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복수의 끝 쿠르릉-!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듯 바싹 타버린 하늘이 구슬프게 울었다. 검은 하늘 속에선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거센 비바람을 타고 휘몰아쳤다. 콰르릉-! 잿빛 하늘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고, 빛이 번쩍이며 대지를 환히 비추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두 개의 덩어리와 작은 누군가의 인영을 관통하며 대지 위로 떨어졌다. 거대한 두 개의 덩어리는 각각 금빛과 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에서 터진 섬광에 의해 드러난 그 빛의 정체는 바로 드래곤이다. 금빛의 정체는 골드 드래곤 페르디난드였고, 은빛의 정체는 실버 드래곤 루시어스였다. 그 두 드래곤 외에도 작은 뭔가가 보였다. 콰르릉-! 번쩍이는 번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창백해 보이는 인상의 아름다운 여성 엘프였다.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려 팔짱을 끼고 있는 것으로 여유를 가장하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만하기 그지없으며,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이 공포에 절어 떨고 있었다. 그들은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을 완전히 버렸는지 본체의 모습을 한 채 그 몸을 떨고 있었다. 두 마리의 드래곤 사이에서 떨고 있는 엘프 여인도 실상은 드래곤이었다. 윤기 나는 아름다운 금발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그녀는 드래곤 중 가장 강하다는 레드 드래곤이다. 레드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금발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는 그녀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면에 웃음을 드리우고 있던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였다. 허공에 떠 있는 그들 세 마리의 드래곤들에게는 몸을 떨고 있다는 것 외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의 그 큼직한 눈이 단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밑에 있는 한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르릉-! 번쩍이는 번개가 조명이 되어 대지를 비추었다. 그리고 빛이 반사되어 더욱 환하게 빛나는 호수의 물에 누군가 보였다. 그곳에는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인간이 서 있었다. 그 인간은 호수 속에 발목이 잠겨 있었고, 붉은 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다. 그가 흘리는 붉은 물은 비바람에 섞여 떨어져 내렸고 맑은 호수의 물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떨어져 내렸다. 붉은 물감이 물속에 퍼지듯 그가 흘리는 붉은 액체는 호수의 물과 섞여 나갔다. 그가 흘리는 붉은 물은 두 곳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복부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그의 두 눈동자에서 기다란 강줄기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붉은 액체를 쏟아내며 호수의 물을 탈색시키는 인간은 바로 로얀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뾰족한 에리오네를 박아 넣은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눈물은 맑고 투명하지 않았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붉은색의 색채를 띄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눈물이 아닌 짙은 혈향을 지닌 붉은 피였다. 고오오오-! 로얀의 발밑에서 출렁이는 호수가 붉은 피로 물들어 갈 때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 검은 기류는 빛의 성지에서 발록 파라무트가 뿜어내던 마기보다도 짙었고 거대했다. 그 검은 기류는 어둠이 되어 검게 타버린 하늘을 가득 메웠고 하늘이 뿜어내는 섬광도 그 어둠에 가려져 버렸다. 바르르- 검은색 기류가 로얀의 몸을 감는 순간 세 마리의 드래곤이 내는 떨림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들의 떨림이 더욱 심해진 것은 로얀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는 순간부터일 것이다. 로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류가 뿜어내는 기운은 드래곤들도 생전 처음 겪는 느낌이었다. 차갑고, 섬뜩하며, 온몸의 공포를 긁어내는, 그런 괴이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족의 마기는 분명 아니었다. 고오오오오-! 검은 기류는 소용돌이가 되어 로얀의 모습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검은 기류를 보면서도 로얀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인형처럼 그의 눈동자는 멈추어져 있었다. 흘러내리던 붉은 눈물도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로얀이 검은 기류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로얀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의 몸속 깊은 곳에서 강한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서 떠나야 한다!' 몸 깊숙한 곳에서 들려온 본능의 외침이었지만 그들 중 몸을 움직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들의 발을 묶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힘이 그들을 묶고 있었기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허공에 묶여 있을 때 로얀은 검은 기류 속에서 몸이 흐려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거대한 힘이 로얀에게로 휘몰아쳐 왔다. 쿠오오오-! 그 힘은 로얀의 몸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듯 그의 몸을 관통하며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힘이 바로 그의 몸 주위를 돌던 검은 기류들이었다. 로얀의 몸 깊숙이 박혀 있는 에리오네는 검은 기류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그의 몸 또한 부서지듯 무너져 내렸다. 휘오오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이 검은 기류로 변해버렸고, 그 기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머물며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서서히 어떠한 형체를 지니기 시작했다. [세 번째의 생명이 꺼졌다. 그리고 세 번째의 봉인이 풀렸다.] 죽음 뒤에 항상 하나의 의식처럼 들려오는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어둠의 기류 속에 잠긴 로얀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와 그의 머릿속에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세 번째 봉인의 대가는 살아 숨쉬기에 느꼈던 것들이다.] [혼돈의 정령왕은 살아 숨쉬는 생명이 아니다.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배고픔도 없으며 아픔도 없을 것이다. 물을 부수고 바람을 가른다고 해서 그들이 상처를 입고 죽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언제나 그랬듯이 이내 기억 속에서 지워질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너무도 뚜렷이 로얀의 머릿속에 그 말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깊게 박혔던 각인은 사라져 버렸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말 중 아픔이라는 것은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무병장수를 하게 된 것이었다. 휘오오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말이 끝난 뒤에 검은 기류는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그리고 만들어져 가던 형체의 모습도 점점 뚜렷해져 갔다. 검은 기류가 만드는 형체의 모습은 로얀의 모습이었다. 검은 기류는 돌이 하나의 조각상으로 태어나듯 그의 모습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를 비롯한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도 만들어졌고, 그가 입고 있던 옷도 완벽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휘오오오-! 로얀의 형체가 완전해지자 검은 기류는 바람에 씻겨 나가듯 사라져 버렸다. 로얀의 얼굴을 적셨던 붉은 피도, 복부에 에리오네가 박혀 있던 부분도 깨끗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에리오네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로얀의 허리에 매여져 있었다. 검은 기류가 사라진 자리는 너무도 고요했다. 세 마리의 드래곤을 압박하던 강대한 힘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휘몰아치던 바람도 조용히 침묵했다. 죽음 뒤에 다시 태어난 로얀에게선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을 보는 듯했다. 그의 눈은 깊게 감겨져 있었고 미미한 떨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호수 위의 조각상이 되어 가만히 서 있던 그를 호수의 잔물결이 그의 발목을 간질이며 깨웠다. 스윽. 호수의 잔물결에 응답하듯 로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깊게 가라앉은 검은 심연의 눈동자가 모습을 보였다. 그가 눈을 떴다고 해서 강한 힘이 다시 느껴진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 마리의 드래곤은 어쩐일인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세 마리의 드래곤은 멍하니 로얀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 어떻게 다시 살아 있을 수가 있지?] 그들이 미동도 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도 놀란 탓이었다. 루시어스가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의문점을 밖으로 꺼내었다. 그 목소리에 로얀은 고개를 움직였다. 스윽. 로얀은 비를 맞으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움찔. 그의 눈동자가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이실리아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를 대한 이실리아의 몸은 움찔거렸다. 멋대로 움직인 자신의 몸에 화가 난 것일까? 그녀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플레어! 헬파이어!" 화르르륵! 불의 속성을 지닌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가 펼치는 화염게 마법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화염계 7서클 마법 플레어와 8서클 마법 헬파이어가 하늘에서 추락하듯 로얀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콰하하항-! 세상을 뒤엎을 듯한 굉음을 터뜨리며 하늘에서 퍼져나가는 홍염의 불꽃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지금 이실리아의 머릿속엔 드래곤 로드에 관한 걱정은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오직 눈앞의 로얀을 죽이는 것이었다. 대지 위로 서서히 내려앉은 이실리아의 마법은 조용히 주위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모든 것을 태워갔다. 초고온의 화염 마법인 플레어와 헬파이어는 조용히 대지 위로 내려앉아 대지를 녹였고, 호수를 증발시켰다. 치지지직! 뜨거운 열에 호수의 물은 자신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알리듯 하얀 수증기를 내뿜었고 호수 주위는 하얀 수증기로 가려졌다. [피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맞았으니 이정도면 죽지 않았을까?] 수증기 속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페르디난드가 로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뿌연 수증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말에도 이실리아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이실리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니, 이 정도론 죽지 않았을 거야." '어떻게 다시 살아났지?' 이실리아의 머릿속엔 로얀이 어떻게 살아났는지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녀는 로얀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시 살아난 뒤로 계속 이같은 의문을 품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떠한 생명체건 죽었을 때 언데드가 되지 않는 한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그것은 지상 최강의 존재라는 드래곤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시어스, 다시 발동해!" 이실리아는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루시어스를 향해 외쳤다. 이실리아의 말에 실버 드래곤 루시어스는 즉시 마법을 펼쳤다. 그녀는 지금껏 이실리아가 이렇게 흥분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무조건 그녀의 말을 따랐다. 이실리아의 명을 받은 루시어스가 펼친 것은 정령석을 이용해 정령의 힘을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로얀과는 너무도 질긴 악연으로 얽혀 있는 주문이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자연의 원소들이여, 저기 평온한 안식처에 내려앉아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리라.] 화아아앗! 곳곳에 박혀 있던 정령석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고 주위에 퍼져 있는 정령의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연 속에 퍼져 잇는 정령의 힘과는 다른 강한 힘이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로얀의 힘이 빨아들여 질 때 느꼈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그 힘이 정령석에 빨려 들어가자 정령석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실리아는 그런 점까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는 로얀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해하며 주위를 세심히 살펴보았다. "역시 살아 있어! 쥐새끼 같은 놈!" 로얀의 모습을 숨겨 주려는 듯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지만 드래곤인 이실리아의 눈을 가릴 순 없었다. 후우웅. 이실리아가 눈을 부릅뜨며 로얀을 찾고 있을 대 페르디난드는 한숨을 쉬며 루시어스를 바라보았다. 루시어스는 마법이 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루시어스, 왜 그래?] [너, 너무 강한 힘이......] 루시어스의 말이 떨리고 있었고 도중에 끊겨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곳곳에 묻어 두었던 정령석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쾅! 펑! 펑! 펑! 하나가 폭발하자 연달아 정령석이 폭발했고 대지를 진동시켰다. 얼마나 많은 정령석을 묻어 두었는지 그 폭발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꺄아아아악!] 정신을 집중한 채 정령석으로 흘러 들어오던 힘을 제어하고 있던 루시어스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정령석을 제어하려다 실패했기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상당한 힘을 소모한 모습으로 루시어스는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를 썼다. 그녀의 그런 모습과 폭발하는 정령석에 페르디난드는 깜짝 놀라며 루시어스를 향해 날아갔다. 로얀을 찾던 이실리아도 갑작스런 사태에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황급히 사태 파악에 나섰다. 휘오오오! 정령석이 폭발하자 그 안에 있던 로얀의 힘과 자연 속에 숨쉬던 정령의 힘이 개방되어 퍼져 나갔다. 그 힘은 검은 기류가 되어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휘오오오-! 검은 기류가 집결하는 그 중심엔 로얀이 있었다. 로얀은 검은 날개를 펼쳐 보이며 하늘에 떠 있었다. 그의 힘을 빨아들이던 정령석이 한계치를 초과해 버려 하나 둘 터져 버린 것이다. 이실리아가 깔아 놓은 정령석은 모두 최상급의 것이었지만 분명 한계는 있었다. 마나석이든 정령석이든 힘을 받아들이고 낼 수 있는 만큼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돌의 계급이었다. 그리고 그 정해진 힘을 초과한다면 힘을 가둬두는 벽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로얀의 힘을 받아들이던 정령석들은 하나둘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펑! 펑! 펑! 그리고 폭발음 속에서 정령석 안에 갇혀 있는 힘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정령석 안에 있던, 로얀이 죽기 전 흡수당했던 힘과 자연 속에 퍼져 있던 정령의 힘이 돌 속에서 하나가 되어 풀려났다. 그 힘은 모두 로얀의 몸속으로 하나둘 흡수되기 시작했다. 정령석에 뭉쳐 있던 힘이 하나로 모인 것은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주위를 맴도는 정령의 힘이 만들어내는 빛 무리 속에서 로얀은 허공에 뜬 채로 이실리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날 찾을 필요 없다. 내가 널 찾아갈 테니." 그의 음성은 삭막했고 차가웠다. 스윽. 화르륵. 로얀의 두 손에 화염이 일렁였다. 오른손의 화염은 눈이 따가울 정도의 붉은 화염이었고, 왼손에 맺혀 있는 화염 또한 그에 못지않은 초고온의 화염이었다. 마나에 친숙한 이실리아는 로얀의 양손에 맺힌 화염의 정체를 단박에 눈치 챘다. 바로 자신이 날렸던 플레어와 헬파이어였던 것이다. 레드 드래곤이 사용한 화염계 마법엔 특별한 힘이 있었기에 이실리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마법은 원거리 마법이었지만 로얀이 펼친 것은 그의 양손에 머물러 있었다. 그 절대 고온 속에서도 그의 손은 작은 화상조차 입지 않았다. 스윽. 로얀은 시뻘건 손을 이실리아를 향해 천천히 들어 보였다. "처절한 고통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게 해주마." 화아앗! 슈아앙! 그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펼쳐졌고, 그는 빠른 속도로 이실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이실리아는 다가오는 로얀을 보며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슈아앙! 그는 그녀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페르디난드!" 루시어스의 상태를 살피던 페르디난드가 있는 곳이었다. 이실리아의 날카로운 외침에 페르디난드는 급히 몸을 돌리며 마법을 시전했다. 그가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대항 한 번 못 해보고 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로얀의 움직임은 빨랐다. 페르디난드는 날아오는 로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드래곤답게 시동어 하나만으로 카이저 실드를 펼쳤다. [카이저 실드!] 로얀은 눈앞에 펼쳐지는 두터운 실드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플레어가 맺혀 있는 왼손을 휘둘렀다. 콰하하항! 붉은 화염이 그의 손에서 퍼져 나갔다. 그의 손은 카이저 실드를 서서히 녹이며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크으으윽!] 페르디난드는 점점 다가오는 고온의 열기에 괴성을 질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이실리아는 급히 마법을 시전했다. 지금 그녀의 눈엔 녹아 버릴 것만 같은 카이저 실드 안의 페르디난드보단 등을 보이고 있는 로얀만이 보였다. "죽어라! 프로미넌스!" 8서클 화염계 마법인 프로미넌스를 시전하자 그녀의 주위로 초고온의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프로미넌스는 형태만 본다면 파이어 볼과 매우 흡사했지만 그 속은 완전히 다른 화염계열의 마법이었다. 파이어 볼보다 크기도 작았지만 프로미넌스로 인해 떠오른 화구는 초고온의 화염이 똘똘 뭉쳐져 있었다. 후우웅! 콰가가강! 수십여 개의 화염구가 이실리아의 손짓에 로얀의 등을 노리며 날아갔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붉은 화구는 곧 강한 폭발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얼마나 강한 폭발이었는지 천지가 뒤흔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모습에 이실리아의 얼굴에서 떠오르려던 웃음이 지워졌다. 바로 앞에 있던 로얀이 텔레포트라도 쓴 듯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프로미넌스는 페르디난드가 펼친 카이저 실드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실리아는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로얀이 자신에게 등을 보이자 무작정 마법을 난사한 것이 그녀의 실수였다. '저 인간이 마법도 쓴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그녀는 로얀이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간이라 자신이 방심해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로얀은 마법을 써서 프로미넌스를 피한 것이 아니었다. 로얀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고온의 열에 급히 하늘로 치솟아 오른 것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전보다 더 빨라진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크윽! 이실리아!] 페르디난드는 이실리아에게 화를 내며 비틀거렸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그의 카이저 실드를 부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 로얀은 페르디난드의 위에 나타났다. 그는 위에서 페르디난드의 거대한 금색 등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를 덜어 줘서 고맙군." 슈아앙! 흠칫! 페르디난드는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로얀을 보며 다시 카이저 실드를 펼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로얀은 이미 페르디난드의 몸에 당도해 있었던 것이다. 로얀의 왼손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오른손은 시뻘건 헬파이어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오른손을 페르디난드의 등판에 꽂았다. 푸욱! 치이이익! 레드 드래곤이 펼친 헬파이어보다 뜨거운 화염이 페르디난드의 단단한 가죽을 녹여버리며 파고들자 단백질이 타는 쾨쾨한 냄새가 뿌연 수증기와 함께 퍼져나갔다. [끄아아아악!] 그리고 페르디난드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다. 푸욱! 푸우욱! 치지지직! 로얀은 페르디난드가 몸을 뒤흔들며 요동을 칠수록 손을 더욱 더 깊게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페르디난드는 끔찍한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살 속을 파고드는 로얀의 손은 집요했고, 잔혹했다. 손을 집어넣었을 때에 느낀 물컹거리는 느낌이 곧 딱딱한 느낌으로 변해 갔다. 보이진 않지만 페르디난드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푹! 팔 하나를 완전히 페르디난드의 몸속에 집어넣으려던 로얀은 다가오는 인영에 급히 팔을 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후웅! 그가 있던 자리로 날카로운 빛이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다가온 이실리아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와 늘씬한 검신을 뽐내는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레어에서 검을 소환한 것이었다. 명색이 드래곤이 들고 다니는 검답게 그 검은 서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명검이라 할 만한 검이었다. 그 검은 강한 마나까지 뿜고 있었다. 바로 마나를 담고 있는 마법검이었다. 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내뿜고 있었는데, 그건 이실리아의 검술 실력이 아니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는 마법검의 힘 덕분이었다. 드래곤들 중 검술을 깊이 있게 익히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애써 육체를 단련시켜 힘들게 검술을 연마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천성이 게으르기로 유명한 드래곤들이 아닌가. 밤낮으로 검을 휘두르며 훈련할 별종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누구나 명검이나 이름난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장식용으로 그저 지니고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유희를 즐길 때에 액세서리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실리아가 들고 있는 마법검도 그런 검 중 하나다. 이실리아는 페르디난드가 로얀에게 공격당한 것이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랫기에 늦기 전에 몸을 날린 것이다. 그리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마법검까지 소환을 했다. 사실 이실리아에게 페르디난드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로얀의 손이 페르디난드에게 깊숙이 박혀 있었기에 기회라고 생각했고, 다가와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하지만 로얀은 이미 그녀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쉽게 그녀의 검을 피할 수 있었다. 로얀은 이실리아의 머리 위에서 그녀를 향해 낮게 말했다. "너는 마지막이다." 그때, 콰하하항-! 로얀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불빛에 급히 다크리온을 뽑아 휘둘렀다. 나머지 한 마리를 잊고 있었기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당황한 건 어디까지나 순간일 뿐이었다. 로얀에게 공격을 가한 이는 멀리서 마법으로 인한 상처를 돌보고 있던 루시어스였다. 그녀는 로얀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페르디난드의 몸에 손을 집어넣자 페르디난드 때문에 쉽사리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얀의 손은 이실리아의 공격에 의해 빠져버렸고, 그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순간을 루시어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드래곤 브레스를 쏘았던 것이다. 바로 앞에까지 날아온 브레스는 곧 로얀이 내뻗은 넓적한 검신을 지닌 다크리온에 가로막혔다. 콰하하항-!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엄청난 위세로 날아오던 루시어스의 브레스는 놀랍게도 다크리온에 가로막혀 좀처럼 나아가질 못했다. 로얀이 오러 블레이드를 펼친 것도 아닌데 브레스는 다크리온을 뚫지 못했다. 다크리온의 주위에 강한 기의 소용돌이가 방패처럼 퍼져 빠져나가려는 브레스를 붙들고 있었다. 그가 죽기 전 펼칠 수 있었던 것 중 가장 강하다 할 수 있는 금빛 오러는 아니었지만 그의 검은 강했다. 과거 한 검에 미친 드래곤이 말했던, 신이라도 벨 수 있다는 오러가 다크리온의 검신에 맺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맺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크리온 자체가 그 오러였다. 다크리온의 속에 강한 오러가 알갱이처럼 뭉쳐져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크리온의 검신 자체가 오러가 되어 있었다. 그 다크리온은 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브레스가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콰하하항-! 거세게 울부짖던 브레스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자 점차 그 힘을 잃어갔고, 점점 불꽃이 꺼지듯 잠잠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스윽. 널찍한 검면을 지닌 다크리온에 가려져 있던 로얀의 얼굴이 브레스가 소멸되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은 정확히 루시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칫. 루시어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몸 속 깊은 곳에서 위험 경보음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슈아아앙! 루시어스를 보며 뭔가를 생각하던 로얀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결단을 내렸는지 오른손엔 다크리온을 들고 루시어스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의 등에 달린 날개는 도약하는 데에 전혀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날개는 출발할 때가 훨씬 빨랐다. 로얀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더니 앞으로 튕겨지듯 날아갔고, 그의 검은 날개가 검은 빛을 흩뿌렸다. [카이저 실드!] 후웅! 콰가가강! 로얀이 접근해 오자 루시어스는 급히 실드를 펼쳤지만 로얀의 검 앞에 그녀의 카이저 실드는 너무도 쉽게, 종이 잘리듯 잘려 버렸다. 턱! [......!] 카이저 실드를 가르고 날아든 로얀은 사뿐히 루시어스의 입 앞으로 날아왔고,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입을 잡고 벌렸다. 그는 날카로운 이빨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드래곤의 크기가 워낙에 컸기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드래곤의 엄청난 턱 힘을 로얀은 한 손으로 벌려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당황하는 한편,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온 힘을 다해 입을 다문다면 로얀이라도 자신의 힘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분이 영 찝찝하지만 씹어 삼키면 그만이었다. 드래곤의 몸속에 존재하는 위장액은 여타 다른 생명체의 것과는 달랐다. 어떠한 생명체라도 드래곤의 몸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 루시어스는 생각하고 있었기에 로얀을 그대로 삼키기로 했다. 콰직!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기 위해 힘을 쓰기도 전에 괴성을 질러야 했다. 다크리온이 억지로 그녀의 살을 비집고 들어온 탓이었다. [크아아앙!] 다크리온이 하늘로 향하며 비스듬히 루시어스의 입 천장을 꿰뚫은 것이었다. 비스듬히 박힌 다크리온의 검신을 타고 붉은 피가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리고 루시어스의 혀를 적셨고, 그녀의 턱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뾰족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던 루시어스는 짐승처럼 부르짖으며 하늘에서 몸부림쳤다. 로얀은 박혀 있는 다크리온을 잡고 그녀의 입을 벌린 채 왼손을 뻗었다. 그의 왼손이 향한 곳은 그녀의 어두운 동굴 같은 목구멍이었다. "이대로 죽어라." 차갑게 말하는 로얀의 음성이 짙은 살기보다도 싸늘했다. 깊숙한 동굴처럼 보여서인지 그의 음성이 멀리멀리 울려 퍼져 그녀의 가슴속까지 와 닿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디난드는 너무도 놀라 허둥대야만 했다. 로얀이 루시어스의 입속에 있는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실리아는 로얀의 음성과 지금 그의 행동을 바라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루시어스의 입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에 눈이 부릅떠졌다. "안 돼! 루시어스!" 친분이 있는 몇 안 되는 드래곤 중 하나인 루시어스가 죽음에 직면에 있다는 것을 이실리아는 느꼈다. 바로 로얀의 왼손에 회오리치는 마나를 보면서 말이다. 지금 로얀의 왼손에 모여드는 마나들. 그건 마치 드래곤이 입을 벌려 브레스를 쏠 때에 마나를 모으는 것 같았다. 느껴지는 힘의 파동이며 모든 것이 같았다. 그 브레스는 실버 드래곤의 브레스인 듯했다. 그러한 일련의 모습에 이실리아는 왜 로얀이 마지막 작별인사처럼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실리아의 뾰족한 외침을 루시어스는 들을 수가 없었다. 다크리온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영원히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 콰하하하항-! [커허헉!] 로얀의 왼손에서 실버 드래곤의 브레스가 쏘아져 나갔다. 브레스는 그녀의 입안을 태우며 긴 동굴 속을 관통했다. 푹. 탓. 로얀은 다크리온을 들고 천천히 루시어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하늘 높이에 그녀의 거대한 몸이 풍선 터지듯 터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후두두둑. 쏴아아아-! 붉은 피와, 시뻘건 살점과, 퍼붓는 비가 한데 어우러져 대지 위로 쓰러졌다.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루시어스는 그렇게 죽어 버렸다.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으로 태어났던 그녀의 마지막은 너무도 비참한 죽음이었다. [루, 루시어스!] "루시어스!" 페르디난드는 크게 격노했고, 이실리아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페르디난드는 화가 나 외친 것이었지만 이실리아가 파리하게 질린 것은 로얀이 브레스를 펼친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든 마스터라는 검술 실력에 8서클에 달하는 마법만으로도 벅찬 상대였다. 거기에 이제는 브레스까지 쓴다니! 이실리아는 문득 저 인간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애써 부인하며 로얀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드는 페르디난드의 뒤를 따랐다. 페르디난드는 루시어스의 끔찍한 결말에 이성을 상실한 듯 크게 격노하며 달려들었다. 콰하하항-! 그는 루시어스가 당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브레스를 쏘며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과연 드래곤에게서 마법과 브레스를 빼면 무엇이 남게 될까? 그가 브레스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르릉. 로얀은 날아오는 골드 드래곤의 브레스를 보며 에리오네를 뽑았다. 로얀의 모습은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는 다크리온을 빙글 돌리며 루시어스의 브레스를 막았던 것처럼 페르디난드의 브레스를 막았다. [블리자드! 썬더 스톰!] 휘오오오-! 콰르르릉-! 연이어 페르디난드는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펼쳤다. 자신의 브레스를 막는 것을 보았기에 그는 브레스를 쓰지 않았다. 얼음의 비가 먼저 내려 주위를 얼려 버렸고 연달아 터진 번개의 폭풍이 얼려진 대지를 부수며 파괴해 갔다. 얼음과 번개가 서로 어우러져 배로 강한 파괴력을 토해 내었다. 하지만 그런 파괴력에도 그 중심에 선 로얀은 너무도 태연히 서 있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얼음의 비도, 파괴적인 번개도 뭔가에 가로막혀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얀은 두 팔을 내뻗었다. 한 손에 들린 에리오네는 서늘한 한기를 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 들린 다크리온은 번뜩이는 전류를 흘리고 있었다. 에리오네에 의해 펼쳐진 블리자드는 페르디난드가 펼친 블리자드와 맞부딪혀 서로 공멸해 갔다. 다크리온에 의해 펼쳐진 썬더 스톰 역시 페르디난드가 펼친 썬더 스톰을 부숴갔다. 휘오오오-! 콰지지직-! 서로가 공멸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얀의 블리자드와 썬더 스톰은 소멸되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로얀의 마법이 페르디난드가 펼친 마법을 부수고 있었다. 스윽. 하지만 두 마법은 로얀이 손을 거두자 언제 있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를 쏟아지는 비가 대신했다. 쏴아아아-! 슈아아앙! 페르디난드의 공격을 무산시켜 버린 로얀은 그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페르디난드의 등에 뚫어 놓은 구멍 위에 당도했다. 빙글. 로얀은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돌리며 검신이 아래로 향하게 했다. 슈앙! 푸욱! [크아아아!] 로얀은 힘껏 밑을 향해 에리오네를 던졌고, 에리오네는 아무런 방해 없이 로얀의 팔이 뚫어 놓은 구멍 속을 헤집고 들어가 버렸다. 살이 구워지고 베이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페르디난드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충격을 받았다. 스윽. 흠칫. 페르디난드의 주위를 맴돌던 로얀의 눈이 이실리아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으득. "폴리모프." 이실리아는 이를 갈며 들고 있던 마법을 돌려보낸 뒤 본체로 현신했다. 이 모습으론 도저히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본 모습으로 돌아가건 말건 로얀은 페르디난드의 거대한 몸을 바라보았다. 에리오네를 등에 꽂고 있는 그의 육중한 몸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마검과 성검으로 펼칠 수 있는 기술이 있지." 로얀은 다크리온을 빙글빙글 돌리며 페르디난드의 등에 박혀있는 에리오네를 힐끔 쳐다보았다. [서, 설마! 네놈!] 드래곤인 페르디난드가 마검과 성검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검과 성검이 서로 부딪히면 강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말이다. 슈아아앙! 로얀은 페르디난드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실현시켰다. 힘껏 다크리온을 페르디난드를 향해 던진 것이었다. 로얀이 멀리서 검을 던진 것은 마검과 성검이 부딪히면서 나는 파괴력은 그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검과 성검의 성질을 항상 잘 이용하는 그였다. 페르디난드는 급히 피하려 했지만 육중한 몸을 지닌 그의 움직임보다 다크리온이 더 빨랐다. 다크리온은 주인의 뜻을 배신하지 않았다. 정확히 페르디난드의 몸에 박혔고, 그의 몸속에서 동료라 할 수 있는 에리오네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강한 섬광을 터뜨렸다. 쾅-! [크아아아!] 굉음과 함께 붉은 피와 붉은 살점이 튀었다. 페르디난드의 금색 찬란한 등이 터져 나간 것이었다. 몸속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 앞에서는 단단하기로 소문난 드래곤의 가죽도 무용지물이었다. 그 폭발을 일으킨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는 하늘을 선회하며 로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흘러들어 갔다. 쏴아아아-! 역시나 루시어스 때와 마찬가지로 빗줄기와 함께 페르디난드의 붉은 피가 대지에 흩뿌려졌다. 어느새 그 맑던 호수는 피의 호수로 변해 있었다. 그 푸르던 나무는 피의 나무가 되어 붉은 눈물을 흘렸다. 슈아아앙! 등이 터져 나갔다고 해서 페르디난드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쿠어어어!] 페르디난드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질렀다. 입에선 타액과 함께 붉은 피를 철철 흘렸고 이지를 상실한 광룡처럼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 페르디난드에게 다가선 로얀의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루시어스와는 달리 아무런 말 없이 손에 들려 있는 다크리온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다크리온이 호선을 그린 곳은 페르디난드의 굵직한 목 앞이었다. 스거거걱! 그때, 닿지도 않았는데 섬뜩한 소리가 페르디난드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살이 베이고 뼈가 갈리는 소리였다. 주르륵. 골드 드래곤 페르디난드의 사람 머리통보다 더 큰 큼직한 눈동자에서 붉은 폭포수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츄화화확! 페르디난드의 목은 서서히 움직였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육중한 몸에서 떨어져 나와 추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피를 철철 흘리는 드래곤의 고깃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쿠우우웅! 육중한 몸과 머리답게 각기 다른 무겁고 육중한 소리를 내뿜으며 바닥으로 떨어져 피를 흩뿌렸다.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를 순식간에 해치워 버린 로얀은 그들의 죽음에 가까이에 있었기에 그들의 피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다. 주르륵.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붉은 피가 로얀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스윽. 천천히 고개를 들어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의 몸보다 큰 거대한 드래곤을 보는 로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를 보던 눈과는 사뭇 달랐다. 지독할 정도로 강한 살기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이 날이... 이 순간이... 왔다." 그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그의 살기가 향하는 곳은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가 있는 곳이었다. 로얀이 만났던 그 어떠한 드래곤보다 레드 드래곤 이실리아의 몸은 육중했고, 느껴지는 힘은 강대했다.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이실리아는 로얀의 앞에 섰다. 서로가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본 채 대면하고 있었다. 이실리아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로얀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에게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이실리아는 침착하게 이때까지 로얀이 해왔던 싸움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서, 설마!' 로얀은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와 싸우면서 상대가 발휘한 마법을 그대로 시전했었다. 그가 펼친 마법 중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가 펼치지 않은 마법은 없었다. 8서클에 달하는 마법사라면 어째서 여러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화르르륵. 이실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로얀을 시험해 보기 위해 파이어 볼을 펼쳤다. 시동어 없이 화염의 구가 그녀의 주위에 생성되었다. 수십 개의 커다란 화염구가 공중에 뜬 채 이글거렸다. 화르르륵-! 생성된 파이어 볼은 즉시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로얀은 날아오는 화염구를 보며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화륵. 타오르던 화염구는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휘둘러질 때마다 반으로 갈리며 하나하나 소멸해 가기 시작했다. 후웅. 화륵! 마지막 화염구까지 소멸시킨 로얀은 이실리아가 쏘아 보낸 것처럼 주위에 커다란 화염구를 생성시켰다. 이실리아가 펼친 것보다 많은 파이어 볼이었다. 이실리아는 눈을 반짝였다. '정말... 그런 거란 말인가!' 화르르륵! 이실리아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로얀이 생성시킨 화염구가 비가 되어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쾅! 쾅! 쾅! 힘차게 날아간 파이어 볼은 이실리아가 생성시킨 실드에 가로막혀 모두 소멸해 버렸다. 로얀이 생성시킨 파이어 볼이 이실리아의 것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낮은 서클의 마법인 파이어 볼에 드래곤이 펼친 실드가 쉽게 부서질 리가 없었다. 이실리아는 로얀이 날린 파이어 볼이 모두 소멸하자 그에게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상대의 마법을 복사... 하는 건가?] "정확히 말해 상대의 기술을 복사하는 거지." 