀석이 사방에 광고하고 다닐 거라는 데 전 재 산을 걸어도 될 것 같았다. "됐다. 다 부질없는 것이지." 키르케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신도 뭣 도 아니니까 국왕에게 군인 그만두고 모아둔 연금으로 미남, 미소 년들 산처럼 쌓아 놓고 방탕하게 살겠다고 통보해도 괜찮지 않을 까, 싶었다. 뭔가 진저리가 나버려서 투덜거리던 키르케는 환하게 웃는 알 테어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힘을 잃은 게 그리 좋냐?" "흥. 이제 나도 보통 여자니까 당당하게 미온을 만날 수 있잖아." 헤죽헤죽 웃고 있는 알테어를 보며 키르케의 이마에 힘줄이 돋 았다. 어쩜 사람이 저리도 밉살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누군 힘 들어 죽겠는데! "백치는 치료도 안 된다더니..... 어떻게 하면 이 와중에 그런 망상이 떠올라? 어차피 미온은 지금쯤 이자벨의 거미줄에 대롱대 롱 메달려 정신개조 당하고 있을 거야. 너 따위는 까맣게 잊게 돌 거라니까." "아니야! 절대 아니야!" "호스트의 마음은 갈대라는 속담도 모르냐." "전혀 몰라! 그딴 거!" "현실을 직시해. 힘도 권력도 개똥도 없는 연상의 여자를 뭘 보 고 좋아하겠냐?" "아냐!아냐! 미온은 그렇지 않아!" "시끄러워! 이 여자야. 그만 칭얼대!" 알테어는 귀를 막고 쪼그려 앉은 채 훌쩍거리며 자신만의 판타 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만약 미온이 이 모습을 봤다면 '님들아, 나 지금 안 그래도 힘든 데...' 라면서 엄청나게 괴로워했을 것이 분명했다. 막사 밖의 병사들은 엄청난 고함소리에 또 다시 양대 아신이 격 돌할까 두려워 멀리 멀리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3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제 시작입니다!" 라이오라의 소멸 소식을 접한 인코그니토의 간부들은 난리도 아니었다. 이렇게 된 거 깜끔하게 백기 들고 항복하자는 주장은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죗값은 항복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 다. 오직 고문과 처형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들 은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발버둥 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런 대책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자벨은 하나의 계획 만 만들 정도로 어설픈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서 베르스 왕실까지는 기마대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습 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텅 비어 있는 적 지휘부를 단숨에 점 령할 수 있습니다." 이자벨이 자신의 지휘부를 셀른으로 선택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 다. 즉, 내부의 독이었다. 현재 지하 기지에는 중무장한 오백 기의 기마대가 대기 중이고 그들은 오합지졸들밖에 없는 베르스 왕실 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다. 그와 함께 전방의 부대가 진격하 면 적이 혼란에 빠질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독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소리 높여 외 쳤다. "작전 자바워크를 발동시켜 주십시오!" "언제부터 너희들이 내게 명령을 내리게 된 거지." 이자벨은 그 새파란 눈동자로 그들을 쏘아봤지만 아무도 물러 서지 않았다. "승리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설마 결심이 흐려진 건가요?" "자바워크는 최종 작전이다. 성급한 판단은 삼가라." "지금이 바로 그 최종입니다!" 그들은 그 끔찍한 작전을 실행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자바워크 작전은 비밀 결사 인코그니토의 특급 기밀이었다. 바로 적국에 퍼 져 있는 공작원들에게 연락을 취해 대규모의 생화학전을 감행하 는 것. 모든 상수도에 연구소에서 생산된 가장 치명적인 독을 뿌 릴 것이며, 도시 곳곳에서는 준비된 장치를 통해 연기를 타고 끔 찍한 역병을 창궐시킬 것이다. 흑사병에 오염된 시궁쥐들을 하수 도에 풀고 투석기로 적군에게 던진 폭탄이 터지며 독가스가 퍼질 것이다. 본래 이 독극물을 만들고 전염병을 배양한 연구소는 마키시온 의 대 아카데미 소드람이었지만 스파이로 잠입했던 리젤이 빼돌 려 이자벨의 손에 들어왔다. 작전 자바워크가 실행되면 군인은 물론 민간인마저 무차별로 죽 게 되고 1년 안에 식량원도 오염되어 베르스와 콘스탄트 그리고 세 계 대부분의 지역은 질병과 기아의 아수라장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 다. 각지에서 도적떼가 설치고 폭동이 일어나며 왕권은 붕궤된다. 그동안 인코그니토는 비축해 둔 물과 식량을 먹으며 그냥 지하 에 숨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할 때까지 말 이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명령 한 마디면 실행되는 것이다. 그녀는 문득 엔디미온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을 만나 지금까지 했던 그 모든 말들이 단 한순간 빠르게 머릿속에 지나갔다. "그 작전은 봉인한다."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녀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 장 확실한 방법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자 간부들의 눈빛이 바뀌어 갔다. 그녀는 나쁜 공기를 맡았다. 반란의 냄새였다. "당신은 이 전쟁에서 져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냐!" 그들 중 하나가 총을 꺼내 이자벨의 머리를 겨눴다. 그녀는 힐끗 주변을 봤다. 역시 리젤도 키릭스도 없다.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네 숨 막히는 고상함에는 질려 버렸어! 완벽한 세상? 그런 게 있 을 것 같아! 누가 그런 걸 필요로 하기라도 하냐고! 우리는 살아야 겠어. 그리고 승리자가 되어서 세계를 지배해야 겠어! 그런 보상을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조직에 충성한 거라고! 알아듣겠어!" 이성을 잃은 얼굴로 그렇게 고함친 사내가 이자벨의 뺨을 때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 다. 단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 어러운 탐욕, 남의 인생 따위 알 바 아니라는 폭력성, 권력욕, 의심, 배신, 이런 것들이 너무도 경멸스 러워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다 똑같은 존재라는 것만 재확인 했다. 그냥 거대한 망상에 빠진 집단이었다. 그녀는 마라넬로가 자신을 침대로 몰아넣고 옷을 찢던 기억을 떠올렸다. 팔마시온을 수석으로 졸업한 날, 황제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었다. 어떤 약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그녀의 두통이 시작된 것은 그때 부터였다. 권력자의 피를 증오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황제는 기이한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너도 나처럼 미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질병, 그녀는 그 광기어린 말로부터 도망쳐 여기 까지 왔는데 결국 황제의 독에 찔린 몸은 치유되지 않았다. 황제 는 그의 뜻대로 죽은 뒤에도 세상을 유린했다.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냥 엔디미온이 보고 싶었다. "지금 이러는 게 그 금발 애송이 때문이야? 빌어먹을, 설마 그놈 을 사랑하는 거야? 그깟 것 때문에 이 모든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 었냐! 집어치워! 너처럼 독사 같은 여자를 누가 사랑할 것 같아?" 사내는 이자벨의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황제의 침실 에서 빠져나왔을 때, 어떤 결심도 주저하지 않고 또 어떤 결심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는데, 평생 보류해 두었던 그 모든 후회들이 단 한번에 몰려와 그녀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말해! 자바워크를 발동시키는 암호를!" "....." 최종 작전 자바워크는 오직 이자벨의 명령을 통해서만 발동시 킬 수 있다. 그것을 실행하는 암호는 오직 그녀만 알고 있으며, 그 것이 반란자들이 그녀를 죽이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들은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지만 이자벨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즘 쇼메 왕자가 움직이고 있겠지.' 이자벨의 뛰어난 머리회전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정세를 정확 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이 쇼메에게 보냈던 문서에는 자 바워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쇼메는 그것을 가지고 바쉐론 국왕과 거래할 것이다. 거래가 성립되면 국왕은 즉각 자바워크를 봉쇄시키리라.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어디 얼마나 버틸지 보자. 인코그니토의 고문이 어떤지는 네년이 가장 잘 알테지?" 그들의 얼굴에는 그녀가 그토록 없애려 했던 탐욕과 광기뿐, 그 녀는 이미 자신은 죽었고 그래서 지옥에 떨어져 죗값을 받는 것이 라 생각했다. 4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베르스 왕실 세아스말도 그 하늘 처럼 고요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전방의 매캐한 포연(砲煙)만 제외 하면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알테어와 키르케, 카론이 수호하는 관문이 무너 지지 않는 이상 이곳까지는 단 한 명의 적군도 들어올 수 없기 때 문이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저거 뭐야? 벌써 귀환?" "그럴 리가. 그런 보고 받은 적 없는데." 왕실 입구를 지키는 근위병들은 자신들에게 오고 있는 기마부 대를 보고도 단지 의아해 했다. 이곳까지는 절대로 적부대가 올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1초 후에 깨졌다. 타아아앙! 차가운 공기를 깨트리는 긴 총성이 울렸다. 동시에 막 임관한 젊 은 근위병은 옆에 있던 동료의 몸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관 통된 머리에서 시뻘겋게 퍼지는 뜨거운 액체는 분명 혈액이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기, 기습이다! 와실에 알려! 신호탄을 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마대의 선두가 칼을 뽑았다. 잘려나간 근위병들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5 "전하! 즉시 피하셔야 합니다!" "왜?" 근위장교의 다급한 보고에 국왕은 만두처럼 도톰한 얼굴을 기 울이며 되물었다. 국왕의 지나치게 순진한 눈동자에 당황한 근위대는 '한 번 알아 맞혀 보시지!'라는 빈정거림을 꾹 참아야 했다. 국왕이 옥좌에서 도망쳐야 할 경우라면 운석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적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수, 수백의 기마대에 의해 정문이 돌파되었습니다! 이곳까지 오는 것도 시간문제...." "뭐라고오오오오오!" 사태를 파악한 국왕이 벌떡 일어섰다. 영혼의 외침 같은 비명소 리가 왕실을 뒤흔들었다. "마, 말도 안돼! 왕실 정문은 단 한 차례도 뚫린 적이 없는데!" 당연했다. 한 번도 공격당한 적이 없으니까. "벌써 카론 군이 무너진 거냐?" "아닙니다. 전방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대체 누가 지금 쳐들어 왔다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군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곧이어 창밖에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국왕은 멍하니 창가로 다 가갔다. 건물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즉시 키르케 중장에게 지원을 요청....." "무리입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피신을!" "그, 그럼 우리 힘으로 저들을 막아낼 수가 있겠는가?" "....." 그러나 근위장교는 단지 입술을 깨물 뿐 불경스럽게도 대답하 지 앟았다. '왕실을 지키는 자들의 전투력은 저들에게는 민간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현재 왕실 주둔 병력은 근위대 100여 명과 헬스트 나이츠의 기 사 20명을 포함, 고작 150명 미만. 게다가 대부분이 실전 한 번 안 겪어 본 새파란 애송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은 완전무장한 인코그니토의 정 예 강습부대 300기. 일방적인 학살이 눈에 훤히 보였다. 그때 조 찬에 참석하기 위해 왔던 위고르가 벌떡 일어섰다. "전하! 지금 왕실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누란지세! 명재 경각! 그리하여 이곳이 곧 함락될 것임은 그야말로 명약관화! 불 문가지! 분언가상! 그래서 당장 피신하는 것이 당연지사! 불언이 유! 창천백일! 이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위고르의 일장연설을 묵묵히 듣던 국 왕은 품위 넘치는 어조로 대꾸했다. "거 씨발, 왕실 함락돼서 도망치는 게 그리 기쁘오?" "초, 촌철살인이시옵니다." 국왕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국왕이 옥좌를 버리고 도망친다는 것은 굴욕 중의 굴욕이지만 방법이 없었던 것 이다. "....짐 싸십시다." "도망치면 안 됩니다." 갑작스레 터진 앳된 미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여졌다. 그는 바로 페르난데스 왕자였다.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설마 다 죽자는 소리란 말인가? "아들아, 이게 창피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자존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 그럼?" "적들의 목적은 혼란과 동요입니다. 이곳이 점령되고 옥좌를 빼 앗긴다면 전방에 있는 아군의 사기가 추락할 것이며 또 어디서 적 이 공격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급속도로 팽창될 것입니 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 번의 승기가 중요한 이 전쟁에서 패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왕실이 그걸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치 욕입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놀라울 만큼 침착하고 정확한 상황판단에 위고르와 군무대신이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 들이 해야 할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아, 이건 지켜내기에는 너무나도 불리한....." "아이히만 대공께서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절망적 인 싸움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싸워야 한다면 절망이 라는 단어부터 망각해라. 가장 위대한 역사는 항상 정망 속에서 이뤄졌다. 아버님, 우리는 아직 싸워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경탕이었다. "내가 잠간 잊고 있었구나. 네가 훌륭한 통치를 할 수 있도록 무 슨 수를 써서라도 이 왕국을 지키겠다는 걸. 내 목숨을 바쳐서라 도 절대 빼앗기지 않으마." 그때 헬렌과 헬스트 나이츠의 기사들이 들어왔다. "전하!" "오오, 때마침 잘 왔소!" 국왕은 자신의 왕관을 벗어 페르난데스의 머리에 씌워줬다. 아직 작은 머리에는 너무도 커다란 왕관이었다. 왕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 아버님!" "전쟁이 끝난 뒤 넘겨주려 했지만, 아무래도 지금이 좋을 것 같 구나.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가 증인이다. 이제부터 네가 베르스 의 국왕이다." "하지마!" 국왕은 곧바로 헬렌에게 명령했다. "헬렌 경, 어서 새 국왕과 내 딸 제냐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 게." "아버지! 저도 같이 싸우겠습니다!" 선왕(先王)은 매달리는 아들을 단호라게 헬렌에게 밀어 넣었다. "아들아, 사람이 죽으면 슬프지만 왕이 죽으면 모든 게 끝난는 것이다. 왕의 미덕은 희생이지만 왕의 의무는 살아남는 것에 있 다. 어떤 굴욕도 이겨내고 살아남아 자신을 믿는 모든 백성들을 지키는 것에 있단다. 살아다오. 이것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 침이다." 새 국왕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의 아버지 길레르모 라스팔마스 는 아들의 왕관을 고쳐 씌워주며 그렇게 말했다. "내 검을 가져와라. 왕궁을 사수한다!" 그때 헬렌 경이 앞으로 나섰다. "정공법으로는 몰려드는 적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옵니다. 제게 묘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오, 그게 뭔가?" "양동(陽動)입니다." "양동이? 그걸로 뭘 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헬렌은 '개그일까 진심일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 었다. "가짜와 진짜, 이것을 이용한 심리전이옵니다." 헬렌은 비장한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할편 신속하게 왕궁 안으로 침투하여 포위망을 완선시키려던 인코그니토의 기마대는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계속 깅르 잃던 지휘관이 결국 짜증을 터트렸다. "젠장! 이놈의 나라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뭔 놈의 표지판이 맞는게 하나도 없어!" 관리들의 무사안일주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라를 돕는 순 간이었다. 6 "같이 싸우자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솔직히 당신들이 조용히 떠났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키스의 사무실에서 자신의 검을 들고 나오며 동료들에 게 말했다. '방해되니까 사라져라'라는 그의 냉정한 말투는 뻔히 속이 보였다. 뒤이어 레녹이 사무실로 들어가 검을 들고 나왔다. "그래요. 싸우러 가는 건 나와 루시온 경으로 충분합니다. 나머 지는 사라져 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가 주저 없이 사무실도 들어갔다. 그 는 난생 처음 잡아보는 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훌륭한 성직자는 기도가 필요할 때와 행동이 필요할 때를 구분 할 줄 아는 성직자라고 오르넬라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흥. 어차피 난 오래 살지도 못하고 오래 살 생각도 없으니까!" 곧이어 애늙은이 같은 심술을 늘어놓은 지스킬이 사무실로 들 어가 검을 들고 나왔다. "후후후. 내 숨은 검술을 공개할 때가 왔군." 이라고 소리치며 랑시가 사무실로 들어가 검을 들었다. 그러나 무거운 진검을 들고 얇은 허리를 휘청거리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이제 남은 기사들은 건장한 바보 듀엣, 쇼탄과 루이뿐. 그들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얼굴로 나란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하하. 루이 경, 어째 사람들이 우리를 흘겨보고 있는 거 같 은데?" "아하하하. 쇼탄 경, 착각이에요. 착각." "으이구, 이 화상들아. 냉큼 가서 칼 가져왓!" 랑시가 빼액 소리치자 루이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짜증을 냈다. "그래, 솔직히 이런 분위기에선 '이 몸을 빼먹으면 섭섭하지!' 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설치는 게 흔한 패턴이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억울하다 이 말씀이야! 나 참, 내가 왜 노비처럼 날 부 려먹는 왕실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해? 필요할 때만 기사야? 왕 실이 어떻게 되든 이 루이님이 콧방귀라도 뀔 것 같으냐고! 안그 러냐 쇼탄?" "물론이지! 왕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야? 빚만 잔뜩 지고.... 저어 그런데 루이, 지금 어디 가?" 루이는 혼자 사무실로 들어가 검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곧바 로 검을 뽑아 쇼탄을 겨눴다. "이 왕실의 독버섯! 왕실이 우리를 위해 뭘 해줄지 기대하기 전 에 우리가 왕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라! 