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은 괜히 해가지고 ────────────────────────────────────Prologue. 사천왕 최약체의 환생마왕군 집행군단장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그는 인간계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마왕군 소속의 사천왕 중 한 명이었다. 마왕군의 사천왕이라고 하면 인간들에게는 손짓 한 번에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메마르며 구르기 한 번에 지진을 일으키는 괴물들로 알려져 있었지만, 아르페는 달랐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기이한 능력을 갈고 닦아 마왕의 인정을 받았으며, 사천왕이라는 어깨 뻐근해지는 직함 또한 그 기이한 능력 덕택에 받은 것이었다. 즉, 쉽게 말하면 약하다. 쩌는 포스를 풍기며 나타났지만 끝내 용사 일행에 의해 죽게 되고, 죽는 것만 해도 서러운데 그보다 더 쩌는 포스를 풍기는 자가 나타나 ‘후후후, 사실 그 자는 우리 사천왕 중 최약체였다!’하고 말하는 부분에서 최약체를 담당하는 사천왕이었던 것이다. “군단장님, 용사 놈들 진짜 옵니다요. 이거 늦기 전에 튀어야 되는 거 아님까.” 그런 최약체 사천왕 아르페의 부하답게 집행군단 소속 마족들도 하나같이 전투력이 부실했다. 덤으로 근성도 부실했다. “어디 튀어봐, 튀어보라고.” “죄송함다!” 아르페는 싸우기도 전에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부하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고는 마왕성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자 저 너머로부터 성벽에 개구멍을 내고 제 딴엔 몰래 잠입한다고 하는 용사 일행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마왕이 탄생해 세계정복 좀 할라치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 산통을 깨놓는다고 전해지는 용사. 마왕군 최대의 적이었다. “진짜로 벌써 오네. 마왕님 계 탔다, 계 탔어.” 설마 아직 용사 출두 3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오겠어? 라고 생각했던 아르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전개였지만 그는 살짝 안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기간이 너무 짧다. 용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마왕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저놈을 우리 군단이 제일 먼저 막아야 한다는 건데.” 마왕의 왕관만 쓰면 정신이 개조되기라도 하는 것인지 몰라도, 이 빌어쳐먹을 마왕 새끼는 용사를 상대할 때 꼭 제일 약한 마족부터 내보내는 지랄 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3년간 저 무대뽀 용사가 가파르게 성장한 것도 약한 마족부터 조금씩 난이도를 높여가며 내보냈기 때문. 상전만 아니었으면 진짜 뒤통수 한 대 후려쳤을 것이다. 지금 아르페가 움직이고 있는 이유도 다름 아니다. 지금 마왕성에서 가장 약한 것이 바로 집행군단과 그 군단장인 자신이었으니까. 그들이 누구 하나 남김없이 죽을 때까지는 마왕성의 그 누구도 대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아르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설마 사천왕인 그가 새내기 용사 따위에게 죽겠는가? 1년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땐 용사의 레벨도 200이었는데. 조금 성장했을지는 몰라도 그 정도론 마왕성에 기스도 낼 수 없을 것이다. “일단 확인이나 해보자.” 아르페는 자신을 군단장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린 능력, ‘만물열람’을 발동했다.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능력. 마왕이 그를 옆에 두고 부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고유능력이었다. 수많은 세월 갈고 닦은 덕분에 그의 능력은 먼 거리를 두고도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그의 눈앞으로 마족어로 쓰인 글귀가 몇 줄 나타났다. [이름 - 메테르] [종족 ? 인간 여성] [칭호 ? 용사] 아르페는 말을 잃었다. 용사가 평민인 인간 여성이라는 것도 이름이 메테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말문이 막힌 이유는 맨 아랫줄에 있었다. [레벨 ? 374] “······.” “군단장님, 어떻습니까?” 옆에서 부하가 묻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했기 때문이다. 뭐? 374? 마지막으로 확인한 1년 전까지는 분명 200도 안 되었었는데! 마왕님 레벨이 이제 400인데! “야, 요 근래 인간들한테 뭔 일 있었냐?” 뭔 일이 있었기에 지렁이가 용이 되었냐? “마왕님이 간 좀 세게 보신다고 용사가 머무르는 곳으로 직접 군대를 몇 개 파견했었죠. 그러고 보니 복귀 소식이 없습니다.” “아하, 간 좀 세게 보셨다고? 캬, 내가 고걸 몰랐네!” 간을 너무 완벽하게 보신 나머지 용사가 풀코스로 완성되어 등장했네! 그 개자식은 마왕이 아니라 셰프를 했어야 하는데! 아르페의 부하는 험악해진 아르페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즉각 파악했다. 놈은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아르페에게 물었다. “군단장님, 튀어야 합니까?” “응, 나도 튀고 싶어졌다.” 누누이 말하지만 아르페는 최약체라고는 해도 사천왕은 사천왕. 레벨 350 상당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용사와 그의 실력 차이를 잘 알았다. 1레벨만 차이가 나도 영혼의 격에서 차이가 나고, 기똥찬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이기기가 힘들어진다. 그런데 24레벨이라? 영혼을 끌어 모아 부딪혀도 한 큐에 박살나는 수준이다. 아르페는 절실히 도망가고 싶었다. 용사가 낸 저 개구멍을 통과해 세상 마족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싸움과 전쟁 따위 없는 평화로운 곳에서 소한테 여물이나 주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크으으으.”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그의 매끈한 목 위로 붉은 초크가 나타나 사정없이 그의 목을 조이며 육신과 사고를 모두 압박했다. 그의 소유주, 마왕의 고유능력 절대지배가 발동한 것이다. 마왕에게 패배하면 그의 고유능력이 발동해 상대를 지배하며, 한 번 고유능력에 걸리고 나면 절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철저히 그의 명에 복종해야 하며, 혹여 명을 거스르려는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지금처럼 목을 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끝이다. 순한 양으로 돌아가 다시 명을 따르거나, 뒈지거나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조금 더 살아서 꿈틀거려보고 싶었던 아르페는 물론 전자를 골랐고, 초크는 금세 사라졌다. “군단장님······.”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죽을 것만 같은 순간은 지금까지도 몇 번씩이고 있었고, 그때마다 아르페는 마왕의 명에 저항하지 않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아왔다. 수라장이라면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용사 정도로 그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필패인 것도 분명하다. 아르페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했고, 정말이지 고르고 싶지 않았던 최후의 수단을 고르기에 이르렀다. “······에트나님께 연락 좀 넣어라.” 사천왕의 홍일점, 적염군단장 에트나 칼리파드이 미레카드. 그녀는 사천왕 서열 2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르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혼 맹약을 승낙할 테니 도와달라고 전하면, 마왕께 허락을 구하고서라도 오실 거다.” 영혼 맹약이란 마족간의 절대적인 우호 계약,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결혼이었다. “······진짜 그분이랑 결혼하실 겁니까? 제 명에 못 죽으실 텐데?” “지금 죽게 생긴 거 안 보이냐? 지금? 너 나한테 시비 거냐? 나보다 먼저 죽어 볼래?” 아르페가 윽박지르자 그의 부하는 쏜살같이 성 안으로 달려갔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트나는 아름다우며 강한 여성이다. 심지어 성질이 지랄 같기로 유명한 마족 중에서도 확연히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기에 하급자들로부터 인기도 많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리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아르페가 여태까지 그녀의 청혼을 거절해왔는가. 그것은 사천왕 서열 1위인 남자가 에트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페는 그 남자의 적이 되기 싫었기에 그녀를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적을 걱정하기엔 지금 저기서 다가오고 있는 용사들이 너무 무섭다. 아, 벌써 날뛰기 시작했다. 집행군단이 비참하게 짜부러지는 모습이 두 눈에 훤히 들어온다. 진짜 너무 무서웠다. 제발 늦기 전에 와주기를! 마왕님이 에트나의 출전을 허락해주시기를! 아니 이대로 놔두면 너도 위험하다니까! 제발 좀 출전시켜주세요, 셰프! “사천왕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제발 순순히 항복해줘. 우린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잖아.” 늦었다. 마생 씨X 진짜. 아르페는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면서도 살짝 울 것처럼 보이는 선량한 용사 소녀를 마주하며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마왕군이 세계 평화 캠페인 하는 소리하네.” 그녀는 마왕군 소속의 모든 마족에게 걸려 있는 영혼의 족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겠지. 싸우기 싫어도 억지로 싸워야 하는, 죽이기 싫어도 억지로 인간을 죽여야 하는 마족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상냥한 그녀는 더 이상 그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르페는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그녀가 마왕을 끝장내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다른 녀석들은 제법 낫구나.” 마법사를 비롯해 방패를 든 워리어와 단검을 든 도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이, 혹여 아르페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라도 하면 즉시 그를 죽이려들 것만 같은 기세였다. 마족의 진실을 알고, 그럼에도 수라의 길을 걷는 진정한 용사들. 아르페는 그들을 존중했다. 그들에게는 용사의 곁에 있을 자격이 있었다. “용사, 아마 곧 이쪽으로 새끈한 누님 한 분 올 건데 내 시체를 보면 엄청 화낼 거거든. 그분한테 이렇게 말씀드려라.” 아르페의 생뚱맞은 말에,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도적이 곧장 움직였다. 겁나 빠르다. 용사보다 빠를지도 모른다. 하긴, 아르페가 불타는 적의를 보인 것도 아니니 용사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전까지 제법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고, 그것을 기다리다 못한 동료가 대신해서 그를 죽이려 나서리라는 것까지도 아르페는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난······ 커헉!” 도적의 단검이 아르페의 심장을 관통했다. 어린 시절의 흑역사보다 날카롭고 치명적인 칼날이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지만 아직 아르페는 죽지 않고 있었다. “사실 난, 연상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칵, 꼭 전해라······!” “무, 무슨 소리야. 왜 이런 때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선 꼭, 너도 평범한 사람인 것 같잖아······!” 용사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아르페는 그녀의 순수한 슬픔과 마주하며 오히려 속이 후련해져 씩 웃고 말았다. 결국 뒈지게 됐지만, 그래도 이 지긋지긋한 나날에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으니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부디 저 빌어먹을 마왕 새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태어나기를. 아르페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며 두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 잔뜩 분노한 여성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이제 뒈질 텐데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는 죽었다. 마왕군 사천왕 중 가장 초라하고 비중 없게. 마지막 순간 그의 망막에 두 개의 글귀가 새겨졌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죽음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고유능력 만물열람 진화.] [시크릿 옵션 리라이트 발동.]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린 남자 아이의 모습이었다. “엥?” 방금 분명 도적놈의 자비 없는 칼날이 내 심장을 쑤셔 터트렸는데? 아르페는 너무나 급격히 변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굉장히 좁고 낡은 오두막이었다. 위에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공중에 두둥실 떠오른 뿌연 먼지를 비추고 있었다. 꼭 인간들이나 살 것 같은 환경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지금 그는 인간 남자아이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혹시 환각 마법인가?’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의 혼에 기록된 고유능력 만물열람은 그 모든 거짓을 꿰뚫고 오직 진실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절대로 환각 계열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거울, 거울을 찾자.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해야 해.’ 그의 능력 만물열람은 굉장한 권능이지만, 자기 자신을 열람하기 위해선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우물물이건 거울이건 다른 이의 눈동자건. 좁고 비루한 오두막을 아무리 뒤져도 거울은 튀어나오지 않았지만, 끝내 그는 식탁 위에서 물이 담긴 접시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접시에는 충분한 양의 물이 담겨 흐릿하게나마 그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내가 맞네.” 검은 머리에 보랏빛 눈,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피부와 무척 어리기는 하나 마족이던 시절의 아르페를 똑 닮은 얼굴. 그것은 부정의 여지가 없는 아르페 자신이었으며, 동시에 부정의 여지가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절찬리에 절망하고 있던 아르페에게 피니시 어택을 갈긴 것은 다름 아닌 그의 고유능력 만물열람이었다. [이름 - 아르페] [종족 ? 인간 남성] [레벨 ? 1] [힘 ? 3, 민첩 ? 2, 체력 ? 2, 마력 ? 19] [고유능력 ? 만물열람(2단계)] 이름부터 종족에 레벨까지 아주 그냥 충격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다! 신이란 놈이 있다면 죽어버려라! 마왕이랑 같이 죽어버려라! “······응?” 그러나 아르페는 곧 아직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유능력 ? 만물열람(2단계)] 만물열람이 2단계라니? ‘고유능력에 언제부터 단계가 나뉘어져 있었지?’ 아르페가 의문을 떠올린 바로 그 순간.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인간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아르페, 놀자!” 그것은 아름다운 인간 소녀였다. 저것이 과연 평민에게 허락된 것인가 의심 갈 만큼 아름다운 황금빛의 머리카락. 밝고 정열적으로 빛나는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헝겊보다는 비단 드레스가 어울릴 새하얀 피부와 서늘한 이목구비. “용사?” 아르페는 너무나 당황하여 그렇게 중얼거렸다. 용케도 그의 말을 알아들은 용사, 메테르는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응, 용사놀이 하러 가자!” 아르페가 마족으로서 죽은 날. 그는 용사와 소꿉친구인 열두 살의 인간 남자아이로 환생했다. ────────────────────────────────────────────────────────────────────────Chapter 1. 나도 용사라고!? - 1인간 남자아이로 환생한 지 이틀, 아르페는 결론을 내렸다. “마왕을 죽여야 한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지만, 마왕을 죽여야 했다. 어째서? 그야 당연하지. 마왕의 1차 목표는 인간 몰살이니까. 그리고 지금 아르페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마족으로 환생했으면 괜찮았을까? 그럴 리가. 놈이 인간을 다 죽이려는 이유는, 자신의 고유능력으로는 인간을 지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유능력이 통하는 대상인 마족은 누구 하나 놓치지 않고 붙잡아 자신의 능력으로 지배한다. 즉, 마왕과 동시대에 존재하는 이상 놈을 죽이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꿈도 희망도 내일도 보이지 않는 결론 앞에 아르페는 통탄했다. ‘왜 하필이면 과거로 돌아와 가지고! 마왕이고 용사고 다 죽은 다음 3년쯤 지나서 태어났으면 아무 욕심 없이 시골에서 소 여물이나 주면서 살았을 텐데!’ 자신이 어쩌다 환생하게 되었는지는 대충 감이 잡힌다. 만물열람이 2단계로 성장해 있었으니, 필시 그것이 어떤 연유로든 관계가 되어 있는 것이리라.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능력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시간과 공간까지 비틀어버릴 줄은 몰랐다. 아니, 고유능력에 2단계가 있었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웠다! 문제는 이 망할 고유능력이 시간뿐만 아니라 인과까지 비틀었다는 것이다. “아르페!” 이틀 전 그때처럼 문이 열렸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과 함께 오두막 안에 들어오는 소녀의 이름을 아르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올 줄 알았다, ‘메테르’.”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너무 기뻐!” 아르페의 눈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는, 아르페의 기억보다 상당히 어리기는 하나 분명 마왕성까지 쳐들어왔던 용사가 맞았다. 만물열람으로 확인했으니 이보다 확실할 수도 없다. “내가 널 왜 기다리냐? 보기만 해도 심란한데.” “심란해? ······아, 아이 참 아르페도.” 열두 살의 용사는 아르페의 말에 무엇을 착각했는지 몰라도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다. 아르페는 그를 눈앞에 두고 망상에 빠지는 어린 용사를 보며 끙, 소리를 냈다. 과거 마왕군 사천왕이었던 시절, 그는 마왕의 명을 받아 용사의 정보 수집을 한 적이 있다. 실로 사천왕 최약체에게 적합한 업무가 아닐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과거 용사에게는 소꿉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르페, 용사놀이 하러 가자!” “미안하지만 난 용사든 마왕이든 지긋지긋해.” “그러면 넌 그거 해. 마왕군 사천왕!” “그것만은 절대 안 해!” 아르페는 놀자고 덤벼드는 용사를 밀어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마왕과 엮이지 않게 해 달랬더니 이번엔 용사와 엮어버리다니, 운명의 여신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엿을 먹여 주리라! 차라리 용사와 관계없는 평범한 마을주민A로 태어났더라면 용사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믿고 평상시 아무 생각 없이 생업에 종사하며, 재수가 없어 용사 일행과 조우하기라도 하면 ‘마왕성은 이쪽 오솔길을 따라 가면 나온단다!’나 ‘요즘 우리 마을에 들고양이가 너무 늘어나서 그런데 녀석들을 좀 잡아주지 않을래?’같은 소리나 적당히 내뱉어주면 됐을 텐데! ‘이 세상은 이미 내가 알던 과거와 달라.’ 정확히는 아르페가 용사의 소꿉친구로 환생한 시점에서 미래가 혼돈 투성이로 돌변해버렸다. 지금 당장 용사로부터 도망친다고 해도 이미 한 번 어긋난 흐름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에휴, 아르페는 또 혼자 놀려고 하는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곁에 있어줄게.” “아니, 필요 없으니까 좀 가줄래?” “하지만 나한테는 아르페가 필요한걸.” 아르페는 절망했다. 대체 전생을 자각하기 이전의 자신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기에 용사와 이렇게나 사이가 좋단 말인가! 이래서야 설령 자신이 도망가더라도 용사가 쫓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너······.” “에헤헤.” 용사가 소박하게 웃으며 아르페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르페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 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렇다. 아르페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자신과 용사의 관계 그 자체였다. 모름지기 용사라 함은 걸어 다니는 폭풍이며 재앙이다. 제아무리 평화로웠던 마을도 용사와 엮이는 순간 존속이 위태로워지며, 용사와 조우하는 이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과거 용사가 통과하는 마을마다 마을의 값나가는 물건을 털렸다는 얘기도 아주 유명하다. 더욱 악랄한 점은 마을사람들은 용사를 만나기만 하면 뭔가 부탁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지고, 용사가 부탁을 들어주면 그 대가로 보물을 내어주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용사의 소꿉친구는 어떻겠는가! ‘아니지. 앞으로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이 녀석이 용사로 각성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지.’ 마왕이 존재하는 한 무조건 용사도 나타난다. 그러나 아르페의 인간 환생으로 인해 미래가 뒤틀린 지금 꼭 메테르가 용사로 각성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메테르는 용사가 되고, 소꿉친구인 자신은 거기에 휘말릴 것이다. 사실 이쪽이 가장 확률이 높다. 세상은 언제나 가장 재능이 넘치는 자를 용사로 선정하는데, 아르페가 만물열람으로 확인한 결과 열두 살 메테르의 재능은 이 녀석을 만들 때 신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아까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마왕을 죽여야 한다. “마생, 아니지. 인생 진짜······.” 골머리를 싸매고 절규하는 아르페를 메테르가 위로했다. “아르페, 힘내! 우린 아직 여태까지 살아온 삶의 다섯 배는 더 버텨야 한단 말이야!” “너 어디서 그런 말 배웠냐.” “아르페한테.” 기억을 되찾기 이전의 나도 평범한 녀석은 아니었구나! 아르페는 더더욱 골치가 아파지고 말았다. 메테르는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마냥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난 안온한 삶을 원할 뿐인데.” “평소 아르페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네.” “그런데 이 세상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아.” “그것도 아르페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야.” “여태까지 내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음?” 툴툴거리며 메테르에게 대꾸하던 그 순간, 아르페의 머릿속에 번쩍 하고 섬광이 쳤다. 여태까지는 자신이 용사의 소꿉친구로 환생하는 바람에 미래가 뒤틀렸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과거 아르페는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용사의 모든 행적은 물론 인간 세상의 정세를 완벽하게 파악한 바가 있다. 그런데 과연 아르페 한 명의 존재 때문에 그가 알아내고 기억한 모든 것이 바뀌었을까?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기껏해야 이런 산골 마을에서 사내아이 한 명 더 태어났다고 해서 일어나야 할 전쟁이 취소되거나 즉위해야 할 왕이 독살당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어디 그뿐 만인가? 전설적인 도둑의 재보가 담긴 무덤도 그대로 제 위치에 있을 것이고, 대마도사의 유적도, 발록의 둥지도, 대마법 레인 오브 루인의 마법서도 전부 아르페가 기억하는 바로 그 장소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맙소사.” 마침내 진실을 깨달은 아르페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는 과거 인간 세상과 마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기억하고 있다. 설령 앞으로 그 가운데 많은 것이 바뀐들 상관없다. 아르페는 그보다 많은 것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무수한 재보, 무수한 마법, 무수한 스킬, 무수한 숨겨진 사냥터! “그걸 이 녀석과 함께 얻는다면······.” “아, 아르페.” 메테르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아르페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분명 또 뭔가 크게 착각한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그것을 신경써주기엔 아르페가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였다. “그렇게만 되면 어쩌면······.” 용사가 성장한 과정을 압축하고, 거기에 과거 용사가 얻지 못했던 것들을 더하고, 자신이 만물열람으로 파악한 모든 것을 녀석의 손에 쥐여 준다면 마왕을 처리하는 건 문제도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되면 자유다! 더구나 용사의 소꿉친구라는 지위를 이용해 보다 안온한 삶을 추구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찬란한 황금빛 미래를 점친 아르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메테르도 벌떡 일어섰다. “좋아. 나한테 모두 맡겨라, 용사.” “용사? 역시 용사놀이가 하고 싶었구나!” “그 따위 소꿉장난을 말하는 게 아냐. 나는 지금 생애 최고로 진지해.” “······아, 알았어.” 용사가 빨갛게 물든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페한테 모두 맡길게.” “너 지금 고개 끄덕였다. 이제 물리기 없다.” “아르페야말로! 물리기 없기!” 아르페는 메테르의 대답에 만족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둘은 서로를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었지만 안온한 미래를 꿈꾸는 아르페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좋아, 그러면 잠깐 돌아가 있어. 난 지금부터 계획을 철저하게 짜야겠으니까.” “계획······ 엄청 본격적이구나. 알았어! 나는 얌전히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메테르가 뒤돌아서서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가려다 말고 아차, 소리를 내며 아르페를 불렀다. “우리 오늘 오후에 그거 있는 거 알지? 세례 의식!” “세례 의식? 아!” 마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투를 치르기 위해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와 달리 인간은 사제를 통해 신과 접촉하는 것으로 클래스를 부여받는다. 목수, 농민, 모험가, 전사 등등의 클래스를 부여받는 것으로 그 인간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것을 인간들은 세례 의식이라고 불렀다. “어떤 클래스를 받게 될까? 너무 기대된다!” “기대되긴, 난 벌써 견적이 잡히는데.” “대단해, 아르페!” 타고난 신분이나 능력에 따라 받을 수 있는 클래스에는 한계가 있다. 귀족이 아닌 이상 기사가 될 수 없고,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면 황태자가 될 수 없으며,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없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 정해진 클래스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지만······. 아르페는 체내를 휘도는 거친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과거 마족이었기 때문인 것일까? 지금 그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과하고 충만한 마나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기까지 했다. 아마 별 문제가 없다면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넌 용사겠지.” “용사? 그야 물론 내가 용사놀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메테르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나는 용사보다 더 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아, 그래.” “아르페가 용사가 되면 좋겠다!” “풋.” 아르페는 그 말을 듣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러면 웃기기는 하겠다.” “신이여, 이 아이의 길을 인도하소서!” “네네,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용사’ 클래스를 얻었습니다.] “······어?” 그러나 실제로 용사가 된 순간, 아르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Chapter 1. 나도 용사라고!? - 2 “후······.” 안온한 미래를 위한 황금 같은 플랜이 초장부터 꼬여버렸다. 전부 아르페가 용사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눈앞에 놓인 미래는 혼돈의 카오스와 혼란의 컨퓨전 뿐이었다. “왜 나까지!” “정말 근사한 일이지, 아르페! 그치!”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메테르의 머리 위로, 오직 아르페의 망막에만 떠오르는 글귀가 보였다. [이름 ? 메테르] [종족 ? 인간 여성] [직업 ? 용사] [레벨 ? 1] [힘 ? 8, 민첩 ? 12, 체력 ? 11, 마력 - 10]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그렇다. 이번에 선정된 용사는 두 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르페가 용사가 될 거라고 믿었어. 그야 아르페는 똑똑하니까!” “난 너‘만’ 용사가 될 거라고 믿었는데.” 그야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용사가 두 명이라니, 신이 창세 1천 주년 대출혈 서비스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 용사가 두 명이면 마왕이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니 좋다 치자. 그런데 왜 하필 그중 한 명이 자신이냐 이 말이다! 졸지에 용사의 소꿉친구보다 더 위험한 처지가 되고 말았잖아!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왕궁에 연락을 드리고 즉각 두 분을 수도로 모시겠습니다.” “왕궁! 정말 왕궁인가요!?” “그렇습니다. 잠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네!” “······어?” 어째서 용사가 두 명인가, 대체 어째서 자신이 용사가 되었는가! 악몽 같은 현실 앞에 머리를 싸매 쥐고 있던 아르페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그들의 세례 의식을 맡았던 사제가 종종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아르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메테르에게 물었다. “쟤 뭐래?” “왕궁에 연락해서 우리를 수도로 데려간대!” “수도!?” “응, 수도! 번쩍번쩍한 도시야!” 메테르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환희가 가득 담겨 미치도록 달콤했다. 그래, 지나치게 달콤해서 그 말을 듣는 아르페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갈 정도였다! 그는 전생에서 용사가 수도로 갔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가롭게 절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망한다! 아르페는 현 상황에 대한 고찰을 싹 접어두기로 했다. 신세한탄이나 원인조사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탈주다! “수도, 왕궁! 용사란 건 정말 멋진 거구나!” “넌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거긴 네 생각처럼 멋진 장소가 아니거든?” 인간들이 용사를 대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마왕을 상대하게 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면 뭐해, 때가 되면 마왕을 죽이라며 그들을 내몰 텐데. 그래서야 잡아먹기 위해 우리에서 사육하는 돼지와 별다를 바가 없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가 뭘까요.” “돼지고기는 비싸서 못 먹는다!” “바로 놈들이 우리한테 먹이는 사료의 질이 구리다는 거야! 그것도 형편없이!” 아르페의 마음을 이해해준 것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처음으로 메테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심각한 어투로 물었다. “와, 왕궁밥 맛없어?” “최악이지.” 아르페는 단언했다. 마왕과 용사가 마지막으로 날뛴 지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다. 왕궁에도 물론 용사 육성 메뉴얼이야 있겠지만 그건 너무 낡았다! 쓰레기다! 지금 와선 마왕군 병졸도 비웃을 수준이다! ‘실제로 용사도 그 메뉴얼을 따르는 바람에 성장이 늦어졌고.’ 메테르의 잠재력은 200레벨에서 불과 1년 만에 374레벨로 성장할 만큼 뛰어나다. 아무리 마왕이 먹이를 떠먹여줬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성장속도.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용사가 왕궁에 머무르는 몇 년 동안은 터무니없이 더디게 성장했다. 마왕이 신경써주지 않았더라면 마왕성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두 명의 용사가 왕궁으로 끌려간다면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처참한 패배와 게임오버뿐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인간이야, 메테르. 잘 기억해둬.” “아, 알겠어.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인간······ 왕궁밥은 맛없다······.” 용사가 인류를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아르페?” “걱정하지 마. 내가 생각해둔 육성······ 성장법이 있으니까. 조금 일이 꼬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씁, 어쩔 수 없지. 내 생각대로 강행하자.” 원래 아르페는 세상의 모든 스킬과 마법을 모두 메테르에게 몰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까지 용사가 되어버린 이상, 적의 메인 타겟은 둘로 나뉠 것이고 아르페는 죽기 싫었다. 그렇기에 아르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너는 무기술을 익혀. 나는 마법을 익히겠어. 그 외 나머지는······ 적당히 나눠서 익히자.” “응!” 용사는 모든 클래스의 스킬과 마법을 배우는 사기적인 클래스 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오직 용사만이 익힐 수 있는 유니크 스킬과 유니크 스펠도 세상에 제법 숨겨져 있다. 원래 무기술과 마법을 동시에 익히는 것은 각 분야의 성취도를 낮추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용사만이 익힐 수 있는 스킬과 스펠을 다른 이가 익힐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용사에게 익히도록 하는 것인데······. ‘지금 용사는 두 명이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지금, 특기분야를 미리 나눠버리면 각각의 스킬 성취를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이걸로 마왕도 간단하게 처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는 무슨 개뿔! 으아아아아! 내가 왜 용사냐고!” “아르페, 개한테 뿔 같은 건 없어!” “이럴 때만 냉정하게 태클 걸지 마!”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용사를 훌륭하게 육성하고, 자신은 뒤에서 콩고물이나 받아먹을 생각이었는데! 그 살 떨리게 강한 마왕하고 자신이 직접 싸워야 한다니! 제기랄! “으아아아아, 전부 꿈이라고 말해줘!” “정말로 꿈만 같아, 아르페. 내가 아르페랑 같이 용사라니······ 같이······.” 그러나 메테르의 덜떨어진 반응이 아르페에게 현실도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까지 넋을 놓고 있다간 정말 마왕군 병졸A를 상대로 발리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아르페는 성대한 한숨을 쉬며 메테르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아얏.” “이제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 용사는 모든 인간의 주목을 받는 만큼, 모든 마족의 표적이 되기도 한단 말이야.” “괜찮아. 내가 아르페를 지켜줄게!” “······그래, 씩씩해서 좋다.” 조금 너무 늦게 깨달은 감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녀석은 제법 바보였다. 이런 녀석이 어떻게 마법이나 치유술을 익힌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아르페였으나, 그러고 보면 전생에서도 이 녀석은 검술 외에는 별로 다루지 않았다. 녀석에게 패배하는 순간까지도 ‘이것이 용사의 여유인가!’하고 생각했던 아르페였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녀석은 그냥 바보여서 어려운 마법을 다루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에휴, 차라리 잘 됐지 뭐. 신도 제법 머리가 굴러가는 작자인가 봐.” 썩어도 준치라고, 아르페는 마족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어지간한 인간보다는 마법을 잘 다룰 수 있다. 그가 용사가 된 이상 적어도 메테르보다는 마법을 잘 다룰 테니 마왕과 싸워 이길 확률도 높아지겠지. 지금은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위가 쓰려 버티지 못할 것이다. “환생은 괜히 해가지고······.” “응? 환생?” “아무것도 아냐. 탈출할 준비나 하자.” “탈출이라니?” 메테르가 반문하자 아르페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가리켰다. “아르페! 잠시 얘기 좀 하자!” “어제만 해도 내가 너희한테 빵을 줬잖니!” “메테르, 네 아빠가 맡기고 간 물건이 있어! 잠깐만 나와 보지 않을래?”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아르페가 혼자 살고 있는 오두막. 결코 마을의 중심이 아니거늘 밖에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여 우글거리고 있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아, 아빠가 맡긴 물건이래!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저거 구라야. 내 옆에 있어.” “응!” 아르페는 초보적인 트릭에 속아 몸을 일으키려던 메테르를 붙잡아 앉히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부터 저 사람들을 전부 따돌리고 마을을 빠져나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메테르가 순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저렇게 몰려 있는 거야? 원래 나랑 아르페한테 쌀쌀맞았는데.” “우리가 용사라니까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두고 싶은가 보지. 그래봤자 레벨 1밖에 안 되는 시작의 마을 주민ABCD인 주제에.” 아르페는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도 모를 고아이고, 메테르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으며 아버지는 떠돌이 상인 신세다. 마을사람들은 둘을 죽게 내버려둘 만큼 모질지 못해 그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도와주기는 했으나,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식량을 축내는 두 명을 항상 밉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덜컥 이 둘이 용사가 되어버렸으니! 지금쯤 마을사람들의 뇌리엔 여태까지 두 명에게 쌀쌀맞게 굴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둘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저렇게 몰려든 것이겠지. “뭔가 쓸 만한 의뢰라도 있으면 받아줄 수 있겠지만······.” 이 마을에는 숨겨진 보물도 기술도 없다. 만물열람으로 확인했으니 확실하다. 즉,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에게선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정말이지 용사가 태어난 마을이라는 점 외에는 특이점이 요만큼도 없는 시작의 마을 그 자체! “이것들이랑 엮여서 좋을 거 없어. 의뢰 같은 거 받아서 수행해봤자 풀쪼가리 하나 내주고 그걸로 끝일걸.” “나 풀도 잘 먹어. 나 어릴 적에 아빠가 먹어도 되는 풀 가르쳐줬다?” “하지만 난 풀을 안 먹어. 소가 아니기 때문이지. 너는 소냐?” “아냐!” “그럼 너도 앞으로 먹지 마.” “응!” 마을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건 아르페는 저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용사가 된 것만도 짜증나는데 괜히 다른 것들하고 엮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오직 돈, 레벨, 스킬, 스펠 뿐이다! “그러니까 도망가자. 이대로 있으면 정말 왕궁으로 끌려가고 말 거야.” “나도 맛없는 밥 싫어!” 메테르는 아르페에게 동의하듯 힘차게 외치다가도, 이내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빠가 집에 오면 내가 없는 걸 알고 슬퍼할 텐데 어떻게 하지? 왕궁으로 가 있으면 연락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잖아.” “묘한 부분에서 예리하구나······ 하지만, 으음.” 과거 이 시점에 메테르의 아버지는 이미 대륙 외진 곳에서 죽어있었다. 그녀의 뒷조사를 맡았던 것이 아르페이기에 확실하다. 그러나 전생에서 그랬으니 아마 너희 아버지는 죽어있을 거야!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아르페의 존재로 인해 그의 생사가 뒤바뀌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는 지금 시점에서 굳이 메테르의 멘탈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둘러댔다. “편지를 써두고 가자. 아저씨도 우리가 친한 걸 아니까, 아마 이 오두막으로도 찾아올 거야.” “아르페, 나 글자 읽을 줄은 알지만 쓰지는 못해······.” “괜찮아. 인간어, 가 아니라 왕국어는 내가 쓸 수 있거든.” “대단하다!” 아르페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검지 끝에 푸른빛이 피어났다. 마법이랄 것도 없는 기초적인 마나 테크닉, 마나 발현. 뜨거운 마나를 이용해 나무를 그슬리면 글자를 쓰는 것이 가능했다. 메테르의 눈망울이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확인했다. “아저씨는 왕국어 할 줄 알지?” “당연하지!” “좋아, 용사님. 그러면 아버지께 전하고 싶은 말은?” “응, 응. 있잖아! 그러니까······.” 아르페는 메테르의 말을 전부 오두막 벽에 받아 적고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부질없는 짓이 될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하는 것으로 메테르가 기운을 낼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내게 이렇게 수고를 끼쳤으니 꼭 살아서 오두막을 찾아오라고.’ 투덜거리며 기원한 아르페가 메테르의 손을 붙잡았다. 메테르가 꺅, 수줍은 소리를 냈지만 무시했다. “이제 튀자.” “으, 응!” “앗, 아르페!” “메테르!” 그들은 기운차게 오두막 문을 박차고 나갔다.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사제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지금 사람들을 상대해줄 시간은 없었다. 아르페는 가장 기가 약해보이는 마을주민D를 팍 째려보며 말했다. “우리 화장실 갈 거거든요?” “미, 미안하다.” D가 물러서자 무심결에 같이 물러서는 A와 B, C와 E! 그것이야말로 아르페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는 메테르를 이끌고 내달렸다. 마을사람D는 그 뒷모습을 보며 정말 화장실이 급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후로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용사들이 탈주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Chapter 1. 나도 용사라고!? - 3 “인간의 육신은 나약하구나.” 아르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의 대가는 무릎의 까진 상처였다. “아르페는 원래 달리기 잘 못했잖아. 으유, 어쩐지 너무 열심히 달리더라.” 왕궁과 통신을 마치고 돌아온 사제가 자신들을 찾아 날뛸 테니 가능하면 멀리 도망치는 게 좋겠지만, 지금은 아르페가 부상을 입어 제대로 뛰기도 힘든 상황. 그 덕에 메테르가 그를 부축하며 걷고 있었다. 용사의 발목을 붙잡다니 사천왕 시절이었으면 공훈감이다! “게다가 이럴 때에 한해서······.” “아르페?” 아르페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늘어트려 놓은 마나의 실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의 샘으로부터 태어난 악의 종자들, 즉 몬스터가 있었던 것이다. 숫자는 셋, 허접스러운 인간들만 사는 지역의 숲에 서식하는 몬스터답게 약해빠진 레벨 3의 자연발생 고블린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든 빠짐없이 초반에 튀어나오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용사든 기사든 마법사든 간에 최대한 처절하게 발리고 퇴장하는 비운의 몬스터. 물론 아무리 고블린이 약해빠졌다고 해도 이제 막 마을을 나서 레벨 1에 불과한 아르페와 메테르보다는 강하다는 게 문제였다. 아르페와 메테르가 정상 루트로 움직였더라면 고블린과 조우하기 전에 슬라임이나 다람쥐처럼 더 약한 것들을 사냥해 레벨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마나의 실을 퍼트려 놓아서 다행이다. 물론 탐색이나 결계 마법을 다룰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은 레벨이 전부다. 레벨이 딸리면 마나도 딸리고, 영혼의 격이 낮다는 이유로 제한이 걸려서 스킬이나 스펠을 배우지도 못하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슬라이딩 태클로 적의 급소를 직격해도 치명타도 잘 안 뜨고, 좋은 장비도 착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메테르, 내 부축은 그만두고······.” “어라?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는데?” 아르페가 메테르에게 경고하려던 찰나, 메테르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아르페는 실시간으로 메테르의 능력이 갱신되는 것을 느꼈다. [메테르] [레벨 - 1] [감지 Lv1] “아르페, 이제 더 선명하게 느껴져. 분명히 우리를 노리는 것들이 있어.” “······아, 그래. 나도 그 얘기 하려고 했어.” 물론 간혹 레벨에 맞지 않는 높은 격을 지녀 스킬들을 마구 익히는 천재도 있기는 하다. 지금 눈앞의 이 금발 소녀처럼! 이런 빌어먹을 천재 같으니!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하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 천재가 자신의 유일한 아군이지 않던가. “고블린이야. 레벨은 3. 1대1이라면 해볼 만하지만 숫자가 셋이야.” “걱정하지 마. 내가 아르페를 지킬게.” 용사의 말은 아주 늠름했다! 하지만 방어력이 0은커녕 마이너스가 아닐까 싶을 만큼 허름한 옷을 입고 장비 하나 없이 더러운 맨손을 불끈 쥐고 선언하는 소녀의 모습은 아르페의 불안감만 증폭시켰다. “아무리 그래도 맨손으로는 무리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응.” 아르페는 그를 부축하던 메테르의 손을 놓고는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정보가 그의 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어떻게든 그중 가장 단단하면서 날카로운 물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도 이내 성과를 볼 수 있었다. “후, 이정도면.” [뜨거운 나뭇가지] [자연적으로 미량의 마나를 머금어 줄기가 단단해지고 껍질에 화기를 띠게 된 나뭇가지. 몇 번 휘두르면 부러진다.] 가끔 이런 식으로 자연에서 저절로 탄생하는 아티팩트가 있다. 작정하고 만들어낸 무기에 비하면 당연히 볼품없지만 임시방편으로는 쓸 만할 것이다. 그는 그것을 들어 메테르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두 놈이 오른쪽 대각선에서 오고 있으니 그쪽을 경계해.” “어라, 이 나뭇가지 조금 이상해. 뜨겁고 편안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뭐?” 아르페는 메테르를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이 갱신되는 정보가 있었다. [메테르] [레벨 - 1] [마나감응 Lv1] “······그래, 그렇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거지?” “그럼, 전사의 소양이야.” 그냥 전사가 아니라 상급 전사의 소양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르페는 앞으로 용사가 스스로 어떤 스킬을 얼마나 더 자각하든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평범한 돌멩이를 하나 주워 뒤로 돌아섰다. 무릎이 쓰렸지만 그는 고통을 무시하며 돌멩이에 마나를 부여하는 데에 집중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나를 다루는 일뿐이었기 때문이다. 마나는 무엇보다도 순수한 에너지. 이것을 평범하기 그지없는 돌멩이 안에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단 한 번, 쓸 만한 투척무기가 완성된다. 다행히도 아르페는 레벨 1치고는 지닌 마나가 턱없이······ 어쩌면 이것 때문에 용사가 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풍부했기에, 돌멩이를 가득 채울 만큼의 마나를 빼내고도 기운이 제법 남았다. 돌멩이는 마나가 가득 차자 푸르게 빛났다. 이대로 놔두면 천천히 마나가 방전되겠지만 그 전에 이것을 던지면 미약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레벨 3의 고블린을 죽이기에는 충분한 폭발력이다. “아르페?” “아까 셋이라고 말했잖아? 뒤에서도 한 놈 오고 있어.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전면을 상대해.” “몬스터가 어디서 올지도 다 알고 있다니 아르페는 대단해!” “앞에 봐라.” “응!” 원거리 무기라도 들고 있는 놈이 나온다면 그대로 도주해야겠지만 이곳은 깡촌의 숲. 고블린이 그런 최첨단 무기를 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초보존이다. 역시나,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수풀 속에서 흐흐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고블린 놈들은 하나같이 이쪽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장비를 걸치고 있었다. 그나마 몽둥이가 튼실해 보였다. [구헤헤, 맛있어 보이꾸악!] “뒈져!” 레벨 3 잡몹 따위에게 대사를 칠 시간을 줄 수는 없다! 아르페는 자신이 맡은 고블린이 사정권에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돌을 던졌다. 돌은 보기 좋게 고블린의 머리에 명중해 폭발했고, 놈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원킬이었다. [키, 키익!?] [약한 인간이!?] “야아아압!” 기습을 담당했던 동료가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당황한 고블린들! 바로 그 순간, 용사는 용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몬스터들의 틈을 노리고 비겁하게 돌격했다! “어쩐지 이대로 휘두르면 될 것 같아!” “감을 믿었다가 패가망신하는 도박꾼이 한두 명이 아닌데!” “흐아아압!” [꾸웨에엑!] 그러나 아르페의 걱정과는 달리 메테르가 휘두른 나뭇가지는 절묘한 힘과 속도를 품고 떨어져 내리며 고블린의 팔을 가격했다. 놈은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떨어트리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레벨 3의 몬스터가 레벨 1의 용사에게! 고블린 일족의 수치로 기록될 일이었다. [메테르] [레벨 - 1] [검술 Lv1] “아르페, 왠지 나 강해진 것 같아!” “아, 알았어 알았어.” 여태껏 용사놀이를 하면서 몇 번 나뭇가지를 휘두른 것 말고는 전투 경험도 없는 메테르가 고블린과의 실전이라는 이유만으로 간단하게 검술을 깨우쳤지만, 검술 정돈 마나감응에 비하면 놀랍지도 않다! 아르페는 심드렁하게 대꾸해주며 다시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한 번 나뭇가지를 휘둘러 용기와 스킬을 얻은 메테르는 나머지 한 마리의 고블린에게 용감하게 덤벼들고 있었다. “무서운 괴물들! 아르페를 괴롭히지 마!” [쿠와아아악, 무서운 인간이다! 꾸웨엑!] 이번 일격은 더욱 강렬했다. 레벨 1 주제에 마나감응 스킬을 터득한 메테르가 본능적으로 나뭇가지의 화기를 이끌어내어 고블린의 몽둥이를 불태워버리고 놈의 대가리를 정통으로 가격한 것이다! 그 끔찍한 고통에 고블린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대체 무서운 괴물은 어느 쪽이냐! [메테르] [레벨 - 2] [마나지배 Lv1] “으, 으으.” 화기를 한 번에 끌어낸 바람에 모든 마나를 소모한 나뭇가지가 메테르의 손에서 재가 되어 휘날렸다. 그것이 괜히 아련해보였다. “정말 죽였어.” 메테르는 모든 기운을 쏟아내기라도 한 듯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짧은 순간의 격돌이었으나 그녀는 지금처럼 강렬하게 생과 사의 경계를 오간 적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목숨을 끊어놓지 않았던가! 그 충격은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르페 역시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아르페, 내가······ 이겼어?” “아니.” 아르페가 냉정하게 대꾸하며 조금 전 주워든 돌멩이를 내던졌다. 짧은 순간 아르페의 마나를 잔뜩 머금은 돌멩이는 멀뚱히 서 있는 메테르의 바로 옆을 바람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 그녀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기 직전이던 고블린의 머리통을 맞추어 터트렸다. 메테르는 고블린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간신히 놈을 인식했다. “꺅!” “적을 전부 죽이기 전까지는 이긴 게 아냐. 명심해.” “······잊고 있었어.” 그녀가 처음 공격한 고블린은 팔을 당해 몽둥이를 놓쳤을 뿐 멀쩡히 살아있었다. 그런데 다른 고블린을 상대하느라 그놈을 잊다니, 하물며 전투 상황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고블린 한 마리 죽였다는 사실에 취해 멍 때리고 있다니! 아르페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메테르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 메테르. 우리는 더 이상 마을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꼬맹이들이 아냐.” “아르페······.” 다른 열두 살의 소녀는 그래도 되지만, 용사는 그래선 안 되었다. 아르페는 자신에 대한 메테르의 호감도가 다소 감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가 독기를 품기 원했다. 전생의 용사는 너무 물렀다. 반 년 간 숙성시킨 치즈보다도 물렀다! 영재교육으로 보다 독하고 냉철한 용사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너무 멋져.” “어라?” 그러나 그의 의도는 살짝 빗나가고 말았다. 메테르는 양볼에 홍조를 띠며 그대로 달려와 아르페의 두 손을 잡고 붕붕 흔들며 마구 흥분해 외쳤다. “아르페 너무 멋져! 정말로 용사님 같아!” “용사는 너야! 아, 이제 나도 용사구나!” 스스로 말하면서도 소름이 끼쳤다. 아르페 자신만큼 용사에 어울리지 않는 이가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적어도 메테르는 아르페가 멋진 용사님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아르페처럼 되고 싶어!” “그건 안 돼.” 아르페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메테르는 그제야 조금 풀이 죽었다. “어쨌든 앞으로는 적이 죽기까지 절대 방심하지 마. 쓰러진 적도 다시 보고 목이 잘린 적도 다시 봐. 알았어?” “응, 알았어. 명심할게! ······그런데 목이 잘리면 죽지 않아?” 아르페는 메테르의 순진한 질문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순순히 죽어주면 그게 어디 몬스터겠는가! “이런 허접한 놈들은 몰라도 나중 가면 몸이 17등분당해도 살아나는 놈이 있어. 그런 놈들이 죽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마나야.” “마나?” “너도 조금 전에 이미 다루고 스킬까지 익혔을 텐데······ 그건 천천히 알려줄게.” “응!”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먼저 가르쳐줄 게 있어.” 아르페는 죽어 쓰러진 고블린에게 다가가 놈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놈의 몸통에서 갑자기 누런 동화가 1개 떨어졌다. 그것을 본 메테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괴물이 왜 돈을 갖고 있어!?”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르페는 죽어 누운 다른 고블린 두 마리를 발로 차 마찬가지로 동화를 수확하며 상쾌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건 나도 몰라!” 용사가 루팅을 배운 순간이었다. ────────────────────────────────────────────────────────────────────────Chapter 1. 나도 용사라고!? - 4 “가만히 있어, 아르페.” “야, 거기 스탑. 오지 마. 야, 야!” 아르페는 일생일대의 위기와 조우하고 있었다. 위기의 정체는 바로 메테르가 한손에 들고 있는 짓이겨진 풀 뭉치였다. “이거 바르면 금방 나아.” “거짓말 치지 마! 그 더러운 걸 바른다고 나을 리가······ 아.” [메테르] [레벨 - 2] [제약 Lv4] [케아 그라스] [모든 종류의 상처에 미약하게 듣는 풀. 짓이겨 액체에 섞는 것으로 그 회복력이 미약하게 증폭된다.] 정말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아르페는 그만 순간적으로 얌전해지고 말았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전생과는 달리 적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하는 법을 배운 용사가 순식간에 치고 들어와 그의 무릎에 짓이긴 풀 뭉치를 바른 것이다! “으아아아아악!” “얌전히 치료받아!” “으아아아······ 정말 낫고 있잖아!” 그냥 근처 수풀을 적당히 뒤져 뽑은 풀에 침 조금 뱉고 짓이겼을 뿐인데 순식간에 쓰린 통증을 없애버리다니! 아르페가 용사가 지닌 뜻밖의 재능에 경악하고 있자니 녀석이 우쭐하며 자신의 아직은 빈약한 가슴을 자랑스레 내밀었다. “아빠가 풀에 대해서 알려줬다니까? 먹어도 되는 풀은 물론이고 상처를 치료하는 풀, 기력이 회복되는 풀, 먹으면 위험한 풀까지 알려줬다?” “그냥 흘려 넘겼는데 쓸 만한 복선이었구나······.” “약효가 스며들 때까지 조금만 쉬었다 가자. 아, 그전에.” 메테르는 또 근처의 길게 자라난 넓적한 풀을 적당히 잡아 뜯어 자신의 소매에 쓱쓱 문질러 닦더니 아르페의 상처와 짓이긴 풀을 사이에 놓고 적당히 느슨하게 묶었다. 고블린과 싸울 때는 악귀처럼 보였지만 이렇게 보니 제법 여성적인 면이 있었다. 평범한 남자애였더라면 이 시점에서 녀석에게 반하지 않았을까? 물론 아르페는 암을 제치고 사천왕의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는 것이 미인계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영차, 다 됐다.” “······고맙다.” “아르페가 나한테 해준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메테르는 방실방실 웃으며 아르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고블린과의 일전이 끝나고, 그들은 첫 전투의 피로를 풀 겸 근처의 커다란 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너한테 해준 것들이라······.” 한편 아르페는 메테르의 말에 찔리는 것이 있어 쓰게 웃었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 확신이 없었다. 과연 기억을 되찾기 이전 메테르와 함께 했던 자신도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아르페에게는 그때의 기억이 없는 것일까? “아르페, 힘들어? 무릎베개 해줄 테니까 잠깐이라도 잘래?” “······아니.” 아르페는 천사처럼 상냥한 메테르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거북해져 슬쩍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붉은 노을이 조금씩 하늘에 퍼져가고 있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상처도 괜찮으니까 이제 일어나자. 밤이 오면 끔찍하게 춥고 어두워질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두 용사는 아직 어리고 약하다. 숲 안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마을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아르페는 살며시 웃으며 정답을 공개했다. “그럴 땐 던전으로 들어가면 돼.” “······응?” 메테르가 반문했다. 아르페는 환생하고 처음으로 용사다운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던전을 공략하러 가자!” 던전, 몬스터와 함정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곳. 하지만 그 끝에는 달콤한 보상이 있어 언제나 모험가들을 유혹한다. 누군가는 던전을 두고 신의 선물이라고 부르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왕의 장난질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난 던전을 노다지라고 부르지.” “아르페 대단해!” 던전에서 보상을 찾아내기란 말할 것도 없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기껏 함정을 모두 피해 마지막 방까지 도달하고 보면 여태까지 지나온 함정 가운데에 보물이 숨겨 있었다거나, 라스트 보스를 죽이고 보니 실은 라스트 보스 자체가 보물이었다거나, 라스트 보스가 보스가 아니었다거나, 도중에 몬스터들과 조우해 독과 저주에 당하는 바람에 보스룸에 도달한 모험가가 끝내 라스트 보스로 각성해버린다거나 하는 일이 이 세상에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신의 심보도 마왕만큼이나 꼬여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그냥 둘이 동일인인 것 아닐까? 그러나 아르페는 모든 거짓을 꿰뚫어 진실을 찾아내는 만물열람의 소유자이다. 그 어떤 것도 아르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아르페는 세상에 숨은 모든 던전을 찾아내며 그 던전에 숨은 보물 또한 어렵지 않게 손에 넣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생엔 그 좋은 능력을 마왕을 위해 써야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일이었다. 그 많은 던전에서 얻은 보상 중 2할만 아르페가 챙겼더라면 아르페 밑으로도 족히 30대는 먹고 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좋아, 안온한 낙농 라이프를 위해 조금만 힘내자.” “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힘내자!” 아르페는 용사가 태어난 마을의 근처에 있는 던전을 한 개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용사가 태어난 시골 마을의 숲속에는 던전이 딱 한 개밖에는 없었지만. 과연 개뿔도 없는 마을다웠다. 그는 처음부터 도주 중간에 거쳐 갈 곳으로 그 던전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용사와 함께 마을을 나온 순간부터 그곳으로 방향을 잡고 걷고 있었다. 던전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대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야?” “응.” 메테르는 던전의 입구를 보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상한 곳에 꼭 들어가야 해? 여기 묘지 아냐?” “원래 던전 입구는 다 이런 거야. 던전을 만든 놈들은 사이좋게 머리가 돌아버렸거든.” 묘지 다음으로는 수천 년 묵은 거목의 옹이라든가, 동굴 한가운데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웅덩이라든가, 마을에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폐가 정도가 던전 인기 스팟이었다. 왜 그렇게 노골적으로 수상한 장소를 용사가 들어가거나 아르페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다들 조사하지 않고 있었던 걸까, 아르페는 언제나 그것이 의문이었지만 이제 와선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나 이런 곳에는 들어가기 싫어······. 우리 아빠가 죽은 사람들의 안식을 방해하면 안 되는 거랬어.” “아저씨가 딸 교육은 참 잘 시키셨구나.” 아르페의 말이면 일단은 순순히 따르고 보는 편인 메테르가 처음으로 거부감을 보였다. 하긴, 전생에도 용사는 이 던전에 들어간 적이 없다. 그것이 용사로 선정되고 곧장 왕국으로 끌려가서인지, 묘지에 들어가기 싫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그녀는 ‘반드시’ 이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아르페는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여기 안 들어가면 우리는 왕궁에 끌려가게 될 거야.” “맛없는 밥은 더 싫어! 추운 것도 싫어. 우우······.” “자, 들어갈 거지?” “······응.” 날이 이미 완벽히 저물었고 주위는 점점 추워지기까지 하니 더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메테르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아르페를 따라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라?” 그러나 막상 던전에 들어서고 나자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는 묘지가 아니잖아?” 메테르는 망자의 시신이 담긴 관이나 싸늘한 돌벽,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박쥐나 길게 늘어진 거미줄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정작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토색 흙으로 덮인 네모난 방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외부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는데, 메테르는 분명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늘 어느 순간인가부터 흙계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르페, 아르페!” 메테르가 두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며 아르페의 더러운 소매를 붙잡았다. 어느 정도 메테르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아르페는 피식 웃었다. “던전은 원래 다 이래. 그보다 어때, 아직도 추워?” “아니, 하나도 안 추워······ 어라? 어째서지?” 용사는 상태이상 가벼운 혼란에 걸렸다! 그녀를 위해 아르페가 짧게 설명해주었다. “던전은 일종의 아공간이거든. 외부와 유리된 별개의 공간이라고 이해해야 돼.” “아공간이 뭐야?” “아공간이라는 개념이 최초로 제시된 건 대륙력 728년, 공간의 허용량 이상으로 마나의 밀도를 높이는 실험을 하던 마족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잘 모르겠어!” 메테르가 한 손을 번쩍 들며 씩씩하게 외쳤다. 이미 그녀가 그렇게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던 아르페가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디부터 모르겠는데?” “너무 많은데······ 그럼 우선, 대륙력이 뭐야?” “좋아, 집어치우자.” 아르페는 설명을 포기했다. 바보에게 마법의 개념을 설명하려던 자신이 죄인이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던전은 그런 곳이야.” “응, 알겠어!” 이렇게 넘어갈 거면 설명해달라는 말이나 하지 말든가! “오늘은 우선 여기서 자자. 던전의 입구까지는 몬스터가 오지 않거든. 더구나 이 던전을 발견하고 들어올 사람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잘 수 있겠지.” “응, 알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르페는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 손가락으로 마나의 실을 여럿 뽑아내 던전 입구의 계단, 너머 방의 입구를 비롯한 곳곳에 연결해두었다. 이것으로 외부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레벨 2 용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르페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움직이는 아르페의 모습을 바라보는 메테르의 눈은 사정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르페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모르는 것도 없고, 운동 빼곤 못하는 것도 없고, 착하고······ 그리고 또 용사고!” “너도 용사야.” “나는······ 그야 좋기는 하지만, 사실은 굳이 용사가 아니어도 됐는데.” 아르페는 그제야 오늘 오전 메테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용사보다 더 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었다. 용사 놀이를 매일 빼먹지 않고 할 만큼 용사를 좋아하던 녀석이 용사보다 더 되고 싶은 것이라니, 뭘까? 곰곰이 생각하던 아르페가 화들짝 놀라며 메테르를 돌아보았다. “설마 넌 용사가 아니라 마왕이 되고 싶었던 거야!?” “아냐!” “사천왕만은 절대 안 된다. 그건 해먹을 짓이 못 되거든.” “그런 것도 아니란 말야!” 메테르가 얼굴이 잔뜩 시뻘게져 씩씩거렸다. 성을 내느라 이미 던전에 대한 두려움이나 앞날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은 깨끗이 사라진 모양이다. 아르페는 그제야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나도 알아, 바보야. 네가 되고 싶은 게 무엇이든 그 꿈은 마음속에 잘 간직해두고 있어. 마왕이 죽고 나면 용사는 자유의 몸이 되니까.” “자유······?” 용사는 마왕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 마왕이 사라지면 당연히 용사 클래스도 사라진다. 그리고 용사는 새로운 클래스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날을 위해 꿈을 잊지 말고 간직하고 있어. 나도 도와줄 테니까.” “꿈······ 내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당연하지.” 메테르가 무슨 꿈을 품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설마 마왕을 토벌하고도 이룰 수 없는 꿈은 아니리라. 아르페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주자 메테르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알았어. 나 앞으로 힘낼게! 무슨 일이든 할게!” “그래. 그럼 이제 자자.” “응! 잘 자, 아르페!” “너도 잘 자.” 용사에게 모티베이션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녀석이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겠지! 아르페는 메테르로부터 돌아누우며 계획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흐뭇하게 웃었다. 그 표정이 마치 농작물의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의 표정 같았다. 만약 메테르의 꿈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이렇게 편안한 표정은 짓지 못했을 텐데, 중요한 것을 놓치는 부분이 어쩔 수 없는 사천왕 최약체였다. 그렇게 해서 두 용사는 무사히 던전에서의 첫날밤을 치른 것이었다. ────────────────────────────────────────────────────────────────────────Chapter 2. 던전은 사망을 싣고 - 1다음날 두 사람은 무사히 눈을 떴다. 아르페는 내심 자신의 감지를 무력화할 만한 엄청난 수준의 모험가나 도적이 나타나 둘을 붙잡는 상황까지도 상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대안1이나 2,3,4가 활약할 필요도 없이 개운한 아침이 밝았다. 던전 안이었기에 아침이 밝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좋은 아침, 아르페!” “별로 좋지는 않지만, 아침인지도 모르겠지만, 안녕.” 메테르는 눈을 뜬 후 자신의 옆에서 무사히 아르페가 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맑게 웃고는 그제야 자신을 살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와아, 이런 바닥에서 잤는데 몸이 엄청 개운해.” “던전 안은 마나가 극도로 활성화되어 있는 공간이라서 생명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문제는 여기서 활동하는 생명이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거야.” 대부분의 몬스터는 던전 안에 들어오면 무척 강해진다. 물론 그만큼 주는 경험치도 많아지기는 하지만, 모든 면에서 강화된 몬스터들과 맞서는 것이 무서운 모험가나 용병들은 던전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사실 오래 살고 싶다면 던전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굳이 던전으로 들어온 거야? 이제 잠도 자고 개운해졌으니까 나가면 안 돼?” “그래도 돼. 물론 지금쯤이면 왕실에서 파견 나온 병사들이 수색 범위를 확장했을 테니 보기 좋게 잡혀서 왕국으로 소환되겠지.” “맛없는 밥은 싫어!” 못 입고 못 자는 건 괜찮아도 못 먹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메테르가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눈으로 외쳤다. 아르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가죽 물통을 내밀었다. “좋아, 그럼 물마시고 힘내서 몬스터들을 잡자고.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가다 보면 강해질 테고, 그럼 나중에 던전을 나가게 되었을 때에도 병사들의 추적 정도는 여유롭게 따돌릴 수 있게 될 테니까.” 그것이야말로 용사의 가장 비겁한 점이다. 분명 용사가 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같이 놀던 평범한 아이들의 우두머리 정도에 불과했던 녀석이, 용사가 되고 일주일 정도만 흘러도 벌써 전쟁에서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병사 정도는 깔볼 수 있는 실력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계에는 어제 이긴 용사한테 내일 죽는다는 말이 있다. 물론 마계의 바보들은 언제나 이 말을 무시하고, 그래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용사한테 털리고 죽는다. 가장 큰 문제는 셰프······ 아니 마왕이 그중 가장 바보였다는 것이다! “아르페, 그러면 우린 이제 그 괴상한 고블린들하고 또 싸워야 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괴상한 놈들. 더 세기도 하지.” “히익!” 어제 맞서 싸웠던 고블린들을 떠올린 메테르가 움츠러들었지만 아르페는 어제 전투 한 번 치르면서 스킬 네 가지를 한꺼번에 익히는 기염을 토했던 메테르의 모습을 떠올리며 으음,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넌 네 레벨보다 한 10레벨 이상 높은 놈들하고 맞서 싸워도 방심만 하지 않는 이상 여유롭게 이길 수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어느 정도는 능력이 되고.” 어제 고블린들과의 전투에서 확실히 느꼈다. 아르페가 마족이었던 시절엔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아무리 좋은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었어도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용사라는 클래스까지 얻은 지금은 제법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마계에는 이렇게 약해빠진 몬스터들은 없었으니까······.” “마계까지 알다니 역시 아르페는 대단해!” “책에서 봤어, 책에서.” 마계의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마나 감지 능력이 뛰어나고 마나 저항력이 높아서, 마나를 직접 실체화시켜 공격해봤자 이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어제의 아르페처럼 돌에 조금의 마나를 불어넣어 던진다거나 마나의 실을 늘여 접근을 감지한다거나 하는 짓은 놈들에게 죽어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계는 그런 간단한 수법에 죽어나가는 몬스터들 천지인만큼, 아르페가 레벨을 높여 적정 마법을 취득하기 전에도 직접 마나를 컨트롤하는 것으로 해당하는 마법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와아, 마법사들은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할 수 있지만 안 하지.” 왜냐면 그냥 주문을 외우는 쪽이 더 간지나고 파괴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르페에게 고유능력 만물열람이 없었더라면 상대의 특징을 미리 파악하고 마나로 대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르페는 메테르에게 자신의 고유능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진 않았지만, 메테르는 ‘아르페는 대단하다!’는 패시브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해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아르페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갑다 하고 믿을 뿐! “무섭지만 힘낼게, 아르페!”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응?” 아르페는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입구 계단 밑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자신의 마나를 끌어내어 손에 담았다. “거기에도 몬스터가 있어, 아르페!?” “아니.” 아르페의 손이 아무것도 없는 계단 밑을 두드렸다. 그의 마나에 반응하여 계단이 서랍처럼 열리고 그 안에서 커다란 나무상자가 튀어나왔다. 메테르의 두 눈이 휘둥그레해지자, 아르페는 상쾌한 얼굴로 메테르를 돌아보며 웃었다. “하지만 보물상자가 있어.” “아르페 정말 대단해!” “그래, 난 대단해.” 아르페도 지금만큼은 순순히 자신을 향한 찬사를 받아들였다. 그는 과거 이 능력 하나만으로 사천왕 자리를 꿰어 찼으니까 말이다! 기분이 좋아진 아르페는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대개의 던전에는 스타터셋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던전 안으로 쫓겨 들어온 도망자들을 위한 초기 장비가 있게 마련이야.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던전 안으로 쫓겨 들어올 정도의 도망자들은 여유롭게 이런 비밀장소를 탐색할 시간도 없다는 거지.” “그래도 운이 좋으면 발견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건 어떤 사람이 준비해놓은 걸까? 분명 멋모르고 던전에 들어온 사람들이 몬스터들에게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착한 사람일 게 분명해.” “착한 사람이라고?” 아르페는 히죽 웃었다. 용사의 인식은 여전히 물렀다. 갓 만들어 따끈따끈한 푸딩만큼이나 물렀다! “초기 장비는 괜히 초기 장비가 아니야. 몇 번 휘두르면 부서진다거나, 며칠 지나면 쓸 수 없게 된다거나 하는 것들이 많지. 그 안에 추가로 장비를 수급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노련하지 않으면 힘들어. 운 좋게 초기 장비를 발견하고 의지가 차올라 힘차게 던전 안으로 발을 디딘 초짜들 대부분이 죽어나가는 이유지.” “그, 그럼 우리도!” “우리는 아냐. 용사니까.” “그렇구나!” 아르페는 그것으로 설명을 마쳤고 메테르 또한 그것으로 납득하고 말았다. 역시 바보는 편하다니까! “일단 넌 이것들로 무장해. 일단 앞으로 정확히 186번 휘두르면 부러지는 낡은 철검. 아, 마나를 담거나 레벨 5이상 차이나는 몬스터의 뼈에 부딪히게 되면 그 절반 이하로 줄어드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건 레벨 5이상 차이나는 몬스터의 타격이나 레벨 3이상 차이나는 몬스터의 베기에 20번 이상 당하는 순간부터 의미를 상실하는 가죽갑옷.” “알았어, 조심할게!” 아르페가 상당히 디테일한 지시를 내렸음에도 메테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세부사항까지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어쨌든 최대한 덜 맞고 최대한 적게 때려서 죽이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어라, 그런데 아르페가 쓸 무기는 없어?” “이런 초보자 던전에 마법사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신은 없어.” 아르페가 워낙 당연하게 마나를 다루니 망각하기 쉽지만, 마법사는 1차적으로 체질을 타고나야 하며 2차적으로는 머리가 좋아야 하고, 3차적으로는 마법을 다루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는 이는 무척 적고, 그렇기에 당연히 인간계의 마법사의 숫자 또한 매우 적다. “아르페는 정말정말 대단해······.” “그래그래.” 상자에는 그 외에도 단검 두 자루, 긴급용 포션 세 개와 건조식량이 조금 들어 있었는데, 아르페는 포션과 식량을 싹싹 긁어 자루에 넣고는 두 자루의 단검을 허리춤에 장비했다. “아르페 단검 쓸 줄 알아?” “투척이라면.” 무엇을 숨기랴, 아르페는 무언가를 던져 맞추는 데에 아주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 마계에서 자라나던 시절의 어린 아르페는 제대로 된 무기나 마법서를 살 돈도 없었기에, 마왕의 눈에 들기 전에는 마나를 직접 다루거나 사물에 불어넣어 던지는 식으로 사방의 위협을 물리쳐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미 말했듯 마계의 몬스터들은 그런 수법에는 잘 당해주지 않았고, 따라서 아르페의 어린 시절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르페의 안구에 습기가 차올랐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모든 무기는 저마다의 무게와 밸런스가 달라. 어제 나뭇가지 휘두르던 감각으로 휘두르다가 아차하면 죽게 될 테니 지금 몇 번 휘둘러보면서 감각을······.” 아르페가 ‘초보 모험가가 사망하는 50가지 이유 ? 너무 당연해서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 때문에 그들은 죽어나간다.’에서 발췌한 대사를 지껄이던 그때 메테르가 허공에 검을 휙휙 휘둘러보더니 밝게 웃으며 외쳤다. “음음, 이 정도면 되겠다! 날이 붙은 무기는 정말 무섭네!” [메테르] [레벨 ? 2] [검술 Lv3] “아, 그래.” 자신이 용사에게 충고를 하다니 마법서 한 권 읽은 애송이가 궁정마도사를 가르치는 꼴이었다. 아르페는 깨달음을 얻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용사가 깜짝 놀라며 그를 붙들었다. “그 앞에는 몬스터가 있다고 했잖아!?” “없어. 다 감지하고 있거든.” 이런 초보자 던전에 나오는 일반 몬스터 정도로는 마나 실 감지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아르페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내뻗다 말고는 인상을 굳히며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가 아니네.” 던전 첫 번째 방 출구 부근에 한 마리의 엘리트 몬스터가 대기를 타고 있었다. 심지어 방 안에 있는 몬스터들은 놈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어서, 방 안의 몬스터들을 다 해치운 모험가가 ‘그럼 다음 방으로 넘어갈까!’하고 한 발 내딛는 순간 목이 날아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르페에게 만물열람이 없었더라면 그들도 똑같은 신세가 되었으리라! “왜 이런 초보자 던전의 1층 첫 번째 방부터 저런 몬스터가 있는 건데!” “강한 몬스터라도 있어?” “레벨 10의 엘리트 좀비. 은신 능력에 치명타 스킬까지 가지고 있어서 저레벨의 모험가가 만났다간 골로 가기 딱 좋은 상대야.” “레벨 10?” 어제 해치운 고블린들보다 무려 7레벨이나 더 높은 상대였다. 그러나 레벨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메테르는 그래서 얼마나 세다는 거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저레벨 대에서는 체감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레벨은 절대적인 힘의 격차거든. 어지간하면 5레벨 이상 차이나는 놈에겐 덤비면 안 돼.” “그럼 당장 도망가야 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전쟁에 임했던 군주 중에 딱 한 명 성대하게 실패했던 놈이 있어.” “그게 누군데?” “있어, 마계 최고의 셰프.” 용사는 언제나 레벨 차이를 개무시하고 성장해왔으니 이번에도 틀림없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2레벨로 비벼보기에는 너무 높은 언덕이라는 것. 따라서 아르페는 놈을 꺾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일단 방 안의 몬스터들을 다 죽여서 레벨을 올린다. 네 능력치라면 1레벨만 올라도 엘리트한테 얼추 칼날이 들어갈 수준은 되겠지.” “그런 후에는?”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앞으로 걸어가면 저 엘리트가 너를 공격하려 들 거야. 그때 내가 놈을 공격해서 빈틈을 만들고, 네가 놈한테 추가로 공격을 가해서 물러나게 한다. 네 공격이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을 때에도 내 추가타가 들어갈 테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알았어!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 너는 뒤로 빠져서 이곳 입구까지 돌아와.” “······응?” “일단 거기까지만 숙지해. 알겠지?” “응! ······응?” 메테르는 어째서 몬스터와 싸우다 말고 뒤로 돌아와야 할 필요성이 있나 의문을 느꼈으나 아르페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르페와 함께 던전의 첫 번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워, 워······.” “인간······ 날, 죽였다······.” “딸의 얼굴······ 보고 싶다······.” 제법 거대한 방 안에 있었던 것은 총 여섯 마리의 좀비! 놈들은 엘리트 좀비와는 다르게 5레벨 수준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인식과 함께 느릿느릿 일어섰다. 좀비는 썩은 냄새가 나는 데다 손톱에 시독까지 함유하고 있어 상대하기 무척 짜증나는 적이지만, 바로 그 느릿느릿한 속도 때문에 무척 상대하기 쉬운 적이기도 하다. 초보용사의 실전상대로 이만한 적은 또 없는 셈이다. “어떻게 해, 아르페. 딸의 얼굴이 보고 싶대······.” 하지만 적이 느릿느릿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 놈들을 공격해 들어가야 할 용사는 좀비가 내뱉는 말에 눈물을 글썽이느라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녀가 답답하다고 욕할 법도 하건만, 아르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주었다. “물론 좀비의 말을 듣다가 공격을 망설이는 모험가도 가끔 나타나게 마련이지.” “그치! 저렇게 가여운 사람들을 공격하는 건 두 번 죽이는 일이야!”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아르페가 메테르를 향해 돌아서며 눈빛을 날카롭게 했다. “우리는 긴 기다림 끝에 좀비 놈들 모두가 일정한 패턴의 대사를 지껄인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습니다.” “딸의 얼굴······ 보고 싶다······.” “그래, 저렇게.” “와, 저 좀비도 딸이 있었나 봐.”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메테르와 아르페가 놈들의 대사에 반응해 움직임이 둔해진 것을 느끼자, 좀비 몇 마리가 머뭇거리더니 이내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딸······ 내 딸······.” “딸의 얼굴이······ 보고······.” “다들 딸부자였나 봐!” “아마 좀비 백 마리를 데려다 놓아도 저렇게 지껄일 걸. 저놈들한테 딸 같은 건 없었어. 그냥 너를 망설이게 하려고 저러는 것뿐이야.” “음······?” 메테르의 반응이 달라진 것은 그때였다. “쟤네······ 설마 지금 거짓말 하는 거야?” “실로 충격적이지? 하지만 모든 몬스터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거짓말을 해. 뇌가 썩어 본능만 남은 좀비조차 그렇게 해.” “······.” 용사는 아르페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리곤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좀비에게로 몸을 날려 놈의 한쪽 다리를 베어 절단했다. 저게 어딜 봐서 레벨 2냐고 묻고 싶을 만큼 날랜 몸짓에 강한 일격! 좀비는 그것만으로 풀썩, 끈 떨어진 연처럼 자리에 쓰러져 허우적거렸다. [메테르] [레벨 ? 2] [치명타 Lv1] “거짓말은 나빠······.” 메테르가 고개를 들었다. 아르페는 힉, 소리를 내며 물러서고 말았다. 메테르의 눈동자에 격렬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말은 나빠!” “딸······.” “거짓말하지 마!” “따아아아아아알!” 그 후로 용사의 분투는 실로 대단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는 좀비들의 다리 한 쪽을 차례대로 끊어놓아 놈들이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만든 것이다! 용사가 불타오르는 눈을 들어 외쳤다. “이제 몬스터의 말은 믿지 않아!” “그래, 그 자세야!” 전직 사천왕이 용사의 인성을 버려놓는 데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 물론 놈들은 쓰러져서도 몸을 질질 끌고 그들에게 전진해왔으나 속도는 압도적으로 느렸다. 메테르는 자신에게 가까운 순서대로 좀비의 목을 잘라내어 죽이다가는 세 마리의 목을 베어낸 시점에서 아차하며 아르페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다 죽이면 나만 성장하잖아. 아르페도 레벨 올려야지!” “아니, 네가 나머지도 다 해치워둬. 전열에 나서는 네가 지금은 더 중요하거든.” “알았어!” 메테르는 아르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저 없이 좀비들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좀비들의 거짓말에 상당히 분노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검의 내구도를 최대한 덜 깎이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기특했다. 아르페는 그녀가 여섯 마리의 좀비를 다 죽인 시점에서야 앞으로 나서서는 좀비들을 툭툭 쳤다. “그러면 일단 루팅하고······.” “봐도 봐도 신기해.” 물론 허접한 좀비들에게서 나오는 것도 고블린보다 그리 나을 것은 없었다. 단 이놈들은 제법 높은 확률로 독이 묻은 기다란 손톱을 떨어트리는데, 지금의 아르페에겐 이것이 무척 좋은 무기가 되었다. “독 묻은 손톱 세 개에 동화 다섯 개, 이 정도면 됐네. 그럼 메테르, 이대로 걷······.” 아르페는 메테르에게 행동을 지시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만물열람을 발동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메테르] [레벨 - 4] “왜?”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좀비는 물론 레벨 5의 몬스터이지만, 그런 놈을 여섯 마리 해치운다고 해서 단숨에 레벨 2에서 4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그게 정상인 것이다. ‘그리고 용사는 비정상이지. 더구나 녀석이 생전에 지녔던 고유능력을 생각해보면······ 아마 이번 생에도 틀림없이 그 능력을 각성할 거야.’ 용사에 대한 질투심이 솟구치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그런 용사가 지금은 자신의 편인 것이다. 그는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순진한 소녀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앞으로 걸어가.” “응.” 메테르가 아무런 주저도 없이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출구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 은신하고 있던 좀비가 나타나 그녀의 목을 물어뜯으려다 말고 아르페가 던진 마나 듬뿍 단검에 정통으로 맞아 경직되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 “에잇!” 놈의 은신이 풀려 놈을 인식할 수 있게 된 메테르 또한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러 놈의 다리를 베어냈다! 물론 괜히 엘리트가 아닌지라 다른 좀비들처럼 한 방에 다리가 떨어져 나가지는······.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떨어져나가네!?” “나는 지금 무척 화가 났어!” “키아아아!” 이어지는 메테르의 공격에 놈은 두 다리를 모두 잃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레벨 10의 엘리트 몬스터가 평균레벨 3 파티에게 딱 세 방 맞고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입구로 돌아가면 되지, 아르페?” 메테르가 좀비로부터 두 걸음 정도 물러나며 아르페를 향해 씩씩하게 외쳤다. 아르페는 실로 용맹한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벅벅 긁고는 대꾸했다. “아니, 그냥 이대로 죽이면 돼.” “응?” “이대로 죽이면 된다고.” “응······?” 용사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던 탓에 작전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 순간이었다. 아르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엘리트 좀비의 급소를 귀신같이 찾아내 검을 푹푹 찔러 넣는 메테르를 보며······. 그냥, 웃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Chapter 2. 던전은 사망을 싣고 - 2던전에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들어온 대다수의 모험가들은 1층을 넘어서지 못하고 전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투능력이 부족하거나, 함정을 눈치 채지 못한다거나, 장비관리에 소홀하거나, 도중에 식량이 떨어지는 경우 으레 그렇게 되기 마련. “와아, 이 계단 봐봐! 이게 혹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야?” “응, 뭐 그렇지.” 물론 팀의 전투력을 책임지는 인간 용사 메테르와 그 외 나머지를 모두 담당하는 전직 마족 사천왕 아르페로 구성된 2인 파티가 중간에 고생을 할 리도 없고, 엘리트 좀비까지 해치우며 한꺼번에 6레벨로 성장하고 만 메테르의 기세에 힘입어 불과 6시간 만에 던전 1층을 초고속 돌파하고 말았다. 그 결과 메테르는 8레벨, 아르페도 어찌어찌 5레벨까지는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으으으으음, 그런데 정말 왜 나만 이렇게 빠른 거지. 아르페가 훨씬 더 대단한데.” “원래 그런 거야. 사람한테는 전문분야라는 게 다 있다고.” 메테르는 자신의 성장속도가 더 빠른 지금 현실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으나 전생에서의 용사를 알고 있는 아르페에게는 오히려 이것도 느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그녀의 고유능력을 각성하고 나면 더욱 빨라지겠지. “이대로는 안 돼.” “뭐?” 그런데 순순히 납득하는 아르페와는 달리,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던 메테르는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페를 돌아보았다. “우리 둘의 레벨을 맞춰야 돼.”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전열에 서는 네 레벨이 더 높은 편이 안전······.” “둘의 레벨을 맞춰야 돼.” 메테르의 눈빛이 무척이나 진지했기에 아르페 또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가 뭔데?” “레벨 차이가 많이 나면 우리 사이도 멀어질까 봐 두려워.” “제법 시적인 비유를 쓰는구나, 너······?” 하지만 메테르의 지적은 의외로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대부분의 파티가 쪼개지는 이유는, 그중 한 명의 레벨이 지나치게 높아지거나 어느 한 명이 지나치게 뒤떨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수준차이가 극심해지면 같이 있어봤자 서로에게 피해가 간다. 몬스터의 레벨이 상대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지 않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 바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리는 없고······ 단순히 나랑 녀석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게 싫었을 뿐이겠지.’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단지 메테르의 역량을 압도적으로 키워 자신은 뒤에서 편하게 콩고물만 받아먹을 셈이었는데, 용사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별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추어 줘야하지 않겠는가.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 하지만 나는 너보다 성장이 훨씬 느려. 레벨을 완전히 맞추는 건 불가능할 테니, 대신 우리 둘이 같은 비율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어떨까.” “같은 게 좋은데······.” 메테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지만 끝내 납득해준 모양이었다. “그럼 밑으로 내려가자.” “내려가긴 어딜, 거기 딱 붙어 있어.” 아르페가 메테르에게 으름장을 놓은 후 마나가 담긴 손을 뻗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붙잡아 당기자, 계단 바로 앞이 무너지며 스르륵, 상당히 커다란 나무상자가 하나 솟아났다. 메테르가 환호성을 지르자 아르페는 가볍게 윙크하며 해설했다. “이건 상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위를 지나갈 경우 바닥에서 독침이 솟구쳐 대상을 죽여 버리는 함정이야.” “히이이익!” “물론 상자를 운 좋게 찾아내고 다가간 녀석들이라고 해도 보물상자인 척 의태를 하고 있던 몬스터 미믹에 당해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지.” “으으으으으.” “최악인 건, 미믹을 용케 알아보고 처리한다고 해도 그 순간 놈이 죽은 자리에서 독침이 솟구친다는 거야.” “이젠 싫어어!” 사실 아르페 또한 태초의 마을 근처에 버려져 있던, 레벨 5의 좀비 따위가 주로 나타나는 초보자 던전에 이렇게까지 공들인 함정이 있다는 사실에 제법 놀라고 있었다. 그야 던전 첫 번째 방부터 엘리트 몬스터가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기야 했지만! ‘과거 용사가 탐색하지 않았고, 입구에도 허접한 좀비가 있을 뿐이어서 과거에는 굳이 이 던전에 들어오지 않았지. 그래봤자 초보자 던전이라 생각해서 만만히 보고 있었는데······ 어쩌면 이 던전은,’ 숨겨진 보물창고일지도 모른다. 아르페는 무심코 입 밖에 낼 뻔했던 그 말을 속으로 꼴깍 집어삼켰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는 법.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성장의 기회였지 재보를 차지하기 위한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니었다. 마냥 좋은 일로 받아들일 수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아르페, 어떻게 해야 돼?” “물러나.” “응!” 아르페의 손가락 사이로 네 개의 길쭉한 손톱이 잡혔다. 물론 그것은 여태껏 좀비에게서 열심히 수집한 바로 그 손톱이었다. 제법 예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던져봤자 상대에게 미약한 중독 효과를 불러올 뿐인 허접한 무기. 하지만 사물에 마나를 불어넣어 강화할 줄 아는 자가 그것을 들면 얘기는 아주 조금 달라진다. 독성과 예기가 모두 강화되어, 비록 명중 후 마나를 모두 소진해 소멸하기는 하겠지만 1회에 한해 낮은 수준의 상대에게 제법 강력한 데미지를 먹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물에 자유롭게 마나를 불어넣어 강화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좀비 손톱보다는 훨씬 좋은 투척무기를 들고 다니기에 그 사실은 아르페처럼 춥고 배고픈 과거를 지닌 이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무척 서글픈 현실이다. “에잇.” 아르페는 메테르가 자신의 뒤로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빠르고 정확하게 네 개의 손톱을 던져 상자를 공격했다. 얌전히 나무상자인 척 하고 있던 미믹은 명중 직전 기기기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점프를······. “훼이크다, 이 병신아!” [기이이이이이이!] 한 순간, 허공에서 방향을 선회한 손톱 무리에 그대로 꿰뚫려 허공에 붕 뜬 상태로 정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놈이 바닥에서 몸을 비킨 그때 밑에 있던 함정이 순조로이 작동했고, 수십 개의 독침이 그대로 솟구쳐 미믹의 몸통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기긱!] 단말마를 내지르기를 잠시, 미믹은 곧 혀를 빼물고 침묵했다. 메테르는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조심스레 아르페에게 물었다. “끝난 거야······?” “응, 끝났어.” 미믹은 그 희귀성과 특수성 때문에 퇴치 난이도에 비해서 ‘보상’이 압도적으로 높은 몬스터 중 하나. 그런 놈을 해치웠다는 증거로 아르페의 경험치가 폭증했고, 레벨이 족히 2단계는 올라 몸에 활력이 솟구치고 있었다. 아니, 다 제쳐두고 만물열람으로 확인해도 미믹은 확실히 끝장나 있었다. “아르페는 정말 대단해······ 그렇게 죽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귀에 딱지 앉겠다.” 아르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미믹이 죽어 누운 자리로 몸을 옮겼다. 그가 혀를 빼물고 죽은 미믹을 거꾸로 집어 들어 탈탈 털자 바닥으로 동화나 작은 단검 따위가 쏟아졌다. 그것을 본 메테르가 깜짝 놀라 외쳤다. “보물상자가 아니라 몬스터였는데 어째서?” “보물상자라고 착각하고 덤벼든 인간을 꿀꺽 집어 삼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녹여 먹고 나머지는 남겨둔 거지. 보물상자라는 착각을 하기 쉬우라고.” “몬스터들은 정말 나쁘구나······!” “나쁘다라, 글쎄······.” 몬스터들은 그렇게 살도록 태어났다. 인간들이 아무런 죄가 없는 돼지나 소를 도축해 먹듯이 몬스터 또한 그렇게 인간을 먹는 것이다. 사실 단순한 선악의 개념으로 구분할 수는 없었다. 단지 모두가 살기 위해 투쟁할 뿐이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살기 위해 이놈들을 다 죽여 버려야 하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르페를 괴롭히는 것들은 모두 내가 해치울게!” 처음 고블린을 죽이고 충격에 부르르 떨던 것이 불과 어제인데 용사는 실로 빠르게도 늠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전생의 용사를 겹쳐본 아르페는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막상 그 당시에도 용사는 자신에게 적의를 품기는커녕 그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떠올리곤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띠며 미믹에게서 얻은 것들을 긁어모았다. 1층의 모든 좀비를 죽이고 얻은 동화가 고작 26개인데 미믹이 토해낸 동화만 138개. 더구나 동화의 백 배 가치를 지닌 은화도 무려 3개 섞여 있었다. 은화가 2개 있으면 숲속 마을의 4인 가족이 한 달 동안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한 돈이다. 평생 촌구석에서 살아온 메테르의 눈이 휘둥그레 뜨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굉장해!” “이 정도는 네가 앞으로 보고 겪고 얻게 될 모든 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냐.” “네가 아니라 우리!” “그래, 그래.” 그는 메테르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주고는 내용물을 다 토해낸 미믹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미 죽은 놈의 시체가 허공중으로 깨끗이 증발하며 그 자리에 책 한 권을 남겼다. 고블린이 동화를 토해내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장면이었다. “책이잖아······?” “미믹은 처치하기 까다로운 만큼 만나기도 힘든 레어 몬스터야. 그런 놈들은 다른 몬스터에 비해 압도적으로 ‘보상’이 후하지. 경험치도, 그리고······.” 아르페는 그 내용이 아무리 허접해도 매물로 나오는 순간 무조건 은화 30개 이상의 가치를 보장하는 마법의 책, ‘스킬 북’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아이템도. 그러니 미믹을 무사히 처치하고 획득했다면 정말 보물상자를 발견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대단해!” 글을 쓸 줄은 모르지만 얼추 읽을 줄은 아는 메테르가 박수를 짝짝 치며 그 책을 살폈다. “굉장해, 하이퍼 러빙(Hyper Rubbing)이라고 적혀 있어! 러브라는 건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아르페가 예전에 알려줬지? 그러니까 이건 사랑과 관련된 마법이구나!” “어······ 음, 아니.” 미처 스킬, 아니 스펠 북의 이름까지는 읽지 않았던 아르페는 메테르의 말에 인상을 참혹하게 구겼다. 나와도 하필이면! 그러나 메테르는 아르페의 속도 모르고 볼을 발갛게 붉히며 몸을 비비꼬고 있었다. “이 마법으로 나와 아르페의 사, 사랑을······.” “러브가 아니야, 럽이지.” “럽이 무슨 뜻인데?” “문지른다는 뜻이야.” “······응?”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아르페의 표정은 처참하게 구겨진 채였다. 하필이면 나와도 이렇게 써먹을 데가 없는 스펠이라니! 러빙(Rubbing) 계열의 스펠은 소프트 러빙, 러빙, 하드 러빙, 하이퍼 러빙의 네 단계로 구분된다. 세분되어 있어 이게 뭔가 싶기도 하지만 정작 스펠의 효과는 아주 간단하여, 마나로 대상을 문지르는 것뿐이었다! 혹시나 이 스펠에 숨은 의미가 있나 하여 연구한 마도사들 모두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물론 아주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마도사를 부릴 만큼의 재력을 지닌 고위 귀족들 중 일부가 러빙 마법에서 오는 기묘한 감각에 끝내 열어서는 곤란한 문을 열고 마도사들에게 이하 생략. “그러니까 하이퍼 러빙은 겁나 세게 문지르는 거지.” “으음, 으으으음······?” 그나마 러빙 계열 스킬에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익히는 데에 별도의 레벨 제한이 없다는 것. 즉 지금의 아르페라도 아무런 문제없이 익힐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메테르는 다시 의문을 발했다. “하지만 그렇게 의미가 없는 마법을 왜 익혀야 해?” “모든 스킬 북과 스펠 북은, 단지 그것을 통해 익히는 것만으로 사람의 한계를 넓혀주고 능력을 키워줘. 종류를 불문하고 스킬과 스펠 북의 가격이 비싸게 책정되는 이유야.” 더불어 그것이야말로 바로 용사가 개사기클래스인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용사는 모든 스킬과 스펠을 닥치는 대로 익힐 수 있으므로, 스킬 북만 충분하다면 기본 능력만으로 다른 것들을 씹어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 물론 마법이나 스킬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익히는 데 실패할 수 있으니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진 않아. 이걸 전문용어로는 꾸직이라고 부르니 기억해두도록.” “꾸직······ 기억했어!” 물론 그것은 아르페와는 관련이 없는 용어다. 만물열람이 그와 함께 하는 한 그에게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란 없으니까! 아르페는 곧장 하이퍼 러빙을 익혔고, 그것은 순도가 높은 마력이 되어 그의 육신을 북돋웠다. 그는 압도적으로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며 깊은 숨을 토해냈다. “후우우우.” 러빙이 아무리 의미 없는 마법이라고 해도 하이퍼 러빙은 러빙 계열의 최고봉. 당연히 그 안에 담긴 마도학의 경지 또한 고절하고(결과는 허접하지만) 마법의 발현에 반응하는 자연의 마나 또한 거대했다(결과는 허접하지만). 따라서 마법을 익히는 것만으로 아르페는 무려 20에 가까운 마력을 얻을 수 있었다. 효과는 굉장했다! “괜히 어중간한 파이어 니들같은 스펠보다는 나았을 수도 있겠네. 이 마나로 그냥 후려치기만 해도 어지간한 파이어볼보다는 강할 테니.” “역시 아르페는 대단해!” “그쯤에서 그런 얘기 할 줄 알았다. 자, 이제 가자.” 챙길 것은 다 챙겼다. 분명 결과만 따져보면 터무니없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데도 어딘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르페는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메테르는 그저 아르페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만으로 뿌듯해져 그를 쫄레쫄레 따랐다. 용사 파티는 그렇게 무사히 2층에 진입했다. 그리고 3층으로, 다시 4층으로. 워낙 돌파 속도가 빨라 던전 중간마다 비치된 보물상자로부터 무기나 식량을 수급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자원인 물은 2층 중반에서 발견한 샘 덕분에 해결이 되었다. 엘리트 좀비 이후로 엘리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나머지 몬스터들은 아르페의 독 손톱과 메테르의 검을 넘어서지 못했다. 던전 탐색은 무척이나 수월했다. 그렇게 두 용사는 던전의 6층에까지 다다랐다. “아니, 대체 어디까지 있는 건데 이 던전!” “던전이란 거 진짜 재미나다! 우리 더 앞으로 가자, 더!” “야, 거기 함정 있으니까 멈춰!” 메테르의 레벨 29, 아르페의 레벨 24에 이른 시점이었다. ────────────────────────────────────────────────────────────────────────Chapter 2. 던전은 사망을 싣고 - 3던전의 6층을 탐색하며 아르페는 점점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던전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이 던전은 대체 뭐지?” “던전은 원래 다 이런 거 아냐?” “대부분의 던전은 아무리 길어봤자 3층을 넘기지 못하거든. 이건 이상해.” 보통 던전의 입구를 보면 그 던전의 난이도 견적이 대충이나마 잡히게 마련이다. 1층의 초입에서 등장하는 몬스터가 5레벨의 좀비라면, 그 던전은 끝까지 가도 보스의 레벨이 10정도인 초보자 던전인 경우가 많은 것. 설혹 다음 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15, 만약의 만약이 있어 더 이어진다 해도 3층이 고작. 보스의 레벨은 20정도일 것이고, 그 정도만 해도 멋모르고 던전을 쭉쭉 돌파하던 초보 모험가들은 전부 죽어나가겠지. 그런데 이곳은. [인간······ 감히 이곳을 범접하는 자들을, 모두 죽인다.] “흐아아아아압!” 푸른 안광을 빛내며 빠른 속도로 돌진해오는 33레벨의 스켈레톤을 향해 아무런 주저도 없이 마주 달려 나간 메테르가, 놈의 뼈 검을 너무나 쉽게 피해버리곤 5층에서 나타나는 스켈레톤 워리어로부터 획득한 뼈 몽둥이를 휘둘러 가차 없이 놈의 두개골을 으깨버렸다. 그 뒤에서 뼈 화살을 날리고 있던 스켈레톤 아쳐 둘은 이미 아르페의 마나가 담긴 뼈 단검 투척 연사에 부서진 지 오래. 그렇게 6층 세 번째 방에서의 전투도 순조롭게 끝이 났다. “벌써 6층인데 아직까지도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이잖아!” “또 이겼다! 후히히.” 메테르는 점점 전투의 승리에서 오는 쾌감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분명 전생에서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엇이 이 아이를 그르친 방향으로 자라나게 한 것일까. 역시 아르페일까. 전생에 마왕이 자리를 아르페한테 양보했더라면 순조롭게 마계가 인간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훌륭한 세뇌력이었다! “아르페는 왜 그렇게 투척을 잘해?” “아무렴 네가 처음 잡은 둔기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만 하겠냐.” [메테르] [레벨 ? 29] [둔기술 Lv4] 아르페는 메테르의 말에 코웃음을 쳐주며 쓰러진 스켈레톤들을 루팅했다. 이젠 루팅이라는 개념에 제법 익숙해진 메테르 역시 아르페를 도왔다. 개중 한 마리가 은화를 하나 드롭했다. 은화에 놀라던 시절도 이젠 까마득한 옛날(대략 사흘 정도 전)이기에 둘은 그리 놀라지 않고 그것을 주웠다. “레벨이 오른다는 건 정말 신비한 감각인 것 같아. 분명 같은 나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 있지! 예전에는 기적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일상이고, 불가능했던 것들이 내 곁에 있어. 정말이지 너무 즐거워.” “보통은 그 감각을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간신히 깨닫게 된다는 것 정도만 기억해둬라.” 물론 지금은 아르페 역시 그렇긴 하지만, 아르페는 어디까지나 과거 전생에서 350레벨까지 성장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메테르의 재능은 단순하게 타인보다 우월한 스테이터스에서 비롯되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레벨, 그리고 전투와 상황에 적응하고 본능적으로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잠재력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정도면 어지간한 용병 수준은 되었겠네. 그것도 전쟁에서 뛰는 본격적인 용병.” “무슨 소리야, 아르페. 우리 이제 겨우 열두 살이야!” 그 말을 들은 아르페가 찌릿, 메테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결코 타인의 강함을 외모나 나이로 판단하지 마. 첫 번째 생존수칙이야.” “으, 응.” “그리고 네가 약한 것을 나이 탓으로 돌리지도 마. 적은 우리가 어리다고 해서 봐주지 않으니까.” “응, 알겠어······ 아르페는 너무 멋져.” “네 결론은 항상 이상하구나.” 아르페는 루팅을 마치고는 습관적으로 장비와 식량, 물을 확인하며 사방으로 마나의 실을 뻗어냈다. 그는 며칠 동안 인간 소년의 몸으로 마나를 다루느라 처음 마나를 발현했을 때에 비해 아득히 완숙한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정보를 확인한다면 마나지배 스킬이 제법 성장해 있으리라. “음?” 그런데 그 마나의 실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안 그래도 1층에서 엘리트와 마주친 이래 너무 순조롭다 싶었는데 저어 멀리 6층의 끄트머리 즈음에서, 다른 어떤 몬스터보다도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는 스켈레톤 한 마리가 절대 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크오오오오오오오오!] 마나의 실이 끊겼다. “미친!” 자아도 있는 주제에 마나까지 다루는 놈이라고!? 아르페는 상황판단이 끝난 바로 그 순간 다시금 수십 줄기의 마나 실을 뻗어내 전방으로 쏘아날려 조종했다. 그와 동시에 메테르의 한손을 붙잡았다. “뛰어! 당장!” “하지만 그 누구가 적이든 일단 맞붙어봐야······.” “그때 좀비랑은 다르다고! 뛰어!” “알았어!” 둘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뒤돌아 뛰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로 스켈레톤이 달려오고 있었다. 철문으로 구분되어 있는 던전의 각 방을 호쾌하게 부수어, 다른 몬스터들까지 자신에게 동조시켜 뒤따르게 한다! 몬스터의 통솔권까지 가지고 있는 최악의 엘리트 몬스터였다! “누가 순순히 당해줄 줄······ 알고!” 한 번 끊겼음에도 마나의 실을 다시 쏘아 보냈던 것은 괜한 마나 낭비가 아니다. 아르페는 자신의 만물열람의 권능으로 사전에 확인해두었던 함정들을 마나의 실로 건드려 작동시키는 것으로 돌진해오는 스켈레톤들을 막아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 이곳저곳에서 스켈레톤들이 부서지고, 그들을 이끄는 엘리트 스켈레톤도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놈의 속도는 그리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부서지는 스켈레톤들의 사체를 방패로 삼아 함정을 막아내기까지 했다. “칫······!” 저레벨의 몬스터 구성에 비해 짜증나는 함정이 많은 던전이기는 하지만 놈에게 치명타를 입힐 만큼 굉장한 함정은 또 없었다. 아르페는 함정을 발동시켜 일단 놈을 따라오는 스켈레톤들을 위주로 정리하며 메테르와 함께 뒤로, 뒤로 물러섰다. “아르페, 그런데 이렇게 달려서 어디까지 가는 거야!?” “던전 입구까지.” “던전 입구라니, 잠깐만······ 1층의 던전 입구!?” 메테르는 제발 아니길 바라며 되물었지만 아르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안에 거기까지 못 가면 죽어.” “못 이겨?” “정면으로는 절대 못 이겨.” 제아무리 메테르가 불세출의 천재이며 일주일 만에 29레벨에 도달한 용사라고 해도 저놈은 못 이긴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의 레벨은 60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놈이 50레벨을 돌파했다는 사실이었다. “용사는 모든 스킬을 익힐 수 있는 대신 마왕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계속 용사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마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종족은 일정 레벨이 되면 보다 강력하고 전문적인 상위 클래스를 얻을 수 있어. 그리고 그 첫 번째 상위 클래스를 얻는 레벨이······.” 바로 50레벨이다. 이것은 몬스터도 예외가 아니어서, 50레벨을 전후로 몬스터들은 현격한 능력차를 보이게 된다. 49레벨의 몬스터와 50레벨의 몬스터 사이에는 족히 1.5배의 무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 50레벨을 넘어서 60레벨에까지 도달한 스켈레톤이라면 어떻겠는가! “심지어 방패랑 칼까지 제대로 된 걸로 들고 있어. 워리어 계열의 상위클래스를 얻은 놈인데다가, 던전의 다른 언데드까지 통솔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일반적인 하급 던전의 보스 정도는 쉽게 공략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놈이라고.” 놈은 지금도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던전을 돌파해오고 있었다. 이제 더는 발동시킬 함정도 없다. 다른 스켈레톤들은 제법 부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 이상은 힘들겠지. 거리가 점점 좁혀져오고 있으니, 이대로는 5층으로 올라가기도 전에 놈과 일전을······. “······아르페, 업혀.” 그때 메테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페는 뭐? 하고 의아한 소리를 냈으나 메테르는 그의 구체적인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대뜸 그를 업었다! “힝, 원래는 반대로 해줬으면 했는데······ 흡.” “너 지금 뭔 소······ 으아아아아아!?” [메테르] [레벨 ? 29] [전투 질주 Lv1] 또냐!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또 레벨을 초월한 스킬을 얻고······ 더구나 저건 상위클래스 전용스킬이잖아! 아르페가 경악하며 외칠 시간도 없었다. 메테르가 그를 업고도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빠른 속도로 던전 복도를 주파하기 시작했으니까! “아르페, 꽉 붙잡아!”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어, 제길!” 아르페는 메테르의 등에 업힌 채, 이게 제법 추한 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리고는 아예 편하게 자세를 잡으며 한쪽 손만을 뒤로 뻗었다. 마침 6층과 5층을 잇는 계단을 올라 5층에 도달하려는 순간, 그는 메테르의 어깨를 붙잡아 잠깐 그녀를 멈추었다. “잠깐, 메테르.” “뭔데, 아르······ 꺄악!” 비록 순수한 마나라고는 해도 무식하게 뽑아내면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르페는 손끝으로 두꺼운 마나의 철퇴를 만들어내어 계단을 두들겼다. 계단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붕괴했다! “아르페 대단해! 이러면 쟤네도 못 쫓아올 거야!” “아니, 아마 쫄따구 스켈레톤들을 부숴서 쌓고 올라오겠지.” “······.” “하지만 시간벌이와 함께 적의 숫자를 줄일 수는 있게 돼. 서두르자!” 6층에서 5층으로, 5층에서 4층으로, 4층에서 3층으로. 그들이 아무리 빠르게 달리며 계단을 부수어놓아도 스켈레톤 워리어는 점차 속도를 높이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2층에 들어섰을 즈음엔 이미 육안으로 놈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워어어어어어어!] “그거 말고 다른 대사도 쳐봐라, 이 뼈대가리야!” [인간 죽인다!] “다른 대사도 치네!?” 2층에는 아르페가 발동시킬 함정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아르페는 소지하고 있는 투척무기들을 던져 공격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지만 아직 그것들을 꺼낼 때는 아니라는 판단을 하곤 대신 자신이 지금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을 발동했다. “나의 의지를 품고, 세상과 소통하며, 대지에 작렬하라.” [그워어어어어어어! 마법, 소용없······.] “하이퍼 러빙!” [음!?] 하이퍼 러빙을 적에게 발동시켜봤자 때도 안 나오는 놈들의 뼈마디만 문지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페가 발한 마법의 대상은 몬스터가 아니라 그들 바로 앞에 놓인 복도였다! 마나의 힘이 한순간, 겁나 강렬하게 복도를 문지르자 복도에 광이 났다. 어찌나 반듯하게 문질렀으면 흙이 아니라 금속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메테르는 그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와, 이 마법 있으면 앞으로 청소할 필요 없겠다!” “앞으로 넌 평생 청소할 일이 없을 거야.” “아, 안 돼! 집안일은 공평하게 분담해야지. 아르페만 고생시킬 수는 없어!” 저런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메테르의 컨디션은 아직까지 괜찮은 듯하다! 기묘한 방식으로 동료의 멘탈 상태를 확인한 아르페는 다음으로 그들을 쫓아오던 몬스터 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했다. 시작은 무리의 선두에 서서 달리던 스켈레톤 워리어였다. 아르페의 마법이 자신의 몸에 직접 상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놈이 아무런 주저도 없이 발을 뻗은 직후, 빙판에 올라간 강아지처럼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끝내 해골을 바닥에 박고 넘어진 것이다! [인간 죽인드아아아아아아아!] 놈의 강렬한 샤우팅은 안타깝게도 일행에게 아무런 데미지도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놈을 뒤따라 뛰어오던 스켈레톤들이 차례차례 미끄러지며 놈에게 강렬한 보디블로우를 선사했다. [그워어어어어어!] [기기기기기기기] [나의 소중한 경추 3번이······!] 아르페는 쾌재를 불렀다. 마법을 구사하면서도 이게 통할지 반신반의했으나, 하이퍼 러빙 마법은 아르페가 원한 대로 흙바닥을 치열하게 문질러 기름칠한 철판보다도 매끄러운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디딘 모든 몬스터들을 차례차례 바닥에 넘어지게 만든 것이다. 마력에서 비롯된 물리력으로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으니, 설혹 마나에 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놈이라도 낭패를 면할 수가 없었다. 차마 버릴 수 없어 익혔던 마법이 두 용사를 위기에서 구원한 순간이었다. ────────────────────────────────────────────────────────────────────────Chapter 2. 던전은 사망을 싣고 - 4놈들의 속도가 강렬했던 만큼 그 효과 또한 강렬해서, 스켈레톤들이 서로 부딪혀 부서지며 엉키고 제대로 엇디딘 놈은 그대로 죽어버리기까지 했다. 반짝 든 생각을 실행에 옮겼을 뿐인데 효과는 굉장했다! “물론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마법을 쓰는 쪽이 훨씬 시간도 마나도 적게 들지만 말이야.” “아르페는 대단해!” “그래, 그래. 난 대단해.” 둘은 스켈레톤들의 질주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곤 1층으로 진입했다. 물론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화려하게 부수어 놓았기에 다른 스켈레톤들을 발판 삼아 1층까지 올라온 스켈레톤들은 워리어를 포함해 고작 넷뿐이었다. “좀비가 아직 없네.” “우리가 다 부쉈잖아. 다른 모험가가 들어와서 죽어야 새로운 좀비가 생기지.” “그런 진실은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워어어어어어!] “야, 서둘러, 서둘러.” “맡겨둬!” 던전의 6층에서부터 1층까지 자신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남자아이를 업고도 아무렇지 않게 달리는 여자애나, 계속해서 마나를 컨트롤해 몬스터들을 방해하고 마법을 발현하는 남자애나 다른 이들이 보았더라면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레벨이 높다 해도 그 능력을 실제로 발현하는 육체는 미성숙하지 않은가. 아르페는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족 기준. 인간은 아니었다! “왔다, 이제 곧 입구다!” “서둘러, 놈들 코앞이야!” [인간 죽인다! 인간 죽인다!] 아무래도 아까의 하이퍼 러빙에 당한 것이 컸는지 스켈레톤 워리어의 방패에 제법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두개골에도 미약한 실금이 보이는 것이 이미 어디서 격전을 치르고 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인다아아아아아아아!] 그러나 실제로 전투를 치른 것도 아니고 그들을 쫓던 중에 미끄러져서 바닥에 박은 것만으로 이 정도로 다치고 말았으니 아마 화가 솟구치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놈의 몸을 붉은 기운이 뒤덮고 있었다. 감정의 고양에 따라 일시적으로 능력을 증폭시켜주는 버프 계열의 스킬임에 분명했다. 언데드 주제에 감정 계열 스킬까지 다루다니! “빨리!” “이익, 늦겠어. 늦겠어어······ 아르페에.” “씁, 어쩔 수 없지.” 여유롭게 대꾸하고는 있지만 아르페의 마나는 이제 곧 바닥이 난다. 던전 복도 전체를 미끄럽게 만들어 스켈레톤을 멈추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에잇!” “꺅!” 아르페가 손을 뻗어 마법을 발현한 그 순간, 그를 업은 채였던 메테르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정확히 그들이 나아가는 길을 따라 미끄럽게 변한 진흙의 복도가 그들을 앞으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마법을 아르페가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메테르는 최대한 넘어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미끄러워진 바닥을 이용해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정말 이 녀석의 재능은 끝이 없었다! [인가아아아아아아아안!] “죽는다, 죽는······.” “도착!” 마법의 힘이 끊긴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은 던전의 입구에 내팽개치듯이 엎어졌다. 직후 아르페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스켈레톤 워리어의 바스타드 소드가 훑었다. 그의 머리카락 몇 개가 예리하게 잘려 허공에 떠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르페의 머리카락을 자르다니 용서 못해!” “진정해!” 곧장 몽둥이를 뽑아들고 워리어에게 돌격하려던 메테르였으나 아르페가 그녀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직후 메테르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쟤 뭐해?” “뭐하는 걸로 보여?” 던전 입구와 1층의 첫 번째 방을 가르는 경계, 바로 그곳에 선 채 스켈레톤 워리어가 이를 갈며 검을 붕붕 휘두르고 있었다. 물론 일행은 입구의 안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 검에 다치기는커녕 닿지도 않았다. “쟤네, 왜 우리가 코앞에 있는데 안 와······?” “왜냐면 던전의 몬스터들은 던전의 입구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야.” “아, 분명히 아르페가 설명해줬었어!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못 나오는 거야?” “바로 그거지.” 부하 스켈레톤들은 이미 지쳐 쓰러졌고, 스켈레톤 워리어만이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이 검을 붕붕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처음 패기롭게 등장했던 때와 비교하면 많이, 그러니까 많이······ 없어보였다. “대체 왜? 아르페, 난 정말 모르겠어! 어째서야? 응?”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르페는 상냥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물론 손에는 저 미련한 스켈레톤 워리어를 공격하기 위해 단검을 쥐고 마나를 모으며. “그건 나도 몰라!” “아하, 그렇구나!” 역시 바보는 이래서 편하다니까!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그래, 계속 그렇게 떠들고만 있어!” 아르페는 원한과 분노에 차 지껄이는 스켈레톤 워리어에게 상냥하게 대꾸해주며 마나를 끌어 모았다. 여태까지 엄청나게 소모하기만 했는데도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제법 많은 양의 마나가 회복되고 있었다. 마족이었던 시절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어린 인간 소년으로서는 이례적인 일. 분명 인간의 육신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마나 친화도가 높은 것인지는 만물열람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아르페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죽인다, 인간! 죽인다! 죽인······ 포기한다.] “야야, 이제 와서 포기하지 마!” 한참을 바스타드를 휘두르던 스켈레톤 워리어도 결국 던전 입구를 넘어설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포기하려던 그 순간, 아르페는 놈의 용기를 북돋워주며 마나가 충분히 모인 단검을 내던졌다. 단검은 아르페의 눈에만 보이는 푸른 마나의 궤적을 그리며 쇄도하여 스켈레톤 워리어의 정수리에 박혔다. 놈이 아까 하이퍼 러빙 마법에 당해 스켈레톤들과 연쇄 추돌사고를 일으켰던 때에 얻었던 실금 부위를 정확히 파고든 일격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죽인다!] “그렇지! 잘 생각했어!” “아르페 나빴어······.” 꺼져가던 불이 다시금 화르륵 타올랐다. 놈은 무력했던 자신을 버리고 어떻게든 둘을 죽여 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검을 열심히, 아주 열심히 휘둘렀다. 아르페는 놈을 응원하듯 고개를 연신 끄덕여주며 마나를 다시 회복했다. 이제야 아르페의 전술을 모두 깨닫게 된 메테르가 멍한 눈으로 물었다. “아르페, 뭔가를 던져서 공격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나는 어떻게 하면 돼?” “너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건조식량이나 먹고 있어.” “응!” 메테르는 열심히 식량과 물을 먹어치웠다. 아닌 게 아니라 6층에서부터 1층까지 아르페를 업고 달려왔으니 스태미나가 소모되기도 했던 것이다. 아르페는 그동안에도 부지런히 마나를 끌어 모아 단검에 주입했다. 6층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무수한 세월을 거듭해 이 던전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의 유품이라거나 보물상자를 발견하여 투척무기를 보충했기 때문에 무기가 바닥날 걱정은 일단 없다고 보면 되었다. [인간! 인가아아아아아안! 포기한다!] “아냐, 넌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없다!] “너를 믿지 마, 너를 믿는 나를 믿어!” “······.” 입구에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무력을 새삼스레 실감하는 스켈레톤 워리어와, 어떻게든 계속 놈을 공격하여 다른 곳에 정신을 팔지 않게 만들려는 아르페. 메테르는 언데드와 인간이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보며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점은 아르페가 벌써 네 개나 되는 단검을 던져 놈의 몸에 훌륭히 박아 넣었다는 것이다. “좋아, 순조로워.” [그아아아아! 포기한다!] “네 레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꼬맹이 둘에게 당해놓고 정말 이대로 도망칠 거야?” [크으으으으으으!] 물론 여기서 가만히 있다간 아르페에게 놀아나 죽음을 맞이할 뿐이지만, 안타깝게도 스켈레톤 워리어의 지성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금 놈에게는 분노 버프가 걸려 있는 상황. 감정을 기반으로 발현하는 버프는 마력적인 대가가 크지도 않고 능력치 증가폭 또한 크다는 장점이 있지만, 해당하는 감정이 증폭되어 그 상태에서 쉽사리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는 단점 또한 있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전투를 포기하지 못하고 아르페에게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도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더 받아라, 더! 아직 더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인가아아아안! 죽인다! 죽인다!] “흠, 여전히 어그로는 우리한테 고정되어 있고······.” “아르페?” 스켈레톤 워리어의 몸통에 박힌 단검의 개수가 여덟 개를 넘었다. 아직 투척무기가 제법 남아있었음에도 아르페는 그쯤에서 투척을 멈추었다. “이 방식으로 죽이려면 이렇게 한 사흘 동안은 던지고 있어야겠는데.” “그러면 포기할 거야? 나 이제 나가도 될 것 같아! 병사 아저씨들도 고블린들도 하나도 안 무서워!” 배를 채워 기운을 회복한 메테르가 씩씩하게 외쳤다. 실제로 그들은 일주일도 안 되어 거의 진화에 가깝게 성장했다. 병사들을 따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정면에서 수십 명과 붙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르페는 그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엘리트 몬스터와 조우할 확률은 제법 낮은 편이야. 물론 놈들은 그만큼 강하고 어려운 상대지만, 죽였을 때의 보상 또한 큰 법이지. 지금 놈을 포기하고 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워.” 전생의 아르페였더라면 레벨 60의 엘리트 몬스터가 내어놓을 보상 따위 코웃음을 쳤겠지만 지금 그는 레벨 24에 배운 마법이라고는 하이퍼 러빙뿐인 초보 용사다. 적을 죽일 가능성이 있는데도 물러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더구나 이 던전 자체도 마음에 걸리고······.’ 레벨 5짜리 초보 몬스터부터 시작해서 6층에 이르러서는 레벨 60에 달하는 엘리트 몬스터까지 나타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초보자 던전. 과연 이 던전의 끝에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묘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마음에 걸려 무시할 수가 없다. 만물열람을 지니고 있기에 대부분의 일은 궁금해 하기도 전에 해답을 얻어왔던 아르페에게, 끝을 보이지 않는 이 던전은 상당히 흥미를 돋우는 요소였다. 물론 위험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아르페와 메테르가 성공적으로 던전을 정복한다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왕궁에서 돼지밥을 먹으며 썩어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니 방법을 바꾸자.”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 거지!?” “아니, 너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앉아서 응원이나 하고 있어.” “히잉.” 아르페의 생각이 가 닿은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마법 하이퍼 러빙이었다. 얻었던 당시에는 문지르는 능력밖에 없는 쓸모없는 마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보니 위기상황에서 일행을 두 번이나 구해버리지 않았는가. 문질러서 지형조건을 변화시키고, 문질러서 메테르의 속도를 북돋우고. 이 마법은 처음 아르페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기만 한 마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들어가는 마나의 양에 비해 환경의 변화 범위가 굉장히 크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아르페는 스켈레톤 워리어의 두개골 외에도 놈의 신체 관절부위마다 단단히 박혀 들어간 여덟 개의 단검과 그 단검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의 마나를 확인하며 눈을 빛냈다. 과연 이 수법이 제대로 먹힐까 고민되기는 하지만 언제까지고 던전의 입구에서 광대놀음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마법을 영창했다. “나의 의지를 품고 한 줄기 칼날에 집중하여 현현하라! 하이퍼 러빙!” ────────────────────────────────────────────────────────────────────────Chapter 3. 성장하는 용사 - 1 [마법에는 당하지 않······ 큭!?] 아까 겪어놓고도 바보같이 똑같은 대꾸를 하다니! 아르페가 레벨이 자신의 두 배는 되는 스켈레톤의 마나 저항력을 알면서도 놈에게 직접 마법을 쓸 리가 없지 않겠는가! 아르페의 영창에서부터 드러났듯이 이번에 그의 마법이 적용된 곳은 그가 놈에게 던져 박아 넣은 단검 중 놈의 방패를 든 팔뚝 관절에 박혀든 단검의 날이었다. 날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하게 문질거리는 하이퍼 러빙! 아르페는 혹여 너무 문질거린 나머지 단검이 빠져나오지 않게 온 힘을 집중해야 했다. [고작 이런 장난질로 내게 피해를······.] “그 장난질에 마빡이 깨진 놈 말이라 잘 안 들리는걸? 좀 더 큰 소리로 말해봐!” [그오오오오오오!] 스켈레톤 워리어가 격렬하게 반응하며 몸을 움직인 바로 그 순간, 드디어 아르페가 기다리던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단검의 문질거리는 힘 때문에 강렬한 자극을 받던 놈의 팔 관절에 놈의 격렬한 몸 움직임이 더해지자 불길한 소리와 함께 뿌득,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어진 것이다! [나는 스켈레톤! 뼈가 구부러지는 것 정도로는······ 큭!?] “아까부터 똑같은 패턴으로 놀라는 거, 사실 너도 지치지?” 단검에서 기인하는 마찰력이 정도를 넘어섰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힘을 무식하게 주어 팔을 움직이려 하자 기어이 한계를 넘어선 관절이 완벽하게 파괴되며, 놈의 무거운 방패와 그것을 들고 있는 팔의 앞부분을 던전 복도에 떨구어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 “대단해, 아르페!” “좀 더 칭찬해봐!” “대단해! 엄청 대단해!” 하이퍼 러빙 따위로 정말 몬스터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을 줄이야! 굉장한 문질거림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무기를 매개로 발현해 몬스터에게 닿게 하는 것만으로 마나 저항력으로는 저항이 불가능한 마찰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니까! 아르페가 하이퍼 러빙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능숙하지 못한 탓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지만, 잘하면 이것을 숙련시켜 나중엔 터무니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 시간에 다른 마법을 익히는 게 훨씬 빠르겠지만 말이야!” 아르페는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하이퍼 러빙의 영창에 돌입했다. 방패를 없애버렸으니 이젠 검을 든 쪽의 팔을 부숴버릴 차례! 아직 마나는 조금 부족했지만 양팔을 없애버리기만 하면 그땐 이쪽에서부터 입구를 넘어서서 놈을 공격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아르페는 여력을 남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 마법을 구사했다. [그으으으으······!] 스켈레톤 워리어 역시 아르페의 의도를 눈치 챘지만 이제와 몸을 빼기엔 놈의 전신을 뒤덮은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저 엿같은 꼬맹이를 죽여 버릴 수 있을까. 스켈레톤 워리어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이내 한 가지 답을 찾아냈다. 스킬로 지니고 있지 않았기에 파괴력은 덜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저 꼬맹이가 ‘여태 실컷 하는 것을 보아왔기에’ 어느 정도는 흉내 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 잘하고 있어. 그쪽 팔도 계속 그렇게 격렬하게 움직······.” [죽어라 인간!] “아르페!” 아르페가 하이퍼 러빙을 집중하던 중, 스켈레톤 워리어가 분노를 담아 포효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메테르가 몸을 날려 아르페를 덮쳤다. “끄으으으으.” [크아아아아아아! 망할 인간! 망할 인가아아아안!] 직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던전 입구 쪽 계단에 거대한 검이 박혔다. 다름 아닌 스켈레톤 워리어의 바스타드 소드였다. “크, 아······.” “메테르?” 메테르가 신음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켈레톤 워리어가 모든 힘을 담아 내던진 바스타드 소드가 메테르의 등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녀의 갑옷을 완전히 아작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등에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망할, 메테르! 메테르!” 설마 투척 스킬도 없는 적이 갑자기 바스타드를 던져올 줄이야! 만물열람을 철석같이 믿고 적을 오판한 대가로 죽을 뻔한 순간이었다. 어쩜 이리도 사천왕 최약체에 걸맞은 방심이란 말인가! 만약 메테르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이미 아르페의 목숨은 없었으리라. “상처 좀 보자. 빨리!” “아, 윽······.” 아르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메테르의 상처를 살폈다. 등에 나는 상처는 조금만 삐끗해도 거동에 영향을 주기 쉽지만 다행히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레벨업을 몇 번 정도 하고 휴식을 취하면 완벽히 멀쩡하게 돌아오리라. 메테르 역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지 한 점 흐림 없는 맑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난 괜찮아, 아르페······ 아르페가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다.” “이런 바보 같으니······.” 아르페는 메테르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안도하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야 그녀가 죽으면 안온한 삶을 꿈꾸는 아르페에게 심각한 타격이 오기야 하지만, 지금 그가 느낀 감정은 그것과는 별개의 원인에서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이겠지. 아르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털어버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분노 계열 버프가 폭주하다 못해 흰색이었던 뼈까지 완전히 붉게 물든 스켈레톤 워리어. 방패를 들었던 팔은 통째로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고, 검을 내던진 나머지 한쪽 팔 또한 충격을 이기지 못해 떨어졌다. 놈은 마구 분노하며 그들에게 몸을 내던졌으나 보이지 않는 벽이 놈을 가로막는 것처럼 어느 부분에서 더는 전진을 하지 못하고 막혔다. [그오오오오오오! 그오오오오오!] “메테르, 움직일 수 있겠어?” “응······.” 메테르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마무리까지 자신이 담당했겠지만 지금은 레벨업으로 그녀를 회복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물론 아르페의 공헌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니 그렇게 해도 메테르에게는 별로 경험치가 가지 않겠지만, 저 정도로 강한 적의 경험치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후우, 후우······ 알았어, 내가 할게.” 메테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허리춤의 낡은 검을 뽑다 말고 시선을 뒤로 돌려 계단에 박힌 바스타드를 확인했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는 이내 그것으로 다가가 양손으로 검을 뽑아 쥐었다. 재질부터가 무거운 금속이고 마력으로 가공까지 되어 상당히 무거운 검이었으나 그녀는 무리 없이 그것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인간······.] “미안해, 나는 아직 정면에서 너를 꺾을 수 없어. 하지만 너를 죽일 수 있는 지금 죽일 거야.” 적의 무기를 취하고, 허공에 단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무기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메테르가 스켈레톤 워리어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나는 모두 이기고 죽여서 아르페를 지킬 거야. 왜냐면 나는······.” 검 손잡이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단단히 쥐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그녀를 마주하며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린 순간, 메테르는 등의 상처에서 오는 화끈한 고통을 스타트 신호 삼아 바닥을 박찼다. “왜냐면 나는! 용사니까!”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짧은 기합과 함께 허공을 가르는 검날. 그것이 놈의 두개골, 그것도 아르페의 단검이 박혀 취약해져 있던 부위를 정확히 강타하며 부수고 들어가 갈비뼈까지 우드득 아작을 내어놓았다. 놈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녀의 공격에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놈에겐 무리였다. 놈은 검에 몸통이 박살나고도 잠시 더 저항을 하는 듯싶다가는 이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아아······ 아, 아, 그, 그런, 그런가.] 그러나 놀랍게도 반 토막이 난 해골이 이내 무언가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않는 검날에 담긴 의지가, 나를 혼몽으로부터 깨워주었다······.] “음, 뭐······?” [그렇다, 어린 용사들이여. 도망쳐 돌아오지 않는 자는 비겁자라 불리지만 끝내 돌아와 승리하는 자는 영웅이 된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라, 지키겠다는 그 의지를 관철하라. 나는 나의 소멸로 용사들의 영광으로 가는 입구를 열겠다.] “이 해골이 지금 뭐라는 거야······?” 아르페가 당황하며 반문했지만 스켈레톤 워리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놈에게 남은 마력이 빠져나가며 아르페와 메테르의 마력이 상승하는 것을 보면 전투가 완벽히 끝나 경험치까지 정산된 상황. “야 잠깐, 할 말 있으면 우리한테 더 해보······ 이런 망할.” 아르페는 다급히 일어서 스켈레톤 워리어를 다시 만물열람으로 살피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놈의 몸체가 풍화하여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오직 금이 간 거대한 쇠방패와 붉은 뼈 재질의 건틀렛, 마력이 짙게 남아 풍화되지 않고 바닥을 뒹구는 뼈 조각 몇 개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진짜 놀랄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완전히 사라진 순간 던전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을 죽이고 천천히 긴장을 풀던 메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르페에게 달려왔다. “아르페, 던전이······!” “기다려,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가끔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던전이 변화하는 경우가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이 던전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어쩌면 아르페의 예상보다도 더욱 거대한 무언가가 안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돌아가야 하는가? 위험을 감수하고 나아가야 하는가? 메테르의 상처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진을 명했겠지만, 지금 아르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르페, 가자.” 그때 메테르가 그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에게 말했다. “나, 강해지고 싶어. 도망쳐야 할 때가 온다면 도망쳐서라도 승리하겠지만, 가능하다면 도망치지 않고 승리하고 싶어.” “메테르······.” “그러니까, 강해지고 싶어.” 이게 어딜 봐서 열두 살짜리 꼬맹이의 대사란 말인가. 아르페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었지만, 메테르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지금 다른 누군가에게 들은 말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걸맞은 치기로 말만 내뱉고 보는 것도 아니다. 짧지만 농밀했던 경험 속에서 그녀는 확실히 무언가를 붙잡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로 아르페가 바라던 변화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 가자. 뭐가 있든 다 쳐부수고 얻어서 나오자.” “응!” 만물열람은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에 가까운 힘이다. 그것에 메테르의 사기적인 재능이 더해진다면 둘은 완벽해진다. 방금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분명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더구나 그것을 자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르페는 망설이지 않았다. 상처가 아픈 기색도 전혀 내지 않고 자신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메테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준 후, 아르페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전리품 정산부터 해야 돼.” “응!” 전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보상! 용사들은 훌륭하게도 속물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Chapter 3. 성장하는 용사 - 2비록 메테르가 스켈레톤 워리어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는 하나 사실상 놈은 아르페 혼자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놈에게서 도망치느라 6층부터 1층까지 주파한 것도 전투 공헌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누가 더 많은 경험치를 얻었느냐 하면 물론 아르페였다. 그 덕에 아르페의 레벨은 6이 올라 30, 메테르의 레벨은 3이 올라 32가 되었다. 많이 벌어졌던 차이가 이로써 어느 정도 좁혀졌다. “메테르, 상처는 어때?” “레벨 오르니까 나아졌어. 격한 전투만 아니라면 무리 없이 할 자신이 있어.” “그때 그 풀은?” “갖고 있어.” 아르페는 메테르의 도움을 받아 응급약을 만들고, 그녀의 갑옷을 벗긴 후 아직 남은 등의 상처를 치료했다. 메테르는 맨살을 보이며 볼을 붉게 물들였지만 아르페의 진지한 눈빛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 이제 붕대 감고 옷 입어.” “왜 엄청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나무상자에서 주운 붕대가 새 거야?” “대우주의 섭리니까 받아들여.” “응!” 상처의 응급처치까지 끝났으니 남은 것은 전투에서 가장 즐거운 전리품 확인 시간. 아르페는 가장 먼저 신중한 손짓으로 붉은 뼈 건틀렛을 집어 들었다. 만물열람으로 읽어낸 정보가 문자의 형태로 나타났다. [크림슨 레이지 본 건틀렛] [언데드로서 무수한 세월을 살아오며 제법 되는 마력이 농축된 언데드의 뼈가, 소멸 직전의 순간 집중된 강렬한 분노로 인해 아티팩트로 분화, 성장하였다. 단단한 강도는 물론이고 착용자의 감정이 고조될 경우 힘을 20% 증폭시켜주기까지 하지만, 그 대가로 일정량의 마력을 소모한다.] “으으으음.” “왜 그래, 아르페?” 아르페는 엘리트 스켈레톤 워리어의 정수가 담겼다고 볼 수 있는 드롭 아이템을 보며 못내 아쉬운 탄성을 냈다. 방어구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인 강도는 물론이고, 비록 마력을 소모한다는 제한이 있으나 힘을 20%나 증폭시켜주니 확실히 지금 그들의 레벨 대에서는 얻기 힘든 아티팩트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슬슬 내게 도움이 될 아티팩트가 나와 주길 바랐는데, 역시 전사 계열 엘리트였으니 어쩔 수 없나.’ 이미 메테르는 스켈레톤 워리어가 쓰던 바스타드 소드를 얻었다. 만물열람으로 확인해본 결과 특별한 옵션은 없지만 마력을 잘 흡수하고 증폭시켜주며 기본적인 강도와 내구도, 예기까지 일품인 아티팩트인지라 적어도 레벨 100에 이를 때까지는 추가로 병기를 바꿀 필요가 없을 정도. 그런데 그 상황에서 건틀렛까지 메테르의 것이 되었으니, 단순비교는 곤란하지만 이전의 그녀에 비해 두 배 이상 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 그녀가 강해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아르페가 허접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전직 사천왕의 저주가 이렇게도 끈질기게 그를 따라붙어 다니다니! “쩝,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메테르, 이거 착용해.” “하지만 아르페는······?” “내가 써야 할 게 나오면 그땐 네가 울며불며 매달려도 잔혹하게 너를 떼어내고 내가 가질 테니까 안심하고 받기나 해.” “응!” 메테르는 본 건틀렛을 장비했다. 강한 마력이 깃든 아티팩트인지라, 재질이 뼈임에도 불구하고 메테르가 착용하는 순간 그녀의 신체에 맞게 줄어들어 손목부터 손가락 끝에 이르기까지를 꼼꼼히 감쌌다. 물론 메테르가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이였더라면 이런 아티팩트를 착용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녀는 레벨 1일 때부터 나뭇가지의 화기를 끌어내는 능력을 각성한 사기 캐릭터였으므로 이하생략. “와, 이거 엄청 든든해! 날 지켜주는 기분이야!” “실제로는 뼈의 원한으로 가득하겠지만,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됐어.” 비록 보기에는 조금 섬뜩했지만 저런 모습이야말로 전사답다고 할 수 있으리라. 아르페는 새로운 장비로 무장하고 생기가 넘치는 메테르를 보며 피식 웃어버리고는 그 자리에 남은 붉은 뼛조각들을 수습했다. 잔류하고 있는 마력이 많으니 이것으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그 다음으로는 아, 방패.” 스켈레톤 워리어의 손에 들려 있었을 때는 한손검으로 보이는 바스타드였지만 열두 살의 메테르가 들고 있으니 클레이모어 이상으로 거대해보였다. 당연하지만 그녀에게 방패를 들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 방패 없어도 돼!” “하지만 이것도 아티팩트야. 모서리 날을 세워 적을 공격하면 약화 저주까지 들어가는데······.” 스켈레톤 워리어가 방패를 활용할 기회가 없어 몰랐지만 알고 보면 바스타드보다도 훨씬 좋은 아티팩트였다! 그런데 그 방패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금까지 갔으니 녀석이 얼마나 분통했을까. 물론 아르페가 알 바는 아니었다. 들고 다닐 수 없다면 메테르의 등에 달아주면 어떨까, 하고 제안했지만 메테르는 질색했다. 하긴, 이 무거운 방패를 등에 달고 다니느니 빠르게 움직여 공격을 피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고 방패를 버리는 것도 아까웠으니······. “씁, 어쩔 수 없지. 네가 직접 다루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내가 쓸게.” 결국 방패는 아르페의 등에 장착되었다. 우선 그동안 던전을 통과하며 주웠던 가죽끈 따위를 모아 아르페의 마나를 불어넣어 강화하고, 방패의 양측 가장자리에 구멍을 내어 끈으로 꿰었다. 다음으로 그 끈을 왼쪽 어깨 위와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통과시켜 묶어주니 아르페는 마치 거북이와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메테르는 아르페가 움직이는 꼴을 보더니 눈을 지그시 가늘게 떴다. “아르페, 원래도 느린데 더 느려졌어.” “원래 수행은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느리게 다니다가 스피드가 중요한 순간이 올 때 이 끈을 풀어버리면, 이 무거운 방패가 쾅!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지면서 상대방을 동요시킬 수 있지.” “앗, 대단해! 그거 멋질 것 같아!” “대리석처럼 깨지는 돌바닥 위에서 떨어트려서 바닥을 깨트리면 두 배로 효과적인 비주얼이 나오니까 참고해라.” “응!” 그것으로 챙길 것은 다 챙겼다. 이젠 1층에서부터 다시 6층으로 내려가며, 스켈레톤 워리어를 따라오다가 도중에 리타이어한 패배자들만 가볍게 지르밟아주면 되었다. 일행은 그렇게 했다. 하려고 했다. “어라.” “아르페, 어쩐지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어쩐지가 아니라 확실히 달라졌잖아.” 5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곳은 그들이 기억하는 던전이었다. 계단도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그곳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불쌍한 스켈레톤들도 숨을 붙여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비도 베풀어주고 겸사겸사 일행의 레벨도 올리고 일석이조의 선행을 반복하며 던전의 6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을 때, 두 명의 용사는 비로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건······ 대리석인데.” 아르페는 그들 눈앞으로 펼쳐진 넓적하고 긴 계단을 내려다보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5층으로 올라올 때 계단을 확실하게 부수어놓았는데 복구가 된 것으로도 모자라 대리석으로 진화까지 일으켰다고!? 더구나 그 너머로 펼쳐진 것은 그들의 기억 안에는 없는 실로 거대한 복도! “대리석? 그러면 여기서 아르페가 방패를 떨어트리면 되는 거야?” “수행 시작한 지 아직 1시간도 안 지났어.” 어쩌면 6층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스켈레톤의 소멸이 던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스켈레톤의 소멸 직전 놈을 만물열람으로 살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만물열람으로 살펴도······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만물열람 앞에 모든 비밀이 드러난다 해도, 던전을 구성하고 있을 뿐인 대리석을 살핀다고 그 던전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던전의 심층으로 들어가 던전의 핵을 살핀다면 모를까. 메테르는 아르페의 낭패한 표정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할까, 아르페?” “뭘 어떻게 해. 이미 나아가기로 결정했었잖아.” “······응!” “하지만 여기부턴 긴장을 풀지 마. 함정은 아예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앞으로의 던전에서 나타날 몬스터들이 두려워진다. 굳이 함정으로 모험가의 진을 빼놓을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한 몬스터들이 수두룩하다는 얘기니까. “뭐가 나타나든 내가 아르페를 지킬 거야.” “그렇게 비장한 얼굴을 할 것까진 없지만······ 뭐 됐나.” 그들은 결심을 굳히고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 뒤바뀐 6층으로 진입했다. 초입에는 몬스터가 없었고, 중반부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을 살피며 잔뜩 긴장한 채 복도를 나아가기를 잠시, 어느덧 그들은 아까 엘리트 스켈레톤 워리어가 있던 곳에까지 도달했다. 여태 아무것도 없던 대리석 바닥에서 그 대리석과 똑같은 백색의 해골을 지닌 스켈레톤 네 마리가 튀어나온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아가고자 하는가?] [물러나고자 하는가?] [지키고자 하는가?] [베어내고자 하는가?] “아르페, 물러서!” “네가 말 안 해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 스켈레톤 주제에 제법 그럴싸한 가죽갑옷을 입고 광이 나는 롱소드까지 지니고 나타난 그놈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메테르를 협공했는데, 아르페는 만물열람을 통해 놈들이 모두 50레벨에 근접한 몬스터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음했다. “던전 난이도가 순식간에 폭등해버렸잖아······!” “괜찮아······ 이제 할 수 있어!” 메테르는 터무니없이 빠른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을 활용해, 아주 미약한 차이만을 두고 그들에게 쏘아내진 네 자루의 롱소드를 순서대로 쳐내고는 뒤로 약간 물러서며 표정을 굳혔다. “흡!” 바로 그 다음 순간 본 건틀렛이 미약한 붉은 빛을 발하며 가녀린 메테르의 팔에 힘을 더했다. 아르페가 감정의 고양으로 아티팩트의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라는 설명을 해주기는 했지만, 설마 저렇게 자유자재로 자신의 감정까지 컨트롤할 줄이야! 그것은 이미 그녀의 재능을 충분히 알고 있던 아르페마저 기가 질리는 광경이었다. “너······.” “간다!” [나아가는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아직 그 시야는 좁지만.] [인정하기에 충분한 용기.] “시끄러워어어어엇!” 메테르가 용감하게 휘두른 바스타드가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스켈레톤의 롱소드 중간을 가볍게 베어내 날렸다. 그녀는 그 기세를 이용해 오른발로 바닥을 찍으며 빙글 돌아 그 스켈레톤의 몸통을 팔뚝으로 가격했고, 롱소드의 무게를 잃어 갸우뚱하던 스켈레톤은 그대로 동료들 쪽으로 넘어지며 그들이 내지른 검격에 몸통을 두드려 맞았다. 그러나 놈들은 아까 전의 스켈레톤 워리어와는 달리 그녀에게 당해놓고도 오히려 감탄을 했다. [적의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 [빠른 판단력은 찬탄할 만하다.] “에잇.” 놈들이 대사를 치는 동안 아르페가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있겠는가! 그는 스켈레톤들이 서로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놈들을 공격했다. 투척할 무기는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상황! 그는 30레벨에 이르기까지 쌓인 마나를 아낌없이 부여해 강화한 단검이며 뼛조각 따위를 날려 메테르를 공격해가는 스켈레톤들을 막아냈다. [크악!?] [그러나 너는 정정당당하지 못하다. 안전한 곳에 숨어 혓바닥만 내미는 자!] “넷이서 덤벼놓고 정정당당 같은 소리하네. 너흰 지금 용사를 시험하는 거냐, 아니면 마왕군에 스카웃되고 싶은 거냐? 엉?” 전생에서부터 이미 훌륭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던전에 들어와서부터는 계속 이 짓만 해댄 탓에 아르페의 투척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던지는 족족 놈들의 급소에 틀어박히며 절묘한 타이밍에 움직임을 끊어놓는 그의 투척 실력은 따로 파티에 도적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본업은 분명 마법사였을 텐데! ‘용사가 되면서 어째 나도 쓸데없이 다른 분야의 능력에 보정을 받게 된 것 같은데······.’ 좋은 일인데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째서일까. 모르긴 몰라도 만물열람으로 확인해본다면 족히 8레벨은 넘기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지금 메테르의 검술도 고작 6레벨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모두를 쓰러트리기 전까지는······ 큭!] “한 마리 끝!” 아르페가 새삼스럽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그때 기어이 메테르가 한 마리의 스켈레톤을 쓰러트렸다. 그러나 놈이 쓰러졌음에도 두 용사에게 경험치는 들어오지 않았다. “좋아, 그대로 나머지 놈들까지······.”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메테르, 개소리 다 씹고 놈들을······ 응?” 바로 그때 아르페의 만물열람이 발동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스켈레톤의 형체가 허공중으로 녹아 들어가며 그 기운이 세 갈래로 갈라져 살아남은 다른 스켈레톤들에게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아르페의 시야에 투영된 것이다. [경험 기록 마나 체력 전이 공유] [진화 시련 과제 자격] 얼핏 무관계해 보이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했으나 아르페가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망할······! 메테르, 잠깐 물러나! 돌과 자연에서 비롯되어 돌과 자연으로 돌아가라, 닿지 못하게 되어라!” 그는 다급히 마법을 영창했고, 세 마리의 스켈레톤이 아까보다 ‘조금 빨라진’ 속도로 메테르를 공격해 들어가려던 찰나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지며 놈들을 바닥에 쓰러트렸다. 아르페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가슴팍에 묶인 방패의 가죽끈을 풀어내었다. “아르페!?” “메테르, 아까 내가 이건 수행용이라고 말했었지?” “응.” “그건 거짓말이다!” 아르페는 끈의 한쪽을 붙잡고 그것을 휘둘렀다. 그의 심장에서 비롯된 양질의 마나가 끈을 타고 방패로 흘러들어가며, 양손으로 붙잡고 있기에도 힘든 거대한 방패를 순식간에 전방으로 쏘아 날렸다. 실로 절묘한 궤도로 쏘아내진 방패는 아르페의 마나를 머금고 불길하게 빛을 발하며 이제 막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스켈레톤들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악!] [역시 비겁하다! 네놈은 비겁하다!] “네놈들보단 덜 비겁하다, 이 망할 놈들아!” 아르페의 마력으로 강화된 방패는 훌륭히 놈들 모두에게 저주 데미지를 먹였다. 적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간단한 저주였으나 메테르처럼 몸놀림이 빠른 이들에게 그것은 전황을 바꾸어놓는 축복! 메테르는 눈을 빛내며 놈들에게 마무리 타격을 가하려 했으나, 아르페가 기겁하며 그녀를 멈추었다. “죽이지는 마!” “어째서?” “이것들을 죽이면 다른 놈들이 강화되니까. 지금 이 던전의 모든 몬스터에 레코드 링크가 걸려 있어!” “응······?” 메테르는 아르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앞으로의 던전에 펼쳐진 함정 ‘레코드 링크’가 얼마나 치밀하고 이가 갈리는 것인지! “어쨌든 저주로 강화된 만큼은 충분히 덮어씌웠어. 이제 돌격해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 “알겠어!” [큭, 비겁자, 시련에 정정당당하게 도전······.] “시끄러워!” 메테르가 셋의 스켈레톤들을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놓는 동안, 아르페는 그들 등 뒤로 이어져 있던 6층의 복도가 어느덧 모습을 감추고 그 대신 그 자리에 거대한 철문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이를 갈았다. 그럴 줄 알고는 있었다. 한 번 시작한 이상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이겠지. ‘무엇이 있든 다 부숴버리고 쟁취하겠다고 다짐하기는 했지만······.’ 아르페는 저 너머 복도로부터 새로이 다섯 마리의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전부 레벨 50에 근접한 놈들이었다. “적어도 경험치는 주면서 해야 될 것 아니냐, 이 개자식들아!” 용사들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시련의 늪에 빠졌다. ────────────────────────────────────────────────────────────────────────Chapter 3. 성장하는 용사 - 3레코드 링크. 고대마법의 분류에 들어가는 대마법으로 발동하기도 유지하기도 까다로운 마법의 대표격이다. 일단 이 마법을 발동하면 서로의 마나 패턴이나 기술, 특성 등이 비슷한 이들의 혼과 육체를 공명시켜 보다 서로의 의사를 파악하기 쉽게 하며, 그중 하나가 죽기라도 하면 그 혼과 육신에 깃든 모든 힘을 링크로 연결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게 된다. 이론상으로는, 일단 링크로 연결되면 아무리 그 구성원이 죽어나가도 집단의 전체 역량은 변하지 않게 되는 것. 여기까지만 들으면 터무니없이 강력하며 최강의 집단을 만드는 비술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마나 패턴과 기술, 특성을 ‘비슷하게’ 맞춘다는 전제조건부터가 극악인지라 실제로 발동된 역사가 거의 없다. 더구나 발동에 성공해도, 서로의 마음이나 의지가 어긋나는 순간 끔찍한 패널티와 함께 마법이 해제되거나 공유되어선 안 될 것까지 공유된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에 끝내 대륙적인 금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그냥 미친 마법이라고 보면 편하다. [그으아아아아아!] [정정당당하게 임하라!] [동료에게 힘이 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구나!] 그런데 이 미친 스켈레톤들은 지금 바로 그 금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설마 촌구석의 던전에서 이런 비술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던 아르페는 지금 극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메테르, 얘네 뼈까지도 복구하니까 다리랑 팔은 완전히 분질러둬! 절대로 죽이면 안 돼!” “알았어! 에잇! 에이잇!” [크아아아아!] 물론 당황하는 것과 전투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별개였다. 마왕군 사천왕에게 중요한 것은 첫째도 폼 둘째도 폼! 폼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 그 뒤에 일어날 모든 상황을 다 가정하는 것이다. 여유란 미리 준비한 자의 것! 아르페와 메테르는 우선 저주에 당한 세 마리의 스켈레톤을 완전한 행동불능 상태로 만들어 저쪽에 치워놓은 후 이어서 달려오는 다섯 마리의 스켈레톤을 맞이했다. “덤벼보시지!” [이럴 수가, 시련을 정정당당하게 치르지 않는······.] “응? 다섯이 모여서 둘을 다굴치는 스켈레톤이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 스켈레톤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처참한 꼴이 되어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보며 당황한 듯 보였지만 놈들이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왜냐면, 레코드 링크의 가장 큰 금기가 바로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동료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전부 이런 식으로 죽지만 않게 만들어놓으면 놈들이 강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 레코드 링크를 몰랐더라면 당했겠지만 만물열람 앞에선 그 어떤 전술 마법보다도 무력하지!” “역시 아르페는 대단해!” [이 비겁자들 같으니!] “레벨 50이 넘어가는 주제에 단체로 습격하는 스켈레톤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거든!” 그야 설마 엘리트 스켈레톤 워리어 놈도 레벨 30도 안 된 꼬맹이 둘이 자신을 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가차 없이 테스트를 시작하다니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법도란 말인가! 아르페의 지론은 첫째가 평온 둘째가 생존이다. 첫째는 이미 애저녁에 글렀으니 지금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비겁한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하리라! “부서져랏!” “메테르, 마나 떨어지기 전에 버프 해제해야 되니까 감정 조절해!” “알고 있어!” 감정을 고양시켜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건틀렛의 옵션을 구사하고 있는 탓에 메테르는 평소보다도 텐션이 높았다. 그야 물론 50레벨 이상의 스켈레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 건틀렛에 달려 있는 버프의 덕택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나······. ‘많이 흥분한 것 같은데, 필요한 때에 끊어낼 수 있을까. 여차하면······.’ 버프의 대가로 마나를 소모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한 버프는 쉬이 취소되지 않고, 버프의 힘을 유지할 마나가 다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턴 체력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감정 계열 버프가 위험한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심할 경우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부작용. 용사를 고작 이런 곳에서 우습게 잃을 수는 없다. 아르페는 점차로 몰려오는 스켈레톤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각오를 다지고는 사방으로 마나의 실을 뻗어냈다. 보유하고 있는 마법이라곤 하이퍼 러빙밖에 없지만, 지금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용사와 함께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했다. “두 마리 쓰러트렸어!” “앞으로는 죽을 만큼 패서 전투불능 상태로 만드는 걸 너덜이라고 정의하자. 그러니까 2너덜이네.” “3너덜! 아니, 4너덜!” 용사의 분투는 실로 굉장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아르페는 끈을 붙잡고 사방으로 방패를 날려 추가로 전장에 진입해오는 스켈레톤들에게 저주를 먹이며 놈들을 견제했다. 끈에 마나의 힘을 불어넣어 강도는 물론이고 길이까지 늘렸기 때문에 혹여나 방패를 놓칠 걱정 따위는 없다! “마법도 뭣도 아니고 그냥 서커스하는 것 같은데······ 젠장.” 그러나 실제로 방패 때문에 메테르에게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는 놈이 많아진 것도 사실. 더욱이 방패의 저주는 놀랍게도 '중첩'이 되었기에, 방패에 여러 번 가격을 당한 스켈레톤들은 이전보다 확연히 몸놀림이 둔해져 금세 쓰러져나가고 있었다. 아르페는 스켈레톤 워리어가 남긴 가장 큰 보물은 건틀렛도, 바스타드 소드도 아닌 바로 이 방패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아르페를 스켈레톤들은 ‘시험의 도전자’라고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등 뒤에 숨어 비겁한 짓을 하는 저 남자를 먼저 죽여야 한다!] [저 자는 시험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자! 단죄하라, 단죄하리라!] “아르페는 누구도 못 건드려어어어어어!” 아, 망했다. 메테르가 진정하기는커녕 자기 감정을 더욱 폭주시키기 시작했다! 최상위의 자질을 지닌 덕에 육체능력은 물론이고 동레벨의 다른 이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마력까지 지니고 있는 메테르였으나 아무리 그녀라도 이 정도 페이스로 버프 스킬을 유지하면 위험해질 것이다. 비록 지금은 용맹하게 날뛰며 스켈레톤들을 쓸어버리고 있는 그녀였으나······. ‘저거 분명히 오래 못 가는데······ 능력은 좋지만 신중하지 못한 초심자들이 하는 실수들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구만.’ 저런 미성숙한 면까지 모두가 용사에게 어울리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아르페와 함께하는 이상 언제까지고 저렇게 어리숙하게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도 저 너머 복도로부터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스켈레톤의 숫자가 너무 많아 한가로이 설교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좋은 방법은 그녀의 마나가 바닥나지 않게 만들어 버프로 인한 부작용을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마나 포션? 애석하지만 이런 던전에는 마나를 회복시켜줄 만큼 고가의 포션이 드롭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나 회복 약초? 물론 가끔씩 던전 구석에 자생하는 마나 약초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던전에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으로 남는 방법이 바로 마나 전이. 아르페의 넘쳐나는 마나(이 육신은 정말이지 인간 중에서는 다시없을 터무니없는 마력 재능을 타고난 것이 분명했다.)를 메테르에게 전달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메테르는 버프를 유지하고 아르페도 쓸데없는 마나를 하이퍼 러빙 같은 데에 낭비하지 않고 써버릴 수 있게 되니 해피엔딩이다. 물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더라면 진즉 했을 것이다. ‘마나를 전달해주는 마법이 없는 건 아닌데 이건 내가 배우지를 못했고.’ 결국 직접 마나를 컨트롤해 메테르에게 주입시켜주는 방법 정도가 남는다. 아르페는 이러다가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마나 컨트롤 클래스를 얻게 되는 것 아닐까? 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새로운 의문을 머금으며, 방패와 연결된 끈을 잡고 있는 손 외의 놀고 있는 손을 들어 한 줄기의 마나의 실을 뽑아냈다. “메테르, 이동반경 줄여!” “알겠어! 2너덜!” 메테르가 기세 좋게 외치며 바스타드 소드를 횡으로 그어 세 마리의 스켈레톤을 쳐날렸다. 놈들 전부 죽는 것이 나을 만큼 심각하게 몸이 부서졌으나 그럼에도 죽지 않는 것이, 메테르가 단기간 내에 바스타드 소드에 미치도록 빠르게 적응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그런 메테르의 어깨에 살포시, 아르페가 쏘아 날린 마나의 실이 가 닿았다. 마나 전이 같은 건 아르페도 살면서 처음 해보는 일인지라 최대한 집중을 해 자신의 마나를 그녀에게 주입하고자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마나가 순순히 메테르에게 흡수되지 않고 중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마나가 메테르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마나를 보충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어깨를 마력으로 마사지해 풀어주는 수준! “다시 3너덜! 에히히, 아르페 간지러워어.” “짜증나니까 좋아하지 마라.” 아르페는 한손으로는 쉴 새 없이 방패를 받았다 던졌다를 계속하며(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방패는 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가 다시 내쏘아질 때마다 속도와 위력을 더해 스켈레톤들을 쓰러트리며 메테르에 버금가는 전적을 올리고 있었다.) 다른 한손으로는 끊임없이 마나의 실을 쏘아내 메테르에게 연결했다. 실패, 실패, 다시 실패. 이대로는 마나 전이에 익숙해지기는커녕 마나의 실을 쏘아내 메테르를 마사지해주는 데에 더 익숙해질 뿐이다! “아르페는 정말 대단해!” “악의가 없다는 걸 알겠으니까 더 짜증나!” 이대로 마나를 낭비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하이퍼 러빙으로 스켈레톤들을 쓰러트리는 게 전황을 바꾸는 데에 더 좋은 선택이 아닐까? 아르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가는, 그들에 의해 폐품이 된 스켈레톤의 숫자가 슬슬 50구를 넘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끝나지도 않는 복도 너머에서 아직도 20마리를 넘기는 스켈레톤이 빼꼼 고개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 “아이씨, 차라리 한꺼번에 오라고!” [내가 간다.] [나도 간다.] [우리가 가겠다.] 아르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쇄도해오는 스켈레톤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정중히 자신의 말을 철회했다. “아니야, 오지 마. 안 와도 돼.” [저 비겁자를 처단하기 위해 우리도 활을 들자!] “오, 망할.” “크으······ 지지 않아! 나는 아르페를 지킬 거야!” 원거리 공격을 해오는 스켈레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절망적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메테르의 마나가 전부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녀의 몸에서 은근히 피어오르는 붉은 빛의 수증기가 그녀의 마력 대신 체력이 소모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 “메테르, 너 그러다 죽는다고! 이 바보가!” “곧 끝내. 내가 다 끝낼 거야. 아르페에게는 접근하게 할 수 없어!” [만용과 용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 용사의 자격은 없다.] [자격 미달. 미달자가 이 시험의 관을 살아서 나갈 수는 없다.] [실로 오랜만의 도전,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이였으나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다.] “메테르! 이이익, 메테르 멈추라고!” “크윽, 크으으아아아!” 아르페는 메테르를 향해 버프를 취소하라고 외쳤지만 메테르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사실 그녀가 틀리지도 않은 것이, 레벨도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메테르가 스켈레톤들과 정면에서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건틀렛의 버프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프가 끊기는 순간이 바로 그들이 패배하는 순간. 뒤로 물러나는 대신 전진을 선택한 시점에서 이미 그들은 만용을 부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이 정도로는 마나를 전달해줄 수 없어. 그렇다고 메테르가 기적처럼 마나 드레인이나 스태미나 드레인에 각성하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고······ 제기랄, 저 융통성 없는 스켈레톤들 같으니! 내가 어떻게 해야, 대체 어떻게······ 어?’ 아르페가 사태 해결의 단초를 찾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아니다. 단지 스켈레톤들을 잇고 있는 레코드 링크의 마나 줄기, 애초에 이 상황을 만들어놓은 근본적인 원인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 것뿐이었다. ‘레코드 링크는 모든 것을 공유시키는 마법이지. 물론 구성원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마법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발동 방식은 지금 내가 하려는 일과 일치하지 않을까?’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물론 아르페가 만물열람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아르페의 뇌가 유연해진 결과 도출해낼 수 있었던 답안이기도 했다. ‘잘하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레코드 링크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주파수를 이용한 연결이다. 그리고 아르페와 메테르 사이에는 그 매개로 사용할 무엇보다도 큰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둘이 이 세상에 단 둘 밖에는 없는 용사 클래스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용사라는 클래스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유한 특성이지. 가능해. 충분히 가능해.’ 아르페의 눈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르페는 자신이 새로운 마법을 각성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벨에 맞지 않는 스킬을 깨닫는 것은 메테르와 같은 천재에게나 허락된 일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동안 보고 배운 게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아르페 또한 그녀와 같은 스킬 창조자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메테르! 지금부터 네 감각이 조금 더 확장되고 마나가 증폭될 수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알았어······!” 역시나 대답만은 경쾌하다. 자신의 체력을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버프를 멈추지 못하는 채, 메테르는 지금도 수십 마리의 스켈레톤들을 맞서 용감하게 날뛰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을 가해오는 스켈레톤들은 아르페가 어떻게든 방패로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은 확정. 더 늦기 전에 마법을 발현해야 했다. “같은 길을 걷는 우리를 잇는 선이여, 그 실체를 드러내라. 같은 곳을 보는 우리의 시야에 비치는 적에, 나의 분노가 그녀의 분노가 되어 강림케 하라.” [비겁자가 다시 이상한 술수를 쓰려고 한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하지만······.] “아르페는······ 건드릴 수 없어······!” 스켈레톤들이 아르페를 노릴 때마다 분노를 더하길 반복한 끝에, 메테르는 이제 놈들이 아르페를 언급하기만 하면 악귀보다 무섭게 눈을 치뜨며 검을 휘둘러댔다. 이젠 그녀의 전신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단지 체력이 소모되는 것만이 아니다. 지금 그녀는 여태까지 그녀가 각성한 어떤 스킬보다도 가장 섬뜩하고 치명적인 스킬을 깨닫고 있었다. [메테르] [레벨 ? 32] [버서크 Lv1]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니······ 기어이 버서크까지 익혀버렸네.’ 광전사의 상징이라 불리며 적은 물론이고 아군까지 모두 죽어버리게 만든다는 최악의 정신계열 스킬, 버서크. 익히는 데에 레벨 제한은 없지만, 스킬 북의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사용자가 극악에 가까운 조건을 만족해야만 배우는 것이 가능한 스킬인 탓에 지극히 희소하다. 그런데 그것을 떡하니 메테르가 익히고 만 것이다. 본 건틀렛이 감정의 고양에 따라 힘을 증폭시켜준다면 버서크는 분노라는 한 가지 감정이 극한에 달하면 그 주인의 방어력을 낮추는 대신 공격력을 증폭시켜주는 희대의 자가 버프 스킬이다. 물론 그 후유증은 본 건틀렛이 주는 버프에 비하면 치가 떨릴 만큼 심하다. “하지만 이제부턴 그것도 괜찮아, 링크 더 마나!” 그때 기어이 아르페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랗고, 오색으로 빛나는 마나의 실이 아르페의 심장으로부터 메테르의 심장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스켈레톤들은 그것을 어떻게도 막을 수가 없었다. “아.” 다음 순간 메테르가 기묘한 목소리를 냈다. 아르페는 마법의 성공을 확신하며 미소 지었고, 스켈레톤들은 그녀가 보이는 기세의 변화에 전율하며 압도적인 숫자 차이에도 불과하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르페······ 최고야.” 메테르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전신으로 지금, 아르페의 넘쳐나는 마나가 모조리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소모되었던 체력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본래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어야 할 수준인 극상의 마나가 주어지며 육신 자체가 일시적으로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 자는 우리의 비술을 훔쳤다.] [아니, 저것은······ 어쩌면 우리보다 우월할지도 모른다.] [맙소사······ 그들은 진정한 용사다.] [용사의 자격, 그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찬란하게 증명하고 있어!] “아무리 인정해도 이젠 늦었어.” 메테르가 고개를 들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이미 몸을 앞으로 굽히고, 먹잇감을 노리는 표범처럼 전신의 근육을 바짝 당기고 있었다. 강화된 마력이, 버서크의 압도적인 괴력으로 화해 그녀의 전신을 두르고 있었다. “너희 다 도망 못 쳐!” 그 다음부터 벌어진 광경은, 전투라기보다는 사냥이라는 단어가 더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Chapter 3. 성장하는 용사 - 4 [나는 이미 너희를 인정······ 컥!] [우리는 이제 뒤로 물러나 다른 이들을 시험······!] “도망 못 친다고 했잖아아아아아!” 아르페의 마나를 공유 받은 메테르는 지치지 않는 맹수가 되어 날뛰었다. 스켈레톤들은 레벨로는 측정할 수 없는 그녀의 기세를 용케도 읽어내고 전투의 포기 의사마저 표명했지만 그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일. 메테르의 분노는 그들의 뻔뻔한 모습을 앞에 두며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모르고 폭주했다. “너희는 원래 아르페를 죽일 생각이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겠다고? 너희는 비겁해, 전부 비겁해! 나는 아르페를 잃을 뻔했는데, 너희는 말 한 마디로 끝내겠다니 너무 너무 비겁해!” [의미가 없다. 이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했을 텐데!] [용사의 분노가, 분노는 그대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는 건 네놈들이야아아아!” 겉으로 보기에는 드는 것조차 힘겨워보였던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지금은 메테르의 손에서 너무나 자유롭게 뛰놀았다. 새하얗게 뻗어난 검날이 횡과 종을 가리지 않고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날뛰며 스켈레톤들의 몸통을 사정없이 부수고 토막 내었다. 그래도 그녀가 놈들의 목숨까지 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한 줄기 이성의 끈은 붙잡고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오랜 세월 분노와 함께한 광전사들도 힘겨워할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지금 메테르가 해내고 있었다. “이 자식, 바보처럼 날뛰기는······.” 아르페는 마나를 회복해 메테르에게 공유해주는 데에 집중했다. 물론 메테르의 마나와 아르페의 마나는 격이 달랐기에, 메테르가 버서크의 유지에 필요로 하는 마나를 공급하고도 여전히 마나가 넘쳐났다. 어느 정도 링크 마법을 유지하는 데에 자신이 붙자, 아르페는 그녀와의 마나 링크를 유지하며 주위에 널브러진 날카로운 뼛조각 따위를 주워 마나로 강화하고, 저 멀리서 원거리 공격을 가하고자 하는 스켈레톤들에게 차례로 던져 놈들을 무력화하기 시작했다. 두 용사의 빈틈없는 공략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전보다 수십 배 이상으로 불어난 숫자의 적을 앞에 두고서! [실로 종잡을 수가 없구나.] [어째서 용사가 둘인 것이지? 정말 둘은 동시대의 인물이 맞단 말인가?] [우리의 역할은 시험, 그것으로 끝. 그들을 다음 장소로 안내하고 물러서는 것이 본디 우리의 몫.] [하지만 이렇게 되어서는······.] 가장 시끄럽게 떠들던 스켈레톤의 사지부터 먼저 해체되었다. 메테르는 바스타드 소드를 몽둥이처럼 휘둘러 움직이지 못하게 된 스켈레톤을 복도 구석으로 쳐 날렸다. 그렇게 쌓인 스켈레톤의 숫자만도 벌써 90구. 아르페는 놈들이 혹여 몸을 복구하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방패를 날려 놈들의 몸을 다져주었다. 방패는 마나로 강화된 끈으로 연결되어 마치 부메랑처럼 자유로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것은, 마치······.] 두 용사의 우세가 이어지던 그때, 어떤 스켈레톤인가가 메테르의 검에 뼈다귀가 다져지며 신음이 되지 않는 신음을 토해냈다. [우리가 시험을 받는 꼴이 아닌가.] [그것은 뜻에 어긋난다.] [따라서.] [수정한다.] “아이씨, 또 뭘······ 응?” 그 순간, 돌연 던전의 마나 밀도가 높아졌다. 복도가 출렁거리며 그 넓이를 걷잡을 수 없이 넓혔다. 저 너머로부터 느껴지는 언데드의 마나가 폭주했다. 벽이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고, 던전 내에 떠도는 마나의 기류가 빨라졌다. “꺅!” 던전 전체에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에 당황한 메테르가 순간이나마 버서크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르페를 돌아보았다. “아르페, 이건 대체······?” “······이젠 알겠어. 내가 착각을 단단히 했었던 거야.” 그러나 미지를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메테르와 달리, 아르페의 입가에는 어느덧 실소가 걸려있었다. 만약 그보다 더 마법을 잘 다루는 마족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진즉 깨달았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사천왕 최약체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더 늦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바로잡을 수 있다. 아르페가 지닌 힘이 바로 그것이다. “던전의 변화는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구나. 아니, 던전 자체가 마법에 갇혀 있구나.” 누가 이것을 초보자 던전이라고 했단 말인가? 이 던전은 겉만 일부러 어설프게 꾸며놓은 진짜배기 던전이었다. 결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도 아니며, 범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우리는 시험한다.] [그들이 출중하다면, 그들이 기괴하다면, 그들이 압도한다면, 그들이 영민하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를 내보여 다시 한 번, 그들을 시험할 뿐이다.] 레벨 50의 수십 마리 스켈레톤 군단이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도 무수한 숫자의 스켈레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앞에서, 뒤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복도가 수없이 확장되며 던전의 벽을 부수고 계단을 부수며 그 너머에, 그 아래에 잠자고 있던 망자들을 깨웠다. 그들 모두가 레코드 링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제 고작해야 레벨 30을 넘긴 초보 용사 둘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으나, 메테르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고 바스타드 소드를 고쳐 잡았다. “괜찮아, 아르페. 내가 지켜. 내가 다 부술 거야.” 흔들리지 않는 에메랄드빛의 눈망울은 열두 살 소녀의 그것이라기에는 너무나 굳건하고 찬란하다. 아아, 어쩌면 진정한 용사는 지금 이 시점에야 눈을 뜬 것일지도 모른다.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대체 언제 어느 시대의 고인이 이런 것을 계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켈레톤들은 용사라는 말을 입에 담고 있다. 이쯤 되면 놈들의 깡패처럼 무자비하고 짜증나는 행동은 둘째 치고 그 의도만은 용사의 자격 증명임에 분명하고, 이 던전을 기획한 이가 누구일지도 대충 감이 잡히는 것이다. “전부 제대로, 재활용 따윈 불가능할 정도로 부수고 다 가져가주지.” 만물열람의 힘을 품은 보랏빛 눈이 빛을 발하며 사방을 훑었다. 던전 전체가 지금 그들 정도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대규모의 고대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며, 그 마법은 상황에 맞추어 실시간으로 변화하며 도전자들을 궁지로 몰아넣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아르페가 나설 차례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승산이 높아진다. “모든 마법에는 구조가 있고 모든 구조에는 틈이 있지. 물론 즉발성 마법의 틈을 뚫고 파훼하기란 힘든 일이지만······.” 넓은 공간에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마법의 경우 뭐 하나만 비틀려도 모두 무너져 내리게 마련. 물론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마법의 구조와 틈을 읽어내고 간섭하여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모든 마도사 사이에 퍼져 있지만 그것은 마왕군 사천왕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의 등장으로 뒤바뀌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 아르페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도 않으니, 그 누가 아르페를 대비하고 마법을 구사하겠는가! ‘어라, 잠깐만.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있어야 할 원래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없나?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을 떠올린 아르페였으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그는 고개를 저어 생존과 관련이 없는 생각을 모두 털어내며 메테르의 상황을 확인했다. “우오오오오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크가아아악!] 메테르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스켈레톤들을 맞서 기세를 굽히지 않고 폭주하고 있지만, 아르페의 마나가 레벨에 비해 워낙 방대한 탓에 그녀가 소모하는 마나 정도로는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물러남을 몰랐고 두려움을 몰랐다. 적의 숫자 앞에 움츠러드는 대신 그 많은 숫자를 교란시켜 움직임에 제한을 주는 법을 알았다. 개인전과 단체전에 대한 교육을 어디서 수십 년은 받고 나온 것처럼 능숙했으나, 그 모든 움직임이 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이 가장 경악스러웠다. “물러나지 않아······ 너희는, 용서하지 않아······!” [크아아아악!] [더, 이 정도 숫자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점점 그녀가 내지르는 검격이 날카롭고 무거워져가고 있었다. 버서크와 본 건틀렛 버프의 유지 외에 그녀가 소모하고 있는 마나는 일절 없을 터인데, 스켈레톤들이 마나를 담아 휘두르는 검을 가볍게 피해내고 찔러 넣는 검격 한 번에 레벨이 20 가까이 차이나는 놈들의 뼈가 우수수 부러졌다. 레벨이 곧 전력의 차이라는 말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거늘, 지금 용사는 대륙에 태어나 레벨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모든 이를 농락하고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스켈레톤들은 아무리 규모가 늘어나도 가녀린 소녀 한 명을 넘어설 수 없자 간신히 그녀의 성장을 인지했다. 그들은 절규했다. [강해······ 강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너무나 강하다, 그녀는 어째서 물러서야만 하는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 그녀에게 성장은 허락되지 않을 터,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가!] [메테르] [레벨 - 32] [검술 Lv7] [배틀스텝 Lv6] [감지 Lv8] “왜긴, 스킬이 성장했으니까지.” 고작 본 건틀렛의 버프 효과를 맛본 정도로 버서크 스킬을 익히는 인재인데, 레벨 30대 초반에 무기술 7레벨을 달성한 것 정도로는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아르페는 메테르의 몸에 거의 상처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젠 계속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메테르, 조금만 혼자서 버텨봐. 상황을 조금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난 아르페를 믿어. 아르페는 할 수 있어.” 그녀에게 굳이 응원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째 기운이 더 솟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어째서인가, 링크 마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좋아, 믿어봐.” 아르페는 입 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마나의 끈으로 연결된 채인 방패가 떠올라 그의 마나의 인도를 따라 그의 몸통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비록 스켈레톤에게 저주를 걸 수는 없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정도는 가능하리라. “강한 위력을 지닌 마법만이 중요한 거라면 마도사는 자기 이름 대신 가장 강한 마법의 이름으로 불리겠지. 하지만 그렇게 불리지 않는 이유는, 마도사 고유의 이름과 그들이 지닌 개개의 재능이 중요한 까닭은······.” 마도사의 진정한 위용은 불꽃이나 얼음 따위로 적 한 마리 한 마리를 상대할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손짓 한 번으로 전장 자체를 뒤바꿀 때, 한 명의 존재로 전쟁의 방향을 바꾸어놓을 때야말로 역사는 그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보여. 전부 다 보인다고. 어떻게 비틀어야 할지도 전부······.” 지금 던전은 규격에 맞지 않는 도전자인 두 명의 용사를 상대하기 위해 던전을 하나의 층으로 합치고 있다. 지금 당장은 레벨 50이지만 이 이후로는 이놈들보다 레벨이 높은, 그러면서도 놈들과 레코드 링크로 연결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제아무리 그들이 레벨 차이를 무시하는 인재라고는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메테르의 역량 강화라면 이미 충분히 되었다. 아르페의 개인적인 성장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는 무리다. 그러니 적과 전장을 통째로 바꾸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냥 구조물이라면 불가능해. 하지만 던전 전체가 하나의 마법으로 통솔되고 있는 지금이라면 다르지.” 아르페의 보랏빛 눈이 기묘한 광채를 띄고 번뜩였다. 그의 눈앞에 던전 벽으로, 복도로, 천장으로 흐르고 있는 마나가 전부 보였다. 그것들이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비틀려 어떤 구조를 띠고 던전을 변화시키는지, 그것이 몬스터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고 있는지! “좋아.” 찾아냈다. 아르페의 열 개 손가락 끝에서 마나의 실이 뿜어져 나왔다. 스켈레톤들은 그가 또다시 괴상한 짓을 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들은 이미 그들 정도의 능력으로는 저 남자를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실로 빌어먹게도, 아르페가 행동에 나설 때는 그 누구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준비를 해둔 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사천왕 최약체가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 결과! 그것이 지금 용사로 화한 아르페에게서 찬란한 결실로 피어나고 있었다! “이건 마나 링크보다도 더 쉬운 일이야. 너희, 마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 일인지······ 지금 내가 보여주지.” 그의 손가락에서 출발한 열 가닥 마나의 실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던전 복도로, 천장으로, 바닥으로, 특정한 위치에 가 닿은 마나의 실들은 그 끝을 날카롭게 갈아내어 사방을 긁었다. 던전이 일으키는 진동이 더욱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여기도, 여기도, 그리고 저기도······.” [무, 무엇을 하는 것이냐!?] [설마 그런 장난스러운 움직임으로 우리의 연결을 끊어놓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불가능해, 그것은 불가능하다!] “맞아, 불가능해. 고작 레벨 30에 달했을 뿐인 내가 이 빌어먹게 오래되고 거대한 규모의 마법을 캔슬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하지만 그에게 가능한 것이 한 가지는 있다. 아르페는 사악하게 미소 지으며 양손을 휘둘렀다. 열 가닥의 마나 실이 출렁거리며 사방으로 솟구쳐, 벽으로, 복도로, 천장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 [뭔가, 변화가······ 아니, 변화가 없다고······?] 던전의 진동이 멎었다. 늘어나던 복도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 스켈레톤이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사라졌던 던전 벽이 슬금슬금 자라났고 폭주하던 던전 내 대기의 마나가 조금이나마 진정했다. “아르페······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잖아?” “그래, 메테르. 정확하게 짚었어.” 아르페가 손을 휘둘렀다. 그의 몸통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그를 보호하던 방패가 돌연 날을 세우더니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 스켈레톤 한 무리를 쓸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진을 빼놓겠다는 듯 한 무리가 쓰러질 때마다 나타나던 스켈레톤의 지원군이, 지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 이건······!” [설마······.] [저 너머에 있던 동료들과의 연결이 끊겼다. 던전의 힘에 의해 마법이 축소되고 말았어! 그리고 그 마법을 조종한 것은 다름 아닌······ 이럴 수가, 그것이 저런 어린 아이에게 가능하단 말인가!] 메테르가 빠르게 깨닫고, 그보다 조금 늦게 스켈레톤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르페는 자신의 마나 감각권을 확장시켜 지금 이 복도에 자리하고 있는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을 모두 범위 안에 넣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놈들의 지원군은 오지 않아.” 지원군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마나만으로 적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래, 놈들은 살아 있다. 살아서, 지금 이 순간도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자리의 모든 스켈레톤이 죽기 전까지는 열리지 않을 던전의 다음 층에서, 말이다. ────────────────────────────────────────────────────────────────────────Chapter 4. 너와 나의 연결고리 - 1아르페는 이런 던전에, 이런 스켈레톤을 대상으로 어떻게 레코드 링크 마법이 발현된 것인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했다. 레코드 링크는 처음부터 던전 전체를,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트 스켈레톤 워리어를 해치우고 조건을 달성할 경우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던전의 진체를 모두 그 범위 안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몬스터 모두를 동기화한다는 말도 안 되는 짓이 가능했고, 던전이 몬스터들의 의사에 따라 변화하며 나뉘어 있던 던전의 공간을 병합하며 보다 많은 숫자의 몬스터를 내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아르페는 그 사실을 늦지 않게 깨달았다. 물론 깨달았다고 해서 그 시점에서 가능한 일은 그다지 없다. 없어야 하고, 없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나는 비정상이거든.” 물론 아르페라고 해도 레코드 링크를 통째로 해제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마나로 거대한 마법을 이루는 구조물들을 쳐내고 비틀어 아주 조금의 변형을 가하는 것은 가능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모든 마나 컨트롤 능력을 동원하여 레코드 링크를 구성하는 마나의 구조를 조금씩 자르고 이어붙이며 범위를 조금씩 나누었다. 던전의 원래 6층에 해당하는 구역을 묶고, 7층을 묶고, 그 밑의 구역을 묶고······. 그렇기에 던전은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다. 물론 같은 층에 머무르는 몬스터들끼리는 여전히 레코드 링크로 연결되어 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던전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돌아왔다. “던전을 깨부수기 어렵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적어도 이젠 얼마나 몰려올지 모를 지원군을 두려워하며 체력을 남겨둘 필요는 없어. 더욱이 이 층에 있는 스켈레톤들과 너머의 층에 있는 스켈레톤들과의 레코드 링크는 완전히 끊어졌으니······.” “그렇다는 건 아르페, 혹시나······.” “제법 눈치가 빠르구나.” 아르페는 메테르의 반짝이는 눈망울과 마주하며 다시 한 번 입 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이 층에 있는 놈들을 다 행동불능으로 만들고 나면, 그때부턴 놈들을 다 죽여 없애도 돼.” 놈들은 독립되었다. 던전 하나를 깨부수기 전까지 경험치를 얻지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고문에 더는 시달릴 필요가 없다. 그야 던전 한 층에 있는 몬스터들을 죽이지 않고 무장해제만 시켜야 한다는 조건은 여전히 까다롭기 그지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둘에게만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긴다. 살아남아 강해진다. 누가 그들을 시험하려 하건 알 바가 아니다. 무엇이 목적이든 순순히 시험 따위 치러줄쏘냐. 그곳이 시험장이면 박차버리고 감옥이거든 무너트리고 왕궁이거든 불태워 없앨 것이다. “적이 만들어둔 무대 위에서 놀아줄 필요는 없어. 메테르, 기억해. 무대는 언제나 우리가 만든다. 적을 춤추게 만드는 것은 우리다. 적을 쓰러트리고 살아남는 것은 우리다.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고 나쁜 놈이라는 욕을 들어먹어도 상관없어.” 그것이 마왕군 사천왕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의 생존방식이다. 전생의 무대에서 초반에 퇴장했어야 할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그가 용사의 마왕성 침략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끝내 그를 패퇴시켰던 찬란한 용사가 지금은 그의 곁에 서 있다.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다. 있더라도 가능하게 만든다.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다. 그러니까 살아남아서 이긴다. 가장 중요한 건 네 생존이야. 다른 어떤 가치도 그걸 뛰어넘을 수는 없어.” “······응.” 메테르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선천적으로 타고난 정의심이 강한 그녀가, 무수한 세월을 살아오며, 버텨내며 쌓인 아르페의 독기와 이기심을 순수하게 이해해줄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 정도로까지 해뒀으면 적어도 타인에게, 상황에 쉽게 휘둘리지 않기 위한 기초공사는 마무리된 셈이 아닐까. [이, 이 무슨.] [크아아아아아아아!] 스켈레톤들은 개인에 의해 던전이 통째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순순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던가, 인내했던가! 고대하고 증오했던가! 그런데 이런 비천한 언데드로 영락해서까지 수호하고자 했던 가치를, 빛내고자 했던 보석을 저 꼬맹이가 쓰레기 취급하고 있었다! 침을 뱉고 우습게 비틀어버렸다! [잘못되었다! 이렇게 해선 제대로 자격을 증명할 수도, 오롯이 강해질 수도 없다!] [너희는 실수를 하고 있다! 정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다 닥쳐. 너희 같은 썩어빠진 해골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자격이라면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메테르!” “누구 하나 도망칠 수 없어!” 마법은 순조로이 나뉘었으니 이젠 그의 마나를 메테르와 방패에만 집중하면 된다. 아르페는 메테르의 힘을 북돋워주는 동시에 방패를 자유로이 조종해 당황하고 있는 스켈레톤 무리를 공격했다. [이럴 수는······ 큭!] [놈들은 시험에 응할 자격이 없다. 죽인다! 멸한다!] 놈들은 레코드 링크에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에 동요하며 초반에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지만, 이내 이곳에 있는 인원만으로 아르페와 메테르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들 사이의 링크를 강화하며 적극적으로 덤벼오기 시작했다. 물론 메테르는 지금 이 순간도 전투를 거치며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다고 기세가 놈들 쪽으로 기우는 것은 아니었다. 시험이라는 이유로 스켈레톤들이 처음부터 일행을 봐준 것도 아닌데 이제와 놈들의 태도가 변했다고 달라질 것이 무어 있겠는가! [이까짓 방패로 부메랑 흉내라도 낼 셈인가, 너무 무거워서 바닥을 굴러가는 돼지 같구나!] “어딜 보는 거냐, 그건 잔상이다!” [크아아아악!] 이런 방향의 성장을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뜻밖에 아르페의 방패 투척, 아니 조종 능력도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메테르에게 마나를 공유해주는 대신 그녀의 체력과 반사 신경이라도 조금 받아온 것일까? 그가 한 손으로 뻗어내는 수십 줄기의 마나에 의해 조종되는 방패는 상대에게 저주를 입히는 날을 날카롭게 세운 채 넓은 던전 복도를 자유로이 유영하며 스켈레톤들의 몸통을 차례대로 두드렸다. 그 데미지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여기, 그리고 여기다!” [놈의, 놈의 방패가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놈을 잡아 죽여야 해, 죽여야 하는데······.] 아르페가 다루는 방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르고 날카롭게 회전하며 메테르의 바스타드 못지않은 전과를 올렸다. 메테르를 두려워해 자신 쪽으로 몰려들던 스켈레톤들이 점점 더 빠르게 쓰러지는 것을 보며 아르페 역시 간신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이거. 뭐야 지금? 난 그냥 밀어내고 견제하는 정도면 충분했는데 왜 계속 딜이 들어가? 레벨 20이 넘게 차이나는 상대를 이렇게 압도하는 게 가능해? 까딱 실수하면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는데······ 게다가 저주 효과도 강해진 것 같아.’ 아르페는 어째서 그런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자신의 마나가 방패에 스며들어가는 과정에서 방패의 특성을 조금씩 더 강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히 마나를 돌멩이에 집중해 폭발시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마나로 인한 아티팩트 성능의 근본적인 진보, 다른 말로 하면 [강화]였으니까. 또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보조계열 스페셜 레어 스킬이기도 하다. 익히기 터무니없이 어려운 스킬이라는 말은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도 없다. ‘······이걸 내가 대체 어떻게 익힌 거지?’ 대체 자신이 뭘 했다고? 그야 던전 전체에 걸려 있던 레코드 링크를 변화시킨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잘한 일이기는 했지만, 방패의 강화는 그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영역이지 않은가. 그 외에 그가 한 일이라곤 메테르와 마나를 링크해 그녀에게 마나를 퍼부어주며 열심히 방패를 던져댄 것밖엔 없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방패가, 방패가 더욱 커진다! 회전을 시작한다!] [피해라, 놈은 결코 우리를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려 할 뿐이다! 놈은 용사가 아니라 악마다! 마왕 휘하의 사천왕에 버금가는 사악함이구나!] 아르페는 마치 그가 전직 사천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얄미운 말을 지껄이는 스켈레톤들을 방패를 날려 밀어버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스킬 각성은 메테르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할 텐데······ 가만, 혹시 메테르와 링크된 것이 마나뿐만이 아니라던가?’ 자신의 육신이 날렵해진 것도 그렇고, 없었던 스킬을 쉽게 습득해버리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아르페는 단순히 마나를 링크하는 것을 넘어서 더욱 굉장한 마법을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만물열람으로 자신의 능력을 한번쯤 확인해두고 넘어가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만약 내 가설이 맞는다면, 정말로 메테르가 그녀의 재능을 내게 공유해주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메테르는 온전히 그 재능을 갖추고 있기에 역사상 가장 찬란한 용사가 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재능을 범재에 불과한 아르페가 나누어 가졌다간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지는 것이다. 메테르의 성장이 둔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르페가 자칫 지나치게 성장해 적의 시선이 자신에게 더욱 집중되는 끔찍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원래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이 마나 링크를 유지하려 했던 아르페였으나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전투가 끝나는 대로 자신의 정확한 상태를 만물열람으로 확인하고, 최대한 빨리 마나 링크를 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가장 빛나는 것은 메테르여야 한다. 아르페가 그녀보다 더욱 빛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도 결국 운동이란 말이지. 운동은 귀찮아. 난 메테르의 빛을 받아 적당히 반사하는 정도면 충분해.’ 정말이지 용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 전직 사천왕이며 안온한 낙농 라이프를 꿈꾸는 아르페였기에 가능한 발상! 그러나 메테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몸을 놀리고 있었다. 아르페의 방대한 마나를 아낌없이 끌어다 쓰며 그녀는 지금 이 순간도 강해지고 있다! “흐아아아아아압!” [강해, 너무나 강하다!] [지원군이 더······ 앗, 이제 없구나!] [메테르] [레벨 ? 32] [검술 Lv8] [버서크 Lv4] [마나지배 Lv6] “저걸 보면 재능이 딱히 줄어든 것 같지도 않긴 한데······.” 아르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며 손을 휘둘렀다. 마침 던전의 6층이 격리되고 마지막으로 추가되었던 증원군, 개중 가장 레벨이 높은 55 정도의 스켈레톤 그룹이 주춤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불가능의 영역을 탐험하는 자들이여, 혼돈의 끝에 창조가 기다릴지 멸망이 기다릴지, 그 작은 몸으로 어디 시험해보겠컥!] “인트로 집어치우고 덤벼!” [감히이이이이이카악!] 가뜩이나 생각해야 할 것도 많은데 뇌가 텅텅 빈 해골 주제에 제법 철학적인 말을 지껄이다니! 엑스트라에 불과한 잡졸 따위가 멋을 부리는 것은 설령 창조주가 용서해도 아르페가 용서할 수 없다! “전부 다 꺼져! 알아서 적당히 대가리랑 몸통만 남기고 바닥이나 굴러다녀!” [놈들이 우리의 숭고한 결의를 모독하는칵!] 스켈레톤 한 마리가 분노에 차 말하려던 직후 아르페가 날린 방패의 모서리가 놈의 몸통을 쳐 던전 벽까지 쳐박아버렸다. 방패는 그러고도 기세를 잃지 않아 추가로 세 마리의 스켈레톤을 공격하고는 그것을 쳐내기 위해 검을 휘둘러오는 스켈레톤들 앞에서 맹렬히 회전하며 놈들의 병장기까지 부러트렸다. “좋아, 이 정도면.” 메테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도 어떻게든 이 자리를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아르페는 사방을 그득 메우고 있던 스켈레톤 무리가 대부분 쓰러지고, 남은 놈들이 채 백 마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무도한 자들에게 길을 내어줄 수는 없다!] [놈들을 꺾는다, 놈들을 우리와 같은 해골로 만들어버리겠다!] “어디 해보시지.” “내가! 다 쓰러트릴 거야!” 남은 마나는 절반 이상. 소모되는 마나와 남은 스켈레톤의 숫자로 미루어 판단해보면······. 할 수 있다. 확신이 섰다. 승자는 우리다. ────────────────────────────────────────────────────────────────────────Chapter 4. 너와 나의 연결고리 - 2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에도 이르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메테르와 아르페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집중했던 순간이었다. 아르페의 마나가 바닥을 찍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저공비행을 계속하고, 메테르의 검술이 끝내 9레벨에 이르고······. 전투에 지친 스켈레톤들이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해 다른 동료들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활로를 열려다가, 아르페가 내던진 방패에 명치를 세게 얻어맞고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바닥을 굴러다니기를 얼마간. 아르페는 기어이 마나와 육신의 한계를 느끼기에 이르렀다. “후우, 쿠흐으······!” “아르페, 이제 다 끝났어!” “끄윽, 알았어!” 아르페가 의식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천사의 음성과도 같은 목소리가 아르페의 귓가를 두드렸다. 아르페는 이를 악물고 버티어 서며 던전의 상태를 확인했다. 인세에 현현한 지옥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각, 가가각······.] [나는 도, 저히······ 납득······.] [죽음, 오직 내게 명예로운 죽음을······.] 전투 중에 죽은 스켈레톤의 숫자는 제로, 전투 속행이 가능한 스켈레톤의 숫자 역시 제로. 모든 적이 서로의 갈비와 척추를 구분하기 힘들 만큼 엉망진창이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 숫자가 족히 400을 넘기고 있었으니 지금까지 일행이 처했던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아르페, 괜찮아······?” “어떻게든, 살아는 있다만······ 너. 너는 이제 버서크 취소할 수 있겠어?” “······응!” 메테르는 그 말과 함께 정말로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던 붉은 기류가 사라지고 체내의 마나까지 정말로 진정되는 것이 보이자 아르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분노에 휩싸여 이성이 일부 마비되었던 그녀이기에 혹여 전투가 끝나고도 버서크를 해제하지 못하는 참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했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기우로 끝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설령 둘 다 무사한 상태로 전투가 끝났다고는 해도 잘못은 잘못. 아르페는 우선 그녀와의 마나 링크를 끊어버리곤, 눈을 지그시 가늘게 뜨며 메테르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네가 위험한 스킬을 익혔다는 자각은 있지?” “으응. 하지만 유지하지 않으면 아르페가 죽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랬다가 네가 죽어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네가 이런 곳에서 죽고 만약 나만 살아남는다면 내가 그걸 기뻐할 것 같아?” “아으으.” 아르페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메테르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아르페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잊어먹기 쉽지만 그녀는 아직 검을 잡은 지 일주일도 안 된 초보 전사에, 고작 열두 살 밖엔 먹지 않은 여자아이인 것이다. 그런데 용케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버서크 스킬을 유지했으니 사실은 칭찬을 해도 모자랐다. “감정을 다루는 스킬이란 그만큼 위험한 거야. 절대적인 우군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네 심장을 찔러오는 칼날이 된다고. 그 사실만은 명심해두도록 해. 알겠어?” “으, 응. 명심할게.” “······좋아, 그럼 끝내자.” 사실은 앉혀놓고 설교라도 하고 싶었지만, 괜히 자신의 말이 그녀의 재능에 한계선을 그을까 우려되어 그 정도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흡.” 그는 방패와 연결된 끈을 거세게 휘둘러 거대한 방패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스켈레톤 수 마리의 머리를 그대로 부수어버렸다. 이미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모든 스켈레톤이 방패의 저주를 몇 겹이고 중첩되어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터져나갔다. [주, 죽었다.] [우리의 동료가, 완전한 소멸을······.] [힘이 강해진다, 하지만······.] “아르페, 이제 다 부숴?” “그래, 다 부숴.” 아르페가 상냥하게 웃으며 다시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몸짓을 따라 떠오른 방패가 날을 세우며 위이잉, 거세게 회전을 시작했다. 메테르 역시 지친 몸에 남은 기운을 끌어올려 바스타드를 휘둘렀다. [크악!] [크가각!] [원통······.] 스켈레톤들은 동료가 한 마리씩 죽어나갈 때마다 몸에 활력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 솟구치는 활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뿐이었다. 물론 다른 스켈레톤이 죽어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살아남은 놈들의 방어력도 상승했으나 수직점프로 일행을 공격하지 못하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한 번에 안 죽네. 에잇! 에잇!” “메테르, 그럴 땐 좋은 방법이 있어. 괜히 네 무기의 내구도를 손상시키지 말고 이렇게.” 아르페는 마나의 실을 뻗어내어 별 저항을 하지 못하는 해골들을 조종, 다른 해골들과 맞부딪히게 해 깨트렸다. 그러자 실로 효과적으로 놈들을 부숴 없앨 수 있었다! [크아아아!] [이, 이 무도한 자들······!] 놈들의 해골이 단단해졌다면, 그 단단해진 해골을 사용하여 다른 해골을 때리면 되지 않겠는가! 비록 과거 직책은 사천왕이었지만 지금 보여주는 사악함은 충분히 마왕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아르페, 대단해! 정말 검보다 쉽게 부술 수 있어!” “응, 그렇지······.” 이 용사는 이미 틀렸다. 전생의 메테르는 분명 적군 사천왕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선한 여자였는데 대체 어쩌다 해골을 들어 다른 해골을 공격하는 소녀가 되었단 말인가! 아르페는 조기교육의 중요함을 실감하며 해골을 휘둘렀다. 누가 보면 두 명은 이미 용사가 아니라 훌륭한 마왕 후보생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아르페, 이것들이 마지막이야.” “해골바가지 단단한 거 봐라. 이 정도면 스켈레톤이 아니라 거의 듀라한 급인데.” [우리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수백 마리 스켈레톤의 힘이 둘로 나뉘어 탄생한 그놈들의 머리통은, 그냥 이것을 무기 삼아 들고 다니면 좋지 않을까 싶을 만큼 단단하고 무거웠다. 힘이 약한 아르페는 들지도 못하고, 바스타드를 가볍게 휘두르던 메테르만이 간신히 그것을 들어 올릴 수 있을 지경. 그 강도도 심상치가 않아 시험 삼아 벽에 내던져봤지만 괜한 던전 벽에만 금이 갔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면 레벨 100 정도는 되지 않을까······?” “레벨 50짜리 스켈레톤 400마리를 잡는 거랑 레벨 100짜리 스켈레톤 1마리를 잡는 거랑 둘 중 어느 쪽이 더 경험치가 좋아?” “그거야 당연히 압도적으로 전자이긴 해. 애초에 이 마법이 적에게 경험치를 부여해주기 위한 마법은 아니거든.” 그러니 지금 아르페와 메테르는 적어도 경험치 측면에서는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냥 멀쩡한 50레벨 스켈레톤 400마리를 잡았더라면 터무니없는 수준의 강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겠지만, 전투의 성과만 놓고 보면 결국 100레벨 스켈레톤을 한 마리 잡은 셈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경험치가 전부가 아니지.” 일단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레벨이 높은 적을 쓰러트렸을 경우에, 그 자에게는 평생을 두고 인정받을 수 있는 업적이 기록된다. 자신의 레벨 50일 때 레벨 70의 적을 쓰러트렸다면, 그때의 업적이 평생 남아 그 자를 보조해주는 것이다. 그 후로 레벨이 더 높은 적과 맞서게 되었을 때도 위축되거나 약화되지 않고 정면에서 싸울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심지어는 스킬의 습득, 몬스터와 싸워 얻을 수 있는 보상 아이템에도 관여한다. “그리고 피니시로 인한 스킬의 성장도 무시할 수 없어. 원래 스킬의 성장은 그 스킬의 실제 사용으로 인한 것이 첫 번째, 적을 죽였을 때의 정산이 두 번째거든. 적을 상대할 때 스킬을 구사했다면, 성공적으로 적을 죽였을 때에 해당 스킬이 다시 한 번 성장하는 거지.” “와아, 대단해.” 물론 적을 성공적으로 사냥하지 못하고 도주한다거나 전투가 중간에 캔슬되거나 하면 정산이고 자시고 없다. 이유가 어째선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가 이 세상을 만든 신과 만나게 되면 물어봐야겠지. 놈의 멱살을 잡고 말이다. “이걸 전문용어로 되새김질이라고 불러.” “아르페는 뭐든지 아는구나!” “뭐든지 아는 건 아냐. 아는 것만.” 메테르는 아르페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얻는 와중에도 두 해골바가지를 서로 부딪쳐 금이 가게 만들고 있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기계적인 반복동작에 아르페조차 살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용서하지 않겠다, 언제고 되살아나 네놈들에게 복수의 칼을 들리라!] “네, 다음 언데드.” “후우······ 이걸로 마지막이닷!” 메테르가 기합을 넣으며 해골을 내던졌다. 그 순간 그녀의 전신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마나가 팔에 집중되며,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일격을 만들어내 두 해골을 모두 깔끔하게 분쇄해버렸다. 그녀는 그와 동시에 강타 스킬을 습득했지만 그 정돈 이제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것으로 던전 6층의 모든 몬스터가 소멸을 맞이했다. 한 데 뭉쳐졌던 마나와 기록이, 드디어 몬스터들로부터 해방되어 도전자들에게 부여되었다. “아으.” 메테르가 짧은 신음을 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아르페는 입술을 꼭 다물었으나 그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내장이 전부 제자리를 벗어나와 토네이도처럼 회전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메스꺼움이 그들을 덮쳐온 것이다. “아르, 페······ 이거······.” “참아······ 레벨 업이니까.” “이게? 크으윽.” [메테르] [레벨 ? 34] [레벨 ? 35] [레벨 ? 36] [레벨 ? 38] 아르페의 눈에 비치는 메테르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었다. 그의 고유능력이 고장이 난 것이 아니다. 아마 지금 아르페 또한 메테르와 비슷한 상태이리라. 극한까지 강화되었던 스켈레톤의 경험치를 레벨 30 초반에 불과한 둘이 나누어 받았으니 순식간에 레벨이 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 레벨은 영혼과 육신의 격이 강화되는 것이니, 한꺼번에 열 몇 번의 레벨업이 일어나면 그야 신체에 격변이 닥쳐와도 이상할 것이 없다. “너무 아파, 아르페.” “참아, 곧 가실 거야.” “응······!” [메테르] [레벨 ? 41] 똑같은 경험치를 얻어도 타인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메테르의 능력이 이번에 빛을 발했다. 아르페의 고통은 서서히 멎기 시작했는데도 메테르는 여전히 괴로워보였던 것이다. 아르페는 급격한 레벨업으로 순식간에 차오르는 마나로 깊은 심호흡을 하며 그녀를 살폈다. 메테르 역시 머지않아 속에 맺힌 것을 모두 토해내듯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레벨이란 정말 신비하구나······ 엄청 지쳤는데, 무지 강해진 게 느껴져.” “나한테 가장 신비한 건 메테르 네 존재야.” [메테르] [레벨 ? 43] [검술 Lv11] [마나지배 Lv8] [버서크 Lv7] 이 정보가 어딜 봐서 일주일 전 처음 검을 잡은 소녀란 말인가. 한 10여년을 전장에서 구른 용병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아르페는 여전히 이 던전의 의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용사의 근본적인 성장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층을 합쳐놓았을 뿐인데 이 정도로 스킬이 성장한다면 대체 이 모든 층의 몬스터를 하나로 합친다면 얼마나 되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걸 시험해보려 했다간 진즉 죽어버렸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자신이 레코드 링크를 변형시킬 수 있었던 것인지 믿기지가 않는다. 정말 어지간히도 필사적이었구만,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르페, 벽이 열리고 있어.” “그렇게 설정해두었으니 그야 그렇게 되겠지.” 던전의 6층을 지배하고 있던 레코드 링크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던전의 7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저 너머에 나타나고, 그동안 고생했으니 쉬고 가라는 듯이 그 근처에 맑은 물이 솟구치는 작은 분수대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아르페는 환호하는 메테르를 보고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속지 마, 독극물이야.” “던전은 정말 나빠!” “그 마음가짐이면 됐어. 이 빌어먹을 곳에 정말 믿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아르페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분수대 근처에서 미약한 빛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견한 아르페의 눈이 반짝였다. “미안, 정정할게. 믿을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기는 있어.” “응?”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커다란 짐수레를 끌고 있는 미녀였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메테르를 돌아보며 아르페는 씩 웃고는 말해주었다. “던전 상인, 말이지.” ────────────────────────────────────────────────────────────────────────Chapter 4. 너와 나의 연결고리 - 3 “안녕하세요, 모험가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원활하고 쾌적한 던전 탐험을 돕기 위해 파견된 애니웨어 상회의 중견상인 미케나랍니다!” 매끈한 갈색 피부와 풍만한 가슴이 특징적인 그 미녀는 종이 울리는 것만 같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아르페와 메테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메테르는 본능적으로 아르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검을 뽑으려 들었지만,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적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저들은 계약에 의해 우리를 결코 선공할 수 없어.” “계약?” “신과의 계약. 던전과의 계약이라고도 하고, 뭐 어찌됐든 인세의 누구도 풀어낼 수 없는 계약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아르페는 정말 대단해.” “어머나, 손님은 애니웨어 상회를 알고 계신가요?” 꼬마들이 이런 던전의 심부까지 이른 시점에서 범상치 않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들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을 줄이야! 애니웨어 상회의 중견상인 미케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르페를 직시했다. 직후 아르페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저었다. “어딜.” 마나의 실이 수십 겹으로 뻗어 나와 허공에 교차되는 순간, 그녀로부터 발현되어 아르페에게 쇄도하던 악의 없는 마나의 집합이 무분별하게 흐트러져 소멸했다. 감히 단언하건대 만물열람 아래에서 모든 탐색과 감지 마법은 무력화된다! “어머나!” “개수작은 포기해라, 상인.” “넵······.” 자신의 탐색마법이 발동도 전에 거부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미케나는 정말로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등이 짐수레와 부딪히며 가슴이 쏟아질 것처럼 출렁거렸다. 그것은 스푼을 들 힘이 남아있는 남자라면 모두가 본능적으로 이끌릴 만큼 매력적인 동작이었으나 아르페는 침을 퉤 뱉을 뿐이었다. “흥, 아줌마가.” “뭐, 뭐라구욧!?” “아줌마, 20% DC 정도는 각오해둬. 몰래 캐냈으면 몰라도 나한테 들킨 이상 변명은 없겠지?” “큭······!” 애니웨어의 중견상인이라면 족히 100년 정도는 이 업계에서 굴러먹은 베테랑이다. 그런데 초면의 꼬맹이에게 이런 굴욕을 당하게 될 줄이야! 미케나가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떠는 가운데 아르페는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극한까지 강화되었던 두 마리 스켈레톤이 죽어 잔해만이 남은 곳이었다. “자, 그러면 일단 루팅 먼저 하자.” “응!” “어라, 손님?” “거래는 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저 당돌한 꼬마 남자애는 그렇다 치고, 여자애까지 깔끔하게 자신을 무시하자 미케나는 자신의 프라이드에 쩌저적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 녀석들은 뭐란 말인가! 왜 겉모습과는 달리 던전 공략만 20년 정도는 한 것만 같은 노련미를 풍긴단 말인가! “진짜 가루만 남았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만······.” “루팅 해보려고 해도 안 됐어.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거야, 아르페?” “좋아, 가르쳐줄 테니 잘 봐둬.” 미케나가 몸을 부들부들 떠는 사이에도 아르페는 스켈레톤의 잔해로 다가가 마나의 실을 마구 뻗어내었다. 옆에서 고개를 갸웃하는 메테르에게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며 말이다. “물론 이렇게 완전히 잔해만 남은 몬스터를 두고 루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하지만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지. 잘 봐둬.” 그가 한손으로 뻗어낸 마나의 실이 두 스켈레톤의 잔해에 가 닿자 당장 그것들이 반응하여 한 무더기로 뭉치기 시작했다. 아르페는 손을 이리저리 비틀어 그것을 더욱 빠르게 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와아.” 그가 마나의 실을 끊어내자 잔해의 움직임 또한 멈추었다. 이제 그것은 뱀파이어가 타 죽은 자리에 남는 잿더미처럼 되어 있었다. “이젠 여기서 결정이 나오기만 기다리면 돼. 섣불리 몬스터를 불태워버리거나 했을 때에 쉽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니 참고하도록.” “역시 아르페는 대단해!” “대체 이 손님들은······.” 자신을 불러낼 만큼 매력적인 던전에서 저렇게 어린 모험가들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저런 고급 테크닉을 구사하여 몬스터에게서 루팅을 하는 장면은 더더욱 놀라웠다. 그러나 미케나가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도 루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 아르페. 뭔가 나오고 있어.” “팔 토시, 너는 이미 건틀렛이 있으니 이건 내 거네.” “와아, 예쁜 수정도 나왔어!” “이건 몬스터들의 잔여 마력이 너무 모인 나머지 자연으로 회수되지 못하고 뭉친 거야. 보통은 마도구의 재료로 많이 쓰이는 물질이지. 으으음, 이것도 네가 써먹을만한 물건은 아닌데······.” “다 아르페가 가지면 되지 뭐. 나는 이미 검도 갑옷도 있는걸?” 음, 변함없는 천사였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정을 품에 챙기고는 이어서 토시를 착용했다. 어째서 뼈밖에 없는 스켈레톤들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검은 가죽 재질의 토시. 착용하게 될 경우 손놀림이 빠르게 되는 부가효과가 붙어있어, 본의는 아니지만 양팔을 사용하여 전투를 치러야 하는 아르페에게 제격인 무구였다. “아르페, 아직 뭐가 반짝이는데?” “아, 빼먹을 뻔 했네.” 한 층의 스켈레톤들이 모두 뭉친 몹의 드롭템답게 그 안에는 돈 역시 섞여 있었다. 누런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제법 커다란 동전, 그것도 두 개나. 아르페는 그것을 주워들며 피식 웃었다. “금화가 나올 거라곤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개라, 나이스.” “와아아아, 예쁘다.” 살면서 금화를 처음으로 본 메테르는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금화는 은화의 100배가치를 지니고 있다. 메테르뿐만 아니라 마을의 촌장이라 할지라도 평생 접해보지 못한 녀석이었다. “보통은 레벨이 100이 넘어가는 몬스터라고 모두가 금화를 드롭하지는 않아. 이번 경우는 레코드 링크로 묶여 있었던 녀석들이 하나로 뭉쳐서 만들어낸 기적 같은 거지. 참고해두도록.” “알겠어!” “손님, 잠깐만요. 레코드 링크? 그게 뭔가요?” 제아무리 던전 베테랑 중견상인이라 할지라도 고대마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르페는 상인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고 루팅을 마무리했다. “현금화할 수 있는 보상은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가 가진 돈에 그걸 더하면 그럭저럭 거래는 해볼 만하겠지.” “그게 뭔데?” “기다려봐.” 아르페는 더 이상 거둘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여태껏 무시하고 있던 던전 상인, 미케나에게로 걸어갔다. 미케나는 여태껏 무시당했던 사실을 잊기라도 한 듯 방긋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손님. 찾으시는 물건은 있나요?” “빈병 하나.” “비, 빈병 말씀이신가요?” “응.” 미케나와 아르페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아르페의 속내를 읽어내려 했으나 그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썩어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거래를 거절하는 것은 애니웨어 상회의 가장 큰 금기 요소! 미케나는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짐수레에서 빈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동화 50개입니다.” “빈병 하나에 뭐가 그렇게 비싸!?” “던전 상인은 원래 그런 거야.” 아르페는 기겁하는 메테르를 무시하고 빈병을 받아들었다. 미케나는 병의 마개를 뽁, 뽑아내는 아르페를 보며 괜스레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손님, 이 분수대의 물을 담으시려는 것 같은데 그 전에 먼저 물이 안전한지를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험가의 기본수칙이랍니다.” “응, 이미 확인했어.” “확인하셨다구요!?” “나의 심장에서 비롯되어 얕은 물의 바닥에 현현하라, 가증스러운 겉껍질을 벗겨 속내를 드러내게 하라!” “뭐, 뭐야!?” 중견상인 미케나가 경악하는 가운데 아르페의 영창이 완료되어 분수대 중심부에서 어마어마한 마찰이 일어났다! “와하하하, 물이 막 끓어!”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나의 마나 낭비다!” 하이퍼 러빙의 마찰은 멀쩡한 차가운 물을 증발시킬 정도. 더욱이 아르페의 레벨도 40을 넘고, 슬슬 하이퍼 러빙을 구사하는 데에도 익숙해졌기에 마법의 효율은 이전과는 또 격을 달리했다. “꺄아아아악, 손님, 만약 독이라도 품고 있으면 독의 안개가 되어버린다구요!” “이미 확인 끝났다니까!” 수증기가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으나 물론 그 안에 독은 없었다. 독에도 물에 완전히 녹아 함께 증발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뚝심 있게 제자리를 지키느라 물이 있었던 자리에 찌꺼기로 남는 녀석이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분수대 안에 들어있는 독은 후자였다. 아르페가 거침없이 물을 증발시킬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거 제가 처음 듣는 주문인데요, 물을 끓이실 거라면 그냥 보일 마법이나 파이어 마법을 사용하시면 되는 거 아녔나요?” “그런 마법이 없으니까 그러지!” “보일 마법은 금화 2개에, 파이어 마법은 금화 1개에 절찬 판매중입니다!” “안 사!” 분수대의 물이 워낙 많았기에 증기가 소멸하기까지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길고 길었던 기다림도 이내 결실을 맺었다. 분수대에 그 많았던 물이 모두 증발해 사라지고, 바닥에 짙은 녹색의 가루만이 뭉쳐 있었다. “아.” “훗.”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무심코 신음을 흘린 미케나를 비웃으며 가루를 병에 담았다. 물론 그 정체는 독이다. 만지는 것만으로는 독성이 나타나지 않고, 액체와 접해 녹는 순간 힘이 발휘되기에 맨손으로 만져도 안전했다. “아······.” “자, 이거 살 거지?” 아르페는 녹색의 가루를 한 톨도 흘리지 않고 병에 담아 마개를 닫고는 미케나에게 내밀어보였다. 그녀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아르페에게 따졌다. “······던전 상인이 어째서 나타나는지 알고 계시는군요?” “당연하지. 너흰 언제나 던전에 나타나는 마법 재화를 노리잖아.”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은 보통 던전의 한 층이 끝날 때마다 랜덤하게 던전이 준비한 기회, 혹은 위험과 마주하게 된다. 숨겨진 보물상자라거나 지금과 같은 독 분수대, 혹은 정말 최상급의 성수가 담긴 샘물. 그리고 던전 상인들은 바로 그 보물의 기운을 감지하고 랜덤하게 던전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모험가가 그 보물을 찾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면, 보물은 그들의 것이 된다. 그리고 절반 이상의 모험가들은 해당하는 층에 보물이 있다는 것조차 잘 감지하지 못한다. 설령 던전 상인이 어째서 나타나는지 알고 있는 자들이라고 해도, 어지간히도 실력이 좋지 않은 이상은 보물을 잘 찾아내지 못한다. 던전 상인이 나타났다고 갑자기 그 일대를 뒤진다거나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제로라는 얘기다. 물론 아르페는 별개였다. 던전 상인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6층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으니 할 말 다 했다. 그는 히죽 웃으며 녹색 가루가 든 병을 흔들어보였다. “그래서 안 살 거야?” 미케나의 인상이 참혹하게 구겨졌으나 상인의 본능만은 곧장 튀어나왔다. “크윽······ 2골드에 사겠습니다.” “그래, 다음번엔 너한테 잘 속아주는 좋은 호구와 만나길 바라.” 아르페가 미련 없이 되돌아서자 미케나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4골드 드리겠습니다! 저희도 가공비가 든다구요, 가공비가!” “이미 물기 하나 없이 말려줬는데 가공비는 무슨. 10골드 내놔.” “그렇게 후려치시다니······!” “10골드에 사지 않겠다면 거래는 없어.” 아르페는 단호했다. 과거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정한 창조주가 이러했을까 싶을 만큼 단호했다. 미케나는 상대가 이미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의 가치를 정확히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별 수 있는가? 수긍하는 수밖에! “10골드, 사겠습니다.” “좋아, 바실리스크의 혈독 분말을 10골드에 샀으니 손해는 안 볼 거야.” “이미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미케나는 그 순간부로 상대를 자신 이상으로 노회한 상인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이런 놈을 만났을 때는 손해만 안 보면 승리! 특히, 아직 대륙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모험가에 대한 정보만 잘 얻어가도 막대한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우리 장비 좀 수리해줘.” “수리, 알겠습니다······ 어라, 다 아티팩트이기는 한데······ 전체적으로 굉장히 허접한 무장이네요? 그렇다는 건 혹시 손님들의 레벨도······?” “탐색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모든 장비를 수리하는 데에 드는 돈이 50실버, 여기에 20% DC가 들어가서 40실버. 설마 수리비까지 깎아먹을 줄은 몰랐던 미케나였으나 자신이 먼저 실례를 저지른 것도 확고한 사실이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 녀석의 부츠랑 헬멧, 내가 입을 로브. 레벨 제한 낮은 것 중에 제일 성능 좋은 걸로.” “블러드 캐타이의 뼈로 만든 부츠와 헬멧이 있네요. 이 둘이 8골······.” “20% DC 감안해서 6골드 30실버 정도면 되겠지?” “모험가 말고 상인하세요, 그냥.” 메테르는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했던 발과 다리, 머리를 지킬 방어구를 얻게 되었다. 아르페의 로브는 마력을 다루는 어둠 고슴도치의 가시를 실로 가공해 만든 검은 천 로브로, 마나를 미약하게 증폭해주고 약한 인식저해를 더해주는 능력이 있었던 탓에 6골드는 지불해야 했다. 솔직히 레벨 40짜리가 입을 수 있을 만한 방어구는 결코 아니었으나 돈의 힘은 실로 위대했다. “자, 메테르. 이것만 입어도 제법 안전해질 거야.” “아, 아으으. 이렇게 비싼, 비싼 걸 내가······.” 메테르는 아르페가 이상한 가루를 팔아 10골드를 손에 넣는 것만 해도 경악하고 있다가는 자신들의 장비 정도로 수 골드가 오가는 것을 보며 끝내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이걸 살 돈이면 소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으아아아.” “진정해, 메테르. 그리고 아줌마, 남은 돈으로는 적당히 물과 식량을 줘. 제일 싼 걸로.” “전 아줌마가 아니에욧, 파릇파릇한 봄처녀라구욧!” “아줌마가 처녀라면 나는 용사겠네.” “으아아아아아아!” 아르페가 정말 용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미케나는 그의 능글맞은 미소에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용사들은 이미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으으, 맛없는 밥은 싫은데······.” “지금의 건빵 한 톨이 내일의 안심 스테이크가 되어서 돌아올 테니 참아.” “······응, 나 참을게! 아르페와 함께 행복해지는 그 날까지!” “아니, 그때까지 참을 필요는 없어.” 미케나는 아르페가 내민 돈주머니를 탈탈 털어 건조 식량과 식수를 준비하면서도 그가 메테르를 달래는 목소리를 들으며 얼이 빠졌다. “하는 짓만 보면 던전 공략만 20년은 하신 것 같은데요. 가정교육을 정말 판타지로 받으셨나 봐요.” “남이사.”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건조 식량이 든 주머니와 식수가 담긴 수통을 받아든 아르페는 그것을 적당히 로브 안에 넣고는 후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미케나는 용케도 비즈니스 스마일을 되찾아 그에게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무정하게도 손을 휘휘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 이제 가봐. 아마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저는 이곳에서 손님들을 배웅하겠습니다!” “아니, 가. 아줌마가 가야 그 아래에 있는 보물상자를 꺼내지.” “······.” 미케나는 끝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 그것까지 눈치 채고 있었다니! 여태까지 굴욕을 감내하며 물건들을 싸게 판매하면서까지 상대방에게 방심을 유도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Chapter 4. 너와 나의 연결고리 - 4미케나는 최대한 불쌍해보이게 두 눈을 글썽이며 아르페에게 부탁했다. 사실 그녀의 메인 목표는 바실리스크의 혈독 분말이 아닌 보물상자였으니까. “이······ 이 안에 있는 거 저한테 파실 거죠?” “뭐가 있는 지 봐서.” 그러나 아르페의 대답은 냉정했다. 덤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도 냉정했다.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빨리 옆으로 비키라는 무언의 압박! 연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르페에게 미케나의 환상적인 미모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큭······ 애니웨어 상회에서 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굴욕을 겪는 건 처음이에요······.” “와, 보물상자다!” 보물상자에서는 낡은 나무테 안경 하나와 검은 가죽 부츠가 나왔다. 시무룩해져 있던 미케나의 눈동자가 그 두 가지를 보며 다시금 맹렬하게 반짝였다! “저한테 파실 거죠!?” “둘 중 하나만.” 그렇게 말하며 아르페는 나무테 안경을 내밀었다. 그것으로 미케나는 확신했다. “손님, 어마어마한 수준의 탐색 마법을 지니고 계시군요?” “탐색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뭐, 이쯤 되면 뻔하긴 하지만······ 자, 여태 많이 후려쳤으니까 이건 이득 안 보고 판다. 45골드.” “사, 사십······!” “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돈의 자릿수가 달라져 경악하는 메테르, 흔쾌히 가격을 지불하겠다고 선언한 미케나! 메테르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르페는 씩 웃고 있었다. “역시 이 던전은 꿀단지였어. 이젠 꿀에 빠져죽지 않게만 조심하면 되겠네.” “손님, 저희 애니웨어 상회는 던전에서의 서포트 및 호위 업무도 수행한답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그래놓고 전리품 반절을 떼어가려고? 꿈 깨시지. 돈이나 내놔.” “쳇.” 나무테 안경은 렌즈에 깃든 마력을 소모해 주위를 탐색하는 기능을 지닌 아티팩트였다. 만물열람의 소지자인 아르페에게는 일절 필요가 없지만, 던전에 들어가는 모험가라면 누구나가 원할 아티팩트! 수요가 넘치기에 가격대가 높게 형성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횟수제한이 있어 몇 번 구사하고 나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점이다. 그 소모성 또한 아티팩트의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나무테 안경에 깃든 마나의 양을 가늠해, 이것을 판매할 때 50, 60골드까지도 너끈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케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짐수레에 쳐박으며 다시금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은 어딘가 고급스러운 광택을 내는 검은 가죽 부츠에 꽂혀 있었다. “손님, 그 부츠도 저희로선 무척 구입하고 싶습니다만······.” “이건 안 팔아.” 아르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원래 자신이 신고 있던 낡아빠진 신발을 벗어던지고 가죽 부츠를 신었다. 메테르가 잘 어울린다며 박수를 짝짝 쳤지만 그에게 잘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성능뿐이었다. “설마 이런 던전에서 블링크 부츠가 나오다니.” “큿.” 심상치 않은 물건일 줄은 알았지만 설마 블링크 부츠였을 줄이야! 미케나는 이를 득득 갈았다. 물론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메테르는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블링크, 짧은 거리를 순간이동하게 해주는 마법이다. 마법사들이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구사하는 마법인데, 블링크 또한 마법인지라 영창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흠. 그러나 이 마법이 아티팩트에 들어가 있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마나를 주입하거나 특정 상황을 맞추어주기만 하면 발동할 수 있게 되니 마법의 효율이 단박에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블링크 마법이 깃든 부츠는 마나 효율이 아무리 떨어져도 최소 100골드는 나가지!” “굉장해, 아르페!” “으아아아아!” 더구나 이 부츠는 하루에 한 번, 위기상황에 마나 소모 없이 자동으로 블링크가 발동하는 옵션이 있다. 추가로 마나를 불어넣으면 블링크의 재사용도 가능하니 블링크 옵션이 있는 부츠 중에서는 가히 최상위권의 물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마무리로 레벨제한이 낮아 아르페가 착용할 수 있다는 점까지 완벽한 삼박자, 이 부츠에 가격을 매기라면······ 매기기도 귀찮다. “이제 아르페가 더 안전해지겠네. 너무 기뻐.” “이 손님은 대체 뭐죠, 손님······?” “뭐긴, 나중에라도 절대 상인은 못해먹을 순해빠진 녀석이지. 자, 그래서······.” 아르페는 미케나에게 받은 45골드를 고스란히 그녀에게 다시 내밀었다. “마나 포션 1개, 나머진 체력 포션으로.” “아르페, 지금 그 돈을 다 쓰는 거야!? 우리 그 돈이면 한 평생 살 수 있을 텐데!” “네 능력이면 이 정도 돈은 언제고 벌 수 있어. 그리고······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을 때 사두는 게 좋거든.” 아르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를 마주하는 미케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저래 제가 손님을 오판했었네요. 무례에 사죄드려요. 중급 마나 포션 1개, 중급 체력 포션 8개 구성이 됩니다만 괜찮으시겠어요?” “체력 포션 1개 더 얹어주면 고맙지.” “거기에 마나 포션 1개 더 얹어드릴게요.” “음?” 아르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건 너무 후한데?” “후한 거야!?” “앞으로 유명해지실 분 같으니 눈도장을 조금 찍어두려는 것뿐이랍니다. 앞으로도 애니웨어 상회를 잘 부탁드려요.” “쩝······.” 미케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이제야 중견상인으로서의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빚을 지는 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냥 여유롭지도 않은 상황에 기분 따라 호의를 걷어찰 수도 없었다. 아르페는 결국 미케나가 주는 대로 포션을 넙죽 받아, 자신은 마나 포션 2개와 체력 포션 1개를 로브의 안주머니에 챙기고는 나머지는 전부 주머니에 담아 메테르에게 건네었다. “엄청 지쳤을 때 마시거나, 다친 데에 뿌려.” “아으으으, 이런 거 아까워서 못 쓰는데.”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건 네 목숨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쓸 수 있겠지?” “으, 응······.” 메테르는 아르페의 늠름한 말에 볼을 살짝 붉히며 얌전히 포션이 담긴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미케나는 거기까지 보며 피식 웃고는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애니웨어 상회의 미케나입니다.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시든가.” “그러면 이만.” 처음 나타났던 때의 빛과 함께 미케나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메테르는 자신이 꿈이라도 꾸었나 싶어 스스로의 볼을 꼬집어보다가도 자신의 장비가 완벽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건 당연하지. 대신 너는 전투의 재능이 뛰어나잖아.” “하지만 나도 아르페랑 이것저것 얘기하고 싶은데······.” “이 이상으로?” 메테르는 이미 아르페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 굳은 결의와 함께 주먹을 꼭 쥘 뿐이었다. “앞으론 나도 책 열심히 읽어야지. 똑똑해져서 아르페한테 도움이 될 거야. 아르페랑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어, 음······ 그래, 힘내라.” 그 문제가 책을 읽는다고 어떻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르페는 일단 그녀를 응원해두기로 했다. “그래도 책은 나중으로 미뤄둬. 이제 곧 던전 7층으로 돌입해야 하니까. 아마 스켈레톤들이 더 강화되어서 튀어나올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될 걸.” “나 어떤 놈이든 다 이길 수 있어. 아르페를 지킬 거야.” “씩씩해서 좋네.” 그는 피식 웃으며 메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제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메테르를 향해 아르페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자자.” “응!” 둘은 거적 데기를 대충 말아 베개 삼고는 누웠다. 제아무리 레코드 링크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해도 던전은 던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 6층에도 새로이 몬스터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물론, 던전에 작용하는 레코드 링크에 종속된 상태의 몬스터가. 한 번씩 처치한다고 해서 사라질 단순한 마법이었으면 아르페가 애초에 기함할 일도 없었다. 그들이 하룻밤 자는 정도로 6층에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몰라 한 손을 내밀어 이리저리 마나의 실을 걸쳐두는 아르페. 메테르는 그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살짝 끌어 그의 곁에 누웠다. 아르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가까워.” “이렇게 하는 게 더 따뜻해서 좋아.” “부끄러움은 어디 갔냐.” “그런 건 우리 집 마당에 묻어두고 왔어.” “너희 집 마당 없잖아.” 메테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만 꼼지락거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밀쳐낼 수도 없었기에 아르페는 이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헤헤.” “아직 멀었네, 멀었어······.” “아르페에.” 메테르가 어리광을 부렸다. 바스타드를 휘두르며 스켈레톤들을 몰아치던 끔찍한 소녀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르페는 속아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어느덧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내내 전투를 벌이며 제대로 씻지도 못했을 터인데 어째서 그녀의 몸에서는 이리도 좋은 향기가 나는지.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아르페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던전의 7층은 6층보다 더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는 않았다. 던전의 몬스터들은 아르페에 의해 던전의 질서와 시험이 모두 망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제는 그들을 시험하기보다는 신성한 시험의 장을 더럽힌 그들을 징벌하겠다는 의도로 가득했기 때문에 더욱 독살 맞게 덤벼들었다. 레벨 또한 6층보다 높아 평균레벨 52 정도의 스켈레톤만 도합 600마리 정도는 7층에 머무르고 있었고, 그놈들이 주로 아르페를 노리고 덤벼드니 아르페의 마나가 남아날 틈이 없었다. [네놈의 존재 자체가 용사에 대한 모독이다!] [네놈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아르페한테는 손 못 대에에에에에에에!” 만 하루 정도로는 도저히 놈들을 다 깨부수고 던전을 클리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레벨이 늘어나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어지간하면 버서크를, 어지간하면 마나 링크를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수단을 아끼면서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메테르는 버서크에 의지해 전방의 모든 스켈레톤들을 막아냈고 아르페는 별 수 없이 그녀에게 마나를 공유해주며, 한편으로는 나날이 익숙해지는 방패 부메랑으로 놈들을 약화시켰다. [크하아아아아악!] “아르페, 이 장갑이랑 부츠 진짜 좋아! 이걸로 때리니까 해골이 잘 부서져!” “그래그래.” [메테르] [레벨 - 43] [격투술 Lv1] [강타 Lv3] [괴물들! 이 자들은 잔혹한 괴물이며 마족이다!] [내게 죽음을 다오! 나의 동료와 하나 되어 네놈들을 징벌하리라!] “네 동료들도 다 그 꼴로 만든 다음에 한꺼번에 부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크아아아아아!]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흐른 것일까? 전적으로 메테르의 버서크와 아르페의 마나 링크에 의존하여 그들은 간신히 스켈레톤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녀의 재능을 공유 받아 그녀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아르페의 부담감과는 달리 메테르의 모든 스킬은 여전히 쑥쑥 성장했고 그것은 아르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생짜로 며칠을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해 거의 모든 포션을 소모해야 했지만, 다행히도 7층의 끝에서 그들은 다시 던전 상인과 조우할 수 있었다. “어머나, 며칠 만에 다시 뵙네요.” “왜 또 아줌마야?” “아줌마가 아니라니까요! ······헉, 그건 황금 도마뱀의 꼬리뼈 대검!?” “97골드.” “끄아아아아악!” 그렇게 용사들은 무사히 재정비를 마치고 8층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던전이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레코드 링크로 인해 대체 던전이 얼마나 많은 층수로 쪼개진 것인지는 쪼갠 당사자인 아르페조차 알 수 없었다. 던전의 8층, 9층, 10층, 11층, 13층, 15층······ 던전은 이어지고 계속 이어졌다. 스켈레톤들의 평균레벨은 계속해서 미미하게 올랐고 어느 순간인가부터 아르페와 메테르의 레벨은 스켈레톤들을 넘어섰다. 이젠 레벨을 불문하고 그냥 스켈레톤이라면 전부 낙승으로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쯤 드디어 레벨 100을 넘어서는 강력한 몬스터, 구울이 등장했고 거기서 일행은 다시 벌어진 레벨 차에 낭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넘어설 수 없는 산은 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상대의 모든 약점을 파악해버리는 아르페와, 그가 일러주기만 하면 상상을 현실로 끌어내버리는 미친 재능의 메테르가 함께하는 한! 그렇게 1년이 흘러, 일행은 던전의 34층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대체 어디까지 있는 거냐고 이 던전!” “단체전 재밌다! 아르페, 이제 슬슬 다른 몬스터 나오지 않을까?” “손님, 이번만은 제발 200골드에 팔아주세요! 제발!” 메테르의 레벨 124, 아르페의 레벨 115에 이른 시점이었다. ────────────────────────────────────────────────────────────────────────Chapter 5. 이걸 선배님이? - 1아르페는 던전의 35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이를 북북 갈았다. “이 던전은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모든 던전이 다 이런 거 아냐, 아르페?” 메테르가 순수한 눈망울을 빛내며 물어왔다. 첫 던전을 이런 무지막지한 녀석으로 끊은 덕에 이제 메테르는 어지간한 던전 정도로는 지치지도 투덜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야 그것이 던전 탐험가의 필수 덕목이기는 한데······. “음, 그러니까 말이지······.” 아르페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은 잘 가지 않았지만 일단 적당히 메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두었다. 그러자 메테르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좋아했다. 짐수레를 뒤로 한 채 그것을 지켜보던 미케나가 눈을 지그시 뜨며 말했다. “꼭 동물조련이라도 하는 것 같네요, 손님.” “시끄러. 245골드.” “아깐 230골드에 팔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물건에 고정된 가격 따위는 없어. 내 컨디션이나 상대의 싸가지, 뭐 그런 변수에 따라 조정되기도 하는 거지. 어디 보자, 지금은 247······.” “245골드에! 사겠습니다!” 미케나는 이러다가 물건의 가격이 더 비싸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급히 돈을 내밀었다. “자.” “크으으으으으.” 아르페는 히죽 웃으며 물건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미케나는 탐색 마법으로 물건을 살피며 침음을 토해냈다. “큭, 확실히 정말 좋은 무기입니다······ 물건의 가격을 매기는 능력 하나는 정말 귀신같으시네요. 애니웨어 상회에서 모시고 싶을 정도로.” “아줌마, 아르페 뺏어가지 마!” “아줌마가 아니라니깐욧!” 얌전히 있던 메테르가 다급히 아르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미케나에게 이를 드러냈다. 이 녀석은 전생에 개과 동물이 아니었을까, 아르페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녀석을 다독여주었다. “가고 싶어도 못 가니까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 아줌마, 그거 아무한테나 팔아먹으면 뒷감당 안 될 테니까 조심해.” 방금 아르페에게서 미케나에게로 넘어간 아티팩트의 정체는 바로 광화의 저주가 걸린 핏빛 금속 할버드. 비록 사용자의 정신붕괴를 이끌어 아군이고 적군이고 다 전멸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강력한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무기였다. 다만 이미 버서크를 지배하고 있다시피 한 메테르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무기였을 뿐더러 아르페는 너무 무거워서 들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다른 모험가나 용병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이 되리라. 그 뒤에 다가올 파멸을 알면서도 손에 쥐고 마는 욕망이, 모든 인간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법이다. “후후 상인인 저는 그저 물건을 비싼 값에 팔 뿐, 주인의 손으로 넘어가고부터는 제 소관이 아니랍니다.” “악덕상인이 따로 없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금화 주머니에서 100골드 정도를 따로 분리해 다시 미케나에게 내밀었다. 그가 무엇을 부탁할지 잘 알고 있는 미케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어 포션과 식수, 식량을 적당히 준비했다. 지난 1년간, 6층에서 34층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나타나 그들과의 거래를 독점한 그녀다. 이 정도는 척하면 착이었다. “그런데 손님.” 에누리 없이 정확히 100골드어치의 물건을 맞추어 아르페와 메테르에게 나누어주며 미케나가 물어왔다. “이 던전은 대체 정체가 뭐기에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거죠? 이 끝에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라도 있나요?” “그걸 우리도 알아내려고 탐험하고 있는 거잖아.” “손님의 능력으로도 짐작할 수 없단 말예요?” 미케나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아르페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 능력을 지나치게 높게 사는 것 같은데. 나라고 전부 다 아는 건 아니거든.” “층수가 깊어갈수록 점점 더 제 구미가 당기는 상품이 튀어나오니, 제 입장에서는 이 던전이 앞으로도 100층 정도 이어져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하지만요······ 이 던전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던전은 아녜요. 짐작하고 계시겠죠?” “응.” 아르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35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34층에서 나타났던 구울들보다 또 평균레벨이 2 가량 높은 구울이겠지. 그도 아니거든 다시 한 번 대대적인 강화가 이루어진 채 나타날 새로운 몬스터이거나. “이건 확고한 목적을 갖고 누군가 만든 던전이야. 우리 둘이 그 목적에 부합되는 도전자가 아니라는 것도 확고한 사실이고.” “보통 이런 경우, 던전이 위치한 곳의 역사를 뒤져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때가 많아요. 만약 조사를 원하신다면, 제가 손님을 대신해 이 지역의 역사를 알아볼 테니 지명을······.” “아줌마, 그럼 나중에 보자.”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죠, 제가.” 미케나가 투덜거리며 물러났다. 오늘도 순조로이 1패를 적립하고,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그녀는 그곳에서 빛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를 보내고 난 후, 아르페는 그녀의 말 때문에 새삼스레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 지역의 역사······?’ 아르페가 이 지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용사가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한 산 속 마을, 딱 그 정도였다. 전생에서는 이 지역과 얽힌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지금 당장 이렇게 수상한 던전이 만들어져 있는 곳에? 어쩌면 이곳은 단지 용사와 마왕의 시선이 모두 닿지 않았기에 감추어져 있던 것뿐이 아닐까?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용사가 묘지를 침범하기 싫어했던 덕분에, 용사가 유리 조각상처럼 금세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황급히 데려간 왕궁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뿐이고 사실 이곳에는 무엇인가 거대한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지? 이곳에 뭔가 특기할 사항이 있었나?’ 알 수 없다. 제아무리 아르페의 만물열람이 만능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까지 모두 꿰뚫어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아르페······?” “······아무것도 아냐.”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메테르의 걱정스러운 눈길에, 아르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털어내며 대꾸했다. 그런데 어째 메테르는 살짝 아쉬워했다. “엄청 진지하고 멋진 얼굴이었는데.” “흥, 그런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는 건 마왕군 사천왕 정도야.” 그래서 직격으로 먹혔다. 아르페는 내심 뿌듯함을 감추며 헛기침을 했다. 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건 그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확실하지 않다. 더욱이 이 던전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알게되는 시점에서 그들이 할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제와 물러나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으니까 말이다. ‘전생에서 용사가 왕궁에서 허비했던 5년에 비하면 아직 완전히 여유롭기도 하고.’ 물론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르페가 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레벨링을 주도했다면 그야 지금보다 많은 성장을 이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레코드 링크라는 희대의 마법을 통해 완성된 스켈레톤 집단과 싸우는 귀중한 경험은 얻지 못했을 터이고, 그 보상으로 얻은 아티팩트를 비롯한 재화도 물론 그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지금 아르페와 메테르의 스킬 수준은 아예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던전에서 첫 스타트를 끊지 않았더라면 버서크나 마나 링크 같은 스킬을 과연 그들이 각성할 수나 있었을까. 그러니 설령 이대로 5년을 던전 안에서 머무른다고 해도 그들의 성장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아, 물론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그곳을 찾아가기는 해야겠지만······.’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기에 아르페가 어드밴티지를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중대한 사항이 있다. 대마법의 스펠 북이라든가 고대 유적이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아르페는 던전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짬짬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있었다. 이 던전에서 세상을 활보해도 괜찮을 만큼 적당한 레벨을 확보하고 난 후에는 그 우선순위대로 그들의 가야 할 곳이 정해지리라. 그러니 망설이거나 뒤돌아볼 시간은 없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건 그대로 나아갈 뿐, 그것이 메테르의 의지이며 아르페의 의지였다. 비록 그 종착점은 서로 갈라져 있겠지만! 순조롭게 마왕을 물리치고 시골에서 소 키울 돈만 얻으면 그땐 메테르에게 볼 일은 없다! 제국의 여황제가 되든 종교를 세우고 여교황이 되든 지가 알아서 하라지! 그러니 그 때가 올 때까지는 아르페도 메테르도 건강히 잘 살아야만 한다. 지금 당장은 이 던전을 순조로이 통과해야 한다. “메테르, 지치지 않았어? 한 숨 자고 내려갈까?” “난 쌩쌩해, 아르페. 아르페야말로 괜찮아? 무릎베개 해줄까?” “나도 쌩쌩해.” “쳇.” 아르페는 못내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는 메테르와 함께 던전 35층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던전이 강렬하게 진동했다. 그와 함께 일행의 귓가로 눅눅하고 곰팡이 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시험은 실로 오랜 세월 유보되었다.] ‘어째 불길한 인트로인데!?’ 마치 앞으로 한 발 내딛기라도 하면, 여태껏 어둠속에 숨겨져 있던 전설적인 존재가 나타나 모험가들을 지옥에 떨어트리기라도 할 것만 같은 대사이지 않은가! “야, 잠깐만 되돌아가자.” [불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트로 대사를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아르페는 다급히 후퇴를 명했으나 그들이 계단에 발을 내딛은 순간 34층으로 돌아가는 길은 닫혀 있었다. [네놈들에게 허락된 것은 전진뿐이다.] “어디 제법 그럴싸한 말을 지껄이고······ 으?” 아르페가 혀를 차며 마나를 짜내던 그 순간, 던전 벽 곳곳에 걸려 있는 횃불이 그들에게 가까운 곳부터 차례대로 불을 밝혀 35층 내부의 정경을 드러냈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미친.” “아르페, 저것들······.” 그곳은 실로 거대한 광장이었는데, 그 안을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많은 숫자의 갑주기사가 채우고 있었다. 스켈레톤보다도, 구울보다도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하는 갑주기사들. 그 속이 언데드임은 자명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법칙의 파괴자여.] [발칙한 꼬맹이, 꿀 바른 혀를 놀려 이치를 어그러트리는 자.] [심판이 다가왔다.] 죽어서도 그 의지와 몸에 새긴 기술을 잊지 않고, 자아를 유지하며 움직이는 기사, 데스나이트. 누구 한 놈 빠짐없이 레벨 150의 강자였다. 그런 놈이 500. 만약 이곳에 있는 이들이 평범한 레벨 120대의 파티였더라면 승리의 가능성은 점쳐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중 선두에 선 자가 투구를 덜컥거리며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아르페를 겨누었다. [네놈은 우리 모두를 욕보였다. 우리의 의지에 침을 뱉고 우리의 힘을 얕보았으며 순수한 용사를 타락시켰다. 그릇된 의지가 강한 육신에 깃들어 사태를 최악으로 만들고 있구나. 운명을 농락하고, 서로 이어져선 안 될 것을 잇고, 끊어져선 안 될 것을 끊어놓았다.] 놈을 따라 모든 데스나이트가 검을 들어 아르페를 겨누었다. 이 와중에도 메테르에게는 딱히 적의를 보이지 않고 아르페만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이 실로 짜증났다. 자식들, 눈치 한 번 빠르기는! [그럼에도 우리는 네가 용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 여기 이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제대로 치러낸다면 우리는 뒤바뀐 현실을, 바뀌어갈 미래를,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믿고 잠들겠다.] “아니, 딱히 믿어줄 필요는 없어.”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점점 증폭되는 것만 같은데. 아르페는 언제든 자신의 장기 마법, 하이퍼 러빙을 발현할 수 있게 준비하며 메테르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전투를 준비하라는, 그리고 적을 조심하라는 그들만의 신호였다. “걱정하지 마, 아르페.”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조차 메테르의 표정은 태연했다. 지난 1년 사이 이목구비가 제법 성숙해져, 가뜩이나 천사 같았는데 이젠 대천사 정도로 아름다워진 미소로 아르페에게 안심을 주었다. “내가 아르페를 지켜. 그러니까 아르페는 나를 지켜줄 거지?” “······그래, 믿어둬.” 아르페의 등에 메여 있던 방패가 두둥실 떠올랐다. 6층에서 35층까지 내려오면서도 몇 번의 수선을 거쳤을 뿐 다른 무기나 방패에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얻어맞는 상대에게 미약한 저주를 중첩시켜 걸어주는 희대의 아티팩트. 이 방패와 함께하는 한 두려울 것은 없다! [전투가 시작되고 나면 또 네놈의 어떤 비겁한 수단에 우리가 놀아날지 모른다.] 그런데 어째 지금부터 그들이 상대해야 할 적의 정신무장 상태가 지나치리만치 굳건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 이 자리에 다소 억지로라도 그대들이 마주할 최후의 과제를 불러오겠다.] “어, 야 너희 잠깐······.” 뭔가를 깨달은 아르페가 차마 그들을 말리기 직전, 처음 입을 열어 말하며 아르페를 노려보고 있던 데스나이트 이외의 모든 데스나이트가 자신의 검을 들어 자신의 심장을 찌르며 마나를 폭주시켰다! 레코드 링크에 속한 동료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살은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압도적인 광경과 마주하며 아르페가 경악하며 외쳤다. “자살하면 죽어서도 벌 받는다, 네놈들!” [우린 이미 언데드다!] 499명의 데스나이트가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그들로부터 비롯된 압도적인 기운이, 마나가, 기록이 중앙의 데스나이트 단 한 명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두고 아르페와 메테르가 아연해져 있던 그때, [자, 용사들이여.] 모든 갑주기사의 힘을 하나로 모아 끔찍한 악몽으로 재탄생한 ‘그’가, 두 용사를 향해 롱 소드를 겨누며 선언했다. [시험을 시작하자.] ────────────────────────────────────────────────────────────────────────Chapter 5. 이걸 선배님이? - 2 “아르페, 버서크를 쓸게!” [한가롭게 잡담이나 할 시간이 있는가!] 놈이 곧장 쇄도해왔다. 지금 일행의 등 뒤로는 올라가는 길이 막힌 벽 뿐. 벽을 등지고 싸우는 것은 다수를 상대로 할 때나 좋은 방법이다. 따라서 메테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서크를 발현하고는 곧장 놈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칫, 상황에 휘둘리는 건 반갑지 않은데······.” 아르페는 투덜거리면서도 곧장 마나 링크를 발동해 메테르와 자신을 이었다. 그리곤 방패를 몸 주위로 회전시켜 자신을 보호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눈에 메테르와 데스나이트가 격돌하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네 검은 지닌 힘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분노에 물든 검으로는 용사가 될 수 없다!] “무엇이 나를 도와주든 이 검을 휘두르는 건 나 자신이야! 설령 그게 분노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나는 내 앞의 너를 이기고 아르페를 지킬 거야! 아르페한테는, 결코 손을 댈 수 없어!” [지금까지 네가 마주했던 적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500의 데스나이트의 경험과 힘을 하나로 모아 완성된 나를 상대로도 감히 그런 오만방자한 말을 지껄이고 있을 수 있을까!] 메테르와 데스나이트의 검이 강렬한 소음과 함께 부딪혔다. 당연하지만 손해를 보고 물러난 쪽은 메테르였다. 손목을 보호해주는 장비가 아니었더라면 크게 다쳤을 것이다. “큭······!” “씁, 500마리로 나뉘어 있을 때는 해볼 만 했는데, 비겁하게 자살로 레코드 링크의 힘을 발휘하다니······.” [우스운 말을 지껄이는군.] 가뜩이나 레벨에 비해 사기적인 신체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메테르다. 그런 그녀가 버서크까지 발현했으니 설령 상대가 레벨 150의 데스나이트라고 해도 여유롭게 가지고 노는 것이 가능하지만, 지금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적은 500의 데스나이트가 레코드 링크의 힘으로 하나 된 괴물. 당장 아르페의 만물열람으로 확인하기에도 그들의 객관적인 능력차는 절망적이었다. 그러니 메테르가 충격을 이겨내 곧장 태세를 정비하고 놈에게 달려드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의 차이는 확연하다. 용사여, 그래도 네년은 저 가증스러운 소년을 지키기 위해 나를 막아설 것인가?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절망과 죽음뿐이라 해도, 완전한 타인을 위해 끝내 자신을 희생할 셈인가?] “흡.” 메테르는 놈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녀의 바스타드 소드가 다듬어진 마력을 머금고 강하게 내질러져 놈의 롱 소드를 맞받아쳤다. [뭣!?]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엔 그녀가 물러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의 전력 차이를 감안한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메테르가 기세를 높여 놈을 밀어붙이며 용맹하게 외쳤다. “500명이 뿜어내던 기세는 어디에 갔어? 지금 너는 너무 볼품없는걸!” [크, 하아! 우연에 불과하다!] 갑주기사는 그것을 우연이라 치부했으나 아르페의 만물열람은 방금 일어난 일을 정확히 파악했다. 지금 메테르는 검술을 다루면서 동시에 격투술의 요령으로 자신의 신체를 강화하고, 더불어 가볍게 내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일격에 강타 스킬의 힘을 담아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로소 데스나이트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은 쉽지, 지금 녀석은 기본 전투 기술만 두 가지를 발현하면서 동시에 액티브 스킬까지 다루고 있다는 얘기잖아. 일격을 교환한 순간 자신한테 부족한 점을 파악하고 다른 걸로 때웠다고? 정말 녀석에 대해 어지간한 건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열세 살 나이에 벌써 이 정도 전투능력이라니······.’ 마나 소모는 둘째 치고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하게 강할 텐데 그것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저 모습에 전율하고, 동경하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메테르는 갑주기사와 멀쩡한 얼굴로 대치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아르페에게 확인했다. “아르페, 마나는······.” “충분해.” 사실은 충분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 기세로 마력을 소모한다면 제아무리 아르페라고 해도 마나가 바닥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메테르가 뒤돌아보지 않게 하기 위해 그렇게 호언장담했다. 그녀 몰래 마나 포션을 하나 까 마시는 것은 기본이었다. “좋아.” 언제 어느 때고 아르페를 믿어 의심치 않는 메테르는 그의 한 마디에 씩 웃으며 다시 강타 스킬로 적을 밀어붙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길 수 있어. 하아아압!” 다시 메테르와 데스나이트가 일격을 교환했다. 메테르의 강타 스킬이 검을 통해 완벽하게 발현되며 데스나이트의 롱 소드에서 아까 자신이 공격했던 부위를 노렸고, 그것만으로 메테르의 노림수를 파악한 놈은 기함하며 검을 비틀어 충격을 받는 지점을 달리했다. [제법 머리를 굴리는구나. 그 머릿속에 든 것은 애욕과 분노뿐인 줄 알았거늘.] “맞아, 그뿐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해!” [우습다!] 설령 힘과 기록은 모두 하나로 모였을지라도 놈의 장비만은 150레벨 수준 그대로. 본인보다 무기를 먼저 공략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전투방법 중 하나였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본인이 알아서 한다는 점이 실로 이하생략. [의도는 가상하다만 그것이 가능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분노가 깊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성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본능이 잠식하고 있다. 그것이 네 검을 무디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점차 강해진다. 너의 심장을 꿰뚫을 칼날이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절대로, 네 맘대로 할 수는 없어.” 메테르와 놈의 충돌이 점차로 심화되었다. 메테르의 실전에서 단련된 검술이 데스나이트의 빈틈만을 노려 내질러지고, 놈은 여태껏 그녀가 겪어보지 못한 노련함으로 그녀의 검을 모두 맞받아친다. 서로의 공격은 결코 방어구에 닿지 않고, 오직 무기의 소모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큭, 크하······!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내가 할 소리야!” 데스나이트는 순수하게 메테르의 실력이 경지에 이르러 있다고 믿는 눈치였지만 아르페만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답은 간단하다. 메테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버서크의 영향으로 검이 둔해지기는커녕, 지금 그녀의 감각은 생애 최고로 예리해져 있었다. [약해! 이 정도로는 불가능해!] “그래, 나는 약해. 하지만 더 강해질 거야······!” [말하는 것만으로 강해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수련자는 없었을 것이다!] 검과 검이 부딪히고, 메테르의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진 데스나이트의 방패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다. 직후 메테르의 발차기가 놈의 무릎을 가격해 자세를 아주 조금 비틀리게 만들고, 그것이 다음 그녀의 검격으로 이어진다. 여태까지는 보지 못한 테크닉이었다. [하!] “크윽!” 데스나이트의 말마따나 지금껏 그녀는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서 무기를 휘둘러오는 적과 상대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그녀는 기사의 모습을 한 적과 만나 고등한 무기술을 접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기술을 정리할 기회를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만 휘둘러왔던 검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알게 되고, 검의 위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깨닫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는 지금 그녀의 일일선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메테르] [레벨 - 124] [검술 Lv19] [격투술 Lv16] 실시간으로 그녀의 격투술과 검술 스킬의 레벨이 오르고 있었다. 단순 무식했던 검로에 재치와 변수가 섞이고, 걸음을 내딛거나 물러설 때의 힘이 달라진다. 처음엔 그녀가 막지 못했던 일격이 어느 순간인가부터 허무하게 막히고, 어떻게 날아들지 훤히 보였던 검이 자신도 모르는 순간 롱 소드에 적중한 그때에 데스나이트 역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네년······ 어떻게······!?] “더 보여줄 건 없어? ······그럼 이제 넌 날 이길 수 없어.” [어떻게······ 이게?] 정답을 아는 것과 그것을 몸에 새기는 것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하지만 메테르에게만은 그 두 가지가 같았다. 빌어먹게도, 실로 빌어먹게도 그녀는 그것이 가능한 터무니없는 천재였다. [실로 경이롭다. 던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미숙함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까지 만들었지? 저렇게 비열한 자와 함께하며 어찌 그 순수한 정신이 마모되지 않을 수 있었지?] “흐아아아압!” [핫!] 메테르는 대꾸하지 않고 강타를 발현했다. 물론 전투 와중에 강타 스킬 또한 성장했기에 그녀의 일격을 막아내기 위해 데스나이트는 이전보다 더 많은 힘을 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데스나이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네가 제아무리 빨리 성장한다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란 존재한다! 너는 결국 무릎 꿇고, 죽게 될 것이다. 우리 둘의 마나량이 얼마나 차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네년이 언제까지고 기운차게 검을 휘두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해보기 전까지는 몰라······ 나는 아르페를 지켜!” [지킬 가치가 없는 인간을 위해 내건 목숨이란 얼마나 가벼운가! 용사, 네년은 저 따위 남자가 아니라 다른 모든 인류를 위해 희생해야 하거늘!] “내가 지킬 대상은 내가 정해!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알 바 아냐, 나한테 제일 소중한 건 아르페야!” 누가 보면 최종결전을 앞두고 서로의 정의가 충돌하는 클라이막스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초보자 던전의 보스전에 불과했다. 그들의 치열한 전투를 뒤에서 보고 있는 아르페만이 어이가 없었다. “저 자식은 나를 거의 마왕 취급하는 것 같은데······.” 아르페는 불과 조금 전, 일행이 함께 35층에 들어선 순간부터 데스나이트들의 분노가 자신에게 꽂혀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메테르에게만 달라붙어있는 것도 아르페가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기 때문일 뿐. 아르페가 조금만 틈을 드러내도 곧장 자신의 목을 따려 들 것이다. 아르페가 끝장이 나면 둘 사이의 마나 링크도 해제될 테고, 그렇게 되면 메테르는 버서크를 유지할 수 없게 될 테니 전술적으로도 타당했다. ‘전투에는 한 발도 끼지 못하는 주제에 언제 죽어나갈지 몰라 대기 타야 하는 신세라니, 너무나 사천왕 최약체에 어울리는 취급이라 할 말이 없구나.’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지만 않았으면 조연이건 단역이건 괘념치 않았을 텐데, 용사가 조금이라도 지치는 순간 허무하게 목이 떨어져나갈 운명이라니 이건 비참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않겠는가. ‘그래도, 이제 나는 사천왕 최약체가 아니란 말이지.’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방패를 들었다. 아무래도 놈은 메테르의 재능에 경악한 나머지 잠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상황을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만든 것은 놈을 경악시킬 만큼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메테르가 아니라 여기서 썩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르페였다. 이대로 메테르에게 집중하는 척하면 아르페가 깜박 속아 넘어갈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르페는 방패만 돌리는 척하면서 이미 수백, 수천 개 마나의 실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소모된 마나 포션만 이미 다섯 병. 남은 마나 포션은 딱 한 병이었다. ‘레코드 링크는 아직까지 이 던전 전체를 덮고 있지.’ 정확히는 던전의 6층에서부터 35층까지를 모두 덮고 있다. 만약 아르페가 개수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던전 6층에서 모든 몬스터와 맞서 싸워, 죽었겠지. 어쨌든 아르페는 던전에 걸린 레코드 링크에 수작을 걸어 던전을 여러 층으로 나누어놓았고, 그 결과 새로이 던전의 6층에서부터 탄생한 몬스터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한 층씩 동료들과 연결된 채 언젠가 찾아올 도전자들을 기다리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아르페가 레코드 링크에 부린 수작질이 캔슬되는 바로 그 순간까지. 그런데, 그런데 만약. “여기서 내가 레코드 링크에 걸어둔 금제를 해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어?” 아르페는 일부러 그 말을 큰 목소리로 내뱉었다. 놈이 틈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뭐······?] “흡!” 그 작전은 실로 효과적이어서 놈은 순간적으로 휘두르던 검을 멈추었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메테르는 땅을 힘차게 딛고 도약해 놈의 검에 찌르기 공격을 펼쳤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놈의 검이 중간부터 뚝 부러졌다. [큭!] 데스나이트는 그제야 정신을 되찾고는 반걸음 뒤로 물러서며 태세를 정비했다. 방패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보조무장인 단검을 꺼내 쥐고, 놈은 메테르와 아르페에게 차례로 눈을 부라렸다. [검을 부러트린다고 어찌 될 것 같은가. 용사, 네가 예사롭지 않은 속도로 마나를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했다. 그리고 네놈, 썩은 눈의 소년. 고작 그 따위 말로 나를 동요시킬 생각이더냐? 그런, 우리에게만 좋은 일을 네가 할 리가 없다.] “아니, 실은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말이지.” 레코드 링크는 그 마법으로 묶인 모든 이들의 기록을 한 데로 모으는 스킬이다. 전투 경험, 스킬, 마력, 체력까지 모두 다. 그런데 레코드 링크에는 아주아주 커다란 약점이 하나 있다. 이 마법이 금주가 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 약점이야말로 그 중 가장 치명적이고 짜증나는 이유였다. “내가 어째서 이 방패를 지금까지 들고 온 것일까,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면의 분노를 끌어올리며 투쟁하는 메테르를, 그녀에게 당해 속절없이 물러서면서도 반격의 기회만을 노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아르페는 히죽 웃었다. “하! 메테르, 지각변동이랑 낙하 몬스터 주의해라!” 그리고는 수천 가닥의 마나의 실을 자신의 힘이 닿는 한도까지 뻗어내어, 불과 1년 전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놓은 매듭, 레코드 링크를 변화시킬 때 묶어놓았던 바로 그 매듭 모두를 해제했다! “꺄아아아아악!” [설마 정말로······!] 던전이 요동쳤다. 타의로 분열되었던 던전이 다시금 진체를 되찾는 순간! 잘게 나뉘었던 레코드 링크가 온전한 모습을 되찾아 던전 전부를 감쌌다. 던전의 6층에서부터 35층까지를 잇는 천장이 한순간에 녹아 없어지며, 1년의 시간 속에서 새로이 나타나 레코드 링크에 묶이게 된 스켈레톤이며 구울들이 마구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가히 지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네놈, 설마 아수라장을 만들어 내 틈을 만들어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소용없다, 지금 네놈이 한 짓을 바로 바보 같은 실수라고 부르는······.] “1년 전에는 체력과 마력이 딸려 불가능했던 일이야. 반 년 전에도 불가능했던 일이지!” 아르페는 방패를 허공으로 날렸다. 1년간 완숙해진 그의 방패 투척 테크닉은 그것을 아주 높이, 그리고 빠르게 날려 떨어져 내리는 좀비와 구울들을 사정없이 베어내 죽였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해. 이래봬도 제법 꼼꼼히 준비를 해뒀거든!” 레코드 링크가 다시 온전히 힘을 찾았기에, 죽어나간 몬스터들의 기록은 다른 모든 몬스터들과, 데스나이트에게 공유되었다. 그들의 힘, 두뇌, 체력, 마력, 기록, 그리고. [큭, 네놈······!?] “놈들에게 걸렸던 모든 저주까지도, 말이야.” 아르페는 죽어나간 모든 몬스터의 저주에 중첩당해, 단박에 움직임이 둔화되어 경악하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그것은 실로 마왕에 어울리는 사악한 미소였다. ────────────────────────────────────────────────────────────────────────Chapter 5. 이걸 선배님이? - 3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미 죽은 이들의 저주가 공유될 리가······.] “그래, 놈들은 더는 없어. 하지만 죽은 건 아니지. 단지 다른 이들의 등에! 가슴에! 하나가 되어 계속 살아갈 뿐이지. 그렇지?” 아르페는 단번에 수십 번의 둔화 저주가 중첩되는 바람에 녹슨 갑옷처럼 삐걱대며 움직이게 된 데스나이트를 약 올렸다. [크흑······!] 그리고 놈은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레코드 링크가 바로 그래서 위협적인 마법이지 않던가! 죽어야 할 이를 죽지 않게 만드는, 그들의 모든 힘을 타인에게 옮겨 살아가게 하는 힘!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제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중첩이 되는 저주 마법에 다수가 걸리게 되면 말이지······ 그놈들을 죽여 없애면.” 아르페는 힘차게 손을 휘저어 방패를 날렸다. 방패는 그의 뜻을 따라 허공을 쇄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좀비와 구울들을 갈아냈다. 누누이 말하건대 방패에 포함된 저주는 약하다. 약해빠졌다. 미약한 둔화 효과를 부여할 뿐이다. 하지만 중첩이 된다. 데스나이트는 이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언데드 한 마리 한 마리가 아르페의 방패에 갈려나갈 때마다 자신의 몸에 족쇄가 하나씩 채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크으으아아아아!] “당연히 남은 놈들이 졸라 괴로워지지. 레코드 링크가 금주가 된 가장 큰 이유야. 몰랐다면 학습하도록. 뭐, 이미 늦었지만.” 아르페는 자신을 공격하려다가도 메테르에게 허무하게 저지되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깔깔 웃었다. 이렇게 유쾌한 기분이 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렇게까지 무한하게 중첩이 되는 저주는 드물거든. 내가 이 허접한 방패를 왜 여태까지 처분하지 않고 아껴두고 있었을 것 같아?” [서어얼마아, 서어어어얼마아아아아 네에에에에노오오오오오오오옴으으으으으으은.] “그래.” 이 방패에 깃든 둔화 저주는 위력이 극히 미약한 대신 정신, 체력, 마나, 스킬 모두에 적용되는 광범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런 저주가 백 번이 넘게 중첩된 결과, 데스나이트는 사고 속도는 물론 의사 전달 속도까지 터무니없이 느려진 상태였다. “이 아르페 님은 처음부터 보스전을 대비해 레코드 링크의 봉합을 풀어낼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고!” 아르페는 그런 놈을 비웃으며 최대한 끝장나게 멋진 폼을 잡았다. 마왕군 사천왕이란 자신이 조금만 유리한 시점이 되어도 하늘 끝까지 오만해져 잘난 척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최대한 얄밉게, 최대한 재수 없게! “아르페 너무 멋져!” [크으으으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르페가 폼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방패만은 쉬지 않고 허공을 가르며 좀비들과 구울들의 몸을 토막 내고 있었다. 이 날 이때만을 위해 예리하게 갈아둔 방패의 날은 어지간해서는 닳지 않는다. 죽어나가는 몬스터의 숫자가 수십에서 수백이 되고 수천이 되었다. [그으으으, 으으으으으으으으으] 이 시점에서 데스나이트는 레벨 3의 고블린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 용사들을 시험하려던 언데드는 모든 기회를 잃었다. 제대로 발악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비장의 기술도 써보지 못하고, 폼 나는 마무리 대사도 쳐보지 못하고, 용사를 훈계해보지도 못하고, 아르페에게 벌을 주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에잇.” 한편 메테르는 현명하게 데스나이트를 피해 몸을 날렸다. 이 상황에서 자칫 그녀가 데스나이트를 죽이기라도 했다간 살아있는 모든 좀비와 구울들이 감당이 안 되게 단단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것은 그녀 생각에 제법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아냐, 메테르!” 그런데 메테르가 내심 뿌듯해하고 있던 그때 아르페가 그녀에게 지시했다. “쟤가 까딱 자살이라도 하면 보상 졸라 구려져! 우리가 받아야 할 건 레벨만 딥따 높은 좀비나 구울의 드롭템이 아니라, 레코드 링크의 기운을 하나로 모아 탄생한 데스나이트의 드롭템이라고! 놈이 자살 못 하게 막아!” “아, 알겠어! 아르페는 역시 똑똑해!” 대체 세상의 어느 누가 이 악독한 자들을 보고 용사라고 칭하겠는가! 마왕이 와서 보고 스승으로 모실 만큼 훌륭하게 썩어빠진 짓거리였다! 데스나이트는 메테르가 몬스터의 홍수를 뚫고 다가와 자신의 무장을 날려버리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막는 것을 보며 분통이 터졌지만, 아르페가 지나치게 활약해 몬스터들에게 저주를 걸고 죽여댄 탓에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비이이이이이이이이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 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옹] “아, 이 정도로 중첩됐으면 이제 게임 끝났겠지. 메테르, 이제 너도 애들 죽이는 거 도와줘.” “응!” 1년 동안 던전을 내려왔기에 아주 잘 안다. 레코드 링크에 묶인 몬스터의 숫자는 정말 토가 나오도록 많았다. 그나마 아르페와 메테르가 던전을 내려오면서 한 번 싹쓸이를 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들에게 승산은 없었을 것이다. “에잇, 에잇.” [우우우우우우우오오오오오오오오옹.] [기이이이이이이이이기이이이이이이이.] 이 많은 존재가 레코드 링크에 묶인 것이 지금처럼 굼벵이보다 느린 속도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다가 죽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아르페와 메테르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지만! 데스나이트가 자살을 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행동불능 상태로 만들어놓은 메테르는 자신의 검은 넣어두고 대신 뼈 몽둥이를 들어 사방의 몬스터들을 마구 두들겨 죽였다. 아르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패를 조종했다. 이놈들을 다 죽일 때쯤에는 방패도 도저히 써먹지 못할 물건이 되어 있겠지만 애초에 이 방패의 용도는 이 던전까지, 그 이후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아르페는 정말 천재야.” “그래, 나도 좀 내가 천재인 것 같아. 메테르도 상당히 천재 같은데.” “고마워! 나도 내가 싸움은 좀 잘하는 것 같아!” 두 명의 용사는 서로를 칭찬해주며 사이좋게 던전을 청소했다. 데스나이트도 굼벵이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을 정도인데 날벼락을 맞아 떨어져 내린 좀비와 구울들이라고 무어 다르겠는가! 운이 좋은 놈은 던전 바닥에 떨어진 순간 그대로 죽었고, 운이 나쁜 놈들은 가뜩이나 언데드인 것도 서러운데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그 자리에서 눈이나 껌벅이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이 던전을 만든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최소한 이런 광경을 기대하며 던전을 만들고 레코드 링크를 걸어놓은 것은 아닐 텐데! 이 던전은 마왕 후보생들을 육성하는 장소가 아니라 용사들을 육성하는 장소였을 텐데! 용사가 모두 호구인 줄만 알았던 제작자의 잘못이었다. ‘아, 아아아아아아아······.’ 양팔을 잃고 완벽하게 무장을 해제당해 바닥을 굴러다니며, 데스나이트는 두 사악한 용사가 좀비와 구울들을 청소하며 돌아다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비록 한 놈이 죽을 때마다 몸에 미약하게 힘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대개 저주에 걸린 놈이었기 때문에 강화되기가 무섭게 그 이상의 둔화가 작용되었다. 움직일 힘을 잃은 것은 예전이고 이제는 제대로 사고할 수조차 없었다. 데스나이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르페의 무지막지한 역량을 읽어내지 못한 자신의 무지를 비웃으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던전에 탄식하며, 정말 저 자들을 믿고 맡겨야 하는가 심각한 고뇌를 품은 끝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저항할 힘도 없는 몬스터들을 다 죽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었다. 중반부부터 워낙 많은 놈들의 기록이 겹쳐, 그 시점까지 생존한 언데드 모두가 쓸데없이 내구도만 오지게 높아진 탓에 제법 많은 시간을 잡아먹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위기라고는 너무나 졸려 몬스터들을 앞에 두고 잠깐의 쪽잠을 청해야 했던 순간 정도였다. “정말 다 죽인 거 맞아?” “응,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였어. 저 위에 걸려 있는 애도 이젠 없어.” “그래, 사실 나도 확인하긴 했어.” 이 던전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넓고 깊은 던전이었다. 아르페의 만물열람으로 몬스터들의 생존반응을 확인하는 데에만 족히 30분 정도는 걸릴 만큼.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났다. 이제 이 던전에 남은 몬스터라곤 오직 한 마리,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데스나이트뿐이었다. “흐음.” 아르페는 놈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하여 놈을 두들겨 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평범한 시체인 모양이다. “아르페, 이건 아르페가 마무리를 해야 해. 지금 내 레벨이 아르페에 비해 너무 높으니까 이걸로 균형을 맞춰야 해.” “네가 그 말 할 줄 알았다.” 아르페는 방패를 들었다. 무수한 몬스터들을 마무리하는 동안 뭉개질 대로 뭉개져 이젠 방패라기보단 그냥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방패. 데스나이트는 이런 무기도 방어구도 아닌 덩어리에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만족해줄까, 물론 알 바 아니었다. “큭. 에잇. 아이씨, 더럽게 단단하네.” 아르페는 덩어리를 들어 열심히 데스나이트를 두들겼다. 그러나 모든 기록이 하나로 모여 완전체가 된 데스나이트는 그 정도 공격으로는 죽지 않았다. 아르페는 별 수 없이 덩어리에 자신의 마나를 있는 힘껏 담았다. “이걸로도 죽지 않으면 네놈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지!” 데스나이트의 몸통 밑에 덩어리를 놓고, 아르페는 곧장 하이퍼 러빙을 발동했다. 터무니없는 기세로 데스나이트를 문질거리는 덩어리! 덩어리가 닳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데스나이트의 몸통도 아주 조금씩 갈려나갔다. 이건 대체 무슨 신종 고문인가 싶을 만큼 잔혹한 광경이었다! [그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데스나이트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놈의 반응이 너무나 느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아르페는 놈의 고통을 빨리 끝내주기 위해 마나를 더더욱 끌어올렸다. 문질거림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와 함께 나타나는 변화가 있었다. “아, 아르페. 저 덩어리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어!” “마나 반응이야. 저 덩어리는 원래 아티팩트였잖아? 그 안에 깃들어있던 마나가, 내가 주입한 마나에 자극을 받아서 폭발에 이르게 되는 거지. 단순한 돌멩이를 마나로 폭발시키는 것보다 아티팩트를 폭발시키는 쪽이 훨씬 반응이 격렬하니까 참고하도록.” “그러면 하이퍼 러빙은 왜 굳이 발현한 거야?” “저놈 놀려먹으려고······ 피해!” 바로 그 순간 덩어리가 폭발했다! 데스나이트는 그 어마어마한 충격량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고, 그 결과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는 신세가 되었다. 차라리 그것이 놈에게는 더욱 행복한 일이었으리라. “크으으으으으으으.” “큽.” 당연하지만 놈이 완벽하게 끝장난 순간 아르페와 메테르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1차적으로 완성된 데스나이트만 해도 어마어마했을 텐데 굳이 레코드 링크를 원상 복구시켜 모든 몬스터의 기록을 하나로 모았으니 오죽했겠는가! “아르페에, 머리 깨질 것 같아아아아아.” “걱정 마, 나도 마찬가지······ 크힉.” 아르페는 전생에서조차 이 정도로 연속적인 레벨 업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육신과 그 안에 들어차는 마나가 진화를 거듭하며 정신에 압도적인 부담감을 주었다. “끄으응, 아르페에.” 아르페가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그때 메테르가 그를 불렀다. 아르페는 고개만 들어 그녀에게 반응하려다가 어째서 그녀가 자신을 불렀는지 깨달았다. “와우, 미친.” “끄으으으으.” 레코드 링크에 속해 있던 모든 몬스터를 죽인 것이 계기가 된 것일까, 던전이 다시금 변화하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다시 몬스터가 나오거나 하면 엄청나게 짜증이 났겠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던전은 빠르게 그 규모를 줄여나갔고, 광장 또한 그 넓이를 좁히며 천천히 그 재질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건, 마치······ 아.” 결정타는 광장 중앙에 솟아나는 분수대였다. 심신이 피로해진 메테르는 맑은 물을 보자마자 환호하며 달려 나가려다 멈칫, 하며 아르페를 돌아보았다. “아르페, 저것도 독극물이지, 그렇지!” 스스로 생각해도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에 메테르가 에헴,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그녀와 마주하는 아르페는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니, 그냥 물이야.” ────────────────────────────────────────────────────────────────────────Chapter 5. 이걸 선배님이? - 4 “이번에도 역시 며칠 만에 끝내셨네요, 손님. 애니웨어 상회에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어머?” 활기찬 인사와 함께 등장한 미케나는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던전의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도,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광장, 위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던전의 천장, 그리고······. 광장 중앙 분수대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두 꼬맹이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혹시 지력 저하의 저주에라도 걸리셨나요?” 그녀는 너희 혹시 돌아버린 것 아니니, 라는 질문을 최대한 순화하여 표현했다. 물론 아르페에게는 씨알만큼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경멸하는 눈으로 미케나를 훑었다. “뭐, 뭔가요 손님.” “응? 꺄아아아악!” “비누, 그리고 깨끗한 속옷. 나랑 메테르 것.” 그래도 메테르는 미케나가 나타나자 꺅, 소리를 내며 몸을 수그렸지만 아르페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은화를 던지며 미케나에게 오더를 넣었다. 그야 던전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1년을 굴렀으니 서로의 나신에 익숙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설마 자신 앞에서까지 저렇게 당당하다니! 미케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정말 무례한 손님이시군요. 1실버로는 안 된다구요!” “그래, 2실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손님.” 아르페는 하이퍼 러빙을 아주 약하게 발현해 소프트 러빙 수준의 문질거림을 구현하고는, 그것을 비누에 적용해 자동으로 자신의 몸을 문지르게 만들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메테르가 자신도 그것을 해달라고 졸랐다. “씁, 어쩔 수 없지. 자.” “아히, 이거 간지러워. 히, 히히힉.” “정말 그 마법 하나로 못 하는 게 없으시군요······.” 그대로 돌아가 버릴까 생각한 미케나였으나 그러기에는 저 한편에 놓인 데스나이트의 너덜너덜한 사체가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비록 소멸되기는 했으나 그 기록과 마나의 잔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놈은 이 던전의 어떤 재화보다도 강렬한 대박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더욱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없다는 것은 이것이 던전의 끝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저 놈이 던전의 보스, 던전의 총체! “파실 거죠?” “기다려, 우리가 깨끗해질 때까지.” “손님들이 깨끗해지는 것보다 저 분수대가 오물이 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사실 그들은 지난 1년간 제대로 몸을 씻지 못했었다. 레벨이 오르면 그나마 몸의 노폐물이 사라지기에 그것만 믿고 버텨온 세월이었다. 아르페와 메테르가 몸을 구석구석 닦고 새 인간으로 태어나기까지 딱 두 시간이 걸렸다. 비누는 그들의 천 장비 세척까지 모두 마치고 장렬히 거품으로 화했다. 아르페는 미케나가 건넨 속옷을 입고 로브를 적당히 마나로 말려 걸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 이제야 좀 사람이 된 것 같네.” “그렇게 깨끗이 씻고 나니 제법······ 아니, 상당히 잘생기셨네요. 조금만 더 자라면 여자 깨나 울리시겠어요?” 아르페는 코웃음으로 미케나의 말을 흘리고는 메테르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 역시 옷을 모두 갖춰 입고는 그르릉 소리를 내며 미케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미케나가 아르페를 타겟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언제나의 바보였다. 아르페는 한숨을 쉬곤 녀석의 머리에 가볍게 알밤을 먹였다. “루팅이나 하자.” “응!” 아르페와 메테르, 미케나의 시선이 데스나이트의 사체로 쏠렸다. 아르페는 망설이지 않고 마나를 쏘아내 그것을 두드렸다. 밝은 빛이 솟구치고, 이내 그것이 잦아들며 그 자리에 세 개의 아티팩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하나를 본 메테르가 눈을 밝게 빛내며 외쳤다. “롱 소드다!” “네 거 해.” “얏호!” 롱 소드는 데스나이트가 다루던 그것과 닮은 모습이었으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견고했으며 날카로웠다. 순간적으로 마나를 증폭해 일점으로 쏘아내는 능력까지 있어,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었던 메테르의 약점까지 보강해주는 터무니없이 훌륭한 아티팩트였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것의 착용제한 레벨이 150으로 제법 높다는 점인데······. [메테르] [레벨 ? 154] “훌륭하다, 메테르. 네 사기스러움에 이제 나도 더는 할 말이 없다.” “이히히, 그렇게 칭찬하면 부끄러워.” “칭찬 아냐.” 아르페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스스로의 레벨을 확인했다. 레벨 145. 그야 자신도 기적에 가까운 수치의 레벨 상승을 이루어내기는 했지만 150레벨을 넘겨버린 메테르와 비교하자면 역시 손색이 조금 있었다. 처음부터 생각하기는 했지만 역시 이 용사가 있는 한 마왕에게 세계정복의 가능성 따위는 반 푼어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오히려 전생에서는 이렇게 빛나는 재능의 용사를 왕궁에서 잘도 5년 동안 붙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님, 그 투구······.” “아줌마가 그거 탐낼 줄 알았지.” 한편 미케나가 눈독을 들인 것은 바로 데스나이트가 쓰고 있었던 투구와 아주 흡사하게 생긴 투구. 무척 단단해 투구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기에 무척 적합한 아티팩트이기는 했다. 그래, 툭 까놓고 말해 롱 소드보다 훨씬 더 뛰어난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원혼어린 데스나이트 헬름] [착용자에게 고위의 데스나이트가 되는 저주를 건다. 헬름을 착용하는 순간의 모든 감정과 사고를 증폭시킨다. 착용자의 마나와 스킬, 스펠을 마 속성으로 반전, 증폭시킨다. 죽음의 기운을 빨아먹고 성장한다.] 이거 완전히 저주템이다. 그것도 까딱하다간 도시 하나 말아먹을 만큼 터무니없는 저주템. 아르페는 질린 얼굴로 미케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줌마, 이런 거 정말 사고 싶어?” “저희 애니웨어 상회는 사람에게는 죄가 있어도 물건에는 죄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답니다.” 미케나의 눈은 헬름에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주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딘가에서 반드시 수요가 발생할 아이템이라고 믿고 있는 완벽한 상인의 눈이다. 그야 물론 아르페 역시 좋은 물건, 재화에 대한 탐욕이 상인을 상인답게 만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전생에서 만물열람으로 보아온 세상은 언제나 보물 때문에 피로 물들곤 했었다. 자신이 지닌 능력 탓에 언제나 피바다의 중심에 서 있어야 했던 아르페에게, 그렇기에 보물은 사실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어.” “걱정 마시길, 손님. 이래봬도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아왔답니다.” 그래, 꼬맹이 말이라 귀에 안 들어온다 이거지. 이런 부류는 스스로 큰일을 겪어보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하며 헬름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미케나는 반갑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 “780골드.” “꽥!” “어차피 1천 골드 이상 받고 팔 거잖아. 엄살 부리지 말고 돈 내놔.” “대체 그렇게 어린 나이에, 1년 동안 이 던전에 박혀 있었던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시세에 빠삭하신 거죠!?” 끝내 헬름을 받아 쥔 미케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에게 금화 주머니를 건네었다. “대형 아공간 마법이 걸린 주머니예요. 주머니 가격으로 50골드 쳐서 730골드 담았어요. 780골드 전부 짊어지고 가실 생각이 아니라면 이걸로 봐주세욧!” “좋아, 봐줬다.” 평범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 하나에 50골드라니! 메테르의 눈은 핑핑 돌아가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별 놀란 기색도 없이 그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사실 아공간 주머니는 지금 받은 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안에도 400골드 정도가 들어 있었으니 이제 일행은 1200골드에 육박하는 돈을 지니게 된 셈이다. “자, 그러면 남은 건 하나네요. 그거, 달걀인가요?” “아줌마는 이게 달걀로 보여?” 롱 소드도 헬름도 데스나이트에게 어울리는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는 그들 모두가 납득할 수 없는 전리품이었다. 새카맣고 작은 타원형의 알. 만져보면 그 안에서 박동하는 생명이 느껴진다. 메테르는 군침을 흘리며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맛있을까, 아르페?” “이걸 데스나이트가 낳았다고 생각해 봐. 먹고 싶어?” “나 배고파!” 먹고 싶다는 뜻이렷다?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메테르의 이마에 알밤을 먹이고는 알을 챙겼다. “레코드 링크의 조화로 탄생한 카오스 에그야. 죽음이 생명을 낳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다만······ 레코드 링크가 시행된 역사 자체가 드물어서 뭐라 판단을 내릴 수가 없네.” 이 안에서 데스나이트가 튀어나오면 그야 웃기겠지. 하지만 아마 아닐 것 같았다. 만물열람으로도 철저히 확인해보았지만 카오스 에그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는 무엇이 태어날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이 안에서 뭐가 태어날까? 나와 아르페의 사랑의······.” “네가 뭘 생각하든 그것만은 아냐.” “힝, 아르페가 나 괴롭혀.” 어떻게 해야 부화할지도 알 수 없지만, 아르페는 그것을 적당히 로브 속주머니 안에 넣어두었다. 이러다 깨지면 운명인 셈치고 스크램블 에그라도 해먹는 수밖에! 자, 데스나이트가 남긴 물건은 모두 수거했다. 레벨도 올랐고 스킬도 성장했으며 깨끗하게 몸까지 단장했다. 아르페는 개운한 기분으로 미케나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했다. “아줌마, 이제 가 봐. 사야될 거 다 샀잖아.” “가긴요, 아직 제일 중요한 던전의 보상이 남았잖아요.” 미케나는 여전히 광장 중앙 분수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페와 메테르가 씻는 데에 상당량의 물이 소모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분수대는 어디서 끌어오는 것인지 모를 맑은 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미케나는 그 안에 비밀이 있다고 굳게 믿는 것처럼 보였다. “저건 안 줘.” “전 어디까지나 정당한 가격을 치르고 구매하고 싶······.” “아줌마.” 아르페가 생긋 웃었다. 미케나 스스로 말했다시피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매력적인 미소였다. “다음에 또 보자.” “헷······.”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의 미소에 홀리고 말았지만, 다음 순간 아르페의 입에서 흘러나온 냉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제정신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녀는 볼을 두툼하게 부풀리곤 괜히 죄도 없는 짐수레를 덜커덩거리며 외쳤다. “하, 정말 이길 수가 없네. 그래요, 퇴장해드리면 되죠? 앞으로도 애니웨어를 잘 부탁드립니다! 쳇!” 미케나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메테르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빤히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난 역시 저 아줌마가 싫어.” “저 아줌마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저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일뿐이야. 그래도 아줌마 덕분에 던전 안에서 보급을 원활히 받을 수 있었잖아. 물건 가격도 그만하면 잘 받았고.” 사실 무척 후하게 받은 편이었지만 아르페는 굳이 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천천히 분수대로 다가갔다. 그래, 미케나의 감은 정확했다. 던전의 남은 가능성은 모두 저 분수대에 집약되어 있었다. 아마 저것이야말로 주어진 시련을 모두 극복했을 때 용사들에게 주어져야 할 진정한 보상이리라. 비록 썩어빠진 방법으로 시련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통과는 통과. 이젠 1년의 결실을 탐할 차례였다. “분수대는 페이크에 불과해. 출구도 이 아래에 있고, 보상도 이 아래에 있어.” “아래에 있다구? 이 아래에는 바닥뿐인데?” “저 물이 어디서 솟아나온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대꾸하고는 메테르에게 지시했다. “분수대, 부수자.” “응!” 뭔가를 파괴하는 데에만은 자신이 있는 메테르가 씩씩하게 대꾸하고는 새로이 얻은 롱 소드를 들어 올려 자신의 마나를 집중시켰다. 이젠 그녀의 레벨도 150이 넘었기에, 굳이 아르페와 마나를 링크시키지 않아도 충분한 양의 마나를 다룰 수 있었다. “와, 검첨에 마나가 집중되는 게 느껴져.” “준비하시고······ 쏘세요!” “에잇!” 비록 롱 소드는 검은 색이었지만 그곳에 모여드는 마나는 메테르의 머리색을 닮은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검첨으로 쏘아져 나온 일직선의 에너지가 그대로 분수대를 강타했고, 그것은 실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며 그 아래로 감추어져 있던 복도를 드러냈다. 더 이상은 밑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곳에는 충분히 사람이 머물 수 있을 만한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맑은 지하수가 그 공간 전체를 감싸고 휘돌았으며, 깨끗하게 정련된 돌바닥이 복도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제단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아르페, 저게 뭐야?” 메테르는 대리석으로 빚어놓은 듯한 제단 위에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권은 붉은 가죽 장정이었고, 다른 한 권은 푸른 가죽 장정이었다. 물론 아르페는 그것을 보는 순간 정체를 파악했다. “스킬 북이야······ 하.” 그것도 그냥 스킬 북이 아니다. 오직 ‘용사’만이 익힐 수 있는 유니크 스킬 북, 유니크 스펠 북이었다. 그 의미를 깨닫고 아르페는 전율하고 말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이곳은 정말로 용사를 위해 만들어진 던전이었단 말인가. 우연이 필연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Chapter 5. 이걸 선배님이? - 5예로부터 붉은색은 전사의 상징이었고, 파란색은 마도사의 상징이었다. 물론 마도사가 전사보다 압도적으로 그 숫자가 적었기에 그 둘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용사는 본래 그 둘을 모두 품는 존재야. 전사로서의 힘도, 마도사로서의 힘도 모두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마법 못 써!”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새삼스럽게 말해줄 필요 없어.” 그동안 간간히 짬을 내어 메테르에게 마법의 기초 이론을 가르쳐 보기도 하려던 아르페였으나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녀석은 바보다. 단언컨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바보다. 검 한 자루만 쥐면 자신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몬스터도 우습게 베어버리는 천재이지만 동시에 간단한 수학 계산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바보였다. 하늘은 공평하다는 사실을 그녀를 볼 때만큼 절감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마법은 내가 배우면 돼.” “사이좋게 하나씩 가지면 되겠네!” 메테르가 순수하게 웃었다. 글쎄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래도 그러네. 아르페는 푹푹 한숨을 쉬며 그녀와 함께 분수대 밑의 광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들이 바닥에 착지한 순간, 기껏 메테르가 뚫어놓았던 천장이 스르륵 덮여버렸다. “이것 봐라······?” 어째 감이 이상한데. 아르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훑었다. 다행히도 공간은 넓었다. 수로를 형성하고 꾸준히 흐르는 물은 무척 맑아 그냥 먹어도 괜찮은 수준이고, 산소도 무리 없이 통했다. 단지 출구가 없다. “즉 던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거지······?” 그러고 보면 분명 레코드 링크의 마지막 주자인 데스나이트를 죽여 경험치를 취했음에도 아직 레코드 링크 마법의 기운이 이곳에 남아 흐르고 있다. 더 이상 몬스터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과제가 남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스킬을 익히는 행위 자체가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아르페, 여기 뭔가 쓰여 있어.” 그때 아르페보다 먼저 제단으로 향한 메테르가 그를 손짓해 불렀다. “허, 진짜네.” 제단으로 향한 아르페는 정말로 제단에 딱딱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고대제국어. 아마 이 세상의 누구도 쉽게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만물열람의 소유자인 아르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시련을 이겨낸 것을 축하한다, 차기 용사여. 내가 누군지는 이곳을 찾은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테니 말하지 않겠다.’······ 이거 도입부부터 글러먹었는데?” “정말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나 봐.” “유명세는 세월에 풍화된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기도 했겠지.” 아르페는 이 오만한 문장에서 인간 특유의 명예욕을 읽어내고는 입 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메테르는 그의 질척거리는 속마음도 모르고 역시 아르페는 똑똑하다며 웃었다. 물론 이 사람의 이름이야 알 바가 아니지만, 그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간다. 이곳에 당당하게 차기 용사라는 말을 적어놓고 있으니 아무래도 전대나 전전대 용사쯤 되는 자였겠지. 아르페는 전대 용사는커녕 전대 마왕도 모른다. 다만 이 글귀가 고대제국어로 쓰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던전이 만들어진 지 수백 년은 지난 곳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이 땅에서 용사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 무덤을 찾아 오리라고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가 선배를 존중하는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용사의 비전을 전해줄 수는 없는 노릇, 레코드 링크를 펼쳐 그대를 시험한 나를 용서하라.’” “이 분도 원래 이쪽 지역에서 태어나셨었나 봐.” “그리고 훌륭하게 잊혔지.” 뭐야, 바깥에서 본 그 무덤이 전대 용사의 무덤이었어? 전생에서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는데! 이쯤 되면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완벽하게 정보를 은닉할 수 있었던 것인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래, 생각해보니 납득이 갔다. 아무래도 메테르는 이 전대 용사의 핏줄일 가능성이 높았다. 원래 용사에게 가문의 비밀 한두 가지는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으니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다. “‘이곳에까지 무사히 도달한 차기 용사라면 얼마든지 과업을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기 이곳에 후배를 위한 선물을 놓아둔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그대가 행하고 겪은 모든 과업이 레코드 링크로 묶여 스킬과 스펠로 화할 것이니, 그것을 확실히 익힌 후에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르페에겐 그 점이 의외였다. 자기 자랑을 한 1만자 정도는 적어놓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깔끔하게 물러나는 선배가 아닌가. “그러면, 어디 보자······.” 글귀를 다 읽은 아르페의 시선이 다시금 제단 위의 두 책으로 향했다. 한 권은 스킬 북, 한 권은 스펠 북. 어쩐지 만물열람의 힘으로도 내용이 잘 안 읽힌다 했더니 아직 소멸하지 않은 레코드 링크의 흐름이 이 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하니 마법의 영향을 받아 완성되는 스킬이라니 마왕군 사천왕으로 평생을 살았던 아르페조차 처음 보는 일이었다. 하긴 전생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곳이니 그것도 당연하려나. 부작용만 가득하다고 믿었던 레코드 링크에 이런 순기능이 있었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레코드 링크가 마냥 우리를 괴롭히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었구나.’ 아르페는 깨달음을 얻었다. 물론 메테르와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선배를 향한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정말 후배위하는 선배님이셨나 봐!” “나도 그렇게 생각해, 메테르. 하지만 앞으로 띄어쓰기에는 신경을 쓰자꾸나.” “응?” 선배 용사의 의도에 대해서만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러나 강에 놓인 돌다리도 부수고 강철다리를 놓아 건너는 성격인 아르페는 우선 만물열람으로 주위를 세밀하게 살폈다. “흐으음······.” “아르페, 왜 그래?” “아니, 그냥 조금 찜찜할 뿐이야. 이상은 없어.” 추가적인 함정은 확실히 없었다. 단지 던전의 마나가 모두 제단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 아르페를 살짝 불안하게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뭔가를 더 준비하거나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젠 나아갈 때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든 저지를 때다. “아르페, 나는 준비됐어.” “나도 마찬가지야. ······좋아, 지금.” “응!” 아르페는 메테르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한 발짝 앞으로 내딛어 각각 스킬 북과 스펠 북에 손을 뻗었다. 순간 그들의 몸이 통째로 빨려들 것만 같은 압력이 그들의 손을 끌어당겨 책에 철썩 달라붙게 만들었다. “큭!?” “참아, 여기서 삐끗하면 레코드 링크가 폭주할 테니까!” 던전 내의 모든 마나가 제단 위에 놓인 두 책으로 나뉘어 흘러들고,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쌓아온 모든 기록을 두 갈래로 나누어 각각의 책에 담은 레코드 링크 마법이 비로소 그 임무를 모두 마치고 소멸되었다. “흐······ 하.” “으아아아, 힘들어. 이거 어려워어.” “참아!” 여태껏 아르페와 메테르가 행해온 모든 일들이 압도적인 마나의 영향을 받아 하나의 스킬로, 스펠로 형상화되고, 각각의 주인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르페는 자신의 뇌리에 정립되는 새로운 마도에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이건······.’ 그야 자신이 이 던전에 들어오고부터 마나를 부려 한 짓들이 마법이라기보다는 마술에 가까운 짓이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마나와 마법의 근본을 부정하는 괴상한 마법이 탄생할 줄이야! 제대로 익히면 왠지 엄청날 것 같기는 한데 이거, 정말이지 마도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마법이잖아! 이걸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씁, 그래도 용사 전용 유니크 매직이니 일단 익혀보는 수밖에······ 으아아아아아!” 대형사건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던전을 유지하던 모든 마나가 제단의 책에 나뉘어 흘러들어갔으니 던전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 당연히 무너질 수밖에! 아르페가 우려하던 것도 다름 아닌 이 사태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빌어먹을! 이 죽여주는 선배 같으니!” 지금은 그의 전신에 새겨지고 있는 신개념의 마도회로에 기뻐할 틈도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스킬 습득을 끝내고 이 던전에서 탈출해야 했다! 아르페는 이를 갈며 메테르 쪽을 돌아보았다. 모든 전투 기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는 메테르라면 아마 자신이 스펠을 익히는 것보다도 빠르게 스킬을······. “꾸직.”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메테르가 더할 나위 없이 무력한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설마 했던 이 시점에서의 스킬 습득 실패라니!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런 개그는 나중에 한가한 때에 해줬으면 했는데! 아르페는 이를 갈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푸른 가죽 장정의 책은 이미 그 역할을 다해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고, 이제 그는 언제든지 마법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마나 스트링!” 그가 뻗어낸 다섯 손가락에서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마나의 실이 튀어나왔다. 여태까지 이 던전에서 아르페는 배운 마법이 적어 대신 마나를 직접 다루는 식으로 사태를 해결해오곤 했었는데, 그 탓에 기어이 유니크 매직조차 이 형태로 고정되고 만 것이다! “큽, 다 부숴버려!” 물론 단지 그것뿐이라면 아르페도 굉장히 허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펼치고 있는 마법 마나 스트링은 엄연한 마법, 마나에서 비롯되어 마법으로 화한 기적이다. 이전에 그가 만들어내어 다루곤 했던 실과는 달리 마나 스트링은 마력에 대한 간섭력도, 자연에 작용하는 물리력도 상당히 높았다. 그렇기에, 단지 마나 스트링을 다섯 줄기 뻗어내는 것만으로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던전 천장을 부수어 갈아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아르페 대단해! 너무 강해!” “감탄할 시간이 있으면 스킬 먼저 익혀!” “하지만 이거 너무 어려우······ 꾸직.” “야 임마아아아아!” 아무리 아르페의 마나가 방대하다 한들 무너지는 던전을 모두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아르페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열심히 마나 스트링을 조종했다. 메테르 역시 필사적으로 스킬 북을 붙들었다. “메테르, 서둘러!” “으으으으, 꾸지익······!” 둔화 저주의 방패를 조종할 때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검은 마나의 끈이 무려 다섯 개! 길게 늘어난 다섯 개의 검은 마나 줄기가 격렬한 회전을 일으키며 던전을 통째로 갈아버리고 있는 모습은, 여태까지 하이퍼 러빙을 발현해 안간힘을 쓰며 사투를 벌이던 아르페는 대체 어디에 간 것일까 의문이 들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마나 소모가 빠르다고! 메테르, 늦기 전에 성공하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 해줄 테니까 제발! 좀 서둘러 봐!” “뭐든지!? 아, 됐다! 익혔다! 만세!” “너 되게 욕망에 솔직하구나!” 붉은 가죽 장정의 책이 드디어 소멸했다! 메테르의 총기 넘치는 눈을 보니 확실히 스킬도 익힌 모양. 대체 무슨 스킬이었기에 무술의 천재인 메테르가 이렇게까지 헤매야 했던 것인지 의아하기만 한 아르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묻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르페, 제단이!” “나도 알아, 당장 내 손 붙잡아!” 필시 두 개의 책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트리거가 되었으리라. 제단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가라앉아 그 자리에 통로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 공간을 휘돌고 있던 물의 흐름이 그곳으로 집중되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아르페는 다급히 메테르의 손을 붙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여전히 마나 스트링을 뿜어내 그들을 덮쳐오는 자연지물을 부수며 그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물이 향하는 곳, 그 바깥에 활로가 있으리라! “아르페, 이 통로도 완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야 당연하지, 마나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 선배 자식은 마법은 잘 다뤘는지 몰라도 정작 마나를 보존하고 배분하는 건 영 꽝이야. 이 망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통로 저 너머에 희미한 빛이 보인다는 것이다. 아르페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첨벙거리는 물에 온갖 욕을 토해내면서도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쯤 간신히 스킬 습득의 후유증으로부터 해방된 메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아르페의 손을 확 당겨 그를 들쳐 업었다. “레코드 디바이드!” “뭐야 그 살짝 멋진 이름의 스킬은······ 으오오오오오오오!?” 바닥의 물을 튀겨 증발시킬 기세로 메테르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것과 때를 맞추어 무너지는 통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추가로 쏟아져 내렸다! “이이이아아아아아아!” 아르페는 자신의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마나 스트링을 뻗어내어 그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파편과 물을 흩어놓았다. “메테르, 서둘러어어어어어어!” “이제 곧이야! 출구가 보여, 아르페!” 빛이 가까워왔다. 하지만 아르페의 마나도 바닥이긴 매한가지! 앞으로 조금 남았을 뿐인데 설마 이대로 매장당한다고? 사천왕 최약체의 마지막에 어울리기는 하지만 여기엔 메테르도 있단 말이다! “아르페, 마나 줄게!” “너한테 여유 마나가 어디에 있······ 어?” 메테르로부터 마나가 흘러들어왔다. 아르페가 링크 마법을 발현하지도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경악한 아르페였으나 그 또한 곧 깨달았다. “레코드 디바이드라고 했지, 너······.” “아르페의 마법이랑 비슷한 효과를 내는 스킬이야! 그것보다 더 광범위하긴 한데······ 그보다 어서!” 메테르가 재촉하지 않아도 이미 마법은 발현하고 있었다. 아르페는 그녀로부터 공급받은 마나를 모두 마나 스트링으로 돌려 뻗어냈다. 아르페와 메테르의 머리를 사이좋게 깨부수기 직전이었던 바위덩어리가 순식간에 갈려나가고, 직후 통로가 끝나며 그들은 빛 너머로 내동댕이쳐졌다. “우와아아아아아, 아르페에에에에에!” “그래! 이거!” 물소리가 들린다. 사방 천지에 물이 있었다. 아르페는 상쾌한 미소와 함께 외쳤다. “폭포야! 이런 빌어먹으으으으으으으으으을!” 용사들은 그렇게 인생 첫 번째의 던전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두 용사의 나이 열셋, 대륙의 모든 기록과 역사를 개무시하는 최강의 꼬마 용사 듀오가 세상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 Chapter 6. 어제의 원수 - 1 두 용사는 폭포에서 시작된 거센 물의 흐름을 타고 즐거운 여행을 하다가는, 당최 어딘지 모를 계곡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후에야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물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신이 쑤시고 위장이 뒤틀리고 등은 쭉 긁혔고 몸이 푹 젖어 기분이 최악이다. 정말이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으웨에엑, 콜록콜록.” 아르페는 천 년의 사랑도 식을 괴상한 소리를 내며 물을 토해냈다. 그 옆에서 아르페와는 달리 멀쩡한 표정의 메테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르페, 괜찮아?” “안 괜찮아! 나는 너처럼 폭포에 휩쓸리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요령은 없거든!” “그게 왜 안 되는 거지? 그냥 정신만 차리고 몸을 조금 흔들면 되던데······.” 아르페는 지금 이 순간만큼 메테르에게 살의를 느끼는 자신을 사랑스럽다 여긴 적이 없었다. 사천왕 시절에 이랬으면 정말 악의로 똘똘 뭉쳐 기적적인 승리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내가 아르페 대신 아팠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진지하게 자신을 걱정하는 메테르의 얼굴을 마주하니 어느덧 그런 감정도 스르륵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아르페는 괜히 자신이 부끄러워져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그렇게 안 아프니까 됐어.” “정말? 다행이다.” 아르페는 혹시나 폭포에 휩쓸려오는 동안 뭔가 물에 쓸려가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확인했으나 소지품은 모두 안전했다. 두 개의 돈주머니는 물론이고 검은 알까지도. 메테르 역시 자신의 갑옷과 포션이 든 주머니, 바스타드 소드와 롱 소드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이젠 그녀 또한 모험가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슬슬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둘 다 쫄딱 젖은 것은 마찬가지다. 덤으로 계절이 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지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 그들의 체온을 낮추고 있었다. 이대로는 감기 확정이었다. “불 피울까?” “응, 나 추워.” 메테르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페는 고개를 들어 자줏빛으로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왕국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수색하고 있을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음, 뭐 있어도 상관없으려나.” 그들의 레벨은 둘째 치고, 지금 보유한 스킬로 미루어보면 설령 상대가 레벨 200의 상위클래스를 지닌 이들이라도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의 레벨을 지닌 이들이 탐색에 나설 가능성은 없다. 왕국이 그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자아.” “와!”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몇 가닥 뻗어내 근처의 나무를 한 그루 썰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메테르는 박수를 쳤지만 아르페의 활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검은 마나 스트링 다섯 줄기가 날을 세워 회전하며 나무를 잘게 토막 내고, 그 중 일부만을 한 곳으로 옮겨 쌓고, 마무리로 아르페의 하이퍼 러빙이 작렬하여 그 나무들을 격렬하게 문질러 건조시켰다. 그러자 이내 환한 불꽃이 솟구쳤다. 여기까지가 불과 25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역시 아르페는 대단해!” “사실 파이어 마법만 있었어도 2초면 되는 일이긴 한데······.” 이젠 돈도 많은데 간단한 마법 정도는 미리 사둘 걸 그랬나. 아르페는 나중에 마도사들의 탑이라도 찾아가보자고 생각하며 불을 쬐었다. 그 옆으로 메테르가 찰싹 달라붙어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이제 이 정도 스킨십은 익숙해진 아르페는 작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지만 메테르는 그 몰래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흐, 편하고 좋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된다는 건 제법 좋은 일인 것 같아, 아르페.” “그 감각에 심취하게 되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니까 조심해라. 일하면 지는 거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생이 끝나버리는 거야.” 자매품으로 딱 책 한 권만 대박내고 남은 마생······ 인생에서 아무 일도 할 필요 없는 인세생활을 꿈꾸는 자도 있었지만 대개 그런 놈들은 경험도 상식도 부족하기에 실패하게 된다. “에이. 가끔 이러고 있으니까 좋은 거지, 맨날 이러면 안 좋은 거야!” “······넌 가끔 되게 똑똑한 말을 한다?” 두 꼬마 용사는 서로에게 기대어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맞이한 것이 얼마만일까. 던전에서는 계속 다른 외부요인에 괴롭힘을 받아야 했는데, 지금은 마냥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굳이 입을 열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 나무가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소리가 그들의 침묵 대신 공간을 메꿔주었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더 흘렀을 즈음에 메테르가 입을 열어 물었다. “······아르페, 우리 앞으론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더 강해지고 싶어.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그리고 아르페랑······.” “그래, 거기까지. 전부 다 앞으로 네가 지치도록 실컷 할 수 있는 것뿐이구나.” “정말!?” 메테르의 눈빛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분명 또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구나, 아르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수정해주기도 귀찮았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돌연 저 너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 죽이······!] [무도······ 전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마법이 발동되며 주위 마나를 태워먹는 소리에 섞여 누군가의 단호한 목소리와 다른 누군가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소설의 도입부가 꼭 이러할까 싶을 만큼 정석적인 패턴! 아르페는 그 소란을 파악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네가 괜한 말 하니까 또 바로 사건이 터졌잖아. 앞으로 2페이지 정도는 더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나한테 내가 모르던 능력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냥 우리의 업보같은 거야.” 지금 이 순간, 이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르페와 메테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으면 모르되, 들은 이상 그들은 반드시 이 싸움과 연관되고 말 것이다. “왜?” “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거든.” 전생에서도 너는 언제나 그랬지, 하는 말을 아르페는 꾹 눌러 삼켰다. 그래, 그것이야말로 바로 용사의 숙명이었다. 이상하게 용사가 가는 곳마다 1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한 사태가 일어나고, 용사는 어김없이 그 사태에 휘말려 어쩌다보니 사태의 중심에 서게 되고, 끝내 멋지게 그 사태를 해결하며 이름값을 드높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다. 용사가 가는 곳마다 전설의 유적이 깨어나거나 대마법사가 행차하거나 고대 괴물이 준동하거나 귀족가의 암투에 휘말리거나! 이렇게 살다가 마왕과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용사가 스트레스로 죽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짜증나는 사건사고의 연속! “혹시 용사가 없었으면 그런 소란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싶을 만큼 용사는 소동을 몰고 다녀. 따라서 우리는 신을 죽여야 한다.” 올해 사과농사가 풍년이기에 국왕의 목을 따야 한다는 것만큼 맥락이 없는 설명이었으나 메테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르페를 위해 신을 죽일게!” “좋아, 기특하다.” 아르페와 메테르가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메테르는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섞여서 나는 비명소리가 신경 쓰이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아르페는 그녀의 속내가 훤히 읽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차피 우린 저 일에 엮일 거야, 메테르. 그러니까 신경 쓰이면 먼저 가 봐. 나는 여기서 몸이나 좀 더 녹이고 있을 테니까.” “아, 안 돼.” 그러나 의외로 메테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신경 쓰이지만, 구하고 싶지만······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은 아르페인걸. 섣불리 나섰다가 아르페가 거기에 휘말려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아마 죽고 싶을 거야.” “뭐······?” 차마 생각하지도 않았던 대답이 돌아온 탓에 아르페는 그만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다. 메테르의 애정이 무겁다. 너무 무거워 압사당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겁다.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존재가 순수한 용사에게 이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전생의 용사였다면 누군가 위기에 처한 것을 깨닫는 순간 단박에 달려 나가 그들을 구했을 것이다. 설령 그곳에 함정이 있건 강자가 있건 전혀 개의치 않고서.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아르페라는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다. 따라서 행동에 앞서 이것저것 따지며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던가. 아르페는 오히려 메테르가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에, 전직 마왕군 사천왕 주제에 이래도 되나 싶기는 하지만 살짝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페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인간 소년의 모습으로 눈을 떴을 때, 나는 전생과 현생을 어긋나게 할 가장 큰 변수가 나 자신이라는 판단을 내린 적이 있었지······ 그래, 내 판단은 정확했구나. 내가 가장 큰 변수였어.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야 할 용사를, 평범한 인간의 위치로까지 끌어내릴 수 있는 변수······.’ 덜컥 겁이 났지만 아르페는 내색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금발의 소녀에게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어차피 우린 저 일에 엮이게 될 거라니까. 그러니까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나는 아르페 곁에 있고 싶어. ······영원히.” “······그래, 알았다.” 어째 조금 지나치게 무거운 사랑고백을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기분 탓이겠지. 아르페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아르페?” “흡.” 불을 쬐던 것은 어디까지나 기분을 내고 싶었기 때문일 뿐, 옷을 말리는 일이라면 조금의 마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약간의 마나를 발산해 속옷부터 로브까지를 완벽히 말리고는 메테르에게도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보송보송하게 만들어주었다. “옷 다 말랐으니까 같이 가보자. 내가 간다면 너도 가겠지?” “······응!” 두 명의 용사는 그렇게 용사답지 않은 언행을 주고받은 끝에야 간신히 용사다운 업무에 착수했다. 참견쟁이도 이런 참견쟁이가 없다 싶을 만큼 멋대로 남의 분쟁에 끼어들어 멋대로 해결해버리는 폭군, 그것이 바로 용사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남의 일에 끼어들기에 앞서 우리가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알려주지.” “응!” 아르페는 메테르와 함께 숲속을 내달리며 입을 열어 말했다. 아르페의 체력은 메테르에 비하면 아주 저질이었으나, 그래도 레벨 140을 넘긴 지금은 어지간한 용병을 압도하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단순한 마도사가 아니라 용사라는 클래스를 갖게 된 것 또한 여기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일단 누구를 적대해야 하느냐, 사실 이게 제일 어려운 일이야. 우리는 결코 남들이 어떤 사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어떤 사람이 나쁘다, 어떤 사람이 착하다, 그런 건 으레 딱딱 구분되지가 않게 마련이거든.” “으으음, 조금 어려워.” “자, 설령 우리가 어떤 사람을 죽이기라도 했다 쳐.” “히익!” 여태껏 몬스터를 잘도 학살해온 주제에 그 대상이 사람이 되자 기겁하는 메테르. 역시 이런 부분은 아직까지 어리구만, 아르페는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죽인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고, 실은 우리가 도운 사람이 나쁜 사람이었어. 이런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야.” “착한 사람은 죽이면 안 돼!” “하지만 어떤 오해가 겹쳐서 그 사람이 우리를 적대하게 될 수도 있고, 우리가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어.” “그럴 수가······.” 순수한 용사의 눈망울이 마구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단순한 가치관으로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 마구 이어지는 바람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의 메테르는 엄청 귀여웠다. 이렇게나 올곧고 순수할 수가! 이렇게 새하얀 마음을 시커멓게 물들일 때야말로 아르페가 가장 즐거운······ 아차, 그만 사천왕이던 시절의 나쁜 버릇이 나올 뻔했다. 아르페는 자신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판단 기준을 절대적인 선악으로 놓으면 안 돼.” “응······?” “절대적인 선과 악 따위 누구도 판단할 수 없거든. 그거야말로 신이 할 일이지, 그건 마······ 인간에게 맡겨진 일이 아냐. 우리가 판단이랍시고 하는 것들 모두가 오만이고 착각이라는 얘기야.” “으으응······?” 점점 더 소란의 현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르페는 간단하게, 그러나 메테르가 결코 잊지 못하도록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악이라고 생각해.” “······.” 용사보다는 마왕에게 어울릴 법한 사고방식이었다. “너를 죽이려는 자, 너를 해하려는 자, 너에게 흑심을 품는 자, 너를 이용하려는 자······ 그들 모두가 악이야. 너는 너 자신을 선으로 놓고, 그 반대를 모두 악으로 놓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아르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건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일이라고 바로 방금······.” “절대적인 선악이 아냐, 상대적인 선악이지. 네가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그 다음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그것은 터무니없는 억지이고 사기였다. 제아무리 단순하고 어린 사고방식을 지닌 메테르라고 해도 아르페의 말이 결코 정도가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한 발 어긋나는 순간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터무니없이 이기적이고 오만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족으로 수백 년을 살고, 불합리한 폭력에 굴해 사천왕 최약체로 살아온 아르페이기에 비로소 가질 수 있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르페는······.” 메테르는 여전히 흔들리는 눈망울을 들어 아르페를 바라보며, 현장으로의 돌입이 임박했음을 느끼면서도 그에게 질문했다. “아르페는,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데?” “이 바보야, 그건 말할 것도 없지.” 아르페가 입 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단언했다. “너는 ‘언제나’ 내게 있어 절대적인 선이었어, 용사님.” “······알았어, 아르페.” 메테르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풀 너머, 병장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히고 있는 현장으로 몸을 던지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면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 ──────────────────────────────────────────────────────────────────────── Chapter 6. 어제의 원수 - 2 수풀 너머 공터, 피와 철가루가 사방으로 튀는 그곳에서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에 하나씩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고 있었다.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고, 지우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갖가지 욕망이 넘실거리며 인간들 모두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황태자를 죽여! 놈을 죽여야 모든 일이 끝난다!” “지켜라! 그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어쩜 이렇게 알기 쉽게 떠들고 있을 수가! 세상에 이런 놈들만 있었더라면 독심 마법은 필요가 없었을 텐데! “엇!?” “앗!” 아르페와 메테르가 공터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전투를 벌이던 이들 모두가 그들을 알아차렸다. 그들을 돌아보는 이들의 시선은 한쪽은 기대를, 다른 한쪽은 짜증을 품고 있었으나,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양측의 표정이 동일하게 일그러졌다. “아이들이잖아······!” “칫, 정리해야 할 녀석들이 늘었군.” 아르페는 이 시점에서 적아 구분을 완료했다. 그리고 아이가 정답을 맞히길 기다리는 과외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메테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아르페에.” 이럴 줄 알았지.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메테르에게 설명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널 죽이려는 놈들을 죽이면 된다고 했지?” “응!” “자.” 아르페가 한 손을 들어 두 무리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같은 양장점에서 맞추기라도 한 듯 시커먼 옷으로 몸을 감추고 있는 무리였다. 지키는 자들과 공격하는 자들 중 후자. 그 놈들이 바로 방금 아르페 일행을 보며 ‘정리해야 할 녀석들이 늘었다.’고 말한 놈들이다. “정리하겠다는 건 우리를 말하는 거잖아. 그렇지?” “아, 그렇구나!” “그럼 여기서 문제입니다. 정리라는 건 뭘 말하는 걸까요?” “음······ 사정을 설명해 돌려보낸다?” “틀렸어. 정답은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지옥으로 보낸다, 야.” “저것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꼬맹이 둘이 만담을 펼치고 있으니 한창 죽고 죽이는 사투를 벌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광경이 얼마나 어이없게 보였을까. 실제로도 그들 모두가 황당한 눈으로 아르페 일행을 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보고도 두려움을 느끼거나 도망치지 않는단 말인가? 요즘 어린 것들은 멍청해도 너무 멍청하군.” “페이······ 3호, 정리해라.” “네.” 나머지 무리는 여전히 지키는 쪽을 공격해 들어가는 가운데 검은 옷 중 단! 한 명! 만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놈의 입에서 ‘개성 없는 악역은 이렇게 말한다 150선’중 가장 인기가 높은 말이 튀어나왔다. “너희 불운을 탓해라!” 아르페는 메테르를 힐끗 쳐다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동상처럼 굳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메테르.” “아, 아으.” 적의 능력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녀는 몬스터가 아닌, 자신과 똑같은 인간을 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 아르페.” “후.” 적을 앞에 두고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여린 감성을 지닌 아이에게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오히려 메테르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주 달려 나가 저 남자를 쓱싹했다면 아르페가 기겁했을 것이다. 물론 아르페는 어디까지나 이런 상황을 상정해 자신의 할 일을 정해두고 있었다. “비켜, 메테르.” “꺅.” 그것은 바로 메테르를 밀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애송이, 그래도 남자라고 제 여자를 지키겠다는 거냐!” “아르페!?” 상대의 표적을 자신으로 확정하며 무방비하게 나서는 것. 그것은 적을 도발하고 메테르의 경각심을 유발하는 일석이조의 행동이었다. 개성 없는 악역1은 그의 도발에 제대로 걸려들어 검을 그에게로 향했고, 아르페에게 밀쳐진 메테르는 두 눈을 부릅뜨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적이 아르페를 향해 내민 날카로운 검날이 확대되어 들어왔다. 검날에 머무르는 것은 선명한 푸른 마나! 아르페의 맨몸으로는 죽어도 받아내지 못할 위력의 스킬이었다. “깔끔하게 보내주마! 파워 스트라이······ 크흑!” 악역1이 아르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것을 본 메테르는 눈이 뒤집혀 대지를 박차며 허리춤의 바스타드를 한 손으로 뽑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레벨 100에 지나지 않는 악역1을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양단해 깔끔하게 보내주었다. “페, 일란······?” “무슨······.” 놈의 시신이 묵직한 소리를 두 번 내며 바닥에 떨어진 그 순간 장내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공격하는 측도, 지키는 측도, 지켜지는 측도 모두가 제 몸집만한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 “미, 친······ 방금, 대체······?” 그것을 본 주변 인물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으나 굳이 이런 엑스트라들을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아르페는 단지 메테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소녀를. “아르페를 죽이려고 했어.” 메테르는 방금 자신의 눈으로 보아놓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한 손으로는 너무 세게 검 손잡이를 쥐고 있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냥 이곳에 왔을 뿐인데······ 와서 봤을 뿐인데 아르페를 죽이려고 했어.” “저 소녀는 위험하다, 다들······.” 그녀는 적이 상의를 하고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바스타드를 들어 ‘적’들을 겨누며 메테르가 물었다. 적이 아닌 아르페에게. “아르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했지?” “그랬지.” “······알았어.” 그 이상의 문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메테르에게서 모든 망설임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피해, 막······.” “흐아아아아압!” 메테르는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가며 바스타드를 횡으로 그었다. 상대하는 자들은 저마다 무기나 신체 일부로 마나를 발산하며 방어, 혹은 역습을 위한 스킬을 사용했으나 그 모두가 메테르의 강타 한 방에 취소되었다. 레벨 100 이상의 상위클래스 수 명이 모여 발동한 방어 기술이, 기초적인 액티브 공격 스킬에 캔슬당한 것이다! “용서 못해! 안 해! 너흰 다 나쁜 놈이야! 내가 그렇게 정했어!” 그녀는 지금 버서크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건틀렛의 옵션도 발동하지 않은 상태다. 그저 순수하게 저들과 메테르 사이에 어마어마한 기량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었다. “크악!” “칵!” “이건 악몽이야, 어찌 저런 어린 아이가 정예기사들을······!” 인간의 정예기사가 이 모양이었으니 마왕이 그렇게 태평했던 거로군. 아르페는 그들 중 가장 강한 자가 끽해야 레벨 120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곤 피식 웃어버렸다. “도망, 절대······.” “못 쳐!” 검은 측의 숫자가 20에서 17, 14, 10······ 5명이 되었고, 2명이 되었다. “어, 어디에서 보낸 자들이냐! 정체를 불어라!” “퇴각해야 합니다, 아직 후발대에게 황태자의 위치를 전달해주지 못크악!” 1명이 되었고, “네놈들이 누구건 오늘 일을 언젠가 후회하게 될” 끝내 0명이 되었다. “후······.”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추적자들이 모두 죽었어. 믿을 수가 없어······.” 메테르는 모든 적을 죽인 후, 바스타드를 가볍게 한 번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는 검집에 회수하며 아르페를 돌아보았다. “아르페에에.” 용감하다 못해 무서우리만치 단호했던 행동과 달리 지금 메테르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래그래, 고생했어.”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알고 있는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받아 안아주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무서워 눈물을 흘리고 있을 그녀의 마음이 아르페의 손에 선명하게 잡히는 듯했다. 분명 그에게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마족답지 않은 자신의 성격에 절망하고, 누구보다도 자신을 증오했던 세월이 분명 아르페에게도 있었다. “정말 이렇게 하면 돼? 나 엄청 잘못한 것 같아.” “아냐, 잘했어. 설령 잘못했다고 한들 네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될 날은 앞으로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르페······.” 아르페가 엉망진창인 어법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광경을 보며, 여태껏 멍하니 소녀의 활극을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했다. 대체 지금 이것들이 무슨 촌극을 벌이고 있는 거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중 세검을 들고 있던 갑옷 차림의 여자가 약간의 경계색을 띄면서도 아르페에게 말했다. “저희를 도와주신 것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이상 저희에게 관여되는 것은······.” “응, 알았어.” “예!?” 아직 제대로 된 설명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여자가 경악하고 있으려니 만물열람의 주인답게 상황을 읽어내는 능력만은 세계제일인 아르페는 여전히 자신의 품에서 훌쩍거리는 메테르를 쓰다듬어주며 여자에게 대꾸했다. “우린 여기서 아무것도 못 봤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바가 아냐. 그냥 지나가다가 몬스터 몇 마리를 만나서 죽였을 뿐이야. 그걸로 됐지?” “예에?” 정확히 자신이 바라던 그대로의 대답이 돌아와 깜짝 놀라는 여자. 아르페는 그녀를 보곤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메테르, 가자.” “이대로 가도 돼, 아르페? 정말 이대로 가면 되는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결과, 저쪽에 관여하지 말아달라는 답을 얻었어. 그러면 이걸로 끝난 거야. 이제 우린 우리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돼.” “······훌쩍, 응.” 메테르도 납득한 시점에서 이대로 돌아가서 다시 따뜻한 불이나 쬘까, 아르페가 그녀를 다독여주며 발을 떼려던 그때.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서 누군가 외쳤다. “멈추어라!” 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다. 아르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 황태자의 명령이다!” “한창 남들이 싸울 땐 쥐 죽은 듯이 있어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불쌍한 사람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우렁차네.” “큭······!” 아르페의 날이 선 대꾸에 어린 소년, 황태자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때로 진실은 잔혹한 법이다. 더구나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함을 지닌 동년배의 소녀를 보았기에 더더욱 황태자의 상처는 컸다. “무, 무례합니다! 방금 스스로 밝히셨다시피 이분께서는 왕국 디아스의 다음 왕위에 오르실······.” “우린 아무것도 못 봤다니까? 너희 바보야?” “윽······.” 바보짓도 정도껏 해야 귀여운 법이다. 기껏 모른 척 하고 넘어가주려고 했는데 스스로 정체를 실토하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권위를 사용해 발을 붙들려 하다니 대체 언제 적 수법이란 말인가!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다시 걸음을 떼어놓······. “나를 도와다오!” “전하!” “왕궁이 역도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나는 언젠가 반드시 궁으로 돌아가 아바마마의 복수를 하고 내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너희와 같은 강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제법 솔직하고 싹수가 있잖아!? 물론 그렇다고 아르페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봐라. 메테르, 가자.” “응. 왕궁 싫어!” 왕궁 밥은 맛이 없다고 굳세게 믿고 있는 메테르에게 왕궁은 결코 가까이 가선 안 될 곳! 메테르는 순순히 아르페의 로브자락을 붙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자, 잠깐!” 그 모습을 보고 기어이 소년, 황태자는 자신을 보호하던 이들을 헤치고 나왔다! 그는 아르페와 메테르와 비슷한 나이대의 적발이 인상적인 미소년이었다. 그는 아르페와, 그리고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던 메테르를 빤히 쳐다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도 이 땅의 백성이라면, 언젠가 이 땅의 지배자가 될 나를 도와다오······! 나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내 반드시 너희에게 후한 상을 내리겠다! 약속한다!” 이제 그만 이 패턴에서는 탈출하고 싶은데.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돌아서선 대꾸했다. “그럼 이 세상의 절반 내놔.” “음!? 그, 그건······.” 아르페의 뜬금없는 요구에 황태자의 눈이 점이 되었다. 그야 왕국의 태자, 그것도 쫓기는 신분에 놓인 그가 어떻게 그들에게 세상의 절반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아르페는 쯧쯧 혀를 찼다. “하다못해 마왕도 용사한테 그 정도 딜은 한다.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방법’이라는 책을 완독하고 다시 찾아오렴.” 단호박도 이런 단호박이 없었다. 메테르는 그저 아르페가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하는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아르페도 그 정도로 인성이 최악은 아니다. 단지.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을까. 확실히 그놈은 원래 디아스 왕국의 황태자 출신이었단 말이지······.’ 전생에 자신과 용사가 적으로 조우했던 그때, 마음이 너무 여려 도저히 아르페를 죽이지 못하는 용사를 놔두고 무자비하게 단검을 찔러 아르페에게 결정타를 먹인 바로 그 도적 놈. “어째서 얘기조차 들어주지 않는 것이냐! 일이 성공하게 되면 정말 후한 보상을 내려줄 수 있다 하지 않았느냐! 더구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소녀인데 어째서 네가 내게 대꾸를 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아르페를 향해 있는 힘껏 샤우팅을 하고 있는 황태자의 얼굴에, 아르페를 죽였던 바로 그 도적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 그냥 싫어. 네가 싫어! 싫다고!” “대체 어째서!” [시페넌 르 디아스] [황태자] [레벨 - 7] [훔치기 Lv1] [은밀한 걸음 Lv2] 그래, 이놈이 그놈이었다. 이 나라의 태자는 나중에 커서 도적놈이 되는 것이다. ──────────────────────────────────────────────────────────────────────── Chapter 6. 어제의 원수 - 3 전생에서 용사는 디아스 왕국에서 태어나, 12살에 용사 클래스를 부여받고 그대로 왕궁으로 끌려간다. 이것이 용사 전생의 가장 큰 실수다. 왕궁은 수백 년도 더 전에 정립된 용사 육성 매뉴얼을 따라 금이야 옥이야 용사를 육성하는데, 이때 용사에게 첫 번째 파티원이 추가된다. 다름 아닌 도적, 나라의 태자 시페넌 르 디아스이다. ‘물론 저 시페넌이 왜 태자 자리를 마다하고 용사 파티에 참여하기를 원했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 아니, 지금 보니 알 것도 같다.’ 시페넌은 분명 아르페를 향해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 시선은 메테르에게 빤히 꽂혀 있었다.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한 눈에 뿅 간 모양. 그야 메테르는 전생에서도 나라 한두 개는 우습게 말아먹을 미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열세 살인 지금도 그 싹이 보였으니 태자가 그녀에게 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메테르가 벌인 참극을 두 눈 뜨고 봤으면서 잘도 저렇게 순수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가 막히기는 했다. “나는 네가 아니라 소녀의 답이 듣고 싶다!” 바로 그 시페넌이 아르페를 향해 윽박지르며 메테르에게 강렬한 시선을 주었다.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이며 메테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메테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우웅?” 아직 눈물이 멎지 않은 메테르가 아르페의 품에서 풀려나 태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태자는 메테르의 부은 눈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이 되었다. “불쌍하게도······ 마음이 무척 여린 아이로구나.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방금 네가 해치운 그 자들은 나라에 반기를 든 역적들이니 그 자들의 죽음에 상처를 입을 필요는······.” “왕궁 싫어! 안 가!” 마음을 달래주려는 시도가 허무하게도 메테르는 딱 잘라 거절하고 다시 아르페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페 못지않은 단호함이었다. “뭣······.” 제대로 차인 시페넌은 그만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뒤에서 그를 보필하던 기사 한 명이 무심코 쿡,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른 이들에게 밟혔다. 그 소리가 자극이 되어 시페넌이 정신을 차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단호한 거절을 당해본 적이 없는 그는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받아 횡설수설했다. “아, 아니 어째서······ 나는 네게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다! 네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가문은 어디지? 저런 밥맛없는 시종을 데리고 다녀야 할 정도라면 안타깝게도 네 가문은 네 격에 걸맞지 않은 곳일 터, 궁으로 돌아가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네게 어울리는 자리를 마련······.” “······지금 아르페 욕하는 거야?” 시페넌의 말에서 마음이 안 드는 부분이 있었는지, 아르페의 품에 안긴 메테르가 얼굴만을 내밀어 그를 째려보았다. 시페넌은 자신이 지뢰를 밟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창백해지고 말았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것이 아니라······.” “방금 말했잖아! 아르페는 밥맛없지도 않고 시종도 아냐!” “시, 시종이 아니라고!?” “정말 나빴어!” 정말이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르페만은 아니었는지, 처음 아르페에게 말을 걸었던 여기사가 시페넌을 조심스레 말렸다. “전하, 안타깝지만 그들의 도움을 얻는 것은 포기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들은 이미 저희와 전하의 목숨을 한 번 구했습니다. 그것에 감사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뜻이 없는 자들을 억지로 붙들어두려는 것은 디아스의 위대한 피를 이은 전하께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크윽······ 이대로 저 소녀를 보내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전하······.” 아주 잘들 논다. 아무래도 저놈들은 이 지경에서까지 왕국 놀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니 여기서 지들끼리 실컷 하라지. “얘가 싫다니까 이제 됐지? 우리 간다.” “흥!”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몸을 돌렸다. 혹여나 그가 자신을 두고 갈까봐 메테르가 그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귀여웠다. 그런데. “멈추어다오······.” 시페넌이 푹 젖어 빨랫줄에 걸린 걸레처럼 축 처진 목소리로 그를 다시 불렀다. 아르페는 짜증을 감추지 않으며 뒤돌아섰다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눈이 살짝 커졌다. “이것을 받아가라.” “뭣······.” 이번엔 아르페가 바보처럼 놀랄 차례였다. 아니, 시페넌이 아르페를 향해 내민, 시종 보랏빛을 발하는 거대한 보석의 원석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만물열람이 곧장 그것의 정보를 보여주었다. [데마이트의 원석] [마도사] [마도구의 최상급 재료인 리마이트 중에서도 지극히 순도가 높은 원석이 오랜 세월이 흘러 스스로 클래스를 얻고 거듭난, 인세는 물론 마계에도 몇 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전설상의 보석. 아직 가공을 거치지 않아 제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제대로 된 가공을 거치면 어마어마한 마나 증폭률과 랜덤한 추가능력이 생성되며, 스스로 의지를 품고 주인을 도와 마법을 완성하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다. 단 너무나 단단하여 가공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다.] ‘이게 얘네 왕국보다 가치가 높을 텐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예상치도 못했던 물건과 조우하여 아르페는 거의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시페넌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은혜를 입었으면 예를 표하는 것이 도리다. 비록 지금 내가 쫓기는 처지이나 그렇다고 도리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소년, 받아라. 비록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왕궁 보고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왔으니 귀중한 보석임에 분명하다. 이것을 팔아 네 주인······ 아니, 그 소녀에게 도움이 되는 장비라도 맞추도록 하라.” “너 지금 그게 뭔지나 알······.” 아니, 알고 있으면 아무리 큰 도움을 받았든 내놓을 리가 없지. 아르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비명이나 환희 따위를 깔끔하게 집어삼키고는 손을 뻗어 보랏빛 원석을 받아들었다. 이럴 땐 얌전히 받아 챙기는 것이 도리! “흠, 역시 황태자님이시라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받으셨군. 고마워.” “아르페, 그거 혹시 칭찬이야!?” 아르페가 시페넌으로부터 데마이트의 원석을 받는 광경을 보며 다른 기사들이 경악했다. 모든 기사가 다 시페넌을 설득한 여기사처럼 예와 도리를 중히 여기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하, 아무리 그래도 왕궁에서 도망칠 때도 소중히 챙겨온 보물까지 내어주실 것은······.” “과합니다. 딱 보아하니 저들의 신분이 그리 높아보이지도 않는데, 그저 칼부림 한 번 했다고 그 보물을······.” “전하께서 내리신 결정이니 다들 입 다물라.” 여기사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녀의 레벨은 118. 이 자리의 기사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것을 보아 리더가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였다. 뭐, 리더라곤 해도 어차피 저들은······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하며 데마이트의 원석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여전히 그것을 아쉬운 눈으로 보고 있는 기사들, 역시 황태자의 인성교육 하난 완벽했다며 자화자찬하는 여기사, 겉으론 쿨하게 그들을 보내주려 하면서도 못내 메테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황태자. “음······.” 아르페는 그들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시페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생에서 그가 자신에게 마무리 일격을 먹였기 때문일 뿐이고, 지금 놈은 제법 싹수가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니, 생각해보면 놈은 전생에서도 그저 용사를 대신해 과업을 수행했을 뿐 딱히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그야 놈을 볼 때마다 전생에서 자신의 심장에 단도를 꽂아 넣던 때의 놈의 담담한 얼굴이 떠올라 짜증나기는 했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들어온 데마이트를 생각해보면 그 따위 트라우마는 순식간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좋아. 이대로 보내긴 아깝지.’ 따라서 그는 보너스를 하나 해주기로 했다. “기다려볼래?” “뭣, 혹시 우리를 도와주기로······.” “종이 가진 것 있어?” “종이?” 여기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품 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어 아르페에게 건네었다. “좋아······.” 그는 그 자리에서 양피지를 펼치곤 손끝에 아주 미약하게 마나를 피워 올려 겉을 그슬리며 글씨를 써나갔다. 마나를 능숙하게 다루는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묘기에 그 자리에서 메테르를 제외한 전원이 움찔했다. “역시 이 소년도 보통은 아니었습니다, 전하······.” “저 소녀를 보필······ 함께 다니려면 저 정도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지. 마도사였군.” “자, 다 썼다. 그리고······.”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수상한 녹색의 가루가 담긴 봉투를 꺼내었다. 그리곤 차곡차곡 접은 양피지와 함께 여기사에게 건네며 가볍게 윙크했다. “당신만 읽어.” “무, 뭣······.” 여기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기사들과 시페넌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여기사는 당황하며 다급히 그것을 품에 감추었다. “어, 어른을 놀리는 것이 아냐!” “진담인데? 꼭 당신만 읽어.” “큭······.” 아르페는 스스로의 외모가 제법 잘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렴 적염군단장 에트나 칼리파드이 미레카드씩이나 되는 거물이 자신에게 매달렸을까. 