로얀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응대했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취했다. 이실리아는 로얀의 대답에 몸을 떨었다. '상대의 기술을 복사하다니?' 상대의 기술을 흡수하는 도플갱어가 있긴 했지만 상대의 기술을 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때 이실리아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영상이 있었다. 루시어스가 로얀이 펼치는 브레스에 죽는 모습이었다. [그, 그렇다면 브레스도 따라한 것이겠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받은 충격은 컸다. "......" 스윽. 이번에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로얀은 검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날개도 천천히 움직였다. 로얀이 움직임을 보이자 이실리아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드래곤에게서 마법과 브레스를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지금 이실리아가 믿을 건 자신의 거대한 몸뿐이었다. 아니,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었다. 팟. 로얀은 이실리아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검은 날개가 바람에 휘날렸고, 그는 빠른 속도로 이실리아를 향해 날아갔다. 후웅! 이실리아에게 다가가던 로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향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휘둘렀다. [카이저 실드!] 쾅! 이실리아는 급히 실드를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머릿속에서 로얀이 카이저 실드를 따라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생각났지만 그의 검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이실리아가 우려한 것처럼 로얀은 카이저 실드를 펼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몸이 카이저 실드를 두른 것처럼 강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반월." 스가가각! 로얀은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두 검에서 흑색 반월의 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이실리아의 카이저 실드와 부딪혔다. 쾅! 쾅! 쾅! 콰가가가강! [큭!] 후우우웅! 이실리아는 카이저 실드를 소멸시킨 직후 몸을 맹렬히 회전하며 긴 꼬리를 휘둘렀다. 그 꼬리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져 있었다. 턱. 쾅! 하지만 그녀의 꼬리는 로얀에 의해 막혀 버렸다. 그것도 그의 한 발에 의해 그녀의 꼬리는 허공에 멈춰 버렸다. 드래곤이 휘두른 꼬리의 힘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증거로 로얀이 그녀의 꼬리를 발로 막으면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실리아와 싸우고 있는 로얀은 페르디난드나 루시어스 때와는 달리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쉴 틈 없이 이실리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스윽. 로얀은 자신의 발에 막혀 버린 이실리아의 긴 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팔을 높이 들었다. 쏴아아아- 빛 속에서 하늘로 치솟은 다크리온이 번뜩이며 밑으로 하강했다. 서걱! 그의 팔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고 이실리아가 꼬리를 움직여 피하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번뜩이는 다크리온에 의해 단단한 가죽을 두른 이실리아의 붉은색 꼬리는 쉽게 잘리고 말았다. 잘린 그녀의 꼬리 끝부분이 밑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와 함께 그녀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쏴아아아- 붉은 그녀의 가죽보다도 더 붉은 피가 그녀의 잘린 꼬리 부분에서 흘러나왔다. [으드득!] 이실리아는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와는 달리 이를 악물며 흘러나오는 비명소리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날개를 움직여 로얀에게서 벗어났다. 비명만 지르고 있다간 로얀에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잘알기 때문이었다. 후웅. 눈을 부릅뜬 채 고통을 참아내려 애쓰는 이실리아를 보며 로얀은 다크리온을 가볍게 휘두르며 묻어 있는 붉은 피를 털어내었다. 스팟! 그 직후 로얀은 이실리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도중에 멈추어 서버렸다. 맹렬히 다가오던 로얀이 갑자기 멈추어 서자 이실리아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긴장했다. 쏴아아아-! 후우웁! 쏟아지는 빗속에서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늘어뜨린 로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크아아압!" 휘오오오! 로얀은 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소리를 내질렀고 그의 몸에서 강한 힘이 터져 나왔다. 흠칫.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었기에 이실리아는 로얀이 내뿜는 거대한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 설마 그때의......] 이실리아는 로얀의 몸을 감싸는 검은 기류와 하늘을 뒤덮는 어둠을 보며 지난 싸움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정령석 속에서 힘을 빨리며 비틀거리던 로얀이 최후의 기술을 펼칠 때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몬스터들을 몰살시키다시피 했던 그 기술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휘오오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을 타고 검은 기류가 휘몰아쳤다. 로얀은 두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크 오브 데스티니." 파하하하핫! 로얀의 말이 울려 퍼지며 검은 섬광이 번뜩였다. [카이저 실드!] 눈앞을 가득 메우는 검은 기류를 보며 이실리아는 전력을 다해 실드를 펼쳤다. 쾅! 쿠구구궁! 카이저 실드와 검은 기류의 만남은 굉음을 동반했다. 이실리아는 점점 밑으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궁! 검은 기류가 카이저 실드를 힘차게 두드리며 이실리아를 밀어내고 있었다. 콰지지직! [이익!] 급기야 카이저 실드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이실리아는 온 힘을 실드를 펼치는 데에 쏟아 부었다. 드래곤이 죽을힘을 다해 펼치는 마법은 강했다. 금이 가긴 했지만 카이저 실드는 로얀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쩌쩌쩡! 그러나 카이저 실드는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이실리아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도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실리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어둠뿐이었다. 카이저 실드를 뒤덮은 것도 부족한지 그녀의 시야마저 가린 검은 기류로 인해 로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쿠구구궁! 검은 기류의 방망이질은 점점 더 거세어져 갔고, 그에 따라 이실리아의 몸도 서서히 아래로 추락했다. 콰하하항! 검은 기류가 굉음을 동반한 채 폭발해 버렸다. 이실리아를 쭉쭉 밀고 가던 검은 기류가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콰차차창! 검은 기류의 폭발에 금이 잔뜩 가 있던 이실리아의 카이저 실드는 처참히 부서졌고 그 여파로 인해 이실리아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니, 대지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크아아아!] 콰드드득! 다른 드래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실리아도 여성체임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의 몸집에 걸맞는 커다란 괴성을 내질렀다. 이실리아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쭈욱 미끄러졌고 그녀의 거대한 몸집에 숲의 나무들이 부서져 버렸다. 이실리아가 추락했을 때 하늘을 뒤덮었던 어둠은 사라지고 없었다. 쏴아아아- 비를 뿌리는 먹구름 때문에 어둡긴 했지만 아무것도 안 보일 만큼 어둡진 않았다. 스으으윽. 로얀은 보통 몬스터처럼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구른 탓에 부서진 나무와 흙을 몸에 묻히고 있는 이실리아를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찰박. 화아아앗! 로얀의 발이 촉촉하게 젖은 대지 위를 밟았다. 그의 등 뒤에서 그의 배경이 되어 주던 검은 날개는 바람에 휘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찰박찰박. 로얀은 아무런 말 없이 이실리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실리아는 카이저 실드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녀의 커다란 입에서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붉은 피가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 찰박찰박. 이실리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로얀을 보며 붉은 피를 흘리며 잘려져 나가던 페르디난드의 목을 생각해 냈다. 평생에 처음 보는 동족의 죽음. 드래곤의 죽음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수명을 다해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도 보기 힘든데, 처참하게 도륙당하며 죽어가는 드래곤은 얼마나 될까? 천족이나 마족에 의해 일어난 큰 전쟁 속이 아닌 이상에는 그런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드래곤이 처참하게 죽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이실리아는 바로 눈앞에서 두 명의 드래곤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죽는 것을 말이다. 이실리아는 몰려오는 두려움에 꾸역꾸역 밀려오는 피를 억지로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쿠쿠쿵. 그녀의 육중한 몸이 움직이자 피로 범벅이 된 레드 드래곤의 가죽이 아름답게 빛났다. 화르르륵! [이, 인간! 여기서 이만 끝내자.] 이실리아는 몸 주위에 커다란 화구를 생성시키며 사뭇 위협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녀의 말속엔 드래곤 피어도 담겨져 있었다. "......" 찰박찰박. 이실리아의 말을 못 들은 것일까? 로얀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이실리아는 다가오는 로얀을 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 그녀는 한 가지 마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10서클의 궁극의 마법을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메테오 스웜. 이 마법이라면 확실하게 이 숲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드래곤 로드에게 어떠한 벌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로얀을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운석을 소환해 비처럼 쏟아지게 하는 메테오 스웜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메테오 스웜을 쓰면 이 근처 모든 곳이 마법의 사정권 안에 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그녀 또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마법으로 워프를 하며 되지만 눈앞의 로얀에게 있는 기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로얀의 특기는 상대방의 기술을 복사하는 것이다. 만약 워프를 해 몸을 피한다고 해도 로얀이 똑같이 따라해 쫓아온다면 메테오가 무용지물이 됨은 물론이요, 따라온 로얀의 검에 죽음을 겪게 될 것이다. [이곳과 함께 널 완전히 날려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란 거지?" 이실리아는 로얀을 향해 온 힘을 짜내어 외쳤지만 그의 대답은 냉담했다. 찰박찰박. "무엇을 한다 해도 네가 나의 검에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스팟! 가까이에 다가온 로얀의 신형이 이실리아가 다시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앞으로 당도했고 그의 팔이 움직였다. 푸욱! 에리오네의 뾰족한 날이 창날이 되어 이실리아의 두터운 가죽을 꿰뚫고, 그녀의 몸속을 헤집었다. 후웅! 부우욱!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그녀의 몸을 갈랐다. [크아아아!] 그의 검은 그녀가 극심한 상처를 입히는 것을 피한 채 여기저기를 찢고, 가르며 고통만을 주고 있었다. 푸화화확! 쏴아아아- 쏟아지는 비로도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로얀의 온몸은 이실리아가 흘리는 피에 잠겨버렸다. 부릅! 자신의 몸을 난도질하는 로얀을 보는 이실리아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는 결국 메테오 스웜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피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저 인간을 눈앞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크하하하! 그래! 같이 가는 거다! 죽어라! 메테오 스웜!] 쿠오오오오! 그녀의 몸에서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갔다. 그 강대한 마나의 힘에 의해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운석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운석엔 고열의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운석들은 대지를 부수고 숲을 태웠다. 콰하항-! 콰하하항-! 더 이상 숲은 어둡지 않았다. 곳곳에서 터지는 폭발음과 타오르는 불꽃 앞에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이 숲은 환하게 빛났다. 부욱! 촤아아악! 크아아아-! "시끄러!" 로얀은 떨어지는 운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실리아의 몸을 난도질했다. "이것보다 더! 더한 고통을 내 동생이...... 으아아아!" 콰드득! 부우욱! 크아아아-!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온몸에 힘이 빠진 데다 꼬리까지 잘린 이실리아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로얀은 그녀를 페르디난드나 루시어스처럼 빨리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검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이실리아의 눈동자가 감겨져 갔다. 어느 순간 하늘을 뒤덮던 거대한 운석이 로얀의 등을 노리고 날아왔다. 그런데도 그의 움직임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파지지직! 콰가가강! 운석이 로얀을 덮치기 직전 운석이 하늘에서 부서져 내렸다. 하늘에서 부서진 운석의 잔해만이 로얀의 등을 두들겼고, 그는 계속해서 이실리아를 도륙해 나갔다. 차가운 얼굴로 미친 듯이 그녀를 난도질하는 로얀의 주위로 많은 수의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스르륵. 모두 모습이 각기 달랐지만 단 하나 공통된 점이 있었다. 모두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며 모두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로얀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날아오는 운석들에 달라붙으며 운석을 파괴했고 그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검은 그림자들에게 보호받으며 로얀은 과거의 모든 분노를 이실리아를 향해 퍼부어 나갔다. 쏴아아아-! 그렇게 로얀은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분노를 비와 함께 씻어내렸다. 34장 떠나는 인연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의 대륙은 서늘한 냉기 속에서 신비로움과 함께 아름다움을 뽐냈다. 겨울의 대륙은 밤이면 눈이 소나기처럼 내렸고, 아침이면 흰 눈이 가랑비처럼 내려왔다. 밤새 가득 쌓인 하얀 눈은 아침이 되면 햇빛에 녹아 겨울의 대륙이 눈 속에 완전히 파묻히는 것은 막아주었다. 겨울의 대륙은 네 개의 대륙에서 기후가 열악한 두 곳 중 한 곳에 속했지만 여름의 대륙처럼 식량난으로 인해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물론 겨울의 대륙도 식량이 항상 부족했고, 모두들 힘겹게 살아갔다. 그러나 겨울의 대륙에 사는 이들은 다른 이의 것을 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겨울의 대륙에 사는 사람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했다. 눈으로 뒤덮인 이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다른 대륙에서 겨울의 대륙에서 온 사람을 보는 것이 극히 드문 것도 모두 혹독한 추위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 겨울의 대륙에서 온 이들이 다른 대륙에서 보이기도 했는데, 그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이종족들이었다. 겨울의 대륙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종족은 이종족인 드워프였다. 몸이 옆으로 퍼져 있기 때문인지 드워프들은 냉기에 대한 내성이 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척박한 겨울의 대륙에 모여 사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가 크고 작은 산이 모여 있는 데다 광맥이 지천에 널려 있는 겨울의 대륙의 특징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가 혹독한 기후 속에서 드워프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이 살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인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두터운 털옷을 입고 다녔으며 차갑고 거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겨울의 대륙 출신의 사람은 꽉 막힌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대하기 힘든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드워프와 인간, 그리고 몇몇의 일부 몬스터들 외의 다른 종족은 겨울의 대륙에 살지 않았다. 요정족은 모두 추위에 약하기에 요정족에 속하는 엘프나 페어리족은 겨울의 대륙에서 살아 갈 수 없었다. 그런 추위와 외로움이 가득한 겨울의 대륙에는 거대한 산이 하나 있었다. 겨울의 대륙에 사는 인간들이 아무리 옷을 단단히 여며 입고 만반의 준비를 해도 오를 수 없는 높고 거친 산이 있었다. 그곳의 이름은 카야 산맥으로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산이자 겨울의 대륙에서 광맥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이 산맥의 주위엔 겨울의 대륙 전체의 드워프 마을 중 절반이 넘는 마을이 모여 있었다. 드워프들이 한 곳에 모여 있기에 사람들은 카야 산맥을 드워프들의 성지, 혹은 왕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휘오오오-! 카야 산맥의 정상에는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눈이 내렸다. 밑으로 한없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 칼날 같은 바람을 타고 카야 산맥을 휘감으며 떨어져 내렸다. 차가운 눈 속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들조차 카야 산맥의 정상엔 살지 않았다. 카야 산맥은 뼈를 시리게 하는 칼날 같은 바람과 급격하게 변하는 기후로 인해 아무리 추위에 강한 드워프라 해도 쉽게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휘오오오-! 오늘도 언제나처럼 카야 산맥의 정상에는 살을 에는 칼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심하게 불어왔다. 뽀드득 뽀드득. 항상 눈보라 소리만 나던 카야 산맥의 정상에 이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험준하기만 한 카야 산맥을 오르는 이가 있는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었지만 카야 산맥은 매정하기만 했다. 휘오오오-! 카야 산맥은 찾아온 손님을 쫓으려는 듯 더욱 세찬 바람을 불러일으켰지만 카야 산맥의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 손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꿋꿋이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뽀드득 뽀드득. 대륙의 하늘은 낮인데도 불구하고 밤처럼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카야 산맥을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카야 산맥의 방문자는 역시나 인간이 아닌 키가 작고 몸집이 큰 드워프였다. 어두운 하늘 아래 드워프는 한 손에 작은 랜턴을 든 채로 한 손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허리에 감겨 있는 줄이 흔들렸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랜턴이 흔들거렸다. 이 추위 속에서도 드워프의 손에 들린 랜턴 속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드워프의 작품답게 환하게 빛을 뿌리며 들고 있는 드워프의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산을 오르는 드워프의 허리에 감겨 있는 줄의 끝은 카야 산맥의 정상에 닿아 있었다. 과거 목숨을 걸고 이곳을 올랐던 그의 선조들이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오랜 세월 카야 산맥의 정상으로 인도해 주던 이 줄은 평범한 줄이 아니었다. 오리하르콘보다는 강도가 떨어지지만 단단한 바위도 자를 만큼 강하기로 소문나 있는 미스릴의 실로 만든 줄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카야 산맥의 정상에 있는 광맥에는 미스릴처럼 희귀한 금속이 묻혀 있었기에 드워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올랐다. 그리고 일말의 생존률이라도 높이기 위해 미스릴로 만든 줄을 달아 놓은 것이었다. 오래전 이곳을 발견했던 선조 드워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뤄낸 땀과 피와 노력의 결정체였다. 그 당시 이 줄을 달기 위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드워프가 죽었고 이 산에 뼈를 묻었었다. 그 후로 드워프들은 보다 수월하게 카야 산맥을 올랐지만 카야 산맥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드워프들은 카야 산맥의 정상을 오를 때마다 많은 인원을 동반한 채 올라왔다. 아무리 줄이 있다고는 하나 카야 산맥은 쉽게 넘볼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야 산맥을 오르는 드워프는 단 한 명이었다. 그의 앞에도 뒤에도 그 외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두터운 털옷을 입은 드워프는 광맥을 찾아가는 것 같지 않았다. 그에겐 작은 배낭 외에는 다른 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에게선 채광을 하기 위한 도구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험준한 카야 산맥에 광맥에 있는 진귀한 금속과 보석 외에 목숨을 걸고 오를 만큼 대단한 이유가 있다는 것일까? 카야 산맥을 오르는 드워프의 얼굴은 두터운 털로 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기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얀 눈이 다닥다닥 붙은 채 바람에 휘날리는 갈색 수염은 또렷이 보였다. 뽀드득 뽀드득. 꾸욱. 눈을 밟으며 한참을 올라가던 드워프의 손에 강한 힘이 가해졌다. 그가 이 산을 찾은 이유가 바로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휘오오오-! 강한 바람이 그의 움직임을 봉쇄하려 들었지만 드워프는 침착하게 한 손으로 줄을 잡고, 한 손으로 허리에 매어져 있는 작은 갈고리 같은 것을 꺼냈다. 퍼걱! 파사삭. 드워프의 손에 들린 갈고리 같은 것이 벽에 박혔고 하얀 눈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퍽, 퍽! 후두둑. 박혀 있는 갈고리를 힘껏 잡으며 그는 발끝으로 눈벽을 두드렸고 발판을 만들었다. 그렇게 갈고리를 벽에 박고 발로 발판을 만들며 드웦는 옆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카야 산맥의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멈춰선 뒤 산의 몸을 타고 옆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퍽! 뽀드득 뽀드득. 휘오오오-! 드워프는 칼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몸을 움직였다. 목숨을 건 행동이자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다. "하아, 하아." 가려져 있는 드워프의 입에서 천을 비집고 하얀 김이 뭉게뭉게 피어나며 하늘로 퍼져 나갔다. 튼튼한 가슴근육이 있을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아 많이 지친 듯했다. 얼마간의 고생 끝에 드워프가 도착한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치는 카야 산맥의 눈보라로 인해 동굴은 눈 속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지만 그는 신기하게도 찾아 내었다. 그는 입구를 뒤덮고 있던 눈을 천천히 치워 나갔다. 우르르륵! 눈이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번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눈사태라도 일어난 듯 눈이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쿠르르릉! 산의 벽을 타고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은 점점 커져갔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파도가 되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얀 눈을 거두자 드러난 동굴은 성인 인간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옆으로는 꽤 길게 뚫려 있었고, 높이도 적당했기에 드워프가 들어가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입구부터가 괴상한 모양을 지니고 있는 동굴이었다. 뚜벅. 뚜벅. "후욱, 후욱." 드워프의 발에서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있던 천을 밑으로 살짝 내렸다. 오랜만에 나온 그의 입이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여기도 오랜만이구나." 모자를 벗으며 말하는 드워프의 눈동자는 옛 과거를 생각하는 듯 젖어 있었다. 랜턴에 의해 밝혀져 있는 동굴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자연 속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동굴이었다. 눈만 아니라면 다른 대륙의 산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흔한 동굴이었다. "거기 있는가?" 뚜벅. 뚜벅. 드워프는 랜턴을 앞으로 내밀며 동굴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랜턴이 그의 발밑을 밝혀 주었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카야 산맥의 정상 가까운 이런 곳에 누군가 있는 것일까? 드워프는 동굴 속을 향해 말을 걸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화앗! 길지 않은 동굴이라 그런지 곧 동굴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드워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의 손에 들린 랜턴이 동굴을 밝히며 드러난 것은 한 명의 인간이었다. 비록 앞이 아닌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갈색 망토를 걸치고 앉아 있는 그 뒷모습은 분명 인간의 모습이었다. 드워프는 그의 등을 보며 랜턴을 내려놓았다. 랜턴이 옮겨지자 그 불빛 또한 옮겨졌다. 드워프는 인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동굴의 벽에 세워져 있는 묘한 기운이 감도는 두 개의 검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장인의 피가 흐르는 드워프답게 그의 시선은 검에 고정되었다. 벽에 세워져 있는 두 검은 척 보기에도 명검 같아 보였다. 더욱이 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두 검에 눈에 띄는 특이한 장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검은 겉보기에 서로 상극처럼 보였다. 하나는 칠흑의 밤을 연상시키는 흑색 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밝은 아침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검이었다. "그날이... 온 건가?" 검을 바라보고 있는 드워프는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이 동굴에 있는 또 다른 인물, 바로 등을 보이고 있는 인간에게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 음성은 무덤덤했지만 깊은 슬픔에 절어 있었다. 그의 음성을 접한 드워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더군." "......" 드워프가 목숨을 걸고 이곳에 오른 것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스윽. 드워프의 말에 등을 돌리고 있던 인간이 몸을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우두두둑!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 그의 관절 여기저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몸을 돌렸기에 얼굴이 드러난 인간의 모습은 드워프와 말을 편안히 트는 것치고는 상당히 젊었다. 잔주름 하나 없는 20대 초반의 외모를 한 젊은 남자는 짙은 흑안을 지니고 있었다. 스윽. 흑안에 긴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는 몸을 숙여 드워프가 바라보고 있는 두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동굴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다시 올 건가?" "......" 몸을 돌려 동굴을 벗어나려는 그는 드워프의 물음에 멈추어섰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휘오오오-! 카야 산맥에 있는 것치고는 그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카야 산맥의 혹독한 기후 앞에 너무도 얇아 보이는 검은색 일통의 천 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 두르고 있는 커다란 갈색 망토도 상당히 얇았다. 휘오오오-! 그가 입구로 향할 수록 칼바람이 그에게로 엄습해 왔다. 그의 갈색 망토가 거칠게 펄럭거렸다. 랜턴을 들고 뒤따라온 드워프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스윽. 입구에 서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밤......" 그가 이런 말을 할 정도로 하늘은 어두웠다. 밤이라고 하기엔 뭔가가 이상한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이다. 그의 말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뒤따라나온 드워프가 즉각 답해 주었다. "하하하. 유감스럽게도 아침이라네.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네만 1년 전부터 하늘이 검게 죽어 버렸지." "상관없겠지." 드워프의 말에 무덤덤하게 말한 인간은 발을 앞으로 내딛었고, 그는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굴이 절벽에 나 잇는 탓이었다. 카야 산맥의 정상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스스로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후우웅. 하늘로 날아오른 그의 모습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등에선 검은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검게 죽은 하늘보다도 새까만 색을 지니고 있었다. 스윽. 하늘로 날아오른 인간을 바라보던 드워프의 눈앞에 검은 갑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의 등에도 하늘로 날아오른 인간이 지니고 있던 날개와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의문의 누군가가 나타난 직후 하늘로 날아올랐던 인간이 드워프에게로 다가왔다. "고맙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의 말속엔 진심 어린 그의 마음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의 표현이라는 것을 드워프는 잘 알고 있었다. "하하하. 자네가 내 친구와 나에게 베푼 은혜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네. 오히려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게 생각하네." 드워프의 대답을 끝으로 검은 날개를 움직이며 인간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드워프의 뒤에 있던 이가 드워프를 안았고 카야 산맥의 밑으로 향했다. 그를 카야 산맥의 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오른 인간의 뒤를 따라 솟아 오른 검은 빛 무리가 있었다. 하얀 눈이 순간 그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검은 빛의 수는 많았다. 그 빛은 하늘로 날아올랐던 인간의 뒤를 쫓았다. 휘오오오-! 모두가 사라진 카야 산맥은 외로이 새하얀 눈을 흩뿌렸다. 칸 대륙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어 피의 대륙이라 불리던 여름의 대륙이 지금은 피가 말라버렸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여름의 대륙에 더 이상 피바람이 불지 않게 된 것은 한 나라가 대륙을 통일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여름의 대륙을 하나로 만들어 버린 나라는 대륙에서 가장 작은 영토를 지니고 있던 몰딘 왕국이었다. 23세의 나이에 몰딘 왕국의 왕이 된 이얀 폰 크라이센에 의해 여름의 대륙은 처음으로 통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봄의 대륙에 이은 두 번째 통일 대륙의 탄생이었다. 이제는 이얀 대제라 불리는 그는 몰딘 왕국을 제국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한 드래곤의 희생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몰딘 왕국의 수도 모르딘에 나타난 블랙 드래곤의 시체가 왕국을 제국으로 변화시켰다. 물론 드래곤의 시체가 있다고 해서 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이얀 대제가 드래곤의 시체를 효율적으로 사용한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얀 대제는 시체를 발견했을 당시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오히려 손수 드래곤의 몸에 선을 그으면서 부위를 나누기까지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얀 대제가 드래곤의 시체를 부위별로 나누어 마법사 길드에 모두 판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드래곤의 가죽과 드래곤 본, 그리고 드래곤 하트를 제외한 나머지만을 팔았었다. 이얀 대제가 나라를 위해 사용한 그 엄청난 돈은 모두 드래곤의 레어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인을 잃은 드래곤의 레어. 이얀 대제는 마법사 길드에 자신이 드래곤을 모두 판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겨 줄 것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레어에서 얻은 많은 마법 물품을 주었다. 물론 레어를 찾고 발굴하는 것은 마법사 길드와 손을 잡고 한 일이었다. 이에 중립을 유지하던 마법사 길드의 본부인 마탑이 스스로 몰딘 왕국에 귀속되었다. 이 때문에 여름의 대륙은 한동안 소란스러워졌고, 다른 나라에선 난리가 났지만 이미 마탑에서 선포를 한 뒤였다. 몰딘 왕국의 일부가 된 마법사 길드는 이얀 대제에게 허튼 수는 결코 부리지 않았다. 이얀 대제에게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흑안의 검사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제 한배를 같이 탄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블랙 드래곤의 레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드래곤은 귀찮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레어가 있다는 사실을 주위에 사는 생명체들에게 광고를 하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의 레어가 드래곤 산맥의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몰딘 왕국에게는 행운이요, 다른 나라들에겐 불행의 시작이었다. 죽은 블랙 드래곤은 가을의 대륙의 어느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는 녀석이었고, 그만큼 레어를 찾는 일은 쉬웠다. 드래곤에 관한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었지만, 동시에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얀 대제가 다른 나라에서 알지 못하도록 직접 모든 것을 지시했기에 모든 일이 극비리에 진행된 것이었다. 마법사 길드에 마법 물품과 여러 가지 물건을 넘겨주고도 산처럼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바탕으로 몰딘 왕국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후, 이얀 대제는 여름의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빈트러드 제국을 침공함으로써 통일 제국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의 군대는 강했다. 드래곤의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고 드래곤 본으로 된 검을 든 그의 군대는 최강의 힘을 자랑했다. 비록 몰딘 왕국의 영웅으로 불리는 흑안의 검사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지만, 드래곤의 무구를 지닌 기사와 마탑의 마법사를 보유한 몰딘 왕국은 너무도 강했다. 빈트러드 제국은 흑안의 검사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빈트러드 제국의 공작이었던 용병왕 카엔의 싸움의 여파로 인해 가진 힘의 절반을 잃은 뒤였기에 빈트러드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있었지만 용병왕이 사라진 빈트러드 제국은 이미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있었다. 빈트러드 제국을 단기간 내에 무너뜨린 이얀 대제의 힘 앞에 여러 나라들이 줄지어 항복을 해왔다. 항복을 하지 않은 나라도 이얀 대제에 의해 하나하나 흡수되어 갔다. 빈트러드 제국이 무너졌다는 사실보다도 드래곤의 무구를 들고 싸우는 몰딘 왕국의 기사들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젊은 이얀 대제는 전쟁을 벌일 때마다 전장에 나왔다. 그는 보통 일국의 왕답지 않게 정령을 이용한 단검을 사용했고, 그 어떤 용사보다도 강했다. 이리저리 전장을 누비는 그의 주위엔 날카로운 단검과 붉은 피가 항상 머물렀다. 그렇게 이얀 대제는 여름의 대륙을 통일했고, 수십 년 동안 제국을 다스리며 통일 제국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된 지 50년이 흘렀다. 몰딘 제국은 지금 침묵 속에 휩싸여 있었다. 밝은 성격에 왕답지 않은 말투와 행동을 지닌 이얀 대제를 국민들은 너무도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얀 대제로 인해 슬퍼하고 있었다. 73세의 그가 병으로 쓰러진 것이 벌써 5년 전이었다. 지금 그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면서, 제국의 국민들은 마음 아파했다. 이제 얼마 후면 세상을 떠날 이얀 대제를 생각하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슬퍼했다. 혹독한 기후를 지닌 여름의 대륙을 당당히 통일하고 제국을 세운 이얀 대제였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세월의 힘 앞에는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었다. 높은 서클의 마법사도 아니고, 소드 마스터도 아닌데도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은 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수련했다. 그랬기에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몰딘 제국 내에서도 수도인 모르딘은 그 침묵이 극에 달해 있었다. 모두가 하나된 마음으로 황제인 이얀 대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리 다른 흑심을 품고 있는 자들도 수도에 있었다. 황제가 세상을 떠난 뒤를 노리는 이들이었다. 이얀 대제는 대륙을 통일한 이후에 늦은 장가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명의 아내를 들였고, 이남 이녀의 자녀를 뒤늦게 두었다. 이얀 대제는 첫째 아들을 황태자로 봉하고 다음 대의 황제로 삼았지만 대다수의 신하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황태자의 능력이 이얀 대제의 둘째 아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이얀 대제를 닮은 것이 황태자라곤 하지만 그건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학식이며 검술실력이며 모든 것이 이얀 대제의 둘째 아들이 월등했다. 황태자의 말투엔 귀족에게서 느껴지는 기품 같은 것이 없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청년이었다. 모두 지금의 황제인 이얀 대제와 닮은 점이었지만 귀족들의 눈에 그런 점은 보이지 않았다. 수도 모르딘은 이황자를 지지하는 신하들과 황태자를 따르는 이들로 인해 묘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모르딘은 근래에 많은 사람들로 인해 분비고 있었다. 모두들 각지에서 이얀 대제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통일 대륙을 이룩한 인간들의 살아 있는 전설인 제국의 황제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말이다. 모르딘의 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이얀 대제의 병이 악화되기 시작한 한 달 전부터 사웁에서 전달된 특이한 사항을 따르고 있었다. 그건 모르딘에서는 검은 옷을 입는 것이 금지라는 것이었다. 검은 옷은 죽음의 상징이었기에 이얀 대제를 위해 그런 조항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한 조항이 생긴 뒤로 모르딘에서는 검은 옷을 입는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오늘도 모르딘의 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꼼꼼히 사람들을 살폈다. 망토나 긴 후드 같은 것을 입은 사람은 일일이 들추며 확인했다. 그러던 중 많은 이종족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렇게 드러난 이종족 중에는 엘프들이 가장 많았다. 봄의 대륙에 있는 빛의 숲과 몰딘 왕국의 수도인 모르딘이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유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이얀 대제의 친우인 흑안의 검사 때문이었다. 엘프들이 왜 그를 찾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흑안의 검사 다크로얀을 찾고 있었다. 엘프들이 흑안의 검사를 찾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흑안의 검사를 찾기 위해 왕성에 도움을 청하면서 알려졌다. 왕성에선 그들의 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흑안의 검사를 영웅시하는 몰딘에서 이미 운명을 달리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그를 찾는다는 괴이한 말을 하는 엘프를 내쫒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죽은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와 대륙의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가 지금은 그가 죽었다고 굳혀져 있는 상태였다. "이봐!" 모르딘의 문을 지키는 수비대의 대장인 알트는 오늘도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부하들이 사람들을 일일이 검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누군가를 발견하곤 성난 황소처럼 앞으로 성큼성큼 나왔다. "모르딘에서 검은 옷을 입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그는 호통을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두 개의 검을 차고 갈색 망토를 두른 장신의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으로도 부족한지 전신이 검은 옷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것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지는데, 망토를 제외한 모든 옷이 검은색이자 그가 화가 난 것이었다. "......" 