왕을 위해 목 숨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기사된 도리거늘! 네가 그러고도 남자 냐!" "어이.... 방금 전의 너는 어디로 간 거냐." "생각해 보니까 이쪽에 붙는게 더 이익인 거 같아!" "그런 말 자랑스럽게 하지 마!" 그 남자의 처세술이었다. 사람들은 언행일치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루이를 황망하니 바라 봤다. 룸메이트의 강렬한 배신에 쇼탄은 피눈물을 흘리며 사무실 로 기어 들어갔다. "이렇게 싸우는데.... 빚 좀 탕감해 주겠지? 절반만이라도 좋으 니까...." 나라가 망하니 마니 하는 판국에도 빚 걱정밖에 모르는 가난한 채무자였다. 결구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도 모두 검을 든 것을 본 루시온은 도 리어 냉랭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 바보입니까. 지금 싸우러 나가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올 수 없을 겁니다. 만용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루시온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고작 일곱 명의 가사로 오백 명의 정예군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인생의 행운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커다란 기적이 필요하다. 싸워야 할 의무도 없고 애타게 자신들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 조차 없다. 아무도 스왈로우 나이츠에게는 기대하지 않는다. 뭔가 생각에 빠져 있던 랑시가 입을 열었다. "지금 키스 경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람들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럼 우리가 왜 싸워? 귀찮다고 발버둥치는 키스를 집어 들어 적진 한가운데 던져 놓으면 알아서 잘 해결할 텐데." "그래, 키스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하는 거라고." "맞아. 모조리 키스 잘못이지." 전혀 엉뚱한 결론을 내버린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들은 '내일 은 당신도 공범'을 흥얼거리며 리더구트 밖으로 나섰다. 그들을 지켜보던 루시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단 한 번도 스왈로우 나이츠를 자신이 평생 있을 곳이라 생 각한 적이 없었다. 단지 가문으로부터 도망친 곳이 여기가 됐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이렇게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기분이 들 었다. 그는 아무더 다치지 않기를 조그맣게 기도하며 동료들을 뒤 따랐다. 7 "이봐 잠깐 멈춰!" 보초는 말없이 지나가던 조직원의 어깨를 잡았다. 절대 의심 받 을만한 복장이 아니었지만 분명 의심 받을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 이다. 베아트리체가 있는 연구실로 가는 길목이었다. "너 누구냐. 얼굴 들어봐. 어디 소속이야?" 우뚝 멈춰선 그는 대답하지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보초의 손 끝이 천천히 칼을 향하기 시작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디 소속이냐고 물으신다면....." 그 순간 기습적인 팔꿈치가 보초의 얼굴을 후려쳤다. "스왈로우 나이츠의 기사 엔디미온 키리안이다!" 벗겨진 모자 속에서 금발이 쏟아졌다. 미온은 뒤도 안 돌아보고 부리나케 달렸다. '으이구! 어떻게 알아챈 거지?' 미온 역시 '변장' 이라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 세탁실에 몰래 들어가 제복을 훔쳐 입는 일은 정면으로 연구실로 뛰어드는 것보 다 훨씬 더 안전한 접근방식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코그니토는 꽤 엄격한 조직이라서 키 180 센티 이상의 건장한 남성이 아니라면 조직원이 될 수가 없다. 반 면 엔디미온의 키는 171센티에 큰육도 체중도 미달-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금방 눈치 챌 발육부족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체력마 저 턱없이 부족해서..... "침입자다! 거기서!" 힘없는 팔꿈치에 맞은 상대가 잠들긴커녕 고래고래 소리를 지 르며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젠장. 다른 소설 보면 뒤통수만 쳐도 기절하고 그러더만!' 미온은 유일한 무기인 가벼운 몸을 이용해 엄청난 빠르기로 도 망쳤지만 곧이어 침입자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편 다른 길을 통해 연구실로 향하던 키스는 사방에서 울려 퍼 지는 타종음을 듣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온 경입니까아? 아무것도 안 바라니까 방해는 하지 말아주세 요오." 도리어 키스에게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현재 엔디미온은 추 적자 한 무더기를 글고서 도망치는 중이니까. '대체 어디에 숨어야 하는 거야!' 엔디미온은 숨을 헐떡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히 숨 을 곳은 없었다. 다시 발각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복잡한 골목 길이라면 모를까 이런 곳에서는 일단 들통 나면 십중팔구 잡히고 마는 것이다. 대책도 없이 도망치던 그는 오른쪽 길로 꺾어 들어가는 순간 누 군가의 가슴에 얼굴을 부딪쳤다. "우왁!" 튕겨나가 바닥에 나자빠진 미온은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그에 게 들이댔다. 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를 보며 그는 칼끝을 떨어야 했다. "....키릭스 세자르." 자신을 짓누르듯 내려다보는 새빨간 눈동자. 실로 최악의 시간, 최악의 장소에 최악의 인물이었다. "호오, 생각보다 오래 살아 있네?" 키릭스는 귀여운 재롱이라도 감상하듯 미온을 바라봤다. 검조 차 뽑지 않았다. 원한다면 의식하지도 못한 순간 그의 목숨을 가 져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도리어 팔을 뻗어 미온을 일으켰다. 미 온은 그의 팔을 뿌리치며 외쳤다. "무슨 속셈이야!" "카론을 생각나게 만드는 눈빛이네? 겁먹지마. 나는 단지 그녀 를 버리고 제 손으로 기억가지 지웠던 나약한 네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대견해서 호의를 베풀려는 것뿐이야." "무, 무슨!" 키릭스는 근처에 있는 창고 문을 열고 미온의 팔을 잡아 그 안에 집어넣었다. 엄청난 힘에 이끌린 미온은 어둑한 창고 안으로 내팽 개쳐졌다. 키릭스는 문을 닫았다. 곧이어 다급한 발소리가 문밖에서 들려 왔다. "키릭스 씨! 탈주자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못 보셨습니까?" "전혀." "그럴리가요. 분명 이쪽으로밖에는 도망칠 길이...." "이쪽으로는 오지 않았어. 다른 데로 가봐." 미온은 문에 귀를 기울인 채 엿듣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키 릭스는 정말 자신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기대대로 흘러가 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 창고 안이 의심스럽습니다." "어이. 내가 못 봤다고 했잖아." "하지만 분명 여기밖에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일단 조사해 보 겠습니다." "지나친 성실감은 인생을 단축시키는 법이지." 그 무감정한 말이 끝나는 순간 미온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 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공기를 날카롭게 찢는 소리, 길게 뿜어져 나온 액체가 벽을 적시는 소리, 묵직한 덩어리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들려왔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정적에 휩싸이고 문이 열렸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뜨 거운 핏물이 흘러 들어왔다. 미온은 떨리는 눈동자로 문 앞의 광 경을 바라봤다. "고맙지?" 두 자루의 검을 든 키릭스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의 뒤에는 사람 들의 피와 살점, 뼈와 내장만이 벽과 바가에 들러붙어 식어가고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도려내 나뒹구는 심장들이 간헐적으로 피를 솓는 소리뿐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짙은 혈액이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미 온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키릭스의 멱살을 잡았다. "어째서 당신이라는 사람은!" "생명의 은인한테 무슨 짓이야?" "넌 악마야! 그냥 사람 가지고 노는 게 즐거울 뿐이잖아!" "후후, 악마에게 신세진 기분이 어때. 그리 나쁘지 않지?" 키릭스는 미온의 턱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었다. 또 다시 그의 팔을 뿌리친 미온은 그를 노려보며 뒷걸음질쳤다. 키릭스는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며 웃었다. "그 여자가 걱정되지? 어서 가봐. 여기서 쭉 직진하면 그녀가 있 는 곳이 나와." "왜 날 도와주는 거야?" "꼭 살아남아서 그녀를 만나야 해. 그래야 절망하니까." "뭐?" 키릭스는 표정 잃은 미온을 뒤로 하며 걸어갔다. 절망한다고? 미온은 고개를 돌려 긴 복도를 바라봤다. 어둠에 잠 긴 길 끝의 음영은 절대 젖혀선 안 되는 장막처럼 불길해 보였다. 8 습격이 벌어진 곳은 베르스 왕실만이 아니었다. 카론이 있는 지 휘부에도 소수의 특공대가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지휘부의 교란과 참모장 카론의 암살이었지만 설령 목적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몸 성하게 빠져나갈 가능성은 거 의 없으니 실로 대범한 기습이었다. "이건 대범하다기보다는....." 현재 10여 명의 척탄병(擲彈兵)들이 이곳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도 카론은 긴장은 커녕 도리어 이해할 수 없다 는 표정을 보였다. '이건 이자벨 크리스탄센답지 않은데.' 카론이 이자벨을 실제로 본 적은 몇 번 안 되지만 그녀가 자신보 다도 더 냉정하고 침착한 여자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 리 라이오라를 잃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 고 있다. 그런데 이런 조급한 기습으로 시간을 벌려고 든다? 앞서 보고 받은 베르스 왕실 기습도 마찬가지로 저급했다. 이것 은 전쟁을 길게 볼 줄 모르는 조잡한 지휘관이나 할 짓이지 그녀 가 명령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허술했다.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의 배짱을 가진 이자벨이라면 좀더 치밀하고 좀더 치명적으로 자신을 옥죄어 왔어야 마땅했다. 문득 카론의 머릿속에 어떤 예상이 떠올랐다. '이자벨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어떤 사건이 생겨 그녀가 지휘권을 잃은 것을 아닐까 상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카론의 그런 가설은 사실이었다. 현재 키르케도 마찬가지로 판단하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총공격의 적기였다. "일단 이곳에서 피하셔야 합니다." 부관이 다급하게 말하자 카론은 불쾌하다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내가 왜 피해야 하지?" "예? 그거야 지금 이곳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때 카론 뒤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전쟁이란 참 재밌지. 살인이 미덕이 되는 유일한 상황이니까. 아주 인간적이야." "루터, 최소 한 명은 살려라. 정보를 캐야한다." "노력해 보지." 낡은 신부복으로 거구의 몸을 감싼 루터는 하품을 하며 문밖으 로 나갔다.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진입하는 적들에게는 몹시 불행 한 소식이었다. 9 "국왕이 왕실에서 도주하고 있습니다!" 한편 베르스 왕궁을 공략하던 장교는 미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국왕을 태운 왕족 전용 마차가 왕실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보 고를 받았다. 국왕 생포도 임무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잡 아야만 했다. 하지만 인코그니토의 장교는 유능했다. "흥. 속 보이는 양동이로군." 헬렌의 양동작전을 간파한 그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명령했다. "그건 미끼다. 진짜 국왕이 타고 있는 마차는 지금 다른 길로 도 망치고 있을 터! 분명 미끼의 반대 방향이겠지. 두 개 소대로 추적 대를 편성해 양쪽 모두를 잡아라. 감히 누굴 속이려고." 명령은 즉시 이행되었다. 이오타 산 명마를 쓰는 기마대는 마차 정도는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르다. 전속력으로 왕실 을 빠져나오는 마차를 에워싼 기마대가 라이플을 들이댔다. "도망칠 곳은 없다! 투항해라!" 곧이어 마차 창문 밖으로 손이 나와 백기를 펄럭였다. "무기를 버리고 나와!" 그러자 순순한 문이 열리며 바싹 마른 사람이 나왔다. "사, 살려주 세요. 전 그냥 명령만 받고...." 그를 본 군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국왕이 아니라 군무대신 이었던 것이다. "역시 이 마차는 가짜였군." 그 무려 몰래 출발시켰던 다른 마차도 따라잡히고 있었다. 양동 작전을 완전히 간파한 기마대는 위협사격을 하며 마차를 세웠다. 마부는 말을 멈추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후후, 이딴 어줍짢은 잔재주로 우리를 속이시겠다.? 당장 나 와!" 하지만 마차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국왕을 생포해야 하 는 기마대가 마차를 벌집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국왕이면 국왕답게 당당하게 나오지 못하겠냐!" 당당하게 생포되는 게 진짜 국왕다운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 만, 그 협박이 먹혔는지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고급스런 정 장을 빼입은 사내가 마차 밖으로 나왔다. 기마대는 눈매를 좁히며 그르 바라봤다. "뭐야. 만두하고 닮은 구석이 없는데? 게다가 너무 젊잖아!"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법무대신 위고르입니다." "구, 국왕이 아니라고?" 그들은 어리둥절했다. 두 개의 마차 모두 진짜 국왕이 아니라면 무슨 이득이 있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이런, 이런, 이런. 베르스를 물로 보면 곤란하지요. 아직도 모 르시겠습니까?" "뭘 모른다는 거냐!" 위고르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가슴을 쭉 펴며 한껏 웃었다. "당신들이 진 거야." 10 최후의 보루가 되어버린 왕궁에서는 호사스런 가구와 예술품들 이 우락스럽게 다뤄지고 있었다. "다 쌓아서 장애물을 만들어! 최대한 적의 진입을 지연시켜!" 헬렌은 카랑카랑하게 명령했다. 집 한 채 값을 가볍게 넘어간다 는 금박 의자와 식탁들이 켜켜이 쌓여 적들의 진입을 저지했다. 이렇게 왕실의 보물들이 하찮은 나무판자 취급 받는 것에 슬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래 인간은 생존 앞에서는 다른 모 든 가치를 망각하는 법이다. 적들은 바리케이트들을 부수면서 계속 전진했지만 하나를 부술 때마다 두 개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것은 시간벌기일 뿐, 이대로 는 언젠가는 함락될 운명이었다. 헬렌은 입술을 깨물며 회중시계 를 꺼냈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 그녀는 결심한 듯 시계를 꽈 쥐며 사람들을 바라봤다. 창과 검을 든 헬스트 나이츠와 근위대가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의 입을 주시 하고 있었다. 그 입술이 열렸다. "적들은 미끼를 물었다. 지금 적들의 병력은 분산되어 있다! 승 리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지금 한번뿐! 알겠나. 흩어진 적들이 모 이기 전에 적들을 섬멸시킨다!" 그 순간 바리케이트가 무너지며 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원 돌격! 왕국을 지켜라!" 그녀는 자신이 먼저 검을 뽑으며 그들에게 뛰어들었고 곧이어 엄청난 함성과 함께 베르스의 군대가 뒤를 다랐다. 밀고 들어오던 적들은 도리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설마 그런 오 합지졸들로 자신들과 맞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빌어먹을. 이런 잔재주를!" 기마대 지휘관은 이제야 헬렌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대 의 마차를 잡기 위해 병력을 나눈 지금만큼은 수적 우세가 아니 다. 헬렌은 바라 지금 반격을 감행한 것이다. 지휘관은 당한 것은 인정했지만, 위기감은 전혀 없었다. 그는 목 을 우득 꺾으며 밀려오는 베르스 군대를 비웃었다. "흥! 저 나약한 쓰레기들에게 진짜 전투가 뭔지 가르쳐줘라!" 세계 공식 최약소국의 기사들에게 절도 무너질 리가 없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며 검을 뽑았다. 11 같은 시작 참모장 카론의 암살을 목표로 침투한 인코그니토의 척탄병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뒤였다. 죽음을 납득한 뒤의 인간 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고작 10여 명으로 이뤄진 결사대는 이미 몇 배가 넘는 경호병들 을 폭사시키며 카론의 코앞까지 밀고 들어갔다. 카론을 만나면 몸 에 두르고 있는 고성능 폭약에 불을 댕겨 주저 없이 옥쇄(玉碎)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카론을 바로 앞에 놔둔 그들은 잊고 있던 죽음의 공포를 상기시켜 주는 악몽과 만났다. ".....나왔군." 올 게 왔다는 그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루터의 육중한 몸은 절망의 벽처럼 복도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폭약으로 무장한 척탄병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좋은 제안을 하나 하지. 그냥 그대로 서 있는 것이다. 그럼 적 어도 고통 없이 죽게 된다." "우릴 우습게 보지 마!" 한 명이 권총을 꺼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눈앞을 새 카맣게 뒤덮은 루터의 주먹을 목격했다. 그리고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버린 시체가 천장에 부딪친 뒤 바닥 에 떨어졌다. 루터는 피에 젖은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비웃었다. "시시하군. 죽을 각오로 여기까지 왔다면 그 의지를 보여라." 그때 다른 하나가 몸에 장치된 기폭장치를 눌렀다. "봐라! 이게 우리의 의지다!" 기폭장치를 누르는 순간 몸에 두른 모든 폭약이 반응한다. 그는 고함을 내지르며 루터에게 뛰어들었고 곧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폭발이 이어졌다. 척탄병들은 드디어 루터가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착각 했다. 매캐한 먼지와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 속에서 단 한 발짝도 밀려나지 않은 루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얼굴을 가린 두 팔 을 서서히 내리며 웃었다. "그래. 이건 좀 재미있구나." 척탄병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희생자의 피와 살점으로 얼룩 진 루터의 모습은 막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루터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마치 커다란 대포알이 지나간 것처럼 주먹을 찌를 때마다 몸통이 으깨지고 팔 과 머리가 날아갔다. 복도는 도살장으로 변해갔다. "여길 봐라! 이 괴물!" 그렇게 소리 지른 자는 마지막 남은 척탄병이었다. 아주 젊어서 청년이라 해도 믿을 정도인데다가 작전상 군복조차 입지 않아 이 런 임무에 어울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대나무를 잘라놓은 것처럼 짧고 굵은 원통형의 총을 들고 있었다. 루터는 그 우스꽝스럽게 생긴 무기를 보고는 비웃으 며 물었다. 그 순간 그 원통에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불덩이가 발사되었다. 엄청난 반동을 이기지 못한 청년의 두 손복이 으스러지며 뒤로 나 가 떨어졌다. 그 무기는 공병이 근거리에서 벽을 부술 때 쓰는 일종의 대포였 다. 본래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뒤에 쓰는 것이지만 그것을 손으로 들고 쐈으니 뼈가 부러지는 것도 당연했다. "....." 루터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복부를 바라봤다. 