물론 사랑은 겉모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지만, 외모가 첫인상을 비롯한 사랑의 여러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시페넌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르세티······ 설마?” “아, 아닙니다 전하! 상대는 어린 소년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얼굴이 붉어졌는데.” “아닙니다! 어쨌든 이 양피지와 가루는 안전을 확인해야 하니 일단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만. 부디 오래 살아서 다시 보자고.” 아르페는 키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었으니 나머지는 그들의 몫이리라. 밤도 깊어오니 이젠 아까 그 불가로 돌아가서 야영의 준비를······. “아르페······.” 그런데 아르페를 바라보는 메테르의 눈빛이 죽은 물고기처럼 탁했다. 그녀가 빙하지옥에 부는 것보다도 싸늘한 바람을 머금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아르페는 연상 취향이야······?” “아니, 아니야. 단언컨대 그것만은 결코 아냐.” 그런 페이크에 네가 걸려들면 어떻게 하냐!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메테르의 머리에 알밤을 쥐어박고는 그녀를 질질 끌고 불가로 향했다. 한편 그 자리에 남겨진 황태자 일행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내 시선을 한 점으로 모았다. 그들의 주목을 받은 여기사, 르세티는 당황하며 팔을 마구 휘둘렀다. “아, 아니라니까! 아닙니다, 전하! 그보다 저희도 어서 야영 준비를 하죠. 물론 적의 추격대가 언제 쫓아올지 모르니 그리 오래 쉴 수는 없겠지만······.” “그래, 쉬면서 편지도 읽어봐야겠지.” “분명 별 것 아닐 겁니다!” 르세티는 전투의 흔적을 지우곤 황태자를 비롯한 일행을 끌고 적당한 야영지를 찾았다. 그리고 기사들을 부려 간이 쉼터를 만들게 하고는 시페넌에게 먼저 휴식을 취하도록 한 후, 아무도 몰래 아르페의 편지를 꺼내어 들었다. “그 건방진 꼬맹이가······.” 그래도 미녀는 알아보는구나, 르세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초를 밝혔다. 어린 아이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유려한 글씨체로 쓰인 편지의 첫 문장이 그녀의 망막에 날아 들어와 박혔다. [기사 새끼들 전부 배신자니까 황태자 뒈지거나 잡히기 전에 알아서 지켜라. 아마 황태자가 나한테 준 보석을 목적으로 대기타고 있었을 텐데 그게 나한테 넘어왔으니까 이젠 망설이지도 않을걸. 아, 동봉한 거 독이니까 그거 이용하고. 이걸로 쌤쌤이다.] ······그것은 르세티가 기대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편지였다. ──────────────────────────────────────────────────────────────────────── Chapter 6. 어제의 원수 - 4 아르페가 피워놓은 불은 아주 따뜻했다. 둘은 계곡에서 적당히 잡은 물고기를 불에 구워 소금(3실버)을 쳐 먹었다. 메테르는 1년이 넘도록 먹지 못했던 물고기의 맛에 새삼스럽게 놀라워했다. “힝, 맛있다······.” “배고플 때 먹으니 뭔들 안 맛있겠어.” 메테르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씩씩하게 물고기를 뼈째 씹어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아르페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는 자신 몫의 물고기를 발라 먹으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어, 메테르. 그 던전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덕에 성장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었으니 앞으로는 조금 여유롭게 움직여도 될 거야. 아니, 네가 싫다고 해도 여유롭게 움직일 거야. 난 지금 굉장히 지치고 힘들거든.” “아르페······.” “말해.” 메테르가 못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코를 훌쩍이며 그에게 물었다. “정말 연상 취향 아니야?” “······.” 설마 그걸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해줬잖아. 보석을 받은 답례로 조금 충고를 해주고 왔을 뿐이야.” “정말로 진짜?” “진짜로 정말.” “······응, 그럼 믿을게.”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방금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보다도 아르페가 다른 여자에게 한 눈을 파는 것에서 오는 불안이 더 컸던 모양이다. 이 정도라면 아르페가 더 걱정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아르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먹은 자리를 치우려는 그때 메테르가 불현듯 말했다. “아르페랑 같이 잘래.” “꼬맹이도 아니고.” “같이 잘래. 아르페, 내 소원 뭐든지 들어준다고 했잖아.” 메테르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듣는 순간 아르페는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아르페에게 쓸데없이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였기에 더더욱, 아르페가 혹여나 자신의 곁을 떠날까 하는 불안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래, 들어준다고 말한 건 어쩔 수 없지.” “야호!” 하나의 침낭(5실버)에 둘이 들어가기는 좁지만, 오늘만큼은 각오하고 들어가는 수밖에. 그는 바닥에 적당히 낙엽을 모으고는 그 위에 천을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침낭을 깔고 누웠다. 혹여 아르페가 자기 말을 취소하기라도 할까 봐 메테르가 잽싸게 그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잘 자, 아르페.” “좁아서 불편해 죽겠는데 퍽이나 잘 자겠······ 이거 벌써 자네.” “스으······.” 메테르는 아르페의 품에 안기니 어지간히도 마음이 놓였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끝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좀 더 편하도록 자신의 위치를 조정했다.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네.’ 실제로도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메테르는 전생 따윈 기억하지 못하는 13살의 어린 여자아이이고, 아르페는 전생까지 합쳐 족히 수백 년을 살아온 전직 마족 현직 용사니까. 그 차이가 가끔씩 실감이 나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었다. 그래도 아르페는 메테르와 함께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묘하게도, 제법 흐뭇하고 뿌듯할 때까지 있었다. 단지 그녀가 마왕을 물리치고 아르페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인재라서가 아니다. 이쯤에서 아르페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그에게는 메테르가 제법······ 상당히 소중했다. 자신에게 물들어 순수하던 아이가 변해가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고, 이 작은 아이가 자신을 바라고 아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죄악을 범하는 듯한,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늪에 천천히 자신을 묻어가는 듯한 감각. 몸서리쳐지게 두렵지만······ 그 이상으로 달콤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의식하지 말자. 안주하는 건 마왕을 쳐죽이고 난 후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아르페는 메테르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히 침낭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마법을 발동했다. 발동하는 데에 조금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 용사의 유니크 스펠 마나 스트링을 말이다. “큭!?” “들켰······!” 사방으로 뻗어나간 다섯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허공에 검은 빛을 뿌리며 마음껏 춤을 추었다. 짙은 밤하늘 아래 붉은 핏줄기가 꽃처럼 피어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곳저곳에 인간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그들 스스로의 기습이 완전했다고 믿었던 자들은 그 믿음의 대가로 목숨을 지불하고 쓰러졌다. 물론 아직도 남은 숫자는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서 대가를 받아내야겠지. 아르페는 싸늘한 시선을 뿌리며 얼음장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애 자잖아. 안 깨게 조용히 해.” “이 자식이 우리를 놀칵!” 아르페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들을 보곤 혀를 쯧쯧 차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마나 스트링이 그의 의지를 받아들여, 거력을 품은 채찍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한 순간에도 두세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소녀보다 더 강하······!” “학습능력이 없는 친구들이구나, 응? 입 여는 순서대로 죽고 있는 거 모르겠어?” 아르페의 보랏빛 눈이 어둠 속에서 찬연한 빛을 발했다. 모든 거짓을 꿰뚫고 진실만을 눈에 담는 그 눈. 어둠을 의지해 일행을 급습하려던 남자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사신의 눈이었다. “이, 이길 수 없어.” “정말 무서운 것은 이쪽······ 칵!” ‘마나 스트링. 최약체로 발버둥 치던 시절의 경험이, 용사의 힘과 만나 탄생한 유니크 스펠······.’ 제대로 된 마법도 아닌, 마법이 되다 만 마나의 실이 아르페가 마계에서 험하게 구르던 시절을 떠오르게 해 사실 처음에는 마나 스트링이 그리 달갑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마법 덕분에 메테르를 편히 재우면서도 조용히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마법을 아낄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력 판단이 잘못······.” “어딜 도망가려고.” 마나 스트링은 마나 그 자체에 압도적인 물리력을 부여하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 대가로 많은 양의 마나를 소모한다. 전투 상황에서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무기는 결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아르페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토대로 가장 효율적인 궤적을 계산해 그대로 손가락을 휘젓고 있었다. 남자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아무렴 그들이 휘두르는 병장기나 움직이는 발걸음이 무게를 갖고 있지 않은 마나 스트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잠깐, 우리에게 협력하면 새로 탄생할 왕국에서······.” “잘 가.” 마나 스트링 다섯 줄기가 한 점에서 교차하는 순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남자가 몇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찢겨 죽었다. 그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한 것이 보여 아르페는 쓰게 웃었다. ‘너희에게 있어선 너희가 절대적인 선이었겠지. 다음 생에는 너희도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는 낙농업 라이프를 살기를 기도해줄게.’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회수하며 품 안의 메테르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괜찮네.’ 하지만 아직 오늘밤의 소동이 전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늘의 메인 게스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단장님, 들켰습니다! 보석 회수가 끝나셨다면 이쪽에 지원을······ 뭣!?” 아르페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위치를 굳이 숨긴 적도 없다. 처음 일행을 습격했던 자들이나 뒤를 쫓아온 자들이나 그리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자, 그래서 두 번째 부나방 그룹은 누구인가 하니 다름 아닌 아까 황태자 시페넌과 함께하고 있던 기사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고, 일부는 중독이라도 된 것 마냥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렴 전멸한 다른 남자들보다야 사정이 낫지 않겠는가. 그들은 지원을 청하러 온 곳에서 설마 일행의 죽음을 목도하게 될 줄은 몰랐는지 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너······ 네놈!?” 메테르는 자고 있고, 아르페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으니 범인을 특정하기도 어렵지 않았으리라. “시끄럽다고, 했잖아.” 물론 아르페가 그들의 분노에 맞서 꺼내든 것은 한 줄기의 마나 스트링에 불과했다. 앞서 아르페 일행을 급습한 자들에 비하면 이 자들은 찌끄레기에 불과했으니까. 레벨 118짜리 호위기사 한 명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 구더기들일 뿐이다. “조용히 해. 영원히.” “컥······!” 마나 스트링이 허공을 갈랐다. 살아서 이곳으로 도망쳐온 기사들의 숫자는 네 명이었고, 그들은 단 6초 만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직후 타이밍 좋게 그곳으로 한 명의 여자가 뛰어들어 왔다. “네놈들, 왕가를 수호한다는 자들이······ 음!?” “쉿.” 침낭 안에서 눈만 가늘게 뜨고는 기사, 르세티를 째려보는 아르페. 르세티는 현장에 무수한 숫자의 사체가 나뒹구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눈치가 제법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이 참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범상치 않다는 것은 직감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압도적이었을 줄은. 대체 이 소년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음?’ 아르페의 살벌한 눈빛이 무서워 찍 소리도 못 내고 침묵한 르세티는 머리만 열심히 굴리다가 문득 깨닫고 말았다. 불과 1년 전 이 인근에서 있었던 일. 촌구석 마을에서 탄생한 두 명의 어린 용사들이 그대로 모습을 감추어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던 바로 그 사건! 두 명의 어린 아이. 도저히 그들의 나이 대에는 있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강함. 남아와 여아. 흑발과 금발······.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으음, 아르페에······?” “아.” 르세티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탄성을 내지른 탓에 기어이 메테르가 눈을 떴다. 아르페의 눈이 싸늘하게 빛나고,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파악한 르세티는 아르페의 손가락 하나가 날카롭게 세워지는 것을 보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아르페, 괜찮아?” “전혀 안 다쳤으니까 그렇게 내 몸을 더듬을 필요는 없어. 지금 이것들 치울 테니까 눈 감고 있어.” “눈 안 감아. 나 이젠 진짜 괜찮아. 아르페가 있으면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 그럼 네 맘대로 하든가.” “응!” 사방에 시체가 널려있다는 걸 몰랐으면 모르되 이제 얌전히 잠을 청하는 것은 글렀다. 두 용사는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낭을 정리하고는, 주위에 널린 시체들을 정리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아르페가 주로 놈들의 병장기 중 쓸 만한 것들을 수거하고, 놈들이 소지하고 있던 은화 따위를 거두었다면 메테르는 ‘루팅’이 끝난 사체들을 한 데 모았다. “아르페, 사람은 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거야?” “우리가 몬스터를 잡는 것과 같은 이유야. 원하는 게 있어서지. 그 뒤에 따라붙는 말은 모두 변명일 뿐이야. 다른 생명을 해하는 것은 설령 그 어떤 의도가 있다고 해도 미화될 수 없어.” “그렇구나. ······산다는 건 정말 힘든 거구나.” “중요한 건, 우리 또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 너는 다른 사람의 삶을 존중하되, 그들과 충돌하게 될 때엔 반드시 네 삶의 방식을 관철해야 해.” “응, 알았어.” 열세 살짜리 꼬맹이들이 제법 철학적인 헛소리를 지껄이며 담담하게 사체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대체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기가 차다? 책이나 더 읽고 와라? 물론 말하는 것이 금지된 르세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그저 무릎을 꿇고 양팔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페의 관대한 벌칙이었다. “끝. 다 모았어, 메테르?” “응!” “좋아.” 아르페는 시체들을 모두 불 속에 던져 처리하고는 르세티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양팔을 번쩍 들며 충실히 그의 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벌칙 끝. 이제 황태자한테 가봐. 방금 봐서 알겠지만 왕궁으로 돌아가 봤자 아마 너희 편은 없을 테니, 앞으로는 그냥 둘이서 어디 외딴 시골로 가서 소 여물이나 주면서 조용히 살든가 해.” “큭······.” 르세티는 제대로 된 반문을 하지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그래, 황태자에게 있는 것은 오직 정통성 뿐, 나머지 모든 면에서 반역자에게 밀리고 있다. 그들의 편이 되어줄 자는 누구도 없었다. 지금 이 참상이 바로 현실이었다. “이봐.” 그러나 그때,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어린 소년이 르세티를 대신하여 아르페에게 반문했다. “어째서 디아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는지 알아?” 그는 붉은 머리의 황태자 시페넌이었다. 물론 아르페는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리 놀란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혹시 용사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국왕이 트집을 잡히기라도 했어?” “정확하다. 물론 너희를 탓할 생각은 없어. 그것은 트리거에 불과했고 작은 아버지······ 대공은 국왕을 물어뜯을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맹수였으니까. 용사의 탈주가 아니었더라도 조만간 다른 이유를 찾아 반역을 했을 테지.” 시페넌 역시 이젠 아르페와 메테르가 용사라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초연했다. 남자는 실연을 통해 성장하는가, 이제는 그의 시선도 메테르가 아닌 아르페에게 똑바로 꽂혀 있었다. “네 말이 맞다. 무턱대고 왕궁으로 돌아가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운이 좋아 황태자로 태어났을 뿐인 애송이가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 왕의 목과 나란히 효수되고 끝이겠지.” “전하······!” “그렇기에 나는 너희들과 함께해야 한다.” “뭐?” 굉장히 의외로운 말이었다. 그러나 시페넌은 진지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대공이 반역을 일으킨 명분은 어디까지나 국왕폐하, 내 아버님께서 용사들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유로 들어 확보한 왕의 자리다. 그는 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지금부터 용사들을 찾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겠지.”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이미 내가 용사들과 함께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자식은 뭔 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눈으로 아르페는 시페넌을 째렸다. 그는 설명을 보충했다. “새로이 왕이 된 자는 용사들을 찾지도 못하는데, 내가 용사들과 같이 파티를 맺어 그들을 돕는다면. 끝내 마왕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때 과연 백성들은, 그리고 중립에 머무르고 있던 귀족들은 누구를 원할 것인가! 당연히 용사라는 명분을 얻은 나이지 않겠는가!” “오오, 굉장히 불안하고 막무가내인 계획인데! 그래도 제법이야.” “그렇지!?” 꼬맹이가 해낸 생각치고는 대견했다. 세상 누구보다도 명분을 중요시 하는 바보 같은 왕국에서는 제법 잘 먹혀들 것 같지 않은가! 아르페가 나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자 시페넌은 신이 나서는 외쳤다. “그러니 나와 함께하자! 나는 지금 이 순간부로 황태자의 신분 따윈 버리겠다. 이제부턴 너희를 도와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 파티의 주축이 되겠다!” “하지만 말이야. 네 계획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커다란 결점이 한 가지 있어.” 아르페가 냉정하게 말했다. “너 너무 약해. 도움 하나도 안 돼. 딱 잘라 말해 짐이야. 그러니까 꺼져.” “크헉!” 반박할 길이 없는 통렬한 지적에 황태자가 격침되었다! 현직 용사는 이렇게 오늘도 승수를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 Chapter 6. 어제의 원수 - 5 아침이 밝았다. 아르페는 계곡에서 새로 몇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 마나 스트링으로 손질했다. 이러라고 배운 마법은 아닐 테지만 상관없었다. 스펠 레벨도 오르고 일석이조일 것이다. 아마도. “와, 아르페 손놀림 진짜 섬세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이런 쓸데없는 데에 좀 재주가 있지.” “르세티, 원래 마도사들은 다 저렇게 기묘한 마법을 사용하는 거냐?” “저도 처음 보는 마법입니다. 아무래도 용사이니 더욱 특별하겠지요.” 그리고 그 광경을 시페넌과 르세티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 왕궁도 직위도 호위병력도 잃고 거지 신세가 되어버린 그들을 그냥 쫓아 보내는 것도 살짝 마음에 걸렸던 아르페가 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어차피 너희 먹을 것도 안 챙겨 나왔지?” “하지만 돈이라면 많다. 왕가의 아공간 주머니는 특제거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거지만 아무데서나 턱턱 거금 쓰지 마라.” “어째서지?” “하.” 아르페는 시페넌에게서 시선을 돌려, 동정하는 눈으로 르세티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그녀가 겪을 고생이 훤히 보였던 탓이다. “······흥.” “에잇.” 그런데 르세티는 볼을 붉히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녀 대신 메테르가 아르페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응?” 뭐지, 이 일련의 교환은? 아르페는 얼떨떨해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에게 황태자가 보충설명을 했다. “르세티는 나이 스물을 먹을 동안 자기수련과 내 호위에만 매달려있느라 남자 한 번 사귀어보지 못한 불쌍한 여자다. 아무리 네 나이가 어려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목말라 있다는 얘기다.” “전하, 그동안 전하를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내세에서는 행복하시길.” “어째서 칼을 뽑아드는 것이냐! 너만은 내편이라고 믿었거늘!” “그 이유를 네가 알렷다!” “반말!?” 잘도 이렇게 간단한 수단으로 충성심을 없애는구나. 아르페는 어째서 디아스 왕국에서 반역이 발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기분을 받으며 생선 손질을 마쳤다. 아공간 주머니에 돈과 함께 보관해두었던 작은 철 냄비를 꺼내 메테르가 근처에서 뽑아온 먹을 수 있는 풀과 상인에게서 산 양념(50브론즈)을 모두 때려 넣고 물을 부어 끓이다가 깔끔하게 손질한 생선을 투하했다. 금세 좋은 냄새가 올라왔다. “많이 해본 솜씨처럼 보이는데.” “산에서 들에서 때리고 뒹굴다 보면 이 정도 실력은 몸에 붙어.” 넷은 완성된 생선 스프를 건조 식량을 반찬으로 삼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아르페가 준 것이라면 흙경단이라도 맛나게 먹는 메테르는 둘째 치고, 시페넌은 본디 황태자출신인지라 입맛이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군말 하나 없이 스프를 먹으며 아르페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고맙다. 아주 잘 먹었다.” “뭐냐, 기분 나쁠 정도로 예의바르네.” “음, 가사능력도 이만하면 훌륭하고······.” 르세티가 무엇을 체크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르페는 설거지를 마친 냄비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자.” “정말 함께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지만 그도 당연한가, 내 능력은 너희에 비해 부족하기 짝이 없으니······.” 시페넌은 시무룩해져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은 순간, 이때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그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리라. 아르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페넌에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셈인데?” “내 목표는 용사를 찾아 마왕토벌의 업적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이제 어찌 해야 할지······ 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솔직히 말하면 막막하다.” “르세티, 당신은 따로 생각해둔 것 있어?” “짜증나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내 주군이니,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킨다. 그뿐이야.” “즉, 따로 생각해둔 건 없구나.” “큭.” 그래도 시페넌보다는 제법 머리가 돌아갈 줄 알았는데 세상물정 모르기는 르세티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이 둘을 보내봤자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리거나 비참한 결말을 맞는 미래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씁, 어쩔 수 없지.”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그들에게 제안했다. “임시 파티를 맺자.” “파티에······ 넣어주는 것인가!?” 시페넌이 눈을 빛냈다. 르세티도 화색이 되었고, 메테르만이 어딘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난 아르페랑 둘이 좋은데······.” “임시라니까. 던전 하나 클리어할 때까지만. 얘네 이대로 보내봤자 험한 꼴 밖에 못 볼 테니까 기초 교육이라도 시켜놔야지. 일단 은혜를 입혀두면 나중에 뭐라도 하나 물어올 거야.” “보통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하나?” 시페넌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대꾸했지만 얼굴은 밝았다. 아르페가 그들에게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모습만 보았기에 이게 정말 용사가 맞는가 하는 생각도 하기는 했지만, 역시 근본적으로는 선한 자였다! 물론 아르페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용사 파티에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기본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사랑 함께하면서도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황태자에게는 도적의 재능이 있다. 그것도 아주 출중하다. 아마 그가 제대로 단련을 한다면 몇 년 안에 왕국 정도가 아니라 대륙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 물론 전생에선 메테르와 함께 5년간 왕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하생략. ‘그런데 여기서 조금 시간을 소모하는 정도로 이 녀석이 성장할 기틀을 잡아줄 수 있다면, 나중에 마왕군에 대적하는 강력한 카드를 하나 만들어두는 셈이 되겠지. 더욱이 빚을 어떻게든 갚으려 하는 성격이라는 점을 보면 잘 해줘서 나쁠 게 없어.’ 은혜를 받으면 갚는다, 지극히 당연한 도리이지만 그 도리가 지켜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눈앞의 황태자는 충분히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이 있어.” 입을 연 것은 시페넌이 아닌 르세티였다. “방금 너는 던전 하나만, 이라고 굉장히 가볍게 말했다만······ 던전이라는 것이 찾기 그리 쉬운 것은 아니잖아?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한 모험가가 일확천금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그들 대다수는 몇 년 이상 허탕을 치다가 간신히 던전을 발견하거나, 기껏 발견한 던전에서 누구도 모르게 개죽음을 맞이할 뿐이라고 들었어.” “잘 알고 있네.” “우리가 어지간한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기까지 앞으로 몇 년은 함께해야 할 터, 그렇다면 너는 우리를 파티에 받아들여주겠다는 말을 복잡하게 꼬아서 말한 거야?” 아마 그것은 르세티의 희망사항이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황태자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여기까지 그와 함께하기는 했으나, 막상 그녀는 전투와 누군가를 지키는 일 외에는 딱히 재주가 없었으니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무력은 물론 다방면에 재주를 갖고 있는 아르페 일행과 함께하면, 그녀는 앞으로도 전투와 황태자의 호위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더욱이 황태자가 정말로 훌륭하게 성장해 용사들을 보조해 마왕을 물리치기라도 하면 디아스로의 실로 영광스러운 귀환도 가능해질 터! “글쎄, 그건 어떨까.” 스무 살이라고는 해도 아르페가 보기에는 아직 애송이다. 아르페는 애써 침착한 척을 하는 르세티의 목소리 안의 미세한 떨림과 다급함을 캐치하고는 쿡, 웃음을 흘렸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로부터 이틀 후, 일행은 썩어 들어가는 고목의 옹이를 앞에 두게 되었다. 무엇을 숨기랴, 그것이 다름 아닌 던전의 입구였다. 아르페가 마나를 뻗어 자극한 것만으로 옹이가 넓이를 넓히며 모험가를 받을 준비를 마쳤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르세티는 황망한 표정이었고, 시페넌 역시 경악하며 아르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바로 찾아낼 수 있는 거지······?” “원래 용사는 가만히 있어도 사건 사고가 찾아오는 존재거든. 그런데 우리가 직접 던전을 찾아 헤맸으니 던전 한두 개는 나타나는 게 당연하지.” “용사란 실로 대단하구나!” “맞아, 아르페는 원래 대단해!” 역시 바보는 이래서 편하다니까! “느껴지는 마력이 그리 농밀하지 않은 걸로 보아 이 안에 나타나는 몬스터도 별 볼일 없을 거야. 자.” 별 볼일 없는 수준이 아니라 지극히 낮은 레벨의 슬라임이 돌아다니는 반박불가 허접용 던전이다. 그런 주제에 또 넓기만 더럽게 넓어서, 이 던전을 완전히 정복한 모험가는 전생의 아르페가 죽은 시점에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자, 일단 이걸로 무장해.” “으, 으으음.” 아르페는 시페넌이 착용할 수 있을 만한 허접한 장비를 골라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는 단검을 받아 쥐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용사 파티에서 활약하겠다고 말한 건 누구더라?” “······나였지.” 아르페의 가벼운 도발에 제법 단단해진 목소리로 대꾸하는 시페넌.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고개를 몇 번이고 주억이더니, 단검을 쥔 손등에 혈관이 떠오를 만큼 세게 힘을 주었다. “좋아, 용사가 이끌어준다는데 거부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해보겠어.” “황태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나서,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치르고 어떤 포지션에 위치해야 할지를 잘 생각하면서 싸우도록 해.” “알겠다.” 그는 한 손으로 단검을 만지작거리다가, 비어있는 반대편 손이 허전한지 그에게 물었다. “혹시 비슷한 거 하나 더 없을까?” “흠.” 양손에 무기를 든다는 것이 말은 쉬워도 그리 권장되는 일은 아닌데······ 뭐, 무슨 일이든 경험해보면 도움이 되는 법. 아르페는 그의 부탁대로 단검을 하나 더 건넸다. “좋아, 이제야 밸런스가 맞는 느낌이다. 사실 궁에 머무를 때도 심심할 때마다 자주 이렇게 손을 놀리곤 했었거든.” “황태자가 참 한가한 직업이라서 좋겠다.” 시페넌은 양손에 든 단검을 번갈아 휘두르며 그제야 흡족해했다. 그 순간 그의 정보가 갱신되었다. [시페넌 르 디아스] [레벨 ? 7] [쌍수단검술 Lv1] “아.” 그렇지, 이놈도 어느 쪽인가 따져보면 분명히 천재 쪽이었지.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시페넌은 완전히 전투 준비가 되었고, 르세티는 어딘가 실망한 기색이었고, 메테르는 이미 1년이나 던전에서 구르다 나온 주제에 마냥 던전이 좋은지 언제 들어가려나, 두근두근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시페넌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던전 탐험이니까 우리는 가능한 한 나서지 않을 거야. 함정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알려주지 않을 테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알겠어?” “······알겠다.” 시페넌이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나란히 던전으로 입장했다. 던전으로 들어와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메테르였다. “아르페, 뭔가가 많아.” “많아? 그럴 리가, 이 던전의 몬스터 생산력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손님을 받는 던······ 어라.” 아르페 역시 곧 던전 안에 이상할 정도로 기척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물열람이 발동하며 그에게 수없이 많은 몬스터, 슬라임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그와 함께 그에게 찾아오는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이 던전이 언제 사람들에게 알려졌더라?’하는 것이었다. 그 답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던전은 바로 전생에서 용사 일행이 왕궁을 나와 처음으로 찾아내, 그 후로 다른 모험가들에게도 공개된 던전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지금 시점에 세상에 알려져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아무래도 우리가 발견자인가보다.” “발견자? 뭔가 좋은 거야?” “그야 좋지.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곳이니 보상도 최상이고, 함정도 새 거니까 정말 감쪽같이 감추어져 있어서 스릴이 넘칠 테고, 몬스터도 잔뜩 쌓여 있으니까 몬스터에 압사당하는 경험도 해볼 수 있고······.” “좋은 것보다 나쁜 게 많은 것 같은데!?” 아르페는 어둡고 축축한 나무 복도의 끝에서 대량으로 나타나 그들을 향해 기어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슬라임 대군을 보고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파악하고 사색이 된 시페넌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힘내. 너는 할 수 있어.” “잠깐, 이건 조금 이야기가 다른 것 같은데······ 그악!?” 슬라임들은 침입자가 터무니없이 강한 자들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이 자리에서 그들이 어찌해볼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인 시페넌을 향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그것과 조우하며 시페넌은 사색이 되었지만 누구도 그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결국 그는 순식간에 슬라임 무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아르페는 심드렁한 눈으로 르세티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 호위기사. 뭐하냐?” “나는 전하를 믿는다. 뭐, 죽으면 어쩔 수 없고. 그나저나 아르페, 나 혼자라면 파티에 받아주겠지?” “너 정말 솔직하구나?” “으아루크아갸갸갸갹!” 아무래도 르세티는 나이 스물에 사고방식의 전환점을 맞이한 모양이었다. 슬라임 무리에 파묻힌 시페넌이 뭐라고 외치는 것 같긴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전하, 저는 전하를 믿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장례를 어떤 방식으로 치렀으면 하는지 먼저 말씀해주시죠!” “으가가가가갸갸갸갹!” 그로부터 45분 후 시페넌은 쌍수단검술로 슬라임들을 모두 해치우고 나오는 데에 성공했으나, 그가 성공할 줄 알았다는 듯 방긋 웃는 3인의 남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할 뿐! “강해지겠어······ 반드시 강해지고 말겠다!” “그래, 바로 그 자세야!” “으아아아아아아아!” 용사 파티의 두 번째 던전 탐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Chapter 7. 던전, 진화, 성공적 - 1슬라임 던전은 아르페의 전생에서, 용사 파티에 의해 1차 탐색이 완료된 후 다른 모험가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던전이다. 일단 이 던전에는 슬라임밖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위험도가 극히 낮고, 함정도 별로 없고, 적정량의 슬라임이 죽어나가 던전 내부에 마나가 활성화될 때마다 던전 안에 랜덤하게 보물상자가 생겨나기 때문에 제법 소득도 기대할 수가 있었던 탓이다. “즉 초보 모험가를 육성하고 던전에 대해 알려주기에는 이만한 던전이 없다 이 말이지.” “그런데 왜 이렇게 슬라임이 많단 말이뉴아아아아악!” “쳇, 죽을 것 같으면서 안 죽네.” “방금 누구냐! 혀를 찬 건 누구냔 말이야아아악!” 시페넌은 분투했다. 원래 재능이란 편한 환경에서보다는 극악한 환경에서 더욱 찬란하게 꽃을 피우는 법. 한 번 삐끗하면 바로 슬라임 무리에 집어삼켜져 녹아내릴 지경이었으니 그는 자신의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쥐어짜내야 했다. 두 개의 단검이 허공에서 춤을 출 때마다 슬라임의 파편이 튀고, 시페넌의 전투 능력이 실시간으로 성장했다. 역시 천재는 천재였다. “전투는 딱히 코치가 필요 없겠는데.” “그런가? 왜 저렇게 움직이는 거지, 싶은 부분이 있는데······.” “너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돼, 메테르. 전원 예선 탈락하고 말 테니까.” “많아, 너무 많단 말이다! 빌어먹을 슬라임 같으니!” 슬라임 던전은 아르페와 메테르가 처음으로 들어갔던 던전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다. 그곳은 몬스터의 생성에 어느 정도 한도가 있었으나 이 던전은 그냥 그런 것 없고 마나가 남아돌면 바로 새로운 몬스터가 생겨나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남아있건 상관없이, 아예 던전을 폭발시켜버릴 기세로! 던전에 생겨나는 몬스터는 던전이 품고 있는 기록과 마나의 영향을 받으니, 이 부분은 정말 던전마다 다르다고 밖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던전 한두 개 탐험한 정도로는 모험가라는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방을 하나 나아갈 때마다 슬라임이 들끓는 것이기도 해. 뭐, 함정을 다 슬라임들이 발동시켜주고 있으니까 함정에 죽을 걱정은 없지만.” “이것도 다 슬라임 덕분이네!” “으오오오오오오오!” 시페넌은 양손에 든 단검을 정신없이 번갈아 휘두르며 슬라임들을 마구 베어냈다. 그의 쌍수단검술은 한 단계 성장하여 2레벨. 비록 처음 던전에 들어와 몬스터들과 싸웠던 때의 메테르보다야 성장세가 덜했지만 저 정도면 제법이다. 하지만 슬라임들은 동료의 죽음을 감수하며 몰려오고 또 몰려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시페넌을 먹어치우는 것만을 지상과제로 삼아 돌격하는 놈들의 모습은 늠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다!” “오오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마왕군을 상대로 전 대륙이 연합해 덤벼들던 때의 광경을 떠올렸다. 앞으로 저렇게 한 백 그룹만 더 몰려오면 제아무리 시페넌이라도 쓰러지지 않을까! “이이익, 쓰러지기 전에 도와달란 말이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리겠습니다, 전하.” “넌 호위기사 해고야! 해고라고! 으가아아아아아!” 시페넌의 분투는 계속되었다. 7레벨이었던 그가 어느덧 18레벨까지 성장해 있었다. 던전을 깊숙이 나아갈수록 나타나는 슬라임의 레벨도 슬금슬금 올라갔지만 시페넌 또한 서서히 단체전에 감을 잡고 있어 좋은 승부가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과 슬라임의 사투를 지켜보며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페, 그런데 스켈레톤들도 전황이 불리해보이면 물러나려고 하던데 쟤네는 왜 끝없이 몰려와?” “우리에 비하면 그나마 시페넌이 만만해보이니까 그렇지. 놈들은 항상 굶주려있기 때문에 먹잇감이 보이면 어지간히 강한 상대가 아닌 한 덤벼들고 보는 성격이야.” “그런데 왜 자기들끼리는 안 먹어?” 그것은 아주 좋은 타이밍에 들어온 질문이었다. “원래 슬라임은 동족을 먹지 않아. 하지만 몬스터를 일반 상식으로 판단하는 건 오만이고, 언제나 변수라는 건 존재하지.” 아르페는 마악 한 무리의 슬라임을 전부 쓸어버리고 몸에 붙은 점액질을 떼어내는 시페넌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같은 종족에 속한 몬스터라고 해도 던전이나 환경, 그 외의 다른 요인에 영향을 받아서 행동 패턴이 달라지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슬라임은 그 변화가 매우 뚜렷하고 간단한 몬스터 중 하나야. 그리고 대개의 던전 또한 몬스터의 행동 패턴 변화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던전은 몬스터와 함께 살아 숨 쉬는 거구나?” “그렇지, 메테르 똑똑하다.” “흐훗.” 드물게 칭찬을 받은 메테르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렇게 태평하게 웃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용사들뿐이었다. “설명이 불안한데······ 마치 우리의 존재로 인해 슬라임들의 행동 패턴이 곧 변화하기라도 할 것 같아.” 르세티가 제법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몸에 소름이 돋은 시페넌이 아르페를 홱 돌아보며 외쳤다. “난 이 미친 곳에서 나가야겠어!” “늦었어. 이미 시작됐거든.” 아르페가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무는 바로 그 순간, 스멀스멀, 점액질이 바닥에 끌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배로 증폭되었다. “슬라임이······ 뒤로 물러나잖아?” “몬스터뿐만이 아냐. 정말로 던전이 변화하고 있어······!” 저 너머 복도에 굳게 닫혀 있던 방이 하나 허물어지고 다시 그 너머의 방이 무너졌다. 던전이 변이를 일으킬 때 가장 흔한 현상 중 하나, 바로 엄격하게 정해진 방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던전이 더욱 위험해지고 몬스터는 더욱 강해지며 보상도 더욱 좋아진다는 뜻이기에, 모험가는 던전의 변이를 느끼는 순간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행동해야 한다. 선택지는 두 개. 나아갈지, 물러설지. “글쎄 난 나가겠다니까!” “유감을 표하도록 하지. 던전의 변이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퇴각을 결심한 모험가들을 순순히 돌려보내주는 쪽과,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닌 쪽이 있거든.” 아르페는 굳게 입을 다문 던전의 뒤쪽 복도를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 던전은 후자야.” 시페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모험가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과 뭐가 다르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던전은 모험가를 성장시켜주고 보물을 안겨주기 위해 있는 곳이 아냐. 던전은 단지 그곳에 있을 뿐이라고. 위험도, 기회도 모두 공평하게 잠들어 있지.” 물론 아르페는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던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 던전은 기껏해야 슬라임 던전. 제아무리 혁신적인 진화를 거쳐도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은 시페넌뿐이다. “슬라임의 패턴 변화 요인은 아주 단순해. 첫째로 침입자가 강해 정면승부로 이기기 어려울 때, 둘째로 침입자가 물러날 생각이 없이 계속 돌진해올 때, 셋째로 슬라임의 숫자가 억수로 많을 때. 그때 놈들은 서로를 먹어치워 강해진다.” “즉 지금이잖아!” 시페넌이 비명을 질렀다. 저 너머에서 슬라임들이 꾸물거리며 뭉쳐 크기를 불리는 광경이 보였다. 하필이면 던전 벽이 계속 무너지고 있어, 그 너머에서 대기를 타던 슬라임들이 차례로 넘어와 동족포식중인 슬라임들을 또 덮치고 있다! “오오, 저 정도로 먹어치우는 건 오랜만에 봐. 잘 하면 그대로 한 단계 건너뛸 수도 있겠는데?” 여러모로 상황이 좋았다. 우선 이 슬라임 던전이 여태까지 발견되지 않고 남아있어 슬라임들이 무지하게 많이 쌓여있었다는 점, 일행의 무력이 시페넌을 포함해(시페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압도적이었다는 점, 던전이 몬스터에 맞추어 대대적인 변화를 이룰 만큼 많은 마나를 비축해두고 있었다는 점까지 모두. 아르페는 이렇게 또 한 번 역사를 바꾼 셈이 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 슬라임 던전은 더 이상 초보자 던전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진화한 슬라임에 의해 통치되는 지옥의 시작이다! “한 단계? 한 단계가 뭐냐? 설마 상위클래스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말해라!” “설마요, 전하. 슬라임은 그래봤자 레벨 5에서 10 사이의 최하급 몬스터입니다. 고작 그런 몬스터가 뭉쳤다고 해서 레벨 50을 넘기는 몬스터로 재탄생할 확률은······.” “아, 던전 무너진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슬라임은 한 번 동족포식을 시작하는 이상, 침입자를 완벽하게 먹어치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상잔을 한다. 처음 그들을 폭주시킨 것은 시페넌이었으나 이 던전 안에는 엄연히 아르페 일행도 들어와 있는 상황, 슬라임들은 층 하나를 합친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으니 아예 다음 층의 슬라임들까지 포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들의 의사를 받아들인 던전이 친히 바닥을 무너트려준 것이고! “꺄아아아악!” “큭!?” 당연히 던전을 찾은 모험가들도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르페!” “쯧!” 아르페는 한 손을 휘둘러 세 줄기의 마나 스트링을 뻗어냈다. 그것이 아르페를 중심으로 메테르, 시페넌, 르세티를 모두 묶어, 무너져 내리는 복도 밑, 던전 2층에 무사히 안착시켰다. [기이이이이이이] [스으으, 스으으으으]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 잘하면 자아까지 싹트겠는데? 이야, 2층에는 슬라임이 더 많이 있었어! 신난다, 쟤네 다 합체한다!” “야호!” “너희 놀러왔냐!” 그래봤자 슬라임이기는 하지만 1층의 슬라임보다는 압도적으로 레벨이 높은 2층의 슬라임들. 놈들은 천장이 무너져 내리든 말든 그냥 얌전히 던전의 도처에서 우글거리고 있다가는, 1층에서 완성되어 나타난 거대 슬라임에게 무력하게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이이이] “오오, 기분 나빠. 슬라임의 내부에서 서로 다른 색의 슬라임들이 섞이는 게 엄청 기분 나빠!” “그런데 슬라임들의 색은 어떻게 달라지는 거야, 아르페?” “그건 말이지······.” “여기서 한가로이 슬라임의 생태에 대해 해설할 시간이 있으면 저 놈을 어찌 해다오, 아르페!” 새로운 종류의 슬라임을 받아들여 몸을 형형색색으로 빛내며 성장하는 대형 슬라임! 일행은 남의 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기라도 하듯 슬라임의 포식을 구경했다. 아르페의 눈에는 거대 슬라임의 레벨이 실시간으로 오르는 것이 보였다. [빅 슬라임] [레벨 ? 33] “괜찮아, 아직 허접이니까. 아, 물론 너는 한 대 맞으면 즉사야.” “그걸 진즉 말해라!” 시페넌은 그 말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다급히 르세티에게로 달려갔다. 르세티 역시 입으로는 장례니 무덤이니 지껄이고 있었지만 정말 그를 죽게 놔둘 생각은 없었기에 그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놈은 엘리트 몬스터야.” “엘리트 몬스터는 해치우면 더 좋은 보상이 나오는 거지?” “그리고 동레벨 대의 다른 몬스터에 비해 더 강하지.” 빅 슬라임은 자신의 주제를 아주 잘 알았다. 비록 자신이 많이 성장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는 저 얄미운 붉은 머리 꼬맹이를 혼내주기도 전에 다른 인간에게 싹둑 썰리고 끝이라는 사실을. 따라서 놈은 만족하지 않고 2층의 슬라임들을 마구마구 먹어치웠다. 그 과정에서 원래 숨어 드러나지 않는 던전 내의 비밀 통로까지 마구 열리고 그 안의 희귀종 슬라임들이 튀어나왔다. 색도 훨씬 화려하고, 미미한 마력을 품고 있거나 접착성을 띠고 있거나 하는 놈들이다. 물론 놈들도 빅 슬라임의 성장의 자양분이 되어 사라졌다. ‘어, 그러고 보니 이 던전에서 비밀 통로가 열렸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물론 아르페는 전생에 이 던전을 찾지 않았기에 만물열람이 활약할 기회도 없었다. 즉, 지금 이 순간 전생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슬라임 던전의 비밀이 또 한 가지 드러난 셈이다. 뭐, 그래봤자 슬라임 던전이니 뭐 대단한 게 숨어있지도 않겠······. [구오오오오오옹!] “울었다!” “빛난다!” “어라, 꼭 그렇지만도 않네.” 평범한 슬라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희귀한 기록이 한 데 모인 끝에, 기어이 슬라임은 벽을 허물고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갔다. 일행은 몬스터가 높은 격을 얻어 상위 클래스에 도달하는 드문 광경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레이트 슬라임] [레벨 ? 50] “이야, 저거 장관인데. 엘리트 레어 몬스터로 거듭났어!”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냐!” “흠, 그렇긴 하지. 슬슬 수를 쓸까.” 아르페는 적당히 바닥의 돌멩이를 주워들어, 마나를 적당히 불어넣고 내던졌다. 근처의 슬라임이 그것을 냠, 주워 먹고 그 직후 그레이트 슬라임에게 흡수되었다. 시페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어떻게 해보라고 했지 슬라임한테 먹이 주라고 했냐!” “아이고, 잘 먹는다.” “계속 주지 맛!” 그레이트 슬라임의 성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내 2층의 슬라임도 모두 사라졌다. 비밀 통로까지 모두 열렸으니 정말 2층에 남은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없는 셈. “아, 보물상자까지 먹는다.” “괜찮아. 슬라임이 물건을 소화시키기까지는 엄청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 나중에 죽이고 회수하면 돼. 그때까지 못 버티고 사라지는 아이템은 뭐 그만한 가치가 없었던 거고!” “난 정말 저놈을 죽일 수는 있겠냐고 묻는 거야!” “아, 2층도 무너진다.” 기어이 던전의 3층까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1층과 2층을 그대로 답파해버렸으니 칼로리 소모도 안 되고 참 좋은 일인데 기껏 아낀 칼로리를 고함을 지르느라 소모하는 시페넌이 참 딱했다. “와아, 3층에도 비밀 통로가 엄청 많았나 봐!” “그레이트 슬라임은 이미 동족포식 태세를 굳히고 있거든. 이제 이곳의 다른 슬라임들에게는 우리가 아니라 그레이트 슬라임이 적이야. 따라서······.” “와!” 3층에 머무르고 있던 슬라임들까지 동족포식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아르페는 끊임없이 주위 돌멩이를 주워 마나를 불어넣어, 그것을 던져 슬라임들에게 먹이로 주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지켜만 볼 건데!” “글쎄, 던전 안의 슬라임이 모두 하나로 뭉치는 순간까지?” “그때가 대체 언젠데!”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르페는 그의 질문에 상쾌한 미소와 함께 대꾸해주었다. “그건 나도 몰라!” 슬라임의 포식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던전의 6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아르페가 전생에 파악한 슬라임 던전의 깊이는, 5층이었다. ────────────────────────────────────────────────────────────────────────Chapter 7. 던전, 진화, 성공적 - 2 [자이언트 슬라임] [레벨 ? 102] [구오오오오······ 오오오오오······.] “이야, 진짜 이 지경까지 오네.” 던전의 7층, 전생에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막혀 있어 모험가들이 들어올 수 없었던 영역에 지금 일행은 들어와 있었다. 물론 그들 앞에서 그들을 대신해 활약하는 것은 끝내 레벨 100을 넘겨 자이언트 슬라임으로 거듭난 바로 그 슬라임이었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 [키히이이이이!] 덩치가 너무 커서 던전 통로를 부수고 다닐 만큼 성장한 자이언트 슬라임의 위용에 던전 7층에 자생하고 있던 레벨 50대 이상의 슬라임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 다녔다. 설마 초보자 던전으로만 알고 있던 이 던전에 상위클래스의 슬라임들이 머무를 줄은 아르페도 모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던전은 복도가 무너질 경우에만 숨겨져 있던 하층이 드러나는 구조인 모양이었다. 즉 레벨 250 이상의 힘을 지닌 상위클래스 파티가 이 보잘것없는 슬라임 던전에 들어와 마구 스킬을 난사해 바닥을 부수거나, 지금 아르페 일행처럼 슬라임의 동족포식을 유도해야만 하층이 드러난다는 뜻. 전생에서 드러나지 않았을 법도 하다. [구오오오오오!] “오, 또 먹는다. 먹힌다.” “아르페, 지금 쟤는 어느 정도로 희귀한 거야?” 메테르도 저놈이 점점 범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더욱이 그 성장구조나 던전을 모두 휘말리게 하는 모습이 그들이 처음으로 정복한 던전의 레코드 링크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어 더욱 흥미가 깊어가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어디보자······ 스페셜 레어 엘리트야. 평범한 슬라임이 저 정도로 성장하기까지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지금 우리가 들어온 것처럼 여태껏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은 데다 그간 어마어마한 숫자의 슬라임이 생산되어 있지 않은 이상에는 만들어지지 않거든.” “정말 대단한 녀석이구나!” 레벨 100을 넘기는 스페셜 레어 엘리트라면, 레벨이 거의 120에 달하는 르세티라고 해도 방심하면 당하는 수준의 강한 몬스터. 르세티는 허리춤에서 세검을 뽑아내며 단단히 긴장한 투로 아르페에게 질문했다. “이제 슬슬 저걸 끝내도 되지 않을까? 아니, 끝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냥 내가 생각해본 건데 있잖아. 만약 슬라임이 던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면 얼마나 대단한 슬라임이 될까? 나, 신경 쓰여요!” “그런 호기심을 왜 이런 곳에서 발휘하고 있느냔 말이야!” 사실 레벨 100을 넘겨 자이언트 슬라임으로 진화하는 순간, 놈은 한 번 고개를 돌려 일행의 무력을 가늠했었다. 그러나 역시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그대로 7층으로 돌격한 것. 레벨이 늘어날수록 놈의 마나 감지력도 늘어나 일행의 힘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게 된 모양이다. 지능이 점차로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겠지. 물론 그럼에도 아르페가 던지는 마나 섞인 돌멩이는 잘 주워 먹었다. 슬라임이 똑똑해봤자 슬라임이니까. 아무리 레벨을 높여도 종의 한계란 어찌 하기가 힘든 것이다. “혹시 아르페가 던지는 마나 듬뿍 돌멩이가 녀석의 성장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 아닐까?” “내가 아까 말했잖아, 마나가 담긴 물건은 소화하는 데 오래 걸린다고. 1층에서부터 7층에 내려오기까지 놈이 먹어치운 다른 보물상자의 아티팩트도 마찬가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럼 대체 왜 먹이는 거냐니까!” 마법의 조예가 없는 르세티와 시페넌은 아르페가 벌이는 이상한 짓의 의미를 몰라 답답할 뿐이었으나 이 시점에서 메테르는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 폼으로 그와 함께 1년간 던전 사냥을 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아는 한 아르페는 여태껏 단 한 줌의 마나도 낭비한 적이 없었다. “어, 7층도 무너진다.” “와, 저기 은색 보물상자 있다. 아, 먹었다.” “지금 한가롭게 슬라임의 포식을 감상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아아아아!”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보니 이젠 마나 스트링으로 일행을 감싸는 일에도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아르페는 아프지 않게 일행을 감싸 던전 8층에까지 부드럽게 안착시켰다. [시이이이이이시이이이] [기기기기] 그곳에는 레벨 70을 넘어가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등장확률 레어인 슬라임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속성을 타고나 간단한 마법을 구사하거나, 신체 일부를 변화시키거나, 특별한 은신 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일정 수준 이하의 공격을 반사하거나 하는 등 슬라임의 바리에이션이 이렇게 풍부했구나, 하고 놀라게 해줄 슬라임들이······! [구오오오오옹!] 한 마리 빠짐없이 모두 놈에게 잡아먹혔다. 분위기 있게 등장한 것까지는 좋은데 활약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삼켜지는 신세가 되다니. 놈은 그야말로 던전의 재앙, 마왕의 재림이었다! “이젠 저 슬라임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이야아, 저거 몸 늘려서 한꺼번에 잡아먹는 거 봐라.” 한 마리 한 마리씩 잡아먹는 게 감질났는지 자신의 몸을 양옆으로 마구 늘려 던전 곳곳을 덮쳐 슬라임들을 녹여버리는 자이언트 슬라임. 그 모습은 꼭 던전에 파도라도 치는 것 같았다. “저게 파도야? 너무 예쁘다······.” “언젠가 진짜 바다에 데려다줄게.” “응! 기대하고 있을게, 아르페!” 슬라임의 포식 장면을 보면서 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두 명의 용사를 보며 시페넌은 짜게 식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저 끔찍한 광경을 파도에 비유하는 아르페나 그것을 보고 감탄하는 메테르나 맛이 간 것처럼 보이는데······.” “전하도 슬슬 환상에서 깨어나고 계시는군요.” 8층의 슬라임을 모두 먹어치운 시점에서 자이언트 슬라임의 레벨은 120이 되었다. 이쯤 되면 르세티가 놈을 싸워 이기려거든 사흘 밤낮은 꼬박 투자해야 할 것이다. “아, 아르페······ 정말 아직 아니란 말이야?” “르세티.” 아르페는 마나 듬뿍 돌멩이를 여러 개 던져 자이언트 슬라임의 배를 불려주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르세티에게 말했다. “읏.” 르세티는 그의 진중한 태도에 또다시 나이 값도 못하고 두근거리고 말았으나 다음 순간 들려온 아르페의 말이 곧장 그녀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지금 역사에 다시없을지도 모르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어. 설령 시페넌이나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이후에 펼쳐질 광경을 봐야겠어!” “왜 너나 메테르의 목숨은 희생하지 않는 건데!” 아르페는 가당치도 않은 말을 지껄이는 르세티에게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야 당신들은 몰라도 우리가 저런 슬라임 따위에 당할 리가 없으니까.” “이 비겁한 용사들 같으니! 당장 죽여! 저놈을 죽이잔 말이야!” 8층을 전부 먹어치운 자이언트 슬라임은 또다시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이대로 돌격해도 될 것인가? 자신은 충분히 강해진 것인가? 여기사와 붉은 꼬맹이는 확실히 먹어치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꼬맹이가 어딘가 불안했다. 불안하다면, 더 먹어치워야 한다. 슬라임은 굳게 결심하며 던전에게 요청했다. 9층을 열어다오! “어쩌면 던전은 용사와 조우할 때, 용사의 현재 상황에 맞추어 특별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아르페는 9층의, 레벨 100이 넘어가는 슬라임들을 마구 먹어치우며 성장하는 자이언트 슬라임을 보며 제법 진지해져 중얼거렸다.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건 상대가 다른 모험가라도 마찬가지인 것 아냐?” “내가 말하는 건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냐. 마왕의 등장에 맞추어 용사가 탄생하듯이, 용사의 등장에 의해 그것이 던전이 되었든 도시가 되었든 나라가 되었든 주위 환경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거든.”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메테르에게 한 번 설명한 바가 있다.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다. 용사는 존재만으로 기적이며, 기록의 변화의 단초가 된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생각해볼 때, 현생을 전생과 다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단순히 전생과 달라진 메테르의 행보가 아니라 새로이 탄생한 용사, 아르페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용사는 물론 그 육신에 지닌 능력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대단한건 존재만으로 상황을 변화시키는 그 미지의 힘이거든. 그러니까 어쩌면 이 던전도 우리 때문에 저 슬라임의 성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슬라임의 레벨은 기어이 150을 넘겼다. 덩치가 워낙 거대해 몸을 변형시키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지경. 그 몸에 지닌 마력도 물리력도 이젠 보통이 아니다. 던전의 심부에서, 어쩌면 영원이 될지도 모를 휴식을 취하고 있던 슬라임들은 천장을 부수고 벽을 열어주는 던전의 인도에 따라 자이언트 슬라임에게 먹히며 원한어린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구오오오오오오.] “그렇지, 잘 먹는다.” 아르페는 습관적으로 마나 듬뿍 돌멩이를 던져 자이언트 슬라임에게 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만물열람의 힘을 품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찬란한 빛을 발하며 사방의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허물어진 던전 벽,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복도, 쓰러져 가는 슬라임들의 잔해, 그것을 모두 먹어치우며 포효하는 자이언트 슬라임. 이제는 슬슬, 이 던전의 전체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0층으로 끝이야.” “아르페, 너 눈동자가······.” 시페넌은 아르페의 자안에 담긴 해석할 수 없는 마력을 느끼고 경악했다. 보통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그것을 파악했다는 것만으로도 시페넌에게 좋은 평가를 내려줄 수 있으리라. “혹시 마안이냐?” “비밀이야.” 아르페는 씩 웃으며 한 손을 펼쳤다. 그 끝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세 가닥의 마나 스트링이다. “한 번만 더 참으면 돼. 르세티는 당신 주인 잘 지키고 있고, 시페넌 너는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봐 둬.” “너······.” 그들이 던전에 들어와서도 제법 되는 시간이 흘렀다. 1층에서부터 9층으로 내려오며 한 마리 슬라임의 진화 과정을 함께하는 것은 물론 재미나고 흥겨운 경험이었지만······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용사의 턴이다. “한 번만 더 참으면 돼. 10층에서부터는 숨 쉬는 것도 조심해. 아, 메테르는 검 뽑아.” “응!” “바스타드가 아니고 롱 소드.” “······응!” 9층의 슬라임이 모두 사라졌다. 레벨 168을 달성한 자이언트 슬라임은, 이제는 한 번 해볼만 하다 여겼는지 그 거대한 몸집을 질질 끌어 아주 천천히 아르페 일행에게 다가왔다. 아니, 10층까지 내려갈 것처럼 말하더니 9층에서 결판이 나게 생겼잖아! 라는 생각에 시페넌은 뭔가 불평을 토해낼 생각이었지만, 다음 순간 아르페의 입이 열리고 조용히 튀어나온 지시가 모든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메테르, 버서크. 놈에게 네 힘을 과시해. 공격하지는 말고, 과시만.” “응,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버서크!?” 그 무시무시한 버프 스킬의 정체를 아는 르세티는 기함을 토해내며 시페넌을 감싸 안고는 다급히 메테르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버서크는 발동하고 싶다고 해서 발동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만 발동되는 스킬이 아니던가? 더구나 이제 클래스를 얻은 지 1년 밖에 안 된 꼬맹이가 무슨 버서크를 다룬다는 것인가! 버서크가 아니라 그 아류 스킬이거나 아티팩트에 붙은 옵션인가를 사용하려는가보지, 그녀는 멋대로 결론을 노리고 메테르를 관찰하다가는······. “후우······ 흡.” “뭣······ 버서크를 마음대로 발동하다니!?” 정말로 메테르가 광화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음을 깨닫고는 기겁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강자의 격을 보이고 있었으나, 버서크와 본 건틀렛의 버프를 모두 발동한 메테르에게서는 족히 레벨 200에 달하는 강자의 품격이 엿보였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일국의 기사단장의 레벨이 200을 넘기지 못하는 실정인데 지금 고작 열세 살짜리 꼬마 용사가 그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 물론 버서크의 위용을 등에 업기는 했으나, 그녀가 버서크를 온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그녀는 레벨 200의 상위클래스에 뒤쳐질 것이 거의 없었다. 메테르는 차오르는 분노를 고스란히 롱 소드에 담아, 그 가녀린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정련된 자세로 똑바로 자이언트 슬라임을 겨누며 입을 열어 말했다. “너, 정말 덤빌 거니?” [구, 구오오오······!] 물론 자이언트 슬라임에게도 그 강함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돌아온 놈의 대답은 간단했다. 바로 9층과 10층을 막는 복도를 무너트려 일행을 10층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옹!] “그렇지!”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르페가 보기 좋게 마나 스트링으로 일행을 감싸 함께 10층에 안착했다. 메테르의 기세에 한껏 쫄아버린 자이언트 슬라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폭주하며 10층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있었고, 그 자리에 남겨진 일행은 메테르의 기세 한 번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얼이 빠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했어, 메테르.” “안 돼, 너무 칭찬해주면 기분 좋아져서 버서크 풀려.” 메테르는 미소 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자세를 유지했다. 아르페는 그 말에 쿡 웃어버리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었다. “어?” “어······!?” 그것을 알아본 시페넌과 르세티가 동시에 기묘한 목소리를 냈다. 아르페는 그들을 무시하고 손에 들린 그 물건에 자신의 마나를 모두 집중했다. 마나를 잔뜩 주입받아 활성화된 데마이트의 원석이 아르페의 눈보다도 찬란한 보랏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Chapter 7. 던전, 진화, 성공적 - 3 “너 그거! 그거 다시 내놔!” “줬던 거 뺏기 없기.” “으그으으으으.” 이젠 둘도 보석의 가치를 안다. 어떤 보석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역도 무리가 황궁에서 도망친 그들을 필사적으로 쫓게 만드는 원흉이라는 사실까지는 안다. 그러나 아르페는 새빨간 혀를 내밀어 그들을 놀리며 데마이트의 원석에 마나를 불어넣을 뿐이었다. “내 말 들리니? 아니, 그야 아직은 제대로 의사소통이 안 되겠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데마이트의 원석, 제대로 된 가공을 하기 전까지는 그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워낙에 대단한 보석인지라 마나를 증폭하는 능력이나 마법을 기억하는 능력만은 이 상태에서도 제법 출중하고, 지금의 아르페에게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걸로 뭐 하려고! 설마 그것도 아까 그 돌멩이들처럼 슬라임한테 먹이려고?” “미쳤어, 그랬다간 정말로 저 슬라임이 한 단계 앞으로······.” “바라던 바야.” 자이언트 슬라임은 어떻게든 메테르를 압도할 강함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던전의 10층 또한 놈의 몸부림에 맞추어 여태까지 없었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구획을 나누고 방을 구분하던 모든 벽을 사르르 녹여 버리고 비밀 공간까지 모두 드러내 던전에 남아 있던 모든 슬라임을 놈과 조우시켜버린 것이다. [키이이이이!] [기긱! 기기기!] 졸지에 하나의 거대한 광장이 되어버린 던전에 내동댕이쳐진 슬라임 모두가 놈의 의사를 파악했고, 허무하게 죽어줄 수는 없었기에 저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발악을 하며 놈에게 대적했다. 고작 슬라임 따위를 보며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그 광경은 실로 장엄했으며 압도적이었다. “저 따위 미물도 살기 위해 투쟁하는구나······.” “인간이나 다를 바 없어. 반대로 말하면, 인간도 몬스터와 다를 바가 없지.” “그게 무슨······ 인간은!” “조용.” 이 꼬맹이들을 상대로 삶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있을 생각은 없다. 아르페는 후, 짙은 한숨을 내쉬곤 마지막으로 데마이트의 원석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메테르, 마나에 여유는?” “버서크의 유지만이라면 충분해. 옵션도······ 세 번 정도는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아, 그러면 대기하고 있어.” 아르페는 손에 쥔 보랏빛의 원석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내던졌다. 자이언트 슬라임에게 대항하던 슬라임 중 한 마리가 우연히 그것을 삼켰다. [기이이이이이] “정말 먹어버렸잖아!” 물론 데마이트의 원석은 슬라임의 레벨이 얼마나 높건 간에 그리 쉽게 녹아내리는 물건이 아니다. 놈은 그것을 품고, 어쩐지 강해진 것만 같다는 생각과 함께 다른 슬라임과 대열을 맞추어 자이언트 슬라임을 공격해 들어갔다. [구오오오오오오오!] 자이언트 슬라임은 그 모두를 먹어치웠다. 몸에 난 상처 같은 것들은 동족을 먹는 것만으로 간단히 회복되었다. 신체 구조가 간단하기에 그만큼 회복도 쉽다. 동족 포식으로 인한 성장도 즉각적이고, 레벨 업도 빠르다. 바로 그것이 놈들을 공략하는 단서가 된다. “슬라임의 수가 줄어가.” “처음엔 5천 마리도 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 던전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그야 이렇게 깊은 곳까지 내려오면 마나의 영향도 짙어질 대로 짙어졌겠지. 더욱 많은, 더욱 강한 슬라임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마나가 짙은 곳에서는 강한 몬스터가 생겨나기 쉽다. 10층의 모든 비밀 통로가 한꺼번에 열려 튀어나온 슬라임 떼는 제아무리 아르페와 메테르라고 해도 몇 날 며칠은 각오해야 할 양이었으나 지금은 그 모두를 자이언트 슬라임이 해치워주고 있었다. “꼭 레코드 링크 같네!” “온전한 공유가 아니기 때문에 효율은 없을 거야. 하지만 단일 개체의 ‘진화’를 볼 수 있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레코드 링크보다 좋을 수도 있지.” “기대된다!” 슬라임의 상위 개체는 정말로 드물기 때문에 좋은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르페와 메테르가 저 압도적인 광경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제법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시페넌과 르세티는 경악했고, 곧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아, 들어갔네.” 그때쯤 데마이트 원석이 자이언트 슬라임의 체내로 들어갔다. 그 순간 이미 놈의 거대한 몸 곳곳에 박혀 있던 마나 듬뿍 돌멩이들이 그에 반응해 미약한 공명을 일으켰다. 그야 아르페가 의도한 바였으니 당연했다. “아르페, 슬라임 무리의 끝이 보여.”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해, 메테르.” “응, 나는 준비 됐어.” 분명 이 던전에는 실로 갖가지 슬라임이 잠들어 있었다. 어쩌면 대륙적으로도 드문 던전이며 앞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두가 하나의 슬라임에 먹혀 융화되고 있었다. [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던전의 10층은 기어이 모든 구조물이 사라져 완전히 평평한 하나의 광장으로 변했다.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은 아르페 일행을 제외한다면 오직 거대한 한 마리의 슬라임 뿐. 놈은 던전 모두를 먹어치웠다. 마나를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체내에 담았다. 그것은 여태까지 없었던 일종의 위업. 그 위업이 놈을 상위 클래스로 이끌었다. [구오오오오오옹!] “맙소사, 빛을 발하고 있어······ 이건.” “슬라임이 진화하나 봐!” “여기서 더 상위 클래스가 있었다고!?” 전신으로 발광하는 슬라임을 보며 만물열람의 능력을 품은 아르페의 자안이 기이한 빛을 토해냈다. 여태껏 대륙에 없었던 새로운 기록을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란 얼마나 감미롭고 자극적인가! 자신도 모르는 새 아르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설마 시페넌을 교육시켜줄 목적으로 온 던전에서 이런 대박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역시 마족······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하는구나! [자이언트 슬라임] [레벨 ? 199] 레벨 100을 넘긴 순간부터 자이언트 슬라임이라는 개체명으로 고정되어 있던 슬라임이, 어느 순간 빛 속에서 한층 더 거대해진 몸집을 드러냈다. [휴즈 슬라임] [레벨 ? 200] 점액질의 몸체는 무지갯빛으로 발광하고 있었으며 그 안의 막대한 마나는 놈의 육신은 물론이고 지능까지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이전보다 더욱 거대한 몸을 이끌고 움직이는데도 쓸데없는 힘의 소모가 적고, 당장 아르페의 만물열람에 확인되는 새로운 스킬만 해도 여러가지. 대상을 보다 효과적으로 포획하고, 소화하는 데에 필요한 스킬들이 모여 놈을 강하게 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가장 아르페를 기쁘게 하는 것은 휴즈 슬라임이라는 놈의 이름이다. 극히 단순하나 분명 여태까지의 대륙에는 없었던 개체명. 희귀도를 굳이 따지자면 울트라 레어 정도는 되지 않을까. “됐다.” [됐다.] 아르페와 슬라임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역시나 인간에게 의사를 전달할 만큼의 지능을 얻었단 말인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놈의 몸이 환희로 부르르 떨린 바로 그 순간 아르페가 소리 높여 외쳤다. “이제 공격해, 메테르!” “알았어!” [이젠 먹을 수 있어!] 광장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크기로 성장한 슬라임이 전신을 날려 그들을 덮쳐왔다. 그러나 놈이 스킬을 발휘하기 직전 메테르가 쥐고 있던 롱 소드의 검첨에 모인 마나가 황금빛의 일직선 에너지가 되어 놈을 타격했다! [이 정도로는······!] 휴즈 슬라임이 되면서 놈이 얼마나 강화되었으면, 메테르의 마나가 담긴 공격이 정통으로 명중했음에도 놈의 몸에는 한 차례 관통상이 생겼다가 그대로 아물어버릴 정도였다. 메테르의 공격으로 놈을 막을 수 있었던 시간은 불과 3초 정도에 불과했다! “하이퍼 러빙!” 그러나 그것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던 아르페가 방아쇠를 당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끄으으으으윽!?] 휴즈 슬라임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당장에라도 먹어치워야 할 것들을 눈앞에 두고 놈은 애꿎은 던전 바닥과 벽에 마구 제 몸을 부딪치며 발작을 했다. 높은 지능을 얻었기에 고통이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승리를 확신했던 순간 다가온 패배이기에 더욱 쓰라리다. “설마 마법을 이렇게도 발현할 수 있었다니······.” “마도사란 정말 무서운 존재구나!” 아르페가 발현한 하이퍼 러빙의 대상은 물론 아까부터 던져 놈에게 먹인 돌멩이들과 데마이트의 원석이었다. 분명 자신의 몸통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유의사를 갖기라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사방을 문지르고 있었으니 미치지 않고 버티겠는가! [그으으으······!] 그럼에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1층에서부터 10층까지를 전부 부수고 내려오면서까지 오직 일행을 먹어치우기 위해 탐욕스레 동족을 포식한 것이다. 이 정도 고통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놈의 탐욕이 너무나 강했다. “쯧,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겠지.” 데마이트의 원석이 하이퍼 러빙의 힘을 터무니없이 증폭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놈을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놈의 정신력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그오오오오오오! 먹는다! 먹는다! 먹는다! 먹는다!] 놈은 내부에서부터 육신이 허물어져가고 있음에도 기어이 몸을 움직여 그들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슬라임의 거대한 육신을 올려다보며 시페넌과 르세티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때 어째선지 아르페가 롱 소드를 쥐고 있는 메테르의 손 위에 한 손을 얹었다. “메테르, 두 번째 공격 가자.” “으, 으응.” 메테르는 아르페 쪽에서 행한 스킨쉽에 마음이 허공에 붕 떠오를 것 같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버서크를 유지하는 데에 곤란함을 느꼈지만 정말 스킬이 풀렸다간 저 슬라임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감정 통제에 어려움을 느낀 그녀의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냉정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냥 아까처럼 에너지를 모아서 쏘아내면 돼. 나머지는 내가 할게.” “응, 해볼게······.” 메테르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마나를 검첨에 모았다. 그때 아르페가 자신과 그녀의 마나를 공유하는 마나 링크 마법을 발현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메테르도 레코드 디바이드를 발현해 공유를 더욱 활성화했다. 좋아, 이것으로 같은 스킬이라도 위력이 훨씬 증폭될 것이다. “쏴. 마나 스트링.” 그리고 서로 다른 스킬과 옵션의 힘을 한 데 묶어내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 메테르는 롱 소드에 모인 에너지가 마법으로 변화하는 것을 느꼈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을 쏘아냈다. 황금빛의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섞여 탄생한 그 기기묘묘한 에너지는 그대로 휴즈 슬라임에게 명중해 놈의 몸통에 관통상을 내고······.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르페의 의지를 전달받아, 중간에 궤도를 꺾어 다시 놈의 몸속으로 파고들어갔다! “하이퍼 러빙!” 심지어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마나 스트링으로 실체화된 에너지의 광선에 기어이 하이퍼 러빙의 옵션까지 부여되자, 그것은 자신이 품은 에너지를 마찰로 화해 슬라임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합성 마법, 대륙의 다른 모든 마도사를 좌절케 만들 고도의 술법이었다! “역시 마도사는 대단해!” “아르페는 원래 대단하다니까!” “머, 멋져라······.” 물론 이 자리에는 하나같이 바보들만 모여 있었기 때문에 단지 대단하고 멋지다는 감상밖에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옹!] 휴즈 슬라임이 고통과 분노로 울부짖었다. 기껏 적을 모두 먹어치울 힘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한 순간에 이런 예상치도 못했던 공격이 들어오다니! 내부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돌덩이들 탓에 제 힘을 내지 못하는 것도 분한데 추가로 들어온 공격이 너무나 아파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죽인다! 죽여서 먹는다! 죽인다!] “또 던전에 부탁해보려고? 하지만 어쩌나, 이젠 더 이상 던전이 숨기고 있는 게 없는데.” 발악하는 적을 앞에 두고 아르페의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놈은 몸을 늘려 던전 벽에 부딪히거나, 어떻게든 약한 적부터 집어 삼켜보려 몸을 분열시켜 뻗어내 보거나 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시도가 하이퍼 러빙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던전은 이미 숨겨두었던 모든 것을 내놓았기에 휴즈 슬라임이 더욱 강화될 방도도 없었으니, 놈의 발악은 정말이지 무의미하고 헛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어, 저 보랏빛 보석······.” 아무것도 못하는 적을 두고 벌벌 떠는 것도 한심하다 여겨진 르세티는 몸을 바로 세우다 말고 휴즈 슬라임의 체내에서 발광하는 보석의 변화를 눈치 챘다. 점점 더 보랏빛의 발광이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상위클래스로 거듭나면서 놈의 용해력도 상당해졌거든. 아마 데마이트의 원석이 실시간으로 가공되면서 힘을 더하고 있을 거야.” 아르페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자 르세티의 표정은 더욱 기묘해졌다. “너, 적을 공격하면서 보석을 가공할 생각까지 했었단 말이야······!?” “당연한 거 아냐? 그냥 죽일 거면 마나 수정 정도면 충분했어.” “너······!” 뻔뻔하게 미소 지으며 대꾸하는 아르페. 르세티는 그 짜증나는 꼬맹이의 미소를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미소에 자신이 살짝 반해버렸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3분, 휴즈 슬라임은 무의미한 발악을 멈추고 얌전히 죽음을 맞이했다. 대륙에 새로운 역사가 기록되었다가, 조용히 묻힌 순간이었다. ────────────────────────────────────────────────────────────────────────Chapter 7. 던전, 진화, 성공적 - 4 “으아아아아아아!” “잘 한다, 시페넌. 조금만 더 왼쪽으로 굴러. 거기 먼지 많으니까.” “나쁜 노오오오오오옴!” 시페넌이 괴상한 신음을 토해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과도한 레벨 업이 한꺼번에 그를 덮쳐와 일어난 현상이었다. “전하는 저 슬라임을 토벌하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왜 얌체같이 경험치를 나눠드시고 계신 것이지?” 시페넌과는 반대로 일절 경험치를 얻지 못한 르세티가 이를 갈며 아르페에게 물었다. 바닥을 구르는 황태자나 주인을 질투하는 여기사나 잘 하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며 아르페는 친절하게도 대꾸해주었다. “네 인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있어. 저 슬라임이 동족포식을 시작한 건 어디까지나 시페넌에게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거든. 놈은 그 시점에서 이미 시페넌에게 어그로가 끌려 있었고, 아마 데미지도 조금 입은 상황이었겠지. 시페넌의 공헌도가 책정된 건 그 이유에서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공헌도도 아닐 텐데!” 시페넌의 성장에 어째 불만을 품은 듯한 르세티의 태도에, 한창 자기 옷을 희생해 바닥의 먼지를 닦아내고 있던 시페넌이 호통을 쳤다. “끄아아아아아! 너는 네 주인이 성장한다는데 왜 투덜거리는 거냐!” “하지만 전하, 레벨만 많이 올라도 쓸모가 없습니다!” “넌 지금 내가 쓸모가 없다고······ 으갸아아아아!” 이 주종관계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아르페가 알 바는 아니지만······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네 말마따나 시페넌에게 배분된 경험치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아. 많아봐야 한 3퍼센트 정도겠지. 하지만······.” “그 3퍼센트만으로도 저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정확히 맞췄어.” 그야 지금은 희미한 잔해만 남기고 죽어간 저 휴즈 슬라임은 레벨만 200에, 던전 몬스터에, 보스에, 엘리트에, 울트라 레어 등급의 몬스터인 것이다. 몬스터는 원래 직책이나 등급이 걸릴수록 기록과 경험치가 폭증하는 바, 제아무리 공헌이 적어도 레벨 20언저리에 불과했던 시페넌이 순식간에 성장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 일은 없다. “그리고 스킬 쪽도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에게는 [되새김질] 보너스가 있잖아.” 되새김질, 즉 몬스터를 상대하며 스킬을 시전했을 때와는 별개로 몬스터가 죽는 순간 몬스터의 기록과 전투 업적의 영향으로 다시 한 번 스킬이 성장하는 현상을 익살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르세티는 여전히 납득을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봤자 저 슬라임 상대로는 칼질 한 번 안하셨을 텐데······.” “그게, 아무래도 했던 모양인데?” 아르페는 연속적인 레벨 업이 완전히 끝나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는 시페넌을 만물열람으로 훑으며 가벼이 대꾸했다. 녀석의 머리 위에, 언젠가의 메테르보다도 더욱 가관인 정보가 문자가 되어 둥실거리고 있었다. [시페넌 르 디아스] [레벨 - 49] [황태자] [쌍수단검술 Lv7] [배틀스텝 Lv6] 놈을 상대하면서 일단 칼질 한 번, 몸 비틀기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것이 곧 레벨 200짜리 상위클래스 몬스터를 처치하는 데에 소용된 업적으로 취급된다. 따라서 시페넌은 레벨에 비해 터무니없는 스킬 레벨의 소지자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의 자질이 워낙 출중하여 스킬의 성장에도 보너스가 붙은 것인지, 기본 스킬 레벨만 따지면 르세티에게도 크게 쳐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아르페가 그 내역을 구구절절 읊어줄 수는 없었으나 르세티가 경악하고 절망하기에는 충분한 정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칼질 한 번 해두는 건데!” “몬스터에게 실제로 위협이 되는 행위가 아니면 효과가 없지. 지금 시페넌이 성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슬라임이 성장하기 전에 칼질을 했기 때문이라니까?” “어째서 전하의 운만 저렇게 오지게 좋은 거야!” “내 운이 좋다는데 왜 네가 불만인 거냐, 르세티이이이이!” 투덜거리는 르세티와 이를 벅벅 가는 시페넌. 아르페는 그쯤에서 그들에 대한 모든 판단을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르세티는 아직도 아르페에게 묻고 싶은 게 남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레벨이 너무 높아서 슬라임의 경험치로도 레벨 업을 거의 못하는 거야?” “아니, 그 정돈 아니지만······ 우리는 슬슬 이런 일에 익숙하거든.” “이런 일에 익숙해!?” “음······ 잠깐 가만히 있어볼래?” “꺅!?” 아르페는 르세티의 순진하고 커다란, 파아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만물열람을 발동해 정보를 확인했다. [아르페] [용사] [레벨 ? 163] [마나 스트링 Lv7] [하이퍼 러빙 Lv24] [마나지배 Lv35] [투척 Lv28] [······] “너, 너! 이런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아냐! 이 꼬맹이! 꼬맹이가아!” “······어쩌자고 내가 저런 얼간이를 호위기사 삼아서.” 졸지에 아르페의 거울 신세가 된 르세티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분노했지만 아르페는 생각에 빠져 있어 그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분노하는 르세티를 놓아주며 본격적으로 고뇌에 빠졌다. ‘이거 너무 빠른데.’ 그는 레벨 145인 상태에서 초보자 던전을 졸업했다. 그야 얼마 전 검은 옷의 기사들과 시페넌 곁에 잠입해 있던 기사들을 해치우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레벨이 수십 이상 낮은 놈들이었기에 경험치는 거의 오르지도 않은 수준. 그런데 이번에 휴즈 슬라임을 해치워 레벨이 한꺼번에 18이나 상승했다. 놈을 처치하는 데 써먹었던 스킬들의 성장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제아무리 상대가 특수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아르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마나 링크와 레코드 디바이드에 신경이 미쳤다. ‘혹시 메테르의 능력이 내게 영향을······!?’ 만약 그렇다면 최악이다! 아르페는 잽싸게 메테르를 돌아보았다! [메테르] [레벨 ? 174] “좋아, 괜한 걱정이었군.” 여전히 안정적으로 미쳐버린 성장속도였다! “괜한 걱정이 아냐. 외간 여자를 그렇게 빤히 들여다보면 실례니까 얼른 사과해!” “뭐?” 웬일로 메테르가 옳은 소리를 하며 아르페를 타박했다! 그녀는 양볼을 잔뜩 부풀리며 타박타박 걸어와 아르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르세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앞으로는 르세티 씨한테 다가가지 못하게 할 테니까 안심하세요.” “어, 음, 으으음······ 아니, 꼭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절대로! 다가가지 못하게 할 테니까! 르세티 씨가 조금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어째서 내가!?” 혹시 아직 버서크가 풀리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르세티는 메테르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던 나머지 시페넌을 방패로 삼아 숨었다. 참된 호위기사의 표본이었다. “꽁트는 거기까지 해라. 그보다 아르페, 저기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은데?” 슬슬 이 파티에서 누구를 믿고 누구를 무시해야 하는지 감을 잡아가는 시페넌이 다 무너진 던전 광장 한구석에서 빛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아르페를 불렀다. 대강 그의 심정을 짐작하는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던전은 갖가지 재화를 품고 있는 장소야. 그런 던전의 한 층이 끝날 때, 혹은 던전이 완벽하게 클리어되었을 때. 던전과 계약을 맺은 던전 상인들은 그 재화를 손에 넣을 목적으로 던전에 나타나지.” “소환마법의 일종인가? 실로 고도의 술법이구나.” 그들이 떠드는 사이에 빛 무리가 사라지고 그 안에서 아르페와 메테르에게는 제법 익숙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손님! 정말로 며칠 안 되어 다시 뵙게 되네요!” “켁, 또 아줌마야.” “나 저 아줌마 싫은데······.” 매끈한 갈색의 피부, 허름한 상인의 옷으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풍만한 바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은발과 살짝 가늘면서도 예리하게 빛나는 은안. 다름 아닌 애니웨어 상회의 중견상인 미케나였다. “조금 더 반가워해주실 줄 알았는데 그 반응은 뭔가요? 아무리 저라도 상처를 조금은 입는답니다······ 어라, 일행이 늘어났네요?” “정말로 나타났구나······ 인세에 존재한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는 미형에, 귀가 길어. 말로만 듣던 엘프인가?” “안녕하세요, 새로운 손님. 하지만 던전 상인의 정체를 캐는 것은 금기랍니다.” 미케나는 비즈니스 스마일을 지으면서도 단호하게 대꾸했다. 시페넌이 살짝 겁을 먹고 물러나는 그때 아르페가 심드렁하게 보충했다. “상대가 알지 못하게 캐는 거라면 금기가 아냐. 물론 그게 들키면 혼나지. 저 아줌마처럼 말이야.” “큭, 설마 또 실패하다니······!” 아르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어 휘젓는 마나 스트링 한 가닥에, 미케나가 시페넌과 르세티를 향해 어떻게든 몰래 발휘하려 했던 감지 마법이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설마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한 감지 마법까지 탐색하고 방해할 수 있다니······ 그래도 손님의 가공할 능력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획득했으니 손해는 안 봤어요!” “하지만 지금부터 손해를 보겠지. 30% DC.” “으긍으응윽.” 미케나는 해석하기 어려운 신음을 냈다. 이쯤 되면 아르페에게 당하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르페는 시페넌에게 바턴을 이어받아 바닥을 구를 기세인 미케나를 무시하고 메테르와 함께 휴즈 슬라임을 루팅했다. 그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물론 소중한 데마이트의 원석. 휴즈 슬라임의 능력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여 그 단단했던 원석의 겉 부분이 아주 조금쯤은 녹아 있었다. “어디 보자······ 오.” 아르페는 적당히 물을 부어 점액질 따위를 닦아내고는, 이전보다 더욱 빛을 발하게 된 데마이트의 원석을 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휴즈 슬라임 50마리 정도만 추가로 나타나주면 얼추 가공이 가능해질 것도 같은데.” “이런 괴물을 50마리씩이나 만들어내겠다고!?” “애석하게도 무리니까 그렇게 겁먹지 마. 이렇게 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어디 자주 찾아오겠냐.” “쉽게······.” 놈은 그 외에도 여태까지 던전을 부수고 내려오면서 삼켰던 던전 내의 모든 보물과 함께, 놈의 기록과 마나를 기반으로 한 아티팩트며 금화를 마구 토해냈다. 메테르가 그중 하나를 보며 반갑게 외쳤다. “스킬 북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미 우리 둘 다 배운 거네.” 스킬 북의 이름은 마나지배. 마나감지 스킬을 익히고 있어야만 익힐 수 있는 스킬이자, 레벨 100 이상의 상위 클래스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가 익혀야 하는 스킬이다. 하지만 이 스킬을 자력으로 익히는 것은 마도사의 재능을 타고난 이가 아닌 이상 어지간히도 힘들다. 스킬을 자력으로 익히지도 못하고 돈이 없어 스킬 북을 사지도 못하는 이들은 레벨 100의 상위클래스가 되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메테르는 그것을 레벨 2에 익혀버렸으니 그녀가 얼마나 사기적인 재능의 소유자인지는 이하생략. “이미 스킬을 익히고 있는 이상, 이걸 사용하는 시점에서 마나가 조금 불어날 뿐인데······.”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여러모로 따져보면 이 스킬 북은 그냥 파는 것이 낫다. 마나지배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스킬 상위 랭킹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스킬이니까. 즉, 가격이 비싸다. 무지하게 비싸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아르페는 뭔지도 모르고 자신을 멍하니 보고 있는 시페넌에게,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스레 물었다. “너 마나지배 있냐?” “그게 뭐냐?” “그렇겠지. 잘 들어라.” 아르페는 히죽 웃으며 앞으로 시페넌이 익혀야 하는 스킬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우선적으로 익혀야 하는 스킬들의 랭킹까지 매겨서! 그리고 그중 단연 1순위가 바로 마나지배였다. “너······.” “미리 말해두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이지!” “거짓말이 아니랍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전하. 저도 마나지배를 돈 주고 사서 익혔으니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 기둥뿌리가 뽑힙니다. 저야 황실 지원으로 쉽게 살 수 있었지만요.” 미케나와 르세티가 적절한 시점에 아르페의 말을 긍정했다! 그럼에도 시페넌은 끄으응, 고민하다가는 고개를 저어버렸다. “나는 내 재능만으로 마나지배를 익히겠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되는 아이다!” “그래, 그럼 이건 그냥 팔지 뭐. 아줌마, 얼마까지 줄래?” “아줌마가 아니라니까요! 300골드에 살게요. 물론 다시 팔 땐 350골드를 넘기겠지만!” “좋아, 인심 썼다. 300골드에······.” “잠깐!” 도매가에서 소매가로 넘어가며 50골드가 뻥튀기되려는 바로 그 순간 시페넌이 스톱을 외쳤다. 아르페와 미케나가 동시에 히죽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 마음이 바뀌었어?” “지금 거래중인데 괜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마시죠, 손님?” 서로 으르렁거릴 땐 언제고 다른 사람을 골려먹을 땐 호흡이 착착 맞는 둘! 시페넌은 이를 갈며 외쳤다. “네놈들 언젠가 반드시 죽여 버린다! 하지만, 그건 내가 산다! 파티원이니까 도매가겠지!?” “그럼, 네 공헌도까지 확실히 따져서 할인해줘야지. 자, 싸게 260골드만 받을게.” 아르페는 찡긋 미소 지으며 스킬북을 시페넌에게 건네었다. 시페넌은 금화가 든 아공간 주머니를 뒤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케나는 그런 그를 보며 동정하고 말았지만 애초에 아르페의 의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순간부터 그의 패배는 확정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너 클래스 전환도 해야 되는 거 알지? 멍청하게 아무 대신전이나 들러서 정체 뽀록나지 말고 여기서 소모성 아티팩트 사서 해결해라.” “그래서 그건 얼마냐!” 아르페가 미케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이미 진즉 대기하고 있던 그녀는 세일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300골드입니다, 손님!” “끄그르으아아아악!” 현재의 황태자가 미래의 도적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Chapter 7. 던전, 진화, 성공적 - 5 [시페넌(르 디아스)] [도적] [레벨 ? 49] 300골드를 주고 산 세례의 수정구는 시페넌에게 무사히 새로운 클래스를 제시했다. 세 번째의 용사가 나타난다거나 하는 일 없이 이번엔 아르페의 전생에서 그랬듯 도적의 길이 열렸다. 세례의 수정구는 비싸고 희귀한 아티팩트인 만큼 일단 한 번 주인을 등록하고 나면 몇 번 더 써먹을 수 있기에, 차후 시페넌이 상위클래스로 가는 길을 열 때에도 그것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후우, 도적이라.” “큭, 정말 도적이라니······.” 내심 또 다른 변수가 생길까 긴장했던 아르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으나, 르세티는 자신이 모시던 황태자가 도적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허망해지고 말았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시골에서 젖소 여물이나 주면서 살까······.” “너 지금 낙농업을 우습게 보는 거냐? 그런 오만한 태도는 마왕이 용서해도 내가 용서 못 해!” “넌 낙농업에 대체 어떤 환상을 품고 있는 거야!?” 그들 가운데에서 오직 시페넌만이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도적이 뭐 어때서 그래. 내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아.” 황태자라는 위치는 절대적인 권위인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족쇄이기도 했다. 비록 국왕폐하인 아버지가 죽고, 작은 아버지의 마수를 피해 도망친 끝에 이른 곳이기는 하나 시페넌은 지금의 절경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도 없는 입장이다만······ 그래, 지금부터는 도적 시페넌인가. 후, 제법 괜찮군. 그리도 그리워했던 새장 밖의 자유가 비로소 손에 잡히는 기분이야.” 시페넌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아르페에게 다시 한 번 예를 표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너를 찾아 나선 것은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는지도. 고마워, 아르페.” “힘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부터 고마워하면 죄책감 들잖아.” “정말 넌 사람의 감사를 순순히 받아주지 못하는구나.” 마왕군 사천왕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그들이 제 감정에 솔직했다간 모든 이야기는 시작도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아, 그리고 나중에 감동적인 반전을 주기도 힘들다. “어라? 시페넌, 시페넌······.” 그때, 가만히 그들을 보고만 있던 미케나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요즘 한창 핫한 이슈 가운데 그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던 그때. 시페넌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맞다. 나는 디아스의 황태자였다.” “전하, 그걸 말씀하시면!” 굳이 감출 정보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까, 아직 어려서일까. 그야 던전 상인이 손님에 대해 마구 떠들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함부로 자신을 노출한 것이 현명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페넌이 그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들을 돌아보며 상쾌한 표정을 짓는 시페넌은,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과거의 자신을 깔끔히 털어버리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르세티. 나는 어디까지나 레벨 49의 도적 시페넌일 뿐이니까. 마왕을 물리치기 전까지, 나는 황태자라는 직책은 그대로 어둠 속에 묻어둘 생각이다. 그러니 설령 누가 알게 되든 상관은 없다. 누구도 황태자 시페넌을 찾지 못할 테니까.” 미케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나, 그랬군요. 어쩐지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더라니. 가만, 그러면 이쪽 꼬마 손님들도 혹시 원래 왕실과 연이 닿아 있었던······.” 그녀의 상상력이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던 그때 아르페가 한손가락으로 뻗어낸 마나 스트링이 끝을 둥글게 말아 미케나의 매끈한 이마를 두들겼다. “아얏!” “그렇게 끈질기게 굴면 남자한테 인기 없어, 아줌마.” “큭······ 이래봬도 상인 시작하기 전에는 저랑 눈 한 번 맞춰보려는 남자들로 중앙 광장 열세 바퀴는 돌았거든요! 제 매력을 모르는 건 손님뿐이라구요, 손님! 이래서 어린애는!” 아르페는 미케나가 투덜거리는 것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전리품들을 모두 긁어모았다.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고작 슬라임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치고는 성과물이 너무나 대단했다. 물론 첫 발견자인 까닭도 있을 것이고 던전 내의 모든 비밀 장소란 비밀 장소는 모두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아티팩트들이 모두 한 차례 휴즈 슬라임의 몸속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리라. 본디 지닌 마력이 미약했던 아이템들은 휴즈 슬라임에게 먹히는 과정에서 대부분 순수한 마력으로 화해 사라졌고, 그 마력의 대부분이 휴즈 슬라임을 강화시키거나, 놈에게 먹힌 다른 아이템들을 강화시켰다. 그렇게 남은 아이템들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엔 대량이네요. 아예 던전 하나를 완벽히 소탕하셨나 봐요?” “응, 뭐 그렇지. 어디보자······ 자잘한 거 다 합쳐서 653골드. 콜?” “음······ 콜.” “좋아.” 서로가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이제 아르페와 미케나의 거래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물론 그 빠른 시간에 가치 산정과 거래가 끝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나머지 일행은 거래를 하는 아르페와 미케나를 무슨 몬스터 바라보듯이 했다. 아르페는 서넛의 아티팩트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깔끔하게 미케나에게 넘겼다. 아공간 주머니에 금화를 다 때려 넣고, 그제야 본격적으로 남은 아티팩트의 감정에 들어갔다. 미케나가 군침을 삼켰다. “사실 정말 팔아주셨으면 하는 물건들은 그쪽인데······.” “고민 좀 해보고.” 사실 아르페는 스킬 북이 더 나왔으면 했지만 그건 마나지배만으로 끝났다. 흔한 파이어 마법의 스펠 북도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은 휴즈 슬라임이라는 존재만큼이나 희귀한 아이템들이었다. “일단 첫 번째로는 이 포션.” [점액질 포션] [모든 액체를 점액으로 만든다. 마나 저항력이 낮은 이가 들이키면 피가 점액이 되어 즉사. 그 성질이 극히 희귀하며, 위협적인 마나가 검출되지 않기에 암살용도로 쓰기에 걸맞다. 극한에 가깝게 진화한 슬라임만이 낮은 확률로 만들어내기에 역사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음?” “손님, 그 포션은 대체 뭔가요? 네? 저, 신경 쓰여요!” “이건······ 일단 킵.” 대체 어디에 써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꼭 이렇게 수상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이 결정적인 순간 도움이 되게 마련. “앗, 뭔지 설명이라도 좀······ 우이이이.” 아르페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것을 품에 집어넣자 미케나의 볼이 팅팅 부풀었다. 물론 연상취향이 아닌 아르페는 이하생략, 두 번째 전리품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휴즈 슬라임의 몸체 일부분을 떼어내 만든 것처럼 보이는, 다소 강도가 불안해 보이는 롱 보우였다. [플렉시블 헌터보우]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모습을 숏 보우에서부터 발리스타까지 변화시키는 활. 마나를 소모해 사용자의 궁술 레벨에 비례한 위력의 마나 애로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레벨 100 이상의 궁수 상위클래스가 아닌 한 사용할 수 없으며, 마나를 불어넣어 내구도를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티팩트의 정보를 확인한 아르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태클을 걸고 말았다. “발리스타는 더 이상 활이 아니지 않아!?” “정신 차리세요, 손님! 그건 발리스타가 아니라 롱 보우라구요!?” 아르페는 만물열람을 다시 한 번 발동해 활의 각 부분의 내구도를 확인하고, 활을 숏 보우에서부터 발리스타까지 실제로 변화시켜보며 그 힘을 대강이나마 시험했다. 물론 이 활의 사용조건은 궁수의 상위클래스이지만 아르페는 용사이기 때문에 그 제한을 가볍게 씹어 먹는다. “헉, 진짜 발리스타가 되잖아요!?”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아르페는 경악하는 미케나를 외면하고, 얌전히 물러나 있는 메테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메테르, 활 써보고 싶은 생각 있어?” “재밌어 보이기는 하는데 검이나 몽둥이보다 잘 다룰 자신은 없어. 그러니까 안 할래.” “좋은 판단이야.” 아무리 모든 무기술을 제 직업만큼 잘 다룰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라고 해도 이것저것 배워대다간 언젠가 낭패를 볼 것이다. 그녀처럼 근접 전투능력이 출중한 이는, 솔직히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분야에 집중해줬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손님, 그건 제가······.” “1,650골드. 살래?” “으으음, 제 주인을 찾기만 하면 그 두 배까지도 받아낼 자신이 있기는 한데······.” “이거 세상에 별로 없는 타입의 아티팩트야. 알지?” 아르페의 말이 실로 지당했다. 사용목적에 맞추어 그 모습을 변화시키는 활이라니! 단거리부터 초장거리까지 모두 이것 하나만으로 커버가 가능하고, 화살도 따로 필요 없고, 내구도까지 회복시킬 수 있다. 당장 아르페가 궁수였더라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이 아티팩트를 지를 것이다. “제 주인, 제 주인······.” 미케나는 무척 오랜 시간 고민했다. 이미 대형 거래를 치렀기 때문에 또다시 커다란 지출을 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던 것. 그러나 아르페가 걱정 말라는 듯이 그녀를 부추겼다. “이번에 내가 사려는 게 제법 있어.” “······후우, 좋지요. 사겠습니다, 1,650골드.” 그렇게 한 번에 1,500 골드를 넘기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제아무리 일국의 황태자였던 시페넌이라고 해도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모험가란 원래 이렇게 떼돈을 쓸어 담는 직종인가?” “모든 모험가가 여기 이 꼬마 손님들처럼 대박 던전만 찾아낸다면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70%이상의 모험가들이 밥 먹듯이 허탕을 치고, 20%의 모험가들은 보물을 탐하려다가 위험 앞에 물러서고, 9%의 모험가들은 용감하게 돌격했다가 끝내 목숨을 잃는답니다.” “그중 1%만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이건가?” “그리고 그 1%는 다시 다음번의 도전에서 성공률 1%의 룰렛을 돌리게 되는 것이죠.” 기회란 언제나 위기와 함께 찾아오는 법이다. 순서를 착각해선 안 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며 뛰어드는 얼간이들이 언제나 가장 먼저 죽어간다. “······명심하지.” “뭐, 이 손님들을 보고 있자면 그 통계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요!” 미케나는 기껏 진지한 목소리로 충고한 주제에 자기 말을 뒤집으며 돌아섰다. 그곳에 휴즈 슬라임이 남긴 마지막 전리품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흉부갑옷이네요. 내구도도 그렇고 마력반응도 그렇고 정말 심상치 않은······.” 그러나 미케나의 물욕 센서가 제대로 발동하기도 전에 아르페가 메테르에게 갑옷을 건네었다. “메테르.” “응, 고마워!” “그냥 두 분이 빨리 결혼하시죠, 퉷!” 브레스트 플레이트라고도 불리는, 신체의 전면만을 보호하는 갑옷. 붉은 광택을 발휘하는 그것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는데, 치명타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옵션과 함께 타격이 들어오는 순간 일정량의 마나를 소모하여 충격을 분산시켜주는 옵션이 있어 보호 용도로는 제격이었다. 결정적으로 착용자의 감정에 반응해 힘을 끌어올려주는 본 건틀렛과 비슷한 종류의 옵션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버서크를 다루는 메테르에게 이보다 제격인 갑옷도 없을 것이다. 감정 계열의 버프가 걸려 있다는 점에서 슬라임이 최후에 느꼈을 감정이 대략 이하생략. “후후, 빨갛게 빛나는 게 너무 예쁘다.” “아, 활보다 저게 훨씬 찾는 손님이 많을 것 같았는데······.” 기뻐하는 메테르와 못내 아쉬워하는 미케나. 아티팩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자격이 없는 르세티는 뒤에서 입맛만 쩝쩝 다시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페는 돌연 제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눈을 험악하게 빛냈다. 마치 우리의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메테르, 내 옆에 앉아 봐.” “응!” 상황을 모르는 메테르까지 아르페의 옆에 덥석 앉아 눈을 빛냈다. 상황의 기묘함이 두 배로 늘어났다. 아르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케나를 향해 진중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내가 사려는 게 제법 있다고 말했었지, 아줌마.” “전 아줌마가 아녜요. 하지만 확실히 그렇게 말씀하셨죠.” “후······.” 아르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거액의 지출을 앞두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사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 해두는 게 좋을까? 정말? 돈이 필요한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는데 지금 시점에 진짜?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다시 던전 상인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 지도 알 수 없고, 그 외의 적당한 장소를 찾기도 힘들 테니······. “좋아.” “갑작스레 고백하셔도 곤란한데요?” 아르페는 미케나의 익살스러운 대꾸에 맞서 이렇게 말했다. “레벨 150까지 전사가 익힐 수 있는 모든 스킬 북과 마도사가 익힐 수 있는 모든 스펠 북 있는대로 내놔.” “······.” 그렇게 해서 아르페는 왕궁에서 용사의 육성에 있어 유일하게 잘한 짓, 바로 돈으로 능력을 뻥튀기시키는 작업을 개시했다. ────────────────────────────────────────────────────────────────────────Chapter 7. 던전, 진화, 성공적 - 6사실 아르페는 모든 근접계열 직업의 스킬 북과, 모든 마도계열 직업의 스펠 북을 구매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아르페와 메테르가 용사라는 사실이 들통이 날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은 그 정도로 많은 스킬 북과 스펠 북을 구매할 돈도 없다. 그러니 지금 이것이 아르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와, 어디 귀족가에서나 할 법한 짓을 잘도.”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미케나의 기가 질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짐 바구니를 뒤져 스킬 북과 스펠 북을 닥치는 대로 꺼내면서도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아르페는 그것들을 일일이 감정해 자신과 메테르 용도로 나누며 씩 웃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몬스터와, 다른 종족과, 그리고 같은 종족과 싸우며 살아가는 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사이코 짓거리 중 하나야. 가장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도핑이고 이 세상이 거의 유일하게 허락하는 치트키지. 그 대가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건 단 하나야.” 아르페는 미케나가 내민 주머니에 금화를 쏟아 붓기 시작하며 씩 웃었다. “돈.” “실제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런 일을 해놔도 괜히 어설프게 많은 스킬을 익히려다 낭패를 보게 될 뿐이지만······ 뭐, 손님들이라면 괜찮으려나요.” 비록 미케나가 직접 그들의 전투 광경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그들의 재능에 대해 감을 잡고도 남는다. 가는 던전마다 좋은 보상을 발견하는 그 운은 둘째 치고 던전을 풀 클리어하고도 멀쩡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는 시점에서 충분했다. “그래봤자 대부분의 기본 스킬은 이미 익히고 있으시죠? 그러면 스테이터스가 미약하게 상승하는 정도밖에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하실 텐데.”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을 때······.” “네,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네요.” 스킬 북은 비싸다. 가장 기초적이고 쓸모없는 것도 최소 수십 실버, 기본적으로 1골드를 호가하는데 제대로 실전에서 쓰이는 스킬 북은 얼마나 비싸겠는가. 메테르는 아르페로부터 건네받은 스킬 북을 세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14개······ 게다가 그중 8개는 이미 익히고 있어! 그래서 이것들 가격이 얼마야, 아르페?” “619골드. 그야 물론 몇 골드에 불과한 것도 있지만 수십 골드를 넘기는 가격의 스킬 북도 제법 있어. 원래 스킬 북 중에 조금 쓸 만하다 싶은 건 곧장 가격이 수십 배 이상으로 뛰거든.” “고작 이런 책 한 권에 수십 골드!” “아까 마나지배의 가격이 350골드라는 얘기 들었잖아?” 메테르는 이미 익히고 있는 스킬의 스킬 북을, 고작 스테이터스를 키우기 위해 익히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르페가 자신을 생각해 마련해준 것을 내칠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전부 익혔다. “후우우······.” “역시 보통내기 인재는 아니시네요. 순식간에 스킬들을 수습하고 적응하다니······.” “잘도 저렇게 비싼 스킬 북들을 마구!” “네가 놀라는 부분은 거기냐, 르세티?” 그래도 한꺼번에 스킬을 익힌 보람이 있어 체력과 민첩, 힘이 각각 10 정도씩은 올랐다. 일반적으로 전사가 레벨 1을 올릴 때 스테이터스 3을 얻으니, 레벨 10을 올려야 얻을 수 있는 스테이터스를 얻었다는 뜻. 그야 물론 레벨 업의 효능이 스테이터스만은 아니기에 1대1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스테이터스 30의 차이라면 확실하게 죽어야 할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가능하다. 메테르라면 더욱 그 효율을 늘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모험가들은 이렇게 무장한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축복받은 환경의 모험가는 별로 없다니까요!” “큭, 나도 저 정도의 자본이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강했을 텐데······.” “르세티, 너도 힘들었구나······.” 어쨌든 스킬 북의 수습은 얼추 문제없이 끝났다. 문제는 스펠 북이었다. “아니, 스펠 북은 9개밖에 안 되잖아!? 아르페, 이건 사기야!” “전부 합쳐서 608골드?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준비했네.” “역시 손님은 알아주시네요!” 스킬 북의 가격 뻥튀기도 심한 편이지만 그것은 스펠 북에 비하면 약과였다. 스펠을 다루는 마도계열 클래스는 스킬을 다루는 클래스에 비해 그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고, 자연에서 나타나는 스펠 북의 비율 또한 그 숫자만큼이나 적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스펠을 구매하기도 쉽지 않고, 애초에 물량이 잘 풀리지가 않는다. 아르페의 말마따나 미케나가 이 정도나 되는 스펠 북을 보유하고 있던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저를 만난 걸 다행으로 여기시라구요. 어지간한 마탑도 이 정도 물량은 쉽게 방출할 수 없으니까.” “절반 이상이 생활마법인데 유세 떨기는.”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스펠을 한꺼번에 전부 익혔다. 제아무리 난이도가 낮은 생활마법이라고 해도 스펠 북을 정독하고 스펠 습득 시도를 몇 번은 해야 정상이거늘, 만물열람의 소유자인 아르페는 그 모든 스펠 북을 그저 손에 쥐고 사용하는 것만으로 모두 익혀버린 것이다. “후우, 마력 23정도······? 나쁘진 않네.” 하이퍼 러빙이 얼마나 고위 마법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수치였다. 아르페가 하이퍼 러빙을 익혔을 때 마력이 20 올랐었는데, 지금은 아홉 개의 마법을 익혀 마력이 23 올랐으니까!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녜요! 손님이 지금 얼마나 괴물 같은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계세요!?” “흥, 이 정도 능력도 없는데 스펠 북을 다 내놓으라고 할 리 없잖아?” 아르페는 대수롭지도 않게 일을 해치웠으나 막상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미케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로 많은 숫자의 마법을 한꺼번에 익히면 머릿속에서 무수한 마법 이론이 충돌해 폐인이 될 가능성마저 있는데 대체 어떻게! 이건 단지 마나를 잘 다룬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암기력과 계산능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손님.” 미케나가 섬광처럼 양손을 뻗어 아르페의 한 손을 꼭 붙잡으며 눈을 빛냈다. 그녀는 뒤에서 메테르가 으르렁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르페를 설득했다. “그 재능을 상계에서 발휘해보실 생각은 없나요!?” “없어.” “쳇.” 아르페는 미케나의 청을 단호히 거절하고는 머리를 굴렸다. 스킬과 스펠의 구매에 들어간 돈이 1,200골드 가량. 사실 2천 골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제법 돈이 남아버렸다. 그렇다면 포션을 더 구비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미 재고는 충분했다. 장비를 맞출까 생각해봐도 지금 상황에서 딱히 더 필요한 장비가 없다. “음······ 끄응.” 조금 더 고민하던 아르페는 이내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미케나에게 물었다. “인식저해 아티팩트 있어? 가능한 좋은 걸로.” “흐으으응?” 미케나의 표정이 능글맞게 변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캐묻지 않고 얌전히 품에서 두 개의 반지를 꺼내들었다. 별로 화려하지 않은 거무튀튀한 금속 반지였으나 그것을 손에 쥔 미케나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마침 최고급 아티팩트가 여기 딱 두 개! 남아있답니다. 반지 형태라서 숨기기도 쉽고, 인식저해는 물론이고 소소한 외형변화까지 해주고, 무엇보다 고위 마도사가 만든 물건이라 레벨 250이하의 대상에게는 걸리려야 걸릴 수가 없······.” “좋아, 개당 500골드. 1천 골드 주면 되겠지?” “뭔 흥정을 못 하겠네 아주 그냥.” 아르페는 500골드짜리 반지 하나를 자신의 손가락에 끼우고는 나머지 하나를 메테르에게 건네주었다. “아티팩트 조작방법은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일단 끼워둬.” “5, 500골드, 500골드면······ 소가 몇 마리지? 모르겠어!” 메테르는 무척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끝내 반지를 받아 끼웠다. 반지를 낀 손가락을 소중히 감싸며 볼을 붉히는 것이 또 쓸데없는 오해를 하고 있음에 자명했지만 그 반지를 소중히 여겨 나쁠 것은 없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 “인식저해 아티팩트 두 개! 다오!” 아무리 황태자로서의 자신을 버렸다고 해도 자신의 얼굴만은 버릴 수 없는 시페넌이 살 길을 찾았다는 듯 미케나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역시 제법 머리가 잘 굴러가는 녀석이다. 지금 시페넌은 아르페와 메테르 이상으로 인식저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전하······ 가 아니지. 시페넌 님, 방금 이 여자는 분명 마지막 두 개였다고······.” “성능이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거라면 있지 않겠는가!” “어, 어머나! 그러고 보니 여기 최고급품이 딱 두 개 더 남아있었네요!” “······.” 미케나는 일행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뻔뻔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상인용어로 아이언 페이스라 불리는 최고위 스킬의 마스터임에 분명했다. 과연 중견상인이다! “후, 내놔라.” 저런 것이 상인의 귀감이라면 죽어도 상인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시페넌은 천 골드를 꺼냈다. 왕궁에서 가져나온 재화도 무한대는 아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돈을 아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거래 후회하지 않으실 거랍니다!” “혹시 똑같은 반지가 앞으로 한 열여섯 개 남아있거나 한 거 아냐?” “성능은 진짜니까 믿어둬. 읏차.”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 것도 다 팔았고, 살 것도 다 샀다. 그들의 거래는 모두 끝났다. 하지만 아직 거래가 남은 자들이 있다. “아줌마, 출장업무 좀 봐라.” “어머나, 데이트 신청인가요? 솔직히 손님이 싫지는 않지만, 적어도 5년은 더 자라신 후에 부탁드려요.” “상인 업무 중에 초보 모험가 교육도 있잖아? 얘네 기본적인 상식 위주로 가르쳐줘.” 불똥이 자신들 쪽으로 튈 줄은 몰랐던 시페넌과 르세티가 반지를 나누어 끼다 말고 눈을 깜박였다. 초보 모험가 교육? 그런 것도 있었단 말인가? “제 말을 완전히 무시하시다니! 큭······ 알겠어요, 해드리죠!” 미케나는 모멸감에 치를 떨면서도 이내 몸에 배인 비즈니스 모드로 전환했다. 이 상태의 그녀의 전투력과 협상력은 대략 20% 정도 향상된다! 그녀가 풍만한 가슴을 퐁, 두드리며 스스로를 과시했다. “알고 계시겠죠? 저는 중견상인이라구요. 원래 그런 간단한 업무는 맡지 않아요. 당연하지만 페이가 제법 높답니다.” “하지만 거기서 제대로 30% DC된 가격으로 정산해줄 거지?” “큭!”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겨보는 것은 실로 사천왕 최약체에게 어울리는 성격이다. 미케나는 상인이 아니라 사천왕을 했어도 괜찮을 텐데,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페는 시페넌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해줬으니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원래 너희를 던전에 데려오려던 것도 어느 정도는 던전 상인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어. 너희 같은 초보들은 던전 상인과 좋은 방향으로 안면을 터두는 게 좋거든.” “나이만 보면 너희도 얼마든지 초보 모험가이지만 말이지······.” 시페넌은 어이가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아르페가 만들어준 무대를 기꺼이 이용하기로 했다. 아르페가 이렇게 말할 정도다. 던전 상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얻어 나가리라! “끄응, 기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하지만 30% DC라면 거기서 또······.” “그럼 우리는 이만 가자.” “응!” “응!?” 얌전히 앉아 수업 받을 준비를 하던 시페넌과 르세티가 화들짝 놀라며 아르페를 돌아보았다. “우리를 버려두고 가겠다는 건가!” “약속대로 던전 하나 끝냈잖아? 레벨도 스킬도 올려줬고 모험가 교육까지 받게 해줬는데 여기서 더 뭘 도와달라는 거야?” “하, 하지만······.” 시페넌과 르세티의 시선이 나란히 아르페에게 꽂혔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것이 꼭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연인을 보는 것만 같아 솔직히 조금 기분이 나빴다. “은혜를 갚고 싶은데, 나중에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지 모르잖아.” “시, 시페넌 님이 돌아가시면 너한테 몸을 의탁하려 했는데! 나를 방랑기사로 만들 셈이냐?” “뭐 임마? 누가 돌아가셔?” 이제 곧 주종관계가 끝장날 것만 같은 두 남녀가 치고 박고 싸우는 가운데, 미케나가 지그시 아르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기 많으셔서 좋겠네요, 손님.” “시끄러, 닥쳐. 통신구나 팔아.” “정말 툴툴거리면서 다 챙겨주는 게 귀여워서 어쩔 수가 없네요! 58골······.” “30% DC해서 40골드겠지?” “그으으으응윽윽!”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사랑을 받는 것 또한 용사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지금의 아르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Chapter 8. 그러고보니 용사였지. - 1아르페와 메테르는 삼인을 던전 안에 던져두고 그대로 그곳을 나왔다. 물론 시페넌의 앞날에 대한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했는데도 죽어버리면 그건 운명이겠지! “그럼 아르페, 우리 이제 어디 가는 거야?” “원래는 만만한 던전을 하나 더 들어가서 우리 레벨을 키우려고 했었는데······.” 시페넌의 레벨을 어느 정도 키워주려고 들어간 던전에서 휴즈 슬라임이 나타나는 바람에 아르페의 레벨은 163, 메테르의 레벨은 174까지 성장해버렸다. 전혀 의도치 않게 자신들까지 폭풍성장을 해버렸으니 이젠 굳이 다른 던전을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역시 용사의 힘은 대단해! 그런데 그 말을 전달하자 어째선지 메테르는 아쉬워했다. “이제 던전 안 가? 나 던전 재밌는데. 계속 강해지는 거 너무 좋아!” 이 녀석은 용사가 아니라 뭘 해도 결국은 세계 최강자가 되지 않았을까, 아르페는 아득한 심정이 되고 말았지만 곧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나중엔 싫어도 던전에서 살아야 할 때가 올 테니 지금은 이쯤으로 참아둬. 이 정도만 되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거야.” 마계에서는 레벨 200도 안 된 녀석들이 대로를 활보하고 다니기는 힘들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인간계. 왕국 기사단장의 레벨이 200을 넘기면 대단하다고 칭송받는 세상이니 그들의 행동에 지장을 받을 일은 없으리라. 더욱이 레코드 링크다 뭐다 해서 아르페와 메테르의 스킬도 다방면으로, 풍부하게 성장했으니, 용사라는 특수성과 더해 생각해보면 어찌어찌 레벨 200미만의 존재까지는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레벨이 절대적인 지표인 이 세상에서, 그 경계를 조금이나마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재능이다. “하지만 그 이상을 만나면 그냥 도망친다고 생각해둬. 레벨 200이상의 상위클래스는 그 이전과는 격을 달리하거든.” “조금 전에 잡았던 슬라임도 레벨 200이었는데?” “놈은 예외야. 마왕군 사천왕 중에서 최약체가 무척 높은 빈도로 강자 반열에서 제외되는 것처럼.” 제아무리 진화를 거듭해서 거대해지면 뭐하는가, 마나가 있는 건 닥치고 집어삼켜서 결국 그 모양으로 자멸하는데. 아르페가 던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며 진화하는 슬라임을 보면서도 여유로웠던 것이 바로 그 까닭이다. 10층이 아니라 100층짜리 던전이라도 그대로 내버려뒀을 것이다. 데마이트의 원석을 완전히 가공할 기회라고 좋아했겠지. “역시 아르페가 대단했던 거구나?” “네 결론은 언제나 그거구나.” “후흐흥.” 메테르는 아르페와 다시 둘만 남게 되어 무척이나 기쁜 것처럼 보였다. 슬슬 아르페도 그녀의 무한한 애정과 스킨십에 적응은 했지만, 이젠 이 녀석이 언제 자신에게 질릴까가 걱정이었다. 사람의 감정은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는 강력한 동력원이지만 그만큼 불안정하며 일시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딱히 용사의 일생을 구속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하지만, 마왕을 해치울 때까지는 녀석이 순순히 내 말을 따라주지 않으면 곤란한데. 그러면 어떻게든 내가 매혹 마법을······ 아니, 이 녀석의 마나저항력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가능성이 없고. ······씁. 그래, 인정하자. 그런 짓을 하는 건 내가 싫어.’ 애써 나쁜 놈처럼 생각하려던 아르페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그래, 다른 존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노는 건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마왕에게 구속된 순간부터 늘 자신이 당해왔기에 그것이 얼마나 개 같은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을 자신이 용사에게? 설령 신이 그것을 용서한다 해도 아르페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아르페는 여태껏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던 자신의 속내와 마주하려다가는······ 이내 얼굴이 벌게져 사고를 정지하고 말았다. 멈춰버린 뇌리에 일순 스치는 것은, 전생의 자신과 마왕성에서 마주보고 있던 늠름하고도 순수한 용사의 얼굴이었다. “······아르페,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아냐. 야, 얼굴 가까워. 치워. 야.” “싫어! 손도 붙잡을래!” 타이밍을 귀신같이 잡은 메테르가 얼굴을 쓱 들이밀자 아르페는 기겁하며 그녀를 밀어냈다. 하지만 아르페가 힘으로 그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메테르는 끝내 자신이 원하던 대로 아르페의 한쪽 팔을 쟁취하고는 소풍을 나가는 어린 아이처럼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이렇게 둘이서만 같이 걸으니까 너무 좋다!” “곧 질리게 될 거야.” “절대 안 질리지롱. 앞으로 천 년 정도는!” “스케일 한 번 드래곤이네.” 아르페는 메테르의 천진난만한 대꾸에 끝내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용사 파티 뉴 멤버를 모집하러 가자.” “이씨이이이잉!” 둘이서만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자마자 곧장 새로운 멤버를 추가하겠다고 선언하는 아르페! 이것이야말로 마왕군 사천왕에게 어울리는 귀축스러운 면모였다! 전생에서의 디아스 왕국은 제법 거뜬히 유지되었다. 대공에 의한 반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용사가 수월하게 제압했다. 용사 덕분에 디아스는 평온했고, 발전할 수 있었다. 마왕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아르페는 슬라임 던전을 떠나 처음으로 들른 마을이 제법 삭막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의 활기를 기대하고 있던 메테르 역시 꽁꽁 얼어붙은 마을의 분위기를 보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르페, 여기 왜 이런 거야?”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들이 헛기침을 한 번만 해도 양민들은 괴로워하지. 그런데 지금은 나라의 주인이 뒤바뀌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잖아. 온 나라가 거기에 휘말리는 게 당연한 거야.”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말로 아르페 때문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아르페가 용사를 탈주시키지 않았더라면 이런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지금 아르페의 곁에서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메테르가 왕궁에 있었더라면, 감히 인간의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무리가 팽배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시페넌이 말했듯 이 사태는 왕국이 자초한 것이지 결코 메테르의 탓이 아니다. 물론 아르페의 탓도 아니다. 그러니 이것을 보며 그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아주 조금, 짜증이 난단 말이지.’ 아르페는 벌써 살짝 울상이 된 메테르를 보며 한숨을 쉬고는 녀석의 머리 위에 한 손을 얹었다. “우리는 이런 데 신경 쓸 것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최종적으로는 마왕을 해치우기만 하면 돼.” “마왕을 해치우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져?” 모든 옛날 얘기에서는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는 것으로 세상의 모두가 평화로워진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옛날 얘기. 아르페에게는 현실적인 근거가 있었다. “아니. 하지만 우두머리를 잃은 마계를 정복하려고 사람들이 몰려갈 테니까, 한시적으로 인적 자원의 수요가 많아져서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능력의 양민이라도 제법 많은 재화를 손에 쥘 수 있게 될 거야. 그걸 지킬 수 있느냐는 별개로 두고서, 말이지.” “그럼 마계는······? 마계의 마족들은?” 제법 예리한 부분을 찔러오는구나. 아르페는 순간적으로 전생에서 마왕에게 지배를 당하던 마족들과,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마족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전부 다 죽이면 돼.” “그야 다들 마족은 나쁘다고 하지만······ 사람 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마족 중에도 착한 마족이 있지 않을까?” “······.” 아르페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메테르는 한 점 흔들림 없는 진지한 눈으로 아르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섣불리 대답을 하기도 망설여졌다. “그건······.” 인간계에서 태어나는 모든 이는 ‘사람은 착하고, 마족은 나쁘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다. 세뇌교육이란 정말 무서운 힘을 갖고 있어서, 제아무리 배울 만큼 배우고 살 만큼 산 이들이라고 해도 마족에 대해서만큼은 무조건적인 적대심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것보다 먼저 사람을 미워하게 됐어.’ 정확히는 아르페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을 본 순간 꼭지가 돌아버렸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 그 후로 메테르는 사람을 향해서도 얼마든지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래서 아르페는 적잖이 걱정을 했었다. 정말로 그녀의 성정이 광전사의 그것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선악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는 선악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지 않게 되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마족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이러다가 나중엔 몬스터를 잡으면서도 망설이게 되는 것 아닐까 모르겠네.’ 결국, 아르페는 쓴웃음과 함께 녀석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아직 그녀는 열세 살이다. 아르페조차 답을 내지 못한 문제를 골 빠지게 고민해봤자 그녀에게 좋을 일이 없었다. “판단 기준은 이미 말해줬잖아. 네 생각대로 행동해. 그렇게 하면 돼. 너무 큰일을 하려 하지 말고, 당장 네 눈앞에 놓인 일들을 차근차근 하다 보면 돼.” “······응, 알겠어. 당장은 내가 해야 하는 걸 할게.” 아르페의 대답은 근본적인 답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메테르는 아르페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든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으로 충분한 척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데 있잖아 아르페.”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어떻게든 답을 얻어야 하는 문제가 딱 하나 남아있었다. “마왕이 착한 마족이면 어떻게 하지?” “아, 안심해.” 이것만은 다행히도 확답을 해줄 수 있는 문제였다. 아르페는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확고하게 단언했다. “마왕이 착한 놈이면 이 세상에 죄악은 없어.” “알겠어. 믿을게, 아르페!” 두 용사의 문답은 그렇게 끝났다. 분명 나중에 다시 이 문제와 조우할 날이 오리라. 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둘이 나이에 걸맞지도 않은 심각한 대화를 마치고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왕국에서 보낸 병사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헤집어지고 있었다. “이 자들을 본 적이 없는가! 붉은 머리의 소년이다! 붉은 머리!” “흑발 꼬맹이랑 금발의 계집애도 함께 찾고 있다. 혹시 네놈들 집에 감추고 있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엉!” 험악한 인상의 병사들이 한 집 한 집마다 저런 식으로 들추고 있으니 마을 분위기가 살아날 수가 없다. 병사들이 황태자 시페넌뿐만 아니라 1년 전에 모습을 감춘 용사 일행까지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메테르가 살짝 겁을 먹고는 아르페 곁으로 달라붙었지만 아르페는 완전히 여유로웠다. “인식저해 아티팩트는 완벽하게 기동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불안한데······.” 지금 둘은 인식저해 아티팩트를 사용해 나라에서 가장 흔한 머리인 갈색으로 머리색을 통일하고, 눈동자도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밤색으로 바꾸어놓았다. 이 둘을 붙잡는다면 그놈은 용사를 붙잡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한 소아성애자이므로 죽여 버리면 되는 것이다. “어이 너희들! 이리로 와서 얼굴을 보여!” “물론 가끔 저런 식으로 구는 놈들이 있기는 한데······.” 모든 이는 강자의 입장에 서면 난폭해진다. 일단 목소리부터가 커지고 거릴 것이 없어진다. 상대가 약해보이는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뭐냐.” 물론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들에게 입장을 재인지시켜주면 되는 것이다. “히, 힉.” 아르페는 우선 로브를 젖혀 갈색으로 변화시킨 자신의 머리칼을 드러내고, 다음으로 허공에 불꽃을 두 덩이 띄워 올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위세 좋게 외치던 병사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네놈들 아까부터 너무 시끄러워. 누굴 찾는지는 몰라도 조용히, 닥치고 돌아다녀. 알겠어?” “마, 마법사······!” 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놈의 시선은 아르페의 손짓을 따라 이리저리 허공을 유영하는 불꽃에 꽂혀 있었던 탓이다. 녀석 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이미 진즉 뒤로 물러선 채였다. “야. 대답 안 하냐?” 아르페가 인상을 부라리며 불꽃을 움직이자 놈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알면 당장 꺼져.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내 시야에 들어오면 앞으로 난로가 필요 없는 몸으로 만들어줄 줄 알아.” “네, 넵!” 대답을 한 놈은 물론이고 그 뒤에서 기가 죽어 있던 병사들까지 썰물처럼 한꺼번에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아르페는 메테르를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저런 덜떨어진 놈들한테는 간단하게 힘을 보여주면 돼. 양쪽 다 덜 귀찮게 끝내는 방법이니 기억해둬.” “으으으, 아르페 너무 멋져······!” 메테르의 눈동자에 별무리가 가득했다. 음, 아무래도 아르페의 의도는 전혀 전달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싸구려 협박을 보고 대체 뭐가 멋지다는 거야?” “난 아르페가 멋져보여서 멋지다고 한 건데, 뭐가 멋지냐고 하면 그냥 멋져보여서 멋지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그래그래, 내가 어리석었다, 내가.”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귀찮은 것들도 쫓아냈으니 이젠 숙소를 구할 차례였다. 아르페가 자신의 계산에 착오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 직후였다. “힉!” “수, 숨어!” “도망쳐야 되는 거 아냐?” “사, 살려주세요!” “······.” 병사들뿐만 아니라 마을사람들까지 잔뜩 쫄아버려, 무서운 마도사 일행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려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 그로부터 30분 후. 아르페는 간신히 잡은 숙소에서 스프를 대접받으며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일반인들 앞에서는 마법을 쓰지 말자는 다짐을 했다. “내일부턴 다시 강행군이야. 목적지까지 쉬지 않고 걸을 테니까 각오해둬.” “동료라면 누굴 찾는 건데?” “그건 있지······.” 용사 파티가 완전히 구축되기까지 전생에서의 용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도적과 용사로 시작해서 워리어, 궁수, 성녀와 합류하고······. 그러나 문제는 용사 파티의 화력이었다. 성녀를 제외한 용사 파티의 일원 모두가 일당백, 일당천까지도 가능한 맹자였으나 결국 거기까지, 등장만으로 전장의 판도를 뒤집어놓는 정도의 활약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정예로 활약한 가능한 곳을 전전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도사가 용사 파티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완벽히 반전된다. 용사 파티에서 용사 다음으로 찬란한 재능을 지닌 이는 다름 아닌 마도사! 마도사의 능력이 오죽 뛰어났으면 용사 파티의 활약은 마도사 합류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 전생을 알고 있는 아르페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마도사를 찾으러 간다.” 아르페와 포지션이 겹치건 말건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좋다! 마도사를 일찍 파티에 합류시켜 성장시키면, 잘하면 아르페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모든 일이 정리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난 아르페만 있으면 되는데······.” 메테르는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지만 아르페는 그것을 무시했다. 자, 지금 이 시점의 마도사가 어디에 있을 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이제 바로 그 녀석을 만나러 가면 되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머무르는 방문을 누군가 노크했다. “자, 잠깐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가느다랗고 높은 소녀의 목소리. 메테르가 아무런 의문도 망설임도 없이 곧장 ‘네!’하고 대답했고, 문이 열리며 터무니없이 평범한 인상의, 어느 마을을 가나 한 명은 있을 것만 같은 소녀A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아······.” 아르페가 그녀를 시야에 담은 순간, 의식적으로 만물열람이 발동했다. 그 순간에서야 아르페는 간신히 깨달았다. 용사로서의 과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Chapter 8. 그러고보니 용사였지. - 2 “저, 저는 에이나라고 해요.” “자기소개는 됐고.” 아르페는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으며 말을 일축시켰다. “네가 무엇을 부탁하러 왔는지, 나한테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만 간략하게 말해.” “······.” 자고로 모든 퀘스트는 빠른 생략이 생명! 퀘스트 내용과 보상만 알고 나면 자질구레한 사정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번 퀘스트에 한해 신경 쓰기도 싫었다. “힉.” “아르페······.” 아르페의 말에 그들을 찾아온 소녀 에이나도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던 메테르도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었으나, 아르페의 표정이 구겨지기 직전 간신히 에이나의 입이 열렸다. “사, 사실은 며칠 전 제 동생이 마을에 쳐들어왔던 병사들에게 잡혀가서 돌아오지 않······.” “좋아, 보상은?” “······.” 퀘스트 내용마저 스킵해버리다니! 다른 누가 들으면 보상을 향한 아르페의 강렬한 집념에 감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아르페의 표정은 과하리만치 일그러져 있어, 소녀도 아닌, 퀘스트도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 보상이라니······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소녀는 울상이 되었다. 그야 그 정도는 아르페 역시 듣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소녀의 차림새는 무척이나 허름했고 만물열람으로 확인해본 결과 몸에는 가치나갈 물건이 아예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아르페는 그녀를 추궁했다. “뭐야, 동화 하나도 없어?” “동화 하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에이나의 눈망울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아르페는 가차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내놔.” “······네?” “동화 하나, 내놓으라고.” 에이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품에서 동화 하나를 꺼냈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동화 딱 한 개. 지금의 아르페에게는 코웃음이 쳐질 만큼 무가치하지만 분명 소녀에게는 아주 소중한, 아주 커다란, 아주 중요한 돈일 것이다. “여, 여기······.” 사람 한 번 잘못 찾아왔다가 졸지에 삥까지 뜯기게 된 에이나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아르페의 손 위에 동화를 올려놓았다. 그것을 보며 메테르는 무척 화가 났다. 아르페를 혼내야 한다! 무척 혼내야 한다! 아이를 울리는 아르페는 나쁜 아르페다! “아르페!” “조용히 해, 메테르. 퀘스트 보상 수령하는 순간은 원래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야.” “으, 응.” 그러나 메테르는 그녀가 화를 낼 것을 예측이라도 했던 것처럼 대꾸하는 아르페의 기세에 눌려 금방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체 아까부터 뭐가 그리 화난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아르페는 엄청나게 무서웠고······ 또 조금 멋있었으니까. “후우······.” 메테르를 조용히 시킨 아르페는 소녀로부터 강탈한 동전을 꾹 쥐었다가, 그것을 품에 단단히 집어넣고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소녀에게 똑바로 고했다. “좋아, 퀘스트 보상은 확실히 받았어. 선금 100%, 잔금 0%. 지금부터 퀘스트에 착수한다.” 그의 ‘인’생 첫 번째의 퀘스트 승낙 선언을. “네?” “계산 전부 끝났다고. 그러니까 지금부터 네 동생 찾으러 가자.” “네······?” 에이나는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깜박였지만 아르페는 망설이지 않고 로브를 걸쳤다. 사실은 제법 졸려서 지금 당장 잠자리에 눕고 싶었지만, 잠은 또 언제든지 잘 수 있다. 지금은 움직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에이나를 재촉했다. “왜 멀뚱히 서 있어? 보상을 받았으니까 퀘스트를 하겠다고 하잖아. 귀 막혔냐?” “아, 아뇨. 하지만······!” “난 지금부터 네 동생을 찾을 거야. 어떻게든 찾아서 네 곁에 돌려놓을 거야. 퀘스트 완료 조건은 이걸로 확실하겠지?” “······아, 아아.” 소녀는 그제야 간신히 상황을 이해했다. 방금 자신에게 동화를 삥 뜯은 이 꼬맹이 마도사는, 지금 그것을 대가로 정말 자신의 동생을 되찾아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르페의 진지한 눈을 보고 있자니 차마 거짓말이죠? 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아르페를 믿기로 했다. “고, 고맙습니다! 제가 어떻, 어떻게 감사를······.” “감사는 동생을 찾아서 무사히 네 곁에 돌려놓은 다음에 해라. 늦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아르페는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소녀의 모습을 자신의 시야에 담았다. 만물열람이 발동하며 현재 그녀의 상태를 고스란히 나타냈다. [에이나] [레벨 ? 1] [저주 ? 마속성 이종족 하급체 변이 진행률 1%] [사흘 전 식수에 녹아든 저주의 마나에 당함.] ‘대체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사람이 몬스터로 변할 수 있을까? 정답은 Yes다. 당장 음의 마나가 활성화된 곳에 버려진 시체는 좀비나 구울로 되살아나기 쉽고, 자청해서 데스나이트나 리치가 되는 술법을 받는 이도 많다. 그 가운데에는 저주에 의해 몬스터로 변이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소녀는 지금 바로 그, 인간을 몬스터로 변이시키는 저주에 당한 상태였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가장 대표적인 저주라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이미 말했듯 아르페가 가장 증오하는 종류의 수작이기도 했다. 그의 입가에서 빠득, 소리가 났다. “아르페는 역시 착해. 나한테는 그렇게 항상 ‘사람은 계산이 정확해야 된다.’고 말했으면서!” “아니, 계산은 정확했는데?” “피, 거짓말. 아르페 부끄러워한다.” 아르페는 픽 웃어버리고 있는 메테르를 향해 진지하게 개소리를 지껄였다. “잘 들어, 메테르. 모든 물건의 가치는 상대적이야. 요는, 내가 계산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계산이 맞는 거야.” 퀘스트 보상은 그래서 중요하다. 객관적으로 보아 아무리 가치가 크다 한들, 그것이 자신에게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계산이 맞지 않는 셈이니까. 확실히 엉망진창인 이론이었지만 아르페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메테르 너는 어때.” 아르페는 자신의 품을 툭툭 두드려보였다. 동화 한 개가 들어가 있는 바로 그 언저리를. “1브론즈, 퀘스트 보상으로 충분하냐?” 메테르는 아르페의 분노로 차오른 눈을 마주보며 그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일까 궁금했고, 어쩌면 에이나의 의뢰를 수행하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언제나 아르페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이 의뢰는 분명 그를 향해 나아가는 한 발짝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녀를 위한 보상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응, 충분하고도 넘쳐.” “좋아, 그럼 퀘스트는 공동수행이네.” 둘은 손을 맞붙잡고, 에이나를 내세워 곧장 방을 뛰쳐나왔다. 좁디좁은 오두막 안에 마을사람 여럿이 몰려와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마, 마도사님. 사실 제 아들도······.” “제 딸, 딸이 잡혀갔습니다. 병사 놈들이 철저히 확인을 하겠다며 근방의 아이란 아이는 모두······!” “마도사님,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아이를!” 그들 모두가 에이나와 똑같은 말을 지껄였다. 사람들이 아우성하는 모습을 본 메테르는 왜 에이나랑 같이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던 거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르페는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아마 에이나는 아이를 잃은 마을사람들의 대표로 들어왔을 것이다. 부탁은 하고 싶어도 아르페와 마주하는 것이 무서웠던 마을사람들은 가장 어리고 여린 그녀를 앞에 떠민 것이다. 약자들 가운데에도 항상 보다 약한 자가 있고, 언제나 그런 이들이 가장 먼저 희생을 강요받게 되니까. 그래놓고 아르페가 퀘스트를 받아들이니 괜찮구나 싶어 그제야 허겁지겁 덤벼드는 것이다. 아르페는 자신들을 둘러싼 마을사람들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도 전 재산 내놔.” “네, 네? 하지만 에이나한테는 1브론······.” “에이나한테도 전 재산을 받았는데, 퀘스트 보상은 공평하게 받아야지. 뭐야, 퀘스트 의뢰 안 할 거야? 아니면······ 내가 직접 받아갈까?” 그 자리의 모두가 말을 잃었다. 아르페가 진심이라는 것은 굳이 그의 일그러진 미소와 마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꼬마 마도사는 지금 무척 화가 난 상태였고, 섣불리 그를 자극했다간 잡혀간 자식이 돌아오기는커녕 자신들 먼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가져오겠습니다요!” 모두는 서둘러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아르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메테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사태파악이 완벽히 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잘 봐둬, 메테르. 허접한 용사는 마을의 집이란 집은 모두 직접 뒤져가면서 물품을 조달하지만 나 같은 베테랑은 주민들이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고.” “······아르페가 굉장히 나쁜 놈처럼 보이긴 하지만 너무 멋지니까 아무래도 좋아.” 베테랑 용사는커녕 전직 사천왕인 주제에 당당히 지껄이는 아르페와 용사로서 조금 어떤가 싶은 감상을 내뱉는 메테르. 에이나가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동생이 어디로 잡혀갔는지 짐작 가는 건······ 역시 없겠지?” “네. 그저, 병사들에게 끌려갔다는 것만······.” 에이나가 다시금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르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가볍게 정리했다. 사건의 발단은 분명 용사탄생이다. 왕국은 그들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일로 왕권이 흔들렸다. 대공은 반역을 일으켰고 성공적으로 왕위를 탈취했다. 대공은 이 지역에, 그리고 어쩌면 나라 전역에 병사를 풀어 도망친 황태자와 용사를 수소문하고 있다. 권력을 보다 확고히 다지기 위해 황태자를 숙청하고, 왕권의 명분을 얻기 위해 용사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제법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세히 확인해봐야 하니 일단 어린아이를 모두 잡아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에이나가, 그리고 아마도 이 일대의 아이들 모두가 식수를 통해 몬스터화 저주에 오염된 것’이다. 그야 물론 두 가지 문제점 사이에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대공은 단지 일처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이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있을 뿐이고, 소녀는 어쩌다 운이 없어 저주에 걸렸을 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병사들에게 잡혀간 다른 아이들은 저주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잘 될 거라 자위하다가 낭패를 보는 건 마왕군 사천왕 시절로 충분해.’ 따라서 아르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다. 에이나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어쩌면 이 일대의 다른 모든 아이가 저주에 걸렸을 경우를. 아이들에게 저주를 건 세력이 대공과 연관되어 움직이고 있을 경우를. ‘운이 좋으면 단순한 흑마법사, 운이 없으면 마왕군. 내가 전생에서 보아온 마왕이라면 벌써부터 이런 본격적인 수단을 써오지는 않을 것 같지만······.’ 전생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고 해서 만만히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 그의 고유능력에 의해 다시 시작된 세상은 결코 이전과 일치하지 않았고, 죽어버린 기록을 가지고 위세를 떨다간 정말이지 마왕군 사천왕 최약체처럼 허무하게 뒈져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대공과 마왕군 사이에 연결이 있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보자. 우선 대공에게 마을의 아이들을 잡아들일 명분이 생겼다. 마왕군은 이 기회를 틈 타 저주를 풀어 아이들을 감염시켰고, 병사들을 이용해 순조롭게 그들을 회수하고 있다······.’ 아이들을 몬스터로 만들어서 무얼 하게? 그런 질문은 필요 없다. 인세가 혼란에 빠지는 시점에서 마왕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는 셈이니까. 그 이후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보너스나 다름없다. “그렇다는 건.” 아르페는 에이나를 바라보며 실로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병사들에게 겁을 주어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오늘은 에이나가 잡혀갈 차례였을 것이다. 지금 이 마을에 저주가 걸린 아이는 에이나 외에는 남지 않은 상태. 만약 그녀도 없었더라면, 아르페는 누가 뭐라던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자신이 가벼운 생각으로 만들어낸 불꽃이 지금의 퀘스트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게 용사인가.” 아르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용사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체 이 용사란 놈은 어째서 가는 곳마다 사건을 끌고 다니는 것인가 의문을 품은 적이 있는데, 막상 당사자가 되고 보니 모든 일이 착착 맞아떨어져 어떻게 변명을 해볼 여지도 없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원인이 되어 그들의 미래를 구축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원환의 이치······ 아, 아닌가. 아니겠지. 그때 바깥이 부산스러워졌다. 마을 사람들이 ‘전 재산’을 준비해온 것이다. “마, 마도사님! 가져왔습니다! 정말로 이게 저희 전 재산입니다!” “워낙 먹고 살기가 힘들어 이런 것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정말 이런 걸 받고도 제 아이를 되찾아와 주실 건가요? 차마 드리기도 송구한 것밖에 없습니다요······!” 아르페는 모든 이가 돌아온 그때 눈을 떴다. 그는 사람들이 가져온 것을 일일이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들이 괘씸해 골탕을 먹여주고 싶었을 뿐, 죄가 없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전부 구출하려는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겉으로는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없다. “너흰 에이나한테 감사해라. 자식이 잡혀갔는데도 내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던 네놈들 대신에 에이나가 용기를 안 냈으면, 난 너희 자식들이 어디서 뒈지든 신경 안 썼을 테니까.” 그의 독기 가득한 말에 사람들이 몸을 움찔했다. 제법 찔리는 바가 있었겠지. 이 정도로 말을 해놓으면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그러길 바랐다. “좋아, 어쨌든 이걸로 너희도 전부 의뢰인에 포함시켜주지. 너희 자식들 모두 되돌려줄······ 응?” 바닥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전 재산’을 심드렁하게 긁어모으던 중, 아르페는 그 안에 섞인 검은 조약돌 하나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낙네 한 명이 몸을 움찔하며 변명하는 투로 말했다. “예, 예전에 바깥양반이 주워온 겁니다! 하도 예뻐서 혹시 비싼 보석이 아닐까 하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르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절대로 보석은 아니야, 아줌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 아들은!” 아르페는 그것을 주워들며 입 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운명이란 무엇인지, 필연이란 무엇인지, 그 따위 것은 하나도 모르겠지만······ 아아, 정말 재밌다니까. “하지만 겉보기만 그럴 듯한 보석 따위보단 훨씬 중요한 거야. 기뻐하라고, 아줌마.” “예?” “아줌마가 모든 아이를 구한 거야.” “예에!?” [탐욕의 흑요석] [A랭크] [모든 저주를 빨아들이는 마석. 저주를 품은 것이라면 마나든 물질이든 가리지 않고 흡수해 저장한다. 특수한 저주 마법의 발동 재료로 사용되며, 흡수한 저주의 양과 질에 따라 마법의 위력을 지극히 증폭시킨다. 현재 텅텅 비어 있는 상태.] 아르페는 그의 보랏빛 두 눈에 비치는 검은 돌의 진명을 확인하며 다시금 웃었다. 이 뒤에서 어떤 놈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건, 그 모두를 철저히 짓밟아줄 생각을 하니 너무 즐거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아, 썩어빠진 용사의 첫 출격이다. ────────────────────────────────────────────────────────────────────────Chapter 8. 그러고보니 용사였지. - 3탐욕의 흑요석이란 본디 저주의 힘을 모아 보다 강력한 저주를 만들어내고자 할 때 쓰이는 물건이다. 저주를 다루는 마법사라면 누구나가 간절히 바라는 물건이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마석의 대표격이기에 매물이 별로 없다. 당연히 무척 비싸다. ‘더구나 이놈은 그중에서도 A랭크. 저주를 무척 많이 담을 수 있다는 뜻이지.’ 다만 이 물건에는 극명한 한계가 있다. 저주 속성의 마나든 물건이든 전부 빨아들여 흡수한다고는 되어 있지만, 이미 발동된 저주를 어떻게 하기는 힘든 것이다. 저주란 단순히 사람의 어깨에 짐을 하나 얹어놓는 개념이 아니다. 그 사람의 피부의 일부를, 뼈의 일부를, 피의 일부를, 근육의 일부를, 뇌의 일부를, 그리고 심장의 일부를 교묘하게 변화시키며 침투해 그와 완전히 섞여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저주의 마나를 빼내겠다고 깝치다가 저주받은 이의 마나를 폭주시켜 죽여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에이나, 일단 너 먼저 이리 와.” “네, 넵!” 당연하지만 아르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그에게는 만물열람이라는 희대의 개사기 능력이 있으니까! 집중만 한다면 사물이든 생물이든 그것을 이루는 모든 세세한 물질들을 파악할 수 있는 그에게 저주의 마나만을 골라내는 것이 무어 어려운 일이겠는가! “조금 아플 수 있어, 참아라.” “네, 네? 하지만 제가 무슨······.” “참아.” “아, 흑!?” 다짜고짜 흑요석을 에이나의 이마에 가져다대는 아르페. 그 직후 에이나의 온몸이 요동쳤다. 그것을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이 겁을 먹으며 일시에 물러났다. 물론 아르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잡았다.” 아르페는 그녀의 신체 내부, 그녀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약한 마력에 섞여 그것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저주의 기운을 정확히 포착하고 뽑아내며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래도 너는 침식도가 월등히 낮아서 덜 고생하는 거야.” “치, 침식······?” 에이나가 고통에 떨면서도 반문하다가, 이내 짐작이 가는 것이 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분명 지금 그녀의 몸이 정상은 아니었을 터이다. 몬스터로의 변이 저주에 걸렸는데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놈이 대단한 것이다. “몬스터, 변이 저주······? 그러면 제 동생도, 마을 아이들도······.” “그것 때문에 잡혀간 거야. 당연하지만 너희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도 그놈들이고.” “이이이이이익.” 소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분노했다. 그것을 보는 아르페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고통은 대개 감정으로 희석되게 마련이다. 진행도 1%에 불과한 저주라면, 그녀가 분노하는 이 잠깐의 시간에도······. “좋아, 고생했어.” “아.” 아르페는 이전보다 조금 더 어두운 빛을 발하게 된 흑요석을 쥐고 뒤로 물러섰다. 만물열람으로 확인해보아도 이제 그녀의 몸에는 저주의 기운이 일절 남아있지 않았다. 에이나는 눈을 깜박이며 신기해했다. “몸이 가벼워요. 저는 그냥, 굶주리고 지쳐서 그런 줄······.” “감정의 동요도 줄어들었지?” “······네.” 다 알고 있다는 듯 짓궂게 묻는 아르페에게 에이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긍정했다. 그녀 뒤로 마을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 마도사님. 저희도 그 몬스터로 변하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혹시 저희도 치유를······.” 하여간 자기 안위는 귀신같이 챙기는구나.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흰 괜찮아. 아무래도 이 변이 저주는 아직 성장이 완벽히 끝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만 걸리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문제는 너희 자식들이지.” “제, 제 딸이!?” “저주······ 저주라니!” “빨리 찾아낼 수만 있으면 괜찮아. 벌써부터 걱정하지는 마.” 단순히 병사들에게 잡혀간 줄만 알았던 아들딸들에게 몬스터 변이 저주까지 걸려 있었다니! 마을사람들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검을 차고 다니는 병사들도 두렵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힘, 마법이나 저주 따위가 훨씬 더 두려웠다. “마도사님,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제 자식이 몬스터로 변하다니, 그렇게 되면 저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제 아들놈을!” 가뜩이나 자식이 걱정되는데 사실은 타임 리미트까지 걸려 있었다는 사실에 마을사람들은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병사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찢어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리고 그것은 메테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르페, 당장 움직이자! 마을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혹시 그 나쁜 놈들이 다른 곳에서도 아이들에게 똑같은 짓을 한 거면!” “네 말마따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일대를 다 수색하기라도 할 거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 사실 옛날 영웅담이나 용사전설에 이런 내용은 아주 흔하게 등장한다. 어떤 마을이 통째로 위기에 빠지고, 용사는 마을사람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제한시간 내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비극이 일어나고, 용사는 심적으로 크나큰 고통을 받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끝내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하지만 우리는 정신적인 성장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다 스킵한다.” 용사가 사막에서 정글에서 울다가 웃으며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옛날 얘기다. 아르페에게는 그런 식으로 소모할 정신과 체력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퀘스트 수행 장소도 몰라 헤매고 다니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퀘스트 받았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끝내버리는 것이 신세대 용사 클래스! “다 비켜봐.” “네, 넵!” 아르페를 중심으로 하여 수십, 수백 줄기의 마나의 실이 뻗어 나와, 순식간에 마을을 벗어나 이 일대로 퍼져나갔다. “후우우······.” 아르페는 지그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마나라곤 모르는 마을사람들도 그가 뿜어내는 기이한 기운에 압도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메테르만이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었으면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는데.” “누가 간단하대냐.” 마나 포션 한 병 꺼내어 물고 마나의 실 컨트롤에 전력을 집중하며 아르페가 투덜거렸다. 지금 그는 수백 줄기의 마나의 실을 사방으로 뻗어내어 반경 500미터, 1킬로미터, 2킬로미터로 차차 수색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레벨 350에 달했던 전생에야 이게 쉬웠지만 어디 그게 지금도 쉬울까! 만약 마나의 실을 극한에 가깝게 강화시켜주는 마나 스트링 스펠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시도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펠을 익히는 순간부터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개사기 스펠이었다. ‘잠깐, 이거 저번에 메테르에게 했듯이 기술의 중첩도 가능할 것 같은데······.’ 자신의 감지 스킬을 마나 스트링에 얹는다면 스펠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아르페는 그것을 곧장 실행에 옮겼고 그것은 아주 당연한 성공으로 돌아왔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메테르의 재능을 빼앗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이 일지만······ 지금은 솔직히 그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5킬로미터. 10킬로미터······.” “아르페, 마나 빌려줄까?” “네 쥐꼬리만 한 마나로 어딜. ······찾았다.” 메테르를 향해 재차 투덜거리던 그 순간 아르페가 눈을 번쩍 떴다. 긴장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사람들, 전신을 잠식해가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그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갖게 된 에이나, 어디에 어떤 놈이 기다리고 있건 언제든 돌격할 준비를 마친 메테르까지······. 그 모두를 향해 아르페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제 에필로그 찍으러 가자.” 그곳은 마을로부터 제법 떨어진 야산 인근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야생의 던전과 조우하기 딱 좋은 곳. 이 세상의 던전은 딱 두 종류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용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던전이고, 두 번째는 용사에 대적하는 무리들이 온갖 위험한 함정과 초특급 기밀 자료라던가 비밀 실험이라던가 여하튼 꽁꽁 감춰둬야 하는 것을 감추고 있는 던전이다. 두 던전의 공통점은 결국 용사에게 발견되어 낱낱이 털린다는 점. 야산에 있던 던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희들은 따라올 거 없다니까.” “하지만 마도사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시는데 저희라고 물러날 수는······.” “방해되니까 근처에 적당히 숨어 있어라. 물론 도중에 죽어도 책임 안 진다.” 마왕군 사천왕 출신 용사는 역시 가차 없었다. 퀘스트의 방해요소를 미연에 치워버리는 단호함! 마을사람들은 이 근처에 또 다른 위험요소가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딸을 두고 도망만 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저마다 집에서 챙겨온 날붙이를 단단히 쥐고 버티어 섰다. “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적어도 이곳에서 우리 아이들을 맞겠습니다!” “그래? 혹시 마을로 또 병사들이 쳐들어올까 봐 무서운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정곡인 모양이었다. 아르페는 픽 웃어버리곤 메테르와 함께 야산의 중턱에 난 동굴로 망설임 없이 진입을······. “같이 갈래요.” “아, 넌 또 왜.” 에이나가 그들을 막아섰다. 그녀의 한손에는 고블린도 쉽게 부러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마도사님 일행만 가면 분명 그 아이들이 겁을 먹을 거예요. 한 사람 정도는 아이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마냥 논리가 없는 건 아니긴 한데, 너 그거······.” 중간에 희생당하고 용사의 분노를 증폭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줄 딱 좋은 조연의 마인드인데. 솔직히 녀석이 하는 말 곳곳에서 죽음의 기운이 풍겨져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뭐하면 지금 당장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이렇게까지 수상하니 오히려 멀쩡히 살아 돌아올 것 같기도 했다. “부탁드려요, 마도사님. 그 아이들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가뜩이나 병사들에게 붙잡혀와 무서워하고 있을 아이들인데, 마도사님 일행과 조우하고 자칫 더 큰 실수를 저지를지도 몰라요······!” 사려까지 깊어요, 아주. 이렇게 되면 쳐낼 수도 없다. 아르페는 그 순간부로 에이나의 목숨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 죽을 녀석은 어떻게든 죽으니까! “좋아, 네 희생으로 아이들은 보다 무사해질 거야.” “왜 제가 희생되는 전제인 거죠!?” “가자, 메테르. 전위 부탁해. 내가 멈추랄 때 멈추고.” “알겠어!” 그렇게 용사 둘과 소녀A로 구성된 파티는 마을사람들을 놔두고 동굴로 돌격했다. 동굴 안은 무척이나 음침하고 쳐진 기운이 떠돌고 있었는데, 던전의 공기 중에도 저주가 섞여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저주를 활성화시키는 또 다른 음의 저주였다. “먹이 많아서 신났네, 그지?” 그리고 아르페는 흑요석을 꺼내어 그 저주를 모두 다 빨아들였다. 설마 이런 보물이 평범한 마을A에 있을 줄 몰랐던 시점에서 마왕군의 패배다! “응, 역시 아르페는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아. 우흐흐.” 메테르는 아르페가 흑요석에 저주를 가득 채우는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에이나는 던전 입구에서부터 기행을 벌이는 용사들을 보며 정말로 이 사람들을 믿어도 될까,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들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동굴을 조금 더 나아가자 곧 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이 몬스터는 아니었다. 바로 얼마 전 마을에서 보았던 병사들과, 마을에서는 보지 못했던 병사들이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 사이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마도사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다. “헛!? 침입자다, 침입자!” “조심해, 마을에서 봤던 마도사가 있어······!” “마도사? 저 꼬맹이가?” 그들을 보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곧장 요격할 준비를 하는 병사들. 이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 시점에서 대공과 흑마법사, 혹은 마왕군 사이에 연결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그런데 아르페가 이를 빠득 갈며 앞으로 나서려는 그때, 그보다 먼저 메테르가 한 발짝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아이들을 몬스터로 만드는 건······ 나빠.” 메테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분노를 품고 번쩍였다. 아르페는 그녀의 ‘선악판단’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우리는······.” 용사와 악당이 조우했을 때, 악당은 으레 자신의 그럴듯한 논리를 설파하며 용사를 비웃는다. 용사는 거기에 분노하고 놈들과 싸우게 되는데, 악당이란 놈들의 종족적 특징이 바로 수다이기 때문에 놈들은 싸우면서도 계속 자신들의 정당성과 대의에 대해 떠든다. 용사는 여기서 두 번 빡치게 된다. 용사 육성 던전에서의 데스나이트가 아주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지. “시끄러워, 닥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메테르는 놈들이 입을 열거나 칼을 뽑거나 마법을 영창하기도 전에 바닥을 박찼고,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딱 한 번 휘둘렀다. 버서크도 없었고, 강타도 발동하지 않았다. 마나조차 담지 않은 그냥 가벼운 일격이었다. “후우우.” 그리고 그것으로 모두가 전멸했다. 대사 한 번 제대로 칠 시간도 없이, 마도사가 오른팔에 봉인한 흑염룡을 불러낼 틈도 없이! “히이익······.” 아르페가 지닌 마도사로서의 힘만 보고 그들에게 의지했던 에이나는, 메테르의 가벼운 검격 한 번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참상을 보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그 참상을 만들어낸 메테르 본인은 스스로 저질러놓고도 실감이 오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아르페에게 돌아서서는 말했다. “아르페, 얘네 너무 약해.” 아르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했지만 곧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괜찮아.” 보통 용사의 첫 퀘스트는 쓰라린 실패와 고난이 함께하기 마련. 그러나 애석하게도 용사들은 뜻하지 않게도 이 시점에서 이미 디아스에서의 레벨링이 거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2회차 진행이 보통 이렇지 뭐.” “2회차?”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했고, 아르페는 그저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에이나가 여전히 혼란에 빠진 가운데 용사는 던전을 주파했다. 그들을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Chapter 8. 그러고보니 용사였지. - 4아르페는 던전을 주파하며 만물열람을 발동하여 던전 내에 설치된 함정이며 그들로부터 가까운 적의 숫자와 거리, 능력, 그 외에 던전이 지니고 있는 마나 따위를 실시간으로 측정했다. 그가 존재하는 이상 모든 함정과 기습은 무의미하며 그 누구도 아르페와 메테르의 공격을 단 한 방도 버텨낼 수 없었으니, 에이나가 쉴 틈도 없이 뛰어야 간신히 그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이놈들, 강하다······!” “‘그 말을 내뱉고 살아남은 자가 없는 대사 50선’의 3위구나. 너도 공부 좀 했는걸.” 에이나의 손을 붙잡고 달리던 아르페가 가볍게 마나를 실어 내던진 단검이 뒤로 물러나던 병사의 목을 꿰뚫고 그 뒤에 숨어 있던 흑마법사의 모습을 드러냈다. “으, 은밀한 어둠의 축복······.” “흥.” 상대에게 정체가 뻔히 드러나는 주문을 외우며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 그러나 놈이 미처 마법을 발현하기 전 앞서 병사의 목에 꽂혔던 단검이 다시 스르륵 허공으로 떠올라 놈의 심장에 박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도 못한 채 놈이 맥없이 쓰러졌다. 메테르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들을 완벽히 정리하고는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얘네 정말 너무 약해.” “내가 언젠가 마계 최고의 셰프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지?” “응! 언젠가 그 마족이 만든 요리를 먹어보고 싶어!” 아르페는 그 말을 하는 메테르를 무척이나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보충했다. “아무래도 그 마족이 지금 일생일대의 요리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여기에는 나쁜 사람들밖에 없는데.” “그런 게 있어.” 만약 강력한 마족이라도 끼어 있었다면 아르페와 메테르가 낭패를 볼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작전에 레벨 200을 넘는 마족 같은 놈들을 마구 배치할 리가 있겠는가? 그들 모두가 인간 흑마법사였고, 심지어는 개중 레벨 50을 넘기는 놈도 없었다. 사실 마왕은 비단 용사를 상대할 때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꼭 자기 휘하에서 가장 약한 순서부터 차례대로 부려먹는다. 협력세력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 그렇게 해서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강자만 남긴다는 논리인 것일까 생각하면 얼추 말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은 바보다. “도, 도망쳐······!” “안 돼, 도망 못 쳐.” “그분, 그분을 불러야······.” “안 돼, 못 불러.” 약한 놈들의 특징은 강한 놈을 보면 일단 도망가려고 하고 그게 안 되면 지원군을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전천후 용사 메테르와 썩은 용사 아르페가 있는 이상 무리였다. “큭!” “카학!” 그들을 발견한 모든 자가 그 순간 척살되니 던전의 깊숙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들에게 소식이 흘러들어갈 리도 없다. 따라서 모든 놈이 비슷한 대사를 내뱉거나, 내뱉기도 전에 죽어갔다. 아르페가 차후 집필 계획 중인 단역 단말마 대사집의 레퍼토리만이 그렇게 충실해지고 있었다. “통신마법을!” “그것도 안 돼.” “칵!” 아르페가 그나마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통신마법이었다. 이 던전 안에 있는 놈은 그 누구도 두렵지 않지만 만약 정말로 마왕군 간부 같은 놈이라도 출동했다간 대책이 없어지니까. 물론 아르페에게 만물열람과 마나 스트링이 있는 한, 그의 앞에서는 통신마법은 물론이고 간단한 불꽃이나 저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놈도 없었다. “네,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응, 알고 있으니까 설명해주지 마.” “커헉!” 자신이 대공이라도 된 줄 착각하는 병사들, 마왕의 자리에라도 오른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흑마법사들. 그들 모두가 제대로 협박을 해보기도 전에 메테르의 검과 아르페의 단검에 죽어갔다. 1층은 금세 끝났고 2층 또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을 따라잡느라 에이나만이 지쳐갈 따름이었다. “어떻, 헥, 이렇······.” “쉿.” 3층에 내려오자마자 마나의 실을 사방으로 뻗어낸 아르페가 곧장 일행을 조용히 시켰다. 그의 표정이 씁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누가 첫 퀘스트 아니랄까 봐······ 던전은 3층에서 끝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퀘스트 착수 시기가 조금 늦었던 모양인데. 쳇.” “아르페는 가끔씩 굉장히 심오한 말을 해.” “이곳에 아이들이 있는 건가요······?” 1층과 2층의 공기 중에 퍼져있던 저주는 그래도 일반인이 견딜 만한 농도였다. 그러나 3층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할 만큼 자욱한 안개가 끼어 있었다. “큭, 마도사님. 공기가, 타는 듯이······!” 당장 에이나의 안색이 파리해지자 아르페는 쯧, 혀를 차며 흑요석을 꺼내 대기의 마나 속에 깃든 저주를 모조리 뽑아냈다. 그녀의 안색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 대기를 모두 빨아들이기 전까지는 고통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그녀의 저주를 미리 없애둔 것이 다행이었다. “여기서부턴 전속력으로 가자. 에이나 너는 필사적으로 뛰어,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3층은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오직 3인이 달리면서 내는 작은 소음만이 복도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모든 함정은 철저히 파괴되어 소멸해 있었고, 1층과 2층에선 심심할 때마다 등장했던 병사와 흑마법사들도 없었다. 3층의 저주는 그들에게도 위험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너무 불안할 정도로 고요해. 아르페······.” “걱정 마. 아이들은 아직 안 죽었어. 적어도 전부는, 아냐.” 아르페의 말이 암시하는 바는 메테르와 에이나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쉬웠다. 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발걸음은 그들의 감정을 반영하듯 빨라졌다. 메테르가 저주로 가득한 던전을 용감하게 내달렸다.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 한 줄기를 뽑아내 그 끝에 탐욕의 흑요석을 묶고는, 그것을 회전시켜 저주란 저주는 모조리 뽑아내 저장하며 그녀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로 에이나가 벌써부터 눈물을 그렁거리며 그들을 쫓았다. 가녀린 손에 무기삼아 쥔 나뭇가지가 그녀의 마음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방 하나를 지나고, 두 개를 지나고, 세 개를 지났을 때쯤. 메테르가 돌연 멈추어 섰다. “······으.” “전사님?” “으으으으으.” 메테르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만물열람으로 인해 주위 환경의 정보를 그녀보다 빨리 읽어 들인 아르페는 그녀가 어째서 그런 반응을 하는 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능하면 눈치 채지 못해주기를 바랐지만, 탐욕의 흑요석이 저주의 안개를 모두 빨아들여 사방을 밝게 만들어주고 있었으니 역시 무리였다. “······죽어있어.” 메테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너머, 던전 방의 한 구석에 피를 흘린 채 죽어 누운 채인 몬스터들의 모습을 보며. 아르페는 침묵했고, 머지않아 에이나 역시 그 몬스터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달이 채 끝나지 않은 것인지 기형적으로 뻗어난 팔과 다리, 작은 몸집, 산산이 찢어진 인간의 옷의 잔해. 그 위를 덮은 갈색의 핏자국. “아, 아으으.” 몬스터들의 사체를 확인한 순간 에이나가 뜻이 불분명한 신음을 토해냈다. 몬스터들에게 정체를 특정할 만한 옷이나 장신구는 없었지만, 지금 그녀가 보기에는 그들 모두가 자신의 동생처럼만 여겨졌던 것이다. 아르페는 만물열람을 통해 녀석들이 몬스터가 된지 열흘도 넘었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곳에 죽어 누워있는 녀석들 모두가 그녀의 동생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아이들이었을 테니까. “왜, 죽인 거야······?”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어. 아이들을 몬스터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것을 이용해 다른 짓을 벌이려던 계획이 있었을 텐데 정작 몬스터로 변이한 아이들을 바깥으로 내보내지도 않고 죽였다는 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왕군이 혼란을 노리고 있었다면 몬스터로 만든 아이들을 바깥에 내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기껏 저주에 성공해놓고도 녀석들을 죽였다? 그처럼 바보 같은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놈들에게는 아직 아르페가 눈치 채지 못한 다른 계획이 있었단 말인가? “많이 아팠겠다.” 아르페가 상념을 이어가던 그때 메테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피를 토하고 죽은 몬스터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도저히 눈을 뗄 줄 몰랐다. 어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많이 아팠겠다······. 무지, 아팠겠다.” “메테르.” 그녀에게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버서크의 전조였다. 아르페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은 바로 그 순간 기운은 오롯이 메테르에게로 수렴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욱 무서웠다. 메테르가 아르페를 돌아보며 부탁했다. “아르페? 아이들, 흔적이 남지 않게······.” “알았어.” 아르페가 손을 뻗자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한순간에 타올라 사라졌다. 기껏 돈을 주고 배운 마법의 첫 무대가 이것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미안해, 얘들아······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해.” “아, 아으으······ 흑.” 메테르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재로 화해가는 아이들의 사체를 가만히 보며 중얼거렸고, 에이나는 혹시 죽은 몬스터 중 하나가 자신의 동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르페 역시 그 모습을 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메테르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아직 정신적으로는 미숙해. 가능하면 이렇게 더러운 일은 조금 나중에 겪게 하고 싶었는데······ 빌어먹을.’ 그러나 이미 닥쳐온 일은 어쩔 수가 없다. 아르페는 메테르와 에이나의 주위를 환기하기 위해 가볍게 박수를 쳐 그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모았다. “애도는 나중에도 해줄 수 있어. 메테르, 지금은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해.” “······알았어.” 메테르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은 저주의 안개, 그 너머를 노려보며 그녀는 바닥을 박찼다. “서두르자.” 던전의 3층은 1층과 2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길었고, 저주를 머금은 대기가 사라질 때마다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몬스터의 사체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나는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몸서리를 쳤지만 두 용사는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불꽃으로 깔끔하게 태워줄 뿐이었다. 특기할 것은 메테르의 상태였다. [메테르] [레벨 ? 174] [버서크 Lv13] 메테르는 지금 버서크를 발동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만물열람으로 확인한 그녀의 정보란에서 버서크 스킬의 레벨이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보였다. 몬스터가 된 아이들의 사체를 볼 때마다, 그것을 태워 재로 만든 후 뒤로 하며 다시 저주의 안개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그녀에게서 붉은 기운이 피어났다가는 그녀 안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 발산될 한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무수한 세월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며 전장을 누빈 끝에 경지에 오른 광전사에게서만 이따금 보인다는 증세를 지금 메테르가 보이고 있었으니, 아르페는 감히 지금 그녀의 심정을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벌써 배, 백이 넘었어요. 마도사님,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죠.”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규모가 더욱 컸던 모양이야. 정말 최악의 가능성은 이런 던전이 한두 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메테르, 멈춰.” 아르페의 말을 듣는 순간 메테르가 그 자리에 정지했다. 그녀 역시 직감하고 있었다.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대기의 저주는 이미 흑요석이 빨아들일 대로 빨아들이고 있으니, 3층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흑마법사는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 파악했을 터. 함정을 쳐두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메테르의 레벨이라면 이 따위 던전에서, 이 따위 저주를 펼쳐두고 있는 흑마법사에게 당할 리는 없었으나······. “네가 분노한 건 알아. 하지만 그 분노를 가다듬지 않으면 결국 언젠가 발목을 붙잡히게 될 거야. 대부분의 광전사가 그렇게 해서 죽음에 이르는 거야.” “아르페······ 충고 고마워.” 메테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르페는 그 미소와 마주하며 역시 자신이 그녀에게 충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난 절대 실수하지 않아. 실수하면 안 될 순간이니까, 절대로.” “······그래. 그럼 가자.” “응.” 메테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이 뻗어나가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함정을 완벽하게 걷어냈다. 당연하게도 적 또한 그 순간 그들을 알아차렸다. “함정을 눈치 챘구나, 빌어먹을 자식들!” 적은 한 명이었다. 정확히는 이 저주의 대기를 견딜 수 있는 수준의 흑마법사가 무리 중 한 명뿐이었던 것뿐이지만. “네놈들은 너무 날뛰었어······ 내가 네놈들을 친히, 응?” 저주로 가득한 대기가 흑요석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고, 거대한 공동과 그 안에 폐품처럼 아무렇게나 쌓인 아이들의 모습이, 조금 지나치게 화려한 로브를 걸친 채 그들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고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어린 아이잖아······!?” 마찬가지로 놈 또한 일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놈은 침입자가 어린아이 셋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설마 아이들이 이 저주를 견뎌내고 이곳에까지 도달하다니!” 아르페는 담담히 물었다. “이 빌어먹을 저주는 네놈이 퍼트린 거냐?” “암, 내가 퍼트렸고말고! 하지만 여태까지 썩 결과가 좋지 않았는데, 지금 네놈들을 보니······.” 놈의 입가에 흉측한 미소가 어렸다. “잘하면 드디어 이 실험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실험······.” 롱 소드를 움켜쥐고 있는 메테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녀는 흑마법사와 대치하는 그 순간에도 공동 안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굶주리고, 저주에 더럽혀져, 괴로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실험이라고······.” 그녀의 몸에서 붉은 증기가 솟구쳤다가 흡수되고, 솟구쳤다가 흡수되기를 반복했다. 분노가 형상화되어 사람의 모습을 이룬다면 꼭 지금 메테르 같지 않을까, 아르페는 생각했다. “당신은 나빠. 아주 나빠!” 메테르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놈을 매도했다. 그녀의 몸을 드나드는 붉은 증기의 양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흑마법사에게는 그 증기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무거운 분노를 오롯이 느끼고 있었더라면 저와 같은 미소는 짓고 있지 못했을 테니까. “하하하, 아주 웃기구나, 아이야! 누구 멋대로 선악을 판단하는 거냐? 넌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아! 아주!” 메테르는 놈의 말을 무시하고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검을 내밀어 자세를 취했다. 그녀와 흑마법사 사이에는 50미터 이상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으나 그녀는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그 거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흑마법사 역시 그녀의 감정 상태를 파악했는지 히죽, 웃으며 스태프를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네게는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이 실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 위대한······.” 그러나 놈은 악역의 전매특허인 여태까지의 사정이나 어째서 우리가 이런 나쁜 짓을 했는가, 우리의 최종목표는 무엇이며 세상은 어떤 식으로 공포에 떨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마저 하지 못했다. “후우.” 놈의 목은 메테르의 롱 소드에 의해 단번에 잘렸고, 보통 인간은 목이 잘리면 죽게 마련이고, 죽은 자는 원래 말이 없는 법이고, 놈은 안타깝게도 스스로에게 리치화의 저주를 걸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전사님.” “메테르, 너······.” 분명 조금 전까지 메테르는 놈과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흑마법사가 있던 바로 그 위치에 선 채 검을 수납하고 있었다. 마치 마법을 보는 것만 같은 광경에 에이나와 아르페의 눈이 휘둥그레 크게 뜨였다. 그것은 아르페를 돌아보는 메테르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페, 이상한 기분이야.” 그녀는 마법을 다루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아르페의 부츠를 빌려 블링크라도 썼단 말인가? 아니,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내 안에, 원래 이 힘이 있었던 것만 같아.” “그야······ 그렇겠지.”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허탈한 목소리로 대꾸하고 말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에 비치는 정보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천재라고는 진즉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녀의 재능이 전생에서보다 더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메테르] [용사] [레벨 ? 174] [고유능력 ? 가속] 전생의 용사가 19살에나 간신히 각성했던 고유능력, 가속. 그것을 13살의 메테르가 각성했다. ────────────────────────────────────────────────────────────────────────────────────────────────────────────────────────────────────────────────Chapter 8. 그러고보니 용사였지. - 5전생에서 용사는 지극히 불리한 조건으로만 가득했던 환경에서도 빠른 성장을 거듭했다. 레벨 200이었던 상태에서 불과 1년 만에 374레벨까지 성장한 것은, 제아무리 훌륭한 셰프의 조력이 있다한들 그녀의 고유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 용사가 19살에 각성한 고유능력의 이름은 바로 가속. 가속 스킬은 패시브로도, 액티브로도 기능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가속시켜준다. 가장 작게는 그녀의 움직임에서부터, 가장 크게는 그녀의 성장까지도. 여태까지 그녀의 레벨업이 기이할 만큼 빨랐던 것도 그녀에게 잠재되어 있던 고유능력의 파편이며, 바로 방금 그녀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여 흑마법사를 베어버린 것도 가속의 힘이다. 물론 액티브로 발동할 때에는 상당한 양의 마나를 소모해야 하지만, 가장 단순한 움직임의 극대화였기에 탈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전생에서보다 실전에 투입된 게 빠른 만큼 더 빠르게 각성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저 능력을 설마 13살의 나이에 얻을 줄은······.’ 아르페는 가속을 각성하고 스스로도 어리둥절해하는 메테르를 보며 어이가 없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고유능력이 없다. 마족도 마찬가지다. 설령 고유능력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고유능력을 각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십 년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각성하지 못해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일단 고유능력을 각성한 자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함을 얻어, 성장한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대부분의 인물에게는 고유능력이 있었다. 고유능력은 제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 해도 여타의 스킬이나 클래스를 압도하는 특성이 있으니까. “고유능력······.” 메테르는 아르페의 설명을 듣고도 아직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조금 전에는 스스로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고 본능에 몸을 맡겨 폭주한 결과였을 것이다. 지금 다시 가속을 써보라고 한들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겠지. 물론 한 번 각성한 능력은 계속 그녀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테니 앞으로 그녀의 레벨 업은 이전보다도 더욱 빨라질 테고······. 아르페는 이러다가 정말 앞으로 2년도 걸리지 않아 마왕을 죽여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메테르, 너무 고민하지 마. 내가 앞으로 차근차근 가르쳐줄 테니까.” “알겠어, 아르페. 역시 아르페는 이미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후후, 정말 대단해.” 흑마법사를 처단하여 속이 조금은 개운해진 것일까, 메테르는 그제야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에이나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아르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마, 마도사님. 이제, 그러니까······.” “그래, 미안.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서 우리 둘 다 멍해져 있었어. 이제 퀘스트를 마무리 지어야겠지.” 아르페는 에이나의 손을 떼어내며 돌아섰다. 죽어 자빠진 흑마법사의 사체 너머, 공동 곳곳에서 고통에 흐느끼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아파.” “엄마······.” 자신들을 속박하고 있던 흑마법사가 죽었음에도 공동을 가득 채운 아이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고도, 감각도 모두 잃고 그저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괜찮아, 얘들아. 우리가 도와줄게!” “시에나, 시에나!” “아파. 아파!” “엄마 보고 싶어. 엄마.” 공동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대체 이 안에 있는 아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3층을 나아가며 마주한 몬스터 사체의 숫자는 이 아이들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이 녀석들이 모두 몬스터가 된다면, 만약 마왕군이 이들을 통솔해 왕국 내의 다른 마을을 습격하기라도 한다면······. “마왕군과의 전쟁이 조금 앞당겨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놈들은 기껏 몬스터로 만든 아이들을 죽여 던전에 내팽개쳤다. 그뿐만 아니라 메테르에 의해 목이 날아가기 전 흑마법사가 실험이니 뭐니 떠들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아이들을 몬스터로 만드는 것이 아닌 듯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지.’ 아르페는 품에서 탐욕의 흑요석을 꺼내어들었다. 그 순간 공동 내의 흐름이 일변했다. 공기 중에 미약하게 남아있던 기운, 죽은 흑마법사의 사체가 흘리는 음흉한 기운, 결정적으로 공동 내에 굴러다니고 있는 무구한 아이들의 체내에서 들끓는 저주의 기운. 그 모두가 검은 연기의 형태로 솟구쳐 아르페와, 그의 손에 들린 흑요석으로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큭.” “아르페!?” 아르페가 만들어낸 광경에 압도되어 있던 메테르는 그가 갑자기 자기 머리를 부여잡는 것을 보며 비명을 질렀으나, 아르페는 걱정은 필요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한꺼번에 수많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라 제아무리 만물열람의 소유자인 아르페라 해도 두통을 피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여기서 용사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게 놔두는 것보다는 두통을 감수하는 쪽이 나았다. “너는 아이들을 달래줘. 에이나의 말마따나 이 저주는 감정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으니까······ 그저 편안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족해. 부탁한다.” “······알겠어.” 멀리서 본다면 그것이 사람인지 쓰레기인지 구분도 하지 못할 만큼 무성의하게 겹쳐져 방치된 아이들. 아마 그간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것이다. 저주를 증폭시키기에는 이만한 환경이 또 없겠지. “시에나! 시에나, 어디에 있니!” 에이나는 자신의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아이들 틈을 헤집고 다녔으나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르페는 그녀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괜찮아, 얘들아. 이제 괜찮아······. 괜찮아.” “시에나······ 제발!” “아, 으아아······.” 바로 그때, 기적처럼 메테르와 에이나는 물론이고 아르페의 마음까지 밝게 만들어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 틈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아닌 분명한 의식을 가진 목소리가 새어나온 것이다! “아르페!” 잽싸게 그 목소리를 캐치한 메테르가 환희에 차 외쳤다. 아르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그녀에게 지시했다. “녀석을 일단 바깥으로! 아마 점점 저주에서 해방되는 녀석들이 나타날 거야!” “응!” 메테르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당장 그 아이를 바깥으로 꺼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괴로워하는 다른 아이들을 최대한 서로 떨어트려놓으며 쓰다듬어주고 보듬었다. 여태까지 분노로 고조되던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고, 아이들을 향한 무한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르페는 두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으으?” “누, 눈이 보여. 누나는 누구야?” “조금만 더 참아. 이제 완전히 나아질 거야!” 흑요석으로 보다 많은 마나가 몰려들면 몰려들수록, 점차로 더 많은 아이들이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1명에서 10명으로, 10명에서 50명으로······ 다른 아이들의 안색도 차차 평온해지고 있었다. “아르페, 대단해······ 대단해.” “시에나!” 그러나 저주에서 풀려나 제정신을 찾은 아이들의 숫자가 100명을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에이나의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붙잡혀간 날짜로 계산해보면 여태껏 그들이 조우했던 몬스터들 사이에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르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자신의 손에 들린 흑요석의 상태를 살폈다. 흑요석은 거의 한계에 가까울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그야 언젠가 한계를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랐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퀘스트의 규모가 컸던 탓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르페가 사태의 악화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준비한 수단이 있다는 것이었다. “강화.” 아르페는 메테르와 함께 초보자 던전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강화 스킬을 손에 넣은 적이 있다. 그것은 평범한 강화가 아니다. 아티팩트의 격을 근본적으로 높여버리는, 전생의 아르페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습득 난이도 SSS랭크의 스킬! 그러나 지금은 그 스킬이 아르페의 손에 있었다. 만물열람으로 모든 사물의 구조를 꿰뚫는 아르페가 강화 스킬을 갖게 되니, 사물의 일부분만을 집중하여 강화시키거나 본래는 강화시킬 수 없어야 할 사물을 강화하는 것까지도 가능해졌다. 간단히 말하면 개사기였다. 그는 탐욕의 흑요석 또한 스킬로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생각이 맞았다. 흑요석은 아르페의 방대한 마나의 절반 이상을 순식간에 집어삼키고는, 이전보다 더욱 눈부신 빛을 발하며 그 크기를 키웠다. 그 순간 공동의 기류가 다시 한 번 달라졌다. 흑요석의 흡수력이 순식간에 강화되면서, 아이들의 몸속에 도사리고 있던 저주의 마나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아!” “아파, 너무 아파!”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생을 증명하는 고통이었다. 비명은 함성이 되고 절규는 환희가 되리라. 아르페는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마나의 흐름을 조종하느라 머리가 터져나갈 것만 같았지만, 그것을 개무시하며 더더욱 가속했다. 늦장을 부리다 간발의 차로 몬스터가 탄생하기라도 하면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다. “시에나······ 시에나!” “어, 언니.” 에이나가 자신의 동생을 찾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이들 틈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던 그녀의 동생은 아르페의 힘에 의해 간신히 의식을 되찾고 자신의 언니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쪽으로 힐끗 눈길을 준 아르페는 이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 언니이.” “시에나? 시에나, 왜 그래! 시에나!” 지금 정말로 그 코미디가 만들어지기 직전의 상황이었으니까. “언니, 아파. 머리랑 가슴이 너무 아파. 언니, 언니.” “시, 시에나! 마도사님, 시에나가!” 아르페는 에이나의 절실한 부름에 대꾸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는 시에나라는 소녀의 상황에 대한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정보가 비추어지고 있었다. [시에나] [레벨 ? 1] [힘 ? 6 민첩 ? 7 체력 ? 14 마력 ? 23] [마속성 이종족 중급체 변이중 33%] [실험 성공] 시에나를 향한 저주는 성공적으로 발휘되어 녀석을 몬스터로 이끌고 있었다. 저주의 기운을 빨아내고자 해도, 이미 변이가 시작된 지금은 괜히 마나가 꼬여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죽어가도록 만들 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그것도 하필이면 에이나의 동생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너무나 용사의 이야기에 어울려 ‘처음부터 이렇게 시나리오가 짜여 있었구만!’ 하고 납득할 정도였다. “마도사님! 제 동생이, 얼굴이 검게······ 마도사님!” “······.”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메테르 역시 시에나의 상태를 파악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그녀는 에이나처럼 아르페를 연거푸 부르는 대신 침착한 목소리로 아르페에게 물었다. “아르페······ 저 아이는 늦은 거야?” “너······.” 만약 늦었다면 무엇을 할 생각인데? 아르페는 그녀의 대답이 두려워 묻지 못했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그녀가, 아이들을 구하고 싶어 하는 그녀가,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는 확신이 서 있었기에. “저, 전사님. 안 돼요. 돌아올 수 있어요. 시에나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마도사님, 전사님을 말려주세요!” 그러나 아무래도 에이나는 메테르가 무슨 짓을 벌일 지 대충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두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뜬 채 그녀가 필사적으로 메테르를 붙잡았다. 레벨 1에 불과한 그녀가 메테르를 조금이라도 멈출 수 있을 리 없건만, 메테르는 시에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에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 또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에이나, 하지만······ 만약, 시에나가 다른 아이들을 다치게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해, 시에나 본인은 어떻게 해······? 나도 모르겠어. 에이나, 미안해. 나도 모르겠어······.” “전사님, 안 돼요! 제발 시에나를 살려주세요! 마도사님, 마도사님!” 에이나와의 대화는 오히려 메테르에게 부정적인 결단을 내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메테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변이를 일으키고 있는 시에나를 향해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기다려, 메테르.” 아르페가 메테르를 멈추어 세운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강화의 힘으로 인해 S랭크로 거듭난 흑요석이 시에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아이의 저주를 걷어낸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공동에는 저주의 기운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왕군이 무엇을 계획했든 그 일부가 허탕으로 돌아간 순간. 이만하면 퀘스트 성공이라고 보아도 되겠지. 단 한 명, 에이나의 동생을 빼놓고 말이다. “멈추라니까, 메테르. 아직 퀘스트 안 끝났어.” 메테르는 여전히 아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나, 아르페의 부름에 정직하게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아르페, 혹시······.” 그녀의 입이 열렸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혹시, 가능한 거야······?” “하지만 검은 뽑아들고 있어. 언제 폭주할지 모르니까.” “······응.” 메테르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 쥐었다. 에이나도 더 이상 메테르에게 기대지 않고 간절한 눈으로 아르페를 바라볼 뿐이었다. 두 여자아이의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그는 후우, 깊은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발을 떼었다. 아르페는 본디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험가는 모험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위험을 무릅쓸 필요 따위는 없다. 실패를 각오할 필요도 없다. 만물열람으로 모든 정답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저 정답만 행하면 되는 것이다. 간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시에나의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낸 정보창에서 아르페의 마음에 걸리는 요소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몬스터가 아닌 ‘마속성 이종족 중급체’라는 의미 불분명한 단어의 나열이었고, 두 번째는 다른 어떤 몬스터의 정보에서도, 이 자리의 다른 모든 아이들의 정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실험성공’이라는 단어였다. 실험의 내용은 아이들을 몬스터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어째서 먼저 몬스터가 된 아이들에게는 실험성공이라는 낙인이 붙어있지 않았는가. 어째서 기껏 몬스터로 만든 녀석들을 죽였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더더욱 마속성 이종족이라는 말에 의문이 생긴다. 그야 물론 몬스터는 마속성이다. 그렇지만 몬스터라는 간단한 표현을 놔두고 어째서 마속성 이종족이라는 표현이 쓰였단 말인가? 처음으로 발견한 저주의 대상인 에이나의 정보에도 똑같은 문구가 있었기에 별 의심을 하지 않았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르페의 큰 착각이었던 것이 아닐까? 만약 흑마법사들의, 마왕군의 목표가 단순한 몬스터 변이가 아니었다면? 몬스터로 완성된 아이들이 사실은 실험의 실패물이며, 그렇기에 살해당한 것이라면? 만약 에이나와 시에나만 특별했던 것이라면? 시에나‘만’이 이 실험에 성공한 것이라면? “크, 크으으으아아아아. 언니, 너무 아파. 언니, 언니이!” “시에나, 안 돼! 시에나!” “아르페······! 빨리!” 만약, 저 마속성 이종족이라는 말이······ ‘마족’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실험의 목표가, 인간을 마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 빌어먹을, 마왕 자식이······.” 만약 마왕이, 전생과는 다른 ‘지배’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라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절대지배’하기라도 할 생각이냐!” 아르페가 이를 빠득 갈며 외쳤다. 더 이상은 그도 차분할 수가 없었다. 전신에 내재된 막대한 양의 마나가 일순 마나 스트링으로 화해, 마치 아르페에게서 돋아난 날개인 양 넘실거렸다. 인간에서 마족으로 바뀌어가는 소녀의 전신에 달라붙은 검은 마나의 실이 필사적으로 그녀의 마나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렇겐 못 놔둬······!” 아르페의 눈이 보랏빛으로 찬란하게 번뜩였다. “그렇겐 못 놔둬, 이 개자식아!”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진실만을 드러내며 언제나 아르페를 옳은 길로 이끌었던 그의 고유능력이, 이번엔 그의 유니크 스펠 마나 스트링에 깃들어 하나가 되었다.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두 능력의 결합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마족화가 진행되던 소녀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녀 내부의 모든 마나가 마나 스트링의 인도에 복종하며 역류하기 시작했다. 용사가 기적을 구축한 순간이었다. ────────────────────────────────────────────────────────────────────────Chapter 8. 그러고보니 용사였지. - 6기껏 용사가 되어 마왕과 싸울 결심을 굳혔더니 이번엔 뭐? 인간을 마족으로 바꿔? 그런 짓을 했다간 나중에 그가 낙농업을 할 인간계까지 전부 마계가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아르페의 소박한 노후계획에 물을 끼얹는 존재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르페의 불꽃같은 의지를 담은 마나 스트링이 시에나의 전신을 파고들어 훑었다. 시에나의 변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처음부터 그 변이를 완전히 막을 생각은 없었다. 완전히는 불가능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활성화되는 변이에 간섭하여 그 방향성을 틀어버리는 것 정도다. 그래, 언젠가 던전에서 그가 레코드 링크를 변화시켰던 그때처럼 말이다. ‘마족이 되는 것만은 피해야 돼. 자신의 이성 또한 컨트롤할 수 있어야 돼. 어떻게든 이 두 가지만은 지켜내야 한다.’ 아르페는 과거의 모든 경험을 되새기며 필사적으로 마나 스트링을 조율했다. 만물열람의 힘을 품은 마나 스트링은 시에나의 체내에서 한없이 섬세하게 움직이며 맞닿는 모든 마나의 변이를 억제하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만물열람은 아르페가 마족이었던 시절부터 인간의 용사가 된 지금까지 항상 그와 함께한 고유능력이다. 실로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 마족과 인간을 모두 알고 있기에, 마나 스트링과 결합한 만물열람은 비로소 시에나의 마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아, 아으으아아아.” “시에나, 내 말 들려? 이 흐름에 저항하면 안 돼.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사고해. 충동에 이끌리면 안 돼.” 아르페는 고통어린 신음을 내뱉는 시에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마나 스트링을 조종했다. 어떻게 보면 아까 공동 전체의 저주를 거두던 순간보다도 신경의 소모가 심했지만, 마왕에 대한 분노나 메테르에게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고조된 지금의 아르페에게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에나, 시에나!” “에이나, 가만히 있어. 초조한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아르페를 방해하면 정말 시에나가 큰 일이 나.” “으으으으······!” 한편 아르페 덕에 간신히 진정한 메테르는 광분한 에이나를 붙잡는 한편으로 다른 아이들을 수습했다. 저주에서 풀려났다고는 해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고 갇혀 있었으니 그들의 건강상태는 엉망이었다. 최대한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아이들을 돌보고 던전 바깥으로 내보내야 했다. “누나, 나 배고파.” “추워. 무서워. 저 형아 누구야? 그 아저씨랑 같은 편이야? 우리도 이상하게 돼?” “아냐, 이제 다 괜찮아. 다들 곧 괜찮아질 거야.” 메테르도 아직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인데, 그런 그녀가 지금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까딱하다간 그녀보다도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보듬어야 할 처지였다. ‘지쳐. 지치고 힘들어. 쉬고 싶어.’ 하지만 자신을 보며 움츠러드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메테르는 아이들을 한 번 보고는, 마지막 한 명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도의 마법을 펼치고 있는 아르페를 돌아보았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망울과 찬연하게 피어오르는 마나. 분명 자신보다 더 지치고 힘들 텐데도 아르페는 오직 지금 해야 할 일만을 생각하고, 할 수 없을 터인 일까지도 거침없이 처리하고 있었다. ‘좋아.’ 메테르는 몸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섰다. 조금만 더 힘내자. 분명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기뻐하고 칭찬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망할, 조금만 더!’ 바로 그 아르페는 지금 실시간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바로 눈앞에는 허공에 조금 떠오른 채 끊임없이 마나 반응을 일으키는 소녀가 있었다. 검게 변했던 그녀의 피부는 지금은 오히려 창백하리만치 새하얗게 반전되었고, 머리칼까지도 기묘한 우윳빛을 발했다. 그녀의 마나반응은 실로 격렬하고 거대했으나 그만큼 불안정해 금방이라도 죽거나 폭주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오, 오빠.” “정신 차려, 할 수 있어.”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역시 모험은 하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새삼스레 깨달았으나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힘겹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기운을 북돋워주며 필사적으로 그녀의 마나를 이끌었다. ‘그 무엇에도 간섭받지 않는 오롯한 자아를, 마에 더럽혀지지 않는 육신을.’ 변형되어가는 기록을 어그러트리고 구조를 이루는 마나를 붕괴시킨다. 앞에 놓인 길을 부수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만물열람과 마나 스트링이 없었다면 죽어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고유능력과 유니크 스펠의 동시 사용 탓에 마나의 소모가 극심해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어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소녀 한 명을 구하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을 마족으로 만들겠다는 마왕의 말도 안 되는 개짓거리를, 그 겁쟁이 소인배의 작전을 박살내는 첫 걸음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마족으로의 변이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던 대량의 마나의 흐름이 기적적으로 멈추었다. “······오빠.” 아르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의 로브 끝을 누군가 붙잡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너.” 소녀가 눈을 뜨고 아르페를 바라보며 희미한,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는 그 순간. 아르페가 제시한 새로운 길을 따라 그녀의 마나가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시에나가 마나의 통제에 성공한 것이다! [시에나] [레벨 ? 1] [마나지배 Lv1] “여기로 가면······ 되는 거야?” “하, 실험성공이랄 때 알아보기는 했다만······.” 이 녀석, 어지간히도 마나에 재능이 있었던 모양인데. 아르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210골드를 주고 마나지배 스킬 북을 산 시페넌은 억울해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아르페에게는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었다. 그는 달성감에 이를 드러내 웃으며 시에나에게 말했다. “그래, 한 번 같이 해보자.” “응, 오빠.” 아르페는 길을 제시하고, 시에나는 그 뒤를 열심히 따랐다. 마나는 길을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 농도와 빛을 바꾸어갔다. 그녀의 육신이 마나의 영향을 받아 또다시 조금씩 변이되었다. 그것이 결코 인간이 되는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족이 되는 길 또한 아니었다. 그녀는 오롯한 인간의 자아를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남은 것은 그녀를 마족으로 만들고자 하는 저주를 정면에서 부정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만약 이거 성공하면 인간계든 마계든 논문 대박은 확정인데······!’ 어느 쪽에서 발표하든 그 세상의 적이 될 테니 차마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할 따름이구나! 아르페는 마나 포션을 하나 꺼내어 입에 물고는 마나 스트링의 조종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만물열람이 이 이상은 없을 만큼 활성화되어 그의 눈에 시에나의 체내 마나가 흐르는 길 모두를 드러내고는, 그 안에서 마나 스트링과 하나 되어 나아가며 마족과 관련된 회로를 모조리 제외하고 폐쇄하며 그녀의 마나를 이끌었다. 그녀의 몸이 뒤틀리고 머리칼이 발광했지만 아르페도 시에나도 더 이상 그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에나는 지금 처음으로 다루어보는 자신의 마나에 취한 상태였다. 그 어떤 고통도 마나의 환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빠.”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한 걸음만 더 가면 돼.”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몸을 잠식하던 마족의 흔적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마족의 회로가 폐쇄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마나 회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것도 마족의 것도 아닌 길과, 그 속을 나아가며 점차 밝은 빛과 함께 구조를 바꾸어가는 마나! 아르페는 그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무심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정말 됐어!’ “됐어, 오빠!” 시에나의 목소리였다. 그녀 역시 자신이 저주를 막아냈다는 사실을 직감한 모양이다. 실제로도 더 이상 그녀의 몸에서 마족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의 기운도 희미하다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이 정도면 죽어도 마왕의 고유능력에 걸리지는 않으리라! “꺅!” 그녀의 전신을 관통하는 회로가 완성되는 순간, 내부의 모든 마나가 빠른 회전을 일으키며 아르페와 시에나 모두의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이 일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으그으윽.” 아르페는 신음을 내면서도 필사적으로 그것을 관측했다. 마족화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방법, 마왕에게 제대로 엿을 먹이는 방법이 시에나의 몸에 실시간으로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기록이었다. 어쩌면 아르페의 회귀는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다음순간,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아르페의 망막에 시에나의 정보가 갱신되어 나타났다. [시에나] [레벨 ? 2] [종족 ? 이블 리플렉터] “풉.” 그녀의 종족명을 인식하는 순간 아르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블 리플렉터? 무슨 이런 노골적으로 유치한 종족이 있단 말인가! 마족을 거부하고 거듭났기 때문인가! 신을 찾아가 대체 뭔 생각하고 사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쾌하다. 이 이상은 불가능할 만큼 유쾌했다. 이것이야말로 마왕의 욕망을 분쇄하는 첫 걸음이지 않겠는가! 그렇구나, 이래서 다들 용사를 해먹는 거구나! 아르페가 근본적으로 어긋난 감상과 함께 자아도취에 빠진 그때, 그의 로브를 살짝 잡아당기는 이가 있었다. 물론 시에나였다. “오빠!” “그래, 고생했어.” 아르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미소 짓고 있는 시에나의 머리를 쓸어주며 그녀를 다독였다. 피부는 여전히 창백하게 희고 머릿결 또한 백색 그대로였지만, 윤기가 흘러넘치는 머릿결은 이전과는 달리 생명력과 마력으로 충만해 있었다. 백색의 피부와 백색으로 발광하는 머릿결. 그것은 시에나를 무척 이질적으로 보이게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메테르보다 아주 조금 앳된 인상의 그 소녀는 자신의 구원자를 향해 맑고 순수한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아르페를 오늘 만났을 뿐이지만, 그 미소에는 아르페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고마워, 오빠.” “뭘. 네 덕분에 아주 좋은 자료를 얻었으니 내가 더 감사할 따름이야.” “헤헤.” 만물열람은 시에나의 마족화가 시작된 순간부터 그녀가 이블 리플렉터로 각성하는 순간까지 모두를 열람하고 기록했다. 물론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그 기록을 바탕으로 연구한다면 언젠가 마족화 저주의 카운터는 물론이고 마왕의 능력에 저항하는 마법을 만들어낼 수도 있으리라! “시에나!” “언니.” 아르페의 로브를 놓고 바닥에 완전히 내려앉은 시에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언니를 마주 안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메테르도, 또다시 아이 중 한 명이 몬스터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울상이었던 다른 아이들도 모두가 그것을 보며 진심으로 안도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 오빠 덕분이야. 오빠가 날 도와줬어.” “······음.” 마냥 웃는 얼굴이었던 메테르가, 시에나의 밝게 웃는 얼굴과 목소리를 들으며 슬금슬금 아르페 쪽으로 다가와 그의 로브를 붙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한구석에 어딘가 모를 음침함이 어려 있었다. “시에나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그치, 아르페.” “난 왜 네 목소리에서 아주 조금의 유감을 느끼는 걸까, 메테르.” “착각이야. 난 정말 너무 기쁜걸. 이대로 시에나와 에이나가 평생 둘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 마을에서. 둘이서.” 음, 역시 착각이 아니었구나. 자신보다도 어린 여자애한테 질투를 불태우다니 대체 용사의 사고회로는 어찌 되먹었단 말인가! 아르페는 메테르의 이마에 알밤을 먹여주며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퀘스트는 완벽히 끝났다. 비록 몬스터로 변한 아이들은 구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놓친 것에 슬퍼하기보다는 손아귀에 무사히 쥘 수 있게 된 나머지에 감사하는 것이 옳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정신적인 피로가 몰려왔다. “······으아, 쉬고 싶다.” “응, 아르페. 나도 엄청 쉬고 싶어.” 아르페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에 메테르 역시 쓴웃음으로 긍정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키득키득 웃다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둘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 집으로 가자.” “아냐. 일단 씻어야 돼.” “나 씻고 싶어!” “배고파!” 아르페의 활약으로 인해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가신 아이들이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해두었던 것처럼 자기 소망을 한두 마디씩 뱉었다. 곧 공동은 혼돈의 카오스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들 모두의 소망을 이루어줄 만능자가 나타났다! “언제나 어디서나 여러분과 함께하는 애니웨어 상회의 중견상인 미케나입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제가 여러분의 욕망을 충족······ 어머나?” 미케나와 아르페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케나는 매력적으로 미소 지었고, 아르페는 히, 웃어버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줌마, 클리닝 마법 구비해놨어?” ────────────────────────────────────────────────────────────────────────Chapter 9. 용사 VS 왕국 - 1 (여기까지 무료 연재)다행히도 미케나는 아르페에게 대량의 마법서를 판매하고 급한 대로 마법서 재고를 채워두고 있었는데, 그것들 모두가 다시 아르페에게 팔렸다. 총 다섯 권, 그 안에는 착실하게 클리닝 마법(45골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자, 너희 다 이리와. 클리닝!”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옷이 보송보송해.” 아르페가 생활 마법사로서 한 단계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평범한 생활 마법사라면 삼백 명이 넘어가는 대인원을 순식간에 깨끗하게 만들어놓지는 못할 테지만 말이다. 미케나는 그것을 보며 기가 질렸다. “정말 마나량이 어마어마하시네요. 한 300레벨 정도 되시나요?” “캐지 말라고 했지?” 아르페는 현재 163레벨이다. 반면 마력 수치는 만물열람 기준으로 800을 호가하는 상황. 이건 아르페가 전생에서 레벨 200즈음이었을 때의 마력 수치다. 하지만 아르페가 그때 당시 이미 마왕의 휘하에 들어 그가 익힐 수 있는 모든 스펠을 익혔었고, 선천적으로 인간에 비해 압도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는 마족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지금 그의 마력은 확실히 터무니가 없었다. 전생에 마족이었으니까, 같은 애매한 이유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아르페가 타고난 마력 재능은 정말이지 용사가 아니고선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르페는 거기에 대해 자세히 생각할수록 자만심에 빠질 것 같아 아예 생각을 그만두었다. 자만심은 언제나 사천왕을 죽게 하는 요소! 그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시페넌은 어쩌고 왔어?” “아무리 출장업무 수행중이라도 제 담당 고객님이 또 던전을 클리어하셨다는데 제가 오지 않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던전 상황이 평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언제부터 우리가 아줌마 담당이 된 건지······ 뭐, 확실히 평범하지 않긴 했다만.” 던전 상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앞으로 찾아갈 던전에 대한 모든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전투가 끝나 평화로워진 던전에 보물이 감추어져 있을 경우 비로소 그 던전에 대한 출동권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던전의 주인이 몬스터로부터 사람으로 바뀐 지 제법 시간이 흐른 곳이었거든. 놈은 던전결계를 펼치고 있었지만······ 이제 죽었으니 풀렸겠지.” 미케나는 공동 안에 모인 아이들을 쓱 둘러보며 단박에 감을 잡았다. “아하, 이것저것 구린 수작을 하고 있었군요······ 어쩜, 그리고 손님들은 그것을 타파하셨다고. 다시 봤어요.” “다시 볼 필요 없어. 아니, 그냥 날 보지 마.” “너무하셔요!?” 메테르가 워낙 단숨에 죽여 버리기는 했지만 사실 놈은 레벨 100가량의 흑마법사였다. 레벨 100이면 초보 용사들은 죽어도 족칠 수 없는 보스! 레벨 100 정도가 아니라 레벨 200의 흑마도사라도 단칼에 끝내버릴 기세였던 메테르가 상대였던 것이 놈의 불운이었다. 하지만 메테르가 흑마법사를 해치운 후에도 아직 몬스터와 마족의 인자를 품은 아이들이 이곳에 남아있었다. 따라서 아르페가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한 후에야 비로소 미케나가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손님, 설마 용무가 마법서 구매로 끝은 아니시겠지요? 던전의 보상도 제게 기꺼이 나누어주시겠지요?” 던전에는 자연발생 던전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던전이 있다. 이 던전은 자연발생한 던전을 인간이 나중에 들어와 차지한 경우인데, 놈들은 흑마법에나 능통했지 던전 탐색에는 영 재주가 없었던 탓인지, 던전에 숨겨진 함정이나 보상 같은 요소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미케나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것. 자신이 찾아낸 것을 아르페가 못 찾아낼 리도 없으니, 그녀는 괜한 탐색전은 관두고 곧장 거래에 돌입하고 싶어 했다. “그래, 그러면······.” 아르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던전을 차지하고 있던 흑마법사의 수준으로 미루어 원래 이 던전의 보스라고 해봤자 허접한 몬스터였음에 분명하지만, 그래도 아르페의 만물열람에 들어오는 보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배고파.” “나 계속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 문제는 던전의 보상보다도 먼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은 기아 상태의 아이들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르페는 에휴, 한숨을 내쉬며 미케나에게 금화를 하나 던졌다. “일단 얘네 먹을 것부터 좀. 며칠 동안 굶었던 애들이 먹어도 가능한 무리가 없을 만한 걸로.” “어쩜 상냥하기도 하셔라. 마침 전쟁 빈민을 위해 마탑에서 개발한 구제용 물품이 있지요. 그런데 이게 단점이 딱 하나가······.” “자, 1골드 추가.” “언제나 감사합니다, 손님!” 미케나는 메테르와 에이나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이블 리플렉터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신체가 격변을 맞아, 배고픔과는 영 동떨어진 존재로 탈바꿈한 시에나 역시 그들을 도왔다. 당연히 미케나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머나, 정말 예쁜 머리네.” “걔 정체를 감출만 한 위장용 아티팩트도 하나 준비해주고.” “그 말씀 왜 안 하시나 했죠. 손님은 어째 정체가 수상한 사람들만 만나고 다니시는군요?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손님들한테 꼬이는 걸까요?” “하.” 아르페는 미케나의 말에 코웃음을 쳐주며 공동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가 어딘가를 툭툭 건드릴 때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나무상자가 떨어지거나 동굴 벽 틈에 자생하고 있던 이끼가 기묘한 빛을 발하거나 했다. 그렇게 모두 네 군데에서 보상을 끌어 모았지만 역시나 그리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은 없었다. “대략 29골드 정도는 나오겠네.” “네, 여기 29골드입니다. 그리고 여기, 친애하는 손님께 드리는 보너스.” 아르페는 미케나에게 물건을 모두 떨이로 넘기고는 그녀로부터 작은 머리핀을 하나 받았다. 나비를 본뜬 금속장식이었다. “마력반응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 만들어주는 간단한 기능의 아티팩트지만, 저 소녀에게는 그걸로 충분할 거예요.” 미케나가 보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해보였나 보다. 하기야 머리랑 피부가 특이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나이에 비해 범상치 않은 기색을 내보일 뿐인 여자아이였으니까. “세례의 수정구도 하나 줘.” 하지만 아르페의 판단은 달랐다. “그것까지!? 이 아이 마족이기라도 한가요?” 미케나는 경악하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에나를 살폈으나 아르페는 더 이상의 탐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미케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그가 내민 500골드를 받고 세례의 수정구를 내주었다. “자, 이걸로 거래 끝. 일단 돌아가 봐.” “어쩜 이렇게 매번 저를 매몰차게 밀어내신담.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아요. 제가 언젠가 반드시 손님을 상계의 왕으로 만들 테니 각오하세요!” “아줌마, 아르페 뺏어가지 마!” “그러니까 너희 그거 그만 좀 하라고.” 아르페는 한차례 떠들썩한 소란 끝에 미케나를 보내고 수정구를 우선 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시에나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는 물었다. “오빠, 그거 어디에 쓰는 거야?” 아무래도 녀석은 이블 리플렉터로 각성하며 마나에 민감해지는 바람에, 아티팩트 전반에 굉장한 흥미를 품게 된 모양이다. 아르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작게 웃었다.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 “응!” 그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모든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아르페는 마을사람들에게 그들의 아이를 돌려주었다. 그 순간부로 펼쳐진 눈물과 감동의 재회란······. “엄마아아아!” “아들, 내, 내 아들!” 그나마 다행한 점이 있다면 이 마을에서 잡혀왔던 아이들은 대부분 무사했다는 점일까. 아이를 돌려받은 마을주민 모두는 감격했으며 아르페와 메테르를 칭송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무척 진지한 눈으로 그들에게 당부했다. “만약 우리 이름이 퍼지기라도 하면 이번엔 내가 너희한테 개구리가 되는 저주를 걸어버릴 줄 알아.” “히익!” 용사가 노려지는 것은 언제나 반복적인 퀘스트 수행으로 이름값을 떨치기 때문! 물론 과거에는 마왕의 완벽한 레시피에 따라 오히려 용사의 폭발적인 성장에 보탬이 되었지만, 지금은 전생과는 사정이 제법 다른 것이다. 마왕이 이 따위 끔찍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은 앞으로 보다 신중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변장과 가면은 필수요 그렇게 꾸며 만들어낸 가상의 이미지마저 어둠 속에 묻으려는 각오가 필요했다. “자, 그러면 문제는······.” 아르페는 마을사람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수백에 이르는 숫자의 아이들이 남아 있었다. “형아야, 나도 엄마 보고 싶어.” “조, 조용히 해. 마도사님한테 더 폐 끼치면 안 된단 말이야!” “힝, 엄마아. 엄마아아아.” 원래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아이들은 괜찮다. 그러나 다른 마을에서부터 잡혀온 아이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야 물론 그들의 원래 마을로 돌려놓아야겠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용사들이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퀘스트는 끝이 나고 용사들은 다른 목표를 향해 떠나겠지. ······그리고 언젠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더더욱 짜증나고 거대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마왕의 노림수는 언제나 두 번 연속으로 찾아오니까! 물론 그것이 초벌구이를 마친 고기를 다시 구워 더욱 풍부한 맛을 내게 하려는 셰프······ 마왕의 원대한 레시피임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가닥을 붙잡은 지금 처리를 해야지, 뒤에 남은 게 훨씬 많다는 걸 알면서도 멍청하게 이 정도로 만족하고 떠날 수는 없어. 무엇보다도······.’ 아르페는 끝내 굳은 결심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 이상 여기에 신경 쓰지 않고 쉬고 싶었지만, 지금 일을 처리해두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피곤해지리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너희, 마을 옮겨라.” 그 결과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바로 이 제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말 한 마디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을을 옮기다니, 어째서 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지금부터 이 아이들이 살고 있던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 마을 사람들도 전부 끌어들일 거야. 그래서 하나로 통합된 거대한 마을, 소도시를 만드는 거야.” “그, 그런 건 못 합니다요!”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우리도 여기서 힘겹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 정도 반론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시 자식들 빼앗기고 싶으면 그냥 여기서 살던가. 너흰 지금 뭉쳐야 될 때야. 뭉쳐서 너희 덩치를 불려. 불린다고 나라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함으로서 너희 흔적을 키워.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을 다른 많은 이들이 알 수 있게 하란 말이야.” 많은 숫자의 인간이 한자리에 모여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다른 집단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대공도 더 이상은 그곳에 헛짓거리를 하기가 힘들게 된다. 마왕군의 모략도 힘들어지기는 매한가지. 애초에 지금 이 저주를 풀고 아이들을 모아 마족화 실험을 진행하는 것도 아이들을 몰래몰래 빼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그렇지만 터전을 옮겨서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란 말입니까?” “여기서도 힘겹고 힘겨웠다며. 거기라고 뭐 다르겠냐. 농사를 짓든 사냥감을 잡든 해야겠지. 거기까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아르페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바로 대공을 족치는 일이다. 이 일대의, 나아가 나라 전체에서 수작을 벌이고 있는 무리를 모두 족치고 흑마법사들까지 덤으로 족친다. 아마 퀘스트의 클라이막스 즈음에 이르러서 마족도 한두 마리 등장하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족칠 자신이 있다. 고유능력을 각성한 메테르와 함께라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마왕을 잡기 전에 나라 하나를 먼저 망가트리게 생겼구나. 음, 좋아. 제법 사천왕 같은 기분이야.’ 어딘가 근본적으로 어긋났다는 감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지만, 아르페는 그것이 썩 유쾌했다. 그는 자신을 굳게 믿고 있는 메테르와 그를 우상 바라보듯이 하는 시에나,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는 에이나와 다른 무수한 아이들, 아르페의 강압적인 명령에 곤혹과 당황과 공포를 함께 느끼고 있는 모든 마을주민들에게 지시했다. “자, 지금부터 도시 건설 계획에 착수한다!” 첫 퀘스트가 연속 시나리오 퀘스트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 Chapter 9. 용사 VS 왕국 - 2 (여기부터 유료 시작입니다!) > 아르페의 난데없는 선언 아래 마을사람들은 울먹이면서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그들 대부분이 이미 아르페에게 전 재산을 헌납했기에(물론 그는 탐욕의 흑요석을 제외하고는 별로 갖지도 않았지만), 챙길 것이라곤 몇몇 옷가지 정도였다. “일단 오늘밤은 자고 내일 바로 출발할 거야. 그때까지만 다른 아이들을 나눠서 맡아줘.” “알겠습니다요, 마도사님.” “후우. 마도사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니지만, 새로 집을 지을 생각을 하니 깝깝하구만······.” 아르페의 말을 개소리라고 웃어넘길 수 있었다면 차라리 좋았겠지만,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않은 아르페가 자신들을 위해 아이들을 구해와준 시점에서부터 마을사람들은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대이주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죽도록 고생하는 게 나으니까. “오빠야, 내일 봐!” “잘 자, 누나!” “흐엉, 으어엉. 엄마아.” 아르페라고 그들의 고통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해산하는 마을사람들과 불안한눈으로, 혹은 울면서 그들을 따르는 다른 마을의 아이들을 전송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규모를 키워 뭉치면 그래도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겠지. 물론 그땐 놈들이 또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을 확보하려들지도 모르겠지만······.’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바로 아르페와 메테르의 역할이다. 어지간한 재앙이라면 눈 딱 감고 무시하겠는데 이건 까딱하다간 나라, 그 정도도 아니고 인간계 전체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일이니 도무지 끼어들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용사의 행보가 다 그렇지, 뭐. 다른 놈들은 이런 대위기를 감지하지도 못하고 뭐하나 몰라. 인간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강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망할 놈들은 용사가 찾아가기 전까지는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숨어 있단 말이지.” 그래놓고 용사가 찾아가면 ‘이제 나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아주 자랑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개자식도 그런 개자식들이 없었다. “아르페,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아니길 바라지만 아마, 어쩌면. 그러니까 짜증이 나는 거지.” 아르페의 대꾸에 메테르의 눈이 험악해졌다. 아르페가 연관되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상황을 웃어넘길 줄 아는 너그러운 성격인 그녀의 얼굴에 지금은 분노가 가득했다. “혼내줘야 돼. 아이들을 괴물로 만드는 나쁜 것들은 전부 다!” 던전에서의 경험이 그녀의 마음가짐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만 것일까. 아르페는그것이 씁쓸하기도,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진정시킬 떄다. “이 정도로 그렇게 흥분하지 마, 메테르. ······앞으로 더 지독한 꼴도 얼마든지 보게 될 테니까.” 메테르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뻗어 그의 소매를 꼭 붙잡았다. 그가한 손을 뻗어 메테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니 옆에서 다른 여자아이가 그의 반대편 소매를 붙잡았다. 누군가 했더니 다름 아닌 시에나였다. “오빠, 오빠는 우리 집에서 자.” “네, 마도사님. 누추······ 정말로 누추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모실게요.” 메테르가 곧장 두 여자아이를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 순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르페의 손길이 알밤으로 바뀌었다. “아야.” 메테르가 자기 머리를 움켜쥐고 아파하는 동안 아르페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시에나의 손을 붙잡아주며 대꾸했다. “그럼 하루 신세 지자. 마침 너한테 줘야 할 것도 있고.” “진짜? 아자!” 시에나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마냥 마주 웃어줄 수만은 없었다. 지금부터 그는 또 한 명의 소녀를 그럴듯한 말로 구워삶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신세를 지게 된 두 소녀의 집. 부모를 잃고 둘이서만 사는 소녀들의 집은 무척 좁고 낡았으며 제대로 관리도 되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차라리 새로 오두막이라도 지어 사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그곳에 일단 짐을 풀어놓은 후, 아르페는 시에나를 불러 그녀에게 작은 수정구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세례의 수정구였다. “자, 받아. 네 거야.” “오빠, 이거 나 주려고 산 거였어!?” 세례의 수정구가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블 리플렉터로 각성한 후 마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 그녀는 적어도 세례의수정구가 얼마나 복잡한 구조의 마나를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오빠, 이거 엄청 비싼 거지?” “그냥 주는 거 아냐. 나중에 이자 엄청 쳐서 갚아라. 복리다.” “응, 알겠어!” 아직 복리이자의 무서움을 모르는 시에나는 순진하게 웃으며 대꾸하고는 수정구를 받아 쥐었다. 곧 그녀의 표정이 살짝 기묘해졌다. “오빠, 이게 막 내 안을 찔러.” “사제들을 대리하여 네게 나아갈 길을 점지해주고, 너를 세상에 기록해주는 거야. 순응하고 있으면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으, 으으응.” 이블 리플렉터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이미 마나를 지배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 그녀다. 아르페는 당연히 그녀가 아무 문제없이 마도사 클래스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에나] [레벨 ? 1] [이블 리플렉터] [전투사제] “······?” “······?” 당사자인 시에나와 그녀의 클래스를 파악한 아르페의 눈이 동그래지고,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메테르와 에이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오직 그녀의 품에 안긴 수정구만이 이전과 다름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이것이 앞으로도 그녀의 상위클래스 전직에 도움이 되어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니,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마도사가 되지 않으면 대관절 누가 마도사가 된단 말인가! 더구나 인간을 벗어나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종족인 된 그녀에게 사제라니!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가출할 지경이었지만 만물열람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오히려 전투사제로서 그녀가 지닌 기록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의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시에나는 의심의 여지도 없는 전투사제다! 시에나는 아르페의 옷을 꼭 붙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빠, 그러면 나 이제 신전 들어가야 해?”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시에나의 순진한 질문에 즉답하는 아르페. 제아무리 전투사제가 어딜 가나 환영받는 직종이라고는 해도, 인간이 아닌 이 소녀가 그 누구보다도 배타적인 신전의 활동에 끼어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자식들의 성정을 고려해 볼 때 시에나가 해부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사제는 마음이 선해서 사제인 것이 아니다. 단지 대대로 전해지는 수련방법을 따라 수련하고, 이기적인 신에게 어떻게 하면 알랑방귀를 보다 획기적으로 떨 수 있는가 연구한 끝에 신성력을 각성했기에 사제가 된 것!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시에나가 처한 상황이 난감한 것이다. ‘이 녀석의 마나가 특수한 방향으로 진화해서, 마를 배척하는 신성력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그나마 이게 유력한 가설이려나.’ 그것은 이블 리플렉터라는 종족명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었다. 성장 방향 또한 얼추 그려진다. 마족을 상대하는 데에 최적화된 그녀의 본질은, 사실 이 녀석이 용사를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대단했다. 만약 이 녀석이 제대로 자라난다면 어떻게 될까. 마족화의 실험에서 탄생한 녀석이 마족을 무찌르는 최전선에 서게 된다면, 그야 마왕을 엿 먹이기에는 그만한 일이없다. 더구나 원래 아르페의 목적 또한······. “······시에나.” 아르페는 스스로에게 살짝 혐오감을 느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에게 세례의 수정구까지 넘겨버린 주제에 더 망설이는 것부터가 위선. 그는 시에나와 시선을 맞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여태까지 평범한 삶을 살아왔을 거야. 이번 일이 없었다면 아마 앞으로도 그랬겠지. 하지만 이번에 그게 제대로 어긋났고, 그 과정은 어떠했든 넌 상당한 힘과 가능성을 손에 쥐게 되었어. 그리고 그 힘이 있는 이상, 앞으로 평범한 삶을 구가하는 건 힘들게 되겠지.” 적어도 앞으로 마왕이 일으킬 혼란이 잠재워지기 전까지는, 이라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시에나는 무척 총명한 아이였으며 아르페의 말을 전부 다 알아듣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응, 고마워 오빠. 나도 앞으론 다르게 살고 싶어. 오빠처럼 강해지고 싶어. 이제 더는 나쁜 사람들한테 당하기 싫어.” 실로 용감한 말이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겪은 일이 그녀를 독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아르페는 생각했다. 어쩌면 새로운 종족으로 거듭나며 정신에 영향이 갔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방향성이 마족보다는 낫기를 바랄 뿐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네가 지닌 힘이 다른 이들의 것과는 다른, 이질적이고 독특한 힘이라는 거지. 내가 네게 세례의 수정구를 쥐여 준 것은 그 까닭이야.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를 두려워하고 배척하거든. 아마 앞으로도 네 모든 것을 훤히 드러내고다니기는 힘들어질 거야.” “오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시에나는 질문을 하면서도 이미 그에게서 나올 대답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요즘 어린애들은 무섭다니까, 소년 아르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메테르를 돌아보았다. 메테르는 지금 상황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듯했지만 끝내 뚱한 표정으로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아르페 사이에 타인이 끼어드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시에나를 이대로 놔둘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 마음이 훤히 보여 조금 재미있었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시에나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길을 제시했다. “······우리 파티에 들어올래?” “응!” 시에나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물어본 아르페가 민망해질 만큼 시원스러운 대답에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일생이 걸린 판단을 그렇게 쉽게 내려도 되겠어?” “응!” “안 돼!” 바로 그 순간 에이나가 빽 소리를 지르며 끼어들었다. 기껏 되찾은 여동생이 어디론가 멀리 가버릴 것만 같아 불안해진 탓이다. 그러나 시에나는 언니가 끼어들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맑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괜찮아. 앞으로는 더욱 괜찮아질 거야.” “시에나······.” “나랑 함께 있으면 아마 언니가 더 힘들어질 거야. 언니도 봤잖아, 나 이제 평범하지 않아.” 말과 함께 손끝으로 새하얀 마력을 분출해 보이는 시에나.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확실히 신성력과 닮은 빛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아무리 봐도 레벨1에 어울리는 마력량은 아니다. “나, 나는······.” “언니도, 혼자서 할 수 있지?” 에이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시에나의 표정은 한없이 맑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맑은 미소 안에는 한 줄기 단호함이 어려 있어, 그녀가 지금 자신의 언니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통보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했다. 똑 부러지게 무서운 녀석이었다. “완전히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꼭 돌아올게. 그러니까 기다려줘, 알았지?” “시에나······ 정말 다시 돌아오는 거지?” 결국 에이나가 패배를 선언했다. 시에나는 밝게 웃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응. 약속할게.” “시에나······!” “보기 좋은 광경이라 미안한데 이번 퀘스트 끝나기 전까지는 동행이다.” “아, 그랬지.” 그리고 아르페가 거기에 초를 쳤다. 자매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 메테르가 킥 웃었다. 내일부로 사라지게 될 마을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 Chapter 9. 용사 VS 왕국 - 2 (여기부터 유료 시작입니다!) > 끝 ⓒ 토이카 < Chapter 9. 용사 VS 왕국 - 3 > 꿈을 꾸었다. 모든 것이 피와 암흑으로 물든 절망의 대지에서, 사람들의 원혼과 고통으로 쌓아올린 성벽에서, 그와 그녀는 대치하고 있었다. 아니, 대치라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일방적이다. 아르페는 이미 용사에게 패배했다. 그의 모든 마법은 마도사에게 막혔고 발악하듯이 쏘아 던진 단검도 기다란 귀의궁수가 쏘아낸 예리한 화살에 전부 파괴되었다. 평소 군단장 권위를 똥으로 알고 개기던 부하들은 어떻게든 아르페를 지키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발악을 하다 워리어의 대검에 가볍게 토막 났다. 평소부터 잘했으면 새삼스럽지나 않았을 텐데, 마지막 순간에 와서 그러니 아르페도 괜히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안 돼요, 잠깐만. 그걸 휘두르지 마.” “용사······.” 투구를 절대 벗지 않는 강철의 기사는 멈추지 않고 아르페의 목까지 베어내려 했으나, 용사가 필사적으로 그를 막았다. 용사 파티의 다른 일원이 그것을 보며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용사는 개의치 않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며 아르페에게 간절히 청했다. “사천왕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제발 순순히 항복해줘. 우린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잖아.” “용사, 너!”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들 조용히······ 부탁이야, 항복해줘.” 처음부터 아르페가 용사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만은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아르페가 용사를 지켜봐왔음을 용사 또한 알고 있었다. 원했다면 아르페가 아주 오래 전에 자신을 끝장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용사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린 한 편이 될 수 있어. 분명히 우린 같은 편에 설 수 있어. 우린······. “마왕군이 세계 평화 캠페인하는 소리하네.” 그러나 아르페는 용사의 말을 가벼이 비웃어버렸다. 치렁하게 늘어진 흑발에 절반쯤 감추어진 예리한 자색의 눈동자는 용사뿐만 아니라 용사 파티 전원을 비웃듯이 반짝였다. “어째서······?” 용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것에 답을 주지 않았다. 용사의 발걸음을 막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가녀린 그녀의 어깨에 가뜩이나 무겁게 쌓인 짐, 거기에 부담을 더 보태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조금이라도 펴보려, 히죽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용사, 아마 곧 이쪽으로 새끈한 누님 한 분 올 건데 내 시체를 보면 엄청 화낼 거거든. 그분한테 이렇게 말씀드려라.” 유언이라기엔 심하게 코미디스러운 그 말에 용사는 얼굴을 가득 찡그린다. 그녀와는 달리 얼추 지금 돌아가는 엿 같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용사 파티의 다른 구성원들은 아르페의 촌극이 끝나기 전에 움직임을 개시했다. 대검을 뽑아 쥐는 워리어, 양손으로 들고 있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스태프를 쥐고 주문을 읊조리는 마도사, 활을 들어 아르페를 겨누는 궁수, 단검을 쥐고 아르페에게 쇄도하는 붉은 머리의 도적. 그들 모두가 용사를 더할 나위 없이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며, 이 세상을 지배하는엿 같은 진실을 그녀에게만은 감추고자 했다. “그녀를 미혹하지 마라, 사천왕.” “사실 난······ 커헉!” 그리고 이어지는 단검의 클린 히트. 이미 마력을 있는 대로 소모하고 방어구도 다깨져나가고 소모성 아티팩트도 깔끔하게 바닥난 탓에, 아르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적의 단검에 심장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난, 연상은 별로 안 좋아한다고······칵, 꼭 전해라······!” 시야가 새까맣게 물든다. 저 멀리서 적염군단장 에트나의 마나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르페는 ‘아, 어차피 내가 죽을 거였으면 저 누님을 여기로 부르는 게아녔는데.’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래선 꼭, 너도 평범한 사람인 것 같잖아······!” 아르페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울먹이는 용사의 목소리. 괜히 아르페의 가슴까지 쓰려오게 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이미 끝난 이야기. 여기서 그의 전생은 막을 내리게 된다. 아르페의 고유능력에 의해 세상은 되감기고, 그는 조그마한 인간의 몸에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되먹지도 못한 악몽에서는 빨리 깨어나 줬으면 좋겠는데······. “안 돼······ 안 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여성의 절규가 들려온다. 전생에 마지막으로 그의 귓가를 두드렸던 바로 그 목소리. 그런데 잠깐만. 그 절규는, 누구의 목소리였던 거지······? “······아.” 아르페는 눈을 떴다. 귀가 먹먹했다. 악몽도 아주 이런 엿 같은 악몽이 없었다. 그는 잔뜩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 내려다보니 메테르와 시에나가 자신의 복부 위에서 영역싸움을 하다 지쳐 잠든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을 보니 그보다 일찍 일어난 에이나가 새하얀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완전히 범죄자를 보는 눈이었다. “······아니, 내가 인기 많은 걸 어쩌라고.” “흥!” 에이나가 볼을 팅팅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코알라처럼 자신에게 매달린 두 꼬맹이를 깨웠다. 이제 곧 출발할 시간이었다. 아침이 밝자 마을사람들과 어린아이들 모두 아르페와 메테르의 인솔 하에 우르르마을을 나섰다. 제각기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어디 피난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때는 늦은 봄, 날씨가 그리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음, 이 정도면 아주 눈에 잘 띄겠는데. 좋았어.” “눈에 잘 띄면 안 좋은 거 아냐, 아르페?”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으나 아르페는 가볍게 웃으며 설명했다. “그건 우리가 던전에서 강한 적들이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을 탐사할 때에나해당되는 얘기고, 지금 이 일대에는 있어봤자 레벨 100 언저리의 찌끄레기들밖에 없으니까 가능한 한 먼저 우리를 관측해주고 다가와주는 쪽이 덜 귀찮아.” “그렇구나!” 아마 그들 대부분이 일행을 발견하는 대로 무조건적으로 공격해올 테니, 메테르 또한 별 거부감 없이 그들을 썰어버릴 수 있을 테고. 아르페는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고 사방으로 마나의 실을 넓게 퍼트렸다. 관측을 당하는 것과 기습을 당하는 것은 기분 더러움의 정도가 다르다. 언제 어떤 놈들이 습격해올지 미리 파악하고 역습을 할 정도의 준비는 해놓는 것이 좋으리라. 그는 대강 마나를 조절하며 근처 마을주민A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라고?” “마을에 이름은 딱히 정해진 바가 없고······ 언덕 하나 넘어가면 나옵니다요.” 마을에 이름조차 없다니, 원래는 용사의 연대기에 기록조차 되지 않을 만큼 엑스트라 마을임에 분명하다. 그런 마을을 몇 개씩이나 찾아가 사람들을 모으고, 병사들이랑 흑마법사들을 쓸어버리고······. 퀘스트의 보상은 나락으로 하락하겠지. 생각만 해도 우울하지만, 제아무리 퀘스트 보상이 거지같다는 것을 알아도 그 다음 단계 퀘스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 하는 퀘스트도 있는 법. 그것이 연속 퀘스트의 묘미이니 지금은 전부 감내해야 하리라. ‘그래도 올 여름 안에는 건너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가을과 함께 찾아오는 그 일만은 피하고 싶어······.’ 스케줄만 따지면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다. 뭐하면 4년 동안 제자리 뛰기만 하고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여유롭다. 메테르라면 그것만 해도 점프와 관련된 온갖 기술을 마스터할 것 같아 무섭다. 문제는 계절에 따른 세상과 몬스터의 변화다. 봄에는 얌전했다가 여름에는 말썽인 몬스터나, 가을 수확기를 넘어 겨울이 되면 인간들을 습격해 식량을 탈취하려는 몬스터까지. 아르페가 통과하려는 루트에도 또한 이런 계절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 놈들이 있었다. ‘시페넌이 좀 빨리 성장해주면 써먹을 수 있을 텐데. 아니, 그 녀석보다는 얘가 성장하는 게 빠르려나.’ 아르페는 메테르의 반대편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고 있는 사랑스러운 백발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마나를 다룰수록 실력이 는다는 아르페의 조언을 따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손에 백색의 마나를 피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실력이 전생의 아르페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터무니없는 재능도 정도가 있지 왜 이렇게 주변에 다 천재밖에 없는 거람! 그런데 바로 그 천재가 아르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오빠, 이거 지쳐.” “마나는 곧 자연이야. 자연을 마나로 인지하게 되면, 곧 자연이 네 마나와 하나가되어 너를 가득 채워주게 될 거야.” “응, 열심히 해볼게.” 마족은 인간에 비해 타고나는 마나의 양도 압도적이지만, 마나를 다 소모한 후 전부 회복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압도적으로 빠르다. 그것은 마족이 마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인간이 마족의 시야를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오랜 세월 끝에 그것을 간신히 깨닫는 자들만이 역사에 기록되는 마도사가 되고, 비로소 마족과 겨룰 토대를 쌓게 된다. 전생에서 용사 파티의 마도사가 바로 그러했다. 마도사의 활약으로 인해 마족의 인간계 거점이 전부 터져나가고 마족도 터져나가고 아무튼 모든 것이 다 터져나갔다. 솔직히 아르페는 전생에서 용사보다 마도사가 더 무서웠다. “아, 조금 빨라졌어. 마나가 나한테 웃어주는 것 같아, 오빠!” “······그래, 그렇구나.” 그리고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는 그 마도사만큼 끔찍한 인재가 한 명 더 늘어난 듯싶었다. 아르페는 왜 이런 괴물 같은 인재가 전생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었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소녀의 머리를 순순히 쓰다듬어주었다. “끄으으응, 아르페. 나두, 나두 마나······.” “메테르 넌 이미 충분히 잘 다루잖아······.” 그들은 머지않아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아이들을 모두 잃고 침체되어 있던 그마을은 무사히 돌아온 아이들을 보며 환희하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아르페의 명령에는 경악하고 거부했다. “그, 그럴 수는 없소!” “물론 내 아이를 구해와 줬으니 그에 대한 사례는 하겠소, 하지만 마을을 버리라는 건······.” “강요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당신들, 이대로 살고 있으면 다시 병사한테 아이들을 빼앗길 뿐이야. 더 나쁜 소식도 있는데 말해줄까? 내 정보를 토해내라며 고문도 당하고 까딱하다간 본보기로 몇 명 정도 죽어나갈 수도 있어.” “구, 국왕폐하께서 그러실 리가······.” “국왕 바뀌었다.” “뭐, 뭐요!?” 사람들은 치열하게 대립했고, 갈라졌다. 끝내 아르페 일행을 따라나선 것은 아이들을 한 번 잃었다가 되찾은 이들뿐이었다. 워낙 아이들이 아르페와 메테르를 잘 따르니 녀석들을 믿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약 병사들이 와서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하면 너희들이 본 그대로 얘기해줘.” “그, 그러면 마도사님께······.” “괜찮으니까 그렇게 말해. 내가 뭘 하려는 지도 전부 얘기해주고. 숨기려다 너희들이 죽는 것보다는 나아.” “마도사님······!” 자신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남는 사람들까지 배려하는 아르페! 물론 그는 마을사람들이 병사들에게 순순히 대꾸한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회는 이미 줬다. 변화가 두려워 생을 포기하는 바보들에게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아르페 일행은 그로부터 며칠에 걸쳐 인근의 다른 마을을 순회했다. 다른 마을에서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 나왔는데, 특히 아이를 잃고 되돌려 받지 못한 자들은 더욱 아르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당신이지! 당신이 우리 아이를 죽인 거지!” 아르페는 그들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했기에 딱히 화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메테르는 아니었다. 그래도 여태까지 제법 잘 참나 했는데 아이들의 부모와 직접 만나게 되니 평정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우리가 찾았을 때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은 이미······.” “메테르, 거기까지.” 그야 아르페가 억울하게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 참상을 함께 헤쳐 나온 메테르가 흥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오히려 그들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르페와 함께하지 않고 남는 마을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이 납치되었고, 불운하게도 죽음을 맞이했다,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이 좋았다. “내가 너무 늦어서 구해주지 못했다. 정말 미안해. 변명의 여지가 없어.” 아르페는 오직 그렇게만 전달해두었다. 사천왕의 필수 스킬인 기만과 멸시는 잠시 감추어두고, 지금은 사기꾼의 필수 스킬인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로 밀고 나갔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익, 이이익······.” “크흑······ 당신에게 잘못이 없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긍정해버리면, 대체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면 된단 말입니까!” “흑······ 우리 아가, 아가······!” 끝내 많은 사람들이 아르페를 거부했다. 미지의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배척을 받는 법이니까. 대신 그것에 도움을 받은 이들은 철석같이 아르페를 따랐고, 아르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메테르만 가슴 아파했다. “아르페에.”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어, 메테르. 미워하는 쪽도 미움 받는 쪽도. 이렇게 엿 같은 경우도 생기는 법이지. 사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대부분은 이래.” 전생에서의 전쟁도 이와 비슷했다. 마왕의 고유능력에 의해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했던 마족이 있었고, 마음이 여린 한 명의 소녀는 용사라는 운명 탓에 끔찍한 싸움을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이 현생에서도 반복될 예정이다. 정말 엿 같다는 말 외에는 해줄 말이 없다. “우으으, 알겠어.” 메테르는 아르페의 뜻을 이해했고, 자신을 억눌렀다. 대신 밤에 그의 품으로 기어들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괜히 경쟁심이 불타오른 시에나까지 달라붙어 아르페만 피곤할 따름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어쨌든 일주일 만에 모든 사람이 모였다. 전부 모아놓고보니 대략 이천에 이르는 숫자였다. 그들이 모여 일을 하며 살기에 적합한 지대를 찾아 또 이틀 정도를 헤맨 끝에, 그들은 몬스터가 잘 나타나지 않는 야산의 중턱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 마을을 지으면 되는 겁니까, 마도사님? 아니, 소도시라고 봐야겠구먼요.” “이천 명이라니,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도시 건설까지는 도와줄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르페는 자신과 메테르만 바라보고 이곳에까지 그들을 따라온 무수한 사람들을 보고 조금 겸연쩍어, 콧잔등을 긁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큰 미끼를 만들었으니, 슬슬 큰 물고기가 걸릴 때가 되었지.’ 그렇게 해서 도시건설이 시작되었다. 물고기 또한 늦지 않게 그것을 눈치 챘다. < Chapter 9. 용사 VS 왕국 - 4 > 2천 명 중 1천 명 이상이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린아이였음에도, 산 중턱을 깎아내 소도시를 만드는 작업은 제법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아야 할 일들이 모두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으로 해결되었으니 그것도 당연했다. “사, 산이 무너진다.” “분쇄된다.” “숲이······ 하나가 전부 사라지고 있어······.” 마나 스트링의 마나 소모량은 확실히 많은 편이지만 그게 부담이 되는 것은 1초 1초가 중요한 전투이고,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곳에서 시간적 여유를 두고 부리는 거라면 마나 스트링 정도는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었다. 마족이던 시절보다 마나 회복 속도가 빨라진 지금의 아르페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아르페는 마나가 회복 될 때마다 마나 스트링으로 산을 갈아내거나, 땅을 파거나, 숲을 통째로 잘라내 나무를 가다듬으며 사람들의 건축 작업을 도왔다. 자연히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아르페를 신이나 그 비슷한 것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인간이 아냐.” “전에 마도사를 본 적이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방금 봤어? 손을 한 번 뻗었는데 스무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다고.” 그가 대공사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지반을 다지거나 그가 토막 낸 나무들을 가지고 건축 자재를 만드는 등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일을 했다. 그 결과 정말이지 놀라운 속도로 도시 건설이 진행되었다. 반나절 만에 지반이 다져지고, 다시 반나절이 흘러 건물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공사를 돕지 못하는 인력은 제각기 끼니를 때울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야산 곳곳으로 발품을 팔았다. 그러고도 채우지 못하는 것은 아르페가 채워주었다. 어떻게? “손님은 정말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건가욧!” 애니웨어 상회의 중견상인 미케나를 통해서 말이다. “여기저기 써먹기 편리한 사람.” “조금 말씀을 고르셨으면 제가 감동했을지도 모르는데!” “아, 식량 제일 싼 걸로 한 삼천인분만 놓고 가줘. 씁, 세례의 수정구 때문에 가뜩이나 돈 없었는데······ 조만간 던전 하나 또 털어야겠네.” “제 말을 아예 무시하시다니······.” 던전 상인들은 보통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던전에서 해당상인과 조우한 이가 외부에서 상인과 거래를 할 수 있는 이용권을 구매하게 될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달라지는 것. 이번 경우에는 야산에 있던 던전을 메테르와 아르페가 깨끗이 청소한 후, 자신의 담당 고객이 또다시 던전을 하나 클리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귀신 같이 나타난 미케나를 아르페가 붙들면서 던전 바깥의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이 정도로 매너가 없는 손님이니 분명 5년만 지나면 수많은아가씨가 손님의 그 난폭한 마음 씀씀이에 상처 받고 울지 않을까 싶네요.” “그 전에 내가 메테르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울게 될 걸.” “흐음.” 미케나는 아르페의 대꾸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째렸다. “역시 좋아하시죠?” “고객의 연애사에까지 간섭하게?” “만약 그분한테 따로 감정이 없다고 하시면 제가 손님한테 침 좀 발라두려고 했죠.” “내가 다 자랄 때쯤이면 침이 말라 흔적도 없을걸.” 아르페는 미케나의 귀가 파닥이는 것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상인들의 칭찬을 곧이곧대로 들은 끝에 남는 건 파산뿐이니까.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그를 살짝 굳게 했다. “하지만 용사의 애인이라는 타이틀은 한 번쯤 달아보고 싶단 말이죠.” 아르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딱 그 순간만 제자리에 굳었다. 회피할까? 부정할까? 머리를 굴려봤지만 대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상대는 떠보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고, 그녀가 아르페와 메테르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느낌은 이전부터 있었으니까. 괜히 여기서 부정해봤자 둘 다 짜증만 날 뿐이었다. 결국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케나에게 대꾸했다. “그래, 여태까지 안 들킨 게 용하지.” “당연하죠. 이미 진즉 눈치 채고 있었어요. 손님들과 제가 만나게 된 시기부터가 공교로웠잖아요? 하지만 괜히 손님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싫어서 꾹 참고 있었던 거랍니다.” “그걸 이제 와서 말하는 이유는?” 대충은 알 것 같지만, 하고 뚱한 말투로 덧붙이는 아르페. 미케나가 키득이며 말했다. “이젠 손님도 절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되신 것 같고, 슬슬 저희의 협력관계를 보다굳건하게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요. 더구나······ 알고 계시죠? 그 어떤 던전을 가셔도 다른 상인을 제쳐두고 제가 나타나는 건, 다른 이들에게 손님의 정체를 감추기위해서라는 걸. 솔직히 이것만 가지고도 감사를 받아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장래 유망한 용사들과의 거래를 독점해서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 가 아니고?” “물론 그게 최종목적이랍니다.” 미케나는 당당하게 긍정했다. 그리고 그 뒤에 덧붙였다. “하지만 마왕의 세계정복을 바라지 않는 건 저도 마찬가지라서요. 쓸데없는 것들이 끼어들지 않도록 두 분 용사님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도 확실히 있다구요. 그러니 이건 제 정의와 실리를 충족시키는 일이죠.” “흠······.” “사실은 오늘 이걸 보고 확신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미케나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소도시의 건설 현장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가고 있었다. 무척 고난스러울 것 같았던 건설 작업은 아르페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상당히 수월해져 있었고, 그 덕에 싫은 소리를 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던전만 부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제법 용사다운 일도 하고 계시잖아요? 이곳의 모든 사람이 손님들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해요. 그러니 저 또한 손님을 믿고 지지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섰죠.” “던전 상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새삼스러운데. 너흰 이윤만 추구하잖아?” “그래서 더더욱, 이죠.” 미케나가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손님들처럼 시종 찬란한 빛을 뿌려대는 사람들에겐 많은 이가 꼬이게 마련이에요. 그곳에 제가 추구하는 최대의 이윤이 있죠. 괜히 용사가 마왕의 대적자가 되는 게 아니라구요.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건 용사뿐이잖아요?” “흥.” 용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용사는 신도 교주도 아니다. 능력은 둘째 치고 그릇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데, 단지 사람들이 멋대로 용사에게 의지할 뿐이다. 그것만큼 역겹고 일방적인 관계도 없는데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편하긴 하지.” 하지만, 아르페가 굳이 나서서 그 착각을 깨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제아무리 달콤한 말로 아르페와 메테르를 포장하고 있다 한들 결국 그들은 거래 관계일 뿐. 그렇다면 서로 철저히 손익을 따져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 외의 감정도 계산도 필요 없다. 무수한 상념을 지워버리고 그저 가볍게 웃어버리며, 그는 미케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혼 계약서, 어차피 준비해왔을 것 같은데.” “그럼요. 효력이 높은 걸로 가져오느라 엄청 힘들었다구요. 상회 본부에도 둘러대느라 제가 무지하게 고생을······.” “계약서 값은 원래 반반, 그쪽이 먼저 제시한 거니까 10% 정도는 더 부담한다 치고 내가 4할만 내면 되겠지?” “계산 철저하시긴······.” 아르페는 미케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내민 계약서에 검지를 얹고 쭉 그었다. 이미 기본적인 사항이 작성되어 있던 계약서에 그의 손길이 지나가며 일부 사항이 수정되고, 일부 사항이 추가되고, 일부 사항은 삭제되었다. “나만이 아니라, 내가 아군이라 판정한 모든 인물에 대한 정보는 유출 금지야. 지금 시점에서는 나와 메테르, 시에나, 시페넌, 르세티가 되겠네.” “하지만 본격적으로 손님께 많은 사람이 얽히기 시작하면 제가 가만히 있어도 계약 위반이 될 위험성까지 있다구요.” “네가 입을 열지 않아도 들킬 상황이라면 계약서가 알아서 판단해주겠지. 말과 행동, 그 두 가지만 조심하면 계약위반이 될 일이 없어.” “그럼 저한테도 이득을 주셔야죠. 던전에서 얻은 물건의 10할 전부 제게만 독점 판매하시는 걸로.” “물론 메테르를 비롯해 내가 속한 파티원들과 판매하겠다는 의견이 일치된 물건에 한해서. 단, 네게 판매하지 않겠다고 한 물건을 또 다른 상인을 만나 파는 경우는없도록 하지. 또한, 네게 구매력이 없을 경우에는 정당한 주인을 찾아 판매하겠어.” “독점계약인 만큼 제게 조금의 유예는 주시겠죠? 그리고 추가 3항에 대해서입니다만······.” 한 장의 계약서를 놓고 아르페와 미케나는 머리를 맞대며 꼼꼼한 계산과 견제에 돌입했다. 한창 공사를 진행 중인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참 저 꼬마 마도사가 여자를 꼬시는 재주가 탁월하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추가사항이 있는데요.” 어느 순간 미케나가 계약서에서 고개를 들어 아르페를 보았다. 아르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생각보다 투명하고 깊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빛을 발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 놀랐다. 여태까지의 대화가 모두 이 순간을 위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뭔데?” “이곳 디아스와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만······ 혹시 손님께선 영원의 숲에대해 알고 계신가요?” “티아타 공국의 접경에 있는, 세계수를 중심으로 하는 엘프들의 근원지?” “······역시 알고 계셨군요. 용사로 선정되기까지 시골마을에 박혀 있었을 뿐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지식이 해박하신지.” 미케나는 아르페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아르페는 그녀의 한숨에 담긴 아릿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읽어내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영원의 숲에 대한 정보는 인간들에게 그리 퍼져 있지 않다. 그 숲의 거주자들이 숲을 철저히 지키며 외부와의 소통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거주자들이란, 아르페의 입으로도 말했듯 다름 아닌 엘프이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영원의 숲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까요.” “추측해볼 따름이지만, 공국과의 마찰이 더욱 심해졌다든가. 엘프들을 원하는 다른 나라에서 조직적인 행동에 나섰다든가. 몬스터들의 난동이 심해졌다든가. 세계수가 말라가고 있다든가, 혹은 그 모든 게 원인이 되어 영원의 숲이 망해가고 있다든가.” “아주 정확해요. 전부 정답이에요. 영원의 숲은 지금 총체적 난국이에요. 이러다간 정말 얼마 안 가 폭삭 망하고 말 거예요. 뇌가 아니라 하반신으로 사고하는 얼간이들 때문에!” 엘프는 예쁘다. 세계수의 정기에서 태어난다고 알려진 그들은 정말 요정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뿐만이 아니라 지성을 지닌 모든 종족이 그들을 미의 정점으로 꼽는다. 당연히 그들을 원하는 이는 아주 많다. “왕국에 유통되는 빨간 책 중 8할은 엘프에 대해 다루고 있을 정도지.” “정말 남자는 최악이에요······!” 엘프에 대한 책을 쓰고 읽는 정도라면 그나마 귀엽다. 과거 무수한 이들이 영원의숲을 침범해 엘프들을 포획했으며, 오랜 세월 그들에 맞서 투쟁하면서 엘프들은 아예 이종족이라는 말만 나오면 학을 떼게 되었다. “오크랑 인간 남자는 모두 그걸 떼어버려야 해요.” 미케나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그녀의 귀가 맹렬하게 퍼덕거리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만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본인은 심각한 투로 말하고 있는데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그것은 연상 취향이 없는 아르페에게도 유효한 타격이었으나 미케나는 애석하게도 너무 분노한 나머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그는 한 손으로 제 뺨을 툭툭 두들기며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너흰 언제나 그러면서도 버텨왔잖아.” “······그렇죠. 여태까지는, 그래왔죠.” 미케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페가 용사라는 사실을 감출 생각이 없었듯 그녀도 자신이 엘프, 그중에서도 다크 엘프란 사실을 더는 감출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사실 그녀는 시페넌조차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전신으로 강렬하게 존재감을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렴 그녀보다 높은 수준의 탐색 마법을 지닌 아르페가 눈치를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더 심각하다구요. 정말 숲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저는 다크엘프로 영락한 탓에 숲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건 힘들고······.” “정말 세계수도 쪼잔하지. 뭐 하나 조금만 잘못하면 다크 엘프로 영락시켜버리고말이야.” “세, 세계수의 탓이 아니에요. 제가 미숙했던 탓이라구요!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영원의 숲이에요.” 이제야 본론인가, 아르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케나가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부탁해왔다. “언젠가, 영원의 숲에 관한 제 퀘스트를 받아주시지 않겠어요?” “좋아, 그럼 계약서에 그것도 기입해.” “네······?” 아르페가 너무나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부탁했던 미케나가 오히려 당황했다. “이렇게 가볍게 받아들이셔서 괜찮아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지금 영원의 숲은 제법 심각한 상황이라구요? 위험해지실지도 몰라요!” “어차피 용사 노릇하다 보면 거기까지 끌려가게 될 거야. 해야 될 일 하는 김에 보상도 추가로 받는 셈인데 내 입장에서는 거절할 필요가 없지.” 아르페의 전생에서 영원의 숲과 거주자 엘프들은 정말 끔찍한 마지막을 맞이했다. 더욱이 지금 디아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아 판단컨대 현생에선 그때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 벌어졌지 그보다 낫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거기도 늦지 않게 손을 써야겠지. 쓰으으읍, 귀찮은 일을 하는 도중에 다른 귀찮은 일이 예약되다니, 이래서 용사가 되기 싫었던 건데······.’ 하지만 지금은 열심히 노력한다. 언젠가 아르페가 맞이할 평온한 낙농 라이프를 위하여. “나머지 한 분이 안 계신데 이렇게 허락해주셔서 되는 건지······.” “하, 그런 말은 계약서를 꺼내들기 전에 말했어야지. 계약에 대해선 메테르가 전부 나한테 맡겨두고 있으니 괜찮아.” 바로 그 나머지 한 분 메테르는 지금 시에나와 함께, 아르페가 이 산에서 찾아내 알려준 던전을 탐험하는 중이다. 시에나에게 전투의 ABC를 알려줄 겸 돈이 될 만한물건도 수급할 겸 보낸 것. 던전이라는 게 원래 필요하다고 해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아르페는 이하생략. “그러면 계약 끝난 거지?” “네? 네······.” 내심 아르페가 굉장한 조건을 불러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미케나는 얼떨떨하게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으, 으으. 이 느낌 싫다니까.” 작성이 완료되고 서명까지 마치자, 영혼의 계약서는 두 장으로 나뉘어 각기 아르페와 미케나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계약이 파기될 경우의 대가는 서로의 영혼. 효력이 어마어마한 마법의 계약서이기 때문에 그 가격 또한 이루 말할 바 없이 비싸다. 여하튼 이것으로 그들은 상대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아르페는 여태껏 벼르고 벼르던 질문을 그녀에게 던지는 것이 가능해졌다. “전투사제용 스킬 북 있어?” “설마 그 아이가 전투사제로 전직했단 말인가요!?” “그래서 있어, 없어?” “지금 당장은 없어요. 전투사제가 얼마나 희귀한 클래스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더구나 그 클래스와 관련된 스킬 북은 대부분 신전에서 관리하니까······ 으아, 처음부터 아주 어려운 과제를 내주시네요, 정말!” “부탁할게.” 아르페는 뭔가를 부탁하는 사람이 절대 짓지 않을 것 같이 얄미운 미소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케나는 또 할 말만 하고 방치냐며 잔뜩 투덜거리려다가는······ 산 아래로부터 발산된 기운을 느끼곤 쩝, 입맛을 다셨다. “과연, 단순히 건설보조 작업만 하고 계시던 건 아녔군요?” 아르페의 입가에 히죽, 일그러진 미소가 걸렸다.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게 해주는 미소였다. “다음에 보자, 아줌마. 시페넌이랑 르세티 잘 부탁해.” “이제 그쪽 일은 다 끝나간다구요. 전투사제 스킬 북을 구매하시려면, 다음엔 절 좀 더 빠르게 부르시는 게 좋을 거예요!” 미케나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아르페에게 휙 던지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르페는 그것을 받아 쥐며 정체를 확인했다. “······통신기잖아.” 아마 미케나와 연락을 나눌 수 있는 통신기이리라. 어쩌면 그녀의 소환권 역할을 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과연, 전속으로 계약하면 이런 서비스가 딸려오는 건가.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품에 집어넣고는, 산을 열심히 기어 올라오고 있는 적군의 기세를 가늠하며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마도사님?” “응, 아냐. 건물 짓고 있어.” 한창 열심히 일을 하던 이들이 아르페의 움직임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르페는 고개를 휘휘 저어 보이며 그들을 물렸다. 어차피 그들이 끼어드는 시점에서 일은 더복잡해질 뿐, 지금부터는 아르페의 영역이었다. ‘그러면 어디, 메테르와 시에나가 향한 던전이 속한 영역을 제외하고······.’ 만물열람이 맹렬히 동작하며 아르페의 뇌에 이 일대의 모든 정보를 주입했다. 메테르와 시에나가 향한 곳, 적군이 올라오는 지대와 그 규모, 그들이 지금 짓고 있는 소도시를 지탱하는 영역과 아르페가 건설 재료의 수급을 위해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일대의 정보까지······. 모든 계산이 끝났다. “좋아, 그럼.” 아르페가 양손을 펼치자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뻗어 나왔다. 그 모두가 저 멀리 땅을 뚫고 들어가며 미약한 지진을 일으켰다. 그것은 곧 나무가 모두 뽑혀 흙을 붙드는 힘이 약해진 숲 일대의 지반을 강타했고, “어라? 어디서 진동이 이는 것 같은데.” “진동이라니, 대체 무슨······ 어?” “흐, 흙이다. 흙과 바위가 섞여서······.” “산사태! 산사태가 났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고위 마법으로도 재현이 불가능할 만큼 거대한 규모의 산사태를 만들어내어 병사들과 흑마법사 무리를 덮쳤다! < Chapter 9. 용사 VS 왕국 - 5 > 아르페가 괜히 산 중턱을 건설 지점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물론 터가 넓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도시의 건설에 적합하다는 판단도 서 있었지만, 일단 이곳은 굉장히 눈에 띈다. 병사와 흑마법사들의 추적을 받기에 이만큼 또 쉬운 곳이 없다는 얘기다. ‘일이 커지기 전에 진압하려 한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 놈들이 정상적인 판단이가능하다면 내가 벌이고 있는 짓을 파악한 시점에서 최대한 많은 인원으로 빠르게 몰아치고 빠져, 이 일을 완전히 어둠 속에 묻어버리려 하겠지.’ 따라서 아르페가 직접 놈들을 유인했다. 괜히 애꿎은 희생자를 늘리는 대신 처음부터 그들의 표적을 확실히 정해준 것이다. 그 생각이 제대로 들어맞아 놈들은 헤매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산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산 중턱이라는 위치는 필연적으로 지리적 이점을 갖는다. 이 도시를 발견하고 산을 타 올라오는 모든 적을 대상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산을 망가트리는 시점에서 아르페의 마지막 노림수가 작렬했다. 어차피 나무를 뽑아내고 땅을 뒤엎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형적인 함정을 추가로 준비하는 것이 무어 어렵겠는가? “크아아아아아악!” “지, 지반이 무너진다! 흙이!” 예를 들면 아르페의 마나를 잔뜩 머금어 터질 날만 기다리는 마나 수정을 흙 속 깊숙한 곳에 잔뜩 묻어두었다가, 적이 올라오면 터트려 대량 살상을 일으킨다던가. “무, 물!? 맙소사, 계곡! 계곡 물이!” “끄아아아아아아악!” 예를 들면 수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살짝 장난질을 쳐놓았다가, 적이 오면 오물과 함께 놈들을 쓸어버린다던가. “바위가······ 거대한, 바위가.” “오, 안 돼······ 창조주시여.” “크푸악!” 예를 들면 지반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걷어낸 무수한 바위를 따로 쌓아두었다가, 산사태를 일으키면서 함께 굴려 보낸다거나. “크아아아아악!” “도, 도망······ 카학!” 제대로 된 전투는 물론이고 적의 위치를 특정하기도 전에 덮쳐온 대자연의 재앙에 수천 이상의 병사가 그대로 죽어버렸다. 마도의 경지가 깊지 않아 그만 병사들과함께 끔살당한 흑마법사의 숫자도 과히 적지 않았다. “악마.” “악마다!” “저 산에는 악마가 있어, 도망쳐!” 그러니 그 누가 산을 오르고 싶어 하겠는가? 병사들의 사기는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흑마법사들조차 저 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존재들이 두려워 발을 내딛지 못했다. “이런 술수를 부리다니 대체 저 마도사의 레벨은 몇이란 말인가!” “으으, 무섭다. 대체 무슨 스펠이지? 나, 나는 이길 수 없어.” 아르페는 보랏빛 눈동자를 찬연히 빛내며 손가락을 허공에 이리저리 휘저었다. 마나 스트링이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대지를 헤집어 추가적인 산사태를 일으켰다. 그의 눈에 만물의 구조가 들어오고, 어떤 부분을 끊어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마왕이시여!” 무수한 숫자의 단말마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죽음이 쌓이고 쌓여 피가 강이 되고 시체가 언덕을 이루었다. 그 위에 덧입혀지듯 희생자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갈 곳은 없다.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였다면 진즉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헉!” “아, 아래를 봐.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지진, 지진이다.” 당연히 건설에 한창이던 주민들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신기하리만치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만 멀쩡하고, 그 외에는 산이 거의 통째로 무너져내리다시피하고 있으니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밑에서 병사들이······.” “하지만 마도사님께서 놈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있어.” “크게 움직이고 있지도 않아. 그냥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인데!” 마나 스트링과 만물열람의 조합은 그를 가히 신과 동등한 존재로 보이게끔 했다. 실제로는 사전에 무수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굉장히 허세를 부리기에 좋은 능력이라는 뜻! ‘사천왕과 용사는 종이 한 장 차이구나.’ 아르페는 뿌듯함마저 느끼며 손을 휘둘렀다. 백 명이 추가로 죽고, 다시 팔십 명이 죽었다. 무수한 고통과 비명과 절규가 산 아래를 가득 메웠다. 물론 그것은 아르페에게 조금의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메테르를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메테르는 선악판단만은 훌륭히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결과 생겨난 모든 죽음을 전부 자신이 떠안으려는 성격은 아직 버리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걸 버릴 수 있어.’ 마왕군 사천왕은 적어도 그런 부분에서는 용사보다 뛰어나다. 목적을 위해 타인을 살생하고 그것을 가볍게 잊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 가볍게 잊어버리지 않고서야 도저히 그 짓은 못해먹는 것이다. 마왕의 불합리한 명령과 불합리한 세상의 편견이 빚어져 탄생한 죽음의 단위가 백만을 넘어간 시점에서 아르페에게도 그것이 가능해졌다. 하물며 죽어 마땅한 일을 한 놈들을 죽이는 일에 아르페가 감흥을 느낄 리가! “이제 얼추 정리 됐나?” 한 시간 정도 손을 휘젓고 있었을까, 아르페는 더 이상 산에 진입하는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손을 거두었다. 이미 그 시점에서 산은 이전과는 완벽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뭐, 오르내리는 데에만 문제없으면 됐지.” “앞으로 우리가 이 산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주민들은 평범한 야산A에서 역사에 길이 기록될 산이 되어버린 그들의 주거환경을 돌아보며 아득한 표정이 되었으나 차마 이 지경을 만들어놓은 아르페에게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르페가 어찌 그들의 속마음을 모르겠는가? “이쪽엔 신경 끄고 건설에나 집중하셔. 설마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힉!” “저, 저만한 사람들이 또 온다는 말씀입니까!?” “더 많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있을 때 놈들을 다 마무리 짓는 게 너희도 편하겠지?” 듣는 이들이 오싹해지는 얘기였다. 사람들은 모두 얌전히 원래 하던 작업으로 돌아갔고,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건설 현장을 빠져나왔다. ‘자, 그러면······.’ 그가 일부러 살려둔 이가 있었다. 흑마법사들 중에 적당히 강하면서도, 적당히 소극적이고, 주위 눈치를 어지간히도 살피는 녀석. 딱 그 놈 한 놈만 자유로이 도망치게 내버려두고 나머지 모두를 묻어버린 것이다. 놈은 자신의 운이 좋았다고, 상황 판단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아르페가, 놈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실로 교묘한 도주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놈은 아르페의 시야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강화.’ 아르페는 빠르게 발걸음을 놀리는 와중에 강화 스킬을 발현하여 자신의 부츠를 강화했다. 그 즉시 마법 블링크를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부츠의 능력이 증폭되어 하루에 두 번까지 마나 소모 없이도 블링크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고, 블링크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대폭 늘려주기까지 했다. 아마 강화 스킬이 성장한다면 부츠를 다시 한 번 강화할 수도 있게 되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흡!” 아르페는 두 번의 블링크를 연달아 사용하며 바닥을 박차, 순식간에 산 아래로 질주를 개시했다. 전생이었다면 죽어도 불가능한 몸놀림이었다. 그 역시 자신에게 적극적인 운동이 가능한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용사라는 타이틀이 괜한 것이 아니라서, 이 1년간 많은 레벨 업을 거치면서 아르페는 마력뿐만 아니라 다른 신체적 스탯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야 물론 레벨 160대의 전사들에 비하면 허접하기 짝이 없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수준의 마도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이었다. 어딜 보나 완벽한 마도사인 아르페가 이만한 신체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차마 다른 이들은 짐작하지 못하겠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아르페는 상대에 비해 우위에 서는 셈이다. “블링크 한 번, 추가로······ 그렇지, 잡았다.” “컥!?” 빠른 속도로 산을 주파하고 도약한 끝에 아르페는 기어이 놈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놈은 용의주도하고 소심한 놈답게 불의의 기습을 당했을 때에 발동해 적을 공격하는 아티팩트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함정은 적이 모를 때에나 유효한 법. 그 발동조건은 물론 위력과 아티팩트의 형태, 구조까지 파악하고 있던 아르페는 놈을 붙잡는 순간 마나 스트링으로 아티팩트를 부수어버렸다. 당연히 아티팩트는 발동하지 않았다. “헉!” 놈은 그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아득한 고수라는 사실을 파악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사, 살려만 주세요! 뭐든지 다 말하겠습니다!”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어.” “컥!” 아르페는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상대의 머리를 땅에 쳐박아 쓰러트렸다. 혹여 놈이 아르페를 확인하게 되면 아이라는 것을 알고 기세가 등등해질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강자의 입장에서 압박하는 쪽이 보다 수월하게 정보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아르페는 놈의 등에 다리를 올려놓으며 물었다. “자, 그래서 대공과 손을 잡은 마족의 이름은 누구지?” 다짜고짜 본론에 들어가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이 일의 배후에 대공이 있다는 것도, 그 대공이 마족과 협력하고 있다는 것도 전부 기정사실화하고 그 다음 질문을 던진 것이다! 놈도 아르페의 질문에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족이라니 저는 모르는······ 히익.” 아르페가 뻗어낸 마나 스트링이 유유히 뻗어나가 놈의 손가락 하나를 감쌌다. 금방이라도 손가락을 잘라버릴 것처럼 날을 세운 마나 스트링을 보며 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르페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목숨의 가치는 내게 더할 나위 없이 가볍지만, 너한테는 아니겠지?”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 입에서 나올 말도 달라야겠지?” “네, 넵.” 무엇을 숨기랴, 협박과 고문은 사천왕의 필수 스킬 중 하나! 마음이 약하거나 미숙하여 끝내 적을 놓치거나, 정보를 캐내는데 실패하여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존의 어리버리 용사와 같은 일은 아르페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티, 티에나라는 여자였습니다. 왕궁의 마도사들을 일부 징집하고, 실험에 협조하는 대가로 대공을 도와준다고······ 저, 저 또한 징집된 마도사입니다.” 그것은 사실이다. 놈은 처음부터 흑마법사였던 것이 아니라 클래스체인지를 거쳐흑마법사가 된 경우였다. 물론 대공의 명을 따라 이곳에 쳐들어온 시점에서 출신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지지만 말이다. 하지만 티에나라. 마계에서 나와 인간계에서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인재라면 전생의 아르페가 알았을 법도 한데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야 인간들에게 본명을 댈 필요도 없고, 아마 가명이겠지만······.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질문을 이었다. “대공은 용사를 찾아 헤매고 있잖아. 그런데 어째서 용사를 적대하는 마족과 협조하겠다는 얼간이 같은 생각을 한 거지?” “하, 하지만 마왕은 용사가 스스로 마왕성으로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결코 용사를죽이지 않는다고······.” 캬, 그 소중한 정보를 설마 이런 말단에게까지 흘리고 다닐 줄이야! 전생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한 마왕군의 계획과 마주하며 조금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아무래도 마왕의 셰프 근성은 달리 어디로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말을 믿고 대뜸 마족을 나라 안에 들이는 대공이나, 정말로 좋은 기회를 잡아놓고도 레시피 준수하느라 용사를 안 잡는 마왕이나······.’ 그냥 이 세상이 깔끔하게 멸망해버리는 쪽이 낫지 않을까. 아르페는 물론 원래 세상을 수호하려는 의지 따위는 코털만큼도 없었지만 그래도 안온한 노후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 설마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에서 태클이 들어오니 기운이 쭉 빠졌다. “저, 정말입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정말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알아, 믿어.” “그러면 절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 전에 마지막으로, 너희 뒤로 대기하고 있는 군단의 규모와 주둔하고 있는 진지, 불어.”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기습하는 것이야말로 승리의 지름길. 아르페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게임은 판이 짜이기 전에 엎는 것이 최고지! 놈이 대답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응?” 아르페의 반문에, 놈은 축 쳐진 목소리로 보충했다. “이게 전부입니다······ 왕국은 이 이상 병력을 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1만을 넘는 병사와 20명에 가까운 흑마법사가 죽었는데 여유병력이 남았을 리가 없잖습니까. 이제 디아스는 망했습니다. 대공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울지 않을까요······.” “······.” 그의 말에서 묻어나는 절절한 한탄과 무력감을 느끼며 아르페는 그만 침묵하고 말았다. 용사가 나라 하나를 무너트린 순간이었다. < Chapter 9. 용사 VS 왕국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1 > “자, 이제 일어나.” “네······ 어린애!? 칵!” “넌 크게 되긴 글렀다.” 당장 얻어야 할 급한 정보를 얻은 후, 아르페는 약속대로 흑마법사를 살려주었다. 양팔을 묶고, 놈이 마법을 시전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터져나가도록 가슴팍 근처에 따뜻한 마나 수정을 넣어주고, 놈이 지니고 있던 금화며 아티팩트를 강탈하긴 했지만 그래도 살려준 것은 살려준 것이었다. “나이도 어리면서 이렇게 악독할 수가······.” “마족과 대공의 협력으로 진행되던 실험이 어떤 건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다시 말해봐, 뭐가 악독하다고?” 아르페가 어리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배짱도 좋게 아르페를 욕하던 놈은 그의 싸늘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기껏 건진 목숨이 가볍게 날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편 아르페는 허무하게 모든 전투가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살짝방황하다가, 아직 모든 것이 정리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떠올려냈다. “이 장소 말고 또 실험을 진행하던 장소, 있어?” “어, 없습니다. 아직 왕국에 징집된 흑마법사들이 남아있지만 그것도 두엇 정도······.” 흑마법사 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만약 그 적은 인원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녀석들이라면 지금 아르페가 어찌 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니 무시하면 된다. 아니, 그렇다면 정말 한 큐에 모든 일을 해결해버렸단 말인가? 스스로도 자신의 업적이 믿기지 않았던 아르페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놈을 압박했지만 그 위에 추가된 것은 놈의 눈물어린 진실고백과 어린 시절의 악몽뿐이었다. 이쯤 되면 진짜였다. 정말로 디아스는 답이 없었다! “물론 디아스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공격해온다면 모르겠으나, 나라 모두가 대공의 편은 아니란 말입니다. 대공이 마법사단을 온전히 휘하에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왕권을 확고히 하려고 마족의 도움을 받은 것도 있어서······ 이곳으로 향할수 있었던 것은 온전한 대공 휘하의 세력 뿐이었죠. 그런데 그게 모두 끝이 났으니······.” 그 뒤로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만간 확정적으로 다시 한 차례 디아스의 주인이 바뀌겠지. 아니면 아예 나라가 사라지던가. 아르페는 아득한 눈으로 저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시신의 산과 피의 바다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지금 아르페의 심정과 어울리는 실로 아늑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래, 그럼 마족은?” “마족은 모든 교육과 지시를 마치고 떠났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디아스 내에 머무르다가 자칫 대공의 적대자들에게 들키면 대공의 입지가 말이 아니게 되니······ 그것이 대공이 내건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과연 그것이 정말일까? 만약 사태가 안 좋게 돌아갈 때를 대비해 자신의 근처에 두었다가, 지금처럼 일이 수틀리게 되면 그 마족을 이용해 왕국 전체를 뒤집어놓거나 하지 않는 것일까? 아르페는 언제나의 버릇으로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그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정말 그렇다면 자신이 왕궁으로 향해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그 정도로 막장이면 그냥 디아스 망하는 게 낫지 뭐.” “그, 그러면 저는 이제······.” 흑마법사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아르페의 표정을 살폈다. 아르페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이 가뿐해진 틈을 타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행동이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흑마법사에게 말했다. “그럼, 약속했으니까 살려줘야지. 그런데 그냥 살려주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지?” “그, 그러믄요.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절대 흑마법 같은 것은 다루지 않고 얌전히 살겠습니다! 시골에 내려가서 얌전히 소나 기를까요?” “너 지금 낙농업을 우습게보냐?” “히익!?” 아르페는 놈의 기를 팍 죽여 놓고는, 만물열람의 힘을 발휘해 놈의 정보를 열람했다. [데이스 폰 시그네마] [흑마법사] [레벨 ? 70] [힘 ? 8 민첩 ? 9 체력 ? 16 마력 ? 169] 아르페의 마력은 800을 넘어간다. 둘의 레벨이 100 가까이 차이 나는 점을 감안해도 그 차이는 터무니없이 컸는데, 아르페가 800이 넘는 마력을 보유하고 있음과 동시에 힘과 민첩, 체력 또한 상당하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데이스라는 이름의 흑마법사와 아르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이차원의 벽이 한 서너 개 정도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데이스의 재능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레벨을 올릴 때마다 착실히 마도를 수련하고, 마력이 오를 만한 짓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다. 보통 이렇게 우직하게 노력하는 놈은 흑마법에 잘 매료당하지 않는 편인데······. 고개를 갸웃하던 아르페의 눈이 문득, 데이스의 이름 뒤에 붙은 쓸데없는 미사여구에 가 닿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너, 부모가 대공파의 귀족이지?” “어떻게 그것까지!? 제 아버지께서 대공의 오른팔인지라 저도 어쩔 수 없이 대공을 따르게 되었······ 헉!” 너무나 놀라운 지적이 들어온 나머지 본능적으로 정보를 토해내고 마는 데이스 폰 시그네마. 아르페의 미소가 사악해지자 놈은 몸을 움찔했다. “아, 아니. 저를 이용하셔도 가문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겁니다. 저도 이제 가문이랑은 의절하고 조용한 산골에 들어가서······.” “아니,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에 퍽 어울리는 설정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저, 전설? 설정?” “그래. 너를 살려주면서 내게도 득이 될 방법이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했어.” 데이스 폰 시그네마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딘가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아르페에게서 튀어나온 말은, 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았음을 증명해주는 한 마디가 되었다. “너, 영혼의 계약서라고 들어는 봤냐?” “아르페, 괜찮아!?” “오빠!” 체험 건설의 현장으로 돌아오자 그곳에는 이미 메테르와 시에나가 던전 탐색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들 역시 산 아래로 어떤 장관이 펼쳐져 있는지는 확인을 마쳤고, 아르페가 대충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도 안 다쳤으니까 그렇게 더듬을 필요 없어.” “저렇게 시체가 많은데?” “빵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베이는 일은 나에 한해선 있을 수 없으니까 안심해.” 제아무리 메테르의 재능이 천재적이라고 해도, 가속 능력이 개사기 능력이라고 해도 그녀는 1만의 병력을 묻어버리는 일은 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마도사이기에 가능한 활약인 것이다. “그래도 아르페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오빠아.” 정말로 아르페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여자애 둘은 나란히 그에게 매달렸다. 데이스는 그런 아르페를 기이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이내 알아서 눈을 깔았다. 눈치가 빠른 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르페는 메테르와 시에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내일 떠나게 될 것 같으니 준비해둬.” “내일!? 너무 빠르지 않아?” “원래 일주일은 더 걸릴 거라고 했잖아, 오빠.” 그렇지, 원래는 아르페도 일주일 정도를 더 예상하고 있었다. 대공 휘하의 군단이적어도 두 차례 정도는 더 공격해올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2회차의 힘은 내 생각보다 강력했어······.” 그리고 디아스의 대공이란 놈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머리가 텅텅 비어있는 놈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 이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적어도 당장은.” 물론 그렇다고 희희낙락하며 원래 살던 곳으로 흩어졌다간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재앙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대공 한 명이 몰락한다고 그들 세력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마왕군이 건재한 것도 마찬가지이니까. 그러니 이 도시는 이곳에 생겨나는 것이 가장 좋다. ‘하룻밤이라. 지금부터 날이 밝아올 때까지는 무지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아르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일행에게 전달했다. “둘 다 던전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어. 내일부턴 다시 바쁠 테니 이틈에 둘 다 씻고 쉬어둬. 시에나, 너는 언니랑 작별 착실히 해두고.” “응!” 시에나는 아르페를 세게 꼭 껴안았다가 떨어졌다. 뒤로 돌아 달려가는 그녀의 머리 위로 레벨 28이라는 문구가 선명히 보였다. 어이가 없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내 주위에는 다 괴물들밖에 없는 거지?” “하지만 아르페가 제일 대단한걸.” 멀어져가는 시에나의 뒷모습을 째려보며 메테르가 말했다. 아르페는 글쎄다, 하고 대답해주며 녀석의 머리를 살짝 거칠게 쓰다듬었다. “가서 쉬고 있으라니까.” “하지만 아르페는 지금부터 또 일할 거잖아.” “이만큼 벌려두고 그냥 갈 수도 없으니까.” 메테르는 뚱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흑마법사 데이스를 일별하며 아르페에게 물었다. “이 사람도 나쁜 사람인데 그렇게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거야?” “살려준다는 약속을 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대신 앞으로 써먹어볼 생각이야.” “으, 으으으.” 아르페가 무슨 말을 하건 지금의 데이스의 머릿속엔 영혼의 계약서라는 단어로 가득했기에 들리지 않는다. 대체 영혼을 저당잡고 무슨 무시무시한 짓을 시킬 생각인지! 메테르는 나쁜 기운을 풍겨내는 데이스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 짓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을 보면 괜찮으려나, 하고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이곳에 데이스의 아군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명령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벌벌 떨고만 있을 운명이었다. 하룻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건설현장의 중심에 선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으로 해놓을 수 있는 모든 짓을 해놓았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산을 어느 정도 정돈하고, 건축 자재로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하고, 산을 탐색하여 찾아낸 동물들을 잡아 사람들이 식량으로 삼을 수 있도록 가공하고······. 아르페는 쓰면 쓸수록 마나 스트링이 대단한 마법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특히 만물열람과 결합되어 발동되는 마나 스트링은 주위 모든 정보를 습득해 분석하고 그 상황에 맞는 최적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마치 자신이 동시에 사방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마법을 구사하는 본인도 놀라울 지경인데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어땠겠는가? 마나 스트링을 관측하지 못하는 타인들에게 아르페는, 그저 손을 휘둘러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바꾸어나가는 전능자로만 보였다. “역시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아까 그 광경을 보고도 아직까지 착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저 분은 신이셔, 신!” 아르페의 분투 덕에 날이 밝아올 때쯤엔 어찌 도시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했다. 건설 현장에 건축에 대한 기본 개념이 탑재된 마도사가 함께하면 어떻게 되는지 사람들 모두가 뼈저리게 깨달았다. “수로, 이런 게 가능하다니 정말 놀랍구만유.” “이미 우리 마을보다는 편한 것 같구만!” “전망이 탁 트여 좋아, 아주.” “이쯤이면 됐겠지.” 아르페는 소도시 전체를 두르는 목책까지 완벽하게 체크한 후 마법을 거두었다. 마나를 회복할 때마다 마나 스트링을 써댄 탓에, 성장에 시간이 걸리는 편인 유니크스펠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10레벨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가볼까.” 모두 깨끗이 털었다. 이보다 더 퀘스트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는 없다. 기본 퀘스트에 히든 퀘스트까지 전부 다 마쳤다. 의도하지 않은 채로 그 다음 퀘스트들까지 줄줄이 깨버렸다는 점이 심히 아이러니했지만 어쨌든 이걸로 끝이었다. “마도사님, 혹시 벌써 떠나시려는 겁니까?” “마도사님······.” 주민들은 아르페가 떠나려는 것을 귀신같이 감지하고는 당황하며 그를 붙들었다.그러나 아르페의 태도는 단호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어. 이 도시에 머무르는 한 더 이상 너희를 위협할 자도,저주를 걸 자도 없을 테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도록 해. 아, 그리고 우리 일행에 대해서는 기억하지도 떠벌리지도 말 것, 명심해둬.” 아이들의 구출부터 그들 모두를 모아 산 중턱의 도시 건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아르페에게 신세를 진 것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라 말하고 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도사님······.” “간다.” 사람들은 아예 아르페가 이 도시에 눌러앉아 그들을 다스려주기라도 바라는 모양이었지만 아르페는 이 따위 산 구석에 미련이 없었다. 강제로 수행해야 되는 주제에 보상도 없는 이 따위 퀘스트는 이제 아주 질색이었다! 아르페는 메테르와 시에나를 끌고 곧장 그곳을 뛰쳐나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쫓아 나왔지만 전부 깔끔하게 무시했다. “시에나, 행복해야 돼!” “다녀올게, 언니!”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에이나와 그와 반대로 활짝 웃고 있는 시에나였다. 언니가 자신을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별로 슬프지 않은것인지······ 아르페는 전자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에나의 얼굴이 지나치게 밝았다. “에이나 언니는 앞으로 이 마을 안에 있으면 안전할 테니까. 나도 오빠랑 있으면 즐거우니까 서로 좋은 거야!” “나는 시에나가 함께 있으면 즐겁지 않은데.” “메테르 언니, 농담도 참.” 두 꼬맹이가 화기애애한 미소로 무장한 채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거기에 간섭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는 척하기도 싫었다. 줄에 묶여 끌려오고 있는 데이스가 아르페에게 빤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무시해두었다. “마도사님!” “마도사니이이이이이임!” 도시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려 걸어가는 시점까지도 사람들의 시선이 등에 박혀 따가웠다. 대체 아르페가 뭘 했다고 저렇게 열광적으로 그를 부르는 것일까. 괜히 돌아보면 마음만 싱숭생숭해질까 두려웠다. ‘인간이란 눈물이 나올 만큼 단순한 존재야. 당연히 그렇게 될 줄을 알면서 행한 일에,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는 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걸까.’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념이다. 아르페는 칫,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내고는 통신기를 꺼내어들었다. 곧 미케나와의 통신이 연결되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손님. 제 이름은 미케나랍니다, 미케나.] “애들 교육은 끝났어?” [······이제 막 끝났어요.] “좋아. 지금부터 거기 한 번 들를 테니까 너도 같이 기다리고 있어.” [설마 그것만 전달하시려고 연락] 아르페는 통신을 가차 없이 끊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시페넌 일행에게 이 흑마법사를 맡길 거야. 당연히 안전조치는 취해둘 거고······. 대충 녀석들에게 앞으로 할 일들을 가르쳐준 후 우리는 마도사를 찾아 즐거운 여행을 떠난다. 이상, 질문 있는 사람?” “네, 저요!” 메테르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시에나랑 우리는 레벨 차이가 많이 나니까, 이 흑마법사를 맡기는 김에 시에나도 맡기면 어떨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제안에 아르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메테르 이 녀석은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똑똑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와 반대로 시에나는 당황하며 아르페의 소맷자락을 꼭 붙들었다. “난 오빠가 좋은데. 레벨 금방 올릴 수 있어, 그러니까 버리지 마. 응?” 물론 아르페는 시에나를 떼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시페넌과는 달리 귀엽고 솔직한 여자애라는 점도 한 몫 하지만, 당연하게도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시페넌이랑 시에나는 달라, 메테르.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일단 클래스란 무엇인가에 대한 길고 긴 설교를 늘어놓아야겠지만······ 지금은 짧게 설명하자. 메테르, 너는 귀족이 아니면서 귀족이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 알고 있어?” 메테르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르페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시에나의 머리에 살포시 한쪽 손을 올렸다. 그리고 메테르에게 말해주었다. “그 녀석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어. 인사해, 이 아이는 파티의 귀족 힐러라고 해.”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2 > 사제는 언제 어디서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거만한 놈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는데, 사제가 마도사만큼이나 희귀한 직종이라는 것이 그 첫째 이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든 빠질 수 없는 인재라는 것이 둘째 이유다.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마법사의 힐은 그 효능이 구려.좌우지간 구려. 게다가 힐을 쓸 마나가 있으면 탐색이나 방어나 공격에 보태는 게 낫지. 그런데 위험한 던전일수록 상처를 입을 확률도 높고 언제까지나 포션으로 버틸 수도 없거든. 그래서 결국 모든 파티가 사제의 도움을 갈구하게 되는 거야.” 물론 용사의 경우 조금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모든 클래스의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그들은 굳이 마도사의 힐링이 아니라 사제의 치유 스펠을 익혀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페는 가뜩이나 평소에 마나 스트링을 비롯해 마나 소모가 극심한 스펠을 다루는데 치유 스펠까지 익혀 다룰 여유가 별로 없고, 메테르는 바보라서 스펠을 익힐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신전의 관리를 받지 않고도 자연적으로 높은 마력을 지니고 탄생한 사제, 시에나가 있다. 비록 전투사제이기는 하나, 완전한 신성력이 아니라 독자적인 구조의 마력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나 좌우지간 그녀는 사제, 치유 스펠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오빠, 나 레벨 낮아도 도움 돼?” 시에나는 아르페의 말에 적잖이 안도하여 그를 올려다보며 물어왔다. 메테르는 노골적으로 실망하고 있었으나 아르페는 가볍게 그녀를 무시하곤 시에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도움 많이 되지.” “다행이다.” 물론 전투 사제가 익힐 수 있는 치유 스펠을 익힌다는 가정 하에. 그 부분만은 미케나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안 들어왔어요.” “퉷, 기껏 전속계약까지 했는데 진짜 도움 안 되는 아줌마네.” “정말 무례한 손님이라니까! 게다가 또 아줌마라고 했어!” 미케나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지만 아르페가 주문까지 넣어놓은 상품을 구비하지 못한 것만은 확고한 사실이었다. 어쩌다 빌미를 준 것일까, 한탄하며 그녀는 아르페가 주문한 다른 상품, 영혼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걸로 됐겠죠, 손님? 전 이제 쉬러 갈 거예요. 그동안의 출장업무 때문에 무척,무우척 지친 상태니까 말예요.” “그간 우리를 도와주느라 정말로 고생 많았다. 잘 가라, 다음에 또 보자.” “고마워, 엘프 상인님.” 시페넌과 르세티가 그녀에게 정중한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미케나 역시 감회가 없지는 않은지, 아련한 얼굴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출장기간 내 교육 및 소모품비, 30% DC로 전부 정산해서 1,287골드 되겠습니다.” “캬, 이게 안 통하네.” “통할 리가 있나요? 얌전히 돈이나 내놔욧.” 시페넌은 꼼짝없이 그녀에게 출장비를 지급해야 했다. 미케나는 확실히 돈을 받아 챙긴 후 짐수레를 끌며 뒤로 물러나더니 아르페에게 지그시 시선을 주었다. “스킬 북은 구하는 대로 연락할게요. 그땐 가까운 애니웨어 상단 지부로 찾아와주세요.” “되도록 빨리 부탁해.” 시에나는 엄연히 전투‘사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사제의 교육을 시켜줄 사람이 없는 탓에 우직하게 전투술과 마나 컨트롤만 배우고 있었다. 마나뿐만 아니라 몸을 다루는 데에도 제법 재능이 있었던 덕에 양쪽 다 큰 성장을이루기는 했지만, 그녀의 격투술 레벨이나 마나지배 레벨이 오를수록 뭔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타 클래스의 스킬이나 스펠 북도 닥치는 대로 모아줘. 내 말 뭔 뜻인지 알겠지?” “그럼요, 믿고 맡겨만 주세요. 대신 손님은 돈을 준비하셔야 할 거예요.” “후.” 돈이라는 말에 피식 웃기만 하는 아르페. 미케나는 그 부분을 자세히 묻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그가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이란 당연한 결론에 이르러, 이내 쳇, 혀를 차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남은 일 하고 가볼까.” “그래, 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시 찾아온 거지? 어라, 그러고 보니.” 미케나가 사라지자 슬라임 던전에는 여섯 명의 멤버만이 남았다. 시에나는 아르페의 뒤에 달라붙어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었고, 시페넌은 그런 시에나의 모습을 이제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가 늘었구나, 아르페. 어린 나이에도 그 정도이니 나중엔 어떨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파티 멤버의 성별을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 파티는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 “파티 멤버? 우리는 안 넣어줬으면서?” 시페넌의 억울한 표정. 아르페는 그의 마음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 파티만 멤버가 늘어나서 섭섭한 거지? 다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너희 파티 멤버도 보충해주려고 여기 인재를 데려왔지. 인사해, 데이스라고 해.”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우릴 네 파티에······ 지금 뭐라고?” 아르페는 시에나를 대신해 시페넌 쪽으로 데이스를 내밀었다. 데이스는 대체 왜 앙탈인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아르페의 힘을 이길 수는 없어 끝내 제 얼굴을 드러냈다. 그 순간 르세티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잘도 나타났구나, 버러지.” “데이스······.” “태, 태자 전하.” 시페넌의 얼굴을 마주하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시페넌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아무래도 구면인 모양. 더욱이 그 관계가 과히 좋지 않아보였다. “아르페. 너는 이 자의 정체를 모르기에 이 자를 파티 멤버라며 데려왔겠지만, 이자는 안 된다. 이 자의 가문은 한때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주제에 뻔뻔하게도 대공 편으로 돌아서, 나를 지키려 하던 무수한 기사들을 죽이고······.” “시페넌, 나도 이 녀석이 누군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어.” “뭣!?” 시페넌이 흥분했지만 아르페의 입가의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데이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네가 직접 설명해줘. 네가 무슨 일을 했고 어쩌다 나와 동행하게 되었는지.” “모, 목숨은 지켜주실 겁니까?” “그럼 당연하지, 앞으로 이용해먹어야 하니까.” “······끄읍.” 아르페의 손에 들린 영혼 계약서를 보며 데이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르세티와 시페넌이 뿜어내는 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끝내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하, 사실 저는······.” 설명은 짧게 끝났다. 비록 현장에 있지는 않았다지만, 스스로 원해서 흑마법사가 된 것도 아니라지만, 증거인멸을 위해 나선 군단에 그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한 죽을 죄였다. 그 점은 본인도 시인하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었지만······. “그 영혼의 계약서라는 건 대체 효과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네가 죽이지도 않고 살려온 것이지?” “어기면 영혼을 빼앗겨.” “대단하군.” 데이스를 평범한 파티원으로 들이려는 것이 아니란 사실만은 전해졌다. 시페넌은아르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괜찮다면, 거기에 나를 위한 조항도 하나 추가해주면 안 될까?” “얼마든지. 그래도 죽이는 건 안 돼.” “당연하지. 죽어버리면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잖아.” “힉.” 데이스는 더욱 더 창백한 안색이 되었으나 누구도 그를 도와줄 이는 없었다. 결국그는 불합리한 조항으로 가득한 영혼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파티에 최하 계급의 노예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흑마법사는 사용가능한 마법이 한정적이고 사제의 조력을 받지 못한다는 점만 빼면 최고의 파티원이 될 수 있어. 자질은 나쁘지 않으니, 시키는 일은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계약서의 내용은 참담했다. 지금 데이스에게선 나라 잃은 자들만이 짓는 표정이 엿보였다. 그가 가질 수 있는 위안이라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 동료들처럼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감정적으로 용납하기 힘들겠지만, 이놈을 부려먹는 걸로 너와 르세티는 더 안전해져. 그러니 죽이지는 말고 데리고 다녀.” “알았다. 네가 우리를 그렇게나 생각해주다니 놀라운데.” 가던 길을 되돌아와 맡길 정도로 그들을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시페넌이 감동하려는 찰나 아르페의 눈이 가볍게 반짝였다. “사실은 그것뿐만이 아냐.” “그럼 그렇지.” 금세 실망하는 녀석들. 아마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 또 반응이 달라질 텐데. 아르페는 히죽 웃으며, 그가 이곳에 와 데이스를 그들 파티에 합류시킨 궁극적인 목적을입에 담았다. “난 오늘 네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러 왔어.” “그거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시페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아르페한테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할 때 들었던 말이지 않은가! 어디 얼마나 끝내주는 제안을 하나 두고 보자는 표정의 시페넌을 놔두고 아르페는 지도를 하나 꺼내어 들었다. “음······ 지도?” “제법 고급스러운······ 왕실에서 발행한 지도잖아!?” 그것은 이전 시페넌을 죽여 없애려던 기사들을 죽여 없애고 얻은 디아스 왕국전도였다. 특이한 점은 그 지도의 군데군데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고, 1부터 시작해 중구난방으로 숫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뭐지······? 이 동그라미에는, 무엇보다 이 숫자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반문하는 시페넌. 아르페는 가벼이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이게 다 던전이야.” “뭣!?” “뭐라고!?” “네!?” 시페넌과 르세티는 물론이고 데이스까지 놀라워하며 되물었다. 동그라미의 숫자만 해도 벌써 스무 개가 넘어가는데 그게 모두 던전이라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르페의 표정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던전이 있는 장소임에 확실하니까 믿어도 돼. 물론 개중에 몇은 이미 발견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너희 레벨을 순조로이 올리기 위해서라면 전부 빠짐없이 빼놓지 않고 들러야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시페넌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번뜩였다. 그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조심스레 아르페에게 물었다. “잠깐, 아르페. 그렇다면 여기 1부터 시작하는 숫자가 혹시······.” “응. 이 순서대로 가면 어렵지 않게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성장할 수 있을 거야. 특히 시페넌 네 탐색 스킬이나 함정해제 스킬을 키우려고 한다면 이 정도 던전은 거쳐줘야지.” “너······.” 놀라움 뒤에 기다리고 있던 경악을 맞이해, 시페넌 일행은 그냥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아르페는 아직 발견이 되지 않은 던전에 나타나는 몬스터 수준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스의 합류로 너희 파티는 이제 사제가 없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구성이 되었거든? 이중엔 미발견된 던전이 많아 보상도 두둑할 테니, 남는 돈으로 마나 포션이든 체력 포션이든 든든하게 들고 다니도록 해. 그래도 혹시 던전 안에서 낭패를 겪게 되면 통신기로 나한테 연락하고.” “너······.” 아르페의 능력이 끝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지식의 풍부함을 뛰어넘는 수준이 아닌가! 과연 이것을 인간이 알고 있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게, 대체······.” “흠, 아르페니까.” “응, 오빠니까.” 르세티는 그냥 대단하구나, 하고 입을 헤 벌릴 뿐이었지만 시페넌은 그렇게까지 멍청하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데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테르와 시에나는 지능의 여부를 떠나 아르페에게 불가능한 일은 세상에 없다고 믿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수긍했다. “후······ 됐다, 됐어.” 잠시 고민하던 시페넌이었으나, 결국 아르페의 말의 진위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아르페가 그에게 이런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이라곤 코털만큼도 없었으니까. 아르페의 능력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차라리 전부 다 믿는 쪽이 속이 편했다. 대신. “보상을 먼저 제시했으니 이젠 조건을 제시할 차례겠지, 아르페?” “역시 넌 똑똑해서 마음에 든다니까.” 아르페는 씩 웃으며 선언했다. “너희들이 얻는 던전 보상의 절반을 내놔.”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3 > “절반? 정말 그걸로 되겠어?” 아르페의 요구사항에 오히려 시페넌이 얼떨떨해했다. 던전의 정보와 몬스터의 수준까지 전부 알려주는데 절반이라면, 타인이 어떻게 판단하건 시페넌 기준으로는 후하다 못해 거저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르세티, 결정적으로 데이스의 스킬, 스펠 북에 장비, 포션 값을 생각하면 그렇게 남지도 않을걸? 돈은 저축보다는 너희의 생존과 강화에 쓴다고 생각해. 그러면 아마 나한테 줄 절반의 몫만 간신히 남을 거야.” “아르페······.”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페넌과 르세티, 그리고 혹시 이건 나한테도 좋은 일이 아닌가, 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데이스. 나중에 마왕을 상대할 때 자신이 고생하는 대신 놈들을 써먹으려 한다는 것도 모르고 기뻐하는 꼴이 아주 보기 좋다! 하고 오랜만에 사천왕스러운 사고를 하며 아르페가 덧붙였다. “그리고 만일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물건들이 던전에서 나오면 상인한테는 절대 팔지 말고 갖고 있다가 나한테 줘. 적어. 지혜의 관, 파괴의 서, 예지의 눈, 눈물의 샘, 황혼의 창······.” 시페넌은 정신없이 그가 말하는 아티팩트의 이름을 지도 한편에 적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만 들어도 어마무시한 이 고위 아티팩트들이 과연 던전에서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적혈의 파편까지······ 좋아, 끝.” 하지만 아르페는 망설이지도 않고 십여 개의 아티팩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받아 적는 시페넌의 표정이 더없이 떨떠름했다.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지만 엄청 귀한 녀석들이라는 것만은 알겠어. 그런데 정말 이런 것들이 저레벨대의 던전에서 나온다고?” “그러니까 탐색 스킬을 열심히 수련해둬. 그러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아니, 무조건 나올 테니까 이것들 다 찾을 때까지 디아스 바깥으로 나오지를 마.” 아르페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태연하다. 당연하지만 그 아티팩트들은 전생에 그 던전에서 나온 물건들이었다. 저렙의 던전에 어울리지 않는 터무니없는 가치의 아티팩트들. 애초에 아르페가 이들에게 던전 위치까지 알려주는 것도 전부 이 아티팩트들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직접 가자니 아르페와 메테르의 레벨이 너무 높고, 또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가기도 귀찮았으니까. 이럴 때 부릴 수 있는 다른 이가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나를 믿고 따르도록 하라.” “그 여유로운 자세가 심히 마음에는 안 든다만······ 좋아, 전부 다 파악했다. 우린 앞으로 이렇게 동선을 짜서 움직이면 된다 이거지.” “아르페······ 정말 네가 없었다면 나는, 꺅!” 르세티가 감격한 얼굴로 아르페의 손을 꼭 붙잡다가는 메테르와 시에나에 의해 내팽개쳐졌다. 시페넌은 아주 잘 논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전 호위기사를 째려보고는 지도를 소중히 자신의 품에 챙겨 넣었다. “아르페, 한 수 배웠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란 이렇게 하는 거구나.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좋아, 그러면 이제 서로 길을 찾아 가자고.” 아르페와 메테르, 시에나. 시페넌과 르세티, 데이스. 누가 봐도 용사 팀과 보조 팀으로 나뉜 그들은 굳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이 다시 만나려면 앞으로 족히 2년은 흘러야 하리라. “나는 강해져서 오겠어. 그땐 네 파티에 나를 들여 주겠지?” “그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아니, 나 싫어. 시페넌 싫어.” “어째서, 메테르!” “너 싫어!” 서로 만나기까지 힘들었지만 언젠가는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들은 해산했다. “아르페, 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던전을 빠져나와 산길을 빠른 속도로 걷던 중에 메테르가 아르페에게 물었다. “뭔데?” “우리가 만나러 가는 마도사 있잖아.” 마도사의 능력과 그 사람을 파티의 일원으로 확보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질리도록 얘기한 터, 아직까지도 일행을 늘리는 데에 거부감이 있는 것일까? 아르페는 고개를 갸웃하며 메테르를 돌아보았다. “마도사가 왜?” 메테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여자야?” “어, 응. 여자인데?” 설마 성별을 물어올 줄이야. 개인의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질문이지 않은가! 아르페는 어이없어하며 대꾸했으나, 그의 대답을 듣고 메테르는 더욱 더 샐쭉한 표정이 되었다. “아르페, 그러면 흑마법사를 시페넌 쪽으로 보낸 것도 흑마법사가 남자라서야?” “······에휴.” 역시 이 녀석은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구나. 아르페는 한숨을 내쉬며 메테르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 마침 시페넌의 파티에는 마도사가 없었고, 녀석은 나한테 약점을 잡혀있으니 시페넌과 함께 행동을 시키기에 적합했어. 놈이 남자라서 파티에서 빼낸 게 아니라고.” “이씨이······ 만약 그 사람이 어리고 예쁜 여자애였다면?”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시페넌 쪽으로 합류시켰을 거야. 이걸로 됐지?” “으으으으으음.” 메테르는 아르페의 대답에 만족을 못했는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면서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말로 해소하지 못한 감정을 스킨십으로 해소하려는 것이다. 그러자 시에나가 경쟁을 하듯 반대쪽에 달라붙었다. 그래, 이제 이 정도는 익숙하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일에 익숙해지며 느끼는이 떨떠름한 감정은 무엇일까, 아르페는 스스로를 관조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번엔 시에나가 그에게 물었다. “오빠, 그 마도사님은 어디에 있어?” “아······ 에이디아라고, 디아스보다 마도 연구가 활발한 나라가 있어.” “다른 나라에 있어!?” 새삼스럽게 경악하는 메테르.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이 꼬마 용사는 비록 그 몸에 지닌바 능력은 어마어마하지만, 능력에 비해 지식이나 경험, 인지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언제까지고 작은 산골 마을이나 어두컴컴한 던전에만 묶여있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이젠 좀 넓게, 좀 멀리 볼 때가 되었다. 마도사와 합류할 때쯤이면 그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바다 하나를 건너야 되니 제법 긴 여행이 될 거야. 물론 루트는 이미 다 잡아놨고······.” 아르페는 품에서 한 장의 지도를 더 꺼내었다. 기사들을 죽이고 얻은 왕국전도는 한 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 여길 보면 지도 끝부분의 도시가 보이지? 이곳이 바로 디아스로부터 타국으로 뻗어나가는 가장 큰 거점, 항구도시 프레이트야. 이곳에서 바다를 통해 에이디아로 건너갈 거고.” 프레이트까지의 거리만 해도 아르페와 메테르가 열두 살까지 살던 마을을 뛰쳐나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달한 거리의 대략 삼백 배 이상 가는 거리였다. 물론 용사 던전이다 마족화 저주다 해서 정작 그들이 여태까지 나아온 거리는 얼마 없었지만, 평생 산골에서 살아온 메테르에게는 차마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의 장거리 여행이 되리라. “와아아아, 멀다. 프레이트까지 그냥 걷기만 해도 세 달은 걸리겠다.” “당연하지만 마냥 걷기만 하지는 않을 거야. 배워야 할 것도 배우고, 사야할 것도사고, 잡아야 할 몬스터도 잡고. 가을과 겨울에는 바다를 못 건넌다는 점도 있어서, 일부러라도 길을 돌아서 갈 생각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가을과 겨울에는 바다를 못 건넌다는 부분에 태클을 걸어올 만도 하건만, 그건 신경도 안 쓰고 오직 몬스터라는 말에 꽂혀 메테르와 시에나가 눈빛을 맹렬하게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살육을 준비하는 그 얼굴은 도저히 열세 살, 열두 살 소녀가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그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고려하면 실로 적합한 마음가짐이기는 했다. “여기서부터 프레이트로 가는 길에 있는 던전은 일부러 시페넌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우리 여행자금도 확보하고 시에나의 레벨도 올려놔야 하니까.” “그렇게나 많은 던전을 알려줬는데 아직까지도 남은 게 있었단 말이야? 역시 아르페는······.” “그래그래, 나 대단해.” 프레이트로 향하는 길에 있는 던전의 숫자는 총 7개. 시페넌에게 알려준 것과 비슷한 부류의 작은 던전도 있지만, 그중 두 개는 한 번 들어가면 족히 3개월 정도는 시간낭비를 할 생각을 해야 하는 거대한 던전이었다. 물론 만물열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일 경우, 말이다. “대충 이 정도 던전을 거치고 나면 시에나의 레벨을 얼추 우리와 같이 던전에서 활약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끌어올릴 수 있을 거야. 물론 전투사제라는 특성 덕에 가능한 일이기는 한데.” “정말?” “당연하지. 이 녀석은 보통 녀석이 아니거든.” 시에나의 재능은 가히 천재적이다. 그야 마도계열의 재능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다 갖고 태어난 메테르와 마족 사천왕 시절에 지니고 있던 재능이 강화까지 된 채 용사로 환생한 아르페에 비하면 부족한 면이 있지만, 만약 이 둘이 없었더라면 시에나가 용사로 선정될 가능성조차 있었을 만큼 뛰어났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재료만 원활하게 공급될 경우 시에나의 성장속도는 터무니없이 빨라질 거라는 거지.” 과거 마왕은 마족들을 재료로 삼아 용사를 훌륭한 요리······ 전사로 만들어냈다. 이젠 아르페가 만물열람과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시에나를 훌륭한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만들어낼 때였다. 마왕의 지시를 따르며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니, 절반만성공적으로 따라 해도 시에나를 괴물로 탈바꿈시킬 수 있으리라! “오빠 말이라면 뭐든지 따를게! 오빠가 시키는 거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뭐든.” 시에나의 맹목적인 애정이며 행동이 꼭 메테르를 보는 것만 같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마침 메테르가 시에나에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이이이, 마음에 안 들어.” “난 언니도 좋아. 오빠가 더 좋지만!” “난 네가 싫어!” 그야 시에나의 경우 아르페 덕택에 목숨을 건져 새로운 종족으로 거듭나고 그에게 마나 교육까지 받았으니, 그를 절대적으로 여겨 따르는 것도 그렇게까지 납득 못할 일도 아니긴 하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할수록 더더욱 메테르의 태도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대체 과거 자신과 메테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너흰 앞으로 서로를 믿고 목숨을 맡겨야 하는 파티원인데 싸워서 되겠냐.” “아르페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싫은 마음을 없앨 수는 없는걸!” “나는 언니한테 내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어!” “나를 좋아해주니까 더 싫어. 마음 놓고 미워할 수도 없는걸!” 아, 이 정도라면 괜찮으려나. 그러고 보면 으르렁대는 메테르나 환하게 웃고 있는시에나나 결국 순해빠진 아이들이었다. 나이를 먹게 되면 그들의 감정도 보다 성숙해질 것이고, 행동거지 역시 마찬가지. 자신에게 향해오는 둘의 올곧은 감정의 폭주가 사실 그리 싫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계속 이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나는 오빠도 언니도 좋으니까 셋이서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데.” “나는 아르페랑만 사이좋게 지내고 싶단 말이야!” ‘지금 이 꼴을 보면 적어도 당분간은 진정될 것 같지 않다만······.’ 아르페는 속으로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발을 내뻗었다. 구성원에는 심히 불만이 남지만, 여하튼 지금부터가 진정한 용사 파티의 시작이었다! 본래 아르페와 메테르가 왕국의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실험에 대해 눈치 채지 못하거나 늦게 발견했더라면 일은 터무니없이 거대해져 시간과 고통과 눈물을 잡아먹는 초대형 퀘스트가 되었을 것이나, 마왕군에게는 애석하게도 아르페는 사태를 초스피드로 해결해버렸다. 마왕군이 한 3년 정도는 우려먹을 수 있는 초장기 프로젝트를 아르페가 단! 하루만에 끝내버린 것이다! 대공은 마족화 실험을 진행하기는커녕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병력의 태반 이상을 잃어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해졌고, 당연히 마족의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아르페는 단지 한 번 힘을 써 마왕군의 계략을 무너트린 셈이 되었다. 가뜩이나 정당하지 못하게 왕위를 차지한 대공을 밉게 여기던 다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몰아냈고, 대공은 나라 밖으로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새로운 왕으로는 전왕의 조카 하데인 백작이 선정되었으며 물론 그는 귀족들의 통제를 받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그래도 디아스 왕국의 혼란만은 어찌어찌 수그러들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걸린 세월이 딱 1년이었다. “후우, 이제 무역도 완전히 정상화되었나 본데. 빌어먹을, 그래서 더 일찍 오고 싶었던 건데.” “사람이 많아, 아르페! 평생 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아!” “오빠, 우리 이제 저 배 타는 거야?” 바로 그 1년 만에, 용사 파티는 항구도시 프레이트에 도달했다.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4 > 계획대로만 착착 진행되는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느냐만, 아르페 일행의 계획은 들어맞는 거라곤 동선 하나밖에 없을 만큼 확실하게 틀어졌다. 한숨과 함성과 호소로 가득한 여행이었다. 그래도 도보 여행 일주일간은 별 무리가 없었다. 미케나에게서 구매한 최고급 침낭은 종종 침낭 하나에 세 사람이 전부 들어가는 바람에 무척 좁게 느껴진다는 점만 빼면 무척 따뜻하고 아늑했으며, 메테르가 풀을 뽑고 아르페가 불을 붙여 시에나가 요리를 하는 분담 작업에 의해 식생활도 제법 훌륭하고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옷의 가짓수는 별로 없었으나 아르페의 마법으로 빨래만은 간단하게 할 수 있었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 아마 그들처럼 여행을 편하고 쉽게 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일주일 만에 엄청난 거리를 주파해 예정보다 15일이나 빠르게 첫 번째 던전에 진입한 후에 일어났다. 개머리의 짐승형 몬스터 놀이 등장하는 이 던전은 1층에서 5층까지, 레벨 30부터 레벨 50에 이르기까지의 다종다양한 놀들과 맞서야 하는 던전이었다. 시에나의 레벨은 28이며 기본적으로 레벨보다 높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종족이었기에, 아르페와 메테르가 그녀를 죽지만 않게 보호해주면 얼마든지 놀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것. 인간과 비슷한 체구에 머리도 제법 굴릴 줄 아는 놀들과 싸우며 시에나의 전투 경험도 다양하게 쌓고, 5층에 걸쳐 차근차근 높은 레벨의 몬스터가 나타나주는 만큼 시에나가 레벨을 올리기에도 수월하리라. 아르페는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던전에 진입하고 일주일, 시에나는 용맹무쌍하게 날뛰며 던전의 1층부터 5층에 이르기까지를 주파해 47레벨에 이르렀으니까. “어라, 아르페? 이 던전 5층짜리라고 하지 않았어?” 문제는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랬지.” ‘전생에는.’ 아르페의 말이라면 그 어떤 증거가 없어도 일단 믿고 보는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6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르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나는 비밀 계단을 노려보며 지긋지긋한 투로대꾸했다. “그건 나도 몰라······.” 이 던전도 과거 용사가 주파했던 던전이란 말이다! 그때는 분명 5층까지로 끝이 났고, 비록 드롭템은 별 볼일 없었지만 약했던 용사가 어느 정도 기본적인 무력을 갖추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분명히 아르페의 조사 기록에 나와 있었거늘. 제아무리 그 당시 시페넌의 도적 스킬이 허접했다고 해도 이렇게 뻔히 노출된 비밀 계단을 발견하지 못했을 줄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면 이것도 용사가 한 명 추가되었기에 신이 서비스를 더해준 것이란 말인가? 용사와 인간계에 대해 조사는 했지만 직접 모든 현장을 발로 뛰지는 못했던 아르페는 이쯤에서 항복했다.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찌 던전의 비밀을 놔두고 발을 뒤로 뺄 수 있겠는가? 자고로 용사는 아무리 수상한 장소라도 일단 들어가 보고, 아무리 수상한 상자라도 일단 열어보고, 아무리 수상한 함정이라도 일단 밟아보는 사이코패스인 것이다! 목숨이 여벌로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다들 어째서 그런 정신 나간 짓들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당장 아르페 일행도 그 비슷한 짓들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시에나, 지금부터는 너한테 조금 힘든 몬스터들이 나타날 수도 있어. 그러니 내가 물러나라고 하면 바로 물러서야 해.” 계단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시에나에게 당부하는 아르페. 그러나 시에나는 배틀 너클을 낀 두 주먹을 굳게 쥐며 밝게 웃어보였다. “괜찮아, 나 이제 강해졌어!” “이것도 전부 제 덕이네요!” 밝게 웃는 그녀 뒤로 돈주머니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짓는 미케나가 있었다. 그녀는기어이 사제의 치유 스펠과 신성격투 스펠을 구해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아르페는 흥,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휘 저어 그녀를 물렸다. “이제 겨우 기본을 갖췄을 뿐이야. 가능하면 전투사제 전용 무기술도 구해와 줬으면 좋겠고, 액티브 스킬도······.” “두 분 손님께서 익히실 스킬과 스펠 북도, 말이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는 미케나. “제가 용사의 서포트를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아무튼 기다리고 있어보세요. 뭐든 갑작스럽게 구하려거든 가격이 뛰는 법이거든요. 최대한 싸게, 빠르게, 많이 모으기 위해 저도 애쓰고 있답니다.” “그래, 그럼 아줌마만 믿고 우리는······.” 아르페는 던전의 6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돈 벌러 간다.” 아르페의 예상은 적중했다. 6층부터는 레벨 60을 넘기는 상위클래스의 놀이 출몰했다. 그럴듯한 갑주를 입고 철퇴까지 휘둘러대는 놀은, 아무래도 시에나가 정면으로 상대하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페는 그녀를 전진시키기로 결심했다. “네가 위험하다 판단되는 순간 내가 마나 스트링으로 놈들을 구속할 거야. 물론 그렇게 되면 네 공헌도가 낮아져서 경험치를 온전히 얻을 수는 없겠지만, 네가 마주하게 되는 위험도에 비해 얻는 보상도 터무니없이 미약해지겠지만······ 그래도 넌 이전보다 확실히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거야.” “오빠······.” 만약 죽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지금 시에나가 처한 환경은 무척이나 축복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보다 터무니없이 강한 적들과 마주하며 겪는 공포와 고통, 무력감은 감내해야겠지만, 그 끝에 그녀를 기다릴 과실은 무척 달콤하리라. “그건 나랑 아르페가 첫 던전에서 겪었던 거랑 비슷하네. 내가 많이 부족해서 아르페가 도와줬었는데.” “이젠 그때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르게 서포트할 수 있어.”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다루면 다룰수록 그것에 능숙해졌다. 그가 직접 손가락을 움직여 행하는 것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나 스트링이 최소 열 가닥. 그것들이 종횡무진 던전을 누비며 탐색과 견제와 공격과 방어를 병행하니, 아르페의 만물열람이 지배하는 공간 내에서 그의 뜻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빠.” 그리고 시에나의 표정은 이전과 같이 밝았다. “오빠가 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나는 할 수 있어!” “······그래.”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일은 지난 1년간 메테르와 함께 너무나 많이 겪었던 탓에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은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단순한 만용을 넘어 금기로까지 불렸던 사항 중 하나다. 더욱이 그 시련을 겪어야 하는 이는 용사도 아닌 시에나.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럼 어디 해보자.” “응!” 하지만 아르페는 시에나의 재능과 의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확신했기에 그대로 그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놀들은 아르페와 메테르의 기세를 파악해 잔뜩 쫄아 있다가도 시에나가 단독으로 앞에 나서자 기세를 높여 울부짖었고, 무리를 모아 그녀를 공격했다. [깨개갱!] [쿠확!] 그리고 그 무리의 3분의 2가량이 순식간에 메테르의 바스타드에 의해 죽어나갔다. 남은 놀들은 주춤하며 곧장 도망치려 했지만 아르페가 내뻗은 마나 스트링이 그것을 막았다. [구오오옹?] [우오오오오오오오!] 놈들은 도망칠 길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가로막히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추가 타격이 들어오지 않자 이내 다시 타겟을 시에나로 바꿔 덤벼들었다. 아르페가 설명했다. “놀들은 괜히 개대가리가 아냐. 그냥 겁나게 무식하다고 보면 돼.” “뇌도 안 남은 스켈레톤보다 더 무식한 것 같아.” 메테르의 입에서 나온 욕 중 최고 수위를 달리는 욕이었다. 그러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듯 기세를 높여 시에나에게 쇄도하는 놈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보다 정확한 묘사도 없었다. “크윽······ 할 수 있어!” 오직 그들을 맞아 싸우는 시에나만이 굳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주먹은 아직 약했고 자가치유능력은 부족했으나,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놀들을 맞서 눈을 부릅떴다. 그 시점에서 이미 합격점을 주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크오오오옹!] [아우우! 가르르르르르!]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철퇴를 휘둘러 오는 놀들, 놈들의 공격을 파악하고 빠르게 몸을 날려 피하며 자신의 주먹을 놈들의 복부에 꽂아 넣는 시에나. 비록 모든 철퇴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레벨 50도 되지 않는 녀석의 몸놀림으로는 무척 훌륭했다. “좋아, 됐다.” “응, 안 죽을 것 같아.” 시에나와 놀 무리 사이에 정상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아르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성장 플랜에 조금의 변경은 있겠지만, 보다 빠르게, 보다 강하게 그녀를 키워낼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 선 것도 이 즈음이었다. “흐아아아아아압!” 시에나가 강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놀의 안면에 깔끔하게 박힌 그녀의 주먹이 크리티컬 히트를 만들어냈다. 전세가 아주 약간이나마 그녀 쪽으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쿠웨에에에엑!] [쿠히!?] “······후.” 놀들은 자신보다 약해야 할 터인 인간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지극히 분노하며 날뛰었고······ 그것을 마주하는 시에나는 입가에 근사한 미소를 띠웠다. 시에나가 전투의 흐름과 기세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을 즈음. 시에나는 무사히 50레벨에 올라 세례의 수정구를 통해 전투사제로서의 상위 클래스를 획득했고, 그때부터는 그녀의 성장에 탄력이 붙었다.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이 나설 차례가 점차로 줄어들고 그만큼 시에나의 전투 공헌도가 높아졌다. 던전 6층을 샅샅이 훑어 모든 숨겨진 보상을 획득하고 몬스터를 말살했을 즈음에는 그녀의 레벨도 60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용사 던전보다는 쉬워서 다행이다, 아르페. 그치?” “거긴 생각만 해도 이 갈리니까 얘기하지 마.” “대체 오빠랑 언니는 어딜 들어갔다 나왔기에 그러는 거야······?” 던전은 그렇게 은근슬쩍 8층까지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한 점이라면 용사 육성 던전에서처럼 두 자리 수를 넘어가는 말도 안 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일까.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합!” 8층의 보스룸에서 레벨 75에 이르는 놀 치프틴을 1대1로 무사히 격파한 시에나는 놈이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던 슬레지 해머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타격부위가 유난히 거대하고 날카로운 흑철 망치는 아무리 봐도 레벨 75의 놀 따위가 들고 다닐 물건은 아니었던 터라, 아르페는 그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용사 파티의 운의 사기성을 실감했다. “어머나, 손님. 그 해머에 쓰인 금속 설마······.” “안 팔아.” “손님 정말 너무해!” 마침 타이밍 좋게도 미케나가 들고 나타난 신성둔기술을 익히는 것으로 시에나는격투술 뿐만 아니라 무기술에도 순조로이 입문하게 되었다. 비록 작은 체구의 여자애가 거대한 해머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무척 안쓰러워 보이기는 했으나 정작 그것을 양손으로 휘두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갈 것이다. “일주일 만에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던 던전에서 1달. 음, 완벽해. 완벽하게 엿 같은 상황이야.” “나 때문에······ 미안해, 오빠. 나 앞으로는 더 열심히 싸울게!” “아니, 너는 괜찮아. 오히려 지나치게 훌륭하게 해주고 있어. 상황이 엿 같은 건 오직 신 때문이야.” “그러면 내가 오빠를 위해 신을 죽일게!” 이 대사를 언젠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르페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메테르는 또 제멋대로 시에나에게 경쟁심을 불태웠고, 시에나는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그 후로 그들이 나아가는 모든 길이 그러했다. 두 번째의 던전은 다행히도 변화가 없었으나 세 번째 던전은 무려 14층까지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세 번째 던전과 네 번째 던전 사이에 거쳐야 하는 소도시에는 저주받은 노파가 있어 그녀를 치료하느라 시간을 소모해야 했고, 언데드로 구성된 다섯 번째 던전은 전투 사제인 시에나가 엉겁결에 비밀 공개 조건을 달성하는 바람에 무려 20층에 가깝게 이어지는 고행의 길을 열었다. 여섯 번째 던전과 일곱 번째 던전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땐 이미 시에나가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 다섯 사람 몫은 할 만큼 뛰어난 전투 사제로 성장한후였다. 어딘가의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모든 고난이 그녀의 해머에 박살나고, 그녀조차 감당치 못할 보스 몬스터는 아르페와 메테르에 의해 박살이 났다. 꼬마 전투 사제를 육성하기 위해 돌입한 던전에서 용사들이 성장해버릴 만큼 난이도가 뒤죽박죽이 되었으니 그들의 여행길은 혼돈이라는 한 마디로는 설명할 수가없을 지경이었다. “와아, 저게 바다구나! 정말 굉장해, 예뻐!” “나두 바다는 처음 봐, 언니. 와아아아.” 그런 고난 끝에 간신히 도달한 프레이트. 늦어도 초봄에는 도달할 예정이었던 항구도시에 일행이 발을 디딘 것은, 여름을 알리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올 때가 다 되어서였다. 그나마 가을에 이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르페는 바닷바람 때문에 습기가 차는 안구를 연신 닦아내며 일행에게 말했다. “그럼······ 일단 우리 좀 쉴까?” “응!” 프레이트에 입성하는 그 날. 메테르와 아르페의 레벨은 각각 191과 187, 시에나의 레벨은 159에 이르러 있었다. < Chapter 10. 용사 파티가 두 개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1 > 여관 주인장은 아르페 일행을 슥 훑어보고는 칫, 혀를 차며 말했다. “객실 하나, 하룻밤 5실버. 식비랑 목욕물은 별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 셋 모두 메테르의 고유능력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훌쩍 자란 덕에 ‘어린애들뿐이냐? 보호자는 어디에 있냐.’같은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었으나······. “뭐가 그렇게 비싸? 지금 이 숙소가 5실버를 받을 만큼 으리으리한 숙소로는 도저히 안 보이는데!” 이건 비싸도 너무 비싸지 않은가! 아무리 큰 도시라고 해도 저렴한 숙소 같은 곳이면 1실버, 많아야 2실버면 해결이 되는데! 그러나 아르페의 지당한 항의에 주인장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지금 프레이트 상황 어떤지 몰라? 디아스와 바다로 연결된 무수한 나라가 모두 참가하는 프레이트에서의 정기 경매가 중단된 지 3년만에 다시 열린다고. 디아스와타국의 상인들은 물론이고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거리가 꽉 찼는데 방 하나라도 남아있다는 점에 감사해야지.” “3년이나 중단되었었다고!?” 그 정도라면 그야 사람들이 몰릴 법도 하다. 아르페가 한숨을 쉬고 있자니 주인장이 때는 이때다 하고 더욱 생색을 냈다. “원래 더 비싼 값을 댈 사람한테 내어주려고 아끼고 있었던 방이야. 그런데 형씨도 그렇고 여자들도 그렇고, 여기보다 더 허름한 곳으로 가면 귀찮아질까 봐 내가 선심 쓴 거다.” 쓸데없는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로브를 뒤집어쓰고, 아티팩트로 되도록 평범한 쪽으로 외모를 고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외모를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특히나 메테르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미색이 더해져 그간 있었던 귀찮은 일을 이루 말하기가 이하생략. “아, 그래. 선심 썼다 이거지.” “당연하지. 농담이 아니야, 당장 나가서 다른 숙소를 알아보라고. 나만큼 싸게 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아르페는 이제야 주인장의 속내를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즉 그는 미녀(아직 미녀라는 말보단 미소녀라는 말이 어울렸지만)들을 양쪽에 끼고 다니는 아르페가 부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혓바닥을 길게 늘여, 그 미녀들에게 감사인사 한 마디라도 받아보려는 것. 다 늙은 주제에 제법 귀엽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 주인장만큼만 순진해도 세상은 살 만할 텐데. “그래, 5실버 준다 줘.” “식사는 1인당 30브론즈, 목욕물은 한 통에 1실버. 우리 가게 버터옥수수 먹어 봤냐, 아주 기가 막혀요 그냥.” “생전 처음 왔는데 어떻게 먹어 봤겠어. 그러니 오늘 한 번 먹어보지 뭐. 목욕물은 됐고······ 그래서.” 아르페는 5실버 90브론즈를 세어 내밀며 그에게 물었다. “경매 시작일은 언제야, 아저씨?” “바로 내일.”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그 때문에 숙소에 많은 값을 치러야 하기는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아르페에게는 찬스였다. 본디 항구도시 프레이트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경매는 항구도시의 특산물부터 시작해 근처의 던전이나 바다에서 얻는 전리품, 물을 건너 온 아티팩트까지 다종다양한 물건이 거래되는 보물 집합소! 경매의 특성상 물건의 가치를 완벽히 파악하고 참여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인데, 두 말할 것도 없이 아르페는 그의 눈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 어떤 물건이든 정확하게판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생에도 그는 곧잘 인간계의 경매에 참여해 인간들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보물들을 싹쓸이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것들이 모두 마왕의 품에 들어갔다는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이가 갈리지만, 이젠 아니다! 전부 인 마이 포켓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참여하게?” “3년만의 축제라는데 구경은 해봐야지 않겠어?” “그러면 아가씨들 간수 잘 해라. 돈이 모이는 곳에는 깡패들도 모이는 법이야. 그예쁜 아가씨들을 데리고 다니면, 시비가 걸리는 놈들로만 저 바다를 다 채울 수 있을 거다.” “이미 질리게 겪었으니 걱정 마셔.”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주인장에게서 키를 받아들었다. 메테르와 시에나는 언제나처럼 얌전히 그것을 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람들을 상대해 거래를 하는 것은 아르페에게 맡겨두는 것이 그들 파티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우와, 진짜 좁네.” 방에는 먼지가 쌓인 침대가 하나 있었고,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그는 우선 클리닝 마법으로 단 2초 만에 방을 새것으로 만들고, 침대 위에 침낭을 펼쳐 보다 푹신푹신하게 만들고, 다음으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사람 둘이 들어가고도 남을 거대한 나무통을 꺼내어 놓았다. 침대와 나무통 사이에 임시 커튼을 펼쳐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고, 마법으로 물과 불을 동시에 만들어내어 끓는 물을 통에 채워 넣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아늑한 목욕탕의 완성이었다. “아르페는 못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너희 먼저 씻어. 스스로도 모르고 있겠지만 너희 지금 엄청 더러워.” “같이 씻자!” 메테르가 활기차게 외쳤지만 아르페는 녀석들을 나무통이 있는 쪽으로 밀어 넣고는 커튼을 쳐버렸다. 메테르와 시에나의 투정이 시끄럽게 이어졌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젠 슬슬 가릴 것은 가려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더욱이 이 두 소녀는 레벨이 높은 탓인지, 전사 계열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탓인지 성장이 또래에 비해 지나치리만치 빨랐기에 아르페가 이하생략. “어디 그럼.” 두 소녀가 목욕을 하는 동안, 아르페는 언제 부서질까 걱정이 될 만큼 연약한 의자에 조심스럽게 등을 기대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는 탐색 스킬을 얹은 마나 스트링을 사방으로 뻗어냈다. 그것은 여관을 지나쳐 큰 길로, 큰 길을 벗어나 광장으로, 광장으로부터 도시 전체로 뻗어나갔다. 그렇다. 지금 그는 작은 여관방에서 도시 전체를 탐색하려 하고 있었다. 물론 1년에 달하는 시간동안 그들 파티는 아르페와 메테르보다는 시에나의 육성에 중점을 두었고, 무엇보다도 항구도시 프레이트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레벨을 많이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정말 질리도록 구사했고, 그 외 다른 마법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에도 집중했다. 파이어나 아쿠아 등등의 기초 생활마법부터 의외의 상황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하이퍼 러빙, 단언컨대 그의 주력 스펠로 거듭난 마나 스트링까지. 모든 스펠을 마나가 남아날 때마다 난사한 탓에 지금 그가 지닌 대부분의 스펠이 40을 돌파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마나 스트링은 무려 51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위력과 효율이 이전에 비할 바 없이 향상된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펠 레벨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아르페는 돈이 모일 때마다 던전상인 미케나를 통해 각종 클래스의 스펠 북을 구매해 익히는 것으로 마력 스탯을 높였고, 그 결과 187레벨에 이른 지금 아르페의 마력 스탯은 1,200에 근접해 있었다. 생전 아르페가 레벨 300이 되어갈 때쯤 마력 1,200을 돌파했으니, 지금 그의 마력은 단순히 레벨로는 가늠할 수 없는 영역에 이르러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본디 뛰어넘을 수 없어야 할 격의 차이를 뛰어넘게 해주는 마력, 그것이 아르페의 손 안에 있었던 것이다. 50레벨을 넘기는 스펠 레벨, 1,200에 달하는 방대한 마력. 이쯤 되면 이 정도 도시 하나 탐색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수십 줄기로 시작된 마나 스트링은 수백, 수천 줄기로 갈라져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덮고는, 마나 스트링의 관측 가능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정보를 완벽히 파악해 주인에게 전달했다. 그 무엇도 아르페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무엇도. “······어라?” 하지만 도시의 탐색을 완료한 아르페는 절대적인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방금, 이 도시에 있어선 안 될 것의 정보를 파악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럴 리가······ 여기에 있을 리가?’ 현실을 부정하며 만물열람의 능력을 강화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정보는 같았다. 아르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엎어질 뻔 했다. 직후, 커튼이 걷히고 두 소녀의 나신이 아르페의 눈앞에 드러났다. “아르페, 이제 씻어!” “너희는 일단 옷을 입어.” 아르페는 미리 대기시키고 있던 마나 스트링 한 가닥을 뻗어 매몰차게 다시 커튼을 쳤다. 