경비 대장 알트의 호통 소리에 검사를 받던 사람들과 검사를 하던 병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딘에서 검은 옷을 입을 수 없었기에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가린 그가 튀는 것은 당연했다.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경비 대장 알트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얀은 좋은 왕인가?" "......" 그의 한 마디에 문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들이 얼어 버렸다. 이곳에서 이얀 대제의 이름을 그냥 부르다니!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경비 대장 알트를 비롯한 경비병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가, 감히 황제폐하의......" 그 정도는 알트가 가장 심했고 격분을 참지 못한 그는 검을 뽑았다. 너무 화가 나 말을 떠듬거리며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촹! 차창! 그의 검이 뽑힘과 동시에 병사들의 창이 남자에게 겨누어졌다. 창백해져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손가락질을 하며 남자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겨눠진 창날과 병사들의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니, 가느다란 미소가 천천히 그려졌다. "이얀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군." "이놈이 끝까지!" 끝까지 그가 이얀 대제의 이름을 막 부르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린 알트는 검은 옷의 사내를 향해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화가나 흥분한 상태였지만 기사의 검답게 날카로웠고 빨랐다. 스륵. "......!" 하지만 검이 도착한 자리에 있어야 할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삐이이익! 잠깐이 침묵이 찾아왔고, 곧 갑자기 사라진 그를 찾기 위해 경비대는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르딘은 갑작스런 사건으로 시끌벅적해졌다. 방금 모르딘의 문 앞에서 그 엄청난 소란을 일으켰던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이미 모르딘의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커다란 2층 집 위에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의 이름은 다크로얀.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는 흑안의 검사이자 몰딘 왕국 두 영웅 중 한 명인 그가 모르딘에 있는 것이었다.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그가 여기에 있다니, 경악할 노릇이었다. 그의 진짜 정체인 혼돈의 정령왕인 로얀은 동생과 마을 사람들의 원수인 이실리아를 죽이고 난 직후 겨울의 대륙에 있는 카야 산맥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카야 산맥의 동굴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는 수십 년 동안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3번째 봉인의 대가로 인해 먹지 않아도 되기에 그는 카야 산맥에서 오랜 세월 은거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험준한 카야 산맥에 은거를 한 것은 모두 엘라임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실리아를 죽였으니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카야 산맥의 동굴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엘라임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실리아와 싸웠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동굴에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엘라임은 100년 후에 중간계로 올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지금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카야 산맥으로 가기 전 로얀은 드워프 록을 만났고, 그에게 얀의 죽음이 다가오면 말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엘라임과의 약속이 중요하긴 하지만 친구가 죽는 순간만큼은 옆에서 지켜봐 주고 싶은 그였다. 지금 얀에게 가지 않는다면 훗날 엘라임에게 더 혼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로얀이었다. 드워프 록은 그의 부탁을 너무도 쉽게 승낙했다. 카야 산맥을 오르는 데에는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친구의 원수인 드래곤을 죽인 로얀의 부탁이었기에 당연하다는 듯 승낙한 것이었다. 카야 산맥을 오르는 것과 드래곤과 혈투를 벌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살 확률이 높을까? 당연 카야 산맥을 오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로얀은 커다란 2층 집의 지붕에서 멀리 보이는 커다란 성을 보고 있었다. 과거 왔을 때보다 더욱 웅장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뚝 솟은 성의 뾰족한 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날씨가 어둡군." 성을 바라보던 로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록의 말처럼 여기까지 오면서 본 하늘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탁한 색을 하고 있었다. 스륵.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던 로얀은 이내 몸을 움직였다. 쉐도우를 사용해 그는 그림자 사이로 녹아들며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수십 년 동안 동굴 안에서 로얀은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세 번째 봉인이 풀리며 생긴 힘을 제어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힘을 제어하기 위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선 많이 나아져 있었지만 아직까지 힘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진 못했다. 그렇다곤 해도 로얀의 힘은 배로 강해졌다. 시동어 없이도 기술을 펼쳤고, 그 모든 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정령들의 힘 역시도 강해졌고, 그 수도 늘어났다. 그들은 지금 모두 로얀의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들이 모르딘을 점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은신을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정령술사라도 정령왕과 함께 있는 어둠의 정령들을 찾을 순 없었다. 정령왕인 로얀과 같이 있기에 어둠의 정령들이 펼치는 은신술은 그 능력이 배가되어 발휘되었다. 어둠의 정령들을 이렇게 우르르 몰고 나온 것은 로얀의 뜻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카야 산맥을 벗어났고, 함께 가겠다는 어둠의 정령들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했기에 모두 우르르 몰려나온 것이었다. 스르륵. 로얀이 움직이자 어둠의 정령들도 덩달아 움직였다. 그들이 모두 향하는 곳은 몰딘 제국의 황성이었다. 35장 잠시간의 재회와 영원한 이별 로얀은 주위에 그림자가 없어도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몸을 숨겼다. 이렇게 몸을 숨기면 드래곤 정도의 생명체가 아닌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몸을 숨긴 로얀은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성 주위를 맴돌았다. '녀석의 방이 어디였지?' 수십 년 전에 한번 얀의 방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워낙에 오래전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당시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는 카엔에게 당한 얀으로 인해 흥분한 상태라 방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로얀은 왕인 얀이 있을 그의 침실을 찾기 위해 창가를 기웃거리며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 로얀은 들려오는 소리에 아차 싶었다. 어둠의 정령들에게 시키면 단숨에 찾을 수 있는 것을 괜히 돌아다닌 것이었다. 얀에 대한 생각으로 어둠의 정령들에 대한 것을 잠시 잊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말을 한 것은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허리를 숙인 채 말한 다크로드였다. 다크로드와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이 명을 내리지 않자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다크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대기하고 있던 어둠의 정령들이 성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후웅. 어둠의 정령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로얀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무리 아바마마께서 단도술을 쓰셨다고는 하지만 그런 걸 왜 익히는 거죠?" 바닥으로 내려선 로얀의 귓가로 누군가의 비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로얀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내가 뭘 익히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흠칫. 로얀은 또 다른 이의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꽤나 많은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잘 다듬어진 잔디가 푸르게 깔려 있었다. 네 명의 젊은 아이들과 기사로 보이는 무리들, 그리고 마법사와 시녀들로 보이는 이들이 몇몇 보였다. 모두 그 네 명의 아이들의 신하인 듯했다. 그들은 커다란 나무를 중심에 두고 서 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대치하고 있는 아이는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은 청년과 금발에 짧은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이었다. 금발의 청년은 커다란 나무의 굵직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다른 두 아이는 여자 아이로 긴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와 금발의 소녀였다. 금발의 소녀가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오똑한 콧날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소녀였다.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는 작은 키에 푸른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청년은 한 손에 작은 단검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는 힐끔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지니고 있는 긴 장검을 바라보았다. "그런 무거운 검을 매일 들고 다니는 게 난 싫거든." 금발의 청년의 이름은 로얀 폰 크라이센이었다. 지금은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 몰딘 왕국의 영웅 흑안의 검사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에 어린 그를 안고 이얀 대제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는 1황자이자 황태자이기도 했다. 황태자인 그에게 다른 동생들이 말을 막하는 것은 그가 오래전 그렇게 하라고 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되어 버린 것이다. 황태자와 이렇게 맞설 수 있는 아이는 제국에서 단 세 명뿐이었다. 바로 그의 동생들이었다. 오래전 죽은 황후의 머리카락 색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인지 두 명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두 명이 2황자 프로미스 폰 크라이센과 두 번째 공주이자 막내인 프란시아 폰 크라이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째 공주인 미시아 폰 크라이센이 있었다. 로얀은 그들의 바로 앞에 있었지만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이 없었다. "후후후, 형님은 이제 그 자신하던 정령술도 쓰지 못하잖습니까?" "......" 싱글벙글거리던 황태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그런 반응에 프로미스는 승자의 표정이 되었다. "바람의 정령 없이 펼치는 형님의 단도술은 약합니다!" "......" 피식. "가자." 마지막으로 못을 박듯 말한 프로미스는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를 기사들이 뒤따랐다. 이황자인 프로미스의 힘의 원천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단도술을 익힌 황제보다는 진정한 기사의 검을 익힌 황제를 원했다. 프로미스는 이제 겨우 들어선 것이지만 그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소년이었다. "고집 그만 피우세요. 정령은 우리들을 버렸답니다. 그럼." 미시아는 황태자를 향해 충고하듯 말하곤 프로미스를 따라 그곳을 벗어났다. 로얀은 미시아의 말속에서 나온 정령들에 대한 것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정령이 사람들을 버렸다? 무슨 소리지?' 동굴 속에만 있던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또한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이 있는 카야 산맥에 모여 있었기에 그들도 세상의 소식에는 어두웠다. 기사들과 많은 시녀들이 나가자 나무 주위에는 오랜 세월 제국을 지켜온 궁정마법사와 다섯 명의 마법사, 그리고 몇몇 기사들이 남았다. 모두 제국의 정통을 따르고 황제인 이얀 대제의 명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충신들이었다. 나뭇가지 위에 있던 황태자가 밑으로 뛰어 내렸다. 그의 옷은 평민들의 옷처럼 수수했고 여행복처럼 간편해 보였다. "웃차." 타탁. "넌 왜 남았지?" 그리고 그는 남아 있는 동생 프라시아를 향해 물었고 그녀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전 오라버니가 좋아서요." "우하하. 그래. 내가 원래 프로미스보다 잘생겼잖아? 쿡쿡."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프라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태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말대로 그가 프로미스보다 잘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조금 잘생긴 축에 들었지만 프로미스는 그야말로 미남의 표본이었다.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황태자의 황족답지 않은 웃음소리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궁정 마법사 라셀 레이드만은 달랐다. 그는 황태자의 저런 활발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웃으며 바라보았다. "정령이 사람을 버렸다는 게 무슨 소리지?" 그때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던 로얀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등장한 로얀으로 인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굳어 버렸다. 가장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황태자였다. 그는 프라시아의 손을 잡고 뒤로 끌어당기며 로얀을 경계했다. "누구지? 정체를 밝혀라!" 촹! 황태자는 침착하게 물었고 기사들은 검을 뽑으며 로얀을 둘러쌌다. 느껴지는 마나로 보아 마법사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행동은 로얀에게 무의미했다. 그는 그들의 눚비를 무시한 채 눈앞에 서 있는 황태자의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스윽. "다크로얀." 로얀의 대답에 황태자는 주춤거렸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 흑안의 검사의 팬인가?" 환태자답지 않은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그였다. "내 말에 답하라. 정령이 사람들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소리지?" 그런 황태자에게 말하는 로얀 또한 특이했다. 제국의 황태자를 대하는 사람의 말치곤 너무도 불경했다. "네 이놈!" "라셀!" 로얀이 황태자인 그의 앞에서 불경한 태도로 나가자 궁정 대마법사인 라셀이 호통을 쳤지만 황태자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의 말보다 기사들의 검이 더 빨랐다. "하압! 윽!" 재빠르게 다가가던 기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동상이 되어버렸다. 푸른 잔디 위에서 검을 들고 달려가는 모습으로 멈춰져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멈추자 마법사들은 의아해 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 몸이 안 움직입니다." 기사들의 한결 같은 대답에 마법사들은 급히 그들에게로 다가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물론 그건 로얀의 짓이었다. 그가 그림자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묶은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냐!" "라셀! 좀 조용히 해!" 황태자는 라셀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저지하곤 로얀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터뜨렸다. "험험, 저기 난 황태자인데......" 아무리 자유분방한 성격의 그라도 대뜸 반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황태자의 신분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반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황태자의 그런 말에도 로얀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바라만 보았다. "정령들은 1년 전부터 갑자기 이상해졌어요. 계약자의 부름에도 소환되지 않았죠. 그리고 이렇게 하늘이 흐린 것도 정령들이 사람들을 버렸기 때문이래요." 급히 로얀에게 대답해 준 것은 의외로 황태자의 뒤에 있던 프라시아였다.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가는 듯하자 급히 나서 로얀에게 답해 준 것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로얀은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설마 정령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엘라임은?' "이제 답이 되었겠군. 그럼 이제 정체를 밝혀 보실까." 황태자는 자신의 단검을 꾹 쥐고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새겨져 있던 장난기 어린 빛이 사라져 있었다. 단검이 내뿜는 예기 때문인지 로얀은 생각을 접고 답해 주었다. "친구를 만나러 왔다." "치, 친구?" 로얀의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일순 주위는 커다란 의문에 휩싸였다. 황성에 친구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더구나 이렇게 정문이 아닌 다른 이들 몰래 들어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그들에게 로얀은 의문에 대한 답 대신 분노를 선사해 주었다. "네 녀석의 아버지 말이다." 로얀은 정확히 황태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태자의 모습이 얀을 그대로 닮아 있었고, 주위의 반응을 보고 로얀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얀의 말은 이들의 이성을 끊어 놓기에 충분했다.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든 것은 바로 눈앞에 있던 황태자였다. 휘익. 그의 날카로운 단검이 로얀을 향해 날아왔지만 그의 공격은 로얀에 의해 너무도 쉽게 막혀버렸다. "......!" 로얀의 손에 황태자의 단검이 붙잡혀 있었다. 섬뜩한 날을 잡고 있었지만 로얀의 손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스팟. 로얀의 움직임을 본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의 팔이 늘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그의 손가락이 황태자의 넓은 이마를 때렸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악! "크으윽!" 황태자는 붉게 부어 오른 이마를 부여잡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쓰러질 듯한 그의 몸을 프라시아가 부축했다. 여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호아태자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을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찢어질 듯 부릅떴다. 그는 로얀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셀은?!' 그러다 문득 같이 달려들었던 신하들이 생각난 황태자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기사들의 검은 마법사들의 목에 닿아 있었고 마법사들의 손에 맺힌 마법은 기사들을 향해 겨누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태로 석상이 되어버린 듯한 그들의 등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로얀이 소울 바인드를 사용해 그들의 몸을 조종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스윽. 황태자는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로얀을 노려보며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빈틈을 노려 다시 한 번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얀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 황태자의 행동을 모두 보았지만 로얀은 신경 쓰지 않고 혹시나 자신이 잘못 짚었나 하고 확인하듯 물었다. 그의 말에 어찌 된 일인지 황태자의 눈에 일던 분노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일어난 감정은 경악과 놀라움이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황태자가 이렇듯 변화를 보인 것은 로얀의 음성에 묻어난 무언가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아버지의 이름을 저렇게 편안하고 따뜻하게 부른 이가 있었던가? 어머니조차도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이름은 고사하고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황제 앞에서 말을 꺼낼때도 어렵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게다가 눈앞의 사내는 아버지의 애칭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말하기까지 했다. 섬뜩. '서, 설마?' 황태자는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로얀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으로 문득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자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흑색의 검과 백색의 상반된 검을 지니고 다니는 최강의 검사이자 이얀 대제의 하나뿐인 친구 다크로얀에 대한 것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것도 눈앞의 이가 그 장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말이다. '말도 안 돼!' 황태자는 자신의 생각을 급히 지웠다. 너무도 바보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흑안의 검사는 자신의 부친의 친우였다. 지금의 나이는 73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도저히 말이 안 된다. 황태자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기에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며 로얀을 향해 당당히 외쳤다. "나는 대제국 몰딘의 황태자인 로얀 폰 크라이센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위압감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의 외침에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한 몸부림도 담겨져 있었다. 호얀은 황태자의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의 이름을 붙이다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황태자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로얀은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얀의 아들이 맞군. 흐음, 그럼 그쪽은 녀석의 딸인가?" 황태자의 말속에 담긴 위엄과 위압감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로얀에겐 조금의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다. 로얀의 눈동자가 이번엔 프라시아에게로 향했고 그의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보며 몸을 떨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궁정 마법사인 라셀은 눈동자를 굴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대화를 듣던 그는 문득 오래전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자식 내가 죽을 때는 반드시 올 거야. 그러니까 자네가 그 녀석이 오면 나에게 안내해 줘."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흑안의 검사라 불리는 내 친구 녀석 말이야." "헛! 저, 정말이십니까!? 그분은 돌아가셨다고......" "쿡쿡, 누가 그러던가. 아마 쌩쌩한 것도 모자라 날아다닐 거다. 아, 그리고 무진장 젊은 모습일 테니 늙은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마. 윽, 녀석이 하나도 늙지 않은 걸 생각하니 배가 아프네. 하하하." 병에 걸린 지 얼마 안 되어 황제가 그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그날 황제는 오랜만에 시원스럽게 웃었었다. 그랬기에 그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날 라셀은 황제의 옆에서 흑안의 검사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떨었었다. '서, 설마... 진짜 다크로얀?' 말도 할 수 없는 라셀은 눈동자만 굴리며 로얀과 또 다른 로얀인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라셀이 어떤 생각을 하건 로얀은 프라시아를 향해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녀석을 전혀 닮지 않았어." "......" 로얀의 말에 프라시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모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였다. 그때 그의 뒤에 있던 황태자가 달려나오며 로얀의 어깨를 붙잡았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동생은 건들지 마라." 스윽. 동생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과 강한 의지가 담긴 그의 말에 로얀은 비웃음이 아닌 묘한 미소를 띄우며 뒤돌아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네 녀석이 가장 그 녀석을 닮았군. 그러니까 황태자가 된 것이겠지? 나의 용건은 단 하나다. 얀의 방으로 안내해라." 로얀이 말이 있은 뒤 황태자의 머릿속엔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다. "우선 라셀과 나의 기사들을 풀어 줘라." 황태자의 이어진 요구에 로얀은 살짝 라셀과 기사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소울 바인드를 풀었다. 콰당! 화륵. 갑자기 소울 바인드가 풀리자 마법을 시전하던 마법사들은 급히 마나를 흘렸다. 자칫 잘못하면 기사들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 기사들은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황태자는 라셀과 기사들에게 걸려 있던 소울 바인드가 풀리자 급히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그의 손엔 작은 프라시아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혼자 로얀의 곁에 두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셀, 괜찮아?" "예, 전 괜찮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괜찮으신지요?" "난 괜찮아. 그보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황태자는 로얀을 힐끔 쳐다보며 라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로얀은 그 말을 다 듣고 있었지만 황태자와 라셀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과 로얀 사이의 거리가 꽤 되기 때문이었다. 라셀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황태자에게 말했다. "음,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황제폐하의 친우인 흑안의 검사일지도 모릅니다." "뭐? 하지만 그의 지금 나이는 70살이 넘지 않는가?!" 현명한 궁정마법사인 라셀이 자신이 생각했던 그 황당하고도 이상한 생각을 똑같이 한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너무도 진지하게 이 말을 꺼냈다는 사실이었다. 황태자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라셀은 오래전 황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서로 속삭이며 말하고 있던 그들은 보지 못했지만 그 순간 로얀의 입가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황태자와 라셀의 대화는 이어졌다. "휴, 저도 믿기지 않을 뿐더러 확실치 않으니 황태자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라셀이 한참을 머뭇거리며 말한 것이었지만 즉시 들려온 황태자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다. "좋아!" 라셀의 말에 황태자는 평소의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오랫동안 생각지 않았다. 그는 힘차게 답하곤 로얀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응?" "아버지의 침소로 데려다 주겠다." "......" "하지만 그곳에서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황태자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뒷말을 흐렸지만 들려오는 로얀의 대답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럼 빨리 가지." "......" 그런 로얀의 태도에 황태자는 말없이 한숨을 쉬며 앞장섰다. "이익!" 상황을 전혀 모르는 기사들은 로얀의 태도에 분개했지만 다행히 라셀이 저지해 그에게 달려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아태자가 프라시아를 옆에 두고 먼저 앞장섰고, 로얀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라셀과 기사들이 뒤따랐다. 물론 라셀의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도 모두 동반한 채 움직였다. 뚜벅. 뚜벅. 딱딱하고 반들거리는 왕성의 대리석으로 된 복도를 걷는 황태자와 일행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나 황태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시원스럽게 대답은 했지만 혹 자신이 판단을 잘못하여 로얀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지금에 와서 내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공주이자 황태자 로얀의 막내 동생인 프라시아는 겁에 질렸던 눈빛은 사라지고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뒤따라오는 로얀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로얀은 역시나 아무런 표정 없이 정면을 응시한 채 걷기만 했다. 아무런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긴장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죽음을 보러 가는 것이기에 아무리 그라도 마음에 동요가 올 수밖에 없었다. 촹! 여기저기 경비를 서고 있던 왕성의 기사들이 창을 가슴에 붙이며 황태자 일행에게 허리를 숙였다. 역시나 로얀의 검은 옷이 문제가 되어 그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지만 앞장서 걸어가던 황태자가 미리 나서며 잘 말해 주었기에 별다른 문제 없이 무사히 왕성을 거닐 수 있었다. 허나,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까지 황태자가 저지할 순 없었다. 끼이익. 몇 개의 문을 아무런 저지 없이 통과한 황태자 일행은 거대한 문 앞에 섰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문이었지만 주위의 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문이었다. 이얀 대제의 방문은 그가 고집하여 직접 명령하여 단 것이었다. 이 문은 흑안의 검사인 로얀이 엘라임과 함께 왔을 때 달려 있던 문과 같은 것이었다. 혹, 그가 자신의 방을 찾지 못할까 봐 달아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이런 문을 만들어 단 이유를 물어 볼 때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회피했기에 그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곳이다." 촹!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까." 황태자가 문 앞에서 멈추어 섰고 문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황실 근위대가 그를 향해 예의를 취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살짝 고개만 숙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황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허리를 숙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황실 근위대는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두껍게 부풀어 있지는 않았다. 마법까지 걸려 있는 갑옷이기에 그들은 좁은 실내에서의 싸움에서도 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다. 황태자의 방문에 황실 근위대장이 말을 걸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말을 걸던 그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로얀에게로 향해졌다. 로얀을 바라보는 황실 근위대의 심기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이번에도 로얀의 옷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때의 그 문이군." 사방에서 날카롭게 쏘아지는 이들의 시선 속에서도 로얀은 사람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문을 감상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황태자 전하, 저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평소 차분하던 황실 근위대장이 언성을 높이며 로얀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그게......" 로얀을 어떻게 설명할지 망설이며 황태자는 주춤거렸다. [잘 찾아 오셨군요. 이곳이 그분이 계신 곳입니다.] 그때 로얀에게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로얀의 명을 받고 이얀이 있는 곳을 찾으러 나갔던 다크로드의 음성이었다. 다크로드는 이얀의 침소를 찾는 즉시 달려가려 했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로얀의 기운을 느끼곤 침소의 문 주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을 보며 감상에 젖어 있던 로얀은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들려온 음성에 화답하듯 로얀은 문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자신을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황실 근위대의 모습이 보였지만 로얀이 보고 있는 것은 벽이며 바닥이며, 모습을 감추고 있는 어둠의 정령들의 모습이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로얀과 다크로드 간에 짧은 대화가 오고갔고 로얀은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촹! "멈춰!" 황실 근위대가 그의 앞을 막았고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황태자가 놀라 외쳤다. 스윽. 문을 바라보며 걸어가던 로얀이 고개를 돌려 부들부들 떨리는 황실 근위대 대장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날 뭐라고 설명할 거지?" 그의 눈동자는 근위대 대장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뒤에 서 있는 황태자에게 향해 있었다. 로얀의 말에 황태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황태자에게 말까지 놓는 로얀을 보며 황실 근위대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려 했다. [다크로드.]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행동으로 펼쳐지지 못했다. 스르륵. 로얀의 말이 흘러나온 직후 다크로드와 그와 마찬가지로 최상급 정령인 다크니스들이 일제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황실 근위병들의 바로 앞에 한 명씩 모습을 나타내었고 즉시 그림자를 이용해 그들의 움직임을 묶어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어둠의 정령들이 한 명씩 근위병 한 명의 몸을 묶어 버렸기에 그들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뜬 황실 근위병들의 모습에서 움직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비추어졌다. 강하기로 소문난 황실 근위대의 대장은 다크로드가 직접 그의 몸을 묶었기에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뚜벅. 뚜벅. 살아 있는 석상이 되어 버린 황실 근위병들을 지나 로얀은 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이 문을 여는 그 짧은 시간이 로얀에겐 너무도 길게만 느껴졌다. 뚜벅. 뚜벅. 로얀이 문을 열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자 멍하니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황태자와 그 일행이 급히 그의 뒤를 쫓아 황제의 침소로 들어갔다. 로얀의 난폭한(?) 행동에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황태자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로얀은 아주 천천히 거대한 황제의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황제의 침상답게 화려했고 아름다운 색상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스윽. 침상의 바로 앞으로 다가간 로얀은 휘장을 천천히 거두었다. "쿨럭, 누구냐?" 깨어 있었는지 침상에서 이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힘 없고도 쉰 목소리에서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져 왔다. "꼴이 말이 아니군." 들려온 이얀의 그 쉰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로얀은 휘장을 거칠게 걷어 올리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에 따라 들어온 황태자와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차갑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두 줄의 맑은 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흐흐. 눈물을 흘리는 네 녀석의 꼴은 좋은 줄 아냐." 앙상한 몸의 이얀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얀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 50년 전의 그 장난기 많고 활기차던 그의 얼굴이 변해 있었다. 50년이란 세월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로얀의 말에 전혀 논라지 않은 듯 태연히 대꾸한 이얀이었지만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 대답해 준 그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로얀과 이얀이 만남을 본 다크로드는 눈앞에 서 있는 황실 근위대 대장을 풀어 주었고, 다른 어둠의 정령들도 황실 근위병들을 풀어주었다. 촹! "하아압!" 스거거걱! 풀려난 직후 근위병들은 검을 뽑아 휘두르며 황제가 있는 침소를 향해 다가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검이 어둠의 정령에게 전혀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문을 부수듯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쾅! "폐하!" "모두 물러가라!" 우르르 몰려 들어온 황실 근위병들은 들려오는 이얀의 호통소리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문 앞에 멈추어 선 채로 멍하니 이얀의 호통소리가 들려온 침상을 바라보았다. 이얀의 몸 상태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기에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근위기사들이 멍해진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얀의 목소리가 곧 다시 들려왔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다. 그와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 "치, 친구......?" 이얀의 이어진 말에 근위병들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황제의 친구처럼 보일 만한 인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저기 계신 분이 흑안의 검사라 불리시는 분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근위병들에게 이제 확실히 된 사실을 황태자가 앞으로 나서며 손으로 로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이 있은 직후 근위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얀에게로 천천히 향했다. "저, 정말로......" 황태자의 말에 너무도 놀란 황실 근위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로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젠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멍하니 있던 황실 근위병들을 일깨운 것은 황제 이얀의 목소리였다. 상반신을 일으킨 상태에서 힘겹게 말한 이얀을 보며 황실 근위대는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방문을 닫고 방을 빠져나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끼이익. 쿵. 급히 빠져나간 황실 근위병들 때문인지 방 안이 왠지 썰렁해진 듯했다. "로얀을 제외한 프라시아와 그대들도 모두 그만 나가보게." 황실 근위병들을 내보낸 것도 부족한지 황제 이얀은 황태자를 따라왔던 공주인 프라시아와 라셀, 그리고 기사들도 모두 내보냈다. 그의 말 속에 담긴 로얀이라는 이름 때문에 흑안의 검사라 불리는 로얀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그,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공주인 프라시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고, 나가기 싫은 듯한 모습이 역력한 라셀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뒤를 힐끔힐끔거리며 물러났다. 