대포알이 관통한 자리에는 신기할 정도로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참으로 현실감 없는 상처였다. 폭포수 같은 출혈이 시작되었지만 루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 았다. "이것 참, 내 몸은 성할 날이 없군." 그는 바닥에 쓰러진 청년에게 걸어갔다. 청년은 공포와 투지로 범벅이 된 얼굴로 괴물을 쏘아보고 있었다. "너, 이름이 뭐냐." "그건 알아서 뭐해! 어서 죽여!" "말해라. 날 죽인 놈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다." "....미카엘." "천사의 이름이라. 참 얄궂기도 하지." 루터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때 그의 뒤로 카론이 다가왔다. "루터, 괜찮은가?" "괜찮고말고." 루터는 어째서인지 편안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카론은 그의 부상을 봤다. 제아무리 루터라도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이었 다. 그는 루터의 마음을 읽었다. "남길 말이 있나." "이 따위 세상에 남기고 싶은 건 아무 것도 없어." 루터는 피와 함께 그 말을 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보통 이럴 때 는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며 후회하고 참회한다던데, 그는 아무것 도 아쉽지도 슬프지도 않은 것을 느끼고는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인생의 전부였던 누나가 죽었던 그날, 그의 영혼도 간이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원한에 빙의된 육체만이 남아 구원도 희망도 없는 이 세상을 헤맨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이 제 끝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웃었다. "참 더럽게 질긴 목숨이야. 이제 끊어다오." 그는 눈을 감았다. 카론은 부관의 칼을 빌려 왼손에 쥐었다. 내 려치는 칼날이 루터의 굵직한 목을 갈랐다. 칼 따위는 단숨에 튕겨내던 그의 육체는 이때만큼은 기이할 정 도로 단숨에 잘려 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잘려 있던 것처럼. 12 "거기 너희들! 멈춰!" 베르스와 인코그니토 사이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본당 정문 을 10여 명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혹시라도 도주할지 모르는 적 왕족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그들 앞에 엉뚱한 자들이 지나갔다. 세 명의 소년 소녀였는데, 화려해 보이는 제복을 입은데다가 상당히 중요해 보 이는 물통을 들고 긍끙거리며 운반하는 폼이 '도저히 그냥 보내줄 수 없을 만큼' 의심스러워 보이는 시동들이었다. "멈추랬지!"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잰걸음으로 도망치던 시동들을 병사들이 둘러쌌다. 그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 팔을 들었다. "살려 주세요!" "이 물통 속에 뭐가 들어 있지?" 벼아들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소장하 게 운반해야 할 물통이라면 대체 무엇일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술입니다." "뭐 술?"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그랬다. 진하게 휘발된 알코올이 코끝을 자극했다. "이건 베르스 왕실이 몇 대에 걸쳐 보관하던 귀한 술입니다. 보 물과 다를 바 없어요. 당신들 같은 평민들은 죽을 때까지 맛볼 기 회도 없을 걸요?" "호오. 그렇게 대단한 술이라 이거지?" "안 대단하면 뭐 하러 이 판국에 목숨 걸고 옮기겠습니까?" 창백한 인상의 미소년이 도리어 답답하다는 듯 되묻자 병사들 은 서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작전에 투입 된 이후 몇 개월 동안 술 한 방울 못 마시지 않았던가. "이거 놓고 꺼져! 이술은 우리가 전리품으로 가져가겠다!" "네? 안돼요!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에이이! 귀하니까 가져가는 거지!" 그러면서 그들은 곧바로 술통에 입을 댔다. "아아아! 마시면 안 돼요! 그 술을 마시면...." 1분 후. "마비된다고, 바보들아." 지스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부들부들 떠는 병사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의 애처로운 소년과는 밉살스러 울 만큼 딴판이었다. 병사들 중 하나가 떨리는 손으로 지스의 발목을 잡았다. "수, 술에....뭘 탄 거냐...." "내가 먹는 약 한 달치." 같이 물통을 나르던 크리스와 랑시가 손짓을 하자 수풀에 숨어 있던 나머지 스왈로우 나이츠들이 몰려왔다. 쇼탄이 온몸이 오그 라든 병사들을 보고는 그 폭발적인 약효에 혀를 찼다. "어떻게 하면 약으로 이 지경을 만들 수 있지, 지스 경. 넌 대체 평소에 무슨 약 먹고 있었던 거냐." 지스는 '비싼 약이야. 꼭 갚아!'라고 쏘아 붙였다. 이 황당무계 한 작전을 계획한 루이가 팔짱을 끼며 깔깔 웃었다. "와하하하하! 언제나 남자의 인생을 망치는 두 가지 유혹은 술과 요염한 유부녀지.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야." 어쩐지 경험에서 우러나는 것 같은 발언에 레녹이 눈을 흘겼다. "모든 남자가 너 같다고 생각하지 마." 크리스도 두 손을 모았다. "당신은 타락했군요." 랑시도 치를 떨었다. "반성해! 이 남자의 수치!" "야! 적어도 너한테만큼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열화와 같은 반응에 루이는 '아, 우리들 솔직해지자고! 지금 이 병사들이 남자의 본능을 증명하고 있잖아!'라고 항변했지만 아무 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자, 들어갑시다. 이제부터는 우리들이 힘을 쓸 차례입니다." 루시온은 본당 안을 바라봤다. 확 풍겨오는 피비린내가 내부의 상황을 짐작케 만들었다. 그는 검을 꽉 쥐며 그 속으로 들어갔다. 레녹과 쇼탄, 루이가 그 의 뒤를 따랐다. 13 엔디미온이 걷고 있는 긴 복드는 놀라울 만큼 적막했다. 마치 진 공의 공간처럼 모든 것들이 숨죽인 채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가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시체들뿐이었다. 앞서 이 길을 지나간 누 군가가 이 섬뜩한 적막을 창조한 것이 분명했다. '.....지독해." 그는 입을 틀어막으며 걸어갔다. 현기증이 올라왔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베아트리체가 있는 연구실 입구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베아트리체가 있는 연구실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엔디미 온은 횃불 밑에서 일렁이는 불길한 그림자를 목격했다. '누, 누구?' 그 그림자는 마치 환각처럼 눈앞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몇 걸음 더 때기도 전에 등 뒤가 서늘해졌다. "이런 실력으로 여기까지 와서 대체 뭘 하고 있나요." "키스 경!" 미온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곧 표정이 굳었 다. 피에 젖은 키스가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었다. 온몸에서 풍기는 자극적인 살기 어디에도 예전의 상냥함은 없었 다. 언제난 눈웃음을 머금던 붉은 눈동자는 슬퍼 보일 만큼 메 말라 있었다. 미온은 이 복도를 깨끗하게 '청소' 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말....키스 경이에요?" 처음이었다. 키스와 키릭스를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은. "실망했습니까?" 이게 본래 내 모습이에요. 키스 세라즈라는 사람 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키릭스에 가까운 존재랍니다. 때로는 나도 내가 키스인지 키릭스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타자기를 치는 것 같은 무미건조한 소리가 미온을 찔렀다. 미온 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동료들 을 대했던 그 모든 키스의 얼굴들이 모조리 가면이라고느 믿고 싶 지 않았다. 그는 키스의 손을 꽉 잡으며 외쳤다. "같이 가요! 같이 가서 베아트리체를 구해요!" 하지만 키스는 그의 손을 풀었다. "혼자 가세요." "어, 어째서! 당신은 누구보다 그녀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날 미워했으면서!" "그러니까 갈 수 없는 겁니다." 그녀를 보게 된다면 애써 결심한 이별이 흔들릴 것 같으니까. "그리고 먼저 정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 난 여기서 기다 릴 사람이 있어요." "키스 경!" "참 다행이네요. 내가 사라지면 누가 그녀를 지켜줄까 걱정했는 데, 이렇게 당신이 왔으니까." 그리고 키스는 검을 들어 미온의 목을 겨눴다. "어서 가세요. 이곳은 내가 막고 있을 테니." "....키스." "이번에도 그녀를 못 구한다면 정말로 당신을 미워할 겁니다." 키스는 몸을 돌려 사라지기 전 잠시 미온을 돌아봤다. 억누르던 아쉬움이 몰아쳤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와 얽힌 2년간의 추억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 하지만 불행도 행복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그는 차분히 그 추억을 마무리했다. "미온 경." "......" "그 동안 즐거웠어요." 어색하게 웃는 키스의 얼굴이 엔디미온의 물기 어린 시선 속에 비춰졌다. 착하고 여리고 진심밖에 몰라서 측은해 보이는 그 얼굴 이 바로 그의 진짜 얼굴이었다. 제33화 긴 복도 1 키스는 그대로 뒤돌아 걸었다.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미온을 바 라보지 않았다. 머릿속을 울리는 베아트리체의 처연한 목소리도 외면했다. ....키스....가지마. 키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온 길을 스스로 되돌아갔다. 허약 하기 짝이 없는 금발의 호스트에게 그녀를 양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가능하다면 기꺼이 평생을 같이하고 싶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고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범이었다. 키스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포기했다. 만나고 싶기 때문에 만나서는 안 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대 슬픈 가슴 내 위에 엎드려 울먹인다 해도 나 말 아니하고 차디차리니 지금 그대 마음껏 매정하소서. "이해해 줘. 이런 사랑도 있는 거야." 그는 희미하게 읊조리며 점점 더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만나 고 알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들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슬픈 이 야기다. 키스는 몇 번이나 그 사실을 뼈져리게 실감했다. 저 멀리서 다른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키스는 마치 거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점점 더 두 그림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흩어진 두 조각이 하나 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그러면 나도 이 땅 위에 남아있으리다." 아주 긴 복도,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은 이미 무덤이었다. 둘 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봤다. 긴 시간을 돌아 처음으로 회 귀했다. 키릭스는 입 꼬리를 올렸다." "어때. 지금까지 즐거웠어? 키스 세자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의 인생을 살면서 말이야." "키스는 분명히 존재해요. 지금 당신 앞에 있잖아요." "아니. 존재하지 않아." 키릭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키스틑 영문을 알 수 없는 비웃음에 인상을 찡그렸다. "뭐, 당신이 죽든 내가 죽든 이제 모두 끝나는 이야기니까." 서로의 영혼이 연결도어 있기 때문에 누구의 죽음도 모두의죽 음이 된다. 이자벨이 만들어 놓은 치면적인 신관이었다. "참 이상해. 내가 죽길 원한다면 그냥 네가 자살하면 될 테 데.... 왜 굳이 날 죽이려고 하는 거야?" "그 이유는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키스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자 키릭스도 능숙하게 뒤로 물러 나 거리를 만들며 검을 뽑았다. "그래. 누가 이겨도 남는 것은 파멸, 그런 게 공평한 인생이지." 서늘한 노래가사처럼 키릭스가 흥얼거렸다. "키스. 왜 이자벨이 키릭스를 둘로 나눴을까." "알게 뭡니까. 흑마술적인 흥미 때문이었겠지요." 키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키릭스는 생각이 달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녀가 단지 호기심 때문에 이런 거창한 일을 저질렀을까?" 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무서운 여자의 머릿속은 알고 싶지 도 않았다. "왜 키릭스를 둘로 나눴냐하면 말이지, 그녀는 키릭스를 너무도 미워했기 때문이야." "키릭스가 그 여자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샀습니까?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데." 키스는 불쾌한 듯 삐죽거렸다. "그래, 키릭스는 죄가 없지. 하지만 키릭스의 아버지는 죄가 많 거든." "당신이 죽인 그 황제 말입니까?" 키스는 경멸적으로 내뱉었다. 키릭스는 뭐가 재미있는지 한참 을 웃다가 말을 이었다. "아까 전에 이자벨이 엄청나게 재미있는 비밀을 하나 알려줬어. 들려줄까?" 키스는 또 눈썸을 찡그렸다. 한 인간이 둘로 나눠졌고 서로의 영 혼까지 공유하게 된 이 자랄 맞은 상황에서 또 뭔 놈의 비밀이 더 있단 말인가. "날 이기면 알려 줄게." 그 순간 칼끝이 움직였다.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실이 없는 키릭 스의 검을 걷어내자마자 다른 칼날이 뱀처럼 키스를 휘감았다. 서 로의 검이 엉켰다. 2 문에 기대어 죽어 있는 경비 들을 치운 뒤 엔디미온은 연구실의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 거대한 연구실이었다. 미온은 모든 것이 생명체 같다고 생각했 다. 연구실 전체를 뒤덮은 알 수 없는 튜브와 케이블들이 넝쿨의 일종처럼 엉켜 있었고 검붉은 액체가 끓고 있는 유리구들이 사방 에서 움트고 있었다. 커다란 강철의 기계는 배설물처럼 천공지를 내뱉고 있었고 그 기계를 이루는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리며 소음을 생 산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가스등의 파리한 색광(色光)을 받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일렁거렸다. 이것이 바로 이자벨이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기계 멘토의 실체였다. 멘토란 극단적으로 증폭된 텔레마코스가 세계 모든 인간들의 머 릿속에 침투해 정신을 개조시키는 세뇌장치와 다름없었다. 미온은 가장 차가운 형태의 광기가 존재한다면 이것이리라 생각했다. "베아트리체!" 멘토의 광기를 뚥고 미온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그 기계숲 속에 서 멘트의 심장이 된 그녀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헤맨 그가 중심부에 있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을 때 그 녀는 잠들어 있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얇고 새하얀 옷에 은색 서 클릿을 쓴 채 동화처럼 누워 있었다. "베아트리체! 정신 차려! 내 말 들려?" 미온이 그녀에게 달려가 좁은 어깨를 살짝 잡았다. 그 순간 감전 된 것처럼 그녀의 마음이 밀려 들어왔다. 슬프고 두렵고 외로운 감정의 미립자들. 어린 시절의 미온이 그 녀를 껴안았을 때마다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뇌에 심어진 자철광에 의해 완전히 정신이 붕궤된 그녀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단지 본능과 무의식이 과거를 헤매며 과거의 사람 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키스.....가지 마." 그녀는 두 팔을 뻗어 미온의 얼굴을 매만졌다. 미온은 표정 잃은 얼굴로 새하얀 그녀를 바라봤다. 더 이상 그녀의 기억 속에 자신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헤어진 뒤 그녀의 염력은 단 한 번도 그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미온 을 보호하는 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엔디미온 을 망각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녀가 부른 사람은 키스였다. 미온이 그녀를 잊지 못하 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염력도 세뇌도 아닌 그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 정말 미안해." 미온은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지킬 수 있었을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결 코 주저하지 않겠다고 외쳤지만 시간이란 냉정해서 1초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엔디미온 경, 왜 이자벨 님을 배신했습니까." 침울한 목소리와 함께 칼날이 번뜩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피했 지만 곧 뜨끔한 통증이 터졌다. 미온은 깊게 베인 어깨를 꽉 누르며 앞을 바라봤다. 단도를 든 채 다가오는 금발 청년의 얼굴은 석고상 같았다. "....리젤." "그분이 몇 번이나 당신을 구해줬는지 알고 있습니까?" "......"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고나 있습니까?" "......" "지금이라도 말하세요. 평생 그분과 함께 하겠다고. 그러면 적 어도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리젤. 똑바로 들어." 미온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베아트리체와 함께 이곳에서 나간다. 다시는 포기하지 않 아!" "배신자." 그 순간 미온은 피를 토했다. 가슴을 찔리거나 한 것이 아니었 다. 눈앞이 흐려졌다. 리젤의 단데에는 독이 묻어 있었다. 리젤이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이게 해독제입니다. 마시지 않으면 당신은 10분 안에 죽습니 다. 선택하세요." 리젤은 바닥에 해독제를 내려놓았다. 예전의 그날과 같았다. 키 릭스가 베아트리체를 데려가며 건냈던 므네모시아. 마신다면 모 든 괴로움과 죄책감은 사라지고 평온한 일상을 보장 받는다. 미온은 이 얄궂은 반복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누구나 의지를 포기하면 편안해지지. 왜냐하면 더 이상 포기할게 없어지니까." 미온은 대답을 대신해 검을 뽑았다. "엔디미온 경. 정말 죽을 생각입니까." "죽으려는 게 아니야. 살려고 하는 거지." "저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리젤, 넌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이자벨 님을 포기하지 ㅇㄶ 겠지?" "물론입니다." "나도 똑같은 거야." "......" 미온의 검술은 딱 잘라 형편없다. 하지만 약하다 해서 도망칠 것 인가, 그런 게 현명한 삶의 방식일까. 이기는 싸움만 허락하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단 영웅 만이 아니다. 극히 평범한 사람의 인생 속에도 희박한 승률 앞에 서 싸워야 할 때가 분명히 온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대처하는 삶의 태도다. 두 손으로 검을 거머쥔 미온이 리젤에게 뛰어들었다. 그의 커다 란 베기 속으로 파고든 리젤의 단도가 춤을 췄다. 리젤의 뺨이 찢어 지며 피가 튀었다. 동시에 단도가 미온의 가슴을 긋고 지나갔다. 3 "하악! 하아!" "생각보다는 제법이다만 여기까지다!" 가쁜 숨을 내쉬며 쓰러져 있는 헬렌의 몸을 밟은 기마대의 장교 는 지독한 여자라며 치를 떨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될 줄 알았던 본궁 내의 혈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쓰러진 사상자들 중에는 기마대도 다수 였고 아직도 주변에는 고함소리와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전멸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기세였다. "너희 대장이 잡혔다!" 장교는 헬렌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지휘관이 잡혔을 때 항복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모두 무장 을 해체해라!" 리더가 잡힌 것을 본 헬스트 나이츠는 주춤거렸다. 그때 헬렌이 소리쳤다. "제 발로 물러설 참이냐! 난 상관하지 말고 싸워!" 