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핏빛 불꽃 언제나 이론 제국에서 열리는 파티의 무대가 되었던 황혼의 궁에는 지금 수백 명이 넘는 기사들과 파티를 즐기던 귀족들을 비롯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한 남자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팔이 잘리고 허리가 두 동강 난 로얀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귀족가의 여인들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고, 귀족가의 나이 어린 자제들은 두려움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감히 로얀의 시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두근두근...... 로얀의 심장이 급박하게 뛰었다. 샤이니어스는 로얀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두 자루의 명검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뚜벅뚜벅...... 샤이니어스는 바닥을 적시고 있는 로얀의 피를 밟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발에 밟힌 로얀의 피가 작은 방울을 여러 개 만들며 그의 바지와 근처 바닥으로 튀었다. 고오오......! 그 순간, 엄청난 기류가 로얀의 시체 주위를 감돌았다. 흠짓! 샤이니어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범상치 않은 흑색 기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저, 저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놀란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로얀의 잘린 팔이 검은 연기로 화하더니 그의 어깨 쪽으로 다가가 일렁였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검은 연기가 서서히 팔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니, 잘린 팔뿐만이 아니라 두동강이 났던 몸도 원래대로 붙었다. 심지어 잘린 옷까지도 처음처럼 붙어버렸다. 로얀의 몸은 마치 슬라임이라는 몬스터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다크리온도 함께 딸려와 로얀의 오른손에 잡혀 있었다. 스오오오...... 로얀의 죽어버린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스스...... 샤이니어스는 자신의 발 밑에 있던 붉은 피가 갑자기 방울방울 떠올라 사라지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바닥을 흐르던 붉은 피가 모두 허공으로 떠올라 로얀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챙강! 챙강! 로얀의 몸이 갑자기 액스 형태를 띠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에 박혀 있던 두 자루의 검이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검이 빠져나간 부분은 순식간에 상처하나 남기지 않고 회복되었다. 고오오오! 몸이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온 로얀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따각. 그의 양손에 들린 성검 에리오네와 마검 다크리온은 주인이 살아나서 기쁜지 검명을 떨치며 검날을 떨기 시작했다. 웅웅...... 콰하하하!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의 검신이 백색의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 백색의 오러는 바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기술인 마나 소드였다.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는 마나를 단순히 검신 위에 덮어씌우는 것이었지만, 마나 소드는 마나가 검속에 녹아들어 융합되는 것이었다. 검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나 소드는 오러 블레이드와는 달리 백광의 오러를 뿜었고 오러를 발산해 멀리 있는 적도 벨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샤이니어스는 중풍에 걸린 환자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뒤로 한 발, 한 발 물러났다. 그의 말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사람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기사들은 칸 대륙에 단 세 명밖에 없다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보자 주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엇고, 마법사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나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로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개의 마나 소드를 지닌 로얀... 흑안의 다크로얀의 부활이었다. 번뜩.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떠졌다. 스오오오...... 로얀의 눈이 뜸과 동시에 그의 몸 주위를 떠돌며 흑색 기류가 눈동자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요동치는 기운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조금 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기도가 달라졌다. 소울 체인지! 소드 마스터가 되면 바디 체인지라는 것을 겪으며 몸이 재구성된다. 하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소울 체인지라는 것을 겪으면서 영혼이 강해진다. 영혼은 강해진다는 것은 곧 정신력이 강해진다는 말과 같다. 소울 체인지를 격은 로얀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로얀은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의 몸을 스윽 훑어보았다. 정말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것도 한층 더 강해져서 부활한 것이다. 한 번 죽을 때마다 강해진다고는 하지만 로얀은 이제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을 때의 기분이란...완벽하게 부활한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이자 목적인 황제 이론을 바라보았다. 로얀의 눈과 마주친 이론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것도 아니고 강한 살기를 띤 것도 아닌, 공허한 로얀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이론을 더욱 두렵게 했다. 화르륵. 화르륵. 로얀의 주위로 붉게 타오르는 화구가 십여 개가 생성되었다. 그것들은 바로 파이어 볼이었다. 기존의 파이어 볼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커다란 화구! 지금 그가 생성시킨 파이어 볼은 그가 죽기 전에 두 마법사가 쏜 파이어 볼의 수식이 기억된 것이었다. 로얀의 눈동자는 여전히 이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론은 밀려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로얄 나이트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로얀은 이론을 쫓지 않았다. 강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파이어 볼" 훙, 훙, 훙,......! 커다란 파이어 볼 열 개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기사들과 귀족들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신들에게로 떨어지는 화염의 구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콰가가강! "꺄아아악! 훙, 훙, 훙, 훙......! 콰가가강! "크아아악! 붉은 피의 향얀이 벌어졌다. 타오르는 불꽃과 붉은 피가 어우러진, 황혼의 궁전이 지어진 아래는 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불에 탄 시체들이 즐비했다. 그 많은 기사들과 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기에 그 피해는 더 컸다. 뚜벅뚜벅...... 절망에 허우적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로얀은 이론이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검은 여전히 마나 소드라 일컬어지는 백광의 오러를 뿜고 있었다. "거기 서라!" 멈짓. 이론이 사라진 곳으로 향하던 로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해준 놈들 중 한 놈의 것이었다. 샤이니어스와 샤엘, 그리고 마법사 두 명과 다른 소드 마스터 한 명도 보였다. 그들 다섯 명과 살아남은 기사들이 그의 뒤에서 있었다. 일반 병사들은 아직 죽지 않은 귀족들을 옮기고, 움직일 수 있는 귀족들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샤이니어스의 검엔 푸른빛 오러가 담겨 있었다. 다른 두 명의 소드 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비장한 각오로 로얀을 대하고 있었다. 몸을 두동강 내어 죽였으나 훨씬 강해져 다시 부활한 로얀이 그들의 눈엔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로얀은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기사다운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 폐하께 저 괴물이 가지 못하게 막아야한다!" "와아아아......!" 샤이니어스의 말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로얀을 향해 뛰어갔다. 철그락, 철그락! "괴물이라......" 스윽. 로얀이 오른손이 들어 올려졌다. "와아아......!" 번뜩!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떠지는 순간,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의 허공을 갈랐다. "끄르륵!" 푸화화확! 그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앞에서 달려오던 십여 명의 기사들이 모두 반 토막이 나버렸다. 그들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거대한 폭포수처럼 지면으로 추락했다. 모두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상징인 마나 소드에 당한 것이었다. "한 소녀를 죽이고 파티를 즐기는 너희는 그럼 뭐지?" "......!"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잠시 바라보던 로얀은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보통 사람의 눈으론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샤이니어스의 외침에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던 기사들은 사라진 로얀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무서운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스슥. "히에에엑!" 로얀과 눈이 마주친 기사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놀라 비명을 질렀다. 푸욱! 백광의 오러를 머금은 에리오네가 기사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그와 함께 백색의 오러가 번쩍거렸다. 로얀은 에리오네를 기사에 머리에 박은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푸푸푹! 로얀이 에리오네를 들자 네 명의 기사가 꽂혔다. 그들은 모두 머리통이 뚫려 있었는데, 뒤에 있는 두 기사는 에리오네에게 직접적으로 뚫린것이 아니라 관통당한 것이었다. 푸화화확! 로얀이 에리오네를 뽑자 네 기사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피화살을 뿜었다. 뚜벅뚜벅...... 그는 다시 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꿀꺽!"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너나 할 것 없이 샤이니어스와 소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남은 세 명의 소드 마스터와 두 명의 마법사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두 마법사 중 한 명이 샤이니어스에게 다가왔다. "조금만 버텨주게." "어떤 대책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마법진을 그리고 있네." 그 말에 샤이니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은 시전자의 한계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5서클의 마법사 두 명이라면 마법진을 그려 6서클의 마법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샤이니어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놈은 인간이다. 분명 인간일 거야. 인간이어야만 해!' 어떠한 인간이든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우웅. "가자." 그가 푸른빛 오러를 뿜으며 기사들은 향해 그렇게 말하자 샤엘과 살아 있는 소드 마스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아아......!" 철스럭, 철그럭!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들은 일제히 로얀을 향해 돌격했다. 스윽, 로얀은 두개의 검을 부드럽게 말아 쥐었다. 부우욱! "크아아악......!" 지옥은 황혼의 궁에 강림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죽음을 선물로 주었다. 로얀과 기사들이 피 튀기는 지옥의 싸움을 하고 있을 때 두 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6서클의 마법진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두려워 머리속이 햐얗게 변하며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콰가강! 푸화화확! "아직 멀었습니까?" "이, 이제 다 되었네." 샤이니어스는 부들부들 떨며 말하는 마법사의 말에 기사들은 모두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잠깐이었지만 족히 백여 명의 기사가 죽었다. 그 중에는 소드 마스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급의 소드 그랜드 마스터인 로얀에게는 초급의 소드 마스터는 그냥 기사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얀은 물러가는 기사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자 창백한 얼굴을 한 마법사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소리를 질렀다. "죽어라, 이 괴물아!" "기가 라이트닝!" 파지지지직! 엄청난 전류가 마법진 안에서 흘러나왔다. 많은 기사들과 마법사는 그 푸른 전류를 바라보며 이제는 살았다고 생각했다. 이글거리는 푸른전류는 마법진이라는 우리에 갇혀 있는 사나운 맹수처럼 보였다. 파직, 파직! 푸른 전류의 구가 마법진에서 떠오르더니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쿠하하항! 콰가가가강......! 엄청난 전류가 황혼의 궁 안에 튀었다. 라이트닝의 강화판인 6서클의 기가 라이트닝은 5서클의 마법사 두 명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기에 한층 더 강해보였다. 휘오오오...... 찬 바람이 불었다. 그에 따라 뿌옇게 내려앉은 연기가 서서히 걷혀갔다. 황혼의 궁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로얀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죽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신들은 그들의 소망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파지직. 파지직. 로얀은 여전히 두 개의 백색 마나 소드를 들고 있었고, 그의 양옆에는 그를 호휘하듯 전기를 머금은 두 개의 구가 떠 있었다. "어,어떻게!" 마법사는 절규하며 외쳤다. 어떻게 기가 라이트닝을 맞고도 상처 하나없이 멀쩡하단 말인가? 로얀은 친절하게도 마법사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그냥 베었을 뿐이다." 그냥 베었다니... 마법진까지 그려 시전하 기가 라이트닝을 그냥 베었다는 말을 들은 마법사는 허무한 마음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얀 주위를 맴돌던 두개의 기가 라이트닝이 기사들과 마법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삶을 포기한 듯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푸른 전류 덩어리를 바라볼 뿐었다. 그 전류 앞에선 어떠한 저항도 무의미했던 것이다. 파지지직! 콰가가가강......! 휘익. 로얀은 엄청난 폭발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후두두......! 황혼의궁이 흔들리며 돌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 차례의 강한 폭발로 인해 황혼의 궁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으, 으... 이 악마!" 스윽. 로얀은 자신의 앞에서 외치는 이를 바라보았다. 작은 키의 어린 꼬마였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귀족가의 자식인 듯했다. 꼬마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한 채 작지만 화려한 단검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꼬마가 쥐고 있는 단검으로 보아 죽은 귀족의 자식 중 하나인 듯했다. 기특하게도 소년은 공포를 딛고 일어나 복수를 하려 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꼬마의 행동에 아무런 표정도없이 걸었다. 꼬마는 부들부들 떨며 다가오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가올수록 꼬마의 떨림은 심해졌고, 눈물과 콧물이 전보다 더욱 많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꼬마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 속에는 길가의 바위를 보는 듯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스걱! 데구루루...... 어린 꼬마의 머리가 허공을 날더니 이윽고 바닥을 뒹굴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이 자식! 검은 그림자가 로얀의 곁을 스치고 지나더니 그의 앞을 막아 섰다. 전신을 붉은 피로 적시고 있는 샤이니어스였다. "어,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이를 죽일수 있느냐?" 로얀의 공허한 흑색 눈동자와 조우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앞을 가로막은 적을 죽였을 뿐이다. 그리고 난 인간이 아니다. 정령왕이지." 부우욱! 푸화화확! "끄르륵......" 샤이니어스는 눈동자를 굴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로얀의 정체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뚜벅뚜벅...... "기려려라, 이론 폰 클라스!" 타오르는 황혼의 궁을 뒤로하고 로얀의 눈동자 속에서 붉은 빛이 살짝 빛났다. "와아아......!" 그에게 달려들며 질러대는 기사들의 함성이 들렸지만 로얀에게는 그저 귓가를 앵앵거리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처럼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스걱! 부우욱! 두 개의 마나 소드가 달려드는 기사들의 몸을 가르고 목을 베었다. 아무리 단단한 검도, 아무리 튼튼한 갑옷도 로얀의 마나 소드 앞에서는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챙강! 쿠쿵......! 