흑안의 검사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 마법사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끼이익. 쿵. 그런 라셀의 기분처럼 방문이 쓸쓸히 닫혔다. 방 안엔 이얀과 흑안의 검사인 로얀, 그리고 황태자만이 남았다. 세월 속에서 앙상한 손이 되어 버린 이얀은 그 손을 들어 황태자를 가리켰다. "난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어." 그의 음성은 노인답게 힘없고 갈라져 내렸지만 로얀을 대하는 그의 말투만은 50년 전과 조금도 달라져 있지 않았다. "조금 전에 봤다. 로얀은 그의 말에 답하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그런 모습을 황태자는 멀리서 가만히 선 채로 바라보았다. 로얀의 말에 이얀은 들었던 손을 내리고 웃으며 말했다. "쿡쿡, 그래 소감이 어떻던?" "한 명을 제외하곤 너와 닮은 녀석이 없더군. 다행히도." "엥? 다행히도?" "그럼. 너처럼 괴상한 성격을 가진 녀석은 한 명만으로도 충분하다." "하하, 쿠, 쿨럭. 젠장! 넌 어째 모습도 그대로인데다 성격도 더 밝아진 것 같다." "안 좋은 건가?" "쿨럭, 쿨럭. 아니! 지금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 특히 웃음이 많아진 모습이 말이지." 말을 하는 이얀은 친구인 로얀에게 자신의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일부러 목소리를 뚜렷이 내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의 목안 깊숙한 곳에서 짙은 혈향이 풍겨져 왔고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 침상 옆에 놓여져 있는 선반 위의 천을 집어 든 이얀은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고운 천 위에 붉은 피를 쏟아내었다. 고개를 돌린 채 피를 토해내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로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스윽. 문득 보인 이얀의 앙상한 손을 로얀은 가만히 움켜쥐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만 같은 앙상하고 작은 손이었다. "정말 앙상한 나뭇가지 같지?" 그렇게 물어 보는 이얀의 목소리는 왠지 서글퍼 보였다. "아니, 그 어떤 인간의 손보다도 강하고 부드럽다." "하하하, 마음에 드냐?" "뭐가?" "내가 50년에 걸쳐 만든 그늘이." "......" 붉은 피가 축축이 젖은 천을 한 손에 움켜쥔 채 웃으며 말하는 이얀의 모습을 보며 로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대화가 있은 직후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아무런 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통해 50년 동안 하지 못한 대화를 나누었다. "50년이라...... 네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냈냐?" 말없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중에 먼저 말을 내뱉은 것은 이얀이었다. 그가 말하는 할 일이란 드래곤들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얀의 물음에 로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로얀의 대답에 이얀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그 대답이 왜 그런지 모르게 그의 가슴속에 슬픔을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망할 놈의 자식! 그랬으면 돌아왔어야지." "미안하다." "망할 놈." 빙긋. 로얀의 대답이 있은 뒤 로얀과 이얀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미소를 띄웠다. 그 대화 뒤로 로얀과 이얀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에겐 황태자의 존재가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이들은 알지 못했지만 지금 방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황제의 병문안을 온 이들이 흑안의 검사가 왔다며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근위병들에 의해 가로막혔고, 흑안의 검사라는 말에 놀란 이들로 인해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근위기사들에 의해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그리고 흑안의 검사가 왔다는 소문이 왕성에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귀족들이 그와 안면이라도 트기 위해 몰려왔다. 수많은 기사들이 인간으로서 검의 끝에 다다른 로얀을 보러 왔지만 차마 황제의 침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로얀과 이얀은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밖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들에게 그런 건 아무런 방해 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 뒤로 로얀은 계속 이얀의 방에서 머물렀다. 로얀은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었기에 쭈욱 이얀의 옆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밥을 먹을 때에도, 그가 잠을 잘 때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이제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을 뿐더러 배고픔이란 것도 없어졌기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얀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왠지 그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오는 듯햇다. 잠을 자고 있는 이얀의 모습을 보던 로얀은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그의 그 쭈글쭈글해진 얼굴을 바라보던 로얀은 그의 모습에서 옛 추억을 떠올렸고, 그의 얼굴 곳곳에 핀 검버섯에서 지난 세월의 아픔을 느꼈다. 그가 떠올리는 추억은 대부분이 전쟁에서 지냈을 때의 추억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옛날의 모습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때 했던 말들과, 그때 들려왔던 소리들, 그리고 그때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흘러 들어왔던 향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엔 항상 눈앞에 있는 이얀이 등장했었다. 그는 항상 환하게 웃으며 귀찮을 정도로 로얀을 따라다녔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이야기 하다 지쳐 잠든 이얀의 자는 모습을 보던 로얀을 보던 로얀은 계속해서 옛 추억을 되새겼다. 로얀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는 것을 시녀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감히 그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모두들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로얀 다음으로 이얀을 찾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황태자 로얀이었다. 그는 혼자 이얀의 방으로 오기도 했고, 프라시아를 대동한 채 오기도 했다. 가끔 이황자와 첫 번째 공주인 미시아가 오기도 했지만 그들은 로얀이 흑안의 검사라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들르는 듯했다. 그들은 침대 옆에 붙어 있는 로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로얀의 외모가 20대 초반의 아주 젊은 외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로얀의 모습을 확인하고 바로 물러났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으로 인해 밖에서 로얀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많은 이들이 되돌아갔다. 어느덧 오 일이 흘렀다. 처음 로얀이 왔을 때 그를 본 이얀은 반가움 때문인지 기운을 차렸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이얀은 점점 죽어가고 잇는 것이었다. 오 일째 되는 날 로얀은 이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드래곤을 죽이는 부분에서 이얀은 통쾌해 하며 웃음을 보였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태자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황태자가 알기에 로얀은 블랙 드래곤 한 마리를 잡은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하지만 흑안의 검사인 로얀의 입에서 나온 드래곤의 수는 모두 네 마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스스로 말했다.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과 눈빛으로 보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더욱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황제 이얀은 그 엄청난 일을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의 하루가 훌쩍 가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로얀의 이야기를 웃으며 듣고 있던 이얀은 밤이 되어 로얀이 이실리아가 죽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끝내자 한참을 웃었다. 로얀이 이실리아를 죽이고 복수를 끝마쳤다는 것에서 왜 그렇게 큰 소리로 웃었던 걸까? 그건 그만이 알 일이었다. 어느새 밤이 되었지만 아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어둠이 깔린 창밖을 보며 이얀이 힘없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다." "뭐든지......" "저기 있는 내 아들 녀석이 무사히 나의 뒤를 이어 받을 수 있게 도와주라." 친구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미안한지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고, 로얀을 바라보지 않았다. 스윽. 이얀의 말에 로얀은 지금껏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신과 이름이 같은 황태자 로얀을 바라보곤 다시 이얀을 향해 말했다. "걱정 마라.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황태자의 이름이 나의 이름과 같기 때문에 도와주는 거다." "그거면 됐어." 여전히 상반신만을 드러낸 채 앉아 있는 이얀은 다시 로얀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 멀리 서 있는 아들을 향해 말했다. "황태자 로얀, 너에게 나와 친구의 이야기를 들렺고 싶었다." "......" 황태자는 아버지인 이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 보거라."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황태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에 이얀을 향해 말했다. "내일 아침은 저도 같이 식사해도 될까요?" "하하. 그렇게 해라." 방을 나서며 뒤돌아본 이얀의 모습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드는 황태자였다. 그런 그에게 이얀은 환하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렇게 황태자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가 나가는 것을 이얀은 흐뭇하게 웃으며 배웅해 주었다. 끼이익. 쿵. 이제 둘만 남게 된 로얀과 이얀은 서로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쳐서인지 웃음을 터뜨렸다. "풋, 하하하!" 한동안 웃음이 이어졌다. 그 웃음이 잦아들 때쯤에 이얀이 말했다. "그 너의 정령들은?" "몸을 숨기고 있지." "흐음, 요즘 세상에 어둠이 드리워지고 가뭄이 계속되는 등,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정령과 관련이 있다던데 무슨 일이냐?" "그걸 나도 잘 모르겠다." "엥? 넌, 정령왕이잖아?" "지난 50년간 난 겨울의 대륙의 산속 동굴에만 있었거든.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전혀 몰라." "허참, 어떻게 50년 동안이냐 동굴 속에 박혀 있냐. 이런 괴물 녀석." "......" 로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어진 이얀의 말을 들었다. "아! 페어리족의 여왕이라는 꼬마 아가씨가 찾아왔었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엘프 아가씨와 함께 왔더군. 급한 일이 있다며 널 급히 찾고 있던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 로얀은 이얀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걱정 마라. 아무런 일 없어." 그는 이얀이 걱정하지 않도록 웃으며 답해 주었고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자꾸만 흘러만 갔다. "쿨럭, 쿨럭."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얀의 기침소리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붉은 피를 항상 동반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얀이 손에 쥔 천을 입가에 가져가는 횟수가 늘어만 가고 있었다. "쿨럭, 쿨럭. 꼭 내 부탁을 들어주라." 피를 한차계 토하며 이얀은 로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꺼내는 그의 눈동자 속엔 미안한 감정이 들어 있었다. 로얀은 힘이 다 빠져 버린 친구를 가만히 안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너무도 작아져 버린 이얀을 품안에 안은 로얀은 그의 등을 손으로 쓸었다. "그때, 그날...... 그 전쟁 속에서 너를 만나고 인연을 맺은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내가 세운 제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은 황제인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그리고... 꼭 영원토록 행복하길 바란다." 이얀은 로얀의 품속에서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천천히, 그리고 또렷이 흘러나왔던 그의 음성은 갈수록 작아져 갔고 희미해져 갔다. "아직 50년간 하지 못했던 말을 다 나누지 못했다.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할까?" 로얀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편안한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얀을 바라보는 그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음성이 끝난 직후 아침이 왔고 방 안엔 로얀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아침임에도 햇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아침 속에서 로얀은 천천히 식어가는 친구의 몸을 안은 채 한동안 석상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석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람에 떨리는 나뭇가지처럼 떨리는 그의 몸과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달랐다. 그렇게 몰딘 제국을 세운 위대한 황제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얀 대제는 73세의 나이에 가장 믿고 좋아했던 친구의 품에서 생을 마감했다. 36장 종말의 전쟁 몰딘 제국은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검게 탄 하늘 아래 횃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왕성 앞 대로로 나와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모두 슬픔에 잠겨 있었으며 모르딘의 상징이 되었던 검은 옷 금지령이 사라져 너나 할 것 없이 흑색 일통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 금지령이 사라졌다는 것은 황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는 역시나 황제 이얀 대제의 죽음 때문이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던 이얀 대제였기에 이런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막상 그의 죽음을 접하자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모두 거리로 나와 눈물을 흘렸고, 왕성 앞엔 타오르는 횃불을 든 사람들로 인해 불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왕성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고 싸늘했다. 냉랭한 기운을 풍기며 왕성을 지키는 용맹한 왕성의 이름 높은 기사들은 오열했고, 황제를 보호하는 로얄 나이트들인 황실 근위대의 기사들도 투구 속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황제는 대륙을 통일하고 제국을 세운 황제답게 금으로 만든 화려하고도 거대한 관 안에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 누워 있었다. 죽은 황제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의 입술이 그리고 있는 호선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커다란 관 속에 누운 황제가 높은 왕성의 계단 위에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그의 가족들과 황제의 친척인 황족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앞에 있는 것이 황태자인 로얀이었고, 그 뒤를 프로미스와 두 공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섰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로 보아 모두들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그 뒤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 수가 확연히 차이나는 황족들이 서 있었다. 황족들의 뒤로는 궁정 마법사인 라셀과 황실 근위병들이 섰고, 관직 순으로 모든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 속에서도 의아해 하며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황제의 관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내였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엔 강한 의문과 함께 불쾌함이 담겨져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검은 옷에 갈색 망토를 두른 장신의 남자는 두 개의 검을 차고 있었다. 바로 로얀이었다. 그는 친구 이얀이 죽은 직후 지금까지 그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얀이 숨을 거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 것은 아침이 되어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시종들에 의해서 알려 졌다. 흑안의 검사를 만나기 위해 문밖에서 죽치고 앉아 있던 이들이 모두 기겁을 했고, 황제의 죽음은 모르딘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들이 모두 문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서거소식은 배로 빨리 퍼지게 된 것이었다. 갑작스런 소식에 왕성은 소란스러워졌고 흑안의 검사를 보기 위해 왔던 그들은 자신이 온 이유를 잊어버리고, 황제의 죽음만을 생각하게 되었었다. 그렇게 왕성은 한동안 떠들썩해졌고 황제의 장례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스윽. 로얀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이얀이 갔을 하늘 저편을 보기 위함이었다. 친구가 간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슬퍼 보였다. 그의 머릿속엔 그동안 이얀과 함께 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로얀은 자신의 두 검을 쓰다듬곤 이얀이 잠든 관을 지나 그의 관 앞에 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이들에게 말하겠다. 나 다크로얀은 친구 이얀의 마지막 유언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전한다." 로얀은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인 채 흐느끼는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말했다. 그의 힘이 담긴 목소리는 왕성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었고, 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들어올려졌다. 그들의 고개가 모두 일제히 번쩍 들어올려진 것이었다. 웅성웅성. 그의 그 말이 가져 온 파장은 컸다. 그의 말속에 담긴 뜻 중에 자신이 흑안의 검사라는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다크로얀은 흑안의 검사를 말함이 아닌가. 불경하게도 황제의 옆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것도 모자라 그의 앞에 선 뒤 이 자리에서 갑자기 그런 허언을 하자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외곽 경비대의 경비대장인 알트는 로얀을 알아보곤 더욱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트는 로얀이 황제의 관 옆에 서 있을 때부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헌데 그가 흑안의 검사 다크로얀이라 스스로 말하자 입이 찢어질 정도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로얀은 왕성 앞 대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촹. 웅웅웅! 그렇게 손을 움직인 로얀은 말없이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를 뽑았다. 그리곤 마나 소드를 펼쳤다. 백광의 오러가 두 검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오러 중에서 이게 가장 높은 것이기에 로얀은 마나 소드를 펼친 것이었다. 고오오오-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백광의 오러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었고, 두 개의 검으로 백광의 오러를 펼치는 사람은 대륙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얀이 검을 뽑아 백광의 오러를 생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너무도 젊은 모습 때문이었다. 이제 73세가 되었을 로얀의 모습이 약관의 청년으로 보이니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눈치 챈 궁정 마법사인 라셀은 옆에 있는 황실 근위대 대장의 팔을 툭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의도 속엔 여기 모인 이들 중 흑심을 품은 자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뜻도 담겨져 있었다. 라셀이 계단 위로 올라갔고 그 뒤를 황실 근위대 대장이 올랐다. 두 사람은 뒤돌아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분은 제국의 두 영웅 중 한 분이신 흑안의 검사가 맞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처척! 척! 가장 먼저 두 사람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일제히 로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간으로서 검의 극에 달한 이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나는 표현이었다. 원래는 허리를 숙여야 했지만 황제가 있는 자리라 고개만을 숙인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드래곤을 이긴 영웅이 눈앞에 있는 것이기에 기사들은 감격해 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로얀이 흑안의 검사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모두 예의를 표했고 궁정 마법사와 근위대 대장이 증언했다. 황제의 한 팔이었던 지혜로운 마법사와 황제가 가장 믿는다 할 수 있는 최 측근인 황실 근위대장이 증언한 것이다.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승하한 황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이황자 프로미스는 왠지 무척이나 당황한 듯했다. 또한 그의 곁에 있던 여러 대신들의 몸이 떨렸다. 그들의 반응은 로얀이 스스로 다크로얀이라 밝힌 뒤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들이 계획했던 그 무언가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전 대륙의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흑안의 검사가 나타난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전혀 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73세의 나이에 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함이 아닌가. 이황자를 비롯한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렇게 포기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로얀의 말대로 황태자가 그대로 황위를 물려받을 것이고 그에게 반기를 들려 했던 이들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모두 참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들 중 이황자와 그를 따르던 여러 신하들은 더욱 그러했고, 로얀이 흑안의 검사라는 것을 부정하려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며 고함을 지른 이는 이황자 프로미스였다. 그는 지금 극도의 공포로 인해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여기서 이대로 물러난다면 죽음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50년, 50년이다! 50년이 흘렀는데 어떻게 흑안의 검사가 고작 20대 초반의 외모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한 귀족이 이황자의 말에 동조하며 외쳤고, 이황자파의 모든 귀족들이 앞으로 나서며 외치기 시작했다. 이황자파의 귀족들을 색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잘 숨는다고 해도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귀족의 권위와 모든 것을 내놓는다면 달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에는 자신들의 모든 재산과 권력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들은 한배를 탄 몸인 것이다. "무엄하다!" "이분은 확실히 흑안의 검사이시네!" 궁정마법사 라셀이 다급히 나서며 그런 귀족들을 향해 외쳤고 이황자파의 귀족들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궁정마법사의 보증은 공허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아니, 그렇게 취급해야만 했다. "라셀! 당신은 황태자파에 속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대의 발언은 납득이 될 수 없다!" 이황자 프로미스가 황태자파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그 스스로가 지금 얼마나 당황했고 상황이 급박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그 말에 이황자파의 귀족들이 동조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럼 저의 말도 못 믿으시겠습니까?" 그때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졋다. 말을 건넨 이는 황실 근위대 대장이었다. 그는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보좌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로 오직 황제 이얀에게만 충성을 바친 강직한 기사로 유명한 이였다. 그렇게 황실 근위대 대장의 발언으로 상황이 싱겁게 종료되려고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익! 쳐라! 지금 이건 음모다!" 그건 절규에 찬 악에 받힌 외침이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황자파를 이끌다시피 했던 제국에 있는 두 명의 공작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뒤로 서 있는 사병들을 향해 외쳤고,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황자파의 다른 귀족들도 덩달아 자신들이 데려온 사병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 그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감히 내 명령......" 스거거걱! 목이 터져라 외치던 공작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투투툭!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기사들을 선동하던 공작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아니, 갈기갈기 찢긴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반듯하게, 깨끗하게 잘려져 있었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며 하얀 계단을 적셨고, 계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갔다. 그 끔찍한 모습에 사람들은 일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로얀은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다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지자 아버지의 시신 옆에 있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공작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그저 뭔가가 베이는 섬뜩한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 묘기 같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이 이곳에 단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황태자는 로얀을 바라본 것이었다. 황태자의 그런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도 어느새 흑안의 검사로 추측되는 로얀에게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로얀은 나직이 말했다. 천천히 흘러나온 목소리가 모르딘 전체로 퍼지는 듯했다. "내 친구가 자는데 시끄럽게 지저귀지 마라." 그의 그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다시 한 번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거거걱! 푸화화확! 그리고 또다시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투투툭! 역시나 떨어져 내리는 사람의 육신이 계단을 굴렀다. 이황자의 양옆에 있던 귀족 두 사람이 동시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소리만을 들었을 뿐 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덜덜. 바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이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자 중간에 홀로 남은 이황자 프로미스는 몰려오는 두려움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털썩. 그의 근처에 있던 첫 번째 공주인 미시아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고, 프라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스윽. 꿀꺽. 로얀의 눈동자가 천천히 사람들을 훑었고 이황자 프로미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접한 프로미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그때 로얀의 시야를 가리며 뛰어든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황태자 로얀이었다. 그는 로얀이 귀족들을 죽이고 자신의 동생인 프로미스까지 죽이려 하자 앞으로 나서며 그를 막아선 것이었다. 스윽. 황태자를 잠시 바라보던 로얀은 그의 진중한 표정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만하겠다는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황태자가 로얀을 말렸고 상황이 종료되는 듯하자 이황자파의 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얀이 귀족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 버렸기에 그의 신분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그 귀족들은 처참하게 갈라져 죽어 버렸었다. 이로써 로얀이 흑안의 검사라는 것이 이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명이 된 것이었다. 로얀에게 대항하는 것은 드래곤에게 대항한다는 소리와 같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력으로 증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고 흠모하는 대륙의 모든 기사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둘 모두를 충족하고 있는 상대다. 스릉.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로얀은 검을 다시 검집에 꽂고 황태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황태자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이얀의 유언에 따라 다음 대 황제는 예정된 대로 황태자 로얀이다." "와아아아-!" 갑작스런 발표였지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눈앞에 펼쳐진 전설이 될 이야기에 환호했다. 절세의 영웅 앞에서 황제의 보위를 이어 받은 황제는 분명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렇게 로얀은 갑작스런 발표를 하곤 뒤돌아 편안히 잠든 이얀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굳이 이 자리에서 그런 발표를 한 것입니까?" 그런 로얀을 향해 이제 황제가 된 황태자가 다가와 말했다. 이얀의 장례식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발표를 한 로얀이 이 순간 원망스러웠다. "얀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서 떠나는 것보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떠나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의 대답에 황제 로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동시에 뿌리며 오랫동안 거리를 지켰다. 그렇게 제국을 통일했던 이얀 대제는 여느 왕과는 달리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떠나갔다. 이 자리의 그 모든 것이 역사서에 쓰일 것이고 음유시인들의 노래 속에 담길 것이다. "정말 이렇게 떠나시는 겁니까?" 황태자에서 황제가 된 로얀은 이얀의 방이었던 곳에서 떠나려는 흑안의 검사 로얀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로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가 말하는 일이란 정령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이 다스리는 어둠의 정령 외의 다른 정령들이 중간계에서 사라졌다면 이는 필시 정령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리라. "해야 할 일?" 로얀은 황제의 반문에 답하지 않은 채 말을 계속이었다. "이얀이 사용했던 단도술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정령이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러니 절대 이얀의 단도술을 버리지 마라." "정령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아버지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단도술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스윽. 로얀은 등을 돌리며 이제는 황제가 된 이를 바라보았다. "넌, 어떤 나라를 만들 거지?" "그저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나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황제의 대답을 들으며 로얀은 몸을 돌렸다. 그의 눈앞엔 열어둔 창문이 보였다. 그곳을 통해 나가려는 것이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러한 너의 대답이 네가 황제가 된 이유다." "......" 로얀의 말에 황제는 웃음을 지었고 로얀은 천천히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로~얀~!"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느다란 것으로 보아 여성인 것 같았다. 타탁! 그리고 로얀이 나가려 했던 창문을 통해 누군가 들어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이는 두 명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뾰족한 귀의 아름다운 엘프와 나풀거리는 하얀 드레스에 분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흰색이 유난히도 어울리는 귀여운 소녀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밖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검을 손에 쥔 그들은 잠시 엘프와 소녀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굳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는 그들을 경계했다. 로얀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이들을 보며 말했다. "나의 일행이다. 여기서 그만 헤어지지." 방으로 들어온 이가 인간이 아니었고, 이들과 하는 대화를 황제나 다른 인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 황제는 로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깨닫고는 허리를 숙였다. 황제의 그 반응에 기사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그들도 로얀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한 나라의 황제로서 다른 이에게 허리를 숙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에게 만큼은 허리를 숙이겠습니다. 편안히 가시길 바랍니다." 황제는 그 말과 함께 기사들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끼이이익. 쿵. 황제와 기사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로얀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레아." "이익! 도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레아라 불린 하얀 드레스의 소녀가 로얀의 앞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50년 전 빛의 숲에서 헤어졌던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였다. 그녀는 50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로얀은 레아의 격한 반응을 뒤로하고 말했다. "그쪽은 그때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군." 로얀의 눈동자가 이번엔 레아의 뒤에 서 있는 엘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오래전 로얀이 엘프의 마을에서 한번 붙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엘프 타니아였다. 로얀의 말에 타니아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님." 그녀의 말투가 50년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가장 큰 변화가 로얀에게 존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타니아가 레아를 통해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니아의 말투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아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로얀은 레아를 바라보았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었나?" 로얀의 물음에 레아는 발꿈치를 들며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 이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그게 문제야!" 너무도 갑작스런 이야기에로얀은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지?" "천족과 마족이 전쟁을 시작하려고 해." "그놈들이 전쟁을 일으키는데 왜 세상이 망한다는 거지?" 로얀은 천족과 마족의 전쟁과 세상이 망한다는 상관관계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천족과 마족은 항상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리는 사이였기에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적대시 한다고 해도 세상이 망할 정도로 전쟁을 벌이진 않았다. 아니, 그렇게 전쟁을 벌일 수가 없었다. 천족과 마족이 규모 이상 의 전쟁을 벌이면 정령왕들이 나서 전쟁을 무산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족과 천족이 짜고 정령왕들을 모두 가둬 버렸어." 로얀의 안색이 굳어졌다. 레아는 한숨을 쉬며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천족과 마족은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면 항상 나타나 훼방을 놓는 정령왕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본능대로 마음껏 싸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천족과 마족은 그렇게 정령왕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싸워 보기 위해 그들을 가두기로 결정했다. 그들을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천계의 천신과 마계의 왕이라 할 수 있는 루시퍼에 의해 이루어졌다. 천계에 속한 신이나 마계에 속한 신이라 할 수 있는 마왕들은 모두 천신과 루시퍼의 명에 따르기에 반대를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단 네 명이서 천족과 마족 모두를 상대하는 정령왕들을 가두기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를 위해 천족과 마족은 각자 강한 힘이 깃든 무구를 찾는 것을 시작으로 네 명의 정령왕들을 가둘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천족과 마족의 연합이다. 모든 준비를 끝낸 천족과 마족은 네 명의 정령왕들을 그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곳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준비해 두었던 마법진을 펼쳤다. 마족이 구한 무구와 천족이 구한 무구가 기둥이 되어 펼쳐진 마법진이었다. 만반의 준비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도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것으로 네 명의 정령왕을 가둘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펼쳐진 마법진.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들이 성공한 데에는 그들이 준비한 마법진과 무구의 힘보다는 다른 요인이 더 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최강의 힘을 자랑하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정령왕을 가둔 천족과 마족은 부모님이 떠난 자리에 집안에 남은 아이들처럼 서로 즐거워하며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정령왕들이 갇히자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왕을 잃은 정령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세상의 질서가 어지럽혀지기 시작했다. 지금 중간계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이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 후 레아는 로얀을 찾아 나섰다. 천족과 마족의 전쟁을 막기 위해선 정령왕의 힘이 필요했고, 그들의 봉인을 풀 수 있는 이는 정령왕인 로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겨울의 대륙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로얀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정령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로얀이 있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맥만큼은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아의 이야기는 로얀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으로 끝났다. "엘라임이 그렇게 된 건 모두 나 때문이다." "휴우. 