그 순간 화가 난 장교가 검으로 헬렌의 손을 찔렀다. 안타까운 비명이 터졌다. 바닥에 못 박힌 그녀의 손바닥에서 피가 쏟아졌 다. 장교가 고함쳤다. "장난하는 줄 아나! 마지막 경고다! 지금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여자와 너희들 모두 고문한 뒤에 천천히 죽여주겠다." 장교의 협박이 통하기 시작했다. 살기 가득한 고함소리에 억누 르던 공포가 터진 것이다. 떨리는 다리를 겨우 겨울 추스르며 싸우던 베르스의 기사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싸움은 겁먹은 쪽이 지기 마련이다. 그 들의 표정을 본 장교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자, 무기를 버려라. 너희들은 귀족가의 고귀한 핏줄 아닌가. 이 런 데서 개죽음 당하고 싶진 않겠지? 항복하면 포로고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주겠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사실 그는 적들을 살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런 약소국의 귀족 따위 포로로 잡아봐야 거추장스럽기만 한 것이다. 장교는 시 커먼 속마음을 감추며 거만을 떨었다. "어서 버려! 나도 더 이상 여자와 싸우고 싶지 않다. 이래봬도 여성을 존중하는 신사란 말이야." 그때 잘도 지껄이던 장교의 등 뒤에서 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랄한다. 존중하는 여자 손에 구멍은 왜 내?" "뭐, 뭐야! 너희들은!" 장교가 뒤돌아본 곳에는 빛이 날 만큼 충중한 외모의 사내 네 명 이 서 있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함쳤다. "설마 네놈들, 정문을 지키던 녀석들을 다 해치우고 올라 온....." "하하하! 이몸의 출중한 검술을 보고는 모조리 무릎을 꿇더구나! 후후후, 그래서 혹자는 이 루이 님을 갓! 오브! 소드!라고 부르지." 기병대들의 얼굴에 '열 명을 혼자서?'라는 경악이 터졌다. 루이 의 유치찬란한 공갈이 어쩐지 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자시뿐, 장교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그 가 루이의 뒤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큭큭, 그래? 대단하시군. 그 신기(神技), 한 번 더 보여주시지 그래." 스왈로우 나이츠는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험상궂은 사 내 무리들이 칼을 뽑은 채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헬렌의 계략으로 잠시 왕궁 밖으로 분산시켰던 기병대들이 돌아온 것이 었다. 최악이었다. 그들을 본 쇼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어, 루시온 경. 이것까지 다 계획에 포함된 거겠지? 그렇다고 말해!" 루시온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명 당 열 명씩 상대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자도 동시에 열 명을 상대해 본 적이 없는데!" "살아남으세요. 살아남으면 제가 당신 빚 대신 갚아 드리지요." "......이보세요. 여기서 죽어도 빚 갚을 일은 없어요." 루시온은 피식 웃으며 검을 다잡았다. "잘 되었군요. 어찌되든 빚은 없어진 거니까." "거 남의 인생이라고 무지하게 긍정적이구먼." 쇼탄도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았다. 장교가 외쳤다. "고작 네 마리 추가된 거다. 항복이고 뭐고 다 쓸어 버려!" 사정없이 뛰어드는 적들을 보며 루이가 고함을 내질렀다. "오지 마! 이 미친놈들아!" 결국 열 명의 군인을 단박에 무릎 꿀게 했다는 검황 루이블랑은 쫓아오는 십여 명의 별사들을 등 뒤에 달고는 '우아아아아! 살 려줘!' 라는 솔직한 비명을 지르며 도주했다. 단숨에 저 복도 끝까지 점이 되어 사라지는 루이를 바라보던 쇼 탄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갓 오브 소드. 하여튼 도움이 안돼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쇼탄의 머리 위로 칼날이 떨어졌다. (어 차피 이판사판이 된) 쇼판의 눈이 빛났다. "우습게 보지 마!" 격력하게 맞받아친 쇼탄의 두 팔에 힘줄이 돋았다. 상대의 표정 에 긴장감이 서렸다. 쇼탄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셌던 것이다. 쇼 탄은 히죽 웃으며 조금씩 그를 밀어냈다. "미안하지만 나도 무지렁이는 아니거든?" 그렇게 둘의 검이 엉켜 있을 때 새로운 병사가 그에게 뛰어들었 다. 카론이나 키스처럼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검술은 전혀 모르는 쇼탄이었다. 결국 쇼탄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궁상맞은 비명을 질렀다. "우아아아아아! 살려줘! 아니, 살려주세요! 전 여기선 죽으면 안 돼요! 거렁뱅이인데다가 빚도 엄청 많아요!" 왠지 죽는 편이 좋을 것 같은 울적한 변명을 내지르던 찰나, 레 녹이 바람처럼 끼어들며 검을 막았다. 쇼탄이 감격에 찬 얼굴로 외쳤다. "고마워! 지금까지 난 네가 엄청나게 치졸하고 이기적이고 속 좁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듣기 싫어! 내가 싫으면 싫다고 해! 나도 너 싫으니까!" 레녹은 안경 너머 찡그린 눈매로 쏘아붙였다. 갑작스럽게 난입한 스왈로우 나이츠를 본 장교는 밟고 있던 헬 렌을 걷어찬 뒤에 그들에게 성큼성큼 걸었다. 살벌한 웃음이 만면 에 가득했다. "이 나라는 남창들도 기사가 되냐?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구 만. 토막을 내주마!" "그 말 취소해라. 아니 취소하게 만들어 주지." 그 앞에 당당히 선 루시온은 긴 칼날을 들이대며 말했다. 감정이 절제된 나직한 목소리와 의외로 제대로 잡혀 있는 자세에 장교는 움찔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깔끔한 루시온의 자세에 곧 안심했다. 실전을 겪은 자신과는 비교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흥. 교과서로 공부한 놈이로군. 샌님 같은 놈." "흥. 교과서도 읽은 적 없는 놈이로군. 무식한 놈." 의외로 발칙한 말투에 화가 치민 장교가 빠르게 검을 찔렀다. 그 것을 우아하게 흘려보낸 루시온은 침착하게 상대의 다리를 훑었 다. 그리 빠르고 격렬한 것 같지 않은데도 루시온의 칼끝이 장교 의 허벅지를 찢고 지나갔다. 그 묵직한 촉감을 느끼며 루시온은 아주 짧은 순간 키스와의 추 억을 떠올렸다. "루시온 경, 시간 있으면 저 좀 도와주실래요오?" 이른 오후였다.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던 루시온을 향해 창 너머 에 있던 키스가 방긋 방긋 웃으며 손짓을 했다. 어쩐지 불안한 기 분이 들어 나간 뒤뜰에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검들이 널려 있었다. "루시온 경, 칼날을 세워본 적이 있나요?" "책으로만 배웠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아." 결국 키스와 루스온은 쪼그려 앉아 검을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장간의 편리한 회전식 숙돌이 아니라서 루시온은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그는 휴대용 숫돌만으로도 완벽하게 칼날을 세우는 키스를 보 며 기가 질렸ㄷ. 어쩐지 졸린 표정으로 대충대충 하는 것 같았지 만 정말 오랫동안 검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솜씨였다. "키스 경." "네에?" "그런데 이 검들을 왜 손질하는 겁니까?" 이때는 엔디미온이 입단하기도 전이었다. 전쟁 같은 것은 영원 히 없을 것만 같던 한가한 나날들의 반복. 그런데도 게으른 키스 가 일부러 검을 손보는 것이 루시온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 만 키스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가 검을 쥘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키스는빛을 맏아 반짝거리는 루비 같은 눈동자로 루시온을 바 라봤다. "루시온 경, 우리는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우리에게 관 시미 있답니다." "......" "물론 가장 좋은 검의 활용법은 쓰지 않는 것이지요." 쪼그려 있던 키스는 털썩 바닥에 앉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만약 써야만 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칼날이 날카로우면 날 카로울수록 좋은 거랍니다."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에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더운 한여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에 숨은 뜻이 섬뜩해 루시온은 소름이 끼쳤다. 그날 이후 틈 날 때마다 스왈로우 나이츠의 검들을 손질한 장본 인은 바로 루시온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칼끝이 심장을 위협할 때 마다 자신만만하던 장교의 표정은 점점 무너져갔다. "뭐 이런 자식이!" 자신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얄밉게 빠져나가며 급소를 노르는 루시온에게 장교는 짜증을 냈다. 아무리 자신이 지쳐 있는 상태에 서 싸운다고 해도 이런 도련님 하나 요리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 렇게 분이 터질 때마다 침착한 루시온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갔다. ".....!" 순간 갑자기 공세로 바꾼 루시온의 날카로운 일격이 장교의 오 른손을 휘감았다. 놓친 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루시온의 칼끝이 그 의 목에 닿았다. "내 승리다." 장교는 기품이 넘치는 루시온을 보며 분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곧 두 손을 들었다. "....졌다. 죽여라." "난 네가 아니다. 무의미한 살인은 싫다." 순간 장교의 눈빛이 바뀌었다. "너, 사람 죽여본 적 없구나?" "살인이 자랑인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루시온의 표정을 본 장교의 손이 뒤춤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군용단검이 숨겨져 있었다. 역시 도련님은 안 된다.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결국 죽여야만 끝 낼 수 있는 싸움에서 결정적인 순간 머뭇거리고 마는 것이다. 산 전수전 다 겪은 장교는 그렇게 비웃으며 단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그 순간 루시온의 칼날이 그의 목에 반쯤 파고들었다. 루시온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소아봤다. "착각하지 마라. 못 죽이는 게 아니라 안 죽이는 거니까.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무기, 바닥에 던져라." 장교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목동맥이 끊기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는 이를 갈며 단도를 바닥에 던졌다. "부하들에게 항복하라고 말해." "흥! 내가 왜 그런 치욕을....큭!" 루시온이 칼을 비틀자 흐르는 핏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그의 손 끝에 목숨이 달려 있었다. "지휘관이 잡혔을 때 항복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며?" 장교는 루시온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로 항복하지 않으 면 죽일 기세였다. "항복하지 않겠다면 나도 첫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검의 가장 좋은 활용법은 쓰지 않는 것이집만 써야만 한다면 날 카로울수록 좋다. 키스가 했던 그 무서운 말을 루시온은 지켜냈 다. 장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항복하지. 빌어먹을, 베르스가 이토록 지독한 줄 알았 다면 좀더 많은 병력을 보냈을 텐데." 지휘관이 항복을 선언하자 다른 병사들도 검을 버렸다. 베르스 측의 기사는 체 열 명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항복을 받은 뒤 루시온은 몸을 벽에 기대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심장이 뛰며 온몸이 떨려왔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상황에 카론처럼 익숙할 리 가 없었다. 루시온도 있는 대로 용기를 짜내 두려움을 꾹 참아낸 것이다. 적은 물론 동료조차 조금도 눈치 챌 수 없도록. 싸움이 끝난 뒤 그 가면이 벗겨진 루시온을 본 레녹이 다가와 신 기한 듯 말했다. "당신도 이럴 때가 있군요." "벼, 별로 겁먹은 것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말과 몸이 따로 놀고 있었다. 쇼탄은 문득 잊고 있던 한 인간을 떠올렸다. "아, 잠깐! 루이는 어떻게 된 거지?" 갓 오브 소드 루이는 일찌감치 도주한 뒤 행방불명이었다. 쇼탄 은 다시 검을 들며 루이가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그냥 영원히 잊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만.) 그때 멀리서부터 루이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쇼탄은 표정을 잃었다. 그의 룸메이트가 피투성이였던 것이다. "루이!" "하하하. 쇼탄. 너 살아 있었냐?" 루이는 힘없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쇼탄은 쓰 러진 루이의 상체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놈들한테 당했어? 야! 정신 차려! 루이!" "흥. 이 몸에게 세 명 정도야 가뿐하지." "허세 부리지 마! 너 어딜 다친 거야! 당장 치료해 줄게!" "쇼탄." "응!" 루이는 울어 버릴 것 같은 쇼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나 또 엉덩이 찔렸..... 우왁!"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쇼탄은 머슴 같은 힘으로 루이를 집어던 졌다. 엉덩이를 움켜쥐며 벌떡 일어선 루이가 소리쳤다. "야! 니가 태어나 두 번이나 엉덩이 찔린 사람의 심정을 알기나 해!" "에이이이! 그깟 엉덩이 아무려면 어때!" "이놈! 엉덩이를 얕보다니! 탱탱한 엉덩이는 남자의 생명이란 말이다!" "뭘 모르시는구먼! 남자의 생명은 구릿빛 피부야!" "시끄러! 이 여름한정아! 진짜 남자의 생명은 말이지, 바로 그...." 그때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헬렌이 루이의 엉덩이를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크어어어억! 내 생명이!" 피 뿜는 엉덩이를 움켜쥔 채 굴러다니느 루이를 뒤로하며 헬렌 은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영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 다는 얼굴로 짧게 말했다. "그대들의 헌신, 진심으로 감사한다." 아마 이것이 헬스트 나이츠가 스왈로우 나이츠에게 건넨 최초 의 고마움일 것이다. "우리들도 기사니까요." 루시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키스는 어디 있나. 그리고 그..... 왕실의 골칫덩이 녀 석도 보이질 않는군. 도망칠 녀석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그 말에 루시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리워하는 얼 굴로 말했다. "아마 둘 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지키고 있을 겁니다." 4 "참 다행이지 뭐야. 솔직히 카론에게는 잔인해지기 힘들었는데 너한테는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거든?" 키릭스의 칼끝이 키스의 몸을 훑을 때마다 옷이 찢기고 피가 튀 었다. 카론의 것과는 달리 키릭스와 키스의 검술은 근원이 똑같 다. 그래서 키스가 어떻게 움직이든 키릭스는 그것을 간파하고 유 린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상대가 자신의 카드를 훤히 보고 있는 것처럼 불공평한 싸 움. 키스는 수치심을 느꼈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이런게 진자와 가짜의 차이일까나?" 키릭스는 자신에게 칼끝 한 번 스치지 못하는 키스를 마음껏 조 롱했다. 막아내기에도 벅찬 키스는 가쁜 숨만 내쉴 뿐 아무 것도 대꾸하지 못했다. 지금 키스가 살아 있는 이유는 단지 증오로 맺힌 키릭스의 가학 성이 키스의 편안한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론도 이 모습을 봤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닥쳐!" 화가 치밀어 오른 키스가 일격을 날렸지만 이번에도 키릭스는 너무도 손쉽게 피했다. 소용없을을 알고 뒤로 빠지려는 키스의 움 직임 역시 완전히 봉쇄되었다. 집요하게 달라붙는 키릭스의 그림자가 키스의 몸을 완벽하게 옭 아맸다. 아무리 빨리 움직이려 해도 키릭스는 키스의 뒤에 있었다. "희망을 버리지마. 그래야 절망하니까." ".....!"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교차하며 키스의 등에 긴 상처가 벌어졌 다. 쓰러질 것 같은 키스는 이를 꽉 물며 몸을 틀었지만 곧바로 키 릭스가 검을 내리쳤다. '흘려야 해!' 보통 기사라면 검과 몸까지 깨끗하게 두 동강 내는 키릭스의 검 을 정문으로 받는 것은 자살행위다. 하지만 상처가 벌어진 몸은 늪에 빠진 것 같았고 어쩔 수 없이 두 칼을 겹쳐 키릭스의 일격을 막았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뼈들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정신을 잃은 키스는 검을 놓쳤다. "키스 아직 죽으면 곤란해." 키릭스의 다른 팔이 움직이며 키스의 가슴을 길게 찢었다. 승부 는 결정 났다. 키스는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빛을 잃은 불은 눈 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미동조차 없는 그의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내뱉는 숨소리만이 그의 생명이 거의 끝자락에 달했음 을 알려주고 있었다. 키릭스는 무표정하게 그런 키스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라 생각하지?" 반쯤 혼절한 키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네가 죽을 권리를 박탁하겠다." 그렇게 선고한 키릭스가 검을 내리찍었다. 정확하게 키스의 오른 쪽 쇄골을 끊은 그 칼끝은 그대로 어깨를 관통해 바닥에 박혔다. 형용할 수 없는 격통(激痛). 풀어진 키스의 동공이 좁혀지며 허 리가 활처럼 휘었다. 키릭스는 싸늘하게 웃으며 천천히 그 칼을 뽑았다. "아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5 중독의 효과란 무섭다. 단 5분 만에 미온의 얼굴은 온몸의 피가 빨려나간 것처럼 창백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고 감 각은 급격하게 사라져 갔다. 쥐고 있는 검의 촉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엔디미온 경. 그러지 마세요. 빨리 죽여줄게요." 리젤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이것은 조롱도 협박도 아닌 진 심이었다. 키릭스와 달리 리젤은 되도록 빨리 미온을 죽이고 싶 었다. 죽여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 그 뒤틀린 배려를 미온은 단호하게 거절 했다. "또 다시....베아트리체를 빼앗기지 않겠어. 절대로!" 리젤은 찢겨나간 뺨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평소 같으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그 상처는 미온의 의지였다. 리젤이 본능적으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정말 미온의 칼날이 그의 머리르 갈랐으리라. 리젤은 이 지루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친구로 삼고 싶었던 금 발의 천년이 절대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알았어요. 그 심장, 멈추게 해드릴게요." 리젤은 단검을 들었다. 상식적으로 장검과 단검이 싸웠을 때 전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리젤처럼 노련하고 기민한 자가 단검을 잡았을 때는 경우가 달랐다. 최대한 상체를 낮추며 파고드는 리젤에게 미온이 검을 내리쳤 지만 리젤이 사라지듯 미온의 우측으로 방향을 꺾자 칼날은 바닥 을 때렸다. "....!" 미온은 급히 몸을 틀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호선을 그리는 칼끝 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젤은 미온 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리젤은 벽을 박차며 다시 한 번 도약했다. 그 는 미온의 뒤로 뛰어내리며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를 노렸다. 단련 된 리젤의 눈에 훤하게 노출된 미온의 급소들이 포착되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혈관을 끊었던가. 그는 자신이 언제부터 살인을 시작했는지 또 얼마나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 다. 