기사들의 검은 주인을 잃고 바닥을 굴렀고,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갑옷을 걸친 그들의 몸뚱이는 차가운 대리석위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높은 백색 계단 위에서 몸을 굴리는 기사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당당하게 이 계단을 올라 황제에게 기사의 칭호를 받았던 이들이 지금은 참혹한 시체가 되어 흰 대리석 계단를 붉은 피로 적시고 있었다. 로얀이 향하는 곳은 황좌가 있는 곳이었다. 황좌는 백색 계단을 올라 정면으로 가면 나타나는 거대한 문 뒤에 있었다. 이론이 벌써 성을 탈출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로얀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황좌가 있는 곳까지 향했다. 이론이 벌써 도망갔다 해도 상관없었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죽일 테니말이다. 황좌를 향해 걸어가는 그에게 병사와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그 누구도 로얀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화르륵! 계단 위에 있는 화롯불이 붉은 화염을 토해 내었다. 척척척! 로얀에게로 달려들던 기사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기사들이 물러난 자리 뒤로 대리석 계단 위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는 백 명이 넘는 궁수들이 보였다. 끼리릭. "쏴라!" 쏴아아아......! 수백의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쏘자 화살이 소나기가 되어 퍼부어졌다. 앞줄에 있던 궁수들이 활을 쏜 뒤 몸을 숙이며 자리에 앉자 뒷줄에 있던 궁수들이 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팟! 화살이 로얀이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날아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로얀이 서 있던 자리에 화살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촘촘히 박혔다. 타탁! 갑자기 사라졌던 로얀이 활을 쏘고 몸을 숙이고 있던 궁수들 앞에 나타났다. 스윽. "히에엑!" "사, 살려줘!" 두려움에 질린 제국의 궁수들은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마나 소드의 빛이 그들을 뒤덮었다. 콰가가각! 뼈가 갈리고 피가 튀었다. 활을 쏘기 위해 도열해 있던 궁수들은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목이 잘리고 몸이 갈라졌다. 근접전에서 궁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텅그렁...... 궁수들이 그들의 생명과 다름없는 활을 내팽개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방으로 도망쳤지만 로얀은 그들을 향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자는 단 하나뿐이았으까. 뚜벅뚜벅...... 스거걱! "크아악......!" 로얀은 두 손이 부드럽게 허공을 수놓을 때마다 아직 도망가지 않은 궁수들의 몸뚱이가 시린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을 굴렀다. "와아아아......!" 궁수부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물러났던 기사들이 다시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 같았다. 콰가강......! "여기군." 로얀은 금빛으로 빛나는 화려하고 커다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긴 복도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죽어라 이 악마!" 타탁! 금빛 문을 쳐다보고 있는 로얀의 귀에 한 기사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를 지른 기사는 로얀의 오른쪽으로 검을 들고 빠르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푸욱. "컥!" 다크리온이 기사의 복부에 박혔다. 기사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었지만 백색의 오러 앞에서는 초라한 천으로 만든 옷과 다름없었다. 로얀은 다크리온을 기사의 배에 꽂은 상태에서 그대로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기사의 뼈가 갈리고 몸이 쪼개졌다. 푸화확! 기사의 몸이 붉은 피를 토해 냄과 동시에 로얀의 다크리온은 허공을 치솟은 상태 그대로 거대한 문을 향해 날아갔다. 콰강! 로얀의 뒤를 똧아오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관문인 거대한 문이 부서지는 것을 보며 로얀은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 황좌를 바라보는 로얀의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곳에 황혼의 궁에서 겁을 먹고 도망쳤던 이론 황제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로 금빛 갑옷을 입은 로얄 나이트들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분명 도망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황제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로얀의 등장에 이론은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태연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철그덕! 로얄 나이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얀도 그들을 마주보며 몸을 날렸다. 타타탁! 철그덕, 철그덕! 백 명의 금빛 기사들과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흑안의 검사의 모습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휘리릭! 스거거걱! 아무리 로얄 나이트들이 빠르고 힘이 넘쳐도 두 개의 마나 소드를 가지고 있는 로얀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로얄 나이트들 사이로 뛰어든 로얀이 두 개의 검을 들고 한 바퀴를 회전하자 일곱 명의 몸이 양분되었다. 부우욱! 로얀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로얄 나이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베었다. 로얀 단 한 사람에게 백 명의 로얄 나이트가 모두 몰살당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런 로얀의 모습을 보던 이론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힘은 소문으로 듣던 것 이상으라고 생각했다. 이론은 마법을 쓰고, 두 자루의 검에 마나 소드를 입히며 싸우는 로얀을 인간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의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아무리 적이라지만 사람을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죽이는 로얀의 모습은 같은 종족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론은 그가 드래곤 아니면 마족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찰박. 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로얀의 발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며 퍼졌다. 로얀은 이론 황제의 눈동자 속에서 굳은 의지를 느꼈다. 죽음을 앞두고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인가?" 로얀의 말에 이론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윽고 이론의 입술이 열리더니 살짝 떨리면서도 제국의 황제다운 위엄이 서려있는 음성이 흘러나왓다. "그렇댜. 이미 가족들은 모두 성을 빠져나갔겠지." 뜻밖의 말이었다. 천하의 야심가인 이론 황제가 가족가 가족을 위해 죽음을 자초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뚜벅. "너의 목을 가지러 왔다." "내가 이곳에 남은 것은 가족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너를 죽이기 위함이다." 이론은 위엄있게 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있었다. 고작 단검으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상대하는 것일까? 한데 이론은 그 단검을 자신의 왼팔로 가져갔다. 스윽. 주르륵. 검날의 베인 왼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르룩. 바닥으로 떨어진 이론의 피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황좌를 돌았다. 그 모습을 보는 이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론 제국의 초대 선황께서 이 성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 넣으셨지. 황가의 피로써만 발동하는 거대한 죽음의 마법진! 이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법사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크크큭, 크하하하......!" 붉은 피는 황좌를 한 바퀴 돌더니 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론의 왼팔에선 끊힘없이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웃어젖치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 황혼의 궁에서 보았을 때에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죽어라 다크로얀! 데스!" 푸욱. 이론의 단검이 그의 복부레 박혔다. 스스로 단검을 자신의 복부의 꽃아 넣은 것이다. 이론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앗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로얀은 자신의 꿈과 야망을 짓밟은 절천지 원수나 다름없었으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죽이고 싶은 상대인 것이다. 쿠쿠쿠쿵......! 성이 크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로얀은 엄청난 진동을 느끼며 만면에 웃음을 짓고 이론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로얀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스걱. 데구루루......! 웃고 있는 이론의 목이 허공을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말했다. 너의 목을 원한다고." 그에게 있어서 지금의 상황은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레나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론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었다. 쿠쿠쿵! 부스스...... 흔들리는 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흙부스러기를 맞으며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바라보았다. 마검과 성검은 서로 부딪치면 폭발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마나 소드를 머금은 마검과 성검이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다. 아니, 이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쿠쿠쿠쿠쿵! 화아악......! 이론 제국의 황궁이 거대한 빛에 휩싸였다. 성 전체가 통체로 폭발하려는 듯했다. 금단의 마법인 데스는 이론 제국의 초대 황제인 이론이 적에게 자신이 세운 것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었다. 콰가가강......! 엄청난 빛에 휩싸인 이론 제국의 황궁이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그 속에서 로얀이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엑스 자로 맞대려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쾅! 쾅! 쾅.....! 지축을 뒤흔들며 그렇게 이론 제국의 황성은 칸 대륙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이시스를 비추었다. 지금 이시스에는 옛 황성의 잔해들만니 보였다. 황성을 둘러싸고 있던 민가와 가게들은 외곽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폭팔의 여파에 휩쓸려 버렸던 것이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로얀이 있었다. 폭발의 여파 때문인지 그의 입에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온몸은 피로 뒤범벅이었다.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는 무슨 힘이 깃들어 있는지 피가 스며들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옷은 전부 피에 절어 있었다. 로얀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혀로 살짝 핥았다. "이제 가야겠군. 이번엔 레이나의 빛을 받으려 가야지." 긴 흑발을 휘날리며 혼잣말을 내뱉은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쉴 시간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이, 그의 흑안이 향하는 곳은 드래곤 산맥 쪽이었다. 10장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본디 세상은 카오스라는 절대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카오스는 수백 개의 차원개와 그 차원계를 가꾸고 이끌어나갈 창조주라 불리는 신들을 만들었다. 수백 개가 넘는 차원계 중 플론테아... 이곳은 다른 차원계와는 달리 창조주 외에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져 있는 두 개의 차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곳 플론테아와 나머지 하나인 네오스는 특이하게도 정령왕에 의해 세상의 흐름이 흘러갔다. 카오스가 정령왕이라는 것을 만든 건 많은 차원계를 만들던 중 떠오른 한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의 흐름을 누군가 일일이 가꾸어준다며 그 세상은 좀더 아름답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이 생각 하나로 인해 플론테아와 네오스에는 네 명의 정령왕과 차원계가 만들어졌다. 카오스의 생각이 맞아떨어진것인지 플론테아와 네오스는 조화로운 모습으로 세월의 흐름을 이어갔고 그 어느 차원계보다 아름답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오스는 이제 편안한 휴식에 들었다. 그의 긴 잠은 영원히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차원계와 창조주를 만들고 이제 자신만의 공간에서 긴 휴식을 취하고자 했던 카오스는 뜻하지 않게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의 몸 속에 남아 있던 힘이 문제였다. 카오스의 몸 속에 조금씩 남은 여러 가지 힘이 요동쳐 그의 잠을 방해한 것이었다. 카오스는 어서 다시 휴식에 들고 싶어 마음에 그 힘을 모두 모아 한 존재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의 몸 속에 있던 모든 속성의 힘이 모여 만들어진 그것은 정령왕의 성질과 가장 유사했다. 그랬기에 정령계가 있는 플론테아와 네오스 중 플론테아로 보내졌다. 전혀 다른 존재가 오면 그 차원계의 질서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정령계가 있는 그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이것이 절대신에게서 처음으로 버림받은 존재, 비극의 정령왕, 또는 혼돈의 정령왕이라 불리게 되는 다섯 번째 정령왕 다크로얀의 탄생이었다. 회색빛 머리카락에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는 탁한 눈동자, 날카로운 손톱, 그리고 등 뒤에 나 있는 거타란 날개... 그 칠흑 같은 날개는 눈부신 백색 깃털로 이루어진 천족의 날개는 물론이고 박쥐 날개같은 마족의 날개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다크로얀의 날개는 검은 연기가 날개의 현상을 이루고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플론테아로 떨어진 정령왕 다크로얀은 조금씩이긴 하지만 절대신 카오스의 몸 안에 있던 여러가지 힘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태어나자마자 차원계의 모든 생명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대로 죽이고 부쉈다. 천신과 마왕이 합심해서 그를 공격했으며 지상의 수많은 생명체와 네 명의 정령왕까지 나섰지만 모두 그에게 소멸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플론테아는 수많은 차원계 중 처음으로 한 존재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다크로얀의 광분이 멈춘것도 그때였다. 차원계가 붕괴되면서 일어난 충격 때문인지 그의 정신은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차원계가 부서졌음에도 그는 어두운 우주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태어나자마자 미쳐야 했으며 헤아릴 수 없을 없을 정도로 많은 죄없는 존재를 죽어야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카오스가 잠든 신전으로 향했다. 광활한 차원계의 틈... 그곳을 신들은 무한의 공간이라 부른다. 자신이 있던 차원계가 붕괴되면서 이곳으로 오게 된 다크로얀은 카오스의 신전을 찾아갔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카오스는 자신이 아끼던 차원계인 플론테아가 붕괴해 버리자 그것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분노한 그는 자신을 찾아온 죄인 다크로얀을 직접 맞이했다. 카오스 앞에 선 다크로얀은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존재인 카오스에게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태어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놈은 나의 실수로 내어난 존재다." 카오스의 너무도 차가워 다크로얀은 몸을 떨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따위가 감히 그런 학살을 자행하다니!" "쿡쿡쿡......" 너무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카오스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다크로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크하하하! 당신의 몸에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겨주리다! 그리고 이 세상에 혼돈의 정령왕은 어디에서든 존재할 것입니다!" 쿠아아앙......! 다크얀은 온 힘을 끌어올리며 형체가 없는 빛 덩어리인 카오스를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런 다크로얀의 행동에는 카오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가라, 나의 실수로 태어난 불쌍한 존재여. 소멸!" 파하핫! 카오스의 손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짐과 동시에 그를 향해 돌진하던 다크로얀의 몸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크르륵... 크아아악!" 푸욱! 다크로얀의 날카로운 손톱이 카오스를 관통했다. 절대신의 몸에 손을 박아 넣은 그는 카오스의 말에도 소멸되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로 카오스의 몸에 오른팔을 관통시킨 다크로얀은 아직 그 오른팔과 영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카오스 이제 오른팔도 소멸되고 영혼의 소멸만을 기다리고 있는 다크로얀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다크로얀의 영혼 속에는 카오스 자신의 잡다한 힘이 담겨 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카오스는 그를 정령계가 잇는 나머지 차원계인 네오스로 보내 그곳의 절대적인 어둠 속에 봉인시켜 버린 것이다. 