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길 잃은 자 차가운 대지 위에서 펼쳐진 정령왕과 드래곤의 싸움이 불러온 것은 찬란한 금빛 광채였다. 카엔은 자신의 눈앞에서 찬란한 금빛을 뿜어내는 로얀을 보고 눈동자에 이채를 띠었다. [크흠, 마검과 성검에 그런 능력도 있었나? 흠, 이거 갈수록 탐이 나는군.] 카엔은 저 금빛 검신이 단순히 마검과 성검의 힘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그런 생각에는 인간의 힘을 인정하기 싫은 그의 마음도 반영되어 있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카엔의 말을 들은 둥 마는 둥 하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 스윽. 그의 고개가 들어올려지더니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블랙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탓! 그리고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차가운 대지를 힘껏 박차고 날아오른 그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카엔의 몸통 부분을 향해 날아갔다. 한데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황금이 뿌려지듯 금빛 광채가 휘날렸다. 카엔은 자신에게로 곧장 날아오는 로얀을 보고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마나 소드 정도면 드래곤의 비늘은 분명 뚫린다. 하지만 마법 중 최강의 방어마법이라 할 수 있는 카이저 실드로 보호받고 있는 상태에서라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해도 드래곤의 비늘을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카엔은 자신의 마법과 단단한 비늘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카엔의 몸통과 가까워진 로얀이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빛으로 빛나는 다크리온이 바람을 가르며 카엔을 향해 돌진했다. [카이저 실드.] 밑에서 검을 휘두르는 로얀을 비웃으며 카엔이 여유있게 시동어를 외치자 그의 말은 곧 마법이 되어 그의 몸 전체를 감쌌다. 드래곤이 펼친 마법은 지난번 로얀과 싸움을 벌였던 어둠의 신전의 리치가 사용한 카이저 실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콰하하항......! 밝은 빛의 막이 카엔을 감싸안는 순간 다크리온이 그 막과 격돌했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하늘을 찢는 커다란 파공음에 한껏 여유를 부리던 카엔은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바람을 찢으며 여전히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또다시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 했지만 그 순간, 다크리온의 날이 카이저 실드의 막에 살짝 부딪혔다. 콰강! 쿠쿠쿵......! 그 결과 거대한 에이션트 드래곤 카엔은 엄청난 진동을 느껴야 했다. 비록 카이저 실드가 로얀의 검에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가 상당했던 것이다. [큭, 썬더 스톰!] 콰지지지! 콰르르릉......! 카엔이 다시 외친 마법 시동어와 함꼐 하늘에 검은 장막이 덮어 씌어지는 듯하더니 하늘이 진동했다. 7서클의 광범위 마법인 썬더 스톰이었다. 그것은 번개의 폭풍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는 마법으로 강한 살상력을 지녔지만 마나의 소모가 극심해 오래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어날 떄부터 마나 덩어리를 지니고 있는 드래곤을 썬더 스톰이 필요로 하는 마나가 무궁무진하게 많기 떄문에 그것을 쉽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쿠오오오! 콰르릉......! 매서운 폭풍이 로얀을 감싸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을 동반한 번개의 폭풍은 그의 몸을 찢어놓으려 했지만 실상은 그의 옷자락 하나 제대로 찢지 못했다.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로얀은 동상처럼 단단해져 번개의 폭풍 따위는 아무런 위협거리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휘오오! 콰르릉......!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협을 느낀 블랙 드래곤 카엔은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그 누구에게서도 피해나 상처를 받지 않은 채 곱게 자라온 드래곤들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 극도로 흥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느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드래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나 다른 종족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상처를 입었다면 다시 본신으로 현신해 자신에게 해를 가했던 존재를 모두 죽이고 마법으로 치료하면 그만이었다. 드래곤들이 유희를 하면서 만나는 적들 중에는 그들 본신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인간은 달랐다. 지금 카엔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로얀이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본체로 현신한 드래곤과 이렇게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빛을 뿌리는 두 개의 검! 과거 검에 미친 드래곤의 저서를 봤을 때가 생각나자 더욱더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카엔이었다. [크하하하!] 카엔은 드래곤인 자신이 고작 인간 따위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것이 못마땅한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동안 로얀의 모습은 썬더 스톰에 뒤덮인 채 점점 카엔의 시야에서 지워져갔다. 쿠르르릉......! 하늘을 날지 못하는 로얀은 몸을 감싸는 폭풍 때문에 하늘에 떠 있을 수가 없었다. 스으윽. 로얀의 양팔이 부드럽게 움직이자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금빛이 폭풍에 휘날려 아름답게 빛났다. 후웅! 후웅!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허공을 향해 휘두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썬더 스톰." 콰르르릉! 휘오오오! 그러자 두 개의 검에서 번개의 소용돌이가 하나씩 튀어나와 로얀의 주위를 돌며 카엔이 만든 썬더 스톰의 폭풍을 쳐내기 시작했다. 이제 7서클까지 복사가 가능한 로얀이 카엔의 마법을 복사한 것이다. 그의 복사 능력은 상대의 힘을 복사하여 다른 모습으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위력이 늘어나거나 사용하는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지금 로얀이 썬더 스톰을 양손으로 두 개 펼친 것도 그런 특징이 작용해서였다. 콰릉......! 콰릉......! 하늘을 가득 메우고 번쩍이는 번개들이 서로 부딪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콰르릉......! 그와 함께 천지를 뒤흔드는 번개의 폭풍 속에 잠식되어 버렸던 로얀이 서서히 카엔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크! 이 벌레 같은 인간 놈, 죽여주마!] 휘오옹! 쿠오오오......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너무도 말짱한 모습의 로얀을 보고 카엔은 극도로 흥분해 입을 벌렸다. 그러자 주위의 마나가 그곳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카엔은 또다시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를 쓸 생각인 것이다. 카엔은 이번에는 미리 언령을 구사해 로얀의 몸을 묶어두었다. 브레스를 피하지 못하게 할 심산인 것이다. 드래곤이 펼치는 언령 마법은 그들보다 상위의 존재가 아니라면 모든 존재에게 통하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쿠오오...... 로얀이 산성 브레스에 사라져 버리는 상상을 하며 마나를 모으고 있던 카엔의 큼직한 두 눈이 갑자기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스으윽. 뾰족한 에리오네를 든 채 번개의 회오리를 타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로얀의 모습을 그는 보고 말았던 것이다. 쿠오오오! 사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로얀은 조금 전 카엔이 쓴 썬더 스톰을 약간 변형시켜 번개의 회오리를 만든 후 그것을 타고 카엔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휘오오오! 로얀과 그의 손에 들린 에리오네가 금빛을 뿌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브레스를 쏘기 위해 높이 날아오른 카엔은 두려움이 일어남을 느꼈다. 쿠오오오! 파지지직! 번개의 회오리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카엔의 몸을 두르고 있는 카이저 실드의 막 위로 전류가 살짝살짝 흘렀고, 바로 그때 로얀이 몸을 움직였다. 번개의 회오리를 그 자신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었기에 카엔과 최대한 가까워졌을 때 그 위에서 뛰어오른 것이다. 덕분에 카엔의 턱 밑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그는 왼팔을 위로 크게 휘둘렀다. 콰가가각! 에리오네가 카이저 실드의 막에 부딪히면서 폭발음을 냈다. 카엔은 인간인 로얀이 자신의 언령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버리고는 날아와 자신의 턱 밑으로 사라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엔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로얀 때문에 지금 너무도 불안했다. 드래곤의 언령 마법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애써 부정하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지금 자신과 싸우고 있는 인간을 골든 마스터라 말하고 있었다. 휘오오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카엔은 턱 밑으로 파고 들어온 로얀을 찾기 위해서 더 높이 나는 수밖에 없었다. 콰가강! 하지만 날개를 움직이려던 카엔은 에리오네의 검신이 감히 뚫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카이저 실드의 단단한 막을 뚫고 자신의 턱 밑까지 파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푸거거걱! 푸화확! [쿠워어어어억!] 금빛 찬란하던 에리오네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에리오네의 검신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여행은 그립에 묶인 기다란 보라색 끈을 적심으로 해서 끝이났다. 물론 여행의 시작은 흑색 카엔의 비늘에서부터였다. 카엔의 턱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른 금빛 검이 검은 구름을 머금었다. 워낙 두꺼운 드래곤의 가죽 때문에 검신이 머리통을 완전히 뚫고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살짝 튀어나온 에리오네에게서 흘러나오는 금빛이 하늘에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엔은 고통에 찬, 거친 비명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로얀을 향해 쏘려던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는 어떻게 됐을까? 카엔의 입 안에 모이고 있던 엄청난 양의 마나는 이미 대기중으로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콰르릉......! 번개의 회오리에서 빠져나온 로얀은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머물고 있었다. 카엔의 머리통을 꿰뚫고 박혀 있는 에리오네의 그립을 잡고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콸콸콸......! 거대한 드래곤의 몸뚱이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들어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블랙 드래곤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바짝 말라 있는 모르드 평원을 붉게 물들였다. [쿠워어억! 크아아악!] 하늘 높은 곳에서 천둥처럼 터져 나오는 커다란 카엔의 음성이 귀를 따갑게 했지만 로얀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흑색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그의 두 눈은 자신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 사이에서 착 가라앉은 채 두꺼운 블랙 드래곤의 비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에 찬 너의 비명소리는 하등한 몬스터와 다를 바가 없군. 그것은 너희도 몬스터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도마뱀아!" 그리고 로얀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카엔의 발광 속에서도 침착하게, 이번에는 다크리온이 들린 오른팔을 움직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레이나라는 이름이 떠올랐고 심장이 요동쳤지만 그녀가 자신의 여동생이었다는 것과 눈앞의 드래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만을 알 뿐 동생의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마법을 걸어 기억을 조작해 자신을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드는 로얀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저 블랙 드래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이 카엔을 보며 분노하고 있었고, 그의 모든 것이 눈앞의 드래곤을 죽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퍼걱! 묵직한 소리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금빛으로 빛나는 다크리온이 굵직한 블랙 드래곤의 목에 박혔다. 푸화확! 카엔의 머리통을 뚫은 에리오네와는 달리 다크리온은 그의 비늘을 베고 목에 박혔기에 훨씬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턱. 로얀이 에리오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팔에서 힘줄이 솟아올랐다. 순간, 팔을 굽힌 그는 다크리온의 손잡이를 발로 밟고는 카엔의 등 위로 올라가기 위해 거대한 신전의 기둥처럼 굵은 그의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마치 암벽을 타듯 카엔의 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목에서 느껴지는 그 이질적인 느낌에 카엔의 몸부림과 고통에 찬 울부짖음은 배가되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그는 마법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오오오! 카엔은 고통 속에서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누볐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발광에도 불구하고 로얀은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오오오! 콰가가가가! 콰르르릉......! 그때, 로얀이 만든 번개의 회오리가 덮쳐왔다. 그러나 이미 그의 품에서 벗어난 힘, 로얀에게는 그것을 조정할 능력이 없었다. 쿠구구구구......! "큭!" [크아아악!] 로얀과 카엔이 동시에 비명소리를 흘렸다. 로얀은 번개의 회오리 때문에 카엔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쳐 잠깐 추락하다가 다행히 카엔의 몸뚱이에 꽂혀 있는 다크리온늬 그립을 잡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그렇지만 떨어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짤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카엔은 로얀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카이저 실드는 이미 깨졌고 로얀으로 인해 두 군데에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다가온 번개의 회오리가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그것을 건드렸기에 카엔은 고통에 크게 몸부림치며 서서히 지상으로 추락해 갔다. [쿠오오오오......!] 드래곤의 포효가 하늘을 뒤덮었다. 에리오네가 입에 박혀 있었지만 커다란 그의 머리통을 뚫기엔 검신이 짧았기에 입을 최대한 벌리며 포효를 한 것이다. 카엔이 추락하자 그에게 매달려 있던 로얀도 지상을 향해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 안에 잡혀 있는 다크리온의 그립을 더욱 강하게 움켜잡았다. 차가운 칼바람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콰르릉......! 카엔이 큰 상처를 입고 추락하고 있는 탓일까? 그가 펼친 썬더 스톰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로얀이 만들어낸 번개의 회오리 역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밑에서 로얀과 카엔의 역사에 남을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다크로드를 포함한, 살아남은 다섯 명의 세드니스였다. 스르륵. 하늘을 날 수 없어 자신들의 왕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왕과 카엔이 모르드 평원의 차가운 대지로 추락하자 그쪽으로 급히 몸을 움직였다. 고오오오...... 차가운 칼바람이 로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현재 그는 카엔과 함께 빠른 속도로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쾅! 콰가가강! 이윽고 모르드 평원을 뒤흔드는 굉음이 뒤따라 들려왔다. 위대한 종족이라 떵떵거리던 블랙 드래곤 카엔이 입에 에리오네를 꽂은 채 차가운 대지에 처박힌 것이다. 카엔이 로얀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상대를 얕잡아본 탓이 컸다. 드래곤답게 마법을 이용해 머리를 써서 싸웠다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래곤이 중간계에서 강한 이유는 마법도 마법이지만 그들이 이끄는 엄청난 몬스터의 수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만약 드래곤이 작정을 하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무리 봉인이 하나 더 풀린 로얀이라도 이렇게 쉽게 카엔을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크르륵......]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머리가 들어올려졌다. 그의 입은 그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스윽. "......" 블랙 드래곤 카엔의 몸을 배경 삼아 로얀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검은 산이 그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얀의 전신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 피는 모두 카엔의 것이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졌지만 카엔의 몸에 매달려 있었던 덕분에 직접적인 충격은 받지 않아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충돌의 여파로 마지막 순간에 퉁겨 나가기는 했지만...... 뚜벅뚜벅...... 로얀은 몸을 일으킨 직후 카엔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검인 성검 에리오네와 마검 다크리온은 여전히 카엔의 몸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찬란하게 금빛을 발하던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은 로얀에게서 떨어진 지금 그것을 모두 허공에 날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크아아아! 헬 파이어!] 화르르르......! 드디어 카엔이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고 정신을 차린 것일까? 로얀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카엔은 몸을 일으키며 드래곤의 대표마법이라 할 수 있는, 로얀이 복사할 수 없는 8서클 화염계 마법인 헬 파이어를 썼다. 콰하하항! 뜨거운 열기가 모르드 평원 전체로 퍼져 나가자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한번 붙으면 꺼지지 않는다는 헬 파이어의 불꽃이 로얀을 덮쳤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인 데다가 로얀에게는 헬 파이어를 막을 검도 없었다. 카엔은 드디어 저 괴물같은 인간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화르륵! 그러나 불꽃이 점점 바람에 날리며 로얀의 모습이 드러나자 카엔의 눈동자가 커졌다. [크으윽, 말도 안 돼! 골든 마스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을 뒤로하고 불꽃 속에서 로얀이 걸어 나왔다. 그러나 헬 파이어의 화염은 그의 옷자락에도 붙지 못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 가루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카엔은 그러한 로얀의 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검에 미쳤던 드래곤의 저서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금빛 오러를 온몸에 뒤집어쓴 골든 마스터는 오러를 몸에 두름으로써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못하는 강인한 육신을 지니게 된다. 아니, 금빛 오러를 뿌리는 단단한 골든 마스터의 육신은 변화하는 기후에 더욱 강하다.> 그래서 카엔 자신이 쓴 헬 파이어의 열기가 골든 마스터로 여겨지는 로얀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한 화염이나 차가운 냉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바람의 속성을 지닌 마법이나 대지 계열의 마법이라면 통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카엔은 이제 침착하게 전투에 임하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하지만 이미 너무 늦고 말았다. 로얀은 바로 그의 눈앞에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타탁. 로얀이 지면을 박차고 카엔의 거대한 몸뚱이 위로 올라갔다. [크르르......] 바로 방금 전에 냉정하게 전투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던 카엔은 인간이 자신의 등 위에 올라타자 그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화가 치솟은 그는 날개를 움직이려 했다. 하늘로 날아올라 로얀을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앞뒤 정황을 살펴볼 때 인간인 로얀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쿠쿠쿵! 카엔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 진동에 비틀거리던 로얀은 이내 발을 움직여 카엔의 날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턱. 그리고 그는 카엔의 날개를 손에 쥐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카엔은 자신의 날개에 이질적인 느낌이 전해져 왔지만 무시하고 날개를 움직였다. 콰드드득! 부우욱! [쿠어어억!] 날개를 움직이려던 카엔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모르드 평원이 떠나가라 커다란 비명성을 토해 냈다. 그의 등 뒤에 달린 거대한 날개는 반쯤 뜯겨 있었고 붉은 피를 뒤집어쓴 로얀의 두 손이 그것을 자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팔에서 힘줄이 불끈거릴 때마다 날개는 점점 더 찢어졌다. 부우욱. [쿠워워워웍!] 로얀은 카엔의 등에서 치솟는 피를 맞으며 그 위를 걸었다. 이윽고 다크리온이 꽂혀 있는 카엔의 목 부분에 당도한 그는 손을 뻗어 카엔의 목에 박혀 있는 다크리온의 그립을 쥐었다. 푸욱. 푸화화확! 단단하게 박혀있던 다크리온이 뽑혀 나오자 붉은 피가 터져나왔다. [크아아아아......!] 카엔이 그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는 순간, 로얀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다시 금빛을 머금었다. 쿵! 쿵! 쿵! "죽어라." 미친 듯 날뛰는 카엔을 보며 로얀은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이제 이것을 한 번만 휘두르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카엔의 목은 차가운 대지 위에 뒹굴 것이고 이름뿐인 여동생의 복수도 하게 되는 것이다. 후우웅! 로얀의 오른팔에 힘줄이 솟음과 동시에 금빛을 뿌리는 다크리온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부우욱! 묵직하고 묘한 느낌이 손 끝에서 전해져 왔다. 다크리온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카엔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푸화화화확! 쿠쿵! 붉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위대한 종족이라 떠들어대던 카엔은 이렇게 차가운 대지에 머리를 식혔다. 뚜벅뚜벅...... 로얀은 걸었다. 자신의 단 한 번의 휘둘림에 죽어버린 카엔의 머리를 향해 그는 걸어갔다. 턱. 에리오네의 그립을 감싼 보락 끈의 감촉이 느껴졌다. 푸우욱. 카엔의 머리에 깊이 박혀 있던 에리오네가 금빛을 머금으며 서서히 밖으로 뽑혀 나왔다. 스윽. 로얀의 착 가라앉은 눈동자가 죽어버린 카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신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지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푸거거걱! 스거걱! 푸화화확! 로얀이 갑자기 카엔의 머리를 향해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온몸에 튀었지만 로얀은 그것을 그대로 맞으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로드.] 멀리서 세드니스들이 다가와 로얀의 주위를 감싼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이 없다.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왜 내가 레이나라는 나의 여동생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인간의 삶은 어떨까?" [로드......] "그렇게 소중했던 존재에 대한 기억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 과거 내가 맹인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동생의 목소리조차 떠올려지지 않는다.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이 모든 게 거짓된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게 빌어먹을 신의 장난이 아닐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실타래처럼 엉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로드와 함께한 시간은 짧지만 당신은 그 누구의 손으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왕이시자 단 하나밖에 없는 혼돈의 정령왕이십니다.] "그런가... 하지만, 하지만 레이나라는 여동생에 대한 기억이 안 나는 것이 너무도 슬프다. 그리고 괴롭다. 크아아아아!" 콰가가가강! 로얀은 내렸던 팔을 다시 들어 올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휘둘렀다. 금빛 광채를 휘날리며 허공을 가르던 두 검은 곧 카엔의 거대한 시체에 와 닿았고 붉은 피와 살덩이를 튀기며 주위를 파헤쳐 갔다. 몰딘 왕국의 수도인 모르딘에 기이하고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사건이 벌어졌다. 모르딘의 대로 한복판, 왕성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생명체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죽어 있어 더 이상 생명체라 불릴 수 없는 것이었지만...... 웅성웅성...... 그저 거대한 생명체의 시체라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처를 입고 하늘을 날던 몬스터가 떨어졌다고 보면 되니 말이다. 아주 드물게 정말로 몬스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와이번은 무척이나 포악해 여러 몬스터와 싸움을 벌였고, 심한 상처를 입은 와이번이 하늘을 날다 이곳에 떨어진 적도 아주 오래 전에 한 번 있었다. 하지만 이 생명체를 보고는 도저히 와이번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잘리고 날개가 뜯겨나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이 생명체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검은색의 단단한 비늘... 이 거대한 생명체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의 본체는 보통 사람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보기 힘들었다. 아니, 혹 본다 하더라도 그 순간 바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드래곤이 드래곤 산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본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뭔가를 파괴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철그덕, 철그덕!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왕국의 병사들이 드래곤의 둘레에 둥글게 서며 그들의 접근을 막아도 끝날 줄을 몰랐다. 이윽고 왕성의 문을 통해 기사들이 발맞추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몰딘 왕국의 현 국왕인 이얀이었다. 갑자기 왕성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중간계 최고의 강자라던 드래곤의 처참한 시체! 그것을 보고 국왕은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여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그런 궁금증을 느끼고 왕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날 왕은 드래곤을 보자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혹 있을지 모를 다른 드래곤들의 복수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그날 이후 드래곤을 부위별로 나눠 마법사 길드에 팔아 넘겼고, 몰딘 왕국의 재정을 확 끌어 올렸다. 드래곤은 어디 하나 값지지 않은 곳이 없는, 그야말로 보물 보따리였던 것이다. 그가 그떄 눈물을 흘린 것이 돈 보따리가 도착해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린 것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생긴 돈으로 세금이 줄어들고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백성들은 환호하며 즐거워했다. 지난 밤 이곳 경비를 서던 병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드래곤이 어두운 밤 바닥에서 솟아났고 검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그주위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무시되었다. 저 거대한 드래곤이 어떻게 그림자 속에서 솟아난다는 건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햇살이 쨍쩅 빛나던 화창한 날에 몰딘 왕국은 거대한 돈 보따리를 손에 넣게 되었었다. 드래곤의 가죽이나 뼈만으로도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나오지만 정말 값진 것은 드래곤 하트였다. 드래곤의 마나가 결집되어있는 이 덩어리는 가격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물건이었는데, 이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이 드래곤은 드래곤 하트도 온전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몰딘 왕국이 길에 버려진 드래곤을 주워 부자가 되고 있을 무렵 크라우트라는 곳에서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라우트는 몰딘 왕국에서 빈트러드 제국으로 가는 길 가운데 있는 모르드 평원의 끝자락에 위치한 숲으로 지독하게 덥고 진득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대륙에서만 자라는 굵고 단단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뻗어 있는, 매우 울창한 숲이었다. 콰가가강......! 푸드득! 평화롭기만 하던 그 푸른 숲에 굉음이 터지자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가가강! 쿠쿠쿵...... 굉음이 들리고 거대한 나무들이 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로얀이 검은 흑발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로얀은 양손에 성검 에리오네와 마검 다크리온을 쥐고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다. 금빛 오러까지 씌어져 있는 두 검은 거대한 나무들을 잘라 숲을 파괴해 갔다. 얼마나 오랫동안 검을 휘둘렀는지 그의 주위는 더 이상 나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자리를 옮기며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로얀으로 인해 아름드리나무들이 허무하게 베어졌다. 이런 식이라면 머지않아 크라우트 숲은 사라지고 말 것 같았다. 검을 휘두르는 로얀의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골든 마스터가 되면서 생긴 엄청난 힘을 그의 몸이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사는 드래곤조차도 죽기 직전 들어섰다는 골든 마스터의 경지를 하루아침에 이루고 그 힘을 얻었으니 그의 몸이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로얀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갑자기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 그의 머릿속에 남겨진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카엔의 브레스가 날아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혼돈의 정령왕으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 후 잃어버린 과거 속에 있던 친구인 얀을 만났고 어머니를 만났다. 그들이 친구이고 부모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추억이 없다는 것이 그를 괴롭혔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 속의 한 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딜 가나 따라오는 이름이 있었다. 레이나라는 여동생......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그녀를 위해 살아왔다고 항시 말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그녀와 함께 했던 일들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도 한 가지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며칠 전 죽인 카엔과 또 다른 드래곤을 죽여야 한다는 것! 그 또 다른 드래곤이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드래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콰가가강!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기억을 부여잡고 로얀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고, 숲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로얀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혼돈의 정령왕인 로얀에게서 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이였다. 검은 후드 속에서 암흑과 함께 번뜩이는 두 눈밖에 보이지 않는 다크로드의 모습에서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왕을 걱정하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콰가가강! "크허헉! 헉헉......" 벌써 몇 시간 동안이나 검을 휘두른 로얀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금빛 오러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사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얀은 카엔을 죽인 직후 피범벅이 된 그의 몸뚱이를 보며 남은 세드니스에게 명했다. 얀에게 이 몸뚱이를 가져다주라고 말이다. 얀과 했던 흑섬에서의 약속은 혼돈의 정령왕이 된 이후에 한 것이었기에 기억하고 있는 로얀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드디어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바로 이 숲이었다. 그리고 그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로드, 그 이상 힘을 쓰신다면 육체가 붕괴될지도 모릅니다.]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며 다크로드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손을 밀치고는 두 검을 바닥에 꽂아 그것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헉헉......." 거친 숨을 토해 내던 로얀은 성검과 마검의 그립 쪽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각각 감고 있는 두 끈은 피에 찌들어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너덜너덜해진 채 길게 늘어져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슥. 로얀은 손을 뻗어 바람에 휘날리는 끈을 잡았다. 부드러운 끈의 감촉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해 떨리고 있었다. 이 고통 속에서, 이 괴로움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얼굴만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다크로드." [예, 로드.] "엘라임이 보고싶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 로얀은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그녀라면 자신의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혀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는 몸을 떨었다. 한 번도 정령계에 가본적이 없는 그로서는 그곳에 가는 방법을 몰랐다. 아니, 누구나아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 불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 산맥의 중심에 떠 있는 거대한 성지인 룬이라는 곳을 통해 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룬은 정령계뿐만 아니라 마계와 같은 곳으로도 갈 수 있는 통로였고, 떄문에 드래곤 산맥의 모든 드래곤이 관리하고 지키는 곳이기도 했다. 아무리 로얀이라 해도 드래곤들이 바글거리는 그곳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엇공 가망성이 없는 일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ㅣㅆ지만 자신의 왕이 너무도 바라고 있었기에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드래곤 산맥의 중심에 있는 룬이라는 곳을 통해 정령계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로얀도 알고 있었다. 바로 모든 드래곤들을 죽이고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찮은 인간을 그들이 지키는 성지인 룬에 들여보내 줄 드래곤은 아부도 없을 테니까. "전면전은 힘들겠지." [......] "드래곤과 함께 들어간다면 어떨까?" 다크로드는 순간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로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을 잡아 길 안내를 하게 하면 말이야." 다크로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드래곤이 과연 로얀에게 잡힐 것인지,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을지도 의문이었지만 혼자 유희를 즐기고 있는 드래곤을 어떻게 찾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드래곤 산맥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드래곤이 유희 중에 발견한 장난감을 다른 동족 드래곤들이 신경 쓸 리가 없으니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로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나 남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서라도 드래곤 산맥으로 가야만 했다. "그렇군. 함께... 하겠나."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래곤 산맥 깊숙이 들어간다 해도 룬을 지키는 드래곤의 눈을 피해 정령계로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저희 어둠의 정령들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합니다.] 스르륵. 다크로드의 말과 함께 곳곳에서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이 숲에 살고 있던 어둠의 정령들이었다. 수백의 어둠의 하급 정령 다크... 칸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 어둠의 정령의 수를 과연 측정이나 할 수 있을까. 로얀은 처음 숲 속에 들어왔을 때 어둠의 정령의 기운을 느꼈지만 곧 검을 휘두르며 정신을 잃었다고 할 수 있었기에 그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로얀은 황폐해진 풍경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거대한 바위 위에 앉은 후 손을 뻗어 검의 그립을 잡았다.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영원이 왕과 함께하겠습니다.] 다크로드가 몸을 숙이며 부복하자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수백의 다크들이 조용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드래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반드시 찾아 죽이겠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드래곤 산맥을 뚫겠다. 너희들과 함께!" 화아아앗!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크라우트 숲 전체로 퍼져 나갔다. 쿠오오오! 그리고 그 검은 빛은 곧 어둠의 정령 다크와 그들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다크로드에게 빠르게 스며들었다. 쿠오오오! 그러나 하급 정령인 다크에게는 가는 빛줄기가 흡수되는 반면 상급 정령인 다크로드에게는 굵직한 빛줄기가 쏘아져 나갔다. "그 누구든 나의 앞길을 막는 자는 죽이겠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지만 나는 혼돈의 정령왕, 이것을 즐기겠다. 그리고 드래곤 산맥을 넘어 그녀를 만나겠다." 크라우트 숲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검은 빛 속에서 로얀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의 강한 의지가 하늘 높이 퍼져 나가는 듯했다. 26장 빛의 성지 여름의 대륙에 있는 숲 중 가장 거대한 크라우트 숲은 쨍쨍하게 내리쬐는 날씨 속에서도 초록의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곳이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곳은 곳곳에서 물이 솟아나고 계곡이 많았기 때문이다. 푸른 나무들과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푸른 풀들이 펼쳐져 있는 크라우트 숲은 크기도 엄청나 이 지역을 얻기 위해 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했다. 더구나 크라우트 숲은 여름의 대륙의 한복판에 있었다. 여기 크라우트 숲과 몰딘 왕국이 바로 주변 나라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1순위의 땅일 것이다. 현재는 빈트러드 제국의 영역 안에 있는 이 숲은 지금 절반이나 파괴되어 있었다. 나무가 모두 바닥에 누워 있었고 떨어져내린 풀잎들이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어 원래의 푸른 숲으로 돌아가려면 몇 년이 걸릴지 측정이 불가능햇다. 엄청난 전쟁이 벌어지고 난 뒤의 모습을 하고 있는 크라우트 숲으로 수십, 수백 개의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스르륵. 뚜벅뚜벅...... 