사람들이 자기가 식사한 횟수를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미온의 목덜미를 향해 단검을 내지르며 리젤은 태어나 처름으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오묘하고 불편한 감정이었다. 이 것을 끝으로 다시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젤은 자신이 처음 느낀 그 감정이 죄책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제발 그만 두세요. "아?" 리젤은 무방비나 다름없는 미온의 목을 긋지 못했다. 머릿속에 소녀의 목소리가 울린 것이다. 그 짧은 순간의 빈틈, 미온은 몸을 돌리며 그 회전력을 실은 베 기를 리젤에게 날렸다. 커다란 반원을 그리는 미온의 칼끝이 리젤 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충분히 결판이 날만한 일격이었지만 동물적인 리젤의 반사 신 경과 중독된 미온의 빈틈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미온은 계속 공 격하지 못했다. 이미 온몸에 퍼진 독기가 신경들을 다 끊어 놓았 던 것이다. "제발 움직여 줘!" 미온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금이 간 육체는 그대로 가라앉기 시 작했다. 미온은 눈물에 얼룩진 분한 표정으로 리젤을 노려봤다. 검을 꽉 쥔 두 손에 피가 번졌다. 이미 떨어트렸어야 옳을 검을 아직까지 쥘 수 있었던 것은 상식 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었다. "엔디미온 경.... 나,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당신도 들려 요?" 미온의 심장이 코앞이었다. 손만 뻗으면 찔러 비틀 수 있는 거 리. 그런데도 리젤은 넋이 나간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말라붙은 황무지에 폭우가 쏟아지듯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에 어 쩔 줄을 몰라 했다. "리젤?" 미온은 깜짝 놀란 얼굴로 베아트리체를 바라봤다. 그녀는 잠들 어 있는 모습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때 전송관을 통해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기계식 확성기를 이용한 정송관은 기지 전체에 뻗어 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전달 되는 음성이었다. "전군은 들어라! 이자벨 크리스탄센은 세계를 정화하려는 우리 의 숭고한 목적을 배신하고 개인적 사리사욕을 위해 악용하려는 불순한 속셈을 드러냈다. 그래서 우리 인코그니토의 간부진은 부 득이 그녀를 감금하고 지휘권을 박탈했음을 알린다. 이후 모든 지 휘는 우리 간부진의 명령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곧 최종 작전 자바워크가 기동될 것이다. 세계의 정화는 얼마 남지 않았 다. 모두 목숨을 아끼지 말고 싸워라! 인코그니코에 영광이 있기를!" 인간이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들은 자랑스럽게 외쳤다. 리젤은 멍한 얼굴로 그 정손관을 바라봤다. ".....이자벨 님." 순간 그의 눈빛에 살기가 돋았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이자벨에게 갈 수 있는 지도가 그려졌다. 단검을 다잡은 그 는 미온에게 다가갔다. "이자벨 님을 구하러 가야겠어요." ".....리젤." "역시 당신은 죽이고 싶지 않아요. 이자벨 님도 이해해 주실 거 예요." 그리고는 해독제를 집어 미온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연구실 반대쪽 물을 열고 나가 오른쪽으로 돌면 감춰진 출구가 있어요." "리젤."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것은 어쩐지 이 세상과 동떨어진 웃음이 었다. "잘 가세요." "리젤!" 그는 미온의 외침을 뒤로 한 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6 "이자벨, 우리는 이미 어떤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키릭스는 그녀의 마지막을 알리는 전송관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격통에 의해 강제로 정 신이 돌아온 키스가 피에 젖은 얼굴로 자신의 쌍생(雙生)을 바라 보고 있었다. 키스가 억지로 몸을 일으킬 때까지 키릭스는 그를 죽이지 않았 다. 그런 것은 만찬이 나오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저녁식사처럼 허 전할 뿐이었다. "키스, 왜 그냥 자살하지 않지?" "자살은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는 거니까요." "호오 그토록 애착이 넘치는 인생이었나?" "당신은 꿈도 못 꿀 만큼." 키스가 검을 가로로 세우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의 칼끝 이 날카로운 일격을 뿜었다. 이번에는 키릭스도 그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키스는 나름대 로 교활했다. 오직 한 자루의 검만 왼손에 들었던 것이다. 두 검을 동시에 쓰지 않는 이상 키스는 더 이상 키릭스의 복제가 아니다. 키릭스에게 간파당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키스가 쓰고 있는 검술은 카론의 것이었다. 키릭스는 순간 의표를 찔린 듯 뒤로 물러섰다. "짜증나게 하는군!" 카론이 쓰는 검술은 하늘로 던진 동전을 네 조각낼 만큼 정교하 며 물길처럼 상대의 힘을 흘려버린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카 론의 단점을 보완하는 독특한 검술. 검과 함께 상대의 몸을 두 동 강 내는 초인적인 키스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섬세하고 우 아한 검술이었다. 하지만 키릭스의 신경을 무척 거슬리게 만들 수 있는 검술이기도 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신경질 나게 만드는 놈이야." 키릭스에게 카론만큼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 그의 검술을 키스 가 쓴다는 것 자체가 키릭스를 짜증나게 만들기 충분했던 것이다. 치기어린 마음이었지만 확실히 키릭스에게는 유아적인 구석이 있 었다. 하지만 화가 났다 뿐이지 키릭스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고 체 력도 거의 줄지 않았다. 상황은 압도적으로 키릭스에게 유리했다. 키스는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사실 이렇게 일어난 것도 기 적에 가까웠다. '잘해봐야 5분 정도....' 그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더 이상 몸이 견디내질 못한다. 문 득 키스는 아까 전 키릭스가 꺼낸 말이 떠올랐다. 이자벨이 남긴 말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이기면 알려준다던 그 말은 대체 무엇 일까. 키스는 지배당할 것 같은 키릭스의 눈을 바라봤다. '그래, 너는 나의 악마다. 악마가 거는 유혹은 못 이긴 척 받아 주는게 예의지.' 키스는 키릭스를 쓰러트리고 그 말을 듣기로 결심했다. 검을 다 잡았다. 7 그 시각 북부 콘스탄트의 왕실로 '납치된' 쇼메는 궁왕 바쉐론과 대면하고 있었다. 처음 바쉐론은 만날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쇼메는 전쟁이 끝난 뒤 이오타를 접수하기 위한 명분으로만 쓰고 버릴 생각이었다. 하 지만 쇼메는 그 무례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지금 나와 거래하지 않으면 이 나라에 아주 큰 재악이 올 텐데 도?" 국왕은 그 점쟁이 같은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쇼메의 알현을 허락했다. "자네아는 평화회담 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군." 늦게 오찬(午餐)에 나타난 바쉐론 왕은 노년에 접어든 나이에 어 울리지 않는 강공(强骨)이었다. 길게 내린 머리칼과 빛나는 눈빛 이 전사와 같은 그에게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위 엄이 있었다. 그런 그가 쇼메를 보자마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응당 왕이 나타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이 예의인데 테이 블 끝에 앉아 있는 쇼메는 오만한 얼굴로 손만 흔드는 것이 아닌 가. 게다가 식사까지 먼저 하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먼저 실례했습니다." 쇼메 특유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오찬에 참가한 왕실 대신들 은 실로 모욕적이라며 쇼메를 노려봤지만 오갈 데 없는 금발의 왕 자는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격노할 줄 알았던 국왕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짐이야말로 실례했군. 곧 나의 사위가 될 사람이 배가 고파서 야 곤란하지." '흐음. 역시 능숙하시군.' 바쉐론은 쇼메의 빈겅거림에 걸려들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 다. 나라를 피로 물들이며 왕위를 거머쥔 자이니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것이 당연했다. 쇼메는 그의 건장한 따님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곤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네." "전쟁의 목적은 승리겠지요?" "만고불변의 진리지." "그러니 이 왕국이 패배한다면 무척 가슴 아프시겠습니다." 순간 그 발칙한 발언을 참지 못한 늙은 대신이 테이블을 쾅 치며 쇼메를 노려봤다. "그 일 다물라! 이 위대한 북부 콘스탄트 왕국을 어디까지 모욕 할 생각인가!" 쇼메는 기분이 좋았다. 어디를 가도 꼭 저런 다혈질의 멍청이가 있어서 이야기가 쉽게 진행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쇼메는 핏빛 와 인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패배가 듣기 거북하셨다면 멸망으로 바꾸겠습니 다." "이, 이놈!" 충신들은 모조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허리춤에 칼이 있었 다면 당장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하지만 정작 바쉐론 국왕만은 시큰둥하게 사슴고기를 썰며 힐 끗 쇼메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의 그 놀라운 발언들에 합당한 근거가 있길 바라네." 쇼메는 국왕의 비웃음을 봤다. 그런 협잡질에 내가 흔들리기라 도 할 것 같나?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히만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듯이 거래와 도박의 공통 점이 있다면 언제나 냉정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바쉐론은 아직 연륜이 부족한 쇼메의 상대로는 조금 버거울지도 몰랐다. '흥. 대단한 자제력이군. 하지만 이 말을 듣고도 계속 태연할 수 있을까.' 쇼메는 생각보다 일찍 첫 번째 카드를 꺼냈다. "이자벨 크리스탄센이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아십니까." "이 왕국을 빼앗기 위해서일 테지. 그럴만한 배포가 있는 여자 니까." 국왕은 도리어 이자벨을 치켜세웠다. 물론 자신보다는 모자라 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칭찬이었다. 그 순간 쇼메의 입가에 승리 의 미소가 번졌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자벨이 국왕 전하보다 훨씬 배포 가 큰 여자로군요." 처음으로 바쉐론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그는 고기를 자르던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쇼메를 바라봤다. 바 쉐론에게 있어서 그것은 묵과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대신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거대한 오찬 테이블 위에 무서운 정적이 퍼졌다. 그 적막을 뚫고 쇼메의 낭랑한 목소리가 바쉐론을 찔렀다. "이자벨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쇼메가 슬슬 줄다리기를 하려던 찰나 바쉐론은 그 줄을 잘라버 렸다. "들을 가치도 없다." ".....!" 쇼메는 바쉐론이 자신의 생각보다도 굳건한 성이라는 것을 느 꼈다. 국왕은 새하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경호 기사들을 눈빛 으로 불렀다. "입맛이 떨어졌군. 식사는 이걸로 마치겠다. 그리고 쇼메 왕자 를 객실로 호위해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국왕은 잠시 풀어놓은 새를 다시 새장 속으로 가두는 것처럼 명 령했다. 쇼메는 끊어진 줄을 다시 이어야만 했다. "그 진짜 이유 때문에 당신의 왕국이 멸망하게 될 텐데도 들을 가치가 없습니까?" 대신들은 입을 쩌억 벌렸다. 또 멸말 운운했다. 게다가 국왕을 '당신' 이라고 불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참수감이다. 설령 가 족이라고 해도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국왕의 이마에 주름이 생격다. 무서울 정도로 눈매를 벼렸기 때 문이었다. 국왕이 냅킨을 던지며 말했다.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 는 소리 같았다. "좋다. 그럼 너의 잘난 세치 혀를 즐겨보도록 하지! 그러나 네 혀가 짐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짐의 사위가 될 사람이라 해도 그냥 넘어가지느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길. 한순간도 지루할 겨를이 없으실 겁니다." 쇼메는 오만한 눈매로 웃었지만 내심 손긑이 짜릿할 정도의 긴 장감을 느꼈다. 역시 마라넬로, 교황, 이자벨과 함께 세계를 나눠 먹은 괴물이다. 그의 약점을 비집고 들어가 이오타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단 한 번뿐이었다. 쇼메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 지하며 입을 열었다. "자바워크라 불리는 작전이 있습니다." 쇼메의 영민한 기억력은 아이히만이 건네준 서류의 내용을 심 표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 10여 분 가량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최종작전 자바워크에 대해 풀어 놓았다. 곧 있으면 콘스탄트 전체가 전염병과 독가스라는 보이지 않는 군대에 점령될 것이며 지금 당장 막지 않으면 바쉐론은 콘스탄 트 마지막 국왕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바쉐론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 전염병과 독가스가 이 나라 어디에 숨어 있다는 건 가." "거기서부터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협상?" "제가 그 위치를 제공한다면 저를 이오타의 왕으로 인정하고 향 후 30년간 이오타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의정서를 써 주십시오." 쇼메는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고 느꼈다. 위치를 모른다면 콘스 탄트는 실로 복구할 길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그것을 막는 대가 로 자신을 이오타의 왕좌에 올리고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은 바쉐 론으로는 분명한 이익이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깨졌다. "하하하하!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바쉐론은 처음으로 커다랗게 웃었다. 눈치를 보던 대시들도 같이 웃기 시작하자 쇼메의 안색이 변했다. "제 말이 거짓으로 들리십니까?" 바쉐론은 엄청나게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을 때처럼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아이디어는 참신하지만 속아주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로군." "지금 비현실적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계획 자체가 비현실이지.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있겠나." 막연한 낙관론. 지금까지 벌어진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앞으 로도 벌어질 리가 없다는 한심한 발상이었다. 쇼메는 저 바쉐론마저 혈통이 아닌 실력으로 오랫동안 절대자 로 군림하며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는' 착각에 지배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쇼메는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그런 말은 제가 알려드린 위치를 수색한 다음에 하셔도 늦지 않을 텐데요." "그럴 필요도 없다!" 바쉐론은 커다랗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왕은 무조건 옳 다는 저급한 권위의식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자네의 말은 즐거웠지만 또한 불쾌하기 짝이 없었네. 왕을 모 욕한 자가 어떤 처벌을 받는지 경험시켜 줘야 할 정도로 말이야." 그는 경호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저 애송이의 팔과 다리를 잘라라. 혈통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건 심장뿐이다." 처음부터 바쉐론은 쇼메와 아무것도 거래할 생각이 없었다. 인 질 주제에 자신과 감히 동등하게 거래하려 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 할 수 없었다. 쇼메는 그 무서운 선고를 받고도 국왕을 똑바로 바 라봤다. "바쉐론 국왕, 당신이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소!" "저 혀도 잘라라." 기사들이 쇼메 주변으로 몰려왔다. 반항하는 쇼메를 바닥에 내 동댕이친 기사들이 그를 짓밟았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쇼메는 노예나 짐승보다 더한 취급을 받으며 엉망으로 얻어맞 았지만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바쉐론은 쓰러진 쇼메에게 다 가가 머리르 밟으며 말했다. "이제 네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았나?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 야 하는 것이다. 오갈 곳 없는 너르 구해줬으면 짐을 주인처럼 받 드는 것이 도리거늘.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평생을 짐에게 복 종한다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 바쉐론은 이것을 빌미로 영원히 쇼메를 묶어둘 계획이었던 것 이다. 그는 나라를 잃은 가련한 왕자가 이런 둘도 없는 자비를 거 절할 리 없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쇼메는 콧웃음 쳤다. "개소리 하지 마라, 천민." 쇼메는 사납게 쏘아보며 내뱉었다. 국왕은 난생 처음 들은 욕설 에 이를 갈았다. "짐의 검을 가져와라! 내 직접 이놈의 사지와 혀를 자르겠다!" 그때였다. 문이 덜컥 열리며 뛰어 들어온 전령이 무릎을 꿇었다. "각 도시들로부터 급보입니다. 사,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스에 중독되어....." 순간 바쉐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쇼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바워크가 가동된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쇼메를 막지 못했다. 의자에 앉은 그는 오만방자하게 테이블 위에 다리를 걸치며 말했다. "그래도 참 다행이네요. 아직 이 도시는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곧 그 비현실적인 작전이 이 왕궁도 덮치겠지요?" 바쉐론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제 칼자루 를 쥔 쪽은 쇼메였다. "그래, 네 거래를 받아들이지. 의정서를 쓰겠다. 널 이오타의 왕 으로 인정하마." 평생 남에게 고개 숙인 적 없는 국왕으로서는 엄청난 굴욕이었 지만 쇼메는 싸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죠? 계약 조건이 바뀌었습니다." "뭐, 뭐라고1" "아까 조건에 추가해서 10만의 병력을 내게 양도할 것, 이오타 의 재건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불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모 뻘 되는 당신 딸내미와는 절대로 결혼 안 해!" 어쩐지 마지막 조건이 가장 절박하게 들렸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이제 당신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았습니까? 망해가는 왕국을 구해줬으면 전 재산을 내줘도 아깝지 않은 것이 도리지요." "감히 날 협박하다니!" "난 협박한 적 없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지요. 단지 선택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당신의 왕국은 점점 더 몰락할 것이고 내 조 건도 점점 더 까다로워질 거라는 사실만 알아 두시기 바랍니다." 