그 반응속도가 가히 고블린이 독침을 쏘는 속도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는 커튼 뒤에서 메테르가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무시하며 그녀들에게 지시했다. “옷 다 챙겨 입고 나면, 너희 먼저 저녁 먹고 쉬어. 그놈의 버터옥수수가 어떤 맛인지 나중에 꼭 좀 알려주고.” “오빠는!?” 커튼 뒤에서 옷을 입고 있던 시에나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아르페는 이제 몸에붙어버린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알아볼 게 생겼어. 바로 방금.” “나두 같이!” “너흰 들켜.” 차라리 이곳에 있는 게 시페넌이었다면 동행했을지도 모르겠다. 녀석은 과거에도은밀행동 하나는 끝내주게 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메테르든 시에나든 조용히 행동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었다. 메테르는 용사의 권능으로 도적 스킬 ‘은밀한 발걸음’까지 익혔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아르페는 달랐다. [아르페] [레벨 ? 187] [잠행 Lv19] 전생에서도 주위에 워낙 다른 강한 놈들이 많아 조용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움직이는 재주를 익혀야 했던 아르페는 용사가 되어 모든 스킬 습득의 제한이 풀린 이제 와서야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혀 자랑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러니까 절대 따라오지 마.” “쳇.” 아르페는 일단 마나 스트링을 모두 거두고 여관을 나섰다. 무수한 인파 속으로 나아가며 아르페는 자연스레 잠행을 발동하여 그들 가운데에 녹아들었다. 그리곤 보랏빛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반지를 빼냈다. 각기 다른 색으로 물들어 있던 머리와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조금씩 평범하게 수정되어 있던 외모 또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물론 잠행을 발동하고 있었기에 그의 변화된 모습을 인식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왕권이 연달아 교체되면서 용사를 수색하려는 움직임도 필연적으로 잦아들었고,용사의 이름이나 외모 따윈 잊힌 지 오래. 사실 일정 순간 이후부터는 우리의 정체 은닉보다도, 독특한 외견을 감추기 위해 아티팩트를 사용했다는 쪽이 맞아.’ 물론 그 덕에 일어날 뻔한 분쟁을 제법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아티팩트를 꿰뚫어볼 수 있는 자와 조우하게 되었을 때는, 반대로 어째서 아티팩트로 자신을 감추고 있었는가에 대한 태클을 받을 우려가 있다. ‘미케나는 250레벨 이하의 상대에게는 절대로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지. 내가 아티팩트를 감정한 결과도 마찬가지였어.’ 그렇기에 반드시 지금은 아티팩트를 착용해제 해야 했다. 상대의 레벨은 250 이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른 척 하고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인식을 당하면 더 골치가 아파지기에, 아르페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그쪽의 상태를 파악해두기로 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관측만 한다면 아마 괜찮을······. “어머나.” “아.” 상념을 이어가며 발걸음을 내딛던 그때, 아르페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의 여성과 기적처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쳤다는 것은 즉 상대가 아르페의 잠행을 아주 우습게 파훼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아, 안녕. 이곳에는 혼자 왔니?” 아르페를 발견하곤 볼을 살짝 붉히며 다가오는 여성. 그녀는 붉은 생머리에 핏빛의 눈이 인상적인, 어지간한 남자보다도 큰 키와 길을 걷던 남자 백이면 백이 돌아볼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소유한 미녀였다. 그리고 아르페는 이 여자를 인간계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에트나 칼리파드이 미레카드] [마족] [레벨 ? 376] [고유능력 절대지배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감시하려던 상대한테 단박에 걸리다니, 이런 미친······.’ 아르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마왕군 사천왕 서열 2위와 조우한 순간이었다.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2 > 적염군단장 에트나의 두 눈은 아르페에게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이글거리는 시선을 마주하며 아르페는 속으로만 신에게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 했는데 도적 계열 능력도 없는 에트나한테 먼저 들키다니 이건 신이 저주를 걸었든 마왕이 축복을 내렸든 둘 중 하나임에 분명해.’ 지금 그녀는 마왕의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기보다는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참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프레이트를 찾은 것 같았다. 수하가 없다거나 제대로된 장비가 없다거나 하는 다른 많은 근거가 있지만, 결정적인 판단 근거는 단한 가지다. 마계 최고의 셰프가 벌써부터 이런 중간보스를 내보낼 리가 없지 않겠는가! ‘역시 무시할 걸 그랬나? 아냐, 내가 이 도시에 머무르는 한 결국은 그녀가 먼저 나를 찾았을 거야.’ 물론 고위사제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 저쪽에서 먼저 아르페가 용사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아르페의 방대한 마력을 모두 감출 수는 없는 법. 마족의 정점에 가까운 그녀라면 당연히 아르페가 얼마나 뛰어난 마도의 재능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했을 터이다. 실로 짜증나지만 둘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어떻게 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궁리해야 한다, 궁리해야······.’ “도, 동행 없으면 나랑 같이 차라도 한 잔 하지 않을래?” “······엥?”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아르페가 제정신을 되찾은 것은 그때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투른 저 권유 대사로 보나 그녀의 표정으로 보나, 지금 그녀는 아르페의 마력량이아니라 아르페 자체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애인이랑 같이 왔는데.” 아르페는 메테르, 시에나와 함께하며 본능적으로 숙달된 구애 거부 스킬을 발동하여 바로 그녀의 제안을 쳐내고는 뒤늦게 핫, 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이미 에트나의 표정은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래······? 정말 요즘 여자들 눈 좋구나. 이렇게 어릴 때부터 벌써 침을 발라놓다니······.” ‘일단 내가 어린 나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구나······.’ 마왕군 사천왕이 아니라 동네 술집 점원A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인간 친화도. 하긴 전생에서도 그녀는 호감을 받기 쉬운 매력적인 외모나 사교성 탓에, 중책을 맡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인간계로 정찰을 나가는 역할을 겸하고는 했었다. ‘전생을 떠올리기 시작하니까 끝도 없네. 에트나는 전생이 아니라 현생에 집중하고 싶은 나에겐 당장 피해야 할 녀석 넘버원이기는 한데······ 빌어먹을.’ “그래도 잠깐은.” “응?” 아르페는 풀이 죽어 돌아서는 에트나의 처량한 뒷모습을 도저히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기보다는, 현재 마왕군의 정보를 캐낼 좋은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 없었기에 그녀를 붙잡았다. “차 한 잔 정도라면 괜찮아. 프레이트는 처음이라서 뭐가 됐든 좀 알려주면 좋겠는데.” “······아.” 실망 가득했던 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어쩜 저렇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에트나는 아르페가 이미 자신을 반쯤 바보로 여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얼마든지 맡겨줘. 내가 모두 알려줄게!” 전직, 현직 마왕군 사천왕과 전직 사천왕, 현직 용사라는 기묘한 커플의 데이트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적당히 거리를 거닐며 기본적인 탐색전을 펼친 남녀는 곧 근처의 주점으로 향했다. 술을 비롯해 다양한 음료를 취급하며, 적당히 사람들 틈에 파묻혀 얘기를 나누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다. “프레이트에서 정기적으로 일어나던 경매를 다른 사람들은 프레이트 페스티벌이라고 불러. 모여드는 사람의 규모나, 그곳에만 나타나는 각종 특산물과 아티팩트는 다른 사람들까지 열광하도록 만들거든.” “그러면 너도 거기 참여하러 온 거야?” “응. 아, 난 에트나라고 부르면 돼.” 아무렇지도 않게 마족으로서의 본명을 말하는 에트나. 아르페는 세상 마족이 다 이렇게 순진했으면 마왕은 진즉 소멸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난 아르페야.” 하지만 본명을 말해주기는 아르페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에서 아르페가 그렇게드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첫째 이유였고, 괜히 가명을 말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땐 더 큰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둘째 이유였다. “어쩜, 이름까지 귀여워라.” “계속 얘기해줘. 실은 아까 숙소 주인한테 3년만이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디아스가 요 근래 시끄러웠던 건 알고 있지? 그게 얼추 정리되면서 프레이트 페스티벌이 재개된 거거든. 단지 디아스의 왕이 바뀌었을 뿐이지만 인간들은 그 왕을 따라 폭주하며 무수한 피를 흘렸어. 자연히 그 과정에서······.” 무수한 새로운 전설이 생겨나고, 저주가 퍼지고, 아티팩트는 강화되었다. 다른 이의 기록을 먹고 성장하는 것은 인간이든 마족이든 몬스터이든, 그리고 아티팩트이든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아티팩트가 모두 이번 경매에 모여든다 이거지.” “바로 그거야. 사람들의 피로 재탄생한 물건들을 보려, 그 참상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더없이 크게 열광하며 모여드는 거야······.” 페스티벌이라,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실로 훌륭한 네이밍이 아닐 수 없다. 아르페와 에트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쓴웃음을 교환했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한 잔 할까?”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미성년인지라.” “그럼 나만 마셔야지. 여기 맥주 한 잔!” 만으로 열네 살인 아르페의 외견은 확실히 나이에 맞지 않게 제법 성숙했으나 아직 자신만만하게 술을 주문하기에는 또 앳된 면이 있었다. 아르페가 부들부들 떠는 가운데 에트나는 주문해 나온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려······ 다가는. “으으엑, 미지근해라.” 질색을 하며 그것을 테이블 위로 돌려놓았다. 그것은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아르페의 전생의 추억을 또 하나 불러일으키는 행동이었다. ‘불사조의 막내딸, 불지옥의 축복을 받은 자, 적염의 정화. 모든 불꽃이 그녀에게 복종했지만, 그렇기에 세상의 냉기만은 그녀를 거절했지.’ 어지간히 차가운 것을 쥐어도 금세 뜨겁게 달아오르니 그녀는 사시사철 차가운 것을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었고, 그것이 아르페가 첫 겨울의 얼음으로 빚어진 조각상을 찾아 그녀에게 선물한 후로는 조금 나아졌었다. 물론 아르페가 그녀를 좋아해서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천왕 중 한 명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두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지만, 그 효과가 조금 세게 먹힌 것이 탈이었다. 아르페가 두고두고 후회한 일 중 하나다. 어쩌면 그녀는 그때 아르페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자신을 향한 그녀의 애정공세가 더욱 격렬해졌으니······ 그리고 ‘그 자’의 질투도 더욱 심해졌었지. “맥주가 너무 미지근해!” “그럴 리가, 우리 맥주가 얼마나 시원한데요!” 그녀가 투덜거리자 괜히 지나가던 여점원만 화를 냈다. 그때 아르페가 픽 웃으며 그녀의 잔에 손을 얹었다. 아주 미약한 빛이 반짝이고, 다음 순간 잔에 살얼음이 끼었다. “어······?” “다 마실 때까지는 버텨줄 거야.” “그럴 리가······ 어?” 에트나는 잔을 입에 대더니 놀라워했다. 그녀의 뜨거운 마력은 여전하여 금세 잔속의 내용물을 달구려 들었으나, 그와 동시에 잔이 발하는 냉기가 그 마력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화기와 냉기가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 그 중간의 술은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며 에트나의 목구멍 안으로 흘러 내려가는 것이다. “어머나······.” 에트나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알코올의 자극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맥주에 대해 더 따지고 들려는 종업원을 손짓으로 물리치고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아르페에게 얼굴을 슥 들이밀며 아까보단 조금 단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자신을 숨기지 않는구나?” “숨통을 조여올 만큼 강렬한 마력을 느낀 덕에 네가 나보다 더 높은 수준의 마법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지. 네겐 내가 더욱 빤히 보일 텐데, 너한테 내 수준을 숨겨서 뭣하겠어.”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라 에트나의 레벨이 376이라는 것도, 적염군단장이라는 것도 그녀가 마왕군 사천왕의 일인이라는 것까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르페는 어디까지나 나이에 비해 지극히 뛰어나지만 그녀보다는 약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마도사를 연기해야 했고,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사천왕 최약체의 비기 혼신의 연기 스킬이 발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에트나가 내게 먼저 접근한 것도 그래서잖아? 내 마력을 보고 다가온 거지?” “어? 아, 어, 응? 응!” 기껏 그녀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주었는데도 당황하는 에트나. 그 모습이 나이에도 안 어울리게 귀엽기는 하지만 연상취향이 아닌 아르페에게는 통하지않는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레모네이드를 쪽 빨아 마시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래, 네 마력이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뛰어나서! 그래서 깜짝 놀랐어. 응!” “그 모습을 보니 나한테 해코지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네.” “해코지라니 그럴 리가! 전혀!” 에트나는 깜짝 놀라며 양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전생에서도 마왕의 명이 있지 않는 한 인간의 목숨을 앗지 않으려 했던 그녀다. 그녀가 혹여나 아르페에게 적의를 품었을 확률은 없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물어본 것은 바로 다음 공격을 위해 상대의 틈을 드러내려는 전략이다! “이해해줘. 에트나처럼 강하고 예쁜 누나가 갑자기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경계를 하지 말라면 무리잖아.” 그 말을 듣는 에트나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다, 그녀는 아부에 약한 것이다! 그녀는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신경 안 쓰니까 괜찮아, 응. 나는 그냥 아르페가 멋······ 호감이 가서! 물론나이와 실력이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많은 재능이 있다고 해도 사선을한두 번 넘는 정도로는 달성할 수 없는 경지에 벌써 이르러 있는 게 참 대단해 보였거든······.” “에트나도 어려 보이는데.” “히······.” 여기서 자연스럽게 아르페의 2차 아부가 작렬했다. 결과는 볼 것도 없는 크리티컬 히트였다. “그래? 내가 어려 보이는구나. 음, 으음.” 일정 이상 나이를 먹는 순간부터 인간이든 마족이든 여성의 최대 목표는 어려 보인다는 말을 듣는 것! 효과는 굉장했다! 약점을 공략당한 에트나의 빈틈이 훤히 드러났다! 그러나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에트나를 보는 아르페의 속마음만은 여전히 차가웠다. 어떻게든 그녀에게 덜 의심을 사면서 순조로이 호감을 사고, 그로 인해 마왕군의 정보를 직간접적으로 얻어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럼 정말 호기심으로 말을 걸었을 뿐이라는 거네?” “그럼, 물론이지. ······응.” ······어라? 마냥 웃기만 하던 에트나의 얼굴에 한 점 구름이 낀 것 같이 보였던 것은 아르페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에트나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최대한 오래 그녀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좋아, 믿어볼게. 그럼 이제 프레이트에서 더 볼 만한 다른 것들도 알려줘.” “응, 그래야지. ······그런데, 내가 술 더 시키면 아까 그 차갑게 하는 마법 더 걸어줄 수 있어?” “물론.” “고마워! 여기 하이볼 한 잔!” 아르페의 단언에 에트나의 얼굴에는 보름달 같은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간단한 일에 진심으로 기뻐해주다니, 정말이지 그녀만큼 마왕군 사천왕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도 없으리라. 그는 속으로만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의 입이 가볍게 열렸다. “모름지기 항구도시라고 하면 말이지······.” 그로부터 대략 두어 시간 정도가 흘렀다. 프레이트로 시작된 얘기는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아르페와 에트나 모두가 서로의 직접적인 신상을 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이나 과거의 추억 같은 흔해빠진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아르페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현재 마왕군의 상황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일단 마왕군에 또 다른 아르페는 없어. 그건 확실해.’ 이름이 다를 뿐이고 존재는 같은 아르페도, 이름이 같을 뿐이고 존재는 다른 아르페도 없다. 마왕군 내에, 그리고 아마도 마계를 통틀어 전생의 아르페와 비슷한 위치를 부여받은 비슷한 능력의 존재는 없었다. 그리고 또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에트나의 서열이 전생과는 달리 사천왕 중 3위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상사라며 들먹이는 세 명 중 두 명의 평소 언행과 성격이 영락없는마왕과 전생의 서열 1위 ‘그 자’였으니, 남은 한 명은 사천왕 중 다른 한 명임에 분명했던 것! ‘나의 존재는 완벽히 사라졌지만, 그 대신에 새로이 사천왕에 편입된 이가 있었던걸까. 누굴까? 누가 있어 에트나보다 더욱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걸까? 정말 전생대로 굴러가는 일이 없구나.’ 물론 그것에 대해 자세히 캐물을 수는 없다. 네가 마족이고 마왕군 사천왕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며 폭로하는 꼴이었으니까. 대신 아르페는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에트나 네가 그렇게나 강한데 그보다 더 높은 사람들이 있다고? 대체 어느 나라의 마탑인지는 몰라도 관심이 가는데.” “평범한 곳이 아냐. 네 말대로 나는 강하지만, 이런 나보다도 강한 자들이 있는걸. ······그곳은 평범한 사람의 마음으로는 견딜 만한 곳이 아냐.” 에트나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말을 듣는 아르페의 입장에서는 한숨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부터 누누이 느껴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쩜 이렇게 허술한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마계라는 답이 도출되어 버리는 것을. 아르페는 에트나의 말을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포커스를 그녀에게 맞추었다. 아마도 마왕에게 지배된 순간부터, 전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품고 있었을 그녀의 고뇌가 지금 아르페의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만물열람 때문이 아니다. 전생에서 아르페 또한 그녀와 같은 고뇌를 품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어떻게든 어린 아이인 척 하려던 것도 때려치우고 제법 진심을 담아 말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특별했던 이는 별로 없어. 단지 평범했던 마음이 환경 탓에 깎이고 깎여, 끝내 다른 사람의 눈에는 특별해보이도록 변했을 뿐이야. 타인은 그것을 특별하다 하겠지······. 사실 그건 지독하리만치 아프고 슬픈 일일 뿐인데.” “어머나.” 그 말을 들은 에트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더니 이내 쿡쿡 웃어버렸다.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그녀의 표정에, 아르페는 방금 자신이 아주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전생에서 그녀에게 얼음 조각상을 선물했던 그 순간 이상으로. “넌 내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하늘이 내려준 천사였구나. 어쩔까, 고민되네. 이대로 보쌈해서 그곳으로 데려가버릴까.” “참아줘. 애인이 울 거야.” “······응, 참아야지. 대신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땐 정말 못 참을지도 몰라.” 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씬한 몸에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을 만큼거대한 가슴이 육감적으로 출렁여 주위 남자의 시선을 잡아당겼다. 물론 아르페는 동요하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았다. “아르페, 기껏 프레이트에 대해 설명해놓고 미안한데.” “으, 응?” “가능한 한 빠르게, 이 도시에서 떠나도록 해. 그 소중한 애인이랑 같이 말이야.” “뭐?” “그럼 안녕.” 한 줌의 미련과 두 스푼의 기대감이 담긴 그녀의 마지막 인사. 아르페는 그녀의 심중에 남은 말이 있음을 알았으나, 에트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마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을 테니 찾으려면 아르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지만 그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들을 만한 것은 전부 들었으니까. ‘도시를 떠나라고? 그럼 에트나는 이곳에 그냥 관광 목적으로 온 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럴 리가, 마왕이 그녀를 벌써 부릴 리도 없을뿐더러 지금 이 도시에는 이상한 물건도 사람도 없는데, 그렇다는 건 당장 내일 들어오는 배나 유입되는 이들 중에······.’ 그러나 아르페의 사고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느라 만물열람을 제대로 발동하지 못하고 있었던 탓에, 그에게 은밀하게 다가온 두 사람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페!” “오빠, 혼자 어디 갔었어어.” ······이 녀석들, 은밀행동을 못 하는 건 전부 다 연기였던 것임에 분명했다. 아르페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혼자서 분위기도 못 잡냐?” “그러면 건너편 자리의 잔은 뭐야? 아, 살짝 달콤한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 냄새도 나! 여자, 여자구나!” “와, 언니 대단해!” 메테르의 예리한 지적. 이럴 때 보면 이 녀석은 머리가 나쁘기는커녕 명탐정의 자질마저 보인다. 아르페는 메테르에게 붙잡혀 추궁을 당하며 멍하니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물론, 프레이트를 벗어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그의 무대였다.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3 > 아르페가 죽었다. 도적의 칼에 찔려 완벽한 생의 끝을 맞이했다. 도적은 칫, 한숨을 내쉬며 단검을 회수했다. 용사는 그 모습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는, 힘이 다 빠져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시페넌······ 어째서.” “이 남자는 결코 우리 편이 되어줄 마음이 없었다. 적이야, 적은 죽여야 해. 망설이다간 네가 위험해진단 말이야.” “아니,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그는 나를······.” 그러나 그녀가 말을 이어가려던 바로 그 순간 주위의 마나가 모두 불로 화해 끓어올랐다. 이미 적의 접근을 감지하고 있던 마도사가 빠르게 스태프를 내밀며 방어 주문을 영창했지만 적의 마나는 그녀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웃돌고 있었고, 결국용사 파티의 전원이 화상을 입었다. 워리어가 터프하게 포션을 부수어 흩뿌려 일행을 치유했다. “용서 못해.” 절절히 끓어오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성벽 위에 울려 퍼졌다. “네놈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어.” “사, 사천왕.” “불의 마녀 에트나!? 정말로 그 자가 불렀단 말인가!” “거봐, 메테르! 놈은 처음부터 인간의 편에 설 마음이 없었다고!” 워리어가 경악하고 도적이 이를 갈며 외쳤다. 그러나 용사는 이미 그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도적을 밀쳐내고 아르페의 시체를 끌어안는 마녀의 모습이었다. 마녀의 전신을 짙은 핏빛의 불꽃이 감싸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만은 증발시켜 없애지 못했다. “잘도, 감히 아르페를. 내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을 네깟 놈들이······!” “네 꼴이 우습다, 마녀! 네년들도 이미 가족과 연인이 있는 인간들의 목숨을 십만, 백만 단위로 끊어놓았을 텐데!” “이미 논리로 상대를 설득할 단계는 지났습니다. 모두 마력을 끌어올리세요. 적을 처단합니다.” 아르페의 죽음에 넋을 놓은 용사 대신 궁수가 침착하게 일행을 독려했다. 궁수의 활시위에 걸린 화살 위로 짙은 냉기가 어렸다. 마녀는 극강한 불의 힘을 지니고 있는 대신 그 약점 또한 사천왕 중 가장 또렷하다. 비록 방금 해치운 사천왕에 비해 아득히 강한 존재이기는 하나 그래도 분명 승산은 있었다. “레이제나, 도와주세요.” “응.” 마도사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영창했다. 비록 마녀에게 기세로 압도되기는 했으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벌써 포기하고 물러서기에는 마도사로서 쌓은 수양이 아까웠다. 그녀는 자연을 바꾸는 대신 자신을 먼저 얼음에 가깝게 바꾸어, 그것을 강화하여 화기에 저항하며 새로운 마법의 술식을 자아냈다. 용사 파티 전원에 겨울여왕의 가호가 부여되고 특히 궁수의 화살에 걸린 냉기가 그 힘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가소로워. 가소롭다고! 내 분노를 버텨내려거든 겨울여왕의 가호가 아니라 겨울여왕 본인을 데려와 보시지!” 아르페를 품에 끌어안은 채 마녀가 폭주를 일으켰다. 세상의 모든 불꽃이 그녀에게 복종하며 기세를 드높이고, 성벽보다 까마득히 아래 지상에서 돌연 마그마가 솟구치는가 싶더니 수백 미터에 가까운 거리를 금세 좁히며 용사 일행을 덮쳤다. 그녀 본인에게서 비롯된 열기는 성벽 전체로 퍼져나가, 일대를 삽시간에 마그마 지대로 만들어버려 일행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마계에 잔뜩 끼어있던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회색의 태양이 지상으로 똑바로 이어지는 불꽃의 기둥을 만들어냈다. 수십만에 가까운 숫자의 화염정령이 깔깔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큭, 저 괴물이······!” “우리가, 이겨.” 도적이 욕설을 내뱉고 그럼에도 마도사는 담담하게 선언한다. 그녀의 말이 언령이 되어 용사 파티 모두의 힘을 북돋웠다. “너무 뜨거워, 다가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 깡통 같은 갑옷을 벗으란 말이야, 이 바보야.” “이 갑옷은 못 벗는다. 그런 저주란 말이다.” “······누구야?” 용사 파티가 어떻게든 열기에 저항하며 마녀를 상대하기 위한 진형을 갖추던 중, 마녀가 조용히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녀 주위로 거대한 화염구가 수십, 수백, 수천, 수만 개 떠올라 용사 일행을 폭격하고 있었다. “아르페를 죽인 건 누구지?” “나다, 이 마녀야!” “······아니야.”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용사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흔들리던 눈빛이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고, 검을 쥔 손에는 굳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를 죽인 건 나야.” “······용사, 네가?” 마녀의 입가가 비틀렸다. 아르페를 잃고 더 이상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분노로 변질된 폭염이 그녀의 전신을 휘돌았다. “그래, 나도 너이길 바랐어. 내가 순수하게 미워할 수 있는 너이길.” 모든 화염정령이 용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세상의 절반이 그녀를 적대하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음에도 용사는 침착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 “네가 아르페의 뭐라고, 그의 유언을!” “그는 연상을 별로 안 좋아한대.” “뭐······?” 용사가 자그맣게 웃었다. 눈물을 머금은 미소였다. “머리 나쁘긴. 당신 차였다고.” “······후, 후흐.” 그러나 마녀, 에트나는 놀랍게도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어버렸다. 한순간이나마 화염정령의 분노가 잦아든 순간이었다. “아르페, 이 바보. 그런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데. 좀 다른 말을 남겨줄 것이지,바보같이······.” “너······.” 에트나는 한 손으로는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다른 한 손을 들었다. 모든 화염정령이 모여들어 그녀의 팔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르페의 마지막은 나였구나. 그는 마지막에 날 생각했구나. 그래, 나는 그것만으로 행복해. 그러니까······.” 불꽃이 폭발했다. 불사조의 딸이 선언했다. “너흰 고통 없이 보내주도록 할게. 한순간에.” “어디 해보시지!” 용사 역시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냈다. 그것으로 그녀는 완벽하게 전투 모드에 돌입해, 실로 용감하게 불꽃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 뒤를 워리어와 도적이 따랐다. 마도사가 스태프를 들어올리고, 궁수는 활에 하나의 화살을 더 재었다. 전투의 승리자는, 용사였다. “······.” “아.” 아르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코가 맞닿을 거리에 바로 메테르의 얼굴이 있었다. 메테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술을 오물거리며 조금씩 그와의 거리를 좁히다가는, 귀신같이 나타난 마나 스트링에 이마를 얻어맞고는 아파하며 움츠러들었다. “아르페 너무해!” “흥.” 아르페는 그녀를 무시하고 방금 자신이 꿈속에서 본 광경을 되새겼다. 아르페의 죽음 앞에 폭주하던 불꽃의 마녀 에트나와 서글프게 웃으면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고 용감하게 전진하던 용사 메테르의 모습을. 당연하지만 그의 기억에 없는 광경이었다. 있으면 그건 아르페가 언데드라는 얘기가 된다. ‘내가 죽은 후의 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아르페는 죽음 이후 곧장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인해 과거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에게 자신의 죽음 이후 일어난 일들의 기억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마 실로 오랜만에 에트나와 만나는 바람에 그녀의 성격이나 행동을 토대로 재구성된 꿈을 꾼 모양이지, 그는 그 정도로 납득하기로 했다. 그러나 헛된 꿈에 불과한 그 기록을 쉬이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계속, 꿈속에서의 에트나의 절규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단 하나 남은 희망이라······ 그 말을 당시 내게 직접 해주었더라면, 음, 그래. 어쩌면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나도 피폐해져 있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역시나 에트나와의 만남이 그에게 충격이기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말로는 싫다 싫다 해도, 아르페에게도 에트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쯤은 남아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감정이 있었다 해도 버려야지. 마왕 같은 상또라이가 있는 이상 지금 당장 그녀와 싸울 일은 없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오늘 본 꿈과 같은 상황과 마주하게 될 테니······.’ 입가에 절로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반대쪽 반신을 붙잡고 잠을 청하던 시에나가 아르페의 온기를 찾으며 칭얼대기에, 그녀에게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침대 밖으로 나왔다. 아르페와 똑같이 잠에서 일찍 깬 메테르가 그를 따라 침대에서일어나며 물었다. “아르페, 그럼 오늘은 뭐할 거야?” “원래 목표는 그냥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경매도 참여해보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좋게는 안 돌아갈 것 같다.” 어제 에트나의 말로 미루어보건대 아무래도 1년 전의 마족화 저주에 이은 두 번째 인간계 침공 무대는 바로 이곳 프레이트인 모양이다. 마왕군이란 놈들이 어쩜 이렇게 용사들이 가는 곳마다 일을 벌이는지는 모르겠다만 미리 알았다고 해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마왕군의 첫 번째 계획에서 가장 레벨이 높았던 놈이 레벨 100 정도였으니까, 그 사이 우리가 모르는 계획이 두어 개 정도 있었다고 해도 이번 계획의 총괄은 기껏해야 레벨 150 정도가 되겠지. 변수라면 마왕군 사천왕 에트나 정도인데, 아마 그녀는 계획을 알고는 있어도 거기에 참여는 안 할 확률이 높아. 아니, 100%지.’ 왜냐? 그것이 마왕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마왕이 그런 꼴통이 아니었더라면 인간계는 진즉 멸망했다. 무력으로도 마력으로도 인간계는 마계에 비벼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에트나는 내 마력을 어느 정도 판단하고 있었음에도 내게 도시를 벗어나라고 했지. 음, 내가 만약 나 자신을 제 3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라고 한다면 레벨 300 정도야.’ 물론 제대로 된 광역 마법도 없고, 레벨에 비해 마력만 무지하게 높은 아르페의 실제 실력은 레벨 300의 마도사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레벨 300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사천왕의 필수스킬 허장성세를 발동하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 ‘마계가 벌써부터 레벨 300의 마도사로 막아낼 수 없는 무력적 침공을 감행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 ‘지켜보는 이의 기분이 더러워지는 쪽의 침공이겠네.’ 아르페는 디아스에서 이루어졌던 마족화 실험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퀘스트 시작부터 완료까지 아르페 일행에게 위험한 순간이란 조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굉장히 짜증나고, 정신적으로 데미지가 깊었던 퀘스트였다. 아마 이번 일도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아무래도 마왕이 현생에서는 인간계 공략 노선을 제법 바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아르페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어주는 쪽으로, 말이다. “에잇.” “야.” 그러나 그때, 아르페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본 메테르가 그의 뺨을 찰흙처럼 만지작거려 얼굴을 풀어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르페. 무슨 일이 있든 내가 아르페를 지켜줄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위험할 거야.” “그럼 내가 그 사람들도 구할게!” 믿음직스럽기로는 인류제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호언장담에 마음이 퍽 풀리는 것도 사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너만 믿는다, 용사님.” “응, 나만 믿어!” 그래, 아르페와 메테르는 고유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용사다. 에트나 덕분에 이곳에서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게 되었으니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으리라. 걱정할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준비를 해놓는 쪽이 낫다. ‘좋아, 그러면 가장 먼저.’ 기분이 찝찝해지는 사건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저주. 사람의 정신을 돌아버리게 하는 것이든, 역병을 퍼트리는 것이든, 물을 상하게 하는 것이든 모두 저주의 마나에서 비롯된다. 마왕군의 계략이 어떤 것이든 반드시 저주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아르페에게는 저주를 물리치는 전가의 보도가 있었다. 바로 그들의 첫 번째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어주었던 탐욕의 흑요석. 그것은 만물열람과 조화되기만 하면 발동준비중인 저주이든 발동한 저주이든 사람의 몸속에 숨어들어간 저주이든 닥치는 대로 빼낼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르페의 강화에 의해 S랭크로 업그레이드된 그것에는 아직까지도 제법 여유 공간이 있을 터, 설령 부족하다고 해도 1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른 스펠들 못지않게 성장한 43레벨의 강화 스킬로 강화해주면 되리라! “자, 이것만 있으면 모든 저주는······ 어?”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외부는 자주 확인했어도 자신의 옷 내부까지는 그리 살피지않았던 아르페는, 그제야 자신의 로브 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없네?” “뭐가 없는데, 아르페? 망설임?” “그건 처음부터 없었어.” “연상취향?” “그것도 처음부터 없었다니까.” “그런데 왜 나한테 뽀뽀를 안 해주는 거야!” 귀찮게 구는 용사를 저 멀리 떼어놓은 후 아르페는 본격적으로 로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탐욕의 흑요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로브 안에서 나온 거라곤 50분의 1 정도 가공이 끝난 데마이트의 원석, 그리고 카오스 에그뿐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그것은 더 이상 카오스 에그가 아니었다. [탐식의 마수의 알] [혼돈 속에서 저주의 기물과 조화된 끝에 창조된,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마수의 알. 모든 부정적인 기운을 탐하고 있으니, 그것들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이다.] “······아.” “어라? 이건 나와 아르페의 사랑의······.” “이런 게 사랑의 결실이라면 그런 사랑은 필요 없어.” “너무해!” 아르페는 그제야 탐욕의 흑요석이 사라진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알에게 왜 흑요석을 먹었냐고 추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통신기를 들어올렸다. “어, 아줌마······ 연원이 사악한 아티팩트나 포션이나 소모품 가진 거 있어······?” 알에게 물을 수 없으니, 이 안에서 태어날 녀석에게 물을 수밖에.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4 > [그냥 근처의 애니웨어 상회 지부로 찾아가시면 된다니까 손님도 참······ 제 목소리가 듣고 싶으신 거면 그런 이상한 이유 대지 말고 연락하셔도 받아드릴 텐데. 1초당 1브론즈만 내시면 말이죠!] “우리 지금 프레이트야.” [어라······?] 미케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여기까지 보이는 것만 같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줌마, 지금 프레이트에 있지?” [헉, 그걸 어떻게······.] 당연하지만 어제 프레이트를 샅샅이 훑는 과정에서 그는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이를 파악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기록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아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셨죠!? 스토킹이라니 손님도 제법 하시는군요!] “헛소리 말고 물건 준비되는 대로 연락해줘.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앗, 잠깐만 손님······.] 아르페는 통신을 끊고 상쾌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테르가 이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보나마나 시답잖은 소리를 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무시해두기로 했다. “조금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응, 나 하나도 안 힘들어.” 그야 그렇겠지. 메테르의 체력을 바닥낼 수 있는 도시라면 아마 도시라는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을 터이다. “좋아, 그러면 이제 시에나 깨워서 내려가자.” “시에나는 아직 어리잖아? 힘든 일이니까 우리 둘이서 하고 시에나는 쉬도록 놔두자.” 메테르의 입에서 터무니없이 기특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아르페는 그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마에 알밤을 먹일 뿐이었다. “아얏.” “시에나 혼자 나서도 어지간한 일은 다 해결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르페는 정말 내 마음도 몰라주는 바보야!” 3인은 숙소에서 스프와 빵으로 끼니를 때운 후 시내로 나왔다. 이미 지리와 인물 정보는 어제 한순간의 탐색으로 아르페의 머리에 각인된 후. 지금부터는 거기에 추가될 사람과 물건의 정보를 수집하며 정확히 이 도시 어디에서 어떤 소동이 일어날 지를 파악해야 했다. “헉.” “저기 봐, 저 여자들.” “아직 어려 보이는데 터무니없군.” 주인장의 경고대로 셋이 함께 거리를 걷자 시선이 우수수 몰렸다. 적당히 여행자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푹 눌러썼음에도 그랬다. “오빠.” “힉, 왜 이렇게 다 보는 거야.” 시에나와 메테르가 긴장하며 아르페에게 달라붙었다. 이젠 아르페도 이 녀석들이정말 겁이 나서 그러는지 아니면 단지 그와의 스킨십을 위해 이러는 건지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메테르는 시에나를 견제한다고 하면서 아르페에게 하는 행동들이 하나하나 시에나에게 좋은 모범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누가 보면 둘이 자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아르페는······ 그리 좋은 시선은 받지 못하겠지. 아르페는 빨리 자신 외의 남자 파티원이 생기기를 절실히 바랐지만 과거 용사 파티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루기 힘든 꿈처럼 느껴졌다. 유일한 구원은 시페넌이지만 어째선지 메테르가 시페넌을 원수처럼 싫어했으니······. 그는 한숨을 쉬며 일단 녀석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아마 우리한테 접근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물론 그들 일행의 외모가 로브와 후드로도 감추기 힘든 수준인 것도 사실이었으나 행인들이 그들을 주목하는 이유가 비단 그 뿐만은 아니었다. 메테르의 허리춤에 걸린 두 자루의 검과 시에나의 등에 메인 슬레지 해머가 길거리 대부분의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하던가. 해머와 장검이라는 특대형 가시를 보고도 다가올 간 큰 남자는 없을 것이다. 설령 있거든 가시 맛을 보여주면 될 일이다. “어제 내가 대충 조사를 마쳤지만, 믿을 만한 정보원에 따르면 오늘쯤 일이 하나 생길 거야. 그걸 미연에 해치워버리고 경매를 즐기는 것이 제일 목표야.” “믿을 만한 정보원······.” 메테르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 어제의 그 시트러스 향수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르페는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달랬다. “다시 만날 때는 그 믿을 만한 정보원도 적일 확률이 높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적이라고 해서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건 아니잖아······?” “넌 그럴 시간도 없었을 텐데 잘도 그럴듯한 소설 얘기를 하는구나.” “나, 나는 언니가 한 명 늘어나도 괜찮아.” 이 녀석들의 교육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마나 스트링을 발현했다. 어제처럼 대대적인 탐색은 아니어도, 많지 않은 마나를 소모해 탐색의효율을 늘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영 소득이 없었다. “항구에 배가 많이 들어와.” “진짜 귀한 물건들은 오늘 들어올 거야. 해로뿐만이 아니라 육로로, 그리고 던전 상인들에 의한 공간이동 마법도.” 이처럼 큰 경매에 던전 상인들이 빠지면 섭섭하다. 던전에서 주로 거래하는 그들에게도 프레이트 페스티벌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시장. 던전에서 확보한 재화를 비싸게 팔고,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구비해둘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인 것이다. “미케나가 온 것도 그래서겠지. 지금쯤은 출품할 물건을 고르고 있지 않을까.” [손님?] 미케나 얘기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로부터 연락이 들어왔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아르페를 스토킹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살짝 긴장하며 통신기를 들어 그녀에게 대답했다. “왜?” [베테랑 상인인 제가 이러는 경우는 무척 드문 일이긴 한데······ 아무래도 상품을구하기가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아줌마 정말 베테랑 상인 맞아?” [정말이지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하지만······ 크으으.]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연원이 사악한 아티팩트와 포션, 이상하게 재고가 없어요. 본부에까지 연락해봤는데 없다고 해요. 이렇게 뒤가 구린 물건들은 수요가 한정되기에 마련인데 말이죠.시답잖은 것들도 전부 팔렸고, 굵직굵직한 것들은 오늘 경매에 출품되고······ 아, 제가 손님께 구매했던 데스나이트의 투구와 광화의 할버드도 오늘 출품된답니다!] “아줌마는 정말 도움이 되지 않는 전속 상인이로구나. 우리 그냥 계약 해지할까?” [그렇게나 사악한 아티팩트가 필요하시면 오늘 경매에서 구하시면 되잖아욧! 오늘 많이 나온다니까욧!] 아르페는 ‘그 경매가 시작될 즈음엔 이미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러지’, 라고는 굳이 추가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러면 탐욕의 흑요석 같은 물건은?” [······어머나, 이 타이밍에 손님이 그 물건을 찾으시니 이상하네요. 지금 애니웨어를 비롯한 던전 상회 모두 그 물건이 품절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르페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다시 말해줄래?” [모든 상회에서 탐욕의 흑요석이 품절이라구요. 순차적으로 동이 나서 바로 어제오전에 애니웨어에도 딱 두 개 남아있던 흑요석이 팔렸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어마어마한 웃돈을 주고 개당 1만 골드에 구매해 갔답니다.] 아르페는 생각했다. 괜히 다방면으로 대비해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 인간계 침공에 임하는 마왕군의 전략적인 핵심 포인트는저주였다! 그러면 그렇지, 이 빌어먹을! 더구나 저번에 어째서 실패했는가를 철저히 분석하고 그 방해 요인을 없애는 것부터가 아주 귀엽기 짝이 없다! ‘사악한 연원을 지닌 아티팩트의 수요부터가 이상한 수준이야. 그것과 연계되는 저주, 그렇다면 인간의 탐욕과 살육에 관계되는 저주인가.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아르페는 어제 에트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와 처음 대화를 나눈 주제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3년 만에 이 도시에서 열리는 프레이트 페스티벌에서, 그간 디아스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피와 눈물이 섞인 기록을 머금고 강화된 아티팩트들이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아르페 자신이 먼저 물어본 화제이기도 하고, 워낙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러워 그리 신경 쓰지 않았으나 생각해보면 에트나는 그 얘기를 하며 유독 한숨을 많이 쉬기도 했고 회한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쩌면 단순히 그간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번 작전을 알고 있기에 나오는 감정이었다면 어떨까. 그것이 그녀가 지나치게 인간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는 추론이 아닐까. 모든 저주받은, 울부짖는, 사악한 아티팩트가 모여드는 이번 페스티벌과, 마왕군이 준비한 저주······. ‘당장 생각나는 건 광화. 어쩌면 매료일 수도 있어. 둘 중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의감정이 이렇게나 끌어올라 있는 욕망의 도시에서 발동되었다간······.’ 찾아오는 것은 죽음과 광란의 축제가 될 것이다. 디아스의 경제 활성화로 흥분했던 사람들을 모두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하겠지. 정말이지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서 뭐라 태클을 걸 수도 없었다. 마왕군치고는 상당히 애썼다고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르페가 아직 사천왕의 지위에 있었더라면 말이다! [손님? 손님? 대답 좀 해주시라구욧! 저랑 직통으로 통신을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으셨으면서 아직까지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계시네요!] “아줌마, 좋은 정보 고마워.” [아줌마가 아니라 미케나라고 불러주세욧!] “미케나.” [어머나······.] 미케나의 목소리가 당장에 녹아내렸다. [그렇게 부르니 얼마나 좋아요.]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보너스로 나도 좋은 정보를 줄게.” [어쩜, 상도덕 준수까지.] “오늘 경매에 출품되는 물건, 다 캔슬해.” [제가 속았네요, 이 사기꾼!] “난 말해줬다.” 아르페는 통신을 끊었다. 이제 그녀가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든 그녀에게 달렸다. 지금 아르페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든 오늘일어날 참사를 막는 것이다. “에트나는 내게 최대한 빠르게 도시를 벗어나라고 했지.” 어쩌면 그것은 에트나 나름의 구원요청일지도 몰랐다. 자신은 도저히 마왕을 거스를 수 없으니, 높은 마력과 지능을 지닌 아르페가 그녀의 은밀한 신호를 눈치 채 마왕군의 계획을 막아주길 바란 것일지도. 어쩌면 과장된 해석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아르페가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원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려 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메테르, 시에나. 가자.” “합법적인 방식이 아니면 이제부턴 어떤 방식으로 하는 건데, 아르페?” 아르페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용사의 방식으로 해결할 거야.” “용사의 방식은 불법적인 방식이었어!?” “뭘 새삼스럽게.” 경악하며 대꾸하는 메테르와 꺄르르 웃는 시에나를 무시하며 아르페는 씩씩하게 발걸음을 놀렸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프레이트의 중앙 광장, 프레이트 페스티벌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곳. 오늘 오후, 무수한 사람과 아티팩트와 욕망이 모여드는, 마왕군의 계획의 중심이 되는 경매장이었다.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5 > “와아아, 사람 엄청 많다.” “경계 인원도 제법 되네. 아무래도 일을 수행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겠어.” 현 시점에서 프레이트의 모든 인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당연히 중앙 광장의 경매장에는 무시무시한 숫자의 인파가 쏠려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요리나 아이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을 파는 노점상도 있었는데, 시에나와 메테르는 노점상을 하나 지나칠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겉만 보면 다 큰 아가씨들인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아이였다. 어차피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던 아르페는 에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각자 원하는 거 하나씩만 먹어.” “야호! 사랑해, 아르페!” “오빠, 나 저 커다란 사탕 먹고 싶어!” 용사와 전투사제는 노점에서 산 사과 크기의 사탕을 깨물어먹으며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했다. 아르페는 혹여나 주위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녀들을 이끌고 경매장 근처로 다가갔다. “경매에는 아무나 참가할 수 있는 건가?” “최소 3천 골드를 제시하지 않으면 입장이 거절된다는 소문이 있더군.” “3천 골드라!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들이 나오기에 3천 골드씩이나 준비해야 한다는 건지 원!” 동그랗게 설치된 거대한 공개 경매장 주위로 워낙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어 이 안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아르페는 다 먹은 사탕 막대를 서로에게 휘두르며 장난치는 바보들을 돌아보며······. “에잇.” “으붑.” 메테르가 그의 입가에 들이댄 사탕을 일단 꽉 깨물었다. 깔끔하게 바스러지며 과일과 함께 그의 입 안에 들어찬 사탕이 견딜 수 없는 감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긴 한데, “이 사탕 저주 걸려 있네.” “응!?” 시에나와 메테르가 일시에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맛있어서 이미 두 개째의 사탕을 입에 각각 물고 있었는데도 이렇다 할 이상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아르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들에게 알밤을 한 방씩 먹이며 설명했다. “너는 용사고 너는 이블 리플렉터 중에서도 사제잖아. 우린 이미 존재만으로도 어지간한 저주에는 면역 상태야. 하지만 그렇다고 저주에 둔해져서는 안되겠지. 감각을 길러, 감각을.” “역시 오빠는 대단해······.” 저주의 정체는 아르페가 익히 예상했던 후보군 중 하나였던 광화. 저주가 깃든 음식을 얼마나 먹든 상관없이, 일정 시간 동안 사람의 몸 안에 잠복해 있다가 특정 조건이 달성되면 발동되는 종류의 저주였다. 물론 그 특정 조건을 달성시켜줄 물건들은 지금 열심히 다른 경로를 통해 이 경매장으로 찾아오고 있을 것이다. ‘이쪽 거리의 노점 대부분이 그런 물건들을 팔고 있어. 더구나 교묘하게 감추어져있어 어지간한 감정 스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고, 설령 알아차렸다고한들 쉬이 해제할 수도 없게끔 복잡하게 꼬인 저주······.’ 역시 사태는 대충 아르페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 도시에 퍼지고 있는 저주가 광화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 당장 눈을 돌리면 먹을 것을 통해, 음료수로, 공기 중으로 퍼지고 있는 온갖 감정 증폭과 몬스터화, 쇠약의 저주가 만물열람에 포착되었다. 이놈들, 아예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말아먹을 생각이다. 이 규모를 보건대 아무래도왕권이 교체된 시점에서부터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놈들이 대형 이벤트를 준비하니 기가 막히게 그곳에 용사 일행이 도착했다는 얘기인가! 빌어먹을! ‘하지만 그 덕에 더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부정할 수는 없겠는걸.’ 아르페는 녀석들이 사탕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는 지시했다. “너희는 지금부터 이 경매장을 파괴해야 돼. 정말 광화의 저주라도 발동한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도록 해.” “······응?” 시에나와 메테르의 눈이 똑같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아르페는 한 마디 틀리지 않고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그들이 잘못 듣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메테르가 당황하며 외쳤다. “그건 범죄야!” “그리고 실로 용사에게 어울리는 일이지.” “대체 아르페한테 용사는 어떤 이미지인 거야!?” 아르페는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티팩트로 너희의 외모를 조금 더 뚜렷하게 바꿔. 그리고 서로 싸우는 척하면서 경매장을 완전히 아작을 내버려. 하지만 일부러 그랬다는 인상은 주지 말고, 경매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해. 어때, 참 쉽지?” “······.” “······으, 응.” 그의 황당한 요구에 메테르는 말문을 잃고 시에나만이 간신히 대답했다. 아르페가 설명을 이었다. “지금 이 도시에는 전력으로 날뛰는 너희를 말릴 수 있을 만한 능력자가 드물 테니 아마 한참은 그렇게 난동을 피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면 사람들의 신경은 너희 쪽으로 쏠릴 테고, 경매장이 완전히 부수어지고 나면 나도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지. 일을 마치고 나면 내가 적당한 사인을 줄 테니까, 그때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붙잡히지 말고 빠져나오도록 해.” “하지만 아르페, 경매장을 부순다고 경매가 중단되지는 않잖아.” “당연하지. 인력을 동원하면 경매 시작 시간까지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경매장을 우리가 부수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어?”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르페가 사악하게 웃었다. 그의 한 손에는 탄생을 기다리는 탐식의 마수가 잠든 알이 들려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저주를 감지하고 알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실로 애처로웠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사람들이 어마무시하게 모여든 중앙 광장. 그곳 한복판에서 잔뜩 분노한 (연기를하는) 메테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도둑고양이 녀어어어어어언!” 어째서 인트로가 그 따위인 건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끈질기게 내 남자한테 손을 대려 하다니 용서 못해!” “큭!” 메테르의 강렬한 발차기에 복부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시에나가 수십 미터를 붕 떠 날아가더니 경매장 벽에 부딪혔다. “꺄아아아악!” “사람, 사람이 날았다!” “피해!” 비행 각도를 기가 막히게 잡은 덕에 기적적으로 그녀 외에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경매장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나기에는 충분한 충격이었다. “죽어라아아아아아!” 그러나 시에나를 걱정한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녀가 몸을 추스르고 움직이기도 전에 메테르의 제2격이 들이닥쳤다.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단단히 쥔 메테르가 전신의 힘을 집중시켜 내지른 바스타드가 시에나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경매장 벽에 격돌, 강타의 힘을 고스란히 쏟아내 벽 한 쪽을 실로 간단하게 무너트렸다. “겨, 경매장이!” “쥐새끼 같은 게 피하기는!” ‘우리 메테르 말투가 언제 저렇게 험해진 거야!’ 연기겠지? 그동안 짬짬이 소설을 탐닉한 끝에 얻은 실감나는 연기력이겠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이 틈을 타 본심을 쏟아내는 건 아니라고 말해줘! “후, 언니는 참 겁쟁이라니까.” 도시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든 메테르를 대상으로 드디어 시에나가 반격을 개시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이 잔뜩 쫄아 물러나건 말건 등에 메인 슬레지 해머를 들어 땅을 쾅, 찍으며 피식 웃었다. “오빠가 나한테 넘어올까 봐 겁이 많이 나나 봐, 언니.” “너······!” “하지만 오빠가 연하취향인건 잘 알고 있겠지? 언니는 이미 끝났어, 오빠는 이제내 거야!” ‘너희 한 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 “주, 죽여버리겠어······!” 메테르가 기어이 버서크를 발동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무력이 별로 없는 인간들은 경매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도망치고 있었고, 경매장을 지키고 침입자를 격퇴해야 할 용병들과 상회 소속 무인들마저 겁에 질려 그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버, 버서크.” “광전사다.” “광전사가 치정 싸움을 벌인다! 물리적으로!” “이젠 끝났어! 이 도신 끝났어!” “크아아아아아아앙!” 메테르가 가속 능력을 발동해 미쳐버린 속도로 돌진했다! 시에나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피했고, 그녀 대신 애꿎은 경매장 벽이 바스타드에 가격당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언니도 자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구는 거잖아, 그렇지? 요즘 오빠가 언니보다 나한테 더 잘 웃어주는 것 같은데!” 드디어 시에나의 첫 공격! 뭔가를 파괴하는 데에는 정평이 나 있는 슬레지 해머가, 그녀의 파괴적인 마력의 영향을 받아 가뜩이나 큰 해머를 더욱 크게 키우고는 횡으로 휘둘러졌다! “흣!” 그러나 몸이 날래기로는 이미 인간계에서 별로 따라갈 이가 없는 메테르는 버서크로 눈이 돌아가 있는 상태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했고, 그녀 대신 애꿎은 경매장 이하생략! “이러다 경매장 다 죽겠다 이것들아!” “소리치지 마, 광전사는 타겟을 가리지 않는단 말이야!” “누, 누가 가서 상회 총수님을!” “던전 상인, 던전 상인들은 어디에 갔어!” “싸움 중재비 7천5백 골드입니다, 손님! 아, 아니다. 8천 골드! 8천5백 골드! 바, 바보 같은! 중재비 계산 불능이라고!?” “당신 누구야!” 그곳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지옥이 인세에 현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절규와 고함과 마나가 한 데 섞여 어우러져 주위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너만, 너만 없었으면 1년 내내 둘이 달라붙어 있을 수 있었는데!” “나만 갖겠다는 게 아냐, 언니. 조금은 나눠줄 수도 있잖아! 나도 원한단 말이야!” “안 돼······! 그는 내 거야! 누구한테도 못 줘!” 메테르와 시에나는 도저히 연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독기와 질척이는 감정이 가득 담긴 대사를 뱉어내며 제각기 바스타드와 해머를 열심히 휘둘러 매번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애꿎은 이하생략. 경매 관계자들은 전전긍긍하고, 무력과 마력을 겸비한 던전 상인들은 과연 자신들이라고 이 싸움을 중재할 수 있을까 망설였다. 그리고 아르페는 작전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정말로 메테르가 시에나를 죽여 버리기 전에 저 둘을 회수해서 튀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용서 못 해애애애애애애애!” “꺄아아아악!” 그러던 어느 순간 기어이 크리티컬 히트가 터졌다. 시에나를 걷어차 바닥에 쓰러트린 메테르가, 그녀의 슬레지 해머를 강탈해 그것에 자신의 마나를 잔뜩 부여하고는 그대로 내려친 것이다! 시에나는 이러다간 정말로 죽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바닥을 굴러 그곳을 빠져나왔고, 메테르의 망치 강타는 아주 훌륭하게 일대를 파괴해버렸다. 이미 그곳에는 경매장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허, 헉.” “저건 극소수의 광전사만이 익힌다는 비기 어스 브레이크······!” 그냥 강타 스킬이었다. ‘때가 왔으니 일단 일은 해야겠지······.’ 멀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르페는 더없이 우울한 기분으로 마법을 발동했다. 잠행의 능력을 부여한 마나 스트링으로 탐식의 마수의 알을 단단히 움켜쥐고, 모든 이가 메테르와 시에나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그 순간을 노려 몰래 그것을 옮겼다. 원래 경매장이 위치했던 중앙 광장의 중앙, 바로 방금 메테르의 필사적인 일격으로 깊은 구멍이 생긴 그곳! 그곳에 알을 확실하게 묻어버리고 그 위를 흙으로 단단히 덮었다. 그것으로 일이 완벽하게 끝났다. “다, 당장 멈춰! 프레이트의 여, 영주 메러드 백작의 이름으로 며, 며, 명한다!” 그때쯤엔 기어이 프레이트의 총 책임자까지 출두했다. 비록 귀족이라는 직함으로도 안심할 수가 없어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친 듯이 날뛰는 저 여자들을 말리려 잘도 본인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 아르페는 그에게 후한 평가를 주기로 했다. 본인은 별로 기뻐하지 않겠지만! “어, 불꽃······?” “아름다워라.” 그런데 영주가 직접적으로 나선 바로 그 순간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에 예쁜 불꽃이 피어났다. 물론 작전 성공을 알리는 아르페의 신호였다. “앗.” “아······.” 씩씩 숨을 몰아쉬던 메테르와 시에나는 그것을 보고 멈칫하더니, 제각기 칫, 혀를 찼다. “결착은 다른 곳에서 짓자.” “흥, 자리를 옮긴다고 언니가 이길 것 같아?” 끝까지 서로를 도발하며 그 자리를 떠나는 둘! 물론 여태까지 보여준 그녀들의 기세가 워낙에 흉흉했기에 아무도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던전 상인 가운데에는 메테르는 몰라도 시에나를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은 제법 있었을 터이지만 돈도 되지 않는일에 끼어들 수는 없었기에 가만히 그것을 방관했다. 그렇게 두 명의 범죄자는 두 발로 현장을 걸어나가는 데에 성공했다! “이게 대체, 대체 무슨 일이야······.” “운이 없었습니다, 영주님. 하필이면 그런 괴물들이 이곳에서 다툼을······.” “그깟 남자가 뭐라고!”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 둘한테 사랑받는 건가. 누군지 몰라도 부럽구만······.” “부럽긴, 제 명에 못살 것이 뻔한데.” “큼. 그······.” 아르페가 에헴, 헛기침을 하며 잠행을 풀고 영주 앞으로 나선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물론 스스로에게 아티팩트의 변장 기능을 적용한 채로 말이다. 당연히 사람들 모두가 그에게 주목했다. 아르페는 쪽팔려 죽을 것만 같았지만 어떻게든 입을 열어 말했다. “그게······ 내가 걔네 일행이거든.” “그 두 여자의 사랑을 받는!?” “어, 그게······.” 주목을 끌며 싸워준 건 고맙지만 하필이면 그런 주제로 싸우다니! 아르페는 한숨을 푹푹 쉬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 새하얀 마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행 때문에 중요한 장소가 무너졌으니, 이걸로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경매장을 복구하는 걸 도와주고 싶어서. 아, 물론 배상금도 지급할게.” “오오오오오!” 보기 드문 마도사의 등장에 영주는 환호했다. 더구나 그 무시무시한 일행과 달리 개념까지 탑재하고 있다니! 그러니 영주가 그를 거절할 리 있겠는가? 오히려 아르페가 경매장의 복구작업을 돕기만 하면 두 사람을 쫓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그를 반겼다. 그렇게 아르페는 경매장의 재건설 작업에 참여하여, 훌륭하게 그곳을 복원했다. 경매는 그 날 저녁에 예정대로 열리게 되었다.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6 > “아주 당당하게도 날뛰셨네요, 손님!” 던전 외의 환경에서 보는 것은 아주 오랜만인 애니웨어 상회의 중견상인 미케나가 자기 무릎에 서류철을 탁탁 내려치며 흥분해서 외쳤다. “어쩔 수가 없었어.” “어쩔 수 없기는 개뿔!” 그녀의 손에 착용된 인식저해 아티팩트가 그녀를 살짝 애매모호해 보이게 했지만아르페나 미케나나 서로를 아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이 경매는 일단 참가자들의 신분을 비밀로 처리하기 때문에 제각기 인식저해 아티팩트나 가면을 착용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포장일 뿐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경매의 특성상 신분을 대놓고 노출할 수 없기에 참가자 전원의 암묵적인 동의 아래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 것이다. 아르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물건들은 뺐냐?” “제 마음대로 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욧! ······그나마 제 명의로 나가려던 것들은미리 빼놨지만요.” 사기를 치느니 뭐니 해도 결국 순순히 아르페의 말을 듣는 것이 제법 귀여웠다. 아르페가 빙글빙글 웃자 미케나는 속이 터져 죽겠다는 듯 가슴팍을 탁탁 두드리다가는 이내 눈을 뾰족하게 뜨며 그에게 따졌다. “그러고 보니 손님께 필요하다면서요? 그럼 이제 헬름이랑 할버드, 구매해주실 거죠?” “아니? 이제 필요 없어.”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어쩌다가 이런 손님을 전속으로 둬서 내가!” 아르페는 너무 분해 앉은 자리에서 방방 뛰며 귀를 맹렬히 퍼덕거리는 미케나를 무시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물어가는 태양 덕에 간신히 고개를 내미는 달과, 주인에맞추어 모습을 바꾸어가는 구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주 훌륭한 전망이다. 자, 하지만 그로부터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것은 경매장의 중심이 되는 단은 물론이고 무대를 빙글빙글 감싸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다. “하.” 제아무리 그들이 아티팩트로 겉모습을 위장하고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다고 해도, 그들의 터질 듯한 욕망이며 광기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그 모두가 아르페의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주를 걸지 않아도 알아서불이 붙어 폭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전생에서의 아르페 곁에도 언제나 저런 놈들이 꼬였었다. 역겹고, 처량하다. “너는······ 아, 이런 풍경은 자주 봤겠네.” “그렇게 뻔뻔하게 화제를 돌리시다니······ 네에, 저야 아주 질리도록 보아왔지요. 저도 그들 중 한 명인걸요. 단지 지금은 아주 조금 더, 제 욕망을 잘 감출 수 있게 되었을 뿐이랍니다.” “솔직해서 좋네. 실은 나도 그래.” 지금 그들이 있는 자리는 경매에 참석하는 이들 중에서도 귀빈 급의 대우를 받는 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상석이다. 아르페는 경매장의 복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초대되었는데 어느 순간눈치 채고 보니 미케나가 자신의 옆에 앉아 있었다. 맨날 말로만 중견상인 행세를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쪽에서 지위가 높긴 한 모양이었다. “으으음?” 한참이나 아르페의 양옆이나 앞뒤자리를 살피더니, 미케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그러면 나머지 두 분은 그 뒤로······?” “어디로 갔는지 나도 몰라.” 거짓말이다. 알고 있다. 정말 그대로 바깥으로 뛰쳐나가서 사생결단을 내는 것이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도 모습을 감추고는 그대로 숙소로 귀환하여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들의 임무는 끝났다. 지금부터는 아르페의 무대다. ······뭐, 만약 필요하게 되면 그때 다시 부르면 되는 것이다. “후훗, 그러면 오늘밤은 제가 손님을 독차지할 수 있겠네요.” “그래, 퍽이나 좋은 데이트 장소다.” 미케나의 비즈니스 스마일에 아르페 역시 썩은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알겠다는 듯 쿡쿡 웃는 미케나 뒤로, 그들로부터 그리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는 한 명의 여자가 아르페의 눈에 들어왔다. 지극히 화려한 붉은 나비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미모를 도저히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그녀는······. “······빠드드득.” 분노로 풀충전된 에트나 칼리파드이 미레카드의 모습이었다. “힉.” 위험을 감수하며 충고까지 해줬는데도 아르페가 도시를 떠나기는커녕 뻔뻔히 가장 위험한 곳에 쳐들어와, 심지어는 여자까지 옆에 끼고 히히덕거리고 있으니 그야 화가 날 수밖에! “어, 위험한데. 죽을지도 몰라.” “갑자기 죽을병에라도 걸리셨나요, 손님?” “나 말고 아줌마가.” “제가 왜요!?” 아르페는 다급히 에트나로부터 시선을 돌렸으나 그녀의 시선이 한 점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곧 미케나까지 그 시선을 눈치 챘다. “정말 여자 꼬시는 재주 하나는 기가 막혀요······ 잘도 저런 어마어마한 미녀를.” “남들이 들으면 오해한다.” 물론 오해도 뭣도 아니라는 점이 가장 엿 같은 점이었다. 아니, 전생에서의 그녀가 아르페를 좋아했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지금 아르페는 제아무리 성숙해보인다 해도 고작 열네 살 꼬맹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못해도 수백 년을 살았다는 걸 뻔히 아는데 열네 살짜리 꼬맹이한테 꽂히다니 저 여자는 제정신이란 말인가! “경비병 아저씨들은 뭐하나, 저런 여자 안 잡아가고.” “그런데 저 분, 딱 봐도 엄청 강해 보이는데요. 혹시 손님보다 강하지 않나요?” “응, 내가 천 명 동시에 덤벼도 못 이겨.” “그 정도라면 경비병이 아니라 제국이 덤벼도 체포는 불가능하겠네요. ······어라?” 그 부분에서 미케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렇다는 건 혹시 저 여자, 마······.” “눈치 빠른 건 좋은데 입 밖에 내지는 마.” “맙소사, 그렇다면 혹시 오늘 이 경매에도 마아읍읍!” “조용히.” 누가 중견상인 아니랄까 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곤 경악하는 미케나. 아르페는 다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혹여 누가 듣기라도 하면 소란이 가속화될 뿐이었으니까! “으읍읍! 읍!” “조용히 할 거야?” “읍!” 미케나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에 손을 뗐더니, 그녀는 당장에 그의 팔을 붙잡으며 작게 외쳤다. “당장 도망쳐요, 손님!” “도망은 개뿔. 이미 퀘스트 진행 중이라 도망칠 수도 없어.” “보상도 없는 퀘스트 따위 내던지고 저랑 빨리 도망치자구요!” “보상이 왜 없어?” 아르페는 그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 말에 미케나의 표정은 멍해졌지만, 아르페는 지금 이 순간 이 경매장을 향해 모여드는 무수한 숫자의 사기, 악의, 저주로 가득한 아티팩트와 그것을 노리는 인간들, 마족들의 기운까지 모조리 잡아내며 실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것들 전부 다 내건데.” “네······?” 저게 다 아르페의 것이라면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아르페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설마 그가 무력으로 저것들을 강탈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없었던 미케나에게 문득, 아까 그가 벌인 만행이 떠올랐다. “손님······ 그러고 보니 아직 경매장을 부순 이유를 못 들었네요?” “부순 건 메테르랑 시에나지, 나는 모르는 일이야.” 아르페는 미케나의 의심에 찬 눈빛을 아주 가볍게 무시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콱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지만 지금은 그런 아르페를 설득해야 할 때였다. “저도 상인인 만큼 돈에 대한 집착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제 목숨이에요. 제아무리 손님이 뛰어난 재능에 마력에, 유니크 스펠까지 겸비하고 있다곤 해도 저런 마족을 상대론 무리니까 제발 저것들은 포기하고 도망을······.” “걱정하지 마. 넌 내가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멋진 대사를 친다고 해서 저 무서운 여자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구요!” 미케나와 아르페가 꽁냥거리는 와중에도 경매장에는 속속들이 참가자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디아스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상계의 큰손, 나아가 디아스와 외교 관계에 있는 각 나라의 귀족들과 상인들까지. 만약 이 경매장에 있는 이들이 몰살이라도 당한다면 인간계는 1년 전의 디아스 왕권 교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프레이트 페스티벌이 두 번 다시 개최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주인님, 이쪽으로.” “각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흠······.” “기대되는군 그래.” 물론 그들도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레벨 100대 중후반에 이르는 호위 병력과 함께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에게도 빠짐없이 저주의 인자가 잠복하고 있어 트리거가 당겨지는 그순간부로 마왕군의 좋은 말이 되어 주리라는 것이다. 이 자리의 그 누구에게도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와 아르페가 ‘이 페스티벌은 무효요!’하고 나선다고 해서 사람들이 물러서겠는가? 마왕군이 인간계를 노리니까 어쨌든 해산하라고 나서는 시점에서 그들이 ‘아, 그렇군요! 비록 이곳까지 오는데 두 달이나 걸리긴 했지만, 마왕군이라면어쩔 수 없으니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자야겠어요!’하고 귀가하겠는가? 그럴 리가, 네놈이야말로 마왕군의 병졸이라며 공격이나 해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쩌면 마왕군이 긴 세월 뿌려놓은 저주를 확실하게 자극하여 난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마저 있다. 그렇기에 아르페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판을 엎는 것이었다. 놈들에게 놀아나는 척,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인과를 반전시킨다! “혹시 그 두 분 손님의 깽판이 재차 이곳에서 벌어질 예정인가요······?” “그런 저급한 수단은 쓰지 않아. 오히려 그건 최악의 수단이지.” 아르페는 미케나의 말을 코웃음으로 일축했다. 미케나는 대체 아르페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으나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굴려가며 끙, 소리를 냈다. “경매장의 재건축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60점 준다.” “낙제군요······ 엄격하셔라.” “이이익, 아르페에······!” 한편 에트나의 시선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아르페에게만 꽂혀 있었다. 미케나와 (겉으로 보기에는) 정답게 애기를 나눌수록 그녀의 분노가 강하게 끓어오르는것이 보였다. 처음엔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이곳에 찾아온 아르페를 향한 걱정과 긴장도 섞여 있었는데, 점점 그런 온순한 감정은 사라지고 자신을 놔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그를 향한 분노만이 커져가는 것이다! 아르페가 그녀의 남자도 아닌데! 아르페는 처음 그녀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어쩌면 그녀가 계략을 방해하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현장에 투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그녀가 너무나 철저하게 아르페 한 명만 마크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르페가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는 판단 끝에 그를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어찌됐든 그녀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못할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날 노려보고 있는 것만으론 내 계획을 못 막아. 오늘의 나는 인형술사거든.’ 아르페는 피식 웃다가도 이내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만약 이 자리에 아르페가 없었더라면 마왕군의 계략은 순조로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현장의 중심에 있는 에트나는 그 모든 참상을 두 눈에 담는 꼴이 되었을 테고······ 가뜩이나 마음이 약한 그녀는 상처를 받았겠지. 그리고 그것이 전생에서의 그녀의 일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언제까지고 회복되는 일 없이 계속해서 상처를 받기만 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그녀의 영혼은 회복할 길이 없을 만큼 썩어문드러졌다. ‘실은 저 여자야말로 시골에서 소 여물이나 주면서 사는 게 어울리는데 말이지.’ 따져보면 결국 이들의 운명을 이 따위로 꼬아놓은 신이 문제다. 메테르와 시에나가 얼른 성장해서 신을 죽여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오늘은 다를 거야.” “네, 손님? 뭐라고 하셨나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르페의 혼잣말을 알아들은 미케나가 그에게 반문하는 바로 그 순간,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경매 진행자가 나타났다. 경매장에 모여든 모든 인간의 욕망이 일순 그 자에게 집중되었다. 모든 아티팩트가 경매장에 집합했다. 마족들은 경매장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도시 곳곳에, 항구에 퍼져 무언가를 기다리듯 미소 짓고 있다. 지금부터 시작될 지옥의 연회를 축복하듯 하늘 높이 떠오른 달이 음산한 빛을 흩뿌렸다. [두근] 그와 함께 아르페에게만 들리는 아주 미약한 심장 박동 소리. 아르페는 그 소리를확실하게 캐치하고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와는 달리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진행자가 우렁차게 외쳤다. “지금부터 경매를 진행하겠습니다!” 무대의 막이 올랐다.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6 > 끝 ⓒ 토이카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7 > “2천 골드.” “2천5백.” “2천5백 골드 나왔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 아뮬렛의 전 주인 파트라 경은 출전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내란이 종식된 후 대공파에 사촌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참수를 당한 인물입니다. 주인에게 승리를 선사하는 수호부에 깃든 누명의 저주까지, 좋은 장인을 만나게 되면 그 성능은 압도적으로 증가하겠지요!” “파트라 경이라······ 그에게 애도를 표하며 3천 골드.” “3천3백 골드.” 사람들의 욕망을 장작으로 삼아 경매는 활활 잘도 타올랐다. 거의 대부분의 아티팩트나 보물들이 수천 골드를 호가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단체로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티팩트에 비해 비교적 단가가 낮고 거래 규모가 큰, 그리고 뒤가 구릴 일이 없는 특산품들은 이미 낮에 거래가 모두 끝났다. 지금 이루어지는 것은 단가가 터무니없이 세고 제법 뒤도 구린 아티팩트가 거래되는 경매였다. “다음은 R후작 부인의 은밀······.” “5백 골드!” “7백 골드.” 어째서 사람들은 아무런 마력도 깃들어 있지 않은 단순한 천 쪼가리에 저렇게 흥분하며 거액을 지불하는 것일까. 제아무리 그 주인이 아리따운 미녀라고 한들 그렇다고 저 천에 특별한 의미가 더해지지는 않을 터인데. 아르페는 인간이란 실로 어리석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미케나가 있었다. 아르페는 일단 변명을 해두기로 했다. “아냐.” “아무리 어려도 남자는 남자네요, 손님.” “아니라니까. 속옷을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런 걸 사는 망종들의 심리가 궁금해서 지켜본 거야.” “네, 그러시겠죠. 한창 그쪽으로 호기심이 왕성하실 때이니 이해는 못 하는 바도 아녜요. ······하지만 일행 분한테 손을 대는 건 참아주세요. 농담으로 안 끝나니까.” “잘 알고 있네, 아줌마. 그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 지금 아르페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마왕도 아니고 에트나도 아니고 메테르가 밤에 자신에게 육탄돌격을 해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화제를 더 끌어봤자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아르페는 무리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다들, 어차피 서로들 정체를 뻔히 알면서 잘도 저런 물건들을 거침없이 사네.” “······프레이트에서만은 모두들 신분과 지위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죠. 만약 프레이트 페스티벌에 제재가 들어온다면 그 순간 디아스의 경제에 어마어마한 타격이가해질 거예요. 그러니 제 마누라 속옷이 거래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놔둘 수밖에없는 거죠.” “더욱이 3년만의 페스티벌, 최대로 약화된 왕권, 내란 직후······ 상황을 막장으로 몰아갈 요소는 전부 갖췄구나.” 그리고 거기에 마왕군이 스푼을 얹었다, 이건가. 하여간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 아르페는 점점 더 고조되어가는 경매장의 분위기와 그에 편승해 서서히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저주, 그에 공명하는 저주받은 아티팩트들의 마나를 온몸으로 느끼며 후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미케나는 살짝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R후작 부인의 속옷이 갖고 싶으세요?” “필요 없어.” “제 속옷이라면 드릴 수 있답니다? 천오백 골드에.” “천오백 골드를 준다고 해도 안 받아.” “손님은 정말 무례하군요!” “지 속옷을 천오백 골드에 팔아치우려는 악덕 상인보다는 낫지.” 경매장의 분위기가 갈수록 고조되어 불씨 하나만 떨어지면 곧장 폭발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바로 그때, 경매장 단상으로 새로이 하나의 카트가 들어왔다. 무심코 그것에 시선을 주었던 아르페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다음 차례는······ 놀랍습니다! 이번 내란의 종결자, 에드워드 메르틴 경의 롱 소드입니다!” “뭐!?” “메르틴 경!?” 경매장이 한 차례 뒤집어졌다.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실수로 가면을 벗어던지는 자도 있었다. 아르페가 아티팩트를 보고 놀랐다면 사람들은 명백히 아티팩트의 원 주인의 이름을 듣고 놀라고 있었다. 그는 미케나에게 물었다. “에드워드 메르틴이 누군데?” “방금 저 사람이 말했잖아요? 이번 내란의 종결자예요. 이름 없는 자작가의 평기사일 터인 그가 검으로 줄기줄기 불꽃의 오러를 뿜어내며 대공 세력의 흑마법사며 기사들을 깔끔하게 태워버리고 대공을 사로잡았을 때, 모두가 디아스에 새로운 최강자가 나타났다며 경악을 했죠! 족히 레벨 250을 넘기는 최고위의 기사일 것이라고 예측되는데, 대체 어째서 여태까지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아, 그야 그럴 거야······.” 그런 사정이었던가. 아르페는 기운 없이 대꾸하며 망막 안에 롱 소드를 담았다. 그것이 담고 있는 정보가 빠짐없이 그의 두 눈에 비추어졌다. [광란의 나락염검] [마계의 화산에서 태어나 수만 년간 자유롭게 살아온 화염정령 멜티아를 저주의 힘으로 강제로 붙잡아, 마계의 화산에서만 나는 세 종류의 금속을 합금해 만든 검에가두어놓았다. 터무니없는 화기를 뿜어내 검으로 베는 모든 것을 태우지만, 그 대가로 사용자의 마력을 모조리 앗아가며 종래엔 그 영혼마저 거둔다. 영혼은 다시 쇠사슬이 되어 멜티아를 옥죄고, 그로 인해 아티팩트의 힘은 점점 강력해진다.] “그야 저 검을 얻기 전에는 그가 두각을 드러냈을 리가 없지······.” “어라, 혹시 뭔가 알고 계신가요? 앗, 그렇구나! 손님이라면 저 검의 정보를······.” “크으으으으으으.”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러워지는 검의 문구에 아르페가 기막혀하고 있자니 바로 근처에서 침음이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돌아볼 것도 없이 알 수 있다. 에트나 외의 그 누구도 아닐 것이다. 불꽃에서 태어나 모든 불꽃을 다스리는 그녀가, 화염정령이 저주에 의해 한낱 물건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는 굳이 묻어볼 필요도 없다. 어쩌면 그녀는 사실 이 물건을 회수하기 위해 이 경매에 참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겠지. 저 검이야말로 마왕군의 저주를 발동시키는 트리거 역할임에 분명했으니까. “크윽, 크으으으윽.” “에트나······.” 아르페는 무심코 에트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가는 황급히 스스로의 입을 단속했다. 그녀를 불러 무엇 할 것인가. 마왕의 명을 거스를 수 없는 그녀가, 아르페 대신 나서 판을 뒤엎을 수도 없는 노릇일 텐데. “에드워드 메르틴 경의 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불꽃의 검! 5천 골드로 시작합니다!” “7천 골드!” “8천 골드!” 아마도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불꽃의 검이었을 것이다. 남작이고 자작이고 백작이고 후작이고 가릴 것 없이 모든 인간이 흥분하며 검의 가격을 마구 높이기시작했다. “저건 꼭 사야 해!” “에드워드 메르틴 경······ 분명 저 검이!” 프레이트로 들어온 순간부터 조금씩 그들의 체내에 쌓여가던 은밀한 저주의 기운이, 지금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고 그들의 전신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호가를 하는 참가자들에게도, 그들을 호위하던 이들에게도, 돈이 없어 목소리 대신 욕망을 불태울 뿐인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공평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9천!” “만!” “만천!” “만이천!” “최소 레이즈 단위를 2천으로 변경합······.” “만사천!” “어라, 이상한데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시작이구나.” 아르페는 어느덧 트리거가 당겨졌음을 파악했다. 아마도 마왕군이 의도한 대로, 경매장에 모여든 인간들의 욕망이 한계치에 달하는 것을 기점으로 점차 저주가 눈에 보일 만큼 짙게 형상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또 다른 저주를 활성화시키고, 겹겹이 겹쳐 설령 레벨 200을넘는 마도사라도 쉬이 벗어나지 못할 올가미를 만들어 모두의 목에 둘렀다. 도시 외곽과 항구에 머무르고 있던 마족들 또한 그때 행동을 개시했다. 모두의 신경이 경매장으로 집중된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족으로서의 마력을 잔뜩 발휘해 또 하나의 트리거를 당겼다. 일순간에 저주가 극대화되어 도시 전체를 덮었다! “큭!” “꺄아아아아악!” 아르페가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듯 마법은 마법진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경매장에 모여든 모두를 재료로 삼아 도시 전체를 휘말리게 하는 저주의 마법진! 이미 되돌릴 수 없다. 도시의 모두에게 저주가 깃들었으니, 아주 자그마한 불씨로도 도시 전체를 불태울 수 있게 되리라! “이만이천!” “이만육천!” “이럴 수가.” 미케나는 던전 상인인 만큼 기본적인 레벨이 높을 뿐더러 마법에도 조예가 깊다. 물론 그녀라고 지금 프레이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만은 익히 깨닫고 있었다. “소, 손님. 이건······.” 그녀는 정말로 상인 체면이고 애니웨어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울상을 지으며 본능적으로 아르페의 한 손을 끌어 잡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던 아르페는 미케나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어버리곤 그 손을 굳게 맞잡아주었다. “지켜준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 미케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맞잡아오는 손이 너무 든든해서 연하라는 사실을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미케나가 기습공격에 당해 해롱거리고 있을 때에도 상황은 점입가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삼만육천······!” “내가 먼저 삼만육천을 불렀다!” “그렇다면 삼만팔······.” “오만!” “오만······!? 익, 이이이익······.” “그만한 돈은 없다, 그만한 돈은 없어······ 젠장, 눈앞에서 저 보물을 놓치란 말이냐!”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네놈!?” 아주 자연스럽게 불씨가 붙었다. 이제 누구 한 명 검을 뽑아 쥐기만, 마법을 영창하기만 하면 마법은 완성이 될 것이다. 저주는 모두에게 번져 도시를, 잘하면 나라를, 그 너머의 영역까지도 불태우게 되리라. 여타 전설이나 신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깔끔하고 대담한 수법이었다. 마왕 놈, 실로 공들인 수작이지 않은가. 전생에서도 이렇게만 했으면 아르페가 죽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그러니 그 복수다, 이 빌어먹을 놈아.” 아르페가 히죽 웃으며 중얼거린 다음 순간. 피를 보기 직전에 이르러 있었던 경매장의 분위기를 단숨에 얼려 버리는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크으으으윽!” “이게, 무슨······!?” 광란의 나락염검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귀족들이며 기사들이 일시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순히 행동을 억제한 것뿐만이 아니다. 대체 어디서 들려온 것인지 모를 그 고함소리는 그들의 육신과 정신을 완벽히 지배해 미치광이로 만들던 저주의 기운까지 산산이 흩어버려, 그들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둘러보았다. “내가 무슨······?” “이, 이런. 토마스, 검을 집어넣게! 돈으로 겨뤄야 할 곳에서 무력을 과시하다니 귀족답지 못한 짓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각하, 각하께서 명령을······ 으음? 이게 대체?” “뒈져라!” “큭!?”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던 그때, 아직 저주가 완벽히 풀리지 않은 이들이 흥분하며 어리바리하게 멈추어 있던 자들을 공격하려던 그때! 다시 한 차례 경매장을 함성이 가득 채웠다. [미오우아아아아아!] 아니, 경매장뿐만이 아니다. 놈의 함성은 경매장에 집약된 저주의 기운을 타고 마족들이 형성한 마법진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도시 전체에서 끓어오르는 저주의 기운을 대다수 빨아들여 ‘먹어치워’버렸다. 트리거는커녕 연료 자체가 폭발하기 전에 소모되는 바람에, 도시에 머무르던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저주의 기운을 잃었다. “이, 이게 무슨······?” 수많은 세월 눈치를 갈고 닦아야 하는 마왕군 사천왕답게 가장 먼저 그 이상을 알아차린 에트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 또한 경매장이 한 번 무너졌다가 새로이 세워졌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서 경매장 건물의 강도를 강화하는 스펠 외의 마나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대체 누가 있어 에트나조차 속일 만큼 교묘한 스펠을 걸어 저주를 교란했단 말인가! “아니, 그야 일을 벌인 건 아르페일 수밖에 없지만······.” 에트나가 멍한 눈으로 아르페를 보고 있으려니 문득 그와 시선이 맞았다. 뺨을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짓궂게 웃고 있는 아르페.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아르페의 입이 열렸다. 그가 입모양만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되찾아줄게.’ “되찾다니 뭘······.” 무심코 입 밖에 의문을 낸 에트나는 그러나 다음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직 아르페가 경매장에 걸어둔 스펠은, 정확히 말해 탐식의 마수와 마나 스트링으로 인한 ‘스펠 변형 스펠’은 다음 단계를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캬아아아아아악!] [크하아아아아!] “이, 이 소리는!?” 마법진을 이용해 탐식의 마수의 힘을 도시 전체로 퍼트려 저주를 빨아들일 수 있을 만큼 빨아들이는 것이 스펠의 제 1단계였다면, 그것으로도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저주의 기운을 전부 거두어 마법진의 각 요지에 대기하고 있던 마족들에게 대신 밀어 넣는 것이 바로 제 2단계였다. [경매장, 경매장에 그것이 있다!] [크하아아아아악! 내 것이다! 내가 가지겠다!] 도시의 모든 욕망이 경매장에 집중되어 있으니, 당연히 저주에 걸린 마족들은 한눈팔지 않고 곧장 경매장으로 직행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아르페가 마법진의 중심이 되는 경매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마나 스트링을 이용해 도시의 마법진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 만들어낸 업적이었다! “마족, 마족입니다! 도시 각지에서 마족들이 나타나 경매장을 향해 질주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전 우리를 덮쳤던 정신이상 증세도······!” “마족! 마족이다! 마족의 급습이다!” 경매장에 있던 사람들이 완전히 제정신을 찾고 벌떡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아르페는 실로 여유로운 웃음을 보였다. 레코드 링크를 고치고, 시에나의 저주를 변형하는 과정에서 아르페는 스펠을 뜯어고치는 데에 제법 익숙해졌다. 그런 그가 마법진의 중심이 되는 경매장에 직접 손을 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저주를 바꾸어놓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손님, 그러니까 이건······.” “인간 대 인간의 구도를 마족 대 인간으로 바꾸어놓는 거지.” 아르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웃었다. 미케나는 대체 어떤 수단을 쓰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해 그저 입을 헤 벌릴 뿐이었다. “두 눈을 뜨고 당했어······ 대단해.” 그리고 그것은 에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비록 고위 마도사에 가까운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그녀는 고차원적인 마법을 다루는 것보다는 불꽃으로 강대한 마법을 만들어내는 데에 능력이 집중되어 있었던 탓이다. 물론 아르페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대담한 수를 쓸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인간들 사이에 화를 불러일으킬 예정이었던 경매장의 물품들은, 인간들이 물건보다 마족을 맞서 싸우는 데에 집중하게 되면서 자동적으로 찬밥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물론 그것들은······. [미아아아아아앙!] “그렇지, 많이 먹고 쑥쑥 커야지.” 주인인 자신에게만 어렴풋이 그 실체를 보이며, 경매장에 가득한 저주의 기운을 빨아먹는 탐식의 마수. 무수한 요소가 모이고 겹친 덕에 비로소 알을 깨고 태어날 수 있게 된 그 녀석은 눈앞에 보이는 저주와 사악한 마나를 먹어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저것들을 전부 먹어치우게 될 즈음엔 완벽한 실체화도 가능해질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아르페는 실로 만족스럽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 너머로 마족들의 폭발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모두 아르페 자신에게도 유효한 경험치 덩어리들이다. “슬슬 마무리 작업 들어가 보실까.” 두 번째 퀘스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르페의 계산대로 이루어졌다. 지금부턴 보상을 수확할 시간이었다. < Chapter 11. 프레이트 페스티벌 - 7 > 끝 ⓒ 토이카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1 > 인간들에게 다행한 점이 하나 있다면, 프레이트의 모든 강자가 경매장에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도시 내 경비병들은!” “마족들은 경비병 정도로 막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마족들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경매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어······.” “홀렸다고······? 가만, 조금 전 우리도······.” 인간들 역시 자신들이 마왕군의 계략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눈치 챘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깨지고 상황이 변화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제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마왕군을 상대로 아주 제대로 굴욕을 겪으리라는 것까지는 파악했으니 다행이었다. “경매, 경매는 중지다.” “아티팩트들을 안전한 곳으로······.”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족들을 상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아티팩트들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설마 이것도 마족의 계략······.” “아티팩트가 아니라 마족이 중요하다고 지금 몇 번을 말하나!” 물론 개중에는 저주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완전히 가라앉힐 수 없었던어리석은 종자도 섞여 있었으나, 탐식의 마수가 열심히 아티팩트들을 집어삼킨 덕분에 인간들의 혼란은 강제로 캔슬되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틈을 노려 아티팩트를 슬쩍하고자 해도 그 아티팩트가 없으니 무조건마족에 집중해야만 하는 상황! “이것도 전부 다 내 덕분이네!” “손님······ 제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시겠지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 모두 내 비서가 알아서 한 일이다.” “손님한테 비서 같은 건 없잖아욧!” 미케나와 만담을 계속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인간들에게 전부 맡겨두기엔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가 않다. 아르페는 우왕좌왕하면서도 호위기사들을 내세워 마족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 디아스의 귀족들, 그 외 다른 국가와 상회로부터 파견된 인물들을 슬쩍 훑어보고는, 다음으로는 어느덧 그들 근처까지 다가와 그를 째려보고 있는 에트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도 참전할래? 네가 도와주면 든든할 텐데.” 그러나 에트나는 파티 요청을 수락하지 않고 아르페에게 태클을 걸었다. “······아르페, 너 설마 알고 있었어?” “뭔 소리야. 네가 힌트를 줬잖아.” “하지만, 너······.”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노출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아르페에게 충고를 했다. 그저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자신의 마음에 쏙 든 인간, 당혹스러울 만큼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와 흔적을 남긴 인간. 아르페가 상처 입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하지만 더욱 더 본심을 말하라면, 그녀는 사실 아르페가 그녀를 이 수라장에 놔두고 도망가지 않기를 원했다. 인간계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재능을 지닌 아르페가 자신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마왕군의 계략을 완벽히 알아채고 타파해주었으면 했다. 그것이 무리한 바람임은 알고 있었다. 마왕의 속박 때문에 제대로 된 힌트는 주지도 못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그가 대비해주길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용사라고 한들 그런 일은 이루어내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내가 그 어려운 걸 해낸단 말이지.” “마음까지 읽어!?” “아니, 대충 찍었어. 지금쯤 네가 내 개쩌는 수완에 경악하고 있을 것 같아서.” 에트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이 정도로 재수가 없기는 쉽지않았다. 만약 그가 마족이었으면 당장 마왕군 사천왕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을 만큼 재수 없었다. 아르페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식 웃으며 재차 권유했다. “헛소리는 여기까지 해두고······ 그래서, 도와줄 거야?” “······미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래, 직접적인 행동 명령은 받지 않았더라도 설마 그녀가 인간 편에서 마왕군을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이 시점에서 그녀는 자신이 마족임을 시인한 셈이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다른 인간이었더라면 ‘네년, 마족이냐!’, ‘그렇게 큰 가슴을 자랑스럽게 덜렁거리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이 고얀 년!’같은 소리를 해댈 타이밍이었거늘 아르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트나가 놀랄 정도였다. “왜 그렇게 수긍해버리는 거야!” “조용히 빠져나가, 에트나. 네 마력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어차피 여기에 없으니까.” “그니까 너는 왜······!” 아르페는 에트나의 목에 걸린, 만물열람을 발동한 자신의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시커먼 마력의 족쇄를 일별하곤 말을 이었다. “메르틴 경의 검, 네가 원하는 물건 맞지? 적당한 장소를 알려주면, 모든 일이 끝난 후에 그걸 가지고 찾아갈게.” “너······!?” 마무리 타격까지 완벽했다. 에트나는 마치 자신이 아르페 앞에 발가벗겨 내던져진 것만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어쩌면 자신이 아르페에게 갖고 있는 감정까지 다 들킨 것이 아닐까. 그녀는 분노와 당황과 아주 약간의 기쁨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어!” “그 물건이 나왔을 때 네가 이를 갈던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 눈치 챘을 텐데?” “끄으으응.” 거짓말이다. 분명 그는 저 검의 비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위해······! 그러니까 어째서! 당혹이 겹치고 겹쳐 정상적으로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에트나는 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을 순순히 듣는 수밖에 없다. 이미 2백 년을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마치 자신이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마족들 온다. 에트나, 어서.” “······C구역 제이미 여관.” 확실히 기억했다. 아르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로 갈게.” “그리고······.” 에트나는 조금의 망설임 끝에 자신이 입으로 내뱉어도 괜찮은 말을 간신히 한 단어 골라내는 데에 성공했다. “바다.” “바다? 바다에서 무슨······ 어라, 잠깐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반문하려던 아르페는 불현듯 생각이 미쳐 고개를 홱 돌렸으나, 이미 그곳에 에트나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 힌트는 아주 적절하고 직접적이어서 아르페가 알아듣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이런 미친,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고······?” “바다라는 게 무슨 소리죠, 손님?” “바다에서 일어나는 연례행사!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연례행사······ 아!?” 미케나 역시 그쯤에서 완벽히 감을 잡았다. 프레이트 페스티벌이 매년 초여름에 벌어지는 이유. 가을부터 겨울까지 바다에 배가 뜨지 못하는 이유. 상회 소속의 상인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루나틱 웨이브!” “맞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크게 뜨였다. “마족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녔잖아요! 지금은 담도 세워져 있지 않고, 오, 항구에 배가 수십 척은 있을 텐데!”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저놈들을 끝내야 돼, 이런 망할!” 아르페는 다급히 몸을 날려 경매장 입구로 내려섰다. 그곳에 이미 프레이트의 영주가 기사들을 대동하고 서 있었다. “마도사! 도와주는 것인가!” “영주님, 저 마족들을 물리치는 것까지 도와주면 내 일행의 잘못은 완전히 없던 걸로, 콜?” 아르페의 앞뒤 다 자른 딜! 영주는 망설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콜이네!” “좋아, 그러면 영주님은 지금 당장 경비병 끌고 항구 폐쇄하고 방어벽 세워!” “방어벽이라니 지금 자네 무슨 소리를······.” 영주 역시 늦지 않게 감을 잡았다. “설마 지금 루나틱 웨이브가 시작된다는 말인가!?” “이번 프레이트 페스티벌로 이 도시에 모여든 인구와 아티팩트를 생각해 봐. 거기에 이 저주까지······ 놈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그거였어!” 루나틱 웨이브.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바다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육지로 침범해오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만물에는 마나가 깃들어 있고 그것은 바다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바다의 마나는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육지의 마나는 불어나게 된다. 해상 몬스터들은 그 차이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육지를 탐하게 되는 것. 당연하게도 이 시기에 배는 뜨지 못하고, 바다와 마주하고 있는 모든 영지는 가을이 되기 전 바다와 면하는 모든 구역을 폐쇄, 높은 방어벽을 세워 몬스터들을 막아낸다. 그렇기에 아르페가 가을이 오기 전에 바다를 건너려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젠 다 끝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왕군이 자연의 이치까지 뒤흔들 수 있단 말인가!” “조건은 충분했어. 지금 이 도시가 지나치게 매력적인 게 문제라고!” 이번 프레이트 페스티벌은 지나치게 성대했고, 그 결과 인간들이 몰려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바다의 몬스터들까지 끌어들이고 말았다. 거기에 마족들이 여러 저주로 프레이트의 마나를 한껏 증폭시킴으로써 루나틱 웨이브를 유도한 것이다. 어쩌면 놈들의 저주는 바다로까지 뻗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계략으로 두 가지 효과, 훌륭하다 훌륭해, 마왕놈! 이런 빌어먹을······.’ 아르페가 가장 분한 것은, 일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다 해도 막을 수 없는사태였다는 것이다. 아르페에겐 마법을 꼬아놓는 능력은 있었지만 캔슬시키는 능력은 없었으니까. 아르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해서 디아스를 혼란에 빠트려? 아니! 놈들은 어떻게든 저주가 발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든 마나가 폭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날뛰고 있는 탐식의 마수조차 루나틱 웨이브를 유발하는 아주 좋은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마왕에게 놀아난 것만 같은 이 더러운 기분. 환생하고 용사로 선정된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패배감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아!” “하등한 인간 놈들, 그곳에서 비켜라! 비켜!” “더러운 마족이 감히 인간의 땅을 침범하느냐!” “다시는 인간의 힘을 얕보지 마라!” 앞으로 더욱 더 큰 재앙이 닥쳐온다는 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제각기 멋져 보이는대사를 지껄이며 마족들과 한 판 붙기 시작했다. 피와 눈물과 용기가 가득한 멋들어진 영웅담이 한 편 탄생하고 있었다. 저 장면만 보고 있으면 역시 인간은 대단해! 하고 메테르처럼 감탄해줄 수 있지만······. 그러나 이미 감각권을 넓힌 아르페에게는 저 너머 바다가 진동하고 출렁이며, 해상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영웅담은 무슨 얼어죽을, 이대로 가다간 프레이트, 잘하다간 디아스까지 그대로 끝장이었다! “영주님, 서둘러!” “하지만 이 자리는······.” “나랑 내 동료가 막는다니까!” “큭······ 알겠네!” 아르페가 진즉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다면 영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매장을 재건하던 때의 그 압도적인 능력과 선의가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부디 이 자리를 부탁하네!” “맡겨둬!” 영주는 아르페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이곤, 다급히 기사들을 소집해 그 자리를 떠나갔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에트나의 충고가 늦지 않은 덕에 최악의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럼 남은 건······.” 그는 양손을 뻗어 마나 스트링을 발현하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저주 비틀기가 제대로 먹힌 것은 좋은데, 그 덕분에 수십에 달하는 마족 놈들이 눈알이 아주 제대로 뒤집혀 날뛰고 있었다. 만약 루나틱 웨이브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저주를 이렇게 꼬아놓지는 않았을 것을! “손님, 어떻게 하죠? 레벨 200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마족이 터무니없이 많아요.” “너도 힘 보탤 거지?” “저뿐만 아니라 다른 상인들도 준비하고 있어요. 어찌어찌 이 자리는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손님.” 이 여자도 제법 오래 살아왔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도 겁이 많은 것일까. 가능하다면 메테르나 시에나에게 그러하듯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줄 텐데, 아쉽게도 아직 아르페의 키가 작아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대신 미케나의 손을 굳게 한 번 잡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메테르가 어떻게든 해줄 거야.” “거기선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라고 하셔야 제가 확실히 반할 거 아녜요!” “내가 아줌마를 꼬셔서 뭐하냐.” 아르페는 흥, 코웃음을 치며 통신기를 들었다. 시페넌 일행과 통하는 것이 하나, 미케나와 통하는 것이 하나. 일행이 찢어지게 될 일을 대비해 당연히 메테르와 연락할 수 있는 통신기도 하나 마련해두고 있었다. “메테르, 지금 당장 경매장 쪽으로 시에나랑 같이 달려와. 최대한 빠르게.” [응!] 메테르는 이런 점이 좋다. 굳이 귀찮게 해설을 할 필요 없이 그저 말 한 마디 하는것만으로 끝이니까! [내가 갈게, 아르페!]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너무 듬직해서 반해버릴 만큼 씩씩한 메테르의 대답을 듣고 통신을 끊으며, 아르페는 다시금 시선을 전장으로 돌렸다. 수십의 마족과 그에 비하면 연약한 인간들이 부딪히는 현장. 전생에서도 수백, 수천 번은 보아온 광경이다. “에라이.” 그때와는 다른 입장에서, 그때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다 뒤져라, 개새끼들아!” 도무지 용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험한 말을 내뱉으며, 아르페는 마족과 인간의 전장에 참전했다!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2 > “캬아아아아아!” “인간, 그것은 네놈이 아닌 이 몸에게 주어져야 하는 물건이다!” “큭, 이 자식들······!” “놈들 전부 광화에 지배되고 있어! 가뜩이나 강한데 광화까지 걸려서 도저히 막아낼 수가······!” 아르페의 저주 한 판 뒤집기는 마족들의 정체를 인간들에게 드러내고, 동시에 놈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어 인간들과의 전투 구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의 의도가 훌륭히 먹혀들어가 마족들은 자기 정체를 감출 생각도 않고 경매장으로 전력질주했으나, 저주로 인해 놈들의 전력까지 강화되는 것만은 제아무리 아르페라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족들이 마법을 구사하지 않는 것만은 다행이네요.” “눈이 뒤집어졌는데 복잡하게 술식 같은 거 계산하고 있겠냐.”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 손가락 끝으로 마나 스트링이 한 줄기, 두 줄기, 네 줄기······ 순식간에 수십 가닥이 뻗어 나오더니 서로의 몸을 얽어 밧줄과 비슷한 모습을 이루었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하이퍼 러빙.” “그 마법 정말 끈질기게 쓰시네요.” 하나로 엮인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에 전부 하이퍼 러빙이 적용되자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마찰이 일어나 마력을 소모시켜 마나 스트링을 달구었다. 아르페는 그것을 가로로 휘둘러, 기사들의 방진을 뛰어 넘어 경매장으로 들어오려던 몇 명인가의 마족을 고스란히 바깥으로 튕겨냈다. 적어도 레벨 100 후반대에서 레벨 200초반에까지 이르는 마족들이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캬학!” “크으으악!” “오오! 과연 마도사!” “흡!” 어차피 아르페가 휘두르는 것은 실체 있는 무기가 아닌 마력의 채찍. 그는 쉬지 않고 그것을 휘둘러 마족들을 원거리에서 공격했다. 하이퍼 러빙이 적용된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은 마족들과 접촉하는 짧은 한 순간 격렬한 저항을 일으켜 놈들의 방어구며 피부를 무용지물로 꿰뚫고 그 속살까지 태워버렸다. 마찰로 인한 직접적인 데미지는 물론이고 마찰열로 지워지지 않을 상태이상까지 입히니, 단순한 불꽃 마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한 줄기만 쓸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수십 줄기에 동시에 걸면 하이퍼 러빙 쪽이 더 이득이더라고!” “저한테 한가로이 해설할 시간에 그 채찍이나 더 휘둘러주세요!” 미케나 역시 무기를 들었다. 그녀가 꺼내든 것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롱 보우였는데, 아르페는 그것이 이전 자신이 슬라임 던전에서 얻어 그녀에게 팔아치웠던 활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거 설마 아줌마가 쓰려고 산 거였어!?” “임시에요, 임시! 깨끗하게 수리해서 팔아치우면 신품이라구요!” 미케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기꾼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활의 모습을 변형시켰다. 공성전에서나 쓰일 법한 발리스타로 재탄생한 활에 은은한 은빛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대형 화살이 장전되었다. “확실히 지켜주셔야 해요, 손님!” “난 몰라, 메테르한테 부탁해봐.” “정말 미워!” 미케나의 발리스타가 화살을 쏘아냈다. 아르페와 마찬가지로 원거리에서 마족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데미지는 둘째 치고 마족들의 움직임을 확실하게 묶을 수 있어 인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발리스타!?” “아무래도 좋아, 지금이다!” “크아아아악!” “출장비는 애니웨어 상회로 부쳐주세요!” “화살이나 쏴, 이 바보야.” 아르페가 쏘아낸 채찍이 그나마 광화의 영향을 적게 받아 마법을 영창할 정신이 남아 있던 한 명의 마족의 목을 휘감았다. “칵, 커헉!” “잘 가.” 그의 명을 받은 마나 스트링이 일제히 매듭을 풀며 격렬한 회전을 일으켰다. 수십겹의 마나 줄기가 회전하며 가뜩이나 강하던 마찰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다! 이것이야말로 마력과 물리력이 혼재된, 지금의 아르페에게 가능한 최고 위력의 대인공격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비록 마나 소모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위력 하나는 절륜했기에, 놈의 영창이 그대로 캔슬되고, 이어서 목숨까지 캔슬되었다. 자신에게로 흡수되는 기록과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체내에서 솟구치는 마나를 감지한 아르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아, 레벨 하나 오른 것 같은데. 마족은 인간계로 나오면 힘은 더 떨어지는데 경험치는 여전히 다른 몬스터에 비해 높은 편이라 참 좋다니까.” “마족을 좋은 경험치 공급원 취급하는 사람은 아마 손님뿐일 거예요.” 둘은 끊임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채찍을 휘두르거나 발리스타를 쏘아내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인간들도 필사적으로 마족에 맞서고는 있었지만 이 자리의 모든 인간을 합쳐도 둘의 전적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도 벌써 미케나가 둘, 아르페가 셋의 마족을 죽였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아줌마는 던전 상인들 중에서도 특별한 편인가 봐?” “손님이시라면 제 실력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강할 거라곤 생각했지.” 물론 구라였다. 어느 정도가 아니라,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전력에 대해선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미케나] [다크 엘프] [던전 상인] [레벨 ? 199] [궁술 Lv59] [마나지배 Lv38] 그녀는 레벨만 따지면 아르페와 메테르보다도 높은 수준이고, 인간보다 오랜 세월을 사는 엘프의 특성상 스킬 레벨도 더할 나위 없이 높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레벨이 처음 본 2년 전부터 지금까지 199에 머물러 있다는 것. 즉 상위 클래스로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던전 상인은 단순히 상인의 자질뿐만 아니라 전투의 소양, 마법의 소양까지 전부 겸비해야 승급이 가능한 상당히 까다로운 클래스다. 대개의 던전 상인은 전투나 마법의 소양이 부족해 승급을 오래도록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미케나의 경우 반대였다. 그녀가 지닌 전투와 마법의 소양은 이미 지나치리만치 충분하지만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상인으로서의 자질. 어쩌면 그녀가 중견상인임을 강조하고 다니는 것도 그런 열등감에서 기인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손님, 아무리 제가 예뻐도 지금은 마족들한테 집중해주실래요?” “풋.” “코로 비웃었어!?” 아르페는 상념을 거두고 전면에 집중했다. 남은 마족의 숫자는 대략 서른. 아르페와 미케나는 포지션이 포지션인지라 제법 안전한 곳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었지만, 최전선에서는 벌써 죽어나가는 인간이 많았다. 영지에 머무르고 있던 사제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만의 힘으로는 해주와 치유를 베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큭, 이대로 인간은 패배하고 마는가······!” “영주는, 영주는 어디에 갔는가! 비겁하게 도망이나 쳤단 말인가!” “지금은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흔들리지 말고 버텨라!” “캬아아아아아악!” 인간들이 저마다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마족에 저항하고 있는 모습이란 그럭저럭 그림이 되었으나 그것을 보는 아르페는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이 인간들 진짜 약하네.” “쉿, 손님! 들려요!” 레벨 150을 넘어가는 인간이 셋 정도뿐인 건 그렇다 치자. 레벨이 약하면 합공을하는 방법을 익히든가 했으면 좋을 텐데 무식하게 몸을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모르다니 마왕군 병졸이랑 똑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똑같은 놈들끼리 부딪혀 나란히 죽어가고 있지! “마도사, 이쪽을 지원해주시오!” “안 그래도 지금 한 방 나간다!” 아르페는 자신에게 남은 마나를 체크해보았다. 아직 70% 이상 남아있기는 하지만 오늘의 진짜 위기는 이깟 마족 한 무더기가 아니라 루나틱 웨이브! 그는 마나 스트링을 다루는 한편으로 화염구를 만들어 마족들에게 내던지며 미케나에게 확인했다. “아줌마, 비축해둔 마나 포션 있어?” “······세일은 못 해드려요?” “나중에 다 정산하자.” “주문 받았습니다!” 발리스타를 쏘아내고 재장전하는 짧은 틈을 이용해 미케나가 아르페에게 마나 포션을 건네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입에 물고는 마나 스트링의 규모를 늘렸다. “사라져라, 버러지들아!” 한 번에 셋의 마족이 채찍에 관통당해 죽었다. 끊임없는 회전을 일으키는 열기의 채찍은 마족들의 상처 입고 연약한 부분만을 귀신 같이 파고들어 놈들에게 치명상을 안겼다. “캬아아아악!” “크학!” 아르페는 자신보다 레벨이 낮거나 비슷한 마족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놈들의 마나 저항을 쉽게 뚫고 공격을 적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페의능력을 제대로 모르는 인간들은 그가 채찍을 내지를 때마다 마족들이 쓰러져가는 것을 보며 더더욱 기세를 높여 환호했다. “강대무비한 마도사가 우리를 돕는다! 마족들을 그에게 겁을 먹어 제대로 공격을해오지 못하고 있어!” “몰아쳐라! 지금이다, 지금을 놓치지 마라!” 기사들과 던전 상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마족과 맞섰다. 그러나 마족이 죽어가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인간 측의 전력 또한 소모되고 있었다. 인간들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이대론 안 돼. 이것 때문에 루나틱 웨이브를 선방해내지 못한다면 우습지도 않은꼴이 될 거야.’ 그렇다면 루나틱 웨이브 때문에 나중에 곤란해지더라도, 일단 마력을 전부 쏟아내 마족들을 죽이고 봐야 하는가? 아르페가 망설이던 바로 그 순간. “흐아아아아압!” “에잇!” “크학!” “쿠오오!?” 드디어 메테르와 시에나가 전장에 도착했다! “헉, 저 소녀들은 아까 난동을 피우던······.” “광전사, 광전사다! 설마 저 소녀도 마족······.” 한창 마족에 맞서 싸우던 귀족들과 기사들이 움찔하며 놀랐으나 그녀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마족들에게 돌격했다. “하!” “흐읍!” 롱 소드를 쥔 메테르는 가속을 응용해 지상을 미끄러지는 것만 같은 속도로 돌진하며 검을 내질러 순식간에 몇 명씩의 마족을 베어 죽였고, 시에나는 슬레지 해머를냅다 내던져 인간들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직전이던 마족의 대갈통을 부수었다. “강해!” “이럴 수가······ 마족이 아니었단 말인가!?” 한 번 발동이 걸린 메테르는 멈추지 않았다. 버서크를 발동해 전신 근육의 힘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그녀는 바닥을 콱 밟고는 화살처럼 자신의 몸을 내쏘아 또 다른 마족을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크, 학······.” “다음.” 놈은 족히 레벨 200이 넘어가는 강자였으나, 전생에서부터 익히 레벨에 따른 격 차이는 가볍게 무시해왔던 용사에게 걸리면 한 큐에 끝장이었다. “그 누구도 1대1로는 맞서지 못하던 마족을 단 한 방에!?” “강하다······ 너무나 강해!” “흐으으으아압!” 그때 마침 시에나가 해머를 내던진 자리에까지 도달해 그것을 회수했다. 그녀가 그것에 그대로 자신의 마력을 가득 담아 대지를 내려치자 마력의 파장이 사방으로 퍼지며 마족들에게 광범위한 타격을 주고, 영역 내의 인간들에게는 치유의 힘을 부여했다. 전투 사제의 전용 스킬 디바인 그라운드였다. “끄아아아아아악!” “이 저주스러운 능력은 뭐냐!” “사제, 사제다!” “설마 저 소녀가 전투 사제였다니!” “광전사와 치정 싸움을 벌이던 소녀가 전투 사제······ 신전도 갈 데까지 갔군.” 메테르가 언제 어느 때고 미친 듯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아르페도 잘 알고 있다. 의외로운 것은 시에나였다. 아직 레벨 160을 넘지 못하는 그녀의 스킬 한 번에 일대의 마족이 맥을 못 추고 있는 모습은 가히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아니, 아마 곧 160레벨을 넘어설 것이다. 여기 있는 마족 중 족히 절반가량은 그녀의 경험치로 화할 테니까. ‘이블 리플렉터······ 그녀가 마족에게 적대적인 종족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는데.’ 시에나의 마력은 마족을 거부한다. 그녀가 다루는 모든 스킬에는 그녀의 마력이 담기고, 따라서 그녀의 모든 스킬에는 마족의 마력을 흩어버리는 효과가 붙는다. 아르페야 당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보니 감상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 녀석 용사 시키면 안 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시에나를 파티 멤버로 받아들인 것은 아르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그 연약했던 꼬맹이가 잘도 1년 만에 저렇게 강해졌네요.” 미케나 역시 시에나의 활약에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찬탄에 아르페는 픽, 웃으며 거들었다. “인간은 원래 저렇게 빨리 변해.” “그것이 인간만의 강점이지요······.” “강점이라······.” 아르페는 딱히 인간찬가를 할 생각은 없다. 빨리 변한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한 것이다. ‘마침 저 녀석도 사제이기도 하고······ 아니, 됐다.’ 전투 중에 딴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직까지도 사천왕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아르페는 혀를 차며 마나 스트링을 휘둘렀다. “빨리 정리하자. 밤은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제가 바라는 바예요, 손님.” 미케나가 웃음으로 대답하며 발리스타에 마나의 화살을 재장전한 바로 그 순간, 저 너머 항구에서 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왔다.” 아르페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인간들은 물론이고 광화의 저주에 휩싸인 마족들까지도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런.” “미, 친······ 설마? 이 시기에?” “오, 맙소사. 하느님.” [지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직후 도시 전체에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나틱 웨이브를 경고하는 알람 마법이 내는 소리였다.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3 > 마족의 급습에 이어 루나틱 웨이브까지 발생했다. 불행은 결코 홀로 찾아오는 법이 없다더니 지금 프레이트가 맞이한 상황이 딱 그 꼴이었다. “루나틱 웨이브, 이건 분명 루나틱 웨이브다! 영주, 영주는 어디에 있지!?” “그는 이미 항구로······ 그렇구나, 영주는 이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인가!” “분명 수십 년 전 다른 항구 도시에서 여름의 루나틱 웨이브가 일어난 적이 있었어!” 모든 항구 도시는 언제나 루나틱 웨이브를 대비한 행동지침을 가지고 있고, 도시에 방문하는 객 또한 그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침대로 움직이고 싶어도 당장 그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마족들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했다. 기사들은 그제야 마왕군의 의도를 깨닫고 치를 떨었다. “맙소사, 설마 마족 놈들은 이 저주를 이용해 루나틱 웨이브를 유도하려던 것이었나!” “디아스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하 마족들까지 희생한다고? 웃기지 마라!” 물론 마왕에게 수하 마족을 희생하려던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아르페가 나서서 ‘사실 저 마족들 눈 뒤집어지게 만든 건 내가 한 짓이야!’ 라고 고백할 필요는 없으리라. “큭, 빌어먹을 마족들 같으니!” “죽어, 죽어라! 디아스를 네놈들 마음대로 망칠 수는 없어!” 이대로 가다간 마족들하고 싸우다가 그대로 루나틱 웨이브에 휩쓸려 죽게 생겼으니 사람들의 마음이 초조해진 것도 당연했다. 저주가 약하게 걸려 예상외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남아있던 마족들은 이미 전부 아르페에게 죽어나간 바, 남은 마족들 또한 거세어지는 인간의 기세에 맞서 미친듯이 날뛰었다. “조금만 더 늦기를 바랐는데 역시 꿈에 불과했구나.” 아르페는 쯧, 혀를 차며 현장을 훑고는······ 메테르와 시에나의 가세에 의해 분위기가 완전히 인간 쪽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다. 역시 메테르는 사기야.” 메테르와 시에나가 있으면 현장은 어떻게든 빠르게 정리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마족을 잡아 경험치를 더 얻는 것도 좋겠지만, 아르페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더욱 좋은곳은 난전이 불가피할 만큼 좁아터진 경매장이 아니라 대자연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이룰 수 있는 항구! “아줌마, 그러면 나는 먼저 항구로······.” “······으으.” 그러나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움직이려는 아르페의 로브 소맷자락을 미케나가 지그시 붙잡았다. 그녀는 고개는 다른 쪽으로 돌려 아르페와 마주보지 않는 주제에 손에만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아르페는 기가 막혀 물었다. “······뭐하냐?” “아, 아뇨. 여기 정리하고 같이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 한시가 바쁜 상황인데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약한 척이냐고 당장 소리를 지르려던 아르페였으나, 눈치를 채고 보니 미케나의 귀가 미세하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아르페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까부터 묘하게 겁을 많이 먹는다 싶더니, 혹시······.’ 혹시 그녀는 마족 공포증이 아닐까? 아르페가 시험 삼아 그녀 옆에서 한 발짝 떨어지자 미케나가 힉, 소리를 내며 그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여태까지 그의 곁에서 용맹하게 발리스타를 쏘아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너······.” “아니면 저를 데, 데리고 가시던가요. 네?” “아줌마, 그러면서 잘도 던전 상인을 해먹는구나······?” 아르페는 후, 한숨을 쉬었다. 아르페가 그녀에게서 떨어지려 할수록, 마족들의 비명소리가 높아갈수록 그녀의 귀의 떨림이 심해지고 있었으니 이건 뭐 어찌 할 방도도 없었다. “그래, 너까지 빠진다고 뭔 일 있겠냐. 같이 가지 뭐.” “후우우.” 그는 안도하며 발리스타를 거두는 미케나를 뒤로 한 채 마지막으로 한 번 경매장을 돌아보았다. 목이 터져라 외치며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자들, 경매장 밖으로 나가지도, 그렇다고 싸우지도 못하고 숨어만 있는 자들······. 그리고 사라진 경매품을 찾아 눈을 밝히는 한심한 종자들과, 저주와 사악한 기운 모두를 포식하며 기쁘게 울부짖는 탐식의 마수까지 모두 그의 시야에 잡혔다. “조금 있다 보자.” [미아아아아아아앙!] 아르페의 나직한 속삭임에 탐식의 마수가 우렁차게 답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알의 주인이었던 아르페마저 적대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제대로 제 주인으로 인식해주는 모양이다. “후.” 그는 돌아오는 녀석의 대답에 피식 웃고는 미케나의 한 손을 잡았다. 그리곤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다음 순간에 둘은 경매장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도달해 있었다. “어라······?” 미케나는 갑자기 시야가 급변하자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이내 아르페에게 따져 물었다. “마법의 발동을 잘 감지하지 못했는데요.” “원래 아티팩트에 달린 마법은 보다 은밀하게 발동하지.” “손님의 아티팩트 중에 공간이동 마법 같은 건······ 어머?” 미케나는 아르페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다시 한 차례 바닥을 박차 수백 미터 이상의 거리를 도약하는 그때에 비로소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방금 이거 블링크였나요!?” “한 번 더 강화하니까 다른 사람도 껴서 이동할 수 있게 되더라고.” “말도 안 돼요, 블링크는 본래 본인의 위기 탈출을 위해 고안된 마법일 뿐이꺄악!” 아르페는 미케나에게 대꾸해주지 않고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참고로 지금 아르페가 신은 부츠의 상태는 이러했다. [바람정령의 축복 부츠+2] [바람이 깃든 검은 가죽 부츠가 특별한 스킬에 의해 두 차례 강화되어 탄생한 전설적인 아티팩트. 하루에 마나 소모 없이 다섯 번까지 원하는 순간, 혹은 공격당하는 순간 블링크를 발동할 수 있으며, 자신과 접촉하고 있는 상대까지 함께 이동할 수 있다. 추가로 마나를 소모해 블링크를 발동할 수 있다. 블링크의 이동범위가 무척 넓어진다.] “한 번 더 강화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더 강화하려면 이 아티팩트에 맞는 마석이 필요한 것 같아.” “저도 강화사의 전설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강화 스킬은 종류가 무척 다양해서 일시적인 것, 영구적인 것, 특수한 조건을 맞추어 발동되는 것,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 사물에 적용되는 것, 환경에 적용되는 것이 있는데······ 그 모든 강화 스킬 위에, ‘같은 대상에 강화를 중복해’ 사용하는 강화 스킬이 존재한다고.” “나도 내가 얻은 강화가 그런 강화일 줄은 몰랐지.” 이렇게 좋은 강화 스킬을 각성한 것도 물론 용사 육성 던전이다. 실로 떨떠름한 일이기는 하나 아르페나 메테르나 그곳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많이 얻어 나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블링크 두 번 더 간다.” “잠꺄아아아악!” 부츠로 블링크를 발동하는 것도 이젠 제법 익숙해져, 정말로 딱 두 번 더 블링크를 구사한 끝에 아르페와 미케나는 바다와 면한 항구의 방어벽 위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들의 바로 코앞에서 물보다 몬스터의 비율이 높은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도착.” “이게 무슨 블링크야, 이게 무슨······.” “헉, 마도사! 그리고 자네는 애니웨어 상회의?”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 아얏.” 조금도 쉬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하며 움직이던 영주가 아르페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아르페는 이 급한 와중에도 비즈니스 모드로 전환하려는 미케나의 허리를 쿡 찔러 물러나게 하며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도 아직 초반이라 약한 놈들 위주로 몰려오네.” “그, 그렇다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막아내야 하는 구역이 이곳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 어떻게든 전 구역에 1차 방어벽을 쌓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2차부터가 문제라는 거지.” 해상 몬스터들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되는 방어벽은 총 3차까지존재한다. 평소 물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가 루나틱 웨이브가 발생하면 곧장 끌어올리는 것이 1차로, 간편하게 설치할 수 있지만 그만큼 높이가 낮았다. 즉, 이 잔챙이들까지는 몰라도 곧 다른 몬스터에 의해 돌파된다는 뜻이다. 2차 방어벽은 모든 배를 일정 구역으로 격리한 후 항구 일대를 변형시켜 만드는 마법의 방어벽으로, 많은 마나가 결집되어 형성된 만큼 해상 몬스터를 도발하고 유도하는 효과까지 갖춘 훌륭한 성벽이 되어주지만······. “지금은 모든 배가 부두에 고스란히 묶여 있단 말이지.” “바로 그게 문제라네······.” 배를 일일이 격리하고 방어벽을 만들어낼 시간이 지금은 도저히 없다. 오히려 1차 방어벽이라도 세운 것을 칭찬해줘야 할 지경이다. 영주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그렇다고 2차를 생략하고 바로 3차 방어벽을 세우자니 1차 방어벽과 3차 방어벽 사이에 방치되는 배들이 문제가 된다네.” “흠······ 내가 보기엔 별로 대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아르페는 말을 잇기 전에 우선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지금 이 공간의 모두가 지극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었다. “루나틱 웨이브는 자연재해야. 설령 그것 때문에 손님들의 소유재산이 날아간다고 해도 그들은 아무런 불만을 말할 수 없다는 거지. 실제로 국가교류조약에도 그렇게 되어 있잖아?” “여, 역시 마도사인지라 아주 잘 알고 있군······.” “영주님이 루나틱 웨이브를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았다면 모르되, 최선을 다했다는 가정 하에 그들은 영주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어. 그렇지? 그리고 지금 영주님은 혼이 빠질 기세로 열심히 일하고 있지.” 속이 다 시원해지게 하는 아르페의 말에 영주의 얼굴에도 아주 조금 미소가 돌아왔다. “그렇지, 자네 말이 맞네. 그래, 고민은 무용이었어. 우리 사람들의 목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암! 그러면 나는 바로 3차 방어벽을 세워야······.” “아니지, 왜 그렇게 되는 거야.” “음?” 영주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귀여운 여자애라면 몰라도 다 늙은 남자가 그런 짓을 하니 무척 재수가 없었지만 아르페는 그를 한 대 패고 싶다는 욕구를 꾹 눌러 참으며 설명을 이었다. “지금 내가 말했잖아, 영주님.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설령 소유재산이 얼마나 날아가든 그들은 아무런 불만을 토해낼 수 없다고.” “그러니까 배를 무시하고 바로 3차 방어벽을······ 으음?” 그때가 되어서 비로소 영주 역시 깨달았다. 지금 이곳에서 그들이 다할 수 있는 최선은 3차 방어벽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면, 2차 방어벽까지도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영주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해지는 바로 그 순간 아르페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싸우는 과정에서 설령 배가 완파되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도, 그들은 아무런 불만을 토해낼 수 없을 거야. 그렇지?” “자, 자네······.” 악마, 악마가 여기에 있다! 영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을 쳤으나 아르페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더욱 더 짙어질 따름이었다. 그의 입에서 지금 상황에 쐐기를 박는 말이 흘러나왔다. “결행하려면 지금이야, 영주님. 타국 인사들은 지금 전부 경매장에 몰려 있다고.” “······서, 설마 자네는 이것도 계산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르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입 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었다. 아아, 지금이야말로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사천왕으로서의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며 잔뜩 허세를 부렸다! “당연하지! 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계산하고 있었다고!” 당연히 개구라였지만, 영주는 마도사의 사악하기 그지없는 계산에 전율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물론,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4 > “하는 이상은······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해야 하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격렬하게 싸우다 보면 손님들의 소유재산에 피해가 오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는 했지만, 내가 직접 뭘 어떻게 한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 “뭐?” 기껏 아르페의 제안에 놀아나기로 마음먹고 굳은 목소리로 말하는 영주에게 아르페는 능청스레 답했다. 그러나 영주가 반문하려던 바로 그 순간, 그들로부터 거리상으로 그리 머지않은 부두에 묶여 있던 거대한 상선 한 척이 꼬르르륵, 침몰하기 시작했다. 분명 몬스터들은 아직까지 1차 방어벽에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네······.” “대단한데, 설마 저렇게 먼 거리에서 마법으로 공격해오는 해상 몬스터가 나타날줄은 몰랐어!” “어디서 그런 씨알도 안 먹힐 구라를, 흡.” 자신의 상식에 근거하여 정당한 태클을 걸려던 영주였으나 아르페의 날카로운 시선에 막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옆에 선 미케나는 이미 진즉 귀를 막고 방어벽 위에 발리스타를 설치하는 척 하고 있었다. “이야, 엄청 강한 몬스터구나. 저것도, 저것도 가라앉네 그냥.” “손님이 과거 어느 때보다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제 착각이겠지요?” “무, 무서운 몬스터군. 무서운 몬스터야. 그래, 몬스터······.” 폭력은 언제나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법, 진실을 알면서도 진실이라 밝히지 못하는 영주의 눈물을 뒤로 하고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조종해 차례차례 배를 가라앉혔다. 살짝 구멍을 내도 좋고, 용골을 아작 내도 좋다. 만물열람을 지닌 아르페에게는 바다에 잠긴 배의 내부구조까지도 선명하게 보였으므로, 마나 스트링을 가볍게 한 번 휘저을 때마다 하나의 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예, 예상 불가능한 곳으로부터의 공격이다! 모두 단단히 대비해!” “배가 전부 가라앉고 있어······ 대체 무슨 수로!” 프레이트 앞바다에서 연달아 가라앉는 배를 보며 바쁘게 뛰어다니던 병사와 기사들 또한 모두가 압도되었다. 저렇게 압도적인 힘을 지닌 몬스터가 배가 아닌 그들을 직접 공격해온다면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나갈 수밖에 없을 터인데, 기이하게도 놈은 인간이 아닌 배를 무너트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차피 바다는 몬스터로 들끓어 바다로 도망칠 수도 없을 터인데, 집요하게 배를 공격하다니······.” “예정보다 이르게 닥쳐온 루나틱 웨이브······ 힘든 세월이 되겠어. 하지만 배가 전부 침몰한 덕분에 우리에게 한 가지 가능해진 것이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주님!” “영주님!” 1차 방어벽 위에 선 모든 이가 영주를 바라보았다. 더럽고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는 영주는 실로 떨떠름한 얼굴로, 그러나 목소리만은 크게 높여 외쳤다. “2차 방어벽을 발동한다! 1차 방어벽에 남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전부 따르라!” “옙!” “영주님을 따릅니다!” 인간들의 전의가 끓어올랐다. 영주는 아직까지도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무거운 얼굴이었으나, 아르페의 말을 따른 덕분에 몬스터들을 막아낼 시간을 번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아르페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마도사, 1차 방어벽을 부탁해도 되겠는가?” “얼마든지. 그냥 애들 전부 빼서 2차랑 3차로 돌려도 돼. 방어벽뿐만이 아니라 프레이트 내부에서도 해야 할 일 많잖아?” “이런 위기에 그대가 있어주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군······ 그럼, 부탁하네.” 아르페 덕에 많은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급박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영주는 다급히 병사들과 기사들을 이끌고 2차 방어벽을 발동시키러 떠났다. 그러자 바로 바다와 맞대고 있는 1차 방어벽 위에는 아르페와 미케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응?” 아르페가 얼떨떨해져 중얼거렸다. “정말로 다 데려가 버렸잖아!?” “손님이 그렇게 폼 잡고 허세를 부리시니까.” 미케나가 투덜거리며 발리스타를 장전해, 쏘았다. 수면 위로 솟구쳐 나오던 몬스터 수 마리가 관통 당해 다시 가라앉았으나 워낙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우글거려 그정도는 티도 안 날 정도였다. “어쨌든 손님이 하신 말씀이니 책임지세요. 당연하지만 저 혼자는 못 막는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싹 빼버릴 줄은 몰랐는데······.” 1차 방어벽은 아까도 말했듯 높이가 낮다. 아직 루나틱 웨이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에 보이는 것이 주로 잔챙이 몬스터들이기는 하나, 아마 곧 이 정도 방어벽은 우습게 뛰어넘을 수 있는 몬스터들이 몰려올 것이다. 특히 물 안에 있을 때엔 상체는 인간, 하체는 어류의 모습을 취하다가도 바깥으로나오는 순간 다리가 솟아나는 인어 등이 루나틱 웨이브의 가장 큰 적이었다. 놈들이나타나는 순간부로 1차 방어벽은 거의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아도 좋았다. “나 혼자 이렇게 광대한 영역을······ 에라, 모르겠다. 해보지 뭐.” 아직까지 사천왕 시절의 허세를 버리지 못한 까닭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더욱이 생각해둔 수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르페는 앞으로는 조금 더 겸손해지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마나를 활성화했다. “손님, 지금이라도 영주를······.” “아니, 기다려봐.” 아르페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한 손을 방어벽 위에 얹고는, 만물열람을 발동해 바다와 프레이트가 면하는 일대를 완벽히 두르고 있는 방어벽의 구조를 철저하게 파악했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미케나만 초조해질 뿐이었다. “손님, 이제 곧 방어벽 밑에 우글거리는 몬스터들로 산이 쌓일 것 같은데요.” “기다려봐.” “손님, 저 멀리 머맨하고 머메이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기다려봐.” “손님······.” “됐어.” 이러다가 방어벽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바로 그 순간, 아르페는 방어벽의 구조를 확실하게, 전부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고개를 드는 아르페의 보랏빛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쩍였다. “손님, 저기 방어벽을 넘어오려는 몬스터가······.” “이젠 못 넘어와.” 아르페는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며 한 가지의 마법을 발동했다. 방어벽과 바닷물이맞닿는, 즉 몬스터들이 넘어오는 바로 그 면에 아르페의 마법이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마족들과의 격전 와중에 성장하여 49레벨이라는 압도적인 경지에 이른 스펠, 하이퍼 러빙이었다. “손님, 그걸로 지금······ 음?” “하이퍼 러빙에는 두 가지 발동방식이 있지. 첫째, 대상을 문지르는 것. 둘째, 대상에게 문지르는 힘을 부여하는 것.” 과거 던전 바닥을 문질러 매끄럽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첫 번째 발동방식이고, 비누에 적용하여 샤워할 때 쓰던 것이 두 번째 발동방식이다. 물론 마나 스트링 채찍을 다루던 때처럼 이 두 가지 방식을 겹쳐 발동하는 것도 가능했으나 지금 아르페가 구사한 것은 두 번째 방식이었다. “바닷물이······ 아니, 몬스터들이!” 하이퍼 러빙을 처음 배웠을 때는 기껏해야 대상을 겁나 세게 문지르는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리 마나를 많이 주입해봤자 주위 환경을 바꿔버리는 규모의 마법은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과거 대부분의 마도사는 러빙을 연구할 생각은 했어도 그것을 실생활이나 전투에적용할 엄두는 못 냈기에 스펠의 레벨은 끽 해야 20, 가장 높은 이가 30 정도였다. 아르페 역시 이전에는 하이퍼 러빙의 한계를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크구루루루루루!] [키아아아악!] 그러나 그에겐 과거 보유 마법이 하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하이퍼 러빙에 의지해야 했던 시절이 있다. 실전에서 어떻게든 마법을 응용하다보니 그의 레퍼토리도 넓어졌을 뿐더러 세상에 의미 없는 마법은 없다는 진리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지만, 가장 큰 성과는 물론 하이퍼 러빙의 성장이었다. 지금 그는 마찰의 황제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녔다. “파, 파도가.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에 저항하듯이 새로운 파도가 일고 있어요!” “마찰은 진동을 일으켜. 그리고 마나를 조율하면 그 진동의 주기와 세기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지.” 처음엔 작게 일었던 파도가 뒤에서 따라오는 파도에 합쳐져 더욱 규모를 불렸다. 아르페는 실시간으로 방어벽이 일으키는 마찰력을 조절해 진동 또한 조절하고, 그것으로 생겨나는 파도까지도 조절해 점점 더 파도의 크기를 키웠다. [캬아아아아악!] [키힉! 캬아악!] 그것도 방어벽이 설치된 일대 전부에서 말이다! “굉장해······ 너무 굉장해요, 손님! 그냥 파도를 일으키는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면 더 간단했겠지만요!” “없어! 그런 마법이 없다고!” 아르페는 성질을 내면서도 더욱 큰 파도를 만들어냈다. 대부분의 쩌리 몬스터들은 파도를 이겨내지 못해 밀려나고, 그것을 이겨내고 돌진해온 몬스터들이라 할지라도 방어벽이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마찰력을 이기지 못해 갈려나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지금은 정말로 아르페 혼자서 1차 방어벽 전체를 수호하고 있었다. “저, 저기를 봐.” “마도사님께서 자연을 부리고 계신다.” “이, 이럴 때가 아냐! 마도사님께서 시간을 벌고 계시는 동안 어서 2차 방어벽을 완성하자!” 그러나 아르페의 활약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방어벽 전체에 걸쳐 하이퍼 러빙을 구사하느라 제법 소모된 마력이 어느 정도 차오르자 그는 다시 한 번 방어벽에손을 얹었다. “손님, 이젠 저를 도와서 몬스터들을 격추······ 또 뭐하시게요?” “강화.” 아르페의 손이 반짝이며 또 한 차례 대량의 마나가 쏟아져 나오더니, 그것이 모조리 방어벽에 투자되었다. 이내 방어벽이 서서히 진동을 늘리며 밝은 보랏빛을 발했다. “잠깐만요, 아티팩트도 아닌 평범한 방어벽에 강화는 무스우꺄아아아악!” 미케나는 방어벽이 흔들리는 그때까지도 설마,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내 순조롭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높이가 낮아 머맨 부대가 출동하는 순간부로 의미를 잃을 예정이었던 1차 방어벽이 아르페의 마나를 받아들여 근본적인 진화를 이룬 끝에 강도는 물론이고 자체적인 크기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좋아, 한꺼번에 두 번까지는 강화할 수 있겠어······ 다시 간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 차례 자색의 빛이 터져 나온 다음 순간, 방어벽이 순식간에 십 미터 이상 솟구쳤다! “오오오오오, 마도사님이 방어벽에 마법을 불어넣으셨어!” “2차 방어벽과 비슷한 크기로까지 솟구친다! 이럴 수가, 저분의 레벨은 대체 몇이란 말인가!” [프레이트 수호의 의지가 깃든 진동벽+2] [이름도 부여되지 않았던 평범한 방어벽에 위대한 마도사의 손길이 닿아, 과거 루나틱 웨이브를 막기 위해 투쟁한 모든 이들의 기록을 흡수하고 새로이 거듭났다. 그 과정에서 방어벽에 걸려있던 특수 스펠의 힘에 영향을 받아 자체적으로 진동을 발하는 대형 아티팩트가 되었다.] 아르페는 설마 했던 아티팩트 탄생에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저질러버렸어.” “손님은 언제나 일을 저지르곤 하시지만······ 이건 너무 크잖아요!” 이젠 아르페가 굳이 하이퍼 러빙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진동의 힘을 부여받은 방어벽은 알아서 파도를 만들어내어 쩌리들을 몰아내고, 벽에 접근하는 몬스터가 있으면 알아서 진동의 힘을 키워 놈들을 갈아버렸다. 결정적으로 방어벽 자체가 높이 솟구쳐 벽을 넘는 시도를 하는 몬스터가 없었다. “아, 저기 대형 머맨 부대가 오네.” “그러게요, 오네요. ······한 발 늦었지만.” 낮은 방어벽 따위 얼마든지 타고 넘어가주지! 하고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바다 너머로부터 몰려오는 인어 몬스터 부대. 아주 기가 막히는 타이밍으로 나타나 혹시 주인공이냐고 물어볼 뻔 했다. [그르르르······ 우엉?] [높다. 높다!] 드디어 1차 방어벽 앞에 도착한 놈들은, 그러나 아빠엄마로부터 들은 인간 놈들의 방어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대형 방어벽과 마주하며 영문을 알 수 없어 굳어버렸다. 원래는 이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꾸어어어어엉! 벽! 아프다!] [넘을 수 없다! 넘을 수 없어!] [집에 돌아가고 싶다!] 뒤틀린 현실에 절망한 머맨과 머메이드 부대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현실도피를 시작했으나 손끝으로부터 마나 스트링을 뽑아낸 아르페가 놈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젠 하이퍼 러빙을 유지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마음껏 놈들을 학살하기만 하면되는 것이다! [쿠아아아악!] [키이익!] “경험치도 안 되는 것들이 어딜! 더 강한 놈들을 데려와라!” “음······ 2차 방어벽이랑 3차 방어벽이 굳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미케나는 조심스레 상황을 전망하며 발리스타를 들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마족과 전투의 현장이 완전히 마무리되어 허겁지겁 항구로 달려온 타국 귀족들이 그들의 배가 모조리, 흔적도 없이 침몰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한 그 순간까지. 1차 방어벽을 넘어서는 몬스터는 없었다.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5 > “아르페!” “오빠!” 마족들을 깨끗이 전멸시킨 그 순간 현장을 박차 항구로 뛰어온 메테르가 압도적인 도약력으로 단숨에 진동벽 위로 올라와선 아르페에게 매달렸다. 시에나 역시 질세라 도약했으나 그녀의 신체능력이 메테르보단 못한 터라, 중간에 벽을 한 번 디뎌야 했다. “이거 아르페가 한 거지?” “맞아.” “여기 엄청 높다!” 메테르의 마나 감각은 원래부터 특출했으나 아르페와 함께하는 과정에서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특히나 아르페의 마나가 머무는 것이라면 귀신 같이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의 마나에서 기인한 파장을 마구 뿜어내는 방어벽을 보고 있으면 그것에 아르페의 손길이 닿았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키이이이익! 인간, 내려와라!] [내, 내 노래를 들어! 내 노래를!] 그러나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방어벽에 가로막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고 있는 인어들을 비롯한 무수한 몬스터들이다. 무수한 숫자의 몬스터가 아르페와 미케나에 의해 죽어갔으나, 바다는 생명의 보고라는 말을 입증하듯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이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가 추가되고 있었다. 과연 이 몬스터의 러쉬에 끝이 있을까 싶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방어벽이 무너질 때까지는 여유로울 거야.” “아, 그래서 다들 방어벽이 아니라 도시 곳곳에 파견되어서 다른 업무를 보고 있었던 거구나.” “괘씸하게도 손님께 모든 것을 맡겨놓고 말이죠······ 누가 보면 손님이 프레이트의 영주인줄 알겠어요.” 루나틱 웨이브를 맞아 프레이트의 주민들이 해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식량의 비축은 첫 번째요 물과 함께 도시 내부로 쳐들어올 몬스터들을 대비해 거대한 도로 몇 개를 폐쇄하고 도시 곳곳에 간이 방어벽을 세우는 등의 일을 해야 했던 것. 올해의 루나틱 웨이브가 워낙 갑작스레 닥쳐왔기에 꼼짝없이 맨몸으로 고난을 겪을 판이었으나, 아르페가 만들어낸 한 수가 효과적으로 작렬해 모든 인간에게 여유를 부여한 덕에 일이 아주 조금 편해졌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아르페는 정말 제대로용사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르페는 정말 착해.” 메테르는 대체 어떻게 하면 마나도 공급받지 않는 벽이 계속해서 진동을 일으키고 파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아르페 덕분에 무수한 사람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단호히 고개를저었다. “안 착해. 그냥 마왕놈의 계략을 전부 쳐부수고, 몬스터를 내가 다 해치워서 보상을 독차지하고 싶었을 뿐이야.” “후흐.” 쑥스러울 때면 언제나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까지 사랑스러웠으니 메테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중증이었다.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애꿎은 몬스터들만 그의 마나 스트링에 갈려나갔다. 그런데 아르페에게 아양을 부리는 대신 몬스터를 잡는 쪽을 선택한 시에나가 몬스터 무리 중에서 인어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었다. “오빠, 저기 저것들은 인간처럼 생겼는데 인간이 아닌 거야?” “음······ 마침 좋은 기회이니 설명해둘까.” 기껏 파도를 이겨내고 방어벽에 다가왔다가는 진동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하고, 그래도 개대가리 놀에 비하면 학습능력이 있어 벽을 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위의 인간을 직접 노려 공격을 가하려는 인어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녀석들의 상반신은 완벽한 인간이었는데, 하반신이 물 안에 잠겨 있어 더더욱 구분하는 것이 어려웠다. “몬스터가 인간을 닮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야. 일단생긴 게 같으면 사람은 그에 동질감을 갖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딘가 방비가 허술해지게 마련이거든. 몬스터는 그 틈을 노려 공격을 하는 게 보통이지.” “응, 그런가?” 상대가 나쁜 녀석이라는 판단만 끝나면 인간이건 아니건 가차 없이 베어낼 수 있게 된 잔혹용사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아르페는 그녀를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몬스터가 인간을 닮는다고 이상해할 건 하나도 없어. 이 땅의 지배종족은 인간이니까. 중요한 건 몬스터의 생김새가 아니라, 우리가 몬스터를 대하는 마음가짐이야.” “아르페, 그건 별 문제가 아니잖아?” 메테르가 다시금 밝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그때 죽이면 돼. 그런데 모든 몬스터는 나쁜 짓을 하잖아!” “······응, 그렇지.” 반절의 정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페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다. 메테르와 시에나는 그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머지는 아르페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간단히 선악 판단이 끝난다면 참 좋겠지만······ 모든 몬스터가 악하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지. 고도로 발달된 지능을 지닌 몬스터들은 간혹 다른 존재를 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참을 수 있게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사실 이종족과 몬스터의 구분선은 인간들 사이에서, 그리고 마족들 사이에서도 종종 회자가 되는 문제이지만······ 씁,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아르페는 상념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진동벽에 몸을 거세게 부딪혀 전신을 푸른 피로 물들인 채, 저마다 눈을 붉게 물들이곤 진동벽 위의 아르페, 메테르에게 창을 던져내는 인어들은,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욕구를 참을 수 있을 것처럼은 보이지않았다. 인어는 특히나 인간처럼 개체차가 심한 녀석들이니까! 애초에 루나틱 웨이브의 영향에 휩쓸리는 녀석들 중에는 그런 놈이 있을 리가 없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다 죽이면 돼.” “응, 알겠어 오빠!” 시에나가 해맑게 웃으며 양손을 뻗었다. 온 세상에서 그녀만이 보유하고 있는 특수한 성질의 마나가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신벌!” 바다에 뛰어들어 수중전을 벌일 수도 없으니,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사제의 공격마법! 전투 사제의 상위직을 보유하고 있는 그녀이기에 전문적인 것까지는 배우지 못했지만, 신성력을 모아 내려치는 정도의 단순한 마법은 배워두고 있었다. “신벌! 신벌! 신벌!” 그녀가 지닌 공격마법은 본래 기껏해야 견제 용도로 쓰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약한 공격마법을 몇 번이고 겹쳐 한꺼번에 발동하는 것으로 규모도 넓고 위력도 강대한 즉석마법을 만들어내어 바다 일대를 타격했다. 파도가 겹쳐 보다 거대한 파도가 되듯, 공격마법 여럿이 하나로 겹쳐져 유의미한 타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키아아아아악!] [아프다! 집에 가고 싶다!] [쿠학!] 시에나의 압도적인 마력이 바다를 타고 흐르며 몬스터들에게 마비효과까지 부여하니, 누가 보면 전투사제가 아니라 마도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역시 저 녀석은 마법에도 재능이 있다니까······ 응?” 그런데 시에나가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하고 있는 아르페의 소매를 누군가 붙잡았다. 돌아보니 다름 아닌 볼이 팅팅 부풀어 있는 메테르였다. “아르페, 나는 뭘 하면 돼? 롱 소드로 일일이 쏘아 맞추기에는 몬스터가 너무 많아!” “너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저놈들보다 상위의 몬스터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저기서 뭐라도 먹으면서 체력보충하고 있어.” “나 배 아직 안 고파!” “여기다!” “모두 이쪽으로! 벽의 안쪽은 진동하지 않는다. 사다리를 세워!” 메테르가 잔뜩 삐져 발을 동동 구르는 그 순간에도 1차 방어벽에 사다리를 걸쳐 올라오는 인간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바다 속에 가라앉아 더는 돌아올 수없게 된 배에 애도를 표하는 일을 마친 후, 타국의 귀족과 상인들, 기사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챙겨들고 방어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이트에 닥친 위기는 타지인인 그들이라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저도 가세하겠습니다, 마도사님!” “마도사, 그대 덕분에 하나의 도시가, 나아가 하나의 나라가 구원받았다. 지금부터는 나도 전력으로 그대를 돕겠다!” “······그런데 마도사, 혹시 우리 배를 침몰시킨 개새······ 몬스터가 어떤 놈인지 가르쳐줄 수 있나?” 아르페가 적당한 비즈니스 스마일을 지어주며 그들을 각자의 위치로 보내던 와중, 돌연 메테르는 커다란 결심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나, 알았어.” “당신들은 저기로, 아니, 어떤 놈인지 모른다니까. 인양? 그건 너희 나라에 부탁하시고······ 응? 메테르, 방금 뭐라고?” “나, 바다 속에 들어가 보는 게 꿈이었어!”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메테르를 아르페가 한껏 비웃어주려던 찰나, 메테르는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한 후 냅다 방어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야아아아아아압!” 방어벽의 안쪽이 아닌 바깥쪽, 수만이나 수십만이라는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물량의 몬스터가 몰려오고 있는 그곳으로! “으아아아아아, 메테르!” “헉, 광전사가 바다로 뛰어든다!” “역시 광전사! 저대로 자기 삶을 끝낼 작정인 게 틀림없어!” “치정싸움에서 사제한테 밀린 게 분명해.” 주위에서 정신 나간 헛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는 그들 모두를 바다로 떨어트릴까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메테르, 바보야! 당장 올라와! 바다 위를 걸어 다니는 아티팩트라도 있으면 모르······.” “흐아아아압!” 언제나 그래왔던 것 같긴 하지만 메테르는 이쯤에서 아르페의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수면으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롱 소드를 거세게 휘둘러 세 마리의 인어를 베어내고는, 그대로 검을 수면에 내려치며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 점프한 것이다! “에잇, 합!” [크악!] [캬아아아악!] 한 번으로 끝나면 섭섭하다. 메테르는 또 다른 곳에 떨어지기 직전에 검을 휘둘러네 마리를 베어내고 이하생략, 이하생략, 이하생략! “어······.” 당장 마나 스트링을 던져 그녀를 낚아채려던 아르페는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조금 전에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게 꿈이라고 말한 주제에 지금 메테르는 몸에는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고 평지에서 뛰노는 것처럼 바다 위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거······ 어······.” “손님, 저게 어떻게 가능해? 하는 눈으로 저를 보셔도······.” “언니 대단해······.”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의 무게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만 같은 가벼운 몸놀림은 언제나의 그녀와 같았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몬스터의 위치와 저항, 스스로가 검을 휘두르는 힘, 검면이 수면과 충돌할 때의 반동까지 모두 계산하고 움직이는 것은 정말이지······. “······자네도 해볼 텐가, 알프레드?” “죄송합니다, 주군. 죽습니다.” 설마 다른 기사들도 바다 뛰어다니기 스킬을 익히고 있는 것일까 의심했던 아르페였으나 다행히도 그녀 외의 검사, 전사들은 모두 바다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메테르를 보며 아르페와 마찬가지로 넋이 나가 있었다. “그래, 역시 쟤 혼자만 이상한 거였구나.” “역사서에 기록될 만한 장면이라구요. 비록 조금 꼴사납긴 하지만요!” 메테르를 따라 기사 백 명 정도가 바다로 뛰어들어 저렇게 뛰어다니고 있으면 볼 만 했을 텐데, 살짝 아쉽다는 생각을 거두며 바다로 시선을 돌리는 아르페. 그런데 때마침 바다 저 너머에 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였다. “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최종보스가 나타날 때의 분위기였다. 아르페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으나, 거대한 그림자가 만물열람의 확인범위 안으로 들어온 바로 그 순간 그의 모든 기대와 희망은 박살나버리고 말았다. [크라켄] [레벨 ? 267] “아놔, 미친.” “왜 그러세요, 손님? 이대로만 있으면 족히 며칠은 순조롭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페는 미케나의 질문에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크라켄 떴다.” “······손님, 농담두 참 잘하신다니까.” 그녀가 정말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면 발리스타를 거두고 도망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르페의 말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그녀가 제법 기특하고 귀여웠다. “어딜 가.” “놔욧!” 그건 그거고 도망은 금지다. 그는 잽싸게 짐을 정리하고 돌아서는 미케나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미케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끝까지 함께하자.” “이럴 때만 자상하게 이름을 부르다니! 이것 놔요, 전 살아야겠어요!” “도시로 도망치면 마족이 기다리고 있어.” “으아아아아아! 손님 나빠! 나쁜 놈!” 미케나가 절규했다. 다음 순간, 그녀에게 호응해주듯 저 먼 바다 위로 한없이 거대한 촉수가 솟구쳤다. 보스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 Chapter 12. 루나틱 웨이브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3. 크라켄 - 1 > 크라켄.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바다의 거대 괴수다. 무수한 세월 다른 경쟁자를 잡아먹고 몸을 불려, 압도적인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마력과 물리력을 겸비하게 된 재앙의 몬스터.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가는 선원들도 대부분은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나타난 이상은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수어 삼키기 때문에 결국 그 실체가 오징어인지, 문어인지 혹은 가재인지는 아는 이가 없다, 는 것이 전설에 흔히 나오는 내용이었다. [크라켄] [레벨 ? 267]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바로 그 크라켄이 지금, 프레이트 앞바다에 나타나 있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 아르페의 만물열람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아직 두 가지 뿐이었는데, 하나는 놈의 레벨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놈이 오징어라는 사실이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오빠, 저거 먹는 거야?” “아니, 보통은 먹히는 거야.” 아니, 이제 막 인간들이 모여 서로 화합하며 몬스터에 대적해보려는 순간인데, 인간들의 우정과 용기로 멋들어진 서사시가 그려지는 그때에 대뜸 최종보스가 나타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빼도 박도 못하는 진짜 크라켄이잖아욧!” “다리 엄청 크다아!” “서, 설마.” “크라켄!? 정말 그 끔찍한 놈이란 말인가!” 상도덕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놈은 최종보스답게 존재감을 드러내 겁만 주려는 것도 아니고, 아예 프레이트를 확고한 목표로 삼고 먼 바다에서부터 연안까지 일직선으로 쇄도해오고 있었다! [키히이이이이!] [온다, 놈이 온다!] 크라켄의 존재감에 벌벌 떠는 것은 비단 인간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육지를 탐하려던 해상 몬스터들 역시 놈의 접근을 느끼고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놈의 말을 듣는다. 복종하라!] [듣지 않으면 죽는다. 다 같이 죽는다.] 특히나 머맨과 머메이드들은 복종이니 하는 말들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 인어들과크라켄 사이의 뚜렷한 상하관계를 암시하고 있었다. 루나틱 웨이브에 크라켄씩이나 되는 몬스터가 나타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인데, 아무래도 이 적극적인 크라켄이 일대의 인어들을 지배해 다스리며, 이번 루나틱 웨이브까지 진두지휘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올해에!” “손님, 놔주세요. 제발!” “아냐, 우리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너만 죽자.” “지금 여차하면 절 먹이로 내주고 튀겠다는 말을 돌려서 말씀하신 거죠, 그렇죠!? 놔달라구욧!” 미케나는 울상을 지으며 끝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실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아예 이 도시에서 도망치지 않는 이상 크라켄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프레이트에 그녀의 출입기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위험해졌다는 이유로 도시를 빠져나오기라도 하면 상인의 자격에 그 순간 거대한 금이 그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상품도 고객도 버려두고 제 안위를 쫓았으니, 목숨을 건지더라도 앞으로 상인행세를 하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여기서 살아남으면 그것만으로 업적이 될 수도 있어.” “업적······?” 아르페의 말이 미케나의 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 말에 떠올리게 되는 것이 있었다. “업적이라면, 설마······.” “상위클래스를 얻을 때 레벨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라구요?” “어떻게 판단하든 네 마음이야. 네가 알아서 해.” 그녀가 상인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크엘프치고 사연이 없는 이는 없다. 미케나는 그리 쉽게 상인이라는 클래스를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더라도 말이다. “······어떻게, 저 무지막지한 괴물을 이겨낼 방법은 있나요?” 결국,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을 꽉 주어 일어나며 조심스레 아르페에게 물어왔다. 아르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걸 지금 고민 중이야.” 단언컨대 이 자리의 다른 인간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레벨이 가장 높은 이가 시에나보다 레벨이 낮으니 크라켄과 정면으로 부딪혀 단 한순간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라곤 자신과 던전 상인들을 비롯해 아주 조금 뿐이다. “이 방어벽도 크라켄이 전력으로 부딪혀오면 결국 무너질 테고.” “방어벽······ 강화, 그렇지! 잠깐만요, 손님!” 그때 미케나가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다급히 그를 붙잡으며 물어왔다. “손님, 마석이 있으면 강화를 중복해서 펼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이렇게 작은 부츠에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이런 거대한 방어벽의 강화를 보조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마석을 구하려면······.” 아르페는 말을 잇다 말고 멈추었다. 미케나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전 영혼 계약서를 들고 영원의 숲에 대해 얘기한 이래로 처음 보는 진지한 눈이었다. “가능한가요, 손님?” 그래서일까, 아르페 역시 어울리지도 않게 제법 진지해지고 말았다. “······내 계산으로는, 앞으로 두 번만 더 강화하면 크라켄이 넘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어.” “필요한 마석의 규모는 산출이 가능할까요?” “레벨 200이 넘어가는 놈의 마석으로 500개 정도. 속성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무조건 레벨 200을 넘긴 상위 클래스의 것이어야 해.” 마석은 몬스터에게서 가끔 드롭되는 순수한 마나의 결정이다. 마석마다 지니고 있는 속성이 다르며,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에너지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마법이나 아티팩트의 보조 재료로 이용되는 일이 많고, 당연히 대개 비싼가격에 거래되며, 레벨이 높은 몬스터의 것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가치가 상승한다. 그리고 레벨 200이 넘어가는 몬스터의 마석이 500개라면······. “오늘 경매장에서 거래될 뻔했던 물건들을 전부 살 수도 있겠네요.” “디아스를 전부 털어도 그만한 마석이 나올까 의문이다만.” “나와요. 나오게 되어 있어요.” 미케나는 강한 확신을 품고 말했다. “돈은 귀신이라도 불러내는 법이니까요.” “너······.” “협상이 필요해요, 손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반드시 500개 모두 가져다드릴 테니까.” 미케나는 곧장 뒤돌아서서는 방어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도망을 치려는 자의 뒷모습이 아닌, 목숨을 건 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뒷모습이었다. “아줌마 주제에 폼 잡기는······.” 그는 이 순간 확신했다. 만약 오늘을 무사히 넘기기만 한다면, 미케나는 무사히 상인의 상위 클래스로 진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래, 오늘을 무사히 넘긴다면 말이지······.’ 크라켄의 등장에 우왕좌왕하는 인간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혼돈에 빠진 몬스터들만 보고 있으면 오늘이 세상 종말의 날인가 싶었다. 역시 다 때려치우고 도망갈까하는 충동이 강렬하게 그를 자극했다. 그때 크라켄의 등장을 알아차린 메테르가 깡총깡총 수면 위를 점프하며 다시 아르페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르페, 저거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마 바다를 펄펄 끓이면 알아서 익지 않을까?” “와아, 그러면 맛있겠다!” 메테르는 아르페의 농담에 순수하게 웃었으나 다음 순간에는 백옥처럼 고운 손을뻗어 지그시 아르페의 한쪽 뺨을 꼬집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 한 켠에 실로 광전사에게 어울리는 분노 한 조각이 깃들어 있었다. “아야야.” “난 지금 진지한데, 아르페?” “나도 진지해. 누가 저 바다를 좀 끓여줬으면 좋겠어.” “바다를 끓일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어!” 사람은 아니고 마족이지만 있기는 있지.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만 그렇게 대꾸했다. 에트나가 나서 마법이라도 한 방 갈겨준다면 모든 일은 간단하게 해결되겠지만, 마왕의 족쇄에 묶인 그녀가 이번 일에 직접적으로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세상 일 참 엿 같이도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아르페에게 메테르가 말했다. “나는 아르페를 믿지만,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도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아르페.” 메테르가 아르페와 시에나의 귓가에만 닿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어떻게 해도 못 이기겠으면 말해줘야 해. 그러면 내가 아르페와 시에나를 데리고 도망칠게.” “다른 사람들은 다 죽게 내버려두고?” “사람들이 죽는 건 슬픈 일이지만, 아르페가 죽으면 온 세상은 내게 의미가 없어지고 말아. 내게 더 중요한 걸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준 건 아르페였어.” 그런 쓸데없는 영재교육까지 했었다니! 아르페는 칫, 혀를 차며 그녀의 머리에 알밤을 놓았다. “이기진 못해도 물러나게는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응, 그러면 믿을게.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줘, 아르페.” “오빠, 나두 준비되어 있어!” 메테르와 시에나는 아까 경매장에서 마족들을 주로 상대해 죽인 덕분에 레벨이 각기 올라, 메테르는 195레벨, 시에나는 174레벨까지 올라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200레벨을 돌파할 것만 같은 메테르는 둘째 치고 시에나 또한 제 레벨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잡아 제법 큰 폭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이 위험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터무니없이 위험한 일이야. 까딱하다간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어.” “무슨 일인데?” “놈이 최대한 이곳에 늦게 도착하도록, 유의미한 타격을 먹여 주의를 끌면서 그 속도를 늦춰야 해.” “······.” 설마 했던 정면 돌격명령에, 메테르는 잠시 멍해져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제법 먼 거리이기는 하나 보고 있기만 해도 겁날 만큼 빠른 속도로 돌진해오는 크라켄의 모습이 그녀의 두 눈에 가득 확대되어 들어왔다. 그녀가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놈을······?” “응. 아마 이 자리에선 메테르, 네게만 가능한 일이야.” 메테르에게는 가속이라는 고유능력이 있다. 저 무지막지한 크라켄의 반응속도에 맞추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가속을 발동한 그녀뿐이었다. 아까 메테르가 천재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감각적인 움직임으로 바다 위를 활보할 때 확신했다. “나와 마나를 링크하자. 그리고 필요한 만큼 가속을 발동해. 그러면 분명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어.” “······알겠어.” 레벨 267의 대형 몬스터를 상대로 시간을 벌라고 말하는 아르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메테르나 이미 맛이 반쯤 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맛이 간 것은 이 상황이었다. “해볼게. 지금 바로 갈게.” “제일 중요한 건 네 목숨이야, 메테르.” 아르페는 메테르의 전투 부츠를 벗기고는, 자신의 검은 가죽 부츠를 벗어 그녀에게 신겼다. 아티팩트는 주인의 의지를 받아들여 저절로 메테르의 발목에 맞추어 크기를 줄였다. “위험하면 바로 도망쳐 와야 해. 그땐 나도 이곳을 버리겠어.” “아으으으.” 그는 메테르에게 부츠의 사용법을 설명해주며 덧붙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르페의 말은 더 이상 메테르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처, 천국인가? 아으, 천국!” 아르페의 행동 때문에 메테르의 행복도가 한계를 돌파하여 그녀를 천상계에 데려다놓았기 때문이었다. 아르페는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메테르? 야!” “······핫, 응! 나 지금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 괜찮아······?” “완전히 괜찮아! 천국을 걷는 것 같아!”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아르페를 마주보는 그녀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만약 크라켄이 그녀의 부츠를 벗기려고 한다면 그녀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크라켄을 찢어발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딘가 불안해진 아르페를 놔두고 메테르는 다급히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 바로 갈게! 그런데 아르페? 그 녀석, 내가 죽여 버려도 상관없는 거지?” 그 말을 들으니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죽이지 말고 도망쳐. 도망치라고!” “흐아아아아압!” 에너지가 풀충전된 메테르가 아르페의 말도 듣지 않고 바다로 점프했다. 몬스터를 일일이 죽이지도 않고 놈들의 머리통이나 높이 쳐든 창 따위를 디딤돌 삼아 잘도앞으로 돌진하는 메테르! 지금 그녀의 기세라면 정말로 크라켄을 죽여 버릴 것 같아무서울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이지······.’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일을 용사 혼자서 해치우는 것은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상에서 눈을 돌려 불편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곳에 자신에게 내려질 지명을 기다리는 또 한 명의소녀가 있었다. “뭐든지 말해, 오빠!” “시에나.” “응!” 그가 부탁한다면 밤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늠름한 목소리로 답하는 시에나에게, 아르페는 차라리 별을 따오는 것이 더 안전할 만큼 위험한 부탁을 했다. “······사실 너는 메테르보다 더 위험한 적을 상대해야 해.” “응? 저 오징어보다 위험한 적이 있었단 말이야?” “지금 당장은 적이 아니지만, 그래.” 사실, 아르페는 미케나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방어벽을 두 번 강화하는 데에 200레벨 이상 몬스터의 마석이 500개 소모된다, 거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두 번 강화하는 정도로는 크라켄을 막아낼 수 없었다. 한 번이 더 필요했다. 그것도 크라켄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속성으로, 더없이 화려하고 강렬한 아르페 인생 최대의 강화를 이루어야 했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강화의 보조 재료는 실로 간단했다. “이 편지를 갖고 C구역, 제이미 여관으로 가.” “C구역, 제이미 여관······.” 아르페가 막간을 이용해 써둔 편지를 받아들며 그의 말을 되뇌는 시에나에게, 그는 처량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거기서 기다리는 여자한테, 내가 손 한 번만 잡아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줘.” 세 번째 강화의 보조 재료는, 다름 아닌 불의 마녀 에트나의 마력이었다. < Chapter 13. 크라켄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3. 크라켄 - 2 > “마도사님!” 두 소녀를 각자의 위치로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르페는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휩싸였다. 방어벽 위보다는 시내가 안전할 텐데도, 사람들은 아르페의 곁이 가장 안전하다고 확신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마도사님, 저 크라켄을 보세요!” “어떻게든 해주십쇼,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크라켄을 어떻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마도사님!” “마도사니이이임!”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달라붙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아르페는 1년 전 산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사람들은 저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아르페에게 구원을 구걸했었다. 아르페나 메테르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며, 그만한 힘을 지녔으니 당연히 자신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듯이. “달라붙지 마. 떨어져라.” 아르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을 떨쳐내고는 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3차 방어벽을 세우다 말고 크라켄의 등장하는 바람에 얼이 빠져있는 프레이트 영주를 붙잡고 필사적인 열변을 토하고 있는 던전상인 미케나의 모습이 있었다. “네놈들의 힘을 모두 뭉쳐봤자 크라켄을 어찌할 수 없듯이 나도 맨몸뚱이만 가지고는 크라켄에게 비벼볼 건덕지가 없어. 그러니 살고 싶다면 크라켄의 육지 습격을 피해 꽁지 빠져라 내륙 산간지방으로라도 달려가 보든지, 저 상인이 필요로 하는 걸내주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하지만 저 상인은 지금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위기상황에 장사를 해먹으려고······.”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놈의 말을 대충 잘라내고 축약하면 이러했다. 레벨 200이상의 마석 정도 되면 수요에 비해 공급이 압도적으로 적은 물건이고, 당연히 판매자들 간의 담합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물건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한꺼번에, 그것도 많은 경쟁자들이 있는 가운데 거래하게 되면 담합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대체 얼마를 받고 팔아야 만족하는 건데?”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문의 마석은 저 따위 상인에게 도매로 취급되어야 할 물건이 아니라, 보다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 “그래서 얼마냐고.” “개, 개당 만오천 골드는 받아야······.” “······뭐?” 매매가 잘 되지 않는 물건에 시세를 붙이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도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벨 200의 마석의 가치는 결코 5천 골드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던 미케나조차 설마 귀족들에게서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겠지. 아르페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마석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나야. 네놈들도 알고 있겠지만 이 도시에 모인 힘만으로는 크라켄에게 대적할 수 없으니 방어벽으로 놈의 돌진을 막는 게 최선인데, 이 정도 방어벽으로는 크라켄을 막을 수가 없고, 고위의 마석을 잔뜩 모아 그 힘을 강화시키지 않는 한 우리나 이 도시나 사이좋게 박살이 날 수밖에 없거든.” “아니, 그렇다고 해도 500개의 마석이라니······.” “그러니까 네놈들은 지금 그 상인이 아니라 나를 욕하고 있는 거야. 자, 그러면 묻자. 지금 이 위기상황에 장사를 해먹으려는 건 나냐, 아니면 네놈들이냐?” 아르페의 눈빛은 14살의 그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심유했다. 그가 뿜어내는기이한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용사에게만 존재하는 능력이었으나, 지금 아르페는 정말로 짜증이 나 있었기에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흠, 큼큼······.” 그럼에도 놈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타국인인 자신들을 엿먹이기 위해 마도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굳이 자신이 마석을 내놓지 않아도 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닐까, 이 방어벽을 강화하지 않더라도 살아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외에도 다른 무수한 그래도, 혹시나, 어쩌면 등등의 마석을 내놓지 않기 위한 변명이 놈들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이 빤히 보였다. 만물열람이 아니라, 이미 과거 그런 이들을 무수히 겪어온 아르페의 경험이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걸렸다. “후우······ 정말 인간은 언제나 언제까지고 같구나.” “하지만 마도사님······.” “꺼져. 내 눈에 들어오지 마.” 마음 같아서는 놈들을 그대로 바다 저 너머로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어쨌든 미케나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한 것이다. 그녀가 다시 도움을 청해오는 그 순간까지는 나서지 않으리라. 아르페는 자신들은 내놓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아르페가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원하는 인간들로부터 고개를 돌려, 지금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크라켄이 나타난 후로 다른 몬스터의 움직임은 소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놈의 기운에 억눌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놈들도 있었으니, 인간들이 이대로 우왕좌왕하고 있어도 몬스터들이 진동벽을 넘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메테르······.” 당장의 상황파악이 끝나자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 너머로 향했다. 바다를 질주해 빠르게도 크라켄에게 접근해가는 메테르. 한 번 뜻을 정한 그녀의 움직임에는 망설임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게 용사가 아니라면 누가 용사일 수 있을까, 아르페는 위기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옹!] 크라켄이 울부짖었다. 놈의 마나를 담은 파장이 바다 전체로 퍼지며 더더욱 많은 숫자의 몬스터를 끌어 모았다. 그 중 일부는 놈의 거대한 촉수에 휘말려 잡아먹혔고, 일부는 놈의 뒤로 붙어 따랐다. 길게 끌고 갈 것도 없이 단숨에 끝내버리겠다는 의지로 충만해보였다. “흐아아아아압!”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메테르가 용감하게 놈의 앞을 막아섰다. 바다 위를 내달리던기세 그대로, 롱 소드에 마력을 있는 힘껏 담아 에너지의 광선을 쏘아낸 것이다! 그 거체와 정면으로 부딪히면 오히려 자신이 데미지를 입고 튕겨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레벨 200에 근접해가는 용사의 일격은 과연 크라켄에게도 유효한 타격을 먹였다. 공격을 개무시하고 달려오면 어쩌려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메테르의 공격에 얻어맞은 순간 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직은 안 돼! 거기 멈춰!” [크아아아앙!] 잔뜩 성이 난 놈이 집채만큼 거대한 촉수를 날려 메테르를 공격했지만 그녀는 아르페의 말을 따라 가속 스킬을 주저 없이 사용하여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재차 빔!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롱 소드의 검첨에서 일직선으로 튀어나온 에너지의 결정체가 크라켄의 머리통을 쪼개 검붉은 피를 터트렸다. 그것은 크라켄의 압도적인 덩치를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이들을 환호하게 하기에 충분한 일격이었으나 놈이 입은 타격량을 냉정하게 계산한 아르페는 고개를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손가락이 생선가시에 찔린 정도의 데미지겠군.” “그것 참 희망적인 말씀이네요.” 혼잣말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르페는 숨을 몰아쉬며방어벽 위에 올라선 여자, 미케나에게 한 손을 내밀며 물었다. “500개 다 모았냐?” “아직, 180개 정도요. 애니웨어 본부와의 통신 결과는 긍정적이었어요. 지금 이 곳에 머무르는 디아스의 귀족도 많은 만큼 지원도 확실히 받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손님 말마따나······.” “디아스 내부에서 모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거지. 그럴 줄 알았어. 디아스에는 레벨 200을 넘기는 몬스터의 출현빈도부터가 낮으니까.” 그리고 그녀에게 모자란 마석을 제공해줄 수 있는 귀족과 상인들은 전부 이곳에 모여 있다. 아르페는 일단 마석 180개가 든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아쉽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1차 강화는 어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래? 이 돼지들은 마석을 팔지 않겠다는데.” “아뇨, 팔게 될 거예요.” 미케나의 눈빛은 아직까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눈으로 방어벽 위의 모든 귀족과 상인들을 훑었다. 지금 보니 타국의 귀족과 상인 대부분이 이곳에 있었다. 욕심이 그득한 만큼 놈들의 눈썰미 하나는 정확하다. 그들은 시내에 숨어있는 것보다, 설령 그곳이 최전선이라고 해도,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한 자의 곁에 있는 쪽이 더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자국으로의 통신 마법도, 상품의 소환마법도 모두 애니웨어 상회 본부에서 지원해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레벨 200 이상 몬스터의 마석을 6천 골드에 판매하는 건 결코 손해가 아닐 거예요.” “누구 멋대로! 우리는 그 가격에는 팔 수가 없다. 그건 우리 가문의 이름을 땅으로 떨어트리는 일이야!” “6천 골드? 하! 이전 수도에서 있었던 마석 경매에 참가했던 이들이 네 말을 듣는다면 모두 비웃을 게야! 만오천 골드! 만오천 골드 이하는 없다!” 만오천 골드, 아마도 그것이 그들의 나라에서 마석이 찍었던 최고 가격인 모양이었다. 어리석어도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을까 싶어 사람들을 돌아본 아르페는 그제야 깨달았다. 마석을 비싼 가격에 팔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각 나라나 상회의 수뇌부이며,지금 이대로 가다간 정말 모두 끝장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미케나와 거래를 하려고 마음 먹은 귀족이나 상인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후, 역시 그러시군요. 다른 분들의 의견도 같습니까?” “그럼, 우리만 손해를 보란 말이냐?” 설령 마석 만오천 골드보다 낮은 가격에 팔 의향이 있었다고 해도, 눈앞에서 다른이가 만오천 골드에 거래를 하고 있으면 절로 욕심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인간들은 한 무리로 똘똘 뭉쳐 만오천 골드라는 평균가를 밀어붙이고 있는 것. 만오천 골드에 320개의 마석을 구입한다면 제아무리 애니웨어 상회라도 파산해버리고 말 것이다. 미케나는 굳이 그들을 더 설득하지 않고, 아르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르페님.” “왜?” 여태껏 손님이라는 호칭으로만 부르더니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르페는 기꺼이 그녀에게 어울려주었다. “저들이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건 마석이 곧 방어벽의 강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이기도 해요. 그러니 증거를 보여주신다면 아마 저들도 조금은 진지하게 제 말을 들어줄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설령 내가 저들 눈앞에서 강화를 해보인들 놈들은 어떻게든 발을 뺄 것 같은데?” “그건 그때 가서 어떻게든 하죠.” “하!” 좋아, 이 정도 기개는 보여야 용사의 전속 상인에 어울리지. 아르페는 그녀의 말에 대답은 않고 씩 웃으며 방금 자신이 받은 마석 주머니를 냅다 허공에 던졌다. 주머니 끈이 풀리고 오색찬란하게 반짝이는 180개의 마석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아, 아니!” “하나에 수천 골드가 넘어가는 저 보물들을······!” “마, 마도사님! 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잘 봐둬. 이걸로 더 이상 모르는 척은 못 하게 될 거야.” 아르페는 한 손을 방어벽 위에 얹었다. 사방으로 흩뿌려진 마석들 역시 뒤따라 벽의 곳곳에 떨어져 내렸다. 그는 강화 스킬을 발동했다. “자, 잠깐만.” “설마 정말로······?” 그 순간 방어벽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밝은 보랏빛을 뿜어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180개의 마석이 하나둘, 차례대로 순수한 마력으로 화해 방어벽으로 흡수되어 간다! “후우······.” “자, 잠깐.” 이내 보랏빛이 모든 마석을 집어삼키고, 아주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눈 깜짝할순간에 사라진 수십만 골드의 재화에 사람들이 멍해져 있다가,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려던 그 순간. “마도사님, 지금 당신은 대체 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모든 빛을 흡수한 방어벽이 그대로 수십 미터 위로 솟구쳤다! “다들 안 떨어지게 조심해라!” “하, 항구가 부서진다! 모두 방어벽에 달라붙고 있어!” “맙소사, 몬스터들의 사체까지······.” 방어벽은 강화 과정에서 부족한 것을 주위 환경과 기록에서 끌어 모아 닥치는 대로 몸집을 불리고 단단하게, 굳건하게 만들고, 진동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2차 방어벽은 물론이고 3차 방어벽도 감히 비교하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방벽이 완성되었다. 본래 재질은 단순한 돌이었을 텐데, 세 차례에 걸친 강화 끝에 짙은 검보랏빛으로 물든 방어벽은 금속질의 광택을 발하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프레이트의 수호벽+3] [소유주 ? 아르페] [나라를, 도시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염원이 위대한 마도사의 힘으로 뭉쳐 탄생한 초대형 아티팩트. 벽이 뿜어내는 강렬한 진동은 어지간한 몬스터가 감히 항구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주인이 원한다면 규모를 줄이는 대신 강도를 높일 수도 있다.] “이럴 수가.” “저, 정말로 방어벽이 더 높아졌어······.” “마석이, 그 많던 마석이 모두 사라졌다. 상인의 거짓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역시 강화 스킬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설마 아르페에게 소유권까지 따라올 줄이야! 비록 그 대가로 소모한 마석의 양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날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높다.” “저 아래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몬스터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보이는구나······.” 이 정도 방어벽이라면 머맨이 아니라 머맨 킹이 와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리라. 예년의 루나틱 웨이브였더라면 이 시점에서 다들 짐 챙겨서 철수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크라켄이 상대라면 이 방어벽도 5분이 한계였다. [쿠아아아아앙!] “안 돼! 못 와!” 메테르는 아직까지 잘 버텨주고 있었다. 크라켄이 메테르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전진을 멈추지 않았기에 점점 놈과 프레이트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만약 메테르가 없었더라면 놈은 이미 진즉 육지로 상륙했을 것이다. “보셨겠죠! 한 번만 더 강화를 이룬다면 크라켄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강제로 빼앗겠다는 것도 아니고 손해를 보지 않을 만큼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거예요, 그것으로 당신들의 목숨은 물론이고 이 도시와 나라, 나아가 대륙을 지킬 수 있다구요!” “크흠,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더 한다고 과연 똑같이 성공할지는······.” “마도사님을 의심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마석이 그렇게나 많이 소모된다는 건 믿기가 힘든 일인데.” “아니지, 벽이 더 단단해진다고 해서 크라켄을 막아낼 수나 있을까?” 미케나의 이가 빠득, 갈렸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도망칠 길을 찾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인간들, 죽음의 위기를 앞에 두고도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하는 아둔한 것들! “어차피 이번 경매는 통째로 아작났습니다! 그 돈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구하는 겁니다, 누구 하나 뒤로 물러설 수 있는 상황이 아녜요! 그런데 다들 그렇게 눈치만 보고 계실 건가요!” “내가 타고 온 배가 침몰했네. 이미 재정적 손해가 막심해. 그렇지, 프란츠 경은 손해를 보지 않았잖은가. 확실히 가문에 마석이 제법 있다고 들었는데······.” “아, 아니.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오. 가주가 꽉 틀어쥐고 있어 내게는 어떠한 권한도······.” 물러날 길이 없자 귀족들은 다른 사람들을 팔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마석 320개만 모이면 되니 자신만은 빠져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을 부리는 것이다. 차마 듣고 있기도 힘들었다. “······여러분의 의사는 잘 알았습니다. 구매를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케나가 차갑고 단호한 말로 귀족과 상인들 사이의 논쟁을 끊어버렸다. 아주 조금의 정적, 그 안에서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섬뜩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이 아닌 아르페를 똑바로 보며 물어왔다. “아르페님. 돈은 나중에 반드시 이자까지 쳐서 드릴 테니 그 상품을 제게 파시지 않을래요?” “무슨 상품?” 네 영혼, 같은 대답이 나올까봐 무서웠는데, 미케나는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상품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 방어벽이요. 실은 영주님께 방어벽의 소유권한이 아르페님께 넘어갔음을 확답 받고 오는 길이거든요.” “······호오.” 그녀의 말을 듣는 아르페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났다. 영주와 미케나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짐작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이 수단을 마련했음에 분명했다. 다들 제법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가! “가격은?” “원하시는 만큼 쳐드려야죠.” “마음에 드네.” 둘 사이의 거래가 착착 진행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 이들이 부르르 몸을떨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좋아, 까짓 팔지 뭐. 그렇게 되면 강화비는 따로 챙겨주겠지?” “그렇게 되면 사유권 침해자에 대한 처벌은 도와주시겠지요?” “사유권, 그거 나도 참 좋아하는 말인데.” 아르페와 미케나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귀족과 상인들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에게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Chapter 13. 크라켄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3. 크라켄 - 3 > “6, 6천 골드에 팔겠소.” “그래, 나도 팔겠다. 이 치사하고 더러운······!” 이러다가는 방어벽 바깥으로 내던져질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에 지배당한 귀족과 상인들이 드디어 태도를 바꾸었다. 본가에도 마석이 없네, 마석은 있지만 자신에게는 소유권이 없네 떠들어대더니 그 짧은 사이에 텔레파시로 가주를 설득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물건의 가격은 언제나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법. 심지어는 때에 따라 구매자와 판매자의 입장이 뒤바뀔 수도 있음을 아직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뇨, 파는 것은 제 쪽입니다.” “파, 팔아?” “무엇을?” “드디어 돌아버린 것인가?” 미케나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방어벽 위 모든 인간들의 귓가에 들어갔다. 미리 대사를 준비해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말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제가 파는 것은 방어벽에 보호받을 권리입니다. 디아스의 모든 주민과 귀족, 상인은 마석 확보에 조력하고, 시내를 정비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그 지분을 확보했지만, 공교롭게도 여기에 계시는 타국의 귀족 및 상인 여러분은 아니거든요.” “뭣, 이 자리에 있을 뿐인 지형지물에 권리니 뭐니······.” “아, 이거 지형지물 아냐.” 아르페가 히죽 웃으며 바닥에 손을 얹자, 그토록 거대했던 방어벽이 서서히 몸집을 줄여나갔다. 그것을 느낀 귀족들이 경악했다. “내가 원한다면 이대로 축소해서 다른 곳에 설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 그렇지, 이 벽에 보호받을 권리를 지닌 사람들만을 보호할 수 있게 3차 방어벽 뒤에 놓아도 되겠네.” “이,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어찌 이 거대한 벽을 마음대로 축소할 수 있단 말인가!” “시험해볼래?” 아르페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방어벽이 더욱 축소되고, 어느덧 바다에서 아우성치던 몬스터들이 벽 위를 넘볼 수 있을 만한 크기까지 줄어들고 말았다. [캬아아아아악!] [놈이 온다. 처벌당하기 전에 전과를 올려야 해!]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대체 크라켄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지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위로 창을 던져오는 머맨과 머메이드들! 우연찮게 날아든 창 하나가 기사의 투구를 박살내버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악!” “사, 사겠소! 이 벽에 보호받을 권리를 사겠소!” “사겠단 말이오!” 사실 거기까지가 방어벽 축소의 한계였지만 사천왕 최약체의 특기 하늘을 찌를 듯한 허장성세 스킬이 크리티컬로 발동한 덕분에 그와 마주하는 이들은 정말로 그가 벽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어버리고 말았다! “좋습니다, 한 분당 레벨 200이상 마석, 3개씩만 받겠습니다. 본가와의 통신도 상회의 전송 마법도 무료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거래를 시작하죠.” 이렇게 해서 미케나는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방어벽 구축에 필요한 마석, 그 이상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르페는 허겁지겁 본국과 본가에 연락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정말 벼랑 끝까지 내몰리지 않으면 인간은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그러게요, 정말 혐오스러워요.” “하지만 거래가 가능해진 상황에서 네가 갑자기 제 이득을 챙기려 한 것도 사실이지. 너도 마찬가지야.” 아르페의 허장성세가 아니었으면 일이 파토날 수도 있었다. 마나 스트링을 동글게 말아 미케나에게 알밤을 먹이자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미 어마어마한 지출이 있었거든요? 이 딜이 통하지 않았다면 설령 살아났어도 상인 때려치우고 도망가야 할 처지였다구요. 기껏 업적을 세워 상위클래스를 얻으려는데 그렇게 되었더라면 억울해서 빵도 목으로 안 넘어갔을 거예요.”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어쨌든 그녀 덕분에 500개의 마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더 이상은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남는 문제는 하난데······ 에트나, 아직이야?’ 성공적으로 두 번 강화를 하는 시점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게 될 터인데, 사실 에트나가 없으면 모든 게 말짱 꽝이 되고 만다. ‘에트나, 제발 손 한 번만 잡자. 절대지배에 거스르지 않는 조건을 생각해내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아르페는 이제 평범한 사람의 시야에도 들어올 만큼 프레이트와 가까워진 크라켄과, 가속과 블링크를 모두 동원해 몸을 놀리며 녀석을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메테르의 모습을 보며 무심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흐으······ 흣! 하앗!” [구워어어어어어어!] 가속 능력은 쓰면 쓸수록 사용자의 몸에 지대한 후유증을 남기는 법인데, 지금 메테르는 그것을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번 이상 연달아 사용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마나를 공급받는다 해도 능력 사용으로 인한 데미지까지 아르페가 대신할 수는 없는 것. 그녀의 기세가 처음보다 약해진 것이 아르페의 눈에는 확연히 보였다. ‘제기랄······ 역시 무린가. 지금이라도 녀석들을 데리고 튀어야 하나? 좋아, 메테르가 앞으로 두 번 더 가속을 쓸 때까지 안 오면 그땐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그때, 그의 귓가를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두드렸다. 주인공도 아닌 주제에실로 절묘한 등장 타이밍이었다! [아르페.] [에트나, 너······ 메시지 마법?] 아르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메시지 마법을 듣는 순간 만물열람을 발동하여 그녀가 방어벽 지척에 이르기까지 다가온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의사를 전달해온다는 것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확실히 말해둘게. ······일이 끝난 후면 모르되 지금은 나설 수 없어. 네가 내게 온다면 네 손을 잡아줄 수는 있지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잡는 것은 불가능해.] “······빌어먹을.” 마왕의 절대지배가 전생보다 복잡한 조건으로 걸려 있음에 분명하다. 아르페는 이를 벅벅 갈며 대체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으나, 이내 그녀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가만, 내가 가서 붙잡는 건 된다고?] [······응.] 물론 아르페가 벽 위에서 자리를 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라면, 단지 그 마력만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거 마나 스트링으로 되지 않나?’ 아르페는 여태까지 마나 스트링으로 자신과 타 개체를 이어본 적은 있어도 서로 다른 두 대상을 이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시도를 하지않았다는 얘기일 뿐, 가능성은 충분했다. [좋아. 그럼 보낸다.] [응? 보내?] 우선 마나 스트링을 수십 줄기 만들어내어, 한쪽 끝을 성벽에 연결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끝을 조종하여 에트나가 숨어 있는 곳으로 일직선으로 날려 보냈다. [어머? 이건 네 마나가 담긴, 아니 마나로 빚어진······ 이게 뭐야? 어마어마한 고도의 마법이잖아!] 아르페는 에트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의 마나 스트링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역시나 그녀는 곧장 반응했다. 아르페는 단호하고도 짧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제 그걸 잡아줘.] [······아르페, 내 손이 붙잡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대체 무슨 낭만을 기대했던 것일까, 에트나는 어딘가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이내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마나 스트링을 붙잡았다. 마왕의 고유능력이 발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순간 아르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르페님, 여기 나머지 모두 가져왔어요!”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야. 아주 좋아.” 한꺼번에 두 번의 강화를 치르는 것은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아르페는 당장에 미케나로부터 주머니를 낚아채 허공에 흩뿌렸다. 그와 동시에 에트나가 지닌 압도적인 불의 마력이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을 타고 방어벽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저 너머에서 메테르가 애타게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아르페, 이제 무리야! 무리야아!”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캬, 이걸 또 저쪽에서도 타이밍을 맞춰주네! 제기랄!” 방어벽에 많은 양의 마나가 집중되는 것을 깨달은 크라켄이 메테르를 잡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프레이트를 향해 냅다 돌진을 개시했다. 이미 놈과 항구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아르페의 강화 스킬이 제대로 발동하기도 전에 놈의 거대한 몸뚱이가 방어벽과 부딪혔다! [쿠아아오오오오!] “꺄아아아악! 아, 아르페님, 빨리! 빨리!” “마도사! 마도사아아아!” 효과는 굉장했다! 크라켄의 돌진 한 방에 세 차례나 강화를 마친 방어벽에 금이 가고, 놈에게서 마구 뻗어 나온 수십 미터 길이의 굵고 길다란 촉수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방어벽 위의 사람들을 위협했다! “어, 어흐.” “크라켄. 저, 정말로 크라켄. 코, 코앞에.” “마도사님, 마도사님!” 실로 압도적인 파괴력과 비주얼에 모든 이의 정신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아르페는 당장이라도 방어벽을 넘어올 것처럼 넘실거리는 촉수를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강화를 쓰는 동안은 내가 움직일 수 없어! 메테르, 이 녀석 좀 어떻게 해봐!” “이익, 알았어. 해볼게!” [구오오오오오!] [명령을 따른다!] [우리는 놈을 거부할 수 없다. 인간, 죽어라!] 메테르가 지친 몸을 끌고 필사적으로 크라켄을 방해하려했으나 그것을 인어 무리가 다시 막아섰다. “어딜! 전부 사라져!” [우리는 홀로 가라앉지 않는다.] [인간, 같이 가자!] 버서크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메테르는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단칼에 베어냈지만 프레이트 앞바다에 우글거리고 있던 인어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베어내도 베어내도 앞이 맑아지질 않았다. “이이이익!” “빌어먹을, 흔들린다······!” 아르페는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에트나의 마나도, 마석의 마나도 순조롭게 주입이 된 상태이니 이젠 강화 스킬을 제대로 성공시키기만 하면 되는데 중간에 방해 요소가 끼어들어서인지 제대로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좀만 더 빨리······ 젠장······!” 아르페는 크라켄의 전력 어택에 흔들리는 방어벽을 실시간으로 수리하며 꾸역꾸역 강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역시 부족했다. 이대로 가다간 강화가 완료되기 전에 벽이 깨지고 말 것이다! “내가 갈게, 오빠!” 그러나 그때, 에트나를 꼬셔온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시에나가 단숨에 방어벽을 넘어서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녀의 두 손에는 그녀의 마력이 가득 담겨 빛을 발하는 슬레지 해머가 들려 있었다. “언니가 했으니까 나도 할 수 있어!” “시에나, 너, 잠, 야!” 조금 전의 메테르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시에나가 바다를 향해 다이빙했다! 다행한 점이 있다면 인어 무리는 메테르에게 집중하느라, 크라켄은 방어벽에 집중하느라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일까. “흐아아아아아압!”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한 시에나는 크라켄과의 충돌 직전의 순간 슬레지 해머에 자신의 모든 마력을 집중시켜 그대로 놈의 머리통에 내려쳤다! [쿠오오오오오오오!] 바로 그 순간, 방어벽을 부술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크라켄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바깥으로 내뻗었던 모든 촉수를 비틀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놀랍게도 레벨 170에도 이르지 못하는 시에나의 일격이 놈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준 것이다. 어쩌면 메테르의 그것보다도 강력할지도 몰랐다. “시에나, 잘했어!” 만물열람으로 보다 크라켄을 자세히 살핀다면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알 수 있을 터이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아르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화 스킬의 스퍼트를 높였다. 마나 스트링으로 방어벽과 연결된 채인 에트나가 이를 악물며 그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내 마력을 대체 얼마나 가져가는 거야!] [난 단지 네 손을 붙잡고 싶었을 뿐이라서 잘 모르겠는데.] [손 안 붙잡고 있잖아, 이 사기꾼아!] 그의 마력, 에트나의 마력, 320개의 마석에서 비롯된 마력이 한 데 뭉쳤다. 그것이 강화 스킬에 적합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방어벽 곳곳으로 퍼지며, 순식간에 두번에 걸친 강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염옥 파수꾼+5] [지옥의 불꽃이 깃들어 완성된 방어벽. 레벨 200이하의 존재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이 벽에 유의미한 손실을 입힐 수 없다. 순수한 수속성, 빙속성의 경우 레벨 300이상이어야 한다. 방어벽의 내구도를 모두 소모하는 것으로 단 한 차례, 광역 범위에 강력한 화속성 공격을 시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됐다!” 아르페가 점잖지 못하게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태까지의 요란했던 강화와 달리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방어벽은 얌전하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마도사, 변화한 것이 없지 않은가······?” “설마 우리들을 상대로 사기라도 쳤단 말인가!” “내, 내 마석! 마석을 돌려내라! 무려 4만5천 골드어치나 된단 말이다!” “후.” 그는 무지몽매한 자들이 잔뜩 성질을 내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직후 마지막 가속을 발동한 메테르가 수면 위로 추락하던 시에나를 붙잡고 성벽 위로 뛰어올라왔다. “아르페!” 시에나의 일격에 제대로 당한 크라켄은 아직까지도 스턴 상태에 빠져 있었고, 놈을 대신해 인어 무리가 녀석들을 붙잡으려 했으나 버서크와 가속을 조화시킨 메테르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역시나 불가능했다. 결국 메테르는 시에나를 짊어진 채 성공적으로 벽 위에 착지했다. “성공한 거지, 아르페?” “당연하지. 고생했어, 메테르. 그리고 시에나는······ 좋아, 멀쩡하네.” 순간적으로 자신의 모든 마력을 쏟아낸 탓에 실신 상태에 빠져있기는 했으나 다행히도 그 이상의 문제는 없었다. 아르페는 고른 숨을 쉬는 시에나의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는, 마나 스트링을 뻗어내 자신을 비롯한 일행의 몸을 칭칭 묶었다. “그럼 이제 다들 대비해.” [쿠르르르아아아아아아!] 한 발 늦게 정신을 차린 크라켄이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정도면 먹을 것을 빼앗긴 메테르의 분노 정도는 될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며 아르페가 덧붙여 말했다. “이번 진동은 제법 셀 거야.” 직후 크라켄이 방어벽을 향해 돌진해 끔찍한 충돌을 일으켰다. 불사조의 딸이 만들어낸 불꽃이, 대리자를 통해 지상에 현현했다. < Chapter 13. 크라켄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3. 크라켄 - 4 > 크라켄과 방어벽의 충돌 순간, 온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 법한 기세로 피어난 적염이 놈의 전신을 뒤덮어 타올랐다. 그것은 과거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마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신대의 불꽃이었다. [크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 두꺼운 피부를 거침없이 뚫고 들어와 살과 피, 내장을 모두 익혀버리는 살인적인 기세의 화염에 격통을 입은 크라켄이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키이이이아아아아아!] 하지만 놈의 몸부림이 격렬해질수록 방어벽은 보다 화끈하게 반응하여 불꽃을 뿜어냈고, 그것은 공격자인 크라켄을 향해 용서 없이 쇄도해 놈의 전신을 칭칭 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불꽃이 스스로 의지를 품고,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몬스터에게 벌을 내리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이럴, 수가······.” “만약 저것이 마도사가 만들어낸 힘이 맞는다면.” “인정해야겠구나, 과연 마석 500개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방어벽이다!” 나라 하나 정도는 우습게 없애버릴 수 있는 거력을 품은 마물은 지금, 거대한 벽 하나에 막혀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꽃은 물론이고 강화를 거듭해 강렬해진 진동 또한 바다를 뒤흔들며 놈에게 끊임없는 타격을 가했다. 메테르와 시에나가 입힌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데미지가 실시간으로 놈에게 누적되고 있었다. [키히이이이이!] [도, 도망쳐야 한다!] 크라켄의 난동에 휘말린 다른 몬스터들은 놈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죽어갔다. 방어벽이 뿜어내는 열기와 진동은 레벨 200이하의 몬스터가 버텨낼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일대의 모든 몬스터가 크라켄의 난동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음?” 크라켄과 방어벽의 장대한 사투에 엮이는 바람에 1초에도 수십 마리씩 죽어가는 몬스터들을 내려다보던 아르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죽어가는 몬스터들의 경험치와 기록이 자신에게 빨려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방어벽의 소유주로 인정받고 있기에 그런 건가······?’ 그야 아르페는 미케나에게 권리를 양도하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정일 뿐 그의 손에 강화된 방어벽은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에 죽어나간 몬스터의 경험치가 아르페에게 들어오는 것도 어찌 보면당연한 일이었다. ‘전생에서는 이런 아티팩트의 덕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네······. 하지만 확실히 느껴지는구나. 지금 염옥 파수꾼과 나는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있어.’ 벽과 에트나를 잇던 마나 스트링도 끊어진지 오래이니, 지금 이 초대형 아티팩트는 순수하게 아르페의 관할 하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그 아티팩트가 뿜어내는 열기와 진동에 죽어나간 몬스터의 숫자가 곧 1만을 돌파할 예정이었다. 비록 몬스터의 절대 다수가 레벨 100에도 못 미치는 허접이기는 했으나, 이쯤 되면 아르페의 레벨이 오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거 그냥 루나틱 웨이브 끝날 때까지 이 위에서 살면 되는 것 아냐?’ 움직이지 않고 레벨이 오른다는 경험이 지나치게 감미로웠던 탓에 살짝 맛이 간 발상을 떠올린 아르페였으나 이내 단념하고 말았다. 지금도 1만 마리를 모아 레벨 하나를 올렸는데, 아마 200레벨을 달성할 즈음이면 모든 바다의 몬스터를 끌어와 벽에 부딪혀야 간신히 1레벨이 오르게 될 테니까. [쿠오오오오오오오오!] “크, 크라켄이 계속해서.” “다들 방어벽에서 내려가, 놈이 우리를 덮칠 거야!” “저 괴물 같으니!” 크라켄의 발악은 점차로 심해졌다. 방어벽과 부딪힐 때마다 어마어마한 격통과 함께 전신에 화상을 입었지만 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스스로의 몸이 부서지든, 방어벽이 부서지든 둘 중 하나가 끝장이 날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 아르페님. 정말 막아낼 수 있는 거죠?” “당연하지.” 에트나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이상 벽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아마도 크라켄 또한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멈추지 않는다. 어째서? 크라켄이 원래 그렇게 무식한 몬스터라서? 아니, 아니다. 크라켄은 오랜세월을 살며 그 나름의 지능을 쌓고, 한두 번 해봐서 쉬이 넘어설 수 없겠다 싶은 상대에게는 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현명한 생존수칙을 고수하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르페 역시 놈의 덩치가 워낙에 커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만물열람이 지금 이 시간도 실시간으로 물고 오는 정보 가운데에 그 해답이 있었다. [크라켄] [레벨 ? 267] [상태이상 광화, 매료에 걸려 있습니다.] 지금 놈은 광화의 저주에 걸린 상태였던 것이다. [크하아아아아!] [크라켄을 따른다!] [따, 따른다. 벽을 부순다!] 그리고 몬스터들 중에도 그런 놈이 제법 있었다. 이대로 돌격해봤자 죽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친 듯이 벽으로 달려들어, 약속된 죽음을 맞이하는 몬스터들.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절로 조금 전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눈이 뒤집혀덤벼들던 마족들과 사투를 벌였던 일을 말이다. 자, 그렇게 되면 크라켄과 몬스터들에게 저주를 건 놈들이 누군지 답은 뻔히 나온다. 마족들이 도시에서 저주의 마법진을 발동하는 순간, 크라켄을 비롯한 바다의 마물들을 향해서도 같은 마법이 발동한 것이 분명했다. 루나틱 웨이브의 유도 수준이 아니다. 마왕군은 아예 작정하고 디아스를 묻어버릴 작정으로 이번 일을 철저하게 꾸며, 시행했다. 아르페가 없었으면 대체 얼마나 끔찍한 참상이 이곳에서 펼쳐졌을까, 절로 치가 떨렸다. “마왕군, 진짜 제대로 움직이는데······.” 저주와 관련된 아티팩트, 프레이트에서 발동된 마법, 루나틱 웨이브까지 모두가 치밀하게 맞물려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셰프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마왕군은 원래 이런 스타일이 아닌데! 아르페는 에트나로부터 얻은 정보가 부족했나, 생각하며 한숨을 쉬곤 고개를 들었다. 아직까지도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뭐야? 다들 할 일 하지 왜 그러고 섰냐?” 아르페는 생각지도 못했던 주목에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사람들 중 미케나가 대표로 물어왔다. 그 눈빛이 실로 진지했다. “아르페님, 이렇게 언제까지 버텨야 할까요?” “글쎄, 놈의 광화가 풀려서 지쳐 돌아갈 때까지?” “저걸 죽일 수는 없을까요······? 이대론 사람들도 계속 벌벌 떨고 있어야 하는데.” “아줌마는 저 놈 덩치를 보고도 죽이자는 말이 나와?” 크라켄 정도 되는 초대형 몬스터는 회복력 또한 장난이 아니다. 비록 모두의 힘을 모아 만들어낸 이 방어벽에 크라켄을 막아내는 힘이 있다고는 하나, 크라켄이 벽을 들이받아 입는 데미지 중 50% 이상은 놈의 자연회복력에 의해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놈의 죽음은 한두 달 정도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숙원이었다. “그러니까 놈을 죽이는 건 포기······.” “마도사, 우리는 저 크라켄을 죽여야 해.” 아르페의 말을 끊고 누군가 말했다. 타국의 귀족 중에서도 유독 많은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자였다. 아마 후작이나 공작 즈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대론 조국에 변명할 수가 없어. 이미 우리나라에서만 백여 개에 가까운 마석을 빼냈네. 이래놓고 크라켄이 돌아갈 때까지 버티기만 해야 한다? 물론 이 상황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나의 조국은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을 걸세.”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마석을 가져다 써야 했다는 명분이 필요하다 이거지?” “역시 마도사인지라 현명하군. 바로 그 말일세.” 귀족이 쓰게 웃었다. 마석을 내놓은 이상은 그에 어울리는 전과가 필요하다, 실로타당한 말인지라 아르페도 납득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래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해. 내가 약속한 건 처음부터 이 도시를, 그리고 당신들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어.” “이대로는 정말 힘들어. 아마 디아스와 타국간의 교류에도 영향이 미칠 걸세. 어떻게든 방법이 없겠나?” 아르페가 디아스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즉 저것은, 이대로 가다간 디아스에도 불이익이 미칠 텐데 그래도 정말 안 나서겠느냐, 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 말을 들으며 코웃음을 쳤다. 마족에서 인간으로 환생한 그에겐 자신이 인간으로서 소속된 국가에 대한 감정도 희박하기 그지없을뿐더러······. “이봐 아저씨. 나 스스로도 무척 유감이긴 한데, 나한테도 저 크라켄을 어떻게 죽일 방법이 없다니까? 능력이 없는 사람한테 협박을 해도 서러울 뿐이야.” “자네는 이미 몇 번이나 기적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여태까지는 전부 내 능력이었어. 하지만 그건 아니야.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기적이라고 하는 거라고!” [쿠아아아아아아아아!] 아르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맞추어 크라켄이 재차 돌진해 벽을 들이받았다. 그 순간, 아르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쿠오오오오, 구오아아아아아아아!] 미쳐 날뛰는 크라켄의 전신을 내던진 돌격에, 방어벽의 일부에 극히 작은 실금이 간 것이다. “어······.” 금이 워낙 작아 아르페를 제외한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지만 만물열람의 주인인 그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금이 갔다. 그것도 앞으로 얼마든지 커질 가능성이 있는 금이, 바로 방금 생겨났다. 아르페의 등에 식은땀이 솟았다. “왜 그러세요, 아르페님?” “지금 살짝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서······.” 빙속성과 수속성의 몬스터는 레벨 300을 넘기지 않는 이상 죽었다 깨어나도 방어벽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없다.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레벨 267의 크라켄이 어째서? 어떻게? 분명 여태까지는 방어벽에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했을 터인데! ‘가만, 그러고 보니······?’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순수한 빙속성과 수속성, 정상적인 크라켄이라면 이것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아까, 녀석은 시에나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고 움츠러들었다. 그 덕에 아르페가 늦지 않게 강화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고작 광화의 저주 정도로는 시에나의 마력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텐데! 의문을 담은 아르페의 시선이 크라켄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 차례 만물열람이 발동한 순간, 그는 드디어 깨닫고 말았다. [크라켄] [레벨 ? 267] [마족화 실험 실패. 저주와 여러 개의 정신계열 상태이상이 겹쳐, 마족의 인자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디아스에서의 마족화 실험까지 연관되어 있었단 말이야!?’ 놈은 순수한 수속성도, 빙속성도 아니었다. 실험 실패로 인해 생겨난 뒤틀린 마속성이, 놈의 힘을 북돋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아르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잡아야겠는데······.” “역시 가능하지 않은가!” “할 수 있는 것과 목숨 걸고라도 해야 하는 건 본질적으로 다르거든? 어쨌든 너희다 여기서 빠져.” “뭐, 뭐?” 아르페의 험한 말에 귀족들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러나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벽 이제 곧 무너질 텐데, 그래도 괜찮으면 그냥 여기서 뻐기고 있든가.” “이 벽이 왜 무너······.” [쿠오오오오옹!] 바로 그때 크라켄이 재차 벽을 들이받았다. 염옥 파수꾼은 언제나보다도 더욱 격렬한 불꽃과 진동으로 놈의 몸에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 대가로 쩌적, 하고 제법 큰 금이 가는 것까지는 피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벼, 벽이.” “도망쳐! 모두 내려가!” 아르페가 굳이 도와줄 것도 없었다. 아르페와 미케나, 메테르와 시에나를 제외한 전원은 실로 신속하게 벽에 달라붙었고, 불과 1분도 지나지 않아 모두가 펄쩍펄쩍 뛰어 시내로 달려갔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감탄하고 말았다. 역시 인간은 자신의 목숨이 걸리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법, 그 초인적인 능력을 크라켄한테 좀 써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또 그러지는 못하는 점이 어쩔 수 없는인간이었다. [카하아아아아! 키아아아아아!] 벽에 흠이 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크라켄의 난동은 실시간으로 격렬해져갔고, 사망하는 몬스터는 바다를 가득 채우고 솟아오를 만큼 많아졌으며, 아르페는 오르는 레벨만큼이나 초조함을 더해갔다. “저는 아르페님을 믿었는데!” 그러나 그보다 더 초조해하는 것은 미케나였다. 만약 크라켄을 물리치지 못하면 그녀는 그대로 끝장이었다! “좋은 교훈을 얻었구나, 아줌마. 앞으로는 그렇게 호락호락 사람을 믿지 말도록 해.” “이이이이이이!” 말은 장난스럽게 내뱉으면서도, 지금 아르페의 머릿속에는 대체 어떻게 하면 크라켄을 물리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놈에게 끝장을 먹일 수단은 다행히도 이미 확보하고 있다. 염옥 파수꾼이 바로 그것. 벽의 내구도를 모두 소모해 광역 범위에 강력한 화속성 공격을 가하는 최후의 일격이 남아있었다. ‘문제는 그거 한 번에 놈이 끝나줄 지 알 수 없다는 거야.’ 한 방에 죽으면 해피엔딩이지만 만약 놈이 죽지 않을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지금 상태의 크라켄이라면 아르페의 공격에 얼마나 큰 치명상을 입든, 인간이 세운 2차 방어벽과 3차 방어벽 정도는 우습게 부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한 방에 죽일 수 있도록 놈을 약화시켜야 해. 약화시켜야······ 하지만 어떻게? 빌어먹을,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은 배운 게 없단 말이다!’ 마도사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이지만, 애석하게도 전황을 바꿀 만한 대마법은 레벨 200이후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아르페는 아직 레벨도 안 될 뿐더러 그런 귀한 마법은 매물로 잘 나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르페가 빨리 저 너머 에이디아, 마도사의 영토로 넘어가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먀.] “먀?” 그러나 아르페가 이를 박박 갈면서도 일단 급한 대로 마나 스트링을 뽑아내려던 그때, 그의 귓가에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 목소리를 그대로 입 밖에 낸 아르페를 메테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귀여워죽겠다는 눈이었다. “아르페, 상황도 급한데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참! 너무 귀엽잖아!” “아니, 내가 한 게 아니라······.” [먀아!] 아르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에트나인가 싶어 뒤를 휙 돌아봤지만, 거리의 그림자에 숨은 그녀는 그저 간절히 두 손을 맞붙잡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르페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마족보다는 성녀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다. ‘그러면 대체 누가······ 아?’ 다행히도 머지않아 그는 답을 찾아냈다. 아니, 정확히는 답이 그에게 찾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먀! 먀아!] “너······.” 허공을 쏜살같이 날아온 그것이 아르페의 한 팔에 철썩 달라붙어 그의 로브에 머리를 부볐다. 시커먼 털, 어둠속에서 더욱 반짝이는 보랏빛 눈, 위협적으로 흔들리는 꼬리와 용맹하게 뻗어난 네 개의 다리······. 아르페는 만물열람을 발동하고 나서야 놈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너······ 고양이였냐?” [먀아아아!] 신장 20센티미터, 꼬리포함 몸길이 40센티미터의 고양이가 우렁차게 울부짖었다. 포식을 모두 마친 탐식의 마수가 드디어 주인을 찾아온 것이다. < Chapter 13. 크라켄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3. 크라켄 - 5 > [먀아아아아.] 방어벽 위의 난입자로 인해 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용사 파티의 분위기가 일순간 흔들렸다. “이 검은 고양이는 뭐야, 아르페?” “고양이도 좋지만 지금은 저 크라켄을 어떻게 해야 한다구요, 아르페님!” “아니, 다들 잠깐만 조용히 해봐.” [먀, 먀아아, 먀우이우아!] 탐식의 마수는 태어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에 무척 감명을 받았는지, 아르페에게 어떤 건 얼마나 맛있었고 어떤 건 조금 단맛이 강했다느니 자신이 먹은 것에 대한 감상을 마구 늘어놓고 있었다. 아르페가 알 바는 아니지만 저주며 사악한기운에는 저마다 다른 맛이 있는 모양이었다. [먀, 먀우우, 먀먀아!] “그래, 그래.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다.” 미케나의 말마따나 지금은 한가로이 고양이와 놀아줄 때가 아니다. 그러나 아르페는 자신에게 찾아온 녀석을 본 순간부터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해결을 위한 마지막 열쇠를 바로 지금 찾아낸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배는 좀 불러?” [먀아아.] “그렇게 먹고 아직도 배가 고프다 이거지. 그래, 좋았어.” “어라, 아르페는 얘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려?” “응. 내가 주인이거든.” 다른 이들에겐 귀여운 울음소리로 들릴 뿐이겠지만 아르페에게는 그 안에 담긴 의사가 뚜렷이 전달되었다. 녀석과 아르페 사이에는 영혼의 계약서로도 구현해낼 수 없는 강렬한 연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도사 계열의 클래스를 보유한 이들만의 특별한 권한, 바로 ‘사역마 지배’였다. 보통은 살아있는 생물에 마력을 부여해 계약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며, 사역마가 된 동물은 일반생물에 비해 우월한 능력과 지능을 지녀 주인을 돕는 것이다. 사역마로 보통은 날아다니는 새를 선호하지만 고양이나 쥐, 간혹 벌레 같은 녀석을 사역마로 삼는 취미 괴팍한 마도사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래. ‘몬스터를 사역마로 삼을 수는 없지. 마족의 지배 스킬이면 몰라도······.’ 그런데 평범한 몬스터도 아니고 7대 죄악을 관장하는 마수와 저도모르는 사이 사역마 계약이 되어 있다니, 이것도 용사이기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아무리 용사라도 보통은 안 될 텐데!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다. 녀석이 아직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저걸 봐봐.” [먀아?] 아르페는 자신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녀석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며 손가락을들어 크라켄을 가리켰다. 저주에서 비롯된 탐식의 소유자인 녀석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느껴져?” [먀!? 먀아아아!] 크라켄의 그 거대한 육신 가득 깃든 탐스러운 저주의 기운을 느낀 탐식의 마수가 아르페와 닮은 보랏빛 눈을 빛내며 흥분했다. 당장이라도 크라켄을 향해 덤벼들 기세인 녀석을 진정시키며 아르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걸 다 먹어치워야 해. 하지만 놈은 무서운 괴수이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네가 다칠 수도 있어.” [먀아아아!] 아르페의 걱정 어린 말에 탐식의 마수는 코웃음을 쳤다. 저 덩치에 얻어맞을 정도라면 탐식이 아니라 탄식의 마수라고 불러도 된다고 대꾸하는 녀석을 보며, 아르페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다녀와라.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면 그땐 예쁜 이름을 붙여줄게.” 그리고 녀석에게 첫 지시를 내렸다. [먀아아아아아!] 명령을 받은 다음 순간, 작은 고양이의 모습을 갖추고 있던 탐식의 마수가 순식간에 검은 안개로 화해 바다로 돌진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메테르와 미케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마력이 많다고는 생각했는데 고양이조차 아니었어!” “저건 생물이 아니군요!? 앗, 그러고 보니 저 마나의 흔적은 경매장에서······.” “쉿. 호기심은 다크엘프 상인을 죽이는 법이야.” “대상 선정이 너무 구체적이잖아욧!” 미케나는 경매장의 물품들이 전부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꾹 눌러 참고 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 이길 수 있는 거야, 아르페?” 그녀 대신 메테르가 물었다. 에메랄드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의 두 눈 가득 아르페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다. 아르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걸로도 못 이기면 그땐 깔끔하게 도망쳐야지 뭐. 다들 짐 싸서 튈 준비나 해.” 지극히 비겁한 방향으로 믿음직스러운 발언이었다! “아르페니이이임!” “그러니 다 내려가 있어.” 아르페가 한 손을 방어벽 위에 얹었다. 그것은 그가 몇 번에 걸쳐 벽을 강화할 때 보여준 모습과 같았지만, 그에게서 피어나는 마나는 강화 스킬의 그것과는 방향성이 달랐다. 보다 파괴적이고 찌를 듯이 날카로웠다. 순수하게 파괴 목적으로 가다듬어진 정련된 마나는, 일단 한 차례 마나 스트링을 만들어냈다가 그것을 다시 순수한 마나로 되돌린 것만 같았다. “어서. 시에나를 챙겨서 내려가.” 만약 시에나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마의 인자에 오염된 크라켄을 상대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녀는 결코 자연적이지 않은 실신 상태에 빠져있다. 그러니 지금은 아르페와 마수만으로 어떻게 해볼 수밖에! “당장.” 일행에게 재차 내려갈 것을 지시하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무거워져 있었다. 그러나 메테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아르페랑 같이 있을 거야. 시에나는 아줌마가 챙겨서 내려가.” “그래, 그럼 넌 여기 있고 아줌마가 챙겨서 내려가.” “이이이이익, 분명히 조금 전까진 제가 제법 활약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순순히 파티원을 챙겨서 물러나야만 하는 이 엑스트라 같은 느낌이 정말 참을 수가 없네욧!” 미케나는 입으로 투덜거리는 것과는 달리 순순히 시에나를 챙겨 벽을 내려갔다. 썩어도 다크엘프인지라 사다리 따위에는 의존하지 않고, 사람 한 명 들쳐 업고는 잘도 펄쩍펄쩍 뛰어 벽을 타고 내려가는 뒷모습이 실로 멋졌지만 아르페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기에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끝까지 엑스트라 취급이었다. [쿠오오오오옹!] [먀아아아아!] 한편 방어벽과 마주한 크라켄은 지치지도 않고 발악을 이어갔다. 들이받고, 화염과 진동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고통을 연료로 삼아 다시금 분노를 불태웠다. 광화의 저주와 마의 인자의 조합은 무척 훌륭하여, 실시간으로 놈의 육신에 검은 각질을 입혀 강화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놔뒀다간 이블 리플렉터에 이어 새로운 종족이 탄생했을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탐식의 마수가 있는 한 크라켄은 변이를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마족과인간의 저주도 빨아먹는 녀석이 저 덩치만 커다랗고 둔한 오징어의 저주를 빨아들이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만물열람의 소유주로서 새로운 기록에 탐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보고 싶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르페는 탐식의 마수가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내기를 기원하며 자신의 마나를 방어벽 전체로 퍼트렸다. 더 이상은 시간을 끌 수 없다. 단 한 방에 놈을 확실히 끝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르페, 벽에 점점 더 금이 가고 있어.” “괜찮아. 오히려 놈이 부숴줄수록 공격하기 쉬워져. 공격술식은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무너지는 대로 곧장 공격이 이루어질 거야. 단 한 가지 남은 문제는 바로 타이밍이지.” 베스트 타이밍, 그것은 바로 놈이 모든 저주와 사악한 기운을 탐식의 마수에게 앗겨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지는 순간이다. 아르페의 만물열람은 바로 그 타이밍을 잡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빛을 발하며 염옥 파수꾼 전체를, 그리고 크라켄의 육신의 상태를 파악했다. [크오오오오오오!] [먀, 먀아아!] 놈은 염옥 파수꾼을 부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어 정작 자신의 몸에 침입하는 마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탐식의 마수는 스스로 장담한 것처럼 여유롭게 놈의 몸 곳곳으로 파고들며 저주의 마나를 포식했고, 머지않아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할 만큼 큰 변화가 나타났다. [크하아아, 키우우아아아아아!] 놈이 방어벽에 재차 돌진해 거대한 충돌을 일으킨 그 순간, 놈의 몸에 갑각처럼 돋아났던 각질 중 일부가 깨져 떨어졌다! 갑각이 있던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새카만 피가 놈을 잠식한 저주의 위력을 익히 짐작케 했다. 놈은 고통에 울부짖었고, 탐식의 마수는 환호했다. [쿠오아아아!] [먀아아아아! 먀우우오아아!] “저 녀석 저거 지금 설마 비명소리 따라하는 건 아니겠지.” [쿠오오오오!] 고통을 느낀 크라켄은 그 고통을 더욱 큰 고통으로 잊으려는지 미친 듯이 벽에 몸을 들이받았다. 방어벽 위는 벽이 일으키는 진동과 크라켄으로 인한 진동이 겹쳐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장 쓰러질 만큼 흔들렸다. “좀만 더, 좀만 더······!” [쿠오아아아!] 점차로 내구도를 소실해가는 방어벽을 살피며 아르페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탐식의 마수는 그의 바람대로 더더욱 빠르게 크라켄의 저주를 흡수했고, 그럴 때마다 놈의 몸통 곳곳에서 저주 섞인 피가 터져 나왔지만 그럼에도 놈의 폭주는 진정될 줄을 몰랐다. “틀렸어. 아예 혼을 놔버렸어. 저주, 아니면 마족화 실험의 여파인지 몰라도 이미놈에게 의식은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아.” “아르페, 벽이······.” “나도 알아, 제길!” 크라켄의 힘이 예상외로 너무나 강력했던 탓에 벽이 무너지는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아르페는 벽 전체에 마나를 퍼트려 어떻게든 붕괴를 늦추려 애썼지만 그의 마나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먀아아아아아!] 놈이 수십 개의 촉수를 한 데 뭉쳐 날려 벽을 강타한 순간, 급기야는 쩌적, 소리가나며 방어벽의 중심부에 절대로 복구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가 났다. 벽에 번개라도친 것처럼 위에서부터 아래로 둘로 쪼개지며 아르페와 메테르의 사이를 나누어놓았다. [쿠오오오오오오!] “아르페!” “메테르, 더 늦기 전에 아래로 내려가!” “하지만!” “지금!” 아르페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설령 놈의 약화가 덜 끝나 이 한 방으로 죽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지금 공격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냥 방어벽이 무너지고그것으로 끝이었다. “부탁한다, 에트나······!” 에트나의 기도가 제발 신에게 닿기를! 그렇다고 정말 닿으면 닿는 대로 또 문제지만! 아르페는 마력으로 깃든 주먹을 방어벽에 세게 내려치며 울분을 담아 외쳤다! “뒈져라아아아!” 그의 마력이 벽 전체로 퍼진 바로 그 순간! 벽이 수십, 수백만의 파편으로 잘게 나뉘어 일대로 쏟아져 내렸다. 하나하나 지옥의 불꽃에 감싸여 아래로 쏟아지는 모습이 꼭 유성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쿠오오오오오오!] [먀!? 먀아아아아아!] 표면적이 넓은 탓에 그 모든 유성우에 두들겨 맞는 크라켄! 놈이 처절한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몸속에 파고든 탓에 직접적인 데미지는 받지 않은 탐식의 마수 역시 아직 식사가 덜 끝났는데 왜 공격을 하냐며 투정을 부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먹고 빠져!” [먀! 먀아! 먀아아아!] 아르페는 허공에서 완만히 떨어져 내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크라켄에게 쇄도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돌멩이가 하나하나 놈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바다에서 비롯되어 마로 거듭난 저 빌어먹을 크라켄은 더럽게 단단했고 오지게 튼튼했다. 이 공격으로 육신의 70% 이상을 잃겠지만 남은 30%만으로도 프레이트 정도는 가볍게 무너트릴 수 있을 터이다. 이걸론 부족하다. 빈사로 만들어놓고 그걸로 끝이다. 이길 수 없다. 죽일 수 없다. 도망가야 한다. 그 결론을 내린 순간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주제파악이 되었다.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적절한 타이밍의 도주는 사천왕 최약체의 필수 스킬이지. 끝까지 정면으로 덤벼서 승리를 거두는 건 용사한테나 가능한 일이지, 나 같은 가짜한테는 처음부터 무리였던 거야. 이대로 도망쳐서 욕이나 먹는 게 정상이지, 그게 당연해.’ 무수한 숫자의 파편이 그를 스쳐지나가 크라켄에게 쏟아지는 가운데, 천천히 바다로 떨어져 내리며 아르페는 급기야 짧은 자아성찰 타임에 돌입했다.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짙은 패배감이 전신에 가득했다. 대체 뭐라고 이런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섰단 말인가.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에 취해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로 우습다. 아니, 우습지도 않다. ‘인간들을 비웃을 자격도 없어.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나까지 어느덧 인간에 물들었었구나. 좋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어. 도망치자. 메테르를, 시에나를 데리고 도망쳐서 처음부터 다시, 이번엔 제대로 시작하는 거야. 두 번 다시는 앞에 나서지 않고, 모든 것을 뒤에서 이뤄내겠어. 앞에 나서는 건 메테르만으로 충분해. 그래, 그거야.’ “아르페!” “······응?” 걷잡을 수 없이 이어지던 아르페의 상념을 누군가가 깨트렸다. 아르페는 중력에 의지해 낙하하는 가운데 멍하니 눈을 돌려 그 정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아르페 자신이 신겨준 블링크 부츠에 의지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메테르의 모습이었다. “바보, 지금부터 도망칠······.” “잡았다······ 레코드 디바이드!” 메테르는 아르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블링크를 구사해 그의 로브를 붙잡으며, 동시에 그녀가 지닌 유니크 스킬을 발동시켰다. 지금 그녀의 마력이나 스킬 따위를 아르페에게 공유해줘서 대체 뭘 하겠다는 것일까, 코웃음을 치던 아르페는, 다음 순간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마력을 느끼며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너, 이거 대체······?” 메테르의 마력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아르페의 마력도 아녔다. “아르페, 이젠 할 수 있겠어?” 메테르의 물음에, 아르페는 황당해하면서도 굳게 고개를 끄덕여 대꾸했다. “해볼게.” “응, 그래야 아르페지!” 메테르의 시원한 미소에 아르페도 그만 쿡 웃어버리고 말았다. 전신을 지배했던 무력감을 대신해 활력과 희망이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흘러들어온 마력은, 모든 마를 부정하는 절대의 마력······ 지금은 의식도 되찾지 못해 기절해 있어야 할 시에나의 마력이었다. < Chapter 13. 크라켄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3. 크라켄 - 6 > 레코드 디바이드를 통해 메테르가 아르페에게 전달해준 마력은 자신의 것이 아닌시에나의 마력이었다. 레코드 링크나 아르페의 마나 링크를 경험한 과정에서 완성된 그녀의 유니크 스펠! 그것은 본디 아르페와 메테르 사이의 스킬이나 스펠, 능력을 나누는 스킬이었으나 그것이 지금은 시에나의 능력까지 끌고 온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 이유를 따져 물을 시간에 그것을 이용해 크라켄을 죽일 방법을 생각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그것으로 다시 한 번, 지금 저 크라켄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파편들을 강화하면 되는 것이었다. 염옥 파수꾼 그대로의 상태였다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철저하게 부수어져, 하나하나가 고유의 소모성 아티팩트로 거듭난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비록 마나가 매우, 무척, 많이 소모되겠지만, 그건 아르페 자신을 쥐어짜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었다. “강화.” 아르페는 스킬을 발동하며 동시에 품에서 데마이트의 원석을 꺼내어 쥐었다. 아직 본래 성능을 발휘하기에는 가공이 덜 되어도 한참 덜 된 물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과거 슬라임을 상대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아르페의 마력을 받아들여 충분히 증폭시켜주었다. “뒤로 물러나겠다고 결심한 순간 또다시 이런 모험을 하는 신세가 될 줄은 몰랐지만······.” “모험이 아냐. 아르페는 할 수 있어.” 메테르는 시에나의 마력을 전달해주고는 곧장 아르페에게 매달려 자신의 남은 마나마저 그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둘이 한 데 뭉쳐 빠른 속도로 수면을 향해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그녀의 두 눈에는 아르페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다. “우리는 할 수 있어.” “······그래, 넌 진짜 어쩔 도리가 없는 용사구나.”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르페를 비웃듯이 ‘우리’를 강요해오는 용사의 모습은, 실로 과거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 그대로여서 절로 그를 웃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감탄과,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반반씩 섞인 웃음이었다. 여태껏 혼자 날뛰다가 안 되니까 ‘역시 나는 가짜 용사다.’라고 멋대로 자기완결을 짓고 도망칠 생각이나 하다니, 아르페는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전생에서도 용사는 결코 혼자 일을 해내려 하지 않았던 것을! 그녀는 언제나 동료와 함께였고, 전생의 아르페는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1+1은 어디까지나 2다. 사람과 사람을 같이 놓으면 마찰이 일어날 뿐이고, 시너지라는 것은 드래곤보다 만나기 힘든 존재다. 마족 아르페에게 있어 타인은 적아를 불문하고 자신에게 방해가 될 뿐인 존재였고,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딱히 혼자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황이, 시대가, 마음이 그를 홀로 행동케 했다. 그래서 인간으로 환생하고도 그는 그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메테르, 시에나와 함께하면서도 서로의 능력을 구분해 영역을 나누었고,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 멋대로 단정 지었다. 그래서 지금도 역할이 끝난 메테르와 시에나를 전선에서 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니었다. 용사의 능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고, 공유할 수 없어야 할 것을 공유케 만들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지금, 데마이트의 원석에 흡수되어 증폭되고 있는 시에나의 마력이다. 시에나의 마력이, 메테르에 의해 전달되어, 아르페의 손에서 피어나고 있다. “키메라도 아니고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헤헤, 나도 안 될 줄 알았는데 정말 열심히 하니까 됐어.” “여기까지 와서 근성론이냐? 너 진짜 최악이다.” 최악이다. 말도 안 되게 짜증나고 말도 안 되게 웃기다. 하지만 그만큼 기뻤다. 나중에 단단히 추궁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가라.” 아르페는 작게 속삭이며 마력을 해방해, 그 모두를 세상을 가득 메운 염옥 파수꾼의 파편에 전달해주었다. 강화 스킬이 발동하여 그 모두를 강화했다. 시에나의 마력을 겉에 입히고, 불꽃을 강화하며, 속도를 더하고, 목표를 확정지어주었다. 그의 자안이 세상을 멸망시킬 마왕의 그것처럼 번뜩인 다음 순간, 그의 입이 다시금 열려 어울리지 않게도 뜨거운 말을 토해냈다. “저 빌어먹을 오징어대가리를 터트려버려!” [쿠아아아아아아아!] 크라켄이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검게 물든 거대한 촉수를 쏘아 날렸다. 그것이 아르페와 메테르의 몸에 닿기 전, 새하얗게 물든 불꽃의 유성우가 놈의 몸을 강타했다. 놈의 속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공격은 이전까지의 공격과 달리 놈의 육신의 근본적인 부분을 녹여 없애버렸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먀!? 먀아아아! 먀먀! 먀먀먀아아!] 처절한 고통에 울부짖는 크라켄과 더 욕심내다간 자기까지 죽겠다는 생각에 당황하면서도 서둘러 몸을 빼는 탐식의 마수. 아르페는 고함과 비명, 저주가 섞인 괴성을 들으며 입가를 일그러트려 웃었다. ‘됐다, 이겼다.’ 강한 확신에 뒤따르는 쾌감이 그를 지배했다. 물러나지 않고 이겼다. 저 빌어먹을인간 놈들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것은 싫지만,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고 끝낼 수 있게되었다는 것은 쾌거였다. 내내 자신에게 부족했던 부분이 이 순간에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준 것은 지금 그를 붙잡고 함께 추락하는 이 용사였다. [쿠오오오, 쿠아아아아앙!] 아르페는 전신의 마나가 빠져나가며 서서히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다 이겨놓고 죽지는 않겠지, 재수가 없어서 크라켄이 단말마삼아서 내지르는 촉수에 얻어맞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인데 설마 그 정도로 내가 재수가 없지는 않겠지, 메테르는 무사하면 좋겠는데······. 무수한 생각이 뇌리를 교차하다가, 추락하는 순간까지도 그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는 용사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어 용사의 이름을 불렀다. “메테르······.” “응?” 마나를 모두 소진해 정신을 잃어가는 것은 메테르 역시 다르지 않다. 아르페의 힘없는 목소리에 돌아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기운이라곤 남아있지를 않았다. 그는 손을 내뻗어 그녀를 살짝 붙잡으며, 몽롱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빨리······.” “응······.” 의식을 잃기 직전의 순간, 전투의 승리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게 된 그 순간. 아르페는 그만 평생을 후회할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빨리 커라, 너······.” “응······ 응!?” 아르페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잃어가던 메테르는 그 한 마디에 순간적으로 의식을완전히 각성하여 반문했다. 빨리 크라고? 어째서? 그야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아!? “아, 아아아아아아아르페? 잠깐만, 그 말 다시 한 번만, 한 번만 더!” “후······.” 그러나 아르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완벽히 의식을 잃고 축 쳐지고 말았다. 어쩌면 깨어난 후에는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이이이익······ 알겠어, 아르페! 나 최대한 빨리 클게!” 그러나 그 말을 확실히 접수한 메테르에게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빨리, 내가 빨리 자라면······! 아르페가!” 그녀의 눈빛은 결의와 각오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빨리 자라는 게 본인의 의지만으로 어찌되는 문제는 아닐 터이나 그런 사소한 문제는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빨리 자란다, 아르페가 빨리 자라달라고 했으니 좌우지간 빨리 자란다! 빨리 자라서······. “우아아아아앗!” 그녀는 초월적인 의지와 사랑의 힘으로 또랑또랑한 정신을 되찾아 의식을 잃은 아르페의 몸을 꼭 붙잡았고, 다음 순간 둘이 나란히 바다 속으로 입수했다. [쿠아아아아아아앙!] “으오오오오오!” 아르페가 걱정했던 크라켄의 마지막 일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는메테르의 타오르는 의지에 그 어떤 흠집도 입힐 수가 없었고, 모든 힘을 다 쥐어짠 크라켄은 그렇게 허망한 삶을 마감했다. 의지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초월했던 메테르 역시 크라켄의 마지막을 보며, 그 어마어마하고 압도적인 경험치가 자신과 일행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비로소 의식을 놓았다. 용사 파티가 크라켄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 [먀······ 먀하하하하!]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 자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유일한존재 탐식의 마수가 제 세상이 왔음을 확신하며 환희의 포효를 터트렸다.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증명하듯 실로 탐욕에 가득 차 있는 사악한 울음소리였다. 아르페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양옆에는 두 명의 여자아이가 달라붙어 자고 있었다. “또 이거야.” 언제나와 같은 일인지라 이제와 새삼스레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 위로 손을 올리려다가는, 그곳에 또 다른 녀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흘러내릴 듯 부드러운 털과 따스한 감촉, 애교스럽게 손바닥에 머리를 비벼오는 감각. [먀아.] “너였냐.” 아르페는 탐식의 마수의 목덜미를 덥석 집어 올려 눈앞으로 가져왔다. 비록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는 있었으나, 흑단처럼 검은 털과 보랏빛 눈은 아무리 봐도 아르페를 똑 닮아 있었다. “탄생 과정에서 내 영향을 받아 그런가?” [먀.] “그래, 그렇구나. 우리가 자는 동안 네가 지켜준 거지? 고맙다.” [먀, 먀아아. 먀아!] “그렇지, 네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었지······.” 아르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좋아, 그럼 아메지스트.” [먀아아아아아아아!] 그 이름으로 불리느니 차라리 탄식의 마수로 불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충은 넘어가주지 않겠다는 것인가, 아르페는 칫, 혀를 차며 다른 후보를 입 밖에 내었다. “로아는 어때?” [먀······ 먀, 먀아!] 100점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녀석은 이름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페의 뺨을 핥았다. 완전히 고양이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인지 혀까지 까끌거렸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간은 얼마나 지난 거야?” [먀아아아.] “이틀?” [먀.] 그 방대한 마나를 모두 쏟아내고 실신한 것이다. 제아무리 레벨업이 겹쳤더라도 일주일 정도의 의식불명은 각오하고 있었으나 로아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희망적이었다. 그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떠올랐다. “메테르랑 시에나는······ 좋아, 이 녀석들도 곧 깨어날 것 같네.” 메테르와 시에나는 자신보다 무리를 더 했으면 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벨 267 크라켄의 막대한 경험치를 셋이서, 아니 로아를 포함한 넷이서 온전히 나누어먹은 덕분에 그들의 레벨도 미친 듯이 성장했고, 그 덕에 후유증도 압도적으로 줄어들었다. 아르페는 녀석들이 다치지 않아 진심으로 안도하는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순순히 그 감정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한껏 달라붙은 어리광쟁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쓸어주었다. “으뮤······ 아르페, 아르페에.” “아무리 그래도 215레벨은 너무하지 않냐, 메테르.”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아르페 자신의 레벨은 216이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메테르보다 자신의 활약이 컸기에 경험치 배분이 확실히 자신 쪽에게 기운 모양이다. 자신의 레벨이 메테르보다 높았던 적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던 아르페는 지금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메테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나게 기뻐할것이다. ‘시에나도 199레벨. 의식을 찾고 나면 확실히 200레벨의 상위클래스로 진입하겠네.’ 무려 크라켄을 죽이는데 가장 확실한 업적을 세웠는데도 상위클래스로 진입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상위클래스의 자격이 있는 인간은 없다. 확실하다. [먀! 먀먀!] “그래그래, 너도 바로 얼마 전에 태어난 주제에 벌써 150레벨이구나. 저주를 대체 얼마나 집어삼켰으면 그러냐?” [먀!] “저주뿐만이 아니라고? ······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탐식의 마수, 로아 이 녀석은 광화를 비롯한 저주의 기운뿐만이 아니라 만물에 존재하는 사념, 심지어는 크라켄이 품고 있던 마의 인자까지 전부 탐욕스레 먹어치웠던 것이다! “몸에 이상은 없지······? 갑자기 마왕한테 지배되거나 하면 용서 없이 죽인다?” [먀! 먀먀먀! 먀먀!] 아르페의 냉정한 말에 로아가 벌컥 화를 냈다. 그 따위 잡스러운 기운에는 지배되지 않는다니, 용맹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게다가 먹어치운 게 그것뿐만이 아니구만. 다시 뱉어낼 수는 있겠지?” [먀아아······?] “개중 필요 없는 건 그냥 너 줄 테니까 소화시켜. 중요한 것들만 내놓으면 돼.” [먀······ 먀. 먀아.] “그래, 착하다.” 녀석은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똑똑한 마수. 아르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승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르페가 기특하다는 듯 뒷목을 간질여주자 녀석도 기분이 좋은지 고롱거렸다. 완전히 고양이였다. “아르페님, 일어나셨군요!” 그러나 모처럼 주종 간에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던 그때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미케나가 들어왔다. 그녀의 귀가 분노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깨어나셨으면 좀 들어보세요, 아르페님! 바깥의 저 머저리들이 자신들에게도 크라켄 사체의 지분이 있다며 떠들고 있다구요!” “뭐? 크라켄 사체의 지분?” 아르페가 멍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미케나가 잔뜩 성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크라켄을 죽이는 데에 자신들 또한 마석을 보탰으니 놈에게서 얻은 것들을 나누어야 한다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던 주제에 뻔뻔하게!” “미케나, 일단 진정해.” “아우으.” 미케나는 아르페에게 이름을 불리자 반사적으로 진정하고 말았다. 그녀의 귀의 파들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아르페는 좋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크라켄을 루팅은 했어? 뭔가 나오긴 했어?” “아뇨, 만약 누군가 멋대로 손을 댔다간 싸움이 벌어질 테니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어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녜요! 어쨌든 가치가 턱없이 높은 몬스터인데 그것을 해치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사체의 지분을 논하다니 저는 도무지 용납을 할 수가······!” “그래, 아직 안 해봤구나. 그러니 그렇게 다들 흥분하고 있는 거겠지.” “네······?” 평소의 그였더라면 흥분해 날뛰고도 남을 상황이었으나, 아르페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인자했다. 미케나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귀를 축 늘어트리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그는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탐식의 마수 로아를 쓰다듬어주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까짓 나눠주지 뭐. 괜찮아, 그 정도는.” “아르페님······ 설마 기절하기 전에 뭔가 하셨어요?” “나? 아니, 기절하는데 무슨 짓을 했겠어.” 아르페는 히죽 웃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로아 역시 히죽 웃었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나는.” [먀아아아아아.] 로아의 울음소리가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는,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 Chapter 13. 크라켄 - 6 > 끝 ⓒ 토이카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1 > 아르페의 예상대로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메테르와 시에나 역시 의식을 되찾았다. 녀석들은, 특히나 시에나는 한 번 자고 일어나니 자신이 엄청나게 강해졌다는사실에 얼떨떨해했다. “오빠가 크라켄을 무사히 죽였구나, 다행이다······ 그래도 내가 얻은 경험치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오빠. 스킬도 이상하게 강해졌어.” “그야 크라켄을 죽이는 데 네가 가장 활약을 많이 했으니까······ 어라? 그러고 보니 그땐 추궁하지 못했다만, 메테르 너 시에나한테 확실히 허락은 받고 마력을 가져온 거냐?” 아르페의 롱 소드 칼날보다 예리한 질문에 메테르가 120%의 웃는 얼굴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나나 시에나나 아르페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걸! 물론 내 쪽이 훨씬 강하지만.” 즉 허락을 맡지 않았다는 뜻이렷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멋대로 타인의 마력까지 끌어다 쓸 수 있었던 것인지 아르페는 도저히 레코드 디바이드라는 스킬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메테르의 머리에 꿀밤을 마구 먹여두었다. “마나가 생명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기백번은 말했을 텐데? 만약 레벨 업을 못 했으면 시에나는 엄청나게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아르페가 죽었을 거야!” “오빠가!? 죽을 뻔했어!?” 메테르의 말에 시에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응했다. 메테르는 기회는 이때라는양 신이 나서는 그녀에게 아르페와 자신이 크라켄을 상대하며 겪은 일에 대해 한껏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얘기를 전부 다 듣고 난 시에나는 다행이라며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 나랑 언니가 서로를 깊이 이해했다는 뜻이네! 난 너무 기뻐. 오빠한테 도움이 되었다니 더 기뻐.” “서로를 깊이 이해해? 너희 사이에 그럴 만한 일이······ 아.” 있었다. 대낮에 경매장에서 벌어졌던 바로 그 사투. 서로 본심이라고밖엔 생각되지 않는 질척질척한 감정을······ 아냐, 연기겠지. 아르페는 굳이 그것에 대해 더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아르페의 머리 위에서 그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로아를 붙잡아 안으며 녀석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얘는 로아. 앞으로 우리랑 함께할 거야. 봐서 알겠지만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 탐식의 마수야.” [먀.] 로아가 앞발 하나를 들어 그들에게 인사했다. 제아무리 탐식의 마수라는 말을 들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유난히 기품이 넘치는 검은 털의 고양이로 보일 뿐인지라, 한창 귀여운 것을 좋아할 때인 시에나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좋아했다. “너무 귀여워! 너무너무 귀여워!” 하지만 메테르는 아르페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태클을 걸어왔다. “아르페, 로아는 수컷이야, 아니면 암컷이야?” “일단 암컷이기는 한데 너 설마 마수하고 까지 경쟁하려고?” “그르르르르······.” [먀아······.] 암컷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로아를 경계하는 메테르. 그것을 상대해야 하는 로아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정말 귀엽긴 너무 귀엽······ 아니, 아르페님!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욧!” 용사파티가 한껏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던 그때, 도저히 참다못한 미케나가 벌컥 성을 냈다. “그래그래, 나간다, 나가. 쳇.” 아르페는 그제야 미적미적 몸을 일으켜 로브를 둘렀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로아가 알아서 로브 안으로 쑥 들어가 그의 머리 위에 숨었다. 인세에 흔히 나오지 않는 레벨 267의 거대 괴수의 사체, 그것을 두고 인간들이 부릴 탐욕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우울해지는 아르페였으나 그렇다고 마냥 피할 수도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먼저 침대를 빠져나와 메테르와 시에나가 제대로 장비를 마치길 기다렸다. 그리고 녀석들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아르페, 나 배고파아.” “오빠아, 나 버터옥수수 먹고 싶어.” “그러면 일단 밥 먹고 가자.” [먀!] “아아, 정말! 아르페니이이임!”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이제 일어났는가?” “자네를 기다렸네, 마도사.” 이틀 동안 못 먹은 밥까지 전부 먹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맛나게 밥을 먹고 나온 광장에는 타국의 귀족들과 상인들은 물론이고 디아스의 귀족들, 영주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 까딱하다간 어제의 경매장보다도 더욱 짙고 더러운 탐욕이 그곳에서 몽실몽실 피어나고 있었다. “와아, 이렇게 보니까 진짜 크다아, 끄윽.” “바보야, 말하면서 트림하지 마.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로 갔냐.” “정말 크다아. 오빠는 이런 걸 죽였구나. 오빠 너무 멋져.” 물론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육지로 끌어낸 것일까 의아스러울 만큼 거대하고 육중한 크라켄의 사체 또한 그곳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삼엄하게 둘러싼 경비병들······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영주에게 물었다. “크라켄이 죽었을 뿐이지, 한 번 시작된 루나틱 웨이브는 겨울이 가기 전까지는 안 끝날 텐데. 당신들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크라켄이 죽고 한 차례, 웨이브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네. 그야 이틀이나 지났으니 조금씩 그 규모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어. 이것도 모두 그대 덕분······.” “그보다 중요한 건 크라켄이다!” “마도사! 이 크라켄의 전리품의 분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크흠······.” 타국의 귀족들이 흥분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 와중에, 프레이트의 영주 메러드 백작만은 그와 다른 이유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라고 크라켄의 사체에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닐 터이나, 그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지 프레이트의 수호였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마도사는 귀공들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것이네. 모두들진정하고, 지금은 그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것이 일을 더 빠르고 순탄히 끝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 이놈들이 부당한 이유로 내 몫의 크라켄을 훔쳐가려 하는데!” “누가 훔친다는 것이지? 나는 저기 저 상인에게 엄연히 방어벽의 지분을 받고 마석을 판매했어! 끝까지 버팅기다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죽기 싫어 마석을 내놓은 네놈들과는 다르다 이 말이야!” “다들 진정하게! 귀족의 체면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지금 우리가 진정할 수가 있겠는가아!” 메러드 백작이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크라켄의 사체로부터 자리를 비웠다가 자칫 되돌릴 수 없는 싸움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는 차라리 크라켄의 사체가 통째로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영주라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 다행이야. 하긴, 이런 사람이라도 없었으면 국가가 유지되지 않겠지.’ 아르페는 영주와 쓴웃음을 교환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는 가운데, 아르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우선은 크라켄의 사체를 살폈다. 이곳에 남은 사체의 가치를 명확히 산정한 후에야 배분에 대해 얘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라······.’ 그런데 놈이 살아 있었을 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정보가 이제야 그의 만물열람에 잡혀들었다. 그야 놈과 싸울 땐 놈의 신체 내부에 뭐가 있는지 살필 생각보다는 놈의 체력과 전체적인 상태를 알아보는 데 집중했으니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만물열람은 확실히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을 알아내는 천고의 능력이지만,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아르페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엇을 살피든 그때 그가 원하는 것에 한정해 정보를 제공하도록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라켄의 내부를 샅샅이 살핀 지금에서야 간신히 발견하게 된 ‘개체’가 하나, 있었다. ‘안에 들어가 있는 건 그렇다 치고······ 아직 살아있네? 게다가 이 녀석 종족이······ 가만, 이거 왠지 또 다른 퀘스트의 냄새가 나는데······.’ 무엇을 감추랴, 이미 크라켄은 탐식의 마수 로아에 의해 한 차례 루팅이 된 상태였다. 이 크라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지금 보는 그대로 이 거대한 덩치의 사체뿐이다. 물론 사체에도 쓸 만한 부분은 많겠지만 솔직히 아르페가 그리 탐을 낼만한 부분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만 거두고 나머지 대부분을 내어줄 생각이었으나······ 놈의 사체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좋아, 공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마도사님이 판정을 내려주지. 일단 우리 파티 삼인의 몫이 5할이다.” “5할이나!?” “아니, 아르페님! 고작 5할이라니······.” 까놓고 말해 이번 일은 용사파티가 다 했다. 마석 500개의 가치가 아무리 지대하다곤 하나 그가 없었으면 방어벽의 강화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욱이 그 방어벽으로 크라켄을 공격하는 일도 불가능했으며 메테르와 시에나가 아니었으면 놈의 목숨을 거두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사체를 모두 가져가도 할 말이 없었으나, 아르페는 아량을 베풀어 5할만 가져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 아량에는 이미 로아에 의해 루팅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라는 여유도 한 몫 했다. 귀족 중 일부는 그것에도 불만을 감추지 못해 분노했으나 그나마 제정신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귀족들이 놈을 뜯어말렸다. 아르페는 놈들에게 코웃음을 쳐주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음으로는 크라켄을 막아내는 방어벽을 만들어내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상인, 미케나의 몫이 2할.” “물건을 사기로 후려쳤을 뿐인 상인에게 사체의 2할이라니 지금 제정신인가!” “그 상인이 없었으면 우리 다 뒈졌어, 그러니까 닥쳐!” 아르페의 거센 일갈에 귀족이 닥치고 말았다. 귀족이 아니니 권력으로 억누를 수 없고, 강대한 마도사이니 무력으로 억누를 수도 없다. 차라리 아르페가 마법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했다면 그땐 국가의 이름을 걸고 윽박지르기라도 하겠지만, 지금 아르페는 전투의 최고 공헌자로서 타인의 공헌도를 산정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목소리를 높여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음으로는 방어벽의 구축을 위해 마석 180개를 ‘저렴하게 판매’한 디아스의 귀족과 상인들에게도 사체의 분배권리가 있다고 인정, 2할을 공평하게 분배한다. 그리고 남은 1할을, 마석 320개를 ‘지불’해 보호받을 권리를 부여받은 타국의 귀족과 상인들에게 위로금으로 분배한다. 이상, 의의 있는 사람?” “1, 1할······ 그것도 100분의 1 이하로 나누라고? 이, 이이이이이이 자가!” 도저히 참지 못한 귀족이 직접 칼을 뽑아 아르페를 겨누었다. 그러나 메테르는 물론이고 시에나조차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평범한 마도사로 보이는 아르페가 지금 어느 정도 수준의 체력과 무력을 갖추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페가 눈썹을 까딱이며 놈에게 확인했다. “내 공평한 분배에 불만이라도?” “뭐가 공평하단 말인가! 이토록 불합리하고 아집에 가득 찬 배분을 나는 달리 경험한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내놓은 마석 3개에 해당하는, 정당한 대가를 얻어가야겠어!” “말은 바로 하시지. 너는 그 대가를 이미 얻었어.” 아르페는 손을 뻗어 놈이 쳐든 검을 붙잡았다. 그에게서 뻗어 나온 마나 스트링이나팔꽃 줄기처럼 그 검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가 놈의 목에 이르렀다. 마나 스트링을볼 수 없는 자라고 해도 마나 스트링이 주는 압박만은 느낄 수 있었기에, 놈은 힉, 소리를 내며 몸을 굳혔다. “네 목숨 말이야. 나머진 보너스지, 안 그래?” “네, 네놈······ 지금 감히 다이탄 왕국의 후작을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은 네놈이 먼저 한 것 같은데. 분명 깔끔하게 끝난 거래를 다시 들먹이며 제몫을 주장하는 것, 이게 협박이 아니고 뭐가 협박이지?” “그, 그건 정당한 거래가 아니었······.” 그가 마나 스트링에 힘을 주자 놈의 검이 깨끗이 부러졌다. 놈은 그제야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차마 가늠할 수 없는 힘을 지닌 마도사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네 목숨을 대가로 치른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전부 회수하고 제로부터 다시 정산을 시작할까? 난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아르페는 일이 더 귀찮아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이라고 생각했기에, 점차로 마나를 키우며 말을 이었다. 귀족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그런 짓을 우리 국가에서 용납할······.” “과연 날 그 따위 북방 국가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내가 일을 제대로 벌이면 이 자리에 증인이라도 남을 것 같아? 네놈들이 방어벽 뒤에 숨어 벌벌 떨 동안 이 크라켄을 처치한 게 우리야.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그새 까먹었냐?” “크, 커헉······.” 아르페의 기세가 점차로 고조되었다. 마왕군 사천왕이 이 자리에 나타나면 이럴까 싶은, 살기가 목구멍 가득 들어차 숨이 막히는 분위기였다. “무시무시한 마나가······.” “그는 크라켄을 처치하고 더욱 강해진 거야. 어쩌면 인간계 최강일지도 몰라······!” 그 자리의 누구도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졸지에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게 된 다이탄 왕국의 후작만 불쌍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아르페의 말은 더한 독기를품고 이어졌다. “내가 네놈들한테 맞춰서 놀아주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더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야. 여기서 너를 없애면 언젠가 네 국가까지 없애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어쩔까. 귀찮은 짓, 만들까?”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아르페가 하나의 국가를 없앨 수 있으리라는 말을 차마 거짓이라 비웃지 못했다. 다이탄의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 아닙, 니다.” “다른 놈들은?”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귀족과 상인들 모두가 아르페의 시선을피했다. 그것을 보는 아르페는 실로 처참한 심정이었다. 끝내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왜 이렇게 다들 목소리를 높이는 걸까. 왜 꼭 이렇게 아르페가 으르렁거리며 힘의 차이를 보여야 하는가. 이래서야 인간은 한낱 강아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 놈들이나, 놈들에게 맞춰 놀아주고 있는 아르페나 다를 바가 없다. 똑같이 한심했다. 그렇지만 목적을 위해선 이 한심한 소꿉놀이를 계속해야 했다. “좋아, 그럼 얘기가 끝났으니 분배를 시작하자. 더 이상 사체를 지킬 필요가 없으니 경비병들은 빨리 2차 방어벽으로 달려가도록. 크라켄의 사체에 권리가 없는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야. 지금 네놈들이 막아야 할 건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몬스터의 살의다.”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도사님!” 장내가 조용해졌다. 욕망을 품은 사람은 있어도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이자리에 남지 않았다. “그러면, 일단 루팅을 해보자고.” “네, 넵.” 아르페는 그의 살기를 버티지 못해 바지에 오줌을 지린 다이탄의 후작을 내던지고는 크라켄의 사체로 다가갔다. 다가가며, 로아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내가 이놈을 건드리는 순간에 맞춰서 별 가치 없는 물건들을 쏟아내는 거야.] [먀아아.] 아르페가 크라켄을 건드렸다. 로아가 입을 열었다. 주종의 합작은 완벽했다.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2 > 아르페가 루팅의 시늉을 낸 바로 그 순간, 로아는 주인의 명을 따라 물건들을 왕창 뱉어냈다. 기껏 확보했던 물건들을 도로 내뱉는 것이 억울했는지, 녀석의 보랏빛눈에 눈물이 찔끔 맺혀 있었다. 그러나 크라켄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보기에 그 광경은, 영락없이 아르페가 루팅한 결과 크라켄이 아티팩트를 쏟아내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이, 이렇게나 많은 숫자가!?” “어라, 그런데 저 창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크라켄은 심해로 가라앉는 배를 통째로 집어삼킨다고 하지. 어쩌면 온갖 왕국의제식 병기가 섞여 있었는지도 몰라.” 경매장의 물건이 섞여 있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로아는 지능이 높은 마수답게 개중 특색이 없는 것들로만, 정확히는 저주를 비롯한 사악한 기운이 깃들기 전까지는 평범한 축에 속했던 물품들을 위주로 토해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위화감은 금방 가셨다. “하지만, 으으으음.” “젠장······ 내 마석 세 개가 똥으로 돌아왔어!” 전설속의 괴수, 레벨 250을 넘기는 바다의 폭군 크라켄이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기에는 전리품들이 지나치게 평범했고, 사람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모든 부정한 기운을 로아가 깔끔하게 먹어치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크라켄의 기록을, 마나를 바탕으로 탄생한 아티팩트는 없나!” “없는 모양이군. 젠장, 가끔씩 이런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에!”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라. 그런 게 있었더라면 꼼짝없이 저 마도사의 손에 들어갔을 테니.” 아르페는 혹시나 로아가 값어치가 높은 아티팩트를 뱉어냈나 하는 걱정에 두 눈을 부릅뜨고 물건들을 살폈다. 그러나 녀석에게 실수란 없었다. 어쩜 이렇게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는지 오히려 남은 물건들을 조금 더 뱉어냈어도 좋았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너희 몫은 됐네. 알아서 분배해, 가져가.” “아니, 물건이 이 정도라면 차라리 크라켄의 사체 쪽을······.” “뭐? 마도사인 내가 쓸 일도 없는 병장기를 가져가라고? 아니면 뭐야, 우리 파티의 장비에 부족한 점이라도 있어 보이냐?” “아니 그게 아니고······.” 아르페가 눈을 부라리자 항의하려던 귀족이 금세 움츠러들었다. 깡패가 따로 없었지만 아르페가 벌인 짓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이상 그에게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그러면 네 몫은 이 창 하나고. 넌 방패고······.” “어째서······ 어째서란 말이냐, 어째서! 이럴 리가 없었는데, 어째서!” “이런 물건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는 쪽이 좋았는데······ 젠장!” 이렇게 해서 귀족과 상인들은 경매에 출품되었던 물건들을 전리품으로서 분배받게 되었다. 사기도 저주도 모두 없는 깨끗한 물건이니 뒤탈도 걱정할 필요 없으리라!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미케나만 눈을 하얗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아르페님이 아까 제게 그런 말씀을······.” “자, 그러면 크라켄의 사체는 온전히 우리 파티랑 미케나의 몫이겠네? 받을 것 받은 사람들은 전선에 합류나 해라. 타국인이라 해도, 디아스에 입국한 이상 루나틱웨이브에 협조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아직, 크라켄의 사체에 뭐가 남아있는지도 모르잖소!” “남아 있으면.” 아르페가 씩 웃으며 물었다. “남아 있으면 어쩌게? 1천분의 1에 해당하는 네 몫으로, 또 뭔가를 주장하려고?” “······바, 방어벽으로 가겠소.” “아르페 너무 멋져······.” 아르페는 그렇게 귀족과 상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아예 크라켄을 감추기만 해도 수상하다는 인식이 따라올 터, 그는 놈의 다리부터 시작해서 마나 스트링으로 천천히 해체 작업을 하기는 했다. 미케나에게 떼어줄 2할을 정산하는 것이다. 바로 그 미케나는 자리를 떠나면서 이를 박박 가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걱정스레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르페님, 솔직히 통쾌하기는 한데 이대론 디아스에 타격이 가는 걸 피할 수 없어요······.” “아마 그렇겠지. 나 개인을 어쩔 수는 없으니, 아마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은디아스의 귀족들에게 항의가 들어갈 거야.” “그렇죠.” “그러면 귀족들의 입지가 아주 조금은 줄어들고, 꼭두각시 왕은 조금 숨통이 트이겠지. 설령 귀족들이 그 데미지를 꼭두각시 왕에게 돌리려 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귀족들만 약해지느냐, 꼭두각시 왕까지 약해지느냐, 둘 중 하나지. 그리고 일이 어느 쪽으로 진행되든 차후 시페넌이 왕국으로 복귀할 때 보탬이 되어줄 거야.” “······.” 미케나는 상상도 못했던 답이 돌아와 벙찌고 말았다. 아르페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가히 짐작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페는 그냥 그러면 나쁠 것 없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자, 대충 이 정도 잘라줄게. 크라켄을 어떻게 가공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줄 필요는 없겠지?” “아르페님은 정말 뭐든지 아시는군요.” “뭐든지 아는 건 아냐, 아는 것만. 어라, 전에도 이 말 했던 것 같은데.” 미케나에게의 배분은 상당히 후했다. 다리 절반 이상, 그리고 몸통에서도 상당부분을 잘라내어 그녀에게 준 것이다. 애니웨어 상회에서 환영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다만 이 거대한 사체를 끌고 가는 것만이 문제다. “몸통은 마나시약의 재료가 된다고 들었어요. 자양강장제로도 쓰이고,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쓸모가 많은 부위라고.” “하지만 가장 환영받는 건 단연 다리지.” 비록 모든 저주와 마의 인자를 로아가 흡수한 탓에 많이 약화되어 있기는 했으나,그럼에도 크라켄은 크라켄. 놈의 다리는 죽으며 더더욱 질겨졌고, 다리를 따라 난 수만 개의 흡반과 그 위에 달린 갈고리는 터무니없이 위협적이었다. 다리 하나만 가지고도 많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그중에서도 크라켄 다리로 만든 채찍이 가장 유명했다. “대가리 쪽에서도 팔아먹을 부분은 나올 테니 기대해. 아, 그래도 먹물은 포기해라. 내가 쓸 거거든.” 아르페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광분하여 날뛰던 놈이니 360도로 머리를 회전하며 사방에 먹물을 뿌려대도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 놈이 육체파 크라켄이었던 건지 저주의 기운을 방출할 수가 없었던 건지 전투 중 먹물을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그냥 몸통으로 부딪히거나 촉수를 날려대기만 했으니 말이다. “크라켄의 먹물이라니, 저는 듣기도 처음 들어요.” “그럴 거야. 저주 마법에 주로 쓰여서, 여기에 연관되고 살아남는 놈이 별로 없거든.” “그, 그건 파신다고 해도 안 살래요!” 프레이트에서 있었던 일의 여파일까, 미케나는 이제 저주의 지읒자만 나와도 사색이 되었다. 귀를 파르르 떨며 뒤로 물러서는 미케나의 모습에, 아르페는 낄낄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실은 저주가 아니라 고위 마도서의 제작에 쓰여. 워낙에 강대한 마나가 깊은 세월 순수하게 농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자신의 의지를 잘 담아낼 수 있는 마도사만 있으면 손쉽게 마도서를 써낼 수 있거든. 한 번 읽으면 사라져 기록으로 흡수되는 마도서가 아니라, 데마이트처럼 알아서 기록을 흡수해 성장하며 마도사를 보조하는 무장이 되는 거야.” “저주랑은 요만큼도 관련 없는 거였잖아요! 이이익, 제 트라우마를 가지고 놀리시다니······!” 미케나가 몸과 귀를 파들파들 떨며 분해했다. 아르페는 그 모습에 재차 낄낄거렸으나 그 뒤에서 그를 바라보던 메테르의 눈빛은 살짝 침잠했다. “아르페, 빨리 거둘 거 거두고 쉬러 가자. 나 아르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생겼어.” “······메테르, 네 목소리가 조금 무서운데.” “너무 지쳐서 그래. 아르페가 옆에 있어주면 곧 괜찮아져. 아르페가, 내 옆에. 내 바로 옆에······.” “더 무서워졌는데······.” 메테르의 기묘한 박력에 잔뜩 쫄아버린 아르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미케나 역시 이대로 있다간 메테르에게 살해를 당할 것 같다는 공포에 상회의 인력을 불러 수거할 것들만 수거하고는 잽싸게 튀었다. 그들의 도축 작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시점까지는 크라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남아 있었으나, 정말로 순수한 몬스터 사체의 도축과 다를 것이 없자 이내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었다. 아르페는 그렇게 사람들이 전부 빠지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주였다. 아르페에겐 그 사실이 가장 의외였다. “내가 본 당신이라면 제일 먼저 방어벽 위로 달려갈 줄 알았는데.” 크라켄을 도축하던 작업도 멈추고 아르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물론 루나틱 웨이브도 중요하지. 하지만 자네에게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일 것 같아서 말이야.” 아르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잠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 멈칫했다. 속으로는 잘도 알아냈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했다. “뭔 소리야. 나도 겨울까지 여기서 못 나가는 처지인 건 똑같은데.” “그런가? 난 자네가 곧 이곳을 떠날 것만 같아 그 전에 어떻게든 감사를 표하고 싶었네. 비록 아니라고 해도, 지금 제대로 감사인사를 해두도록 하지. 고맙네.” 영주는 그렇게 말하며 아르페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네었다. 제법 깊은 마력이 깃들어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아공간 주머니였다. “좀 더 제대로 된 물건으로 보답을 하고 싶었으나 남는 게 이런 것뿐이었네. 그래도 용량과 무게감소율에 대해서만은 왕국제일이라는 평을 받았으니, 크라켄 하나 담아가기에는 충분할 거야.” 아르페는 영주의 설명을 들으며 그것을 받아 건성으로 살피다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정말로 과장이 아니야. 이건 어마어마한 보물인데?” 아공간 주머니란 제법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더 좋은 물건을 찾다 보면 터무니없이 가격이 뛰는 물건 중 하나다. 개중에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더라도 구할 수 없는, 고대의 대마도사가 만든 컬렉션도 있었는데 이 주머니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애초에 몸길이만 백 미터를 넘기는 어마어마한 거대 괴수 크라켄을 담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시점에서 일반적인 아공간 주머니의 규격을 한참은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나 때문에 손해만 보게 될 텐데 잘도 이런 귀한 물건을 줄 생각을 했구나······?” “손해?” 아르페의 대꾸에 영주는 픽 웃어버리곤, 인자한 눈으로 아르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있어 구할 수 있었던 이 도시의 무수한 목숨을, 자네 덕분에 막을 수 있었던 피와 눈물의 무게를 생각하면, 저깟 놈들의 압박 따위는 웃으며 넘길 수 있네.” “······.”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멋들어진 대꾸가 돌아와 아르페는 침묵하고 말았다. 위선과 가식은 과거 많이 보아왔기에 오히려 지금 이 남자가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 하도 역겨운 인간들만 보다 보니 잊고 있었어. 턱없이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인간 중에는 분명 이런 이도 있었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한없이 이기적인 인간들을 마주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며 한 점 주저도 없었던 아르페에게 불의의 순간 아주 제대로 들어온 공격이었다. “당신······.” 영주의 말은 그러나 거기서 더 이어졌다. “분명 우리는 미흡했어. 지켜야 할 것을 착각하여 어리석은 실수를 했어. 하지만 자네 덕분에 되돌릴 수 없는 참사를 막아낼 수 있었지. 인간이란 본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생물인지라 자네 앞에서 또 이런 추태를 보이고 말았지만······ 그래도 나처럼 생각하는 인간도 분명 많을 것이란 사실을 알리고 싶었네.” 전생에서 수백 년을 살았던 아르페에 비하면 고작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삶을 살았을 터인 영주가 자신을 꿰뚫어보다니. 아르페는 자신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영주는 눈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그만큼이나 연륜이 담겨 총기를 잃지 않은 두 눈으로 똑바로 아르페를 바라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자네가 한 일의 가치를 알고, 비록 따라하지는 못하지만, 존경하는 이가 나 외에도 무수히 있다는 사실을 꼭 알리고 싶었어.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인간을 도와주게. 자네가 실망했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똑같이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게 되는 날도 올 거야. 나는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믿네.” “하······.” 완패다. 하지만 기분은 실로 나쁘지 않았다. 아르페는 손을 내밀어 아공간 주머니를 받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 한 명 실망하고 좌절한다고 인간계에 큰일이라도 나겠냐마는······ 알았어, 영주님. 꼭 기억해둘게.”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정말 다행이네.”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드는 영주는 아르페의 눈에 어린 독기가 조금 가시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밝게 웃었다. 아르페는 그 미소와 마주하며 묘하게 쑥스러워져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표정과는 다른 느낌의 말이 새어나왔다. “지금은 일단 자리를 비우겠다만······ 강화해서 놔둘 터였던 방어벽이 부서진 건결국 내 잘못이니, 1차 방어벽은 재건해주도록 할게.” “아니, 방어벽은 크라켄을 물리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순 것이지 않은가. 그보다도 지금 1차 방어벽이 있던 자리는 물과 몬스터로 가득하네만······.” “그런 게 나한테 문제 될 것 같아?” “······아니, 문제없겠군. 그러면 나는 먼저 전선으로 향하겠네. 다시 말하겠지만,정말 고맙네.” 그의 능력은 익히 보지 않았던가. 영주는 픽 웃으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곤 인간과 몬스터가 맞서는 전선으로 향했다. 아르페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리에는 아르페 일행 3인만이 남았다. “그런데 자리를 비우겠다는 건 뭐야, 아르페?” “이놈 도축을 이어서 해야지.” 가뜩이나 지금부터의 작업은 사람 눈을 피해서 하려던 것인데, 적절한 도구까지 받았으니 굳이 이 자리를 고집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크라켄을 통째로 주머니 안에 넣어버리고는, 정말로 크라켄을 담고도 여유롭게 가벼운 주머니에 만족해 씩 웃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다음 퀘스트 받으러 가자.” “퀘스트!?” 크라켄은 제 역할을 다해 쓸쓸히 무대에서 퇴장했다. 이제는 그 뱃속에서 나타날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과 대면할 순간이었다.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3 > 인간들이 바다 몬스터를 막기 위해 항구에서 한창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아르페일행은 그 누구도 모르게 야산으로 향했다. 아니, 아마 도시에서 단 한 명 에트나만은 알고 있을 터이나 그들을 따라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얌전히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어줄 모양이었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넓은 공터에 이르러 비로소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로부터 크라켄의 사체를 꺼내어 놓았다. 미케나에게 제법 많이 떼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놈의 사체는 거대하기 그지없었다. 다리와 몸통의 도축이 끝나 그것들을 따로 떼어내자 간신히 제법 덤벼볼만한 규모로 줄어드는 수준이었다. “몸통 부분도 얼추 다 끝났고······ 좋아, 이 정도는 따로 빼놓자.” “방어벽에 쓰려고 그러는 거지, 아르페?” 메테르의 예리한 지적에 아르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찌된 게 이 녀석은 아르페 자신과 관련된 일에만 유독 머리가 잘 굴러간다. “맞아. 크라켄의 몸통을 말려, 잘게 가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자재들을 강화시켜주는 좋은 재료가 되어줄 테니까.” “역시 아르페는 너무 착하다니까.” “나중에 다른 얘기가 안 나오도록 방어벽을 복구시켜놓으려는 것뿐이거든.” 아르페는 먹히지도 않을 구라를 치며 동시에 여럿의 마법을 발동했다. 불꽃과 바람과 마나 스트링을 난무하며 크라켄의 몸통을 말리고 잘게 다져 가루로 만든 후 따로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어두고 나자, 그곳에는 크라켄의 대가리 부분만이 남아있었다. “후우······ 해볼까.” 조금의 과장도 없이 크라켄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였다. 마나 스트링을 뽑아내는 아르페의 움직임도 더욱 신중해져 있었다. “일단은 여기서 대가리를 쪼개고 먹물낭을 조심스레 빼냅니다.” “크라켄의 덩치는 엄청 큰데 낭은 제법 작네?” “생산력만 보장된다면 굳이 크기가 클 필요는 없거든. 여기에······.” 그리고 이 부분에서 아르페에게만 가능한 특별 에디션, 강화를 거친다. 두 번의 강화를 연달아 발동하자 크라켄의 먹물낭이 아르페의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로 변화했다. 그 안에 들었을 먹물 또한 강화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어라.” “왜 그래, 아르페?” 어쩐지 이대로 한 번 더 강화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아르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그의 강화 스킬에 의한 강화는, 마석 등의 보조 재료가 없는 한 두 번이 한계였을 터인데 말이다. ‘혹시 크라켄전에서 스킬이 성장한 결과인가?’ 혹시나가 아니라 역시나였다. 강화 스킬을 난무해야 했던 크라켄전에서 아르페는일종의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이 경험치 정산 과정에 반영되어 그의 강화 스킬을 성장시켜놓은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아르페의 강화 스킬은 51레벨에 이르러 있었다. 프레이트에 입성할당시의 스킬 레벨이 43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성장 폭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스킬 레벨 따위가 아니다. 마석 없이도 일행의 장비를 세 번씩이나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얘들아, 너희도 이리 와라.” “응!” 아르페는 당장에 먹물낭을 강화하고, 자신의 부츠를 비롯한 일행의 장비까지도 한꺼번에 강화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원래부터 사기적인 성능을 자랑했던 그의 부츠는 물론이고, 이제 슬슬 바꿔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었던 두 사람의 장비들이 완벽 그 이상으로 성장해주어 그를 흡족케 했다. “오빠오빠, 봐봐! 망치가 진동을 저장했다가 발사한대!” “그래, 이제야 그 금속의 힘이 제대로 드러나는구나.” “와아, 이젠 빔이 두 발까지 연속으로 나간대!” “그래, 그냥 빔이라고 부르자 이제.” 마음 같아선 데마이트도 강화해두고 싶었으나 자아를 품은 녀석을 강화시키는 건사람을 강화시키는 일이나 마찬가지인지라 아직은 무리였다. 그러나 아직 무리라는것은 언젠가는 가능해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데마이트를 강화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은 즉······.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눈앞에 있으니까.’ 아르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생각을 털어버리곤, 딱 휴대하기 좋은 크기로 완성된 먹물낭을 잘 매듭지어 로브 안에 매달았다. 이젠 설령 크라켄이 몸통박치기를 한다고 해도 아르페의 뼈가 으스러지면 으스러졌지 먹물낭이 터지지는 않을 것이다. 먹물낭을 제외하고 남은 부분은 대체로 로아의 먹이가 되었다. 강한 마나를 품고 있지만 독을 포함하고 있어 인간이 섭취하지 못하는 내장과 같은 부위가 주로 녀석에게 주어졌다. [먀아, 먀아아아.] “그래, 이거 먹었으니까 나중에 다른 것들은 토해내야 한다.” [먀.] 귀족들에게 내준 전리품들은 어디까지나 가짜. 크라켄의 기록과 마나를 담은 진정한 전리품은 로아의 뱃속에 들어 있는 상태다. 로아는 아르페가 직접 손질해준 크라켄의 내장이 제법 맛있었는지, 별로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페는 녀석의 턱을 간질여주며 도축을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가리가 모두 해체되고, 그곳에는 놈의 거대한 위장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한 메테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아르페, 이 안에 살아있는 게 있어!” “일단 검 뽑아들고 준비해.” “······응.” 아르페의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크라켄의 위장 안에 들어있는 생물의 정체가 다름 아닌 몬스터라는 것. 메테르는 깊게 따져 묻지 않고 바로 검을 꺼내 쥐었다. “좋아, 그럼 간다.” 아르페는 녀석이 준비된 것을 확인하고, 마나 스트링을 조종하여 실로 섬세한 동작으로 위장을 갈랐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눈부시게 새하얀 피부와 물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미녀였다. “크으······ 흐윽······.” 그녀는 무척이나 괴로운 안색으로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는데, 몸에 기력도 마력도 전혀 남지 않아 이대로 두었다간 며칠 안에 죽을 것처럼만 보였다. 더욱이 그녀의 몸에 깊이 침투한 마의 인자······ 분명 마족화 실험의 희생양이 된것이리라. 크라켄의 위장 안에 들어가 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터였다. 아니, 최악의 경우 애초에 그녀를 크라켄이 집어삼킨 것조차 실험과 연관된 일일 수도 있었다. “이이이이익!” 그러나 깊은 사연을 암시하는 그녀의 몸 상태는 알 바 아니고 오직 그녀가 발가벗은 나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노한 메테르가 이를 갈며 검극을 아르페에게 겨누었다. “그럼 이제 이 검으로 아르페의 눈을!” “진정해, 일단 진정해봐. 여자라서 구한 게 아니니까!” “언니, 이 몬스터도 나랑 똑같은 증세야. 분명 오빠도 그걸 알아본 거야.” “윽.” 시에나의 말에 간신히 검을 거두는 메테르.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어들은 평범한 몬스터 이상의 지능을 지니고 있어. 나와 말이 통하는 이상, 이녀석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겠지. 내가 이 녀석의 존재를 숨겨, 살리려는 것도 전부 그것 때문이야.” “그럼 정보를 얻어낸 다음에는? ······죽일 거야?” 몬스터는 모두 나쁜 짓을 하니 적이라고 단언했던 메테르도, 지금 이렇게 약해져 끙끙대고 있는 머메이드를 향해 먼저 검을 내지를 용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르페는 그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받은 상대는 죽이지 않아. 데이스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조치를 할 테니 안심해도 좋아.” “응, 알겠어. 하지만 옷은 빨리 입혔으면 좋겠어.” “몬스터라니까 참.” “하지만 몸매 좋단 말이야! 아르페의 눈에 안 좋아!” 확실히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겉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녀석의 나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도 기분이 묘하긴 하다. 아르페는 급한 대로 그녀의 나신 위에 천을 덮어주었다. [먀?] “그래, 잘 아네. 부탁하자.” 자기 차례임을 직감한 로아가 종종걸음으로 그의 어깨 위에서 내려오더니, 머메이드의 복부 위로 폴짝 올라가 입을 크게 벌렸다. [미야아아아아앙] 단지 그것만으로 머메이드를 지배하고 있던 마의 인자가 모두 깔끔하게 빨려나와로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아르페는 이미 녀석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장면을 보며 새삼스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오스 에그에 탐욕의 흑요석이 흡수되어 정말 다행이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능력인걸. 만약 로아가 처음부터 있었더라면 나두 오빠 고생시키지 않았을 텐데.” 한때나마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아르페의 손에 의해 이블 리플렉터로 거듭난 시에나에게는 그 광경이 제법 감회가 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이블 리플렉터가 되어 이렇듯 전투로 범벅된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항상 웃고 있는 그녀이기에 착각하고 있었을 뿐, 사실 그녀는······. “하지만 그 덕에 오빠랑 언니랑 같이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이쪽이 더 좋아, 오빠.” “너랑 메테르랑 같이 독심술 스킬 같은 거 익히고 있냐?” “헤헤.” 아르페는 혼자서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게 만드는 파티원들에게 투덜거리며 로아를 거두어들였다. 녀석이 장난스레 하품 한 번 한 것만으로 머메이드의 몸을 지배하던 저주며 마의 인자는 모두 깔끔하게 소멸되었다. 이제 저 머메이드는 단지 몸이 지나치게 쇠약해져 있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치명적인 치명상 상태에서 평범한 치명상 상태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시에나.” “응.” 시에나는 망치를 내려놓고 다가와 머메이드를 향해 한 손을 펼쳤다. 그녀의 따스한 마력이 머메이드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즉시 머메이드가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물빛의 눈을 번쩍 뜨며 신음을 토해냈다. “크흑, 흑!?”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인간의 언어가 아닌, 몬스터, 그중에서도 머메이드를 비롯한 해상 몬스터들과 소통할 수 있는 몬스터의 언어였다. [한 방에 의식이 돌아왔네. 마의 인자가 머무르고 있었으니 아프긴 하겠지만, 육신을 깨끗이 씻어내는 과정이니 참도록 해.] “칵, 케흑!” 참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에나의 마력이 머메이드의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그녀의 기력을 북돋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도 녀석은 고통을 참지 못해 끊임없이 비명을 토해냈다. 차라리 의식을 나중에 되찾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한 방에 깨어나는 바람에 괜히 더 고생이었다. 그나마 시에나의 마나가 마를 구축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단시간 내에 치료가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카윽, 히크아으으으······.” 시에나가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치료야 완벽히 끝났지만 아직 통증이 잔류하고 있었던 걸까, 머메이드는 간헐적으로 신음을 토해내며 자신의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순수한 물빛 눈망울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공포로 가득했다. 아르페가 고개를 저어보이며 말했다. [이젠 괜찮아. 마족의 인자도, 저주도, 상처도 모두 없어. 그러니까 넌 이제 죽지 않을 거야. 내 말에 복종하기만 하면.] 차기 마왕으로 선정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사악한 발언에 가녀린 머메이드는공포로 벌벌 떨었다. 메테르가 그의 말을 알아들었더라면 불같이 화를 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몬스터의 언어에는 조예가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아, 알겠습니다. 당신은 저를 헤어날 수 없는 위기로부터 구해주셨으니, 앞으로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응? ······아, 그거구나.] 인어는 인간들 사이에도 몬스터다, 아인종이다, 의견이 분분한 종족 중 하나였다. 루나틱 웨이브만 다가오면 평범히 몬스터처럼 이성을 살짝 잃은 모습으로 나타나인간들과 적대하기에 몬스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특이하게도 그중에는 간혹지성이 높은 개체가 있어 루나틱 웨이브에 휩쓸리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성이 높은 개체는, 은혜를 입을 경우 그 은혜를 어떤 식으로든 갚는 것으로 유명했다. 작게는 바다에서 나는 보석과 같은 보답에서부터, 크게는 평생을 바치는 복종에 이르기까지. ‘보통은 적으로 조우할 뿐인 머맨이나 머메이드에게 목숨을 바칠 만큼 큰 은혜를 입히기가 어려워 역사 속에서도 극히 드물게 밖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만.’ 이거 메테르가 알게 된다면 무척 골치가 아파지겠구나. 몬스터고 자시고 일단 예쁜 여자는 다 잠재적인 적으로 분류하는 메테르이니······ 하지만 어차피 정보나 캐낼 목적으로 살려낸 녀석이다. 적당히 일을 본 후 다시 풀어주면 되겠지. 아르페는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 넘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도 이 난리통에 대해선 대충 파악하고 있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희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저주를 퍼트린 놈들이 있지?] [네, 있습니다.] [너는 어째서 크라켄의 뱃속에 들어가 있었던 거지?] [그들이 저를 붙잡아 크라켄에게 먹이로 내주었습니다. 크라켄의 힘은 워낙에 강대하여 그들의 힘으로도 직접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대신 저에게 저주를 걸고, 크라켄이 저를 잡아먹게 하는 것으로 크라켄에게도 저주를 걸었습니다.] 음, 역시 상당한 수준의 개새끼들이구나. 아르페는 근엄하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놈들, 아직 바다에 있냐?] [있습니다. 심해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를 차지하고 저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름은 아냐?] [압니다. 마델루드라는 남자였습니다.] 아르페는 그 대답을 듣고 문득 떠오른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곧 답을 떠올렸다. “마델루드면 디아스의 전 대공 이름이잖아······?” 자신의 첫 번째 퀘스트가 아직 달성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르페는 그제야 간신히 알게 되었다.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4 > 인어로부터 당장 파악해야 할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아르페는 일단 자신의 위장용 아티팩트를 인어에게 끼워(이 부분에서 다시금 메테르는 격노했다.) 대충 정체를 감추곤, 그녀에게 치마와 적당한 상의를 입혀 도시로 끌고 돌아왔다. 물론 루나틱 웨이브 기간이었기에 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한산했다. 모두가 루나틱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 버티는 것을 목적으로 생활패턴을 변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녀석을 보고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은 다행이네.” [인간의 옷은 불편합니다.] [참아. 사람의 눈이 없는 곳까지만.] [알겠습니다.] 인어는 수면 아래에 있을 때에는 하반신이 물고기의 그것으로 변하지만, 물이 없는 곳으로 나오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다리로 변해 이족보행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 하여 그 위에 인간의 옷을 입는 것은 인어에게는 상당히 거북한 일이었다. 인어는 지금도 치마를 붙잡았다 놓으며 연신 초조해하고 있었다. [혹시 너희한테도 이름이 있어?] [있습니다. 제 이름은 세릴 아나이드입니다. 주인님께서는 편하게 세릴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 네가 내 이름을 부를 일은 없겠다만 일단 말해두자면 내 이름은 아르페······ 잠깐만, 아나이드라고?] 이제와 한참 늦었지만 그녀와 이름을 교환하며 뒤늦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던 아르페가 그녀의 이름에 뭔가 짚이는 게 있어 눈살을 찌푸렸다. [인어의 왕국인가 하는 곳의 이름이 아나이드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저는 아나이드 왕국의 37왕녀입니다.] 누가 물고기 아니랄까봐 자식 숫자 한 번 겁나 많았다. 아르페는 이 인어, 세릴이 차기 여왕이라든가 하는 사태만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끌고 여관 문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크라켄을 이렇게······.” “맥주 한 잔 더! 아직도 놈의 면상이 잊히지가······.” “이봐, 주인장!” 거리가 그렇게나 조용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여관 1층의 식당에는사람이 모여 바글거리고 있었다. 방어벽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교대한 병사들이나 급하게 불려온 용병들, 심지어는 타국의 상인들까지. 아르페는 술을 마시며 떠드는 이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루나틱 웨이브를 생각하면 쉴 수 있을 때 이렇게 가스를 빼놓는 편이 좋으리라. 아마 나중에 그들과 교대할 이들 또한 여관이나 술집에서 똑같이 늘어지게 될 것이다. “어, 저기······.” “여자다.” “눈이 다 환해지네, 환해져.” 그런데 바로 그곳에 아르페 일행이 들어온 것이다. 아르페야 그렇다 치고 그의 뒤로 따라붙어 들어오는 이들을 확인한 사람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냥 여자도 아니고 예쁜 여자가, 셋씩이나. 그중 두 명이 어리건 등 뒤에 위협적인 무기를 메고 있건, 가뜩이나 남자 비율이 높은 이곳에서는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겍.” “야, 눈 돌려. 죽고 싶지 않으면 눈 돌려!” 그러나 그들에게 쏠렸던 시선은 곧 조용히 거두어졌다. 첫째로는 이전 광장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싸우던 메테르와 시에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녀들이 인간들을 수수깡 비틀듯이 꺾어 죽이던 마족을 우습게 베어내거나 뭉개어 죽였던 것을 기억하는 이 또한 있었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프레이트뿐만이 아니라 디아스 전체를 집어삼킬 수도 있었던 괴물 크라켄을 끝장낸 장본인, 무지막지한 마력의 소유자 소년 마도사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이곳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남자라면······.” “사이에 두고 싸울 만하지.” “그런데 저 자식 심성이 그렇게 더럽다면서. 내 고용주가 아주 치를 떨던데.” “닥쳐, 이 바보야!” 아르페는 모든 바보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분명 주인장 대신 업무를 담당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가 카운터로 다가가는 순간 음식을 나르고 있던 주인장이 잽싸게 카운터를 접수했다. “와, 왔군. 네놈 마도사!” “그렇게 중요한 일 아니었는데. 그냥 일행이 한 명 추가됐으니 혹시 추가금이 필요한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인데 굳이 아저씨가······?” “나는 단지 네놈이 부럽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제기랄, 그 사이 또 여자가 하나 늘어나다니! 그것도 아주 예쁜 여자가!” 정말 끝내주게 솔직한 주인장이었다! 물론 세릴이 몬스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반응이 조금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아르페는 주인장이 분해하는 모습이 제법 보기 즐거웠기에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래서 돈 더 줘야 돼, 말아야 돼?” “그것도 아주 당연하게 같은 방으로 끌고 들어가다니······ 아니, 필요 없다! 그 좁아터진 방에서 잘 수 있다면 여자 셋이든 다섯이든 마음대로 데려와서 자라!” “알았으니까 울지 말고 말해봐······.” 주인장이 갑자기 아르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곤 진심어린 눈으로 말했다. “네가 크라켄을 잡아낸 마도사라는 얘기를 들었어. 우리 도시를 지켜내 줘서 고맙다. 그래, 네놈이라면 자격이 있어······! 부디 날 대신해 내 꿈을 이뤄다오! 마누라로만 저택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환상의······.” “기분 나쁘니까 손 치워줄래?” 주인장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줄 풍운아를 만나게 된 것이 그렇게나 흥겨웠는지 통 크게 선언했다. “에잇, 기분이다! 오늘 저녁은 무료로 제공하지!” “이왕 서비스하는 거 여관방까지 딜리버리 서비스로 부탁해도 될까?” 딜리버리 서비스는 불가능했으나 테이크아웃은 가능했다. 아르페는 여관의 명물 버터옥수수를 비롯한 따끈따끈한 요리가 가득 담긴 플레이트를 받아들고 일행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후우.] 방 안에 들어와 사람들의 시선에서부터 자유롭게 되자마자 세릴이 냅다 치마를 벗어던졌다. 그 즉시 메테르가 아르페를 향해 몸을 던졌고, 아르페는 잽싸게 그것을피하며 세릴에게 천을 집어던졌다. 스스로도 용케 쟁반을 쏟지 않고 해냈다고 자화자찬할 정도였다. [그걸로 가려!] [알겠습니다.] 숨 막히는 찰나의 사투 끝에 넷이 모두 좁은 방 안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메테르는 여전히 세릴을 경계하고 있었고, 시에나는 아르페의 후드 바깥으로 나온 로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암컷이라 경계하고 보는 메테르와는 달리 시에나는 로아가 퍽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것은,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응? 아, 이거? 자.] 아르페는 세릴의 시선이 버터옥수수에 꽂힌 것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그것을 하나 집어 건네었다. 세릴은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앙상해진 두손으로 그것을 꼭 쥐고는 천천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치유가 끝났으니 소화시키는 데에 문제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배탈로부터 무적이 되는 건 아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나머지 파티원에게도 옥수수를 한 개씩 쥐여 주며 말했다. “이 머메이드는 앞으로 세릴이라고 부르면 돼.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는, 그래.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만’ 함께할 테고······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적대할 일은없으니 안심해도 돼.” “퀘스트······ 지금 바다 안에서 그 끔찍한 저주가 다시 퍼지고 있는 거야, 오빠?” “대공은 나쁜 사람이야. 그 저주는 두 번 다시 나타나선 안 돼.” 혹시나 세릴에 초점을 맞추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시에나와 메테르 모두 퀘스트 쪽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대공을 포함해서 마족화 실험과 연관된 놈들의 잔존세력이 바다로 숨어든 모양이야. 아마 그 마족도 함께하는 것 같고······.” 대공 세력의 진압 과정에서 마왕군이 방출한 아티팩트가 활약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눈치를 채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왕군은 대공을 그냥 놔두지 않고 회수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전 대공 현 민간인인 마델루드는 저주를 연구하는 남은 마도사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쉬이 들키지 않는 바다로 향했고, 마왕군의 지시를 받아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를 점령하고 저주를 퍼트리기 시작한 것. “왕 내쫓고 국왕 자리 탐낼 때부터 알아는 봤다만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는 새끼라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오빠, 그 사람 혼내줄 거지?” 메테르에게나 시에나에게나, 마족화 저주와 관련된 일은 결코 웃으며 떠올릴 수는 없는 기억이었다. 무수한 이의 피와 눈물이, 죽음이, 분노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기에. 당시에는 왕국까지 쳐들어가지 않아도 알아서 일이 마무리되리라는 생각에 가야할 길을 서둘렀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앞길을 놈이 직접 가로막고 있는 이상 치워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르페 역시 이를 드러내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그러나 사실 이번 퀘스트를 수행하려는 것은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르페는 자신 몫의 버터옥수수를 뜯어먹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번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배에 몸을 싣고 있었을 거야. 목적지가 에이디아라는 건 이미 말해줬었지?” “응, 하지만 지금은 루나틱 웨이브가······.” “그렇지. 루나틱 웨이브가 일어나게 되면 바닷길은 막힌다고 보면 돼. 모든 항구가 폐쇄되니 배가 뜨질 못하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바다를 넘어갈 수 없는 건 아냐. 위가 아니라, 아래로 가면 되니까.” “바다 아래······? 아.”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던 시에나가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버터옥수수를 뜯어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답이 되었다. “그렇구나, 바다의 왕국이라고 했었지.” “그래. 인간이든 몬스터든, 나라를 만들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바로 도로 정비거든. 에이디아로 넘어가기 위해 녀석들의 도로를 빌릴 생각이야.” 인어의 왕국, 비록 가본 적은 없었으나 그 존재만은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바다에 다른 몬스터나 위험요소로부터 유리된 해저도로를 만들어놓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본 바가 있다. 전생에는 이용할 일이 없었고 가능하면 현생에서도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바닷길이 막힌 이상, 또 이렇게 든든한 안내자가 생긴 이상은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게 오빠가 세릴을 도와준 근본적인 이유였구나. 아, 그러려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 나쁜 사람들하고 싸워야겠네.” “바로 그거야. 이제 대충 정리가 됐지?” “응.” [흠······ 음, 흠.] 인간들 사이에서 인어의 왕국을 구해주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릴은 여전히 옥수수를 뜯어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성숙한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저렇게 천진한 모습을 보이니 묘한 매력이 있었다. 바로 그때 메테르가 아르페를 홱 돌아보았다. “아르페에에?” “아니, 내가 매력을 느꼈다는 건 아니고. 정말이야.” 빌어먹을, 이 녀석들은 독심술 스킬을 익히고 있는 게 분명한데 어째서 만물열람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단 말인가! 아르페는 혀를 차며 메테르의 추궁하는 듯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이내 여기서 한가롭게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내, 때는 이때다 싶어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너희끼리 저녁 먹고 쉬고 있어. 내일이 출발이니까.” [먀아.] 시에나의 품에 얌전히 안겨있던 로아가 폴짝 뛰어 다시 그의 후드 안으로 들어왔다. 메테르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아르페에게 따졌다. “말이 곤란하니까 도망가는 거지.” “오빠는?” “난 이 도시에서 해둬야 할 것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올게. 방어벽도 새로 세우고······ 만날 사람이 있기도 하고.” “······만날 사람, 이라면.” 메테르가 그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빛이 바뀐 것도 그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남편의 바람기를 걱정하는 아내의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전장으로 떠나는 연인을 붙잡는 처녀의 눈빛이었던 것이다. “아르페, 그 여자 따라서 가버리면 안 돼. 알았지?” 시에나라면 몰라도 메테르는 그녀와 직접 만난 적도 없을 텐데, 용케도 짚어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정 걱정되면 따라올래?” “······아니, 아르페를 믿을래. 아르페는 연상취향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믿을 거야.” 전혀 믿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 더구나 그녀가 연상이라는 건 또 어찌 알았을까. 아르페는 살짝 심란해졌지만 이것도 업보다. 그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메테르의 머리를 그저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 이것으로 안정이 되기를 바랐다. “다녀올게.” “······응.” “너무 늦게 오면 안 돼!” 세릴은 여전히 옥수수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르페는 픽 웃어버리곤 녀석에게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란 한 마디를 남기며 방을 나왔다. 그리곤 C구역의 제이미 여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5 > 제이미 여관이라고 아르페 일행이 머무르던 여관과 무엇이 그리 다르겠냐마는, 그곳의 분위기는 제법 침체되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아르페가 들어와도 사람들은 일제히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뭐냐?” [먀아아.] 어디서 초상이라도 났나,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는 아르페. 여급 한 명이 쪼르르 달려와 그에게 속삭여주었다. “어떤 예쁜 여성분께 치근대던 남자 한 명이 그대로······.” 그 뒤로 이어진 내용은 정상적인 남자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듣지 않는 것이 좋은 내용이었다. 과연, 그래서 다들 이렇게 애도의 시간을 갖고 있었단 말인가. 아르페 또한 짧게 그의 남은 생애를 위하여 기도했다. 자손은 낳지 못할 터이니 본인이라도 즐기다 가기를. 아, 즐기지도 못하겠구나.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드는 아르페에게 여급이 숙연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니. 사람을 만나러 왔을 뿐이야.” 아르페는 계단을 오르기 전, 혹시 모르니 사타구니 보호대라도 차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정말 그녀가 마음을 먹었다간 그 정도로는 막을 수 없을 터이니 포기했다. [먀, 먀아아아?] “보호대가 아니라 정조대가 필요한 거 아니냐고? 아냐, 그녀는 준법정신이 투철하니까 미성년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을 거야.” [먀아······.] 로아의 가느다랗게 뜬 눈을 무시하며 아르페는 여관 3층의 구석진 방을 노크했다. 그녀는 아르페가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가느다랗게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기에,설령 그에게 만물열람이 없었다 한들 쉬이 그녀가 머무르는 방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들어와.] “들어갈게.” 아르페는 그에게 대답해오는 에트나의 목소리가 평온한 것에 안심하며 문을 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혹시나 마대자루가 눈앞을 덮쳐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아르페.” “안녕, 에트나.” 눈앞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의 미녀가 서 있었다. “······그래, 안녕. 몸은 좀 나아졌어?” “응.” 서로 무난하게 인사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에트나는 문을 열어준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르페는 뭔가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입을 열었다. “약속했던 걸 주러 왔어. 원래 바로 오려고 했는데, 의식을 잃고 있었던 바람에.” “괜찮아. 별로 오래 안 기다렸······.” 에트나는 연한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하다 말고 아르페의 한 손에 나타난 검을 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붉게 빛나는 검신을 지닌 그 장검은 한때 광란의 나락염검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던 검으로, 디아스의 내란에서 크게 활약한 기사의 검으로 유명하나 실상은 불의 정령 멜티아가 봉인되어 있어 누가 쥐던 어마어마한 활약을 발휘하는 대신 끝내 목숨을 잃고 마는 마검이었다. 물론 로아에 의해 저주가 완벽하게 거두어진 지금은 불의 정령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검을 뛰쳐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저주는 본디 그렇게 쉽게 거두고 말고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아니, 이걸 보니까 안 괜찮아졌어. 너 대체 어떻게 이 저주를······ 아니, 말하기 시작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분명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텐데 검을 받아드는 에트나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침대 위에 주저앉아버렸다. 영원으로 느껴지는 찰나의 침묵 끝에, 그녀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페······ 넌 대체 누구야?” “나이도 어린데 레벨도 재능도 개쩌는 소년 마도사.” “아냐, 그런 게 아냐! 이 검도 그렇고, 그 날 보여준 모습은 영락없는······ 너, 너 혹시.” 그러나 그녀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목 위로 떠오르다가 사라지는 검은족쇄가 아르페의 눈에 선명히 보였다. 마족이라는 굴레에 갇혀있는 한 그 누구도 벗어던질 수 없는 절대적인 구속이.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족쇄가 사라졌다. 말을 고르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예감이 안 좋아. 언젠가 꼭 너와 싸우게 될 것만 같아.” “난 지금 너보다 훨씬 약해. 해치우려면 지금이야.” “······이익.” 아르페가 농담하듯 던진 말에 에트나는 정말 죽여 버릴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제야 피식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지금 싸울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걱정해? 나중에 정말로 한 판 붙게 되면 그때 걱정하면 되잖아.” “넌 그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겠다. 계속 애늙은이 같다가 이제 좀 어린애답네.” “어린애 맞는데?” “······그래, 애 맞지. 난 대체 어쩌다 이런······.” 에트나는 말을 마치곤 에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아주 조금 밝아져 있었다. “그래, 때려치우자. 네 말마따나 지금부터 걱정하는 건 미련한 짓이야. 당장 내가내일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삶인걸.” “좀 괜찮아졌어?” “그렇게 괜찮지는 않지만, 괜찮은 척 하기로 했어. 그거 내 전문이거든. 후흐.” 그녀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페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가 태도를 바꾸었다. 마치 여태까지의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후우······.” 몸의 긴장을 조금 빼고, 눈은 살짝 가늘고 짓궂게 뜨며, 아르페와 자신의 관계가 평범한 남녀의 관계인 양 포장하며,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그 셋 중 누가 네 애인이야?” 어째서 아르페가 아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대화에 돌입할 때 이런 인트로를 선택하는 것일까, 아르페는 한탄하며 입을 열었다. “제일 예쁜 애.” 물론 그 셋 중 애인 따위는 없었기에, 설령 거짓임이 들통 나더라도 상대가 만면에 미소를 띨만한 거짓말을 골라서 했다. 그 말을 들은 에트나는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셋 다라는 대답이 안 나와서 다행이다.” “그렇게 대답했으면?” “많은 여자를 울리는 바람둥이는 용납할 수 없어. 그러니까 평생 한 명만 울릴 수있는 처지로 만들어주려고 했지.” 아르페는 도망칠 준비를 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알아들을 수 있게 번역해주지 않을래?” “그대로 납치해서 튀려고 했지.” “너 저리 가. 이리 오지 마.” “농담이야, 농담.”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자신의 옆자리를 퐁퐁 두드렸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아르페는 무척 망설였으나 결국은 그녀의 뜻에 따라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닿지 않는, 그저 아스라이 체온이 느껴질 뿐인 거리를 두고 앉았다. 아르페는 그것이 묘하게 간지러워 사이를 더 벌리려했지만, 에트나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고양이는? 엄청 얌전하네.” “사역마야.” [먀우.] 분위기 파악을 하고 있는 건지 로아는 제법 얌전했다. 아니, 어쩌면 본능적으로 에트나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에트나가 손을 뻗어오자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얌전히 몸을 내주는 모습이 완전히 무저항 모드였다. 에트나 역시 그것을 깨닫곤 쓰게 웃었다. “······이렇다니까. 동물들은 기운에 민감하거든. 항상 이랬어.” “널 무서워하지 않게 될 만큼 강하게 키워서 다시 데려올게.” “어머나, 에프터 신청이라니 이렇게 기쁠 데가.” 에트나는 로아에게 뻗었던 손을 조심스레 거두어 이번엔 아르페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가느다랗고 섬세하면서도 뜨거운 손이 그를 온전히 차지했다. 아르페가 고개를 갸웃하자, 에트나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말했다. “내 손, 붙잡고 싶다며.” “아, 그러고 보니 마력을 달라는 말을 그렇게 둘러댔었지.” “으드득.” 에트나의 입에서 나온 소리와 똑같은 소리가 아르페의 뼈마디에서 울려 퍼질 뻔 했다. 에트나는 아르페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무시하고 그렇게 한참 그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는 간신히 놔주었다. 그의 손에 붉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이도 어린 게 여자를 가지고 놀려고 들어.” “그럼 나이가 많았으면 괜찮았다는 얘기야?” “응. ······그러니까 빨리 자라줘.” “······응?” 어라, 어째 이 비슷한 말을 내가 누군가한테 했던 것 같은데? 하고 기묘한 기분에빠져드는 아르페. 그러나 그가 기억의 저편에서 답을 건져 올리기 전에 에트나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고는, 그를 살포시 끌어당기며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불사조의 딸답게 더없이 뜨겁고 강렬한 감촉이었다. “어······.” “후훗.” 상상도 못했던 기습공격에 아르페가 멍해있자니 에트나는 빙긋 웃어버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네가 자라서, 만약 그때에도 우리가 싸우지 않게 되면. 그땐 진지하게 한 번 만나보는 거야.” “애인 있다니까?” “후.” 아르페는 절대무적의 방패로 스스로를 보호했으나 그것은 에트나의 코웃음 한 번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거짓말인 거 모를 줄 알았어? 다른 부분은 잘 감추는데 왜 그쪽에만 둔한지 모르겠네.” “어······.” ······이상하다, 어째서 오늘은 가는 곳마다 다 속내가 읽히는 걸까. 혹시 속내를 드러내는 마법에라도 걸렸나 싶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보는 아르페를 보며 에트나는 흐림 한 점 없는 맑은 얼굴로 웃어버렸다.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지만, 아무래도 슬슬 타임 리미트라서.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 “에트나?” “그리고 이거, 선물.” 에트나가 그에게 검을 내밀었다. 확인해볼 것도 없이 자신이 방에 들어오며 에트나에게 건네었던 바로 그 광란의 나락염검이었다. 그러나 아르페가 그것을 받아 정보를 살피니 이미 그 안에 불의 정령 멜티아는 없었다. 다만 여전히 강렬한 불꽃의 기운이 머물고 있었는데, 아르페는 그것이 에트나의 힘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멜티아가 머물렀던 시절보다야 훨씬 못하겠지만, 녀석이 남긴 기록과 에트나의 힘이 조화되어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아티팩트로 거듭나 있었다. “너만은 못해도, 나도 내 힘을 인챈트하는 데에는 제법 솜씨가 있거든. 나라고 생각하며 아껴줘. 아, 그 여자애한테는 주면 안 돼. 그럼 진짜 미워할 거야.” 메테르 주려고 했던 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아르페는 속으로는 그렇게생각했으나 겉으로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쓰려고 했어. 걱정하지 마.” “후흣, 거짓말 같지만 믿어볼게. 그럼 안녕.” 다음 순간 에트나는 정말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며칠 전 주점에서 사라졌을 때처럼 그렇게 감쪽같이, 아마도 이번엔 이전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한 번에 떠나갔다. 불꽃을 다루는 주제에 바람같이 빠른 움직임이다. [먀아.] 로아는 그제야 간신히 여유를 되찾고는 아르페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내려와 빤히 그를 올려다보며 울었다. 두 눈 가득 공포와 걱정이 가득했다. [먀아아아아······.] “아니, 정에 휘둘리는 여자는 아냐. 만약 날 죽여야 하는 때가 오면 가차 없이 죽이겠지.” [먀먀, 먀우아아.] “그래. 그렇게 되면 아마 나보다 그녀가 더 상처 입을 거야. 그러니까······.” 아르페는 그녀의 쓸쓸한 얼굴을, 그녀의 목을 휘감은 검은 족쇄를 떠올렸다.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타올라야 한 찬란한 불꽃이, 바깥으로 뻗어 나오지 못해 속으로만 침잠하는 그 참담한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렸다. 하지만 오늘 한 번 더 확인한 덕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는 절대로만 느꼈던 그 힘이, 지금은 그렇게까지 무섭지 않다는 것을. “이번엔 내 힘으로 끊어내야지. 도와줄 거지, 로아?” [먀아!] 로아가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준 불꽃의 검을 허리춤에 적당히 차고 로브로 감추며, 그는 씩씩하게 바깥을 향해 발을 내뻗었다. “그럼 남은 일 처리하러 가자.” 미케나와의 거래에 이어 1차 방어벽의 건축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숙소로 복귀했을 때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새 제법 사이가 좋아져 서로 어깨를 기대어 잠들어 있던 세릴과 시에나와는 달리 메테르만은 도끼눈을 뜨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아르페, 할 말은?” “믿어주지는 않겠지만, 아니야. 다른 일도 하고 온 거야.”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 자, 이리 와.” “넵.” 조금이라도 잠을 청하고 싶었던 아르페는 자신과 에트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메테르가 믿어주기까지 삼십분 동안 시달린 끝에야 간신히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들 수 있었다. 메테르 딴에 그것은 에트나에게 아르페를 빼앗긴 시간이나 애정을 다시 되찾아오는 과정인 모양이었으나, 아르페에게는 형벌 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잠은 아주 푹 잘 수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잠든 세 시간, 그동안프레이트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쌓였던 피로가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가셨으니까 말이다. < Chapter 14. 퀘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5. 언더워터 - 1 > “으음······ 아.” 눈을 뜨니 정면에 메테르의 매끈하게 뻗은, 눈부시게 흰 목이 보였다. 몸을 비틀어보았지만 메테르가 양팔로 자신을 구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어디서 그라운드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닐 텐데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붙들고 있는지 그녀의 재능이 새삼스레 놀라울 정도였다. “잘도 이런 상태에서 잠을 잤네······ 안 돼, 또 졸려와.” 아르페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면서도, 결코 그가 괴로워하거나 답답하지는 않게 신체의 부드러운 부분으로만 그를 감싸는 센스까지. 어디서 연구라도 해온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완벽한 포옹이었다. ‘너무 푹 자버린 거면 안 되는데······ 아, 다행이다. 해는 안 떴네.’ 살짝 괴로우면서도 기분이 좋은 묘한 구속 상태에서 간신히 고개만 들어 창밖을 확인하니, 아직까지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루를 그대로 스킵하고 잠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지만 설마 그건 아닐 것이다. 정말로 그랬으면 그건 어쩔 수가없다. “메테르, 일어나.” “음, 아르페······? 에히.” 메테르는 눈을 반쯤 뜨며 일어나더니 아르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밤새 그가 에트나에게로 떠나버리지 않나 걱정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아르페에에.” “어리광 그만 부리고 일어나, 임마.” 아르페는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녀석의 이마에 꿀밤을 먹여주고는 괴롭고도 행복한 구속 상태에서 무사히 벗어났다. 이제 화는 전부 풀렸는지, 녀석은 맞으면서도 즐거워보였다. “너희도 일어나. 오전에 해둬야 할 일이 많으니까.” “오빠······?” [주, 주인님. 귀환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잠들어 죄송합니다.] [그런 걸로 죄송해할 필요 없어.] 아르페는 제각기 눈을 부비며 졸음을 떨쳐내는 파티 멤버들을 나란히 앉혀놓고는아공간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그 안에서 족히 백여 권이 넘는 스킬 북과 스펠 북이 우르르 쏟아졌다. “이게 다 뭐야, 아르페!?” “뭐긴 뭐야, 우리가 익힐 스킬이랑 스펠이지. 크라켄 사체 처분하고 얻어왔어.” 비록 크라켄 몸통의 50% 가량이 방어벽 건축에 소모되기는 했으나 아르페에게는그 외에도 팔아먹을 부분이 많이 남아있었다. 크라켄의 사체가 워낙에 거대했던 탓에, 그리고 아르페가 그중 대부분을 차지한 탓에, 나중에 그들 파티가 써먹을 만큼을 제하고도 상당한 양을 팔아치울 수 있었던 것이다. 크라켄이라는 놈이 좀처럼 쉽게 나타나지 않는 만큼 놈의 사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언제든 찾을 수 있고, 마침 미케나가 얻은 크라켄 사체를 유통하기 위해 애니웨어 상회 전체가 그 일에 달라붙어 있었던 만큼 아르페 역시 수월하게 그것을 팔아먹을 수 있었다. 물론 스킬 북이나 스펠 북이 돈이 있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전속 상인이기도 한 미케나는 이번 크라켄 토벌전에서 큰 역할을 했기에 드디어 200레벨의 상위클래스 상인으로 거듭났고, 취급할 수 있는 매물 또한 대폭 늘어났다. 그 기회를 놓칠 아르페가 아닌지라, 크라켄에게서 나온 부산물들을 제시하고 그 대가로 스킬, 스펠 북들을 대량으로 얻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레벨 200을 돌파해 광역 마법을 익힐 만한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상회에 매물이 없어 구매할 수 없었던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스킬 북과 스펠 북을 합쳐 159권을 구매하고도 2만 골드 가량이 남았어. 뭐 어차피 이것도 나중에 스킬 북이랑 스펠 북을 사는 데에 쓰이겠지만.” “아르페는 정말로 용사가 아니라 상인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미케나의 지분을 다소 후하게 쳐서 넘겨준 것도 크라켄 사체를 보다 쉽게 팔아먹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상대에게 이득을 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까지 깔끔하게 취하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너무 많아!” “전투 사제의 것이 아닌 스킬은 대부분 네 거니까 일단 그것들을 익혀두면 돼.” 메테르는 얼떨떨해하며 집히는 대로 스킬 북 하나를 익혔다. 그리곤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대장장이의 효율적인 날 갈기······ 어째서 이런 스킬을 익혔는데 힘이 증가하는거야, 아르페?” “그건 날을 효율적으로 갈기 위해 절묘한 수준의 근력이 요구되기 때문이지.” “스킬의 세계는 정말 신비롭구나······.” “와, 내가 익힐 수 있는 스킬도 엄청 많아, 오빠!” “아줌마의 상품 취급 권한이 늘어났거든. 이걸로 신전 내부 비리 세력과 직빵으로 연결될 수 있게 됐어!” “정말 세상엔 나쁜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하지만 그 나쁜 사람들 덕분에 시에나가 강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도, 이것도. 와아, 전투사제들은 원래 이런 스킬을 쓰는 거구나!” “앞으로는 더 늘어날 거야.” “으으으, 연속으로 익히려니까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아.” 아르페는 정신없이 스킬과 스펠 북을 집어 익히는 메테르와 시에나를 보며 피식 웃어버리곤 자신도 마찬가지로 스펠을 익히기 시작했다. 용사 파티가 아니고선 쉽게 볼 수 없는 그 진풍경을 세릴은 그저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목공의 스킬을 익혔을 뿐인데 내가 더 강해지는 걸까? 난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아르페.” “그 이유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낙농업 라이프에 보탬이 될 것 같긴 한데.” 정신없이 스킬과 스펠을 익히면서 무려 30분을 보낸 끝에 비로소 용사 파티는 눈앞의 책의 산더미를 깨끗이 비울 수 있었다. 팔아먹을 수 있는 크라켄의 부산물들을 대체로 스킬, 스펠 북과 바꾼 덕분에 아르페와 메테르의 스테이터스는 한꺼번에 50 가량 상승했다. 이젠 슬슬 그들의 레벨 대에 익힐 수 있는 스킬과 스펠이 거의 남지 않았을 지경이었다. 반면 시에나는 용사가 아닌지라 아무래도 익힐 수 있는 스킬이 한정되어 있는 편이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사제와 전투사제가 공용으로 익힐 수 있는 시시콜콜한 스펠 북을 이번 기회에 대량으로 익혀 가뜩이나 괴물 같던 스테이터스가 더욱 올랐다. 크라켄을 해치운 업적을 인정받아 세례의 수정구를 통해 200레벨의 상위클래스로 진보하기까지 했으니, 지금 그녀의 능력은 크라켄 토벌전때와는 또 차원이 다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오빠, 그러면 이제 바로 출발하는 거야?” “그 전에 딱 한 가지가 남았어. 가장 중요한 전리품 정산의 순간이.” [먀아아아아.] 자신의 차례임을 직감한 로아가 무척 피곤한 울음소리를 냈으나 아르페는 용서 없이 녀석을 잡아 올렸다. “긴 말 안할게. 크라켄에게서 얻은 것 전부 다 토해놔.” [먀! 먀아? 먀아아아!] “안 돼.” [먀우우······.] 자잘한 것 여러 개도 좋지만 큰 것도 좋아요! 하나만 갖고 싶어요! 라는 로아의 요구를 아르페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로아는 시무룩해져 입을 열었다. 그 안에서 딱 네 개의 물건이 떨어졌다. 그 거대한 크라켄이 내놓은 전리품치고는 규모가 작았으나, 그만큼이나 하나하나의 가치가 대단한 것들뿐이었다. “일단 첫 번째가 놈의 마석. 이건 나중에 강화재료로 쓸 거야. 가능하다면.” 레벨 267 보스 몬스터의 마석이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마석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아공간 주머니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물빛의 금속 부츠, 부츠와 비슷한 광택을 내는 건틀렛과······ 짙은 물빛 가죽 장정의 스펠 북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아르페는 주먹을 불끈쥐었다. 가죽 장정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힘이, 그것이 고레벨의 광역마법임을 확신케 했다. “드디어 나왔구나.” “안에서 엄청나게 많은 마나가 느껴져······ 그리고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워!” 경지가 높은 스펠 북은 제목만 봐도 멀미를 호소하는 메테르의 반응으로 더욱 더 확실해졌다. 아르페는 부츠와 건틀렛을 각기 메테르와 시에나에게 나누어주곤, 자신은 득의의 표정으로 마법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당연한 수순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갓 플러쉬(God Flush)······.” “아르페, 왜 그래······?” “말하고 싶지 않아.” 그것은 광역마법이다. 분명한 광역마법이었다. 습득레벨도 낮은 편이고, 그런 주제에 광역마법 가운데에서도 위력이 굉장한 편이고, 특정 조건만 갖춰지면 비교적 적은 마력으로도 발휘할 수 있는, 무척 훌륭한 대마법······ 인데. “그런데 왜 그렇게 썩어 들어가는 표정이야, 아르페?” “왜냐면······.” 아르페는 한숨을 내쉬며 설명해주었다. “플러쉬 계열의 마법이 바로 마도왕국 에이디아의 하수도 시설 완비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전설적인 마법이기 때문이지······. 게다가 접두에 갓이 붙다니 내 생애 처음 본다.” “응······?” 마법과 수도 시설에 대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그 연원을 알 리 없는 일행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으나, 아르페는 그저 성대하게 한숨을 들이쉬며 갓 플러쉬를 익힐 따름이었다. 아르페의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희귀마법에 광역마법이라는점까지 더해져 그 스펠 하나 익힌 것만으로 무려 30이나 되는 마력 스탯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아르페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그래, 강하기만 하면 됐지. 강하기만······.” 놈의 부츠는 크라켄의 성질을 닮아 어디에든 찰싹 달라붙는 것이 가능하고, 물속에서의 움직임을 지상에서와 다를 바 없이 자유롭게 해주는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반면 건틀렛은 평상시 마나를 모아두었다가 크라켄의 속성과 힘을 그 손에 쥔 무기에 부여할 수 있게 해주는 아티팩트. 둘 모두 아르페의 손에서 세 차례의 강화를 거쳐 완전히 새로운 아티팩트로 거듭난 후 각기 메테르와 시에나에게 분배되었다. “이거 재밌다!” “두 배는 강해진 것 같아, 오빠!” “응, 두 배 강해진 게 맞아.” 스킬과 스펠을 모두 익히고 전리품까지 배분하고 나니, 어쩌면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어제의 크라켄과 만난다면 이 셋이서 놈과 한 판 일전을 벌여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어째서 크라켄을 이기기 위해서 그 전에 크라켄을 한 번 쓰러트릴 필요가 있는 것일까, 아르페는 새삼스럽게 인생의 부조리함을 느꼈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나면 마왕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마법을 익힐 수 있게 된다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바다에 크라켄이 한 마리 더 살고 있을 리도 없고······.” “아르페, 나 배고파아.” “이제 곧 해가 뜰 테니 밥을 먹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인어의 왕국에서 미역보다 맛있는 만찬이 나오길 기도하자.” 전력만 봐선 에이디아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대로 마계로 쳐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참아두었다. 아무래도 전생과 달리 현생의 셰프의 레시피는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변한 모양이니 말이다. 일행은 그들이 있었다는 흔적을 깔끔히 지운 후 곧장 여관을 나섰다. 물론 루나틱웨이브가 한창이었기에 지금도 각 방어벽 위에는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저 정도 사람들도 속이지 못해서야 용사 파티라는 이름을 댈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아르페, 아직 중요한 걸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아.” 아르페의 옷깃을 꼭 붙잡은 채 걸음을 옮기던 메테르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어왔다. “우리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면 숨은 어떻게 쉬는 거야?” 아르페가 상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그건 나도 모른다고 하면 때릴 거야. 입술로, 아르페의 입술을 말이야.” “미안, 농담이었어. 지금 말해줄 테니까 다가오지 마.” 어느덧 협박의 수위가 증가해 있었다. 아르페는 정말 자신이 메테르를 망쳐놓고 만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로 정답을 공개했다. “수중호흡이라는 마법이 있어. 쓸데없이 마법의 난이도가 높고,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될 뿐 행동은 전혀 편해지지 않기 때문에 매물이 있어도 잘 팔리지는 않는 그런 애매한 마법이지. 덕분에 이번에 하나 싸게 장만했어.” “마법은 정말 대단하구나.” “언제까지고 마나 스트링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 기왕이면 광역마법도 좀 더 제대로 된 놈을 얻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주인님.] 그때 그들의 뒤를 서툰 걸음으로 쫓아오던 머메이드, 세릴이 아르페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인어의 도로가 곧 열립니다.] “좋아, 그럼 가자.” 아르페는 일행을 이끌고 3차 방어벽을 지나쳐 그대로 2차 방어벽에 이르렀다. 몬스터들은 아르페가 밤사이 새로이 건축한 1차 방어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의 경비병들과 기사들은 1차 방어벽과 2차 방어벽에 나누어 주둔하고 있었다. 2차 방어벽에 주둔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자고 있고, 그나마 1차 방어벽에 주둔하는 이들은 제법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다들 눈 똑바로 뜨고 움직여! 머맨이 언제 기어 올라올지 모른다!” “하지만 단장님, 이상하게 아까부터 인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몬스터들은 방어벽에 접촉하는 대로 기겁하며 물러나니······.” “마도사님은 정말 굉장해. 어제의 그 방어벽을 다시 재건이라도 해놓으신 것 같군.” “긴장을 풀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이 머저리들이!” 기사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하룻밤 사이 건축이 완료된 1차 방어벽을 눈에 두게 되었다. 2차 방어벽보다도 훨씬 늠름하게 우뚝 선 녀석인지라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붉은 광택의 금속 방어벽. 건축 과정에서 들어간 금속도 없는데 어째서 결과물이 금속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물에 닿아도 녹이 슬지 않는다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저게 아르페가 새로 만든 벽이구나.” “굉장해, 오빠. 저것도 엄청 단단해 보여.” “그야 당연하지. 들어간 소재가 소잰데.” 비록 크라켄을 상대하면서 염옥 파수꾼이 완파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마력을 품은 잔해는 그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아르페는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며 그 파편들을 수거하고 거기에 크라켄의 몸통에서 얻은 성분을 더해 새로운 1차 방어벽을 구축했다. 그리고 거기에 강화 스킬의 성장으로 가능하게 된 세 번의 강화를 연달아 펼쳐, 비록 염옥 파수꾼보다는 못하나 이전 그 자리에 있었던 1차 방어벽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튼튼한 방어벽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건축과정을 함께한 영주는 지나치게 감격한 나머지 거기에 아르페의 이름을 붙이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르페는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1차 방어벽을 단숨에 넘어가서 바다로 들어가면 되려나.” “그랬다간 몬스터는 둘째치고 사람들의 시선을 죽었다 깨어나도 피할 수가 없게 되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들어가자.” “여기서······?” 2차 방어벽과 1차 방어벽 사이에는 원래 항구가 있었다. 타국의 귀족들과 상인이타고 온 배가 정박되어 있던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그곳은 지금, 아르페의 마법과 크라켄의 돌진, 다른 몬스터들의 공격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어 바닷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어젯밤 이후로 몬스터들이 1차 방어벽을 넘어오지 못하게 되어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호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분명 그 안에는 어제의 사투의 흔적이, 무수한 인간과 몬스터의 피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을 터였다. “그리고 경황 중에 수거하지 못했던 각종 전리품과 상선 등에 가득 쌓여 있던 물자 또한 고스란히 묻혀 있지.” “······아르페에.” “그런 눈으로 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니 포기해. 나는 도둑질을 하는 게 아니라, 바다에 묻혀 있던 보물을 발굴하는 것뿐이야!” 용사 파티의 재정을 담당하는 한 아르페는 어디까지고 뻔뻔해질 수 있었다! 메테르는 굉장히 따지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바로 방금 자신들이 익혔던 스킬과 스펠 북의 가격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르페는 마냥 착하지만은 않아. 그리고 그걸 알면서 용인하는 나도 나빠.” “그 정도가 아니라 나는 그냥 대놓고 나쁜 놈이야. 그러면 간다!” 아르페는 수중호흡 마법을 시전해 그들 일행에게 동시에 걸었다. 물론 인어인 세릴이나 마수인 로아에게는 걸어줄 필요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마법을 발동해 동시에 셋에게 적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메테르, 저기 돌 하나 던져봐.” “응.” 메테르의 강렬한 투구가 수면에 거대한 파문을 일게 했다. 덤으로 그 주위에 있던몬스터들까지 여럿 죽였다. 스킬도 아니고 단지 돌멩이 하나를 던졌을 뿐이었는데! “······음? 방금 저기서 이상한 소리가!” “또 크라켄이 온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이냐!” 메테르의 시선 끌기 전략이 조금 과도하게 먹혀, 1차 방어벽과 2차 방어벽에 머무르는 모든 기사의 시선이 바닷물로 인해 조성된 인공호수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한 순간. 용사 파티는 바다 아래를 향해 잠수했다. < Chapter 15. 언더워터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5. 언더워터 - 2 > “역시 건질만한 게 얼마 없네.” “그게 아르페가 할 말이야?” 아르페는 진심으로 투덜거렸으나 메테르는 그를 보며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페는 크라켄이 한 마리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아공간 주머니를 바다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봐. 귀족이든 상인이든 정말 중요한 물건은 이미 경매에 내놓은 상태잖아? 만약 수만 골드 어치의 물건이 상선에 실려 있었더라면 저 새끼들은 루나틱 웨이브고 자시고 그것들을 수거하는 데에 혈안이 되었을걸.” “그냥 바다에 들어와서 물건을 수거할 능력이 안 되었던 것 아닐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 아르페의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아서, 하나의 상선에서 기껏 얻을 수 있었던 물건이잡다한 금화나 보석, 소형 아티팩트를 합쳐 3천 골드 정도였다. R후작부인의 속옷 두 벌을 살 수 있는 돈이긴 하지만, 그걸 회수하자고 목숨을 거는 귀족과 상인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선이 다 합치면 50개 정도. 16만 골드는 넘겼네. 이게 바로 규모의 경제라는 거야, 메테르.” “아르페는 아주 나쁜 놈이야.” 아르페는 상선의 내용물을 털기만 한 것이 미안해, 침몰한 배의 잔해들을 보기 좋게 정리하여 나중에 수거해 재활용하기 좋게 쌓아놓았다. 결코 사람이 한 것 같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몬스터가 손을 대어 망가트리기는 힘들게. 일을 마친 후 일대를 휘휘 둘러본다. 1차 방어벽을 넘어 이곳에까지 이르는 몬스터는 여전히 없고, 상선은 빠짐없이 깔끔하게 털었으며, 몬스터들로부터 돈도 아이템도 확실하게 수거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좋아, 그럼 가볼까.” [이곳에서······ 정말 많은 동포가 죽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왕국의 인어였습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세릴이 말했다. 다른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인어들을 아이템, 돈으로 취급하는 아르페에게 반발심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 그것을 품에 넣으며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 [같은 인간들끼리도 치고 박고 죽이는 게 우리야. 하물며 먼저 덤벼온 인어들을 살려줄 리가 없잖아. 따지려면 번지수가 틀렸어.] [모든 인간이 서로를 죽이려 들지는 않듯이, 인어 또한 다 같은 인어가 아닙니다.그중에서도 저희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은, 그 자들이 오기 전까지는······.] 세릴의 목소리에 울분이 담겼다. 아르페에게 충성을 맹세할 뿐 이번 루나틱 웨이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현장과 마주하니 감정이 북받쳐 오른 모양이었다. 아르페 역시 그녀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 그대로 심해에서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면 인간들이 너희를 적대할 일도 없었겠지.] [주인님께서 정말 그들을 몰아내주신다면, 왕국에 드리운 저주를 거두어주신다면······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은 앞으로 다시는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원래,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마나의 거대한 흐름에 이끌리는 일 또한 없었습니다.] 즉 루나틱 웨이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정도의 문명을 갖추고 있단 뜻이렷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전생에서는 크게 활약한 적이 없어 굳이 기억하지도 않았던 인어들에 대해 아르페에게 조금의 흥미가 생겼다. ‘왜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한 인어를 우리가 그렇게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걸까······ 아, 그래. 인어 중에서는 레벨 200을 넘기는 상위클래스가 나온 적이 없었지.’ 그들 재능의 한계이든, 환경의 한계이든 상관없다. 인어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강자를 배출한 적이 없다. 더욱이 쪽수로 밀어붙이려 해도 인어의 절반 이상이 무능력한 레벨 한 자리수의 허접 몬스터에 불과했으니, 인간도 마왕군도 여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광화의 저주를 걸어 정예화한 인어 전투부대라면 용사 파티나 마왕군은 몰라도 바닷길을 이용하는 인간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거야.’ 전생에서 셰프는 인간 전체보다는 용사 파티에 포커스를 두고 요리를 진행했기에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었는데, 역시 이런 점만 보면 전생과 무척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 이왕 대공 잔당의 척살을 결심한 김에, 그들에게 연관된 인어들까지 말끔하게 처리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르페는 뒤에 후환을 남겨두는 것이 제일 싫었다. 꼭 사천왕 같아서. [좋아, 네가 원하는 일은 대부분 네 뜻대로 이루어질 거야. 네가 우리 안내만 제대로 해준다면 말이지.] [저는 주인님의 종복입니다. 주인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저는 그저 주인님께서명하신 바를 따를 뿐입니다.] 아르페의 대꾸에 세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감추려 애써 담담하게 대꾸하는 것이 웃겨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인어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옆에서 메테르가 눈을 부라리는 것이 조금 무서웠다. “그런데 오빠, 그 길이라는 걸 이용하려면 결국 1차 방어벽 바깥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거야? 저 벽 부숴야 해?” “기껏 만들어놓은 방어벽을 내 손으로 부숴버릴 순 없지. 지하에 구멍을 뚫어서 반대편으로 빠져나갈 거야.” 방어벽을 뚫을 수 없으니 임시 해저터널을 만들어 방어벽을 넘어간다니, 그것과 방어벽을 뚫는 게 대체 뭐가 다른지 묻고 싶을 만큼 단순무식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일행이 모두 기가 막혀 있는 가운데 두 줄기의 마나 스트링을 뽑아내어, 그 둘을 서로 비비 꼬아 회전하는 나선을 만들어냈다. 마나와 마법의 운용만은 실로 기막힌 감이 있었으나, 결국 그 마법 자체는······. “마법을 많이 익혀도 결국 마나 스트링이구나, 아르페.” “달라.” 아르페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두 개의 마법을 더 영창했다. 하나는 대상의 마찰력을 극대로 끌어올려주는 하이퍼 러빙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대상의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마법 헤이스트였다. 마법에 다른 마법이나 스킬의 속성을 겹치는 것은 원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어째선지 그의 유니크 스펠 마나 스트링은 다른 모든 스킬, 스펠의 힘을 더해 강해지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가랏, 마나 스트링!” “결국 주력이 마나 스트링하고 하이퍼 러빙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거구나, 오빠······.” “그런 점이 너무 귀엽다니까.” 아무리 아르페가 귀여워도 그가 만들어낸 마법의 결과물은 결코 귀엽지 않았다. 무려 세 가지의 마법이 겹쳐 완성된 마나의 나선이 격렬한 회전을 일으키며 땅과 부딪힌 그 순간, 보는 이의 눈을 경악하게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땅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돌진한다! 흙먼지가 일겠지만 그 정도는 참아!” “바깥사람들이 눈치 채겠어! 빨리! 서둘러!” [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마법을 구사하시다니······!] 두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실시간으로 구멍을 확장하고 길게 뚫어내는 그 안으로 용사 일행은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1차 방어벽이 미처 커버하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일순간에 뚫고 들어간 마나 스트링은 곧장 방향을 전환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아르페는 실로 세심하게도 이미 그들이 지나쳐온 곳을 또 다른 마법으로 무너트려 메꾸며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좋아, 역시 완벽해.” “벌써 밖으로 나왔어, 오빠!” [벌써 통로가 완벽하게 메꿔졌어요!] 누가 보면 마도사가 아니라 전문 굴착꾼이었다. 누구도 과거 이곳에 구멍이 뚫렸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리라! [키아아아아아!] [이, 인간! 인간이 땅속에서 나타났다!] [죽여야 한다!] 바다 바닥 근처에 머무르던 몬스터들이 아르페 일행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개중에는 틀림없이 아나이드 왕국 소속이었던 인어들 또한 있었다. 그 규모가 세릴의 예상보다도 훨씬 많았다. [이럴 수가, 이렇게나 많이······.] 그들을 발견한 세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해도 막상 닥치고 보면 상상보다 더 참혹한 현실에 당황하는 법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결혼이나 출산이 바로 그러하다. [아나이드 왕국의 백성들이여, 내가 보이지 않는가! 아나이드 왕국의 공주, 세릴이란 말이다!] [죽인다!] [캬아아아아아!] 