다른 그림자들은 소리없이 이동했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발걸음 소리를 내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유일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뚜벅뚜벅...... 검은 흑발을 휘날리며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허리에 매여 있는 두 개의 기다란 검이 철그렁거렸다. 차갑다 못해 서늘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그는 바로 흑안의 검사라 불리는 로얀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은 당연히 어둠의 정령들이었다. 로얀은 어딘가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을 드래곤을 찾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는 길을 나선 것이었다. 스르륵. 뚜벅뚜벅...... 그들이 향하는 곳은 뮤트라는 곳으로 빈트러드 제국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바로 옆에 이 울창한 크라우트 숲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뮤트가 크라우트 숲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라우트 숲을 지나면 작은 사막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뮤트가 나오는 것이었다. 푸스스. 사막이 가까워오는지 황폐해진 크라우트 숲을 거니는 로얀의 발에 모래가 휘날리며 채였다. 그리고 로얀의 등 뒤를 따라오고 있는 어둠의 정령들은 모래를 흘려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로얀에 의해 폐허가 된 크라우트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 사막 때문에 되살아나지 못하고 점점 사막화되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르륵. 얀에게 갔던 네 명의 세드니스도 언제 돌아왔는지 로얀 바로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바스락! 로얀은 걷던 길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이 눈에 들어왔다. 휘오오오! 모랫바람이 휘날리는 가운데 로얀은 자신의 시력을 늘려 사막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묘한 흑빛을 살짝 뿌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지나면 뮤트라는 곳이라 했던가?" [예, 마스터.] 로얀의 물음에 그의 그림자 속에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크라우트 숲에서 어둠의 최상급 정령 다크니스로 진화한 다크로드였다. 그 덕분에 로얀 또한 다양한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직 그 기술들을 실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사박, 사박...... 로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눈은 어느새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사박, 사박...... 로얀이 골든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발은 생명체의 발을 잡아끄는 모래 속에 잠기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 발걸음 소리조차도 그가 힘을 쓴다면 얼마든지 없앨 수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사막에 발도장을 찍은 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로얀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고 있었다. 사람 모양을 한 모래가 떼지어 다른 곳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품속에서 너덜거리는 책자를 꺼내 뒤적거렸다. 바로 그와 함께 거친 싸움을 거쳐온 '몬스터 도감'이었다. 그것이 아직도 로얀의 손에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바스락거리는 낡은 책장을 넘기던 로얀은 드디어 모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샌드맨... 사막에서만 사는 그것은 상당히 착한 몬스터라 할 수 있었다. 상대가 공격하지 않는 한 먼저 덤벼들지 않았고,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 해봐야 상대방을 잠재우는 슬립마법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촤아아! 샌드맨은 사막에서 사는 몬스터답게 모래를 타고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한데 어찌나 많은 수가 모래 위를 지나가는지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샌드맨은 원래 항상 무리지어 다닌다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많은 수였다. 바스스슥. 로얀은 뭔가에 쫓겨 도망가는 듯한 샌드맨 무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사막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많은 수의 샌드맨을 쫓아낸 존재를 찾기 위함이었다. 촤아아......! 그러는 동안에도 샌드맨의 집단 이동은 계속되었고, 이윽고 로얀은 사막을 살펴보던 것을 멈추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 한 이들을 쫓아낸 존재에게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꽈앙! "크하하합!" 키르르륵! 그런 로얀의 귓가로 굉음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람들의 우렁찬 기합소리와 몬스터 특유의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박, 사박...... 로얀은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쪽은 로얀의 목적지 방향이었기 때문에 그가 걸으면 걸을수록 누군가가 몬스터와 싸우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모습도 점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몬스터 네 마리가 용병으로 보이는 다섯 명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데 그들 중 늙은 마법사 한 명과 정령술사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로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둘 다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보다. 그리고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 검사와 그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젊은 여자 검사가 보였다. 마지막 한 명은 사람이 아니라 도끼를 휘두르는 드워프였다. 키르르륵......!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몬스터는 거대한 크기의 스콜피온이었다. 주로 사막에서 서식하는 그것은 단단한 강철 갑주 같은 붉은 피부에 꼬리에는 맹독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로 사막에서는 가장 강한 녀석이었다. 모래 속에 숨어 있다 먹잇감이 나타나면 갑자기 솟아올라 덮치는 이들은 눈이 없어 소리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했고, 항상 혼자 다니며 사냥을 하는 몬스터였지만 지금은 특이하게도 네 마리가 함께 이들 용병들을 둘러사고 있었다. 사박, 사박......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로얀을 용병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거대한 스콜피온이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리에 예민한 스콜피온은 로얀의 등장을 눈치 채고 있었다. 스콜피온 네 마리는 로얀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은 모랫바람 속에서 로얀의 발걸음 소리 하나만을 들었지만 왠지 그의 뒤에 엄청난 대군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소울 바인드." 스스스슷. 로얀이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린 스콜피온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나직이 중얼거리자 그의 등 뒤에 있는 그림자에서 검은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더니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다크로드나 어둠의 정령이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다크로드가 최상급 정령으로 변하면서 새로 생긴 로얀의 기술 중 하나였다. 스스슷! 검은 덩어리는 순식간에 스콜피온에게 당도했고 그들의 그림자로 흡수되었다. 순간, 스콜피온들은 돌이 되어버린 듯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드래곤이 사용하는 드래곤 피어는 극도의 공포감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두려움이 없는 존재나 마음이 강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로얀이 사용한 것은 영혼을 묶는 것으로 웬만한 존재는 모두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영혼이 강한 존재가 아니라면 모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술은 그림자가 없다면 쓸 수 없는 단점이 있기도 했다. 갑자기 멈추어 버린 몬스터를 다섯 용병들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박, 사박...... 그리고 그제야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로얀을 보았다. 로얀은 동상이 되어버린 스콜피온을 지나 다섯 명의 용병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키르륵......! 로얀이 점점 멀어져가자 굳어 있던 스콜피온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들의 기다란 꼬리가 움찔거렸고 그들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멈춘 스콜피온과 로얀의 등장으로 로얀의 기술에 당한 것도 아닌데 굳어 있던 다섯 명의 용병은 그제야 스콜피온들에게 급히 달려들었다. 까까깡! 하지만 강철같은 스콜피온의 단단한 피부는 쉽게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로얀을 따라 도망가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때를 놓치고 말았다. "하아아압!" 키르륵! 사박, 사박...... 스콜피온이 내는 소리와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러나 로얀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심히 가던 길을 걸어갔다. 바로 그 순간, 로얀의 몸으로 친숙하고도 그리운 기운이 전해져 왔다. 스윽. 그 기운을 쫓아 로얀은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린 정령술사가 세 명의 실프를 정령계로 돌려보내고 이제 막 물의 중급 정령인 운다인을 소환해 싸우고 있었다. 물의 정령까지 사용하는 저 어린 소녀는 아마 이 여름의 대륙에서는 꽤나 값을 쳐줄 것이다. 이곳은 물이 귀한 곳이니 말이다. 어린 소녀가 소환한 운다인은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짝 얼굴을 찌푸린 채 끊임없이 물줄기를 허공에서 쏘아대며 스콜피온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스콜피온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물의 정령......" [저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로얀의 의도를 알아차린 다크로드가 그렇게 말하자 로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처리하겠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팟! 로얀은 그 자리에서 바닥을 힘껏 밟으며 날아올랐다. 뒤로 점프한 그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자 그의 등에 매달린 땅의 숨결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파라락! 타탁. 거대한 스콜피온 위로 떨어져 내린 로얀은 곧바로 에리오네를 뽑아 들고는 그것을 내려찍었다. 푸걱! 키에에엑! 크르륵! 머리를 관통당한 스콜피온은 괴성을 지르다 곧 잠잠해졌고, 하늘을 향해 솟아 있던 꼬리도 힘없이 처졌다. 키르륵! 로얀의 갑작스런 등장에 스콜피온과 한창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다섯 명의 용병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타탁. 사사삭. 에리오네를 뽑아낸 후 죽은 스콜피온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 로얀은 이번에는 다크리온을 검집에서 뽑아내며 다른 스콜피온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은 다섯 명의 용병 중 그 누구도 정확하게 보지 못했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나마 두 검사와 드워프만이 그의 신형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을 뿐이다. 퍼걱! 로얀은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을 수평으로 눕히고 스콜피온의 입을 향해 돌진했다. 곧이어 다크리온의 커다란 날이 스콜피온의 쭉 찢어져 있는 입을 가르며 꼬리까지 나아갔다. 키에엑! 쿠쿵......! 몸이 횡으로 갈라진 스콜피온은 짧고도 괴이한 소리를 냄과 동시에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다크리온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죽은 스콜피온의 몸에서는 진득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키르르륵! 드디어 로얀의 모습이 드러나자 남은 스콜피온 중 한 마리가 그의 등 뒤로 빠르게 돌진해 왔다. 빙글.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오는 스콜피온을 느낀 로얀은 몸을 돌려 왼손에 있던 에리오네를 가볍게 던졌다. 쉐에에엑! 그러자 에리오네는 금빛 가루를 흩뿌리며 엄청난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푸가가가각! 그리고 스콜피온의 입으로 들어가 그의 몸 속을 여행하고 나온 후 모래 속에 깊숙이 박혔다. 쿠쿠쿵...... 또 한 마리가 쓰러지자 마지막 남은 스콜피온이 맹독이 들어있는 꼬리를 앞세운 채 로얀을 향해 돌진해 왔다. 쉬에엑! 그리고 뱀이 내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그 거대한 꼬리를 로얀을 향해 내려찍었다. 하지만 로얀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어린 정령술사 소녀는 눈을 가렸고 다른 용병들도 고개를 살짝 돌렸다. 턱. 키륵? 그러나 당장이라도 로얀의 몸을 찍어누를 것만 같았던 스콜피온의 거대한 꼬리는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로얀의 손이 그것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그 상태에서 힘을 주었다. 꽈악. 펑! 그의 손힘에 그 단단하다는 스콜피온의 껍데기가 찌그러지더니 초록색 체액이 터져 나왔다. 키에에엑! 스콜피온은 엄청난 고통에 괴성을 질렀다. 사박, 사박...... 로얀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스콜피온을 향해 다가갔다. 스거걱. 그리고 오른손을 휘둘러 다크리온을 움직이자 흑색 검날이 스콜피온의 앞부분에 있는 네 개의 다리를 잘라 버렸다. 스콜피온은 수십 개의 다리가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잡지 못해 그만 앞으로 무너져 버렸다. "다크리온은 관통시키기에는 부적합한 검이거든." 그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스콜피온의 꼬리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따. 푸걱. 날카로운 스콜피온의 꼬리가 주인의 붉은 머리를 뚫고 박혔다. 그러자 스콜피온은 풀썩 쓰러져 버렸다. 빙글. 사박, 사박...... 네 마리의 스콜피온을 모두 처리한 로얀이 에리오네가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그의 뒤를 다섯 명의 눈동자가 따라갔다. 사박, 사박...... 그리고 로얀이 네 개의 스콜피온 시체를 지나 사막의 바스락거리는 모래 위를 걸어가자 그 뒤를 다섯 명의 사람들이 따라갔다. 로얀은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일부러 사막의 모래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다. 그렇게 그들이 뮤트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머리카락이 짧다 뿐이지 엘프 여검사 타니아와 비슷한,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늘씬한 몸매의 여인이 동료들을 향해 물었다. "도대체 누굴까?" 그녀는 당연히 로얀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 상급 몬스터인 스콜피온을 네 마리나 해치워 버린 로얀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언니, 혹시 그 소문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아닐까?" "쯧쯧! 아무리 흑안의 검사가 젊다고는 해도 20대 초반은 아닐 거야." 어린 정령술사 소녀의 말에 짧은 갈색 머리에 양 귀에 작고 동그란 금색 귀고리를 한 남자 검사가 중얼거렸다. "아까 언뜻 보기에 두 개의 검이 금빛을 뿌리고 있었어. 아마 마법검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 그리고 그 엄청난 움직임도 내 생각엔 신발이나 장비에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런 것 같아." "와아! 그럼 저 사람은 부자겠네?" 어린 소녀의 감탄사에 젊은 용병 검사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웃음 지으며 아주 작게 말했다. "우리가 가는 곳엔 분명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것보다 더 굉장한 게 있을 거야." "정말?" "그럼." 네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소곤거리며 말하는 것은 세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무척이나 조용하고 과묵한, 털이 덥수룩한 드워프였다. 그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보통 인간보다는 오래 살았을 것이다. 드워프라면 누구나 장인의 기질과 함게 엄청난 대장장이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가 로얀의 두 검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는 앞의 청년이 마검과 성검 두 개를 동시에 들고 다닌다는 소문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괜한 소란을 일으키기 싫어 이런 사실을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늙은 마법사는 로얀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로얀은 자신의 뒤에서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고 있는 그들의 말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아니, 저절로 들렸다. 게다가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대는 늙은 마법사 때문에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가 이들을 도운 건 오로지 물의 정령을 부를 줄 아는 어린 정령술사 때문이었다. 물의 정령에게 엘라임에 대해 묻고 싶었기 때문에 힘을 쓴 것뿐인데 자신의 옆에 붙어 조잘대는 늙은 마법사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그들의 이름을 수십 번도 더 들었기에 저절로 머릿속에 그들의 이름이 각인되어 버린 로얀이었다. 늙은 마법사는 도리스, 붉은 머리의 여검사는 타냐, 작은 귀고리를 한 남자 검사는 클라토스, 과묵한 드워프는 록, 마지막으로 물의 정령을 부려 로얀의 발걸음을 돌렸던 어린 정령술사는 루이였다. 이들은 모두 용병으로 오래 전부터 한 팀으로 같이 행동해 왔고, 용병 일을 하며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나이로 따지자면 드워프 록이 리더가 되어야 하지만 그는 그런 직책을 싫어해 그 다음으로 나이가 많고, 머리 좋은 사람들의 직업이라는 마법사인 도리스가 이들의 리더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리더가 누가 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용병들은 대부분이 그런 직책을 귀찮아했던 것이다. 이들 용병들은 원래 봄의 대륙에서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도리스가 갑자기 어떤 지도를 들고 왔는데, 그 지도엔 고대 유적으로 가는 길이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는 빛의 성지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우연히 입수한 이 지도로 인해 이들은 빛의 성지를 목표로 잡고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도는 여름의 대륙을 기점으로 길을 나타내고 있었고, 이들 용병들은 용병 의뢰를 마다하고 합심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한데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도리스가 왜 처음 보는 로얀에게 말하는 것일까? "자네도 합류하지 않겠나?" 결국 도리스의 의도는 이것이었다. 거기까지 가는데 또 어떤 몬스터가 덤벼들지, 그리고 그 유적에 어떤 함정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판국에 로얀이 마법검을 들고 있든 말든 그 실력이 굉장한 것만은 사실이었기에 도리스는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로얀은 과거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를 통해 빛의 성지라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한데 그때 분명 지도는 어떤 드래곤이 가지고 갔다고 그린 드래곤 그라시드가 말했다. 게다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그 지도를 왜 도리스가 들고 있는 것일까? "......" [다크로드를 제외한 다른 정령들은 모두 크라우트 숲으로 가 있어라.] 로얀이 도리스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정령어로 그렇게 말하자 그를 따르던 세드니스와 정령들이 움찔거렸다. 그들은 거리가 너무 멀어 용병들이 자신들을 볼 수 없으리라 여기고 모두 그림자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마스터.] 다크로드가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지 않겠나? 거기에 있을 보물들을 생각해 보게나." 하지만 로얀은 여전히 도리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정령어로 정령들에게 말햇다. 정령어는 소리로 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도리스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내 옆의 도리스라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네? 그럼 도대체!] 로얀의 말에 어둠의 정령들은 웅성거렸다. 인간으로 변할 수 잇는 인간이 아닌 존재는 흔치 않앗던 것이다. [그러나 드래곤 역시 아니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면서 눈을 얻게 된 로얀은 신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어도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을 통해 그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데 도리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드래곤의 거대한 마나의 힘이 아니었다. "응? 응? 어떤가, 내 제안이? 그저 따라와 주기만 하게. 여행 경비도 내가 다 내주겠네." 도리스는 웃음 지으며 로얀을 향해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가 마나를 잘 다루지 못해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최상급이 된 다크로드는 몰라도 너희들은 눈치 챌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모두 그 숲으로 물러가 있어라. 명령이다.] [예.] 스르륵. 로얀의 명령이라는 말에 다른 정령들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물러났다. 그러나 다크로드는 그림자 속에서 로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래곤이 아니고, 중간계에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마나를 잘 다루지 못한다면 도플갱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얀은 도플갱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도리스가 바로 옆에 있는 상황에서 책을 꺼내 읽을 수는 없었다. 정말 도리스가 도플갱어라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을 눈치 챌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휴우... 마지막으로 부탁하네." 한숨 섞인 도리스의 말이 들려오자 로얀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빛의 성지라는 곳에 대해 아나?] [네. 그곳은 빛의 정령과 관련된 곳입니다.] 아주 오래 전, 빛의 정령들은 중간계에 머물고 있었다. 빛의 성지라는 곳은 그런 빛의 정령들이 살던 곳이었다. 또한 그들을 친히 거두어 보살피겠다고 말한 천족이 빛의 정령을 데리고 천계로 올라간 통로가 있는 곳이었다. 그 당시 천족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때마침 전대 다크로얀이 일으킨 대학살을 무마시키기 위해 카오스가 많은 힘을 소진한 터라 그가 친 중간계와 천계를 막는 막 또한 얇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천족은 스스로의 힘으로 통로를 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천계로 갈 수 있는 길이라는 말에 로얀의 눈빛이 빛났다. 천계로 갈 수 있다면 정령계로 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그의 의도를 눈치 챈 다크로드가 말했다. [마스터, 드래곤의 손에 있을 지도를 어떻게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일까요?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이......] [상관 없다. 어차피 그녀를 만나기 위해 드래곤 산맥을 뚫고 갈 생각이었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을까?] 사박, 사박...... 로얀의 발소리가 순간 더욱 크게 들려왔다. [저는 그저 마스터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어쩌면... 빛의 성지에서 드래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신기한 물건과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까마귀 같은 드래곤이 고대의 유적에 눈독 들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로얀과 다크로드의 대화를 알지 못하는 마법사 도리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역시... 안 되겠는가?" "가겠다." "저, 정말인가!" 드디어 로얀의 입이 열리고 승낙의 말이 나오자 도리스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앞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뒤의 다른 용병들이 의아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스터, 저자를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고 있다. 그나저나 도플갱어라......] 그러는 동안 어느새 그들 일행의 눈앞에 사막도시 뮤트가 거대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뮤트로 들어가 혼자 있을 때 몬스터 도감에서 도플갱어에 대해 찾아보기로 한 로얀은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도리스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로얀과 다크로드는 빛의 성지로 가는 여정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27장 사막의 밤 사막의 도시 뮤트는 거대한 오아시스를 중앙에 두고 집들이 둥글게 들어서 있었는데, 사막의 모래를 가지고 뮤트 사람들만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이 집들은 다른 지역의 여행자들에게는 좋은 눈요깃거리였다. 빈트러드 제국에서 자원이 풍부한 나라인 몰딘 왕국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시인 뮤트는 많은 상인들이 오고갔다. 마법사 연합처럼 상인들도 연합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국경선을 넘나들어도 나라에서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물론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적대국에서 오는 상인은 막아야 하겠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빈트러드 제국의 황제가 전쟁을 중단하고 몰딘 왕국과 휴전을 맺었기 때문에 지금 뮤트에는 그동안 전쟁 때문에 오지 못했던 몰딘 왕국의 상인들이 몰려와 있었다. 빈트러드 제국의 황제는 용병왕 카엔 공작이 사라진 직후 몰딘 왕국과 휴전을 맺고는 정복 전쟁을 중단했다. 그리고 전 병사들을 수도로 집결시켰다. 여름의 대륙 사람들은 빈트러드 제국 황제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용병들을 이끌던 용병왕 카엔 공작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황제에게는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있었고 이미 점령한 땅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그 끔찍한 전쟁이 종결된 것에 많은 사람들이 안도하며 웃음을 흘렸다. 사실 사람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빈트러드 제국 황제는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몰딘 왕국에 드래곤의 시체가 떨어졌다는 소문과 함께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카엔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일치했다. 카엔은 블랙 드래곤이었고 몰딘 왕국에 떨어진 드래곤도 블랙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카엔에게서는 이제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카엔이 몰딘 왕국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게 당했건 뭐건 간에 이제 더 이상 몰딘 왕국과는 싸울 수가 없었다. 드래곤을 죽인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는 나라를 어떻게 친다는 말인가? 빈트러드 제국 황제에게는 그만한 강단이 없었다. 아니, 그는 사실 상당한 겁쟁이였다. 그가 수도로 병력을 모은 것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보복으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서였다. 다른 드래곤이 동족의 복수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죽일 거라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해츨링이 죽은 것이라면 또 몰라도 성룡 이상의 드래곤이, 그것도 인간에게 죽었다면 그 멍청한 드래곤에게 욕을 퍼부었으면 퍼부었지 복수를 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빈트러드 제국의 황제가 겁을 집어먹고 휴전을 제의해 온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몰딘 왕국의 국왕인 이얀이었다. 그는 빈트러드 제국과 휴전을 맺은 후 드래곤의 몸을 팔아 나라를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몰딘 왕국의 국력은 병력과 더불어 나날이 막강해져 갔다. 사막의 도시인 뮤트는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모랫바람이 불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칠흑이 깔린 뮤트의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간혹 거리를 걷는 사람은 커다란 터번을 머리에 쓰고 얼굴과 온몸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들이었다. 사막은 밤의 거리를 걷는 자들을 싫어하는지 강하게 손을 휘둘렀고, 그 손은 모래와 바람이 되어 도시를 뒤덮었다. 그때마다 거리를 걷는 사람은 몸에 두르고 있는 천을 꽉 여민 채 발걸음을 멈췄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길을 걸었다. 휘오오오......! 거친 바람의 움직임은 초저녁부터 시작되어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잠잠해졌는데 그것은 마치 저녁이면 또다시 불어닥칠 모랫바람을 예고하는 폭풍전야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랫바람 때문에 뮤트의 사람들은 온몸을 가리고 다니는 것은 물론 집 또한 직각으로 꽉 막히게 단층으로 지었다. 그 안에서 한 가족이 사는 것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이곳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강했고 자신의 가족만을 챙겼다. 언뜻언뜻 보이는 2층 이상의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 외의 2층짜리 건물은 이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의 커다란 저택뿐이었다. 아무튼 사막의 모래처럼 무뚝뚝한 뮤트의 사람들은 주로 어둠의 직업, 즉 시프나 어쌔신이 되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것 외에도 다른 직업을 하나씩 더 가지고 위장을 했고, 길드를 통해서 임무가 전달될 때 외에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생활했다. 어둠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뮤트에 상인들이 모이는 이유도 어쌔신과 시프 때문이었다. 그런 자들과 연관된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돈만 준다면 확실히 목숨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휘오오오! 쏴아아...... 어둠의 도시라 불리는 곳답게 짙게 깔린 어둠 위로 모래비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딸랑, 딸랑...... 뮤트에서 가장 큰 건물인 3층짜리 여관 '오아시스'의 문에 달린 종이 사막의 바람에 요동쳤다. "와하하하......"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일하고 밤에 푹 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이곳 사람들과는 달리 여행자들은 이 신기한 마을에서 술로 밤을 지새웠고,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웃음소리는 불빛과 함께 뮤트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어도 뮤트 사람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신에게 일(?)이 생기면 밤에 활동했지만 평소에는 이 시간이면 조용히 수면을 보충하는 뮤트 사람들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오는 여관 오아시스는 오늘도 여기저기에서 온 손님들로 만원이었고, 여행자들은 모두 뮤트의 밤을 즐기기 위해 일층 식당으로 내려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여관 '오아시스'는 일층은 식당이고 이삼 층은 숙박을 위한 방들이 있었다. 한데 그 많은 방들 중 삼층의 복도 끝 방에서는 지금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으으윽......" 보통 때라면 그 소리를 뮤트 사람인 여관 주인이나 종업원이 못 들을 리가 없을 테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그것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방 안에는 소리를 차단하는, 은은한 검은 빛을 내는 아주 얇은 막이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음을 흘린 사람은 지금 검은 흑발을 길게 드리우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우수에 젖은듯한 그는 눈동자를 아주 심하게 떨고 있었고, 자신의 양손을 엑스 자로 교차시켜 반대쪽 팔을 각각 잡고는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크으윽! 허억, 허억......" 그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토록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라 불리는 로얀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모를 것 같던 그가 지금 이 순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로얀의 몸을 부축했다. 그는 얇고 가벼운 검은 갑주를 온몸에 걸친 것만으로도 모자라 얼굴 전체를 투구로 가리고 있었는데, 검은 투구에 유일하게 나 있는 눈 부분은 회색빛으로 빛나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검기만 한 갑주에 다른 색상을 띠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양팔뿐이었다. 그의 팔목을 피처럼 붉은 천이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붉은 천 아래쪽으로는 검은 철갑으로 뒤덮인 손이 있었다. 이 갑옷이 철로 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금속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겉모습만 봤을 때에는 철갑 같았다. 이렇게 괴상한 차림을 한 이는 사람이 아닌 정령이었다. 로얀의 그림자 속에만 있던 다크로드가 최상급 정령 다크니스가 된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크윽!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군." 다크로드의 부축을 받고 침대 위에 걸터앉은 로얀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이 떨림이 시작된 것은 그가 뮤트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데 그 떨림은 갈수록 심해져 지금은 마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그럼 그때 금빛 오러를 쓴 것도......] 다크로드의 말에 로얀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사실 그가 스콜피온을 상대하는 데 금빛 오러를 쓸 필요는 없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오러 블레이드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가 없었다. "힘의 조절이 되지 않고 있다." [......] 다크로드는 로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블랙 드래곤 카엔에게 죽었다 살아난 것만 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게다가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기까지 하고는 그것을 조절할 수 없다는 이상한 말을 하니 그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로얀은 지금 이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전재 다크로얀이 폭주한 이유는 그가 너무 강한 힘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힘에 미쳐버린 것이었다. 로얀 자신 역시도 지금 강한 힘에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강해지라는 뜻으로 전대 다크로얀이 봉인을 걸어둔 것이었지만 자신은 단 몇 달 만에 두 개의 목숨을 날려버렸고, 그에 따라 두 개의 봉인을 풀어버렸다. 한데 로얀 자신의 나약한 육체는 그 강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왈칵! 후두둑. 떨림을 제어하기 위해 양팔이 터져라 꽉 잡고 있던 로얀의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는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뮤트에 세워져 있는 이 건물의 바닥은 당연히 나무가 아닌 모래였다.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고 다크로드가 급히 다가왔지만 로얀이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큭!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군." [대체 마스터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다크로드의 말에 로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냥... 묻지 않았으면 한다." [예... 마스터.] 로얀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다크로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것이 왕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나타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로얀은 팔을 들어 아직 자신의 허리에 매여 있던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를 풀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힘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겠다! 여기서 봉인이 하나 더 풀린다면 내 육신은 반드시 부서질 것이다. 아직 드래곤에게 복수를 끝마치지도 못했고, 엘라임을 만나지도 못했다. 이대로는... 하루 빨리 이 힘을 제어해야 해!' 로얀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품 속에서 '몬스터 도감'을 꺼내 들었다. 힘을 제어하기 이전에 자신 옆에 다가와 있는 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자신은 지금 매우 불완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위험에 미리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책장이 넘어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메우기 시작하자 다크로드는 그런 로얀을 묵묵히 바라보며 석상처럼 서 있었다. <도플갱어...... 일정한 형체가 없는 몬스터로 처음에는 작은 벌레나 약한 몬스터부터 시작해 점점 그 크기와 힘을 늘려 옮겨다니며 상대를 흡수, 진화하는 몬스터로 상대의 모든 기억과 힘까지 흡수하기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그러나 도플갱어의 수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도플갱어는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데다가 늙은 노인을 죽여 흡수하면 노인이 되고, 어린 아이를 죽여 흡수하면 어린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숲을 거니는 그대, 동료를 살펴보아라. 언제 도플갱어가 그대들의 동료가 되어 웃고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탁! 로얀은 도플갱어에 관한 내용을 찾아 읽고는 '몬스터 도감'을 덮었다. 그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크로드가 지켜보고 있었다. "도플갱어......" 로얀은 무의식적으로 방금 읽은 도플갱어가 떠올라 중얼거렸다. [그가 도플갱어라면 어째서 마스터에게 접근한 것일까요?] "아직 도리스가 도플갱어라 확정 지을 수는 없다.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인간이 아닌 존재이고, 마스터께 일부러 접근한 자입니다. 제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하늘 아래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다크로드가 말을 함과 동시에 허리를 숙이자 로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윽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침대 위에 누웠다. 커다란 방 안에는 네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다른 일행의 것이었다. 여자 두 명을 제외하고는 남자들은 모두 여기에 묵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리더 격인 도리스가 사라진다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 도리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일행들에게 말한다 해도 과연 처음 만난 로얀의 말을 그들이 믿어줄까? "그가 누구든 간에 나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는 한 나와는 상관없다. 나에게 용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낫다." [마스터와 원한관계인 드래곤이 만든 함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자 로얀이 다크로드의 시선을 받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드래곤의 소행이라면 좋겠군. 만약 이것이 정말로 드래곤이 만든 함정이라면 그 연극 속에는 나라는 인물이 있겠지. 카엔이 만들었던 연극처럼 그 끝은 역시 나의 죽음이겠지만, 이번에도 내가 그 결말을 바꿔놓겠다." 