실수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식이었다. 또한 혼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자신과 아주 흡사한 생명체였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수 많은 세월을 사는 동안 처음으로 자신의 육체에 공격을 가한 존재가 아니던가? 카오스는 자신의 성질과 흡사한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그를 풀어놓는다면 이전과 같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또다시 차원계를 소멸시켜 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생명하며 깨우쳐 진정한 정령왕으로 깨우쳐 진정한 정령왕으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네오스로 보내면서 어둠 속에 봉인 시켜놓은 것이다. 다크로얀은 봉인된 이후로도 카오스가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은 이유를 생각보았지만 그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로얀은 기나긴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는 지금 숲 속을 걷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떠올린 것은 전대 다크로얀으로부터 받은 기억이었다. 모든 존재의 부모라고 불리는 카오스에게서 버림받은 존재인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로얀은 자신이 전대 다크로얀에게 선택받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도 신에게서 버림 받지 않았던가? 사박사박...... 그의 발끝에 낙엽이 이리저리 채였다. 이곳은 가을의 대륙인 만큼 낙엽은 어딜 가든 존재했다. 사박. 로얀의 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긴 상념에 빠져 있다보니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가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로얀은 자신 앞에 있는 존재에게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어린 꼬마 아가씨였다. 자신을 페어리들의 여왕이라 발혔던 분홍빛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인형같은 외모의 레아였다. 레아는 평소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로얀 앞에서는 쉽개 말을 꺼내지 못했다. 7만 년을 넘게 살아온 그녀였지만 어쩐지 로얀 만큼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힘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슬픈 분위기가 무서웠다. 사박사박...... 그러자 레아가 짧은 다리로 로얀의 뒤를 총총히 따라갔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정령왕이에요?" 멈칫. 로얀의 움직임이 멎자 레아의 움직임도 덩달아 멎었다. "어떻게 알았지?" "헤헤... 페어리들은 몸을 잘 숨길 수 있거든요." 로얀은 황혼의 궁에서 스스로 정령왕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이 그의 머리속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때 날 지켜보고 있었군." 그의 눈동자가 매섭게 변했다. 그러자 레아가 얼른 말을 돌렸다. "이제 뭐 할 거에요?" 로얀은 그녀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기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도마뱀을 잡으러 간다. 그러니 이제 귀찮게 하지 마라." 그러나 레아는 계속 로얀의 뒤를 따라가며 도대체 도마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도마뱀이란 단어에 레아의 머리속에 떠오른 존재는 셋이 있었다. 불의 하급 정령인 샐리맨더, 몬스터인 리자드맨, 그리고 그녀가 봤을 때 아무리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인간인 로얀이 죽이기에 힘든 존재인 드래곤이 그 후보였다. 로얀이 정령왕이라고 밝히는 것을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지만 레아는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페어리의 여왕으로서 보통 인간의 몇 배를 살아왔지만 혼돈의 정령왕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박사박...... 레아는 고민 끝에 후보 중에서 한 존재를 골랐다. "리자드맨이죠?" 그녀는 그날 로얀과 헤어질 때 따라오지 말라던 로얀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해 몰래 따라갔다. 그리고 황혼의 궁에서 그가 보인 실력과 죽었다가 살아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정령왕이라 칭한 것이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진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해 결국 로얀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로얀의 얼굴에는 귀찮다는 표정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나 레아는 그런 것은 보이지 않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드래곤이다." 흠짓. 생글거리던 레아의 작은 몸이 흠칫 떨려왔다. 설마 그 도마뱀이 드래곤일 줄이야!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레아는 소리나게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 해츨링!" "마법과 브레스를 쓰는 헤즐링이 있던가?" 로얀은 자신도 모르게 어린 꼬마에게 휘말려 대답을 해주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와 빨리 헤어지고자 빠르게 걸었지만 레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헤츨링이 아니라면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드래곤은 못 죽여요. 마법을 남발하고 브레스를 쏘아대는 드래곤을 어떻게 죽여요? 그래도 진짜 갈 거예요?" 레아의 입에서 브레스라는 말이 나오자 로얀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드래곤의 브레스도 복사할 수 잇을까?' 현재 자신은 한 번 죽고 난 뒤로 6서클의 마법까지 복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서클 마법을 브레스와 비교하는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브레스는 적어도 9서클 이상의 마법과 맞먹는 것으로 이시스의 절반을 단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로얀은 브레스를 복사할 수 있게 되면 드래곤 산맥으로 가 당한 것과 똑같이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이제 그가 이곳 가을의 대륙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어서 힘을 길러야 했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봄의 대륙으로 간다. 따라오면 죽이겠다." 로얀의 말에 레아의 머리속이 빛으로 번뜩였다. 뭔가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드래곤과 원한 관계가 있어서 힘을 기르려는 거죠?" "......" "그럼 봄의 대륙의 빛의 숲으로 가요." 빛의 숲은 렌과 세리나가 간, 엘프들의 고향이었다. 사박사박...... 로얀은 레아의 말을 무시했다. 그가 봄의 대륙으로 가는 것은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지 그런 곳에 놀러(?) 가기 위한것이 아니었다. "아아, 빛의 숲 속엔 칸 대륙에 세 명밖에 없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한 명 있는데......" 움찔. 레아가 혼잣말로 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녀를 무시하고 자신의 갈 길만 갈 생각하던 로얀은 단번에 무너져 버렸다. 자신과 동급인 상대와 싸우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수련이 된다. 로얀의 반응을 본 레아의 얼굴에 회심이 어린 미소가 번졌다. "헤에! 길 모르죠?" 가을의 대륙에서 벗아나 본 적이 없는 로얀이 그곳까지 가는 길을 알 턱이 없었다. "제가 길을 안내할 테니 몇 가지 부탁만 들어줘요." "뭐지?" "첫째, 저와는 이제 일행이니까 일행으로서 대우해 줄 것." "죽지는 않게 해주지." "쯧쯧! 전 페어리들의 여왕이라고요. 저도 충분히 강해요." 팔을 걷어붙이고 그것을 허리에 가져다 댄 채 말하는 레아의 말은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너무도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귀엽게 보이기는 했지만 무슨 힘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레아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했다. "헤헴! 둘째는 호칭." ".......?" "겉으로 보기엔 제가 어려 보이지만 저도 나이 먹을 많큼 먹었으니까 그냥 로얀이라 부를게요. 덤으로 말도 놓게 해줘요." 황혼의 궁에서부터 그를 쭉 지켜보았던 그녀이기에 그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로얀이 싸우는 도중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지 않던가! "그 두 가지로 끝인가?" 끄덕끄덕. "알겠다. 그리고 동행은 그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만날 때까지만이다." "꺄아! 로얀, 우리 잘해 봐. 헤헤......" 레아는 나이도 잊고(?)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그렇게 묘얀 그들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배고프다......" 타탁. 한 어린 소녀의 처절한(?) 외침 뒤에 불꽃이 바스락거렸다.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와 흑안의 다크로얀이라고 불리는 로얀은 꽃의 대륙이자 봄의 대륙이라 불리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레아의 안내에 따라 여행을 시작한 지 이틀이 지난 밤,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영을 하고 있었다. 한데 아직 끼니를 해결하지 못한 레아는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직접 먹을 것을 구하러 가기는 싫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로얀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런 레아의 말에도 로얀은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레아는 로얀의 정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큼직한 눈동자에 로얀의 모습이 담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배고파......" "......" 로얀은 인상을 찌푸리며 육포 몇 개를 건내주었다. "히잉, 다른 정령왕은 이렇게까지 매정하지는 않는데... 로얀은 가짜야?" 레아가 육포를 거부하자 로얀은 그것을 도로 집어넣으면서 나무에 등을 기댔다. 시끄러운 소녀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꿈이라는 장소를 택한 것이었다. 레아는 눈을 감는 로얀을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곧 다른 정령왕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걱정도 안 하고......" "무슨 말이지?" 로얀의 눈동자가 다시 떠졌다. "저번에 숨어서 로얀을 볼 때 거기에 나 말고 다른 도마뱀들도 있었어." 레아의 말에 그의 눈썹이 휘어졌다. "드래곤?" "에휴, 그놈의 드래곤 타령 좀 그만 해. 난 불의 하급 정령 샐리맨더를 말한거야." 로얀이 그날 황혼의 궁에서 커다란 파이어 볼을 사방에 날리는 바람에 불꽃이 터졌었다. 그러니 엄청난 열기를 좋아하는 하급 정령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니 그 녀석들도 로얀이 정령왕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거야."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건가?' "당연하지. 정령왕을 사칭하는 거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도마뱀들은 그 바람둥이 변태에게 알렸을 테니 그 변태는 분명 나타날 거야." 뒤에 바람둥이라는 말을 입에서 담을 때 누군가가 생각났는지 레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로얀은 정령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듣고 싶어 레아를 쳐다보았다. 그가 계속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씩씩거리던 레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좋았어!' "배가 너무 고파서 더 이상 말을 못 하겠어." "......" "배고파......" 스윽. 로얀은 결국 자신의 새로운 삶인 정령왕에 대해 알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헤헤! 요정은 신선한 과일이 주식이야." 숲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사라지면서 나무 한 그루를 주먹 모양이 선명하게 찍힐 정도로 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속 마음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레아가 웃으며 배웅해 주었다. 한 시간. "아아, 언제 오는 거야......" 두 시간.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배고프다... 심심하다......" 세 시간. "우씨, 설마 날 버리고? 에이! 설마 나처럼 예쁜 소녀를... 아냐, 로얀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레아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화악. 그녀의 몸 주위로 밝은 빛이 퍼져 나왔다. 주위에 있을 작은 요정들에게 로얀의 위치를 묻기 위함이었다. 요정들이 알려준 로얀의 위치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레아는 씩씩거리며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죽어라......!" 피를 뚝뚝 흘리며 다 죽어가는 기사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는 시퍼런 검날이 번뜩였다. 부욱. 기사의 정면에 서 있던 로얀이 허리를 약간 숙이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가사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얀은 황혼의 궁에서와는 달리 에리오네만 꺼내지 않고 다크리온만 들고 싸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 소드가 아닌 푸른빛의 오러 블레이드만으로 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허리가 두동강 난 채 죽은기사 주위에는 그와 같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로얀은 살아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수수한 옷을 입었지만 기품이 흐르는 귀부인 한 명과 척 보기에도 귀족의 자체처럼 보이는 소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들 이외에도 귀족처럼 보이는 어린아이들과 귀부인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다섯 명의 기사들이 보였다. 타탁. 그들 모두가 여기서 야영을 하고 있었는지 한쪽에서는 커다란 모닥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많은 기사들이 죽고 남은 다섯 명의 기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파핫!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기사들은 로얀을 향해 몸을 던졌다. 로얀을 죽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훙...... 부욱. "커컥!" 로얀을 달려드는 기사들의 검을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처럼 부드럽게 몸을 움직여 피하고는 그들을 베어버렸다. 붉은 피가 다크리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사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가자 한 중년의 기사가 귀족들로 보이는 자들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어서 피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황태자 전하만큼은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황태자... 지금은 이 땅은 이론 제국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크아아!" 중년의 기사는 노장의 힘을 발휘하여 힘차게 돌진했다. 그러나 로얀의 표정은 여전히 암흑 그 자체였다. 스팟! 부욱. "크억! 제, 제국이여 영원하라!" 털썩. "꺄아아아......!"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황태자라 불린 소년은 몸을 벌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터벅터벅...... 로얀은 레아의 부탁(?)으로 먹을 찾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왔을 때 멀리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보았다. 그것을 본 로얀은 이런 숲 속에서 과일이나 열매를 따러 다니는 것보다는 저곳에서 야영하고 있을 이들에게 얻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곳에서 야영하던 이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기겁하며 모두 검을 빼 드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게다가 이제 그들은 몸을 피하라고 소리를 질러 로얀에게 어린 소년의 정체를 알려 주기까지 한 것이다. 여기에 있는 어린 소년은 바로 이론 제국의 황태자였고,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은 제국의 마지막 혈손들이었다. 스릉...... 에리오네가 답답한 검집 속에서 나와 빛을 뿌렸다. 터벅. "흑흑......" 번뜩. 츄하학......! 슬피 울던 여인의 목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붉은 피가 대지를 적셨다. 그러나 로얀의 검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그의 눈동자 또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까아아악!" "오, 신이시여!" 부욱! 스걱! 푸화확......! 그는 검을 천천히 휘두르며 한 명, 한 명 죽여갔고, 그럴 때마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터벅터벅...... 이제 그는 황타자를 향해 다가갔다. "엘레나를 만나거든 사죄하라." 덜덜덜...... "으흐흐흑!" 스걱! 푸화확! 로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허공을 수놓은 피는 황태자의 것이 아닌 황가의 한 여인의 것이었던 것이다. "으아아아! 어, 어머니!" 황태자는 죽은 여인의 시체를 잡고 오열했다. 그녀가 바로 이론 제국의 황후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려 로얀의 검을 받았던 것이다. 로얀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황태자라는 소년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괴로운가? 나도 나의 여동새을 잃어 괴로웠다. 하지만 너의 괴로움은 길지 않을 것이다." 스윽. 로얀의 검이 들어 올려졌지만 황태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죽은 황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스럭. "자, 잠깐!" 로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숲 속에서 나온 이는 레아였다. 