아무튼 그 바보 같은 마족과 천족이 전쟁을 벌이면 한쪽은 사라지게 될 거야. 둘 중 하나만 사라져도 세상은 붕괴될 거라고." "세상이 붕괴된다는 것을 천족이나 마족은 모르는 건가?" "알고 있겠지. 아마 전쟁 도중 스스로 중단하려 할 거야. 하지만 밀리는 쪽이 멈추길 바랄까?" 밀리고 있는 도중에 전쟁을 중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설사 완벽한 패배는 아닐지라도 상대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다 상관없다. 하지만 엘라임을......" 으드득. 엘라임을 가둔 천족과 마족을 생각하며 로얀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레아와 타니아가 들어온 창문을 바라보았다. 급히 나가려는 로얀을 보며 레아는 그의 망토를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봐! 천족과 마족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드래곤 산맥에 있는 룬을 통해 가는 수밖에 없어." "알고 있다." "에? 그러면 어떻게 룬으로 갈 건데? 음, 로얀은 모르겠지만 드래곤들은 널 안 좋게 생각해.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드래곤 슬레이어 때문에 그들의 자존심에 심한 금이 갔기 때문에 아마 널 보면 공격하려고 할걸?" 레아는 당연 로얀이 망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 같이 그에 대해 의논하길 바랐다. "내 앞을 막으면 모두 죽이고 간다." "그, 그건 아무리 너라도 불가능해!" "오래전 룬을 통해 정면으로 드래곤들을 뚫고 정령계로 가고자 했었다. 그리고 나에겐 나를 따르는 정령들이 있다. 걱정 마라." 로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레아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50년 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의 그였다. 그 때문에 레아는 굳어 버렸고 타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화앗! 로얀은 그렇게 창문을 통해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빠져나온 로얀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휘날렸고 검은 하늘에 빛을 뿌렸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로얀의 뒤로 검은 날개를 휘날리는 다크니스들이 솟아올랐고, 하급부터 최상급까지의 모든 어둠의 정령들이 모두 로얀의 뒤를 쫓았다. 어둠의 정령들이 로얀과 함께 모르딘을 떠나자 황제의 방 안엔 레아와 타니아만이 남았다. 로얀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타니아가 레아를 향해 말했다. "이걸로 우리가 할 일은 끝난 건가요?" "아니." "네?" "난 정령계로 가봐야겠어." 레아는 타니아에게 그렇게 말하곤 급히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몸을 날린 레아는 투명한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 높이 사라져 갔다. 37장 룬을 향해 드래곤 산맥은 중간계에서 최강의 생명체로 군림하고 있는 드래곤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강한 힘을 지녔으며 포악한 성질을 지닌 드래곤이 모여 사는 곳답게 이곳에는 인간의 마을도, 엘프나 드워프의 마을도 존재하지 않았다. 산맥의 여기저기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었고 산맥의 곳곳엔 강한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몬스터와 드래곤만 사는 드래곤 산맥은 태초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칸 대륙의 모든 드래곤의 레어가 드래곤 산맥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다수의 드래곤이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룬이 드래곤 산맥에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드래곤 산맥이 칸 대륙을 크게 둘로 나누는 선이 되기 때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모든 대륙과 이어져 있으며 중간계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드래곤 산맥이기에 드래곤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또한 드래곤 산맥은 자원이 풍부했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드래곤 산맥을 찾는 이들은 전무하다 할 수 있었기에 드래곤 산맥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에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며 막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대한 산맥의 정상엔 자욱한 안개가 뒤덮여 있었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하늘에 솟아 오른 뾰족한 산꼭대기에 뿌연 안개가 고리처럼 걸려 있었다. 언제나 드래곤 산맥은 누구도 찾지 않기에 울부짖는 몬스터들의 소리와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흘러나오는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그들의 우렁찬 울부짖음만이 산맥 곳곳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화아아앗! 하지만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그 누구도 함부로 찾아오지 않는 드래곤 산맥으로 흑색 빛 덩어리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가올수록 뚜렷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괴이했다. 검은 날개를 휘날리고 있었고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손에 휘감긴 붉은 천을 제외하곤 온통 흑색인 칙칙한 옷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등에 있는 날개만 보아선 타천사 같아 보였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마기와는 전혀 다른 따스한 정령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복장을 한 이가 있었다. 비록 망토만 다르다 할 수 있었지만 갈색의 망토를 휘날리는 유난히 눈에 띄는 이였다. 바로 로얀이다. 로얀의 뒤로 보이는 검은 날개의 주인들은 어둠의 최상급 정령인 다크니스들이었다. 그리고 로얀의 바로 옆에는 다크로드가 있었다. 어둠의 정령들은 온통 검은 갑주로 가려져 있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회색 눈동자가 내는 빛은 드래곤 산맥의 중앙에 둥실 떠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바로 룬이었다. 중간계에서 유일하게 천계, 마계, 정령계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곳이자 드래곤들의 성지이며, 드래곤들의 회의장이기도 한 곳이 바로 저 룬이라는 곳이었다. 슈아아앙! 로얀은 룬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의 뒤를 그의 등에 달려 있는 검은 날개가 빛을 뿌리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검은 빛의 가루를 뿌리며 그의 뒤를 다크니스들이 쫓았다. 검은 빛의 가루를 뿌리며 날개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수백의 다크니스들이 펼치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그런 그들의 멋진 모습을 시샘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들의 등장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건 바로 드래곤 산맥의 주인인 드래곤들이었다. 드래곤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한 이들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로얀과 다크니스가 드래곤 산맥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자고로 밤에 찾아오는 손님치고 환영받는 이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넘어가더라도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로얀을 좋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로얀이 그림자 속에 숨는다고 해도 그를 제외한 다른 정령들은 드래곤들에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기에 로얀은 처음부터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지 않은 채 룬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런 그들을 향해 드래곤 산맥에서 골드 드래곤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이는 그 세 드래곤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드래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드래곤들이 레어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귀찮아서다. 세 마리의 드래곤이 날아오르자 일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 신경을 끊은 탓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쿠오오오-! 날아오른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거대한 눈에서 드래곤 피어를 뿌리며 로얀과 다크니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 마리의 드래곤은 모두 같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들 거대한 덩치를 지닌 에이션트 급의 드래곤들로 찬란한 황금빛 비늘을 지닌 거대한 골드 드래곤들이었다. 그 중 가운데에 있는 골드 드래곤이 말했다. 그의 목소린 침입자를 맞이하는 이의 목소리치곤 이상하게도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그의 음성엔 강한 힘과 함께 거대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로얀에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로얀은 그를 보며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응시했다. "나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난 룬으로 가겠다." 로얀은 짧게 용건만을 말하곤 앞으로 다시 나아가려 했지만 드래곤들은 그런 그의 행동을 막았다. 피식. 주춤거리는 로얀을 바라보며 드래곤들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얀의 말 속에 등장하는 다크로얀이라는 이름에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며 뭐라 대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크로얀? 쿡쿡. 우리 동족을 죽인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인간 녀석인가?] 드래곤 산맥으로 걸어 들어온 것도 아닌 날아온 데다 정령의 기운과 괴이한 기운을 풍기는 로얀에 대한 모든 것을 그 한마디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이실리아도 페르디난드도 루시어스도 모두 당했으니까.] [흥! 이곳은 드래곤 산맥이다. 잊었나?] 순간 걱정을 하던 두 마리의 드래곤은 들려온 드래곤의 말에 마음의 여유를 지닌 채 로얀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드래곤 산맥이었다. 수백의 드래곤들이 모여 있는 드래곤들의 성지인 것이다. 드래곤 산맥에서 드래곤과 싸운다는 것은 드래곤족 전체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들의 뒤에는 수많은 드래곤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을 마주 바라보는 드래곤들에게선 여유로움이 넘쳐 났다. [하하하, 감히 룬으로 가겠다?] "막으면 죽인다." 로얀은 한시 바삐 룬을 통해 엘라임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신 때문에 엘라임이 상처를 입었고, 그 때문에 그녀가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그였다. 자연히 로얀의 음성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건방진 놈!] 하지만 그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드래곤들에겐 그의 말이 한없이 건방지게 들려왔고, 그들의 분노를 더욱 가증시켰다. [죽여주마!]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로얀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휘오오오-! 그들의 주위에서 마나가 요동쳐왔다.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답게 마법을 펼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법을 펼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이 마법을 펼치기 위해선 시동어만 외치면 시전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들에겐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촤촹! 스거거걱-! 로얀의 검은 단 몇 초도 허용하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다크니스들이 그 세 마리의 골드 드래곤들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몸을 지닌 드래곤의 몸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그들이었지만 수십 명이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자 세 마리의 드래곤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츄아아아악! 더구나 세 마리의 드래곤들 중 그 누구도 다크니스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그들의 비행능력이 드래곤보다 월등히 뛰어난 탓이었다. 다크니스의 팔에 감겨 있던 붉은 천은 두 개의 검으로 변해 다크니스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붉은 검신을 빛내는 그들의 검은 붉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붉은 피의 주인은 거대한 드래곤들이었다. 스거거걱! 쿠어어어-! 다크니스는 그 단단하다는 드래곤의 비늘을 종잇장 베어내듯 가르고 있었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이곳저곳의 살을 도려내는 그들로 인해 세 마리의 드래곤은 몸부림치며 붉은 피를 쏟아내었다. 허공에 떠 있는 살아 있는 거대한 표적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쿠어어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수십 명의 다크니스가 펼치는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의 덩치가 워낙에 컸기에 그들의 검을 피할 수도 없었다. 쿠어어억-! 얼마 가지 않아 고통을 견디지 못한 한 마리의 골드 드래곤이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쿠쿠쿵! [크아악! 이 자식들!] 바닥을 구른 탓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골드 드래곤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하늘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쩍 벌렸다. 우우웅! 마나가 그의 입으로 모이는 것으로 보아 브레스를 쏘려는 듯했다. 콰지지직! 쿠어어어-! 하지만 그의 시도는 너무도 황당하게 무산되어 버렸다. 그의 거대한 몸을 뚫고 섬뜩한 뭔가가 수없이 박혀들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공격한 존재를 보려던 골드 드래곤의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검을 겨누고 있는 이는 상급 정령인 세드니스였다. 그리고 그의 몸을 뚫고 박힌 섬뜩한 무언가는 세드니스의 검이었다. 푸푹! [크아아아!] 드래곤은 고통에 찬 신음성을 토해냈지만 그건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 푸푸푹-! 단단한 비늘 탓에 검이 잘 들어가지 않았기에 세드니스들은 드래곤의 허점을 노리며 검을 박아 넣었다. 비늘처럼 단단하지 않은 눈이라든지 말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세드니스에게 몸을 내준 드래곤은 고슴도치같이 변해 버렸다. 세드니스들이 드래곤의 몸 중에서 잘 박히지 않는 곳이 있다 할지라도 억지로 살을 꿰뚫고 쑤셔 넣고 있었기에 드래곤의 몸은 금세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세드니스의 검은 칼이 드래곤의 몸에 주렁주렁 박혀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세드니스는 눈을 빛내며 검을 들어 올려 그의 큼직한 금색 눈 안에 박아 넣었다. 콰직! [크아아아악!] 비늘이 없는 드래곤의 눈 속으로 세드니스의 검이 깊이 박혀 들어가자, 골드 드래곤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푸푸푹! 골드 드래곤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검을 쥔 세드니스들이 더욱 골드 드래곤의 몸속 깊이 그것을 박아 넣었다. 세드니스의 검이 드래곤의 살을 헤집으며 더욱 깊이 박혔고, 골드 드래곤이 겪는 고통은 배가되었다. 푸욱! [크아아아!] 그렇게 느껴져 오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골드 드래곤의 움직임이 곧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온몸에 붉은 피를 철철 흘리는 그에게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화르르륵! 쾋하하항! 하지만 그는 눈이 서서히 감겨지려 할 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역시나 중간계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이답게 그의 마지막 일격인 드래곤의 브레스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힘들 정도로 상처를 입었었지만, 그는 세드니스들에게 둘러싸여져 있는 자리에서 마나를 입 안 가득 끌어모으곤 드래곤들의 상징인 브레스를 쏜 것이었다. 콰가가가가강-! 그가 남긴 브레스는 자신의 앞에 있던 세드니스들과 울창한 숲을 덮쳤다. 스르륵! 하지만 드래곤이 입안에 마나를 모으는 순간부터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세드니스들이었기에 브레스는 세드니스를 맞추지 못했고 죄 없는 숲만을 파괴했다. 그렇게 마지막 일격인 브레스를 쏜, 온몸에 칼이 박힌 골드 드래곤은 죽음을 맞이했다. 피범벅이 되어 숨을 거둔 그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했다. 허나, 그의 그 마지막 일격이 아무런 효용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세 드래곤이 로얀을 맞으러 나가고 난 뒤 레어 안에서 관심을 끊은 채 웅크리고 있었던 다른 드래곤들을 깨운 것이다. 골드 드래곤이 마지막 일격으로 토해낸 브레스가 숲을 뒤엎으며 굉음을 터뜨리자 드래곤 산맥의 전 드래곤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레어에서 나왔다. 드래곤 산맥에서는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함부로 숲을 파괴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으로 인해 골드 드래곤이 숲을 파괴했다. 그것은 상황이 상당히 위급했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전 드래곤이 다시 관심을 갖고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쿠쿵! 골드 드래곤의 거대한 머리가 지축을 뒤흔들며 떨어져 내렸다. [아니!] 그렇게 죽어 버린 동족을 보며 하늘에 떠 있는 두 마리의 드래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지상의 세드니스들을 처리하고자 드래곤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급히 명을 내렸다. 쿠어어어-! 삐이이익! 끼아아악! 드래곤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있어 산맥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의 명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두 드래곤의 명령은 모든 몬스터들에게 전달되었고, 곧 드래곤 산맥에 있는 각종 몬스터들이 일제히 세드니스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세드니스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은 다양했다. 하늘을 나는 비행 몬스터도 있었고 거대한 몸집의 대형몬스터들도 있었다. 우어어어-! 쿵쿵쿵! 키키킥!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며 세드니스들은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죽은 골드 드래곤에게로 다가갔다. 푸푹! 그리고는 죽은 골드 드래곤의 시체에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두꺼운 비늘을 뚫고 검을 박을 때에는 힘들었지만, 빼내는 데에는 너무도 쉬웠다. 스르륵. 그런 세드니스의 모습 주위로 모습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어둠의 중급 정령인 데스였다. 그동안 몸을 숨긴 채 따라오던 그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모습을 나타낸 어둠의 중급 정령 다크는 커다란 사신의 낫을 어깨에 짊어진 채 광분하는 몬스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르르륵! 쿠어어어-! 그렇게 지상에선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스가가각! 케케켁! 그러나 이를 전쟁이라 볼 수는 없었다. 정령들의 일방적인 학살이었기 때문이었다. 상급 정령인 세드니스 외에도 그들보다 배 이상의 많은 수를 지닌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가 가담해 발휘하는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는 모습은 작았지만 사신의 낫이라 불리는 시클을 든 모습답게 몬스터들 도륙해 나가며 사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쿠어어어-! 몬스터만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많은 드래곤들이 포효하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드래곤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들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는 더욱 차갑게 빛나며 착 가라앉았다. 스윽. "모두 죽여주마." 로얀은 그 말과 함께 그제서야 지금껏 뽑지 않았던 검을 뽑기 위해 허리춤에 차여져 있는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후우우웅! 로얀이 검을 뽑으려 하는 동안에 드래곤들은 일제히 브레스를 쏠 준비를 했다. 그렇게 검을 뽑아든 로얀과 다크니스들, 브레스를 쏘기 위해 준비하는 드래곤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쿠오오오-! 수백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동시에 브레스를 쓰기 위해 대기 중에 떠다니는 마나를 모으자 강한 기의 파동과 함께 마나가 소용돌이쳤다. 그동안 얼굴에 변화를 보이지 않던 로얀도 그 광경에 긴장하며 두 개의 검을 엇갈리게 표하며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로얀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복사할 수 있었지만 저 많은 드래곤이 쏘는 브레스를 피하거나 막아야 한다는 선결과제가 우선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저 브레스의 비 속에서 살아남아야 되돌려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날아오는 브레스를 보고 바로 날릴수도 있었지만 수백 개의 브레스를 모두 볼 수는 없다. 대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브레스의 속도는 평범한 인간의 눈으론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평범하지 못한 로얀이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로얀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많이 접해 봤기에 더욱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쿠오오오-! 로얀은 금방이라도 드래곤의 거대한 입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마나의 덩어리를 보며 긴장했따. 그와 마찬가지로 다크로드와 다크니스들도 긴장하며 다가올 브레스의 비에 대비했다.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과는 달리 브레스를 완전히 피할 수 없었기에 더욱 대비해야 했다. 게다가 브레스에 맞으면 그대로 소멸해 100년 후에나 다시 깨어날 수 있기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쿠오오오-! 드래곤들은 로얀과 다크니스의 태도가 브레스를 대하자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보곤 그들이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이미 터져 나오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지만 드래곤들은 느긋하게 로얀과 다크니스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겁에 질려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들이 공포에 절은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레스는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했다. 그때, [모두 멈춰라! 로드로서의 명령이다!] 바로 그때 다른 드래곤들의 음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위압감과 거대한 힘이 실린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드래곤 산맥 전체로 울려 퍼졌다. 그의 그 목소리에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그의 말 속에 마법의 힘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모습을 나타낸 이는 붉은 비늘을 지닌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었다. 그는 모든 드래곤의 등급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에이션트 드래곤의 평균적인 체격에 비교해도 매우 큰 덩치를 지니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그의 등장에 브레스를 쏘려던 드래곤들이 일제히 중단하며 입 안 가득 모아 두었던 마나를 다시 흩어 보내야 했다. 지상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싸움도 마법이라도 걸린 듯 중단되었다. 멈춰버린 듯한 몬스터들을 보며 어둠의 정령들은 아무 말 없이 상황 판단을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명령을 내려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하늘에 떠 있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산맥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숨소리마저 잠재운 레드 드래곤은 몸집에 걸맞는 거대한 날개를 한번 퍼득이며 말했다. [이제 그만들 하게나. 그리고 모두 각자의 레어로 돌아가게.] 휘오오오-! 날개를 한번 퍼득였을 뿐인데, 강한 돌풍이 불며 하늘에 떠 있는 이들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존재감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말에도 반박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드래곤들이었다. 이 시건방진 인간을 곧 죽일 순간에 중단시켰기에 억울한 듯했다. [하, 하오나 로드!] 반박하는 드래곤들의 말 속에 담긴 로드라는 말. 그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바로 모든 드래곤들의 수장이자 대표인, 드래곤 족에서 가장 강하다는 드래곤 로드였다. 전 드래곤을 다스리는 드래곤 로드답게 그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드래곤족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레드 일족의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족 중에서 레드 드래곤이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건 역대의 드래곤 로드 중의 거의 모두가 레드 드래곤이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결코 저놈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로드가 직접 모습을 나타내며 명했지만 많은 드래곤들이 그의 명에 강하게 부정의 의사를 표하며 나섰다. 특히 드래곤 로드의 말에 가장 강하게 반박하는 이들은 골드 드래곤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열을 내며 나서는 이유는 이미 두 드래곤이 깊은 상처를 입었고, 한 드래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골드 드래곤의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외에도 이실리아와 페르디난드, 루시어스, 카엔이 속했던 종족들이 반박해 왔다. 골드 드래곤인 페르디난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속했던 레드, 실버, 블랙 일족이 바로 그들이다. 그에 반해 나머지 화이트, 그린, 블루 일족이 멀리서 불구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드래곤들을 보며 드래곤 로드는 조용히 자신의 뜻을 전했다. 흘러나오는 그의 말은 조용히 울려 퍼지는 것이었지만 그 어떤 이의 말보다도 가슴깊이 새겨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로드의 권능을 사용하겠네.] 휘오오오.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며 반박하던 드래곤들이 모두 그의 단 한 마디에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드래곤 로드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바로 드래곤 로드의 권능이라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권능에 대해 설명하자면 먼저 드래곤 로드라는 자리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드래곤 로드라는 자리는 다른 종족이 볼 때에는 대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당사자인 드래곤들에게 있어서는 귀찮은 자리에 불과했다. 천성이 게으른 드래곤이기에 그들 중 다른 동족들을 관리하며 생을 보내고 싶은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래곤들이 단합하려면 대표자가 반드시 필요했고, 좋든 싫든 드래곤들은 억지로 한 명을 지목해 드래곤 로드의 자리에 앉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드래곤들은 하나의 법칙을 정해 놓고 드래곤 로드를 선출했는데, 그 법칙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 가장 강한 드래곤이 드래곤 로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법칙 때문에 최강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많은 드래곤들이 많은 드래곤들의 떠밀림에 드래곤 로드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고 자신의 평생을 희생(?)해야만 했다. 그 때문인지 드래곤 로드가 되지 않으려고 잠적한 드래곤도 많았다. 잠적했던 드래곤을 다른 모든 드래곤이 앞장서 찾았기에 탈출을 시도했던 대다수의 드래곤이 잡혀와 드래곤 로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전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혼자서 전 드래곤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자신의 힘을 숨기는 이도 있었고, 필사의 탈출을 하는 이도 있었다. 자신의 힘을 숨기는 이는 드래곤들이 힘을 모아 만든 힘을 측정하는 아티팩트로 인해 밝혀졌지만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던 이들 중엔 정말로 종적을 완전히 감춰버린 드래곤도 있었다. 레드 일족이 아닌 다른 일족이 드래곤 로드가 되었을 때가 바로 한 드래곤이 로드의 자리를 피해서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고, 성공했던 때였다. 그렇게 모든 드래곤이 싫어하는 드래곤 로드의 자리이기에 각 드래곤 족의 대표가 모두 모여 회의한 끝에 드래곤 로드에게 한 가지 권한을 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든 드래곤들을 위해 일생을 희생하는 대신 주어지는 특권인 셈이었다. 드래곤 로드의 권능은 로드의 일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드래곤 로드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전 드래곤족은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죽음을 명한다거나, 드래곤 하트를 달라고 하는 등 너무도 터무니없거나, 말도 안 되는 부탁은 제외되지만 말이다. 드래곤 로드의 말에 하늘을 날고 있던 드래곤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 [어, 어째서!] [그럼 됐겠지?] 단 한 번뿐인 권능을 로드가 여기서 사용하자 많은 드래곤들이 강한 의문을 표했지만 드래곤 로드는 느긋하게 로얀을 향해 말했다. [거기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날 따라와 주게.] 그렇게 말한 드래곤 로드는 눈앞에 보이는 룬을 향해 날아갔다. 그 뒤를 로얀과 다크니스가 뒤따랐고 지상의 세드니스와 데스는 다시 몸을 숨겼다. 그들의 앞을 드래곤들은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 로드가 자신의 평생을 담보로 받은 권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드래곤들이 자신들을 지나쳐 룬을 향해 날아가는 로얀과 다크니스에게 강한 살기를 풀풀 풍겼지만 그들의 앞을 막지는 않았다. 비록 드래곤 로드가 로얀을 데리고 가려는 방향헤 그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룬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드래곤들은 살기를 풀풀 날리며 조용히 이를 갈 뿐 이를 저지하거나 달려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분노한 드래곤들이 만들어내는 드래곤 피어의 길을 지나 로얀과 다크니스는 룬을 향해 날아갔고, 룬의 땅 위에 발을 내딛었다. 로얀이 드래곤 로드로 인해 룬으로 쉽게 들어갈 때, 레아는 다른 방법을 통해 룬으로 가기 위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로얀을 따라가고 싶었고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작은 날개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를 내며 그는 룬을 향해 날아갔다. 검게 죽은 하늘을 열심히 날아 레아가 도착한 곳은 푸른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이었다. 이곳은 빛의 숲으로 레아의 고향이자 그녀가 사는 곳이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여기까지 와서 찾는 그 누군가는 바로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였다. 그라시드는 드래곤 로드에게 있어 비서 같은 존재로서 그의 옆에서 많은 것을 도와주고 있는 인물이었다. 특이한 성격만 뺀다면 지혜의 드래곤이라는 골드 드래곤보다 더 지혜로운 이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의 특이한 셩격이란 너무도 낙천적인 성격을 말했다. 오죽하면 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또 다른 아름다움이라 말했고, 지금의 하늘을 그림에 담겠다며 외쳐댔겠는가. 그가 인간들의 세계로 따지자면 드래곤 로드의 비서였지만 항상 드래곤 로드 곁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도 자유분방한 특성을 지닌 드래곤이었고, 그에게도 쉴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드래곤 로드와 다를 바가 없는 일생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빛의 숲의 아름다움에 반한 그라시드는 오래 전부터 이곳으로 이사 와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드래곤 산맥에 사는 드래곤들처럼 레어를 만들어놓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빛의 숲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았고, 이를 절대로 망가뜨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는 오두막을 손수 짓고 엘프로 폴리모프를 했다. 이 아름다운 숲에 동화되어 조용히 은거를 하듯 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엘프들과 페어리들은 그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었다. 아니, 그가 직접 빛의 숲에 사는 이들을 찾아가 새로 이사 왔다며 자신을 소개하고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었다. 누가 드래곤이 이사왔다는데 그것을 반대할 수 있겠는가. 엘프들과 페어리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 간에 교류가 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엘프를 포함한 빛의 숲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저 멀리서 힐끔거리며 그라시드를 지켜볼 뿐 직접적으로는 다가가질 못했다. 너무도 당연했다. 그들 모두가 드래곤을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시간과 그라시드의 태도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를 무서워하는 분위기였고, 그에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지금은 빛의 숲에 사는 모든 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그라시드를 찾아갈 정도로 빛의 숲에 사는 이들은 그라시드를 믿었고 그를 따랐다. 그렇게 보든 이들에게 인정받은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는 빛의 숲에 정착을 하게 되었고, 그곳의 주민이 되었다. 자연히 이곳에 사는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와는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인연으로 두 사람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레아도 처음에는 그라시드를 어려워하고 멀리했었지만 그의 너무도 괴이한 성격과 특이한 취미생활에 호기심을 보였고, 이내 오랜 세월을 함께 나눈 친구처럼 친해지게 되었다.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온 레아는 한참을 풀밭을 거닐었다. 그라시드의 행동 범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오두막집이 있는 위치를 레아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집안에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항상 빛의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그였다. 때문에 레아는 풀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페어리들에게 명령을 내려 찾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빛의 숲의 크기가 어마어마했기에 작은 어린 소녀의 몸을 지닌 레아로서는 사막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웠다. 그녀의 등에 작은 날개가 있었지만 그 날개를 퍼득이며 빛의 숲 전체를 뒤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그라시드는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빛의 숲의 동굴 속에 들어가기도 했기에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물속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다며 물속에도 들어가는 그라시드였다. 바스락 바스락. "그라시드!" 레아는 힘차게 외치며 초록 풀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두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댄 채 사방을 둘러보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외침소리는 숲속으로 울려 퍼졌다. 다른 페어리들도 그라시드를 찾기 위해 빛의 숲속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레아의 목이 쉬어 소리를 지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녀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바스락 바스락. 풀숲을 헤치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레아는 풀이 우거져 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라시드?" "하하하, 페어릳족의 여왕님께서 어째서 여기에 왔는지요?" 레아가 상대를 확인하기 윟 꺼낸 말에 대답을 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레아를 향해 다가왔다. 바스락 바스락. 이윽고 풀숲을 헤치며 누군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가 바로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였다. 그라시드는 로얀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빛의 정령 때문에 그를 찾으러 나왔다가 로얀과 엘라임과 마주쳤었다. 단지 스쳐 지나갔던 인연이었지만 로얀과는 한번 만남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레아를 바라보는 그라시드의 초록색 에메랄드 같은 그의 눈동자는 반가움 반 장난기 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초록색 엘프들이 즐겨 입는 옷을 입고 있었고, 두 손에는 갖가지 도구가 들려져 있었다. 모두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들이었다. 레아는 그라시드의 장난기 어린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다짜고짜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에?" 그라시드는 그녀의 태도에 순간 당황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레아는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진지하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날 드래곤 산맥의 룬으로 보내줘." "루, 룬이요?" 그라시드는 대뜸 레아가 룬으로 보내달라고 하자 더욱 당황해야만 했다. 아무리 그가 낙천적인 성격에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특이한 드래곤이었지만 레아의 룬으로 보내달라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룬은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곳이 아니다. 드래곤들이 모여 회의 하는 곳이자 다른 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곳이다. 어떠한 드래곤에게든 다른 이들이 룬을 통해 다른 계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건 태초의 약속으로써 드래곤들에게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가 당황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는 너무도 진지한 레아의 얼굴을 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흘리며 말을 돌리려 말을 이었다. "그런 돌덩어리에 가서 뭐 합니까. 차라리 제가 요 며칠 전에 발견한 장소로 가시죠. 정말 기막힌 풍경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써......" 말을 잇던 그라시드는 레아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는 것을 발견하곤 말끝을 흐렸다. "정말 꼭 가야겠습니까?" 오랜 친구였기에 그라시드는 드래곤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응! 세상의 멸망이 걸려 있는 문제라니까!" 세상이 멸망하는 것과 레아가 정령계로 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었지만 레아는 당당히 말한 것이다. "이 검은 하늘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응! 이제 곧 정령왕들의 봉인이 풀리는데 내가 정령계로 가봐야겠어.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거든." 그녀가 그렇게 정령계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로얀과 관계가 깊었다. 그날 로얀이 모르딘을 떠날 때 레아는 그의 등을 보며 왠지모를 불길함에 휩싸였었다. 기분 탓이라 생각했지만 계속 그의 뒷모습이 눈에 밟히자 즉시 빛의 숲으로 온 것이었다. 정령계로 가 정령왕들의 봉인이 풀렸을 때에 그들에게 로얀에 대한 것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봉인을 푼 로얀을 마계와 천계에서 가만히 둘 리가 없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를 구출해야 했고, 그러려면 봉인이 풀린 정령왕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날 로얀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 후회가 되기까지 한 그녀였다. 