스르륵. 툭. 로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땅의 숨결을 풀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직 명을 기다리고 있는 다크로드에게 말했다. "그래도 주의를 하는 게 좋겠지. 다크로드, 그를 감시해라. 그가 아무리 대단한 존재일지라도 최상급 정령인 너를 쉽게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왕의 명령에 다크로드는 허리를 숙인 후 한 팔을 가슴에 대며 답했다. [예, 마스터.] 그리고 다크로드는 로얀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휴식에 들려 하자 천천히, 녹아내리듯 바닥으로 스며들어 바닥을 적시고 있던 로얀의 붉은 피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그와 거의 동시에 방 안에 쳐져 있던 검은 막도 사라졌다. 스르르륵. 다크로얀과 검은 막이 사라진 커다란 방 안에는 로얀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로얀이 오랜만에 편안한 잠에 빠져들려 하고 있을 때 여관 '오아시스'의 일층에서는 사람들의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엇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그냥 잠을 자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어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돌로 만든 뮤트만의 특이한 각진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은 나무가 귀했기 때문에 테이블 또한 돌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의 일행과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로얀과 일행이 된 이들도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여행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이나 자신들의 과거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안주용으로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 추억들은 그들이 워낙 오랫동안 같이 일한 덕분에 벌써 수십 번도 더 들은 이야기들이었다. 새로 들어온 신참(?) 로얀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지만 이들 중 그를 여기로 데리고 올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도리스와 속을 알 수 없는 드워프 록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갑자기 보물찾기(?)에 끼어든 로얀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도의 주인인 도리스가 그를 일행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초저녁부터 할 얘기가 떨어지자 이들은 묵묵히 술만 마셨다. 원래 과묵한 드워프 록은 한마디 말 없이 술잔만 들이켜고 있었고 술이 약한 클라토스는 이미 뻗어 있었다. 어린 정령술사 루이는 우유를 홀짝이고 있었고 마법사 도리스는 앞에 놓여 있는 술은 마시지 않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웃음을 담을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침묵속에 붉은 머리의 여검사 타냐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답답한 것을 싫어해 머리카락도 짧게 자른 그녀인 만큼 조용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매우 싫어했다. 커다란 컵에 담겨 있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타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금속 술잔을 돌 테이블 위에 강하게 내려쳤다. 깡! "으으음......" 그러자 그 요란한 소리에 엎어져 있던 클라토스가 잠깐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졌고 술집 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도리스만이 아직도 술잔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크아아! 답답해, 답답해! 누구든 좋으니까 말 좀 해! 말 좀!" 타냐의 신경질적인 말에 토끼눈을 뜨고 있던 루이가 우유 잔을 만지작거리며 도리스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왜 그 로얀이라는 사람을 일행으로 받아들이셨어요?" 루이의 말에 타냐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로얀이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가 이 자리에 없으니 그에 대해 얘기하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타냐는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가 마법검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움직임은 엄청난 것이었어. 그냥 실력만 따져 보아도 우리보다 위일 거야." "그치만... 아무리 강해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건 그래. 도리스 영감님, 갑자기 왜 그를 일행에 끼워 넣으셨죠? 지금이라도 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쾅! "안 돼!" 따지듯 묻는 타냐의 말에 지금껏 말없이 술잔만 바라보고 있던 도리스가 돌연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노인이 낸 소리 치고는 우렁찬 그 음성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또 한 번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흠흠! 아무 일도 아니니 하던 얘기들이나 계속하시죠." 타냐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휙휙 저으며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잠깐 수군거리던 그들은 다시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일층 식당 안은 다시 떠들썩해졌다. "안 돼! 그가 빠지면 여행의 의미가 없어." 그 모습을 보고 도리스는 혼자 그렇게 속삭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한데 그런 그의 얼굴에는 소름 끼치는 이상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돌렸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어, 어디 가세요!" 루이가 도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지만 그는 이미 여관을 나서고 있었다. 이 밤에 도리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 버리자 일행은 당황하여 한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언니." 도리스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타냐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루이를 바라보았다. "으응?" "할아버지... 요즘 이상한 것 같지 않아?" "확실히 이상해졌지." "그치, 그치?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타냐는 진지하게 말하며 커다란 눈을 가까이 대는 루이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풋! 내 생각이지만 마법사들은 다 미친 사람들이야. 게다가 그 영감탱이는 아마 노망이 들어서 더 그런 걸 거야. 푸하하하!" 화통하게 그렇게 외친 타냐는 여자답지 않게 큰 소리로 웃고는 비어 있는 자신의 술잔을 카운터에 있는 종업원을 향해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던 루이도 자신의 잔을 잡고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클라토스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드워프 록은 술을 들이켜며 도리스가 사라진 방향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로얀이 침대 위에서 편히 잠자기 시작한 지 몇 시간이 흘렀다. 사사삭. 오랜만에 곤히 잠자고 있던 로얀의 귓가로 미세한 소리가 감지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발달된 그의 감각은 이 미세한 소리를 정확히 집어내고 있었다. 누군가 지붕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로얀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누가 죽건 간에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로얀은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가 빨리 사라지기만을 바랐지만 그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소리가 점점 그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아직 밑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지 방 안에는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사삭. 빠르게 다가오는 이를 다크로드를 시켜 처리할까도 생각했지만 자신의 명으로 도리스를 감시하기 위해 그의 그림자 속에 있을 다크로드를 이런 일로 부를 수는 없었다. 타탁.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로얀은 소리로 세상을 보았다. 누군가 창가에 내려앉는 것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상대는 단 한 명뿐이었다. 휘휙. 쉐에엑! 어두운 밤의 침입자는 창가에 내려선 즉시 뭔가를 누워 있는 자신을 향해 날렸다. 날아오는 소리로 보아 암기 네 개인 듯했다. 벌떡. 타탁! 로얀은 암기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몸을 벌떡 일으켜 그것들을 낚아챘는데, 그 손놀림은 눈으로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그의 그런 움직임에 침입자는 놀랐는지 살짝 몸을 떨었다. 휘휙. 쉐에엑! 로얀은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암기를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한데 그가 던진 암기는 침입자의 것보다 훨씬 더 큰 파공음을 내며 날아갔다. 퍼퍼퍽! 그리고 두 개씩, 침입자의 양팔에 정확히 박혔다. "큭!" 어둠 속에서 짤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신음성은 단 한 번뿐이었다. 탁. "과연 드래곤 슬레이어군요." 창가에서 내려선 그 침입자가 그렇게 입을 열며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양팔에 암기를 각각 두 개씩이나 꽂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서서히 로얀의 눈앞에 드러나는 그는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어둠을 믿어서인지 복면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로얀의 눈에는 그의 얼굴이 너무도 잘 보였다. 눈매가 위로 올라가 있고 턱선이 날카로운,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짧은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뚜벅뚜벅. 스윽. 로얀은 침대 옆에 세워둔 에리오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날려 단숨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아아, 흥분하지 마십시오." 누가 흥분했다는 건지... 제멋대로 로얀의 상태를 입에 담은 어쌔신으로 추정되는 이는 양팔에서 붉은 피를 뚝둑 떨어뜨리면서도 로얀을 향해 계속 다가왔다. 그가 보통 암살자였다면 로얀은 암기로 그의 양팔이 아닌 심장을 꿰뚫어 바로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로얀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도리스와 똑같은 족속이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 챘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뮤트의 어쌔신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의 공격은 단지 인사였을 뿐입니다.' 뚜벅. 침입자가 로얀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나 로얀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저를 공격한다면 잡혀 있는 일행 분이 어떻게 될지는......" 씨익. 침입자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그런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로얀에게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사람을 잘못 찾아왔군. 그런 인질놀이라면 일층으로 가라. 그곳에 진짜 일행들이 있으니까." 흠칫. 로얀이 보인 뜻밖의 반응에 어쌔신은 흠칫했다. 아무리 최근에 만나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그도 일행이 아닌가? 그러나 로얀은 마치 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당신도 그들의 일행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죽든지 일층으로 가든지 하나만 선택해라." "그, 그런... 당신이 저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도리스라는 마법사의 목숨은......" 일이 어긋나서인지 당황하는 어쌔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고 자려던 로얀은 바로 그 순간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어쌔신은 틀림없이 도리스와 같은 족속이었다. 바로 도플갱어일지도 모르는 괴상한 존재인 것이다. "어디로 가면 되지?" 어쌔신과 도리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드래곤 산맥으로 가지 않고 정령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빛의 성지로 갈 수 있는 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리스뿐이었다. 때문에 다른 일행이 잡혀갔다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도를 가지고 있는 도리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슨 함정을 파놓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빛의 성지로 가기 위해서는 이 어쌔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목소리를 통해 어쌔신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스윽. 로얀은 침상에서 일어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양 허리에 매었다. 그리고 땅의 숨결을 몸에 두른 후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문으로 나가지. 너는 밖에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그럼 밖에서 뵙죠." 파팟. 어쌔신은 어찌 됐건 임무를 완료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 안을 벗어났다. 그는 팔에서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끼이익. 로얀이 방문을 열고 빠져나가자 커다란 방 안은 텅 비어버렸다. 뚜벅뚜벅...... 돌로 된 계단을 밟으며 로얀은 일층으로 내려갔다. "와하하하......"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따갑게 했다. "손님!" 뚜벅뚜벅 걸어 여관을 나서려던 로얀을 여종업원이 불러 세웠다. 스윽. 살짝 고개를 돌린 로얀은 여종업원의 손에 들린 기다란 천을 볼 수 있었다. 저것을 머리에 둘둘 말면 터번이 되는 것이다. 여종업원은 조금 전 밖으로 나간 도리스에게는 그가 너무나 갑자기 휑 하니 나가 버리는 바람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커다란 마법사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로얀은 달랐다. 그의 검은 머리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십중팔구 모래가 그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스윽. 뚜벅뚜벅...... 그런 사람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얀은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로얀......" 여종업원이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로얀을 본 루이가 그를 부르려 했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로얀이 이렇게 문을 통해 나간 것은 일행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뒤늦게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괜히 찾으러 와 귀찮게 할 것 같아서 미리 그것을 방지한 것이다. 오아시스 건물을 뒤로하고 로얀은 파삭이는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조금 전 그의 방에 침입했던 어쌔신이 걷고 있었다. 한데 그의 팔에서는 로얀이 꽂아두었던 암기는 물론 상처 또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휘오오오...... 그러나 로얀은 묵묵히 그러한 어쌔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휘오오오...... 심한 모랫바람이 불어와 로얀의 머리카락을 괴롭히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자잘한 모래 또한 그 속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마다 금빛 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그 모습을 앞장서 걸으면서도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어쌔신도 볼 수 있었다. 명령대로 그냥 그를 데리고 가기만 하면 되지만 로얀의 기이한 모습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해 자연히 걸음걸이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어쌔신은 로얀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온몸을 천으로 두르고 있었고 얼굴도 로얀의 방을 빠져나온 직후 검은 천으로 둘둘 말고 있었지만 짓궂은 모래는 바람을 타고 그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아니, 간혹 눈까지 침입한 모래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고 걸음걸이를 주춤거리기도 했던 것이다. '인간 맞아? 눈알이 무슨 강철로 돼 있기라도 한 거야?'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로얀은 마치 달밤에 산책을 나온 듯 느긋한 모습이었다. 누구는 짜증나는 모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누구는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저 인간이 드래곤 슬레이어에 독특한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분이 호기심을 가질 만큼의 가치가 있는 존재일까? 뭐, 우린 명만 받들면 되지만......' 어쌔신은 알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막도시 뮤트의 음지로 향했다. 한데 어둡고 좁은 골목을 끊임없이 지나가는 어쌔신의 걸음걸이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그 또한 느긋하고 조용히 가고 싶었지만 이 밤에 사막의 모래를 정면으로 받으며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로얀 때문에 가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뮤트의 비밀장소였기 때문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어쌔신과 로얀은 거대한 호수가 바라보이는 곳에 멈추어 섰다. 뮤트의 중앙에 있는 오아시스였다. 이 근처에는 나무들과 풀이 무성했고, 바람은 불었지만 모래는 타고 있지 않았다. 로얀을 안내했던 어쌔신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몸을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그때, 로얀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호수의 모습이 그의 눈길을 끌었지만 정작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른 쪽이었다. 거미줄처럼 숲을 뒤덮은, 그의 감각에 잡힌 사람들... 아마 자신을 안내한 어쌔신과 같은 편인 듯했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이 숲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도리스와 같은 족속이라는 것이다. 경관을 감상하듯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로얀이었지만 그는 그 짧은 순간에 숨어 있는 모든 어썌신들을 바라보았고, 덕분에 그의 시선이 지나갈 떄마다 그들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덜컥, 뭔가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바닥을 더듬던 어썌신이 손에 잡힌 것을 들어 올렸다. 끼이익! 부스스...... 두꺼운 나무판이 들어 올려지자 그 위에 쌓여 있던 모래가 부서져 내렸다. "이곳입니다." 나무판 밑으로 계단이 나타나자 로얀은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게 말했다. "허술하군," 어썌신의 본거지 치고는 너무도 허술해 보였던 것이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문이 있습니다. 그 뒤로부터 함정이 본격적으로 펼쳐지죠. 그럼 따라오십시오." 어썌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을 밟았다. 뚜벅뚜벅...... 로얀도 그 뒤를 따라 계단을 밟았다. 끼이익. 쿠쿵! 로얀이 계단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나무판이 닫혔고, 그제야 숲 속에 숨어 있던 어썌신들이 움직이느 소리가 로얀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어둡지만 불을 켜선 안 됩니다." 문이 닫히고 유일한 빛인 달빛을 가리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엔 어둠으로 가득 찼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의 어둠이었다. "불을 켜는 순간 뜨거운 불꽃이 몸을 덮쳐올 것입니다. 이 통로의 사방에는 기름이 발려 있거든요." 어썌신들의 본거지로 침입하는 길은 이곳이 유일했다. 숲 속의 어썌신들을 물리친다 하더라도 이곳으로 들어와 어둠 때문에 불을 켠다면 뜨거운 화염이 온몸을 덮칠 것이다. 불꽃이 조금도 튀지 않도록 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뚜벅뚜벅...... 로얀은 어쌔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만약 그 순간 앞장서서 가고 있떤 어쌔신이 뒤를 돌아 그러한 로얀의 모습을 봤다면 눈을 커다랗게 떴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라고는 하지만 로얀은 주로 밤에 활동해 어둠에 익숙한 어쌔신보다도 더 태연하게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로얀의 눈동자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기 떄문에 그는 지금 어둠을 가르고 앞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두 사람은 대낮의 거리를 걷듯 계단을 밟으며 밑으로 내려갔다. 뚜벅. 드디어 계단이 끝나고 거대한 석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뚜벅. 어썌신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바로 눈앞에 있는 석벽의 구멍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후 이리저리 돌렸다. 그그그긍..... 후두둑! 어썌신은 뭔가를 작동시킨 듯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천장에서 모래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쿠쿠쿵....... 그리고 여러 가지 무늬가 수놓여 있는 거대한 석문 옆에 위치 한 조그마한 문이 열렸다. 아니, 구멍이 생겼다. "여기 이 구멍을 통과하면 길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앞으로 쭈욱 가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 어쌔신의 임무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그는 로얀이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는 일단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로얀에게 다가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로얀을 구멍까지 직접 이끌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서 가겠다." "......!" 뚜벅뚜벅......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어쌔신을 스쳐 지난 로얀은 작은 구멍을 바라보며 몸을 숙였다. 키가 큰 자신에 비해 상당히 작은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어쌔신은 로얀이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인간... 아무리 네가 대단하더라도 그 분과 또 다른 두 명, 세 명이 펼치는 게임 속에서는 살아날 수 없을 거다." 이윽고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어쌔신은 또다시 석벽의 작은 구멍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그러자 기관이 다시 작동해 로얀의 모습을 삼켜버린 구멍이 그 입을 닫기 시작했다. 작은 구멍을 기어서 통과한 로얀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구멍 너머에는 성인 남잗가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의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통로는 사방이 칼로 잘려진 듯 평평했다. 그리고 역시나 불빛이 전혀 없었지만 로얀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뚜벅. 밋밋한 통로 바닥을 밟으며 로얀은 앞을 향해 걸어가기 십작했다. 뚜벅뚜벅,,,,,,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수록 여기가지 안내해 준 어썌신이 어째서 직선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양쪽 벽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직사각형으로 여기저기 뚫려 있어 마치 미로를 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그 입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바람소리가 그의 몸을 휘감았고, 귓가를 가득 메웠다. 뚜벅. 일직선으로 통로를 콩과하던 로얀이 이윽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다크리온의 그립을 쓰다듬었다. 뚜벅뚜벅......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을 안내해 준 어쌔신은 분명 통로를 통과하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건만 통로를 채 통과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뚜벅. 로얀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존재는 모두 다섯 명으로 그들 모두는 로얀을 안내해 준 어쌔신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가 달랐다. "너희들은 누구지?" "아......!" 로얀의 말에 다가오던 이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로얀이 어둠을 뚫고 자신들을 보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확인할 겸해서 아무 말 없이 옆 벽에 나 있는 네모 모양의 입구를 가리켰다. 사실 로얀에게 다가와 그를 직접 옆 통로로 안내하려 했던 그들의 원래 계획은 위험성이 높았다. 만약 로얀이 정말로 앞을 보지 못했다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다가와 팔을 붙잡는 그들을 드래곤 슬레이어씩이나 되는 로얀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일은 쉽게 풀려 로얀은 그들이 가리킨 대로 순순히 그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그가 본 어쌔신들은 모두 도리스와 같은 족속인 데 반해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그렇게 로얀과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어둠을 헤치며 다른 통로로 들어갔다. 빙글. 스윽. 앞장서서 걸어가던 어쌔신들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로얀은 손을 슬쩍 검 위에 올려놓았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블랙 드래곤을 잠재운 드래곤 슬레이어 흑안의 다크로얀님! 흠흠, 처음 뵙겠습니다. 쉐이트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키가 매우 작은 한 사람이 그를 향해 다가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어쌔신 역시 덩달아 몸을 숙였다. 스윽. 로얀은 검에서 손을 떼고 그런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쉐이트라는 사람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뚜벅. 쉐이트는 또다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들고 로얀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도와드리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 "현 뮤트의 총 대장인 르샤크는 인간이 아닙니다." "도플갱어겠지." 흠칫. 진지하게 말한 쉐이트는 흘려보내듯 가볍게 내뱉은 로얀의 말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걸......?" '역시 도플갱어였던가?' 로얀의 짐작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막도시에는 도플갱어가 바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군. 그대는 어떻게 그들이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지?" "그것은... 우선 지금의 상황부터 먼저 말씀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들이 눈치 챌 수도 있으니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어쌔신과 시프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사막도시 뮤트는 국가에서 내려보낸 영주보다는 마을의 총대장인, 최고의 어쌔신이라 불리는 르샤크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특이한 곳이었다. 한데 그런 뮤트에 이변이 생긴 것은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뮤트의 어쌔신들 중에서도 꽤 높은 직위에 있는 쉐이트는 그 날도 언제나처럼 이 지하기지의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시간이 계속 지속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백여 명의 정체 모를 사람들과 유난히 눈에 띄는 세 사람이 이 지하기지로 침입한 것이다. 어쌔신들과 시프들은 신속하게 그들을 공격해 들어감과 동시에 곳곳의 함정을 발동시켰지만 침입자들의 옷깃 하나 자를 수 없었다. 갑자기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말 어이없게도 공격해 들어가는 자세 그대로 몸이 마비된 것이다. 아직도 쉐이트의 머릿속에는 돌처럼 몸이 굳은 동료들을 향해 손을 뻗은 채 웃음을 흘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비릿한 조소를 흘리는 아름다운 은발을 가진 여인과 금빛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모습 역시 그의 기억 속에 새겨졌다. 지하기지 깊숙한 곳에서 업무를 보던 쉐이트는 미처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고 멀리서 백여 명의 인물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달려드는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갑자기 졸음이 밀려옴을 느꼈다. 자신의 뒤에 있던 동료들은 이미 모두 잠들어 있었다. 상급 어쌔신인 쉐이트는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텼지만 침입자들이 동료들을 죽임과 동시에 그들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보고 무너져갔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자신이 업무를 보던 책상이 보였다. 처음엔 꿈을 꾼 것이라 생각했다. 꿈속에서 부서져 내렸던 기지가 지금은 말짱했고 동료들 또한 모두 무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의뢰를 거절하고 드래곤 슬레이어인 흑안의 검사에게 총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 쉐이트는 동료들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도플갱어임을 의심하게 되었다. 쉐이트는 그때 쳐들어왔던 두 명의 여인과 한 남자가 드래곤일 거라 추측했다. 이 중간계에서 손을 뻗는 것만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그 자리에 묶어놓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꾸밀 수 있는 존재는 드래곤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래곤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인 로얀을 유인하는 것이지 어쌔신과 시프를 모두 죽여 뮤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닐 거라고 쉐이트는 결론 내렸다. 그 모든 얘기를 빠르게 말하느라 힘이 드는지 쉐이트는 숨을 헐떡였다. "드래곤이라... 나에게 도와 달라는 건가?" "후우...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쳐들어왔던 그 세 명은 모두 드래곤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드래곤 슬레이어라 해도 드래곤 세 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저희는 드래곤의 밑에서 인형이 되어 살 마음이 없기에 잠시 마을을 떠나 있을 겁니다. 그 전에 드래곤 슬레이어인 당신을 살리고 싶어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복수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도리스는?" "그자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봤는데, 그는 종종 이곳에 왔던 사람입니다. 아니, 그도 도플갱어일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당신의 동료가......" "나에게 그는 중요치 않다. 지도, 빛의 성지로 향하는 지도만 있으면 된다." 로얀의 말에 쉐이트는 주위를 한번 두리번거리고는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빛의 성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도가 진짜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서 뮤트를 떠나십시오." 뚜벅뚜벅...... 로얀은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그들 다섯 명을 처음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와 다시 일직선으로 걸었다. "아무리 당신이 드래곤 슬레이어라 해도 드래곤이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입니다!" "너라면 드래곤 세 마리와 싸우겠나, 아니면 드래곤 산맥과 싸우겠나?" 뚜벅뚜벅...... 쉐이트는 멀어져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드래곤 산맥과 싸운다는 말은 곧 드래곤 족 전체와 싸운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주군, 어서 떠나셔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쉐이트를 향해 말했다. "아니. 당분간 그들의 인형으로 살아보자." "네?" "그가 드래곤들을 죽여준다면 고향을 버리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하, 하지만!" "안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일을 그는 벌써 해냈지 않은가. 한번 믿어보자. 그 강한 에이션트 드래곤 급의 블랙 드래곤을 죽인 드래곤 슬레이어 다크로얀을!" 빙글. 뚜벅뚜벅...... 쉐이트는 몸을 돌려 로얀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네 명의 어쌔신들이 뒤따라갔다. 28장 드림 스톤 로얀의 눈동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어둠 속을 걸으며 주위의 기운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율려 퍼지는 가운데 로얀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이곳은 마치 개미집을 연상케 했다. 여기저기 뚫려 있는 입구... 그 중 하나에라도 발을 들여놨다가는 이 땅 속에 영원이 갇혀버리고 말 것이다. 뚜벅뚜벅......!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로얀은 드디어 목적지에 다 와간다는 것은 느꼈다. 멀리서 다크로드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아앗!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갔을 때, 이윽고 로얀의 눈동자로 밝은 빛이 달려들었다. 뚜벅. 그러나 로얀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 빛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성인 남자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입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상당히 좁은 공간으로 특별한 장식은커녕 낡은 나무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만이 입구 맞은 편에 덜렁 놓여 있었는데, 그러한 살벌한 풍경을 사방 석벽에 걸려 있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들이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오셨군요, 마스터.] 두 음성이 동시에 로얀을 맞이했다. 음침하고 스산한 목소리는 로얀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고 어둠의 정령 다크로드가 말하는 정령어는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었다. 한 명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로얀과 마주보고 있는 검은 복면을 한 남자였고 다른 두 사람은 로얀의 오른편에 서 있는, 역시나 복면을 한 사람과 마법사 도리스였다. 도리스는 밧줄로 몸이 꽁꽁 묶인 채 그 복면인에게 잡혀 있었는데, 그의 목에서는 복면인이 쥐고 있는 단검의 날카로운 날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불꽃에 번뜩이고 있었다. 도리스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고 말라 버린 입술은 바들바들 떨고 있어 누가 봐도 누군가에게 붙잡혀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도리스와 비슷한 성질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본 로얀은 지금의 이 상황 역시 같은 편끼리 펼치는 자작극임을 눈치 채고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복면을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요새의 비밀을 상세히 말하면서까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저런 연기를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스르륵. [저들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도리스의 그림자 속에 있던 다크로드가 로얀의 그림자 속으로 옮겨오며 그렇게 말하고는 지금까지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들의 배후에는 아무래도 드래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미 쉐이트에게서 들은 사실인 데다가 그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실이기도 했다.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는 진짜인가?] "나를 여기로 부른 것이 너인가?" 로얀은 다크로드에게 정령어로 말한 직후 눈앞의 검은 복면을 한 존재에게 그렇게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눈앞의 존재가 도리스보다 강해 보일 테지만 로얀이 느끼기에는 도리스가 제일 강했다. [예. 그 지도를 멀리서 보았는데, 빛의 정령이 만든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빛의 정령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지도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것으로 보아 진짜가 틀림없었습니다.] "당연하지. 저기 있는 늙은 마법사의 동료이자 드래곤 슬레이어인 다크로얀, 너에 대해 미리 조사 좀 했지." 도리스를 인질로 검 자루를 움켜쥐고 있다고 믿고 있는 복면인은 오만하게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이 마을의 모든 어쌔신과 시프를 책임지고 잇는 르샤크라고 한다." "......" 로얀은 르샤크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다크로드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지?] [마법으로 어디론가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를 보낼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바로 그 지도를 가지고 온 드래곤의 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지도를 찾으려면 드래곤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드래곤을 만나려면 이들의 장난에 좀더 놀아주는 수밖에.' 속는 셈 치고 저들의 말을 따라주다 보면 언젠가는 드래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르샤크는 로얀이 계속 말이 없자 그가 도리스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동료가 걱정되나 보군. 우리의 요구는 하나야. 그걸 들어준다면 저 마법사 노인을 살려주지." 스윽. 그의 음침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도리스의 목에 단검을 대고 있던 복면인이 그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로, 로얀 군!" 도리스의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얀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원하는 게 뭐지?" 이미 그들의 장난에 좀더 놀아주기로 결정한 로얀은 순순히 그들의 의도에 응했다. 그러나 사실 로얀은 거짓 눈물을 흘리는 도리스를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었다. "며칠 전 오래 전부터 찾던 던전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아서 말이야, 대신 그 안에 있는 물건을 가져와 줘야겠어." "알겠다. 어디로 가면 되지?" 로얀은 르샤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 [이번 일은 절대 맡으시면 안 됩니다.] 르샤크는 로얀이 너무도 쉽게 넘어오자 순간 당황해 할 말을 잃었고, 다크로드는 로얀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르샤크는 곧 동료가 걱정이 돼서 그런 거라고 지레짐작하고는 로얀을 응시했다. "흠흠! 여기 지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굴의 위치만 가르쳐줄 뿐, 그 내부 구조는 아무도 모른다." 르샤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탁자 위로 둘둘 말린 지도를 던져 놓았다. "그 던전에 있는 드림 스톤이라는 것을 가지고 와줘야겠어. 그것은 검은색으로 된 돌로 신비한 빛을 뿌리니 아마 알아보기 쉬울 거야." 뚜벅. 스윽. 로얀은 걸음을 옮겨 낡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지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스터!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저들의 대화를 모두 들은 다크로드였기에 그는 저 지도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 돌과 던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고대의 한 전설과 관련이 있는 곳... 다크로드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이야기가 만약 사실이라면 그곳으로 가는 것은 어쩌면 카엔과의 싸움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크로드의 그런 걱정을 모르는 로얀은 그의 말을 흘려버리고는 르샤크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그럼 갔다 오지." 스윽.