기꺼이 백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공주에 대한 그들의 보답은 바로 창과 물줄기였다. 세릴은 손에 물의 창을 만들어내 그것을 늦지 않게 막아냈으나, 얼굴에는 슬픔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인간뿐만 아니고 같은 인어에게조차 망설임 없이 공격을 가하다니.] [지금 너희 왕국의 인어 모두가 이런 상태라고 봐도 되는 거야?] [제가 크라켄에게 먹히기 전까지는 인구의 불과 5%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이상이 흐른 지금은 아마······.] [얼마나 많이 당했든 상관없어. 아니, 어쩌면 전부 저주에 당해 있는 쪽이 우리한테 보다 수월할지도 모르지.] 어째서? 이미 저주에 당했던 놈들은 그 저주를 건 세력에게 절대적인 적의를 품고 있을 터이고, 지금부터 그들을 구원할 아르페에게는 호감을 느낄 터, 그의 뜻대로 휘두르기 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쪽에는 저주가 아무리 많든 얼마나 강력하든 전부 먹어치울 수 있는 괴물이 있지. 그는 씩 웃어버리곤 메테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메테르, 저 위에 있는 인간들은 우리 눈치 못 채고 있지?” “응, 들어보니까 오늘 아침에 뭘 먹을까를 주제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어.” 메테르의 어마어마한 감각은 바다 바닥에서 물 바깥의 인간들이 떠드는 목소리까지 듣는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나저나 아침이라, 버터옥수수가 참 맛있었는데, 하고 한가롭게 생각하며 아르페는 로브 안에 손을 집어넣어 로아를 밖으로 꺼내놓았다. “녀석들의 저주를 먹어치워라, 로아. 퀘스트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먀?] 정말? 정말 날뛰어도 돼? 하고 보랏빛 눈을 반짝이며 재차 확인하는 로아.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죽이지만 마.” [먀!] 로아가 그 즉시 물속으로 뛰쳐나갔다. 그 과정에서 검고 작은 고양이의 몸집을 유지하고 있던 녀석이 흑색의 안개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아아아아아앙!] 그 즉시 광범위한 영역 내의 모든 부정한 기운을 흡수하는 로아! 무수한 숫자의 몬스터들 사이에 흩어져 있던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고통스러워했다. [크아아아아악!] [크흑, 하악!? 나, 나는 대체?] 처절한 고통에 이어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이 제정신을 찾자, 그들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한 다른 몬스터들이 곧장 그들을 향해 돌아서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에 의해 목이 잘려나갔다. “네놈들을 해치우지 않았던 건 길을 서두르고 싶어서였지 무서워서가 아니었거든.” 그가 만들어놓은 방어벽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해 이곳에서 빌빌거리고 있는 주제에 감히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다. 아르페는 두 손으로 뽑아낸 열 가닥의 마나 스트링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바다를 몬스터의 피와 사체로 가득 채우며, 그와 로아가 만들어낸 장관에 넋을 놓고 있는 세릴을 향해 단호하게 지시했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녀석들을 거둬. 아나이드 왕국의 공주인 너라면 할 수 있겠지?] [이렇게까지 압도적으로······ 맙소사.] 세릴은 자신이 모시게 된 주인의 능력이 그녀의 부족한 상상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것이 자신에게 복이 될지 흉이 될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었지만. [뭐해, 안 가?] [가, 가겠습니다!] 주인의 강함에 넋을 놓고 있던 세릴은 아르페의 말에 다급히 대꾸하고는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그리고 피와 사체, 그리고 흑색의 안개와 혼돈으로 가득한 바다의 전장으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나의 주군께서 우리의 왕국을 구원하러 오셨도다!] [고, 공주님!?] [세릴님! 맙소사, 공주님께서 살아나셨다! 크라켄에게 잡아먹혔던 우리 공주님께서!] [오오, 공주님!]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일대의 모든 몬스터는 죽고,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은 모두가 제정신을 차려 공주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루나틱 웨이브에 영향을 받는 몬스터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증가하고 있을 터이나, 아르페는 나머지는 인간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수백 배로 불어난 일행과 함께 인어의 도로로 향했다. 항구도시 프레이트로부터, 인어가 아닌 인간들과 한 마리의 마수에 의한 아나이드 왕국 인어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Chapter 15. 언더워터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5. 언더워터 - 3 > 인어의 도로는 바다 깊이 나아간 곳에 감추어져 있어, 평범한 몬스터들은 쉬이 찾아내기가 힘든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근처에도 저주로 더럽혀진 인어들이 잔뜩 주둔하고 있었지만 놈들의 저주를 다 합쳐봤자 로아에게는 식전 오드블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 금세 다 강제정화한 후 놈들까지 합류시켜 도로 안으로 들어섰다. “봐봐, 아르페. 이게 다 마법이야?” “대단하다, 정말로 바다 안에 길이 있는 것 같아.” 인어의 도로로 진입한 그 순간 메테르와 시에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도로는 좋은 의미로 모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일단 굉장히 넓었을 뿐더러 바다의 다른 영역과는 확연한 구분이 되었고, 일반적인 해상 몬스터는 설령 도로 안으로 들어와도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할 환경으로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 그래, 이건 종족 마법이야. 고대로부터 이어온 계약으로 종족 전체를 묶고, 이 도로를 이용하는 모든 인어의 힘을 이용해 도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거지.” 아르페 역시 인어의 도로가 있다는 것은 알았어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실체와 마주하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마냥 놀라운 일행과는 달리 그는 만물열람으로 이 일대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인어의 도로] [인어가 지닌 물을 조종하는 힘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일종의 아공간. 인어를 제외한 모든 존재는 이 영역에서 힘이 감소되며, 인어는 도로의 힘을 받아 더욱 강화된다.] [아나이드 왕국의 도로는 세상에 분포하는 다른 인어 국가의 그것과는 다른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주인님.] 그렇게나 대단한 능력을 지닌 주인이 놀라는 모습을 보며 세릴은 적잖이 뿌듯한 모양이었다. 이 도로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명에 가까운 숫자의 인어의 저주를 풀고아군으로 합류시켜, 지금 그녀는 심신이 제법 안정된 상태였다. [자랑스러워할 만해.] [영광입니다, 주인님.] 아르페의 칭찬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며 대꾸하는 그녀는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즉, 인어의 도로는 물을 조종하는 인어들의 힘에 의해 바다와는 유리된, 물이 없는 도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놨으면 과연 다른 해상 몬스터들은 이곳을 이용해먹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머리 잘 굴렸구나.” “아가미 호흡과 폐호흡을 모두 하는 인어에게만 가능한 일이구나······.” “아가미? 폐?” 시에나가 감탄하는 것을 들으며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똑같이 산골에서 살았을 텐데 어째서 시에나가 아는 걸 메테르는 모르는 걸까. 아르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적당히 메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두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기뻐했다. 눈을 다시 뜰 때쯤이면 아가미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일행이 도로를 둘러보며 감탄하는 그때, 그 뒤에서는 한창 제정신과 기력을 찾은 인어들이 세릴에게 따지고 있었다. [어째서 저런 어린 인간을 섬기시는 겁니까, 공주님.] [지금의 공주님이라면 능히 우리 왕국을 대표할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런데한낱 인간에게······.] [왕국의 구원자가 되어주실 분이니 말씀을 삼가라. 우리 왕국을 모두 합친 것보다 위에 계신 분이다. ······너희도 보면 곧 알게 될 거야.] [큭,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공주님의 눈을 의심할 수는 없으니, 믿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나 인어들이 반기를 드는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아르페도 조금은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세릴 선에서 수습이 끝날 모양이었다. 37공주라기에 실권이고 뭐고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법 그녀의 권위가 강한 것처럼 보여, 어쩐지 나중에 한층 더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아 아르페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먀, 먀아아.] “······너 설마 아직도 배고프냐?” [먀아.] 그때 아르페의 손을 로아가 마구 두드리며 울었다. 여태까지 천 마리도 넘는 숫자의 인어에게서 저주를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너머에서 저주의 기운이 느껴지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 그래. 먼저 가서 먹고 있어.” [먀아아아아아아오!] 녀석은 아르페의 허락이 떨어지는 대로 안개로 화해 그들보다 앞서 도로를 질주했다. 이미 녀석에게 저주를 흡수당한 전력이 있는 인어들은 그것을 보곤 힉,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아르페는 놈들을 무시하며 발을 뻗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쪽에서 먼저 저희를 찾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아르페의 보랏빛 눈이 번쩍였다. 비록 크라켄을 상대할 땐 놈이 워낙에 거대해 한번에 정보를 잡아낼 수 없었지만 이곳에선 다른 것이다. [누구 한 놈 빠짐없이 내가 먼저 찾아내, 끝장을 내줄 테니까.] 바다가 깊고 넓었기에 도로 또한 필연적으로 길었다. 그나마 다행한 점이 있다면 도로는 외부와 유리된 일종의 아공간 취급을 받아, 바깥을 걷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행은 그것을 변화해가는 바다의 풍경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와, 저기 상어가 지나가, 아르페!” “그래도 상어는 알아서 다행이구나.” “상어가 참 맛있다던데.” “······.” “아르페에.” 메테르의 간절한 눈빛을 견디다 못한 아르페는 마법으로 도로 밖의 상어를 한 마리 잡아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회수했다. 메테르는 신이 나서는 아르페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 옆에선 세릴이 경악하고 있었다. [인어의 도로 바깥에서 마법을 발현하고, 심지어는 물건만 공간이동 시켜 회수하다니······.] [부츠를 한 번 더 강화했더니 내 소유의 작은 물건까지 블링크시키는 게 가능해졌거든. 별 거 아냐.] 인어들이 아공간을 만들었다고 해봤자 아르페의 만물열람으로 그 구조를 해석하지 못할 리가 없다. 도로 바깥에서 마법을 발현해 상어를 죽이는 것도 간단한 일이고, 블링크를 적용한 아공간 주머니를 바깥으로 빼내어 상어의 사체를 회수하는 것은 그것보다도 간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한 메테르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변해가는 것은 비단 바다풍경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도로를 나아가며 몇 명, 혹은 수십 명 단위로 바닥에 널브러져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인어들과 차례차례로 합류할 수 있었다. [큭, 저희가 대체 무슨 짓을······.] [앗, 공주님! 세릴 공주님이시다!] 이미 로아에 의해 저주를 뿌리 끝까지 빨아 먹히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인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다가도 세릴과 조우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아주 순조로이 다른 인어들과 합류해 세릴을 따랐다. [자네는 2대대다. 합류하도록.] [세릴 공주님께서 저희 모두의 정신을 맑게 해주셨습니다. 지금은 공주님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왕국을 점령한 그 무뢰배들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되찾겠다. 서둘러 진군한다!] 도로를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인어와의 조우확률이 높아져만 갔다. 루나틱 웨이브에 투입되는 녀석들인 만큼 당연히 전투 병력이고, 전투 병력이라고 해봤자 레벨 100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로아에게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저주를 빨려 누워 있었다. [자네는 3대대! 그리고 자네는 4대대!]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게 대체 얼마만이지?] [좋은 일이 아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키던 그곳이 지금은 무방비하다는 얘기니까. 지금 왕국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생각해보면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구원자와 함께하고 있다.] [구원자라, 과연 그 구원자의 실력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군.] [공주님께서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를 믿을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는 말만 들어보면 정말이지 인간의 국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과 유사한 지능, 문명과 체계라······ 과연 메테르는 이런 놈들도 몬스터라는 이유만으로 먼저 공격해, 죽일 수 있을까? 문득 걱정이 된 아르페가 메테르를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마냥 웃는 얼굴로 아르페의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페는 자신의 걱정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래, 내 기대가 너무 컸다.” “아르페가 방금 실례되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네가 실례야. 널 걱정한 내 마음에 실례가 되고 있어. 실시간으로.” “아.” 그 말을 듣는 메테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아르페에게 보다 가까이 붙으며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아르페, 설마 날 걱정해준 거야······?” “······난 대체 어떻게 하면 너한테 미움을 받을 수 있을지가 궁금해.” “그건 포기해.” “단언하다니!?” 정화된 인어의 군단의 숫자는 천 명에서 천이백으로, 천오백으로, 이천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도로가 꽉 차 오열종대로 헤쳐 모였는데도 그 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얘네 안 굶어죽냐?] [저희는 마나와 물만 있으면 생명활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 인어가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아무에게나 허락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전투인원과 지배층의 체력과 마나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음, 역시 이런 부분은 확실히 몬스터구나.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살아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고. 여타 몬스터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물을 먹는 행위로 마나와 기록을 얻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살육을 반복한다. 그리고 인간이라고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먀!? 먀아! 먀아아아아! 먀먀! 먀먀먀아!] 그렇게 한참을 빠르게 진군하던 한 순간, 인어의 도로 위에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로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꼭 보물섬을 발견한 해적선장이 지르는 환호성처럼만 들렸다. [이, 이 소리는 그 마수의!] [고, 공주님. 제 뒤로! 제가 공주님을 보호하겠습니다!] [아니, 경계할 필요 없다. 이미 겪어서 알지 않느냐. 그 마수는 나의 주인께서 부리는 자이다.] [그런 끔찍한 마수를!?] 로아와 관련된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게 된 인어들이 일제히 경악하며 물러나는 가운데 아르페만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어서 이 녀석이 이렇게나 기뻐 날뛰는 것일까? 비록 로아가 태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녀석의 감정 발산 패턴은 지극히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녀석이 이렇게나 좋아할 일이라면······. [먀아! 먀먀먀먀먀먀아아아아아!] “저주의 원천이라도 발견한 모양인데.” “아르페, 나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어.” “괜찮아. 언제나의 일이니까.” 그로부터 30분 후, 배가 빵빵해진 로아가 지극히 만족한 얼굴로 돌아와 아르페의품에서 잠들었다. 지극히 흡족한 미소를 띠곤 잠꼬대까지 하고 있었다. [먀아아, 먀우아······.] “이 녀석······.” 아르페가 쉬라는 말도 하기 전에 잠들어버리다니, 어쩌면 이것은 더 이상 저주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인가? 아르페는 녀석의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시켜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내 저 멀리서 터져나온 경악성이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왕께서 하사하신 아티팩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실험장이 통째로 날아갔지 않은가, 마족!] [인간, 네놈이 저지른 짓이렷다!] “아르페, 저기 너무 시끄러워.” “······응, 뭐 그럴 거라고 대충 생각은 하고 있었다만.” 녀석은 이미 왕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삿된 기운을 전부 먹어치운 후였기 때문이다. < Chapter 15. 언더워터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5. 언더워터 - 4 > 온 세상의 분노와 슬픔을 모두 담아낸 것만 같은 함성과 비명이 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순조로이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이루는 군세가 적지 않았기에 적에게 들키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인어의 도로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그리고 세릴의 청을 들어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의 저주를 거두어주기로 한 시점에서 이미 은밀행동은 파토가 나 있었던 것이다. “오, 저기 바로 앞에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여. 도로와 연결되어 있구나.” “인어의 도로의 중심은 인어의 왕국이야. 당연한 일이지.” “오빠, 저기 다른 인간들도 보여! 아, 그리고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도······!” 인어의 왕국은 도로를 지배하는 마법과는 또 다른 공간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바깥에서 보면 마치 수정구슬 안에 미니어쳐로 담아놓은 모형을 보는 것처럼 축소되어 보였다.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지금 그 안에 한창, 나라가 떠나가라 난동을 피우는 인간의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 없어. 없다! 그분께서 마련해주신 모든 게 사라졌어!” “인어들, 그놈들의 반역이 분명합니다!” “어리석고 우둔한 인간들 같으니, 그것 하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이 소동이더냐!” 인간들 가운데에는 금발의 여자 마족이 한 명 끼어 있었는데, 만물열람으로 그녀의 정보를 확인한 아르페는 그녀야말로 이전 디아스 왕국의 소동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던 마족, 티에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이놈의 마족들은 대체 뭐가 그렇게 당당하다고 어디에서건 자기 본명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건지 몰라.’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땐 에트나와 너무 비슷한 이름이어서 혹시 그녀가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몰래 피어났었지만, 그 의문은 프레이트에서 에트나 본인과 조우하며 깨끗하게 박살났다. 괜히 이름은 헷갈리게 지어가지고 아르페를 신경 쓰이게 만들다니, 그것만으로도 죽을 죄다. “각하, 인어의 대군이 역류해오고 있습니다! 저주가 해제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모습까지······ 저 연놈의 인상착의를 보고받은 기억이 난다······ 으드득.” “마족화 실험을 방해했던 그때 그 놈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저, 건방진 꼬맹이들이 어딜 당당하게 내 눈앞에!” 3천이 넘어가는 숫자의 대군을 어찌 감출 것인가? 아르페 일행은 왕국의 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적의 핵심 세력에 제대로 록온되고 말았다. [주인님, 마델루드라는 남자를 보호하는 기사들은 레벨 150이상의 고수뿐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저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마족입니다. 저 여자의 손짓에 황실을 호위하던 이들이 모두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겠지. 레벨 200을 넘겼으니까.] 막상 왕국에 도달하고 나자 새삼스럽게 겁이 났는지, 세릴은 아르페의 로브 소매를 붙잡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 뒤로 정렬한 인어들은 그렇지 않았다. [공주님,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한 데 뭉쳐 있습니다. 이번엔 결과가 다를 것입니다!] [어서 저 무뢰배들을 처단하고 우리의 왕국을, 우리의 바다를 되찾아야 합니다!] [전군 전투 준비! 공주님을 왕궁으로 모신다!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밀어버린다!] [우오오오오오!] 놈들의 저주에 당해 미쳐 날뛰었던 과거는 옛말이라는 듯 저마다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각오를 다지는 인어들의 모습에, 세릴 역시 적잖이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그녀의 눈빛에 용기가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모, 모두들······ 좋아, 여러분과 주인님이 나와 함께 하는 이상, 나도 더 이상 겁먹지 않겠어!] “그래그래, 다들 여러모로 발전한 것 같아 기쁘다.” 일은 로아가 다 했지만 말이지! 아르페는 세릴의 자신의 소매를 놓고 인어들에게 돌아서는 것을 보며 음,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연하게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하지만 네놈들이 돌진하게 놔뒀다간 또 무수한 피와 눈물이 흐를 테니 너흰 가만히 있어. 저놈들은 우리가 정리할 테니까.] 그와 동시에 인어들에게 선언했다. 당연히 인어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세릴이 당황하며 다시 그에게 다가왔다. [주, 주인님? 하지만 지금 저들에게 맞서려면······.]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인어들의 저주를 풀어준 건 전투에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냐. 그냥 네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부턴 우리 퀘스트를 마무리할 차례야. 너희가 끼어들 차례는 없어.] [뭐, 뭣!? 저 건방진 인간이······.] [조용! 우리를 구한 것은 나의 주인이시다. 예의를 갖춰라!] 두 거대한 세력이 정면으로 부딪히기 직전인 상황에 태연하게 홀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메테르 역시 당황하며 그를 붙잡았다. “쟤네 지금 우릴 엄청 경계하고 있는데?” “그야 경계하겠지.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둬, 메테르. 경계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건이길 자신이 있으면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야. 상대를 모르고, 그 전력을 가늠할 수 없기에······ 자신들 전력에 자신이 없기에 하는 행동이지. 난 아냐.” 아르페의 눈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여기서 숨어있던 크라켄이 한 마리 더 튀어나온다거나 하면 몰라도, 지금 아르페의 눈에 잡히는 대상은 이미 파악이 완벽하게 끝난 상태다. “놈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건, 무슨 아티팩트를 어떻게 구사하건 놈들은 우릴 못 이겨. 왜냐면 우린 죽었다 깨어나도 잡지 못했어야 할 크라켄을 잡아버리고 엄청나게 강해졌거든. 마왕군의 흔한 설계미스이니 이번 기회에 기억해둬.” “으, 응!” 아르페의 지당한 말에 납득해 조용해지고 마는 메테르. 아르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족의 모습을 발견하고 담담히 등 뒤에 멘 슬레지 해머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시에나의 모습이 있었다. “시에나는 준비하고.” “응.” 굳이 용사 파티 전원이 나설 것도 없다. 아르페와 시에나, 단둘이면 충분했다. 셰프의 조리법이 제법 빡세기는 했으나, 그 과정을 거쳐 그들은 전생의 용사보다 맛있는 요리로 탈바꿈했으니까! 그런데 적을 앞에 두고도 일행하고 떠들거나 무방비하게 앞으로 나오는 등 여유롭기 그지없는 아르페의 모습이 심히 거슬렸던 것일까, 티에나라는 이름의 마족이 기어이 선공을 가해왔다. 한껏 벌린 그녀의 양손 사이로 피어난 마나가 꿈틀거리며 사기를 토해낸다! “죽음의 세례!” “어딜.” 그러나 아르페는 그녀가 만들어낸 검은 안개를 마주하며 코웃음을 쳤다. 확실히 그것은 레벨 200 상당의 마족이 다룰 법한 강력한 흑마법이기는 했으나······. “그, 그럴 수가······ 사제!? 분명 마도사라고 들었는데!” 아르페가 허공에 만들어낸 반투명한 장막을 뚫지 못해 허무하게 소멸하고 말았다. 장막의 정체는 바로 그가 이번에 구입해 익힌 스펠 중 하나, 신전사제의 스펠 홀리배리어였다. 안타깝게도 전투사제의 길을 걷는 시에나가 익힐 수 없는 상위등급 사제전용 스펠이었으나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아르페는 용사. 그딴 제한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스펠을 익힌 것이다. “시에나, 지금이다!” “알겠어, 오빠!” 보통 이런 전개로 흘러가게 될 경우 사태의 흑막을 담당하는 마족이 이런저런 수상한 말을 지껄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식의 발언으로 용사 일행의 분위기를 찝찝하게 만들어놓기 마련이건만, 아르페는 괜히 귀찮게시리 뒷일을 암시하는 것은 아주 그냥 딱 질색이었다! 이 퀘스트는 그냥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제발! “흡!” 그의 단호한 지시에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던 시에나가 대포알처럼 뛰쳐나갔다. 그것을 본 이들은 처음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고, 다음 순간엔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저 망치에 어린 기운은 설마······.” “말도 안 돼, 저렇게 어리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잘못 본 거야!” “하아아아아압!” 그녀의 망치에 희뿌옇게 뭉친 기운은 레벨 200이상의 상위 전투사제만이 익힐 수 있는 대표적인 전투망치스킬인 디바인 해머! 그것이 시에나 특유의 마나와 엉켜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반투명의 기이한 오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 기운이 마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사, 상위 클래스의 전투사제까지!? 그래, 이제 알겠어! 마도사의 능력과 사제의능력을 동시에 갖출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이이이익! 인간, 나는 중요한 일이 생겨 잠시 자리를 피하겠다!” 인간계에서 활동하는 마족들이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용사와 조우할 가능성!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계로 나가기 전 중요한 몇 가지의 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그 중 첫 번째는 상기하였듯 용사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기 위해 괜히 자기 뒤에뭔가가 더 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허세 스킬이고, 두 번째가 바로 도주하여 나중을 기약하는 방식으로 용사의 마음의 부담감을 더하는 ‘오늘은 이만 물러가주지’ 스킬이었다. “네놈은 분명 용사렷다! 내가 오늘은 이렇게 물러가지만, 네놈들의 정체를 알아낸 이상 모든 게 끝장이다! 곧 마왕께 고개를 조아리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누가 누구한테 고개를 조아려? 그 짓은 이미 지긋지긋하게 해봤어, 망할 년아!] [마, 마족어!? 네놈은 대체!] 그렇기에 용사로 환생한 직후부터 아르페는 이 두 가지 스킬을 원천차단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다행히도 운이 따른 덕에 지금은 이미 그 두 가지 스킬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능력이 빛을 발할 때였다! “마나 스트링!” “결국은 그거잖아!?” “큭!?” 아르페가 섬전처럼 쏘아낸 몇 줄기인가의 마나 스트링이 돌진하는 시에나를 지나쳐 먼저 마족에게로 도달했다. “공간······ 이럴 수가! 그렇다면 아티팩트······ 이것도!?” 마족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본인 스스로 공간이동마법을 마련해둔 것은 물론이고 위기탈출용 긴급 블링크 아티팩트, 긴급 공간이동 아티팩트까지 여러 개의 도주용 아티팩트를 구비해두고 있었으나, 그녀에겐 애석하게도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은 단순히 마력적인 간섭뿐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간섭능력까지 완벽했다. 그녀가 자아내는 마력을 마나 스트링으로 동여매 마법을 발동하지 못하게 만들고, 만물열람으로 알아낸 그녀의 아티팩트를 하나하나 마나 스트링으로 낚아채거나 부수어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물리와 마력이 조화된 스킬 마나 스트링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일정시간동안 대상의 마나를 묶어두는 마나 속박 스펠을 읊는 편이 훨씬 더 편하겠지만 말이야, 젠장!”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결국 마나 스트링으로 할 거 다 해내는 아르페가 너무 멋져!” “크으아아아아아악! 용사! 네놈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공간이동 한 번 해보려다가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에 완벽하게 무력화되고 그것에칭칭 묶이기까지 한 마족은 두 눈을 부릅뜨며 다른 공격마법을 영창하려 했으나, 그전에 시에나가 그녀에게로 도달해 망치를 내려쳤다. “하!” 그녀의 짧은 기합과 함께 내지른 과감한 일격이 마족을 강타한 순간 발생한 충격파에 마델루드를 비롯해 일대에 몰려있던 인간들이 일제히 뒤로 나뒹굴었다. “큭, 꾸에에에에엑!” 그러니 그것에 직격당한 마족은 어땠겠는가? 시에나의 일격에 한쪽 어깨와 팔이 완전히 박살나고, 활성화되기 직전의 마나가 흐트러져 폭주한 탓에 돼지 멱따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정신을 놓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우리는 손도 댈 수 없었던 마족이, 이렇게나 간단하게······.” 여태까지 마족과 전 대공 마델루드에 의해 억압받고 있던 인어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정작 가장 놀란 것은 그녀와 협력하고 있던 마델루드 본인이었다. “어떻, 어떻게. 마족을 이렇게 간단히 제압하다니······!?” 대공 시절 마왕의 대리자로 자신을 찾아온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그녀는 압도적인 강자로 머물렀다. 그녀가 내놓는 흑마법과 저주의 지식이며 가끔씩 보여주는 그 신위, 기이한 마법에 그는 그녀를 이용하거나 반항하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자들은 뭔가! 아주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를 골려먹더니, 정말로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그녀를 무력화시키지 않았는가! “에잇, 한 번 더······!” “······잠깐만, 시에나. 마무리하지는 말고 그대로 끌고 와.” “응, 알겠어!” 마족에게 깔끔하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려던 시에나는 아르페의 지시에 즉각 행동을 멈추었다. 그녀는 일단 슬레지 해머를 길게 휘둘러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무리를 완벽하게 밀어내고는 넝마가 된 마족을 들쳐 업은 채 그의 곁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마델루드를 비롯한 인간들은 시에나의 일격이 만들어낸 참상에 잔뜩 쫄아버린 나머지 그녀가 그들 무리의 최강자이자 협력자인 마족을 회수하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르페, 그 마족은 왜 살린 거야? ······설마 여자라서?” “내가 대체 뭘 했다고 매번 이렇게 의심을 받아야 하는지······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아르페는 메테르의 이마에 알밤을 먹여주며 대꾸했다. 직후 그의 시선이 저 너머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인간들에게로 향했다. “일단 저놈들 먼저 끝장내고 말이야.” 당연하지만 마델루드 일행에게 마족을 제외한 숨겨진 보스는 없었다. 장장 1년을 넘게 이어져온 퀘스트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Chapter 15. 언더워터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5. 언더워터 - 5 > “나는······ 그녀, 마족 티에나에게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양손 머리 위로 올리고 무릎을 꿇은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마델루드가 입을 열어 낸 첫 마디였다. 아르페는 흠,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확실히 처음엔 그녀가 제시한 조건에 매력을 느꼈다. 난 왕이 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함정이었어. 마족의 조력을 얻는 대가로 내게 내려진 임무는 하나같이 끔찍하기 그지없었고 나는 이내 후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내게 돌아갈 길은 없었어······.” 아르페는 참혹하게 인상을 구기며 회한을 담아 말하는 마델루드를 보며 무대에서연기를 하라고 해도 제법 잘할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뒷말을 재촉했다. “그러던 차에 끝내 네놈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마족의 지시로 실행했던 실험도 실패하고, 심지어는 네놈들을 묻기 위해 내가 온전히 부릴 수 있는 세력만 추려 보낸 군대도 전멸하고 말았으니까.” “그땐 참 어이가 없었는데.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넌 너무 바보구나.”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족의 더러운 실험만 끝나고 나면,디아스가 오롯이 내 손 안에 들어오리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모두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아니, 어찌 보면 그도 당연한가. 마왕군과 관련된 일에 훼방을 놓는 것은 언제나 용사니까 말이야. 안 그런가, 용사!” 담담하게 말하는 것 같다가 돌연 이를 빠득 갈며 외치는 전 대공, 마델루드. 아무래도 새삼스럽게 자신의 처지에 울분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르페는 놈을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용사가 나타날 줄 알면서도 그런 개 같은 짓을 벌인 네가 병신인거지.” “용사는 진즉 뒈져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왕국의 보호를 거부하고 도망친 어리석은 꼬맹이들 같으니, 네놈들이 그때 그렇게 도망가지 않았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왕궁에 들어가지 않은 덕분에 우린 이렇게 강해진 거야.” “······열두 살 꼬맹이들이, 왕궁의 보호를 거부하고 도망친 것이······ 강해지기 위해서였다고?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상상치 못했던 대답에 마델루드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얘기나 계속해. 그래서? 디아스에서 간신히 도망칠 때까지도 마족과 함께였나?” “큭! 나는 어떻게든 내 세력을 온존하여······ 타국에서 입지를 새로 세우려 했다.그때 그 마녀가 다시 날 유혹한 것이다.” “유혹?” 까지 말하다 말고 아르페는 감을 잡았다. 이어지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지금 아나이드의 상태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너,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의 지배자가 되려고 했나? 그래서 인어들을 네 세력으로 부리려고 했어? 한 발 더 나아가면 그걸로 디아스를 정복해 왕국으로 복귀까지 했겠다?” “······.” 정곡을 찔려 침묵하는 마델루드를 보며 아르페는 기가 막혔다. 뭐? 티에나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그럴 리가, 놈은 처음부터 전부 다 알고 있었다. 마족과 마델루드는 처음부터 서로의 속내를 전부 알고 협조하던 관계에 불과했다! “그러면 다시 말해봐. 누가 누구한테 이용당했다고?” “그녀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나는 그 저주가 그런 것인지는 꿈에도 몰랐” 아니, 역시 더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르페는 역겨움을 참다못해 손을 휘둘렀고, 그 끝에 솟아난 마나 스트링은 전 대공 마델루드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날렸다. 놈은 추잡한 변명을 잇다 말고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때나마 국가의 정점에 섰던 남자의 최후라기엔 지나치게 허망했으나, 놈이 여태까지 저지른 일의 무게에 비하면 실로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가, 각하께서!” “네놈, 감히 주군을······.” “그래,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면 지옥으로 가서 마저 보필하던가.” “크학!?” 이대로 놈들과 더 마주하고 있다간 기껏 프레이트의 영주와 대화를 나누며 회복했던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깔끔하게 잃어버리고 말 것 같다는 생각에, 아르페는다른 놈들의 목도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이 정도라면 처음부터 놈들의 말을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마왕군에 협력하는 남자 따위의 말 따위, 진지하게 들어줄 가치도 없었던 것을! [그 강자들을 손쉽게 죽여 버렸어!]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반항조차 할 수 없었던 자들의 목숨을 단 한 번 손짓으로 모두 거두다니······.] 인어들은 아르페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하며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아르페는딱히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생각으로 힘을 보인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코웃음을 치며 손을 거두곤 놈들의 사체를 불태워 없앴다. 인어의 왕국은 도로와 비슷하게 공기로만 가득한 공간이 있는가 하면 물로 가득한 공간도 있었다. 인어의 도로에서 바로 연결되는 왕국의 관문은 물론 바다와 유리된 공간이었기에, 결론부터 말하면 불꽃 마법을 발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좋아, 이걸로 나중에 이놈들이 언데드로라도 다시 나타나 우릴 괴롭힐 가능성까지 모두 제거했어.” “그걸 걱정했던 거구나, 아르페······.” 이제 아르페는 대공이나 마델루드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에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았다. 모든 일처리는 깔끔하게 하는 것이 최선! 그는 마델루드와 그의 세력이 흔적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섰다. 이젠 마족과 관련된 일을 처리할 차례······. [주인님.] 그러나 작업을 이어가려던 그를 방해하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세릴. 주인의 명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그녀의 모습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어 아르페는 우선 그녀에게 지시했다. [왕국에 남아있던 사악한 기운은 모두 없앴으니, 남은 일은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 우리 퀘스트는 이걸로 완벽하게 끝이야. 이 이상은 너희에게 터치할 일이 없어.] [아, 알겠습니다, 주인님.] 마족과 인간의 연합군에 대항해 일전을 벌여야 할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던 세릴은 아르페와 시에나의 활약에 의해 빠르게도 끝나버린 상황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제법 빠르게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급히 인어들에게 지시했다. [1대대, 실험장으로! 저주가 사라졌다고 하나 아직 그곳에 결박된 인어들이 많을것이다! 2대대는 지금 이 순간부로 긴급 경비 인원으로 편성한다. 왕국 내 시민들의안전을 확보하라! ······그리고 3대대와 4대대는 그곳으로! 늦기 전에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공주님!] [당신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음, 역시 37공주인 것치고는 지배력이 너무 절대적인 것 같은데. 아르페는 슬슬 나머지 36명의 공주와 왕자들, 결정적으로 인간들이 점령하기 이전의 지배자였던 인어의 왕은 대체 어디에 간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전부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에게 지시를 마치고 돌아선 세릴로부터 돌아온 대답이 실로 기가 막혔다. [뭐가 어째?] [그들은 저 이전에 크라켄의 먹이로 내던져졌습니다. 아나이드 왕국에서 가장 많은 마나와 상위의 자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우리 왕가였으므로······ 마델루드 무리는 크라켄에게 광화의 저주를 걸고 마족화 저주를 걸기 위해 그들 모두를 내던졌습니다.] 어쩐지 그 뒤로는 안 들어봐도 뻔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또 묻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아르페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네가 마지막 타자였단 말이야? 네가 지닌 적성이 가장 높아 크라켄이 너와 매개로 묶여 저주에 당했고?]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인간들은 왕국을 완벽히 지배하기 위해 왕족이라는 변수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실험에 희생시키지 않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왕가를 정리했겠지요······.] 그러나 37공주 세릴만은 크라켄에게 저주를 거는 매개로서 성공한 탓에 며칠간의 유예를 얻었고, 죽기 전에 무사히 아르페에게 구출되었다. 그리고 저주에서 풀려난 인어들은 왕족이 아직 남아있음에 안도하며 그녀를 따랐다······. 비록 그 뒤에 믿을 수 없는 인간이 서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말이다. ‘내가 이렇게 될 것 같더라니.’ 37공주라서 막연히 왕이 될 일은 없겠지, 하고 생각하던 아르페가 어리석었다. 아무리 왕위 계승권이 낮으면 뭘 하는가, 그 외의 나머지가 전부 죽어버리면 결국 그녀의 차례가 돌아오는 것을! 어쩐지 아르페는 이 뒤로 이어질 말까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주인님.] 그리고 그의 불안에 쐐기를 박아버리듯, 세릴은 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국을 되찾아 제가 왕국의 대표자가 되었으니, 이 왕국은 주인님께 귀속될 것입니다. 본디 제가 왕위에 오른 후에 말씀드려야 할 일이나,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낫겠다 싶어······.] 아르페는 그녀의 목숨을 구제한 인간이었으며, 동시에 도저히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왕국의 탈환을 손쉽게 이루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실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었다. 마델루드는 디아스로부터 쫓겨나 인어의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마족과 함께 온갖 지랄을 다 했는데, 아르페는 그들을 물리친 것만으로 그가 원하던 것을 대신 이루었으니! [기껏 되찾은 왕국인데 그걸 나한테 송두리째 넘겨서 괜찮겠어?] 아르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으나 그에게 답하는 세릴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모두가 각오하고 있는 일입니다. 주인님께선 우리 왕국을 억압과 공포로 지배하려 들었던 무도한 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우리를 저주로부터 해방해주셨습니다. 우리 인어들은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설령 주인님께서 저의 주인이 아니었다 한들, 결국 주인님은 왕국의 지배자가 되셨을 터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을 잇는 세릴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그녀라고 어찌 인간에게 왕국을 넘기는 것이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래도 마델루드에게 지배를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리라는 것만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은혜를 무조건 갚아야 한다는 건 누가 가르쳐준 거냐?] [인어의 본능입니다. 험난한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대로부터 몸에 익혀온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 지혜를 믿고 따른 끝에,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미쳐버려서는 마델루드처럼 이 왕국을 말아먹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순간 세릴의 눈빛이 흔들렸으나, 그녀는 이내 표정을 고쳐 답했다. [주인님께서는 그런 일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너 지금 내가 이런 말하니까 조금 불안해졌지.]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지혜냐, 바보 같은 고집이지!] [하지만······.] 세릴의 불안한 표정을 보며 아르페는 또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델루드에 의한 침공을 당하기 전까지는 인간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그녀는 아직 인간에 대한 판단을 잘 내릴 수 없다. 아르페의 말 한 마디에 불안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 순수함이 참 귀엽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별로 겉으로 티도 내지 않았는데 귀신같이 그의 볼을 꼬집어오는 메테르가 무서웠기 때문에 아르페는 잽싸게 상념을 접어두고는 그녀에게 지시했다. [내가 인어의 도로로 들어온 이유가 뭔지는 말해줬지?]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선 에이디아로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처음부터 그것 하나뿐이었어. 그러니 너 본인도, 왕국도 필요 없어. 에이디아까지 안내만 해주면 그걸로 됐어. 너 본인이 따라올 필요도 없고 그냥 수하 한 명 딸려 보내는 걸로 충분해.] [예······?] 세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말을 못 알아들었나 싶어 다시 설명해주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주인님께선······ 저를 거부하시는 겁니까?] 잠시간의 침묵 끝에 세릴이 말했다. 어째선지 볼이 팅팅 부풀어 오른 채로. 영문을 모를 반응에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대꾸했다. [아니, 네가 싫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아나이드를 다스려야 할 널 굳이 괴롭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저는 주인님께 제 모든 것을 바치기로 이미 엄숙히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주인님께선 어째서 제 맹세에 흠집을 내려 하시는 것입니까?] [네가 싫어하는 걸 강요하지 않으려는 것뿐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잖아!] [제 감정은 고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한 명의 어엿한 인어로서, 은혜를 갚아 마땅한 주인님께 그 은혜를 갚고 싶을 뿐입니다!] 음, 골치가 아프군. 아르페는 인어의 지능이 인간과 비슷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생각을 깔끔하게 철회했다. 이 녀석들은 그냥 바보였다! [먀.] “응?” 그러나 아르페가 세릴에게 ‘너를 싫어하는 것도 귀찮은 것도 모욕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단지 너와 네 왕국을 위해 더 좋은 길을 제시하고 싶을 뿐이며 앞으로 가야할 길이 구만리라서 이 왕국에 조금이라도 더 묶여있을 수가 없다’는 설명을 입 밖에 내기 전에, 포식을 마치고 얌전히 잘 자고 있던 로아가 눈을 번쩍 떴다. “잘 자더니 왜?” [먀, 먀먀아. 먀아하먀아!] 그의 품을 비집고 나오는 로아의 엉덩이가 절로 들썩였다. 당연하지만 이런 반응은 녀석이 맛있는 저주나 사악한 기운을 감지했을 때 나오는 반응. 이미 이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사기를 먹어치운 녀석이 또다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르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먀먀먀먀먀먀? 먀먀아, 먀우우우먀아!] 그런 주인을 위해 로아는 기꺼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엉덩이와 꼬리를 연신 흔들면서. 지금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여태까지 없었던 기운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크라켄이 품고 있던 저주만큼 맛있을 것 같다고?” [먀아!] [쿠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도, 도망······!] [끄아아아악!] 그리고 로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 순간, 저 너머에서 끔찍한 괴성과 함께 인어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세릴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마, 맙소사······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기어이 고대의 신전이!] 아르페는 어쩐지 그녀로부터 돌아올 답이 대충 예상이 갔지만,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의 신전이 뭔데?] [바다의 끔찍한 마물을 봉인한 곳입니다. 아나이드 왕국은 그 봉인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여태까지는 꾸준히 인원을 교체하면 봉인지를 지켜왔으나, 인간들의 침략으로 인해 일주일 이상 그곳을 지키지 못한 탓에 결국 그 봉인이······!] [그래, 그랬겠지.] 돌아오는 세릴의 말에 아르페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욕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퀘스트가 이렇게 순조롭게 끝날 리가 없지! 인간이랑 마족을 수월하게 잡아낸 시점에서 짐작했어야 하는데! 용사의 억센 운명은 기어이 본래 그들이 조우할 일이 없었어야 할 고대의 괴물들까지 불러내고 만 것이다! < Chapter 15. 언더워터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5. 언더워터 - 6 > 전생에서 용사는 바다에 들어간 적이 없다. 지금 메테르를 보면 딱히 물을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딱히 바다를 싫어했다던가 하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다만 용사 일행에게 마도사가 합류한 것이 마족과의 전쟁이 심화된 이후였으므로, 그 이전에는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갔을 테고 마도사가 합류한 이후로는한가롭게 바다 속이나 탐험할 시간이 없었으리라는 것이 가장 타당했다. ‘그리고 마왕군도 이쪽에는 신경을 안 썼었는데······.’ 그런데 설마 했던 바다 속 고대 신전이라니. 마왕을 순조로이 죽이고 나서 모두가안심하며 돌아섰을 때 갑자기 발견되어 다시금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는 히든 보스에게 어울릴 법한 설정이 아닌가! [먀아, 먀아아아. 먀우우.] “그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고? 좋아, 그러면 네 말을 믿어보겠어.” 로아와 의견 교환을 마친 아르페는 곧장 일행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둘이 먼저 가서 막아줘. 나랑 로아는 바로 뒤따라갈게.” [먀!? 먀먀! 먀먀먀먀아!] “금방 갈 테니 잘 버티고 있어.” “응, 알았어!” “바로 와야 해, 오빠!” 메테르와 시에나는 그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장 뛰쳐나갔다. 굳이 위치를 알려줄 필요도 없다. 봉인이 풀린 고대의 신전은 누구든 자신을 찾아오라는 듯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님, 도와주시는 건가요!?] [넌 인어들 통솔해서 뒤로 물리기나 해. 너희 힘으로는 저거 못 막아.] [주인님······ 알겠습니다.] 세릴은 감사와 분함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좋아, 자신을 파악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만 잘해도 앞으로 인어들을 다스리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먀아아아······.] “조금만 참아, 로아. 오래 안 걸려.” 아르페가 일행과 함께 떠나지 않은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아직 이곳에 처리해야 할 녀석이 남아있었던 탓이다. “어이, 일어나.” “큭!? 크으으으악!” 아르페는 시에나에게 제대로 얻어맞고 기절해 있던 마족을 난폭하게 깨웠다. 마족, 티에나는 일어나자마자 곧장 아르페에게 덤벼들려 했으나 그가 준비해둔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에 꿰여 곧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끅, 끄르륵!” “내가 원하는 것만 제대로 말해주면 살려줄게. 이건 약속이야.” “크으으학! 끄으으으윽!”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몸을 움직이는 것도, 마력을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끝내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입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저주를 담은 눈으로아르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큭, 꼴에 용사라고 아량을 베풀겠다는 건가? 우습지도 않다!” “단지 거래를 하자는 것뿐이야. 생명이라는 확실한 대가가 약속된다면 네게도 말을 할 맛이 날 거 아냐.” “뭐······?” 용사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말에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르페는 그녀가 깊게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질문했다. “넌 누구의 명을 받아 움직인 거지?” “이제와 새삼스레 그것을 묻는가? 답은 뻔하다, 세상에 비할 바 없는 고귀함과 마력을 갖추신 그분, 마왕폐하······.” “거짓말 치지 마.” 그는 티에나의 말을 일축했다. 그의 보랏빛 눈이 실로 요사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눈앞에 숨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네 목엔 족쇄가 없잖아.” “큭!?”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족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래, 이것이 그녀를 살려둔 이유 중 하나였다. 절대지배에 속박되어 있지 않은 마족이라니, 오히려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였으니까. 멈춘 시간 속에서 아르페만이 말을 이었다. “휘하 마족을 믿을 수 없어 무조건 고유능력을 발동하고 보는 마왕이 인간계로 파견되는 마족에게 제약을 걸어놓지 않았다고?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누구야? 누가 있어 마왕의 눈을 피해 마족을 부리고 있는 거지?” “그, 그렇, 그걸, 너······.” 그의 말에 티에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과 마주하는 그녀의 육신이 의지의 통제에서 벗어나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마나 스트링에 꿰인 육신에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그것으로 인한 고통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 어떻, 어떻게······? 너, 너! 마족? 마족이지! 그렇지!” “질문은 내가 하는 거야. ······이제 대답해줄래?” 아르페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그의 기세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뛰어날 뿐인 용사, 정도로 그를 인식하고 있던 티에나에겐 이제 그가 자신의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신적인 존재로마저 느껴졌다. 숨이 턱턱 막혔다. “아, 아니. 나는 말할, 말할 수 없다. 나는 마왕폐하의 명을 따르고 있어, 그래! 인간 소년에 불과한 네놈 용사가 대체 뭘 알고 있다고!” “티에나, 잘 생각해봐.” 아르페가 한손을 들었다. 그 손에 그의 방대한 마력이 마나 스트링으로 화해 촘촘히 짜여, 선명한 단검의 모습을 형성했다. “절대지배에 속박되어 있지 않으니 너는 말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넌 자유로워. 네 삶과 죽음을 네 의지로 선택할 수 있어.” “아, 아니······ 아냐. 나는 두려워.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없어. 용사, 넌 몰라. 너는 몰라.” 모르니까 너를 통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말할 수 없다고 한다면, 강제로 그것을 들을 방법은 없다. 단지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이 있다면, 이 여자는 지금 맞이할 죽음보다 지금 입을 연 대가로 나중에 맞이하게 될 ‘누군가의’ 분노를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 “그래, 말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사실 그 놈 이름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뭐······?” 심문을 포기한 아르페는 날카롭게 뽑아냈던 마나의 실을 풀어버렸다.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티에나였으나, 그 의문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아르페를 대신해 나선검은 고양이를 보고서 말이다. [먀아아.] “아, 안 돼.” 직접 마주하게 된 지금에야 비로소 그녀는 이 고양이의 육신에 어떤 힘이 감추어져 있는지 알게 되었다. 공포는 인식에서 기인했고, 순식간에 불길처럼 번져 그녀의정신과 육신을 모두 지배했다. “로아, 이건 실험이야. 그것도 아주 중요한 실험. 네가 뭘 해야 할지는 알지?” [먀아.] “아냐. 내가 에트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싸울 필요도 없는데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아서야.” [먀아, 먀먀아? 먀우우아!] “시끄러 임마. 아니라니까. 메테르한테 맞아죽을 일 있냐.” 주종의 정다운 대화를 들으면서도 티에나의 몸은 시종 공포로 진동했다. 있는 힘껏 몸을 뒤틀어 보았으나 도망칠 길이 없었다. 그것을 보는 아르페의 미소가 뒤틀렸다. “너희도 인간으로 실험을 했었잖아? 나도 그 비슷한 실험을 하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어쩌나, 이건 마족으로밖에 실험할 수가 없거든.” “아니, 안 돼. 부탁이야, 용사. 차라리 그냥 죽여줘. 제발, 안 돼.” “응, 닥쳐.”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로아를 내밀었다. 로아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 수 없이 입을 벌렸다. [먀아아아.] 그녀가 마족으로서 타고난 마의 인자가, 일순간 그녀의 육신의 통제를 벗어나 녀석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끄그아아아아아아아아악!” 티에나의 처참한 비명이 광장 전체를 가득 채웠다. 해방된 고대의 신전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인어들마저 그 끔찍한 소리에 전율하며 멈추어 설 정도였다. “으음, 아직 안 되나.” [먀아?] “아냐. 전부 빨아내. 나오는 과정에서 신체나 정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확인해야 해.” “끄르르르그아악!” 티에나의 비명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아르페와 로아 모두 멈출 생각은 없었다. 로아는 있는 힘껏 빨아냈고, 아르페는 그 과정에서 티에나의 육신에 간섭해 그녀의 회로를 고쳐보고자 했다. 영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일부 회로가 그의 뜻에 맞게 조정되기는 했으나 그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한 종족을 이루는 기록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 “끄악! 끄으으악! 칵, 까그그극!” 이것은 마족화 저주에 당했던 시에나의 육신을 조정하는 작업과는 차원이 달랐다. 순수한 마족에게서 마의 인자를 빼내고 새로운 종족으로 만드는 일이 그렇게 쉬웠으면 아르페가 진즉 신 했지 인간노릇을 하고 있겠는가. 단지 조금의 힌트라도 얻으면 되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아. 역시 아직은 안 되네.” [먀.] “아니, 그래도 얻은 기록은 상당해.” “흑, 끄윽······.” 그렇게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까?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던 티에나의 비명이드디어 잦아들었다. 죽은 것은 아니었으나 거의 죽은 상태에 가까웠다. 피부는 시퍼렇게 물들었고, 생기 넘치던 머리카락은 파뿌리처럼 시들어버렸다. 간신히 헐떡거리며 토해내는 숨결만이 생의 증거로 남아있었다. 흘릴 눈물이 없어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는 눈은 과연 뜨고는 있는지 감은 건지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주, 죽여, 죽여버릴······ 거야······!” 그래도 아직까지 독기어린 말을 토해낼 기력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마의 인자는 이미 로아가 모두 빨아들여 남아있지 않았지만. 아르페가 말했다. “직접 겪어보니까 어때? 네가 했던 짓들이 개 같았다는 걸 이젠 좀 알겠지. 그렇지?” “너 따위, 용사가 아냐······ 마족, 마족에, 어울려······!” “역시 동족들한테는 감출 수가 없다니까. 그래,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독기를 가득 담아 토해내는 티에나의 말에, 그는 차게 웃으며 긍정해주었다. 물론 모든 마족이 사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개의 마족은 타고난 순수와 감성을 삶 속에서 소실해, 결국 모두 비슷한 꼴로 전락한다. 따스한 마음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던 에트나는 그렇기에 대단한 것이다. 그렇기에 안타깝기도 했다. “용사로 태어났으니 용사처럼 해보려고 했는데, 역시 진퉁 용사는 따라갈 수가 없더라.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그런데 또 가만히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난 그냥 나한테 어울리는 일이나 하면서 녀석을 보조하기로 한 거야. 어때. 역할분배 한 번 기가 막히지 않냐?” “죽, 어······!” 거의 다 죽어가던 그녀가 마지막 힘을 내어 외쳤다. 그것은 저주의 트리거였다. 마지막 순간 목숨과 영혼을 소멸시켜 그 대가로 발동하는 최악의 저주. 그 저주에 당한 자의 운명을 보다 죽음에 가깝게 뒤틀어버리는, 전선을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한둘쯤은 짊어지는 저주였다. 단지 그 순도가 터무니없이 높을 뿐. [먀!] 물론 그 최후의 저주는 로아에게 제법 맛있는 간식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르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 만든 저주조차 허무하게 막히는 꼴을 보며 티에나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아,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이 악독한 용사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분뿐, 어쩌면 그분마저······. “폐하······!”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엑스트라에게 어울리는 유언을 남기며, 디아스와 바다를 모두 뒤흔들었던 대공 세력의 흑막 티에나는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로아가 작게 울며 폴짝 뛰어 내려가 그녀를 건드리자, 육신을 유지할 모든 마력을잃은 그녀의 사체가 먼지가 되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한 권의 마도서였다. “뭐야 이거, 스펠 북이 아니라 진짜 마도서잖아.” 안 그래도 크라켄의 먹물이라는 좋은 잉크가 들어온 김에 마도서로 쓰기 적합한 책을 찾아 자신 전용의 마도서를 한 권 만들어두려던 아르페였으니 실로 공교롭기 그지없다. 물론 이미 내용이 적혀있는 마도서라면 수정하기 조금 까다롭지만 아르페의 능력이라면······. “······아.” 그러나 마도서를 들어 살피던 아르페의 입가에 이내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그래, 그랬지. 이 여자가 인간계로 나와 벌였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야 그렇겠지. 그는 더는 마도서를 살피지 않고 곧장 그것을 품에 집어넣었다. [먀아아.] “안 돼, 내 거야.” [먀.] 흥, 하고 삐쳐 꼬리로 아르페의 팔을 툭툭 치는 로아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주며안아 올린 아르페가 뒤로 돌아서자, 그곳에는 여전히 세릴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인님······.] 온갖 감정이 섞인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마주하며 아르페는 실로 난감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야, 그걸 다 보고 있냐.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걸 알았으면 얘기는 빠르지? 이런 놈 주인으로 섬기지 말고 네 나라나 잘 다스려라. 아, 마지막 정으로 지금 본 건 못 본 걸로 해줘.” [감사합니다, 주인님.] “······엥?” 잠깐만, 지금 뭐라고? 지금 상황에서 죽어도 나올 수 없어야 할 말이 나온 것 같은데 그건 아르페의 착각일까?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는 황당해하며 반문했으나, 세릴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양손을 꼭 붙잡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전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내겠습니다. 인어를 대표하여 그들의 분노를 드러내 ‘올바른’ 방식으로 적을 응징하셨으니, 당신의 은혜는 왕국의 모든 인어가 기억할 것입니다.] “음······ 어······.” 뭐가 올바르다고? 뭐가 어째? 살짝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한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어쩔 수 없을 만큼 깊은 오해가 쌓인 터. 아르페는 이 바보 물고기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이내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나 일단 신전으로 간다!” [저는 이곳에서 주인님을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길!] 세릴의 충성심 가득한 말에 역시 어딘가 어긋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르페는 일단 로아와 함께 파티원들이 먼저 간 곳으로 향했다. 전생에서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Chapter 15. 언더워터 - 6 > 끝 ⓒ 토이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1 > [구그오오오오오!] [큭, 일대가 무너진다! 다들 도망쳐! 방어마법을 활성화해!] [지금 당장 방어마법을······ 안 되잖아!? 방어마법을 활성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했었지.] [맙소사, 모든 마나가 신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 고대의 신전은 바다의 밑바닥에 뚫린 해저 터널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인어의 왕국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기에 과연 전생에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도 납득이 가는 위치.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인어들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지금은 이 바다를 통째로 위험에 빠트릴 화약고나 다름없는 곳으로 변모했다는 정도였다. [인간 일행은!?] [들어가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벌써 죽······.] 아르페가 도착한 시점에서 이미 상황은 최악을 향해 폭주하고 있었다. 그는 사기를 줄줄이 뿜어내는 해저터널 근처로 다가가며 인어들을 밀쳐냈다. [네놈들 다 비켜봐.] [엇, 고, 공주님의 주인······.] [쉿, 말을 조심해!] 메테르와 시에나는 이미 신전으로 진입한 상황. 바깥의 인어들은 신전의 마수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게 경계하며 이것저것 분주하게 움직이며 비상시를 대비한 방어술식이며 함정을 활성화하고 있었지만 신전이 사방으로부터 마나를 끌어당기는 통에 그중 제대로 작동하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뭐야 이거, 이미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잖아. 대체 만들어진지 얼마나 된 거야!] [수, 수백 년이 넘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망가진 것도 당연하지······. 여기 달라붙어 있어봤자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다들 물러나.] [하지만······.] [물러나!] 아르페의 거친 명령에 인어들은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별 수 없이 물러났다. 아르페는 쯧, 혀를 차며 로아에게 물었다. “지금 이 마나들 먹어치울 수 있겠어?” [먀아아아아아!] 주인의 말에 대답도 않고 곧장 입을 벌려 신전의 기운을 먹어치우는 로아. 다만 녀석이라고 해서 모든 기운을 먹어치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분 없이 마구 뒤섞여 방출되는 마나 중에서 뒤틀린 기운, 격렬한 감정이 깃든 기운, 부정적인 기운만을 흡수할 뿐. 물론 그것만으로도 일대의 진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기는 했지만 역시 이대로는 신전도 터널도 이 일대도 아나이드 왕국까지도 무너질지 몰랐다.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로아를 놓아주었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가자. 먹어치울 수 있는 건 전부 먹어치워.” [먀!] 씩씩하게 대꾸한 로아가 곧장 육신을 흑색의 안개로 변화시켜 터널 속으로 돌진했다. 아르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당연하지만 고대의 신전을 비롯한 해저 터널 일대는 인어의 도로의 영향에서 벗어난 수중. 아르페는 수영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물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물속에서 하이퍼 러빙을 발현해 진동을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먀아아아아아앙!] “이 신전의 모든 걸 네게 먹여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그 전에 일행과 합류해야 해.” [먀아.]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 몇 마리인가 몬스터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끔찍하게도 그것은 원래 인어였던 것으로 보이는 괴수였다. 단지 평범한 인어보다 몸집이 훨씬 더 크고, 지닌 마력이 사악하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의 왕국에 소속되어 있던 인어는 아닌데······ 그렇다는 건.” 가능성은 두 가지, 인어들과 적대하던 이들일 경우와 원래 이 인어의 일부였던 이들일 경우다. 아르페는 어쩌면 이 고대의 신전은 인어의 왕국이 세워진 시점 전후로봉인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그 봉인의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왕국을 세운 인어들일까? 어째서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이런 비슷한 일을 과거에 한 번 겪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깊은 상념에 잠겨가던 아르페를 로아가 깨웠다. [먀아! 먀!] “그래그래, 우리도 빨리 가자. 그나저나 이 녀석들 정말 엄청 빠르게도 처리하고 지나갔네.” 메테르와 시에나의 강함은 아르페 역시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의 판단이 물렀던 모양이다. 해저 터널을 지나 신전 입구를 지나기까지 기백에 달하는 괴수가 죽어 있었는데, 놈들의 레벨이 하나같이 210, 220을 넘기는 고레벨이었던 탓이다. 이건 그냥 강해서 되는 게 아니다. 역시 이대로 마계로 돌진해도 될 것 같은데······. [먀!] 로아가 다시 아르페를 불렀다. 아르페는 고개를 들고, 그의 시야 가득 차는 수중 풍경을 보며 작게 대꾸해주었다. “그래, 내게도 보여.” [먀먀먀먀먀먀먀!] 신전 입구 즈음에는 실로 거대한 바위의 파편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이 바위가 신전을 봉인하는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아르페는 그것을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로아를 보며 말했다. “그거 다 빠짐없이 챙겼다가 나중에 나한테 줘야 한다?” [먀, 먀먀아······.] 신나게 먹고 있는데 나중에 토해놓으라니, 로아의 식욕이 뚝 떨어지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주인이 먹여준 맛난 것들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 로아는 씁, 혀를 차면서도 신전의 봉인석을 자갈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먀!] “다 먹었어? 좋아, 그러면 가자.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신전 입구를 지나, 거대한 돌과 바다의 보석으로 장식된 기둥과 복도를 빠르게 지나갈수록 점점 더 일행의 마나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해졌다. 아무리 녀석들이 강하고 빠르다 한들 전투 한 번 거치지 않고 뒤를 따르고 있는 아르페만 할까. 아르페는 곧 녀석들이 벌이는 전투를 귀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흡!” [크가아아아!] [저주스러운 자들이여, 우리를 가두고 억압한 자여······!] “하아앗!” 어류의 하반신을 지닌 채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괴수들을 상대로 메테르와 시에나는 한 발도 물러나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압도한다고 보는 쪽이 어울렸다. “합!” [크학!] “흐압, 언니 비켜!” “꺅!?” 메테르는 크라켄에게서 입수한 부츠 덕분에 수중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게움직이며 놈들을 압도했고, 시에나는 메테르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강력한 한 방을 날려 상황을 한꺼번에 정리했다. 물론 크라켄에게서 얻은 건틀렛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푸른 바다정령의 축복 부츠+3] [크라켄 소울부츠가 세 번의 강화를 거쳐 새로이 탄생한 아티팩트. 수면을 걸어 다니게 해줄 뿐 아니라 수중에서 자유로이, 나아가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한다. 신고 있는 것만으로 수속성, 빙속성의 공격에 저항력이 더해지며, 수중에서 전투를 벌일 때 마력과 근력이 증폭된다.] [검푸른 바다정령의 축복 건틀렛+3] [크라켄 소울건틀렛이 세 번의 강화를 거쳐 새로이 탄생한 아티팩트. 자연의 마나를 끌어당겨 저장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수중의 마나를 흡수해 저장하는 능력은 더욱 탁월하다. 저장한 마나를 축복의 형태로 바꾸어 착용자의 무기에 부여해,그 무게와 강도, 마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다.] “죽어어어어어엇!” [크하아아악!] 시에나는 건틀렛의 힘으로 가뜩이나 커다란 슬레지 해머의 크기를 더욱 키워 냅다 내던졌다. 수속성의 힘을 품은 해머는 물에 저항을 전혀 받지 않고 날아가 그 일대를 완전히 파괴해버렸고, 이후 다시 수중을 날아 시에나의 손으로 돌아왔다. 근접계열 공통하위스킬 웨폰 부메랑이 저렇게 끔찍하게 활용될 수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아르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오빠!” “아르페!” 이제 막 현장을 정리한 시에나와 메테르가 밝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물론 로아는방금 그녀들이 처리한 괴수의 사체를 루팅하고 놈들의 사기를 빨아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르페, 그 여자마족은?” “죽였어.” “응, 알겠어.” 어째서 한 번 살렸던 마족을 죽인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죽인 것인지 물어볼 법도 한데 메테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페의 한 손을 붙잡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봐봐. 여기 나타나는 인어들은 조금 이상해, 아르페.” “꼭 마족 같지?” “······응.”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말을 읽어낸 것만 같은 아르페의 말에 메테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들이 지니고 있던 사악한 기운이나 흉험한 기세가, 경매장에서 한 판 싸움을 벌였던 마족들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인어들을 상대로 한 마족화 실험이 성공했으면 꼭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마 성공했더라도 열화판이었겠지. 괜히 고대의 신전이라는 말이 붙은 게 아냐. 놈들은 아나이드 왕국의 인어들과는 아예 종이 달라. 달라진 건지, 원래 달랐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쩌면 티에나가 인간 다음으로 인어들을 실험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고대의 신전의 정보를 몰랐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신전의 봉인을 풀기 위해 일부러 왕국의 모든 인어를 잡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상황이 너무 공교롭단 말이지.’ 신전을 나아가보면, 그 끝에 이르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인어들의 비밀이나, 이 인어들을 봉인한 자나, 어쩌면 마족과의 연결고리까지도. 단지 이 신전의 규모가 그의 생각보다도 더욱 넓어 보인다는 것이 유일한 난점이었으나, 일행은 이젠 규모가 큰 던전을 탐사하는 것도 어지간히 익숙해져 있었다. 던전 한 번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나온 게 한두 번도 아니지 않은가! “제발 1년까지만 걸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만······ 후, 일단 가보자.” “아르페, 우리 그러면 배고플 때 먹을 건 어떻게 해!? 여긴 물속인데!” 마족 대군단의 공세보다도 굶주린 뱃속 거지들의 투쟁이 더욱 두려운 메테르가 새삼스레 그 사실을 떠올려내곤 공포에 질려 물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저 인자하게 답해줄 뿐이었다. “우리한테 크라켄 사체가 있다는 걸 잊었어? 우리 셋 먹을 정도면 5년은 너끈하니까 걱정하지 마.” [먓!] “그래, 넷.” “크라켄 사체······ 지금 먹어보고 싶어! 나 배고파!” “안 돼, 일단 좀 더 가고.” “그러면 지금 가자! 당장!” 안 그래도 열심히 저주도 먹어치우는 주제에 인간의 먹을 것까지 탐하는 괘씸한 탐욕의 마수와 맛있는 것이라면 한때 마족화 실험에 쓰였던 거대오징어라고 해도 가리지 않는 먹보 용사. “후히, 오빠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시에나······ 고맙다.” 그저 담담하게 그를 반기며 환하게 웃어주는 시에나만이 아르페의 구원이었다. 아르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선언했다. “좋아, 어디 여기도 깔끔하게 털어보자.” 과거 이미 무수한 던전을 공략한 용사파티의 능력은 과연 대단했다. 이것이 과연 인어들이 지은 공간이 맞나 싶을 만큼 거대한 신전을 계속해서 나아가며, 심심할 때마다 나타나 일행을 공격하는 사악한 인어들을 가차 없이 물리치며, 몬스터만 나타나면 질릴까봐 중간중간 마련된 함정이나 저주도 모두 사전에 파악하고 부수거나 먹어치우며 일행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비단 그 넓이나 몬스터의 난이도 때문만이 아니라, 고대의 신전은 레벨 200 이상의 상위클래스로만 구성된 파티라고 해도 일주일이 못 지나 포기선언을 할 만큼 지독한 환경에 있었다. 일단 심해였기에 몸에 전해지는 부담도 제법 있었고, 주기적으로 수중호흡 마법을 걸어줘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던전 상인이 나타날 수도 없는 곳인지라 먹을 것도알아서 수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먀! 먀먀먀먓!] “좋아, 클린. 이놈은 먹는 자를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게 하다 끝내 죽게 만드는 독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젠 좋은 단백질원이 되었어.” “야호, 먹자!” 그러나 모든 부정한 기운을 흡수하는 탐식의 마수 로아가 파티에 존재하는 이상 용사 파티는 그들과 조우하는 모든 몬스터를 식량으로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다. “음, 맛있다. 이거 새우 맛 나.” “바다는 정말 좋은 거구나, 오빠! 맛있는 게 이렇게나 가득해!” “······내가 죄인이다, 내가.” [먀우우, 먀아!] 굶주림 앞에는 사람과 닮은 몬스터라서 꺼려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평소에는 가능한 한 크라켄을 먹다가도 그게 물린다 싶으면 결국 그들은 인어에 손을 댔다. 상반신은 껄끄러워 버린다 쳐도 완벽한 어류의 형상인 하반신은 그냥 형태 그대로의 어류의 맛이 났으니 마음에 걸릴 것도 없었다. “아르페, 그런데 나 이제 삶거나 찐 거 싫어. 구워먹고 싶어.” “구우려고 해도 삶아지는데 어떻게 해. 투정부리지 말고 그냥 먹어.” “그럼 대신 아르페한테 뽀뽀해도 돼?” “안 돼.” “히잉, 이게 왜 안 통하지.” 그렇게 아르페 일행은 순조로이 신전의 심부에 도달했다. 바다에 들어선지 두 달이 흐른 시점이었다.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2 > 두 달간 교대로 잠을 청하거나 먹을 것을 먹거나, 볼 일을 보는 시간만 제외하고 일행은 조금도 쉬지 않고 고대의 신전을 질주했다. 고대의 신전은 과거 그들이 겪었던 그 어떤 던전보다도 깊고 넓었으나, 이젠 일행의 무력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성장한 상태. 더욱이 고대의 인어들과 맞상대하면서 실시간으로 레벨이 오르기까지 했으니, 설령 인어 괴수들의 레벨이 점차로 높아져도 그들의 신전 돌파 속도가 느려지는 일은 없었다. “읍, 물이 무거워.” “오빠아.” 그러던 어느 순간 일행은 신전의 통로가 조금 좁아졌다는 사실을, 분위기가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위가 더 어두워지기까지 했어, 아르페.” “마나의 속성이 변질되어가는 거야. ······슬슬 정말 위험한 놈들이 나올 테니 긴장하고 있어.” 심해로 들어오게 되면 이미 태양빛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다. 단지 바닷물 속에 깃든 마나가 스스로 빛을 발해 주위를 밝히는 것인데, 그 마나의 속성이 달라지면 자연히 빛의 세기나 색도 달라지는 것. 그러니 그곳에서 서식하는 몬스터의 능력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먀아아아아.] “넌 아주 기운에 취했구나.” 두 달간 아르페 일행 중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것을 고르라면 그것은 단연 로아였다. 탐식의 마수는 태어난 이후로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성장속도가 달라지는데, 녀석은 태어난 이후 쭉 비단길만 달려오다가 이 고대의 신전에서 아예 정점을 찍어버린 것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기가 마기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으니 그것도 당연하긴 하다만······.” [먀아, 먀우우.] 로아의 레벨은 현 시점에서 222. 아르페 일행 중 가장 레벨이 낮은 시에나가 현재 235레벨이었으니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가장 레벨이 높은 메테르는 246레벨. 아르페가 245레벨로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레벨 200을 넘긴 인간들의 성장이 얼마나 힘든데, 우린 이틀에 하나 꼴로 레벨을 올리고 있으니 과연 용사의 능력은 명불허전이구나. 셰프도 깜짝 놀랄 거야.’ 아르페는 사실 이쯤에서 한 가지 확신을 갖고 있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메테르의 고유능력 가속의 힘을 그들 파티가 공유하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선 아르페나 시에나가 메테르와 비등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흠······.” “왜 그래, 아르페? 내가 아무리 예뻐도 그렇게 빤히 보면 부끄러워.” “너 점점 뻔뻔해져가는구나.” “아르페 닮아서 그래! 어쩜 우린 천생연분인가 봐.” 심증도, 물증도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얘기를 꺼내봤자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일일 테니 아르페는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설령 정말로 고유능력이 그들 전원에게 공유되고 있다고 해도 메테르의 성장속도가 미쳐버린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이쯤 되면 능력이 쪼개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크후아아아아아] 그런데 아르페 일행이 사방을 경계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신전의 심부를 탐색해가던 그때, 저 멀리로부터 끔찍한 괴물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느낌이 딱 중간보스야. 마왕군으로 치면 사천왕 정도 되겠지.” “그럼 별 거 없겠네?” “······응, 뭐 그렇지.” 수없이 긴 세월을 잠들어있던 엘리트 괴수들이 신전의 심처를 범한 무뢰배들을 징벌하기 위해 드디어 눈을 뜬 것이다. 그런 놈이 하나둘도 아니고 아르페의 감각에잡히는 것만 벌써 다섯 마리였다. “레벨 250 이상인데······.” “괜찮아. 이길 수 있어.” “물론 이길 수 있지.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한 마리씩 상대해.” “당연하지.” 레벨이 높으면 높아질수록 1레벨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진다. 더욱이 몬스터의 힘이 50레벨을 경계로 크게 증폭된다는 사실을 감안해 생각해보면, 신전 심부에 도사리고 있는 몬스터들은 정말 끔찍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놈들이 그대로 풀려나 바다로 퍼졌더라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디아스에 닥쳤던 루나틱 웨이브 정도는 농담처럼 여겨질 사태가 일어났겠지.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이 세계 엄청 불안정하지 않아? 용사가 없었으면 마왕군 나설 것도 없이 그냥 인간계 끝나고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을까······.’ 아르페는 투덜거리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끝에서 새하얗게 피어난 가공된 마력이 일행 전원을 감싸는 오각형의 빛의 방어막이 되었다. 그 정체는 물론 사제의 스킬 홀리 배리어. 주로 마력을 막아내는 용도이기는 하나물리력을 저지하는 효과 또한 있었는데, 이 배리어에 마나 스트링과 하이퍼 러빙을 첨가해주면 그 능력이 아주 기가 막히게 상승했다. 이젠 아르페도 굳이 두 스펠을 자신의 주력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카하!] 아르페가 배리어를 만들어낸 직후 어둠 속에서 돌진해온 괴수가 아주 씩씩하게 그것에 돌진해 부딪혔다. 단 한 번의 돌진에 배리어에 거대한 금이 가니, 아르페는 오히려 배리어를 산산조각 내어 그 파편들을 놈의 몸통에 박아 넣었다. [쿠와아아아아앙!] [후이이이이, 우리의 원수들······!] “다른 곳에서도 온다. 경계해!” 아르페의 손짓을 따라 사방에 홀리 배리어가 생성되었다. 그 직후 그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배리어가 생성되는 곳마다 돌진해 머리를 들이받는 괴수들. 당연하지만 아르페가 만물열람으로 그들의 기척과 마나를 읽어내 예상 궤도에 미리 방어막을 만들어둔 것이었다. 녀석들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으리라. “시에나!” “응, 언니!” 일행은 처음부터 다른 괴수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가장 처음 돌진해 아르페의 마법에 얻어맞은 괴수만을 노려 공격하고 있었다. 아르페가 다른 괴수들을 모두 막아 주리라 확신하지 못한다면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먀아아아아아아아아!] “지금!” 로아의 마기 흡수에 놈의 정신이 흐트러진 그때, 기회를 포착한 메테르의 롱 소드가 고유능력 가속의 힘을 품고 빠르게 내쏘아져 괴수의 몸을 난도질했다. [쿠오아아아아아아!] “디바인 해머!” 스킬도, 스펠도 구사하지 못하게 만드는 연격에 놈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에는, 이미 그곳에 자리한 시에나가 거대한 해머를 움켜쥐고는 놈에게 내려찍고 있었다! 가뜩이나 부정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그놈은 시에나의 일격에 완벽하게 끝장이 났다. “한 마리 끝! 다음!” “빨리 해!” “지금 가!” 녀석들이 여유롭게 한 마리를 마무리하는 동안에도 아르페는 정신없이 홀리 배리어와 마나 스트링을 난사하고 있었다.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으로 연결된 십여 개의 홀리 배리어가, 아르페가 손가락을 까딱할 때마다 바닷물 속을 가로지르며 나머지 네 마리 괴수의 돌진을 막아내는 상황. 대체 얼마나 마나가 남아돌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까 싶은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디바인 해머! 디바인 해머!” “흐으으으읍, 비이이이임!” [먀아아아아아!] 레벨 250이 넘어가는 괴수들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는 아르페도 대단했지만, 셋이서 한꺼번에 달려들어 스킬을 퍼부으며 순식간에 한 마리씩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버리는 나머지 일행도 대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나가 방대하기로 유명한 아르페야 그렇다 치고 메테르와 시에나에게는 조금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것도 메테르의 레코드 디바이드 스킬이 있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르페의 마력은 그녀들에겐 거의 무한과 같았으니까. [캬하하아아아악!] [분하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레벨이 1높아질 때마다 격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다른 녀석들의 레벨이 1오르는 것보다, 용사 파티 멤버의 레벨이 1오를 때의 능력상승폭이 압도적이었을 뿐. 두 달 동안 신전을 탐사하며 가속을 구사하는 데 더욱 완벽하게 적응한 메테르, 마족을 비롯해 마의 인자를 품은 몬스터를 대상으로는 메테르보다도 오히려 더욱 강한 능력을 보이는 시에나는 자신들보다 레벨이 10, 20이상씩 높은 적을 상대로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완벽하게 놈들을 제압했다. 로아가 붙들어 약화시키고, 메테르가 틈을 만들어, 시에나가 강력한 기운을 꽂아넣어 마무리한다. 그들의 연계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르페, 저기 아직 한 놈 남아있어!” [쿠오오오오오오오오!] “칫, 날래기는······.” 어느덧 네 마리의 괴수가 죽어나가고 남은 것은 단 한 마리, 다른 놈들보다 유독 거대하고 강한 괴수였다. 놈은 돌진 한 번에 홀리 배리어 하나를 깨부수는 흉악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처음 아르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부터 오직 그를 향해서만 달려들고 있었다. [쿠오오오오옹!] 마나로 따지자면 이블 리플렉터인 시에나에게 더 거부감을 느낄 터이고, 메테르의 공격이 더 파괴적인 결과를 낳고 있으니 그녀를 우선적으로 공격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어째서 아르페를 그렇게 철천지원수 대하듯 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에나, 마나 줘!” “응!” 그러나 놈이 마기를 품은 몬스터인 이상, 메테르를 통해 시에나의 마나를 공유하는 아르페에게는 조금 귀찮은 적에 불과했다. “뒈져랏!” [쿠하아아아아아아악!] 시에나의 마나가 듬뿍 담겨 발현된 마나 스트링이 아르페의 전신으로부터 한꺼번에 수십 줄기나 솟구쳐, 아르페를 그대로 짓뭉개버릴 듯 돌진해오던 괴수의 전신을 꿰뚫어 그 자리에 묶어놓았다. 그것은 마치 과거 단 한 번 나타났다는 최상위 사제직 신의 대리자가 발휘했다는 최상급 구속 마법 신의 쇠사슬을 보는 것만 같았다. [쿠오오오옹, 우그아아아앙!] 놈은 하반신에 달린 여덟 개의 통통한 문어다리를 한꺼번에 뻗어내며 있는 대로 저항했지만, 직후 메테르와 시에나의 동시 공격에 난자당해 끝내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말았다. 메테르의 말마따나 마왕군 사천왕처럼 별 것 없는 놈들이었다. 아르페는 어딘가 마음이 조금 아팠다. 메테르는 죽은 놈에게서 루팅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 분명히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데 계속 소리밖에 안 질렀어.” “깊은 곳으로 들어올수록 그런 경향이 높아졌지. 마기와 순수한 마나가 균형을 이루지 못해 지능이 점점 떨어진 거야. 강해지는 방향성이 잘못된 거지. 그놈은 그중에서도 끝판왕이었을 테고.” [먀먀아.] 적이 똑똑하건 무식하건 로아에게는 맛있는 포식대상일 뿐. 그러나 녀석은 마음껏 괴수의 마기를 빨아먹다가는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먀아? 먀먀아? 먀우아아?] “어디서 먹어본 맛이라고? 여태까지 먹어본 맛이겠지.” [먀, 먀먀! 먀먀아먀먀먀!] “하, 또 이게 자세히 살펴보게 하네.”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미 죽어버린 사체이기는 하나 정보를열람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어다리를 달고 있던 고대 인어를 만물열람의 사정권에 담는 순간, 녀석이 지니고 있는 모든 기록이 그의 두 눈에······. [에인션트 크라켄 머맨] [레벨 ? 261] [에인션트 크라켄과 에인션트 머메이드의 혼혈. 두 종족의 마의 인자가 겹쳐 기적적으로 태어났으나, 작은 육신에 지나치게 많은 마기가 집중되어 영혼을 깎아먹어 불균형한 성장을 이루었다.] “······뭐?” 아르페는 자신의 두 눈을 믿지 못해 멍한 목소리를 냈으나 만물열람이 한 번에 파악하지 못하는 정보는 있어도 정보를 잘못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 그는 다급히 다른 네 마리의 사체를 살폈으나 그것들은 그저 에인션트 머맨이나 에인션트 머메이드라는 이름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태초의 마기의 근원에서 비롯된 고대 해상 종족. 그래, 전부 같았다. 이 크라켄 머맨이라는 놈만 빼놓고는 전부 말이다. [구우우우오오오오오오오오] 딱 그 타이밍을 맞추어 신전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웅장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나간 아이들을 애도하는 듯한, 바턴은 내가 이어받을 테니 편히 쉬라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 아르페는 벌써부터 놈의 정체를 확신하고 말았다.실로 불운하게도! [쿠오오아아아아아앙] 목소리가 아주 조금 더 그들에게 가까워졌다. 이제 곧 아주 많이 가까워질 것이다. 아르페는 하하, 인자한 웃음을 웃으며 로아의 뒷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야 임마, 그렇게 위험한 건 없다면서.” [먀아아아아아아.] 주인님도 다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완벽히 알아, 하고 반문하는 로아. 실로 분하게도 정답인지라 아르페도 녀석을 더 혼내지 못했다. 더구나 위험한 게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어쨌을 것인가, 어차피 들어왔을 텐데! “아르페, 보스야?” “응, 보스야.” 아르페는 메테르의 질문에 답해주고는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기껏 강해졌는데 미안하지만 언제나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아.” [쿠오오오오오옹!] 곧 고대의 신전에 봉인되어 있던 흉악한 마수, 에인션트 크라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문어였다.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3 > 칠흑 같은 동체, 일행을 오시하는 섬뜩한 두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째서 신전이 그토록 거대했던 것인지 알려주는 듯한 몸집. 저 바깥에서 루나틱 웨이브를 견뎌내고 있을 인간들이 보았더라면 그냥 빠르게 삶을 포기했을 법한 괴수가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에인션트 크라켄] [레벨 ? 291] [고대 혼돈의 근원에서 태어난 마수 중 하나. 오랜 세월 봉인된 끝에 매우 약화되었다.] “음, 저게 약화된 상태란 말이지.” 아르페는 다리 하나만 가지고도 염옥 파수꾼을 부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덩치의 크라켄과 마주하며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약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쳤더라면 뼈도 추리지 못했을 테니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먀, 먀아!] “알아, 임마.” 마의 인자를 비롯해 부정한 기운만 발견하면 군침을 뚝뚝 흘리며 덤벼들던 로아조차 놈을 보곤 잔뜩 겁에 질려 아르페에게 달라붙었다. 이대로 돌진했다가 놈에게 잘못 얻어맞으면 그대로 끝장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크라켄전과 비교해 적과의 레벨 차이는 오히려 줄어들었는데도, 그때보다 무력과 마력의 차이는 압도적으로 컸으니까. ‘하지만 이거 어쩐지······ 아,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에인션트 크라켄이 행동을 개시한 것으로 인해, 여태껏 암흑에 둘러싸여 있던 신전의 최심부도 드디어 아르페의 눈앞에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아르페의 예리한 눈은 신전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제단’의 모습을 한순간에 캐치해냈다. 그러나 아르페가 언제까지고 여유롭게 신전을 관찰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 “큭!?” 에인션트 크라켄 주위에 진동이 이는가 싶던 다음 순간, 순수하게 물과 마나로만 뭉쳐 이루어진 수십 줄기의 마법이 일행을 향해 레이저처럼 내쏘아졌다. 아르페는 다급히 홀리 배리어를 형성해 그것을 막았지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박살났다. “아르페, 또 그 붉은 여자 불러와야 해!?” 설령 아르페가 다시 블링크 부츠를 신겨준다 해도 저런 괴물과 정면에서 맞서 싸울 용기는 없었던 메테르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아르페는 한꺼번에 수십 개의 홀리 배리어를 겹쳐 생성해 놈의 레이저를 막아내며, 뜻밖에도 이렇게 외쳤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어떻게?” “일단 너흰 뒤돌아서 신전 입구까지 달려! 저 자식 시선을 끌면서!” “날 제물로 내던지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아니겠지? 아닌 거지!?” 메테르는 아르페의 지시에 태클을 걸면서도 순순히 돌아섰다. 자신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시에나를 단단히 붙잡고 가속을 발휘해 빠르게 이탈하는 메테르! 그 뒤를 다시 몇 개인가의 물줄기가 쫓았으나 아르페가 만들어낸 수십 중첩 홀리 배리어에 막혀 좌절되었다. 그러자 놈은 메테르를 쫓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아르페를 향해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메테르, 도발!” “우이씨잉!” 아르페의 단호한 지시에 메테르는 어쩔 수 없이 에인션트 크라켄을 도발했다. 시에나의 마나를 나눠받고는 그것을 고스란히 롱 소드에 모아 증폭시켜, 빔! [쿠구오오오오옹!] 제아무리 레벨이 높고 오랜 세월을 살아왔어도 역시 이블 리플렉터의 마나에는 약한 것일까?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빔에 얻어맞은 놈의 검은 동체에서 굵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놈의 덩치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양이나 고통은 격렬했으리라. 놈은 즉각 여덟 개의 다리를 모두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일순간 뒤꽁무니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분사하며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쿠아아아아아아앙!] “캬, 저거 효과 있네.” “아르페 미워! 나중에 뽀뽀할 거야!” 몸집이 거대하니 속도는 좀 느릴 줄 알았던 녀석이 신전이고 뭐고 다 부술 기세로뛰쳐나오자 경악한 메테르가 필사적으로 가속을 발동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신벌! 신벌! 신벌! 신벌!” [쿠아아아아!] 그녀에게 짐짝처럼 들린 시에나가 한 손만 뒤로 뻗어 신벌 짤짤이로 녀석의 속도를 어떻게든 늦춰보려 했으나 놈의 약만 더 올릴 뿐이었다. 물론 훌륭한 도발이 되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구와아아아아아아!] “메테르랑 시에나 잘한다! 파이팅!” “미워! 미워어!” 꽁무니로 끊임없이 물을 분사해 터무니없는 속도로 신전을 질주하는 크라켄과 그런 녀석을 피해 필사적으로 가속을 발동하는 메테르. 그들은 여태까지 신전을 탐사해왔던 속도의 한 백 배는 되는 속도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몸에는 부담이 가겠지만······ 녀석을 죽이면 레벨 업은 확실히 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만 고생해줘, 메테르.’ 아르페는 놈들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까지 얌전히 대기하다가는 이내 후우, 깊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아까 한 번 살폈던 제단이다. 그 위에는 붉고 푸른 가죽 장정의 책이 각각 한 권씩 놓여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풍경이다. “선배님, 역시 여기도 다녀가셨구나?” [먀아?] 용사가 다사다망한 거야 익히 알고 있지만 설마 이런 곳에까지 자취를 남겨두었을 줄은······ 아니, 사실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로 들어온 순간부터 아주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아나이드의 건설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이라고 한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쨌든 수백 년 전이면 지금의 마왕과 용사와는 아예 관련이 없는 시절, 즉 전대나 전전대의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을 때인 것이다. 그러니 전대 용사, 선배님이 이곳에 들렀다 갔을 확률도 아예 없지는 않은 셈. 더욱이 아르페는 하나의 던전을 통째로 레코드 링크로 묶어놓을 정도의 마법 실력을 지닌 선배라면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나 인어라는 종족의 기록과 개념을 통째로 묶어낸 인어의 도로도 충분히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의심을 품었었다. 그리고 이 제단까지 발견한 지금은 그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그래, 그렇게 대단한 마법을 저 인어들이 자력으로 만들었을 리가 없단 말이지.’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제단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그 제단에는 이곳 아나이드, 그리고 고대의 신전과 관련된 선배의 영웅담이 잔뜩 적혀 있었다. “에인션트 크라켄을 감당할 수가 없어 어떻게든 이곳으로 몰아넣고 봉인을 실시한다. 혼돈의 근원에 맞닿아 태어난 다른 인어들을 매개로 묶었으니, 족히 수천 년은 봉인이 풀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 봉인은 어디까지나 마의 기운을 품은 인어들을 이용한 것이므로, 만약 바깥 바다에 새로운 마 성향의 인어가 나타나면 봉인이 어찌될지 모른다······.” 그러지 마. 제발 마족 놈들이 여기까지 예측하고 움직였다고 말하지 말아줘! 아르페는 마왕군이 그렇게까지 똑똑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족 놈들은 고대의 신전이 해방되는 조건을 알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했다. 아르페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이놈들이 이렇게까지 완벽하고 철저하게 움직여서야, 상황을 뒤집을 변수라곤 정말 우리들뿐이잖아!’ 반대로 말하면, 마왕군이 이렇게까지 철저히 일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일행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아르페와 메테르가 모든 마왕군의 계획을, 그리고 마왕군인지 아닌지 의심 가는 마족의 계획까지도 전부 엿 먹이는 데 성공하지 않았는가! 이렇게까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어째서 이놈들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꼬아놔서 아르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만든단 말인가! 어째서! 왜! 이래선 노후의 평온한 낙농 라이프에 지장이 갈 뿐인데! 환생은 괜히 해가지고! [먀아아.] “그래, 진정할게.” 아르페는 로아의 뒷목을 긁적여주며 안정을 되찾아 제단에 새겨진 나머지 문구를읽어나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라면 필시 봉인이 약해져 깨어난 크라켄을 처단한 자일 터,감사하는 바이다. 그 보상으로 그대의 업적에 반응해 완성되는 유니크 스킬 북과 스펠 북을 하나씩 준비해두었으니 부디 도움이 되길 바란다. 만약 크라켄을 처단한 이가 용사라면, 후배여, 아주 잘했다. 내 무덤은 이미 다녀왔겠지? 이 스킬 북과 스펠 북이 이미 후배가 익힌 유니크 스킬과 스펠을 강화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일러둔다.” [먀아아아아.]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선배는 하나의 스킬 북에 두 가지의 기능을 넣어놓은 모양이었다. 첫 번째는 이전 그들이 육성 던전에서 익혔던 것처럼 익히는 순간에야 스킬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만약 육성 던전에서 이미 스킬을 익혔을 경우 그 스킬과 스펠을 강화해주는 것. 아르페와 메테르는 육성 던전에서 스킬을 익혔으니 이것을 익힐 경우 해당하는 스킬들을 강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후배 용사라면 아주 당연히 지 무덤을 먼저 찾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굉장히 뻔뻔하기는 하다만······.’ 실제로 다녀왔으니 어쩔 수가 없다. 더욱이 아직까지도 이 선배가 대체 무슨 수법을 써서 이런 스킬 북과 스펠 북을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선배가 아나이드와 인어의 도로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크라켄을 신전에 봉인했다는 것도, 심지어 스킬 북과 스펠 북을 준비해놓았다는 것도 아니지.’ 가장 중요한 문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스킬 북과 스펠 북을 익히면 제단이 무너진다. 제단이 무너지면 신전도 무너지니, 탈출에 주의하도록. 이미 내 무덤을 다녀온 후배라면 알고 있겠지만!] “이 자식 역시나 여기도 저질러 놨구만!” [먀?] 이 답도 없는 선배 자식이 기껏 스킬을 익힌 후배들을 그냥 생매장을 하려고! 어쩐지 그럴 것 같았는데 역시나 그랬다! 그러나 사실 아르페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신전을 무너트렸을 때 간신히, 그가 크라켄을 이길 방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제단을 발견하고 먼저 한 생각도 ‘무너트리면 혹시나?’였으니까. ‘문제는 아직 크라켄을 쓰러트리지 못했으니 제단의 스킬과 스펠을 익힐 수 없다는 건데.’ 그러나 아르페는 선배가 만들어놓은 문구에 주목했다. 스킬과 스펠을 익히면 제단이 무너지고, 제단이 무너지면 신전도 무너진다. 그야 원래는 스킬과 스펠을 익혀서 제단을 무너트리는 게 순서겠지만······. “먼저 제단을 무너트리면 신전이 그냥 무너지지 않을까?” [먀아아아······.] 로아가 굉장히 한심하다는 듯이 울었지만 아르페는 신경 쓰지 않고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는 덥석, 제단 위의 스킬 북과 스펠 북을 수납해버렸다! 비록 스킬 북과 스펠 북만 따로 떼어낼 수는 없었지만, 아공간 주머니의 흡입력으로 제단을 통째로 분질러 넣는 것은 가능했다! “역시 된다!” [먀아아아아아아!] 더구나 제단을 무너트린 직후, 그 제단에 의해 통제되던 신전의 마나의 흐름이 완벽하게 폭주하며 붕괴를 일으켜, 사방에서 파괴적인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역시 마법은 잘 짜놓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바보 같다니까! 아르페는 쾌재를 불렀지만 사실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거대한 신전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무시무시한 크기의 파편이 아르페의 바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크라켄을 공격하는 대가로 자신도 똑같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후······ 그럼 가볼까, 로아.” [먀아아아······.] 이럴 거면 그냥 나도 언니들 따라서 가는 건데, 하고 로아가 불만스럽게 울었지만아르페는 녀석을 무시했다. 소중한 스킬 북과 스펠 북이 들어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단단히 챙기고, 뒤를 돌아서며 부츠의 능력을 활성화했다. “가자!” [먀먀아아아아앗!] 시야로 확인이 가능한 곳이라면 어디로든 그를, 그리고 동료까지도 데려다줄 수 있는 지고의 아티팩트. 세 번씩이나 강화가 끝난 덕에, 아르페의 마나만 남아있다면얼마든지 블링크를 발동할 수 있었다. 이 부츠가 없었다면 그가 이런 위험을 자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먀아아아아! 먀아앗, 먀아!] “괜찮아, 이거 안 무너트렸으면 어차피 우리 여기서 죽었으니까!” 누가 전직 사천왕 아니랄까봐 누구보다도 죽음과 밀접한 삶을 살아가는 아르페. 그는 부디 앞서 나아가고 있을 메테르와 시에나가 신전 파편을 무사히 피하고 있기를 바라며 블링크를 발동했다. 만물열람으로 떨어져 내리는 파편을 모두 파악하고, 블링크로 안전한 지점을 찾아 이동한다! 모든 신전 파편이 그를 맞추지 못해 애꿎은 해저를 부수어나갔다. [크와아아아아아앙!] 저 너머로부터 파편에 세게 얻어맞음에 분명한 크라켄의 괴성이 들려와 아르페를웃음 짓게 만들었다. 좋아, 진정한 보스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르페 미워어어어어! 뽀뽀보다 더 심한 짓 할 거야!” “······.” [먀아아.] “시끄러 임마. 추측하지 마.”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기가 조금 두려워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르페는 나중에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게 적당한 파편이라도 하나 맞아둘까, 진지하게 고려하며 다시 블링크를 발동하는 것이었다.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4 > 수백 년 전 용사에게 봉인되어 기나긴 세월을 어둠 속에 잊혀 있다가 이제야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에인션트 크라켄. 지금 놈은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쿠가아아아아!]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이야, 녀석이 죽지 않았으면 자신의 봉인이 완벽히 풀리지 않았을 테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저 망할 용사들은 자신의 근원을 건드리는 짜증나는 기운을 발산하는 데다, 심지어는 이 갑갑한 감옥을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이곳을 통째로 무너트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쿠아아아아아아앙!] 신전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에인션트 크라켄이 지닌 마의 인자에 치명적인 것 뿐!그것이 수십 톤, 수백 톤의 무게를 품고 떨어져내려 자신을 공격해오니 아프지 않을턱이 없었다. 더욱이 에인션트 크라켄의 덩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거체였기에, 제아무리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한들 무너지는 신전 파편을 피할 길이 없었다. 신성력을 품은 파편에 끊임없이 얻어맞으며 놈의 단단했던 피부에도 금이 가고 피가 솟구쳤다. “무너트릴 거라면 무너트릴 거라고 얘기나 해주지! 아르페 나빠!”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게 이 말이었구나. 역시 오빠는 너무 대단해. 너무 멋져.” “그야 멋지긴 하지만! 그래도오!” 바로 그 무지막지한 놈의 분노와 무너지는 신전을 동시에 감당하게 된 메테르와 시에나는 아주 그냥 죽을 맛이었다. 그간 성장을 거듭하며 가속의 반동에도 비교적 잘 견딜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리그래도 레벨 290을 넘기는 보스 몬스터로부터 도망치며 신전 파편까지 피하자니 정신적 소모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컸던 것이다. “언니, 저기 온다!” “쳐내줘, 저건 못 피해!” “저걸!? ······익, 알았어! 하압!” 시에나를 껴안고 끊임없이 가속을 발동하는 메테르와, 메테르의 품에 안겨 그녀가 미처 피하지 못하는 파편을 망치로 쳐내는 시에나! 둘의 호흡은 환상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았다. “아, 언니! 나 좋은 생각났어!” “나 어차피 못 알아들으니까 설명하지 말고 너 알아서 하렴!” “응, 알았어!” 주위 모든 상황을 파악하며 가속을 반복해 사용하느라 정신이 없는 메테르와는 달리, 그나마 시에나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멍하니 파편을 쳐내기만 하는 것보다 보다 도움이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지금 그녀에겐 크라켄의 힘을 무기에 부여하는 건틀렛과, 세 번의 강화를 중첩한 끝에 진동을 저장해 발사하는 능력을 품게 된 자신의 슬레지 해머가 있다. 이 둘의 능력을 동시에 발동한다면, 어쩌면······! “언니, 저기 저 파편은 피할 필요 없어!” “저거 딥따 큰데? 에이, 몰라!” 메테르는 시에나를 믿지는 않지만 시에나를 믿는 아르페를 믿었기에, 그녀의 말대로 위에서 떨어지는 파편을 보면서도 그냥 냅다 돌진했다. 당연히 그 뒤를 크라켄이 미쳐버린 질주로 뒤쫓았다. “흡······ 조금만 더!” “시에나, 뭔지 몰라도 빨리! 내가 뽀뽀하고 싶은 건 아르페지 저런 돌덩이가 아니란 말이야!” 메테르가 재차 가속을 발휘하는 그 순간, 크라켄이 한 차례 물을 분사하며 강력한추진력을 얻어 그들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오는 순간, 실로 거대한 신전 파편이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하아아아아압!” 크라켄의 힘으로 해머를 강화한 시에나는 그것에 저장해놓았던 진동의 힘까지 집중하여 그것을 냅다 등 뒤로 휘둘렀고, 파편은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 순간 해머 헤드에 얻어맞아 튕겨나갔다. “그우우우겍!?” “꺄아아악!” 어찌나 무거운 파편이었으면 시에나가 그것을 쳐내는 순간 일어난 반동으로 메테르와 시에나가 앞으로 더욱 거세게 튕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파편은 그대로 방향을 바꾸어 크라켄에게 돌진했고, 시에나의 신성력까지 듬뿍 담겨 크라켄을 정통으로 후려 갈겼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 크라켄이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다. 어찌나 아팠던지 돌진도 멈추고 여덟 개의 다리를 사방으로 퍼트리며 난동을 부렸다. 사방에서 물 덩어리가 뭉쳐 그들을 향해 레이저처럼 쏘아내졌고, 메테르는 등 뒤에서 뜨겁게 작렬하는 기운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그것들을 피해냈다. “너 대체 무슨 짓 한 거야!” “그냥 공격했는데 많이 아픈가봐! 언니, 저기 저걸로 한 방 더 가자!” “나 죽어, 진짜 죽어어!” 메테르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재차 앞으로 돌격했다. 단순한 돌격이 아니다. 시에나가 망치를 휘두르기 좋게 파편이 떨어져 내리는 방향을 계산해 가속을 발동하는 것으로, 그들의 질주로 인해 발생한 운동에너지까지 파편에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게 했다. 당연하지만 그것에는 아르페라고 해도 단시간에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연산과정이 필요했으나 메테르는 그저 본능적으로 최선의 루트를 파악하고 움직였다. 몸으로 움직여 행하는 모든 일에 관련해 그녀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였다! “어어······ 에잇!” [쿠하악!? 키이이이이하아아아악!] 그 결과 시에나는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자세로 파편을 쳐낼 수 있었고, 파편또한 첫 번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품고 크라켄에게 쇄도했다. 그 효과는 파편에 얻어맞은 크라켄의 반응이 더욱 격렬해진 것만으로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쿠학! 키하아악!] “······언니, 오빠 오기 전에 우리끼리 잡을 것 같은데?” “아니, 이제 시작이야······ 시에나, 꽉 붙잡아!” “꺄아아아악!” 이전에 그들이 잡았던 크라켄은 광화에 걸려있어 충차처럼 계속 돌격만 반복했기에, 맞서 싸우는 적보다는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에인션트 크라켄은 달랐다. 스스로 돌격해올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물을 레이저처럼 쏘아내는데다, 이젠 먹물까지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구오오오옹!] “큭, 주위 마나를 차단하고 있어······!” “언니, 조심해!” 실로 경악스럽게도, 에인션트 크라켄이 뿜어낸 먹물은 일대의 마나를 크라켄의 것으로 물들여버리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 메테르와 시에나가 마나를 발하는 것도 힘들어졌을 뿐더러 놈의 몸 주위에서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레이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언니!”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크라켄의 마나에 저항하며 억지로 마나를 활성화해 가속을 발동하고, 부츠의 옵션까지 끌어내며 메테르의 이가 악물렸다. 이렇게 된 이상 아르페에게 부담이 많이 가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레코드 디바이드를 최고조로 활성화해 아르페의 방대한 마력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후우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감각을 최대로 활성화해 떨어지는 신전의 파편, 크라켄의 촉수, 놈의 본체의 위치, 놈이 쏘아내는 레이저의 에너지 반응을 모두 잡아냈다. 덤으로 시에나가 쳐내는 파편에 힘을 더해줄 수 있도록 돌진 방향을 설정해, 질주했다! “저거, 저거! 쳐내!” “우그으아아아아아알겠어어어어어!” 레이저와, 먹물과, 크라켄의 촉수가 난무하는 환경에서 메테르는 그 모두에 몸을내주지 않으며 질주 속도를 오히려 더 높였다. 시에나가 망치를 휘두르기도 힘들어졌지만 투덜거리고 있을 시간도 없다! “흡! 흐으으으압!” [쿠하아! 쿠이우아아아아아!] 그녀는 메테르의 지시에 맞추어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러 파편 두 개를 추가로 크라켄에게 쏘아 보냈다. 크라켄은 레이저를 조종해 그중 하나를 격추했지만 나머지 하나에는 속절없이 얻어맞았다. 양측의 속도가 모두 빨라진 상태이니 충격량도 더욱 컸다. 시에나의 신성력을 가득 담은 파편은 크라켄의 몸속 깊숙이 박혀 폭발해, 놈의 마기에 지대한 손상을 입혔다. [크아아아아아아아!] 크라켄의 발광, 쏟아져 나오는 먹물, 질주하는 용사 파티! 아르페가 일행을 따라잡은 것이 바로 그때쯤이었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로아!” [먀먀먀아아아앗!] 아르페의 품에 끌어안긴 로아가 입을 벌렸다. 당연하지만 녀석이 흡수하는 것은 크라켄이 뿜어낸 먹물이었다! “앗······ 아르페!”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새카맣게 물들었던 바닷물이 제 색깔을 되찾음에 따라 순식간에 놈의 마나통제력이 줄어들고 메테르와 시에나의 질주는 더욱 빨라졌다. [쿠오오오옹!] 크라켄은 곧장 아르페를 인식해 돌아보았으나 다음 순간 시에나가 쳐낸 파편이 놈의 대가리에 박혀 폭발하는 바람에 다시 방향을 전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엔 아르페가 마나 스트링 수십 개를 조종해 붙잡아 던진 신전파편이 놈의 촉수에 꽂혔다. 시에나의 마나를 빌려올 수는 없었지만 신전 파편 자체로도 충분한 위력이 있었다. [퀴익, 퀴우아아아아아!] 앞뒤에서 성가신 공격을 해오니 크라켄은 바다생물인 주제에 스트레스로 승천해버릴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일대를 장악할 의도로 뿜어낸 먹물은 모두 어딘가로 빨려사라지고 있으니! “메테르, 속도 높여! 시에나는 잘 한다, 그대로 파편 공격!” “말은 쉽지이이이!” 그러나 아르페의 말을 듣고 순순히 속도를 높이는 메테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행동도 쉬워 보였다. 아르페는 그 뒤를 따라붙으며 몇 번 더 파편을 붙잡아 놈의 뒤통수에 던져주고는, 블링크를 연달아 발동해 메테르의 옆으로 붙었다. “아르페 너 끝나고 각오해.” “다 너희 살리려고 한 거야. 그보다 지금부턴 전술 변경이다.” 아르페는 한 손에 메테르를, 한 손에 시에나를 붙잡았다. 메테르의 가속도 충분히빠르지만 한 번에 수백 미터를 도약하는 아르페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다. 이젠 그가운반역이었다. 그는 블링크를 발동해 크라켄과 신전 파편을 피해 수중을 도약하며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로아는 빨아들일 수 있는 건 전부 빨아들여! 아, 먹물은 따로 보관해라.” [먀아아아아, 먀먀아아먀아!] 아주 나쁜 주인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그의 명에 따르는 로아. 그는 이어서 그에게 바턴을 패스하고 한가해진 메테르에게도 지시했다. “레코드 디바이드로 가속의 힘을 시에나에게 공유하는 것 가능하겠어?” “아, ······응.” 이 급한 상황임에도 메테르의 대꾸가 아주 살짝 늦었다.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다. 이 녀석 역시 평소부터 가속을 일행과 공유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그것은 추궁할 일이라기 보단 감사할 일이고, 뭣보다도 지금은 그 덕에 많은 일이 가능해졌으니 아르페는 굳이 그것을 추궁하진 않았다. “좋아, 그러면 메테르는 가속의 힘을 시에나한테 공유해주면서, 우리가 미처 못 피하는 장애물을 롱 소드의 빔으로 파괴.” “응!” 지금도 수십 줄기씩 날아들고 있는 크라켄의 물줄기 공격이나 촉수 공격은 아르페의 배리어에 차단되고 있었다. 아무리 아르페라도 한꺼번에 수십 가지의 일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었으니 메테르와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시에나는 공격이다. 가속 덕에 공격력이 상승할 거야. 지금부터는 가장 큰 파편만 쳐 날려!” “자신 있어, 오빠!” “그럼 간다!” 블링크가 연속으로 발동하며 그들을 순식간에 수백 미터 너머로 데려다놓았다. 직후 그들 코앞에 나타나는 신전의 기둥! “흐아아아아압!” 시에나는 크라켄의 힘, 진동을 한껏 응축한 슬레지 해머로 기둥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수십 개의 파편으로 나뉜 기둥이 그들 뒤로 쫓아오는 크라켄에게 쇄도했다! [쿠구오아아아아아아!] [먀아! 먀먀앗!] 로아가 놈의 먹물을 모두 빨아들이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궤도에서 발생하는 레이저는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아르페와 로아가 합류하고 나자, 크라켄은 정말 그들 일행이 깜짝 놀랄 만큼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카하아아아아아! 키오아아아악!] 짜증나는 용사들을 죽이기는커녕 제대로 따라잡지도 못하고, 신전 파편에 계속 얻어맞아 슬슬 체력이 위험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을 즈음, 기어이 크라켄의 분노가 임계점을 돌파했다! “이런 미친!” 바로 그 순간, 수십 줄기씩 생성되던 레이저가 두 배, 세 배로 늘어나 일행을 노렸다. 로아가 한꺼번에 먹어치우기 힘들 만큼 압도적인 양의 먹물이 쏟아져 나와 일대마나를 지배했다. 놈의 몸통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비축해둔 물 대신 피를 쏘아내 놈의 돌진 속도를 더했다! “아르페, 따라잡혀! 정말 따라잡히겠어!” “오빠, 더 이상 공격할 만한 파편이 없어! 이러다 정말······.” “이러다 정말!” 아르페가 외쳤다. “탈출이다! 저기 후려쳐!” “응!” 시에나가 순순히 아르페의 말을 따라 천장을 후려친 직후, 아르페는 최후의 블링크를 구사해 해저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직후 일대가 끔찍한 진동을 일으키더니 번개폭풍이 치는 것만 같은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쿠우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에인션트 크라켄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촉수도, 레이저도 일행의 뒤를 쫓지 못했다. 놈은 신전과 함께 터널 아래에 묻히고 말았다.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5 > [쿠와아아아아아! 키하아아아!] 지옥의 심부에서 울부짖는 마귀의 비명이 이러할까?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소리가 바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바다의 대지가 마구 진동하고 무너져 내렸다. 심해생물들이 모두 멀찍이 도망가고 몬스터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인간들이 나왔다!] [저, 저 안에 대체 무엇이!?] [아직도 안 가고 남아 있는 놈들이 있었냐?] 그 와중에 어떻게 된 것이, 인어들만이 한가득 몰려와 있었다. 어쩌면 인어들은 정말 몬스터가 아니라 아인종일지도 모른다. 사람 말을 더럽게 안 듣는 꼴이 꼭 인간들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 아니면 머리가 나빠서 두 달 만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먹었거나! 아르페는 저놈들이 죽어도 절대 책임져주지 말자고 생각하며 메테르와 시에나를 품에서 놔주었다.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기에 메테르도 별 투정을 부리지 않고 잽싸게 그에게서 벗어났다. “아르페, 여기까진 어떻게 했는데······ 쟤 안 죽겠지?” “죽을 리가 없지.” 마지막 시에나의 일격이 크리티컬로 터져준 덕에 크라켄이 정말 깊숙이 묻히기는했다. 그러나 놈은 생매장당한 지금도 거칠게 난동을 부리고 있기에 그 위를 덮은 신전의 파편이나 해저터널의 돌덩이들이 언제 모두 치워질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콰오오오오오오!] “와, 바닥 들썩이는 거 봐.” 잘도 저런 괴물에게서 무사히 도망쳤다는 생각을 하며 아르페는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순조로이 도달했는데, 그 과정에서 생각보다 마나를 많이 소모하는 바람에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있기도 힘들었다. 메테르가 펑펑 사용해댄 가속도, 시에나의 파편 투척 공격도, 아르페 자신이 사용한 블링크까지도 모두 대부분 그의 마나로 발동한 것이나 다름없다. 잊어먹기 쉽지만 지금 일행에게 걸린 수중호흡 마법도 아르페의 마나를 소모해 유지하는 것이다. 아르페가 규격을 초월하는 마나량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미 죽었어도 수십 번은 죽었으리라. “젠장······ 그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아르페는 미케나에게서 구입한 최상급 마나 포션을 입에 물었지만 모든 포션은 즉효성이 아니기에, 그가 필요로 하는 마나량에 도달하기까지는 앞으로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아마 그전에 크라켄이 저곳을 탈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르페 일행과 함께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는 길었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리라! 아르페는 마나 포션을 다 들이키고는 필사적으로 주위 마나를 끌어 모으며 동시에 머리를 굴렸다. ‘마나, 반드시 마나······.’ 데마이트의 원석······ 그건 필수로 사용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무리가 있다. 마나 포션을 여러 개 마셔도 효과는 없을 테고, 그래, 크라켄의 마석! 이걸 소모하면 그나마 구색은 갖춰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부족했다. 아르페의 두 눈에는 저 밑에 파묻힌 크라켄의 상태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끝장을 낼 수 없으리라 확신하게 해주는, 저 빌어먹게 팔팔한 놈의 상태가! 지금 놈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오직 놈을 구속하는 신전의 파편들에 남아있는 신성력 덕분이었다. 놈의 마력이 신성력을 완전히 밀어내는 데 성공하는 순간, 이 일대가 놈의 난동으로 모두 뒤엎어지고 말 것이다. 그때 아르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메테르, 네 레코드 디바이드의 적용범위는 대체 어디까지야?” “내 동료거나······ 나보다 월등히 약한 애들.” “그러면 저 인어들은 어때.” 메테르는 어찌된 게 점점 더 주위로 몰려오기만 하는 인어들을 돌아보며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마나를 주는 이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힘들어.” “좋아, 기다려봐.” 힘들 뿐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너무나 무서웠지만, 용사라는 게 원래 애꿎은 사람들한테서 뭔가를 뺏어 차지하는 직업이니 그리 잘못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르페는 곧장 인어들을 향해 돌아서며 외쳤다. [전부 다 이쪽으로! 너희들 마나 좀 쓰자!] [마, 마나!? 인간, 어찌 우리의 마나를······.] [혹시 저 인간도 그 자와 같은 목적이 아닐까? 우리를 가지고 실험하려는 거지! 이 극악무도한 인간 같으니!] 역시 좋은 말로는 안 되려나, 아르페가 체념하고 강압적인 수단을 꺼내들려 한 순간. 인어들 저 너머에서 굳건한 의지를 품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분은 나의 주인이시니, 곧 왕국의 주인이시다! 모든 인어는 그분의 명을 따르라!] 바로 세릴의 목소리였다. 설마 인어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그녀까지 이곳에 와 있었다니! 아르페는 기가 막혔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 뒤로 우르르 몰려오는 수천 마리의 인어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자기들 스스로 도망칠 길을 닫아버리다니,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아르페의 생각과는 달리, 인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세릴의 목소리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 [주인께서 곧 왕국이니, 주인이 죽으면 왕국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마나가 한 톨이라도 남은 인어라면 모두 그분을 따르라!] [공주님, 아니 여왕폐하······.] [여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불만을 품은 이도 있으리라. 불안해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인어들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순순히 여왕의 명을 따라 아르페 일행에게 제 목숨을 맡겼다. 그것을 확인한 메테르의 녹색 눈이 반짝였다. “가능해!” “아직 강화도 하지 않은 스킬로 그 정도······ 좋아, 그럼 바로 가자! 마나 되는 대로 다 나한테 쏟아 부어!” 아르페는 자신과 메테르 사이에 마나 링크를 발동했다. 메테르는 레코드 디바이드로 주위 인어들로부터 마나를 끌어 모으는 데에만 집중하고, 아르페는 그 마나를 자신에게로 끌어와 마법을 발동하는 것! “시에나, 네 마나도 필요해. 나누어줄 수 있을까?” “응, 오빠. 저 놈 잡고 레벨이 오를 걸 가늠해서 죽기 직전까지 짜내볼게!” “우리 시에나가 너무 강하게 자랐구나······.” 마음이 짠해왔지만 그렇다고 마나를 받지 않을 수도 없다. 아르페는 이를 악물고 품에서 데마이트의 원석을 꺼내어 들었다. 그동안 중요할 때마다 활약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원석에 불과한 녀석. 아마 이번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그때부턴 아르페가 직접 가공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번 전투만 참아줘, 이제 곧 네 진짜 모습을 드러내줄 테니까······!” 인어들로부터 메테르를 거쳐 자신에게 쏟아지는 마나를 모조리 데마이트에 집중했다. 그와 함께 대마법의 영창을 개시했다.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온 신비, 원시 창조의 요람이여. 그대의 품 안에 잠겨 그대의 손을 이끌고자 하니 내게 응하라. 순수를 더럽히는 종자를 씻어내 신비를 유지하라.” 그의 말이 한 마디 이어질 때마다 데마이트가 눈부신 보랏빛을 토해내며 마나를 증폭시켰다. 이 일대에 그의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대마법의 영역이 설정되어 증폭된 마나로 진을 설계했다. 진이 확장되고, 영역을 확정하고, 그것만으로 압력이 되어 들썩거리는 일대를 억눌렀다. “내가 그대의 대리자가 될 터, 그대의 힘을 내게 맡겨라. 발아하는 생명의 힘이여, 지금 이 순간 반전하여 적을 멸하는 죽음의 철퇴가 되어라.” “어떻게 해, 너무 멋져······!” 아르페가 대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처음 보는 메테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아르페는 그저 쓴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는 이 마법의 결과물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쿠구오오오오오오오오!] 아르페의 마법이 완성되어 갈수록 위기감을 느낀 크라켄의 폭주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더니 기어이 대지 일부분이 무너져 내려, 그 사이로 물줄기 하나가 솟구쳐 아르페를 노렸다! “어딜!” 마법을 영창하는 아르페와 레코드 디바이드를 구사하는 메테르를 대신해, 이번엔 시에나가 전면에 나섰다. 망치에 진동의 힘을 집중해 쇄도해오는 물줄기를 거세게 내려치자 굉음과 함께 그것이 무력화되었다. 어떻게든 놈의 공격은 막을 수 있었지만 놈이 물줄기를 쏘아낸 것은 비단 공격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직후 여러 개의 물줄기가 솟구쳐 지면을 완전히 무너트리고는 그 안에서 터무니없이 거대한 크라켄의 다리 하나가 튀어나온 것이다! [쿠아아아아아아!] [놈의 다리가 빠져나온다!] [이, 인간! 우리의 마나를 가져갔으니 뭔가 보여줘, 보여주세요!] 생명이 위험해지자 비로소 인어들로부터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아르페는 흥, 웃으며 주문의 절정을 입에 담았다. 인어들로부터 빼앗아 온 마나, 마지막으로 시에나 특유의 마를 부정하는 마나를 한 데 섞어 데마이트에 밀어 넣고,다시금 그것을 마법진의 핵심에 배치한다! “바다여, 그대의 분노를 보여라! 더러움을 모두 씻어내 순수를 증명하라!” 마법의 발동을 앞두고 그의 품에서 꺼내든 것은 레벨 267 크라켄의 마석. 이 마석을 보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눈물 나게 안타까웠지만, 저 빌어먹을 놈을 완벽하게 끝장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아르페는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전직 사천왕 최약체니까! “빌어먹을······ 아래로 흘려라, 갓 플러쉬!” 아르페는 크라켄이 토해낸 마석을 있는 힘껏 부수어 그 마력으로 마법진을 최대로 활성화하며 주문의 마지막을 입에 담았다. 갓 플러쉬는 마석의 주인이었던 크라켄이 남긴 대마법이다. 더욱이 그것으로 공격하는 대상 또한 크라켄이니 실로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웃기지 않았다. [쿠우!? 쿠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막 수중으로 해방되어 타겟을 확보하려던 놈의 거대한 촉수가 일순, 수중에 정지했다. 기이한 고요가 전장에 찾아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압도적인 양의 마나가 마법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에 쓰였는데, 정작 그 결과가 침묵이라니. “아르페, 방금 무슨······.” “메테르, 나 좀 잡아줘.” 메테르의 질문을 씹어버리고 아르페가 당당하게 말했다. “응!” “나두!” [먀먀아아아아앗!] 스킨십과 관련된 부탁이라면 결코 거절하지도 반문하지도 않는 메테르가 그 말을듣자마자 덥석 그를 껴안았다. 시에나도 질세라 아르페를 껴안았고, 그 사이에 끼인로아만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직후 바닷물이 꿀렁였다. “시작된다.” 아르페는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무엇이 시작되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곧 조금 전의 침묵이 거짓말로 느껴지게 하는 격류가 일대를 덮쳤기 때문이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르페에에에에에에에!” [먀아아아아아앗!] 그것은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바다 중심부에서 일어난 소용돌이는 바다를 이루는모든 것을 끌어들여 만들어낸 소용돌이를 보다 깊숙한 곳, 해저로 끌고 내려갔다. 일행은 나선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그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당연하지만 그 종착점에는 크라켄이 있었다. [카하! 크하아아악! 키에에에에!] 거대한 소용돌이는 바닷물을 이끌고 놈을 뒤덮었던 어마어마한 무게의 돌덩이와 신전 파편까지 전부 아작을 내 놈을 밑바닥에서 꺼내주었지만, 다음 순간에는 그렇게 아작을 낸 파편 덩어리를 모두 이끌고 무시무시한 회전을 일으켜 놈의 몸에 어마어마한 상처를 입혔다! [이, 이럴 수가. 해신이 분노했다!] [이, 인간이 아니었어. 그는 바다의 신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강림한 바다의신!] 거대한 소용돌이로 크라켄을 징벌하는 아르페의 모습에 인어들은 그가 바다를 부리는 해신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도 지금 그는 신이라 부르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일을 행했으니! [꾸아아아아아아아!] “역시 좋은 마석을 쓰니까 1레벨 스펠도 저렇게 나오는구나······ 젠장!” “꺄아아아아아아!” “너 지금 은근슬쩍 내 볼에, 으갸아아악!” 지금 메테르는 볼 정도가 아니라 소용돌이에 못 이기는 척 그의 얼굴에 마구 입술을 들이대는 것 같았다. 안 좋은 것은 금세 배우는 시에나까지도 그녀에게 합세했다! 그러나 지금 아르페는 자신이 발현한 대마법 갓 플러쉬에 같이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일행에게 매달려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인과응보란 이런 것인가, 아르페는 용사와 전투 사제의 스킨십에 온몸을 내어주며 나지막이 탄식했다. [키히이이익! 키하아아아아!] 크라켄의 비명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놈의 전신을 강타하며 바다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수압에 시에나의 신성력이 겹쳤고, 소용돌이에 완파된 신전의 파편들은 하나하나 치명적인 가시가 되어 놈의 전신을 난자했다. 푸르른 바다 속으로 놈의 시커먼 피가 꿀렁거리며 퍼져나가 바다 전체를 검은색으로 물들였다. 아르페는 로아에게 저것도 모두 흡수하도록 지시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오래 버텼을까? 수중에서 시작된 소용돌이가 에인션트 크라켄을 이끌고 완전히 바다 밑바닥을 향해 질주하자 자연히 그들도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더 이상은 크라켄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고, 촉수도 보이지 않았다. 놈은 완전히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 버린 것이다. 메테르는 그제야 만족한 듯 품에서 아르페를 놓아주며 그에게 물었다. “아르페, 저놈 저러고도 안 죽으면 어떻게 해?”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답변해주었다. “저놈은 무조건 죽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6 > 지금 이 순간, 바다에 살고 있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바로 방금 어마무시한 소용돌이에 의해 해저로 끌려가버린 크라켄의 괴성이 아직까지 그들의 고막을 두드리는듯 했으니까. 그들은 그 끔찍한 괴물을 정말 죽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촉수만 보았던 인어들도 그러할진대 놈의 진체를 확인했던 아르페 일행이라고 다를까. 아르페가 확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수면을 살피며 자신의 무기를 꼭 쥐었다. “······.” [······.] “······.” [······.]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오랫동안 기다려도 크라켄이 다시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다가, 이어지다가, 끝내 아르페 일행에 의해 끊어졌다. “으그아아아아아아.” “맞다, 레벨 업! 머리 아파아아아!” “큭!” 에인션트 크라켄의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고 경험치가 일행에게 나뉘어 들어온 것이다! 에인션트 크라켄이 죽었다는 증거로 이것보다 확실한 것도 없었다. 문제는 레벨 291에 이른 에인션트 크라켄의 경험치를 나누어받은 셋이 나란히 수중에서 춤을 추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흐그극, 아르페! 우린 왜 매번 이렇게 레벨 업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는 거야!?” “그건 우리가 매번 지랄같이 레벨이 높은 놈들만 상대하느라 그런 거야! 보통은 마······ 인생에서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일이거든!” “히잉, 오빠아아아!” 춤을 추는 과정에서 메테르의 레벨은 261로, 아르페는 그녀보다 조금 더 경험치를 얻어 263으로, 그들 못지않게 활약을 했던 시에나 역시 247까지 레벨이 수직상승했다. 스킬의 성장도 마찬가지. 특히 대마법인지라 자주 쓸 기회가 없는 갓 플러쉬도 크라켄에게 마무리 일격을 먹인 것이 좋게 작용했는지 단숨에 5레벨까지 성장했다. 물론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양대 산맥인 레벨과 스킬이 한꺼번에 성장한 결과 아르페는 더욱 큰 두통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 정도는 사소한 문제······ 아니, 역시 제법 짜증난다. “으그그극, 아파······!” [이, 인간들을 조심해라. 놈들의 상태가 이상해!] 혹시 광화의 저주에라도 걸린 것인가 인어들이 경계했으나 물론 그들이 인어들을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얼마 걸리지 않아 인어들도 그들을 따라 몸을 뒤트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니, 잠깐. 그런데 내 몸이······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크학!?] [으아아아아아악!] [아프다! 머리가 너무나 아파!] 에인션트 크라켄에게 직접적인 상해를 조금도 입히지 못한 인어들이 성장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메테르가 그들의 마나를 레코드 디바이드로 끌어온 만큼 그들에게 에인션트 크라켄을 처치하는 데 공헌한 셈이 되어, 에인션트 크라켄의 막대한 기록에서 극히 일부가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내 몸이······ 내 비늘이!] [죽는다! 죽어!] 비록 아르페 일행이 얻은 것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지분이기는 했으나 평균레벨 백에 못 미치는 인어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인 양이었고, 곧 이곳저곳에서 10레벨 이상씩 성장을 하는 인어들이 쏟아졌다. 더욱이 개중에는 업적을 조금 과도하게 인정받아 상위 개체로 진화하는 녀석까지있었다! [주, 주인님! 제 몸이······ 이상합니다! 크학!?] 그런데 하필이면 그 와중에 진화 방향을 잘못 잡은 녀석이 있었으니, 바로 아르페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다짐한 인어의 여왕 세릴 아나이드였다. [큭······ 크아아아악!] 다들 경사스러운 가운데 세릴 혼자서만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르페는 고막이 째질 듯한 비명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은 급변하고 말았다. 차라리 엄살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들 경사로운 와중에 그녀 혼자만 재앙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넌 또 왜······ 이런, 망할!?] 에인션트 크라켄이 갓 플러쉬에 당해 바닷물 중으로 쏟아낸 놈의 저주 가득한 피가, 지금 전신으로 빛을 발하는 세릴의 몸으로 전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육신과 정신이, 영혼과 마력이 마의 인자에 물들어 나아가선 안 될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구나, 세릴은 인어 중 유일하게 마족화 저주를 받아들여 버틴 케이스였지······! 어쩌면 그녀의 선조 중 에인션트 머메이드가 있었을지도 몰라, 젠장!’ 아르페는 자신을 덮쳐오는 성장의 고통에 머리를 움켜쥐면서도 다급히 세릴을 향해 다가갔다. 로아 또한 잽싸게 입을 벌려 크라켄으로부터 빠져나온 피를 모두 끌어당겼지만 이미 대부분의 피가 세릴에게로 흘러들어간 상태! “로아, 이렇게 된 이상 그녀의 몸으로 흘러들어간 인자를 직접 빼내는 수밖에 없어.” [먀아, 먀먀아!] [큭, 끄으으아아아악!] 과거 한 번 마족화 저주를 받아들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지금 세릴의 변이가이루어지는 속도는 눈으로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원래 인어였으니, 그녀에게서 마의 인자만 빼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죽지는 않을 터! “나, 나두 도울게!” “고마워, 지금 당장 달라붙어!” 한꺼번에 레벨 업이 겹쳐 인상을 잔뜩 쓰면서도 시에나가 그를 따라왔다. 아르페는 일단 로아에게는 세릴의 몸에서 마의 인자를 빼낼 것을, 시에나에게는 그녀의 마나를 세릴에게 불어넣을 것을 지시하며 자신 또한 직접 마나를 조종해 세릴의 육신을 뒤덮었다. [끄그르으으으, 주, 주인님.] [그러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너도 팔자 한 번 더럽다.] [하지만 두 달이 넘도록 나오지 않으시니 걱정이 되어······ 크학!] 괜히 따라와서 이 꼴이 난 것도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들이 없었으면 갓 플러쉬를 발현하는 데에도 지장이 있었을 테니 뭐라고 혼을 낼 수도 없다.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내부를 관조했다. 과거 시에나라는 성공사례가 있었다고 해서 만만히 볼 수도 없는 것이, 인어인 세릴의 마나 구조는 인간과 판이하게 달랐을 뿐더러 그녀의 몸을 뒤덮은 마의 인자도 순수한 마족의 그것과는 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마족들이 이 신전을 노렸던 것도 이해가 가네, 빌어먹을······.’ 세릴의 전신을 뒤엎은 마의 인자는 어떻게 된 것이 마족의 마나보다도 더욱 지독했고, 더욱 순수했다. 새로운, 합당한 자격을 지닌 주인을 찾아낸 마의 인자는 그녀의 육신과 마력을 보다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대가로 그녀의 정신을 순수한 악으로 물들이려 들었고, 로아가 입을 벌려 빨아들이는 데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크하악, 주, 주인님!] [참아.] 에인션트 머메이드의 마나 구조도, 에인션트 크라켄의 마나 구조도 이미 익히 파악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더 있어야 할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아르페는 이내 자신이 또 다른 힌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도서!’ 그는 다급히 품에서 마족 티에나를 죽이고 얻은 마도서를 꺼내어 펼쳤다. 검은 가죽 장정의 그 마도서는 자체적으로 품고 있는 마력이 워낙에 굉장하여 수압에도 변형되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악!] 마도서가 밖으로 나온 순간 세릴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던 마나가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왜 아니겠는가? 비록 원인과 과정은 다르다지만 지금 세릴은 마도서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 이대로 놔두면 둘이 서로 공명하여 세릴을 보다 강력한 개체로 거듭나게 해줄 것이다. 물론 아르페는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책 주제에 자기주장하지 마, 네놈의 주인은 나다!” 아르페는 마도서를 탐독하며 그것에 서술된 것과 일부러 정반대의 방식으로 마나를 조종했다. 그의 보랏빛 마나가 마도서의 검은 마나와 충돌을 일으켰다. 마도서의 기록과 집념은 실로 대단하여 새로운 주인의 성향을 납득하지 못하고 격렬히 저항했으나, 아르페는 에인션트 크라켄을 잡고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룬 상황. 놀랍게도 검은 마나가 더 이상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하아아아!] [의식 놓지 말고 버텨, 버텨봐! 너까지 죽으면 이 왕국은 그대로 끝장이야!] 아르페는 이전 시에나에게 그러했듯 세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필사적으로 마도서를 붙잡고 마나를 조종했다. 에인션트 머메이드도, 에인션트 크라켄도, 물론 마족도 아닌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인어의 마나 구조······ 인어의 마나 구조가 어땠더라. 제길, 알고는 있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 시에나 때보다 훨씬 더 힘들어!’ [먀아아아아!] “큭, 바뀌면 안 돼!” 로아와 시에나 역시 아르페의 곁에서 필사적으로 투쟁했다. 어떻게든 마의 인자를 조금이라도 더 빨아내고, 어떻게든 그것을 지워 없애며 세릴의 육신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있어주었기에 그나마 세릴의 변이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큭, 크흐아아아!] [이익, 빌어먹을······ 인어의 여왕이라면서! 야 임마!] [크학!] 사실 상황은 시에나의 변이 때보다는 훨씬 긍정적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세릴의 정신력이 시에나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뿐이다. 그녀가 의식의 끈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더라면 과거 시에나가 그러했듯 아르페의마나의 인도를 따라 어떻게든 자신 내부의 마나를 이끌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릴은 자신의 정신과 육체의 근본이 뒤바뀌는 충격에 완전히 의식을 놓아버린 상황이었다. 시에나가 얼마나 대단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알게 되기는 했으나 지금은 그보다도 세릴이! [끄흐으으으윽!] [이 바보가······ 인어의 맹세에 흠집을 내지 말라더니, 지금 네 스스로 그 맹세를 망가트리고 있잖아!] [······학!?] 그러나 아르페가 되는 대로 말을 마구 주워섬긴 한 순간, 놀랍게도 세릴이 눈을 번쩍 뜨며 제정신을 차렸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기쁘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그놈의 맹세가 뭐라고!’ [주인님, 주인님께 폐를 끼칠 수는······!] 정신을 차린 세릴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나를 붙잡았다. 주인의 뜻을 무시하고 마구 폭주하며 그녀의 몸을 변화시키던 마나에 일시 스톱이 걸리고, 기회를 포착한 아르페의 마나가 녀석들을 붙잡아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물론 그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오답임에 확실한 길을 전부 다 내버리니 한 줄기밖에는 남지 않았다! [주인, 님······!] [입 다물고 따라와! ······됐다!] 세릴의 몸속에서 마나의 흐름을 빼앗으려는 주도권 경쟁, 그 최후의 승자는 아르페였다. 검은 마도서는 이제 아르페의 뜻에 따라 완전히 보랏빛으로 물든 마나를 뿜어냈고, 그 마나의 인도에 따라 세릴의 신체 내부의 마나 구조도 아주 조금씩, 서서히 아르페의 뜻에 따라 변형되기 시작했다. “오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축복!” “알겠어!” [먀아아앗!] 로아와 시에나 또한 마지막 스퍼트를 내어 세릴의 몸 속 마의 인자를 뽑아냈다. 아르페는 불순물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내며 그녀의 마나만으로 회로를 가득 채우고, 자신의 마나를 서서히 거두었다. 세릴 또한 그의 의지를 파악해 필사적으로 정신과 육체를 일치시켰다. [후우······ 하아아아아!] 세릴이 자신의 몸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마의 인자까지 모두 바깥으로 뱉어낸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육신이 아까와는 다른 찬란한 빛을 토해냈다. [아아, 아아아아아!] “성공인 것 같기는 한데······ 다들 대기.” “응. 제발······!” [먀아아아아.] 아르페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빛이 서서히 걷히고 세릴의 모습이 천천히 바깥으로 드러나면서, 그녀의 정보가 만물열람에 완벽히 해석되는 것을 보고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야, 또 이거야!?’ [세릴 아나이드] [제네시스 머메이드] [머메이드 퀸] [레벨 ? 139] 대체 새로이 탄생하는 녀석들의 종족명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거야! 아르페는 폭소를 참으려 애쓰며 뒤로 물러섰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것 마냥 세릴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주인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왕국의 백성들이여······.] 크나큰 고통 끝에 올바른 방향을 찾아 진화한 그녀는 이전보다 한층 성숙하고 깊어진 물빛의 눈동자로 주위를 훑었다. 그녀가 모두를 보고 있듯이 모두가 그녀를 마주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럴 수가······ 왕국의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인어가 이곳에서!] [여, 여왕이시여······!] 세릴의 모습을 알아본 인어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물고기들에게는 에인션트 머메이드말고 제대로 된 선조가 있었나보지, 하고 아르페는 대충 결론을 내리며 돌아섰다. 사실 세릴이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되건 카오스 머메이드가 되건, 에인션트 머메이드 같은 꼴이 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일행의 레벨 업도 끝나고, 인어들의 레벨 업도 끝나고, 세릴의 진화도 다행히 별 탈 없이 이루어진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에인션트 크라켄의 루팅이었다.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6 > 끝 ⓒ 토이카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7 > 용사 일행은 나란히 서서는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해저의 돌무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해치운 에인션트 크라켄의 사체가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래, 그 안 깊숙한 곳에. 메테르가 입을 열었다. “아르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그 손은 뭐야. 너 요즘은 뭔가를 묻기 전에 날 붙잡을 준비부터 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그럴 리가.” 메테르는 은근슬쩍 그에게 뻗어오던 손을 싹 거두어들이며 물었다. “바다 깊숙이 묻힌 크라켄을 어떻게 꺼내서 루팅한다는 거야?” “다시 한 번 대마법을 쓸 생각이야. ······너 왜 실망하냐?” “피, 아르페 미워.” 아르페가 언제나 대답에 뜸을 들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아르페를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노려오기 시작하는 메테르를 상대로 쉽게 빌미를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14살이면 사춘기인가. 예전엔 분명 손을 잡아준 것만으로 하루 종일 방실거렸던 것 같은데······.’ 점점 더 바라는 것이 많아지더니, 미케나와 에트나 같은 다른 여자들이 아르페 주위에 나타나 얼쩡대기 시작하자 많이 초조해졌는지 급기야는 도장을 찍고 싶어 하기에 이르렀다. 아르페는 이 이상 인생을 귀찮게 만들 생각이 없었지만, 잘 하다간 이대로 그냥······.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헛!?’ 아르페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만 자신의 머리를 망치로 으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급히 돌아섰다. 크라켄이 어디 묻혀있는지는 확정할 수 있었으니 이젠 마법을 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너희는 먼저 돌아가라.] [주인님의 일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이 안에 묻혀 있던 에인션트 크라켄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면, 그 마의 인자가 다시 너희를 덮칠 거야. 다른 인어들이 너처럼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오히려 그쪽을 더욱 바라는 바입니다.] 세릴이 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까는 미처 알지 못했는데, 그녀를 감싼 빛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은 그녀의 이마에 보랏빛을 발하는 자그마한 보석과 같은 결정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녀를 한층 더 신비로운 분위기로 꾸며주었다. [저것은 그릇되었으나 분명 태초의 기운입니다. 주인님께서 만약 저 마귀의 기운을 제게 나누어주신다면, 제가 그것을 바로잡아 저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제게 알려주신 길을, 제가 저의 백성들에게도 알려주겠습니다.] [······.] 세릴이 뚜렷한 의지와 확신을 담아 선언한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이마의 보석이 짙은 빛을 발했다. 그와 함께 아르페의 눈에 비치는 정보가 갱신되었다. [세릴 아나이드] [제네시스 머메이드] [머메이드 퀸] [레벨 ? 139] [고유능력 ? 동족통솔] “하.” 설마 인어가 고유능력을 각성하는 순간을 보게 될 날이 오다니, 환생을 괜히 한 것만은 아니었구나. 아르페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광경 앞에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고유능력은 단순히 강하다 해서 각성할 수 있는 능력도, 현명하다 해서 각성할 수있는 능력도, 핏줄을 잘 타고났다고 해서 각성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재능과, 경험과, 운과 기록이 모두 조화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발현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더욱이 동족통솔이라? 만약 인간에게서 나타났더라면 그 인간에 의한 통일제국의 역사가 새로 쓰였을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능력이지 않은가. 아르페는 또다시 자신이 일을 저질렀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이번 사태는 시에나를 구했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사태로 발전할 지도 몰랐다. ‘만약 이 녀석이 순조로이 다른 인어들을 성장시킨다면······. 이거, 인어라고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 재밌어졌는데.’ 그래, 마왕군 측에도 변수가 나타났는데 이쪽에도 이런 변수가 하나둘 있어서 나쁠 것 없지. 그는 제법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첫 번째 권속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어디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 봐. 대신 에인션트 머메이드처럼 괴상하게 변하는 놈이 있거든 내가 직접 끝장내줄 줄 알아.] [주인님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이, 그땐 제가 직접 그들을 죽이겠습니다.] [말은 잘 해요.]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크라켄이 묻힌 곳을 향해 돌아섰다. 역할을 다 한 마도서를 접어 품에 넣고, 데마이트의 원석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한 손을 들어 조금 전과 똑같이 마법진을 지정할 뿐이었다. 그것을 본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빠, 아깐 마나 엄청 끌어 모았었는데······ 아무리 레벨 업을 해서 회복했다지만 그걸로 되는 거야? 내 마나라도 빌려줄까?” 그러나 시에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식 웃으며 일대를 가리켜 보일 뿐이었다. 그곳에는 크라켄을 끝장낼 때 가동되었던 대마법, 갓 플러쉬의 마법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물론 아르페와 시에나처럼 마나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마법진으로 가동하는 모든 마법에는 장점이 있어. 특별히 마나 간섭을 받지 않는 한, 한 번 마법을 펼쳤던 장소에서 똑같이 마법을 시전할 땐 소모되는 마나가 이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는 거지.” “그렇구나······ 그럼 적이 마법진을 만들어냈던 장소는 조심해야겠네?” “아니, 네가 그 특별한 마나 간섭을 만들어내서 마법진을 지워버리면 돼. 자세한 방법은 나중에 가르쳐줄게.” “응!” 사실 메테르는 이미 과거 본능적으로 그 방법을 깨닫고 자신 주위에서 마법이 발동되지 않도록 일대 마나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었지만, 시에나에게 그 정도의 천재성은 바라지 않았다. 용사가 두 명이어도 곤란할 뿐이니까. “그러면······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온 신비, 원시 창조의 요람이여.” 짧은 마법 수업을 마친 아르페는 곧장 마법의 영창을 개시했다. 크라켄을 상대하며 외웠던 주문과 완벽히 동일한 주문! 메테르가 뒤늦게 태클을 걸었다. “잠깐만, 또 소용돌이를 만들어내서 일대를 묻어버리면 사체를 더욱 끌어내기 힘들어지는 것 아냐!?” “아니, 이 마법에는 발동 패턴이 두 가지가 있거든.” 첫째는 아래로 흘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는 무엇일까. 메테르도 이 질문에는 어렵지 않게 답을 냈다. “위로 솟구치게 하는 것······?” “바로 그거야! 역류해라, 갓 플러쉬!” 마법진이 일순 찬란한 빛을 토해냈다. 다음 순간, 이전과 같은 침묵이 일행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미 이 마법을 한 차례 겪어본 일행은 이것이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메테르와 시에나가 그에게 덥석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것이 찾아왔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솟구친다! 돌덩이 솟구친다!” 바다 밑바닥, 그 더 안쪽의 물이 끓어오르며 솟구치니 그에 영향을 받은 돌무더기도 가루가 되어 일대를 뒤덮었다. 당연히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던 아르페는 미리 준비해둔 방어막으로 일행을 보호했다. 이번 갓 플러쉬는 크라켄의 사체를 꺼낸다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것이니 마나를 굳이 많이 투자할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방어막을 다룰 여유도 넘쳐났던 것. [나, 나온다.] [거대해······ 저것은 너무나 거대하구나.] [끔찍해, 정말로 저게 사체란 말이야? 정말 죽은 거야?] 솟구치는 물과 돌 더미에 섞여 크라켄의 사체도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마에서 비롯되어 각종 신성력에 한껏 두들겨 맞은 데다 한 번 쓸려갔다가 다시 역류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으니 말할 것도 없이 놈의 사체는 너덜너덜, 심지어는 염옥 파수꾼에 두들겨 맞아 죽은 크라켄보다도 상태가 더 심각했다.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어서 그런가. 우와,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렸네.” “그럼 이걸로는 뭘 할 수 있어, 아르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아르페의 말에 메테르의 눈이 사정없이 반짝였다. “먹을 수 있어!?” “그래.” 아르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녀에게 답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평범한 문어를 못 먹는 몸으로 만들어주지.” “이거 우리끼리 다 먹으려면 백만 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먀아아아아.] 아르페 일행이 진지하게 여행 중 식사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무렵, 세릴은 인어들을 한 데에 모아놓고 그중 자질과 자격을 갖춘 이들을 선정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전에서 진화를 이룩한 인어들에게 고하니, 백성들이여. 우리의 태초의 형태로 돌아갈 준비는 되었는가?] [여왕님······ 얼마든지!] [폐하께서 먼저 걸으신 길을 기꺼이 따라 걷겠습니다!] 인원은 금세 추려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인어들을 전부 물리고는 한 손을 뻗어 에인션트 크라켄의 전신으로부터 흘러나와 바닷물로 퍼져가는 마기를자신 쪽으로 전부 끌어왔다. 탐식의 마수인 로아도 아니면서 저렇게 마기를 조종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동족통솔이라는 고유능력 말고도 제네시스 머메이드라는 종족 자체에서 오는 권능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통 끝에 회귀가 기다린다. 우리는 오래도록 되찾지 못했던 모습으로, 본래 있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간다. 나의 주인님께서 되살려주신 기록, 그것을 이어 쓰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끄아아아아아!] [크하아악!] 마기가 그들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가자 조금 전의 세릴이 그러했듯 인어들도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세릴은 이마의 보석을 한껏 빛내며 그들몸속에 자리 잡은 마기를 자유롭게 부렸다. [태초의 기운이여, 내게 복종하며 저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라!] 물론 저쪽에서 새로운 신화의 시작이 쓰이고 있건 말건 아르페는 본격적인 에인션트 크라켄의 루팅에 착수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분질러낸 제단을 어디 적당한 데에 박아넣는 것이었다. “크라켄도, 신전 파편도 모두 모여 있어. 좋아, 가랏!” “앗, 그거 이전에 선배님 던전에서!” “알아차리는게 늦어.” 원래 제단은 신전을 구성하고 있던 마나와 기록을 전부 빨아들여 제단 위의 스킬,스펠 북에 나누어 부여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아르페가 제단을 먼저 분질러버렸으니 자칫하다간 제단의 의미를 상실해, 스킬, 스펠 북을 못 써먹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 선배님이 다루는 마법의 마나 패턴은 다 숙지했다 이거지. 역순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아무 문제 없다 이 말씀이야······!” “제단으로 마나가 집중되는 게 느껴져······. 그래, 그래서 신전이 무너졌던 거구나?” 아르페는 메테르의 말에 대꾸없이 씩 웃으며 제단에 양손을 가져다대고 집중했다. 그러자 신전 붕괴의 순간 주인을 찾지 못해 폭주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마나가 아르페의 인도에 따라 제단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전의 파편에서도, 크라켄의 사체에서도 각기 마나와 기록이 빨려나와 스킬 북과 스펠 북에 흡수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 주위로부터 마나를 끌어당긴 것일까? 주위 모든 사물의빛이 아주 조금씩 바래는 대가로 스킬 북과 스펠 북에서는 뚜렷한 광채가 일었다. 비록 크라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조금 줄어들기는 하겠으나 스킬의 강화에 비하면 그 정도 대가는 가벼웠다. “됐다. 메테르, 쥐어.” “왠지 아르페가 나한테 밥을 떠먹여주는 기분이야······ 반대였으면 좋았는데.” 스킬 북은 메테르의 레코드 디바이드를, 스펠 북은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을 강화해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도 사기적이었던 주력 스펠의 강화에 설레어하며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든 스펠 북으로 인한 변화를 기다렸으나······ 어째선지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어라, 실패했나.” “괜찮아, 아르페. 여태까지 쭉 성공만 해왔으니까 한 번쯤 실패해도 돼.” “위로해주는 건 고맙다만 이게 실패할 리가······ 어라?” 만물열람으로 확인해본 바로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변수가 너무 많다 보니 중간에 뭐가 잘못되었어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든 상황. 아르페는 더할 나위 없이 찝찝했지만 메테르가 개의치 않아했으므로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빌어먹을······ 선배놈, 언젠가 반드시 복수해주마.” “아마 그 선배님도 제단이 중간에 뽑혔을 상황은 고려하지 못하셨을 것 같은데······.” 이를 닦지 않은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으로, 일단 용도를 다한 제단을 부숴버리곤이어서 크라켄의 루팅에 들어가는 아르페. 우습게도 튀어나온 전리품의 개수는 딱 네 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유독 아르페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레벨 291 보스 몬스터의 마석······.” 267레벨 몬스터의 마석을 소모했으니 이걸로 마음을 달래라는 것인가. 어째 제로섬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어쨌든 이쪽의 레벨이 훨씬 더높으니, 보다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으리라. 이것으로는 반드시 아티팩트를 강화하리라 다짐하며 아르페는 그것을 품에 꼭꼭 챙겨 넣었다. 그리고 남은 것들을 살피니 검은 금속의 바스타드 소드가 하나, 마찬가지로 검은 투구가 하나, 어마어마하게 거대하며 표면이 우툴두툴해 기분이 나쁜 타워 실드가 하나였다. “기껏 강한 몬스터를 사냥했는데 아르페가 쓸 만한 게 없네.” 어째선지 메테르가 풀이 죽었지만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전위가 든든해지는 쪽이 전투의 승률이 높아지니까 신경 쓰지 마. 이제 너도 바스타드 소드를 바꿀 수 있겠네.” 때와 상황에 따라 바스타드 소드와 롱 소드를 번갈아 쓰던 그녀이지만, 사실 바스타드 소드 쪽은 그녀가 열두 살일 때부터 휘두르던 녀석이다. 제아무리 강화를 거듭했다지만 기본적인 성능의 한계는 어쩔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터무니없이 든든한 녀석을 얻게 된 것이다. “응. 이 검으로 아르페를 지킬 거야.” “그러면 나는 이 투구랑 방패 써야 해?” “조금 답답하겠지만 네 안전을 위해선 그게 좋아. 네 미모를 보고 덤벼드는 남자도 줄겠지.” “오빠, 그렇게 말하면 부끄러워.” 얌전히 볼을 붉히며 좋아하는 시에나. 메테르도 예전엔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둬야 할 게 있어.” 아르페는 에인션트 크라켄의 마기라는 탐스러운 먹잇감을 놓치고 그의 품 안에서얌전히 이를 갈고 있던 로아를 꺼내어 놓으며 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아티팩트에 있는 저주 싹 다 빨아들여. 누가 성질 더러운 놈 아니랄까봐 죽은 후에도 함정을 설치해놓네.” [먀아, 먀먀아먀.] 일단 이걸로 만족해줄까, 하고 새침하게 대꾸하며 로아가 입을 열었다. 모든 저주가 녀석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니 그곳에 남은 것은 순백으로 물든 아티팩트뿐이었다. “그 짙은 검은 색이 다 저주의 마나였단 말이야!?” “방패 예쁘게 변했어!” 저마다의 아티팩트를 쥐고 좋아하는 일행을 보며 아르페 역시 피식 웃었다. 그렇게 전리품 분배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세릴 역시 훌륭하게 인어들을 태초의 종족으로 이끄는데 성공했는지, 그녀와 비슷하게 성숙한 오오라를 뿜어내는 인어들이 다수 탄생한 것이 보였다. 앞으로 인어 종족이 완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지, 새로운 가능성으로 부상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만들어갈 역사의 중심에 세릴 아나이드가 서 있으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 아르페는 그 사실에 미묘한 감상을 받으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많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정말 에이디아를 향해 떠날 시간이었다. < Chapter 16. 설마 여기서 또? - 7 > 끝 ⓒ 토이카 < Chapter 17. 잘못된 만남 - 1 > [주인님, 맹세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건 주인님이십니다.] [난 그런 지시를 내린 기억이 없어. 전부 내 비서가 한 일이다.] [주인님께는 비서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주인님의 비서가 되겠습니다!]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에 드리운 암운도 깔끔하게 없애버리고, 덤으로 바다 하나에서 크라켄을 두 마리씩이나 잡는다는 그리 달성하고 싶지 않은 업적도 달성했다. 이제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에이디아로 떠나려 한 일행이었으나 유일한 걸림돌이있었으니 바로 소동이 모두 정리되어 모두의 지지를 얻어 여왕으로 등극한 제네시스 머메이드 퀸, 세릴 아나이드였다. [주인님께 입은 은혜가 이루 말할 바 없이 크니, 절대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주인님은 제 목숨을 구해주셨을 뿐더러 인어의 잊힌 영광을 되살려주셨고, 저를 이끌어주셨으니······ 그러니 이젠 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인님을 따를 차례입니다!] [저 인어들은? 네가 기껏 저들을 새로이 거듭나게 했잖아?] 세릴의 고유능력과 크라켄의 마기를 통해 훌륭하게 제네시스 머메이드와 머맨으로 거듭난 새로운 인어 정예 부대를 가리켜 보이며 말하는 아르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세릴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흉부의 유동이 극심해 아르페의 마음까지 심란해지니 제발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이 말을 입에 담았다간 메테르한테 어떤 형벌을 받을지 모르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태초의 인어로 거듭났으니, 이제 제가 없이도 이 바다의 패권을 차지하고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주인님의 곁에서 직접 당신을 보필하겠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제 육신과 정신 모두를 바쳐!] [정신도 필요 없지만 육신은 더더욱 필요 없는데······.] 아르페의 거절에 세릴은 물빛을 발하는 큰 눈과 이마의 보랏빛 보석을 동시에 반짝이며 외쳤다. [사실은 제게 주인님이 필요합니다!] [이 자식을 그냥.] 시에나를 이블 리플렉터로 이끌었을 때에도 느낀 거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종족으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그녀들은 아르페에게 일종의 충성심과 경외를 동시에 품게되는 것 같았다. 그 증거는 바로 저 인어들에게 있다. 지금 세릴이 아르페에게 매달리듯이 그들 역시 여왕에게 매달리고 있었으니까! [안 됩니다, 여왕 폐하! 부디 우리 곁에서 이끌어주소서!] [폐하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 인간님 덕분에 우리 왕국이 평화를 되찾은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바이나, 그렇다고 해도 폐하를 인간님에게 보낼 수는!]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것이 인어의 맹세이니 어쩔 수 없다.] 아르페를 붙잡는 세릴과 세릴을 붙잡는 인어들. 상황은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메테르는 세릴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으나 강한 전력을 지닌 이가 따라붙겠다는 것을 대놓고 거절할 수도 없어 속으로만 끙끙대고 있었고, 시에나는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세릴에게 제법 호감이 있는지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 로아는 자신에게 허락된 마기를 먹어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우······ 안 돼, 세릴. 지금의 넌 우리 이상으로 사람들 눈에 띌 뿐더러, 분명 충분한 강함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와 함께 하기에는 조금 많이 부족해.] [그럴 수가······.] 세릴이 절망했다. 좋아, 효과가 있다! 아르페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우리 중 가장 레벨이 낮은 시에나의 레벨이 247이야. 너보다 100레벨 이상이 높지.] [하, 하지만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은총으로 종의 진화와 고유능력의 각성을 이루어 레벨을 초월하는 강함을 얻었습니다!] [그래, 그리고 너의 그 능력은 인어들을 지배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지. 그래서 몬스터를 상대할 땐 특별히 도움이 안 돼. 너 200레벨 몬스터 혼자서 잡을 자신 있어?] 아르페의 용서 없는 지적에 세릴이 찔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잔혹한 법이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 넌 이미 크라켄을 잡는 과정에서 내게 충분한 도움을 줬어. 남은 건 에이디아로 가는 길을 안내해줄 녀석 정도만 붙여주면 돼. 우린 인간이고 넌 인어야. 서로 갈 길이 다르니 여기서 깔끔하게 헤어지자.] [주인님, 잔인하시군요······. 반박을 못 하겠다는 부분이 더욱 분합니다.] 연달아 쏟아지는 진실 공격에 세릴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르페는 그녀를 보며 씁쓸하게 웃다가는, 이내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무엇인가요?] 세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너무 빠른 반응이어서 혹시 기다리고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너는 앞으로 이 바다의 인어뿐만이 아니라, 이 대륙, 저 대륙,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어들을 지배해. 어차피 크라켄이 죽고 마기를 모두 없앤 이상 너희가 이 영역만 고집하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 원정을 떠나란 말이야.] [원정······.] [인어뿐만이 아냐. 바다의 몬스터 중에 말 안 듣는 놈은 죽이고, 강한 놈은 떼거지로 덤벼 죽이고, 그래서 말을 듣겠다는 놈들은 휘하에 거둬. 그렇게 네가 모든 바다를 손에 넣으면, 쉽게 말해 바다의 패자가 되면 그때는 네가 바다에 있어도 따로 할 게 없어지겠지?] [그야, 매우 까마득한 일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그리고 레벨도 높아져 있겠지.] [터무니없이 까마득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도 그럴 것입니다.] 아르페는 사기꾼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그때 우리 일행에 합류하는 걸 허락해줄게.] [······모든 바다의 인어들을 흡수하고, 그뿐만 아니라 바다의 모든 몬스터들의 지배자가 되어라. 그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르페는 이쯤에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보통 그가 이런 제안을 하면 상대방은 ‘그걸 어떻게 해! 불공정거래다! 계약은 파기다!’같은 말을 지껄이겠지만 상대는맹세에 목숨을 거는 인어 세릴. 그녀라면 아마도······. [후.] 역시나. 세릴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좋습니다, 해내겠습니다. 마왕이라도 처치하고 오라는 말씀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주인님보다 레벨을 더 높여 찾아가도 구박하지만 않으신다면요.] [자신감이 충만해진 것 같아 좋구나······.] 제네시스 머메이드, 실로 무서운 종족이다. 아르페는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거대한 크라켄의 육신에 달라붙어 놈의 육신 가득한 마기를 빨아먹고 있는 검은 고양이의 살랑거리는 꼬리를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녀석이 밥 먹는데 방해하지 말라는 듯 인상을 쓰며 뒤돌았다. [먀!] “로아, 그만큼 먹었으면 만족했지?” [먀먀먀아!]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그건 이미 한 번 써먹었던 수법이잖아.” [먀아아······.] 인내 끝에 도래한 뷔페 타임을 즐기고 있었거늘 또 식사에 통제가 들어오다니! 로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아르페는 평범한 빈 포션 플라스크를 세 번 연달아 강화해 순식간에 마법시약 저장소로 만들고는 그것을 세릴에게 내밀었다. [앞으로도 쓸 일이 있겠지? 거두어가도록 해.] [영광입니다.] 세릴은 플라스크를 쥐고 에인션트 크라켄의 거체로 다가가, 놈의 몸에 남은 모든 마기를 끌어 모아 담았다. 순수하게 정제해 플라스크에 가득 담길 만큼 뽑아내고 나자 크라켄의 사체에는 마기 한 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흡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 안전한 먹거리가 되었네.” “문어는 어떻게 해먹는 게 제일 맛있을까······?” “빵에 들어가면 그렇게 맛있대, 언니.” [먀먀아. 먀먀먀먀먀먀.] 아르페는 일행이 문어 요리에 대한 2차 토론을 이어 하도록 놔두며 에인션트 크라켄의 사체를 꼼꼼히 살폈다. 이윽고 촉수의 빨판과 거기 달린 갈고리, 먹물낭을 제외한 놈의 모든 부위에 식재료 이상의 가치가 남아있지 않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린 그는 대담하게 그것을 토막 내어, 90% 이상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남은 것만을 아공간에 담았다. 10%만 챙겼음에도 앞으로 족히 10년간은 굶어죽을 걱정이 없을 양이었다. [왕국에서 난리가 났으니 식량도 부족하겠지? 독기는 네가 직접 뽑아냈으니 안심할 수 있을 테고, 이걸로 애들 밥 해라.] [주인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척 하면서 결정적인 부분에서 배려를 해주다니! 그의 말에 세릴은 퍽 감동을 받고 말았다. 사실 이걸 다 가져가서 먹을 자신이 없었던 것뿐이었지만 아르페는 그녀가 원하는 쪽으로 생각하도록 놔두었다. “할 일 진짜 다 마쳤다. 이제 가자.” “응.” “이제 새로운 일행 만나러 가는 거야?” [먀아.] [그럼 가죠.] [어딜.] 기껏 합의까지 다 끝내놓고 이제 와서 자연스럽게 일행에 묻어가려는 세릴을 제법 난폭하게 걷어내는 아르페. 그러나 세릴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꾸했다. [주인님께서는 바다를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 말씀을 들은 순간 이미 인어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제가 다스리는 이들 중에는 그야 물론 왕국 바깥으로 나가면 루나틱 웨이브에 휩쓸리고 마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가 더 많거든요. 즉, 이미 정예 부대에 의한 바다 정벌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이쪽 바다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정리될겁니다. 주인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디아스와 그 인근의 몬스터들은 사실······ 조금 많이 약하니까요.] 그건 당장 눈앞의 인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명색이 하나의 왕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종족인데, 그중 최강자가 그나마 이번에 많이 성장하고 진화해 레벨 139를 달성한 세릴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런 환경에서 크라켄이다 뭐다 이상한 괴수들을 상대하게 된 용사 파티의 운이 오지게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니 이쪽에서는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제가 있어주면 인어들의 사기가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는 몬스터뿐이니까요. 그러니 제가 직접 주인님을 모셔다 드릴 시간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 반박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아르페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세릴의 눈을 보며 차마 입을 열어 매도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안 되나요?] [끙.] 전생에서부터 이렇긴 했지만 그는 여자의 진심에 약하다. 사천왕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고치고 싶다고 다 고쳐지면 사천왕의 최약체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휴.]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바닷길 뭐 얼마나 멀겠어. 같이 가지 뭐.] [감사합니다, 주인님!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모셔다드릴 수 있습니다!] [어째 멘트가 살짝 불안한데 돈은 안 받겠지 이거······.] 그러나 그렇게 그녀의 합류를 인정하고 돌아서니 도끼눈의 메테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페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메테르가 말했다. “벌칙.” 아르페는 그녀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상쾌하게 외쳤다. “자, 가볼까!” “벌칙, 아르페가 자고 있을 때 시행할 거야. ······여태까지 그랬듯이.” “야, 잠깐만.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야, 야!” 메테르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르페는 앞으로는 잘 때 알람 마법과 각종 함정 마법을 설치하고 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인어의 도로에 내려섰다. 시에나와 로아가, 마지막으로 세릴이 그 뒤를 따랐고, 무수한 인어들이 통곡을 하며 여왕의 외출을 배웅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어쩐지 이럴 것 같기는 했지만 왜 이런 곳에서 해저 던전이 갑자기 나타나는 건데!” [이상합니다, 이것도 여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던전입니다!] “아르페, 이 던전 재밌다! 공간이 막 뒤집혀!” “오빠, 계단 또 있는데?” [먀아아아아아!] 언제나의 탈선을 거듭하며, 그로부터 세 달을 더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야 일행은 간신히 에이디아의 항구도시 벨라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을 에일 듯한 바람이 부는 늦겨울, 아르페와 메테르가 열다섯 살이 된 겨울이었다. < Chapter 17. 잘못된 만남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7. 잘못된 만남 - 2 > 에이디아는 현 대륙에서 마도공학이 가장 발달한 국가였다. 사실은 마도공학뿐만아니라 정통마법, 흑마법, 공간마법 등등의 깊은 탐구가 이루어지는······ 그래, 툭 까놓고 말해 대륙에서 마도를 논하고자 한다면 에이디아에서 시작해 에이디아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한 마도의 총본산이라고 봐야 했다. “반대로 신전의 총본산은 에이디아와 바다 두 개와 대륙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신성국가 팔라티나라고 보면 돼.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모든 신전, 그 신전에 소속된 사제와 성기사들은 근본적으로 팔라티나에 적을 두고 있지.” “그러면 디아스는 뭐로 유명해, 아르페?” “디아스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버터옥수수를 만들어내는 것뿐이야.” 그 꼬라지를 보면 모르겠니, 라고 말해주려다 참았다. 메테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조금 뚱해졌고,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곤 한 마디 보태었다. “하지만 네가 디아스에서 태어났잖아. 디아스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아우, 그렇게 갑자기.” 국력도 약하고 나타나는 몬스터도 약하고 모여드는 마나도 미약한데 어째선지 모르게 대대로 용사가 태어나는 것으로 유명한 국가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인데, 어째 전달에 어폐가 있었던 모양이다. 메테르가 실로 오랜만에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진실을 말해줄까 하다가 본인이 좋아하니 그냥 놔두자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 아르페. 그곳에는 그들과 함께 여행한 다섯 달 동안 끝내 레벨 200의 고지를 돌파한 제네시스 머메이드 퀸 세릴 아나이드의 모습이 있었다. 레벨이 빨리 오른 것이야아르페 일행과 함께한 모두가 그러니 이제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동안 고마웠어, 세릴.” 어딘가 앳된 구석이 남아있던 이전과 달리 미모가 완연히 무르익어,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눈부시도록 찬란한 빛을 뿜어내게 된 인어 세릴. 그녀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르페에게 답했다. “이곳부터는 인간의 영역이니, 더는 제가 모실 수 없겠네요.” 다섯 달 동안 일어난 변화는 비단 그녀의 외모와 레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진화를 거치며 지능이 성장한 그녀는, 특히 마나와 대륙을 이루는 모든 종족의 근본적인 이해 영역에 있어 비약적인 진보를 이뤘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언어 습득 능력이었다. 이전엔 인어의 언어로밖에 소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렇듯 인간의 언어로 자유롭게 그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무리한 거잖아. 어서 돌아가 봐.” “이제 당분간은 주인님을 곁에서 모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대체 어디서 제 삶의 위안을 얻어야 할지······.” “네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인어만 수천이 넘어가는데 무슨 그런 헛소리를.” “이런, 이게 안 통하네요.” 세릴은 장난스럽게 대꾸하고는 해변에 이는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와, 그의 뺨에 부드럽게 키스하고는 물러섰다. 충성과 애정이 동시에 담긴 스킨십이었다. “다시 모시게 될 날을 위해, 바다를 손에 넣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많이 늠름해져서 기쁘다······.” “나중에 봐, 세릴 언니.” “아르페한테 꼬리만 치지 않으면 참 좋은 인어였어. 나중에 다시 만날 땐 꼭 신랑감하고 같이 왔으면 좋겠어.” [먀아.] 일행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이별인사를 건넸다. 세릴은 모두에게 같이 푸근한 미소로 답했지만 메테르에게만은 불꽃을 튀기며 응수했다. “제가 돌아오기 전에 서두르세요. 그때는 제 상대도 되지 않으실 테니.” “······호오. 정말로 제법 용감해졌네.” 아마도 저것이 저들 나름의 작별 방식이리라. 아르페는 그렇게 납득하기로 했다. 그렇게 납득하지 않고선 위장이 쓰려 견딜 수가 없다. “그러면, 정말로 물러가겠습니다.” 부두의 끝자락에서, 세릴이 사뿐히 뒤로 뛰어 물러섰다. 그녀의 육신이 물거품이 되어 바닷물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죽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200레벨이 되어 익힌 제네시스 머메이드의 스펠 가운데 하나였다. 녀석은 저 스펠을 구사해 인간은 상상도 못하는 속도로 바다를 질주할 수 있었다.그것을 보며 아르페는 새삼 자신이 무시무시한 종족을 되살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테르는 그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르페는 정말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 거야! 왜! 왜에! 여자는 다 아르페를 좋아해, 이 세상에는 아르페 외에 남자가 없어!?” 누구보다도 아르페를 좋아하는 메테르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아르페는 적당히 그녀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너도 인기 많잖아. 무려 일국의 태자였던 시페넌도 널 좋아하는데.” “그런 거 필요 없어. 난 아르페만 있으면 되는걸······.” 열다섯 살이 되었음에도 메테르의 용사답지 않은 발언은 여전했다. 그러나 글러먹은 정신 상태와는 달리 그녀의 신체 성장만은 터무니없이 빨라서, 그녀를 본 누구든 그녀가 성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갑옷을 벗을 때마다 드러나는 가슴이라던가, 엉덩이라던가, 분명 그럴 리가없을 텐데 그녀의 고유능력이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단히 탐스······. “아르페? 왜 갑자기 가로수에 머리를 찧는 거야?” “명상 수련의 한 가지 갈래이니 신경 쓰지 마.” “치유해줄까, 오빠?” “······고마워.” 볼 때마다 아르페의 번뇌를 자극하는 메테르와 달리 그래도 시에나만은 가까스로미성년자의 문턱에 서 있었다. 성장이 빠른 것도 몸매가 좋은 것도 매한가지였으나 메테르에 비하면 그래도 양심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볼까.” “겨울이라서 그런지 배는 하나도 없네.” “여기는 4차 방어벽까지 구성해놓나 봐, 그런데 1차랑 2차 방어벽은 완전히 부서져버렸어.” 잊기 쉽지만 지금은 아직 루나틱 웨이브의 한중간. 봄이 되어 바다에 마나가 차오르기 전까지 인간들은 항구를 개방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 이 바다는 세릴이 다스리는 인어들에 의한 정벌이 이루어지고 있어 몬스터의 공세도 줄어들었으나 인간들은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도시에 사람도 별로 없어.” “겨울은 정말 쓸쓸한 계절이구나.” [먀.] 아무리 도시에 활동인구가 없다 해도 갑자기 바다에서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야 다들 눈치를 챌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행은 해저던전에서 얻은 소모성 아티팩트 오션 젤리를 복용한 상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은신 상태였다. 오션 젤리는 해파리와 닮은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얻은 것으로 하나 먹는 것으로 수십 분에 달하는 은신 상태를 적용받을 수 있는 보물인데, 이 소모성 아티팩트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아티팩트를 복용한 이의 마나 수준에 따라 그 은신의 완성도가달라진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도시에, 까딱하다간 나라를 통틀어도 그들을 발견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아르페와 메테르의 레벨은 280에 육박하고 있었으니까. 에인션트 크라켄을 해치우고 에이디아로 향하는 길에 오르고 다섯 달. 셰프의 전문 관리를 받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바다 속에서 설마 이렇게까지? 너까지? 이런 놈도 여기에? 라는 말이 연달아 튀어나오게 할 만큼 강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던전을 차례차례 발견한 덕에 자연히 용사 파티의 평균레벨도 제법 올라갔다. 에인션트 크라켄을 해치우고 260레벨을 넘겨버린 아르페와 메테르조차 20레벨 가까이 올랐으니 말 다 했다. “음, 역시 이대로 마계로 돌격해도 될 것 같긴 한데······.” “그러자!” “힉.” [먀! 먀먀먀아!] 아르페는 제법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메테르가 그 말을 듣곤 눈을 반짝이며 그러자고 외쳤고, 시에나는 살짝 겁을 먹고는 아르페에게 달라붙었다. 가장 열렬히 환영한 것은 로아였다. 마계는 녀석이 환장할 저주와 마기로 가득할 테니 말이다. “아니, 그래도 조금 부족하지. 역시 예정대로 가자, 예정대로.” [먀아······.] “아르페는 너무 신중해. 그런 모습도 멋지지만.” “넌 여태까지 목숨의 위기를 너무 쉽게 헤쳐 나와서 그런지 위기감이 부족해. 아무리 안 죽을 것 같아도, 인간은 앗 하는 순간 죽어버린단 말이야. 아니, 정확히는 모든 존재가 그래.” “아······.” 아르페가 가볍게 던진 말에 어째선지 메테르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아르페는 빠르게도 성숙해진 외모 탓에 입만 다물고 있으면 문득문득전생의 용사를 떠올리게 하는 메테르의 옆얼굴을 보며 덩달아 침묵하고 말았다. 이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내가 너무 경솔했어. 아르페는 날 보호하려고 그렇게 애쓰는데 난 파티에 여자가 늘어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이대로 마계로 가자고 하다니······ 나는 바보야. 아르페는 대단하지만 그걸 믿고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이나 부렸어.” “마계로 바로 가자는 게 정말 그 이유 때문이었냐!?” “하지만 새로운 파티 멤버가 모두 여자뿐인걸······.” 메테르는 기껏 자책을 하다말고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젓고는 아르페의 팔에 매달렸다. “이제 파티 멤버 갖고 투정 안 부릴게. 아르페 맘대로 10명이든 20명이든 데려와. 내가 첫 번째라면 난 참을 수 있어.” “전부 여자는 아닌데.” “정말!?” 메테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생긴 남자면 좋겠다! 마도사를 꼬셔줄 만큼 잘생긴 남자!” “무척, 대단히 잘생겼다는 소문이 있어. 그 녀석을 순조로이 파티에 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렇게 소문이 날 정도면 진짜 유명한 사람인가보다.” “응, 뭐.” 그가 마도사 다음으로 생각하는 파티 영입 후보는 정말 디아스 산골 출신인 아르페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유명한 남자였다. 다만 그를 순조로이 파티로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직 알 수 없다. 전생에서 용사의 파티에 들어가 있었던 그 남자는, 정말 어째서 용사의 파티에 합류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녀석이었으니······. “역시 메테르의 미인계였으려나.” “나 별루 안 이쁜데? 그리고 아르페 이외의 사람을 꼬실 수는 없어.” “너 그럴 때마다 진짜 재수 없다. 이제 가자.” 오션 젤리의 효과도 무한한 것이 아니다. 설마 이 도시에 그들의 은신을 잡아낼 수 있는 이가 있으리라곤 믿기지 않았지만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가능한 한 빨리 내륙으로 진입해 볼일을 볼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만물열람의 영역 안에 들어온 무언가를 발견한 아르페는 일행을 붙잡고 곧장 블링크를 구사했다.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도약해 그나마 인구가 많은 중심부로 이동한 것이다. “아르페, 갑자기 무슨······ 어라.” “······언니도 느꼈어?” 메테르가 그에게 반문하다 말고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를 잡았다. 시에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페는 재차 블링크를 구사하려 했으나, 그 전에 정확히 아르페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포착. 은신 상태. 적의, 살의 없음. 비전투 경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르페는 재차 블링크를 구사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곤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탄했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 “아르페, 그렇게 물어도 나는 몰라. ······아, 신이라도 죽여줄까?” “응, 꼭 좀 부탁하자.” 아르페의 절실한 말투에 메테르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곤 시장에서 생선을 사면 덤을 얹어주는 아주머니처럼 손가락을 들어 ‘덤’을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쟤는?” “아, 쟨 죽이면 안 돼.” “발견. ······강함. 전투 시······ 승률 없음. 도주 불가. ······대화를 시도.” 도통 알아먹기 힘든 목소리를 내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로브를 뒤집어쓴 꼬맹이. 아르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며 재차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쟤가 우리 다음 파티 멤버거든.” 용사 파티의 가장 강력한 화력, 마도사 레이제나와 조우한 순간이었다. < Chapter 17. 잘못된 만남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7. 잘못된 만남 - 3 > “음? 그러고 보니 집에 난로가 어떤 상태였더라.” “마누라가 만삭이었지. 술집이나 찾고 있을 때가 아녔어.” “이곳까지는 전화가 옮겨 붙지 않는다 해도, 미리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주위 사람들이 서서히 거리에서 모습을 지워갔다. 일행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보고 친절하게 자리를 비켜준 것은 아니다. 강력한 마법에 의한 인식 통제로, 그들에게 ‘당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큰 일이 난다’는 암시를 단단하게 때려 박은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수백, 수천 명의 인간의 의지를 암살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 설령 레벨 300을 넘기는 대마도사라 하더라도 쉬이 해낼 수 없는 일. 그래, 이런 건 마족에게나 어울리는 힘의 행사다. 그러나 정작 그런 장관을 만들어낸 대마도사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똑바로 아르페만을 노려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강력한 힘, 항거할 수 없는 권능······ 당신은 이 대지에, 무슨 목적으로?” 작은 소녀는 아르페의 마력을 느끼며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곤, 그럼에도 뒤로 물러나지 않으며 그에게 물었다. 공포와 미약한 적의, 그보다 더욱 미약한 호기심이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소녀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의 아르페는 알 수 없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쯤 되면 한숨 부자 대륙 랭킹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니, 왜 상륙하자마자 목적을 달성해버리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도 최악의 방법으로! 전생에서 지금 시점의 그녀는 탑 한 구석에 틀어박혀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을보내고 있어야 할 터······.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은 전생의 그녀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역사의 흐름이 아르페의 전생에서와는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 또한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터, 설령 아르페 일행이 이 대지에 발을 디딘 최대의 목적, 대마도사 레이제나가 이 항구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빠, 정말 이 아이야? 작은데?” “······작아, 그렇다면 설마 경쟁대상? 아니, 하지만 아르페는 빨리 크라고······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너무 혼란스러워!” 시에나와 메테르가 제각기 마음껏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아르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는 소녀와 보이지 않는 마나의 겨루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닌바 마력으로 상대할 자가 없는 아르페와 정면으로 마나를 겨루는 시점에서 이미 그녀의 능력은 재볼 것도 없는 최상이었다. ‘그래, 능력은 이미 이 시점에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지. 그래서 내가 최대한 빨리 이 녀석과 합류하려 한 것이기도 하고······.’ 전생에서 용사 파티의 광역 딜러를 담당했던 마도사, 레이제나. 용사 파티가 마왕성으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그녀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작달만한 체구였다. 아르페와 비슷한 흑색의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기에 제아무리 뚫어져라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금색 눈동자 뿐.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작은 꼬맹이가 퀴퀴한 로브를 걸치고 다닐 뿐이라 여겨 관심을 주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아르페에게는 달랐다. 그에게 관측되는 이상 그의 눈을 피해갈 수 있는 이는 그 누구도 없으니까. 그에게는 보였다. 마도사 레이제나, 그녀의 얼굴이며 가녀린 몸, 본질에 기록된 모든 정보까지도. [이름 ? 레이제나 드 파트레타 엘로칸시스 로델로테] [직업 ? 겨울의 마도사] [레벨 ? 250] [힘 ? 125 민첩 ? 125 체력 ? 125 마력 ? 1,750] ‘레벨 250에 마력 1,750. 다시 봐도 어마어마하네.’ 물론 레벨 280에 이른 아르페 자신의 마력은 2,300에 근접한다. 그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는 판단을 내려버리면 그야 간단하지만, 아르페는 용사라는 클래스의 특성상 마력을 올려주는 다수의 스펠을 익혔을 뿐더러 마족의 마나 특성을 고스란히 타고나 다른 마도사에 비해 압도적인 마력 상승을 겪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딱 잘라 말해 레이제나의 마력 스테이터스는 과거 그 어느 인간도 도달할 수 없었던 상위의 영역에 있었다. 이렇게 무식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용사 파티가 전생에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 다닐 수 있었겠지. 지금 아르페가 그렇게 하고 있듯이 말이다. “안녕. 날씨 좋지?” “기상은 눈보라.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기피되는 날씨.” “대답 한 번 삭막하네.” 과거 그 어느 인간도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여자아이가 덜컥 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르페처럼 특수한 고유능력을 지녀 과거로 되돌아온 것도, 용사도 아닌데 대체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래, 그러니 대답은 간단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종족 ? 데마이트] 스스로 의지를 품고, 레벨을 얻어 성장하며, 클래스까지 지닐 수 있는 지고의 아티팩트, 데마이트로 만들어진 골렘. 그것이 대마도사 레이제나의 정체였다. 만물열람이 없었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추측할 수 없었으리라. 그 귀한 데마이트로 골렘을 만들다니! 심지어 그 골렘이 대마도사로 성장하다니! 평범한 용사였더라면 그녀의 정체도 모르고 장장 수년에 달하는 모험을 함께하다가, 감정표현이 적었던 그녀의 마음이 차차 변해가는 것을 깨닫고 기뻐하다가, 그녀에 관한 진실과 그 뒤에 숨은 케케묵은 과거나 비밀 따위를 깨달아 절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렘인 그녀를 긍정하며 서로의 관계를 진전시킴과 함께 진정한 용사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그런 귀중한 성장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나 만물열람의 소유자인 아르페에게는 그런 거 없고 처음부터 파악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니 관계도 마음가짐도 성장하지 않는다. 감동도 감흥도 없다. 레이제나는 그냥 골렘이고, 아르페는 순수하게 골렘으로서 그들 앞에 나타난 그녀를 긍정했다. 그뿐이었다. 혹여 메테르나 시에나가 충격 받지 않도록 나중에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골렘이면 어떤가, 인간이 아니면 어떤가. 아르페에게 사고하며 행동하는 모든 이는 공평했다. 적이거나, 아군이거나, 둘로 나뉠 뿐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레이제나는 후자이길 바랐다. “마나반응 포착. 탐색······ 불가. 저항······ 불가. 도주 가능성의 재계산. 불가.” 만물열람이 발동하는 순간을 느낀 것일까? 레이제나는 돌연 그런 소리를 지껄이며 고개를 아주 살짝 숙였다. 그 모습이 꼭 풀이 죽은 것처럼 보여,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두 손을 들어보였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우리한테 적의는 없어.” “그렇다면, 정체를 밝혀라. 은신 아티팩트, 어째서?” 사람 이름을 물어볼 땐 자기 이름을 먼저 밝혀야지, 하고 말하려 해도 은신을 하고 나타난 이쪽이 지고 들어간다. 아르페는 어쩔까 고민하다가는 이내 평소 스타일대로 가기로 했다. “은신을 하는 게 딱히 불법도 아니잖아? 그러는 넌 왜 우리를 잡아 세워 심문 흉내를 내고 있는 거야?” 그렇다. 바로 배째기 전략이다. 레이제나는 설마 했던 적반하장에 침묵하다가는 눈을 조금 더 크게 치뜨며 말했다. “국가로부터의, 비밀 임무 수행 중.” “그리고 그 비밀 임무인가를 하는 데 우리가 거슬리는 거구나, 그렇지?” “······.” 우위가 뒤집힌 순간이었다. 더 말해봤자 자신 쪽의 정보가 빠져나갈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레이제나가 급기야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다고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굳어 있을 뿐. 그녀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렇기도 할 것이다. 여태까지는 그녀의 좋지 못한 언변으로 일을 해결하지 못했을 때, 바로 무력행사로 넘어가면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르페 일행 중 그녀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상대가 아예 없었다. 단언컨대 그녀의 생애에서 최초로 일어난 일. 가뜩이나 마법 외의 영역에서 복잡한 사고를 하지 않는 그녀에게 패닉이 찾아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 아르페는 천천히 그 뒷말을 기다렸고, 이내 그 결실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걸 나한테 묻냐!” 이 녀석도 제법 골 때리는 녀석일세! 아르페는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태클을 걸고 말았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우린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지 않아서 은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야. 너도 알겠지만 우리 힘이 평범해보이지는 않잖아, 그렇지?” 전부 다 말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이 녀석의 상태를 보니 아르페가 대충 둘러대도 물러날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수행중이라는 ‘비밀 임무’에, 그들은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을 납득시켜주는 일이었다. “일반인, 혹 군인에 대한, 공격 의도는?” “그런 게 있었으면 당장 너부터 무사할 것 같아?” “······납득 가능한 논리에 의해, 적도 아군도 아닌 제 3자라는 결론을 도출.” 그러나 그 직후 그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지금 이 대지에, 적도 아군도 아닌 자는 출현 불가. ······어디에서, 왔는가?” “너 이분법적 사고가 나 못지않구나. 그런 결론은 대체 어떻게 하면 내릴 수 있는······ 잠깐.” 레이제나의 황당한 말에 태클을 걸다 말고 아르페가 고개를 들었다. 혹여 레이제나 말고 다른 마도사가 이 장소에 끼어들면 복잡한 일로 발전할 것 같아 만물열람을적용한 마나 스트링을 늘어트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지금 그것에 뭔가가 걸려든 것이다. “너, 지금 비밀 임무 수행중이라고 했지?” “그렇다. 비밀이기에, 자세한 내용은 노출 불가. 강제로 캐내려 할 시, 적으로 규정. 그 경우 도주.” “캐낼 생각 없으니까 튈 필요 없어.” 아르페의 눈빛이 심유해졌다. 마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때 강렬한 마나 반응에 의해 눈으로 집중되는 마나 입자들이 공기 중의 마나를 빨아들이면서 생기는 일이었다. 메테르는 언제나 아르페를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이때의 아르페를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 곧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납득.” “아르페, 나도 알 것 같아.” 아르페와 레이제나의 선문답을 무시하고 메테르가 강철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이 어느덧 롱 소드의 검집에 가 있었다. “살의를 저 바깥에서부터 뚝뚝 흘리고 있는 멍청이들이 이 도시로 오고 있는걸.” 한두 명이 아니다. 족히 수백에 이르는, 그것도 기사 중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 병력의 정련된 살기가 느껴졌다. 저것은 특정한 누군가와 싸우러 오는 게 아니다. 이 살기를 느끼는 이든 느끼지 못하는 이든, 다짜고짜 죽여 없애버리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에이디아에 도착하면 조금 느긋하게 돌아다니면서 자연 구경도 하고 마탑마다 들러서 마도서도 알아보고 할 생각이었던 아르페는 곧 그들에게로 닥쳐올 전투의 피비린내를 맡곤 처참하게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이런 일은 전쟁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데. 그렇다는 건······.” “당신들의 제3자라는 주장을, 확실히 납득.” 그때가 되어서야 레이제나는 아르페 일행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그리고 설명했다. “마도왕국 에이디아, 현재 다이탄 왕국, 티아타 공국의 연합군과 5개월째 전쟁. 이 대지의 인간이라면, 모를 리 없음.” “그래, 알려줘서 참 고맙다.” “지닌바 무력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온 것이라 판단.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한, 은신이라는 선택. 훌륭했음.” “그래, 알아줘서 참 고맙다.” “제 3자에게 제안한다.” 아르페의 빈정거리는 말을 용케도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레이제나는 차갑게 굳은, 그러나 어딘가 안심한 구석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마도왕국 에이디아로부터 당신들에게, 전쟁용병으로의 참전을 권유한다. 보상 두둑, 신분 보장, 전적 높을 시, 간부 승진, 지부장 취임. 기분 최고.” “너 그 메뉴얼 누가 알려줬냐. 바른 대로 불어보련?” “기밀.” 그 수상쩍은 권유 문구를 누가 레이제나에게 주입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가 막힌 멘트로 설득한다고 해도 아르페의 답은 단 하나. 바로 거절이었다. < Chapter 17. 잘못된 만남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7. 잘못된 만남 - 4 > 마도의 총본산이고 자시고 아르페는 에이디아를 공격하면 공격했지, 그들의 편에 서서 다른 나라와 싸울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물론 그가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자 레이제나의 얼굴에 미약한 낭패감이 떠올랐다. “매우 곤란함······.” 레이제나는 난감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는, 이내 어깨를 살짝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교섭 실패. 대상에게 적의는 없음. 무시하고 임무 속행.” “임무가 뭔데?” “기밀.” 기밀이라고 말하며 몸을 돌려 도시 너머, 수백의 무리가 달려오는 바로 그곳을 응시하는 레이제나. 그야 뻔하지, 에이디아의 마도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골렘인 그녀는 국가의 명령을 따르고 있으니, 그 국가를 침범하는 군대를 상대하는 것이 임무일터였다. “있잖아, 내가 쟤네랑도 좀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아르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레이제나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불가.” “그래? 네 비밀 임무가 쟤네를 죽이는 거구나?” “기밀.” 아르페는 본의 아니게 그녀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에 성공했다. 분명 레이제나는 여태까지 다른 이들에게 이런 울상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녀를 상대하는 것이 제법 재밌어지기는 했지만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있을 수는 없다. “메테르.” 아르페는 곤란해 하는 그녀를 보며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튕겼다. 바로 그 순간 용사의 콤비네이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주장하듯 번개 같은 속도로 일이 이루어졌다. “에잇.” “큭.”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움직인 메테르가, 레이제나가 차마 방어술식을 영창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모든 방어기제를 돌파해 뒤통수를 강타, 기절시킨 것이다! 용사가 아니라 범죄자들의 콤비네이션 같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좋아, 업어.” “응!” “좋아, 가자!” “응!” 아르페는 그 길로 일행과 함께 항구도시 벨라타를 빠져나왔다. 상쾌하게 일을 마무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망할,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전쟁이 나가지고.” 그들이 도착한 나라 에이디아의 북쪽으로는 다이탄 왕국이 위치한다. 반면 에이디아의 서쪽에는 티아타 공국이 있다. 레이제나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지금 에이디아는 바로 이 다이탄 왕국과 티아타 공국의 연합군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당연하지만 아르페의 전생에서 에이디아는 다이탄 왕국과 티아타 공국의 연합군과의 전쟁을 벌인 역사 자체가 없다. 오히려 전생에서는 티아타 공국과 다이탄 왕국의 전쟁에, 에이디아가 티아타 공국의 지원군으로 참가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티아타 공국의 지배자 에리타드 대공은 현 에이디아 국왕의 동생이었으니까. “그런데 티아타 공국이 에이디아를 배신하고 다이탄에 붙어? 이건 성립될 수가 없는 일이야.” “다이탄이라는 나라가 티아타 공국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 아닐까?” 메테르의 조심스러운 추측에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적어도 다이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럼 아르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티아타 공국은 일찍이 에이디아로부터 떨어져 나온 도시 국가로, 혈족으로 연결된 만큼 에이디아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 상부상조해왔다. 그러니 만약 북방국가 다이탄이 정말로 티아타를 꼬드기는데 성공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에이디아에 큰 타격을 주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페는 티아타가 에이디아를 배신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 그들의 쿵짝은 아주 잘 맞았고, 그들의 합작으로 일어난 일 때문에 용사는 인간들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되니······. “가만······?” 아르페의 걸음이 멈추었다. 일행이 따라 멈추었다. 기절한 채 메테르에게 업혀 있던 레이제나의 팔다리가 흐느적거렸다. “합작이라면······ 혹시?” “아르페?” 메테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르페가 메테르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미케나와 약속을 하나 했던 건 알지?” “응. 영원의 숲과 관련된 퀘스트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약속 말이지?” “그래. 사실 영원의 숲은 티아타 공국의 접경에 있거든.” 고고한 엘프들이 무리지어 사는 영원의 숲. 티아타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은 언제나 그 숲과 엘프들을 탐내었고 번번이 분쟁을 일으키곤 했었다. 끝내 에이디아가 티아타를 도와 일으킨 일로 인해 영원의 숲은 참사를 겪게 되고,용사 또한 큰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만약, 만약 지금 일어나는 이 전쟁이 그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억측일까.’ 물론 전생에서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용사의 나이 스무 살을 넘겨서였다. 하지만 미케나와 전속 계약을 맺었을 때의 그녀의 말로 미루어보면 이미 그 전부터 일은 진행되고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갑작스레 캔슬되지도 않았을 터이고, 티아타 공국이 그 일에 협조를 해주는 에이디아에 반기를 들었을 리도 없으니······ 그 둘이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다는 가정을 해보면, 다이탄과의 동맹이 그저 속임수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어쩌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전쟁은······.” “아르페, 조금 있다 설명해줘. 이제 곧 와.” 메테르의 목소리가 그의 사고를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이내 그의 시야로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항구도시 벨라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인마의 무리. 그 숫자만 족히 수백으로, 저마다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마주하는 모든 것을 박살낼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아르페는 메테르에게 아직 나서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보이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혹여나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도록 상냥하게 권유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잠깐만 멈춰보지 않을래?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적입니다! 전방에 마력이 느껴지는 대상이 넷!” “그대로 밀어버려! 목격자 하나 남겨두지 않고 몰살하라는 명령이시다!” “계집들의 미색이 범상치 않습니다. 대장님, 괜찮으시다면 저것들을 생포하여······.” “대의를 위한 일에 그런 추잡한 개인적 욕망을 드러내지 마라! 전부 죽여라!” “······옙!” 아르페가 먼저 말을 걸었는데도 적이라 단정 짓고 죽이려 하다니! 그래도 옛날 기사이야기에 나오는 놈들처럼 ‘쿠헤헤, 예쁜 여자는 살려서 붙잡는다!’고 말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은 각박하다니까.” “아르페, 저건 적이지? ······죽일게?” “그렇긴 한데······ 기다려봐.”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손을 흔들었다. 완숙의 경지에 이른 하이퍼 러빙이 대지를 깔끔하게 갈아버리자 모든 말이 달려오던 기세를 이기지 못해 주르륵 미끄러졌다. 개중 레벨이 낮은 놈들은 그 즉시 자리에 엎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날랜 이들은 간신히 벗어나 대지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마법! 적은 마도사입니다!” “빌어먹을, 그걸 던져!” 놈들의 품속에서 일제히 튀어나오는 표창. 그것은 명중시킨 상대의 마나 흐름을 둔화시키고, 고통을 극대화해 주문 영창을 방해하는 대마도사용 무기였다. 마도사 제압용 아티팩트까지 가지고 있다니 다이탄에서 제법 본격적으로 준비를 한 모양이긴 한데······. “어딜.” “크하아아아아악!” “끄윽, 끄으아아아아!” 아르페의 손짓을 따라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넘실거리며 뻗어나가 그것들을허공에서 낚아채 되돌렸다. 그 짧은 순간 아르페의 마나를 주입받은 표창들이 주인의 지척에 이르러 폭발하며 그들을 상처 입혔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자라면 그 누구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테크닉이었다. “상대할 수 없어. 무슨 수를 쓰는지도 알 수가 없어!” “퇴각, 퇴각하라!” “쯧.” 아르페는 혀를 찼다. 다짜고짜 모든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기선제압을 당한 것만으로 곧장 도주하려고 드는 모습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어볼 게 있다니까.” “헉!?” 바로 그 순간 아르페는 난장이 된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블링크 부츠를 다루면 다룰수록 그것에 익숙해져, 스펠도 스킬도 아티팩트의 옵션도 아니고 자신의 신체를 다루듯 자연스럽게 발동할 수 있게 된 것만은 그의 자랑이었다. “어, 어, 어떻······.” 몇몇은 무기를 들어 그를 덮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엔 아르페의 전신에서부터 뻗어 나온 마나 스트링에 단단히 속박되어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서 도망······ 큭!?” 도주하려던 놈들 역시 마찬가지. 치명적인 살기와 마력을 품은 마나의 실이 삽시간에 전장을 교차하며 수백의 기사들을 모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과거 마나 스트링을 처음 익혔을 땐 다섯 줄기를 다루는 것도 버거웠지만, 레벨 280에 이르러 이미 전생의 자신을 한참 뛰어넘은 마나량을 보유하게 된 아르페에게는 다섯 줄기가 아니라 오백 줄기도 너끈했다. “자, 그러면······ 대장 누구니?” 전원을 완벽히 제압한 후 입을 열어 말하는 아르페.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아르페는 별 수 없이 질문을 바꾸었다. “어디에서 왔니?” 그제야 개중 한 명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외쳤다. “우, 우리는 영광된 다이탄 왕국의 기사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에이디아의 군대가 없는데? 국제교전법 몰라?” “······.” 군인은 군인과 싸워야 한다. 명백히 민간인밖에 없는 곳을 노리는 것은 국제법상 최악의 금기, 대륙의 공적이 되기에 마땅한 짓이었다. 지들의 죄는 아는지 다시금 침묵하는 기사들. 아르페는 코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기사들이 이런 무뢰배 집단이 된 거야?” “우리의 제일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무뢰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짓까지 해놓고 전쟁에도 지면 그냥 병신쓰레기가 되겠지. 안 그래?” 아르페는 따분한 어조로 지껄이며 손을 튕겼다. 그 순간 놈들을 속박했던 마나 스트링이 일시에 사라졌다. 놈들이 경악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뭣······!?” “더, 덤비지 마. 적은 언제든 마법을 발휘할 수 있어!” “경계, 경계하라!” 다행히도 아주 바보들은 아닌 모양. 더 이상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아르페에게 덤벼들지도 않고 그를 경계하는 기사들을 보며 그제야 흡족해진 아르페가 느긋이 기다리고 있자니, 기사들 중 한 명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대장으로 보이는 이였다. “혹시 당신은······ 에이디아 소속이 아닌 것인가?” “에이디아에 나처럼 졸라 센 마도사가 있다는 얘기 들었어?” “그 마력, 외모······ 모두 들어본 적이 없다. 에이디아에 당신과 같은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우리 기사단을 가벼운 손짓 하나로 제압할 수 있는 마도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제아무리 협력자가 있다 한들 에이디아와 겨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에이디아에는 이미 레이제나가 있다. 아르페보다는 약해도, 레이제나 정도면 이 기사단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터. 그러니 다이탄은 처음부터 승산 없는 싸움을 걸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레이제나의 비밀 임무라는 것은 그들을 제압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에이디아의 마도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전쟁 중인 국가에 머무르고 있었는가, 어째서 그들을 맞아 제압했는가, 어째서 그들을 살려주었는가. 놈의 의문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에 아르페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너희 윗대가리를 만나고 싶어. 그 이유를 미리 말해주자면.” 아르페의 눈이 사악하게 반짝였다. “날 고용해라. 에이디아와의 전쟁에 참가하는 전쟁용병으로. 아주 비싸게.”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1 > “전쟁용병······!?” 설마 했던 아르페의 말에 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전쟁용병, 그것은 국가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지닌 마도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적인 단어였다. “그래. 너희가 에이디아에 무조건 이기게 해줄 테니, 대가를 치르라 이거야.” “갑자기 그런 요구를 받아도, 그러나······ 내겐 권한이.” 이런 상황을 상정했을 리가 없었던 대장은 지극히 당황했으나 아르페와 같은 초현실적인 강자가 스스로 고용되어주겠다는데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어 어떻게든 긍정적인 말로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리고 그런 때에. “꺅!” 여자아이의 째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저 너머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아르페가 고개를 돌리니 허공중으로 레이제나가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 밑에서 메테르가 이를 갈며 도약했다. “어딜!” “도주.” “못 가!” 메테르가 무릎을 굽혀 대지를 디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고유능력 가속이 발동해그녀의 단순한 도약을 수백 미터 이상 가는 하이퍼 점프로 바꿔놓았다. “큭······!” 레이제나가 동시에 수십 가지의 마법 술식을 짜내어 메테르를 구속하는 동시에 공간이동 마법을 발현하려 들었지만, 메테르가 롱 소드로 쏘아낸 두 줄기의 빔이 그모든 술식을 해체해버렸다. 그것을 본 레이제나의 눈이 크게 뜨인 직후 메테르가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아, “못 간다고 했잖아!” “칵!?” 그대로 내던져 지상에 메다꽂아버렸다! 제아무리 골렘인 레이제나라고 해도 그 기능이 체력보다는 마력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해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 “······.” 가녀린 여자아이가 허공으로 떠올라 수십 개의 마법을 다루는 광경에 이어, 마찬가지로 가녀린 여자아이가 그것을 다 파훼하고 붙잡아 던져 수백 미터 아래 지상에 박아버리는 광경을 보며 기사들은 사이좋게 침묵 상태에 돌입했다. 아르페가 싱긋 웃으며 보충했다. “우리 일행이야. 참 세지?” “대체 당신 같은 강자의 집단이 여태 어디에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거지?” 대장이 진지하게 물었다. 아르페 역시 진지하게 대꾸했다. “바닷속에서.” “대답해줄 생각이 없단 뜻이군······ 아니, 그래도 좋다. 이걸로 확신을 얻었어. 우리나라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마족을 제외한 그 누구의 손이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아마 상부에서도 거절하지 않을 거야.” “좋아, 마족과는 손을 잡지 않는다는 부분이 제일 훌륭하네.” “하······.” 아르페의 농담 섞인 대꾸에 대장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민간인들까지 죽이려 했던 것은 분명 씻을 수 없는 중죄다. 설령 미수에 그쳤다 한들 그 죗값은 평생 짊어지고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우리라고 해도 인류 전체를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아.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게 있었단 말이지······. 아르페는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아마 저들에게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그것도 어쩌면 조만간. “일행을 데려올게. 아, 그전에.” “음?” 아르페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멍하니 있던 기사 중 한 명의 영 좋지 못한 곳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끄아아아아악!” “그럼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 그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경악하며 물러나는 가운데 아르페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폭거에도 불구하고 대장은 그에게 따지지 못했다. 지금 미래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만 기사가 어째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죽은 기사는 바로 아르페 일행과의 충돌 직전 메테르와 시에나의 미모를 알아보고 저속한 말을 지껄였던 이였다. “대장님, 저 자는 너무 위험합니다! 거절해야 합니다!” “분명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길 겁니다!” “아니, 다들 조용히 해라.” 아르페가 블링크를 구사해 일행들에게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며 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는가? 하고자 한다면 그는 굳이 우리를 통하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어차피 통제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 국가에 이득이 가도록 조정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동료가 이유 없이 죽었습니다! 팔을 잘린 기사들도 여기에 이렇게!” “이유가 없지는 않지. 개인적인 원한으로만 따지면 충분한 사유였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미 전쟁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너희는 그렇지 않은가?” “······.” 입을 다문 부하들을 돌아보며, 대장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판단해라. 그래도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상부에 정식으로 건의해라. 판단은 윗선에서 내릴 것이다.” “큭······.” 기사들 사이에서 아르페에 대한 열띤 토론이 오가는 그때, 아르페는 일행에게 복귀하여 레이제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역시 튼튼하네. 수백 미터를 추락해 얼어붙은 땅에 들이박았는데도 외상 하나 없잖아?” “칫.” 메테르의 혀를 차는 소리를 무시하며 레이제나를 짊어지는 아르페. 당연하지만 기껏 만난 마도사를 풀어줄 수도 없고, 이대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것을 본 메테르가 그에게 물었다. “아르페, 이 아이는 에이디아에 소속된 것 아냐? 그런데 왜 그 적인 다이탄에 합류하겠다는 말을 한 거야? 만약 이 아이를 파티에 합류시키고 싶다면, 우린 당연히 에이디아의 편에서 싸워야 하는 거잖아.”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지금 에이디아와 다이탄, 티아타······ 그리고 영원의 숲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본다면 말이지.” “영원의 숲도 여기에 엮여 있는 거야?” “아마도.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볼 생각이야.” 그것도 레이제나를 끌고서 직접. 레이제나의 자아는 희박하지만 결코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준다면, 분명 그녀는 그들에게 합류해주리라고 아르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보다 메테르 넌 목적을 위해서 아무런 유감도 없는 일반 병사를 죽이려 들 수 있어?” “아르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아얏.” 아르페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껄이는 메테르의 이마에 제법 아프게 꿀밤을 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을 해칠 이유는 없어. 그것도 무고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네가 짊어진 용사라는 클래스를 보다 곰곰이 생각해보란 말이야.” “······하지만 아르페,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우리가 꼭 해야만하는 일을 위해서,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을 베어야 하는 순간이, 적어도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 말에 아르페는 순간 멈칫했다. 왜 없겠는가, 그들은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용사인 것을. 오히려 짚이는 것이 너무 많아 곤란할 정도였다. 어쩌면 간접적으로는 이미 몇 번이고 그런 일들을 겪어왔는지도 모른다. “걱정하지 마.” 그럼에도 아르페는 단언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적어도 너는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거야. 더러운 일들은 내가 할 테니까. 전생에서 용사의 동료들이 그렇게 했듯이. 그러니 너는 언제까지고 순수하게 빛날 것이다. 전생에서처럼 그렇게 찬란하게. 아르페는 그렇게 속으로만 생각했으나 어째선지 메테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르페,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난 다 알아. 아르페는 가끔 그렇게 비장한 얼굴을 해!” “역시 독심술 스킬을 익히고 있구나?” “이이이이익.” 메테르는 제법 화가 났는지 눈을 치켜떴지만 아르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테르가 더는 못 참고 불같은 기세로 따지려던 순간, 아르페가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얹었다. “이건 아르페가 쓰다듬어준다고 해서 납득하고 넘어갈 문제가······.” “조금만 더 참아줘, 메테르.” “응······?” “네가 조금 더 자라서, 마음이 좀 더 단단해지면. 그때는 너와 모든 걸 공유할게.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나한테 맡겨줘.” 적당히 둘러대는 아르페의 말에 메테르의 볼이 터져나갈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미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간신히 말을 짜내어 반박했다. “하, 하지만 아르페는 나랑 동갑인데······.” “내 정신력은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네 정신력은 나이에 비해 미숙하거든.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거야.” “아르페 나빴어.”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진실 폭격에 메테르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말에 납득은 해주었는지, 곧 그에게 살짝 기대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가 오면 꼭, 공유해줘야 해.” “그래.” 좋아, 역시 간단한 여자라니까, 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아르페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 순간. 메테르의 입이 나풀거리며 아르페의 심장을 멎게 만드는 날카로운한 마디를 토해냈다. “아르페가 숨기고 있는 것들까지 전부.” “······.” 예기치 못한 역습이었다. 그야 바보가 아닌 한 언젠가 그의 이상한 점을 알아채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바보인 메테르가 이런 말을 해올 줄은 몰랐으니까. 얼마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처음부터? 아니, 설마 그러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숨겨오다 이제야 말을 꺼낸 것을 보면 이젠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르페?” 순간적으로 아르페의 말문이 멎자, 메테르가 고개를 빼꼼이 들어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더없이 깊고 순수한 에메랄드빛의 눈망울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너······.” “공유, 해줄 거지?” “······그래, 내가 졌다. 말해준다, 그래.” 완패다. 어쩌면 아르페의 태도를 문제 삼은 것도 결국 얘기를 여기까지 끌고 오기위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아르페는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언젠가 말이야. 언젠가.” “응,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한층 밝아진 미소를 지으며 물러서는 메테르에게는 미안하지만, 물론 사실을 모두 말해줄 수는 없다.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꾸며야 메테르가 납득할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될까? 아르페는 언제 한 번 날을 잡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스토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가 골몰하던 그때 아르페의 소매를 붙잡는 이가 있었다. “오빠, 나 소외감 느껴······.” “아.” 그것은 바로 용사들의 대화에서 배제된 시에나였다. 그녀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참을성이 좋은 시에나라고 해도 방금 아르페와 메테르가 만들어낸 둘 만의 공간은 버티지 못했던 것! “나한테도 공유해줄 거야, 오빠? 공유해줄 거지? 응?” “그래, 시에나한테도.” “야호, 오빠 너무 좋아!” 메테르에게도 꾸며서 말할 작정이었으니 그 청자가 한 명 늘어난다고 문제되지는않겠지. 아르페가 별 망설임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에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에게 덥석 안겼으나, 아니나 달라 그것을 본 메테르가 벌컥 화를 냈다. “잠깐만, 내가 이 대답을 듣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왜 시에나한테는 즉답해주는 거야!? 여기선 나랑 아르페 둘만의 비밀로 넘어가야 하는 거 아냐!?” “그야 오빠가 연하취향이니까 그렇지······?” “오해받을 소리하지 말고 이제 그만 가자.” 아르페는 소란스럽게 떠드는 일행을 다독이며 기사들에게로 향했다. 물론 레이제나는 여전히 기절한 채였다. 기사들을 이끄는 부대장이 말했던 ‘권한을 지닌 상부’와 접선하기 위해 가는 길, 급하게 구한 마차에 오른 아르페 일행은 더할 나위 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야 물론 적지 깊숙한 곳까지 침입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기에 지나가는 길마다꽃잎을 깔아두거나 나팔을 불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지극히 저자세로 나오며 그들을 떠받드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면 이런 게 혹시 귀족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째서, 나를.” 그리고 졸지에 아르페 일행에게 납치당한 신세가 된 레이제나는 반항하지도, 도주하지도 못해 어쩔 수 없이 얌전히 그의 곁에 붙어 앉아 하루 종일 이해 불가능, 납득할 수 없음, 같은 말만 지껄여대고 있었다. “나는 족쇄로, 묶여 있다. 에이디아에 저항, 불가능. 인질로서 관리, 번거로움. 어째서 죽이지 않는가?” “널 우리 파티에 맞이하고 싶어. 그러니 죽일 수야 없지.” “나는 족쇄로, 묶여 있다.” 레이제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게 꼭 ‘한 번에 못 알아 듣냐, 이 띨빡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아르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 이미 알아. 제약이 걸려 있다는 거지?” “······그렇다. 내 정체를, 파악했는가?” “그래. 넌 골렘이잖아?” “긍정.” 만약 골렘이 그 주인이 되는 마도사에게 반항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골렘을 만들지 않겠지. 따라서 대부분의 골렘에는 주인에게, 혹은 특정한 대상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마법적인 족쇄가 걸린다. 그 정도는 마왕의 고유능력까지 가지 않아도 골렘을 만드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레이제나는 지금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 “골렘이라는 것을 알면서, 파티에······?” “자, 그래서 네 개인의 생각은 어때. 제약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네 생각.” 아르페가 물었다. 레이제나는 얼굴에 미약한 의아함을 띠며 고개를 살짝 갸웃해보였다. “개인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제약은 절대이고, 나는 에이디아를 따른다.” “아니, 중요한 건 네 생각이야. 그래서 난 에이디아가 아니라 널 직접 설득하려는거야.” “납치가, 설득?” 제법 예리한 부분을 찔러오는데 그래, 아르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경한 수단을 쓰지 않았다면 도망쳤을 테니까. 널 붙잡아두고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거든. 납치에 대해선 사과해둘게.” “사과로 끝나면, 법은 불필요.” ······자아가 미약한 게 아니라 이미 확고한 것 같은데. 아르페는 의심어린 눈으로레이제나를 살폈으나 그녀의 얼굴은 어디까지고 무표정했다. “인간의 어리석음, 통감. 골렘은 골렘. 단순한 시각 정보로, 설득은 불가능. ······추가 설명, 골렘은 어디까지나 골렘. 외형은 설정된 것. 연하로 보이지만, 연하가 아님.” “······너 누구한테 무슨 말 들었냐?” “묵비권 행사.” 아르페는 그 대꾸에 피식 웃어버리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앉은 메테르가 두눈을 뾰족하게 뜨고 레이제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여성의 질투, 추함.” “······죽여버리겠어.” 아르페는 투닥거리는 레이제나와 용사의 모습을 보며 끙, 혀를 찼다. ‘당분간 설득은 어렵겠네. ······그래도 에이디아의 최고 전력을 빼내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야겠지.’ 레이제나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에이디아가 지닌 최강의 패다. 그것을 아르페가 빼돌렸으니 지금쯤 놈들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고 있겠지. 그러니 이제부턴······. “판을 뒤집어버려야겠지.” “아, 오빠 지금 엄청 나쁜 얼굴 했어.” “잘 알고 있네.” 아르페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부터 퀘스트에 돌입할 생각이었거든.” “우리가 하는 퀘스트라는 건 다 나쁜 짓이었어!?” 용사의 세 번째 퀘스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2 > 마음 같아선 블링크를 연사해대며 목적지로 향하고 싶었으나 제아무리 아르페의 마나가 방대해도 기사들 전원을 이끌고 블링크를 발동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다른 수단을 쓸까 조금 진지하게 고민한 아르페였으나, 결국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움직이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급한 일도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처음 에이디아에 입성할 때의 목표였던 느긋한 여행을 절반쯤은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정찰병 발견. 11시 방향, 네 명이다. 빠르게 처리하고 복귀하도록.” “알겠습니다, 대장님!” ······비록 그들과 함께하는 녀석들 때문에 여행의 근본적인 부분이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아르페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괜찮아? 아.” 그러나 아르페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메테르와 시에나는 창 너머로 지나가는 대자연과 그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방긋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응! 아르페, 나 사실 마차라는 것 처음 타봐.” “그래, 그건 나도 잘 알아.” “덜커덕거려서 재밌어!” 몇 년간의 여행을 하며 많은 일들을 겪은 그의 파티 멤버들은 슬슬 싫은 건 적당히 무시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즐거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르페는 일행을 보며 자신이 어디서부터 실수한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할 수 있는 것을 찾기로 했다. “마침 이렇게 느긋하게 앉아있을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긴 했으니까······ 비록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말이야.” “······그건?” 아르페로부터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그의 파티 권유에 응할 수도 없어 어느 순간부터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레이제나가, 그가 품에서 꺼내든 보랏빛의 광석을 보곤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래, 그녀가 관심을 보일 줄 알았다. “이건 데마이트의 원석이야.” “데마이트······.” 아르페가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자 레이제나의 눈이 실로 기묘한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그것은 감동일까, 호기심일까, 그도 아니면 실망일까. 아르페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데마이트, 앗.” 그녀는 무심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는 이내 제정신을 차려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아르페는 흔쾌히 그녀에게 원석을 내밀었다. “살펴볼래?” “······괜찮아?” “그래. 너도 마도사라면 이 녀석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응.” 레이제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르페의 손을 만지지 않고 원석만을 받아들어 살며시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금색 눈동자 안으로 촘촘히 자줏빛의 은하수가 어렸다. “이게, 데마이트······.” “그래. 오랜 세월의 인내 끝에 순도 높은 마나와 약간의 기적이 주어져 자아와 클래스를 부여받은 마석. 모든 마도사가 꿈에도 그리는 인생의 동반자지.” “데마이트······.” 이미 아르페의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제나는 생애 처음으로 만난 자신 외의 데마이트에 지극히 흥분한 모습으로 코가 그것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살폈다. “데마이트······ 데마이트.”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르페에게 만물열람이 없었다고 해도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의 그런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돌연 레이제나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 “나는 골렘. 데마이트로 만든 골렘.” “대충 알고 있었어.” “클래스를 갖고, 성장하는 것. 데마이트이기에 가능.” 레이제나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더 말하고 싶은 게 남은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나는 골렘. 골렘이다.”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아냐?” “골렘은 제약을, 벗어날 수 없음. 데마이트 또한, 도구에 불과함. ······둘은 같다.” “그러니 널 설득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긍정.” 레이제나는 손에 쥔 데마이트의 원석을 만지작거렸다. 어느 순간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히 마음먹은 듯 그것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이내 힘없이 손을 내리며 데마이트의 원석을 아르페에게 돌려주었다. “······자아는.” “응?” 그녀의 입에서 언제나와는 다른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아는 어째서, 주어졌는가?” “제법 철학적인 말을 하는구나.” “판단은 허락되지 않는다. 행동은 주인에 맞춘다. 우리의 자아는, 오직 주인을 위한 것. 그렇다면.” “그렇다면?” “신은······ 인간을 위해, 우리를 만들었는가?” “재미있는 말을 하네.” 아르페는 피식 웃어버렸다. 신이 인간을 위해 데마이트를 만들어? 바로 그 데마이트로 만들어진 존재가 그런 말을 입에 담으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제 뜻대로 살지 못하는 건 대부분의 인간도 마찬가지야. 난 그놈의 신이 정말 인간이나 데마이트 따위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는걸. 그리고 넌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만약 인간이 널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넌 지금 그런 사고를 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 사실에, 불만은 없다. 단지 의문을, 품었을 뿐.” 레이제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수많은 것이, 세상을 이룬다. 인간이 원하면, 모두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던전에는 보상이, 업적에는 대가가. 마왕이 나타나면, 용사가 막는다. 이 세상은 지나치게······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다.” “······.” “197년 보아온 세상에서, 모든 것이 같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명하고, 나는 따랐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나는.” 그러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필시 입 밖에 내는 순간 제약을 어기게 될 것이라 여겼겠지. 그 모습이 마치 마왕에게 족쇄로 묶여 자유롭게 말하고 움직이지 못했던 에트나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르페가 뭔가 말하기 전, 끝내 그녀가 알아서 말을 돌렸다. “그래서 나는, 연하가 아니다. 인간의 나이로도, 198살.” “결국 또 그 얘기냐? 됐거든?” 그래,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겠지. 아르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네 결정적인 착각을 하나 알려줄게.” “착각?” “마도사와 데마이트의 관계는 결코 종속이 아냐. 데마이트는 원석으로 존재하는 한 그저 희미한 의지를 가진 돌덩이에 불과하고, 마도사는 그것을 가공하며 그들과 계약 관계를 맺게 되는 거지. 이것 자체가 일종의 계약 의식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너도······.” “그러나 나는, 골렘.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흥.” 아르페는 데마이트의 원석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은은하게 붉은 기운을뿜어내는 장검을 들었다. “이 녀석이 완성되고 나면 너도 깨닫게 되는 게 있을 거야. 그러니 두고 보도록.” “······.” 에트나의 힘에 의해 불꽃의 힘을 품고 강화된 장검은 사실 한 손으로 잡기에는 살짝 큰 감이 있었지만, 지금 그에게 이보다 적합한 조각칼이 없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르페는 마차 천장을 뚫어버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것의 손잡이 부분을 단단히 잡고, 옆면 날을 데마이트 쪽으로 향하게 해 조심스럽게 그 겉을 긁었다. “오, 된다.” 강력한 불꽃의 힘이 날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단단하기 그지없는 데마이트의 원석의 겉을 아주 살짝 녹이고 필요 없는 부분을 떼어냈다. 물론 그것들에도 강력한마나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그는 그것을 따로 받아내 소중히 보관했다. “······마나가.” 레이제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데마이트가 아주 조금씩 가공되는 그 순간에 외부의 마나가 데마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데마이트는 원석인 상태에서는 그저 주입된 마나를 증폭하는 정도의 능력밖에는 내질 못해. 하지만 넌 아니지? 너 자신만의 마나를 갖고 다루잖아.” “긍정.” “그래, 곧 이 녀석도 그렇게 될 거야. ······너처럼 뚜렷한 자아는 갖지 못하겠지만.” “······하는 일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자아의 의미는, 없음. ······차라리 다행.” 아르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칼을 놀렸다. 워낙에 신중한 작업이고 또 어려운작업이기도 해서 작업속도가 결코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마차를 타고 달리는 몇 시간 동안 데마이트가 발하는 빛은 꾸준히 짙어져 갔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나의 양도 마찬가지로 많아졌다. “이미 나랑 몇 번 활약을 했었거든. 그땐 제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니 경험치를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마이트의 원석은 이미 레벨 100에 달하는 경험치를 쌓고 있었다. 아르페 일행이 얼마나 많은 수라장을 겪어왔는지 익히 짐작하게 하는 일이었다. “어때, 달라지는 게 보이지?” “천천히······ 깨어난다.” 레이제나는 아르페가 작업을 하는 내내 그의 손놀림, 그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가는 데마이트의 원석을 지켜보았다. 아르페가 데마이트를 다루는 것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도 데마이트가 깨어나는 것에는 감흥을 느끼는 모양. 정말 복잡한 녀석이라 생각하며 아르페는 작업을 이어갔다. 데마이트의 가공은 하루 이틀로 될 일은 아니었다. 특히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 작업을 더욱 늦추었다. 마차가 달리고, 휴식을 위해 아주 잠깐 멈추고, 또 달리고, 자고, 일어나 달리고. 더욱이 아르페는 데마이트를 가공하는 와중에도 다른 일들을 신경 써야 했다. 예를 들어 사라져버린 에이디아의 에이스 레이제나를 찾아내기 위해 주위를 돌아다니는 마도사들을 그 누구도 몰래 격추시켜버리거나, 조금만 신경을 꺼도 이를 드러내는 무식한 기사들에게 몇 명 친히 지도를 해주거나, 하루에 수십 번 이상 아르페 성분이 부족해 달라붙는 메테르나 시에나와 놀아주거나 하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도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시간마다 한 번씩 의무적으로 도주를 시도하는 레이제나를 미리미리 붙잡아주고, 투덜거리는 그녀와 놀아주는 일이 있었다. “······이미 여자가 있으면서, 새로운 연하를 찾아 헤맨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 “아, 그러니까 아니라고.” “골렘은 성기능이 없다. 애석하지만, 응답 불가.”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플라토닉?” “······.” 아무래도 레이제나는 아르페를 놀려먹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터득한 모양이었다. 아르페는 레이제나에게 쓸모없는 지식을 가르쳐준 시에나를 원망했지만 그녀는 그저 순수한 미소와 함께 ‘레이제나가 오빠랑도 잘 놀아서 다행이다!’같은 말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둘이서 제법 대화를 나눌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젠장, 이거 힘드네.” “예쁘다아.” “점점 더 예뻐지는걸.” [먀아아아.] “깨어나기, 직전.”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서서히 데마이트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데마이트가 마나를 흡수하고 방출하며 뿜어내는 찬란한 빛에 원래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다른 일행들마저 그의 작업을 지켜보게 되었다. 문제는 안으로 파고 들어가면 파고들수록 원석이 점점 더 단단해졌기 때문에 작업속도도 점차로 느려졌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다이탄 군의 본영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완성하고 싶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데마이트의 완성까지 아주 조금을 남겨둔 상태에서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고 말았다. “도착했으니 이제 내리면 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지?” 마차의 문을 연 부대장에게 죄는 없었으나 아르페를 포함한 전원으로부터 무언의질책을 받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타이밍 한 번.” “이제 곧. 이제, 곧.” 마음 같아선 데마이트가 완성될 때까지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별 수 있나.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데마이트를 품에 집어넣고는, 아쉬운 눈으로 그의 품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레이제나를 시에나 쪽으로 슬쩍 밀어내며 부대장에게 대꾸했다. “그래, 가자, 가.” “이미 기사 한 명이 보고를 위해 달려갔으니 곧······.” “끄아아아아악!” 부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본영의 거대한 막사 쪽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페가 피식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내 부하의 목소리다.” 부대장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가 뒤를 홱 돌아본 그때, 막사로부터 수십, 수백 명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전의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적의 수뇌가 본영에 침입했다! 모두 죽여라!” “마도사······ 이게 대체.” 어쩜 이렇게 예상했던 그대로 일이 풀려갈까. 아르페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부대장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자, 내가 누구랑 딜을 하면 될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3 > 기껏 전쟁을 이기게 해줄 우군을 모셔왔더니만, 본영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부하의 죽음과 수백이나 되는 기사의 적의였다. 부대장은 뜬금없는 상황 전개에 넋을 놓고 말았지만 아르페는 일말의 배려도 없이 그를 채근했다. “누구랑 딜하면 되냐니까.” “딜이라니, 한가롭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선은 이 오해를 풀어야······.” 어리석어도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나. 아르페는 비웃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오해를 푼다, 그거 좋지. 그래서······ 잔뜩 화가 나서 달려오는 기사들을 상대로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저들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죽어버린 네 부하가 했을 말과 얼마나 다를 것 같아?” 오해는 잘못 나온 답이다. 따라서 오해란 본디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다른 답을 원한다면, 이쪽에서도 다른 문제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보다 알기 쉬운 문제를 말이다. “······.” “그러니 대답해. 내가 저들 중 누구랑 얘기하면 되는 거지?” 부대장은 그의 말에 대꾸를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는, 이내 짧게 한 마디만 내뱉었다. “저들 중에는 없다. 막사 안에 있다.” “알겠어. 너희는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메테르, 혹시 모르니 전투 대비해두고.” “응!” 메테르에게 일행을 맡긴 후, 아르페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그는 달려오던 기사들 한중간에 서 있었다. “강력한 마도사? 전쟁용병?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를 이곳에까지 데려왔단 말인가! 정녕 제정신이더냐!” “마도사라면 당연히 에이디아의 전력임에 당연! 그런 뻔한 거짓부렁에 속아······엇!?”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기사들은 아주 잠깐 동안 아르페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 아주 잠깐이면, 아르페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행하기에 충분했다. “너희도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아르페가 휘두른 한 줄기 마나 스트링이 바닥을 얕게 쓸었다. 양다리를 잃은 기사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쓰러졌다. 달려가던, 달려오던 수백 명의 모든 기사가 일제히. “크하악!?” “다, 다리. 내 다리가!” “얌전히 있어. 너무 버둥대면 상처 단면이 닳아서 자연스럽게 붙이기가 힘들어져.” 아르페의 말에 놈들이 귀신 같이 얌전해졌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막사로 다가갔다. 그가 벌인 짓을 알았는지 곧장 막사가 열리며 추가 인원이 튀어나왔다. “크아아아아악!” 그리고 먼저 나온 놈들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난 대화가 하고 싶을 뿐이야.” [먀먀먀아.] “아냐, 얼어 죽은 건 내 대화 방식이 아니라 이놈들의 에티켓이지.” 몇 명인가가 더 튀어나왔지만, 놈들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다리 잃은 기사들을 보며 창백하게 굳어 멈추어 설 뿐이었다. 사실 이미 이 시점에서 아르페는 다이탄과 티아타 연합군의 전력 30% 이상을 무력화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이럴 수가.” “너희 중에도 대표는 없지?” 아르페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를 열어젖혔다. 이미 그 안에 있던 기사들이 대량으로 빠져나갔으니 막사 내부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는데, 저 너머 마련된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있는 몇 명인가의 인물만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침입자가 여기까지 들어오게 놔두다니, 기사들 기강을 바로잡아야겠군!” 그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만물열람으로 살펴보니 그는 레벨 230에 달하는 기사로, 다이탄 왕국의 후작과 동시에 군사령관을 겸하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는 건 가장 상석에 앉은 자는······. [안젤로 제아드] [인간] [국왕] [레벨 ? 243] 다이탄의 젊은 국왕이 아르페를 마주 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 눈이군.” “응, 네가 왕이구나. 그런데 특이하네.” 아르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음 순간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검을 뽑아 쥐고 그에게 덤벼오는 군사령관에게는 이미 관심의 조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다이탄의 윗대가리는 원래 배에 근육보다는 기름이 많이 끼어있는 놈이었을 텐데.” 그리고 배에 낀 기름만큼이나 욕심도 많은 놈이었다. 그래서 전생에서의 용사 파티는 이쪽 대륙으로 넘어와 고생밖엔 하지 못했다. 어느 나라고 마왕과 용사 사이의대립을 이용해먹으려는 빌어먹을 놈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 말이 맞아. 하지만 얼마 전에 바뀌었다. 아니, 바꾸었지. 마침 좋은 기회가 있었거든.” 좋은 기회라? 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아르페의 머릿속으로 문득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처럼 느껴지는 프레이트에서의 경매와 크라켄. 디아스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많은 나라에서 욕망을 품은 자들이 잔뜩 몰려와 대참사를 일으켰던 바로 그때의 광경. 과연, 전생과는 그 부분이 바뀌었나. 디아스의 최대 규모 프레이트 페스티벌로 배에 기름이 낀 귀족들이 전부 그곳으로 몰려간 사이, 루나틱 웨이브로 소통이 완벽히차단된 틈을 타 저들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면······. “무릎을 꿇어라. 감히 어디서 다이탄의 절대자와아아아앗!?” 아르페가 새로운 정보를 획득해 조금 놀라고 있던 때 마침 그의 지척에 군사령관이라는 자가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아르페에게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손가락 끝조차 가져다 댈 수 없었다. 막사에 들어오는 순간 아르페가 깔아둔 마나 스트링의 함정에 걸려 칭칭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얘 죽여도 되지?” [먀먀?] “······참아주면 좋겠어.” 국왕의 답이었다.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는 것은 가상했으나 미소 한구석이 무너져 있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아르페의 힘을 확인해볼 겸 그를 말리지 않았을 터인데 아르페의 실력을 조금도 끌어내지 못하고 제압당해버렸으니. “좋아, 봐줄게. 대신 건방지게 군 대가로 돈은 받을 거야.” “크학!” 아르페가 손가락을 튕기자 놈을 감싸고 있던 마나 스트링이 빠르게 풀려나갔다. 대신 놈 역시 달려왔던 반대방향으로 튕겨나가, 막사의 반대편 벽에 부딪혀 쓰러지고 말았다. “자, 그러면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데 더 말릴 사람은 없지?” “들어볼까.” 국왕에게 그 외에 허락된 답은 없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처음 아르페를 맞아 싸웠던 부대장과 같아, 어차피 통제할 수 없다면 최대한 그와 같은 편에 서서 이득을 보자, 는 것이었다. 레벨만 높은 줄 알았더니 그래도 머리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르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내 제안은 간단해. 너희가 에이디아를 꺾게 해주지. 대신 너희도 내 부탁을 하나들어줘야 해.” “다이탄과 티아타의 연합군은 이미 에이디아와 자웅을 겨룰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그대를 용병으로 고용해야 하지?” “리스크, 그리고 기회비용. 날 고용하면 너희 군의 희생도, 시간의 소모도 현격하게 줄어들 거야. 단언컨대 일주일이면 모든 일이 끝나게 해주지. 내 능력을 봤으니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은 무리겠지. 하지만······ 그대의 능력을 내가 감히 측정할 수 없으니, 지금은 그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국왕은 고뇌했다.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르페는 그것에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그 대가로 네가 치러야 하는 건 내 사소한 부탁이야. 욕심만 크게 부리지 않는다면 무리될 일도 없는 부탁이지.” “그렇다면 일단 그대의 부탁이 무엇인지 들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음, 역시 만족스럽다. 한 국가의 지배자로 이 정도면 심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옛날 용사이야기에 나오는 무식한 왕이었으면 이미 이 시점에서 벌떡 들고 일어나, 괜히 지는 죽기 싫으니까 대신 병사들한테 ‘저 망할 놈을 붙잡아!’ 라고 샤우팅을 지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소, 제아드 공. 저 몸에 지닌 극한의 마력, 분명 에이디아의 것이오!” “모르시겠는가, 에리타드 공. 저 자가 에이디아의 전력이었으면 이 전쟁은 이미 끝나 있었네. 굳이 번거롭게 나와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을 거야. 그것이 저 자가 에이디아의 소속이 아니라는 가장 큰 증거야.” “다이탄 왕!” “그만하시게.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지 않겠는가.” 그는 군사령관과는 반대편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였다. 다이탄의 국왕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누는 자. 만물열람이 없더라도 그의 정체를 능히 알아낼 수 있으리라. 아르페는 이번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티아타 공국?” “하, 그렇다. 내가 바로 티아타 공국의 에리타드 대공이다.” 설마 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말로 다이탄과 티아타의 우두머리가 같은 자리에 있을 줄은 몰랐다. 괜히 티아타 공국까지 들르지 않아도 되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르페가 물었다. “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겠다는데 태클을 걸어? 너희 정말 동맹 맞냐?” “그대처럼 강한 이가 무엇을 원해 우리와 동맹을 하겠단 말인가!” “그럼 너희는 무엇을 원하는데?” “우리는 공국의 독립을 원한다!” 바로 그 순간. 아르페가 그에 바로 따라붙듯이 외쳤다! “하지만 그건 페이크고 사실 진짜 목표는 영원의 숲이다!” “그렇다! 이제 곧······ 뭣!?” 공왕은 거세게 고개를 끄덕여 동조한 직후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바로 그 순간놈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물음표와 느낌표가 떠다니고 있을지 들여다보지 않아도알 것 같았다. “······영원의 숲? 그게 무슨 소리지?” “어, 아니오, 제아드 공. 내가 그만 흥분하여 저 자의 되도 않는 말에······.” “본심을 말하고 말았지. 그래서 이제 곧 영원의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너희가 에이디아와 함께 수 년 동안 준비했던 그 마법이냐?” “······!” 아르페의 이어지는 추궁에 공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단순한 허세라면 그래도 한 국가의 지배자씩이나 되는 그가 당황할 이유가 없다. “어, 어떻······ 그 일은······.” 그러나 아르페의 말은 공왕의 정곡을 찔렀다. 외인이 결코 모르고 있어야 할 정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 당황하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그런데 아르페의 말은 거기서 더 이어지고 있었다. “다 알고 있어. 그래, 다이탄을 꼬신 것도 너희가 먼저지? 공국의 독립이라는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다이탄과 편을 먹어 에이디아를 공격하고······ 하지만 진짜 목적은 독립 따위가 아니잖아. 전쟁으로 일부러 국가 방위에 ‘틈’을 만들어, 그것을 노린 엘프들이 먼저 공국으로 쳐들어오게 만들기 위해서 아냐? ······그들을 멋대로 휘두를 ‘명분’을 얻으려고.” 전생에서 영원의 숲에서 일어난 재앙. 그것은 공국과 에이디아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되찾기 위해 그들이 다이탄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모든 세력을 집결시킨 엘프들이,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돌아선 공국과 에이디아의 수작질에 의해 눈 깜짝할 사이 세계수를 제압당한 사건을 이르는 것이었다. 용사는 당시 에이디아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철석같이 그들을 믿고 있었고, 그렇기에 배신감 또한 컸다. 그리고 깊은 고뇌 끝에 엘프들과 함께 에이디아에 맞서 싸웠다. 그것이 용사가 인간과, 인간의 집단에 칼을 겨눈 첫 번째 사건이었으며······ 용사한 명에 의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왕국이 끝장이 난 끝에 모든 국가가 용사를 두려워하여 지원을 기피하게 되는 최악의 결과에 이르렀다. 그 후로 용사의 싸움은 실로 고달팠다. 마도사가 일행으로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그 시점에서 용사의 모험은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는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에리타드 공?” “아, 아니······ 제아드 공, 아니오!” 아르페는 이미 전생에서 일어났던 일의 전말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그야 물론 일이 전생에서처럼 흘러가지 않았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전 미케나와의 대화와 계약이 그렇지 않음을 증명해준 것이다. “너희 원래 에이디아 공격할 생각 없었잖아. 그런데 티아타가 꼬드기지 않았어?”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란을 일으켜 왕의 자리에 이른 몸. 내게 향하는 원망과 적의를 나라 바깥으로 돌릴 필요성이 있었다. 내게 에리타드 공의제안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지.” “그래서 의심과 망설임을 접어두고 응했구나?” “닥쳐라!” 분위기의 주도권을 아르페가 휘어잡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티아타 공왕이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당장 아르페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은 표정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놈은 다이탄 국왕보다도 훨씬 약한 찌끄레기에 불과했으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곤최대한 분한 표정을 지으며 시끄럽게 외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다이탄 국왕은 지극히 당황해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티아타 공왕보다는, 지닌바 무력으로 판단하여 ‘굳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강자’ 아르페의 말을 더욱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나는 영원의 숲에 대해 잘 모르며 관심조차 없다. 엘프들이 사는 곳이라는 사실 정도가 내가 아는 정보의 전부다. 그런데 그대의 얘기를 들어보면······ 티아타 공국의 목적이 에이디아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그 영원의 숲이라는 곳에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저 남자가 왜 저렇게 당황하고 있는지 생각해봐. 왜 전쟁을 빨리 끝내줄 강자의 등장에 격하게 반응하는지 생각해봐.” 아르페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한손으로 뻗어낸 마나 스트링이 티아타 공왕의 전신을 구속하여 놈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놈은 단지 ‘전쟁’이라는 상태를 오래 지속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렇게까지 말해줬으면 짚이는 게 있을 텐데.” “······.”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동안 아르페가 데마이트만 깎고 있었을 리가 없다. 에이디아의 마도사를 격추하면서, 레이제나를 설득하면서, 일행과 놀아주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지나오는 길, 마을, 도시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며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판단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하나. 전쟁이 시작된 지 다섯 달이나 지난 것치고는 지나치게 양측이 소극적이며, 그 피해 또한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묻는다, 지고의 마도사여.” 다이탄 국왕 안젤로 제아드가 물었다. “티아타 공국의 도움 없이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줄 능력이, 그대에게는 있는가?” “내가 무어라 대답하건 당신이 순순히 믿을 수 있겠어?” “그건······.”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곤 말했다. “순순히 따라와. 당신 눈에 직접 새겨줄 테니까.” 다이탄 국왕은 그의 패기 넘치는 말에 부끄럽게도 조금 압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이 아르페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만은 어떻게든 깨달을 수 있었다. “······좋아, 무슨 부탁이든 에이디아의 무게보다는 덜할 터. 믿고 따라가 보겠어.” “콜.” 아르페가 씩 웃었다. 전쟁의 승패가 갈린 순간이었다.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3 > 끝 ⓒ 토이카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4 > “어리석은!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티아타 공왕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 질렀다. 한 국가가 동맹국을 차버리고 개인을 선택하는 광경을 마주했으니 그야 어이가 없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를 돌아보는 다이탄 국왕의 표정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무엇이 어리석은가? 난 지지부지 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최대한 주관을 배제해 판단을 내렸을 뿐이오.” “정말 그 자의 말을 믿는단 말이오!?” “믿는다? 애초에 우리 동맹 또한 서로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아니오? 중요한 것을 착각하고 있는 듯하오만, 에리타드 공.” 다이탄 국왕의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아르페가 막사 안으로 들어와 군사령관을 날려버릴 때도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그의 목소리에 미약한 열기가 담겼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절대적인 힘뿐이오. 지금 둘 사이에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당연히 마도사를 고를 것이오. 그대가 보기에도 너무나 극명하지 않소?” “그는 에이디아의······!” “그래, 믿는다는 말이 나와 생각해보니 에리타드 공의 변명이 아직이었구려. 그대는 대체 영원의 숲에서 무얼 하길 원하는 것이오? 이제 와서 사실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는 멍청한 대답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을 것이고.” 티아타 공왕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반박했다. “영원의 숲과는 연관이 없다고 하지 않았소! 엘프들과 반목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으리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요! 나는 정말로 우리 공국의 독립을 위하여······!”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마도사를 내치려 했단 말이오? 어째서 그를 다짜고짜 에이디아의 마도사라 규정하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단 말이오! 에이디아에 이토록 강한 마도사가 있었다면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거늘!” 그게 실은 저 막사 바깥에 한 명 더 있단 말이지, 라고 아르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티아타 공왕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한 모양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에이디아와의 유착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 이것이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것은······ 그것은.” 티아타 공왕은 입을 열려다가도 다물어버렸다. 그럴듯하게 변명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까 드러낸 틈이 너무 컸다. 말을 하면 할수록 빈틈이 벌어질 뿐이니 양쪽의 늑대에 물리고 찢겨 피만 토해내는 꼴이 되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자신의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방법뿐이라 생각한 티아타 공왕이, 낯빛을 차갑게 굳히며 말했다. “생각해보시오······! 티아타의 병력이 지원해주지 않으면 다이탄은 전선에서 버티기 힘들어질 것이오! 아무리 강력한 무기가 있다 한들 방패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소?” “······하, 방패라.” 아, 그러나 그 말은 지뢰를 밞은 셈이 되고 말았다. 끝까지 냉정하려 애쓰던 다이탄 국왕의 남은 인내심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특대형 지뢰! “이제 버티는 것만으로는 안 되오. 이미 너무 오랫동안 버텼어. 지난 다섯 달 전선은 지지부진하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할 뿐이었고, 루나틱 웨이브로 바닷길이 막힌 에이디아를 우리와 티아타 양측에서 틀어막고 가을과 겨울 내내 괴롭혀 자원을 소모시킨다는 작전은 적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우리나라만 힘들게 만들고 있소! 이젠 특단의 대책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야!” 항구도시 벨라타를 공격한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 다이탄은 진즉 한계에 이르러 있었고, 국제교전법을 어기면서까지 정예부대를 편성해 내보낸 것도 어떻게든 전쟁의 돌파구를 마련해보기 위한 발악이었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유효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왔어도 문제가 되었겠지. 가뜩이나 침략자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인데 민간인에게까지 피해를 입혔으니, 전쟁에 승리해도 앞날이 캄캄하리라는 사실을 국왕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르페는 물었다. “그 앞서의 작전은 누가 세운 거야? 에이디아를 압박해 소모시킨다는 작전.” “에리타드 공이 제안했고 내가 승낙했지. 하지만 결국 이 꼴이다.” 분노와 무력감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순순히 대꾸해주는 다이탄 국왕. 그러나 아르페는 그 얘기를 듣고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확실히 힘이 강한 만큼 지능은 부족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사나이 의리로 동맹국을 철저히 믿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미련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바다는 막혔고, 육지도 북과 서로 틀어 막혀자원이 유입될 수가 없었을 텐데 그들은 어째서 잘 버티고 있었던 걸까? 그 뛰어난 마도의 힘으로 물자 전송이라도 했을까?”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을 먹여 살리기 위한 물자를 전송한다, 라······ 가능한가?” “내가 백 명 정도 있으면 가능하지. 그리고 그게 가능했더라면 굳이 물자를 전송해 버티는 뻘짓을 하기 보단 다이탄의 수도를 날려버렸을 거야. 즉, 놈들에게 외부로부터 물자를 받을 길 따윈 없었어.” 마왕군 사천왕의 필수스킬 중 하나 이간질! 아르페의 물 흐르듯 이어지는 설득력 있는 언변에 에리타드 대공을 바라보는 다이탄 국왕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져만 갔다. 외부에서 물자를 받을 수단이 없다면 남는 곳은 그들의 동맹국이라 믿었던 티아타 공국뿐이지 않은가! “가당치도 않소! 그 작전은 나와 그대가 함께 세운 것이 아니오!” 온몸이 저릿저릿하도록 쏘아져오는 시선에 대공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다이탄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나는 그대의 말에 수긍했었지. 너무나 시기적절한 작전이었으니까. 그리고 5개월이 지나 그 결과가 이거야. 에리타드 공, 공은 적이 어떻게 물자를 조달했을 것이라 생각하오? 내게 작전을 설득시켰던 그때처럼 다시 한 번 설득시켜보시오.” “제아드 공······!” 끝났다. 물증 하나 없이 심증만 있는 상태였음에도, 분위기가 너무 확고하게 기울어 어떻게 뒤집어볼 여지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다이탄 국왕도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힘이라고. 설혹 티아타가 에이디아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어준다 한들, 다이탄 국왕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티아타 공왕의 이가 빠득, 갈렸다. “정녕 우리 공국을 이토록 무시하겠단 말이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소이까!” “후회라면 이미 지금 하고 있지. 반역으로 왕의 자리에 이른 몸, 민심이 두려워 서둘러 타국과의 전쟁을 일으킨 끝에 국가가 안팎으로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꼴을 보며 하루라도 후회를 하지 않은 날이 없다.” 다이탄 국왕은 말을 마치고 칼을 뽑았다. 어느덧 그의 표정은 눈보라처럼 싸늘하게 식었고, 말투 또한 바뀌어 있었다. “유일한 동아줄을 내버릴 수 없어 썩은 줄 알면서도 붙잡고 있었다. 침몰해가는 배에서 내릴 수단이 없어 가증스러운 연극의 무대에서 몇 번이고 3막을 되풀이하며종막이 찾아오기만 기다렸다. 그대로 가라앉느니 유령선에라도 올라타겠어. 똥칠이 된 줄이라도 새 것이라면 붙잡아보겠다. 내 인생 어리석지 않은 판단이 없었고 무모하지 않은 행동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그와 같이 행할 뿐!” “그래, 그 이상의 후회가 있다는 것을 내가 보여주겠소! 그대가 틀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도 되돌릴 길은 없을 것이오!” “어딜!” 다이탄 국왕이 검에 가득 마나를 담아 티아타 공왕을 향해 휘둘렀다. 이 이상으로분명하게 두 국가의 단절을 상징하는 행동이 있을까! “내가 반드시 오늘의 일을 되돌려줄······ 엇!?” “에잇.” 아르페는 사천왕 시절 갈고닦은 이간질 스킬이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멋지게 퇴장하기 위한 악역의 필독서 상권’에 나오는 대사를 지껄이고 있던 티아타 공왕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특수한 조건을 만족하여 티아타 공왕의 몸에서 발동하던 이동계열 아티팩트가,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에 칭칭 묶여 미처 발동하지 못하고 그의 손으로 이끌려 들어왔다. “뭣!?” “헛!” 티아타 공왕도 놀라고 정작 검을 내지른 다이탄 국왕도 놀랐다. 홧김에 검을 휘두르기는 했다만 설마 한 국가의 수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대로 맞아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그가 휘두른 검에 티아타 공왕이 그대로 두 쪽이 나 죽어버린 것이다! “좋아, 이걸로 티아타는 해결됐고.” “······.” 전 동맹국 수장을 깔끔하게 죽여 버린 다이탄 국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찝찝한 얼굴로 검을 수납하고는 아르페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아티팩트를 회수한 아르페의 표정은 실로 상큼했다. “긴급탈출용 아티팩트, 일회용이지만 써먹을 수 있겠는데. 오늘은 운수대통이야.” “정말······ 그대가 압도적인 능력의 마도사라는 것만은 아주 잘 알겠다······ 후, 그래서.” 다이탄 국왕은 이곳에 남은 ‘유일한’ 동맹 아르페에게 채근하듯 물었다. “이젠 구체적인 방법을 듣고 싶다. 그대 개인의 무력은 인정하는 바이나, 개인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마도사의 능력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그러면서 잘도 전 동맹국 수장을 베어 넘겼네.” “불운하게도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수준의 마도사가 없거든. 그리고 원래 저 새끼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 좋은 핑곗거리가 나타난 김에 저질러버렸다는 것이다. 아르페는 그것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대꾸했다. “나한테 에이디아의 수도를 완전히 망가트릴 수 있는 대마법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돼. 귀찮게 변경부터 시작해서 에이디아 전역을 피로 물들일 필요는 없잖아? 에이디아를 지배할 생각이라면 그곳에서 사는 일반인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고, 무엇보다 다이탄의 병사도 무한한 게 아닐 테고. 난 많은 피가 흐르는 건 싫거든.” 전직 마왕군 사천왕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으나 아르페는 과거의 자신과 결별한 몸! 그렇다고 용사로 뛰고 있는 지금은 또 평화주의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다이탄 국왕은 그의 마력과 마법의 힘을 가늠하느라 바빠 정작 그의 말에는 집중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대가 그렇게 장담할 정도의 대마법이라면, 그것으로 수도를 무력화할 수 있다면······ 믿고 따르겠다 했으니 따를 수밖에. 좋다.” 끝내 계산을 끝낸 것인지, 고개를 들어 아르페와 마주하는 국왕의 두 눈이 반짝였다. “수도까지 전속력으로 가지. 일행은?” “안 그래도 슬슬 날 찾아 울부짖고 있을 때가 됐어. 3시간 후에 다시 모이자고. 핵심병력만 모아줘. 수십 정도.” “수십은 너무 적은 것 같다만······.” “그것도 생색내기용이야. 내 힘으로 에이디아를 무너트려도, 수도를 점령하는 자리에선 당신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테니까.” 다이탄 국왕은 정말 아르페를 고용하기를 잘한 것인가, 고뇌했으나 이미 일을 저질러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씁, 입맛을 다시며 아르페에게 물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을 듣지 않았다. 부탁은 무엇인가?” “아, 그랬지. 아직 그것도 얘기하지 않고 있었네.”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까 얘기한 영원의 숲. 너흰 거기 그냥 놔둬라.” 국왕은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르페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이내 그것이 부탁의 전부라는 것을 깨달은 국왕이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정말 그것뿐인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거야. 당신이 혼자 단속한다고 사람들이 그 말을 들어줄 까닭은 없거든. 그러니까 내 부탁을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이래. 전쟁이 끝나고 에이디아와 티아타를 무사히 흡수하게 되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 사람들이 영원의 숲에 위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아르페의 말마따나 그리 쉬운 부탁은 아닐 것이다. 돈이나 아티팩트라면 그냥 하나 내놓고 끝나겠지만, 이 부탁은 왕국이 이어지는 내내 지켜가야 할 부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아르페의 도움으로 에이디아와 티아타를 모두 정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혹시 그대는 엘프의 후손인가?” 에이디아나 티아타의 일부를 떼어줄 각오까지 했던 다이탄 국왕이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어왔다. 아르페는 답했다. “아니, 그냥 퀘스트야.”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5 > 아르페가 막사를 나왔을 때, 그곳에 다리를 잃은 기사의 무리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아르페 일행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부대장이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어, 어찌······ 되었는가?” “들어가 봐. 아마 너한테 한 자리 줄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그 말은!” 아르페의 대꾸에 화색이 된 부대장이 막사 앞에서 쩌렁쩌렁하게 관등성명을 대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편에 서 있는 마차로 향했다. 일행은 아르페가 마차를 나설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얘기 잘 풀렸어, 아르페?” “당연하지. 아, 그리고 레이제나.” “친근한 부름에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 “······.” 아르페는 역시 한 대 때려둘까, 하고 생각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 막사까지 오는 길에 스스로 이름을 밝혀줬으니 그래도 마음을 제법 열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아르페가 어리석었다. “여기 이거 받아.” 아르페는 그녀의 말에 굳이 따지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레이제나는 미미하게 그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힘이 약해 거스를 수 없다는 듯한 몸짓으로 어쩔 수없이 한 손을 마주 내밀어 그가 주는 것을 받았다. 그리고 표정이 급변했다. “이것······ 어째서?” 그것은 티아타의 공왕에게서 빼앗은 긴급탈출용 아티팩트였다. 티아타 공왕의 것이니 행선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티아타 공국의 심부. 마나 스트링을 다루는 아르페의 실력도 나날이 상승하여, 이제는 굳이 아티팩트를 파괴하지 않고도 그 기능만을 일시적으로 무력화해 수거하는 것이 가능했다. 즉 아티팩트는 멀쩡한 상태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것을 포로인 레이제나에게 내밀다니! 레이제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아티팩트를 받은 모습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아르페는 그 모습이제법 웃기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공왕과 만나서 얻었어. 마침 좋은 기회라 너한테 주는 거야.” “공왕······?” 무심코 반문하던 레이제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막사 안에 공왕이 있었다면, 에이디아를 대놓고 적대시하는 아르페가 공왕과 만났다면······. “공왕은, 죽었는가?” “응.” “좌절. 막지 못함. 공왕, 명령권자 중 하나. 주인 죽음 방치.” 레이제나가 미묘하게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명령에 집착하는 모습만 보면 확실히 골렘다웠지만······ 글쎄, 아직도 핵심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르페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공국에는 공왕 말고 네게 지시를 내릴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겠지?” “긍정.” “그러면 그 아티팩트를 써서 공국으로 가게 되면 당장 널 막는 건 없겠네.” “억압자로부터 풀려나면, 바로 에이디아로 귀환. 자유는 없음. 어리석은 믿음.” 레이제나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하는 표정이었지만 아르페는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네 스펠은 모두 공격과 제압 계열에 치중되어 있잖아. 그 무식한 마나를 전부 이동 계열 마법에 때려 박아도 티아타에서 에이디아까지 가는데 일주일은 걸리는 거 다 알아. 그리고 네가 일주일 걸려서 찾아올 때면 난 이미 모든 일을 마쳐놨을걸.” “······어떻게 내 스킬을, 알았지?” “그런 탐색 스킬이야.” 실은 고유능력이다. 레이제나는 그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긍정. 시일 내에 귀환 불가. 따라서 이 행동으로 인한, 당신의 전술적 손해 없음.······그러나, 이득도 없음. 어째서?” 어째서 굳이 그녀를 티아타로 풀어놓는 짓을 하는가. 파티 멤버로 삼고 싶다고 했으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붙잡아놓고 있어야지,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 왜 갑자기 그녀를 풀어주는가? 그녀의 당연한 의문에 아르페는 이렇게 답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납득. 당신은 바보. 이성적인 판단 불가.” 아르페는 레이제나의 매도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에이디아로 돌아오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티아타에서 출발해서 아무리 빨리 와도 에이디아의 상황은 변할 게 없어. 그렇지? 어차피 변할 건 없으니까, 길을 외곽으로 돌아서 와줘. 영원의 숲 접경 부근으로 말이야.” “길을, 돌아서······?” 아르페의 말을 무시하고 아티팩트를 발동하려던 레이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직접 봐야할 것이 그곳에 있어. 보고 나면, 바뀔 거야.” 그 말에 비로소 레이제나는 아르페가 자신의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레이제나의 마음속에 기묘한 감정 하나가 피어났으나, 그녀는 그것을 부정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골렘은, 바뀌지 않음. 레벨만이, 바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골렘은, 주인을 따른다. 주인과 떨어지면, 주인을 찾아 돌아갈 뿐.” 레이제나는 단정 짓듯 그렇게 말한 후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여 말했다. “그 증명을 위해, 길을 돌아서 복귀.” “결국 부탁을 들어주는구나.” “얄미움.” 그녀는 미약한 의지를 담아 아르페를 째려보면서도 그가 쥐여 준 아티팩트를 꼭 쥐었다. 그리고 아티팩트 발동 직전의 순간 어째선지 시에나를 돌아보았다. 하기야 아르페는 그녀를 붙잡은 장본인인데다 메테르는 그 아르페에게 철석같이 달라붙어 자신을 경계했으니, 그나마 정을 붙일 만한 이가 있다면 시에나뿐이었으리라. 과연 시에나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 레이제나.” “······다시 오지 않음.” 레이제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에나의 말에 한 줄기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메테르가 흥, 코웃음을 쳤다. “그래, 오지 마. 저얼대로 오지 마.” “바보는, 옮는다. 옮기 전에 탈출.” 마지막까지 바보 같은 말을 남기며 레이제나가 떠나갔다. 긴급탈출용 아티팩트답게 발동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져, 그녀를 다이탄의 본영으로부터 티아타로 순식간에 옮겨놓았다. “후, 이걸로 일단락이네.” 아르페가 그 빈자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그와 마찬가지로 레이제나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메테르가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페.” “응?” “아르페는 원래 감성보다는 논리로 움직이잖아?” “그렇지?” “그럼 어째서 저 아이한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성적으로 대한 거야?” 아르페는 그 부분에서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면이 감성적이었는데?” “레이제나는 자신이 골렘이라고 말했는데, 아르페는 계속 그 아이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인 것처럼 대했잖아.” “그야 녀석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래, 역시 그랬구나.” 메테르는 그의 대꾸에 별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 또한 마찬가지. 아마 그녀들은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르페에게 물어본 것 또한 확인에 지나지 않으리라. “오빠, 레이제나는 골렘이 아닌 거지?” 시에나의 질문이었다. 아르페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녀들이 레이제나를 파티 멤버로 맞이하고자 한다면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머릿속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그래. 녀석이 골렘이라면 골렘의 정의는 마도공학적인 측면에서 뒤바뀌어야 해.” 확실히 마도사들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사고하고 성장하며 마법을 부릴 수는 있어도 활동력은 없었던 데마이트에게, 보다 확고한 의지와 그 의지를 바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육신을 부여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 가지 착각이 있다면, 그들은 데마이트로 골렘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골렘은 어디까지나 마도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도구이니까. 그런데 독립된 자아를 지니고 성장하는 레이제나가 골렘이라고? 농담도 정도가 있다. 지금 레이제나의 상태는 데마이트가 육신을 얻은 것,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정도였다. 굳이 말하면 골렘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아니, 한없이 인간과 비슷한 이종족이라고 칭해야겠지. “무수한 시행착오와 터무니없는 자원의 소모가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데마이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육신을 만들어낸 것은 칭찬해줄 일이야. 하지만 거기까지, 마도사들은 골렘에게 그러했듯 그녀를 통제할 수는 없었어. 의지를 지닌 그녀의 육신에 골렘에게나 쓰이는 지배의 술식을 박아 넣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놈들이 선택한 게 바로 암시야.” “암시······.” “그래, 암시.” 암시. 레이제나 또한 선보인 적이 있는 것으로, 그 실체는 정신적인 자극을 주어 그 말을 자연스럽게 믿고 따르도록 하는 마법의 일종이다. 태연하게 수백, 수천의 인간에게 암시를 걸었던 레이제나 본인이 암시에 걸려 있다니 실로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정신과 육체가 미성숙할 때부터 끊임없이 그녀에게 한계를 지어줬겠지. 다른 골렘들이 그러니 너도 그래야 한다. 이것을 어기면 큰일이 난다. 너는 할 수 없다. 무조건 우리만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무수한 암시가 겹치고 겹쳐 가뜩이나 결함이 있었던 그녀의 정신에 절대적으로 작용한 거야.” “원래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 암시 때문에 그렇게······.” 함께한 기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행 또한 레이제나가 얼마나 많은 구속을 당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말을 하려해도 금지된 단어를 입에 꺼내지 못해 우물거리고, 발작적으로 도주를 시도하고, 의무적으로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는 그녀의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으니까.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일행이 무력으로 그녀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뿐, 그녀는 원래 타인과 대화를 나누지않는다. ‘주인’이 시키는 일만을 수행하고, 다 이루면 복귀, 마법수련, 레벨 업. 오직 그것만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녀의 말투가 이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야.” 이내 메테르의 선악판단이 끝났다. 레이제나를 견제하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시에나 또한 메테르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화를 냈다. “정말 나빠. 다 혼내주고 싶어.” “걱정 마. 내가 다 혼내줄 테니까.” 대충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던 아르페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때 메테르가 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물론 그것도 아르페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왜 본인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야, 아르페?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잖아.” “그녀를 붙잡은 적인 내가 말한다고 그녀의 암시가 풀릴까? 그건 오히려 암시를 굳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 “그렇다면······.” “그래서 그녀를 티아타로 보낸 거야.” 원래는 에이디아에 머무르는, 그녀의 ‘주인’을 칭하는 무리를 싹 다 조져버린 후 천천히 암시를 풀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공왕으로부터 티아타 직행 티켓을 얻은 덕에 일이 쉬워졌다. “당장의 상처는 더 클지 몰라. 하지만 이렇게 하는 쪽이 분명 더 빨리 아물어. ······다른 이들의 피해도 그렇게 줄일 수 있겠지.” “영원의 숲의 접경이라고 했지? 그곳에 뭐가 있는데, 아르페?” 아르페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여태까지 봐온 것과 그리 다를 것도 없어. 어느 곳이든, 인간의 욕망이 겉모습을바꿔 도사리고 있을 뿐이지.” 메테르와 시에나는 그 정도 선에서 납득하고 물러났다.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레이제나에게 관심을 집중한 덕분에 자신이 그녀에게 쏟는 관심을 얼버무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은 메테르의 지적이 정확했다. 그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아르페는 레이제나를 감성적으로 대한 것이 맞았으니까. 그녀가 골렘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론 설득력이 부족하다. 레이제나를 대하며 아르페는 어디까지고 불확실한 가능성에 의지했으며, 지나치게 무르게 대했다. 파티 멤버로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레이제나는 마도사들의 손에 탄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족쇄를 차고 2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왔다. 그리고 전생에 마왕에게 속박된 삶을 살았던 아르페는, 그렇게속박된 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레이제나를 보고만 있어도 화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다 완벽하게 마왕을 쓰러트리고 안락한 노후를 즐기고자 한다면 달리 취할 강압적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아르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환생하고 최대한 빠르게 레이제나를 찾아오려 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도 많은 부조리의 화신이나 다름없는데,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사람한테만 동정적으로 반응하니 이기적이기 짝이 없지. 누구냐 대체, 이런 막장마생을 용사로 되살려놓은 놈은.’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것이 아르페 자신인 것을. 그는 저마다 에이디아 침공의 각오를 다지는 일행을 돌아보며 쓰게 웃고는 상념을 접어두고 품에서 데마이트를 꺼내었다.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로아만이 먀아, 하고 짧게 울었다. 아르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이건 안 줘, 임마.” [먀.] 그 날 저녁까지, 아르페는 데마이트의 가공을 모두 끝내는 데에 성공했다. 일행은 다이탄 국왕이 선정한 정예부대와 함께 에이디아의 수도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 Chapter 18. 적과의 동침 - 5 > 끝 ⓒ 토이카 < Chapter 19. 영원의 숲 - 1 > 사실 아르페는 말을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 신체능력에 자신이 없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생에선 자신 외의 다른 생물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한 역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히히히히힝!” “핥지 마! 핥지 마!” 그래서 지금이 더욱 낯설었다. 기사들과 함께 전속력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다이탄에서 준비한 전투마를 받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녀석들이 그를 따라도 너무 잘 따르는 것이다. “정말 아르페를 잘 따르네. ······암컷인가?” “확인했지만 수컷이었어. 그리고 너도 남 말할 때는 아닐 텐데.” 그야 왕실에서 작심하고 길러낸 녀석들이니 사람을 가리지 않고 따르도록 훈련시키기는 했을 텐데, 이건 따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좋아 날뛰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유독 아르페와 메테르에게만 그랬는데, 아르페는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이것이 용사의 능력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용사라는 사실을 들키진 않겠지.’ 사실 이제 강해질 만큼 강해진 터라 굳이 용사라는 사실을 감출 필요도 없기는 하지만, 마왕군의 움직임을 감안하면 대놓고 용사로서 활동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에라, 용사로서 활동하고 자시고 이제 곧 정면으로 부딪히게 될 테니 상관없으려나. 모든 일이 전생과 다르게 돌아가는 걸 보면 이번 생에선 슬슬 사천왕들이 활동할 시기도 됐고. 아, 그래도 마계로 넘어가는 건 이쪽에서 볼 일을 다 본 후로 미루고 싶은데 일이 그렇게 좋게 풀려주지만도 않을 테고······.’ “마도사, 말을 못 탄다면 내 뒤에 타겠는가?” 말에게 얼굴을 마구 핥아지면서도 꿋꿋이 상념을 이어가던 아르페를 다이탄 국왕이 붙들었다. 내심 그것을 바라고 있던 아르페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긍정하려 했으나 메테르가 소박하게 웃으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 뒤에 타면 되겠다, 아르페.” “너도 말 타본 적 없잖아.” “하지만 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이었다!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을 터인데, 아르페를 강제로 자신의 뒤에 앉힌 메테르는 여느 기사들보다도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시에나 역시 그녀에게 뒤쳐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괜히 아르페만 억울해졌다. “나도 말 혼자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돼.” 그러나 남자의 오기는 용사의 개인적인 욕망 앞에 부서져 내렸다. 메테르는 절대로 아르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난 그냥 평생 이러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난 켄타우로스는 취향이 아냐.” 아르페는 냉정하게 대꾸해주며 한숨을 쉬었다. 그들 바로 옆으로 시에나가 탄 말이 달리고 있었고, 또 반대편 옆으로는 국왕이 탄 말이, 그리고 나머지는 일행을 호위하듯 사방에서 둘러싸고 달리고 있었다. “이거, 마법사들 폭격 맞아 죽기 딱 좋은 진열이네.” “실제로 전쟁을 치르는 내내 그랬지. 내전에선 그저 뭉쳐서 달리면 다 밀어버릴 수 있었다만······.” “힘이 있으면 아무리 마도사가 적이라도 그냥 밀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런 돌대가리니까 티아타 공왕한테 여태 속았지.” “······아군이지만 정말 얄밉군.” 다이탄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마도사 대책이 미비했다. 아마 그 부분을 티아타에의존했던 것이 아닐까 싶긴 했는데, 그 부분에서 최악의 인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느린데. 이대로 일주일 안에 에이디아 왕궁으로 쳐들어갈 수 있겠어?” “모두 레벨 80을 넘기는 준마들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말에는 문제가 없다, 라.” 그러면 남는 건 녀석들의 장비인가. 아르페는 잠시 고민하다가는, 이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을 펼쳤다. 그의 전신에 잠들어 있던 마력이 마구들끓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후우······ 가라.” “아르페?” 활성화되는 그의 마나를 느낀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한 다음 순간. 아르페의 마력이 맹렬히 질주하던 전투마 모두를, 정확히는 녀석들의 발굽에 달려 있던 편자와 안장을 감쌌다. 왕을 비롯한 모두가 그 순간 마나가 발동했다는 것을 깨닫고 움찔하며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마법을 쓴 것인가?” “마법이 아니라 스킬. 이제 곧 알게 돼.” 아르페가 발동한 스킬의 이름은 강화. 언제나 하던 것과 같은 영구적인 강화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사물의 성능을 끌어올려주는 강화였다. 아르페의 강화 스킬은 이것저것 못하는 게 없는 멀티플레이 스킬이니까! 일시적 강화는 영구적인 강화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마나가 적게 들고, 한꺼번에 여럿을 강화하기 힘든 영구적 강화에 비해 동시다발적으로 발현하는 것이 수월하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멸되기에 생각 없이 막 내지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야말로 지금 같은 상황에 적격이 아닐 수 없다. ‘자, 그러면······.’ 편자를 강화시켜 말의 피로를 덜고 다리근육에 영향을 미쳐 더욱 빨리, 오래 달릴수 있게 하고, 안장을 강화시켜 그 위에 앉는 사람의 활력을 돋운다. 편자와 안장의 상징적인 의미와 기록을 마도의 힘으로 극대화하여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 그게 바로 아티팩트를 만든다는 것이다. 아르페는 강화 스킬로 수십 마리 전투마의 마구를 일시적으로 아티팩트화 하는 데에 성공했다. “말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어!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럴 수가, 분명 질주하는 말 위에 앉아 있는데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하다니!” 곧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르페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살짝 재수 없었지만 그의 간단한 손짓 한 번에 일행의 이동속도가 족히 20% 이상 빨라진 것은 물론 여행의 불편함까지 해소된 것이 사실. 국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르페를 바라보았다. “모든 마도사가 이렇게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 나만 이래.” “오오, 정말 재수 없군.” “곧 그 말을 후회하게 될 거야.” 아르페는 흥, 코웃음을 치며 다시 한 번 양손을 펼쳤다. 그 모습을 본 국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설마 한 번 더!?” “아니, 그럴 리가.” 아르페의 몸 바깥으로 빠져나온 마나가 반쯤 실체화되어 일렁거렸다. 개인이 지니기엔 너무나 압도적인 마나. 그것이 모두 강화 스킬에 맞게 가공되어 재차 편자와안장을 감쌌다. 그것이 한 번, 다시 한 번 더. “이, 이럴 수가······!”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국왕의 표정을 보며 아르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더.” “진심으로 재수가 없군······!” 그러나 아무리 아르페의 마나량이 대단해도 수십 마리의 전투마가 착용하고 있던편자와 안장을 동시에 세 번 연달아 강화하니 80% 이상이 쫘악 빠져나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헥헥거리며 메테르의 등에 기대어 물었다. “어때.” “지금도 좋긴 한데 지쳐서 기대는 느낌 말고 좀 더 사랑스럽게 꼭 껴안아주면 좋겠어.” “아니, 나 말고 말 속도 임마.” “음, 한 세 배 정도로 빨라진 것 같아.” 제아무리 일시적인 강화라 해도 연달아 세 번, 사물을 격변시키는 마나의 흐름이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그 변화가 일시적으로 끝날 리가 없는 것. 전투마를 감싼 편자와 안장은 저마다 붉은 광택을 발하는 금속 재질의 하급 아티팩트로 변화했다. 강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 그 힘을 잃는다 해도 아마 영구적으로 한 번 강화한 정도의 효과는 남으리라. “마도사란 정말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태연하게 저질러버리는군.” “정말 전율스러운 힘이야. 동경하게 되는군.” “어렸을 적엔 나도 마도사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지······.” 왕을 비롯한 기사들은 전투마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환호했다. 북방의 사나이들은 좌우지간 빠르기만 하면 환장을 하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메테르는 전투마와 호흡을 맞춰 달리면서도 어딘가 뚱한 표정이었다. “······일주일도 너무 짧은데.” “시끄러워, 바보야.” 뜻하지 않은 아르페의 조력으로 인해 일행은 정말 강습조라는 말에 어울리는 속도로 에이디아의 수도로 돌진하게 되었다. 말과 사람의 성능, 내구도를 모두 극한으로 끌어내 휴식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니 농담이 아니라 종전의 세 배는 되는 속도로 이동하는 셈이 된 것. 그러나 한창 전쟁 중인 영토를 고속으로 내달리는 인마의 무리에 시선이 쏠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에이디아는 원래부터 전국에 깔린 마법 통신으로 타국은 넘볼 수 없는 정보수집 양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당장에 왕궁에 그들의 행적이 보고되고, 마도사와 호위부대로 구성된 정예부대가 그들의 돌진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다. “멈춰라!” “전쟁의 스트레스에 기어이 돌아버렸는가, 다이탄 국왕? 에이디아의 심부로 기어들어오다니 다섯 달 동안 당해놓고도 아직까지 힘의 차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 물론 거리가 거리이니 바로 왕궁 마도사들이 튀어나오지는 못했지만, 공간마법과 저지마법을 위주로 다루는 부대가 1차로 달려와 그들을 막고 있으면 공격마법으로 적을 섬멸하는 역할을 맡은 마도사들이 깔끔하게 그들을 마무리······ 할 예정이었다. “마도사, 저들의······.” “알아.” 그러나 저 멀리서 나타난 마도사들이 대지를 미끄럽게 만드는 마법이나 흙의 방벽을 세우는 마법으로 그들의 돌진을 저지하기도 전에,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놈들의 접근을 확인한 아르페가 손을 가볍게 휘둘러 그 모든 것을 무력화했다. “크학!?” “마, 마나가! 보고를, 왕실에 보고를 올려야······ 카학!” 순식간에 제압당한 마도사들은 그 순간 다이탄 군에 그들보다 훨씬 강한 마도사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그 사실을 어떻게든 왕실에 알리려 했으나 마법이 저지당한 순간 이미 승패는 나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킬 레벨이 오르고 올라 이젠 수 킬로미터 바깥에까지 물리력과 마력을 동시에 지닌 마나 스트링을 쏘아낼 수 있게 된 아르페가 그들이 한가로이 마법을 발현하거나 아티팩트를 발현하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지 않은가! “큭, 감지, 감지 마법이다! 적의 마법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 “멍청한 것들, 마도사 본인을 공격해라!” “사정거리가 모자랍니다! 더욱이 마나 자체가 파훼당하는 느낌이······ 칵!” 허공에 몇몇 고레벨의 능력자들만이 확인할 수 있는 수백 줄기의 가느다란 마나 스트링이 넘실거리며 아르페의 의지에 반하는 모든 것을 가르고, 부수고, 지워냈다. 바로 그 몇몇 고레벨의 능력자 중 하나인 메테르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결국 마나 스트링이구나?” “불만 있냐.” 마나 스트링은 얻은 직후부터 아르페의 주특기로 등극한 마법이다. 그러나 지난 1년간의 아르페는 사실 다른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부러 마나 스트링을 사용하는 감이 있었다. 그것은 마나 스트링이 다방면으로 유용한 스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년 전 에인션트 크라켄과 싸운 그때 이루어진 유니크 스킬, 스펠의 강화가 그냥 불발로 끝났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별 반응이 없단 말이지.’ 만물열람으로도 완벽하게 확인할 수 없는, 특정될 수 없는 혼돈을 품은 유니크 스펠. 1년 사이 60레벨을 넘어 70레벨의 고지를 넘보고 있는 지금까지도 아르페는 이스펠을 완벽히 다룬다고 자신하질 못했다. “괴, 굉장하다. 저 많은 숫자의 마도사가 나타난 순간 끝장이 났어······!” “오오오, 우리의 마도사는 무적이다! 무적!” “마도사! 마도사!” 여태껏 그들을 엿먹여온 에이디아의 마도사들이 허무하게 추락하는 꼴을 본 다혈질의 다이탄 기사들은 아르페를 칭송하며 기뻐했다. 바로 그 아르페한테 바로 얼마 전 본인들이 제압당했던 것은 새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굉장하네, 마도사! 이대로라면 정말 사흘 이내에 왕궁을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지 몰라!” “이렇게 떠들썩하게 이동해서야, 적에게 단단히 대비를 하라고 일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대는 지금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틀리지 않아.” 역시 한 나라의 왕 자리를 차지할 만큼 감은 좋군. 아르페는 국왕의 말에 히죽 웃으며 긍정했다. “최대한 약을 올리는 거야. 열이 바짝 올라 수도에 온갖 무기 다 갖추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도록 만들어야 해.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할 만큼 시간을 많이 줘서도 안 되지.” “대체······ 수도에서 무슨 짓을 벌일 생각이기에?” 누군가 한 명은 물어봐주길 원했는데, 아주 좋은 타이밍이지 않은가. 아르페는 국왕의 물음에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지상 최고로 더럽고 화려한 축제지.”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 하고도 한나절. 아르페 일행은 에이디아의 수도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 Chapter 19. 영원의 숲 - 1 > 끝 ⓒ 토이카 < Chapter 19. 영원의 숲 - 2 > “후, 보인다.” “······정말 보이는군.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쳐부수며, 때론 조금씩 쉬기도 하고 때론 말을 치유하기도 하며 일행은 끝내 고작 이틀도 지나지 않아 에이디아의 수도 레이즈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훈련된 전투마를 타고 휴식을 최소한으로 잡아 전속력으로 이동한다는 가정 하에일주일을 예상했던 다이탄 국왕의 콧잔등을 후려갈기는 스코어였다. “폐하, 조금씩 속도를 늦추겠습니다! 적군이 보입니다!” “와아, 저렇게 많은 마도사가 모여 있는 건 처음 봐!” 에이디아는 소규모의 정예부대를 차례대로 내보내봤자 그들의 질주를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도중에 작은 규모의 영지 하나를 통째로 불태워 막아보려고도 했지만 마법이 제대로 발동하기도 전에 파훼되자 끝내 수도의 힘이 아니면 막을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르페 일행의 전력을 알아보기 위해 나간 마도사들의 연락이 전부 끊기는 바람에 그들의 규모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고, 따라서 에이디아는 국가 건립이래 최악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모든 자를 동원해 적을 막아내는 것! 마도왕국 에이디아이기에 펼칠 수 있는 마도사의 물량공세였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일반 시민들의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페를 위시로 하는 다이탄 군의 진격은 개시되고 이틀도 채 지나지않았고, 에이디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짧았으니까. “에이디아는 워낙 지방마다 방어설비가 잘 되어 있어 수도까지 털리는 일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어. 당연히 수도 공습 상황에 대비한 대피시설도 메뉴얼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지.” 적군의 공습에 통째로 뒤집어진 수도의 정경을 보며 아르페가 일행에게 해설했다. 마도사들은 전부 집결하고, 수도 내부의 민간인들은 우왕좌왕하는 꼴이 우습기까지 했다. “그러면 아르페, 혹시 우리는 민간인들까지 죽여야 하는 거야?” 메테르가 입술을 짓씹으며 하는 말에 아르페는 피식 웃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수도로 바로 쳐들어가기로 결정한 건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어. 그런데 그런 일을 지시할 것 같아?” “하지만 아르페, 저 수도에서 느껴지는 마나량은 너무나 많아. 과연 우리가 저것들과 충돌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할 수 있을까······?” “충돌이라니?” “응?” 예상치 못했던 타이밍에 돌아온 아르페의 반응에 메테르의 고개가 기울었다. 아니,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설마 적군과 싸우는 부분에서부터 태클을걸어올 줄이야! 그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이탄 국왕이 설마, 하며 물어왔다. “적과 충돌하지 않고 수도를 제압하는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 우리를 맞아 쳐죽일 준비를 하고 있는 적들한테 솔직히 돌격해서 피를 볼 이유가 없잖아······? 나는 몰라도 기사들은 무진장 죽어나갈 텐데.” “하지만 적이 저렇게 대비를 하도록 만든 것은 그대가 아닌가······?” 다이탄 국왕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피 두 사발 정도는 기꺼이 내어주마!’ 라는 표정이었지만 아르페는 그저 픽 웃을 따름이었다. “내가 지상 최고로 더럽고 화려한 축제라고 했잖아. 축제에서 사람이 죽어나가서야 쓰나.” “무수한 인간이 한 데 뭉쳐 죽어나가는 전쟁이야말로 축제가 아니고 그 무엇이란말인가?” “아니야. 너흰 아무짓도 하지 마. 내가 직접 보여줄 테니까.” 이래서 뇌에 근육만 가득 찬 기사들은 안 된다니까. 아르페는 쩝, 혀를 차며 한 가지 마법을 영창했다. 그의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먼저 갈 테니까 너희들은 조금 속도를 늦춰서 따라와. 마도사들은 내가 가는 길에 막아줄 테니 안심하고.” 그것은 마도사라면 누구나가 극초반에 익히는 마법이지만 유독 아르페만은 운이 없어 레벨 250을 넘길 때까지 못 익혔던 스펠, 바로 부유였다. 사실 아르페 레벨의 마도사 정도 되면 부유가 아니라 비행, 아니 그것도 아니고 공간이동 정도는 사용해줘야 어울리는데 하필이면 이동계열의 마법서가 징하게도 안 나오는 탓에 지금은 부유를 익힌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믿느니 오직 미케나 뿐, 그러나 여태까지 수중에서만 노느라 미케나와 만난 적이 없다. 이번에 영원의 숲 퀘스트를 해결해주는 걸 빌미로 보다 격렬하게 쪼아 마법서를 구해내고야 말겠다고 아르페는 다짐했다. “그나마 부유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역시 루팅은 하고 볼일이라니까.” “그냥 포로로 붙잡은 마도사들의 물건을 빼앗았을 뿐이잖아? 그중에 운 좋게 스펠 북이 있었던 거구······.” 마도사 중 몇몇은 스펠 북을 품에 지니고 다니기도 한다. 이미 해당 스펠을 스펠 북으로 익혔음에도 어쩌다 다시 스펠 북을 얻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탓이다. 그러면 팔아먹거나 다른 누구를 주면 될 텐데, 대다수의 마법사는 그 스펠 북을 꽁꽁 감춰두거나 품에 가지고 다녔다. 스펠 북을 연구한다거나 기념 삼아 간직한다거나 하는 것이 겉치레고, 괜히 스펠 북을 팔아치웠다가 자신의 경쟁자가 익혀 더 강해지기라도 하면 짜증이 난다는 것이 속내다. 마법사는 선천적으로 자기과시를 좋아하고 속이 좁은 놈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다. “자, 그럼 어디 출동해볼까.” “아르페, 위험한 짓은 하면 안 돼.” “위험한 짓은 안 해. 위험한 짓은.” 부유 마법 하나 달랑 걸고 수도로 날아가는 놈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아르페는 어디까지고 당당했다. 그의 몸 주위로 넘실거리는 마나 스트링을 보고 있노라면 일부 믿음이 가긴 했다. “오빠, 우리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어?” “고용주가 죽지 않게 보호만 해주면 돼. 어느 순간부로 수도는 물론이고 마도사들 전체에게 어마어마한 혼란이 닥쳐올 거거든? 그때 정신이 사나워지기 쉬우니까 눈 똑바로 뜨고 있어.” “응, 으응······.” “그야 수도를 제압할 마법이라 장담했으니 요란하지 않을 리는 없겠다만······ 수도에 이토록 많은 이가 모여 있는데, 그들의 목숨에 피해를 입히지 않고 제압한다고?” 다이탄 국왕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미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모두 전달한 아르페에겐 더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딱히 대꾸해주지 않고 뒤돌아서서는 쏜살같이 수도의 상공으로 돌진했다. 그것을 보는 이 누구도 부유마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 이게 다 압도적인 마나를 퍼부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저 자다! 저 자가 에이디아에 반기를 든 마도사다!” 아르페가 허공 높이 떠오르니 아무래도 눈에 띤 것일까, 저 너머로부터 쩌렁쩌렁 외치는 자들이 있었다. 아르페는 에이디아에 적을 둔 적이 없는데 반기라니 허풍도 정도가 있다. 설마 저들은 세상 모든 마도사가 에이디아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마도사들의 편협하고 오만한 판단을 마음껏 비웃으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은혜도 모르고 이를 드러내다니 멍청한 것······ 저 자를 징벌하라!” “에이디아의 힘을 보여라!” 수도 상공으로 무수한 마법이 솟구쳤다. 가장 흔한 마법인 마나탄부터 파이어볼, 스피어, 드물게는 아르페가 날아오는 일대를 점령해버리는 범위마법까지도 있었다. 형형색색의 마나와 저마다의 형태를 지니고, 폭죽놀이라도 하듯이 솟구치는 마법의 향연. 그 하나하나에 사람을 가볍게 죽일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본다면, 그것은 정말 일생에서 두 번은 다시 만나지 못할 장관이었다. ‘여태까지 내보낸 마도사들이 전멸 당했다는 걸 알면서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정면으로 순진하게 마법을 날려 오는 건지. ······하지만 그래, 마도사란 원래 그런 것들이었지.’ 하늘 높이 뜬 아르페는 무수한 마법이 쇄도해오는 것을 보며 전생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겪은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고 지켜본 것일 뿐이지만. ‘그때 이 자리엔 레이제나가 있었지. 진실을 깨닫고 잔뜩 뿔이 나 용사와 같은 편에 선 그녀를, 에이디아는 끝까지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어. 지극히 어리석게도······.’ 사천왕 최약체로서 용사 파티의 감시를 명받은 아르페는, 한 명의 소녀가 자유를 되찾는 그 모습을 보며 응원해선 안 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더랬다. 절대지배의 발동으로 그 이후 한동안 괴로워했던 것도 지금은 좋은 추억······아니, 역시 좋은 추억은 아니다. “저 자의 영혼에 마도왕국의 법도를 새겨주어라!” “그 정도로는 부족해, 더 쏟아 부어라!” 아르페가 유유자적 떠 있는 꼴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아르페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마도사들이 신나게 마나를 소모하며 마법을 추가로 발휘했다. 전쟁을 앞두고 포션의 징발이라도 한 것인지 끊임없이 포션을 마셔대는 꼴이 짠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쏟아 부어도 안 된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는 시점에서 너흰 끝난 건데 말이지.” 아니, 레이제나를 끝까지 구속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던 시점에서부터 진즉 끝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놈들이 완벽하게 끝장나기도 했다. “에잇.” 아르페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수백에서 수천 줄기로까지 분열한 마나 스트링이 넘실거리며 뻗어나가, 한 줄기 한 줄기마다 각기 마법 하나씩을 지워나가며 기세를 줄이지 않고 질주했다. 전혀 긴장하지 않아도 쉬이 막아낼 수 있는, 그저 아주 조금 귀찮을 뿐인 공격. 에이디아의 마도사들이 부릴 수 있는 마법이란 지금의 아르페에게 딱 이 정도였다. ‘지금 전선에 나와 있는 자들 중에서 200이 넘어가는 마도사는 고작 셋. 티아타와 영원의 숲에도 파견되어 있을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강자가 너무 적어.’ 그것도 대륙최강의 마도왕국이라는 에이디아가 이 꼴이다. 그러니 용사가 없이는인간계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셈인데, 고작 이 정도로 기고만장해져선 다른 궁리나 하고 있다니 눈물이 나올 만큼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과거를 되풀이할 수는 없으니까.” 아르페는 하늘 한가운데에 서서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마법을 끝도 없이 지워가며 천천히 눈을 감고는, 마나 스트링에 할애하는 마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추악한 욕망의 배설구여.” 그리고 아르페가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대마법의 영창을 개시했다. “인간의 더러움까지도 모두 받아들인 끝에 비참하게 갇힌 자연의 신비여.” 위치는 이미 제대로 잡았다. 아르페는 마법들을 전부 막아내며 어느덧 에이디아의 수도 레이즈의 정중앙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삭혀온 분노를 드러내라. 인간의 주제를 가르쳐라.” 마법진? 놀라워라, 아르페가 마련할 것도 없이 이미 그가 발현코자 하는 마법의 마법진은 레이즈 전역에 깔려 있었다. 아니, 찾는다면 분명 다른 도시에도 철저하게깔려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아르페가 설치한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설치한 것이다. “내가 허하니 지금은 자유를 되찾아라. 마음껏 폭주하라.” 그의 품 안에서 서서히 자색의 마법구가 떠올랐다. 가공을 끝마쳐 자아를 품고 태어난 데마이트가 아르페를 도와 영창을 보조하며, 그의 마력을 한없이 증폭해주었다. “저놈이 마법을 부린다! 마법진, 마법진을 이용한 대마법이야!” “바보 같은,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면 우리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 “부숴! 지금 당장 마법진을 부숴야 해!” “하, 하지만 마법진이······ 오, 맙소사.” 그래, 부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도왕국 에이디아의 번영을 상징하는 마법진. 순수한 마나뿐만이 아니라물질의 도움으로 구축된 금세기 최고의 비술. 마법진으로 완성되어 영구히 그 마법을 유지하는, 마법의 활용도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인류는 물론이고 마족에게까지 상기시킨 위대한 마법진이니까! “그렇게, 모두를 평등하게 뒤덮어라.” 끝내 아르페는 마법을 전혀 방해받지 않고 완성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어린 것은 회심의 미소가 아닌 체념의 표정이었다. “역류하라.” 데마이트에 모조리 빨려 들어간 아르페의 마나가, 한순간 레이즈 전역으로 확대되어 지상 ‘아래’에 파묻힌 마법진에 스며들어갔다. 아르페는 정말 이 짓을 해야 하나 싶은 표정으로, 주문의 끝을 맺었다. “갓, 플러쉬.” ······에이디아의 수도 레이즈 전역에 설치된 하수도 시설이, 일시에 폭발했다. < Chapter 19. 영원의 숲 - 2 > 끝 ⓒ 토이카 < Chapter 19. 영원의 숲 - 3 > “끄아아아아아!” “꺄아아악!” “익, 더럽! 으아아아아아!” 수도에 머무르는 모든 인간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타이밍을 맞추어 수도 곳곳이 펑펑 터져나가며 수도 전역에 설치된 인공의 플러쉬 마법진, 하수도관을 따라 흐르던 온갖 오물이 솟구쳤다. “이게 뭐야! 뭐냔 말이야!” “어, 어떻게······!” 당연하지만 마도사들도 오물 세례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주둔하는 시설의 하수도관이 성대하게 폭발하며 놈들에게 끝내주는 화장을 해주었다.어지간한 규모라면 배리어 마법으로 막기라도 하겠는데 수도의 하수도관이 통째로 폭발하니 아무리 방어 마법을 써도 못 막는 부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이이이이이!” “감히, 감히 이런 짓을!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겠어!” 레벨 200이 넘어가는 마도사건 레벨 1에 머무르는 평민이건 공평하게 오물을 뒤집어썼다. 심지어 갓 플러쉬는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는데, 일단 하수도관을 박차고 나온 똥오줌 섞인 물이 곳곳에서 소용돌이를 치며 건물을 부수고, 거리 사방으로튀겼다. 정말 더러웠다. 정말로 더러웠다. “그러게 누가 마법진 만들어놓으랬나. 만들어 놓을 거면 보안을 철저히 하든가.” 물론 만물열람으로 마법진의 구조를 단숨에 파악하고 나아가 지배할 수 있는 아르페가 아니고선 누구도 이런 장관을 만들어낼 수 없었겠지만 알 바 아니었다. “좋아, 그럼······ [흠흠!]” 아르페는 인명은 살상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마음과 수도의 건물만을 골라 죽이는위대한 마법, 갓 플러쉬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한편으로 또 하나의 마법을 발동했다. [다들 내 말 들리지? 난 다이탄에 용병으로 고용된 마도사야.] “저, 저놈이!” “죽여 버리겠다!” 그것은 아르페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도록 도와주는 확성 마법이었다. 그것도 수도 전체에 퍼질 만큼 압도적인 확장력을 지닌 고위의 확성 마법! 미케나는 이런 잡다한 마법은 고위 계열까지 잘만 구비해놓으면서 어째서 실전 마법의 구비는 느린 것일까, 아르페는 속으로만 한탄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방금 구사한 마법은 갓 플러쉬야. 너희가 레이즈에 설치해둔 플러쉬 마법진을 이용한 덕에 아주 쉽게 광범위한 영역에 발동할 수 있었어. 고마워.] 아르페는 그 말로 에이디아의 하수도 시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모든 마도사의 복장을 효과적으로 터트려버렸다. 마왕군 사천왕으로 재직하며 어느 타이밍에어떤 말을 해야 상대방을 최고로 약 올릴 수 있는지 숙달한 아르페의 솜씨는 과연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알는지 모르겠는데 플러쉬 계열 마법의 발동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어. 첫 번째는 모두 흘려보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물의 흐름을 뒤틀어 역류시키는 거지. 방금 내가 실시한 건 그중 두 번째 방법이야.] 아르페는 여유롭게 마나 포션을 들이키며 그가 사용한 마법을 해설했다. 그것만으로 마도사들의 멘탈에 추가 데미지가 들어갔다. 이미 수도로 쳐들어오는 기사들 따위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마도사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달려와 마나 간섭이나 방어 마법, 정화 마법 등을 급히 펼치고 있었으나 결국 마법은 테크닉 싸움! 사천왕 최약체를 거쳐 용사로 거듭난 아르페의 마법 행사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이 나라 에이디아에는 없었다! [소용없어. 땅 파내고 너희가 만든 수도 시설을 일제히 들어내지 않는 한은 못 막아. 얌전히 똥으로 샤워하도록 해.] “갓 플러쉬라니! 플러쉬 따위에 신의 칭호를 붙이다니 들어보지도 못했다! 놈은 흑마법사, 흑마법사다!” 기어이 흑마법사로 매도하기 시작하는가. 조금이라도 마도를 익힌 자라면 갓 플러쉬가 어디까지나 플러쉬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 터이고, 그렇다면 에이디아의 수도시설을 정비한 자들 모두가 흑마법사가 되는 셈인데 아주 웃기는 말이었다. “더러워······ 더러워!” “빌어먹을, 고절한 수준에 이른 마도사가 이렇게 더러운 수를 쓰다니!” 도로도 더러웠지만 특히나 변기가 설치된 건물 안은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되어 있었고, 따라서 지금은 수도 내의 모든 인간이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모두 상공의 아르페에게 꽂혀 있었다. [난 평화를 사랑하거든. 그래서 조금 전에는 굳이 마법의 영역을 하수도에 국한시켰어. 하지만 에이디아에는 하수도만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인간이 사용해 더러워진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 하수도, 그리고 물을 깨끗하게 만들어 인간에게 공급하는 시설이 바로 상수도다. 에이디아의 마도사들은 하수도와 상수도를 철저하게 구분하여 대륙에서 가장 위생적인 나라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아르페의 마법 통제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상수도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수도의 설계자들이 구분을 철저히 해놓은 덕에 피해가 확장되지는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아르페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수도의 중앙에 뭉친 오물의 소용돌이가 이를 드러내며 인간들을 위협했다. 수도 전체에 울려 퍼지는 아르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불운하게도 그의 뒷말을 듣지 않아도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도······ 상수도까지 깔끔하게 터트릴 수 있다는 얘기야.] “악마! 놈은 악마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찌 그런 잔인한 짓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상수도까지 깔끔하게 터트려 오물로 더러워진 몸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다면 당장은 좋겠지만, 그 다음에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상수도와 하수도의 구분이 없어진 레이즈. 지상에서 가장 더러운 죽음의 도시······ 아니, 똥통의 탄생이었다. “저, 전쟁이 문제가 아냐······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 거야!” “에이디아의 역사가 담긴 도시를 이렇게 망가트릴 수는 없어······!” “마, 말로 하자! 말로!” 아르페의 마법 행사를 도저히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마도사 중 일부가 마찬가지로 확성 마법을 발동하여 아르페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말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세상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단 하나다.] 아르페는 엄중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전면항복해라. 그리고 티아타 대공은 이미 죽었으니 혹여나 티아타가 우리 뒤를쳐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 편이 좋아.] “티, 티아타가······!? 티아타는 분명 지금 다이탄과 동맹을······.” “설마 그것이 들켰, 헛!” 에이디아의 마도사들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으나 개중 극소수, 경악하는 자들의 모습이 있었다. 아마 저들은 에이디아와 티아타 사이의 은밀한 계약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자들이리라. 아르페는 일단 그들의 모습을 기억해두었다. [국왕이 직접 항복 선언을 한다면 마법은 그 순간 중단될 거야. 지금부터 딱 5분을 준다.] 물론 그 5분 동안에도 놀고 있을 생각은 없다. 아르페는 부지런히 마나 포션을 들이키며 데마이트에 마나를 불어넣어 오물의 역류를 보다 활성화했다. 지하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지상의, 조금 커다란 건물이다 싶으면 냅다 돌격시켜 오물로 물들인다! 되도록 민가는 피했지만 상가와 마탑이 모두 부서지고 더럽혀졌다. 그것이 넓디넓은 레이즈 전역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으니 아르페의 마법 컨트롤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으리라! 당연히 그의 파괴행각이 지속되면 될수록 사람들의 아우성 또한 높아졌다. “하, 항복! 항복!” “내 가게만은 제발! 상품들을 다 버리게 된단 말이야, 제발!” “잘 살고 있던 우리를 먼저 건드려놓고, 수도에 이런 행패까지 부리다니······ 저주하겠다, 다이탄!” “제기랄, 제대로 전투를 벌일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하지만······ 우리가 졌어. 이길 수 없어!” “크흑, 우리가 속국이 되어야 한다니!” 권한이 없는 놈들이 뭐라 지껄이든 아르페의 귓가에는 들려오지 않는다. 아르페는 그저 에이디아 왕궁이 있는 곳에 지그시 시선을 한 번 주고는, 픽, 웃으며 반응이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것이 왔다. “······없다.” “없어······ 궁에 폐하가 계시지 않는다!” “이럴 수가, 분명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계셨거늘······!” “······도망이다.”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어!” 국왕이 수도를 비웠다. 그것도 마도사 전원이 동원된 수도방어전을 앞두고. 도주 이외의 어느 것도 아니다. 물론 아르페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마도사라면 몰라도, 마도왕국의 정점에 이른 국왕이 아르페의 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가 갓 플러쉬를 구사한 순간 경악했을 것이고, 티아타 공왕이 이미 죽었다는 말에 결심을 마쳐 실행에 옮겼겠지. ‘티아타 공왕도 긴급이동용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종주국인 에이디아의국왕에게 도망칠 수단이 없을 리가 없지. 아티팩트가 되었든 게이트가 되었든.’ 물론 놈도 어지간하면 맞서 싸워보려 했겠지만 아르페의 마나는 어지간하지 않은수준이었다. 따라서 놈은 모든 계산을 마치고 튄 것이다. 어디로? 그야 후보지는 하나뿐이지 않은가. 놈은 티아타로 튀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레이제나와 조우하게 되리라. 그 다음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르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두 방향으로 갈리겠네. ······덜 귀찮은 방향과, 제법 귀찮은 방향으로.’ 물론 어느 쪽으로 진행되든 아르페가 원하는 바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능한 한 덜 귀찮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기를 바랐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레이제나를 위해서. [국왕은 도망친 모양인데······ 그러면 그 다음으로 권위 높은 인간?] 물론 그들도 없었다. 국가의 요직을 맡은 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국왕과 손 붙잡고 티아타로 튀어버린 상태였다. 아마 레이제나의 지배권을 지닌 이들 모두가 그 안에 포함되겠지. “항복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맞설 힘이 없다······ 젠장!” “국왕도 도망친 판에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하겠어. 본디 에이디아는 지닌바 마력이 가장 강한 자를 국왕으로 섬기는 바, 지금부터 우리는 그대를 국왕으로 인정한다!” [국왕은 얼어 죽을, 너흰 그냥 힘에 굴복한 거고, 새로운 국왕은 다이탄의 왕이야.] “저······ 끝까지 빌어먹을 자가!” 아무리 아르페가 다이탄 편에 붙어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용병인 아르페를 국왕 자리에 앉히려 하다니 택도 없는 소리다.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곤 마법을 취소하며 재차 선언했다. [좋아, 그러면 전원 스스로의 마나를 묶고 엎드려. 기사들도 알아서 무장해제하고, 선량한 수도시민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최대한 굴욕적인 자세로 항복을 선언하도록 해. 자, 그러면 에이디아의 새로운 국왕폐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수도를 방위하던 마도사와 기사, 병사들이 완벽하게 무력화된 그때에 이르러 아르페가 폭죽을 쏘아 올렸다. 다이탄 국왕은 그가 수도를 제압하고도 당분간 수도에 입성하려 하지 않았지만, 끝내 씁, 혀를 차며 기사 무리를 이끌었다. “마도사가 훌륭하게 수도를 무력화했다! 왕궁을 제압하고 승리를 선포하자! ······나를 따르라!” “폐하, 길 조심하십시오.” “으익, 똥이다!” “나 여기 싫어······.” 어쩜 이렇게 떨떠름하고 더러운 승리가 있을까! 다이탄 국왕은 기사들에게 지시해 마도사들을 한 명 한 명 묶어 뒤따르게 하면서도 썩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르페가 자신만만하게 말한 대로 정말 살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처럼 납득가지 않는 승리도 처음이었다. “에이디아가 이렇게 몰락하다니······.” “믿을 수 없다. 마도왕국의 번영을 가져온 마법이 우리를 배신하다니······.” 이 날을 기점으로 세상의 모든 역사서는 새로 쓰이리라! 아르페가 환생 이후 제대로 예정되었던 역사를 뒤엎은 순간이었다. “첫 무대가 이런 거라 미안하다.” 활성화되어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데마이트를 수거하며 가만히 속삭이는 아르페. 데마이트는 그에 반응하듯 웅웅 진동하며 보랏빛을 두어 번 토해냈다. 의사를 전달하는 것 같기는 한데 알아먹을 수는 없었다. 레이제나가 있었더라면 통역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애석한 일이다. [······먀?] 그때, 갑자기 그의 품에서 눈을 뜬 로아가 설렘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응? 가만히 잘 있다가 갑자기 왜 그래.” 혹시 데마이트랑 말이 통하는 거니, 하고 물으려던 아르페였으나, 로아는 대뜸 눈을 빛내며 허공으로 뛰쳐나갔다. [먀먀먀먀먀아아아아!] “흑마법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고? 난데없이 또 무슨······ 흑마법?” 짙은 안개로 화해 똑바로 왕궁을 향해 질주하는 녀석의 뒤를 따르며 아르페는 낯빛을 굳혔다. 점점 전생에 있었던 일의 실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 Chapter 19. 영원의 숲 - 4 > 원래 다이탄 군과 합류하여 앞에서 이것저것 자기과시를 하거나 마법을 행사하며그들의 행진을 보다 당당하고 뭔가 있는 것처럼 꾸며줄 생각이었던 아르페였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한가로이 똥이나 치우고 있을 시간은 없어지고 말았다. “기다려, 로아! 설마 또 마족화 저주는 아니겠지?” [먀아아아아아!] 로아는 이미 흥분하여 아르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혀를 차며 로아의 뒤를 따라 급하강했다. 그러자 과연, 왕궁 깊숙한 곳에 남겨진 저주의 흔적이 아르페에게도 느껴졌다. 다행히도 마족화 저주는 아니고 단순한 감정 증폭 계열의 저주였다. ‘······감정 증폭 계열 저주라고?’ 일단 이번 사태에 마족이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점만은 다행이었으나, 어쩌면 그보다 더러운 꼴을 겪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아르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먀! 먀아아!] 아르페보다 먼저 왕궁에 도착한 로아는 오물로 가득한 궁내를 쏜살같이 질주해 궁 안에 꽁꽁 감추어진 장소로 향했다. 비단 오물만이 아니다. 하수도가 모두 폭파되는 대형사고 속에도 멀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각종 마법 함정과 잠금장치! 그러나 로아는 틈 하나 없는 벽도 통과할 수 있는 마법의 안개로 화해 그 모두를 간단하게 돌파했다. 아르페는 뒤집어진 왕궁을 깔끔하게 청소하며 그 뒤를 따랐다. “정말 꽁꽁 감추어놓기도 했네.” 저주의 흔적이 얼마나 깊은 곳에 비밀스레 감추어져 있었는지 만물열람을 지닌 아르페나 모든 부정적인 기운을 다스리는 탐식의 마수 로아 정도가 아니면 도저히 그것을 눈치 챌 수가 없었다. 그야 왕궁 내 모든 마도사가 국왕의 생각에 찬동하는 것도 아닐 터이고, 결정적으로 레이제나에게만큼은 감추고 싶었을 테니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도착.” [먀! 먀먀먀!] 왕궁 안에 국왕과 그의 수발을 드는 극소수의 하인들만이 드나드는 공간이 있었는데, 비밀 공간은 그 안에서도 비밀 장치를 몇 번은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는 창고였다. 로아는 나머지를 다 뚫어놓고, 특정한 마나가 아니면 모든 것을 다 튕겨 내버리는 마지막 장치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먀아아아아아.] “아주, 이럴 때만 앵기지.” [먀먀아.] 아르페는 허름한 문 너머로 들어가지 못해 끙끙대고 있다가 아르페를 발견하자마자 고양이 모습으로 돌아와 안기며 그에게 조르는 로아를 내려 보며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어차피 나도 들어가야 하니까······좋아, 그러면.” 아르페가 손을 펼치자 마나 스트링 몇 가닥이 허름한 문의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함정의 구조는 만물열람으로 이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비록 주인의 마나를 주입해야만 열리도록 되어 있는 철통같은 보안이 걸려있다고는 하지만, 선배 용사님의 던전을 거쳐 오며 슬슬 마법에 간섭해 수정하는 데에도 도가 튼 아르페에겐 보안마법을 건드려 주인을 일시적으로 바꾸는 조작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뭐, 이게 안 되면 그저 이 보안장치가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의 마나로 순식간에 제압하면 되지만. 너도 잘 알아두렴.” [먀먀먀아.] 문이 열렸다. 아르페는 곧장 튀어나가려는 로아를 붙잡았다. 방 바깥이 오물 냄새로 진동한다면, 방 안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이거.” 아르페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당분간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그는 그 내부를 둘러보며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그의 전생에서 마왕군은 에이디아와 엘프들 사이의 분쟁에 굳이 끼어들지 않았었다. 알아서 공멸해가는 녀석들을 건드리기보다 다른 방향에서 귀찮게 만들어주자는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왕군의 정보수집담당 아르페조차 이 일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인과 관계와 그 결과만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벌여, 어떻게 진행되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먀아.] “그러게.” 그곳에는 에이디아가 티아타와 함께 영원의 숲을 먹어치우기 위해 벌인 일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각종 연구 서적, 저주의 재료가 되는 시약과 아티팩트, ······그리고 생체실험의 흔적까지도. “아주 제대로 빌어먹을 녀석들이구나. 나의 양심을 보호해주기 위해 이런 짓까지하다니 역으로 기특할 정도야.”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 안에서 적당한 천을 꺼내어 한 편에 방치된 엘프들의 사체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곤 당장에 저주를 먹어치우려 하는 로아를 부드럽게 달랬다. “어차피 누가 안 훔쳐가니까 조금만 참고 있어. ······일이 무척 더러워졌지만, 동시에 쉬워지기도 했으니까.” 이 방은 현 에이디아 국왕의 실체가 낱낱이 담긴 마법의 방이다. 국왕은 워낙 급작스럽게 도망을 가느라 증거를 미처 인멸하지 못했고, 그 어떤 마도사라도 이 방을발견하는 순간 에이디아의 수뇌가 여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정상적인 교양과 최소한의 양심을 갖추고 있는 이라면, 그 시점에서 아르페의 편으로 수월하게 영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거 청소를 먼저 해야 하게 생겼네.” 아르페는 일단 비밀의 방에 배리어 계열의 마법을 걸어 현장을 보존해둔 후 돌아서서 클리닝 마법을 대대적으로 영창했다. 왕궁의 일부가 순식간에 깨끗해지는 모습에 쾌감마저 느껴졌다. “일행이 오기 전까지 적어도 왕궁은 전부 깔끔하게 해놓아야겠지.” [먀먀아.] “너도 도와 임마.” [먀!] 그로부터 2시간 후, 수도 내의 모든 마도사와 정예기사들을 줄로 묶어 질질 끌고 다이탄 국왕 일행이 왕궁 앞에 도달했다. 그들이 지나온 길만 깨끗해져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도 전부 그 길 위로 몸을 피신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웃겼다. “아르페!” “오빠!” “그래, 일단 씻어. 클리닝.” “우갹.” 그거 조금 떨어져 있었다고 있지도 않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덤벼드는 메테르와 시에나를 클리닝으로 세척해버린 후에야 받아 안아주는 아르페. 다이탄 국왕은 그런 아르페를 실로 참담한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마도사, 그대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대마법으로 모든 이들을 무력화하고 수도를 제압했지. 하지만 아주 중요한 진실을 감추기도 했어. 지금 내 몸에서 똥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소! 그리고 대체 하수도는 어떻게 정비하며 수도는 언제 다 청소한단 말이오! 이미 이 시점에서 수도가 통째로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소! 마비! 이 뒤처리를 대체 어찌하란 말이오!” “거 예민하게 굴기는.” 아르페는 마법을 난사해 왕궁을 청소하느라 레벨이 수직상승한 클리닝 스펠을 재차 발동하여 국왕을 비롯한 이들의 몸을 깔끔하게 만들어주었다. 클리닝 마법이 확장되며 순식간에 수천, 수만 명의 인간들을 뒤덮는 광경은 고작 클리닝 마법 주제에장엄하게마저 느껴졌다. “역시 어마어마한 마도사야. 일말의 더러움이나 냄새까지 전부 없애버리다니······ 목욕을 할 필요도 없겠군.” “그런데 대마도사라는 인간이 어째 구사한다는 스펠들이 전부······.” “하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마법이 무서워 도망간 ‘선대’ 왕보다는 훨씬 더, 우리 에이디아의 지배자에 어울리는 그릇이다.” 마도사 중 누군가 한 말에 놀랍게도 대부분의 마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정신을 얼마나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지 단박에 깨닫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던 다이탄 국왕 역시 분위기를 파악했다. 사실 어디까지나 다이탄의 전쟁용병으로 참전했다고는 하나 아르페의 활약은 너무나 압도적이지 않았는가! 좋게 말해 압도적인 것이지, 이건 뭐 다이탄이 한 일이라곤 이미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한 군인들을 사로잡아 이 왕궁에 도달한 것밖엔 없었다. 거지가 땅바닥의 먼지 묻은 빵을 주워 먹어도 이보다는 수고로울 것이다. “그대······ 설마 스스로 국왕의 자리에 앉으려는 것인가?” 그럴 거면 굳이 우리 끌고 오지 말고 혼자서 쳐들어왔으면 됐잖아? 라는 억울함을 담은 눈빛으로 다이탄 국왕이 아르페를 째렸다. 아르페는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앞에 마 자가 붙는 왕이건 안 붙는 왕이건 귀찮아죽겠어. 당신이 다 해먹어.”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당신이 정말 존경스럽기는 하오만.” “그래, 다들 모여 있는 김에 지금 말해둘게.” 아르페는 공포와 두려움과 짜증과 분노와 경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에이디아의 마도사들과 기사들을 향해 단호하게 선언했다. “다이탄의 국왕을 새로운 군주로 섬기든, 내 대리자라고 생각해 따르든 상관없어. 하지만 개기지는 마. 나도 귀찮아질 테고 너희도 귀찮아질 테니까. 이해했냐?” “대체······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오?” 레벨 217의 마도사, 후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아르페에게 물어왔다. “그렇게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다이탄의 하수인을 자청하지? 당신이 지닌 그 힘은 인세에는 없었던 것인데, 굳이 국가 간의 전쟁에 관여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내가 당신 정도의 힘을 지녔더라면 온 대륙을 통일하는 전쟁이라도 치를 것이오.”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르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리곤 돌아서며 그들에게 깨끗한 왕궁의 복도를 가리켜보였다. “그 이유를, 마침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보여주려던 참이거든.” 수만 명이 동시에 왕궁으로 진입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인간이 묶여 호송되고 있다는 것이 실로 아이러니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깔끔하게 원상복구되어 있다니.” “복원 마법인가!? 그 희귀한 마법을 이렇게 넓은 범위에 사용하다니 정말 터무니없군!” “아니, 그냥 매우 높은 레벨의 클리닝 마법이야.” 고레벨로 성장한 클리닝 마법은 단순히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약간의 물질이동과 파손 복원 작업도 가능하게 하는 것! 아르페가 20분 동안 왕궁에만 매달려 작업한 끝에 지금 왕궁은 갓 플러쉬의 역류를 겪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설령 마왕을 물리치고 백수가 되어도 청소부로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수준의 청소력! “아니, 그런데 이 깨끗한 왕궁에 어째서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이지?” “······설마 당신이 보여주려는 게 그것이오? 혹여 국왕이 도망 대신 자결이라도 택했소?” “자결이면 그나마 귀여운 수준이지.” 아르페는 일행을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마도사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어마어마한 수준의 마법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아르페가 전부 깔끔하게 파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침음성을 냈다. “우리 왕국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왕궁 방위 마법의 수준이 높다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알고 있었으나, 설마 그것을 이리도 간단하게 파훼했을 줄이야.” “설령 마왕이 침입해 와도 왕궁만은 범접치 못하리라 여겼거늘······.” “그, 그렇다면 혹시 당신은 마왕이오!?” 정말 가지가지하는 놈들이구나.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그들을 보다 안으로 이끌었다. 저 너머에서 로아가 빨리 오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들리는 것 같다. “오, 맙소사. 전 국왕의 비처가······.” “아니, 이건 저주의 기운이 아니오!?” 슬슬 마나 감각이 좋고 눈치가 빠른 마도사들이 감을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도사들은 원거리에서부터 알아챈다쳐도 기사들은 무리. 왕궁 자체가 수만 명이 다 들어오기는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아르페는 그들이 다 들어올 수 있도록 새로 공간을 텄다. “왕궁이 무너진다!” “으아아아아아악!” 물리적으로! “이 무식한 양반이!” “이건 다 같이 보는 게 좋아.” 아르페는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왕궁의 파편을 잘게 부수며 길을 더욱 깔끔하게 확장했다. 수백 줄기의 마나 스트링과 함께한다면 건물을 부수는 것도 정리하는 것도 전혀 어려울 일이 없다!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런 말을······.” “······아니, 나는 조금 알 것도 같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느낌이······.” 국왕이 결코 깨끗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마도사들은 점차로 굳은 얼굴을 했고, 그중 극소수, 국왕에게 붙어 ‘그 일’에 동조했던 마도사들은 어떻게 하면이 상황에서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르페의 만물열람은 그들이 익힌 스킬이나 이곳 국왕의 비처에 남은 마나의 흔적 등으로 충분히 그들의 유무죄를 가릴 수 있었다. 물론 아르페는 그들에게 조금씩 시선을 주며 언제든 후려갈길 수 있도록 준비를 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 다 왔어.” [먀먓!] 기다리다 지쳤다고 투덜거리며 품으로 뛰어드는 로아를 받아들며, 주위 벽을 깨끗하게 터 사람들에게 국왕의 비밀공간을 보여주는 아르페. 가장 앞 열에 붙어 따라오던 마도사들이 그것을 보며 말을 잃었다. “이럴, 수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오. 나도 대충은 짐작이 가니, 어서······ 헛.” 동요가 번져갔다. 그 광경과 마주한 이들이 차례대로 굳어, 뒤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끌어내고 나아가며 다시 굳고, 다시 뒤에 있던 자들이 끌어내고 나아가며 굳고를 반복했다. “에이디아와 티아타, 영원의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젠 알겠지?” 아르페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당분간 없었다. 당사자들은 진지하겠지만 옆에서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바보처럼 느껴질 수가 없는 동요의 전염, 그 끝에. “마도사.” 다이탄 국왕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에이디아의 국왕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짐작이 가오만. 그 토벌에 함께해주겠소?” 그의 눈은 피와 저주로 얼룩진 창고 내부와 온갖 저주와 욕망으로 얼룩진 엘프들의 사체, 그 저주를 만들어낸 시료와 지배 마법에 관련된 흑마법서로 가득한 책장과······ 절반쯤 무너진 워프 게이트에 꽂혀 있었다. 아르페는 답했다. “기다려. 참가자를 더 모집해볼 생각이거든.” 사실 참가자가 아니라 관객을 원하는 것이었지만, 아르페는 굳이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듣는 관객 기분 나쁠 테니까. < Chapter 19. 영원의 숲 - 4 > 끝 ⓒ 토이카 < Chapter 19. 영원의 숲 - 5 > “에이디아의 국왕이, 흑마법을······.”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오, 맙소사. 이건······ 지배의 술식. 타인을 억압하는 흑마법이잖아!” 마냥 굳어있던 것도 잠시, 마도사들은 차례대로 방 안으로 들어와 정말로 이것이 국왕이 만들어놓은 것인지, 그 외에 또 누가 이 일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인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내가 충성을 맹세한 자가 이런, 사악한 마법을······!” “다들 현장을 보존하시오. 우리가 여태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하기 짝이 없지만······ 더 이상의 실수는 있어선 안 되오. 오늘을 똑똑히 역사에 기록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것은 에이디아에 소속된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도왕국이라고 해도 기사는 기사. 그들 또한 나름의 신념과 기사도를 갖고 있었기에 이제는 전 국왕이 되어버린 자가 대체 어떤 흑마법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어째서 엘프들에게 이런 잔혹한 짓을 했는지 마도사들을 도와 샅샅이 밝혀내고자 했다. 한 명의 마도사에게 굴복하여 무력해진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일로 다시 그들의 의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엘프의 사체에 남은 저주의 감정이 끝났소. 이건······ 이건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저주요. 그래, 분명 티아타와 영원의 숲에서 최근 이종족 분쟁이 격화되고 있었어. 설마, 설마······!” “국왕, 설마······ 어리석은!” “티아타 공왕과 주고받은 서찰이 보관된 장소가 있소이다. 엘프들을 마법으로 강제하기 위한 연구의 기록 또한······ 아아, 아아아!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마도왕국 에이디아의 심부에서 버젓이 대륙을 좀 먹는 흑마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니!” 그렇다. 에이디아의 국왕이 연구하던 것은 바로 이성이 있는 존재를 지배하는 마법이었다. 일의 처음 시작은 아마도 레이제나가 만들어진 그때. 레이제나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도사들은 당시의 국왕과 함께 암시 외에 보다 그녀를 완벽히 지배하기 위한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마법으로는 사람의 정신을 강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끝에······ 흑마법에 손을 대었다. 흑마법은 달리 흑마법이 아니다. 그 어떤 마법이든 용도에 따라 끔찍한 결과를 낳을 수 있겠으나, 흑마법은 그것을 수련하고 사용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부터 다른 존재의 희생을 강요하기에 흑마법이라고 불리는 것. 마족이나 사용하는 마법이란 인식이 퍼져있는 것도 그래서다. 마도왕국 에이디아는 건립 당시부터 흑마법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관리해왔다. 그렇기에 왕국의 비처에는 흑마법과 관련된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레이제나를 강제하기 위해 시작된 마법의 연구는 당연히 차츰 다른 쪽으로도 번지게 되었다. 한 번 유혹에 지고 나니 더 이상은 거리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서 에이디아는 티아타와 협력하여 엘프를 지배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아마 인간이 아니니 괜찮을 거라 스스로를 납득시켰겠지. 하지만 과연 그것에서 끝났을까? 그럴 리가.’ 엘프를 지배하는 마법을 연구한다니, 그것은 우스운 변명에 불과하다. 그들이 연구하던 마법에 과연 종족을 구분하는 기능이나 있었겠는가? 인간이 아니니 괜찮다며 안전선을 쳐둘 셈이었겠지만 그 연구의 실상은 엘프든 인간이든, 데마이트든 가리지 않는 절대적인 지배의 마법일 터. 어떤 의미로 보면 마왕의 고유능력보다도 더욱 악질이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모든 것을 지배하거나, 지배하지 못하는 대상은 파괴해버릴 만큼 잔악무도한 마왕은 인간들이 연구한다는 지배 마법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 또한 지극히 간단. 이미 절대지배라는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는 마왕이기에, 고유능력이 아닌 마법의 힘으로 다른 존재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전생에서 에이디아의 마법은 실로 끔찍한 부작용만을낳았고, 그 때문에 엘프들은 인간들과 죽고 죽이는 싸움 끝에 거의 전멸에 이르렀다. 숲은 통째로 불타올랐으며 새로운 엘프가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 나라 몇 개가 망했으며 마왕군이 본격적으로 용사 파티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용사는 많이 아파했고, 울었으며······ 아르페는 그때 처음으로 용사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었던 것 같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전생이 아니다. 아르페는 그때 그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으니까. “이 마법은 실패작이야. 너희도 보면 알겠지?” “아니, 우리는 마법의 소양이 당신처럼 지극하지 않다오. 여기 죽어 누운 엘프들이 저주의 부작용에 희생되었다는 것만은 간신히 알겠소만.” “감정을 자극하는 저주는 어디까지나 그 밑단계로구려? 사고구조를 단순화하여 지배 마법을 걸기 쉽도록 만드는 사전 과정에 불과했어.” “그리고 일단 그 저주를 시험하여 엘프들의 샘플을 확보하고······ 오, 맙소사. 이건 재앙이오!” 슬슬 판단이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아르페는 박수를 쳐 한창 현장에 몰두해 있던 마도사들과 기사들을 멈추어 세웠다. 비로소 그가 사정을 설명할 때가 왔다. “나는 어떤 엘프로부터 이 일의 조사를 부탁받았어. 제법 많이 고생한 끝에 이것을 알게 되었고······ 국왕뿐만 아니라 에이디아의 수뇌 대다수가 이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지. 그래서 다이탄 국왕에게 협력해 일단 에이디아를 한 번 밀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거야.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짠, 지금에 이른 거야.” 물론 그 밀어버리는 방식에서 태클을 걸고 싶은 사람은 무척 많았을 터이나, 다행히 포커스는 그곳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 모아졌다. “아니, 수뇌 대다수라니? 잠깐 기다려보시오······.” 이곳에 있는 마도사와 기사들, 그 외의 귀족들 가운데에도 수뇌라 불릴 만한 이들이 있을 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향했다. 아르페가 피식 웃어보였다. “나 정도 되면 이 비처에 남은 마나와 기록을 조사하는 게 가능하거든. 그러니까 시간만 있으면······ 그렇지.” “크아악!” “나, 난 아니오! 아니······ 칵!” 떡밥을 던지자마자 잽싸게 그것을 무는 멍청이들 같으니! 아르페는 미리 대기시켜두고 있던 마나 스트링으로, 아르페를 공격해오거나 반대로 현장에서 도망치려 하거나 이미 부서져 기능을 제법 상실한 워프 게이트로 뛰어들려던 이들을 모조리 붙잡아 죽였다. 그 속도가 가히 전광석화에 가까워 그들의 부정을 잘 알고 있는 이들마저 제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럴 수가, 저항이 불가능해.” “어쩌면 정말 마왕이 아닐까.” “듣도 보도 못한 스펠이외다. 가느다란 마나의 실이,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담고······.” “중요한 건 내 마법이 아니잖아?” 아르페는 손을 털어 배신자들의 사체를 깔끔하게 불태우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위에 둥둥 뜬 데마이트가 조금씩 회전을 하며 위협적으로 불꽃을 발했다. 놀랍지만 녀석이 시전하고 있는 것은 기초적인 불꽃 마법에 불과했다. 단지 아르페의 압도적인 마나와 녀석의 이중영창으로 어울리지 않게 어마어마한 힘을 품게 된 것이다. “자, 자진해서 튀어나온 놈들은 모두 죽였고······ 그럼 이제 숨은 놈들 가자.” “아직 더 남아있었단 말이칵!” 뻔뻔하게 자신은 아닌 척 행세하던 귀족의 머리통이 제일 먼저 불타올랐다. 놈을 시작으로 수만 명이나 되는 에이디아의 정예 병력 가운데 이곳저곳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그 화려하고 압도적인 불꽃의 축제는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아 끝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나간 자의 숫자만 백오십에 달했다. “조사, 조사가 필요하다지 않았소! 억울한 사람들을 죽인 것 아니오!?” “방금 죽인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흑마법의 흔적을 묻히고 다니던 놈들. 나머지는 평생 들키지 않게 조용히 숨어 있거나, 알아서 자살하는 게 편할 거야.” 갓 플러쉬는 어디까지나 마법진을 이용한 대마법이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르페에게 어마어마한 마력이 있으며 마법진을 읽고 이용할 줄 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아르페가 보인 것은 소름끼치도록 세밀한 마나의 조종과 조금의 마력으로 압도적인 위력을 만들어내는 효율적인 마법의 미학. 보통 마도사들은 전문영역을 정해두고 정진하게 마련인데 지금 아르페가 보인 모습은 제아무리 레벨이 높은 마도사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해하기가 힘든 수준이었다. “이런······ 알겠소.” 그때에 이르러 비로소, 마도사 중 한 명이 탄식을 터트리며 외쳤다.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다양한 능력의 발휘, 어린 외견에 압도적인 마력과 레벨, 엘프의 퀘스트를 받을 만큼의 친화력까지······ 당신은 이번 대의 용사로군?” 일대의 인간들이 모두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뭐?” “이런 폭군이 용사라고?” “말도 되지 않소. 확실히 디아스 왕국에서 용사가 탄생했다는 말은 들었소만 그것은 불과 몇 년 전······ 아니, 확실히 그렇군.” 아르페는 열다섯 살치고는 상당히 성장이 빨라 이제 갓 성인이 된 수준으로 봐줄 만큼은 자라 있었지만, 앳된 티를 미처 다 벗지는 못했다. 그것은 아르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메테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여태까지 지나온 많은 곳에서 어째서 아르페와 메테르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 했나 의아할 정도였다. “이번 대의 용사가 둘이라는 말은 이미 들어 알고 있소. 나머지 한 명은 두 아가씨 중 하나겠군. 둘 다 너무 강해 누가 용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사였는가. 그래서 흑마법에 그렇게 강렬한 반응을!” “아니, 그런데 하는 짓이 용사라기엔 조금 너무 더럽······.” 마도사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진 가운데 아르페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래?” “믿을 것이오. 당신이 용사라는 사실을.” 그는 쩝, 입맛을 다셨다. 빌어먹을 마도사들 같으니, 고집과 편견으로 가득한 주제에 또 이런 때는 눈치가 빠르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르페를 용사로 단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들 가운데 용사는 별격으로 취급되어, 용사가 뛰어나다고 하면 그것은 시기하고 질투할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상대를 용사로 단정한다······ 그래도 마왕이라고 하던 것보다는 낫지, 아르페는 체념하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용사 퀘스트다. 이젠 모두 납득이 가냐?” “가오. 하지만 설마 에이디아가 용사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게 될 줄은 몰랐어······ 실로 쓰디쓰구려.” 마도사들의 얼굴에 허탈함이나 체념과 비슷한 감정들이 어려 있었다. 아르페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럼 모두 납득한 걸로 알고 계속하자. 자, 여기에 내 힘을 진즉 파악하고 국왕이 튀어버린 흔적이 남아있어. 시간이 없어 연구 자료도 다 없애지 못하고, 워프 게이트조차 완벽히 파괴하지 못했지. 상황을 요약해 말해주자면, 너희가 원한다면 에이디아가 망하는 데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국왕 놈을 조지러 갈 수 있다는 얘기야.” 에이디아를 망하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르페였으나 그는 현장의 참혹함에 빌붙어 책임을 에이디아의 국왕에게 전가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정의감과 배신감에 불타오르는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워프 게이트로 뛰어들려 들었고 마도사들 또한 마음만은 그들과 같았다. 다만. “하지만 반파되어 있지 않소이까?” “넌 어디서 유물 복구 퀘스트도 안 해봤냐? 원래 완파된 거 복구할 때랑 반파된 거 복구할 때 재료 요구량 자체가 다른 거 몰라?”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크라켄의 사체 일부를 꺼내어 워프 게이트에 던지며강화 스킬을 발동했다. 그것으로, 정말로 허무하게도 워프 게이트가 순식간에 제 기능을 찾아 동작하기 시작했다. “잠깐, 방금 사용한 시료는 분명······.” “두 번 더 간다.” 강화 스킬을 발동할 때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레벨 200을 넘기는 고위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마구마구 꺼내어 부재료로 사용하는 아르페! 그 덕에 세 번의 강화를마친 워프 게이트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튼튼하고 거대한 통로로 완성되었다. 이미 수리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지금 이 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게이트를 타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방금 내 눈앞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머리가 아프오. 방금 그것, 마법은 맞았소?” “자, 그러면.” 아르페의 미소가 짙어졌다. 실로 음울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지금부터 에이디아 전 국왕 토벌 파티를 모집한다.” 당연하지만 그 자리에 허나 거절하거나 모두가 ‘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패기 넘치는 놈은 없었다. 아르페는 수만 명을 이끌고 그대로 게이트로 돌격했다. < Chapter 19. 영원의 숲 - 6 > 레이제나는 태어난 순간을 기억한다. 아니, 사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겪는 모든 일을 기억할 뿐 잊을 수가 없었다. [너는 기적의 보석 데마이트로 만들어진 골렘.] ‘주인’의 말은 갓 눈을 뜬 레이제나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 [에이디아를 수호하는 최강의 골렘이 될 것이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는 그녀에게 뒤이어 그녀의 정신을 속박하기 위한 암시의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제아무리 데마이트에 자아가 있고 성장을 한다지만, 탄생부터가 기적이었던 그녀에게 레벨 200을 넘기는 마도사의 암시를 거부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래, 그 당시에는. “에이디아, 망함.” 아티팩트를 구사해 티아타 왕궁에 도착한 레이제나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에이디아가 아르페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더욱이 그 옆에는 근접전 능력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재인 메테르까지 있지 않던가. 심지어 방실방실 웃으며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해주던 아이도 레벨 270을 넘기는 전투사제였다. 그 파티의 수준은 명백히 인간계 최강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바보.” 아르페는 정말 자신을 좋아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의 힘이라면 레이제나를 충분히 억압해 소유하는 것까지도 가능했을 텐데, 기껏 붙잡은 그녀를 이토록 허망하게 풀어주다니. 더욱이 그녀에게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라니, 골렘인 그녀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바보.” 레이제나는 골렘이다. 골렘인 그녀를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는 아르페를 그녀는 어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짜증이 났다. 