스걱! 푸화화확! 어린 소년의 머리가 허공을 수놓았다. 이론 제국 황가의 마지막 핏줄인 그가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어, 어떻게... 로얀!" 레아의 음성과 그녀의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려왔다. 가을의 대륙에서 봄의 대륙으로 넘아가기 위해가기 위해서는 드래곤 산맥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대륙 간의 이동을 막는 것은 신의 뜻에 뜻에 위배될 수도 있는 일인지라 그들은 산맥의 양쪽에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두었다. 그 중 한 곳인, 가을의 대륙과 봄의 대륙을 잇는 통로를 향해 두 남녀가 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잠깐 멈추라고 했는데도 검을 휘두르고 말이야!" 그날, 이론 제국의 황태자를 죽인 뒤부터 뚱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레아는 다음날 아침부터 투덜기리기 시작했다. 로얀이 짤막하게 원수였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핀잔은 계속되었다. 이론 제국의 황태자를 죽인 곳은 드래곤의 통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로얀을 피해 봄의 대륙으로 갈 생각이었던 듯했다. 레아의 끊임없는 투덜거림에 로얀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뭐가 불만이지?" 레아는 로얀이 멈추어 서자 덩달아 멈추어 서며 그를 째려보았다. "어차피 나에게 인간의 목숨은 중요한 게 아냐. 하지만!" "......?" "왜 음식을 구하러 가서 사람을 죽였어? 아무리 원수라도 나의 말에 잠깐이나마 멈춰줄 수는 있잖아!" 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내심 로얀이 걱정되었다. 그녀가 보기에 로얀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동요 없이 저항도 못 하는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동료니까." "......" 약간(?)은 황당한 답변을 한 레아는 로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꼭 그렇게 죽여야 해?" 로얀은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할 존재를 죽였을 뿐이다. 뭐가 문제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그의 말에 레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것이 진심일까? "휴우... 알겠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죽이지 말라고 하면 절대 죽이면 안돼." "어째서?" "생각해 봐. 그냥 장난으로 널 건드린 사람을 넌 어떻게 하겠어?" 레아의 말에 로얀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답을 물론 '죽인다'였다. 장난이건 뭐건 자신에게 검을 들이민다면 죽일 수밖에 없다. 멈칫거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도시 한복판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면? 정말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장난으로 날 건드릴 만큼 친분이 있는 존재가 나에게는 없다." 물론 얀이 있었지만 그는 로얀에게 해가 될 장난은 치지않는 친구였다. 로얀에 말에 레아는 순간 흠칫했다. '윽! 로얀을 묶어두기 위한 완벽한 작전이......' 레아는 여행을 하는 동안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로얀의 성격을 뜯어 고치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여행은 피의 여행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얀의 행동을 제어하리라는 이 생각은 황태자가 죽는 순간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였다. "아, 암튼! 그 그냥 그렇게 해줘. 대신 어둠의 숲에서 몬스터를 만나지 않고 빛의 숲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로 안내할게." "어둠의 숲?" "응. 거긴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거든." 로얀은 생각이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름길을 사양하지. 그냥 정면으로 돌파한다." "에엑! 거기 몬스터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못생겼는데!" '안 돼! 여기서 지면 난 영영 로얀에게 끌려(?) 다닐거야!' 그녀의 권력(?)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생기려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로얀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을 묶어두려는 레아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이미 레아의 생각을 간파하고 있었다. "걱정마라. 네가 동료로 있는 동안은 네 말대로 할 테니. 그러니 어둠의 숲을 정면 돌파한다. 그리고 정령왕에 대해 말해줬으면 한다." 로얀은 몬스터와 싸움으로 실전 경험을 쌓을 생각이었다. "으응......" 레아는 자신의 생각을 로얀이 알고 있는 듯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그렇게 봄의 대륙으로 가는 통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을 가는 동안 레아는 로얀에게 정령왕에 대해 말해주었다. 먼저 땅의 정령왕인 노아스는 로얀에게 검을 주었던 대장간의 그 정령 노인이었다. 그는 정말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할아버지 같은 정령왕으로 밭을 일궈 뭔가를 키우는 것을 좋아하고,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정령이었다. 그리고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은 여성체로 매우 냉랭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바람의 정령왕인 실피드는 매우 자상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여성체였다. 하나 그녀의 연인인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뭔가를 잘못할 때면 엘라임보다 더한 냉기를 뿜는다고 레아는 말했다. 레아는 다른 정령왕들은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 준 것에 비해 불의 정령왕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주지 않았다. 로얀으로서는 자신을 찾아올거라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어떤 인물인지 제일 궁금했는데 말이다. "이프리트는 어떤 존재지?" 레아는 로얀에 말에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그 귀여운 얼굴에서 험악한 표정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천하제일의 바람둥이에, 최악의 아저씨야.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그리고 능글거리는 미소..." 그녀가 말한 것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렇게 생겼다는 건가." "응? 어, 똑같이 생겼... 까아악!" 그 남자는 이미 로얀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걸렸다. "훗! 오랜만이구나, 꼬마 할망구." "이익! 이 변태! 저질! 바람둥이!" "하하하! 내가 너무 반가워서 비명소리까지 질렀으면서." "그건 절망의 비명소리야!" 그때, 로얀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인가?" "오호... 너로구나." 타오르는 불꽃같이 붉은 머리에 붉은 눈, 조각 같은 얼굴에 휜칠한 키를 자랑하는 이프리트가 로얀의 외모를 훑어보았다. 로얀을 기다리고 있던 이프리트는 노아스가 만든 망토를 두른 로얀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나를 기다린건가?" "하하, 물론이지!" 로얀은 그를 경계하며 눈동자를 빛냈다. "후후후... 스스로를 혼돈의 정령왕이라고 칭했다고? 게다가 노아스 영감탱이한테 들으니가 성검과 마검을 동시에 들 수 있다며? 정말 특이한 녀석이란 말이야?" "용건이 뭐지?" "시험!" "시험?" 이프리트는 노아스로부터 로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정령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이곳에서 그를 기다린 것이다. "그래, 네가 정령왕이 맞는지 아닌지를 말이야. 합격하면 정령왕으로 인정해 줄께." 씨익. 화르륵. 이프리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고 그의 손이 불길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싸움을 거는 그의 행동에 레아는 격분하여 외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저씨!" 레아는 기가 막혔다. 정령왕 시험이라니! "시끄럽구먼. 발육 부진의 꼬마는 저리 좀 가 있으렴." 이프리트가 레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젓자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프리트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변해 있었다. "나의 공격을 받아봐라." 로얀은 두 손이 검을 향해 나아갔다. "너에게 시험을 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날 공격하면 죽이겠다." 화르르륵!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불꽃이 강하게 피어오름과 동시에 로얀의 두 검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우우웅......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백색 오러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프리트의 손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휘오오오...... 가을 바람이 한차례 불어 두 사람 사이를 가볍게 훑고 지나가자 로얀의 긴 흑발이 살짝 휘날리고 이프리트의 불꽃이 출렁였다. 파핫! 두 사람은 마주보며 동시에 달려갔다. 그와 함께 이프리트의 정령왕 시험이라는 황당한 결투가 시작되었다. 화르륵! 이프리트의 주먹에서 불꽃이 출렁이며 뻗어 나왔다. 다크리온에 부딪힌 불꽃이 폭발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청난 고온의 열기를 느꼈을 것이다. 스팟! 그때, 로얀의 에리오네가 이프리트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히죽. 이프리트는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그는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콰가가강......! 그의 마구잡이식 공격은 웃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화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자신을 덮쳐오는 불꽃을 향해 두 개의 검을 풍차처럼 돌렸다. 화르르륵! 두개의 검이 일으키는 풍압에 불꽃들이 퉁겨 나갔다. 이프리트의 눈동자는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의 그것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로얀은 이런 식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검을 허공을 향해 강하게 그었다. 콰가가강......! 화륵! 백색 오러에 불꽃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흩어졌다. 로얀은 불꽃들이 잠시 멈추자 바닥으로 몸을 굴렀다. 그가 피한 자리에 불꽃들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이프리트는 로얀이 피하든 말든 충분히 공격할 수 있었지만 무슨 생각인지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정령왕씩이나 되는 인물이니 하늘을 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화르륵!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불꽃이 퍼져 나왔다. 붉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듯했다. "이제 장난은 끝이다. 파이어 레인!" 그의 붉은 눈동자도 덩달아 타오르는 듯했다. 화르륵! 엄청난 열기가 이프리트 몸에서 뿜어지고 스멀거리던 아지랑이가 로얀이 있는 지면으로 날아갔다. 콰가가강! 불의 비가 하늘에서 내렸다. 화염 계열 마법 중 하나인 7서클의 파이어 레인이었다.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불 계열의 모든 마법을 부릴 수가 있었다. 파팟! 보통 사람들보다 감각이 월등히 발달한 로얀에게 날아오는 뭔가를 피하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저기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그냥 피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으나 불의 비를 피하면서 이프리트가 있는 곳까지 간다는 것은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정령왕의 불꽃은 지면과 부딪히면 큰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빛 막 안에서 로얀과 이프리트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레아는 인상을 구겼다. 이프리트가 쏘아대는 불꽃에 주위는 불바다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리 그녀라 해도 맨몸으로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랬기에 은빛 막을 쳐야만 했는데,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그녀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이프리트가 못마땅해 저리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드래곤들의 영역인 이곳을 부수는 것은 곧 드래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레아는 은빛 막 안에서 허공에 둥둥 뜬 채 즐겝게 불꽃의 비를 뿌리고 있는 이프리트에게 외쳤다. "변태 아저씨! 미쳤어?" "하하하! 꼬마 할매, 넌 거기서 구경이나 해. 우하하하......" "이익! 여긴 드래곤 영역이라고!" "하하하! 걱정 마. 드래곤 로드에게 그걸 해주기로 했거든. 여기 숲을 볶아 먹든 튀겨 먹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 이프리트는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 하늘이 올리도록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레아는 한숨을 쉬었고, 로얀은 여전히 불꽃을 피해 뛰어다녔다. 드래곤 로드에게 해주기로 했다는 그것이란 바로 중매를 말하는 것이다. 이프리트는 종족을 가리지 않고 중매를 서주고 있었다. 마족이나 천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신들 중에도 그의 손에 이루어진 커플이 많았다. 이프리는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언어 구사 능력도 뛰어났고 매너도 좋았기 때문에 많은 여자들에게 호감을 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마다하지 않았기에 웬만큼 예쁜 여자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발은 하늘만큼 땅만큼 넓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웬만큼 예쁘다는 기준은 실로 심오한 것! 덕분에 그가 취미로 하는 중매는 백발백중이었다.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프리트가 다른 남성체에게 소개시켜 주는 여인들은 모두 그와 몰래 사귀었던 여인들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남성체들이 알았다면 당장 이프리트를 죽이려 들었겠지만, 다행히 그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명 그것을 알고 있는 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레아였다. 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을 때 레아는 이프리트가 중매를 하면서 남성체들에게 뭔가를 받아먹는 것을 보고는 그의 오랜 연인인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에게 달려가 고자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와아,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 여기서 싱긋 웃는 실피드, 그녀는 이미 이프리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이프리트가 정말 바람을 피운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실피드에게 발각되어 천하의 쾌활남 이프리트가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여기저기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던 레아는 그후 이프리트의 여자 관계에 대해 알아차리게 되엇느데, 그때 그녀는 그 사실을 알리기보다는 그것을 빌미로 맛있는 사탕을 받아먹고 있었다. 레아느 둘의 싸움을 말리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왜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레아는 그것이 이상했다. 분명 로얀은 황혼의 궁에서 파이어 볼 비슷한 것을 주문도 없이 마구잡이로 날렸다. 거기서 6서클의 기가 라이트닝도 날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마법을 써서 하늘을 날아 싸운다면 정령계가 아닌 이곳 중간계에서는 절반에 해당하는 이프리트와 동수를 이룰수도 있을 텐테 그러지 않다니.... 파팟! 로얀이 높이 뛰어올라 떨어져 내리는 불꽃을 마치 계단처럼 밟고 올라갔다. 그는 마침내 강행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의 발끝에 밟힌 불꽃이 찌끄러지기도 전에 그는 다른 불꽃을 밟았다. 쾌속한 움직임에 이프리트는 순간 흠칫했다. "죽어라." 스팟! 쾅! 로얀의 몸이 이프리트의 몸을 파고듦과 동시에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엄청난 열기가 파도처럼 로얀을 향해 덮쳐왔다. "크아아악!"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츄아아악! 로얀은 지면으로 떨어진 후 뒤로 쭉 밀려났다. 그의 발에 흙이 땅에 밀려 땅이 파였다. 옷에 여기저기 불이 붙은 것 빼고는 상처 하나 없는 로얀은 먼지를 털 듯 옷에 붙은 불꽃을 터뜨렸다. 비명소리의 주인공은 이프리트였다. 그의 몸은 어느개 토막토막 잘려 있었다. 스윽. 로얀은 허공에 잘려 잇는 이프리트의 몸을 보며 자신의 검을 집어넣으려 했다. 이제 곧 그의 시체가 지면으로 떨어지지라. "로얀!" 멈짓. 검을 반쯤 넣고 있던 로얀은 레아의 목소리레 본능적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뜨거운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다. 화르르륵! 콰카카캉......! "크으윽, 더럽게 아프네! 너 설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거야?" 이프리트는 자신이 쏘아 보낸 불덩이를 로얀이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정통으로 맞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 너 정령왕 맞아? 정령이 죽는 거 봤어? 정령은 죽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무리 신의 육체에 상처를 낼 수 있는 마검과 성검이라지만 정령왕은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은 한 죽었다고 표현하는게 아니야." 이프리트의 몸이 불꽃에 휩싸이더니 상처 하나 없는, 싸움을 시작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검과 성검은 확실히 에고 소드나 여타의 마법검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 즉 죽지 않는다는 신의 육체에도 상처를 낼 수 잇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검으로도 이프리트를 죽이지 못한 것은 이프리트가 정령이기 때문이다. 