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린 로얀의 눈에 도리스가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도리스에게서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의 환영을 보고 있었지만 르샤크와 복면인은 그가 도리스를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뚜벅뚜벅......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두 어쌔신과 도리스, 아니 세 명의 도플갱어를 무시하고 로얀은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뒤로하고 로얀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고 다크로드는 그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얼마 후 로얀은 뮤트의 북쪽 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 문 앞에는 온몸을 천으로 친친 감고 있는 네 명의 경비병이 있었는데, 지루함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들은 휘몰아치는 모랫바람 속에서 느릿하게 다가오는 로얀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천으로 얼굴을 감싸지 않아 그 긴 흑발이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병 자신들은 천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모래가 비집고 들어와 서로 대화조차 할 수 없는데 말이다. 터벅터벅...... 그들의 눈에는 로얀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는 다크로드가 뒤따르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던 모래가 검집 속으로 들어가면 적이 출현했을 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뮤트의 병사들은 창을 주로 사용했다. 검이라곤 소맷자락 속이나 바짓단 속에 단검을 숨기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터벅. 창......! 양쪽에 서 있던 병사들이 창을 내밀자 그 두 사람의 창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로얀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휘오오오...... 섬뜩한 창의 날과 함께 로얀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동자도 빛났다. 그들은 심한 모랫바람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어 눈빛으로 로얀에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신분증이었다. 스윽. 로얀은 품속에서 용병패를 찾아 그것을 그들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말도 흐르지 않았다. B급의 용병패는 흔하다 할 수 있었고 용병이 이곳을 한두 번 지나간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은 전혀 놀라지 않고 로얀에게 용병패를 넘겨주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발을 떼었다. 어떻게 이 모랫바람 속에서 그리도 태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모랫바람이 입을 막고 있어 병사들은 궁금증을 묻어두고 서서히 멀어져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터벅터벅...... 멈칫. 뮤트의 북문을 지나 걸음을 옮기던 로얀의 발걸음이 다시 멈추어졌다. 모랫바람 속에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 때문이었다. 입 부분에 특수한 가죽으로 만든 무언가를 두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을 천으로 감고 있는 자였다. 그는 키가 무척이나 작아 로얀의 허리 정도에나 올 듯했지만 덩치는 상당해 보였다. "자네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목소리에 로얀은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이 모랫바람 속에서 말을 한다는 점이었고 하나는 그 목소리가 드워프 록의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사실 록이 이 모랫바람 속에서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그의 입을 가리고 있는 특수한 가죽 덕분이었다. 그것은 드워프인 그가 직접 만든 그 자신의 발명품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로얀은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네가 요즘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것을 난 알고 있지. 한데 자네가 우리 일행에 들어온 것은 정말 빛의 성지 때문인가?" 드래곤 슬레이어씩이나 되는 인물이 왜 빛의 성지에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인지 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윽. 로얀의 눈동자가 록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나?" 흠칫. 록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로얀이 묻는 그는 록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 평생에 하나뿐인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내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그는... 아마 죽었겠지." 록의음성이 슬픔에 절어 떨려왔다. 처음 도리스가 도플갱어가 되어 나타났을 때에는 긴가민가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록은 그가 자신의 친구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따라다닌 것은 친구의 복수를 위함이었다. 아니, 복수라기보다는 자신의 친구 모습으로 다니는 도플갱어를 없애고 싶었다. 그것이 죽은 친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쉐이트에게서 로얀와 도리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어 도플갱어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록은 그 배후의 존재를 알기 위해 지금껏 그와 동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오늘 술자리에서 도리스가 갑자기 자리를 뜨자 록은 그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그리고 도리스가 사라진 쪽을 멀리서 바라보다 얼마 후 그쪽으로 향하는 로얀을 볼 수 있었다. 도플갱어의 배후에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록은 복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허튼 수를 부린다면 악독한 드래곤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드워프 마을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평소 드워프를 노예처럼 다루는 드래곤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행을 이끌고 다른 마을로 갈 생각이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드래곤이 있지. 아무리 자네가 드래곤 슬레이어라 해도 여러 마리의 드래곤과 싸우는 것은 정말 자살행위야."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사실 드워프 록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라 부르기도 뭐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만류하니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정말 그의 목숨까지 걸고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이런 모습을 드래곤이 본다면 드워프 록은 그들에 의해 살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우린 자네에게 사막에서 목숨을 빚진 적이 있지. 비록 드래곤을 상대할 수는 없어 친구의 복수는 포기했지만 드워프는 원래 은원이 분명한 종족이지. 그래서 말하는 것이네. 그만두게." 록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빛의 성지로 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 그 무엇이 막는다 해도 갈 수밖에......" 터벅터벅...... 휘오오오......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로얀을 록은 붙잡을 수 없었다. 그 칠흑 같은 눈동자에 담긴 굳건한 의지를 보았고, 그 의지는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드래곤들을 자네가 죽여준다면 내 무엇으로든 은혜를 갚겠네. 정말 자네게 그들의 손안에서 살아남는다면 겨울의 대륙의 카야 산맥으로 와주게나!" 멀어져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외친 것이 드워프 록이 그를 향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뮤트를 벗어난 로얀과 다크로드는 눈앞에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걸었다. "왜 이번 일을 그렇게 말린 것이냐?" 로얀의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은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있는 다크로드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저도 워낙 오래 전 들었던 이야기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 던전은 드래곤과 싸우는 것보다 더 위험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던전 하나가 드래곤보다 위험할 수 있다니... 로얀은 어리둥절해 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속의 다크로드를 바라보았다. [오래 전, 마계에서 파괴의 종족이라 불리는 발록의 수장과 몽마들의 왕이라 불리는 마족이 크게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한데 아무리 몽마의 왕이라 해도 무력으로는 발록의 수장을 이길 수가 없어 그는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럼 그 함정이라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향하는 던전?" [네. 그 당시 어쩐 일인지 중간계와 다른 차원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약해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빛의 정령들이 천계로 간 때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 약해진 결계를 뚫고 중간계에서 대결을 펼치자고 몽마의 왕이 발록의 수장에게 말했습니다. 자존심과 호승심이 강한 발록의 수장은 당연히 그 말을 수락했는데, 그것이 그의 실수였습니다. 몽마의 왕은 이미 중간계에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약해진 결계를 뚫고 중간계로 내려올 수는 있었지만 힘이 반감되는 것은 마왕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발록의 수장은 몽마의 왕이 파놓은 함정에 지금까지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저 발록이 갇혀 있다는 것뿐인데 어째서 위험하다는 거지?" [아무리 힘이 반감됐다고는 하나 그는 발록의 수장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그곳에 갇혀 있다는 것은 그 던전에 있는 함정이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곳에서 발록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아무튼 정말 위험합니다.] 사박, 사박...... 다크로드가 이야기를 마치고 더 이상 말이 없자 로얀은 다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데... 오래 전 일을 자세히 기억하는군." [빛과 어둠의 정령은 정령 중에서도 활동범위가 가장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다크로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로얀은 다음 마을을 향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모랫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흘러 들어온 짙은 혈향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바삭. 로얀의 발에 바싹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밟히며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붉은 피가 바닥을 흐르고 있었고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마을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어 활활 불타고 있었고 검은 연기는 하늘로 솟아올라 맑았던 하늘을 흑빛으로 뒤덮었다. 이글거리는 불꽃과 부패하지 않은 시체들로 보아 작은 오아시스를 중심에 두고 있는 이 마을은 습격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사막에 서식하는 다른 이종족이나 몬스터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저지른 일은 아닌 듯했다. 음식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몬스터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장 맛있는 먹이인 인간의 시체가 여기저기 붉은 피를 뿌리며 널려 있었던 것이다. 한데 무기를 쥐고 죽어 있는 마을 남자들은 간간이 보이는 것에 반해 습격한 이의 시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마을 사람 전원이 처참하게 도륙당한 것이다. 지금 로얀의 눈앞에 보이는 이곳은 원래 셀피아라는 사막마을로 인구도 적고 평소 몬스터의 공격도 없었기에 자경단의 규모 또한 상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시체 한 구 남기지 않은 적들로 보아 자경단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이곳이 셀피아인가?" 로얀은 품속을 뒤져 확인 차 르샤크에게서 받은 지도를 꺼내 펼쳐보았다. 드워프 록을 만나고 난 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어온 그였다. 사막의 서늘한 밤도, 사막의 푹푹 찌는 낮의 태양도 그의 발길을 붙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을이 습격당한 모습이 조금 이상합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요?] 다크로드가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로얀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평화롭던 마을이 갑자기 이렇게 혈향을 흘리며 활활 타오르는 것이 의심스러웠고, 무엇보다 식량이나 귀중품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이 더 수상했다. "드래곤이 만든 연극의 배경 중 하나겠지. 지도에 따르면 던전은 이 마을의 오아시스 속에 있다." 다크로드의 물음에 사막의 모래보다 더 메마른 음성으로 대답한 로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의 환영을 받으며 로얀은 지도 상에서 사라져가는 셀피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크로드는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 눈까지만 살짝 내민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뒤를 경계햇다. 스윽. 이윽고 마을 중앙에 선 로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기억 저편의 한 장면이 차르륵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혼돈의 정령왕이 되기 이전의 기억을 잃은 그는 혼돈의 정령왕이 된 순간이 바로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혼돈의 정령왕이 된 그가 제일 처음 본 것은 이 마을보다 더 황량한 마을이었다. 그곳은 이곳처럼 사막도 아닌데 모랫바람이 일고 있었고 풀 한 포기 자라나 있지 않았다. 자신이 살았던 곳으로 보이는 그 마을은 이미 깨끗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기억의 영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얀의 이름과 함께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레이나라는 이름이었다. "크윽......!" 파지직! 로얀이 그 자신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순간, 그의 왼손에서는 황금빛 전류가 파지직 하고 흘렀다. 다그닥, 다그닥...... 그 때문일까? 로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시선조차 두지 못했다. 그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주위를 살피던 다크로드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괜찮으십니까, 마스터!] 다그닥, 다그닥...... 스윽. 점점 가까워져 오는 소리에 다크로드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검은 기류와 함께 팔을 감고 있는 붉은 천이 넘실거렸다. "다크로드, 가만히... 있어라. 저들보다... 마을 곳곳에 뭔가가 숨어 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듯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각. "워워!" 히힝! "너희들은 뭐지?" 검은 연기 속을 뚫고 나타나 로얀 등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상당히 젊은 청년이었다. 많이 봐줘야 2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그 청년은 사막에 어울리지 않게 큰 백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는데, 눈을 살짝 내리깔고 로얀과 다크로드를 보는 그는 세상을 다 가진 황제같이 거만해 보였다. 사막의 지리적 조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낙타를 선호했지만 귀족들은 천한 사람들이나 낙타를 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낙타를 탔을 때의 모습에 멋이 없다는 게 귀족들이 낙타보다 말을 선호하는 진정한 이유였다. 말을 타고 당당히 나타난 이 청년도 꽤나 쟁쟁한 귀족가의 자식인 듯 그의 양옆으로 역시나 말을 타고 있는 호위기사가 그와 별 차이 나지 않는 눈빛으로 로얀과 다크로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들 뒤로는 말을 타고 있는 기사가 열 명 정도 더 보였고, 그 뒤를 메우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보병이었는데 이들 모두가 사막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간단한 갑주만을 착용한 상태였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이라 모랫바람은 심하지 않았기에 얼굴을 천으로 두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귀족가의 도련님으로 보이는 청년이 또다시 로얀을 향해 떠들어댔다. "너희가 이곳을 이렇게 만든 범인인가?" "......" 두 번이나 말을 씹힌 백발 청년이 입술을 씰룩거리자 그 오른편에 있던 중년의 호위기사가 눈을 한껏 치켜 뜨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창......! "감히 도련님의 말을 무시하다니!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의 호통소리를 들은 귀족 청년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곳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며 놀기 위해 왔던 그는 타오르는 마을을 보고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화가 났지만 마을 중앙에서 본 로얀과 다크로드로 인해 기분이 조금 풀렸다. 용병으로 보이는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자신의 호위기사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너무도 훌륭하게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죽여주마." 다크로드가 살기가 진득하게 묻은 인간의 말을 내뱉자 그것은 귀족 청년을 비롯해 기사들과 병사들의 가슴속 깊숙이 박혔다. 츠츠츳! 검은 기류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스파크를 일으켰고 그의 양팔에 감겨 있는 붉은 천이 넘실거렸다. 섬뜩. 병사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고 기사들은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며 다크로드를 노려보았으며 백발 청년은 자신이 잠깐이나마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에 화가 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스윽. 그때,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있던 로얀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온다." 그의 말에 검은 기류를 흘리며 붉은 천을 흩날리던 다크로드가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방에서 뭔가가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 함정이었나! 네놈들!" 로얀과 다크로드를 향해 고함을 지른 호위기사는 로얀과 다크로드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꾸민 짓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백마 위에서 사방에서 자신들을 조여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바라보던 귀족 청년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 너희들부터 죽여주마. 모두 이놈들을 사살하라!"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음성에 따라 기사와 병사들이 로얀과 다크로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 또한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게 된 다크로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로얀의 주위를 맴돌았고 로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다크로드는 로얀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끌어 올렸다. 주인의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 인간들만이라면 몰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과 싸우는 것은 위험했다. 다크로드를 진정으로 두렵게 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로얀이 폭주하여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와아아......!" 자신들을 향해 몽을 날리는 병사들을 본 로얀은 검집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춰 세웠다. 마치 머릿속에서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그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는 멈춰 세웠던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다크 미스트." 츄아아악. 그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검은 안개와도 같은 자욱한 기류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러자 그 주위에 검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더군다나 거기에 마을을 태우고 있는 불길이 내뿜는 연기가 더해져 그 효과는 배로 늘어났다. 다크 미스트는 시야를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둠의 정령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마나를 천천히 빨아들이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아주 미약한 양이긴 했지만 말이다. 다크로드는 내심 안심하며 로얀에게로 다가갔다. "이 기회에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로얀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한번 싸워볼 만했겠지만 지금 그의 몸 상태는 무척이나 나빴다. "그럴 수... 없을 것 같군." 스르릉! 촤아아! 촤촤촥! 로얀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다크리온을 뽑아냄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그림자를 갈라놓았다. 다크로드 역시 자신의 뒤족에서 덮쳐오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팔에 감겨 있던 붉은 천이 채찍처럼 늘어나 상대를 찢어놓았다. 촤르륵. 눈앞에 드러난 그 그림자의 정체! "모래?" 로얀의 말대로 그와 다크로드가 부순 그림자는 모래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림자 속에서 마나석의 기운을 느낀 그들이 그것을 부숴버렸기 때문에 모래인간은 다시 재생되지 않은 것이다. 로얀과 다크로드 둘 다 키메라와 싸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상대를 파악하고 그의 약점을 부순 것이다. 모래인간은 로얀이 사막에 와서 처음 만났던 샌드맨과는 전혀 달랐다. 모래로 된 갑주까지 차려 입은 모래인간은 정말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누군가 마법을 사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다크로드는 로얀의 의문을 풀어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들 모래인간은 몬스터가 아니라 골렘처럼 마나석으로 인해 움직이는 존재들이었지만 골렘처럼 커다란 마나석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급의, 아주 조그마한 마나석으로도 움직였기 때문에 대량으로 제조가 가능했던 것이다. 모래인간이 안개 속에서도 로얀과 다크로드를 찾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원래 눈이 없는 대신 생명체에 흐르는 미세한 마나를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근처에 이들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크아아악!" 안개 속에서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도 모래인간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모래로 된 검에 피를 뿌리고 있었다. 로얀과 다크로드에게는 이 검은 안개가 도움이 되었지만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지옥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그 안개 때문에 저들은 대항 한번 못 해보고 도륙당하고 있었으니까. 파팟. 콰가가각! 로얀은 다른 인간들의 상황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조이는 두통은 싸움이 시작되자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모래인간들 때문에 로얀과 다크로드는 서로 떨어져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그들의 주위로 모랫바람이 휘날렸다. 파하학! 로얀이 휘두르는 마검 다크리온이 그 모랫바람을 뚫고 자그마한 마나석을 부숴버리자 모래인간은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촤촤촤아! 다크로드의 몸이 살짝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허공에서 춤췄다. 그러자 붉은 천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모래인간 사이사이를 누볐다. 다크로드가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는, 어둠의 최상급 정령에게는 기본적인 공격방법이었다. 후두둑! 다크로드는 모래인근들을 쉽게쉽게 부숴버렸다. 그건 로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콰가가각! 우선 소리부터가 달랐다. 로얀은 오러 블레이드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모래인간들을 금빛 오러를 휘날리며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때문에 마나석을 맞추든 안 맞추든 모래인간은 로얀의 검에 닿기만 하면 사라져 버렸다. "으득!" 로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몸 속에서 피가 꾸역꾸역 솟아올라 오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입안에서 진한 혈향을 느끼며 다크리온을 휘둘렀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본 다크리온은 더욱 빨리 움직였다. 이윽고 그 주위에 있는 모래인간이 모두 터져 나가자 그는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마스터!" 스윽. "......" 로얀은 다크로드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마을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모래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크기의 뭔가가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서히 드러나는 모습! 거대한 여덟 개의 발과 몸은 도마뱀 같았지만 얼굴과 목은 기다란 뱀 같았다. 그리고 몬스터 주제에 머리에 달고 있는 왕관같은 무언가...... 그 모습을 본 다크로드가 나직이 음성을 흘렸다. "바질... 리스크." 인형이라 할 수 있는 모래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상당한 지능을 갖춘 상급의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 바질리스크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기며 로얀은 쭉 찢어진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다크로드, 저놈은 내가 맡겠다. 뒤를 부탁하겠다." "하, 하지만!" "명령이다." 스릉. 로얀은 딱 잘라 말하고는 에리오네를 뽑았다. 그러자 에리오네는 모습을 드러낸 것과 동시에 황금빛을 뿌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힘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힘을 모래인간에게 쓰는 것보다는 상급의 몬스터인 바질리스크에게 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크로드는 바질리스크와 대치하고 있는 자신의 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또 모래인간들이 달려 들어와 그와의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주르륵. 다크로드의 팔에 감겨 있던 붉은 천이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팔을 타고 흘러내린 그 붉은 천이 그의 두 손에서 서서히 어떠한 형태를 갖춰갔다. "블러드 소드." 그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액체로 변했던 천이 형체를 완전히 갖추었다. 심하게 휘어진, 핏빛으로 번뜩이는 두 자루의 시머터였다. 날카로운 그것을 양손에 든 채 모래인간을 노려보는 다크로드의 몸에서는 검은 기류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들을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고 로얀에게 가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지금 자신의 왕은 검을 든 어린아이와 같이 위험한 상태였던 것이다. 저 위에서 로얀을 내려다보는 쭉 찢어진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사막에서만 서식하는, 정말 희귀한 몬스터인 바질리스크의 눈이었다. "네가 다크로얀이라는 인간이냐?" 놀랍게도 바질리스크는 대륙공용어인 인간의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었다. "날 알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시킨 것인가?" "맞다니 다행이로군." 바질리스크는 로얀의 물음을 무시하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쿠쿠쿠......! 쉐에엑! 곧 이어 지축을 뒤흔들며 그 거대한 여덟 개의 발을 움직이던 바질리스크의 뱀 머리가 로얀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 들어왔다. 콰가강......! 그러나 로얀이 잽싸게 몸을 움직여 피하는 바람에 바질리스크는 머리를 맨바닥에 처박았다. 쉬쉬쉬!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천천히 감겨 올라가자 그의 얼굴이 하늘로 치솟으며 햇살에 비늘이 반짝였다. 순간, 옆으로 몸을 날렸던 로얀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양손에 들려 있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금빛을 뿌리며 바람을 갈랐다. "죽음의 반월!" 콰가가강! 바질리스크의 공격이 지축을 뒤흔들었다면 로얀의 공격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바질리스크의 비늘이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마나 소드를 견딜 수는 없었다. 그런데 로얀은 지금 마나 소드보다 한 단계 위인 금빛 오러를 사용하고 있었다. 쿠쿠쿵! 자신의 단단한 비늘을 믿고 버티려던 바질리스크는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만든 금빛 반월의 오러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땅을 뒤집으며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푸화화확! 쿠쿵! 육중한 몸을 굴려 피했다고는 하지만 수십여 개에 달하는 반월의 오러를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바질리스크는 여덟 개의 다리 중 뒤쪽 다리 하나를 잃고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키에엑!" 고통에 찬 음성은 보통 몬스터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질리스크가 괴로워할 때 로얀 역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너무도 과도한 힘이 몸을 갉아먹는다고나 할까? 로얀이 금빛 오러를 사용하여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의 몸 속에 있는 거대한 힘이 들끓었고, 그것이 그의 육체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와라!" 입 속에서 살짝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느끼며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꽉 움켜쥐었다. "크륵!" 바질리스크는 명색이 사막의 왕이라는 자신이 바닥을 굴렀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바닥을 구르개 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무의식적으로 바질리스크는 그 종족의 특기를 사용하려 했다. 바로 그의 눈으로 상대를 돌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스르륵. 그의 쭉 찢어진 눈 속에 있는 눈알이 회색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갔다. 바로 그 때! [너는 혹시라도 그 인간이 길을 찾지 못할 것을 염려해 보내는 안내자일 뿐이다. 그러니 안내자로서의 임무만을 충실히 이행해라!]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음성이 있었다. 드래곤 피어와 함께 쏟아져 나왔던 그 말은 비수가 되어 바질리스크의 가슴을 후벼팠다. 지난번 드래곤이 자신에게 한 말이 지금 떠오른 것이었다. 자신의 잠을 깨운 존재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아무리 같은 도마뱀(?)과라 해도 그의 눈앞에 있던 세 개의 그림자는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 무려 세마리나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은 채 그에게 모래인간들과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로얀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렇게 로얀을 습격한 것이었다. 스륵. 회색빛이 눈알 속에서 사라지고 이제 날카로운 노란색 눈동자가 다시 로얀을 노려보았다. 쩌억. 커다란 그의 입이 벌어지자 날카로운 이빨이 초록색 액체를 뚝뚝 흘렸다. 치이익! 입 안에서 흘러나온 초록색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하얀 연기와 함께 모래가 녹아들었다. 바질리스큳의 또 다른 특기인 독이었다. '저런 괴물 같은 인간이랴면 이 정도 독 떄문에 죽지는 않겠지?' 혼자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 바질리스크는 목을 살짝 뒤로 젖힌 후 앞으로 내뻗었다. 푸화확! 그 순간, 그의 입 속에서 초록색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쉐도우." 스르륵. 독이 몸에 닿기 전에 로얀은 쉐도우를 사용해 근처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치지지직! 독에서 뿜어져 나온 자욱한 연기가 로얀이 사용했던 다크 미스트와 불길 속에서 흘러나오는 연기와 합쳐져 진한 장막을 쳤다. 스르륵. 쿠쿠쿵! ".....?" 그림자 속에서 밖으로 나온 로얀은 저 멀리 도망치는 바질리스크를 볼 수 있었다. 상급 몬스터가 독을 뿜고 갑자기 도망친다? 로얀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질리스크는 어딘가로 돌진하게 시작했다. 그를 가로막는 나무들은 힘없이 부러졌고 건물을 부서져 내렸다. 또한 바질리스크는 가다가 멈춰 로얀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가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무슨 속셈이지?' 숨는다기보다는 마을의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바질리스크의 모습에 로얀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지이잉. 로얀이 잠깐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이 떨려왓다. '검들도 금빛 오러의 힘을 느끼는 것일까?' 로얀은 두 검을 다시 꽉 쥐며 몸을 날렸다. 팟! 이왕 힘을 쓰기 시작한 거 지금 바질리스크를 끝장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스터!" 멀리서 모래인간들을 상대하며 그 모습을 바라본 다크로드가 급히 외쳤다. 하지만 골든 마스터인 로얀은 다크로드로도 겨우 형체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빨라 그때 이미 그는 바질리스크를 쫓아 사라지고없었다. "사신의 춤!" 스가가각......! 촤르륵! 다크로드의 양손에 들려 있는, 보통의 시미터보다 더 휘어진 붉은색 도가 번뜩이며 모래인간들 사이를 누볐다. 그리고 아주 정확히 모래인간의 몸 속에 있는 작은 마나석을 부숴버렸다. 촤르륵. 모래로 흩어지는 모래인간들을 보며 다크로드는 로얀의 뒤를 쫓으려 했다. 터벅터벅!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 어느새 모래인간들이 그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의 왕에게 무례를 범했던 어린 인간의 것이었다. 그는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스거걱! 촤르륵. 다크로드는 인간의 외침에 신경을 끄고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한데 그의 이런 태도가 그 귀족 청년을 살아나게 했다. 그가 모래인간을 모조리 처리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아!" 또 하나의 모래인간을 베어 넘긴 다크로드에게 귀족 청년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리고 모래인간이 소멸한 자리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있는 귀족 청년이 튀어나왔다. 바닥을 구르며 다크로드에게로 온 그는 다크로드의 다리를 붙잡으며 외쳤다. "제발 살려줘, 제발! 으흐흑!" 애처롭게 우는 그였지만 다크로드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예의 그 붉은 도가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꺼져라." "으흐흑......?"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죽는다. 꺼져라." "으아아......!" 다크로드의 스산한 음성에 귀족 청년은 모래인간이 없는 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스윽. 특수한 가죽으로 만든 듯한 검은 투구를 쓰고 있는 다크로드, 그의 회색빛 두 눈이 검은 흑막 속에서 스산하게 빛났다. 지금 그는 모래인간들 틈 사이로 보이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인간들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귀족 청년이 데리고 온 인간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고, 다크로드의 발끝에도 와 닿았다. 스윽. 다크로드는 무릎을 굽혀 오른손에 들려 있는 블러드 소드를 그쪽으로 옮겼다. 푹. 그리고 붉은 피로 축축해진 땅에 그것을 꽂았다. 쿵쿵! 그런 다크로드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모래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다시 다크로드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순간, 붉은 피를 내려다보는 다크로드의 회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블러드 보그." 츠츠츠! 블러드 소드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떨리는가 싶더니 그 파동이 붉은 피로 전해졌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땅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에 있는 다른 웅덩이의 피도 함께 출렁거렸다. 다크로드가 최상급 정령이 되면서 생긴 또 다른 기술이었다. 피의 늪이라는 이름대로 피가 있어야 사용 가능한 기술로, 붉은 피가 시전자의 주위로 모여들어 죽음의 늪을 생성하는 것이었다. 츄아악......! 마을 여기저기에 고여 있던 붉은 피가 땅 속 깊이 박힌 다크로드의 블러드 소드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물에 약한 모래인간들은 붉은 피가 모여들어 발을 적시자 발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츄아악! 그렇게 모여든 붉은 피가 다크로드를 중심으로 커다란 호수를 형성시켰다. 그리고...... 촤르륵......! 붉은 피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불쑥불쑥 솟아올라 모래인간을 덮쳤다. 콰드득! 스산한 소리를 내며 모래인간을 덮친 붉은 피가 그들의 육신을 조이며 부수기 시작했다. 굳이 마나석을 노릴 필요도 없었다. 붉은 피가 그들 모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자 마나석은 자연히 부서져 내렸던 것이다. 모래인간을 가루로 만든 붉은 피는 그들의 시체(?)를 끌고 땅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힘을 과도하게 사용한 다크로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의 시체도 모래인간의 시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귀족 청년만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멀리서 그런 다크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블러드 보그의 단점은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 바로 앞에서 붉은 피의 호수가 멈춰 더 이상 퍼지지 않았기에 그 청년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윽. 다크로드에게 있어 인간의 목숨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청년을 내버려두고 로얀이 사라진 방향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귀족 청년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 이윽고 하얀 거품을 물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크로드가 블러드 보그라는 기술로 모래인간을 멋지게 전멸시키는 동안 로얀은 바질리스크와 대면하고 있었다. 바질리스크는 발이 많아서인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로얀의 움직임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곧 바질리스크를 앞질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앞지르기 전에 바질리스크가 갑자기 멈추어섰다. 바질리스크와 로얀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반구형으로 움푹 파여 있는 곳으로 푸른 물줄기가 여기저기 흐르고 곳곳에 물이 고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마을의 중심인 오아시스인 듯했다. 하나 마을의 젖줄인 오아시스는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누군가 임의로 물을 없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아마 드래곤을 등에 업은 눈앞의 바질리스크일 것이다. 이 오아시스는 지도에 따르면 드림 스톤이 있는 던전으로 가는 입구가 되는 곳이었다. "나를 일부러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인가?" 