그의 기대감이 자신에게 전염되는 것이, 그 끝에 절망이 기다릴 것이 예상되어 무서웠다. “바보. 명령하는 인간도, 기대하는 인간도, 친절한 인간도, 모두 바보.” 답답함을 담아 중얼거리며 레이제나는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그녀의 비행 스펠 레벨은 낮다. 아르페가 말한 대로 아무리 빨리 날아도 에이디아가 정벌되기 전까지 수도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설령 빠르게 도착한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 제압당해 또 아르페의 재수 없는미소와 마주할 뿐이다. “따라서, 우회로 인한, 제약은 없다.” 아르페의 말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굉장히 바보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과가 변하지 않는데 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왕궁을 빠져나왔다. 당연하지만 티아타에 머무르고 있는 귀족과 기사들은 아직까지 공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상황. 그녀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간단한 은신마법을 구사하여 순식간에 공국의 수도를 벗어났다. 영원의 숲의 접경, 가본 적은 없으나 그 위치라면 이미 알고 있다. 신비로운 이종족 엘프들이 거주하는 공간. 에이디아의 명령만을 받아 움직이는 그녀에게 영원의 숲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었고, 사실 엘프들과의 조우가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했던 방식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건······.” 그녀가 이상을 눈치 챈 것은 귀신 같이 영원의 숲 접경에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엘프의 기운을 느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그곳에 짙은 저주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어째선지, 익숙한 기운······.” 어째서 익숙한 것일까? 그녀는 골몰했으나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느낀 기운은 에이디아의 왕궁 비처에서 실험하고 있던 저주였으니, 평소 그녀의 터무니없는 마나 감응력으로 인해 단단히 봉인된 저주의 기운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끼고는 있었지만 정체나 위치는 특정할 수가 없어 잠재의식 안에만 기록되어 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불길한 기운.” 그녀는 초조해져 저도 모르게 비행속도를 빨리 했다. 어째서 불길한지 어째서 초조한지도 모르고 마냥 서두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상공을 가르고 날았던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그녀는영원의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날짜도 어느덧 이틀 이상이 흘러 있었다. “아.” 불길한 기운을 따라오다 보니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어쩌면 아르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녀에게 접경을 따라 이동하라는 말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돌아섰다. 함정을 밟은 기분이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기이한 감정으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그것은 엘프, 그것도 심상치 않은 결의를 하고 있는 엘프들의 목소리였다. “인간들은 모두 전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금,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에게복수할 때입니다.” “맞습니다. 세계수가 그것을 원하고 있어요. 숲을 더럽히고 엘프의 긍지에 흠집을 입히려는 인간들을 벌해야 합니다.” 인간들과 전쟁을 벌인다고? 대체 어째서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단 말인가, 레이제나는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엘프는 숲의 종족. 비록 세계수의 비호를 받는 숲 안에 머물고 있을 땐 레벨 이상의 실력을 낼 수 있는 사냥꾼이지만 숲 밖으로 나오면 인간의 군대에 맞서 당해낼 수가 없다. 그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영원의 숲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뭐? 직접 인간의 나라를 공격하겠다니 그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나는 에이디아의 골렘. 티아타와는 전쟁 중. 그러나 티아타와 적대 불가. 비호 또한 불가.’ 다이탄을 완벽히 속여 넘기기 위해 에이디아의 일반 시민과 대다수 기사와 마도사들에게는 티아타와의 관계가 그대로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레벨 250에 달하는 레이제나가 본격적으로 티아타를 휩쓸었다간 정말로 티아타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기에, 레이제나에게는 티아타를 공격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티아타를 대놓고 도와주지도 말라는 애매한 지시가 내려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들이, 티아타를 공격한다면.’ 막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레이제나는 지극히 혼란스러워하며 조금 더 전진했다. 이내 공터에 모인 수천 명의 엘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주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독한 저주.’ 그녀는 불길한 기운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엘프들이 어째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감정을 이상하게 꼬아놓는 저주로 인해 지금 엘프들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주의 속성도 지독하기 짝이 없어, 엘프들을 대상으로 발동하며 그 숙주의 마나를 바탕으로 다른 엘프들에게 전염까지 시키는,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굉장히 오랜 세월 연구 끝에 탄생한 저주임에 분명했다. 아니, 아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누가 만들었는지 모른단 말인가? 레이제나는 자문했고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절대의 기억력과 계산능력을 지닌 그녀가, 이만큼이나 많은 힌트가 주어졌는데도 답을 찾지 못할 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구석은 어디든 있었다. 자신이 출입하는 것이 금지된 왕궁 내 비밀스러운 영역, 국왕에게서 느껴지던 흑마법의 기운, 그리고 왕궁 전체에 어딘가모르게 감돌던 불길한 마나. 국왕에게는 비밀이 많았고 레이제나는 자신에게 그것을 탐구할 권리가 없음을 알았기에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마나로 인해 발현된 저주와 마주하면서까지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에이디아가 티아타와 연극을 벌이면서까지 원했던 것은 바로 지금 이 광경이다. 영원의 숲에 저주를 푼 것 또한 그들이다. 그들은 적어도 수십 년의 연구에 걸쳐 엘프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강력한 저주를 준비하여 성공적으로 엘프들을 오염시켰고, 일부러 인간들 사이의 전쟁을 일으켜 틈이 있는 척 꾸미는 것으로 그들이 스스로 숲을 뛰쳐나오도록 유도했다. 5개월 동안 전쟁이 소모전의 양상으로 지속되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엘프들에게 저주를 확실히 퍼트리기 위한 일종의 준비 작업에 불과했던 것이다. 레이제나는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물론, 모르고 있었던 편이 마음은더 편했을 테지만 말이다. “더 많은 엘프들의 협조를 얻어야 합니다!” “진정하게!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엘프가 아닌가. 세계수는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 제 피부를 보십시오, 까맣게 물들어 있지 않습니다. 세계수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세계수의 의지입니다!” 엘프가 다크 엘프로 영락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정설은 자아를 품고 숲을 관할하는 세계수가, 엘프의 자격을 잃었다 여긴 이를 선별해 영락시킨다는 것이었다. 엘프들 대다수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니 다크 엘프로 영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즉 세계수의 뜻이니 따르면 된다.엘프들은 지금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성급하고 단순한 사고방식. 이미 엘프들이 이성을 잃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아아, 그렇군. 자네 말이 맞아.” “인간들을 벌하자!” “더 이상 인간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어! 우리가 숲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숲에 갇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최악인 것은, 저주에 감염된 엘프들과 접촉하면 접촉할수록 다른 엘프들도 금세 저주에 물들고 만다는 것. 레이제나는 일단 그들을 놔두고 가속하여 숲 속 더욱 깊숙하게 들어갔지만, 어딜 가든 비슷한 풍경이 펼쳐질 뿐이었다. “그래, 인간들을 죽이자!” “숲을 지키자!” 저주의 보유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감염속도도 빨라지고, 이미 퍼진지 제법 시간이 흐른 저주는 더 이상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숲의 깊숙한 영역까지 침투해 있었다. “이젠 우리가 나갈 때가 되었어! 모두 활과 지팡이를 챙겨라, 전사의 시간이다!” “복잡한 생각은 일단 접어둬. 지금은 숲을 위해 일어설 때다!” 엘프의 고향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기운과 전투의 열기, 점차로 모여드는 엘프들을 보며 그녀는 확신했다. 앞으로 며칠, 아니 어쩌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숲의 모든 엘프가 저주로 물들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그들이 당한 저주의 이면에서 보다 사악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저주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진 엘프들의 내부에 잠복한 채 트리거가 당겨지기만 기다리는 흑마법이. 대체 어떤 마법일까? 발동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는 지금 이 상황보다도 엘프들 내부에 잠복해있는 저주가 더욱 두려웠다. 에이디아가 단순히 인간과 엘프의 전쟁을 노리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탓이다.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인간의 탐욕이 이끄는 전쟁의 끝은 분명 그보다 더 처참할 터였다. ‘그는 내게, 이 광경을.’ 아르페는 무엇을 바랐단 말인가. 레이제나가 특정한 행동을 취하길 원했을까? 그렇다면 어리석다는 말밖에는 돌려줄 것이 없다. 레이제나는 골렘. 에이디아의 국왕에게 명받은 대로, 단지 에이디아를 위해서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티아타를 공격하는 엘프들, 막는다.” 레이제나는 판단을 내리고 행동에 임했다. 어디까지나 에이디아를 수호하기 위해서, 영원의 숲 한복판에서 대마법의 영창에 임했다. 대마법의 이름은, 집단수면이었다. < Chapter 19. 영원의 숲 - 6 > 끝 ⓒ 토이카 Chapter 19. 영원의 숲 - 7 > 레이제나에게서 비롯된 마나가 크게 확장되어 일대를 덮었다. 레이제나는 동레벨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마력수치를 지닌 데마이트! 영원의 숲은 어지간한 나라의 크기보다도 거대했지만, 그녀의 마력은 그 숲의 10% 이상을 능히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엘프들을 모두 모아······ 으, 으음?” “어째서인가, 이렇게나 중요한 순간인데, 무척 졸려오는······ 느낌이······.” “흐아아암. 안 되는데······.” 그리고 그 영역 내의 모든 엘프는 현격한 레벨 차를 버티지 못해 모두 기절하듯이잠들었다. 아직 저주가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이도, 저주가 골수까지 물들어 단순하고 광폭해진 이도 모두가 마찬가지 꼴로 쓰러졌다. 레이제나는 영역이 클리어된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곧장 명상을 시작했다. 마나를 회복해 다음 영역으로 향해 똑같은 마법을 반복하기 위해서다. 티아타는 공식적으로는 에이디아의 적이기에, 레이제나는 결코 전면에 나서 엘프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제나는 그 답을 수면 마법으로 낸 것이다. 엘프들을 모두 재워버리면 그들은 티아타로 쳐들어갈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레이제나가 직접적으로 엘프들을 공격한 것은 아니니 그녀가 직접적으로 티아타의 편을든 것은 아닌 셈. 또한 엘프들은 그녀의 수면 마법에 의해 행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적어도 숲 밖으로 나가 낭패를 겪을 일은 없게 된다. 그렇게 누구도 다치지 않고 현상은 보류된다. 적어도 그녀가 수면마법을 더 이상 구사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굉장한, 억지 논리.’ 스스로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반칙이다. 어떻게든 그들의 지시와 자신의 상황을 비비 꼬아, 지시를 어기지 않고 있다는 변명을 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레이제나 자신은······. ‘움직인다.’ 레이제나는 어째선지 그 뒤를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져 사고를 중단하고 몸을 날렸다. 지금은 그저 이 엘프들 모두를 잠재우는 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 정도가 더 흘렀을 때, 레이제나는 기어이 숲 안에 머무르고 있던 모든 엘프들을 확실하게 잠재우는 데에 성공했다. 엘프 가운데에는 수백 년에 이르는 세월을 살아온 끝에 레벨 230을 넘긴 장로급의 대단한 강자도 있었으나, 집단수면을 펑펑 써대면서 잠재우기의 프로가 된 레이제나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 힘으로 영원의 숲을 무력화한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고 시한부였지만. ‘······시간 낭비.’ 영원한 수면은 죽음뿐. 결국 엘프들은 잠에서 깨어날 터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인간들의 세상으로 쳐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레이제나는 또 그들을 재우기 위해 집단수면 마법을 영창해야 한다. 언제까지? 그렇게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자문하던 그녀는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정답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 자신을 속박하는모든 것이 갑갑했다. 이것도 모두 그녀에게 괜한 자극을 불어넣은 아르페 탓이다. 그녀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의심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자신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지금부터 나는, 어찌해야.’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얼마 이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숲 안으로 들어오는 강대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기운.’ 그녀는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에이디아 국왕의 마나였다. 가장 절대적인 자신의 명령권자. 그가 어째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일까? 그야 뻔하지, 놈은 아르페에게 패퇴해 도망친 것이다. 레이제나는 기가 막혔다. ‘이렇게나 빠르게, 하나의 국가를.’ 에이디아의 국력은 어디까지나 나라를 지탱하는 강대한 마도사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수도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 수도가 함락당하면 에이디아 역시 끝장나는 셈. 하지만 그렇기에 그만큼 수도는 철저히 보호받고 있다. 그곳의 마법장벽과 각종 함정마법에 대해 얘기하려면 사흘밤낮도 부족했다. 그런데 아르페는 그것을 이렇게나 단기간에 무력화해 국왕이 비루하게 도망치도록 만든 것이다. 이쯤 되면 에이디아가 재수가 없어 자연재해를 만났다고 밖엔 말할수 없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망한 것이다! 레이제나는 에이디아 국왕이 어째서 이곳으로 오는지도 대충은 짐작이 갔다. 수도가 함락된 이상 에이디아의 다른 도시를 거점 삼아 저항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정예 병력 대다수가 이미 무력화되었을 뿐더러, 설혹 군을 이루어낸다 해도 아르페의 손에 또 다른 도시가 추가로 끝장나고 그것으로 끝이겠지. 티아타 공왕이 살아있었다면 그래도 티아타에 들어갈 수라도 있었겠지만 공왕은 죽었고, 그 외 대부분 티아타의 귀족과 기사들은 티아타가 정말로 에이디아와 등을 돌렸다고 파악하고 있는 상황. 결국 놈은 티아타에도 발을 붙일 곳이 없다. 그래서 남는 게 바로 이곳 영원의 숲. 놈이 저주를 벌려놓은, 에이디아와 티아타의 숙원이 담긴 장소인 것이다. ‘역시, 그 저주는.’ 단순히 엘프들을 날뛰도록 만드는 저주였다면 국왕이 이곳으로 오는 시점에서 화가 엄청나게 치솟은 엘프들과 1대 다수의 전쟁을 벌이게 될 뿐. 가뜩이나 패배해 도주한 국왕은 더욱 비참한 꼴로 끝장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놈이 이곳으로 향한다는 것은, 레이제나가 걱정한대로 감정 증폭의 저주 다음으로 발현될 흑마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 레이제나는 그 흑마법이 어떤 것인지 정체까지 알아낼 수는 없다. 아마 아르페가 이곳에 있었다면, 레이제나의 스킬 레벨까지 알아맞히는 그라면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그녀는 돌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설혹 흑마법의 정체를 알아낸다고 해서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타인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흑마법을 해제하는 방법도 모를 뿐더러 그것은 주인의 뜻에 반하는 일이다. 만약 국왕이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모르되, 이미 그가 와버린 이상 레이제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녀는 그저 그를 기다려, 그 명령을 받들 뿐이다. ‘······정말?’ 문득 속에서 치밀어 오른 의문을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골렘은 제약을 어길 수 없다. 그녀에게 그 외에 가능한 일은 없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다시금 비행 마법을 구사했다. 그리고머지않아 인간 일행과 마주할 수 있었다. 영원의 숲의 침략자, 평화로운 숲을 탐욕으로 물들이려는 자들과. “레이제나······!?”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국왕, 그리고 그와 함께 도망친 마도사 출신 귀족들은 영원의 숲 안쪽에서 모습을드러낸 레이제나를 보며 경악했다. “설명해라, 레이제나. 너는 벨라타로 향했을 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지?” “벨라타에서, 적과 조우. 포로로 붙잡혀, 해방되니 이곳. 난폭한 취급, 인간에게 절망.” “적과 조우해 포로로 붙잡히다니, 최강의 골렘인 네가 어찌······.” “아니.” 에이디아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수도에 갓 플러쉬를 펼친 바로 그 대마도사와 만난 것이겠지. 그래, 그는 루나틱 웨이브를 뚫고 바다를 통해 에이디아에 상륙한 것이 분명해. 그래서 여태까지 우리에게 정보가 파악되지 않았던 거야.” “허어, 그럴 수가······.” 국왕의 눈치는 제법이었다. 과연 아르페의 실력을 눈치 채고 일찌감치 도망칠 정도의 수준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벨라타에서 녀석과 조우한 거지. 단지 의문인 것은 어째서 기껏 붙잡은 레이제나를 놓아주었는가. 그리고 또 어째서 이곳인가······ 설마 놈, 이곳에 대해서도 파악을 하고 있단 말인가······?” 레이제나와 만난 덕에 괜히 그의 고뇌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레이제나와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은 솔직히 감사한 일. 국왕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확실히 그를 네 홀로 힘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겠지. 차라리 잘 되었다. 레이제나, 지금부터는 우리를 따라라.” “긍정. 과 함께 의문.” 그런데 안심하고 있던 국왕에게 순간, 레이제나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엘프들, 흑마법. 무엇?” “······뭐?” 국왕의 심장이 철렁했다. 어지간해서는 반문조차 하지 않는 레이제나가 먼저 질문을 던져오다니,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으니까. 더욱이 그 내용은 혹여나 그녀의 암시에 나쁜 영향을 줄까 두려워 국왕이 감춰두고 있던 금기였다. “왕궁에서 느껴진, 마나와 동일. 행사자는 국왕. 흑마법, 무엇?” 레이제나의 눈빛에 담겨있을 의지를 읽기 위해 국왕은 무던히도 애를 썼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투명하게 빛날 뿐이었다. 결국 국왕은 불길한 침묵을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그것은······ 에이디아를 지키기 위한 흑마법이다.” “어떻게?”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되니 더는 묻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긍정.” 끝내 그녀는 입을 다물고 얌전해졌다. 국왕은 조금 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으나,끝내 혀를 차며 돌아섰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가능성을 지켜볼 예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그걸 바로 발동해야겠어. 에이디아 본국은 포기하고 영원의 숲을 취한다.” “그 자가 쫓아오지 않을까요?” 국왕의 입가에 더러운 미소가 어렸다. “설령 그가 쫓아온다고 해도 상관없어. 마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엘프들의 힘을 끌어올 수 있게 된다. 우리와 레이제나, 엘프들의 힘까지 더한다면 제아무리 강대한 마도사라고 해도······.” “······.” 그 말을 들은 레이제나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엘프들의 힘? 어째서 국왕은 엘프들의 힘을 자기 것인 양 이야기하고 있단 말인가. 영원의 숲에 수작을 부렸던 것이 엘프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면 번지수가 틀렸다. 엘프들은 아르페를 적대하기 이전에 먼저 국왕을 죽이려 들 터였다. 그러니 남은 가능성이 있다면 흑마법 뿐이다. 저주에 걸린 엘프들 사이로 들불처럼 번져 심어진 흑마법. 트리거가 당겨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흑마법. ‘네가 직접 봐야 할 것이 그곳에 있어. 보고 나면, 바뀔 거야.’ 아르페의 목소리가 새삼스레 귓가에 생생하다. 그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걸까? 이 흑마법의 정체와 그 결과물까지도 이미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자신이 오는 대신 그녀를 보냈는가. 그녀에게 무엇을 바랐단 말인가. 골렘인 그녀가 대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세계수로 간다. 전속력으로!” “알겠습니다, 폐하!” “······잠, 깐.” 레이제나는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그러나 방금 국왕을 멈춰 세운 것은 분명 그녀자신의 목소리가 맞았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섰다. 그들 또한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레이제나는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어 물었다. “대답을, 원한다. 무슨, 흑마법?” “명령했을 텐데, 묻지 말라고.” 그녀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재차 물었다. “무슨, 흑마법?” “네, 년이 지금······.” 고장 난 골렘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레이제나를 보며 국왕은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아니리라 믿고 싶었지만 어쩌면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암시를 스스로 깨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암시가 깨질 리가 없다. 200년에 달하는 세월 반복적으로 부여된 암시를 한순간에 깰 수는 없는 것이다. 에이디아의 무수한 마도사가 그녀를 통제하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가, 지금 그들이 시험하는 마법이 어떻게 해서 탄생했던가! 국왕은 이를 악물며 반문했다. “레이제나, 어째서 그걸 묻는 거지?” “······자세한 내용, 알아야. 보조가 가능.” 보조, 보조라고 했겠다. 여전히 걱정을 떨칠 수는 없었으나, 국왕은 그 말을 들으며 적잖이 안심했다. 인간이란 급박한 상황일수록 단순하고 즉흥적으로 판단을 내리며 행동하게 되는 어리석은 생물인 것이다. “에이디아의 정수가 담긴 마법이지. 오랜 세월 티아타와 엘프의 반목이 지속되어온 것을 알고 있겠지. 나는 티아타에 요청을 받아 그것을 해결하는 마법을 만든 것이다.” “어떤 식으로, 해결?” “······.” “어떤, 흑마법?” 국왕은 망설였다. 그러나 암시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녀는 마법의 내용이 어떠하건 국왕을 도와 그 마법을 성공시켜줄 터였다. 그래, 더 이상 골렘인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가 행하려는 마법이 어떤 것이든, 골렘은 그저 따를 뿐이다! “엘프가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하는 마법이다.” “······긍정.” 레이제나는 돌아온 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정신과 관련된 작용을 하는 일이 많은 흑마법으로 엘프들의 힘을 이용하겠다는데 뻔하지 않은가. “좋아, 그럼 따라와라. 이미 마법의 씨앗은 심어두었고, 저주도 충분히 숙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수를 파괴해 그들의 이성을 완벽하게 무너트린 후 대마법을 발동시킬 것이다.” “세계수를, 무너트리고.” 레이제나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자극하고, 정신을 억압한다. 마법의 진행 구조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과연 에이디아는 마도의 종주국이었다. 숲의 종족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그들이 벌인 수작은 욕지기가 솟을 만큼 치밀했다. 하지만. “엘프들, 모두 잠듦. 세계수 파괴해도, 모름.” “뭐라?” “내가, 재움.” “······.” 레이제나가 어째서 엘프들을 재웠단 말인가? 그 생뚱맞은 말에 국왕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망설였으나 이내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들이 숲을 벗어나려 했군. 티아타로 쳐들어가려 한 거야.” 그것은 기쁜 일이다. 저주가 성공적으로 작용하여 놈들의 이성을 앗아갔다는 소리니까. 그런데 그것을 레이제나가 막았다고. “긍정.” “그래서 티아타에 피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전부 재웠다, 그 말인가?” “긍정.” 순간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과연 그것도 골렘인 레이제나라면 할 만한 판단이라 여긴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럼 이제 그들을 깨워라, 레이제나. 의식은 단순할수록 좋지만, 잠들어있는 채라면 진행할 수가 없어.” “······긍정.” 레이제나는 깊은 고뇌 끝에 스태프를 들어 한 가지 마법을 영창했다. 그것은 엘프 정도가 아니라 저 너머 마계의 마왕이라도 깨울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마나를 담은, 폭발 마법이었다. < Chapter 19. 영원의 숲 - 7 > 끝 ⓒ 토이카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1 > 아르페 일행이 게이트를 넘어 티아타에 도달한 그때, 저 멀리서 마법의 발동으로 인한 폭음이 울려 퍼져 그들의 고막을 두드렸다. 아르페는 단지 그것만으로 마법이 발현된 장소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 마법이 누구의 마나에서 비롯된 것인지 순식간에 파악하곤 씩 웃어버렸다. “레이제나, 역시 제대로 해주고 있네.” “레이제나가 엘프들을 공격하고 있는 거야!?” 어김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하는 메테르의 이마에 알밤을 한 방 먹여준 후, 그는 돌아서며 게이트에서 쉴 새 없이 빠져나오는 인간들이 열을 맞추기를 기다렸다. 다이탄 국왕이 그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셈이오, 마도사?” “일단 저기서 몰려오는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겠지.” 아르페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으로부터 내달려오는 무수한 숫자의 병사들과 기사들! 그야 에이디아 국왕 일행이 빠져나왔을 땐 워낙 소규모였던 터라 비밀리에 움직일 수 있었지만 아르페 일행은 이건 뭐 숨길 생각도 없이 우르르 대규모 이동을 해버렸으니 티아타 측에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메테르.” “······아르페, 그 ‘너로 정했다!’같은 표정은 뭐야?” 아르페의 조기교육이 빛을 발한 것인지 이젠 메테르의 실력도 제법이었다. 아르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외쳤다. “너로 정했다! 저놈들을 최대한 부드럽게 돌파하는 거야!” “너무해!” “그리고 하는 김에 우리가 영원의 숲에 다녀올 때까지 혼자서 티아타를 상대해줘. 아, 가능한 한 애들은 죽이지 마.”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너무해!” 이번 사태의 핵심은 ‘최대한 적은 피’를 흘리는 것. 따지고 보면 다이탄도 에이디아도 티아타도, 그리고 물론 영원의 숲까지도 소수의 인간들에게 휘둘려 놀아났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죄가 없다. 아르페는 최대한 스무스하게 이번 일을 넘기고 싶었다. 그 사고방식의 결과물이 갓 플러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지만 지금 그것은 무시한다. 영원의 숲에서의 소동이 번질 경우 티아타까지도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 그때 누군가 절대적인 무력이 티아타의 시선을 잡아끌어준다면,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만약 엘프들이 영원의 숲을 빠져나온다 해도, 그녀가 티아타에 있으면 최대한 희생을 내지 않고 그들을 제압하는 일 또한 가능할 터!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은데······.” “아니, 그뿐인데?” 아르페는 뜨끔하여 곧장 부정했지만 사실은 메테르의 말이 맞았다. 그가 그녀를 이곳에 남겨두려는 것은 영원의 숲과 관련된 썩 좋지 않은 일을 어디까지나 자신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사태는 완벽하도록 깔끔하게, 누구 한 명 상처입지 않고 끝날 수는 없는 일이다. 전생과는 달리 이미 아르페가 여러 부분에 손을 써놓았기에 과거와 같은 참사는결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르페는 메테르가 영원의 숲과 엮이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부탁해, 메테르. 소원이야.” 아르페는 메테르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그녀와 눈을 가까이 하며 부탁했다. 아르페가 얼버무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넘어가고 마는 메테르! “응, 나한테 맡겨둬!” 역시 단순한 여자는 이래서 좋다니까. 바스타드를 뽑아들며 달려 나가는 메테르를 뒤로 하고 아르페가 나쁜 남자 같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자 다이탄 국왕은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그녀가 강한 전사에, 용사라는 것까지도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녀 혼자서 공국을 통째로 틀어막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하단 말인가?” “응.” “흐랴아아아아아아!” 때마침 뛰쳐나간 메테르가 강타 스킬을 담은 검을 거세게 내리쳐 복도를 통째로 무너트려, 그 위를 달려오던 수천의 기사와 병사들을 한꺼번에 묻어버리는 것을 보며 국왕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떤 의미로는 아르페의 마법보다 더 무서운 광경이었다. “최대한 죽이지 말랬더니 정말 죽기 직전까지만 때려놓으려는 모양인데 저거.” “인세의 영역을 벗어난 힘이군······.” “나중에 마왕군이랑 싸울 땐 그 힘을 지겹도록 겪어야 할 텐데. 정예 병력 육성에지금부터 힘을 기울이는 게 좋을걸.”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대는 용사였지! 마왕 출현의 가능성을 이제야 깨달았네!” 굉장히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놈이었다. 아르페는 놈을 째려봐주고는 돌아섰다. “그럼 출발해볼까.” 수만 명의 기사와 마도사들, 다른 말로는 관객들. 아르페는 궁전 벽을 터트려 시원한 통로를 만들어내어 그들을 이끌었다. “그러니까 어째서 꼭 지나가는 곳마다 다 무너트리느냔 말이오!” “자, 마나가 과열된다! 서두르자!” 영원의 숲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지금 이 자리의 인간들은 모두 그 정도 거리는 우습게 주파할 수 있는 능력자들! 아르페가 호언장담한 대로 정말 메테르 혼자서티아타를 통째로 틀어막고 있는 동안, 그들은 빠르게 티아타를 빠져나와 영원의 숲 접경에 도달했다. 그쯤 다른 이들도 눈치 챘다. 숲 전체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사실을. 저주, 흑마법, 그리고 저 너머 어디선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마나의 대립. 그것을 느끼며 일행이 이를 갈았다. “이건 비처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운이 아닌가.” “우리가 늦었는가!” 지금 이곳에 모여든 이들에게 엘프를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이성을 지니고 있는 종족을 대상으로 용납 받아선 안 될 대륙 최대의금기가 행해지고 말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언젠가 같은 인간을 향해 돌아올 수 있음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늦었다고 표현한다면, 이미 몇 달 전부터 늦어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르페는 부유 스펠의 속도를 높이며 일행을 안심시켰다. 이 일은 늦든 이르든 벌어지게 되어 있었고, 알았다고 해서 쉬이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아르페에게 이 모두를 언제든 무로 돌릴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쥐여져 있다는 것이다. [먀, 먀먀먀먀먀, 먀먀앗먀아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지금은 좀 기다려야 해. 상처가 덧나기도 전에그걸 치유해버리면, 그들은 경각심을 갖지 못하게 되거든.” 아르페는 당장이라도 숲에 어린 기운을 몽땅 먹어치우고 싶어 날뛰는 로아를 차분하게 달래며 녀석에게 속삭여주었다. 여기서 메테르를 보낸 이유가 하나 추가된다. 바로 아르페의 시커먼 속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거 이미지 관리라고 하는 거지, 오빠? 언니한테는 지극정성이라니까, 정말.” “하지만 넌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사태를 깔끔하게 끝내고 싶었더라면 사실 레이제나와 함께 로아를 곧장 티아타로보내면 되었다. 하지만 아르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두 그가 사전에 해결해버리면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고 레이제나는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달아야 했다. 여태껏 그들이 저질러온 일의 실체를,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그러면 나중에 우리가 좀 편해지겠지.” “이미 오빠는 엄청 귀찮은 상황인걸. 아무리 다른 사람을 대신 내세워도 결국 오빠가 다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 말 거야.” “시끄러, 이 녀석.” “으이이이이.” 아르페에 양손에 뺨을 짜부당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시에나. 어쩐지 조금 재밌어진아르페였으나 뒤에서 ‘여자가 둘······.’이니 ‘용사라는 사람이 여자를 둘이나 끼고 노닥······.’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와 그만두었다. “기운이 점점 더 가깝게 느껴지는데.” “아니, 이건 혹시 엘프들의 마나가 아닌가?” 정답이다. 영원의 숲 한중간에서 일어나는 소란으로 인해 서서히 엘프들이 자극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증폭의 저주. 지금 이 때에 숲에 침입해 있는 수만의 인간 무리를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미쳐 날뛸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발견했다! 인간이다!” “캬, 말하기가 무섭게 오는 거 봐.” 전투를 예감케 하는 목소리가 일행의 고막을 진동시킨 직후, 나무로 가득한 숲 너머에서 화살 수십 발이 쏘아졌다. 물론 그 모두 아르페가 영창한 홀리 배리어에 가로막혔다. 이미 용사라는 사실을 들켰으니 마도사 외의 클래스의 스펠을 사용하는 데에도 망설일 것이 없었다. “큭, 숲속의 엘프 수백 명이라······ 안타깝지만 그냥 당해줄 수는 없다. 전원 전투 준비를······!” “할 필요 없어!” 다이탄 국왕의 말을 끊어버리듯 외치고 간단한 마법을 영창하는 아르페. 그것은 다름 아닌 화염구 마법이었다. “자, 잠깐······.” “인간, 말로 하자!” “가랏!” 순식간에 보름달 만하게 커진 화염구는 아르페의 손을 떠나 순식간에 저 멀리 숲에 착탄하여 폭발했다! “으아아아아악!” “숲이, 숲이 타오른다!” “대체 얼마나 마나가 많으면 단순한 화염구로 저런 끔찍한 참상을! 인간, 용서치 않겠다!” 엘프들이 아르페를 죽일 것을 다짐하건 말건 순식간에 수십 그루의 나무가 타오르고, 점점 다른 영역으로 불길이 번져갔다! 인간들이 뜨악하고 엘프들마저 경악해공격을 멈춘 그때 아르페가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 우리랑 싸울래, 저 불 끌래! 불 끈다고 하면 우리는 공격 안 할게!” “큭, 저 악랄한 인간 같으니!” “비겁하다!” 비겁하게 숲을 인질로 잡고 엘프들을 협박하는 용사의 모습! 그러나 그것은 실로 효과적이었다. “크으윽······ 두고 보자, 인간!” “잊지 않겠다!” “으아아악, 불이 번집니다! 다들 서둘러!” 엘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 삶의 터전이 되는 숲이었다. 설령 그들의 전의가 증폭되어 있어 인간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로 충만해졌어도, 눈앞에서 숲이 타고 있는데도 그것을 놔두고 인간들과 드잡이 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와, 썰물처럼 빠지는 거 봐. 숲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니 역시 엘프들은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받은 모양이야.” “······어디서 그런 비겁한 수단은 줄줄이 배워왔는가.” 엘프들과 한창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다이탄 국왕이 검을 수납하며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페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씩 웃기만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후로도 수만 명의 인간을 감지한 엘프들 무리가 시도 때도 없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럴 때마다 아르페는 새로운 화염구를 만들어내어 던져 숲의 일부분을 불태웠다. 엘프들은 경악하며 당장 그것을 끄기 위해 달려갔고 그러는 사이 일행은 쾌속으로 숲을 질주했다. 그리고 아르페의 뒤를 따르던 이들은 슬슬 싸울 각오를 단단히 마쳤던 것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인간!” “에잇.” “끄아아악!” 양손에 하나씩 화염구를 장전하고 숲을 내달리는 아르페의 모습은 방화마가 따로없을 만큼 흉악해보였다. 그러나 어쨌든 영원의 숲을 거의 30% 가까이 주파했음에도 그 순간까지 인간과 엘프의 희생이 모두 제로 스코어였으니 실로 평화적인 방법이기는 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떨떠름한 생각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게 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만들어낸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인한 착각이야.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고쳐먹도록······ 아.” 언제 어디서 엘프가 나타나든 그들을 효과적으로 쫓아버리기 위한 계산을 하고 있던 아르페의 발이 중간에 뚝 멈추었다. 열심히 따라 달려오던 이들이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멈춘 그때, 아르페의 두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고 있던 화염구가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도착했다. 세계수야.” “세계수?” 다이탄 국왕이 반문한 다음 순간, 그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나무들이 화려한 폭발마법으로 터져나갔다. 아르페가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그 잔해를 걷어내고 나자, 그제야 나머지 일행 또한 아르페가 무엇을 두고 말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네 년······! 주인을 거역하려느냐!”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님.” 그곳에는 작달만한 소녀 한 명을 상대로 비겁하게 어른 여럿이 달려들어 치열하게 마법 전투를 벌이는 광경과, “이럴 수가······.” “나무가 이렇게까지 자라날 수 있단 말인가? 제아무리 많은 세월을 버텨냈다 해도 어떻게!” “아아아, 이것이 바로······.” 소녀가 등을 지고 있는 거대한, 실로 거대한······ 지면에서부터 뻗어난 길이만 따져 족히 삼백 미터는 넘는 말도 안 되는 크기의 나무가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1 > 끝 ⓒ 토이카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2 > 세계수는 모든 엘프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리는 신수. 세계수가 살아있는 한 엘프의 명맥은 끊이지 않으며, 세계수가 시들지 않는 한 결코 엘프의 힘 또한 쇠하지 않는다. 세계수는 엘프라는 종족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함께하는, 그들 종족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것이 지금 일행의 눈앞에 있었다. “나도 이렇게 온전한 상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온전한 상태······?”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는 얘기였어.” 그 높이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세계수를 보며 마음이 느슨해졌던 탓에 그만 전생과 연관된 감탄사를 내뱉고 만 아르페는 그 부분을 잽싸게 물어오는 시에나에게 빠르게 변명했다. 물론 시에나 또한 세계수에 압도된 상태였기에 그의 변명에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주었지만. 세계수에 감명을 받은 것은 아르페만이 아니었던지 다른 인간들도 여기저기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엘프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 들 만하군. 세계수 전체에서 느껴지는 이 어마어마한 마나······ 세계수를 이용하면 과연 얼마나 대단한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을지.”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엘프가 인간을 적대하는 거라고, 임마.” “큭!” 아르페는 서슴없이 다이탄 국왕의 뒤통수를 갈겼다. 국왕은 그런 네놈은 화염구로 영원의 숲의 나무를 족히 10% 이상은 태워먹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힘이 약하니 얻어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러워서라도 앞으로 더 레벨을 올리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큭, 인간들!? 그리고 저놈은······!” “······지나치게, 빠름.” 아르페 일행이 세계수 앞에 당도했다는 것을 에이디아 국왕 무리와 레이제나 또한 알아차렸으나 지금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느라 다른 데에 한 눈을 팔 시간이 없었다. 레벨 240을 넘기는 수준의 대마도사인 국왕과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의 고위 귀족들이 전부 달려들어 간신히 레이제나와 호각을 이루고 있었으니 과연 레이제나의 실력을 알 만 했다. “역시 에이디아를 대표하는 마도사 집단인가. 그 품은 뜻은 사악하나 힘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그런데 그들과 맞서 싸우는 소녀는 대체 누구지? 그 몸에 지닌 마력이 저들보다 더 깊잖아!?” “헛, 레이제나······ 레이제나가 국왕에게 반기를 들었단 말인가!?” 다이탄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레이제나의 존재를 모르는 마도사들은 모르는 대로, 알고 있는 마도사들은 또 아는 대로 놀랐다. 결코 에이디아를 거스르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던 레이제나가 지금 국왕을 비롯해 그녀의 명령권을 지닌 자들을 대놓고 공격하고 있었으니까! “오, 저기 하극상하는 골렘이다.” “······하극상, 아님.” 아르페의 태클을 귀신 같이 들었는지, 레이제나가 전투로 바쁜 와중에도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제약, 그런 거 없었음. 인간은 다, 사기꾼.” 그녀가 국왕을 반하게 만든 명령이란 무엇이었을까? 전투의 흔적이 숲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이곳 세계수에까지 이른 것을 보면 적어도 그녀가 이젠 에이디아에서 준비한 저주와 흑마법에 대해 대부분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과연 그녀는 국왕이 엘프들에게 하려는 짓을 알고, 그것에 품은 반감을 기초로 드디어 그를 거스르고 스스로 바라는 행동을 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자신의 목을 조이는 족쇄는 당연하게 감내하고 있었으면서, 타인이 당하는 모습을 참지 못해 끝내 행동에 나서다니······ 하긴, 그녀는 전생에서도 그렇긴 했지. 그땐 이미 한참 때가 늦어 있었지만.’ 전생에서 그녀는 흑마법이 완벽하게 발동되어 모든 엘프들의 목줄을 조르고 있던때에야 간신히 주인을 거스를 생각을 했다. 그녀가 용사와 같은 편에 선 순간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희생이 너무나 많았고,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또 거기서부터 무수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와 일찍 조우한 아르페가 다양한 방식으로 간을 보고 양념을 치며 자극을 준 덕에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막지 못했더라면 또 그런대로 일을 풀어갈 방법이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최상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마왕보다 더한 판 깔기 능력이라고 아르페는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아직 일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에이디아 국왕은 필사적으로 레이제나의 사고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이미 효력이 다 한 암시를 재차 발동하여 그녀를 옥죄려 드는 것! “나중에 그것이 더 큰 대가로 돌아올 것이다! 네년은 지금 사고회로가 마비된 것에 불과해!” “제약은 실시간. 나는 멀쩡. 제약은 없음. 지금, 무척 화났음!” “큭······!? 막앗!” 당연히 그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레이제나가 양손을 펼치자 그녀의 마력에서 비롯된 바람이 용의 발톱처럼 들고 일어나 국왕 무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녀의분노와 마력을 듬뿍 담아낸 일격이었다. “빌어먹을!” “크아아아아악!” 마도사 사이의 전투에서는 긴 영창이 필요한 대마법보다도 마력만 있으면 즉각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단발성의 공격마법이 더 유효한 법! 공격을 당하는 이들 또한 빠르게 방어마법을 영창했으나 순발력에서 밀린 탓에 개중 두 명의 몸이 갈가리 찢겨졌다. [먀아. 먀아아아아아. 먀먀먀먀먀먀먀아아!] “참아, 조금만 더 참아.” “오빠는 정말 성격이 나빠. 그 점도 정말 좋아!”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슬슬 너도 준비해, 시에나.” “정화라면 자신이 있어, 맡겨둬.” 세계수에서 벌어지는 세기의 마법 전투는 숲 일대의 마나를 자극했다. 저주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게 된 엘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수를 향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들이 숲 밖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괜히 메테르만 더 귀찮게 만드는 꼴이 되었을 테니까. “마도사, 우리는 무얼 하면 되오? 그대가 저 끔찍한 마력의 소녀를 붙잡아준다면, 우리 힘으로 에이디아의 잔당을 처리하겠소만.”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 미안하지만 사실 너희한테 맡길 일은 없어. 너흰 버터옥수수나 먹고 있어.” “버, 버터옥수수?” “디아스의 명물 모르냐? 역시 촌뜨기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어차피 이들은 더러운 역사를 기록하고 반성하기 위해 마련한 관객에 불과하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레이제나, 아르페, 그리고 로아와 세계수뿐이었다. “인간들이 이곳에!” “감히 신성한 세계수를 더럽히려······ 인간!” “저들을 모두 죽이라고 세계수께서 명하고 계신다!” “다크엘프? 아니, 지금은 세계수의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다크엘프가 될 것이다!” 머지않아 일대의 엘프들이 전원 세계수로 몰려왔다. 그 숫자는 점점 불어나 순식간에 수만을 돌파했다. 개개인의 레벨은 낮을지라도 숲속에서, 그리고 세계수의 비호를 받는 한 두 배 이상으로 능력이 뛰는 엘프가 한꺼번에 수만! 그쯤 되자 인간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 마도사. 그놈의 버터옥수수가 대체 무슨 암호요? 이대로 있다간 정말 많은 이들이 위험해질 것 같소만. 영원의 숲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란 말이오!?” “너무 초조해하지 마, 어차피 저 녀석들은 곧 한가롭게 우리를 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게 될 테니까. 자, 넌 저 엘프들이 지금 정상으로 보여?” “뭐?” 아르페의 말에 순순히 엘프들을 돌아본 다이탄 국왕은 다음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다크 엘프? 아니, 지금 영락하고 있잖아!” 사방에서 몰려오는 엘프들. 그들 중 절반 가까운 숫자의 피부가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엘프의 전승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규율을 지키지 않아 세계수에 버림을 받았을 때 전락한 결과물이라는 다크 엘프. 그 말을 믿는다면······ 지금 저 엘프들은 통째로 세계수를 반하고 있는 셈이었다. “안 돼, 내 피부가!” “장로님, 멈추세요! 장로님의 피부가 갈색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세, 세계수께서 어째서 나를!” 엘프들은 기껏 그들의 영역에 들어온 인간들을 벌하는 것도 잊고 극심한 혼돈에 빠져들었다. 대체 어째서? 세계수와 감응하며 단지 숲을 지키기 위해 인간과 싸우려 했을 뿐인데 어째서 다크 엘프로 전락하고 있단 말인가! “오빠······ 나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인간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엘프들도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시에나가 아르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이것도 오빠가 의도한 바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르페의 입 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역시 시에나는 누구와 달리 머리가 좋다니까. 그는 그 질문에 답을 해주는 대신, 시에나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시에나, 넌 다크 엘프가 어떻게 탄생하는 건지 알고 있어?” “규율을 어긴 엘프를 세계수가 벌하는 것······ 이 아니니까 오빠가 그렇게 물어봤겠네?” “응.” 아르페는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다크 엘프는 일종의 전직이야. 세계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특정한 성향의 엘프를 골라 내리는 축복이기도 하지.” “축복······?” 지금 상황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그 말에 시에나가 반문했다. 아르페는 키득 웃으며 보충했다. “다크 엘프는 일반 엘프들에 비해 생산 계열 스킬의 성장이 둔화되는 대신 전투 계열 스킬, 스펠의 성장이 빨라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거든. 엘프가 숲의 관리자라면, 다크 엘프는 숲의 파수꾼인거야.” “하지만 엘프들은······.” “맞아. 그들은 전투적이고 활발한 성향을 보이는 다크 엘프를 규율을 어겼다 배척하고, 숲에서 쫓아내지. 그래도 다크 엘프는 그 대다수가 숲을 잊지 못해 그 주위를 얼쩡거리고, 숲을 지키며 그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해내.” 미케나가 숲에서 쫓겨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숲에 닥친 위기를 직감하고 상인으로서 활동하며 어떻게든 숲을 지켜보고자 노력한 것. 아마 파수꾼 중에서는 가장 적극적이고 톡톡한 성과를 올린 축에 들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은 봐, 세계수가 굉장한 위기에 처해있지. 당장 세계수를 불태울 수 있는 수준의 마도사만 여럿에, 수만의 기사들까지. 세계수가 겁을 먹기에 충분한 환경이잖아?” “그래서 이렇게 축복을 난사하고 있는 거야······?” “정답.” 자신을 지켜줄 파수꾼의 숫자를 늘리는 세계수와, 그 세계수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엘프들. 실로 어리석고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물론 전생에선 제법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왜 굳이 이런 꼴을 만든 거야, 오빠? ······아, 그렇구나.” 시에나는 숲을 구성하던 엘프들 가운데 50% 이상이 단박에 다크 엘프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며 의아해했지만, 아르페에게 묻다 말고 스스로 답을 찾아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엘프들은 인간에게 계속 당하는 삶을 살아왔다. 숲을 지킬 무력이 부족해 뻑하면 인간에게 납치당하거나 저주에 걸리거나, 인간에게 굴욕을 당한 역사로만 편집해 500페이지 세 권 묶음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직접적인 무력인 다크 엘프를 인정하고 육성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크 엘프가 탄생하는 대로 쫓아내기에 급급했으니, 영원의 숲의 전력이 늘어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에이디아와 티아타가 영원의 숲을 범하려 했던 것도 결국 그들이 만만해서였다. 만약 미케나와 같은 높은 레벨의 다크 엘프들을 배척하지 않고 모아 부대를 육성했더라면, 애초에 저주가 숲까지 파고들 일이 있었을까? 인간들이 쉽게 엘프를 납치해 저주의 실험에 써먹을 수 있었을까? “물론 이번 사태에서 가해자는 절대적으로 인간이야. 하지만 사태가 이 모양이 된 데에는 엘프들의 원인제공도 결코 적지 않아. 언제까지고 이런 모습이어선 아무리 내가 인간들을 단속하건, 결국 이 녀석들은 이와 비슷하거나 더 끔찍한 꼴을 당할 거야.” “알겠어. 그러니까 오빠는 인간들도, 엘프들도 공평하게 혼내주고 싶었던 거구나.” “정답.” 그렇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 사태를 방치했던 것은 비단 인간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엘프들에게 쓴 맛을 보여주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강제로 바꾸어놓기 위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악랄해! 나빠!” “그래서 싫어?” “너무 멋져!” 아르페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시에나의 메테르화에 우려를 금할 수 없었지만, 일단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 안 돼! 이런, 다크 엘프는······!” 레이제나와 싸우던 도중 일이 수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이디아 국왕이 고함을 토해냈다. 어째서? 인간의 보편적인 인식으로, 갈색의 피부보다는 흰색의 피부가 선호되기 때문이다. 실로 역겨운 인간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비명이었다. “폐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더 폭주하기 전에 어서 세계수를 터트리고 그 마법을!” “지금 당장······ 이이이익, 레이제나아아아아!” “긍정. 내 이름, 레이제나. 에이디아로부터, 얻은 유일한 것.” 레이제나가 고개를 들었다. 국왕의 내부로부터 짙은 흑색의 마나가 뭉글뭉글 피어나는 것이 느껴져 기분이 무척 불쾌했다. 그것이 저 엘프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더욱 불쾌했다. 저 국왕의 머릿속에 들었을 생각이 쉽게 연상되어 너무나 짜증이 났다. “나를 따라라, 레이제나! 에이디아의 번영을 위하여!” “에이디아, 이제 없음. 망했음.” 그녀는 냉정하게 대꾸하며 양손을 펼쳤다. 그녀를 넘어설 수 없음을 깨달은 국왕은 급기야 세계수를 쓰러트리는 것을 포기하고 당장 흑마법을 발동시키고자 했다. [먀아아아아아. 먀먀먀아아.] 그리고 그때에 이르러 인내가 한계에 달한 로아가 초조하게 울부짖으며 아르페를보챘다. 꼬리로 찰싹찰싹 그의 팔을 때리며 내보내달라고 간청하는 로아를 보며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오래 기다렸다. 이제 됐어, 로아.” 그리곤 녀석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다 먹어치워라!” [먀먀먀먀먀아아아아아!] 국왕의 몸에서 마나가 활성화되고, 시에나의 두 눈이 부릅 뜨인 그 순간. 에이디아와 티아타, 영원의 숲을 뒤덮은 암운을 모두 걷어낼 마지막 주인공이 힘차게 울부짖으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3 > [먀먀먀먀먀먀먀먀먀먀!] “와, 로아 엄청 흥분했네.” 검은 안개가 되어 순식간에 일대를 뒤덮으며, 사방의 부정적인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로아. 지금 영원의 숲의 상황은 녀석이 태어났을 때 이래 가장 많은 먹이로 가득한 뷔페였다. 인내 끝의 과실은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법, 엘프들의 마나를 양분으로 삼아 한껏자라난 저주의 기운과 인간들이 모아둔 흑마법의 기운 모두 로아가 지금껏 먹어본 것들 중 가장 맛있었다. 세상 모든 저주가 자신을 위해 모여든 것만 같다는 생각에 로아는 환희의 포효를 내질렀다. [미야아아아아아앙!] “큭, 이럴 수가!?” 로아의 포식활동에 당장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에이디아의 전 국왕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흑마법을 익히고 있는 흑마법사. 그것도 이제 막 흑마법을발휘하려는 순간인데, 그 모든 기운을 다짜고짜 빨아들이는 탐식의 마수가 나타났으니 마나를 제대로 컨트롤할 수야 있겠는가? “마, 마나가······.” “안 돼, 마법진이 으스러진다! 이럴 수는 없어!” [먀아아아아앗!] 그나마 그들의 레벨이 로아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면 모르되, 탄생 이후 아르페와 함께하면서 가히 탐식의 마수의 로열로드를 걸어온 로아는 레벨로만 따져도 이미 그들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헛, 이것······ 크학!?” “끄아아아!” 그들은 당연히 마법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 당황했고, 그 틈을 파고든 레이제나의 일격이 국왕을 제외한 나머지 귀족의 머리통을 깔끔하게 전부 터트려버렸다. 다급히 방어 마법을 영창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똑같은 꼴이 되었으리라 직감한에이디아 국왕이 공포감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레이제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어째서 흑마법이 발동되지 않은 것인지, 마나가 다른 곳으로 빨려나가고 있는지 궁금해 할 틈도 없었다. “레, 레이제나 네년! 감히이이이!” “행운. 근심 없음. 볼일에 집중.” 아르페가 오기만 해주면 막연히 전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설마 저런 사기스러운 능력의 마수와 함께였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그 덕에 더 이상 세계수를 보호하거나 흑마법을 방해하는 데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런 제한이 없다면, 레이제나가 낼 수 있는 힘은 지금까지의 족히 두 배는 되었다. “나는 네 주인이다! 주인이란 말이야! 골렘이 감히 그 주인을 거스르려 하느냐!” “나는 데마이트, 내 주인은 나. 자유의지, 행사.” 그녀는 골렘이 아니다. 뭐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목줄은, 지긋지긋. 내 목에 걸린 것도······.”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마나를 짜내며 주위를 둘러보는 레이제나. 골수까지 파고든 저주에 자아를 상실하고 괴로워하는 엘프들을 훑던 그녀의 시선이, 어째선지 다음 순간 저 너머 아르페에게 꽂혔다. ‘······부정. 저 인간은, 원래부터 자유. 조금 지나치게, 자유.’ 그와 함께했던 때에 잠깐 느꼈던 동질감 따위 그녀의 착각에 불과하리라. 전부 연하취향인 아르페가 자신을 꼬시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를 했던 것에 아주 조금 속았을 뿐이다. 그뿐이다. 레이제나는 아르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타인의 목에 걸린 것도. 전부, 지긋지긋.” “엘프가 인간에게 복종한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래, 그것은 저런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엘프들의 힘을 빌린다는 뜻이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레이제나가 양팔을 들었다. 마법은 이미 완성되어 쏘아내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제나의 대인마법 중 최고의 위력을 자랑하는 얼음 계열 극소 범위 궁극마법, 빙룡의 분노였다. “하지만 나는, 데마이트.” “레이제나, 잠깐······ 큭!? 카학!” 1차로 마법적인 냉기를 뿜어내 적의 마나와 물리적인 움직임을 무력화하고 구속한다. 2차로 모든 것을 얼려 부수는 얼음폭풍을 극소 범위로 압축해 내쏘아 적을 파괴한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빙룡의 분노에 정통으로 당한 에이디아 국왕은, 이미 그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하나도 남겨놓지 못하고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후.” 자신이 주인이라 인식하고 따르던 상대를 모두 깔끔하게 전멸시킨 레이제나는 잠시 허공에 동동 뜬 채 혹시나 자신의 몸에 이상이 닥쳐오는지를 점검했으나, 아무리시간이 흘러도 변화가 닥쳐오지 않았다. “자유, 정말로 자유.” 하긴 그녀가 정말 골렘이었고 제약을 어긴 대가를 치러야 했더라면 엘프들을 깨우라는 명을 무시하고 귀족들 대다수를 잠재워버린 폭발 마법을 영창한 그 순간 당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확인 절차인 셈이었다. “원래부터, 자유. ······무식하면 몸이 고생. 지부장 취임보다, 기분 최고.”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새삼스럽게 확인한 후, 아무런 흔적도 없는 자신의 목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지상에 착지했다. 우연이었을까, 바로 그 근처에 더럽게 잘생긴 자안의 마도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런데 우리 헤어질 때 뭐라고 했더라? 골렘은 주인의 명을 따른다, 뭐 그런 비슷한 소리를 커헉.” “얄미움.” 레이제나는 자신이 무력으로는 아르페에게 딸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주먹에 강화 마법을 걸어 아르페의 복부를 가격했다. “자유를 되찾아준 사람한테 너무한커헉.” “얄미움.” 말을 할 때마다 한 대씩 타격이 들어올 것 같았으므로 아르페는 입을 다물어버렸으나, 그럼에도 레이제나의 가격이 끝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음. 내 상태, 완벽하게 파악. 하지만 무언. 얄미움. 얄미움. 얄미움.” “말해줘도 안 믿을 거였잖아! 시에나, 도와줘!” “앗, 저기 저주로 괴로워하는 엘프들이! 나 잠깐 다녀올게 오빠!” “날 배신하다니!?” 레이제나는 아르페의 복부를 그로부터 몇 번을 더 가격한 후에야 간신히 분이 풀렸는지 주먹을 거두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로부터 두어 걸음 물러나 그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움.” “감사인사 한 번 과격하네. 두 번만 더 감사했다간 뼈 부러지겠다.” “얄미움 재충전.” “아냐, 하지 마. 내가 잘못했어.” 레이제나는 마법을 영창하다 말고 취소했다. 그리곤 아르페에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엘프들, 이제 안전?” “음, 아마.” 아르페는 말을 마치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들은 에이디아의 전 국왕을 비롯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폭사해버린 에이디아의 지배자들이 있던 자리를 보며 허탈한 심정에 눈만 깜박이고 있었고, 세계수 아래로 모여든 엘프들은 로아에 의해 강제적으로 저주와 흑마법의 기운을빨리는 와중에도 그것으로 인한 고통보다 다크 엘프로의 영락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더욱 괴로워하고 있었으며, 로아는 이 일대의 모든 부정적인 기운을 흡수해버리겠다는 기세로 포효하고 있었다. [먀아아아아아아아아!] “적어도 저들이 저주나 흑마법에 물들 일은 없어. 기운을 다소 강제로 빼내고 있으니 마나 회로에 상처를 입긴 하겠다만, 요양하면 낫겠지.” “구원 방법도, 사악하기 그지없음. 마왕 후보군. 하지만, 다행.” “너처럼 눈치 빠른 꼬마는 정말 싫어.” 아르페는 레이제나에게 농담조로 대꾸하며 피식 웃었다. 아르페가 엘프들의 집단다크 엘프화를 방치했음을 그녀가 알고서 하는 말이라면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다크 엘프로 변한 엘프들은 다시는 원래의 피부를 되찾을 수 없다. 이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다크 엘프가 되어버렸으니, 그것을 인정하든 여태 그러했듯 그들을 내쫓든 둘 중 하나의 선택이 그들의 미래를 가를 것이다. 물론, 적어도 절반 이상의 엘프는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르페의 작전은 그것만으로 이미 대성공이었다. “어쨌든 저들과 일단 대화는 시도해야 할 테니, 미케나를 불러야겠지······ 으아아, 혼날 걸 생각하니 우울해지네.” “······경악. 여자가, 또 있음.” “전속상인이거든.” 그는 레이제나의 태클에 이를 갈며 반박하고는 돌아섰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기까지, 아르페와 함께 숲을 찾아왔던 인간들은 끊임없이 멍을 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 에이디아 잔당 토벌 완료됐지? 너흰 이제 돌아가.” “아니, 하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찝찝하지?” “그, 그렇소.”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짚어내는 아르페의 말에 다이탄 국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긍정했다. 흑마법을 다루는 사악한 자를 처단한다는 영웅적인 목표와 함께 모여든 수만 명의 기사들과 마도사들! 그러나 정작 그놈들을 처치한 것은 웬 듣도 보도 못한 소녀였고, 저주와 흑마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엘프들을 구원하고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무서운 마수였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주역을 원했거늘 조역도 아니고 하다못해 이름 한 번 언급되지 않고 끝나는 엑스트라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기분에 박탈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 저어기 에이디아 국왕이 쓰던 아티팩트 같은 거 몇 개 기념품 삼아 주워서 돌아가. 돌아가는 김에 이 인원으로 티아타 정벌도 마무리하고, 아, 메테르는 이쪽에서 회수할 테니까 이번엔 너희 힘만으로 해. 너희 마도사들, 다이탄에 협력하겠지?” “혀, 협력은 하겠다만······ 이 기분은, 이 기분은 대체······.” “이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은 대체 무엇이지······?” “그건 너희가······ 용사가 아니라서 그래.” 그 어떤 강렬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라도 근처에 용사가 등장하는 순간 용사를 돋보이게 하는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다. 예쁜 여자는 용사한테 반하고 멋진 남자는 용사를 존경하게 되며 늙은이는 연륜을 뛰어넘는 용사의 지혜에 감복하고 영주는 용사에게 영지를 넘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지······.” “티아타는 이미 지배자를 잃은 상황이야. 에이디아와 다이탄의 힘이 하나로 합쳐졌음을 과시한다면, 아마 별 충돌 없이 무난하게 접수할 수 있을 거야.”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다이탄 국왕은 적당히 포기하고 물러났다. 하나로 모아진 기사들과 마도사들의 힘을 티아타 정벌에 쏟아야 한다는 현실은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었으나, 실제로 지금 상황이 끝나버렸으니 여기에 더 끼어들 건덕지가 없었다. “그러면······ 전군 회군. 이대로 티아타로 향한다.” “크흠, 이렇게 티아타로 향하는 것은 모양새가······.” “아니, 그렇지만도 않소. 어쨌든 티아타 또한 이 끔찍한 참사에 역할을 했던 것은사실이지 않소이까. 에이디아와 티아타의 지도부 모두 대죄를 저질렀으니, 우리가 새로 따를 자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이탄의 국왕뿐이외다.” “무엇보다 다이탄에는 용사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아르페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르페의 용사라는 직책은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큰 수단이 되어주는 것이다! 저들이 다소 억지스러운 상황을 납득하고 돌아서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물론 아르페는 알 바가 아니었기에, 그저 로아의 포식이 잘 진행되어 가는가, 엘프들을 치료하는 시에나의 마나가 부족해지지는 않는가를 확인하며 통신기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메테르는 금세 그에게 응했다. [아르페!] “상황종료. 바로 영원의 숲으로 들어와.” [응!] 일단은 메테르에게 수문장 역할 때려치우고 영원의 숲으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내린 후, 실로 오랜만에 그의 전속상인 미케나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신호가 얼마 가지 않아 곧장 응답이 돌아왔다. “응, 아줌······.” [정말 빨리도 연락 주셨네요! 지금 대체 어디에 계신 거예요? 순조로이 에이디아에 진입하기는 하셨나요? 물건을 살 일이 없었어도 멀쩡히 잘 있었으면 안부라도 전해주실 것이지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어서 제가 대체 얼마나 걱정을······.] 굉장히 쌓인 게 많은지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두다다다 말을 쏘아내는 미케나를 진정시킬 겸, 아르페는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하여 그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나, 영원의 숲. 퀘스트 끝.” [그렇다고 제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도 모양새가······ 네? 뭐라구요?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실래요?] “퀘스트 끝났으니까 보상 내놓으라고.” 미케나는 침묵하고 말았다. 그녀 평생의 숙원이 뚝딱 이루어지고 만 순간이었다.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3 > 끝 ⓒ 토이카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4 > 다이탄 국왕이 무리를 이끌고 물러간 후로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까, 영원의 숲 속에 가득했던 저주와 흑마법의 기운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조리 사라졌다. [먀아, 끅.] 지금 저기서 트림하고 있는 작은 마수의 뱃속으로. [먀먀먀아.] “만족했냐?” 흑마법의 기운 한 톨 남김없이 먹어치운 로아는 곧장 아르페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녀석을 받아 안으니 배가 똥똥하게 불러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거 다 소화하려면 밥은 따로 못 먹겠네.” [먀!? 먀먀먀!] 어쩌면 녀석의 정체는 고양이가 아니라 돼지 아닐까, 아르페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엘프들을 치료하고 있는 시에나 쪽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던 그때. 가만히 있던 레이제나가 아르페의 소매를 붙잡았다. “데마이트.” “그래, 너 데마이트인 거 다 알······ 아.” “데마이트.” 레이제나는 아르페의 로브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품에서 가공이 완료되어 첫 실전까지 치른 데마이트를 꺼내어놓았다. “완성된······ 데마이트.” 대번에 그것에 시선을 집중시킨 레이제나의 눈이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바로 조금 전 사람 몇을 폭사시킨 이라고는 믿지 못할 만큼 순수한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자.” “선물?” “어딜 날로 먹으려고. 구경만 해. 데마이트의 마도사의 바른 관계에 대해 알아보기도 할 겸.” “바른 관계······.” 레이제나는 자신의 손으로 넘어와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는 데마이트를 세밀하게살폈다. 데마이트 역시 자신을 쥐고 있는 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했는지 웅웅거리며 마구 빛을 발했다. “데마이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또 처음 보는데······ 아, 일단.” 전생에선 볼 수 없었던 광경에 만물열람의 소유주다운 호기심이 발동하려 했으나, 자신의 파티원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대로 방치해둘 수도 없는 노릇. 아르페는 두 데마이트를 그러고 있도록 놔두고 시에나에게 다가갔다. “힐!” “이, 인간······ 고맙, 크으.” “힐! 여기서 얌전히 쉬고 있어.” 그녀는 모든 마를 부정하는 마나로 엘프들을 차례차례 치유하며, 흑마법과 저주로 인해 멍들고 찢어진 그들의 마나 회로를 보듬고 심신의 안정을 되찾아주고 있었다. “아, 오빠.” “너무 무리하지 마, 시에나.” “아냐, 나 아직 멀쩡해. 그리고 이 엘프들한테는 지금 치료가 필요한걸.” 평소 아르페와 메테르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는 이미 레벨 260을 넘겨 레벨로도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이블 리플렉터라는 종족적 특징으로 인해 동레벨의 인간에 비해 압도적인 양의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 능력자.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천에 가까운 숫자의 엘프들을 치유했음에도 아직까지 그녀에겐 여력이 남아 있었다. “기운이 좀 돌아온 이들은 다른 엘프들을 이쪽으로 좀 옮겨줘!” “크음, 네 부탁이라면······.” “인간 중에도 저렇게 상냥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가 있었군.” 제법 자존심이 높은 종족이었던 엘프들은 저주로 인한 감정의 고양, 그 뒤를 이은인간들의 침략, 마무리로 집단 다크엘프화 현상까지 겪으면서 이미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세상 끝난 것처럼 마냥 널브러져 있던 그들은, 그들을 돕고자 하는 시에나의 순수한 목소리에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순순히 움직이고 있었다. 긍정적인 현상은 비단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장로님께서 정말 다크엘프가 되어버리셨어.” “숲의 규율에 따르면 엘프는 다크엘프와 접촉할 수 없지만 장로님께서 영락할 만큼의 과오를 저지르셨을 리가······.” “그러나,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짧은 순간 규율을 어기는 행동을 할 수가 있었는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늘어난 다크 엘프의 숫자에 의문을 품고, 실로 오랜 세월 반복되어온 그들의 어리석은 실수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낸 엘프들이 그 가운데에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만약 저들이 다크엘프로 변할 만한 잘못을 한 것이라면, 우리 또한 다크엘프로 변했어야 하지 않는가?” “아니, 그렇지만 세계수는 틀리지 않는다!” “세계수가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틀려 있었다고 한다면 어떻지?” “······뭐?” 아르페가 이번 일에서 다이탄에게 전쟁의 승리를 안겨주는 것보다도, 에이디아를 멸망시키는 것보다도, 어쩌면 세계수가 불타오르는 것을 막는 것보다도 더욱 원했던 바로 그 일이 지금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 우리 모두 인간의 저주에 당해 같은 마음으로 함께 움직이고 있었는데 누구는 다크엘프가 되었고 누구는 엘프로 남았다. ······다크엘프란, 정말 규율을 어긴 끝에 탄생하는 존재가 맞는가?” “그것에 의문을 품어선 안 된다!” “아니,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태까지 다크엘프들을 내쫓은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그건······.” “당신, 지금 다크엘프야.” “너 역시.” 다크엘프가 탄생할 때마다 한 명씩, 한 명씩 쫓아내는 일은 쉬웠으리라.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개인을 축출하는, 그뿐인 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구성원의 절반 가까이가 다크엘프로 변한 상태. 평소대로 하다간 다크엘프를 격리하는 것인지, 엘프를 격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무엇보다도 아내와 남편이 갈리거나, 부모와 자식이 갈리는 경우가 너무나많았다. “그래도 이대로는 안 돼.” “분명 지금까지의 우리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같지 않은가! 설마 다크엘프가 되었다고 해서 쫓아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즉, 씁쓸하지만 엘프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다크엘프와 엘프를 차별하다간 공동체가 와해될 위기에 놓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방침을 수정한 것뿐이다. 하지만 아르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찌되었든 더 이상 다크엘프를 배척할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다크엘프를 배척하던 많은 엘프들 또한 다크엘프가 되어버렸으니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다크엘프가 잘못되었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진 않을 것이다. “좋아, 이걸로 완벽해졌어.” 치유를 받고 서로를 돕는 엘프와 다크엘프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아르페는 실로 흡족해져 중얼거렸다. 전생에서는 이것이 되지 않아 엘프들이 끝내 처참한 마지막을 맞이했었는데, 이번엔 흑마법의 발현도 막고 원하는 것도 이루었으니 흡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며 시에나는 어이가 없어 반박했다. “모두를 낮추어 평등을 이루다니······ 오빠의 방식은 너무 난폭해.” “단지 평등 때문만이 아니야. 나중에 마왕군에 맞서 싸우려면 풀만 뜯어먹을 것처럼 생긴 엘프들보다는 전투적 성향이 짙은 다크엘프 쪽이 더 도움이 되거든.” “······.” 엘프들을 향해 치유 스펠을 펼치던 시에나가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경직이 풀린 후,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르페에게도 치유 스펠을 펼쳤다. 아르페는 이 숲에 들어온 이후로 긁힌 상처 하나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시에나는 오히려 그것을 보며 과장되게 놀라워했다. “이상하다, 분명 사악한 기운은 없는데.” “너 방금 되게 실례되는 생각하지 않았냐?” “그래도 오빠가 인간이라서 다행이다, 응.” “역시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아르페는 투덜거리면서도 시에나를 도와 움직였다. 이 자리에 아직 메테르가 없어 아르페의 마나를 시에나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신 마력을 동원해 망가진 숲을 대충이나마 복원하고 마법사들과 로아가 날뛴 흔적을 깨끗하게 만드는 정도는 가능했다. “아르페!” 아르페가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티아타 왕궁으로부터 영원의 숲까지 빠르게 주파한 메테르가 곧장 그의 품으로 날아들어 안겼다. 아르페는 익숙하게 그녀를 받아 안아 내려놓았다. “상황 벌써 다 끝났어!?” “응. 너 온 김에 내 마나 좀 시에나한테 옮겨줘.” “정말 너무해!”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아르페의 말을 따랐다. 아르페는 명상으로 숲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마나를 빠른 속도로 끌어당겨 그것을 전부 메테르에게 넘겼고, 메테르는 다시 그것을 고스란히 시에나에게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에서 찬란하게 피어나는 치유의 빛! 그 빛에 이곳저곳에서 엘프들이 기력을 되찾고 일어섰다. 수만, 수십만에 달하는 엘프들을 모두 치유하기까지 고작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고맙다, 인간. 이름이 시에나라고 했었지.” “숲에 침입해 나무들을 불태우기까지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지만 저들은 엘프들에게 무기를 들지 않았어. 숲을 어머니 세계수와 같이 여기라는 규율이 있기는 하나 그 목적이 우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면······.” “······우리는 너희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늦은 인사가 되겠지만, 환영한다.” 다크엘프를 허용하기로 한 김에 다른 부분에도 이래저래 관대해진 것일까? 엘프들의 지나치게 긍정적인 반응에 아르페는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때, 그의 바턴을 넘겨받아 대신 당황해줄 이가 등장했다. “마, 맙소사. 숲의 경계를 지키는 이들이 없어 무슨 일이 났구나 싶기는 했는데, 대체 어째서 이렇게······.” 그것은 바로 무거운 짐수레를 끌고 숲을 주파해온 또 한 명의 다크엘프 미케나였다. “아르페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숲의 구성원 절반 이상이 다크엘프가 되고 말았잖아요!” “나는 모르는 일이야. 모두 내 비서가······.” “비서 없잖아욧!” 아르페의 능글맞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설마 아르페가 엘프들을 단체로 타락시킨다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을 리도 없다.미케나는 이 사태에 아르페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에 그저 이만 갈아야 했다. “아니, 너는 미케나······.” “네가 어째서 숲에······ 크흠, 아니지.” 다크엘프를 차별하던 시절(불과 몇 시간 전까지)을 기억하던 엘프들이 미케나에게 으름장을 놓으려다가는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미케나!” “정말 미케나야!” 그 대신 미케나가 숲을 나가기 전까지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지금까지도 그녀를 그리워하던 일부 엘프들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미케나, 이젠 숲으로 돌아와도 괜찮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인정했어. 다크엘프는 타락의 상징 같은 게 아니야!” “미케나, 정말 잘 왔어!” “너희······.” 얼떨떨해하면서도 친구들의 손을 맞붙잡는 미케나. 그녀는 다른 엘프들을 돌아보며 그들 모두 같은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체 이 숲에서 모든 일이 일어났기에! 그녀의 입이 저절로 헤 벌어졌다. “아르페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제대로 설명하자면 기니까 지금은 압축해서 들려줄게.” 아르페는 세계수 밑으로 모여드는 엘프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어 말했다. “인간들의 분쟁은 끝났다. 나는 그들의 우두머리와 협상을 하여 더 이상 그들이 영원의 숲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확언을 받아냈다. 그러니 너희도 더 이상 인간과 결전을 벌이겠다며 이를 갈 필요가 없어.” “아니, 그럴 수가······?” “더욱이 지금은 그 충동도 사라졌을 텐데?” “······그렇지.”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들이 호전적으로 행동했던 것도 모두가 저주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니, 이것저것 다 빠져나가고 축 쳐진 지금 인간들과 결전을 벌이자! 고 말한들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도 바로 얼마 전까지 너희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저주와 흑마법의 존재에 대해, 그것이 빠져나간 지금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거야. 그건 바로 마도왕국 에이디아의 수작이었어. 너희를 숲 밖으로 유도해 약화시키고, 세계수를 불태우고,너희의 정신에 족쇄를 걸어 지배하려던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당장 수 개월간의 일이 아니라, 수십 년을 두고 길게 진행되어온 계획이었지.” 그것을 엘프 전체의, 자신의 위기로 판단한 세계수는 다크엘프를 양산해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고, 그 시점에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아르페는 로아를 풀어 사태를깔끔하게 종식시켰다. 아, 물론 레이제나의 정신적 독립 선언은 그 덤으로 따라온 일이었다. “하지만 죄를 지은 인간들은 내가 모두 깨끗하게 없앴어. 그러니 너희는 굳이 다른 죄 없는 인간들과 적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인간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너희 종족을 위해서도, 마지막으로 세계를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 그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던 엘프 중 하나가 반문했다. 엘프의 장로 중 한 명으로,지금은 다크엘프가 된 중년의 여성이었다. 물론 엘프 나이로 중년이니 실제로는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왔겠지. 그녀 정도면 자신의 말을 알아들으리라 판단한 아르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세계를 위해서. 인간하고 싸우거나, 하물며 같은 종족인 엘프와 다크엘프 사이에 분쟁을 일으킬 여유가 없단 얘기야.” “그렇다는 건······.” “그래.” 어차피 인간들에게도 들켰으니 더 이상은 망설일 것도 없다. 아르페는 지금 그가 지닌 전가의 보도,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는 마스터 스펠, “우리는 용사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간과 이종족 사이의 분쟁을 막고, 너희 모두에게 마왕군의 발호를 경고하기 위해 왔다.” 정체 밝히기를 시전했다.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4 > 끝 ⓒ 토이카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5 > 용사라는 사실을 감추고 다니는 게 힘들지, 자신이 용사임을 증명하기란 아르페와 메테르에게 무척 쉬운 일이었다. 그저 두 개 이상 다른 직업의 스킬을 발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오오, 정말 용사다!” “어쩐지 인간이 순순히 우리를 도와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시에나가 용사가 아닌 거지?” 엘프들은 아르페와 메테르가 용사라는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 남은 찜찜함까지 모두 털어버렸다. 용사란 그런 존재였다. 단지 존재만으로 마족을 제외한 모두에게 환영받고,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기적인 존재. 물론 그것은 어찌 보면 쓸쓸한 일이기도 했다. 그들을 직접 겪기도 전에 모든 판단을 끝내버리고, 선망의 시선과 함께 용사를 멋대로 규정하며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바라오니까. 용사라는 한 명의 개인은 무시되고, 남는 것은 용사라는 직책과 그들의 업적 뿐. 짜증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용사들이여, 이쪽으로. 상황이 이렇지만······ 차라도 준비하겠습니다.” “미케나는 우리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인이야. 잘 대접해줘.” “으, 으음.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미케나, 너도 함께 오거라.” “······네.” 하지만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건 어떻게 규정하건 알 바 아닌 아르페는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먹자는 주의였다. 여태까지 용사임을 밝히지 않은 것도 마왕군 때문에 귀찮아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지 않던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상, 용사라는 신분으로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을 굳이 빙 돌아가느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더 다친 엘프는 이제 없지?” “용사 일행을 제외한 인간들은 모두 숲에서 나갔어. 저주받을 흔적들 또한 모두 지워냈으니······.” “용사가 나타났으니 마왕군 또한 지금 어딘가에서 움직이고 있을 터. 모든 엘프는 지금부터 전쟁의 준비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 다크엘프들도 같이 말이야.” 현장의 정리도 대충이나마 끝나고, 아르페 일행과 장로들을 제외한 다른 엘프들은 저마다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남은 이들은 세계수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에 있는 엘프 장로 한 명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계수께서 주기적으로 떨어트리는 잎을 모아 만든 차입니다.” 아르페 일행은 그곳에서 돈이 있다고 어디 가서 마실 수도 없는 세계 최고의 차를대접받았다. 그는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찻잔 가득 담긴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차가 정말 세계수 잎으로 만든 차라는 것을 확인하며 감탄사를 발했다. “와, 그 난리통에 남아 있었네.” “아까, 조금만 더 그 기이한 감정의 증폭 상태가 계속되었더라면 마을이 전부 날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그 전에 용사가 나타나준 덕에.” 엘프들이 정성들여 숙성한 세계수 잎으로 우려낸 차는 깔끔하고 시원하며 달콤한맛은 둘째 치고, 마나를 영구적으로 맑게 해주어 마도사들이라면 일생에 한 번이라도 마셔보고 싶어 하는 보물! 문제가 있다면 영원의 숲 바깥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며 영원의 숲 내부에서도 그리 쉽게 맛볼 수 없는 차라는 점인데, 용사라는 신분을 밝히니 이런 귀중한 차까지 서비스로 나온 것이다. 아르페는 이 순간만큼 용사라서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아르페, 이거 쓰고 맛없어.” “그래, 그런 너를 위해 준비한 사탕이나 먹고 있어.” “응!” 아르페는 메테르의 입을 봉인할 겸 사탕을 물리고는 그녀 몫의 차를 미케나에게 밀어주었다. “아, 이건······.” 미케나는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 장로의 눈치를 보았으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짙은 갈색으로 물든 피부의 장로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귀를 미미하게 파닥거리며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흐뭇한 미소를 보며 장로가 아르페에게 물었다. “다크엘프는 인간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그건 엘프들의 태도 때문에 덩달아 인간들까지 다크엘프를 무시하게 된 거지. 하지만 난 외견만으로 편견을 갖는 건 원래 질색이라.” “다크엘프와 엘프의 차이가, 단순한 외견이라······ 혹시 용사여, 엘프와 다크엘프의 차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도 있나요?” “내가 말해준다고 수백 년간의 인식을 뒤집을 수 있을까?” “인식이라면 이미 뒤집혔으니, 괜찮아요. 기존의 인식대로라면 우리 엘프는 절멸을 면치 못할 테니 말입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어쩌면 저 장로는 용사의 권위에 빌어 지금 사태를 보다 진정시켜보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좋아, 그럼 간단하게 얘기해줄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아르페가 원하는 바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어 설명했다. “다크엘프는 세계수가 만들어내는 것이 맞아. 너희 내부에서 작용하는 힘이 아니라는 건 너희도 이미 느끼고 있을 거야.”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세계수가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했죠.” “어째서 피부가 까맣게 물들고 전투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것이 벌이지?” “그건······.” 장로는 침묵했다. 이미 수백 년 이상도 더 전부터 굳어온 당연한 인식이지만, 새삼스럽게 되짚어보면 실로 말도 안 되는 편견의 덩어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있을 테니까. 사실 그것은 인간과 그닥 다르지 않은 엘프의 미적 관념 때문이다. 인간들이 어두운 피부보다 백색의 밝은 피부를 높게 치듯이, 엘프들 또한 그렇기 때문. 그래서 희던 피부가 까맣게 물든 것을 두고 당연히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수는 너희랑은 보는 눈이 다르거든. 그건 벌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야. 실제로 너도 다크엘프로 변한 지금, 숲에서 얻는 혜택이 줄어든 대신 전투적인 능력이 증폭된 걸 느끼고 있을 거야, 그렇지?” “그것은······ 맞습니다.” “세계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엘프들 중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이들을 골라 다크엘프로 만들어.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다크엘프로 영락한다는 편견이 지배적이었던 건, 단순히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녀석들이 사고를 칠 확률이 높기 때문이지. 짚이는 구석이 있을 텐데?” “크윽······.” “크윽.” 옆에서 얌전히 귀를 쫑긋거리며 차를 마시고 있던 미케나마저 스플래시 데미지를입었다. 아무래도 영원의 숲에 머무르던 시절 정말로 사고를 치긴 했던 모양이었다.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 그러니 세계수가 위기에 처할 땐 당연히 다크엘프의 숫자도 많아지는 거야. 여기까지 이해 가?” “······그렇구나, 그래서 아까.” “좋아, 이제 완벽하게 알아들었구나.” 과장 하나 없이 아까 세계수는 끝장이 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축복을 난사해 다크엘프를 양산했고, 그 결과 엘프와 다크엘프의 비율이 거의 1대1수준까지 맞추어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너무나 그럴 듯한, 논리나 인과적으로 보아 반박할 길이 없는 아르페의 설명에 장로는 말을 잃고 말았다. 어째서 진즉 자신들이 떠올리지 못한 것일까 싶을 만큼 단순한, 그만큼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게 되는 이유. 그녀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저 변명거리를 원했을 뿐이었는데.” “이제야 속내를 드러내는구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엘프들과 다크 엘프들이 한데 뭉쳐 살아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어쩌면 은연중에 서로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깔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로를 통해 아르페의 말이 퍼진다면, 용사라는 이유로 그의 말을 신뢰해준다면······ 엘프와 다크엘프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겠지. 아르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용사, 당신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던 거죠?” “그게 내 능력이야. 다른 이보다 제법 많은 걸 볼 수 있지.” “······.” 장로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유능력······ 어쩐지 그 눈에 밀집된 독특한 마나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설마 그것이 용사의 고유능력이었을 줄이야. 이번 대의 용사는 정말 굉장하군요.” “이번 대의 용사······.” 아르페는 그 말을 들으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엘프는 장수하는 종족. 아르페의 자안에 미처 담기지 못하는 과거의 정보를, 어쩌면 그들은 인식하고 있을 수도있다. “혹시 선대 용사에 대해 알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아르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물었다. “만나봤다는 얘기지? 선배님은 대체 어떤 놈이었어?” “굉장히 의욕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는 남자였죠. 하지만 그 실력까지 절대적이었느냐면 글쎄,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여태껏 만난 두 개의 제단에는 전부 자화자찬만 적혀 있어서 어쩐지 그럴 것 같기는 했는데 대뜸 부정적인 평가라니. 아르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재촉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습니다. 물론 용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고, 우리 엘프들에게도 최대한 친절하게 대했습니다만······ 저는 어딘가 그에게서 흑심을 느껴 그리 가까이하지는 않았습니다.” “음, 그냥 한량 같은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당시의 마계와 인간계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은 영원의 숲을 영역에 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사는 전쟁을 크게 키우지 않겠다며 마계로 들어갔고, 그 후로 정말 전쟁은 종식을 고했습니다.” 혼자서 끝내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계로 들어가 정말로 끝내버렸으니 능력 하나는확실한 모양. 더욱이 용사는 그 후로 여유롭게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흔적을 마구 남겼으니 승리자가 누구인지도 확실했다. “그 외에 아는 정보는 없어? 생전에 어딜 들렀다던가.” “없습니다. 저를 비롯한 엘프들은 그와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도움이 되지 않는구만, 아르페는 혀를 차며 말을 돌렸다.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보다도 앞으로의 너희의 행동방침에 대해서 전달해두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영원의 숲을 찾아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 “선대와 함께 그 시절을 겪어냈으니 알고 있습니다. 마왕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우리 엘프들에게도 맞서 싸워야 할 적. 전투태세를 단단히 갖추어······.” “아냐, 그 정도로는 부족해. 그래서 너흰 선대 용사한테도 별로 도움이 안 된 거야.” 아르페는 전생에서의 참사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영원의 숲을 찾았다. 그것은 레이제나의 각성(지금도 그녀는 아르페 곁에서 데마이트를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아르페가 인도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너흰 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그래, 보다 적합한 표현을 빌자면 ‘육성’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네.” “······예?” 장로들이 하나같이 반문했다. 아르페는 진지한 얼굴로 그들에게 요구했다. “이 숲 지도 내놔봐. 지금. 당장.” “지, 지도?” 엘프들은 어떤 의미로 보면 인간들보다도 더욱 용사의 말을 신뢰하고 따르는 이들 중 하나다. 인간은 마왕군의 위협을 알면서도 당장 눈앞의 욕망을 참지 못해 반목하지만, 엘프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줄 알고, 고련을 감내할 줄 안다. 용사가 나타나고 마왕군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최우선적으로 그것에 집중할 것이다. “이건, 대체······?” 장로의 집 안에 들어와 있던 모든 엘프의 시선은 지금 아르페의 손에 들린 숲의 지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장로의 손을 떠나기 전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지도 위에, 지금은 곳곳에 수십 개의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 숲에는 많은 숫자의 던전이 있어. 인간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많은 마나가 모여드는 장소인데 던전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우리는 던전을 발견한 적이 별로 없······.” “그건 너희가 용사가 아니라서 그래. 자, 어쨌든 이 지도에 쳐진 동그라미는 전부던전을 나타내는 거야.” 언젠가 시페넌에게도 제공했던 적이 있는 용사표 던전 지도! 친절하게 레벨대까지 구분해서 작성한 영원의 숲 던전 지도를 받아든 엘프 장로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어떻게······?” “그냥 그런 것까지 다 파악하는 고유능력이야.” “세상에나, 우리 숲에 이렇게 많은 던전이.” “꺅, 아르페님. 저 귀한 정보가 담긴 지도를 그냥 주시면 어떻게 해요!” “넌 엘프 편 해야지, 임마.” 아르페는 미케나의 이마에 알밤을 쥐어박으며 말을 이었다. “전투적 성향은 다크엘프 쪽이 뛰어난 편이니, 다크엘프를 위주로 파티를 편성해서 던전에 들여보내. 너희의 그 나태한 사고방식을 뜯어고치고 전투능력과 마음가짐과 레벨을 기르란 말이야.” “그, 그러나 던전은 미지로 가득한 장소인지라, 자칫 희생자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마왕군에 엘프들이 통째로 쓸리는 것보단 낫지. 그리고 당장 인간들은 내가 막고 있다지만, 나중에 내가 사라진 후에 또 다른 인간들이 영원의 숲을 넘보면 어떻게 할래?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지금 미리 엘프들을 육성해두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닐 거야.” 아르페의 설명은 청산유수가 따로 없는 수준! 뭔가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납득하게 되는 그의 말에 장로들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레벨까지 붙여놨어. 이 이상 안전한 던전을 바란다면 그냥 밭이나 매는 게 나을 거야. 자, 어떻게 할래.” “저희는······.” “다른 엘프들의 의견을 수렴해보아야······.” “아니.” 다른 장로들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이번에 다크엘프로 거듭난 장로만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뜻을 하나로 모으면, 엘프들은 따라올 겁니다. 차라리 좋은 기회가 되어줄 거예요. 지금 엘프들은 인간들의 침입과 다크엘프로의 영락, 용사의 등장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상황. 그들을 전투와 성장에 집중하게 만들어 그 혼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손해 볼 일은 없어요. 던전의 수준까지도 친절하게 설명을 들었습니다. 위험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위협을 받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성장하는 것이라는 용사의 말이 맞아요. 지금은 변화의 시기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르려다간, 결국 우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겁니다. ······고대의 인어종족처럼 말이에요.” “크흑,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방금 말씀하신 고대의 인어종족은 이제 막 부활하긴 했지만 아르페는 굳이 그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어쩔래?” “우리는······.” 엘프와 다크엘프의 시선이 교차했다. 다크엘프와 다크엘프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엘프와 엘프가 씁쓸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엘프들에게 닥친 변화의 물결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5 > 끝 ⓒ 토이카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6 > 장로들은 숲의 던전 지도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끝에 아르페의 뜻을 수긍했고, 엘프들을 불러 모아 그의 뜻을 전달했다. 많은 충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상황은 스무스하게 흘러갔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용사에게 고분고분하게 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에나의 치유마법에 반해 그녀를 믿고 따르는 엘프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이유는 이번 사태로 그들 종족의 보존과 번영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엘프들이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단 용사의 등장과 마왕군 발호뿐만이 아니다. 인간을 비롯해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종족의 욕망을 용사의 작은 몸으로 모두 막아줄 수 있겠는가? 이번 사태와 같은 재앙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위해, 엘프들은 다크엘프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또한 그들 자신의 기량을 키워야 했다. 엘프를 수호하기 위해, 세계수를 수호하기 위해. “음, 역시 계획대로 됐어. 너무 일찍 막아도 안 되고 너무 늦게 막아도 안 되고, 정말 적절한 시기에 막아낸 거지······ 음, 일단 반숙 테크닉이라고 이름 붙일까.” “역시 이 사태를 조장한 건 아르페 님이셨군요······.” 엘프 장로들이 세계수 아래로 모여드는 다크엘프와 엘프들을 수백, 수천 개의 파티로 적절히 나누어 전투조를 편성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아르페의 옆으로 미케나가 다가와 말했다. “아니, 난 적절한 시기에 막았다니까.” “그러니까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까지 일이 진행되기를 유도했다. 아닌가요?” 자신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미케나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그는 히죽 웃어버렸다. “이건 아줌마를 위해서이기도 했는데. 봐봐, 속으로 뭔 생각들을 하고 있건 이제 적어도 겉으로는 엘프와 다크엘프의 대우가 평등해. 네 친구들은 마음 놓고 너의 귀환을 환영하는 파티를 열 수 있게 되었고 엘프와 다크엘프로 나뉜 부부가 헤어질 필요도 없게 됐지.” “이제와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 새삼스레 아르페 님한테 반하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아줌마가 아니라 미케나라고 불러주세요.” 퉁명스레 대꾸하는 미케나였으나 귀만은 기쁘게 파닥이고 있었다. 저 너머로 그녀를 지켜보는 또래 엘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도 절반 정도의 비율로 다크엘프로 변해 있는 것이 새삼스레 웃겼다. “후우, 이런 방식으로 돌아오게 되는 걸 바라지는 않았는데.” 아르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눈치 챈 것일까, 미케나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에 대답하는 아르페의 목소리는 조금 상냥해졌다. “다크엘프가 되는 것은 영락이 아냐. 아줌마가 다크엘프라고 해서 부끄러워할 일도, 친구들이 다크엘프가 되었다고 해서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니지.” “하지만 제게도, 저 아이들에게도 선택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어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그 무어 있겠는가? 마족으로 태어나는 것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클래스도, 대부분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자유란 그 범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지극히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러니까 아줌마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지랄을 해. 그게 바로 우리가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거야.” “결론이 그런 지랄 같은 방향으로 튀지만 않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에휴. 어쨌든 사소한 불만만 제한다면 완벽하게 퀘스트를 수행해주신 것도 맞는 말이고, 하니.” 미케나는 한숨을 쉬며 품을 뒤져 작은 크리스탈 병을 하나 꺼내어 들었다. 그 안에 담긴 살짝 반투명한 액체가 흔들릴 때마다 오색으로 빛을 발했다. “이번 퀘스트의 보수예요. 제가 인간들의 세상에서 백······ 제법! 되는 세월 동안상인 노릇을 하며 얻은 것 중 가장 귀한 거랍니다. 물론 아르페 님이 한꺼번에 인간의 위협이며 엘프들 사이의 분쟁까지 해결해버리신 것에 비하면 약하겠지만······.” “약하지 않잖아. 이거 엘릭서잖아.” 아르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살짝 멍청한 목소리로 대꾸하고 말았다. 미케나가 살포시 웃으며 보충했다. “진짜 엘릭서였으면 제가 이걸 어떻게 확보했겠어요.” “그도 그렇긴 한데······ 줘봐.” 그는 다급히 미케나에게서 그것을 받아 쥐고는, 만물열람으로 꼼꼼히 그것을 살폈다. [불완전한 엘릭서] [지고의 마법과 연금술이 하나 될 때 탄생한다는 불로불사의 시약. 기적 끝에 탄생한 순수한 엘릭서의 양을 늘려보겠다는 의도로 다른 약초와 마석을 섞어, 당연하게도 그 효과가 약해지고 낮은 확률로 사망을 불러오는 부작용까지 생기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 가치는 다른 시약에 비할 바 없이 뛰어나다.] “아, 완전품은 아니네.” “당연하죠. 평소 저와 거래하던 연금술사가 정말 기적적으로 엘릭서를 연성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양이 너무 적었던 거예요. 그는 어떻게든 양을 불려 보려고 갖은 수단을 썼지만 그 결과가 이거였어요. 분명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엘릭서라고 팔아치웠다간 큰 곤혹을 치르게 될 게 분명하니, 엘릭서를 연성한다고 진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게 이 불완전한 엘릭서를 싸게 넘겼죠.” “역시 중견상인다운 수완이야······.” 그 말에 어째선지 미케나가 후흐, 콧바람을 내뿜으며 자랑할 만한 그녀의 가슴을 자랑스레 폈다. 어깨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후후, 이젠 대상인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그렇다. 미케나는 이전 크라켄과의 전투에서 업적을 달성하여 순조로이 대상인으로 클래스를 진보시킨 것이다! 아르페는 그녀의 잘난 척에 코웃음을 쳐주며 크리스탈 안의 내용물을 다시금 살폈다. 빛을 받을 때마다 신비롭게 빛을 발하는 그 액체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르페조차 미혹시켜 마시고 싶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 그냥 드시면 안 돼요! 아르페 님이라면 이걸 활용할 방도가 있겠거니 싶어서······.” “나도 알아. 퀘스트의 보수로 결함품을 제시하다니 아줌마도 제법 배짱이 있구나.” “홀린 것처럼 받아들 땐 언제고?” 이놈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떠오른 것이 바로 강화였다. 엘릭서에 합성된 다른소재의 힘이 딸린다면, 그 소재들의 힘을 끌어올려 엘릭서의 격에 맞추면 그럴 듯한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다. 어쩌면 추가재료가 필요할 수도 있고, 엘릭서를 건드리기에 그의 강화 스킬은 부족하다는 판단이 서 있었기에. “어쨌든 이 정도로 납득해주지.” 아르페는 엘릭서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퀘스트의 완료를 선언했다. 그런데. “그······ 마, 만약 납득을 못 하시겠으면.” 어째 미케나가 그 말과 함께 몸을 비비 꼬았다. 귀의 퍼덕임이 점점 더 심해졌다. 덤으로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다른 거라도······ 드릴까요?” 부르르 떨리는 입술이나 끈적이는 손놀림이 무척 야릇하여 아르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니, 됐어.” “이이이이익!” 추가보수를 거절했을 뿐인데 미케나가 버럭 화를 냈다. “너무해! 기껏 엘프가 각오를 다졌는데! 일생일대의 각오를 그렇게 물거품으로······!” “괜찮아, 이걸로 납득했다니까.” 아르페의 상냥한 대꾸에 미케나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제 친구들한테 가 봐. 널 기다리고 있잖아.” “아아, 저 눈치 없는 것들이 정말······ 이젠 됐어요! 나중에 다시 해달라고 해도 안 해줄 테니까!”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돌아섰다. 아르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이 그때였다. “미케나.” “왜욧!”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영원의 숲에 눌러앉을 생각하지 말고.” “······흥.” 잠시 머뭇거리던 미케나는 이내 코웃음을 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어차피 전속으로 계약되어 있으니 도망치고 싶어도 못 치거든요!” 미케나는 귀를 파닥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엘프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돌아섰다. “용사 지위 이용. 인기 만점. 최악.” “야 임마······.” 그곳에 레이제나가 있었다. 만물열람으로 감지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게 없었더라면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얘기 끝날 때까지, 숨어서 얌전히 기다렸음. 연상을 쳐내는, 칼 같은 태도에 감동.” “이게 낯빛 하나 안 변하고 구라를 치네.” “삐삐랑 얘기, 마침.” “삐삐가 누구······ 야.” 레이제나가 조심스레 뻗어 내민 양손바닥 위에 데마이트가 둥둥 떠 있었다. 시종 빛을 발하는 그 녀석의 몸통에 달린 리본 장식은 설마 예뻐 보이라고 단 것일까, 아르페는 진심으로 의아했다. “이름, 삐삐.” “안 돼.” “삐삐.” “넌 그냥 예쁜 이름을 붙이고 싶었을 뿐이겠지만 마법을 영창할 때의 쪽팔림은 내 몫이라고!” “알 바 아님. 삐삐.” 실로 애석하게도 레이제나가 삐삐라는 단어를 입에 낼 때마다 데마이트가 허공을휘리릭 돌며 한층 더 밝은 빛을 뿜어냈다. 완전히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녀석에게 넘겨주기 전에 이름이라도 하나 붙여놓는 건데! “데마이트와 마도사의, 올바른 관계. 삐삐한테 들었음.” “······그래, 어땠어?” 적당히 체념하고 삐삐를 받아 품에 안으며 아르페는 그녀에게 물었다. 레이제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여보이곤 설명했다. “데마이트의 원석, 사고, 행동 불능. 수준이 높은 마도사, 그것을 가공 가능. 둘의 계약은, 그때에 시작.” “그렇지.” “데마이트의 가공은, 그 자체로 계약.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데마이트의 몫. 가공이 완성되면, 둘은 파트너 관계를 형성. 마도사는 데마이트를, 데마이트는 마도사를 보조.” 데마이트는 그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자유로이 이동하는 것도,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을 하고 행동하는 것도 힘들다. 마도사들은 그런 데마이트를 가공해 계약을 맺는다. 데마이트와 함께하며 세상을 겪고, 그들의 기록과 레벨을 성장시킨다. “자유란, 인식에 따름. 데마이트에게, 마도사와의 동행은······ 자유.” 그렇다. 홀로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데마이트는, 마도사가 자신을 발견해내어 가공하고 다루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대가를 얻는 셈이 된다. 더욱이 이 데마이트는 시페넌에 의해 왕궁을 빠져나와 아르페에게 전달되기 전까지 수백 년의 세월을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지내야 했다. 그러니 아르페가 자신을 붙든 것을, 그가 자신을 가공해준 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을 리가 없다. “삐삐는, 당신을 좋아함.” “이제 납득했어?” “납득.” 레이제나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삐삐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랐다는것을 이제는 그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삐삐 쪽이 올바른 데마이트로서의 삶과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시작부터 잘못. 인간들의 욕심에, 나의 무지가 섞여, 사태는 최악으로.” “그들은 너를 가공해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큰 자유를 부여했지. 네가 그것에 감사함을 느껴 그들을 돕겠다는 계약을 했으면 모르되······ 암시로서 통제하려 했던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어.” “200년 세월, 봉사했음. 이제 충분. 나는 자유.” 그러고도 미처 계산이 맞지 않았던 부분은 주인의 목숨으로 충당, 인가. 실로 험악한 계산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레이제나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내 제안에 답을 들려줄 때가 된 것 같은데.” “거절.” 어라, 분위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 타이밍에 거절을 하다니! “나는 아직, 판단 능력이 부족. 섣불리 결단, 불가능.” “······그런가.” 그녀의 가치관이라면 충분히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르페는 레이제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깊게 따지고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았다. 포기할게.” 에이디아에 상륙해서부터 다이탄과 티아타, 영원의 숲에 이르기까지 개고생을 한 가장 큰 목표 중 하나가 허무하게 날아간 순간이었으나 아르페는 그리 충격 받지않은 표정이었다. ‘족쇄는 이미 완벽하게 풀어놓았으니, 마왕군이 발호하면 그녀는 어차피 이쪽에 붙게 될 거야. 적어도 마왕의 고유능력을 알게 된다면 빠질 리가 없어.’ 그가 일부러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그녀의 의식 개혁을 노린 이유가 무엇이던가. 물론 첫째로는 에이디아에 속박되어 있던 그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마족을 지배하고, 인간들마저 마족으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마왕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레이제나가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 번 움직여 여러 가지 일을 해치우는 궁극의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대신, 계약을 원한다.” “응?” 그런데 그의 생각을 끊어버리듯 레이제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조금 의외였다. “삐삐처럼, 당신과 계약. 나는 힘을 보태고, 당신은 나를,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성장시킴. 상부상조.” “······아니, 그건 좀.” “계약.” 단칼에 쳐낼 생각이었던 아르페였으나, 순간 레이제나의 얼굴에 어리는 불안한 표정을 읽어내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가.’ 레이제나는 이제 막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자아는 여물지 않았고, 그에 비해 그녀의 힘은 강대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그녀는 스스로가 두려운 것이 아닐까? 섣부른 판단으로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 방금 그녀가 한 일만 해도 그렇다. 한 나라의 국왕이었던 자를 실로 쉽게 죽여 버리지 않았던가. “계약.” “······알았어. 계약하자, 해. 하지만 내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 때엔, 네 생각을주장할 줄도 알아야 해.” “긍정.” “물론 난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지만.” “얄미움.” 아르페는 레이제나의 펀치를 가볍게 피하며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레이제나는 잠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조심스레 자신의 한 손을 마주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창백한 뺨에 아주 약간 생기가 돌았다. “이렇게라도 내게, 닿고 싶어 하는, 애끓는 마음. 조금만 허용.” “너 그냥 다른 데 가라.” 그렇게 해서 용사 파티는 에이디아와 티아타를 강제로 다이탄에 병합시켜버리고, 영원의 숲의 소란도 잠재우고, 대마도사 레이제나 또한 순조로이 일행에 합류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태클을 걸 부분을 따지자면 허벅지에 피멍이 들 정도였지만, 퀘스트는 이로써 깔끔하게 막을 내렸다. “메테르,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 “아르페, 여기 옆에 누워.” “야, 잠깐, 나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다 알고 있으니까, 여기 옆에 누워.” “넵.” 아르페의 동정을 잃을 뻔한 사소한 위기와 함께, 영원의 숲에서의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 Chapter 20. 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 6 > 끝 ⓒ 토이카 < Chapter 21. 뜻대로 안 된다니까 - 1 > 영원의 숲은 평소와 다른 조금 소란스러운 아침을 맞이했다. “레벨을 맞추란 말이다! 너희는 아직 약해!” “하지만 우리는 다크엘프가 되어 강해졌습니다. 우리를 자원이나 노예 취급하는 인간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더욱 빨리 강해져야 합니다!” “이미 충분히 무리를 하는 수준이다. 너의 죽음으로 슬퍼할 동포들을 생각해!” “크윽······.” “대형 던전이 있습니다. 파티 20개를 편성하여 함께 돌입하라는 용사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아침은 먹고 갈 거지? 미케나가 대륙 중심부의 맛난 것들을 가져왔어. ······광장이 가득 찰 만큼.” “그런데 미케나는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지? 대륙으로 나간 다른 다크엘프들도 그럴까?” “역시 우리는 너무 섣불렀던 거야. 벌을 받아야 할 이들이 있다면 다크엘프들이 아닌 우리였는데······.” 평화와 고요를 사랑하는 엘프들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이라면 이질감을 느끼고도 남을 만큼 힘세고 강한 아침. 밤이 새도록 메테르의 품에 폭 안겨 자야 했던 아르페는 새벽 일찍 그녀의 품을 탈출해 엘프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사, 벌써 일어났습니까.” “좋은 아침. ······너도 가냐?” 엘프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페에게 다가온 이는 어제 가장 먼저 그의 제안을 긍정했던 장로 다크엘프였다. 평소 숲에서 움직일 때의 가벼운 차림과는 다른, 보호해야 할 곳을 확실히 보호하는 가죽방어구를 입고 등 뒤에 활과 화살통을 비끄러맨 모습이 상당히 멋들어져 보였다. “장로들은 달리 말하면 영원의 숲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엘프. 레벨로 따져도, 스킬로, 스펠로, 전투경험으로 따져도 엘프 중 가장 강합니다. 그렇게 수백 년 쌓아온 실력이 이제 갓 백 살을 넘긴 미케나와 비슷하다는 것은 제법 충격입니다만······.” 그런가, 미케나는 백 살을 넘겼는가. 나이에 민감해 곧 죽어도 그것에 대해서만은입에 담지 않던 미케나의 최대 비밀을 뜻하지 않게 알아버렸지만 어차피 아줌마니까 관심이 없다. 아르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미케나와는 세월의 질이 다를 테니 어쩔 수 없어. 그 차이는 지금부터 따라잡으면 되는 일이고.” “그래서 영원의 숲의 장로들끼리 순번을 정해, 한 명이 세계수를 지키고 있는 동안 나머지 장로들이 던전을 다녀오기로, 이야기를 정했습니다.” “발전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열심히 해.” 그래도 엘프들은 한 번 잘못된 걸 알면 고치기 위해 성실히 노력한다는 점에서 인간보다는 훨씬 낫다. 그들의 인식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다크엘프에 대한 편견도 어찌어찌 깨질 것 같으니, 앞으로 그들의 종족적 결속은 보다 굳건해질 것이다. “아마 용사께서는 오늘 이곳을 떠나겠지요.” “예리하긴.” “떠나지 않을 셈이었다면 던전 중 하나는 용사 파티의 몫으로 남겨놓지 않았을까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용사는 일대의 던전을 모두 우리에게 맡겼으니.” “아, 그건 아냐. 이 일대의 던전으로는 이미 우리의 레벨은 못 올려.” 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성인으로 보아줄 수 있는 외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디 어린 인간인데 벌써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장로는 새삼스레 놀랐다. “이번대의 용사는······ 정말, 정말 대단하군요. 하물며 그 용사가 둘이라니.” “그러게 말이야. 어째서 둘일까.” “마왕의 힘이 그만큼 강대하다는 뜻이겠지요. 신은 균형을 중요시하니까요.” “흥, 언젠가 둘 다 죽여 버릴 거야.” 야욕을 아무 망설임 없이 드러내며 돌아서는 아르페. 장로는 쿡 웃어버리고는 그를 불렀다. “용사여.” “왜?” “미케나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냐, 안 받아. 돌아가.” 아르페의 단호한 대꾸에 장로는 어째선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과거 다크엘프들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미케나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감도 품지 않고, 오히려 숲과 우리를 걱정해 많은 일을 해왔어요. 우리는 이제야 잘못을 깨달아 그녀에게 보답할 길을 찾고자 하오나······ 아무래도 우리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가 않답니다.”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끽해야 디스카운트 정도지.”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삶에 무척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앞으로도 용사와 함께라면, 분명 더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흥.” 아르페는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손만 휘휘 저어 보였다. 장로는 느긋하게 웃어보이곤 물러났다. 그 미소의 뜻을 얼추 읽어낸 아르페는 어제 보였던 미케나의 모습을떠올리며 속만 끓였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아르페가 어릴 때부터 그에게 침을 발라두려 했던 전적이 있었다. ‘내 인생에 지나치게 개입해오는 건 메테르 하나면 충분한데······ 으으으.’ 전생의 그도 여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일이 많았는데 어째 현생은 그보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세계수 아래를 벗어나 던전으로 향하려는 엘프들을 향해. “야, 너희.” “용사!” “용사다!” “어리다.” “잘생겼다.” 엘프들은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용사라는 말을 반복하며 그를 둘러쌌다. 마냥 용사라는 존재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던전으로 가는 녀석들은 차례대로 나한테 오도록.” “축복을 걸어주려고 하는구나!” “아니.” 그가 엘프들에게 걸어준 것은 축복이 아니라 강화였다. 그의 마나를 별로 소모하지 않는 1차 영구적 강화를 거치는 것만으로 그들의 옷이 더욱 가볍고 튼튼해지며 무기는 더욱 강하고 단단해지니, 죽어야 할 상황에서 죽지 않고 탈출하는 정도로는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몸이 가벼워!” “내 활이 탄력을 얻은 느낌이야. 용사의 힘은 굉장하구나!” “장로님, 장로님도 와서 축복을 받아요!” 엘프도 다크엘프도 하다못해 장로들까지도 아르페의 강화 스킬을 거친 장비를 확인하며 똑같은 얼굴로 기뻐했다. 그는 강화를 마친 녀석들을 빠르게 내보내며 다음 녀석들의 장비를 강화해주었다. “세계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냥 고맙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그러나 이번에 한해 엘프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르페가 한창 수만 명 엘프들의 장비를 깔끔하게 강화해주었을 즈음, 갑자기 세계수가 미약한 진동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저 위에서 세계수 가지 하나가 뚝, 부러져 땅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으헉, 맞으면 죽는다!” “엄청 큰 가지다!” 그것은 정확히 아르페의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수백 미터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음에도 부러지지 않은 것이 과연 그 강도를 실감케 했다. “세계수께서!” “오오오, 세계수께서 용사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그냥 바람 불어서 부러진 게 아니라, 아얏.” 어느 틈엔가 뒤로 다가온 미케나가 아르페의 뒤통수를 때렸다. “세계수께서 감사의 선물을 해주신 거잖아요. 엘프들이라고 해도 좀처럼 받을 수없는 선물이니 감사히 받으세요.” “이런 광신도 같으니······.” 세계수의 부러진 가지는 제법 두껍고, 잔가지도 많이 달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그 끝에 달린 푸르고 싱싱한 잎사귀의 숫자도 상당했다. 그런데 아르페가 얌전히 그것을 주워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있자니 저 너머에서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이제나의 머리 위로도 작은 가지 하나가 떨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세계수 대출혈이네.” “하긴 인간들을 직접적으로 막았던 건 그녀였으니······.” “나, 나도! 나도 가질래!” “나도 세계수님 가지 갖고 싶어!” “좋아, 지금 당장 던전으로 달려가자! 세계수를 지킬 힘을 얻어오는 거야!” “좋다!” 일족의 절반 이상이 다크엘프로 거듭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째 숲의 종족의 적극성이 조금 지나치게 상향평준화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아르페는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아르페 옆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는 다크엘프가 한 명 있었으니 다름 아닌 ‘대’상인 미케나였다. “아르페 니임, 그 가지 저한테 파실 거죠?” “잎사귀 하나도 안 팔 건데?” “너무해!” “꼬우면 너도 세계수한테 감사 인사 받아내던가.” “정말 너무해!” “아, 아르페! 거기서 뭐해!” “오빠!” 엘프들이 새벽부터 부산을 떨고 있으니 곤히 잠을 자고 있던 메테르와 시에나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전원 일어났으니, 아르페는 가지를 받아든 채 멍하니 세계수를 올려다보고 있던 레이제나까지 회수해 바로 영원의 숲을 떠나기로 했다. 더 이상 미적대봤자 이숲에서 얻을 것도 없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통신을 많이 해주세요. 그래도 스킬과 스펠 북은 제때제때 구매하셔야 할 것 아녜요?” “그래, 그래. 아, 뒤에서 친구들이 부른다.” “아으으, 정말! 저 눈치 더럽게 없는 것들!” 미케나 또한 그들과 함께 떠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 오랜 세월 그녀를 그리워했던 친구들이며 이제 처음으로 던전에 도전하는 엘프들도 있어 당분간은 숲에 머무르며 그들을 보조해주려는 모양이었다. “행복해보여, 아줌마. 거기서 잘 지내!” “전속만 아니었어도 저 꼬맹이를 그냥!” 메테르는 미케나가 평생 영원의 숲에 있어도 좋겠다는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곤 아르페와 손을 맞붙잡았다. 아르페의 남은 손을 시에나가 붙잡고, 그녀의 반대편 손을 레이제나가 살포시 붙잡았다. 네 명으로 거듭난 용사 파티는 그렇게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들 같은 모습으로 영원의 숲을 떠났다. “다시 봐도 정말 크다아. 저 안에서 또 다른 종족이 살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티아타로 돌아가는 길, 아무리 걸어도 세계수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자 메테르가 내뱉은 말이었다. 시에나 역시 동감하며 한 마디 보탰다. “저 나무 끝까지 올라가면 하늘나라가 있을 것 같아.” “글쎄, 세계수 끝까지 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덤벼올 엘프들을 전원 하늘나라로보내주는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오빠 너무해!” 아르페는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잔혹한 현실로 부숴버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들에게 보조를 맞추어 걷고 있는 레이제나의 모습이 있었다. “너 세계수 가지는 어쨌냐?” “팔찌로 변함.”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레이제나의 가녀린 손목에 못 보던 팔찌가 하나 채워져 있었다. 갈색의 나무줄기로 엮이고, 풍성한 나뭇잎에 감싸인 팔찌. 짙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그것은 단지 차고 있는 것만으로 존재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증폭시켜주는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였다. 아르페가 받은 나뭇가지는 그녀의 것보다는 컸지만 생명력보다는 마력에 치중된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어쩌면 세계수는 선물을 하면서 그들에 맞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부를 가공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어쩌면 레이제나의 저 아티팩트를 이용해 그녀를······ 아니,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아르페는 고개를 저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생각을 털어내며 말했다. “저런 걸 다 엘프한테 채워놨으면 인간들이 숲을 넘볼 생각도 못했을 텐데, 정말 어리석지.” “특별대우. 뿌듯.” 아르페는 미미하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제나를 무시했다. 그때쯤 세계수에서 눈을 완벽히 떼어낸 메테르가 그에게 물어왔다. “아르페, 이젠 어디로 가?” “일단 티아타와 에이디아, 다이탄의 상황을 볼 거야. 그놈들한테 영원의 숲을 건드리지 말라고 확실히 엄포도 놓아야 하고, 그리고······.” 어차피 용사라는 사실이 발각되었으니, 그 사실을 보다 대대적으로 알리고 인간들에게 마왕군의 발호를 주지시켜야 했다. 과거 디아스에서 용사가 탄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용사 본인들이 떠들고 다니는 것과는 위기 인식의 정도가 다를 테니까. “물론 인간들이 엘프들처럼 순순히 움직이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시켜놔야겠지. 그러면 설령 놈들이 멋모르고 깝치다가 마왕군에 발려도 내 마음만은 편안할 테니까.” “인성 최악. 희대의 쓰레기.” “그런 점이 좋은 건데 레이제나는 아직 잘 모르는구나?” “시에나 불쌍함······.” 아르페는 시에나까지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아르페, 그 다음엔? 그때 말했던 남자 파티원을 찾으러 가?” “아니. 사실 레이제나가 파티에 합류했으니 나머지 애들은 별로 열심히 찾을 필요 없어.” “어깨 으쓱.” 짜증나는 자기과시형 추임새를 넣는 레이제나를 어떻게든 무시하며, 아르페는 그가 생각하는 한 가장 용사다운 말을 내뱉었다. “지금부터는 이 세상의 모든 보물을 다 확보하러 갈 거야.” < Chapter 21. 뜻대로 안 된다니까 - 2 > 영원의 숲에서부터 티아타로 돌아오는 길, 조금 걸어보며 기분을 전환하기도 했던 일행이었으나 곧 그것에도 질려, 비행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레이제나와 부유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아르페가 각각 시에나와 메테르를 품에 안고 질주하여 고작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숲을 빠져나왔다. “날아다니는 거 재밌어!” “안 그래도 조만간 하늘을 나는 펫 같은 걸 새로 영입해볼 생각이야.” [먓!? 먀먀먓!] “아냐, 난 이대로가 좋아!” 경쟁자의 등장에 긴장하는 로아와 하늘을 난다는 것보다는 아르페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좋았던 메테르의 반응에 아르페는 굳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확정사항이야.” “너무해!” [먀아아아아아!] 용사 파티는 곡예비행을 하며 티아타 상공을 가로질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티아타의 모습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탄과 에이디아 연합군에 대한 티아타의 저항을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다이탄 국왕의 대처가 적절했던 모양이었다. “다이탄 국왕은······ 아, 에이디아에 있는 모양이네. 하긴 지금 티아타보다는 에이디아를 정리하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그런데 아르페, 인간들에게 마왕군의 위협을 알린다더니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에이디아의 마도사들과 상회 소속 던전 상인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야. 아마 다이탄 국왕도 반길걸? 그는 다이탄의 민심을 다른 데로 쏟기 위해 에이디아를 침공했던 것처럼, 에이디아와 티아타 백성들의 혼란과 분노를 다른 데로 쏟기 위해 용사의 등장을 대대적으로 홍보해줄 거야.” “아르페는 대체 한 번에 몇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메테르의 눈빛이 지나치게 초롱초롱해졌기 때문에 아르페는 ‘되는 대로 말을 주워 삼기며 허세부리기’ 스킬의 발동을 그쯤에서 취소해두기로 했다. 곧 그들은 통째로 무너진 복도가 인상적인 티아타 왕궁으로 복귀해, 다이탄과 에이디아의 기사와 마도사들이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는 워프 게이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헛, 용사!” “엘프의 숲에서의 일은 어찌······ 허억, 그때 그 마도사까지!” “내 이름, 레이제나.” “아냐, 괜찮아. 자기소개 안 해도 돼.” 아르페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영원의 숲과 관련된 주의사항을 일러놓고는, 게이트에 마나를 주입해 활성화하여 일행과 함께 몸을 던졌다. 당연히 그 너머에도 또한마도사와 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헛, 용사!” “엘프의 숲에서의 일은 어찌······ 허억, 그때 그 마도사까지!” “내 이름, 레이······.” “너희 혹시 교본 같은 거 두고 연습하냐?” 궁에 다이탄 국왕의 모습은 없었다. 기사 한 명을 붙잡고 설명을 들어보니, 마도사와 기사들을 진두지휘해 오물로 뒤덮인 수도를 청소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에나와 레이제나를 돌아보았다. “나랑 메테르는 며칠 동안 여기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용사가 직접 나서는 쪽이 일이 편하게 굴러가겠지.” “그럼 나랑 레이제나는?” “너흰 일단 에이디아에 있는 던전을 모두 털고 와. 레이제나의 레벨도 끌어올릴 겸, 특히 빡센 곳 위주로 정리해줄게.” “······.” 에이디아 전도를 꺼내어 던전과 유적을 체크하기 시작하는 아르페를 보는 시에나와 레이제나의 눈빛이 새하얘졌다. 레이제나는 불만이 많은지 아르페의 복부를 툭툭 가격했지만 메테르의 바디 태클로 단련된 아르페에게 그 정도는 이제 가렵지도 않았다. “자, 됐다. 여기서 나오는 유니크 스펠은 일단 전부 레이제나, 네가 익혀둬.” “어째서 나에게?” “용사한테는 용사만이 익힐 수 있는 유니크 스펠이란 게 있거든. 물론 그렇다고 다른 스펠을 익히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모든 스펠을 내가 독점해버리면 네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져.” “이미 충분히 강함.” “마계에 가면 우리 정도의 강함을 지닌 마족은 깔리고 널렸어. 그 정도로 만족했다가 끔살당할 뿐이라고.” 물론 깔리고 널린 정도는 아니고 지금 레이제나 수준으로도 상위 10%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마계의 10%라는 것은 숫자로 따져 수만을 넘긴다는 얘기. “나랑 메테르 수준이 되면 상위 5%. 물론 우리 능력이 사기라서 3%까지는 비벼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직 1만이 넘는 숫자의 마족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얘기가 돼. 우리가 놈들보다 앞서는 건 오직 하나, 성장속도 뿐이지. 그걸 살려야 해.” “그리고 사기능력.” “그리고 쓸데없이, 잘생긴 외모.” 아르페는 시에나와 레이제나의 머리에 각각 한 방씩 알밤을 먹여주고는 덤으로 던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또한 넘겨주었다. “그러니까 한 달 안에 돌아와. 시에나 레벨 10, 레이제나 레벨 20 증가를 목표로 두고.” “그렇게 빨리, 레벨 오름?” 아르페는 그 부분에서 메테르를 힐끗했다. 메테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아르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긍정해주었다. “응, 빨리 올라.” “······무언의, 감정교류를 감지. 파티 화합을 위해, 해설을 요구.” “그러면 한 달 후에 보자.” “해설을 요구.” 아르페는 품에서 삐삐를 꺼내어 레이제나에게 건네주었다. “빌려줄게. 원래 데마이트는 계약자만 따르는 게 원칙이지만, 같은 데마이트라 그런지 너한테는 충분히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으니까.” “······고마움.” 삐삐를 받아 안아 정성스레 쓰다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법 영창을 돕는 아티팩트가 아니라 애완동물이나 인형을 다루는 모습이었지만, 뭐 저건 저것대로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며 눈을 돌렸다. 순조로이 화제도 전환할 수 있었으니 목적은 달성이었다. “우와아, 던전 다섯 개에 유적까지 하나 있어. 레이제나, 빨리 가자.” “삐삐로 강해짐. 쾌속 비행.” 레이제나와 시에나가 그렇게 떠나갔다. 메테르는 둘만 남자 좋아 죽으려 하며 아르페의 팔을 껴안았지만 아르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거리 청소로 나서야 해.” “아르페가 그 참상을 만들어놓은 주제에.” “사람은 언제나 나중에 후회하는 존재거든. 결국 이걸 내가 감당하는 꼴이 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의 쾌감을 못 이겨 저지르고 마는 거야. 후후, 제법 빡센 작업이 되겠는걸······.” “그렇게 체념하는 아르페도 살짝 글러버린 맛이 나서 너무 좋아.” “난 슬슬 네 감상의 디테일이 무서워.” 아르페와 메테르는 곧장 수도 청소를 개시했다.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메테르가 할 수 있는 것은 레코드 디바이드로 자신의 마나를 아르페에게 빌려주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작업 속도를 높이기에는 충분했다. “헛, 저 자는!” “수도를 더럽힌 바로 그 마도사다!” “그런데 저 자가 용사라는 소문이 있던데······.” “용사? 말도 안 돼! 웃기지 마!”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건 이미 포기했다! 인간들과 협력해 마왕을 막아낼 생각 따위 디아스의 마수를 피해 탈출하던 그 시점 이후로 접은 상황. 그는 그저 나라 단위로 마왕군 방비를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클린! 클린! 클-린!” “굉장해, 먼지도 곰팡이도 냄새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사라졌어!” “미안하지만 구체적으로 해설하지 마. 클린!” 아르페의 클린 마법은 그 규모도 효율도 다른 마도사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백 명의 마도사들이 1시간 동안 뻘뻘 땀을 흘려가며 거리 하나를 정리하고 있을때 아르페는 한 번의 마법 행사로 소도시 범위를 완벽하게 새것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앗, 마도······ 용사! 돌아왔군!” “나중에 얘기하자! 클린!” “······저 자는 용사인가, 아니면 청소부인가.” 아르페는 뻘뻘 땀을 흘리는 국왕 무리를 지나치며 클린을 난사했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 남는 것은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거리 뿐! 저마다 청소에 힘쓰던 수도 시민들은 아르페를 원망하면서도 그가 빨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도 와주길 바랐다. 민가도, 상가도, 국가시설도 모두가 평등하게 그의 손길을 거쳐 깨끗해졌다. 꼬박 사흘에 걸쳐 먹지도 자지도 않고 레이즈의 상공을 활보하던 아르페는 문득 자신이 수도를 전부 깨끗하게 복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도가 깨끗해졌어!” “하수도 시설까지 다 고쳐졌어. 정말 어마어마한 능력이야······.” “정말 어마어마한 능력이구나. 용사라는 걸 납득할 수 있을 정도야······.” 어쩜 인간은 이리도 단순할 수 있단 말인가! 아르페가 이런 참상을 만들어놓았던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손에 도시가 다시 깨끗해지는 광경을 보며 이젠 아르페를 보며환호하는 인간의 숫자가 제법 늘어나 있었다! “역시 인간은 단순하구나.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날 칭송까지 하겠어.” “정말 바보들이네!” “······.” 아르페는 메테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밝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아르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르페는 바보를 이끌고 최대한 빠르게 왕궁으로 향했다. 다이탄 국왕은 이미 의관을 정제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 용사. 뒤처리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소만.” “어디까지나 우리 일을 빨리 진행시키고 싶었을 뿐이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그 양옆으로 나란히 다이탄의 기사들과 에이디아의 마도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에이디아를 자신의 수중에 넣는 것만은 확실히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르페에게 향한 원망 중 절반은 그에게도 똑같이 향했을 텐데 수완이 제법이었다. “제국은 선포할 생각이야?” “조금 더 양국을, 아니 티아타까지 삼국을 정비한 다음으로 미룰 생각이었소만······.” “그러지 마. 어수선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확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거야.” 그의 전생에서, 마왕군이 본격적으로 인간계를 침공한 것은 용사의 나이 스물이 넘어서였다. 마왕군이 물밑에서 진행하던 여러 계획이 동시다발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용사는 인간들에게 실망하면서도 파티 멤버들의 도움으로 그 모든 음모를 차례차례 격파해나갔다. 물론 지금 용사의 나이는 열다섯이지만, 전생과 달라진 것은 용사 측 전력뿐만 아니라 마왕군 또한 마찬가지다. 마왕의 명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무리까지 생각해본다면 변수는 더더욱 늘어난다. “용사의 이름을 팔 수 있도록 허가해주겠단 말이오?” “내가 처음 당신을 찾아간 것도 그럴 목적이었는데. 방금 말한 삼국 중에 가장 나랑 말이 잘 통할 것 같았거든.” “슬슬 용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오.” “이런, 제법 늦구나.” 그들은 히죽, 사악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상대를 몰래 이용한다면 범죄지만 합의한다면 거래가 되는 것. 상부상조라는 단어가 지금만큼 어울리는 상황도 없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소?” “제국을 선포해야겠지. 그리고 에이디아의 마도사들은, 상회의 힘까지 빌려서 다이탄과 에이디아, 티아타를 통합하는 마나 통신 루트를 만들어. 제국을 선포하며 동시에 용사의 출두, 마왕군의 발호를 모두 알리는 거야. 아, 우리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니 영상 전송 기능도 필수라고 할 수 있겠지. 어때, 참 쉽지?” “쉽기는 개뿔!” 마도사 중 한 명이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으나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다이탄 국왕, 아니 통일제국의 황제가 될 남자와 아르페는 굳건한 악수를 나누었고, 계약은 순조로이 체결되었다. 그로부터 2주가 넘는 기간에 걸쳐 에이디아의 마나 통신 루트가 다이탄과 티아타에까지 확장되었다. 그 즉시 통일제국 제아드의 초대 황제 안젤로 제아드의 즉위식이 치러졌고, 그와 함께 통일제국의 건설에 있어 가장 중대한 목표가 밝혀졌다. “에이디아의 국왕은 티아타의 대공과 협력하여 인간계의 평화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마법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모르고 놀아나고 있던 나를 도와그 음모를 쳐부숴준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두 명의 용사였다.” 그것은 용사의 존재가 삼국, 아니 통일제국 제아드로, 아니 전 대륙적으로 공표되는 순간이었으며, “그렇다. 백성들이여!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마왕이 나타난것이다! 인간끼리의 싸움은 끝났다. 우리의 적은······ 마족이다!” 인간계가 마왕군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 Chapter 21. 뜻대로 안 된다니까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1. 뜻대로 안 된다니까 - 3 > “용사.” “정말 용사다. 디아스에서 탄생한 용사가 에이디아······ 아니, 제아드에 있었다니.” “용사가 함께했다면 납득이 가능해.” “용사와 탄생을 함께 한 국가······ 에이디아의 멸망은 확실히 쓰리지만,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을 보는 기분이다. 그 탄생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겠지······.” 사실을 알고 있던 이들도, 모르고 있던 이들도 용사와 마왕이라는 이름 앞에 모든현실을 긍정하고 말았다. 용사란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인간 대 마족의 구도로 옮겨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니까. 물론 각 국가의 수뇌부는 그 안에서 어떻게든 제 이득을 챙기려 하지만, 지금은 에이디아와 티아타의 수뇌부가 통째로 사라진 상황. 아르페에게 협조하는 전 다이탄, 현 제아드의 국왕 안젤로 제아드와 대세를 파악하고 그에게 붙은 많은 기사와 마도사들 덕에 제아드의 건립과 용사의 선언은 순조로이 통일제국 제아드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후, 이걸로 대충 그림은 바로잡았네.” “이게 아르페가 원했던 거야?”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적절한 때에 전쟁이 일어나준 덕분에 그걸 이용하는 게 가능했어.” 문제란, 의외로 잠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인식하고 고치기가 쉽지 않다. 강한 충격을 받아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에는 대다수의 사람이 ‘여태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중요해’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 문제를 뒤로 밀어두는 것. “그런데 전쟁이 그 모두를 뚜렷하게 만들었구나? 에이디아와 티아타의 계획, 영원의 숲의 엘프들이 떠안고 있던 문제들까지.” “그래. 그것이 드러난 상황이라면, 도려내고 치료하는 게 차라리 쉬워지지.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후흐흐, 아르페는 정말 착해.” “안 착하거든. 야, 쓰다듬지 마.” 그때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두 용사가 정말 사이가 좋군.” “한창 때의 남녀야. 몇 년을 함께 했는데 정분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어쩜 이렇게 예상한 그대로일까! ‘타인의 인생의 조연이 되고 싶지 않다면 절대로읽지 말아야 할 대사집 상권’에 나오는 대사들만 읊어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았다. “거 봐, 이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야.” “후후, 이렇게 우리 사이를 과시하면 다른 녀······ 여자가 감히 끼어들 생각을 못하겠지.” “야, 방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냐.” 지금 그들은 괴상한 퍼레이드 행렬에 가담해 이동하고 있었다. 안젤로 제아드의 즉위 기념 행진에 꼽사리를 껴 용사들의 모습까지 덩달아 광고하는 것이다. 용사와 제아드가 맺은 동맹을 확고히 드러내는 행사였다. “용사님, 손 한 번만 잡아주세요!” “용사님!” 물론 중간중간 들려오는 민중의 목소리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서민에게 너무 친근한 이미지를 주었다간 나중에 별 것 아닌 일까지 그들의 도움을 바라게 되는 법이니까! 마왕을 죽일 기회에서 꽃 파는 소녀A 한 명 구하려고 돌아서는 빌어먹을 일이 생기기 전에, 그럴 가능성이 생길 법한 루트를 모두 깔끔히 차단하려는 아르페의 심계였다. “우응, 착하다가 갑자기 나빠졌어.” “원래 나빴어.” “그래도 아르페가 다른 여자 손 잡는 것보단 나으니까 봐줄게.” “······너도 요즘 나 못지않은 거 알고 있냐?” 용사의 육성을 어디서부터 잘못한 것일까. 아르페는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내내 고민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의 모습과 지나치도록 친밀한 관계만은 퍼레이드를 지켜보는 시민 모두에게로, 그리고 기록된 영상을 보는 이들 모두에게 확실히 전해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더 지나 드디어 퍼레이드가 끝났다. 제아드 황제 안젤로 제아드는 에이디아의 수도 레이즈를 그대로 제국의 수도로 천명했다. 그 대신 다이탄의 대지와의 연결을 보다 긴밀히 하고, 에이디아와 티아타 사이에 있는 워프 게이트와 비슷한 것을 다이탄과 에이디아 사이에도 만들기로 했다. 이미 마법 통신은 제국 전체로 통하는 상황이니, 워프 게이트만 완성된다면 제국의 통치도 수월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날 따라 연극 해주느라 고생 많았소, 용사.” “이것도 거래 내용인데 뭐. 앞으로 당신이 고생이지, 황제.” 용사에게 황제라는 말로 불리자 안젤로 제아드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용사, 그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러니 지금부터는 제국을 지켜내는 것으로, 내게 이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었음을 증명하리다.” “마왕군의 발호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포부라, 제법 마음에 들었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페의 품에서 또 지도 한 장이 튀어나왔다. 이미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메테르의 눈은 아주 살짝 가늘어졌지만 안젤로 제아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받아들었고······ 앞서 그 지도를 받아들었던 모든 이가 했던 반응을 고스란히 답습했다. “이 지도에 있는 내용이 사실이란 말이오!?” “다이탄과 에이디아, 티아타에 이르기까지. 병사와 기사, 그리고 마도사를 육성하기에 좋게 분류해 작성했으니 감사한 줄 알아.” 당연하지만 그것은 던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였다. 고레벨을 위한 던전은 자신들의 몫으로 남겨놓고,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던전 정도만 표시해둔 것이었지만 안젤로 제아드가 놀라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아니, 이렇게까지······.” “이걸로 제국의 힘을 키우는 것은 물론, 당신을 대하는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올리는 거야. 가능하겠지?” “충분하고도 남소! 만약 이 지도의 절반, 아니 90%가 거짓이라 해도 남은 10%만으로 국력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오!” “가치를 잘 알아주는 것 같아 다행이다.” 아르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무 한 번에 풀지 마. 사람은 자신이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마련이거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니 게을러지고, 더 많이 바라게 돼. 당신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명심하겠소. ······레벨과, 던전에서 나오는 재화의 양까지 따로 작성해둔 것도 그 때문이구려? 대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묻지 않겠소.” 안젤로 제아드는 지도를 받아들어 자신의 품 깊숙이 감추었다. “단지 믿고 행하겠소.” “좋아, 내가 바라던 대답이야.” 전생의 용사는 던전 탐험을 위주로 하며 자신과 파티의 힘을 키웠다. 대륙의 각 국가간 역학적 관계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단지 마왕만 쳐부수면 된다는 안일한 사태 인식을 하고 있던 탓에 어지간한 인간들의 국가와 뭐 제대로 된 우호 관계를 형성해보기도 전에 파토가 났고, 고독한 싸움을 강요받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영원의 숲의 엘프들과도, 이쪽 대륙의 인간들과도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그들의 힘을 키워 마왕군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과정은 완전히 엉망이었지만 결과만 보면 최상이라 할 수 있으리라. ‘디아스는 인간계에서 따지면 사천왕 최약체 정도 취급이니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면 되겠고, 신성국가 팔라티나는······ 우리보다 더 적합한 인재를 파견해둔 상황이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이 재보 싹쓸이인 것. 이제 시에나와 레이제나가 돌아오는 것만 기다려 함께 신나는 던전 공략의 세계로 떠나면 된다! “신전으로부터의 사절입니다, 폐하.” “들라하라.”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아르페에게도 있었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폐하. 신전은 인세의 난리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바, 전쟁부터 시작해 지금까지의 사태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사과드립니다.” “아니, 신경 쓰지 않소.” 신전에서 파견되었다는 사절은 대주교의 관을 쓰고 있었다. 에이디아의 모든 신전을 관할하는 대주교! 당연하지만 신전 서열로 따져 탑 7 안에 들어가는 쟁쟁한 인물이다. 물론 갓 플러쉬로 레이즈가 뒤덮였던 레이즈 대참사(이미 이름까지 붙여졌다.) 때는 신전도 똑같이 곤경을 겪었겠지만 지금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기분 탓인지 아르페를 째려보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니 무시했다. “다만 폐하, 즉위식과 행진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전의 재가를 얻지 않고 용사의 이름을 공표한 것에 대해 팔라티나의 교황께서 우려가 깊으셨습니다.” “흠, 그것은?” 황제의 반문에 비로소 고개를 든 대주교는 명명백백 아르페를 째려보고 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나보다! 물론 메테르의 험악한 시선에 쫄아 곧장 고개를 돌려버리기는 했지만! “용사의 클래스를 수여하는 것부터 그들을 관리하는 것까지 모두가 팔라티나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사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이들과 함께하며 하물며 신전을 대신해 그들의 존재를 공표하기까지 하다니, 이는 안 될 일입니다. 안 될 일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용사가 맞소. 인상착의부터 과거 신전에서 공표했던 것과 일치할뿐더러, 서로 다른 다섯 가지 클래스 이상의 스킬과 스펠을 구사하는 이가 어찌 용사가 아닐 수 있단 말이오?” 황제는 괜한 트집을 잡지 말라는 듯 강한 어조로 대주교에게 따졌다. 대주교 역시그것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 또한 그들이 용사라는 것은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모습을 밝히기 전에, 그들이 먼저 신전에 들렀어야 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클래스 부여부터 관여했던 신전이 그들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야 모든 이가 안심하여 용사를 따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음, 확실히 그것은······.” 전생에서의 용사는 확실히 그 과정을 거쳤다. 디아스와 신전, 팔라티나의 연계는 제법 끈끈한 편이었으니까. 그래서 용사도 뒤늦게나마 팔라티나를 찾아갔던 것이고······ 하지만 아르페는 그 끝에 기다릴 참극을 알았기에 그냥 팔라티나를 내버려두고 싶었다. ‘뭔 생각이나 걱정을 하기만 하면 그게 찾아오네. 용사는 이런 점이 피곤하다니까, 젠장.’ 그렇다. 아르페가 평소 용사임을 밝히기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신전과 엮이기 싫어서였다. 신전은 용사의 강림을 자신들의 업적인 양 꾸미기를 좋아하고, 용사의 움직임에 일일이 간섭하기를 원하니까. “용사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는 신전의 재가가 필요합니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용사이니 황제께서 그에 대해 모르시는 것도 당연한 일, 신전에서는 굳이 그것에 타박을 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주의해주시기를 당부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으음, 그것은 용사들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용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대주교의 눈이 빛났다. “마왕군에 대적하는 용사의 임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알겠소.” 이제 막 제국을 선포한 제아드가 신전과 척을 지면 일이 골치 아프게 돌아간다. 안젤로 제아드는 일단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아르페에게 눈짓을 했다. 이대로 괜찮겠냐는 뜻.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용사들이여.” 바로 그때를 노렸던 것처럼 귀신 같이 대주교의 타깃이 전환되었다. “아주 오랜 기간 당신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퍼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우리의 인내심에 감탄을 표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절실했습니다.” “본론, 임마.” 아르페의 말에 대주교의 눈썹이 확 치켜 뜨였지만, 다음 순간 지옥에서 기어 나온마귀처럼 무시무시한 메테르의 시선에 쫄아 스르르 내려갔다. “교황께서 당신들을 찾으십니다. 팔라티나로 오시지요. 마왕군에 대비해 용사들에게 주어진 신의 계시는 물론이고, 성녀 또한 여러분을 절실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녀라는 말에 메테르가 아르페의 팔을 꽉 붙잡았다. 분명 이전에 여자가 얼마나 늘어나건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한 주제에 곧장 이렇게 무력을 행사하다니 역시 여자는 모두 거짓말쟁이다! “안 돼······!” “아니, 메테르.” 그러나 아르페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붙잡아 떼어놓으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심해도 돼.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어쨌든 이번만은 안심해도 돼.” “······그럼 안심할게.” 아르페는 메테르를 달랜 후 대주교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그가 당장 대주교의 목을 날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메테르는 언제쯤 대주교의 목을 날리면 좋을까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지만, 아르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는 단어였다. “좋아, 가자. 팔라티나로.” < Chapter 21. 뜻대로 안 된다니까 - 3 > 끝 ⓒ 토이카 < Chapter 21. 뜻대로 안 된다니까 - 4 > “용사······?” “아르페!?” 아르페가 대주교의 청을 너무나 쉽게 응낙하자 메테르도 놀라고 황제도 놀라고 심지어는 대주교까지 놀랐다. “가, 가자는 말입니까······?” “뭐야, 네가 가자면서. 싫어? 가지 말까?” “아, 아닙니다!” “좋아, 그러면 용사의 행차에 걸맞은 편안한 마차를 준비해라. 호위 인원도 잔뜩 준비하고.” “제대로 속물······ 크흠, 알겠습니다!” 어차피 용사와 자신들과의 관계를 제아드 이상으로 광고해야 했던 신전에게 아르페의 요구는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대주교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고, 황제와 메테르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어째서······?” “메테르, 그렇게 됐으니 준비하자.” “어째서!?” 바로 그 다음날, 아르페와 메테르는 신전이 준비한 호화스러운 마차를 타고, 수십의 전투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보호받으며 에이디아를 떠나게 되었다. 라이트닝 마법으로 콩을 구워먹어도 이보단 느릴 것이다! 그렇게 마차여행을 시작하고 이틀, 마차는 순조로이 에이디아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흐흥, 흥흥흥.” 마차의 창 너머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메테르는 흥겨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콧노래를 불렀다. 처음 당황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긍정적인 모습. 물론 아르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응, 평생 이래도 좋을 것 같아!” 메테르는 한 손으로는 아르페의 로브 소매를 꼭 붙잡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아르페의 소매를 붙잡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 지금 마차 안에는 아르페와 메테르, 단 둘뿐이었던 것이다. “용사님, 혹시 불편한 점은······.” “방해하지 말아요, 알겠죠?” “넵.” 메테르는 적절한 타이밍으로 마차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사제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곤 그대로 밀어내며 다시 문을 닫았다. 마차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출발했고, 메테르는 다시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페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디아스에는 막 결혼을 한 부부가 고향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며 서로의 관계를 보다 단단하게 굳히고, 평소 못 보던 것들을 보며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신혼여행이라는 풍습이 있대. 지금 우리 꼭 신혼여행 하는 것 같다, 그치?” “그거 중간에 산적을 만나 신부도 재산도 잃는 경우가 많아서 폐지된 풍습이야.”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찢어놓는 나쁜 산적 같은 건 전부 찢어죽이면 될 텐데.” “보통 신부는 너처럼 산적을 찢어 죽이는 능력은 없어.” 아르페는 한숨을 쉬면서도 메테르가 편하도록 어깨를 조금 더 낮춰주었다. 그의 작은 배려에도 행복해하던 메테르가 문득 궁금해져 물어왔다. “아르페, 그런데 왜 시에나랑 레이제나는 내버려둔 거야? 드디어 나를 소중히 대해줄 필요성을 느낀 거야?” “널 소중히 대하려면 다른 여자를 내 근처에서 다 치워버려야 하는 거구나, 그렇지?” “그게 아니면 뭔데······?” 에이디아를 떠나기 직전. 대주교는 그에게 파티 멤버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아르페는 그들과는 임시 파티였을 뿐이라고 해명했고, 어차피 중요한 것은 용사들뿐이었기에 그 또한 쉽게 수긍했다. 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신전은 한 번 타깃팅한 우리를 쉽게 놔주려 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그게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신전을 쓸어버리면 기껏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용사의 이미지가 뭐가 되겠어?” “그래서?” “그래서 일단 용사인 나랑 너만 신전에 응해주는 척하는 거야. 한편으로 시에나와 레이제나에게는 지속적으로 지시를 내려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까지 맡기는 거지.” 더욱이 이블 리플렉터인 시에나는 팔라티나로 입성하는 순간 용사 이상의 주목을받게 될 터, 떼어두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 될 것이다. “지나치게 벌어진 우리들과의 레벨 차이도 따라잡을 수 있을 테고, 우리가 팔라티나에서 일을 처리하는 동안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으니 이쪽이 나아. 시에나에겐 근접 전투 능력이, 레이제나에게는 원거리 전투 및 보조능력이 있으니 파티 구성도 완벽하지.” “팔라티나에서도 처리할 일이 있는 거구나······. 왜 인간들은 다 그렇게 문제가 많은 걸까?” “인간뿐만 아니라 지성을 지닌 모든 종족이 그래.” 그래도 팔라티나만은 정말로 ‘다른 이들’ 손에 맡기고 싶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일행을 찾아왔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제 발로 찾아들어가 박살을 내주는 수밖에. “요 근래 찾아가는 곳마다 다 박살만 내는 것 같은데······ 슬슬 우리가 용사인지 마왕 측 인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어.” “글쎄, 박살로 끝날지 재건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지. 두고 봐야 알아.” “둘 중 어느 쪽이건 일단 한 번 박살이 나는 전제라니······.” 메테르가 제법 똑똑해진 탓에 이전처럼 속여 넘기기가 힘들어졌다. 아르페는 쳇, 혀를 차며 통신기를 들었다. 물론 그 전에 마차 내부에 결계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당한 고위의 방음 결계는 물리력까지 동반하고 있어 어지간한 놈은 깨부수려다가 지칠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스펠이었다. “떠나기 전에 에이디아의 창고를 털어서 정말 다행이지. 쓸 만한 마법을 많이 얻었다니까.” “그건 또 언제 턴 거야? 난 못 봤는데.” [먀아.] “아, 그렇구나.” 마나가 가득 깃든 것은 일단 먹어치우고 보는 로아와 함께 하는 한 혹시라도 보물을 못 보고 놓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아르페는 후, 미소를 지어주며 통신기를 켰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어, 시페넌.” “시페넌!?” 흐름상 시에나나 레이제나의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여지없이 그 기대를 배신하는 아르페! 그러나 메테르의 눈이 휘둥그레 크게 뜨이건 말건 아르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레벨 몇이냐?” [218이다. 어때, 나도 제법이지?] “응, 제법 느린걸.” [큭!] 레벨 250까지는 올려뒀기를 바랐는데 역시 성장속도 증폭기 메테르가 없이는 그정도인가. 아르페의 말에 시페넌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런 네놈은 몇인데!] “283.” [졌습니다······.] 단순히 그들이 처음 만난 시점에 레벨이 어느 정도 차이 났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레벨은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올리기 힘들어지는 것. 특히 레벨 200을 넘긴 때부턴 레벨 1차이에 소위 말하는 급수가 달라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283레벨에 달하다니? 시페넌 자신도 정말 2년간 죽어라 노력했지만, 아르페를 도저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일행은?” [르세티가 208, 데이스가 206 정도다.] 시페넌이 과거 용사의 파티 멤버였을 정도로 사기스러운 능력을 지녔음을 감안한다면 르세티와 데이스도 열심히 따라온 셈. 그 정도면 당면의 목표를 수행하기에 충분하리라 판단한 아르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위치는 어디야?” [네가 상인을 통해 전해준 지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까 여기가······ 아,팔라티나 근처네.] “아르페에?” 통신을 엿듣던 메테르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가 미케나를 통해 시페넌에게 또 다른 지도를 전달했다는 것도, 시페넌 일행이 지금 팔라티나 근처에 있다는 것도전부 처음 듣는 얘기였으니까! 그러나 아르페는 히죽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다른 이들한테 맡겨두고 있었다고 했잖아. 내가 일을 맡길 이들이 또 어디에 있겠냐.” [일을 맡겨? 아, 네가 찾아달라고 했던 것들은 일단 다 보관하고는 있는데 그 얘기냐?] “아니, 아냐. 앞으로 던전 하나만 더 찍고 곧장 팔라티나로 와. 거기서 합류하자.” [합류!? 드디어 네 파티에?] “이번 일 하는 거 보고 결정하자.” 아르페는 통신을 종료했다. 메테르가 화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요구했다. “설명해줘.” “간단한 일이야. 나는 팔라티나에 접근하기 싫었고, 마침 시페넌이라는 움직이기좋은 패가 있었어. 그래서 디아스의 던전을 다 찍고 성장한 그 녀석에게 다음 지역의 지도를 건네줘서 자연스럽게 팔라티나로 이동하게 한 거야. 녀석한테 일을 떠넘기고 싶었거든. 참고로 이건 바다 속으로 들어가기 전 미케나를 만났을 때에 미리 해둔 일이었지.” “정말 진솔한 설명이구나······.” 팔라티나는 사실 에이디아보다는 디아스에서 더 가까운 곳에 있다. 에이디아에서마도가 발달한 것도, 신의 말이 잘 닿지 않는 먼 거리에 있어 신의 힘보다는 자신의 힘을 기르고자 하는 마도사들이 활약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즉, 팔라티나 내부에서는 그렇게 마도사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얘기가 돼. 난 용사지만 능력이 마도사 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니 찜찜한 것도 있고, 신과 연관된 신전이라는 세력을 신용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아르페는 방음 결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더 낮추어 말했다. “성녀가 짜증나.”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어쩌면 이슬만 먹고 살면서 하루 종일 신한테만 기도드리는 청순한 미소녀일지도 모르잖아?” “네가 이미지하는 모습이 맞아. 맞는데······.” “흐음, 맞구나?” 메테르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조금이라도 더 성녀의 외모를 칭찬했다간 큰일을 벌일 것 같은 기세였기에 아르페는 다급히 말을 돌렸다. “내 취향은 아냐! 난 신하고 관련된 것들은 딱 질색이거든.” “아르페는 언제나 그렇게 취향이 아니라면서, 결국 보면 다들 아르페를 좋아하니까 거세게 내치질 못해.” 메테르의 지적에 찔리는 것이 없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적어도 성녀에 한해서만은 아르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아마 성녀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걸.”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는 거야?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의 인적사항을 아는 건 언제나의 아르페다운 일이긴 하지만 취향까지 장담할 수는 없잖아?” “아니, 그야 그렇긴 하다만······.” 아르페는 전생에서 성녀를, 그녀의 남자관계를 보았으니 그녀의 취향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솔직히 말해주면 기껏 메테르에게 전생을 숨기고 있던 의미가 사라지기에 그는 결국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어쨌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안온한 낙농업 라이프가 보장되는 그 순간까지는 여자랑 엮일 생각 없으니까.” “아르페는 나만 있으면 되는걸, 그치? 후후.” “······그렇게 상냥하게 물어볼 거라면 검손잡이에서 손을 떼는 게 좋았을 텐데.” 그는 한숨을 쉬며 메테르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전부 용사로 활동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니까.” “응······ 이게 다 아르페가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거야.” 메테르는 아르페에게 조금 더 찰싹 달라붙었다. 팔라티나에서 또 다른 일행과 합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아르페 성분을 보충해두려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잘 읽혀 곤란하다는 생각과 함께 아르페는 품에서 책 한 권을꺼내어 들었다. 무척 두꺼운 가죽 장정의 책. 심상치 않은 마나가 느껴지는 그것을 보며 메테르가 눈을 빛냈다. “그때 그 마도서구나?” “응. 농땡이를 많이 피우긴 했다만, 이젠 슬슬 쓰기 시작해야지.” 그것은 마족 티에나를 죽이고 입수했던 마족화 저주의 결정이 담긴 마도서였다. 물론 세릴을 제네시스 머메이드로 이끄는 과정에서 아르페가 마나를 퍼부어 강제로 그 방향성을 돌린 탓에 지금은 다소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있었고, 이제 크라켄과 에인션트 크라켄의 먹물을 잉크로 삼아 그것을 확실히 바꿔놓을 생각이었다. “어디, 일단 내용을 조금 살피고······ 좋아, 내 기록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어.” “마도서가 계속 빛을 발하네.” “주인이 바뀌었음을 아직까지 인정하지 못하고 나한테 저항하는 거야. 물론 소용없겠지만.” 아르페는 우선 크라켄의 먹물 주머니를 강화 재료로 삼아 에인션트 크라켄의 먹물 주머니를 자신이 강화할 수 있는 한도까지 강화했다. 그렇게 두 잉크의 성능을 궁극으로 합쳐내고, 이어서 적당한 깃펜을 들어 먹물을 찍었다. [먀아아아아.] “아냐, 조금 더 원대한 목표를 노려볼 셈이야.” 단순히 저주를 없애는 능력이라면 이미 로아가 지니고 있다. 본디 인간을 마족으로 바꾸는 것에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마도서인 만큼, 아르페는 그것을 완전히 뒤바꾸어 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여태까지 해온 다른 어떤 일들보다도 중요할지 몰라.” “집중하는 아르페가······ 너무 멋져······.” “로아.” [먀아먀.] 아르페는 로아에게 메테르가 흥분하여 자신에게 덤벼들지 않도록 막아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펜을 들어 마도서의 첫 장에 찍었다. 그들이 신성국가 팔라티나에 도착하기까지, 아직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1 > 에이디아에서 팔라티나까지는 대륙 하나와 대양 두 개라는 압도적인 거리의 차가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배를 타고 몇 개월을 걸쳐 바다를 건너, 대륙을 횡단하고 다시 바다를 건너는 뻘짓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신전은 대륙의 각지에 워프 게이트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감추어져 있었구나.” “신전이 보유하고 있는 워프 게이트의 위치는 최고 기밀 사항으로 다루어집니다.물론 두 분 용사님께는 당연히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만. 마왕군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개시된다면 필요한 일이 많아지겠지요.” “역으로 워프 게이트의 위치를 추적당해서 엿을 먹는 일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자부합니다.” 사제의 자부심에 걸맞게 그 워프 게이트의 성능은 결코 에이디아가 보유하고 있던 것에 뒤지지 않았는데, 게이트를 살핀 아르페는 단박에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선배님의 흔적이 여기에도 남아있었네.’ 그뿐만이 아니다. 선대는 단지 그것을 개조해놓았을 뿐, 워프 게이트는 선대 용사가 활동하기 이전부터 현역이었음에 분명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무수한 이들의 기록을 받아먹으며 능력을 키워온 그 워프 게이트는 이미 단순한 워프 게이트가 아니라 성유물에 가깝도록 발전해 있었다. “워프 게이트를 타고 총 일곱 번 이동합니다. 게이트를 발동하기 전 용사님들의 마나를 게이트에 인식시키려 합니다만······.” “아, 당연히 그래야지. 어차피 우리 둘은 항상 같이 다니니까, 나만 해둘게.” 메테르는 어째선지 기뻐했고 사제는 그가 정해진 절차를 따르지 않아 떨떠름해 했지만, 항상 같이 다닌다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수긍하는 수밖에. “으음, 알겠습니다.” 대륙 각지에 설치된 워프 게이트는 모두 보이지 않는 마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 신전의 워프 게이트는 허가받지 않은 이가 이용하지 못하도록 신성 스펠에 의한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지만, 하나의 워프 게이트에 개인을 ‘주인’으로서 등록하면 다른 게이트도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입니다.” “식은 죽 먹기지.” 사제가 게이트를 작동시키고,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마나가 일행을 향해 뻗어 나가려다말고 아르페의 인도에 휩쓸려 그의 손에만 집중되었다. 사제와 성기사들이신기에 가까운 그 마나 컨트롤에 경악하는 사이, 아르페는 빠르게도 등록을 마쳤다. “정말······ 용사다운 능력입니다.” “용사니까 당연하지. 이제 가자고.” 아르페가 등록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적대하는 마나를 뿜어내던 워프 게이트는 이제 언제든 들어오라는 듯 따스한 마나를 은은하게 흩뿌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고, 곧 바다 위의 외딴 섬에 도착했다. “응?”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망망대해에 메테르의 눈이 점이 되었다. 아르페가 피식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사제가 게이트를 일곱 번 타야 한다고 말했잖아. 당연히 중간에 바다를 거쳐야지.” “그렇구나, 그래서 섬에······.” 그냥 섬이 아니라, 워프 게이트를 중심으로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는 섬이었다. 과연 인간계에서 가장 강한 세력은 에이디아가 아닌 신전 세력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만드는 스펠의 구성.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섬을 낱낱이 훑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수번에 걸쳐 마왕군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을 지키고도 세력을 유지할 만큼은 되네.” “······용사 임명 이후 많은 공부를 하셨나 봅니다.” 도저히 열다섯 살짜리가 내뱉을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사제가 떨떠름한 목소리로물어와, 아르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스에서 벗어날 때부터 언젠가는 신전과 엮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때를 대비해두는 건 당연하잖아.” “우린 절대적인 용사의 우군입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 따져 보면 처음 디아스의 소환을 뿌리쳤던 것부터 안타까웠습니다. 그 때문에 모두 힘들게 빙빙 돌아와야 했으니······.” “아, 원래 간섭받는 건 싫어해서. 너희가 우리를 챙기려 한다는 것만은 알겠으니 그쯤에서 물러가.” “······알겠습니다. 이해해 주신다면 다행입니다.” 아르페는 그 정도로 사제의 간섭을 쳐냈다. 하지만 실소가 치미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우군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신뢰하라니, 이렇게 바보 같은 말은 오랜만이다. 설령 인성을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고 실력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멍청한 아군은 똑똑한 적보다도 위험한 법이니까. 아르페는 그것을 마왕을 보며 깨달았다! ‘그리고 이놈들은 그 마왕보다 더한 놈들이지. 네놈들을 믿을 바에 차라리 에트나를 믿겠다.’ 그는 모래사장에 가득한 백색의 고운 모래를 발로 걷어차며 까르륵 웃고 있는 메테르의 뒷모습을 보며 사제에게 확인했다. “지금 당장 다음 게이트로 건너가는 건 불가능하겠지?” “네, 마나를 사흘 정도 모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마나를 보태면 이틀까지로 줄일 수 있겠지.” “······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다행히 사제 놈들의 보는 눈까지 완전히 썩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워프 게이트를 장악하던 아르페의 실력으로 보아 그가 굳이 허언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한 사제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고, 아르페는 완벽하게 온존되고 있던 자신의 마나를 모조리 워프 게이트에 부어버렸다. “허, 제아무리 사용자로 인식되었다고는 하나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워프 게이트에 마나를 부어 충전하다니······.” “뭘, 내 마나를 자연의 마나와 같게 취급하도록 인식시켜주면 되는 일인데.” “정말 어마어마한 마도의 지식을 쌓고 계시는군요······.” 그들을 토해낸 후 미미한 빛을 발하던 워프 게이트가 한층 더 강렬한 빛을 토해내게 되었다. 물론 그 정도로는 아르페 일행과 그들을 호위하는 사제들, 성기사들을 한꺼번에 옮겨놓기엔 무리가 있었다. “꼼짝없이 이틀은 묵어야겠네.” “이런 때를 위해 숙소를 마련해두었습니다. 두 분을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아, 그 전에 잠깐.” 아르페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해변에서 놀고 있는 메테르의 모습을 가리켜 보이며 피식 웃곤 말했다. “우린 좀 놀다가 들어갈게.” “······두 분 사이가 좋으시군요. 무척 좋아 보입니다.” “그런 네 표정은 안 좋아 보이는데?” “그것이······ 성녀께서, 용사와의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계셨기에. 그런데 지금 보니 두 분의 사이가 너무 좋아 차마 성녀께서 끼어들 틈이 없어 보여, 그것이 조금 걱정이었습니다.” “용사를 기대했다라······ 나, 아니면 메테르?” 아르페의 짓궂은 물음에 사제의 표정이 곤혹스러워졌다. “당연히 아르페 님입니다. 특히 이번 에이디아에서의 활약이 퍼지면서, 흠······ 아르페 님의 미모가 출중하다는 소문이 팔라티나에까지 퍼져.” “······메테르가 아니라 나?” “그렇습니다. 물론 메테르 님도 아름다우십니다만, 그······.” 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아르페도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 둘 사이에 껄쩍지근한 분위기가 감돌아, 그것을 민감하게 파악한 아르페는 곧 뒤로 조금 물러났다. “너 저리 가라.” “제가 아니라 성녀께서 고대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만!” “알겠으니까 저리 가.” 아르페는 사제들을 모두 쫓아낸 후 메테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모래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르페, 이거 좀 봐. 새하얀 모래가 이렇게나 고와!” “이제야 좀 오랜만에 애 같네.” “응?” 메테르는 백사장에 정신이 팔려 있어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너 놀 거면 그 갑옷이나 벗고 놀아.” “하지만 갑옷을 벗으면 여차할 상황에 아르페를 지킬 수 없는걸.” “여기선 여차할 상황이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하지만······.” “괜찮다니까.” “······으응, 그럼 그렇게 할게.” 그녀는 붉은 갑옷 상하의를 모두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녀의 갑옷은 아르페에 의해 세 번씩 강화되어 있어 무게를 별로 느끼기 힘든 수준으로 변해있었지만, 그래도 벗고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봐봐, 아르페! 눈 위를 달리는 것처럼 발자국이 찍혀!” “별게 다 신기하네.” “와아! 으히히.” 메테르는 이미 항구도시 프레이트에서 바다를 본 적이 있지만, 그곳에 이런 백사장은 마련되어 있지 않아 물가에서 노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에이디아의 항구도시 벨라타 역시 마찬가지. 그런데 이곳에서야 겨우 바다를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가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아르페는 새삼스럽게 생각하다가는 어느덧 본인도 즐거워졌음을 깨달았다. “신전 녀석들이 도움이 되는 일도 있네.” 아르페는 가만히 중얼거리다가는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 이곳 무인도에 마련된 숙소 근처에 모인 사제와 성기사들이 아르페와 메테르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꺼져.] “히익!?” “광역 메시지 마법!?” 그는 적당히 인상을 써 놈들을 숙소 안으로 쫓아내버렸다. 이런 때 놈들에게 방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먀먀먀.] “너도 놀고 싶어?” [먀아먀아.] “로아, 이리와!” 로아를 풀어주자 녀석도 작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해변을 내달려 메테르를 뒤쫓았다. 사람의 발자국과 고양이 발자국이 모래사장 위에 나란히 찍혔다가는 바닷물에 쓸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아르페는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낙농업이 아니라, 해변가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르페는 노후계획에 조심스레 해변의 집을 추가했다. 그리곤 자신 역시 로브와 신발을 벗어 조금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왔다. 마무리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세계수 가지를 꺼내어 꽂으니 그 끝에 풍성하게 매달린 잎사귀가 그림자를 만들어 적당히 햇살을 가려주었다. 세계수가 급할 때 햇살이나 가리라고 가지를 떼어내 준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겐 알 바 아니었다. “그러면 작업이나 계속해볼까.” 그러나 아르페는 마도서 개서 작업을 그리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로아랑 노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한 메테르가 곧 그에게 달려와 그를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아르페, 바닷물이 차가워서 기분 좋아! 같이 놀자!” “아냐, 됐어. 나는 그런 청춘과는 타협하지 않는 어두컴컴한 삶이······ 으아아아!” “에잇!” 여유를 부리고 있던 아르페는 메테르의 압도적인 신체능력에 의해 바닷물에 거꾸로 처박혀지는 꼴이 되었다. 다행히 마도서와 먹물만은 제때 보호할 수 있었지만, 마침 방어구를 전부 벗은 가벼운 차림이었던 탓에 속옷까지 흠뻑 젖고 말았다. “정말, 일하고 있는데 짜증나게······.” 그는 다급히 마법을 구사해 몸을 띄웠다. 그러나 메테르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 찰싹 달라붙은 속옷. 그것을 보는 메테르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꿀꺽······.” “네가 군침을 삼키면 어떻게 하냐! 입장이 반대잖아, 입장이!” “아르페, 같이 놀자······?” “아, 저거 이미 글렀는데······ 으힉!” 아르페는 신변의 위험이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부터 아르페와 메테르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건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로아는 그 모습을 보며 그저 한심하다는 듯, 먀아아, 하고 울 뿐이었다. “아르페, 우리 같이 놀자!” “정확히 무엇을 하고 놀고 싶은 건지 정확히 해설해주지 않으면 곤란하겠는데! 야! 잡지 마, 잡지 말라고! 로아, 도와줘!” [먀먀먀.] 용사들의 술래잡기는 그로부터 다섯 시간, 바닷가의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르페는 메테르가 지쳐 배고파할 때까지 그녀에게 잡히지 않는다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그 대가로 저녁 내내 그녀에게 뺨을 문질문질당하는 형벌을 겪어야 했다. 워프 게이트는 그 후로도 여섯 개나 남아 있었다. 아르페 일행은 가는 곳마다 마나를 아낌없이 발휘해 게이트의 마나를 충전해준 끝에, 고작 이주일도 지나지 않아 신성국가 팔라티나에 입성할 수 있었다.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1 > 끝 ⓒ 토이카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2 > [오빠 정말 너무해.] “조금만 참아줘. 금방 여기서 일 끝내고 갈 테니까.” [잡은 물고기에게, 미끼를 주지 않음. 악마 같은 술수.] “넌 대체 그런 말 누구한테 배우냐?” 아르페는 통신 너머 시에나와 레이제나의 투정을 적당히 받아주며 그녀들에게 똑바로 지시했다. “다이탄보다도 위쪽으로 올라가면 인간이 살 수 없는 빙하대륙 글라케이아가 있어. 봄이 오기 전에 글라케이아의 중심부로 가서······.” 그는 일행과의 통신을 마치고 후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메테르가 그를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 “좋겠다. 나도 가고 싶다, 빙하대륙.” “그냥 추울 뿐이야.” “춥다는 핑계로 아르페한테 달라붙어 있을 수 있을 텐데.”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반박했다. “지금도 달라붙어 있잖아.” “이미 달라붙어 있지만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있고 싶어.” 아르페는 그 시점에서 용사의 갱생을 깔끔히 포기했다. 마차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메테르가 조금이라도 더 지금을 만끽하고자 그에게 찰싹 달라붙는 것을 반쯤 해탈의 심정으로 받아들이며 다음 통신을 시작했다. “그래, 아줌마.” [미케나라고 불러주세요.] “시에나 일행한테 마지막 보급 부탁해. 글라케이아로 들어갈 거야.” [그럼 괜찮겠네요. 전 글라케이아의 던전까지도 얼마든지 출장이 가능하답니다. 대상인이니까 말이죠.] “그 다음으로는 시페넌 일행한테도 마지막 보급을 부탁해. 소모성 폭발 아티팩트부터 열쇠 툴까지 모조리 최고급품으로. 다 같이 팔라티나에서 날뛸 예정이거든.” [······아르페 님, 용사 맞으시죠?] 어떤 의미로는 용사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팔라티나에서 날뛴다는 말에 미케나의 목소리가 경직되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상큼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용사는 악을 처단한다. 단,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음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그리고 팔라티나에서는 냄새가 나. 악의 냄새가.” 전생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아르페의 말은, 당연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타인이듣기에는 지나치게 막무가내였다. [그냥 마왕 하시지 그러세요!] “한 다리 건너면 용사가 마왕처럼 보이고 마왕이 용사처럼 보이는 거지 뭐. 그러면 난 부탁했다.” [잠깐만요, 언제든 그렇게 먼저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곤란······.] 미케나와의 통신도 끊었다. 마지막 통신은 시페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팔라티나의 수도 리하제타로 잠입해야 한다고?] “리하제타의 모든 구성원은 용사들인 우리에게 시선을 집중하겠지. 그 동안 너희가 활약을 해줘야 해. 르세티랑 데이스는 어디까지나 네 보조일 뿐, 도적으로서 기량을 키운 네가 이번엔 적극적으로 뒤집어줘야 해.” [아르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줘. 정확히 뭘 뒤집으라는 거야? 슬슬 네가 알고 있는 걸 털어놓으라고.] 시페넌의 요구는 지당한 것이었다. 아르페는 흠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하제타는 사제의 계급별로 도시의 구획을 나누어놓고 있어. 이것까지는 알고 있지?” [당연하지.] “그 중 어느 구역까지는 외부 사람들도 출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성녀와 교황, 몇몇 고위사제들을 위한 제로 클래스에는 용사를 제외한 외부인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어.” [제로 클래스가 있다는 건 처음 들었네······.] “넌 그 제로 클래스를 철저하게 뒤져 줘. 부탁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거다.” [야 임마, 말의 앞뒤가 안 맞잖아! 외부인인 내가 거길 어떻게 들어가!] 아, 이런 태클을 그 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요즘 슬슬 메테르와 시에나가 태클을 걸어주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르페의 말을 다 따라줘서 살짝 섭섭한 마음까지 있었는데 그렇게 답답해진 마음을 시페넌이 뻥 뚫어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말했잖아. 제로 클래스에는 용사가 들어갈 수 있다니까.” [그래서?] “내가 들어가면서 수작을 부려놓을 테니까 너흰 그걸 이용하는 거야. 뒷구멍이라고도 하지. 밤이 되면 들어와. 내가 어떻게든 오늘밤까지는 뚫어놓을게.” [······.] 그것은 도저히 용사라는 놈이 지껄일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신성국가 팔라티나의 수도 리하제타에 이제 막 입장하여 사제와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 중심부로 들어가고 있는 놈이 할 말은! 그러나 시페넌이 기가 막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에도 아르페의 말은 이어졌다. “팔라티나에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는 건 너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 제로 클래스를 낱낱이 털어, 신전의 실체를 온 세상 곳곳 널리 보여주는 것이 이번 나의 계획이야.” [그래, 설혹 신전이 숨기고 있는 것이 있고, 내가 기적적으로 그것을 찾아낸다 치자. 대체 무슨 수로 그 사실을 대륙으로 퍼트릴 생각이냐?] “아주 좋은 질문이야! 사실은 에이디아의 마도 기술을 이용할 생각이야. 거기 나올 때 영상 송신구를 몇 개 가져왔거든.” [이 악랄한 놈 같으니!] 아르페는 시페넌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고 있었다. 그에게 굳이 그것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어쩌면 아르페는 수백 년 뒤에 대륙을 덮쳐올 역병에 대한 준비까지도 미리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알겠어. 그럼 일단 잠입은 해보겠다만······ 솔직히 그리 자신은 없어.] “너를 믿지 말고, 너의 아티팩트를 믿어. 디아스의 모든 역사를 탈탈 털어 무장한너라면 할 수 있어!” [거짓말로라도 기운을 차리게 해주면 좋을 텐데 네놈은 정말 최악이다!] “힘내, 시페넌!” [네가 응원에 영 자질이 없다는 것만은 알겠다! 흥, 네놈도 힘내라!] 시페넌은 툴툴거리며 통신을 끊었다. 이것으로 외부와의 모든 연락이 끝났다. 이제 당분간은 외부와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 지금부터는 서로의 호흡을 믿고 내달릴 뿐이다. 아르페는 통신기를 품에 집어넣고는 상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메테르가 뚱한 얼굴로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아르페는 왜 그렇게 시페넌을 좋아하는 거야? 혹시 여자보다 남자가 좋은 건 아니지, 그치?” “유일하게 정신적으로 믿을 만한 동료라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 말에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는데!?” 메테르의 추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마차 문을 누군가 노크했다.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성국의 주민들에게 용사님들의 존안을 보이며 모두로부터 축언을 듣는 퍼레이드가······.” “또 퍼레이드야.” “용사라는 게 원래 이런 거야. 그래도 꼬꼬마 때부터 이렇게 놀아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 네, 부탁드립니다.” 메테르의 투정과 묘하게 달관한 듯한 아르페의 말에 ‘이게 아닌데?’하면서도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사제. 아르페와 메테르는 곧장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저분이 이번에 탄생한 용사님인가!” “듣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데······.” “정말 두 사람이잖아. 둘 다 용사인가?” 아르페는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했다. 용사로 임명되었을 당시의아르페 또한 어째서 용사가 두 명인지 골치를 꽤나 썩었으니까. “이쪽으로. 외곽부터 순회하여 대신전으로, 그곳에서 축복을 받은 후 내부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래그래.” 아르페는 무척이나 싫어하는 메테르를 질질 끌고 새로운 차량으로 몸을 옮겼다. 이미 잔뜩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을 입고 그 차량을 호위했다. “이 차량조차 마법이네.” “그렇습니다. 선대 용사께서 신전과 협력하여 만들어내신 보물이지요.” 아르페와 메테르는 어쩐지 조금 뿌듯하게 말하는 사제를 무시하며, 그들이 서서 시민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단 위로 올라갔다. 선대 용사의 마법이 깃든 행사용 차량의 단은 균형을 잃지 않고 십 수 미터 이상의 높이까지도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그 위에 서니 최후의 최후까지 마왕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도시 전체가 방위 마법진 역할을 하도록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신성국가 팔라티나의 수도, 리하제타의 정경이 한눈에 보였다. “와아, 꼭 장난감으로 만든 도시 같아······.” 계획적으로 조성되었으니 당연히 도시도, 그 안에 들어찬 각종 시설들도 반듯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을 수밖에. 그것을 내려다보는 메테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르페는 고개를 끄덕여주며 해설했다. “반듯반듯하지? 물론 마왕군이 쳐들어오면 다 부서지겠지만, 실은 부서지는 순간 더욱 끔찍한 마법이 발동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 더 든든해 보이지.” “아르페는 정말 사람의 꿈을 망가트리는 데에는 도가 텄구나.” 어떤 의미로 보면 에이디아의 수도 레이즈와도 비슷하지만, 레이즈의 마법진은 단지 상하수도 시설에 불과했다면 리하제타의 마법진은 실제로 마왕군의 힘을 축소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마법을 발동할 수 있도록 마법진의 역할이 분화되고, 여차할 때에는 한 가지 마법에 힘을 집중하도록 나머지 마법진을 강화 마법진으로 변형까지 할 수 있도록······. “머리가! 내 머리가 너무 아파, 아르페! 으그아아아아아!” “알았어, 설명 안 할게······.” 요를 간추려 말하자면 여기에도 선대 용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잘나신 선배님의 실체를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아르페는 아주 살짝 기대했다. 더불어 마법진을 통제할 방법도 알아낼 수 있어 즐거웠다. 역시 자신이 힘들게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을 써먹는 게 더욱 즐거운 법! 아르페가 오랜만에 마왕군 사천왕에 어울리는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드디어 퍼레이드가 개시되었다. “메테르 님, 정말 아름답게 성장하셨군요!” “아르페 님, 이쪽을 봐주세요!” “으윽, 시선이 너무 많아.” “아르페, 기운 내.” 이미 에이디아에서 한 번 퍼레이드를 경험한 적이 있지만, 황제와 함께 나누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를 지금은 온전히 그들 둘이서 받게 되었으니 그 부담도 열기도 두 배 이상이었다. “아르페 님 너무 멋져!” “메테르 님!” “아르페 님!” “꺄아아아아아악! 아르페 님이 이쪽을 보셨어!” ······그런데 어째 이상하게도 메테르보다 아르페 쪽이 불리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 고개를 돌린 아르페는 아니나 다를까 메테르의 일그러진 미소와 조우할 수 있었다. “야, 사람들 앞이야! 표정관리, 표정관리!” “하지만 저 사람들이, 감히 나의 아르페를······.” “화난 이유가 그거였어!?” 그 후로도 아르페의 이름을 부르며 꺅꺅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메테르의 분노 게이지가 쌓여갔다. 아르페는 메테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그저 소극적으로 손을 흔들어줄 뿐이었다. “역시 남자 쪽이 진짜 용사인 것 아닐까? 봐봐, 여자아이는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잖아.” “하지만 분명 사제는 둘 모두를 용사의 길로 인도했다고 하셨다. 사제는 곧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분들, 감히 신을 의심할 수는 없지.” “교황 성하를 뵐 때면 모든 것이 확실해지겠지.” 무리 중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르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메테르는 뭐가 좋아 웃냐며 그의 허벅지를 찌르곤 그에게만 들리도록 소곤거렸다. “돌아가면 뽀뽀 백 번이야.” “······나한테 벌을 주는 건데 뽀뽀를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아르페한테 주는 벌이 아니라 잘 참은 나에게 주는 상이야.” “내 동의여부는! 야!” 수도 리하제타에서의 퍼레이드는 에이디아에서 벌였던 것보다 훨씬 느리고 집중도가 높아 두 용사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일행이 외부 구역과 내부 구역을 가로지르는 성역, 대신전에 도달하면서 일차적으로 휴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람들 시선은?” “없어.” 두 사람은 일단 한 차례 사람들이 빠진 것을 확인하고는 동시에 후우, 한숨을 내쉬며 서로에게 기대었다. 사제와 성기사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둘을 방관하던 그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사님.” 갑자기 들려온 청명한 여성의 목소리에 메테르의 몸이 움찔했다. 아르페와 메테르는 동시에 뒤를 돌았다. “바디네 쿠아르 팔라티나입니다. 부디 저를 바디네라고 불러주시길.” 그곳에 서 있던 것은 두 용사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검은 머릿결의, 태어나 지금까지 이슬만 먹고 살았을 것처럼 가녀리고 청순하게 생긴 미소녀였다.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3 > ‘아, 이 미치광이 성녀가 기어이 나타났네······.’ 검은 머리, 푸른 눈의 소녀를 보며 아르페가 한가로이 생각하던 그때, 메테르가 본능적으로 아르페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바디네라고 이름을 밝힌 소녀는 그것을 보며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조신하게 웃었다. 메테르는 그 모습이 무척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아직 미숙하오나 이곳 팔라티나에서는 성녀라 불리는 몸, 용사님을 돕기 위해 태어난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먀아.] “어머나, 귀여운 고양이군요.” 아르페의 품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 로아가 성녀를 보며 작게 울었다. 아르페는 로아를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려놓으며 녀석을 다독였다. “놀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얌전히 있어.” [먀아······.] “꼭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네요.” [먀.] “어머나.” 꼭 그녀에게 대답을 하는 것만 같은 로아의 울음에 성녀, 바디네는 다시금 까르륵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을 본 메테르의 경계가 더욱 심해졌다. 상대는 여태까지 아르페 주변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타입의 청순가련형 미소녀. 혹여나 아르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기울 것을 우려해 최대한 아르페가 그녀와 마주하지 못하게 막는다! “되게 바보 같으니까 옆으로 비켜 봐, 메테르.” “하지만!” “신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용사님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축복을, 드디어 시행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래, 들어가자.” “우으으으음.” [먀아. 먀먀먀아.] 아르페와 메테르, 로아는 촌놈들처럼 대신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성녀를 따랐다. 그들 뒤를 수십의 사제와 성기사가 보호하니 그 모습이 가히 그럴듯해 보이기는 했다. “진한 마나의 기척······. 아르페, 마나는 원래 순환하는 건데 이렇게 오랜 세월 붙잡아둬도 되는 거야?” “마나를 붙잡는 것, 그게 마법진과 아티팩트의 기본이야. 물론 요령 없이 붙잡아놓기만 하면 폭주하거나 썩어버리게 마련이지만, 너도 느끼고 있듯 이곳의 마나는 대신전 내에서의 마력을 증폭, 순화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했지. 대신전이 1차적으로 마나를 거르고, 2차적으로는 대신전과 연결된 도시의 마법진이 마나를 정화시켜. 그래서 이곳에서는 평범한 사제도 고위사제급의 힘을 낼 수 있게 되는 거야.” “정말 마도에 밝으시군요. 차분하고 조리 있는 설명에 그만 저까지 집중하게 되었어요.” 앞서 복도를 나아가던 성녀가 아르페를 돌아보며 호감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메테르는 아르페의 허리를 찔렀고 로아가 한심하다는 듯 울었다. 하지만 한 번 생긴성녀의 호기심은 좀처럼 쉽게 가시지 않았다. “국가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단독행동을 감행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우려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이렇게 깊은 지식과 뛰어난 실력을 몸에 갖추게 되셨으니 결국 판단이 옳으셨던 셈이지요.” “왕궁 밥 맛없······ 으붑.” “아니, 아무것도 아냐.” “네에······.” 성녀는 아르페가 메테르의 입을 막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미소를 되돌리며 둘을 더욱 안으로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와아.” 그로부터 5분여 더 걸어 도착한 대성당. 빛의 마나가 집중되어 은은한 빛을 발하는 제단과 신의 강림과 인간의 대지를 표현한 거대한 십자가, 그 뒤로 늘어선 거대한 광장과 같은 공간에 저기압이었던 메테르조차 감탄사를 발했다. “정말 따스한 마나로 가득한 곳이야.” “팔라티나의 중심이 리하제타라면 그 리하제타의 중심은 바로 이곳 대신전입니다. 아까 아르페 님께서 설명해주셨듯, 최고로 정화된 마나가 이곳에 모여드는 것이지요.” 물론 또 다른 중심,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제단으로 움직였다. 그곳에 다른 사제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나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양옆으로 움직여 그녀가 제단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했다. “용사님을 축복하는 것은 성녀의 임무입니다. 이곳에서 의식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퍼레이드의 후반을 이어 내부 구역에 이르게 됩니다.” “축복 꼭 받아야 해?” “응.” 의외롭게도, 대답한 것은 성녀가 아닌 아르페였다. “용사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우리가 용사임을 증명할 가장 간편한 수단이야. 그리고 이 정도로 마나가 집중되어 있다면 보너스로 딸려오는 것도 제법 될 걸? 스테이터스라던가. 어쩌면 내가 모르던 기록이 추가될지도 모르겠어.” “아, 아르페 님.” 아르페의 적나라한 해설에 바디네는 당황했고, 반면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우린 클래스 업그레이드 대신에 다른 클래스 스킬과 스펠을 마구 익힐 수 있잖아?” “응, 거기에 축복까지 받는 거야. 그래야 개사기지.” “그렇구나!” “아으으.” 글러먹은 용사의 인식과 마주하게 된 바디네가 당황했다! 하지만 아르페는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축복이라. 알고는 있었지만 이곳에서 겪을 귀찮음에 비하면 미약한 것이라 여겨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모여든 마나가 상상 이상으로 정순해. 다른 곳에서는 일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이곳도 다르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의외야······.’ 기왕 이렇게 된 것, 여기서 축복이라도 받지 않으면 아깝다. 아르페는 메테르를 이끌고 제단 앞으로 가 섰다. 성녀의 눈썹이 아주 조금 꿈틀거렸다. “그러면······ 축복을 시작하겠습니다.” “부탁해.” 성녀의 양손이 조금 높이 들어 올려졌다. 대성당 내의 모든 마나가 그녀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제단에 준비되어 있던, 용사의 축복을 위해 만들고보관해온 성물의 마나가 한 점 더러움 없는 황금의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예쁘다아······.” “쉿.” 성녀 바디네의 푸르던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신성력을 극한에 가깝도록 끌어올리고 있다는 증거! 신성한 순간을 지켜보는 사제와 성기사들의 감탄성이 절로 높아지고, 아르페의 만물열람은 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마나반응을 관찰하여 그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성녀의 눈이 크게 뜨인 그때, 아르페는 처음으로 이상을 감지했다. ‘이것 봐라?’ 용사는 둘이다. 당연히 축복도 둘에게 나누어 공평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성물을 희생하여 발동한 영구 축복 주문을 영창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을 단 한 명, 다시 말하면 아르페에게로 한정하고 있었다. ‘벌써 수작이 들어오다니······ 아니면 뭐야, 설마 몇몇 주민들이 떠들어대던 것처럼 얘도 두 명의 용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분명 신전 소속의 사제가 아르페와 메테르를 둘다 용사로 판정했고, 실제로 둘은 용사가 되어 지금 이 순간까지 활동해왔거늘 신전세력의 중심인 성녀라는 것이 차별을 하고 있다니! “신이여, 부디 그 자격이 합당한 자에게 당신의 따스한 손길을 허하소서.” ‘얼씨구.’ 아르페는 자신의 인식이 물렀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팔라티나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건 상관이 없었다. 성녀는 그냥 처음부터 또라이였던 것이다! “일체의 거짓 없이, 오직 진실 된 광명만을 비추소서.” 성녀의 축복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양 손 끝으로 모여드는 가히압도적인 신성력이 용사에게 강림할 순간만을 기다리며 증폭되고 또 정화되며 하나의 형체를 갖추어갔다. 그 와중에 아르페는 마나 링크로 자신과 메테르의 마나를 하나로 묶었다. 그것을 눈치 챈 메테르가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아르페의 가벼운 윙크 한 번에 신기하게도 그의 뜻을 알아챘다. 그녀는 레코드 디바이드를 발동해 자신과 아르페의 모든 기록을 공유했다. 이미 마나 링크로 연결되어 있던 둘의 결속이 더더욱 굳건해지며, 같은 용사이기에 가능한 일체감이 일었다. “아, 아아아.” 메테르가 좋아죽는 소리를 냈다. 보통은 아르페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터놓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그녀는 지금 처음으로 올바르게 아르페와 연결된 셈이었다. 아르페는 녀석에게 알밤이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었으나 성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저 침묵했다. “강림하소서, 신이시여!” 그리고 끝내 성녀의 영창이 끝을 맞이했다. 황금빛의 압도적인 양의 마나가 일직선으로 아르페에게 쏟아져 내려······ 메테르에게도 공유되었다. “······응?” 성녀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라는 듯한 표정. 그러나 아르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경건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와아아, 아르페에.” “쉿. 가만히 즐겨.” 이미 축복은 발현되었으니 컨트롤은 더 이상 성녀의 영역이 아니고, 강대한 축복의 에너지는 아르페에게 닿아 그와 완벽하게 기록을 일치시키고 있는 메테르에게로절반 흘러갔다. 너무나 순조로이 이루어져 마치 처음부터 그것이 성녀의 의도였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에너지가 두 사람의 내부에서 형태를 잡아 자리한 그때, 기어이 둘의 등 뒤로 황금빛의 마나로 이루어진 깃털 날개가 솟아났다. 성녀는 그것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럴 수가······.” 그 날개는 아르페의 왼쪽 어깻죽지에서 하나, 메테르의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하나씩 솟아났으니까. “아아, 아름다워라.” “두 용사의 어깨에서 각각 편익이. 둘이 합쳐 비로소 온전한 날개가 되는구나.” “이렇게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이번대의 용사는 둘이 맞구나. 그 누구도 실수하지 않았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훌륭하게 마왕을 토벌해줄 것이다.” “보는 내가 다 흐뭇해지네.” 축복의 순간 아르페와 메테르에게서 솟아난 황금의 날개는, 두 용사가 레코드 디바이드로 연결되어 있는 덕분에 더더욱 실감나게 호흡을 맞추어 펄럭거리다가는 이내 두 사람의 내부로 가라앉았다. 만약 둘의 옷을 벗겨 놓는다면 둘의 견갑골 부위에 작은 금빛 날개 문신이 새겨진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이건, 이렇게 될 것이······.” 축복의식이 완전히 끝나 대성당이 평상시 모습을 되찾았음에도, 성녀는 아직 만족을 못한 듯 허공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미 성물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축복의식을 위해 준비된 성당 내의 마나도 깔끔하게 소진된 상황. 뭘 되돌리려 해도 그렇게 할 방법도 없었다. “왜 그래, 바디네?” 아르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르페의 눈빛에 바디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눈가에는 아주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축복 의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어요.” “우리를 위해 힘써줘서 고마워.” “아니······ 저야말로, 요. 축복의식은 처음 해보는 것이라 긴장했는데······ 덕분에,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아르페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제야 상황을대충 이해한 메테르는 바디네를 한 대 때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지치셨으면······ 잠시 휴식을?” “네가 지쳐 보이는데.” “그, 그래요. 실은 조금······ 지금부터의 퍼레이드는 저도 함께하게 되기에, 죄송하지만 컨디션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알았어. 마음껏 쉬어.” 아르페는 손을 흔들어 성녀를 배웅했다. 그런데 그녀가 등을 돌려 휴식을 취하러 가는 것을 보며 그들도 조금 쉴까 생각하던 그때, 아주 미약한 빛이 아르페와 메테르에게서 동시에 치솟았다. 그 순간 아르페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기억의 단편이······. “아르페······?” “끊어!” 아르페의 차가운 말에 메테르는 다급히 레코드 디바이드를 캔슬했다. 아르페의 표정이 상상 이상으로 험악해져 있는 것을 보며 정말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한 그녀가 울상이 되어 변명했다. “미안해, 아르페. 더 깊게 연결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갑자기 스킬 능력이 강화되는 바람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네 잘못 아니란 거 알아. 괜찮으니까 울지 마.” “흐으, 하지만 아르페, 엄청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방금 일어난 일은 지극히 간단했다. 갑자기 레코드 디바이드의 출력이 거세지면서, 아르페와 메테르의 기록을 지금까지 이상으로 깊게 일치시켰다. 그 결과 서로의 기억이 서로에게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화 안 났어.” “흐이, 미안해에. 미안해, 아르페. 흐으으.” 화가 안 났다고 하는데도 기어이 울어버리는 메테르를 보며 아르페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괜찮다며 그녀를 끌어안아 달래주지는 못했다. 방금 그는 자신의 전생을 그녀에게 들킬 뻔했던 것이다. 솔직히 심장이 철렁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혹여 그녀에게 접촉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전달될까 두렵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게 다, ‘빌어먹을 선배님, 축복을 받아야 강화가 이루어진다는 걸 말해줬어야 될 거 아냐!’ 절묘한 타이밍에 유니크 스킬과 스펠이 강화되도록 설정해둔 선배님 탓이었다!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3 > 끝 ⓒ 토이카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4 > 마족들의 피와 마나로 검게 물든 대지 위에서, 용사 일행은 한때 그들의 동료였던소녀와 대치하고 서 있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어.” “진정해, 바디네. 나를 똑바로 봐.” “똑바로 보고 있어요! 오직 당신을! 용사가 아닌 당신을!” 수백 년 신성함을 간직했던 도시 리하제타는 마족과 그들 자신의 손에 무너져 내렸다. 마왕군이 엮인 음모는 처절하리만치 놈들의 의도대로 진행되었고, 그것을 되돌릴 수 있었던 유일한 가능성은 스스로 타락을 택했다. “어째서 당신이 용사가 아닌 거죠? 어째서! 왜!” “누가 용사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 모두 메테르를 도와서 마왕을 쓰러트린다, 그게 목적이잖아!” “아뇨, 전 아녜요······ 참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요!” 타락한 성녀는 자신의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리며 붉게 물든 눈을 빛냈다. “이런 현실, 납득할 수 없어······ 당신이 아닌 용사는 인정할 수 없어.” “바디네······.”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용사는 어떻게든 성녀를 설득하고자 했으나, 격전으로 지친 그녀의 눈빛마저 지금의 성녀에게는 모멸로 여겨졌다. 용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성녀에게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거부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 대신 다시 도적이 나섰다. “바디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마족을 쓰러트렸잖아······ 부패한 신전도, 인간계를 넘보던 마왕군의 욕망도······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든막아냈어. 그런데 어째서?” “제가 꿈꾸던 것은 이런 게 아녔어요······ 나는 들러리가 되기 위해 그토록 피나는 수련을 거친 것이 아냐!” “한심한 것!” 전사가 일갈했으나 성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예, 어째서 신전이 그들과 손을 잡았는지 지금이라면 알겠어요. 배워온 것과 달라, 지켜온 것과 달라, 그들은 필시 염증을 느끼고 있었겠지요. 지금의 저 역시 그래요. 제 삶의 목적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으니까. 예에, 저도 이젠 질렸어요! 이대론 싫어요!” “그들은 단지 사천왕에게 놀아났을 뿐이야. 우리가 함께 그 음모를 밝혀냈잖아! 수도를 희생해가며, 우리가 그들의 계획을 막아낸 거야. 제발, 바디네!” “푸흐, 흐후훗.” 성녀가 웃었다. “아뇨, 그들의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뭐?” “알고 계실 텐데요? 그들의 비밀을 여러분께 누설한 것이 저라는 사실을. 사태를이렇게까지 끌고 온 것이 다름 아닌 저라는 사실을.” “바디네······?” 낌새가 이상함을 느낀 용사가 경악하며 칼을 뽑으려 들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사태는 그들이 막을 수 없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리하제타의 모든 것은 마법진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필요에 따라 성능을 하나로 압축하기도, 그 모습을 바꾸기도 하죠. 그리고 마족들의 난동으로 마법진은 필요이상으로 그들에게 최적화되었어요. 예에, 계획은 성공입니다. ······오직 저 한 명을 위한, 성공입니다.” 일대의 검은 마나가 모조리 그녀에게로 집약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기운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있어선 안 될 방향으로, 한계를 모르고 끊임없이. 그 압도적인 마나에 끝내 성녀의 존재마저 개변되고 말았다. “바디네, 너······.” “저는 성녀라는 제 입장이 싫어요. 메테르가 용사인 것도 싫어요. 하지만 메테르를 바꾸어놓을 수 없으니, 제 자신이 바뀔 수밖에요.” “우리가 힘들게 쌓은 모든 걸, 넌 지금······!” 도적, 시페넌이 소리쳤다. 한때 성녀였던 여자는 그를 보며 쿡, 웃었다. 완전히 붉게 물든 두 눈이, 그녀의 견갑골 뒤로 뻗어난 마의 날개가 신성의 소실을 증명했다. “시페넌, 내 사랑. 우리를 위해선 이 방법뿐이에요.” 그는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끝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그들의 곁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성녀가, 인간에서 마족으로 타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아르페가 울먹이며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는 메테르를 달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아주 조금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는 레코드 디바이드가 완전히 취소된 것을 확인하고,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히끅, 미안해.”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미안해에.” “그래그래.” 어린애처럼 울기만 하던 메테르는 아르페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한참을 다가오지 않아 완전히 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닌가 겁먹고 있었는데, 아르페가 달래주니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르페, 정말 화 안 났어?” 그의 품에 폭 안겨 반쯤 울먹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묻는 메테르. 아르페는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화 안 났다니까.” “미안해, 앞으로 싫다는데 뽀뽀 안 할게.” “사실 그렇게 싫지는 않아.” “그럼 앞으로도 자고 있을 때 뽀뽀해도 돼?” “······.” 아르페는 지그시 메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몇 번이나 했는데?” “으으으음······.” 고분고분 모드로 돌입한 메테르는 한참을 열심히 생각하다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아르페는 여태까지 먹은 빵의 개수를 기억해······?” “너 저리 가. 앞으로는 무조건 다른 방에서 자자.” “아으으으, 미안해! 미안해에! 그것만은 봐줘!” 헤어 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는 이젠 패시브가 되어버리고 만 한숨을 포옥 내쉬며 적당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멋대로 내 기억을 보면 안 돼.” “응, 안 볼게. 아르페가 보여주는 것만 볼게.” “······그래, 그거면 됐어.” 가끔 이 녀석의 말에서 평소의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느낄 때가 있다.지금도 그랬는데, 아르페는 메테르의 순수한 눈동자를 보며 그 께름칙한 기분을 털어 넘기고 말았다. “별 거, 못 봤지?” “응. 아르페의 대처가 빨라서 못 봤어. 그리구 나두 빨리 스킬 취소했으니까. 잘했지?” “그래, 잘했다.” “후히.” 메테르는 아르페의 화가 완전히 풀렸다는 확신이 서자 안도하며 그의 손을 꼭 붙잡고는 물었다. “그러면 아르페, 아르페 스펠도 강화됐어?” “그래. 빌어먹을 선배 같으니, 축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던 주제에······.” 그들은 일 년도 더 전에 에인션트 크라켄이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신전에서, 선대용사가 준비한 유니크 스킬 북과 스펠 북을 흡수한 적이 있다. 선배는 분명 그것이 그들의 유니크 스킬과 스펠을 강화해줄 것이라고 했지만 그 당시는 물론이고 여태까지도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었는데, 그것이 오늘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꺼번에 강대한 외부 마나가 유입되어서 이루어진 것인지, 처음부터 축복으로 완성되는 구조였던 것인지는 만물열람의 주인인 아르페라 할지라도 완벽히 알 수 없었다. 단지 한 가지 추측 가능한 것이 있다면, 선배는 그들이 과거 당연히 선배의 무덤을 찾았으리라 여긴 것처럼 당연히 팔라티나에서 축복을 받았으리라 여겼을 것이라는 사실 정도다. “빌어먹을 선배 놈. 여기서 놈의 모든 흔적을 찾아서 비웃어주고 말겠어.” “음습한 의도로 움직이는 아르페도 멋져.” 아르페는 시험 삼아 마나 스트링을 한 줄기만 뽑아 보았다.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고 뽑아낸 마나 스트링은 이전과 비슷한 굵기였으나, 그 안에 담긴 힘은 보다 유동적이었다. 그의 마나의 연장선에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나 스트링이 곧 마법이 되고, 마법의 기운을 다시 풀어 마나 스트링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야?’ 단순히 실의 형태에 구애될 필요도 없다. 지금 마나 스트링은 자유로운 마나의 극한을 추구하고 있었다. 마력에 물리력을 부여해 면의 형상으로 짜내는 것도, 혹은 아르페가 원하는 다른 어떠한 형태로 가공할 수도 있었으며, 그렇게 가공한 형태의 마나를 마법으로 바꾸어낼 수조차 있었다. ‘이건 더 이상 마나 스트링이 아냐······ 그렇지.’ 아르페는 언제까지고 그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메테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맑은 녹안에 아르페의 모습이 가득 담겨 비추어졌다. [아르페] [인간] [용사] [레벨 ? 283] [힘- 619 민첩 ? 581 체력 ? 708 마력 ? 2,674] [히어로 오라 Lv1] [구현 Lv1] “초기화냐!” “응?” “아니, 그런 게 있어.” 단순히 스펠이 강화된 수준이 아니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름이 뒤바뀌어 1레벨에서부터 시작이라니! 물론 여태까지의 기록이 그 스펠에 모두 남아있어 1레벨임에도 1레벨이 아닌 스펠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허탈하지 않다면거짓말이었다. ‘더구나 구현? 뭘 구현해, 내 상상을? 이상을? 무엇이든 내가 원한 것을 구현한다면, 이건 그냥 마법의 종착점이잖아!’ 물론 원래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 하나 가지고 못 하는 일이 없기는 했지만, 스펠을 활용하는 것과 그냥 그 스펠 자체로 완전체인 것은 용사와 마왕만큼 다르지 않은가! 아니, 이렇게 생각하니 그냥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약이 많기는 하다만······.’ 제약이 없으면 그 시점에서 용사 이야기는 막을 내릴 테니 그야 제약이 있는 것이당연했다. 아직 실이 아닌 다른 형태로 마법을 발현하려면 정도 이상의 마나를 소모해야 해서, 아르페의 방대한 마나로도 구현 마법에 세밀한 조건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좋아, 이건 차차 연구해보자. 그러고 보면 히어로 오라라는 스킬도 새로 생겼네.’ 분명 견갑골의 낙인과 일치하는 스킬이리라. 아직은 이 스킬을 쓴다고 해도 황금빛의 편익을 뿜어내는 정도였지만, 아마 스킬 레벨이 오르면 다른 기능이 붙을 것이다. 물론 전생의 용사는 이 스킬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스테이터스도 상승했다. 아르페는 용사인 탓에 가뜩이나 다른 마도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힘과 민첩 수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축복에 담긴 압도적인 마나 탓인지 성물에 담긴 기록 탓인지 마력 수치가 상승하면서 덩달아 힘과 민첩, 체력까지 상승한 덕에 이젠 마력이 없다 해도 어디 가서 훌륭한 200레벨 이상의 고위 전사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250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쨌든 이득이네. 메테르 너도 그렇고······.” “응, 이 스킬은······ 으으음, 레코드 마스터, 정도 되려나.” 아르페가 전체적으로 강화되었듯 메테르 역시 마찬가지. 그와 같은 히어로 오라를 얻었고, 모든 스테이터스가 증폭되었으며, 레코드 디바이드 역시 이전과 비할 바 없이 성장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타인의 기록을 동의 없이 빼앗거나, 자신의 것을 보다 제한 없이타인에게 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안 된다고 말했다?” “어차피 아르페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시도할 수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메테르는 다시 아르페를 화나게 만들기는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는 문득 여전히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사제와 성기사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아르페의 로브 소매를 끌어당겼다. “아르페, 저기 사람들이 우릴 이상한 눈으로 봐.” “그야 용사들이 기껏 축복받아놓고 연애질이나 하고 있으면 저런 눈으로 안 보겠냐.” “여, 연애······.” 메테르의 눈에 별빛이 담겼다. 아르페는 자신이 또 섣불리 그녀의 스위치를 켜버렸음을 직감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 그럴 거라는 뜻이었어.” “그렇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보이는구나.” “아······ 응, 그래. 그렇겠지.” “으히, 그렇구나.” 조금 전까지 울던 녀석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아르페는 어쨌든 그녀의 기분이 나아져 다행이라 생각하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을 수습한 성녀가 돌아온 것도 그쯤이었다. “이제······ 두 분, 내부구역으로 향하는 퍼레이드에 함께해주세요.” “그래, 잘 부탁해.” 그렇게 해서 내부구역으로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아르페와 메테르, 성녀 바디네는 모두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리하제타의 주민들이 보기에는 모두 똑같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미남미녀일 뿐이었다. “어쩜, 성녀님도 함께하고 계시잖아.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네.” “두 분 용사님이 축복을 받았다는 얘기 들었어? 글쎄 편익이······.” “신께선 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걸까, 이러면 안 되지만 마왕군과의 전쟁이 아주 조금 궁금해질 지경이야.” “예끼, 이 사람아.” 아무래도 이 나라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의 조연이 되고 싶지 않다면 절대로 읽지말아야 할 대사집 하권’을 읽은 모양이었다. 주위 시민들의 인식과 미래에 대한 언급을 조금씩 섞어주는 게 아주 완벽한 엑스트라의 자세였다! “용사님, 곧 행진이 끝납니다. 그곳에서부터는 다른 사제와 성기사들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라, 저와 두 분 용사님께서만 함께하시게 됩니다.” “그래, 알겠어.” 참으로 길고 길었다. 아르페는 성녀의 속삭임에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론 실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전생에서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정말 귀찮아지는데. 과연 시페넌이 잘해줄 수 있을까? 물론 녀석이 실패해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되도록 깔끔하게, 마왕군을 보다 완벽히 엿 먹이는 방향으로 가려면······.’ 그는 성녀를 힐끗했다. 아직까지도 표정 한 구석에 낭패감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신의 축복을 가득 받은 성녀다운 성스러운 미소로 그에게 응답했다. 메테르는 자숙 기간이었기에 평소처럼 아르페의 허벅지를 찌르지 못했다. 그때 성녀가 기습적으로 말했다. “두 분 용사님의 사이가 무척 돈독해보여······ 부럽네요.” “너도 좋은 남자 찾아.” 아르페의 심드렁한 대꾸에, 성녀는 쓴웃음과 함께 대꾸했다. “저는 신에게 바쳐진 몸, 남자를 만날 수 없는 몸이랍니다. 그렇지요, 만약 제게 허락된 짝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오직 당신 용······.” “리하제타의 모든 시민이여,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한 여정에 나설 두 분 용사와 성녀님을 축복해주시오!” 성녀의 말이 끝나기 전 성기사 한 명이 우렁차게 외쳤다. 시민들이 일제히 일행을향해 축언을 던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렬을 따라온 시민도 있어 그 숫자는 족히 수십만을 헤아렸고, 당연히 성녀의 말은 아르페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럴 터였다. ‘뭐? 그런 거였어?’ 하지만 아르페는 영웅담에 나오는 나사 하나 빠진 주인공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시민들이 소리를 지르건 메테르가 그를 째려보건, 성녀의 입 모양만으로 그녀가 하고자 했던 말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성녀는 용사 외엔 남자를 못 만난다고? 그런 거짓부렁을 믿고 있어서 이년이!’ 아르페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째서 성녀가 전생에서 미친년처럼 날뛰었는지, 조금 전의 축복에서 일부러 메테르를 제외시키려 한 것인지 모두 깨닫고 말았다. 전생의 성녀는 단지 잘못된 말을 믿고 필사적으로 구혼활동을 하다가 폭주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4 > 끝 ⓒ 토이카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5 > ‘하, 이걸 살려 죽여······.’ 아르페는 어디까지나 전생은 전생, 현생은 현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생은 어디까지나 아르페가 마왕군 사천왕이던 시절의 역사이고, 그때 그가 보고 판단했던 모든 것이 현생에서도 그대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전생에서 단검 한 자루로 그의 심장을 깔끔하게 관통했던 시페넌과 현생에서는 제법 괜찮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그 때문. 개개인에 대한 전생의 감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면 시페넌은 지금 레벨 200을 넘긴 도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디아스 어디 야산에 묻혀 깨어날 일이 없는 숙면을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 “용사님, 저를 왜 그렇게 보시나요? 아아, 혹시······.” 그러나 지금 아르페와 마주하며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에 진심으로 기뻐하고있는 성녀에 대해서도 똑같은 대접을 해줘도 되는 것일까? 이건 원하는 남자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스스로 마족이 되기까지 했던 미친년인테? 모든 사태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나니 오히려 이 여자가 더 무서웠다. 뭔가 중대한이유라도 숨어 있었으면 이해라도 했을 텐데 이 여자는 순수 100% 치정 문제로 그 사단을 일으켰던 것이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너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생겼거든.” “저에게도 아직 희망이! 앗,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명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닌데 벌써부터 시집 갈 생각을 하고 있는 성녀 바디네를보며 아르페는 실로 착잡해지고 말았다. 과연 자신의 말을 순순히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이거, 갱생 가능할까······.’ 인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 자체가 끝장나 있는 경우라면, 설령 전생과같은 참사를 막고 파티 멤버로 들인다고 해도 불안요소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아르페가 불안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이 여자의 미소 뒤에 감춰진 욕망과 폭주의가능성을 보고 있었기에! 다만 만약 정말 그녀의 타락 이유가 ‘남자’일 뿐이라면, 그 문제만 깔끔하게 해결해버리면 불화의 가능성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페넌을 깔끔하게 이 여자에게 넘기고, 성녀가 용사와 사귀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은 구라라는 점을 그녀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그래, 시페넌을 깔끔하게 넘길 수 있다면 말이지······.’ 바로 그것이 마지막 남은 문제였다. 전생의 시페넌은 메테르를 사랑했다. 현생의 시페넌은······ 잘은 모르지만, 아마 메테르에게 적잖이 호감을 품고 있을 것이다. 메테르에게 한눈에 반했던 소년 시페넌의 모습을 그는 아직 잊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둘을 떼어놓았을 뿐더러, 시페넌은 물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내게 많이 의존하고 있는 만큼 알아서 한 발 물러나줄 거야. 그렇게 되면 남는 문제는 과연 녀석이 성녀를 받아들여주느냐, 인데······.’ 에라, 여차하면 어차피 국왕이 될 테니 부인 하나 더 두는 셈 치라고 하면 되지 뭐! 뭣보다 바디네는 전생의 참사를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저 청순한 매력을 마구 자아내는 미소녀일 뿐이었으니, 어쩌면 시페넌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른다! “히잉, 아르페에에.” “아, 정말 손 많이 타네 이 녀석.” “······으득.” 그 후, 일행은 순조로이 퍼레이드를 마치고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로 진입했다. 아르페는 그 순간 자신이 장담한 대로 샛길을 만들어두는 데에 성공했다. 시페넌이라면 능히 제로 클래스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네가 훔쳐야 할 가장 중요한 게 따로 있어, 시페넌! 부탁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민폐스러운 일을 시페넌에게 떠넘겨버리는 아르페였다.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로 도착한 것이 워낙 늦은 시간이었기에, 일행은 교황과의 만남을 다음날로 미루고 우선 숙소로 안내되었다. 기사도 사제도 없는 적막한 시설의 복도를 성녀와 아르페, 메테르만이 걷고 있었다. “사실 시중을 드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위사제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람이 없는 때를 골라 일을 하지요. 모두 이 영역에서 활동하는 고위사제의자녀들을 골라 특별히 엄선해 교육한 아이들이랍니다.” “그런 수고를 자처하다니 대단한 신앙심이야.” “모두가 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용사를 위한 일이니까요. 아마 용사님들이 이곳에 묵으시는 것을 알게 되면 많이 좋아할 거예요.” 복도를 걷던 도중 작은 나무 문 앞에 도달했다. 정성스레 조각해 만든 타원형 문패에는 붉은 글씨로 ‘Yes’라고 쓰여 있었다. 어떤 Yes인지는 묻고 싶지 않았다. “이곳이 제 방이랍니다.” “응, 알고 있었어.” “미리 알아보셨다니, 어쩜······.” 별것도 아닌 일에 행복해하는 성녀의 모습은 어딘가 메테르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음, 역시 메테르에게 실례되는 감상이니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곳이 아르페 님의 방. 조금 더 가면 메테르 님의 방이 있어요.” 바디네의 방과 무척 가까운 곳에 아르페의 방이 있고 거기서부터 결코 조금이 아닌 거리를 걸어 도착하는 곳이 메테르의 방. 어쩜 이렇게 속보이는 구조란 말인가! 아르페는 슬슬 방 선정을 누가 했을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페에게 죄지은 것이 있어 여태까지 꾹 눌러 참고 있던 메테르는 슬슬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나, 아르페랑 같이 자.” 도저히 참지 못한 메테르의 입이 결국 열리고 말았다. 바디네가 까르륵 웃으며 대꾸했다. “어린 시절에는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 된답니다. 자, 메테르 님의 방은······.” “나.” 메테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아르페의 팔을 끌어당겨 꼬옥 붙잡았다. “아르페랑, 같이, 자.” “······.” 바디네와 메테르가 치열한 눈빛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중간에 아르페가 메테르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아얏!” “이 녀석 인식은 그냥 어린아이 수준이야, 바디네. 정말로 같이 자는 것뿐이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마.” “이, 이상한 생각이라뇨! 저는 이래 뵈도 성녀라 불리는 몸, 단지 미성년 남녀가 불경한 일을 저지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용사님은······.” “그러니까 안심하라는 말이야. 나는 메테르 방으로 갈게. 내일 아침에 보자.” “으아아으.” 바디네가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시페넌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저 여자에게 잡아먹히겠다고 생각한 아르페는 메테르를 끌고 그녀의 방까지 경보로 달려가 문을 열어, 들어가, 닫고, 잠갔다. 겨우 안도가 되었다. “허억, 허억······ 저렇게 어린 나이에 작정하고 덤벼드는 여자는 처음이야.” “와아, 아르페, 방 좀 봐.” “응? 아······ 그러네. 예쁘네.” 설마 메테르의 방에도 뭔가 수작을 부려놓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거기까지는 바디네의 영역이 아닌 듯 방은 무척 깔끔하고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푹신하고 넓은 침대도 과거 메테르가 겪어보지 못한 고급품이었다. “이불도 엄청 포근해! 우리 빨리 씻고 자자!” “그래, 그러자. 먼저 씻어.” “같이 씻갸악.” 메테르는 아르페를 어설프게 유혹하다 말고 알밤 한 방에 방에 딸린 욕실로 쫓겨났다. “후우, 그럼 어디 볼까.” 간신히 차분한 환경을 찾은 그는 우선 화장대에 딸린 의자에 걸터앉아 이 방에 작용하는 감시 마법을 비롯한 간섭 계열의 마법이 있나 샅샅이 확인해본 후, 마지막으로 방음 결계와 간섭제한 결계를 펼친 후 비로소 통신기를 꺼내어 들었다. “시페넌.” [야, 진짜 잠입 성공했다. 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것처럼 결계의 극히 일부가 열렸다고. 물론 르세티와 데이스는 따로 행동하고 있다만.] 역시, 이 녀석 재능은 제법이라니까. 아르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지시를내렸다. “우리가 머무르는 숙소 위치를 알려줄게. 내 방을 비워뒀으니 일단 그곳을 써.” [들킬 텐데?] “네 실력으로 하녀들한테 들키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다 치면 널 발견할 수 있는녀석은 한 명뿐인데······ 사실, 그 녀석한테는 들켜줬으면 좋겠어.” [뭐 임마?] 아르페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라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여자 한 명 꼬셔볼 생각 없냐.” [······설마 너, 메테르를 놔줄 마음이 들었냐?] “메테르는 못 줘, 이 바보야.” 부지불식간에 부끄러운 소리를 내뱉고 만 아르페는 혹시나 이 목소리가 욕실의 메테르에게 들렸을까 엄청나게 긴장했으나, 다행히도 반응은 없었다. 이게 다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인 시페넌 때문이다! 이놈은 어찌 된 게 도적으로 전직하더니 정말 그 나이 대의 껄렁껄렁한 뒷골목 도둑놈 같은 말투를 익혀선! [아 그럼 뭔데!] “여기 바디네라고 엄청나게 예쁜 성녀가 있거든.” [엄청 예쁜 성녀인데 왜 네가 안 꼬시고?] “얘가 메테르랑 사이가 안 좋아. 내가 꼬셨다간 전쟁이 벌어지고 말 거야. 뭣보다이 여자는 날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것은 사실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르페에게 어필을 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성녀는 용사와 짝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를 원하는 것뿐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아르페가 보기에는 그랬다. 더구나 전생에서 그녀는 시페넌을 사랑했었다. 이 차이는 확연하다. 둘 중 바디네를 확실히 매료시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 시페넌이다! [그래도 영 미덥지 않은데······.] “너뿐이야, 시페넌. 이 여자가 신전세력의 비리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걸 뿌리 뽑느냐, 아니면 나라를 몽땅 썩히느냐가 이 여자한테 달렸다고.” [에이이이, 왜 신성국가라는 게 그 모양이야!] 그것이야말로 아르페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시페넌은 고뇌하다가는, 아르페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살펴보기는 할게. 침입자 입장에 여자를 꼬시라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까마득하긴 하다만······.] “매뉴얼을 작성해줄게. 안심하고 꼬셔!” [진짜 다시 만나면 네놈 면상을 세게 때려주고 싶다.] “일단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아, 당연하지만 다른 것도 확실히 털어야 한다.” [정말 확실히 부려먹네. 끊는다. 이제 움직여야 해.] “그래. 내 방에 잠입하고 나서 연락해. 내가 매뉴얼 들고 갈게.” [집어치워 임마!] 아르페는 시페넌과의 통신을 마치고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들었다.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은 바디네의 성격과 시페넌의 능력을모두 아는 아르페의 힘으로 성공률 100%의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이다! “아르페, 나 다 씻었어.” “아······ 음.” 아르페가 매뉴얼 작성에 골몰하던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메테르가 나왔다. “여기 에이디아보다도 시설이 좋은 것 같아.” “그야 여긴 오폐물을 신성마법으로 아예 다 정화해버리니까······ 그보다 옷 갈아입어라.” “응!” 메테르는 목욕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으나, 저 나이에 저게 가능한가 싶을 만큼 탐스러운 신체 라인을 감추는 것은 무리였다. 더욱이 발갛게 상기된 뺨이 그녀의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아찔한 요염함마저 느껴져 아르페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둘이서만 같이 자는 건 오랜만이다. 그지?” “그러게. 나도 씻고 올게.” “응! 아, 그런데 있잖아 아르페.” 메테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왔다. “아르페는 내 인식이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했잖아?” “······그, 그런데?” “그냥 같이 잘 뿐이라고도 했잖아? 그럼 그냥 같이 자는 것 말고 어떻게 같이 잘 수 있는 거야?” “······.” 아르페 인생 최대의 위기와 조우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바디네가 말했던 남녀 간의 불경한 짓이라는 게 뭐야? 응?” “그, 그건······ 어른이 되면 알게 되는 거야.” “나 아직 어른 아니야?” 아르페에게 물으며 스스로의 몸을 확인하려 하는 메테르. 아르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향하며 메테르에게 당부했다. “침착해, 메테르. 지금은 그 수건을 떼어내지 말고, 내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잠옷으로 갈아입는 거야. 알겠지?” “아르페에, 알려줘. 응? 응?” “아직 일러! 어른 되면 알려줄게!” “어른은 언제 되는데! 응?” 아르페는 메테르가 쫓아 들어오기 전 필사적으로 욕실 문을 닫았다.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일 났다.’ 내부의 적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마왕군보다도 바디네보다도 지금은 메테르가 제일 무서웠다! “아르페, 나오면 알려줄 거지? 응?” “먼저 자!” “너무해!” 아르페는 고뇌했다. 그냥 같이 자는 것이 아닌 같이 자는 것을, 메테르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 지에 대하여. 그 날 밤, 다행히도 아르페는 자신을 추궁하려 드는 메테르를 먼저 재우는 데에 성공했다. 시페넌 또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숙소로 잠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6 > ‘설마 합류 미션이 이렇게 기가 막히는 놈이라니.’ 르세티와 데이스에게 개인행동을 하라고 일러둔 후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로 진입한 시페넌은 시종 투덜거리며 그림자에서 그림자 사이로 몸을 날렸다. 레벨 220에 근접하며 도적으로서 수련을 쌓은 그는 일정 영역 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이의 기척과 마나를 파악하고, 그 모두의 감지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동을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아르페의 말마따나 그는 도적 계열 능력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재능을 믿어주고 지원해준 게 모두 이 날 이때를 위한 건 아니었겠지······.’ 생각하고 보니 굉장히 의심스러운데, 시페넌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고뇌하는 그의 정신과 별개로 빠르게 움직이는 육신은 에어리어 내에 가득한 마나의 그물을 어렵지 않게 통과해 숙소로 다가가고 있었다. ‘일단 놈이 일러준 숙소, 놈의 방으로 가자.’ 아르페에게 넘겨받은 지도에 나왔던 던전을 차례로 순회하며 도적 스킬을 수련하길 2년, 시페넌은 이제 미지의 영역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기본적인 방침을 정해두고 있었다. 그는 결코 무적의 갑옷을 입은 전사도, 강대한 마력을 지닌 마도사도 아니다. 적을 정면에서 쳐부수거나 건물을 통째로 무너트려 목표물을 취하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인 것이다. 던전이 되었든 유적이 되었든 우선 그 안으로 잠입해, 자신이 쉬이 움직일 수 있도록 안전을 확보한다. 그 다음 거미처럼 천천히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내부 정보를 모두 파악하고, 마지막으로 목표물을 포착, 깔끔하게 확보하여 빠져나가는 것. 이것이 시페넌의, 도적의 방식이었다. ‘확실히 빌어먹을, 마력으로 촘촘하게 짜여 있어 분석에 시간이 걸리긴 할 것 같다만. 아르페 이 자식은 대체 여기 구조를 어떻게 꼬아놓을 수 있었던 거지?’ 가벼운 발놀림으로 몇 개인가의 은밀한 함정을 뛰어넘어 무사히 숙소 내부로.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이들의 기척을 읽어내고, 그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신속하고도 은밀하게 움직여 이내 아르페가 말해주었던 방에 도달했다. 아니, 실은 그 전에 마음에 걸리는 방이 하나 있기는 했다. ‘저 Yes라는 팻말이 달린 방은 대체 뭔지 모르겠다만, 저 안에서 엄청난 마나가 느껴지는데.’ 설마 저 안에 있는 사람을 꼬셔야 하는 것일까. 팔라티나의 번영과 용사 파티의 발전을 위해? 만약 그렇다면 납득이 간다. 저 정도의 인재라면 무슨 수로든 파티로 영입하고 싶었겠지. 유일한 문제는 그녀를 자신이 꼬셔야 한다는 것이다. ‘외모는 완벽하다 했으니 분명 성격에 하자가 있을 거야. 아르페 그 개자식, 지는 메테르 같은 천사를 옆에 끼고 있는 주제에 나한테는······ 아아아, 몰라. 일단 나도 좀 쉬어야겠다.’ 시페넌은 한숨을 쉬며 아르페의 방문을 잡고, 도적의 특수 스킬 ‘조용한 침입’을 발동하여 문을 열면서 자물쇠 따기부터 알람, 감시 마법 해제는 물론 문 여는 소리까지 죽이는 작업을 동시에 마쳤다. 그 안에 여자아이 한 명이 있었다. “어······.” “아······.”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둘 다 말문을 잃었다. 다만 헤드드레스나 간소한 앞치마, 움직이기 편한 펑퍼짐한 원피스 등 어딜 어떻게 보아도 시중의 행색을 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시페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네 실력으로 하녀에게 들키지는 않을 거 아냐.’ 아아, 그래. 분명 아르페가 했던 말이었지. 시페넌 역시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었다. 그렇기에 실로 면목이 없었다. 설마 정말로 하녀에게 들켜버릴 줄은 자신도 몰랐으니까! “그, 그으······ 누구, 누구세요?” 몸에 달라붙는 검은 야행복에 검은 두건까지, 완벽하게 수상한 놈인 시페넌을 보며 하녀가 울상이 되어 물었다. 큰소리를 지르면 그에게 죽임이라도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소리를 죽여주는 것이 그나마 고마웠다. “일단······ 난 나쁜 사람은 아냐.” “거짓말!” 자연스럽게 문을 닫고 잠그며 말하는 시페넌에게 큰소리로 반박하고 마는 하녀. 시페넌은 쓰게 웃었다. “내 말을 들으면 죽이지는 않아. 자, 우리 둘 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흐흑, 당신은 어째서 제로 클래스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가요. 전 용사님을 만나게 될 줄 알고 기대했는데 어째서 이런 도적이랑······.” 시페넌은 바로 그 용사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해줄까 생각했지만 참았다. 일단 창문까지 확실히 닫고, 침대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소녀를 살폈다. “흐음······.” “히, 히익.” 초라한 행색이기는 하나 결코 박색은 아니다. 오히려 깨끗하고 밝은 피부며 또렷하게 큰 눈으로 보아 제대로 꾸며놓으면 상당히 예쁠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존재감이 정말, 희미하다는 점이다. “너, 대체 어떻게 내 감지에 걸려들지 않았던 거지? 난 분명 방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버님께서도 넌 이곳 제로 클래스의 하녀로 딱이라고······.” “단순히 희미한 게 아냐. 그건 능력이야.” “그 능력 덕분에 이런 도적이랑 만나버렸어요. 흐이이이.” 소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겁이 났는지 끝내 울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시페넌이여차하면 자신을 죽이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팔라티나의 하녀답게 순수한 성격이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울지 마. 안 죽인다니까?” “흐끄으으, 정말요?” “그래, 내 말만 잘 들으면.” 당장 계획이 꼬여버리고 만 시페넌의 머릿속도 복잡했지만, 그는 상황이 복잡해졌다고 사람을 죽이는 성격은 아니다. 어차피 당분간 이 방에 머무르며 마나를 회복하고 상태를 살필 생각이었던 시페넌은 차라리 이 소녀를 꼬드겨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자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 일단 그 청소용구는 놔 봐.” “하지만 용사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청소를 해놓지 않으면······.” “놔.” “넵!” 하녀는 잽싸게 청소용구를 놓고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왔다. 시페넌은 영역 내로 다가오는 이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두건을 벗고 맨 얼굴을 드러냈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이런 압박감 주는 복장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아······.” “왜? 너무 어려서 놀랐냐?” “그, 네.” 시페넌의 붉은 머리칼과 타오르는 붉은 눈은 그 자체만으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성장속도로는 아르페나 메테르에게 못 미치지만 이제 그도 어엿한 열다섯 살. 소년은 이제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정체모를 도적놈에서 헌앙한 미남자로 탈피하니 하녀의 적대심도 많이 줄어들 수밖에. 하녀가 조금 편한 모습을 보이자 안도한 시페넌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이름은?” “아리아 쿠아르 세리리타······ 입니다.” “쿠아르? 세리리타? 뭐야, 너 고위사제의 자제야?” “제로 클래스의 하녀는 모두 고위사제의 자제로 구성되는데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굉장히 놀라운 정보를 얻었다! 시페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아, 아리아. 내 이름은 시페넌이고, 원하는 것이 있어 이곳에 들어왔어. 네가 협조해주면 내 일도 쉬워지고, 네 목숨도 건사하고, 팔라티나에도 좋을 거야.” “거짓말. 당신은 도적이잖아요? 분명 팔라티나의 소중한 성물으으읍.”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한 말을 이어가는 시페넌에게 무심코 태클을 넣던 하녀, 아리아가 문득 자신의 입장을 떠올리곤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시페넌이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자,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전 사제의 딸이에요. 당신을 모른 척 하는 건 가능하지만, 당신이 팔라티나의 사람을 헤치거나 재물을 취하려 한다면 협력해드릴 수 없어요.” “네가 죽는다고 해도?” “······네.” 마냥 겁을 먹고 움츠러들 땐 보이지 않던 제법 결연한 표정. 시페넌은 그것을 보며······. “사실 난 용사의 부탁으로 이곳에 들어왔어.” “그게 정말인가요!?” 역시 이용해먹기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봐. 용사가 제로 클래스로 입성한 그 날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 아무리 봐도 너무 작위적이지 않냐? 더욱이 난 곧장 이곳, 용사 아르페의 방으로 왔지. 그에게 사전에 위치를 듣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그, 그러고 보니······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용사님께서 굳이 도적을 따로 고용할 이유가······.” “그건 조금 있다 증명할 수도 있어. 그러니 지금은 잘 들어. 여기서 부터가 중요해, 아리아.” 언제 봤다고 그녀를 스스럼없이 이름으로 부르며 말을 잇는 시페넌. “이번대의 용사가 왕국의 소환을 거부했었던 것도, 신전으로 오기까지 제법 길을빙 돌아왔다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그, 그랬었나요? 이곳 제로 클래스에는 외부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서······ 하, 하지만 확실히 용사님이 탄생하시고 이곳에 오기까지 이상하게 시간이 걸리긴 했어요! 제로 클래스에서 예정되었던 행사도 몇 번 취소되기도 했고······.” 시페넌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하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온실의 아가씨. 90%의 진실과 10%의 허구를 섞어 얼마든지 속여 넘길 수 있는 먹잇감에 불과한 것이다. 본인도 온실 속 왕자님이었던 주제에 속세의 때가 탄 지 얼마나 됐다고 건방진 생각을 하는 그였다. “그건 용사가 신전의 부패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듣고 놀라지 마. 지금 신전은마왕군과 결탁하고 있다.” “네!? 읍읍.” 무심코 방이 떠나가라 큰소리를 내려는 아리아의 입을 시페넌이 다급히 손을 들어 덮었다. 외간 남자와의 접촉에 그녀의 얼굴이 터져나갈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조용히 들을 거지?” “으으으븝.” “좋아.” 시페넌은 그녀를 놔주고는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정신을 아주 그냥 작신 몰아쳤다! “그렇기에 용사는 모든 준비가 되기 전까지 이곳에 오지 않았던 거야. 그리고 나를 동료로 포섭하여 간신히 여기에 올 결심을 내린 거지. 그래, 어디까지나 나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럴 수가······ 도적인 당신을?” “용사 일행이 직접 제로 클래스로 들어와 사제들의 시선을 끄는 사이, 나는 신전이 부패했다는 증거를 낱낱이 밝혀내 그들의 ‘정의’를 무너트린다. 그리고 용사와 협력해 신전을 정화시키는 것이 최종목적이다.” “그럴, 수가······.” 실로 우습게도, 지금 시페넌은 되는 대로 말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그 대다수가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순진한 규중처녀 아리아는 그의 드라마틱한 말에 그만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에서 그 말을 납득하고 말았다. ‘실제로 용사 이야기에서는 꼭 이런 일이 일어나던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팔라티나에는 전부 망상을 좋아하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고위사제 몇몇이, 교황이 수상한 모습을 보이거나 뭘 제로 클래스 내에 감추려고 하지 않았어? 분명 있을 거야.” “하지만,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식이나 성물이라면 숨기시는 것도 당연······.” “그래, 그렇게 핑계를 대기 좋다는 게 문제지. 하지만 증거는 곧 나올 거야. 난 찾아낼 수 있어.” “하, 하지만······.” “생각해봐, 아리아. 이건 용사의 과업이라고. 신전은 언제까지고 여기에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두 용사는 대륙을 돌며 악을 처단하고 선을 행하고 있어. 둘 중 누가 더 믿음직스러운지, 고민할 것도 없잖아?” “그, 그건······.” 평생을 믿고 따른 신전과 그 신전에서 절대적으로 숭앙하는 용사를 놓고 비교하라는 것은 순진한 소녀에게는 아무래도 자극이 조금 강했던 모양이다. 당황하며 어버버하던 소녀는,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당신이 용사님의 의뢰를 받고 들어왔다는 것까지는 믿을 수 있어요. 굳이 저에게 그런 거짓말까지 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전 신전에 일생 의탁할 것을 맹세한 몸, 그리 쉽게 마음을 바꿀 수는 없어요.” “쳇.” 소녀의 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시페넌은 역시 일이 그렇게 쉽게는 안 풀리나, 생각하며 혀를 찼지만, 직후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가관이었다. “······아직은요. 그러니까 제게 증거물을 보여주세요. 신전이 타락했다는 증거를요!” “응?” “얼마 전, 제가 복도 청소를 하던 중에 교황 성하께서 다급히 제 옆을 지나가셔서비밀 통로를 열고 들어가신 적이 있어요. 실은 저도 그게 조금 수상했는데······ 만약 당신이 그 통로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준다면 모든 일이 분명해질 거예요!” 그녀는 이미 시페넌에게 협력할 기세로 만만이었던 것이다! < Chapter 22. 고인 물웅덩이 - 6 > 끝 ⓒ 토이카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1 > 아리아는 어이가 없어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 시페넌에게 자세한 설명을 개시했다. “저는 원래 존재감이 약해서,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도 다른 분들이 저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셨어요.” “그 시점에서 존재감이 약하다는 것 이외의 다른 발상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리아는 시페넌의 지극히 정상적인 태클을 상큼하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교황 성하나······ 다른 고위사제께서 종종 저를 눈치 채지 못하고 중요한 업무를 보신 적도 많았어요.” “그중 미심쩍은 게 있다 이거지. 그런데 왜 여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데?” “저는 그저 하녀일 뿐 아무런 능력도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성하를 비롯한 사제님들을 믿는 것뿐이었다구요.” 아무런 능력도 없기는 개뿔, 교황을 속일 정도의 은신능력을 가진 주제에 뻔뻔하게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시페넌은 기가 막혔으나 기세 좋게 이어지는 아리아의 말을 막을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의 얘기를 듣고 보니, 역시 가만히 넘길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성하의 표정은 정말 이상했어요. 꼭 무언가에 홀린듯한······ 딱 잘라 말해 변태 할아버지 같았으니까요.” 지나치게 딱 잘라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뭔 짓을 하긴 한 것 같다 이거지.” “네. ······차마 제가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지만 당신이라면 가능하겠죠.” 제로 클래스까지 잠입한 시페넌의 능력이라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의 시선에 시페넌은 아주 조금 우쭐해졌다. 항상 빨리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몰아칠 뿐이었는데, 타인에게 그것을 인정받으니 제법 괜찮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그 비밀통로인가 하는 곳으로 안내해.” “저, 저도 같이 가야 하나요?”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믿을 수 있겠지?” “그건······ 네, 그래요. 그, 용사님은?” “아, 그렇지. 먼저 아르페한테 연락을······.” 시페넌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아리아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빠르게 일어난 일에 그녀가 눈을 꿈벅거리고 있자니, “아?” “······으음.” 직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성녀 바디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분명 목소리가 들렸는데······ 젊은 남성, 용사님의 것인 줄 알았는데.” “아, 저, 성녀님······.” “안 계시는구나. 내가 환청을 들었나 봐.” 물론 아리아는 바디네에게 무시당했다. 발견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긴, 도적으로서 성장한 시페넌조차 방문을 열기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아, 용사님. 예상대로 멋진 분이셨어. 완벽히 내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그 점이 더 좋아······.” 성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앉았다. 아리아가 얼음장이 되어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녀의 행동은 점점 더 가관이 되었다. 침대에 쓰러져 누워선 이불을 더듬기 시작하는 것이다. “후우······ 더 가까이에서 뵙고 싶어라. 내일은 이 방으로 오실까? 그 방해되는 여자만 없었더라면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 “······.” 그 방해되는 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지는 명백했다! 교황의 실체를 밝히려던 직후 성녀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 아리아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울상만 짓고 있었다. “축복은 분명 아르페 님께만 주어질 예정이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된 걸까. ······분명 그 마녀가 이상한 술수를 부렸을 거야. 용사의 자리도 원래 아르페 님만의 것이었는데, 그 여자가 지금과 같은 수단을 써서 그분의 힘을 앗아간 거지. 그래, 그게분명해. 그 외엔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서 살의가 뚝뚝 묻어났다. 이젠 자신의 존재를 들키는 쪽이 더욱 위험한 상황! 아리아가 필살 자연과 동화되기 스킬을 구사하는 동안에 드디어 성녀는 최악의 단어를 입 밖에 냈다. “그 여자만 사라진다면, 아아, 용사님께서 나만 바라봐주신다면.” 성녀의 얼굴에 욕망과 질시가 가득했다. 도저히 성녀라는 여자가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 여자는 악이야. 나와 용사님 사이를 가로막는 악······ 어떻게 그년의 정체를 까발릴 수 있을까? 어떻게, 어떻게······.” 침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고뇌하던 성녀는 끝내 답을 내지 못하고, 골몰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성녀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충분히 썩어빠져 있었다. “아, 아으으. 성녀님마저······.”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알게 된 아리아가 울상을 짓고 있자니 천장에 달라붙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시페넌이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표정도 참혹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르페······ 저런 여자를 꼬시라고 하다니······!” “꼬, 꼬셔요?” “용사의 의뢰 중 하나였어. 그런데······.” 원래는 그 여자를 꼬셔 아군으로 확보하고, 그녀와 함께 교황을 비롯한 신전세력의 비리를 멋들어지게 밝혀낼 셈이었다. 오늘 밤부터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개될 예정······ 이었는데, 그 전에 뜻하지 않게 아리아라는 조력자를 만나 다른 루트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확인한 성녀의 실체는, 조금······. “아니, 조금이 아니지. 저건 완전히 쓰레기잖아.” “성녀님, 언제나 웃으며 저희를 축복해주시는 좋은 분이었는데······ 어째서 저렇게.” “메테르를 서슴없이 악이라 단정하는 모습에 감탄하고 말았어. 인간은 저렇게까지 뒤틀릴 수도 있구나.” “꼬, 꼬실······ 건가요?” 아리아의 조심스러운 질문. 시페넌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다른 남자한테 목을 매는 여자를 꼬시는 취향은 없어. 더구나 저런 괴팍하고 성질 더러운 여자를 꼬시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다행이다······ 앗.” 그 말을 듣고 무심코 이상한 말을 입에 담은 아리아가 다급히 자신의 입을 단속했다. 그러나 시페넌은 속으로 아르페를 욕하느라 바빠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역시 폭탄이었잖아! 외모만 완벽하지 나머지는 전부 엉망인데 저걸 꼬시라고? 더구나 그 자식은 지한테 저렇게 매달리는 여자를 나보고 꼬시라니 대체 나한테 무슨 수치를 안기려는 속셈이지?’ 아르페의 폭탄 돌리기 전략이 실패한 순간! 시페넌은 마구 욕을 내뱉으면서도 통신기를 들어 아르페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아르페가 곧장 응답했다. [주위에 마법 펼쳐진 거 없어?] “아티팩트로 확인해봤다. 없어.” [사람은?] “나 말고 한 명 있는데.” [좋아, 알겠어. 지금 내가 널 죽이러 갈게.] “진정해, 아군이야.” [······일단 그 아군이라는 사람 꼭 붙들어놓고 기다려.] “메테르는?” [간신히 재웠어. 으으으.] 메테르와 같이 잔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워 승천할 지경인데 어째서 아르페는 저렇게나 끔찍한 경험인 양 말한단 말인가. 시페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르페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도 않고 통신을 끊었다. 옆에선 아리아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정말 용사님인가요!?” “믿는다 해놓고 새삼스레.” “세계 5대진미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과 그것을 직접 먹어보는 건 완벽히 다른 경험이거든요!” “그거 다 별로 맛없어. 차라리 버터옥수수가 맛있더라.” “네······? 5대진미를 알고 계신단 말이에요······?” 둘이 어딘가 어긋난 대화를 하며 그로부터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방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칼, 보랏빛으로 매혹적인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 들어왔다. 바로 아르페였다. “시페넌, 오랜만이다.” “켁, 아르페. 너 나보다 더 컸잖아? 비실비실해졌을 줄 알았는데······.” 2년 만에 마주하는 아르페를 보며 시페넌은 이를 갈며 탄식했다. 레벨로는 뒤쳐질지 몰라도 키나 체격으로는 자신이 압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아르페는 완전히 마도사로 노선을 잡은 주제에 탄탄한 체격은 물론이고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으니까! “당연히 크지, 용사니까. 그러는 넌 어째 몸이 좀 얇다?” “당연히 얇지, 도적이니까! 젠장!” 게다가 어릴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열다섯 살로 성장하며 놈은 가뜩이나 잘생겼던 외모가 두 단계 이상 업그레이드 되어 요염하게마저 느껴지는 미모를 지니게 되었다! 보는 시페넌이 절로 위축감이 들 만큼! “와아아, 정말 용사님이다! 멋져라······.” “응?” 반면, 시페넌과 재회인사 삼아 가벼운 딜을 주고받은 아르페는 방문을 닫고 들어오다 말고 자신을 보며 환호성을 터트리는 아리아를 발견했다. 그리곤 킥,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신전에 이런 녀석도 있었네.” “보자마자 뭔가 알아냈냐?” “응, 뭐.” 아르페의 눈에 비추어지는, 한없이 크고 맑은 눈망울을 지닌 어린 하녀. 그녀는 고위사제의 자제 신분으로 하녀로 일한다는 점이 조금 특이했으나 그 외에는 인간이라는 종족도, 3이라는 레벨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하녀였다. 단지 이상한 점이 두 가지 있다면. [아리아 쿠아르 세리리타] [인간 여성 14세] [레벨 ? 3] [고유능력 ? 동화] 첫 번째는 그녀에게 클래스가 없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레벨 3에 열네 살밖에 안된 그녀가 고유능력을 각성했다는 점이었다. “안녕, 아리아. 넌 왜 클래스가 없니?” 아르페의 질문에 아리아가 어버버하면서도 착실히 대꾸했다. “제, 제로 클래스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모두 클래스를 부여받지 못해요. 5년의 봉사기간을 마치고 나갈 때가 되어서, 업적을 인정받고 처음 세례를 받으며 엘리트 사제 코스를 시작한다······ 고 아버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내 생각보다도 속물적인 얘기라서 깜짝 놀랐어!” 아르페는 깜짝 놀라는 시페넌을 개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 가능성을 모르고 있었구나. 네겐 동화라는 고유능력이 있어. 지금 당장은 주위 일부 환경과 동화되어 사람들에게 널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 정도인 모양이지만, 앞으로 성장에 따라 얼마든지 더 대단해질 수 있지.” “제게, 고유능력이······!?” “그래. 네 고유능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고유능력의 개념을 잘 잡을수록, 자신의 인식 안에 자리 잡은 한계를 걷어낼수록 고유능력은 강대해지거든. 명심하도록 해.” “동화, 동화······.” “어쩐지.” 하긴, 레벨 3에 스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가 성녀니 교황이니 하는 이들을 속일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고유능력뿐이다. 납득한 시페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아르페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했다. “그래, 너에겐 없는 고유능력이 이 아이에겐 있는 거지.” “넌 정말이지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특기를 지닌 용사로구나.” “대단하지?” “닥쳐.” 시페넌과 아르페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아리아는 자신의 고유능력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려보고 있었다. 오늘밤 그녀에게 일어난 일 모두가 놀라운 일뿐이었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일을 꼽자면 단연 자신에게 고유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르페에게도 그것은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고유능력 하나로 마왕군 사천왕이 된 나와, 용사가 되며 고유능력을 각성한 메테르. 그 외에는 별 난리를 다 치르며 제네시스 머메이드 퀸으로 거듭난 세릴 정도가 고유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희귀한 재능을 이곳에서 일하는 하녀가 가지고 있었으니······.’ 정말 기가 막힌 우연, 아니지. 그녀에게 동화 능력이 없었다면 시페넌과 그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터, 어찌 보면 이것은 필연이기도 했다. ‘좋아, 일이 조금 틀어지기는 했지만 이 녀석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남는 장사가될 지도 몰라.’ 아르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확인했다. “그래, 우리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아니야, 아르페. 일단 확실한 증거를 잡은······.” “네, 용사님!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야 임마!” 말이 달라졌잖아! 그러나 용사를 직접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그의 말에 무한한 신뢰를 품게 된 아리아에겐 더 이상 망설임이 남아있지 않았다. “두 분 다 저를 따라오세요. 가장 수상했던 장소로 안내할게요.” “아아아, 납득이 안 돼. 납득이!” “시끄러 임마. 빨리 가자.” 모두가 잠든 한밤중, 용사와 도적과 하녀라는 기묘한 구성의 파티가 제로 클래스의 탐색을 개시했다.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1 > 끝 ⓒ 토이카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2 > 아르페는 아리아를 따라 복도를 걷던 도중 그녀보다 먼저 멈추어 섰다. 그의 눈이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 여기구나. 그렇지?” “맞아요. 어라, 제가 말씀드리기도 전인데······.” “나한테도 고유능력이 있거든.” 그는 씩 웃으며 설명해주곤 우선 주위를 확인했다. 교황을 비롯한 거물들은 모두 잠을 청하고 있고, 성녀는 아직 잠에 들지 못한 것 같았지만 방에서 나오지는 않고 있으니 되었다. 하녀 중에 아리아같은 괴짜가 있지 않은 한, 하녀들도 별 문제는 없다. “좋아, 지금이라면 문제없어.” “아, 하지만 그 복도는 특별한 조작을 하지 않으면 열 수 없어요.” 아르페는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대답해주려다 멈칫하더니, 시페넌을 돌아보며 그에게 확인했다. “시페넌, 열 수 있겠지?”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좋아, 부탁해.” 물론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모든 마법과 함정의 구조를 꿰뚫어보는 만큼 무리 없이 비밀을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기껏 시페넌을 지원해가며 성장시킨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그의 능력을 키워 자신이 나설 일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너 방금 불쾌한 생각했지.” “하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흥, 나와 봐. 네가 날 언제까지고 철부지로 생각해도 곤란하거든.” 과연 전생의 용사 파티에서 활약했던 만큼 시페넌의 실력은 확실했다. 그가 마주한 인식 장치는 결코 문 따기 계열의 스킬이 높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디아스의 여러 던전을 거쳐 습득한 아티팩트와 미케나를 통해 구비한 툴을 적절히 사용해 거짓 신성력을 흘려 넣거나 장치의 인식에 일시적 에러가 오게 하는 방식으로 방비를 느슨하게 만들어 결국 함정을 무효화하고 길을 여는 데에 성공했다! “굉장해요······. 성하께서도 5분 동안 달라붙어 계셨는데.” “그만큼 복잡한 안전장치가 걸려 있었다는 얘기지. 아르페, 이 안에도 함정이 가득하니 주의해라.” “알고 있어.” 모습을 드러낸 비밀 통로 안에서부터 기이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마나에 민감하지 않은 이라면 구분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으나······. [먀아아아아.] “역시, 먹음직스러운 냄새만 나면 깨어나는구나.” “고, 고양이? 어디서 나왔죠? 귀여워라.” [먀먀.] “안 돼, 일단 얌전히 기다려.” [먀아아······.] 어째서 원하는 것을 갖기 전에는 항상 기다림을 거쳐야 하는가. 아니, 기다림이 있기에 비로소 그 결실 또한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철학적인 고찰을 하며 로아가 얌전히 아르페의 품에 안겼다. 시페넌 역시 고양이의 등장에 순간 정신을 앗겼으나, 곧 자신의 뺨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리아,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 내가 밟은 곳만 밟으면서, 최대한 몸을 꼿꼿이 펴고 따라와.” “아, 알겠어요.” “젠장, 이거 왠지 여기 하나로 안 끝날 것 같은데······.” 통로의 구조상 비단 물건을 감춰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하는 역할도 충분히 해낼 것 같다는 생각에 시페넌은 혀를 찼다. 그리고 그 예상은 과히 틀리지 않았다. 통로를 나아가던 도중 갈림길이 나타난 것이다. 시페넌이 잠시 망설이고 있자니 아르페가 대뜸 고개를 저었다. “저긴 꽝이야. 우리가 발견한 통로처럼, 외부에서 이 영역으로 들어오기 위한 거야.” “역시 그러냐. 통로 참 많기도 하다. 이용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증거겠지?” “넌 말이 빨라서 좋다니까······ 맞아. 고위사제의 절반 이상이 여기에 연관되어 있을 거야. 그 숫자도 점점 늘어날 테고······ 전원이 한 패가 되는 순간.” 비밀통로는 더 이상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팔라티나의 중추인 제로 클래스가 통째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전생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 아, 물론 그때는 성녀가 나서서 모든 것을 뒤엎고 자신이 차지하기는 했지만! “아르페, 문득 생각한 건데.” 시페넌이 앞으로 나아가며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탐색하는 와중에 누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뭘 하는지 지켜봐야지.” “우리가 들키면?” “죽여야지?” 아르페의 흔들림 없는 대꾸에 시페넌은 질문을 포기했다. 이놈은 정말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히려 그의 태도에 뭔가를 짐작한 아르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확인했다. “너 설마 아직까지 망설이는 거야? 여기가 팔라티나라고 해서?” “망설이지는······ 않아. 다만 이곳에 들어온다고 해서 모두 나쁜 의도를 품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아직 우리가 찾는 것의 실체를 너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니······.” “너는? 너는 전부 알고 있단 말이야?” 아르페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시페넌은 투덜거리면서도 일단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리아는 조금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도착했다.” 통로가 제아무리 길다 해도 결국 제로 클래스 내부. 통로를 발견하고 15분 정도 걸려 그들은 작은 책장을 둔 막다른 복도에 이르게 되었다. 책장 근처 벽에 책상 하나가 있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뭐야 이게. 책장뿐이잖아.” 아르페의 말로 미루어 무슨 악마 소환 마법진이라도 발견할 줄 알았던 시페넌이 허무해져 중얼거렸다. 아르페는 쯔쯔, 혀를 차며 말했다. “단순한 책장을 이렇게 들어오기 힘든 곳에 감춰두겠냐.” “하지만 정말 단순한 책인데. 봐봐, 마왕숭배라던가 흑마법이라던가,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고.” 도적의 탐색 스킬로 책장을 발견한 순간 탐색을 마친 시페넌이 ‘어디 한 번 확인해보시지!’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시페넌, 너 진짜 도적 맞냐?” “······아, 잠깐만.” 앞으로 나서려는 아르페를 시페넌이 멈춰 세웠다. “기다려, 나도 발견했으니까. 지나치게 교묘해서 정말로 깜빡 속아 넘어갈 뻔 했을 뿐이야.” “그렇다니 다행이다. 그러면 네가 책장을 건드리는 순간 발동하는 마법이 하나 있다는 것만 알려줄게. 조치 취하고 시작하도록.” “······좋아, 해볼까.” 시페넌이 품에서 아티팩트를 꺼내어 들었다. 그것은 붉게 빛을 발하는 로켓이었는데, 뚜껑을 열자 여느 로켓처럼 사진이 담긴 것이 아니라 눈꺼풀에 덮인 하나의 눈동자가 담겨 있었다. “눈을 떠라, 주시자.” 시페넌의 속삭임에 눈동자가 열리고 붉은 빛을 쏘아냈다. 비록 발동하는 시간 동안 만만치 않은 마력을 소모해야 하지만, 그 빛을 쏘이는 대상은 마법을 발동하는 데에 굉장한 저항을 받게 된다. 특히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 다시 말해 물체를 상대로 써먹기 굉장히 적절한 최상급의 아티팩트였다. “이런 아티팩트가 있다니······ 정말 대단한 도둑이기는 한가 봐요.” “주시자의 눈, 좋은 아티팩트지. 사람이 아니라 물체를 대상으로 할 땐 레벨 250의 마법까지도 무리 없이 캔슬하니까.” “네가 알려준 던전에서 얻은 건데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은 부족해. 내놔 봐.” “뭐?” 지금 인간계에, 레벨 250이상의 유지 마법을 사물에 걸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된다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시페넌은 얼떨떨했으나 아르페의 눈이 진지했기에 별수 없이 그에게 아티팩트를 내밀었다. “후우······ 좋아.” 아르페는 시페넌에게서 주시자의 눈을 받아들어 순식간에 세 번의 강화를 거듭해시전했다. 워낙 고위의 아티팩트였기에 강화에 요구되는 마나량도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의 아르페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완성. 이걸로 물체에 걸린 마법의 저지라면 어디서든 거의 완벽하게 될 거야.” “너······ 아니, 됐다. 이렇게 된 거 다른 아티팩트도 전부 강화해줘.” “똑소리나네 아주 그냥.” 아르페가 시페넌의 툴과 방어구, 무기까지도 전부 강화해주는 동안 시페넌은 적절한 위치에 주시자의 눈을 설치해 그것으로 책장을 비추고는, 그와 동시에 자신의 여러 도적 스킬을 발동해 본격적으로 책장의 비밀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암호······ 이것도 신성력을 요구하네. 귀찮게······.” “앗, 은색의 열쇠에서 깨끗한 신성력이······ 아니, 변형됐어!?” “여기선 추적이 필요하겠는데. 좋아······ 내 대신 읽어라, 스피드아이.” “또 아티팩트!” 단순히 아티팩트가 많다고 놀랄 일이 아니다. 어떤 아티팩트를 어떤 상황에서 써야할 지 파악하고, 여럿의 아티팩트를 동시에 다루며 차근차근 책장을 분석하는 시페넌의 모습은 정말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도둑 같았다. “대단해······.” 그것을 바라보는 아리아의 심장은 마구 두근거렸다. 정말로 용사 파티가 활약하는 장면을 지켜보게 되다니! 어쩌면 자신은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아리아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도 다 내 영재교육의 힘이지. ······받아, 시페넌. 강화 전부 끝났으니까.” “마침 그게 필요했어.” 평범한 분필처럼 보이는 아티팩트를 받아든 시페넌이 책장 아무 곳에서나 꺼내든것처럼 보이는 책을 펼쳐 맨 앞장에 글씨를 휘갈겼다. 그것은 얼핏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처럼 보였으나, 직후 책장이 덜컥거리다가는 주시자의 눈이 쏘아내는 빛에 잠잠해지는 것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뭐야, 정말 어마어마한 마법이 걸려 있었나본데. 네 손에 강화를 거친 주시자의 눈에까지 저항하려 하다니······.” “내가 말했잖아?” “그렇다는 건, 네 말은 지금 이 제로 클래스에······ 아, 됐다.” 보이지 않는 글씨가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진 직후, 책이 음산한 빛을 발하며 차르르륵, 스스로 책장을 넘겼다. 책의 사분지 삼 가량이 그렇게 넘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양옆으로 완전히 펼쳐진 책. 그것을 확인한 시페넌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발견했어.” “훌륭해.” 아르페는 순순히 그를 칭찬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나섰으면 그냥 처음부터 아무 책이나 하나 뽑아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 풀어낼 수 있는 함정이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에게 만물열람이 있기 때문. 지금 인세에 이 잠금장치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인류는 마왕군에게 한 방 먹이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렇다. 당연하지만, 지금 이 책장에 걸린 잠금장치는 인간이 아닌 마족의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에 마족이 들어와 있다는 얘기지?” “맞아. 아마 어떤 놈인지 들으면 깜짝 놀랄걸.” 아르페의 짓궂은 표정과 말투에 시페넌은 순간적으로 조금 설렜다가는 제정신을 차렸다. 동성까지 유혹하고 마는 아르페의 미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흥, 알려주지 않을 거라면 다물고 있어.” 그는 애써 진정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책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 내용은 얼핏 평범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응, 평범한 일기······ 아, 아니네. 교환일기네.”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에 머무른다는 건, 당연하지만 그만큼 신전 내부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얘기거든. 차분하게 모여 음침한 얘기를 나눌 수 없으니 이런 곳에다가 서로의 흔적을 남겨 의견을 주고받는 거야.” “오, 오늘 쓰인 것도 있다. ‘두 명의 용사 제로 클래스에 입성. 마왕군의 대계를 위해 용사를 반드시 살려둘 필요가 있다 하나, 굳이 둘을 전부······?’” 까지 읽은 시페넌의 얼굴에 쩌적, 경악의 금이 갔다. “방금 내가 읽은 거, 마왕군의 용사관찰일지가 아니라 신전의 교환일기 맞지······?” “저, 저도 보여주세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리아가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그에게서 책을 빼앗았다. 그녀의 눈이 시페넌이 읽은 다음 부분을 훑었다. “‘둘 다 용사임은 확고한 사실. 퍼레이드 결과 시민으로부터의 지지도는 남자가 압도적. 여자가 죽거나 사라지더라도 큰 지장은 없을 것으로 파악. 여자의 미색이 출중. 제물로 바치거든 마신께서도 기뻐하실 것.’······.” “‘따라서 선대의 마법진의 일부 변형을 요청. 레벨 250의 마수 소환이면 충분하리라 판단.’” 시페넌과 아리아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아르페는 인자한 얼굴로 그들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제 알겠지?” “응······.” “필체가 익숙해요. 아버지의 친구로 확인되는 분의 것도······ 있었어요.” 시페넌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는 고위사제의 자제답게 증거물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발언까지 덧붙여주었다. 팔라티나의 중추, 제로 클래스 내부에는 마신 추종 세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3 > 마신이 무엇인가? 인간이 신을 섬기듯 마족이 섬기는 신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그러나 아르페가 여태까지 마신을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왕이 마신의 첫째 아들이라는 전승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승일 뿐, 만물열람으로 확인한 마왕의 근원은 결코 마신이 아니었지. 더구나 사천왕으로 활동하면서 어지간한 곳은 가봤지만 그 어디에도 마신이라는 놈의 흔적조차 없었어.’ 이쯤 되면 그냥 마왕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마신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일반 마족은 마신의 존재를 철석같이믿고 있고, 아르페 또한 전생에서는 마신을 믿는 척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척’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 인간들이 마신을 이렇게 열성적으로 믿고 있단 말이지······.” 그것도 신전세력의 중심이 되는 팔라티나 리하제타의 고위사제들이!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신의 은총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받고 있는 이들이······ 용사님, 대체 어째서?” 믿지 않을 수 없는 증거를 앞에 두고 시페넌과 아리아는 같은 꼴로 신음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글쎄, 나도 추측만 할 따름이다만······ 어쩌면 이들은 신의 힘을 알기에, 더더욱마신의 존재를 믿기 쉬운 위치에 있는 것 아닐까. 더구나 이들은 용사의 원조를 목적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용사는 수백 년에 한 번 나타나는 존재지. 세월 속에서 책임감은 풍화되었을 테고, 외부에서 들어온 가벼운 자극에도 그들은 쉽게 반대편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야.” “우으으,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리아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아직, 아직이에요. 하나론 확신할 수 없어요. 그저 사이코들이 몇 자 끼적여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의심스러운 곳이 아직 스물일곱 군데 정도 남아있어요. 시페넌 씨, 함께해주실 거죠?” “너 실은 그 누구보다도 신전을 의심하고 움직였던 것 아니냐?” “아녜요, 제가 일하고 있는데 다들 멋대로 이상한 짓을 했던 것뿐이라구요!” 시페넌과 아르페는 이쯤 되면 그냥 아리아가 신전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르페는 열의에 찬 아리아의 모습을 흘낏하곤 시페넌에게 속삭였다. “야, 쟤도 꼬셔봐. 완전 월척인데.” “아, 그 얘기 나온 김에 지금 말해두는데, 나 성녀 못 꼬신다.” “왜!” 아르페가 소스라치게 놀라 반박하자 시페넌은 이를 갈며 아까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성녀가 멋대로 아르페의 방에 들어와 침대 위에서 스토커 비슷한 짓을 한 것과, 메테르를 욕하고 그녀를 아르페의 곁에서 떼어낼 궁리를 하던 것까지. “······.” 설명을 전부 들은 후 아르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이제 막 자신을 만났을 뿐인 성녀가 거기까지 썩어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나 시페넌은 벙쪄있는 아르페를 보며 단호하게 임무수행 불가 선언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무리다. 걘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아리아와 협력해서 이쪽의 증거를 따로 모을 테니까.” “아니······ 응, 알겠어. 미안하다······.” 그래도 아직 갱생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었는데, 설마 구혼활동에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었다니! 그것도 곧장 메테르를 제거하려 들 정도로······ 절로 아르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죽여야 하나.” 그러나 그의 결의가 굳혀지던 순간 시페넌이 툭, 한 마디 내뱉었다. “너라면 그렇게 하지 않고도 해결할 방법이 있잖아.”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분명 메테르를 해치려 들 거야.” “글쎄다, 난 네 말 몇 마디로 바꿀 수 있다고 보는데.” “······?” 시페넌은 아르페가 준 영상기록 아티팩트로 책장은 물론이고 팔라티나 소속 사제들의 마신 숭배와 용사의 살해 모의가 담긴 모든 내용을 기록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직은 그저 말일 뿐이잖아. 막말로, 저주라면 누구든 할 수 있어. 메테르의 마음을 독차지한 저 썩을 놈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저놈이 없었으면 내가 용사의 곁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같은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단 말이지.” “그건 네놈이 하는 생각 같은데.” “맞아. 사실 난 메테르한테 한눈에 반했거든.” 도적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사실 내가 널 대신할 수 있다면, 하고 바란 적이 꽤 있어. 하지만 메테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에, 네가 메테르를 얼마나 위하는지 알기에 그 마음을포기한 것뿐이지. 그래도 아직까지 그런 욕망은 내 내부에 남아있어. 가끔씩 너를 저주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 ······그래서, 넌 나를 죽일 거냐?” “하지만 넌 그걸 이성으로 억누르고 너 자신을 위해, 우릴 위해 움직이고 있잖아.뭐가 더 중요한지 알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잖아? 망상을 그저 망상의 영역으로 남겨두잖아.” “맞아. 난 너를 미워하는 만큼 너를 좋아하고, 메테르를 좋아하는 만큼 그녀를 위하니까.” 시페넌이 긍정했다. “그리고 난 그 사이코 성녀도 너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애초에, 그녀가 아직 실행에 옮긴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메테르에게 나쁜 마음을 품은 여자를 내가 꼬시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 “그렇다면 우선 메테르에게 확인해. 그리고 메테르가 괜찮다고 하면 성녀를 어떻게든 완전한 네 편으로 만들어. 성녀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 정도 예외는 감수하고, 그 정도 수고로움은 감수하라는 말이다.” “너······.” 그것은 아르페의 사고방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러나 시페넌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정론이었다. “넌 용사야. 메테르의 마음을 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마왕을 처단하는 것에도 그만큼 신경을 쓰라고. 성녀의 능력이 필요한 것 아니었어?” 시페넌의 말은 아르페의 마음에 쿡, 들어와 박혔다. 그것은 그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며 동시에 여태껏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제멋대로 움직여온 아르페에게 제대로 제동을 거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끝내 아르페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겠어. 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나서는 게 맞겠지. 서둘러 적대하지 않고, 우선 아군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보겠어.” “좋아. 이제 제법 용사 같네.” 시페넌이 히죽 웃었다. 아르페는 그 미소를 마주하며 이번만은 자신이 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는 아리아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어, 어쩐지 아웅다웅하는 두 분을 바라보는 사이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식혀둬.” “재워둬.” 시페넌과 아르페는 동시에 그 말을 내뱉곤,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행동이 아리아를 더욱 불타오르게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 날 밤의 모험은 그것으로 끝을 맞이했다. 이 이상 싸돌아다녔다간 정말 다른 이에게 들킬 수도 있었으니까. 모든 증거물을 사본으로 뜨고, 영상으로 확보한 후에야 아르페는 안심하고 그 자리를 떴다. 시페넌과 아리아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부턴 내가 못 도와. 아마 내일부터 정신없이 휘둘릴 테니까. 둘이서 잘 할 수 있겠지?” “네, 용사님! 맡겨만 주세요!” “흥, 내가 함정해제하는 걸 보고도 못 믿겠어?” “······보통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는 놈들이 꼭 실수를 하던데.” 못 미덥지만 어쩌겠는가, 맡기는 수밖에. 아르페는 자신이 항상 신고 다니는 부츠를 벗어 시페넌에게 건넸다. 시페넌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것을 살폈다. “이건 뭐냐······ 부츠?” “블링크 부츠야. 여차할 상황에 도움이 될 거야.” “이런 거 줘도 성녀는 안 꼬실 건데.”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거든!” 아르페는 한숨을 쉬면서도 그들에게 앞으로의 임무를 맡기고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찬, 아르페와 메테르는 처음으로 교황과 마주할 수 있었다. “프레드리히 쿠아르 팔라티나입니다. 부디 두 분 용사님께선 프레드리히라고 불러주시길.” “······메테르, 예요.” “아르페입니다.” 쿠아르, 팔라티나 내에서 고위 사제의 위에 오른 이와 그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미들 네임이다. 바디네와 아리아가 그랬듯 당연히 교황 역시 쿠아르라는 미들 네임을 지니고 있었다. “······교황님?” “후.” 메테르는 교황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아르페는 피식 웃었다. 교황은 그들의 반응을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인자하게 웃었다. “과연 두 분 모두 맑은 눈을 지니셨습니다. 처음 용사가 둘 탄생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지금 보니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 두 분 모두 실로 용사에 어울리는 기상을 지니고 계시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르페의 건방진 말에도 교황은 그저 허허,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부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신의 축복을 잔뜩 받아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또한 용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것 참 고마운 일이네요.” “성하, 저를 빼놓으시면 섭섭하답니다.” “하하, 미안합니다. 그대는 저 이상으로 용사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겠지요?” “후후훗.” 성녀는 교황과 농을 주고받으며 맑게 웃었다. 그녀를 보며 아르페는 어제 시페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섣불리 성녀를 적대하기보다, 몇 마디 말로 그녀를 아군으로 돌리는 것이 더욱 편하리라는 것을 자신에게 납득시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메테르는 교황과 성녀를 번갈아보며 점점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르페, 있잖아······.” “나중에. ······나도 네게 할 말이 있어.” “으, 응.” 메테르는 아르페의 진지한 눈빛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건너편에 앉은 성녀는 그것을 보며 다시 눈에서 불꽃을 튀겼지만, 아르페는 일단은 그것을 무시해두었다. 그리고 오찬이 끝나 자유 시간. 아르페는 메테르의 방에서 그녀와 마주 앉았다. 아마 지금 그의 방에는 시페넌과 아리아가 머무르고 있겠지. 성녀는 성녀대로 이를 갈고 있을 것이고, 아마도 교황은······ 아니, 지금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메테르, 네게 부탁이 있어.” “뭔데?” 메테르는 어디까지고 그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르페는 심호흡을 하곤 말했다. “너도 지금 이곳의 사제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파악하고 있을 거야.” “응. 교황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났어.” “교황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고위사제들 대부분이 그런 상태야. 나는 이곳에 잠입한 시페넌에게 부탁해 그것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수를 써놓은 상태이고······.” “역시 아르페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메테르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사실 그녀는 성녀와 교황에게서 풍기는 기운의 차이를 느끼고 그것을 물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르페가 대뜸 그것을 긍정해주었으니! “교황이라는 사람한테서 제일 이상한 냄새가 났어! 있잖아? 그때 만났던 그 티에나라는 마족처럼 괴상하고 짜증나는 기척이······.” “정확히 읽었어. 교황은 마족이거든.” 아르페는 팔라티나 전체가 뒤집어지고도 남을 폭탄선언을 했으나 메테르는 역시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르페의 말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교황은 고위사제들을 마왕군으로 포섭하고 있어. 하지만 성녀는 아직 그들쪽으로 넘어가지 않았지.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성녀를 우리 편으로 확보하고 싶어.” “하지만 그 여자는 다른 방향으로 수상쩍은데?” 역시 메테르의 감은 세계제일이었다. 마왕군 편에 서지 않았다 뿐이지 성녀가 이미 골수까지 썩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르페는 시치미 뚝 떼고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단지 용사라는 직책에, 자신의 역할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그래, 나는 아직 그녀에게 갱생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메테르, 조금만 협력해줘.” “불길한 예감이 드는걸. 어째설까, 벌써부터 거절하고 싶은데······.” “······조금 재수 없는 말이긴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그 여자한테 좀······ 그래, 어울려주려고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메테르의 표정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러나 아르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연극일 뿐이야. 조금 더 그 여자한테 친절하게 구는 것뿐이야.” “아르페, 되게 나쁜 남자 같아······.” “넌 단지 이것만 알아주면 돼. 그 여자를 대하는 내 태도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 “아르페는 언제나 그런걸. 진심을 감추고 겉으로 포장하기만 열중하는걸.” “메테르.” 아르페의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메테르는 입술을 쭉 내밀고 싫은 티를 노골적으로 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신 내 소원 들어줘야 해.” “좋아, 너무 심하지 않은 선에서 하나 들어줄게. 그러면 너도 성녀를 우리 파티로영입하는 데 방해하면 안 되는 거야, 알겠지?” “웅······.” 계약은 순조로이 체결되었다. 아르페는 그날 점심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3 > 끝 ⓒ 토이카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4 > 화창한 날씨, 꽃은 만발하고 벌들이 날아다니며 새가 지저귄다. 바닷물에 흠뻑 적신 듯 푸르게 투명한 하늘 아래, 성녀는 보기 좋게 꾸며진 화원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그시 감은 두 눈과 흐뭇하게 기울어 있는 입가가 그녀를 실로 순수해보이게 만들었다. ‘저렇게만 보면 정말 성녀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미소녀인데 말이지······.’ 그리 특색 있는 복장을 한 것도 아니다. 여성용 사제복에서 색조를 희게 통일하고성녀의 상징인 금빛의 십자가를 새겨 넣은 단순한 사제복을 입고 있을 뿐. 그러나 그녀의 차분한 흑발이 그 위로 길게 흘러내려, 옷을 치장해주는 최고의 액세서리가 되었다. 마치 그녀 등 뒤로 후광이라도 솟아난 듯 쏟아지는 햇빛에 지지 않고 빛을 발하는그녀의 모습에, 이미 그녀의 실체를 알고 있는 아르페조차 깜박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서서 자지는 마라.” “요, 용사님.” 아르페가 다가가자 성녀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용사 일행에게는 오후 스케줄이 빡빡하게 잡혀 있었으니까. 아르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히죽 웃었다. “다 메테르한테 떠넘겼지. 나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발코니에 서서 손을 흔들거나 냄새 나는 아저씨들의 따분한 얘기를 들어주거나 하는 건 잘 못하거든.” 그러나 메테르는 할 수 있다. 정말 바보니까. “하지만······ 그 일들은 이곳 팔라티나에 용사님을 인식시키기 위해 꼭 거쳐야만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메테르 님만을 내보내시다니, 만약 이런 일이 계속되거든 아르페 님의 입지가 메테르 님의 입지보다 줄어들 수도 있어요.” “다른 놈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관심 없어. 나는 그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거든.” “아, 으으.” 아르페의 직구에 성녀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더더욱 정말 이 녀석이 어제 그런 말을 입에 담은 여자가 맞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성녀는 이미 뿌리까지 썩어있었지만, 다른 불순물이 들어와 썩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썩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보면 아리아와 다를 바 없는 순수한규중처녀였다. 또래 남자와 만날 일도 없이 오직 용사만을 기다리며 성장해온 그녀이니 오죽하겠는가! “그,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성하께서 보시거든 경을 칠 일이지만 마침 그 성하도 이래저래 바쁘시니······ 자, 여기에 앉으세요.” “그래.” 바디네는 허둥지둥하며 그를 화원에 마련된 정자로 이끌었다. 차를 내오겠다며 안으로 들어가려던 성녀를 멈춰 세운 아르페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찻잔과 티포트 세트를 꺼내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것들을 가지고 다니시나요?” “실은 아티팩트야.” “후후, 그렇군요.” 성녀는 그의 말을 대충 들어 넘겼지만 실은 정말 아티팩트였다. 어떤 찻잎을 넣든독성의 여부나 그 외 마법적인 효능을 체크하고 부정적인 효과는 제거하며 긍정적인 효과는 증폭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아티팩트. 그것이 지금은 아르페의 강화를 거쳐 제법 굉장한 수준까지 이르러 있었다. “마나를 불어넣어주면 깨끗한 물을 만들어내어 끓여주기까지 하지.” “어머나······.”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티포트가 아니다.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 안에서 또 다른 주머니를 꺼내어 그 안의 내용물을 조심스레 한 움큼 집었다. 아직 차로 우려내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청명한 향에 성녀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 찻잎은······?” “세계수. 엘프들을 도와주고 얻은 거야.” “아아, 그 일에 대해선 전해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무수한 인간의 욕망이 얽힌 일이었죠. 만약 용사님께서 나서지 않으셨더라면······.” 이런 부분에선 정상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용사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 그렇게 극적으로 변모하는 것일까,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포트 안에 찻잎을 넣었다. “용사님께선 비단 마도뿐만이 아닌 다른 영역에도 재능을 갖고 계시군요.” “아냐, 대부분 마법으로 때워.” 차향이 우러나고 물이 적절한 온도로 식을 때까지 기다려 그것을 따랐다. 바디네는 제법 감격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감동했다. 푸르던 눈에 금빛 광채가 가득해졌다. “오늘을 기념일로 제정하고 싶을 만큼 기뻐요.” “그래······ 그거 영광이구나.” “네, 그래서 나중에 성하께 건의를 드려볼 생각이에요.” 본격적이잖아!? 아르페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차를 마시는 성녀에게 태클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모처럼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는 그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단순히 용사라는 이유만으로는 태도가 조금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빌어먹을, 알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이 여자를 제정신 차리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시페넌이 싫다고 했으니 다짜고짜 그에게 밀어붙이는 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 여자가 진심으로 아르페에게 사랑에 빠졌다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용사님. 용사님?” 그때 상념에 빠져있던 아르페를 성녀가 불러 깨웠다. “용사님, 묻고 싶은 게 있으신 것 아녔나요? 뭐든 물어보세요. 저는 줄곧 이 안에서만 살아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지만······.” “아, 그런 거면 족해. 그저 이제 곧 같은 파티가 될 텐데 서로 아무것도 모르면 이상하니까, 너에 대해 듣고 싶은 것뿐이었거든.” “그러면······.” 성녀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조금 지나치지 않나 싶을 만큼. “용사님 얘기도 해주실 건가요?” “물론이지.”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으니까. 아르페의 눈도 반짝였다. “그러면······ 정말 별 것 없습니다만, 제 얘기부터······.” 그녀는 볼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입을 열었다. 아르페의 얼굴을 마주하며, 지금 이 순간만은 아까까지 하고 있던 ‘메테르를 어떻게 하면 아르페에게서 떼어낼 수 있을까’같은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서.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메테르가 아르페를 대신해 리하제타에서 예정된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이것저것 챙겨주려는 대사제들을 다 상큼살벌한 미소로 보내주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때, 그곳에는 침대 위에 말린 오징어처럼 늘어져 있는 아르페의 모습이 있었다. “어, 왔냐······.” “아르페, 왜 그렇게 지쳐 보여?” “으으, 여자는 정말 질색이야······.” 그리고 여자에게 맞춰주는 것은 더더욱 질색이다. “그래, 나 말고 다른 여자는 다 나빠. 그걸 알아주니 다행이다.” “그리고 넌 날 완벽히 이해 못하고 있구나······.” 메테르가 돌아오기 아주 조금 전까지 바디네와 얼굴을 마주하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궁리하다 해방된 끝에 아르페의 심신은 지극히 피로해진 상태였다. “흐으으음.” 메테르는 아르페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가늘게 뜨며 침대로 다가와 그 옆에 털썩 앉아버렸다. 희미한 땀 냄새에 섞여 언제나 맡아온 메테르의 달콤한 체향이 아르페의 코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아르페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땀 냄새 난다. 씻고 와라.” “아르페 너무해, 혼자서 고생하고 온 사람한테! 에잇.” 메테르는 아르페의 말을 단호하게 무시하며 오히려 그에게 달라붙었다. 예상했던결과였기에 아르페는 뭐라 더 말하지 않고 지금을 만끽하기로 했다. “아저씨들이 이상한 수작 안 부리디?” “응, 오늘은 얌전했어. 그런데 교황 할아버지처럼 노골적이진 않아도 퀴퀴하고 짜증나는 냄새를 풍기는 아저씨들이 제법 많았어.” “홀애비 냄새랑 헷갈린 건 아니겠지? 아얏.” 또 장난을 치는 아르페의 머리를 메테르가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어 내려쳤다. 그리곤 그 위로 자신의 몸을 포개듯 엎어져버렸다. “무거워!” “하루 종일 그 여자랑 놀았지. 아르페 나빠, 이건 그 대가야.” “참기로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낮에는 참아도 밤에는 내 거니까 괜찮은걸.” 음, 역시 메테르도 성녀 못지않게 위험한 상태구나. 아르페는 냉정하게 판단하며 대꾸했다. “오늘 밤에도 찾아가볼 생각인데?” “······아르페?” 아르페는 위에서 들려오는 메테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살벌하여 살짝 쫄았지만 이내 제정신을 찾고는 설명했다. “낮이고 밤이고 붙들어두는 게 중요해. 다른 생각을 못하게, 동시에 내게 느슨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나한테 정말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둘이서 그냥 자는 것 말고 다르게 자려고 그러지! 나한테 끝까지 안 가르쳐준 거하려고 그러지!” “그것만은 절대 아니니까 안심해라.” 메테르는 그 후로도 계속 위에서 아르페를 짓누르거나 볼을 꼬집거나 하면서 그를 괴롭혔지만, 그것이 벌이 아니라 상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깨닫지 못하는 한은 결코 아르페를 꺾을 수 없었다. “아르페는 정말 너무해. 아르페를 껴안고 자는 것만이 내 인생의 낙인데······.” “슬슬 다른 낙을 찾아주지 않을래?” “안 돼.” “누르지 마, 누르지 마! 기본적인 수치 정도는 학습해라!” “그런 건 고대의 신전에 다 묻어두고 왔어!” 아르페와 메테르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꽁냥거리던 그때. 시페넌은 슬슬 잠에서 깨어났다. 아리아가 조용히 자신의 얼굴을 내려 보고 있다는 것 또한 동시에 깨달았다. “뭐하냐?” “도적을 할 것 같은 얼굴은 아닌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흥.” 구구절절 따지고 들어가면 사연 없는 이가 어디에 있을까. 시페넌은 때 묻지 않은순수한 소녀이기에 나올 수 있는 아리아의 감상을 코웃음으로 흘려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 “제가 아침 점호를 빼먹긴 했지만 원래 사람들은 저를 잘 찾지 못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어요.” “그런 슬픈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시페넌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들기 전 확인한 그대로였다. “정말 좋은 방도 내줬네, 새삼스럽다만.” “성녀님께서 강력히 주장하셔서······.” “성녀님은 무슨. 마귀년이지.” 이곳은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의 숙소 중 아르페에게 주어진 바로 그 방이었다. 아르페가 언제 이용할지 모르니 멋대로 침입하지 말라는 선언을 해둔 덕에 얼결에 시페넌의 아지트가 되고 만 것. “식사하실 만한 걸 가져왔는데.” “감사히 먹을게.” 시페넌은 그녀가 내민 빵을 한 손에 쥐고 뜯어먹으며 책상에 놓여 있던 지도를 집어 들었다. 어젯밤, 제로 클래스 에어리어로 들어오고부터 작성을 시작한 내부지도였다. “일주일이라고 했던가, 촉박하기도 하네. 대체 이걸 어떻게 일주일 만에 뒤진단 말이야? 가뜩이나 이쪽은 늦은 밤부터 움직일 수 있는 신분인데······.” “그거 말인데요, 어제 용사님 말씀을 듣고 연습한 끝에······ 이렇게.” “응? ······켁!” 시페넌은 지도를 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아리아의 모습을 확인하다가는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분명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만은 어떻게도 확인할 수가 없었으니까! “좀 더 잘 숨어있을 수 있게 됐어요!” “너, 너······ 그게 하루 만에 됐다고?” “원래 되어야 정상인 것 아닌가요······?” 시페넌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시페넌의 분통을터지게 만들 만큼 귀여운 제스쳐였다. “그러니까, 제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먼저 도착해서 안전을 확인한 다음 시페넌 씨를 부르면 될 것 같아서.” “그런 문제가 아니다만······ 아니, 그래. 됐어. 네가 의욕이 넘친다면 그걸로 된 거지.” “의, 의욕이라니! 저는 단지 부패한 신전을 깨끗하게 되돌리고 싶을 뿐이에요!” 새침하게 대꾸하는 척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들뜬 것을 감추지 못하는 아리아와 함께, 시페넌은 이걸로 괜찮나 싶은 제로 클래스 탐색을 재개했다. 아르페가 작정하고 지원해 키워낸 전신 아티팩트 무장 도적과 고유능력을 보유한하녀 콤비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단 한 번도 들키지 않고 제로 클래스의 비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각자가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며 그렇게, 약속된 일주일을 하루 앞두게 되었다.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4 > 끝<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5 >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에이디아를 떠날 때 그곳은 아직 겨울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팔라티나는 이제 봄의 중순경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좋은 날씨에 아르페는 성녀와 벌써 6일 째, 같은 장소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용사님, 애플 타르트를 만들었는데 드셔보시겠어요?” “아, 응. 잘 먹을게. 마침 사과가 먹고 싶었어.” “야호······! 실은 한창 드실 때이니 과일보다는 고기로 속을 채워 키슈를 굽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했는데.” “아냐. 고기는 매일 먹으니까 괜찮아.” 아르페는 바구니에서 생크림과 절인 사과를 잔뜩 담아낸 타르트를 꺼내어 테이블위로 올려놓는 성녀, 바디네를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싱그럽게 빛나는 푸른 눈이 기대를 잔뜩 머금은 채 아르페에게 꽂혀 있었다. ‘틈이 없어.’ 6일의 시간 동안 아르페는 제법 이런저런 방향에서 그녀의 마음을 공략해보고자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상황은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생각엔 그러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아르페는 새삼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전은 그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드시기 좋게 잘라드릴게요. ······아.”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칼을 장비하고 타르트를 기세 좋게 자르던 바디네가 갑자기 무엇을 떠올렸는지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더니 이내 포크를 들어 먹기 좋게 자른 타르트 한 조각을 쿡, 찔러 올려 그것을 아르페의 입가로 내밀었다. “머, 먹여드리는 게 편하실까요?” “그냥 내가 먹을······ 아냐, 고마워.” 처음엔 거절하려던 아르페였으나, 성녀의 표정이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며 급히 말을 바꾸었다. 메테르에게 들키면 성녀는 살해당하고 말겠지만 그것도 운명이다. “맛있나요, 용사님?” “음······.” 아르페는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성녀를 보며 다시금 생각하는 것이다. “응. 적어도 내가 먹어본 타르트 중에선 제일 맛있어.” “아, 아이 참. 용사님도······.” “실은 타르트를 먹어본 게 처음이거든.” “정말 나빴어. 제가 잔뜩 만들어드릴 테니, 앞으론 제 것만 드셔야 해요. 후훗.” 역시 이 작전은 시작부터 글러먹었다고. 자신을 만난 순간부터 제멋대로 호감도 맥스를 찍어버린 상대를 더 어떻게 유혹하란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아르페는 그 날 그녀와의 데이트를 조금 일찍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메테르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방이 아닌, 원래 자신에게 주어졌으며 지금은 시페넌이 숨어 있는 방이었다. “왔냐?” “응. 아리아도 안녕.” “네, 넵. 아르페 님도 건강해보이셔서······.” 이젠 좀 익숙해질 만도 할 텐데 아르페와 마주하기만 하면 긴장하는 아리아. 시페넌은 그것을 보며 불퉁해졌다. “나랑 그 녀석 대우가 다르다 너?” “그야 시페넌 씨는 시페넌 씨잖아요······?” 아리아는 시페넌을 돌아보며 편한 말투로 응대했다. 아르페가 피식 웃어버리는 모습에 아주 조금 상처를 받은 시페넌은 아리아에게 자신이 과거 디아스의 황태자였다는 사실을 밝혀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지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스스로가 한심해졌기 때문이다. “시페넌, 네 쪽은 좀 어땠냐.” “그 축 쳐진 목소리를 들어보니 네 쪽은 오늘도 영 성과가 없었다는 건 알겠네. 우리는 순조로운데 말이야.” 아르페는 정곡을 찔러오는 시페넌을 하얗게 째려보았다. 그러나 시페넌은 여유롭게 자료들을 늘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네 방식으로는 앞으로도 진전이 없을걸. 지금 넌 단지 성녀가 딴 짓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야. 물론 신전을 무너트린 이후로도 성녀의 지위를 온존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것만이라도 일단은 성공인 셈이다만.” “왜 진전이 없는 거지?” “성녀 안에서 이미 너와 자신의 관계는 완성되어 있는 상태니까.” 과연, 시페넌의 지적이 실로 합당했다. 성녀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미 아르페를자신의 짝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러니 그녀의 마음가짐이 변화할 일도 없었다. 아르페에 대한 호의도, 메테르에 대한 적의도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째서 가능하냐는 거야. 아무리 망상벽이 심하다고 해도 그렇지, 이제 막 만났을 뿐인 상대한테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전생에서 성녀가 시페넌을 사랑했다는 사실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아르페가 답답함을 못 이겨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 아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르페 님이 잘생기셔서 그런 것 아닐까요······?” “······.” “······.” 아르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리아를 보는 시페넌의 눈빛도 그와 비슷했다. 당황한 아리아가 추가설명을 했다. “아, 아뇨! 단순히 잘생기셨다는 게 아니라······ 그 누구든 한눈에 반할 만큼 잘생기셔서 그런 것 아닐까요!” “너 제법 고백을 화끈하게 하는구나.” 시페넌이 어이가 없어 하는 말에 아리아는 어쩐지 더더욱 당황하며 부정했다. “그으, 저는······ 물론, 아르페 님이 잘생기셨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녜요! ······좌, 좌우지간 아녜요!” “솔직히 말해도 돼. 저놈은 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하는 호색한이니까.” “아니라니까요!” 시페넌의 추궁에 조금 화까지 내는 아리아. 그녀의 귀가 뿌리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아르페는 요 며칠간 성녀와 어울리며 본의 아니게 여심을 탐구하는 처지에 놓였던 탓인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예리함으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시페넌한테 꽂혀있구나. 하긴 뻔한 일이긴 한데.’ 메테르에게 있어 아르페가 왕자님이라면 아리아에게 있어선 시페넌이 왕자님일 것이다. 하녀로 살아가던 자신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도적, 심지어 잘생긴 청년! 용사의 동료로 움직이는 그와 협력해 신전의 비리를 캐다니 완전히 소설의 줄거리이지 않은가. 그 정도면 시페넌에게 마음을 품지 않게 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어째서 여자는 모두 아르페한테 반하는지. 우리 르세티도 하루에 두 번은 네 이름을 부른다고. 네가 눈앞으로 뿅 소환될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시페넌은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둔감한 주인공 그 자체였다. “······너도 나랑 비슷하구만 뭐.” “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어, 어쨌든!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아르페가 눈치를 챘다는 사실을 알아챈 아리아가 다급히 그들의 대화를 끊고는 설명했다. “만약 제가 성녀님이었다면, 용사님을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아르페 님을 만난 순간 사랑에 빠지지 않고 배길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지금 성녀님은 모든 여자애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에 놓여 계시니까요.” “그리고 유일한 방해물이 바로 메테르라 이거지.” “그렇죠······.” 아르페의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졌다. 그런 그를 보며 시페넌이 말했다. “어쨌든 성녀를 대하는 방식을 바꿔보는 게 좋을 거야. 우리는 거의 끝나가거든.” “끝나가? ······아, 과연.” 테이블 위에 널린 자료들을 보며 아르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들이 만들어둔 제로 클래스의 내부 지도, 그 대부분이 새카맣게 체크되어 있었던 탓이다. 남은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부분이 핵심에 가까울 터였다. “아마도 오늘밤, 아니면 내일 밤에는 수색이 완료될 거야. 그리고······.” 시페넌의 눈에 차가운 분노가 어렸다. “놈들의 수작도 그쯤이겠지. 네가 메테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팔라티나에서 인식하는 ‘용사’의 이미지가 너에서 메테르로 옮겨가기 시작했거든. 놈들은 더 늦기 전에 메테르를 처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지금까지는 아르페 님께서 성녀님을 잘 마크해주셨지만, 아마 그들은 일을 벌리기 전 어떤 방식으로든 성녀님께 권유를 할 거예요. 그들은 아르페 님이 성녀님께 푹 빠졌다고 믿고 있어서, 메테르 님과 아르페 님을 떨어트려놓기 위해 그분을 이용할 생각이거든요.” “······정말 그런 것 같네.” 자료를 살피며 묵묵히 얘기를 듣던 아르페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바로 방금, 옆방에 마기를 감춘 고위사제 한 명이 노크를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시페넌은 괜히 자신이 더 초조해져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떻게 하게? 지금 막을 거야?” “글쎄······ 조금 들어보고 판단해볼까.” 아르페는 방 벽에 한쪽 손을 대고 도청 마법을 발동했다. 그 어떤 방음 마법이든 결계 마법이든 전부 무시하고 그가 원하는 목소리를 잡아낼 수 있는 마법. 에이디아에는 언제나 감사할 따름이다. [성녀님, 용사님과 사이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나요? 후흐, 우흐흐.] [그러나 항상 같은 곳에서만 만나시는 게 답답해보여······ 마침 용사맞이 축제가 열릴 때도 되었고 하니, 두 분께 시내로 나가는 것을 허용한다는 교황 성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달해드리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어머나, 그렇게나 근사한 제안이······.] 과연, 그렇게 나왔는가. 그것은 어찌 보면 그들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스무스하게 성녀와아르페를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지금 성녀와 아르페가 제법 좋은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성하를 직접 찾아뵙고 감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성하께서 직접 성녀님을 응원하고 싶어 하셨으나, 공교롭게도 지금은 다른 일로바쁘십니다.] [응원이라······ 모두 저를 도와주는 것 같아 너무나 기뻐요.] [성녀님께서 용사님을 오매불망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저희도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이렇게만 들으면 평범하게 주책을 떠는 사제들과 봄바람에 한껏 들뜬 처녀의 대화 정도가 될 텐데, 그들의 속내를 알고 있는 아르페에겐 그들의 대화가 그렇게 섬뜩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내일 마차를 준비해놓겠습니다.] [네, 다시 한 번 고마워요.] 성녀는 밝은 목소리로 사제를 배웅했다. 그 사제가 방을 나가고, 혼자 남은 그녀는 잠시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는 후, 웃음을 흘렸다. [정말 빤히 보이는 수작이야. 아르페 님과 나를 치워놓고 메테르를 없애겠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를 드러내는구나. 마기를 풀풀 풍기면서, 자신에게서 나는 썩은 내 조차 맡지 못하다니. 조만간 신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겠어.] 아르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그녀는 비록 나이를 조금 더 먹은 상태이긴 했지만 신전의 타락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지금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해서 무리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 뒤를 잇는 그녀의 말은 솔직히 그를 놀라게 했다. [이렇겐 안 돼. ······아르페 님께 가지 않으면. 지금이라면 아마 그 계집애와 같이계시겠지.] 성녀는 그 말과 함께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못해 아르페의 눈이 꿈벅였다. 그를 지켜보고만 있던 시페넌과 아리아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하는 표정으로 아르페를 바라보았다. “신전 내부 세력이 메테르를 죽이려는 작당을 하고 있어.” “그리고? 성녀는?” “······그걸 막으려나본데?” 얼떨떨한 투로 내뱉은 그의 말에 시페넌과 아리아 역시 아르페와 비슷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도청을 들킨 것 아닐까요? 그래서 아르페 님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그럴 리가, 난 이 제로 클래스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마법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그러면 대체? 아니, 메테르 님을 향한 성녀님의 적의로 판단해보면 이번 일을 방치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협력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라구요!” “그래서 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셋이 어떻게 떠들고 있건 중요한 사실은 지금 바디네가 아르페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르페가 없는 방을 지키고 있는 메테르와 조우하게 되겠지! 아르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희는 탐색하고 있어. 나는 대체 바디네가 메테르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야겠어.” 그래. 그 둘의 대화를 듣는다면, 그때 비로소 아르페는 바디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단순히 미친 년인지, 아니면 따로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이번 생에서도 인간에서마족으로 거듭날 계획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성녀로서 아르페의 곁에 남길 원하는 것인지! “······간다!” “아, 아으으. 무서워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요.” “······우리는 조사나 하고 있자. 빨리 끝내놔야지.” 전생에서 용사와 맞서 싸우던 순간에도 하지 않았던 각오를 다지고 자신에게 은신 마법을 부여한 후 방문을 나서는 아르페를 비장하게 전송하며, 시페넌과 아리아는 그저 자신들의 일에나 집중하기로 다짐하는 것이었다.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5 > 끝 ⓒ 토이카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6 > 한창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아르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메테르는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그 자리에 딱 멈추었다. [아르페 님, 들어가도 될까요?] 대신전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울리는 종과 비슷하게 느껴질 만큼 맑고 깨끗한 여성의 목소리. 메테르는 신기하게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아르페 지금 없어.” [읏······.] 문 너머의 여자는 메테르의 목소리를 듣고 망설이는 듯했으나, 곧 다시 문을 노크했다. [메테르 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아르페가 없다는 말에 곧장 돌아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을 찾다니? 메테르는솔직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져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물론 방 안으로 들어오며 대놓고 자신을 쏘아보는 성녀와 마주하며 금세 후회하게 됐지만. “안녕하세요, 메테르 님.” “별로 안녕하지 못하길 바라는 표정 같아.” “어머나, 보기와는 달리 그래도 제법 눈치가 있으시네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칼부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대화! 그러나 두 사람은 적어도 지금 본격적으로 붙지는 않았다. 물론 붙어봤자 바디네가 끔살당하고 끝이었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아르페 만나고 싶어서 온 거잖아? 그런데 왜 굳이 들어온 거야?” “그래요, 아르페 님이 너무나 너무나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서, 그래서 참지 못하고 왔는데 메테르 님밖에 안 계셔서 절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 메테르 님과 대화를 나누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왔답니다.” “아르페에 대해 알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물어봐. 아르페에 대해서라면 뭐든지알고 있거든. 뭐든지.” “후, 후후······ 그거 참 고마운 말씀이네요.” 만약 이 자리에 아르페가 있었더라면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직설적인 말의 교환이 이어졌다. 실제로 방 바깥에 은신하고 도청 마법으로 그들의 말을 듣는 아르페는 실시간으로 위가 아파오고 있었다. “그래서 뭔데? 정말 아르페에 대해 물어보러 온 거야?” “아뇨, 아르페 님에 대해선 앞으로 제 스스로 알아가려고 해요. 마음만 감사히 받죠.” “그렇다면? 용건이 있다고 했으니 아르페가 오기 전에 빨리 끝내줘.” 메테르는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디네는 적잖은 위압감을 느꼈으나 그녀의 깡이 그녀를 버티고 서 있게 해주었다. “메테르 님은 신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고여 썩은 물웅덩이.” “······제 예상보다도 정확히 짚어내시는군요.” “그 물웅덩이 한가운데에 너도 있는걸. 교황을 비롯한 다른 사제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너 역시 썩어있어. 네 눈빛은 성녀라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야.” 메테르의 직설적인 말에 바디네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 또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던 것이다. “맞아, 저 역시 썩은 물의 일부예요. 사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추악한 욕망도 집착도 일그러진 망상도 모두 제 것이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도 없어요. 단지 제가 다른 사제들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디네는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메테르 바로 곁에서 고개를 숙여, 메테르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저는 마왕군과 결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죠.” “알고 있었구나?” 메테르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오히려 그 반응에 바디네가 더욱 놀랄 정도였다. “······알고 있었지만 제 혼자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었어요. 그러던 때에 여러분이 와주셨죠. 제가 아르페 님과의 만남을 운명이라 생각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요?” “아르페를 네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건 네 자유이니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그래서 이 얘기는 아르페한테 했어?” “아뇨, 조금만 더 순수하게 달콤한 시간을 즐기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되었네요.” 바디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놈들이 결국 이를 드러냈어요. 저와 아르페 님이 이곳을 비우게 만들고, 그 사이당신을 해하려고 하는 거죠.” “······.” 그 어느 때보다도 메테르가 놀란 순간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줘?” “그게 무슨 뜻이죠?” “그대로 놔뒀으면 내가 죽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넌 그쪽이 더 좋지 않아?” “어머나, 전 언제나 용사의 편에 서는 성녀랍니다?” “하지만 넌 날 용사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그녀들의 말은 실로 무시무시하게 서로의 본심을 꿰뚫고 있었다. 아르페 앞에선 마냥 헤실대기만 하는 메테르가 실은 얼마나 날카롭게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지, 자신을 감추는 데에는 자신이 있던 바디네를 단단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래요. 전 당신을 용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르페 님만이 유일한 용사님일 것이라, 마음 속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아요. 저는 한 명의 용사를 위한 성녀, 오직 단 한 명만을 위한 성녀이니까요.” “그런데?” “하지만 당신이 진실 된 용사이건 아니건, 아르페 님께서 당신을 끔찍이 여기신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요. 저랑 얘기할 때에도 화제의 절반은 언제나 당신에 관한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그 말을 들으며 솟구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야 했는지······ 당신은 모르시겠죠.” 그 말을 듣는 메테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바디네는 그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때 당신이 우리가 없는 곳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아르페 님께선 큰 상처를 입게 될 거예요. 그리고 전 평생 당신에게 이길 수 없게 되겠지요.” “너 정말 재미나다. 순수하게 썩어빠진 것 같아.” 아르페와 메테르의 감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네에, 그래서 이렇게는 당신을 잃을 수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아니랍니다.” “으음,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어. 흐히.” 메테르는 까르륵 웃어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바디네가 심중에 있는 말을 모두 내뱉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날 죽이기 위해 세운 계획이 뭔지는 알아?” “정확히는 알지 못해요. 하지만 가능성을 추려본다면 단 하나지요. 바로 마법진입니다.” “윽.” 그 말을 듣는 순간 에이디아에서 있었던 참사를 떠올리며 신음하는 메테르. 성녀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에이디아의 마법진과는 세월부터가 다릅니다. 물론 그 보안수준 또한 비교도 되지 않지요. 제아무리 아르페 님께서 방대한 지식과 그것을 뛰어넘는 마력을 지니고 계셨어도, 교황과 성녀를 통해 대대로 전해지는 통제권을 획득하지 못한 이상은 마법진의 힘을 마음대로 다루시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르페한테 불가능한 건 없는데.” 아르페를 믿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성녀는 메테르의 바보 같은 말에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방금 말씀드렸듯 제게도 마법진의 통제권이 있습니다. 교황의 그것에 비하면 확연히 떨어집니다만, 그럼에도 그 힘의 행사를 방해할 수준은 되죠.” “그래서 그걸로 막겠다고?”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대립하는 순간 교황을 비롯한 고위사제들이 본색을 드러내게 될 테니까요. 그들을 확실히 끌어내리기 위한 수단을, 지금부터 궁리해야 해요.” 이쯤에서 아르페는 마음을 놓았다. 한때는 어찌되나 했지만 다행히도 성녀에게는최소한의 이성이 갖추어져 있던 모양이었다. ‘역시 전생대로 되지는 않는 거구나. 비록 그 성질머리는 그대로지만, 그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전생의 그녀는 용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헛소리를 믿고 폭주하여 스스로 마족이 되기에 이르렀지만, 어쨌든 지금은 두 명의 용사 중 한 명, 내가 남자니까.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일은 없어진 셈이고······.’ 물론 메테르를 향한 적의를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 것은 신경 쓰이지만, 성녀는어디까지나 라이벌로서 메테르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즉 아르페가 용사인 한,성녀는 자신의 포지션을 버려가면서까지 메테르를 상처 입히려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 작전을 짜려고 한다면 아르페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래요, 그러고 보면 본론이 아직이었지요. 당신에게 닥친 위기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얘기가 남아있었어요.” “호오, 그렇구나. 나도 아르페가 오기 전에 너한테 해두고 싶은 얘기가 있었던 참인데.” 어라,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당분간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게 될 것만 같은이 불길한 예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직감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아르페가 도청 마법을 캔슬하고 다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그때, 제로 클래스 전역에 두웅, 하고 진동이 낮게 울려 퍼졌다. “······마법진.” 아르페는 낮게 중얼거리며 멈추어 섰다. 이것은 특정한 조건을 만족한 끝에 시작되는 공명, 마법진과 마나의 공명이다. 제로 클래스의 심부에서 발현된 그것은 아마 곧 리하제타 전역으로 퍼져나갈 터, 그렇게 되면 막을 수 없다. 홀로 도시 전체에 수백 년 이상 쌓여 온 마나와 대적할 셈이 아니라면 말이다. [먀아, 먀먀아?] “맞아. ······빌어먹을, 상황 더럽게 돌아가네.” 분명 놈들은 아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메테르를 없앨 모의를 하던 놈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전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을 설명해줄 가능성이 있다면 두 가지. 첫 번째는 성녀의 움직임이 들켰을 가능성이다. 성녀가 신전을 거스른다는 사실을 저쪽이 깨달았다면 저렇게 급박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영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르페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구현 마법과 만물열람을 구사하여 주위 상황을 파악하고 있기에, 이 가능성은 일단 제쳐둔다. 그렇게 되면 두 번째 가능성밖에는 남지 않는다. 바로 시페넌과 아리아가 들켰을 가능성이다. “그 바보 녀석들 같으니!” 어지간히도 치명적인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마법진의 구동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페는 이를 악물며 그들의 위치를 추적하려다가는······ 어느덧, 도시의 상공에 인공적인 빛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라, 이거 설마······.’ 도시 어딘가에서 솟구친 그 빛은 상공 어느 지점에 턱 걸린 것처럼 멈추어, 도시의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거대한 영상의 막을 만들어냈다. 바로 아르페가 시페넌에게지원해준 영상전송, 영사 아티팩트였다! [설마 용사가 비밀을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본인이 얌전하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수하를 부리고 있었을 줄이야. 안 되지, 안 돼. 마왕 폐하의 대계를 방해하도록 놔둘 수는 없음이야.] 도시 전체로 교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상의 질은 그리 좋지 않았으나, 교황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시페넌이 아티팩트를 숨기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마왕 폐하? 교황이라는 작자가 대체 어떻게 그 따위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거지?] [그것은 자격과 직책일 뿐 나의 의지와 행동을 속박할 수는 없다. ‘신’이라는 것이얼마나 허망한 개념인지, 너는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힘, 거대한 힘 뿐! 그리고 바로 그것을 마왕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다!] 교황이 절대 내뱉어선 안 될 말이 스스럼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화면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시민들은 교황의 모습과, 교황의 목소리를 마주하며 경악하고 말았다. 그런데 시민 모두가 깨달은 그것을 아직 교황만이 모르는 모양이었다. [네놈 때문에 일이 정말 피곤하게 되었구나. 깔끔하게 용사 한 명만을 처리할 셈이었는데, 이대로라면 둘 모두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게 될 거야.] [······아르페와 메테르는 네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아.] [흐하, 그건 이제부터 두고 봐야겠지. 제물의 상태가 훌륭하니 결과도 기대할 수 있겠구나.] “제물······?” 아르페는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흐릿한 영상 너머, 마법진의 중추에 내던져진 소녀의 모습이 그제야 간신히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고유능력을 지닌 하녀 아리아의 모습이었다. < Chapter 23. 미션 파서블 - 6 > 끝 ⓒ 토이카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1 > “아르페!?” “아르페 님!” 도시를 모두 뒤덮은 소란은 깨어있는 자라면 누구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창 여자의 전쟁을 벌일 기세였던 성녀와 용사 역시 창 너머로 보이는 영상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켜 달려 나왔고, 그곳에서 아르페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아르페 님,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고 계신가요!?” “아주 대충은. 설명해줄 시간은 없고······ 따라와!” 오늘 시페넌이 보여주었던 지도에서 아직 탐색이 완료되지 않았던 구역, 그 후보지 중 지금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특정하는 데 성공한 아르페는 둘을 다짜고짜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앗, 성녀 님칵!” 저 너머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달려오던 사제가 아르페가 휘두른 마나 스트링에 곧장 목이 날아갔다. “일단 수납.” “아르페 님!?” “괜찮아, 마기가 없는 놈들은 죽이지 않아.” “마기······ 역시, 그렇다면 용사님······!” “나중에 다 말해줄게. 지금은 움직여야 해.” 아공간 주머니에 사제의 시체를 집어넣으며 가볍게 웃어 보이는 아르페의 모습에바디네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르페까지 신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둘째 치고, 여태 마도사로만 알고 있었던 그가 외견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더 많은 사제들이 모이기 전에 서두르자. 저 친구들을 구해야 해.” “저 아리아라는 여자애는 또 뭐야? 왜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어 있는 거야?” “시페넌의 협력자.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어. 마력 그 이상의 기록, 마법의 제물로써먹기에는 딱 좋지.” 아르페는 그 말을 하며 이를 갈았다. 운이 없어도 너무나 없었다. 시페넌과 아리아가 교황에게 들키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여유롭게 판을 짤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시페넌이 아티팩트를 발동해 실로 적절한 타이밍에 놈의 실체를 도시 전체에 퍼트리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제로 클래스에 머무르는 지금도 도시 전체가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경악과 분노가, 의심과 고함이 여기까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가면무도회는 끝났어. 일이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된다고 해도 이 도시의 신앙이 회복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리게 생겼는데······.” “이것도 전부 아르페 님께서 준비하셨던 거로군요. 저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하를 부려 신전의 어둠을 만천하에 까발리실 생각을 하시다니······ 구사한 아티팩트와 마법의 종류도 그렇고, 모두가 제가 상상하지 못할 것들뿐이군요.” “후후, 아르페 너무 멋지지?” “네에, 정말······ 너무 대단해요.” 싸움 끝에 우정이 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 여자들은 서로의 아르페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다가 궁극에 이르러 통한 모양이었다. 아르페는 이제 그냥 이 여자들과 연관되는 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희망은 남아있지 않을까? 현장에서 시페넌과 조우한 바디네가 기적적으로 그를 향한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역시 무리인가. “큭!? 용사님······.” “그래, 잘 가!” 제로 클래스 영역에서 지금 뛰어다니고 있는 사제는 딱 두 종류였다. 사태 파악을못하고 어리버리하고 있든가 비리가 들킬까 초조해져 움직이는 놈들. 전자는 아르페 일행과 마주칠 일이 없었고 후자는 마주치는 대로 죽여 버렸다. 로아는 놈들이 죽을 때마다 갸르릉거렸지만 이놈들의 마기를 빨아먹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아마 곧 보다 탐스러운 먹이가 나타날 거야.” [먀아아아.] 그 먹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직감한 메테르가 서서히 전투 모드로 돌입하며 아르페에게 확인했다. “아르페, 교황의 레벨은 어느 정도야?” “340정도.” “340!?” “참고로 마왕군 사천왕이기도 하지.” 아르페의 어마어마한 폭로에 메테르와 바디네는 바보가 되고 만 기분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뒤를 이었다. “마왕군은 원래 그렇게 인간의 뒤통수를 치는 걸 즐겨. 신전을 손에 넣는 것으로 용사를 절망시키고 정작 용사는 죽이지 않는 거야. 그게 바로 마왕군의 방식이다.” 이번에 저놈들이 용사를 두 명도 아니고 딱 한 명 죽이겠다고 지랄을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이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작전은 분명 셰프의 손길이 닿은 것! 그리고 그 총지휘자는······. “변신의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는 마족, 제리에트. 마왕군 사천왕······ 최약체.” 전생에 아르페가 마왕군에 있었던 시절에야 그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마도 놈이 최약체일 것이다. 더욱이 아르페와 더불어 능력이 전투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있지 않아, 가뜩이나 자신들보다 레벨이 높은 적을 상대해야 하는 용사 파티에게는 가장 만만한 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교황의 이상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가 마족이었을 줄은······.” “놈은 대상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모든 특징을 복사해 변신하는 것이 가능해. 교황은 어느 순간 바꿔치기 당한 거야.” “그럴, 수가······.”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바디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알 수 있는 거죠, 아르페 님!?” “그런 고유능력이야. 내 눈 앞에 숨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 그래, 지금처럼.”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마나의 실 여러 가닥이 아무것도 없던 허공을 휘저었다. 다음 순간 복도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리며 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정말 오싹해지는 권능입니다. 과연 저의 용사님······!” “그런데 아르페.” 바디네의 두 눈 가득 사랑과 감탄이 담겼다. 반면 이제 그의 능력에 제법 익숙해진 메테르는 검을 뽑아 쥐며 물었다. “레벨 340의 적을 이길 방법은 있어? 크라켄도 에인션트 크라켄도 모두 절묘한 상황 덕분에 이길 수 있었던 적인데, 지금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하지. 어째서 마족이 인간계에서 대놓고 용사를 적대하지 않는지 넌 아직 몰라서 그래.” “응?”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하는 메테르에게 사정을 설명한 것은 아르페가 아닌 성녀였다. “마족은 인간계에서 그 능력이 약화됩니다. 마나의 차이라고도 하고 대기의 차이라고도 합니다만, 레벨의 권능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을 만큼 약화된다고 합니다.” 일행의 뒤를 따라 계단에 내려서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지닌 힘으로 그들을 더욱 약화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녀의 존재의의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래서 언제나 마왕군은 신전을 무력화하는 것을 최초의 목표로 삼는 거야. 위험을 무릅쓰고 사천왕씩이나 되는 작자가 변신해서 기어들어온 이유도 그것이고.” 실제로 전생에서는 그 작전이 아주 훌륭히 성공하여, 비록 사천왕의 목숨 또한 사라지기는 했지만 훌륭하게 신전이 초토화되었다. 성녀까지 비참하게 끝장난 것은 보너스다. “하지만 아무리 제가 그들을 약화시킬 수 있다 한들 결국 저는 전투력이 없는 성녀. 아르페 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그들을 눈치 채지 못한 척하는 수밖에 없었죠.” “오히려 눈치를 챘던 게 대단해. 놈의 변신을 꿰뚫어보는 건 평범한 용사한테도 불가능하거든.” 새삼스럽지만 아르페와 메테르는 평범한 용사가 아니다. 이미 어디서 마왕 한 마리 잡고 온 것만 같은 용사다. 그런데 성녀에 불과한 바디네가 이미 오래 전부터 신전 내부에서 꿈틀대는 불온한 기운을 눈치 채고 있던 것만도 대단한 것. “그러면 이대로 돌격하는 거야? 레벨은 340이지만 인간계라서 적이 약화되어 있는 상황에, 이 여자가 추가로 약화 주문까지 걸면······ 응, 해볼 만하겠다.” “그러나 사실 지금 상황을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는 다름 아닌 마법진입니다.” 역시 전생에 그 마법진을 사용해 마족으로 반전했던 경험이 있는 성녀다운 예리한 지적이었다. “변신 능력이 있다는 그 마족이라는 작자가 교황 성하를 먹어치워 성하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면, 그리고 마법진의 구동 능력까지도 얻었다면······ 아마도 지금 마법진의 구동 상황을 보아하니 100%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증가시킬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그렇게 되면 마법진과 묶여 움직이지 못하게 돼. 시페넌과 아리아만이 아니라 나와 메테르 둘 중 하나를 해할 셈이라면, 본인의 힘을 증가시키기보단 마계의마수를 불러내는 소환마법의 형태로 써먹을 가능성이 크지.” “소환마법······ 과연,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실제로 시페넌과 아리아가 탐색했던 제로 클래스의 내부 구역에서 발견된 교환일기에도 그 비슷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당초 레벨 250의 마수라고 쓰여 있었으니, 희생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금은 그보다 더 레벨이 높은 녀석을 부를 셈이겠지. 어쩌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수도. 그리고 그 마법의 대가로 바쳐지는 것이 바로 아리아······. 아르페의 입술이 질끈깨물렸다. “활약하고 싶어하더니 정말 기사 이야기의 여주인공 같은 짓만 골라서 하네.” “아르페······ 설마 그 여자애까지?” “아니, 걘 내가 아니라 시페넌.” 계단 아래 어두컴컴한 복도를 내달리고 있으니 더 이상 도시 상공에 떠오른 화면과 목소리는 접할 수 없다. 하지만 아리아가 처한 상태가 심각해지면 심각해졌지 나아지지는 않았으리라. 제아무리 사천왕 제리어트가 약해져 있음을 감안해도 레벨 220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페넌이 당해낼 상대는 결코 아니었으니까. ‘내가 아는 그놈이라면 허세와 잘난 척으로 용사 파티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는 정석적인 마왕군 사천왕의 역할을 해주긴 할 텐데······ 만약 시페넌이 영상을 내보내는 마도구를 들켰다면 일은 커질 거야. 아리아를 구하기 위해 무리하다 자신마저 다칠 수도 있고······ 젠장!’ 애초에 녀석들만 들키지 않았으면 좀 좋아! 그렇게만 되었으면 개심한 성녀와 두 용사의 합작으로 통쾌하게 교황과 그 핵심세력만을 엿 먹이는 고전적 시나리오대로흘러갈 수 있었을 텐데, 이대로 가다간 소중한 인재 두 명을 그대로 날려먹고 덤으로 신전까지 날려먹게 생겼다! “아르페, 저 앞에!” “다 죽여!” “알겠어!” 제로 클래스 각 구역에 퍼진 비밀 통로를 통해 마법진의 중추로 접근해오는, 신을버리고 마신을 추종하게 된 사제들! 아르페와 메테르는 용서 없이 그런 놈들을 쳐죽이며 앞으로 내달렸다. 바디네는 너무나 당황하여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는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시, 신이시여! 당신의 명을 받아 악과 맞서는 용사들에게, 그들의 기상에 어울리는 힘을! 히어로 블레스!” 그것은 오직 성녀만이, 오직 용사에게 발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려진 버프 스펠이었다. 당연하지만 아르페와 메테르가 그것을 받아본 것도 처음. 뚜렷하게 힘이 증가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그들은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일시적으로 수십 번의 레벨 업을 겹쳐 이뤄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영혼의 격을 높여주는 버프예요! 레벨이 높은 상대와 맞선다면 이게 필수일 것 같아서······.” “아, 응. 버프를 받아본 게 처음이라 색다르네.” 다행히도 이번에마저 축복이 아르페에게만 향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제아무리 바디네라 해도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만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페는 그것을 확인하곤 무심코 바디네를 보며 웃었고, 바디네는 그의 시선에 부끄러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설마 아르페 님께서 그때의 일을······? 아, 아으으. 마도에 출중하신 아르페 님이라면 알아차리셨을 수도 있어. 그렇구나, 그래서 감쪽같이 세례를······. 정말 어쩜 이렇게 대단하신 분일까.’ 아르페의 무슨 행동을 하든 결과적으로 어떻게든 호감도가 치솟고 마는 것이 메테르와 그렇게 흡사할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아르페는 그저 다시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수 명의 사제(제로 클래스에 상시 머무르는 사제의 숫자가 스물이 채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태까지 그들이 처리한 사제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은 셈이었다.)를 더 처리한 끝에, 일행은 간신히 현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페넌, 어떻게든 버티······ 응?” 그러나 마나 스트링에 자신의 마법을 담아내 곧장 현장을 엎어버릴 각오로 문을 박차고 지하광장에 들어선 다음 순간, 아르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선 안 되겠지만, 최악의 경우 이미 아리아가 사망해 마법이 완성되어 레벨 300 즈음의 머리 세 개 달린 마수 세 마리 정도가 튀어나올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리아!” “읏, 으아아아아아아!” “큭, 이, 이 년이!” 마법진의 중추는 여전히 미치도록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마법은 완성되지 않고, 마나는 마법진의 핵심에 놓인 제물, 아리아에게로 쏟아져 들어갈 뿐이었다. “뭐······?” 아르페는 눈을 비비며 현장을 다시 살폈지만 그의 능력, 만물열람으로 파악되는 정보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아리아는 자신의 고유능력을 펼치고 있었다. 마법진과, 동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2 > “한낱 레벨 3의 평민 따위가, 고유능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 격이 아득히 낮은 비천한 버러지가 어찌 마법진의 힘을!” “크, 크으으으하아아아!” 이젠 자신의 정체를 굳이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 할아버지 교황이 더없이 경악하며 아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놈의 마법은 아리아에게 맞닿는 순간 마법진 전체로 퍼져 중화되고, 마나로 되돌려져, 다시 아리아에게 부여되었다. 그 순환은 아마 아리아가 저 동화 상태에 빠진 직후부터 계속되었으리라. 당연하지만 그것은 아르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겐 마법진의 통제권도 동화능력도 없으니까. “마, 맙소사······.” “아르페, 왔으면 어떻게든 해봐! 이대론 아리아가!”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전개에 아르페가 아연해 있자니 그들의 난입을 알아챈 시페넌이 버럭 외쳤다. 이미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리 치명적인 치명상이 아닌 평범한 치명상이었다. 아무래도 제리어트가 그를 본격적으로 공격해 들어가기 전 아리아의 각성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치명상인 시점에서 평범하지 않잖아 이 자식······ 크윽!” “바보야, 치료하면 살아날 수 있는 치명상이라는 뜻이었어. 바디네, 저 녀석을 치료해줘. 부탁한다.” “아르페 님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이왕이면 전생의 사랑까지 덤으로 떠올려줘, 라는 마음을 담아 바디네에게 시페넌을 떠맡긴 후, 아르페는 전신으로 마나 줄기를 뿜어내며 사천왕과 대치했다. “큭, 용사. 빨리 왔군.” 놈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야 놈의 작전대로였더라면 용사가 찾아왔을 땐 이미 마수 소환에 성공해 든든한 마수를 거느리고 있었어야 하는데, 마법진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 데다 용사들은 성녀까지 대동하고 왔으니 그에겐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진이 네 모양대로 되지 않는 모양인데? 마왕군 사천왕 제리어트.” 놈의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다고 판단한 아르페는 여기서 놈의 정신에 더욱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사천왕의 필수 스킬,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나?’ 스킬에 시동을 걸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그래, 슬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어. 마왕군 사천왕 최약체와 만나 고전 끝에 승리하고, 아직 네 뒤로 너보다 훨씬 강한 세 명의 사천왕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가 입술을 깨무는 순간이 찾아오리라고!” “뭣!? 내가 최약체라는 것을 어떻게······!” 마왕군 사천왕 지침을 숙달하고 있는 아르페의 선제 정신공격에 제리어트는 지극히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그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보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사천왕 최약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용사를 좌절시키고 공포를 불어넣는 것! 하지만 그의 뜻을 벗어나 폭주하는 마법진을 앞에 두고 쩔쩔 매는 사천왕의 모습에서 아르페 일행은 공포의 터럭조차 느낄 수 없었다. “후, 내가 마왕군 사천왕임을 알아차린 것까지는 칭찬해주지······ 하지만 너무나거만하구나! 이제 고작 출두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용사들의 힘으로 감히 나 제리어트를 꺾어보겠다는 것인가!” 아르페는 바디네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시페넌을 향해 방금 거 확실히 찍었냐는 의문을 담은 시선을 던졌고, 시페넌은 조용히 엄지를 들어보였다. 좋아, 이걸로 완벽했다. “하지만 제리어트······ 지금 네놈은 변신을 하고 있는 상황이지. 본체의 레벨은 과연 지금의 우리가 대적하기에 힘든 감이 있지만, 교황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지금넌 평소보다 훨씬 힘이 떨어져 있는 상태야. 그렇지 않아?” “하, 그것으로 받는 레벨 패널티는 고작해야 20% 정도······.” 까지 말하던 제리어트는, 아르페의 주위로 떠오르는 무수한 마나의 실 가닥과 메테르의 손에 쥐여 빛을 발하는 바스타드 소드를 보며 말을 흐렸다. 3년간 성장해봐야 얼마나 성장했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시 마족의 모습으로 돌아오자니, 그것은······. “네가 어째서 본 모습을 되찾지 않고 있는지 내가 맞춰볼까?” “가소로운, 인간인 네가 감히 나를 읽어보겠다는 것이냐?” “지금 네가 본 모습으로 돌아가면 마법진의 통제권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때문이야, 그렇지?” “큭!?” 그렇다. 사천왕이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이전 교황을 잡아먹고 그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 그런데 그가 다시 본래 마족의 모습을 되찾으면 교황 행세를 하며 얻었던 어드밴티지는 모두 사라진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러니 마법진을 후딱 발동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자연스럽게 본 모습으로 돌아와 용사들을 압박하면 실로 완벽한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 장면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르페, 대체 아리아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위험한 거 아냐?” “위험하지. 녀석의 존재가 위험해. 대체 어떻게 저런 녀석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뭔 소리냐 대체!?” 사실 아르페는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법 여유롭게 적을 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제리어트의 정신에 연신 진실폭격을 하며 한편으로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우선, 시페넌과 아리아가 제로 클래스의 마지막 남은 구역을 탐색하다가 재수 없게도 제리어트에게 들킨 것까지는 확실해 보였다. 제리어트는 시페넌과 아리아를 조용히 처리하기 글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한편으로는 아리아가 마법진의 제물로서 더할 나위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끝내 본색을 드러내며 마법진을 가동했고, 시페넌은 영리하게도 영상전송 아티팩트를 이용해 놈의 모습을 리하제타 전역에 생중계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교황에게 덤벼들어 아리아를 구하고자 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사천왕과 맞서 싸우기엔 능력이 부족해 크나큰 상처를 입었고, 아리아는 마법진의 제물로 사용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아르페가 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인식하고 있었던 것도 딱 이 정도. 그래서 시페넌과 아리아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인데, 막상 들어와 보니 마법진에 제물로 바쳐진 아리아가 도리어 마법진의 마나와 동화를 이루어, 그 안에 훌륭하게 녹아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마법진의 발동을 지연시키는 정도인가 했는데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통제에 가까웠다. 그것은 아무리 아리아의 고유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동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런 대상하고나 할 수 있었다면 아리아는 진즉 신의 경지에 이르렀을 테니까. 하물며 마법진은 무수한 세월 거쳐 완성된 마법적 계약을 통해 지극히 일부의 대상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녀석이다. 그런 마법진과 동화하고 있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가. 만약 그게 가능하려면, 아리아는 분명······. “그래, 이 제리어트 님께서 친히 네놈들을 상대해주지!” 어차피 마법진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만큼, 결국 마법진의 통제를 포기하고 교황의 겉껍질을 벗어버리고 원래 마족으로서의 모습을 되찾는 제리어트! ······를 일단 놔두고, 아르페는 시페넌의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디네에게 외쳤다. “바디네! 저 소녀, 아리아에게······ 세례를 내려줘!” “네!? ······알겠습니다!” 아르페의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바디네는 성녀로서의 힘을 전부 발휘해 지금 마법진의 중추에 서 있는 소녀를 대상으로 세례 스킬을 발동했다. 아무런 클래스도 없이 태어난 인간에게 평생을 안고 갈 클래스를 제공하는 사제의 기본적인 스킬을! “지금 상황에 무슨 한가로운······.” “메테르!” “맡겨둬!” 그들의 영문을 알지 못할 행동에 분노하며 발을 떼는 제리어트. 그러나 놈이 일행을 방해하기 직전, 아르페는 자신의 몸 주위에 두르고 있던 마나 스트링을 일제히 놈에게 쏘아내 그 전부를 마법 장벽으로 구현했다. 비록 그 하나하나는 우습게 파훼 가능하지만, 한꺼번에 수천 개가 밀어닥치니 일단 그것들을 파괴하기 전에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감히 사천왕인 내게 이런 잔재주를······ 큭!?” 그리고 놈이 간신히 운신의 자유를 되찾았을 때에는 이미 가속으로 놈의 지척에 도달한 메테르가 눈을 빛내며 바스타드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르페, 도와줘!” “당연하지!” 둘 중 하나였다면 부족했겠지만 두 용사의 합공은 실로 완벽했다. 인간계, 그것도신성력이 집중된 공간인 제로 클래스에서 마족의 육신을 되찾아 약화된 사천왕을 상대로, 성녀의 버프 스킬을 받아 강화된 아르페와 메테르의 전력공격! 그들의 등 뒤로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날개가 각각 하나씩 피어났다. 그것이 그들의 연결을 보다 깊게 하고, 서로의 힘을 끌어올렸다. 마왕군 사천왕이라면 누구나가 질색하는 동료 사이의 진실한 유대가 명백한 물리력과 마력으로 실체화하여 놈을 괴롭히고 있었다! “건방진······ 좋다, 네년을 죽여주마!” 비록 변신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해도 제리어트는 어엿한 레벨 340의 마왕군 사천왕. 흑색의 가죽으로 뒤덮인 놈의 몸통 곳곳에서 검은 마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것이 히어로 오라에 대항하듯 불길한 빛을 뿜어내며 놈의 육신을 강화했다. “과거 변신했던 대상으로부터 수거한 힘으로 내 육신을 강화한다······ 이 능력이있기에 나는 마왕군 사천왕의 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다 알고 있으니까 설명하지 말고 그냥 덤벼!” “흐아아아압!” 기껏 능력을 자랑할 타이밍인데 아르페는 그것을 개무시하며 마법을 날렸고, 메테르는 단단해진 놈의 배때지에 바스타드를 쑤셔 넣어 피를 터트렸다. 심지어는 그 상태로 강타 스킬을 발동, 내장을 터트린다! “크하아악!” 이런 상도덕도 없는 용사들 같으니! 제리어트는 다급히 뒤로 물러서 상처를 회복하며 이를 갈았다. 과거 그가 흡수한 대상 중에는 경악스러운 회복력으로 단 5초만에······. “해설하지 말라고!” “크악! 입 밖에 내지도 않았는데!” 아르페의 부재로 새로운 사천왕 최약체로 거듭난 제리어트는 확실히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으나 그와 함께 치명적인 단점 또한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변신 능력과관계된 부가스킬을 구사하여 자신의 육체나 특성을 강화할 때 아주 조금의 딜레이가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조금의 딜레이만 있으면 아르페와 메테르가 놈을 공격하기에 충분했다! “크하아아!” 무척 화가 난 제리어트가 두꺼운 팔을 휘둘러 그대로 메테르를 가격했다! 메테르는 늦지 않게 가속 스킬을 발동해 피했지만 놈의 레벨과 파괴력은 어디 가지 않아, 시원스레 쭉 허공을 가르다 말고 그 끝에 비밀 공간의 벽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터트려 버렸다. 순식간에 공간 확장 공사가 이루어지며 전원에게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음?” 그리고 놈은 그제야 자신이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 그러고 보면 성녀가······.” 두 용사의 전투를 지원해야 할 성녀가 움직이지 않는다. 어째서? 아르페를 독차지하겠다는 욕망을 끝내 버리지 못해, 메테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움직이려 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아르페의 지시를 수행하고 있었다. 두 눈을 부릅 뜬 채, 있을 수 없는 현실에 경악하며. “아, 아르페 님. 혹시······ 혹시 이 소녀는!?” “흐아아아아아아아아!” 상대가 부여받는 클래스의 특징에 따라 짧게는 1초에서 길게는 1분을 넘겨서까지 진행되는 세례 스킬이, 비로소 그 임무를 수행하고 완료되었다. 제리어트의 난동에 의해 뚫린 천장을 통해 아리아에게 유독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리고, 그녀에게 주어진 클래스가 세상에 선명히 드러났다. “후우, 하아아아······.” 클래스를 얻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그녀가 드디어 자각하고 눈을 뜬다. “이럴, 수가······!?” “성, 녀······.”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의 눈을.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3 > 제로 클래스를 비롯해 팔라티나의 수도 리하제타에 새겨진 마법진을 구동하는 능력을 갖춘 것은 오직 교황과 성녀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선대 용사 시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계약의 산물. 제아무리 아리아에게 동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마법진의 잠금을 풀고 순순히 그 기운과 동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마법진은 그녀를 제물로 삼아 흑마법을 가동하려던 상황이니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설명해줄 유일한 가능성은 무엇인가? 그렇다. 아리아가 성녀라면 상황이 실로 간단하게 설명되는 것이다. [아리아 쿠아르 세리리타] [레벨 ? 36] [성녀] [고유능력 ? 동화] “그, 그럼 아르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당연하지. 용사가 두 명인데 성녀가 두 명이 아니라는 법도 없잖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르페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아 떨어진 것을 확인하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고? 용사가 두 명이고 성녀가 두 명이면, 이젠 마왕이 두 명이라고 해도 이상할 까닭이 없었으니까! “그, 럴 수가······.” 한편 자신의 손으로 새로이 임명한 성녀, 아리아를 바라보는 바디네의 눈빛은 실로 황망했다. 온전히 스스로만의 것이라 여겼던 지위에 다른 여자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올라서일까? 아니라면 혹여 사랑의 경쟁자가 늘어날까 긴장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자신과 같은 운명에 놓인 아리아를 동정이라도 하는 것일까. 어쩌면 전부 답이고, 전부 오답일 터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절대적으로 여겨왔던 법칙이 이 순간 완벽히 박살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리아, 괜찮아!?” “아, 아직······ 마법진을 완전히 다스릴 수 없어서!” 클래스를 얻고, 마법진으로부터 흡수하는 기록으로 인해 레벨 업을 거듭하는 과정에 있는 아리아였으나 그런 그녀라 해도 마법진을 완전히 다스릴 수는 없었다. 제리어트가 마법진의 통제를 포기하며 흑마법의 기운을 품은 채 제멋대로 폭주하는 마법진은 아리아가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금세 그녀의 육신을 집어삼킬 것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성녀로 거듭났다고 해도, 이번 전투에서 그녀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서, 설령 성녀가 두 명이었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 성녀마저 죽여, 인간의 절망과 공포를 드높일 뿐이다!” 두 번째 성녀의 등장에 무척 당황한 기색이긴 했으나, 제리어트는 아직까지 씩씩했다. 실제로 메테르의 공격을 큰 피해 없이 받아내며 반격까지 시도하는 모습이 놈에게 여력이 남아있음을 짐작케 했다. 다만 성녀는 그 존재만으로 마족의 기운을 위축시킨다. 