이프리트의 말처럼 정령은 죽지 않는다. 하급 정령 실프를 예로 들어봤을 때, 실프를 검으로 베어 사라지게 만든다 해도 그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갈 뿐이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정령을 죽이려면 정신체까지 완전히 소멸시켜야 한다. 불꽃은 잘라도 여전히 불타오르는 것처럼 조금 전처럼 단순히 육체를 토막내 봐야 어느 정도 고통만 줄 뿐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것이다. 뜨거운 불꽃이 걷리고 두 개의 검을 잡고 있는 로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옷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고 그 사이로 피가 비쳤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너무도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자, 제2라운드다!" 이프리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의 팔이 뜨겁게 타올랐다. 화르륵! 이프리트의 모습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런 모습에 레아는 로얀이 걱정되었다. 그녀가 보기엔 로얀은 사람이었다. 인간은 도저히 정령왕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로얀! 어서 마법을 사용해!" 레아는 로얀이 물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이프리트에게서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긴, 만약 보통 인간이라면 물의 마법을 쓴다고 해도 이프리트의 공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로얀은 레아의 말에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좀 전에 파이어 레인은 수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는말은 지금 자신은 6서클의 마법까지 복사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령왕인 이프리트가 지금 쓰는 것은 마법일까?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의 순수한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힘이 반감되어 있는 정령왕이었지만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불끈 말아 쥐었다. 그의 손끝으로 붉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이 이프리트의 웃음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정령왕은 피를 흘리지 않지, 이 가짜야." 화르륵! 이프리트는 로얀을 향해 덮쳐갔다. 그 모습은 정말로 뜨거운 태양이 강림하는 것만 같았다. '도전이다!' 로얀은 이프리트의 불꽃을 보았다. 과연 정령왕이라는 대단한 존재의 힘을 복사할 수 있을까? 콰가가강.....! 이프리트의 몸이 떨어지고 로얀의 검과 맞부딪쳤다. 엄청난 불꽃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그 뜨거운 불꽃을 보며 이프리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얀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재가 되어 화했으리라. 그러나! "이런 마, 말도 안 되는!" 화르르륵! 이프리트는 그와 대등한 불꽃을 붐어내고 있는 로얀을 보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의 검신에 백색오러가 둘러쳐져 있고 그 주위를 타오르는 불꽃이 넘실대고 있었다. 이프리트가 몸으로 뿜어대는 것을 로얀은 검으로 펼친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레아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불의 정령왕인 자신에게 불로 공격하려 하자 이프리트는 화가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로얀이 자신과 대등한 힘을 가진 불을 내뿜자 경약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 로얀의 두 검이 내뿜는 화염은 이프리트가 내뿜는 화염과도 대등했다. 불의 정령왕이 내뿜는 화염과 느낌도 열기도 비슷한 화염! 결코 인간이 내뿜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있단 말인가!'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제가지 수십만 년 동안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프리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핫! 화르륵! 이프리트가 너무 놀라 이런저런 생각에 잡혀 있을 때 로얀이 몸을 날렸다. 그러자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내뿜는 화염이 이프리트를 향해 덮쳐왔다. "큭!" 이프리트는 급히 화염을 내뿜으며 양 옆구리로 들어오는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주먹으로 쳐냈다. 쾅! 쾅......! 엄청난 화염끼리 부딪치다 보니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죽지는 않으나 고통은 느끼는 이프리트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폭발 속에 그의 몸이 흔들렸다. 커다란 폭발에 이프리트는 몰론이고 분명 로얀도 그만큼 고통을 느꼈을것이다. 하나 로얀은 바닥에 떨어진 직후 재도약해 이프리트를 덮쳤다. 그의 두 개의 검은 여전히 이글거리는 화염을 머금고 있었다. '같은 정령왕이라 그런가? 정령왕의 힘은 복사가 되는군.' 화염 속에서 로얀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평범한 인간이 괴물로 변한 자신의 존재를 납득하는 과정은 쓸쓸한 길이었다. 화르륵! "크윽!" 두 사람이 충돌했는데 이프리트만이 신음을 내뱉었다. 화염의 농도는 같았지만 로얀에게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가 화염을 내뿜는 심지가 백색의 오러라는 점이었다. 타탁! 다시 지상으로 떨어진 로얀은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이번 공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온 힘을 끌어 모았다. 이번 한 방으로도 정령왕을 소멸시킬 순 없겠지만 정령계로 돌려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크아아아!" 화르르르르......! 이프리트의 분노가 폭발할 것일까? 괴성과 함께 그의 온몸에 서 화염이 출렁였다. 타탁! 그는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오며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로얀의 엄청난 능력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레아는 분노한 이프리트를 보며 긴장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심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은 지상에서도 정령왕 본신의 힘을 모두 사용할 방법이 있었다. 다만 3분 후에 강제로 정령계로 보내진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백 년 동안은 정령계에거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레아는 백 년간 정령계에 틀어박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프리트가 본신의 힘을 쓸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가 본신의 힘을 쓴다면 아무리 로얀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터벅터벅...... 이프리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로얀을 주시하며 다가왔다. 로얀은 두 개의 검을 고쳐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화르르륵! 한데 이상하게도 로얀에게 다가갈수록 이프리트의 몸에서 뿜어지는 화염이 잦아들고 있었고, 덩달아 로얀의 검에 맺힌 화염도 잦아들었다. 이프리트나 레아는 로얀의 화염이 잦아드는 이유가 이프리트쪽에서 먼저 힘을 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로얀은 이프리트가 내뿜는 화염을 그대로 복사해 쓰고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프리트의 몸에서 흐르던 화염이 모두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한 청년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로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로얀은 여전히 검을 든 채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화염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의 백색오러는 여전히 출렁였다. 무겁게 닫힌 이프리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살짝 올라갔다. "향복." 휘오오오...... 그의 단 한마디가 주위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 석상 같은 로얀조차 휘정거릴 정도로 맥 빠지는 소리였다. 흥미진진해지고 있는 싸움을 지켜보며 걱정하고 있던 레아의 황당은 하늘을 뚫고 우주을 날고 있었다. "하하하! 아무리 날 베어봤자 난 죽지 않으니까 괜히 힘 뺄 필요 없잖아?" "정령계로 돌려보낼 순 있겠지." "이봐, 친구. 어떻게 그런 섭섭한 말을!" "친구?" "하하! 기뻐해. 널 정령왕으로 인정하겠어. 으하하하......!" 이프리트는 하늘을 향해 화통하게 웃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쉰 그는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하아! 정령계에서는 말이야... 우리 실피드는 엘라임과 놀지, 그놈의 영감탱이는 꽃이랑 놀지...난 뭐냐! 하지만! 드디어 나에게도 같이 술도 마시고 이것저것(?)도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거야!" 로얀은 두 개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프리트가 한말이 맞았다. 그는 어차피 죽지도 않는 괴물이니까...... "어떻게 나라는 존재를 그렇게 쉽게 인정하지?" 혼돈의 정령왕이라는 황당한 존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인정할 수 있을까? "험험! 그건 네가 쓴 화염 때문이다. 그 화염은 나의 것과 똑같은! 이거면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어?" 물론 그것만으로는 정령왕으로 인정하긴 힘들다 할 수 있었지만 워낙에 정령계에서 왕따당하다시피 하는 그는 친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물론 여자를 더 좋아하는 그였지만 정령계에는 그와 놀아줄 여자가 실피드 외에는 없었다. 엘라임은 이프리트를 극도로 싫어했고, 무엇보다도 정령계에서 작업 들어갔다가는 실피드의 바람의 칼날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이프리트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실피드였던 것이다. 로얀과 이프리트 간의 싸움이 정리되려 할 때 어디선가 뭔가가 날아왔다. 타타탓! 퍽! 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와 이프리트의 복부에 주먹을 꽃은 것은 레아였다. 그러나 그녀의 주먹에 고통스러워할 그가 아니었다. "하하하! 뭐야, 그렇게 내게 안기고 싶었어?" 이프리트가 품안에 있는 레아를 안으려는 순간 그녀는 잽싸게 빠져나왔다. 레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게 항복할 거면 왜 화난 것처럼 연기한 건데!" "아하..그건 연출이야. 멋지잖아? 하하하!" "이, 이 사이코 정령왕!" 레아는 격한 반응에 이프리트는 혀를 찼다. "쯧쯧! 역시 어린 할망구는 이런 것도 이해 못 해요. 그건 그렇고 너희들 일행에 나도 끼워줘라." 그의 반응에 레아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외쳤다. "죽어도 안 돼! 절대 안돼! 불가! 불가!" 터벅터벅. 이프리트는 레아를 무시하고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나도 끼면 안 될까?" 레아는 로얀이 절대 허락할 리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믿음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뜻밖이었다. 그의 말에 이프리트는 레아를 향해 웃음을 터뜨렀고 보너스로 브이 자를 그리며 손을 흔들었다. "으윽! 이건 말도 안 돼......!" 레아늬 외침이 드래곤 산맥에 울렸다. 그리하여 로얀의 일행에 이프리트도 끼게 되었다. 한데 로얀이 이프리트를 동료를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 녀석이 옆에 있으면 좀 전에 화검을 다시 쓸 수 있겠지.' 그는 이프리트를 무기로 여겼다. 아니, 불을 피울 수 있는 부싯돌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답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프리트는 레아를 놀리며 즐거워했다. 11장 여신의 부탁 가을의 대륙과 북쪽에있는 봄의 대륙을 잇는 거대한 터널은 드래곤들이 직접 만든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위용을 뿜내기 위해 이곳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터널 안은 온통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거대한 드래곤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터널의 천장에는 주먹만 한 마나석이 엄청나게 꽂혀 있었는데, 그곳에서 밝은 빛이 터져나와 터널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황금과 마나석으로 도배되어 있는 터널이었지만 이곳의 금을 긁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곧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을 모두들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터널을 터는 것은 곧 전 드래곤들의 레어를 동시에 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멋진 터널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드래곤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드래곤들은 가디언을 시켜 일정한 통행료를 받고 있었다. 한데 그 통행료라는 것이 엄청나게 비싸, 덕분에 대륙 간의 이동은 보통 여행자들은 엄두도 못내고 거대한 상단이나 왕국의 사절단들만이 이용했다. 그 엄청나게 비싼 터널을 지나는 이들이 있었다. 한데 마차의 덜그덕거리는 소리도,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흘리는 요란한 발걸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 터널을 지나는 인물은 모두 세 명뿐이었다. 바로 로얀과 레아, 이프리트였다. 그들이 통로를 아무 방해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이프리트의 공이었다. 고금제일의 중매쟁이이자 천하의 카사노바 이프리트가 드래곤 로드에게 중매를 써주겠다고 한 것은 때문에 통로 입구에서의 싸움은 물론이고 통로를 이용하는 것까지 드래곤들이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프리트의 손을 거치면 누구든 천생연분이 된다.' 그의 중매쟁이 경력 3만년이 되던 해에 들려온 말이었다. 이프리트가 싱글벙글 웃으며 로얀의 옆에서 걸어가는 반면 레아는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이프리트를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였기에 그 근처에는 다가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프리트가 뒤를 돌아 레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쿡쿡! 역시 페어리의 여왕들이란......" "......" 그러나 로얀은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레아의 나이가 얼마인지 알아?" 이프리트가 로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나 로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큭큭! 자그마치 7만 하고도 1천 살이라고." 로얀은 이프리트의 말에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놀랐다. 페어리의 여왕은 레아의 겉모습은 어린 소녀였고 그녀의 심성도 매우 어려 보였는데 실제 나이는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놀랐지? 페어리들은 10만 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신의 몸을 얻어 영원히 살게되지." 페어리... 페어리는 요정들을 뜻했다. 요정 하면 매우 작은 몸에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을 달고 다니는 존재를 뜻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어린아이로 묘사했다. 요정 중에는 흰 수염을 늘어트리고 꾸부정하게 다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멸할 때까지 어린아이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연령이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그들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신은 성장했다. 그 모든 요정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바로 페어리들의 여왕이었다. 여왕은 태어날 때부터 여왕으로 정해져 태어나기 때문에, 신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다고 전해지는 요정이었다. 그리고 엘프들과 비슷하게 1만 년 정도를 사는 요정들과는 달리 페어리들의 여왕은 10만 살이 되어서야 성인이 된다. 여왕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어린 소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정은 보통 인간의 주먹만 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여왕은 인간 소녀의 몸를 지니고 있었고, 10만 살이되면 인간 성인 여성의 육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역대 여왕 중 성인이 된 사람은 없었다. 있다면 더 이상 여왕이 바뀔 필요도, 탄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들이 성인이 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진 이들은 페어리로 10만 년이라는 지루한 인생을 살았다. 이런 판국에 성인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라니! 결국 그녀들은 모두 10만 살이 되는 해에 소멸했다. 페어리의 여왕이 성인식에서 소멸하면 원하는 존재로 환생할 수 있기에 미련도 없었다. 아무튼 레아의 성인식은 이제 2만 년하고도 9천 년이 남은 것이다. 한데 레아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내 욕 했지!" 어느새 레아가 다가와 이프리트와 로얀의 중간에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더 이상 페어리의 여왕이 바뀌진 않겠군." 로얀의 결론이었다. 어리다는 말을 극도로 싫어하며 다른 페어리의 여왕들과는 달리 호기심이 많은 그녀라면 아마 성인이 될 것이다. 레아는 왠지 기분 나빠 발끈하며 외쳤다. "로얀! 무슨 소리야!" "풋, 그렇지? 푸하하하......!" "뭐, 뭐야!" 이프리트의 웃음소리가 커짐에 따라 레아의 얼굴은 빛나는 마나석 아래에서 더욱더 붉어졌다. 봄의 대륙이자 꽃의 대륙이라 불리는 이곳은 현재 통일된 하나의 제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르센 제국... 봄의 대국을 제패한 제국의 이름이었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한 지 백 년이 지났다. 백 년 동안 봄의 대륙은 엄청난 발전을 해 어느 제국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물론 여시에는 봄의 대륙을 제패한 카르셈 제국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 바로 어둠의 숲과 빛의 숲이었다. 