어떤 묘한 힘이 담긴 로얀의 음성이 바질리스크에게로 전해졌다. "크크크... 나의 다리를 자른 널 드디어 죽일 수 있겠군." 긴 혀를 날름거리며 웃음을 흘린 바질리스크는 이윽고 입을 살짝 벌렸다. 덕분에 독이 가득한 그의 입 안이 언뜻 들여다보였는데, 뜻밖에도 그 안에는 작은 구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바질리스크의 극독에도 녹지 않는 물건이 있다니! 신기한 빛을 뿌리고 있는 그 구슬들은 각각 푸른빛과 흑빛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중 칙칙한 검은 구슬의 빛깔이 더욱 묘하고 신기했다. 그 검은 구슬은 바로 마정석이라는 것으로 마기를 품고 있어 흑마법사들에겍는 마나석보다도 더 귀한 보물 취급을 받았다. 한데 그 빛깔로 보아 바질리스크가 들고 있는 마정석은 최상급의 물품이었다. 입 안에서 구슬을 굴리던 바질리스크가 두 개의 구슬 중 바로 그 검은 구슬을 커다란 뱀의 그것처럼 생긴 혀를 이용해 밖으로 내뱉었다. 쉬르륵. 지이잉......! 바닥으로 떨어진 구슬이 부르르 떨리며 강한 마기를 뿜었다. 그리고 움푹 파여 있는 오아시스의 바닥에 기묘한 그림과 고대어가 빛을 내며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강한 빛이 폭사하는 그 순간, 로얀은 갑자기 몸을 돌려 달려나가는 바질리스크를 볼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던지 그는 벌써 오아시스를 벗어나 위에서 로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정석을 주었던 드래곤이 그렇게 하라고 바질리스크에게 미리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엇이 있고,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그도 알지 못했지만 저 빌어먹을 인간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드래곤의 말이 있었기에 바질리스크는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드래곤이 최상급 마정석까지 주면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찰박. 로얀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무시하고 바질리스크를 올려다보며 여유잇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기이잉! "음?"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부서질 듯 요란하게 떨던 검은 구슬이 오아시스의 바닥으로 들어가자 오아시스가 요동쳤고 기이한 빛이 바닥에서 솟아 나와 로얀의 발을 묶은 것이다. 마기를 풀풀 날리는 마정석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던전을 깨운 것이다. "크크크......" 로얀은 멀리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흘리는 바질리스크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저기 들어가면 죽을 거라 했으니 여기서 돌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바질리스크는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린 후 로얀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드래곤 이상의 높은 존재가 아니라면 그 어떠한 존재라도 돌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그의 가장 강한 무기가 발동한 것이다. 회복력이 뛰어나 다리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사막의 왕이라 불리는 자신을 바닥에 구르게 한 인간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꽈악. "......!" 로얀 또한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더욱 거세게 움켜쥐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로얀은 돌이 되지 않아 오히려 바질리스크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스르륵. 우우웅! 로얀의 몸은 강한 빛과 함께 땅 속으로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로얀은 바질리스크만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던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이건 보통의 던전이 아니었다. 과거 몽마의 수장이 발록의 수장을 가두기 위해 만든 함정이었다. 발록의 수장인 파라무트조차 빠져나오지 못한 던전을 그가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드래곤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얀은 이 던전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어차피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질리스크를 직시했다. 그는 던전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그를 해치우고 싶었던 것이다. "소울 바운드." 그러자 로얀의 그림자에서 검은색 무언가가 떨어져 나와 바질리스크를 향해 돌진하더니 이윽고 그의 그림자와 합쳐졌다. 온 힘을 다한다면 몇 초간은 바질리스크를 조종할 수 있을 테니 그 스스로 죽게 만들 생각이었다. 독으로 가득한 바질리스크의 이빨이 그의 살에 박힌다면 바질리스크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크르륵?" 바질리스크는 자신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이윽고 그의 긴 목이 다리로 향하는가 싶더니 입이 쩌억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익. 주르륵 흘러내리는 초록색 액체가 대지를 녹였다. 그 모습이 바질리스크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설마 자신의 최후가 자살이라니! 죽음을 예감하며 생을 포기하던 바질리스크는 다리 바로 앞에서 자신의 얼굴이 멈추자 로얀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츄아아악! 빛이 오아시스를 가득 메울 정도로 더욱 강해졌고 로얀은 목까지 잠겨 있었다. 그리고 곧 얼굴마저 서서히 사라져갔다. 슈우우욱! 로얀이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직후 오아시스의 바닥에서 빛나던 고대어와 기이한 문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아시스는 예전의 평범한 모습을 되찾았다. 비록 물은 여전히 말라 있었지만 말이다. 바질리스크는 웃음을 흘렸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에 대한 안도감과 함께 사라져 버린 로얀에 대한 비웃음도 함께 담겨 있는 웃음이었다. "크크크, 크하하! 저런 바보 같은......" 퍼엉!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입 속에 있던 푸른 구슬이 폭발해 머리가 처참하게 터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 구슬은 모래인간을 조종하는 마법구로서 모래인간이 모두 죽으면 터지게 되어 있었다.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가 퍼밀리어를 사용했을 때, 그 퍼밀리어가 죽으면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가 상처를 입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단지 그 대상이 푸른색 구슬이라는 것과 그것이 폭발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바질리스크의 머리가 폭발하는 순간은 다크로드가 블러드 보그를 사용해 모래인간을 전멸시킨 순간이기도 했다. 29장 깨어나는 기억 이 세상이 아닌 것만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로얀의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 나뭇잎이 무성했고 하늘로 쭉쭉 뻗은 커다란 나무가 가득했다. 아름다운 꽃들이 저마다 자신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런 그들을 더욱 아름답게 비춰주었다. 그런 아름다운 숲 속을 거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범함 속에 어떤 따뜻함이 묻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 여인의 품에는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가 안겨 있었고 활짝 웃고 있는 작은 소년이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말 단란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한 가족이었다. '뭐지......?' 로얀은 하늘에 둥실 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존재를 그 단란한 가족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을 나느 색색깔의 새들이 그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지금 로얀의 육체는 마치 유령 같았던 것이다. 셀피아의 오아시스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온 직후 펼쳐진 광경이 이것이었다. 자신은 유령이 되어 그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얀이 주위를 둘러보며 그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기려 할 때! 화아악! 눈앞의 풍경과 단란한 가족이 빛에 휩싸이며 지워졌다. 그러자 태양도 마주보는 로얀의 눈이 강렬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화아악! 그리고 다시 바뀐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로얀은 역시 허공에 떠 있었지만 그의 몸을 관통하고 다니던 새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푸른 하늘과 구름도 없었다. 로얀은 어느 건물 안에 있었고 그의 눈앞엔 조금 전 보았던 가족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평범함 속에 따뜻함이 묻어났던 남자는 붉은 눈동자에 괴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그의 품에는 어린 소년이 안겨 있었다. 남자의 손이 점점 소년의 눈을 향해 다가갈 때 멀리서 어린 소녀를 안고 있던 여인이 절규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남자의 손은 거침없이 돌진했고 소년의 눈을 관통해 눈알을 뽑았다. 걸쭉한 액체와 붉은 피가 솟아 나왔다. 소년은 당연히 미친듯이 몸부림치며 고통에 찬 고함을 질렀다. 흠칫. 남자의 손이 소년의 눈알을 뽑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로얀은 무심결에 자신의 눈을 매만졌다. 그리고 빛의 숲에서 어머니에게서 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저 소년이 나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난 맹인이었던 걸까?' 로얀은 혼돈의 정령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과거에 맹인이었다는 것을 몇 번 스스로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의 일부분을 잃은 지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아악! 로얀이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려 할 때 다시 장면이 바뀌어 버렸다. 마치 무슨 연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린 소녀와 어린 소년이 보였다. 평화로운 마을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 소녀가 소년의 손을 잡고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소년에게는 누구에게나 있는 눈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녀에게 몸을 맡긴 채 무척이나 행복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공에서 그 모습을 보던 로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아악! 그리고 다시 장면이 빠르게 바뀌었다. 이번에는 전쟁터에서 맹인 소년이 처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화아악! 그리고 어느 순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더니 시간이 정지된 듯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그와 동시에 로얀의 몸이 크게 떨리며 그의 눈이 요동쳤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과 거대한 몸집의 드래곤이 하늘에 떠 있었다. 드래곤은 자신이 죽인 카엔이라는 블랙 드래곤으로 그의 육중한 몸이 평화롭기만 하던 시골 마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드래곤의 눈동자가 바라보는 곳에는 맹인 청년과 그 품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고, 그를 마주보고 있는 맹인 청년의 비어 있는 안구에서는 스산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콰가가강......! 거대한 드래곤의 입이 열리며 그곳에서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인 브레스였다. 덮쳐오는 브레스를 보며 청년은 품에 안겨 있는 소녀를 으스러져라 꼬옥 껴안았다. "아, 안 돼! 절대로 안 돼!" 허공에 떠 몸을 떨던 로얀이 절규에 가까운 음성을 내뱉고는 브레스 앞을 가로막앗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금빛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콰가가강! 하지만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블랙 드래곤의 산성 브레스는 로얀의 몸을 그냥 관통하고 청년과 소녀와 함께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을 날려버렸다. "으, 으아아아......!" 화아악! 로얀의 고통에 찬 신음성을 뒤로하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는 누가 옮겨놓았는지 검집으로 다시 들어가 있었고 로얀은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대 다크로얀이 기억을 사라지게 했다고 말햇지만 그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잠시 기억을 잃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을 잃은 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찾는 자는 강한 힘을 얻을 것이다! 전대 다크로얀이 바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시련! 인간의 육체가 나약하다는 것을 감안한 봉인인 것이다. 스스로 기억을 되찾고 자기 자신을 찾는다면 폭주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크으윽......!" 머리를 후벼파는 고통 속에서 로얀은 슬며시 눈을 떴다. 아니, 뜰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장면들 중에서 가장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허공을 가득 메운 드래곤들과 하늘에 떠 있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천족과 마족들... 그들 모두 단 한 존재를 둘러싼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나타난 이 광경은 조금 전과는 뭔가가 달랐다. 정말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이들 중 천사의 새하얀 깃털도, 악마의 칙칙한 박쥐 날개도 달지 않은 존재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엘프의 모습, 어떤 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 하나같이 강한 힘과 위압감을 뿜어대고 있었다. 바로 신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로얀에게 너무도 친숙한 기운을 풍기는 네 사람이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현재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 이전의 불의 정령왕이었고, 드워프의 모습을 한 노인은 땅의 정령왕이었다. 나머지 초록색 짧은 머리스타일의 남자는 현재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 이전의 바람의 정령왕이었으며 푸른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드리운 여인이 현재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 이전의 물의 정령왕이었다. 물론 그들의 이름 또한 이프리트이며, 실피드이고, 엘라임이었다. 그들 중에서 당연히 물의 정령왕이 로얀의 눈에 뚜렷이 박혀들었다. 엘라임과 다른 외모의 여인이었지만 너무도 비슷한 느낌을 지닌 여인이었다.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도 같았고 느껴지는 기운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로얀이 아는 엘라임이 아니었다. "너의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냐!" 허공에 떠 있는 많은 이들 중 가장 강한 힘을 뿜어대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눈앞의 존재에게 물었다. 그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 그는 천사의 날개도 아니고 악마의 박쥐 날개도 아닌, 연기처럼 흐물흐물하지만 결코 흩어지지 않는 검은색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크크크크......" 긴 검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는 그는 대답 대신 괴이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어둠의 기운과 겉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마족이었지만 모든 마족들과 그들을 이끄는 마왕이 그에게 살기를 드리우고 있는 걸로 봐서는 마족도 아닌 듯했다. 사실 여기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은 눈앞의 존재가 결코 마족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은 불의 정령왕보다 더 강한 화염을 뿜어대고, 바람의 정령왕보다 더 빨리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땅의 정령왕보다 더 강한 보호막을 만들어내며, 물의 정령왕보다 더 엄청난 치료능력을 가진 데다가 신의 육체에까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로얀은 허공에 떠서 물의 정령왕의 모습을 보다가 멍하니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모여 있는 그 누구보다도 친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 붉은 눈동자의 그가 괴이한 웃음만 짓자 그에게 질문을 했던 백발 노인이 드래곤 족에게 눈짓했다. 쩌억. 쿠오오오......! 수천 마리의 드래곤이 동시에 입을 벌리며 마나를 끌어 모으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색색깔의 드래곤들이 저마다 종족 특유의 브레스를 입에 담는데도 붉은 눈동자의 남자는 비웃음만 흘렸다. 아니, 정면으로 돌진했다. 쇄애애액! 쿠오오......! 그가 돌진하려 하자 물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이 바람과 물로 그의 온몸을 묶어버렸다. 그러나 물질적인 힘도 엄청난 그였기에 정령왕들은 자신들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콰하하항......! 이윽고 브레스가 그를 덮치자 모든 이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침묵... 모두들 침묵했고 경악했다. 콰하하항......! 드래곤의 브레스가 빨려 들어가듯 붉은 눈동자의 사내에게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양손을 내뻗어 쥐 죽은 듯했던 침묵을 깼다. 콰하하항! 그가 손을 뻗는 순간 그의 양손에서 오색 빛깔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드래곤 족의 브레스였다. 아니, 이제는 그의 양손에서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허공에서도 브레스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콰가가가강! 굵직한 브레스의 비를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브레스의 빛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로얀의 눈으로 밝은 빛이 흘러 들어왔고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화아악! 다시 나타난 장면에는 그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허공에 떠서 오른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운 여인... 물의 정령왕이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이미 사라져 있었으며 중간계의 대지는 퍼즐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스윽.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의 손이 움직였다. "안 돼......!" 로얀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목이 찢어져라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이 순간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자신으로 보였고 그 손에 들린 여인이 엘라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푸욱! 하지만 그의 음성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의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왼손을 여인의 심장 부위로 찔러 넣었다. 정령왕은 죽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손이 가슴에 박히는 순간 여인의 몸이 흑빛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여인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으아아아아......!" 로얀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붉은 눈동자의 남자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뽑혀져 나온 다크리온이 강한 마기와 함께 금빛 오러르 뿌렸지만 모두 그냥 관통할 뿐이었다. 하지만 로얀은 멈추지 않았다. "으아, 으아아아......!" 그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파지지직! [젠장! 여기서 다크리온을 들고 있는 인간을 보게 될 줄이야!] 그때 갑자기 하늘이 찢어지며 그 속에서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에 삐죽머리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로얀의 뒷덜미를 붙잡고 자신이 찢고 왔던 하늘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크아아아......!" 불빛 하나 없는 칙칙한 동굴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끝 부분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로얀이 긴 흑발으 휘날리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꽉 막힌 동굴이라 그런지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왔다. 후웅. 콰가가강......! 그의 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허공을 갈랐다. 금빛 오러를 뿌리며 날아간 다크리온은 동굴을 부숴버릴 듯 벽을 깎아버렸다. "하아... 시끄러워." 로얀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금빛 오러를 뿌리며 날뛰고 있을 때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듯 삐쭉삐쭉 산발이 되어 있었으나 아무튼 남자답게 생긴 이였다. 로얀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다크리온이 내는 위력은 엄청났기에 지금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했다. 스윽. 하지만 로얀이 아직 검집 속에 들어 있는 에리오네에게 손을 뻗으려 할 때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턱! 로얀의 품으로 빠른 속도로 파고든 그는 다크리온을 쥐고 있는 로얀의 팔목을 왼손으로 붙잡고는 은은히 빛나는 돌멩이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뻗었다. 후웅, 퍼억! 팔을 휘두르는 남자의 근육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그의 주먹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로얀의 복부에 박혔다. "크아아악!" 파지지직! 그 순간, 로얀의 복부에 박혀 있는 남자의 손에서 진득한 마기와 함께 검은 스파크가 일어나자 로얀은 괴성을 지르며 그만 다크리온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챙강......! "크아아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로얀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츠츠츳. 무너져 내리는 로얀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빠져나와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의 손에 쥐여져 있는 돌멩이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털썩. 바닥으로 고개를 묻는 로얀을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고 바닥에 놓여 있는 마검 다크리온을 바라보았다. "일단 드림 스톤이 정신을 되돌려 주긴 했고... 저 빌어먹을 검만 아니었다면 내가 인간 따위를 구할 일은 없었을 텐데, 운이 좋은 건가?"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있는 돌멩이를 보며 드림 스톤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 정체 모를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로얀이 던전 속에서 정체 모를 남자에게 구함을 받고 있을 때 셀피아에 남은 다크로드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마을 안에 서 있었다. 블러드 보그로 모래인간들을 모두 해치운 그는 곧장 로얀을 찾아 떠났다. 로얀과 바질리스크가 사라진 방향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치솟았기에 의외로 쉽게 그를 찾을 수 있엇던 것이다. 말라버린 오아시스에 도착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머리카락까지 빛에 잠기며 사라져 버리는 로얀이었다. 그가 그를 잡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미 로얀은 그 자리에 없었다. 로얀이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지자 다크로드는 왕의 기운으로 그를 찾으려 했다. 기운만 감지한다면 그에게 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듯 왕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로얀이 사라진 자리에 서서 그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찾을 수 없자 다크로드는 발길을 돌렸다.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다른 방법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콰직. 발길을 돌리는 그의 발에 머리가 박살나 진득한 액체를 흘리고 있는 바질리스크가 걸렸다. 로얀을 사라지게 한 원인이 바로 이놈이었기에 다크로드는 발에 강한 힘을 실어 바질리스크의 몸을 밟고 지나갔다. 화르르륵......! 마을을 태우는 붉은 불꽃은 아직도 여기저기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했다. 사박, 사박...... 마을의 입구 쪽으로 나온 다크로드의 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청년이 보였다. 거만하게 자신과 왕을 바라보던 그 인간 청년이었다. 사박, 사박...... 다크로드는 괜한 데 시간을 뺏기기 싫어 청년을 그냥 지나치려 했다. "자, 잠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청년은 다크로드가 다가오자 얼굴이 환해졌다가 그가 자신을 횅하니 지나쳐 가자 당황한 듯 그를 불러세웠다. 셀피아에서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사막을 건너야 했다. 사막은 혼자서 건너기에는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 사막에는 도적 떼도 있었고 갖가지 몬스터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은 사막의 기후였다. 그런 위험한 사막을 혼자서 지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귀족 청년은 다크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고 갔던 모래괴물들을 단 한 방에 날려버린 다크로드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다크로드는 청년의 외침을 흘려버렸다. 살려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판에 자신을 명령조로 불러 세운 그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왕을 찾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네 녀석! 나는 대 백작가의 장남이다!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너의 동료는 이미 죽은 것 같고... 나를 안전하게 호위해 준다면 큰상을 내릴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너에게 수배령을 내리겠다!" 멈칫. 멀리 앞서 나가던 다크로드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춰졌다. 그 모습에 귀족 청년은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하하, 어리석진 않구나! 원한다면 내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너를 기사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사박, 사박...... 다크로드는 몸을 돌려 귀족 청년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자 청년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사박. 이윽고 코앞에 도착한 다크로드가 투구 속에서 그 붉은 눈을 빛내며 귀족 청년을 응시했다. "하, 하! 부담스러우니 물러... 컥!" 턱. 꽈악. 다크로드의 손이 번개처럼 나아가 청년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커컥!" 발이 공중에 뜬 청년은 숨이 막히는지 인상을 구기며 발버둥쳤다. "누가 죽었다고 했나? 그리고 그분은 나의 동료가 아니다. 나의 주인, 나의 왕이시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는 다크로드의 말 속에는 온몸을 짓누르는 강한 살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손에 잡혀 있는 인간 청년을 던져버렸다. 훙. 털썩. 귀족 청년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쿠, 쿨럭!" 사박, 사박...... 숨을 헐떡이는 인간 청년에게서 시선을 뗀 다크로드는 몸을 돌렸다. 그는 이미 뮤트에서 멀지 않은 숲 속으로 가기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곳에는 로얀이 진화시켜 놓은 어둠의 정령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들을 모두 동원해 로얀을 찾을 생각인 것이다. 로얀이 어떤 위험한 상황에라도 처한 것이라면 모든 어둠의 정령들을 동원해 한시라도 빨리 그를 찾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사박, 사박...... 앞으로의 일이 정해졌기에 다크로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른 속도로 사막 위를 걸어갔다. "쿨럭! 나, 나도 같이 가!" 백작가의 장남이라는 귀족 청년도 다크로드의 모습을 쫓아 급히 달려 나갔다. 다크로드가 애타게 찾고 있는 로얀은 그때 어느 동굴 안에 있었다. "크으윽......" 로얀은 깨질듯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여어!" 아니,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이상한 남자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상체를 벗고 있어 우락부락하고 단단한 근육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로얀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살짝 웃었다. "더럽게 오랫동안 벽만 보고 살아서 말이야." 오랫동안 동굴 벽만 보고 살았기 떄문에 몇만 년 만에 찾아온 로얀이 신기해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긴 어디지?" 로얀의 대꾸에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언제 인간이 자신에게 말을 놓은 적이 있었던가? 왠지 호기심이 동하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인간이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 궁금했다. 지금껏 그 어떤 생명체도 찾아온 적이 없는 바로 이곳에 말이다. "그래, 그래. 말 까는 게 대수냐?" 그는 약간, 아니 무척이나 특이한 남자였다. 좋게 말하면 성격이 참 쾌활한 호탕항 남자였다. 그는 혼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로얀은 자신의 말에 답하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그를 보다 문득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다크리온을 보게 되었다. 로얀의 시선을 느낀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다크리온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거?" 스릉. 웅웅....... 그리고 그는 다크리온을 뽑아 들었다. 주인을 선택하는 마검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뽑은 것이다. 로얀의 동공이 커지 건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마검은 그의 손 안에서 가늘게 울기까지 했다. "할 이야기가 많을 것 ㄱㅌ은데... 통성명이나 하지." "....." 이던전에서 존재하는 저 남자는 몽마가 만들어낸 꿈일까? 아니면...... 로얀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다크리온을 장난감 검처럼 휙휙 돌리다가 검집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긔고 그것을 옆에 던져놓았다. "뭐, 내가 연장자이니 먼저 할까나? 난 발록들의 수장인 파라무트라고 한다. 그러는 넌 누구냐?" 그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로얀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바보같이 몽마의 함정에 빠져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갇혀 지낸 비운의 마족 말이다. "다크로얀." 로얀은 잘막하게 대답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자신을 발록이라 소개한 파라무트는 아군일까, 적군일까? 또한 그에게는 물업로 것이 너무도 많았다. 평소 무관심한 로얀이었지만 지금나큼은 파라무트에게 궁금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흐음... 인간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지?" 턱을 쓰다듬으며 묻는 파라무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찾을 것이 있어 들어왔다." "엥? 찾을 거? 여기에 뭐가 있다는 것지?" 파라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신이 갇혀 있는 이 동굴에는 어떠한 물건도 없었다. 인간이 죽을 각오까지 하며 찾을 만한 물건은 더더구나 말이다. "드림 스톤." "뭐?" '인간이 드림 스톤을 알고 있다니!' 파라무트는 놀란 눈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서 돌멩이를 꺼냈다. 그것은 검은색의 돌이었지만 흑빛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게 드림 스톤인가?" 로얀은 이렇게 쉽게 찾게 되자 도리어 당황했다. 드래곤이 만든 함정이 고작 이 정도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원하는 물건이 맞나 보군. 하지만 원한는 것을 얻었다고 해도 여기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 역시나 드래곤이 만든 연극다웠다. 하긴 이곳은 물리적 힘에 있어서는 최강이라는 발록의 수장조차 나가지 못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로얀은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을 굳혔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파라무트는 눈을 빛냈다. '어쩌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모를 희망이 샘솟는 파라무트였다. "여기서 나갈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뭐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로얀이 급히 되물었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이 그에게는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먼저 그 더러운 몽마 나세스 자식이 만든 이곳에 대해 설명해야겠군. 흐음, 그러니까... 이곳은 일단 들어오면 들어온 자의 기억 속에서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을 차례차례 보여주지. 그리고 그 와중에 미쳐버린다면 그냥 한줌 피가 되어 뒈지게되지만 만약 모두 견뎌낸다면, 마지막엔 그 기억들 중 가장 금찍한 걸 보여주게 되지. 네가 미쳐 죽을 뻔했을 때가 아마 마지막이었을 거야." 로얀 또한 정신을 잃기 전의 그 장면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아니, 엘라임과 비슷한 여인을 죽이는, 자시과 너무도 닮은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신을 잃기 전과는 달리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로얀의 눈빛 속에서 그 의문을 느낀 파라무트가 그 답을 말해주었다. "드림 스톤에는 정신적이 상처를 입은 자를 치료해 주는 기능이 있지. 나는 그걸로 너를 구했고."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기억도 몽마가 재생시킬 수 있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기억 상실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묻어두는 거니까. 실제로 갑자기 기억을 되찾는 이들도 있지 않나?" "......." "보아하니 기억을 잃었나 보군. 그러니 보통 인간이 마지막까지 통과할 수 있었겠지." 스윽. 파라무트는 몸을 일으켜 동굴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뭔가를 생각했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은 마지막ㄷ에 본 환상 속의 인물 중 가장 강한 자를 죽이는 것뿐이야." 로얀의 환상 속에서 가장 강한 자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검은 날개를 휘날리며 파괴를 행하던 남자! 그러나 그를 죽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강해도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래곤 전체와 싸우는 게 나을 것이다. "당신은 왜 탈출할 수 없는 거지?" "몽마 나세스가 마지막에 내개 보여준 환상 속에서 가장 강한 이는 나의 아버지였다. 사실 상대는 누가 되었든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육체에 상처를 입힐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파라무트의 말을 로얀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환상 속에서는 물리력이 없는 유령이 된다는 것을 몸소 겪었으니 말이다. "오래 전, 단 한 번 작은 상처를 낸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난 그날 죽을 뻔했지." "......?" 로얀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환상이 어떻게 사람을 공격한단 말인가? "어떠한 상처라도 입히면 환상은 상대를 반격하며 공격한다. 때문에 단 한 방에 심장을 꿰뚫어야 한다. 환상의 존재가 그 누구든 간에 환상의 약점은 심장이 있는 가슴 부분이거든." 사실 파라무트는 아버지의 공격을 받고 이리저리 도망다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공격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처음 갇힌 곳이자 드림 스톤이 있는 이곳까지 와서야 겨우 몸을 쉴 수 있었다. 이곳 중심부에는 몽마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태풍으로 본다면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드림 스톤을 부순다면 탈출할 수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드림 스톤의 재질이 무엇인지는 마계에서조차도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떠한 수를 동원해도 탈출하기 위해서는 환상을 부숴버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일격필살! 단 한 방에 끝내야 한다!" 그는 그렇게 외치고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때 본 너의 상대는 도대체 누구냐?" 그때 그도 보았다. 참혹하게 변한 세상과 그 위에 떠 있던 검은 날개의 남자를...... 그런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도대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 로얀은 그가 누군지 짐작이 갔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그때 본 환상은 전대 혼돈의 정령왕의 것이었다. 정령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그의 기억까지 자신에게 흘러 들어왔기에 그런 환상이 보인 것이리라.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였다. 모든 봉인이 풀려 있는 혼돈의 정령왕은 차원계를 날려버릴 정도의 힘을 지닌 괴물이었다. "그를 죽여야 한다면 죽이겠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 만약 첫 공격에 실패하면 넌 죽는다." "그래도 할 수밖에." 로얀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파라무트를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가?" "응?" 로얀의 시선은 어느새 파라무트가 들고 있는 드림 스톤에게로 옮겨졌다. "뭐, 이 돌멩이를 이용하면 과거의 기억을 꿈처럼 보여줄 수는 있지. 그렇게 되면 기억을 되찾을지도... 하지만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미쳐버린다면... 그때처럼 드림 스톤으로 치료해 주면 되지 않나?" 정말 무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파라무트였다. "굳이 기억을 되찾을 필요가 있나? 억지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를 거다."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 말을 끝으로 로얀은 입을 다물었다. "휴우,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라니까. 뭐, 그럼 결정난 건가? 오늘은 잠이나 자. 내일 하지 뭐." 파라무트는 기지개를 켜며 동굴 구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림 스톤으로 인해 이제 막 깨어난 그에게 또 같은 짓을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파라무트는 로얀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자신은 여기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지금 이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그렇게 덜어져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크리온을 어떻게 만질 수가 있지?" 먼저 말을 꺼낸 건 뜻밖에도 로얀이었다. "그 빌어먹을 검을 내가 만들었으니까." 파라무트가 눈을 치켜뜨며 그렇게 말하자 못 믿겠다는 의지가 듬뿍 담겨 있는 듯한 로얀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제기랄! 내가 만들긴 했는데, 난 망치질만 했다. 빌어먹을!" 울분을 토하며 파라무트는 다크리온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거 한 마왕과 내기를 한 파라무트는 그만 그에게 지고 말았다. 내기의 대가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었는데, 내기에서 이긴 마왕은 파라무트에게 망치질을 시켰다. 그냥 마음대로 휘두르는 망치질이라면 이렇게 울분을 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마왕은 하나의 검을 만들기 위해 옆에서 이것저것 쉴 새 없이 잔소리를 해대며 그에게 망치질을 시켰던 것이다. 그것도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그 검의 재료가 오리하르콘에 그 마왕의 뼈가 추가된 엄청나게 단단한 것이라 파라무트는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다 늙은 마왕과 단 둘이 동굴에 처박혀 망치질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재료가 재료인 만큼 물리적인 힘으론 최강인 파라무트를 마왕이 이용한 것이다. 