바디네 한 명만 있을 땐 레벨 차이로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아리아가 성녀로 완벽히 거듭나 마족에 대한 억제력을 지니게 된 지금은 제아무리 제리어트가 레벨 340의 마왕군 사천왕이라 해도 부담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 이대로 가다간 자칫 제대로 된 활약도 하지 못하고, 용사를 한 명 죽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끔살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사천왕의 신분으로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나······ 이 상황에서 더 버티려 드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이미 주도권은 완벽하게 용사들에게 넘어갔으니, 지금은 우선······!’ “흐오오오오오오!” “꺄악!?” 놈의 눈이 빛난 바로 그 다음 순간, 놈의 심장 부근에서 들끓던 짙은 흑색의 마기가 순식간에 활성화되었다. 압도적인 양의 마기가 그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아르페의 마나를 무식하게 힘으로 눌러 꺾는다! “큭!? 이 무식한 놈이 누가 최약체 아니랄까 봐······!” “이블 피스트!” 놈의 두꺼운 주먹 위로 마기가 모여들어 망치의 형상을 이루는가 싶더니, 대뜸 메테르를 향해 내리쳐졌다. 피스트라고 말한 주제에 전혀 피스트가 아닌 것이 바로 스킬의 핵심! “이익!?” 놈의 주먹이 내질러질 것을 예상하며 움직이고 있던 메테르는 공간을 가득 메우고 덤벼드는 마기의 망치를 보곤, 자신이 피하면 그 뒤의 아르페 일행이 다치리라는생각에 이를 악물고 그것에 맞서 바스타드를 쳐들었다. “크하하! 쥐새끼 같이 잽싸더니, 동료를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구나!” 둘이 맞부딪히는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꺅!” “메테르!” 제대로 방어 태세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는데 레벨에서부터 밀리는 그녀가 제리어트의 혼신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메테르는 전신을 덮쳐온 충격에 순간 뒤로 내동댕이쳐졌다. 활성화한 마나 스트링으로 제리어트를 공격하려던 아르페는 혀를 차며 마나 스트링을 전부 부드러운 방어막의 형상으로 구현해 그녀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놈이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놈은 순식간에 몸을 띄워, 아까 자신이 무너트린 천장의 구멍 너머로 높이 솟구쳤다. “아차, 아무리 그래도 레벨까지 높은 놈이 먼저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저놈은 내 생각보다 더 비열한 겁쟁이 찐따였어!” “마음껏 지껄여보시지! 더 이상의 격장지계는 통하지 않는다!” 아르페는 메테르를 받아낸 직후 다급히 마나 스트링을 날렸으나 이미 두 성녀와 거리를 벌려 힘을 되찾은 사천왕은 그의 마나 스트링을 어렵지 않게 저지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나주지, 하지만 다음엔 두 용사 중 한 명의 목숨을 반드시 받아가겠다! 성녀, 네년들도 마찬가지! 모든 인간이여, 성국 팔라티나를 뒤덮은 마왕 폐하의 그림자에 두려워하며 전율하라! 으하하하하하!” 이 자식, 영상 아티팩트의 가동을 눈치 채고 있었구나! 어쩌면 눈치 채는 건 늦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한 것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놈이 이동 마법을 구사해 그 자리에서 완전히 퇴장하려던 바로 그 순간, 놈의 등 위로 나타나는 인영이 있었다. “날 잊고 있었구나, 이 개새끼야!” “큭!” 그것은 다름 아닌 시페넌이었다. 비록 바디네에게 막 치료를 받고 일어선 후였기에 몸에 힘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아르페에게 빌린 블링크 부츠를 발동해 놈의 뒤를 점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 그는 자신의 모든 마나를 담아 도적의 유니크 스킬, 행운의 일격을 발동해 놈의 뒤통수를 찍어 눌렀다. 비록 레벨의 차가 현격하여 그 위력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놈이 균형을 잃고 아주 조금,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지금입니다, 아르페 님!” 두 성녀의 영향권에 들어온 그 순간 놈의 육신은 미약하게 흑색의 안개를 뿜어내며 약화되었다. 그 틈을 놓칠 새라 바디네가 스펠 신의 쇠사슬을 구사했고, 그것은 놈에게 구속과 면역력 저하의 디버프를 부여했다. 물론 제아무리 바디네가 우수해도 사천왕과의 현격한 레벨 차를 뛰어넘지 못해 고작 몇 초의 구속 효과를 부여할 뿐이었으나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잘 했어, 바디네!” “크학!?” 그 직후, 아르페가 쏘아낸 수천 줄기의 마나 스트링으로 구현화된 거창이 놈의 복부에 정통으로 틀어박혔다! “끄르르르르륵!” 전혀 방비하지 못한 순간 틀어박힌 거창은 그 다음 순간에 놈의 육신 안에서 올올이 풀려나가 수천 줄기의 하이퍼 러빙으로 구현되었다. 이미 70레벨에 도달한 하이퍼 러빙은 그 출력을 전력으로 높일 경우 마찰열로 마족의 피라도 끓일 수 있을 정도! 그것이 동시에 수천 줄기의 마나 스트링에서 발현되니 제아무리 사천왕이라 해도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메테르.” “후우우······.” 그 다음 차례는 바로 메테르였다. 어깻죽지 위로 찬연한 반쪽 금빛의 날개를 피워 올리며, 메테르는 깊게 침잠한 눈을 뜨고 바스타드를 단단히 쥐었다. 아르페에 의해 강화되어 마력의 증폭도만 따지면 어디 전설에 나오는 성검 정도로 성장한 바스타드 소드! “전력으로 받았으니······ 전력으로 돌려줄게!” 움직일 여력까지 모두 마나로 치환하여 바스타드 소드에 부여한 메테르가, 금빛의 찬연한 오러를 발하는 검을 쥐고 도약해 제리어트의 복부에 그것을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아플 텐데, 다음 순간 아르페가 하이퍼 러빙으로 구현되었던 자신의 마나를 구현 스킬로 되돌려 메테르의 오러로 바꾸어내는 것으로 추가타를 가했다! “캬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는 고통에 제리어트의 비명이 높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르페의 공작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미숙하나마 분명 구현 스펠은 그의 통제하에 들어오는 모든 마나를 마법에서 마나로, 마나에서 마법으로 자유로이 바꾸어내는 스펠! 레코드 마스터 스킬로 인해 아르페와 메테르의 마나는 모두 공유되고 있고, 그는 메테르의 마나까지 전부 합해 오러를 마나 스트링으로, 마나 스트링을 하이퍼 러빙으로, 하이퍼 러빙을 블레이즈 스펠로 바꾸며 끊임없는 연속공격을 가했다. “크흑! 끄아아아악!?” “두 명 째의 성녀가 나타난 순간, 네가 시페넌에게 뒤를 잡힌 순간, 나한테 배때지를 뚫린 순간 넌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굉장해······ 용사님의 마법이, 끊이지 않고······!” 마법을 발현하는 데 있어 마나가 소모되는 과정은 둘로 나뉜다. 첫째는 마나를 마법의 형태로 바꾸어내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마법을 유지하며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것. 그리고 아르페의 구현 마법은 첫째 사항에 해당되는 마나의 소모량만을 감수하며지속적으로 마나의 모습을 바꾸게 하는 것이 가능한 스펠이었다. 어지간한 괴물이 아니고서야 그들의 마나가 쇠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끅, 끄르르르륵······!” 그리고 제리어트는 사천왕이기는 했으되 어지간한 괴물은 아니었다. 아르페와 메테르의 공격에 저항하며 마나를 일으켜 어떻게든 마법으로 빚어보려던 놈이 끝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카흑!” 놈이 입을 벌리자 시커먼 피가 콰르르 쏟아졌다. 그럼에도 놈은 자신의 유전자에 새겨진 그 대사를 내뱉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의 남은 힘을 쥐어짜내, 말했다. “네, 놈들······ 안도하지, 마라······ 나는······ 사천왕 최약체에, 불과하다······.” “그래, 넌 정말 최약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약했어. 네 다음으로 나타날 녀석도 전혀 무섭지가 않다 야!” 그 다음 타자, 사천왕 제 3위가 이 버러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자인 불의 마녀 에트나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은 적을 놀리고 보겠다는 각오로 무장해 놈을 깔보는 아르페! 그리고 그것은 실로 효과적이었다! “이 개자식, 꺼헉!” 원래 그 뒤를 잇는 공포와 절규의 유언을 남기려던 제리어트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혈압이 올라 더 말을 잇지도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전생과는 뒤바뀐 사천왕 최약체가, 최약체에 걸맞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큭!” 놈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아르페와 메테르의 두통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뭐 하러 아르페가 놈을 마주한 순간 기습적으로 죽여 버리지 않고 놈이 본체를 되찾는 순간을 기다렸겠는가? 바로 패널티를 모두 버리고 레벨 340의 본체로 돌아온 놈을 죽여 경험치를 온전히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어!?” “당연하지!” 모르긴 몰라도 이 고통을 견뎌내고 나면 아르페와 메테르는 레벨 300을 충분히 넘길 수 있게 되리라! “아으아파!” “아으으으으으으!” 그러나 이번엔 고통의 막춤을 추는 멤버에 두 명이 더 추가되었는데, 용사들이 사천왕에게 맞설 수 있게 한 근본적인 힘을 제공해준 성녀 바디네와 결정적인 순간 놈의 도주를 저지한 도적 시페넌이었다. 특히나 둘은 레벨이 아르페 일행과 비교해 현격히 낮았기 때문에, 경험치 할당량이 낮은 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페나 메테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레벨 업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머리, 내 머리······!” “용사님, 너무 아파요. 용사님의 손길이 필요해요······! “성장통이니까 너무 엄살 부리지 마! 그것보다······!” 사천왕의 죽음을 확신한 아르페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아직까지도 폭주하고 있는 마법진 위에 놓여 필사적으로 고유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아리아의 모습이 있었다. “지금은 저 녀석을 구해야 해. 아, 시페넌. 지금부터는 대외비니까 영상 전송 그만.” “대외비? 영상 전송은 이미 아까 끊기긴 했는데······.” “구한다니 어떻게? 아, 잠깐만 아르페. 나 알 것 같아.” 마기를 품고 폭주하는 마나, 그 마나를 받아들이며 괴로워하는 이. 아무리 메테르에게 학습능력이 없어도 이 정도로 반복되는 패턴을 몰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또 새로운 종족 탄생시키려고 그러지!” “땡.” 아르페는 그녀의 말을 일축하며 품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어 들었다. “성녀를 새로운 종족으로 만들어서 뭐할 건데. ······이번엔 오롯이 인간의 모습을 유지시켜주지.” 과거 아르페에 의해 개서되어, 본래의 뜻과는 다른 방향을 지향하게 된 마도서. 아르페의 손에서 태어난 기적이 눈을 뜨는 순간이다.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3 > 끝 ⓒ 토이카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4 > 아르페가 마도서를 펼치는 순간, 마도서가 은은한 빛을 발하며 그의 마나를 특정한 방향으로 활성화시켰다. 좋아, 그의 손으로 직접 개서한 만큼 링크는 확실한 모양이다. 그는 이어서 그것을 다시 마법진과 연결했다. 마법진이 내뿜는 빛과 마도서가 내뿜는 빛이 중간에서 섞이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로웠다. “아, 아르페 님······?” 아르페의 마나가 마법진과 연결된 것을 깨달은 아리아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아르페는 단순히 마법진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통제권을 갖고마법진에서 발현되려는 마법을 변형시키고 있었으니까. 그래, 무엇을 숨기랴. 아르페는 처음 마나를 퍼부어 워프 게이트에 등록하는 그 순간 이미 자신의 마나로 신전과 관련된 모든 관리 권한을 획득해 놓은 상태였다. 마법진의 통제 권한까지도 어느 정도. 만약 오늘 시페넌과 아리아가 교황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일은 그 시점에서 끝났으리라. 물론 이번 일은 단지 사천왕을 처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놈을 어떻게 처리하며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어떻게 성장시키느냐가 쟁점이었다. 주로 시페넌과 성녀 바디네, 그리고 나아중에 추가된 성녀 아리아까지. 그리고 마지막 과정에서 아주 조금 어긋난 것만 빼면, 일은 아주 훌륭히도 그의 의도대로 진행된 상태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걱정하지 마. 소환마법은 지금부터 내가 해제할 테니, 넌 그저 동화 능력을 최고조로 발현하면 돼.” “하, 하지만······.” “괜찮아. 이때를 위해 준비한 게 있으니까.” 마도서가 빛을 발했다. 저절로 책장을 파르르 넘기는 마도서를 내려다보는 아르페의 눈은 지극히 침잠되어 있었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본다. 시에나를 인도했을 때와 세릴을 인도했던 때, 그리고마족 티에나에게서 마기를 빼냈던 때 모두를 떠올리고······ 그 경험을 마도서를 통해 하나의 완성된 마법으로 구현해내어, 마법진에 전이시켰다. 폭주하던 마법진이, 확고한 뜻을 품은 새로운 오더에 차마 저항하지 못하고 마법의 형태를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먀?] “아니, 이번에 네 차례는 없어. 넌 저기 저 사천왕 시체의 마기나 빨아먹고 있어.” [먀먀먀먀먀먀먀!] 기껏 신경 써줬더니 돌아온 것이 차가운 대꾸라니! 분노한 로아는 아르페의 손등을 꼬리로 퍽 치고는 사천왕 제리어트의 사체로 향했다. 그러나 집중하고 있는 아르페는 로아가 자신의 품을 떠난 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마도서를 눈으로 빠르게 읽어나갔다. 그것은 마도서로 발현하는 마법의 성능을 높이고 마법진을 수월히 통제하기 위한 자기암시와 스펠 영창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시, 시페넌 씨.” “내 이름은 왜 불러. ······알았어, 가면 되잖아.” 아리아는 필사적으로 동화를 유지하면서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막 ‘성장통’에서 벗어난 시페넌은 아리아의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해 입맛을 다시면서도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주었다. 그것을 보며 메테르는 배시시 웃었고, 바디네는 불안해했다. “설마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어쩌지. 소녀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바디네가 할 필요도 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법진의 마나는 점점 더 고조되어만 갔다. 그에 맞추어 마도서가 발하는 빛도 강렬해졌다. “아리아, 동화 영역을 더 확장할 수 있겠어?” “마, 마법진의 일부만으로도 제 육신과 정신이······.” “그건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답해줘.” “가, 가능해요.” 아르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씩 웃었다. 그리곤 마도서의 출력을 높이며 외쳤다. “마법진의 모든 마나를 빨아들이겠다는 기세로 동화를 펼쳐! 마법진에 남은 마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라!” “······믿을게요!” 불과 조금 전에 선정되었다 하나 성녀는 성녀. 아르페의 확신어린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아는 스스로 제한을 걸고 있던 동화 능력을 최고조로 활성화했다. 고유능력을 다루는 한 그녀의 재능은 가히 메테르와 아르페 못지않은 수준! 순식간에 일대의 마법진을 넘어 제로 클래스, 나아가 리하제타에 설치된 마법진에까지도 그녀의 마나가 동화되었다. 그러니 제리어트의 수작으로 폭주하고 있던 마나와 마법진의 기록이 전부 그녀에게 몰려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야, 아르페에에에!” “지금! 마지막으로······ 구현!” 마기와 온갖 기운에 뒤덮여 성녀가 성녀가 아니게 되기 직전, 아르페의 손에 들린마도서가 폭발적인 빛을 뿜어내며 일대를 마비시켰다. 뻗어나간 모든 마나가 구현 스펠에 의해 특정한 형상을 갖추고, 허공에서 다시 한 차례 작은 마법진을 그려낸다! “아아아아아아아!” “아리아! 야, 내 손, 손 아파! 야!” 그것으로, 완성이었다. “후우······.” 눈부신 빛의 폭발 속에서, 아르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마도서를 덮었다. 순간이었지만 전력을 다한 마법이었다.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끝.” “어라?” 그 사실에 가장 놀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메테르였다. “아르페, 벌써 끝났어? 엄청 오래 끙끙댈 줄 알았는데!” “언제까지고 같은 패턴이어선 나도 마왕군도 지치거든. 슬슬 쉽게 처리할 때도 됐지 뭐.” 빛이 사그라지며 마법진 한가운데에 묶여 있던 아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 더 이상 그곳에 마법진은 없었다. 그저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다만 어딘가 고귀한아우라를 풍기는 아리아 한 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아, 마법진은 잘 써먹을 확률보다 마왕군에 이용당할 확률이 더 높아. 그래서 제거했다.” “제거하다니······ 수백 년의 역사와 기록이 담긴 마법인데 그것을 그렇게 쉽게 제거하셨단 말인가요!?” “응, 마도서랑 아리아에 반반 나누니까 됐어.” “반반!?” 마법진의 기록이 삶은 무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반반으로 가르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 아르페는 경악하는 바디네를 놔두고, 이미 사라지고 없는 마법진의 중심 즈음에 주저앉은 아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아리아.” “아, 르페 님······.” 그녀는 고유능력을 지나치게 발현한 끝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지 않은 듯,시페넌에게 몸을 기대어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꺼번에 레벨이 너무 많이 올라 힘들 거야. 그래도 몸에 악영향이 갈 일은 없을테니 안심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하지만 아리아의 몸에 마기라곤 없었다. 자칫 그녀를 제물로 마수를 소환하거나, 아예 그녀의 몸에 마족을 강림시킬 가능성마저 보였던 마법진은 아르페의 마도서에 의해 모든 마기를 반전시켰고, 마지막으로 구현 스펠이 발동하여 그것을 모두 아리아에게 밀어 넣었으니까. [아리아 쿠아르 세리리타] [레벨 ? 231] [성녀] 그 결과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레벨 업이 일어날 수 있었다. “후, 후우······.” “레벨이 너무 많이 올라? 아르페, 그게 뭔 소리냐?” “뭔 소리긴, 아리아가 너보다 레벨이 높아졌다는 얘기지.” “그게 뭔 소리야!?” “방금 설명해줬잖아 임마!” 성장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마나와 기록. 대부분의 경우 다른 생명을 해하거나 위업을 달성했을 때에 이 성장이 이루어지지만, 아리아는 무척 특수한 경우에서 압도적인 양의 마나와 기록을 제공받은 끝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르페와 메테르의 레벨이 워낙 높아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 아리아의 레벨은 2년간 아르페의 레시피를 따라오며 성장한 천재 도적 시페넌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아르페, 설마 처음부터 이 아이를 성장시킬 생각으로······?” “아니, 어차피 다른 데 낭비할 마나라면 유망주를 육성하는 데에 쓰자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마침 동화 능력으로 마법진과 동화했으니까, 이때다 싶어서.” “······.” 메테르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러나 전생에서 이 마법진이 어디에 쓰였는지 알게 된다면 그녀도 납득하리라! “시페넌, 아리아가 많이 지쳤을 테니 데리고 가서 쉬어. 아마 지금쯤 도시가 통째로 뒤집어졌을 테니, 우리는 그걸 수습하러 갈게.” “왜 내가? 그러니까······ 아리아가 두 번째의 성녀라면, 앞으로는 너희와 행동해야 할 텐데 지금 사람들 앞에 같이 모습을 드러내는 쪽이.” 시페넌이 그렇게 말한 순간 아리아가 무심코 그의 팔뚝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것을 본 아르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리아는 너희 파티야. 우리 파티에는 이미 바디네가 있잖아.” “하지만 용사를 보조하는 것이 성녀의 역할이라며······ 아, 아프다고!” “히잉.” 아리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아르페와 둔팅이 시페넌과 울먹이는 아리아. 그때 바디네가 몹시 당황하며 끼어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르페 님. 아르페 님의 판단과 행동에 감히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하지만 성녀는 그럴 수 없어요.” “응?” “성녀는 용사를 보조해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용사와 맺어지는 존재! 아리아라는 아이가 성녀가 되기 전이었으면 모르되, 저렇게 찬란한 금안을 지닌 성녀가 된 지금이라면 그녀는 용사가 아닌 다른 사람과는······.” “아······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음······ 그러니까. 그래.” 아르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바디네, 넌 큰 착각을 하고 있어.” 바디네가 품고 있는 모든 말도 안 되는 환상, 지금 그의 입으로 쳐부숴주기로. “······네?” “성녀든 용사든,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클래스일 뿐 권리도 의무도 아냐.” “네······?” “다시 말해주면.” 아르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성녀가 반드시 용사와 같은 파티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제한도, 성녀는 용사를 사랑하게 된다는 법칙도, 용사 외의 다른 남자와는 맺어질 수 없다는 규율도······ 그 따위 말은 전부 전승이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라는 얘기지.” “······예?” 바디네는 아연한 얼굴이 되었고, 아리아는 안도를 감추지 못했고, 시페넌은 지금까지도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알아듣지를 못하는 표정이었다. 오직 메테르만이 사태를 완벽히 파악해 키득거릴 뿐이었다. 정말 이럴 때 보면 평소의 그녀와 괴리감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다. “그, 그러니까······ 제가 용사님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뜻?”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실제로 지금 아리아를 보면······.” “으와아아아아아아아!” 아르페가 인정사정없이 아리아의 순정을 까발리려던 순간 아리아가 큰 소리를 질러 그의 말을 막았다. 아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어 보이더니 제법 기운이 난 모양이다. 아르페는 히죽 웃으며 그치? 하고 바디네에게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딱히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건 잠을 자건 아이를 낳건, 신은 그녀를 처벌하지 않아.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내맡겼는데 감정까지 통제하려 한다고? 그 따위 신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신이 아니라 마신이지.” “이럴, 수가······ 그러면 전 여태까지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렇지.” 바디네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아르페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여 믿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여태까지의 그녀였다면 아르페의 말이 이렇게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실 된 용사가 두 명, 그녀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난 성녀, 교황의 육신을 뒤집어쓰고 나타났다가 허무하게 사망한 사천왕 최약체 등등 그녀의상식을 부수는 현실이 너무나 많이 나타난 탓에 지금은 확고한 자아에 금이 가 있던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에 그녀 자신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아르페가 아예 망치를 들고 덤벼들었으니, 와장창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랬, 군요······.” 그러나 다음 순간,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 바디네의 얼굴 표정은 어째선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저는 여태까지, 제가 성녀이기에 아르페 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 “아르페, 저 여자 죽여도 되지?” “안 된다니까.” “그런데 아니었군요.” 어라, 어쩐지 인트로가 불길한데, 하고 생각한 아르페는 그쯤에서 그만두자며 바디네를 말리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바디네가 더 빨랐다. “저는 그저 당신께 반했을 뿐이었군요! 성녀라서가 아니라, 그저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뿐이었어요!” “아······.” “후······.” “와오······.” “아아,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요, 이것을 사람은 운명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그녀의 눈이 금빛 찬란하게 광채를 발했다. 새로 임명된 성녀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강렬하게! 어째 이렇게 될 것 같아 불안했던 아르페는 그대로 쩌적 굳어버리고 말았고, 메테르는 바스타드를 뽑았으며, 아리아는 성녀의 적극적인 사랑고백에 괜히 자신까지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러워졌고, “저 망할 개자식. 세상 여자를 다 가져라, 다!” 눈치코치 더럽게 없는 시페넌은 어째서 이 화제가 대두되었는지도 모르고 아르페를 마냥 저주할 따름이었다.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4 > 끝 ⓒ 토이카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5 > 교황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던 마왕군 사천왕 최약체가 용사와 성녀의 손에 의해 토벌된 바로 그 날 밤, 리하제타는 잠들지 못했다. 야밤중에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영상은 깨어있던 시민 모두를 집중시켰고 잠들어있던 시민 모두를 깨웠으니까. 교황의 난데없는 악당놀이와 하녀를 인질로 붙잡은 모습, 그와 대적하는 용사들. 결정적으로 교황이 마족으로 화하는 모습까지. 차라리 실감나는 연극이라는 쪽이 더 설득력이 높을 기괴한 영상을 보며 사람들은 혼의 출타 현상을 겪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상 속에서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실제로 리하제타 심부의 제로 클래스에서 실시간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빛이 솟구치고 마기가 풍산하는 것을 느끼며 그것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실로 다행인 것은 영상이 뚜렷하지 않아 아리아가 제 2의 성녀로 각성하는 모습까지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드러났으면 드러난 대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아르페에게는 이쪽이 더 사정이 좋았다. [정말, 꼭두새벽에 사람을 불러내다니 실례에요, 실례. 아르페 님이 아니었더라면 받지도 않았을······.] “이쪽은 아직 밤이니까 쌤쌤이 치자. 그보다도 상회와 연락해서 전 대륙에 퍼트려줬으면 하는 영상 첨부 소식이 있는데.” [뭔데요?] “교황으로 변신해 있던 마왕군 사천왕을 순조로이 격파했어.” [······.] “빅 이슈지?” [······내가 정말 못 살아. 간부 파견할 테니 단독 특집 부탁드려요!] 팔라티나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신전을 한 번 뒤집어 놓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만큼 아르페의 움직임은 실로 신속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리하제타의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려 안정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이 팔라티나, 마지막으로는 바로 얼마 전 용사의 출두를 알게 되어 얼떨떨해하고 있던 대륙 사람들에게 신전 내부에까지 침투한 마족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경각심을 제대로 일깨우는 것. 제로 클래스를 모두 개방하고, 그 안에 쌓여온 썩은 물을 세상에 드러낸다. 신전의 부패를, 마왕군의 존재를 드러내는 뚜렷한 증거자료가 리하제타의, 팔라티나의,전 대륙의 인간들에게 공개되는 순간이다. 아르페는 르세티, 데이스와 연락해 리하제타의 수습을 떠맡기고 미케나에게는 그들이 벌이는 일들을 전 대륙으로 퍼트리도록 부탁했다. 그 후 자신은 메테르, 바디네와 함께 제로 클래스로 모여드는 사제들을 수습했다. “이, 이럴 수가. 성하께서 정말로 마왕군 사천왕에게 당하셨다니······.” “아리아, 내 딸! 용사님, 내 딸은 무사합니까!?” “이 기록들을 보게! 맙소사, 제로 클래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아, 저 자는 썩었네요.” “응, 너 처단.” “끄악!” 제일 큰 적인 교황이 사라진 이상 더는 망설일 필요도 없다. 아르페와 바디네는 제로 클래스의 ‘썩은 물’과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그 자리에서 처단하고 결백한 이들만을 남겼다. 용사와 성녀에 의한 철혈의 집행! 사제들은 제로 클래스가 있던 곳에 새로 생긴 폐허에 쌓이는 썩은 자들의 사체의 언덕을 보며 전율했다. “실로 냉정과감하다. 아르페 님께서 여태 모습을 감추고 계셨던 것은 바로 신전 내부의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였구나!” “저 판단력, 인내······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어.” “이번 대의 용사는 최강이다. 마계로 넘어가기도 전부터 사천왕을 한 마리 잡고 시작하다니!” 사실 그 부분은 전생의 용사도 그랬다. 당시 마왕의 레시피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한 가지, 바로 사천왕 최약체보다 제3위가 먼저 당했다는 것. 그때의 변수는 마법진에 능통한 성녀가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의 전모를 파악하고있었다는 것이고······ 용사 측의 실수는 성녀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 사천왕과 함께 성녀까지 잃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바로잡는 데 성공했지. 사천왕도 계획대로 죽였고, 바디네도······계획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확실한 아군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어.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두 번째 성녀 아리아가 탄생했다는 것. 아르페는 그것을 떠올리면 골치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전부터 의심스럽기는 했다. 마왕의 고유능력 절대지배에 속박되지 않은 채 세상을 활보하던 마족 티에나와 만났을 때도 그랬고, 에트나가 자신 위로 두 명의 사천왕이 더 있다는 얘기를 할 때도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두 명 째의 성녀가 탄생하며 확실해졌다. 아마 마계에는 두 명 째의 마왕이 있을 것이다. “끄앙악앙악.” 전생에서 200년 겪어봐서 안다. 운명이라는 놈은 충분히 역사를 그렇게 꼬아놓고도 남을 놈이다! 마왕을 후딱 처리하고 맘 편히 낙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던 아르페는 넘어야 할 산이 두 개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용사님, 왜 그러시나요?” “후,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사람은? 다 모였어?” “리하제타의 사제는 전부 모인 것 같습니다.” 아르페는 제로 클래스를 완전히 부수어 만든 공터를 가득 채운 사제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에는 영상 전송 아티팩트를 들고 이 광장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데이스와 르세티의 모습이, 다른 한쪽에는 애니웨어 상회에서 파견 나온 간부 한 명이 마찬가지로 아티팩트를 들고 서 있었다. 대륙을 뛰어넘는 영상 전송 시스템은 구축하는 것만으로 어마무지한 돈과 마력이소모되지만, 이번 이슈가 이슈인 만큼 모두가 손해를 감수하고 있었다. “우선, 모두 여기를 주목해줘.”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사천왕 제리어트의 사체를 꺼내어 놓았다. 더 이상 변신은 지속되지 않기에 마기가 풀풀 풍겨 나오고 있는 놈의 사체는, 그러나 여전히교황에게만 주어지는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어 그 모습이 실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었다. [먀.] “안 돼, 적어도 사천왕이었다는 흔적은 남겨놔야 될 거 아냐.” [먀아아아.] 로아는 사체에 남은 마기를 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지금은 그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바디네는 그것을 보며 새삼스레 깨닫는 것이 있었다. “평범한 고양이가 아녔군요. 마기를 모두 잡아먹는 고양이······ 과연 용사의 애완동물로는 그 이상 가는 아이가 없겠어요.” [먀먀아.] “방금 무슨 말을 한 건가요?” “너 예쁘대.” “······흐훗, 고마워라.” 실은 ‘너도 엄청 썩은 내가 나는데 신기하게 마기랑은 관련이 없네?’라는 뉘앙스였지만, 아르페는 바디네를 위해 굳이 그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기껏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성녀가 다시 흑화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다. 그는 사천왕의 사체에 시선이 집중된 사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다들 보고 있겠지? 아마 간밤의 도시를 밝혀주었던 영상 또한 모두 보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증거는 여기에 모두 다 있다. 지금 우리는 리하제타에, 팔라티나에, 그리고 전 대륙에 알리고자 한다.” 아르페는 사천왕의 사체를 들어올렸다. 교황의 성의를 입고 있는 추악한 사체의 모습이 모든 이의 눈에, 영상전송 아티팩트에 선명하게 담겼다. “용사를 돕고 마왕군을 물리치기 위해 구성되었던 신전의 제로 클래스에서, 마왕군의 사천왕이 교황을 사칭하며 다른 사제들을 마신추종자로 만들고 있었다. 용사를 축복한다는 작자들이 용사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성녀바디네와, 다른 내 동료의 도움을 받아 그 음모를 미리 알아차리고······.” 물론 구라지만. “마수를 소환해 우리를 죽이려던 사천왕을 무사히 참살, 그 과정에서 제로 클래스는 물론 리하제타 전역에 퍼진 마법진까지도 모두 무력화했다. 비록 마왕군에 대적할 강력한 카드를 잃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정체를모르는 적보다도 위험한 법. 수백 년의 역사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 대가로 사천왕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이제 나아가 아직까지 신전 내부에 자리 잡은 썩은 것들을 잡아 족치고, 모든 것을 원래 있어야 할 방향으로 되돌릴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용사님! 이쪽을 봐주세요!” 용사가 아니라 교주를 해도 될 것 같은 아르페의 유창한 연설! 열광하는 사제들의모습을 보며 아르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바보들뿐이라 편하네.” “아르페, 속내는 좀 숨겨.” 그가 앞으로 나선 것은 비단 리하제타의 사제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 그들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사천왕 처단이라는 실적을 단단히 보고해 그 어느 나라도 그들을 소홀히 대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분명 대륙 곳곳에 숨어 있을 마족들을 향해 이제 슬슬 대놓고붙어보자는 선전포고를 때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을 빛내며 강렬한 목소리로 연설하시는 아르페 님······ 후욱후욱.” “으음, 역시 죽이고 싶은데.” [먀아아먀아.] 아르페는 그 후로도 여태까지 시페넌과 아리아가 수집한 자료들을 꺼내며 공개적으로 신전 내부에 잠들어 있던 비리를 낱낱이 밝혔다. 그 과정에서 에이디아 때와 같이 어설프게 다른 사제들 사이에 숨어 있던 마신추종자들을 깔끔하게 죽여 효수한 것은 물론이었다. “용사는 다 아는구나.” “용사님은 모두 다 알고 계신다!” 리하제타의 소동은 그렇게 해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팔라티나는 새로운 교황을 뽑기 위해 부산해졌고, 아르페가 부순 제로 클래스의 폐허 위에는 모든 사제가 출입할 수 있는 새로운 사제관과 신전이 만들어지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렇게 되자 아르페가 신전에서 처리하고 넘어가야 할 일은 딱 한 가지가 남은 셈이 되었다. 사람들을 물리고 적당한 숙소에 자리를 잡은 후. 그는 애타게 딸을 찾는 사제, 리하제타의 대주교를 그 안으로 불러들였다. “용사님, 제 딸은 무사합니까?” “아리아 쿠아르 세리리타를 말하는 것이라면, 무사해.” “오오오오!” 아르페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대주교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그녀는 하녀 노릇을 못하게 될 거야. 물론 리하제타의 본단에서 사제로 일하는 것도 힘들어지겠지. 그녀를 우리 파티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거든.” “이럴 수가,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만······ 우리 아이는 아직 약합니다.” “하지만 특별해. 당신도 알고 있겠지?” 대주교는 그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리아는 특별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의 레벨이 순식간에 높아지는 것은······.”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 당신이 유념해야 할 것은 단 두 가지. 아리아가 우리 파티에 소속되었음을 비밀로 할 것, 그리고······ 그녀의 클래스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 “아리아의 클래스······?” 아르페는 대답 없이 영혼의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새벽에 애니웨어 상회에서 구입한 따끈따끈한 최고급품이었다. 참고로 바디네의 흑화를 막기 위해서도 일단 그녀에게 멋대로 굴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사인을 받아두었다. 바디네는 어째서인지 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더 흥분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사인하시지.” “······알겠습니다.” 그는 대주교가 사인을 마치기를 기다려, 손가락을 튕겼다. 처음부터 방 안에 대기하고 있던 아리아가 얌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아?” “아버님.” “너······.” “에헤헤.” 아리아가 계면쩍게 웃었다. 그녀 뒤로 드러나는 후광을 느끼며 대주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신실한 대주교인 그가, 자신의 딸이 얻은 클래스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모든 소동이 마무리된 다음날, 용사 일행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리하제타를 떠났다. < Chapter 24. 더블 크라이시스 - 5 > 끝 ⓒ 토이카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1 > 야밤에 아무도 모르게 리하제타를 나선 일행. 아르페와 메테르는 물론이고 바디네, 시페넌, 아리아와 르세티, 데이스까지도 함께였다. 교황이 선출되는 것까지 보고 갈까 싶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다. 가뜩이나 마계에 선전포고를 때린 상황인데 느긋하게 한곳에 머무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후우, 자고 싶다.” “내가 업어줄 테니까 잘래, 아르페?” “아냐. 참아줘.” 언제나와 같은 아르페와 메테르의 대화를 들으며 부러움과 질투로 몸을 떨던 시페넌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러고 보니까 아르페, 처음에는 이번 일로 우리의 합류 여부를 정한다고 하지 않았었냐?” “그랬지. 그리고 정했어. 우리는 이대로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을 걷게 될 거야······.” “이 자식이!?” 아르페의 말에 시페넌이 아르페의 멱살을 붙잡으려다가는 메테르의 칼날같은 시선과 마주하고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아르페가 설명했다. “아리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합류를 결정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시페넌, 이젠 아냐.” “성녀가 한 명 늘어나면 좋은 거잖아! 이번에 상대한 사천왕도 충분히 약화시킬 수 있었고!” “그보다는 성녀를 한 명씩 보유한 두 개의 파티가 활약하는 쪽이 적을 더 혼란시킬 수 있어. 무엇보다······.” 마계에 두 명의 마왕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지금, 여덟 명 이상으로 구성된 파티로우르르 몰려다녀봤자 적의 표적이 되기 딱 좋을 뿐이다. 용사 파티가 마왕군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볍고 날카로운 창이었기 때문. 이쪽이 몸집을 필요 이상으로 불려서 좋을 게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렇게 두 개의 파티로 나뉘어 다니자. 이걸로 너희도 파티의 균형이 제법 완벽해졌잖아?” “그래도 우린 너희에 비하면 아직 약한데.” “그러니 강해져야겠지. 적의 어그로를 끄는 것은 우리다. 너희는 몰래 숨어서 일단 힘을 키우도록. 두 개의 용사 파티로 마왕군을 상대하는 거야.” “······너.” 시페넌은 그제야 아르페가 얼마 전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가 아리아를 굳이 시페넌과 함께 하도록 했는지, 그녀를 어째서 노출시키지 않았는지. 어째서 그가 바디네, 메테르와 함께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는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 용사 파티가 나서서 가짜 용사 파티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니 멍청한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그래서 더욱 당황했다! “그렇다고 너희를 방패막이 시키고 마왕성으로 쳐들어가자니 너흰 너무 약하잖아. 그러니 반대로 하는 수밖에.” “우리 강해. 괜찮아.” 아르페의 말에 이어지는 메테르의 담담한 말에 시페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야, 아르페와 메테르의 힘이 자신으로선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 이번에 사천왕을 물리치며 더욱 강해지기까지 했을 터. 하지만 어째설까, 그들이 무모해 보이는 것은. “그러니 노력하도록. 르세티, 데이스. 할 수 있겠지?” “용사 파티라니, 내가 그런 이름을 짊어지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저는 그저 당신이 시키는 일을 해야지요, 어쩌겠습니까.” 르세티와 데이스의 대답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둘 다 발을 빼려 하지 않는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혼란스러운 시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그들은 시대를 바꾸어놓는 흐름에 일조하고 있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으리라. “목숨을 걸고서 말이지?” “마왕군이 승리하면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거나 마왕의 뜻대로 놀아나거나 둘 중하나야.” 아르페는 그렇게 담담하게 말하곤 마지막으로 시페넌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소녀, 아리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불과 열흘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이 돌변하여 모든 것이 어렵고 낯설 그녀는, 그럼에도 성녀라는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와 시페넌을 붙여놓은 것도 그녀의 힘을 북돋워준 이유겠지만······. “아리아, 힘내.” “네, 아르페 님. 성녀의 몸으로 용사님을 옆에서 보조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죄송하지만······ 이것도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일이라 믿고 지금은 시페넌 씨의 곁에서 힘낼게요.” “그래, 그걸로 충분해.” 시페넌은 그것을 들으며 아르페의 파티로 가지 못해서 정말 애석해 하는구나, 하고 불퉁하게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빙 둘러 말하는 아리아의 말에서 충분히 그녀가 지금 상황에 무척 만족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페넌을 보는 르세티의 표정이 새하얘졌지만 그녀는 아리아를 생각해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럼 간다. 너희는 우선 르세티와 데이스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데에 집중해줘.” “근 2년간 던전에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어. 맡겨둬라.” 아르페와 시페넌이 마지막으로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는 것을 이별 인사로 삼아, 두 파티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페넌 일행은 예정했던 대로 근처의 던전을 순회하며 실력을 키울 예정이었다.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가네. ······메테르는 이제 포기할까.” “그래요, 메테르 님은 아르페 님이 아니면 죽어버릴 것 같은 분이었으니까요.” 성녀 아리아의 직언에 시페넌은 끙, 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명색이 호위기사라는 르세티는 주인을 달래주기는커녕 떠나가는 아르페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아르페, 더 잘생겨졌네······. 이젠 완전히 어른이 다 되었어요. 게다가 왜 남자애가 무슨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 색기가 묻어나온담. 후우······ 스읍.” “미련과 욕망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구나, 르세티. 아예 그쪽으로 파티를 옮기지 그랬냐.” 불퉁한 시페넌의 대꾸에, 그러나 다음 순간 르세티는 피식 웃어버리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도 우리 시페넌 님을 제가 아니면 누가 모시겠어요. 제 청춘을 바쳐서라도 가짜 용사 역할을 달성하게 해야죠.” “쿠쿠, 르세티 씨는 참 좋은 분이네요.” “어머나, 그걸 알아보다니 제법이구나.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벌써 사이가 좋아진 르세티와 아리아의 모습에 시페넌의 입술이 더 부루퉁해졌다. 그러나 얼추 그녀들의 마음을 짐작하는 데이스는 살짝 시페넌이 재수가 없었다. “빨리 가죠, 시페넌 님.” “가뜩이나 슬픈데 왜 너까지 심통이냐, 데이스.” “아, 빨리 가죠! 몬스터나 좀 잡게!” “이 자식이!?” 레벨 231의 고유능력 첨부 성녀를 새로운 파티원으로 획득한 시페넌 파티는 이제 정말 어디 가서 용사 파티를 지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능력을 갖추고 다시금 던전탐색을 위해 이동했다. 아마도 세상은 그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터이나, 그들의 힘이 드러나는 순간 마왕군이 정말 제대로 엿을 먹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편 아르페 일행의 이동속도는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빨랐다. 그들이 에이디아에서 팔라티나로 넘어와 머무르는 기간 동안 더욱 멀어지고 만 나머지 일행을 따라잡아야 했으니 그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번에 대륙 각지에 퍼진 워프 게이트의 위치를 모두 파악한 데다, 이용할 권리까지 획득했지. 후후, 이제 제법 용사 파티답게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어가는 기분인데.” “시스템······?” “후, 들어봐.” 아르페는 친절하게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보통 용사 이야기 초반에는 용사가 가는 곳마다 포커스를 맞추잖아? 어느 마을이니 어느 던전이니 세세한 부분마다.” “그렇죠?” “그런데 어느 이야기책이든, 중반 이상 넘어가면서부터는 슬슬 용사가 마주해야 할 강적, 그러니까 나라, 대륙, 드래곤, 마왕군 따위의 적을 내보내지 용사가 어떤 마을에서 뭘 먹었는지, 그 마을의 어떤 여자가 예뻤는지 따위는 별로 묘사를 하고 싶지 않아 하거든.” “그야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도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보다는 용사의 활약상을 듣고 싶어 하니까요.” “바로 그거야.” 그래서다. 그럴 때쯤 해서 용사들은 워프나 초장거리 이동 마법, 하늘을 매우 빠르게 날아다니는 펫과 같은 이동수단을 획득하게 된다. 딱히 그들의 능력이 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야기 전개의 편의성을 위하여! “그러니까 오랜만에 우리가 용사 이야기의 왕도를 걷고 있다는 얘기야.” “굉장해요, 그런 해석도 가능했군요!” “······아르페가 굉장히 쓸데없는 걸로 거들먹거리는 것 같은데.” 그저 아르페를 띄워주는 것이 목적인 바디네와 그 사이 제법 태클 실력이 늘어난 메테르. 이 둘과 다니는 것도 제법 재미있겠지만······. “이제 일행과 합류해야지. 시에나한테 줄 선물도 잔뜩 챙겼고.”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신성 계열 스펠 북과 신성 전투 계열 스킬 북을 내보이는 아르페. 메테르는 그건 또 언제 챙겼냐고 물어보려다가는 아르페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로아를 보며 추궁을 포기했다. “신전의 모든 것은 용사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시에나라는 분은 혹시?” “여자야. 레이제나라는 애도 있는데 걔도 여자야.” “······.” 레이제나를 여자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느냐, 는 제법 어려운 문제이기는 했지만 아마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여자애로 보일 터다. 메테르의 말에 순간 바디네의 얼굴이쩌적 굳었으나, 다음 순간엔 애써 평정을 찾았다. “그, 그렇지요. 아무렴 아르페 님의 매력을 다른 이들이라고 모를 리가······.” “이동하자.” 기껏 잠재운 바디네의 다크 사이드를 다시 건드리기 싫었던 아르페가 다급히 일행을 포함한 수백 미터 거리의 블링크를 실시했다. 바디네와 메테르는 얌전히 아르페에게 달라붙어, 다음 순간 서로를 째릿 노려보고는 흥, 코웃음을 쳤다. 직후 약속이나 했다는 듯 서로를 씹는 것이, 어쩜 이렇게 하는 짓이 똑같은지 알 수가 없다. “차라리 두 명 째의 성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마음 놓고 모함할 수 있었는데.” “성녀, 다시 한 명으로 만들어줄까?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후후, 그거 참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그러고 보면 성녀를 공격하는 용사는 용사일 수가 없겠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르페 님?” “······우리 용사 파티 맞지?” 한편 그 시각, 아르페와 떨어지고 무려 스무 날 이상이 흘러 극심한 아르페 결핍증에 걸린 시에나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레이제나는 아르페의 지시대로 북방 국가 다이탄의 북쪽, 인간은 발을 들이지 않는 빙하대륙 글라케이아에 도착해 있었다. “힝, 오빠 보고 싶어. 추워. 오빠 보고 싶어.” “시에나는 이미,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레벨.” “아냐, 내 마음이 추워. 오빠가 없어서 꽁꽁 얼어붙고 말았어.” “과연 시에나, 웃기는 농담.” “······레이, 실은 나 미워해?” 둘 모두 레벨이 270을 가뿐히 넘겼기에 제아무리 빙하 대륙의 한복판에 서 있어도 별반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아무렴 아르페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오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 있으면 봄이 대체 언제 오는 건지도 모르겠는걸. 아니, 애초에 봄이란 건 뭘까? 오빠가 없는 봄을, 과연 나는 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시에나, 감성 충만. 부러움.” 하지만 아르페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빙하대륙 글라케이아에서 봄이 오기 전에 찾아야 한다고 했으니 봄이 오기 전에 찾아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지도에, 던전의 위치 나옴. 이곳 위주로, 성장하며 수색.” “응, 우리 빨리 레벨 업해서 메테르 언니를 뛰어넘어버리자.” “긍정. ······그런데 저것, 무엇?” 아르페와 메테르가 사천왕을 뚜드려 잡고 레벨 300의 고지에 근접한 것도 모르고 둘이 의기투합하며 모처럼 의욕을 불태우던 그때, 레이제나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보였다. “어라?” 온통 빙하로 뒤덮인 대륙 글라케이아의 한가운데에서 증기가 펄펄 솟구치는 것이아닌가. 시에나 역시 그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저게 대체 뭐지? 아, 저 멀리 사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해.” “······강력한 마나, 감지. 터무니없이, 강력한 마나.” “어······ 나, 저 마나 아는 것 같은데······.” 피부로 느껴지는 싸늘한 바람을 온풍으로 뒤바꾸어 버릴 만큼 압도적인 열기. 딱히 마나를 활성화하지 않았음에도 주위 모든 마나가 그녀에게 위축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니, 어디를 가든 온전한 그녀만의 영역이 확보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 설령 그것이 얼어붙도록 싸늘한 마나로 가득한 빙하대륙이라고 해도. “레이, 도망치자.” “긍정.” 시에나는 저쪽에서 그들을 파악하기 전 빠르게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레이제나가 그녀를 붙잡고 혹시나 이럴 때를 대비해 아르페가 마련해준 공간이동 아티팩트를 이용해 빠르고 신속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때, 불운하게도 적이 그들을 탐지해내고 말았다! “아, 거기 소녀! 도와줘어어어어어!” “큭!?” 지닌바 힘에 어울리지 않는 살짝 나사 빠진 목소리에 시에나가 다리를 삐끗했다. 레이제나가 다급히 그녀를 부축했으나 이미 적에게 체크당한 이상 쉬이 도망칠 수는 없다! “여기 자꾸 녹아! 다리가 빠져어어어!” “······시에나, 전략 수정?” “응, 이미 도주는 무리야······ 에휴, 저 여자한테 가보자.” “긍정.” 도망칠 수도,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시에나와 레이제나는 전략을 도주에서 접촉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저쪽에서 먼저 시에나를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이미 몸은 반쯤 물에 잠겨 있었는데 그 물이 펄펄 끓으며 주위 얼음까지 녹이는 것이 실로 무서웠다. “아, 역시 저번에 만났던 애다! 헉, 그런데 너 엄청 강해졌네!?” “그쪽은 변함없이······ 뜨거우시네욧!” 그녀의 이름은 에트나 칼리파드이 미레카드, 마왕군 사천왕을 맡고 있는 여자였다.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1 > 끝 ⓒ 토이카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2 > “겨울정령의 가호.” “고마워!” 레이제나의 마법이 발현되고 나자 에트나의 몸 주위로 피어나던 화염 성질의 마나가 어느 정도 기가 죽었다. 에트나 스스로는 결코 자신의 육체 온도와 마나를 진정시킬 수 없으나, 레이제나 정도의 마도사가 되면 그런 그녀의 마나를 진정시킬 수준은 되는 것이다. “마나 저항력, 터무니없음.” “미안해, 받아들인다고 받아들이는데도······.” 물론 에트나가 그녀의 마법을 허락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이런 괴물, 어디서 알게 됨?” “음, 그게 있지······ 어쩌다 보니, 도움을 받았어.” 레이제나는 아직 에트나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가 제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에트나는 레벨 370을 넘기는 마족 최상위의 실력자. 애초에 마기보다는 화기에 가까운 마나를 지닌 그녀이기에, 전생을 경험한 아르페나 모든 마족의 대척점에 선 이블 리플렉터 시에나 정도가 아니고선 한눈에 에트나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상은 넓음. 실감하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 “나야말로, 아르페 말고도 어린 나이에 이렇게나 강한 아이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 놀라운걸.” “······.” 평소의 그녀였더라면 어리다는 말에 너보다 연상이라며 반박했을 터이나, 레이제나는 그보다 그녀가 한 말의 다른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 “아르페와 아는 사이?” “응. 역시 너도 아르페의 파티원이구나? 그런데 그······ 아르페는 같이 없네?” “······이쯤 되면, 경이. 대단한 남자.” 혹시나 아르페가 숨어 있나, 기대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에트나를 보며 레이제나는 경악에 이르고 말았다. 대체 아르페는 여자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시에나는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런데 에트나 씨······? 는, 여기서 뭐하세요?” “응, 실은 내가 찾고 있는 게 있거든. 고대 마······ 도서에서 발견한 건데, 이 글라케이아의 유적에 그 물건이 있다는 정보를 얻어서.” “유적?” 아르페가 가르쳐준 것도 유적이었는데, 어째설까. 일행이 찾는 유적과 에트나가 찾는다는 유적이 겹칠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시에나는 아르페가 유적에서 수거해오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에트나에게 물었다. “혹시 찾으시는 물건이 뭔지······?” “이름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첫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라는 것만은 알아.” “······그렇군요.” 겹치잖아! “그러고 보면 너희는 여기서 뭐해? 그래, 아르페에 대해 듣는 게 아직이었네. 아르페는?” “오빠랑 언니는 지금 따로 행동하고 있어요. 일 마치는 대로 온다는데 언제 오는지는 모르구······ 그래서 저랑 레이만 일단 이쪽에 온 거죠. ······유적을 찾아서.” “유적······?” 에트나 역시 그쯤에서 눈치를 챘다. “설마 너희도 그 조각상을 노리는 거니?” “정확히는 오빠가.” 당신이 호감을 품은 그 남자가 물건을 원하니 이번엔 한 발짝 물러나주시죠? 라는 뜻을 담아 말하는 시에나였으나 에트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르페 본인이 와서 부탁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물러날 리가 없잖아?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다. 내가 그 조각상을 가질 테니 아르페한테 찾아와달라고 하는 거야. 우흐흐흐.” “히잉, 역시 이렇게 되네.” 시에나는 머리회전이 굉장히 빠른 아이였다. 아직 찾지도 못한 유적의 아티팩트를 두고 입씨름을 해서 얻을 게 없다는 것도, 아르페가 없는 상황에서 에트나와 뭘 어떻게 경쟁을 해볼 수도 없다는 것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금세 한 가지의 결론에 도달했다.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해요. 우리가 찾는 그 유적에는 조각상 말고도 다른 많은것들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힘을 합쳐 그 유적을 찾아서, 조각상만 에트나씨가 갖고 나머진 우리한테 양보해주시는 거예요. 어때요, 괜찮은 조건 아닌가요?” “어, 실은 그 유적에 마······ 나한테 도움이 될 것도 제법······.” “에트나 씨, 이 지역에서 활동하려면 레이의 마법이 필요하죠?” “끄으으응.” 역시 시에나는 딜을 할 줄 아는 아이였다! 에트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다가는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뭐······.” “그럼 이제부턴 임시 파티네요!” “······시에나, 존경스러움.” 그렇게 해서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얼추 짐작하고 있는 용사 일행과 사천왕의 기묘한 파티가 성립된 것이었다. “봄이 오기 전에 찾아야 한다고? 아르페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어라, 에트나 씨는 모르셨어요?” “응, 실은 이쪽에 조각상이 있다는 정보를 우연히 얻은 김에 무작정 돌격해온 거라.” 겉으로만 봐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아가씨인데, 하는 말로 들어보면 그냥 무식한 돌격 스타일이다. 그녀와 나름의 정보교류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시에나는 패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에 인상을 팍 찌푸리고 말았다. “아르페 말했음. 지금 우리 레벨에, 힘든 던전도 다수. 저 여자 이용가능.” “그 말을 내 앞에서 대놓고 하다니, 이 아가씨 뭐하는 아가씨야······?” “아하하하하.” 그 아르페조차 유적이 어디에 있는지 완벽하게는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유적의 위치를 알고 있어도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한다. 그 유적은 글라케이아의 최북부에 머무르며, 주기적으로 마법을 통해 그 위치를 바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봄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겨울이 되어야만 다시 나타난다고만 했어요.”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왔는데······ 타이밍이 좋았던 거구나. 어쩜, 아르페는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까? ······아르페는 어떻게 자랐을까? 분명히 더 잘생겨졌어. 내 여자로서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확실히 엄청 잘생겨지긴 했는데······ 오빠 지금 바빠요. 아마 못 만나실 거예요.” 대다수의 사람에게, 사람이 아닌 이에게도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다가갈 수 있는 시에나이지만 마족인 에트나에게만은 아주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언제든무력으로 아르페를 채어갈 수 있는 요주의 인물. 그녀가 경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수준이다. “심술궂기는······ 어머, 저기서 던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가봐야겠어요. 그 마도유적은 글라케이아의 던전에 의태한다고 하니, 유적을 찾으려거든 보이는 던전이란 던전에는 모두 들어가 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실은 거짓말이다. 아르페가 가르쳐준 특별한 사인이 있어, 굳이 던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도중에 판단하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지시를 받은 상황이었던 것. 그러나 레이제나의 말마따나 그녀를 이용해 성장할 생각을 했던 시에나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고 에트나는 철석같이 그 말을 믿었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현명한편은 아니었다. “자, 들어가 보자!” “네!” 당연하지만 첫 번째 던전에서 일행을 반겨준 것은 유물이 아닌 거대한 뱀 형태의 몬스터였다. 아무도 찾지 않아 수백 년 이상의 세월 동안 방치되어, 싸늘한 한기를 머금은 마나와 다른 몬스터들을 먹어치우며 장수한 끝에 무시무시하게 강해진 고대의 뱀!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머나, 뱀이잖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무서운데요!” “최소 레벨 300 이상. 아르페는 나쁜 놈.” 졸지에 생애 조우했던 몬스터 중 가장 흉악한 녀석과 마주하게 된 시에나와 레이제나는 사색이 되었지만 에트나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휘저어 불꽃을 쏘아 날렸다. [캬아아아아아악!] 빙하지대에서 서식하기에 얼음을 좋아하고, 그만큼이나 불에 취약한 거대 뱀은 에트나의 불꽃에 겉껍질이 모두 타들어가는 바람에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쿵! 떨어져 내렸다. “겨울정령의 가호 때문에 위력이 많이 떨어졌네······ 그래도 대지를 녹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 “이게 위력이 떨어진 거라구요!?” 아르페와 함께하던 때에는 얌전했던 시에나는 에트나와 함께하며 비로소 번개 같은 태클 능력을 각성했다! 물론 적을 쳐부수는 데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지만! “어쨌든 방어력은 물론이고 이동능력까지 크게 저하시켜놨어. ······자, 이제 상대하기 수월할 거야.” “······아.” 한 방에 적을 무력화시킨 에트나가 어째서 바로 놈을 죽이지 않나 했더니, 그녀는레이제나의 말마따나 그녀들을 성장시켜줄 의도로 적을 약화하는 선에서 손을 멈춘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비록 공헌도에서는 많이 손해를 보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레벨 300이 넘어가는 적을 상대로 하는 만큼 압도적인 경험치를 얻는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을 터! ‘혹시 이 사람······ 내 생각보다 훨씬 착한 걸까?’ 시에나 안에서 에트나에 대한 호감도가 치솟는 순간! 그녀의 소속을 짐작하고 있는 시에나는 설마 정말로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일단은 전투망치를 쥐고 앞으로 나섰다. 뒤에선 레이제나가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다. “후우······ 흐아아아아압!” “바람의 정령이여, 그녀의 속도를 빠르게. 적을 옭아매, 부자유를 자유로, 자유를 부자유로.” [키아아아아아!] 제아무리 뱀의 겉껍질이 홀라당 타버렸다고 하나 놈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수다. 놈은 에트나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을 보자 기세를 되찾아 상대적으로 만만한두 명의 소녀에게 덤벼들었다. “어림없어!” “그곳.” [캬하아아!] 그러나 시에나와 레이제나 역시 레벨 270을 넘기는 인간계 최고의 강자! 그녀들은 아르페의 지시 하에 여러 던전을 거쳐 오며 단련한 팀워크로 뱀을 상대했다. 레이제나의 마법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를 시에나의 망치가 두들겨 패고, 망치를 휘두르느라 틈을 드러낸 시에나에게 반격을 가하려는 뱀을 다음 순간에는 레이제나의 마법이 저지한다. 공격과 수비의 톱니바퀴가 절묘하게 맞물리며 그 사이에 낀 뱀을 천천히 갈아낸다! [캬아아아아아아아!] 환경과 던전, 무엇보다 적의 움직임에 적응한 소녀들의 몸놀림이 보다 빠르게 변하면서, 그들을 상대하는 뱀은 점점 위축되었다. 레벨에서 30 이상 앞서면서도 그녀들이 보이는 기세와 기술의 조화에 천천히 자신의 생명력을 내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조금 뒤로 물러나 지켜보던 에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 저대로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네. ······에휴, 인간을 키워주고 있다니 나는 지금 대체 뭘 하는 거람. 어쩌면 이게 마족의 숙명인 걸까?’ 그냥 발견한 순간 끝장을 내면 편할 것을, 굳이굳이 레시피대로 용사를 소중히 육성해 끝내 마왕성에까지 개돌하게 만드는 마계 최고의 셰프 아래에 오래 있다 보니 그녀조차 물든 것인가? 성장을 도와줘봤자 나중에는 결국 적대하게 될 아이들을 손수 키워주며, 에트나는 이것도 절대지배의 효과인 걸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이 자라면 아르페도 상대적으로 안전해질 테니까. 그리고 아르페가 안전해지면······ 그는······.’ 까지 생각하다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어째선지 처음 본 순간 그녀의 마음에 깊숙이 들어와 빠져나가질 않는 그 소년, 이제는 제법 자랐을 그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 좋은 설렘과 함께 아주 조금의답답함이 느껴졌다. 아르페는, 아마도 용사가 아닐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운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설혹 그가 용사가 아니라 해도 인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게 강한 힘과 재능을 지닌 소년이 마왕군과의 전투에 빠질 리도 없고······. ‘차라리 마왕군이 진행하는 마족화 실험이 성공해서, 아르페를 마족으로 만들게 된다면 적어도 적대할 일은······.’ 아니,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마족으로 태어난 까닭에 절대지배에 묶이는 신세가 된 에트나가, 소년을 죽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마족으로 만들려 하다니. 아르페를 위한답시고 그런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일었다. ‘아무리 많이 생각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는구나. 마왕군도, 인간계도, 나 자신도······ 차라리 전부 다 불타버리면 좋을 텐데. 내 존재까지도 집어삼켜 활활 타오르면 좋을 텐데.’ 휴가는 언젠가 끝난다. 용사가 성장해 마왕군을 위협할 정도가 되면 그녀는 인간계를 떠나 마계로 귀환해야 할 테고, 그때가 되면 마왕군은 본격적으로 인간계로의 진군을 개시할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까지도 나오지 않는 답을 찾아 헤매다, 끝내 그렇게······. “에트나 언니, 죽였어요!” “으, 응!?” 갑자기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에트나가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씩씩하게 웃고 있는 시에나와 여전히 무표정한 레이제나, 그 너머로 참혹한 꼴로 죽어 누운 거대 뱀의 사체가 보였다. “레벨 좀 올랐어?” “두 개 가까이 오른 것 같아요. 이것도 전부 언니 덕분이에요!” “언니······.” 호칭이 어째 익숙하지 않다. 에트나가 무의식적으로 반문하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듯 시에나가 입을 막았다. “아, 으······ 죄송해요. 평소 습관이 되어놔서.” “아니, 괜찮아. 앞으로도 언니라고 불러줄래?” 인간과 정을 쌓아 무얼 할 거냐, 라는 자문은 그녀의 무의식에서 차단되었다. 언니라는 말의 울림이 너무나 기분이 좋아, 지금은 깊은 고민은 하기 싫었다. ‘그래, 지금은 지금을 사는 거야. 고민해봤자 나오지 않는 답······ 지금만은 머릿속에서 밀어두자.’ 고뇌를 마치고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에트나에게, 시에나 역시 만면에 가득 미소를 띄워 답했다. “네, 언니!” “시에나, 무서워······.” “레이, 쉿.” 그렇게 시에나는 훌륭하게 마왕군 사천왕을 그녀의 새로운 언니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3 > 여자 셋의 기묘한 모험은 그 후로도 순항이었다. “레이!” “얼음의 대지, 적에게 속박을.” “흐으으읍, 디바인, 에이 쾅!” [꾸오오오오오오!] 글라케이아의 악명은 과연 허언이 아니어서, 비록 모든 던전에서 거대 뱀 같은 괴물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인간계에서는 어지간하면 볼 수 없을 레벨 200대의 몬스터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제아무리 에트나의 공헌도가 크다 해도 이렇게 되니 시에나와 레이제나가 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 그들이 동행을 시작해 불과 1주일이 지났을 무렵 시에나와레이제나의 레벨은 레벨 280을 가뿐하게 돌파했고, 거기서 열흘 가량이 더 흘렀을 땐 레벨 290을 돌파하여 시에나의 레벨 295, 레이제나의 레벨 292에 이르러 있었다. [카······ 카하아아아아아아아!] “후우, 이제 좀 쉬자.” 한 시간에 이르는 고전 끝에 레벨 310에 달하는 얼음거인을 무사히 처리한 후, 에트나가 기지개를 켜며 휴식을 선언했다. “네, 언니.” “긍정. 마력의 충전이 필요.” 시에나와 레이제나는 에트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던전의 돌바닥에 오도카니 기대어 앉았다. 직후 시에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잖니.” “화, 활동량이 많아서 그래요. 그리고 성장기라서!” 시에나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변명하듯 외치고는 품을 뒤졌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길고 검으며 가느다란 막대기. 에트나와 레이제나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나, 설마 그거 먹는 거니?” “불길한 기운.” “에인션트 크라켄의 다리를 잘게 찢어 말린 거예요. 드셔보실래요?” “에인션트 크라켄······.” “용감한 소녀.” “맛있는데.” 어째서 알아주지 않는 걸까, 시에나는 고뇌하며 그것을 오물거렸다. 로아에 의해 마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에인션트 크라켄의 다리는 아르페의 특제 마법으로 완전히바싹 말려, 비록 조금 질기기는 하지만 유통기한이 한 백 년 정도 되고, 그 안에 든 영양이며 마나가 풍부해 던전에서의 간식으로 딱이었다. 아르페는 이것을 만들면서도 과연 먹게 될 날이 올까 반신반의했으나 지금은 이렇게 시에나의 허기를 달래주고 있으니······. “히이이이이, 오빠 보고 싶어어······.” “아르페 연관 시, 이렇게 됨. 학습능력향상 절실······.” “그렇게 안 봤는데 어리광쟁이네.” 레벨은 확실히 순조로이 오르고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아르페와 만나지 못한 탓에 시에나의 금단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도 배는 고팠기 때문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열심히 크라켄 다리를 물어뜯는 시에나의 모습은 처량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레이제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는, 어느덧 자신의 품 안에서 뭔가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통신 도착. 송신자 아르페.” “뭐!?” 시에나가 실로 번개 같은 속도로 레이제나에게서 통신기를 빼앗아 들었다.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는 레이제나를 무시하며 그녀가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오빠 언제 와!” [앞으로 하루면 그쪽에 도착해. 유적은 찾았어?] “흐으으으. 보고 싶어. 빨리 와아아.” [그래, 못 찾았구나. 알았어, 최대한 빨리 갈게.] 그렇게 통신이 끊겼다. 시에나로부터 돌려받은 통신기를 멍하니 내려 보던 레이제나는 아무 말 없이 시에나의 등을 퍽퍽 때렸다. 그제야 시에나는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 미안. 레이도 얘기하고 싶었구나.” “부정. 시에나도 부정.” “날 부정한다구!?” “부정. 부정.” “잠깐만, 아파! 아파!” “······그래, 아르페가 내일 이곳으로 온다고?” 시에나와 레이제나가 오고 가는 주먹 속에 우정의 깊이를 더해가는 와중, 에트나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빨리 찾지 않으면.” “아.” 그제야 시에나 역시 깨달았다. 아르페가 이곳으로 온다는 것은 에트나와도 마주하게 된다는 뜻. 이전 에트나는 본인 입으로도 말한 적이 있는 것이다. 아르페가 나타나지라도 않는 이상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아르페가 온다면······. “아르페가 오기 전에 빨리 찾아야지!” “어차피 오빠랑 마주하게 될 텐데!” “그래도 내가 직접 찾아두는 거랑은 다르지! 아무리 아르페라고 해도 그건 양보할 수 없단 말이야! 미안하지만 이제 너희 성장지원은 끝이야!” “앗, 언니! 먼저 가지 말아요!” 마음이 조급해진 에트나와 어떻게든 하루 그녀를 붙잡아두어야 하게 생긴 시에나, 둘은 엎치락뒤치락 던전을 내달렸다. 레이제나는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는 어쩔 수 없이 두 바보의 뒤를 따랐다. “어? 여기 봐봐!” 약속의 이튿날. 기어이 어제 하루 동안 세 개의 던전을 주파(그중 시에나와 레이제나가 잡을 수 있었던 몬스터는 단 한 마리뿐이었다.)하는 기염을 토한 에트나가 다음 던전을 찾아 얼어붙은 대지를 질주하다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추어 서며 외쳤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든 에트나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그들 주위의 대지에서 짙은 수분을 품은 안개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수증기 아냐?” “대지의 일부, 녹아내림.” 레이제나의 보충에 셋의 시선이 순간 허공에서 만났다. “설마······ 이거.” “벌써 봄이 온단 말이야······?” 셋의 마음이 급해졌다. 유물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둘째 치고 일단 그 유물을 발견하기나 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빨라지는 걸음, 그에 따라 더욱 많이 피어오르는 수증기! 시에나는 바로 그 시점에서 간신히,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니, 혹시······.” “왜 그래? 지금 급해! 빨리 유적을 찾지 않으면 대지의 일부가 소실되어버릴지도몰라!” “그 소실을 지금 언니가 일으키고 있는 것 아닐까 해서······.” “······엥?” 에트나는 그 말을 듣고 멈추어 섰다. 과연 그랬다. 수증기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피어나고 있었지만, 어디가 가장 심하냐 하면 단연 에트나의 몸 주위였던 것이다. “어, 어라? 이상하다, 정령의 가호도 제대로 걸려 있을 텐데?” “가호 확실함. 대지의 탐색능력, 감추어진 열기, 찾아냄.” 레이제나의 마법으로 에트나의 열기가 감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까다로운 빙판의 대지가 에트나의 몸 속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감지하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이, 이건······ 이건 자연환경이 아냐. 혹시 글라케이아라는 대륙 자체가 마법에 감싸여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유적이 만들어지는 순간 대륙에 그 유적을 지키기 위한 마법이 걸렸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유적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레이제나는 급한 대로 에트나에게 가호를 중첩해서 걸어보거나 그녀의 기운을 약화하는 디버프를 걸어보거나 했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대지의 기화를 막을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그때에 대지가 갈라지며 그 안에서 실로 거대한 몸집을 지닌 용 한 마리가 솟구쳐 올라왔다! [봄을 강제로 불러온 자, 겨울을 탐하는 자! 처벌한다!] “저런 정보는 오빠한테 들은 적이 없는데!” “레벨······ 측정 불가.” 아르페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놈은 레벨 320에 달하는, 글라케이아의 상징과도 같은 터줏대감 마물 아이스 드래곤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을 테지만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어머나······ 이건 나도 좀 각오를 해야겠는걸.” 에트나는 힘차게 포효하며 봄을 몰고 온 자들을 위협하는 아이스 드래곤을 올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그녀의 레벨은 370을 넘기는 수준이지만, 마계가 아닌 인간계, 하물며 화기를 억압하는 빙하의 대륙 글라케이아에서는 족히 20% 가까이 능력이 축소되고 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카운터 속성이 아니었다면 아이스 드래곤과 단신으로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아니, 애초에 이 드래곤은 소수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같은데요 언니!” “괜찮아. 아니······ 안 괜찮구나. 이 가호를 두른 채로는 맞서 싸울 수 없겠어.” [크화아아아아아아아!] “언니!?” 한창 에트나가 자신의 전력 파악을 하던 그때, 아이스 드래곤이 자신을 앞에 두고도 움츠러들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고깝게 여겼는지 거대한 입을 쩍 벌려 극한의 냉기를 담은 숨결을 토해냈다. “응, 역시 안 되겠어.” “꺄아아아아악, 대지가아아아아!” 에트나는 칫, 혀를 차며 자신에게 걸려 있던 레이제나의 가호를 모두 풀어버렸다.그 순간 그녀 주위로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양의 열기! 에트나가 붉은 눈을 부릅뜨자, 그 앞으로 나타난 거대한 불꽃의 벽이 아이스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대지 역시 사정없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언니, 망했다! 유적 망했다!” “적어도 우리가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니! 안심해, 너희 목숨은 반드시 지켜줄 테니까!” [갸호오오오오오오!] 쿵! 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스 드래곤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놈의 펄럭이는 날개 주위로 수천 개 이상씩 생겨나는 얼음의 결정이 대지를 새로이 얼음으로 뒤덮고, 일행의 육신을 얼려 꿰뚫기 위해 쇄도한다! “어림없어! 그 따위 얼음으론 내 마음도, 머리카락 한 가닥도 얼릴 수 없으니까!” 불사조의 딸이 지닌 화기가 일순 폭주했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부풀어 오른 불꽃이 대지를 통째로 녹여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듯 혀를 날름거리며 아이스 드래곤과 장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캬아아아아아아!] “후후, 겨우 이 정도야? 그렇다면 넌 끝이야!” 그녀가 한 손을 들었다. 놈의 냉기가 그녀의 몸을 침범해 손등 위로 서리를 내리게 했지만, 다음 순간 그것은 열기에 녹아 이슬로, 증기로 화했다. 이어 그 손으로 뻗어내는 것은 화기를 압축해 만들어낸 불기둥! [캬아아악, 케헤에에에!] 그것은 막 벌어지던 놈의 입 안에 정통으로 명중하며 두 발 째의 브레스를 쉽게 취소시켰다. 많이 아팠던 것일까, 놈은 돌진공격을 포기하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타 증기를 헤치고 시에나와 레이제나가 그녀에게 달려왔다. “언니, 괜찮아요!?” “얘가 지닌 냉기가 제법 강하긴 한데······ 괜찮아!” 사실 그리 괜찮지는 않았다. 이렇게 전력으로 불꽃을 뿜어내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계와 얼음이라는 이중의 속박이 그녀의 몸을 휘감아 영 그 출력이 만족스럽지가 않다. 더욱이 처음 아이스 브레스에 이어 놈이 만들어내어 던져내는 수천 개의 얼음 결정이 그녀의 몸을 차츰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반면 적의 상태는 어떠한가 하니, 몸의 일부가 녹아내렸다고는 하나 수백 미터의 몸통에 비하면 그 손해는 지극히 경미하다. 특히 마나가 주로 머무는 부위로 보이는심장부와 날개, 꼬리에 가득 모여드는 냉기는 그것만으로도 일국을 능히 얼리고도 남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칫, 마계의 다른 환경이었으면 이 정도 녀석은 가볍게 해치울 수 있었는데······!’ 이거 제법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유적을 찾고 못 찾고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 에트나는 자신과 드래곤의 충돌로 일어난 자욱한 증기 안에서 서서히 그녀가 발할 수 있는 최대의 화염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이스 드래곤 역시 일대의 냉기를 끌어 모아 날개에 집중시키는 것이, 에트나를 끝장내기 위한 비장의 수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언니, 저도 도울게요!” “아냐. 저놈은 안 돼. 여기서 떨어져, 시에나. 여파만으로 다칠지도 몰라.” 아이스 드래곤은 이곳에서 탐험한 던전에 나타났던 다른 몬스터들과는 격이 다른상대였다. 무엇보다 필드 보스라는 타이틀이, 기록과 방대한 영역에 감도는 마나의 통제권이 주어지는 순간 몬스터는 일반적인 몬스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독자적인영역을 구축하게 되는 것! 이런 놈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마왕군도 이 녀석을 포섭하기 위해 에트나가 아닌 다른 마족을 내보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번 휴가조차 반강제로 우겨 나온 거면서 뭘 새삼스레 마왕군을 생각하고 있담.’ 에트나는 스스로 떠올린 생각을 비웃으며 본격적으로 마법의 영창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진행되기 전, 돌연 그녀의 눈앞이 맑아졌다. “야 미친! 마법 취소해! 취소!” “하지만······ 응? 아르페!?” 그녀의 지척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을 보며 에트나가 놀라 외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대지 위로 피어나던 증기가 모두 사라졌다. 아르페의 냉기 마법이 구현 마법을 통해 일대에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레벨 300을 ‘넘기는’ 아르페의 무지막지한 마나량을 바탕으로 일순 광범위한 지역을 얼려버리니, 마치 에트나와 아이스 드래곤이 싸웠던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대지가 멀쩡하게 얼어붙었다. [음······.] 바로 그때에 이르러 아이스 드래곤이 침음을 냈다. [겨울을 되찾아준 자에게 감사를.] “그래, 정정당당하게 겨울에 도전할 테니까 지금은 얌전히 잠들어!” [알겠다.] 아이스 드래곤은 아르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고는, 얌전히 대지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자 놈이 나타났던 자리에 냉기가 모여들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빚어냈다. 일행은 그것을 보며 멍해졌다. 드래곤의 정체가 바로 유적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3 > 끝 ⓒ 토이카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4 > 죽고 죽이는 전투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던 중 난데없이 주위가 얼어붙고, 대체 그것으로 뭘 납득했는지는 몰라도 아이스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져버린 덕분에 한껏 고조되던 일행의 긴장감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어······.” “당황. 안도. 놀라움. 기쁨.” “아르페!” “휴, 어떻게든 간신히 막았네.” 상황판단을 정지하고 덤으로 행동까지 정지한 셋의 여자들 앞에, 아르페와 두 명의 여자가 얌전히 착지했다. 시에나는 당장이라도 아르페의 품에 매달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빠, 방금 그게 뭐야?” “유적이 사라질 뻔한 것을 막은 거지.” “그 드래곤 자체로 유적이었던 거야? 그러면 내가 죽였으면 그걸로 됐던 것 아냐?” 싸움을 방해받아 사실은 조금 화가 난 에트나가 볼을 부풀리며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말했다. 아르페는 대체 어째서 에트나가 이곳에 있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우선은 착실히 대답해주기로 했다. “유적의 수호자이며 유적의 혼이기도 한 아이스 드래곤은 결코 평범한 방식으로는 죽일 수 없어. 아까 같은 방식으로는 그저 놈을 일시적으로 소멸시키고, 이 대륙의 봄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을 뿐이야.” “어째서? 생명을 끊어놓으면 그 기록과 마나, 전리품은 내게 그 소유권이 주어지는 거잖아. 그건 수백······ 제법 오랜 세월 살아오는 동안 날 단 한 순간도 배반하지않았던 진리야.” “하지만 그 진리를 뒤트는 게 마법이라는 사실 정도는 너도 알고 있잖아?” “그건······.” 짚이는 것이 있는지 입을 다물어버리는 에트나. 아르페는 그런 그녀를 보곤 피식 웃으며 추가로 설명해주었다. “네가 아까 맞서 싸운 아이스 드래곤, 그리고 놈이 수호하는 유적은 글라케이아 대륙 전체와 링크되어 있거든. 만약 네가 불꽃으로 대륙을 통째로 태울 수 있다면, 그래. 유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겠지. 그래서, 가능해?” “······아니.” “그래, 그래서 내가 모두 얼린 거야. 말해두지만 넌 유적에 못 들어가. 그런 유적이야.” “알겠어······.” 그렇게 대답하는 에트나의 볼은 팅팅 부풀어 있었다. 마치 어머니에게 혼나는 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에 시에나가 킥킥 웃다가는 그녀가 노려보자 모르는 척을 했다.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트나가 여기 있는 줄 알았더라면 내가 더 빠르게 왔을 텐데, 도중에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고 오는 바람에······.” “다른 길까지 들렀단 말이야!? 오빠 너무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 시점에서 인내가 한계에 달한 시에나가 마음 놓고 아르페의 품에 매달렸다. 아르페 옆에 얌전히 서 있던 바디네의 눈썹이 그 순간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꼭 스턴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아르페에게는 그 모습이 그리 우습게 보이지 않았지만! “오빠, 오빠아.” “그래그래.” 솔직히 심경이 복잡하기로는 다른 이들보다 아르페가 더했지만, 그는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레이제나와 함께이니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울먹이며 그의 가슴팍에 볼을 부비는 시에나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그의 생각이 물렀던 모양이다. “오빠 너무해. 정말 너무해. 너무해.” “그래, 미안해. 내가 많이 늦었다.” 한 번도 길게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어 몰랐지만, 시에나가 아르페에게 기대는 부분은 그의 상상보다도 더욱 지대했던 것이다. 평소 메테르보다 어른스럽게까지 보였던 시에나가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에 아르페는 조금 흐뭇하기까지 했다. 마치 딸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마는 아빠 같은 기분이었다. 반면 레이제나는 아주 조용히 그들 곁으로 다가와 눈을 희게 뜨며 말했다. “여자 더 늘어났음. 희대의 괴물.” “이런 말 듣는 게 서러워서라도 빨리 남자 파티원을 영입해야지.” 그러고 보면 아르페와 메테르 둘이서 시작한 용사 파티가 어느덧 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뿐인가, 그들과 다른 곳에서 그들과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시페넌 파티까지 합치면 무려 아홉 명이 된다. “아직 영입해야 할 사람이 둘이나 더 있으니 문제지만.” “위대한 야욕, 존경. 하지만 마음에 안 듬.” “여자 아니라고.” 그러나 지금은 그에 대한 반가움을 퉁명스러운 말로밖에는 전달하지 못하는 레이제나와 여유롭게 놀아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르페······ 너 엄청 자랐구나?” “그래, 한창 성장기거든. ······그보다.” 다섯 명으로 뭉친 아르페 파티와 아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는 아르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여자, 에트나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에트나, 넌 정말 어쩌다 여기로 온 거야?” “나는, 그······ 이곳에 내가 원하는 물건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원하는 물건? 아.” 아르페는 금세 감을 잡았다. 세상 첫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말하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지금부터 일행이 들어가려고 하는 유적에 있었다. 전생에서 아르페 역시 이 유적에서 그것을 손에 넣었다. 물론 능력이 부족해 그 이상은 얻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너, 그 얘기를 어디서 들었어?” “마······ 크흠! 도서관에서 자료를 수집해서 찾았어.” “······도서관이라고.” 아르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생의 아르페는 당시 유적에 대한 정보를 찾는 데에 꽤나 애를 먹었더랬다. 마계에 그 힌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적에 이르기 전의 전 단계 즈음에 해당하는 막연한 힌트밖에 없었는데,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그리 추리력이 뛰어나지 않은 그녀가 혼자 힘으로 이곳에 도달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좀 받기는 했어.” “그랬구나. 하지만 네 능력으로는 유적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었던 모양이네.” “······응.” 에트나는 시무룩해져 고개를 떨구었다. 아르페는 머릿속으로 대체 에트나가 없는마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는, 지금은 그녀를 달래는 것이 먼저란 판단을 내렸다. “걱정하지 마, 에트나. 네가 어째서 그 유물을 원하는 건지는 대강 짐작이 가니까.” “하지만 이젠 텄어. 아르페가 오기 전에 확보하려고 했는데 설마 내가 들어갈 수조차 없는 유적이었다니······.”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 유적을 찾은 주목적은 그게 아냐. 그것 정도는 양보해줄게.” “아······.” 에트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것을 보던 시에나는, 분명 처음 아르페가 자신에게는 그 조각상까지도 확보하라고 했던 주제에 어째서 갑자기 에트나에게양보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납득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다가는 이내 깨닫는 것이 있었다. ‘설마 오빠는 에트나 언니가 이곳을 찾지 않았더라도, 처음부터 그 조각상을 에트나 언니한테 선물해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이 사실을 메테르가 알게 되면 무척 화가 날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한 시에나는 이미 에트나의 존재만으로도 메테르가 무척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뭐 괜찮겠지, 하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상황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러면 나, 여기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기다릴게.” “아니, 두어 발짝은 떨어져. 네 존재만으로 유적이 녹을 수 있으니까.” “으으으, 알겠어.” “자, 그러면 우리는 들어가자.” 아르페는 일행을 먼저 유적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은 어째선지 아르페가 아주 조금 서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별 반박 없이 얌전히 그 안으로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남은 아르페는 에트나에게 다시 한 번 약속했다. “우리가 나오기 전에 이 유적에 들어오려 했다간, 유적이 통째로 사라져 우리가 다시 겨울이 찾아올 1년 후까지 이 아공간에 갇히는 신세가 될 테니 그것만은 참아줘.” “응, 절대 안 들어가고 기다릴게.” 유물을 내심 포기하고 있던 상황에 찾아온 아르페의 배려 넘치는 제안에 에트나의 기분은 이미 하늘로 둥둥 뜬 상태. 오랜만에 만난 아르페가 보기만 해도 그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멋진 남자로 성장한 것도 거기에 한 몫 했다. “별 일이 없다면 한 달 안에는 나올 거야. 길어지겠지만 기다릴 수 있어?” “그 정도 기다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다녀와, 아르페.” “응.” 그녀는 아르페의 약속에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대지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지만 마나로 자신의 몸을 둥둥 띄우고 있었기 때문에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아르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곤 씩 웃어 보이며······ 다급히 돌아서서 완전히 유적 안으로 들어왔다. 그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미친, 에트나가 왜 여기 와 있어!” “아르페, 태세 전환 되게 빠르다.” 사천왕 최약체 제리어트를 물리친 지금 상식적으로 보아 그들이 맞서야 할 다음 사천왕은 다름 아닌 제 3위 에트나. 하지만 그 레벨 차이는 현격한 수준! 처음 이곳에 에트나가 있는 것을 본 아르페는 셰프의 바뀐 레시피가 벌써 적용되어 에트나가 용사의 다른 일행을 인질로 잡으러 오기라도 한 것일까 착각했을 정도였다. “아, 미치겠네. 이미 우리가 용사라는 것도 전 대륙에 알려진 상황이고, 사천왕 최약체까지 죽였다는 게 알려지고 나면 그땐 분명 에트나의 차례가 올 텐데. 그녀가아직까지 바디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건 다행이다만······.” “아르페 님, 역시 저 여자는 마족인 거죠? 그것도 엄청 강한······.” “사천왕 현 3위일 거야.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인데······ 아, 거기 함정.” 아르페는 유적 안의 함정을 차례대로 파훼하며 말을 이었다. “원래 대책이 없었던 건 아닌데 그래도 지금은 너무 일러. 젠장, 설마 에트나가 자진해서 이 북쪽 대륙까지 오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는데······.” “그러나 저 여자, 아르페 좋아함. 별 위협, 되지 않음.” “······그래, 아마도 그녀는 나를 좋아해. 하지만 그렇다고 위협이 되지 않는 건 아냐. 마족 전체에 적용되는 마왕의 지배 능력은, 개개인의 감정에 파괴될 만큼 녹록하지 않거든.” “후, 후후······ 적군의 수뇌까지, 유혹하고 마는 아르페 님은······ 네, 역시 대단하시다니까요.” 바디네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하고는 있었지만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야 처음 경쟁자가 메테르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녀의 뺨을 후려갈기듯,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파티원이 전부 여자인 데다 적군의 간부까지 아르페를 바라보고 있으니 속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이건 더 이상 메테르 한 명을 아르페 님 옆에서 떼어놓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냐······!’ “바디네, 괜찮아?” “네, 네에. 그럼요. 저는 아르페 님 곁에만 있어도 건강해진답니다······ 하, 하하.” 아르페는 어떻게든 미소를 가장하고 있는 바디네의 속내가 손에 잡힐 듯 했다. 그녀의 적의가 메테르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모두에게로 분산될 테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딘가 아닌 것도 같았지만 적어도 파티 내에서 당장 칼부림이 일어날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무리 에트나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해도 마왕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어.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빠르게 성장했어도, 그녀가 이 환경에서 크게 약화된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레벨 380에 달하는 그녀를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따라서.” “따라서?” 그의 말을 따라 멍하니 반복하는 레이제나. 아르페는 고개를 들어, 서서히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 겨울 유적 안으로 자신의 마나를 확장시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그녀를 확실히 제압해둘 힘을 얻어 나가야해. ······그리고 그 주역은 너야, 레이제나.” 애초에 이곳으로 시에나와 레이제나를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팔라티나에서의일을 마치고 나면 본격적으로 마왕군과 전투를 벌이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가능하다면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완벽하게 성장해주길 바랐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염원, 결국 일행 다섯이 다 같이 유적에 도전하는 결과가 되고말았다. “······빙빙 돌려, 말하는 호감. 귀찮지만 조금, 귀여움.” 그리고 레이제나는 또다시 멋대로 그를 오해했다. “네가 뭘 생각하든 아냐.”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들을 반기는 것은 고대로부터 축적되어 절정에 달한 냉기의 정수, 겨울여왕이 잠든 침소를 지키는 수호자들······! [키이이이이이이!] [침입자들을 모두 묻어줘야지!] ‘물론 내가 준비할 건 또 하나 따로 있지만.’ 그들에 맞서 전투를 준비하는 일행을 살피며, 아르페는 지그시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마도서를 매만졌다. 아리아를 순수한 성녀로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마기를 소멸시키며 또 한 차례 성장한 마도서, 이 녀석을 어떻게든 이 유적에서 나가기 전 완성시켜야 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때는 에트나를······. “아르페!” “······그래, 지금 간다!” 아르페는 상념을 접어두며 마나 스트링을 길게 뽑아냈다. 다섯 명으로 완성된 용사 파티의 첫 출격이었다.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5 > 빙하대륙의 심부에 자리한 겨울여왕의 유적은, 과거 아르페가 찾아내 보물을 습득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살아서 빠져나온 곳이 없는 인간계 최악의 던전이라 해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일단 빙하대륙에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힘들뿐더러, 평범한 인간이 버텨낼 수 없을 빙하대륙의 환경을 버텨내며 대륙의 겨울에만 활성화되는 유적을 찾아내기도 힘들고, 설령 유적을 찾아냈다고 해서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몬스터들과 맞서 싸워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 “더욱이 이 유적은 넓고 길어. 총 10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 제아무리 커다란 아공간 주머니를 구비해왔다고 해도 중간에 보급이 끊기면 그대로 끝장이야.” “뭘 새삼스럽게.” 아르페의 말에 메테르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제 그녀에게 10층 이하의 던전은 던전도 아니었으니까. 원래는 7층 이상 길어지는 던전이 대륙적으로 드문데도! “10층이나 된단 말인가요!? 전 이게 단층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아르페 님께선 정말 이 유적을 완전히 파악하고 오셨군요?” 반면 신전사제들의 주도 하에 비교적 안전한 던전에서의 성장을 거듭해온 성녀는유적의 규모에 경악하고 있었다. “저는 사실 지금도 우리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던전을 주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평범한 규모의 파티였더라면 이미 포기했을 거예요.” “여기는 복도도 넓은 주제에 천장까지 엄청 높으니까 말이지.” 그러나 그 높은 천장이 부질없게도 유적의 1층에 주로 나타나는 몬스터는 거대한얼음 두더지들이었다. 그렇게 바닥을 부수고 나올 거면 뭐 하러 천장은 높게 했냐고따지고 싶을 지경! [키히이이이이이!] [묻어줘야지! 묻어줘야지!] “그래, 너희가 이곳 공사했니?” [꾸긱!] 얼음 두더지의 강점은 바로 언제든 땅을 파고 들어가 예측 불가능한 곳에서 솟아나 공격해온다는 것. 그러나 만물열람을 활성화하고 있는 아르페가 기껏 수백 미터 범위 내에서 움직이는 놈들을 놓칠 리도 없고, 그저 가벼운 마법 몇 개로 놈들의 움직임을 정지시킬 수도 있었으니 위협이 되질 않았다. [킥!] [키익!] “이것도 결국 마나 스트링이지?” “구현이라고 불러, 구현이라고.” 하지만 놈들의 움직임을 멈춘 시점에서, 일행이 놈들을 죽인다고 해도 딱히 경험치를 얻을 수는 없었다. 얼음 두더지의 레벨이 평균적으로 270전후인 반면, 파티원중 가장 레벨이 낮은 이가 레이제나로 293레벨, 메테르에 이르면 무려 304레벨이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파티 멤버 중 유일하게 놈을 죽여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하면. “바디네!” “네! 신의 망치!” [캬학!?] 바로 글라케이아로 오면서 메테르와 아르페의 집중교육을 받았음에도 아직까지 239레벨에 머무르고 있는 성녀 바디네였다! “신의 망치! 신의 망치! 신의 망치이이이!” [캬하아아악!] 그녀에게 직접적인 전투능력은 그리 없다. 그녀가 크게 활약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족을 상대로 할 때! 딱히 마기를 품지도 않은 몬스터에게 유효타를 입힐 수 있는 스킬은 단 하나, 바로 신성 공격 마법 중 무속성 데미지를 함께 주는 상위 스킬 신의 망치뿐이었다. “신의 망치! 신의 망치······ 후, 후우.” “벌써 마나가 다 떨어졌어?” “그, 네······ 죄송합니다.” 신의 망치는 영창 시간은 짧아 좋지만 그 대신 상당한 양의 마나를 소모해야 하는마법이었다. 다행히 광역 범위를 커버하는 마법이라 한꺼번에 많은 숫자의 두더지를 공격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만의 마나로는 도저히 얼음 두더지들을 죽일 수 없었다. “후, 이 여자한테 마나 주기 싫은데.” “동료 좋다는 게 뭐냐, 동료 좋다는 게.” “씁,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뽀뽀 한 번.” “내가 모르는 마일리지를 적립하지 마라.” 따라서 그녀가 끊이지 않고 마법을 연사할 수 있도록 메테르가 레코드 마스터를 사용해야 했는데, 이미 타인의 마나까지 빼앗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 동료의 마나를모아 한 명에게 몰아주는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녀 본인이 바디네와 연결되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후우······ 이 여자한테 도움을 받는 건 껄끄럽지만······.” “교대로 아주 그냥, 누가 보면 스펠 시동어인 줄 알겠다.” 메테르를 통해 자신에게 전달되는 막대한 양의 마나를 실감하며 바디네는 다시금눈을 금빛으로 번쩍였다. 이윽고 그 지대에 떨어지는 무지막지한 신의 망치의 세례! 얼음 두더지 무리는 아르페에게 묶여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땅 밑으로 숨지도 못하고 바디네의 망치 세례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굉장해요!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 레벨이 무려 3이나 올랐어요!” “좋아, 이대로 가면 바디네도 머지않아 우리 레벨을 따라잡겠어.” “오빠, 사실 우리 굉장히 기형적인 파티인 것 맞지?” 그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레벨에 맞지 않는 파티원이 들어와도 말도 안 되게 강한 던전에서 빡세게 굴리는 것만으로 평균레벨을 맞춰버리니! 처음 팔라티나를 떠나던 때의 바디네는 아리아보다도 낮은 220레벨이었으나 불과 며칠 만에 239레벨을 달성했고, 지금 이 유적에선 그보다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것도 전부 아르페의 구현과 메테르의 레코드 마스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역시 선배란 놈은 뭘 좀 아는 놈이었어.” “하지만 어째설까요, 이건 결코 용사 파티에 어울리는 성장 방식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순조로이 성장은 하면서도 지금 자신의 성장방식과 그 속도가 이상하다는 것만은 간신히 자각하고 있는 바디네의 태클은 아르페의 코웃음으로 간단히 부정되었다. “용사 이야기에 나오는 것 같은 영웅적인 스토리와 성장을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괜히 마음고생에 몸고생만 할 뿐이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때 성장해두는 게 좋다고.” “그래도 이건 조금······ 으음, 제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너무 큰 것 같아서요.” 모든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는 타고난 재능과 운에 좌우되기에 결코 노력의 절대적 가치를 정할 수는 없다는 꿈도 희망도 없는 얘기를 해줄까 했던 아르페였으나 그만두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재능과 운만은 그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은 축복받은 환경에 놓여 있었으니까. “네가 부당하도록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도 거기에 거부감을 갖지 마. 그 대가로 나중에 우리는 마왕이라는 끔찍한 놈과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될 테니까.” “마왕······.”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얼음 두더지들만 때려잡던 와중 갑자기 용사에게 어울리는 적의 이름이 나오자 바디네의 눈빛이 뚜렷하게 빛났다. “그렇지요, 저는 반드시 용사님을 도와 마왕을 처단해야 합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지 않으면······!” “좋아, 그 기세야.” 아르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뻗었다. 아르페 일행이 한 무리를 전멸시키고 쉬고 있던 틈을 노려 사방에서 솟아나던 얼음 두더지들이 아르페의 함정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놈들을 잡아.” “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성녀는 툴툴거리며 다시금 신의 망치를 영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에 걸쳐 유적의 1층을 돌파하는 동안, 바디네의 레벨은 245로,신의 망치 스펠은 29레벨까지 상승했다. “이 속도는 정말이지 말도 되지 않아요······!” “아, 2층도 두더지네. 바디네, 망치 준비해라.” “그냥 망치가 아니라 신성 스펠이랍니다, 아르페 님······.” 그렇게 해서 유적에 들어오고 열흘이 지났을 무렵, 일행은 유적의 5층에 이르러 있었다. [키기이이이이익!] [겨울여왕의 잠을 방해하는 인간이 밉다! 인간이 밉다!] “흡!” “바람정령의 창. 트리플.” “신의 망치!” 5층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비늘을 지닌 거대 도마뱀, 그러니까 아이스 리자드가출몰했는데, 아이스 드래곤의 기운을 나눠받아서인지 높은 생명력과 마력을 지닌 그놈들의 레벨은 290전후였다. 4층까지 나타났던 몬스터는 아무리 잡아도 다른 이가 성장할 수 없어 경험치를 모두 바디네에게 몰아주고 있었지만 이젠 슬슬 놈들의 레벨이 아르페와 메테르를 제외한 일행을 따라잡을 지경이다. 따라서 아르페는 시에나가 전위를, 레이제나가 보조를, 바디네가 마무리를 담당하게 해 성장시키는 방안을 택했다. 물론 마나는 아르페와 메테르를 통해 무한정 공급되는 것까지는 똑같지만, 몬스터를 제압하는 데 아르페가 나설 일이 없어져 오히려 그에게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그가 바라마지 않던 시간이었다. “아르페, 그 마도서 되게 열심히 쓰네?” 그렇기에 아르페는 일행이 성장하는 것만큼이나,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마도서 작성의 마무리 작업에 드디어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개선점도 발견되었고, 이렇게 내 마나에 적셔두는 것만으로도 능력이 상승하니까······ 원래 마도서는 특정한 계열의 마법을 다루기 위해 작성하는 경우가 많지만,그래도 이 정도로까지 내 기록과 일치시켜두면 데마이트······ 그래, 삐삐를 다루는 것보다는 못해도, 내가 다루는 거의 모든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켜주는 게 가능해.” “그런데 왜 다른 마도사들은 이런 거 안 가지고 다녀?” “데마이트만큼은 아니어도, 이것도 굉장히 귀하거든······.” 마도서 작성 재료가 귀한 것도 문제지만, 마도서를 만드는 작업은 시작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끝을 내기란 더욱 지난하다. 그 근본이 되는 종이를 구하는 일도 그것을 책으로 엮는 일도 그 안에 마력을 잔뜩 녹여낸 잉크로, 서술자의 감정과 기록, 마나를 고스란히 담아낸 글줄을 써내는 것도······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난 운이 좋게도 내가 작성하려는 마도서의 카운터 속성 마도서를 구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방향성을 틀어버린 덕분에 비교적 쉽게 작성할 수 있게 된 거야. 원래대로라면 50년 세월도 부족한 작업이지.” “그럼 이 마도서가 아르페의 손에 들리기 전까지 족히 5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만들어졌다는 얘기네?” “그렇지······.”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을 때만 골라 예리한 부분을 찔러오는 녀석이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긍정해주었다. 여자 마족, 티에나는 필시 이 마도서를 위해 많은 세월을 소모했으리라. 아니, 그러고 보면 이 마도서의 제작자는 그녀 한 명이 아니다. 마족 전체에 의한 공동 연구,혹은 일부의······. ‘마왕에게 지배되는 마족 고유의 특징, 절대지배의 족쇄. 그녀에겐 그것이 없었지. 나는 마왕이 인간들을 마족으로 만들어 부리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마왕이 아닌 다른 자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오랜 세월 전부터 진행되어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게 전생에서는 없었던 일일까? 그럴 리가, 단지 아르페만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생과 현생의 사소한 차이점이 눈에 보이는 마왕군의 행보를 다르게 만들었을 뿐, 없던 세력을 만들어 내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생의 그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내 눈을 피했을까. 아니, 그때의 난 단지 만물열람을 지녔을 뿐인 마족이었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니······. 중요한 건 지금 그들의, 아아, 몰라.’ 음, 좋아. 포기하자. 나중에 놈들과 맞닥뜨리면 알게 되겠지. 중요한 것은 지금 아르페의 손에 들린 것이 마족 놈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에트나는 순순히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과연 이 마도서의 힘으로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 무수한 세월과 피눈물로도 벗겨낼 수 없던 족쇄를 과연 이 알량한 책 한 권으로 벗겨내는 것이 가능할까. 아르페는 문득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일까, 생각해보다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생의 그는 어디까지나 전생, 지금의 그는 용사다. 용사에게만 주어지는 축복도 받았고, 히어로 오라인지 뭔지 하는 성스러운 기운도 뿜어낼 수 있다. 마나가, 스펠이, 능력이, 의지가 다르다. 신이라는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놈이 아르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거의 다 되어가. 샘플도 충분히 확보했다. 남은 건 내 노력과 시간, 그리고······.’ 아주 조금의 기적 정도. 아르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에트나와 단독으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같은 우연이 아니고선 좀처럼 만들어낼 수 없을 테니까. 유적에서 강해져서 나간다. 에트나를 빠르게 제압한다. 마도서의 능력으로 그녀에게, 자유를 찾아준다. 하지만 그녀는 시작에 불과하다. 아르페는 이 엿 같은 무대의 등장인물들에게 공평하게 엿을 먹여주고, 판을 뒤집어놓을 생각이었다. 전직 사천왕이자 현직 용사이기에 할 수 있는 대범한 각오와 함께 그는. 에인션트 크라켄의 잉크가 묻은 펜을 다시금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 Chapter 25. 그녀와 그녀와 그녀 - 5 > 끝 ⓒ 토이카 < Chapter 26. 겨울여왕 - 1 > 용사 일행은 북방의 고대 유적에 이르렀다. 마왕군 사천왕 제 2위, 불의 마녀 에트나를 꺾기 위해 반드시 그 유적에 잠든 스킬을 얻어야 한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유적은 길었고 추위에 익숙지 않은 용사 일행은 오직 레벨이 주는 저항력만으로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 전사가 씩씩하게 앞장을 섰고 도적은 그런 그가 혹여나 자신을 제치고 용사에게 포인트를 딸까 두려워 용사의 곁에서 그녀를 성심성의껏 돌보았다. 나머지 파티원들은 무표정하게, 혹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대 유적을 탐색하며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물리치고 추위를 인내해야 했던 것일까, 그들은 끝내 유적의 심부에 이르러, 보상을 얻을 자격을 쟁취해냈다. 단. [그대에게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째서?” 레이제나는 겨울하늘처럼 투명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녀에게 답하는 목소리는 빙하대륙의 기온보다도 싸늘했으나, 그 안에 담긴 극미량의 안타까움만은 신기하게도 레이제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얻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으나, 정인을 위한 물건을 가지고 나갈 자격만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겨울여왕의 유적은 탐험가를 시험하는 곳. 선객이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용사 일행은 그 때문에 유적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다. 아주 조금 더 느렸다는 이유로. “우리가 최초, 아니라서?” [그렇다.] “불의 마녀······ 물리쳐야 함. 시험은 통과, 보상은 불충분. 바닥으로 떨어트린 아이스크림, 태워버린 고기.” 레이제나가 낙담하여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목소리는 아주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니······ 늦기 전에, 이보다 더 전에 어쩌면 다시 마주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 내겐 없음.” [후후, 그래. 그대에겐 없겠지. 어디 두고 보자꾸나. 지금은 가호로 그치지만, 훗날 다가올 과거에는 보다 재미난 광경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뜬구름 잡는 말, 사절.” 그나마 레이제나가 간신히 목소리에 대꾸하고 있을 뿐, 나머지 파티원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멍을 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귀여운 아이야,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아 인간을 꿈꾸는 아이야. 네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이루는 방법은, 어쩌면 이곳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지도 모른단다.] “잘난 척하는 사람은, 이래서 질색.” 레이제나는 투덜거렸으나 그에 답하는 목소리는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직후 유적이 통째로 새하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압도적인 마나가 되어 그 마나를 받아들이기에 가장 적합한 이, 용사 파티의 마도사 레이제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러면 이 힘으로 잘 해보아라. 다만 명심하거라, 네가 마주한 진실은, 오직 너에게 있어서의 진실일 뿐이라는 사실을······.] 레이제나는 막대한 양의 마나가 특별한 형태로 조각되어, 그녀의 기록에 간섭하는 것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끝까지 다 아는 척, 재수 없음.” 아르페는 눈을 떴다. 레이제나가 그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르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레이제나의 입가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아르페는 그것이 그녀 나름의 흐뭇함을 뜻하는 표정이라는 사실을 간신히 알아차렸는데, 그녀는 지금 보나마나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음에 뻔했다. “······원하는 게 있는 표정. 말해주면 들어줄 수도, 들어주지 않을 수도.”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둘째 치고······ 너 말이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방금 그 말은 제법 정치인 같았지만.” “음······.” 아르페의 반격에 레이제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끄덕끄덕, 고개를끄덕였다. “긍정. 시에나 덕분.” “그래, 그럼 시에나 옆으로 가서 자.” “부정. 마력, 신체, 정신 피로도 회복 완료. 지금은 아르페의,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을 탐구 중. 이상하게 여자가 꼬이니, 얼굴 자체로 고유능력일 가능성, 부정할 수 없음.” “탐구하지 마······.” “아픔.” 아르페는 레이제나의 쓸데없이 단정한 얼굴을 밀어내며 하품을 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방금 꾼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이런 꿈을 자주 꾸는데. 내가 전생에 겪었을 리가 없는 일들을 바탕으로 한 꿈을······. 대체 뭐야. 전생에 용사 파티의 뒤를 조사했었기 때문인가? 전생의 내가이 유적에 들러 먼저 조각상을 가져나온 일 때문에 이 녀석들의 일이 어긋난 것을 자책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 전생에 아르페는 에트나의 화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 유적을 들러 조각상을 가져나온 적이 있다. 당연하지만 용사 파티는 그 후로 이 유적을 찾았고, 그 때문에 유적에서 얻어야 할 것을 온전히 가지고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당시의 나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어차피 전생엔 적이었는데······ 으으음, 역시 꿈을 꾼 이유로는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대체 어째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르페의 옆얼굴을 레이제나는 질리지도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이가 깨어 있었더라면 그녀를 말렸겠지만 이어지는 전투에 지친 시에나도 바디네도, 원래 잠이 많은 편인 메테르도 지금은 곤히 잠들어 있는 상황. 심지어 로아까지 잠에 빠져있어서, 실로 드물게도 지금은 고요한 유적의 안전지대에 단 둘만 깨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왜 임마.” “탐구 중.” “······.” 아르페의 품에서 뭔가가 웅웅, 울렸다. 꺼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데마이트로 빚어진 아티팩트 삐삐일 것이다. 보다 레이제나를 성심성의껏 대해달라는 의지표명이겠지. 그러나 아르페는 그 진동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아직 그는 레이제나를 완벽히 알지 못한다. 단지 그녀에게 나쁜 뜻이 없다는 것만은 알기에, 그녀가 하는 행동은 어지간하면 놔두려 하고, 지나치게 간섭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가 지금의 기묘한 대치였다. “······.” “······.” “······.” 다만 오늘은 아무래도 이상한 꿈을 꾼 탓에, 평소보다 레이제나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뭔데?” 아르페는 그런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고, 반면 레이제나는 언제나처럼 눈을 투명하게 빛내며 대꾸했다. 대답은 아까와 같았다. “탐구 중.” “그래. 맘대로 해라, 맘대로.” 아르페는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마도서를 꺼내어 들었다. 그리곤 그의 체내에 고요히 머무르는 압도적인 양의 마나를 활성화하여 전부 그 안에 쏟기 시작했다. 사실 마도서 작성은 이미 8층에 머무르던 때에 다 끝냈다. 단지 틈틈이 마나를 불어넣어 마도서의 빈틈을 채우려는 것뿐. 아르페가 보기에 지금의 마도서는 결코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이 작업이 얼추 진행됐다 싶으면 그 다음엔 강화 스킬로 마도서를 강화해볼 요량이었다. “마나, 보태어줌?” “아니, 마도서는 오롯이 마도사 본인의 힘으로 완성하는 게 가장 좋아. 그래서 이전 소유자의 마나를 비워내는 데에도 애를 먹었지.”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질적인 요소는 물론이고 그 물질이 지니는, 혹은 깃드는 마나, 그 사물이 만들어지고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 형태로 남아 사물에 머무르는 것을 뜻하는 기록, 그 이상을 알아보려 하면 아르페의 뇌가 과부하로 터져버리기에 평소에는 거기까지 열람하지는 않지만 그 외에도 무수한 요소가 사물을 이루고 있다. “아티팩트란 바로 그 사물을 나누거나 합성하거나 하면서 인공적으로 조정해 자신이 원하는 마법적 효과를 낼 수 있게 하는 거야. 무수한 변수를 조율해 특정한 주파수를 맞추는 작업. 당연하지만 마도서의 경우는 그것을 한 장 한 장 적용시켜야 하니 아티팩트 중에서도 작성 난이도가 미쳐버리도록 높지.” “납득. 연하 주제에, 박식. 칭찬해줌.” “······.” 레이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페의 작업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시선도 받아내다 보니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그도 그녀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 “······.” 깊은 유적 아래에 있으니 시간의 흐름 따위는 알 방도도 없다. 단지 유적을 지키는 수문장들의 접근을 막아내는 마법의 불꽃, 그것을 태우는 데에 소모되는 장작의 양으로 가늠해볼 따름이다. “······.” “······.” 그냥 넘기기에는 제법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던 꿈 때문인가, 아무래도 오늘 아르페는 상당히 일찍 일어난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이쯤 해서 메테르가 일어나 그의 목에 매달리거나 반쯤 눈을 뜬 시에나가 그의 품에 꼬물거리며 안기거나 바디네가 부담스러우리만치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취향에 맞춘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가고 또 가도 그 셋이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아르페.” 그것을 레이제나도 인식했음인가, 아르페의 작업이 끝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페는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왜.” “질문 가능?” “해봐.” “메테르와 교미함?” “영원히 다물어.” “가벼운 농담.” 농담인 것 같지 않았지만 한 번만 봐주기로 했다. “그 마도서는, 무엇을 위한 마도서?” “마족을······ 마족이 아닌 존재로 만들기 위한 마도서야.” “그 목적은 무엇?” “······전부 지금 말해줄 수는 없어. 하지만 글쎄, 최종목적은 자유라고 할 수 있겠네.” “자유······.” 레이제나는 가만히 그 말을 입에서 굴리다가는 문득 떠올렸다.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되찾은 그 날, 영원의 숲에서 아르페를 보고 어째선가 떠올렸던 동질감을. “아르페는 자유로움?” “아니. 완전히 자유로운 자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 모두가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구속당해 반드시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게 돼. 그리고 무려 신에게 직접 임명 받아 마왕과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 용사는 그 최고봉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지.” “······납득.” 실은 납득하지 못했다. 레이제나가 아르페에게 느꼈던 동질감은 그렇게 원대한 개념으로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보다 가까웠다. 레이제나에게 웃으며 해주던 말 속에 숨은 그의 답답함과 울분을 그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레이제나가 엘프들의 상황을 못 견뎌 주인을 배반했던 것처럼, 아르페도 실은 레이제나의 상황을 못 견뎌 그녀를 자극했던 것이 아닐까······ 레이제나는 그런 생각까지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정. 아르페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 역시 레이제나만의 착각이었겠지. 분명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었을 뿐이리라. 그렇다면 왜 그와 자신을 겹쳐보고 싶었는가 하면, 그것은······. 어째선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아주 조금 부끄러워졌으므로, 레이제나는 다급히 사고를 정지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무난한 답변을 했다. “아르페를 도와줌. 마왕을 쳐죽이고, 자유를 되찾게 해줌. 은혜 갚기.” “제법 패기 넘치는 말을 내뱉는구나. ······하지만 고마운걸.” 마왕의 고유능력, 절대지배의 특성을 알게 되기 전까진 그리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녀가 용사라는 그의 입장을 이해해줄 줄은 몰랐다. “아르페.” 그러나 아직 그녀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왜?” “마왕을 해치우면, 자유로워짐?” “······글쎄, 그땐 또 다른 뭔가에 속박되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인생은 덧없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그래. 낙농업을 하든, 해변가에 집을 짓고 살든 필시, 항상 무언가에 쫓겨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될 것이다. 절대지배에 속박되어 사천왕 노릇을 해야 했던 전생보다는, 어울리지도 않는 용사라는 타이틀 아래 마왕에게 맞서 싸워야 하는 지금보다는······. “지금, 아르페의 눈.” “······응?” 정신을 차리고 보면 레이제나가 그를 이전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워 임마.” “숨기고 있는 것이, 있음. 내게 말하지 않은, 감추려 하는 무언가.” “······.” 이젠 하다하다 레이제나에게까지 들키다니? 아르페가 쓴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레이제나의 얼굴이 더더욱 가까워졌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그녀의 창백한 피부는 과연 이곳 겨울여왕의 유적과 잘 어울렸다. “아르페.” 무엇을 물어오든 메테르에게 그랬듯 적당한 말로 넘겨야지, 하고 생각하던 아르페의 귓가에 레이제나의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메테르와 교미함?” “······.”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흘러 깨어난 일행은 어째서 레이제나의 머리에 혹이 나 있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레이제나는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유적은 아직 조금 더 갈 길을 남겨두고 있었다. < Chapter 26. 겨울여왕 - 1 > 끝 ⓒ 토이카 < Chapter 26. 겨울여왕 - 2 > 6층까지는 시에나와 레이제나, 바디네의 3인을 주로 내세워 던전을 쓸게 하고 아르페는 마나 공급이나 적당히 하면서 마도서를 작성할 수 있었지만, 7층부터는 레벨 300을 넘기는 몬스터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그때부터 본격적인 5인의 파티 사냥이 시작되었다. 처음 아르페는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다섯 명이라는 대인원으로 파티를 어떻게 굴러야 할지 고민했지만, 시에나와 메테르가 전위를, 아르페가 견제와 보조를, 레이제나가 광역 마법으로 적을 쓸어버리는 후위를, 마지막으로 바디네가 치료와 버프를 맡으니 유적의 돌파속도가 어마무시하게 빨라졌다. 무엇보다 아르페의 마나에 크게 의존하던 기존의 기형적인 파티구조에서 벗어난 덕분에 마나 회복을 하느라 쉬어야 하는 시간도 줄고, 아르페의 피로도도 훨씬 덜어낼 수 있었다. “여태까지가 문제였던 것이죠. 탐색이든 견제든 전부 아르페 님께만 떠맡기고 있었던 게 잘못이에요. 후, 누구의 실력이 부족한 탓에······.” “······나, 나도 여태까지 열심히 아르페를 지켰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메테르도 내심 반성하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투뿐이라는 이유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선 지나치게 아르페에게 맡겨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이전부터 하고 있었으니까. “메테르한테 시켜도 어차피 못했을 일이니까 괜찮아.” “아르페 너무해!” “넌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하면 된단 얘기야. 지금처럼.” “위로인지 바보취급인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7층에서부터 또 열흘 이상을 열심히 내달린 끝에 결국 그들은 9층의 끝, 유적의 마지막 층인 10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거대한 계단이네요.” “내려가기 전에 일단 보상 체크하고.” 던전의 온갖 비처에서 설마 이렇게까지? 싶을 만큼 보상을 쏙쏙 빼오는 아르페의모습은 이미 일행 모두에게 익숙한 광경이 되어 있었다. 단지 마나를 감지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고도로 훈련한 도적도 눈치 채지못하는 미미한 이질감을 캐치해 비밀을 모두 드러내는 능력! 제아무리 파티가 확충되고 다방면으로 활약하는 동료가 생겼다고 해도 여전히 이것만은 아르페의 몫이었다. “다들 갖고 있어.” 9층의 보상을 전부 깔끔하게 수거한 후, 아르페는 일행에게 돌아서며 아주 작고 투명한 수정을 수십 개씩 나누어주었다. 던전의 1층에서부터 곳곳에 떨어져 있던 것을 줍기에 마석과 비슷한 것인가 했으나, 그 안에는 극미량의 냉 속성 마력이 들어있을 뿐 큰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뭔데?” “일정 이상의 냉기를 빨아들여주는 소모성 아티팩트. 보관 가능한 냉기의 양은 한정되지만, 개수가 많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참고로 냉기가 완벽히 충전되면 그땐 그것을 소모하여 얼음 마법을 구사할 수 있지만 이 유적에서 얼음 마법을 구사해봤자 별 효과를 볼 수도 없으니 그것까진 필요가 없다. “아르페 님의 선물······ 가보로 간직할게요.” “난 소모성 아티팩트라고 분명히 말했다?” 일행은 곧장 계단을 타고 10층으로 내려갔다. 한없이 길어지는 계단, 넓어지는 폭. 나선형의 계단을 정신없이 내려가며 천장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주위의 냉기는 더해갔다. 기이한 마나가 계단을 중심으로 퍼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기이한 마나의 유동에 고개를 든 아르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전생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나머지 일행은 그보다 아주 조금 늦게 그것을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어딘가 통과한 것 같은데,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아. 이 계단은 유적의 침입자를 구분하는 수문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우리는 옳은 길을 따라가고 있는 거고.” “수문장······.” “그래. 이 유적은 유적을 찾는 이에 따라 다른 모습을 내보이거든. 10층은 그 마지막 장이나 다름없지.” ‘역시 이곳도 용사를 위한 곳이었어. 전생의 내겐 이 루트가 허락되지 않았었지.’ 아르페는 전생에 자신이 찾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정경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아르페의 목적은 단 하나, 에트나에게 가져다줄 조각상뿐이었다. 그래서 계단이 그를 다른 루트로 인도하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그 끝에 그가 원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부턴 내게도 미지야. 이 유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만큼······ 긴장을 덜 수는 없겠는걸.’ 마법의 계단을 타고 얼마나 오래 걸어 내려온 것일까? 어느 순간 유리처럼 깨끗한 얼음의 복도가 그들을 반겼다. 겨울여왕 유적의 10층에 도달한 것이다. “와아, 예뻐라······.” “9층까지는 그래도 자연미가 남아 있었다면, 이곳은 완벽히 계획적으로 설계되고 구축된 곳이군요.” 신비로이 반짝이는 얼음의 수정으로 장식된 복도와, 일대를 잠식하는 고요. 바로 9층에서만 해도 이곳저곳에서 몬스터가 나타나 일행을 짜증나게 했었는데 10층의 초입부에는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해요. 아르페 님, 정말 우리가 이곳에 들어와도 되었던 것일까요?” “되니까 이렇게 환영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게 환영이라구······?” 10층의 몬스터가 없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저 너머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뿌려내며 일행을 도발하는 기운이 존재하기 때문. 감히 그 어떤 몬스터가 저 존재감을거스르고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 아이스 드래곤의 기운인 걸까?” “아니, 아이스 드래곤은 개념에 가까운 존재라니까. 유적에 들어온 이상 놈과 조우할 일은 없어. 오히려······.” 놈이 수호하던 것, 그 실체와 맞닥뜨릴 수 있게 될지도. 전생의 아르페는 어디까지나 유적이 겨울여왕의 흔적을 담은 곳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얼마 전 꾼 꿈도 그렇고(그 꿈을 믿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지금 10층의 모습도 그렇고 아무래도 단순한 흔적이나 상징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가보자. 준비는 얼추 끝났으니까.” 일행이 유적의 심층이 내보이는 미려한 풍경에 정신을 팔고 있던 사이, 모든 준비를 마친 아르페가 그들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늘어지게 대답하며 아르페를 돌아보던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뭐야?” “파괴의 서.” 아르페의 허리춤에 매달린 책이 어느덧 두 개로 늘어나 있었다. 하나는 원래 그가 작성 중이던 마도서이고, 나머지 하나는 디아스에 있는 던전이란 던전은 모조리 돌아 유물들을 싹쓸이한 시페넌으로부터 아르페가 수거한 아티팩트 중 하나인 파괴의 서였다. 스펠 북은 아니고 얼핏 보면 마도서처럼 생겼지만, 실은 마도서가 맞았다. “물론 원래 작성되어 있던 녀석이라 그 용도는 지극히 한정되지만, 파괴 계열 마법의 능력을 증폭시켜주는 데에 한해서만은 끝장나는 성능을 자랑하거든.” 아르페는 이것을 성공적으로 수거하자마자 일단 세 번의 강화를 거듭해 그 성능을 극한에 가깝도록 끌어올렸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마석을 추가적으로 소모하여 강화할 마음까지 있었다. 일단 이 안의 마나를 전부 소모하고 나면 다시 충전하기 전까진 사용할 수 없다는사소한 단점이 있지만, 파괴의 서는 그것을 감안해도 무척 좋은 아티팩트였다. 파괴의 서에 깃든 힘을 여러 번에 나누어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고, 한꺼번에 방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여차하면 유적 째로 폭발시키고 튀는 거야.” “그런 말 왜 안 하나 했다. ······그럼? 아르페 머리 위에 그건?” 아르페의 달라진 점은 허리춤의 마도서 뿐만이 아니었던 것! 아르페는 남자에게 달아주기엔 조금 아니지 않나 싶은데 어째서 그에게는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알 수가 없는 은색의 머리장식을 만지며 설명했다. “이건 지혜의 관. 착용자의 두뇌 회전을 빠르게 해준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나순환을 빠르게 해주는 아티팩트야. 성능이 좋은 만큼 부작용도 심해 오래 발동할 수는 없어.” “그럼 손에 들린 그 안경은?” “이건 예지의 눈. 레이제나 거야. 마나의 흐름으로 적의 마법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급의 아티팩트지.” “그건 왜 아르페가 쓰지 않는 건데?” “난 이런 거 없어도 다 알 수 있거든.” 정말 재수 없는 말이었지만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르페는 레이제나에게 안경을 끼워주고는 그 외에도 일행에게 한두 개씩 아티팩트를 나누어주었다. 메테르에게는 적혈의 파편이라는 목걸이와 함께 황혼의 창을, 시에나에게는 눈물의 샘이라는 반지를, 마지막으로 바디네에게는 그 성향이 지나치게 파괴적이어서 신전으로부터 봉인명령을 받은 바 있는 스태프 ‘천벌’을 주었다. “······아르페 님, 이거 제로 클래스의 보고에 있던 물건이지요?” “바디네, 너한테 꼭 주고 싶었어.” “소중히 다룰게요!” 메테르와 바디네의 성향은 확실히 달랐는데, 메테르가 ‘아르페가 좋다니 나도 좋다’라면 바디네는 ‘아르페 님이 좋으시다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였다. 굳이 따지자면 바디네 쪽이 더 무섭다. “오빠? 이 반지, 내 팔이 잘려나가도 재생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대로 봤어.” “아르페, 이 목걸이 버서크 스킬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 맞지?” “맞아. 그거 연속으로 사용하면 나도 못 알아보게 되니까 조심해라.” “이런 보물들을 어디서 다······.” 대부분 디아스에서 난 것들이었다. 어째선지는 알 수 없지만 디아스는 그 역사가 깊은 만큼 오래 묵은 던전에서 좋은 물건이 발견될 확률도 높은 것. 특히 아르페는 전생에 그 아티팩트가 전부 어디서 나오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니 일행에게 필요한 것들을 골라 수급하는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뛰어다니며 아티팩트를 발굴한 것은 시페넌이지만! “왜 진즉 안 주고 지금 줬는지는 스스로 아티팩트를 확인해보면 알 거야. 확실히 강대한 능력을 품고 있는 물건이지만 그 한계가 뚜렷해서, 한 번 쓰고 나면 당분간은 쓰지 못하게 되는 물건이거든. 그러니 몸에 지니는 장비가 아니라 소모성 아티팩트라는 생각으로 다루도록 해.” “그러면 이 유적에서보다 밖으로 나가서 에트나와 싸울 때 쓰는 게 낫잖아?” “에트나를 상대할 힘을 얻으려고 여기서 이 아티팩트를 쓰는 거잖아.” 원래는 메테르의 말마따나 유적을 클리어하고 이곳을 나가기 전 강화를 마친 아티팩트를 나누어주어 일행을 무장시키려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유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럴 때 ‘음, 별일 없겠지.’하고 생각하며 그대로 나아가면 엑스트라처럼 죽어나가기 십상인 것! 수상한 분위기가 찾아오면 설령 그들보다 레벨이 100 정도 높은 놈이 나타나도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준비는 다 끝났느냐.] 아르페가 ‘다 착용했으면 이제 가자’고 말하려던 순간, 저 너머로부터 한 줄기 겨울바람 같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르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전 꾼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 목소리······.” “세상에나······.” 목소리에 경직되기는 다른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 안에 담긴 거력을 눈치 챘기 때문일까, 본디 인지하지 못해야 할 존재를 강제로 인지해버렸기 때문일까. 제대로 된 전투도 벌이기 전에 일행의 기가 꺾일 것을 염려한 아르페가 마나를 퍼트려 기운의 잠식에 저항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단다. 나는 손님의 목숨을 앗는 취미는 없으니까.] “손님이라.” 그 말을 들으며 아르페는 서서히 파괴의 서를 활성화시켰다. 메테르는 바스타드를 뽑아 쥐며 눈을 반개했고, 시에나는 끙차, 소리를 내며 망치를 들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두 눈을 꿈벅거리는 레이제나와 바디네를 개무시하며 아르페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목소리를 향해 선언했다. “미안하지만 우린 손님이 아냐. 전부 다 가져가러 온 도굴꾼일 뿐이다.” [후후, 굳이 그것을 원한다면······ 일단은 원하는 대로 대접해주지!] 목소리가 사라졌다. 직후 복도가 요동치며 사방에서 얼음의 창이 솟구쳤다! < Chapter 26. 겨울여왕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6. 겨울여왕 - 3 > “큭······!” 어지간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레이제나가 침음을 냈다. 마나의 유동을 감지한 순간 얼음 마법을 발휘한 그녀였으나, 경악스럽게도 이 공간에서는 얼음 마법을 일절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녀의 마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냉기로 변환되는 순간 지배권이 그녀에게서 사라져 이 너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이에게로 넘어가는 것! “레이제나!” “······괜찮음.” 레이제나는 그 사실을 파악한 순간 곧장 바람 마법으로 전환해 얼음의 창을 부수어냈지만 모두 피할 수는 없어 몸에 조금의 상처를 허용했다. 아르페는 적의 격렬한반응에 혀를 차면서도 곧장 구현 마법을 발현, 얼음의 창을 전부 부숴버리며 일행에게 지시했다. “다들 앞으로 내달려. 공격은 전부 내가 막을 테니, 일단은 적에게까지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대화로 해결하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아르페 님!?” “있었어도 거절이야!” 유적에 들어온 순간부로 그들은 침략자다. 그런 침략자를 손님이라 칭하는 이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괜히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가 치고 박기는 껄끄러워진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실로 성급하고 자기중심적인 판단, 그러나 패기로운 모습이 과히 나쁘지 않구나! 천변만화하는 인간의 모습, 이번엔 너도 보여줄 수 있겠느냐!] “······그리고 저렇게 뭐든 다 안다는 듯한 말투로 사람을 깔보는 것들은 딱 질색이야.” “기분 나쁜 우연이지만, 마음의 일치.” 빠르게 내달리는 시에나의 등에 업혀 바람 마법을 영창하던 레이제나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것들은, 나도 질색.”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대강이나마 짐작이 간다. 설마 했던 겨울여왕 본인 혹은 그에 준하는 힘을 지닌 누군가. 무력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계절의 정령이리라. ‘마치 내가 이전엔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꾸만 이전 꾸었던 꿈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그 꿈의 목소리는, 꼭 아르페의 환생으로 인해 세계가 되풀이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처음엔 아르페 자신이 꾼 꿈이니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요소가 섞였다고 생각할 수라도 있었지만 정말로 그 목소리가 등장한 지금은······. “아니, 일단 마주하고 생각할까.” 목소리가 말한 손님 대접은 정말 제대로였다. 비록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사방에서 불규칙적으로,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솟아나는 얼음 창과 이 또한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사방을 얼려버리는 냉기의 안개! 마치 던전 그 자체가 일행을 죽이려 덤벼드는 것만 같았다. “더 빠르게 달려!” “하지만 아르페······.” “아래에서 온다!” “힉!” 그러나 더욱 대단한 것은 아르페의 대처였다. 일행의 이동속도와 범위를 파악하고 마나 스트링으로 그 주위를 감싸며, 공격이 오는 부분을 미리 감지하고 그 부분에만 구현 마법으로 방어막을 생성하는 것! 처음 공격이 개시된 순간 일행이 조금 다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돌격을개시하고는 단 한 번도 그의 방어막이 뚫리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마나 장악력과 반응속도에 그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일행이 더 놀랄정도였다. 물론 놀랐다 뿐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지금은 아르페를 칭찬하는 것보다 적을 쳐부수는 것이 더욱 급했다. [빠르구나. 그 감각은 과연 이전에 비해 성장했어!] “성장······? 성장이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놈한테나 쓰는 말이야!” 아르페로부터 뻗어난 마나 스트링이 한 가닥, 한 가닥 늘어나며 힘껏 내달리는 일행의 주위에 나풀거린다. 나비인가 싶은 다음 순간에는 화살로, 벽으로, 방패로 변해 일행을 위협하는 얼음의 창을 막아냈다. 일행은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르페가 적에게 도달하라고 했으니 있는 힘껏 내달릴 뿐이다. 오직 그들의 마나만이 뜨겁게 활성화되어 언제고 적에게 날카롭게 쏟아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를 믿는 마음, 그에 응하는 기개. 둘 다 훌륭해. 단지 그 구심점이 하나라는 것이 불안하지만, 아직은 든든하게 버티고 있구나.]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말투가 거슬린다고!” 누군가를 애송이 취급하는 놈들은 으레 정말로 애송이 취급해도 될 만큼 굉장한 거물인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실체를 드러난 다음에야 납득할 수 있는 것! 지가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아놓고 어른 행세만 하는 놈들은 딱 질색이었다! 그래놓고 역시 어린놈들은 안 된다느니 세상이 넓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냐느니 훈수를 두는 재수 없는 것들! 설령 정말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짜증난다. 아르페는 그런 놈들 다 붙잡아놓고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것이 소원이었다. “고작 이 정도 공격밖에 못 한다면 지금부턴 존댓말로 해라, 존댓말로! 어디 싸가지 없게 반말이냐!” [스스로 침입자라 밝혔으면서 태도만은 실로 당당하구나. 좋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아르페가 기껏 사천왕다운 허세를 부리려는 그때,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큭!?” 바로 그 순간 아르페는 본능적으로 블링크를 발동했다. 자신을 포함한 일행 다섯을 모두 수백 미터 전방으로 날려 보낸 것이다. 직후 그들이 있던 공간이 구겨져 사라졌다. “뒤, 뒤······!” “꺅!” 아주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공간과 함께 종잇장처럼 구겨져 죽었으리라. “뭐······!?” “또 온다! 저항하지 말고 나한테 맡겨!” 아르페는 다시 블링크를 구사했고, 직후 이전보다 더 큰 범위의 공간이 구겨져 소멸했다. 얼음의 창도 무서웠지만 이번 공격은 그것을 넘어 일행에게 공포마저 느끼게 했다. “칫, 적의 격에 맞추어 대응도 달라진다 이거지······.” [잘 알고 있구나. 너희는 지금 내 전력을 걸고 상대해야 할 만큼 뛰어난 아이들이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이 옳아. 실제로도 잘 해내고 있지 않으냐.] “마무리까지 재수 없네.” 유적이 목소리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공간을 구겨 없앨 정도인 줄은 몰랐다. 비록 이 목소리가 유적 그 자체와 동화되어 있다 해도, 그 일부를 없애려면 고위 레벨의 공간 마법을 터득하고 있어야 할 터. ‘같은 공간 마법이라도 단순히 아공간을 만들어내는 것과 존재하던 공간을 부수는 것은 차원이 달라. 단순히 스펠 북이 놓여 있다고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는 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을 존재가, 정말로 왜곡된 시공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는데.” [설마 이 한 수로 뭔가를 깨달은 것인가? 정말 즐겁게 해주는 아이야!] 단순한 속성 마법으로는 아르페 일행을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목소리는 그 순간부로 전략을 공간 마법으로 선회했다. 아르페 일행이 있는 공간을 통째로 짜부시키거나, 아르페가 블링크로 일행과 함께 이동하는 것을 예측해 그 공간까지 없애거나. 아르페에게 만물열람이 없었더라면 일행은 제대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했으리라! ‘젠장, 용사가 둘로 늘어난 것에 따라 이 유적의 내용물도 바뀌었음을 감안했어야했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에트나를 만나 당황했기 때문이다. 아르페가 메테르와 함께 유적을 찾는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던 탓에 이런 사단이 났다. 물론 그랬다고 한들 그의 선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아르페는 언제나 다음의 다음 수를 대비한 대책을 준비하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다들 마나를 아르페한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보다도 다들 일격을 준비해.” 아르페가 연속적으로 구현 마법과 블링크를 구사해 유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본 메테르가 그렇게 말하려던 때, 아르페가 메테르의 말을 차단하며 품에서 마석을 하나 꺼내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에인션트 크라켄을 처치하고 얻은 마석이었다.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차라리 잘 됐지 뭐.”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몇 번째일지 모를 블링크를 구사해 목소리의 공격에서 벗어난 바로 그 순간 아르페는 마석을 자신의 부츠에 거세게 내려치며 강화 스킬을 발동했다. 강화에 있어 조금의 유예도 있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바로 스피드! [바람정령왕의 깃털+4] [본디 블링크 성능을 품고 있던 부츠가 기적을 만들어내는 마도사의 손에 네 차례강화되어, 세상에서 사라진 바람정령왕의 기록을 끌고 와 강림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마나를 소모하지 않고도 시야에 미치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으며, 상응하는 마나를 소모하여 하루에 단 한 번, 착용자가 원하는 만큼의 거리를 원하는 만큼의 사람을 대동하고 이동할 수 있다. 이것을 착용한 이는 몸놀림이 지극히빨라지며 바람 마법을 다루는 데에 보너스를 받는다.] 그의 염원이 통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그동안 갈고 닦은 강화 스킬이 빛을 발한 것일까. 강화는 라이트닝 마법으로 콩을 볶아먹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더욱이 그 성능 또한 출중했는데, 아르페는 비단 에인션트 크라켄의 마석 때문만이 아니라 강화가 이루어진 장소가 결과물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럴 수가, 어째서 그 부츠에서 잃어버린 이의 향기가······.] 역시나, 적을 당황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강화가 끝난 아티팩트를 곧장 활성화했다. 아르페의 전력이 상승했음을 깨달은 목소리가 그와 때를 맞추어 연속적으로 주위공간을 부숴 일행을 차단했으나 이번의 공간 이동은 목소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범위에서 이루어졌다. [헛!?] “좋았어!” 아르페는 이전 꾼 꿈을 바탕으로, 전생에 용사 일행이 마지막으로 도달했으리라 짐작되는 바로 그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이럴 수가, 어찌······!] “체크 메이트.” 아르페의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그답지 않은 도박이었으나 결과는 성공이었다. 잔존하던 마나를 전부 소모하는 꼴이 되기는 했으나, 그대로 이동했더라면 한 세월이 걸렸을 거리를 과감하게 스킵하고 유적의 최심부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일행이 도달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모두가 얼음으로 빚은 투명한 유리로 조성되어 마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주는 공동이었다. 그 공간에 서 있는 것은 오직 거대한 여인상 하나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압도적인 마나의 양으로 보아 재질을 모를 그 여인상이 목소리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강타!” “신의 망치!” “흐압!” “신의, 불씨.” 공동에 도착한 이상 아르페가 공격 지시를 내릴 것도 없었다. 일격을 준비하라는 아르페의 말이 떨어진 순간부로 저마다 비장의 스킬과 스펠을 준비하고 있던 일행 모두가 앞 다투어 여인상에 그들의 마나가 듬뿍 담긴 공격을 퍼부었다! [큭······.] 레벨 300을 넘은 일행의 일제공격에 조각상을 둘러싸고 있던 방어, 보호 스펠이 단박에 깨부숴지며 덤으로 조각상의 10% 가까이가 단숨에 깎여 나갔다. 고통을 받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조각상이 파괴되며 손실되는 기록으로 인한 타격은 느끼는 듯, 목소리에 고통이 어렸다.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구나, 설마 내 허락 없이 이곳에 침입할 수 있는 인간이 실재했으리라고는······.] 그래, 그 목소리는 과연 여인상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못 부수겠지, 그렇지? 네 본체가 있는 곳이니까 말이야.” 아르페는 마나가 없어 헐떡거리는 주제에 입만 살아 깐죽거렸다. 아까 허세를 부리다가 한 방 먹은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여인상은 다른 공격방법을 선보여 재차 아르페에게 엿을 먹이는 대신, 새로이 방어 마법과 보호 마법을 활성화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며 그에게 물었다. [······공간 마법에 의해 보호받는, 본디 도달하지 못해야 할 장소에 바로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아티팩트야.” [거짓을 말하고 있구나.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겠는가.] 글쎄 아르페는 어디까지나 유적의 모든 것을 가지러 온 도둑놈에 불과할 뿐인데 대체 이 목소리는 아르페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단 말인가. 그는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과연 지금은 말하기가 힘들겠구나.] 그러나 아르페가 빨리 마나를 회복해 상을 마저 부숴야겠다고 다짐하던 그때, 돌연 여인상 위로 바로 얼마 전 아르페가 겪었던 적이 있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공격용은 아니고, 도주용도 아니고······. “아공간?” 어떤 종류의 아공간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저지하고 보자며 마나 스트링을 뻗어내는 순간 그보다 한 발 앞서 마법이 발동했다. [그러면 이제는 말해줄 수 있겠지.] “······와우.” 더 이상의 적의도, 전의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말하는 여인상의 목소리에, 아르페는 두 눈만 꿈벅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공동에는 아르페와 여인상 둘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 Chapter 26. 겨울여왕 - 4 > [설마 마지막 관문에까지 도달하는 이들이 나타날 줄은 몰랐구나.] “관문이라, 이것도 어디까지나 네 시험이라고 주장할 셈이구나, 그렇지?” 아르페는 그의 뇌리로 직접 꽂히는 것만 같은 여인의 목소리에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근처에 대충 주저앉았다. 무방비한 것처럼 보여도 지금 그의 전신에는 지극히 가느다랗게 뽑아낸 마나 스트링이 걸쳐져 있어, 그 누가 어떤 공격을 해오든 그에 맞추어 반응할 수 있는 상태였다. [아니, 더 이상은 없다. 네게는 말이야.] “다른 일행한테는 있고?” 여인상이 그에게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보다가는 이내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살아 있어!?” [내 기록을 모두 담은 아티팩트이니 골렘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다. ······그러면 이제 이야기를 계속해도 괜찮겠나?] 아르페는 그녀의 말을 막고 이 유적에서 그녀가 보인 싸가지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는 것이 좋을까, 일단 얘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지만 아주 미세하게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좋아, 해보든가.” [일단 너에 대해서구나. 너는 내 모든 의도를 가볍게 무시하고 내 앞에까지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도중에 마련된 관문까지 무력으로 뛰어넘었으니 더 이상 내가 너를 시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봐야겠지. 다만 네 일행에대해서는 아니다.] “그들이 내 힘에 기대어 이곳에까지 왔다고?”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에게 따로 기회를 주었다. 가치를 입증할 기회 말이야. 걱정하지 마라. 비록 네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들 또한 내 앞에 이른이들,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다.] “그 정도의 공격을 못 하는 것뿐이겠지. 넌 지금 다섯의 아공간을 만들어 네 힘과의지를 다섯으로 나눴잖아. 제아무리 막대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5분의 1만 남은 권능으로 레벨 300에 달하는 내 일행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아르페의 통렬한 지적에 여인상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르페의 탐색 능력을 얕보았다 한 방 먹은 셈이다. [······그래, 그것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게 너희를 죽일 의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야.] “······.” 아르페도 그것마저 부정하지는 않았다. 전생의 아르페도 단독으로 이 유적의 주인의 힘에 미칠 수는 없었고 그것은 용사 일행도 마찬가지였을 터, 여인상의 의지는오직 그들에게 적합한 과제를 내주고, 그들이 그것을 해결하면 그것으로 만족해 보상을 내어주고자 했다. 그 결과 비록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셈이 되더라도. 그것이 생명을 흉내 낼 뿐 더 이상 생명은 아니기에 가능한 희생인지, 애초에 이 유적의 의도가 그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시험을 방해하지 마라, 이거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아르페가 아공간을 얼마든지 찢어버릴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겠지.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을 가둔 아공간 역시. 이 유적에서 온전히 모두를 얻어나가고 싶다면, 지금은 이 시험이라는 것에 순순히 놀아나주는 쪽이 낫다. 죽여서 얻는 것보다 당사자의 협조하에 축복을 받는 쪽이나은 건 당연지사니까. 아르페는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일행이 고생하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쉬고 있는 건 내키지 않는다만······.” [정말 친인을 사랑하는구나. 이전 네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에도 본인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서였지. 그러고 보면 이번에도 마찬가지려나. 이곳을 네가 다시 찾은 것은 비단 용사 파티를 위해서 뿐만은 아니겠지?] 아르페의 움직임이 틱, 하고 멈춘 순간이었다. “마침 잘 됐다, 너.” [음?] 아공간에 격리되었다는 사실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가 이 목소리를 짜증내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러고 보면 따로 있었다. 뭐든 다 아는 듯한 말투로 말하던 목소리의 비밀, 그것이 영 성가셔 목에 가시가 걸린 것만 같았더랬다. 마침 일행과 떨어지기도 했겠다, 그는 지금이 의문을 해결할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판단이 섰다.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나는 단지 흐름을 기억할 뿐이다.] 여인상은 그러나 그의 질문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편안한 어조로 답했다. [이전 마족의 모습으로 이곳을 찾았던 네가, 지금은 인간의 용사가 되어 나를 다시 찾아왔다는 것을 알지. 그리고 이전엔 너와 대척점에 섰던 아이들이, 지금은 너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비록 시간대로는 이쪽이 더 앞이지만 그게 무어 중요하겠는가. 내 기록은 역사를 뒤집는 미증유의 힘에도 손상을 입지 않을만큼 깊다, 그 정도의 일이다.] 아르페는 그 말에 조금 충격을 받아 침묵했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뿐이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예기치 못할 상황이 펼쳐질 때를 대비해 항상 보다 많이 준비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막상 그의 전생을 긍정해버리는 이가 나타나니 눈앞이 순간적으로 막막해지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기록, 이라고······.”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겠지? 나는 한때 겨울을 다스리는 여왕이었단다. 인간이기도 했고, 용이기도 했으며, 끝내는 개념으로 여겨지기도 했지. 죽었음에도 온전히 죽지 못해 글라케이아의 심부에 남았으니 그 기록이 얼마나 방대한지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러면 지금 이 세상에는 너 이외에도······?” [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나 혼자는 아닐 거다. 자, 그러면 이번엔 내가 질문해도 괜찮겠지?] 아르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대체 어떻게 내 앞에 도달할 수 있었지? 네 부츠에 바람정령왕의 힘과 기록이깃들게 된 것만은 간신히 파악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너와 네 일행이 내 눈앞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아. 바람은 단지 너를 실어줄 뿐,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의 몫이니까.] 목소리의 질문은 과연 익히 그의 예상범위 안에 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아르페와 용사 일행의 전생에 대해 알고 있으니 이야기는 빠르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해주었다. “네 눈앞으로 곧장 도약해올 수 있었던 것은 꿈에서 널 봤기 때문이야. 내 일행이너와 대면하는 모습을, 어째선지 꿈의 모습으로 볼 수 있었거든.” [과연 그렇구나. 그래서 바람정령왕의 기록이 담긴 그 부츠를 활용할 수 있었던 거야. 너는 꿈으로 동료의 기록을 나누어 받았구나.] 꿈으로, 동료의 기록을 나누어 받는다. 아르페가 이전부터 품고 있었던 의심을 그녀는 아무런 자각도 없이 긍정해버렸다. ‘그건 역시 메테르의 힘이었나.’ 아르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했다. 일찍이 그녀가 용사 육성 던전에서 레코드 디바이드를 익힌 때부터 아르페는 그가 직접 겪지 않았던 전생의 일을 꿈으로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처음엔 그것이 자신의 상상으로 재구축된 망상일 뿐이라 여겼으나, 그러기에는 꿈이 지나치게 디테일할 때가 있었고 심지어 이번엔 그 꿈 덕분에 곧장 유적을 클리어하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까지 부정하는 것은 안쓰럽다. 그래, 그 꿈은 메테르의 기록이다. 아르페는 그녀의 기록을 본 것이다. 그것도 현생의 그녀가 아닌, 전생의 그녀의 기록을. [그게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지진 않겠지. 비록 역사는 되감기 되었으나, 그것은 없었던 일이 아니라 단지 덮어씌워진 일일 뿐,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진실이니까.] “그렇다는 건, 메테르는 혹시 전생에서의 자신을······.” [글쎄, 그것까지는 내가 알 수 없구나. 그녀의 기록이 보다 거대했다면 확신할 수있었겠다만.] “뻔한 대답 고마워.” 아르페는 퉁명스레 대꾸하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충격적인 사실을 두 가지나 접하게 되어 영 기운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저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변화가 없다는 것도 짜증의 원인 중 하나였다. ‘나가면 물어봐야 하나. 아니, 그래서 만약 알고 있었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나는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거지? 게다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데 괜히 내가 물어보는 바람에 녀석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면······.’ 아르페가 머리를 부여잡고 고뇌하던 그때에, 여인상이 그를 다시 불렀다. [묻고 싶은 것이 이제 없다면, 내게서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이것 말이지.] 여인상이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 다시 자그마한 여인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은 솔직히 호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번엔 이렇게 받아가지 않았는데!” [하지만 순도는 이쪽이 더 높다. 나의 진신 일부를 떼어낸 것이니 너의 그녀에게도 더욱 잘 맞을 터.] 확실히 그 말이 과히 틀리지 않아, 그의 손에 들린 조각상이 은은하게 뿜어내는 냉기의 질이 전생에 그가 취했던 조각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을 살피던 아르페는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지금 너 자신이 바로 세상 첫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구나. 이건 네 일부고.” [그렇다.] 만물열람으로도 파악하는 데 한참이 걸리기에 대체 얼마나 많은 성분이 조합된 것일까 고민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단지 너무 압도적으로 뭉쳐져 있어 해석에 시간이 걸린 것뿐이었다. 크라켄처럼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라면 몰라도 설마 그의 시야에 완벽히 들어오는 상대를 분석하는 데에 이 정도 시간이 걸리다니. 만물열람도 아직 부족하다 해야 할지, 이번 기회로 성장했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난 이걸로 됐어. 그보다도 내 일행이 제대로 된 힘을 얻기를 바란다만.” 전생에 그들이, 특히 레이제나가 에트나에 맞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바로 겨울여왕의 가호. 대마도사 레이제나를 주축으로 부여된 겨울여왕의 힘은 용사 파티가 마계로 넘어올 때부터 시작해서 그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비록 아르페 사후이기는 했으나 그들이 에트나를 넘어서는 것은 겨울여왕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그것은 안심해도 좋겠구나. 이번엔 너희가 함께 나를 찾아왔으니, 그들에게······ 그래, 그녀에게 부여되는 힘도 완전할 것이다. 적성으로 따져 그녀가 제일 내게 가까우니, 그녀에게 주어지는 힘도 가장 크다.] “그것 참 세심한 배려네.” 만물열람 덕택에, 무엇보다 전생을 겪은 덕분에 이번 생의 아르페는 말로 누구에게 특히 밀리는 적이 없었는데, 겨울여왕이라는 작자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 아르페에게 밀리지를 않는다. “그래, 그럼 됐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네.” 아르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조각상을 품에 집어넣었다. 에트나가 이것을 받고 기뻐해준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그녀와 조우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전투가 벌어질 것만 같아 우울했다. [그리고 또?] 그런 그를 귀찮게 목소리가 다시 멈춰 세웠다. “또 라니, 내 일행한테나 제대로 주라니까.” [네게 줘야 할 것이 남았다. 방금 그 조각상은 지금의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형평성에 맞지 않아.] “유적을 올 클리어 했으니 다 가져가라 이거냐. 블링크 한 번 구사한 대가로는 거창하네.” [바람정령왕의 힘을 되살려, 넘어설 수 없는 시공의 힘을 현재에 불러오는 데에 성공했다. 네가 이룬 것은 결코 시시하지 않으니 보다 당당하게 요구해도 좋다. 무엇보다······.] 겨울여왕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나의 기록을 오롯이 넘겨줄 때가 되었지. 그러니 준다고 할 때 순순히 받아라.] 아르페는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뜻을 파악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깨닫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스스로 소멸을 택하겠다는 말이야?” [아니,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하겠다는 말이다. 아니, 이것을 삶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질렸다. 최근 몇 년은 더더욱.] 겨울여왕의 목소리에 아르페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필요도 없는 걸 받아봤자 별 도움은 되지 않을 터······. “그러면 이거나 좀 봐주던가.” [······호오, 과연.] 어쩌면 아르페와 조우한 이래 가장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겨울여왕이 응답했다. [그녀에게 줄 선물은 얼음 조각상뿐만이 아니었구나?] < Chapter 26. 겨울여왕 - 4 > 끝 ⓒ 토이카 < Chapter 26. 겨울여왕 - 5 > 아공간으로부터 가장 먼저 해방된 것은 물론 용사 메테르였다. 그녀는 후욱, 후욱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으려다가는 이미 아공간에서 나와 한가로이 얼음을 깨물어 먹고 있는 아르페의 모습을 발견하며 환하게 웃었다. “아르페에!” “그래그래.” 아르페는 몸을 움직일 힘도 남지 않았는지 그대로 그를 향해 무너져 내리는 메테르를 어찌 받아 안으며 한숨을 쉬었다. 얼음 밭에서 구르기라도 한 건지 그녀의 몸이 싸늘했다. “몸이 다 식었네.” “응, 아르페가 따뜻하게 해줘.” 그의 목에 얼굴을 마구 부비며 어리광을 부리는 메테르를 적당히 쓰다듬어주며 아르페는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겨울여왕과 나눈 대화로 여태껏 그가 꾼 꿈이 메테르의 기록을 공유한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메테르는 이미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도 지금보다 훨씬 이전에. ‘······말도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아르페가 마왕군 사천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아르페에게 이렇듯 친근하게 달라붙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기에는 가끔 그녀가 내보이는 성숙한 모습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다. “아르페 너무 따뜻해. 아르페는 봄인가 봐.” “······역시 착각인가.” “응, 뭐가?” “아무것도 아냐.” 사천왕이던 시절의 아르페를 알고 있다면 그를 봄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닐까.설마 메테르가 연기를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감출수는 없는 성격인 것이다. 그래도 만약, 만약 메테르에게 그가 모르는 다른 것이 감추어져 있다면······. “아르페, 또 아득한 눈이야. 나한테 감추는 거 있지!” “너는. ······너는 없어?” “응? 음······ 아.” 아르페의 충동적인 질문에 메테르는 두 눈을 깜박이는 듯싶더니, 짓궂게 웃으며 아르페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몸을 밀착시켰다. “에잇.” “야, 야.” 식은 몸 데우기의 일환이라기엔 쓸데없이 그녀의 가슴이 강조되어 보이는 탓에 아르페는 당황하며 시선을 돌리려 했다. “아르페, 나 감추는 거 하나 있는데.” 그때 메테르가 그의 주의를 끌려는 듯이 말했다.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아르페는 아주 조금 머뭇거리다가는 대꾸했다. “보나마나 시답잖은 말이 돌아올 테니 들을 필요도······.” “······실은 가슴이 또 커진 거 있지.” “역시 시답잖은 말이었어.” 수치와 부끄러움을 산골 마을이며 고대의 신전에 놓고 온 녀석 다운 대담함이었다. 하지만 그녀 덕분에 고민이 날아간 것도 사실이기에, 아르페는 후우,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적당히 쓰다듬어주려 했으나······. “아르페, 나 이제 충분히 큰 것 같은데.” “응?” “아르페가, 나보고 빨리 크라고 했잖아?” “······아.” 그가 걱정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터무니없는 위기가 닥쳐오고 말았다! ‘빌어먹을, 잠깐만, 설마 내가, 잠깐, 그러니까 내가, 그렇지, 크라켄······!’ 메테르가 굳이 부연설명을 할 것도 없이 아르페는 순간적으로 상황파악을 마치고전율했다. 오히려 여태까지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 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렇다. 크라켄과 맞서 싸우던 당시, 아르페는 나잇값도 못하고 그만 메테르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반쯤 홀린 탓에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인 것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크라켄을 처리하고, 메테르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눈 직후 정신을 잃은 탓에 그때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때의 상황을 완벽히 떠올리고 만 것이다. “나 많이 컸지?” “······그야 충분히 크기는 했는데.” 몇몇 부위는 조금 지나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컸다. 아니, 어째서 전생보다 큰 거지? 식습관과 빠른 레벨 업 때문인가? 의지의 힘인가? 기적인가? 새삼스레 솟구치는 의문은 많았으나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그럼 이제 우리 결혼하는 거야!?” 아르페의 말을 지표로 삼아 성장해온 메테르의 기대 수치가 꽉 차올라 폭발 직전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결혼이라······.” “응, 다 크면 결혼하는 거잖아!” 그런가, 추가적인 힌트 없이 용케도 결혼이라는 키워드까지 도달했는가. 아르페는 아득한 눈을 하며 메테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메테르, 충분한 정도로는 안 돼.” “응!?” “너도 나도 용사잖아. 그런데 충분히 큰 정도로 만족할 거야?”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지껄였다. “그, 그러고 보니까 그것도 그래······!” 물론 바보 메테르는 그의 말에서 설득력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 크도록 해.” “응! 더 빨리 키워볼게! 하지만 키가 아르페보다 더 커버리면 싫으니까······.” 메테르는 그렇게 말하곤 지금도 충분히 큰 자신의 가슴을 매만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르페는 내심 저질렀다는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론 이런 바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을 얻기도 했다. “흐으, 그러면 앞으로는 여기랑 여기를, 으음, 이 정도 느낌으로······.” “······음?” 그때 아르페는 메테르의 태도를 보며 설마,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 있었다. “메테르······ 그걸 네가 키우는 방법이 있는 거야!?” “당연하지!” 그리고 실로 경악스러운 답을 얻고 말았다! “레벨 업을 할 때 가속 능력으로 신체의 성장을 어느 정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그래서 고유능력을 얻은 후로는 근육도 더 날렵하고 강하게 성장하는걸?” “그것도 가속으로 가능한 거였냐······.” “그야 레벨도 빨리 오르니까, 몸도 빨리 성장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해봤더니 됐어! 우흐흐, 아르페가 찍 소리 못 하고 인정할 만큼 성장해줄게!” 레벨에는 특정한 한계가 없다지만, 신체의 성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 둘을 똑같이 취급하며 실제로 육신의 성장을, 그것도 제멋대로 주무를 수있다니 그것은 이미 가속이라는 능력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메테르, 너······.” “왜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아르페는 그것에 대해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잊고는 있었지만 그의 고유능력 만물열람 역시 지금 2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환생을 한 이후로 다른 특별한 징조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만물열람이 스스로를2단계라 밝히고 있으니 이전보다 성장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직 녀석의 고유능력에 변화가 없지만······.’ 어쩌면 메테르의 고유능력 역시 성장하여, 가속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능력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특히나 전생에 비해 압도적인 성장속도를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그녀라면. 자신이 괜한 말을 해 고유능력의 진화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싫었던 아르페는 그저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로 했다. 물론 그녀의 고유능력이 변화하게 된 계기가 빨리 자라달라는 아르페의 부탁 때문이라는 사실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몸 녹였으면 이제 좀 떨어져. 다른 애들 나올 때 됐다.” “더 붙어있고 싶은데. 이미 붙어있지만 더욱 격렬하게 붙어있고 싶은데.” 그러나 메테르가 최대한 미적거리던 그때 공동에 한 명의 여자가 나타났다. 의외로 그것은 바디네였다. 그녀의 몸에 한 줄기 깃든 냉기를 보아하니 시험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착실히 성공한 모양이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저 봐.” 바디네가 성큼성큼 걸어와 메테르를 아르페에게서 떼어냈다. 메테르도 이 이상은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떨어져 나왔다. “아르페 님도 정말 고생이 많으셔요. 단지 같은 용사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계신 거죠? 가엽게도······.” “은근슬쩍 내 무릎 위에 앉으려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르페는 슬슬 바디네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잡혔다. 그는 바디네에게 적당히 알밤을 먹여 자신에게서 떨어트리며 물었다. “성과는 좀 있었어?” “으음, 사실 성녀인 제게 그녀의 냉기는 그리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그녀는 제마나의 절대량을 끌어올려주고 아티팩트를 주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슥, 자신의 다리를 아르페에게 내밀었다. 당혹스러워 눈만 깜박이던 아르페는 이내 그녀가 이전에는 없었던 스타킹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얼음으로 실을 내어 빚은 것만 같은 투명한 스타킹이었다. “냉기저항이구나.” “분신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갖추고 있어요. 사제에게는 최적의 능력이지요. ······무엇보다 예쁘기도 하고요.” 실전 경험은 없는 주제에 남성에게 어필하는 방법만 잔뜩 익힌 성녀다운 선택이었다. 그녀의 늘씬한 다리와 미끈한 허벅지를 돋보이게 하는 그 스타킹은 확실히 바디네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아르페의 가슴을 아주 조금 두근거리게 했고, 메테르의 눈을 가늘어지게 했다. “아르페에?” “아, 진짜. 다들 빨리 나와 줘!” “오빠!” “시에나, 보고 싶었어!” “이히히히.” 아르페의 위장에 구멍이 뚫리기 직전, 다행히도 시에나가 풀려났다. 그녀도 바디네와 마찬가지로 마나가 늘어났고, 아티팩트를 받았다. 냉기저항력과 함께 전반적인 능력이 상승하는 일이니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이 유적의 주역이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야 겨울의 힘이 가장 어울리는 건 레이제나이니까.’ 레이제나는 바람 마법과 얼음 마법을 다루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속성 마법을 모두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이니 두 말할 나위 없지만, 특히나바람 마법과 얼음 마법에 대해선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그녀에 필적할 이가 드물 만큼 굉장한 숙련도를 자랑했다. ‘전생엔 조건을 달성하지 못해 겨울여왕의 힘을 온전히 받아올 수 없었지. 하지만지금은 달라.’ 서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메테르와 바디네를 시에나가 진정시키는 것을 들으며 아르페는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겨울여왕의 도움을 받아 마도서는 이제 얼추 완성이 되었다. 레이제나가 시험을 마치기만 한다면 곧장······. 바로 그때, 거대한 진동과 함께 유적이 흔들렸다. “아르페!” “진정해.” 유적이 공격을 받은 것이리라. 해석하기 쉬운 천박한 적의가 깔린 마나였기에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마나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아르페, 역시······.” “에트나는 아냐.” 메테르가 말하려던 찰나 아르페가 곧장 부정했다. 메테르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녀의 마나 패턴은 이미 완벽하게 파악했어. 이건 그녀의 것보다 격이 낮아. 하지만······.” 강함은 그리 뒤쳐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순간 아르페의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지금 그들이 이 유적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트나를 대적하기 위해서인데, 그녀와 힘은 비슷하면서 속성은 완전히 다른 마족이 찾아오기라도 했다면 대체 그것을 어찌 막으란 말인가! 설혹 레이제나가 겨울여왕의 힘을 온전히 얻어 나온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막막한 일이었다. “이대로 계속 유적에 공격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겨울여왕은 우리에게 힘을 넘겨주고 소멸하기 직전의 상황에 있어. 원래라면 저정도 공격에 꿈쩍도 하지 않아야 정상이지만······ 최악의 경우, 우리까지 함께 생매장당할 수도 있어.”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딱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간다고 과연 저 자를 대적할 수 있을 것인가? 혹여 에트나한테까지 합공을 받게 된다면 그대로 끝장이 나고 말 텐데 이를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일단 레이제나가 시험을 클리어하고 나와야 일을 어떻게든······. [네 고민은 모두 알고 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르페의 고개가 휙, 뒤로 돌았다. 다섯의 아공간이 만들어진 후로 자리를 비웠던 여인상의 모습이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복귀. 주인공은 늦게 등장.” “레이제나, 시끄러.” 물론 그곳에는 이전보다 월등히 강해진 레이제나의 모습도 함께였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이 너무나 급했다. [지금은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겠구나. 과거의 동료와 지금의 적이 모두 한 자리에 있으니까.] 여인상의 목소리가 아르페의 귓가로만 들려왔다. 과거의 동료는 물론 에트나를 말하는 것, 그리고 지금의 적은 유적에 공격을 가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겠지. 여기서 문제는 과거의 동료인 에트나 역시 지금은 맞서 싸워야 할 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역시 그러냐······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우리를 도와줄 방법이 뭔가 있다는 거겠지?” 여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소멸을 가장하자꾸나. 내 남은 힘을 모두 바쳐, 너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다.] “······뭐?”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반문한 아르페였으나 여인상은 더는 말하지 않고 허공에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직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 Chapter 26. 겨울여왕 - 5 > 끝 ⓒ 토이카 < Chapter 27. 지저 - 1 > 겨울여왕은 레이제나에게 자신의 모든 힘을 전달하고 그대로 소멸을 맞이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이야기의 그럴듯한 마무리로도 손색이 없었다. 문제는 지금 유적이 실시간으로 붕괴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 잠깐만. 야! 그대로 사라지면, 임마!” “오빠, 블링크! 블링크으!” “꺄아아아악! 아르페!” “아르페 님!” 유적을 유지할 힘이 사라지고, 외부에서의 공격까지 더해지니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10층에 달하는 유적이 모두 무너져 내릴 뿐! 그러나 아르페 일행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얼음의 파편들을 일시적으로 붙들어두며 레이제나가 말했다. “만약의 사태 대비, 통로 존재. 그녀가 말해줌.” “그녀라면 겨울여왕?” “긍정.” 그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지금 레이제나의 전신에서 겨울여왕의 기록과 마나가느껴졌으니까. 레이제나에게 힘을 몰아주겠다더니, 아무래도 그 이상의 것을 준 모양이다. “오래는 못 버팀.” “지금 찾고 있어.” 아르페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실시간으로 유적이 붕괴되는 중이기에 갖가지 마나가 사방으로 튀며 그의 눈을 가렸지만, 무수한 세월 단련된 그의 눈은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정보만을 정확히 캐치했다. ‘찾았다.’ 사방의 마나가 폭주하며 치솟아 이리저리 폭발하며 얼음을 깨부수고 승화하는 가운데, 그중 단 하나 지하에서 도도히 흐르는 마나의 길이 보였다. 만약 겨울여왕이 미리 준비한 것이 있다면 이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으리라! “미친, 더 지하로 내려가라니······ 씁, 다들 이쪽으로! 레이제나, 너도!” 아르페는 구현 마법으로 묶어낸 마나 스트링 수백 줄기를 단숨에 쏘아내 지하로 통하는 길을 뚫어내며 일행을 그 안으로 안내했다. 끝까지 유적의 붕괴를 막아내던 레이제나를 반쯤 짐짝처럼 짊어지고 자신 또한 마나의 길로 뛰어들었다. 직후 뒤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우왓!” “냉기를 머금은 바람, 길을 이루어 인도.” 앞서 뛰어내린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도 납득이 가능한 것이, 이 마나의 길은 단지 마나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로 마법의 일부였다. 거센 냉기의 바람이, 사람이라도 너끈히 들어 나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람이 쭉쭉 뻗어나가고 있었다! “아아아아아르으으으으페에에에에에에!” 이 ‘도로’로 먼저 진입했던 메테르가 길의 흐름을 초인적인 의지와 마나로 거스르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면 시에나는 바디네를 붙잡고 망치를 도로 바닥에박아 넣어 버티고 있는 상황. 아르페는 레이제나를 옆구리에 끼고 앞으로 나아가 일단 메테르와 손을 붙잡고, 뒤이어 나머지 일행과도 순조로이 합류했다. “이대로 손 붙잡고 흘러가는 거야?” “그럴 리가, 나와라 마법의 양탄자!” “그냥 평소 쓰던 천막이잖아!” 아르페는 정교한 마나 컨트롤로 천막 전체로 마나를 주입해 그것을 넓게 펼치더니, 길을 흐르는 바람의 급류에 보기 좋게 얹고는 일행을 그 위에 태웠다. 바람의 흐름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일행이 편안하게 앉아서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갑자기 엄청 편안해졌어.” “길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지. ······이 마나의 흐름이 언제끊길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아무래도 겨울여왕은 이 길을 만드는 데에 제법 오랜 세월을 투자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아르페에 의해 세계가 재구축된 그 순간부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하다보니, 제아무리 겨울여왕이 만든 것이라 해도 중간에 뚝, 끊어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있었다. “마나의 길, 굉장한 기록.” “너······.” 한편 레이제나는 바람의 길 위에 올라오고 자리를 잡는 순간부로 뒤로 돌아서서는 가만히 양팔을 벌리고 있었는데, 무엇을 하는가 했더니 그들이 지나오는 길을 뒤따라 흐르는 바람과 냉기를 고스란히 취하고 있었다. “냠냠.” “알았어, 알았으니까 뒤는 더 설명해주지 않아도 돼.” 필시 겨울여왕에게 미리 들은 게 있는 것이겠지. 이미 그녀의 기록과 마나 상당수를 부여받은 레이제나라면 바람의 길을 이루고 있는 마나도 거부감 없이 흡수할 수 있을 터다. ‘어쩌면 막연한 내 상상보다 더 대단한 것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어. 혹시나 그녀 본인을 받았는지도······.’ “겨울여왕이 이 길이 어디까지 가는지도 얘기해주든?” “정처 없는 여정. 바람의 인도, 기적 같은 만남.” “그냥 모른다고 말해.” “모름.” 비록 이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유적으로부터는 한참 빠져나왔다고 봐야 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바람의 인도를 따라 흘러온 거리가 족히 수백 킬로미터는 될 것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일단 마족들에게 공격받을 일은 없겠어.” “기껏 그 여자와 싸우려고 준비한 게 허사가 됐어. 아르페를 향한 내 사랑의 힘을보여주려고 했는데······.”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르지.” 메테르의 농담은 둘째 치더라도, 파티 멤버들이 갖추게 된 냉기저항능력과 레벨의 성장, 무엇보다도 레이제나가 새로 얻은 힘이라면 에트나와 자웅을 겨루어볼 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사천왕인 그녀를 용사의 전력으로 회유하여 마왕군에게 더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 아르페의 목표였는데, 겨울여왕의 도움으로 마도서를 완성한 지금까지도 그는 아직 자신의 마도서가 성공적으로 기능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능력은 충분해. 어쩌면 나 스스로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마족의 역사를, 미래를 바꿀 만한 힘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니까······.’ 좋든 싫든, 새로운 적이 나타난 것으로 인해 마도서의 능력을 확인할 기회는 아주조금 나중으로 미루어지고 말았다. 그건 별 문제없다. 오히려 ‘실험’을 더 해볼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기까지 했다. 문제는 갑자기 나타나 다짜고짜 유적을 공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적. 아르페가 느껴보지 못한 마나의 기척이었으므로, 전생의 그와 관련이 없었던 마족임에 분명했다. ‘아마도 다른 마왕 후보세력의 간부일 가능성이 높아. 어쩌면 에트나를 이곳 빙하대륙으로 보낸 장본인일지도······.’ 그들이 에트나를 이곳 빙하대륙으로 보낸 목적도 얼추 가늠이 가기는 했다. 유적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그녀가 목숨을 잃기 바랐다, 는 것은 아무래도 비약이겠지만, 어쩌면 불의 마녀인 그녀의 힘으로 유적을 날려버리게 해 용사 일행이 겨울여왕의 힘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술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생의 기억을 지닌 이가 나뿐만이 아닐 가능성이 충분하니까. 전생에 대두되지 않았던 세력이 이제 와서 부상한 것도 모두 그것 때문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앞으로는······.’ 다행히도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처리해야 할 급한 일들은 얼추 처리가 된 상태다. 가장 중요한 멤버인 레이제나를 확보하고 겨울여왕의 힘까지 온전히 거둘 수 있었으니까. 그 외에 얻어야 할 아티팩트도 시페넌의 도움으로 거진 얻는 것이 가능했으니, 이제 아르페가 전생을 아는 다른 이들보다 먼저 확보해야 할 것이 있다면······. “대마법 레인 오브 루인의 스펠 북 정도인가.” 레인 오브 루인. 그것은 대기의 마나를 이끌어 공격성을 띄게 하고, 자신의 마나와 동조시켜 강화하고, 목표로 하는 곳을 폭격하는 유도성 광역마법이다. 극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며 단일 개체를 대상으로도, 광역 범위를 대상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지나친 위력을 자랑하는 이 마법에 단점이 딱 두 가지가 있었으니, 첫 번째는 마법을 발현할 때 자신의 마나를 전부 소모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법을 영창할 때 죽을 만큼 쪽팔리다는 것이다. “굉장히 유치함. 아르페에게 딱.” “이거 내가 아니라 네가 익혀야 해. 익힌 다음 마법을 영창할 때마다 자랑스럽게 외쳐줘야 하니까 지금부터 연습해두는 게 좋을걸.” “······부정. 부정. 부정.” 바람에 깃든 마나를 빨아들이는 데에 바빠야 할 레이제나가 연신 고개를 흔들며 아르페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낄낄대는 아르페를 지그시 바라보며 메테르가 물었다. “레인 오브 루인이라는 스펠 북은 어디서 얻어야 하는 건데, 아르페?” “제스트바라는 해역이 있어. 마계와 인간계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지.” “그러면 그걸 얻으러 간다는 건······.” “마계로 들어간다는 거지.” “역시······.” 사실 슬슬 때가 되기는 했다. 인간계에는 어지간하면 레벨 300을 넘기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빙하대륙 글라케이아에 조금 있는 편인데 이번에 에트나가 시에나와 레이제나를 이끌고 다니며 수백 년 묵은 고레벨의 몬스터를 대부분 끝장내버리기도 했고, 뭣보다 언제 적의 수뇌가 나타날지 모르는 곳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쪽에서 얻어야 할게 아직 조금 남아있기는 한데 그건 시페넌이랑 미케나한테 맡겨두면 얼추 해결될 거야.” “둘 다 싫어.” “인간계를 전부 파악하고 계시다니······ 아르페 님은 정말 뭐든지 알고 계시는군요.” “바디네, 그거 저번에 했어.” “······?” 이번에 새로 거듭난 제국은 물론이고 신전세력까지 한 번 갈아엎고 대비를 시켜놨으니, 인간계에는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리라. 이 이상 신경을 쓴다고 뭐가 나아지지도 않을 터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아직 전생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전사와 궁수를 영입하지 못했다는 점인데, 과거 메테르가 그들을 파티로 맞이한 것부터가 우연의 연속이었기에 그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걔네보다 훨씬 강력한 파티 멤버가 생기기도 했고······.’ 전생에서는 끝내 갈라서야 했던 성녀 바디네도 그렇고, 이블 리플렉터로서 모든 마족과 대척점에 서 있는 강력한 다크호스 시에나도 그렇다. 아르페는 자신이 할 수있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해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통수는 으레 이런 상황에 맞게 마련이다. 사실 이미 한 방 맞았다고 봐야 한다. ‘두 번째의 마왕이 부리고 있을 세력,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더구나 기존의 사천왕 구도에 새로 끼어든 인물도 영 의심스럽고······ 어떤 일을 맞닥뜨릴지 모르는 이상 파티 전력 강화는 필수야. 으음, 전생의 궁수를 대신해 미케나를 파티에 넣어볼까.’ 평소 대상인이라며 거들먹거리는 그녀지만 아르페에게 마음이 제법······ 상당히 있어 보이니 파티에 들어오라고 하면 또 냉큼 들어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오면 가뜩이나 살벌한 파티 분위기가 더욱 개판이 될 것 같아 꺼려지기도 했다. 뭣보다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 같아 영 껄끄럽다.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자가 태클은 고이 접어두었다. ‘전사, 그 녀석을 찾아야 하는데. 빌어먹을, 지금은 대체 어디에 가 있으려는지······.’ 정말 이대로 마계로 떠나도 되는 걸까, 하는 불안이 아르페의 머릿속을 슬금슬금 잠식했다. 인간계에서 할 일을 정말 다 한 것일까,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가! “······오빠?” “왜 그러니, 시에나?” 용사 파티 멤버 중 유일하게 아르페의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는 보물, 시에나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아르페는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길, 대체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그러고 보니 그러네.” 1초에 수백 미터를 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으니 글라케이아는 진즉 벗어났을 터, 이 정도면 바다를 몇 개는 건너 디아스에 다시 도착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수평으로 잇는다 치면 이미 이 세계를 한 바퀴 돌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게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지금 우리 혹시 지하로 가고 있냐?” “그럼 소멸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생매장당하는 거 아냐!?” 길이 수평이 아니라 아래로 기울었다는 뜻인데! < Chapter 27. 지저 - 1 > 끝 ⓒ 토이카 < Chapter 27. 지저 - 2 > 바람의 길이 대충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깨닫게 되고 몇 분 정도, 아르페 일행은 사이좋게 침묵하고 있었다. 용사 파티가 양탄자에 타고 땅속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가 단체 자살, 같은 얘기는부끄러워서 용사 이야기에도 실을 수 없다. “힘차게 달리는, 바람.” “슬슬 어디쯤에서 멈추고 천장을 파야할지 고민 중이니까 가만히 있어봐.” “경사는 그렇게까지, 기울지 않음.” “단 1도만 기울어 있어도, 이 정도 속도로 달리다보면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로 지저를 향해 돌진하게 되는 셈이야.” “하지만 죽지는 않음. 겨울여왕의 의도, 목적지는 존재.” 레이제나의 말에 드물게 강한 확신이 어렸다. 아르페는 바람을 빨아들여 자신의 마나를 불리고 있는 작은 먹보를 보며 무슨 말로 반박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이내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래, 네 말을 믿어보자고. 탈출할 수단은 준비해두겠다만.” “긍정.” 아르페의 블링크 부츠의 옵션, 하루에 한 번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한다면 탈출도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아직 그 옵션을 구사한지 만으로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는 것과, 거리에 따라서 소모되는 마나의 양이 달라지는 만큼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섣불리 옵션을 구사했다간 아르페가 모든 마나를 소진하고 비쩍 마른 미라 꼴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먀아. 먀아아.] “그런 거 없어.” 부정한 기운을 먹지 못하고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 로아는 아예 쇠약 상태였다. 물론 다른 먹을 것은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으니 실은 엄살에 가까웠다. “참아.” [먀먀먀아.] “없다니까.” 이 지저에 부정한 기운이 무어 있겠는가! 수십만 년 이상 묵은 화석이 갑자기 언데드로 벌떡 일어나지 않는 한은······. [먀!?] “······아, 그래.” 실은 내내 얌전하던 로아가 자기주장을 하는 순간부터 왠지 ‘곧 변화가 찾아오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은 들었는데, 어쩜 이렇게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일까. 아르페가 실소를 짓고 있으려니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정말 언데드라도 나타났어? 그런 기운은 안 느껴지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데드라면 제가 모를 리가 없어요.” “언데드는 아닌 모양이야. 그것보다 더 악질이면 악질이지.” 아르페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아 그의 품안에서 기어 나오는 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행에게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레이제나의 말이 맞았던 모양이야. 겨울여왕은 확실히 목적지를 설정해두고 있었어.” [먀먀먀아.] “그래,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기를 바랐던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아르페라도 눈치를 채지 않을 수 없다. 전생에는 접한 기억이 없지만, 분명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깊은 지하에서 사는 종족이라면 단 하나뿐이란 말이지.” “지하에서 사는 종족······? 지금 그들을 향해 가고 있는 거야?” “응.” 아르페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바람의 길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그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고, 레이제나가 바람을 흡수하는 속도도 더욱 더 빨라졌다. “드워프. 영원의 숲의 엘프처럼 고유의 문화를 자랑하는 이종족이었지만, 수백 년 전 터전을 버리고 지하로 기어들어간 이래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은 신비의 종족.” 틀림없다. 이젠 아르페의 만물열람에도 확실히 감지되고 있었다. 이 도로가 끝나는 곳, 분명 지하종족이 사는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으로 보아 어쩌면 드워프 외에 다른 녀석들도 같이 나와 아르페 일행을 반겨줄지 모른다. “드워프라면 그 난쟁이 종족 말하는 거 맞지? 망치 들고 다니고, 잘 싸우고, 장인도 많고.” “크흠······ 아마 아닐 겁니다.” 메테르의 순진한 물음에 바디네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렸다. “드워프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은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요. 지금 시대에 나도는 드워프 관련 서적은 대부분 까마득한 과거의 자료를 참고했기에 정확하지도않을뿐더러, 대개 저자의 상상력이 섞여 괴상하게 비틀렸죠. 아마 일부 맞는 부분도있겠지만······.” “하지만 울 아빠가 그랬는데. 드워프는 무지 짱 센 종족이라고 했단 말이야.” “아저씨가?” “웅.” 누가 방랑상인 아니랄까봐 헛소리 스킬을 제법 심도 있게 수련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르페는 굳이 메테르의 환상을 스스로 나서서 깨부수지는 않기로 했다. 이제 곧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사실, 아르페도 드워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전생의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에 드워프의 활약은커녕 등장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사천왕 최약체 아르페가 죽는 순간까지는 지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리라.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울여왕이 이렇게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것을 보면 그들한테 뭔가 있기는 있다는 건데······ 실제로 지금 로아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이 기운, 만약 드워프들이 이것들과 맞서 싸우느라 지상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라면.’ 전생에서 미처 해결할 수 없었던 의문의 퍼즐이 또 한 조각 끼워 맞추어지는 듯한기분이었다. 아르페가 혼자 피식 웃고 있으려니 뿔이 난 메테르가 그의 뺨을 잡아당겼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품의 로아만이 맹렬히 눈을 빛냈다. [먀먀! 먀먀먀먀!] “사천왕이랑 싸울 때나 이렇게 좀 적극적으로 굴지.” [먀먀아아아아!] 여자의 약한 부분을 건드린 죄로 로아까지 그의 팔을 할퀴었다. 물론 아르페는 코웃음을 쳤다. 그때 가만히 있던 레이제나가 입을 열어 말했다. “길 끝나감. 전투의 예감.” “바로 봤어, 레이제나. 다들 충격에 대비하도록.” 아르페의 손바닥 위로 자줏빛의 마나 덩어리가 떠올랐다. 그것은 수천 가닥의 마나 스트링을 실 뭉치처럼 뭉쳐 놓은 형상이었다. 무척 작아 보이지만, 그 한 가닥 한가닥이 구현 마법으로 부풀려질 것을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지하를 통째로 무너트리려는 거지, 아르페?” “무서우니까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곧. 4초 정도 남음.” “4초라니, 아직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쿠악!?” 레이제나의 말이 떨어진 순간 바람의 길이 갑자기 가속했다! 동시에 완만했던 경사가 급해지며 거의 위에서 아래로 떨어트리는 것만 같은 압박감이 일행을 덮쳤다! “아르페!” 일행의 시야에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이 기세로 부딪혔다간 그대로 쥐포가 되어 나가떨어질 뿐! 바람의 길은 거기서 끝이었다. 레이제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마나를 거두었지만 그렇다고 여태까지 가속해온 속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이대론 정말로 죽겠다는 생각에 시에나가 슬레지 해머를 필사적으로 쥔 다음 순간. “큭, 간다!” 아르페가 손바닥 위에 머무르던 마나의 실 뭉치를 내던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확장되며 그들의 눈앞을 가로막은 벽 전체로 퍼져나가나 싶더니, 놀라운 속도로 그것을 지워나가며 길을 뚫었다. “뭐, 뭐야!?” “설마 부식 마법!?” 용사가 그런 끔찍한 마법을 익히고 있을 줄은 몰랐던 바디네의 두 눈이 휘둥그레 크게 뜨일 즈음, 마법의 정체를 파악한 메테르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이퍼 러빙으로 벽을 다 갉아냈구나?” “제법이군.”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은걸.” 외부에 많은 충격을 주지도 않으면서 정확히 그들이 원하는 부분만 없애는 방법, 바로 격하게 문지르고 또 문질러 부수는 것! 엄청나게 둘러가는 데다 마나를 날려먹기 딱 좋은 방법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가 좋으니 올라잇이었다. 그때 마침 레이제나 또한 양팔을 거두었다. 그녀의 몸에 충만한 마나가 회오리치며 그녀의 격을 실시간으로 높여주는 것이 보였다. “바람의 길, 멈춤. 잘 먹었습니다.” “잠깐만, 그러면 이 양탄자도 멈춰줘야지!” “양탄자가 아니라 천막이라니까!” 벽을 지워냈다고 해서 천막의 속력까지 지워낼 수는 없는 법! 일행은 벽이 사라져뻥 뚫린 바닥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바람의 길에 올라타고 있었을 땐 그래도 흔들림은 없었는데, 일단 한 번 중심을 잃고 내던져지니 천막이 전후좌우로 마구 흔들리며 1초에도 수십 번씩 위아래가 바뀌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이거 좀 재밌다!” “방금 엉덩이 더듬은 놈 솔직히 자수해!” “죄송해요, 아르페 님!” “!?” 그러나 혼란도 잠시, 벽 아래로 펼쳐진 지나치게 커다란 광장의 모습이 일행의 두눈에 가득 찼다. 안타깝게도 이미 다른 손님으로 만석이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기이이이이이이이] “막아! 오늘은 저놈들만 막아내면 모두 끝난다!” [캬아아아아] “우오오오오오오!” “후려쳐! 후려쳐!” 터무니없이 넓은 공동에 잔뜩 모여든 작은 키의 전사들과, 꼭 냄비 바닥에 눌러 붙은 재가 그대로 커진 것만 같은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괴물들! 로아가 반응했던 것은 바로 저 괴물들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로아도 아르페의 품에 안겨 먀먀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 아르페는다급히 천막에 부유 마법을 부여해 제동을 걸었고, 천막이 크게 펼쳐지며 일행을 그대로 감싸 추락을 멈추었다. [기기기기기기?] “엇, 저것들은 뭐지!? 설마 어비스가 또 하나 열린 것인가!” 한창 싸우고 있던 중에 거대한 덩어리가 나타나자 괴물들도 전사들도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아주 짧은 한 순간! 아르페는 덩어리가 되어버린 천막의 한 켠을 조심스레 열며 로아를 불렀다. “로아, 이제 괜찮지?” [먀!] “좋아, 날뛰어.” [먀아아아아!] 실로 오랜만에 펼쳐진 뷔페에 조금 지나치게 흥분했는지, 곧장 검은 안개로 화한 로아가 포효를 내지르며 공동을 질주했다! 깜짝 놀란 전사들이 반사적으로 휘두르는 도끼를 모두 여유롭게 피해 마기에 물든 몬스터들을 덮친 로아는, 그동안 쌓인 테크닉으로 놈들의 저항을 간단히 무시하고는 오직 마기만을 쪽쪽 빨아내먹기 시작했다. [기······ 기이이이이이이이이!] [갸갸갸갸갸갸갸갹!] 인세에 없을 끔찍한 비명소리가 공동을 가득 채웠다. 몬스터들은 그들 존재의 근원을 용서 없이 포식하는 그들보다 더한 괴물의 등장에 전율했고, 한창 몬스터들과 맞서 싸우던 전사들은 경악과 공포마저 느껴지게 하는 로아의 포식에 그만 기선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저, 저건 대체 뭐란 말이야!?” “설마 어비스의 핵심인가? 죄의 그림자를 모두 먹어치우고 지하의 정점에 군림하려는 것일지도 몰라!” 몬스터와 전사 양측이 서로 다른 이유로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광장, 천막이 아주천천히 바닥에 착지했다. “후우, 살았다.” “아쉬워라······ 조금만 더.” “바디네 넌 기억해둬라.” 그 한가운데에서 아르페 일행이 일어서자 전사들은 다시 한 번 움찔했다. 그들의 범상치 않은 기운은 둘째 치고, 이곳 지하에서는 그들의 종족 자체가 이질적인 것이었기에. “이, 인간인가?” “하지만 저 괴물과 함께 온 것들인데······ 인간인 척 하는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저들에게선 무척 선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잠깐, 혹시 저 괴물이 어비스의 괴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작달막한 전사들은 수군거리면서도 일단 일행을 경계하며 무기를 들었다. 13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길 것만 같은 작은 키에, 그 작은 몸에 가득 들어찬 튼실한 근육.아르페는 중얼거렸다. “뭘, 책에 나온 그대로구만.” “그러게요······.” 면목이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바디네. 아르페는 그 반응에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역사에서 사라진 종족, 드워프와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 Chapter 27. 지저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7. 지저 - 3 > [먀먀먀먀먀먀먀먀!] [키아아아아아!] [내, 내 기운이······ 빨려나간다······!] 지저의 거대한 공동에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안개가 묘하게 귀여운 기합을 내지르며 공동을 뒤덮고, 그 안에 갇힌 검은 괴물들은 연신 비명을 내지르며 쪼그라들어 이내 쓰러져 죽는다. 마왕이 있다면 이러할까 싶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좋아, 이제 저 정도 놈들은 아무리 많아도 잘 먹네.” 그것을 보며 아르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시에나가 두 눈이 동그래져 중얼거렸다. “레벨 200은 여유롭게 넘기는 녀석들 같았는데······.” “로아도 그동안 많이 성장했거든.” 아르페 일행은 지극히 여유로웠지만 그들은 보는 전사들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이들에 의해 수백, 수천을 넘기는 숫자의 적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나가고 있었으니! “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적이냐! 마족이냐!” 어느 쪽이든 적이잖아, 라는 태클은 일단 접어두고, 아르페는 공동을 헤집고 다니는 검은 안개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저거 주인이야. 덤으로 말하자면 인간이다.” 새삼스럽지만 드워프들은 대륙 공용어가 아닌 고대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대부분의 언어에 능통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그들의 말에 맞춰 대꾸할 수 있었다. “역시!” “아니, 그렇다고 적이 아니리라는 보장은 없어. 죄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마수라니 내 생애 처음 본다고!” “이 지저에 대관절 어찌 인간들이 들어온 거지?” 그러나 전사들이 혼란스러워하건 말건 로아는 열심히 포식을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동 안에는 단 한 마리의 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럴, 수가······.” “겨, 경계해. 저것들을 다 먹어치웠으니 이젠 우리를 노릴지도 몰라!” 작은 드워프 전사들이 쭈뼛거리며 한 데 뭉치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지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로아는 그놈들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동 너머의 검고 깊은 구덩이를 빤히 들여다보다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와아르페의 품에 안겼다. [먀먀먀, 먀먀아.] “그래, 다른 곳으로도 통해 있다 이 말이지.” 아르페는 녀석의 설명을 들으며 쓰게 웃었다. 설마 지저에 저런 끔찍한 ‘던전’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 존재만으로 주위가 마기로 물들고, 주기적으로 바깥에 마귀를 토해내기까지 하는 던전이라니, 드워프들이 지저에 갇혀 지상으로 나오지 못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였다. “고, 고양이?” “정말 주인이잖아.” 드워프 전사들이 얌전해졌다. 단지 로아를 받아 안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우위를 점하는 데 성공한 아르페가 피식 웃으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움찔하며 저마다 무기를 세게 붙잡았다. 아르페가 말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그런 의미에서 혹시 너희 퀘스트 없니?” 그것이야말로 처음 만나는 이종족을 대하는 용사의 바른 자세! 드워프들은 이제 막 드워프라는 종족 전체의 명운을 건 전투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벌 떨다가는 그의 생뚱맞은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퀘, 퀘스트?” “처음 만난 이들의 무엇을 믿고 퀘스트를······.” “아니, 다들 조용히 해보게. 우리 쪽에도 저들과 동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한 명 있지 않은가.” “아, 그렇군!” 결론이 난 것일까, 드워프 전사들 몇이 다급히 뒤돌아 공동 안으로 달려갔다. 거대한 공동의 한쪽 끝에는 마귀들이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다른 쪽에는 아마도 드워프들의 터전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통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역시 드워프는 드워프구나.’ 아르페를 놀라게 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시원스레 뻗은 통로였다. 이렇게 깊은 땅속에 무너지지 않는 동굴을 파고 유지할 수 있는 이는 전설이 전하는 한 드워프 외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우리는 땅속에서만 살아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나, 다행히 이치에 밝은 동료가 있으니 당신들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오.” “아니, 그리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닌데······ 알겠어. 일단 우리가 너희한테 적의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드워프 중 한 명이 나서 정중히 하는 말에 아르페 역시 쓴웃음과 함께 대꾸했다. 그야 일행이 이 공동에 나타나자마자 다짜고짜 수천에 가까운 괴물을 학살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놈들은 마기를 품은 괴물이고 드워프들은 엘프와 비슷한 이종족인 것이다. ‘······아니, 인간이 타 종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저런 반응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얼마 전 에이디아에서 그 난리를 치르고 온 참이지 않던가. 그것을 떠올린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동료라는 이는 언제 오는데?” “다른 공동의 전투 또한 거의 다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오. ······아, 오는군.” 통로를 빠르게 질주하는 동료를 본 드워프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대체 얼마나 강하고 듬직한 동료기에 저럴까,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아르페는······. “어······.” 전혀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조우하게 된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리빙 아머?” “무지 큰 갑옷이다!” “끔찍한 마력. ······외관은 우스움.” “어머나, 확실히 저 사람이라면 우리와 눈높이가 맞겠네요. ······물리적으로.” 드워프의 동료이니 당연히 드워프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까딱하다간 아르페와 메테르를 합쳐놓은 것보다도 거대한 풀 플레이트 아머에 헬름까지 착실히뒤집어쓰고 나타난 남자는, 등에는 거대한 도끼와 방패를 각각 하나씩 걸머지고 무겁지도 않은지 무척 빠르게 통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적인가! 나한테 맡겨둬라!” “아니 기다려 엘릭! 적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니까!” 그 뒤를 쫓는 드워프들이 성급히 행동하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 자는 드워프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지 도끼를 꽉 쥐며 속도를 더 높이기까지 했다. 그것을 본 메테르가 슥 검을 뽑아들려 했지만, 그 전에 아르페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 놈, 우리 공격할 생각 없어.” “응, 알겠어.” 과연 아르페의 생각대로였다. 그대로 도끼를 들어 일행을 쪼개버릴 기세였던 그 자는, 그러나 일행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줄이더니 그들 앞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멈추어버린 것이다. “음, 적은 아니네!” 갑옷 안에서 울리듯이 퍼져 나오는 목소리는 굉장히 씩씩하고 터프한 남자의 것이었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니야. 저 마기에 뒤덮인 놈들이 너희의 적이라면, 오히려 도움을 주고 싶을 정도지. 물론 적절한 대가를 받겠지만.” “솔직해서 좋군! 반갑다, 나는 엘릭이다! ······아.” “아르페야.” 남자는 한쪽 건틀렛을 벗으려다가는 아차, 하며 그 손을 그대로 내밀었다. 그러나아르페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의 건틀렛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미안하군, 지금 건틀렛을 벗지 못하는 상황인데 내가 자주 깜박해서 말이야.” 남자가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실은 투구 때문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목소리는 그런 투였다. “이해해. 세상엔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 [먀아아아.] 아르페에게 동감한다는 듯이 울부짖는 로아. 그러나 아르페는 아직은 아니라는 듯 녀석을 다독였고, 방금 포식을 마친 터라 별로 배도 고프지 않았던 로아는 알겠다며 다시 짧게 울고는 그의 품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아르페의 품에 자리 잡는 로아를 보며 남자가 놀라움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고양이가 죄의 그림자를 전부 먹어치웠단 말이야? 정말 대단한 사역만데 그래.” “맞아. 유능한 녀석이야. 그보다······ 저것들을 죄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모양이네?” 만물열람으로 확인한 결과는 에인션트 이블 스피릿이었지만, 이런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는 않았으니 그냥 죄의 그림자라 치기로 했다. “나도 드워프들에게 배웠어! 실은 이 지하에 온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거든.” 남자가 계면쩍게 머리를 긁으려다가는 닿는 것이 투구뿐임을 깨닫고 손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답답해보였지만 그는 투구를 벗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지.’ 정정하자. 그는 건틀렛도, 투구도 뭔가의 고집 때문에 벗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벗지 못하는 것뿐이다. [투혼의 혈광] [대륙 최강의 광전사 알투르크가 전장에서 죽기 직전까지 입고 있었던 중갑으로,그의 원혼이 저주가 되어 깃든 탓에 이 갑옷을 입은 이는 강력한 힘을 얻는 대신, 죽는 그 순간까지 갑옷에 속박되고 만다.] 그것은 저주 중에서도 최상위 계열의 저주가 깃든 갑옷이었다. 갑옷을 벗지 못하는 고통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동정하고 싶지 않아도 동정하게 된다. “고생이 많아 보이네.” “역시 마도사는 달라. 바로 알아보는구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우연히 얻은 갑옷인데, 입고 보니까 벗지를 못하겠어서 말이야. 처음엔 팔라티나에 가봤지만 이 자식들은 날 수상한 놈이라고 안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고, 그 다음으로 에이디아에 갔더니 이 새끼들은 이상한 계약서부터 들이밀더군. 그래서 세상을 헤매다가 찾은 곳이 바로 이곳 지저야. 드워프들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않을까 싶어 이곳에 온 거지.” 갑옷을 벗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 세상을 떠돌다가 끝내 이른 곳이 이곳 드워프들이 살고 있는 지저 세계였단 말인가. 겨울여왕의 도움으로 반쯤 날로 먹듯 이곳에 도달한 아르페 일행과는 달리, 그야말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허이, 엘릭. 우리 기술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자네의 갑옷을 벗겨줄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이곳에 와서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을 찾았으니 손해는 아니라고.” “엘릭, 너라는 놈은!” “그······ 흠.” 엘릭과 드워프들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르페가 작게 헛기침을 하자 엘릭은 그제야 다시 그들에게 돌아섰다. 지금 그는 어디까지나 이종족 드워프의 대표로(인간이지만) 아르페 일행과 교섭해야 하는 인물! “아르페, 너희는 나와 같은 통로로 지저에 도달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쩌다 이 깊은 지저에 도달하게 된 거지?” “유적을 클리어하는 순간 강력한 마력에 던져져서 이곳에 이르렀어.” “아, 맞아. 그럴 수 있지.” 사정을 지나치게 간추려 설명하는 아르페나 납득하는 엘릭이나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주위의 드워프들도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다 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곳에 찾아온 것은 우연, 물론 너희에게 드워프들을 적대할 생각은 없고······ 오히려 우리한테 퀘스트를 받고 싶다 이거지.” “그래, 너희는 아무래도 죄의 그림자라는 녀석들과 싸우느라 힘든 것 같으니까. 우리가 저것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난데없는 등장만큼이나 놀라운 제안인데······ 좋아, 기다려봐.”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는 드워프들과 상담했다. 한편 아르페 일행 역시 수군거리고 있었다. “드워프들 귀엽다.” “저 남자보다는 못하지만, 이 드워프들도 다 강해보이는 걸요. 이렇게 강한 세력이 여태 지하에만 묻혀 있었다니.” “흥미로움. 탐구는, 마법의 어머니.” “갑자기 일이 결정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괜찮겠어, 아르페?” “응. 조금 전까지도 긴가 민가 했지만, 역시 이곳에서 얻어나갈 것이 있다는 판단이 섰어.” 전생에서는 조우할 일이 없었던 드워프와 그들의 영역, 짙은 마기로 물든 괴상한 몬스터들. 처음엔 겨울여왕이 단지 그것 때문에 일행을 지저로 안내한 것인가 했지만 엘릭을 본 순간 그 모든 생각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설마 용사 파티의 전사가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드워프들과 얘기하며 호탕하게 웃고 있는, 중갑옷을 입은 남자 엘릭. 그야말로 바로 초기 용사 파티를 구성한 삼인의 파티원 중 한 명으로, 용사 파티가 마왕성에 달하는 순간까지도 변함없이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전사였던 것이다. < Chapter 27. 지저 - 4 > 아르페가 어렴풋이 추측했다시피, 드워프들은 지저세계의 구멍 어비스를 타고 기어 나오는 마물 ‘죄의 그림자’를 막아내느라 지상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 맞았다. 그나마 수백 년간 그 괴물들만 처리하면 지저에서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어느 날을 계기로 갑자기 괴물의 힘과 물량이 대폭 증가했다.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동족이 하나둘 죽어가고, 적의 숫자는 조금씩 끊임없이 증가하고. 그렇게 곤경에 처해있을 때 등장한 것이 굉장한 힘을 지닌 전사 엘릭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도끼나 좀 휘두르는 전사거든. 강한 놈을 죽이는 건 쉽지만, 물량을 당해내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이 말씀이야.” 그렇게 최악보다 아주 조금 나은 상황에서 드워프들과 엘릭이 협조하며 버텨오기를 몇 년. 아르페 일행이 시기적절하게 이곳 지저세계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이런 구멍이 몇 개나 되는데?” “지저세계를 통틀어 열일곱 개. 하지만 우리는 그 구멍이 모두 같은 곳으로 이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네.” 이제야 아르페 일행이 조금 편해진 것인지, 엘릭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말하는 드워프. 아르페는 흔쾌히 긍정해주었다. “맞아. 이건 던전이거든. 아마 던전의 입구가 여러 개로 나뉜 걸 거야.” “역시 던전인가!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놈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에 먼저 들어갈 용기가 없어 그동안 주춤하고 있었다네.” “용기와 만용은 구분해야 하니까 말이지.” “불편하지만 맞는 말이야······ 그래, 우리에겐 아무리 해도 불가능해. 그래서.” 엘릭이 그에게 물었다. “너희에게는 가능할까?” “물론이지. 단지 얼마나 빨리 끝내느냐, 정도가 문제야.” [먀아.] 아까 로아가 날뛰는 광경을 본 드워프들은 아르페의 자신 넘치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엘릭 또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실력 있는 전사인 그에게, 아르페 일행의 기세를 읽어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퀘스트라고 말했었지. 그렇다면 드워프들에게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희가 줄 수 있는 것들을 받아가겠어. 아니, 그러고 보면······.” 아르페는 드워프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한 명 만물열람으로 살펴본 결과, 지상 국가의 기사단 정예보다도 훨씬 강한 그들의 무력 수준 말고도 그들이 당연하게 지니고 있는 것 한 가지를 알아챘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대장장이 스킬을 익히고 있었으며, 심지어 몇몇은 까마득히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너희 중에는 장인이 많다지. 나와 일행의 장비를 손봐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 아, 그리고 만들어줬으면 하는 것도 있고.” 아르페 일행은 솜씨가 좋은 대장장이와는 영 연관이 없는 여행을 해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몬스터를 해치우거나 던전의 보상으로 얻은 아티팩트로 버텨온 것이다. 물론 그들이 다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일행이 걸친 아티팩트 중 무엇 하나 부족한것이 없었지만, 마력으로 강화되는 것과 물리적으로 조정되는 것은 또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솜씨 좋은 대장장이의 손을 거치면 아르페가 강화 스킬을 펼치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향상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고작 그걸로 된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도 그 정도이니 뭐라 할 말이 없구먼.” “엘릭, 이 자들은 우리 도시로 들여도 괜찮지 않겠어?” 엘릭은 드워프들과 또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강철투구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르페는 그에게서 희미한 한 줄기 안도를 느꼈다. 그라고 지저세계의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겠는가. 아르페 일행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들은 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너희를 드워프들의 도시로 안내하지. 아니, 나도 손님일 뿐이긴 하지만 말이야.” [먀먀먀.] “그래, 로아.” 그렇게 해서 일행은 전투가 끝나고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온 공동을 뒤로 했다. 드워프들이 뚫어놓은 통로를 지나가는 동안 곳곳에서 나타난 드워프들이 차례대로 합류했다. “이 인간들은 누구야?” “엘릭과 같은 곳에서 온 인간들인가?” “강하잖아! 설마 이 사람들도 죄의 그림자를 처치하는 일을 도와주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통로를 나아가며 합류한 드워프들만 숫자를 따져 대략 수천에 달했다. 그러나 씁쓸한 것은 그들 중 일부가 죽은 동료의 시체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죽은 이가 적구만. 그쪽에는 나타났는가? 큰 놈.” “이쪽엔 안 나타났어. 그나저나 데테바, 너희는 죽은 사람이 거의 없구나. 혹시 그 인간들 덕분이냐?” “인간들 덕분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뭐하다만······ 아니, 조만간 자네도 보게 될 거야. 그보다도 이 인간들은 귀중한 손님이니 섭섭하지 않게 대해주시게.” “아, 아르페. 이쪽이야.” 곧 통로가 끝나고 아까 공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공간이 그들을 반겼다. 터무니없이 높은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메테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대단해, 아르페. 분명 인공적인 구조물로 떠받치고 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마나를 모여들게 해서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어.” “그걸 한 눈에 알아보는 네가 더 대단하다. ······그래, 순수한 대장장이 기술만으로 마나를 지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드워프들이 아티팩트를 만드는 방식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어. 실제로 보는 건 나도 처음이지만 말이야.” 그 말에 메테르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그럼 아르페도 이건 처음 보는 거구나. 후후.” “······저, 저도 처음입니다!” “나도 처음이야!” “바보들.” 드워프들이 구축한 지하 도시는 각종 건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다만 유흥시설은 그리 많지 않아 기껏해야 술집 한두 개가 보일 뿐이었다. “예전에는 우리도 제법 풍류를 즐겼지만······ 지금은 먹고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제법 삭막하게 변해버렸지.” 아르페의 눈길이 가 닿는 곳을 알아차린 드워프가 머쓱해져 설명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지하에서 이종족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는 충분히 신선했다. “만약 너희는 저 구덩이가 해결된다면 그때부턴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렇게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는걸.” 그래, 그야 없겠지. 드워프들은 아르페 일행을 반겼고 그들이 자신들을 도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힘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상엘릭처럼 그저 강한 전사가 추가되었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해. 이봐, 그보다 저곳에 너희를 위한 숙소를 준비했다고.” “그것 참 상냥하군.” “카시보, 여기부턴 내가 맡을게. 인간계 소식을 듣고 싶었던 것도 있고.” “알았어, 엘릭. 좀 있다 술집에서 한 잔 하자고!” “당연하지!” 드워프들은 엘릭에게 아르페 일행의 안내를 떠맡기고는 즉각 도시 안으로 흩어져갔다. 곳곳에서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전투를 하지 않는 때에도 전투를 준비하며 이것저것 만들고 있음에 분명했다. “인간들이 보면 정말 까무러치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아르페. 어때, 이들이 지상으로 나오면 정말 재밌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엘릭의 물음이었다. 당연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그의 투구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다. “드워프들의 무장을 보아 알겠지만 그들의 기술은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에 이르러 있어. 하지만 그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바로 녀석들의 평균 레벨이 200을 가볍게상회하고 있다는 거지.” “그 숫자가 적어보이긴 한다만, 그래. 확실히 놀라운 일이야.” 번영보다는 쇠락에 가까운 시대가 지속된 탓에 지금 지저세계에 머무르는 드워프들의 숫자는 채 10만을 넘기지 못하는 상황. 그러나 그 중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자는 7만에 이르렀고, 그들 대부분의 레벨은 200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지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인간계의 대표적인 이종족 엘프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넌 그들을 지상으로 내보내고 싶은 거야, 엘릭?” “아니, 네가 아까 말했잖아. 어비스가 해결되면 무엇을 하고 싶느냐고. 그 말에 문득 떠올렸을 뿐이야. 생산능력도, 전투능력도 대단한 이들이 지상으로 나갔을 때의 모습을. 만약 인간계가 평화로운 상황이라면 괜한 분란을 불러올 뿐이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하고 엘릭은 스스로 고개를 저어버렸다. “마왕군이 인간계를 침범하기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어. 이런 상황에 이렇게든든한 군대가 인간 측에 합류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계기로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계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거야.” “······.” 설마했던 말에 아르페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인간 중에도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 것이다. 그러나 직후 더한 타격이 들어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용사?” “허.” 이 녀석 다 알고 있었잖아. 하여간 전생 용사 파티에서도 그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는 대표주자를 달리고 있었던 카리스마 깡통 전사답게 사람의 허를 찔러오는 능력이 있었다. 아르페가 대꾸 없이 웃어버리자 엘릭 또한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용사라는 사실을 알렸으면 모두가 보다 쉽게 네 말을 따랐을 텐데 어째서 말을 하지 않은 거지?” “대뜸 나타나서 나 용사요, 하는 것보다는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말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 사실은 상황전개가 너무 급작스러웠던 나머지 용사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뻘쭘했던 탓이 컸지만 아르페는 굳이 거기까진 얘기하지 않았다. 엘릭 또한 그의 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말보다 행동이라 이건가. 아주 좋아.” “그런 의미에서 묻겠는데······ 내가 용사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그 어린 나이에 터무니없이 강하고, 이름이 아르페, 뭣보다 인상착의까지. 디아스에서 게시한 것에서 조금 자라기는 했다만 거의 똑같잖아. 그러면 그뒤의 여자애 이름은 메테르지? 바로 얼마 전에 본 기억이 있는데 모르면 이상하잖아.” “디아스에서 게시한 공고를 기억하고 있었던 거란 말이야!?” 이 녀석이 드워프들의 영역에 진입한 시점이 어느 때인지 대강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용사에 대한 공고인데 당연히 기억하지. 하지만 설마 벌써 이렇게 강해졌을 줄은 몰랐는데······.” “우리가 용사로 임명받은 후로 3년 이상이 지났어.” “3년밖에 안 지났다고!? 고작 3년 동안 그 정도로 강해졌단 말이냐!?” “하······.” 아르페는 경악하는 엘릭을 보며 그건 대체 누가 할 말이냐, 하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페는 분명 결성 당시의 용사 파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엘릭 베르토파타] [인간 남성] [실드 마스터] [레벨 ? 287] 처음 메테르와 시페넌으로 시작된 파티는 곧장 전사를 동료로 맞이했는데, 그 당시 전사의 레벨은 결코 200을 넘기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지금 그의 레벨은 팔라티나에 들렀을 때의 아르페 일행의 레벨과 비슷한 수준! 이러니 아르페가 그를 만난 순간 놀라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가능한 추측은 단 한 가지, 바로 전생에는 드워프들과 만나지 못하고 용사 파티와합류했던 그가, 용사의 탈주로 인해 미래가 비틀린 현생에는 어찌 하다 드워프들의 영역에 이르러 강한 괴물들과 맞서 싸우면서 고속으로 성장했으리라는 것 정도였다. ‘이 녀석도 천재성으로 따지면 시페넌을 깔아볼 수 있는 괴물이니까 말이지.’ 어째선지 항상 비교대상이 시페넌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이것도 전부 시페넌이 그 기재들과 비교될 만큼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도 불세출의 천재인데 세상에 그보다 더한 천재가 어마무시하게 튀어나왔으니 이젠 신을 탓하라고 말할 수밖에는 없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면······ 용사인 네 입장에서도 드워프들이 인간 측에 합류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일 거다. 그러니 신경을 써달라, 뭐 이런 말을 하고싶었을 뿐이야. 이 녀석들은 정말 착한 놈들이거든.” “걱정하지 않아도 곧 끝날 거야.” “곧?” 엘릭은 반문하다 말고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아르페의 품에 안겨 있던 작고 검은귀여운 고양이의 모습이 어느 순간인가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그 고양이 혼자 힘으로?” “흐, 예리하군.”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로아는 아르페와 드워프들 사이의 퀘스트가 성립된 순간, 다른 누구에게 기운을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두려워 곧장 구덩이로 달려간 것을. “그러니 우린 느긋이 이 도시 관광이나 하다가 보상 받고 떠나면 된다 이 말씀. 그보다도 엘릭, 나는 네게 제의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큭, 제법인데.” 용사라는 사실을 들켜 가볍게 빼앗겼던 주도권을 여유롭게 되찾아온 아르페. 그는 히죽 웃으며 엘릭에게 물었다. “만약 네가 그 갑옷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준다면, 넌 어떻게 할래?” < Chapter 27. 지저 - 4 > 끝 ⓒ 토이카 < Chapter 27. 지저 - 5 > “나를 갑옷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단 말이야!?” “그럼, 당연하지. 아주 간단한데.” “그럴 수가······!” 전생에서 용사 파티의 전사, 그러니까 엘릭 베르토파타는 적어도 아르페가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는 갑옷을 벗지 못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것이 과연 전생의 그가 지저세계를 들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그냥 이 녀석의 갑옷에 어린 저주가 빌어먹게 지독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가 피로 갑옷을 적시며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저주가 강화되기까지 하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는 이미 인간계에 존재하는 해주 마법으로는 엘릭을 어찌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갑옷의 저주에 걸린 초기에 에이디아의 국왕이나 팔라티나의 성녀 바디네를 만날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엘릭에게는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없다. “어, 어떻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그런데 인간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것을, 아르페가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할수 있다고 했으니 엘릭이 흥분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아르페에게 다가와 투구를 쓱 들이밀고는 말했다. “단순히 장난으로 한 말이라면 난 무척 화를 낼 거야. 난 이 갑옷을 벗기 위해 인생을 걸었단 말이다.” “드워프들은 물론 금속으로 마법을 만들어내는 신기를 지닌 종족이기는 해. 나도아까 두 눈으로 확인한 터이고······ 하지만 그들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지. 적어도 지금 저들의 수준으로는.”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저들과 함께 죄의 그림자를 토벌하며 그들이 기술을 숙련하기를 기다리고······.” “역시 그렇구나.” 하지만 그렇게는 언제가 되어서 갑옷을 벗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과연그때까지 드워프들이 살아남아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하지 못하는 것을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난 그걸 듣고 싶은 거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지는데······ 거리에서 떠들고 있기는 이상하잖아? 일단 장소를 옮기자고.” “그, 그렇지. ······이쪽이야. 조금만 더 가면 돼.” 아르페 일행은 지나치게 흥분한 엘릭과 함께 그들에게 배정된 임시 숙소로 향했다. 전 주인이 바로 얼마 전에 죽은 것일까, 숙소는 제법 넓고 깔끔했다. “그럼 이제 말해줘!” 오죽 급했으면 엘릭이 현관을 열어젖히며 곧장 아르페에게 돌아서서는 외쳤다. 아르페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그래도 우리 애들은 쉬게 해야지.” 만약 엘릭이 여자였다면 그의 파티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겠지만 그는 남자. 겨울여왕의 유적에서부터 지저세계에 이르기까지 여행하며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은 순순히 물러났다. 다만 메테르만이 그를 걱정했다. “아르페, 괜찮은 거지? 만약 저 갑옷 안의 내용물이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귀여운 여자애라면 나는······.” “넌 지금 대체 뭘 걱정하는 거냐?” “아얏.” 꿀밤을 얻어맞은 메테르까지 순순히 물러나자, 둘은 거실의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갑옷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지만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들썩들썩거려,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것만은 충분히 전해졌다. “이봐, 아르페······.” “이미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더 이상 뜸을 들였다간 현관에 세워둔 도끼를 집어 그에게 내려칠 기세. 아르페는순순히 그에게 어울려주기로 했다. “네가 정말로 갑옷을 벗고 싶다면,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로아가 돌아오는 대로 곧장 벗겨주지.” “정말인가! 그 고양이가 먹어치울 수 있는 건 마기뿐만이 아니었구나!” “당연하지. 특히 네 갑옷에 걸린 저주는 독하고 진해서, 녀석에게는 최고의 진미나 다름없어.” 만약 죄의 그림자가 어마무시한 규모로 잠들어 있는 어비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놈은 단 한 순간도 참지 못하고 그의 갑옷을 쪽쪽 빨아먹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데.” 아르페의 눈이 빛났다. “정말로 그 갑옷을 벗어도 괜찮겠어?” “음?” 투구 너머를 꿰뚫어보는 듯한 아르페의 시선에 갑옷이 다시 절그럭거렸다. 그는 최대한 태연한 척 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르페를 속일 수는 없다. “너는 지금 무척 강하고, 드워프들의 신임을 한 몸에 얻는 것처럼 보이는데······ 만약 네가 갑옷의 능력을 잃는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활약을 할 수 있을까?” “······이 갑옷의 능력을 알아본 거냐?” “저주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 단순히 너를 괴롭히기 위한 게 아니라, 너를 괴롭게 해서 결과적으로 네 전투력을 더 끌어올리려는 것처럼 보이거든.” 레벨은 곧 격. 레벨이 1이라도 차이나는 순간 비록 스킬에서 우세를 점한다 해도 상대를 뛰어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레벨을 뛰어넘게 해주는 기적적인 요소가 이 세상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주자로는 용사, 성녀 등의 특별한 클래스나 고유능력이 있고 마지막으로 성능이 초월적인 아티팩트가 있다. 단언컨대 엘릭의 육신을 구속하고 있는 갑옷은, 사용자의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아티팩트 중에서도 최상위권을 달리는 전설적인 아티팩트다. 아르페가 지닌 것 중에서는 데마이트 삐삐 정도가 개겨볼 수 있을 정도였다. 데마이트가 일반적인 아티팩트가 아니라 고유의지를 지닌 생물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면, 엘릭의 갑옷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네 말이 맞아.” 조금 머뭇거리는 듯 하던 엘릭은 이내 그의 말을 긍정했다. “이 아티팩트 덕분에 나는 드워프들의 기대에 보답하는 것이 가능했다. 심지어는갑옷에 갇혀 발산되는 내 울분이 갑옷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 “그야 지금 네 갑옷에 걸려있는 건 네 육신과 기록이 더해져서 비로소 완성되는 복잡한 저주거든. 그 덕에 네가 레벨보다 더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하지만 만약 그 갑옷을 벗게 된다면 당연히 더는 그 힘을 다루지 못하게 될 테고, 약화된 육신에 적응하지 못해 사고를 치게 될 확률마저 있어. 그래도 너는 갑옷을 벗을 거냐?” “······.” “나는······.” 엘릭이 말을 잇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더 걸렸다. 아르페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고, 이내 그의 입이 열렸다. “그래도 나는, 이 갑옷을 벗고 싶다.” “그러냐.” “단순히 답답해서가 아냐. 비록 이 아티팩트가 나를 이 위치에까지 끌어올려준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지만, 아티팩트 또한 분명한 내 힘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하지만?” 아르페의 입가에 어리는 미소를 아는지 모르는지, 엘릭은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았다. “아티팩트는 어디까지나 내 도구여야지, 나를 다루는 주인이 될 수는 없어. 그러니 나는 이 갑옷을 벗고 싶다.” “좋아, 넌 아티팩트를 바르게 인식하고 있구나.” “뭣보다······ 이제 거짓말은 지쳤거든.” “거짓말이라. 그래, 그건 거짓말이지.” 아르페의 미소가 짙어지는 것을 보며 엘릭의 갑옷이 재차 절그럭거렸다. “너는 재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정답이야. 아마 태어나서 여태까지 내가 빵을 먹은 개수보다도 재수 없다는 말을 들은 횟수가 더 많을걸.” “그러면 거기에 한 번 추가해라. 넌 되게 재수 없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새삼스럽기까지 했다.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아티팩트를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다만.” “거절하고 싶은데.” “아냐, 일단 들어봐. 실은 네가 갑옷을 벗으려면 로아한테 맡기는 것이 제일 확실하기는 한데,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한 가지 더 있거든.” “······역시 거절하고 싶은데.” 확실하게 벗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됐지 왜 굳이 다른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러나 아르페는 불안해하는 깡통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 아티팩트는 도구여야 해. 지금 네 갑옷의 문제점은 너를 멋대로 휘두르려 한다는 거지. 자, 보라고. 그러면 만약 아티팩트의 성향을 반전시킬 수 있다면 너는 갑옷을 마음대로 벗을 수도 있고, 갑옷의 힘을 다룰 수도 있으니 최고 아냐?”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또 이런 말씀도 하셨지. 나한테 너무 유리한 얘기는 한 백 번쯤 곱씹어본 후에 거절하라고.” 기껏 백 번 곱씹었는데 거절이라니! 과연 엘릭이 이렇게 강직한 성격으로 자란 것은 가정교육이 판타지였기 때문이었는가. 아르페는 조금 긴장했지만 그렇다고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야 물론 위험한 점은 있어. 원혼 그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폭주를 하며 너와 나를 상처 입히려 할 가능성이 있지. 로아한테 맡겨두면 원혼이 너를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녀석에게 먹혀 사라질 테니 위험은 없는 셈이거든.” “그렇다면 역시 그 고양이에게 부탁하는 쪽이······.” “하지만 네가 그 막강한 힘을 네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지 않겠어?” “그래도 고양이가······.” 아르페는 그 시점에서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기로 했다. “너, 우리 파티에 들어오고 싶었던 거 아냐? 하지만 지금 이 지저세계의 일이 해결된다고 해도, 네 지금 상태로는 파티에 들어올 수는 없어.” “······.” 정곡이었는가, 엘릭이 그대로 침묵하고 말았다. “······어떻게?” “보통 용사에 관한 공고를 3년 이상씩이나, 그것도 이런 어두컴컴한 지저에서 생활하면서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 “크흐······.” 물론 엘릭이 전생에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엘릭은 아르페 특유의 허세 스킬에 그대로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확실히 나는 용사 파티에 들어가고 싶었다. 항상 용사가 되고 싶었지만, 용사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들의 곁에라도 있고 싶었지······ 하지만 역시 안 되는가. 갑옷이 없는 내겐 가치가 없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단지 그 정도 아티팩트의 보조가 없으면 마계에서는 못 버틴다는 뜻이야.” 그 말에 엘릭이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외쳤다. “너희, 마계로 가려는 거냐!?” “여기로 불시착하는 일이 없었다면 이미 마계로 진입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곳에 도착해 저 마귀들과 너를 발견했고······ 솔직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파티원을 늘릴 기회. 로아를 포식시켜 성장시킬 기회. ······그리고 마도서를 시험해볼 기회.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네 재능과 육신은 이미 무척 훌륭하고, 우리 파티에 들어오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고 생각해. 단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게 문제야. 하지만 조금 위험한 시도를 해서라도 네 전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면······.” “함께 마계로······.” 고뇌하던 엘릭이, 이내 조금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죽지는······ 않겠지?” “끽해야 평범한 치명상 정도.” “······좋아. 성공할 경우엔 네가 날 파티 멤버로 받아들여준다는 조건 하에, 그 시도라는 걸 해보겠어.” “아주 좋은 선택이야.” 실은 갑옷을 못 써먹게 된다 해도 그를 끌고 다니며 메테르의 레코드 마스터와 가속 스킬을 병행해 마계에서 그의 폭풍성장을 이룩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르페는 굳이 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와 손을······ 건틀렛을 붙잡아 악수했다. 좋은 실험 기회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럼 내일 찾아와. 이쪽에서 준비할 게 몇 가지 있으니까.” 마족이 아닌 원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 만큼 마도서의 여백을 이용해 새로운 술식을 몇 가지 짜내야 할 테고, 마석도 준비해야 한다. 애초에 지저로까지 흘러들어와, 엘릭을 만나게 될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 하루 만에 마법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내일인가······ 알겠다. 너희도 지쳤을 테니, 오늘은 푹 쉬어두도록 해. 내일은 또 내일의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전투라······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내일 보자고. 그 답답한 투구 벗을 준비나 해.” 과연 내일 전투가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말이지. 아르페는 의뭉한 미소로 그를 배웅하고는 일어섰다. 그렇게 아르페는 엘릭을 아주 간단히 속여먹었다. 내일이 기대될 따름이었다. < Chapter 27. 지저 - 5 > 끝 ⓒ 토이카 < Chapter 27. 지저 - 6 > “있잖아, 엘릭은 그 갑옷 안 답답해?”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용사의 물음에, 투구에서 유일하게 열 수 있는 턱 가리개를 들어 올리고 스프를 그 안에 퍼붓던 전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답답하다.” “그러면 왜 안 벗어?” “······시페넌, 이 여자 때려도 되겠지.” “아니, 참아줘.” 용사는 무척 상냥하고 아름다우며 강하기까지 하지만 그 대신 머리는 조금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도적이 필사적으로 전사를 말렸다. 아직 셋뿐인 용사 파티에서한 명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갑옷을 벗을 수가 없다고 말했잖아, 메테르.” “그야 듣긴 했지만······ 우우웅.” 용사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고갯짓을 따라 찬란한 금발이 스르륵 흘러내리는 모습을 넋 놓고 보던 도적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상하다. 갑옷에서 나온 마나가 엘릭을 엄청 복잡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냥 마나를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면 벗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페넌.” “참아.” 용사의 머리는 나쁘지만 마나 지배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정말 그녀라면 갑옷의 저주에 당해도 마나를 움직여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절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저런 바보보다 뒤쳐진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릭, 실은 그것과 관련해서 나도 궁금한 게 있어.” 전사에게서 국자를 받아들어 자신 몫의 스프를 떠 담은 시페넌이 후후, 그것을 불며 그에게 물었다. 아직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가, 그의 얼굴에도 앳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 갑옷의 마나는 불길하기 그지없는데, 엄청난 실력자인 네가 갑옷의 저주를 모르고 입었다는 게 납득이 안 가.” “맞아, 불길한 마나가 엄청 줄줄 새어나오는걸.” “후우······.” 용사와 도적이 함께 물어오자 전사는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아주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끄응,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투구 때문에 입을 여는지 안 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 맞다. 사실 나는 이 갑옷을 착용하기 전, 갑옷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막연히 상상하고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그렇다면 어째서? 엘릭, 네가 그렇게 힘을 탐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데.”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을 하며 그의 인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났다. 그는 약자를 돕는 것을 좋아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용사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 그런 이에게 힘이 없다면 그저 바보가 되겠지만 전사는 자신의 정의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저주받은 갑옷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투혼,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저 자신을 감추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 사실 갑옷 안의 내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이니까. 그래놓고 이제와 후회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지.” 그렇기에 지금 그의 말은 일행에게 굉장히 의외로웠다. 용사가 헤, 입을 벌리며 질문했다. “혹시 뺨에 뾰루지라도 난 거야······?” “야 임마, 커헉!” 전사를 대신해 도적이 용사의 머리에 알밤을 먹이려 했으나 용사는 남다른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하곤 반사적으로 도적의 다리를 걷어차 쓰러트렸다. 그 직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미, 미안해 시페넌. 그만 반사적으로······.” “아니, 네 반사신경을 알면서 본능을 참지 못했던 내가 나빠······. 하지만 생각해봐. 한 번 착용하고 나면 다시는 벗게 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착용한 거다.뾰루지 정도는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런 게 아니면 부끄러워할 건 달리 없잖아? 사람은 모두 다른 모습을 갖고 있고 그건 당연한 거라구.” 용사가 순수하게 말하며 눈망울을 빛냈다. 갑옷 안의 전사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듯이. 그러고 보면 언제나 그랬다. 사람이 지닌 외견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인데 용사는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거나 그 사람의 외모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용사와 함께하며 그녀가 정말 그러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도적과 전사는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메테르 너라면, 내 진짜 모습을 보고도 웃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웃는 건 행복한 건데 왜 나쁜 일처럼 말하는 거야······?” “거기서부터 설명해줘야 하는구나. 저 녀석의 순수함은 대체······.” 끝내 도적과 전사는 모두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새삼스럽지만 결심했다. 메테르, 나는 반드시 이 갑옷을 벗어던지고, 네게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말겠다.” “응, 기대하고 있을게!” “설마 나보다 잘생긴 건 아니겠지······.” “메테르를 상대로는 네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소용이 없다, 시페넌. 너도 외견이 아니라 내면을 가꾸는 법을 생각해보도록 해.”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 그저 평범한 노점상이라기엔 지나치게 잘생긴 흑발자안의 청년을 우연히 만난 이후 용사가 계속 멍한 상태로 지내는 것을 보며 그녀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아도 외모를 보는 눈조차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고 말았다. 눈을 뜨니 메테르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쪽.” “······.” “우흐흐흐.” 순조로이 기습 뽀뽀에 성공한 메테르가 아무 말 없이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본 아르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그녀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시 덤벼드는 것을보곤 그제야 그녀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아얏.” “흐음.” 메테르는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아 몸을 움츠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아르페는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는 일어났다. 마침 바디네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르페 님, 이제 아침입······ 아아아아! 역시 당신, 그쪽으로 도망쳤었군요!” “메롱!” “바디네, 메테르한테 알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하겠습니다!” 바디네는 그 즉시 날렵하게 몸을 던져 메테르에게 알밤을 먹이고자 했다. 여자의 집념과 원한이 가미된 그 몸놀림은 아르페의 동작에 비해 빠르면 빨랐지 결코 느리지는 않은 수준! 그러나 바디네의 주먹이 메테르의 이마에 닿기 전, 그녀는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그것을 피해내곤 바디네의 몸통에 태클을 걸어 넘어트렸다. “아, 미안. 본능적으로 그만.” “한 대만······ 한 대만 때리고 싶어욧······!” “역시 그런가.” 메테르는 평소 아르페의 알밤을 피할 수 있음에도 맞아주는 것이 분명했다. 아르페는 버둥거리는 바디네를 일으켜 세워주곤 메테르에게 재차 알밤을 먹였다. “아얏! 에히히.” “그래, 넌 변태로구나.” 꿈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 조금 전의 지시는 메테르의 반사신경이 전생과 다르지 않은가를 확인하는 간단한 실험이었다. 그는 맞아도 좋다며 달라붙는 메테르를 적당히 밀어내며 바디네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침이라고? 여긴 아침이라는 걸 어떻게 확인하는 거야?” “시계를 만들어놓고 나름의 사이클을 만들어 움직이는 모양이에요. 밤이 되면 천장의 조명도 끄고,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조명의 밝기를 조절한다고 하네요.” “이 거대한 도시 전체를 두고 말이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기술력이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그녀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참고로 시에나와 레이제나는 그들보다 더 오랜 세월 글라케이아에 머무르고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직까지 숙면하고 있는 상황. 어차피 지저세계에서 그녀들의 도움을 받을 일은 별로 없으니, 일이 끝날 때까지 편히 자게 놔두기로 한 후 셋이서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왔다!” 바로 그곳에 엘릭이 있었다. 어쩌면 어젠 그렇게 쿨하게 나가놓고 오늘 날이 밝자마자 이곳으로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준비는 된 건가, 아르페!” “너, 정말 일생일대의 각오를 한 것 같은 목소리구나.” 그가 꾸었던 꿈속에서 엘릭은 자신의 겉모습 때문에 갑옷을 처음 뒤집어썼다는 말을 했다. 비록 전생에서의 그와 현생에서의 그가 지나온 길은 다를 테지만, 갑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아르페, 이 사람 우리 파티로 들일 거지?” “어제 얘기를 들었구나.” “아니, 아르페가 특히 사람한테 신경을 쓸 때는 꼭 그렇게 됐으니까.” 아르페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 없이 결정해서 미안해. 하지만 마계를 앞둔 지금 전력의 증가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어.” “아니, 불만 없는걸. 예쁜 여자애만 아니면 돼.” 아르페가 그 기준도 조금 그렇지 않나 생각하고 있던 그때, 돌연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드워프들의 웅성거림이었다. “이봐, 어제 찾아온 인간들이 엘릭의 갑옷을 벗겨주겠다는 얘기를 했어!” “뭐!?” “대체 무슨 소란이야?” “다들 이쪽으로 오라고!” 드워프 한두 명이 아니다. 한 명의 드워프가 또 다른 드워프를 부르고, 또 드워프들이 몰려들고······ 심지어는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있는 놈까지 있다! 아르페가 엘릭을 보자 역시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다 같이 몰려올 건 없는데!” “다들 전투 때문에 바쁜 거 아니었냐?” “그게, 실은 오늘 경비병들이 말하길 구덩이에서 죄의 그림자가 범람할 기미조차안 보인다고······.” 그야 그렇겠지, 겉에서부터 꼼꼼히 파먹는 것을 좋아하는 로아가 입구로 나올 몬스터를 남겨두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로아 덕분에 임시 휴일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드워프들이, 마침 그들의 주된 화제였던 엘릭의 갑옷과 관련된 이슈를 넙죽 물고 달려드는 상황. 엘릭에게 주목을 피할 길은 남아있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 할까, 엘릭? 안으로 들어올래?” “······아니.” 엘릭은 잠시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이왕 나를 드러내기로 한 이상, 3년간 나와 함께하며 나를 걱정하고 챙겨준 드워프들에게도 당당히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맞겠지. 이대로 부탁한다, 아르페.”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하자.” 미약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르페의 품에서 데마이트 삐삐가 빠져나왔다. 이미 최대로 활성화된 데마이트가 자신의 마나와 아르페의 마나를 공명시키며, 그의 마나의 위력을 증폭시킨다. 대마법을 영창할 때의 기본적인 자세라고 보면 되었다. “저게 대체 뭐지!?” “맙소사, 들어본 적이 있어. 저게 있으면 최강의 스태프를 만들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혹시 저 자는 저것을 우리한테 맡겨서 무기를 만들려던 것이 아닐까?” “빨리 만져보고 싶다!” 다음으로는 어제 하루 동안 조금의 개서 작업을 거친 마도서. 데마이트를 통해 증폭된 아르페의 마나가 마도서에 고스란히 쏟아 부어지고, 그의 의지를 받아들인 마도서가 허공으로 둥둥 떠올라 페이지를 스스로 마구 넘기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오!” “방대한 마력 반응이다. 이럴 수가, 저 자라면 정말 그림자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엘릭의 갑옷에 걸린 저주를 없애는 데 정말 저 정도 힘까지 필요한 건가?” 슬슬 외야가 시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아르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마도서의 타깃을 확정했다. 물론 타깃은 엘릭이 입고 있는 저주 어린 갑옷, 그 핵심이었다. [캬하아아아아아아아!] 바로 그 순간 갑옷 위로 검은 얼룩이 나타났다. 마치 아르페가 마법을 발현하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큭!?” “괜찮아, 엘릭?” “크으으으으으으, 아니······!” 그가 입은 갑옷은 본디 광전사의 갑옷이다. 여태까지는 엘릭의 탁월한 정신력으로 갑옷의 힘을 다루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변질 위기를 깨달은 갑옷이흥분하여 억지로 엘릭의 정신을 잠식하려 들고 있었다. 엘릭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버텨내며 외쳤다. “크아아아아아! 이게 무슨 평범한 치명상이냐!” “바보야, 치명상에 평범한 게 어딨냐!” “아르페 님, 저번이랑 설명이 다른 것 같아요!” 바디네의 예리한 태클은 무시한다! 허공에 떠오른 마도서가 아르페의 뜻을 받아들여 더욱 밝은 빛을 발했다. 저주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아르페 입장에서는 더 편할 따름, 그대로 놈을 덮쳐······ 반전시킨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 “크으으으으!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괜찮아, 나는 지는 승부는 시작하지 않아!” 마족을 반전시킬 기세로 작성한 마도서다. 비록 힘의 근본은 다르다지만 마족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약한 원혼은 마도서의 힘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붙들리고 말았다. [키이이이이이!] “좋았어!” 아르페는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을 기억하려 애쓰며 마도서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데마이트가 눈부신 빛을 폭발시켜 자체적으로 원혼의 움직임에 제동을 건 다음 순간, 마도서의 힘이 오롯이 그 원혼에 쏟아진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원혼의 단말마가 도시 광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강렬한 만큼이나 짧아,데마이트가 폭발시킨 빛이 수그러들 즈음엔 이미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끝.” 아르페는 힘을 잃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마도서를 여유롭게 받아내 탁, 하고 덮어 품에 집어넣었다. 표정은 실로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마족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제 마족을 대상으로 한 데이터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롭다! “······뭐, 뭐야. 끝난 거야?” “엥? 끝났다고? 뭐가 변한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갑옷의 발악을 흥미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드워프들은 작업이 벌써 끝났단 사실을 믿지 못해 눈을 깜박였다. 개중엔 역시 실패했나, 하고 생각하는 놈도 있었다. “······이럴 수가.” 그러나 그들 모두의 의문을 박살낸 것은 바로 갑옷의 주인인 엘릭 본인이었다. “설마 정말로 갑옷의 능력을 온존하며 저주만을 해제하는 방법이 있었다니······ 아니, 이건 해주가 아니라······.” 그러고 보면 갑옷에도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검은 얼룩이 지금은 연하고 푸른 자국으로 변해 갑옷 전체에 기하학적인 선을 그리며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 수호령이 된 거냐······!?” “온전한 혼이 아니라 집착의 조각에 불과했으니, 아티팩트의 보유스킬이 바뀌었다는 정도로 파악하면 되겠지만 일단 그 비슷하다고 보면 돼. 어때, 훌륭하게 성공했지?” “정말······ 대단해.” 그렇게 말하는 엘릭의 투구가 덜그럭거리더니, 다음 순간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드디어 엘릭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꺄아아아아악!” “뭐, 뭐야!” ······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그들에게도 있었다. “텅 비었어!” “얼굴이 없어!” “리빙 아머가 맞았군요!”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는데······.” 갑옷 안의 엘릭이 주위에서 돌아오는 반응에 못마땅한 투로 투덜거렸다. 오감이 예민한 메테르가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다음 순간. 기어이 갑옷의 상반신까지 절그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엥?” “설마.” “엘릭!?” “젠장······.” 그곳에, 신장 130센티미터의 작고 귀여운 소년이 서 있었다. < Chapter 27. 지저 - 6 > 끝 ⓒ 토이카 < Chapter 28. 연결 - 1 > “어린애 아니다. 성인이다.” 엘릭은 자신을 향해 꽂히는 사람과 드워프들의 시선을 느끼며 뚱한 투로 먼저 못을 박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람들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작잖아.” “인간인데 작아.” “드워프보다 작은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메테르만은 불안한 눈으로 아르페를 보았다. “설마 아르페······.”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니야.” “이상하네요. 설마 성장둔화의 저주일까요? 아냐, 제 힘으로는 잡아낼 수 없어요. 분명 저주는 아닐 터인데······.” “그래, 저주가 아냐. 그냥 타고나길 이렇게 타고난 것뿐이라고.” 미소년 엘릭의 표정은 지나치게 뚱했다. 아마 그는 여태까지 이와 같은 해명을 몇천 번이고 되풀이해왔겠지. 그래도 얼굴 한 구석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갑옷에 갇히고 오랜 세월, 그는 이 지긋지긋한 순간마저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갑옷은 사용자를 구속하는 대신, 어느 정도 의지만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난 저주가 걸렸다는 걸 알면서도······.” “어지간히도 아이 취급을 받는 것이 싫었던 거겠지.” “넌 알고 있었던 눈치인데.” 만물열람의 주인인 아르페가 원하고자 한다면 갑옷 너머 엘릭의 진실 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가 대꾸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자 엘릭은 역시 재수 없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그 뚱한 태도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주위에서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엘릭, 갑옷의 저주에서 풀려난 것을 축하한다!” “아······ 보두케. 고, 고맙다.” 만약 이곳이 인간계였다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지저세계. 신의를 중시하며 호탕한성격을 지니고 있는 드워프들은 엘릭의 모습에 처음 조금 놀랐을 뿐, 다음 순간에는그에게 다가오며 밝게 웃어보였다. “축하한다!” “오늘은 죄의 그림자도 범람하지 않고, 축제를 위한 날이로군!” “축제다, 축제!” 엘릭은 드워프들에게 둘러싸여 얼떨떨한 모습이었으나 이내 밝게 웃었다. 저주도트라우마도 모두 떨쳐내고 진정으로 웃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아르페는 그것을 흡족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너희 축제는 내일로 미뤄라.” “어쩜 아르페는 뒤통수치는 실력도 최고야. 너무 멋져.” “그리고 엘릭 너는 갑옷 다시 입고.” “모처럼 사람이 현실을 받아들일 마음을 먹었는데 왜 그런 초를 치는 소리를······ 음?” 소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르페가 단순히 그를 괴롭히려고 꺼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도 다음 순간에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너머, 그들이 항상 방비하면서도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구덩이 너머의 지옥에서 기운의 폭주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3년이라는 시간 극한의 환경에서 수련하며 강해진 엘릭 본인조차 막아내기 힘들 것이라 생각되는 기운이었다. “설마······.” “아무래도 저항이 조금 격렬한 모양이야.” “저항? 떼몰살의 시동을 거는 게 아니라 저항?” 저항이란 본디 상대적으로 약한 쪽의 투쟁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방금 그들이 느낀 격렬한 기운의 폭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포식자의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르페는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로아가 질 일은 없어. 단지······ 조금 늦어지기는 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들어가볼까 하는데.” “오오, 드디어 구덩이에!” “죄의 그림자들을 소탕해준다 그 말인가!” 로아가 먼저 구덩이를 소탕하러 떠난 줄도 모르는 드워프들은 그들이 퀘스트를 수행하려는 모습을 보며 환호했으나 엘릭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거기에 날 끌고 갈 생각이군.” “파티는 일심동체거든.” “하나의 마음, 같은 몸······. 몸······ 같은······.” “아냐, 메테르. 그걸 쓸데없이 깊게 받아들이고 있지 마.” 엘릭이 기꺼이 파티에 들어오겠다고는 말했지만, 아직 아르페 일행의 무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은 없다. 마침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서로의 능력을 확인해보고 앞으로 서로 잘해나갈 가능성을 점치기 위해, 절대 죽을 일도 없고 나름의 강한 적이 등장하는 구덩이는 테스트 던전으로 아주 딱이었다. “테스트가 다 얼어 죽었어······.” “아르페, 시에나랑 레이제나 깨워야 해?” “아니, 그 녀석들은 이대로 쉬게 놔두자. 그동안 쌓인 피로가 장난이 아닐 테니까······ 무엇보다, 어쩌면 우리가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는 사이 지극히 적은 확률로 새로 생겨난 몬스터가 지저를 습격해올 수도 있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그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르페였으나 굳이 그 말을 입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당장 바디네와 메테르, 떨떠름한 얼굴로 갑옷을 다시 착용한 엘릭을 한 자리에 모았다. 바로 떠나려는 것이다. “나도 빠질 수 없지! 길고 긴 세월 이어져온 끔찍한 굴레, 그것을 벗겨준다는데 내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지 않을 수 없군!” “부디 우리와 함께 가자! 죄의 그림자를 상대하며 기른 실력, 녹록치 않다는 것을보여주겠어!” 일부 드워프들이 실로 용감하게도 가세하겠다고 말해주었으나 아르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주제를 알아야지. 죽기 싫으면 여기들 있어.” “말투는 전혀 상냥하지 않아!” “괜히 애매한 말로 달랬다가 나중에 따라와서 지랄하게 하는 것보다 이쯤에서 묵직한 진실 폭격으로 가라앉혀두는 편이 좋아.” 그렇게 성공적으로 드워프들을 진정시킨 아르페는 일행을 이끌고 구덩이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지저도시와 그들이 지키는 수십 개의 구덩이를 연결하는 지하통로,지금은 불길하리만치 고요했지만 그것은 사기가 모두 구덩이의 심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놔두면 로아가 다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맞아. 하지만 새로운 파티원과 손발을 맞출 좋은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게다가 사실 처음부터 신경 쓰였던 것도 있고.” 혹시 그가 구덩이에 직접 들어가려는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얘기인가. 바디네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물어왔다. “신경이 쓰이셨다면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지저도시. 통로도 그렇고, 그들이 관리하는 구덩이마저도 그래. 드워프들이 도시를 짓고 살던 지저, 하필이면 바로 그 근처에 구덩이가 생겨난 것도 아닐 테고······ 이 지저세계의 구성 자체가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그건 확실히······ 그렇네요.” 죄의 그림자의 탄생 이유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드워프들도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그들의 삶의 터전이 더럽혀지기 때문만은 아닌 듯이 보였다. “그것보다 설득력 있는 가설이 하나 있어.” 수백 년 전, 드워프가 인류의 역사에 발을 들이밀지 않게 된 그 순간. 어쩌면 그들은 그때까지는 지상에 살고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 특별한 일을 계기로 지하에 내려오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일이라면 역시 그 죄의 그림자를 말하는 것인가요?” “맞아, 바디네. 그들은 처음부터 죄의 그림자를 막기 위해 지저로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이럴 수가, 그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드워프들이 자진해서 그 짐을 짊어졌다는 말인가요!” 아르페는 그녀의 물음에 글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진이었는지 강요였는지는 모르지.” “강요······?” 아르페는 그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고 그저 히죽 웃기만 했다. 수백 년 전, 실로 애매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세월. 이 패턴도 이미 여러 번 겪지 않았던가. 분명 특정할 수 없는 시대여야 할 수백 년 전에 일어났다는 일들이 하나같이 전대용사와 관련된 일이었으니, 아르페는 이 지저세계 또한 선배님, 전대 용사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와 비슷한 면도 있지. 그들이 지키던 고대의 신전을 생각해봐. 그 안에 봉인되어 있던 에인션트 머메이드를.” “하지만 고대의 신전은 봉인되어 있었잖아?” “그런 대규모의 봉인을 어디에나 발현할 수는 없어. 고대의 신전이 조금만 더 규모가 컸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에인션트 크라켄의 힘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불가능했겠지. 인어의 왕국과 도로로부터 얻는 지원도 봉인을 강화시켰었고. 하지만 지저는 사정이 다르거든. 훨씬 열악하고 위험해. 정말이지 드워프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곳에서 수백 년씩이나 버티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서 선배님이 드워프들을 모두 지저로 데려와서 죄의 그림자를 막게 했다는 거야?” “그렇지. 선배 입장에서는 적절한 인선이었겠지만, 그 때문에 드워프들은 대를 거듭해가며 이 지하에서 서서히 쇠락하는 꼴이 되고 만 거야. 실로 용사다운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그게 용사다운 거야!?” 더욱이 죄의 그림자라는 녀석들은 아무래도 에인션트 머메이드보다 훨씬 더 불길한 냄새를 풍긴다. 레벨도 압도적으로 높을 뿐더러 본질적으로 마에 가까운 인상이었던 것이다. 마치, 마족에서 한 발 엇나가면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가만······?’ 마족? 아르페는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에 발을 멈추어 섰다. 정말 우연히 떠오른 그 생각은 그러나 곧 그의 머릿속에서 가득 부풀어 올라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니, 잠깐만. 말도 안 되지. 그렇지? 말도······.’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르페 혼자만 알고 있으면 미워.” “그냥 문득 떠올렸을 뿐이야. ······만약 인간을, 아니 타종족을 마족으로 만드는 저주의 연구가 내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거라면, 하는 생각을.” 여태까지 아르페는 당연히 마족화 저주의 연구가 현 마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있다고 생각해왔다. 마왕의 절대지배는 마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인류를마족으로 만들어버리면 만사해결! 얼마나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제쳐두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의 아르페도 모르는 까마득한 세월 이전에, 이미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그렇다면 아르페 님, 마족화 저주의 연구가······ 선대 마왕 때부터?” “그럴지도 몰라.” 어쩌면 에인션트 머메이드 또한 그 연구의 결과물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르페는 막연히 고대 인어가 모두 그랬던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선조인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있지 않았던가. 그 시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에인션트 머메이드도 어디까지나 인위적으로 탄생한 종족에 불과한, 수백 년 전에 있었던 마족화 저주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맙소사······.” 그래도 긍정적인 일이 없지만도 않다. 과거의 실험의 결과물보다 현대의 실험의 결과물이 더 별 볼일이 없다는 것.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바로 연구의 단절, 혹은 퇴보를 이름이다. “이봐, 지금 신입 기죽이는 거야, 뭐야. 대관절 알아먹을 수 없는 얘기만 하고 있잖아.” “아, 그랬지. 미안해, 엘릭. 그럼 빠르게 정리하자고. 중요한 건 이거야. 현 마왕 세력과 별개로 날뛰고 있는 놈들은 아마도 전대 마왕의 잔당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저 구덩이 안에······.” 아르페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빌어먹을 선배님의 흔적이 또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선배님 땜에 아르페한테 혼났어. 선배님 미워.” 레코드 디바이드가 강화되던 순간을 말하는 것일까. 아르페는 메테르의 뜬금없는말에 실소를 흘리며 일행에게 선언했다. “다 왔어. 들어가 보자.” 물론 아직 해결되지 않는 의문은 산처럼 남아있었다. 어째서 아르페의 전생에는 그 전대 마왕의 잔당세력이라는 놈들이 날뛰지 못했었는가, 에 대한 의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행에게 털어놓고 상담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그는 입술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로아가 뿜어내는 강렬한 기운과 포효, 그에 저항하는 죄의 그림자들의 절규로 가득한 곳으로. < Chapter 28. 연결 - 1 > 끝 ⓒ 토이카 < Chapter 28. 연결 - 2 > 일행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아무리 죄의 그림자들의 저항이 거세어도 로아가 그리 어렵지 않게 어비스를 진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예 씨몰살을 해버렸는데.” “역시 우리가 들어올 필요 없었던 것 아닐까, 아르페?” 로아는 어비스를 그리 어렵지 않게 진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어비스에서 괴물들이 생겨나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기세로 구덩이를 쓸어버리고 있었던것이다! [크오오오오오오아아아아아!] [먀먀먀아아아아!] “그렇다는 건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이 압도적인 기세와 괴성은······.” “아마 단일 개체가 만들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어쩌면 다수가 모여 하나로 변이했을지도 모른다. 죄의 그림자 놈들은 딱 봐도 형체가 정해져 있지 않고, 물질보다는 마나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어 여차하면 합체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을 품고 있던 아르페이기에 세울 수 있는 가설이었다. “레벨 300은 가볍게 넘겼어. 나 혼자로는 버거울지도.” “적어도 에인션트 크라켄보다는 훨씬 강하겠지.” 아르페는 드워프들이 말했던 큰 놈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엘릭을 돌아보았다. 아르페가 할 말을 예측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몰라도 아르페에게는 갑옷 안의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제법 귀엽다. “네 생각이 맞다. 죄의 그림자는 특정한 조건 하에 융합해 그 덩치와 마력을 불리지. 드워프들은 놈들을 큰 놈이라고 부른다. 보통 우리가 조금 유리한 상황이 되면 나타나는데, 그래서 우리는 전투를 벌일 때 이길 것 같아도 일부러 아슬아슬한 간극을 유지하곤 했었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나타났을 땐 놈들이 융합을 하기도 전에 다 쓸어버렸던 거고.” “새삼스럽게 어마어마하네.” 자신의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던 엘릭도 그 정도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해본 적은 없는 것이겠지. 아르페가 히죽 웃자 그는 살짝 열 받았는지 등에 진 도끼를 손으로 꽉 쥐었다. “내 갑옷을 강화해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아르페. 반드시 근시일 안에 파티의 최강자가 되어주지.” “진짜냐, 엄청 힘들겠지만 힘내라.” 만약 엘릭이 정말 파티의 최강자가 되어준다면 마왕이 두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 나타나도 문제없을 텐데,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아르페는 구덩이 안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잔해도 하나 없이 깔끔해요. 마치 신성의 힘으로 정화를 펼친 것처럼······.” “정화는 마기를 평범하거나 축복받은 마나로 전환시키는 작업이야. 반면 로아의 포식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먹어치우지. 녀석의 포식은 결코 그런 편리한 능력이 아냐.” “그런 괴물을 어떻게 얻은 거지? 용사와 그리 어울리는 사역마는 아니잖아.” “있어, 그런 게.” 생각해보면 로아를 얻은 것도 선배가 마련해놓았던 용사 육성 던전에서였다. 물론 그 당시엔 안에서 태어날 이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으니 설마 이것까지 선배가 예상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점점 기운이 강렬해져. 아르페, 조금 서두르자.” “그래.” 어비스는 굳이 따지자면 고대의 신전과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었다. 던전 자체가 하나의 마법진을 이루는 요체가 되어, 그 안의 대상을 바깥으로 쉬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로서 이 안에 선대 용사의 흔적이 있으리라는 아르페의 가설이 힘을 얻었다. [미야아아아아아아앗!] [쿠고오오오오, 고고고오아아아아!] 다만 고대의 신전과는 상황이 여러모로 달랐다. 지저에서 땅을 파고 만들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단 봉인의 힘이 느슨했는데, 어비스 제작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유지되었어도 힘들었을 것을 죄의 그림자 놈들이 빠른 속도로 그 숫자를 불리는 바람에 봉인이 내용물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놈들이 구덩이 바깥으로 나가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렇게 어비스에 적용되었던 마법의 효과가 약해지고, 죄의 그림자는 다시 숫자를 불리고······ 심지어는 어느 순간부로 그것이 가속했다.” 마기를 지니고 마기에 반응하는 죄의 그림자의 특성상 그 시기를 판단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마왕군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해 인간계의 마나에 마기가 섞이기 시작했을 즈음이겠지. ‘겨울여왕도 이 사태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그래, 마기에 드워프에 선대 용사에 전생 용사 파티의 전사라······ 잘도 이 많은 톱니바퀴가 한 데 맞물려 있구만.’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을 놀렸다. 격돌의 장소는 대충 파악이 끝났다. 터무니없이 짙은 마기와 그것을 억압하고자 하는 대량의 마나가 집결된 곳. 그리고 그 모두를 집어삼키고자 날뛰는 로아의 마나가 느껴지는 곳이다. “남은 거리는 한 번에 가자!” “네!” “응!” “뭐, 뭐지? 어째서 다들 네게 안기는 거냐!” 그냥 신체 일부만 접촉하고 있으면 된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말을 더럽게도 듣지 않는 파티원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긴장감 따윈 지상에 놓고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엘릭은 자신도 아르페에게 안겨야 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다음 순간엔 아르페가 그의 갑옷을 붙잡고 블링크를 시전하고 있었다. [먀아아아, 먀먀아아앗!] 눈을 감았다 뜬 다음 순간, 그들은 어비스의 심부로 들어와 있었다. 로아의 우렁찬 포효를 듣고 녀석을 향해 돌아선 아르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로아가 거대 고양이가 됐잖아!?” [먀아아아아아아아!] 포효는 여전히 귀엽기 짝이 없었지만, 녀석의 검고 매끄럽게 빠진 동체가 족히 수십 배 이상 확대되어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차라리 검은 안개의 형태였다면 놀라지라도 않았겠지만 지금 녀석의 모습은 엄연한 실체! 반대편에서 녀석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괴물과 육박전을 벌이는 모습으로 보아 확실했다. [먀먀아아아아아앗!] “로아 크다아아!” “아무래도 녀석, 이 던전에서 300레벨을 넘긴 모양인데······.” 레벨도 높을뿐더러 마족의 그것보다도 진한 마기를 지니고 있는 놈들을 던전 하나 통째로 먹어치웠으니 그 정도 성장도 납득이 가능하다. 겨울여왕의 유적이 아르페 일행을 강화시켜주었다면, 어비스는 로아를 한 단계 진보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저 놈, 내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죄의 그림자 중 가장 거대하고 짙어······.” “나도 상황을 보아 조력을 할까 말까 생각하긴 했지만······.” 아르페는 적과 격렬한 사투를 벌이는 로아의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한 죄의 그림자를 구성하는 마기가 로아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처음엔 저것보다도 훨씬 더 덩치가 거대했겠지. “로아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야. 저건 오롯이 처치하게 놔두자고.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아르페가 마나 스트링을 사방으로 뻗어냈다. 죄의 그림자는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로아의 맹공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녀석에게 돌아서야만 했고, 그 틈을 타 아르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거대 공동 내부로 마나 스트링을 확장시켰다. 그의 눈에는 지금 이 공동의 구조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감추어진 함정과 위대한 도전자를 위한 보상까지도. 그 시점에서 어비스를 만든 이가 그들의 선대 용사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어비스는 고대의 신전을 만들기 전에 만들었던 곳인 것 같아. 선배의 수준이 확실히 허접하거든. 일단 몬스터를 쓰러트리지 않고선 접근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모든 마법은 그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을 다루는 이 앞에서 무력해지는 법. 당대의선배는 지금의 아르페보다 허접했다. 그 결과로 마나 스트링이 지나가는 곳마다 어비스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반응하고 있었다. “아르페, 그렇게 드러내면 이곳은······.” “어비스는 이제 사라질 거야. 지금 근본을 뽑아내는 중이거든.” 엄밀히 말하면, 어비스는 죄의 그림자를 가두기 위한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마기를 뿜어내는 ‘무엇인가’를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게뭉치고 뭉쳐, 자의식을 가지게 될 만큼 뭉쳐 탄생한 것이 바로 에인션트 이블 스피릿, 죄의 그림자인 것. “아르페, 마나가 뭉치는 것만으로 의사를 지닌 무언가가 탄생할 수 있는 거야?” “몬스터의 생성 구조도 그와 비슷하다는 이론이 있어. 태어나는 것이 몬스터냐, 정령이냐가 문제인데, 저놈들 같은 경우는 마족과 정령의 중간 지점에 있는 몬스터라고 봐야겠지.” 요는 이것이다.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까지는 아르페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터무니없는 마기를 뿜어내는 물질이 있었고, 선대 용사는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해 어비스에 묻었다. 그리고 드워프들을 시켜 지저를 지키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걸 꺼내고 있지.” “누가 보면 마왕인 줄 알겠다.” 실제로 저 물건이 마왕의 손에 들어가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 생길 것이다. 겨울여왕이 그들을 바로 이곳으로 보낸 이유도 어쩌면 그것이 아닐까. 아니, 혹 마왕군 사천왕이 겨울여왕을 찾아온 것도 그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끝이 없겠지. 일단 저걸 해결하고 생각하자.’ 아르페의 마나가 유적의 이곳저곳을 동시에 건드리니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미약한 지진에 이어 바닥 한 부분이 들썩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엇인가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 것. 로아와 치열한 격돌을 벌이고 있던 괴물은 그 정체를 깨닫곤 갑자기 전신을 부풀리며 흥분에 포효했다. 그리고 로아의 앞발에 얻어맞아 얼굴의 절반을 상실했다. [먀먀, 먀먀먀먀!] [그우우아아아아아아아!] 지진이 더 심해졌다. 어비스 깊숙이 묻혀있던 물건이 보다 빠르게 올라오면서 대기를 진동시켰다. 마기의 질이 한층 강력해져 일행의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였다. 그것을 눈치 챈 바디네가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낭랑하게 외쳤다. “퓨리파이.” “고마워, 바디네.” “조심하세요, 아르페 님. 이 정도로 사악한 기운은 처음 느껴 봐요. 사천왕이라던그 여자보다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생물에 불과하니 걱정할 것 없어.” 하지만 아마 로아가 없었더라면 아르페도 저것을 바닥에서 끄집어낼 생각은 하지못했으리라. 그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다. 아직 진체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끔찍해 구토기가올라올 지경이었다. 마계의 대기에 내던져진 것만 같은 기분. 대체 이 망할 선배님은 저 물건을 어디서 가져왔단 말인가? [구아아아아아아아!] “로아, 잘 붙잡아둬.” [먀먀아아아아!] 로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이제 녀석은 적보다 훨씬 덩치가 컸는데, 로아가 마기를흡수하며 몸을 실시간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적은 마기를 앗겨 덩치가 작아지고 있었으니 그도 당연한 일이었다. “됐다, 나온다. 바디네, 부탁해!” “맡겨만 주세요, 아르페 님! 후우······ 생츄어리!” 아르페의 기합에 맞추어 바디네의 눈이 찬란한 황금빛을 토해냈다. 일대 영역을 신성력에 지배되도록 만드는 성녀만의 스킬! 직후 바닥에 구멍이 뽕, 뚫리고 지극히 작은 쇳덩어리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어비스의 근원, 핵심! 바디네의 성역으로도 미처 정화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마기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만약 성역이 아니었더라면 당장에 무수한 숫자의 죄의 그림자가 새로이 생성되었으리라! [쿠구아아아아아아!] [먀먀먀먀먀먀!] “으왓, 저 녀석들 흥분했다!” 아르페는 다급히 그것을 쥐어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직후, 그것이 튀어나온 자리가 크게 들썩이는가 싶더니 어디서 많이 본 기억이 있는 제단이 튀어나왔다. “뭐야, 왜 스킬 북도 스펠 북도 없어.” “이땐 선배님이 더 허접했던 것 아닐까, 아르페?” “메테르, 똑똑한데······?” 아르페는 메테르의 의외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단으로 다가갔다. 스킬 북과 스펠 북이 없는 대신 제단에는 더욱 빽빽하게 선배 용사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첫 문장은 이랬다.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뭐?” 그것은 용사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패배 선언이었다. < Chapter 28. 연결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8. 연결 - 3 > [먀아아아아!] [쿠오오오!] 두 거대괴수가 충돌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아르페는 제단의 글귀를 빠르게 읽어나갔다. “우리는 이길 수 없다. 나는 진실을 깨닫고 말았다. 모두가 내게 그것을 감추고자했으나, 내 뛰어난 두뇌와 마력을 속일 수 있는 이는 인간계에······ 아, 자랑질은 그대로구나?” 적힌 내용이 10이라면 그중 9.9는 선배의 자랑질이었다. 아르페는 그 모두를 과감하게 쳐내고 남은 0.1을 건져냈는데, 그나마도 대부분 빙 둘러가는 말이나 그 당시 그와 같은 시대를 겪지 않은 이라면 알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반절 정도가 유효한 정보였다. “누군가 용사를 속였다. 진실을 깨닫고 절망한 용사는 이블 하트를 봉인했고 드워프들에게 그것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거기에 더해 이블 하트가 해방되는 순간 어비스가 무너지도록 마법을 설치해놓았다. 이 글귀를 읽고 있는 자라면 필히 이블 하트를 이용해 세상을 마로 물들이려는 자일 터, 결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르페, 어서 빠져나가자!” “아니, 괜찮아. 이블 하트인지 뭔지 빼내기 전에 일단 그 마법 먼저 일시정지시켜놨거든.” “······.” 무너지는 유적을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느라 고생하는 것도 이젠 질렸다. 매번 같은 패턴에 당하는 거야 용사 이야기의 정석이긴 하지만 전직 마왕군 사천왕인 아르페는 더 이상 순순히 당해줄 수 없었다! “이젠 우리도 좀 여유롭게 살 때가 됐지.” “곧 마계로 들어가게 될 텐데 과연 아르페의 생각대로 이루어질까······?” 아르페는 메테르의 걱정 어린 말에도 그저 후, 하고 웃어 보일 뿐이었다. 메테르는 근본적인 착각을 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아르페의 전문 영역은 인간계가 아닌마계인 것을! “그보다도 아르페 님, 누군가 용사를 속인 것과 이블 하트를 어비스에 봉인한 것은 대체 무슨 연관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더욱이 선대 용사는 서두에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또 무엇일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어비스가 무너질 낌새도 안 보이자 안심한 바디네가 그제야 제단의 글귀에 신경을 썼다. 그녀의 질문에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설마 선대 용사라는 작자가 마족에게 도움이 되는 짓을 나서서 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선배는 이블 하트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되어 있었어. 그것을 근거로 생각해보자면······ 마법 연구를 도와줬더니 탄생한 게 이블 하트더라, 혹은 이블 하트를 없애기 위해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실은 그것을 손에 넣어 사악한 짓거리를 하기 위한 작전이었더라 및 기타 등등 정도가 있을 법하네. 인간의 배신 세력이 있었다는얘기니 용사가 절망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 “과연······.” 세상만사는 퍼즐 맞추듯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나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일은 대개 더러운 흔적을 남기기 마련. 마주하는 퀘스트마다 전부 수행하고 마는 본능을 지닌 용사가 욕망의 함정에 걸려들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 정신적으로 성장하느냐 하지 못하느냐가 갈림길이 되겠지. “그래도 대단해. 마계에서도 이런 물건을 차마 만들어내지 못할 텐데 어떻게 이런 걸 인간계에서 만들었을까. 물론 이 일에 마족도 관계되어 있었겠지만······.” 이블 하트라는 물건이 얼마나 끔찍한 양의 마기를 뿜어내는지, 이미 아르페의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음에도 주머니를 뚫고 발산되는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 바디네는 끊임없이 성역에 마나를 부여해야 했다. 아공간에 쳐박았으니 일단은 안심, 같은 일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없앨 수 있다면 좋겠는데······ 아르페 님?” “불가능. 쉽게 없애지 못하는 물건이니 봉인했겠지? 보다 정확히는, 이걸 파괴하는 과정에서 발산될 마기가 문제가 돼. 서투르게 정화라도 시도했다가 까딱하다간 네 목숨이 날아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대답이었다. 바디네는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르페 님? 로아에게 먹이실 건가요?” “그것도 불가능. 아무리 로아라도 폭주할지 몰라.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이블 하트가 뿜어내는 기운을 전부 로아가 빨아들이도록 하는 건데, 이건 간단한 조치만 취하면 가능하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로아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고, 아주 느린 속도로나마 이블하트를 끊임없이 약화시키는 것도 가능해진다. 문제의 원흉을 당장 없앨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죄의 그림자니 뭐니 하는 것들은 더생겨나지 않게 될 뿐더러 파티의 전력도 실시간으로 강화되니 이 이상 가는 방법이 없다. 선대 용사는 부족했던 것이다. 마수가. “뭔가 더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까 허무하네. 게다가 스킬 북도 스펠 북도 없고.” “설마 그 선배도 자신의 후대 용사가 이런 곳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겠지. 그리고······.” 이 선배란 인간이 모든 진실을 담아놓았으리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바디네에게는 용사가 속았다는 사실에 대해 대충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았던 아르페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탓이다. ‘이렇게 뛰어난 마도의 재능을 지니고 있던 선배가 고작 몇 마디 말에 넘어갔을 리는 없어. 이블 하트의 특징을 몰라봤을 리도 없지. 용사와 이블 하트, 그 사이에 빠진 단서가 분명 하나 이상 존재하는 거야······.’ 인간과 마족, 용사와 마왕. 그리고 이블 하트. 알 것 같으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아르페를 괴롭혔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한 사실이 있다면 결론은 분명하다는 것. ‘우리가 강해지면 된다. 귀찮은 일이 나타났을 때 덜 귀찮기 위해선 우리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간 이블 하트가 뿜어내는 마기를 힐끗 살피고는 고개를 들었다. 로아가 이제 막 거대 죄의 그림자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먀아아아아아아아!] [갸아아아아악!] 그것이 놈의 단말마였다. 처음엔 로아를 압도하다시피 하다가 어느 순간인가부터비등해지고, 결정적으로 해방된 이블 하트에 정신이 팔린 사이 주도권을 빼앗겨 처절하게 린치를 당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겠다만 그것이 엑스트라의 숙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 [먀아아아아아아!] 로아의 함성이 어비스를 가득 채웠다. 녀석의 거대한 몸 곳곳에서 빳빳이 일어난 검은 털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힘을 잃은 죄의 그림자를 칭칭 동여매, 그것을 순수한 마나로 녹여 다음 순간에는 깔끔하게 흡수시켰다. 녀석의 레벨이, 기록이, 마나가 순식간에 폭증했다. 아마 녀석의 탄생 이래 가장 그 특성을 살리기에 적합한 ‘식사’가 되었으리라. “로아가 엄청 강해지고 있는 게 보여.” “진짜 치사한 능력이라니까 저거.” 몬스터 퇴치 경험치는 따로 받고 마기까지 흡수해 또 성장하다니. 아르페가 투덜거리는 사이 죄의 그림자를 완벽하게 흡수한 로아가 다시 한 번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더니 서서히 몸집을 줄여나갔다. 그 끝에 결국 어비스에 들어오기 전의 고양이 사이즈로 돌아왔다. [먀?] “그래, 고생했다.” 내가 알아서 다 해치울 텐데 뭐 하러 왔니,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로아를 품에 안으며 아르페가 선언했다. “자, 던전 클리어. 퀘스트도 클리어. 이제 지상으로 나가자. 드워프까지 다 같이 말이야.” “끝? ······아니, 이걸로 정말 끝이란 말이냐?” 미지의 던전에서 손발을 맞춰볼 기회도, 숨겨져 있던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도 없이 그냥 모든 사태가 정리되어버리자 엘릭이 경악해 외쳤다. 그러나 아르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뭘 더 바란 거야?”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기껏 갑옷까지 강화시켜놓았으니 날뛸 기회가 생기겠지, 하고 내심 각오하고 있던 엘릭은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난감해졌지만 아르페의 품에 안겨 꼬물거리고 있는 로아를 보고 있자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아르페가 시에나와 레이제나를 두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빠르고 간단하게 끝날 일이라서 그랬던 것뿐! “로아, 이것 좀 물어봐. 삼키면 안 된다.” [먀먀.] 로아라고 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마기의 한계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터, 녀석은 아르페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블 하트를 입에 물었다. 작고 검은 쇳조각으로만 보이는 그것은 로아의 입에 물린 순간 스스로 뿜어내던 모든 마기를 로아에게 집중시켰으나······. [먀!? 먀먀먀! 먀아먀먀아!] “그래, 그렇게 먹고도 또 먹는구나. 장하다. 넌 훌륭한 돼냥이가 될 거야.” [먀먀먀먀!] 로아는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떨어지지 않는 간식에 환호하며 귀엽게 울 뿐이었다. 탐식의 마수 만만세다. [먀먀아, 먀아먀아아.] “그래, 안 뺏을 테니까 삼키지만 마. 바디네, 앞으론 로아한테 신경을 조금 써줘.” “아르페 님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요.” [먀먀먀.] 생각해보면 실로 우스운 일이다. 어떻게 보면 로아야말로 아르페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우연의 산물로 탄생한 녀석인데, 지금 그 녀석 덕분에 전대 용사가 드워프 종족까지 희생시켜가며 봉인해야 했던 원흉을 실로 간단히 처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수백 년간 갇혀 있었던 드워프 종족이 이렇게나 허무하고 쉽게 해방되다니······.” “엘릭, 너는 증인 노릇도 해줘야겠어. 네 말마따나 수백 년간 갇혀 있던 드워프들이 갑작스레 찾아온 자유를 실감하기란 힘든 일일 테니까.” “아니, 당장 나부터 실감할 수가 없다만······.” 처음 어비스에 들어올 때만 해도 호기롭게 선언했던 엘릭이었으나 지금은 과연 자신이 이들과 어울리는 활약을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런 그를 보면서도 그저 히죽 웃을 뿐이었다. 마계 최고의 셰프밑에서 수학하고 독립하여 어느덧 훌륭히 만들어낸 요리로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 이미 완성되어가는 녀석의 성장을 부추기는 것 정도는 아르페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였다. “걱정 마. 강해지게 될 테니까.” “그 말이 더 무서워 임마.”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흘렀다. 어비스로부터 돌아온 아르페 일행을 맞이한 드워프들은 그 짧은 시간에 어비스를 클리어하고 왔다는 일행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으나, 실제로 마기의 근원이 사라졌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물론 바로 그 마기의 근원은 로아의 입에 물려 있었지만 마기가 생겨나는 즉시 로아에게 깔끔하게 흡수되니, 겉으로만 보아선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그, 그러면 정말 우리가 지상으로 나가도 된단 말인가?” “믿기지가 않는군. 죄의 그림자, 그 끔찍한 놈들을 더는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하지만 엘릭의 말은 믿을 수 있어. 실제로도 어떠한가? 어비스에서 항상 느껴지던 그 끔찍한 기운이 지금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단 말이야!” “그래, 이건 현실이야!” “다들 이주 준비다! 지상, 지상으로 나가는 거야!”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용사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했던 드워프가, 본격적으로 인간계에 난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 그 전에 우리 무구 만들어주는 거 잊지 마.” “켁.”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릴 예정이었지만 말이다. < Chapter 28. 연결 - 4 > 지상으로 나갈 짐을 싸는 인력을 제외한 모든 드워프가 아르페 일행의 장비를 손보는 일에 투입되었다. 원래부터 그들이 쓰고 있는 장비들을 보다 그들의 신체에 맞추어 손보고, 전체적인 조화를 맞춘다. 추가로 재료를 소모해 부족한 장비들을 만들어낸다. 본격적인 용사 파티의 출두를 앞두고 파티의 전체 능력이 확실히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사제나 마도사의 장비를 다루는 건 처음인데! 서, 선조님들이 남기신 기록 가져와봐!” “하, 하도 오래된 일이라······ 이봐, 멋대로 분리하지 마! 소재의 힘을 다 죽일 일있어!” 드워프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아르페 역시 조용한 방을 잡아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바로 세계수의 가지를 다듬는 일이었다. 세계수에게 가지를 받을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마나를 받아들이고 증폭하며 폭주하는 마나의 흐름을 통제하는 능력까지 지닌 가지는 스태프로 만들기에 아주 제격이었다. 다만 여태까지는 스태프보다 마도서를 만드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그것에 손을 대지 못했는데, 마도서는 완성이 되었고 마침 지저에서 며칠을 머물러야 하는 신세가 되었기에 이참에 만들어두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 아르페 찾았다!” “달라붙지 마, 메테르. 더우니까······ 이 자식이, 달라붙지 말라니까.” “안 떨어질 거지롱. 에잇, 에이잇.” 할 일이 많은 아르페와는 달리 전투 외의 취미나 특기는 아르페뿐인 메테르는, 드워프들의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지저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후로 아르페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취미도 특기도 아르페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항상 입고 다니는 갑옷을 벗어버려 가벼워진 그녀의 차림새가 아르페의 이성에 치명상을 입혔다. 하지만 아르페가 진심으로 질색하지 않는 한 메테르는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적당히 포기하며 자신의 이성을 단련하는 쪽이 편했다. “아르페, 가지에 달려 있던 잎은 다 어디 간 거야?” “절반은 찻잎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아르페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작은 유리 용기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고레벨 몬스터의 마정석과 함께 곱게 갈린 세계수의 잎가루가 담겨 있었다. 결정 하나하나가 마나를 흡수했다가 내뱉으며 발하는 영롱한 빛에 메테르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예쁘다······.” “못 먹는 거야.” “안 먹어!” 그래도 순수한 여자아이로서의 감성이 조금은 남아있었는가, 메테르는 빛을 발하는 결정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르페는 그런 그녀를 보곤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바디네나 시에나처럼 수련이라도 하지 그래.” “해보긴 했는데 난 자기수련으로는 실력이 안 느는 것 같아.” “대련은 어때.” “애들이 너무 약해서 수련이 안 돼.” “······.” 아르페는 힐끗 메테르의 정보를 살폈고, 그녀의 검술이 어느덧 80레벨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그야 그렇겠지. 이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으면 메테르가 아닌 것이다. 최근 아르페가 전면에 나서 마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일이 많아져 그녀가 활약할 장소가 줄어들었었기에 아주 잠깐 망각하고 있었지만, 파티의 최고 사기 멤버는 그 누구도 아닌 원조 용사 메테르였다. “아르페?”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는 메테르의 머리를 적당히 쓰다듬어주곤, 꼭 로아라도 된 것처럼 가르릉거리는 메테르를 거북이 등껍질처럼 등에 매단 채 작업을 재개했다.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가지를 다듬으며 내부의 마나 흐름을 자신의 그것에 맞춘다. 마도사 전용의 스태프를 제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드워프들은 아르페의 스태프까지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애석하게도 이것은 다른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거 만들고 나면 아르페 많이 강해져?” “극적인 변화는 노리기 힘들지만, 그래도 아마 1할 정도는 더 강해지지 않을까. 지금부터 만들 스태프가 내 생각대로만 되면 1할 5푼까지도 가능해.” 말이 쉬워 1할이지 레벨 310을 넘기는 아르페의 1할이라면 그의 수준을 족히 340까지는 끌어올린다는 얘기다. 아르페는 불확실한 요소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한 것보다도 더욱 크게 전력이 늘어나리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와아, 그럼 마왕군 사천왕하고도 싸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아직은 힘들어. 바디네와 엘릭, 특히 엘릭의 레벨이 한 30 정도만 더 오르면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긴 한데.” “웅······.” 아르페의 부정적인 말에 메테르가 시무룩해졌다. 그제야 아르페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한 가지 있었다. “혹시 겨울여왕의 유적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응.” 메테르는 그리 뜸들이지 않고 긍정하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며 덧붙였다. “그건 도망이었어.” “그래, 도망이었지. 우리가 더 약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면······ 만약 겨울여왕이 우리를 지저로 안내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상으로 달려 나가 놈과······ 그리고 에트나와 사투를 벌였겠지.” 겨울여왕의 유적을 완벽 이상으로 클리어한 아르페 일행에게는 에트나를 마왕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만들 능력이 있었으나, 그 작업이란 것이 다른 사천왕과의 전투를 병행하며 이룰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사천왕이 한 명 추가된 시점에서 아르페의 작전은 엉망이 되었던 것이다. “사투라는 건,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알면서 묻는 말이다. 아무리 메테르라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단지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을 뿐이었다. 아르페도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무서웠어.” 메테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와 달라붙은 아르페에게도 그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손에 들고 있던 세계수의 가지를 놓아버리곤 그녀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지금은 괜찮아. 놈들이 지저까지 쳐들어올 방법도 없을뿐더러, 이젠 놈과 만나도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어. 에트나가 함께 있더라도 마찬가지야.” “겨울여왕이 아니었더라면 죽었을지도 몰라.” “이젠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르페의 말에도 그녀는 쉽게 진정하질 못했다. 지저에 들어와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두려워.” “메테르······ 조금 냉정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너도 용사로 나선 이상 어느 정도는 각오를······.” “아르페를, 잃을까봐 두려워.” “······.” 과연, 본인의 목숨의 위기에 대해선 전혀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으나 메테르는 어디까지고 진지했다. “죽으면 안 돼, 아르페.” “안 죽어, 안 죽어.” “절대로, 절대로 죽으면 안 돼.” “그래, 걱정하지 마.” “웅······.” 아르페는 불안을 주체하지 못하는 메테르와 그대로 조금 더 어울려주었다. 그녀는 아르페에게 한껏 어리광을 부린 후에야 안심이 되었는지 그의 등에 매달린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고, 아르페는 한숨을 푹푹 쉬며 작업을 재개했다. “애 아빠.” “시끄러.” 삐삐와 한창 놀다가 반납하러 들른 레이제나가 그 광경을 보며 통렬한 지적을 했다. 그녀는 세계수 가지를 꺾으며 툴툴거리는 아르페의 대꾸를 무시하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메테르에게 정실부인 대우, 바디네 질투. 시에나와 2부인 자리 놓고 격돌.”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직접 전투를 벌일 능력이 없는 바디네가 시에나와 정면으로 싸우기라도 했다간 그녀의 슬레지 해머에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아르페가 진저리를 치는 모습에 레이제나는 아주 조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업보.” “그래, 다 내 잘못인 걸로 치자.” “전부 다 받아들이는 것도, 남자의 배포.” “그러다 칼 찔린다.” 아르페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메테르에게. 아르페는 뭔가 더 말하려는 레이제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작업에 집중해야 하니 더는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가만히 지켜봄.” “마법 수련이라도 해라.” “수련은 항상. 아르페의 곁에 있는 것, 가장 큰 수련. 유혹 마법에 저항.” “그런 마법 안 쓰거든? 엉?” 아르페는 이를 갈면서 가지를 다듬었다. 마나 스트링을 휘감은 그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세계수의 가지가 보다 반듯하게 다듬어지며, 보다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 방을 가득 채웠다. 신비롭고 장엄하기까지 한 광경이다. 레이제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스태프 제작, 어디서 배움?” “책 보고 배웠다 임마.” “연하인 주제에, 나보다 지식이 풍부. 정말 연하?” “네가 상대적으로 무식한 것 아닐까?” “부정.” 여전히 무표정한 주제에 볼만 불룩 튀어나오는 것이 귀여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레이제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르페가 이상함.” “그래그래, 내가 이상한 걸로 치자.” 아르페가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레이제나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는 이내 자신의 조막만한 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차갑고 시원한 손은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부러질 것만 같아 아르페를 절로 긴장하게······ 아니, 이게 아니라. “네 손 말고 삐삐 달라고.” “······얄미움.” 레이제나에게서 돌려받은 삐삐를 다듬어진 세계수 근처에 놓았다. 삐삐는 자신의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마나를 뿜어내 세계수 가지와 공명을 시도했다. 아르페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진정한 ‘데마이트 스태프’ 제작의 핵심 과정이었다. “삐삐는 마나를 다뤄 마법을 발현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내 마나를 증폭시켜주기까지 해.” 공명을 이루는 데마이트와 세계수 가지를 만물열람으로 세심하게 관찰하며 말하는 아르페. 레이제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내게는 불가능. 아르페의 마나 증폭 불가능.” “넌 삐삐와는 조금 달라. 같은 데마이트였지만 너는 인간들에 의해 지극히 독립적인 개체로 거듭났으니까. 그 과정에서 너라는 존재가, 개인의 기록이 너무 분명해진 탓에 타인과 섞이기 어려워진 거야.” “유감······.”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데마이트에도 불가능한 것은 있어. 바로 녀석의 마나 증폭과는 별개로, 녀석이 지닌 순수한 마나는 내가 멋대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거야. 여차할 상황에서는 막막해질 수 있지.” “······긍정. 마나 증폭과, 스스로의 마법. 두 가지의 기능은, 겹치지 않음.” “바로 그게 데마이트의 유일한 단점이야. 그래서 이용하려는 게 세계수의 가지고.” 아르페와 삐삐의 마나를 한 데 섞어 융화시키고, 동시에 증폭 기능까지 수행할 수있도록 도와주는 중간다리. 그 과정에서 마나가 소실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되도록하는 것이 세계수의 가지다. 실로 세계수의 이름에 걸맞은 굉장한 위용이 아닐 수 없다. “내 마나가 흐를 길은 이미 만들었어. 이제 삐삐와 공명을 이루게 되면 녀석의 마나가 흐를 길도 개척되겠지. 다음은 간단해. 두 길을 모두 삐삐에게로 유도해, 그 끝에 다시 삐삐가 마나를 증폭해 마법을 완성할 수 있도록 세계수 가지에 구조를 짜 넣는 거지. 어때, 참 쉽지?” “전혀 쉽지 않음.” “세계수의 가지가 개쩔어서 나랑 삐삐의 마나를 한 데 합쳐줄 수 있다는 얘기야.” “쉬움.”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삐삐와 세계수 가지의 공명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르페는 주의 깊게 그것을 살피며 마나 스트링을 몇 가닥 뽑아냈다. 그 눈에는 비장한 각오가 가득했다. “좋아, 시작해볼까.” “기대.” 세상사람 누구도 모르는 지저에서, 역사의 정점에 자리하게 될 아티팩트가 탄생하고 있었다. < Chapter 28. 연결 - 4 > 끝 ⓒ 토이카 < Chapter 28. 연결 - 5 > 엘릭은 시에나와의 연습 전투에서 통산 50전 50패를 맞이했다. “젠장, 더럽게 세네!” “하지만 엘릭도 강해!” 갑옷을 벗은 엘릭이 체격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르페 파티에서는 오직 레이제나뿐이었다. 그러나 레이제나는 마도사이기에 단순한 비교는 불가능했고, 결국 그보다 키가 조금 큰 시에나 정도가 만만했다. 더욱이 둘은 모두 둔기를 다룬다는 공통점 또한 있어 연습시합을 하기에도 좋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까마득한 차이가 나는 거지?” “엘릭이 평소 갑옷을 입은 상태에서의 전투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엘릭은 지금 갑옷을 벗은 상태였다. 지상으로 올라가기 전 드워프들이 엘릭의 장비 또한 손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시에나 또한 별 장비를 걸치지 않은 상황. 둘이 장비한 것이라곤 평상복과 드워프들이 만들어둔 연습용 둔기 정도였다. “조건은 비슷할 터······!” “그리고 레벨도 차이 나.” 시에나는 겨울여왕 유적에서의 성장으로 아르페와 메테르의 레벨을 얼추 따라잡았다. 즉 310레벨에 육박한다는 뜻. 엘릭과는 20레벨의 차이가 난다. 오히려 그녀가 엘릭에게 밀리는 것이 이상하다. “그, 그래도······.” 이렇게나 어린 여자애인데, 라는 말을 엘릭은 필사적으로 집어삼켰다. 타인이 자신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것 때문에 평생 속을 썩어온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능력은 외관에도, 나이에도, 그리고 성별에도 비례하지 않는 것이다. “갑옷을 입는다면······.” “응, 갑옷을 입는다면 더 강해지겠지. 하지만 일단은 그 모습으로 벌이는 전투에도 익숙해지자. 평생 갑옷을 입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래, 그렇지. ······맞는 말이야.” 엘릭은 용사 파티에서 시에나가 가장 똑똑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똑똑한 것만이 아니다. 그녀는 무척이나 상냥했고 결코 험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바디네가 성녀라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아마 시에나가 성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한 번 더 싸워보자! 그리고 갑옷이 오면 그땐 갑옷을 입고도 싸워보는 거야.” “······그래, 그렇게 하자.” ······그리고 그녀는 웃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엘릭이 그녀와 비슷한 나이였더라면 반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물론 외관상으로는 지금도 비슷해 보이지만, 엘릭의 실제 나이는 20대 후반. 아무리 좋게 봐줘도 시에나의 삼촌뻘이다. “그러니까 아니야······.” “응? 뭐가, 엘릭?” “아, 아니. 그러니까.” 엘릭은 시에나의 눈부신 미소를 마주보지 못하고 살짝 고개를 돌리며 지껄였다. “편하게 엘릭 오빠라고 불러도 좋아.” “그건 싫어! 오빠는 아르페 오빠뿐이거든. 헤헤.” “······아, 응. 그래.” 어쩐지 뺀질이 기질이 보이더라니, 하고 구시렁대며 엘릭은 다시 얌전히 연습용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에 맞서는 시에나 역시 전투망치를 들어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귀엽지만 무서운 사신의 미소였다. 그로부터 나흘이 더 흘렀다. “후, 됐다.” 아르페는 눈앞에 놓인 지팡이를 쓸어보며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세계수 가지를 가공해 세 번에 달하는 강화를 거치고, 거기에 데마이트인 삐삐를 연결해 완성한 배틀 스태프. 마나를 흘려 강도를 강화하는 기능까지 있어 유사시 방패의 역할까지도 해줄 수 있는 만능기였다. “아티팩트와의 동기화, 무척 신기. 아르페, 인간이 아님?” “시끄러 임마.” 일단 스태프와의 공명을 완벽히 이룬 이상, 굳이 아르페가 쥐고 다닐 것도 없이 평소에는 삐삐의 마력을 이용해 그의 주위를 떠다니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삐삐는 스스로 떠다니는 것이 재미있는지 시종 밝은 빛을 발하며 아르페 주위를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박수를 쳐주며 레이제나가 물었다. “이제 마왕 이김?” “스태프 두 번만 더 만들면 우주라도 창조하겠다 야.” 아르페가 레이제나와 함께 방을 나오니 그곳에 메테르의 모습이 있었다. 붉은 갑옷으로 목부터 다리까지 빈틈없이 무장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용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마침 드워프들도 작업을 마친 모양인데.” “응! 짐도 다 쌌어!” “아, 오빠다!” 아르페가 자석도 아니고, 그를 발견한 이들이 차례차례 그에게 달라붙었다. 메테르와 시에나에 이어 바디네까지 팔 한 쪽에 달라붙으니 무슨 합체골렘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것을 보며 엘릭은 절로 심란해졌다. “슬슬 파티의 정체성에 대해 알 것 같은데······ 이 파티 정말 내가 끼어도 되는 걸까.” “날 이 지옥에서 구해줄 사람은 엘릭, 너뿐이야.” “하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파티에 남자가 합류하게 될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려왔던가. 지금이야말로 질척거리는 환경에서 벗어나 보다 순수한 용사 파티로 거듭나기 위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리고 가능하면 그가 바디네나 레이제나를 꼬셔준다면 좋다. 둘 다 꼬신다면 더욱 좋다. “우리는 준비가 되었소! 이제 나갑시다!” “장비도 완벽하게 개수했으니 아마 전력이 족히 1할은 늘었을걸!” 10만에 달하는 드워프들이 광장으로 모여드는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장관이었다. 그렇게 전원이 모이자 아르페가 그들 중 그나마 낯이 익은 드워프 한 명을 골라 물었다. “그래서? 지상으로 나가는 방법은 대체 뭐야? 어쩌자고 이렇게 광장에 무턱대고 모이기만 한 건데?” “그야 광장에 모여야 지상으로 나갈 수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소.” “······?” 아르페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것을 보며 엘릭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잘 보라고. 이것이야말로 드워프 기술공학의 정점이니까.” “기술공학이라, 굉장히 불길한 울림인걸.” “그러면 시작한다!” 아르페를 더더욱 불길하게 만드는 드워프들의 구령이 울려 퍼진 직후, 광장 전체에 덜컥, 하는 진동이 일었다. 아르페는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아니겠지.” “마나는 충분히 쌓였다, 10만명을 동시에 올리는 것도 가능해!” “좋아, 가자!” 만물열람을 발동하여 다급히 광장 전체를 살핀다. 그 순간 아르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아냐, 가지 말아봐!” “간다!” 어느덧 광장 곳곳에 배치된 드워프들이 일제히 호스 비슷한 무언가를 잡아당겼다. 그것을 개시 신호로 삼아 광장의 경계를 가르는 검은 선 위로 마나의 방어막이 이중으로 솟아나 곡선을 그리며 쭉쭉 올라가더니 종래엔 반구 형태의 거대한 방어막을 완성시켰다. 아니, 아마 저 방어막은 광장 밑으로도 파고들어갔을 테니 반구가 아닌 구 형태의방어막으로 보는 것이 맞았다. “하하하······.” 그것으로 상황을 완벽히 파악한 아르페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그리고 조용히 마나 스트링을 뻗어내 자신을 포함한 일행의 몸을 묶었다. “드워프, 이 미친놈들.” “아르페, 이건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르페에게 질문하려던 다음 순간 광장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광장은 도시로부터 독립되어 만들어져 있었으며, 광장을 구성하는 타일 밑에는 흙 대신 광장을 통째로 쏘아 올리기 위한 추진기관이 있었다! “이게 무슨 기술공학이야! 그냥 무식하게 던지는 거잖아!” “지금부터 지저를 돌파한다! ‘공’에 마나 주입!” “마나 주입!” 드워프들의 마나가 주입되자 두 겹으로 구성된 방어막 중 외부의 방어막이 무려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직후 천장과의 격돌! 실로 경악스럽게도 도시의 천장을 지지하고 구성하던 건축물들이 방어막에 달라붙으며 오히려 방어막의 힘을 더했다! “오오,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던 게 사실이었어!” “우리는 추진력을 얻었다! 가자!” “설마 정말로 이것이 가능한 일이었을 줄은······ 역시 우리의 선조는 위대해!” “너희 그냥 즐기고 있는 거지 지금!” 방어막의 회전에 물리력과 마력이 더해지자 흙이 그것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구형의 방어막에 감싸인 광장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땅을 두구구구구뚫으며 위로 솟구쳤다! “이거 언젠가 돌파력과 추진력이 떨어지면 그냥 다시 추락하는 거 아냐!?” “걱정하지 마라, 일단 탈출 시스템이 가동된 이상 광장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쏟아내 위로 상승한다!” 아르페는 자신만만한 드워프들의 외침을 들으며 더 이상의 판단을 포기했다. 그리고 이 구체가 떨어질 것 같을 즈음에 자신의 일행만 데리고 지상으로 공간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드워프들이 쏘아올린 겁나 거대한 공은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모르고 위로 솟구치기만 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드워프들이 아티팩트를 만드는 방식이 그렇다고 설명한 적이 있잖아. 이것도 그일종인 모양이야.” 만물열람으로 보고 실체를 파악했음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이치. 하긴 세상에는 분명 그 구조와 원리를 파악했어도 따라할 수 없는 일들이 차고 넘치도록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종족 전체의 고유능력과도 비슷한 개념이리라.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검고 검은 지면이 방어막과 그 위에 달라붙은 쇳덩이들의 회전에 의해 쉼 없이 갈려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갈려나간 지면이 방어막의 회전을 타고 뒤로 흘러가, 방어막이 지나온 길을 다시 메운다. 말도 안 되는 원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태클을 걸 수도 없다. 어쨌든 도중에 멈추어도 추락할 일은 없을 테니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움직였을까, 다시 드워프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제 곧인가.” “그렇군, 이제 곧이야.” “마지막 추진을 준비한다!” “모두 빨리 움직여! 마나를 불어넣으란 말이야!” “드디어······.” 엘릭의 목소리에 열망이 담겼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아르페는 그저 픽 웃으며 재차 일행을 붙잡고 있는 마나 스트링에 마나를 더했다. 직후, 거대한 방어막이 지면을 뚫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강렬한 빛이 광장을 덮쳤다! “끄아아아아악!” “엄살 부리지 마, 눈부심 차단 기능도 달려있단 말이야!” “그래도 밝은 건 밝은 거잖아!” 수백 년을 지저에 갇혀 살았던 드워프들은 그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조명이 아닌, 자연의 눈부신 태양을 마주하며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며칠 만에 마주하는 태양이 따갑기는 아르페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준비되면 방어막을 해제한다!” “사람들 몰려들기 전에 빨리 해치우자고! 그런데 여기 대체 어디야?” “디아스! 디아스의 산골이야.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 걱정하지 말고 방어막 해제나 해!” 드워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방어막 해체 작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아르페는 그것을 멍하니 둘러보다가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 풍경이 묘하게 익숙했던 것이다. 더욱이 드워프들이 방금 디아스의 산골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는 건, 여기는······.” “어라, 아르페.” 메테르 역시 늦지 않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둘의 시선이 곧 엘릭에게 꽂혔다. 엘릭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래, 맞아. ······여긴 너희 고향이다.” 두 용사가 뜻하지 않게 귀향하게 된 순간이었다. < Chapter 28. 연결 - 5 > 끝 ⓒ 토이카 < Chapter 28. 연결 - 6 > “내가 드워프들의 도시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저세계로 향하는 입구가 두 용사의 고향에 있었기 때문이야.” “넌 혹시 디아스에서 우리를 추적한다는 말을 듣고 곧장 이곳으로 왔던 거야?” “바로 그거다. 그리고 너희 대신 지저세계로 향하는 입구를 발견한 거지.” 엘릭의 대꾸에 아르페와 메테르가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고있자니, 차차 태양에 적응한 드워프들이 제각기 기지개를 켜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광장설치부터 하자고!” “야, 잠깐만. 뭘 설치한다고?” 잘못 들었길 바랐지만 아니었다. 드워프들이 또 광장 곳곳으로 퍼져, 광장바닥 이곳저곳을 건드려 조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대지가 광장과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광장에 방어막을 씌우는 데에 쓰였던 마나가 이번엔 그 마나를 주위 대지에 쏟아 부어 대지의 질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드워프들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란 도대체 아르페의 만물열람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완벽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지금은 그보다도. “야야, 그냥 여기서 너희들 마음대로 일 벌여도 되는 거야!?” “선조들께서는 나중에 해방될 때를 대비하여 많은 조치를 취해놓으셨지. 그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지상으로 나왔을 때 거주하게 될 지역이다. 이곳은 산이 많고, 광맥도 많으며 대자연의 은혜가 풍부하여 우리 드워프가 살기에 무척 적합한 환경이지. 선조께서는 디아스와의 거래를 통해 이 산맥의 소유권을 인정받으셨다. 남은 것은 도시를 건설하는 일뿐이야.”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권리가 유지되고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레벨 200이 넘어가는 수만의 병력을 보유한 드워프들이라면 디아스가 통째로 덤벼들어도 무리 없이 대적할 수 있을 테니 별 문제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우리끼리도 해낼 수 있어.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네, 친구들.” “자네들이 어비스를 깨끗이 지워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오기는커녕, 우리보다 힘이 커진 그 그림자들에게 끝내 삼켜져버리고 말았을 것이야. 언제든다시 찾아오게나. 자네들의 힘이 되어주겠네.” “아, 그리고······.” 드워프 중 한 명이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엘릭으로부터 당대 용사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그와 만나게 되거든우리들에게 찾아오라고 부탁해줄 수 있을까? 자네들의 능력을 보아하니 언젠가 반드시 용사와 엮이게 될 것 같아 하는 말이네만.” “용사는 왜?” “그야 그를 도와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서지.” 드워프들의 눈이 험악해졌다. “마왕을 처치하지 못하면 언젠가 죄의 그림자 같은 놈들이 또 기어 나오게 될 거야.” “죄의 그림자뿐만이 아냐. 이번엔 정말 세계가 마로 물들게 될지도 몰라. 우리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마족을 공격해야 한다.” 드워프들의 강렬한 전의를 보며 아르페는 내심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겨울여왕의 안내는 탁월했다. 어지간한 인간 국가보다도 믿음직한 집단, 그것도 절대적으로 용사의 편을 들어주는 집단과 접촉하게 해주다니 말이다. “나야.” 그러니 이젠 진실을 말해줘도 될 것이다. “뭐?” “나라고. 정확히는 우리지만.” 아르페의 뜬금없는 말에 드워프들은 그저 두 눈을 깜박거릴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르페와 메테르가 히어로 오라를 발산해 각자에게 있는 편익을 드러내자, 그것을 알아본 드워프들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용사잖아! 그야 이 정도 힘을 지닌 인간이 용사 외에 과연 누가 있을지 의문이기는 했으나 설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오오오,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엘릭 자네 알고 있었나!?” “어쩐지, 그렇게나 용사를 밝히던 자네가 순순히 다른 이들과 파티를 맺겠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도끼 들고 화내지 마! 나는 단지 명성이 아닌 실력만으로 자신을 증명하고싶다는 말을 들어주었을 뿐이니까!” 잠시 소동이 일기는 했지만 곧 모두가 진정을 되찾았다. 어쨌든 멀리 돌아가는 일없이 용사를 찾았으니 드워프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용사를 만나게 되면 주려고 준비한 것들이 잔뜩 있었는데······.” “우리가 개수한 장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거······.” “아, 그렇다면.” 거기서 아르페는 시페넌 파티를 떠올렸다. 물론 그들 또한 아르페 덕분에 아티팩트로 떡질한 최상위 템빨 파티였지만, 그들 이상으로 강한 장비를 갖추고 있던 아르페 일행 역시 드워프들 덕분에 강화되었으니 그들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지금 우리와 따로 행동하고 있는 파티 멤버들이 있어. 그들에게 연락을 해둘 테니, 그들이 오거든 그들의 장비도 한 번 봐줬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우리의 성이 차지 않는데······ 그렇지. 장비는 이미 완벽하니 보조도구들을 만들어주면 되겠군. 어느 정도 만들어둔 것이 있으니······ 한 네 시간만 기다려줄 수 있겠는가?” 이미 완료한 퀘스트의 보상이 한 차례 더 강화될 줄은 몰랐다. 굳이 주겠다는 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고, 아르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 시간 정도라면······ 마침 봐두고 싶기도 했으니까.” “······응.” 아르페가 메테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듯,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아왔다. “이 근처에 우리가 나고 자란 고향이 있어. 가볍게 한 번 둘러보고 올게.” “꼭 저도 함께하고 싶은데······.” “둘이서만 가려는 이유가 있을 거야, 바디네 언니. 우리끼리 놀고 있자.” “하, 하지만!” 시에나가 바디네를 붙잡아두는 사이 아르페와 메테르는 여유롭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엘릭이 휘적휘적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보였다. “다들 잘 살고 있을까?”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받지 않았으면 잘 살고 있겠지 뭐.” 마을로 찾아간다고는 했지만 괜히 그들과 번잡스럽게 얽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르페는 자신과 메테르에게 은신 마법을 걸었다. 메테르 역시 반발하지는 않았다. 마을을 그리워하기는 했으나 그녀 또한 마을에 딱히 정을 주고 있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페와 메테르가 살고 있던 이름도 없는 산골 마을은 드워프들이 도시를 구축하기로 한 곳과 걸어서 2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아르페와 메테르는 블링크로 그 시간을 단 2분으로 줄일 수 있었다. “아, 그대로다.” 마을에 들어선 순간 메테르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그야 몬스터도 출몰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도 찾지 않는 외딴 산골 마을에 별 일이 있었다면 그것이 더 놀라울 일이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은 정말로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정도. 어른들은 모두 3년 어치, 혹은 그 이상 늙었고 메테르와 아르페(물론 그에게는 기억이 희박했지만)와 함께 용사놀이를 했던 아이들은 많이 자랐다. “나무? 또 나무하러 가? 어제도 나무, 그제도 나무······.” “난 나무가 정말 싫어.” 그러나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어버린 아르페나 메테르와는 달리 녀석들의 성장은더뎠다. 새삼스레 자신들의 성장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실감하며, 아르페는 메테르와 함께 누구도 그들을 찾지 못하는 레벨 1짜리 허접들로 가득한 마을을 활보했다. “아르페, 이것도 그대로야. 저것도, 여기 우리 키 쟀던 나무도. 와아.” 괜히 왔나 싶을 만큼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지만 메테르가 즐거워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됐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르페는 자신의 손을 세게 붙잡는 메테르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때 마을 어딘가에서 미약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을의 경계선 즈음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에서 느껴지는 기운. 즉 아르페가 살던 오두막이었다. “······메테르.” “응! 꺅!?” 마을아이들이 키 재는 나무에 서서 지금 키를 체크해보려던 메테르를 붙잡고 블링크를 시전했다. 다음 순간 오두막에 도달한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그들이 편지를 남겨두었던 오두막 벽. “어라, 아르페. 이건······.” “맞아.” 벽에 새겨져 있던 편지는 그대로였지만, 특정한 몇 개의 글자 위에 마법이 덧씌워져 있었다. 그것도 용사의 마나, 정확히는 히어로 오라와 접촉해야 빛을 발하는 조건부 마법이. “혹시 우리 아빠일까?” “떠돌이 상인이 마나를 다룬다고······? 정말로 그렇다면 흥미롭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저씨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어.” 아르페의 전생에서는 메테르의 아버지가 이미 죽어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그가 조사한 바로는 그랬다. 당연하지만 그의 마나를 접해본 적도 없다. “아르페에.” “기다려봐.” 아르페는 히어로 오라를 발동해 벽면에 걸린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윽고 벽면의 몇몇 글자가 차례대로 빛을 발했다. 그냥 편지 한 장 남겨두면 될 것이지 뭘 이렇게 개폼을 잡으면서 메시지를 남겼담! 아르페는 투덜거리면서도 글자를 차례대로 읽어나가며 메시지를 완성했다. “‘준비가 되거든 마계의 니로타시드로 찾아 오거라.’ ······함정이라기엔 너무 무식하게 공을 들였는데 이거.” “니로타시드가 뭐야? 먹는 거야?” “먹히는 곳이지.” “먹힌다면 아르페 외에는 싫어.” “너 그 말 누구한테 배웠어!” “바, 바디네가 아르페에게라면 먹혀도 좋다고······.” 아르페는 차후 바디네에게 엄중한 벌을 내리자는 생각(바디네라면 그것조차 좋아할 것 같아 두렵지만)을 하는 한편으로 니로타시드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니로타시드. 마계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라 어지간한 마족은 아예 발을 들이지도 않는 곳이다. 섭씨 200도를 넘기는 뜨거운 바람이 불고, 마계의 칼날모래를 머금은 태풍이 수시로 불고, 레벨 350을 넘어가는 괴수로 득시글한 마계의 지옥. 만약 두 용사를 그곳으로 불러들여 죽이려고 한 것이라면, 너무 무식한 발상이라 비웃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오히려 함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지만 또 그런 인식의 틈을 노리고 정말로 그들을 죽이려 한 것일 수도······. “아빨까? 아빠겠지? 아빠 보고 싶다. 아르페도 꼭 봐야 해. 결혼식 올리기 전에 아빠한테 인사는 해야지.” 벌써부터 아버지와 재회할 생각에 잔뜩 들떠있는 메테르. 비록 그녀의 말에 여러 가지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르페가 내린 결론도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 찾아가야지. 함정이라면 함정인 대로, 함정이 아니라면 함정이 아닌 대로 그곳에 있을 이가 누군지 확인해야 하니까.” 만약 함정이라면 그것을 마련해둔 놈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용사 파티의 전력은 지금 가히 최강이었으니까. 만약 용사 이야기였더라면 파워 밸런스를 무슨 이따구로 잡았냐며 서술자가 독자한테 칼에 찔릴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제스트바에 들리자.” “응, 아르페 말대로 할게!” 어떤 함정이 있건 쳐부술 자신이 지금의 아르페에겐 충만했다. 하지만 그의 일행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일단 제스트바에서 일행의 전력을 끌어올리고 마계로 진입, 니로타시드에 일직선으로 돌진한다.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모든 마족과 마물을 밟아버리면 니로타시드를 여유롭게 탐색할 정도로는 성장할 수 있겠지. ‘니로타시드라, 정말 절묘한 초이스야. 무사안전제일주의인 내게 니로타시드는 발을 들여놓을 엄두도 하지 못했던 곳이니까.’ 마계에 대해선 대부분의 것을 꿰고 있는 아르페지만 니로타시드만은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인 것이다. 만약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 해도 가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이것이 메테르의 아버지가 남긴 것이고 그가 그곳에 살아 있다고 한다면······. “일이 또 복잡해지는 건데······.” 그 자의 레벨은 몇이나 될까, 또 그는 혼자일까 동료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전생에는 나서지 않았는가······. “아냐, 아르페! 우리 아이는 일단 다섯 정도만 낳고 그 다음엔······.” “대체 어딜 어떻게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버지라는 키워드로 떠올린 결혼식에서부터 이어지는 망상이 극에 달해 살짝 위험한 표정으로 헤죽거리는 메테르의 머리에 가볍게 알밤을 먹이며, 아르페는 언제나와 같은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마계로 떠나야 하는 이유만 늘어나고 있었다. < Chapter 28. 연결 - 6 > 끝 ⓒ 토이카 < Chapter 28. 연결 - 7 > 그들은 결국 마을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다시 드워프들에게로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으리라 여겼는데 벌써 드워프들이 약속했던 4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어서 오시오! 용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추려, 그대들에게 맞도록 가공을 마쳤다오! 이것들 어서 확인해보시오!” 용사들에게 안겨주기 위한 각종 보조도구를 잔뜩 안은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드워프들의 모습은 일견 뿌듯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자, 이건 마나를 주입하면 수만 개의 파편으로 비산하여 적을 공격하는······.” “분쇄탄이구나. 이거 하나 만들기도 엄청 어렵다던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부, 분쇄탄을 알고 있다니 과연 용사의 견식이 대단하군. 그 다음은 이 물건이오. 이건······.” “주입된 마나를 가짜로 부풀려 보이게 만드는, 몬스터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위협용 마나 스프레이.” “혹시 이것도 아시겠소?” “굉장한데, 이거 확장형 임시성벽이잖아. 공간압축 마법이 드워프들의 손에서 금속을 대상으로 재현될 수 있을 줄은······.” “······.” 드워프들은 무엇이든 알아보는 아르페를 보며 기겁했고 아르페는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도구들을 마주하며 얼떨떨했다. 물론 도구를 만드는 데 보태라며 여태껏 모아왔던 몬스터들의 부산물(에인션트 크라켄의 것을 비롯하여)을 내놓기는 했으나,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기술 없이는 이런 물건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전부 다 알고 있으니 우리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겠는 것 있으면 질문하게.” “아니, 용도와 사용법만은 어떻게든 알겠어. 이거 정말 도움이 되겠는데.” 순간적인 마나 증폭제나 각종 속성 마법을 막아낼 수 있게 해주는 소모성 아티팩트. 만물열람의 능력으로 그 구조를 샅샅이 살피고 있는 아르페조차 대관절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아직 그는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건 우리가 만든 철마일세. 마나를 충전해주기만 하면 준마 이상의 속도로 내달리지. 마나의 질에 따라 그 속도가 달라지니 느리다며 불평할 일은 없을 걸세. 쓰지 않을 땐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놓으면 되니 편리하지.” “마지막에 이런 대박을 숨겨두고 있었구나?” 철마라고는 하지만, 드워프들이 마지막으로 내놓은 탑승형 마도구는 말이라기보단 마름모꼴의 박스에 가까웠다. 사람이 열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한 내부, 마나와 반응하여 작동하는 엔진에 기반해 회전하는 수십 개의 바퀴, 조종자의 의지를 받아들여 그 바퀴의방향을 바꾸는 센서까지 도무지 인세에서는 등장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신기였다. [먀아아아아.] “그래, 이젠 너도 우리 태울 수 있는 거 알아.” 로아는 그 괴상한 철마를 보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는 일이라곤 마기 잡아먹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에 내심 신경이라도 쓰고 있었던 건지, 이번에 어비스를 청소하면서 얻은 신체 거대화 능력으로 아르페와 일행을 태울 수 있다고 자랑하듯 울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얻자마자 이렇게 자신의 포지션을 위협할 만한 녀석이 나왔으니! “하지만 도구가 있을 땐 그걸 사용하는 게 더 좋아. 네 힘은 아껴두었다가 꼭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하자.” [먀아, 먀먀?] “그래그래, 많이 줄게.” 그는 로아를 달래듯 녀석의 입에 이블 하트를 물려주며 드워프들에게 돌아서서 감사를 표했다. “잘 쓸게.” “용사의 일행이라는 자들이 오거든 그들도 챙겨주도록 하지.” “정말 고맙다.” 이미 시페넌에게는 시간이 되는 대로 드워프들에게 들러 전력 업그레이드 한 번 해두라고 지시해놓았다. 아르페는 확답을 주는 드워프들에게 만족하여 크게 고개를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좋아, 그럼 이제 가자.” “엘릭, 부디 자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도록 해!” “믿어둬! 마왕의 마수가 자네들에게까지 미치지 않도록 할 테니까!” 엘릭과 드워프들의 이별에 아주 조금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르페는 그것을 작은 미소로 지켜보았다. 뛰어난 장인이며 전사들이기도 한 드워프들을 엘릭을 매개로 부려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미소 짓지 않으리! “아르페, 방금 나쁜 생각 했지.” “메테르, 귀여워.” “아르페도 멋져! ······응?” “잘도 저걸로 넘어가는군······.” “좋아, 발진!” 아르페는 자신을 포함하여 총 여섯 명으로 불어난 일행을 데리고 비로소 철마를 발진시켰다. 비록 디아스로 돌아오는 꼴이 되기는 했으나 지금 그들에게는 지치지 않고 꾸준히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달릴 수 있는 철마가 있다! 더욱이 대륙 각지에 흩어진 신성국가 팔라티나의 워프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 제스트바로의 길이 그리 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제스트바? 얼핏 소문을 들어본 적은 있는데,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 아냐?” 일행과 함께 출발하고 나서야 행선지에 대한 얘기를 들은 엘릭은 경악하며 아르페에게 되물었다. 갑옷 속의 귀여운 소년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무척 귀여웠으나 아르페는 냉정하게 그의 질문을 짓밟았다. “이중 평범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가 누가 있냐?” “그, 그건 그렇지만······.” 이 파티는 자라지 않는 저주를 받고 몸집보다 월등히 거대한 갑옷을 입고 있는 엘릭 본인이 가장 평범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특수한 파티였다. 두 명의 용사에 성녀, 분명 예쁘지만 기이하리만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마도사까지.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것이 시에나인데, 그녀의 눈빛이나 머리칼이 가끔씩 빛나는 것을 보면 이 녀석도 텄다. “제스트바에 던전은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물론 마족도 들어가기를 꺼리는 험지지. 그냥 그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들도 졸라 짱 세다는 거야.” “그런데 아르페가 찾으려는 건······.” “그래, 유적이야. 이 유적의 몬스터는 얼마나 센 지 내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 “응······.” “즉 마계에 들어가기 전 우리가 레벨을 더 올려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의 땅이라는 얘기야.” 대체 어떻게 하면 대륙 제일의 험지라는 말이 그렇게 좋게 포장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기에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아르페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무는 엘릭을 보며 히죽 웃고는 앞을 주시했다. 과연 철마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드워프들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 너머로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워프 게이트가 보이기 시작한 것. 문제는 그것이 위치한 언덕으로 넘어가기 위해 험준한 절벽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아르페와 비슷한 타이밍에 그것을 확인한 엘릭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설마 이대로 돌진할 생각은 아니겠지!?” “맞아!” “으아아아아아!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내리겠어!” 기분 탓인지 갑옷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후로 억지로 근엄한 체하던 모습을 버리고 외양에 어울리는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놀려먹기에도 좋다. “너 지금 마도사 두 명이랑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뭐?” “부유.” “바람이여.” 절벽으로 그대로 돌진해 떨어지기 직전, 아르페가 짧게 입에 담은 말에 그들이 타고 있던 철마가 가볍게 위로 떠올랐다. 레이제나가 바람을 조종해 그것을 밀자 철마는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공중을 달려 곧 반대편 언덕에 착지했다. “······.” “재밌어, 아르페! 또 하자! 또!” “아르페 님, 안 돼요! 부디 봐주세요! 제발!” 착지한 철마가 부드럽게 내달리는 가운데 메테르를 주축으로 한 공중돌진 리플레이 파와 바디네를 주축으로 한 살려주세요 파가 대립했다. 메테르가 원하는 대로 후진을 한 번 할까 고민하던 아르페는 바디네와 엘릭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고 그냥 얌전히 전진하기로 했다. 그렇게 1분도 되지 않아 그들은 첫 번째 워프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어째서 몬스터랑 싸우기도 전부터 이렇게 지쳐야 하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건 엘릭이 훌륭히 우리 파티의 일원이 되었다는 뜻이야! 막상 몬스터나 마족이랑 싸우면 별 거 없으니까 안심해!” “그것 참 퍽이나 안심이 된다!” 전생의 용사와 전사 사이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아르페는 키득 웃으며 일행과 함께 내려 철마를 우선 수습했다. 워프 게이트를 작동시키는 것은 바디네가 맡았다. “이제 건너가면 됩니다, 아르페 님. 제스트바 해역까지는 워프 게이트를 일곱 번 거쳐야 하니 서두르시죠.” “고마워, 바디네. 그러면······ 메테르, 가자.” “······.” “메테르?” 그러나 디아스를 떠나 바다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에 오르기 전, 메테르는 문득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워프 게이트가 위치한 언덕 아래 디아스의 주민들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그들이 떠나온 고향 마을을 닮아있었다. 그제야 아르페는 자신이 무신경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역시 모두들 만나고 오는 편이 좋았어?” “으응, 끊어진 인연은 끊어진 채로 놔두는 게 좋아. 내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을 지키기만도 벅찬걸.” 메테르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더니, 그저 작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냥, 이번엔 모두를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서.” “그러게.” “응.” 메테르가 아르페의 손을 조금 세게 잡았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게이트 너머로 발을 디뎠다. 본격적인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불의 마녀의 죽음은 실로 끔찍했다. 원혼과 집념어린 불꽃은 끝내 기적의 영역에까지 이르러 용사의 혼을 불태우고자 했으나, 겨울을 다루는 마도사는 자신의 존재와 기록을 모두 내건 가호로 용사와 다른 일행을 지켰다. “레이제나, 안 돼. 레이제나······!” “······메테르가 살아, 기뻐.” 물론 그 대가는 마도사 본인의 소멸이었지만 말이다. “마왕을 보지 못하게 되어, 유감······ 하지만, 성의 근본적 구조는, 모두 파괴. 봉인되었던 힘도 모두 해방. 마왕의 힘 약화.” “레이제나, 레이제나······ 아아, 내가 만약 그때 바디네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성녀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 것. 메테르는, 항상 웃고 있을 것.” 마도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용사의 뺨에 자신의 차가운 손을 가져다 대며 작게 웃었다. “평생 이해 못한 감정을······ 이제는, 알아. 모두 메테르 덕분.” “레이제나······!” “마지막으로, 경고를.” 마도사의 눈은 동료들이 아닌, 부서져가는 성에 꽂혀 있었다. “마왕보다 끔찍한 것이 존재. 어쩌면 우리는 여태 겉을 핥았을 뿐. 조금 전 해방으로, 확실히 깨달음.” “마왕보다 끔찍한······? 해방?” “지금은 이미 늦음. 전대의 기록, 기이하리만치 없음. 우리는 속았지만, 이제는 깨달음. 그러니 메테르.” 무수한 마기가 솟구치는 마왕성, 그 안에서 비로소 몸을 일으키는 두 명의 절대 강자의 모습을 가늠하며 마도사는 고개를 어지러이 흔들었다. “미지를 경계할 것. 승리를 자신하지 못할 땐, 도망칠 것.” “하지만 내가 도망치면······.” “메테르의 고유능력은.” 마도사의 말이 힘겹게 이어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님. 성장 가능성, 확인.” “어떻게?” “사천왕 아르페.” 마치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부끄러움에 용사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마도사는 그녀의 어리석은 연정을 질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가능성을 개화. 그에 의해 역사는 개변.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도, 그에 의해 바뀌게 됨. 우리 모두는 휩쓸릴 뿐, 하지만 메테르는, 함께하는 것이 가능.” “무슨 소린지 너무 어려워서 모르겠어, 레이제나. 알기 쉽게 말해줘······!” “간단히 말하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을까? 마도사의 두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녀가 말했다. “사랑은, 쫓아서라도 쟁취하는 것.” < Chapter 28. 연결 - 7 > 끝 ⓒ 토이카 < Chapter 29. 제스트바 - 1 > 꿈을 꾸었다.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 수십 개의 촉수를 달고 쫓아와, 그저 압도적인 공포에 짓눌려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악몽이었다. 마법으로 날려버리고 싶어도 마법을 발할 수 없어 그저 당황하다가 끝내 붙잡혀, 촉수로 간지럽혀지며 남자가 이런 일을 당하는 광경을 봐도 누구도 즐거워하지 않을 텐데······ 까지 생각하다가. 아르페는 잠에서 깼다. “흐무무, 아르페에······.” “······.” 그러자 메테르가 양팔과 양다리로 아르페의 전신을 얽고, 아기고양이마냥 아르페의 뺨을 핥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잠들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보다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변태. 용사라는 이름의 변태.” “아냐, 레이제나. 기다려봐. 메테르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난 억울해.” 아르페는 그것을 빤히 지켜보는 레이제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블링크를 시전하는 것으로 메테르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레이제나는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아르페를 보다가는 한숨을 쉬었다. “메테르에 대한 방비가 부족.” “그럼 노숙하면서 뭘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사전에 메테르의 몸을 칭칭 묶어두려는 노력이 부족.” “너 그냥 시비 거는 거지?”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대충 뺨을 닦아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르페를 잃은 메테르는 온기를 찾아 허공을 더듬더니, 이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해 인상을 찌푸리며 울먹이고 있었다. 메테르의 눈물에 약한 아르페는 기껏 벗어난 주제에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시 붙잡히고 말았지만 이젠 양팔로 그의 다리를 부여잡고 다리에 뺨을 부비는 정도다. 견딜 만 했다. “그런데 레이제나 너는 왜 그러고 섰어?” “남녀를 관찰. 흥미진진한 일. 향후 교미가 기대됨.” 취미도 참 더러웠다. 계속 구경하쇼, 하고 메테르와 다시 껴안고 잘 수도 없고 어차피 잠도 다 깨버린 상황. 그는 그 근처에 적당히 앉았다. 물론 시간은 아직 새벽, 할 일은 딱히 없다. “아, 그래. 너도 있었구나. 안녕?” 아르페는 어느덧 그의 눈앞으로 돌아와 휘리릭 허공을 회전하는 스태프를 작게 톡톡 두드렸다. 그것에 스태프는 작은 빛을 발하며 기뻐했다. 이것도 나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나도 두드림?” “해줄까?” 레이제나는 막연히 고개를 젓더니 조금 더 아르페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지금 둘을 제외한 전원은 잠들어 있으리라. 만물열람으로 확인할 것도 없다. 레이제나는 다른 일행이 깨어있을 땐 어지간해선 아르페에게 접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스트바, 얼마 남지 않음.” “그렇지.” “들어가면 아마도, 당분간은 인계로 복귀 불가.” “그것도 그렇지.” 겨울하늘을 담아낸 듯 시리게 푸른 레이제나의 눈이 아르페를 훑었다. 메테르와는 다른 의미로 그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이다. “이대로 떠나면, 인간계는 용사의 비호에서 멀어짐. 아르페와 메테르, 존재만으로 인간의 버팀목. 하지만 이제 사라짐.” “그렇게 되겠지.” “마왕군은 곧 인간계 공격. ······괜찮음?” 마왕군의 준동의 낌새는 아르페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제스트바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상황에, 마계로부터 넘쳐나는 마기가 스멀스멀 인간계로 기어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았다. 정말로 1년도 남지 않았다. 전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빠르지만, 이미 모든 것이 전생과 바뀌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맡겨둬도, 정말 괜찮음?” “응, 아마 잘 될 거야.” 그러나 아르페는 걱정도 없이 편한 말투로 대꾸했다. 어떻게 보면 전생과 가장 다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최대의 변수, 두 번째 용사 파티가 있는 덕이다. “시페넌과 아리아가 있으면 르세티와 데이스도 충분한 힘을 낼 수 있어. 더욱이 녀석들이 확보한 아티팩트의 힘이면······.” 전생의 용사 파티보다 강해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아르페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워프들에게 들르라고 전달한 것은 물론 그들의 장비를 강화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페넌을 디아스로 불러들이려는 것이기도 해. 이쯤에서 시페넌이 디아스에 복귀해주면 힘도 명분도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는 군주의 탄생이지.” 더욱이 시페넌은 아르페를 통해 바다 너머 통일제국 제아드와 협력하는 것이 가능하다. 두 번째의 성녀 아리아가 제 힘을 드러내면 팔라티나 또한 디아스에게 힘을주지 않을 수 없겠지. 그것만으로 이미 인간계 힘의 절반 이상은 모았다. 드워프들과 엘프들의 힘이 추가되기까지 하면 정말 마왕군 사천왕 정도가 나서지 않는 이상은 인간계를 어찌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놈들을 처리하는 히트맨이 되는 거지.” “위험부담을 이쪽으로 돌림?” “그렇게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봐야겠지. 너희한테는 부담을 지워 미안하다만······.” “부담은 없음. 부담은 언제나 아르페가 짐.” 레이제나의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아르페는 조금 당혹스러워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메테르에게는 냉정해지라 하면서, 아르페는 사람을 너무 좋아함.” “······.” “그런 주제에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척 하니, 조금 귀여움.” “아니, 정말 최선의 방법으로 움직이는 건데.” “사람에게 최선을 맞추었을 뿐.” 아르페가 입술을 삐죽였다. “너,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아르페가 숨기는 것이, 신경 쓰일 뿐.” 또 메테르와의 교미 어쩌고 하면 한 대 때릴까 했던 아르페였지만 직후 레이제나의 입에서 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싫지 않을 뿐.” “······.” “그것이 나를 자극할 뿐.” “······그러냐.” “그래서 아르페를 관찰함. 질리지 않음.” 아르페는 오늘 꾼 악몽 이전에 자신이 꾸었던 꿈을 기억했다. 이미 자신이 죽은 후, 에트나까지 물리친 용사 일행 사이에서 레이제나가 죽어가던 순간의 꿈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레이제나가 아르페의 고유능력의 각성을 알아챈 것이나 메테르에게 한 의미심장한 말도 그렇고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메테르를깨워 삼자대면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레이제나가 자신을 보고 슬퍼하는 메테르를 달래듯이 한 말이었다. 평생 이해하지 못하던 감정을 메테르 덕분에 알게 되어 기쁘다고 했던 그 말. 어쩌면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레이제나는 그저 감정을 탐구하려는 마음뿐이던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며 마족을 구속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마왕에 대한 감정은 그저 부차적이었을지도. 전생에서 그녀가 바라보았던 대상은 메테르였고, 현생에서의 대상은 아르페였다. 단지 그 차이였다. 거기까지 깨달은 아르페는 자신이 레이제나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덜컥, 겁이 났다. “나 너무 믿으면 안 된다.” “안 믿음. 연하취향의 위험한 남자. 어려보이기만 하면, 실제 나이도, 성별도 신경 쓰지 않는 무시무시한 변태. 특급 경계.” “그래, 그걸로 됐어.” “······.” 레이제나는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르페는 더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대론 자신의 전생에 대해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미리 아침이라도 마련해둘 요량으로 움직이는데, 근처 텐트에서 자고 있던 엘릭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그를 보는 것이 보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전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히익!” “뭐야, 왜 경계하냐······ 음?” 아르페는 곧 그가 자신을 경계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방금 레이제나의 말에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려보이기만 하면 실제 나이도 성별도 신경 쓰지 않는 변태라고······. “아냐, 아니라고.” “오지 마! 더 다가오면 벤다!” “아니라고!” 엘릭과 아르페가 벌인 소동 탓에 결국 파티 멤버 전원이 깨버리고 말았다. 물론 저마다 레벨이 경지에 이른 만큼 수면이 부족한 이는 없었고, 결국 그 자리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치우고 움직이게 되었다. 새벽에 아르페와 레이제나가 대화를 나누었듯 제스트바는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 워프 게이트를 탈 것도 없이, 철마에 타고 흔들리는 풍경을 떠나보내며 저 너머 바다를 향해 질주할 뿐이었다. “있잖아 아르페, 오늘 엄청난 꿈을 꾼 거 있지.” “아냐, 말하지 마.” “히잉.” 메테르의 꿈에 대해선 지금 당장 접근할 용기가 없었던 아르페는 그녀의 말을 사전에 차단해버리곤 한편으로 마법 술식을 짜냈다. 제스트바는 사람도 마족도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비처, 그곳에 형성된 방어막을 뚫고 해역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제아무리 아르페라 할지라도 제법 공을 들여야 했다. “아, 저쪽에 사람이 보여.” “소국이야, 무시해.” “마족이랑 싸우고 있어, 오빠.” “흔한 일이야, 무시······ 뭐?” 아르페는 시에나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다 말고 반문했다. 곧장 그의 시선이 저 너머로 돌아갔다. 그러자 정말로 보였다. 그곳에 치열하게 투쟁하는 인간들과그런 인간들을 우습게 짓밟는 마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럴 수가.” 레벨 200을 갓 넘긴 하급 전투병들로 보였지만 그래도 마족은 마족이다. 아무래도 마계에서 아르페의 예상보다도 이르게 전쟁을 개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저들은 본대의 진군에 앞서 인간계를 밟은 정찰 부대에 불과하겠지만······. 아르페는 놀라워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결계 부수느라 개고생 할 필요가 없게 됐잖아!” “왜 그런 말 안 하나 했지.” 메테르가 툴툴거리는 가운데 아르페는 즉각 블링크를 시전했다. 아르페의 일행, 심지어는 철마까지 한꺼번에 공간을 뛰어넘어 마족과 인간의 격전장에 이르렀다! 철마로 가장 만만한 마족 한 마리를 짓밟아버린 것은 애교였다. “안녕, 너희가 제스트바의 진입결계를 우리 대신 뚫어줬구나!” “뭣!? 인간······!” “밟아!” “야호!” 전생과는 성격이 제법 달라져 절로 그를 걱정하게 만드는 금발의 용사 메테르가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철마에서 뛰어내렸다. 정찰 부대라고는 해도 그 숫자만 족히 500명 이상! 그러나 그것이 메테르가 착지하는 순간에는 400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녀가 힘차게 내지른 바스타드의 첨단에서 터져 나온 빛이 정확히 마족들이 모여 있는 곳을 타격해 놈들의 마나를 전부 소진시켰기 때문이다. “메테르, 적극적이지 않은 놈까지 죽이지는 마! 레이제나, 너는 통신 방해 마법!” “응!” “바람의 정령이여, 그대의 귀를 간지럽히는, 무뢰배들에게 응징을.” 메테르의 몸놀림은 마치 번개와 같았다.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남는 것은 쓰러진 마족과 핏자국 뿐. 마족들은 이상 사태를 깨닫고 다급히 본대에 보고하고자 했지만 그땐 이미 레이제나의 방해 마법에 의해 마나가 차단된 상황이었다. “숫자는 고작 여섯에 불과해!” “전부 잡아 죽인다! 가장 먼저 저 마녀를 없······ 크악!” 전투 외에 가능성이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마족들이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었지만그런 놈들부터 먼저 메테르의 검에 목이 잘려나갔다. 메테르는 어디까지나 아르페의 말을 유념하고 있었지만, 일단 자신과 아르페의 목숨에 위협이 될 자들은 살려둘정도로 인정이 많지는 않았다. “나도 간다!” “아니, 엘릭. 이 자리는 메테르와 레이제나만으로 정리할 거야. 제스트바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 따위 마졸들보다 위험한 적이 덤벼오니 체력을 관리해둬.” 그렇다면 어째서 메테르와 레이제나는 날뛰게 두는가 하면, 이 녀석들은 이 정도 적을 해치우는 정도로는 체력도 마력도 그리 소모되지 않는 특등급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오, 이럴 수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하다니 저들이야말로······.” “아, 서브 퀘스트 집어치워! 살았으면 도망 가 새끼들아!” 제아무리 소국이라고는 하나 먼저 퀘스트와 보상을 안겨주려고 달려드는 인간들이 있음에도 귀찮음에 거부하고 내쫓는 아르페! 인간들은 더 말을 붙여보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르페의 싸늘한 눈빛을 견디지 못해 곧장 줄행랑을 쳤다. 이윽고 그 자리에는 마족들과 아르페 일행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후, 좋아.” 그는 마족 중 단 한 놈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메테르와 레이제나에게 목숨을 잃거나 제압당하는 것을 확인하며, 철마에서 내려 가장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는 마족에게 다가갔다. 숨이 붙어 있는 놈이었다. “지금부터 2차 실험 시작해볼까.” 그로부터 30분 후, 현장을 완벽히 정리한 아르페 일행은 철마를 타고 무사히 제스트바 해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아르페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Chapter 29. 제스트바 - 2 > “아르페, 그것들 그대로 보내줘도 정말 괜찮은 거야?” “능력을 잃었고 마계로 돌아갈 수도 없는 데다, 결정적으로 우리를 죽이기는커녕도축장에 끌려온 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놈들을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 결론부터 말하면, 마족을 인간으로 만드는 실험은 지극히 성공적이었다. 아르페는 무력화한 마족들을 대상으로 마도서의 힘을 발휘했고, 몇 번인가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무사히 놈들에게서 마의 인자를 빼내면서 목숨을 붙여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절대지배의 족쇄도 완벽히 벗겨낼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마도서를 발동하기에 앞서 대상의 마나를 한 톨도 남김없이 소모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로아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족쇄가 풀리는 순간 마족, 아니 마족이었던 자들은 마왕의 영향권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된다. 아마도 마왕은 그들이 죽었다고 판단하겠지. 혹여 저놈들이 다른 마족을 만나거나 하면 마왕이 자신의 오판을 깨닫게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또한 아르페 일행을 경계하고 많은 숫자의 마족을 보내오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고마운 일이다. ‘에트나만, 어떻게든 에트나만 아군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아니, 사실 아군일 필요도 없다. 중립으로만 있어줘도 충분했다. 마의 기운보다 순수한 화염에 가까운 그녀는 마족이라는 특성이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능력자. 