그라시드는 레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결정을 내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아는 그의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숲의 이웃이었다. "후~. 일단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만, 로드께서 반대하시면 다른 계로 가는 게이트를 탈 수 없을 것입니다." "걱정 마. 드래곤 로드께선 날 정령계로 보내 주실 거야." 레아는 방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에효~. 알겠어요. 일단 가보도록 하죠." 그라시드는 한숨을 한차례 더 쉬곤 몸을 움직였다. 먼저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도구를 자신의 집으로 돌려보냈고 레아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새어 나온 푸른빛은 레아와 그라시드를 감쌌다. 그렇게 푸른 빛에 감싸인 레아와 그라시드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레아가 룬으로 오기 위해 그라시드를 찾고 있을 때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이 드래곤 로드를 따라 룬에 도착했다. 룬은 의외로 단순했고, 너무나 썰렁했다. 거대한 탁자와 수십 개의 의자만이 덩그러니 룬의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룬은 거대한 돌덩어리 같은 모양을 지닌 것답게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삭막한 땅이었다. 말 그대로 떠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인 것이다. 중앙에 있는 의자가 로드의 자리로 보였고, 그 자리의 뒤편엔 거대한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탁자의 양 옆에도 거대한 문이 보였다. 로드의 자리를 기준으로 뒤에 있는 문은 초록색의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는 게이트였고, 오른쪽에 있는 문은 이글거리는 붉은 화염이 넘실거리는 게이트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왼쪽 편에 있는 것은 새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게이트였다. 화아아앗! 룬으로 도착한 드래곤 로드는 폴리모프를 하여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변화시킨 드래곤 로드의 모습은 레드 드래곤답게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인간 남자였다. 드래곤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폴리모프했을 때의 모습이 늙은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이 펼치는 폴리모프는 그들이 원하는 연령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종족까지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폴리모프 할 수 있는 것은 중간계에 존재하는 존재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는 폴리모프를 할 수 없다. 붉은 눈동자의 중년 남자가 된 그는 로얀과 다크니스들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이곳에 온 건 네 명의 정령왕에게 걸린 봉인을 풀고 싶기 때문이겠지?" "......!!" 스윽. 로드의 말에 로얀은 그립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하하. 걱정 말게. 난 자네의 앞을 막으려는 게 아냐." 로드는 로얀의 손이 그립으로 향하며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보곤 호탕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이실리아를 오래전부터 감시해 왔다네. 그리고 그 와중에 자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지." 말을 하던 드래곤 로드는 긴 회상에 잠겼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보아오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한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이실리아를 감시하던 중 드래곤 로드는 로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와 이실리아의 관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실리아와 드래곤들을 어떻게 죽였는지에 관한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들의 유희였고, 그들이 자초한 일이었기에 나서지 않고 놔두었었다. 무엇보다도 그 와중에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드래곤 로드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리 로얀의 정체를, 그의 힘을 끝까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로얀이 네 마리의 드래곤을 죽이는 것을 보곤 그가 스스로 칭한 것처럼 혼돈의 정령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로얀은 너무나 큰 호의를 베푸는 드래곤 로드를 보며 강한 의문을 표했다. 드래곤 로드의 권능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적지 않은 희생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드래곤 로드의 너무 과한 호의에 로얀은 그를 경계했다. "왜 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지?" 로얀의 물음에 드래곤 로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칸 대륙에 사는 이상 이 차원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다른 드래곤들은 어째서 날 막은 거지?" 로얀이 의문을 표하자 드래곤 로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다른 드래곤들은 자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 "부정?" "하하하. 그들도 자네가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드래곤 로드는 말끝을 흐리며 말을 이어 설명했다. 다른 드래곤들 또한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중간계에서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들의 속마음이었따. 드래곤들은 로얀의 존재를 부정했고, 그들은 로얀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만약 드래곤 로드가 로얀이 이곳으로 찾아 올 테니 얌전히 자신에게로 보내라고 말했다면 그들이 들어주었을까? "게다가 우리 드래곤들의 모든 힘을 합친다고 해도 마계와 천계의 전쟁을 말릴 수가 없어. 기껏해야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지." "......" "헌데, 자네가 그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서 드래곤들이 들을까? 난 우리 드래곤들을 아주 잘 알고 있지." "......" "만약! 자네가 정말로 정령왕들의 봉인을 푼다면 모든 드래곤들이 자네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야." 드래곤 로드의 말이 쭈욱 이어지는 와중에도 로얀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듣기만 했다. "하하하. 드래곤 로드라는 호칭은 이렇듯 이름만 거창할 뿐이지 실속은 없다네. 뭐, 어쨌거나 이렇게 만났으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나." "......" 로드는 로얀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 하자 웃으며 정령계로 가는 게이트 앞까지 걸어갔다. 드래곤 로드는 로얀이 생각에 잠겨 있든 말든 게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령왕들은 마계, 천계, 정령계가 모두 만나는 곳에 있네. 그리고 그 봉인을 풀려면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를 지닌 이들을 죽여야 해." 로얀은 드래곤 로드의 설명 속에 있는 빛의 무구라는 말에 오래전 만났던 이들을 떠올렸다. 빛의 성지에서 만난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와 천사 아델레이트가 생각난 것이다. 그들은 천계의 명을 받고 빛의 무구라는 것을 찾으러 왔다고 했었다. 로얀은 그들이 찾은 빛의 무구를 본 적이 있었다. 백색 팔찌 모양의 그것은 강한 신성력을 뿜어냈고 엄청난 파괴력을 선보이는 기이한 물건이었다. 또한 로얀은 그 물건을 사용하는 천사 아델레이트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었다. 로얀은 과거의 생각을 접고 로드를 향해 물었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당연히 빛의 무구를 지닌 이는 천계에 있고 어둠의 무구를 지닌 이는 마계에 있지. 아! 마계와 천계에 가면 가장 높은 건물이 보일 게야. 기다란 탑인데, 그 정상에 있네. 그곳에서 무구를 사용해 정령왕들을 봉인하고 있지. 그 봉인은 그 무구를 지닌 이의 피와 연결 되어 있기에 반드시 죽여야 하네." "......" 로드의 말에 로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디를 먼저 가겠나." "천계로 먼저 가지." 로얀은 한번 대한 적이 있는 빛의 무구가 상대하기 더욱 쉬울 것이라 판단하고 천계로 가는 것을 택했다. 스윽. 그렇게 결정을 내린 로얀은 하얀 빛을 뿜어내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다크로드와 많은 어둠의 정령들이 줄줄이 뒤따랐다. "잠깐!" 그 모습을 보던 드래곤 로드가 로얀을 불러 세웠다. 멈칫. "......?" "천계든 마계든 무구를 지닌 이만 죽이면 되니 너무 많이 가는 것은 좋지 않네. 더구나 천계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아마 짐만 될 게야." 확실히 이런 대군을 이끌고 아는 것은 천계와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령왕들에게 걸린 봉인을 푸는 것에 있다. 드래곤 로드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로얀은 다크로드를 불렀다. "다크로드." [예.] "다크니스들만을 데리고 간다." [알겠습니다.] 로얀의 말이 울려 퍼졌고 다크니스를 제외한 모든 어둠의 정령들이 그를 향해 몸을 숙이며 모습을 감추었다. 다크로드가 다크니스를 지휘하며 게이트로 다가갔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다크로드와 다크니스를 보며 로얀은 몸을 다시 움직였다. "그럼." 로얀은 그렇게 다시 가던 길을 걸어 하얀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하얀 게이트는 그를 집어삼킬 듯 삼켜 버렸고, 이어서 뒤따라 들어온 다크니스들까지 안으로 삼켜 버렸다. 화아아앗! 그들 모두가 사라진 일렁이는 빛의 게이트를 보며 드래곤 로드는 걸음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겠네. 그리고 마계에도 가야 하니 부디 빨리 오게나." 그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드래곤들의 회의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룬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썰렁해 보였다. 38장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 화아아앗! 게이트를 통해 천계로 온 로얀은 게이트를 지키고 있을 천족들의 공격을 예상하곤 그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아주는 천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천족 모두가 곧 있을 마계와의 전쟁준비로 한창이었기에 게이트의 앞을 지키는 이가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준비하는 천족과 마족들은 전쟁놀이를 준비하는 어린아이들 같았다. 어찌 되었건 천계로 아무 문제 없이 도착한 로얀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천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천계의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로얀에게 천계의 모습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천족의 대지는 모두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이었다. 거대한 구름들이 여기저기 둥실둥실 떠 있었고, 아름다운 색색깔의 밧줄로 서로가 이어져 있었다. 천족 모두가 하늘을 날며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듯했다. 하늘이 그들의 길인 것이다. 드래곤 로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는 로얀이엇다. 수많은 구름들이 떠 있었고, 그 위에는 아름다운 하나의 작품같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구름 위에 세워져 있는 아름다운 성이 보였다. 보석으로 만든 듯한 아름다운 성은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천계의 이곳저곳을 훑어보던 로얀이 다크로드를 포함한 모든 어둠의 정령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여기서 대기한다." [허나......] "이곳엔 그림자가 없다. 아무리 나로 인해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해도 바로 발각되고 말 것이다. 나 혼자 들어가 빛의 무구를 지닌 녀석만 죽이고 돌아오겠다." 로얀의 말대로 천계엔 그림자는 커녕 어둠이 없었다. 건물 자체가 흰빛을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지라고 할 수 있는 구름까지 흰 백색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녀석과는 한번 싸워 본 적이 있다. 3개의 봉인이 풀린 지금의 힘이라면 이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빠져나올 땐 혼자가 편할 듯하다." 드래곤 로드가 이것까지 모두 예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얀은 혼자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는 할 수 없이 물러났다. 그리곤 허리를 숙이며 게이트로 다시 들어갔다. 화아아앗! 게이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크로드와 다크니스들을 집어삼켜 버렸다. 하얀 구름 위에 로얀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스르르륵. 로얀은 쉐도우를 펼치며 몸을 숨겼고 날아올랐다. 어둠의 정령왕답게 로얀은 이 빛 속에서도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단, 누군가 자신을 건드린다면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힘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드래곤 로드가 말한 가장 높은 건물은 찾기가 쉬웠다. 거대한 성보다도 더욱 높은 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빛을 내는 지팡이처럼 생긴 탑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화아아앗!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기에 로얀은 즉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누군가 자신을 감지해 냈을지도 모르지만 로얀은 곧장 탑의 꼭대기를 향해 날아갔다. 탑이 천계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으며 가장 높은 건물이라 그런지 탑의 정상엔 천족들이 보이질 않았다. 타탁. 도착한 탑의 가장 높은 곳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의 중앙엔 푸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로얀을 바라보며 마법진의 중앙에 있는 이가 말했다.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는 마법진의 중앙엔 의자가 놓여져 잇었고 거기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너무도 아름다워 그의 아름다움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앉아 있는 이는 물론 천족이었지만 로얀의 생각과는 달리 그때 만났던 천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가 말한 대로라면 이곳에 빛의 무구를 지니고 있는 이가 있다. 로얀은 확인 차 그에게 물었다. "네가 빛의 무구를 지닌 천족인가?" 로얀의 물음에 앉아 있던 천족은 턱을 매만지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흐음. 잘 찾아온 것 같다만, 넌 누구지? 아! 먼저 내 소개를 하자며 나는 대천사장 중에 한 명이다. 훗! 이름은 알 필요 없겠지?" 천족과 마족이 합심하여 만든 정령왕들에게 건 봉인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천계와 마계에 거대한 탑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서 정령왕들이 갇힌 마법진에 힘을 보내는 방식의 특이한 봉인이었다. 무구의 주인이 된 자가 탑의 꼭대기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 속에 무구를 넣으면 그 힘이 탑의 마법진을 통해 보내지는 형태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드래곤 로드가 모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무구의 주인을 죽이면 봉인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탑을 부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탑을 부수려면 무구가 마법진 속에서 나와야 했다. 탑을 지탱하는 것이 그 무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법진 속의 무구를 꺼낼 수 있는 이는 무구의 주인뿐이었다. 탑을 지키는 것은 당연 무구의 주인이었다. 무구와 멀리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로얀은 눈앞의 천족을 바라보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천족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빛의 무구의 주인은 천사 아델레이트가 아니었나?" "하! 어떻게 일반 전투 천사 따위가 빛의 무구의 주인이 될 수 있겠나." 빛의 무구는 먼저 손에 넣는 이가 주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이었던 아델레이트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하하, 어리석게도 그는 빛의 무구를 탐냈고 결국 신의 심판을 받았다." 아델레이트가 죽었다는 말이었지만 로얀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악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결론은 죽이고 빼앗았다는 거군." "빼앗은 게 아니다. 원래 빛의 무구의 주인은 신의 뜻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 말을 하는 천족은 너무도 당당했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을 핮. 넌 정체가 뭐지? 외향으로 보자면 영락없이 더러운 타천사인데, 느껴지는 기운은 정령의 기운. 흐음." "혼돈의 정령왕이다." "하하하하. 정령왕, 정령왕이라...... 정령왕들은 모두 갇혀 버렸을 텐데?" 로얀의 대답에 천족은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고 말을 이었다. "뭐, 어찌 되었건 봉인되어 있는 정령왕과 관계가 있는 자라는 소리겠지? 물론 목적은 봉인을 풀기 위해서일 테고." 자신을 대천사장이라 소개한 그는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말에 그가 봉인을 풀기 위해 온 이라 생각했다.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말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도 정령왕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한 것이라 판단했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단정지어 버리는 그였다. 물론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목적만 따지고 보면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로얀은 그런 천족을 보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탑 속에 혼자 남아 지킬 정도로 무구의 주인이 되고 싶고, 무구가 탐나는 것일까? "이런 곳에 갇히면서까지 무구가 탐나는 건가?" "훗! 이번 천계와 마계의 전쟁이 끝나면 더 이상 봉인은 필요가 없게 될 것이고, 난 빛의 무구를 지니고 여길 벗어날 수 있지." "꼭 그렇게까지......" "힘은 아름다운 것. 난 아름다움을 사랑하거든." 금발을 쓸어 넘긴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고 말을 이었다. "그냥 전쟁이 끝나길 조용히 기다리면 될 것을 여기까지 봉인을 풀기 위해 오다니 정말 멍청하군." 스르릉. 로얀은 더 들을 필요 없이 다크리온을 뽑아 들었다. 성검 에리오네는 천족에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뽑지 않았다. "훗, 검을 뽑아 봤자 천계의 대천사장인 나에겐......" 쿠오오오-! "......!" 지금껏 평정심을 유지한 채 웃음을 짓던 천족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다크리온을 쥔 로얀에게서 거대한 힘이 휘몰아쳐 나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전쟁놀이를 위해 왜 그녀가 희생되어야 하지?" 로얀은 몇 초라도 더 빨리 엘라임을 위해 봉인을 풀어주고 싶었기에 온 힘을 끌어올렸다. 단 한 번에 끝내 버리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지금 천족과 로얀 사이의 거리는 좁았다. 여기서 공격을 가한다면 천족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죽음의 반월." 콰가가가강! 그의 온 힘이 담긴 죽음의 반월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무색의 오러가 다크리온의 검면을 타고 흘렀다. 그가 쏘아 보내진 수십여 개의 흑빛 반월이 천족을 덮쳤다. 콰하하항! 죽음의 반월의 여파로 탑이 크게 흔들렸고, 굉음이 천계 전체로 울려 퍼졌다. 이 정도로 소란을 일으켰으니 얼마 가지 않고 아마 천계의 모든 천족이 날아올 것이다. 콰르르릉! 죽음의 반월의 여파로 인해 탑이 무너져 내렸다. 빛의 무구로 인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탑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는 빛의 무구가 마법진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크으윽. 젠장! 빌어먹을! 탑이 무너져 버렸잖아! 이 빌어먹을 자식!" 대천사장인 천족이 분개하며 모습을 나타내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새하얀 깃털을 뿌리는 여섯 장의 날개를 단 그는 하늘에 둥실 뜬 채 로얀을 노려보았다. 휘리릭. 그의 몸 주위를 하얀 구가 맴돌고 있었다. 로얀이 오래전 빛의 성지에서 보았던 그 빛의 무구였다. 로얀이 바로 앞에서 펼친 공격에 담긴 강한 힘에 놀란 천족은 천신의 명령을 뒤로하고 마법진 속에서 빛의 무구를 꺼내 로얀의 공격을 막았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빛의 무구를 꺼내게 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로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빛의 무구가 막아준 것인가?" 그의 그런 중얼거림을 전혀 듣지 못했는지 천족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무너져 버린 탑으로 향해 있었다. "이런, 봉인이 풀려 버렸잖아!" 천족은 로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무너져 내린 탑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로얀은 천족의 봉인이 풀렸다는 말에 의아해 했다. 드래곤 로드에게 들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응? 봉인을 풀려면 무구의 주인을 죽이는 것이 아닌가?" 다시 들려온 로얀의 말에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된 천족은 그의 말을 들었고, 로얀을 향해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 봉인을 풀려면 두 개의 탑을 부숴야 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냐!" 천족은 매우 흥분한 듯 로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봉인의 탑이 부숴졌다는 것 때문에 사고가 정지되었는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천신에게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천족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에게 내려질 형벌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로얀은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 로드가 날 속인 건가?' "미안하게 됐군. 몰랐다. 그리고 천계에서의 볼일은 끝난 셈이군." 화아아앗! 어쨌거나 로얀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몸을 돌리며 게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어딜!" 슈아아앙! 스걱! 봉인의 탑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탑을 부순 자마저 놓친다면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천족은 다급히 빛의 무구를 휘둘렀다. 날아간 빛의 무구는 몸을 숨긴 로얀의 망토 자락을 자르며 되돌아왔다. 로얀의 날아가는 속도가 너무도 빨랐기에 망토 자락만을 벤 것이었다. 정령왕이 만든 망토를 너무도 쉽게 날려 버린 빛의 무구의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크윽. 절대 놓치지 않겠다!" 대천사장은 황급히 로얀의 뒤를 쫓았다. 카오스의 법에 따라 자신은 중간계로 갈 수 없다. 로얀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가 게이트로 사라지기 전에 잡아야만 했다. 빛의 무구의 주인 말고도 많은 수의 천족이 로얀의 뒤를 쫓았다. 봉인의 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달려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로얀의 날개가 펼치는 능력은 뛰어났다. 그를 뒤쫓는 천족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슈아아앙! 그것을 깨달은 대천사장도 빛의 무구를 급히 사용했다. 빛의 무구는 선회하며 빠른 속도로 로얀의 등을 노리며 날아갔다. 등 뒤로 다가오는 빛의 무구를 돌아보며 로얀은 온 힘을 다해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죽음의 반월!" 쿠하하하항! 콰가가가강! 수십 개의 검은 반월 모양의 기가 날아갔고 빛의 무구와 충돌했다. 콰항! 빛의 무구와 충돌하지 않은 반월의 기는 뒤쫓아오던 천족들을 향해 날아갔다. 천족들은 로얀을 쫓던 움직임을 멈추고 죽음의 반월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슈아아앙! 화아아앗! 죽음의 반월을 부숴낸 빛의 무구가 로얀을 향해 날아갔지만 그는 이미 게이트를 통해 중간계로 사라진 뒤였다. "이런!" 대천사장은 빛의 무구를 거두며 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카오스의 법이 저주스러웠다. 스윽. 그때 그의 뒤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헛! 천신님." 뒤돌아본 그는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하얀 로브를 입은 늙은 노인이었다. 백발을 휘날리는 그에게선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신비로운 기운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 인자해 보이고 성스러워 보이는 그에게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흘러나오자 허리를 숙이고 있는 대천사장은 긴장하며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제가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천신이라 불린 노인의 눈썹이 휘어졌다. "대천사장은 중간계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허, 허면." 스윽. 천신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대천사장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바라보는 대천사장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져 버렸다. 그 얼굴 위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콰가가강! 그 빛은 천신의 손에서 뿜어지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너무도 따스한 빛에 대천사장은 괴성을 지르며 한줌의 빛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사라진 대천사장의 자리를 대신해 그의 하얀 깃털이 휘날렸다. 천신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빛의 무구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내 손에 들어오게 될 무구였으니." 집어 든 무구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던 천신은 급히 몸을 움직였다. "아무튼 어서 빨리 마계에 연락을 취해야겠군." 정령왕들의 봉인이 완전히 풀리는 것은 염려스러웠지만, 그 역시도 중간계로 나갈 수가 없다. 만일 마계의 탑마저도 무너져 내리면 모든 것은 끝이다. 서둘러 마계에 연락을 취해야 했다. 그렇게 로얀이 천계에서 봉인을 부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드래곤 로드와 어둠의 정령들이 있는 룬으로 누군가 찾아 왔다.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 앉은 채로 그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 이유는 이곳에 함부로 다른 이를 데리고 온 그라시드 때문이었다. 드래곤 로드인 그 또한 로얀을 이곳으로 함부로 데리고 온 것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차원계 전체이 존망이 달린 것이었다. "그라시드와 페어리들의 여왕이 여긴 무슨 일로?" "......" 룬으로 찾아온 이는 잠자리 날개 같은 얕고 투명한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을 날아온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였다. 그녀는 로얀과 헤어진 직후 그의 뒤를 뒤쫓았다. 하지만 로얀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거의 동시에 출발했지만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늦게 도착한 데에는 로얀의 속도가 원체 빨랐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이곳으로 오기 위해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를 찾아갔다는 것이 더 커다란 이유였다. "하하. 오랜만이에요. 로드~." 그라시드는 손을 번쩍 들고 힘차게 휘두르며 로드를 향해 인사했다. 죄진 게 있는 그였기에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그런 그의 활기찬 인사를 받은 로드는 한숨을 쉬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자신이 처음 질문했던 것에 대한 답을 원하는 것이었다. 레아를 알아본 이는 드래곤 로드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어둠의 정령인 다크로드 또한 그녀를 알아보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과거 페어리들의 여왕인 그녀에게 어둠의 정령들은 허리를 숙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는 것도 그녀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다크로드뿐이었다. 레아는 급히 달려와 드래곤 로드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는 다급히 말했다. "정령계로 좀 가야겠어요." "정령게?" "로얀이 봉인을 풀러 왔다고 알리게요. 그리고 로얀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레아는 로얀이 봉인을 모두 풀고 위험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 정령왕들에게 로얀의 소식을 알려 그를 도우라 말하러 가려는 것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페어리족의 여왕인 레아와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위해 정령계로 간다고 하자 의문을 표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얀이 봉인을 푸는 것과 정령계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봉인의 탑은 마계와 천계에 있는데 말이다. "로얀이 봉인을 풀게 된다면 마계와 천계는 자신들의 계획을 망친 그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제서야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드래곤 로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을 풀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봉인이 풀린다면 천계건 마계건 다크로얀을 죽이려 들겠지. 그때 정령왕의 힘이라면......" 드래곤 로드는 말끝을 흐렸고, 레아는 그를 지나 다급히 정령계의 게이트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 로얀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드래곤 로드는 레아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그전에 내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정령왕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하는 말이 있는데......" "네?" 레아는 의아해했지만 드래곤 로드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레아에게 말하는 것은 로얀에 관한 것이었다. 로얀과 이실리아에 얽힌 이야기를 그는 자세히 해주었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로얀이 한번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였다. 로얀이 죽음 뒤에 다시 살아난 것은 레아도 본 적이 있었다. 로얀이 단신으로 한 왕국에 쳐들어가 죽음을 당했을 때, 그녀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모르는 드래곤 로드는 말을 이었다. "그는 죽을 때마다 더욱 강해져 태어났지. 하지만 강한 힘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르는 법. 데스 나이트나 리치가 강한 힘을 얻고 다시 살아남는 대신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말이지." 말을 하는 드래곤 로드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해 보였다. "그도 정령왕인 이상 그에게 일어난 그 괴이한 현상을 다른 정령왕이 알아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어." 이것이 드래곤 로드가 레아에게 자신이 한 이야기를 전하라고 한 이유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레아는 드래곤 로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다크로드의 음성이 울려 퍼져왔다. [레아님! 물의 정령왕님께 마스터의 세 번째 봉인이 풀려났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봉인?' 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말 한마디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다시 들려온 그의 말에 일단은 다크로드에게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정령계로 향하는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녀를 향해 그라시드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그녀는 이내 게이트가 뿜어내는 강한 빛에 휩싸였다. 화아아앗! 환한 빛이 레아를 집어 삼켰다. 레아는 로얀이 천계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화아아앗! [마스터!] 레아가 정령계로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어 환한 빛과 함께 게이트를 빠져나온 로얀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다크로드였다. 다크로드는 팔에 감긴 붉은 천을 휘날리며 달려와 로얀 앞에 섰다. 로얀은 다크로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거짓말을 했더군." 그것이 로얀이 천계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런 로얀을 바라보며 드래곤 로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거짓말이라니?" 그의 반응으로 보아 연기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봉인을 풀기 위해선 무구의 주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탑을 부수는 거였어." "그런 거였군. 흐음, 미안하게 됐군. 나도 자세한 건 몰라서 말이야. 아무리 드래곤 로드인 나라고 해도 천족과 마족이 합심해서 만든 마법진을 없애는 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 않겠나. 그리고, 어찌되었건 그 탑과 무구가 봉인의 핵심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았던가." 로드의 해명에도 로얀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험험, 다른 건 모두 진실이니 어서 이제 마계로 가보게나. 천계에 있는 봉인을 풀었다면 아마 마계에서 어떤 준비를 해놓고 있을지도 몰라. 그전에 어서 가게." "......" 로얀은 드래곤 로드에게 보내던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며 아무 말 없이 마계로 향하는 이글거리는 화염처럼 보이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게이트 속으로 들어갈 것 같던 로얀의 발걸음을 드래곤 로드가 붙잡았다. "아! 좀 전에 귀여운 페어리족의 아가씨가 왔었네." 멈칫. 로얀은 고개를 돌려 드래곤 로드를 바라보았다. "페어리?" "페어리족의 여왕인데 조금 전 급히 정령계로 가버렸지." "......" [그... 레아님입니다.] 로얀에게 다크로드가 드래곤 로드의 말을 보충해 주었다. 그 페어리족의 아가씨가 레아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페어리족의 여왕이라는 신분이라면 드래곤 로드를 만나러 왔다는 명분하에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로얀과 함께 온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무사히 들어올 순 없었겠지만 말이다. 로얀의 시선이 레아가 갔을 정령계로 향하는 게이트를 잠시 바라보다 마계로 가는 게이트로 향했다. "이번에도 혼자 가겠다. 그게 더 빠른 듯하니." [예, 마스터!] 다크로드는 로얀이 천계에서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기에 순순히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화아앗! 그렇게 천계로 향하는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로얀은 마계의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붉은 홍염이 그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화아아앗! 로얀이 게이트를 타고 도착한 마계에는 천계와는 달리 많은 이들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붉은 박쥐 날개를 한 거대한 체구의 거인들이 붉은 피부에 이글거리는 화염을 담은 듯한 눈으로 로얀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마계의 투사라 불리는 발록이다. 로얀의 앞에 서 있는 발록들은 길게 쭈욱 늘어져 있었다. 거대한 그들로 인해 마계의 모습이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모두들 로얀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거대한 발록들 사이에 육중한 근육을 자랑하듯 상체를 드러낸 남자가 서 있었다. 외향만 보아선 인간이었다. 이곳저곳으로 삐죽삐죽 솟은 붉은 머리카락이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로얀을 바라보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하하하, 역시 자네였군." "응? 파라무트?" 로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오래전에 만나 인연을 맺었던 발록들의 수장이라던 파라무트였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로얀은 그의 이름을 말했다.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기쁜지 파라무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 정말 오랜만이지?" 그는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통한 성격도 그대로인 듯했다. 오히려 50년 전보다 더 젊어 보였다. "덕분에 나세스를 박살내주고 나의 자리도 되찾았지." 파라무트는 자신의 뒤에 늘어서 있는 발록들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랑스럽다는 듯이 허리에 팔까지 척하니 얹은 상태였다. "그럼 여긴 무슨 일이지?" "아? 너와 싸우러 왔지." 싸우러 왔다는 말을 너무도 쉽게 말하는 파라무트였다. 스윽.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로얀은 에리오네의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파라무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싸우러 왔다고는 했지만 전혀 싸울 의사가 없어 보였다. "위에서 내린 명령이 너와 싸우라는 거였다는 거지. 하지만 난 너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 "이걸로 너에게 빚진 건 완전히 사라지는 거다." 혼돈의 정령왕이라 칭하는 이가 마계의 탑을 부수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마계의 왕 루시퍼는 수많은 마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대책을 준비했다. 바로 게이트를 지키고 있다가 로얀이 나타나면 그를 막을 이를 뽑는 것이다. 그때 평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파라무트가 번쩍 손을 들고 자청해서 나섰다. 나세스로 인해(?) 더욱 강해져 돌아온 파라무트와 그가 이끄는 전투종족 발록이라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루시퍼는 매우 기뻐하며 파라무트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로얀은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파라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그냥 보내준다는 거냐?" "뭐, 그런 셈이지." 로얀의 말에 파라무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넌 명령을 어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 "뭐, 동굴에 백 년 정도 처박아 놓겠지." "......" "걱정 마. 너 아니었으면 그 끔찍한 동굴 속에서 영원히 갇혀 있어야 했으니까. 몇 백 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어서 가봐. 그리고 그 탑을 박살내 버려! 난 그 탑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크크크크." 파라무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로얀의 어깨를 탁탁 치며 웃어젖혔다. "아쉬운 점이라면 천계 녀석들을 박살내는 것이 물 건너갔다는 정도일까. 크흐흐." 터벅 터벅. 로얀은 고개를 숙인 채 파라무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씨익. 로얀의 말에 파라무트는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멈칫. 한참을 파라무트의 배웅을 받은 채 걸어가던 로얀이 길을 열어 주는 거대한 발록들을 보며 멈추어 섰다. 파라무트는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어째서 이렇게 쉽게 보내 주는 걸까? "쿡쿡, 쟤네들은 내 명령만 듣는다니까. 우리 마족들은 같은 종족 간의 충성심은 끝내주거든. 안 그러냐?" "우어어어-!" 파라무트의 말에 발록들이 일제히 울부짖었고 로얀은 발록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계로 들어섰다. 마계는 천계와는 달리 바닥이 검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몸을 숨기기가 쉬웠다. 마계의 빛이라곤 뿜어져 나오는 용암이 다였다. 마족들은 들쑥날쑥 솟아 오른 뾰족한 바위 안을 파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듯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일반 마족들이었고, 거대한 성을 짓고 사는 이들은 고위급 마족이었다. 마계는 천계와는 달리 움직이기가 편했고 로얀은 멀리 보이는 흑색 탑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로얀이 도착한 마계의 탑은 천계의 환한 빛을 뿌리는 탑과는 달리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겉모양은 천계의 탑과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검은 지팡이 같았다. 타탁. 