그의 눈에 파라무트는 망치질하기에 딱 알맞은 적임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피와 땀이 서린 다크리온을 그가 잊을 리 없었다. 그에겐 자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는 검이었으니까. 그의 이야기를 들은 로얀의 생각은 하나였다. '바보.' 마왕과의 내기에 져서 천 년 동안이나 망치질을 하고, 몽마에게 속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이곳에 갇혀 있다니... 그는 바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크아아악......" 칙칙한 동굴 속에서 로얀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기억을 되찾기 위한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바닥에 앉아 있는 로얀의 오른손에는 드림 스톤이 들려 있었다. 그곳에서 영롱한 빛과 함께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와 검은 전류처럼 로얀의 전신을 감돌았다. 파지직! 평소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던 로얀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로얀은 환상 속에서, 꿈속에서 헤엄치며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봤던 장면을 되풀이해 보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눈을 잃고 가족을 잃는 그 광경을! 그것을 볼 때마다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며 점점 과거의 아픔이 살아났기 때문인지 로얀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 역시 커져만 갔다. 그가 눈을 감고 꿈 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붉은 머리의 파라무트는 다크리온을 들고 아무 말 없이 로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크아아! 커억......!"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로얀이 큰 소리로 외친 뒤에야 묵묵히 앉아 있던 파라무트가 움직였다. "허억, 허억......" 로얀은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쓰러져 있던 로얀은 파라무트가 다가오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를 꽉 깨물고 일어서는 그의 눈에서 독기마저 느껴졌다. 츠츠츳. 파라무트의 오른손에서 강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드림 스톤을 활성화시키려면 보통의 마기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또 간다." 파라무트는 자신의 오른손을 로얀의 오른손 위에 얹어놓았다. 그러자 로얀의 손 안에 있던 드림 스톤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검은 전류가 흘렀다. 파라무트의 마기를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파지지직! 그 전류가 잠잠해졌을 때 파라무트는 손을 떼었다. 로얀은 이미 또다시 꿈 속 여행을 시작한 듯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크으윽!" 아니, 그의 비명소리가 서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놈 인간 맞아? 보통 인간이라면 영혼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을 텐데." 인간들에게 괴물이라 불리는 파라무트가 로얀을 괴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에 익숙한 그라도 드린 스톤과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몽마 나세스의 마법진이 보여주는 환상은 고통스러웠다. "크아아악!" 조금 전처럼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로얀을 보며 파라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로얀의 이와 같은 행동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환상이 끝나고 지쳐 쓰러져 있던 그가 다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면 파라무트가 다가와 다시 드림 스톤에 마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러면 로얀은 다시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로얀이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마족답게 아무 말 없이 드림 스톤에 마기를 넣어주던 파라무트가 반나절이 지나자 그것을 멈추고는 질렸다는 듯이 로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다크로얀! 이제 그만해. 아무리 네가 괴물 같은 인간이라도 더 이상 하면 정말 미쳐버린다니까. 쉬엄쉬엄 하자고." "헉헉... 난 인간이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크으윽!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컥! 계속 부탁한다." 환상 속을 헤매고 나올 때마다 로얀은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기억의 조각이 모두 모여 하나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그래. 넌 인간이 아닌 괴... 뭐, 뭐? 너 정말 인간이 아니야?" 건성건성 대답하던 파라무트의 고개가 획 돌아가며 눈이 큼직하게 떠졌다. "크흑! 혼돈의 정령왕이라고 하지." "뭐? 도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변한 거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굴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던 파라무트가 돌연 멈추어 서서 로얀을 바라보았다. "흠흠, 아무튼 그렇단 말이지? 다섯 번째 정령왕이라... 그럼 다시 시작하자." 파라무트는 다시 오른손에 마기를 모으며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로얀이 정말 정령왕이라면 이 정도로 영혼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파지지직! "크으으윽......" 로얀이 다시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파라무트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의 육중한 근육이 불끈거리며 뚜둑, 소리를 내었다. 스오오오......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동굴 안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아니라 동굴 속에서 부는 바람이었다. 파라무트는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로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휘오오오......! 파지지직! 바람은 로얀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전신에서 금빛 전류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얀이 이런 변화를 보인 것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 드림 스톤을 사용한 지 하루가 지나서였다. 이 동굴 안에서 밖을 보면 밖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고, 햇빛 또한 들어왔다. 그러나 동굴 안에서 보는 밖의 풍경은 셀피아의 오아시스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눈앞에 바다처럼 펼쳐져 있던 모래는 보이지 않고 푸른 초목만이 가득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 동굴 밖의 풍경인 것이다. 그러나 푸른 초목을 쫓아 동굴 밖으로 나가면 몽마 나세스가 만든 환상이 시작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햇빛이 들어오고 밖의 풍경이 보이는 관계로 낮과 밤도 구별할 수 있었는데, 로얀이 이런 변화를 보인 것은 햇빛이 스며들던 아침이었다. 로얀은 몰라도 파라무트는 잠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해달라는 대로 계속해서 드림 스톤에 마기를 주입시켜 주었다. 그리고 로얀은 밤새도록 환상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햇살과 함께 로얀의 전신이 금빛으로 빛나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 속으로 강한 힘이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파라무트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겠지만 파라무트는 그가 큰 상처를 입었다가 이제야 정령왕으로서의 힘을 회복한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렸다. 쿠오오오......! 로얀의 몸 속으로 바람이 빨려 들어갔고 전신을 감돌던 금빛 가루가 그의 피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스르륵. 감겨 있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뜨이자 동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거대한 힘도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을 뜬 로얀의 흑색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파라무트는 알고 있었다. 지금 로얀의 몸 속에서는 강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을 거라는 걸! 그 자신도 그렇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파라무트의 모습은 본모습이 아니었다. 로얀은 눈을 뜨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레이나... 이리아... 으드득!"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열리고 상반된 감정이 담겨 있는 두 이름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로 흘러나온 이름에서는 진득한 슬픔과 아련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고 뒤따라 나온 이름에서는 진득한 살기와 처절한 증오가 담겨 있었는데 특히 이리아라는 여인의 이름을 말할 때의 로얀의 모습은 파괴의 마족이라는 파라무트조차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싸늘했다. 그는 돌아온 것이다. 모든 기억의 조각을 맞추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로얀의 몸 속에서 서로 나가려고 아우성치던 힘들은 이제 몸 속 여기저기에 골고루 퍼져 잠잠해져 있었고, 그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심연의 바다 같은 그의 눈동자에서 금빛 잔상을 남기며 붉은 혈광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파라무트, 동굴을 나가면 바로 환상이 시작되는 것인가?" "지, 지금 가게?" "지금의 나라면 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을 수 잇을 것 같다. 그는 환상일 뿐이니까." "그렇다면야... 그럼 나와 같이 가지." 파라무트가 다크리온을 들고 다가오자 로얀이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환상은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때문에 같이 나간다고 해도 서로 갈라져 다른 환상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로얀의 그런 의문을 그의 얼굴 속에서 읽은 파라무트가 활짝 웃으면서 다크리온을 들어 보였다. "나느 다크리온 속에 있을 테니... 부탁 좀 할게.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 말이야." 스오오오! 츠츠츳. 그리고 로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파라무트는 검은 연기로 화해 다크리온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가 다크리온 속으로 들어가자 넙적한 다크리온의 검신 위로 붉은 선이 굵게 그려졌다. 붉은 피처럼 보이는 그 붉은 선은 금방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파라무트는 로얀이 거절할까 봐 잽싸게 다크리온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꺼내주기 싫다 해도 그 자신의 검을 두고 갈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말이다. 로얀은 어차피 자신을 구해 주었던 파라무트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묵묵히 바닥에 있는 다크리온을 집어 들었다. '묵직하군.' 파라무트가 안에 들어가서 그런지 다크리온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로얀은 훨씬 무거워진 다크리온을 스윽 훑어본 뒤 검집에 집어넣었다. '엘라임을 만나기 전에 이곳에서 끝내야 할 일이 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로얀을 재촉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파라무트였다. [빨리 가자고! 밖으로!] 다크리온이 웅웅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 있는 파라무트가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동굴 속에서 해방된다는 생각에 파라무트는 들떠 있었다. 그는 로얀이 나세스의 던전을 부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 같은 로얀의 흑색 눈동자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초목을 바라보았다. 파라무트가 들어있는 다크리온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로얀의 허리에 매여 있었다. "가자." 로얀의 음성이 낮게 울림과 동시에 그의 발걸음 소리가 동굴 가득 울려 퍼졌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단 일격에 전대 다크로얀의 심장에 검을 박아야 한다! 뚜벅뚜벅...... 파지지직! 로얀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동굴 입구로 다가가자 강한 빛이 그를 덮쳐왔다. 몽마 나세스가 만든 마법진이 발동한 것이었다. 웅웅...... 그의 품속에 들어 있는 드림 스톤도 미세하게 떨려왔다. 나세스가 만든 마법진은 주위의 마기를 끌어들여 드림 스톤에 전달해 주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드림 스톤은 지금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파하하핫! 마법진이 발동하면서 뿜어지는 빛 속에는 검은 마기도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로얀을 집어 삼켰다. 화아아앗! 로얀은 유령이 된 듯 어느새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전대 다크로얀이 서 있었다. 던전 안에서 빠져나갈 때에는 마지막 환상만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콰가가강! 굉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대 다크로얀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종족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던 로얀이 눈동자를 번뜩였다. 츠츠츳. 그의 전신에서 흑색 스파크가 이는가 싶더니 흑색 기류가 그의 등을 휘감았다. 그리고 커다란 뭔가가 솟아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전대 다크로얀이 지니고 있는 날개와 똑같은 것이 그의 등에 생성되고 있었다. 웅웅웅...... [이, 이봐! 저 괴물이 너였어?] 다크리온 속에서 주위의 모든 것을 보고 있던 파라무트는 그렇게 외쳤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로얀의 모습은 전대 다크로얀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다. 전대 혼돈의 정령왕이다." [뭐? 혼돈의 정령왕이 언제 생겼기에 벌써 전대고 자시고야!] 정령왕이라는 존재는 상급 신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의해서건, 어떤 사건으로건 소멸되지 않는다. 그들이 소멸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소멸시킬 때뿐이었는데, 사실 그 방법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영혼이 소멸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다시는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영원히 산다고 할 수 있는 이들 중 자신의 이름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자신이 얼마나 이 던전에 갇혀 있었다고 새로운 정령왕이 벌써 다른 이에게 이름을 물려주었단 말인가? 파라무트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하지 않고 로얀은 에리오네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뽀족한 에리오네가 상대를 꿰뚫기에는 더 쉬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르릉...... 마검인 자신(?)보다 에리오네가 이 상황에서 더 필요하다는 것을 파라무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니, 그는 도대체 자신이 여기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로얀은 처음에는 어색하게 움직였지만 곧 자연스럽게 날개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흑색 날개를 퍼덕이며 전대 다크로얀 바로 앞에까지 날아갔다. 로얀은 이 환상 속에서 유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전대 다크로얀은 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콰가가강! 전대 다크로얀의 양손에서 강한 마나의 파동과 함께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지옥의 불꽃이 되어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태우기 시작했다. 스윽. 그 모습을 보며 로얀은 에리오네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 방에! 제발 성공해라......] 파라무트도 생각을 접고 침을 삼키며 로얀을 응원했다. "환상을 베는 것은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때다. 진심으로 상대를 꿰뚫고 싶을 때." 스윽. 로얀의 눈동자가 전대 다크로얀의 눈동자와 맞부딪혔다. 콰하하항...... 에리오네의 검신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순간, 로얀은 그것을 수평으로 눕힌 채 전대 다크로얀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당신은 환상일 뿐!" 인정을 잃은 로얀이었기에 이 시련이 너무도 쉬운지도 모른다. 전화위복의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스윽. 푸욱. 그리고 전대 다크로얀의 팔이 로얀의 가슴에 박혔다. 서로의 가슴에 각기 검과 손을 박은 채로 둘은 그렇게 허공에서 정지했다. [......] 다크리온 속에서 파라무트는 침을 삼키며 결과가 어떻게 날지 주시했다. 푸화확! 붉은 피가 로얀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왔다. 실패한 것일까? "엘라임... 조금만 더 기다려줘." 쩌쩌쩍. 로얀의 말과 함게 전대 다크로얀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전대 다크로얀이 손을 움직인 것은 로얀 때문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날아오던 천족 천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붉은 피는 천사의 피였다. 그 천사의 피가 유령이라 할 수 있는 로얀의 몸을 뚫고 뿜어진 것이다. 쩌쩌적! 콰지지직! 전대 다크로얀을 중심으로 환상 속의 세계 전체가 흔들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더 심해져 이윽고 커다란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콰하하하항......! 로얀은 온몸을 덮쳐오는 강한 빛에 조용히 눈을 감고 마법진이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콰하하항......! 부서진 하늘 뒤로 또 다른 하늘이 나타났다. 로얀은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엔 파라무트가 오랜 세월을 지냈던 동굴이 있었다. 넝쿨로 둘러싸여 잇는 그 동굴은 음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왠지 훨씬 맑은 듯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로얀은 주위의 초목을 바라보았다. 웅웅,,....! [해, 해냈구나] 다크리온 속에서 파라무트가 말을 더듬거리며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는 박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다크리온의 검신에서 붉은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스팟, 그때 갑자기 로얀 앞에 빛이 뿌려지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족이 여긴... 응?" 빛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정말 너무도 아름답게 생긴 남자였다. 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는 그에게서는 신비로움마저 느껴졌다. 짝! 로얀에게 다가오던 청년이 갑자기 박수를 치며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로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 살아남았잖아!" 청년은 진심으로 놀라며 로얀의 이곳저곳을 바라보앗다. 스릉...... 로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크리온을 뽑았다. 그의 안광이 살기로 짙게 물들고 있었다. "드래곤인가?" "하하하! 정말 건방지다는 것도 사실이었군. 뭐 아무튼 난 네가 살아난다에 걸었고, 너는 내가 내기에서 이기게금 해줬으니 내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지." 청년은 말과 함께 허공에 손을 뻗었다. 츠츠츳! 그러자 허공에서 강한 빛과 함께 자그마한 갈색 두루마기가 나타났다. 청년은 그것을 손에 쥐고 로얀에게 던졌다. 로얀은 얼떨결에 날아오는 두루마기를 왼손으로 받았다.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다." 그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는 로얀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무슨 속셈이지?" "하하! 빛의 성지로 가는 지도는 원래 약속했던 거고, 드림 스톤 같은 쓸모없는 돌멩이는 필요없다. 그리고 내가 줄 선물은 충고다. 아무리 인간이 날고 뛰어봤자, 너희는 그냥 살짝 밟으면 죽는 벌레일 뿐이야." 스윽. 금발의 미청년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뒤를 힐끔 바라보며 혀로 붉은 입술을 살짝 핥았다. "빛의 성지로 가지 말라는 소리다. 그곳에는 나와 나의 동족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피식. "그나저나 이리아... 아니, 내기에 진 이실리아의 얼굴 볼 만 하겠는데?" 츠츠츳! 팟! 그 말을 끝으로 금발의 미청년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빠른 속도로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마법을 사용해 다른 곳으로 사라진 것이다. 로얀이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들 드래곤 중에 자신의 원수 이리아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츠츠츳! 팟. "이봐, 괜찮아?" 파라무트가 다크리온에서 나오며 로얀에게 말을 건넸다. "빛의 성지로 반드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난 빛의 성지로 가겠다." "그래? 그럼 난 이만 마계로 돌아가 봐야겠어. 이 은혜는 다음에 반드시 갚기로 하지. 그럼!" 츠츠츳. 그의 몸에서 강한 마기가 휘몰아쳐 나오는 가운데 파라무트는 여유있는 웃음을 담은 채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 그는 마기에 휩싸이기만 할 뿐 사라지지 않았다. "엥?" 잠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네가 갇히고 난 후 중간계와 다른 계를 막고 있던 결계가 다시 강해졌다." 결국 로얀은 이 말을 시작으로 결계에 대해 긴 설명을 해주었다. 중간계로 내려오면 힘이 반감된다는 것부터 빛의 성지와 룬이라는 통로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파라무트는 힘이 반감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빛의 성지에 관해서는 지금 로얀에게서 처음 들었다. "이런 젠장할!" 츠츠츳. 팟! 파라무트는 그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마계로 간 것이 아니라 로얀의 검인 다크리온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럼 빛의 성지까지 잘 부탁해.] 던전 속에서 상당히 게을러진 파라무트는 걷기도 귀찮았기에 다크리온 안으로 잽싸게 들어간 것이었다. 너무도 뻔뻔하게 로얀에게 그렇게 말한 파라무트는 검 속에서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라무트는 다크리온 전체로 세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검의 그립만 밖으로 나와 있어도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 로얀은 왼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펼쳤다. 지도를 꼼꼼히 훑어보던 로얀은 지도를 든 상태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츠츠츳! 로얀의 등에서 검은 기류가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예의 그 형체가 없는 검은 날개가 생성되었다. 이것은 정령들의 계급이 높아지면서 저절로 생겨나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가 정령왕으로서 강해지면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었다. 때문에 로얀이 최상급의 다크니스에게 전해 주지 않는 한 그들은 이 날개를 펼칠 수 없는 것이다. 로얀의 등에 날개가 생겨도 파라무트는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걱정했다. [험험! 그런 난 한숨 자고 있을게.] "......" 그러나 로얀은 아무 말 없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파라무트가 다크리온 안에 있는 이상 그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상 로얀의 뒤를 지켜주던 다크로드는 지금 그가 있는 곳으로 올 수가 없었다. 로얀이 셀피아가 아닌 전혀 다른 곳으로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정령왕과 한 발록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30장 천사 아델레이트 드넓은 창공 위로 검은 선이 그어졌다. 흑빛 보석 가루를 부리며 날아가는 정체불명의 그것! 슈아아앙...... 바람을 찢는 굉음과 함께 구름을 흩뿌리며 하늘을 질주하는 그것은 검은 날개를 등에 단 로얀이었다. 그 모습에 하늘을 누비던 수십 마리의 새들이 화들짝 놀라며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다. 지상의 사람들이나 다른 존재들이 자신이 검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것을 보면 성가신 일이 생길 수도 있기에 그는 일부러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사실 인간들이라면 밑에서 어떤 소란을 피우건 상관이 없겠지만 드래곤이나 다른 존재라면 충분히 성가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슈아아앙......! 구름 뒤 하늘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천계는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천계나 마계 모두 어디에 있는지 발견된 적은 없지만 분명한 건 정령계처럼 마계나 천계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검 속에서 잠을 자는지 파라무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고요한 침묵 속에 로얀은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드래곤이 나는 것보다 빠르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슈아아앙......! 로얀의 한 손에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펄럭이는 지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빛의 성지가 표시된 지도였다. 오래 전 땅 속에 묻힌 빛의 정령들의 고향이자 빛의 성지라 불리는 곳은 의외로 찾기가 쉬웠다. 우연인지 어떤지 드림 스톤이 있던 던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데다가 로얀이 높은 하늘 위에서 드래곤보다 더 빠르게, 자유자재로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로얀은 그곳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박. 로얀의 발이 모래 속에 살짝 파묻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질리도록 보아온 모래의 바다였다. 휘오오오...... 모래의 바다가 로얀을 반기며 출렁였다. 스윽. 로얀은 묵묵히 손에 들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때 만났던 빛의 정령이 온 건가?" 그의 눈동자가 바로 앞에, 마치 용암 덩어리가 땅을 파들어간 것처럼 타원형으로 매끄럽게 뚫려 있는 거대한 굴을 직시했다. 그 안쪽에서는 밝은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굴을 쳐다보는 순간 예전 엘라임과 빛의 정령을 만났을 때 빛의 정령이 빛의 성지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천족과 함께 중간계로 내려왔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저 굴 안에는 빛의 정령과 천족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스윽. 탓. 로얀은 지도를 품속에 구겨 넣은 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파라라락......!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땅의 숨결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손을 벌려오는 바람에 거칠게 펄럭거렸다. 파라락! 얼마나 밑으로 떨어져 내렸을까? 몇 분이 지나서야 로얀은 땅을 다시 밟을 수가 있었다. 그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쿠쿵. 로얀의 발이 지면을 밟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의 발은 무릎까지 땅에 박혀버렸다. 콰드득! 후두둑. 땅 속에서 발을 빼내 지면을 새롭게 밟던 로얀은 순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화아아앗! 갑자기 전신을 엄습해 오는 밝은 빛 때문이었다. 태양도 정면으로 보는 로얀이었기에 빛으로 인한 고통은 순간이었다. 그는 눈을 살며시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대낮보다도 더 밝았다. 파지지직! [우갸갸갹!] 마침 마검 다크리온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가늘게 떨리더니 그와 거의 동시에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났는지 파라무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로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눈 앞의 광경이 그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무슨 돌인지 모를 새하얀 돌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밝은 빛은 바로 그 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길게 뻗은 통로가 그 새하얀 돌로 온통 뒤덮여 있었는데, 돌들이 뿜어내는 밝은 광채에서는 상당한 신성력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괜찮나?" 주위의 광경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로얀이 그제야 다크리온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파라무트는 마족이었고, 마족과 상반되는 힘이 바로 신성력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괜찮지. 갑자기 느껴진 신성력에 따끔거렸을 뿐이야. 이 정도 신성력에 발록의 수장인 내가 상처를 입을 리가 없지! 으하하하!] "......" 다크리온 속에서 웅웅거리며 말하는 그의 말엔 왠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로얀은 다크리온의 그립을 잡고 뽑았다. 스릉. 흑색의 마검 다크리온도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 광채 앞에서는 밤하늘에 빛나는 반딧불에 불과했다. 묵직. 다크리온은 파라무트의 몸무게만큼(?) 묵직해진 듯했다. 사실 발록이 본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파라무트의 몸무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였지만...... 스윽. 로얀은 다크리온을 하얀 벽 쪽으로 옮겼다. 당장이라도 다크리온의 검신이 벽에 박힐 것만 같은 순간! [자, 잠깐!] 스윽. [상처는 입지 않지만 기분은 무진장 더럽다고! 원하는 게 뭐냐?] "조용히 있을 것." [......] 스릉. 로얀은 나직이 말하고는 다크리온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뚜벅뚜벅...... 하얀 돌이 사바에 깔려 있는 통로를 걷자 로얀의 발걸음 소리가 어느 동굴 속보다도 크게 울려 퍼졌다. 밑으로 떨어질 떄에 비하면 눈앞에 펼쳐진 통로는 무척이나 짧은 편이었다. 이윽고 로얀은 통로에서 빠져나와 넓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사각의 방이 끝이 아니었다. 맞은 편에 또다시 통로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방의 벽도 신비한 그 돌이었는데, 그 위에는 빛의 정령으로 보이는 둥근 구들이 즐겁게 노는 것이 조각되어 있었다. [와아.......]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조가(?)도 볼 수 있었다. 감탄성까지 내는 그 조각은 둥글둥글한 몸에 큼직한 두 눈이 붙어 있는 하얀 구체였다. "윌오위스프......" 그렇게 중얼거린 로얀은 그 구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는 벽면에 새겨져 있는 조각을 보며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엇다. 로얀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롤 말이다. 이곳을 아는 사람이 없어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호오, 빛의 정령이군! 근데 왜 저리 통통 불었지?] 실로 오랜 세월 만에 다시 만나는 빛의 정령을 보고 잠깐 조용하게 있던 파라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뚜벅뚜벅....... 그러나 로얀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눈앞에 있는 빛의 정령에 게로 다가갔다. 지금 중간계에는 빛의 정령이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빛의 정령은 바로 엘라임과 함께 만났던 빛의 정령일 터였다. 턱. 움찔. 로얀은 손이 조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윌오위스프는 위를 덮쳤다. 그러자 윌옫위스프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허걱! 다, 당신은!] 몸을 돌려 로얀을 본 윌오위스프는 순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곧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있던 로얀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오랜만이군." [응? 아는 사이였나?] 윌오위스프는 갑자기 들려온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번에 만났던 다크로드에 대한 공포심이 살아 나면서 여기 어딘가에 그가 있는 가 하고 찾는 것이었다. [어이, 빛덩아! 이 몸은 여기에 있단다.] 웅웅웅.....! 파라무트가 다크리온을 진동시키며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왔다. 그냥 다크리온 밖으로 나오면 될 것을 끝까지 그 안에서 버티고 있는 그였다. [거, 검이 말을! 아니, 아니, 에고 소드라면 말을 할 수가 있지. 아냐! 에고 소드의 목소리는 주인에게만 들리는 건데!] 혼자서 횡설수설하는 우리오위스프를 로얀은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긔 반응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쯧쯧쯧! 이 몸은 검 안에 갇힌 게 아니라 잠깐 쉬고 있는 거다. 고로 에고 소드가 아니란 거지. 그건 그렇고 넌 뭘 처먹고 그렇게 자란거냐? 어디 한번 갈라볼까? 흐흐흐......] 웅웅웅! 파라무트의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다크리온이 웅웅거렸다. [으아아아......!] 그의 말에 윌오위스프는 비명을 지르며 사각 방을 뱅글뱅글 돌았다. 스릉. 그때 다크리온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그래, 좋아! 갈라보는.....] 그그그극! 신이 나서 그렇게 외처던 파라무트의 음성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검을 뽑아 든 로얀이 하얀 벽면ㅇ르 향해 다크리온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으갸갸갹!] 하얀 가루를 튀기고 벽에 굵은 선을 남긴 다크리온이 파라무트의 비명소리와 함께 다시 검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파라무트는 침묵했다. "넌 왜 여기에 있지?" 로얀은 아직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윌오위스프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어떤 물건을 찾으러 왔다는 그가 왜 여기서 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이 왔을 천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아델레이트님께서 방해하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셔서요.] [저기, 그 아델... 무시기가 누구냐?] "천사다." 로얀은 넌지시 물어오는 파라무트에게 그렇게 짧게 대답해준 뒤 다시 우리오위스프에게 뭔가를 물으려 했다. [흐흐, 천족 자식이 여기 있단 말이지? 으흐흐! 오랜만에 천족의 피를......] 턱. 파라무트의 말은 로얀이 다크리온의 그림을 잡음과 동시에 끊어졌다.; " 그 천족은 어디에 있지?" [저, 저쪽이요.] 잔뜩 겁먹은 얼굴의 윌오위스프가 눈으로 로얀이 지나왔던 통로 맞은편에 있는 다른 통로를 가리켰다. 뚜벅뚜벅...... 그러자 로얀은 다크리온의 그립 위에 손을 얹은 채 윌오위스프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망설임없이 걸어갔다. [같이 가요!] 로얀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윌오위스프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런 그의 뒤를 쫓았다. 뚜벅뚜벅...... 로얀의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뒤를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가 조용히 따랐다. 항상 로얀의 그림자 속을 지키고 있던 어둠의 정령 다크로드는 지금 로얀에게로 올 수가 없었다. 이곳 빛의 성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강한 신성력과 빛이 로얀의 그림자를 지워버린 데다가 로얀 자체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크로드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얀이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때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의 기운을 얼른 감지하지 못했는데, 다크로드가 어느 정도 왕의 기운을 감지하려 했을 때 또다시 빛의 성지로 인해 그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로얀이 그를 직접 소환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정작 로얀은 왕을 찾지 못해 애 태우고 있는 다크로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 없이 빛의 통로를 거닐 뿐이었다. 뚜벅뚜벅...... 이 통로도 길지 않아 그들은 곧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화아아앗! 통로를 벗어나자 시야가 확 트임과 동시에 밝은 광채가 몸을 덮쳐왔다. 그곳은 중앙에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고 바닥에는 기이한 문양과 고대어가 가득 새겨져 있는 널찍한 홀이었는데 그 벽면에는 사각의 방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땅 속에 있었기에 여기저기 부서진 곳도 눈에 띄었지만 그 정도로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깎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홀 안에는 총 네 개의 다른 곳으로 가는 통로가 존재했다. 뚜벅뚜벅...... 홀 안을 가득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통로를 벗어나자마자 자리에 우뚝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홀 안을 울리고 있는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로얀 그가 아니었다.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가 있었지? 통로를 우연히 발견했다 해도 그 깊이가 상당할 텐데?" 로얀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건넨 사람은 발목까지 오는 긴 은발에 이곳의 빛과 어울려 빛이 나는 새하얀 옷을 걸친 남자로 조각 같은 얼굴에 눈매가 길어 사뭇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새하얀 옷만큼이나 하얀 피부와 너무도 아름다운 그의 외모는 중성적인 느낌까지 들게 만들었다. 바들바들...... 그의 등장에 로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던 윌오위스프가 화들짝 놀라며 로얀 뒤로 몸을 숨겼다. 눈앞의 남자가 바로 윌오위스프 그와 같이 온 천사 아델레이트였기 때문이다. [찾으시는 물건은 찾으셨나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윌오위스프의 모습을 보고 아델레이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차갑게 보이는 그의 얼굴에 오만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찾앗지. 그리고 너의 그 시끄러운 음성에 이렇게 나왔지만." 그의 음성 속에는 차가움이 담겨 있었다. 윌오위스프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델레이트는 뒤를 돌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고 잇는 아름다운 분수대를 보며 말했다. "이곳에 다른 계로 가는 엄청난 대형 마법진이 있을 줄이야... 같은 천족이라 해도 이런 걸 알려줄 수야 없지." 그는 사람들이 그리는 착하고 성스러운 천족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담으며 분수대에서 눈을 떼고 로얀을 바라보았다. "죽어줘야겠다, 인간." "천족은 처음 보는 것이지만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 "하하하하! 인간 따위가 감히 어떻게 우리 천족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가?" 스윽. 로얀은 아델레이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성검 에리오네의 그립을 쥐고는 서서히 그것을 검집에서 빼냈다. 스르릉...... "응? 성검?" 웅웅웅......! 주위에서 느껴지는 신성력 때문에 에리오네는 기분이 좋은 듯 검집에서 뽑혀 나오자마자 백색 광채를 흩뿌리며 맑은 검명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델레이트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르륵. 한 정령왕과 한 천사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자 겁 많은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는 잽싸게 부서진 하얀 기둥의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네가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성검... 인간 따위에겐 정말 아까운 물건이지. 내가 친히 접수해 주겠다." [이봐, 로얀! 다크리온을 뽑아야지! 내가 저런 빛돌이보다 못하단 말이야!] 웅웅웅......! 로얀이 에리오네를 뽑자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바로 파라무트였다. 그는 에리오네를 빛돌이라 칭하며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스릉. 쾅......! 로얀은 파라무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크리온을 뽑아 그것을 하얀 벽면에 박아 넣어 버렸다. 그러자 단단히 삐쳤는지 파라무트는 말은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의 적은 이제까지 그가 상대해 왔던 존재들과는 전혀 다른 이였다. 그런 상대를 맞아 무거운 다크리온을 들고 싸울 수는 없었기에 이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호오, 에고 소드인가?" 