아르페가 족쇄를 풀어준다면 그 순간 족히 1.3배는 강해진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그녀가 용사 편에 서지 않는다 해도 그녀가 인간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마왕군에 대한 큰 저항력이 되는 것이다. “아르페, 또 그 여자 생각했지.” “아냐, 아냐. 네 생각하고 있었어.” “거짓말 같은데······.” 메테르를 상대로 하는 거짓말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에트나와 관련된 거짓말이 특히 그랬다. 이것이 여자의 직감인 것일까. 무섭기 그지없다. 아르페는 메테르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마침 적당한 것이 있었다. “자, 저기 몬스터 온다! 몬스터!” “으으음.” 메테르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으나 몬스터가 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정말로 제스트바 해역을 질주하는 철마(이쯤 되면 육해공 만능 탑승기구였다.)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개체 한 마리 한 마리가 철마보다 크고, 용맹한 흑색의 갈기가 솟았으며 두 눈은 매섭게 번뜩이고, 몸통 바깥으로 솟아난 뼈의 갑옷 곳곳으로 위협적인 가시가 튀어나와 있는······. “오빠, 어째서 해마가 바다 위를 달리는 거야?” “글쎄,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던 말의 본능이 되살아났나보지.” “그냥 생김새만 비슷한 줄 알았는데 조상도 같았구나! 오빠 굉장해!” “속지 마, 이 녀석아.” 아르페는 오히려 해마의 존재를 알고 있던 시에나 쪽이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놈들이 일행을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갈게, 아르페!” “······나머지 인원도 전투 대비. 놈들은 레벨 300에 근접하는 놈들이고, 마계의 영향을 받아 레벨에 비해 강한 힘을 품고 있으니 절대, 절대로 공격당하지 말 것.” “흡!” 그는 적을 인식한 순간 이미 철마에서 뛰어내려 바다를 내달리기 시작한 메테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은 한 손을 철마 밖으로 뻗어 해수면에 집어넣었다. 그것을 본 바디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르페 님?” “해마는 원래 바다 안에 사는 놈이잖아. 양동으로 덤벼오고 있는 거야.” “아!” 굳이 그가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바다 안으로 내쏘아진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그들이 타고 있는 철마와, 내달리고 있는 메테르를 향해 몰래 돌진하던 거대 해마 무리를 붙잡아버린 것이다. 놈들의 방어력이 얼마나 강력했으면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으로도 한 번에 죽일 수는 없었지만, 레이제나가 잽싸게 마법을 영창하자 아르페가 붙들고 있는 마나 스트링을 통해 내쏘아진 거대한 바람의 기운이 그것에 붙들린 해마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실로 완벽한 콤비네이션이었다. “더 몰려옴.” “당연하지, 방금 공격은 놈들을 더 자극시키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는데. 곧 바다 전체가 우리를 적대하게 될 거야.” “악취미. ······조금 멋짐.” 해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적들의 모습을 확인한 아르페와 레이제나가서로의 실력을 칭찬하며 두 번째 마법을 준비하던 바로 그 시각, 메테르 역시 거대 해마들 앞에 당도했다. “흐아아아압!” 정면으로 그녀를 막아낼 수 있는 이가 그 어디 있겠는가? 그녀의 검격에 해마의 골판이 산산조각 나고, 뒤이어 내지른 강격에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물을 박차고 다음 타겟에게 덤벼들어 이번엔 일격으로 놈의 숨통을 끊었다. 한 마리 죽이는 과정에서 놈들의 육신을 낱낱이 파악하고, 다음 순간부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힘과 움직임을 내는 것. 달리 천재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용사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여자군요. 납득하기는 싫지만.” “바디네, 멍하니 보고 있지 말고 내 쪽으로 와.” “알겠습니다!” 바디네는 아르페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방금 그와 레이제나의 콤비 공격을 감상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능숙하게 신성력을 뿜어냈고, 아르페는 그것을 조종해 마나 스트링을 강화시켰다. 신성력으로 물든 수십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해수면 깊숙이 들어가, 다음순간에는 아르페의 의지를 따라 팽창하며 일대로 몰려들던 몬스터들을 일시에 공격한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 [크갸갸갸갸갸갸! 기아크으으그그그그!] 마계의 해역에 나타나는 만큼 당연히 강력한 마기를 품고 있는 제스트바의 몬스터들이 그것에 당해 괴로워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괴롭히기만 하고 끝내면 인정이 없으니, 그는 구현으로 신성력과 마력을 이리저리 조율하며 마법의 형태를 바꾸어 지속적으로 놈들을 공격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레벨 300이 넘는 몬스터들인지라 일행의 경험치도 빠르게 상승했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 [키히! 키히이이이이!] 바다에 파랑이 일고 피분수가 솟구치며 괴성이 진동했다. 고통을 못 견디고 수면 위로 솟구친 해마 한 마리가 아르페를 덮치기 직전 시에나의 망치에 얻어맞아 튕겨나갔다.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일격의 교환에도 불구하고 아르페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아르페 님, 마나는 무한하지 않으니 한 번쯤 퇴각을······.” “퇴각? 중간에 물러날 길이 있을 것 같아?” 물론 아르페의 블링크 능력을 구사하면 당연히 물러날 길이 있지만 아르페는 물러날 생각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바다 전체가 적대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냐. 이제 곧 바다 속에 물보다 몬스터의 비중이 더 높아질 거야.” “······뒤에, 몰려옴.” “뭣······.” 제스트바 해역의 몬스터가 타깃을 확정한 순간, 제스트바 해역의 모든 몬스터는 그들을 노리고 몰려든다. 그것을 어떻게든 피해 마계든 인간계든 상륙을 하든가, 아니면 그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다 결국 바다에 잠들든가, 이 해역에 발을 들인 자에게는 그 외의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보통은 전투가 심화되기 전 놈들의 포위를 피해 다른 쪽으로 건너가려 하겠지? 굳이 이곳에서 뭉개면서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오빠의 목적은 바로 이 해역에 있다고 했지? 우리는 해역의 안으로 나아갈 뿐 마계로 건너는 길에 오른 것은 아니고······ 그렇다면 이곳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바로 유적을 열어주는 힌트가 되는 거야?” 역시 시에나의 이해력은 범상치 않다. 그는 시에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놈들이 바로 유적의 열쇠야. 보통은 알아내지 못하지. 천하의 마왕이라도 알아낼 수 없어.” 놈에게 이 해역의 몬스터란 굳이 끌어 모아 없앨 만큼의 가치조차 없었으니까. 아르페는 수면 위로 솟구치는 몬스터들을 단독으로 맡아 처리하고 있는 메테르의 용맹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스트바 해역은 항시 결계로 보호받기 때문에 실상 뭔가를 숨기기에는 가장 적합한 곳이야. 그리고 이 해역 전체를 뒤덮고 있는 고대의 마법진, 인간의 손으로는 만들어내는 것도 재현하는 것도 바라보는 것마저 힘든 그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파수꾼들을 모두 수면 위로 끌어냈을 때지.” 그 다음으로 이어질 아르페의 말은 그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쉬지 말고 이놈들을 잡아.” “눼이······.” 그러나 일행에겐 다행하게도, 그들의 수준은 제스트바 해역의 모든 몬스터들을 압도할 만큼 강했다. 그 어떤 몬스터도 일행의 공격을 두 방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그 누구도 그들의 몸에 미치지 못하니 점차로 많은 몬스터가 뿔이 나서 달려든다. 본래 며칠 이상은 걸렸을 유인 작업이 몇 시간으로 줄어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페, 저길 봐라!” “오, 드디어.” 제법 오랜 시간에 걸쳐 몬스터들의 피로 검푸르게 물든 해역 한가운데에서 물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안에 깃든 무시무시한 마나에 눈치 챈 해역의 몬스터들이 전부 그 주위로 모여들자, 메테르는 급한 대로 놈들 일부를 후려쳐 죽이곤철마 위로 복귀했다. “아르페, 혹시 저게 유적이야?” “보면 곧 생길 거야.” “생긴다니 대체 뭐가······ 으으으으으.” 아르페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소용돌이에 주었던 메테르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먹는 것도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지만 먹는 것으로 장난치는 것만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벌어지는 광경은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왜 몬스터들이 전부 저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서 갈리고 있는 거야!? 저래선 맛을 볼 수 없는걸!” “일단 메테르 너한테 ‘몬스터는 먹을 것’이라는 인식이 서 있다는 것만은 잘 알겠다. 어쨌든 여기까지 수고했어. 지금부턴 조금 쉬어 둬. 공격하지 말고 쉬라니까.” 아르페는 한숨을 쉬면서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소용돌이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공격하려 드는 일행을 적당히 말려두었다. “몬스터들을 잡으려면 지금이 제일 좋은 기회 아닌가요, 아르페 님?” “하지만 이미 트리거는 당겨졌어. 이젠 유적이 형체를 갖추길 기다릴 때지.” “유적이라니, 일단 저 몬스터들을 없애야 유적에 들어가든 말든······ 아?” 설마, 하는 목소리와 함께 바디네의 고운 아미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르페 님, 혹시 소용돌이로 몬스터들이 몰려드는 과정 또한 유적의 일부가 되는 것인가요?” “아, 똑똑한 일행을 둬서 정말 다행이야······.” “나두 알고 있었다 뭐! 쟤네가 합체해서 딥따 거대한 물고기가 되는 거지!” “메테르 님,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답니다. 방금 저희가 유적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런데 뜬금없이 거대한 물고기라니 무슨······.” 바디네와 메테르 사이에 또다시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아르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테르가 맞아.” “네? 그게 무슨 말씀······ 어라?” 반문하려던 바디네의 입이 어느 순간 다물어졌다. 그녀의 두 눈은 너무나 많이 몰려든 탓에 더 이상 소용돌이를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한 해역의 중심부에 꽂혀 있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탄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아르페 님······ 어째서 몬스터들을 가만히 두라 하셨지요?” “살아있는 몬스터가 많이 융합할수록 결과물이 풍성할 테니까.” “그래서 저 결과물······ 대체 얼마나 풍성한 것일까요?” “글쎄.” 아르페는 고개를 들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그곳에 더 이상 소용돌이는 없었다.제스트바 해역의 모든 몬스터가 몰려든 그곳에는 육편과 피와 근육과 뼈가 하나로 뭉친 타원형의 덩어리가 되어 기분 나쁜 맥박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꼭 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라고 말씀해주실 거죠, 아르페 님?” “모두 준비해.” 아르페가 입을 열어 지시한 다음 순간, 알의 윗부분이 터져나가며 무엇인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을 본 바디네가 외쳤다. “물고기는 아니잖아욧! 저건 포유류라구요!” “고래다아아아아아!” 그러나 그녀의 태클은 메테르에게 들리지 않았다. 메테르는 그저 알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래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자, 돌진하자.” “오, 아르페 님.” 그리고 바디네가 절규하건 말건 아르페는 씩씩하게 지시했다. “저 고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대마법 레인 오브 루인이 잠든 유적, 바다의 무덤으로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 Chapter 29. 제스트바 - 2 > 끝 ⓒ 토이카 < Chapter 29. 제스트바 - 3 > [구오오오오오옹!]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고래의 힘찬 포효에도 굴하지 않고 아르페가 씩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스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무척 난해한데, 그중에서도 대마법 계열은 어쩌다 보니 한 곳에 뭉치게 된 자연의 힘이 수많은 세월을 거쳐 오며 인간의 기록과 마나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정형화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야.” 실제로 스펠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그 지역 일대에 사는 모든 생물과 인간의 기록이며 마나가 개입되어 스펠의 형태를 고정하는 보다 복잡한 과정이 있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은 깔끔하게 생략했다. “그러면 자연환경이 험한 곳에 보다 강력한 마법이 모습을 드러낼 일이 많겠네?” “그렇지. 그리고 대마법 레인 오브 루인은 그중 최강······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최강의 마법이야.” 자연이되 자연이 아닌, 인공이되 인공이 아닌 초월의 기록. 인계와 마계의 경계에서 끊임없는 파도와 해진, 해저화산, 무수한 몬스터의 영향을 받아 그 끝에 탄생한 초자연적인 유적. 그것이 바로 제스트바의 모든 몬스터가 모여 융합되는 개체 포식자의 체내에 생성되는 바다의 무덤의 정체였다. “이런 걸 어떻게 알아내고 찾아와!” “아무도 못 알아냈으니까 우리가 올 때까지 감추어져 있었지.” “그, 그러네?” 엘릭이 납득하곤 조용해졌다. 메테르가 뿌듯하게 어깨를 폈다. “우리 아르페 대단하지.” “아르페 님이 대단한데 어째서 메테르 님이 자랑스러워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그래서 아르페 님. 우리는 분명 거대 고래의 입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바디네는 주위를 둘러보며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생물체의 체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딱딱한 흙벽과 천장에 박힌 미약한 마나의 수정은 그것만으로 바디네에게 겁을 집어먹게 만든 것이다. “호, 혹시 여긴 일종의 아공간인가요?” “맞아. 유적의 입장 조건을 달성해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지. 그러니까 여기서가만히 있어도 소화되는 일은 없어. 안심하도록.” “그 말씀을 해주시길 기다렸답니다······.” 아르페 역시 실제로 이 유적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제스트바에 이 마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는 아르페 본인이 맞았으나, 그는 스스로 마법서를 찾으러 올 능력도 권한도 없었기에 마왕에게 순순히 그 위치를 고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 가뜩이나 강했던 마왕은 이 마법을 익혀 더더욱 강해졌다. 물론 아르페는 마왕이 레인 오브 루인을 구사하는 순간까지는 보지 못했으나, 인간계에서 그 마법을 막아낼 이가 용사를 포함해 그 누구도 없었으리라는 추정만은 가능했다. 그것을 막아낼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이가 레이제나인데 그녀가 에트나와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니······. “······시선이 기분 나쁨.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 “그래, 어쩌면 그런 반응을 해주길 기다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전생은 어디까지나 전생, 지금 그들은 아군이다. 아르페는 꼼지락거리며 그의 눈을 피하는 레이제나를 보며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내곤 일행에게 돌아섰다. “다들 전투 준비. 이미 말했지만 유적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보스급이니 긴장하도록. 시에나가 선두를, 엘릭이 후미를 맡아줘.” “응!” “맡겨둬!” 메테르의 장비도 시에나에 비해 꿀리는 편이 아니지만, 메테르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보단 빈틈을 노리고 돌격해 적을 무너트리는 역할에 더욱 걸맞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아르페의 지시에 따라 둘이 각각 파티의 앞과 뒤에 자리하자, 메테르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온다.” 아르페의 말이 떨어진 직후 허공에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생겨났다. 레이제나는 그것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위스프······?” “위스프라면 저도 알고 있답니다, 아르페 님. 순수하고 풍부한 마나 가운데 우연히 태어난 자아를 중심으로 마나가 뭉쳐 탄생한 순수한 정령이며, 그 의지가 미약하여 현세에 행사할 수 있는 물리력이 미약하기 그지없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이 녀석들은 평범한 위스프가 아냐. 레벨 320의 위스프지.” [!?] 위스프가 뭔가를 말했다. 말한 것만 같았다. 다음 순간 시에나가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다. [!?!?] “크햑!” 위스프의 몸통이 정통으로 시에나의 방패를 들이받고 있었다. 가히 아르페의 블링크와도 비견되는 속도! 그런 주제에 힘은 메테르의 전력을 다한 박치기보다도 강했다. “끄으, 으하아아아!” “잘했어, 시에나!” 끔찍한 충격에 시에나의 두 눈이 부릅 뜨였으나 그녀는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뻗어내는 한편으로 다급히 파티원들에게 지시했다. “바디네, 축복!” “내, 내 님을 지키는 이에게 수호자의 가호를!” “물리력으로는 상처 입힐 수 없어! 레이제나, 속도 디버프!” “혹한을 지새우는 겨울여왕의 이름으로, 나그네의 걸음을 늦추어라.” 바디네와 레이제나의 영창이 줄지어 이어졌다. 마나를 감지한 위스프가 그것들을해제하고자 마력을 발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아르페가 기다리고 있던 틈이었다. 사방으로 뻗어난 마나 스트링이 위스프의 마나와 접촉해 놈의 몸통을 붙잡으려들자 기겁한 위스프가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당연히 바디네와 레이제나의 영창은 끝까지 제대로 이루어졌다. 시에나에게 어린 축복이 그녀의 체력을 강화시키고, 레이제나의 디버프가 순수한 빛의 마나로 이루어진 위스프의 몸통 곳곳에 서리가 어리게 했다. 놈은 다시 일행에게 돌진해왔으나 조금 전에 비하면 뚜렷이 그 속도가 느렸다! “메테르!” “하아!” 메테르가 총알같이 튀어나가 위스프의 몸통에 바스타드를 찔러 마나를 폭발시켰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위스프가 인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나갔다. “한 놈이 아냐, 경계해!” 어느덧 아르페의 스태프가 허공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스태프와 아르페를 매개로 수천, 수만 가닥씩 뻗어 나오는 마나 스트링! [!] [??] [!?!!] 유적 곳곳에서 튀어나온 위스프가 그것을 보며 경악해 저마다 알아먹을 수가 없는 소리를 질렀다. 동료의 복수를 하고자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위스프들도 있었으나, 겹겹이 쌓인 마나 스트링의 벽을 뚫지 못하고 오히려 붙잡히고 있었다. 어찌어찌 마나 스트링의 포위를 벗어난 녀석들도 제각기 엘릭과 시에나에게 막혔다. “아으으, 아르페! 아파! 이놈들 졸라 아파!” “바디네, 엘릭한테는 축복 한 겹 더 걸어줘!” “아아, 아르페 님. 너무 아름다워요······.” “네가 정신이 팔리면 어떻게 해 임마!” “흐아아압!” 다행히도 메테르만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바스타드에 최대한의 마나를 집중시킨 그녀는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질주하며 속박된 위스프들의 몸통에 거침없이 칼을 찔러 넣었다. 놈들의 레벨이 하도 높아 한 방에 죽일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나가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능력이었다. “레이제나!” “겨울여왕의 위엄 앞에, 빛은 필요치 않으니.” 그렇게 무력화된 놈들을 끝장내는 것은 레이제나의 몫이었다. 허공에 맺힌 얼음 결정들이 반짝이며 쇄도하여 위스프들의 몸통에 차례대로 박혀, 놈들의 기록을 깔끔하게 수거한다. 고작 몇 마리 죽였을 뿐인데 곧 엘릭의 레벨이 올랐다. 나머지 일행의 경험치도 조금씩은 올랐으리라. 그리고 레벨 300을 넘은 시점에서, 조금의 경험치란 실로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이 조그마한 위스프가 어찌 이런······!” “레벨 업 해도 아파······!” 위스프는 순수한 마나의 정으로 이루어진 마나 생명체. 당연히 어디에서 탄생하느냐에 따라 지닌 힘이 다르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 탄생하는 위스프는 그 중에서도최상위권에 위치한 놈들이었다. “이놈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스프가 있긴 있어. 마왕성 뒷산에 보면······.” “아냐, 말 안 해줘도 돼······.” 엘릭은 시무룩하게 대꾸하며 다시 방패를 들어올렸다. 위스프들의 속도가 워낙에 빨라 반격할 생각은 진즉 버렸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르페와 레이제나, 바디네를 보호하는 것! 일단 막아내기만 하면 아르페가 쏘아낸 실이 위스프를 휘감고, 메테르와 레이제나가 끝장을 낸다. 지금 그들은 어비스에선 경험할 수 없었던 파티 플레이를 제대로경험하는 중이었다. “숫자가 점점 더 불어나는데,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증식하고 있는 것 아냐?” “생각해 봐. 이 유적이 생겨난 건 까마득히 먼 옛날인데, 유적에 들어온 건 우리가 처음이잖아. 그러면 유적에 쌓인 잉여 마나가 얼마나 많겠냐.” “와아, 반딧불이 같아!” 반딧불이의 몸통을 두 쪽으로 가르는 취미가 있는 메테르가 밝게 외쳤다. 동족을 학살하는 메테르에게 분노한 위스프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돌진하다가는 시에나의 방패에 쿵쿵 부딪혀 떨어져 나갔다. 위스프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아르페와 레이제나만 바빠졌다. 그렇게 족히 수백에 달하는 숫자의 위스프를 처리하고 있자니 어느덧 전장에 변화가 찾아왔다. 위스프의 증식 속도는 처음과 다를 바 없었으나 어째 놈들이 점점 소극적으로 굴기 시작한 것. 전방의 몇 마리만 날파리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며 일행을 견제하고, 나머지는 한 자리에 뭉쳐 웅웅거리고 있었다. [!!?] [!!!] [!!] “아, 저놈들 뒤에서 합체한다!” “저건 아픈 건데······ 완성되기 전에 막아!” 동일한 지역에서 생겨난 위스프는 보다 강한 자아를 지닌 녀석에게 흡수되는 것으로 마력과 기록을 고스란히 넘길 수 있다. 그렇게 수십 마리를 먹어치운 위스프는 인간계의 마도사는 꿈도 꿀 수 없는 압도적인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는 대신······. “흐아아압!” [!?!?!?] 방어력과 체력만은 한 마리일 때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일단 해치우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챈 메테르가 가속을 거듭해 곧장 놈에게 스킬을꽂아버리자 성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흣!” 제대로 합체 공격을 해보기도 전에 그 주인공이 폭사해버렸다! 그에 분노한 위스프들이 그녀를 공격하고자 했으나 메테르는 재차 가속을 구사해 일행과 합류했다. 그 뒤를 쫓듯 돌진해온 위스프들이 시에나의 방패에 연달아 부딪히며 북 두들기는 소리를 냈다. “오빠아아아아.” “조금만 참아!” “흐아아압!” 위스프들로 가득한 공간을 폭발적인 위력을 담은 마나의 실이 가로질렀다. 레이제나도 시종 두 눈을 빛내며 마법을 구사했다. 위스프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허공으로 많은 양의 마나가 비산하기에, 그것들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마력이 부족해 고생할 일도 없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일대에 나타났던 위스프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그 후로도 두 번쯤 더 위스프들의 합체 시도가 있었으나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으으, 정말 터무니없는 던전이야.” 지저에 들어가 죄의 그림자를 상대하는 등 만만치 않은 수라장을 겪었다 자부하는 엘릭이었으나 그런 그도 수백 마리 규모의 320레벨 위스프를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르페, 혹시 앞으로 나타나는 녀석들도 이런 것들일까?” “감을 잡았구나, 메테르.” 레인 오브 루인은 순수한 파괴의 에너지를 다루는 마법, 그것을 지키는 유적의 몬스터들도 순수한 에너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위스프는 그 대표 격인 몬스터였고, 이 뒤에 기다리는 이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길이는 어느 정도인데?” 시에나의 질문이었다. 아르페는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유적의 통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아, 그렇구나.” “어라? 나 대답 아직 안 했는데.” 아르페가 당황했으나 일행은 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정리하며 스트레칭을 개시하고 있었다. “다들 가자. 빨리 마법서 얻어서 나가야지.” “그래.” “흥미로운 유적. 레벨 업.” “야, 아직 말 안 해줬잖아!” 마계를 앞두고 맞이한 최후의 유적, 그 탐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 Chapter 29. 제스트바 - 4 > “그래서 여기까지 쭉 위스프 뿐이었다 이거죠? 그보다 여기 대체 어딘가요, 아르페 님? 일단 이동 가능하겠다 싶어서 와보긴 했는데 막상 안에 들어오니 대기의 마나만으로 기가 죽는걸요.” 바다의 무덤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 오랜만에 만난 던전상인 미케나는 여전히 말이 많았다. 아르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장비 수리.” “반갑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줘도 좋을 텐데.” 미케나가 투덜거리며 일행의 장비를 수거했다. 아르페와 한 번이라도 같이 던전을 돌았던 적이 있는 나머지 일행은 아무렇지 않게 장비를 건네었으나 엘릭은 기겁을 했다. “다, 다크 엘프!? 엘프를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야!” “어머나, 귀여운 손님이네요. 갑옷 무겁지 않으세요?” “난 성인이다!” “농담도 잘하셔라.” 미케나는 그렇게 훌륭히 엘릭과 첫 만남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는 데에 성공했다. “외관을 보고 판단하는 것들은 최악이야!”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봤자 외관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분명한 사실이랍니다. 실제로 손님도 저를 보고 무척 예쁘다고 생각하셨죠? 그러면본능적으로 험한 말이 나오지 않게 되죠. 그러니 손님도 손님의 외모를 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시는 게 더 유익해요.” “심지어 재수까지 없다니!” 엘릭이 미케나를 상대하며 으르렁대는 동안 아르페는 유적의 1층에서 건질 수 있는 보물상자를 샅샅이 뒤졌다. 바디네는 그에게 따라붙어 보조하면서도 한편으론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고래 뱃속의 유적이 층까지 나뉘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난 아르페가 아주 좋은 질문이라고 말할 때 이미 짐작했는데.” 이미 아공간으로 들어온 이상, 그 입구가 무엇이었건 내부 공간의 넓이와는 관계가 없었다. “이제 위스프는 진저리가 나. 방패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아. 2층에서는 제발 다른 몬스터가 나왔으면 좋겠어.” “시에나, 그러면 방패를 하나 더 줄까?” “아냐, 오빠. 괜찮아······.” 장비 수리는 순식간에 끝났다. 수리 과정에서 일행의 장비가 드워프의 손을 탔음을 깨달은 미케나가 눈을 반짝이며 아르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르페 님, 마왕군 출두가 얼마 남지 않은 이때 인간계의 전력을 끌어올릴 좋은 방법이 하나 생각났는데 말이죠······.” “드워프들의 위치에 대해선 시페넌 일행한테 이미 말해놨으니, 그 녀석이 디아스에 들어간 이후에 개시해. 드워프와의 거래를 무기로 삼으면 시페넌의 왕권을 굳건히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야.” “역시 아르페 님밖에 없다니까요!” 거래관계가 오래되다보니 거래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을 떼어놓아도 서로 의사가 통했다. 호흡이 착착 맞는 남녀를 보며 메테르는 무척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어디까지나 거래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태클을 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미케나, 너 출장업무 좀 수행해라. 돈은 얼마든 줄게.” “······네?” 출장업무라니, 그것도 돈은 얼마든 주겠다니! 지나치게 늠름한 아르페의 선언에 순간적으로 미케나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엘프 기준으로는 아직 한창 나이인 미케나의 머릿속으로 무수한 망상이 퍼져나가던 그때 아르페가 이어 말했다. “시페넌 일행한테 합류해줘.” “······.” 사람의 감정을 독으로 바꾼다면 아르페가 당장 그 자리에 녹아내리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격렬한 분노를 담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미케나. 아르페는 그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시페넌의 파티에 원거리 공격수가 추가되면 마왕군을 상대로 밀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보거든. 애니웨어 상회에서도 어차피 마왕군 대비 전략을 여러 가지로 세우고 있겠지? 디아스와의 향후 거래관계를 미끼로 시페넌을 도와주겠다고 하면 그들도 별 말은 하지 않을 거야.” “아르페 님······.” “결국 마왕군과 싸우게 될 거, 엘리트 파티에 합류해서 레벨도 올리고 능력도 키워둔다 생각해. 사천왕 정도 되는 거물들은 대부분 이쪽에서 처리해둘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후, 후후후······.” 분노가 임계점을 돌파한 미케나가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아르페를 한 번 째리고는 이어서 아르페의 파티원들을 차례대로 째렸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대금은 그 빨강머리 손님의 파티에서 제가 활약한 만큼을 정산하여 나중에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부탁할게.” “그러면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계약서는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시페넌 일행을 목숨의 위기에서 돕거나, 몬스터나 마족을 퇴치하거나 하는 자잘한 항목에까지 대금이 달려 있기는 했으나 충분히 납득 가능한 금액이었고, 상호합의 하에 대금을 적절한 물품이나 권리 등으로 정산할 수 있으니 아르페의 입장도 고려해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한기가 도는 걸까.” “두 번 세 번 읽어보시고 사인하세요. 물론 대상인이 작성한 계약서에 오류 같은 건 없겠지만요.” 위화감의 정체를 찾아내지 못한 아르페는 별 수 없이 사인을 마쳤다. 미케나는 한부를 품에 집어넣고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러면 저는 지금 당장 출발해보겠습니다. 2층부터는 다른 상인이 저 대신 나타나겠지만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래, 부탁할게.” 미케나의 모습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녀의 빈자리를 빤히 보고 있던 엘릭이 말했다. “용사라는 게 원래 만나는 여자들마다 후리고 다니는 클래스냐?” “아르페에 한해선 그래.” “아냐.” 아르페는 엘릭과 메테르의 뒤통수에 알밤을 한 방씩 먹였다. 메테르는 자기 머리를 감싸 안고 아파하며 아르페에게 말했다. “아르페는 정말 너무 착해. 왜 그렇게까지 그 짜증나는 빨강머리를 챙기는 거야?” “적어도 너는 그 녀석을 시페넌이라고 불러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시페넌이 들으면 울겠다! 그러나 아르페의 말에 메테르는 그저 툴툴거릴 뿐이었다. “너무 싫은데. 너무너무 싫은데.” “언젠가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워야 할 녀석들이야. 앞으론 친절하게 대하도록.” “음······ 아르페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어. 마왕을 처리할 때까지 만은 친절하게 대할게.” “그래, 착하다.” 아르페는 메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파티 전체에 고했다. “그러면 전진하자. 앞으로 일주일 안에는 이곳을 클리어하고 싶으니까.” 400레벨의 마왕이 홀로 유적에 들어가 일주일 만에 마왕성으로 복귀했다. 아마 지금 용사 파티의 전력이라면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여도 유적 클리어 속도로는 뒤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아르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은커녕 한 달이 넘어도 일행은 유적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을 땐, 더 이상 유적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가 몇 층이더라?” “39층.” 시에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유적은 뒤틀려 있어, 오빠. 우리가 들어간 유적이 언제나 그랬듯이!” “우으으, 차라리 빨리 마계에 진입하고 싶어요, 아르페 님······.” “아르페,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이야!” 유일하게 메테르만 생기에 넘쳐 있었다! 하지만 위스프를 상대하는 데에 질린 일행은 모처럼 맞이한 휴식에 취해 계단을 내려갈 생각을 하질 않았다. “자, 그러면 여기······.” 아르페는 아예 돗자리를 펼쳐놓고, 바로 방금 던전 상인(미케나가 아니었다.)으로부터 구매한 생일 케이크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시에나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풀어졌다. “어? 오빠, 그러고 보면······.” “응. 여기에 앉아, 시에나.” “아, 응!” “빨리 다음 층에······ 아!” 오늘은 무척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아르페 일행과 시에나가 만난 지 3년 째 되는날이었기 때문이다. 시에나는 자기 나이만 알았지 생일은 몰랐기에, 그들은 이 날을그녀의 생일로 삼아 축하하고 있었다. “빨리 와서 앉아, 열다섯 살.” “후흐흐, 이제 나 결혼해도 되는 나이다? 나도 많이 자랐지, 오빠?” “결혼······.” “겨, 결혼······.” 기쁨에 찬 시에나의 말에 잠시 그 자리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아르페는 메테르와 바디네가 이상한 말을 꺼내기 전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덤이지만 370레벨 달성도 축하해.” “이건 사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기라구요.” 물론 아르페와 메테르, 레이제나 역시 370레벨을 넘겼다. 바디네와 엘릭은 이보다는 조금 쳐져 있었으나 그래도 365레벨 정도. 이 유적에 들어왔을 때 엘릭과 바디네를 제외한 일행의 평균레벨이 310에 달해 있었으니 사흘에 하나씩 레벨을 올린 셈이었다. 전생의 용사가 마왕성에 쳐들어왔을 때 그녀의 레벨이 374였으니, 비로소 그 당시 용사의 레벨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 할 수 있으리라. 레벨 업에 집중한 기간만 놓고 보자면 오히려 전생에 비해 더 느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전생에서의 용사의 레벨 업 속도를 감안해도 이것이 실로 굉장한 일이라 판단했다. 그 이유 또한 지극히 단순했다. ‘전생의 용사 파티 또한 레벨이 평균적으로 높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메테르는 독보적이었어. 다른 파티원들과 족히 30레벨 이상 차이가 났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그녀의 고유능력 가속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파티원에게 적용되었고, 실제로 지금 아르페를 비롯한 전원이 그녀와 비슷한 레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박애주의이며,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아파하는 정신만 따져보면 전생의 메테르가 지금의 개인적 욕망에 가득한 메테르에 비해 압도적일 터. 그런데 어째서 고유능력의 공유는 이번 생에 더욱 발달한 것일까, 아르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좋은 게 좋은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레벨이 빨리 오른다 해도 이젠 슬슬 나가야 해. 우리가 마계로 들어가기 전에 마왕군의 정벌이 시작되면 말짱 꽝이니까 말이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주려고 유적이 이렇게나 길어지는 걸까?” “글쎄다······.” 아르페에게는 이곳이 이미 전생의 유적과는 다른 곳이라는 확신이 서 있었다.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이런 끔찍한 유적을 일주일 만에 토벌하고 나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먹자. 시에나,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응! 오빠 너무 좋아!” 파티 멤버 중 그 누구보다도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시에나였으나 이런 때만은 완전히 애였다. 아르페는 케이크 중 제일 큰 조각을 받아들어 기뻐하는 시에나를 보며괜시리 뿌듯해져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보며 레이제나가 툴툴거렸다. “아르페, 내 생일은 챙기지 않음.” “언젠지 말해줘야 챙기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주길 바라는 소녀의 마음.” “오히려 알아채면 더 무섭지 않을까, 그건······?” “오늘부터 내 생일은 오늘.” “그래그래. 생일 축하해, 레이제나.” “만족.” 아르페와 시에나 다음으로 돗자리에 착석한 것은 레이제나였다. 그 뒤를 이어 바디네도 앉았다. 금방이라도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싶어 하던 메테르였으나 케이크 앞에선 어쩔 수없다. 엘릭도 모처럼 갑옷을 벗고 케이크를 우걱우걱 먹었다. 닭다리를 물어뜯는 것보다는 훨씬 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아마 말하면 화를 낼 것이다. 한 층이 끝나는 지점에만은 결코 위협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 던전과 유적의 철칙,이곳에서만은 모두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르페, 아――” “안 돼, 모처럼 쉬고 있는데 분란의 씨앗을 만들지 말아줘. 제발······ 음?” 그러던 한 순간 유적이 미약한 진동을 일으켰다. 메테르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던 아르페가 즉각적으로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며 마나를 일으킨 그때, 그들 모두의 귓가에 쩌렁쩌렁한 진동이 밀려왔다. [그 힘······ 나와 비슷한 이의, 힘······!] “아.” 레이제나가 나지막이 목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저것, 정령.” “정령? 잠깐만, 그러니까······.” [나를······ 핍박하러 왔어?] 압도적인 마나가 담긴 진동에 아르페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자신 몫의 케이크를 다 먹지 못한 나머지 일행이 급한 대로 케이크 조각을 입에 쑤셔 넣는 그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를······ 핍박하러 왔어!] 당연히 그들이 앉아 있던 복도까지도 붕괴에 휘말려 들었다. 아르페가 다급히 마나 스트링을 뻗어 일행 모두를 확보하며 부유 마법을 시전했으나, 그 급한 와중에 바닥에 깔았던 돗자리까지 챙길 수는 없었다. [나를! 핍박하러! 왔어!] “······.” 39층이 강제로 40층과 통합되었다. 그 아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가 분노로 폭주하며 마나를 일으켰다. 일행이 저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드디어 찾아온 보스전을 대비해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단 한 명, 그 모습 그대로 굳은 이가 있었다. 레이제나였다. “케이크······.” 레이제나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입이 작은 데다 먹는 속도도 느려 아직 절반 이상조각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돗자리와 함께 붕괴에 휘말려 추락, 뭉개지고 만 것이다. [나를! 핍박하러······!] “용서 못해.” 레이제나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 뒤이어 일어나는 압도적인 냉기. 그것이 일행을 덮쳐오는 파괴의 마나를 모두 그 자리에 얼려, 추락시켰다! “용서 못해!” “기껏 레이제나가 처음으로 느낌표를 썼는데 그게 케이크 때문이라니!?” 고개를 든 레이제나의 두 눈이 얼음보다도 시리게 빛나며 40층의 보스를 쏘아보았다. 바다의 무덤의 보스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Chapter 29. 제스트바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1 > “아르페, 레이제나가 너무 무서워.” “괜찮아, 나도 그래.” 분명 보스 전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사 파티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있었다. 적의 힘이 너무 강해서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적은 분명 강했지만 반 년 동안 유적에서 레벨을 올려온 일행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죽일 거야!” 문제는 아군이었다. 레이제나의 전신에서 뻗어 나온 냉기가 대기를 얼리고, 그 안에 깃든 마나를 얼리니 당연히 보스라고 나타난 녀석의 마나도 그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냉기가 어찌나 강했으면 그것에 해를 입지 않는 아르페 일행조차 움직이기가 힘들 지경! [핍박······ 핍, 박······!] “죽여 버릴 거야!” “저 얼음장 같던 소녀가 저렇게 험한 말을······.” “역시 케이크의 힘은 위대해.” 메테르는 핀트가 엇나간 지적을 했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겨울여왕이여. 대지를 키우는 본분을 망각하고, 땅의 소출을 유린하는 광자에게,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겨울의 냉기를!” “레이제나가 저렇게 긴 영창을 하다니!” 유적의 보스, 아르페의 만물열람에 잡힌 정보에 따르면 [고대 빛의 정령왕]은 분명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일행을 전부 짓누를 것만 같은 포스로 가득했으나, 놈의 전신에서 퍼져 나온 빛이 일정 거리 이상을 전진하지 못하고 전부 얼어붙는 지금은 솔직히 우스워보였다. “아르페, 그런데 빛을 얼린다는 게 가능해?” “핵심을 짚는구나, 메테르. 120페이지에 걸친 얼음 마법과 빛의 마법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해주자면,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해.” “마법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힘이구나.” 아르페가 굳이 보스의 능력을 설명해주지 않아도 일행 역시 적이 빛의 힘을 다룬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빛에 힘을 담아낸다면 그 속도를 쫓을 수 없고, 파괴력에 당해낼 수 없으니 가히 최악의 적! ······일 터인데 지금 레이제나가 그것을 모두 얼려버리고 있으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부정하려면 마법의 근본부터 부정해야 해. 마법은 신비이며 기적이고,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까. 오히려 그 결과물이 현실에서 동떨어질수록급수가 높은 마법이 돼. 지금 레이제나가 다루는 냉기의 마법은 단연 최고위 냉기 마법이라고 볼 수 있겠지.” 겨울여왕이 레이제나에게 많은 힘을 주었다는 것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 본인의 기록을 대부분 넘겼으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마치 레이제나 본인이 겨울여왕이 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어쩌면 겨울여왕은 그들이 이곳에 와서 고대 빛의 정령왕과 마주하게 될 것까지도 예견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겨울의 지배자여, 이곳에 겨울을 불러오라!” [이이이익, 거절한다! 나의 아이들아, 찬란하고 따스한 빛을 이 자리에 되살려라!] 케이크를 잃고 분노한 레이제나의 맹공으로 빛의 정령왕이 움츠러들던 것도 잠시, 곧 국면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가라!] [!] [!?] [!!?!] 빛의 정령왕이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내 허공에 던지자, 그 안에서 무수한 숫자의 위스프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전부 레벨 350을 넘기는 위스프가! “얘들아, 우리가 해야 할 일 찾았다!” “또 위스프야! 또!” “그래도······ 이젠 나도 잡을 수 있다 이 말씀이야!” 투덜거리고는 있었지만 일행의 움직임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 아르페가 수천 줄기의 마나 스트링을 뽑아내어 위스프들을 붙잡자 무기를 쥔 파티 멤버들이 냉기를 떨쳐내고 신속히 돌진하여 놈들에게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바디네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일행에게 버프를 거는 한 편으로 신의 망치를 영창하여 위스프들에게 원거리 광역 공격을 가했다!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빛을 구속하다니!] “얼어붙어라! 녹아 사라져라! 프로즌 바이트!” [크아아아아아아!] 본래 레이제나를 저지할 터였던 위스프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붙잡히자, 녀석들을 만들어내느라 아주 조금의 빈틈이 생긴 빛의 정령왕의 몸통에 레이제나의 냉기가 작렬했다. 그것도 냉기로 베어 물고 분쇄하여 녹여 없애는 강력한 마법! 영창 과정에서 느낌표를 마구 발산해야 하는 탓에 여태까지 자제했던 마법이지만지금의 레이제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솟구쳐라, 내리앉아라, 바람으로 자라라!” 레이제나의 장기는 얼음 마법과 바람 마법. 한 번 만들어낸 얼음에 냉기의 바람을불게 해 더욱 위력을 키우는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마나가 턱없이 많이 소모된다는 것인데, 아르페의 마나를 빌릴 수 있게 된 지금은 거리낌 없이 다중 스펠을 구사하여 허공에 수백 개의 거대한 아이스 스피어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겨울의 냉혹함, 몸으로 깨달아라!” [크오아아아아아아!] 고대 빛의 정령왕이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다. 비단 레이제나의 공격 때문만이 아니다. 일행이 위스프를 제거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기 때문이었다. 정령왕이 만들어낸 위스프는 놈의 기록과 마나를 기반으로 하기에, 한 마리 한 마리가 소멸될 때마다 본체에 데미지를 주는 것이다. “좋아, 효과 있어! 이대로 밀어붙여!” “설마 이런 무식한 사냥방법이 보스 전에서도 효과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야호, 백 마리 돌파!” 20층 즈음부터 위스프에 질린 아르페가 ‘그냥 잡으면 너무 쉬우니까 몰이 사냥이나 해보자’하고 일행에게 미친 제안을 한 이후로, 일행은 유적의 한 층을 질주하며 위스프들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한꺼번에 사냥하는 것을 연습해야 했다. 일부러 던전의 난이도를 높여 습득 경험치도 높이고 전리품도 높이며 스킬 레벨도 높이는 일석삼조의 계책! 엘릭만은 피눈물을 흘리며 아르페를 욕했지만 그 성과가 지금 이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이제 아르페 일행을 골탕 먹이려거든 여기 있는 위스프의 세 배는 가져와야 하리라! “흐아아아압!”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위스프를 베어내던 메테르가 어느 순간 바닥에바스타드를 깊숙이 꽂아 넣으며 마나를 폭발시키자, 대지 곳곳에서 황금빛의 마나가 수천 가닥으로 나뉘어 솟구치며 그 자리에 남아있던 모든 위스프들을 꿰어 터트렸다! 여태까지 남아있던 위스프들은 이미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과 구현으로 데미지를 입었던 놈들인 만큼 마왕성이라도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은 메테르의 공격에 한 마리도 남김없이 깔끔하게 소멸하고 말았다. “아르페, 저건 무슨 기술이지?” “기합이라고 불러라, 기합이라고.” [이럴 수가, 나의 아이들이······.] “얼어붙어라!” [크흐······ 빛의 전사들이여!] 위스프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빛의 정령왕은 기어이 본신의 힘뿐만 아니라 유적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위스프보다 강한 자의식과 보다 뚜렷한 형체, 무엇보다도 빛의 속성력을 지닌 정령들을 불러내려는 것이다! “이이익······! 동강나라!” [빛의 정수에서 깨어난 이들이여, 무엇보다도 빠르고 강한 준마여!] 레이제나는 놈의 영창을 막기 위해 갖은 마법을 쏘아냈지만, 그녀와 싸우는 짧은 순간 속에서 냉기 저항이라도 익힌 것인지 놈의 반응이 이전보다 약했다. 레이제나는 자신의 마나만으로 폭주해도 적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끝내 뒤를 돌아보았다. “큭······ 메테르, 아르페! 마나!” “마나 달라고?” “저 녀석 혹시 나를 포션 비슷한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구시렁거리기는 했으나 어차피 위스프들을 다 처치했으니 다른 데 소모할 마나도없다. 아르페는 허공에 넘실거리던 모든 마나 스트링을 수거하여 마나를 회복하고는 그것을 전부 스태프에 밀어 넣었다. 자색의 데마이트가 찬란한 빛을 발한 다음 순간, 메테르가 그렇게 증폭된 마나를 고스란히 가져와 레이제나에게 넘겨주었다. 레이제나의 눈이 청명한 하늘빛으로 빛났다. “겨울의 아이들, 고요와 침묵을 사랑하는 아이들!” “어라, 저거 설마······.” “아르페가 설마라고 말했으니까 확실해. 아르페가 생각하던 바로 그게 일어날 거야!” 최근 메테르의 눈치가 너무 좋아져서 곤란하다. 아르페는 입술을 삐죽이며 텅텅 빈 자신의 마나나 회복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허공에는 격렬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빛의 정령왕이 자신의 몸체를 떼어내어 빛의 정령들을 새로이 창조하는 한편으로, 레이제나가 뿜어낸 하늘빛의 냉기가 그 사이사이로 들어가며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형태의 정령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그랬구나! 네년은 겨울정령의 힘을!] “너는 너무너무 나빠. 너무너무너무너무 나빠. 내 아이들아, 나를 대신해 저놈을 얼려 죽여라!” 아르페와 데마이트를 통해 증폭되고 메테르를 거쳐 레이제나의 품에서 냉기로 화한 마나가 40층을 가득 채웠다. 그 안에서 서서히 그녀가 창조한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개개의 힘은 빛의 정령왕이 만들어낸 정령보다 약하지만 숫자로만 따지면 놈들을 완벽히 압도하고있었다! “겨울여왕은 레이제나를 새로운 겨울여왕으로 삼은 것이었어. 과연 인간이 아니되 누구보다 인간과 닮은 그녀라면 겨울여왕의 힘을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인재일지도 모르지······.” “와아, 예쁘다. 꼭 눈이 내리는 것만 같아.” 반짝반짝 빛나는 빛의 정령과, 그들의 빛을 반사하는 반투명한 얼음과 눈으로 이루어진 겨울의 정령들. 그것들이 한 데 섞이니 과연 장관이었지만 실상은 두 바보들의 의지를 받들어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깽판의 현장일 뿐이었다. “죽여 버려!” [빛을 지워 어둠을 몰고 오고자 하는 이들을 찬란한 빛으로 물들여라!] 겨울정령의 군단과 빛의 정령의 군단이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레이제나와 빛의 정령왕은 서로를 격렬히 노려보며 서로를 공격할 또 다른 마법을 자아냈다. 가히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광경이었다. “준비 됐지?” “응, 오빠.” 그리고 아르페 일행은 거기에 초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가라.” 메테르의 레코드 마스터 스킬은 비단 레이제나를 대상으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바디네의 마력과 신성력, 그리고 엘릭의 무식한 힘과 체력의 기록을 끌어와 시에나에게 부여하고 있었던 것! 지금 시에나는 겉으로 보기엔 언제나의 그녀와 같았으나, 그 가녀린 팔뚝에 깃든 힘과 망치에 깃든 신성력은 가히 신의 그것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후우우······ 합!” 준비가 되는 즉시 시에나가 돌진했다. 지금 그녀는 메테르의 은신 스킬까지 공유 받고 있었기에 무수한 정령 사이를 돌파하면서도 놈들에게 감지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서로를 공격하느라 바쁜 레이제나와 빛의 정령왕 또한, 설마 이 격전장을 뚫고 들어올 이가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르페 일행을 새카맣게 잊어먹고 있을 가능성조차 있었다. 시에나는 그 인식의 틈을 이용하여 불과 2초도 지나지 않아 적의 지척에 이르는 데 성공했다. “흐우, 하아아압······ 흡!” 새하얗게 빛나는 망치를 꼭 쥔 채 허공으로 높이 점프! 그 순간에야 비로소 빛의 정령왕이 그녀의 모습을 인식했으나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큭!?] “천!” 가뜩이나 거대한 슬레지 해머가 신성력에 감싸여 그 크기를 족히 세 배 이상으로 부풀렸다. 시에나는 그것을 있는 힘껏 휘둘러 빛의 정령왕의 얼굴이 있을 만한 부분을 강타했다! “벌!” [크하아아아아아아!] 크리티컬 히트! 셋의 힘을 하나로 모은 신의 일격이 순수한 빛의 마나로 이루어진빛의 정령왕의 얼굴을 깔끔하게 터트려버렸다. 육신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인간과 똑같은 급소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기반의 절반 이상을 순식간에 잃을 만큼 강렬한 공격이었다. [이 년이이이이이이이이!] “시에나, 나빠. 정당한 분노의 행사, 방해.” “하지만!” 시에나는 망치를 휘두른 반격으로 허공으로 튕겨났으나,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슬레지 해머를 있는 힘껏 내던져 다시 빛의 정령왕을 공격했다. 그것도 그녀의 남은 마나를 모두 담아서! “생일파티를 방해받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크, 크호오오오오오!] 가뜩이나 레이제나를 상대하느라 본신의 힘을 많이 떼어놓은 상태였던 빛의 정령왕은 이어지는 그녀의 공격을 버티지 못해 그 자리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여태까지 아르페 일행이 만났던 보스급의 몬스터 중 가장 강력했던 놈이 가장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아르페, 저기 봐.” “그래, 확실히 끝났네.” 허공을 메우고 있던 빛의 정령들이 숙주를 잃고 하나둘 사라져갔다. 레이제나가 마력을 모두 소모했기에 겨울정령들 역시 그 뒤를 이어 사라졌다. “······아.” 레이제나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 자신보다 우아하게 착지하는 시에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 원래 오늘의 주인공은 시에나였던 것이다. “혼자 폭주, 면목 없음.” “괜찮아, 레이. 나도 마음은 같은걸.” 두 소녀가 순수한 미소를 주고받는 가운데, 직접 나서서 싸운 것도 아닌데 힘은 있는 대로 소모한 나머지 일행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그 자리에 앉았다. “새로운 전략을 얻었으니 이걸로 된 셈 칠까.” “난 이거 재미없어서 싫다 뭐.” 유적의 주인이 깔끔하게 소실되었기에 곧 던전 상인이 나타났다. 미케나는 아니었으나 반 년 넘는 세월 마주하느라 제법 익숙해진 얼굴의 상인이었다. 불과 조금 전에 왔었는데 이상하다, 하는 얼굴로 나타난 던전 상인을 보며, 아르페는 시에나와 레이제나를 대신해 주문했다. “케이크 하나. 제일 큰 걸로.”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2 > 바다의 무덤의 보스 고대 빛의 정령왕은 생명을 잃고 쓰러진 후에도 희미하게 빛을 발산했다. 전리품으로 무엇이 나올지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일행은일단 눈앞에 놓인 케이크를 먼저 먹기로 했다. “그, 손님······ 저도 그렇게 한가로운 몸은 아닙니다만······.” “장비수리 끝났으면 보급품 좀 챙겨줘. 제법 긴 여행길을 떠날 예정이니까 추천목록을 일단 쫙 뽑아보도록.” “으으음, 미케나 님께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과연 대단한 손님이군요······.” 쩌리 신세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르페의 주문을 소화하기 시작하는 던전 상인. 아르페는 그를 뒤로하며 레이제나와 시에나에게 큼지막하게 케이크를 잘라주었다. “그런데 레이제나 너, 정령들을 불러낼 수 있었으면 진즉 그렇게 하지.” “굉장한 레벨과 굉장한 마나를 요함. 바로 얼마 전에 자격 획득. 우물우물.” 양볼 가득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대꾸하는 레이제나의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비록 보스전이 아르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풀리기는 했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케이크 맛있어?” “긍정. 긍정.” “매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다, 오빠!” “아르페에게 생일선물을 요구. 마음 가득, 물질 가득.” “양아치가 따로 없네, 이것들.” 던전 상인이 모든 보급품을 준비하고도 10분여가 더 흘렀을 즈음 비로소 일행은 케이크 하나를 통으로 해치우는 데에 성공했다. 레이제나와 시에나의 울분이 그것으로 풀렸기를 바랄 뿐이다. “말씀하신 물품 모두 여기 있습니다. 손님, 그런데 저기 저······.” “준비하느라 고생했어.”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에 물품들을 밀어 넣고 셈을 치른 후, 빛의 정령왕이 죽어누운 자리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던전 상인을 상냥한 미소로 돌려보냈다. 그 후 주위 환경을 마지막으로 체크하고, 빛의 정령왕의 사체를 두들겼다. 두 권의 책이 떨어졌다.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니.” 과거 마왕은 결코 고대 빛의 정령왕 같은 거창한 개념의 존재와 싸운 적이 없다. 그보다 급수가 두 단계 이상은 떨어지는 유적의 파수꾼을 만나 해치우고 레인 오브 루인을 얻어왔을 뿐. 용사들의 존재가, 어쩌면 겨울여왕의 힘을 품은 레이제나의 존재가 유적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 유적의 기록의 양과 질이 업그레이드되었고, 마왕 퇴치를 위해 그것은 좋은일이면 좋은 일이었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레인 오브 루인 없음. 대신 다운폴 찾음.” “그거 참 굉장하게 업그레이드되었구나.” 케이크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볼에 희미하게 홍조를 띠고 있던 레이제나는 실로 거창한 이름의 스펠 북을 집어 올리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아까 네가 영창했던 주문들이 더 쪽팔리면 쪽팔렸지 덜하진 않으니까.” “부정. 부정. 부정.” 레이제나가 미약하게 울먹이며 다운폴을 익히는 사이 아르페는 나머지 한 권의 스펠 북을 들어올렸다. 긴가민가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용사만이 익힐 수 있는 스펠이었다. ‘만약 마왕이 얻었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렸겠군.’ 쓴웃음을 지으며 스펠의 이름을 확인하는 아르페. 스펠의 이름은 히어로 플래시였다. “······메테르, 스펠 익혀볼래?” “난 바보라서 스펠 몰라.” “아냐, 난 널 믿어. 넌 분명 할 수 있어.” “흥이다!” 아르페는 절망했다. 레이제나를 놀렸던 업보가 이렇게 빨리 그를 습격해올 줄이야! 유치한 것도 정도가 있지, 히어로 플래시라니 산골마을 아이들이 용사놀이를 할 때에나 튀어나올 법한 스펠이었다! “씁, 어쩔 수 없지······.” 아르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스펠을 익혔다. 지금 시점에서 이미 전생의 마왕에 필적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그가 스펠의 습득에 실패할 리도 없고, 다운폴을 익히느라 고생하고 있는 레이제나보다도 먼저 스펠 북에 담긴 모든 마나와 기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펠이 품고 있는 힘은 아르페의 걱정과는 사뭇 달랐다. ‘이거 설마 했던 연계 스펠이잖아······?’ 히어로 플래시는 히어로 오라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스펠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히어로 오라에 물리력과 공격적인 마력을 부여해 조종하는 스펠. 아르페의 등에 난 히어로 오라는 비록 반쪽이라지만 날개의 형상인만큼 히어로 플래시를 발동해 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움직이는 속도를 빠르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메테르, 이 스펠은 너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번 해볼래? 일단 히어로 오라 발동하고.” “응. 아르페, 손.” “손까지 잡을 필요는 없지 않아?” “아르페, 손.” “그래······.” 굉장한 대마법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히어로 플래시는 영창도 필요 없는 간단한 마법이었다. 쪽팔리게 스펠을 외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일단 히어로 오라를 발동해 각자 편익을 뽑아낸 후, 아르페가 스펠을 발동하자 즉각 빛의 날개에 변화가 찾아왔다. 보다 거대해지고 찬란하게 빛나며,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메테르 역시 레코드 마스터의 힘으로 아르페의 힘을 빌려와 그의 것만큼 날개를 크게 만들어냈다. 그것을 보며 바디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용사는 누구보다도 빛에 가까운 존재죠. 까마득한 예전의 용사 중에는 빛의 정령을 다루는 자도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그것이 약해지고 약해져 지금의 용사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힘이 바로 용사의 상징에 불과한 힘 히어로 오라예요. ······어쩌면 지금 아르페 님이 익히신 스펠은 빛의 힘을 되살리는 첫 걸음이 아니었을까요?” “아르페, 이거 날 수도 있을 것 같아!” 반쪽일 뿐인데 가능할까 싶었지만 막상 해보니 잘만 날았다. 아르페는 의지로 날개를 조종해 허공에 떠오르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생각보다 쓸 만한 스펠이잖아. 스펠 레벨을 올리면 어쩌면 큰 활약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마족은 빛의 속성에 약하니 아르페 님께서 편익을 펼치시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겠지요. 메테르 님은 그 힘을 검에 담는 연습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물론 아르페 님께 빌려왔을 뿐인 스펠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니 제법 고생을 하셔야겠지만 그래도······.” “와, 됐다!” “······퉷!” “방금 성녀가 해선 절대로 안 되는 짓을 본 것 같은데, 바디네 언니!?” 물론 마왕 정도 되면 빛의 힘으로 가득한 유적을 일주일 만에 클리어하는 것도 가능해지지만, 그 빛의 힘을 용사들이 가지게 된다면 어떨까! 아르페는 히어로 플래시의 힘을 마음껏 다루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마왕에게 엿을 먹여줄 순간이 점차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구현 마법에 생각이 미쳤다. ‘구현은 내 모든 스펠을 포함하는 힘인데, 그렇다는 건······.’ 메테르가 성광을 검에 옮겨 담았듯이, 그가 다루는 마법 모두에 히어로 플래시를 덮어씌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을 곧장 실천에 옮긴 아르페였으나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기보다는 각 스펠의 레벨이 부족해서였다. “히어로 오라와 히어로 플래시, 구현······ 앞으로는 계속 유지해야겠네.” “그러다 마나가 부족해서 말라죽고 말 거야, 오빠!” “글쎄, 아마 모두 유지해도 마나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걸.” 아르페는 히죽 웃으며 그렇게 답하곤 일어섰다. “그럼 이제 나가자!” “그런데 아르페,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뒤늦게 그 의문을 떠올린 엘릭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르페는 아주 잘 물어봤다는 듯 흡족한 얼굴로 설명해주었다. “일단 이 아공간을 부숴야 해.” “역시 그런가. 그 다음은?” “우릴 집어삼킨 고래한테 소화되기 전에 놈을 죽여야겠지?” “결국 놈을 죽여야 하는 거잖아!” “하하, 누가 아니랬냐.” 다른 이였더라면 아공간을 부수기 위해 방금 익힌 대마법을 구사하고, 그 탓에 다시 고래를 상대하느라 고생을 해야 했겠지만 만물열람의 소유자 아르페에게는 전혀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마나 스트링 몇 가닥을 뽑아내어 길게 늘이며 레이제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다운폴 준비해둬, 레이제나.” “쓰는 것만으로 굴욕이 되는 마법······ 대가는, 아르페의 굴욕으로 받아냄.” “와아, 아공간이 녹아내리고 있어!” “꺄아아아악! 레이, 마법! 다운폴 빨리!” “으, 은하수의 모든 별이여······.” 그로부터 30분, 아르페 일행은 어떻게든 고래를 죽이고 풀려나는 데 성공했다. 고래는 일행을 삼킨 이후로 제스트바 해역의 심부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는데, 놈의 배를 가르고 빠져나오자 사방이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빛이 아예 안 들어오는 곳인가 봐.” “몸이 조금 무거운데, 여기서 움직이는 연습을 하면 나중에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아르페 님, 아무래도 이쪽이 마계의 해역에 가까운 모양이에요. 굉장히 사악한 기운이 느껴져요······!” 아르페는 우선 일행을 모아, 블링크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해수면 가까이로 이동했다. 얼마나 깊은 바닷속이었으면 한 번 블링크한 정도로는 올라온 티도 나지 않았지만, 점차로 수압이 낮아지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 점차로 상승하던 도중, 아르페는 문득 무엇인가의 기척을 느껴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아르페?” “익숙한 기운인데.” “음?” 메테르 역시 그보다 조금 늦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굉장히 싫은 기운이기는 한데······ 뭔진 몰라도 죽일까?” “용사가 절대 해선 안 될 말이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르페는 메테르의 ‘죽인다’는 말에 바로 감을 잡았다. 지금 일행이 위치한 곳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부터 일행을 향해 맹렬히 헤엄쳐오는 생명체가 발산하는 기운, 아르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마나의 기척. [주인님!] “죽이자.” “진정해, 메테르, 아군이야.” “아르페를 노리는 건 다 적이야!” 흥분한 메테르를 붙잡아두는 사이 곧 ‘그녀’가 그들의 지척에까지 이르렀다. 빛이들어오지 않는 심해에서도 오색으로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거품이 우르르 몰려오는가 싶더니, 아르페의 코앞에 이르러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주인님!” “······.” 바다와 닮은 머릿결과 진주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바로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의 여왕, 제네시스 머메이드 퀸 세릴 아나이드였다. “이 자식, 인어까지······.” “아, 아아아아.” “연상으로 보임. 세이프.” 세릴과 처음 마주하는 이들이 저마다 감상을 한 마디씩 내뱉었다. 아르페는 헛소리를 하는 레이제나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는 세릴을 향해 돌아섰다.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왜 이렇게 많이 변한 거야?” “주인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서!” 거의 1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재회하게 된 세릴은 그야 외적으로도 많이 성숙해 있었지만, 뭣보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레벨이 어느덧 350에 가까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스스로의 클래스도 두 번 갈아치웠고, 각종 스킬도 터무니없이 성장했다. 단적으로 말해 바로 방금 그들이 해치운 고래보다 그녀가 강했다! “주인님께서 명하신 대로 모든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물론 마계의 바다는 아직이지만 이제 충분한 준비가 되었으니, 출정하기만 하면됩니다!” “1년 동안!?” 어쩌면 아르페는 터무니없는 종족을 되살려낸 것일지도 모른다! “마계 해역에 사는 몬스터들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정찰하던 도중 거대 고래가출몰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직접 찾아와보니 주인님의 마나가 느껴져······ 주인님께서 나오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이렇게 찾아왔다고.” “마계의 해역까지 모두 접수한 다음 찾아뵙는 것이 예의지만, 도저히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어······.” 아르페를 향한 세릴의 마음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 광신, 숭앙에 가까웠다. 그러고보면 아르페가 생각 없이 내던진 말에 그녀가 바다를 지배하게 된 것이 아닌가. 말이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구나, 아르페는 반성하기로 했다. 그렇게 반성하는 아르페에게 세릴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주인님, 만약 마계에 들어가시려 하는 것이라면······ 저희와 함께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날 찾아온 목적이었냐.” 안타깝지만 정해둔 행선지가 있어 그렇게 할 수는 없겠다, 라고 대답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르페는 문득 떠올렸다. ‘만약 이 녀석들과 함께 하면서 마계의 해역 정벌을 돕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전생의 용사 파티는 당연히 육로로 마계를 질주했다. 끊임없는 마왕군과의 격돌로 시간은 시간대로 날리고 소수정예의 장점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지금 그들이 바다를 통해 마계로 들어간다고 한다면······? ‘마계의 바다는 마계의 어디로든 통해있지. 우리의 1차 목적지인 니로타시드에도빨리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마왕성까지도. 결국 마족들과 싸우느냐,마계의 해양 몬스터들과 싸우느냐의 문제인데 후자를 고르면 인어들의 지원이 붙는다. 더욱이 우리가 인어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성장시킨다면, 인간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역을 거쳐야 하는 마족들을······.’ 계산을 마친 아르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메테르는 그 미소를 보며 체념했고, 세릴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 도와주지. 확실히 안내하도록 해.” “주인님······!” “뭐, 뭐야. 바다? 바다로 가는 거야?” “아르페, 바보.” 용사 파티의 행보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3 > 아르페 일행은 일단 철마에 탔다. 육해공을 모두 커버하는 철마는 무려 잠수 기능까지 있어, 일행이 그 안에 탄 채 잠수 기능을 발동하면 물에서 산소만 걸러 통과시키는 기능을 지닌 유리천장을 생성하는 것이다. 일행은 그 안에 타고 바닷속을 가르며 세릴의 뒤를 따랐고, 곧 세릴의 명을 받아 제스트바로 집합하는 제네시스 머메이드 무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숫자와 기세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제네시스 머메이드, 엄청 많이 늘어났네.” “정말 어마어마한데······?” “그런데 제네시스 머메이드라는 게 대체 뭐냐?” “······올바른 방향의 회귀. 기적적인 오류.” 아르페에 의해 제네시스 머메이드 퀸으로 거듭난 세릴에게는 장성한 인어를 제네시스 머메이드로 진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자격을 입증한 인어에 한해, 그녀의 마나와 기록이 허용하는 선에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1년이라는 시간은 그들 모두를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다른 인어들은 아나이드를 지키도록 남겨두고, 제네시스 머메이드로 거듭난 이들만 소집하고 있습니다.” “제네시스 머메이드만 따져서 이렇게 많단 말이지······.” 바다는 육지보다 깊고 넓으며 그 안을 가득 채운 몬스터들의 숫자 또한 절대적으로 많다. 몬스터의 평균 레벨 또한 높았다. 그런데 그 바다의 구심점이 될 인물이 나타나 인어들을 이끌고 휩쓸었으니, 그들의 레벨이 오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 지금 당장 아르페의 눈에 들어오는 제네시스 머메이드의 숫자만 족히 20만을 넘겼는데, 그들 전원의 레벨이 200을 돌파하고 있었다. “흠.” 아르페는 지극히 냉정하게 판단했다. “인간계 없어도 되겠는데.” “모두 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신 주인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그래도 마계의 바다 몬스터들은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거야.” “이미 수개월에 걸쳐 완벽히 정찰을 마쳤습니다. 마계 해역의 규모도, 적의 숫자와 레벨도 파악해두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며 차례대로 전투를 벌인다면 병력을 실시간으로 성장시키면서 정벌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 저희에겐 주인님이 함께 계시니 인간계의 해역보다도 정리가 빨리 끝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음, 그러냐.” 세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마치 꼭 아르페의 칭찬을 갈구하는 메테르의 눈빛처럼 보였다. 아르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세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애썼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다.” “후후후.” “······.” 물고기 꼬리의 형상인 그녀의 하반신이 기쁨에 차 퍼덕였다. 그것을 본 레이제나가 옆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르페의 페로몬으로 마계정벌.” “시끄러.”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인어들이 아르페 일행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아르페와 메테르가 유지하고 있던 히어로 오라 탓에 그들이 용사라는 것만은 금방 알아보았다. 더욱이 그들의 지배자인 여왕 세릴이 아르페에게 복종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역시 대단한 고유능력인데 그래······.” “인어라는 이름 아래, 과거의 찬란한 영광과 위업을 되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모인 이들입니다. 그 뜻을 함께하는 한 인어들 사이에서 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뜻을 함께한다 이거지······.” “제네시스 머메이드의 역사를 다시 열어주신 주인님이시니, 저들도 주인님을 성심성의껏 모실 거예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세릴의 감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아르페였다. 특히 그의 등에 쏟아지고 있는 따가운 몇 쌍의 시선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다. [먀아, 먀먀아.] 세릴이 아르페의 곁에서 뭔가 얘기를 더 하려고 했으나 그때 마침 로아가 아르페의 품을 빠져나와 울었다. 녀석의 입에 물린 채인 이블 하트가 유난히 짙은 빛을 토해내는 것이 보였다. 그보다 아주 조금 늦게 아르페 또한 제스트바 해역에 밀집되는 마기를 감지했다. 과거 아르페 일행이 유적에 입장할 때 제스트바의 몬스터들을 한 번 쓸어버렸지만, 반년도 넘는 세월은 제스트바를 다시 몬스터로 꽉 채워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뭐야, 그거 마기 탐지기 역할도 겸하는 거야?” [먀먀먀.] 마계 해역에는 어설픈 마족보다도 짙은 마기를 지닌 몬스터도 넘쳐난다. 아무래도 무수한 숫자의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제스트바로 몰려들면서 그것에 자극을 받은마계의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럼 어디 네가 이끄는 인어들의 실력을 한 번 볼까.” “예, 이 정도라면 굳이 주인님을 귀찮게 해드릴 필요도 없겠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세릴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별 수 없이 자신의 부하들에게로 돌아섰다. 곧 인어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저마다 마나를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마계의 입성을 앞둔 첫 전투입니다! 저의 주인님께서 보고 계시니 결코 우스운 모습을 보여드려선 안 될 것입니다!” 인어들의 중앙에 선 세릴이 스스로의 고유능력을 활성화하자, 놀랍게도 20만을 넘는 숫자의 제네시스 머메이드 전원이 그녀의 영향을 받아 몸으로 미미한 빛의 입자를 뿌려냈다. 단지 그녀의 영향 하에 있는 것만으로 능력이 상승하고, 동료와 보다 즉각적이고 긴밀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것! 그것이야말로 세릴의 고유능력 동족통솔의 진면목이었다! “굉장해요. 저 많은 숫자의 인어들에게 버프를 걸다니, 마나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부족할 거예요.” “고유능력의 발현은 마나에 기반을 두지만, 마나보다 높은 영역에서 완성되거든.······온다.” [먀먀먀, 먀먀먀아?] “저것들 죽은 다음에 먹어, 죽은 다음에.” [먀아아······.] 이블 하트로 24시간 내내 마기를 먹어치우고 있는 주제에 또 다른 마기를 노리다니 로아의 식탐은 정말이지 알아줘야 했다. 이러다 정말 돼냥이가 되는 것 아닐까. 그는 걱정스럽게 로아의 복부를 더듬었다. [먀아먀아, 먀먀아먀먀아!] 아르페는 로아의 울음을 무시하고, 제스트바 해역 너머로부터 다가오는 몬스터 무리를 향해 돌진을 개시하는 제네시스 머메이드 무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계의 해역에 나타나는 몬스터의 무력 수준에 대한 판단은 이미 끝났다더니, 과연 적의 수준에 맞추어 인어들을 네 명 한 조로 편성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굉장한데, 세릴의 의념이 전해지는 그 순간 20만 마리의 인어가 그것을 받아들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어. 대체 어떻게 1년 만에 이 정도로 세력을 불린 것인지 의심스러웠는데 과연 이 정도라면······.’ 세릴이 전장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녀의 능력은 전쟁을 단순한 체스로 만들어버리는 어마어마한 능력이었다. 어쩌면 20만에게 적용되는 버프보다도 이쪽이 더 대단한 것 아닐까? [먀먀먀먀먀먀아아아!] “그래그래.” 아르페는 삐져버린 로아를 적당히 쓰다듬어 달래며 철마를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나머지 일행 또한 인어들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꼭 어어어어엄청나게 큰 무대 위에서 하는 연극을 보는 기분이야.” “연극이라면 메테르 님께서 항상 하고 계시는 그것 말이죠?” “후후, 그러게 말이야. 바디네도 연극이라면 익숙하지?” 평상시였더라면 전장의 선두에서 날뛰고 싶었을 메테르도 반년이 넘어가는 유적에서의 생활에 지치긴 지쳤는지, 지금은 바디네와 말다툼을 벌이며 인어들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니, 검을 뽑아드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그리 지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레이제나 너는 쉬지 말고 다운폴 연습하고 있어. 목표는 마왕성 도달하기까지 다운폴 레벨 70이다.” “아르페 미움.” “아르페 너, 저 인어는 또 언제 유혹한 거지? 그것도 인어들을 다스리는 여왕을······.” “난 꼬신 적 없어. 그냥 퀘스트만 수행했는데 알아서 넘어왔을 뿐이야.” “재수가 무척이나 없군······!” 엘릭의 분노에 찬 이 가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세릴이 이끄는 제네시스 머메이드 무리와 마계의 몬스터 무리가 격돌했다! [크갸아아아아아아!] “적은 덩치가 클 뿐 제 마력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반푼이들이다! 진정한 바다의 지배자가 누군지 저들에게 보여라!”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선두에는 레벨 300을 넘어가는 친위병들이 있어 우선적으로 적의 돌진을 막아내고, 직후 4인1조로 구성된 인어들이 민첩하게 돌격하며 한 마리씩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인간 기준으로는 지극히 단순한 전술이지만 이성이 없는 몬스터들을 상대로는 그것이 지나치리만치 효과적으로 먹혔다. “돌진해! 돌진!” “밀어붙여!” “오른쪽 적의 전열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3군은 우회하여 기세를 확실히 꺾습니다.” 처음엔 호쾌한 맛이 있었지만,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점점 몸에 한기가 돌았다. 인어들이 너무 압도적으로 적을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밀어붙이는 것은 괜찮다 쳐도 그들이 쓰러트린 적을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고 있었기에 괜히 더 무서웠다! “어, 음······.” “조금 무서운데.” [먀아! 먀먀먀먀먀아아아아아!] 물론 전략적인 면에서 그들의 행동에는 흠을 잡을 부분이 없었다. 체력을 보충하고 마나를 효과적으로 섭취하기 위해선 적의 사체를 먹는 것이 최고! 제네시스 머메이드는 마기를 정화하여 스스로의 마나로 흡수하는 능력까지 있었기에, 인간계의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였을 때보다 오히려 더욱 큰 회복과 성장을 야기하는 것이 가능했다. “마나를 회복한 이들은 일시에 스킬을 구사해 적의 저지선 돌파를 막습니다. 11시 방향, 적의 증원! 전투병력을 교체합니다!” 세릴은 입으로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의념으로 인어들의 행동을 통솔했다. 제네시스 머메이드 군단이 레벨에 비해 지닌바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깨달은 몬스터들은 다급히 다른 몬스터들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땐 이미 상황이 늦어도 한참은 늦어 있었다. “적의 추가증원이 없습니다. 마무리하세요! 부상자는 일단 뒤로!” “마무리!” “마무리한다!” 수만에 달하는 숫자의 해양 몬스터들이 20만의 인어들에 의해 파편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기까지 그로부터 20분이 더 걸렸다. 인간과 마족의 전쟁도 이보다 치열하지는 않으리라! 아르페는 전투의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하는 인어들을 보며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도 규모의 힘을 처음으로 실감한 듯 멍해져 있었다. “이게 전쟁이구나······.” “어쩌면 지금 인간계에서는 이것보다 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건 아냐. 마왕군 지침에 따르면 아직 0단계거든.” 참고로 0단계란 인간들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는 졸개들 위주로 편성한 군단을 끊임없이 내보내 인간들이 ‘이 정도라면 이길 수 있겠어!’라는 확신을 품게 만드는 단계였다. 그 후로 이어지는 1단계와 2단계에서 잔뜩 부풀어 오른 인간들의 희망을 꺾어놓는 셰프의 잔혹한 플랜이 실현되지만 지금은 그것까진 알 바 아니다. [먀아······.] “미안. 설마 쟤네가 깔끔하게 먹어치울 줄은 몰랐어.” 전투가 끝나고 나면 포식해도 된다는 말만 믿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로아는 마기 조각 하나 남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된 전장을 보며 암담해지고 말았다. 설마 인어들이 저렇게 전투적인 식사를 하고 있는 줄은 몰랐던 아르페의 실수다. 아르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블 하트를 쪽쪽 빨아먹는 로아를 쓰다듬어주며 철마를 몰아 세릴에게 다가갔다. 그녀 역시 마계의 몬스터 가운데 대장격에 달하는 몬스터를 이제 막 깔끔하게 먹어치우곤 입가를 닦고 있었다. “주, 주인님······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니, 효율적인 회복 방식이잖아. 다만 마계 깊숙이 들어가면 너희의 정화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마기를 품은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그건 조심하도록 해.” “물론입니다, 주인님. 어디까지나 이곳은 마계 해역의 초입이지요. 아직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인님을 바로 곁에서 보필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막 전투를 승리로 끝마친 주제에 지치지도 않고 열의에 불타오르는 세릴! 이정도라면 아르페가 무슨 말을 더 해줄 필요도 없으리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한 차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좋아, 그러면 병력 수습하고 바로 마계 해역으로 들어가자. 길안내는 나한테 맡겨둬.” “세상에, 마계 해역의 정보까지 갖고 계시다니······ 과연 주인님이세요!” 정확히는 전생에 갖고 있었던 정보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이지······ 차마 그렇게 말해줄 수는 없어, 아르페는 그저 미미한 미소를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먀! 먀먀!] “그래, 너도 앞으론 전투해라, 해.” [먀먀아!] 그렇게 해서 용사 파티와 인어 군단은 성공적으로 마계에 진입했다. 두 용사의 나이 16살, 초여름의 일이었다.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3 > 끝 ⓒ 토이카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4 > 마계의 인간계 침공이 시작되었다. 마왕군은 제스트바 해역을 건너 서대륙의 자잘한 소국을 사흘 만에 먹어치우며 전쟁의 신호탄을 화려하게 쏘아 올렸는데, 알고 보면 국력이 모자란 소국은 모조리 통일제국 제아드의 권고에 따라 이미 인구와 병력을 옮겨놓고 있었기에 영토가 초토화되었을 뿐 그 외의 피해는 입지 않았다. “용사가 이른 대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간계의 모든 국가는 대륙교전법 10조 1항에 의거하여 인간, 혹은 아인종 사이의 분쟁을 종결짓고 대륙적인 동맹을 결성해야 할 것이다!” 통일제국 제아드의 황제는 용사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마왕군의 무서움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자였다. 그는 일찍이 마도사들과 각 상단과의 협조로 구축한 마도구를 통해 대륙적인 통신망을 구축하고, 각 국가에 동맹군 참가를 촉구했다. “용사께선 마왕을 직접 쓰러트리기 위해 먼 길을 나서셨다. 우리는 그분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마왕군을 막아내야 한다! 신성국가 팔라티나의 이름으로, 대륙의 모든 사제는 종군하라!” “인간들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과 협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사라지게 됩니다. 세계수께서 이르십니다. 숲을 위해서도, 우리 엘프들을 위해서도 아니고, 인류 전체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서라고!” 신성국가 팔라티나, 영원의 숲의 엘프들도 일찍이 제아드에 합류했다. 이미 대륙의 힘의 저울이 완벽히 그들 쪽으로 기운 바, 마왕군 발호의 틈을 타 이득을 취해보려던 타 국가들도 별 수 없이 동맹군에 참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맹? 어리석은 소리! 이대로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그대로 동강이 나고 말 거야!” “마족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용사를 배출했지 않은가! 우리는 응당 그만큼의 대접을 받아야 해!” 물론 모든 국가가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힘을 지닌 국가들은 물론이고 대륙적인 위치 탓에 마왕군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평화로운 국가 디아스는 몇 년에 걸친 내전으로 소모된 국력을 이번 기회에 확장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귀족들에 의해 결정된 국왕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평화와 탐욕에 찌든 귀족들은 국왕을 조종하며 결코 영원하지 못할 부귀를 누리고자 했다. 그것을 끝맺은 것은 다름 아닌 시페넌이었다. “클래스와 이름.” “클래스는 디아스 황태자, 이름은 시페넌이다.” “······뭐?” 시페넌의 폭주는 수도의 관문에서부터 이루어졌다. 후드를 벗어 새빨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드러내며 등장한 그는 한 손에는 세례의 수정구를 들고 있었는데, 경비병들이 보는 가운데 그것이 그를 도적으로부터 디아스의 왕자로 다시금 바꾸어놓았다. “태, 태자 전하!?” “아니, 그분은 분명 반란으로 인해 돌아가셨다고······.” “상부에 보고해라! 너희가 그렇게 찾아 헤맸던 정통 왕위 계승자가 돌아왔다고!” 마법사 데이스의 조력으로 확성 마법까지 걸려 있었던 탓에 시페넌의 목소리는 관문 너머로 멀리도 퍼졌다. 그보다도 빠른 통신 마법으로 금세 왕국 수뇌부에 그 사실이 알려졌고, 그들은 불같이 분노하여 금세 병력을 소집했다. “비록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다고는 하나 그것도 몇 년 전의 일! 현 국왕 또한 어엿한 왕위 계승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 훌륭히 국정을 수행하고 있거늘 그를 끌어내리고 왕위를 되찾겠다는 주장은 온당치 못하다! 그는 일개 반역도에 지나지 않으니 붙잡아 처형함이 옳다!” “시페넌은 반역도이며 악적이다! 더 이상 황족이 아니니 참하여야 한다!” 시페넌은 병력이 충분히 모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라, 여러 번 움직일 시간도 없을뿐더러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디아스는 용사의 왕국,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용사를 지지하고 보조해야 하는 국가다! 동맹결성을 거부하고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현 수뇌부는 모두 디아스의 귀족은커녕 백성의 자격조차 없다! 수하에게 조종당하는 왕은 왕이 아니며 왕을 제멋대로 쥐고 흔드는 수하는 수하가 아니니, 제 주제를 망각한 자들을 정통 디아스 국왕의 이름으로 참하리라!” 시페넌이 처음 수도에 입성하고 고작 일주일이 흘렀을 때에는 이미 디아스의 모든 군대가 그를 적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성들조차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싶어 했으니 귀족부터 백성까지 근성이 있는 놈이 없었다. 정말이지 이런 국가에서 용케도 용사가 나왔구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페넌은 굴하지 않았다. “르세티, 내가 눈먼 화살에 안 맞게 방패 잘 들어라.” “그럴 땐 거짓말로라도 제 안위를 걱정해주시죠, 전하.” “아리아, 네가 성녀로 데뷔하는 순간이야. 잘할 수 있겠지?” “저, 지금 보이나요? 제대로 보이고 있는 것 맞죠?” “좋아, 잘 보이고 있어. ······그럼 가자.” “저 인간 나한테는 말 안 거는 거 봐.” “시끄러워욧.” 단 다섯 명으로 구성된 파티였으나 그 면면은 지나치리만치 화려했다. 디아스의 군대가 그들을 마중 나온 타이밍에 맞추어, 다섯은 수도로의 진군을 개시했다. “붙잡아라, 저놈이 반역······ 크헉!?” “생각보다 강하다, 일단 포위망을······ 칵!” “뚫린다!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있어!” 다섯 명에 불과한 일행을 디아스의 전력이 집결된 군대가 막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죽일 기세로 덤벼오는 군대를 상대로 경상 이상의 상처를 입히지도 않고 파죽지세로 돌파하는 시페넌 파티의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이럴 수가······.” “호, 혹시 전하야말로 용사인 것이 아닐까?” “마, 말도 안 돼. 하지만······ 강하다!” “에이, ‘주인공의 인생에 간섭하고 싶은 단역이 필히 읊어야 할 대사 250선’은 저리 치워욧!” 아티팩트로 무장한 데이스가 동시에 수천 명을 상대로 디버프를 걸고, 르세티는 단순한 실드 차지로 한 번에 수십 명 이상을 뻥뻥 쳐 날렸다. 원거리에서 그들을 공격해오는 마법이나 화살을 막아내는 것은 다크엘프 궁수이며 ‘대’상인인 미케나.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시종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활약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르페에게 받아낼 대가가 차근차근 적립되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는 마왕을 막는 자들입니다! 마왕군의 침략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디아스가 앞으로도 용사의 왕국으로 남기 위해, 대륙의 역사를 이어가기위해 우린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부디 무기를 버리고 우리 얘기를 들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리아는 전장을 채우고 있는 인간들 모두를 대상으로 신성력을 흩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지 그뿐이었음에도 인간들은 모두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압도적인 신성력은······ 성녀, 성녀가 분명해!” “성녀가 전하와 함께하고 계셔! 우, 우리는 저분을 공격해선 안 된다.” “이건 잘못되었어. 아니, 잘못하고 있는 건 우리다!” 무지한 백성들을 설득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힘과, 포장된 위세다. 어린 시절에나마 권력의 정점에 가까이 이르렀던 시페넌이기에, 그는 백성을 현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극히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잔머리는 잘 굴러간다니까요.” “르세티, 너 내 편이 아니라 저쪽 편이지? 지금 솔직히 말해.” 시페넌 파티가 지닌 압도적인 무력과 성녀가 내보이는 신성력은 병사들이 절로 무기를 놓게 만들 만큼 호소력이 짙었다. 그것은 집 나갔던 황태자가 조금 힘을 얻었다고 주제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을 뿐이라 생각했던 디아스의 수뇌부 모두를 벙 찌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막아라. 놈을 막아야 해.” “기사들을 내보내! 저 자들은 왕궁의 권위를 더럽히려는 무뢰배들에 불과하다!” 물론 기사단이 출동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페넌의 힘과 성녀의 신성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본 기사들이 그 자리에서 시페넌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바람에 그의 세력과 위엄을 더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귀족들과는 달리 전선의 공기를 쐬는 기사들은 이미 누구를 중심으로 역사가 흐르고 있는지 알아챈 것이다! “국왕은 왕궁이 아닌 이곳에 있다! 이분은 선대 국왕 폐하의 큰아들이시며, 동시에 스스로 오롯이 일어나 마왕에 대적하시고자 하는 우리의 용사다! 모두 시페넌 전하를 따르라!” “병사들이여, 그대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국왕을 알아보지 못한 죄일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전하의 깃발 아래 합류하라!” “우오오오오오오!” 시페넌의 전략은 지극히 유효했다. 그는 수도 관문에서부터 시작해 왕궁에 이르기까지 조우한 적을 끝내 자신의 휘하로 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모두 스스로의 무력과 아리아의 조력으로 이루어낸 일이었다. “백성은 제 주인을 알아보았다! 네놈들은 어쩔 테냐, 꼬리를 말고 도망칠 테냐, 아니면 주인도 못 알아보는 똥개답게 짖어보기라도 할 테냐!” “아으, 멋있다······.” “뭐라고, 아리아? 다시 말해볼래?” “언니, 쉬이이잇!” 시페넌은 끝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왕궁에 들어섰다. 자신들이 패배했음을 깨달은 귀족들은 일찌감치 도망치고자 했으나 데이스와 미케나는 그들을 훌륭히 모두잡아냈다. 죽여야 할 이는 죽이고, 살려 붙잡아야 할 이는 붙잡았다. 무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디아스의 왕궁이 피로 물들었으나 시페넌이 나서지 않아 차후 디아스가 흘리게 되었을 피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한 양이었다. “이미 상회에 연락해 잔당의 도주로까지 차단해두었으니 안심하고 가야 할 곳으로 가시죠. 아, 여기 영상송신구.” “정말 꼼꼼하다니까······ 너 디아스에서 한 자리 해먹을 생각 없냐?” “대가로 아르페 님을 주신다면 생각 좀 해볼게요.” “걜 사려면 디아스를 줘도 부족할 텐데······.” “잘 아시네요?” 그 둘에게 잔당의 소탕을 맡겨둔 채 시페넌은 르세티와 아리아만을 대동하고 대전으로 향했다. 그 누구도 국왕을 챙기지 않았기에, 그는 옥좌에 우두커니 앉아 시페넌이 자신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하.” 한때 당연히 자신이 오르게 되리라 생각했던 바로 그 자리에, 내팽개쳐진 듯 구겨져 앉아 있는 국왕을 보며 시페넌은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거기 앉으면 좀 어때? 내려오기 싫어지나?” “나, 나는······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대도 알지 않는가? 당시 내가 국왕의 위에 오르지 않았으면 디아스는 엉망진창이 되었을 거야! 내겐 선택권이 없었어······ 그들이 내게 강요했을 뿐이야!” “알아. 당신에게 죄는 없지. 하지만 당신에겐 의지도, 생각도 없었어. ······제아무리 꼭두각시라고 해도, 그 자리에 앉은 이상 사람을 생각했어야지. 나라를 생각했어야지.” “······면목이 없네.” “······죽이진 않을게. 하지만 앞으론 살아도 산 게 아닐 거야.” 그 날, 디아스의 국왕이 바뀌었다. 16살의 어린 국왕은 본인의 무력만으로도 정점에 이르러 있었으며 성녀의 조력을 받기까지 하여, 디아스 건국 이래 가히 최강의지배자로 칭송받았다. 새 국왕은 통일제국에 국가를 정비하고 병력을 추려내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을 요청했고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국왕 시페넌은 그 대가로 드워프의 무기를 제시했으며 그로 인해 동맹 내에서 디아스의 입지는 눈에 띄게 올라갔다. 인간계 동맹이 그로인해 완성되었다. 텅텅 빈 인간의 대지를 버리고 내륙으로 침투해온 마왕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5 > “나라 상태 정말 제대로 엉망진창인데.” “국고가 텅텅 비었네요. 그래도 무수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인데.” 소년국왕 시페넌의 심정은 실로 참담했다. 어찌어찌 나라를 되찾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나라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상인이라는 클래스가 있어 자산을 관리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미케나가 그를 도와 왕궁과 수도의 자산현황을 체크하고 있었으나, 작업이 진척될수록 점점 절망스러워질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폐하.” 어째선지 르세티만이 자신만만했다. 시페넌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그녀가 자랑스레 가슴을 펴며 외쳤다. “국고를 빼돌린 귀족들을 족쳐 다시 채워 넣으면 됩니다! 수상한 낌새가 있거나 갑자기 재산이 불어난 귀족이 있으면 일단 반역죄를 먹이는 것이죠.” “과연, 왕국이 그렇게 유지되어온 것이군요?” “이런 왕국은 이제 싫어!” 다음 생엔 제국의 황태자로 태어났으면! 시페넌은 절규하면서도 순순히 르세티의 충고를 따라 움직였다. 어차피 배때지에 기름만 들어찬 귀족 놈들은 마족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 돈으로 병사들을 배불리고 병장기를 만드는 쪽이 백만배는 나으리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폐하! 제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건국에 공헌한 우리 가문을 이리도 막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건국?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건국공신이니까 안 된다고? 시끄럽고 뒈지기 싫으면 다 뱉어, 씹새야.” “하, 한 나라의 지배자라는 분께서 어찌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으커억!” 귀족 한 명이 시페넌의 발길질에 뻥 하고 날아가 반대쪽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대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아연해진 직후, 시페넌은 몸을 놀려 나머지 귀족들까지 밟기 시작했다. “후, 어째서 인간은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칵! 구, 국왕이 귀족 팬다!” “야, 거기 문 닫아라.” 시페넌은 국가의 모든 귀족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패대기를 쳤다. 건국공신도 변경백도 다 필요 없다. 흰 머리에 수염을 기른 귀족들을 단체로 두들기고 굴리자 곧 놈들도 지금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드, 드리겠습니다!” “진즉 그럴 것이지 꼭 피차 피곤하게 만들어요.” “흐흑, 크흐흐······.” 어쩌면 그들 가운데 죄가 없는 놈들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시페넌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국가의 위엄과 기틀? 그 따위 것에도 관심은 없었다. 명분 따윈 나중에 만들면 되었다. 후대가 그를 독재자라 기록한다 해도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그의 막무가내 행동의 결과로 국고가 다시 꽉 들어찼고 귀족들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져 중앙으로 권력이 집결되었다는 사실 하나 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했어. 이미 대륙 동맹은 마족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언제까지고 마족들이 저 대군하고만 싸울 것 같나! 우리가 면한 바다는 세상 전체와 통한다. 당연히 마족 놈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움직일 기력이 있는 자라면 모두 칼을 들고 일어나! 지금은 인간의 운명을 걸고 싸울 때다!” 시페넌은 디아스 마족대항군을 창설하고 국가 내 모든 귀족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까지 싹싹 긁어모아, 마족의 침입로를 파악하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한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렇게 하자 드워프를 포함해 15만이 넘는 숫자의 병력이 남게 되었다. “우린 이제부터 대륙 동맹에 합류한다.” “하, 하지만 굳이 우리가 이 나라 밖으로 나설 것까지는······.” “우리 땅에서 싸우는 것보다, 다른 땅에서 싸워 물리쳐두는 쪽이 훨씬 나아.” 지금은 마계와 인간계의 접경에서만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전쟁이 길어져 인간들이 틈을 드러내게 되면, 놈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간계에 파고들게 될 것이다. 시페넌의 목적은 그것을 막는 것. 대륙 동맹 또한 일부러 놈들에게 내어주다시피 한 서대륙의 소국을 포위하듯이 방어선을 형성하고, 한편으론 바닷길을 원천봉쇄하여 전장의 확대를 방지하고 있었다. “우리 드워프들이 활약할 때가 온 것인가!” “가자고, 디아스 국왕! 수백 년간 마를 물리쳐온 드워프들의 힘, 보여주겠어!” 시페넌은 실로 화끈한 드워프 형씨들과 함께 바닷길에 올랐다. 디아스가 보유하고 있는 배를 상선이고 군선이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동원하여(강제로) 병력을 실었다. “정말 잘하는 짓인가 모르겠다.” “바닷길이 걱정되나요?” 아리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페넌은 주저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 자체는 그리 큰 걱정이 없다만······ 과연 나라가 안전할까, 이렇게 떠나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 “그건, 마왕군이 상대이니까요······.” 틀어막는다고 틀어막고 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마족 일부가 바다를 통해 디아스로 침입해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다. 괜찮을 것이라 확답을 해줄 수도 없는 일인지라 아리아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데이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바다 너머에서 굉장한 기척이 느껴집니다만.” “그럼 대비해야지 뭘 하고 있어!” “아니, 그게······ 너무 드러내놓고 있는 데다 마족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정순합니다.” “저러다 한 번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 봐야 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구나! 하고 깨닫게 될 텐데······ 음?” 속도 답답하니 데이스나 욕하면서 기분을 풀자고 다짐한 시페넌이었으나 직후 그또한 데이스처럼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이건 아예 인간도 마족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제가 뭐랬습니까.” “시끄러, 데이스.” 시페넌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사들에게 대비를 단단히 시킨 후 뱃전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곧 그 마나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일렁이는 물결 아래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은 상체는 인간, 하체는 물고기의 그것을 지닌 종족 인어였다. “인어······!?” [내 말이 들립니까, 인간의 지배자?] 심지어 녀석들은 텔레파시 마법까지 구사했다! 시페넌이 고개를 끄덕이자, 디아스의 군대가 탄 배를 호위하듯 사방에서 헤엄을 치며 나타난 인어들 중 유난히 아름답고 강한 인어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재차 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우리는 바다의 여왕 세릴 아나이드 님의 명을 받고 인간들의 바닷길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한 당신들은 폭풍우와 암초, 마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세, 세릴 아나이드······?” [그렇습니다. 세릴 아나이드 님께서는 인간의 용사 아르페 님을 따르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아르페 님의 의지를 받들어, 인간들에게 협력하여 마족을 물리치고자 하시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따라오세요. 인간들과 마족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아르페가 설마 인어까지 꼬셨을 줄은 몰랐던 시페넌은 인어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르페의 이름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아니, 바다의 여왕? 즉 바다를 전부차지했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인간, 괜찮습니까?] “아······ 아냐, 괜찮아. 호위해준다니 고맙다. 너희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인간의 국가 디아스의 국왕이 너희의 여왕에게 깊이 감사한다고 전해다오.” [여왕께서는 인간의 예의에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만.] 인어는 그 말을 마치곤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수한 인어들이 선단을 호위하고 있었고, 이젠 병사들이나 선원들도 그들의 항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인어들이 우리를 축복해주고 있는 건가?” “왜, 왠지 용기가 나기 시작했어. 그래······ 우린 막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 확신이 든다!” “인간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국왕폐하께서 이끌어주시는 한!” 시페넌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괜히 지들끼리 좋아하는 병사들을 보며 굳이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저 지쳤다. 언제나 그의 상상 이상을 달리는 아르페의 행보에 기가 막힐따름이다. “내가 나라 하나 되찾는 동안 놈은 바다를 먹었다 이거지······. 그놈은 분명 용사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야. 아르페와 적대하다니 마왕군 놈들도 정말 불쌍하네.” 전생에 자신이 직접 아르페의 배때지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인어의 여왕과의 사랑, 정말 로맨틱해요.” “그 옆에 메테르만 없다면 로맨틱했을 텐데 말이야.” 이젠 시페넌도 아르페 파티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안다.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르페가 부럽지만 동시에 불쌍하게도 느껴지는 것은, 시페넌이 조금은 성숙했다는 증거일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먼 바다, 아주 작게 대륙이 점처럼 보였다. 마족과 인간의 전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아르페 일행의 마계 해역 정벌은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돌진! 놈들은 모두 상처입고 약화되었어, 더 이상 우리들의 적이 아니다!” “레벨이 뒤쳐지는 자들이 우선적으로 나서야 해! 여왕 폐하의 발목을 질질 잡아끌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있어도 좋다!” “우오오오오오오!” 제네시스 머메이드 군단은 일행과 함께 마계의 심부로 들어올수록 눈에 띄게 강해졌다. 마계 해역은 넓은 만큼 무시무시한 숫자의 해양 몬스터가 분포한다. 마족들도 놈들과 귀찮게 엮이는 것이 싫어 바다 깊숙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제네시스 머메이드 군단과 아르페 일행은 마족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바로 그 깊숙한 심해를 몽땅 털어내며 이동하고 있었으니 하루에도 두세 번 이상씩 큰전투를 치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다수의 인어가 최소한 이틀에 한 번씩은 레벨업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들뿐이었다면 사상자가 나오면서 무턱대고 전력이 강화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 그들의 뒤에는 시에나와 바디네라는 걸출한 능력의 사제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큰 상처를 입은 인어들을 곧장 치료해주어 죽는 일이 없게 만드니, 마계해역으로 진입해 세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20만의 인어들이 그 숫자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군단이 빠르게 강해지고 있어요. 모두 주인님의 비호 덕분입니다!” “음, 그래. 다들 쑥쑥 자라서 다행이야.” 아르페는 순진하게 기뻐하는 세릴을 향해 웃으며 대꾸해주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제네시스 머메이드, 정말 무서운 종족이었다. 세릴이 꾸준히 살아남아 강해진다면 그녀를 중심으로 뭉친 인어들이 언젠가 마왕까지 잡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물론 마왕이 순순히 물속으로 들어온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이 녀석들 평균레벨이 이제 어느 정도야?” “230입니다.” 마왕군 정예병력보다 강하잖아! “전부 시에나 님과 바디네 님이 계셨기 때문이지요. 원래 저는 이 시점에서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하긴 머메이드 중에는 치료술을 지닌 이가 별로 없긴 하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아직까지 그 능력을 개화한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없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제네시스 머메이드는 어디까지나 고대종이며 아르페의 손에 의해 막 부활했을 뿐인 것. 머메이드 퀸인 세릴은 육체적, 정신적인 능력을 모두 보유한 것은 물론 치유능력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다른 제네시스 머메이드에게도 치유능력이 잠재되어 있을 가능성은 높았으나, 아직까지는 능력을 제대로 발현한 이가 없었다. “하지만 제겐 분명히 가능성이 느껴집니다. 진화를 거듭하다 보면 분명 치유능력을 각성하는 동족도 나타날 거예요.” “아, 음. 그래.” 아르페는 잠시, 마왕이 쓰러진 이후에도 발전한 거듭한 제네시스 머메이드들이 끝내 육지까지 지배하겠다며 나설 가능성을 생각해보았으나······ 곧 귀찮아졌기에 사고를 중단하기로 했다. [먀아먀아.] “그래, 점점 더 심해지는구나.” 로아가 갑작스레 울었다. 녀석의 입에 물린 이블 하트는 마계에 진입할 때부터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는데, 마계 영역 깊숙이 들어오면서 점점 더 진동을 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니로타시드야.” 전생의 용사는 아마 니로타시드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 과연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까? 단순한 마족의 함정일까, 아니면 보다 거대한 기록일까? 아르페의 눈이 침중해졌다.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먀먀아.] 그로부터 사흘이 흘러, 일행은 갑자기 나타난 마왕군 사천왕과 전투를 벌인다거나 하는 일도 없이 순조로이 니로타시드에 도달했다.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5 > 끝 ⓒ 토이카 < Chapter 30. 전쟁의 시작 - 6 > “아르페, 봐봐. 하늘하고 구름이 주황색이야.” 메테르는 어디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아르페의 팔짱을 끼고는 밝게 웃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도저히 그럴 심정이 아니었다. “마족들이 흘리는 피는 지독한 저주의 흔적을 남기거든. 대지에서 싸워 쓰러진 마족들의 피가 증발해 하늘로 올라가면, 그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하늘과 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거야. 그나마 저건 요즘 전투가 덜해서 색이 연한 거지, 전투가 심화되면 새빨갛게 물들게 될 거야.” “그렇구나, 그래서······.” 예상치 못했던 무거운 대답이 돌아온 탓에 메테르의 목소리가 끊겨버리고 말았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어떤 의미로는 마족이 훨씬 더 솔직한 걸지도 몰라. 분쟁의 규모도 잔혹함도 인간이 더할 때가 많은데, 인간들이 싸운 흔적은 저렇게 하늘에 남지는 않으니까.” “살아간다는 건 싸움인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들이 마계에 발을 디딘 것도 결국 죽기 전에 먼저 마왕을 치려는 것임에 불과하다. 그들이 찾아가는 니로타시드의 심부에도 어쩌면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면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익히는 것 모두가 싸움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다. “전에도 말했었지? 마왕을 죽인다고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냐. 다만 그때부턴 싸움의 형태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조금씩 바꾸어갈 수는 있겠지.” “응······.” “주인님,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메테르를 달래던 도중 그의 귓가로 들려온 말에 아르페가 뒤를 돌아보니, 세릴이 육지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 뒤로 20만의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차례대로 바다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하반신에 달려 있던 물고기 꼬리가 곧 늘씬한 두 다리로 바뀌어 대지를 디디고, 익숙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인어의 왕국 아나이드 내부에서는 두 다리로 생활하는 것이 일상적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바다에서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이 움직이고, 지상에서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는 부대라······ 공중전 기능까지 첨부되면 최강이겠네.” “가끔 아르페 님은 정말 재미있는 말씀을 하신다니까요.” 바디네가 후훗 웃었지만 일행은 아르페가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어들을 띄우는 방법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며 돌아선 아르페는 20만의 인어가 정렬을 마치기를 기다려, 그들을 이끌고 출발했다. 그런데 메테르와는 반대쪽에서 아르페의 팔에 달라붙은 시에나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그런데 오빠, 이건 소수정예라는 용사 파티의 취지와는 조금 안 맞는 것 아닐까?” “네가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니로타시드는 일반적인 마계와는 조금 달라. 자, 보렴.” “음······!?” 아르페가 손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붉고 검게 불길한 빛을 발하는 니로타시드의 모래사막, 그 너머에는 필시 일반적인 마계의 영역이 있어야 할 터다. 그런데. “저게······ 저게 뭐지?” “커! 엄청 크다아!” “우와아, 저기 들어갔다간 모래에 갈려서 죽어버리고 말 거야······.” 그러나 일행은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마치 니로타시드와 타 영역을 가로막듯이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의 모래 폭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그들이 빠져나온 바다 한가운데에도 그것과 비슷한 규모의 폭풍이 있었다. 바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접근해왔기에 몰랐다 뿐이지, 아마 저것에 가까이 다가가기라도 했다간 레벨이 무색하게 휘말려 내던져졌을 것이다. 마치 니로타시드라는 거대한 영역 전체를 포위하기라도 하듯 대지와 바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보며 메테르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마저 아연해졌다. “저건 어째서 일어나는 거죠······?” “글쎄, 적어도 마계의 역사에 기록된 시점에서부터 계속 불고 있었으니 아마 인간계에도 마계에도 저 태풍의 생성 원인을 꿰뚫어보는 이는 없을 거야.” 하지만 저 폭풍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니로타시드에는 마왕군 사천왕(아르페)마저 쉬이 발을 들이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레벨의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며, 자연환경이 워낙 지랄맞아 도무지 생명체가 서식할 만한 곳이 못 되기 때문이다. 마족들은, 물론 마왕까지도 니로타시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곳에 들어온 자는 없는 셈치고,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 살아나온 자가 없단 얘기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어들을 끌고 다니건, 백만대군을 양성하건 마계는 우리를 파악하지 못해. 안심해도 된단다.” “오빠 설명을 들으니까 그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안심이 안 되는걸! 무척!” “우리 시에나, 태클 능력도 늘었네.” 마왕군 측에 아르페와 같은 능력을 지닌 이가 있었더라면 제아무리 니로타시드에진입했다고 해도 일행이 이렇게 태평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에겐 아르페가 없다! “이렇게 험한 곳에 우리 아빠가 찾아왔단 말이야······?” 메테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아빠는 엄청 강한 걸까.” “그야 너처럼 어마어마한 딸을 낳았으니, 그 아빠가 평범한 방랑상인이라는 쪽이더 설득력이 없기는 하다만.” “아르페도 참······.” “칭찬 아니니까 좋아하지 마라.” 일행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면서도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모래사막을 주파했다. 그때 문득 로아가 작게 울었다. 녀석의 입에 물린 이블 하트의 진동은 이제 슬슬파도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심해져 있었다. [먀아아.] “얘들아, 온다.” “온다니 무슨······ 큭!? 몬스터!” 점잖게 아르페의 뒤를 따르던 세릴이 그에게 반문을 하다 말고 침음을 냈다. 제네시스 머메이드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높은 레벨을 보유한 그녀인 만큼 마나를 느끼는 센스 또한 뛰어났던 것이다. 그녀의 동요가 20만의 인어들에게 즉각 전달되었고, 그들은 곧 병장기를 추켜들었다. 아르페가 눈썹을 꿈틀하며 말했다. “엄청 죽을 텐데.” “저희가 해보겠습니다. 부디 지켜봐주시길.” “상대의 레벨은 파악하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주인님.” “음······ 그래, 네가 지닌 걸 보여 봐.” 조금 고민한 아르페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해서, 제아무리 니로타시드의 몬스터들이 강하다지만 지금 성장할 때까지 성장한 일행의 레벨을 올리기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니로타시드의 심부로 향한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했다. 메테르의 아버지라는 인간은 대관절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바로 그때,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몬스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놈은 거대한 두 개의 뿔을 달고 있는 코뿔소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키만 해도 수십 미터를 넘기는 거구라는 점은 둘째 치고 놈의 전신으로 송곳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마기가 분출되고 있어 지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보통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놈들은 마나량이 많지 않아. 마나량이 많으면 마법의 적성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데 가끔가다가 육체도 강인한데 마력까지 많은 놈이 있어. 그런 놈들은 저렇듯 마나를 육체에 둘러 강화하는 특유의 스킬을 익히지.” “정말 무시무시하군요. 저 마나의 갑옷은······ 저것을 뚫지 않는 한 육신에 상처를 입힐 수 없는데, 그것을 뚫어도 단단한 육신이 기다리고 있다니.” 즉 가장 상대하기 싫은 타입의 몬스터였다. 약점이 있어야 공략할 맛이 나는데 저놈을 쓰러트리려면 단순히 마력과 체력을 모두 바닥까지 떨어트려야 하는 셈 아닌가! “내가 상대하려 해도 한참 걸릴 것 같은데······.” “메테르, 일단 놈을 막을 준비만 해두고 있어.” “응.” “정예부대는 앞으로 나서라! 적은 너희보다 레벨 100이상이 높으니, 천 명으로 한 조를 구성한다!” 용사 파티를 제외한 모두에게 레벨은 절대적이다. 사실 아르페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인어들이 레벨 350의 몬스터를 상대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 명이 뭉친다고 그들의 힘이 정말 하나로 모이는 것도 아니고······. 칼날이 놈의 몸통에 박히지도 않을 텐데 대체 어떻게 상대하겠다고 하는 것일까 의아해하던 아르페는, 일사분란하게 모이는 제네시스 머메이드들 사이로 연푸른빛의 마나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제 눈을 의심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봤던 건데.” “제 고유능력으로 메테르 님의 능력을 조금 흉내 낸 것일 뿐입니다.” “흉내? 저건 흉내 정도가 아닌데!” 아르페 일행도 바로 최근에야 써먹게 된 마나와 스테이터스의 집중, 그것을 인어들이 이루고 있었다. 999명의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마력과 힘을 1명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 그것은 그들 모두가 제네시스 머메이드이며 세릴의 고유능력으로 통솔되고 있음을 감안해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물론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끝없는 성장을 반복하며 이제 간신히 천 명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을 압도적으로 쓰러트릴 수는 없겠지만 동등한 조건에서 겨루는 것만은 가능합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영광입니다, 주인님! 그러면······ 놈을 쓰러트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나머지 999명의 힘과 염원을 받은 1명의 전사가 무리에서 총 200명. 세릴은 그 200명을 이끌고 실로 용맹한 모습으로 사막을 질주했다. 코뿔소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마기를 더더욱 폭주시키며 마주 돌진해왔다! “산개!” 세릴의 우렁찬 외침에 200의 인어가 즉시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세릴 본인은 여전히 중앙에서 내달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양손에 각각 하나씩 물로 빚어진 투창이 생겨나는 것이 보였다. “하!” [쿠오오오오옹!] 허공을 가르고 내쏘아지는 두 줄기의 청광! 코뿔소는 돌진하던 기세를 못 이겨 그것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놀랍게도 투창의 충격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무너지고 말았다! “공격!” 좌측과 우측, 각각 100명씩 갈라진 제네시스 머메이드들이 그 즉시 놈의 양옆으로 달라붙어 공격을 퍼부었다. 코뿔소의 몸통에 돋아난 마기가 반항하듯 솟구쳤지만 그것으로 인어들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 집단공격에 시커먼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어떻게 그렇게 바다에서 급격히 세를 불릴 수 있었는지 알것만 같은 기분이야······.” “으으음, 저거랑 싸운다고 가정하면······ 음음.” 실로 압도적인 위용에 일행이 말을 잃은 가운데 메테르는 자신이 이들과 싸웠을 경우를 가정해보고 있었다. 찌푸려져 있던 메테르의 얼굴은 의외로 금세 밝아졌다. 힘을 한 명에게 집중하는 제네시스 머메이드의 능력이 강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약점 또한 뚜렷했기 때문. 바로 자신의 힘을 내어주고 한 편에 짱박혀 있는 나머지 인어들을 먼저 족치면 되는 것이다! 아르페 또한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어들을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흩어져!” 한창 공격을 하던 인어 무리들이 세릴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즉각 코뿔소로부터 떨어져나왔다. 직후 다시 코뿔소에게 적중하는 세릴의 투창! 정신을 되찾고 마기를폭주시켜 인어들을 죽이려 했던 코뿔소는 세릴의 공격 탓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터무니없는 마기가 칼날의 갑옷이 되어······ 아아, 정말이지 이곳은 마계로군요!” 코뿔소가 분노했다. 레벨로 따지면 자신보다 훨씬 하등한 것들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있다는 현실을 놈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신으로 붉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광화 상태에 돌입하는 놈을 보며, 세릴은 더욱 짙은 미소를 띨 뿐이었다. “마계든 인간계든 몬스터들의 무식함은 여전하구나. 전원 투창 준비!” [쿠오오오오오!] 이전보다 두터운 장갑으로 무장한 코뿔소가 재차 돌진을 개시했다. 놈의 목표는 오직 단 하나, 제네시스 머메이드를 통솔하는 세릴! 그러나 세릴은 도망가지도 않고 당당히 놈을 기다리며 창을 들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세릴이 제일 무식해 보이는데······.” “아니, 그렇지도 않아. 충돌 이전에 쓰러트릴 자신이 있으니 저렇게 나서는 것이겠지.” 세릴이 무어라 말했던가. 투창을 준비하라 했던가? 괜히 자신 있게 외친 것이 아니다. 이미 저마다 자리를 잡은 200의 제네시스 머메이드는 집중된 마나를 오롯이 쏟아 부어 만들어낸 물의 투창을 쥐고 코뿔소를 조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릴이 코뿔소에 맞서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의 폭풍우를 만들어내는 순간, 코뿔소의 몸을 뒤덮은 치명적인 마기의 장갑이 그것과 맞닿아 아주 조금이나마 벗겨지는 순간! “투창 개시!” “우오오오오오!” “놈을 처단하라!” “투창! 투창하라!” [크오오오오오!] 허공을 가르고 날아든 200개의 투창이 코뿔소의 몸통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와아······ 아프겠다.” 메테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페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코뿔소의 체력은 그것으로 한계를 맞이했고, 그 뒤로는 득달같이 달려든 인어 떼에 의한 도륙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니로타시드 탐색은 그 후로도 순조로이 이루어졌다. 제네시스 머메이드들은 마계의 해역을 정벌할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마왕군보다도 무시무시한 세력이 탄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깝게도 인간들과마족들만 몰랐다.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1 > 니로타시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세계였다. 분명 외부에서 확인하면 그렇게까지넓지 않은데, 막상 그 안을 탐험하는 일행에게는 끝도 없이 이어진 사막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곤 해도 제네시스 머메이드들은 물에 살던 종족이다. 점차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위해 레이제나가 냉기를 녹여 물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진즉 리타이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여왕을 따른다는 일념으로 견뎌냈다. 그 끝에 적응과 강화를 이루었고, 니로타시드에 진입하고 두 달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선 평균레벨 250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주인님!” “그래.” 아르페가 쏘아낸 수백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허공에서 수십 갈래로 교차했다. 그 위를 덮쳐온 도끼가 교차된 실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직후 세릴이 내던진 투창이 적을 관통해 쓰러트렸다. “후, 역시 이젠 우리 레벨도 오르네. 이걸 보면 심부로 들어오긴 했는데······.”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거두며 한숨을 쉬었다. 방금, 체내에서 약동하는 마나의 기운을 그는 분명 느꼈다. 메테르 역시 검을 수납하며 작게 웃고 있었다. “얘네들은 강해서 좋다!” “그냥 강하기만 하면 좋겠지만, 썩어문드러진 마기에 코가 찡할 정도예요. 아르페 님, 이 안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글쎄······.” 전생에선 마왕조차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마왕이 겁쟁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아르페가 모르는 것이 이곳에 감추어져 있다면, 만약 마왕보다도 더 무서운 무엇인가가······. [먀.] 로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르페와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사막 너머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녀석의 입에 물린 이블 하트가 점점 더 진한 진동과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블 하트랑 비슷한 게 또 있다고?” [먀먀먀.] 이쯤 되면 확실해진다. 분명 로아가 바라보는 저 곳에, 아르페의 오두막에 서신을남겼던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그 자가 정말로 메테르의 아버지인지는 확실치 않다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거 크기가 많이 줄어들지 않았냐?” [먀먀먀먀.] 사탕을 빨아먹으면 줄어드는 게 당연하지, 라는 투로 답하는 로아. 아르페는 문득걱정이 되어 녀석의 몸을 살폈으나 아무리 보아도 멀쩡했다. 바디네 역시 확언해주었다. “제가 매일 확인하고 있지만, 로아의 능력도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걸요. 어쩌면이블 하트는 로아를 완성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으래애? 그 정도라고······?” [먀먀!] 자기과시의 타이밍은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 로아가 가슴을 쭉 내밀고 자랑스레 울었다. 아, 지금도 이블 하트가 조금 크기를 줄였다. “마족으로 변할 것 같으면 얘기하렴, 로아야. 내가 마도서로 널 되돌려줄게.” [먀먀먀먀먀먓! 먀먀먀아아!] 음, 이 정도로 일러두었으면 괜찮을 것이다. 아르페는 흥분하여 꼬리를 빳빳이 세우는 로아를 달래주듯 쓰다듬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좋아, 그러면 다시 출발하자. 방향은 어느 정도 잡힌 것 같다.” “네!” 레벨 370을 넘기는 마수가 아무데서나 툭툭 튀어나오면 곤란하다. 니로타시드의심부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확실히 한 마리 한 마리가 강자였지만 그만큼 소수여서, 그 날은 두 마리의 마수를 더 만난 것을 제외하곤 그저 평화로이 사막을 걸었을 뿐이었다. 사막의 밤, 20만의 인어와 용사 파티는 임시 막사를 설치하고 휴식을 취했다. 일주일만의 휴식이었다. 일단 레이제나가 자신의 마력을 대거 소모하여 불러낸 겨울정령들의 힘으로 일대를 서늘하게 만들자, 그곳에 다들 늘어져 체력을 보충했다. “어떻게 된 게 여기는 밤에도 더워.” “피구름이 떠 있어서 그래. 단순히 마계를 살풍경하게 만들어주는 능력만 지닌 게 아니거든. 열을 뿜어내서 지상을 달구는 거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려고 그러는구나!” “······그래, 그런 셈이지.” 악에 받쳐 살아가는 마족들이라면 정말 죽어서까지도 다른 이들을 괴롭히기 위해피구름, 혈운의 형태로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르페는 메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근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르페 님의 기운이 날 음식을 만들게요. 마계의 식재료들이지만 정화를 거쳤으니 괜찮을 거예요.” “아, 거기 그건 정화해도 독성이 남아 있어서 빼야 해. 그것도. 이건 좀 많이 넣어도 돼. 마물의 독성까지 없애주는 특성이 붙어 있어.” “네!” 바디네는 인어들과 함께 부산스레 움직이며 요리를 만들었는데, 대병력을 통솔하여 많은 양의 요리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내는 모습이 실로 대단했다. 아르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비록 그녀가 뒤틀려 있긴 해도 훌륭한 신붓감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마 용사의 짝이 되겠다는 일념 아래 요리를 연습했겠지, 실로 집요하다. “나두 요리 할 수 있어!” “아냐, 넌 하지 마.” “아르페 미워.” 대인원이 먹기에는 스튜만큼 좋은 것이 없다. 아르페는 뜨끈한 국물을 들이키며 다른 인어들처럼 다리를 풀어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확신이 있었다. 당장 오늘 밤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해두어야 했다. “아르페.” 메테르가 그를 불렀다. 또 요리를 하겠다고 나서려는 것인가, 하고 그녀를 말릴 준비를 하던 아르페는 메테르가 검을 뽑아 쥐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 오는데?” “정면이야.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내 능력으로는 완벽히 파악할 수가 없어. 아르페가 좀 살펴줘.” “그렇다는 건.” 한 손에는 여전히 스튜 그릇을 든 채, 나머지 한 손만으로 마나 스트링 몇 가닥을 뻗어낸 아르페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놀려 실을 정면으로 쏘아냈다. 실 끄트머리가 사람의 손가락처럼 섬세하게 허공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곧 무언가와 맞부딪혔다. 아르페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주인님?” “아니, 다들 쉬고 있어. 전투의 필요성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든 아르페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비추어진 사막에 다른 이들은 확인할 수 없는 작달막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건물이, 지금은 고위의 은신 마법으로 스스로를 가린 채 떡하니 그들 막사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고위의 은신이었기에 아르페가 그것을 직접 두 눈에 담지 않았더라면 눈치 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 이건 뭐 달팽이도 아니고.” “달팽이? 아!” 달팽이라는 말에 바디네가 가장 먼저 감을 잡았다. 다른 이들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지만 로아만은 맹렬히 울부짖었다. [먀! 먀먀먀먀먀먀!] “그래, 조금만 기다려.” 마나 스트링의 숫자가 두 배로 불어났다. 그것이 허공을 콕콕 찌르고 물러났다가는 다른 곳을 더듬는 동작을 반복하며 차차로 건물에 걸린 은신 마법을 거두었다. [그, 그만!] 텔레파시가 전해져왔다. [이게 드러나면 니로타시드의 모든 몬스터가 이곳으로 몰려들 거야!] “바로 그게 내가 원하는 바야!” 아르페는 멈추지 않고 손을 놀려 기어이 건물에 걸린 은신을 완벽히 해제시켜버렸다! 핏빛의 구름에 가려 달빛도 붉게 물든 사막 위에 덩그라니 작은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튜를 먹고 있던 이들 중 일부는 너무 놀라 입에서 스튜를 흘렸다. 바디네가 말했던, 코를 찔러오는 것만 같이 썩어문드러진 마기. 그것이 그 신전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먀아아아아아아아아!] 로아의 포효가 사막 전체로 퍼져갔다. 녀석은 흥분을 감추지 못해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아르페가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올렸다. “아직 안 돼, 참아.” [먀아! 먀먀아!] 아직 입에 이블 하트를 물고 있으면서 뭘 더 욕심 내냐고 타이르려던 아르페였으나 이미 로아의 입 안에는 이블 하트가 남아있지 않았다. 녀석이 기어이 그것을 삼킨 것이다! “야 임마!” [먀아아아앗!] 수백 년 동안 죄의 그림자를 만들어낼 만큼 어마어마한 마기를 품은 물건을 삼켰으니 로아의 몸에서 격렬한 마기의 폭주가 일어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르페의 우려와는 달리 로아를 지배하지도, 로아를 죽이지도 못했다. 그동안 많이 성장했음을 증명하듯이 로아의 탐식 능력이 마기를 모두 억누르고 소화하기 시작한 것! 얼마나 새 먹이가 먹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아르페는 기가 막히고 말았다. [이걸 어쩔 것인가, 이 성급하고 무모한 용사여! 이제 니로타시드의 모든 마물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아, 좀 다물어 봐.” 아르페는 텔레파시에 퉁명스레 대꾸하곤 로아를 바디네에게 넘겼다. 로아가 미처소화하지 못하는 마기를 정화해달라는 뜻이었다. “저 녀석이 신전에 있는 것까지 집어삼키지 못하게 감시도 해줘.” “맡겨주세요, 아르페 님.” “그러면 우리는 저곳으로 가보자. 우릴 찾아온 모양인데 대화는 해봐야지.” 아마 아르페의 돌발행동에 신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으로, 신전에 걸렸었던 은신 마법을 복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느라 바깥으로는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복구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실로 어리석다! [누구 탓인가, 누구!] “그러니까 그만들 두고 나와 봐요. 아, 혹시 그 안에 아저씨 있어요?” “아빠!”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치는 메테르! 곧 신전의 문이 열렸다. 얼마나 짙으면 유형화되어 검은 안개가 되어 빠져나오는 마기와 함께, 그리 크지 않은 키의 남자가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정말로 왔구나.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정말 아빠다!” 메테르가 한 걸음에 달려가 그 남자를 껴안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타이밍에 이루어진 부녀 상봉에 일행은 멋도 모르고 어설프게 박수를 쳤다. 용사와 그 아버지의 조우라니 실로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그 가운데 오직 아르페의 표정만 진지했다. [프로메스] [인간] [대상인] [레벨 ? 265] [힘 ? 329 민첩 ? 383 체력 ? 335 마력 ? 1,255] ‘여기서 살아남을 레벨은 아닌데.’ 그야 떠돌이 상인인 줄 알았던 메테르의 아버지가 강자였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놀랍긴 했지만, 지금 저 레벨은 간신히 마계에서 살아남을 수준이었다. 니로타시드를 기준으로 한다면 저기서 족히 레벨 100은 더 높아져야 하는 것. 그렇다면 남는 가능성은 단 하나, 방금 아르페가 훌러덩 벗겨버린 신전의 은신 마법이 그의 생각보다도 대단한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메테르의 아버지도, 그리고 신전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신전의 비호를 받아 안전했던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이들이 뭐하러 굳이 니로타시드에까지 들어와 있는가, 이 신전은 무엇이며 신전에서 지키고 있는 물건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들은 누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아니, 더 이상 돌려 말하는 것은 그만두자. 아르페는 이미 그 답을 모두 알고 있지않던가. “그리고 네가······ 아르페구나.” 아르페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때. 문득 메테르의 아버지, 프로메스의 시선이 아르페에게 와 닿았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던 아르페는 그의 차가운 눈길에 문득 소름이 끼쳤다. 아르페가 아이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 이미 프로메스는 메테르의 곁을 떠나고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 자는 아르페의 전생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한들혹여 지금의 아르페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끼거나 한다면······. “맙소사, 그럴 줄은 알았다만 이 녀석 정말 절세 미남이 되었군. 메테르, 괜찮겠니?” “독점은 포기하기로 했어. 아무리 용사라도 세상 전체와 맞서 싸울 수는 없는걸.” “어른이 되었구나, 내 딸.” “응?” 걱정하던 것이 빗나갔음에도 기분이 이상한 건 어째서일까. 아르페는 인상을 팍 썼다. 파티 내 여성 멤버들의 시선이 그에게 아프게 쏟아지는 것이 더욱 짜증났다. “아르페, 네가 용사라는 것은 알겠다만 신전의 마법은 왜 벗긴 거냐! 니로타시드를 지나온 너라면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이 신전에 모셔진 물건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일찍도 따지시네. 몬스터를 불러 모을 기회가 있는데 이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아르페는 입에 잘 붙지 않는 존댓말을 억지로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프로메스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으려니, 아버지의 품에서 빠져나온 메테르가 폴짝 뛰어 다시 아르페의 곁으로 다가오며 검을 뽑아 쥐었다. “그러면 남은 얘기는 일단 저것들 다 해치우고 하자!” “다들 먹던 거 잠깐 치워두고 전투 준비해!” “한 그릇 더 먹고 싶었는데······.” “전투 끝나고 먹어!” 아주 자연스럽게 전투 모드로 이행하는 일행을 보며 프로메스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용사들이 자신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그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곧 저 너머로부터 온갖 괴물들의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 밤, 니로타시드의 괴수 대결전이 벌어졌다.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2 > [끄아아아아악!] 괴수의 단말마가 사막의 밤을 가득 채웠다. 니로타시드의 마수들은 집단으로 뭉친다면 마왕과도 일전을 결해볼 수 있을 만큼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족통솔 능력으로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제네시스 머메이드들과 한 명 한 명이 재앙에 가깝게 성장한 용사 파티의 합공에 버텨낼 수는 없었다. “이럴 수가······.” “시체는 저쪽에 쌓자. 로아, 일단 저것들 먹어라.” [먀먓!] 밤사이 일행이 해치운 몬스터의 숫자는 수백을 넘어갔다. 과연 신전의 은신 마법을 벗긴 것이 주효하여 어디에 그렇게 숨어 있었던 것인지 모를 만큼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든 덕에 한 순간도 질리지 않는 짜릿한 사냥을 할 수있었다. 레벨 360, 370을 넘기는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열 마리 이상 나타났을 땐 제아무리 그들이라도 쫄렸으나 인어들을 이용해 놈들을 포위하고 아르페 일행이 한 마리씩 집중 공격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섬멸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덕에 경험치를 인어들과 나눠먹기는 했지만 인어들이 강해진다면 아르페입장에서도 좋은 일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더 이상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싸워댄 끝에, 더는 때려죽여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시점에 비로소 사막에 몬스터가 남지 않게 되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많이 쌓였네.” “어째서 마족들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지 알게 된 기분이다······ 그걸 내 몸으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만!” “진정해, 엘릭. 그러다 키 안 큰다.” “너 죽여 버린다!” 그와 타이밍을 맞추어 마계의 태양이 떠올랐다. 태양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열기에 사막에 흥건한 마물들의 피가 증발하고, 그것이 다시 붉은 안개가 되어 허공으로너울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은 어찌 보면 장관이기는 했다. “하룻밤 만에 5레벨은 올렸네······. 후, 삭신이 쑤신다.” “몬스터는 더 없나 봐, 아르페.” “금세 또 생기겠지. 이 자리에 로아가 없었다면 말이야.” 괴수의 사체는 자연으로 환원되어 기록을 보태고, 그 기록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마가 잉태한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둔화시키기 위해선 지금 로아가 하고 있듯 놈들의 사체에 남은 마기를 깔끔하게 먹어치우는 방법뿐이었다. [먀먀먀, 먀먀아먀아아.] 두 개의 꼬리를 기분 좋게 살랑거리며 마기를 빨아먹는 로아. 아르페는 아무 생각없이 그것을 보다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야 임마, 꼬리 하나는 어디서 데려왔어.” [먀아먀.] 아무래도 녀석이 이블 하트를 정상적으로 소화시키는 데 성공한 그때 돋아난 것 같았다. 만물열람에 비치는 바로는 정상이었지만······. “전투는 모두 끝났다! 모두 쉬어!” “스튜 다시 끓여주세요!” “성녀님, 스튜!” “아, 아르페 님을 위한 스튜인데······ 어쩔 수 없지요, 당신들은 손을 깨끗이 씻고 저를 도와주세요.” 어느덧 스튜의 포로가 되어 바디네를 조르는 인어들. 그녀는 어젯밤에 먹다 치워둔 냄비를 수거하고 새로 스튜를 끓이기 시작했다. 이젠 그녀도 용사 파티에 익숙해진 탓에 전투를 끝낸 직후 요리를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아르페 님, 밤새 움직이셨으니 배가 고프시죠?” “응, 내 것도 부탁할게.” 아르페는 전장 정리를 끝내고 어제 밤과 비슷한 모습으로 근처에 자리 잡는 인어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제 은신 마법은 포기한 것일까? 마계의 태양 아래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신전이 그곳에 있었다. “아, 그리고 저 사람들 것도.” “네, 알겠습니다. 먼저 저들과의 일을 보고 오시면 내어 드릴게요.” “고마워, 바디네.” 달라진 점이라면, 그 앞에 메테르의 아버지 프로메스를 비롯한 세 명의 인간이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믿음직한 용사로군.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전의 은신을 거둔 것은 너무 했네. 까딱 잘못했으면 마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재앙이 이 땅에 재림할 수도 있었단 말이네!” 한 명은 프로메스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 다른 한 명은 영락없는 노파. 아까 아르페에게 텔레파시를 던진 것은 저 할머니다. 확실했다. 그들은 모두 프로메스와 비슷한 수준의 레벨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가 마도에 몸을 담그고 있기도 했다. “욕을 하려면 나한테 직접 해야지, 망구야.” “마, 망구!?” “이제 당분간은 몬스터로 귀찮을 일 없을 거야. 그러니 이젠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르페는 일단 사방으로 마나 스트링을 뻗어내 경계태세를 완비하고는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사방에 널브러진 괴수들의 사체로부터 마기를 다 흡수한 로아가 잽싸게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신전 안의 물건이 어지간히도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체 당신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혹시 메테르와 내가 용사로 임명받을 것까지도 예측하고 있었어?” “설마.” 아르페의 말에 프로메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짧게 끝날 얘기는 아니구나. 들어오렴. 너랑 메테르만······ 아니,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이라면 그들도 함께 들어와도 좋단다.” “······그러죠.” 아르페는 스튜를 만드느라 바쁜 바디네를 제외한 일행을 데리고 신전에 들어섰다. 그 안에 들어서고 보니, 신전의 내부는 놀랍게도 팔라티나의 대신전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눈치 챘구나. 성녀와 함께 있을 때 예측하긴 했다만, 역시 팔라티나를 다녀온 모양이지?” “팔라티나······ 그렇다는 건 역시.” 가뜩이나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젠 정말이지 빼도 박도 할 수가 없다. 아르페는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서둘렀고, 이내 신전 내부 몇 겹의 결계 안에 감추어져 있는 방에 이르러 한숨을 내쉬었다. “열어도 된다. 어차피 이제 니로타시드엔 이것을 노리고 덤벼들 몬스터도 없으니.” “그래도 그것은 너무 무모했어!” 누가 망구 아니랄까봐 했던 말을 또 하는 노파. 아르페는 그녀를 상큼하게 무시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사람이 고작 몇 명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좁은 공간과 작은 제단이 있었다. “오빠, 저거!” “······젠장.”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제단이었다. “역시 선배님이었구나!” “음? 우리 가문의 선조에 대해 알고 있는 거냐?” 프로메스의 말이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용사를 말하는 거라면, 네. 우리가 지나온 길에 선대 용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죠.” “오오, 역시 위대한 분이시다. 후배들을 위해 그런 조치까지 취해두시다니······.” “시끄러, 망구.” “또, 또 망구라고!” 그 망할 선배 때문에 한 고생을 떠올리면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아르페는 제단 위에 놓인 물건을 발견하자마자 뛰어 내리려는 로아를 잽싸게 붙들어 메테르에게 넘기고는 천천히 제단으로 다가갔다. 신전에 머무르고 있었던 3인은 그것을 보며 잠시 움찔했지만 그를 막지는 않았다. 아까 그가 보여준 힘을 기억한다면 막을 수도 없었다. “맞아······ 이것도 이블 하트야.” “그렇다. 선조께서는 이것을 이블 하트라고 불렀지. 원래 너희가 이곳에 당도하게 되면 모두 말해줄 생각이었다만,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그래도 말해줘요.” “엇, 그것을 함부로 만지면······!?” 아르페는 단호하게 말하며 제단 위의 이블 하트를 들어올렸다. 마가 아르페의 육신에 침투하고자 했으나, 그의 허리춤에 걸린 마도서가 희미한 빛을 발하자 그 뜻을이루지 못하고 정화되어 순수한 마력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 럴 수가······.” [먀먀아. 먀먀먀먀먀먀!] “기다려봐, 이 녀석아.” 아르페의 레벨이 오를수록, 마를 배척할수록 그가 지닌 마도서의 힘도 강해지는 법. 그는 과거 지저에서 이블 하트를 발견했던 때와는 또 그 능력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마기를 무효화하는 아르페의 모습을 보며 벙 찌고 말았지만, 다행히도 프로메스가 빨리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있을 만하구나.” “그러면 이제 얘기해봅시다.” 아르페는 이블 하트를 이리저리 흔들어 메테르의 품에 안겨 있는 로아를 놀려먹으며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당신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건 선대로부터 내려져온 과업이거나 그런 건가요?” “그래, 맞다.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성인이 되면 이 마계로 들어와 신전과 이블 하트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지. 이쪽은 내 사촌이고, 이 분은 내 고모님 되는 분이다.” 수백 년을 이어져온 가업이라, 실로 골 때리는 일이다. 설마 마계의 금지에서 용사의 후손들이 머무르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따졌다. “그럴 거면 그냥 이 안에서 자손까지 낳고 살았으면 되잖아!” “그것이 우리 가문의 법도거든. 선조께서는 자신의 후손이라면 필히 인간계와 마계를 모두 겪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었다. 그래서 우리는 유년을 선조의 고향에서 머무르고, 성년을 기점으로 후손을 낳고 인간계를 떠돌며 수련한 후, 신전을 지키기에 합당한 힘을 얻었을 때 비로소 마계로 들어오는 것이지.” 후손 성격 삐뚤어지기에 딱 좋은 삶의 방식이었다. “용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메테르, 너 또한 우리의 뒤를 이었을 게야.” “우리의 임무는 이블 하트가 다른 이, 특히 마왕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거야. 아르페 너도 보아 알겠지만 이것은 지극히 위험한 물건이거든. 네게 마기를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어도 그것과 장시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지 않아.” 아르페는 프로메스의 말에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비록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지만, 아르페 본인의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도 않은 인물이지만 그가 아르페를 걱정하는 태도는 진짜처럼 보였다. “여기에도 같은 말이 쓰여 있네요.” 여태껏 아르페와 메테르가 찾았던 선대 용사의 제단에는 주로 후배들에게 자기자랑을 하는 내용과 무엇무엇을 준비했으니 감사히 받으라는 자기과시문구로 가득했다. 물론 이 제단에도 자기자랑이 가득하기는 했으나, 그 외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후손에게 전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프로메스의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들뿐이어서 굳이 읽을 필요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프로메스 일행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이블 하트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 지저에 봉인되어 있던 것과 짝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물건이었다는 사실이다. 선배는 이블 하트가 지닌 힘을 경계한 탓에 그것을 둘로 나누었고, 어찌 보면 세상의 끝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곳에 나누어 봉인해두었던 것이다! “이 신전의 지킴이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우리는 마계가 진동하는 것으로 이번 대의 마왕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길로 몰래 마계를 나와 인간계로 향하니 메테르, 너와 아르페가 동시에 용사로 선정되었다는 말이 전 대륙에 파다하더구나.” “그렇게 고향에 와 보니 내가 남긴 편지가 있었다.” “그렇지. 그래서 너희가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오리라는 확신을 품고, 용사들만이알아볼 수 있도록 답신을 남겼다. 이래 뵈도 용사의 일족인 만큼 특수한 스킬을 익히고 있거든. 그 외에 다른 수단도 취해놓았는데, 너희는 그것을 보고 찾아온 모양이구나.” 용사의 일족이 지닌 스킬. 오두막에서 서신을 확인한 아르페 또한 그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여기에 와서 직접 이들의 능력을 확인해보니 딱 용사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솔직히, 김이 빠졌다. ‘전생과 무엇이 달라졌나 했는데 그대로였나. 메테르의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가장하고 마계로 들어와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니로타시드에는 그 누구도 출입하지 않았기에, 이곳에 이블 하트가 있다는 사실은 마왕조차 몰랐다. 그렇다면 전생에서는 적어도 내가 죽는 그 시점까지 마왕이 이블 하트를 이용하지 못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현생에서 일어난 일치고는 극히 드물게 속 시원하게 사태가 풀린 것이다. 변수는 없었다. 단지 전생의 아르페가 몰랐던 진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그럼 아저씨는 앞으로도 이블 하트를 지킬 생각인가요?” “그래야지. 아, 그렇구나. 너희를 이곳에 오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금의 휴식기를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 지옥 같은 환경에서?” “너희는 용사의 임무만을 수행하느라 너희 둘에게 있어 그보다 중요한 일을 한 가지 까먹고 있으니, 그것을 확실히 하기를 바라기도 했고.” 어째설까, 전혀 불안할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몸에 한기가 돈다. 아르페는 본능적으로 이블 하트를 조금 거세게 쥐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것을 메테르가 가만히 다가와 붙잡았다. “뭔데, 아빠? 우리를 불러서까지 해줬으면 하는 일이 뭐야?” “그야 하나뿐이지.” 프로메스가 웃었다. 아르페는 도망칠 마음을 굳혔으나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메테르가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녀 역시 눈치 채고 있다! 눈이 별빛으로 빛나고 있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니. 아이 하나 만들고 가거라.” “네!” “긍정하지 마 임마!” 설마 했던 장소에서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3 > “지금 인간계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두르다간 오히려 일을 그르칠 뿐이야. 단순히 후대를 남겨두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너희가 돌아가야 할 곳을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돌아가야 할 곳······.” 메테르의 눈은 여전히 별빛으로 반짝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프로메스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선 안 된다.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아르페와 아이를 만들겠다는 생각 말이다! “응, 나도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아비된 입장에서, 네가 그렇게 반색하고 나서는 것도 좀 그렇긴 하다만······.” “그렇죠? 역시 이르죠?” “아니, 그건 아니고.” 젠장, 이 아저씨가 왔다 갔다 헷갈리게 하기는! 어쨌든 아르페는 이 미친 곳에서 당장 나가야 했다! “잠깐, 제안이 있습니다! 용사의 후대를 만드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죠, 그렇다면 용사와 성녀의 후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 아닐까요!” “음!?” “바디네 넌 언제 들어왔어!”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녀석이 나타나다니! “오히려 용사와 용사보다도, 용사와 성녀의 조합이 옛날 이야기적인 관점에서 볼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날 가지고 멋대로 조합하지 마!” “성녀님, 스튜 주세요!” “얼른 데려가!” “스튜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요!” 바디네는 강철 같은 버티기 자세를 굳히고 물러나지 않았다. 아르페는 메테르와 바디네, 프로메스로 완성된 포위진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이건 지금 당장 자리를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로아!” [먀!] “으아아아아아아!” “무슨 지거리야!” 답은 다른 방향으로 난장을 만들어버리는 것뿐이다! 아르페는 손에 쥐고 있던 이블 하트를 로아에게 던졌고, 메테르가 아르페를 마크하는 사이 느슨해진 그녀의 품에서 곧장 뛰쳐나온 로아가 그것을 냠, 입에 물었다! [먀? 먀먀? 먀먀먀?] 먹는다? 진짜 먹는다? 먹어도 되지? 하고 똘망똘망 눈을 빛내는 로아. 아르페는 적국에 메테오를 떨어트리기 직전의 대마도사처럼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해치워!” [먀아아아!] 녀석이 이블 하트를 꿀꺽 삼켰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망했다! 수백 년의 수고를 헛것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이 미친놈이!” “인생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게 싫어 진짜 무덤으로 들어가려 하느냐, 이 자식아!” 모두가 화들짝 놀라 로아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 아르페는 마도서를 꺼내어 펼치며 스태프를 둥둥 띄웠다. “그렇게들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어.”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아르페라고 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로아에게 이블 하트를 먹인 것은 아니었다. 로아는 이미 이블 하트를 하나 먹어치운 전적이 있고, 마의 근원에 가까운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르페가 두 개째의 이블 하트를 입수한 순간 그것을 로아에게 주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것이 첫 번째 것과 어떻게 다른 지를 보고 판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판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끝났다. 비록 판단이 끝난 시점에서 그의 솔로 라이프까지 같이 끝나버릴 뻔한 것은 심히 유감스러웠지만! [먀먀먀우먀, 먀이우먀먀아.] “주위 몬스터들을 먼저 치워둔 것은 이블 하트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야. 마도서까지 준비해뒀으니 실패의 가능성은 단언컨대 제로! 이미 모든 상황은 만들어두었던 상태란 말이지.” “그냥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일단 저지르곤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아니더냐!?” 이래서 눈치 빠른 어른은 싫다니까! 아르페는 망구······ 노파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하지만 아르페가 이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로아가 먼저 이블 하트를 집어먹을 상황을 대비했던 것이지 아르페 자신이 스스로 로아에게 먹이를 줄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먀먀먀먀먀먀먀먀!] 로아의 몸속에 이미 완전히 녹아 들어간 마기가 자신의 반쪽을 만나 활성화되었다. 로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마나를 불러일으켜 그것을 필사적으로 소화시켰다. 아르페는 그것을 주시하며 마도서를 활성화시켰고, 바디네는 아르페에게 도장을찍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자신 또한 스킬을 준비했다. 그리고 메테르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게 싫었구나, 아르페. 나 상처 입었어.” “단지 지금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먀! 먀아! 먀아아아우우우아아아아아아!]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로아의 울음소리가 점점 높아져갔다. 신전은 더 이상 아르페의 혼사와 후사를 가늠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든 이가 긴장하며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 끝에, 로아의 몸에서 찬란한 자줏빛의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 “아르페······?” “음.” 만물열람으로 로아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던 아르페의 표정이 실로 미묘해졌다. 그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끝내 마도서를 덮어버렸다. “이것도 두 번째네.” “두 번째?” 메테르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자,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줏빛 마나에 감싸인 로아를 가리켰다. 기이하게도 빛이 포괄하는 범위가 점차로 넓어지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빛에 감싸인 로아가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나랑 연관된 녀석이 고유능력을 얻는 장면을 보는 경험 말이야.” “로아는 이미 마기를 집어먹는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던 것 아녔어!?” “그건 종족특성이지.” “뭐야 그거 사기잖아!?” 시야에 뚜렷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로아의 능력을 읽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로아] [탐식의 마수] [레벨 ? 385] 탐식의 마수라는 종족명도 익숙하고, 지나치게 많은 마기를 흡수한 탓에 오히려 메테르와 아르페 이상으로 높아진 레벨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아래당당하게 나타난 문자열이었다. [고유능력 ? 폴리모프] 고유능력의 전조는 이미 예전에 보았다. 첫 번째 이블 하트가 잠들어 있던 거대 던전, 어비스. 그 안에 있던 죄의 그림자들을 모조리 포식한 끝에 녀석은 제 몸집을 거대하게 불려 보스와 맞붙었던 적이 있다. 아르페는 그것이 단지 마기 응용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녀석은 자신의 작은 몸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의 마기를 먹어치우기 위해, 스스로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고유능력을 각성하고 만 것이다.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먀아.” 자줏빛 마나 무리 안에서 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의 성대를 기반으로 마나를 담아 텔레파시처럼 발하던 이전과는 달리, 어째 꼭······ 인간이 고양이를 흉내 내는 것만 같은. “먀먀아.” 마나의 안개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갔다. 저마다 병장기를 쥐고 있던 인간들이 긴장감을 더하며 제각기 스킬을 준비하고, 바디네 또한 축문을 외웠다. 그러나 단 한 명, 메테르만은 제단 위에 놓여 있던 천을 꽉 쥐고 있었다. 만물열람의 보유자인 아르페 다음 가는 안력의 보유자인 그녀는 마나 안개 안에서 무슨 일이벌어지고 있는지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먀아?” 그리고 안개가 완전히 걷힌 바로 그 순간, 메테르는 가속을 발동해 로아를 덮쳐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분명 그 안의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지? 메테르, 괜찮으냐!?” “메테르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는데! 설마 방금 공간이동 마법이라도 발동했단 말인가!?” 인간들이 저마다 당황하며 한두 마디씩 뱉어내고 있을 때 아르페는 차분히 메테르와 로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곧 신전 기둥 뒤편에서 메테르와 로아가 ‘걸어’나왔다. “······?” “그 수인족은 대체······ 아니, 혹시?” 메테르의 모습은 이전과 같다. 하지만 로아는 아니었다. 녀석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검은 고양이 귀와, 세 개의 고양이 꼬리를 지닌 사람이. “먀?” 녀석은 자신의 두 발로 바닥을 디디고 선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명백한성인 여성의 육신에 검은 천이 칭칭 감겨 신체 윤곽을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메테르가 제단에 놓인 천을 집어든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자기 나신은 아르페를 상대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노출하는 주제에 다른 여자가 그러는 꼴은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탐식의 마수로 태어나 여태껏 고양이로 살아온 로아라고 해도! ······하긴 로아가 고양이이던 시절부터 경계하고 있었으니 이제와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정말 저 여자가 아까 그 고양이란 말이야!?” “예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사악한 존재로 탄생한 것은 아닌가!?” “아니, 아니야. 마기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기운이잖아. 대체 어떻게? 이블 하트를 통째로 삼켰으면서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이블 하트가 허무하게 사라진 순간, 크나큰 당황에 사고를 잇지 못하는 셋의 인간을 버려두고 아르페가 로아에게 말했다. “넌 임마, 몸이 작아서 마기를 먹을 수 없으니까 몸을 키워 버리냐?” “먀! 먀······ 아? 호아아?” 익숙한 울음소리를 내려다 말고 자신의 성대로 보다 다양한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로아. 신전을 가득 채운 인간들이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로아는 간신히 뜻을 담은 말을 입 밖에 냈다. “주인님의 몸 참고했어! 먀!” 실로 적절한 판단이다. 아르페는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해 있지만 정작 신체 구조는 평범한 인간도, 그렇다고 마족도 아닌 실로 유니크한 체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나를 정도 이상으로 증폭하며, 보다 많은 마나를 수용하고, 한꺼번에 많은 마나를 다루기에 적합한 기적적인 신체. 작은 몸에 많은 마나를 담기 위해서는 아르페의 육신을 따라하는 것이 옳다. 최적의 판단이다. “그럴 거면 성별도 일치시키지 그랬냐?” “체형과 성별 관계없어? 없어! 하지도 못해! 먀아!”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이던 로아는 스스로의 육신을 확인한 다음에야 밝게 웃으며 확답을 주었다. 녀석이 익힌 폴리모프는 어디까지나 존재의 기록을 기반으로, 본질을 그대로 남겨둔 채 모습을 바꾸는 것이기에 성별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 물론 아르페도 잘 알고 있었다. “먀, 먀아, 먀아아. 먀먀.” “끙.” 아르페를 닮았기에 로아의 모습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심지어 눈과 머리의 색마저 완전히 같아, 꼭 아르페를 여성으로 바꾸어놓는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메테르의 표정은 무척 언짢았고, 다른 이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당장의 위기를 피하고자 나중에 더 귀찮아질 일을 만들어버린 기분이 드는데 착각이겠지?” “착각이 아녜요, 아르페 님! 또 여자가 늘어났잖아요!” “아냐, 그래도 쟨 마수니까 세이프야, 세이프!” “제일 위험하다구욧!” 메테르로부터 단단히 주의를 받은 것인지 로아는 천을 벗어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녀석은 중세 신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을 한 채 종종종 걸어와 아르페의 품에 다시 돌아가려다가, 품 안으로 들어가지지 않자 당황했다. 녀석이 아르페에게 달라붙는 모습을 보며 메테르의 눈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어떻게 해? 먀?” “나한테 묻지 마, 임마······.” 어쨌든 한 가지 다행한 것이 있다면. 적어도 아르페의 후대에 대해 논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4 > “먀, 먀먀, 먀아.” 끝내 두 개의 이블 하트를 모두 먹어치운 로아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세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녀석은 계속 아르페의 주위를 떠돌았다. 아르페의 몸 어디에 걸터앉아야 기분 좋게 앉을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것이다. 평생을 그러고 돌아봐라, 앉을 곳이 보이나. “이 마수는?” 프로메스가 한 30년쯤은 늙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마기를 먹어치워 자신 고유의 기운으로 만드는 능력을 지니고 있죠. 탐식의 마수이고, 내 사역마로 계약되어 있으니 앞으로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백 년 우리 가문을 괴롭혀온 이블 하트를 그렇게나 간단히······.” 간단하지는 않았다. 로아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무수한 마기를 단계별로 먹어치워 왔고, 마기를 제압하는 능력을 갖춘 성녀와 아르페가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조금전에도 이블 하트를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에 비하면 간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겠지. 아르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해방되신 것들 축하합니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납득이 되지 않아!” “아르페와 엮이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해!” “그거 내 칭찬 아니니까 그렇게 웃는 얼굴로 말하지 마.” 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태평한 사람이 있다면 아르페와 로아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신전에서 볼 일은 끝났으니 나가자. 바디네, 스튜는 어떻게 됐어?” “팔팔 끓이고 있으니 다들 나가서 드셔도 좋아요. ······그리고 로아, 당신은 좀 더 점잖은 옷을 입어야겠어요. 따라와요, 어서.” “먀!? 나도 스튜 먹을래, 먀아아!” 대체 얼마나 단정한 옷을 입히려고 저러는 것일까, 아르페는 조금 궁금했지만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남은 사람들을 신경 쓰기도 바빴다. “이럴 수가, 가업이······.” “이렇게 허무하게 해결되다니, 으음, 그야 이것을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으으으음, 으으으으음!” “문제가 일어날 거야, 위험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래도 두 남자는 사태를 온전히 받아들였으나 노파는 너무 황당했던 나머지 현실부정을 하기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아르페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노망이 온 거죠? 그럴 수 있지.” “캬아아아아악!” 아르페는 노파를 골리며 남은 두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렇게 멍 때리고 있지 말고, 앞으로는 무엇을 할지 생각해봐요. 어쨌든 이 신전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으니 지금은 나와서 같이 스튜나 먹죠.” “아르페, 너는······ 딴 사람이 된 것 같구나.” 프로메스의 말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그 말에 뜨끔해 표정관리를 하는 아르페를 앞에 두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예전엔 뭐든 귀찮아하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상황을 주도하고 있어. 더욱이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기괴한 방식으로······. 용사가 되며 바뀐 것이냐?” “그건 아니거든요.” 지금도 귀찮다. 단지 지금 귀찮게 움직여두어야 나중에 안온히 낙농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있을 뿐이다. 마왕만 해결되면, 마계만 해결되면 무슨 일에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리라. 그저 우직한 소와 함께 우직하고 느릿느릿한 삶을 살리라! “후, 어쨌든······ 나갑시다. 아르페의 말이 맞아. 신전도 이블 하트도 이젠 없으니까. 용사가 와서 용사답게 일을 해결했다, 그뿐인 일 아닙니까.” “문제가 생길 거야! 이블 하트는 결코 그렇게 간단히 사라질 물건이 아냐! 앞으로수백 년, 족히 수백 년 이상은 그 힘이 쇠하지 않을 악마의 물건이었거늘! 저 계집애가 일을 그르친 게야, 용사와 함께 일을 그르친 게야!” “프레드, 이 아줌마 좀 기절시켜라.” “그래.” 두 장년의 남자는 기절한 노파를 들쳐 업고 신전을 나갔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나머지 일행을 끌고 그곳을 나섰다. 메테르는 여전히 뿔이 난 얼굴로, 그러나 아르페의 팔짱을 단단히 끼고 그를 따랐다. 중간에 바디네가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스튜는 어젯밤보다도 더욱 맛있게 완성되어 있었다. 수십 년을 이 사막에 머무르며 건식과 마수의 사체 같은 것만 먹으며 버텨온 신전의 수호자 일행에게 그것은 천상의 감미였다. “실은 이 냄새를 맡고 신전과 함께 이동해온 것이란다.” “그럴 줄 알았지 내가.” “아빠, 그러면 이 신전은 어디까지든 이동할 수 있는 거야?” “아니, 이블 하트의 마기를 동력원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던 물건이니 이제 더는 의미가 없단다. ······그래, 떠날 때 부숴야겠지.” 따스한 스튜를 먹고 정신을 차리기라도 했는지, 프로메스의 입에서 드디어 현실을 인정하는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 옆의 프레드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긍정했다. “부숴버리자고.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마계를 나가는 거야. 아, 이런. 지금부터도마계 안으로 나아갈 너희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었구나.” “아니, 각자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가는 게 맞으니까.” “비록 마계를 떠난다지만 그래도 우리의 본분은 잊지 않았다. 대륙 동맹이 만들어졌다고? 거기에 한 팔 보태야겠지.” “전투는 오랜만인걸.”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스튜 한 그릇 더 다오.” “그런 의미라니 무슨 의미냐. 나도 한 그릇 더.” 아저씨들이 스튜를 와구와구 먹어치우고 있을 때, 바디네가 로아를 끌고 다시 돌아왔다. 로아는 지극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강제로 입혀진 옷 이곳저곳을 당기고 있었다. “먀아······.” “설마 했던 사제복이라니.” 로아는 정숙하고 단정하기로는 그 어떤 복장도 따라갈 수 없는 여성용 사제복을 입고 나타났다. 문제는 잘 먹고 잘 큰 탓인지 몰라도 발육이 무척 훌륭하여 펑퍼짐한 사제복으로도 녀석의 볼륨을 미처 가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답답해, 먀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지낼 생각이라면 인간의 법도에 익숙해지도록 하세요. 여자는 외간 남자에게 살갗을 그렇게 보여선 안 됩니다.” 깜짝 놀랄 만큼 고리타분한 말이었다! 아니, 그보다 바디네가 아르페에게 언제나오픈되어 있었던 것은 그를 외간 남자라고 여기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란 말인가! “주인님은 내 주인님인데, 먀?” “이 세상엔 아르페 님을 제외하고도 남자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주인님이 상대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해요!” “먀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의 로아였으나 바디네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다. 로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너 싫어. 먀아아.” “앗, 어딜 가는 거예욧.” 로아는 양볼을 두툼히 부풀리고는 그녀로부터 벗어나 아르페의 무릎 위에 털썩 앉았다. 바디네와 메테르의 눈이 번쩍 빛났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아르페는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지들도 얼마든지 하는 주제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먀. 쟤네 귀찮아. 먀아아.” “하지만 아직 본체로는 마나를 완벽히 통제할 자신이 없지?” “먀.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아직은 아니야. 먀아.”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먀아, 기분 좋게 울며 그에게 몸을 기대는 로아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고양이 그 자체. 삿된 마음으로 달라붙는 메테르나 바디네보다 오히려 이쪽이 나았다. “주인님.” “음?” 그때 뒤에서 세릴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설마 쓰다듬어 달라는 것인가, 긴장한 아르페였으나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사막의 폭풍이 걷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뭐?” 뒤를 돌아보는 아르페의 시야가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만물열람의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하고, 뻗어내는 수십 줄기 마나 스트링을 구현 마법을 통해 풍광의 확대에 이용하여 저 너머 니로타시드와 일반 마계의 경계까지를 한 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정말 사라지고 있잖아······?” 어째서 스튜를 먹고 있을 때에 한해서 괴상한 일이 닥쳐온단 말인가! 이쯤 되면 스튜에 마법적인 힘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니로타시드와 마계의 경계가 사라진다니, 혹시 그것은······.” “혹시고 자시고 이블 하트와 연관된 마법 술식이 있었던 게 분명해!” 아르페는 로아를 품에서 밀어내고는 당장 시선을 지면에 주었다. 아니, 그보다 더낮은 영역에 역시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여태껏 수호자 일행이 타고 다녔던 움직이는 신전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마법진! 물론 아르페도 신전에 걸린 마법까지는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저의 마법진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만물열람으로 지저를 주의 깊게 살피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명한 사실은 신전에 봉인된 이블 하트가 신전을 구동하는 동력원인 동시에 지저의 마법진을 구동하여 니로타시드의 결계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니로타시드 영역 전체를 감싸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보호마법’이, 동력원을 잃은 지금에 와서 완만하게 소실되기 시작했다는 것! “로아, 넌 이만한 물건을 먹은 건데 괜찮냐!?” “안 괜찮아, 먀! 속 더부룩해서 소화시키려고 모습도 바꿨는데, 먀!” “녹여 먹었어도 됐는데······.” 하지만 녹여 먹었든 꼴깍 삼켰든 로아가 이블 하트를 차지한 이상 마법진의 소실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르페가 이런 대규모 군단을 이끌고 태평하게 스튜나 끓여먹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두 니로타시드의 폭풍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다들 서둘러. 마법이 완전히 효력을 잃기 전에 이동하자!” “하지만 신전이······.” “지금 신전을 부수면 마법이 즉각적으로 풀리게 되고, 그러면 그 순간 마계의 존재들에게 감지됩니다. 그건 악수예요.” 더욱이······ 수호자 일행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신전에는 또 다른 이블 하트의 존재를 암시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고어에 능숙한 아르페만이 알아볼 수 있었던 문장. 그것은 디아스의 지저에 있는 드워프들의 세계에 대해 논하고 있었는데, 아마 선대 용사는 후손들이 그곳까지 신경 쓰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즉 우리가 신전을 방치하고 가면 이곳을 찾은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지저 세계에대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찾아가겠지. 실로 황당하게도 아르페는 오히려 그것을 바랐다. 그곳에 그들을 위한 선물을 하나 남겨두고 왔기 때문이다. “서둘러 움직여! 스튜 냄비는 가져갈 생각하지 마, 독이라도 넣어두든가!” “정렬, 정렬하라! 곧장 바다로 향한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결계 걷히기 전에 결정해요.” “씁. 이렇게 갑작스레 움직이게 되다니······. 며칠 더 가족의 정을 돈독히 하고 싶었는데, 아르페 네 녀석 때문에 모든 일이 라이트닝 마법에 떡 튀겨먹듯이 진행되는구나.” 프로메스는 노파를 들쳐 업고는, 프레드의 한 손을 굳게 잡고는 품에서 귀걸이 한쌍을 꺼내어 꼭 쥐었다. 분명 공간이동 아티팩트였다. 하긴 용사의 일족이 저런 아티팩트 하나 없이 마계와 디아스를 왕래하지는 않았겠지. “이대로 너희를 놔두고 가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만 어쩔 수 없구나. 우린 디아스로 가겠다. 그곳에서 마족들과 싸우겠다.” “그래요. 아마 디아스 내부로 마족들이 침입할 수 있으니 그땐 잘 부탁해요.” “음. 아르페,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많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거라.” 그는 아르페를 향해 굳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메테르에게 시선을 두었다. “내 딸, 훌륭하게 커주어 고맙다. 사위도 너 못지 않게 훌륭해 보이니, 이제 애만 만들면 되겠구나. 마계에서 일이 영 안 풀리면 1년 정도 휴식기간을 갖는 것도 좋을거야.” “응! 곧 만들게!” “이 타이밍에 또 그 얘기를 꺼내다니! 아니, 1년씩이나 쉬었다간 인간계가 쑥대밭이 되거든요!” “그러면 정말로 가보마!” 그의 손아귀에서 귀걸이가 깨져나간 순간, 셋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나마 메테르에게 아이를 만드는 법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아르페는 한숨을 내쉬며 일행에게 지시했다. “그러면 우리도 전속력으로 빠져나가자!” “알겠습니다!” “먀!” 일단은 사막 지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그 다음으로 바다로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것이 목표였다. 아르페는 부디 결계가 오래 버텨주기를 바라며 일행과 함께 질주를 개시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일행은 성공적으로 마계 해역에 재진입할 수 있었다. 결계가 풀리기 직전, 외부 영역으로부터 멋모르고 기어들어오는 마물이 하나둘 생겨날 즈음이었다.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5 > 마계는 결코 인간계에 비해 작지 않다. 광활한 사막이나 고원이 지형의 주를 이루지만 작물이 풍족하게 자라는 곳도 많으며, 비록 레벨이 100부터 시작한다지만 지방질이 풍부하고 연한 고기를 생산하는 가축도 얼마든지 기를 수 있다. 종종 혈운이 끼기 때문에 우중충하고 덥기는 하지만, 더우면 또 더운 대로 적응해서들 잘 산다. 또 인간계의 북부 대륙보다도 추운 지역도 있기 때문에 평형은 맞는 셈이다. 그러니 냉정히 따져, 마계는 굳이 인간계를 정벌할 필요가 없었다. 예로부터 전쟁이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타인에게서 빼앗아오기 위해 이루어진 일, 마계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굳이 인간계로 나가 그들과 아웅다웅할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그러면 마왕은 왜 인간계를 침략하려는 거야?” “전투가 그곳에 있으니까.” 정확히는 그곳에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들이 있으니까, 다. 마족 중에는 강자가 많이 태어난다. 그리고 강자들은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데, 그 증명의 방식이란 으레 다른 이들을 강제로 꺾고 복종시키는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고, 인간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이번 대 마왕은 모든 것이 제 손아귀 위에서 굴러가지 않으면 진정하지 못하는 타입이기에 인간계를 정벌하려는 것이긴 한데.’ 용사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마왕은 굳이 인간계를 공격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들 바보같이 계속 덤벼오는 거구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키하아아아아!” 마계 해역을 제네시스 머메이드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바다를 건너 인간계로 가려는 마족들은 대다수 인어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놈들은 기본적으로 레벨 200을 넘기는 강자들뿐이지만 아르페 일행과 함께니로타시드를 일주한 인어들의 평균레벨은 이제 250을 넘기는 상황! 이젠 굳이 일행이 옆에서 보조해주지 않아도 마족들을 얼마든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님, 정리 완료했습니다. 이곳에도 1만 정도를 배치하는 것이 좋겠지요.” “음, 1만 정도면 잘 막을 수 있을 거야.” 20만에 달하는 인어들을 언제까지고 끌고 다닐 수는 없어서, 니로타시드를 나온 이후로 세릴은 아르페의 지시를 통해 해역의 요지마다 제네시스 머메이드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그들은 얼마나 먼 거리를 격하고 있어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으니, 유사시 서로 협력하여 마족들을 막아내는 광역 포위망을 만드는 셈이었다. “하지만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일 땐 퇴각하여 보내줄 것. 인간계에도 병력은 있어. 너희가 마족을 다 받아내다가 쇠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겠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20만이었던 인어가 10만으로 줄고, 5만으로 줄고, 끝내 1만까지 줄었다. 니로타시드를 나와 한 달이 더 흐른 시점이었다. 마계의 심부에 가까워올수록 일행의 안색도 긴장으로 물들었다. 아르페를 놓고 후대를 누가 만드느냐에 대한 문제로 바보같이 싸웠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여기가 마지막이야.” “······아.”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던 인어들과의 동행은, 그러나 갑자기 아르페의 말 한 마디에 의해 끝나버렸다. 그야 마계의 바다가 일직선으로 마왕성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 한은 닥쳐올 수밖에 없는 일이기는 했다. “이 이상은 마왕성에 감지될 확률이 높아. 이 일대를 두고 자유로이 이동하며 마족들을 견제하도록 해. 그게 최선이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만이라도 주인님을 따르겠습니다.” 세릴의 현 레벨은 360가량. 일행의 레벨이 380에 육박하는 것에 비하면 조금 적었다. 하지만 아르페는 무슨 생각에선지 비교적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와다오, 세릴.” 이 시점에서 일행의 레벨은 이러했다. 메테르와 아르페가 동일하게 383레벨에 도달해 있었고, 그 다음이 시에나로 381, 레이제나가 380, 바디네가 377이었으며마지막으로 엘릭이 375였다. 덤으로 로아의 레벨이 382다. 펫 주제에 아르페와 메테르의 레벨을 1차이로 쫓아오고 있는 것이 괘씸하다. “이제 뭍으로 나가게 되면 마왕성을 육안으로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져. 당연하지만 마왕성에 있는 이들도 우리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용케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왔네.” “인어들 덕분이지.” 세릴이 말없이 부끄러워했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 들어, 지금부터가 중요하니까. 안타깝지만 이대로 마왕성에 쳐들어갈 수는 없어.” 전생의 메테르는 374레벨인 채로 마왕성에 쳐들어왔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생의 일, 여러 가지 변수가 가미된 지금 상황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마왕성 인근에는 던전이 하나 있어.” “여기까지 와서 던전이야!?” 여기까지 왔기에 던전인 것이다. 인계의 던전으로는 그들의 레벨을 키울 수 없어 이곳에까지 온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바다의 무덤이나 니로타시드를 통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레벨을많이 올리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지금부터 일행을 이끌고 가려는 던전을 수월히 클리어할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었다. “마계 최고의 대마도사라 칭해지는 자가 있어. 아공간을 최초로 밝혀낸 자이며, 공간의 허용량 이상으로 마나 밀도를 높이는 실험을 하기도 했던······.” “어려워!” “그거 네가 예전에 이미 했던 반응이야.” “웅?” 메테르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아르페가 피식 웃으며 추가로 설명했다. “메테르에게는 예전에 한 번 말해준 거지만, 나나라이 바보드라라는 마족이 있었어.” “괜히 이름이 기분 나쁜걸요.” “가명이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마왕성 인근에 바로 이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만든 것임에 분명한 던전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렇다면 전생의 아르페는 그것을 몰랐는가? 알았다. 알았지만 마왕에게는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 던전은 정말로 그 어떤 누구의 침범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꽁꽁 감추어져 있었으며, 던전이 위치한 일대에 광역 왜곡 마법이 흐르고 있어 아르페를 제외한 누구도 던전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마왕은 설마 마왕성 인근에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기에, 아르페가 그것을 굳이 마왕에게 보고하지 않고도 넘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 “우리가 그곳에 진입하면 마왕군은 우리를 찾지 못해. 그래서 난 부츠의 능력을 이용해서 곧장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다. 그 던전에서 마지막으로 모두를 성장시켜, 마왕과 한 판 붙는 거지.” 대륙 동맹과 20만의 제네시스 머메이드과 마왕군의 주력을 상대하는 틈을 타 마계에 잠입하여 수뇌부의 대가리만을 따는 것. 그야말로 용사 일행에게 어울리는 활약이 아닐 수 없다. 아르페가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실로절묘한 구도가 완성된 셈이었다. “그러면 바로 이동하면 되는 거 아냐?” “메테르, 방금 내가 뭐라고 말했지?” “날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나두 사랑해! 결혼하자!” “날조하지 마.” 아르페는 분명 ‘그곳에 진입하면 마왕군이 찾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강조해 말하기 전, 문득 레이제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령 그 전에 들켜도, 일단 들어가면 못 찾는다.” “바로 그거야, 레이제나.” “아르페, 악랄함.” 과연 레이제나는 바보 용사와는 이해력의 수준이 달랐다. 단지 그것만으로 아르페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파악했으니까! “주역은 누구? 아마도 나.” “네가 맞아. 준비해, 레이제나.” “아르페······ 설명 안 해주면 울어버릴 거야.” 아르페는 스태프를 활성화시켜 녀석과 레이제나에게 마나를 동조했다. 레이제나는 이미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비교적 최근에 얻은, 무척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 탓에 영창하는 데에만 무려 10분 이상이 걸리는 대마법이었다. “레이제나가 말했잖아. 설령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마왕에게 우리 존재를 들키는한이 있어도, 놈이 우리를 잡기 전에 던전이 있는 지역으로 진입하면 놈은 우리를 찾지 못해. 오직 나만 아는 던전이거든.” “아르페의 고유능력으로?” “그래, 내 고유능력으로.” 그렇다면 곧장 던전으로 달려가기는 조금 아깝지 않은가. 어차피 들켜도 괜찮다면, 진입하기 전에 한 방 거창하게 갈겨주고 가는 것도 좋다는 계산이 서는 것이다. “그 한 방이라는 게 혹시······.” “레이제나의 다운폴이야. 그리고 이왕 크게 갈길 거 우리 마나까지 싹싹 모아서 보태자는 거지.” 그만한 마법을 레이제나 혼자 조율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아르페는 스태프의 도움을 빌어 마나의 통제를 돕고, 레이제나의 마법을 보조할 생각이었다. 이것도 구현마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걸로 마왕이나 사천왕을 죽일 수는 없어. 워낙 거대한 규모의 마법이라서 시전 중이면 몰라도 일단 발동한 후에는 이걸 눈치 못 채고 맞아주기가 오히려 더 어렵거든. 하지만······.” “마왕성은 싸그리 날아가겠네.” “그렇지. 그러니까 다들 마나 뱉어. 메테르,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지?” “우으, 결국 또 이거야.” 메테르는 얌전히 레코드 마스터를 발동했다. 나머지 일행 또한 체념하고 자신의 마나를 메테르에게 맡겼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로아가 폴리모프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지면서 녀석 또한 메테르에게 마나를 공유해주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그 외에다른 것도 공유해서인지는 몰라도 최근 더 성장이 빨라졌지만 장점에 비하면 미약한 단점이었다. “마나 너무 많음.” “거들게.” 메테르를 통해 레이제나에게 쏟아지던 마나의 일부가 아르페의 통제를 따라 스태프로 흘러들었다. 아르페는 레이제나가 형성하는 다운폴의 마법진을 보조하며 그 힘을 증폭시켜주는 두 번째의 마법진을 만들어나갔다. 만물열람으로 마법의 구조마저 뜯어볼 수 있는 그이기에, 그런 그가 구현 마법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 레이제나의 안색이 곧 조금 편안해졌다. “이대로라면 가능.” “당연히 가능해야지.” 마계의 해역에 녹아든 농밀한 마나의 결정이 마법진에 빨려 들어가 그 힘을 키워나갔다. 어느 순간, 레이제나와 아르페의 합작으로 마나로 충만한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이제 영창만 끝나면 언제든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과 때를 맞추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하는 레이제나. 아르페는 그녀를 따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르며 눈을 빛냈다. 해수면을 돌파해, 상공으로. 실로 거대한 마법진을 이끌고 있었기에 무척 눈에 띄리라는 자각이 있었다. ‘이제 슬슬 눈치를 챌 때가 됐지.’ 아니나 달라, 그들이 물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시점에 저 멀리 미약한 점으로 보이는 마왕성으로부터 찬란한 광선이 쏘아내졌다. 익숙한 기척, 필시 전생의 마왕군 사천왕 1위였던 그 남자가 보유한 힘이다. “하지만 대비하고 있었거든.” 아르페는 드워프들로부터 받은 소모성 아티팩트 몇 개를 망설임 없이 내던졌다. 언제든 쓸 수 있도록 마나를 꽉꽉 채워 충전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아르페의 손에서떠난 즉시 활성화되어 실로 거대한 방어벽을 형성했다. 직후 방어벽과 충돌하는 광선! 아르페는 방어벽 너머로 광선의 힘을 가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방어벽 세 개가 녹아내렸지만 아직 세 개가 더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다행히도 놈은 전생과 비슷한 수준이야. 이 정도면 지금 붙어도 이긴다.’ 놈이 직접 이곳으로 달려와 줘도 괜찮을 텐데 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조금 더 거대한 마력이 활성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저것 또한 아르페가 알고 있는 기운이었다. “아르페, 마나 흔들림!” “큭······!” ‘마왕이다.’ 아르페는 그 마력을 느낀 순간 심장이 옥죄는 것을 느꼈다. 전생에 받았던 지배의흔적을 아직 기록에서나마 지워내지 못한 탓인가? ‘우습다, 내가 제일 우스워. 뭐가 자유란 말이냐, 단지 마나를 느낀 것만으로 움츠러드는데.’ 하지만 언제까지고 바보같이 굳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그는 인간이며 용사다. 심적으로나마 마왕에게 속박될 수는 없다, 안 될 일이다! “아르페.” 그때였다. 일행과 함께 뭍으로 나온 메테르가 돌연 그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아르페는 너무 놀라 마법을 통제하던 것도 잊을 뻔했다. “너······.” “괜찮아.” “······.” “내가 지킬 테니까, 괜찮아.” 그녀의 말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아르페는 두려워 묻지 못했다. 물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손을 맞잡은 다음 순간 아르페의 마나는 안정되었고, 스태프는 그 모두를 훌륭히 증폭시켜 마지막으로 마법진을 강화시켰다. 레이제나는 지금이야말로 마법을 구사할 때라는 것을 확신해, 살짝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운폴!” 대마법이 발동했다. 유사 이래 없었던 멸망의 마법이 마왕성을 덮쳤다. < Chapter 31. 용사의 후예 - 5 > 끝 ⓒ 토이카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1 > 하늘에서 굵은 빛의 광선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폭우였다. 아르페가 생전에 본 그 어떤 마법보다도, 심지어 레인 오브 루인보다도 압도적인 파괴의 세례! 마왕성의 주민들은 제각기 그것을 막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 모두가 부질없었다. 그저 순수한 파괴의 힘으로 가득한 그것은 그 외의 모든 마나를싸그리 밀어버리고 마왕성과 그 일대를 뒤덮었다. 소음은 일체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소멸했다. 마법을 발현한 당사자 레이제나마저 그 초월적인 힘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수한 기록이 소멸하고 재탄생하며, 레이제나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스펠 레벨이 올랐으니 만약 다음 차례가 있다면 지금보다 더 끔찍한 장관이 펼쳐지리라. “으아아아아아아아.” “무수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던 마왕성이······.” “이제 튀자.”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아르페는 일행을 모두 데리고 부츠의 능력을 발동했다. 직후 일행은 풍경이 기이하게 일그러진 고원 지대에 이르러 있었다. “아, 마왕성이 내려다보여, 오빠.” “마왕성이 있던 자리가 보이는 거겠지.” 이동한 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일행은 당장 대기에 떠도는 마나의 질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왕성 코앞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피부를 찔러오는 예리한 마기가 더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굉장히······ 고요한데.” “그러게 말이에요.” 엘릭의 말에 바디네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리곤 아르페의 말마따나 한때 마왕성이 ‘있었던’ 자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긴 저렇게나 아수라장인데 말이죠······.” 수백 년, 최소한 전대 마왕 시절 이전부터 이어져온 마왕성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대마법 다운폴은 레이제나가 목표로 삼은 일대를 완벽하게 파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면까지 깎아내 대형의 크레이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마왕성에 주둔하고 있던 마족들 대다수는 그 순간 죽었고, 고위 마족 가운데 몇도그것을 피하지 못해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사천왕 정도 되는 놈은 죽지 않았겠지만, 마왕의 경우 마법을 막으려 하다가 추가적으로 피해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마족들 대단하다! 조금 전까지 우리가 있었던 곳으로 찾아왔어!” “우리 위치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을 테니까. 오, 사천왕이 직접 출두했네.” 사천왕이라고 해봤자 전생의 아르페가 기억하는 사천왕 중 살아있는 있는 마왕군사천왕 서열 1위의 그 남자와, 서열 2위였던 에트나 뿐. 더욱이 에트나는 마왕성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 즉 일행이 마왕성을 향한 마법을 시전한 곳, 마계 해역 인근의 뭍으로 달려온 이는 바로 전생의 사천왕 서열 1위의 그 남자였다. “굉장히 차가운 인상의 남자네.” “제대로 봤네. 저 놈은 강력한 냉기의 힘을 다루거든.” “냉기?” “그래.” 레이제나와 함께 겨울여왕의 유적을 찾아 그 힘을 얻어 와야 했던 이유는 비단 에트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다. 사천왕 서열 1위에 해당하는 남자의 힘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던 것. “그렇다는 건, 레이제나의 냉기도 저 남자에게는 안 통하겠네?” “에트나의 열기로 공격하면 되지.” “그 여자를 아군으로 포섭하는 건 확정이었어? 응?” 메테르의 눈이 가늘어지며 아르페의 허리를 마구 찔렀다. 아르페는 그녀를 부드럽게 무시하고는, 일행이 머무르던 자리에 선 채 마나를 마구 뿜어내는 그 남자를 주시했다. 혹시나 공간이동의 흔적을 읽어내 이곳까지 쫓아올 수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무리였나 보다. 놈은 쳇, 혀를 차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아르페는 그 모습을 보며 실소했다. “떠나봤자 돌아갈 곳이 없겠지만 말이지.” “와아, 마왕성에 살던 마족들이 난민이 됐어.” “난민으로 끝났으면 다행이지, 아마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숫자 이상의 마족이 죽어나갔을 거야.” 그중에는 전생에 아르페를 따르던 마족 수하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르페가 그것에 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으나 현생에 인연도 없는 그 녀석들을 챙겨준답시고 마왕성에 미리 대피 권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미안하다, 억울하면 너희도 다시 태어나렴.’ 아르페는 짧게 묵념을 하곤 돌아섰다. 마왕성의 그 누구도 일행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젠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으로 들어가면서 뒤를 걱정할필요도 없었다. “유적에 들어가기 전에 너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어. 솔직히 여태까지의 던전이나 유적 탐사에선 우리가 헤맬 일이 없었지?” “전부 아르페 덕분이지!” 메테르가 씩씩하게 외친 다음 순간 아르페가 짜게 식은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 유적에 대해선 나도 잘 몰라. 위치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하도록. 솔직히 굉장히 위험할 수 있어.” “여기까지 왔는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 메테르의 여전히 기운찬 대꾸에 아르페는 고소를 머금었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이미 마왕성을 앞두고 있는 상황인데 더는 뭘 못하겠는가? 다른 일행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후후, 마왕성을 부수고 시작하는 최종전이라니 무척 마음에 들어요. 역시 아르페 님은 최고에요.” “언니, 침 떨어져.” “스읍.” 워낙 용사 이야기에 환장하는 바디네는 그저 지금 자신이 아르페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세였고, 시에나 역시 제법 태평했다. 시에나를 당황시키려거든 일단 아르페를 그 자리에서 치워야 할 것이다.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단점이지만, 아르페가 곁에 있기만 하면 시에나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마왕이라······ 마왕성까지 공격해놓고 그 전에 유적에 들어가면서 기껏 상승한 긴장감을 떨궈버리는 게 정말이지 용사답지 않지만, 그래.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다행이다.” 엘릭 또한 갑옷 안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현생에 와서야 그 이미지가 제법 많이 달라진 그이지만, 전생에서는 언제까지고 과묵하게 일관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용사를 지킨 그이다. 그의 근간을 이루는 정의감과 용기는 현생에서도 단 한 번도 쇠한 적이 없다. 마지막은 세릴과 로아였다. “저는 그저 주인님을 따를 뿐입니다. 어디까지고, 언제까지고.” “먀, 맛있어 보이는 냄새가 풀풀 난다, 먀.” “좋아, 다들 각오가 된 것으로 알면 되겠지.” “아님. 아르페 바보. 절대 아님. 휴식 필요, 이대론 죽음.” 다들 지금부터라도 유적에 돌격하자! 라는 적극적인 자세였지만 오직 한 명 레이제나만이 그 자리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야 그만한 대마법을 발하고도 쓰러지지 않은 것이 용할 지경이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을 다독였다. “지금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 그저 모두의 각오를 확인했을 뿐이지, 다들 마력을 뽑아내느라 지쳤을 테니 지금 당장 들어가는 건 무리야.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 움직이자.” “뒤늦은 배려에 감사.”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까.” “상냥한 내가 친히 속아줌.” “이 녀석이······.”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지역 일대에 그가 펼친 마법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마나의 흐름을 조금씩 비트는 것으로 숨어있던 유적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다. 아르페는 일행이 쉬면서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는 동안 우선 이 작업을 끝내두었다. 고원의 일부가 가라앉으며 구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덩이처럼 허술해보였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까지 허술하지는 않았다. “오빠, 안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너무 흉흉해. 정말 괜찮을까?” “너무 걱정할 것 없어. 이대로 마왕성에 돌격하는 것보단 낫거든.” 아르페는 조금 전 확인한 사천왕의 레벨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그의 레벨은 분명 390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는 그 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몇 년 차이 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생의 그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이번 생에 딱히 더 특출난 일을 해서가 아니다. ‘마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레벨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 다르지 않을 거야.’ 마왕의 레벨은 아마도 400언저리일 것이다. 아까 느꼈던 마왕의 기세로만 판단해도 대충 그 정도는 나온다. 물론 아르페 일행이 지금 지닌 힘을 고려했을 때, 특히 레벨을 어느 정도 무시하는 두 용사의 사기스러운 능력을 감안한다면 사천왕은 물론이고 마왕과도 곧장 일전을 벌여볼 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야. 마왕성은 괜히 이곳에 세워져 있었던 게 아니거든. 너희도 느끼고 있겠지만, 이 유적을 제외한 일대는 밀도가 높은 마기로 가득해. 당연히 마족의 힘은 최대가 되고 인간의 힘은 최소가 되지. 더욱이 그 효과를 증폭시키는 것이 마왕성이야. 마왕성은 한 마디로 마기를 지닌 이들이 그 누가 됐든 적을 무조건 이기게 해주는 비겁한 필드 마법이라고 할 수 있거든.” “그래서 오빠가 유적에 들어가기도 전에 일단 마왕성을 부수려고 한 거구나?” “그렇지. 물론 우리가 유적에서 나오면 마왕성을 대체할 아티팩트를 만들기는 하겠지만, 당연히 그 효율은 마왕성에 비해 아득히 떨어질 것 아니겠어?” 그때 시에나가 고개를 번쩍 들며 아르페에게 물어왔다. “오빠,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을 버리고 인간계를 먼저 점령하려는 마음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어.” 아마 놈은 마왕성을 최대한 보호하려 했겠지만, 다운폴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곧장 회피 수단을 구사했을 것이다. 그야 물론 다운폴의 후속타가 닥쳐올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 당분간은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하지만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놈은 누구보다도 무대를 중시하는 사이코거든. 완벽하게 인간계를 차지하고 싶었다면 용사가 탄생한 그 순간 곧장 움직였겠지.하지만 아니잖아? 놈은 용사가 스스로 이곳에 발을 들여 결판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결코 이 땅을 떠나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유적에서 힘을 얻어 나와 기습할 때까지 바보처럼 기다릴 거란얘기야?” “바로 그거야.” 전생의 용사는 실로 용감하게도 374레벨에, 동료들의 수준은 그것보다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음에도 용감하게 마왕성에 쳐들어갔다. 물론 그때 용사 일행은 인간계의 서포트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성장을 핑계로 더 미적대다간 마왕을 결단 내보기도 전에 인간계가 통째로 결딴날 상황이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돌진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용사는 실패했을 것이다. 에트나도 간신히 꺾은 용사 일행이 사천왕 서열 1위를 꺾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고, 설령 그를 꺾었더라도 마계 최심부의 마기와, 심지어 그것을 증폭하기까지하는 마왕성의 서포트를 받는 마왕의 힘을 넘어설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라. 마왕성도 없앴고, 이 시점에서 이미 전생의 용사 파티의 전력을 아득하게 초월했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해볼 만하다. 이 정도면 전생을 알고 있는 아르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 유적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얻어 나올 수 있을지, 마왕 다음에 기다릴 전대 마왕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할 지만이 유일한 변수이지만, 그것까지는 아르페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이씨, 환생은 괜히 해가지고······.’ 아르페는 습관처럼 투덜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메테르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것까지는 예상했는데, 레이제나가 아무런 말도 없이 천천히 그의 무릎에 머리를 뉘였다. 바람이 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레이제나?” “안온한 휴식이 필요.” “······흐음.” “호오.” “아냐, 검 뽑지 마. 신성스펠 영창하지 마.” “그러지 말고 다 같이 사이좋게 쉬자!” 괜히 상황이 험악해지려는 가운데 시에나가 바디네에 세릴, 로아까지 껴안고 아르페에게 다이빙했다. 엘릭만은 간신히 그 전에 몸을 뺄 수 있었지만 아르페는 그를제외한 일행에게 완전히 깔리고 말았다. “······용사는 용사로군.” “에휴.” 엘릭의 부러움과 동정이 섞인 시선을 받으며 아르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폭삭 무너진 마왕성과 절규하는 마족들을 배경으로 삼아, 일행은 그렇게 유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2 > 만 세 시간에 걸쳐 안온한 휴식을 취한 아르페 일행은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마왕군을 비웃어주며 유적으로 들어섰다. 다들 최상의 컨디션을 되찾은 가운데 아르페만 몸이 불편했지만 그는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따지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오빠, 괜찮아?” “애들 끌고 다이빙했던 거 너잖아. 잊어먹었을 줄 아냐, 요 녀석아.” “에히.” 아르페는 수줍게 웃는 시에나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어주고는 사방으로 마나 스트링을 뻗어냈다. 일단 유적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오기는 했지만 너무나 자욱한 마기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기도 어려웠고, 그 탓에 만물열람의 위력이 축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나 스트링에 만물열람의 능력을 부여해 확장시키면 시야를 보다 분명하게 확보할 수 있다. 사기였다. “나나라이 바보드라도 어엿한 마족이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짙은 마기를 모아두었으면서 그걸 당시의 마왕에게는 비밀로 한 것일까······? 정말 마족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마족이라니까.” “아르페가 모르는 것도 있다니 신기해.” “놀러 나온 것 아니니까 그렇게 웃고 있지 마, 인마.” 긴장감이 결여된 메테르에게 알밤을 먹이며 마나 스트링을 더더욱 깊은 곳으로 뻗어내던 중, 아르페는 그것과 무언가가 접촉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실이 끊겼다. “온다!” 아르페는 그렇게 외치며 일행 앞에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실이 끊긴 나머지 부분을 조종해 신성 방어막의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직후 방어막에 뭔가부딪혀왔다. 바디네가 신성으로 피워낸 불꽃으로 주위를 밝히자 그 정체가 드러났다. “골렘······?” [기이이이이기기기!] “일단 부수고 보자!” 골렘은 예상외로 그리 거대하지 않았다. 갑옷을 입은 엘릭보다 조금 더 큰 정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결코 적지 않았는데,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다면······. “마기가 아냐.” “신성력으로는 추가 타격을 입힐 수 없어요!” “괜찮아, 물리 타격은 여전히 통하니까!” 시에나가 힘차게 외치며 돌진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슬레지 해머의 크기가 두 배로 불어난 다음 순간, 그녀는 그것을 힘차게 휘둘러 이제 마악 방어막을 깨부수고 그대로 돌진해오려던 골렘의 대가리에 클린 히트를 먹였다. [기이이이이이이이!] 놈이 신성력에 약하건 강하건 상관없다. 아르페가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단단하게 합성된 금속 재질의 외피도 시에나의 힘에는 버텨내지 못해 절반가량이 그대로 함몰해버리고 말았다! [기기기기기기기!] “나도 간다!” 무거운 망치를 휘두른 직후이니 시에나에게는 필연적으로 틈이 생겨난다. 그 틈을 어떻게든 메꾸고 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이 시에나가 파티에서 맡은 역할이었는데, 전위에 엘릭이 추가된 지금은 그녀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 [기이이이이이이이!] 전신을 새카만 금속으로 뒤덮은 골렘이 곧장 팔을 휘둘러 시에나를 쳐내려 했지만, 그녀가 망치를 회수하는 것과 같은 타이밍에 돌진해온 엘릭이 휘두른 도끼에 그것이 부딪혀 굉음을 토해냈다. “큭, 이 자식 더럽게 단단해······!” “하지만 어째선지 적극적으로 공격해오지는 않는데?” “겨울정령이여, 적의 관절에 달라붙어라.” 레이제나의 영창에 가뜩이나 그리 빠르지 않았던 골렘의 움직임이 더더욱 느려지고 말았다. 그 기회를 놓칠 메테르가 아니다. “흡!” “에잇!” 가속을 구사하여 돌진한 그녀가 거세게 휘두른 바스타드에 골렘의 대가리가 또다시 푹 파였다. 그대로 마나를 폭발시켜 놈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메테르의 뒤를 이어시에나와 엘릭이 추가타를 넣는다! 망치와 도끼가 차례대로 골렘의 몸통을 파고들어가는 것이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무척이나 잔인해보였을 것이다. “겨울여왕의 손톱!” 그 직후 이번엔 레이제나가 쏘아낸 얼음의 창이 골렘을 그대로 꿰뚫었다. 현생의 용사 파티에게 다굴이란 전력을 다한 승부의 다른 표현! 골렘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그대로 기능을 정지했다. 얼음 창이 날아드는 것과 때를 맞추어 뒤로 물러난 일행이 저마다 땀을 닦았다. 나름 승리의 세레머니였다. “생각보다 쉬운데?” “얘, 왜 이렇게 반항을 안 한 거야······?” 상대의 기세에 비해 전투가 너무 쉽게 종료되었다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일행이 고개를 갸웃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는 가운데, 아르페는 추가로 적이 몰려오지 않는가를 확인하며 골렘에게 다가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녀석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렇게 대놓고 마기를 풀풀 품어내는 유적인데다, 강력한 마력까지 지니고 있는데?” “그래. 어쩌면 말이지.” 모든 유적과 던전이 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었던 마도사의 공방이 훗날 방어기제와 그 안에 깃든 지식과 마도서 탓에 던전으로 취급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 대개 던전과 유적은 그것을 탐험하는 이들에 의해 정의된다. 이곳을 유적이라 정의하고 멋대로 전투를 준비해 들어온 것도 아르페 일행이었다. “이 골렘, 이렇게 마기가 가득한 공간에 있었는데 정작 다루는 에너지는 마기가 아닌 마나였잖아.” “그랬지······?” “그렇다는 건, 어쩌면 이 녀석의 제작 목적은······.”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놈의 몸통을 샅샅이 훑어, 결국은 내부에 있던 금속의 소형 마법진을 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메테르와 레이제나의 공격에 제법 많이 상해 있었지만 아르페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마기를 평범한 마나로 바꾸는 마법진이야. 놈은 그래서 마기를 뿜어내지 않았던 거야. 유적 내의 마기를 빨아들여 마나로 만들고, 그 마나를 동력원으로 삼아 구동하고 있었던 거지.” “······응?” “오빠, 이거 마족이 만든 것 맞지······?” “아까워라, 먀아.” 파티 멤버들이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마족이 어째서 마기를 마나로 바꾸는 연구를 하는 거야?” “혹시 그 사람, 마족이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럴 리는 없어. 그가 활동한 시대의 기록을 합산해보면 결코 인간의 생애로는 불가능한 길이였으니······ 그런데.” 마족이, 마나를 마기로 전환하는 것도 아니고 마기를 마나로 전환하는 연구를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마기는 순수한 마나에 비해 공격성이 높은 에너지이며 효율도 딱히 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마족은 순수한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만큼 마기를 마나로 바꿔서 좋을일이 없었다. ‘나나라이 바보드라, 단순히 연구 업적이 많은 천재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르페는 문득 몸에 한기가 들었다. 마왕성을 앞둔 마지막 레벨 업의 찬스! 정도로 여기고 들어왔건만 어째 그 정도 선에서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일단 지금부터는 골렘을 때려눕히지 말고 진행해보자.” “마기를 마나로 정화하는 데에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메테르의 말이 옳았다. 애초에 이 유적의 위치부터가 마왕성 인근이지 않은가. 혹시나 유적을 경솔하게 초토화시켰다가 일대의 마기가 강화된다거나 하는 일이 생겼다간 견딜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애초에 이곳이 마족을 위한 장소였더라면 만물열람의 소유자인 아르페만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꽁꽁 문을 닫아걸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다는 것은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유적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음에 분명했다.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마족의 편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 서 있었던 것일까······?” “일단 나아가보자.” 아르페가 한 손을 펼쳤다. 마나 스트링 수십 줄기가 구불구불하게 뻗어 나와 유적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유적이 어떤 스타일인지는 골렘 한 마리를 격파하며 충분히 깨달았다. 이제부턴 망설일 것이 없었다. “죽이지 않고 진행하려면, 아무래도 제법 힘들어지겠지만 말이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걸 뭐!” 씩씩하게 대꾸하는 메테르를 보며 아르페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녀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으리라. 사색이 된 다른 일행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일행은 그 후로 유적 깊숙이 나아갔다. 함정이 즐비하여 빠르게 나아갈 수는 없었지만 아르페의 힘으로 그 모두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해제한 덕에 곤경을 겪지는 않았다. 물론 유적에 설치된 것이 함정만은 아니었다. 마기를 빨아들여 마나로 정화하는 아티팩트, 주위의 골렘들과 공명하며 효율을 증폭시켜주는 아티팩트, 마기를 동력원으로 삼아 작동하되 그 효율이 형편없어, 그저 유적의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힘을 갖고 있을 뿐인 아티팩트까지 유적의 모든 것이 마기를 있는 힘껏 부정하고 있었다. “여기도 있어. 비단 골렘뿐만이 아니라 유적 그 자체로 마기를 정화하는 거야.” “어쩌면 이 유적이 정체를 감출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 아니었을까요? 이곳에는 마기를, 나아가 마계를 부정하는 개념적인 결계가 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정. 마기를 부정하기에 더더욱 눈에 띔. 마기는 이질분자를 용납하지 않음. 지금 유적에는······ 마계 전체를 속이는 마법이, 걸려있는 것.” 레이제나의 말이 옳았다. 이 유적이 아무리 대단할지언정 마계 전체를 이겨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유적을 감추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마기가 전부 순수한 마나로 바뀌는 것치고는 유적 내에 마나가 풍부하지 않지? 아마 그 마나를 동력원으로 삼아 유적을 감추고 있는 것이겠지.” “그럼 만약 우리가 골렘을 더 파괴했더라면······.” 유적을 감추는 데에 쓰이는 마나가 부족해져, 유적의 위치가 고스란히 마계에 노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깨달은 일행의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마왕을 급습하려다가 오히려 그들이 된통 당할 수도 있었던 것! “지금까지 제압한 골렘이 모두 몇 마리지?” “522마리.” “그렇다는 건······ 이 유적이 없었던 시절의 마계는 대체 얼마나 지독했다는 얘기지?” 아르페는 전생에서 마왕에게 이 유적의 위치를 고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골렘들은 그 생성목적부터가 마기의 마나 변환이었기에 방어력이 높을 뿐 그리 전투적이지 않았고, 만약 마왕이 이 유적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이곳을 싸그리 파괴해 당장에 마계의 전력을 높였으리라. “아르페, 끝이 보여.” “아르페 님, 불길한 기운입니다. 전투를 준비해야 해요.” “······먀, 먀아.” 차례대로 메테르, 바디네, 로아였다. 던전의 정체를 알아차린 후로 계속 진정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로아가 급기야는 아르페의 등을 벅벅 긁으며 그를 보챘다. “먹고 싶다. 먹고 싶어, 먀.” “피 한 방울 날 때마다 꿀밤 한 대씩 먹일 줄 알아.” “먀아아, 먀아아아.” 아마도 유적의 중심에 가까워진 것이겠지. 수호자와 그들에 의해 엄중히 보호받고 있는, 아마도 마기가 집약되었을 어떠한 물건의 기척이 아르페에게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익숙한 기척이 하나 더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르페?” 아르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메테르가 그 연유를 캐물을 틈도 없이, 공동 너머로부터 33마리의 골렘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전의 시작이었다.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2 > 끝ⓒ 토이카<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3 > [기기기기기기] [기이이이기이] 수백 년 정도 기름칠하지 않은 양철갑옷처럼 괴이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좁혀오는 골렘을 보며 아르페가 단호하게 지시했다. “저것들 다 온전히 제압해야 해. 하나라도 파괴했다간 그대로 마기가 폭발할 거야.” 유적의 용도를 알면서도 심처까지 기어들어온 시점에서 일행은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아르페 일행과 같은, 인간의 편에 선 이들이 굳이굳이 유적을 탐사할 경우도 생각을 해두었는지, 만약 골렘들을 파괴하지 않고 제압할 경우엔 최심부로 입장할 자격을 얻도록 설계를 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페, 먼저 갈게!” “시에나와 엘릭은 우리를 보호해줘. 로아, 너도 힘 좀 써야겠다!” “먀아!” 인간의 육신을 얻어 물리전투에도 재주가 생긴 로아가 메테르의 뒤를 따라 돌진했다. 불편한 사제복은 진즉에 벗어버리고, 정말 꼭 가려야 하는 부분만을 가려 한결 시원해진 차림새였다. “먀!” “흡! 강격!” 유적을 탐험하며 익히 경험했듯 골렘들은 그 몸에 지닌 마나가 아까우리만치 근접전투를 고집했고, 메테르와 로아는 놈들의 둔중한 공격을 피해 움직이며 그 몸뚱이에 제각기 검과 손톱을 박아 넣었다. 골렘의 중심이 되는 회로와 그것을 구동하는 마력원을 피해 팔과 다리만을 분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 [기이이이이이이] [기긱, 기기기긱] 속도로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메테르와 원래 실체를 없앨 수도 있는 만큼 자유로운 몸짓의 로아가 함께 하니 골렘들은 제대로 유효타를 명중시키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회전할 뿐이었다. 여기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물의 창을 다루는 세릴의 원조가 더해지니 마치 잘 짜여진 연극 무대를 보는 것만 같다! “겨울정령이여.” “디바인 해머!” “후······.” 반면 원거리 공격을 구사하는 이들은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골렘들을 향해마법을 난사해 무력화시켰다. 유적의 최심부를 수호하는 놈들이었기에 평균레벨이 무려 390에 달했지만, 유적을 지나오며 비록 레벨은 올리지 못했어도 골렘과의 전투에만은 충분히 익숙해진 일행은 어렵지 않게 놈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아르페는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유적 전체에 설치한 마법진을 탐색하고, 그것의 통제권을 자신에게로 가져오고자 했다.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4년 전, 그가 메테르와 함께 처음으로 찾았던 용사 육성 던전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의 그는 던전에 펼쳐진 마법에 어느 정도의 간섭을 하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르페는 전생의 자신을 일치감치 뛰어넘어 있었고, 유적에 걸려 있는 마법은 그에게 익숙하다 못해 질릴 만큼 친숙한 것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르페는 이를 갈며 뒷말을 삼켰다. 전투를 벌이는 동료들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일행이 골렘을 상대하는 사이 마나 스트링을 보다 유적 곳곳으로 퍼트리고 심부로 돌진시켜 유적의 마법진에 접촉시키곤, 이어서 구현 마법을 발동했다. 그의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희대의 사기 스펠! 그것이 만물열람과 조합된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마법은 그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기이이이이이이] [기기기긱] 골렘들은 유적의 통제권을 앗으려는 아르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더욱 큰 틈을 드러내게 할 뿐! 놈들의 움직임을 읽어낸 메테르와 로아의 검과 손톱이 허공에 난무하며 실시간으로 한 마리, 두 마리씩 골렘을 쓰러트렸다. “제거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알고 있어, 먀아!” “어렵지 않아,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만 하는 것도 이젠 익숙하니까.” 메테르 역시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럴 때만 눈치가 귀신이지, 아르페는 픽 웃으며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15분 정도가 흐른 후였다. “어라, 골렘들의 움직임이 더 둔해졌어.” “겨울여왕, 서리, 성공적.” “골렘의 출력이 점차로 떨어지고 있어요. 설마······ 아르페 님?” 설마고 자시고 정답이었다. 아르페는 유적의 마법진을 손보면서 골렘을 구동하는마나를 자신에게로 끌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마기를 빨아들여 마나로 전환하는 작업을 수행하느라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는 골렘들이, 자신들에게 남은 마나마저 빼앗기고 있었으니 움직일 힘이 나겠는가! “조금만 더.” “어떻게 하는지 짐작도 안 감. 아르페는 고대의 원령.” “디바인 그라운드!” 골렘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 더 이상 마법사들을 포위하지도 못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시에나와 엘릭도 근접전에 나섰다. 시에나가 망치로 바닥을 사정없이 내려쳐 골렘들을 바닥에 쓰러트리고, 엘릭이 도끼로 놈들의 팔다리를 사정없이 분지른다! 메테르와 로아의 깔끔하고 우아한 전투에 비교하면 몸에 한기가 돌 만큼 무서웠지만 효과적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골렘 두 마리의 다리가 분질러지고, 한 놈이 추가로 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버둥댄다! “아, 스킬 성장했다!” “됐다, 다들 뒤로 물러나!” 아르페의 마법이 완성된 것은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아르페의 전신에서 빠져나온 마나의 실이 그와 스태프를 한 번 휘감았다가 사방으로 퍼져 유적의 곳곳과 연결되고, 아르페의 의념을 실은 마나가 그 실을 타고 흘러가······. “구현!” [기이이이이이이이] 자줏빛의 마나가 유적 전체를 가득 채운 다음 순간, 일행을 공격해오던 골렘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놈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들이 기어 나왔던 공동으로 다시 되돌아갔는데 그것이 꼭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보였다. 설명을 요구하는 일행에게 아르페는 간단히 설명했다. “우리를 주인으로 인식하게 됐어.” “대단해, 아르페······.” “맞아, 난 대단해.” 겸손 따윈 개나 줘버린 긍정! 아르페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유적 전체가 그에 반응해, 포커스를 그에게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아르페는 유적 그 자체나 다름없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아르페 님이 나나라이 바보드라보다 뛰어난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군요!” “역시 주인님이셔요······.” “버터 그만 발라.” 비록 일행이 시간을 끌어야 하긴 했지만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구축한 마법진의 힘을 제 것으로 만들었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르페는 그것에 묘한 감회를느꼈다. “일단 안으로 가자.” “응.” “아, 그 전에.” 아르페는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골렘들에게 마나를 부여해 회복시켰다. 녀석들 또한 먼저 공동 안으로 들어간 이들과 마찬가지 움직임으로 천천히,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공동으로 향했다. 아르페 일행은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니 빛의 왕국이었다. “아······.” 그토록 화합이 안 되던 일행도 지금만은 하나가 되어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 실체를 알아보는 이든, 알아보지 못하는 이든 이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예뻐라.”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워요······.” 이곳만큼 마기와 마나가 공존하는 곳이 인간계와 마계를 통틀어 과연 존재하기나할까? 마기가 어마어마한 기류를 형성하고, 공동으로 복귀한 서른세 개의 골렘이 그것을 다시 빨아들여 마나로 만들어내니 검은 마기와 백색의 마나가 중간에 맞물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만 같은 불안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르페 님의 말이 맞았어요. 만약 우리가 골렘 하나라도 폭파했더라면······.” “유적하고 같이 날아갔겠지.” 물론 마기를 정화하는 것이 골렘뿐만은 아니었다. 공동의 중앙에는 하나의 제단이 있었는데, 마법문자가 빽빽하게 쓰인 그것이 마기 정화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아르페 님, 이건 봉인에 가까워보이는데요······?” “맞아. 단순히 마계의 중심에 있어서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의 마기가 발산되고있는 게 느껴지지?” “네.” 이 끔찍한 마기를 발산하는 물건이 제단 안에 들어가 있어서 그렇다. 제단은 그것을 최대한 마나로 정화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미처 정화하지 못하고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골렘이며, 그 외 유적에 설치된 아티팩트들이 정화하고 있는 것. “······굉장히 익숙한 기운인데, 오빠. 그리고······ 굉장히 익숙한 제단이야.” 시에나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다른 이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블 하트, 먀.” “정답.” “······선배님.” “그것도, 정답.” 아르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제단에 다가가 그 위에 쓰인 문구를 읽어나갔다. 문구는 하나하나 마법의 힘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 제단에 찾아온 이를 향한 분명한 메시지의 형태를 띠고있었다. “‘나는 나나라이 바보드라, 마족 창조 이래 가장 뛰어난 마법사다.’” “굉장히 재수 없고 익숙해.” “‘그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나는 한 때 인간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고 용사였으며, 그 실력을 고스란히 품고······ 마족으로 변이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 아르페의 눈이 질끈 감겼다. 익숙한 형태의 제단을 감지한 순간 익히 예상하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긍정을 당하니 또 감회가 달랐다.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정체는 바로 마족으로 영락한 선배님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이상 글귀를 읽을 필요도 없다 여겼으나, 그럼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동료들을 위해 뒷부분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어리석은 인간들이 낳은 산물이다. 한 번 만들어진 이상 이블 하트는 세상의 모든 마나를 마기로 바꾸어놓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버리고 만 종족 또한 그러하리라.’” “만들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메테르의 물음이었다. 아르페는 답했다. “마족이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족이라는 얘기야.” “······응?” 메테르는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하리라. 어린 시절부터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난 그녀에게, 인간과 마족의 대립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족이라니······?” 아르페는 그것에 대한 답 대신 제단의 글귀를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태초에는 마족이 없었고, 마기도 없었다. 인간들은 마나의 힘을 보다 파괴적으로 구사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거듭했고, 그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이블 하트였다. 이블 하트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은 마족으로 변화했으며 바라던 대로 강력한힘을 얻었다. 그러나 마기로 각성한 마족들은 끔찍한 파괴본능과 마나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으며, 이윽고 인간들과 대립을 이루게 되었다.’” “맙소사······.” 그것이 마계의 탄생이며, 마족의 탄생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힌트는 충분했다.인간을 마족으로 변화시키는 연구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부터 그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했다. 단지 그럴 리가 없으리라 무의식중으로 부정해왔을 뿐! “‘이곳에까지 이르러 이 글귀를 읽고 있는 자는 필시 내 뜻을 존중하는, 뒤틀린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이일 터. 고하건대 이 끔찍한 물건에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라. 이것을 어찌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겨울여왕도, 내게 마도의 길을가르쳐준 드래곤도,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 엘프들도, 위대한 장인의 종족 드워프들도 수를 내지 못했다.’” 글귀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일행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으나 아르페는 나머지를 전부 읽었다. “‘진실을 깨달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블 하트를 조각내어 봉인하는 것으로 더 이상 마계가 팽창하는 일을 막는 것. 그리고 스스로 마족으로 변화하여 얻은 수명을 모두 바쳐, 마족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뿐이었다. 내가성과를 거두었다면 이곳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니, 이곳을 찾은 이는 과욕을 부리지 말고 조용히 물러가라. 혹여나 마족에게 이 장소를 들키게 된다면 인간계에는 큰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다.’” 끝내 제단의 글귀를 완독한 후, 음, 하고 아르페는 생각했다. 이거 굉장히 불길한 플래그 같은데. [늦었다.] 유적 안으로 누군가가 공간이동을 해왔다는 사실을 아르페가 알아차린 것은 바로그 순간이었다. [이곳에 내가 왔다.] 거봐, 역시나 그럴 줄 알았지. 한숨을 쉬며 돌아선 아르페의 두 눈에 한 명의 마족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유적에 들어오기 전 확인한 전생의 사천왕 서열 1위의 그 남자보다도 오히려 레벨이 높은, 전생의 아르페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마족이었다.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3 > 끝 ⓒ 토이카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4 > 일행이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 벙쪄 있던 바로 그 상황에 유적 안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 당연하지만 그는 마족이었고, 어마어마한 마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용사, 미리 말해두건대 네놈들이 구사한 수단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단, 우리가더 뛰어났으며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다.] “오오, 재수 없어. 나도 한 재수 하지만 너도 대단하구나.” 남자의 모든 것이 시커멨다. 가면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렸을 뿐더러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답답한 가죽옷으로 전신을 꽁꽁 싸매고 있어 일단 제 정체를 감추려는 건 알겠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만물열람으로 감지한 놈의 레벨은 393에 이르러 있었다. 여태껏 용사 파티가 마주했던 그 어떤 적보다도 강하고, 뚜렷한 적의로 무장하기까지 한 적! 분명 위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페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마족에게 물었다. “마왕성 일대 공간을 전부 싸그리 싹싹 훑었구나?” [그렇다. 네놈들은 너무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었어. 멀리 도망가지 못했으리라는전제를 두고 수색하면 제아무리 꽁꽁 숨겨진 유적이라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 없지. 더욱이······.] 가면을 쓰고 있어 알 수 없었지만 아르페는 아마 그가 웃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수백 년 동안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찾아왔던 우리라면 말이다.] “수백 년 동안 감도 못 잡고 있다가 우리 덕에 간신히 찾았으면서 말은 그럴싸하게 잘해요.” [······.] 마왕군 사천왕의 필수 스킬 ‘무심코 몸을 움찔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빈정거림’에 남자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아르페의 말이 사실이었다. 만약 일행이 유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들의 힘으로 유적을 찾아내기까지 앞으로 족히 수백 년은 더 걸렸으리라. 그렇다면 명색이 용사 파티면서 마족에게 이로운 것을 찾아냈다며 괴로워해도 부족할 지경인데 저 자는 뭐가 잘났다고 자신을 이렇게 놀리고 있단 말인가. 또 자신은 왜 순순히 정신적 타격을 입고 괴로워하고 있단 말인가! 그는 이를 빠득 갈며 다시 입을 열어 고했다. [그것은 본디 마족의 것, 인간이 탐을 낼 것이 아니다. 거두어가마.] 남자로부터 미증유의 마기가 쏟아져 나왔다. 레벨 393에 이르는 절정의 강자, 그가 전력으로 투기를 발하는 것이다. 용사 파티는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강적과의 전투에 긴장하며 저마다 병장기를 들었다. 인간계에서 마주했어도 경계해야 할 적인데, 마기로 가득한 유적에서 제단을 수호하며 전투를 벌여야 했으니 난이도가 더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았다. “로아.” 하지만 그 가운데 유난히 자유로운 이가 한 명 있었다. 물론 아르페였다. “먀?” “먹을 수 있겠어?” “아르페!?” 그 공간에 있던 모두가 그의 말을 의심했다. 그러나 오직 한 마리 로아만은 그의 말에 세 개의 꼬리를 열심히 살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수 있어, 먀! 소화하는 데 무지 오래 걸리지만! 먀아! 그리고 주인님이 도와줘야 하는데, 먀?” “좋아, 얼마든지 도와줄게. 그럼 먹어!” “먀아아아아!” “아르페에에에에에!?” 마족은 대체 뭐가 뭘 먹는다는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으나 그 외의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홱홱 저었다. 하지만 먹을 것 앞에 그 누구의 방해도 용납하지 않는 용감한 고양이 로아만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곧장 제단을 향해 입을 벌렸다. [뭣······!?] 그제야 로아가 하려는 짓을 알아챈 마족이 다급히 마기를 뻗어냈다. 본능적으로 놈의 앞을 막아서는 시에나! 비록 레벨은 10 이상 차이 났지만 그녀가 지닌 이블 리플렉터의 힘은 그녀를 마족 앞에 버티고 서 있도록 만들었다. 시에나가 들어 올린 망치가 급속히 거대해지며 빠르게 날아드는 마기의 촉수를 막아냈다. 시에나의 신성력을 이기지 못한 촉수의 끝부분이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는 것을 보며 마족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네년의 힘······ 그것은 무엇이지!?] “큭, 크흑······!” 그래도 오래는 무리였다. 여태 용사 파티가 그래왔듯 가볍게 웃어넘기며 레벨 차이를 무시할 수 있는 적이 아닌 것이다. 놈의 힘은 진짜였다. 시에나가 반대로 부정되어 사라질 수도 있을 만큼 압도적인 마기가 쏟아져왔다! “바디네······ 언니!” “신이시여, 삿되고 일그러진 마물에 저항하는 당신의 총명한 딸에게 축복을!” 바디네의 즉각적인 영창에 시에나 체내의 마나가 극한에 가깝도록 활성화되었다. 모든 마를 배척하는 이블 리플렉터의 마나! 그것이 그녀의 망치를 강화시켜 마족의 마기를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내 그 마기를 분해해 순수한 마나로 되돌리기까지 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것만 같은 광경에 마족이 크게 분노하여 외쳤다. [일그러져? 우리를 일그러지게 만든 것은 너희 인간들이다!] 아르페가 제단의 글귀를 읽는 목소리를 엿들었음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방금 저 자는 그들이 수백 년 동안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흔적을 쫓아왔다고 말했다. 즉 그가 속한 세력, 아마도 전대 마왕의 세력은 이미 마족 탄생의 비밀과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놓고 이제와 우리를 부정하며 멸하기를 원하니······ 실로 어리석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수백 년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을 내가 알 바냐, 새끼야!” “먀아아아아아!” 아르페의 윽박과 동시에 로아가 기어이 제단에서 여태까지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이블 하트를 꺼내어 삼키기 시작했다. 이러다 정말 늦겠다 생각한 마족이 마기의 발산을 멈추고 곧장 공간이동을 구사해 돌진해왔지만 그것을 가만히 놔둘 용사 파티가 아니다! “어림없어!” “큭, 용사······!” 아르페와의 기록을 공유하는 덕분에 그녀 또한 구사할 수 있게 된 스펠 히어로 플래시! 그녀의 등 뒤로 돋아난 찬란한 빛의 날개에 마기가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거기에 바디네의 성녀로서의 힘이 발휘되어 놈을 이중으로 구속한다! [그래봤자······ 네놈들은, 고작 몇 년 온실에서 자라났을 뿐인 애송이다!] 그럼에도 마족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놈의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마기가 주위 마나까지 까맣게 물들여, 놈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알량하게 용사 놀이나 하는 놈들 따위에게······ 방해받을쏘냐!] “큭!?” “내가 버틴다!” 마족의 전신에서 마기가 거대한 괴수의 앞발처럼 솟구쳐 시에나와 메테르를 동시에 쳐냈다! 그러나 엘릭만은 갑옷의 힘을 총동원하여 괴수의 질주를 막았다. 마기의 손톱에 맞서 들어 올린 엘릭의 도끼에 작게 실금이 갔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위를 보호하는 것이 전사의 임무다!” [어리석은 꼬맹이, 길을 터라! 마족의 것을 마족의 것으로 되돌릴 뿐이니!] 엘릭의 도끼날에 마족의 주먹이 그대로 틀어박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첨예하게 다듬어진 마력의 칼날이 놈의 전신에서 솟구쳐 엘릭을 공격해 들어간다! “크흑······!” “에이잇!” 바로 그 순간 메테르의 발차기가 마족의 몸통에 틀어박혔다. 칼날이 솟구치건 가시가 몸을 파고들건 신경 쓰지 않는 신속의 발차기에 마족이 그대로 튕겨나가 유적 벽에 틀어박혔다. [하!] 그러나 놈이 노리던 것이야말로 바로 그 순간! 놈은 용사 파티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바로 그 순간, 아르페가 구사하는 블링크와 유사한 공간이동으로 순식간에 제단 앞에 도달하고 말았다! “먀?” [잠깐, 네년······!] 그러나 놈이 제단에 도달한 순간엔 이미 로아의 입 속에 이블 하트가 들어가 있었다. 정말로 그것을 그대로 먹어치울 심산이란 말인가? 지극히 당황한 마족이 손을 뻗어 로아의 멱살을 잡으려던 바로 그때. “먀아······ 꿀꺽.” [이럴, 수가······.] 설마 정말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삼켜버릴 줄은 몰랐던 마족은 눈앞에서 이블 하트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허탈해져 그 자리에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로아의 배를 가르고 다시 꺼낼 수는 있겠지만 그땐 순도가 훨씬 떨어져 있을것임에 분명하지 않은가! [무슨 짓을!] “무슨 짓?” 마족의 말에 아르페는 실소를 짓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음에도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그저 어리석고 우스울 따름이었다. 이블 하트를 꺼내었음에도 제단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고, 던전 또한 유적에 가득 차오른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단지 그 대상이 이블 하트의 마기가 아닌 이 유적에 침입한 마족의 마기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이런 짓이지.” 아르페의 손이 까딱이자 제자리에 위치해 있던 33개의 골렘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마족을 노려보았다. 아르페 일행마저 시간을 걸려 처리해야 했던 골렘들이다. 제아무리 레벨이 높다 해도 만만한 적은 아닐 터!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골렘의 무력이 아니라, 그 골렘들의 몸통에 새겨진 마법회로가 마족의 마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구속이 된다! [네놈······ 내 마기를! 어떻게 유적의 힘을!?] 마족 놈은 이 유적이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이며 이곳에 이블 하트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지만, 비록 이블 하트가 사라졌다 해도 유적의 힘은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마족 놈은 그제야 유적의 위험성을 피부로 실감하게 된 모양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 늦어 있었다. 애초에 놈이 일행을 쫓아 넙죽 유적 안으로 들어온 시점에서 게임은 끝이었다. “아니, 생각해 봐. 너희는 병신이라서 수백 년 동안 유적을 못 찾았잖아. 그런데 난 너무 대단해서 유적을 바로 찾았잖아? 그러면 이 정도도 할 수 있는 게 당연하지않겠냐? 설마 아무 생각 없이 개돌한 건 아니지? 그치?” [큭, 크으으으으으윽!] “아르페 진짜 재수 없다.” “그게 멋진 점이죠!” 마족이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몸을 뒤트는 동안에도 골렘들은 놈을 포위하고있었다. 그 사이 바디네는 상처 입은 파티 멤버들을 치유하고 원기를 북돋웠다. “내심 한 명 기어들어와 주길 기대하긴 했는데, 설마 정말로 들어올 줄은 몰랐어.역시 마족은 함정인 줄 알면서 돌진하는 바보 같은 면이 한둘 정도 있어야 재밌지.” 인간입장에서 말이야, 하고 히죽 웃으며 아르페가 품에서 마도서를 꺼내어 펼쳤다. 스태프가 허공으로 떠올라 밝은 자줏빛 마나를 토해냈다. “여긴 이제 내 영역이야. 멋대로 침입한 손님은······ 죽어줘야겠지?” [기이이이이이이이이!] 아르페의 신호에 맞추어 골렘들이 일제히 마족을 습격했다! 분명 일행을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골렘의 움직임은 느릿느릿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놈들은 지금 마치 메테르의 가속을 공유 받은 것처럼 기민하게 놈을 덮치고 있었다! “주인님, 도와줘어먀! 이거 너무 커다래!” “안 그래도 지금 시행 중이야. 당장 못 삼키는 건 일단 토해내.” “먀아아.” 여태까지 먹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물을 삼켜 괴로웠던 것인지, 로아의 눈가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물론 그 정돈 아르페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마도서를 펼친 것도 그래서였다. [설마 그 마도서, 티에나의 것이냐!?] “역시 티에나는 너희 파벌이었구나.” [큭······! 역시 네놈들이 티에나를 죽였던 것인가!] 자신에게 쇄도해오는 골렘의 무리에 맞서 마기를 폭발시키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치는 마족. 마기를 미처 정화하지 못하고 세 개의 골렘이 즉각적으로 터지고 말았지만 아르페는 이미 그것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네 의사는 묻지 않겠어. 그러면······ 마지막 실험을 개시해볼까.” 마도서가 부르르 진동하며 허공으로 반쯤 떠올라, 유적 전체와 공명을 일으켰다. 마도서가 어떻게 개서되었는지 그제야 깨달은 마족의 두 눈이 크게 뜨인 다음 순간. “모든 것은, 원래 있었던 모습으로, 돌아가라.” 마기와 마족의 비밀이 밝혀져 비로소 완성된 마법 ‘재생’의 주문이, 아르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5 > 그것은 기적이라는 말 외의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큭······ 크하!?] “먀아아아아.” 검은 빛으로, 자줏빛으로, 그저 밝고 투명한 빛으로, 마도서가 뿜어내는 마나의 질이 순식간에 몇 번이고 뒤바뀌었다. 마도서의 변화에 유적도 발을 맞추었다. 본래동일한 목적을 갖고 설계된 아티팩트이기에 공명도 쉬웠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지금 마도서와 유적은 하나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아르페의 영창! 마법은 순조로이 완성되었고, 그에 따라 마기와 그것을 품은 존재가 동시에 변화하고 있었다. 로아는 자신이 미처 소화시키지 못하는 마기가 마나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안도했으며, 마족은 자신의 존재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경악해 비명을 내질렀다. “어쨌든 이건 선배님 덕에 완성된 마법이야. 어째서 방향성이 같은가 했더니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어. 차이점이 있다면 선배님은 오로지 순수한 마기의 정화를, 나는 마기를 품은 존재의 변화만을 추구했다는 것이지만······.” 그 두 가지가 이제 하나가 되었으니 마법은 비로소 완벽해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본래 아르페와 그의 마도서의 방식으로는 그 존재의 기록을 상당부분 훼손할 수밖에 없었다. 마기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기에, 대상이 마기를 모두 소진한 틈을 노려 일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이젠 그것이 틀렸음을 안다. 아르페는 마족을 인간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족을 인간으로 되돌려야 했던 것이다. 유적에 숨겨져 있던 비밀은 확실히 토악질이 나올 만큼 역겨웠다. 전대 용사이자 메테르의 선조는 아르페보다 먼저 그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스스로 마족이 되었고, 아르페는 그와는 다른 이유로 마족의 인간화를 연구했으며 끝내 이곳에 이르렀다. 비록 과정은 달랐으나 둘의 마음은 이곳에서 일치되었다. 그 짜증나는 선배와 마음이 일치했다는 것은 역겨운 일이지만······ 그는 옳았고, 아르페 역시 결과적으로 옳은 길을 걸은 셈이 되었다. 어쩌면 아르페가 고유능력으로 세월을 거슬러 용사의 입장에 서게 된 것 역시 끝내 이곳에 이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음, 역시 그것까진 아니겠지. 아르페는 그저 안온하게, 평화롭고 조용한 낙농업 라이프를 즐기고 싶을 뿐이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원하는 이들과 함께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마법을 오롯이 완성시켜야 한다. 선배가 쌓아둔 기록과 아르페가 쌓아온 기록을 합쳐 세계에 새로운 법칙을 새긴다! [마족의 숙원을 앞두고······ 이까짓 마법에 굴복할 줄 아는가!] 스스로의 기록을, 존재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마족의 몸이 둥글게 굽어졌다. 골렘들의 공격은 더 이상 개의치 않고, 그저 두터운 마기의 방어막을 만들어내 스스로를감쌌다. “그렇게 보호하겠다 이거지. 아니, 그대로 도망칠 생각인가?” 정답이었다. 마족은 이 유적 내에서는 자신이 용사 파티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절절히 깨달았고, 당장 이블 하트를 회수하는 것보다도 우선 물러섰다가 나중에 상대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더러운 인간의 종자들! 진실을 깨달았음에도 오직 제 뜻만을 고집하는 저열하고더러운 자들! 네놈들을 내가 반드시 멸하고 말리라!] 놈의 몸통을 감싼 거대한 마기의 구체가 수십 개로 분열했다.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것은 강대한 힘에 감싸여 하나도 쉽게 막아낼 수가 없었다. 구체 중 하나에 숨어 일행의 포위를 피하고 빠져나가려는 속셈이겠지만, 놈은 가장 어리석은 수를 둔 셈이다. 아르페의 만물열람을 속이려거든 구체 수십 개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어딜.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여도 나갈 땐 아니거든.” [큭!?] 아르페가 히어로 플래시의 힘을 담아 있는 힘껏 쏘아낸 마나 스트링이 구체 중 하나를 타격하자 그 안에 숨었던 마족의 모습이 드러나며 나머지 구체가 모두 펑 터져사라져버렸다. “정답. 어디서 야바위야, 야바위가.” [크아아아아아아아!] 웃음마저 나올 만큼 유쾌한 광경이었으나 타격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 마족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면 어느덧 놈의 가면이 벗겨져, 검고 추악하게 물든 마족의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 있었다. 물론 놈은 아르페와는 면식이 없다. 이제와 또 다른 뒷설정이 밝혀져도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어떻게 알았지!?] “메테르, 조져!” “응!” 히어로 플래시가 마족에게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메테르 역시 자신의 바스타드에 눈부신 빛을 두르고 놈에게 돌격했다. 마족은 그에 이를 악물며 메테르에 맞섰다. [더러운 배신자의 후손! 죗값은 네년 또한 공평하게 치러야 한다!] “선조님 같은 건 알 바 아냐!” 제아무리 아르페의 마법에 당하고 있다 해도 그의 무력이 당장에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는 것! 그가 내지른 주먹 위로 겹쳐 생성된 마기의 손톱이 히어로 플래시와 부딪혀 유적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충돌을 일으켰다. 그 폭발음 속에서 메테르가 입술을 짓씹으며 외쳤다. “다들 도와줘! 아르페의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만 버텨내면 돼!” “흐으으으읍!” 메테르가 놈을 막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사이 시에나와 엘릭 또한 그녀에게 합류했다. 메테르와 맞서는 사이 망치와 도끼에 흠씬 두들겨 맞은 마족의 얼굴에 극심한 분노가 어렸다. [비겁한 인간들 같으니!] “좋아, 그대로 가만히 있어!” 마도서와 유적의 공명이 점차로 심해져 갔다. 마기와 마족의 정화가 이루어지며, 동시에 마도서와 유적의 기록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물론 그 주체는 마도서다. 지켜야 할 이블 하트를 잃어 굳이 모습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유적이, 새로운 주인인 아르페를 따라 그 힘을 마도서 하나에 압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먀아아아······ 끄으으윽.” 마족과 용사의 투쟁, 유적과 마도서의 융합! 그야말로 용사의 서사시에 어울리는장엄한 광경을 배경으로, 배탈이 난 것처럼 복부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로아의 입에서 귀여운 트림 소리가 나왔다. “······.” “······.” 일행 중 일부가 흰 눈으로 노려보는 가운데 로아가 벌떡 일어나 기운차게 외쳤다. “소화됐어, 먀아! 놓친 건 아깝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는 만큼은 다 먹었어, 먀!” [소화······!? 아니, 말도 되지 않는다. 이블 하트는 영구불멸하며 모든 마기의 원점이 되는 아티팩트, 고작 개인이 집어삼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먀아아, 당분간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먀아아.” 로아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미끈한 복부를 쓸어내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엔 마족을 쏘아보며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래도 디저트는 별개, 먀.” “로아, 넌 강해졌다. 돌격해!” “먀!” 농담이 아니다. 로아는 정말로 터무니없이 강해졌다. 아르페는 당초엔 그저 이블 하트가 세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한 데 모인 지금 보니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로아의 포식에 의해 정화되어 녀석의 뱃속에서 하나로 합쳐진 이블 하트, 이젠 이블 하트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된 아티팩트는 로아의 체내에 완벽히 융화되어 안착했고, 지금은 어마어마한 마나를 끊임없이 토해내 그녀를 강화하고 있었다. 단순한 마나의 양으로만 따지면 아르페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는데, 아르페의 마나가 전생의 마왕을 압도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있으리라! “먀아아아아아아아!” [이 년, 설마 이블 하트를 모두 네년이 먹어치운 것이냐! 지저로 향했던 내 동포들이 죽음을 당한 것도 전부 네년들의 짓이었느냐!] “어, 설마 했는데 정말 그 함정 밟았어?” 아르페가 깔깔 웃자 마족의 얼굴에 더한 분노가 어렸다. 보통 용사 이야기에선 이럴 때 적의 슬픔에 조금이나마 동정을 느끼거나 손속이 약해지거나 할 텐데 이미 마왕군 사천왕 메뉴얼을 마스터하고 있는 아르페에게 한해선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수백 년을 마계에서 굴러먹었다는 마족들이 정말 그걸 당하면 어떻게 하냐. 바보냐?” [크흐으으으!] 지저세계에 있던 제단이 무너지는 순간 발동되게 되어 있던 붕괴 마법, 그 마법에간섭해 붕괴를 다른 침입자가 들어올 때까지로 미루어두고 내심 기대했었다. 니로타시드의 신전 또한 일부러 방치해두고 지저에 대한 힌트를 남겨두었는데, 아무래도 이 마족 집단은 니로타시드의 결계가 풀리자마자 그곳으로 찾아가 미끼를넙죽 물었던 모양이다. [어째서······.] 마족은 자신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인간계와 마계의 이블 하트를 모두 용사 일행이 확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이를 상실했다. 실은 겨울여왕과 선대 용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결과만을 확인한 마족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수백 년을 준비해온 우리가 있거늘 어째서 네놈 따위가 상황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단 말인가!] “아, 그거 귀찮게 자꾸 해설해줘야 하냐. 너희가 모자라서 그런 거라니까.” [죽여 버리겠어!] “먀아아아아아!” 마족이 용사 일행을 밀어내듯 피워 올린 마기의 손톱에 로아가 돌격했다. 이블 하트를 먹어치우기 전이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밀렸을 그녀가 지금은 단숨에 놈의 손톱을 깨부수고 놈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에 묻은 놈의 마기를 핥아 먹으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맛있긴 한데 많이 먹지는 못하겠다, 먀아.” “괜찮아, 어차피 놈은 실험체니까.” 놈의 마기는 로아와 접촉하는 것만으로 녀석에게 흡수되어 사라진다. 그로 인해 놈의 공격은 1차적으로 위력이 줄어들고, 2차적으로는 로아의 마력을 회복시켜 그녀를 강화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지금 이 순간 로아의 존재는 시에나 이상으로 마족에게 치명적인 독이었다. [크······ 크흐!] 어디 그뿐이랴? 유적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어 가는 것에 맞추어 마도서가 뿜어내는 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물론 놈의 힘은 그에 맞추어 서서히 쇠하고, 마족의 육신은 그의 의지를 부정하고 조금씩 인간의 육신으로 바뀌어 가며 그에게 고통을 안겼다. 마족과 마기를 태초에 있었던 모습으로 되돌리는 대마법, 용사, 성녀, 이블 리플렉터와 탐식의 마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사 파티는 그야말로 용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힘과,마족을 멸하기 위한 힘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힘과 레벨을 믿고 홀로 유적에 들어선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했던 것이다. [좋다, 인정하지.] 극한의 분노에 이르러 오히려 놈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뭔가 있어 보이는 적의 전매특허, ‘밀리는 상황에서 갑자기 여유로워지기’ 스킬이었다. [네놈들은 강적이다. 전대의 용사보다도, 그 어느 때의 용사보다도 더욱 마족에게 위협적이며 이미 마족을 인간으로 영락시킬 수단까지 확보했다······ 그렇기에칵!?] “죽엇!” 보통 저런 대사를 내뱉은 다음에는 굉장히 짜증나는 일을 벌이기 마련이다. 몇 년간의 모험을 통해 그것을 익히 깨닫게 된 메테르가 대사를 치느라 텅 비어 있던 놈의 목구멍에 바스타드를 꽂아 넣었다. 놈의 마기는 이미 상당부분 마법에 의해 정화되었고, 그나마 남은 것도 심장부로 쏠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목의 방비는 취약했다. 메테르가 굳이 놈의 목을 공격한 것도 그래서였다. [꺽, 꺼헉!] “흡!” 마족이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그녀는 그대로 검을 거세게 휘둘러 놈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머리통을 날렸다. 미처 할 말을 다 하지 못해 분노와 경악과 당황이 사이좋게 얼버무려진 그 머리통은, 직후 시에나의 망치에 의해 육편이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먀! 저놈 심장 터지려고 하는데, 먀아?” “괜찮아!” 놈이 준비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옛날용사 이야기의 사천왕도 하지 않을 진부한 마법이었다. 그런데 아르페가 그것에 대비를 하지 않았을 리가! 놈의 의지가 사그라진 탓에 놈의 육신은 더는 재생의 힘을 거부하지 못했고,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마족의 심장은 다음 순간 마법에 휩싸여 순수한 마나로 뒤바뀌었다. 그 결과, 어떤 화학작용이 있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그 자리에는 393 레벨에 해당하는 격과 기록을 고스란히 남긴 마석이 남았다. “좋아, 그러면.” 아르페는 마석을 손에 쥐며 말했다. “이제 튀자!” < Chapter 32. 나나라이 바보드라 - 5 > 끝 ⓒ 토이카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1 > 마족의 죽음을 확인한 아르페는 곧장 공간이동을 발동했다. 블링크 부츠의 능력으로 자신과 일행을 모두 그곳으로부터 한참은 떨어진 마계의 공터로 옮겨놓은 것이다. 일행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곧장 행한 일이었다. “여, 여기는?” “뭐야? 방금 전투 끝난 거였어······?” 아르페와 메테르를 제외한 일행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분명 처음으로 조우한 강적과 만나 전력을 다해 싸우려고 했는데, 아르페가 뭔가를 하나 싶더니 금세 수세에 몰린 마족이 폼을 잡으며 비장 카드를 꺼내들려 했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메테르가 놈을 쳐죽였다. 그리고 아르페가 마석을 주웠고, 일행은 마계의 공터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음? 으으으으음?” “무언가 석연치 않아요. 응당 있어야 할 과정을 몇 개는 그냥 건너뛴 느낌이에요!굉장히 석연치 않은데 일이 잘 끝났으니 뭐라고 따질 수가 없네요······!” “다들 시답잖은 소리 관두고 모여. 여기라고 안전한 게 아니거든.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의 결계는 마족이 침입한 순간 뚫렸고, 인근의 마족들도 그것을 단박에 알아차렸을 거야. 하지만 정작 유적은······.” 아르페는 시선을 돌려 그들이 떠나온 자리를 확인했다. 역시나, 모든 힘과 기록을마도서에 전달한 탓에 유지력을 완벽히 잃은 유적은, 아르페 일행이 떠나는 것과 거의 같은 타이밍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주위로 마족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저 마족들은 한때 어마어마한 마기가 있었던 흔적만이 남은 폐허를 보며 경악하고 분노할 터였다. “그러니 곧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하겠지. 아까 우리를 찾아왔던 그 마족 놈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여기서도 빨리 이동해야 해. 골렘들은 이쪽으로.” [기이이이이이이] “골렘이잖아!?” 놀랍게도 아르페는 자신의 일행뿐만 아니라 마족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열일곱 개의 골렘들까지 끌고 왔다! 이 녀석들은 마기를 빨아들여 움직이기 때문에, 마계 어디에 있든 마족이 근처에 있다면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한 개 한 개 레벨 370을 넘기는 고레벨의 골렘인데 유적에 방치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우리를 보호해라. 이곳으로도 마족들이 당도할 터, 부서지는 그 순간까지 마족들을 상대하도록.” [기기기기기기] [기이이이기기] 아르페가 골렘들에게 마나와 명령을 부여하는 것을 보며 메테르가 말했다. “아르페, 그러면 이젠 어떻게 할 거야? 원래 유적에서 마지막으로 레벨을 키워 그대로 마왕성으로 돌격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본래 경험치를 얻으려던 것이 그리 원하지도 않았던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족은 본디 인간이었으며 마계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에너지, 마기의 폭주로 형성된 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모든 일이 이렇게 뒤틀렸다는 사실은 인간을 대표하여 마왕을 멸해야 하는 용사 파티에게 있어선 기운이 빠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메테르, 그렇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뀌지는 않아.” 아르페의 말은 얼핏 차갑게마저 들렸지만 어디까지고 진실이었다. “저들이 한때 인간이었다고 해서 화합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설령 저들이 인간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우리가 용사고, 저들이 마족이라서 싸우는 게 아냐. 그냥 놈들이 우리의 적이라서 싸우는 것뿐이지.” 마계의 인간계 침공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왕은 훌륭한 셰프 정신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한에 가깝게 성장한 용사를 자신이 나서 짓밟기 위해서지, 용사와 소꿉놀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백 년 전부터 이블 하트를 노리고 움직인 적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러면 놈들이 그걸 왜 노렸겠어?” “저 마족은 그것까지 얘기해주기 전에 죽었는걸.”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나라이 바보드라, 전대 용사가 어째서 이블 하트를 봉인했는지를 떠올려 보면 되는 것이다. “놈들의 목적은 인간계의 마계화야. 모든 인간을 마족으로, 모든 마나를 마기로 바꾸려 하는 거라고. 이블 하트의 힘이라면 실제로 가능했을 것이고······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그놈들에게 제일 거슬리는 게 뭘까.” “아르페랑 로아?” “바로 그거야.” 처음부터 그것을 의도하진 않았지만 현 시점의 아르페와 그의 마도서는 마족들의대척점에 서 있다. 마기를 먹어치우며, 이블 하트를 먹어치운 로아 역시 마찬가지. 그들이 존재하는 한 마족들의 계획은 언제든 실패할 가능성이 있었다. “수백 년도 더 전에 선조들이 마족들을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가 놈들한테 심정적으로 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어.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도 않은 일 때문에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그냥 우리를 죽이려는 놈들을 다 패주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지?” “조금 지나치게 간단한 것 아닐까 싶긴 하지만, 응······.” 아르페의 목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흔들린 적이 없다. 지금은 단지 그 과정에 색다른 양념이 더해졌을 뿐이다. “주인님, 지금 우리의 힘으로 마왕을 꺾을 수 있을까요?” “아슬아슬해. 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죽을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이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물론 전생의 용사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악한 조건에도 개의치 않고 마왕성으로 돌격했지만 그 대가로 아픈 꼴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아르페 일행은 아니다. “플랜A가 무너졌으니 다음은 플랜B로 가는 수밖에.” “어라······ 플랜B가 있었나요?” “방금 만들었어.” 마족들은 이미 고원에 있는 아르페 일행의 기척을 감지했다. 마왕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과거 사천왕 최강자였던 그 남자의 기척은 충분히 느껴졌다. 만약 지금 놈과 부딪힌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겠지만······. ‘놈하고 싸우고 있으면 마왕이 어떤 식으로는 반응을 보이겠지. 원래 사천왕이 다쓰러질 때까지 나서지 않는 것이 놈이지만······.’ 마왕성이 무너지고, 마왕의 절대적인 우위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에 와선 마왕이 어떻게 행동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르페는 전대 마왕 세력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전생의 상식으로 마왕군을 판단하려는 시도를 깔끔하게 접었다. “마계에는 미개척 지역이 많아. 설마 그곳에까지 이블하트가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만······ 레벨 업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곳이지. 이젠 거기로 가보는수밖에 없어.” 말하자면 최종보스를 클리어한 후 후일담으로 언급이나 되어야 할 곳을 미리 가자는 셈이었다. 원래 없어야 할 적까지 나타난 마당에 그게 무어 문제가 되겠는가! 어쩌면 그들이 향하는 곳에 전대 마왕의 세력이 주둔해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온다. 서두르자.” “웅.” 아르페는 골렘들만을 남겨두고 재차 블링크를 발동했다. 한 번, 두 번, 마왕성의 영역에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다. “아르페, 한 놈이 쫓아와.” “칫.” 그 한 놈이 누군지는 굳이 그녀에게 들을 것도 없었다. 아르페는 최대한 마나의 흔적을 지우며 블링크를 반복했지만 적과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근처에 도달했다. [멈춰라.] “와오, 여전히 재수 없는 목소리라니까.” 아르페는 쳇 혀를 차며 다시 블링크를 구사했다. 멈추란다고 멈춰줄 리가 있겠는가! [그 인상착의······ 분명해, 네놈이 바로 용사 아르페구나! 네가 바로 에트나를 속인 인간인가!] 어떻게 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챘는가에 대해선 새삼스레 놀랍지도 않았다. 유적에 들어왔던 마족도 그들을 바로 알아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러고 보면 이 남자가 에트나를 좋아했었지. 에트나의 거침없는 애정공세와 저 남자의 분노어린 시선, 그 모두로부터 피하고 싶어 했던 자신의 모습까지 어쩜 이렇게 그리움의 조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추억이 있을 수 있는가. 아르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과거의 추억을 다시금 의식 너머로 묻어버리며 재차 블링크를 시전했다.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칠 수 있을까. 감히 이 페이트라 님과 경주라도 해보겠다는 것이냐!] 그러나 아르페가 일행을 끌고 블링크를 거듭해, 마왕성 폐허의 일부도 보이지 않게 된 시점까지도 남자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아르페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지금 마계에 있는, 그것도 마왕의 명을 따르는 사천왕은 저 남자 하나뿐일 텐데. 유일한 전력을 저렇게 쉽게 떠나보낸다고? 자신의 곁에 붙들어 매지는 못할망정?’ 아르페는 문득 멈추어 섰다. 분명 마계의 일부이지만 마기가 희박하여 고위 마족들은 잘 찾지 않는 황무지였다. 대체 블링크를 얼마나 연발한 것인지 그와 함께 이동한 일행의 표정도 조금씩 메스꺼워보였다. “아르페, 뭔가 생각난 게 있는 거야?” “아니, 단지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마 우리가 마왕성을 폭파시켜서 마왕이 성을 완전히 떠나버린 건가?” “그러면 어디에 가 있는데?” 상상을 초월한 용사 파티의 힘에 쫄아서? 그게 아니라면 여태까지의 나태했던 자신에 반성하며 수개월 간의 수련을 거쳐 골든 마왕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그도 아니라면 혹여 전대 마왕의 세력에게 급습당해 목숨이라도 잃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마왕이 근처에 없는 게 확실하다면······.” 저 남자 한 명뿐이라면 그들이 굳이 이렇게 도망 다닐 필요가 없다. 아르페는 스태프를 꽉 쥐며 뒤돌아섰다. 두 눈을 새파랗게 불태우며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남자의 면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해치우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분노에 굴복하라, 얼어붙어라! 페이트라 데아레토 테코투스의 이름으로 네놈들을 징벌해주겠다!] 전생의 사천왕 서열 1위, 페이트라. 유적에서 대마법을 구사하느라 지친 아르페에게는 쉽지 않은 상대지만 지금 아르페는 혼자가 아니었다. 까딱하다간 이블 하트를 먹어치우고 강해진 로아 혼자의 힘으로 녀석을 끝장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설마 우리가 유적을 탐사하고 나오는 동안 더 강해졌을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일단······.’ 아르페의 눈이 자줏빛으로 빛났다. 놈이 쏘아내는 거대한 냉기의 안개를 어렵지 않게 차단하며 만물열람을 발동한 그의 눈에 페이트라의 모든 정보가 비추어졌다. [페이트라 데아레토 테코투스] [레벨 ? 390] [마족] 역시 놈의 레벨은 바로 얼마 전 싸웠던 마족보다 낮았다. 여태까지 없던 고유능력을 개방한 것도 아니고, 극적으로 종족이 개변한 것도 아니고, 이대로 싸우면 어떻게든 일행이 놈을 이길 수······. ‘잠깐.’ 아르페의 사고가 그대로 멈추었다. 이제는 육안으로 선명히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리가 줄어들어, 놈의 푸른 피부 얼굴에 돋아난 솜털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목에 족쇄가 없는 거지······?’ 아르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놈이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해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만물열람으로 놈의 정보를 확인해도, 마력으로 놈을 샅샅이 훑어도. 놈은 마왕의 고유능력에 지배되고 있지 않았다.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1 > 끝ⓒ 토이카<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2 > [그것이 너에게 합당한 모습이다!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라!] 아르페가 자신의 마력과 냉기에 겁을 먹은 것이라 확신한 페이트라가 한 손을 뻗어 냉기를 방출했다. 과연 그 힘은 무시무시하여, 일시에 평원과 하늘이 통째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아르페 일행에게까지 덮쳐오는 냉기! 만약 숨을 들이쉬거든 허파까지 얼어붙을 것이다. 그러나 일행이 피해를 입기 전 레이제나가 한 손을 들었다. 그녀 주위로 놈이 다루는 것과는 질이 다른 냉기가 퍼져 나와 놈의 그것과 대치했다. “마족의 독자적인 힘, 순수한 마기로 자연을 일그러트림. 하지만 눈속임에 불과, 진정한 겨울의 힘이 아님.” [뭣······?] 페이트라가 경악하며 멈추어 섰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아무래도 에트나에게 겨울여왕의 유적에 대해 알려준 이가 페이트라는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감히 냉기의 힘으로 내게 이겨보겠다는 것인가?] “요즘 이상하게 활약 무대가 많음. 이러다 나 죽음?” “안 죽어, 안 죽어. 그만큼 네가 파티에 필수적인 존재라는 얘기지.” 애초에 겨울여왕의 유적으로 향했던 이유가 에트나와 페이트라를 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아르페는 스태프를 들어 올려 레이제나의 마나를 보조하며 피식 웃었다. 한편 페이트라는 아르페의 방대한 마력의 편린과 스태프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경악했다. [과연, 마왕성을 날려버릴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는 얘기인가······!] 말은 바로 하라고 마왕성을 날려버릴 정도의 실력은 마왕군 내에서도 마왕 정도가 아니면 없었다. 아르페는 놈에게서 마왕군 사천왕의 필수 스킬 허세의 흔적을 느끼며 문득 그리워지고 말았다. [좋아, 어디 한꺼번에 덤벼 보아라! 전부 통째로 얼려주지!] “레이제나, 이 냉기 더는 어떻게 안 돼?” “왜곡되었지만 그렇기에 강함. 이 이상의 중화는 불가능.” 페이트라가 강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놈의 존재만으로 얼어붙는 대기에 그의 적이 행동에 기본적인 디버프를 받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일행에게 레이제나가 있어 놈의 냉기를 자신의 냉기로 뒤엎어 일행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피부에 서리가 끼는 것을 보면 사천왕의 자리를 노름으로 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테르, 싸울 수 있겠어?” “응, 무리 없어. 견딜 수 있어.” “좋아. 이걸 써.” “이건······.” 평소의 바스타드를 꺼내려던 메테르에게 아르페가 품에서 롱 소드 하나를 꺼내어건네었다. 그것은 과거 에트나가 아르페에게 선물하며 메테르에게 주지 말고 꼭 네가 쓰라며 다짐했던 바로 그 불꽃의 힘을 담아낸 검이었다. 아르페가 지닌 강화의 힘으로 세 번 연속 강화하고, 오며가며 모은 마석으로 4차 강화까지 거듭한 탓에 처음 검에 담긴 불꽃의 힘이 성냥이었다면 지금은 지옥불 정도로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어차피 너도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지, 에트나?’ 만약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다른 것으로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그 여자가 아르페한테 선물한 검을 내가 쓰는 건······.” 메테르는 순간적으로 굉장히 미묘한 얼굴이 되었으나 감정에 휘둘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일단 그것을 덥석 쥐었다. 검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당장에 그녀를 덮쳐온 냉기를 물러나게 했다. [그건!?]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의 근원을 알아본 페이트라의 낯빛이 대번에 바뀌었으나 메테르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가속으로 놈에게 돌진했다! “미안하지만 빨리 정리할게!” [그 패기만은 인정해주지!] 메테르가 놈을 습격하기 직전, 대지에서 거대한 얼음의 송곳이 솟구쳤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피해낸 그녀였으나 페이트라의 노림수는 처음부터 그 움직임이었음에 분명했다. 손을 들어 냉기를 뿌리며 물러나는 페이트라의 눈앞으로 솟아난 회오리바람이, 허공으로 점프한 메테르를 덮친다! “하!” [큭!?] 그러나 허공중에 머물러 있다고 운신이 자유롭지 못할 메테르가 아니었다. 그녀는 히어로 플래시의 힘을 담아 펼쳐낸 빛의 날개의 힘으로 쏜살같이 앞으로 돌진해 냉기의 결정이 섞인 회오리바람을 피해내곤, 바로 페이트라의 전면에 도달해 불꽃의 검을 휘둘렀다. “흡!” 그녀의 터무니없는 반응속도에 놀란 페이트라는 냉기의 방어막으로 그것을 막아냈지만 그것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고 말았다. 페이트라는 그것이 불꽃의 검이 뛰어나서도, 자신의 컨트롤이 떨어져서도 아닌, 지금 이 공간에서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냉기를 다루며 그의 영역을 빼앗고 있는 마도사의 존재 탓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어디서 얄팍한 수를······!] “한꺼번에 덤비라고 한 게 누군데. 엘릭, 시에나. 세릴, 너도.” “준비되었습니다.” “그냥 놈을 훼방 놓는 데에만 집중해. 알아듣겠지?” “알았어, 오빠!” 놈이 냉기를 다루는 방식은 바로 마기의 온도 자체를 극한에 가깝게 낮추는 것. 타고나기를 냉기에 잘 버티는 육신으로 타고나, 놈의 체외로 방출되는 마기뿐만 아니라 놈의 체내를 흐르는 마기도, 놈의 뼈와 근육과 피부마저도 모두가 극한의 냉기에 보호받고 있었다. 따라서 놈에게 상처를 입히려면 일단 그 냉기의 갑옷을 뚫어야 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그것이 가능한 이는 불꽃의 검을 들고 있는 메테르뿐이었다. “디바인 그라운드!” “어스퀘이크!” 그렇기에 시에나와 엘릭은 곧장 놈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메테르와 페이트라가 대치하고 있는 사이, 놈의 냉기가 그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해오지 못하는 틈을 타 접근하여 지형 일대를 무너트리는 것! [잔챙이들이!] 대지가 흔들려 균형을 잡지 못하게 되자 혀를 차며 마력으로 자신의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리는 페이트라. 놈의 손짓에 얼어붙어 갈라진 대지 곳곳에서 얼음의 창이솟구쳐 시에나와 엘릭을 튕겨냈다. 그들은 냉기에 오래 견디지 못했기에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빠르게 물러났다. 그리고 메테르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놈의 마력과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읽어내며 빠른 시간 뇌 내에서 자신의 대처를 시뮬레이션하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잔챙이들의 공격에 그렇게 흔들리는 걸 보니 너도 그리 대단하진 않은가 봐!” [어설픈 도발이구나!] 페이트라의 전신에 일던 냉기가 순간 거대한 마물의 손톱과 같은 형상이 되어 메테르를 후려쳤으나, 그녀는 불꽃의 검에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간단히 녹여버렸다. [과연 그 가짜 불꽃으로 어디까지 얼음을 녹여낼 수 있을지 시험해보자!] 페이트라는 그제야 단순히 냉기를 뿌려내는 것으론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입으로만 빠르게 주문을 외워 허공에 거대한 얼음의 검 여섯 개를불러냈다. 하지만, 그것조차 놈의 오산이었다. “시험 싫어!” 놈이 마법을 영창하는 그 짧은 틈이 메테르에게 있어선 영원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가속을 발동해 놈의 지척에 도달한 메테르가 그대로 롱 소드를 놈의 복부로 찔러넣었고, 페이트라는 그것을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었다. 관통은 이루지 못했으나 상처를 피할 수는 없어, 금세 푸른 피가 배어나왔다. [크헉!] 놈은 피를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처를 입어도 워낙에 피가 차가워, 조금 흐르다 말고 금세 얼어붙어 상처부위에 달라붙기 때문에 피가 흐르는 일을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 레이제나 탓에 그가 다루던 냉기의 힘이 많이떨어졌고, 두 번째로는 메테르가 들고 있던 불꽃의 검이 타격 순간 놈의 몸속으로 강한 열기를 밀어 넣어 피를 녹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녀언!] 타격당하는 순간을 대비한 대피 아티팩트가 발동했다. 놈은 그 자리에 여섯 개의 얼음 대검만을 남겨두고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쳐 메테르로부터 거리를 벌리곤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것은 역시 에트나의 힘이구나! 네놈들이 에트나를 겁박한 거야! 네년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어!] 타격 대상을 잃고 허공에 홀로 내던져진 메테르를 향해 일제히 꽂혀드는 얼음의 대검. 그러나 그것들은 제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다. 그 직전 허공에 내뿜어진 거대한 물의 회오리가 대검을 일제히 튕겨 내버린 것이다! “우리 주인님께선 죄 없는 이를 겁박하지 않으신다!” 세릴의 낭랑한 외침은 그들 바로 근처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아르페에게 명을 받은 순간 허공중에서 거품으로 변환하여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다가왔던 것이다. [뭣······ 인어!?] 비록 스스로의 힘으로 데미지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하다지만 메테르를 보조하기엔 충분한 힘을 지닌 그녀! 한 번 튕겨났던 대검들이 부메랑처럼 다시 메테르를 향해 쇄도했으나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방향을 선회한 물줄기가 어렵지 않게 그것을 튕겨내었다. “어디 이 물도 얼려보시지!” [내가 못할 줄 아는가!] 그는 순간적으로 세릴의 격장지계에 말려들어, 그녀가 쏘아낸 물의 회오리의 지배력을 빼앗아 얼렸다. 지극히 짧은 순간 이루어진 공방이었으나 그것이 메테르에겐 한 번 더 검으로 쑤셔달라는 애절한 몸짓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에잇.” 그래서 그녀는 놈이 원하는 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그 기세까지 더해 불꽃의 검을놈의 턱주가리에 꽂아버렸다. [끄악!] 불꽃의 검은 놈의 턱 밑에서부터 입, 뒤통수까지 관통해 제대로 꽂혀버렸다. 페이트라는 그것을 뽑아내지도 못하고 끔찍한 비명에 울부짖으며 추락했다. 놈의 동선을 따라 차게 식은 푸른 피가 흩뿌려지며 허공에서 얼어붙어, 마치 작은 은하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흐압!” 일단 뒤로 한 번 물러섰던 시에나가 기회는 이때라는 듯이 점프했다. 두 손으로 들고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슬레지 해머를 한 손에 쥐고 빙글빙글 돌려원심력을 얻고는, 그것을 그대로 휘둘러 마악 떨어지고 있던 놈의 턱주가리, 그곳에 꽂혀 있던 불꽃의 검의 검손잡이에 클린 히트! [꾸어어어어어어!?] 추진력을 얻은 검이 기세를 타고 놈의 입 안 더욱 깊숙이 꽂히며 화르륵 타올랐다. 놀랍게도 시에나는 타격 순간 이블 리플렉터로서 지니고 있는 마나를 그 검에 부여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신성의 불꽃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됐다! 조합스킬 '성화'야!” “요즘 우리 애들이 전부 서로의 마나를 이용하는 데에 익숙해진 것만 같은 기분인데······.” 분명 좋은 일이긴 한데 어째 정말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모두의 힘을 하나로합쳐!’같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시작을 자신이 끊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아르페는 적당히 체념하며 한 손을 들었다. [······!?] 메테르가 전면에 나서 놈과 싸우는 동안 일대에 설치한 수십만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일시에 줄어들며 페이트라를 꽁꽁 감싸버렸다. 거미에게 붙잡힌 곤충처럼 숨 쉴 틈도 없이 감싸인 페이트라는 비명조차 마음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몸을 뒤흔들었다. [!?] “수고했어, 다들.” “설마 얘도 인간으로 되돌릴 거야?”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쏟아낸 여파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메테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착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라는 듯한 표정에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전에 확인할 게 있거든.” [읍읍읍!!!] 명색이 사천왕 1위(아르페가 기억하기론)임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잡혀버린 페이트라가, 자신의 정신만은 무너트릴 수 없을 것이라는 듯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저항했다. 그 모습이 꼭 애벌레같았다. “야, 애벌레.” 그러나 이어지는 아르페의 질문에, 놈은 그 고귀하고 드높은 자존심마저 모두 내버릴 수밖에는 없었다. “마왕의 족쇄는 어디로 가고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있냐? 너도 전대 마왕 세력에 가담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 그것은 2회차를 진행하고 있는 만물열람의 보유자에게만 가능한 초특급 유니크 스킬, ‘그,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였다.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3 > “자, 네가 내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한다면 더는 아프지 않게 해줄게.” [!!!!] 페이트라가 격렬한 긍정의 뜻을 표하며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아르페는 페이트라가 꼭 위스프처럼 감정표현을 하는 모습이 제법 웃기다고 생각하며 놈을 감싼 고치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뒈져······ 큭!?] 놈은 마나의 통제권을 되찾는 그 순간 냉기를 쏟아내 아르페를 얼려버리려고 했지만, 바로 그때 고치 전체에 불꽃이 옮겨 붙어 타오르며 놈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마나와 속성의 공유는 우리 파티의 장점이거든. 대단하지?”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냥 불꽃도 아니다. 롱 소드에 깃든 불사조의 화염, 그것에 시에나의 마력까지 더해져 성화에 비슷하게 탈바꿈한 불꽃을 고치 전체에 구현해낸 것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놈의 두 눈에서 푸른 피눈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끄으, 끄흐으으으으으······.] 불꽃은 오래 가지 않아 사그라졌지만 끄트머리에서는 여전히 건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더불어 아르페의 마나는 아직까지 충만한 상태. 스태프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조금 전 이상으로 거대한 불꽃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구현 마법 만만세다. “너도 알겠지만 두 번째 기회는 없어.” 아르페가 짠돌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조금 전과 같은 타격을 받으면 그대로놈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천왕이······ 용사에게 협력할 것이라고 생각했나? 어리석은 용사, 네놈들은 결국 마계의 힘을 넘지 못해 패배할······.] “그것이 네가 모시는 마왕은 아니구나, 그렇지? 마왕이 아니라 마계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 아르페는 그 말을 하며 자신의 목을 매만져보였다. 만약 족쇄를 차고 있었다면 정확히 그쯤에 위치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를 페이트라가 아니었다. [네놈, 어디까지······ 큭, 알고 있는 거지······!] “바로 조금 전 네게 말한 것까지. 마왕은 원래 모든 마족에게 자신의 고유능력으로 족쇄를 걸어 관리한다는 것과, 그 족쇄에 속박되지 않는 전대 마왕군의 세력이 지금 마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정도. 심지어 원래 족쇄에 속박되어 있었어야 할 터인 너도 자유의 몸인 상태라는 것까지 말이야.” [용사 따위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자, 얘기를 계속하자. 아마도 지금 너는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은데 맞나? 기껏 마왕 바로 아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들이 네 자리를 빼앗고, 마왕의 절대지배마저 위태하게 만들었으니까.” [······.] 그것은 어느 정도는 아르페의 추측이 담긴 말이었다. 전대 마왕의 세력이 현 마왕의 간섭을 아예 받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유적에서 해치웠던 마족, 그놈이 페이트라보다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페이트라가 원래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위협 당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 추측이 개입된다만······ 혹시 지금 마왕이 어떻게 된 상태인거냐?” [······!] 크게 뜨인 페이트라의 두 눈을 보아 판단컨대 놈에게 변고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레벨 400에 달하는 그 괴물이 누군가에게 밀릴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아르페는 상황이 제대로 어긋나버린 것에 한탄했다. 전대 마왕 세력, 대체 그놈들은 어째서 전생엔 가만히 있다가 현생에선······. “가만.” 아르페는 그 시점에서 선대 용사,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말을 떠올렸다. 선배는 언제나 자기자랑과 업적을 과시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그가 뚜렷이 ‘마왕을 죽였노라’고 자랑하는 문구가 있었던가? ······없었다. “야, 잠깐만.” 어째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빌어먹을, 아르페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 생각은 순식간에 자라나 아르페의 머릿속에 가득 차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살피는 동료들을 힐끗 돌아보고는, 고치 안에서 트위스트를 추고 있는 페이트라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전대 마왕이 살아있는 거냐?” [······.] 놈은 그 말에 길게 침묵했다. 그러나 어떻게 대답해야 더 아르페 일행을 빡칠 수 있게 할 수 있는지 연구한 끝에, 진솔한 비웃음을 입가에 담아 이렇게 대꾸해왔다.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어쩔 테냐?] “맙소사.” 자신의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는 페이트라의 얼굴과 마주하며 아르페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엔 스스로도 농담 삼아 생각하던 것이었다. 용사가 둘이니 마왕이 둘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 그러나 그 막연했던 상상이 어느덧 몸집을 불려, 끝내 현실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현 마왕이 어찌되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전 마왕은 지금 이 세상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것도 현 마왕보다 확실하게 강한 마왕이! 그렇게 제 잘난 맛에 살던 선배님이 끝내 죽이지 못한 마왕이! 아니, 그보다도 이 선배 자식은 후대 용사를 위해 뭘 그렇게 챙겨놓고 마족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연구를 하느니 하더니 정작 지가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 끝냈었단말인가! 더욱이 이 시간차 공격은 또 뭐란 말인가! ‘잠깐만. 일전에 꾸었던 꿈······ 아마도 전생의 메테르의 기억에서 레이제나가 어떻게 말했었지? 마왕보다 끔찍한 것이 있으며, 그것이 해방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게 전생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그게 어째서 현생으로까지 이어진단 말인가! 알 듯 말 듯 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닥친 상황만 해도 충분히 골이 아팠다. [이 이상 말해줄 것은 없다. 네놈들이 나보다 강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이미말했듯 네놈들은 마계를 뛰어넘을 수 없어. 결국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돌아가게 될 테지. 인간계가 곧 마계가 될 것이다. 더 이상 인간과 마족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자, 그것을 알았거든 나를 죽여라. 네놈들에게 내 손으로 직접 절망을 선사해주지못하게 되어 오직 그것만이 유감이구나.] “에트나는.” 아르페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내뱉은 말에,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듯이 움직이던 페이트라가 그대로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면 에트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어? 무사하긴 한 거야?” [너······?] 아마도 아르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나, 페이트라는 순간적으로 그의 눈동자에서 자신이 에트나에게 품고 있는 감정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 지금 자신의 목에 꽂힌 검으로 미루어 그와 에트나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아르페의 감정을 확신한 순간, 끝내 페이트라는 지금 자신의 상황조차 잊고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미친놈인가?] 고통도 잊고 놈이 깔깔 웃었다. 아주 마음껏 아르페를 비웃었다. [에트나가 마족답지 않게 다른 종족에게도 정을 주고 마는 어리석은 여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정체성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엄연한 마족이며 그래야 할 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네놈을 불태워버릴 것이다. 마왕의 절대지배 같은 고유능력 탓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마족과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 네놈은, 용사라는 작자가 설마······.] “잡소리는 집어치워.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잖아.” 놈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으나 오히려 페이트라는 그가 이를 갈며 하는 말에 더더욱 크게 웃었다. [에트나와 만나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나에게 그러하고 있듯 그녀를 죽이는 일뿐이다. 저 마도사가 있으니 죽이는 것도 쉽겠군. 그러니 나는 말해주지 않겠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에, 비록 그녀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새로운 마계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기를 원한다.] 역시 더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가. 사실 여기까지도 전생의 경험과 만물열람을 응용해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로 놈을 당황하게 해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 자신의 말로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페이트라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전무에 가까웠다. 전대 마왕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현 마왕이 그에게 위치를 위협당하고 있거나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고 물러나야 할 모양이었다. “아르페, 시간 끄는 건 위험하다고 아르페가 말했잖아.” “······그래, 그랬지. 이제 가자.” 아르페는 한 손가락을 들었다. 그것을 그대로 아주 조금 더 올리면, 구현 마법이 한 번 더 발동하며 마나 스트링을 일시에 조여 성화로 놈을 단숨에 태워버리는 것이가능했다. 하지만, 그 전에. “사랑은 무슨, 스토커 새끼 주제에.” [!?!?] 도저히 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참을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부터 꾹꾹 눌러참았던 그 말이, 사천왕과 용사라는 입장으로 조우한 지금이 되어서야 간신히 터져 나왔다. “넌 단 한 번도 에트나의 뜻을 물어본 적이 없을 거야, 그렇지? 아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걸. 마족이라서 원래 그렇다고? 마족으로 태어났건 인간으로 태어났건 지 하고 싶은 일 하고 살고 싶은 건 누구나 다 같아, 병신아. 에트나는 자기 몸이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것만큼이나 싸움을 싫어했거든? 알아? 병신아, 아냐고. 참고로 너도 조오오오오오올라 싫어하지. 그러게 좀 적당히 들이대야지. 하긴 에트나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 바도 아니고 그저 네 감정만 밀어붙이던 네놈인데 에트나가 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도 못했겠지.” [······.] 하나하나 부정할 수가 없는 진실의 폭격에 페이트라는 찍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물론 그것은 아르페의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듣기만 하면 용사라는 놈이 마왕군 사천왕을 더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 가운데 메테르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렇구나아, 아르페는 에트나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언니!? 전투 끝났는데 왜 검을 드는 거야! 언니!?” 다행히도 메테르의 분노가 아르페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전에 페이트라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놈이라면 에트나를 이해해줄 수 있다 이거냐? 네놈이 그녀를 이해해준다고 무엇이 달라지지? 그런다고 네가 그녀에 대해 취할 행동이, 그녀가 너에 대해 취할 행동이 달라지는가?] “달라질 수 있어. 너는 모르겠지만.” [······.] 아르페의 확신에 가득 찬 눈동자를 보며 페이트라는 순간적으로 열이 뻗쳤다.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경쟁자의 자신을 팍 꺾어놓고 싶은 심정이, 자신이 그녀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야말로 저 남자가 그녀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어떻게든 보아야 성이 풀릴 것만 같은 심정이 들었다. [네놈, 용사.] 죽음을 앞두고,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마족으로서 지니고 있던 관념을 아득히 뛰어넘은 바로 그 순간. [영혼의 계약서를 내놓아라. 내가 기필코 네놈을 그녀 앞에 데려다놓을 테니, 어디 그녀 앞에서도 지금 한 그 말을 고스란히 내뱉어 봐라!] 페이트라 데아레토 테코투스는 생애 최초의 일탈을 결심했다.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3 > 끝 ⓒ 토이카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4 > 아르페는 언제 어떤 이와 계약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항상 영혼의 계약서를 가지고 다녔다. 영혼의 계약서는 상호동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간과 인간, 마족과 마족, 인간과 마족은 물론 인간과 정령 등등 혼이 있는 이를 상대로 한다면 무조건 발동할 수 있어 이만큼 믿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영혼의 계약서에도 단점은 있어. 바로 계약을 하는 이의 마력이 너무 클 경우엔 영혼의 계약서의 힘으로도 그 자를 강제하는 것이 힘들 수 있다는 거지. 그때엔 필연적으로 상대측 계약자의 마나를 빌려 징벌을 행하게 되는데, 만약 이 마나가 부족할 경우 오히려 상대측의 마나가 다 빨려나가 송장이 되는 경우도 생겨.” “그렇구나.” 메테르는 계약서에 주르륵 적힌 사인 아래 자신 역시 사인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파티 전원이 이렇게 사인을 하고 있는 거구나. 계약보조자로서, 유사시 마나를 보태주는 거지?” “우리 메테르 많이 똑똑해졌네.” “더 칭찬해줘, 칭찬.” [······.] 타고난 마족답게 바로 방금 아르페가 말한 사항을 이용하여 아르페를 엿 먹이려고 했던 페이트라는 아르페 파티 전원의 협력으로 훌륭하게 완성된 계약서를 보며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아르페와 레이제나, 이 둘의 방대한 마력에 이겨낼 자신은 없었다. 더욱이 고양이 귀가 돋아나 수인족으로 보이는 저 소녀, 저 소녀의 마력은 자신이 차마 짚어내기도 힘들었으니! “좋아, 그럼 계약을 다시 확인할까. 페이트라는 이하의 내용이 완수될 때까지 결코 아르페가 아군이라 지정한 이를 직간접적으로 건드리지 못하며, 거짓말 또한 하지 못한다. 그 판단은 아르페가 행한다.” [불평등조약이다!] “너도 사인 해놓고 이제 와서.” [크윽······!] 이제 도망칠 틈은 없다. 페이트라는 단 한 순간의 변덕으로 완전히 목줄이 매이고만 것이다. 아르페는 놈이 신음을 흘리는 것을 유쾌한 표정으로 마주하며 나머지를 읽었다. “페이트라는 아르페와 그 일행을 에트나에게로 안내하며, 그녀가 외부 요인에 억압받지 않도록 그녀를 보호한다. 그녀가 아르페의 동행 제의를 거절할 경우 페이트라는 계약으로부터 풀려나며, 아르페 일행은 그를 공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아르페의 뜻을 따르겠다고 선언할 경우, 페이트라는 계약에 의거 아르페의 명을 따른다. 음, 훌륭한 노예계약이군.” “아르페는 자유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타인에게 복속을 강요해도 돼?” “나는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할 줄 아는 모든 이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얜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할 자격이 없어. 쓰레기거든.” “역시 아르페라니까.” 분명 계약 자체는 자신이 먼저 제안했거늘 어째서 이렇게 꿀리는 느낌이 든단 말인가. 페이트라는 이를 악물면서도 생각했다. ‘어쨌든 에트나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녀의 의지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자유로이 풀려날 수도 있게 되니 손해를 볼 일은 없어.’ [나는 절대지배에서 풀려났지만 그녀 또한 그렇게 되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너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겠지?] “당연하지. 그녀의 의사만 확인할 수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기 위한 방법 또한 그동안 연구하여 끝내 완성시키지 않았던가. 아르페와 선배님의 합작, 재생 마법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페이트라는 아르페가 어째서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이라 여겼기에 더는 그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에트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 그녀는 글라케이아로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그곳에서부터 수색을 시작하면 될 것이다.] “글라케이아는 우리도 알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그뿐이 아니다. 나는 마법으로 그녀의 흔적을 뒤쫓을 수 있다!] “스토커구나.” [큭······!] 아르페는 머릿속으로 이전 글라케이아에서 그녀와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최초의 얼음 조각상을 목적으로 찾아왔던 그녀는 아르페에게 뒷일을 맡기고 유적앞에 버팅기고 있었는데, 일행이 유적을 클리어하고 나갈 때쯤 찾아온 강력한 마족이 유적을 공격해오는 바람에 아르페 일행은 일단 후퇴를 선언해, 그대로 지저세계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아르페는 당연히 에트나가 그 마족과 협력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같은 마족이고, 에트나에겐 족쇄가 걸려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페이트라의 말을 듣자니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에트나는 마왕 폐하의 명을 수행한 후, 당분간 간섭을 받지 않는 휴가 상태에 있었다. 그 때에, 그래. 네놈이 말한 대로 전대 마왕 세력이 그녀에게 접촉한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녀가 글라케이아로 가도록 뭔가 조치를 취했거나, 적어도 유도를 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북부대륙에서 약해진 그녀를 손쉽게 제압하려 한 것이지.] “이런, 망할······.” 사천왕을 몰래 바깥으로 유도하여 제압하려 했다면, 그 목적은 물론 마왕세력의 약화일 터이다. 즉 현 마왕세력과 전대 마왕세력은 대립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그때 아르페가 나가서 그녀를 도와 마족과 싸웠으면 되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런데 무턱대고 그녀가 그 마족과 같은 편일 것이라 판단했으니 바보도 이런바보가 없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긴 했지만! ‘아냐, 그 당시 재생 마법은 완벽하지 않았어. 차라리 이쪽이 잘 된 일이지. 겨울여왕 덕분에 이블 하트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재생 마법도 완성했으니까. 늦지 않았어. 에트나가 무사하다면 된 거야.’ 아르페는 자책을 그만두고 페이트라의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르페 일행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북부 대륙에 찾아오는 바람에, 그저 에트나를 제압할 목적으로 찾아왔던 마족이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리라. ‘겨울여왕의 유적도 없애야 하고 에트나도 제압해야 하는데, 놈은 둘 다 하려다가실패한 거야. 에트나는 놈을 본 순간 이미 상황을 파악했던 거고.’ 이제야 모든 상황이 시원스레 파악되었다. 마계가 둘로 나뉘어 있음을 파악한다면 이 이상 일이 분명할 수가 없었다. [간자는 사천왕 중에 있었다. 가장 최근에 들어와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놈이 배신자였다.] 페이트라는 놈의 신상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는데, 그로부터 아르페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단 하나였다. 바로 그놈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언제?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에서! ‘좋아, 일단 복선 하나 제거했고.’ 아르페는 묵묵히 주먹을 불끈 쥐며 이어지는 놈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깨달은 시점이 너무 늦어 있었지. 네놈들의 손에 의해 팔라티나에서 암약하던 제리어트가 죽어버렸고, 에트나 역시 놈들의 공격을 피해 도망쳐 복귀하지 못했고······.] 아르페는 놈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울고 있진 않았지만 푸른 피부가 조금 달아올라 있는 것이 부끄럽긴 한 모양이었다. [마왕성에서 유의미한 전력은 오직 마왕 폐하와 나뿐이었다. 본격적으로 놈들과의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하필이면 네놈들의 마법에 마왕성이 무너져 내려 전력이 약화되었고 놈들은 그 틈을 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네놈 또한 충분히 짐작하고 있겠지.] 설마 이게 그렇게 연결되다니!? 아르페가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사이에도 놈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마계의 지배세력은 교체되었다. 그 후로 마왕 폐하께서 어찌 되셨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절대지배가 해제되었다는 것으로 그분과 나의 연결 관계가 끊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그 후로 그들은 마왕성이 있던 일대를 내게 맡기고,그들 자신은 마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계의 중추를 접수했으니 이제 대놓고 찾을 것이라 했으나 정작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페이트라는 모르겠지만 아르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상황을 정리하자면 아르페 일행은 마왕성을 부숴 전대 마왕 세력의 확장을 돕는 반면으로 이블 하트를 모두접수해 놈들의 숙원을 깔끔하게 망가트린 셈이 된 것이다. 역시 인생은 재밌다니까! [나는 마계를 위해 그들에게 협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에트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가자고.” 그러나 기운차게 돌아서는 아르페를 맞이하는 파티원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그들을 대표하여 메테르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그 여자를 놓고 싸우는 거지? 우리는 완벽히 들러리인 것 같은데.” “에트나가 우리 편에 붙으면 당장 우리 레벨 몇을 올리는 것보다도 훨씬 효과가 크다고. 다들 군말 없이 따라올 것.” “그럼 결국 마계로 들어와서 이블 하트 먹어치우고 다시 돌아가는 거네.” “아니지. 마왕성도 부쉈잖아. 그 덕분에 마계 세력까지 업데이트되긴 했지만!” “먀, 나는 좋아. 주인님 최고, 먀아.” 아르페 일행의 모험이 시작된 후로 언제나 그렇긴 했지만, 그들은 이건 뭔가 아닌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떠났다. 그 뒤로는 마왕도, 사천왕도 마왕성의 흔적도 없는 폐허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한편 인간계와 마계의 전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제아드 제국을 주축으로 한 인간계 동맹은 디아스의 신왕 시페넌이 팔라티나 왕국과 드워프의 적극적 협조를 이끌어내면서 완벽하게 형성되었고, 마왕군은 설령 인간계가 아무리 효과적으로 힘을 모으건, 그들 모두를 밀어버릴 기세로 돌진해왔다. 비록 바다를 건너오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인어들의 공격을 받아 규모가 대폭 감소되기는 했으나 그래도 마족은 마족이었다. 최소 레벨 200으로 구성된 마족들은 한 명 한 명이 능히 병사 1개 대대를 날려버릴 수 있는 괴물들이었고, 인간계에는 그만한 레벨의 강자가 그리 많지 않아 결국 병사들을 소모시키며 한 마리 한 마리 마족을 잡아나가는 수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즉 전쟁은 소모전이었다. 어느 쪽이 이기건 고통이 남는다는 뜻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 모두가 피폐해졌으며, 생의 의지를 잃어갔다. “좀 더 빠르게 움직여! 저기 기어오는 놈들 안 보여!?” “마족 증원군이 11시 방향으로부터! 우리도 증원이 필요합니다!” “성녀가 기도를 올리고 있어! 부상을 입은 자들은 모두 성녀의 곁으로!” 전장은 끔찍하리만치 소란스러웠다. 지휘를 막론하고 전장에서 날뛰는 이 모두가제 것인지 마족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피를 뒤집어쓰고, 아군의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공격을 받아넘기며 질주했다. 시페넌은 그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빛나는 이였다. 아르페가 철저하게 설계한 레시피를 고스란히 따른 끝에 완성된 그는 암습의 최강자이기도 했으며 정면승부 또한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았고, 일단 그가 한 번 모습을 드러내 전장을 쓸어버리면 그의 찬란한 붉은 머리에 홀린 아군들은 특별한 버프를 받지 않았음에도 다시 힘을 내어 칼을 휘두를 수 있었다. “오른쪽을 뚫어줄 테니 그쪽으로 뭉쳐라!” “알겠습니다, 폐하!” “저 분이 디아스의 신왕······!” 두 개의 쌍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족 수십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인간들은 그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환호했다. 그러나 시페넌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더욱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전선은 이곳만이 아냐. 여길 마무리 짓고 엘프들을 도우러 가야······. 아니 아르페 이 자식, 정말 마계에서 활약을 하고 있긴 한 거야?’ 설마 정말로 사천왕만 처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페넌은 이를 빠득 갈며 몸을돌렸다. 그때 그의 눈에 큰 낫을 들고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있는 강대한 마족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다른 마족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함이었다. ‘아르페 이놈은 결국 사천왕도 제대로 못 막아냈구나! ······어쨌든 저건 혼자선 못 이겨.’ 실로 빠른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도주를 택하려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이런 상황이 있으리라 생각해, 전장 곳곳으로 퍼진 일행을 하나의 파티로 모을 준비를 해두고있었기 때문이다. “아리······ 큭!?” 그러나 시페넌이 자신의 성녀에게 통신을 날리려던 그때, 그의 눈앞에 거대한 낫이 나타났다. 시페넌은 늦지 않게 몸을 빼냈으나 그가 사용하던 통신구가 박살나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찾았군, 디아스의 소년왕.] 실로 빠른 속도로 그의 눈앞에 도달한 마족은 기어가는 뱀처럼 징그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후드를 걷었다. 당연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 이어야 할 텐데. [아니면······ 제 자리를 빼앗긴 용사 파티의 도적, 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까.] 지금의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문자의 조합일 뿐인데, 그 말을 들은 시페넌은 어째선지 자신의 뇌에 노이즈가 끼는 것을 느끼며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마족은 그저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5 > [저것은 네 년이 한 짓이냐?] 그의 목소리는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용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런 짓을 왜 했겠어. 난 마왕, 당신이 한 줄 알았는데. 우리가 무서워서 엄마라도 부른 줄 알았잖아.” [······그래, 알고 있었을 리도 없을뿐더러 알고 있었다 해도 행할 리가 없지. 그것을 물은 내가 어리석었어. 하, 이렇게 나도 조연으로 전락하고 마는가.] “앞으로 주연이 얼마나 더 나타나든 상관없어. 전부 베어버릴 뿐이니까.” 용사의 말에 마왕은 그녀에게로 조금 더 다가왔다. 놈은 여전히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결코 절대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를 넘어선다고 일이 끝나지 않음을, 이제 용사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사가 검을 꽉 쥐고, 전사는 방패를 들었으며, 상처를 입고 쓰러진 도적은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며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것을 보며 마왕이 웃었다. 결코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그저 자신이 만들어놓은광경이 흐뭇하여 어쩔 수가 없다는 듯한 웃음.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두 눈에 독기가 가득하군. 내가 원한 것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를 네게 보냈던 것도 그래서였지.] 마왕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용사가 모를 리가 없었다. 용사의 이가 악물리며 으득, 소리가 났다. 그러나 마왕의 말은 거기서 더 이어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적으로 마주하고, 그를 베며, 동료를 하나둘씩 잃는다. 그 안에서감정은 마모되어가며 독기만이 남는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넘어설 수 없어, 끝내 좌절 속에 두 눈을 감는다. 그것이 내가 그려온 네년 용사의 최후였는데.] 그 부분에 이르러 마왕이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은 용사도 그녀의 일행도 아닌 그 너머를 향해 있었다. [설마 나 또한 무대의 일부였을 줄은.] 아직 완전히 풀려나지 않은 힘, 그럼에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절망이 그곳에 있었다. 마왕성이 파괴된 순간 눈을 뜬 그것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는 순간, 용사와 마왕은 공평하게 그것에 휩쓸려 사라지게 될 터였다. [달갑지 않아. 달갑지 않아. 이건 재미가 없어. 이래선 너무 압도적이지 않은가. 인간에게 희망이 있기에 절망은 더욱 찬란히 꽃피우는 법이거늘, 수백 년 동안 키워온 꽃을 이대로 꺾어버리게 되다니.] “누구 마음대로 이야기를 끝내려는 거야? 누구 맘대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거야?” [나조차 넘지 못하는 네년이 저것을 넘어보겠다는 것인가? 아냐,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부족해. 이건 실패야. 지켜보는 것조차 지루하기 그지없거늘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라고? 나는 거절하겠다.] “아니······ 난 반드시 해내겠어.” 용사는 그렇게 말하며 고유능력을 발동했다. 도적은 용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황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것이 바로 레이제나가 이른 고유능력의 개화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어나서 그녀를 도와야 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든 자신이 곁에 있어 주어야 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안기고 만 절망보다 더 커다란 희망을 어떻게든 만들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녀가 만들어낸 빛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마왕조차 그에게는 관심이 없다. 조연조차 되지 못하는 단역, 단역조차 되지 못하는 이야기의 배경. 그것이 지금 도적의 처지였다. 어째서인가. 그는 항상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왔는데, 용사의 짝이 될 것이라, 그녀와 함께 이야기의 막을 내리는 주인공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허무하게. [잘 알고 있구나.] 정체모를 목소리가 도적의 귓가를 간질인 것은 그때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용사에게 있어서, 물론 마왕에게 있어서도 그저 우연히 이 자리에 함께 있을 뿐인 배경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여태 계속 까치발을 들고 서 있었을 텐데 아프지 않으냐.] “네, 놈은······!”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숨결 대신 피가 터져 나온다. 자신에게 말을 건 이가 누군지 찾으려 해도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다. 단지 저기서 대치하고 있는 용사와 마왕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라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놀랍고 재미난 사실을 가르쳐줄까? 네놈은 앞으로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비참해져······? 지금 여기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이보다 더 비참해질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은 앞으로 다시 쓰이게 된다. 누구의 손에 다시 쓰이느냐 하면, 놀랍게도 네놈이 죽인 바로 그 남자에 의해서다. 그가 죽음의 순간 각성한 힘은 너무나 강대하여 저기 저 마왕도, 나도, 내가 모시는 분께서도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휘말릴 뿐이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그게 바로 고유능력이 지닌 힘이다. 용사가 가진 그것, 마왕이 가진 그것, 나의 주인이며 유일한 마왕 폐하께서 지니고 계신 그것. 하지만 네놈에겐 없지. 내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그것에 휘말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적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 여태까지는 그저 당연하게 납득하고 있던 차이가, 이제 와서 부조리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발악해봤자 용사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녀는 너를 보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아, 마찬가지다. 다시 시작되는 세상에도 네 차례는 없다. 모든 것이 똑같거나 더욱 나빠질 뿐이야. 어쩌면 이번엔 무대 위에도 오르지 못하게 될 지도 몰라. 실로 우습지 않으냐! 그래, 그 남자는 용사를 사랑했었지. 어쩌면 너를 쫓아내고 용사의 옆자리마저 차지할 지도 모르겠구나!] ‘우습긴······ 퍽이나······ 우습구나.’ 가슴 속에서 피어난 차가운 분노는 누구를 향하는가. 자신을 바닥에 누워 있도록 만든 사천왕 페이트라인가, 자신을 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마왕인가, 그렇게나 열렬히 구애했음에도 끝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용사인가. 그도 아니라면 적으로 나타난 주제에 용사의 마음까지 앗아가 끝내 돌려주지 않은 그 남자인가. [너는 대체 무엇이었느냐? 아무런 의미도 없이 태어나 아무런 의미도 없이 지는 삶을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하느냐? 삶이라 부를 수는 있느냐? 너는 만족하느냐? 용사 이야기에조차 등장하지 않을 너의 그 뻔하디 뻔한 죽음은 과연 마왕군의 창날에 목이 뚫린 한낱 인간의 병사의 죽음과 무어 다르더냐?] ‘나, 는······.’ 도적은 특별하게 태어나 특별하게 자랐다. 용사를 만나 자신의 삶이 더욱 특별해질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도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런데 이젠 심지어는 되돌아가야 한다고? 지금의 위치조차 무너진다고? [다시 그 삶을 반복할 테냐? 결과는 지금보다도 더 추할 텐데, 너는 그것을 받아들일 테냐?] ‘네놈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이지?’ [다르게 살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다르게······ 살아?’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도적의 세상이 무너지는지, 모두의 세상이 무너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과연 종말이었다.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처럼 세상의 끝이 말리고 있다. 마왕 또한 그것을 인지해 경악하고, 오직 용사만은 예상했다는 듯 황금빛을, 그 크기를 더욱 키워나간다. 과연 그녀는 어디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주역이다.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니까. 자신과는 다르다. 결국 끝까지 자신은 용사의 곁에 설 수 없었다. 그녀가, 곁에 서주지 않았다. [빼앗아라. 가지면 되는 것이다. 방해하는 것을 죽이고, 아, 이건 이미 한 번 했군. 보다 합당한 위치를 내어주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용사를 가질 수 있게 해주마.] ‘용사를······?’ [시간이 없다. 우리도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을 뿐이다.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면 빨리 결정해라. 우리는 그저 효과적으로 인간계를 물들이고 싶을 뿐이니, 네가 그 선봉에 서준다면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다.] ‘······.’ 도적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마지막 순간 들려온 목소리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만날 날을 위해 그 기억을 맡아두마.] “내 자리를 빼앗겨?” 시페넌은 아무렇지 않게 응수하면서도 식은땀을 흘렸다. 가뜩이나 마나에 예민하던 그다. 상대가 줄줄이 흘리고 있는 마기로만 판단해도 그가 족히 자신보다 레벨이10 이상 높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놈은 그저 불길하고 또 불길했다. 분명 대지에 굳건히 서 있다 생각했거늘 놈과 마주하고 있으면 꼭 늪에 빠진 것처럼 불안하게 다리가 흔들렸다.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너와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대화를 하고 싶었다면 정중히 왕궁에 사절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시페넌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물러났다. 되도록이면 병사들이 없는 쪽으로 놈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상대가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건만, 그는 잔챙이들을 더 죽여 무엇 하겠냐는 듯 기꺼이 그에게 놀아나주었다. [이전에 비해 많이 강해졌군. 아주 많이 강해졌어.] “이전? 난 널 여기서 처음 본다만.” [하지만 여전히 단역에 불과하구나.] “······.” 역시, 놈의 말을 들을 때마다 멈칫하고 만다. 시페넌은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육신에 이를 갈며 있는 힘껏 마나를 불러 일으켰다. 적은 그것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잘 생각해보아라, 우리는 이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너는 네가 내린 선택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서 안타깝지만, 넌 아무래도 치매에 걸린 것 같아. 평소 주위사람들한테 잘못했던 것 있으면 지금부터 미리 사과를 하고 다니는 게 어떨까?” 적의 약을 올리는 스킬만은 아르페에게 전수받아 성장시킨 시페넌! 꼭 이런 쓸데없는 것만 배워서 문제지, 하고 투덜거리며 몸의 긴장을 푸는 시페넌을 보며, 적은 놀랍게도 빙그레 웃었다. [그를 따라하는 것은 조금이나마 용사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인가?] 또 다시 멈칫. 그 시점에서 시페넌은 자신의 감정을 보다 분명하게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불쾌감이었다. 웬 처음 보는 새끼가 그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씨부리면 빡이 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모험은 참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지, 하고 중얼거리며 단검을 쥔 자세를 고치는 시페넌. 허공에서 단검이 교차되며 스파크를 피워 올렸다. 아르페가 알려준 유적에서 얻어 나온 쌍단검 천둥신의 분노였다. [이런, 아무래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역시 넌 배경이었어.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아. 그렇다면 어디 계약을 떠올리게 해줘야겠지.] “어딜!” 놈의 접근을 감지한 시페넌이 눈부시도록 빠르게 움직이며 허공에서 단검을 교차시켰다. 그가 있던 자리에 대신 생겨난 분신이 낫을 받아내며, 그 순간 거대한 번개의 형상이 되어 고스란히 놈을 덮쳤다! [오오, 짜릿해. 하지만 네놈은 더욱 짜릿할 거야, 그렇지?] “크흑!?” 평범한 전투라면 시페넌의 판단은 그야말로 최상의 것이었을 테다. 분신을 만들어 방어와 공격까지 수행하는 도적 계열 최상위 유니크 스킬에, 아티팩트로 그것에 번개 속성까지 부여했으니. 시페넌의 회피는 지극히 완벽했다. “끄으으으으으윽!?” 그러나 적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시페넌이건, 그의 마나건, 그의 분신이건, 그의 기록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이게······ 이게 뭐야! 메테르······!? 큭, 내가 왜 마왕성에! 이 기억은, 제기랄, 네놈 무슨 짓을······!” 놈의 고유능력, 레코드 키핑(기록보관)이 발동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5 > 끝 ⓒ 토이카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6 > [모두 기억이 났는가.] “기억······? 개, 무슨 짓거리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무수한 기억이 혼재해 정말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너는 용사 파티의 도적으로서 용사 메테르와 함께 무수한 모험을 했지. 그리고 끝내 마왕성에서 패배해, 쓰러졌다.] “헛소리를······.” 본능적으로 반박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 장면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메테르보다 조금 더 성숙한 메테르, 그런 그녀의 곁에 선 자신. 다른동료들의 모습까지. 그러나 그곳에 아르페의 모습은 없었다. [두 번째의 용사 같은 것은 없었다. 용사의 파트너는 너였다. 적어도 너 스스로는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용사 메테르에게 시페넌은 다른 동료와 별 다를 바없는 친구에 불과했고, 끝내 그녀는 자신의 전장에 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시페넌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적으로 나타난 한 명의 남자를 사랑했고, 남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시페넌은 그것을 질투했으며 용사를 대신한다는 변명으로 무장해 남자를 찔러 죽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단 말인가. 그는 세상을 되돌릴 기회를 얻었으며 모두가 그것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르페······.” 저 빌어먹을 마족 탓에 얻은 기억 속, 아르페는 용사가 아닌 사천왕의 모습이었다. 재수 없도록 잘 생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위치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적대했고 끝내 쓰러졌지만, 현실로 돌아와 보면 그는······.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는 이미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현명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너는 이미 많이 겪지 않았던가?] “······.” 시페넌은 어느덧 적을 향해 내지르던 무기를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말을 헛소리라 일축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 바로 방금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찬 다른 의지가 그것을 막고 적과 대화를 이어가게 만들었다. “아르페가······ 날 속였다고?” [정확히는 세상 전체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마왕군의 사천왕이었던 그가 제 입맛에 맞게 세계를 바꾸어 용사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웃기지 않을 수 있는가! 마땅히 용사의 곁에 있어야 할 자를 떼어내고 용사를 차지했으니 어찌 웃지 않을 수있는가!] “큭!” 다시금 머리가 아파왔다. 과거의, 아니 세계가 뒤바뀌기 전의 기억과 의식이 서서히 시페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나의 고유능력은 기록보관. 그렇기에 놈에게 완전히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폐하의 기록을 온존하고, 네놈의 기록 또한 받아두었다. 그 이유는 스스로 깨닫고 있을 것이다.] 사신이 웃었다. [너의 대답을 떠올려라. 너는 내게 함께하겠다 말하지 않았던가.] “나, 는······.” 자신의 초라하고 비참한 처지에 절망하고, 한 순간도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 용사에게 실망하고, 죽음으로써 오히려 완전히 거듭난 남자 아르페를 증오하며. 그렇다. 분명 도적 시페넌은 사신의 제의를 수긍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어긋난 것은 단 한 가지. 나는 전생의 네 기록을 돌려주어 너를 강화시켜주려 했건만, 너는 너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그 남자를 순순히 따라 힘을 얻었구나. 그러나 그렇게 얻은 힘이 결국 다시 한 번 그 남자를 찌르는 데에 쓰일 터이니 이 또한 우습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왜, 네가······.” [디아스의 정당한 핏줄. 인간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한 힘. 네가 마족의 편으로 돌아서면 무수한 이가 죽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뭐······?” 시페넌이 아연해져 되묻자 사신이 실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 결국 이들도 모두 폐하의 백성이 될 터인데 전멸을 시킬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소리지?” [간단한 얘기지. 모두가 마족이 된다는 얘기다. 모두가 같게 되면 인간과 마족으로 나뉘어 싸울 일도 없지. 인간계는 마계가 되겠지. 아니, 더는 세상을 이분하여 부를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무슨······!” 시페넌은 순간적으로 사위가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신의 말이 그의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가능성 여부는 둘째 치고, 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따위 횡포······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시페넌은 이를 뿌득 갈며 외쳤다. 흐릿해져가던 정신이 조금씩 또렷하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전생 따위 애매한 말에 휘둘릴 수는 없다. 그는 무수한 인간들을 책임지는 국왕이며 한 명의 전사이지 않은가! 그러나 사신은 그런 그의 반응에도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족은 인간보다 강하며 수명 또한 길다. 인간들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을 이유로 인간을 모두 마족으로 바꾸어놓겠다니 제정신이냐······?” [바꾸다니, 그저 인간들이 원했던 대로 행할 뿐이다.] “원했다고······?” 시페넌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 이상은 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놈을 공격하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와 마족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실력 차가 있었다. 사신은 번개를 튀기는 그의 단검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과거 인간들은 보다 강해지고, 보다 오래 살고 싶어 했다. 아니, 인간들은 지금도 그렇지.] “믿지 않는다.” [무수한 세월 골몰하던 끝에 인간들이 찾아낸 방법은 바로 마나를 뒤트는 데에서 얻는 신체의 변이, 즉 진화였다. 보다 강력하고 파괴적인 마나, 우월한 육신, 긴 수명. 비록 모두가 진화를 이룰 수는 없었지만, 새로이 거듭난 이들은 분명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믿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깨닫고 있겠지. 그것이 바로 마족이다. 마족도, 마계도, 모두 인간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아냐!” 그럴 리가 없었다. 마족 또한 엘프나 드워프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인간과 다른 종족이었을 것이다. 저 자는 단지 시페넌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강제로 주입한 기억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 거짓말이다! 모두 거짓말이다! [너는 내게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다. 이미 나와 함께 하겠다 다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는······ 아니다. 인간들을 마족으로 만들어? 그 따위 일에는 동참하지 않겠어.” 설령 거짓말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마족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질리도록알고 있다. 저 자가 주입한 기억에서도 그것과 관련된 기억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처절한 약육강식의 사회,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세상, 질서가 힘으로만 유지되는 세상! 그래, 일부의 인간이라면 마족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인간 전체의 의견이 아니며, 결코 소수의 절대자에 의해 행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페넌의 반감이 아무리 심해지든 사신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가 결국엔 자신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듯이. [그들을 모두 네 손에 넘겨주겠다. 우리는 단지 세상의 통일을 원할 뿐, 나약한 이들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거든.] “믿을 것 같나?” [나는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저 사람들을 내어주는 것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는가? 그렇다면······ 좋다. 그녀를 너에게 주마.] “그녀······?” 시페넌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벼락에라도 맞은 것 같았다. 메테르를 만난 순간부터 쌓아온 연정이, 전생으로부터 사신의 능력을 타고 건너온 기억이 그를 지배했다. 사신의 입가에 지극히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용사 메테르, 본래 그녀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네가 협력하여 인간들을 우리에게 바친다면 그녀를 살려, 너에게 주겠다.] “그녀는······.” [용사의 마음을 차지한 자, 제 것이 아닌 자리를 탐한 자, 세상을 되돌린 자. 두 번째 용사 아르페를 네 손으로 죽일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모두 네가 원했던 것이다. 그 모두가 이루어질 것이다. 대가로 네가 치러야 할 것은 인간계를 마계로 물들이는데에 조금의 도움을 주는 정도지.] “아르페를······?” [그렇다. 기억을 되찾았으니 이제 너도 깨닫고 있을 것이다. 놈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비열한지, 네가 그 남자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도······.] 놈의 말이 맞았다.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전생의 시페넌은 아르페를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었다. 더욱이 마지막 순간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달았을 땐, 이미 죽였다 믿은 그가 고유능력을 개화하여 세상을 바꾸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부정적인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시페넌의 마음까지 장악하고 있느냐 하면, 솔직히 말해 그렇지 않았다. ‘마왕성은 맡겨두고, 너는 네가 지켜야 할 땅을 지켜라.’ 시페넌이 디아스의 왕위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아르페와 나눈 통신에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시페넌은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랑 르세티한테 잘 해주고. 겪어보니까 세상에서 여자의 원한이 제일 무서운 것 같아.’ 메테르와의 관계를 과시하듯 시페넌을 약 올리면서도, 제법 진지하게 그를 위한 충고를 건네던 아르페. 그뿐인가? 그동안 그가 한 행동을 따져보면 무엇 하나 인간을 위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아르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장 잘 알아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철저하게 실리를 챙기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를 보면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다. ‘그것을 과연 기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정말로 아르페가 이전에 마왕군 사천왕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의 아르페를 매도할 사유가 되는가?’ 아르페는 사람들을 이끈다. 그에게 이끌린 사람들 모두가 웃는다. 메테르의 삶의 이유는 아르페나 다름없었고, 그 뒤로 그의 파티에 합류한 다른 모든 이도 그보다 짙은 감정을 품으면 품었지 강제로 그를 따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르페가 정말 어마어마한 힘으로 세상을 개변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만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그런 위치를 꿰찼다고 하자. 시페넌이 그를 다시 베어버린다면 그것은 옳은 일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메테르를 억지로 강탈하며 마족과 협력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일인가? 아니, 애초에 아르페는 마왕군에 속하고 싶어서, 마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인간을 적대하고 싶어서 적대했던 것일까? 전생의 시페넌의 기억이 뚜렷이 고하고 있지 않은가. 마족 누구나가 차고 있는 족쇄 절대지배의 존재에 대하여! 전생의 용사 메테르는 아르페에 대해 어떻게 말했던가? 지치고 처연한 아르페와 마주하며 그녀는 무슨 말을 했고, 아르페는 어떤 말을 되돌려 주었던가? ‘전생의 내가 품었던 감정은 과연 지금의 내가 고스란히 이어받기에 합당한 감정인가?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면서, 타인에게서 그것을 마음대로 빼앗아올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정말 전생의 시페넌이 아닌 지금의 시페넌에게 있어서도 최선의 선택인가? “대답은······” [이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었는가.] “거절이다.” 시페넌은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올렸다. 그의 손아귀에 쥐인 두 개의 단검이 푸르게 비명을 토해냈다. 레벨이 제아무리 높은 마족이라 해도 아주 잠깐은 시야가 흐려질 수밖에 없는 광원! [거절!? 어리석은 인간, 그만한 좌절과 분노를 품고 어찌 거절할 수 있단······ 큭!?] 이윽고 시야를 되찾은 마족이 이를 빠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을 때, 그러나 더 이상 시페넌은 혼자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아, 엄청 강한 마족이잖아요! 오는 게 아녔는데!” “젠장, 정말 더러운 인생······!” “후, 후흐흐. 추가 수당······! 저 놈만 잡으면 아르페 님의 목덜미를 그냥!” “시페넌 씨, 늦지 않았나요!?” 그와 일생을 함께한 호위기사. 악연으로 엮었으나 어찌어찌 미운정이 들어버린 흑마법사. 제법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데 어째 모습도 마인드도 바뀌지 않는 상인 아줌마. 마지막으로 항상 그를 못미더워하면서도 따라와 주는 하녀 출신의 성녀. 네 명에 시페넌을 더해 이곳에 또 하나의 용사 파티가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하든,이것이 지금의 시페넌의 파티였다. “이제 내겐 메테르보다도 소중한 이가 생겼거든.” [네놈······!?] 시페넌이 아까 내보인 번개가 자신에 대한 위협이 아닌 동료를 부르는 신호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신, 마족이 이를 드러내며 분노했다. 시페넌은 그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웃고는 전투 자세를 취했다. 성녀가 잽싸게 그를 축복해 능력을 끌어올려주었다. 전생의 도적이 현생의 소년 국왕과 하나가 되었다. 모든 것을 깨달은 끝에 지금을 택한 소년의 검이, 이전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발했다. < Chapter 33. 남자의 계약 - 6 > 끝 ⓒ 토이카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1 > [어리석은, 좋은 마족의 자질이 보여 특별한 대우를 해주려 했건만 결국 이런 선택을 하다니!] “개소리.”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한 시페넌이 상대의 말을 일축했다. “좋은 마족은 죽은 마족뿐이야.” [하!] 시페넌의 단검과 놈의 낫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여전히 시페넌이 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 차이는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지 않았다. 어찌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성녀의 버프가 시페넌을 강화시켜주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놈······!] 마족 또한 깨닫고 있었다. 시페넌의 움직임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특히 몇몇 가지 스킬의 레벨이 순식간에 강화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내가 돌려준 기록이더냐!] “떫으면 다시 뺏어가든가.” 불가능하다. 기록을 돌려줄 때는 제약이 없으나, 기록을 가져올 땐 상대의 동의가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페넌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음에 분명했다. [이전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였음에도 여전히 나를 적대하는 이유가 뭐지!?] “이전의 나 또한 네놈들 마족을 적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용사 메테르와 아르페에 대해선 무어라 답할 테냐!] “둘은 내 친구다.” 고민했던 것이 스스로 바보처럼 여겨질 만큼 시원스레 답이 나왔다. 그는 경쾌하게 단검을 휘둘러 스킬을 구사하며 놈에게 돌진했다. “친구를 죽이는 새끼는 없어, 이 새끼야!” [모든 것을 알고도 끝내 어리석은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하다니! 우리는 네놈이 없어도 얼마든지 인간계를 집어삼킬 수 있지만 네놈은 우리를 거절한 것으로 인해 가장 치욕스럽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누구 맘대로!” 시페넌의 목소리가 아닌 아리아의 목소리였다. 대체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이 시페넌을 욕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욕해도 다른 사람은 시페넌을 욕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품은 아리아의 신성스펠이 마족을 덮쳤다. 물론 레벨 차이가 있기에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놈의 몸을 한순간이나마 움찔하게 했고, 그 다음 순간엔 르세티가 놈의 전면으로 치닫고, 데이스와 미케나가 원거리에서 놈에게 추가로 공격을 넣기 시작했다. [이것이 네 선택인가. 끝내 스스로를 속이고 손아귀에 쥔 것으로 만족하는 척할 셈인가.] 놈의 낫이 불길한 빛을 발하며 일행의 공격을 한꺼번에 걷어냈다. 시페넌이 그림자를 타고 질주해 놈의 다리에 단검을 박아 넣으려 했으나 마기가 폭발하며 그의 공격을 무효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좋다, 그것 또한 여흥이다. 여기서 탄생한 절망이 인간의 마음을 무너트리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시페넌 씨! 이익, 언니!” “에휴!” 놈이 휘두른 낫에서 수십 개의 어둡게 반짝이는 마나의 칼날이 솟구쳐 바닥을 구르고 있는 시페넌을 덮쳤다. 일행 중 유일하게 방패를 든 기사 르세티가 그것을 막았지만, 놈이 가볍게 만들어내 휘두르는 기술이 그녀에겐 하나하나 필사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무거운 타격이었다. “이건 그냥 괴물이잖아욧!” “버텨, 르세티! 이 새끼 그냥 놔두면 전장을 혼자서 쓸어버릴 거야!” 빠르게 일어나 자세를 잡은 시페넌의 단검에 푸른 오러가 타올랐다. 번개의 속성을 품은 오러가 단검은 물론 그의 팔까지 뒤덮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능력의 부족으로 쓰지 못했던 기술이다. “흐아아아아압!” [기세가 제법이지만 그 정도로는······ 흡!] “좋아, 10골드 적립.” 적절하게 날아든 미케나의 화살이 놈의 후드를 걷어냈다. 놈이 본능적으로 움찔한 순간 시페넌의 공격이 놈의 얼굴에 적중했다. 격렬한 스파크가 튀며 미처 참아내지 못한 신음이 그 사이로 흘렀다. [크흡!?] “좋아, 유효타야. 아리아!”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간절히 원합니다. 사악하게 뒤틀린 자들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아리아가 발현할 수 있는 한 가장 성스러운 축복이 마족에게 내려졌다. 성녀인 그녀가 마족을 공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 신성력은 마족을 ‘그른 것’, ‘뒤틀린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축복의 힘으로서 그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자 한다. 그 결과 마기가 위축되고 상처의 회복이 지연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신성력에 마족이 괴로워하는 이유도 극명해. 정말로 마족이 인간이 변화한 모습이라 치면, 그것이 옳지 않은 형태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신의 뜻은 마족을 향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전생의 자신이 남긴 짙은 증오가 그의 마음을 검게 물들이려 했지만, 시페넌은 자신만을 똑바로 지켜보며 걱정하는 아리아를 보며 칙칙한 감정을 떨쳐내 버렸다. [애송이, 버러지들이 감히!] “좋아, 너도 전형적인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구나!” 아르페는 언제나 말했다. 뭔가 있어보이던 놈들이 흔한 악역의 대사를 뱉는 순간부터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까지 그의 말을 떠올리는 것이 스스로도 우스웠으나, 이번 생에서 그와 아르페가 쌓은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스러웠다. ‘나중에 단단히 각오해둬라, 아르페.’ 놈에게 일의 전말을 듣고 말 테다. 그리고 전생의 감정까지 담아 메테르에게 깔끔하게 고백하고 차이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누구인지 깨달았다고 할지언정 전생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감정에 결착을 짓기 전까지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좋아.” 시페넌의 눈빛이 밝았다. 반드시 마족을 쓰러트리겠다는 각오가 섰다. [죽여주마, 도적!] “큭!?” 놈은 피를 흘리면서도 크게 낫을 휘둘러 르세티를 떨쳐냈다. 데이스와 미케나의 공격은 그냥 받아내며 시페넌에게로 돌진했다. 그가 파티의 중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후우.” 시페넌은 깊은 심호흡을 하곤, 놈을 마주해 단검을 쥐었다. 정면으로 부딪혀봤자 무기가 부러지거나 팔이 부러지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전생의 나는 나보다 레벨이 낮았어.’ 하지만 그는 지금의 시페넌보다 오랜 세월 용사와 모험하며 능력을 갈고 닦았다. 물론 아르페의 레시피에 따라 시페넌 역시 각종 도적 기술들을 갈고 닦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수련 기간과 전생의 그의 수련 기간은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전생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지금, 시페넌은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적을 때려눕혀야 했다. 전생의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지금의 레벨, 지금의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숙달된 전생의 스킬. 둘이 조화되면 얼마든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찮은 목숨, 거두어주마!] “흡!” 쌍단검이 허공에서 교차하며 눈부신 백광을 뿜어냈다. 단지 빛뿐만이 아니라 유형화된 마나가 번개로 바뀌어 폭발하며 사신을 덮쳤다. 사신은 그의 공격을 어느 정도 예측해 미리 방어 마법을 영창해두고 있었고, 어렵지 않게 그것을 내밀며 시페넌이 방어막에 막힌 다음 순간 낫으로 그의 머리를 베어낼 생각을 했다. [음······?] 하지만 놈이 시페넌의 위치를 확인하고 낫을 휘두르려던 그때, 놈은 자신의 손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뒈져!” [큭!?] 시페넌의 단검이 텅 빈 마족의 가슴팍에 작렬하며 강렬한 번개를 흘렸다. 단검은 하나였다. 시페넌은 나머지 한 손에 마족의 것이었던 낫을 쥐고 있었다. “득템! 미케나, 사라!” “넙죽!” 거래는 전광석화로 이루어졌다. 미케나가 순식간에 낫을 받아들어 아공간 주머니에 넣자, 마족은 너무 기가 막혀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사이 날아든 추가타가 놈에게 적중해 북 터지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감히, 내 손에서······?] “용사 파티의 도적이라고 네놈 입으로 말했잖아. 그리고 도적의 장기는 훔치는 거거든. 위치가 언제나 실력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난 언제나 실력으로 내 위치를 증명해왔어.” 메테르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전생의 시페넌 또한 지금의 시페넌처럼 분명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있었다. 원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전생과 현생의 시페넌이 하나로 합쳐져, 응당 그에게 주어져야 할 능력을 각성했다. [무기 따위 없어도 네놈 정도는 마법만으로······!] “그렇다면 그것도 훔쳐낼 뿐이다!” 다시금 시페넌이 질주해왔다. 더 이상은 쌍단검이 아니다. 쌍단검은 그의 진정한 능력을 가리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 진정한 도적이라면 언제나 한 손을 자유로이 놔둘 수 있어야 했다. [감히 사천왕 데오즈의 힘에 간섭해보겠다는 것이냐!] “그래.” 자신을 데오즈라 밝힌 마족이 짧은 영창으로 만들어낸 칠흑의 창을 마주하면서도시페넌은 담담하게 웃었다. 분명 저 마족은 강력했다. 고유능력 또한 독특하며, 이치를 뒤틀기에 충분한 힘이다. “하지만 그건 그리 전투적인 힘은 아니지, 그렇지?”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충분히 전투적인······ 네놈?]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데오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늦어도 한참은 늦어 있었다. 성녀의 백업을 받아 능력이 최고조로 상승한 도적은한 손엔 번개의 단검을 쥐고, 자유로운 한 손을 뻗어 데오즈의 공격과 마주했다. [끄학!?] 다음 순간 놈의 손에서 순수한 마기로 이루어진 창이 소실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창과 이어진 마기의 흔적이 송두리째 뽑혀 나오며 놈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입혔다. 그것이 데오즈는 파악할 수 없는 이치로 이루어졌으니, 적어도 설명을 듣는다고 알 수 있는 스킬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흐아아아아아!” 직후, 놈에게서 뽑아낸 마기를 고스란히 번개로 치환해 담아낸 시페넌의 단검이 놈의 가슴팍 깊숙한 곳에 박히며 에너지의 대폭발을 일으켰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런데 내 힘은 어떻게 써먹든 충분히 전투적이라서 말이야.” 자신의 힘까지 고스란히 담겨 돌아온 카운터에 끝내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마족. 기회는 이 때다 하고 르세티와 미케나, 데이스와 아리아의 집중공격이 퍼부어져 놈의 생명력을 깎아냈다. 레벨이 10 이상 높은 마족을 상대로 이 정도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아니면 혹······. “혹시 너.” 시페넌은 놈의 가슴팍에 박혔던 단검을 비틀어 뽑아내며 놈에게 물었다. “네가 속한 곳에서 넌, 사천왕 최약체라고 불리는 놈이냐?” [그것을, 어떻게······!] 전대 마왕군의 사천왕 최약체, 기록보관담당 데오즈가 이를 갈았다. 아니 그냥, 하고 입맛을 다시며 시페넌은 놈의 머리통에 다시금 단검을 박았다. “어째 죽는 패턴이 그런 것 같아서.” 시페넌은 적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그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세상천지가 온통 그의 것으로만 보였다. 과거 용사 파티의 도적이었던 남자, 현재 디아스의 소년 국왕으로서 또 하나의 용사 파티를 이끄는 남자. 시페넌이 자신의 고유능력 강탈을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2 > 아르페 일행은 순조로이 마계를 빠져나왔다. 물론 나오는 길에 제네시스 머메이드들과 일시적으로 합류하여 그들의 전력을 확인하고, 마계를 효과적으로 틀어막기 위한 방어선을 새로이 구축하기도 했다. “남겠습니다, 주인님.” “역시 그렇게 결정했구나.” “예. 주인님의 곁에 있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릴은 다시 제네시스 머메이드를 통솔하는 위치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신의 욕망만으로 아르페와 함께하다가, 자칫 자신이 다스려야 할 백성들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이곳에서 마족들을 막겠습니다. 잠시나마 다시 주인님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전쟁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야. 모든 것이 끝나거든 그때 보자.” “반드시 빨리 끝나도록 만들어 보이지요.” 단신으로도 사천왕 급의 무력을 지닌 그녀가 그런 말을 하니 무척이나 든든했다. 아르페는 그녀가 인어들과 합류하는 것을 보며 뒤돌아섰다. 메테르의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저런 여자는 다시 볼 필요 없잖아. 그냥 바다에서 살게 내버려두자.” “넌 가끔씩 깜짝 놀랄 만큼 무서운 소리를 하는구나.” “난 단지 아르페가 다른 여자들에게 속을까봐 걱정하는 것뿐이야. 아르페는 착하니까 속이 시커먼 여자들의 꼬임에 잘 넘어갈 것 같단 말이야. 봐봐, 지금도 속이 시커멓다 못해 타버린 여자 한 명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잖아?” 아르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속이 제일 시커먼 여자는 그 말을 하고 있는 메테르였지만 그녀에게 자각이 없는 한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으리라. “정말 그래요. 아르페 님은 너무 착하셔서 나쁜 여자에게 속기 쉽지요. 제가 아르페 님을 보호하지 않으면.” “바디네도 참 재밌는 말을 하네.” 메테르와 바디네의 싸움을 말리는 것은 이미 진즉 포기한 그는 차라리 그들을 외면하기로 결심했다.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한시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페이트라가 추적용 아티팩트를 들어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그거 본다고 아냐?” [굉장히 세심한 아티팩트지. 하지만 수십 년간 이것을 다루어온 나는 아티팩트 하나만으로 대상의 위치와 거리까지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역시 프로 스토커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닥쳐라.] 프로 스토커 페이트라는 그 후로도 한참 아티팩트를 들여다보다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문제야. 설마 에트나가 죽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와 위치가 바뀌지 않는 것이지······?] 아르페는 머릿속으로 페이트라의 추적을 감지하고 그것과 관련된 흔적을 불태워버리는 에트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실로 바람직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의 위치라면 어딘데. 글라케이아?” [글라케이아에선 빠져나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젠장. 서둘러야겠어.] 에트나가 전대 마왕군에 쫓기는 것에 대해선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페이트라였다. 그 또한 전대 마왕군에 협력하고 있었던 입장이기도 하고, 그녀가 전대 마왕군에 제압당해 그들을 따르게 된다 해도 결국 둘이 같은 편에 서게 되는 것이기때문에 별 반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글라케이아에 갇혀 있었다면 얘기는 다르다. 빙하대륙은 존재만으로 에트나의 힘을 약화시키는 환경. 그런 곳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다녔다면 그녀의 육체와 정신의 상태는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페이트라는 송장을 끌어안는 취미는 없었다. “일단 가볼까.” “결국 또 글라케이아야.” “추워서 싫어어.” 아르페는 철마의 속도를 높이며 생각했다. 에트나와 페이트라에 대해서? 아니. 그가 생각하는 것은 전대의 마왕과 용사였다. ‘어째서 전생과 현생이 다르게 굴러가고 있는지 이제 조금씩 감이 잡혀. 비록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그 꿈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게 진실이라는 확신은 이미 진즉부터 서 있었으니까······.’ 전생에서 전대 마왕과 그 세력은 분명 봉인되어 있었다. 전대 용사의 업적일 것이다. 봉인할 수 있으면 좀 죽일 것이지 왜 봉인에서 그쳤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만만이었으나 아마 죽이기엔 힘이 모자랐다든가 하겠지. 그래놓고 후대에 전하는 메시지에는 마왕을 죽이지 못했다는 말은 쏙 빼놓고 자기자랑만 늘어놓았으니 이미 죽은 작자를 불러내 세게 때리고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래, 그들은 봉인되어 있었어.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이 마왕성 근처에 있었으니 봉인 또한 근처에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봉인이 메테르 일행이 마왕성에 쳐들어온 그 날, 내가 죽게 된 그 날 풀린 거야.’ 추측컨대 봉인이 풀린 순간은 아르페가 고유능력의 2단계 ‘리라이트’를 각성해 세계를 개변한 그 순간. 세계가 되감기는 순간 그 지척에 있던 봉인이 그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무리였다. 어쩌면 아르페의 각성 또한 봉인되었던 전대 마왕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은 ‘리라이트’에 무력하게 휩쓸릴 수밖에 없었지만 봉인되어 있던 전대 마왕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기회였다. 겨울여왕이 말하지 않았던가. 방대한 기록을 품은 이들은 개변에도 휩쓸리지 않았다고. 전대 마왕이 그만한 힘을 갖춘 이라면 지금 이 사태가 설명이 된다. 아르페가 완벽하게 과거로 돌아온 시점에서, 이미 현실은 왜곡되어 있었다. 전대 마왕 세력은 그 시점에서부터 차츰차츰 힘을 되찾아 현 마왕 세력과 대립했고, 끝내마계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결국 나 때문이잖아.” “맞아. 아르페가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내가 이렇게 피곤할 일은 없을 텐데······.” “아르페 님이 조금만 더 엄격한 분이었어도 이런 용사와는 진즉 다른 길을 걷게 되셨을 텐데······.” “아직도 그 문제로 떠들고 있었냐.” 아르페는 누가 더 옳은지 판정해달라며 다가온 메테르와 바디네의 머리에 사이좋게 꿀밤을 먹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문득, 마계의 심부까지 들어가서 굵직한 전투를 치르고 마계의 비밀까지 접하고 돌아온 녀석들도 이렇게 여유로운데 자신만 너무 긴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해지고 말았다. 편하게 생각하자. 어디까지나 그의 추측일 뿐 정말로 전대 마왕의 봉인이 아르페의 각성 탓에 풀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니까. 더욱이 마계 측 전력이 보강된 것 이상으로 용사 측 전력도 많다. 전생의 사천왕이었다가 현생의 용사로 부활한 아르페를 필두로 바디네와 시에나, 전생보다 훨씬 강해진 시페넌도······. [아르페.] 양반은 못 되는가, 그를 떠올린 순간 귀신같이 통신이 왔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통신기를 꺼내어 그에게 대꾸했다. “잘 버티고 있냐? 우리는 새 파티원 모집하러 글라케이아로 가는 중인데.” [그거 저번에도 말한 것 같은데······ 어쨌든 우리는 마왕군 사천왕이라는 놈을 잡았어.] “사천왕? 내가 알기로는 남은 사천왕이 없을······.” [현 마왕이 아니라, 전대 마왕이 거느리던 사천왕 중 최약체. 기록보관이라는 고유능력을 갖고 있던 놈이었다.] “······.” 설마 시페넌의 입에서 그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아르페가 한창 고민하고있던 찰나에! 놈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아니, 그런데 전대 마왕군 사천왕과 조우했다면······! “다친 사람 없어!? 피해는!” [전부 무사해. 그놈 고유능력이 전투와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능력이었거든.] 전대 마왕이고 자시고 역시 사천왕 최약체다운 결과였다! 아니, 심지어 지니고 있는 고유능력이 어정쩡하다는 점까지 닮았잖아! 그놈도 죽으면서 세상을 되돌리거나 한 건 아니겠지! 그야 아르페가 여기 이렇게 있으니 그건 아니겠지만! 분명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모르게 눈물이 나는 아르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페넌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놈을 해치우는 과정에서 우리 다 같이 제법 성장했지. 넌 아마 날 다시 보게 될 거야.] “이미 다시 보고 있어······. 어쨌든 무사히 죽였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전대 마왕이라니, 놈이 스스로를 밝혔어? 기록보관은 또 뭐냐?” [좋아, 설명해주지. 하지만 그 전에 너한테 꼭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녀석의 낮게 깐 목소리에 아르페 역시 그가 진지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말해.” [너는······ 너는. 그러니까, 너는.] 막상 판을 깔아주니 녀석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불안해진 아르페는 선수를 쳐두기로 했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난 여자가 좋아.” [그중에서도 메테르를 좋아하는 거지?] “어······ 뭐?” 설마 이것이 꼭 확인해야 할 일이었단 말인가. 아르페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메테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곤 히익,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통신을 훔쳐듣고 있는 것은 아닐 터다. 단지 아르페가 혹시 여자와 통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질투해서겠지. [빨리 대답해.] 아르페는 방음결계를 쳤다. 메테르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지만 그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좋아한다. 됐냐?” [그러면 약속해라. 절대로 메테르를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싸우다 보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확답은 못하겠는데.” [야.] “······적어도 내가 죽기 전에는 죽게 놔둘 생각이 없다만.” 상대가 진지하니 그만 아르페도 진지해지고 말았다. 시페넌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대답이 없었지만, 이내 후우,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좋아, 믿는다. 그러면 본제로 넘어가자.] “뭐 임마?” [네 전생에 대해, 어째서 네가 사천왕에서 벗어나 용사가 된 것인지에 대해 듣고 싶다.] “······.”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그의 사고가 멈추었다. [나는 기록보관의 능력을 지니고 있던 마족으로부터 전생의 내가 지니고 있던 기록을 넘겨받았어. 놈은 그것으로 나를 설득해 인간계를 마계화하는 데에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그 덕에 난 강해져 끝내 놈을 죽일 수 있었지.] “기록보관······ 하긴, 납득이 간다.” 동시에 어째서 전대 마왕 세력이 힘을 빨리 회복할 수 있었는가도 납득했다. 과거로 돌아가기 직전의 기록을 보관한 사천왕이 과거에 이른 시점에서 그것을 회복시켰기 때문이겠지. 놈이 죽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그런 변수는 빨리 사라져주는 쪽이좋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변수가 지금 아르페의 골을 아프게 만들었다. [자, 그러니 아르페. 내가 배신하려한다든가, 너에 대해 까발리고 다닌다든가 하는 걱정은 일단 접어두고······ 그저, 너의 이야기를 해줬으면 해.] “시페넌, 너 되게 성숙해졌다.” [네 덕분이지, 아르페. 그러니······.] 통신기 너머, 아마도 쓰게 웃고 있을 전생의 원수가 그에게 말했다. [얘기해주겠지?] “엄청 길어질 텐데, 사내자식들끼리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 통신기 붙잡으면서?” [틈틈이 시간 날 때 말해주는 걸로 괜찮아. 난 단지······ 너처럼 강해지고 싶을 뿐이야. 조금이나마 네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을 뿐이야.] 아르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어차피 그들은 당분간 이동만을 반복하느라 딱히 크게 할 일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에 대해 마음 놓고 얘기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사실 아르페에게도 제법 고마운 일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나에 대한 존경심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해주지.” 끝내 아르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즈음 완전히 뿔이 난 메테르가 주먹에 마나를잔뜩 불어넣고 방음결계를 부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이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않았다. “일단 메테르 좀 적당히 속이고.” 글라케이아로 가는 길, 그렇게 아르페에게 무료를 때울 소일거리가 생겼다.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3 >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생명반응은 확실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게 포착되고 있어.] “후우.” “역시 살아있구나.” 글라케이아에 가까워져올수록 일행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왕성에 돌격할 때보다도 다들 긴장도가 높아져 있는 것 같았다. “전대 마왕군의 세력과 싸우게 되리라 생각해서 긴장하고 있는 거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 전대 마왕이 직접 출두하지 않은 한은 밀리지 않을 테고, 그놈이 직접 나섰으면 에트나가 이렇게 도망을 치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으으, 그 여자가 우리 파티에 합류할 걸 생각하니 너무 긴장돼······!” “설마 그게 문제였냐!?” 메테르의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농담 같은 말에 다른 이들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에 대해선 아예 걱정도 안 하고 있던 모양이다. 아르페는 파티원들을 대하는 자신의 교육방침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역시 마주친 순간 요절을 냈어야 하는데.” “네가 안 당하면 다행이다, 임마.” 글라케이아에 있는 에트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르페는 생각해보았다. 설마 자신이 몸을 담고 있던 마왕군에 대한 의리로 전대 마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 터, 그녀는 단지 싸우기 싫어서 도망치고 있을 뿐이리라. 그것이 꼭 긍정적이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 ‘마왕군에서 싸우지 않는 것과, 인간의 편에서 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그녀는 피가 흐르는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마족을 공격해달라는 부탁을 해도 되는 것일까. 마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싫어할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아르페에 대한 반감으로 전대 마왕군에 합류한다든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생긴다면······. “아르페에 대한 반감이 있을 리가 없는데 괜한 걱정을 하네.” “그 여자가 아르페를 적대하는 일, 실은 아르페가 마왕이었을 가능성보다 낮음.” “너희는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니.” 아르페는 아티팩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페이트라를 힐끗했다.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그는 겉으로는 담담한 행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일행은 그렇다는데.” [에트나는 마족이다. 그녀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러면 왜 도망을 다니고 있는데? 책임과 의무를 다할 거라면 그냥 전대 마왕 세력에 굽히고 들어갔으면 될 텐데.” [그건······ 현 마왕 폐하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지.] 