쇼메는 일그러져가는 바쉐론의 표정을 즐기며 품속에서 낡은 케이스를 꺼내 담배를 물고는 불을 댕겼다. 아이히만의 것이었다. 8 왕실이 안전하다는 보고를 받은 키르케는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키르케와 알테오, 카론이 지휘하는 3군은 거의 일방적으 로 적을 두르렸다. 라이오라라는 검과 이자벨이라는 머리를 잃은 이오타 측은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전선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이, 이대로 죽으라는 거냐!" "대체 수뇌부는 뭐하는 거야?" 전방의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사수하라'는 명령만 되풀이하는 한심한 수뇌부를 비난했다. 새로 지휘관을 잡은 인코그니토의 간 부들은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하지 못했다. 전쟁에는 문외한에 가까웠던 그들은 전면전을 앞두고도 서로 더 권력을 쥐기 위해 다투고 조악한 기습전을 남발하고 실로 파멸 적인 작전 자바워크에만 열을 올리는 둥 약점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카론의 분석력은 그 약점을 포착했다. "이자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카론은 적 장교를 생포해서 얻어낸 정보를 듣고는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어떤 포로들도 이자벨이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숨기고 있거나 자신은 모른다는 정도가 아니라 군 내부의 누구도 알지 못하며 단지 텔레마코스를 통해서만 명령을 전달받는다는 것이었다. "이상해." 카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어떤 불길한 추측이 머 릿속을 스쳤다. 수사관이었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었던 추리력이 었다. '설마!' 곁에 있던 부관은 조각 같은 카론의 표정에 금이 가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결사대가 자신을 죽이러 코앞에 들이닥쳐도 냉정 그 자체였던 카론이 갑자기 무신 이유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카론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도를 가져와!" "예? 작전 지도는 여기 있습니다." "그거 말고 베르스 지도를 가져와라. 당장!" 이 판국에 어째서 후방 지도를 찾는단 말인가. 부관은 어리둥절 한 얼굴로 지도를 들고 와 테스크 위에 펼쳤다. 카론의 투명한 흑청색 눈동자가 그 지도를 훑었다. 곧 그의 입술 에서 신음소리가 터졌다. ".....셀른." "예?" "즉시 셀른으로 부대를 급파해!" "세, 셀른이 어디입니까?" 콘스탄트 출신의 부관이 베르스의 작은 소도시를 알 턱이 없었 다 카론은 급히 코트를 입으며 말을 정정했다.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10분 내로 준비를 마쳐라." "예에?" 전시에 지휘관이 작전 지역을 이탈하다니! 부관을 비롯한 모든 참모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카론은 길게 말할 겨를이 없다는 듯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이자벨은 셀른에 있다." 사람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카론이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카론 의 추리를 감탄할 실마리조차 없었지만 그의 추리에는 분명 확실 한 단서가 있었다. 인코그니토의 경솔한 기습작전이 도리어 카론 에게 단서를 준 것이다. 수백 기의 기병대가 아무도 모르게 국경을 넘어 왕실을 습격하 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 에 이미 베르스 내부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규모의 부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기 가 장 좋은 곳이란 이미 폐허가 된 도시 셀른이었다. 카론은 키스와 엔디미온을 떠올렸다. 현재 행방불명된 그들 역시 셀른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흥. 바보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발걸음은 점 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9 "후후, 처음부터 불었으면 이런 꼴 안 당할 텐데 말이야." 반란을 일으킨 인코그니토의 간부들이 이자벨을 바라보고 있었 다. 의자에 묶여 있는 이자벨의 온몸은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 모든 고문에도 그녀는 자바워크를 기동하는 암호를 알려주기 는커녕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치사량에 가까운 자백제에는 그녀도 견디지 못했다. 그 녀의 발밑에는 주사기들이 널려 있었다. 비극적이게도 그 약물을 만든 사람은 이자벨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경비병이 들어왔다. "리젤 경이 왔습니다." 간부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리젤은 이자벨의 심복 중 심복이다. 이자벨이 이런 꼴이 된 것을 보게 된다면 당장 자신들을 죽이려고 들 것이 뻔했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무장해체 시키고 포박해서 데려와." "하지만....." "닥치고 내 명령대로 해! 허튼 짓 하면 이자벨을 죽여 버리겠다 고 전해." 칼자루는 이자벨의 목숨을 죽고 있는 간부들 측에 있었다. 잠시 후, 리젤은 두 손을 둥 뒤로 묶인 채 끌려왔다. 그는 고개를 꺾은 채 정신을 잃은 주인을 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곧 구해드릴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간부 하나가 리젤의 머리에 총을 겨눴다. "우릴 원망하지 마라. 대의를 위해서는 이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신입니까? 이자벨 님을 저렇게 만든 게?" 리젤은 총을 겨눈 상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상식 밖의 행 동에 간부가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리젤을 묶은 밧줄이 거짓말처 럼 풀어졌다. 실은 처음부터 묶여 있지 않았다. "자, 잠깐만!" 리젤은 마치 장난감 다루듯 상대의 손목을 비틀어 권총을 빼앗 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두 눈을 깊이 찔렀다. 찢어지는 비명 속에 서 리젤이 다른 간부들을 향해 웃었다. "잘 보세요. 당신들도 곧 이렇게 될 겁니다." 리젤은 두 눈을 움켜쥔 체 비명을 내지르는 간부의 머리에 총구 를 대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귀가 울리는 총성과 함께 비 명이 끊어졌다. 그 순간 간부 중 하나가 이자벨에게 뛰어갔다. "함부로 움직이면 이 여자를 죽...." 리젤은 무표정하게 그를 쐈다. 정확히 머리가 관통된 그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는 싱글실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경고입니다. 이자벨 님 근처라도 가면 죽게 됩니다. 뭐, 어차피 다 죽이겠지만." "겨, 경비병! 뭐하나! 어서 저놈을 죽여!" 하지만 리젤 뒤에 서 있는 경비병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간부 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처음 리젤을 포박하지 않은 것부터 경비병 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일반 병사들과 친한 쪽은 리젤이지 간부들 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이자벨 님께 충성을 맹세하시는 분들은 살려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석게 판단력이 좋은 간부 하나가 뛰어나와 무 릎을 꿇었다. "주, 죽을 죄를 졌습니다. 평생 여왕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총구가 불을 뿜었다. 리젤은 고개를 조아리다 즉사한 시체를 바 라보며 흥얼거렸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간부들은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절망의 시선으로 리젤을 바라봤다. 개중에는 바지가 젖은 사람들도 있었다. 피와 오물이 한테 뒤섞여 지저분한 악취가 피어올랐다. 리젤은 총을 버렸다. 아무래도 총은 저들에게 너무 자비로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분노의 끝에 달하면 통제할 수 없 는 웃음이 나온다고 한다. 그는 병사의 검을 받아 들고는 활짝 웃 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어린애처럼 왜들 그래요? 그냥 포기하세요. 그래야 덜 아파요." 제34화 영혼이 잠드는 곳 1 힘겹게 검과 검을 마주하던 키스는 순간 믿겨지지 않는 모습을 포착했다. '설마?' 키스는 눈을 의심했다. 키릭스의 검술 속에서 빈틈을 본 것이었 다. 그것은 자세가 바뀌는 찰나의 순간 반짝였던 틈으로 마치 새 햐얀 백자 밑바락의 미세한 흠집처럼 빈틈이라 할 수조차 없는 사 소함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검술의 천재인 키릭스다. 키스는 조심스러웠다. 어쩌면 그것조차 키릭스가 파놓은 함정일 수도 있었다. "왜 표정이 그래? 피를 너무 쏟아 정신이 이상해진 거냐?" 키릭스는 자신 있게 밀고 들어왔다. 그때 또 다시 그 빈틈이 벌 어졌다 닫혔다. 어쩌면 카론도 그 빈틈을 발겼했던 것일지도 모 른다. '어째서....' 키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키스도 키릭스도 기적 따위는 빋지 않 는다. 그러니 갑자기 하늘이 키스에게 키릭스의 빈큼을 알려줬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키릭스 본인도 모르는 키릭스의 약점 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가. 진짜는 가짜보다 완벽하다. 그러니 키스는 더 완벽한 키릭스의 빈틈을 볼 수 없어야만 했다. 그 순간 키스의 온몸에 충격파가 밀려왔다. 미쳐 흘려내지 못한 키릭스의 검이 키스의 것과 맞부딪친 것이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키스의 검이 산산이 깨졌다. 그는 튕기듯 밀려나가 거세게 벽과 충돌했다. "크윽!" 키스의 입에서 다시 피가 터졌다. 허리가 부서진 것 같은 통증이 머리끝까지 몰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키스는 입술을 꽉 깨물며 별에 의지해 떨리는 몸을 지탱했다. 이대로 정신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뭐야. 그 한심한 꼴은? 카론도 지금 네 모습을 봤으며 좋았을 텐데 말이야." 키릭스의 조롱이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는 마지막 일격을 위해 자세를 바꿨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벽을 박차며 키스가 뛰어 들었다. 물론 키 릭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가련할 정도로 필사적인 키스의 공격 따위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두 자루의 검이 키스의 등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둘의 그림자가 뒤엉키며 움직임이 멈췄다. 그 정적 속에서 키릭스가 중얼거렸다. ".....뭐야. 이거." 키릭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심장을 찌른 검을 바라봤다. 부서져 밑동만 남은 키스의 검이 집착처럼 밖혀 있었다. 초보자도 안 하는 실수. 키릭스는 피식 헛웃음을 내뱉으며 칼을 뽑았다. "역시 이자벨의 말이 맞았군." 꿰뚫린 상처 속에서 뜨거운 혈액이 분출했다. 고통스러울 법도 할 텐데 키릭스는 마치 승리자 같은 미소와 함께 키스의 뺨을 메 만졌다. 피에 젖은 그 손이 창백한 뺨을 슬고 지나가자 키스는 불쾌한지 거세게 고개를 돌렸다. 키릭스가 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부터 뭐할 거야? 베르스로 돌아가 카론을 만날 거야?" "마지막까지 기분 나쁜 농담은 하지 마시죠. 여기가 우리 무덤 이니까." 키릭스가 죽으면 키스도 죽는다. 서로를 미워하는 둘에게 이자 벨이 이어준 치명적인 공생 관계. 그런데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소 리만 하는 키릭스를 키스가 쏘아붙였다. 하지만 키릭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자벨이 여기 오기 전에 재미있는 과학 상식 하나를 알려줘 어. 그래서 뭐라고 했냐하면....." 키스의 귓가에 자조에 젖은 키릭스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영혼은 인간구성의 최소단위라서 더 이상 나눌 수도 공유할 수 도 없다는 거야." 키스는 멍한 얼굴로 그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점점 더 그 '파멸의 공식'이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되며 키스의 표정도 변했다. 여우같은 두 눈이 두려움으로 떨리 기 시작했다. 키릭스가 쿨럭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난 영혼이 없는 존재래." "닥쳐! 거짓말! 헛소리! 미친 자식!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대체 어디서부터 속고 있었던 것일까. 키스는 비명에 가까운 고 함을 쏟아냈다. 키릭스는 그런 겁먹은 키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 꼬리를 올렸다. "자아, 키스라는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 어떠신가.... 키릭스 세자르 씨." "닥쳐! 난 키스야!" 그 찢어지는 절규에 키릭스가 대답했다. "곧 알게 되겠지. 내가 죽어도 네가 살아 있다면 넌 키릭스야." "아니야! 그럴 일은 없어!" 키릭스는 쿨럭이며 웃었다. 이제는 고통에도 증오에도 현실김 이 없었다. 종이를 오려 만든 달처럼 모든 것이 창백하고 얄팍했 다. 하긴, 따지고 보면 누가 인생이다 다 그렇지 않던가. "내가 말했지? 네 죽음을 박탈하겠다고. 넌 이제 영원히 키스로 는 죽을 수 없어. 꿈을 깨라. 네 인생 지금 돌려주마. 비록 형편없 이 일그러진 인생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노력한다면 조금쯤은 어린 시절부터 갇혀 있던 그 황무지에서 빠져나올지도 모르지." ".....키릭스" "살아라. 그게 내가 너에게 주는 가장 큰 고통이다." 그 나직한 속삼임이 복도를 울렸다. 그는 복도 끝에서부터 불어 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 길고 긴 복도를 잇댄 가스등의 불빛 들이 조금씩 무채색에 잠겨갔다. 그 희박한 의식 속에서 키릭스는 키릭스를 바라봤다.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혈액을 느꼈는데 항시 그 속에서 끓어오르던 증오가 이제야 식어가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닥을 그리던 혈선들이 천천 히 죽어갔다. 키릭스는 난생 처음 아늑함을 느꼈다. 죽음의 직전에야 편안해 질 수 있는 불행한 행복. 그 거대한 졸음 속에서 그는 또 다른 자신 을 향해 말했다.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서 춤추는 자로구나. 이제 더 이상 황무지의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희미하게 웃 는 키릭스의 두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2 카론이 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셀른에는 어슴푸레한 페허의 잔 영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부관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 적의 우두머리가 있을 리 가....." "수색해. 반드시 있다." "하, 하지만 지금은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지금은 전쟁 중이다. 이 사실을 무시무시한 사령관 키르케가 알 았다가 자신까지 문책 당할 것을 생각하니까 오금이 다 저려왔다. 하지만 카론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피 냄새가 난다." "예?" 부관은 코를 킁킁거렸지만 코가 얼어붙을 것 같은 새벽의 냉기 만 들어오자 재채기를 했다. 하지만 카론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기지에서 올라오는 지독 한 혈향을. 그때 선두에 있던 병사 한 명이 달려와 외쳤다. "민간인 2인을 발견했습니다!" "민간인?" "금발의 청년과 소녀입니다. 모두 부상이 심합니다." 곧이어 나타난 그들을 보자 카론의 눈동자가 커졌다. "엔디미온 경!" "....카론 경." 미온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퍼졌다. 만신창이가 된 그는 목숨처 럼 베아트리체를 품고 있었다. 그에게 달려간 카론이 외쳤다. "괜찮은가? 지금 치료해 주겠다." "고마워요. 나보다 베아트리체를 먼저....." "그런데 키스는 어디 있나." 미온은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카론은 일부러 냉정하게 재 촉했다. "말해라. 지금 어디 있나." "키스 경은......" 그때였다. 카론은 미묘한 진동에 마른 가지를 떨구는 고목을 바 라봤다. 그리고 그 진동이 전전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카론이 병사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 몸을 숙여!' 병사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찰나 거대한 폭음과 함께 대지가 울 렸다. 지진을 방불케 하는 진동에 놀란 말들이 울부짖으며 병사들 을 떨어트렸다. 거대한 폐허들이 무너져 내리며 굉음을 뱉었다. 미온이 베아트 리체를 꽉 껴안으며 소리쳤다. "지, 지하 기지가!" 그리고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격을 보았다. 우레와 같은 괸음과 함께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기둥들이 하늘 높이 치솟은 것이다. 연쇄 폭발한 지하 기지의 불길이 하나둘씩 환풍구를 타고 속구 쳐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뭐, 뭐야!" 셀른 중심부에서부터 시작된 함몰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 다. 마치 이 땅이 도시 전체를 집어 삼키려는 것처럼 그 아가리가 커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카론을 바라봤다. 카론이 날카롭게 명령했다. "즉시 도시 밖으로 탈출한다!" 미온이 카론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카론 경." "시간 없어! 너도 빨리....." "키스 경은 저 안에 있어요." 그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카론은 표정 잃은 얼굴로 셀른을 바라 봤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화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3 의무병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던 미온은 무엇인가를 목겨했 다. 그의 시선을 살짝 스쳐간 사람이었다. 미온이 그곳으로 가려 하자 의무병이 만류했다. "혼자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저어, 금방 갔다 올께요. 베아트리체를 치료해 주세요." 의무병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한 미온은 숲 속으로 뛰어갔다. 곧 이어 한 청년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틈인가 콘스탄트 군 복을 입고 있었지만 미온은 금방 그의 정체를 알아첼 수 있었다. "리젤 씨!" 리젤은 모자를 벗으며 미온을 돌아봤다. 그는 멋쩍은 듯 뺨을 긁 적거리며 웃었다. "당신에게도 들킬 정도라니 이제 어디 가서 첩보원이라는 말도 못하겠군요." 이자벨의 명령으로 기지를 폭발시킨 사람은 바로 리젤이었다. 이자벨은 문제가 벌어지면 증거를 없앨 생각으로 처음부터 대량 의 초강력 폭약을 기지 곳곳에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이자벨 다운 결벽이었다. "이자벨 님은 어디 있습니까?" "음, 마차에 계세요." "도망치지 말아요. 이제 갈 곳도 없잖아요." 그 말에 리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세상엔 이자벨 님의 능력을 탐내는 권력 자들이 너무도 많답니다. 심지어 이 세상 밖에서도 이자벨 님을 월하고 있어요. 이자벨 님에게 베아트리체를 제공하고 마라넬로 황제에게 키릭스의 어머니를 제공한 것도 그들이었으니까. 뭐, 필 요하다면 다시 콘스탄트와 손을 잡을 수도 있어요." "그, 그런....." "엔디미온 경, 우린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항상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도 평 화도 아닌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야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마술 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배신하고 착취하고 잔 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자벨이 인간에게 절망한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자벨 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제가 설득할 수 있어요!" "에에, 하지만...." "리젤 씨도 이자벨 님이 더 이상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잖아요! 