만약 빛의 숲 앞에 어둠의 숲이라는 거대한 성벽이 없었다면 빛의 숲은 진작에 인간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의 조화 때문인지 두 숲은 가까이 붙어 있었다. 어둠의 숲... 칸 대륙에 서식하는 모든 몬스터들이 모여 산다고 번해지는 저주받은 땅이었다. 그러나 로얀이 지금 찾아가는 인물인 만큼 그는 어둠의 숲 너머에 있는 빛의 숲에 있을 것이다. 빛의 숲은 페어리들과 엘프들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로얀 일행은 드래곤 산맥의 터널을 지나 라이난이라는 거대한 도시로 들어왔다. 이곳에는 칸 대륙에서 창조주를 모시는 가장 거대한 신전이 있었는데, 현재 이 신전의 황제보다 더한 귄위를 가졌다는 교황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 신전은 다른 곳과는 달리 톡득한 뭔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향기였다. 봄의 대륙답게 신전 내부에 흐르는 물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향긋한 향기를 내뿜었던 것이다. "꼬맹아 화 좀 풀어라......" 레아는 드래곤 산맥의 터널을 지난 때부터 삐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프리트가 끝내 로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프리트는 레아 옆에 붙어 그녀의 팔을 콕콕 찌르며 그녀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라이난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로얀 일행은 신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신을 싫어하는 로얀이었지만 팔란 왕국과 이론 간의 전쟁을 멈추게 했던 교황이라는 인물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명색의 칸 대륙의 하나뿐인 교황인데 쉽게 대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먼발치에서 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 해서 가는 것이었다. 신을 믿고, 신에게서 사랑받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레아와 이프리트가 벌이고 있는 말씨름을 외면한 채 로얀은 저 멀리서 웅장한 자태를 드래낸 신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프리트는 레아가 끝까지 화를 풀지 않자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자신의 품을 뒤졌다. 레아가 계속 삐쳐 잇으면 그가 무척이나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상황에 실피드라도 나타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레아는 이프리트만큼이나 여기저기 돌아니는 것을 좋아해 그가 저지른 많은 사건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또한 귀여운 외모의 소유자인 레아는 실피드와도 무척이나 친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프리트가 왜 레아에게 꼼짝도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스윽. 흠짓. 그가 꺼내 든 것은 커다란 막대 사탕이었다. 그것을 본 레아는 몸이 살짝 떨렸다. 이프리트는 살짝 웃었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아까워했다. 이 사탕은 신들이 먹는 귀한 것으로서 그도 몇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레아는 엄청난 속도로 이프리트 손에 들린 사탕을 빼앗았다. 그리고 힐끔 이프리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그래, 그래" '윽! 벌써 한개를 쓰다니. 앞으로 레아의 입을 막으려면 부족할지도......' 이프리트는 로얀과 여행하면서 여전히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레아의 입을 막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인간 세상을 여행하면서 사탕을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그건 다 레아 때문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자신이 일궈낸 수많은 작업 중 하나를 실피드에게 말해 혼줄이 났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여차하면 그의 비리를 고자질할 수 있는 레아의 입을 막기 위해서는 사탕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가 종종 신들에게 중매의 대가로 대량의 사탕을 요구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레아는 사탕을 할짝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밝게 웃으며 사탕을 먹는 그녀의 모습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그런 그녀의 모습과 이프리트의 잘생긴 외모에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로얀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얀은 이프리트와 레아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신전에 있을 교황만을 생각하며 옮겼다. 백색 대리석을 만든 거대한 계단이 로얀 앞에 펼쳐졌다. 신전 앞은 여기저기서 찾아온 신자들과 여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인가,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자신은 그렇게 처절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여기에 있는 이들은 신의 가호 아래 웃음을 잃지 않으며 행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좀 그만하고 이만 가주십시오!" 신전에서 호통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신관으로 보이는 사람과 신전을 지키는 몽크들, 그리고 몽크들에게 잡혀 있는 한 여인...... 호통을 쳤던 신관이 몽크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은 여인을 신전 밖으로 내쫓았다. 갑작스런 소란에 신전 앞을 메우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 여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정적...... 신전에서 나온 여인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아름다운 초록빛 머리에 붉은 입술 뽀얀 피부, 그리고 몸매 또한 고혹적이었다. 밝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신전에서 좇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을 바라조고 있었다. 그녀가 신전에서 쫓겨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신전으로 들어갔고 매번 쫓겨났다. 이곳에 오늘따라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것도 밖으로 다시 나올 그녀의 외모를 보기 위함이었다. 엄청난 외모를 지니고 있는 여인이엇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없었다. 치근대던 한 남자에게 그녀가 공개적으로 본때를 보여주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로 보아 그녀는 꽤 높은 서클의 마법사인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누군가가 다가가고 있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아름다운 레이디?" 상큼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를 바라보는 인물은 바로 이프리트였다. 조각 같은 외모에 루비같은 눈동자, 훤칠한 키의 외모... 그는 잘생긴 데다 매너있고, 몇십만 년의 경력까지 있는 선수였다. 그런 그의 말속엔 묘한 마력이 숨어 있는 듯했다. 이프리트는 사탕 때문에 나서지 않고 노려보고만 있는 레아에 대한 생각은 이미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그의 신조는 일단 저질러 놓고 보자는 것이었다. "감사해요." 여신이라도 반할 만한 미소를 띄우며 다가간 이프리트의 말에 그 차갑던 여인도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이프리트는 여신도 꼬신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그 여신과 실피드는 크게 싸웠다. 하지만 정령계나 신계나 똑같았기에 본신의 힘을 쓰는 실피드는 강했고, 당연히 그 싸움의 결과는 그녀의 승리로 남아 있었다. 이런 일 때문에 실전경험(?)을 많이 쌓은 그녀는 정령왕 중 가장 강했고, 신계든 마계든 모두 그녀를 두려워했다. 한데 왜 실피드가 이프리트를 감싸며 그를 그렇게 사랑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정령왕의 힘은 최상위의 신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마계와 신계를 묶어두고, 세게의 균형을 유지하는 자로서 정령왕들은 차원계를 지키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령왕들은 중간계의 드래곤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수 있었다. 조금 전 레아와 투덜거릴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인 이프리트는 여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지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이프리트의 말에 여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끼었다. "말하자면 길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프리트는 그녀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팔로 두른 채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좀더 조용한 곳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이프리트가 여인을 이끌고 사라지려 하자 레아는 로얀의 소매를 잡아 그를 재촉하려 했지만, 그녀의 손을 피한 로얀에게 로히려 손목이 잡혔다. 굳은 얼굴로 신전 바깥에 있는 조각들을 보고 있던 로얀은 갑작스런 레아의 행동에 얼굴을 구겼다. "그 변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빨리!" 오른손에 막대사탕을 들고 깡충깡충 뛰며 말하는 그녀를 보고 로얀은 레아의 손목을 놓고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그의 이런 행동은 정말 의외였다. 그렇게 그 두 사람도 이프리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레아를 따라 이프리트를 쫓던 로얀은 거대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여관과 식당을 겸하는 곳으로 크고 화려했는데, 어쩐일인지 식당 안에는 신전 앞에서 만났던 여인만이 있었다.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는 이프리트와 여인을 발견한 레아는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레아가 그 여인 옆자리에 앉자 뒤따라온 로얀은 이프리트 옆에 앉았다. "이 식당 통채로 빌렸지?" "훗!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를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게 뻔하니까." 이프리트의 말에 여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웃기지 마. 작업에 방해가 되니까 그랬겠지!' 레아는 으르렁거리며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이프리트는 정령왕 중 가장 부자였다. 그의 취미가 취미인 만큼 들어오는 수입이 엄청나게 짭짤했던 것이다. 그는 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을 통채로 빌린 후 사람들을 간단하게 쫓아버렸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귀족이었지만 정령왕만의 기운과 힘으로 쫓아버린 것이다. 쉽게 에를 들자면 드래곤의 피어 같은 것으로 말이다. 식당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로얀 일행은 먼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프리트는 식사 도중에도 레아의 눈빛을 외면한 채 여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에 음식이 모두 사라졌다. 빈 접시를 가져가는 종업원에게 이프리트가 뭐라 속삭이자 종업원은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제 식당안에는 로얀 일행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프리트는 앞의 여인을 보며 턱을 괴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전 불의 정령왕 이프라트라고 합니다." "뭐, 뭣!" 그 말에 반응을 한 건 레아였다. 설마 인간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정체를 밝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 여자는 인간이 아니다." 이프리트의 말에 얼굴이 살짝 굳어졌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여인이 그 말에 움찔했다. 그녀도 이프리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프리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그 인간이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라고 호칭했지만 그녀는 이프리트 때문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꽃의 여신 로즈아린이라고 해요." 꽃의 여신인 그녀였지만 지위 상으로나 힘으로나 정령왕인 이프리트보다 한참이나 아래였다. 그녀는 신 중에서도 하급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급 신은 5천살 이상의 이상의 에이션트 드래곤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보면 드래곤은 나이에 비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본신의 힘으로도 에이션트 드래곤을 이길 수 없는 로즈아린은 인간계로 올 때의 제약 때문에 절반의 힘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지금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힘은 신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로즈아린의 계급이 아래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프리트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높였다. "신기를 잃어버렷군요." "네......" 이프리트의 말에 로즈아린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신기는 신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한데 상급 신은 신기가 없어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하급 신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프리트는 좀전에 신전에서 흘러나오던 꽃향기와 그녀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신기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레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도 신기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신기를 잃어버렸어요?" "하아......" 로즈아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간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유희를 나온 그녀는 신기를 그만 강탈당하고 말았다. 범인은 아마도 드래곤. 실제로 드래곤 중에는 유희를 나오는 하급 신의 신기를 훔치는 이가 종종 있었다. 보석과 신기한 물건을 좋아하는 드래곤의 특성 때문이었다. 신기를 강탈당해 망연자실해 있던 그녀는 어느 날 이곳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신전 전체에서 향긋한 꽃향기가 난다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신기밖에 없었다. 로즈아린은 신기를 돌려 받기 위해 신전을 찼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의 힘으론 성기사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어 번번히 쫓겨났던 것이다. "호오... 그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프리트의 말에 로즈아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령왕인 그의 힘이라면 신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창조신인 주신의 사자인 교황이 마음에 걸렸지만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라면 문제없을 것이다. 레아도 도와주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로즈아린의 손을 잡고 있는 이프리트의 손을 탁 쳤다. 그녀의 행동에 이프리트는 손을 치우며 미소를 띄웠지만 속으로는 강하게 노려보고 잇었다. 평소 같으면 반대하고 나설 로얀도 이번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신의 축복을 한 몸을 받은 교황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 감사해요." "하하! 대신 신기를 되찾은 후 저와 데이트를 해주시겠습니까?" 이프리트의 말에 로즈아린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밤에 시작하죠." 물건을 훔지는건 밤이 무대여야 제격이다. 이프리트가 로즈아린의 손을 슬쩍 잡고는 물었다. "시간이 남는데 그동안 도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 로즈아린이 화사한 웃음으로 답하자 이프리트는 웃으며 먼저 식당을 나섰다. 그를 따라 일어나려던 로즈아린의 소매자락을 레아가 붙잡았다. "저 변태의 여인이 누군지 몰라요?" 빙긋. 로즈아린은 페어리의 여왕인 레아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레아가 자신의 나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놓았다. 레아가 어려보였기에 말을 높이는 것이 어색한 이유도 있었다. "난 그날의 사건을 직접봤어. 단지 이프리트님의 힘을 빌리고 싶어서... 일이 끝난 후에는 실피드님께 직접 말할 생각이야. 그러니 이프리트님에게는 비밀로 해줘." 그녀는 신전앞에서 이프리트를 알아보았고 신기를 되찾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한 것이다. 신기가 아니엇다면 이프리트는 처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피드와 상급 여신의 싸움이 있었던 그날 그녀는 보았다. 차가운 얼굴로 상급 여신을 소멸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실피드를 말이다. 그 사건 이후 신계의 여신들은 이프리트를 피하게 되었다. 로즈아린의 말에 레아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이 일이 끝나고 이프리트가 자신의 수작을 걸었다고 로즈아린이 실피드에게 말한다면? 그말로 이프리트는 인간계에서 사라질 것이다. "걱정말아요." 레아의 말에 로즈아린이 이프리트에게로 가자 식당안에는 로얀과 레아만이 남았다. 레아는 로얀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우리도 놀러 가자." 드륵. 그 말에 로얀은 의자에 몸을 일으켰다. "난 잘 테니 밤이 되면 깨워줘." "윽, 지금은 대낮이라고!" 레아의 외침에도 로얀은 밤을 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도둑들에게는 아침의 태양과 같은 두 개의 달. 환하게 뜬 두 개의 달을 보며 로얀 일행은 신전이 보이는 숲속에 모였다. "레아, 부탁해." 끄덕끄덕. 이프리트는 레아가 웃음까지 띄우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모두 손을 잡아요." 