여태껏 아르페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참신한 개소리였다. 페이트라 본인도 스스로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는지 곧 말을 돌렸다. [직접 물어보면 될 일. 그러기 위해 네놈과의 계약을 한 것이다.] “답은 이미 나와 있지만 말이야.” 페이트라가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르페는 쓰게 웃었고, 페이트라는 흥, 코웃음을 쳤다. 곧 일행을 실은 철마가 빙하대륙 글라케이아에 진입했다.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설원은 언제나와 같아 보였지만 만물열람으로 보이는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르페는 직감적으로 대륙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깨닫곤 중얼거렸다. “망했다 이거.” “그 여자 죽었대?” “아니, 내가 보기엔 대륙이 죽어가는 것 같은데.” 아르페를 대신해 레이제나가 입을 열었다. “북부, 원래 추움. 겨울여왕이 북부에 잠든 이유. 그로 인해 더 추워졌음.” “하지만 그녀는 기록을 네게 넘겼지.” “대륙은 이전의 모습을 되찾는 중. 에트나가 무사한 이유도 아마 그것.” 겨울여왕의 냉기가 유지되었더라면 에트나가 글라케이아에서 버티기 힘들었을 테지만 그 기록이 레이제나에게 넘어간 덕분에 그녀가 어찌어찌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대륙이 전부 녹아내리는 일만 없다면 괜찮겠지, 아르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물열람을 최대한도로 발동했다. 에트나의 위치만 문제인 것이 아니다. 이 대륙에는 전대 마왕 세력도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찾아내 처리할 생각이었다. “아르페, 시페넌이랑은 이제 통화 안 하는 거지?” “그래, 대충 끝냈으니까.” “마음에 안 들어.” 언제나 한결같이 시페넌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는 메테르. 아르페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는 문득 물었다. “넌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아르페가 말해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릴래.” “그러냐.” “응, 그래.” 사실은 너도 시페넌처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아르페의 용기가 없어서다. 그녀의 무한한 호의에 이대로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을 뿐이다. “저는요, 아르페 님? 저는.” “너랑은 관계없는 일이야.” “너무해요!?” 전생에선 아르페와 바디네가 엮인 역사도 없으니 오히려 그녀를 볼 땐 편안하다. 마찬가지 이유로 시에나도 편하다. 가끔 메테르가 시에나를 편애한다고 질투하는 것은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반응이 격해지기 시작했어.] 아르페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기 시작한 바디네를 적당히 달래주던 그때, 페이트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르페는 철마의 속도를 높이며 대꾸했다. “어차피 반쯤 예상하고 있던 것 아니었어? 이만한 마력을 지닌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데 저쪽에서 우리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서두르자는 얘기를 하는 거다. 적어도 에트나가 죽기 전에 그녀로부터 답을 들어야 하니까.] “······흠.” 페이트라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행동에 관여하고 있는 감정은 오직 순수한 마족으로서의 책임감일까? 동지애? 이미 오래전 아르페가 꿰뚫어본 바 있는, 에트나에 대한 애정? 그러나 담담한 그의 얼굴로부터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아르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답을 듣는 것만으론 안 돼. 반드시 살려놓아야지.” [생명의 빛이 이렇게나 희미한데, 허약할 데로 허약해진, 마족인 그녀를 네놈들이 무슨 수로 살리겠다는 것인지 기대가 되는구나.] 페이트라가 아르페를 비웃었다. 마치 에트나가 정말 죽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이지 않은가? 역시 마족 놈들은 하나같이 싸이코 뿐이라고, 과거 그 마족 중한 명이었던 아르페는 생각했다. 아티팩트의 반응은 점점 더 강렬해져갔다. 페이트라의 말마따나 에트나가 정상 컨디션이 아님은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녀는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생명반응 또한 확실했다. “아.” 아르페가 감탄사를 내었다. 그의 자안이 맹렬한 빛을 발하며 전방을 훑었다. “아무래도 우리 덕분에 적도 에트나의 위치를 대강 눈치 챈 모양이야. 우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 “전력 확인은 돼?” “레벨 385짜리가 하나, 370짜리가 둘, 350 언저리가 다섯 정도.” 전생의 아르페였으면 사천왕의 쫄따구 수준! 설마 저들이 전대 마왕 세력의 전력도 아닐 테고, 에트나 하나 잡아 데려가려고 왔다고 치기에는 지나치게 압도적인 전력에 아르페는 살짝 질려버리고 말았다. “좋아, 그러면 내가 저쪽으로 갈게.” 그러나 메테르는 아르페의 말을 듣자마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쥐며 그렇게 선언했다. 아르페의 아연한 얼굴을 보며 메테르가 왜?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아르페랑 로아가 가장 경험치를 많이 받기는 했지만, 그때 그 마족 잡고 나도 385레벨 됐는걸.” “정말 괜찮겠어?” “응, 항상 레벨 높은 애들하고만 싸웠는데, 고작 숫자만 조금 많을 뿐인 허접들한테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어.” 의도하지 않아도 항상 명대사를 내뱉고 마는 메테르가 너무 무서웠다. “아니, 그것뿐만 아니라······.” “그 여자는 아르페를 보면 엄청 기뻐할 테고, 아르페는 그 여자를 가만히 놔둘 수없을 테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 그 여자를 죽이고 싶어질 테니까 자리를 비워주려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아르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스킨십은 다 끝내두어야 해.” “넌 정말 한결같구나······.” “읏차.” 그런데 메테르에 이어 레이제나까지 스태프를 들고 나섰다. “어쩌면 저들의 목표는 에트나뿐만이 아닐 수도. 에트나에게서 우리를 보고 있을수도 있음.”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간다는 소리. 저들이 원하는 답을 내가 갖고 있음.” 레이제나의 눈이 반짝였다. 대관절 에트나와 레이제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던 아르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에트나에게 겨울여왕의 유적의 정보를 준 것은 전대 마왕 세력이었지. 어쩌면 그들은 단지 에트나를 제압하기 위해서 그런 공정을 거친 게 아니라, 에트나와 충돌하여 약해진 겨울여왕까지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그녀가 지닌 불의 힘은 빙하대륙 전체를 약화시킨다. 당연하지만 빙하대륙과 동화되어 있던 겨울여왕 역시 약화된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권능이며 제아무리 레벨이 높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대가로 에트나까지 약화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빙하대륙 글라케이아 역시 세상의 일부. 세상을 마계로 만들고자 한다면, 글라케이아의 지배자를 처단할 필요가 있음.” “훌륭한 추론이야, 레이제나. 그래서?” “감.” 그녀는 철마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메테르의 등짝에 찰싹 달라붙으며 입술을달싹였다. “글라케이아의 차기 지배자로서.” 그렇게 둘은 금세 철마로부터 벗어나 전대 마왕 세력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이트라는 레이제나가 떠나기 직전 남긴 말에 붙들려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언제나와 같이 그를 무시했다. “이제 곧 도착이야.” 더는 페이트라의 아티팩트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다. 에트나는 자신을 꽁꽁 숨긴다고 숨겼지만 페이트라의 아티팩트도 읽어내는 기척을 아르페의 만물열람이 읽어내지 못할 리 없었던 것. [보이지 않는군. 열기를 이용한 은신 스펠인가, 과연 에트나······.] “난 보이는데.” [뭐?] 아르페의 눈은 정확히 에트나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녀는 정체모를 철마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이내 두 손에 거대한 불꽃을 피워 올렸는데, 다른 이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던 설원이 갑자기 녹아내리며 그 안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으로만 느껴졌다. [난 돌아가지 않아!] 불꽃이 철마를 덮치려던 바로 그 순간 페이트라의 냉기가 그것과 충돌했다. 불꽃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며 페이트라가 혀를 찼다. [역시 죽어가는군.] “그래, 그럴 것 같았어.” 아르페는 짧게 답하며 철마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돌발행동에 페이트라 또한 당황하며 뒤를 따랐다. “······아르페?” 믿지 못할 것을 본 눈으로 에트나가 중얼거렸다. 역시 그녀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아르페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그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아르페!” 대지에 착지하는 그의 모습을 뚜렷이 확인한 에트나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한 것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아르페는 그제야, 혹시 에트나가 여태 아르페가 죽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트나.] 페이트라가 마족의 언어로 에트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르페에게 시선이 꽂혀 있던 그녀는 그제야 페이트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분명 처음 느껴졌던 건 저, 내가 질색하는 냉기였어······ 아르페, 어째서 둘이 같이 온 거야······? 호, 혹시 아르페는 마족과 함께 일하기로 한 거야?” “아니.” 아르페는 블링크를 구사해 곧장 에트나 앞에 도달했다. 그녀는 곧장 아르페를 끌어안으려다가도 그 뒤를 이어 나타나는 페이트라의 모습을 확인하곤 그를 경계했다. [에트나, 네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페이트라는 에트나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마계로 돌아갈 테냐, 아니거든 이 남자와 함께할 테냐.] “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에트나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페이트라의 모습을 보며 아르페는 나지막이 한탄했다. 아, 이러니까 이 새끼가 여자한테 인기가 없지.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3 > 끝<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4 > “일단 에트나를 좀 회복시킨 후에 하자고.” [확인이 먼저다.] 아르페는 인상을 쓰며 페이트라를 막아섰지만, 그는 전신으로 냉기를 피워 올려 아르페의 접근을 차단하며 에트나에게 한 발짝 나아갔다. 그와 함께 폭탄선언을 했다. [에트나, 이 자는 용사다. 그럼에도 너는 그와 함께하고 싶은가?] 이 자식, 이런 방식으로 선수를 치다니! 좀 더 에트나를 안정시킨 후 조심스레 고백해도 모자랄 것을 이 빌어먹을 놈이 초를 친 것이다! 그러나 아르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에트나가 조심스레 아르페의 옷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함께하고 싶다면, 너 혼자 얌전히 마계로 돌아갈래?” [큭······.] “뭐?” 아르페가 더 놀랐다. 에트나가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처음부터 네가 용사 아니면 용사의 파티 멤버일 거라고 생각했어. 게다가 난 이미 내 마음을 말했잖아. 페이트라는 몰라도 아르페가 그렇게 놀라는 건 마음에 안 드는걸. 여자 마음이 그렇게 우스웠니?”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그렇군, 네 뜻은 잘 알았다.] 페이트라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를 거부하고 택한 것이 용사더냐.] “그래, 맞아. 어째서 네가 아르페와 함께인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내게 마족도, 마왕군도, 구역질나는 네 옆자리도 강요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런가······.] 그 순간 아르페는 영혼의 계약서가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페이트라가 계약서를 거스르려 한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사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넌 마족이다. 마족으로 태어나 마족을 거부하겠다는 것인가?] [난 태어나 여태까지 단 한 순간도 마족이고 싶지 않았어. 페이트라.] 페이트라가 냉기를 만들어낸다. 그에 맞서 에트나 역시 전신에 불꽃을 태워냈지만 이미 1년에 가까운 세월 대륙에 의해 약화된 탓에 그녀의 불꽃의 힘은 많이 빠져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쓴다면 정말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아르페는 이를 악물며 방어막을 만들어내, 그것으로 에트나를 가리며 페이트라를 쏘아보았다. “페이트라, 너는 에트나를 사랑하는 것 아냐? 이대로 그녀와 싸워 죽이기라도 할셈이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는 필요 없다. 마족으로 태어나 마족을 거부하는 여자는 필요 없다. 더욱이 그 여자가 용사와 붙어먹는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거센 냉기가 일어 아르페와 에트나를 덮쳤다! 에트나의 불꽃의 힘을 입은 방어막이 그것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에트나의 약화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놈의 냉기는 빙하대륙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러게 저 자식은 왜 데리고 온 거야, 아르페!” “너한테 안내해준다잖아. 아무리 내가 대단해도 힌트 하나 없이 널 찾으려면 대체 얼마나 걸렸겠어!” [용사 아르페, 너는 내가 처음부터 내가 목숨에 미련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영혼의 계약서를 어긴 대가는 결국 죽음, 그것을 알면서도 내게 계약서를 내민 시점에서 네놈은 그저 바보짓을 했을 뿐이다.] 페이트라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아르페와 에트나의 관계를 알고, 에트나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끝장내기 위해 그를 이곳까지 안내한 척 했던 것이다. 아르페는 이제야 페이트라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놈은 단지 병신일 뿐이었다. “영혼의 계약서의 대가가 단지 목숨이라······ 마생 헛살았구나, 너.” 하지만 아르페가 영혼의 계약서 하나 믿고 그와 함께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정말 바보는 페이트라 쪽이다. [뭐······ 큭!?] “영혼의 계약서의 대가는 말 그대로 영혼이야.” 영혼의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어기면 영혼을 상대방에게 빼앗긴다. 이것을 단지 죽음이라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틀렸다. 영혼이란 말 그대로 존재의 모든 기록을 담은 근원, 그저 죽음이 찾아올 뿐이라면 귀찮게 계약서 같은 거 안 쓰로 철퇴로 상대의 머리를 깨부수는 쪽이 빠르다. [무엇이 되었든······!] 아르페와 함께 작성했던 영혼의 계약서가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페이트라가 입술을 짓씹으며 자신의 모든 마나를 끄집어냈다. [발동하기 전에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처음 아르페 파티에게 패했을 땐 상태가 말도 아니었지만, 빙하대륙까지 오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곳의 대지를 밟으면서 놈의 냉기는 이미 전성기의 위력을 상회하고 있었다. 놈의 계산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영혼의 계약서에 의한 형벌이 집행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놈이 쌓은 격이 격인만큼 그것에 어느 정도 저항하는 것도 가능할 터, 자신이 죽기 전에 아르페와 에트나를 통째로 끝장낸다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그건······?” 물론 아르페에게 이럴 경우를 상정해 대비해둔 물건이 없었다면 말이다. [큭!?] “에트나, 미안. 소중히 다뤄야 하는 물건인데······.” “아······!” 아르페가 품에서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에트나 본인으로부터 받은 불꽃의 검! 마정석을 이용한 4차 강화까지 거쳐 페이트라와 전투를 벌일 때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검을 들었다고 해서 페이트라를 베어 넘기기라도 할 것인가? 그럴 리가, 아르페는 지금 검을 강화하고 있었다. 에트나는 검이 폭염을 토해내어냉기를 막아내는 것을 보며 떠올린 것이 있었다. “프레이트에서, 그 방어벽······!” “맞아.” 강화 스킬의 사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르페가 여태까지 주로 쓰던 방법은 아티팩트를 영구적으로 강화해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 하지만 비교적 적은 대가를 치러 아티팩트의 성능을 일시적으로 강화시키는 방법도 분명 있었는데, 지금 그가 벌이는 짓은 후자에 가까웠다. [고작 그 따위로!] “어림없어.” 단순한 폭염이 아니었다. 불꽃의 검 곳곳에서 아르페가 다루는 마나 스트링이 솟아났는데, 그 모두가 불꽃의 힘을 담고 허공에서 이리저리 교차하며 견고한 방어막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위치한 불꽃의 검에는 점점 실금이 가고 있었지만 그 대가로 방어막은 열기를 더해갔다. “오빠!” “아니, 공격하지 마!” 뒤늦게 철마를 타고 현장에 도착한 아르페의 일행이 그들의 대치 상태를 보고는 다급히 달려왔지만, 오히려 아르페는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페이트라의 공격이 그들에게만 집중되는 쪽이 막아내기에 더 쉬웠기 때문이다. [고작 아티팩트 따위로 이 페이트라의 목숨을 바쳐 만들어낸 마법을 막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는가!] “고작 아티팩트 따위라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넌 글렀어!” 아르페의 입가에 히죽, 미소가 어렸다. 직후 그는 강화 스킬의 출력을 더욱 높였다. 그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면······. “검이!” “괜찮아!” 불꽃의 검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렸다! 아티팩트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출력만 점점 높아지니 끝내 그것을 이겨내지 못해 붕괴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이 만들어내었던 열기만은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아니, 오히려 에너지를 가두던 답답한 틀에서 벗어난 까닭에 점차로 그 힘을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아티팩트가 지니고 있는 최고의 능력을, 그 아티팩트를 희생하는 대신 극한에 가깝게 불려 결과로써 단 한 번의 대마법을 만들어내는 것! 이게 바로 강화와 구현의 힘을 합쳐 만들어낸······ 돈지랄 스펠이다!” “좀 더 멋진 네이밍도 있었을 텐데!” 제법 감격하고 있던 에트나가 아르페의 절망적인 네이밍에 기겁하는 동안에도 그가 만들어낸 돈지랄, 거대한 폭염의 방패는 어렵지 않게 냉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페이트라의 입술이 질끈 깨물렸다. [이럴 수는 없어! 마족을 배신하고, 마왕 폐하를 배신하고, 마계를 배신하고, 나를 배신한 저 여자를······ 나는······!] “흡!” 아르페는 구현을 발동해 방패의 형상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금세 크기를 불린 폭염이 허공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포효를 내지르며 페이트라를 그대로 덮쳐버렸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용에 그 불꽃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에트나조차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불꽃 너머로부터 페이트라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히 불꽃으로 인한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놈의 힘이 불꽃에 의해 전부 수그러져, 드디어 영혼의 계약서가 제대로 ‘형벌’을 집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용사아아아아아아! 이놈, 아르페에에에에에에에에!]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람.” [감히 네놈이! 네놈이이이이이이!] 혹시 죽음의 순간 기적처럼 전생을 떠올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르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으나 페이트라는 그 이상 아르페를 부르지 못했다. 아르페의 품에 있던 영혼의 계약서가 힘을 다해 파스스 부서져 내리고, 직후 놈을 덮쳤던 불꽃 역시 깔끔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단순한 돈지랄이 아냐. 비록 아티팩트의 힘을 빌렸다지만 내 손에서 구현된 마법, 그 기록이 고스란히 구현 스펠에 남으니까······ 이만한 힘은 아니어도 나중에 다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거지.’ 아르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로소 구현 스펠의 힘을 제대로 키울 방법을 알아낸 기분이 들었다. 비록 이제 남은 적이 얼마 없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제 곧 놈들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기분마저 드는 요즘이지만! “아르페, 괜찮아!? 페, 페이트라는!” “아, 에트나.” 에트나를 구하러 와놓곤 마법에 취해 그녀를 잊고 있었다. 아르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붙잡는 에트나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해주었다. “나는 괜찮고, 페이트라는 깔끔하게 소멸했어. 영혼만 남기고 말이야.” “영혼······?” 불꽃이 사그라진 자리, 그곳에 아주 작은 푸른빛의 구슬이 하나 남아 있었다. 아르페는 그것을 주워 쥐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옛날이야기에 보면 마족들이 마신을 되살리느니 마느니 하면서 생지랄을 떠는데, 보통은 그 매개체가 되는 것이 이런 구슬이야. 마신의 영혼이 담긴 파편이니 마니 하는 그 대부분의 구슬이······ 이런 강력한 마족의 영혼이 담긴 구슬이지.” 마신 소환을 한다며 떠드는 무리가 수십 년에 한 번씩은 꼭 나오는데, 여태까지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영혼의 구슬 역시 아르페가 어디 던져 놓으면, 어떤 머리 텅 빈 녀석들이 이 구슬이 뿜어내는 마기에 혹해 마신 소환을 시도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하지만 아무리 영혼이 담겨 있다고 해도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해. 물론 놈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것뿐이거든. 실제론 그냥 성능 좋은 아티팩트 재료야. 마법에 써먹을 수도 있고······ 레이제나가 좋아하겠어.” 사실 페이트라와 재회한 순간부터 그를 이용하면 레이제나의 마법을 강화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아르페는 그와 영혼의 계약을 맺는 순간부터 이렇게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입 밖에 꺼내면 너무 악랄해 보일 테니까 굳이 말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다, 에트나.” 아르페는 구슬을 품에 챙기며 에트나를 향해 돌아섰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그녀의 매끈한 목. 족쇄의 흔적은 확실히 없다. 정말로 마왕에게 무슨 일이 생기긴 했던 모양이다. “무사하다니, 아르페 너야말로······ 난 네가, 네가 정말로 죽은 줄 알아서······.” 정신없었던 사태가 모두 지나가고 나니 다시 에트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야 마지막 순간 겨울여왕의 유적을 무너트리며 지저로 도망쳤으니 에트나가 그들이죽었다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내가 그 자를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나는, 나는······.” “에트나.” 그때까지는 에트나에게 족쇄가 있었다. 그녀가 같은 마족, 그것도 자신만큼 강한 마족을 어떻게 대놓고 방해할 수 있었겠는가!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도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어쩌면 다시금 그녀를 아프게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필시 그녀는 그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며. “나와 함께해주지 않을래?” 아르페는 그녀에게 약간 쑥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4 > 끝 ⓒ 토이카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5 > “하, 함께······.” 에트나의 뺨이 화르륵,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육신을 냉기로 좀먹는 빙하대륙에서 오랜 세월 체류하느라 창백해져 있었는데, 이제야 좀 생기가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 그러면 그 아가씨는 떨쳐내고 온 거니?” “아니, 아마 내 인생 끝까지 쫓아올 것 같은데.” “너 최악이구나! 대놓고 양다리야!?” 사실이었기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잔뜩 볼을 부풀리고 있는 그녀를 상대로 ‘너랑 결혼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파티에 들어오라는 말이었는데 너무 자의식 과잉인 것 아니니’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가 그녀를 그저 ‘좋은 파티원이 되어줄 이’만으로 보고 있는 것도 결코 아니었다. 결코 사감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옛날 일. 아르페는 사천왕에서 벗어나 용사로 탈바꿈한 순간부터, 아주 조금씩 스스로의 마음에 솔직해져가고 있었다. “아으으, 정말 굉장히 무례한 제안인데 어째설까. 엿이나 먹으라고 거절할 수가 없는 이유는. 얄미워죽겠네.” “무례하게 들린 김에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어떻게 해, 이런 남자는 처음인걸.”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에트나를 훑으며 그녀의 현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태연하게 그를 대하고는 있지만 지금 에트나의 기력은 상당히 쇠해있는 상태였다. 본래 그녀가 지니고 있는 마기와 화기는 빈말로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데, 수개월 빙하대륙에서 버티며 그녀의 화기가 약해진 틈을 타 마기가 폭주하는 바람에 신체 내부 곳곳에서 괴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마족이지만 마기보다는 불에 가까운 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진 이상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었다. 솔직히 지금 그녀가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페이트라 말고도 그녀의 뒤를 쫓는 전대 마왕 세력의 존재를 우려해 멀쩡한 척 버티고 서 있는 것이겠지.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조금 부끄러운데.” “넌 정말 메테르랑 닮았구나······ 아무튼.” “닮았다는 말을 해도 하필이면 그 꼬마 아가씨랑!” “에트나, 인간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아르페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여태까지는 부끄러움과 당황으로 어쩔 줄을 모르던 에트나의 눈이 사납게 뜨였다. “나 그런 농담 싫어해. 아르페가 아니었더라면 한 번쯤 태웠을지도 몰라.” “농담이 아니라면.” “그럼 더더욱 질이 나쁜걸.” “널 마왕의 족쇄로부터 풀어내기 위해 연구했던 마법이야. 믿기 힘들겠지만 성공했어. 지금이라면 무조건 성공할 거야.” “······.” 아르페가 자신을 속박했었던 족쇄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그녀를 위해 마법을 연구했다는 말에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직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내겐 이제 마왕의 족쇄가 없어. 속박당하고 있었더라면 여기에 이렇게 머무르고있지도 않았겠지.” “알고 있어.” “그러면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야? 단지 나와 같은 종족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같은 의도라면 안타깝지만 별로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여전히 당황하고 있구나. 아르페는 그녀의 혼란을 걷어내기 위해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대로 있으면 얼마 못 버텨. 너도 알고 있겠지? 회생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마기나 화기 중 하나를 걷어내는 것뿐인데, 화기를 걷어낼 수는 없으니 마기를 걷어내야 하지 않겠어?” “······왜 너는 항상 전부 알아차리고 마는 거니?” 에트나가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르페는 그녀를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지금 네가 전대 마왕 세력에 쫓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이건 페이트라가 알려준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만약 네가 그들을 경계하고 있는 거라면 안심해. 메테르와 레이제나가 놈들을 처리하러 갔거든.” “단 둘이서!? 안 돼, 미쳤어!? 당하고 말 거야!” 아직 에트나의 인식은 반년도 더 전, 300레벨에 간신히 턱걸이를 했던 일행의 수준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동안 정신없이 숨어 다니기만 했을 테니시간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하면 정신적으로 몰려 있는 상태라는 것. “아르페 니이이이임!” “오빠!” 하지만 마침 적절한 타이밍에 나머지 일행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대마법을 구사하던 페이트라와 그런 그의 발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낸 아르페의 모습에 경악해 가만히 서 있다가는, 에트나와 아르페 사이에 좋은 분위기가 생성되자 더 이상 견디다 못한 바디네가 철마를 이끌고 돌격해온 것이다! “아르페 님! 벼, 별 일 없으시겠죠!?” “별 일은 이제부터 네가 만들 것처럼 보이니까 일단 진정해. 신성 스펠 영창하지 마.” “어라, 너흰 저번에 봤던 애들······ 성녀!?” “이번엔 알아보는구나.” “자, 잠깐만······?” 아르페가 강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능력이 늘어나기까지 했다는 것을, 그가 페이트라를 가볍게 제압하는 것을 지켜보며 충분히 깨달았다. 하지만 바디네와 시에나, 엘릭까지 모두 380레벨 즈음의 강자였을 줄이야!? 일행을 보는 순간 그들의 저력을 알아본 그녀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시에나는 나랑 같이 다니기까지 했는데, 그때도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는 결코······.” “에트나 언니도 대단하지만 아르페 오빠는 더 대단하거든요!” 시에나가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곧장 에트나에게 다가갔다. 그녀 또한 마기에 민감하기로 두 번째라면 서러운 이. 에트나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그녀를 본 순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언니, 이제 쫓아오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천천히 오빠 말을 들어주세요. 네? 지금 세상에 퍼져 있는 마족들은, 마계는 그 탄생부터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오빠는 그걸 바로잡고자 해요! 오빠에겐 그걸 가능케 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마족의 숫자도 상당하긴 하지만 그것은 얘기하지 않았다. “시에나까지 알고 있어!? 물론 아르페가 대단히 특수한 능력을 지닌 마도사라는 건 나도 알지만, 그래. 용사라는 것까지도 어느 정도 예측하고는 있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족을 인간으로 바꾼다느니 하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지 않아!?” “말이 돼. 왜냐면 난 엄청 잘났거든.” 아르페는 엄숙하게 선언하며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믿고 맡겨봐. 적어도 이대로 있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아아아아아,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잖아!” 전대 마왕 세력에 공격당하고, 마왕의 족쇄가 어느 샌가 사라지고, 도망자 신세가 되고, 아르페와 페이트라가 같이 나타나더니 페이트라가 병신 짓을 하다가 죽어 영혼의 구슬만 남기고 사라지고, 아르페는 가슴 두근거리는 고백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인간이 되라고 하다니! “으으으으, 대체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날벼락 같은 거야. 하나씩 천천히 들어오면 좋을 것을!” 그녀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풀썩, 고개를 떨구었다. “맞아, 이대로 있으면 나는 죽게 될 거야. 그러니 아르페 마음대로 해. 날 인간으로 만들든 불사조로 만들든 알아서 하라구! 하지만 일단 네 여자 친구를 살려놓은 다음에 해. 그 자들은 정말 강하단 말이야. 얼른 가서 도와주지 않고 바보같이 나나 챙기고 있다니 뭘 하고 있는 거야! 너 진짜 용사 맞니?” “넌 정말 착해빠졌구나······? 너야말로 마왕군 사천왕 맞냐?” “원래 옛날 용사 이야기 읽어보면 예쁘고 착한 마왕군 사천왕이 용사한테 넘어가고 그러던걸 뭐.” “와, 에트나 언니 재수 없다.” 아르페는 시에나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실 그녀를 설득할 뾰족한 수단이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지금 에트나가 이렇게쇠약해진 것에 감사라도 해야 하나.’ 말을 돌려 하고는 있었지만 결국은 승낙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확고한 주관을 가진 그녀이니만큼 설득하는 데 제법 애를 먹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좋아, 그러면 일단 메테르와 합류를······.” “그럴 필요 없어!” 아르페가 한숨을 쉬면서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저 멀리서 힘차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있는 것은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두 명의 소녀. 당연하지만 메테르와 레이제나였다. “벌써 다 처리했으니까!” “뭐······?” 메테르는 순식간에 달려와 에트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이 살짝 충혈 되어 있었다. 걱정과 분노가 적절히 혼재된 눈빛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턴 스킨십 금지야!” “그러니까 메테르, 아까 네가 했던 말은 조금이라면 스킨십을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마족들을 금방 처리하고 오겠다는 결의 표명이었구나?” “메테르, 무서웠음. 마왕보다 마왕에 어울림.” 레이제나가 겁에 질려 있는 것만 보아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오른 레벨을 보아 그녀도 만만치 않게 활약한 것처럼 보였지만 아르페는 굳이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로 그들을 다 죽였단 말이야? 너희가?” 한편 에트나는 파티 내에서도 강함으로 수위권을 다투는 메테르와 레이제나의 마력을 느끼며 놀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정말로 여태껏 그녀를 괴롭혀온 마족들을 깔끔하게 처리했다는 사실을 깨닫곤 기가 막혀 어버버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제법 바쁘게 돌아가고 있거든. 참고로 바로 방금 마왕군 사천왕과 전대 마왕군이 죽어나간 이곳은 결코 안전한 환경이 아냐. 그러니 해야 할 일 빨리 끝내고 가자고.” “해, 해야 할 일······.” 에트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메테르는 눈을 치떴지만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누가말하지도 않았는데 시에나가 마기의 폭주에 대비해 자신의 마나를 불러 일으켰고, 엘릭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또 파티에 여자가 하나 늘어나겠군, 하고 생각하며 묵묵히 망치를 꺼내들어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파티가 이렇게나 강하면 굳이 네가 날 꼬실 것도 없지 않니!?” “무슨 소리야, 준비는 아무리 많이 해놓아도 부족한 법인데. 적은 강대하다고.” “그럴 땐 파티 때문이 아니라 날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줘야 하는 것 아냐!?” 이 처녀는 아무래도 로맨스 소설에 뇌를 잠식당한 모양이었다. 그간 아르페를 겪으며 대충 그에게 기대해도 될 것과 기대해도 안 되는 것에 대해 파악이 끝난 다른 파티 멤버들이 가엽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아르페는 천천히 마도서를 펼치곤 스태프를 허공에 띄워 올렸다. 그의 체내에서 뻗어 나온 마나가 지팡이를 거쳐 수십, 수백 줄기의 맑은 마나의 실이 되어 빠져나와, 다시 마도서에 쏟아져 내려 눈부신 자광을 쏟아낸다. 마치 그의 눈 색과 같은 찬란한 보랏빛. 에트나의 시선이 그것에 고정되었다. “그 마도서······.” “에트나, 조금 아플 거야.” 아르페가 나지막이 경고한 직후, 재생 마법이 발동했다. 인과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5 > 끝 ⓒ 토이카 < Chapter 34. 불사조의 딸 - 6 > “흡······!” 체내가 뒤틀리는 충격에 에트나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일단 발동한 마법을 멈추어봤자 마기가 더 거세게 날뛸 뿐, 아르페는 오히려 스태프에 마나를 더욱 쏟아부으며 마법을 가속했다. “으으으, 메스꺼워, 토할 것 같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바디네, 너는 치료 준비해. 시에나는 폭주하는 마기를 잡아줘.” “네!” “맡겨둬!” “먀?” “넌 일단 대기만 해!” “주인님 미워, 먀!” 그동안 실험은 많이 했다. 에트나보다도 강한 마족을 상대로 임상실험까지 마쳤다. 비록 에트나에게는 화염이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기를 바꾸는 일을 도울지언정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에트나는 모든 마나를 화기로 저장하지. 그녀가 지금까지 다루던 불꽃은 엄밀히 말해 마기가 섞인 화기지, 순수한 화기도 순수한 마기도 아냐. 이미 근본부터가 불안정하다는 거지······.’ 그래서 아르페는 항상 의아했었다. 마족으로 태어난 그녀이거늘 어째서 체내의 기운이 이리도 균형이 맞지 않는가? 마족으로서 화기를 다루는 힘을 타고난 것이라면, 마기 그 자체의 온도를 낮추는 페이트라처럼 마기의 속성을 변화시켜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페이트라가 A를 A-로 바꾸는 느낌이라면, 에트나는 A를 B로 바꾸는 느낌이었다. 미처 A를 다 B로 바꾸지 못해 결과적으로 그녀가 발하는 기운은 A+B에 가까웠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폭발적인 불꽃을 다루니 과연 대단하다 해야겠지만, 그녀의 본질은 그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아르페는 늘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드디어 답을 얻는 데 성공했다. 마기는 애초에 뒤틀린 마나, 마족이란 변형된 인간일 뿐. 그녀는 원래 순수한 불의 힘을 타고난 인간이었어야 했는데, 마족의 피를 잇는 바람에 그게 어긋나고 만 것이다. 어쩌면 마족 가운데 그녀가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비추어지는 것도, 다루는 힘도 마족에 걸맞게 영락한 이들 가운데 오직 그녀만이 마족과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힘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는 마족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힘이 축소될 수도 있지만 그녀는 분명 마기를 떨쳐내면서 더 강해질 수 있어. 아니, 이제야 비로소 제 모습을 찾게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지.’ “에트나, 너도 느끼고 있는 거야?” “아으으으, 너무 아파서 모르겠어!” 그렇군, 그녀의 대답은 포기했다. 아르페는 단지 마도서로부터 비롯된 마법이 그녀의 육신을 감싸 일으키는 변화에, 재생에 집중했다. 본래 그녀는 순수한 화기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잘못된 기록을 없애고 뒤틀린 육신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그녀의 몸을 뒤덮었던 마기 또한 화기로 치환되고 있었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의 몸에서 한 차례 거센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육신은 아르페가 몸을원래 있어야 할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안다. 재생 마법 앞에 마기가 위축되고 화기가 활개를 펴면서, 미처 없애지 못한 마기를 불꽃과 함께 외부로 방출해 태워내고 있었다. 반대로 마기는 그것에 저항해 몸집을 부풀렸다. 뼈가, 근육이, 내장이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며 숙주의 건강을 해쳐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아득바득 발악을했다. “정화하겠습니다!” “외부로 방출된 것만!” “오빠, 언니 체내에서 마기가 꿈틀하는 게 느껴지는데······.” “제압해. 에트나의 육신에 손상이 가면 안 돼.” 그녀의 육신의 재생을 주도하는 아르페의 지시 아래 바디네와 시에나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기가 뿜어내는 음산한 빛과 아르페의 마나를 기반으로 하는 보랏빛, 시에나와 바디네가 뿜어내는 눈부신 백광이 어우러져 장내에 강렬한 마나의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으윽, 이거······.” 아르페는 마법이 무조건 성공하리라 확신했지만, 약화된 에트나의 육신이 재생 마법의 충격을 잘 버텨낼 수 있을 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숨만 붙어 있다면, 인간화를 완료한 후 바디네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재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마법을 강행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면 아르페의 생각은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흐아아아아아아!” “꺄아악!” “오빠, 저게 뭐야!?” 불꽃이 폭발했다. 마기와 장렬하게 부딪히는 와중에도 서로를 소모시키기는커녕 점점 더 몸집을 불려나가며, 안 그래도 상태가 메롱하던 빙원을 깔끔하게 녹이고 있었다. “흐······ 하아아아아아!” 불꽃은 곧 에트나였다. 화기가 마기에 비해 강성해지자, 그것은 빠르게 에트나의 체내를 질주하며 상처 입고 약화된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니, 치료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화기의 질주에 따라 그녀의 육신이 순수한 불꽃으로 화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르페는 그것을 미처 살필 수가 없었다. 만물열람으로 에트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도,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폭주하는 마기와 그에 지지 않고 솟구치는 화기 사이에서 위태위태한 마도서를 케어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했으니까. “불꽃이······.” “엄청나요. 마치 몸이 불꽃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아.” “일단 저 불꽃 편을 들면 되는 것 아닐까?” 설마 불꽃이 주인인 에트나를 해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끝에 아르페의 마나가 끝을 날카롭게 세워 불꽃과 대립하는 마기를 덮쳤다. 이번엔 아르페의 허가를 받아 로아도 한 팔 거들었다. 재생 마법으로 인해 마기의 정화가 이루어지고는 있다지만 마기를 온전히 화기로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르페는 놓아줄 것은 놓아주고, 대신 그녀의 육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에 집중했다. 그릇이 온전하다면 결국 내용물은 다시 채울 수 있게될 테니까. “흡······ 하아아!”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마도서가 마지막으로 한 차례 눈부신 빛을 토해낸 직후, 화기가 아르페의 마법을 받아들여 한꺼번에 남아있던 모든 마기를 정화시켜버렸다! “먀!” “아까워하지 마, 인마.” 물론 아르페가 구현 마법을 동원해서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에트나의 불꽃이 순수한 속성의 힘을 띠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르페 님, 저 여자의 치료는······.”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보다······ 배리어!” 아르페는 역할을 마치고 가라앉는 마도서를 다급히 회수하며 스태프를 붙잡고 최대 출력의 배리어를 만들어냈다. 그의 말만 듣고 동시다발적으로 동료들이 배리어를 만들어낸 직후, 어마어마한 불꽃의 폭발이 배리어를 덮쳤다. “꺄아아아아아!” “큭!” “혹시 공격인 걸까? 죽일까?” “넌 용사 교육 다시 받고 와 임마!” 일행이 저마다 기겁하며 한 마디씩 내뱉은 직후, 세상을 가득 메울 것처럼 부풀어올랐던 붉은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아니, 한 점으로 압축되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후우우······.” 바로 그곳에 불꽃의 정령이 있었다. “이럴 수가······.” “우우, 이래서 불안했는데. 마족일 때 죽였어야 했어요!” “아름다워라······.” “인간으로 되돌린 것······ 맞아, 아르페?” 아르페의 파티원들이 경악하여 저마다 한 마디씩 흘리는 가운데 메테르가 예리한지적을 해왔다. 아르페는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린다고 했지, 그게 인간이라고는 안 했잖아.” 물론 아르페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몰랐다. “후우······ 하아······.” “수, 숨결에 불꽃이 섞여서 나와.” “으으, 보고 있으니까 왠지 몸이 아픈데 왜지.” 허공에 둥둥 뜬 채 은은한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에트나의 모습은 빈말로도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불꽃을 그대로 실로 자아낸 것 같은 길고 풍성한 붉은 머릿결도 그렇고, 불꽃처럼 일렁이는 맑고 큰 눈동자도 그랬다. [에트나 칼리파드이 미레카드] [화령의 혼혈] [레벨 ? 388] [고유능력 ? 정령화]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아르페의 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다. 추측컨대 선대에 정령의 피가 섞여 간신히 그녀의 대에 이르러 개화했으나,그것이 마족의 뒤틀린 피에 억눌려 제 힘을 발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것으로 보였다. ‘그렇구나, 결국 이전 보았던 그 꿈이 맞았어. 내 죽음을 확인한 후 폭주했을 때, 그녀는 그녀의 육신을 살라 정령들을 불러냈었지······.’ 그것 또한 그녀의 몸에 깃든 정령의 힘의 편린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제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니, 아르페가 재생 마법을 익히게 된 것도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후우······.” 그녀는 자연스럽게 허공에 둥둥 뜬 채 일행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는 천천히 지상에 착지했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대지가 녹지 않았다.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거구나.” “응, 아르페가 보고 있는 그대로야.” 아직까지 근처에서 타오르고 있던 모든 불꽃을 깔끔하게 걷어내며 에트나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메테르는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에트나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메테르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아르페에게 걸어왔다. “그나저나 괘씸해. 얄밉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응?” “그렇게 순수한 눈망울로 바라봐오는 것도······ 정말, 감쪽같이 속았다니까.” 그녀의 말에서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한 아르페가 싸악 뒤로 물러나며 메테르에게구원 요청을 하려던 바로 그 순간 에트나가 허공에서 펑, 터져 사라지나 싶더니 곧장 그의 뒤를 점했다. “아르페에에.” “히익!?” 분위기가 바뀌었다! 순진했던 시골 누나가 수도로 상경하더니 세상만사를 겪고 요염한 도시 아가씨가 되어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 아르페는 재생 마법으로 인해 에트나의 인격이 변하기라도 한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답은 보다 간단했다. “이제 날 받아주는 거야? 받아주는 것 맞지? 네가 먼저 다가와줬는걸, 분명 받아준다는 게 맞아. 응, 맞아.” “어······ 에트나?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다시 얘기를 해봐야 할 것······.” “어쩜 그럴 수가 있니. 그렇게 튕기더니, 마지막 순간까지 연상 취향은 아니라고 단언을 하더니······.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속이 찢어졌는지 알아?” 어라. 아르페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이상 화제를 끌어가면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에트나, 설마.” “음, 그 반응은······ 역시 네게도 기억이 있는 거구나. 나보다 훨씬 먼저, 어쩌면 처음부터. 아니면······ 네가 주동자려나? 하지만 어찌되든 좋아. 이렇게 다시 둘이 살아서 만나게 되었는걸. 후후, 아르페.” 아르페는 그 말을 듣고 완벽하게 감을 잡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에트나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시페넌에게 들을 때만 해도 놀랐는데 어째서 그녀까지, 이러다가 다들 ‘실은 나도알고 있었어’라며 아르페를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 어마어마한 규모의 서프라이즈 파티였던 것은 아니겠지!? “아르페한테서 떨어지시지. 아르페가 싫어하잖아. 연상취향 아니라잖아.” “어머나, 용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르페가 이렇게 고생고생해가면서 내게 와준 게 보이지 않는 거야? 이건 그냥 대놓고 고백을 한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은 행복하겠어. 후후, 아무래도 여기서 확실히 해두고 가야겠는걸.” “다시 한 번 붙어보자는 거지? 좋아, 여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제대로 1대1, 붙어보자구.”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메테르와 에트나가 자아내는 압도적인 기세에 기가 질린 파티원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서고, 아르페는 에트나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기겁하여 어찌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가운데. “그만.” 레이제나가 자신의 스태프를 들어 바닥을 쿵, 찍었다. 에트나와 메테르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 홱, 고개를 젖혀 그녀를 쏘아보았지만, 레이제나의 스태프에서 비롯된 냉기가 순식간에 대지 전체로 퍼져나가며 그녀들의 마나를 동결시키는 것을 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아르페에게 갖는 애정은 이해. 하지만 둘이 싸우면 파티의 전력은 약화. 마왕한테 다 죽고 싶으면 굳이 말리지 않음. 아르페와 시에나만 챙겨 튐.” 겨울여왕의 뒤를 이어 새로이 글라케이아의 주인으로 우뚝 선 레이제나의 힘에 두 여자는 조용해졌다. 승패가 가려진 순간이었다. < Chapter 35. 재생 계획 - 1 >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야. 정말 너무나 상쾌한걸.” “그러면 그 기세를 몰아 다시 죽여줄까?” “메테르, 용사가 아니라 마왕 같음.” “큭.” 일행은 우선 글라케이아를 빠져나왔다. 비록 에트나가 오롯한 존재로 거듭나며 더 이상 글라케이아의 냉기에 구애되지 않는 지경에 오르기는 했으나 그곳에 그대로 있다가는 전대 마왕 세력이 언제 찾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르페, 정말 이 여자 파티에 넣을 거야?” “에트나가 도와준다면 당연히 넣어야지.” “분명 언젠가 뒤통수를 칠 텐데.” “뒤통수? 난 살아오며 단 한 순간도 아르페에게 손을 댄 적이 없는걸. 어떤 의미로는 손을 대고 싶었지만 아르페를 해치려고 한 적은 맹세코 단 한 순간도 없어. 오히려 그건 용사가······.” “에트나.” “어머나, 무서워라. 사실인데 나만 그렇게 노려보면 미워.” 레이제나의 극적인 개입으로 일단 치고 박고 싸우는 분위기에서는 벗어난 둘이었으나 여전히 둘 사이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메테르는 아르페가 유난히 에트나에게 집착을 보였던 것이 거슬렸고,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에트나는 전생에서 메테르가 아르페를 죽였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고운 눈길을 주려야 줄 수가 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온전히 되찾았다는 가정 하에서 보면, 에트나가 지금 이렇게 얌전히 있어주는 것도 기적적인 일이긴 한데.’ 아르페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칼 물고 죽겠다고 협박하면 둘 다 진정할지도 모르지. 아르페는 일단 그것을 최후의 방도로 남겨두기로 했다. “마음에 안 들어.” “어쩜, 마음이 맞는구나. 나도 네가 무척 마음에 안 드는데.” 아르페는 옥신각신하는 두 여자를 상큼하게 무시하며 나머지 일행에게 고했다. “자, 성공적으로 에트나까지 합류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마왕 토벌이군요.”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지.” 두려움과 약간의 기대감, 사명감을 동시에 갖추고 대꾸해오는 바디네에게 애매하게 대꾸하는 아르페. 레이제나가 그를 대신해 뒤를 이었다. “지금은 불가능. 마왕성은 무너지고, 마왕은 행방불명. 전대 마왕 세력 나타남. 마계는 넓고, 우리는 그것을 다 뒤질 수 없음.” “레이제나의 말이 맞아. 우리의 목표물이 애매해진 거지. 이때 주의를 하지 않으면 금세 나태해져서 다른 짓이 하고 싶어지지. 가끔 용사 이야기에 보면 쓸데없이 상단의 이야기를 한다거나 귀족들을 상대로 깽판을 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도 다 메인 퀘스트가 너무 빨리 끝나는 바람에 다음 퀘스트를 못 찾고 서브 퀘스트나 찾아다니다 보니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커져서 그런 거라고. 쉽게 말하면 본업에충실하지 않고 딴 길로 새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그런 놈들은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야.” “꼭 어디서 보고 온 것만 같은 얘기를.” 아르페는 엘릭의 태클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봤겠지?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가 근본적인 착각을 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어. 마계는 원래 인간계의 일부였고, 마족은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낳은 산물이었다. 단순히 마왕만 처리하면 되었던 것에서 일이 커진 거지.”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모두 난리가 나겠지? 게다가 꼭 나라마다 한 명 이상씩은 있는 인류애 투철한 운동가들이라든가 신전에서도 길길이 날뛸 테고.” “음,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테고, 마계를 다시 인간계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사실 아르페는 그런 일에 엮이는 것이 무척 싫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마기를 정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아르페이니만큼 도저히 빠질 수가 없겠지. “그러니 괜히 더 귀찮아지기 전에 후딱 끝내놓자는 거야.” “후딱······?” “아르페, 설마 다시 마계로 가는 거야······?” 아르페는 고개를 살짝 메테르의 시선을 외면했다. 마계로 가자는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테르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탈탈 털며 따졌다. “왜! 아르페는 언제나 효율적인 움직임을 강조했었는데!” 마계 심부로 들어가서 마왕성을 깨부순 것까지는 좋다.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에 들어가 진실을 깨닫게 되고, 내친 김에 전대 마왕 세력의 사천왕을 한 명 죽여 버린 것까지도 훌륭하다. 그런데 어째서 페이트라와 자존심 승부를 하는 꼴이 되어 글라케이아까지 되짚어돌아왔다가, 볼일이 끝나니 다시 마계로 가는 것이란 말인가! 어째서! 어째서 이런 뻘짓을 해야 하는가! 정녕 이것이 최선이란 말인가! “어머, 용사도 참 센스가 없구나. 아르페는 원래 마계에 나와 만나러 왔던 게 분명해. 그런데 내가 없으니 페이트라를 이용해서 날 찾으러 온 거지. 전혀 이상할 게 없잖니?” “너 같은 건 그냥 곁다리에 불과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이 귀엽기는 하구나, 어린 용사야.”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에트나가 메테르의 양손을 아르페에게서 떼어내고는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피부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열기가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을 데워주었다. “그 먼 길을 나 때문에 돌아온 거구나, 아르페······. 말로는 파티 전력 증강이니 뭐니 둘러대면서 말이야. 후후, 하지만 난 언제나 네 그런 면이 참 좋았어. 응, 더 좋아졌어.” “아르페한테 친한 척 뺨 비비지 마.” “하지만 실제로 친한걸?” 아르페는 무척 곤란해졌다. 시페넌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가 적으로 돌아서게 될까 두려웠다면, 에트나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고 나니 아르페를 향한 그녀의 감정이 단순한 사랑에서 헤아리기 힘들 만큼 깊은 애정으로 진화해버렸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니······ 메테르, 이것도 다 에트나라는 든든한 아군이 합류한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낭비가 아니라고. 우리가 마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기왕 인간계에 나왔으니 대륙동맹과 합류하자! 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우으으······ 역시 납득할 수 없는데······.” 물론 지금 아르페 일행의 전력이라면 굳이 소수정예를 표방하며 마왕군 수뇌만 척살할 것 없이 군대에 합류해 마족들을 씨몰살 해도 충분하다. 어차피 마왕성도 없고 현 마왕도 사라졌고 전대 마왕 세력의 수뇌는 어디 붙어있는지 알 수도 없으니 소수정예로 돌격할 목표물이 없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러면 대체 마계에서 정확히 뭘 하려는 건데?” 아르페의 사정설명을 들으며 메테르 또한 충분히 납득했다. 납득했기에,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어왔다. 아르페는 시원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마계를 인간계로 만드는 작업을 하려고.” 메테르는 그 말을 들으며 아득한 눈이 되었다. 나머지 일행도 그 비슷했다. 그러나 아르페의 말은 거기서 더 이어지고 있었다. “마족이 아니라 지역 전체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이야. 마나가 많이 소모되는 건 둘째 치고 마족들의 어그로를 벗어날 수가 없겠지. 어쩌면 전대 마왕 세력이라는놈들을 끌어들이기에는 가장 적합한 수단이 될 지도 몰라.” 놈들은 인간계를 마계로 뒤바꾸려 하고 있다. 그런데 마계 한복판에서 아르페가 그들의 뜻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을 행하고 있으니 어그로가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게 가능할까?” “용사 이야기를 근본부터 뒤집다니 역시 아르페 님 다우시다는 생각은 들지만······.” “가능해.” 시간과 예산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간이야 어쩔 수 없지만 예산은 인간계에서 마련해 갈 생각이었다. “먀아아아아.” “로아야, 이 세상엔 마기 말고도 네가 먹을 것들이 많단다.” “먀아, 다른 부정한 것들을 먹으면 되지만, 먀아아. 어째서 마기가 맛있는 먹이였던 건지 새삼스럽게 알 것 같아, 먀.” 아르페는 로아의 말에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인간의 뒤틀린 욕망의 정점에있는 기운이니 부정한 기운을 주식으로 삼는 로아가 좋아하게 된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그 시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마기를 인간계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까?” “너무 아득한 얘기라서 감이 잘 안 오는걸.” “할 수 있어.” 아르페는 의문을 갖는 일행에게 자신만만한 투로 대답했다. “그러니 이제 출발하자.” “우우, 아르페가 저렇게 자신만만해할 때에 한해 엄청 황당한 짓을 저지르곤 했는데······.” “글라케이아, 안녕. 나는 더욱 강해져서 돌아올게.” 철마가 떠올랐다. 모두가 불안해하는 가운데 레이제나만은 담담하게 대륙에 손을흔들었다. 그러자 대륙이 그에 대답하듯 눈보라를 휘날렸다. “레이제나의 능력까지 강화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됐네.” “아, 아르페가 방금 결과적이라고 말했어. 결과적이라고!” “먀아아아.” 철마가 가속했다. 그것이 움직이는 방향은 다름 아닌 신성제국 팔라티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아르페?] 깊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간. 아르페는 귓가에 들려오는 마족의 언어에 자연스럽게눈을 떴다. 바로 옆에, 미미하게 붉은 빛을 발하는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가 앉아 있었다. [깼구나.] [왜 그래?] 철마는 자동운행모드로 설정해놓아 여전히 밤하늘을 내달리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곳곳에 궁상맞게 앉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 정도 레벨이 되면 며칠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지만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유적에서부터 시작해서 페이트라와 함께하는 며칠 동안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긴장을 풀 수 없었기에, 그동안 쌓인 피로를 이때를 이용해 풀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페도 피로를 풀고 싶었다. [그렇게 째려보지 마. 난 네 사소한 행동에도 상처 받는단 말이야. ······방금 좀 사랑에 빠진 소녀 같지 않았어?] [지금 가장 쉬어야 하는 건 에트나 너야.] [후후,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나는 아주 완전하고 평화로운 상태야. 그보다 아르페, 이제 에트나 님이라고는 부르지 않는구나. 기뻐라.] [추억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늙은 용병이 주점에서 취객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늘어놓듯, 그녀 역시 아르페를 상대로 전생의 이야기를 하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에트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그냥 아르페랑 달라붙어 있고 싶어서.] [솔직한 것도 정도가 있지······. 왜 내가 아는 여자는 다 메테르를 닮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그 아가씨가 나를 닮은 것 아닐까?] 에트나는 아르페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반대쪽에는 메테르가 있었는데, 용케도 그녀가 깨지 않게 움직인다고 아르페는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선 아마도 둘만이 알고 있을 마족어로 노래하듯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다시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 이게 정말 현실이기는 한 건지, 어째서 마족이었던 아르페가 인간, 그것도 용사가 되어 있는 건지, 어째서 모든 사태가 이전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궁금한 건 산더미같이 있지만.] [말해줄 수 있는데.] [됐어.] 에트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의 목덜미에 짧게 키스했다. 마냥 뽀뽀해달라고 떼쓰는 메테르와는 달리 동작 하나하나가 어른스러워 아르페는 괜히 두근거렸다. 하지만 곧 그녀와 메테르를 비교하는 자신에게 환멸감이 느껴져 사고를 중단했다. [아르페가 날 찾아왔는걸. 그러니 이젠 아무래도 좋아.] [말해두겠지만 예전에도 딱히 네가 싫었던 건 아냐. 사랑했던 것도 아니지만.] [음음, 이해해. 페이트라는 언제나 골치 아팠지. 이전에도, 이번 생에서도. 아, 이런. 옛날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놓고선.] [지금을 말하려면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말해야 하는걸. 일부러 피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아르페, 용사 아가씨 좋아해? 그러니까 내 말은······ 옛날부터, 좋아했던 거야?] 기습공격이었다. 아르페가 그 말을 하길 기다려 질문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르페는 어이가 없었지만 순순히 대꾸해주었다. [그래, 무척.] [용사 아가씨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했었지. 나는 그 아가씨가 너를 죽인 줄 알고무척 화가 나 날뛰었지만······ 가장 날뛰고 싶었던 건 이 아가씨였는지도 모르겠네.] [······참아줘서 고마워.]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시점에서 에트나는 메테르와 레이제나를 상대로 폭주를 일으켜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감정을 누르지 않았던가. [으음, 솔직히 아르페가 살아있다고 하니까 뭐든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 게다가 이젠 모두 입장이 달라지기도 했고 말이야.] [······그렇지.]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저 용사 아가씨, 내가 아르페의 편인 한 절대 나를 적대하지 않을걸.] 정말 잘 아는구나, 싶었다. 메테르는 이전 아르페에게 선언한 이래 그들의 안전을최우선으로 놓고 움직이게 되었다. 비록 이를 득득 가는 일은 있어도 아군에게 칼을겨누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야 나도 그러니까. 나도······ 아르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거든.] [나도 참 죄 많은 남자야.] [그러게 말이야.] 아르페의 재수 없는 능청에도 에트나는 후후 웃어버렸다. 그리곤 다시 아르페에게 기대었다. [다시 만났구나······.] [그러게.] 그녀의 온도가 아주 조금 올랐다. 아르페는 뒤척여 메테르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했다. 에트나가 한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아주 살짝, 붙잡았다. [지킬 거야, 아르페. 이전에, 너를 지키지 못했던 몫까지······ 반드시, 반드시······.] [이상한 데 신경을······ 에트나?] 그녀의 목소리가 끊겨 조심스레 살피니 에트나는 잠들어 있었다. 피로가 없는 상태니 어쩌니 떠들더니 그의 곁에 와 금세 잠들어버린 것이다. 아르페는 그것을 깨닫곤 픽 웃어버렸다.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고, 자신 또한 잠을 청했다. < Chapter 35. 재생 계획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5. 재생 계획 - 2 > 다음날 아침, 아르페의 한쪽 어깨를 끌어안고 잠든 에트나를 발견한 메테르는 굉장히 분노하기는 했으나 그녀를 깨우지는 않았다. 레이제나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메테르 덕에 아르페는 가슴이 안 좋은 의미로 두근거렸다. “모든 게 다 끝난 후에 결판내주겠어.” “죽이면 안 돼. 에트나가 순순히 죽어줄지도 의문이지만.” “으으음.” 아르페와 에트나를 마지막으로 용사 파티 전원이 기상했다. 철마는 상공에 멈추어 있었는데, 까마득한 아래로 신전의 지붕이 보였다. “벌써 팔라티나에 도착했구나.” “아르페, 정말 할 거야?” “해야지.” “팔라티나······.” 마족이었던 에트나만은 팔라티나를 내려다보며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용사가 성국의 도움을 등에 업을 수 있게 되다니.” “용사 이야기의 왕도잖아.” “용사 이야기······ 훗, 흐흣.” “웃지 마, 인마.” 전생에선 그렇지 못했다. 모든 것을 설계하는 셰프의 레시피 덕분에 용사는 성국은커녕 다른 모든 나라의 지원을 받지 못했었다. 레시피 하나는 기가 막혀서 용사의성장속도 하나만은 어마어마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전락했었다. “응, 이게 아르페다운 방식이야. 나도 마음에 들어.” “잘 알고 있네. 마족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니 너도 순순히 협력해.” “여부가 있겠니, 나의 용사님. 네가 원하는 대로 따를게. 무엇이든지.” “윽······.” “나도 용사님인데, 나도! 어디 내 말도 한 번 따라보시지!” “어머, 꼬마 아가씨도 용사님이었지.” “꼬마!?” “예전에 비하면 커지긴 했는데······ 풉.” “비웃었어!? 방금 비웃었지!” 역시, 기억을 되찾은 후로 에트나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쓸데없이 요염해 아르페를 곤란하게 했다. 더욱 곤란한 것은 그 모두가 진심이라는 것. 아르페는 그 말에 자신 대신 으르렁거리는 메테르에게 에트나를 맡기곤 직접 철마를 조종하기로 했다. 귀찮은 녀석과 어려운 녀석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니 에트나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 “입 밖에 냈냐!?” “그 반응을 보니 확실.” 점점 사람을 다루는 데 고단수가 되어가는 이 녀석까지 함께 처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아르페는 반성도 모르고 무례한 생각을 했다. “팔라티나라······.” 한편, 점차로 가까워져오는 팔라티나의 수도 리하제타를 내려다보는 엘릭의 얼굴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요즘 그는 전투가 없을 때는 대체로 갑옷을 해제해 다니는 편이었는데, 수호령이 깃든 후로 갑옷을 벗어도 그것이 형태를 유지하고 두둥실 그의 뒤에 떠다녀 누가 보면 네크로맨서로 착각할 것만 같았다. “세상이 그리 순수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곳이거든.” “저주를 풀려고 갔을 때 문전박대 당했다고 했었지.” “맞아. 제대로 상대도 해주지 않았어. 아르페, 네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까지도 갑옷에 갇혀 있었겠지.” “리하제타는, 아니 팔라티나라는 나라 자체가 고인 물이었으니까요.” 바디네가 거들었다. 그녀는 그래도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다고 멋을 냈는지 상당히 깔끔한 복장에, 성녀로서 성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두르고 다니던 액세서리들도 꺼내어 착용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법 성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전해져 내려오는 말씀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어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죠.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안으로 들이지 않으며, 그렇게 점점 썩어갔던 겁니다. 아르페 님이 모두 부수기 전까지.”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척이나 신랄했다. “지금도 본질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러나 적어도 아르페 님의 말이라면 들을 겁니다. 아르페 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후대 사람들 모두가팔라티나를 비웃었을 테니 아르페 님의 은혜가 아주 크지요.” “바디네가 순순히 아르페가 시키는 대로 하고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바뀌지 않은 것과 비슷하구나.” “시끄럽습니다, 메테르 님. 하긴 메테르 님이 용사님을 향한 저의 사랑을 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요!” 성녀와 용사의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철마가 착지했다. 당연하지만 기척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리하제타의 심부에 머무르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달려 나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 대부분이 대륙 동맹에 속해 있어 마족들과의 전장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요, 용사님!” “두 분 용사님과······ 바디네 성녀님까지!?” 아리아의 공식 출두 이후 성녀도 둘이 되었기 때문에 바디네와 아리아를 구분해 부르는 사제들. 바디네는 그 호칭에 조금 묘한 기분이 되었지만 굳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마계로 들어가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들어갈 거야. 그 전에 너희가 해줘야 할 게 있어.” “오오오오오오!” “드디어 용사님께서 우리에게!” 용사를 도와 마왕을 물리치는 것만을 지상과제로 삼아온 신성국가 팔라티나! 그 사제들은 아르페의 입에서 나온 요청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지요!” “고마워, 그럼······.” 아르페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비볐다. “어디 금고부터 털어보실까.” “······네?” 상인과 사기꾼의 필수 스킬 아이언 페이스를 발동한 아르페는 그 후로 리하제타 곳곳을 뒤지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마나를 품고 있는 성구와 마석을 모조리 빼냈다. 그 누구도 질주하는 아르페를 말릴 수 없었다. 이렇게 시원스레 강탈하면 오히려 불만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사제들은 중요 국가시설들이 활동을 정지하는 것을 보며 입만 헤 벌렸다. “요, 용사님. 그러니까······.” “어차피 마족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오면 그 시점에서 인간계 끝난 거잖아. 괜히 여기다 방벽같은 거 쌓지 말고 나한테 넘겨. 오, 바디네. 저것도 해체해라.” “네, 아르페 님!” “아니, 용사님, 그러니까 저건 팔라티나의 위엄과 명예를 상징하는······ 성녀님, 그것만은 안 됩니다!” “위엄과 명예론 목숨을 살 수 없잖아. 살 수 있을 때 사둬.” “끄윽.” 아르페 앞에선 그 어떤 주장도 통하지 않는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아르페는 리하제타의 모든 아티팩트를 기어이 깔끔하게 강탈했다. 망연자실해있는 사제들까지 부려먹은 덕분에 대략 세 시간 만에 끝마칠 수 있었다. “후, 어느 정도 찼군.” 용량 하나만은 세계제일인 아공간 주머니에 그것을 싹 밀어 넣고 돌아선 아르페는 묵은 빨래를 해치운 주부처럼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그렇게 속상해하지 마. 다른 나라도 빠짐없이 들를 테니까.” “다, 다른 나라까지 말입니까?” “당연하지. 이 정도로는 턱도 없는데.” 현재 리하제타에 머무르는 사제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교황대리 베시디 주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하는 아르페. 사제는 아연해져 그에게 물었다. “용사님, 대체 마계에서 무엇을 하려 하시는 겁니까?” “성공 여부가 확실치 않아 뭐라고 확언을 줄 수는 없다만······.” 아마도, 그가 계획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팔라티나의 존재 의의도 조금은 바뀌게 되겠지.” “네······?” 이해하지 못하는 사제를 뒤로 한 채 아르페는 다시 철마에 올랐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빠른 철수!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에 사제들이 멍을 때리고 있을 때 나머지 일행도 그의 뒤를 따라 철마에 탑승했다. 마지막으로 에트나가 뒤를 돌아보며 사제들에게 윙크했다. “다들 괜한 짓 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 보너스로 얻은 인생이잖아?” “보너스······?” “하여간.” “꺅, 아르페에.” 에트나는 그 직후 아르페에 의해 끌려가며 까르르 웃었다. 철마가 떠올라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사제들은 에트나가 남긴 보너스라는 말을 곱씹어야 했다. 처음 보는데 참 예쁜 처자로군, 하는 생각과 함께. “이쪽 경로에 있는 나라를 다 털 거야. 지금부터는 견적을 내자고.” “무슨 견적?” “각국이 마왕군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마석과 아티팩트의 견적.” 나머지는 모두 강탈이다. 그 말을 들으며 메테르가 눈을 하얗게 떴다. “아르페, 마왕보다 아르페가 나쁜 것 같아.” “아냐, 메테르. 따지고 보면 마계가 생겨난 건 결국 인간의 욕심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그 대가를 인간 모두에게 치르게 해서 세상을 다시 원래 모습대로 만들어놓으려는 것뿐이야. 특히 우리는 그것 때문에 용사로 선택받아서 더욱 개고생을 했으니까,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만큼 다른 놈들한테 다른 걸로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것뿐이야.” 말도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반박할 구석이 없는 아르페의 말에 메테르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철마는 제아드 제국의 수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되지. 그 외에도 털어야 할 놈들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털어야 할 놈들이 남았다니······? 모든 나라를 털겠다고 선언해놓고 뭐가 더 남는다는 거야?” “아니, 잠깐만. 나라를 털고도 또 턴다면, 너······.” 불행하게도 엘릭이 눈치를 채고 말았다. “너 설마······?” “모르면 모르겠다고 말해.” “상회를 털려는 거냐!?” 엘릭의 지적에 바디네가 ‘캬, 고것도 있었네!’하는 표정으로 손뼉을 마주쳤다. 반면 메테르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설명이라도 들은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시에나는 킥킥 웃었다. 엘릭 외에 가장 심각하게 사태를 받아들이는 이는 의외로 레이제나였다. “돈과 관련된 것들, 무서움. 집착과 욕망의 덩어리. 마도왕국도 쉽게 상대하지 못함. 아르페는 그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음.” “당연하지, 나도 알고말고. 애니웨어 상회를 비롯해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상회의숨겨진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당연하지만 마왕군과의 전쟁 정도가 되면 각 상회에서도 보급물자를 싸게 풀거나지원을 하거나 한다. 물론 손해를 보고 물건을 팔수는 없기에 다른 쪽으로 이권을 챙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 그들도 열심히 마왕군에 대적하고 있는 대륙 동맹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회의 전력이 아니다. 물론 인간계를 수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상회를 존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최정예 전력은 따라서 상회의 가장 중요한 보물들을 지키는 일에 투입된다. 혹여 인간계가 완전히 패망할 것 같거든 차라리 마왕군 쪽에 투신하려는 마음을품고 있는 상회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인간도 마족도 아닌 돈. 최고의 가치가 사랑인 미케나는 초특급 예외.” “그 얘기 미케나 앞에서는 하지 마. 어쨌든 나도 상회의 전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있어.” “그러면 누구를 털겠다는 것?” “상회.” 레이제나의 몸에서 가볍게 냉기가 일었다. “농담은 싫어함.” “잘 생각해봐, 레이제나.” 아르페가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마도왕국도 쉽게 상대하지 못했다는 건 일단 상대할 수는 있었다는 뜻이잖아.” “나라의 멸망을 각오하면 가능.” “하지만 결국 마도왕국 정도란 거잖아?” “······.” 레이제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마도왕국을 끝장낸 당사자라는 사실을! 어디 그뿐인가, 이젠 레이제나의 레벨도 불과 몇 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상승한 상태였다! 그녀 혼자서도 얼마든지 대형 상회를 털 수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우리는 잘 털 수 있어.” “역시 아르페가 제일 나빠 보여······ 그 점이 너무 좋지만!” 용사 일행은 제아드 제국의 황성을 찾아 철마를 조종했다. 마왕보다 더 악랄한 용사 파티의 대마법 재료 수집은 그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 Chapter 35. 재생 계획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5. 재생 계획 - 3 > 통일제국 제아드의 황제 안젤로 제아드는 패기롭게 황궁을 점령한 어린 용사에게기가 막힌다는 투로 확인했다. “그래서 아티팩트를 달라는 건가, 지금?” “주기 싫으면 안 줘도 돼.” 아르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가져가면 되지 뭐.” “그러면 그냥 주겠네.” 황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곧장 실력행사를 하려던 아르페가 오히려 그 말에 놀라 발을 삐끗할 정도였다. “그냥 준다고? 장난 아니게 가져갈 텐데 다 주겠다고?” “길고 짧은 건 대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자네 혼자서도 능히 제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안 주겠다고 버텨서 뭐하겠는가? 더욱이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는데 필요로 한다니 거절할 수 없는 명분이기도 하군.” 역시 이 양반은 말이 좀 통한다니까. 아르페가 히죽 웃고 있으려니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 뿐, 귀족들에게서 원성을 사지 않기가 힘들 걸세. 집행은 도와주겠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자네 탓을 많이 하게 될 거야. 조금이라도 그들의 분노와 증오를 분산시켜야 하니까 말이야. 나중에 귀가 간지럽거든 내 탓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해, 괜찮아. 보나마나 말을 안 듣는 놈도 나올 테고 내가 힘을 써야 할 일도 나올 테니까.” 사실은 지금도 그 전 단계에 해당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도왕국이 지니고 있던 마도공학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계승한 제국의 획기적인 영상통신 시스템을 이용해 지금 용사 파티가 아티팩트와 마석을 필요로 하니 달라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안내드립니다. 순순히 아티팩트와 마석을 내놓는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야, 좀 더 부드러운 말투로 하라니까!” 아르페는 수도 상공에 떠오른 영상 안에서 메테르가 상냥하게 웃으며 패왕 같은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곤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안젤로 제아드는 그 모습을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적어도 내가 욕을 먹을 일은 없겠군.” “그것 참 퍽이나 좋겠수다.” 아르페는 나지막이 투덜거리며 팔을 걷어붙였다. 자아, 이제부턴 집행의 시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황제 아저씨. 한 가지 더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설마 같이 마왕성에 쳐들어가자는 부탁은 아니겠지?” 확실히 안젤로 제아드는 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계 기준이다. 사천왕 휘하의 마왕군 간부와 1대1 승부를 벌일 정도의 수준은 되겠지만 건국황제를 단순병력 1로 부려먹는 것은 너무 아깝다. 더구나······. “마왕성은 이미 무너트렸어. 일단 안심해둬.” “마왕성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안심할 수 있겠나!? 마왕성은 무너트렸는데 마왕은 쓰러트리지 못한 거겠지!? 그럼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기대했던 그대로의 재미난 반응이었다. 아르페는 깔깔 웃으며 본제로 돌입했다. “나라만 털면 너한테 미안하잖아? 그래서 각 상회까지 털려고 해.” “상회라 한다면 중소규모의 상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니웨어, 마이트, 세라오스.” 전부 던전 상인을 부리고 있는, 각 국가에 지부를 두고 운영되는 초대형 상회였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곤 킥킥 웃어버렸다. “오오, 역시 용사는 제대로 미쳤군. 상회를 털겠다? 인간계와 마계의 총력전이 되어도 금고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상회를?” “그래.” 아르페는 씩씩하게 말하던 중 좋은 생각을 떠올려 손뼉을 쳤다. “놈들한테 마계랑 내통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누명을 씌우자.” “본인 입으로 누명이라는 소리를 하다니 시작부터 글러먹었어.” “마족이랑 엮인 것이 아니면 순순히 상회 재산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그래도 숨기는 놈들은 마족이랑 한 패로 규정하고 싹 쓸어버리는 거지. ······어때, 완벽하지 않아?” 완벽하게 미치광이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말을 듣고 방긋 웃었다. “그거 제법 마음에 드는데 그래!” “좋아, 협력한다는 걸로 알지.” 남의 불행은 깨소금 맛이라는 옛 격언을 따라 황제와 아르페 사이의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 제국의 보물창고가 털려 재정이 어려워진다면 다른 놈들의 창고까지 털어 하향평준화를 시켜버리면 되는 것! 실로 못난이 심보가 아닐 수 없었다. 곧 황제는 대륙 동맹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초대형 상회의 대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황제가 주관하는 것이니 다른 이를 내보내는 것도 불가능. 꼼짝없이 모두가 황제와 같은 천막 아래에 앉게 되었다. “그러면 시작하지.”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용사가 제국에 찾아와 아티팩트와 마석을 강탈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마이트 상회 대표가 선수를 쳤다. 애니웨어 상회의 대표와 세라오스 상회의 대표 역시 인상이 살짝 굳어 있는 것이 제국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것에 대한 분풀이로 황제가 각 상회에 뭔가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유감입니다만 우리 상회는 이미 충분히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제국의 편의를 봐드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 상회의 창고를 비우고 있단 말입니다.” “다들 진정하시지요. 제아드 황제는 그저 회의를 개최했을 뿐입니다. 그런 무례한 제안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황제는 아직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않았거늘 상회 대표들이 알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미리 방어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태는 언제나 그들의 생각보다 한 발 빠르고 강력하게 닥쳐오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왔다!” “용사!?” 블링크를 시전한 아르페가 테이블 위에 떡하니 나타나자 회의장에 모였던 이들이기겁하며 뒤로 의자를 뺐다. 그런다고 아르페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을 텐데! “짠.” “큭, 결계!?” “어마어마한 수준의 고위 결계다!” 아르페는 나타나자마자 손가락을 튕겨 회의장 전체에 결계를 쳤다. 마나 스트링으로 구현하여 마나도 물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폐하는 처음부터 용사의 협력자였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용사한테 당해놓고도 그에게 협력하다니, 우리를 팔아먹다니!” 황제는 상회 대표들의 목에 핏줄이 서는 것을 보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그래도 내가 일국의 황제인데 다들 말이 제법 짧구만. 나는 어디까지나 마왕을 죽이기 위해 용사와 뜻을 같이 하고 있을 뿐이건만. 그대들을 핍박하려는 것도 겁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륙의 평화를 위해 다 같이 조금의 희생을 감수하자는 것뿐이네.” “거짓말! 그렇다면 왜 그렇게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입니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는 황제를 대신해 아르페가 나섰다. 결계를 몇 번 튕겨보고는 보안이 완벽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테이블 위에 털썩 앉으며 상회 대표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쳤다. 모두가 그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내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도 일의 전말에 대해선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아르페는 유난히 눈부신 미소를 지어보이며 설명했다. “앞뒤를 다 떼고 본론만 설명하지. 마왕을 해치우기 위해 대규모의 마법을 펼칠 필요가 있거든. 거기에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해. 구체적으로는, 다수의 아티팩트와마석이 말이야.” “제국 하나를 통째로 털었으면서 그것으로 부족하단 말이오!” “어디서든 마왕이라는 이름만 들먹이면 뭐든 될 것이라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린 그렇게 어수룩한 바보들이 아니야. 물론 넌 용사고 마왕의 대적자이지만, 그 칼날이우리를 향한다면 우리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야!” 집단 저항 태세를 취하며 아르페를 질타하는 상회 대표들! 그러나 아르페의 태도는 변함없이 여유로웠다. “미안한데 난 딱히 너희들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냐.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뭐······?” “그리고 집행한다.” 아르페의 미소가 비틀린 다음 순간, 그가 지닌 압도적인 밀도의 마나가 회의장 전체를 뒤덮어 사람들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크헉!?” “큭······!” 이 자리의 모두가 제법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나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아르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평온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르페와 그에게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한 약삭빠른 제아드 황제뿐이었다. “언제부터 너희에게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지?” 용사가 해선 절대로 안 될 말 베스트 5에 들어갈 법한 악질적인 발언이었다. “너희가 뭐라고 생각하건 상관없어. 합당한 이유를 설명했으니 지금부터는 아티팩트와 마석을 모두 거두어갈 뿐이야. 알아들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무리 용사라지만 이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용사가 아냐, 마왕보다도 지독한 놈······ 큭!” 마나의 파장이 겹쳐졌다.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놈들이 다시 예의바르게 테이블에 고개를 쳐박았다. “만약 이를 거부할 시에는 마왕군과의 유착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어. 그 경우에는 해당하는 상회를 전부 깨부술 수밖에는 없지. 그러니 현명한 판단을 하도록 해.” 마왕보다도 더 지독한 놈이었다! 그의 말이 과장 하나 없는 진심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상회 대표들이 그저 어이가 없어 눈만 부릅뜨고 있자니 아르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미케나를 통해 엮인 정이 있으니 애니웨어부터 시작하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뭐, 뭣?” 허공에 휘둘러지는 아르페의 손짓을 따라 뻗어난 마나 스트링이 애니웨어 상회 대표의 몸을 칭칭 묶었다. 통일제국 황제와의 회의장이었던 까닭에 상회 대표를 따르는 호위도 없었고(물론 있었어도 결과가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와 아르페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긴 말 안 한다. 창고가 있을 거야, 그렇지? 지금 연합동맹에 풀어주는 것 말고 정말로 귀중한 것들을 담아두는 창고가.” “큭······!” 애니웨어 대표는 사실 어느 정도 방심을 하고 있었다. 아르페 본인이 말했다시피 애니웨어 상회는 용사 출두 당시부터 던전 상인 미케나를 통해 용사 파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전 팔라티나 사태에서도 제법 큰 거래로 도움을 주고받았었으니까. 내심 마왕 퇴치 후 용사를 이용해 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과거도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대표는 착잡해졌다. “있소.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고 있지.” “순순해서 좋네.” 그는 목에 걸려 있던 로켓을 꺼냈다. 그것을 열자 보리 이삭 하나나 들어갈까 싶은 아주 작은 주머니가 있었는데, 아르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대박임을 직감했다. “좋아, 아주 좋아.” “용사, 정말 제대로 양아치 같소.” “시끄러.” 그것은 초소형 아공간 주머니였다. 반면 공간 압축율은 극상으로, 놀랍게도 아르페가 한 500명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내부 공간을 자랑했다.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그 안을 샅샅이 훑어보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어마한 마나를 머금은 아티팩트 열여섯 점과 레벨 250에서 300에 이르는 몬스터들의 마석, 최상급의 포션까지. 포션은 마법에 필요 없지만 그래도 일단 챙겼다. “자, 그 다음은?” “없소. 그걸로 끝이오. 대체 대륙 동맹이 창설되고 우리가 얼마나 큰 지출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티팩트도 마석도 모두 전장에 투입되었단 말이오.” “오케이.” 대표는 아르페가 선선히 물러나는 것을 보며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연하지만 방금 건넨 것은 정말 유사시 상황에 써먹기 위한 고가치 품목이고, 애니웨어 상회의 진정한 창고는 상회의 본단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내심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다니 그나마인연이 있다고 봐주는 것인가! 대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 그러면 다음. 너희는 어쩔래?” “큭······.” 반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상회의 대표들은 잘 하면 애니웨어처럼 최소한만 내어주고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래, 설마 정말로 상회를 다 털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르페가 나서서 대표들을 붙잡아두며 협박하는 사이, 다른 파티원들이 실제적인 ‘집행’을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 Chapter 35. 재생 계획 - 3 > 끝 ⓒ 토이카 < Chapter 35. 재생 계획 - 4 > “이곳이 애니웨어 상회의 본단이에요.” “역시 대상인이야!”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상쾌하게 웃는 메테르의 저 동작은 필시 아르페로부터 배운 것임에 분명했다. 미케나는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미묘한 표정으로 전방을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후우, 이거 정말 인류를 위한 일은 맞는 걸까······.” “아르페를 위한 일이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말 손님은 어떻게 된 게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군요.” “그동안 가슴은 아줌마보다 커졌는데?” “시끄러워욧!” 디아스의 중소규모 영지 세르타의 거리, 아무렇지 않게 세워진 허름한 건물 아래에 애니웨어의 본단이 있었다. “와, 확실히 곳곳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게 느껴지네. 이 사람들은 마왕군하고 안싸우고 뭐하는 거람?” “상회에게는 마왕군을 상대하는 일도 비즈니스의 일부이니까요. 상회는 결코 올인을 하지 않는 법이죠.” 미케나의 매끄러운 설명에 시페넌이 코웃음을 쳤다. 용사 파티의 특별 게스트로 초청된 디아스의 소년 국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토지에 뻔뻔하게도 비밀 아지트를 건설한 애니웨어 상회에 분노보다도 허탈함을 먼저 느끼고 있었다. 이놈들은 싸그리 반역죄다. 삼족을 멸해도 모자랐다. “몽땅 털어 국고로 환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하지만 아르페가 전부 가져오라고 했어.” 간결하게 말하며 검을 뽑아드는 메테르의 모습에선 실로 흉흉한 기세가 느껴졌다. 이미 디아스의 국고까지 털린 마당에 조금쯤은 괜찮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던 시페넌이었으나 메테르의 살벌한 미소를 보며 조용히 포기하기로 했다. 소녀 용사가 아니라 희대의 살인마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메테르 이 녀석 확실히 전생을 기억하는 것 같은데······.’ 시페넌 자신만 보면 별 이유도 없이 이를 득득 가는 것도 그렇고 기이할 정도로 아르페에게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보통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전생을 자각하고 메테르에 대한 미련을 어느 정도 털어낸 시페넌은 이제 굳이 메테르의 마음을 얻는 데에 연연할 생각이 없었지만, 전생에서 수년을 동고동락했던 동료이자 친구로서 메테르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만은 여전했다. “메테르.” “왜 불러, 빨강?”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젠 빨강머리라고 부르는 것조차 귀찮은 모양이었다! 시페넌은 체념하고 앞으로 나섰다. “네가 나서는 것도 좋겠지만, 내 고유능력은 이럴 때도 유용하거든. 아르페는 내 능력만으로는 부족할 거라 생각해 너를 보낸 모양인데······ 어디 기다려봐. 본단을 통째로 들어내 주지.” “흐음, 자신감 넘치는 모습만은 보기 좋은걸.” “아아, 애니웨어는 이제 끝이야······.” 시페넌이 새로 각성한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미케나만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얼마 뒤 시페넌이 호언장담한 대로 깔끔하게 상회 본단을 털어버린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나마 시페넌 조는 굉장히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한 편이었다. 애니웨어 상회는 대부분의 고급품을 본단의 창고에 보관해두고 있었고, 굳이 여러 군데를 들를 것 없이 그 한 장소만 털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시페넌의 고유능력이 있었기에 일의 착수에서부터 마무리까지가 굉장히 스무스하게 전개되었다. 문제는 마이트와 세라오스를 터는 일이었다. 두 상회는 애니웨어와는 달리 본부의 위치가 세간에 공개되어 있었는데, 그런 만큼 재물을 모두 나누어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회는 재물을 전송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 레이제나는 그렇게 설명하며 마이트 상단 본부의 중심이 되는 건물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물론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시에나와 엘릭의 실드 차지에 의해 나가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 또한 기록. 공간 마법이 위험한 이유는, 공간을 이동하면서 남은 기록을 추적당해 따라잡힐 수 있기 때문.” “굉장히 어렵지만 대충은 알겠어. 그러니까 레이 네 말은, 어쨌든 본부를 한 번 거쳐 간 물건들은 본부에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는 얘기구나?” “긍정. 가치가 높은 물건들은 1차적으로 본부에서 가치 측정을 거침. 그 후 물건의 가치나 부피, 종류를 따져 각 지부로 전송.” 레이제나의 지식은 굉장히 철저했다. 어째서인가 하면 마이트 상단의 본부는 과거 마도왕국이라 불렸던 에이디아의 도시 중 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디아의 비밀병기로 키워진 레이제나는 마이트에 대해서도 수년에 걸친 조사를 통해 정보를 확보해두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그 기록을 추적해서 지부들까지 찾아갈 수 있겠구나!” “부정.” 시에나가 나름 머리를 굴려 낸 답에 레이제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려니, 레이제나는 스태프를 들어 올려 마력을 발산하며 다른 마도사가 들었더라면 기함을 할 법한 얘기를 했다. “찾아가지 않음. 기록을 활성화하여 다시 불러들임.” “······아티팩트랑 마석을?” “긍정. 공간 마법뿐만이 아님, 아티팩트의 마나 패턴을 읽어 현재 위치를 읽어내고 되감기.” “응, 모르겠어!” 눈부신 미소와 함께 대꾸하는 시에나의 머리를 스태프로 가볍게 때린 후, 레이제나는 설명을 계속하는 대신 마법을 발동했다. 겨울여왕의 기록을 잇고 마나와 관련된 기록을 파악하는 눈이 강화된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마법, 바로 소환 마법이었다. 당장에 어마어마한 마나의 파장이 밀어닥쳐 건물 지붕을 부수어버렸다. 쏟아져 내리는 별빛 아래 하나둘 물건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와아, 계속 나온다!” “시에나, 주워 담아야지 뭐하는 거야.”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져서······ 아, 역시! 저쪽에 아티팩트랑 마석 말고 사람도 나타나는데?” 시에나는 아티팩트를 꽉 붙잡고 나타난 상인 한 명을 방패로 가볍게 쳐 지붕 너머로 날려 보냈다. 레이제나가 담담하게 해설했다. “소환 마법을 방해하기 위해선 그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접촉, 마나를 흘려 차단할 필요가 있음. 실패하면 같이 소환되어버림.” “아, 저기두!” 순진한 웃음을 흘리는 주제에 시에나의 방패만은 가차 없이 허공을 가르며 상인들을 기절시켰다. 곧 지부의 관리자들뿐만 아니라 아티팩트와 마석을 갖고 던전 상인으로 활동하던 이들도 하나둘 나타났다. “이, 이곳은!?” “말도 안 돼, 마나를 겨뤄보지도 못하고 곧장 소환되고 말다니······ 카흑!?” 어지간하면 저항해보겠지만 레이제나의 소환 마법은 너무나 강력했다. 최소한 레벨 300을 넘기지 않으면 그녀가 자아내는 마나 패턴에 간섭조차 할 수 없는데, 지금 인간계에 레벨 300을 넘기는 이들은 아르페와 시페넌의 파티 멤버들을 제외하면 없었던 것이다. “끝도 없이 나타나네. 칫, 더러운 자들이야. 지금도 전선에서 인간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것들을 꿍쳐두고 있다니······.” “이해는 가. 그저 모두 생각하는 바가 다를 뿐이야.” 시에나는 조용히 말하며 방패를 휘둘렀다. 이제 마악 소환되어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던 던전 상인이 방패 모서리에 얻어맞고 깔끔하게 기절했다. “단지 오빠의 뜻이 이들보다 강했던 거지.” “힘의 논리로 얘기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만······ 너에게 있어선 아르페가 절대일 테니 굳이 더 따지지는 않겠어.” 이번 건에 한해서는 엘릭 역시 아르페가 옳다고 생각했다. 인간계 존립의 위기에 이토록 많은 재보를 감추어두고 있다는 것은 대륙 동맹의 패배 이후, 즉 마왕에 의해 세계가 정복되었을 때를 대비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인간의 열세가 너무나 분명해, 자원을 아껴두었다가 저항군을 기르려는 속셈이라면 몰라도 한창 팽팽한 접전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다른 주머니를 차는 것은 그 속내가 너무 뻔했다. “레이, 앞으로 얼마나 더 소환해야 해?” “마이트 상단, 무척 많음. 던전 상인들까지 모두 불러온다고 생각할 경우 앞으로 다섯 시간.” “다섯 시간······ 응,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긍정.” 레이제나는 한창 소환 마법을 유지하는 와중에 다른 방향으로 마나를 뻗어냈다. 에이디아 왕국 영토에 걸쳐 있는 통신 시스템에 간섭하여 마이트 상회의 인간들이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일종의 광역 통신 방해 마법을 발현한 것이다. “이젠 놀랄 기운도 없다.” “에트나 언니 쪽은 어떨까? 순조롭게 되고 있을까?” “왜 하필 성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하고 있겠지.” 시에나와 엘릭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시에나는 자신의 사소한 행동에 엘릭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알지 못할 터였다. 그녀의 생각은 에트나를 향해 있었다. ‘오빠한테 설명을 들었을 때, 언니는 자진해서 세라오스로 가겠다고 했지. 본부 위치도 알 것 같다면서······. 로아와 바디네 언니를 콕 집어 데려갔다는 것도 그렇고, 혹시, 어쩌면······.’ 억측이길 바라면서도 시에나는 걱정을 금하지 못했다. 그녀는 부디 에트나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바로 그 시간, 에트나는 로아와 바디네를 대동하고 팔라티나의 수도 리하제타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먀먀, 부정한 기운이 없는 곳은 싫어, 먀. 주인님 보고 싶어, 먀아.” “그건 혹시 아르페 님이 부정하단 뜻이니, 고양아?” “먀, 주인님은 포근해서 좋아, 먀아아. 적당히 썩은 부분도 좋아, 먀!” “호오, 내가 보기엔 네 눈이 썩어있는 것 같은데.” “먀아아······.” 마를 멸하는 성녀와 마를 먹어치우는 마물이 본격적으로 세기의 대결을 벌이기 직전, 에트나가 뻗어낸 불꽃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들이 발산하던 마나까지 모두 깔끔하게 태우는 그 솜씨는 그녀들의 기를 질리게 했다. “이제 곧이야.” “그······ 에트나 씨? 확실히 세라오스 상회의 본부는 팔라티나에 있어요. 하지만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리하제타가 아닌 지방 도시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그곳에는 쭉정이뿐이야.” “끄응.” 리하제타는 팔라티나의 수도인만큼 무수한 마법에 뒤덮여 있었다. 개중 일부가 저번 소동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만큼 많은 숫자의 새로운 보호 마법이 생성되었고, 리하제타 곳곳의 신전이 뿜어내는 신성력도 만만치 않았다. 만물열람의 보유자인 아르페조차 이곳에서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꽤나 애를 먹을 것이다. “제리어트는 가짜 교황 역할을 하며 팔라티나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어.그 사태의 중심에 서 있었던 너라면 아주 잘 알고 있겠지?” “네에, 물론이죠. 그리고 혜성같이 나타난 아르페 님의 활약으로······.” “솔직히 주인님은 별 일 안 했지만, 먀아.” “닥치세요.” 에트나는 둘이 으르렁대는 것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아르페는 정말 최선의 조치를 취했어. 성직자들을 모두 낱낱이 살펴 간자들을 걸러냈고 변명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처단했지. 과감하기도 했고, 그 이후로 사제들이 절대 딴 눈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했지만······.” 그때 에트나가 갑자기 우뚝 멈추어서더니 바닥을 쿡 찔렀다. 한때 어마어마한 마나를 담은 마법진의 한 획이 지나던 자리, 그곳에 미미하게 다른 마법진의 흔적이 있었다. 그것이 에트나의 마나를 받아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바디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공간이동의 흔적인데요······?” “그는 너무 손속이 빨랐던 탓에 한 가지 가능성을 놓치고 말았지.” 그것이 무엇인지 바디네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법진은 곧 확대되어 일행 모두를 감쌌고, 다음 순간 그들은 거대한 건물의 지하복도에 들어와 있게 되었다. “먀?” 로아가 코를 킁킁대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마기가 느껴지는데, 먀아아.” “설마 마왕군 사천왕 제리어트가······!” “맞아.” 실로 우울한 목소리로 긍정하며, 전 마왕군 사천왕은 한 발짝 앞으로 내딛었다. “그는 가장 먼저 전대 마왕 세력에 빌붙었고, 인간계에서의 그들의 활동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맡았지. 그것을 위해 접수한 것이 바로 세라오스 상회야.” 곧 복도 너머로부터 레벨 300을 우습게 넘기는 마족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공간이동의 기척을 느끼고 다급히 달려온 것이다. 그들을 보며 로아는 이를 드러냈고, 바디네는 경악했다. 가장 먼저 허무하게 죽어간 현생의 사천왕 최약체 제리어트. 아르페는 그가 세라오스 상회를 접수해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넘어갔었던 것이다. < Chapter 35. 재생 계획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5. 재생 계획 - 5 > 어느 순간인가부터 인간계에서 마족화 실험을 자행하던 마족들의 움직임이 사라지다시피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제리어트가 아르페에 의해 처단되는 바람에 세라오스 상회가 위축되어, 그대로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동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전대 마왕이 부리던 사천왕을 비롯해 강력한 마족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마계 바깥으로 쉽게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미 인간계로 나온 마족들은 제리어트만큼의 능력이 없었기에 상회의 힘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그 결과 현상은 답보되고, 그들은 여태껏 상회의 비밀본부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도 잘 알지 못했어. 전대 마왕 세력이 대두되면서 간신히 그 형체가 드러난 거지. 이건 마왕의 스타일이 아녔거든.” “그러면 마왕은 무슨 스타일이죠?” “뒤에서 뭔가 꾸미는 것보단 대놓고 몸집을 불려 보이면서 공포를 주는 걸 좋아하지.” 그 말만 듣자면 마왕이 아니라 침팬지에 대해 소개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상황에농담이나 주고받을 수도 없었기에 바디네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가장 신이 난 것은 역시나 로아였다. “먀아, 먀먀아, 먀먀먀먀먀.” 그녀는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봐 사뿐사뿐,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발걸음으로 장내를 장악하며 사방에서 마기를 빨아들였다. 이젠 로아도 예전의 로아가 아니다. 신속하고 정확하면서도 깔끔하게 마기만을 골라 빨아들이니 마족들은 마법을 발현할 틈도, 하다못해 몸을 놀릴 틈도 없이 바닥에 나자빠지는 신세가 되었다. “로아, 하나도 놓치면 안 돼.” “알고 있어, 먀아.” 에트나는 직접 마족들을 제압하진 않고 단지 그녀 자신의 방대한 마력으로 상회 본단 전체를 커버하는 거대한 열기의 결계를 만들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마나와 물질이 타 사라져 내외를 차단했다. “이런 것까지 가능하군요. 열기 하나를 극한에 이르게 가공하다니······.” 이미 아르페가 만들어내는 완벽에 가까운 결계를 감상했던 적이 있는 바디네였으나, 에트나의 방식은 아르페와 달리 실로 무식한 것 같으면서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적아를 구분하는 능력까지 갖추어져 있어 단순한 열기가 아니라 정령이 개입된 결과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로아를 도와줘.” “로아 혼자서도 충분히······ 아, 네. 알겠습니다.” 이미 마족의 몸을 벗어던진 에트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마족들을 상대하며 마냥 편한 마음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챈 바디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아와 합류했다. ‘아마 당분간 죽는 것보다도 괴로운 상황이 이어지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들을 죽이지 않겠어. 아르페가 모든 것을 올바르게 되돌리면 그때 다시 너희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지겠지. 만약 그때도 너희가 변함없이 군다면······.’ 그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들을 태워버리리라. 에트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불꽃의 정령들이 허공에서 작게 피어나며 웃었다.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말이다. 일행은 세라오스 상회의 본부를 어렵지 않게 정리하고 아티팩트와 마석들을 회수했다. 마족을 위해 마련된 물건들은 만만치 않은 사기를 내뿜고 있었으나, 로아가 용서 없이 부정한 기운들을 모두 빨아들였다. “먀아, 배가 빵빵해. 먀.” “그렇게 바깥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다니지 마세요.” “먀, 먀아아.” 이래저래 투닥거리면서도 바디네는 로아를 챙겼다. 마를 제압하는 로아의 근본적인 성질에 바디네가 본능적으로 호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썩어문드러졌어도 성녀는 성녀였다. “역시 왔었구나······.” “음?” 바디네와 로아가 아티팩트와 마석의 회수에 집중하는 반면 에트나는 복도를 천천히 거닐며 자신의 마나를 뻗어내 탐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상행동을 알아챈 바디네가 고개를 갸웃하자 에트나는 쓴웃음과 함께 답했다. “전대 마왕 세력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후로 수뇌가 한 번쯤은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생각했어. 이곳에 놔둔 재보들을 가져가기 위해서 말이야. 그리고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았던 것 같아.” 사실 세라오스 상회의 본부는 대륙을 삼분한 거대 상회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보유하고 있는 재보의 양이 적었다. 따라서 에트나는 이미 한 번 본부가 대대적으로 전대 마왕 세력에 대한 ‘보급’을 하지 않았나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면 다른 곳에도 먹을 것들이 있는 거야, 먀아?” “혹시 추적 가능하신가요?” 말은 달랐지만 둘이 원하는 것은 모두 한 가지! 에트나가 고개를 끄덕여 대꾸했다. “응. 하지만 얼마나 그곳에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우리끼리 가는 건 위험해.” “저와 로아를 데려오셨으니 혹 셋이서 그대로 돌격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만.” 에트나가 피식 웃었다. “그건 우리가 이곳에 왔을 때 그들 수뇌가 이곳을 찾을 확률이 있다고 생각해서······ 다들 조심해!” 말을 잇던 도중 에트나가 다급히 마나를 끌어올리며 외쳤다. 결계의 힘이 한곳으로 집중되며 한 점에 어마어마한 열기를 응집시킨 직후, 그것을 받아내며 한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큭, 자동반격까지 하는 결계라니······!] 등장과 동시에 침입자들을 처단할 생각이었던 남자는 예기치 못했던 결계의 반격을 막아내느라 마나를 소모하며 바닥을 굴러야 했다. 비록 등장은 처량하다지만 그 육신에 감추어진 마기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 바디네는 본능적으로 신성 스펠을 외웠고, 로아는 냅다 놈에게 덤벼들었다! “배달 서비스, 먀아아!” [배달? 읏!] 몸에 부정한 기운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로아의 곁에만 있어도 그 기운을 흡수당하고 약해진다! 로아의 능력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진 지금은 설령레벨 390을 넘기는 마족이라고 해도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먀먀먀먀먀먀먀!” [시끄럽다!] “먀아!?” 그러나 놈은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마기를 폭발시켜 로아가 그것을 흡수하도록 유도한 후 곧장 품에서 예리한 검을 뽑아내 찌르는 마족! 마기에 취해 있던 로아는 다급히 허공에서 몸을 튕겨 그것을 피했다. “식사 중에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먀아아아!” “집중해요, 로아!” 성녀인 바디네는 말할 것도 없고 불의 힘을 다루는 에트나도 굳이 따지자면 근접전보다는 원거리전을 위주로 펼치는 이. 근접전을 펼치는 마족과 맞붙을 수 있는 것은 로아 뿐이었다. “신이여, 질서를 거스르고 마를 탐하는 자를 막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가호를!” [성녀까지······!] “먀먀먀!” 곧장 로아의 몸에 바디네가 시전한 축복이 깃들어 그녀를 강화시켰다. 그래도 이름은 마수인데 무리 없이 신성력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체 어딜 봐서 마수냐고 따지고 싶을 지경! [그렇다는 건 용사들이 눈치를 채고 움직였단 말이군? 하지만 용사는 없고 성녀만 보내다니, 아무리 성녀가 둘이라고 해도 어리석은 짓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놈이 두 앞발을 동시에 휘둘러 공격해오는 로아를 피해 몸을 날리며 다시 검을 추켜들던 그때, 돌연 놈이 착용하고 있던 갑옷형 아티팩트 위로 짙은 선홍의 불꽃이 피어나 마나와 물질 모두를 태웠다. [크흐, 네년은······!?] 놈의 신경은 자신의 마기를 빼앗는 능력을 지닌 로아에게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기에, 에트나의 공격은 완전히 노마크에 가까웠다. 놈은 이글거리는 화염에 저항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제야 자신 못지않은 존재감을 지닌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 마녀 에트나!? 그런데 어째서 마족의 기운이······!] “어째서일 것 같아?” 에트나는 그 마족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저 마족은 아무래도 마왕성에 잠입했던 스파이를 통해 그녀의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놈을 살려 보낼 수는 없다. 아르페가 마왕군 사천왕을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을 만큼 가공할 마법을 완성시켰다는 것은 적어도 그가 마법을 완전히 드러내는 그 순간까지는 비밀이어야 했다. [네가 마족을 배신하고 용사에게 붙었구나!] “나를 상대로 떠들 시간이 있나보구나, 마족.” “먀아아아아아아아!” 놈에게서 빈틈을 발견한 로아가 매서운 기세로 허공을 가르고 돌진했다! 마족의 검 위로 두꺼운 마기로 빚어진 오러가 피어오른 다음 순간 에트나의 불꽃이 그 오러를 태워버리고, 황망한 얼굴로 다시 오러를 불러일으키려는 마족의 얼굴에 로아의 길게 뻗어난 손톱이 작렬한다! [크하아아아악!] 로아는 탐식의 마수. 그녀의 마나는 단지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을 갉아먹는 힘을 지닌다. 그녀의 손톱에 당한 자리는 금세 살갗과 뼈가 소실되고, 솟아나려던 피마저마나에 먹혀 증발되었다. 실로 섬뜩한 광경에 아군마저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검에 기운을 집중시켜 로아의 배를 꿰뚫은 마족이었다. “먀아아아아!” [마기를 갉아먹는 그 힘······ 마녀보다도 위험하다!] “먀먀! 먀아아아!” 로아는 붉은 피를 흘리면서도 성나게 울었다. 바디네가 다급히 그녀를 회복시켰고 에트나는 전신의 마나를 뻗어내 놈을 공격했다. 그러나 놈의 몸에서 솟아난 마기가 검신을 타고 흐르던 로아의 피를 빨아들인 다음 순간, 놈의 몸에 맞닿은 불꽃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역시 되는군.] “고유능력!” [그렇다. 내 고유능력 반전은 적의 능력을 파악하고 피를 확보하는 것으로, 적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다룰 수 있게 만든다. 그것도······ 이렇게 반전시켜서 말이지!] 레벨로 얼추 예측하긴 했지만 역시나 놈은 전대 마왕군 소속의 사천왕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저렇게 자신의 능력을 구구절절이 설명해주는 것을 보면 분명했다! “큭!” 하지만 그런 만큼 놈의 능력만은 진짜였다. 적이 고유능력을 갖고 있건 마법을 보유하고 있건 근접능력을 갖고 있건, 마족 자신이 생각한 적의 특수능력 바로 그것을베껴오는 사기스러운 힘! 놈이 마구 뻗어낸 마기가 에트나의 마나가 섞인 불꽃을 깔끔하게 먹어치워 마기로 만들었고, 그 결과 파괴력을 더욱 불려 에트나를 덮쳤다. 아직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인 로아가 먀, 하고 외치며 그녀 앞을 막아섰다. “마기다! 먀아!” “안 돼, 로아!” 마나를 마기로 바꾸는 능력, 그것을 로아가 환영하리라는 것을 적이 몰랐을까? 실제로 로아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며 놈의 입가에는 웃음이 어려 있었다. 에트나는 그것을 본 순간 확신했다. 놈은 로아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흡!” 역시나. 로아가 입을 쩍 벌리던 바로 그 순간에 맞추어 마족과 로아의 위치가 고스란히 반전되었다. 놈의 고유능력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 활용법이 있었던 것이다! [적과 위치를 바꾸는 것도 얼마든지!] “칫!” 놈이 에트나의 피까지 얻어 그녀의 불꽃에 반하는 힘을 얻게 되면 골치가 아파진다. 다행한 점이 있다면 에트나가 놈의 노림수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는 것.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열기의 불꽃을 그녀 주위로 둘러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불꽃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녹기 시작한 놈의 검은 기어이 에트나의 육신에 닿기 전 검신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불꽃에 함유되어 있던 마나가 다음 순간 마기로 치환되며 동시에 그녀의 목을 조르는 비수가 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넌 결코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 설마 마족의 힘을 버리고 더욱 강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흥미로워!] “먀아!” [너에겐 이제 흥미가 없다!] 검신을 완전히 잃은 검 끝으로 오러의 칼날만을 만들어내어 집요하게 에트나를 노리는 마족! 마기도 놓치고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던 로아가 잽싸게 놈을 향해쇄도했으나,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기로 거대한 창을 빚어내 그녀에게 내던졌다. [이걸로 네년의 힘도 내 것으······ 뭣!?] “먀!” 그러나 그대로 에트나에게 일격을 가하려던 다음 순간, 놈은 순식간에 접근해온 로아에게 목을 물리고 말았다. 분명 마기의 창이 로아와 겹쳐지는 순간을 보았는데,라고 생각한 다음 순간 에트나의 불꽃이 놈의 전신을 화끈하게 뒤덮었다. [큭, 떨어져!] “먀아아아아아아아!” 로아가 놈을 붙잡고 마기를 빨아내는 한 놈은 에트나의 불꽃에 제대로 저항할 수 없다. 더욱이 에트나의 불꽃은 아군에게는 상처를 입히지 않는 기이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까지 하다. 놈은 이를 악물고 전신으로 오러의 칼날을 뿜어내 로아를 떼어내려 했으나 그 순간 로아의 몸이 일렁이며 그것들을 모두 피해냈다. 마기가 빨려나가는 속도는 그대로였다. [뭐······!?] “먀아아아. 바보.” “후.” 로아가 히죽 웃었다. 에트나는 놈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더욱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이 망할 괴물이이이이!] 마족의 몸통이 온통 새카맣게 물들었다. 치를 떨리게 하는 마기가 솟구쳐 모두 유형화하는 모습은 실로 장엄하게마저 느껴졌다. 바디네는 그런 놈을 상대로 침착하게 스펠을 외웠다. “신이여, 저 오만무도한 이물을 바르게 되돌리소서!” “먀!” “타버렷!”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마족에게 신의 철퇴가 강림한다! 거기에 로아와 에트나의 공격까지 더해지니 마족은 마치 늪에 발을 들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폐하께 보고를 먼저 드렸어야······!’ 마족의 눈앞이 점차로 흐릿해졌다. 놈은 로아만이라도 제거하기 위해 그녀의 몸속에서 솟아나는 마나를 마기로 바꾸어 폭주를 일으켜보고자 했지만, 그녀의 심장 근처에서 용솟음치는 불분명한 에너지원이 마기를 곧장 먹어치워 버렸다. ‘하······ 그랬던가. 이것이······.’ 그것이야말로 그가, 그의 주군이, 주군의 협력자가 그토록 갈구하던 것의 정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마족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한 가지 마법을 발동했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 에트나 일행은 세라오스 상회 본부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 Chapter 35. 재생 계획 - 5 > 끝 ⓒ 토이카 < Chapter 35. 재생 계획 - 6 > “자, 이젠 돌아가도 좋아.” “······.” “왜? 집에 가라니까?” “······.”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도 상회 주인들을 붙잡아놓고 ‘물건 가격 한 푼보다는 기술이름 선정에 더욱 목을 매는 용사와 기사들의 지갑을 효율적으로 터는 방법’에 대해상회 주인들에게 강연을 하던 아르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그들에게 해산을 명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수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오?” “이제 와서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 목적은 너희 상회로부터 지원을 받아내는 거였는데?” “지원, 그래. 지원······.” 용어 선정의 부적절함에 크나큰 분노를 느낀 상회 대표들이었으나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레벨로는 도저히 그들이 닿지 못할 영역에 이르러 있는 용사에게 무력으로 개겨볼 수도 없고, 단지 이를 득득 갈며 그가 열어주는 대로 천막 바깥으로 나가는 수밖에. “뭐? 본단······ 뭣!?” “어디가 어떻게 되었다고!?” 여태까지는 결계 안에 있어 외부와 소통을 할 수도 없었지만, 결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그들이 지니고 있던 통신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와 그들이 뒤를 돌아보고 아르페에게 따질 수는 없다. 왜냐면 그들은 어찌됐든 그에게 협조하겠다는 얘기를 했고, 상회가 보유하고 있는 마석과 아티팩트를 주겠다고 했으니까. 오히려 왜 본단을 털었냐는 얘기를 했다간 ‘너희가 준다며?’라는 사람 빡치게 하는 대답밖에는 돌아오지 않을 터! “으드드득······.” “왜 그래, 잇몸 안 좋아?” “아니······ 괜찮소······!” “아, 그런데 잠깐만.” 그런데 그들 모두가 비틀거리며 천막을 나서고 있을 때, 아르페가 갑자기 그들 중한 명을 붙잡았다. “세라오스 상회 대표······ 게오타였나?” “게, 게오르그요.” “그래, 어쨌든 너. 사실 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네 뒤에 누가 있었느냐가 중요하지. 안 그래?” “······!” 아르페의 말에 그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했으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면 무리였다. 하긴 수십 년 상인 노릇으로 익힌 포커페이스로 무장하기엔 상대가 좋지 않은 데에도 정도가 있다. “뒤에······?” 다른 이들은 뭐라도 더 뜯길까 두려워 이미 천막을 빠져나가고, 안에는 황제와 아르페 밖에는 남지 않은 상황. 황제는 아르페의 말에 의아해하며 게오르그의 안색을 살폈는데, 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과연 방금 아르페의 말이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대륙 3대 상회 중 하나에 그 주인이 따로 있었단 말인가?” “나도 이제 알게 됐으니 안심해.” 아르페는 모든 일행으로부터 일이 무사히 완수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결계를 해제했다. 그러나 그 끝에 에트나가 덧붙인 말이 있었던 것이다. 아르페가 상회를 협박할 구실로 삼은 그 일이 실제로도 일어나고 있었다고 말이다. “······우리 상회의 본단이 발각되고, 털리기까지 했다는 것은······ 아아아.” “그래, 네놈은 이미 다 들켰다는 거지. 얘기가 빨라서 좋구나, 게오타.” 아르페는 다시 결계를 치고, 게오르그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들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니까 제리어트를 비롯해 마족들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들 모두 빼먹지 않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 마왕놈 족치다가 네 얘기랑 다른 얘기가 나오면 그땐 너 하나로 안 끝날 테니까.” “힉!” 전직 사천왕이기에 가능한 협박술! 게오르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반면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던 황제는 정말로 마족이 인간계의 상회와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겁하여 벌떡 일어났다. “설마 그 억지가 정말 들어맞을 줄이야!” “뭐가 어째 인마?” “얼른 시작이나 하시오. 이쪽의 정보가 마왕군으로 얼마나 넘어갔는지는 나도 알아야 할 테니까.” “그냥 마왕군이면 이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음······?” 아르페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황제와 몸을 부르르 떠는 게오르그. 아르페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흘러 아르페는 일행과 합류했다. 돌아온 일행 모두가 가지고 갔던 아공간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워와 아르페를 흡족하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요, 아르페 님?” “턱없이 부족하겠지. 뭐 나머진 마계를 인간계로 바꾸는 과정에서 전환된 마나를소모하는 식으로 메꿔볼 생각이야.” “대체 얼마나 큰 마법이기에······.” 마계를 인간계로, 마족들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니 그야 대단한 마법이기는 하겠지만 그 규모가 너무 아득해 감도 잡히지 않을 지경이다. 바디네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로아, 넌 뭘 묻혀서 오고 그래.” “먀? 저항이 거셌는걸, 먀아.” 로아가 억울하다는 듯 제 팔을 핥으며 대꾸했다. 바디네의 신성력으로 깨끗하게 치료를 했음에도 방어구의 파열이나 잔 상처까지 완벽히 감출 수는 없었던 것. “쓰다듬어줘, 먀아.” “오냐오냐.” 녀석은 먹는 것 다음으로 애교 부리기를 좋아하는 고양이답게 아르페에게 달라붙어 먀먀 울었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에 마나 스트링을 두르곤 구현 마법으로 그녀에게 묻어난 것들을 모두 지웠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우, 아직 해결이 안 됐단 말이지.” “해결이 안 된 건 아르페의 정신 상태야! 그렇게 나를 제외한 여자애를 마구 만지면 안 된다구!” “오히려 네가 안 되지. 로아는 고양이니까 세이프야.” “그래서 제일 위험하다니까요!” 아르페는 일행의 농담에 적당히 맞추어주며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다행히도 상처를 입은 것은 로아 한 명 뿐이었다. “에트나, 적의 레벨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거지?” “그 정도로 레벨이 높은 것을 보면 아마 사천왕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할 뿐이야.” “그거면 충분해.” 슬슬 전대 마왕 세력의 사천왕도 거의 다 해치워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르페의 착각일까. 아니, 그보다도 이 빌어먹을 선배 자식은 전대 마왕은커녕 사천왕들까지도 죽이질 못해 봉인을 시켜놨었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무능력한 용사가 아닐 수 없었다! “좋아, 그러면 마계로 돌아가자.” “결국 다시 마계로 가는구나.” “분명 뭔가 엄청 많이 하기는 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어.” 허탈과 충족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티 멤버들 너머, 아르페는 착잡한 얼굴로 게오르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제아드 제국 황제에게 말했다. “곧 전황이 크게 바뀔 거야. 마계로의 추격을 준비해둬.” “마족들이 스스로 물러난다는 말인가?” “아니, 추격이겠지.” 아르페의 말에 황제의 두 눈 가득 의문이 들어찼다.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으나, 아르페는 그것에 대해 굳이 풀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러면 가자. 다음에 볼 땐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끝나있을 거야.” “전쟁이······ 끝난다라. 그것 참 반가운 말이네만.” “그러니 적어도 내가 무너질 때까지는 무너지지 마, 황제 아저씨.” “허.”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방금은 진짜 좀 용사 같았네. 제국과 삼대상회를 모두 털어버린 사람이 했다고는 죽어도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다 필요해서 수거한 거라니까 참 사람이 쩨쩨하구만.” 일행은 철마에 올랐다. 이대로 가까운 워프 게이트로 출발해 전속력으로 마계로 향할 셈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다름 아닌 마왕성(이 있던 곳)! 대마법은 그곳에서 시작되어 마계를 전부 덮고, 거기서 더 뻗어가 끝내 마족들까지도 모두 집어삼킬 것이다. 아르페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이젠 정말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했다. 지금 아르페의 심정은 ‘이젠 정말 더 없나? 없겠지? 갑자기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마왕이 나타난다던가 하는 일은 없겠지? 더 숨겨진 던전도 없겠지?’였다. 여태껏 약속된 길만을 달려오다가(물론 그 길들도 대부분이 중간에 이상하게 꼬여버리기는 했지만) 이제와 정확히 레벨도 알 수 없는 상대를 먼저 도발해 상대하려니 죽겠는 것이다. 그냥 마왕만 따져도 이제 겨우 승률 80%를 점칠 지경인데 그것보다도 더욱 강한 전대 마왕이라니 말이나 되는가! 이럴 바엔 차라리 마왕성을 부수지 말고 적의 위치를 확정해둘 것을 그랬나? 아니, 그랬더라면 가뜩이나 강한데 마왕성의 지원까지 받는 전대 마왕과 대결하는 꼴이 되었을 테니 역시 이쪽이 낫기는 했다. ‘빌어먹을, 이게 다 선대 용사 탓이야. 아무튼 다 그 사람 탓이야.’ 그런데 출발하는 철마 중간에 앉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손을 문득 메테르가 붙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르페.” “걱정은 무슨.” “모두 다 아르페가 미리 알고 대비할 순 없는걸.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생각해. 적어도 내가 보기엔.” “······하.” 아르페는 어째서 그녀는 이런 타이밍마다 귀신 같이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것일까, 참으로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덕에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그래, 분명 일행이 있어준다면······ 하고 아르페가 용사에게는 어울리지만 자신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낯간지러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쯤. 메테르가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 마. 곧 태어날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왕이건 전대 마왕이건 전부 다 내가 쳐부술 테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면 지금 있는 것 같으니까 하다못해 언젠가로 수정해.” “이게 안 통하네!” “가슴이 철렁했잖아욧!” 파티 멤버들 사이에 재차 발발할 뻔한 전쟁을 능숙하게 수습한 아르페가 곧장 철마를 출발시켰다. 아르페도, 메테르도, 시에나도, 레이제나도, 바디네도, 엘릭도, 에트나까지도 모두가 저마다의 생각을 품고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작아진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마음을 일일이 헤아리다간 밤이 새도 부족할 것이다. 철마는 그저 묵묵히 앞을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첫 번째 워프 게이트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익숙한 이들의 모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 황제가 붙잡고 안 놓아줬나보지?” “시페넌······?” 시페넌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호위기사인 르세티에 흑마법사 데이스, 성녀 아리아, 당연하게도 시페넌에게 합류시켰던 던전 상인 미케나까지도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왜 왔냐?” “이제 정말로 마지막 전장이 될 것 같아서 그런다. 적어도 마지막 무대는 같이 장식해야 하지 않겠어?” “네가 괜히 이렇게 나오니까 정말로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불안감이 엄습한다만······.” “뭐 인마?” 용사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 되면 꼭 그렇게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출동하던데 지금 이것도 그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아르페는 새삼스럽게 다가온 최후의 전투를 깨달으며 아주 조금 우울해졌다. 그런 그에게 아리아가 환한 미소로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다. “마왕을 상대하는 일이니, 성녀인 제가 나서야겠지요.” “그야 네가 있어주면 보탬이 되긴 한다만······ 아니, 그렇지만 인간계에도 아직 성녀가 필요한 일이 남았을 텐데.” “그게 이제 인간계에는 포인트를 벌 만한 마족이 별로 남지 않아서 말이죠.” 미케나의 말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는 아르페도 얼추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그의 재산을 거덜 내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굳이 따라오겠다는 이들을 돌려보내는 것도 야속하겠지.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긴 마법을 시전하고 나면 있던 놈들도 다 마계로 몰려올 테니······.” 인간계의 가장 큰 전력인 시페넌 파티가 빠지게 되면 인간계는 당분간 더 힘들어지겠지만, 그만큼 마계에서 수행하는 아르페의 작전의 성공률이 높아진다. 좋아, 황제가 좀 더 고생해야지 뭐. 아르페는 무책임한 생각을 하며 철마를 열었다. 강화를 거친 철마에는 시페넌 일행이 전부 들어오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공간이있었다. “가자. 마왕 잡으러.” “그렇게 나오셔야지.” 시페넌이 씩 웃으며 철마에 올랐다. 에트나와 마주하는 순간 둘 다 움찔했지만, 다행히도 둘 다 참아냈다. 제법 굳은 안색의 르세티와 데이스가 그 뒤를 이었다. “아, 데이스 넌 마계 들어가기 전에 마기 완전히 지우고 가자.” “켁!?” “엄살 부리지 말고. 별로 안 아파. 아마.” 아리아와 미케나가 마지막으로 철마에 올랐다. 미케나의 눈이 번쩍이는 것이 어째 그녀의 의욕이 가장 넘치는 것 같아 무서웠다. “먀, 결국 밥그릇을 엎으러 가는구나, 먀아아.” “······그래, 너라도 평상시 모드라 다행이다.” “먀?” 그렇게 아르페 일행은 마계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Chapter 35. 재생 계획 - 6 > 끝 ⓒ 토이카 < Chapter 36. 마왕 - 1 > 이전에도 일행에게 호언장담한 바가 있지만 아르페의 마계에 대한 지식은 누구보다도 앞서 있었다. 마왕의 눈에 뜨이기 전까지 긴 세월, 물론 마왕의 휘하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로도 마계 대부분 구역을 제 안방처럼 돌아다니며 만물열람으로 샅샅이 훑었던 그가 아니던가. “인어들은 잘 해주고 있군.” “저들도 데려가면 성공률이 더 오를 텐데.” “세릴에게는 이미 말을 해두었어. 마족들이 마계로 돌아올 때,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도록 위치시켜두었지.” 역시 전투란 정면에서 벌이는 것보다 적의 약점을 찌르는 쪽이 더욱 재밌는 법! 아르페의 말에 시페넌은 피식 웃어버렸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유리하게 만들어놓고 지는 게 더 어렵겠다.” “전쟁은 무조건 이길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만약 마법과 레벨이 없는 세상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이 세상엔 혼자 힘으로 백만, 천만을 몰살할 수 있는 괴물이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존재를 뒤흔드는 마물들 또한 있다. 이 전쟁의 끝에 그것들을 그대로 남겨둔다면, 결국 인간이라는 종족은 패배하게 될 것이다. “아니, 사라지겠지······.” “인간의 마족화라.” 시페넌은 자신을 유혹했던 사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더러운 기억이었다. “전대 마왕이라는 놈도 현 마왕과 비슷한 놈인가? 이 지상에서 인간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못 견뎌 하는 그런 타입 말이야.” “현 마왕은 단지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싶어 했을 뿐이야. 진정한 의미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어 했지.” “그래, 그게 정확한 표현이겠어.” 그것은 아주 역겹고 잔인한 일이었지만 그 덕에 용사 일행이 성장할 수 있었던 셈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대 마왕은, 비록 아르페가 놈을 직접 만난 적도 없지만······. “보다 신중하게 움직였다면 지금보다도 더 무서운 적이 되었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놈은 현 마왕보다도 그 목적이 뚜렷해. 오직 인간들을 모두 마족으로 만드는 것만이 목표인 것 같아.” “선대 용사 시절에 그와 대립했던 인물이니 서로 정반대 방향의 과업을 추진하고있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 빌어먹을 선배에 대해선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아르페는 뚱하니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철마는 인어들이 머무르고 있는 해역을 일직선으로 돌파해 지금은 마계의 상공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마계로 들어왔을 땐 이목을 피해 마왕성까지 일직선으로 도달하려 애를 많이 썼지만 지금은 눈에 뜨이는 것이 목적이다. 아예 대놓고 기운을 흩뿌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중간에 선대 마왕이 덜컥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이대로 붙어야지.” 아르페의 말에 엘릭이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낄낄 웃으며 보충했다. “그 자리에서 마법을 시행할 뿐이야. 우리가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아티팩트를 모아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우리 힘이면 충분히 레벨을 뛰어넘어 놈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어. ······레벨이 너무 많이 차이나면 무리겠지만 그 정돈 아닐 거야.” 놈 휘하의 사천왕들을 겪어보며 내린 판단이었다. 그러니 분명 그럴 것이다! ······아마도. “즉 대책이 없다는 거잖아!” “아, 그럼 용사가 이것저것 준비 다 해놓고 마왕 발라먹는 용사 이야기가 이 세상에 어딨냐! 원래 죽기 직전까지 고생도 좀 하고, 파티원들의 값진 희생을 바탕으로 간신히 마왕의 심장에 검을 꽂는 거지······ 그래, 바로 엘릭 너 같은 파티원 말이야.” “흐이이익!” “하지만 안심해, 엘릭. 네 묘지는 내가 양지바른······ 아야.” 아르페가 엘릭을 놀려먹으며 좀 더 겁을 주려던 찰나 에트나가 그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아무도 죽지 않고 이길 방법을 고민해야지.” “나도 그게 제일 좋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모두가 끝까지 살아남아 하하호호 웃으며 막을 내리는 것은 그야말로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전생의 아르페에게 승리란 언제나 이별과 함께 찾아왔다. 현생에선 운이 좋아, 그의 능력이 강해져, 메테르의 능력이 워낙 사기적이어서 그런 일을 겪지 않았지만······. “최대한 막겠지만,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야. 그러니 그때 가서 다치지않으려면 조금쯤 마음의 대비를 시켜둘 필요가······.” “후. ······아르페 너는 언제나 그렇게 정이 많았지.” “병 주고 약 주기는······.” 에트나는 양팔을 뻗어 아르페의 머리를 감쌌다. 아르페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크게 저항하지는 않았다. 전생의 지위 탓인지 그녀가 품게 된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그는 유독 에트나에게만은 순종적인 편이었다. 세라오스 상회 본단에서 마족들을 상대하며 아르페 못지않게 심란해져 있던 그녀는 그렇게 자신과 아르페를 모두 달랬다. “······아.” 조금만 더 이렇게 달라붙어 있으면 곧 더 적극적인 스킨십이 하고 싶어질 것 같았지만, 아르페의 파티에 들어와 그들 파티의 분위기에 빠르게도 익숙해진 에트나는 이미 한 가지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금만 둘이서 분위기를 내고 있으면······. “치, 치사해요! 저흰 범접할 수 없는 연상의 분위기로 아르페 님을 그렇게······!” “하지만 아르페는 연상 취향 아니니까 괜찮은걸. 그렇지, 아르페?” “긍정. 아르페는 법률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연하 취향.” “뭐가 어째?” 이렇게 주위에서 적당히 말려주니 말이다. 에트나는 여자아이들에게 붙잡혀 아르페와 떨어지며 그만 푸흣, 하고 웃어버렸다. 사실 그녀는 이런 것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로 목숨을 위협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보기엔 충분히 위험해보였다. 주로 아르페의 목숨이. “역시 아르페 네놈은 마왕한테 죽지 않거든 언젠가 저 여자들 중 한 명한테 찔려 죽게 될 거야.” “그 말을 네 입으로 들으니 불길함의 정도가 예사롭지 않다, 야.” “꼭 그렇게 비꼬기는.” 시페넌은 툴툴거리며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페의 강화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해 완성시킨 철마는 평범한 존재의 인지를 아득히 벗어난 속도로 마계의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론 그 기세를 알아본 다른 마물들이 고함을 지르며 쫓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대다수의 마족이 인간계로 원정을 나간 탓인지 마족에게 조준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마왕성, 아니 마왕성이 있던 폐허까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어쩌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도착하지 않을까? 드워프의 기술에 강화가 더해지니전생엔 차마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가능해졌구나, 하는 생각에 시페넌은 그저 웃어버렸다. “마왕성이라······.” “······시페넌 씨는 두렵지 않아요?” 아리아의 물음이었다. 나머지 여자들이 모두 아르페를 괴롭히고 있을 때 그녀만은 가만히 시페넌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후의 그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이가 그녀였다. 사람이 극적으로 변했다는 사실만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는 시페넌이 본질적으로 뒤바뀌었다는 생각에 약간의 공포감마저 품고 있었다. 어쩌면 고유능력 동화를 지니고 있는 그녀이기에 더욱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시페넌은 멍하니 그녀의 능력에 대해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부딪혀야 할 놈하고 부딪힌다는 느낌이야. 두렵다면 두렵지만, 애초에 피해봤자 의미가 없는 상대니까.” 상대가 현 마왕이든 전대 마왕이든 달라질 것은 없다. 마왕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극단적이어서 어쨌든 인간이나 마족 둘 중에 하나가 끝장날 때까지 내달리니 말이다. 어디로도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시페넌은 제법 담담할 수 있었지만, 아리아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저는······ 두려운데. 물론 제 죽음도 두렵지만······ 혹시나 시페넌 씨가 죽어버릴까 봐.” “······.” 시페넌은 그대로 침묵했다. 숫제 사랑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지 않은가! 기억을 되찾기 이전의 시페넌이라면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메테르를 향한 애타는 사랑을 겪어본 전생의 기억이 더해진 지금의 시페넌은 그녀가 보내오는 몸짓이나 말투 하나하나에서 전부 자신을 향한 사랑을 진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이걸 어떻게 눈치 채지 못했던 건지 이전의 자신이 좀 짜증이 날 정도였다. “너······.” “두 분 용사님을 돕기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사실 파티에 합류하고 싶지 않았어요. 시페넌 씨와 함께 인간계에 남아있고 싶었는데······. 시페넌 씨가 죽는다면 저는······.” 시페넌은 그 말을 듣고 아리아가 아닌 다른 이들 쪽을 휙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아르페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람의 장막은 아리아의 목소리를 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후,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리아.” “지, 지금 말해두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아리아의 볼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는 모양이었다. “아르페 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용사 이야기는 언제나 희생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던 걸요. 용사는 둘째 치고 용사의 동료들이 멀쩡히 살아남는 경우는 정말 극히 드물고······.” “그렇다고 동료들이 빠지면 용사 혼자서 마왕 잘도 잡겠다.” “그렇지만 희생하는 동료가 꼭 시페넌 씨일 필요는 없잖아요.” “아까부터 재수 없는 소리만 골라 하기는.” 아무래도 아르페의 이야기에 제대로 겁을 집어먹은 것은 엘릭이 아니라 아리아였던 모양이다. 시페넌은 후, 한숨을 쉬고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아리아가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가뜩이나 붉었던 볼을 더욱 발갛게 물들였다. “아르페가 말했어. 최종결전 이전에 강해보이는 말을 하면 무조건 결전에서 죽는다고. 그러니까 강해보이는 말은 안 할게. 미래를 약속하는 말도 안 할 거고 뜬금없이 추억을 회상하지도 않을 거야.” “그, 그러면요?” “그러면은 무슨 그러면. 지금 이렇게 손 붙잡고 있잖아. 마왕성 도착할 때까지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거지 뭐.” “······그게 뭐예요.” 아리아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긴장감은 풀린 것 같았으니, 어찌됐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시페넌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나지막이 힘을 실었다. 두 사람의 온기가 겹쳐질 수 있도록. 이것으로 그의 마음이 전해졌을까. 맞잡아오는 손에 힘이 더해진 것을 보면 분명 전해졌으리라. 시페넌은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면서도 그녀에게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은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웠던 탓이다. “망할.” “아, 또 왜.”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두 남녀의 애틋하고도 흐뭇한 분위기는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다름 아닌 아르페에 의해서였다. “이젠 제발 변수 같은 것들은 좀 던져버리고 싶었는데.” “난 지금 널 철마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리아와의 약속 탓에 그녀와 엮은 손을 풀지도 못하고 감추며 아르페에게 따지는 시페넌. 아르페는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허탈한 미소로 철마 밖을 가리켰다. “저기 던전 보이냐?” “······던전?” “이제 와서 무슨 또 던전!” 메테르의 비명이 모든 파티 멤버의 마음을 대변했다. 실은 아르페도 같은 심정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던전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없었다. 마왕성으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세워진,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 확실한 던전. 그 입구 위에 오직 만물열람의 주인인 아르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강력한 마기의 궤적으로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레시피’ “빌어먹을, 그 새끼 내가 뒷담하는 거 들었었네.” 아르페는 아주 조용히 욕을 지껄였다. 그 던전은 바로 현 마왕이 만든 던전이었다. < Chapter 36. 마왕 - 1 > 끝 ⓒ 토이카 작가의 말 1. 저는 오늘 오후 여섯 시에 돌아오겠습니다!^^< Chapter 36. 마왕 - 2 > “함정이야.” 에트나가 단언했다. “저 던전, 단기간에 만들었다고는 믿지 못할 만큼 공을 들였어. 더구나 아르페의 눈에밖엔 안 보인다는 시점에서 이미 노리는 바가 명확하잖아! 그렇다는 건 현 마왕은 이미······.” 전생을 자각했다. 에트나는 곧장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그 말을 간신히 꼴깍 집어삼켰다. 아직 이 자리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오직 아르페만이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트나처럼 뭔가가 계기가 되어 자각했을 가능성은 충분해. 아니면 전대 마왕과의 결전 이후, 시페넌이 말했던 사천왕이 지니고 있던 기록보관의 고유능력으로 기록을 되찾았을 지도 모르지.’ 이건 상당히 가능성이 낮은 일이지만 어쩌면 아르페 일행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빨리, 리라이트 능력이 발동한 시점에서 이미 마왕이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은 했다. ‘아니, 이건 말이 안 되려나.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현 마왕이 전대 마왕에게 이토록 허무하게 밀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도 아니라면 알고 있었어도 당했을 만큼 그들이 강했다는 건가?’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던 전대 용사가 미처 죽이지 못하고 봉인할 만큼 강한 적이다. 현 마왕이 놈들의 봉인이 깨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을 가능성은결코 낮지 않았다. 어쩌면 그 시점부터 전대 마왕 세력과 현 마왕 세력의 대립이 시작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왕의 기질이 아르페가 알고 있는 그대로라는 것. 그렇다면······. “들어가자.” 장고 끝에 아르페의 입에서 튀어나온 선언을, 일행은 순간적으로 알아듣지 못했다. 굳어 있던 그들 사이에서 메테르가 기겁하며 외쳤다. “아르페!?” “놈은 마지막 레시피라고 했어. 그건 저 안에 들어가면 우리가 더 강해질 수 있단뜻이지.” “그냥 조리가 끝났으니 먹어치우겠다는 선언이 아니고······?” 엘릭의 불안은 지당했으나 아르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불안해했던 건 전대 마왕이라는 미지의 존재의 등장 때문이지, 현 마왕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야. 지금 우리 파티의 전력이면 사실 현 마왕이랑은 충분히 해볼 만하거든.” 적어도 수세에 몰렸을 때 누구 한 명 희생시키지 않고 다 같이 도주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은 되었다. 에트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은 단순히 레벨로 따질 수 있는 적이 아니지만, 그건 이 파티도 마찬가지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아르페, 일부러 적이 준비한 함정에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을 텐데.” 물론 타오르는 불 속에 부나방처럼 돌격하는 것이야말로 용사의 존재의의이기는 하지만 그들 파티는 여태껏 영리하게 잘 헤쳐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 의문을 담은 에트나의 말에 아르페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 지금 마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봤어.” “무슨 생각은, 그냥 용사들을 해치우려는 생각 아닐까?” “아니. 일부러 마왕성으로 가는 길목에 던전을 배치한 저 센스하며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설령 전대 마왕이라 할지라도 눈치 챌 수 없도록 설계한 결계까지 고려해보면······ 난 조금 다른 생각이 드는걸.” “음······? 잠깐만, 혹시 마왕이 전대 마왕과 뜻을 함께하고 있지 않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응.” 마계의 지배세력이 바뀌었다. 아르페는 이전 전대 마왕 세력을 따르고 있는 페이트라의 모습을 보며 마계의 모든 것이 전대 마왕 세력으로 넘어갔다고 판단했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코 현 마왕이 전대 마왕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지금 놈은 홀로 나타났다. 전대 마왕 세력과의 모든 끈을 끊어버리고, 절묘하게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내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단지 용사 일행을 쳐죽이기 위해서였더라면 그냥 전대 마왕과 함께 했으면 되었을 텐데 굳이 혼자서, 튀게! 실로 아르페가 기억하는 마왕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놈의 그 결벽에 가까운 강박관념, 그것에 기묘하게 결합된 과시욕을 결합해보면,어쩌면, 놈은 어쩌면······.’ 아르페가 결론을 내리려던 바로 그 순간 문득 시페넌이 말했다. “혹시 현 마왕은 지금 상황을 무척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아닐까?” “그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시페넌은 그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마왕은 이렇게 말했었다. [설마 나 또한 무대의 일부였을 줄은.] 자신이 오롯이 상황을 휘두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심한 짜증과 분노를 느끼던 그의 목소리를 시페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달갑지 않아. 달갑지 않아. 이건 재미가 없어.] 그리고 또 뭐라고 말했더라? 시페넌의 머릿속에서 마왕의 결의를 담은 선언이 재차 울려 퍼졌다. 그를 향한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메테르를 향했는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부족해. 이건 실패야. 지켜보는 것조차 지루하기 그지없거늘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라고? 나는 거절하겠다.] 시페넌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이건 놈이 철저한 사이코라는 가정 하에 해본 생각이다만.” “놈은 철저한 사이코가 맞아.” “혹시 마지막 레시피라는 건 자기 자신을 희생해 우리를 강화하겠다는 말이 아닐까?” “음······.” 성자나 성녀쯤 되는 인물이었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마왕이다. 시페넌의 말을 듣는 다른 이들의 표정은 살짝 썩어있었다. 시페넌은 당혹스러워하는 동료들을 최선을 다해 설득했다. “잘 생각해봐. 물론 아르페가 너무 사기적이라서 우리 모두가 다른 이들의 예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게 성장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마왕이 판단하기에는, 전대 마왕과 그 세력의 부활은 용사와 마왕의 대결 구도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사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래서 대결의 성립 이전에 무대가 엉망진창이 된다는 거지. 하다못해 마왕은 전대 마왕보다 약하기 때문에 단역으로 밀려났을 뿐이고. 그래서 그 상황에서 마왕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르페가 그를 대신해 말했다. “우리를 더 성장시켜 전대 마왕과 붙어볼 만하게 만든다, 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거지!” “으으음, 정말 어지간한 사이코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발상이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내어놓는다는 부분이 특히나 사이코 같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아르페 또한 시페넌과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에트나역시 딱 잘라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야 원래 그런 놈이니까······.” “이래서 마족이 위험한 거구나.” 파티 멤버들이 저마다 깨달음을 얻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때, 아르페는 다시 그들에게 확인했다. “빠지고 싶은 이들은 빠져도 좋아. 하지만 난 가야겠어.” 놈에게서 들어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아마 놈을 만나고 살아서 귀환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더는 전생에 대해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아르페는 모종의 각오를 다지고 후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빠지겠다는 이들은 없었다. “어마어마한 마기예요. 그 어떤 마족에게서도 이 정도로 압박감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던전과 점차 가까워져갈수록 마기에 민감한 이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갔다. 하지만 아르페와 에트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아르페는 실망하고 있었다. ‘레벨이 과거보다 낮은 것 같은데. 그야 전생에서 마왕의 절정기는 지금 시점으로부터 6년은 지난 후였으니 어쩔 수 없지만, 전생을 자각한 그가 이 정도라니 이건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아르페,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강한 존재의 기척이 지나치게 많은걸?” “뭐······?” 에트나의 지적을 받은 아르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던전을 자세히 살폈다. 시야에 잡히지 않는 이상 모든 존재의 기록을 훔쳐볼 수는 없지만, 에트나의 말마따나 터무니없이 강한 기척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까딱하다간 지금 인간계로 진출한 마계의 병력을 씹어먹을 수도 있을 만큼 많았다. “전대 마왕 세력은 아니라고 했잖아, 아르페?” “그래, 아니야.” 아르페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이건 그냥······ 몬스터야. 그중에서도 마계 최심부에 서식해 우리는 평생 만나보지도 못하는 마수.” “먀? 먀아?” 로아가 반응했다. 그녀는 어쨌든 그곳에 마기가 있기만 하다면 생기가 넘치니까. 아르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덧붙였다. “역시 맞는 것 같아. 그것도 최소레벨 360으로 구성된 마수들로······ 그래, 놈은 정말로 우릴 위한 마지막 레시피를 준비한 거야.” “전대 마왕에게 밀려난 이후 모습을 감추었다는 얘기를 페이트라가 했었지. 어쩌면 그 기간 동안 전대 마왕과 함께 했던 게 아니라, 마계 최심부로 들어가 마물들을 모으고 다녔던 것 아닐까?” 실로 그럴듯한 추론. 아르페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마족은 다 이렇게 머리가 돌아버린 것들밖엔 없나요?” 바디네의 진지한 질문에 아르페는 입을 다물고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 즈음 철마가 지상에 착륙했다. “정말 이대로 들어가도 되는 걸까.” “함정 지대에 함정이 있다는 걸 알고 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지. 안심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안심하냐!” 일행이 모두 철마에서 내린 것을 확인한 아르페가 그것을 아공간 주머니에 수납하고는, 마나 스트링을 뻗어 던전 입구를 가리고 있는 결계를 아주 조금만 열었다. 메테르가 앞장을 서고, 다른 일행들이 투덜거리면서도 그녀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섰다. “마왕의 기척은······?” “멀어. 원래 놈은 깊숙한 곳에서 상대의 발악을 관찰하며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마왕다운 악취미로군요.” 던전에 모두가 들어서고 나자 슬슬 정말로 이 끝에 마왕이 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어떤 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으며 어떤 이는 입맛을 다셨다. “후.” “꺄악!” 아르페는 마나 스트링을 뻗어 입구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일행과 마왕 둘 중 하나가 끝나지 않는 한 던전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에트나는 끝도 없이 펼쳐진 새카만 동굴 통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마왕이라면 우리가 들어온 순간 엄청 폼 잡으면서 메시지 마법이라도전달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미리 결계로 차단해뒀어. 무슨 복장 터지게 하는 말을 걸어올지 모르니까.” “역시 아르페야, 빈틈이 없지.” 아르페는 말없이 에트나와 악수를 교환했다. 일행은 그것을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쯤 되면 긴장하고 있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들어가 볼까.” “응.” 메테르가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쥐었다. 합동전투는 처음이지만 그들 모두 던전과 전장을 거쳐 온 숙련자들, 곧 빈틈없는 진형을 구성하여 천천히 앞으로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던전 탐험의 개시였다. < Chapter 36. 마왕 - 2 > 끝 ⓒ 토이카 작가의 말 1. 저는 내일 오전 여덟 시에 돌아오겠습니다!^^< Chapter 36. 마왕 - 3 > “흐오오오오오오!” [구오오오오!] 기사의 격렬한 기합성이 대기를 진동시키고, 그에 위축된 몬스터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주 고함을 내지른다. 그러나 그때 작렬하는 마법사의 슬로우 마법에 그만빈틈을 노출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는 괴물! 기사는 그 순간만을 노려 높이 점프하더니, 자신의 팔 만한 길이의 롱 소드를 일순에 수십 번 내질러 괴물의 안면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렸다. [쿠······ 쿠구와아아아아악!] “큭, 이 안개 독이야!” “퓨리파이!” “플레임 스핀!” “후······ 하아아아아압!” 정화 마법을 구사해 신속하게 독 안개를 해독하는 궁수,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마법사의 견제 마법! 기사는 끝내 둘의 도움을 받아 훌륭하게 마수의 몸통에 필살의 일격을 작렬시켰다. 검날에 집중된 오러가 새하얗게 폭주하며 마물의 전신을 내달린다! “후우, 후우우······.” [갸, 갸오오오오오오!] 몸길이만 수 미터를 넘기는 마수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수 토벌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야, 르세티도 많이 늘었네.” “그러게 말이야. 냠냠.” 그리고 아르페 일행은 그런 세 명을 구경하며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제법 잘 싸웠어. 레벨 업도 한 것 같네.” “저땐 레벨 업이 빨라서 참 좋았지, 그치?” “한가롭게 떠들고 있지 마!” 막 마수를 쓰러트린 용맹한 여기사, 르세티가 벌컥 화를 냈으나 일행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코앞에서 세기의 전투가 벌어지든 말든 무대 위의 연극을 보는 것만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360레벨의 마수가 날뛰는 모습도 레벨 380을 훌쩍 넘기는 일행들에겐 앞집 강아지의 재롱을 보는 것과도 같아, 긴장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방금 정말로 죽을 뻔 했는데! 독이 내 폐까지 그대로 들어갔는데!” “정화 한 번이면 사라지는데 뭐. 어쨌든 고생했어. 스튜 먹을래?” “계속 그렇게 불을 피워놓고 향긋한 냄새를 풍기니까 마수들이 줄지어 나타나잖아!” 아르페에 대한 르세티의 환상도 이쯤에서 깨졌다. 그녀와 데이스, 미케나만 계속 전투로 돌리면서 나머지 일행은 아주 느긋하게 쉬게 하는데, 누가 보면 마왕 잡으러온 게 아니라 피서라도 온 것처럼 보였으니 그녀가 열이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기껏 셰프가 잡아온 마수인데 이대로 낭비할 수도 없고.” “마수를 단순한 경험치로만 파악하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먹었어!” “단순히 경험치로만 보는 건 아냐. 돈으로도 보지.” “으아아아아!” 르세티가 발을 탕탕 구르며 분해했으나 아무도 그녀의 분노에 동조해주지 않았다. 이것도 모두 그녀와 데이스의 레벨이 일행에 비해 아득히 뒤쳐지기에 일어난 일일뿐인 것이다! 사정은 간단했다. 아르페가 파악한 대로 던전 안에는 최소 레벨 360을 넘기는 마수들로 득시글거렸다. 물론 그 이상 가는 레벨의 마수도 있었지만 무대 관리에 철저한 셰프답게 낮은 레벨의 마수부터 차례대로 배치해놓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지금 아르페 일행 수준에서 그 정도 몬스터를 잡아서는 성장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은 우리 레벨 계산을 잘못한 게 분명해.” “그야 그렇지, 우린 이 정도 마수를 잡아봤자 레벨 업은커녕 경험치도 제대로 못 받으니까.” 에트나가 그것에 동조했다. 물론 그녀의 레벨은 388로 일행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기는 하나 나머지 일행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르페와 로아가 386레벨, 메테르가 385레벨, 그 외 일행도 대부분 380레벨에 근접했던 것. 물론 마왕 또한 전생과는 다른 관점으로 용사 일행을 판단하고 있었기에 전생의 사천왕 최약체였던 아르페보다도 레벨이 10이상 높은 마수를 배치하는 등 신경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문제는 아르페 일행이 마왕의 예상을 아득히 웃도는 수준의 레벨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 쉬는 시간은 주어야 할 것 아니야!” “그래선 극한 상황에 처하기 힘들잖아. 어찌됐든 죽는 일만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저기 저 마수한테 돌진해!” “으힉!? 정말로 또 오고 있어! 또!” “배리어!” 바로 시페넌 파티의 르세티와 데이스, 미케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콰오오오오오오오오!] “저건 셋이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가 아닌 것 같은데!” “저 몬스터도 너희한테 잡히려고 태어난 건 아냐! 단지 너희가 놈을 죽일 뿐이다!” “그럴 듯하게 포장해봤자 결국 개돌하란 얘기잖아!” 메테르까지는 제법 능숙하게 속일 수 있었는데 르세티에게는 처음부터 안 통했다. 아르페는 입맛을 쩝 다시며 스튜를 떴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 캬구와아아악!] “어림없음.” 바디네의 특제 스튜 냄새에 환장한 마수가 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해오다가는 레이제나가 설치해둔 결계에 부딪혀 꼴사납게 튕겨나갔다. 르세티 일행은 목숨을 걸고 덤벼야 하는 마수가, 레이제나에게는 동네 똥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부조리해······ 납득이 가지 않아······!” “일단 잡고 나서 생각하죠. 저 놈은 덩치가 크니까 정산금이 더 높아지겠어요!” “르세티 양, 잠깐 뒤로 빠져요!” 르세티는 부조리와 공포에 치를 떨었으나 도망칠 길은 없었다. 호위기사의 명예를 걸고, 시페넌이 가는 길에 자신만 무섭다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 결국 그녀는 언제나 그래왔듯 장렬하게 투덜대면서도 마수를 향해 검을 치켜드는 것이다! “너무 르세티를 놀리지 마. 이래봬도 끝까지 나를 따라와 준 충신이니까.” “지금까지도 정말 단순한 충성심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르페가 빙글빙글 웃으며 하는 말에 시페넌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할 말은 아니라는 투였다. 그러던 중 이내 그의 시선이 아르페의 한 손에 가 닿았다. 스튜 그릇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이었다. “그거 계속하는 거냐?” “방심하는 순간 뚫릴 테니까.” 아르페의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방으로 마나 스트링을 쏘아내고 있었다. 허공에서 교차하는 무수한 숫자의 마나 스트링은 일대를 뒤덮으며 서로 다른 신호를 발산해, 그들을 향한 탐색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다. 물론 상대도 가만히 있지 않아 주기적으로 교란의 축이 무너졌지만, 만물열람을 지닌 아르페는 무너지는 축을 귀신 같이 간파하고 곧장 새로운 마나 스트링을 쏘아내 방어벽을 채웠다. 세상에서 오직 아르페만이 보일 수 있는 기교였다. “우리의 마나와 움직임을 계속 감추기만 하면 오히려 수상쩍게 여길 텐데. 적은 마왕이잖아. 그런 어쭙잖은 눈 가리기가 통할 상대가 아냐.” “착각을 하고 있나 본데, 감추는 게 아냐. 매 순간 서로 다른 마나를 발산하면서 우리 일행의 움직임을 조작하고 있는 거야. 아마 마왕은 우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없어도, 마수와 그리 차이나지 않는 레벨로 애써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든 거지.” “오케이, 포기.” 시페넌이 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예전부터 마도사들이 하는 얘기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전생에서 함께 했던 동료인 레이제나의 말도 꼭 아르페가 하는 말과 닮아 있었다. “저 남자 시선이 기분 나쁨.” “이해해, 레이제나. 너한테 반해서 저래.” “인기를 실감. 하지만 나는 임자가 있는 몸. 매력을 감추지 못하는 죄 많은 자신에게 한탄.” “아니거든!?” 무심코 오도카니 앉아 있던 레이제나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보내고 만 시페넌이 아르페와 레이제나의 반응에 이를 갈며 반박했다. 그것을 보던 에트나는 무심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재미난 광경이야. 설마 이렇게 섞일 수 있게 되리라곤······ 꿈도 못 꿨는데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두 빨강만 없어지면 참 좋을 텐데.” 메테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 그녀의 손에 들린 스튜 그릇은 싹싹 비워져 있었다. 그녀라고 해도 바디네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에트나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분명.” “그렇게 은근슬쩍 나와 아르페 사이에 끼어드는 게 싫어.” “후후, 이 용사 아가씨는 언제까지고 그런 재미있는 말을 한다니까.” 처음 끼어든 것이 누구인지 알면 그런 소리는 못할 텐데, 역시 그녀가 전생을 자각했으리라는 생각은 에트나의 괜한 착각이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저 미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마물의 수준이 높아지는 게 보인다. 언제까지고 르세티 일행에게 맡겨두지 말고우리도 슬슬 준비하자.” 두 여자 사이에 감도는 전운을 느낀 아르페가 메테르의 손에서 스튜 그릇을 낚아채며 말했다. 메테르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얌전히 물러났다. “알았어. 빨리 마왕도 해치우고, 전대 마왕인가 하는 놈도 얼른 해치우고, 아르페랑 시골에서 소 키우면서 살아야하니까.” “기대되네요, 낙농업 라이프.” “나 염소도 기르고 싶은데.” “대농가의 탄생 예감.” 아르페 일행은 적당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순조로이 마수를 쓰러트리곤 숨을 몰아쉬고 있는 르세티 일행과 합류했다. 왜 이제야 왔냐는 눈물어린 르세티의 시선은 적당히 무시해두었다. 앞으로도 얼마간은 그녀 일행에게만 맡기게 될 테니까! 동굴을 나아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마수의 레벨뿐만이 아니었다. 마왕은 원래 무대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만큼 함정도 제법 공을 들여 설치해놓았는데, 전생을 자각한 만큼 아르페의 능력을 인지하고 있는 탓에 평범한 함정도 아니고 일행을 감지하는 순간 무조건 발동하는 괴팍한 함정들뿐이었다. “큭!” “위에서 쏟아진다! 아, 저기 몬스터!” “흐오오오오오오!” 혹시 이 새끼 이거 10년 동안 틈이 날 때마다 던전만 만들고 있었던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악랄한 함정의 연속! 마왕의 마기에 의해 억눌려 있다가 함정이 발동하는 순간에 맞추어 해방되는 몬스터들이 시기적절하게 일행을 공격해 들어오니, 슬슬 르세티 일행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시점에 이르렀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 2군!” “2군이라고 부르지 마!” 시페넌을 필두로 하는 레벨 370대의 전사들이 놈들을 막아섰다. 아르페는 여전히 마왕과의 신경전을 벌였는데, 던전의 심부로 들어가며 그것도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점점 마기가 짙어져.” “아르페······?” “빌어먹을 놈, 역시 대비하고 있었구나.” 아르페가 가장 먼저 마왕성을 부순 것은 다름 아닌 마왕성 내에서 증폭되는 마왕의 마기 때문이었다. 고밀도의 마기는 형체화되어 공간을 가득 채우게 되는데, 어지간한 마나의 바람으로도 밀어낼 수 없는 그 마기는 아르페의 고유능력이 발동하는 것조차 가로막는다. 그런데 놈은 이 던전을 간이 마왕성으로 활용하여, 자신이 데려다놓은 마물들이 내뿜는 마기에 자신의 것을 더해 서서히 공간을 장악, 마기를 형체화하여 아르페의 고유능력이 발동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 스트링을 이용해 가르고자 해도 결국 놈의 마기와 맞부딪혀 정면 승부를 해야 하니 만만치 않았다. 물론 그 효용은 단지 시야차단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간 전체를 마기로 지배하여 그 영역 내에서 자유로이 마법을 발동하거나 이동하는 등 그야말로 전능자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 누구보다도 짙은 마기를 지닌 마왕이기에 가능한 위엄이었다. “아르페, 혹시 놈이 근처에 있어?” “아니, 아직은 아냐. 놈이 준비한 마수가 다 죽기 전까지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거야. 어쨌든 다들 대비해둬.” 물론 아르페는 이미 놈의 마기를 걷어낼 방법까지도 확보하고 있다. 전생의 마왕이 모를 수밖에 없는 필살기, 전생의 마왕은 마주하지 못했던 사람들. 하지만 아르페가 준비한 무기들을 벌써 꺼내들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정말 강해졌군······ 사천왕 서열 제 4위,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나는 아무래도 그 전에 마왕과 기 싸움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그러니 지금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 아주 잠시 무릎을 꿇을 때였다. < Chapter 36. 마왕 - 3 > 끝 ⓒ 토이카 < Chapter 36. 마왕 - 4 > “르세티, 이제 빠져! 아까 구성했던 진으로 가자!” “예, 폐하!” [너는 어디까지나 단역에 불과한 아이였다.] [널 기준으로 따진다면 모두가 단역이었겠지.] [반말인가, 이건 또 새롭군. 아주 재미있어.] 다른 일행이 함정과 몬스터에 맞서 싸우고 있을 때 아르페는 실로 오랜만에 마왕과 대면하고 있었다. 물론 유형화된 마기에 가려 서로의 진신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아르페는 장막 너머에 있을 마왕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메테르, 아무래도 함정은 우리가 걷어내야 할 것 같아.” “그냥 받아내긴 부담스러우니까 몬스터들에게 유도하자. 그 정도 공헌이라면 경험치를 별로 빼앗지 않고 끝날 거야.” “이렇게만 보면 참 똑똑한데······ 알았어, 그렇게 하자!” [아직까지 전생에 매달려 있는 거야? 세계는 새로 시작됐다고.] [그리고 그 주체는 너다. 그렇지 않은가? 두 번째의 용사. 하하, 실로 그럴듯한 직함을 걸머지지 않았는가.] 아르페는 그 말을 들으며 침묵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의해 세계가 되감겼다는 사실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정작 어째서 그의 기록이 송두리째 뒤바뀐 것인지 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일련의 사태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아르페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트나를 정령으로 바꾼 것은 너의 힘인가? 어쩌면 그것은 그녀를 나의 구속에서 풀어놓기 위한 비장의 수단이었는가? 에트나, 그녀는 나의 무대에서 가장 재미난 춤을 추었던 광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설마 지금 이렇게 나와 반대편에서 나를 대적하게 될 줄이야, 역시 재미나.] [너라고 모두 아는 것은 아니구나. 이미 전대 마왕 세력은 나에 대해 알고 있던데.] [하지만 네 성격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지. 그 증거로 나는 이곳에 있고, 그들은 이곳에 없다. 아르페, 가장 오랫동안 내 곁에서 춤을 추었던 광대야. 나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너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넌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네가’ 이곳에 있는 것처럼.] [하.] 이제 아르페는 놈의 허장성세에 속지 않는다. 놈이 아무리 강하건, 대단한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건 놈 또한 리라이트에 휩쓸린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 대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적어도 이 세상에는 없으리라. 그가 고유능력의 2단계를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야 답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 전대 마왕인가 하는 놈한테 발렸다지. 그렇다는 건 넌 이제 더는 마왕이 아니구나, 그렇지?] [이런이런, 전 상관에 대한 예우가 엉망이군. 곧장 약점을 캐다니.] [예우? 최근 들은 농담 중 가장 웃겼어.] 아르페는 놈을 향해 대놓고 물었다. [세력도 지위도 잃은 주제에 왜 너만 따로 떨어져 나와 움직이고 있는 거지? 넌 바보냐?] [세월이 네게서 경험과 공포마저 앗아갔는가? 조금 더 높아진 레벨이 너를 오만하게 만들었는가?] [네가 직접 그 공포를 덜어주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놈과 마나를 겨루는 도중에도 아르페의 시선은 일행에게 가 닿아 있었다. 아르페와 메테르, 에트나에 비해 비교적 부족함이 많았던 나머지 일행은 지금 마왕이 친히준비해둔 시련과 마주하며 빠르게 기량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저건 진짜 안 될 것 같은데.” “그래? 아르페한테 물어보······ 아르페가 고개 흔든다. 너희만으로 된대.” “거짓말! 거짓말 같은데! 으아아아아아아!” 마왕은 일행이 자신에게까지 도달하기를 원했기에, 실수로라도 그들의 목숨을 앗아갈 장치는 해두지 않았다. 따라서 일행은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회복하는 것을 반복하며 레벨과 스킬만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 놈은 스스로 나서서 용사 일행과 자신의 격차를 줄여나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놈들의 능력이 내 상상을 벗어나 성장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마왕성을 무너트린 그 일격, 필시 제스트바에서 얻어온 마법일 테지.] [그것 때문에 졌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나는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마왕성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 어라, 이렇게 쿨하게 인정하는 게 마왕의 컨셉이었던가? 아르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마나 스트링을 한 줄기 더 뽑아내고 있으려니 그의 귓가로 연달아 놈의 목소리가날아들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네게 감사한다. 네가 시계바퀴를 다시 돌린 덕분에 나는 무대를 바꿀 기회를 얻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사이코라는 거야. 사이코는 지배자를 하면 안 돼.] [나는 정복자이며 지배자가 되기를 포기했다. 그러니 나를 찾아와 그 다음의 답을 직접 들어라, 두 번째의 용사.] 놀랍게도 마왕의 목소리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그 순간부로 더더욱 영역 내 마기가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르페의 눈초리가 찌푸려졌다. 마왕이 하는 짓거리는 전생에서부터 무엇 하나 마음에 든 게 없었지만 지금은 특히 더했다. “쥐뿔도 없으면서 저렇게 폼 잡고 여유부리는 게 제일 빡쳐.” “아르페, 저건 어때!?” 재빠르게 마나를 조작해 다시 영역 지배권을 확보하던 아르페가 마악 마기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그들 일행을 덮쳐오는 거인 형상의 몬스터의 모습을 확인하곤 생긋 웃으며 외쳤다. “레벨 380! 너희 다 빠져!” “우으와아아아아아!” 2진이 빠지고 슬레지 해머를 쥔 시에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메테르와 에트나는톱니바퀴 맞물리듯 연달아 발동해 일행을 노려오는 함정의 해체에 바쁜 상황. 지금 가장 든든한 전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시에나였다. “하아아아압!” [네놈들만 죽이면······ 내게도 자유가!] “불쌍한 악역의 대사 150선이구나, 나도 그것 참 좋아해!” [크하!] 시에나의 해머와 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허공에서 맞부딪혀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자아냈다. 시에나는 신성 스펠로 육신을 강화하고 있었기에 그리 충격 받지 않았지만 그것은 놈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전선에 합류한 아르페가 마나 스트링을 뻗어내 놈의 움직임을 막아낸 덕에 일행은 놈에게 깔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흐우우웁!” [쿠아아아아아아!] 그러는 동안 시에나는 반발력을 이용해 허공에서 한 번 회전하며 다시금 해머로 놈을 내려쳤다.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었으나 그것이 자아낸 파괴력은 무시무시했다. 아르페에게 붙들려 한순간 운동능력을 상실한 놈은 태산의 무게를 품고 내리쳐지는 해머에 그대로 대가리의 절반가량이 으스러지고 말았다. “지금이다, 밟아!” “저 저렴한 대사 선택이 정말 참을 수가 없다니까!” 아르페의 손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가닥의 마나의 실이 저항 불능 상태에 놓인 거인의 전신을 순식간에 꿰어버렸다. 거인이 몸을 뒤틀 때마다 날카롭게 놈의 몸통을 갈아버리며 행동을 구속하는 마나의 실! 바닥에 무사히 착지한 시에나의 차지를 시작으로 일행이 우르르 돌격하여 발밑을미처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거인을 인정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때에 아르페는 이미 마나 스트링을 회수해 다른 방향으로 던져내고 있었다. “오빠?” “왼쪽에서 함정. 몬스터 한 마리 더 나타날 거야.” “좋았어!” 파티원들은 아르페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고, 모든 것이 계산대로 돌아갔다. 마왕의 마기가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아르페의 만물열람이 완벽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르페도 이전의 아르페가 아니다. 레벨이 오르면서, 무엇보다도메테르의 기록을 공유 받아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체적으로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마나의 감각만으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부족하다면 육신에 의지하면 되는 것. 마도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육신은 조금의 마나를 투자하는 것만으로도 월등히 강화되고, 그는 만물열람에 오감을 더해 주위 환경을 더욱 완벽히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마력만 레벨에 맞는 수준이었다 뿐이지 육체로는 어지간한 인간 기사만도 못해 빌빌거리던 나만 기억하고 있는 마왕은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겠지.’ 마왕은 무대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등장인물들이 딴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필시 놈의 패인이 되리라! 물론 아르페는 마왕을 확인하는 순간 놈의 정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기에 방심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마기만 걷어낼 수 있게 되면······.” “이거 그냥 내가 먹으면 안 돼? 먀아아?” “조금은 괜찮은데 아마 많이 먹으면 배탈날 거야. 그러니 가장 중요한 순간을 위해 참아둬.” “먀아아아.” 로아 역시 본능적으로 마왕의 마기는 질이 다르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 경우 멋모르고 마기를 들이켰다간 소화도 못 시키고 앓아눕게 된다. 이 마기를 오롯이 소화시키는 방법은 바로 마기의 주인을 꺾는 것뿐! 탐식의 마수인 로아에게 육체와 마나로 전투를 벌이는 능력이 주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리라.그녀는 전의를 고조시키며 발톱을 예리하게 갈았다. 바로 그때. “왼쪽 클리어!” “오른쪽도 클리어. 아르페?” “좋아. 모두 집합.” 메테르와 에트나의 우렁찬 외침에 아르페는 자안을 만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가자. 지금부턴 1진도 전열에 합류할 거야. ······마왕에게 이르는 길의 시작이다.” “아으으, 갑자기 배가 아파. 이제 곧 마왕이지? 마왕 나타나는 것 맞지?” “정말 마왕이란 말이지······.” 마기가 짙어질수록 파티 멤버들도 미약한 공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피식 웃어줄 수 있었다. 원래 마왕성에 들어서는 자들이 느끼는압박감은 이것에 비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으니까. “메테르, 준비 됐어?” “난 언제든. 다른 애들이 문제지.” 연습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르페 파티 내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그러니까 마계에 들어섰을 즈음부터 연습해왔고 시페넌 파티가 합류하여 이 던전에 들어서고서도 마왕의 눈을 가려가며 열심히 연습했다. 그럼에도 불안한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이제 더는 지체할 여유도 없다. 더 이상은 마왕의 눈을 가리는 것도 벅찼다. “좋아······ 지금부터는 전속력으로 가자고.” “마왕······.” “너무 쫄지 마, 데이스. 이제 네 몸에 마기는 없잖아.” “폐하는 어떻게 된 게 그 짧은 시간 현자가 되어버렸네요.” “짜식.” 시페넌은 기죽은 채 입술을 삐죽이는 데이스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한때 철천지원수로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 그들 모두가 똑같이 운명에 휩쓸린 가련한 희생양일 뿐. 인간계에 드리운 암운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그땐 그의 목에 걸린 족쇄를 벗겨주어도 될지도 모른다. “아직 마수를 다 잡은 것도 아니니 벌써부터들 쫄지 마. 마왕은 언제나 모든 판이완벽하게 깔린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단 말이야.” “하지만 언제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란 말이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아르페는 히죽 웃으며 앞장을 섰다. 마왕의 마기는 접촉하는 것만으로 정신계열 상태이상을 불러오고 육신에 미미한 저주를 남기며 실제로도상처를 입히는 악랄한 부가효과를 지니고 있다. 마기를 먹는 것이 특기인 로아에게마저 못 먹일 정도니 말은 다한 셈. 아르페는 한손으로 마도서를 펼쳤다. 놈과 외부의 연결이 없다는 것은 이미 진즉 확인이 끝났다. 이제부턴 속전속결로 놈을 처리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재생.” 그의 속삭임에 마도서가 우웅, 미약한 진동과 함께 그 힘을 드러냈다. 마왕의 마기라고 해도 재생의 힘은 이겨낼 수가 없었다. “마나는 괜찮을 것 같아, 아르페?” “충분해.” 메테르의 물음에 웃음으로 되돌려주며, 아르페는 바닥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왕이 조성했던 임시 마왕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Chapter 36. 마왕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6. 마왕 - 5 > 대기가 진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주인인 마왕의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곧 그마저도 마도서에 휘말려 순수한 마나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서둘러! 더 빠르게 달려!” “저기 몬스터······ 큭!” 레벨 381, 대체 마계 어디에서 데려온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마수가 고통의 신음을 내지르며 일행에게 덤벼오다가, 마도서가 일대의 마기를 삽시간에 마나로 바꾸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 움찔하다가는 메테르의 참격에 팔 하나를 잃고 나가떨어졌다. “에트나!” “예이예이!” “레이제나가 마무리!” “긍정.” 에트나와 레이제나가 순식간에 화력을 퍼부어 마수를 죽여 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레벨 370의 마수를 상대로도 끙끙대던 나머지 일행이 보기에는 실로 기가 막힌 광경이었으나, 아르페는 놈의 사체를 통째로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버리곤 그대로 질주를 재개했다. “함정은 무시해! 어차피 재생 마법에 휩쓸려나가 무효화된다!” “좀 더 아르페 뒤로 바짝 붙어! 마나로 정화되는 공간에 보다 거세게 마기가 밀려들고 있어······!” “후우욱, 후우우······ 여태껏 있었던 공간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겠어요!” 마기를 마나로 되돌리는 재생 마법의 힘은 과연 실로 강력했다. 비록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는 탓에 처음부터 구사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그에겐······. “데이스, 마나 내놔!” “내가 그때 혀 깨물고 죽었어야 했는데······.” 아르페의 기대 이상으로 훌륭히 성장한 데이스의 마나를 고스란히 마도서에 쏟아붓는다! 그의 것으로도 부족하다면 그땐 다른 이들의 마나도 차례차례 받아낼 생각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해치워야 하는 것들은 네놈들인가!] “아닐지도 몰라!” [엇, 그런가······!?] “빈틈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그 후로도 레벨 380을 넘는 압도적인 힘과 기록을 지닌 마수들이 무려 셋이나 나타나 일행의 앞길을 막아섰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을 구해온 것인지 아르페는 그저 미스테리였다. 이것들 있으면 마왕군 사천왕 필요 없지 않나? 아니, 그냥 이것들을 인간계로 보내지 왜 쓸데없이 마족들을 희생시키고 있니? 라고 물어보고 싶을 만큼 압도적인 힘을 지닌 마수들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아르페 일행은 마기라는 환경을 일시적으로 빼앗겨 약화된 놈들을 어렵지 않게 쳐부수고 길을 트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질주해!” “이 앞은 쭉 트인 길인데! 이제 뭐 더 없는 거야?” “뭐가 없긴······ 마왕이 있지!” “꺄아아아악!” 그리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마왕 앞에 이르는 데에 성공했다. 설마 뭔가가 더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던 일행은 설마 했던 서프라이즈에 기겁했으나 이제 뒤로 돌아갈 길은 없었다. 마왕이 바로 그들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그럴싸한 의자에 앉은 채! [그 마도서······ 과연, 대단한 힘이군. 어떻게 얻은 것이지?] “그쪽이야말로 대단해. 네놈은 정말 그대로구나, 마왕.” 마왕이 조성해놓은 마기의 공간을 마도서가 지닌 재생의 힘이 파먹으며, 일행이 머무르는 곳을 품은 마나의 공간과 마왕이 앉아있는 공간을 품은 마기의 공간이 대치하는 것만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아르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이 웃겼다. 전혀 계획되지 않은, 계획할 수도 없었던 것이 지금 상황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 말이다. [나는 약화되었다. 더 이상 마왕성의 지원을 받을 수 없고, 네놈의 간교한 술수로여기에 이렇듯 구축한 지배의 공간마저 어긋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네가 나를 보고 놀란다면, 그렇다. 이것이 나다. 운명을 피하려 발버둥치는 가련한 영혼, 순수를 연기하는 마의 자식,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여. 강자의 격은 그리 쉬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음, 더럽게 혀가 긴 것도 여전하군.” 입으로는 지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아르페는 내심 긴장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전대 마왕에게 그가 밀려났다는 사실은 아무런 위안도 되어주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졌다 해서 그 힘까지 빼앗기는 것은 아닐 테니까. 실로 웅장한 풍채, 본신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기 힘들게끔 그 주위를 감돌고 있는시커먼 마기의 구름. 전생의 그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겉모습에 그는 그만 본능적으로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이것만은 어쩔 수 없으리라. 전생의 그를, 영혼과 육신 모두를 틀어쥐고 놓아주지않았던 자였으니까. 아무리 벗어났다 한들 상처자국 하나 남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 떨고 있냐······?” “응. 하지만 마왕도 떨고 있는 것 같으니까 괜찮아.” “그럴 땐 아니라고 해줘야지, 메테르.” 마왕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당당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분명 놀라움과 경악이 깃들어 있었다. 재생 마법의 힘을 느꼈다면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이야말로 그들의 대적이 될 수 있겠구나. 그들이 꿈꾸는 것과 정확히 정반대의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것은 처음 연구를 진행했던 자들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의 힘이다. 결코 마도서 하나로 감당할 수 없는 힘이거늘 어째서 그것을 네가 가질 수 있게 된 것일까.]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아냐.] 기적과 우연의 산물이라는 말만큼 설득력 높은 말도 없다. 하지만 언제나 이야기는 그렇지 않던가. 이래서 게임이 되겠냐 싶을 만큼 어이없이 강한 최종보스를 마련해두고, 주인공 일행도 나름 개고생을 해가며 성장하기는 하지만 역시나 이놈을 뛰어넘을 수는 없겠다 싶은 시점에서, 또다시 말도 안 되게 황당하고 우연적인 힘을 얻어 최종보스를쓰러트리는 것이다. 그래서야 여태까지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한 주인공 일행의 고생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하는 의문부터 철저한 설계와 안배로 작전을 수행한 최종보스는 정말로 그 우연의 산물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지게 되는 것인가 하는, 분명 선의 승리로 이야기가 끝나기는 했지만 어째선지 마음에 남는 한 줄기 찝찝함까지. 그럼에도 실제로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따져보면 세상에 제대로 설명되는 일이 무어 있던가? 무슨 일이든 개연성이 없다느니, 작위적이라느니 지나친 우연이라느니 따지는 놈들은 진짜 제대로 꼬이는 인생을 살아보지도 않은 애송이들임에 분명하다고 아르페는 생각했다. [이제 붙자. 피차 서로 말 길게 할 필요 없겠지.] [크흐······ 실로 만족스러운 눈빛이다. 그 눈빛, 나와 짝이 되어 춤추기에 모자람이 없는······ 눈빛이야!] 마왕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마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오며 일행을 급습했다. 아르페는 마도서를 펼친 채 꽉 쥐어 주문을 외우는 한편으로 파티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바디네, 아리아!”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왕, 놈은 뛰어난 마법사이며 동시에 독물이다. 페이트라의 마기가 극한의 냉기에 가깝다면 마왕의 마기는 살아 움직이는 독! 레벨 300이하의 존재라면 그의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 치명적이고 독을 한 모금 머금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른다. 전생의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이건 성녀가 있어도 못 막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아르페 일행에게는 성녀 두 명이 있다. 그리고······. “흐아아아압!” [뭣······?] 모든 마기를 거부하는 이블 리플렉터, 아르페에게 처음으로 마기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준 계기가 되어준 아이 시에나 또한 있다! [저것은 무엇이지? 무슨 힘을 다루는······ 핫!] 마왕은 그가 접해보지 못했던 타입의 마나를 다루는 시에나가 정면으로 마기를 뚫고 돌진해오는 것을 보며 아르페의 재생 마법을 접했던 그 순간보다도 놀랐다. 그러던 그때 아르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어라, 잠깐만. 시에나가 지닌 마나는 결코 마기가 아니지만 동시에 순수한 마나도 아니잖아. 하지만 마기는 마나가 변형된 결과물이었고, 그렇다는 건 내가 그녀의마기를 되돌리는 데에 성공했더라면 그녀는 순수한 마나를 지니게 됐어야 하는데······.’ 그러나 상념을 길게 이어가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촉박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시에나는 슬레지 해머를 힘차게 휘둘러 마왕을 가격했고, 마왕은 순식간에 삼중의 방어막을 만들어내 그것을 막아냈다. 직후 시에나가 뚫은 길을 따라 쏜살같이 질주한 메테르가 롱 소드를 내질러 그 방어막을 부수었다! “마왕!” [다시 보는구나, 용사. 네년 역시 그때에 비해선 알아보지 못할 만큼 성장했지만,과연 이번에는 나를 넘어서서 그 뒤의 무대로 향할 수 있겠는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하지 말고 덤벼!” [크하하하하하!] 두 소녀에 맞서 싸우는 마왕의 몸에서 일순 마기가 폭주했다. 아르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대마법의 전조임을 알아차렸다. “레이제나, 에트나!” “준비완료.” “나도 마찬가지!” 레이제나와 에트나는 제각기 겨울정령과 불의 정령의 힘을 다루는 능력을 지니고있다. 물론 그 둘이 제각기 힘을 발휘하여 마왕을 상대해도 충분하겠지만, 서로 상반되는 속성을 다루는 만큼 힘의 감소는 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둘의 힘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서는 중간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바로 메테르의 스킬 레코드 마스터를 거쳐 타인에게 그 마나와 힘, 기록을 오롯이 전달하는것. 당연하지만 그 대상은 바로 아르페였다. “후우······! 시에나, 메테르! 물러서지 마!” “언제나 오빠를 믿어!” “물러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 마왕조차 아르페에 의해 재배치되는 마나의 질을 느끼며 침음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그 마나를 다루는 아르페는 여유가 넘쳤다. 신체에 주어지는 약간의 과부하는 사랑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구현!” 불꽃과 얼음, 각기 속성의 궁극에 달해있는 마나는 제아무리 메테르를 거친다 해도 완전히 정화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르페에게는 선대 용사가 남긴 가장 큰 유산, 아마 남긴 본인도 이렇게 완성되리라곤 예상치 못했을 유니크 스펠 구현이 있는 것이다. 모든 마나가 그의 명을 따라 그의 이미지를 세상에 구현한다. 그 모태가 되는 것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발동하고 있는 재생 마법! 마왕이 만들어내는 대마법의 구조 따윈 이미 전생에서부터 실컷 보아오고 있었다. 단지 마나가, 단지 능력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다 걷어내 주마!” [컥!?] “하아아압!” 동굴을 통째로 무너트릴 기세로 부풀어 오른 마기에 맞서 예리한 마나의 창이 돌진했다. 마왕은 물러나지 않고 마주 마기를 내뿜었으나 물러나지 않는 것은 시에나와 메테르 또한 마찬가지. 시에나는 본인의 마나로 신성 스펠을 발동했고, 메테르는 바디네의 힘을 빌어 롱 소드를 내질렀다. 그녀들이 있어 마왕의 스펠은 더욱 늦게 발현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정면으로 내 권능에 항거하겠다는 것인가!] [권능? 타고났을 뿐인 힘에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마.] 아르페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놈이 만들어낸 철벽과도 같은 마기의 벽을 뚫고 들어간 마나의 창은 곧 놈이 발현하려던 스펠을 완벽히 부수는 데에 성공했다. 놈을해치운 것도 아니고 단지 놈이 발현하려던 마법을 막은 것뿐이지만 그 쾌감은 실로 엄청났다. [고작 이 정도, 그 만한 마나를 품고도 네가 이룬 것은······.] “구현!” 아르페의 구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나가 유지되는 한, 그의 뜻이 살아있는 한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바꾸어 그곳에 다시 나타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구현 마법이 사기인 이유! 목표물을 깔끔하게 꿰뚫어 마왕의 뜻을 저지시킨 마나의 창이 모습을 바꾸었다. 내부에 응축해두었던 마나를 일순간에 폭발시켜, 일대의 마기를 마나로 [재생]시켰다. [카······ 카흐흐! 제법이구나, 아르페!] 마기에 가려 있던 마왕의 진신이 비로소 오롯이 드러났다. 놈의 목에 새카만 족쇄가 나타나 있었다. < Chapter 36. 마왕 - 5 > 끝 ⓒ 토이카 작가의 말 1. 칠칠치 못한 마왕 2. 저는 오늘 오후 여섯 시에 돌아오겠습니다!^^< Chapter 36. 마왕 - 6 > “뭐냐, 그건······?” 순간적으로 아르페는 멍해져 중얼거렸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마왕의 목에는 분명 족쇄가 걸려 있었다. 놈이 절대지배로 수하들을 속박했던 근원, 바로 그것 말이다. [이미 완성되었으면서 다시 한 차례 변하는 형태의 마법이라니······ 제대로 한 방먹었어. 인정하지.] 마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족쇄가 엄청난 기세로 희미해져 결국은 사라졌다. 그러나 만물열람을 지닌 아르페에게는 그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족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저 마왕이 그것에 저항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역시 레벨 400이 넘는 괴물 정도 되면 절대지배의 힘에 저항도 할 수 있게 되는군, 하고 한가롭게 생각할 때는 결코 아니다. [절대지배에는 제한이 있었어. 그렇지?] [······.] 고유능력의 진체를 꿰뚫어보는 것은 만물열람의 능력으로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눈앞에서 단서가 주어져 있는데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아르페는 혀 깨물고 죽어야 했다. [상대를 이긴다면 지배할 수 있게 되지만 만약 지게 된다면 반대로 네가 복속되는거지. 너는 전대 마왕에게 패배해서 그에게 지배당하게 된 거고.] [그 짧은 시간 거기까지 보고 파악했는가. 하지만 결국 이것은 나의 고유능력, 네놈도 보았듯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하다.] 거짓이다. 절대지배는 강력하기 짝이 없는 만큼 결코 그 주인에 의해서도 통제될 수 없는 위험한 능력이었다. 요컨대 저것은 강력한 주술이다. 적에게 성공적으로 걸지 못하면 오히려 자신이 걸려드는 지독한 저주와도 같다. 마왕은 지금 단지 그것을 자신의 방대한 마기로 몰아내고 있을 뿐, 그것이 느슨해지면 끝내 복속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당연히 놈은 족쇄를 막기 위해 제 능력의상당 부분을 묶어두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이 정도 마기라는 점에 실로 치가 떨리긴 했지만······. ‘그렇다는 건 이 자식은 죽을 무대를 찾아 왔나?’ 아르페와 마왕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놈의 의중을 읽어보려던 아르페는 곧 탐색전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만물열람으로도 대상의 생각만은 읽어낼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거세게 몰아친다면 분명 놈의 속내도 알 수 있겠지. “놈은 지금 약해져 있는 상태야. 지금 조져야 해!” “오케이!” “알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깔끔하게 생략하고 적의 현재 상태만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당황한 마왕이 마기를 다시 거세게 뿜어내는 듯 하지만 메테르와 시에나는 그런 것 따윈깔끔하게 무시하고 놈에게 돌격했다! 휘몰아치는 마기의 폭풍 속을 내달리며 메테르는 검을 높이 들었다. “강격!” 스킬은 평범한 강격이지만 그녀의 검에 어려 있는 것은 분명한 성광이었다. 히어로 오라의 발전형 스펠 히어로 플래시, 그 힘이 남김없이 담겨 본래 성능이 좋을 뿐인 바스타드 소드를 성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장했다. 마왕은 그것에 맞서며 눈을 부릅떴다. [레벨만 높아진 것은 아니었는가!] “너와의 승부······ 지금이라면 낼 수 있어!” 성광과 마기가 나란히 폭주하며 장내를 뒤덮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시에나의 망치가 놈을 노리고 내리꽂혀, 빠르게 공간이동을 해 피한 마왕 대신 놈이 앉아 있던 의자를 산산조각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야. 놈의 심장소리가 빨라진다.” “나도 기억하고 있어······ 후우우우.” 마왕에게 속성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에트나 뿐이다. 그녀의 불꽃은 얼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녹여 불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마왕의 심박이 빨라짐에 따라 놈의 존재의 근원, 심장으로부터 치명적인 독기를 품은 마기가 솟구쳐 놈의 등 뒤로 분사되었다. 그것이 마치 증기로 이루어진 날개를뻗어내는 것과도 같았다. [네 생각이 너무 많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인형아. 더 이상 너의 마법이 내 목을 예리하게 노리지 못하는 것을 보아 네 손보다 마음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음이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래서 넌 네 입이 마기보다 빨리 움직이냐?] 재생 마법은 이미 기세를 탔다. 놈의 일부를 정화한 이상 나머지는 그대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될 뿐. “마기는 전부 막아낼 테니까 좀 더 빠르게 몰아쳐!” “흐아아아아아압!” [단순히 빠르기만 해선 나를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아르페는 마법을 일부러 조금 느릿하게 조종하고 있었다. 만약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놈을 정화시켜버린다면, 놈이 인간이 되어버린다면 어떨까.’ 이미 아르페는 마족을 인간으로 되돌린 경험이 있다. 지금 그의 곁에서 불꽃을 태워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여자 에트나. 그녀는 타고난 자신의 힘과 마족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충돌하여 평생을 병든 것이나 마찬가지인상태로 살아왔으나 이제 겨우 진신을 되찾아 고유능력까지 각성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가 실수로라도 마왕을 정화하게 된다면, 그가 지닌 고유능력이 아르페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방향으로 진화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놈의 족쇄를 본 순간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능력의 주인에게 패널티를 입히는 고유능력 따위 들어본 적도 없다. 그것은 즉 마왕의 고유능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에트나의 경우와 그리 다를 바가 없다. 마왕 역시 그것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고, 전대 마왕에게 패배해 고유능력이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운 순간 처절하게 실감했을 터. 그대로 전대 마왕에게 복종할 셈이 아니라면 다른 수단을 강구할 터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아르페가 알기론 그가 지니고 있는 재생 마법이 유일했다. 물론 족쇄를 억제하느라 약화된 마왕이 그대로 아르페 일행의 손에 죽어 무대를 완성시키려 했다는 판단도 가능하지만, 만약 놈이 아르페의 재생 마법의 존재를 알고, 그의 마법에 일부러 당해 마족의 육신을 벗어나려 했던 것이라면 어떨까. ‘놈이라면 어쩌면 그 가능성까지도 저울에 걸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음 무대로 나아갈 이를 가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 아르페는 심호흡을 하며 마도서를 쥐었다. 건너편, 마왕이 만들어낸 마기의 날개가 이번엔 짙은 흑색의 용이 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왕의 악랄한 점은 그렇게 멋있는 마법으로 폼을 잡는 한편으로 다른 은밀한 마법을 구사해 적을 압박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르페가 그것을 알고 있는 이상재생 마법의 타겟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따라서 마왕의 마법은 발현되기 직전 캔슬되기를 반복해 겉으로만 보면 마치 아르페 일행에게 몸으로만 개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마왕의 마법에 대적하는 아르페 또한 마찬가지였다. 쉴 새 없이 피어나는 흑색의 마기와 그 사이로 파고들어 헤집는 보랏빛의 마나, 그것과 어우러지는 열기와 냉기의 원천을 알아볼 수 있는 이라면 누구나 감탄할 것이나 멋모르는 이에겐 그저 눈싸움으로 보일 뿐! [무엇이 두려워 자꾸 막는 것이지? 아르페, 보아라. 네놈의 마나와 내 마기가 어우러지는 모양을. 보다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다면 너는 한 발 물러서는 것이좋아!] [이 부분을 자서전으로 쓰게 되면 폭죽이라도 몇 발 추가로 터트려줄 테니까 안심하시지. 난 옛날이야기에서 마법사들이 붙을 때마다, 누가 더 바보인지 자랑하려는 것처럼 바턴 주고 받으면서 대마법을 써대는 장면이 제일 짜증났거든?] 아르페와 에트나, 레이제나가 주축이 되어 마왕과 치열한 물밑 마법전투를 벌이는 한편으로 메테르와 시에나를 주축으로 한 근접전투원들도 마왕에의 두려움을 버리고 용감하게 뛰어들기 시작했다. [하! 내가 또 모르는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군.] “얘 자꾸 못 알아듣겠는 말해서 무서워!” “데이트 신청은 아니니까 안심하고 찔러!” 가장 레벨이 낮은 축이었던 르세티 역시 마왕이 준비한 던전을 거치며 큰 폭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놈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성녀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무엇보다도 그녀의 검 끝에서도 마찬가지로 피어나고 있는 히어로 플래시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용사에게만 허락되어야 할 권능을 대체 어떻게 다루고 있는 것이지? 흥미로워, 점점 더 흥미로워. 이것이 무대의 최종장이 되었어도 좋았을 것을 그렇지 못하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아쉽구나!] [넌 결국 끝까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용사만 익힐 수 있는 스펠이 있는 것은 물론 세상의 법칙이라면, 그것을 어그러트리는 것이 바로 아르페와 메테르다. 메테르의 레코드 마스터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끝에 자신과 아르페에게 연결된일행 모두에게 히어로 플래시를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죽는 것 아닐까?” “죽으면 마왕이나 용사 같은 건 없는 세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 거야. 특히 폐하는 더 없었으면 좋겠다.” [인간들······!] 시에나가 틈을 만들고 메테르가 그 틈을 벌리면 나머지 일행이 그것에 돌진해 마구 상처를 내었다. 마왕이 놈들을 공격할 때쯤 되면 다시 시에나가 용맹무쌍하게 돌격한다! 일행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톱날이 되어 마왕을 갈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것은 마왕이 근접전투에는 그리 소양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왕은 자신이 서서히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에트나······! 강대무비한 마족의 모습을 버리고 택한 것이 결국 그 꼴인가? 영락하여 너는 정녕 얻고 싶은 것을 얻었는가!] “아르페, 놈이 특히 짜증나는 연극을 시작했어. 아무래도 세 번째 페이즈인가봐.” “오우케이.” 수백 년을 넘는 세월 마왕 밑에서 고생해온 둘은 이제 마왕이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놈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아내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마왕 또한 자신의 말버릇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고치지 않고, 행동패턴을 읽혔음을 깨닫고도 그대로 하는 것이 실로 마왕다웠다. [너는 아직까지 네 손을 느슨하게 하고 있지. 하지만 이제부턴 그렇게 느긋하게 굴 틈이 없을 거야.] “메테르, 가속 최대한! 가능하다면 다른 애들까지 나눠줘서 마왕한테 따라붙어!” “알겠어!” 놈의 옥좌가 있던 자리가 터져나가며 마기가 분출했다. 놈이 미리 묻어둔 것! 그와 함께 여태까지 터지지 않고 있던 함정들도 몇 개가 동시에 터지며, 아르페가 여태까지 기껏 정화해 마나로 되돌려놓았던 에너지들을 삽시간에 마기로 되돌렸다. 아르페는 그것이 전대 마왕 세력의 기술임을 알아보았다. [역시 놈의 지시를 받고 있었던 건가!?] [놈은 결코 나와 뜻이 같지 않다. 하지만 나를 완벽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있었기에 내게 힘의 일부를 내주었지. 그것은 놈의 실수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마왕의 말이 또다시 길어진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만 보여주는 모습! [네가 한 번에 마나로 되돌릴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 자아, 어디 보여 보아라. 이 마왕의 마법을 마주하면서 마기들로부터 동료들을 지켜낼 수 있는지!] 아르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까지 아르페와 마법을 겨루어 그의 재생 마법의 정도와 한계를 파악하고, 그 후에 한 단계 위력적인 모습을 내보여 자랑하는것! 그야말로 엣날이야기에서 마왕이 전통적으로 차지하는 절대적 강자 포지션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르페는 마왕의 마법을 막든 순식간에 공동을 가득 채우는 유형화된 마기의 독을 막든 일행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게 될 치명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입가에는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그의 손이 아공간 주머니로 들어갔다 나왔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길다란 스태프! “그럴 줄 알고 준비했지, 데마이트 스태프 삐삐!” “아르페 말투가 이상해!” 여태껏 마나를 충전하고 있던 삐삐가 강렬한 빛을 토해내며 마도서와 공명한 다음 순간, 공간을 가득 채웠던 마기도 마왕의 마법도 모든 것이 마나가 되어, 순식간에 마왕을 옥죄어 들어갔다! [기다리던······ 순간이다!] 그 순간, 마왕의 눈이 번뜩이며 그 마나를 오롯이 스스로의 몸에 받아들였다. 놈을 대상으로 재생 마법이 발동하는 순간. 그것은 아르페가 기다리던 순간이기도 했다. < Chapter 36. 마왕 - 6 > 끝 ⓒ 토이카 < Chapter 36. 마왕 - 7 > [다음 무대로 넘어갈 주인공은 내가 된 모양이구나!] 역시나 마왕의 뜻은 아르페가 유추한 대로인 모양이었다. 놈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족쇄를 풀고자, 아르페의 재생 마법을 역으로 이용해 마족의 몸을 벗어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아르페 일행도, 전대 마왕까지도 쓰러트리고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 하는 것일까. “아니, 넌 이 자리에서 퇴장이야.” 물론 아르페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스태프를 휘두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비롯되어, 마도서를 거쳐 완성된 거대한 마법의 기운, 마왕의 마기를 마나로 바꾸어가고 있는 재생의 에너지! 마왕의 육신 깊숙이 끌려들어간 그것을 단숨에 붙잡아, 그 위에 구현 마법을 발현했다. [······큭!?] 이미 재생 마법의 형태로 고착되어 완성된 마법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실시간으로 마왕의 육신과 영혼과 마나를 변화시키던 마법이 그것을 멈추고, 보다 찬란하고 잔인하리만치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아르페에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사에게만 허락된 빛의 스펠 히어로 플래시였다! [크하아아아아아아!] 포션을 마셨더니 그것이 속에서 독으로 발효한 꼴. 마왕은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쿨럭, 새카맣게 물든 피를 토해냈다. 그 어떤 공격을 받으면서도 고통을 크게 내비치지 않던 마왕이 처음으로 치명타를 입은 순간이었다. [컥, 커흑······!] 그도 그럴 것이다. 자진하여 마나를 품에 받아들인 순간 그것이 반전했으니 그가 어떻게 대비를 하며, 어떻게 처치를 하겠는가!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것이 최고의 함정을 깨닫게 된 마왕은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이 수 싸움에서 밀렸음을 인정했다. [아르페, 네놈은 설마······!] [아,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그렇게 애써서까지 할 필요는 없어. ‘설마 마법의 형태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까지 간섭할 수 있었단 말인가!’ 라든가 ‘이미 체내로 흡수한 마법의 기운까지 통제하다니 대체 무엇을 얻어온 것이냐!’ 같은 말이라든가, 식상하거든.] 지 입으로 다 말하고 있잖아, 라는 태클을 걸 여유도 없었다. 아르페는 한 손을 비틀어 쥐는 것으로 마왕의 몸속에서 히어로 플래시의 기운을 응집시켰다. 스태프가 격렬한 빛을 토해내며 마법의 기운을 고조시켰다. 말하자면 지금 마왕은 불꽃을 집어삼킨 얼음이었다. [굉장히 위험한 힘을······ 얻었군······!] 치명적인 독기를 머금은 입김을 뿜어내며 마왕이 말했다. 마기를 마나로 전환하는 재생과 달리, 마기 그 자체를 절대악으로 간주하고 소멸시키는 히어로 플래시의 힘에 의해 마기의 질도 제법 옅어져 있었다. 더욱이 재생 마법이 도중에 중지되었기에, 한창 마나로 전환되던 도중의 마기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제 주인을 속에서부터 갉아먹기도 했다. 마왕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갑작스러우면서도 완벽한 파멸이었다. 마왕에겐 적어도 자신의 지식과 마력 내에서 이 상처를 수복할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아르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마법이란 곧 자연. 그것을 근본부터 바꾸는 것은 피어난 꽃을 바위로 만들고, 구름을 화산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곧 네놈도 깨닫게 되겠지. 스스로가 신에 이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너는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알 바 아냐.] [아직 스스로가 얻은 힘의 무게를 모르는가. 만약 내게 그 힘이 있었더라면······ 하하, 그 누구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 자부하던 내가 새로운 세상에 이르러 이 꼴이라니 이전의 내게 들려주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여전히 길다. 그리고 아르페와 에트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 마왕에게 여력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모든 마기여, 내게 복종하라.] 자신의 계획이 어긋났음을 깨달은 마왕이 조용히 읊조리자 던전이 통째로 흔들렸다. 아르페의 일행이 몸을 바로잡느라 마왕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바로 그 순간, 놈은 품에서 아티팩트 하나를 꺼내어 가슴팍에 박아 넣었다. 바로 마나를 마기로 전환하는 아티팩트였다. 그것이 마왕의 몸에 빠르게 달라붙어 그의 마기를 빨아들이며,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함께 어두운 빛의 진동을 흩뿌리는 모습이란 실로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아르페. 본인의 격이 부족하여 능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패인이 되어 네 목을 옥죌 것이다.] 압도적인, 마기, 마기와 마기! 히어로 플래시고 재생 마법이고 결국은 마나를 근간으로 하는 것, 아티팩트와 자신을 동기화하여 모든 것을 마기로 물들여버리는 마왕의 압도적인 격에 끝내 그 힘을 잃고 말았다. 지금 놈의 힘이 형체를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종말이 아닐까, 아르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결국 그는 마왕을 홀로 넘어서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분한 마음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끝에 그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넌 언제부터 나와 1대1 결투를 벌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 거야?] [뭐······?] 마왕은 반문하다 말고 몸을 비틀거렸다. 그의 통제에 따라 부풀어 오르던 마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져, 이윽고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네, 놈······.] “안녕.” 놈의 등 뒤에서 뻗어난 남자가 내민 한 쌍의 단검이 놈의 심장과, 그것에 달라붙어 융합한 아티팩트를 단숨에 깨부수었다. 그것을 쥔 청년은 단검을 휘저어 놈의 내장을 엉망진창으로 터트렸다. 과감하고도 잔혹한 손속, 과연 전생의 아르페를 찔러 죽일 만큼의 실력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냉혹한 비수가 아르페의 편이었다. “여전히 네 눈에는 내가 들어오지도 않았던 모양이지. ······그게 네 패인이다, 개같은 새끼야.” 엄밀히 말하면 시페넌이 자신의 고유능력 강탈을 이용해 아리아의 동화 능력을 일시적으로 강탈, 그 힘을 이용해 완벽한 은신을 구사하다가 완벽한 순간에 튀어나와 마왕을 기습한 것이지만 지금 시페넌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적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싶다는 점에서 아르페와 동급으로 악질이었다. [나의 눈마저 속이는 은신이라. 하, 단역에도 지나지 않던 잡것이······ 쿡, 쿠큭, 크하하하하하!] 말을 잇다 말고 마왕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놈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그렇기에 후련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제법 극적인 공방이었고 마왕은 그 결과에 납득했다. 그것을 납득하고 있는 자신 또한 무대의 주인공으로 썩 괜찮았다. 그는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아르페의 도전적인 시선과 마주하며 새삼스레 그의 그릇의 크기를 깨달았다. 아아, 역시 마족이란 족쇄다. 그것을 벗어던진 아르페는 이다지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실로 재미있었다. 나는 만족했다.] 아르페가 놈의 이상을 감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놈의 육신에서,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모를 마기가 솟아나 급격히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 “끝까지 더럽게!” “아냐, 시페넌! 망할······ 돌아와! 얼른!” “뭐!?” 그는 마왕에게 추가적으로 공격을 먹이려는 시페넌을 다급히 불러들이며 새되게 외쳤다. [마왕 주제에 자폭이라도 할 생각이냐!?] [그럴 순 없지. 세월에 순응하지 않고 돌아온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을.] 히어로 플래시, 재생, 시페넌의 일격까지. 마왕의 마기를 깔끔하게 소멸시켜 놈의 육신과 영혼을 더는 유지하지 못하도록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니, 놈은 남은 마기를 소모해 일행을 공격하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놈의 선택은 둘 다 아니었다. 놈의 마기는 마나도 히어로 플래시도 심장에박혔던 아티팩트까지도 모두 몰아내고, 피 흘리는 육신을 질주하며 형이상학적인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마법진 삼아 마법을 구동하려는 것이다! “아르페, 지금 공격해야 해!” “아니, 건드리면 그때야말로 터져. 저건 ‘완성을 두고 볼 수밖에 없는’ 마법이야. 일단 물러나 체력을 회복해!” 시전을 일부러 중단시킬 경우 더 큰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에 적이 수작을 부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건드릴 수 없는 마법! 과연 마왕다운 마법이었다. 아르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마도서를 움켜쥐었다. 마왕의 말이 이어졌다. [들어라, 아르페. 나의 사천왕, 성공한 반역자, 시대가 선택한 새로운 신이여.] [갑자기 거창하게 수식해준다고 봐주진 않을 건데.] [물러날 때가 되었음에도 무대에서 버티고 서 있으려는 자는 버러지에 불과하지.나는 패배를 인정한다.]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르페는 실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을 무어라 표현해야할까. 성취감일까? 허무함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의든 타의로든 생애 대부분을 마왕 밑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르페가, 이 순간 진정으로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되며 느낀 해방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대론 그들과 제대로 싸울 수 없다.] [뭐?] 그러나 곧장 마왕이 그 해방감에 초를 쳤다. [그들에겐 나를 상대하며 보였던 마법이 잘 통하지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격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그러니 더욱 강해져야 한다.] [지금 설마 충고를 하고 있는 거냐?] 마왕이 용사한테? 그 아이러니에 아르페는 그저 웃음밖엔 나오지 않았다. 마왕에대해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이젠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마왕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라는 사실을! [나는 선이 악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들은 선과 악의 구분마저 없애고자 한다. 그래선 안 되지. 선을 인정하지 않는 악은 악이 아니다. 악과 대립하지 않는 선은 선이 아니다. 인간에겐 마족이 없어도 되지만 마족에겐 인간이 필요해. 따라서 너는 반드시 그들을 막아야 한다. 새로운 악의 탄생을 축복하여야 한다!] 갑자기 단숨에 마왕같아졌다. 이런 기가 막힌 이유로 마왕이 용사와 뜻을 같이 하다니 오히려 불쾌할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 기가 막혀 하고 있는 아르페에게 마왕이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똑똑히 인지해라, 아르페. 마신은 존재한다.] “뭐······?” [마나를 마기로 변화시키는 근원에 대해 아는가? 인간은 그것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 만들어낼 능력도 없다. 그들은 단지 불러내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아르페는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어째서 그것을 몰랐지? 이블 하트 같은 귀물을 인간들이 어떻게 만들어냈을지, 어째서 거기에 집중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르페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마왕이 뒤를 이어 설명했다. [마나를 마기로 변화시키는 원천, 그것이야말로 바로 마신이라 불리는 괴물이다.따라서 모든 마족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신에 귀결한다. 네가 넘어야 할 것은 세월을거슬러 돌아온 마족도 인간도 아닌,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신이다.] 이 모든 것이 아르페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마왕의 술수일 것이라 단정 짓는 것은 너무나 편했지만, 아르페는 도저히 마왕의 말을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신성 국가 팔라티나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마족 제리어트가 만들어낸 참상. 과연 제리어트가 가장 먼저 전대 마왕 세력에 협력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그가 가장 약해서였는가? 인간들에게 마신을 믿도록 종용한 것은 단순히 인간세력을, 그들의 신앙심을 흔들어놓기 위해서였는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마신이 실재하며 전대 마왕의 목표가 그곳에 있다면······? [네가 지닌 힘은 그들을 대적하기에 충분한 것. 다만 아직까지 그 격이 낮다. 그러니 보아라. 그러니 겪어라. 그러니 넘어라.] 마왕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아르페의 만물열람은 그제야 비로소 마법진의 정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소환진······?” [마신의 일부, 뛰어넘어라.] 직후 마왕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산산 조각으로 터져나갔다. 놈을 해치운 것으로 인정되어 세상이 그들에게 새로운 기록과 마나를 부여했으나, 아르페는 폭발적으로 치솟는 레벨을 느끼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한때 마왕이었던 피와 뼈, 살점이 허공에 거대한 원을 그려냈다.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 < Chapter 36. 마왕 - 7 > 끝 ⓒ 토이카 작가의 말 1. 오늘 저녁 여섯 시에 돌아오겠습니다. < Chapter 37. 마신의 파편 - 1 > [그, 그그그그그그가가가] “아직 말은 배우는 중인가 봐.” 아르페가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웃는 이는 없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지옥문을 뚫고 나오는 괴물에 집중되어 있었다. [크그그그그그그, 기기기가가가가각] 가장 처음 나온 것은 거대하고 검은 손이었다. 우툴두툴한 각질에 뒤덮인, 반경 10미터에 달하는 손이 일곱 개의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사방으로 마기를 뿜어냈는데 그것이 품고 있는 독기가 족히 마왕의 것 이상이었다. “일단 저 문을 부수자! 마기도 그렇고 어떻게든 더 노출되는 걸 막아야······!” “아니, 시페넌.” 아르페가 제지했다. 시페넌의 판단은 더없이 정확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지해야했다. “마왕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어. 저 개새끼는 옛날부터 짜증나는 말은 했어도 틀린 말은 별로 안 했거든. 그런 면에선 마족 같지 않은 놈이었지.” “아르페······.” 모두가 아르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마왕과의 격전을 치르며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 있다. 바로 마왕과 아르페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것. 단순히 시골에서 자라나 용사로서 성장한 소년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음을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그것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아르페를 의심하기에 그들은 지나치게 아르페를 사랑했고, 의지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아르페가 얘기해주리라, 단지 철석같이 그렇게 믿을 따름이었다. 아르페는 그 믿음에 보답하기로 했다. “내 얘기는 나중에 해줄게. 어쨌든 지금은 저놈이 그대로 빠져나오도록 놔둬.” “다 같이 죽자는 건 아닐 테고.” 가장 먼저 아르페의 말을 따른 것은 의외로 시페넌이었다. 그는 단검에 마나를 불어넣은 채 대비하면서도 천천히 물러났다. 그러고는 아르페에게 물었다. “대충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다. 역시 넌 미치광이야.” “국왕자리 폼으로 꿰찬 건 아니구나.” 하지만 저 거대한 손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겁한 다른 동료들은 납득하지 못한 눈으로 아르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막 손목이 나오며 주위를 더듬는 상황.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놈을 살피며 일행에게 설명했다. “마왕을 죽였으니 다들 성장한 걸 느낄 거야, 그렇지?” “지금까지도 머리가 아파.” 르세티가 수긍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레벨이 많이 떨어졌던 르세티와 데이스는,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음에도 이들과 파티로 묶여 메테르의 스킬 레코드마스터의 발현에 도움을 준 것만으로도 압도적으로 성장했을 정도였다. 마왕의 압도적인 격을 보고 겪은 것만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르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로 말했다. “하지만 마왕은 그것만으로는 전대 마왕에게 이기지 못한다고 했어. 우리가······내가 마신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도 했고.” “그냥 우릴 죽이려고 저걸 불러낸 것 아닐까!?” “저건 마신의 일부야.” 아르페가 확언했다. “놈은 우리가 저걸 온전히 꺾고 성장해야만 전대 마왕과, 놈이 불러낼지도 모를 마신의 힘과 붙어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리고 내 생각도 같아. 놈을 꺾으면 우린, 나는 크게 성장할 수 있어.” “역시 한 번 셰프는 영원한 셰프구나······ 죽을 때까지 재수 없긴 했지만.” “그래서 지금 넌 저것이 온전히 나올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기다리자는 거야!?” 엘릭이 기겁해 묻는 말에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방금 일부라고 말했잖아. 가만히 놔둬도 중간에 끊길 거야. 그건 동시에 두가지 희망적인 소식을 우리한테 줄 수 있는데······.” 첫째는 그들이 이 자리에서 온전한 마신(적어도 마신이라 지칭될 정도의 압도적인 힘을 지닌 괴물)과 맞서 싸울 일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여기서 저 ‘마신의 일부’를 처리해두면 설혹 나중에 전대 마왕이 술수를 부리더라도 저만큼의 능력이 떨어진 상태의 적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 참 긍정적인 소식이구나······ 하아.” “시페넌 씨, 정신 차려요!” “진짜 저것과 싸워야 한다고? 정말?” 아르페의 태도가 강경한 이상 일행도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아르페는 여태까지 틀린 결정을 내린 적이 없었고, 이번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마왕을 상대하는 일만 해도 진이 쭉 빠졌는데 이젠 그 마왕이 스스로를 희생해 불러낸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아무도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가장 앞서서싸우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용사의 길. 동행하기로 자처한 이상 버티고 또 끝까지 버틸 뿐이다. “파, 팔목. 팔목까지 나오고 있어.” “마기가······ 아르페, 막을 수 있겠어?” 아르페는 자신의 손에 들려 희미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는 마도서를 내려다보았다. 마왕과의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발동하고 있던 탓에 이젠 그의 마나도 한계를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각국과 상회로부터 갈취해온 마석과 아티팩트를 쓰려는 것도 아니었다. “마기를 마나로 재생해 그걸 소모하면 돼.” 일행은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벙쪄있다가, 이내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순서대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게 되면 완전 무적 아니야!? 아니, 그럴 거면 마석과 아티팩트는 뭐 하러 가져온 거야?” “마계를 정화하는 작업에 물질을 소모하려는 것은, 어디까지고 세상을 세상의 형태로 재생하기 위해서였지. 세상의 마나를 빼앗는다면 그곳엔 죽음의 대지밖엔 남지 않잖아.” 하지만 지금 저것은 이계로부터 소환된 기운이다. 저 기운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해도 이 세상에는 전혀 해를 끼칠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 이형의 마물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기운, 아르페가 빼앗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굳이 아르페가 아니더라도······. “삐삐, 부탁해.” 곧 일행이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스태프를 한 번 가볍게 쥐었다 놓은 아르페가 이어서 마도서를 손에서 떼어놓자, 스태프가 마도서를 주축으로 삼아 회전을 시작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재생 마법은 지속되고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놈의 마기를 빨아들여 마나로 바꾸고······.” “그 마나로 마법을 유지하고 있어······.” “그것도 스태프가!” “다재다능 삐삐.” “왜 레이제나가 자랑스러워하는 거지······?” 이 정도 되면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페는 그 끔찍한 마왕을 상대하면서도 힘을 더 남겨두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마왕의 비장의 한 수에 대비하기 위한 암수. 아리아의 힘을 빌린 시페넌을 대기시켜놓고도 또 다른 것까지 준비해두고 있었다니 그의 치밀함에 절로 감탄사가 치밀었다. “문이 줄어들고 있어요!” [크그그그그그그극, 쿠가가가가가가가가가!] 재생 마법의 코어가 된 마도서와 스태프가 천천히 자리를 옮겨 안전한 곳에 위치하는 사이 지옥문은 아르페의 말마따나 서서히 크기를 축소하고 있었다. [키히이이이이이익! 커흐으흐쿠크가가가각!] 그 안에서 실로 거대한 검은 팔이 천천히 튀어나오다가는, 중간에 문이 닫히기 시작하자 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팔과 손을마구 비틀고 있었다.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그것의 힘을 냉정히 따져보고는 단호히 말했다. “에트나, 시에나, 메테르 앞으로. 레이제나는 방어.” 나머지 인원은 전부 뒤로 빠지란 뜻이었다. 마왕에게 치명타를 입힌 시페넌조차! “결국 그거구나.” “후우. 다들 모여! 어서!” 그러나 시페넌을 포함한 일행은 그것에 전혀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아르페는 이미 파티 멤버들에게 이렇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했었고, 그들은 결코 단순한 병풍이아니라고도 얘기했었다. “메테르, 가능하면 너도 뒤로 물리고 싶지만······ 네가 나서지 않으면 안 돼. 스킬의 통제와 전투, 동시에 가능하겠어?” “그런 당연한 건 묻지 마, 아르페.” 바스타드의 손잡이를 힘을 주어 잡은 메테르가, 아르페를 살짝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아르페에게만 초점이 집중된, 사랑하는 소녀의 눈빛이다. “난 아르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뭐든지.” “내가 아니라 평화나 우정 같은 거였으면 더 바람직했겠지만······ 지금은 그걸로됐어.” 마왕을 처단하고 일행이 모두 레벨 업을 하면서 잠시 멈추었던 메테르의 스킬, 레코드 마스터가 다시 작동을 개시했다. 아르페에게 호명을 받지 않은 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곳에 모여 주저앉았고, 레이제나만이 그들 앞으로 나서며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삐삐와 마도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미처 해독하지 못한 마기가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려다 말고 레이제나가 만들어낸 냉기의 방어막을 뚫지 못해 밀려났다. 레이제나가 맡은 방어란 바로 일행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을 굳이 밖으로 물리지 않고 이곳에 둔단 말인가? 그것은 레코드 마스터를 통해 그들의 마력과 근력, 체력을 빌려온 메테르와 시에나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아르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최종결전 모드.” “음, 역시 그 이름은 쪽팔려.” 흔히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메테르의 스킬이 없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타인의 기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스킬 레코드 마스터를 가지고 있고, 이런 말은 부끄럽지만 서로에 대한 강한 신뢰를 지니고 있는 파티원들의 마나는 물론이고 근력과 체력 등의 신체적인 능력까지 자신의 몸에, 그리고 다른 동료의몸에 옮겨올 수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 실전에서 이 능력을 대대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다. 한두 번 있기는 했지만 그것 모두 순간적이었다. 하지만 아르페는 그들보다 강대한 적을 상대할 때 이 능력이 필수적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들에게 힘을 빌려주는 대상 역시 강력한 능력자여야 스킬의 효용성이 높아질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에 이를 만큼 성장한 파티 멤버들이 저렇듯 자리에 주저앉아 메테르와 시에나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 것이다. [쿠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올 거야.” 다행히도 일행이 무사히 마친 그 순간에야 비로소 놈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옥문이 억지로 닫히고, 그 탓에 팔이 어깨에 이르기 전에 잘려 끔찍한 농도의 피를 철철 토해내면서도 놈이 서서히 전진을 개시했다. 동굴 바닥을 부식시키며 대기를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마기를 뿜어내며, 놈은 강한 생명력을 발하고 있는 시에나와 메테르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음에도 워낙 지닌바 에너지가 거대하여 동굴 사방이펑펑 터져나가며 구획을 넓혔다. “먀아아아아.” 로아가 울었다. 오히려 마왕과 싸울 때는 기를 펴지 못했던 그녀가, 저 거대한 팔을 보면서는 식욕이 동한다는 듯이 기쁘게 울고 있었다. “그래, 너도 있었지. 로아, 부탁한다. 이기면 저거 다 먹여줄게.” “먀, 주인님 사랑해. 먀아아.” [크가가아아아아아!] 로아의 꼬리 세 개가 살랑거리며 전의를 북돋웠다. 여전히 어디로 소리를 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마신의 팔이 거대한 비명을 지르며 돌진을 개시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 Chapter 37. 마신의 파편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7. 마신의 파편 - 2 > [크구르르르르가가가각!] 이제 와서 말하긴 살짝 늦은 감이 있지만, 마왕의 레벨은 403에 이르러 있었다. 기나긴 세월을 살아왔음을 감안해도 도무지 믿기 힘든 레벨. 그리고 그는 과연 그 레벨에 걸맞은 마기와 높은 레벨의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신의 파편] [레벨 ? 408] 그리고 지금 저 괴물은, 소환진으로부터 고작 팔만 빠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408레벨이라는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마기 부풀어 오른다! 뒤로 물러나!” “먀아, 전부는 못 먹어!” 마왕의 마기를 바쳐 소환한 까닭인가? 놈의 마기는 마왕과 비슷한 독성을 지니고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마왕의 것보다 훨씬 지독하고 농밀하다는 것. 재생 마법과 로아의 탐식으로 그것들을 족족 없애고 있었음에도 그 지경이었다. “시에나, 무리해서 상대하지 마! 시간을 끌면 결국 이기게 되어 있어!” “응, 언니!” 그나마 다행한 점은 높은 수준의 지성을 지니고 있던 마왕(비록 그 이상 가는 똘끼가 있었지만)에 비해 저 팔의 의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 놈은 자신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두 여성, 시에나와 메테르를 쫓아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검고 우툴두툴한 손, 그것에 매달린 일곱 개의 길다란 마귀의 손가락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놓았다 하며 먹잇감에 대한 갈망을 표출했다. 만약 그 사이에 잡히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마왕이 뭘 느끼라고 했는지 알겠어.” 재생 마법이 담긴 마도서를 삐삐에게 맡긴 채 두 팔과 마나를 놀릴 자유를 되찾은아르페는 마신의 팔을 세밀하게 관찰한 끝에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저런 괴물이 온전히 이 세상에 강림하기라도 했다간 모든 게 끝장이지. 즉 놈은 우리 세상의 역사를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거든 저놈들이 마신 불러내기 전에 해치워라,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그 정도라면 그냥 말로 해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에트나는 실로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 궤적을 따라 피어난 불꽃의 칼날이 괴물의 새끼손가락을 정확히 강타했으나, 자르기는커녕 아주 작은 피륙의 상처 하나를 남겼을 뿐이었다. [쿠오오오오오오!] 그럼에도 놈이 에트나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하기에는 충분했고, 애초에 그것이 에트나의 목적이기도 했다. 시에나와 메테르, 둘과 싸우며 놈의 몸통이 점차 일행에게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테르는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 거라고 했지만, 아르페.” 가까이 다가오는 놈의 몸통을 향해 자신의 전력을 담은 불꽃의 대포알을 쏘아내며 에트나가 물었다. “가능하겠어?” “재생 마법이라면 끝까지 유지하는 게 가능해. 로아의 탐식에도 한계는 없지. ······문제가 있다면 메테르야.” 레코드 마스터, 많은 이들의 기록을 하나로 묶어 재분배하는 사기스러운 능력에 제한시간이 없을 리 없다. 메테르는 오직 마나와 정신력만으로 버티고 있는 모양이지만 마나는 어찌 추가로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쳐도 정신력만은 불가능했다. “흐아아아아아압!” [쿠가아아악!?] 아르페와 에트나가 걱정스레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들에게로 돌진해오는 팔을 막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마법을 자아내던 그때, 일행의 근력을 한 데 모아 강화한 시에나가 용맹하게 망치를 내질러 놀랍게도 놈의 손가락 하나를 아작 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을 기다린 메테르가 잽싸게 시에나의 몸을 낚아채 뒤로 빠졌다. 직후 광분한 마신의 팔이 주위 공간을 마구 움켜쥐었는데, 마법을 발현하는 한편으로 놈의 동작과 기척과 형태 모든 것을 훑어내던 아르페는 이내 놈이 그 동작을 반복할 때마다 그 공간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공기도, 먼지도, 마나도, 마기도, 그 공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 “맙, 소사······.” [쿠그르르르르그아악!] 마나건 마기건 상관하지 않고 소멸시키는 그 힘은 분명 고유능력의 편린이었다. 아르페가 여태껏 조우했던 그 어떤 고유능력보다도 단순하고 파괴적인 능력! 아르페는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찌 생물에게 저 만한 권능이 주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만한 권능을 두고, 마기를 소모해 뭉개졌던 손가락을 수복하는 광경 정도는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그때 아르페의 머리 위로 파스스 먼지가 내려앉았다. 예리한 눈으로 천장을 살피던 아르페가 급기야 고함을 내질렀다. “동굴 무너진다. 레이제나!” “긍정.” 놈이 워낙 많은 마기를 뿜어내며 날뛰다 보니, 마왕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했던 던전에도 끝내 한계가 찾아왔다. 그러나 레이제나는 냉기를 흘려 동굴의 일시 붕괴를 막고, 떨어지는 거대한 파편들을 마신의 팔에게로 유도해 놈에게 조금이나마 데미지를 입히려 했다. [키하아아아아아아!] 그 덕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놈의 몸통 주위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데!? 손아귀에 쥐지도 않았는데!” “그게 속임수였어. 고유능력은 손아귀에 쥐지 않아도 발동되는 거지. 만약 레이제나가 아니었다면······ 빌어먹을. 시에나, 메테르! 저 능력이 거두어질 때까지 접근하지 마!” 아르페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그의 손가락으로부터 뻗어 나온 수백, 수천 줄기의 마나 스트링이 몇 번이고 방향을 바꾸어 늘어나며 공간을 가득 채우더니 그들에게로 돌진해오는 마신의 팔을 정면으로 막아냈다. “큭!” 그러나 동굴과 함께 그들까지 순식간에 집어삼킬 것만 같던 팔의 돌진이 멈춘 그 순간, 아르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새끼 이거 마나를 통해 원념을······!” 놈의 마기와 접촉하는 순간 마나와 연결된 아르페의 뇌리에 섬뜩한 이미지, 저주가 흘러들어왔다. 아르페의 정신력을 흩어 마법을 무효화하는 수작. 그야 저 압도적인 기록을 품은 놈의 능력이 고유능력 하나뿐이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과연 마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위용이었다! [쿠구루르르르르르!] “하!” 그러나 마나 스트링은 놈의 고유권능에 녹아 사라질지언정 정신력 부족으로 흩어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르페의 자안이 밝은 빛을 토해내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한 정신오염공격이기는 하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난 정신공격 면역이거든, 새끼야!” 아르페가 놈의 정신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마력을 고조시켜 마나 스트링에 퍼부었다! 수십 겹에서 수백 겹으로 순식간에 숫자를 불린 마나 스트링은 한 겹 한 겹 녹아내리면서도 끝까지 놈의 전진을 막아냈다. 에트나가 아르페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자 그 모든 실 가닥 위로 찬란한 불꽃이 피어나 마신의 팔에게로 옮겨 붙었다. 그녀는 본디 정령의 피를 이은 만큼 정신공격에 상대적으로 취약했지만, 아르페의 마나에 자신의 힘을 더하는 정도라면 공격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근접공격이 안 된다면······!” 그 즈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메테르가 다음 공격에 나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바스타드가 아닌 롱 소드. 마나를 응축해 쏘아내는 능력을 품고 있는 그 검은 메테르의 손에 맞는 바스타드를 얻게 되고 활약할 차례가 줄어들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마나를 응축하는 능력만은 최상위 티어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메테르 쯤 되면 에너지를 쏘아내기 전 응축 단계만으로 검의 상태를 고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메테르는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에 갇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마신의 팔, 그중에서도 그나마 약해보이는 손목 관절 부분을 노리곤 롱 소드를 빠르게 내던졌다. 그녀의 고유능력, 레코드 마스터의 힘까지 모두를 담아 내던진 필살의 투척!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무기를 일회성 투척 무기로 소모하는 꼴이었으나 순간순간이 전멸의 위기인 지금 그녀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쿠그그그가가가가!] 마신의 팔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무기를 확인하곤 그것 자체를 파괴해버리고자 했으나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이 놈을, 놈의 권능까지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놈이 그것에 저항하며 일순 파괴되고 확장된 공동에 가득 차오르는 마기! 재생 마법과 로아의 힘으로 어떻게든 일행에게 미치는 여파는 차단했으나 놈에게쇄도하던 검의 궤도가 비틀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메테르는 정신오염을 감수하고 뛰어들려 했지만, 그 전에 아르페가 나섰다. “구현!” 순식간에 롱 소드가 그 크기를 수십 배로 불렸다. 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마기를 일순에 소멸시킨 대검이 곧장 놈의 손목에 틀어박혀, 그 기세 그대로 완전히 손목을끊어버렸다! “해냈다!” “아직 안심하기엔 일러! 팔, 팔을 없애!” 둘로 끊긴 손과 팔목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부르르 떨다가는 이내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목의 부피가 어디로 보나 더 컸지만 아르페는 서슴없이 팔목을 먼저 공격할 것을 명했는데, 그것은 마신의 마기가 집중된 것이 팔, 마신의 권능이 집중된 것이 손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저건 쉽게 못 없애. 일단 팔을 없애서 마기 공급원을 끊어버려야 해!” 아르페는 말을 하면서도 마나 스트링을 이끌어 놈의 손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도 한층 더 독한 마기가 대기를, 대지를, 천장을 녹이며 일행을 덮쳐 오려다가는 아르페의 마나 스트링에 의해 갈려나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구현 마법의 영향을 받아 거대화한 롱 소드가 천천히 허공에 떠오르는가 싶더니 다시금 손을 향해 쇄도했다. 구현 마법의 특징은 바로 한 번 발현하는 데에는 많은 마나를 소모하지만, 그것을유지하며 변화시키는 데에는 그리 큰 마나가 소모되지 않는다는 것! 마신의 손은 강력한 마나를 머금은 대검에 집중하느라 다른 데에 더는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 순간을 노리고 메테르와 시에나가 돌진했다. 바스타드를 쥔 메테르가 아무렇게나 휘둘러지는 거대한 팔을 타고 오르며 그대로 놈의 겉가죽을 베어내고, 시에나는 망치로 팔목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아르페가 말했듯 마신의 권능은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직접공격에도 불구하고 정신공격에 당하는 일은 없었다. “후, 후우······.” “메테르, 조금만 더 버텨!” “조금만이 아니고 언제까지든······!” “언니, 거기 물러나! 흐아아압!” [쿠그그가가가가가가!] 메테르의 거짓말을 알아채지 못할 이는 이 공동에 없다. 아르페는 레이제나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지하 동굴의 모습을, 끝내 마나 스트링의 속박을 떨쳐내고 대검을 아그작 씹어 먹고 있는 마신의 손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래도 마왕 새끼가 그들을 죽이려고 작정했다고 밖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왕보단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을 주먹으로 한 대 때리고 싶을 지경이다. 저 거대한 에너지와 권능의 덩어리는 존재만으로 재앙이며 공포였다. 놈에게 이성 따윈 필요 없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신에게 인간과 동등한 지성, 동등한 눈높이를 요구하는 이는 없으니까. “물러나! 손이 오고 있어!” “쯧······!” “레이제나, 그쪽!” “부정. 한꺼번에 여럿은 불가.” “에잇······!” 파티원들이 저마다 최선을 다해 마신의 파편을 상대하던 그때, 아르페는 마왕이 남긴 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신을 넘어서라고 했던가. 마지막까지도 정말 웃기지도 않는 놈이다.’ 편린만으로 용사 파티를 압도하는 마신을 아르페 혼자의 힘으로 넘어서라니, 진즉부터 사이코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알려주고 가는구나. 아르페는 투덜거리며 한 손을 들었다. 수천, 수만 가닥의 마나 스트링이 뻗어 나와 다시 한 차례 난동을 피우는 손을 구속했지만, 재생 마법과 로아의 탐식을 거치고도 결코 약화될 수 없는 놈의 권능이 아르페의 마나를 짓누르고, 깨부수었다. 아르페는 그 감각을, 놈의 고유능력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파괴에만 충실한 고유능력이 있을 수 있을까, 실로 기가 막히지만······. “씁, 어쩔 수 없지.” 아르페는 입맛을 다시며 허공에서 뭉개진 마나를 필사적으로 끌어 모았다. 마신의 고유능력에 당했음에도 일부를 남긴 것에서 아르페의 절정에 이른 마나 통제력을 엿볼 수 있었다. “파괴의 기록······ 제발 되라.” “아르페······?” 아르페의 중얼거림을 들은 에트나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아르페는 굳이 말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만 절실한 의지와 염원을 담아 읊조릴 뿐이었다. “구현.” < Chapter 37. 마신의 파편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7. 마신의 파편 - 3 > 그것은 마치 신의 창조를 보는 것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허공에 응집된 마나, 그것에 눈부신 빛에 덧씌워지더니 서서히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어갔다. 마신의 손은 그 안에서 느껴지는 신성한 힘에 비명을 지르며 일곱 개의손가락을 마구 휘저었지만 그 어느 것도 빛에 가 닿지 못했다. 정확히는, 빛에 닿는 순간 터무니없는 광량을 뿜어내며 되레 마신의 손가락을 태워버렸다. “아르페!?” “팔······ 빨리 없애!” 아르페는 마법에 집중하느라 도저히 일행에게 다음 지시를 내릴 상황이 아니었다. 시에나와 메테르는 그가 말한 대로 바스타드와 망치를 미친 듯이 휘둘러 덩그러니떨어진 마신의 팔을 공격했다. 마신의 손은 팔이 공격당할 때마다 꿈틀거렸으나 그보단 아르페가 만들어내는 빛을 없애는 것이 더 급한 모양이었다. 대충이나마 아르페의 마법의 정체를 깨달은 레이제나와 에트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아르페 너, 어떻게······?” “에트나, 마나 내놔!” “으, 응!” 다급한 나머지 메테르를 통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마나를 뿜어낸 에트나였으나그것으로 충분했다. 과거 아르페와 메테르가 용사라는 고유의 존재임을 이용해 그들의 마나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던 스펠, 마나 링크가 어째선지 아르페와 에트나사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아르페가 벌이고 있는 짓의 어마어마함에 비하면 그 정도는 전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에트나는 자신의 마나를 고스란히 쏟아 부었고, 그것이 다시 고스란히 마법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끝에, 빛 무리가 폭발했다. “꺄아아아아악!” “여, 역시 실팬가?” “아니.” 공동을 가득 채운 빛에 마신의 손과 팔은 물론이고 아르페 일행마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아르페가 시도하던 짓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트나는 아쉬움에 탄성을 발했지만, 아르페는 그녀의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성공했어.” [캬하아아아아아아아아!] 마신의 손이 울부짖었다. 놈이 분노에 차 아르페를 향해 질주해오려던 다음 순간,그러나 놈의 손아귀를 거대한 무엇인가가 덥석 붙잡았다. 그것은 빛 무리의 폭발 속에서 나타난 하얗고 거대한 손이었다. “정말 만들어냈어······.” “사기. 아르페는 사기.” “흐으······ 흡.” 에트나와 레이제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아르페는 전신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그대로 무너지려던 것을 간신히 버티어 섰다. 그것을 늦지 않게 눈치 챈 에트나가 다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조종할 수 있겠어?” “그대로 붙잡아줘.” “으, 응.” 에트나는 기운이 빠져 말하는 아르페를 보며 순간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린 자신에게 반성하며 그를 붙잡아주었다. 아르페는 에트나가 괘씸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본격적으로 손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조종한다고는 해도 더 이상 마나는 소모되지 않는다. 이미 마법은 완성되었으니, 남은 것은 그의 의념을 오롯이 손에 전달하는 것뿐이다. 정당한 주인으로서 명할 뿐이다. [쿠그가가가가가아아아아!] 저 삿된 마기를 몰아내라고 말이다! 하얀 손이 마신의 손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마신의 손은 고유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하얀 손을 파괴하려 했으나, 그것은 하얀 손이 가지고 있는 파괴의 힘에 의해 상쇄되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마신의 손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메테르와 시에나가 마신의 팔을 파괴해가며 마기를 없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정말로 고유능력을 카피하다니······.” “개념을 익혀 구현한 거야. 될까 의심스러웠지만 되더라.” 아르페의 설명은 간단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다. 고유능력의 개념을 보는 것으로 익히다니, 일단 그 시점에서 만물열람을 지닌 아르페가 아닌 이상 불가능했을 뿐더러, 설사 정말 아르페가 그 개념을 학습했다 해도 그것을 구현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역시 난 주인공인 것 같아.” “진지하게 헛소리 하지 마.” “마왕이 했던 얘기도 뭔지 알 것 같고······.” 마왕은 아르페가 지닌 만물열람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아르페 생애 그것을 가장부러워했던 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였기에 아르페가 미리 마신을 겪게 된다면 여태껏 없었던 단계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라 직감한 것이다. ‘빌어먹을 셰프······.’ 정말 분한 일이지만 놈의 레시피는 끝까지 완벽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먀아!” 여태껏 마기를 빨아먹기만 하던 로아가 드디어 직접적으로 나섰다. 마신의 손이 아르페가 만들어낸 손에 의해 완벽히 붙잡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직후이기도 했다. 녀석은 빠르게 공간을 질주하더니 한창 메테르와 시에나가 공격하고 있던 마신의 팔의 한쪽 끝부분을 덥석 물어뜯었다. “먀아아아아!” 그리고 그것을 있는 힘껏 흡수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아! 쿠가가가가크크크크카가가각!] 대뜸 놈의 비명소리가 거칠어졌다. 단순히 공격당해 일부를 파괴당하는 감각과, 먹히는 감각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그러나 팔 자체에는 공격력이 없다. 손은 하얀 손에 붙잡혀 있다. 놈은 더 이상 뭘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메테르, 시에나! 이제 손을 공격해!” “먀아! 이건 내가 다 먹을 수 있어, 먀아아!” 마신의 팔을 와구와구 물어뜯는 로아의 얼굴은 그 이상은 없을 만큼 행복해보였다. 메테르와 시에나는 얌전히 물러나 마신의 손을 공격했다. 놈의 권능과 모든 공격의지가 하얀 손에 집중되어 있어, 그녀들 입장에서도 한결 편했다. [캬하! 캬그그가가가! 키히이이이!] “밀어붙여! 놈에게 다른 짓을 할 틈을 주지 마!” 그것은 메테르와 시에나에게의 지시이며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하얀손은 자아라도 지닌 것처럼 아르페의 말에 몸집을 불리며 보다 거세게, 보다 완벽한파괴능력으로 마신의 손을 밀어붙였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신이 직접 마신을 벌하는 모습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비슷해. 왜냐면 신성력에 시에나의 마나, 히어로 플래시의 힘까지 더했거든.” “그걸 전부 하나로 만들 수 있단 말이야······?” 이젠 놀라는 것도 포기했다. 에트나는 그저 기적적으로 탄생한 저 신의 손이 부디마신의 손을 쓰러트릴 때까지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일까? 어느 순간 마신의 손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마신의 팔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족히 10미터 이상의 길이였던 거대하고 검은 팔뚝을 모두 로아가 먹어치운 것이다. “먀아, 메인 디쉬.” 로아는 똥똥하게 부푼 자신의 배를 외면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걸 먹어치우기까지는 쓰러질 수 없어, 먀아.” “가라, 돼냥아! 전부 먹어치워!” “먀아아아아아!” [크가가가가각가가가가가각!] 포식자의 접근에 마신의 손이 마지막 남은 힘으로 발악을 했다. 그러나 아르페가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지 마법을 더한 순간, 사방으로 퍼지던 마신의 마기가 힘을 잃고 옅어져갔다. 그의 곁에 있던 에트나만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재생 마법의 힘까지 더했구나.” “맞아.” 할 일을 마친 스태프가 천천히 내려와 아르페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르페는 스태프와의 공명을 끊었음에도 여전히 옅은 빛을 발하고 있는 마도서를 한 손으로 쥐고 그 힘을 하얀 손에 집중시켰다. [크하······ 키그극······ 그그가가각······!] “먀······ 먀아아아아!” 로아가 마신의 손가락을 물었다. 그 거대한 손가락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필사적으로 마기를 토해냈지만, 그것은 로아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로아는 그저 재생 마법이 놈을 전부 마나로 되돌려버리기 전에 최대한 많이 먹겠다는 듯이 기세를 높여나갔다. “이걸로 끝이다!” “흐아아아아아압!” 메테르가 내려친 바스타드가 한꺼번에 놈의 손가락 두 개를 잘라냈다. 로아가 그것을 넙죽 집어삼켰고, 시에나는 거세게 망치를 내려쳐 놈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먀아, 먀아아아!” 로아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안으로부터 발생한 어마어마한 흡입력이 마신의 손을 전부 빨아들였다. 녀석은 그대로 그것을 삼켰다. “끄윽. 다 먹었다, 먀아아.” 그리곤 지극히 만족한 얼굴로 동굴 바닥에 뻗었다. 직후 아르페 일행 전원은 극심한 두통을 느껴야 했다. 결코 겪을 수 없어야 할 이계의 기록을 조우해 물리쳐, 그 업적을 받아들이며 압도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이었다. “끄으으으으······ 젠장, 마음 놓고 아파할 틈도 없어! 동굴 무너진다!” “링크 끊어! 아프겠지만 전부 일어서!” “아르페, 아르페한테 모여! 어서!” 아르페는 다급한 와중에도 손을 놀려 바닥에 떨어진 전리품을 챙겼다. 그 가운데 마왕이 남긴 것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들을 한가로이 살필 틈이 없다! “다 모였으면 나간다! 블링크!” 용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싶을 만큼의 격전이었다. 마왕에 이어 마신의 파편과 싸우는 과정에서 동굴은 붕괴될 대로 붕괴되었고, 일행의 육체와 정신도 소모될 만큼 소모되었다. 어마어마한 레벨 업도 지친 영혼까지 치료해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들은 이겼다. 살아남은 것이다. 일행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마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사방이 마족으로 가득했다. “이, 이게 뭐야?” “아, 그도 그런가. 마왕이 전력을 발휘한 데다 마신의 파편까지 나타났으니 마족들이 반응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어그로도 이런 어그로가 없었다. 이미 마계에 남아있던 마족이 거의 다 모여든 상태였고, 아마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다른 마물들, 인간계로 향했던 마족 중 일부마저도 올지 몰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대 마왕. 아마 그들도 마왕의 죽음을 느꼈겠지. 누가 그것을 행했는지도 뻔하다. 인간계 정벌을 스탑하고서라도 달려올 것이다. 인간계의 마계화, 그 작업에 누가 가장 걸림돌이 될 지는 분명하니까. 그때 문득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방에 널려있는 마족들이 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라? 그런데 저놈들 왜 우리를 못 보고 있는 거야?” “동화를 구사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답한 것은 아리아였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레벨 업의 후유증에 머리를 싸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유능력으로 일행을 보호하고 있던 것. 심지어 일행까지 모두 동화 능력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 그녀도 훌륭한 파티 멤버가 되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아리아, 대단해······.”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 아무리 우리 작전이 급하다지만 지금은 그것보다휴식이 더 급하니까.” 아르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행을 보며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해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Chapter 37. 마신의 파편 - 3 > 끝ⓒ 토이카< Chapter 38.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 1 > 마왕이 만들었던 던전이 무너진 폐허로 점점 많은 수의 마족이 모여드는 가운데, 아르페 일행은 그들을 유유히 지나 한가로운 곳으로 향했다. 장소는 던전. 마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아르페에게 마계의 던전 하나쯤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던전이 안전한 장소라는 아르페의 발상이 너무 존경스러워.” “하지만 실제로 안전하단 말이지.” 적어도 수백 년 동안 마족들의 눈을 피해 유지되어온 던전. 아르페 일행의 목적은그저 편히 쉬는 것이었기에, 일단 레벨 300 근처의 몬스터들로 가득한 그 던전(3층짜리였다.)을 빠르게 정리한 후 보스 룸의 광장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았다. “이제야 좀 살겠다.” “차라리 던전으로 직행해서 좋았어. 마왕과 마신의 파편을 물리치면서 한꺼번에 레벨이 오르는 바람에 몸을 놀리는 게 좀 부자유스러웠거든. 이젠 익숙해졌어.” 누가 이런 미친 소리를 하나 했더니 역시 메테르였다. 아르페는 두 눈 가득 그녀를 담았다. 곧 익숙한 문자열이 나열되었다. [메테르] [레벨 ? 401] “흠.” 설마 했는데 정말로 400레벨을 넘길 줄이야. 그러나 이어서 확인해본 자신의 레벨 또한 401에 이르러 있었기에 남 말이 아니게 되었다. 마왕도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안겨주었지만 역시나 마신의 팔이 컸다. 그게 아니었으면 400레벨이라는 고지를 넘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400레벨을 넘긴 건 나랑 메테르, 그리고 시에나랑 에트나······ 아, 마지막으로 로아가 있구나.” “먀아. 이제 더 이상은 마기 안 먹어도 돼, 먀아아. 그래도 그 마신이라는 건 더 먹고 싶어, 먀아. 주인님 그거 불러내줘.” “맞고 싶지?” “먀아, 먀아아아.”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기가 막히다고 해야 할까. 로아의 레벨은 405에 이르러 있었다. 전투의 공헌보다도 순수하게 마기의 결실을 먹어치운 데에서 압도적인 기록과 마나를 확보한 결과였다. 물론 어느 정도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보니 덧없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인간이 아니라 마수로 태어나는 건데. “내가 보기엔 네가 제일 괴물이거든. 마왕하고 싸울 때도 놀랐지만 마신의 파편은 진짜······.” “너희도 만만치 않아. 다만 마신의 팔이랑 직접 겨루었는가 아닌가, 이게 공헌도를 가른 것 같다.” 마신의 팔, 지금 다시 떠올려도 끔찍했다. 조금만 더 많은 부분이, 그러니까 팔뚝에서부터 손에 이르기까지 무게를 버티며 들고 휘두를 수 있는 어깨 부분까지만 나왔더라도 아르페 일행은 생사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서 몇 명은 죽어나가지 않았을까. 물론 마왕이 그것을 고려해줬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미 아르페 일행에 의해 마기가 적잖이 소모된 상태에서, 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 그 정도였을 것이다. “마지막 구현이 실패했으면······.” “그 손 진짜 대단하다. 안 사라져?” “실은 그게 안 된단 말이지.” 그리고 마신의 팔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 하얀 손. 그것은 놀랍게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크기는 아르페의 손에 가깝게 줄어들었으나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 “내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어마어마한 집중도였거든. 소모한 마나도 많았을 뿐더러 고유능력을 재현하기까지 했으니······.” “신의 손이라고 부르자, 신의 손.” 신의 손은 아르페가 특별한 의지를 갖고 조종하지 않는 이상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아르페의 뒤를 쫓으며 희미한 빛을 유지했다. 그는 그것을 조종해 장갑처럼 자신의 손에 끼워보았다. 무리 없이 되었다. “힉, 그걸로 나 만지지 마.” “어차피 내 의지가 없으면 파괴의 능력은 발동하지 않아. 마신과는 다르거든.” 그는 피식 웃으며 대꾸해주곤 손을 다시 다른 곳으로 풀어놓았다. 다음으로 확인할 것은 마왕과 마신의 파편이 남긴 드롭품이었다. “마왕 이 새끼, 딱 하나 남기고 갔네.” “그게 뭐야? 이상한······ 종 같은걸.” 마왕은 존재만으로 기적에 가까운 몇 안 되는 생물 중 하나였다. 그가 쌓아올린 기록은 죽음과 함께 무로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미처 세상이 거두어가지 못한 흔적이 아티팩트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결실이 바로 한 손으로 들고 흔들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의 종이었다. [마의 부름] [마의 기운을 품은 모든 것들은 이 종소리 앞에 약해지며, 종의 소유자에게 기이한 충성심을 느끼게 된다.] “놈의 고유능력과 특징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녀석이네.” “레벨제한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설마······.” “맞아.” 아르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마왕 본인에게도 얼마든지 통한다는 거지. 어쩌면, 아니 확실히 재생 마법에도 도움이 될 테고······.” 남긴 물건이 하나라고 투덜거릴 때가 아니었다. 놈은 심지어 자신이 죽고 남기는 전리품까지도 완벽한 레시피로 만들어둔 것이다! 확신은 서지 않지만 적어도 이 정도라면 전대 마왕과도 해볼 만할 것이라고 아르페는 확신했다. 여태까지의 불안에 종지부를 찍어버리는 아티팩트였다. “일단 가볍게 4강해두고.” “그게 가벼운 거구나.” 아르페는 빠르고 신속하게 [마의 부름]을 네 번 강화했다. 그의 강화 스킬은 단순히 아티팩트의 능력을 증폭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르페의 능력과 기록에 기반해 사물을 강화시키는 스킬! 당연하게도 네 번의 강화를 거친 아티팩트는 아르페의 기질을 닮은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멸마의 선언+4] [마나를 소모하여 마를 멸하는 진동을 발생시킨다.] “최종결전 무기가 된 것 같은데······.” “먀아, 아직 울리면 안 돼, 먀아아. 마신 먹은 다음에 울려야 해. 먀아아아.” “종이 새하얗게 변했어요. 아르페 님의 기상이 담긴 것이겠지요.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 어쩜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을까요. ······제 색으로 물들이고 싶네요.” “호오, 여전히 재밌는 농담을 하네, 바디네.” 아르페는 메테르와 바디네가 눈싸움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다음으로 마신의 파편이 남긴 드롭품을 꺼내어 들었다. 오롯이 마신을 잡은 것도 아닌데도 드롭품은 무려일곱 가지나 되었다. 바스타드, 방패, 단검, 스태프, 망치, 장갑, 레벨 408의 마석까지. 아르페는 시험 삼아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앞에 살벌하기 짝이 없는 문자열이 배치되었다. [파멸의 단검] [사용자의 생명력과 마기를 대가로, 단검에 짙은 저주를 담는다. 이 단검에 한 번찔릴 때마다 영혼이 깎여나가며, 이 단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면 단검의 소유주를따르게 된다. 단, 이 단검으로 전투를 벌이다 죽게 될 경우 소유주의 영혼도 단검에 속박된다.] 단검의 예기에 혹해서 집어든 자들 모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만 같은 저주템이었다. “전부 짙은 마기로 뒤덮여 있어서 도무지 써먹을 게 못 되어 보이는데······.” “마왕의 드롭품도 네 번 강화하니까 완전히 하얗게 물들었잖아. 그렇다는 건.” 아르페는 모아둔 마석을 몇 개 꺼내어 쥐었다. 마계를 수복하는 데에 써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마석 몇 개 희생해서 이 병장기를 써먹을 수 있게 만든다면 훨씬 남는 장사였다. “이것들도 전부 강화하면 되는 거야.” “와아, 정말이다! 새하얗게 물들고 있어!” 아르페의 의도는 엇나가지 않았다. 용사 파티보다는 마왕과 사천왕에게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았던 무시무시한 파멸의 무구들은 정확히 네 번의 강화를 거치며 앞서 멸마의 선언이 그러했듯 새하얗게 탈색되었는데, 그는 그것들의 옵션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그것들을 일행에게 나누어주었다. 바스타드 소드는 메테르에게, 방패는 엘릭에게, 단검은 시페넌에게, 스태프는 레이제나에게, 망치는 시에나에게, 장갑은 미케나에게. 마석은 아르페 본인이 챙겼다. “아르페, 나는? 응, 나는?” “지나친 접근과 스킨십 금지.” “나도 아르페한테 선물 받고 싶은데.” 아르페는 잠시 고민하다가는 이번에 무구를 배분받지 못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구 하나씩 내놔. 4강해줄 테니까.” “아자!” 그렇게 얼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전리품 분배가 끝이 났다. 아르페는 한숨을 쉬며 남은 마석의 양을 확인했으나 너무 많아서 얼마나 줄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젠 정말로 쉬자. 난 자야 해. 수면과 아르페의 어깨가 날 부르고 있어.” “아니, 그 전에 잠깐.” 메테르가 아르페의 어깨에 기대려던 순간, 아르페는 그녀를 저지하듯 한 손을 들었다. “다들 쉬고 싶어 하는 건 알지만······ 그 전에 얘기를 잠깐 들어줬으면 좋겠어.” “얘기······?” 메테르는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 않아도 돼, 아르페.” “아니, 해야겠어.” “하지만······.” 아르페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메테르를 보며 그저 쓰게 웃을 따름이었다. 이전부터 그럴 것이라는 느낌은 많이 받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거나, 적어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얘기하고 싶어. 고해라고 해도 좋아. 어리석은 믿음이라고 해도 좋겠지. ······들어줄래?” 농담이나 할 분위기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일행은 서로를 마주보다가는 이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생을 뚜렷이 자각하고 있는 시페넌과 에트나 또한 그의 말에 쉽사리 끼어들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정말 좋은 동료들이다. “좋아, 그러면······ 다들 마왕과 내가 나누는 대화에서 위화감을 느꼈으리라 생각해.” “응······.” “그뿐만이 아니지. 여태까지도 많았잖아? 각국에 위치한 던전의 위치도 그렇고, 내가 앞날을 예견하듯 움직인 것도 그렇고. 물론 대부분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시작점을 알고 있었어. 모두 그 생각을 했을 거야.”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단지 ‘아르페니까’라는 한 마디로 납득하고 넘어가기에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를 알아보는 눈과는 다르다. 그에게 예지의 능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료도 있었다. “나는 알 수밖에 없었어. 왜냐면······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거든.” “아르페······.” “나는.” 자신을 막으려는 듯 뻗어오는 메테르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아르페는 선언했다. “과거, 지금은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마족이었어. 마왕군 사천왕의 지위를 얻어 마왕에게 복종했으며, 너희, 메테르를 주축으로 하는 용사 파티와 대적해 끝내 죽음을 맞이했지. 그 끝에 고유능력을 각성하여 세계를······ 세계를, 되돌렸어.” “어······ 재밌는 농담인데.” 엘릭이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르페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너무 두서가 없어요. 앞뒤가 전혀 연결되지 않아요, 아르페 님.” 바디네가 반문했다. 곤혹스러운 목소리에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말로 끝낼 생각은 없었어. 좋아, 그러면 좀 더 찬찬히 얘기하자. 그러니까······ 내가 마계에 태어나 마왕에게 패배해 복종하게 된 순간부터면 좋을까.” 이번엔 그의 말을 막는 이가 없었다. 아르페는 좋아,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시작했다. 한 남자가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를. < Chapter 38.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8.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 2 > 일행 모두가 휴식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얘기를 나눌 시간만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아르페는 일행이 혹여나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 찬찬히, 확실하게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패배자의 기록이었기에 그리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생각했지만 일행에겐 그렇지만도 않았나보다. “아르페가······.” “그래서 다 알고 있었다는 건가? 이미 겪었기에?” “전생엔 많은 것들이 용사의 손아귀 대신 마왕의 손아귀로 들어갔었지.” 전생의 이야기는 아르페의 패배의 기록인 동시에 용사 파티의 패배의 기록이기도했다. 그는 그것까지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용사 파티의 결성, 현생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던 마왕군의 전략, 용사 파티가 미처 막지 못했던 팔라티나의 타락과 바디네의 시페넌에 대한 사랑과 파멸, 용사와 인간 국가들의 관계, 그들의 출정, 아르페와의 전투와······ 그의 마지막까지. “정말 개판이었군.” “그래, 개판이었지. 나는 인간들의 적이었기에 인간들이 얼마나 한심한 종족인지잘 알고 있었어. 메테르를 바깥으로 빼돌린 것도 마찬가지 이유지. 이제와 새삼스럽게도 충격적인 고백을 하자면, 사실 왕궁 밥은 우리가 여태까지 먹었던 다른 밥들보다는 제법 맛있을 거야.” “아르페는 거짓말쟁이로구나.” 메테르는 그렇게 짓궂게 말하며 웃었다. 아르페 역시 희미하게 웃었다. 새삼스럽게도 그녀와 이렇게 웃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내가 죽은 이후로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나는 직접적으로 알지 못해.” “그럼 이제 내 차례로군.” 바턴을 이어받은 것은 시페넌이었다. 그는 전선에서 마주했던 사천왕에 의해 자신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과, 죽기 전 자신의 상황에 대해 모두 솔직히 얘기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절망적인 얘기였지만 그럼에도 그것으로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니까 원래 마왕을 해치우고도 숨겨진 보스를 잡았어야 했는데, 아르페가 세상의 역사를 되돌리는 바람에 이번엔 처음부터 그 숨겨진 보스가 활약을 했다, 뭐 그런 얘기가 되는 거구나.” “그 중 대부분도 해치우기는 했지만 결국 전대 마왕이 남아있는 건 마찬가지야.” “그랬구나, 그래서······.” “전 납득하기 힘든걸요.” 바디네는 뚱한 표정이었다. “제가 어떻게 저런 남자를?” “너 나중에 한 판 붙자. 여자라고 안 봐준다.” “굉장히 신비한 기분인걸. 그럼 그 세계의 나는 어땠던 걸까.” 시에나는 멍하니 이전 세계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 같았지만, 이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인간으로 태어나줘서 다행이야. 오빠를 만나지 못했던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걸.” “정말이지 아르페가 아니었으면 세상이 끝날 뻔 했는걸.” 시에나와 메테르의 반응에 아르페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사천왕이었으며 용사였던 메테르와 대적까지 했다고 말했음에도 이렇게 가벼운 반응이라니, 신경을 쓰고 있던 자신이 이상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가 아르페 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죠. 개죽음을 면한 것도 다행이고요.” “아르페, 저 여자 한 대만 때리면 안 될까? 딱 한 대만.” “넌 조용히 있어.” 눈치를 채고 보면 어느덧 메테르가 아르페의 손을 가만히 붙잡고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메테르의 미소에, 아르페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도 그만두고 말았다. 이제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은 그것뿐이야?” “사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얘기라서 지금까지도 반신반의의 심정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고 해서 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지.” 엘릭의 말이었다. 남자 파티원인만큼 아르페에 대해 가장 냉정한 말을 던져줄 수 있는 그이기에 오히려 가장 신뢰가 갔다. 괜찮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어딘가 한구석에서는 조여져 있던 마음이 그제야 풀어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이전에, 제가 아르페 님을 만나기 전에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조금쯤은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마계를 인간계로 되돌리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아르페 님께서 마족들 중 가장 먼저 인간으로 돌아왔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아르페 님께 그 마도서의 힘이 주어진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가요.” “어······?” 아르페에게 홀딱 반한 바디네이니 어차피 아르페를 위한 말을 토해낼 뿐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르페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지만 곧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아르페가 걱정하던 것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도라 해야 할지, 자괴감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이 덮쳐왔지만 그는 이내 그런 감정들도 싹 날려버렸다. “여태까지 끙끙대던 내가 바보 같아지는 의견들 고마워.” “아르페 님이 끙끙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저는 더 놀라운걸요.” “시끄러, 아줌마.” “아줌마 아니라니까욧!” 툴툴대며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가 내심 감격하지 않았다면 그도 거짓말이었다. 부끄러움이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순간 아르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엎어져 눕고는 후드를 푹 눌러써 스스로의 얼굴을 가렸다. “그냥 그렇다고. 전대 마왕놈이 말하는 것보단 내가 먼저 말해두는 게 동요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했을 뿐이야. 너희 태도가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거나 믿지 못해서가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알아둬.” “아르페 님도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네요.” “시끄럽다니까.” “······충격.” 다른 이들에 비해 감정의 변화가 지극히도 드러나지 않는 레이제나가 가장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아르페가 나보다 연상이었음.” “레이제나가 왜 그 이야기를 안 하나 했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연하. 매우 위험한 상태.” “지극히 안전해. 지극히.” “그간 아르페의 이상했던 행동들을 이해. 앞으로 아르페를 잠재적 위험요소로 분류.” 어울려줄까 생각했던 아르페였지만 괜히 여자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만 같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레이제나는 그것을 보며 삐졌는지 스태프로 아르페를 툭툭 찔렀지만 그는 끝까지 무시했다. ‘이제 연상연하 얘기는 그만두게 해야······.’ 적당히 한 마디만 해줄까, 생각하던 찰나 아르페는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사실 마왕에 이어 마신의 파편을 상대하며 가장 무리했던 것도 그였고, 당연히 피로가 쌓이기도 그가 제일 심했다. 그런 끝에 전생의 이야기까지 남김없이 털어놓았으니 지쳐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아르페 잠들었는데?” “흐음.” 메테르가 빠르게 움직여 아르페 옆을 사수했다. 시에나가 그녀 못지않은 속도로 움직여 나머지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우리도 자자.” “정말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네요.” “아르페가 내어주질 않으니 우리가 알아서 쟁취하는 수밖에 없는걸.” “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에요.” 메테르와 시에나가 양옆을 지킨다고 지켰지만 바디네는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아르페의 머리맡에 앉았다. 편한 표정으로 잠든 아르페의 머리칼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얹었다. “분명 아르페 님께선 망설이고 계셨던 것이겠죠.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이 다르기에, 저희의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여도 될지 확신이 없으셨던 거예요.” “평소엔 되게 무식한 주제에 이럴 때만 성녀 티가 나는구나.” “시끄러워욧.”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바디네의 입가에서는 그러나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망설이시는 이유를 알았으니 이젠 마음 놓고 돌격해도 괜찮겠지요.” “여태까진 아니었단 말이야!?” 오늘 들은 아르페의 이야기보다도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그러나 바디네는 자신의 다른 경쟁자들을 향해 견제의 눈빛을 뿌리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밤이라도 새려고?” “그렇게 해서 아르페 님이 편안한 휴식을 취하실 수 있다면요. 여러분도 쉬어두세요. 아르페 님이 말씀하셨다시피······ 내일은 참으로 긴 하루가 될 테니까요.” 몸의 기운이 쭉 빠지게 하는 말이었다. 일행은 모두 말없이 동의하며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피로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던전은 그로부터 몇 시간, 누구의 방해도 허락하지 않는 고요를 맞이했다. 다음날, 아르페는 유난히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다. 바닥에 누운 것 같았는데 머리맡이 포근하고 따뜻해 만져보니 다른 이의 허벅지였다. 그 주인이 바디네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그녀는 허벅지에 아르페의 머리를 얹어놓고 불편하지도 않은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잠들어 있었는데, 여태껏 아르페가 보아온 그녀의 표정 중 가장 맑은 미소라는 점이 역으로 찜찜했다. ‘얘가 왜 이러지, 그래도 여태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먼저 접촉해오지는 않았는데.’ 어제 아르페의 발언이 그가 걱정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의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 이쪽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아르페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메테르와 시에나는 물론이고 양쪽 허벅지에 에트나와 미케나가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봉인마법에라도 당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위험한 남자.” 그리고 그것을 레이제나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어떻게든 해줘.” “다가가면 위험하므로 방치. 함정에 빠지는 벌레의 패턴을 학습할 수 있어 유익.” “그래, 어제 무시해서 미안하다. 그대로 잠들어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 “······긍정.” 레이제나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스태프를 휘둘러 일행을 천천히 그에게서 떼어내 주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일행도 곳곳에 나뉘어 얌전히 잠들어 있는 것이보였다. “깨우지 않아도 괜찮음? 마계의 인간계화,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음.” “지금은 파티 멤버들이 오롯이 정상 컨디션을 되찾아주는 쪽이 훨씬 더 중요해. 여기서 나가면 당분간 쉴 일이라곤 없을 테니까 말이야.” “······긍정.” 레이제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와 아르페의 곁에 앉았다. 왜 그러나 싶어 보았더니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생의 나에 대해 듣고 싶음. 세세한 이야기를, 당신이 나를 인식하게 한 당신의이야기를.” “그렇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앞으로 유쾌해지기 위해서라면 감수.” 우문에 현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픽 웃곤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얘기해줄게. 그래도 너무 인간들을 미워하진 마.” “설혹 그들 중 일부가 내게 무슨 짓을 했어도,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를 미워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 쓸데없는 걱정.” “그래, 너는 그런 녀석이지, 참.” 전생에서도 메테르와 끝까지 함께 했던 용사 파티의 일원을 상대로는 불필요한 걱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르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입을 열었다. “내 전생에서는 마도왕국과 엘프들 사이의 일이 조오금 더 지독하게 번졌었는데······.” 둘의 이야기는 나머지 일행이 깨어날 때쯤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설마하니 어제 한 발 물러섰던 레이제나가 그런 고단수 전술을 취할 줄은 몰랐다는 듯 경악했지만 레이제나는 무표정을 고수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아르페는 감추어왔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 줄기의 미혹도 남지 않았다. 용사 파티는 최후의 전장으로 향했다. < Chapter 38. 아르페 히르타나 켈두크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9. 최종장 - 1 > 전대 마왕의 수뇌 세력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왕군 사천왕이었던 제리어트의 행적이나 그와 연결되어 있던 세력의 움직임을 감안해 볼 때, 어쩌면 그들은 마왕군과 인간계의 전쟁을 기회로 삼아 인간계에서 뭔가 수작을 부리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가 마계에서 마법을 발동하려 하듯이, 그들도 인간을 바꾸려면 인간계에서 작전을 시작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두 마법이 충돌하게 된다면 그것도 골치 아프겠는걸.” 사실 아르페는 전대 마왕 세력이 마족화 실험의 당사자라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서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었다. 인간계에 있는 아티팩트와 마석을 모조리 확보한 것은 마계의 정화작업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놈들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던 것. “물론 그래도 늦었을 수도 있겠지만······ 마왕이 날뛰어준 덕분에 좋은 의미로든나쁜 의미로든 모든 수작이 제로로 돌아갔지.” 아르페 일행의 비밀스런 움직임도, 전대 마왕 세력의 작전도 모두가 끝장났다. 마왕이 한껏 폭주를 일으킨 끝에 마신의 파편까지 불러낸 마당에 설령 놈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건 마계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마법을 개시하는 순간부터 놈들과 맞짱을 뜨게 될 거라 마음먹어두는 편이 편해.” “인생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구나.” 하지만 아르페는 제법 자신이 있었다. 마왕의 레시피는 그들에게 충분히 전대 마왕과 해볼 만한 수단을 쥐여 주었으니까. 그의 품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멸마의 선언이나, 아직까지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파괴의 손이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장소는 마왕성.” “이제 더는 없는 장소지만 말이야.” 철마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마왕성 터는 아르페의 블링크를 몇 번 거듭하면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어디를 가든 마족이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장소를 골라 이동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이 유일한 난점이었다. “조금 쉬다 나오는 사이 마족이 더 늘어났네.” “아리아, 미안하지만 조금 더 무리를 해줘.” “저도 이젠 제법 성장했으니까요. 레벨 500을 넘지 않는 이상은 누구도 저흴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아리아의 자신감 넘치는 말은 겸손하지는 않을지언정 거짓은 없었다. 아르페는 순간적으로 아리아가 바디네보다 훨씬 뛰어난 성녀가 아닐까하고 생각했지만 귀신 같이 바디네가 그를 돌아봐 휙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들은 분명 메테르에게 눈치까지 공유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착.” “전망 한 번 끝내주네.” 마왕이 죽었기 때문에 마족 누구도 절대지배에 의해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마왕의 부재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마왕을 죽인 자를 찾기 위해 철저한 수색 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이 그 정도로 마왕에게 충성심을 바치고 있었단 말이야······?” “아니, 그것보단 마왕을 죽인 이들이 자신들까지 죽일까 두려운 거야. 따로 다니다가는 자신만 죽을까 두려우니 뭉쳐 다니는 거지. 뭉쳐서도 안 될 것 같으면 그땐 잽싸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을까.” “어쩜 그렇게 단역 같을 수가.” 그것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던 자들의 한계다. 그들은 일생 마왕에 의해 속박된삶을 살아왔다. 그들에게 최우선의 가치, 그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치는 오직 그들의 생명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질 것이다. 전투와 피, 죽음을 종착점으로 내달려야 했던 그들의삶은 바뀌어야만 했다. 비록 처음엔 에트나의 인간화만을 목표로 삼았던 아르페였지만 이 지점에까지 이른 지금은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이 이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바디네의 말이 맞았다. 아르페는 처음으로 인간으로 돌아온 마족이며, 동시에 다른 마족들을 인간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 선도자였다. “곧장 마법을 발현할 거야. 그 과정에서 우릴 죽이려 드는 마족이라면, 설령 이제곧 인간으로 변할 놈이라고 해도 가차 없이 죽여도 좋아.” 이들 중에 전대 마왕 세력에 속한 놈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실정인데 ‘하, 하지만 우린 이 사람들을 인간으로 되돌리려고 이곳에 온 거잖아!’라는 한심한 말 따위를 하다가 허무하게 실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성을 느낄 여유도 없게 만드는 아르페의 말에 일행도 굳은 각오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시작하자.” 아르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곤 마도서를 펼쳤다. 스태프가 마도서와 공명하며 허공중으로 떠올랐다.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아리아의 동화는 한계를 맞이해 그들 일행의 모습을 허공중에 완전히 드러냈다. [인간이다!] [피, 피부를 파고드는 기운······ 신성력, 신성력이다!] 아니, 단순한 신성력이 아니지. 아르페는 사악한 미소를 베어 물며 마법을 본격적으로 시전했다. 재생 마법은 본디 마족과 마기를 가리지 않고 발동하는, 어긋나고 뒤틀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마법! 아르페의 마나가 스태프를 통해 증폭되고, 그것이 고스란히 마도서로 흘러들어가 뒤틀린 세상 마계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아공간 주머니 하나 안에 들어가 있던 아티팩트가 통째로 소멸하며 일대의 마족들을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아 인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뭣······!] [머, 멈춰봐. 인간 놈들이 우릴······.] [어째서 이런, 어째서 인간들이 우리까지······?] 마족들 중에는 사태파악을 하지 못하는 놈들도 많았지만 자신이 인간이 되었다는사실을, 그것이 용사 일행에 의한 것임을,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이들도 있었다. [흥분하지 마, 우리는 어차피 놈들을 이길 수 없단 말이다. 게다가 놈들은 우릴 인간으로 만들었어! 인간, 인간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존재가 뒤틀리는 느낌이다. 어째선지······ 어째선지 감정이 가라앉고 있어.] [빌어먹을, 물러나. 물러나라고! 놈들에게 덤벼봤자 죽을 뿐이야, 그런데 놈들은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고!] 방황하는 이들은 결코 섣불리 아르페 일행을 공격해올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빠르게 현실을 파악한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마왕성 터에 모여든 수천, 수만 마리의 마족들이 전부 그런 양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아르페 일행은 완벽한 진을 이루는 데에 성공했다. “아르페, 더 빠르게!” “말은 쉽지!” 하지만 행동도 쉬웠다. 아르페는 아공간 주머니에 준비해두었던 아티팩트며 마석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방에 뿌려대었는데, 그것들은 허공에 해방되는 순간 마도서로 빨려 들어가 소멸했다. 잿빛과 적색, 죽음과 피로 가득했던 공간이 한순간 천연색을 되찾으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호흡하던 다른 공간의 마기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대기가······ 세상이······.” “분명 이게 원래 있어야 할 모습인 거겠죠. 보세요, 붉은 구름까지 사라지고 있어요.” “너무나 아름다워. 마계에서 이런 풍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동시에 그것은 지독히도 처절한 광경이기도 했다. 아직 마족인 자들과 마족에서 벗어난 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반목하다가는 끝내 갈등을 일으켰다. 마계와 마계에서 벗어난 대기가 서로 섞이지 못해 서로를 소모시키며 병들게 만들기도 했다. “어째서 싸우고 있는 걸까.” “저들은 우릴 인식하지 못해······ 아니, 인식하지 않고 있어요. 우리를 이해하거나 막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그 답답함을 다른 이를 통해 해소하는 거죠.” “최악이네.” 아르페는 또 하나의 아공간 주머니를 풀었다. 재생 마법의 범위가 한꺼번에 확대되며 그들의 시야에 닿는 범위 전부를 천연색의 세상으로 되돌렸다. 그 안에 있던 마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좋아, 이제 싸울 필요 없겠지.” “이미 마족과 인간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 같아요, 아르페 님. 이렇게 말하면 사악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솔직히 재미난 광경인걸요.” 마족의 투쟁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살아있기에 다른 무언가를 죽일 뿐, 그저 명령받았기에 타인을 해할 뿐. 명령권자도 잃고 스스로도 잃은 마족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충돌하고, 헤매며 주저앉았다. 피도 제법 튀었고 도주하는 자도 있었지만 아르페 일행은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는 이상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장소를 이동할까?” “아니, 정말 경계해야 할 녀석들이 나타났을 때 이놈들이 벽이 되어줄 거야.” “여태까지는 알 수 없었는데 아르페 님의 용사답지 않은 얍삽함은 전생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로군요! 역시 멋져요!” “야, 방금 욕 같았는데.” “아니랍니다!” 마법은 확장을 반복했다. 그곳에 한 때 마왕성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지금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밀도 높은 마기가 지금은 고스란히 마나로 치환되어 일행의원기를 북돋아주고 있었다. “이걸로 나중에 어찌되든 마족 세력 약화는 달성할 수 있겠지.” “······아르페, 놈들이 오려는 것 같아. 느껴져. 이제 곧!” 그때, 메테르가 기껏 활성화된 주위 마나를 모두 검에 끌어 모아 전방을 향해 내질렀다. 마족에서 이제 막 인간으로 변화된 이들에 대한 배려라곤 전혀 담기지 않은난폭한 공격에 대기가 폭발했다. 직후, 그 너머로부터 명백히 일대의 마족들과는 다른 공격성을 띤 마기를 지닌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만 족히 수백 이상, 더구나 하나같이 극렬히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치 지들이 먹던 밥에 아르페가 침이라도 뱉은 것만 같았다. “저놈들 다 죽여!” “알겠습니다!” 누가 마왕군 사천왕 출신 아니랄까봐 수상한 놈들을 발견하는 즉시 공격을 지시하는 아르페와 잽싸게 그의 지시를 받아 놈들을 공격하는 파티! 일단 적이라고 판단한 상대에게 일행은 용서가 없는 것이다! 메테르를 비롯한 일행의 즉각적인 반응에 일대에 모습을 드러낸 레벨 300 이상의 마족 중 족히 절반 이상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고, 나머지 놈들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가만히 있다가 그만 재생 마법에 당해 인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저놈들을 막아야 해, 우리의 숙원을 방해하는 자들이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어떻게든 저들을 막는다. 그 마법을······!] “어림없어!” 전대 마왕 본인이 행차한 것도 아닌 이상 재생 마법을 막을 수는 없다. 마법이란 처음 발현하는 것은 힘들지만 일단 성공적으로 안착하면, 마나를 계속 공급해줄 대상만 있다면 그 기록을 점점 불려가며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다. 지금 아르페가 발현하고 있는 재생 마법이 바로 그 상태였다. 과거 없었던 규모로재생 마법을 활성화시킨 아르페를 막기 위해선 그를 죽이거나, 마도서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곧 나를 직접 노린 공격이 들어올 거야. 저들 중 한 명이든, 전대 마왕이든, 아니면······.” [죽어라.] 아르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아르페의 심장을 일직선으로 노리고 날아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시에나의 빠른 반응에 그녀를 미처 뚫지 못하고 중간에 막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설마 인간, 네놈들이 먼저 시작했을 줄은······ 그것도 한때 마족이었던 네놈이.] 아르페를 공격한 자가 곧 정체를 드러냈다. 시에나의 방패를 미처 뚫지 못하고 중간에 박힌 그것은 바로 검은 금속질의 창이었다.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늦게 나타나 그것을 틀어쥔 마족은 무려 레벨 401에 달하는, 전생의 아르페는 보지 못했던 이. [이젠 때가 되었다. 주군께서 바라고 계시는 모든 것이 이곳에 모였으니, 주군을 맞이하기 위해 내가 네놈들의 모든 것을 수거하겠다.] “얘 레벨 별로 안 높다! 그냥 집중공격으로 죽여!” “응!” [뭣······ 커헉!?] 그러나 놈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아르페 일행이 전대 마왕 세력의 음모를 모두 알 수는 없었던 것처럼, 놈 또한 아르페 일행이 최근 들어 얼마나 급성장을 거듭했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가는 바로 죽음이었다. 아르페 일행은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전대 마왕 세력의 마지막 사천왕의 죽음이기도 했다. < Chapter 39. 최종장 - 1 > 끝 ⓒ 토이카 < Chapter 39. 최종장 - 2 > 사위가 고요했다. 레벨 400을 넘기는 고수준의 마족이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 반향이 작을 리 없었다. 놈과 함께 당도한 수하 마족들 또한 그들의 생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르페 일행의 저력에 기겁하여 멈칫하다가는 마법진의 힘에 당해 곧장 인간으로 바뀌었다. [힘이 줄어든다.] [힘뿐만이 아니다, 적들을 거세게 몰아붙이게 하는 투기마저 더는 느껴지지 않아. 놈들은 우리를 인간이라는 굴레에 속박시키려는 것이다!] “굴레는 무슨, 여태까지 네놈들이 뒤집어쓰고 있었던 탈이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은 왜 하질 못하는 거지?” 자신 안에 확고한 관념이 생긴 이상 아르페는 더는 고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다. 재생 마법은 모든 것을 원래 있었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존재했다. 아르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세상의 의지이기에 결코 마법은 꺾이지 않는다! [설마······.] 어떤 늙은 남자의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마법을 완성시킨 자가 있을 줄은······.] “압도적인 마기야. 레이제나, 에트나!” “준비완료.” “그런데 이 마기······?” 마신의 팔을 상대했던 그때처럼 재생 마법은 스태프에게 맡겨두고 아르페가 전투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재생 마법의 확산 속도가 느려지는 것도 당연지사! 따라서 그는 가능한 한 일행에게 전투를 맡겨두고 싶었지만······. “잠깐만.” 스태프와 마도서의 공명을 유도해 순간적으로 자유를 되찾은 아르페가 파괴의 손에 마나를 불어넣자 그것이 순식간에 처음 나타났던 그때처럼 모습을 크게 부풀렸고, 이어서 아르페가 의념을 전달하자 전방에 손바닥을 펼치게 하는 것으로 거대한 방어막을 생성했다. 직후 그 중심에 틀어박히는 마기의 창 세례! 손바닥은 그것을 훌륭히 막아내, 파괴했다. 그 과정에서 적의 수준을 감지한 아르페의 표정이 험악하게 뒤틀렸다. “어쩐지 말도 안 된다 싶더라니,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 손은 무엇이지? 세상에 그런 생물도 있었던가? 아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마법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골렘이로군! 흥미로워, 골렘 주제에 내 공격을 막아내다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지? 하지만 다음번 공격까지 막아낼 수는 없을 거야. 난 이미 그 골렘의 특성을 파악했거든!] “아르페, 나 쟤 재수 없어.” “걱정하지 마, 나도 마찬가지거든.”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먼저 그물을 형상화한 마법으로 파괴의 손의 움직임을 구속하고, 강력한 마탄의 세례로 손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리는 연계공격. 당연하게도 파괴의 손은 그것을 맞이해 깔끔하게 소멸시켰다. [뭣······!?] “이상하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에 말투인데 굉장히 익숙해······.” “그리고 짜증나.” 아르페의 파티원들은 기묘한 데자뷰를 느끼며 저마다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아르페는 상황이 다급함에도 불구하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미 만물열람의 능력에 잡혀드는 기척이 있었다. 자신의 은신 마법을 그 누구도 꿰뚫어볼 수 없으리라 자신하는 탓인지 몰라도 놈은 정말이지 무방비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 만물열람 능력이 없는 한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대단한 은신 마법이기는 했으나······. [에트나.] [응, 이제 내게도 보여. 정말 재수 없는걸.] 만물열람의 능력을 공유 받은 에트나가 확실히 적의 모습을 포착했다. 아무리 갖은 애를 써서 구사한 마법으로 공격해도 파괴의 손이 모두 그것을 막아내자 놈이 성을 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죽이는 건 포기하고, 놈이 알아차리기 전 최대한의 타격을 몸에 넣는 것에만 집중해줘. 놈은 마법에 대해 우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고수거든.] [그걸 아르페가 어떻게 알아······? 아니, 어쨌든 알겠어. 최대한 마법에서 벗어난 일격을 가하면 된다는 얘기지?] 그러나 그렇다고 근접 전투원들에게 맡기자니 놈과의 거리가 너무나 멀다. 미케나는 아쉽게도 일격의 데미지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에트나였다. 에트나는 마법이 아닌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보여주지.] 에트나의 고유능력이 발동했다. 단순한 마법이었다면 놈에게 들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고유능력 정령화는 아르페의 전생에서도, 당연하지만 수백 년 전 전대 마왕과 용사가 날뛰고 있었을 때에도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능력이었다. “팔 한 짝은 받아가야겠어!” [크헉!?] 그렇기에 놈은, 마족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갑작스레 그가 있는 곳에서 치솟아 오른 새하얀 불꽃에 반응할 수 없었다. 불꽃의 정령으로 화한 에트나를 발견한 순간 즉시 방어막을 만들어내기는 했으나 그땐 이미 에트나가 선언한 대로 놈의 팔 한 짝을 완전히 태워먹은 시점! [큭, 크하아아아아아아!]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고통의 엄습에 놈이 신음하며 제 어깨를 부여잡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아르페가 말했다. 그 입가엔 싸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 선배님.” “선배님······? 응?” 그제야 나머지 일행도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등장순간부터 재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마족의 정체는 그들의 여행에 주기적으로 흔적을 드러내 도움을 주었던 전대 용사이자 마족 나나라이 바보드라 본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마기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패턴도, 압도적인 기세와 403이라는 터무니없이높은 레벨도, 결정적으로 아르페의 눈에 비추어지는 놈의 이름이 그 정체를 증명했다. “어째서······?” “저 사람 왜 우릴 공격하는 거야? 노망난 거야? 혹시 우리가 용사인지 모르는 거야?” “아니, 그것까진 잘 알고 있을걸.” 아르페는 한 짝밖에 남지 않은 팔을 들어 그들을 조준하며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마족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마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이 머릿속에서 전부 날아간 모양이지.” [두 명의 용사, 파티······ 익숙한 모습이군. 그리운 모습이기도 해. 나도 한때 인간을 위해 투쟁한 적이 있었지.] 놈의 말에 아르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돌아오려거든 아직 늦지 않았어.” [늦었지. 젊은 용사, 나의 후배. 자네는 세월의 무게를 아는가? 죽음의 무거움을 아는가? 나는 마족으로 지낸 세월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어. 마기는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대신 새로운 욕망을 불어넣어주었지.] 늙은 전직 용사의 말에 아르페는 코웃음을 쳤다. “네놈은, 네놈의 파티는 전대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봉인에 그쳤어. 내 말이 틀렸냐?” [아니, 우리 파티에겐 당시 마왕을 죽일 만한 힘이 없었다. 봉인하는 것이 고작이었지.] “네놈의 파티원들에게는 그렇게 둘러대도 통했을지 모르겠다만 나한텐 아니거든. 네 능력이 봉인보다는 공격에 치중되어 있다는 건 아주 잘 안단 말이지. 어째서? 네놈은 봉인 같은 수수하고 티도 안 나는 능력보다는 화려한 공격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야. 맞지?” 평범한 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부터의 접근이었으나 마족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아르페의 말에 흠칫해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떻게 그것을······.] “아, 이 새끼 바보다.” “그렇구나, 역시 바보였어.” 아르페는 놈이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난 네가 어째서 마왕을 죽이지 않고 봉인한 것인지 계속 고민했었어. 그런데 결론은 간단하더군. 넌 그냥 그 순간부터 이미 마족에, 마기에 끌리고 있었던 거지. 마족으로 변한 것도 어디까지나 마기를 마나로 되돌리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도 너 자신의 본능을 속이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던 것 아냐?” [······.] 놈은 잠시 침묵하다가는 입을 열었다. [실로 훌륭한 추리이기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네 말은 틀렸다, 후배여.] “틀려?” 놈의 눈이 빛났다. 늙은 마족의 육신 가득 마기가 흘러넘쳐 놈을 강화시켰다. 에트나가 놈의 한쪽 팔을 없애놓지 않았더라면 그들 파티가 밀리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기세! 놈은 전의를 고조시키며 아르페 일행에게 윽박지르듯 외쳤다! [내가 마왕을 봉인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그녀를 봉인해두고 평생에 걸쳐 그녀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연구를 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연구를 어디에서 어떻게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상이 뒤바뀌어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그녀가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나의 생각은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었으며 진정으로 옳은 것은 마족이라는 사실을!] “······.” 아르페는 그 말을 듣곤 아연해져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마왕이 여자였다는 정보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전 영원의 숲에서 엘프 장로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용사가 엘프들에게 껄떡거리고 다녔다는 노골적인 설명. 어쩌면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복선이었던가? 단숨에 납득 가능한 설명이었다. “아무래도 저 새낀 약도 없는 병신 새끼인 것 같아.” “응, 죽이자.”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도 메테르의 조상인 동시에 아르페 일행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한만큼 조금쯤 더 얘기를 들어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개뿔이었다. 더욱이 놈이 전대 마왕의 아군으로 나타난 시점에서 의심하고 있던 것이긴 하지만, 놈은 지난 세월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거든 자신이 만들어둔 유적의 힘을, 무엇보다도 셋으로 나누어 보관해둔 이블 하트를 회수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놈은 불완전해.’ 인간을 마족으로 바꾸는 마법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전대 마왕 세력이 봉인이 풀린 이후로도 인간들을 마족으로 쉬이 바꾸지 못했던 것만 보아도 뻔히 알 수 있는일이다. 그것은 나나라이 바보드라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나는 옳은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마기는 뒤틀린 마나가 아냐, 단지 마나의 발전된 형태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던 것이다. 나는 생애 내내 마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 분을 깨닫게 된 후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마신이 실재하는 것으로 마기의 정통성이, 마나에 대한 우월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놈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래도 자신보다 고등한 마도의 길을 걸었던 선배에 대한 예우만은 지키고 싶었지만 그것도 물 건너갔다. 마기와 마나의 본질을 짚어내지 못하고, 그저 무력이며 공포일뿐인 마신을 신성시하는 시점에서 마도사로서의 놈은 이미 끝난 것이다. 아르페는 냉정하게 지시했다. “에트나, 네가 중점적으로 나서줘야 할 것 같아. 나는 놈들의 약화에 주력하겠어.” “아르페, 나는?” “너는 나머지 한 쪽을 맡아줘. 레이제나, 일행의 보호를 부탁해도 되겠지?” 무엇을 맡으라는 지는 굳이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행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나나라이 바보드라까지 직접 출두한 이상 누가 더 남았는지는 뻔하지 않겠는가! [감이 좋은 아이로구나. 전대 용사와는 다르게 말이야. 더구나 귀엽기까지.] 어딘가에서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화색이 되어 고개를 들고, 아르페는 이를 악물었다. “······우리 아르페한테 손대면 죽여 버릴 거야.” “아니, 그냥 인사 대신 던진 말에 그렇게 낚이지 마, 메테르.” [후후, 역시 재미나. 뒤틀린 역사, 용사와 용사······ 그 분께 헌상하기에 가히 최고의 무대로구나.] 아르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눈부신 흑발을 지닌 미녀, 전대 마왕이 나타나 있었다. < Chapter 39. 최종장 - 2 > 끝 ⓒ 토이카 < Chapter 39. 최종장 - 3 > 전대 마왕은 단 한 순간도 아르페를 오롯이 인식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르페가죽은 이후에야 봉인에서 풀려났고, 새로이 시작된 세상에서도 대부분의 시간동안 타인보다는 자신을 감싼 지독한 봉인을 풀기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봉인으로 약해진 힘을 회복하기 위해 여태까지 무대 위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어 이 자리에 나타난 것. 물론 그녀가 지닌 힘의 핵심은 그녀와 나나라이 바보드라 둘만으로 90% 이상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마신의 피를 잇는 마왕, 가넷 오르소디아. 너희가 가여운 나의 후대를 죽인것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나는 귀여운 아이에게 관대하지. 아르페라고 했던가? 자,방황은 그만두고 이제 다시 마족으로 돌아오렴. 너를 내가 품에 안으마.] 그녀의 시선은 아르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용사 파티의 주축이자, 파티 멤버 전원을 이렇게까지 성장시켜낸 이가 누구인지 그녀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아르페가 스태프와 마도서를 통해 발현하고 있는 마법! 마계를 실시간으로 인간계로 바꾸며, 그녀의 수하 마족들까지도 인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압도적인 힘을 다루는 자!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이를 모두 잃은 그녀는 자신의 적을 보면서도 그들을 수하로 부릴 생각을 먼저 하고 있었다. [미리 말해두건대 모든 발악은 의미가 없단다. 나는 존재만으로도 기적, 세상의 역사의 첫째이자 막내! 마신을 증명하는 그의 딸이니까. 나는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 네 발로 걸어와 내 품에 안기렴. 자, 나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단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마기가 묻어나는데, 그렇다는 건······.” 아르페는 마법을 유지하는 한편으로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만물열람은 그녀의 능력을 훌륭히 주인에게 전달했다. [가넷 오르소디아] [마왕] [레벨 ? 419] [고유능력 ? 유혹] [모든 종족의 마나를 담아 완성된 봉인 마법에 당했던 후유증으로, 봉인에서 풀려났음에도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아르페 일행이 일을 벌이는 것이 빨라 힘을 완벽히 되찾기 전에 외부로 모습을 드러낸 모양새이기는 했으나 그녀 본인이 장담한 것처럼 충분히 강했다. 아르페는 실로 분하지만 다시 한 번 마왕은 옳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놈과 충돌하지 않고, 마신의 파편을 겪지 않고 이 자리에 이르렀다면 아르페는 결코 가넷 오르소디아를 꺾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419레벨. 하지만 봉인에 갇혀 있다 풀려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약화되었을 거야. 마왕이랑, 마신의 파편을 상대했을 때와 똑같이만 하면 돼.” “아르페는 언제나 너무 쉽게 말하는 게 탈이야.” 전대 마왕이 끔찍한 괴물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존재가 암시되었던 순간부터 익히예상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르페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각오였다. 메테르와 시에나가 앞으로 나서고, 나머지 일행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 진을 형성했다. 레이제나가 그 모두를 지키기 위해 스태프를 들었다. [전부 다 나서도 부족할 터인데 몇 명만 나서서 되겠어? 더구나 너는 그런 대마법까지 발현하고 있는데 말이야.] “저 여자의 말은 일단 듣지 마. 고유능력 유혹은 용사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이야. 지금 저기 있는 저 바보처럼.” [이런, 참 매정한 아이로구나. 나는 말해준 적도 없는 내 능력을 그 입으로 말하고 있다니,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야. 진도를 너무 빨리 나가는 것 아니니?] “저 여자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네 전의가 고취된다니 굳이 뭐라 말은 더 하지 않을게.”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강대한 마기를 뿜어내며 그를 보호하듯 옆에 서는 가넷 오르소디아의 모습을 보며 코를 벌름거렸다. 굉장히 한심한 모습이어서 깜짝 놀랄 만큼 이전까지의 그의 이미지에 들어맞았다. [내가 없었다면 그녀의 봉인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봉인을 당하는 자의 격이 높을수록 봉인을 풀기 어려운 마법이었으니까.] “봉인한 당사자도 봉인을 바로 풀지 못했다는 건 역시 네가 개념이라든가 기억을많이 잃었다는 얘기구나.”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 가넷 오르소디아의 말은 더더욱 그냥 듣고 있을 수 없다. 아르페의 마음과 하나된 것일까? 에트나가 곧장나나라이 바보드라를 공격해 들어갔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때까지는 이 남자를 죽일 수······ 흡!] 전대 마왕, 가넷 오르소디아가 곧장 에트나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직후 에트나의 뒤를 따라붙듯 돌진한 시에나의 망치가 그녀가 있던 자리를 뭉개어버렸다. 시에나 역시 레벨 400을 넘기는 실력자! 설마 용사도 아닌 용사의 파티원이 그런 힘을 지니고 있는 줄은 몰랐던 가넷은 깜짝 놀라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녀의 당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아, 아아아.] [정말 성가신 놈이구나!] 가넷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나나라이가 울분에 차 외쳤다. 놈의 시선은 아르페에게 꽂혀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새하얗고 작은종에 말이다.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아티팩트를!] “좋아, 저 놈 낚여서 달려든다. 에트나!” “라져!” 성공적으로 바보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에트나가 전신으로 불꽃을 피워올리며 나나라이 바보드라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더할 나위 없이 전투적인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멸마의 선언의 효과를 받아 약화된 나나라이 바보드라와 일대일로 맞붙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 더욱이 마법에 익숙한 나나라이는 정령의 힘을 다루는 그녀에게 잘 반응하지 못해 점차로 몸에 유효타를 허용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너희가 이렇게 난폭하게 나오니······ 조금 아프겠지만 참으렴. 나중에 충분히 쓰다듬어줄 테니까 말이야.] 가넷 오르소디아가 이를 악물었다. 멸마의 선언은 지금이라도 그녀의 뇌를 쪼개어버릴 기세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아티팩트 하나 이겨내지 못해서야 어디 마계의 지배자를 칭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을 노려보며 검을 치켜드는 메테르와 시에나를 향해 한 손을 펼쳤다. 단지 그것만으로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마탄이 튀어나와 그녀들을 공격했다. 가벼운 공격이라고 무시하기엔 터무니없이 강력한 마탄이! “피하면 아르페가 다쳐!” “어딜 봐서 조금 아프다는 거야······!” 가속의 묘리를 더한 메테르의 검격이 빠르게 마탄을 가르고, 나뉜 파편을 시에나가 방패로 막아냈다. 이어서 마탄을 발사하고 근접전투로 이행하려던 가넷은, 그러나 한 번 휘둘러진 메테르의 검격이 마나를 품고 허공을 가르며 자신에게로 쇄도하자 이를 악물며 그것을 피해 움직여야 했다. “아르페 건드리지 마!”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음 순간 자신에게 돌진해온 메테르의 검격을 맞이해 팔을 들어올렸다. [귀엽기만 한 아이는 아니구나······!] “하긴 너는 늙었으니까 귀여운 것들을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호오.] 메테르의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가넷은 초근접거리에서 마기를 폭주시켜 메테르를 공격했으나 그땐 이미 시에나까지 그녀에게 접근해 방패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가넷을 보고 자신이 직접 공격을 하는 것은 포기한 시에나는 오직 메테르를 보호하고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방패를 든 것이다. [네 마력은 특이하구나······?] “언니, 부탁해.” “응. 아르페는 내가 지켜.” 메테르는 시에나가 이블 리플렉터로서 지닌 마나를 고스란히 넘겨받아 검에 담아냈다. 때마침 뒤에서 날아든 바디네의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메테르와 가넷에게 직격하며 그들의 우위를 순간적으로 뒤바꾸기까지 했다. [아주 짜증나도록 익숙한 광경이구나. 과거 저 자도 내 앞에서 그렇게나 동료의 유대를 강조했었지······ 하지만 지금 그는 나의 것이야!] 가넷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무수한 숫자의 마탄이 생성되었다. 가넷에게는 이미 죽어버린 마왕과 같은 고유능력은 없지만, 다른 이들을 유혹해 정신적으로 자신에게 복속시키는 고유능력 유혹과 함께 단순히 끔찍하리만치 방대한 마기가 있었다. 단순하기에 오히려 약점을 파고들기가 어렵다. 어찌 보면 그녀야말로 정통의 마왕에 어울리는 자였다. [마탄이 약화되고 있어······!?] “흐아아아아압!” 물론 아르페가 흔드는 멸마의 선언 앞에서는 그것도 약화되지만 말이다! [저 종을 부숴야 해!] [나나라이, 네가 해! 나는······ 이 꼬맹이들과 놀아줘야 해서 말이야!] 메테르의 레코드 마스터가 본격적으로 발동되며 일행의 힘을 그녀에게로 끌어왔다. 메테르의 스킬은 마왕과 마신의 파편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더욱 성장해 있었다. 단순히 파티 멤버들의 능력을 모아 자신과 시에나에게로 나누는 수준에서 벗어나, 자신이 공격할 때에 자신에게, 시에나가 방어하고 반격할 때엔 시에나에게 전부 건네어주는 것으로 서로의 능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가넷은 그들의 기록이 오고가는 그 순간을 노려 공격하고자 했지만, 놀랍게도 능력의 이동은 메테르가 사고하는 그 순간 바로 이루어져 도무지 틈이 나질 않았다. 가넷은 메테르의 작열하는 녹색 눈동자를 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네년······!] “미안하지만 너희 무대는 앞으로도 없어. 여기서 모두 끝낼 거야.” 굳건한 의지를 담은 바스타드가 백광을 뿜어냈다. 히어로 플래시였다. “퇴장해줘야겠어.” 한편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어떤가 하면, 놈은 마왕보다도 훨씬 열세에 몰려 있었다. 에트나는 아르페와 메테르와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는 유일한 전력! 그런 그녀가 정령화라는 힘까지 얻었으니 나나라이 바보드라를 상대로 이기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설마 정령의 힘인가!? 그것으로 내 팔을······! 귀여운 여성이지만 손버릇은 제법 험악하군 그래!] [할아버지, 미안하지만 입 냄새나니까 좀 다물어줄래? 아니면······ 내가 다물게 해줄까!] 에트나가 내지른 주먹 끝에서 피어난 불꽃의 새 수천, 수만 마리가 순식간에 일대를 용암지대로 만들었다. 나나라이가 피워내는 마력은 마법으로 화하기 전에 전부 불꽃에 타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에트나는 그 누구보다도 속성의 궁극에 가까워져 있었다. [계속 당해주기만 하리라 판단하면 오산이야!] [흡!] 몇 번 마법의 발동 전에 저지당한 나나라이 바보드라는 마족의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화상 두어 개를 더 입은 후에야 영창을 포기했다. 그러나 놈과의 전투는 그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놈이 한 쪽밖에 남지 않은 손을 다급히 휘두르자 마왕 가넷과 비슷한, 그러나 질적으로 다른 마탄의 세례가 퍼부어졌다. 마탄에 담긴 힘은 가넷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지만 그 안에는 경악스럽게도 마법진이 담겨 있어, 불꽃과 접촉하는 순간 마법을 발동시켜 불꽃을 잡아먹었다! [용사와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마족이 되기 전부터 마도에 관해선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수준이었지.] [아르페한테 뒤쳐진 마법 수준 말이지.] 에트나가 코웃음을 쳤다. 실제로는 놈의 마법진에 담긴 마법을 하나하나 읽어내지 못해 살짝 초조해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마왕보다도 이쪽을 더 경계해야 해. 인간계의 마계화 작업을 주도하는 이는 전대마왕이 아니라 이 남자일 테니까······!’ 실제로 놈은 에트나와 싸우면서도 아르페가 관리하고 있는 재생 마법에 가끔씩 시선을 주었다. 말도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재생 마법을 해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잡았다.] “으······ 뭣!?” 전투 중에도 아르페를 신경 쓰느라 집중력이 분산된 탓이었을까? 에트나는 놈이 쏘아낸 마탄 하나가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전신에 흐르고 있는 불꽃이 마탄을 어련히 알아서 막아 주리라고 생각했지만······. “크학!?” [체크 메이트. 자, 이제 게임을 끝내볼까, 후배들?] 에트나의 전신에서 불꽃이 사라졌다. 에트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도서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던 아르페가 경악하며 고개를 든 순간,그는 나나라이 바보드라에게서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고유능력 ? 마법진 생성] [자네의 고유능력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말이지.] 나나라이 바보드라, 끝까지 그들의 발목을 잡는 웬수 선배님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잠깐 정도 기록을 숨기는 마법진을 구상해봤는데, 아무래도 잘 먹힌 모양이지?] “저 개새끼가······?” 아르페는 이를 뿌득 갈았다. 아무래도 적은 마법진으로 구현 마법을 펼치는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 Chapter 39. 최종장 - 3 > 끝 ⓒ 토이카 < Chapter 39. 최종장 - 4 > 마법진이란 술자의 마나만으로는 펼칠 수 없는 마법을 구사하고자 할 때, 술자가 아닌 타자가 마법을 쓰게 하고자 할 때, 혹은 그저 영창으로 해결하기엔 마법의 구조가 너무나 부족할 때 쓰는 수단이다. 물론 좋은 점이 있는 만큼 쓰기도 그리 쉽지만은 않아서, 술자가 만만치 않게 마나를 소모해야 하고 생성에 오랜 시간이 걸리며, 조금 오래 지속시키고 싶거든 마석까지 투자해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그런데 설마 그걸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만들어낸다고? 그것도 이런 단시간에?’ 고유능력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거기에 태클을 걸 수도 없는 노릇. 아르페는 어째서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용사로서 빨리 성장했으며, 그렇게나 많은 유적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 드디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작 본인도 그 원리를 모르는 마법을, 자신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마법진으로 만들어내 영속시킬 수 있단 얘기지 지금?’ 실제로 오늘 처음 본 반정령 에트나의 힘을 소진시키는 마법진도 만들어내어 마탄으로 발사하기까지 했다. 마치 마법을 구성하는 전 단계를 쏙 빼놓고 마나에서 마법으로 바로 완성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일이다. “넌 천재 마도사가 아니라 고유능력으로 천재인 척을 했을 뿐인 발정 용사일 뿐이었구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후배. 결국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스테이터스가 결정된 존재야. 내가 용사로 선택받은 것도, 후배가 그런 기구한 삶을 살게 된 것도 모두가 태어난 순간 결정된 것이 아니던가. 뛰어난 머리를 이용해 마법을 만들든, 타고난 고유능력을 이용해 마법을 만들든 그 원인도 결과도 모두 같다는얘기지.] 부정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천재란 타고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니 비록 그것이 고유능력으로 이룬 업적이라 해도 천재라는 타이틀에서 그리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린 살며 얻은 모든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개화시켰고 그 결과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나 자신도 노력했던 만큼 다른 이들의 노력을 부정할 셈은 없어.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없었다면 내가,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니지. 우린 특별하다. 천재,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바로 천재라고 부르는 것이야.]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에트나를 향해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직후 에트나의 육신이 슥,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아르페의 곁에 나타났다. 물리적으로도, 마나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정령의 힘이었다. [퇴각을 할 힘을 남겨놓았음에도 굳이 같은 전장으로, 그것도 후배의 곁으로······ 어지간히 후배를 사랑하는 모양이지.] 선배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유혹 능력에 당해 완전히 바보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넷에게 놀아나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음,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는 유대라는 게 있거든. 고래로 마왕 파티는유대라는 말만 들으면 미쳐 날뛰는데 너는 아닌가?” [유대, 알지. 나 또한 그것을 믿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나 스스로 나서 배신하게 되면서······ 더는 믿지 않게 되었지.] 마탄이 날아든다. 그러나 그 모두가 아르페가 크게 펼쳐낸 파괴의 손의 손바닥에 금세 막히고 말았다. 파괴의 손의 힘으로는 어지간한 마법진 따위는 기를 펴기도 전에 증발시켜버릴 수 있었다. [강하군. 강해. 대체 그 손은 무엇일까, 그것을 막아내고 파괴하는 마법진을 구상했는데 어째서 먹히지 않는 것일까. 그저 신기할 노릇이야.] 물론 아르페는 방심하지 않았다. 고유능력만 따지면 가넷보다 이 남자가 더욱 무시무시한 적이었다. 어쩌면 놈이 준비했던 던전에서 마나 스트링을 거쳐 구현 마법을 얻은 것도 전부 놈의 기록이 관여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 ‘구현 마법으로 놈에게 어느 정도 대항하는 것이 가능해. 이렇게 되면 지금부터는놈이 마법진 생성으로 무엇을 노리는지 파악해 바로 카운터를 하는 게 중요해지는데······.’ 아르페는 파괴의 손을 겉으로 내밀어 방어 태세를 취하며 다시 하나의 아공간 주머니를 털었다. 그것은 재생의 마도서를 거쳐 에트나에게 일부의 마나를 흘려보내었다. 그녀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명확해졌다. “카, 흑······.” “에트나, 쉬고 있어.” “크으······.” “네 덕분에 저 놈이 숨기고 있던 게 뭔지 알았어.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안심해.” 에트나는 그의 듬직한 말에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재차 정신을 잃었다. 마나는 보충해줄 수 있어도 그것을 정령력으로 바꾸는 것은 온전히 에트나의 몫, 지금은 그녀가 충격에서 회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르페는 에트나를 레이제나에게 맡기곤 자신이 직접 나나라이를 상대하기로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 말고 나나라이를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호, 설마 했는데 그것은 데마이트인가! 굉장해, 데마이트로 만들어진 스태프에 마법 구사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그만한 대마법을 혼자서 유지할 수 있을 줄은!] “시끄럽고.” 재생의 마도서를 삐삐에게 맡긴 아르페가 덤으로 아티팩트와 마석을 한꺼번에 소모해 재생 마법의 범위를 다시 한 차례 확장시키며(그것만으로도 나나라이와 가넷의 마기를 깎아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양손에 보랏빛 마나의 실타래가 휘돌고 있었다. “덤벼, 선배님.” [이런, 결국 난폭한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겠구나!] 마탄이 폭주했다. 나나라이의 전신을 통해 수 만, 수십 만, 숫자로 세지 못할 만큼터져나오는 마탄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폭주라고밖엔 부를 수가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그 마탄 하나하나가 다른 마법의 힘을 품고 있다는 것. 멸마의 선언과 재생 마법에 의해 약화되고 있는 와중에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잠깐. ‘마기가 끊임없이 솟아나는데 그 마기는 결코 스스로에게서 기인한 것도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도 아니다.’ 무수한 숫자의 마탄이 아르페와 그 일행을 덮쳤다. 아르페는 파괴의 손을 내밀지 않고 실타래를 풀어내 그 한 가닥 한 가닥을 서로 다른 방어 마법으로 구현해 마탄을 모조리 막아내며 사고를 가속했다. ‘놈의 육신은 불완전할 뿐더러 마기를 공급해주는 아티팩트도, 포션도 없어. 이 세상은 지금 우리가 실시간으로 인간계로 만들고 있으니 마족이 강화되기는커녕 대기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약화되는 것이 정상. 그렇다면 놈의 마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디에서?’ 그는 과거 나나라이가 직접 서술했던, 자기자랑 99%와 나머지 진실 1%가 기록되어 있었던 제단의 문구들을 떠올렸다. 인간들이 마나를 마기로 전환하기 위해 무엇을 했던가? 어디에서, 무엇을 불러냈던가? “네놈.” 아르페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실타래를 한정 없이 풀어내며 아르페는 믿지 못해 외쳤다. “그건 설마 마신의 힘이냐!?” [설마 그것까지 알아보다니!] “찍은 건데 진짜잖아!?” 이 미쳐버린 놈이, 그래도 한 때 마신과 연결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이블 하트를 나누어 봉인까지 했다던 놈이 설마 자신의 몸에 마신과, 마신이 있는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를 열다니! [후배, 그러니 이젠 납득하겠지? 자네가 나를 이길 방법은 없어. 내 마법은 내가 원하는 것을 현실로 이끌어오지. 자네의 죽음도, 인간계의 마계화도, 모두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야. ······이블 하트만 있다면.] 얼추 예상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 인간계를 마계로 만들기 위해선 이블 하트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긴 제아무리 마신의 힘을 빌려올 수 있다 해도, 이블 하트마저 그곳에 무한정으로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스스로 나누어 봉인한 이블 하트를 찾아다니다니 실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그러면 지금, 가장 위험한 것은.’ 가넷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메테르와 시에나도 아니고, 나나라이의 마법을 일일이 구현으로 받아쳐가며 대적하고 있는 아르페도 아니고. “먀아아아아, 빨리 먹고 싶은데. 먀아아.” 레이제나와 함께 일행을 지키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이블 하트와 마기를 품은 존재를 먹어치운 탐식의 마수 로아가 아닌가? [후배, 움직임이 둔해졌는걸.] “그런 네놈은 아까부터 조금도 움직이고 있지 않은데 말이야.” 아르페는 깨달았다. 지금 저 놈도, 마왕 가넷도 전력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르페가 구사하고 있는 재생 마법을 파악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을 이블 하트를 탈취하기 위해 때를 노리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르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메테르의 목소리였다. 아르페는 단호하게 답했다. [나나라이를 먼저 죽여야 해. 놈의 마법진은 너무 위험해.] [알겠어. 시에나, 아주 잠깐만 맡아줘.] [응!] 셋의 의지가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통했다. 굳이 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르페는 마석을 몇 개 소모해 마나 스트링의 개수를 순식간에 증폭시켰고, 갑자기 거세어진 그의 기세에 나나라이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뒤로 물러섰다. “뒈져!” “그 대사는 용사가 외치기엔 좀 어떨까 싶은데!” [크헉!?] 직후 가속 능력을 구사해 빠르게 마왕에게서 이탈한 메테르가 눈 깜짝할 사이 나나라이의 가슴팍에 바스타드를 박아넣었다. 이어서 놈의 마탄을 모두 막아내고도 남은 마나 스트링이 순식간에 놈의 몸통에 달라붙어 놈이 스스로의 몸에 새겨 놓았던 모든 마법진을 무력화했다. 놈은 설마 자신의 고유능력을 무효화하는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떻, 이렇······.] [나나라이!] 사랑을 주고 있던 것은 아니나 지금은 그녀의 가장 완벽한, 하나뿐인 동료인 나나라이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가넷이 기겁하며 돌아섰다. 자신이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놓치고 만 메테르의 모습이, 나나라이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감히 내게서 등을 돌리다니!]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거대한 마기의 채찍이 생겨나 아르페와 메테르를 향해 쇄도했지만, 그것을 홀로 남은 시에나가 막아섰다. 바디네의 신성력과 시에나 자신의 마나를 모두 담아낸 방패가 마기의 채찍을 고스란히 막아내, 소멸시키는 것을 보며 가넷의 입가가 비틀렸다. [너는 처음부터 불쾌했지. 마족의 은총을 거부하고 섭리를 거스르는 괴상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안타깝게도 내가 열어갈 세계에 너를 위한 공간은 없을 것 같구나.] “오빠가 지켜준 육신, 오빠가 만들어낸 종족, 오빠를 위한 마나야.” 시에나는 언제까지고 그래왔듯 담담했다. 그녀의 열정은 언제나 그렇듯 작고 조용하게, 그러나 끊이지 않고 타올랐다. “네가 뭐라 생각하든, 너를 막을 거야. ······인간을 억지로 마족으로 만드는 일 따위, 결코 용납할 수 없어.” [이제 알았다······!] 그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나라이가 외쳤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에 놈은 아르페와 메테르를, 시에나와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재생 마법의 구조를 파악하고 말았다. [가넷, 저 고양이! 여태 나서지 않고 있는 저 고양이다!] 직후 메테르의 검이 나나라이의 목을 베어냈다. 놈의 장기인 마법진 생성은 수천,수만 가닥으로 나뉘어 발현된 아르페의 구현 마법에 의해 처단되어, 놈은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고양이라고?] “먀아아아?”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은 훌륭히 가넷에게 전달되었다. 아르페는 나나라이의 사체를 불태워 없애버리며 혀를 찼다. [그런가, 이블 하트!] 가넷이 외쳤다. 로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먀아아, 다시 귀엽게 울었다. 아르페와 메테르는 다급히 가넷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가넷의 품에서 반짝 광채가 일었다. 그것은 나나라이가 그녀에게 남기고 간 유산이었다. < Chapter 39. 최종장 - 4 > 끝 ⓒ 토이카 < Chapter 39. 최종장 - 5 > “먀!?” 아르페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가넷이 움직였다. 시에나로서는 그녀가 사방에 마기를 흩뿌려내며 움직이는데 그것을 모두 쳐내고 그녀의 움직임을 확인할 방도가없었다. 결국 로아의 몸에 가넷이 내던진 마석 하나가 맞닿았다. 아르페는 만물열람으로 단지 그것이 나나라이의 몸에 작용했던, 그의 만물열람의 권한이 미처 닿지 않는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를 여는 마법진을 담고 있다는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마법이 담겨 있었지만 워낙에 많은 마법이 담겨 있어 한꺼번에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 미친, 시페넌!” “하!” 아르페가 부를 것도 없이 이미 시페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고유능력 강탈로 로아에게 작렬한 마석을 강탈한다! 그의 능력은 실로 대단하여, 이미 작용하던 마법의 힘까지 강탈,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다. 재생 마법이 마석을 통째로 강화했다. 정말 완벽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설마 이런 비장의 패를 숨겨놓고 있었다니, 감쪽같이 당했는걸. 하지만······.] 그러나 가넷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린 마력이 직후 그녀의 마기에 의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보며 아르페는 나지막이 신음했다. [자신의 죽음을 대비한 나나라이가 고작 하나밖엔 만들어놓지 않았을 것 같아?] “메테르!” “이젠 못할 거야!”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죽었으니 아르페 일행의 적은 오직 가넷 한 명 뿐! 어차피 이 일대의 모든 마족은 인간이 되었고, 현 마왕도 아닌 가넷이 주도하는 상황에 끼어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바디네, 아리아! 이제 더는 감출 것도 없어! 지금이 가장 전력을 발해야 할 순간이야!” “신이여! 당신을 부정하고 마를 불러들이려는 자가 있나이다!” “디바인 해머!” 아르페 일행의 전력이 오롯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레이제나와 아르페의 마법도, 메테르의 검격과 시에나의 망치도! 그러나 가넷이 몸에 두른 마기가 그 모두를 걷어냈다. 멸마의 선언도 재생 마법도효과가 없었다. 그녀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마기는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나나라이, 네놈은 제 역할을 다 했다. 이젠 내가 맡으마. 모든 것이 마로 돌아가리라!] “빌어먹을.” 나나라이 뿐만이 아니다. 아무래도 가넷 또한 그 몸으로 마신을 체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봉인을 풀어내느라 약화되었던 그녀는 이번 전투로 오히려 녹슬었던 몸을 풀고 본연의 힘을 되찾기까지 했다. 나나라이가 준비한 마석에 담긴 마법진이 하나, 하나 해방될 때마다 일행의 힘이 차례로 튕겨나갔다. [인간이 마를 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족이 인간보다 강한 이유가 무엇인가? 마가 옳기 때문이다. 지향해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신은 우리에게 관여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뿐이지만 마신께선 기꺼이 우리에게 힘을 내어주신다!] “개소리를.” 어째서 마왕이 가넷을 증오했는지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가넷은 정신병자였다. 마를 꿈꾸던 인간들의 대표와 같은 여자였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악은 태동하지만, 마족들 사이에서 선은 나올 수 없다. 선과 악의 대립을 사랑하던 마왕은 굉장히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인간과 비슷했다. “먀, 나는 남자가 좋은데, 먀아.” [귀여운 아이야, 네가 숨기고 있는 것들 전부 내게 보여주지 않으련? 이블 하트, 그 고귀한 보물을 하나도 아니고 전부 네가 삼켰구나, 그렇지? 그렇지 않니?] “먀아아아아!” 가넷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깨닫고 로아도 다급히 몸을 놀렸다. “먀아, 뭔지 몰라도 이미 다 소화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그 본질은 결코 사라지지 않지. 그래, 너야말로 바로 마신께서 강림하기 위해 고른 몸이로구나!] “주인님, 이 여자 이상해, 먀아아! 먀먀아!” 로아가 자신을 덮쳐오는 손을 피해 펄쩍펄쩍 뛰었지만 가넷은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 늦지 않게 가속을 발동한 메테르가 로아를 거세게 밀쳐내고 가넷을 덮쳤지만,그녀는 메테르를 기다렸다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아귀의 마석을 하나 부수었다. [나를 도와주련, 아이야.] “큭······!?” “메테르!” 고유능력을 강화시켜주는 마법이 담겨 있는 마석이라니!? 메테르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은 다음 순간, 가넷은 자신의 마기를 떨쳐 메테르를 비롯한 일행을 모두 완벽히 뒤로 물려버리곤 허공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녀의 눈앞에 전신의 털을 바짝세운 로아가 있었다. 그녀 또한 강화된 가넷의 고유능력에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만것이다. “그 전에 저를 상대하셔야 할 거예요.” [음······?] 그러나 가넷이 로아를 확보하려던 바로 그 순간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아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테르보다 훨씬 연약한 그녀는, 그러나 마기를기반으로 성립되는 가넷의 고유능력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성녀? 두 번째의 성녀가 너로구나. 숨는 솜씨 하나만은 감쪽같다만 그것으로 무얼 할 수 있겠니?]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킵니다. 성녀로서 제가 부여받은 힘은 모두 그것을 위함입니다.” 아리아의 두 눈으로부터 황금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가넷이 이를 악물었다. 전대 그녀가 상대했던 성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마력, 신의 힘이 성녀 둘에게나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대한 힘이었다. “당신의 마기도 결국 마나입니다. 아르페 님께서 그것을 알려주셨지요. 당신은 저의 영혼을 모두 파괴하기 전까지 로아를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멸마의 선언과 재생 마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리아의 고유능력 동화로 가넷의 마기를 흡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가넷은 자신의 방대한 마기가 다음 순간 신성력이 되어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느끼곤 두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하나 있어도 과하다 여겼던 힘이 너희 모두에게 있구나. 아아, 연약한 신이 마신을 두려워해 이런 이들을 한꺼번에 내보낸 것인가!] “마신, 그 따위 허상에 매달리는 네가 불쌍할 뿐이야!” 아리아가 가넷의 마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이 메테르가 유혹의 힘을 이겨내고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가 휘두른 바스타드를 나나라이가 남긴 마석 하나로 막아내며 가넷이 이를 드러냈다. [마신의 힘을, 그 증거를 접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수백 년 세월 고난 끝에 구축한 마계를 다시 인간계로 되돌리려 하다니. 마를 포식해 마나로 되돌리다니.] “피해, 메테르!” 블링크를 구사해 로아를 회수한 아르페가 가넷의 몸 안에서 솟아나는 마기의 양에 경악해 외쳤다. 다행히도 메테르는 그의 말을 듣고 늦지 않게 아리아를 껴안고 이탈했다. [모두 어리석은 아이들의 착각인 것을!] 다음 순간 마기가 폭발했다! 레이제나의 방어막으로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는 충격이 일대를 휩쓸어 날려버렸다. 그 중앙에 피부까지 시커멓게 물든 가넷의 모습이 있었다. “빌어먹을, 진짜 세상이 멸망이라도 할 것 같네······!” “그냥 저 여자가 마신 아니야? 썩을, 이제 몸에 기운도 안 남았는데······!” 마기, 마기, 마기. 그녀의 육신이 버티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멸마의 선언과 재생 마법의 힘으로도 위축되지 않는 압도적인 양의 마기가 그칠 기세를 모르고 폭주했다! [너희는 되돌린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고 다시 마기로 돌아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너희가 이르지 않았던? 마기는 마나와 하나라고! 그렇다면 그 역도 성립하는것이다. 마나가 마기로 변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 하다못해 너희가 그토록 믿고 따르는 신마저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은, 강함을 추구하는 인간 모두가 마신을, 마신 아래의 새로운 질서를 원한다!] “먀아, 저 여자 미친 것 같아. 먀아아.” 아르페의 품에 안긴 채 로아가 소곤거렸다. 이토록 급한 와중에 굳이 그 말을 해야 했을까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의 일부분은 진실이기도 해. 로아, 너는 분명 이블 하트를 삼켜 네 것으로 만들었지만 만약 저 여자가 마나를 마기로 바꾸는 마석을 가지고 있다면······.” “먀아아, 그럼 내 마나가 계속 마기로 바뀌어서 나도 계속 그것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거야? 먀아아.” 정말이지 행복한 사고회로로구나. 아르페는 일단 아니라고 단호히 말해주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바로 얼마 전 한 번 보았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블 하트의 새로운 주인, 가련한 축생아. 너 그곳에 가만히 있거라. 내 너에게 마신을 모시는 영광을 주려 했건만, 네가 그것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너희 모두가 그것을 거절한다면!] “어, 이런. 메테르!” 가넷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마기의 배열, 그것이 더없이 익숙하다는 생각을 한 다음 순간 마왕 또한 저런 마법진을 발동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르페는 마왕에게 마법진을 새겼던 것이 나나라이 바보드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 맞을 것이다. [나나라이는 끝까지 그것을 막고자 했지. 마신으로의 길을 열어준 그이기에 그 뜻을 존중했다. 이블 하트를 회수해 일을 벌여도 늦지 않다 여겼지. 하지만 이젠 아냐.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 마신의 뜻을 따르는 내게, 지금 이렇게 마기가 복종하고 있으니!] 그렇다는 것은, 마왕보다도 압도적인 기세를 발하는, 나나라이 바보드라로부터 수거한 마석의 힘을 오롯이 스스로에게 보태고 있는 지금 그녀가 마법진을 발동시킨다면······. [마신을 내 몸에 모시는 수밖에!] “어딜!” 메테르가 돌진했다. 아르페를 제외한 모든 이의 체력과 근력을 반쯤 억지로 빌리다시피 하고, 그 모두를 자신의 마력으로 다시 한 번 강화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고유능력의 힘이 덧씌워져 마치 하늘에서 치는 번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용사, 이 순간 너희가 함께하는 것도 운명이겠지. 마신께서 강림하시면 그 모든 것을 마기로 뒤바꿀 터, 너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을 이용해 세상을 마로 물들여주겠노라!] “큭······ 이걸로도 부족해!” “흐아아아압!” 아르페는 재생 마법과 구현 마법의 힘을 담아낸 마나 스트링을 일시에 내쏘았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기를 약화시킨다. 어떻게든 마법의 발동을 막아내야 했다. 가넷이 발현하고자 하는 마법의 구조는 이미 보았다.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서도 마법을 어그러트릴 방법이,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릴 방법이 분명 있을 터였다! 이미 그 방법을 스스로가 알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에게 진하게 들었다. 분명, 분명 가능할 터······. “아르페!” 그때였다. 시페넌이 아르페에게 마석 하나를 내던졌다. 아르페가 다급히 그것을 붙잡고 보니, 그것은 아까 시페넌이 가넷에게서 강탈한 마법진이 박힌 마석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마법진은······. “시페넌, 최고야!” “빨리 해결하기나 해!” [가만히 있거라, 아이들아. 그저 가만히 경건하게 마신을 모시거라!] 마기가 터무니없이 폭주한 까닭에 그녀의 고유능력도 사정없이 증폭된 상황. 그러나 그것이 아르페와 시페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둘 다 외부 요인으로 감정이 흔들릴 시기는 이미 애저녁에 지난 것이다. “좋아, 해보자고.” 아르페가 나나라이 바보드라의 권능이 담겨 [고유능력을 강화하는] 능력이 부여된 마석을 가넷이 그러했듯 망설이지 않고 부수었다. 그 순간, 그의 귓가로 가만히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딘가 부드럽고 그리운 감정이 솟게 하는 목소리였다. [고유능력 만물열람의 2단계 ? 리라이트(수정)가 완전히 개화됩니다.] 아르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오롯이 깨달았다. 자신이 어째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인지, 인간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인지, 어째서 하필이면 메테르 곁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인지, 어째서 구현이라는 마법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인지. “제기랄.” 전생의 자신이 죽던 그 순간, 조금만 정신을 또렷이 차리고 있었더라면 훨씬 전에능력을 자각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유일하게 아쉬웠다.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그런 힘을 아르페는 손에 쥐고 있었다. 마왕의 레시피로는 준비할 수 없었던 힘이기에, 그것은 마왕의 생각보다도 절대적인 힘이었다. “리라이트.” 아르페가 조용히 읊조리며 눈을 떴다. [잠, 이건······ 마신이여, 당신의 힘을 어서······!] “늦었어, 전대 마왕.” 아르페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그의 눈동자가 찬란한 자색으로 빛났다.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을 상대로. 지고의 고유능력 수정의 힘이 적용되었다. < Chapter 39. 최종장 - 5 > 끝 ⓒ 토이카 < Epilogue. 완전한 세계 > 그로부터 고작 세 시간이 흘러 아르페 일행은 마계를 모두 인간계로 되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르페는 재생 마법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릇된 것은 마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계에도 마기처럼 뒤틀린 것이 얼마든지 존재했고, 아르페는 더 이상 재생의 마도서가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때까지 마법을 이어갔다. 고유능력 리라이트와 공명을 이룬 끝에 재생 마법에 드는 마나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기에. 아르페는 준비한 마석과 아티팩트가 다 떨어지기 전에 일을 모두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다. “이곳이 정말 마계 맞아?” “이젠 아냐.” 마계의 하늘에 가득했던 핏빛 구름은 이제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인간계와 마계라는 구분도 무의미했다. 과거 마계라고 불렀던 대륙, 인류는 이 대륙을 그렇게 기록하게 될 것이다. “아르페, 마지막······ 어떻게 되었던 거야? 그걸 어떻게 막았던 거야?” “모두를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린 것뿐이야.” 아르페는 지극히 담담하게 대꾸하며 마도서를 품에 받아 안았다. 그것은 천천히 녹아 아르페의 육신에, 영혼에 통합되며 그의 고유능력을 강화시켰다. 일행은 그것을 아연해져 가만히 바라보고 섰을 뿐이었다. 시페넌이 패스해주었던 마석은 고유능력의 일시적 각성을 촉구했을 뿐이지만, 이미 만물열람의 2단계에 이르러 있던 아르페는 그로서 본인의 능력을 확실하게 자각하며 만물열람의 2단계 능력 리라이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그의 유니크 스펠 구현이 그것에 통합되었고, 이젠 재생까지 통합되며 보다 완전해졌다. 결국 아르페라는 근본에서 배양된 능력,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전대 마왕이 죽은 자리에서 이게 나왔는데.” 시페넌이 작은 마석 하나를 주워왔다. 본디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에 뒤덮여 있었을 그것 또한 재생 마법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 불가사의한 힘을 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페는 그것을 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자신의 야망을 이런 방식으로 후대에 남기겠다 이거지. 아주 전통적인 용사 이야기의 엔딩 방식이군.” 만물열람으로 살핀 그것에는 마신과 연결되는 통로를 여는 마법진이 적혀 있었다. 아르페는 정말이지 그녀의 집념 하나는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만약 아르페 일행이 못 보고 지나가거든 후에, 한 수백 년이나 천 년쯤 흐른 후에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이걸 집어 들어 다시 세상에 마기를 불러온다거나, 아르페 일행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전대 마왕의 잔존세력이 인간이 된 후로도 연구를 계속하다가 끝내 이 돌을 발견하고 전대 마왕의 숙원을 대신해 수행한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일이 발생하리라. “물론 강력한 힘을 얻은 지금 우리가 이 돌을 이용해 반대쪽 세상으로 건너가는 일도 가능하겠지.” “던전? 던전이야?” “젠장, 결국 마신하고 싸우러 가는 거야? 진짜로?” 여태껏 신나게 싸워온 주제에 또 새로운 던전이라는 생각에 들뜨는 메테르. 반면 다른 일행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마왕, 마신의 파편에 이어 전대 마왕, 이젠 진짜 마신하고까지 싸우러 가자고!? 그러나 아르페는 그들의 기겁한 얼굴을 보곤 피식 웃으며 마석을 손에 쥐었다, 놓았다. 그러자 그것은 그저 압도적인 양의 마나가 담긴 마석으로 화해 있었다. “아······.” “어, 어떻게?” “귀찮아.” 아르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기껏 이 세상에 있는 적을 다 없앴는데 새로운 세상으로 가서까지 싸우자고? 농담하냐, 우리가 전투민족도 아니고.” “하지만 모든 화근을 없애지 않으면······.” “화근이라는 건 언제나 새로 생기는 법이야. 그런 걸 우리가 일일이 찾아가며 다 없애고 다니면 소 여물은 누가 주냐.” 아르페가 마기를 깔끔하게 지워냈다고는 하지만 후대에 인간이 그것과 비슷한 다른 기운을 연구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말로 아르페 일행이 이 너머 세상으로 건너가 마신을 깔끔하게 지워버린다 치자, 그러면 인류 역사의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해피엔딩이 찾아오겠는가? 그럴 리가. 나중엔 또 다른 이유로 대악당이 등장해 나머지 인류가 놈과 치고받을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갈등은 언제든 생겨나는 법이야. 그러니 마신이 있는 세상인지 뭐시기인지는 우리 후대 용사를 위해 남겨두자.” “굉장히 그럴듯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더 싸우기 싫을 뿐인 것 아냐······?” 정답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이쪽으로 쳐들어올 것도 아닌 놈을 잡겠다고 일부러 그쪽으로 건너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수정의 힘으로 저쪽으로 가는 통로를 처단하는 작업은 다 해두었다. 만약 자력으로 통로를 뚫는 놈이 나온다면, 그 놈은 설령 마신이 없어도 뭔가 저지를 놈이니 괜찮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어!” “아, 몰라. 그래도 정히 가고 싶다는 놈들은 보내줄게. 갈래?” 바로 방금 기록이 담긴 마석을 지워놓은 주제에 당당하게도 선언하는 아르페. 그가 만물열람 2단계를 오롯이 각성하면서 자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영역에 이르렀다는 것을 파악한 일행은 원한다면 정말로 그가 일행을 마신에게로 보내버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전원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유일하게 로아만이 살짝 아쉬워할 뿐이었다. “먀아, 나중에 먹고 싶어지면 그때 갈래, 먀아아.” “뭘까, 견딜 수 없이 찝찝한 이 마음은······.” “원래 모든 용사 이야기의 뒤가 찝찝한 법이야. 불행이나 불안의 씨앗 하나쯤 남겨놓지 않아서 후대 애들은 뭔 맛으로 사냐.” 그들은 더 이상 아르페에게 따지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이게 아르페다워.” “그럼 정말 아군 누구의 희생도 없이 평화를 되찾는 데 성공한 건가. 이들 중에 누군가 배신하기 전까지는······.” “이제 그동안의 정산 내역을 아르페 님께 청구할 일만 남았네요.” 누가 아르페의 동료 아니랄까봐 자청하여 아르페에게 불안의 씨앗을 심기 시작하는 동료들에게 한 방씩 알밤을 먹여준 아르페는 레이제나로부터 에트나를 넘겨받았다. “지키느라 고생함.” “그래그래, 애썼다. ······그보다도 이건 정말 심각한데.” 에트나는 나나라이의 고유능력을 늦기 전에 까발리는 업적을 달성했지만 그 대가로 놈에게 당해 정령력을 거의 다 소모하고 실신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아르페가 다급히 마나를 채워 넣긴 했지만 그 마나를 정령력으로 바꾸려면 결국 본인의 의식이 각성해야 했다. 이대로 놔두면 앞으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었다. “망할 선배 자식. 정말 끝까지 성가시게 하네.” 하지만 그것도 이전까지의 얘기다. 단순히 만상을 원래 있어야 할 것으로 되돌리는 [재생]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정]하는 경지에 이른 지금의 아르페에겐 마나라는 힘을 정령력으로 치환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그 정돈 마왕 가넷 오르소디아를 처리하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그 힘은.” 이제야 아르페가 각성한 힘을 오롯이 알아본 레이제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르페는 피식 웃으며 쉿, 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직후 주위 마나가에트나 본연의 정령력으로 치환되어 그녀의 몸을 가득 채웠다. “커, 흑······.” 에트나가 콜록거리며 눈을 떴다. 그녀의 붉은 두 눈동자 가득 아르페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들어왔다. “아르페······ 이겼어?” “이겼어.” “끝났어?” “끝냈어.” “좋아······ 훌륭해. 아주 멋져.” 내심 다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르페는 그녀의 몫까지 훌륭히 적을 해치워준 모양이다. 에트나는 아르페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그것을 본 메테르가 그대로 경직되었다. “자, 잠깐만. 키스로 마무리하는 건 나여야 하는데!” “이미 다 해치웠지롱.” “으, 으으으! 역시 죽였어야 했는데!” 메테르가 분노했지만 모두 그것을 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이 정도 일에 화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가자.” “어디로?” “어디든.” 아르페는 굳은 얼굴로 답했다. 실로 비장하게, 과거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꾸었던 꿈을 입 밖에 내었다. “낙농업이 가능한 곳으로.” 20년이 흘렀다. 세상은 그야말로 대격변을 맞이했다. 모든 마족이 인간으로 변하고 마계와 인간계가 하나로 통합되었으며, 마족이 실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탄생한 존재라는 것이 밝혀졌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사실을 전 대륙인들이 실감했다. 비록 인간으로 화한 마족 중 일부가 현실에 납득하지 못해 이곳저곳에서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마계와의 전쟁을 치르며 강화된 인간들은 그런 일련의 사태를 가차 없이 진압했다. 평화가 찾아왔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깨달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마왕과 그 휘하 세력은 모두 깔끔하게 사라졌으며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디아스 국왕 시페넌 역시 본격적으로 정무에 착수했다. 1황비 르세티를 통해 황제에 충성하는 기사단을 육성하고, 2황비 아리아를 통해 신성국가 팔라티나와의 국교를 돈독히 한 그는 드높은 레벨과 그에 못지않은 인성으로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나라를 지켰으며 국민들을 지켰다. 그의 천직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아드 제국은 전 대륙 위에 우뚝 서는 데 성공했다. 사실 제아드는 디아스까지도휘하로 두고 싶었으나, 그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으며 현 대륙의 최강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어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차후 시페넌의 사후가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나,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한 두 나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리라. 용사 파티는 해체되었으며, 그대로 은거했다. 그들과 우호적이었던 이들도, 그들과 적대적이었던 이들도 결코 필사적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찾아내봤자 그들의 힘으로 용사 파티를 어떤 쪽으로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비로소 아르페는 200년 세월의 꿈 낙농업 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여보오.” “닭살 돋아!” 아침, 아르페는 메테르의 속삭임 한 방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히 신기와도같은 반응속도에 그의 이름을 부른 메테르가 까르륵 웃으며 좋아했다. “아직까지 쑥스러워하기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진짜.” “하지만 여보는 여보인걸.” “누가 아니래? 난 그냥 그런 말을 듣기 싫을 뿐이거든.” 여기서 그녀를 따라 달콤하게 응수해줬다간 어젯밤보다도 격렬한 2차전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을 요 20년간의 경험에 따라 익히 알고 있는 아르페는 일부러 퉁명스레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에나는?” “바디네랑 같이 우파 보러 갔어. 에트나는 밭에 갔고······ 미케나는 아직 자나 봐.” 우파란 그들이 키우는 젖소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한 마리로 끝이 아니다. 우파, 우파두부터 시작해 우파룸파까지 23마리의 젖소를 키우고 있었다. “미케나가 자고 있다면 당분간 날 방해할 사람은 없단 얘기지. ······그럼 나도 좀 더 자도 되겠군.” “응, 같이 자자. 슬슬 셋째 만들어야지.” “······아냐, 역시 일해야겠어.” 20년씩이나 지나면 지나치게 무거웠던 애정도 조금쯤 다른 감정으로 치환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메테르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아르페는 반쯤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메테르에게 나머지 반은 진담이었지 않느냐며 알밤을 먹이곤 집을 나섰다. 아니, 그 전에. “아, 애들도 불러줘. 귀찮지만 오늘은 마법학습날이니까 아침 일과 끝나고 바로 시작하게.” 아마도 아르페의 자녀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법. 아르페 부부는 날짜별로 교대하며 아이들에게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교육하고 있었다. “네에, 여보.” “으아아아!” 그녀의 마지막 기습 공격으로 닭살이 돋아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아르페의 뒷모습을 보며 메테르는 다시금 푸근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에게 가져다줄 쉐이크를 만들고, 아이들을 위한 밥상을 차린 후 다 같이한 방에 모여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려 방에 들어섰다. “얘들아, 일어나야지?” 아이는 총 일곱 명이었다. 메테르가 낳은 남매, 바디네가 낳은 여자아이, 에트나와의 사이에서 본 기운찬 남자 쌍둥이, 미케나가 낳은 하프 엘프 남자아이, 마지막으로 시에나가 낳은 공주님. 당연하지만 한 번 부른다고 일어나주지는 않는다. 메테르는 배에 힘을 넣고 다시 한 번 우렁차게 외쳤다. 현직 용사의 워크라이는 아무런 무리 없이 아이들을 잠에서깨어나게 했다. “또 워크라이 썼지, 엄마! 애들 운다니까!” 첫째 히르티가 아이들을 대표해 항의했으나 메테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따름이었다. “밥 먹으렴, 얘들아. 오늘은 아빠가 마법 가르쳐주신대.” “우우, 아빠가 제일 빡세. 난 그냥 우파룸파나 키우면서 우리 농장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데.”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한 거랬어, 바보 오빠.” 일어나면서 투정을 부린 게 언제냐는 듯, 아이들은 소란스럽게 떠들며 어머니 메테르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메테르는 자녀들의 뒤를 따랐다. 입가에 절로 흐뭇한미소가 그려졌다. “응, 이걸로 됐어. ······이젠 되돌릴 필요도 없겠어.” 20년의 세월은 아무런 흠도 없이 평화로웠다. 그동안 그녀의 고유능력 2단계는 단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다. < Epilogue. 완전한 세계 > 끝 ⓒ 토이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