그분이 속죄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요. 부탁이에요." 리젤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잠시 생각하던 리젤 이 결국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은 믿을 수 있어요." 마차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리젤과 함께 마차 로 걸어가는 미온은 희망을 느꼈다. 이번에는 그녀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목에 얽혀 있는 사실을 끊어주겠다고 다 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간은 희망보다 한 발자국 앞서갔다.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그 사슬을 끊었던 것이다. 타아아아아아앙 마차 안에서 울린 총소리에 새들이 날아올랐다. 막 해가 떠오른 숲에는 투명한 빛줄기들이 내리고 있었다. 공기는 맑고 투명했으 며 밤새 얼어붙은 이슬들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지친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기에 어울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최종화 THE END OF SWALLOW KNIGHTS TALES 1 "아아아, 이런 날 늦잠이라니이이이!" 나는 이른 아침부터 새하얀 스왈로우 나이츠 제복을 차려 입으 며 본당으로 뛰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왕궁 사방에 걸려 있 는 베르스와 이오타의 국기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의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 국왕 전하와 이오타의 쇼메 블룸버그 국왕이 관세동맹을 맺는 날인 것이다. 베르스와 이오타가 동등한 입장에서 손을 잡을 날이 오리라고 는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 감개무량한 공휴일에 나는 왕실에 지명되어....잡일을 하러 뛰어가고 있다. 나는 내 옆에서 뛰고 있는 쇼탄을 보며 말했다. "쇼탄 공도 지명이에요?" "그게 아니면 내가 왜 휴일 아침부터 전력질주를 하고 있겠냐. 말 시키지 마라. 숨 찬다." 전쟁이 끝난 뒤 왕실은 쇼탄에게 세 개의 훈장과 백작 작위를 하 사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빚은 전혀 안 갚아 준 것이다.(게다가 전쟁 중에도 이자가 붙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나 먹는다고 권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쇼탄은 결국 예전처럼 몸으로 때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늘도 쇼탄 백작은 귀빈들에게 음식을 나르기 위해 전력으로 뛰 고 있는 것이다. 힘내라 백작 나리! 아, 참고로 나는 스왈로우 나이츠가 왕궁을 사수할 때 없었다는 이유로 전혀 작의를 주지 않았다. 하하하, 어차피 내 인생 이러니 까....라고 마냥 웃기에는 가끔 눈물이 난다. "그런데 루이 공도 돈 벌러 가요?" 나는 반대쪽을 바라봤다. 루이 백작이 뛰고 있었다. 그가 술에 덜 깬 얼굴로 투덜거렸다. "한 마디도 하지마, 토 나올 거 같아." "....." 이쪽도 비렁뱅이 백작이었다. 놀랍게도 바람둥이의 로드맵 같 던 루이는 우리 중 가장 먼저 결혼했다. '미녀들은 세상의 보배' 라고 부르짖는 그가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굳이 말 안 해도 짐작하실 수 있으시리라.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유식을 사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루이 백작의 모습은 꽤나 대견해 보인다. 아, 그리고 루이는 자기 자식을 호스트 시키겠다며 애를 낳기도 전부터 나를 대부(大父)로 삼았다. 그런데 낳고 보니 딸이었다. 뭐 가 뭔지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까 최근 크리스 소식 들었어요?" "엽서 왔더라. 십일조 내라고." "....." 크리스티앙은 성직자가 되어 스왈로우 나이츠를 떠났다. 작위 대신 성직을 달라고 전하에게 간청했던 것이다. 완전복종 오르넬 라 성녀님의 총애를 받는 크리스에게는 성직자의 엘리트 코스가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성직은 희생'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빈민촌 의 신부를 자청해 구호소를 운영하고 있다. 정말 훌륭한 녀석이 다. 그 구호소의 운영비를 우리한테까지 뜯어내고 있다는 점만 빼 면 말이다. "랑시한테도 소포 왔어요. 열심히 격투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치마 입었을 때가 좋았지." 랑시는 형 무라사 씨와 함께 발랑을 떠났다. 왜지 가기 싫어졌다 고 게으름을 피우는 무라사를 뻥뻥 걷어차서 끌고 나갔으니 참으 로 대단한 기세다. 확실히 랑시도 무라사 집안의 남자가 맞는지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면 년 만에 나보다도 키가 훌쩍 커버렸고, 킥으로 나무를 쪼개고 주먹으로 자연석을 깨며 검으로 철판을 자 른단다. 이 분위기에서 스커트를 입으면 엄청 위험한 남자가 되어 버리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치마를 입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올해 중에 올 것 같다. 어쩐지 긴 머리를 뒤로 묶고 두 손을 붕대로 검은 채 가늘고 날카로운 눈 매로 눈웃음을 보일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엄청나게 기대된다(아 니, 솔직히 좀 무섭다.) 그런데.... 돌아와도 이제 지명보다는 경호 업무로 파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 맞아, 미온. 레녹이 오늘 오전까지 금주 결산 보고서 올리라 고 어제 말했어." "으아아아아! 그런 건 빨리 말해줘요 좀!" 레녹은 행정부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작위를 받는 대신 '업무 지옥' 이라 불리는 용의 굴 행정부 직원을 자청한 것이다. 사실 레녹은 아이히만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 긴, 오직 업무능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행정부는 레녹의 깐깐 한 성격에 가장 어울리는 곳일지도 모른다. 현재 그는 스왈로우 나이츠의 손익 실적을 담당하며 언제 동료 였냐는 듯 우리들의 목을 콱콱 조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레녹에게 보고서를 올리냐고? 아, 애기 안 했던가? 난 키스 경의 후임으로 새로운 스왈로우 나이츠의 단장이 되었다. 덕분에 하루하루가 살인적으로 바쁘다(키스가 얼마나 게울 렀는지는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으음, 본래 단장은 루시온 경이 맡아야 하지만 그 양반도 스왈로우 나이치를 떠났다. "오늘 루시온 경도 오나요?" "바빠서 못 올 것 같다는데?" "우와. 진짜 섭섭하구먼." 루시온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가문으로 돌아갔다. 자기의 인 생을 외면하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지극히 '루시 온 스러운' 말을 남기고. 자신의 가문을 경멸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싫다면 스스로 바꿔야 한다. 가문 안에서부터 말이다. 자신의 가문을 이어 받은 루시온은 1년 만에 아버지의 무역업을 볓 배로 성장시켰다. 지금은 쇼메 국왕과 순을 잡고 세계 무역 시 장을 뒤흔들고 있다. 오늘 이오타와 무역동맹을 맺은 것도 루시온의 힘이 크다. 어쩌 면 이사람, 20년 정도 후에는 세계를 지배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 움마져 든다. "지스킬도 안 와요?" "귀찮으니까 이쪽에서 오래." "거기까지 어떻게 가!" 지스킬 윈터차일드는 현재 옛 마키시온 제국의 소드람에 있다. 지스의 불치병은 20대를 넘기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치 료제를 만들기 위해 연구소에 들어간 것이다. 내가 메데이아 교수를 소개시켜 제자로 들어갔는데 곧이어 교 수님으로부터 '무지무지 귀여워'라는 답장이 왔다. 그 성격파탄 의 어떤 부분이 귀엽다는 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여자들의 마 음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만 이 모양이야?" 나와 쇼탄 루이가 동시에 투덜거리며 뛰었다. 에, 그러면 영광스 러운 스왈로우 나이츠의 멤버가 이제 오갈 곳 없는 우리 세 명만 남았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설마! 그레서야 장사가 되겠는가. 현재 스왈로우 나이츠의 지명 기사는 약 250명. 쌍둥이 집사들 을 포함한 관리직은 자그마치 천 명이 넘는단다. 에헴! 왕실이 전국의 귀부인들을 모조리 등쳐먹을 야망이라도 품고 있는 거냐! 라면서 격분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에에, 실은 여 기에는 말 못할 이유가 좀 있어요. 그 이유는 잠시 후에 보여 드릴 게요. 우리는 헐떡거리면서 걸음을 멈췄다. 분홍빛 꽃잎이 날리는 본 당 앞은 각국에서 초청받은 귀빈들의 입장행렬이 붉은 카펫 위 가득 했고, 귓속 가득 들어차는 웅장한 파파르가 울려 퍼지고 이 었다. 2 거대한 연회장은 베르스와 이오타의 동맹을 축하하러 온 전 세 계의 내빈들로 가득했다. 이것만 봐도 베르스가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백만 대군을 거 느린 강대국이 된 것도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이 나라에 굶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장담하건데 이게 세계정복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나는 위고르 대공의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그의 목에 타이를 감 아줬다. 이런 커다란 행사는 처음인 위고르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 로 물었다. "엔디미온 경, 어때. 나, 괜찮아 보여?" 위고르 님은 전쟁 후 그 수훈을 인정받아 아이히만 대공의 뒤를 이어 국가 유일 대공 칭호를 하사 받았다. 게다가 최초의 총리대 신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만인지상 일인지하(萬人之上 一人之下)! 왕국의 2인자라 해도 과인이 아니다. 지금쯤 하늘에서는 아이히만 할아범이 '푸하하하하! 이제야 기 저귀를 땠구나, 애송이!'라는 악담을 퍼붓고 있으리라.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멋져요. 어떤 여자도 반할 것 같....흐읍!" 위고르는 황급히 내 입을 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그런 말 좀 하지마! 마누라님이 들으면 내 목을 뽑아 버릴 거야!" 게다가 여전히 공처가였다. 그때 연회장 가득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페르난데스 라스팔마스 국왕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곧 성대하게 국가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훤칠한 청년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탄성을 쏟았다. 나조차도 (분하지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페르난데스 전하의 용안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위험천만한 속삭임들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 했다. "아아, 누구와 혼인하실까. 아니, 평생 결혼 같은 거 안 했으 면." 그럼 이 왕국 대가 끊기는뎁쇼? "하룻밤이라도 좋으니까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싶어라." 침대만 빌려주는 거라면 들어줄 수 있을지도..... "저대로 냉동시켜 평생 저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남의 국왕 멋대로 죽이지 마! 페르난데스 국왕 전하의 키는 키스만큼이나 훤칠하게 커버렸 다. 만두 선왕님의 키와 비교하노라면 새삼 대자연의 신비에 감탄 하게 된다. 또한 여전히 부드럽고 기품이 넘치지만 예전의 연약한 인상은 모두 사라져 온몸이 남자다운 당당함으로 가득했다. 부디 진화는 이쯤에서 멈추고 만두 선왕님의 형상으로 발전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발칙한 소망이 있다. 그때 제냐 공주님이 갑자기 걸어 나와 내빈들에게 손을 흔드는 오빠의 팔을 점프해 잡아챘다. "모두에게 발표하겠다! 난 오빠랑 결혼할 거야. 자! 어서 축하 해!" 그 순간 국가를 연주하던 파이트 오르간 연주자가 너무 놀라 건 반을 내려찍었다. 콰과과과광! 하는 세기말의 효과음과 함께 연회 장은 경악스러운 적막에 잠겨 버렸다. "....좆됐다." 위고르가 세계 멸망이라도 본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 사람들 의 얼빠진 표정을 살피던 제냐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아하하하, 역시 공주님의 개그 실력은 정말이지.... 심장 터지 는 줄 알았잖아요! "하지만 기억해 둬. 오빠와 결혼하는 여자에게는 저주를 내릴 테니까! 오호호호호!" 어쩐지 농담이라는 말을 남기지 않는 제냐 공주님이 퇴장하자 내빈들은 '방금 뭐였지', '뭐냐, 이나라' 라는 황망한 얼굴로 웅성 거렸다. 죄송합니다. 사실 이게 그다리 밝히기 싫은 우리나라 고유의 분 위기랍니다. 사회자는 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파국을 막으려 애쓰고 있 었다. "예, 예정에 없던 제냐 공주님의 축사가 있었습니다. 그럼 이오 타에서 내방해 주신 위대한 쇼페 블룸버그 국왕계서 입장하십니 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눈썹을 움찔했다. 곧이어 경쾌한 이오타 국가가 울려 퍼지며 금발의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사람 들은 또 다시 경악했다. "허억! 저, 저런!" 쇼메는 검은 가죽 바지에 붉은색 재킷, 그리고 선글라스 차림이 었다. 게다가 자기 나라 왕관을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긍 돌리며 귀찮다는 듯 들어오는 게 아닌가. 쇼메를 처름 보는 사람도 '저 사람 성격 나쁘다!' 라는 것을 단박 에 느끼게 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으이구, 철 좀 들어!'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쇼메는 무릎을 꿇은 내 빈들을 훑어보며 툭하고 내뱉었다. "됐으니까 일어나용. 난 이것 말고도 할 일이 많으니까." 콘스탄트에서 바쉐론 국왕과 거래를 한 쇼메는 전쟁이 끝난 뒤 바쉐론이 눈물을 삼키며 내 준 군대를 몰고 이오타로 돌아갔다. 곧바로 불순 세력들을 숙청하고 왕위를 거머쥔 쇼메는 마치 마 술처럼 빠른 시간 안에 무너진 이오타를 재건했다(물론 그 마술의 비밀은 쇼메가 바쉐론에게 뜯어낸 거금이었다.) 인트라 무로스를 부활시킨 쇼메는 스스로 그 막강한 방첩기관 의 국장을 겸임하며 내전 중이던 옛 마키시온 제국령의 왕국들을 이리저리 뒷조종했다. 그런 사정 안 봐주는 책략으로 쇼메는 5년 만에 옛 이오타의 두 배에 달하는 영토를 확장했던 것이다. 그는 마치 날개 돋은 사자 와 같았다, 라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쳇." 그래, 잘난 거 인정했다. 사후에 대황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해 도 이상할 게 없어. 하지만 말이지 난 마냥 쇼메를 찬양할 수는 없단 말이지. 설령 쇼메가 우주를 정복해도 마찬가지야. 왜냐하 면...... 3 무역동맹에 합의한 전하와 쇼메는 담소를 위해 응접실로 향했 다. 그리고 불행하면서도 불길하게도 내가 그 접대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날 지명한 인간이 말할 놈의 쇼메였다. "야, 천민. 이런 짓 하려고 내 제안 거절한 거냐?"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차를 따 르는 내 귓가에 숨 쉬듯 자연스러운 쇼메의 빈정거람이 들렸다.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닥치고 차나 드세요. 국왕님아." "맛없어." '이 짜샤! 마셔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결국 부글거리며 폭발한 내 얼굴을 본 쇼메가 담배를 피워 물고 는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타.와." 대체 이 양반이랑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기에..... 나는 차 수레 를 힘차게 몰아 쇼메와 충돌해 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꾹꾹 누르며 다시 홍차를 타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금을 듬뿍 넣어서. 자, 냉큼 마셔라. 마시고 피를 토하란 말이다. 망할 쇼메! "이번엔 맛있어?" "그럼요." "그럼 네가 마셔." "네?" 확실히 쇼메는 왕이 되더니 더욱 영악해졌다. 안 좋은 쪽으로. "네가 다 마셔. 당장." "아하하하하. 소인이 어떻게 국왕님의 차에 손을....." "안 마시면 동맹 취소할 거야. 너 하나 때문에 이 나라가 위태롭 게 돼도 괜찮아?" "조, 좀 많이 치졸하시다는 생각 안 하시나요?" "원래 정치는 치졸한 거야. 마셔. 주욱." 낭패다. 예전보다 소금 두 배는 많이 탔는데!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일일 권장 나트륨 섭취량의 네 배 를 들이켰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미소와 함께 쇼 메가 말했다. "맛있지?" "네.... 짭짤하게 간이 된 것이 아주 일품이네요." "그래, 국왕한테 개기면 이렇게 되는 거야." 쇼메는 내 이마를 쿡 찌르며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쇼메는 나를 자신의 기사로 지목했고 물론 난 단박에 거절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검술도 형편없고 그렇다고 두뇌회전이 비상 하지도 못한 내가 무슨 수로 쇼메를 지킨단 말인가. 이오타의 왕이 된 쇼메가 위험에 처하기라도 하면 가까스로 안 정된 세계가 다시 혼돈에 빠진다. 게다가 쇼메는 적도 많다. 그렇 기에 그의 기사는 카론 경이나 미레일 경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A+ 등급이어야 했다. 하지만 내 깊은 뜻도 몰라본 쇼메 이 양반은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런 지긋지긋하고 유치찬란한 방법으로 착한 사람 희롱하는 것 이다. 매우 뒤끝이 않좋은 사나이였다. "하하. 항상 두 분은 사이가 좋은 것 같군요." 맞은편의 페르난데스 전하께서 웃으며 말하는 순간 우리 둘은 극약을 마신 표정으로 전하를 바라봤다. 역시 전하가 한 수 위다. 쇼메는 더 이상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4 쇼메는 너무도 일찍 이오타로 돌아갔다. 식사조차 돌아가는 마 차에서 해결하기로 했단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 이었다. 아이히만이 그러했듯 그도 아마 평생을 숨차게 살아갈 것이다. 예전 니샤 왕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함께 했던 마차 안에서 그가 나에게 말했었다. 몹시도 지친 목소리였다. 그거 알아? 미친 짓을 하면서도 미치지 말아야 한다는게 가장 힘들어 어쩌면 키스 경도 이자벨 님도 아이히만 대공도 마라넬로 황제 도 라이오라 씨도 키르케 씨도 그리고 키릭스 씨도 쇼메가 말한 그 무서운 딜레마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가 나를 기사로 ㅈ목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선글라스를 쓰며 마차에 올라타는 쇼메의 뒷모습이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 나 는 불현듯 그에게 달려갔다. "쇼메!" 근위병들이 검을 뽑으며 나를 가로막았다. "무업하다! 떨어져라." "천민, 또 뭐냐?" 쇼메는 손짓으로 근위병을 물렸다. "조만간 놀러갈게요. 같이 미레일 경 묘소에 들려요." 선글라스 너머에 있는 쇼메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 려다가 다시 입을 다문 그는 곧 콧웃음을 치며 마차에 올라탔다. "맘대로 해라. 번거로운 녀석." 시선을 피하는 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지나간 것 같았다. 5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온 나는 군중들 속에서 성령을 목격했다. "와아! 오르넬라 성녀님!" "어머나. 미온 구운. 너무 오랜만이야." 성령이 내 얼굴에 담배연기를 뿜었다. 술 냄새, 담배 냄새, 향수 냄새. 타락의 삼위일체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무신론자 성녀님 그대로였다. 아하하하. 지나치게 여전하십니다. "잘 지내고 계세요?"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이미 훤히 보이지만. "그러엄. 신앙으로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단다." ".....다른 부분도 충만하신 것 같습니다만." 오르넬라 님을 다시 만난 것은 전쟁 후 지금이 처음이다. 이분도 그만큼 바빴던 것이다. 화형 집행을 기다리며 교황청에 감금되어 있던 성녀님은 신전 기사연합이 쿠데타를 일르키며 풀려나게 되었다. 교황 레오3세 가 죽은 후 교황청의 요직들을 독점하려 했던 추기경 집단에 대한 군부의 반발이었다. 