로얀은 역시나 천계와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로얀을 맞은 것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은색 눈동자를 지닌 마족이었다. 풍기는 마기의 양으로 보아 고위급 마족인 듯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로얀으로 인해 당황해 하고 있었다. 어둠의 무구의 주인이자 이 탑을 지키고 있던 그는 파라무트가 이끄는 발록들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로얀이 들이닥치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었다. 화아앗! 로얀의 등장에 마족은 천계의 천족과는 달리 방심하지 않고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검은 박쥐 날개에 이마에 기다란 뿔을 가진 마족은 로얀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하하하항! 그의 손이 허공을 수놓자 뜨거운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로얀을 덮쳤다. 화염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홍염의 일족인 듯했다. 마계는 부족 사회라 할 수 있었기에 각자의 종족에 따라 커다란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검은 박쥐 날개에 인간형인 악마 계열의 마족들은 이곳에 있는 마족처럼 그들이 지닌 속성에 따라 나누어졌다. 불을 사용하는 악마족은 악마족들 중에서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화염계열의 모든 마법을 사용했고, 그들이 펼치는 마법은 레드 드래곤이 펼치는 화염계열의 힘을 앞질렀다. ",,,,,," 쾅! 로얀은 말없이 에리오네를 뽑아 마족이 쏘아 보낸 거대한 불길을 무산시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무구를 끌어내기 위해선 저 마족을 탑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하거나 직접 꺼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로얀은 처음부터 마족을 몰아붙이기로 결정했다. 마족은 자신의 화염을 검으로 가볍게 무산시킨 로얀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채챙! 마족은 갑자기 달려든 로얀의 공격에 민첩하게 대응했다. 로얀의 검과 마족의 손톱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마족의 보랏빛 손톱이 성검 에리오네를 버텨내고 있었다. 치이익. 고위급 마족의 손톱이라 단번에 잘리진 않았지만 허공에서 천천히 성검의 힘에 의해 녹아내렸다. 챙! 마족은 로얀의 검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났다. 단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육체적인 힘이 로얀이 자신을 앞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족은 로얀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근접전으론 승산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족의 육체적인 능력은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으로 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법을 펼치려 손을 움직이는 마족을 향해 로얀은 오른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가볍게 휘둘렀다. "죽음의 반월." 콰가가강! 검은 반월 모양의 기가 마족을 향해 쏘아져 나간 동시에 로얀은 왼손을 휘둘렀다. 콰하하항! 조금 전 마족이 사용한 화염을 그대로 복사해 쏘아 보낸 것이었다. 콰가가강! 마법으로 죽음의 반월을 막던 마족은 연이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염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느낄 수 있었다. 그 화염이 자신이 쏘아 보낸 것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 '서, 설마 내 마법을 복사한 것인가?' 그가 사용한 불꽃은 홍염의 일족이 아니라면 펼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힘만 센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가 빠르게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갖가지 술수를 부리며 이상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큭, 저놈을 죽이려면 어둠의 무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 단 한번만 사용하는 거다!' 로얀이 쏘아 보낸 화염까지 모두 받아낸 마족은 로얀을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바닥으로 향했다. 천천히 접근하며 무구를 꺼내 로얀을 단 한 방에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족의 생각과는 달리 로얀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일부러 마족이 쏘아 보낸 마법을 즉시 시전 하여 자신이 상대의 기술을 복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해준 것도 그의 마음속에 있을 공포심을 증가시키기 위함이었다. 당혹감에 휩싸인 채로 궁지에 몰린다면 살기 위해 어둠의 무구를 꺼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도박일 뿐이었다. 빛의 무구는 날아다니는 빛의 구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둠의 무구는 어떻게 생겼을지 모른다. "죽어라!" 화아앗! 천천히 이동해 로얀의 바로 앞까지 접근한 마족은 마법진 속에서 무구를 꺼내며 무구의 힘을 펼쳤다. 사사사삭! 나타난 무구는 심하게 휘어진 흑색 검이었다. 마족은 그 흑색 검을 쥐고 휘둘렀다. 검은 검기의 다발이 탑은 전혀 부수지 않고 로얀만을 난도질하기 위해 그의 몸을 감쌌다. 가시 덩굴이 몸을 옭아매어 오는 것만 같앗다. 피피핏! 마족이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도 무언가가 로얀의 살갗을 베었다. 자신을 덮치는 흑색 검기를 바라보며 로얀은 다크리온까지 뽑아 들었다. 그리고 두 검을 힘껏 움켜 쥔 상태에서 휘둘렀다. "다크 오브 데스티니!" 이 좁은 공간 속에서 펼친 그 공격은 너무도 무모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어둠의 무구가 만들어낸 검기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격을 감행했다. 쿠하하하항! 콰가가가가강-! 어둠의 무구를 사용한 마족 또한 로얀이 이렇게까지 공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눈을 부릅떴다. 검은 빛이 그의 시야를 덮어버렸다. 크아아악-! 로얀의 가장 강한 기술인 다크 오브 데스티니와 어둠의 무구가 펼친 기술이 부딪히며 일어난 폭발에 탑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어둠의 무구가 빠져나온 탑은 그저 거대한 건조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콰르르릉! 콰가가가강! 폭발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마계가 진동했고 높이 솟아 있던 탑이 그렇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또한 그 탑을 지키던 고위급 마족 또한 탑처럼 무너져 내렸다. 탑과 함께 너무도 허망하게 소멸해 버린 것이었다. 슈아아앙! 그때 그 폭발 속에서 솟아 오른 흑색 빛이 있었다. 바로 검은 날개를 휘날리는 로얀이었다. 그의 옷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는 더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입가엔 붉은 피를 주르륵 흘려보내고 있었다. 쿵쾅 쿵쾅. 그는 자신의 심장이 급박하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끈적끈적한 피로 인해 시야가 붉게 물드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헉헉, 이제 봉인이 풀렸겠군. 이제 엘라임을......" 슈아아앙! 콰하항! "크허헉!" 무너져 내린 탑을 보며 이제 풀려났을 엘라임을 생각하던 로얀의 생각이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며 백지장이 되어 버렸다. 그의 몸을 뭔가가 관통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끄으응. 오랫동안 세운 계획이!" 누군가의 목소리와 하얀 빛과 함께 늙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로얀의 몸을 관통했던 흰 빛이 그 노인에게로 돌아와 그의 몸 주위를 맴돌았다. 노인은 천계에서 모습을 나타내었던 천신이었다. 하얀 빛이 관통한 로얀의 옆구리는 뻥 뚫려져 있었다. 무언가로 인해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극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붉은 피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하얀 빛이 지나간 자리는 불에 지진 듯 살과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늙은 노인 외에도 한 사람이 더 등장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미남자였다. 여섯 장의 검은 날개를 지닌 그의 날개는 조금 특이했다. 다른 마족들과는 달리 깃털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타천사임을 의미했다. 원래는 천계의 천족이었으나 영혼이 악으로 물들어 마계로 떨어진 이들 중 하나라는 증거다. 그가 지닌 날개가 여섯 장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과거 천계의 대천사장이었을 것이다. 검은 날개의 사내는 부서진 탑의 잔해 속에서 어둠의 무구인 검을 집어 들었다. "젠장할 영감탱이." "지금 자네가 나에게 화낼 자격이 있는가? 미리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탑 하나 못 지키는 건가, 루시퍼?" "닥쳐! 빌어먹을 영감탱이." 루시퍼라 불린 어둠의 무구를 집어 든 남자는 늙은 노인의 모습을 한 천신을 향해 외쳤다. 루시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로얀을 그냥 보내준 발록들과 그들의 수장인 파라무트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로얀을 바라보며 어둠의 무구를 휘둘렀다.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이 휘두른 어둠의 무구는 조금 전 고위급 마족이 휘둘렀을 때보다 더 강한 위력을 동반한 채 로얀을 덮쳤다. 콰가가각-! "크으윽!" 극심한 상처를 입은 로얀은 이를 악물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도 하늘에 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카카카캉! 촤촤촤! 수십 개의 검기 다발 중 몇 개는 로얀이 휘두르는 검에 가로막혔지만 나머지는 모두 그의 몸을 할퀴었다. "크허헉! 으드득." 온몸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로얀은 하늘에서 주춤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엘라임을 가둔 장본인인 천계의 천신과 마계의 루시퍼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꽈악. 로얀은 온 힘을 짜내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들어올렸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루시퍼는 천천히 하늘위로 날아올라 천신과 함께 로얀을 중앙에 두고 마주섰다. 중앙에 있는 로얀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는 그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대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그의 상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천신은 피로 목욕을 한 로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끄응, 이제 전쟁만 남았거늘." 기이잉. 그리고 그의 몸 주위를 도는 백색 구가 있었다. 그건 빛의 무구로 로얀의 허리에 구멍을 낸 장본인이었다. 천신과는 다르게 루시퍼는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자식!" 그리고 천신과 루시퍼는 동시에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를 휘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정령왕들은 풀려날 것이다. 전쟁은 고사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눈앞의 로얀만큼은 처참히 죽이고 싶었다. 천신과 마계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루시퍼의 화풀이 상대가 되어 버린 로얀이었다. 콰가가각! 슈아아앙!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가 동시에 힘을 발휘하며 로얀을 향해 덮쳐갔다. "다크 오브 데스티니." 백지장으로 변했던 로얀의 머릿속으로 엘라임과 함께했던 순간이, 지금껏 살아왔던 순간이 천천히 그려졌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다크 오브 데스티니를 펼쳤다. 한 사람에게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 주위로 검은 기류가 폭발하듯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콰하하하항! 콰가가가강-! 그렇게 빛의 무구가 쏘아내는 빛과 어둠의 무구가 쏘아내는 빛이 로얀의 몸에서 펼쳐진 어둠의 기류와 부딪쳤고,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가가강! 마계를 지나 그 진동이 천계와 정령계에까지 미칠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39장 풀려진 봉인 로얀을 돕기 위해 룬을 찾은 페어리족의 여왕 레아는 드래곤 로드를 통해 모든 자초지종을 들었고, 급히 정령계로 들어갔었다. 그 모든 것이 로얀이 봉인을 풀면 바로 정령왕들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도 엘라임에게 로얀의 이야기를 해야 했다. 봉인이 풀리기도 전에 로얀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슈아앙. 정령왕이 사라져 버린 정령계는 혼란스러웠다. 정령왕이 없는 정령계는 날씨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최상급 정령들과 상급 정령이 날뛰는 중급과 하급의 정령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의 수는 최상급 정령과 상급 정령의 수를 훨씬 넘기 때문이었다. 최상급 정령과 상급 정령은 날뛰는 정령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리 저리 돌아다녔고, 중급 정령과 하급 정령들은 그들이 분주히 움직이든 말든 정령계를 누비며 날뛰었다. 콰르르릉! 쏴아아아! 천둥이 치고 대지가 솟아올랐다. 불의 비가 내리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에 봉인되어 있는 거야?" 작은 날개를 퍼득이며 정령계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녔다. 불의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다시 날아오르기도 했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정령계를 누비던 레아에게 너무도 반갑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아님?] "앗! 실레스틴!" 레아에게 말을 거는 이는 바람의 정령이었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중에서도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의 보좌관이라 할 수 있는 정령인 실레스틴이었다. 실레스틴은 실피드와 함께 레아를 몇 번 만난 적이 있기에 레아를 금방 알아차렸다. 정령계에 있는 실레스틴 중에서 유일하게 레아를 아는 이였다. "마침 잘 만났어! 실피드 언니와 다른 정령왕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날 좀 데려다줘. 어서!" 레아의 다급한 표정을 보며 실레스틴은 말했다. [어서 제 등에 올라타세요.]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실레스틴이 등을 내밀었고 그의 등 위에 레아가 내려앉았다. 그녀가 자신의 등에 앉자 실레스틴은 바람을 가르며 정령계의 하늘을 날아올랐다. 슈아아앙! 바람을 가르며 실레스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간 곳은 정령계의 중앙에 솟아 있는 거대한 산이었다. 그 산은 네 개로 나뉘어져 있는 정령계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산속으로 들어간 실레스틴은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레아와 실레스틴이 도착한 곳은 오래전 실피드의 초대로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정령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정령왕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한 곳이었다. 하지만 꽃으로 뒤덮여 있던 바닥에는 검붉은 대지만이 존재했다. 꽃 대신 푸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마법진의 주위엔 그 어떠한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법진이 대지를 썩히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은 정령왕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지만 정령계로 온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했다. 정령왕들이 이곳에 봉인당한 것은 정령왕들이 천신과 마계의 루시퍼를 이곳에서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날따라 평소에 찾아오지 않을뿐더러, 항상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 있던 천신과 루시퍼가 나란히 정령계로 찾아오자 정령왕들은 그들을 이곳으로 안내했었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른 그들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정령왕들이 모두 모였고, 이곳에서 그들을 만났었다. 그리고 힘이 많이 약해져 있는데다 슬픔에 빠져 있는 엘라임을 실피드가 억지로 데리고 왔었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모든 정령왕들이 모였고, 천신과 마계의 루시퍼는 합심하여 만든 봉인마법을 펼쳤고 정령왕들을 가두었다. 이미 마계와 천계에 기다란 탑을 세우고 그곳에 무구를 설치해 둔 뒤였다. 실레스틴은 정령왕들이 갇혀 있을 마법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마법진 속에 계십니다.] "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저렇게 작은 마법진 속에 친한 이들이 갇혀 있다고 하자 레아는 슬픔이 밀려왔다. [네. 대화는 가능해요.] 실레스틴의 대답을 뒤로하고 레아는 급히 마법진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곤 레아는 마법진 위에 주저앉은 채 마법진을 향해 외쳤다. "실피드 언니!" [레아니?] 레아의 말에 마법진 속에 갇혀 있는 실피드가 그녀가 걱정하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언니, 괜찮은 거야?" [그래, 천계와 마계의 전쟁이 시작된 거니?] 그녀는 레아가 이곳을 찾은 것이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아직 시작되지는 않았어. 아! 거기 엘라임 언니도 있지?" [나도 여기 있어. 지금은 힘을 많이 되찾았고.] [여~ 할망구 왔어~?] [허허허. 여기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겐가.] 엘라임의 목소리가 들려 왔고 뒤따라 불의 벙령왕 이프리트와 땅의 정령왕 노아스의 말도 들려 왔다. "시끄러워!" 레아는 이프리트의 말에 발끈 하며 마법진을 주먹으로 힘껏 내려쳤다. 퍽. "꺄악." 그러나 딱딱한 바닥이었기에 그녀의 여린 손은 상당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푸하하하.] [이프리트, 그만 놀려!] [쿡쿡. 하지만 너무 웃기잖아, 실피드.] 붉어진 손을 만지작거리며 마법진을 노려보던 레아는 뭔가를 떠올리곤 급히 마법진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이제 곧 봉인이 풀릴 거야!" [풀리다니?] 마법진 안의 정령왕들이 의문을 표하며 레아를 향해 물었다. 이 봉인을 풀려면 마계와 천계의 중심부로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응. 내가 로얀을 불렀거든." [오우, 나의 친구가 날 구하기 위해 왔구먼.] [허허 그 친구가......] [그, 그가 천계와 마계로 간 거니?] 이프리트와 노아스와는 달리 엘라임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진정해! 엘라임!] 실피드가 안에서 엘라임을 진정시키며 레아를 향해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 줘.] 레아는 드래곤 로드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 로얀이었다. 로얀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이실리아와 두 마리의 드래곤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에 엘라임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어진 로얀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에 엘라임은 어쩔 수 없이 그 동굴에서 나갔을 로얀을 생각하며 슬퍼했다. 이 모든 것은 드래곤 로드가 다른 정령왕들이 알아두면 좋을지도 모른다며 해준 이야기였고, 레아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알려 주었다. 특히 그 이야기를 엘라임에게 해주라고 한 이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다크로드였다. 다크로드는 로얀의 봉인에 관한 것을 아는 엘라임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뭐?! 로얀이 한번 죽음을 맞이했다고?] 너무도 놀란 듯한 엘라임의 목소리에 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이번에 그 드래곤들과의 싸움에서 한번 죽음을 맞이했대." 레아의 말에 엘라임의 목소리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정령왕들은 그 말의 뜻을 모르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콰하하항! 콰르르릉! 그때 정령계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응? 무슨 소리지?] [설마 전쟁이 시작된 건......] 이프리트와 실피드가 동시에 말했다. 화아아앗! 그리고 마법진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꺄앗!" 굉음에 놀랐던 레아는 갑자기 바닥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이 빛나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화아아아앗! 그리고 마법진 위에 네 사람이 나타났다. 수북한 수염이 인상적인 드워프 노인은 편안히 앉아 있었고,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엔 초록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과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있었다. 초록 머리카락의 여인은 편안히 앉은 채 있었지만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은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고 초조해 보였다. 그들은 마법진 속에서 나온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땅의 정령왕 노아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 그리고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엇! 봉인이 풀렸잖아!" 이프리트는 폴짝 뛰어 오르며 몸을 일으켰고, 노아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피드님!]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실피드를 향해 실레스틴이 날아왔다. "그래, 그동안 수고했어." 그렇게 말하곤 실피드는 활짝 웃어 보였다. "로얀!" 그때 엘라임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주위를 급히 둘러보던 엘라임은 그제서야 봉인이 풀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엘라임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친구인 실피드가 붙잡았다. "일단 진정 좀 해!" "하, 하지만." "휴, 정령계는 우리가 풀려난 것만으로도 이제 서서히 질서가 잡힐 테니 우리 다 같이 그를 찾으러 가보자. 지금 너의 힘은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잖아." 실피드의 말대로 정령왕들의 봉인이 풀린 이상 모든 정령들이 원래의 힘을 되찾을 것이며, 폭주하며 날뛰던 정령들은 모두 스스로 진정될 것이다. 실피드의 말에 엘라임은 입술을 깨문 채 머뭇거렸고 실피드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아는 여기 있어." "그치만......" 레아는 함께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실피드의 눈빛을 대한 그녀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실피드는 엘라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프리트와 노아스를 포함한 네 명의 정령왕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정령계, 마계, 천계는 모두 이어져 있는 것이기에 그들은 굉음이 들려온 마계를 향해 곧장 워프했다. 화아앗! 화아아앗! 워프를 사용하여 마계로 도착한 네 정령왕들에게 처음 보인 것은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를 맞이하는 로얀의 모습이엇다. 그리고 그가 뿜어내는 어둠의 기류와 함께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로얀!"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엘라임의 슬픈 외침도 울려 퍼졌다. 콰하하항-! 거대한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거대한 기운은 중간계까지 미치고 있었다. 중간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하늘에서 들려온 천둥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정령왕들이 깨어났기에 하늘은 다시 푸르름을 되찾았었지만 굉음이 일어난 뒤의 하늘은 다시 검게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정령왕들이 봉인당했을 때의 하늘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검은색의 하늘거리는 천이 하늘에서 나부끼는 것만 같았고, 마치 검은 오로라처럼 보였다.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기운을 드래곤 산맥의 드래곤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이 굉음과 이 힘이 마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이게 대체......" 로얀을 마계로 보낸 장본인이자 전 드래곤들의 수장인 드래곤 로드는 이 현상으로 인해 크게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룬에 있던 어둠의 정령들은 마계에서 일어난 폭발음과 기운에 이미 룬을 떠나 마계로 간 뒤였다. 이렇게 당황해 하는 드래곤 로드의 모습은 평소 잘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룬으로 모여든 각 드래곤족의 수장과 많은 드래곤들이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지금 룬은 모여든 드래곤들로 인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룬 위에 있는 이들은 폴리모프를 한 상태였는데, 그 종족은 너무도 다양했다.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 드워프도 있었다. 심지어는 몬스터로 분류되는 오크도 있었다. 룬 주위에는 지금의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몰려든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드래곤 로드에게 이 현상에 대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 온 것 같았다. "로드,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당황해 하던 로드가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 검은 머리의 잘생긴 남자가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드래곤 로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드래곤 로드에게 물었던 검은 머리의 잘생긴 남자는 바로 블랙 드래곤 일족의 수장이었다. 블랙 드래곤의 수장인 그의 물음이 있은 직후, 그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던 드래곤들은 들려올 드래곤 로드의 대답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후~." 먼저 들려온 것은 드래곤 로드의 긴 숨소리였다. 그리고 드래곤 로드가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네만, 그때 왔던 혼돈의 정령왕이 봉인 당한 정령왕들을 꺼내는데 성공은 했어." "혼돈의 정령왕?" "자네들이 핍박하던 검은 머리의 드래곤 슬레이어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드래곤 로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에 모든 드래곤은 잠시 침묵했다. 그들도 긴가민가하던 사실이 진실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를 다섯 번째 정령왕이자 자신들보다 높은 존재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정령계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것은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골드 일족의 수장의 것이엇다. 골드 일족의 수장은 긴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였다. 그녀의 말대로 드래곤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검게 죽었던 하늘이 새 생명을 얻은 듯 잠시 동안이지만 환하게 빛나며 파랗게 돌아왔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하늘이 지금은 다시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마계에서 흘러나오는 힘도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힘과 그 검은 빛은 대체 뭐죠?" 다시 들려온 골드 일족 수장의 말에 드래곤 로드는 눈을 굳게 닫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계로 간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듯하군. 흘러나오는 힘도 심상치가 않아. 모든 드래곤족의 수장은 자신들의 일족을 지휘하게. 모두 마계로 가세나." "마계로 말입니까?" "내가 앞장설 터이니 모두 따라오게. 이번에는 우리 드래곤족도 이 차원계에 큰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 말과 함께 드래곤 로드는 천천히 마계로 향하는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화아아앗! 그는 붉은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남아 있던 드래곤들의 각 수장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움직였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들의 일족을 대동한 채 마계로 향하는 게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화아아앗! 드래곤들이 자리를 비운 드래곤 산맥에 찬바람이 불어왔다. 쿠쿠쿠쿵! 쿠오오오오-! 로얀은 빛의 무구와 어둠의 무구가 일으키는 폭발이 있은 직후 어둠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너무도 친근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 검은 기류는 로얀의 온몸을 감싸 안아 주었고 로얀은 스르륵 감겨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휘오오오-! 그리고 눈이 감기고 잠들기 직전 그의 머릿속으로 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지막 네 번째의 봉인이 풀렸다. 이로써 너는 완전한 혼돈의 정령왕의 힘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 봉인의 대가는 너의 심장이다. 심장은 신체의 중심. 모든 피가 심장을 통하며 너의 육신이 숨 쉬는 곳. 심장이 사라짐과 동시에 너의 육체 또한 사라졌다. 정령은 원래 형체가 없는 것. 이제 너의 영혼도 육체도 정령이 된 것이다.] 묘한 음성은 연이어 로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마지막 봉인으로 인해 육체와 함께 너 자신도 잃게 되겠지만 만약 자신을 찾는다면 너는 카오스를 제외한 그 어떠한 존재보다도 강한 힘을 지닌 이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휘오오오-! 로얀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잠들려 할 때 그를 바라보는 천신과 루시퍼는 눈을 부릅떴다. 휘오오오-! 로얀이 폭발 속에서 검은 기류에 휩싸인 채 서서히 검은 연기로 변해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천신과 루시퍼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도 연기가 되어 로얀의 육체와 하나가 되어 버렸다. 쿠오오오-! 검은 기류 속에서 거대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천신과 루시퍼마저 몸이 가늘게 떨릴 정도의 거대한 힘이었다. "로얀!"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이들 중 그를 향해 외치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바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턱. "엘라임, 멈춰!" 실피드는 급히 엘라임의 팔을 붙잡으며 그녀를 막았다. 검은 연기로 변한 로얀에게서 뿜어지는 기운이 너무도 강대했기에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피드, 제발 놔줘!" 엘라임이 실피드의 팔을 떨쳐보려 했지만 실피드는 그녀의 팔을 절대 놓지 않았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와 땅의 정령왕 노아스도 온 힘을 끌어올리며 엘라임의 앞을 막아섰다. 검은 기류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으로 인해 정령왕이 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놀란 천신과 루시퍼는 검은 기류로부터 급히 뒤로 물러났다. "크윽,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이게 대체......" 휘오오오-! 그리고 검은 기류의 소용돌이는 한 존재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하악, 하악. 크크큭." 검은 기류 속에서 섬뜩한 음성이 흘러나왔고, 연기를 뚫고 날카로운 손톱을 지닌 팔이 드러났다. 화앗! 그리고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거대한 날개가 솟아났다. 연기로 이루어진 검은 날개는 바람에 하늘거리며 흑빛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휘오오오! 검은 기류는 휘몰아치며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은 네 명의 정령왕과 천신과 루시퍼 외에도 많았다. 마계의 모든 마족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날아올라 있었으며, 게이트를 지키던 발록들 또한 이 심상치 않은 광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다크로드와 어둠의 정령들 또한 하늘을 바라보며 검은 기류를 주시하고 있었다. 굉음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든 다크로드가 어둠의 정령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휘오오오-! 그러게 시간이 흘러갔고 검은 기류는 바람에 씻겨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모습을 나타낸 이는 분명 로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 "크크큭."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그의 등엔 땅의 숨결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있었다. 항상 그의 허리에 자리잡고 있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사라져 있었다. 외향은 같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그 모습 자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이 솟아나게 만들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물러나라!" 그 목소리의 주인은 게이트의 앞을 지키고 있던 발록들의 수장인 파라무트였다. 장난기 가득 하던 그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심하게 떨렸다. 그의 그런 모습을 처음 접하는 발록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 "어서!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모두 뒤로 물러나라! 저놈을 피해 도망치라고!" 파라무트는 로얀의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너무도 강한 힘을 지닌 괴물 같던 그의 본성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몽마 나세스가 만든 던전 속에서 로얀이 만들어낸 환상에서였다. "모두 물러나!" 파라무트는 다시 한 번 부하들을 향해 외치곤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정령왕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 나름대로 정령왕이 죽는 것만은, 이 세상에서 소멸하는 것만은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화아아앗! "모두 여기서 피해!" 파라무트는 처음 보는 정령왕들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쳤다. "넌 누구지?" 이프리트는 갑자기 다가와 반말을 하는 파라무트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맏받아쳤다. "이런 씨팔! 저 녀석을 아주 잘 아는 놈이다. 저 모습을 나세스의 환상 속에서 본 적이 있단 말이다!" "환상?" "그래! 그 속에서 저 모습을 한 저 녀석은 차원계를 아주 아작을 내버렸지. 저 녀석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어서 몸을 피해!" 파라무트가 버럭 화를 내머 서둘러 외쳤다. 그는 다시 부하들이 있는 마계로 내려갔다. 타탁. 도착한 파라무트는 부하들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모두 마계의 마족들을 최대한 많이 데리고 이곳에서 멀리 떠나라!" [하지만 다른 마족들이 도망간다는 것에 찬성할까요?] "그럼 다 개죽음 당할래? 억지로 잡아 끌어서라도 어서 멀리 피해라!" 파라무트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외치며 손수 앞장서서 다른 마족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대피시킨다기보단 어깨에 들쳐메고 나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모든 발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40장 혼돈의 정령왕 로얀은 허공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크크큭." 스팟. 괴이한 웃음을 짓던 로얀의 모습이 허공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더니 천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헛!" 슈아아앙! 그의 등장에 천신은 빛의 무구를 즉시 움직였다. 빛의 무구는 맹렬히 회전하며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피식.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빛의 무구를 보는 로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빛의 무구를 잡아버렸다. 턱. 가가가각! "어, 어리석... 헉!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파지지지직! 로얀의 행동을 비웃으며 말을 잇던 천신은 숨이 멈출 듯한 충격을 받았다. 로얀의 손에 붇잡힌 채 맹렬히 회전하던 빛의 무구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로얀의 손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며 빛의 무구를 휘감았다. 쾅! 뒤이어 들려온 폭발음. 빛의 무구의 찬란한 파편이 바람에 휘날렸다. "크크크큭." "이, 이런 말도 안......" 퍼어억! 콰가가강! "꾸어억!" 더듬거리며 말을 하던 천신은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로얀의 주먹이 날아와 그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로얀의 주먹에서 천신이 느낀 무게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것이었다. 그 주먹을 맞은 천신은 피를 뿜으며 마계의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낀 루시퍼는 어둠의 무구를 휘둘렀다. 그의 눈에 잡힌 것은 로얀의 뒷모습이었다. 등 뒤를 노려 기습 공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스가가각! "큭큭." 스팟! 하지만 어둠의 무구가 쏘아내는 검기의 다발은 허공을 할퀴었다. 로얀이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턱. 흠칫. 로얀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루시퍼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과 자신의 팔을 붙잡는 누군가의 손길에 몸을 떨며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그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어둠의 무구를 쥐고 있는, 지신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는 로얀의 팔을 볼 수 있었다. 우두둑. 루시퍼의 팔을 움켜쥔 로얀의 손에 박혀 있는 힘줄이 불끈거렸다. 우둑! "끄아아악!" 그리고 루시퍼의 팔이 붉은 피를 뿌리며 뽑혀져 나왔다. 사람의 팔을 한 팔로 뽑을 정도의 엄청난 괴력을 선보인 로얀이었다. 어둠의 무구를 쥐고 있는 팔이 뽑힌 루시퍼는 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큭큭큭." 로얀은 손에 들려 있는 루시퍼의 팔과 그 팔에 있는 어둠의 무구를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빛에 반응하듯 로얀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며 손에 들려 있는 루시퍼의 팔과 어둠의 무구를 휘감았다. 콰지지직! 콰하하항! 펑! 그렇게 어둠의 무구도 빛의 무구와 마찬가지로 처참히 부서져 내렸다. 검은 가루를 뿌리며 어둠의 무구는 루시퍼의 붉은 피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크으윽." 바닥으로 추락했던 루시퍼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고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는 로얀을 바라보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족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저 괴물을 죽인다! 전원 공격하라!" 화아아앗! 루시퍼의 명이 마계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모든 마족들이 검은 박쥐 날개를 퍼덕이며 로얀을 향해 날아올랐다. 츄아아앙! 츄아아앙!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로얀의 양손에 검이 솟아 나왔다. 그의 양손의 손등에서 솟아 나온 검날은 각각 흑빛의 검신과 백광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 "모두 돌격!" 슈아아앙! 마족들이 머뭇거리자 최고위급 마족이 우렁차게 외치며 날아올랐다. 다른 모든 마족들이 일제히 그의 뒤를 쫓아 로얀을 향해 돌진했다. "크크크크. 크하하하!" 그 모습을 보는 로얀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두 손을 허공을 향해 휘두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스가가가각! 콰지지직! 그의 양손에서 검은 기류의 검기 다발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어둠의 무구가 펼치던 그 괴이한 기술이었다. 하늘엔 로얀이 만든 검기의 거미줄이 쳐졌다. 그 거미줄에 걸린 마족들은 갈기갈기 찢어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멀리서 본 마족들의 죽음은 곤충이 바람에 찢기는 듯했다. 검은 날개와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물러나는 이가 없었다. 두려움이 없기로 소문난 마계의 용맹한 마족들답게 그들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하하하!" 마족들이 그럴수록 로얀들의 웃음소리는 커져갔다. 그때 루시퍼가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뒤를 다른 마족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강한 마기를 뿜어내는 이들이 뒤따랐다. 마계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마왕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으드득. 가장 먼저 로얀에게 주먹으로 얻어맞고 마계의 바닥으로 추락했던 천신이 이를 갈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천계에 있는 대천사장에게 명했다. [지금 즉시 모든 군을 이끌고 마계로 와라.] [정령왕들이 모두 풀려났는데, 전쟁을 벌이시는지요?] [닥쳐라! 명령이니 아무 소리 말고 어서 와라!] 