레아의 말에 서로서로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간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요정들의 기술을 레아가 지금 쓴 것이다. 이 기술을 몸을 투명인간처럼 숨기는 것이었다. 로즈아린은 손을 잡지 않았다. 신기를 가지러 가는 데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아가 힘을 이용해 모두의 몸을 숨긴 후, 이프리트와 레아가 양쪽에서 로얀의 손을 잡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신전의 지붕에 붙어있는, 사람들의 눈에 잘 뛰지 않는 창가였다. 그곳에 내려앉은 그들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게 맡겨." 화륵. 이프리트의 손가락이 불꽃에 휩싸였다. 치이이익! 그는 그 손가락을 유리에 가져다 대더니 칼로 종이 자르듯 그것을 동그랗게 잘라 나갔다. 딸각. 이윽고 다 자른 유리를 그가 떼어냈다. 신전으로 들어갈 입구가 생기자 이프리트가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로얀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가져오지." "뭐? 안돼." 만약 로얀이 신전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의 성격상 덤벼드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신전을 파괴할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렇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커져버린다. 이프리트는 확고한 표정을 하고 있는 로얀을 말리라는 눈빛을 보냈다. "괜찮아. 로얀, 갔다 와." 이프리트와는 달리 레아는 로얀이 가는것을 찬성했다. 신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자신들과는 달리 감각이 발달한 로얀이라면 꽃의 냄새를 따라 신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죽이지 마." "알겠다." 그렇게 차갑던 로얀이 레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프리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기는 목걸의 형태를 하고 있대." 레아의 말에 로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손에 불꽃을 피웠으면 한다." "엥? 뭔소리야?" "나와 싸웠을 때처럼." 로얀의 말에 이프리트도 레아도 어리둥절했지만 이프리트는 곧 오른손에 강한 불꽃을 생성시켰다. 화르륵! 마그마의 열기처럼 뜨거운 것이 피어났다. 그러로얀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을 바라보았다. 레아는 5분 정도가 지난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불을 꺼. 들킬지도 몰라!" 그제야 로얀은 이프리트의 팔에서 시선을 돌리며 신전 안으로 뚫린 길을 바라보았다. "이제 됐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 파핫. 말을 마친 그는 신전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프리트와 레아는 로얀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둘은 계속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로즈아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타탁. 로얀이 뛰어내린 자리에는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신전의 구석진 곳이라 사람이 많이다니지 않았던 것이다. 화륵. 그의 방문을 반기는 듯 벽에 줄줄이 걸린 횃불들이 출렁였다. 주위를 한번 흝어본 로얀은 후각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진한 꽃향기가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얀은 그 향기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후각이 남달리 발달한 로얀이 맡기에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진했고, 때문에 그 근원지를 찾는 것은 식은 스프 먹기보다 쉬웠다. 졸졸졸......! 향기를 쫓아 나아가던 로얀은 문득 길 양옆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 신전이 맑고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물이었다. 신전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꽃향기는 그 물을 타고 전파되고 있었다. 향기를 쫓아 물을 쫓아 로얀은 한참이나 신전을 누비고 다녔다. 종종 프리스트로 보이는 사람들이나 성기사들을 보았지만 레아의 말대로 죽이지 않고 피해 다녔다. "저기인가?" 로얀의 발걸음이 멈춘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의 눈앞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신의 모습을 조각했는지 두개의 문짝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기사들로 보이는 남자 열 명 정도가 지키고 서 있었다. 로얀은 이곳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문 틈에서 꽃향기가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르륵. 로얀의 몸이 어둠에 잠기더니 사라져 버렸다. 레아가 펼쳤던 페어리 기술을 쓴 것이다. 스윽.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성기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성기사들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아의 기술을 본 건 단 몇 분, 빨리 끝내야 한다!' 그는 등 뒤를 보이는 두 명의 성기사를 노렸다. 휘익. 퍼퍽. 그의 수도가 뒷목을 강타함과 같이 두 성기사는 집단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털썩, "무슨 일이야!" 남은 동료 성기사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로얀은 침착했다. 하지만 저들이 더 큰소리를 질러 동료들을 불러오기 전에 서둘러 행동했다. 스륵. 그는 다시 다음 목표물을 찾아 이동했다. 휘익. 퍼퍽! 털썩. 로얀은 신속하게 남은 성기사들을 처리해 갔다. 그렇지만 언제 발각될지 모르니 어서 로즈아린의 신기를 찾은 후 가능하면 교황의 얼굴을 본후 돌아가야 했다. 퍼퍽. 털썩. 성기사 열 명을 모두 처리한 로얀은 거대한 흰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갓다. 쿠쿵. 열 때에는 아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지만 닫힐 때에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닫혔다. 쪼르르륵...... 물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연못... 로얀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넓은 홀 안에는 거대한 연못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수대가 없어 물이 하늘로 치솟진 않았지만 거대한 연못의 물은 여러갈래로 나눠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스르륵. 모습을 다시 나타낸 로얀은 연못을 향해 걸어갔다. 꽃의 향기는 연못에서 나오고 있었다. "깊군." 맑고 깊은 연못 속에는 특이하게도 어떠한 것도 살지 않았다. 보통사람들이 연못을 만들면 물고기를 넣어두는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스릉.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았다. 아무래도 신전이다 보니 성검인 에리오네가 어울릴 듯했다. 화르륵. 에리오네가 뜨거운 화염에 휩싸였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본 이프리트의 기술을 복사한 것이다.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의 기술답게 마그마의 열기과 같은 뜨거움이 에리오네의 검신에서 흘러나왔다. 로얀은 불꽃으로 휩싸인 에리오네를 연못에 집어넣었다. 치지지직! 갑작스런 열기에 맑게 빛나던 연못이 비명을 질렀다. 잔잔히 흐르던 연못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일렁거렸다. 갑자기 마그마가 들어온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었기에 연못 물은 급속도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연못이 피처럼 토해내던 연기가 잠잠해진 것은 이삼 분 후였다. 이프리트에게서 충전(?)한 불꽃이 다한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에리오네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자 로얀은 그것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연못의 물은 순식간의 증발해 밋밋하게 남은 물 아래로 연못 바닥이 보였다. 그곳을 살피던 로얀은 뭔가를 발견했다. 연못 중앙에서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목걸이를 찾은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로즈아린이 말한 그녀의 신기인 듯했다. 로얀은 생각할 것도 없이 훌쩍 뛰어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찰박, 찰박! 발목까지 물속을 걸어 로얀은 반짝이는 로즈아린의 신기를 주었다. 확실이 이 목걸이에서는 강한 향기와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쏴아아......! "......?" 갑자기 물이 급속도롤 차 올랐다. 로얀은 목걸이를 품속에 집어넣고는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파팟! 타탁. 연못 밖으로 나온 로얀은 진귀한 관경을 목격했다. 증발해 없어졌던 연못의 물이 순식간의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은 저절로 생성되고 있었다. 그 괴기하기까지 한 광경에 로얀은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정말 멋지죠?" 흠칫.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아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신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적이었다. 그는 어쨌거나 물건을 훔지러 왔지 않은가? 더구나 상대가 말을 걸기 전까지 자신은 그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 위기의식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창......! 휘리릭! 쾅! 힘차게 나아가던 에리오네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생성된 흰막에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흰 백의에 키가 백발,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 목소리의 주인은 레아의 키와 비슷했고 몸도 여자처럼 호리호리한 소년이었다. 한데 그 소년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매우 신비로웠다. 아무리 공격이 가로막혔어도 다시 공격할 로얀이었지만 그는 소년의 신비한 분위기와 느껴지는 힘에 입을 열어 물었다. "넌 누구지?" "사람들은 절 교황이라고 부르더군요." 소년은 별것 아니라는 말투로 말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칸 대륙 모든 신전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을 만나는 것도 이곳을 침입한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교황이라......" 교황이라는 소년은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신의 사랑을 받고 자란 인간, 자신과 뭐가 다를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교황을 훑어보고 있던 로얀은 그 말로 인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드래곤에게 강탈당한 로즈아린의 신기, 그것을 교황이 들고 온 것이었다. 아무리 간 큰 드래곤이라도 교황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신들과 대화할 수 있는 교황이 신들에게 드래곤의 신기를 강탈했다고 말하면 끝장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신기를 훔치는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는 로즈아린의 신기를 신전으로 옮겨놓고는 로얀을 기다렸다. 이프리트의 성격과 여러 가지를 모두 예상해 벌인 일이었다. 나이만 어렸지 교황은 어느 현자 못지않게 총명했다. "날 아나?" "물론입니다. 카오스님에게서 들었거든요." 교황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카오스라는 말에 로얀의 눈은 크게 떠졌다. 전대 다크로얀의 기억에 따르면 카오스는 깊은수면에 들었고, 카오스의 존재를 아는 이는 창조의 신인 주신뿐이었다. 빙긋. "덕분에 인간 최초로 카오스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분의 존재도 알게 되었습니다. 드래곤도 모르는 분을 말이죠. 아! 카오스님이 수면에 드신 건 맞지만 인간에게 말을 전하는 것 정도야 쉽습니다. 그분은 신 중의 신이시니 말입니다." "카오스가 날 기다리라고 했다?" "앗! 님 자를 붙이셔야죠." 로얀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던 교황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난 신에게 버림받고 어둠 속에서 살아왔다," "전 눈이 시린 빛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로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 와중에도 교황의 말은 계속되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빛이라는 감옥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지?" "이것이 저의 운명이자 사명이니까요." 팟. 파악. 로얀의 손이 섬광처럼 뻗어 교황의 흰 목을 움켜잡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교황의 목엔 방어막이 쳐져 있지 않았기에 로얀의 손이 그의 목을 쥘 수 있었다. 키가 작은 교황이 로얀의 손에 의해 허공으로 들렸다. "레이나와 엘레나를 잃은 것도 나의 운명인가? 그렇다면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나의 사명은 뭐지?" 그의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큭! 자신의 사명을 찾는 것도 과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이 없을 텐데요?"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떠있었지만 교황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지 거리낌없이 말했다. 교황의 말대로 그의 귓가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듯했다. 아마도 신전의 성기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교황이 있는 이곳을 고작 성기사 열 명으로 지키고 있었던 것도 모두 교황의 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륵. "쿨럭! 헥헥......" "볼일은 끝났다. 이만 가보겠다." 그러자 교황이 목을 어루만지면서 잔잔한 웃음을 담았다. 피식. "저들을 모두 죽이실 건가요?" "......" 뚜벅. "전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았답니다." 스윽. 그 말과 함께 교황이 로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환한 빛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곧 그의 조그마한 입술이 열렸다. 화아악......! "기억하십시오. 리커버리! 홀리 웨폰! 프로텍션!" 로얀을 향해 엄청난 빛이 뿜어짐과 동시에 여러 개의 신성마법이 펼쳐졌다. 상처를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는 리커버리가 로얀의 눈동자에 각인되었고, 그의 검 중에서 에리오네에 홀리 웨폰이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인 프로텍션은 몸에 둥근 막을 형성시켰다. "당신의 능력으로 이 정도 힘의 신성 마법이라면 복사하실 수 있겠죠?" 교황은 카오스에게서 여러가지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다크로얀에게는 힘을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그에게 신성력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죽여야할까?' 교황은 손은 여전히 로얀을 향해 있었다. 한데 그가 별안간 작게 중얼거렸다. "텔레포트." "크윽! 기다려라!" 화아악. 파핫. 로얀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교황이 강제로 텔레포트시킨 것이다. 그가 텔레포트되어 간 곳은 이프리트와 일행이 있는 숲 속이었다. 로얀이 사라지자 교황은 손을 내렸다. "헉헉... 역시 저도 인간인지라 힘이 드내요."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쳐 있었다. 텔레포트로 사람을 강제로 이동시켰기에 힘의 소모는 더욱 컸다. 교황은 맺혀 있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그리고 눈을 떴다. 백색 눈... 온통 흰색인 백안의 눈이었다. 로얀이 사라진 자리를 교황은 가만히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카오스님께서 버림받은 단 하나의 존재... 그분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전 도저히 카오스님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그리고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당신의 몸에 휘감긴 사슬이 끊어질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교황은 백색의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 카오스님의 생각을 전 영원히 알 수 없겠죠. 저도 인간이니까." 그의 맑은 음성이 연못을 통해 긴 파장이 되어 홀 안 가득 울려퍼졌다. 12장 비는 생명이었다. 봄의 대륙을 평정한 카르센 제국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 봄의 대륙의 존재했다. 몬스터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어둠의 숲과 요정들이 세계라 불리는 빛의 숲이 그것이었다. 가을 대륙에서 봄의 대륙으로 넘어오자마자 보이는 거대 도시 라이난은 다른 대륙과 연결되는 통로와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상업이 매우 활발한 도시였다. 그 거대한 라이난에서 동쪽으로 길을 따라 쭈욱 가면 다일리아라는 성이 나온다. 이곳은 어둠의 숲과 맞닿아 있어 몬스터의 출몰이 잦았기에 병사들의 수도 많았고 다른 성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라이난에서 다일리아로 가는 길목은 꽃의 대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색색의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에 휘날린 꽃잎들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꽃길이었다. 그 화려한 꽃길 위를 로얀 일행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의 앞길엔 바람에 휘날려 떠다니는 꽃잎이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즐거워 보이는 레아와는 달리 이프리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에휴......" 한숨을 쉬던 이프리트는 어제 저녁을 떠올렸다. 로얀은 지난밤 로즈아린의 신기를 되찾아왔다. "이건가?" 로얀은 신인 로즈아린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하고는 목걸이를 건냈다. 그것을 본 로즈아린은 환한 표정으로 로얀의 손에서 빼앗듯 목걸이를 받았다. 그리고 신기를 목에 걸고는 로얀을 쏘아보았다. "신기를 되찾아준 건 고맙지만, 한낱 인간이 신에게 말을 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나?"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가웠다. 