성기사들은 무의미한 성전으로 국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명 분으로 각 교구의 간부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유수시켰고, 대신 새 로운 지도자로 오르넬라 성녀님을 추대했다. "기사단장의 뺨을 때렸다는 소식 들었어요.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오르넬라 님이 그녀를 옹립하려는 신전기사연합 단장의 뺨을 힘차게 후려갈겼다는 소식은 이미 전설이다. 그녀는 실웃음을 보 이며 대답했다. "신의 목소리를 들었거든.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르는 놈은 후려 쳐 버리라고." "맙소사." 그녀는 화가 났던 것이다. 누구는 눈물을 머금고 교황을 죽여야 했는데 이놈들은 정신 못 차리고 빈 왕좌를 서로 먹겠다며 엎치락 뒤치락 하는 꼬락서니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녀의 손에 신의 기운이 묻어 있었는지 기사단 장은 자신을 모욕한 오르넬라 님을 참수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 에게 임시로 교황청을 이끌어 달라고 간청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청을 들어 준 오르넬라 님은 지금까지 권력의 중심권 밖에 있던 가난한 신학자들과 변방의 신부들을 모두 불러 들여 공정한 투표와 심사를 거친 뒤 새로운 교황과 추기경들을 선 출했다. 그리고 자신은 쿨하게 물러났다. 현재 오르넬라 님은 남부와 북부 콘스탄트의 내전을 종식시키 고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아깝지 않아요? 최초의 여자 교황이 될 수도 있었는데." "권력이 세상을 향해 말했지. 너눈 내 것이다. 그러자 세상은 권 력을 왕좌에 앉은 죄인으로 만들었지." 오르넬라 님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랑이 세상을 향해 말했지. 나는 네 것이다. 그러자 세상은 사 랑에게 머물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 그래서 난 후자를 택한 거 야." 성녀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샴페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 다. 나는 빙긋 웃었다. 어째서 기사단장이 그녀를 죽이지 못했는 지 알 것 같았다. 6 얼마 후 나는 또 의외의 손님을 맞이했다. 바로 카론 경과 이멜 렌 님이었다. 이 세상에는 희귀병이 하나 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젊어지는 병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환자가 바로 카론 경이었다. 카론 샤펜투스 36세. 그런데 저 얼굴 어디에 36의 흔적이 있는 데? 이 세상 모든 36세 남성들에게 백번 사죄해도 모자를 죄악의 동안이었다. 게다가 이멜렌 님도 여전히 작고 인형처럼 귀여워서 모르는 사 람이 보면 카론 경 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얼레? "얼렐레?"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설마 저것이 착시인지 몇 번이나 확인했 는데도 아무래도 진짜로 보이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이멜렌 님에 게 뛰어갔다. "우아아아앗! 그건 대체 뭡니까아아아!" 나는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이멜렌 님의 배에 찰싹 밀착했 다. 그녀의 배가 살짝 불러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이런 굉장한 사건을 남몰래(당연하지만) 저지르다니! 나 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카론 경을 바라봤다. 이멜렌 님은 몹시 기쁜지 방글 방글 웃고 있었지만 카론 경은 싸늘한 어조로 내게 경고했다. "내 아내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호스트가 전염되니까." 아니, 호스트가 무슨 장티푸스입니까!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는 '얘야, 넌 절대 네 아빠같이 쌀쌀맞은 사람 되면 안된다. 인 생이 피곤해져요.' 라며 중얼거렸다. "엔디미온 경." "네?" "여전하구나." 카론 경은 이제야 엷은 웃음을 보였다. 나는 헤헤 웃으며 회답 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카론 경은 군복을 벗었다. 왕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겠다는 콘스탄트의 제안도 단숨에 거절한 그는 이멜 렌 님에게 돌아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계속 집필에 몰두하고 있 는 중이다. 테라스에 앉아 한가록게 책을 읽다 잠들고 때로는 부인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며 늦은 밤 고요한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카 론 경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우리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참 재미있는 사실인데 카론 경은 은퇴한 다음에 더욱 더 '은의 기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명예라는 것은 버렸 을 때 찾아오기 마련이다. "엔디미온 경, 키스 소식은 있나?"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씁쓸한 얼굴로 구개를 저었다. 카론 경도 나도 그날의 폭박에 휘말려 키스가 죽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지금쯤 또 어딘가에서 스왈로우 나이츠 같은 단체를 만들어 마음 껏 게으름을 피우고 있겠지. 고량이처럼 잠들어 있는 키스의 얼굴을 떠올리자 또 다시 눈물 이 고였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괴로움들을 혼자 다 가지고 떠나 버린 것 같았다. "때가 되면 돌아올 것이다. 단지 너무도 버리고 올 것이 많아 시 간이 걸릴 뿐이야." 친구니까 꺼낼 수 있었던 그 단호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카론 경은 예나 지금 이나 가심 시릴 만큼 따뜻한 사람이다. 7 마지막으로 만난 분은 알테어 님이었다. 그녀가 내 두 눈을 가리 며 물었다. "누구게?" "저어..... 보통 이런 장난은 뒤에서 눈을 가리고 하는데요." 그녀가 손바닥을 치우자 내 눈앞의 그녀가 순진하게 웃고 있었 다. 고개를 기울인 알테어 님의 얼굴은 아찔할 정도로 귀여웠다. 자제력이 부족한 사내라면 십중팔구 와락 껴안았으리라(그리고 생 을 마감한다.) "즐거우신 것 같아요." "그거야 미온을 만났으니까." 그녀는 헤헤 웃으며 내 두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신의 힘을 잃 은 알테어 님은 돌아와 달라는 교황청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더 이상 아신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신이었다. 교황청이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알테어 님은 꼭 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직책은 제복 디자이너였다. 뭐? 라고 반 문해도 답은 똑같다. 교황청에서 만드는 모든 옷은 이제 알테어 님이 디자인하게 되었다. "알테어 님, 최근 교황청 제복의 노출도가 심해진 것 같던데...." "왜? 시원하고 좋지 않아?" 여기 들어오면서 반바지 입은 교황청 근위대를 본 것은 역시 착 시가 아니었다. 하긴 그런 옷을 입고는 전쟁 못하겠지. 새로운 방 식으로 전쟁을 억제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키르케 님은 안 오셨나요?" "으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생겼어." "뭐, 뭔데요?" "친선차원에서 내가 키르케를 위해 만든 군복을 보냈거든. 그런 데 바쉐론 국왕이 보더니 마음에 드는지 계속 입으라고 했다나봐. 그 다음부터 연락도 다 끊고 잠적해 버렸어. 왜 그럴까. 이해가 안 가." "....전 이해가 갈 것도 같네요." 불쌍한 키르케 님의 절규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이참에 아예 군인을 그만둘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려던 찰나 알테어 님이 말했다. "미온." "네." "나 결혼해." 난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가, 갑작스럽네요." "나보다 두 살 많은 기사야. 좋은 사람이야. 다름 달에 할 거야."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일까.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내게 가장 먼저 달려온 분은 알테어 님이었다. 하지만 내 옆에 베아트리체가 있는 것을 보고는 말없이 교황청으 로 돌아갔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냐고 화를 내도 좋은데 그녀는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분명 펑펑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받 아들이려 애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결혼한다는 말에 섭섭한 마음이 들어 축하 한다느 말조차 하지 못하는 내게 화가 났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쉰 뒤에 그녀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축하해요." "......" "미안해요."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8 모든 행사가 끝나자 나는 어쩐지 힘이 빠져 집으로 향했다. 나도 왕궁 내에서 꽤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로 전하로부터 저택을 하사 받았다. 재미있게도 예전에 카론 경이 이멜렌 님과 살던 그 집이 었다. 물론 그리 큰 집은 아니지만 베아트리체와 같이 살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다녀왔어." "미온."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그녀를 구한 뒤 행운과 불 행이 함께 찾아왔다. 행운이라면 가망이 없을 거라 말했던 그녀의 정신이 비록 아주 느리지만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고, 불 행이라면.....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원의 꽃들을 매민지던 작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 다. 꽃향기가 맴돌았다. "오늘은 어땠어?" 그녀는 어눌한 발음으로 내게 물었다. 날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 자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방울질 듯 촉촉했다. 나는 그녀를 부드럽 게 안으며 속삭였다. "오늘도 좋은 일밖에 없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는 그때보다 더 잘 해줄 수 있으니까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처음부터 다시 그녀를 행 복하게 해주면 된다.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미온. 키스가 느껴져." "뭐?"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 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 있어?" 베아트리체는 눈을 감고는 추억하듯 말했다. "내가 태어난 곳에." 9 나는 새로운 업무를 위해 리더구트로 돌아갔다. 뭐랄까, 사실 이 쪽이 본업에 가깝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명을 기다리는 신입 기사들이 반짝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셨습니까. 단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단장님!" 사방에서 기세 좋게 인사를 하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례했 다. 어째 분위기가 영 달라졌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많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스왈로우 나이츠 단 여섯 명이서 왕실을 지켜냈다 는 포장하기 참 좋은 전설이 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더니 어쩐지 인 기 절정의 기사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게다가 평민이라도 미남 미소년이면 오케이니까 전 세계에서 지원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입단 조건도 무지하게 까다로워졌고(업계 용어로 물관리라고도 부른다.) 리더구트도 증충에 증축을 거듭해 정신 차리 고 보니까 펠리오스 무녀의 탑에 버금가는 메머드 급 남성 기숙사 가 만들어져 버렸다. 이째 이거 광기 같지만 아무튼 뭐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많 은 남정네들을 관리해야 하는 게 단장인 나 엔디미온 키리안이다. 이러니 내가 피를 토할 만큼 바쁜 것도 당연하지 앟은가(그런데도 왕실은 자꾸 날 내부 지명하고 난리다!) "단장님, 괜찮으시다면 이것 치우는 게 어떨까요." 신입 기사 한 명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풋풋한 소년이었 다. 그가 가리킨 것은 낡고 커다란 소파였다. "아무래도 내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치우면 안돼요." "예? 어째서...." "곧 저 위로 돌아올 사람이 한 명 있거든요." "누, 누군데요?" 나는 대답없이 그 소파를 쓰다듬었다. 방금 전까지 그 사람이 누워 있었던 것 같은 온기가 손끝에 전해졌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 믿어요."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기사에게 그렇게만 말하고 로비를 나갔 다. 그 사이에도 로비에서는 수십여 명의 기사들이 호명을 받아 지명을 떠나거나 지명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터미널 같았다. 나는 자하로 내려가 검고 두꺼운 문 앞에 섰다. 이 뒤는 통제 구 역이며 신전기사단 스왈로우 나이츠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곳이 기도 했다. 이곳을 지키는 열두 쌍둥이 집사들은 나를 보자 무표정한 얼굴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전쟁이 끝나자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 리더구트를 청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혹시 이 녀석들 리더 구트의 정령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후우. 또 일이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검은 문에 그것을 넣고 돌리자 커다란 문이 열리며 언제 봐도 대단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질서 정연하게 배열된 데스크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 곳에는 천 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서류를 작성하고 또 분류해 나갔 다. 또한 사방에 배치되어 있는 서른 명의 텔레...레이디들이 전 세계와 이어져 끝없이 정보를 받고 또 보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 바로 스왈로우 나이츠가 존재하는 이유다. 페르난데스 전하는 다른 범상한 국왕들과는 달리 정보의 중요성 을 알고 있었다. 단 한 줄의 정보가 수만 명의 사람들을 구할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이자벨 님의 지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전하는 나와 함께 스왈로우 나이츠를 왕실 정보기관으 로 재편하기로 결심했다. 지명은 더 이상 귀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철저하게 훈련받은 스왈로우 나이츠들은 제비처럼 전 세 계로 날아가 정보를 수집해 돌아온다. 때로는 위험을 미리 감지해 보고하며 때로는 첩보원이 되어 감시 활동을 하기도 한다. 실시간으로 시집되는 정보들은 남부 콘스탄트의 과일값부터 악 투르 군의 이동 경로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이 모든 정보들은 세 밀하게 분류되어 정보가 필요한 왕실의 각 부서로 보내지거나 비 싼 값으로 타국에 팔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스왈로우 나이츠다. 그리고 나는 이자벨 님 의 뒤를 잇는 셈이었다. 나도 많이 생각이 바뀌었다. 정의를 지키 기 위해 굳이 말을 타고 검을 뽑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늦으셨네요. 엔디미온 경." 서류를 잔뜩 들고 지나가던 리젤이 방긋 웃었다. 그가 기운을 찾 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여전히 좀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지만 종보에 관한 한 프로페셔널인 리젤이 아니었다면 이 방대한 조직 을 결코 완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조금 긴장한 얼굴 로 내게 말했다. "엔디미온 경. 어떤 사람들이 우리 축과 접촉하려 하고 있습니 다." "어떤....사람?" "세계 밖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강대국들과 은밀히 거래했다는 소문 외에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조종했던 자 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아트리체도 키릭스의 어머니도 이 자벨 님의 기계장치들도 모두 그들이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키스가 지금 그 '세계 밖'에 있지 않은가. 그런 그들이 왜 나를 만나려는 것일까. 혹시 아직까지도 숨겨져 있는 위험한 비밀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딪치지 않으면 아 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만나겠어요." "조심하셔야 해요. 이자벨 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놈들이예 요." "그러니까 더욱 더 만나야 해요." 어쩐지 이 일로 키스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 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10 어둠이 내리자 왕궁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준비된 마차를 탔고 아닌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집 이나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행렬에서 벗어나 언덕을 넘어 홀로 집으로 향했다.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에 몸을 웅크린 채. 이지러진 달무리 밑을 종종 걸음으로 걷던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봤다. 수풀 곳곳에서 반딧불이 빛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길은 예전 카론 경이 다녔던 길이었다. 또한 나와 키스가 다녔 던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 길을 다시 걷고 있다. 시 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스왈로우 나이츠에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햇빛이 포근 하게 내려앉은 리더구트에는 게으른 키스가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고 나는 도통 지명을 받지 못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신전을 청소하고 있었다. 카론 경은 싸늘한 냉기를 뿜으며 범죄자들과 싸 우고 있었고, 아이히만 대공은 쩌렁쩌렁 고함을 내지르며 행정부 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국왕 전하는 만사태평한 얼굴로 금동상을 닦고 있었다. 우리 왕국이 아니었다면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엉뚱한 사건들 이 매일 매일 터졌던 그날의 바람이 지금 이별을 고하며 내게 불 어왔다. 나는 그것을 한껏 들이켰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날들은 어느새 추억으로 변했고 나는 또 새로운 날들이 내 앞에 이어져 있는 것 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뒤를 돌아보면 그날로 돌아갈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추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가치를 지님을 나는 알고 있다. 추억이 때로 아픈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활 짝 웃으며 외쳤다. 고마웠어요!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게요! 불현듯 눈물이 흘렀지만 곧 닦아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소복이 쌓인 시간의 재 위에 하나둘 발자국이 찍혀갔다. (Swallow Knight Tales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