천신은 이를 갈며 천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얼굴을 주먹으로 얻어맞고 마계의 바닥을 구른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었지만, 그를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빛의 무구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스거거걱! 콰지지직! 크아아악-! 섬뜩한 살 베이는 소리와 마족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마계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게이트 앞에 있던 발록들은 수장인 파라무트의 명대로 마족들을 억지로 끌고 로얀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 중엔 로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파라무트도 끼어 있었다. 게이트 앞의 다크로드는 로얀의 모습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의 모습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어둠의 정령들이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왕을 공격할 수은 없지 않겠는가. 어느새 하늘로 다시 날아오른 천신은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낀 루시퍼는 팔이 잘린 곳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으드득! 루시퍼는 이를 악물며 손에서 붉은 화염을 일으켰고 팔이 사라져 피가 흐르는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치지지직! 고통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이를 악물며 상처를 불로 지져 버린 루시퍼는 천신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꽈악. 루시퍼는 왼손에 어둠의 힘을 집중했다. 빛의 무구를 잃은 천신은 두 손에 환한 빛무리를 생성시켰다. 스윽.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꽂혔다. "크크큭." 그들의 시선이 꽂힌 곳에 있는 이는 미친 듯이 달려드는 마족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있는 로얀이었다. 스윽. 그들에게서 잠시 시선을 옮기며 천신과 루시퍼는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사건. 천계의 천신과 마계의 루시퍼가 힘을 합친 것이었다. 정령왕들을 가두기 위해 음모를 꾸민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천신과 루시퍼가 힘을 합친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대사건이다. 천신과 루시퍼는 온 힘을 끌어올렸다. 로얀을 향해 날아가는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빛과 어둠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스가가각! "크아아악!" 그 와중에도 로얀은 달려드는 마족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마족들이 그의 손에 하나둘 죽자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거대한 빛과 어둠의 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큭큭큭." 로얀은 달려드는 둘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온 힘을 끌어올리며 합심하여 달려드는 천신과 루시퍼를 그는 너무도 느긋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느긋하다 못해 장난기 어린 미소까지 그려져 있었다. 슈아아앙-! 콰하하항! 하지만 로얀의 생각과는 달리 천신과 루시퍼는 역시나 신들의 왕답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로얀이 일말의 신음소리를 조금도 내지 않았을 뿐이지 빛과 어둠의 두 힘에 몸이 뒤로 쭈욱 밀려나고 있었다. 가가가각! 두 빛 무리는 로얀의 몸을 들이받았고, 그대로 뒤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콰과과곽! 이 정도라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죽어야 했지만 로얀은 태연히 빛과 어둠의 힘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마치 느긋하게 안마를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콰가가각! 빛과 어둠의 힘은 결국 로얀을 정령계, 마계, 천계가 하나로 모이는 중심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로얀과 천신, 루시퍼가 마계를 떠났고, 마계에 있던 이들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명의 정령왕이 먼저 급히 로얀의 뒤를 쫓았다. 그 뒤를 마족들이 뒤 쫓았고, 뒤이어 다크로드가 어둠의 정령들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마계에 남아 있는 파라무트와 발록들은 남아 있는 마족들을 확인하며 그들을 대피시켰다. 마계를 둘러보며 로얀과 싸움을 했던 이들 중 살아남은 이가 있는지 찾아보던 파라무트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로얀과 조금이라도 가까이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갈기갈기 찢겨진 채 죽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파라무트의 입에서 더욱 깊은 한숨이 나오게 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그건 바로 게이트를 통해 건너온 드래곤 로드와 수백의 색색깔의 드래곤들이었다. 그들은 넘어온 즉시 멀리 사라지는 로얀과 천신, 루시퍼, 그리고 그들을 따라가는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뒤 쫓아 급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드래곤들을 보며 파라무트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따. "하~. 그 환상대로라면 브레스의 소나기가 내리겠군. 아니지, 피의 소나기가 먼저 내리려나? 멍청한 드래곤들이 자기 무덤을 파는구먼. 쯧쯧쯧." 혀를 차며 파라무트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필이면 마계에서 싸움이 벌어졌기에 마계의 피해가 심각했다. "크크크크." "흐아아압!" 로얀을 쭈욱 밀고 가던 천신과 루시퍼는 그가 상처 하나 없이 웃음을 흘리고 있자 이를 악물며 온 힘을 퍼부었다. 콰하하항! 대지를 울릴 정도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빛과 어둠이 어우러져 폭발을 일으키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무섭도록 강한 파괴력을 표출했다. 그들의 협공은 마검과 성검이 만났을 때 일으키던 폭발과 같은 원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검이 일으키는 폭발과 그들이 일으킨 폭발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강한 굉음이 울려 퍼졌고, 폭발음과 함께 퍼진 섬광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악, 하악, 끝났나?" "헉헉, 끝났겠지. 크흐흑." 천신과 루시퍼는 숨을 헐떡이며 로얀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크하하하하!" 그때 웃음을 흘리던 천신과 루시퍼의 표정을 싹 바꾸는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서, 설마!" "크크크," 섬광 속에서 드러난 로얀은 상처라곤 티끌만큼도 입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괴기한 웃음을 흘리며 천신과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로얀은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콰하하항!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거대한 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콰하하항! 로얀을 향해 날아오는 검붉은 화염덩어리는 단숨에 그를 삼켜버릴 듯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로얀은 천신과 루시퍼의 공격을 받아내던 때와 마찬가지로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화염은 로얀의 몸과 부딪혔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일어났다. 하지만 역시나 로얀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모습을 나타내었다. [자네 미쳤는가!] 그리고 그때 그에게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급히 뒤따라 온 드래곤 로드의 것이었다. 드래곤 로드와 드래곤들을 본 천신과 루시퍼의 얼굴이 환해졌다. 둘은 일단 그들의 뒤로 몸을 피했다. 드래곤 로드는 천신과 루시퍼의 협공을 받아낸 로얀이 자신의 브레스를 받아낼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로얀의 행동을 저지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자네 대체......] 콰하하항! 로얀과 대화를 시도하려던 드래곤 로드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덮치는 거대한 화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흡!] 자신의 초고온의 화염 브레스를 잘 받아 넘긴 드래곤 로드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손을 들어올린 채 괴이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로얀을 말이다. 로얀을 보며 대화를 하려던 드래곤 로드는 망설였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그런 드래곤 로드를 보며 블랙 일족의 수장이 큰 소리로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외쳤다. [모두 공격하라!] 카엔으로 인해 블랙 일족은 망신을 당했다. 그 원인은 로얀에게 있었다. 로얀은 블랙 일족의 원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그들에게 이 순간 로얀이 정령왕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박살내놓은 상대를 합법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뿐이다. 이미 마계와 천계에서도 그를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아, 안 돼!] 하지만 드래곤 로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로얀을 공격하는 것을 급히 말렸다. 그는 로얀의 상대의 기술을 복사하는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족 모두가 브레스를 쏜다면 그 대가는 드래곤족의 멸족에 이르는 타격일 것이다. 콰하하항-! 쿠하하항-! 허나, 드래곤 로드의 절규 어린 외침으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없었다. 이미 블랙 일족의 모든 드래곤들이 브레스를 쏘았기 때문이었다. 콰하하항-! 블랙 일족에게 지지 않으려 다른 드래곤들도 경쟁하듯 브레스를 쏘았다. 콰하하항-! 그들이 쏜 브레스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로얀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브레스의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콰하하항-! 콰쾅-! 브레스는 로얀과 부딪히며 굉음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갖가지 브레스가 로얀을 덮쳤다. 그렇게 일어나는 폭발음은 한동안 쭈욱 이어졌다. 드래곤들은 로얀이 입었을 피해를 기대했다. 천신과 루시퍼가 힘을 합쳐도 그에게 티끌만큼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는데, 자신들의 브레스에 그가 없어진다면 드래곤들의 입지가 더욱 높아질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콰가가강-! [크아아악!] [커어억!]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드래곤족의 드높은 위상이 아니라 잔혹한 학살과 고통에 찬 신음성이었다. 더욱 강해지고 배로 불어난 브레스의 비가 드래곤들을 덮치고 있었다. 그 비는 로얀에게서 시작되었다. 그의 몸 주위에서 브레스들이 빛과 함께 쏟아져 나오며 드래곤들을 덮치고 있었다. 로얀이 드래곤들의 브레스를 모두 맞은 뒤, 그들의 브레스를 복사해 그대로 되돌려 주고 있는 것이었다. 드래곤들이 쏜 브레스의 비가 가랑비라면 로얀이 쏜 브레스는 소나기를 뛰어넘는 폭우였다. 콰가가가강-! 크아아악-! 브레스를 연타로 맞은 드래곤들이 하나둘 피를 뿌리며 추락해 갔다. 그들은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밑으로, 밑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드래곤 로드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멸족당할 순 없었다. [모두 급히 퇴각한다! 물러나라!] 콰하하항-! 크아아악-! 드래곤 로드는 쏟아지는 브레스를 막으며 그렇게 외쳤다. 드래곤들은 하나둘 뒤로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허나, 이미 같이 왔던 드래곤족의 반 이상이 브레스의 폭우 속에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드래곤족이 그렇게 물러나자 루시퍼는 자신을 따라온 마왕들과 마족들과 함께 다시 로얀을 향해 달려들 준비를 했다. 탁. 그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잠시 로얀이 벌이는 싸움에 한눈을 팔고 있던 실피드의 팔을 뿌리치며 엘라임이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로얀은 물러가는 드래곤들을 보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엘라임을 보며 그녀가 혼자이자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다. "이런!" 그 모습을 보며 이프리트가 급히 몸을 움직였따. 엘라임의 몸을 뒤덮는 검은 검기의 다발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화르르륵. 콰하하항! 이프리트의 팔에서 붉은 화염이 이글거리며 폭사해 나갔고 엘라임을 덮치던 검은 검기의 다발과 부딪혔다. 이프리트가 화염으로 로얀의 공격을 막으며 엘라임을 뒤로 물리자 로얀이 그 모습을 보며 붉은 혈광을 빛냈다. "크크큭." 스팟! 달려드는 마족을 죽이는 것보다 화염을 쏘아 보내며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이프리트에게 흥미가 동한 것이었다. "읏." 갑자기 나타난 로얀으로 인해 놀랄 틈도 없이 이프리트는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스릉. 퍼억! "커헉." 로얀의 손에 솟아 있던 검이 다시 그의 팔 속으로 빨려 들어감과 동시에 그의 오른 손이 이프리트이 복부 깊숙이 박혀들었기 때문이었다. 퍼억. 로얀은 연이어 이프리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그 힘에 이프리트는 밑으로 추락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연인인 실피드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멍하니 로얀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는 엘라임을 향해 날아갔다. 턱. 그리고 그녀의 팔을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목격한 로얀이 몸을 날리려 할 때 그의 등 뒤로 환한 빛의 소나기가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천신의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온 천족이 천신과 함께 로얀을 향해 빛의 화살을 날린 것이었다. 슈아아앙-! 콰가가가강-! 실피드와 엘라임을 목표로 삼고 있던 로얀은 갑작스런 천신과 천족의 공격에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돌아 눈 안에 가득 메워진 빛의 화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휘오오오! 그의 손끝에서 검은 기류가 휘몰아쳤고 그곳으로 빛의 화살이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가강! 작렬하는 빛의 화살이 내는 섬광이 마계에 잇는 이들의 시야를 가렸다. 쿠오오오-! 그리고 천천히 드러난 시야 속에 로얀의 모습이 보였다. "크크큭."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며 그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상처라곤 역시나 티끌만큼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켰다. "어, 어떻게!" 천신은 너무도 놀라 손을 들어 로얀을 가리키며 부르르 떨었다. 그런 천신을 올려다보며 로얀은 손을 뻗었다. 후우우우웅! 그리고 그의 몸 주위로 빛의 화살이 생성되기 시작햇다. 수백 수천 개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빛의 화살이 끊임없이 생성되었다. 슈아아아앙-! 로얀의 주변에 생성된 빛의 화살은 천족이 쏘아 보낸 빛의 화살이 가랑비처럼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폭우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지면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하늘을 향해 내리는 빛의 폭우였다. 콰가가강! 잔인할 정도로 강한 파괴력을 동반한 빛의 화살은 천족들이 펼친 방어벽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쏘아져 오는 빛의 화살 때문에 그 방어벽은 오래가지 못한 채 뚫려버렸다. 방어벽을 부순 빛의 화살은 천족의 몸을 관통했다. "크아아악!" 콰가가강! "으득." 천신은 빛의 화살로 인해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자신의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천사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크아아앗! 모두 돌격하라!" 결국 격분하다 못해 평정심을 잃은 천신의 외침에 그의 명을 받은 천족들이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 저놈을 향해 돌격하라!" 그리고 지켜보고 있던 루시퍼도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며 마족들에게 명을 내렸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천족과 마족들은 저마다 함성을 지르며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슈아아앙! 그렇게 로얀은 양쪽에서 천족과 마족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다. 씨익. 오히려 진한 웃음까지 그려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천족과 마족을 보며 로얀은 천천히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팔에서 검은 잔상이 흘러내렸다. 그 잔상의 정체는 검은 기류였다. 마기도 아닌 것이 검은 연기 같은 그 기류는 로얀의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모든 천족과 마족을 휘감기 시작했다. "쿡쿡, 크하하하하!" 스가가가각!! 콰가가각-! 그리고 이어진 광경은 너무도 참혹했다. 검은 기류에 휩싸인 천족과 마족은 갈기갈기 찢기며 바람에 휘날려 떨어져 내렸다. 대지에는 때아닌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붉은 피가 비가 되어 정령계, 마계, 천계가 한곳에서 만나는 이 세계 위에 적셔졌고, 천족과 마족의 갈기갈기 찢겨진 시체가 한데 어우러져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악-!" "끄아아악-!" 천족과 마족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의 고통에 찬 음성 뒤에 로얀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뒤이었다. "크하하하하!" 얼마 지나지 않아 로얀을 향해 달려들던 천족과 마족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버렸다. 로얀의 무자비한 학살 때문이었다. 휘오오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이 줄어들자 로얀의 몸을 감싸고 돌던 검은 기류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제 하늘에 남은 것은 아주 적은 수의 천족과 마족, 천계의 신들과 천신, 그리고 마계의 루시퍼와 마왕들뿐이었다. 로얀이 미쳐 날뛰고 있을 때 그의 몸엔 그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텅 빈 껍데기뿐인 그의 몸. 그는 자신의 몸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로얀은 어둠 속에 둥둥 뜬 채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나의 후손이자 혼돈의 정령왕인 다크로얀이여.] 그런 로얀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로얀은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딱 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나의 후손이자 혼돈의 정령왕인 다크로얀이여.] 그 기이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그리고 그때 잠을 자고 있던 로얀은 정신이 천천히 드는 것을 느꼈다. 잠이 완전히 깬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 만남인가? 나는 전대 혼돈의 정령왕이다.] 로얀의 생각을 읽었는지 그 목소리가 답을 해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로얀이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진득한 어둠 속에서 만난 혼돈의 정령왕의 것이었다. '당신은 소멸한 것이 아니었나?' [나는 마지막 남은 기억의 파편.]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대 혼돈의 정령왕이 로얀의 몸에 걸린 봉인이 모두 풀렸을 때에 그가 폭주할 것을 염려해 남겨둔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로얀에게 항상 그가 뭔가를 궁금해 할 때 머릿속으로 답해주던 기억의 파편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이것을 남겼었다. 그 마지막 파편이 지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는 나와 같은 절차를 밟지 않길 바랐거늘.] '무슨 뜻이지?' 지금 정령계, 마계, 천계가 만나는 곳에서 자신이 폭주하여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로얀은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말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은 그대의 모든 봉인이 풀려 결국 폭주를 하고 말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된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로얀이 생각하기에 그의 정신은 말짱했다. [그대는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있는가?] 들려오는 물음에 로얀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는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깊은 잠 속에서 잠시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럼 지금 내 몸은......' [과거 나와 마찬가지로 오직 파괴만을 원하며 움직이고 있겠지.] 그 말과 함께 로얀의 머릿속으로 지금 로얀이 벌이고 있는 피의 전쟁의 모습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대체......' 로얀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몸을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여기에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자신은 대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에 밟힌 것은 엘라임의 모습이었다. 엘라임은 실피드의 손에 꽉 잡힌 채 로얀의 모습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로얀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로얀의 머릿속으로 다시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나는 완전히 소멸한다. 더 이상 그대의 정신을 붙잡아둘 수가 없다.] '무슨 소리지?' [내가 사라지는 순간 그대는 깊은 잠에 빠질 것이고, 이 차원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어, 어떻게 하면 되지! 내, 내가! 어떻게 하면!' 로얀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해 외치며 전대 혼돈의 정령왕에게 답을 요구했다. [나 또한 폭주에서,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이미 모든 것이 종결된 뒤였기에 나 또한 알지 못한다.] '그, 그러면......' [그대 스스로 깨어나라. 그대 스스로 일어나라! 내가 해줄 말은 그것뿐이다.] '......' [시간이 없군. 묻겠다. 그대는 진정 깨어나길 바라는가?] '물론이다!' [왜지? 이대로 잠든다면 고통도 없이 슬픔도 없이 편안히 꿈꿀 수 있을 텐데.] '훗날 꿈에서 깨어났을 때 본 것이 끝없는 악몽이라면...... 차라리 깊은 잠 속에서, 깊은 어둠 속에서 악몽을 겪는 것이 낫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나를 향해 웃어준다면 그 모든 것이 씻기겠지.' [......] '꿈은 꿈일 뿐이다.' [진심으로 돌아가길 바라는가?] '물론!' [그대의 결심이, 그대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라. 그대의 마음이 곧 그 모든 것을 억누르는 권능이 될지어다.] '그런 복잡한 건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일 초라도 발리 엘라임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원했던 만남은 이와 같은 피 속에서 그녀를 만나는 게 아니었으니까!` 로얀의 외침이 울려퍼졌지만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주르륵 로얀의 모슴을 멀리서 지켜보던 엘라임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의 알을 꽉 붙잡고 있는 실피드의 손을 잡았다. "실피드. 날 보내줘." "......" 실피드는 말없이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프리트가 어느새 다시 날아올라 그들의 옆에 서서 실피드의 어깨를 살며시 잡으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에 따라 실피드의 손이 엘라임의 팔에서 떨어졌다. 엘라임은 자신의 팔을 놓아준 실피드를 향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로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잡으려는 듯 실피드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이프리트의 손에 붙잡혔다. "하지만! 조금 전에 봤잖아! 그는 엘라임의 목소리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어! 다가가는 즉시 죽이려 들거라고!" "아니, 그 녀석은 결코 엘라임을 죽이지 못할 거야." 실피드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이프리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화아앗. 실피드의 손에서 벗어난 엘라임은 로얀을 향해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 챈 로얀은 팔을 크게 휘저었다. 슈아아앙! 그의 움직임에 검은 기류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엘라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츄아아악! 그 칼날은 엘라임의 몸 주위에 생성된 물의 장벽에 가로막혀 무산되어 버렸따. 스윽. 자신의 공격을 감히 가로막은 엘라임을 바라보며 로얀은 몸을 날렸다. 직접 다가가서 없애기 위함이었다. 스팟. 흠칫. 팟! 하지만 엘라임의 바로 눈앞에 당도했던 로얀은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며 급히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다가오는 엘라임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엘라임이 자신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리고,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엘라임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전에 엘라임을 없애고자 멀리서 검은 기류를 생성시켰다. "로얀." 흠칫.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생성시킨 검은 기류는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스윽. 그렇게 엘라임은 천천히, 천천히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바로 눈앞에 마주 보고 섰다. 가느다란 그녀의 팔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짜악. 엘라임의 하얀 손이 로얀의 뺨을 때렸다. 이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경악했다. 로얀의 고개는 조금도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던 로얀이 엘라임의 일격을 그대로 맞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던 것도 아니었다. 아니, 평범한 인간 여인이 가볍게 휘두른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허나, 로얀은 그 공격을 그대로 허용했다. 시원스런 소리가 마계, 천계, 정령계 할 것 없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만큼 그 소리는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온 것이었다. 그 소리 하나로 이 세계는 침묵의 도가니가 되었다. 엘라임은 자신이 때린 로얀의 뺨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크르륵." 엘라임이 자신의 뺨을 쓰다듬고 있을 때 로얀의 붉은 안광이 크게 흔들거렸다. 그리고 엘라임의 가는 손이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겼을 때 그의 눈동자가 정지했다. 와락. "사랑해. 로얀도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돌아와줘. 우리 이제 그만 슬퍼하자. 우리 이제 그만 아파하자." 로얀의 품속에 안긴 엘라임은 흐느끼고 있었다. 평소 차갑기로 널리 알려져 있던 그녀가 뜨거운 눈물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스윽. 가늘게 떨리는 엘라임의 몸을 로얀의 팔이 천천히 들어올려져... 껴안았다. "엘라임, 엘라임, 엘라임." 초점이 정지한 눈동자로 로얀은 멍하니 엘라임의 이름만 불렀다. 그의 손톱이 줄어들었고, 그의 손등에 솟아나 있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사라졌다. 기괴한 음성으로 엘라임의 이름을 말하는 로얀의 음성도 점차 변화되어갔다ㅣ. "엘라임, 너무 만나고 싶었어. 너무......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해." 마지막 음성을 흘리는 로얀의 음성은 너무도 또렷했고 맑았다. 그렇게 차원계를 뒤흔들던 괴물이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잔뜩 긴장했던 많은 이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장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천계의 천신과 마계의 루시퍼였다. 천신은 비틀거리며 하늘 위에 가까스로 서 있었고, 루시퍼는 잘린 팔에 손을 가져가며 비틀거렸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41장 새로운 나날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 폭주한 그 끔찍했던 사건이 있은 지 어언 삼만 년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세월이 흘렀다. 그 사건이 가져온 여파는 매우 컸다. 각 세계로 따지자면 정령계는 혼돈의 정령왕으로 인해 네 명뿐이던 정령왕이 다섯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령계의 영역이 더 갈라진 것은 아니었다. 로얀이 어둠의 정령들과 함께 정령계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라임과 함께 정령계에 있고 싶은 마음은 강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령계는 생겨났을 때부터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다스리는 홍염의 대지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스리는 바람의 대지, 땅의 정령왕 노아스가 다스리는 숨결의 대지, 그리고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다스리는 생명의 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정령계에 어둠의 정령과 혼돈의 정령왕 로얀이 있을 곳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힘은 어느 쪽에든 속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날 그 폭주로 인해 로얀의 힘이 드러난 탓이었다. 그날 폭주가 있은 뒤 로얀은 다시 엘라임과 한동안 떨어져 지냈다. 아직 완전히 자신의 힘이 되지 않은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보다 강한 힘이 탐나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둔다면 언젠가 또다시 폭주할 것이고, 파괴를 일삼을 것이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렇게 로얀은 자신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 다시 카야 산맥으로 들어갔었다. 그리고 로얀은 카야 산맥을 중심으로 중간계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았다. 중간계에 어둠의 정령들을 풀어놓고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중간계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예전처럼 어둠의 정령이 중간계에 머물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둠의 정령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정령이라 불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드래곤이나 다른 이종족들도 어둠의 정령을 쓸모없는 정령이라 여기지 않았다. 많은 세월이 흘러 로얀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제어해 세상에 나왔을 때 드래곤과 마족, 천족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누가 자신을 어떻게 보건 신경 쓰지 않고, 정령계로 달려가 엘라임을 만났었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 이프리트와 실피드 커플의 뒤를 이어 정령왕 커플이 되었다. 로얀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천계는 침묵 속에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천계의 천신은 몇몇 신들과 함께 천계 깊숙한 곳으로 몸을 치료한다는 명분 하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그렇게 모습을 감춘 것은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때문이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신으로서의 위상과 자존심은 이미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마계를 공격하기 위해 편성해 두었던 군대가 단 한 사람에게 격파당하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는 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벌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천계의 속한 신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어떻게 벌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기에 스스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세계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마계였다. 팔을 잘린데다 극심한 상처로 인해 힘을 잃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루시퍼는 천사 출신인 그를 싫어하던 마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남은 마왕들은 하나의 왕좌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 싸움은 수십 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마계에 붉은 피를 뿌렸다. 그렇게 벌어진 치열한 전쟁의 승패는 결국 가려졌고, 승자가 드러났다. 그 승자는 발록의 수장인 파라무트가 차지하게 되었다. 혼돈의 정령왕과의 전투에서 몸을 사리며 도망을 쳤다는 이유로 파라무트는 마계에서 배척당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시끄럽게 떠든다는 이유로 파라무트가 광분했다. 그의 진정한 힘이 펼쳐지고, 그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마족들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로얀이 혼돈의 정령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제공한 드래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드래곤들은 여전이 드래곤 산맥에 틀어박힌 채 빈둥거리고 있었다. 로얀이 폭주한 덕분에 드래곤들의 수는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했다. 로얀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사건으로 드래곤족의 숫자가 반이 넘게 죽었었다. 중간계는 여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드래곤 산맥을 중심으로 기후별로 네 개로 나뉘어지는 칸 대륙은 여전했다. 많은 나라가 그동안 새로 탄생했고, 많은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걸었다. 여름의 대륙은 얀으로 인해 통일의 대륙이 되었었지만 지금은 여러 개로 쫙쫙 가라져 있었다. 현재 여름의 대륙에는 이얀이 세웠던 몰딘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로얀은 얀의 후손이 당당히 적에게 맞서 싸웠고, 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절대 나서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았었다. 그렇게 몰딘 제국은 역사 속에 묻히게 되었었다. 중간계에는 이제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의 또 다른 이름인 흑안의 검사를 아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록도 전혀 남아 있질 않았고, 그렇게 그가 인간일 때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드래곤들 또한 로얀에 대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를 아는 드래곤들은 멸족의 위기까지 몰리게 한 그를 끝까지 싫어했고, 혼돈의 정령왕 또한 드래곤들을 싫어했기에 드래곤은 어둠의 정령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 아니, 맺지 못했다. 그러나 혼돈의 정령왕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나갔다. 정령왕들은 정령계에 자신의 영역을 두고 정령을 다스리고 세상의 질서를 다스렸지만 혼돈의 정령왕은 특별했다. 그는 중간계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버렸기 때문이다. 중간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가 다스리는 어둠의 정령들이 중간계 이곳저곳에 자유롭게 퍼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중에서도 중간계에서도 강한 힘을 보이고, 마나의 소모가 적으면서도 강한 어둠의 정령을 선호하는 정령술사가 늘어났다. 하지만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중간계가 아닌 정령계에 머물다시피 했다. 그가 있는 곳은 물의 정령왕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연인사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리고 오늘 좀처럼 정령계를 나서지 않고 항상 붙어 있던 혼돈의 정령왕과 물의 정령왕이 중간계로 나왔다. 그 둘 외에도 불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 땅의 정령왕까지 모두 중간계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빛의 숲이었다. 빛의 숲 깊숙한 곳에 많은 엘프들과 페어리, 그리고 어둠의 정령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의 성인식을 보기 위함이었다. 역대 페어리족의 여왕과는 달리 레아는 성인식을 치르고 페어리족의 영원한 여왕으로 남길 자청했기에 다시없을 페어리족 여왕의 성인식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온 것이었다. 드래곤들 중에선 단 한 명만이 초대를 받아 참석했는데, 그는 역시나 드래곤 로드였다. 물론 그는 과거 로얀과 만났던 드래곤 로드가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마나의 품으로 돌아갔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새로운 드래곤 로드였다. 화아아앗. 곧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다섯 명의 정령왕이 등장했고 그들은 미리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 여왕님의 성인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페어리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지며 레아의 성인식이 거행되었다. 페어리족의 여왕의 성인식답게 화려했고 아름다웠다. 페어리족이 추는 춤은 눈이 부실 정도였고, 그들의 노랫소리는 영혼마저도 흔드는 듯했다. 성인식이 아니라 요정들의 축제를 감상하는 듯했다. 그들이 준비한 행사가 하나하나 끝나갔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아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요정의 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나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성인식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제 그 나무 속에서 레아가 나온다면 성인식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왔을 때의 레아의 모습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일 것이다. 화아아앗! 그렇게 모두 숨을 죽인 채 레아가 사라진 나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아가 거대한 나무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뚜벅 뚜벅. "오오오오-!" 천천히 걸어 나오는 레아의 모습에 요정의 나무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있던 이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발꿈치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머리카락과 커다란 하늘거리는 날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긴 치마가 짧은 치마처럼 되어 있었고 신고 있던 신발은 벗어 놓았는지 새하얀 맨발이었다. 레아는 화사한 웃음을 담은 채 다섯 명의 정령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정령왕들을 바라보다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호호, 거기 바람둥이! 나 어때?" "오오오. 크윽." 레아의 모습에 환호하던 이프리트는 옆에서 고통을 가하는 실피드의 손길에 살짝 손을 휘적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축하한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축하해." "고마워, 언니." 레아는 노아스와 실피드의 축하인사를 환한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로얀과 엘라임을 향해 다가갔다. "축하해." "축하한다." "와~. 로얀이 나를 보며 웃다니! 엘라임 언니의 힘이겠지?" 웃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엘라임과 로얀을 보며 레아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녀는 엘라임의 곁에 행복하다는 듯 서 있는 로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응?" "받어. 렌이 오래전에 로얀에게 전해주라고 한 거야." 레아는 성인식을 위해 나무로 들어가기 전 렌이 로얀에게 주라고 한 것을 손에 꼭 쥐고 들어갔었다. 레아의 말에 로얀은 아주 오래 전 자신에게 아름다운 음을 들려주었던 귀여운 남자아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 레아의 손을 통해 전해진 것은 낡은 종이였다. 로얀은 부서질 것만 같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바스락. <인간은 나약하지만 고통과 슬픔의 강을 건넌다면 신도 될 수 있다.> <하나의 인연이 사라지면 하나의 인연이 생기고, 하나의 인연이 떠나가면 하나의 인연이 남는다.> 렌이 로얀에게 남긴 것은 단 두 마디였다. 이것이 칸 대륙에 아름다운 음을 전한 위대한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렌이 혼돈의 정령왕 로얀에게 전하는 선물이었다. 로얀은 그 종이를 쥔 채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싱그러운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듯했다. 그의 손엔 하얗고 작은 엘라임의 손이 쥐어져 있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