아델레이트는 빛의 성지의 신성력 덕분에 마기가 미세하게 느껴지는 마검 다크리온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 마기 때문에 마검이라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마검과 성검을 동시에 들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검과 성검의 힘을 검신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말을 하는 마검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드래곤보다 높은, 상당한 존재의 영혼이라면 버틸 수 있겠지만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검이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아델레이트의 결론이 바로 마기를 품고 있는 에고 소드였다. 다크리온을 벽에 박아 넣은 로얀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아델레이트의 눈에는 에리오네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윽. 기이이잉......! 아델레이트가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백색 팔찌가 커지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직 사용법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래, 여기서 너를 대상으로 실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의 아름다운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순간, 그의 팔이 로얀에게로 뻗어졌다. 스윽. 후우우웅! 파지지직! 로얀도 에리오네를 아델레이트를 향해 겨누며 힘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황금빛이 그의 온몸을 감쌈과 동시에, 주위의 신성력에 반응해서인지 에리오네에게서 평소보다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로얀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상당하자 아델레이트도 움찔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는 자신의 오른 손목 위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팔찌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 빛의 성지는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성검이 이곳의 기운을 받아 강한 힘을 내뿜는다고는 하지만 천족이 신성력을 끌어들여 사용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야말로 이곳은 천족을 위해 존재하는 전투장인 것이다. "이것에 이름은 없지. 그저 고대의 빛의 정령들이 신처럼 떠받들며 모셔왔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 기이이잉! 쿠오오오! 팔찌가 회전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짐과 동시에 아델레이트의 몸 속에서 뿜어지는 신성력 또한 배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아델레이트는 이 팔찌의 사용법을 잘 몰랐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바로 신성력을 증폭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아델레이트는 계급이 높지 않은 일반 전투천사였다. 전투천사도 1, 2, 3등급으로 나뉘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3급의 전투천사로 강한 힘에 집착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임무에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팔찌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팔찌가 뿜어내는 빛보다 더 반짝거렸다. 화아아앗! 아델레이트의 등에서 순백의 깃털을 자랑하는 두 쌍의 날개가 생겨났다. 아름답게 빛나는 날개의 등장에 그의 몸은 땅에서 한 뻠 정도 떠올랐고, 그의 신성력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제 그는 천계에서와 똑같이 자신의 힘을, 아니 더 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죽어라!" 후우우웅! 묵직한 바람의 소리를 일으키며 아델레이트의 오른팔이 휘둘려졌다. 어느새 주먹을 쥔 그는 하얀 깃털을 날리며 로얀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콰드드득! 그가 지나가자 땅이 굉음을 내며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서는 신이라도 강림한 듯 강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반월." 로얀 또한 손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는 이곳에서는 그림자를 이용한 기술은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기술은 제한도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 펼쳐보지 못한, 최상급 정령을 빝에 두면서 생긴 강한 기술은 빛의 성지가 무너질 우려가 있어 쓸 수가 없었다. 콰가가강! 밝은 빛에 휩싸여 은은한 흑빛을 뿌리는 수십 개으니 반월이 아델레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콰하하항! 하자민 그 반월들은 아델레이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신성력에 의해 소면돼 버렸다. "흡!" 쾅! 로얀은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온 아델레이트의 주먹을 향해 에리오네를 수직으로 세워 앞을고 내밀었다. 콰드드드! 아델레이트의 주먹과 에리오네의 검신이 부딪치자 폭발음과 함께 로얀의 발이 바닥을 파헤쳐 들어가며 뒤로 쭈욱 밀려 났다. "훗! 운 좋게 성검으로 오른손을 막았다고는 하나 나머지 왼주먹은 어쩔 거지?" 아델레이트는 빙긋 웃드며 놀고 있던 왼팔을 휘둘렀다. 이번 에야말로 로얀의 얼굴을 뭉개버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미안하지만 나나 외팔이가 아니다." 쾅!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은 로얀의 왼 주먹이 그의 주먹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순간 와장창 깨져버렸다. 설마 인간의 주먹이 자신의 주벅을 막을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놀란 아델레이트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크윽!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아델레이트는 고함을 내질렀다. 최상의 조건에서 인간에게 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일 뿐더러 그의 자존심이 용납치 않았다. 끼긱. 턱. 아델레이트는 왼 주먹을 활짝 펄쳐 로얀의 왼 주먹을 말아 쥐고는 그대로 그의 몸을 뒤로 내던져 버렸다. 가냘파 보이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말 엄청난 괴력이었다. 쾅! 콰르르릉! "큭!" 로얀의 몸이 분수대와 부딪쳤다. 그러자 산산이 부서진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그의 뭄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금빛을 뿜어내는 그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기에 그는 벌떢 몸을 일으켰다. "으으으!" 로얀의 멀쩡한 모습에 아델레이트는 광분하며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죽여버리리라!' 순간, 팔찌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회전하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가느다란 하얀 선이 뿜어져 나왔다. 콰가가가강! 한 줄기로 흘러나온 그것은 이내 수천 갈래로 갈라져 로얀을 덮치고는 굉음을 일으키며 홀 안의 바닥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피핏! "크윽!" 그 단단한 로얀의 육체에도 가는 상처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곧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백색 광채로 이루어진 선의 공격은 집요했고 공격 하나하나에 강한 힘을 싣고 있었다. 그것은 천족이 뿜어내는 신성력보다 더 밝고 선한 느낌이 드는 그런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정령들이 내는 힘이리라. 콰가가강! 휘이이익. 오른팔을 뻗은 채로 로얀이 궁지에 몰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아델레이트가 이윽고 날개를 움직여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스으윽. 츄리리릭! 높이 떠오른 그가 팔을 거두자 백광의 선이 순식간에 팔찌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엄청나군." 아델레이트는 그 짧은 순간에 팔찌가 만들어놓은 엄청난 파괴의 현장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홀의 바닥이 완전히 갈아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얀의 모습을 보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거였다. 파괴되어 있는 돌무더기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로얀의 몸에는 작은 상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큭!" 아델레이트는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두 팔을 뻗었다. 휘오오오...... 그러자 홀 안의 하얀 돌들이 강한 빛과 함께 거대한 신성력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 힘은 모두 그의 두 팔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공중에 거대한 빛의 구를 만들었다. "하하하하! 이 힘이야! 이 힘이라면!" 로얀으로 인해 나빠졌던 기분이 확 풀린 아델레이트는 기분좋게 웃으며 곧 이 힘의 희생양이 될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존재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윌오위스프와 벽면에 박혀 있는 다크리온 속에서 삐쳐 있던 파라무트였다. 웅웅웅......! 다크리온이 강하게 떨리며 거친 음을 토해내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마기를 풀풀 날렸다. 화아아앗! 그리고 다크리온의 검신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에 불끈불끈한, 갑옷 같은 근육을 가진 남자 파라무트의 등장이었다. "흐흐흐... 로얀, 이 몸을 감히 벽에 박아버려서 벌받은 거야. 그건 그렇고......" 뚜벅뚜벅...... 그는 아델레이트가 갈아엎어 놓은 홀 안을 둘러보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하늘에 떠 있는 아델레이트를 바라보았다. "허 참! 이래서 면상만 광이 나는 새대가리들이 싫다니까." "마, 마족?" 아델레이트는 로얀에게 마지막으로 먹일 기술을 준비하다 엄청난 마기에 힐끔 밑을 쳐다봤다가 파라무트를 발견하고는 말을 더듬거렸다. 여기서 마족이 갑자기 왜 나타난단 말인가? 게다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상당했다. 쿠오오오......! 한데 그 마기는 증폭되기까지 했다. 파지지직! "크크큭!" 파라무트의 온몸을 검은 마기가 뒤덮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이 변할수록 그것을 바라보는 아델레이트의 눈이 크게 확대되어 갔다. 파지지직! 파라무트의 전신을 감싸고 도는 검은 마기와홀 안 가득 퍼져있는 신성력이 부딪치면서 강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러나 사방에서 달려드는 신성력에도 불구하고 파라무트의 마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쿠오오오......! 이제 마기가 전신을 짙게 두르고 있어 파라무트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마기가 서서히 파라무트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감에 따라 변화된 모습의 발록 파라무트가 나타났다. 오우거보다 큰 거구! 그의 피부는 용암을 발라놓은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는 핏빛 갑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워낙에 큰 덩치라 갑옷이 몸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도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으며 간혹 보이는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얼굴도 물론 몸처럼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굵직하고 붉은 그의 뿔은 터질 것 같은 화산을 연상케 했다. "크크크... 이 모습, 정말 오랜만이군. 후우웁! 하아......!" 등에 붙어 있는 너덜거리는 붉은색 거대한 박쥐 날개를 살짝 움직이며 파라무트는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키가 커진 만큼 높은 곳의 공기를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온몸을 꽉 채우고 도는 어둠의 기운... 그 하나만으로도 그는 그 오랜 세월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윽! 발록이 어떻게 여기에!" 아델레이트의 눈은 찢어질 듯 크게 떠져 있었다. 계약을 통해 넘어오는 발록이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밑에 박혀 있는 인간이 지금 발록을 소환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발록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마나가 소모되기 때문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하지만 밑의 인간은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자신과 발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 넘치는 신성력으로 인해 여기서 마족을 소환하는 진을 그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쿠오오오! 하급에 속하는 전투천사 아델레이트와 모든 발록들의 수장이자 고위급 마족에 속하는 파라무트와의 대결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아델레이트를 바라보는 파라무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고 그의 거대한 날개가 활짝 펴졌다. 그리고 검은 마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홀 안을 잠식해 가는 그 검은 마기에 대항하여 아델레이트를 중심으로 강한 신성력이 부딪치며 눈부신 스파크를 일으켰다. 아델레이트는 지금의 자신이라면 발록 한 마리 정도는 가뿐하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의 발록이 발록들의 수장이라는 파라무트라는 사실을 그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지금의 파라무트는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마족이든 드래곤이든 태어날 때부터 힘이 넘치는 이들은 자신의 힘을 갈고 닦는 일을 귀찮게 여기기 마련이었다. 그건 파라무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미치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수많은 시간 동안 던전 속에 갇혀 있던 그는 따분함을 이기지 못해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화아아앗! 콰지지직......! 파라무트를 향해 아델레이트가 팔을 뻗자 강한 빛이 그를 덮쳤다. 순간, 파라무트의 전신에서 감전이라도 된 듯 스파크가 일자 아델레이트는 묘한 쾌감과 함게 몸을 꽉 채우는 자신감을 느꼈다. "아무리 마계의 전투병기라 불리는 발록이라 해도 여기서 난 신이다!" 콰지지직! "쿡쿡쿡......" 온몸을 감도는 백색 전류를 보며 파라무트는 음침한 미소를 날렸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 확실히 짜릿하긴 하군, 이 새대가리야. 크흐흐흐......" 파핫! "......!" 아델레이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 때 파라무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속도로 날아올랐다. 마치 검은 덩어리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했다. "주, 죽어라!" 아델레이트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며 로얀에게 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백색의 구를 발록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파라무트는 전광석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움직임으로 날아올라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콰직! 커다란 파라무트의 오른손이 아델레이트의 오른쪽 날개 중 위에 있는 날개를 쥠과 동시에 그의 왼손은 그의 왼쪽 어깨를 쥐었다. 날카롭고 커다란 붉은 손톱이 각각 순백색의 날개와 어깨에 박혀 들어가자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콰직! 우두둑! 홀 안 가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헉, 끄아아악!" 촤아아아! 눈알이 빠질 듯 툭 튀어나온 아델레이트는 고통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마족들의 힘의 근원이 뿔이라면 천족의 힘의 근원지는 순백의 날개였다. 그렇기에 천사들은 날개의 개수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었다. 그런 소중한 날개가 지금 파라무트 의 우악스런 손에 의해 뽑혀나간 것이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붉은 피를 뿌리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터뜨리며 아델레이트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손에 있던 백색 구체는 저절로 소멸해 버린 지 오래였다. 스으윽. 파라무트의 기다란 붉은 혀가 자신의 얼굴로 튄 아델레이트의 피를 핥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천족의 피라......" "크아아악! 하악, 하악......" 영혼을 뒤흔드는 고통에 온몸을 떨고 있는 아델레이트는 아직 파라무트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의 왼손이 아델레이트의 팔목에 채워져 있는 백색 팔찌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그걸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면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크크크크... 그나저나 날개를 잃은 새는 어떻게 살아갈까?" 터억, 콰직! "크흐흑! 이, 이 자식!" 아델레이트는 자신의 왼쪽 날개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과 함게 고통이 찾아오자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흐흐흐......" 그곳에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백색 날개를 쥐고 있는 파라무트가 있었다. 아델레이트는 여기서 날개를 하나 더 잃는다면 자신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얼른 몸 안의 신성력을 모두 끌어 모았다. "크아아앗!" 파하하핫! "칫!" 파라무트는 몸으로 때우기에는 너무도 강한 신성력이 자신을 덮쳐오자 급히 하늘로 날아 뒤로 물러났다. "허억, 허억......" 힘을 한꺼번에 터뜨린 탓에 아델레이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네 개의 날개 중 하나를 잃은 것이 더 큰 손실이었다. "허억! 다음에 만날 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파라무트를 노려보는 아델레이트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델레이트는 그 한마디와 함께 손을 양옆으로 뻗은 뒤 고대어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앗! 그러자 홀 안 가득 새겨져 있던 고대어와 문양 중 벽면에 그려져 있던 문양과 고대어만이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그 중 빛의 정령들이 평화롭게 노는 석화가 가장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백광의 빛이 홀 안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아델레이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호오, 정말 여기에 그런 마법진이 있었군!" 파라무트는 흥미로운 뭔가를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아델레이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미 마법진이 발동했고 그의 모습이 반이나 사라져 있었기에 파라무트로서도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가, 같이 가요!] 그리고 언제 왔는지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가 파라무트를 스쳐 지나 아델레이트를 감싸는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아아악! 그렇게 아델레이트와 윌오위스프는 천계로 떠나버렸다. "운이 좋은 새대가리인걸? 큭큭!" "왜 네가 나선 거냐?" 지금껏 두 사람의 싸움을 밑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얀이 퉁명스럽게 그렇게 묻자 파라무트는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왔다. "우리 마계의 마족들은 은원이 확실하다. 네가 나에게 준 은혜는 이걸로도 못 갚지. 안 그래?" 쿠쿠쿵......! 이때 빛의 성지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데다가 아델레이트가 팔찌로 빛의 성지를 완전 엎어놓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빛의 정령들이 살았던 빛의 성지가 이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려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런! 여기가 무너지면 이제 다른 계로 가는 방법은 드래곤 산맥의 룬뿐이겠군. 이제 더 이상 재수없는 도마뱀들 안 봐도 된다고 좋아했더니!" 파라무트는 홀 안을 빙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족과 드래곤은 앙숙관계였다. 드래곤에게 마법을 전해 준 것은 마족이거늘 그 은혜를 잊고 스스로를 마법의 종족이라 칭하는 드래곤들을 마족들이 좋게 봐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간계에서 마계로 돌아가는 길은 드래곤 산맥 위에 떠 있는 룬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족들은 인상을 구기며 드래곤 산맥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마족들은 계약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중간계로 유희 나오는 것을 꺼렸다. "난 이 마법진으로 마계로 갈 거다. 너도 정령계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나?" 파라무트는 로얀을 다섯 번째 정령왕인 혼돈의 정령왕이라 머릿속에 각인시켜 놓고 있었기에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로얀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쿠쿠쿵! 무너지는 빛의 성지... 빛의 성지가 무너지면 엘라임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정말 드래곤 산맥의 룬을 통하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도저히 정령계로 갈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고, 그의 직감은 이리아와의 만남이 코앞에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몽마 나세스의 던전을 통해 고통의 기억이 더욱 뚜렷해지고 복수의 감정이 진해진 지금, 그는 도저히 이리아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도록 내버려두고 엘라임을 만나러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복수심 가득한 자신이 지금 엘라임을 만나러 가봤자 불행해지는 것은 엘라임뿐일 거라는 걸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남겠다는 건가?" "......" 파라무트의 말에 로얀은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지.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쿠쿠쿡! 심심하면 정령계로 내가 쳐들어갈 테다! 흐흐흐, 그럼 다음을 기약하며... 친구여." 우렁차게 외치던 그의 음성 중 끝의 세 글자는 아주 작았다. 화아아앗! 날개를 퍼덕여 날아오른 파라무트는 아델레이트와 똑같이 고대어를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법진은 아델레이트의 경우와는 딜리 흑색 빛을 뿜으며 그의 전신을 뒤덮어갔다. 이 마법진의 시동어는 어느 계를 가든 똑같지만, 목표 지점을 정하는 것은 시전자가 가진 기운이었다. 예를 들어, 마계로 가기 위해서는 고대어를 중얼거리며 마기를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화아아앗! 천천히 흑빛에 잠식되어 가던 파라무트는 이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쿠쿠쿠쿵......! 흔들리는 홀 안으로 모래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빛의 성지가 무너지면서 위를 덮고 있던 사막의 모래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파핫! 로얀은 몸을 날렸다. 그런 그의 등 뒤에는 언제 튀어나왔는지 검은 날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턱! 낮게 날며 에리오네를 왼손으로 바꿔 쥔 로얀은 아직까지 벽면에 박혀 있던 다크리온을 뽑아 들고는 홀 위로 날아올랐다. 쿠쿠쿵! 순간, 빛의 성지가 요란하게 흔들리며 천장에서 모래와 돌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로얀은 빛의 성지와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31장 짧은 재회 콰하하항......! 쿠르르릉......! 보통 하늘에서 치는 천둥소리가 지금은 땅 속에서 흘러나왔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사막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모래만 가득한 사막의 땅이 밑으로 폭삭 내려앉았고 거기서 나오는 자욱한 모래 먼지가 흡사 안개처럼 하늘에 연막을 치며 넓게 펼쳐졌다. 후우웅...... 폭삭 내려앉는 대지 속에서 검은 빛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바로 검은 날개를 나부끼며 날아오른 로얀이었는데 그의 양손에는 마검과 성검이 들려 있었다. "라이트닝 프리쉬먼트." 콰르르르릉! 우르릉! 파지지지직......! 로얀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순간, 하늘이 미쳐버린 걸까? 어디선가 고운 음성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하늘이 검게 타버리며 번개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쾅! 쾅! 쾅! 번개가 작렬하자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대지가 움푹움푹 파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 번개는 라이트닝 프리쉬먼틀는 마법으로 인한 것으로 광범위하게 번개의 비를 내리는 9서클의 마법이었다. 홍 홍! 쾅! 쾅! 한여름에 쏟아지는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번개 속에서 로얀은 빠른 속도고 몸을 움직였다. 검은 날개는 형체가 없었기에 번개를 그대로 통과시켰고 로얀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콰르르릉! 쾅! 쾅! 쾅! 그러나 번개의 속도는 점차 빨라져만 갔고 그에 따라 로얀도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번개를 그대로 맞은 사막의 대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처참하게 변한 사막은 뿌연 연기와 함께 모래 먼지를 가득 피워 올리며 하늘까지 뒤덮기 시작했다. "정말 살아 있었잖아?" "내가 살아 있다고 했잖아." 내려치는 번개 속에서 두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고운 음성으로 여성의 것이었는데, 그것은 번개의 시작을 알리던 그 음성과 동일했다. 그리고 그 뒤에 들려온 것은 남자의 것으로 그 역시 상당히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콰르르릉......! 하늘이 마지막으로 포효하더니 번개가 잠잠해져 갔다. 뮤트 크기 정도의 범위로 내려친 번개의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만약 이 번개가 정말 뮤트에 떨어졌다면 그 도시는 지도 상에서 사라져 버렀을 만큼 파괴적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번개의 소나기는 그렇게 멈추어져 갔다. 내려치는 번개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로얀은 허공에 뜬 채로 목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모래 먼지와 번개로 인해 생긴 하얀 연기가 사막의 바람에 서서히 사라져가자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 발록이나 천사를 봐도 놀라지 않던 로얀이 모습을 나타낸 이들을 보고 크게 놀라며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습을 나타낸 것은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었는데, 그 중 남자는 발록 파라무트와 함께 로얀이 던전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본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로얀은 그들을 보자마자 곧 알 수 있었다. 그들 세 명 모두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로얀이 지금 온몸을 떨며 놀라는 이유는 눈앞에 나타난 세 마리의 드래곤 때문이 아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운 여인! 그녀는 귀가 뾰족한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왠지 이질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로얀은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몽마 나세스가 만든 마법진이 보여준 환상 속에서 그녀는 이리아라는 이름으로 그의 앞에 보여졌던 것이다. "이리아......" 꾸욱. 로얀의 두 손이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의 그립을 각각 강하게 움켜쥐었다. 검신이 저절로 바르르 떨릴 정도로 그것을 꽉 움켜쥔 로얀의 눈동자에 핏발이 일었다. 붉어지는 그의 눈동자가 이리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응? 이실리아, 저 인간을 알아?" "......" 금발 머리 미청년의 말에 이실리아라 불린 여인의 고운 아미가 치켜 올라갔다. 드래곤인 자신이 눈앞의 인간에 대한 것을 떠올리지 못하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저 인간은 분명 자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릿속에서 그의 모습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알 듯 말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날 어떻게 아는 거지?" 결국 이실리아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아는 듯한 인간에게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엔... 네가 한 유희 속의 인형이자 벌레처럼 죽임을 당했던 팔레인이란 마을의 시엔이다." "아!" 로얀의 말을 듣자 이리아는 시엔이라는 청년과 레이나라는 소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외모가 너무도 바뀌어 있었기에 그녀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로얀의 지금 모습은 과거 시엔이었을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어 아무리 드래곤인 그녀라 하더라도 기억을 못 해내는 게 당연하다 여겨질 정도였다. 이미 첫 만남에서 이실리아의 기분을 상하게 한 로얀이었기에 이어지는 그녀의 음성은 곱지 않았다. "그때 그 인간은 마을과 함께 깨끗이 지워버렸을 텐데?" 마을을 지워버렸다는 것을 너무도 태연하게 말하는 이실리아를 보고 로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죽, 여, 버, 리, 겠, 다!" 웅! 웅! 웅! 웅! 콰지지직! 차갑고도 처절함이 묻어 있는 음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크게 진동하며 금빛 오러를 뿜어내었다. 지금까지 로얀이 사용했던 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힘이었다. 흠칫! 세 드래곤이 모두 놀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하아아압!" 로얀이 커다란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등에 있는 날개가 흑색 잔상을 흩뿌렸다. "카이저 실드!" 세 마리의 드래곤이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세 겹의 카이저 실드가 그들 앞에 생성되었다. 그리고 로얀의 두 검과 카이저 실드가 맞부딪혔다. 콰가가강! 쩌쩌쩡.....! "이, 이런!" "꺄악! 이실리아 언니!" 로얀의 일격에 두 사람보다 어려 보이는 은발 소녀가 뒤로 살짝 밀려났다. 그녀의 실드가 가장 앞에 있었는데 로얀이 그것을 부수자 그 여파로 뒤로 밀려난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 앞에 있던 금발 청년이 당황한 듯 로얀을 노려보았다. "당황하지 마. 루시어스, 페르디난드!" 이실리아가 담담히 말했다. 콰지직! 로얀의 검은 한 개의 카이저 실드를 격파하고 두 번째에서 멈춰 있었다. 세 마리의 드래곤이 하는 협공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마계와 천계의 전쟁과 같은 큰 싸움이 아니라면 절대 뭉쳐서 움직이지 않는 드래곤들은 항상 홀로 싸웠다. 그리고 매번 승리를 거두어 중간계의 최강자가 된 것이다. 그런 드래곤이 세 마리나 모여 한 사람을 상대로 협공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들은 로얀과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인간과 드래곤 세 마리의 싸움이라니? 자존심 강하고 자신들의 위상을 세우기에 급급한 그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거대한 제국을 상대로 싸운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에 드래곤이 세 마리나 모여 인간 한 명을 죽여봤자 그건 이긴 것도 아니었다. 싸움 뒤에 돌아오는 것은 같은 드래곤들의 차가운 시선과 비웃음일 테니 말이다. 이실리아를 포함한 여기 있는 드래곤들은 그저 로얀을 가지고 놀 생각에 모인 것이었다. 카엔이 멍청해서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에이션트 드래곤이었고 앞의 인간은 그 드래곤과 싸워 이긴 이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들은 이실리아의 계획 하에 로얀을 함정 속에 밀어 넣었다. 고서에 나오는, 발록들의 수장인 파라무트가 갇혀 있는 곳이 바로 그들이 로얀을 위해 준비한 함정이었다. 물론 드래곤 로드에게는 카엔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러 간다고 하고 나왔기 때문에 카엔과 로얀의 싸움에 대해 세세히 조사하는 모습을 일부러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철저히 준비한 그들은 로얀을 몽마 나세스가 만든 던전 속에 밀어 넣어 버렸다. 혹 던전에서 살아남아 그 중심부로 들어간다 해도 그곳에는 파괴의 제왕이라 불리는 발록 파라무트가 있을 테니 인간은 그 순간 죽은 목숨일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로얀은 당당히 살아 나왔고, 두 드래곤들의 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로얀에게 내기를 건 골드 드래곤 페르디난드는 정말 뜻밖에도 그들에게 이길 수 잇었다. 그러나 이실리아는 페르디난드가 내기에서 이긴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 인간이 나세스의 던전에서 살아 나왔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실리아는 리치 콘이 로얀과 싸울 때 썼던 방법을 써먹기로 했다. 그건 바로 정령석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와 다른 두 드래곤들은 미리 빛의 성지 주위의 사막에 최상급 정령석을 설치해 두었다. 루시어스와 페르디난드가 정령석을 설치하는 동안 이실리아는 몬스터들을 몰고 왔다. 그들은 로얀이 정령석이라는 우리 안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며 서서히 죽어가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일을 진행시켰다. 로얀이 빛의 성지에서 나오고 루시어스의 카이저 실드를 부수면서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그 힘도 곧 정령석에 의해 사라지리라! 그리고 힘을 잃고 인형이 된 로얀은 몬스터들에게 이리저리 굴러다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시어스와 페르디난드의 머릿속에 자리 잡혀 있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이실리아는 로얀을 바라보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강한 인간이라... 그 몸에 들어 있는 영혼도 강하겠지?" 로얀을 바라보는 이실리아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녀의 미소에 같은 편인 페르디난드는 절로 오싹해짐을 느끼고는 뭔가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실리아, 아직도 그 실험 해?" "호호호! 얼마나 흥미로운데, 영혼이라는 건 말이야!" 아름답게 웃으며 말하는 이실리아에게서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이실리아의 그 모습에 페르디난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기한 것과 특이한 것을 좋아하고, 어떤 대상을 정해 놓고 실험하기를 좋아하는 이실리아의 성격을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이기도 한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그런 성격은 폴리모프를 할 때 레드 드래곤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엘프를 고집하는 점에서도 나타났다. 물론 유희를 나갈 때는 빨간색 머리를 일부러 금발로 염색까지 한 뒤 나가는 그녀였다. "루시어스는 그걸 발동시켜 줘." 이제 갓 에이션트 드래곤이 된 루시어스는 이들 중 가장 어린(?) 드래곤이었기에 힘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루시어스는 이실리아의 말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페르디난드가 팔짱을 끼고 이실리아 곁으로 날아왔다. "그냥 죽이지 귀찮게 꼭 그렇게 해야겠어?" "난 죽인다고 한 적 없어." "그래, 그래! 영혼을 가지고 놀겠지. 뭐, 어쨌거나 재미는 있겠는데?" 한 번의 공격으로 로얀은 드래곤 세 마리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눈앞에 원수를 두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죽어 봉인을 풀 생각까지 하는 그였다. 그만큼 이리아에 대한 그의 증오심은 엄청났다. 웅웅웅......! 뒤로 물러나 드래곤의 움직임을 살피던 로얀이 검을 고쳐 쥐며 다시 돌진했다. 그의 날개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흑빛 광채가 뿜어지고 있었다. 금빛과 흑빛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광경! "사신의 춤!" 콰하하항......! "크윽!" 이실리아는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로얀을 바라보았고 페르디난드가 앞으로 나서며 로얀의 공격을 막았다. 앞의 인간이 블랙 드래곤 카엔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페르디난드는 그를 얕보고 있었다. 쾅! 하지만 엄청난 마나를 퍼부은 카이저 실드에서 강한 충격이 전해지자 그는 앞의 인간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 정령의 힘이 깃든 마법구로 공격하는 주제에 이렇게 자신에게 강한 충격을 주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는 그였다. 우습게도, 그들 또한 자신들이 멍청하다고 한 카엔처럼 로얀이 마법구에서 힘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폴리모프." 화아아앗! 그러나 페르디난드는 카엔과 달리 로얀이 마법구를 쓰든 말든 그의 힘을 순순히 인정하고는 그 즉시 본체로 모습을 변환시켰다. 쿠오오오......!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는가 싶더니 황금색 비늘을 가진 거대한 드래곤이 허공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본체로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응?] 그러자 이실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페르디난드의 뒤를 가리켜 보였다. 화아아앗! 그곳에는 루시어스가 있었는데, 그녀의 양손에서는 지금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자연의 원소들이여, 저기 평온한 안식처에 내려앉아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리라." "이 주문은......?" 로얀은 루시어스의 조그마한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을 한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크산의 협곡에서... 리치 콘이... 그것은 바로 정령의 힘을 빨아들여 정령석에 가두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빙긋. "별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영감탱이의 눈 때문에 너에 대해 꽤 조사를 했거든." 아무리 이실리아가 강하다 해도 전 드래곤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드래곤 로드에게는 얌전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이실리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후우우웅! 이윽고 루시어스의 긴 주문이 끝나자 그녀의 손에 있던 푸른빛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사막 곳곳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아앗! 그 빛은 로얀이 빛의 성지에서 나오기 전 그들이 미리 설치해둔 정령석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리치가 아닌 드래곤이 직접 펼친 데다가 최상급 정령석이 사막 가득 깔려 있으니 그 위력은 정말 엄청났다. [하하하! 너의 힘의 근원이 정령이 깃든 뭔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벌여왔던 싸움에 대해서 꽤 열심히 조사했거든. 이제 곧 너의 힘을 모두 흡수당하게 될 것이다. 하하하!] 페르디난드는 뭐가 그리 좋은지 로얀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화아아앗! 로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정령의 힘이 빠르게 정령석에 흡수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등에 있는 검은 날개 또한 흩어져갔다. 스으윽. 날개가 사라져가자 로얀은 어쩔 수 없이 밑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빙긋. 로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루시어스가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사박. 로얀은 결국 사막에 착지했고 날개를 스스로 소멸시켰다.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이 정령의 힘을 더 빨리 흡수당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등에서 날개가 사라지는 것을 본 이실리아는 사막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제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음성이 멀리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쿠어어어......! 쿵! 쿵! 쿵! 쿠아아앙......! "......" 로얀은 무언가의 포효소리와 땅이 진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내려앉은 검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사막의 모래 안에서 튀어나와 저 멀리서 달려오는 것은 모두 몬스터 대군이었다. 사막에는 없는 오크나 오우거도 있었다. 사막의 흉폭한 늑대 떼도 있었고 로얀이 사막에서 처음 상대했던 스콜피온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쿵! 쿵! 쿵! 마지막으로 가장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골렘이 있었다. 돌로 된 스톤 골렘은 모래 안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언니, 이렇게 일을 벌이면 로드께서 뭐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호호호, 상관없어! 나라를 엎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인간 한 명 가지고 노는 걸로 그 영감탱이가 뭐라고 할까?" 루시어스가 사막을 가득 메운 몬스터들을 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이실리아는 어깨를 으슥하며 그렇게 답했다. 쿵! 쿵! 쿵! 쿠어어어......! 두두두두......! 자신을 향해 질주해 오는 여러 몬스터와 느릿하게 다가오는 거대한 골렘을 쳐다보면서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뽑아 수평으로 눕혔다. 스오오오......! 그의 몸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족의 마기보다도 더 진한 흑색의 기운! 사막의 바닥을 가득 메운 정령석이 활발하게 그 빛을 빨아들였지만 그의 전신에서 나온 그 흑빛 소용돌이는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로얀은 지금 모든 힘을 짜내고 있었다. 어차피 조금만 더 있으면 힘을 쓸 수 없게 될 바에야 그 전에 강력한 기술을 써서 몬스터를 하나라도 ;더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지금 정령의 힘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었지만 수백 개에 달하는 정령석의 흡수력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곧 정령석의 속도에 따라잡혀 자신의 정령력은 생겨날 때마다 흡수당하게 될 것이다. 로얀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몬스터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때까지 세 마리의 드래곤은 하늘에서 관람객이 되어 로얀과 몬스터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경기장에서 맹수와 싸우는 노예들의 싸움을 구경하러 온 귀족 같았다. 쿠어어어......! 두두두두......! 쿵! 쿵! 쿵! 몬스터들의 거친 숨소리와 땅을 울리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쿠웅......! 후웅! 그리고 로얀 바로 앞에 도달한 순간, 가장 앞서 다가오던 거대한 스톤 골렘이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사막에 바람이 만들어졌다. 자신의 앞머리를 건드리며 지나가는 그 바람을 느끼며 로얀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스윽. 그리고 그의 입술이 열림과 동시에 그 안에서 왠지 모를 섬뜩함과 공포감이 느껴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크 오브 데스티니." 기이이잉! 그러자 가슴 앞에서 수평으로 눕혀 놓았던 두 검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사막을 덮어 나갔다. 갑자기 사막에 밤이 찾아오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세 마리의 드래곤도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쿠쿠쿵. 휘오오오오...... 왠지 모를 스산한 소리와 함께 검은 기류가 몬스터들 사이에 흘렀다. 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공중에서 피어난 그것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차가움을 내뿜고 있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고 어느 순간, 그 침묵 속에서 터진 굉음과 함께 피의 광란이 시작되었다. 콰가가가강......! 콰지지직! 검은 기류에 뒤덮여 있던 곳에서 강한 폭발이 일어났고 몬스터의 몸이 갑자기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돌로 만들어진 골렘도 예외는 아니었다. 와르르르......! 쿠어어어......! 크아악......! 스톤 골렘은 처참하게 부서져 무너져 내렸고 다른 몬스터들은 각기 다른 피를 내뿜으며 살 조각을 흩뿌렸다. 그것은 드래곤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참혹하고 역겨운 광경이었다. 피의 광란은 왠지 섭섭할 정도로 짧았다. 그 뒤에 남은 건 이것을 어떻게 치울지 걱정이 될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사막의 모습뿐이었다. 휘오오오...... 갖가지 피의 색으로 물든 사막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몬스터의 수가 워낙에 많았기에 모두 죽일 수는 없었지만 이 한 방으로 로얀은 절반에 가까운 몬스터 대군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하지만 이 결과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정령석에게 힘을 계속 흡수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많은 힘이 소모되는 광범위 기술을 썼기 때문에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힘들게(?) 모은 몬스터 군대가 절반이나 사라지자 이실리아는 분노했다. 꽉 주먹 쥐여진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 정령석이라는 우리에 갇혀 있는 인간 주제에 자신의 부하를 죽이자 화가 난 것이었다. "모두 저 인간을 공격해라!" 이실리아는 공포에 질려 로얀을 향해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드래곤 피어를 담아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로얀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의 인간에게 죽든 드래곤에게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의 괴물 같은 인간이 드래곤 세 마리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승산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죽기살기로 그를 향해 달려든 것이었다. 쿠어어어......! 후웅! 콰가가강! "너희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 로얀은 지쳐 있었지만 금빛 오러를 뿜어내는 그의 두 검은 달려드는 몬스터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베고 가르고 부수며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은 이리저리 번뜩였다. 붉은 피가 튀고 녹색 체액이 튀었다. 쿵! 후웅......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스톤 골렘이 굵직한 주먹을 내뻗었다. "헬 파이어." 화르르르......! 콰가강! 그때 하늘에서 불꽃이 쏟아져 내려 골렘을 부수고는 그대로 로얀의 몸을 덮쳤다. 골렘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자신의 공격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루시어스가 마법을 시전한 것이었다. 그녀도 이실리아와 마찬가지로 로얀을 가지고 놀고 싶은 생각이 이미 싹 사라진 상태였다. 그저 죽이고 싶은 마음만 가득할 뿐! 팟. 자신을 덮쳐오는 헬 파이어를 그는 몸을 살짝 굴려 피했지만 불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볼케이노." 콰드드드......! 루시어스 옆에 있던 이실리아도 합세해 마법을 시전하자 로얀의 발 밑으로 용암이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치이익!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은 평범한 가죽 신발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얀 연기를 내며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쾅! 쾅! 쾅! "흡!" 로얀은 바닥이 갈라지고 시뻘건 용암이 붉은 기둥이 되어 솟아 나오자 몸을 피하려 했다. 용암이 흐르는 대지 위에서도 그의 발은 붉게 빛날 뿐 녹지 않았지만 용암이 밑에서 솟아오른다면 그도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쿵! 쿵! 쿵! 그가 몸을 피하려 하자 골렘들이 달려들어 그 앞을 막아서더니 그대로 몸을 날려 그를 덮쳐왔다. [죽어라, 인간!] 하늘에 떠 있던 페르디난드가 어느새 마나를 입에 머금고는 골드 드래곤의 불꽃 브레스를 쏘아 보냈다. 그것은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화염의 브레스는 아니었지만 그 대신 상당히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콰하하항......! 콰가가강......! 직선으로 날아오는 브레스를 가만히 맞고 있을 로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실리아가 선수를 쳤다. "파이어 스톰." 화르르르......! 불의 폭풍이 로얀의 두에서 생겨나 그를 덮쳐갔다. 로얀이 뒤로 피하지 못하도록 그녀가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7서클의 썬더 스톰보다 파괴력이 월등하고 마나의 소모도 그만큼 많았기에 파이어 스톰은 8서클로 분류되는 마법이었다. 때문에 7서클까지만 복사가 가능한 로얀은 그것을 복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크아아압!" 로얀은 온 힘을 다해 덮쳐오는 골렘과 몬스터를 죽이며 다가오는 마법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거나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금빛 피부의 그는 웬만한 마법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만 드래곤이 쏘는 브레스는 그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로얀 그라고 해도 드래곤의 브레스를 견뎌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브레스에는 엄청난 위력이 담겨 있었다. 과거 로얀이 살던 팔레인을 지도에서 깨끗이 지워버렸을 정도가 아니던가! 콰하하항! 퍼걱! 콰르르르...... 앞을 가로막고 있던 골렘을 부수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브레스를 로얀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는 불의 폭풍이 덮쳐왔고 정면에서는 브레스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두 마리의 드래곤이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며 비릿한 조소를 흘리는 가운데 이실리아는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로얀이 최후를 맞으려는 순간! 파하하핫! 허공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며 로얀과 브레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콰하하항......! 로얀은 브레스를 조금이라도 방어하기 위해 손으로 앞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대체 어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려는 것일까? 브레스가 푸른 빛에 퉁겨져 나가 이곳저곳에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로얀은 푸른 빛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흠칫! "아니!" [어, 어떻게!] 브레스가 일으킨 빛이 사라지고 서서히 드러나는 광경에 세 드래곤은 할 말을 잃고 눈만 크게 떴다. 하나 그것은 로얀도 마찬가지였다. "에, 엘라임!"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그가 잘못 본 건지,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피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떠 있는 엘라임이었다. 스르륵. 푸른 빛을 휘날리며 로얀에게로 날아온 엘라임은 그를 안았다. 그의 두에서는 불의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다가오는 불꽃의 소용돌이를 보며 엘라임은 마법을 시전해 이곳 사막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른 곳으로 공간이동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로얀과 엘라임이 사막에서 사라졌고, 드래곤 세 마리는 황량하다 못해 마계의 데스랜드 같은 땅이 되어버린 사막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32장 붉은 눈물 엘라임이 로얀을 안고 공간이동을 해 도착한 곳은 어느 동굴 안이었다. 그 사막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깊은 산의 호수 안에 있는 수중 동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동굴 안은 물로 가득 차 있지 않아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물론, 동굴의 깊숙한 곳은 땅으로 뚫린 구멍으로부터 빛이 미세하게 들어왔다. 맑은 물이 흐르는 데다 물의 정령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그 미세한 빛을 반사시켜 안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동굴 속은 어둡지 않았다. 물의 정령들은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엘라임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 곁에 로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의 정령들은 자신들의 왕인 엘라임이 로얀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물의 정령들이 아름다운 빛이 되어 로얀과 엘라임을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밝혀주었다. 로얀의 품에 안겨 있던 엘라임이 그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살짝 물러나려는 순간, 그녀는 힘없이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엘라임!" 로얀은 자신이 당연히 브레스를 맞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나 그것을 막아선 엘라임을 보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본 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자 로얀은 크게 놀라며 그녀를 받쳐 안았다. 엘라임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차가워 보이던 평소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하아, 하아......" 엘라임이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예전 처럼 푸른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얼굴색이 너무도 창백했다. 푸른빛을 띠고 있는 입술 하며... 마치 심한 병에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령왕이 병에 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얀......" 그녀가 힘겹게 파리한 입술을 움직이자 로얀은 항상 강해 보이던 그녀가 너무도 아파하는 모습에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 어떻게......" "하악! 이 세계의 율법을 어겨서 그, 그런 거야." 분명 엘라임은 얀을 살리기 위해 율법을 어겼고, 중간계로 백년간 올 수 없다는 제약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걸까? "무, 물은 공기 중에도, 어디에도 존재해. 하악! 언제나... 로얀을 지켜보고 있었어." "더, 더 이상 말 하지 마!" 로얀은 자신의 품속에서 너무도 힘겹게 말하는 엘라임을 꽉 껴안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시, 시간이 없어. 하아! 로얀은 그때 나와 헤어지고 난 후로... 한 번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어. 오직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아, 아파 했어. 하악! 난 그, 그게 너무 싫어. 왜 로얀은 자꾸 아파만 하려는 거야. 저, 정말 바보같이." 그녀는 로얀이 카엔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 후로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제약 때문에 중간계로 올 수가 없었다. 로얀이 기억을 잃고 자신을 찾을 때에는 솔직히 기쁘기도 했지만, 기쁨보다는 로얀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더 마음 아팠다. 아무리 봉인이 풀림과 함께 찾아온 시련이자 힘의 대가라고는 하지만 설마 기억을 잃을 줄이야! 전대 다크로얀이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로얀이 또다시 드래곤에 의해 죽임을 당하려 하자 그가 또 한 번 고통을 겪는 것을 보기 싫어 그녀는 율법을 어기고 중간계로 억지로 내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엄청나 엘라임은 지금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그녀는 바로 정령계로 강제 소환될 것이다. "난 괜찮아. 난 정말 괜찮으니까......" "하악! 이제 더, 더 이상 못 버티겠어." 엘라임이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내뱉자 로얀은 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떨리는 그의 손을 엘라임이 잡았다. "야, 약속해 줘. 나는 정령계에서 쉬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줘. 내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줘." 그녀는 로얀에게 더 이상 드래곤을 향해 검을 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드래곤을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가 또 한 번 죽음을 겪고 여지없이 찾아올 고통을 겪는 것이 걱정되어 이런 약속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약속할게." 증오스러운 이리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로얀은 블랙 드래곤 카엔을 죽임으로써 이미 복수의 절반을 했기에 눈앞의 엘라임을 택했다. 그는 이리아의 모습을 깨끗이 지워버리며 그렇게 말했고, 엘라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편안한 미소를 띠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 그러자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로얀의 검은 눈동자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내 마음도 너를 좋아해. 너무나도 널 좋아해." 그의 이 한마디에 엘라임의 눈동자가 떨려왔고,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로얀의 입술과 엘라임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화아아앗! 그러나 입술이 닿는 순간 터져 나오는 밝은 빛을 보고 느끼며 로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빛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파핫. 그리고 엘라임은 푸른 빛의 가루가 되어 동굴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령계로 강제 소환 당해 버린 것이었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갑자기 나타나 로얀을 데리고 사라져 버리자 이실리아, 루시어스, 페르디난드는 한참 동안 허공에 멍하니 떠 있었다. 그 극적인 순간에 어째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나타난 건지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물의 정령왕이 자신의 일을 망친 것은 분명했기에 이실리아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어부의 마음이었다. 이실리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로얀을 여기에 가두기 위해 들어간 최상급 정령석이 몇 개였으며, 그의 손에 사라진 몬스터들이 몇 마리이던가? 그는 이실리아의 계획을 철저히 부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말이다. "쫓아가자." 분노에 떠는 그녀의 입에서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지금의 그녀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페르디난드는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루시어스는 달랐다. "언니, 여기서 그만 하는 게... 쫓아가서 죽이면 다른 드래곤들이 우릴... 컥!" 루시어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잛은 거리를 텔레포트하여 도착한 이실리아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윈 개나 줘버려! 난 나의 계획을 부순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인간의 목숨이 더 중요해." "아... 아, 알았어." 루시어스가 힘겹게 말을 내뱉자 그제야 이실리아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반드시 찢어 죽여버리겠어!" 그리고 이실리아는 즉시 엘라임이 공간이동한 곳을 찾기 위해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이 세 마리씩이나 뭉쳐 있기에 엘라임의 행방을 찾는 것은 쉬웠다. 그곳은 여기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여름의 대륙에서 유일하게 나무와 풀로 가득한, 축복받은 산이라 불리는 프리암이라는 산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그들은 엘라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엘라임이 로얀을 데리고 수중 동굴로 이동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프리암의 이 호수는 깊고 맑아 물의 정령들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마나의 흐름을 지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실리아를 포함한 세 마리의 드래곤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산에 물이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원래의 성격대로 물을 모두 증발시켜 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산은 돌산이 돼버릴 테고, 여름의 대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을 그렇게 만들면 드래곤 로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이실리아는 그 방법 또한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엘라임과 로얀이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한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루시어스와 페르디난드는 본체의 모습으로 산을 돌고 있었다. 이미 수십 번은 더 이 주위를 맴돈 그들이었다. 이실리아는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엔...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아름다운 미소를 띠었다. [응?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났어?] 때마침 이실리아 근처로 날아오던 페르디난드가 그 말을 듣고는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페르디난드, 인간이란 말이야 한없이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일지라도 스스로 죽으러 나올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나 이실리아는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프리암의 풍경을 보며 웃음 지을 뿐이었다. 쿠르르릉! 그녀가 미소를 짓자 하늘이 몸을 떨었다. 하늘을 떠다니던 먹구름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차가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후둑, 후둑! 쏴아아아......!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은 이실리아의 몸을 적시지 않고 퉁겨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속에서 과거 유희를 하던 중에 만난 눈이 없던 청년과 그 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를 유난히 좋아했던, 특이하고 강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 청년을...... 로얀은 동굴 속에서 드래곤들이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의 정령들이 말해 주었기 때문에 그도 드래곤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쪼르르르......! 로얀이 앉아 있는 곳 앞으로 호수로 나아가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맑고 아름다운 물은 투명하기까지 해 바닥까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고기떼들이 보였다. 그렇게 동굴 속에서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저 멀리서 마나에 말을 실어 말하는 이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엔,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지.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녀의 음성과 말투에 로얀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과거 그녀가 자신의 연인이었을 때 말하던 부드럽고 친근감이 넘치는 그 말투와 음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듣고 싶지 않아도 멀리서 마나에 실려 들려오는 그녀의 말은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난 아주 오래 전에 정말 흥미로운 연구를 시작했지. 그건 바로 영혼에 관련된 거였어.]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그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실리아는 오래 전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영혼이란 뭘까라는 생각과 함께 실험을 시작했다. 그녀는 지능이 없는 몬스터를 죽여 영혼을 실험하기도 했고 지능이 있는 인간이나 엘프를 죽여 그 영혼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 실험에는 물론 흑마법이 큰 공헌을 했다. 흑마법을 이용해 실험을 하는 동안 그녀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사람마다 영혼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떤 인간의 영혼은 그녀로서도 쉽게 굴복시킬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어떤 영혼은 과연 이것이 그렇게 잘 났다고 나대는 인간의 영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 결과를 얻기까지 그녀의 손에 죽은 생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영혼의 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영혼을 몸 밖으로 꺼내 실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생명을 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사이 그녀는 더욱 강한 영혼을 찾는 것에 재미가 들려 점점 더 그 이상한 실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혼을 이승에 잡아두고 그녀가 개발한 흑마법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강한 영혼일수록 그녀가 하는 실험 속에서 오래 버틴다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실험을 위해 더욱 더 강한 영혼을 찾기 시작했다. 영혼을 가지고 노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하고야 말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드래곤 로드도 눈치 채고는 몇 번이나 이실리아를 찾아왔고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만 드래곤 중에서 가장 비상한 머리를 지닌 이실리아가 너무도 철저하게 사실을 숨겼기에 어떠한 증거도 잡을 수 없었다. 현 드래곤 로드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이실리아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감시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더욱 강한 영혼을 가진 생명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일종의 유희이자 실험도구를 수집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희를 떠난 그녀의 목표물은 고대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는 아이였다. 처음엔 그녀도 어디까지나 전설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레어를 조사하러 왔던 로드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고대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물론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그녀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몇몇 문헌에서 보아왔던 얘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게도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조사를 하기 위해 왔던 드래곤 로드의 행동이 그녀에게 또 다른 범죄를 지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다는 그 아이는 최초의 인간이라 할 수 있었고, 그 피는 대대로 그 아이의 자식 중 단 한 명에게만 물려졌다. 그 아이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눈동자 속에 금빛 마나가 맴도는 것이 그 아이의 가장 큰 특징이었기 때문에 마나를 보고 느끼는 드래곤인 그녀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이의 영혼은 당연히 강하지 않겠는가? 부푼 기대를 지니고 세상에 나온 그녀였지만 그녀는 그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 포기하고 다른 이를 찾기 위해 전쟁터를 찾앗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인간 중 혹 강한 영혼을 가진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전쟁터를 떠돌던 그녀는 몇 년 후 한 인간 청년을 보았다. 바로 시엔이었다. 눈이 없는 앳된 청년이 이런 전쟁터에 있는 것부터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죽을 고비를 수십 번도 더 넘게 넘나드는 그를 보며 이실리아는 그의 영혼이 그 어떤 이보다 강할 것이라 추측하며 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영혼을 빼내는 것이야 매우 쉬운 일이니 그를 죽이기 전에 이 흥미로운 인간을 좀더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로얀 바로 옆에서 그를 관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로얀 바로 옆에서 그를 관찰하기 위해 그의 연인이 된 것이었다. 시엔이라는 인간 청년은 아직 어린 나이에 너무도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매번 전쟁터에서 확인시켜 줄 때마다 이실리아는 흥미로워했다. 너무도 오랜 옛날의, 긴 이야기를 한 이실리아는 말을 늦추며 로얀을 자극시켰다. [그렇게 난 네 옆에서 연인으로 지냈지.] 이실리아는 로얀에게 드래곤 로드에 관한 것부터 시작해서, 옆에 듣고 있는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마저 놀랄 이야기를 세세하게 풀어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서 두 드래곤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실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인간을 죽이려는 거다!' "으득!" 차가운 물이 흐르는 동굴 속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로얀은 이를 꽉 악물었다. 하지만 엘라임과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율법을 또다시 어기면서까지 여기까지 온 그녀와의 약속이 아니던가! [이제 그만 나오는 게 어때? 난 너무 보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하하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실리아는 마구 웃어댔고,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는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처럼 어느새 이실리아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흐음... 그럼 그 뒷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할게. 여동생을 끔찍이 생각하던 너라면 안 나오고는 못 배길걸.] 이실리아는 로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지금부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라면 로얀이 반드시 스스로 죽으러 나올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시엔이 여동생이 있던 마을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말이야.] 로얀이 친구 얀이 읽어주는 동생의 편지 내용을 듣고는 용병 생활을 정리하고 마을로 간다고 하자 이실리아는 속으로 아쉬워하며 그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녀가 같이 가자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로얀과 그녀는 레이나가 있는 팔레인까지 같이 오게 되었다. 기회를 놓친 것을 분해 하며 짜증스러워하고 잇을 때 이실리아는 한 소녀를 보았다. 마을 앞까지 나와 자신들을 반겨주는 레이나라는 소녀...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속을 맴도는 금색 마나! 그랬다. 바로 레이나가 그 피를 타고난 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이자 로얀의 어머니인 메리엘이 어린 나이에 천재적인 마법사로 이름을 날린 이유도 그 피를 타고나서였다. 또한 기억을 잃은 레이나가 빠르게 마을 생활에 적응해 가고 뭐든 빨리 배웠던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실 메리엘과 나르크가 빛의 숲에서 숨어 살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랬기에 이실리아가 그들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엘프들과 페어리들만이 산다는 빛의 숲에 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실리아는 그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 반갑게 레이나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즐거워하는 목소리를 들은 로얀은 미소를 지었었다. 아무튼 팔레인에서 이실리아는 만나기 싫은 놈을 만나야 했다. 바로 블랙 드래곤 카엔이었다. 마법사로 분해 유희를 즐기고 있던 그도 레이나의 눈동자 속에 담긴 금빛 마나를 보고 그녀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술자리에서 카엔의 정체를 일부러 말해버렸다. 여기에는 치밀한 그녀의 계획이 깔려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잔인한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카엔은 신기한 힘을 지닌 레이나를 죽이는 것이 아까웠지만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이실리아가 옆에서 드래곤 족의 법칙 운운하며 그를 부추겼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려고 브레스까지 날려버렸다. 이실리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영혼이었기에 그녀는 그날 죽은 레이나의 영혼을 잡았다. 또한 로얀의 영혼까지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영혼은 하늘로 치솟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레이나의 영혼만을 데리고 온 이실리아는 자신의 레어에서 그 영혼을 상대로 갖가지 실험을 했다. 생명체의 영혼에 어떤 힘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흑마법으로 영혼을 쥐어짜기도 했고, 어째서 영혼은 사물을 통과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금단의 마법으로 만든 이상한 약을 주입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영혼을 찢고 부수는 행위였고 그에 따른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미 죽은 상태인 레이나는 끊임없이 그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녀가 저승에서 편안히 잘 살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로얀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다. 그러나 이실리아는 로얀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실리아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다 영혼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다는 실험을 하기에 이르었다. 바로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영혼들을 가지고 그 실험을 백 번도 더 했지만 백이면 백, 원래 몸의 주인 영혼과 그녀가 억지로 넣은 영혼은 둘 다 부서져 버렸다. 아니, 이것은 당한 영혼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을 때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봐 아예 세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레이나라는 영혼으로 계속 실험을 하다가 어느 정도 질린 그녀는 바로 그 마지막 실험을 행했다. 그녀의 목표가 된 사람은 바로 팔란 왕국의 엘레나 공주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연히 지나다 본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공주인 주제에 궁에서 편안히 지내다 죽을 것이지 밝게 웃으며 사람들을 돕는 그녀가 왠지 거슬렸던 것이다. 이실리아는 왠지 모를 스릴까지 느끼며 왕성에 잠입해 레이나의 영혼을 엘레나의 몸 안에 집어넣었다. 실험은 대 성공이었다. 엘레나의 영혼은 이실리아가 저승으로 가기 전 붙잡아 그 마지막 실험으로 부숴버렸다. 또한 어떻게 된 일인지 엘레나의 기억은 자신의 몸에서 떠나기 전 그 레이나의 영혼에 새겨졌다. 이건 이실리아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무튼 레이나는 엘레나의 몸에 무사히 자리 잡은 것이다. 그 후 이실리아는 실험의 결과물을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로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레어 속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물론 떠나기 전 두 개의 기억을 지닌 레이나의 머릿속에서 레이나였던 그녀의 원래 기억을 지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실리아는 그동안 그녀의 이런 실험을 아는 몇몇 드래곤에게 나름대로 입막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이실리아가 그런 짓까지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 너 미쳤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상관없어. 그 좋은 결계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무리 신이라 해도 중간계에서는 반쪽짜리일 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한 이실리아는 다시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튼 레어 속에 가만히 있는 것은 그녀에게 고문이었는데, 때마침 카엔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친한 드래곤을 모아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솔직히 그녀는 카엔의 죽음에 기뻐했다. 그는 그녀의 실험에 대해 알고 있는 몇몇 드래곤 중 한 명으로, 그 사실을 빌미로 이실리아에게서 보물을 가장 많이 뜯어갔기 때문이다. 카엔의 죽음이 이상해 조사하러 간다는 말에 로드는 미심쩍어 했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카엔이 인간에게 죽었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레이나가 죽을 때 곁에 없어서 그 영혼을 놓친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다시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하게 된 거야. 두 남매의 영혼이 나란히 내 장난감이 되다니, 우린 정말 인연인가봐. 아하하하!] "크으으으......" 로얀의 꾹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레이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이실리아의 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아파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아니 온몸이 불에 지진 듯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희생된 엘레나라는 여인의 영혼도 안됐지만 로얀은 지금 자신을 오빠라 부르던, 엘레나의 모습을 한 레이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친오빠인 그를 사랑한다며 떠나간 레이나의 마음은 또 뭐가 되는 걸까?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떄 전쟁터에서 이실리아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때 그녀를 마을에 데려오지만 않았더라면......! 스윽. 그가 흐르는 물을 향해 몸을 돌리자 엘라임의 명을 받은 물의 정령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로얀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처음 느껴보는 무섭고도 이상한 기운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말... 이번 싸움만 끝나면 널 몇백 년이고, 몇천 년이고 기다릴게. 미안해, 엘라임......" 첨벙. 로얀은 그렇게 물 속에 몸을 담갔다. 여기서 호수 속을 헤엄쳐 나가야 지상인 것이다. 로얀은 아픈 몸을 이끌고 와준 엘라임과의 약속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깨버린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촤아악......! 호수의 아름다운 물을 뚫고 로얀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쏴아아......! 그런 그를 차가운 빗방울이, 세 마리의 드래곤이 반겨주었다. [거봐, 나온다고 했지? 이래서 인간이 어리석다고 하는 거야. 아하하하!] 배를 감싸고 웃는 이실리아를 쳐다보며 로얀은 입술을 깨물었다. 광기 어린 이실리아의 웃음을 보고 페르디난드와 루시어스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녀가 같은 편이라는 것에 안심하며 그들 또한 로얀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왠지 로얀이 굉장히 불쌍해 보이는 그들이었다. 스르릉...... 로얀은 조용히 에리오네를 뽑았다. 웅웅웅......! 주인의 괴로움을 느낀 것일까? 에리오네가 유난히 검신을 떨며 구슬푼 울음소리를 흘려냈다. 그리고 황금빛 오러를 눈물처럼 흘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뛰었다. 그의 영혼이 눈앞의 드래곤... 정확히 이실리아를 찢어 죽이라며 절규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동생의 죽음을 두 번이나 지켜본 그였다. 레이나가 팔레인에서 죽기 전 자신이 혼돈의 정령왕이 되었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었을 거라 로얀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혼돈의 정령왕이 된 이후에도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자신 때문에 아파했던 동생이 또다시 허무하게 떠나간 것이다. 그동안 이실리아의 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두근두근두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온몸을 떨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세 마리의 드래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나누고는 전투 준비를 했다. 아니, 하려 했다. 푸욱! 드래곤을 향해 날을 번뜩이던 에리오네가 방향을 바꾸어 주인의 심장을 꿰뚫었다. 땅의 숨결까지 꿰뚫고 나온 에리오네가 자신의 주인인 로얀의 붉은 피를 머금었다. 스윽. 로얀은 목에서 끓어 나오는 피를 입으로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핏발이 선 그의 눈에서는 진하디진한 피눈물이 그의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의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아픔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세 마리 드래곤 모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에리오네의 그립을 잡고 있던 로얀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부릅떠진 채로 붉은 피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