확실히 인간이 신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윽. 로얀은 로즈아린의 말에 다트리온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행동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마검과 성검은 신도 죽일 수 있다고 하더군." 그 말이 공포의 그림자가 되어 로즈아린을 감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레아는 이프리트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눈짓했다. "험험! 이 녀석은 인간이 아냐." 이프리트는 로얀의 목에 두르며 로즈아린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았다. 로즈아린은 이프리트의 말에 로얀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아무리봐도 인간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로얀을 바라보자 이프리트는 자신의 붉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눈을 붉게 빛내는가 싶더니 스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로얀은 나와 같은 정령왕이다.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한다면 정령왕을 능멸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꽃의 여신 로즈아린!" "죄, 죄송해요." 로즈아린은 이프리트에게서 폭사되는 엄청난 기운에 몸을 떨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로얀의 정체에 대해 토를 단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데 로얀은 다크리온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치워라." 그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이프리트의 손이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너무하는구먼!" 번뜩. 파팟. 다크리온에서 섬광이 번득이자 이프리트는 번개같은 빠르기로 로즈아린 옆에 가서 섰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다크리온이 훑고 지나갔다. 로얀은 여전히 번뜩이는 다크리온을 들고 이프리트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은은한 살기까지 내비쳤다. 로얀이 이프리트를 향해 다가가려 할 때, 그들의 우정 어린(?) 행동을 보던 로즈아린이 이프리트와 로얀에게 각각 허리를 살짝 숙였다. "정말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레아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 그녀는 꽃잎에 휩싸였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다급해 보였다. "자, 잠깐! 나와의 데이트는!" 파핫. 이프리트의 손이 닿기 직전에 로즈아린은 끝내 사라져 버렸다. 휘이이잉...... 이프리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더니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는 로얀을 노려보았다. "네가 너무 매정하게 대해서 그런 거야!" 로얀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이윽고 힘없이 손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지, 나도 매정하게 대했구나. 몇 년 만에 걸려든(?) 여신인데! 으아아아......!"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부림쳤다. "가자." 그러나 로얀은 그러거나 말거나 쳐다보지도 않고 다크리온을 검집에 넣고는 앞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 뒤를 레아다 웃으며 뛰따랐다. 그 웃음은 이프리트를 향한 것이었다. 굴러 들어온 여신을 놓친 이프리트는 모든 것을 잃은 부랑자처럼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있었다. 휘이이잉......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로얀은 숲 속을 거닐며 물소리를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는데, 아무래도 물가에서 식사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기 때문이다. 퐁......! 그의 귀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감지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로얀은 가던 길을 멈추고 망원경처럼 조절하여 멀리 떨어진 곳의 물을 찾아내었다. 조그마한 샘물이 있었고 나뭇잎을 따라 맑은 이슬이 떨어지고 있었다. 레아가 꽃향기를 맡으며 숲을 감상하고 있다가 로얀이 갑자기 멈춰서자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이제 식사를 하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구나? 헤헤......" 시각을 원래대로 되돌린 로얀은 샘물이 있는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소식가인 페어리 레아는 별로 배고프지 않았고 이프리트는 정령이라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하나 로얀은 아직까지는 인간에 가까웠기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뒤를 쫓으려던 레아는 이프리트가 좀비처럼 정처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자 그의 손목을 낚아챈 후 로얀의 뒤를 쫓았다. 이슬로 만들어졌는지 무척이나 맑고 아름다운 샘물이 눈에 들어왔다. 레아는 샘물 가에 걸터앉아 물장난을 치며 즐거워했고 이프리트는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로얀은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식사를 준비하려 했다. 촤아악......! 그가 막 가죽 주머니에서 음식을 꺼내려던 순간, 레아가 손을 담그고 있던 샘물이 출렁였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자 샘물 위를 물방울이 모이며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휘오오오......! 출렁이던 샘물이 갑자기 불어온 강풍에 작은 파도를 일으키며 출렁였다. 그리고 샘물 위에 바람이 모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물과 바람이 각각 사람의 형상이 되어가자 로얀은 두 개의 검 위에 손을 올렸고 레아는 반가운 표정으로 웃었다. 반면 이프리트의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고요한 숲 속에 강한 힘의 파동이 터져나왔다. 일행의 눈 앞에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존재들...... 샘물이 뭉쳐 푸르고 긴 물결 같은 머리를 드리운, 마치 얼음을 조각해 놓은 듯 차가운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바람도 한곳으로 모여 끝이 말려 올라간 초록빛 긴 머리에 뽀족한 귀를 엘프 형상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따뜻한 봄 햇살을 보는 듯 부드러운 인상에 평온한 모습이었다. 먼저 나타난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의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고 뒤에 나타난 초록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다. 두 인물의 등장에 레아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녀는 정령왕들과 친분이 각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령왕 중 가장 친한 존재를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실피드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온화한 실피드의 성격 덕분에 레아는 그녀에게서 어머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엘라임과 실피드가 지상으로 내려서자 레아는 쏜살같이 실피드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언니!" 와락. 자신의 품에 안긴 레아의 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며 실피드는 빙긋 웃었다. 이윽고 실피드의 품에 머리를 묻고 있던 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실피드는 그런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들의 상봉을 옆에서 지켜보던 엘라임은 살짝 웃음 짓고는 고개를 돌려 굳어 있는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남자에게는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죄인 이프리트, 각오는 되어 있겠지?" 엘라임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이프리트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러나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어색하게 웃었다. "엘라임, 오랜만이네. 그동안 더 예뻐진 것 같아? 하하하!" "실피드만 아니었다면 넌 오래전에 소멸됐을 거다." 이프리트와 실피드의 만남을 가장 반대한 인물이 바로 엘라임이었다. 그녀와 실피드는 태어날 때부터 친구로서 함께해 왔다. 그런 절친한 사이인 실피드의 짝으로 바람둥이인 이프리트를 엘라임이 인정할 리가 없었다. 엘라임 주위로 물방울이 생성되고 있을 때 실피드는 레아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이프리트는 실피드의 시선을 받으며 엉거추춤 앞으로 걸어갔다. "하하하! 여긴 어쩐 일이야? 이곳에서 실피드에게 주려고 희귀한 물건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는데." "......" 능청스럽게 술술 거짓말을 하는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실피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휘오오오...... 그녀의 주위로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오자 이프리트의 등에서 식은땀이 삐질 생겨났다. 저 모습은 이미 신계에서는 전설이 된, 여신과 정령왕의 대결에서 보인 실피드의 모습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실피드의 승리를 목격한 이프리트는 다시는 여신에게 작업을 걸지 않을 것이며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이프리트." 생긋. 실피드는 자신의 연인인 이프리트의 이름을 부르며 밝게 웃었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이프리트에겐 사신의 웃음처럼 보였다. 스아아아아...... 이프리트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차가운 바람이 그의 몸을 훑고 숲 속으로 날아 지나갔다. 쿠쿠쿵! 커다란 굉음과 함께 이프리트의 등 뒤에 위치하고 있던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드러누워 있었다. 이프리트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하하! 역시 실피드는 정령왕 중에 으뜸이야!" "고마워요." 생긋. 하지만 그녀의 웃음에서는 날카로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로즈아린이라는 꽃의 여신이 저에게 왔더군요." 실피드에 얼굴엔 상반되는 얼굴이 담겨 있었다. 눈동자는 싸늘했지만 그녀의 입에 걸린 미소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평소처럼 자신의 성에서 엘라임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꽃의 여신 로즈아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엿 됐다.' 이프리트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떻게든 잡아떼야 했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 지 모르지만 난 결백해." 그때! "언니, 저 인간이 분명 그 여신에게 치근댔어요. 게다가 저에게도 찝쩍댔다니까요." 쿠쿵......! 레아의 엄청난 발언에 이프리트는 작은 골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실피드의 주위를 감돌던 바람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프리트, 그렇게까지 타락하다니! 어떻게 어린 레아에게까지!" "헉! 절대 아냐! 저런 발육 부진 꼬맹이에게는 관심없다고!" 이프리트의 강한 부정에 엘라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성숙한 여인은?" "그야 물론 쭉쭉 빵빵한 미녀라면... 헉!" 이프리트는 뒤늦게 입을 막았지만 이미 실피드의 고개는 푹 숙여져 있었다. 그녀의 여려 보이는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실피드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굳은 얼굴로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털썩.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죽을 죄를 지었어! 부디 용서를!" "......" 사박. 실피드가 이프리트에게 다가가자 그녀 주위에 있던 바람이 꽃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허걱! 부디 자비를!" 그러나 실피드는 이미 이프리트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퍼억. "커컥!" 정확히 그의 복부에 박힌 실피드의 주먹! 무릎을 꿇고 있던 이프리트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더니 곧 이어 바닥을 쭉 밀려 나갔다. 작고 흰 주먹에 실린 그녀의 파괴력은 실로 엄청났다. 스륵. 실피드는 바닥을 나뒹군 이프리트에게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이프리트 몸에서는 이미 혼이 달아나고 없었다. 실피드가 지금 어디로 갈지 잘 알고 있는 이프리트는 삶을 포기한 표정을 짓고 있엇다. 정령계...... 여기서의 실피드도 무서웠지만 힘이 모두 돌아오는 정령계에선 너무도 무서웠다. 한데 그녀는 자신을 데리고 정령계로 가려 하고 있었다. 완전히 기가 죽은 이프리트를 질질 끌며 실피드는 레아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아니에요." "먼저 가볼게." 빙긋 웃어 보이며 마지막으로 엘라임에게 말한 실피드는 이프리트의 멱살을 잡은 채 사라졌다. 정령계로 가는 이프리트의 뒤를 레아가 페어리로서 축복을 해주는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프리트와 실피드가 정령계로 가버리자 엘라임도 돌아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지금 실피드의 성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니 그녀의 신상에도 위험하니 얼마간은 자신의 성에서 쉴 생각이었다. "나도 이만 가볼게." 남자들에겐 얼음 덩어리였지만 친분이 있는 여자들에겐 상냥한 엘라임이었다. 한데 작은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덥석! 엘라임의 말에 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응?" "가지마요. 우리랑 같이 여행가면 안 돼요?" "미안해. 너도 잘 알잖니." 엘라임의 눈동자는 로얀을 처다보고 있었다. 남자를 꺼리는 그녀가 로얀과 같이 여행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엘라임의 성격이 이렇게 된 것은 계약자들 때문이었다. 그녀를 소환한 이들은 대개 여자였다. 남자에게 배신당하거나 욕을 본 여인들은 한을 품고 수련을 하여 정령왕을 소환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여인들이 복수를 해줄 존재로 엘라임을 소환했던것이다. 실피드는 온화한 성격으로 복수와는 뭔가 맞지 않았고, 이프리트나 노아스는 남자였기에 당연히 제외되었다. 때문에 엘라임이 인간 여자들의 복수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물론 정령왕을 소환하여 계약을 맺으려면 엄청난 수련이 필요했기에 엘라임이 인간 여자들과 계약을 많이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번의 계약을 통해 여자들의 복수를 대신한 엘라임은 남자들의 안 좋은 면만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녀는 남자에 대한 거부감과 뿌리 깊은 불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엘라임은 미소를 지으며 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레아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로얀과 단 둘이 다니기엔 심심했기 때문이다. 아니, 무뚝뚝한 로얀은 활발한 성격의 레아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레아는 엘라임에게 귀를 대보라고 손짓하고는 허리를 숙인 그녀에게 속삭였다. "조금 전까진 이프리트가 있어서 그러지 않았지만, 만약 단 둘이 있게 되면 절 어떻게 할지도 몰라요." 흠칫. 큰 눈동자를 글썽이며 말하는 레아를 보며 엘라임은 몸을 작게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로얀을 쳐다보았다. 로얀은 엘라임과 실피드가 나타났을 때부터 관심을 끊고 나무 아래에 앉아 육포를 씹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레아가 엘라임에게 한 말을 모두 들었지만 뭐라고 하기도 귀찮았고, 구태여 말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에 가만히 있었다. 로얀의 무심한 눈동자와 엘라임의 차가운 눈동자가 부딪혔다. 그 순간 레아는 엘라임을 붙잡은 것이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다시 레아에게로 향하는가 싶더니 분홍빛 엘라임의 입술이 열렸다. "같이 가자." 그러자 레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고 로얀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댈 뿐이었다. 이프리트가 갑자기 떠나버리고 엘라임이 합류하게 된 로얀일행은 어둠의 숲으로 가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다일리아로 향하고 있었다. 꽃잎으로 둘러싸인 숲을 지나 한참을 걸은 그들의 눈에 커다란 성이 들어왔다. 너무 멀어 아직 희미하게 보였지만 다일리아가 틀림없었다. 로얀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었다. 그런 그의 곁에서 레아가 걷고 있었고, 레아 옆으로 엘라임이 양쪽에서 걷고 있는 것이었다. 로얀이 앞서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와 엘라임 사이가 너무 차가워 조금이라도 사이를 트기 위해 레아가 그의 옆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자 레아와 이야기를 하며 걷던 엘라임은 자동적으로 로얀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한동안 그들 사이엔 말이 없었다. 그때, 로얀이 주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너와 일행이 된 뒤부터 저것들이 계속 따라오는군. 뭐지?" 그는 손을 들어 길 옆 나무들이 드문드문 나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실프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초록빛을 뿌리는, 훨씬 작은 정령이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는 정령이 틀림없었다. 로얀의 말에 엘라임은 보통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정령을 알아본 그를 놀랍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로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레아는 놀라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로얀이 말을 준 탓이었다. "포레스트라는 숲의 정령이야." "숲의정령?" "응." 처음 들어보는 정령이었다. 불의 정령, 물의 정령, 바람의 정령, 땅의 정령, 이들 말고도 정령이 또 있었던가? "숲의 정령이란 뭐지?" "에... 언니가 설명 좀 해줘." 레아가 설명하기 힘든지 엘라임의 소매를 흔들며 그렇게 말하자 엘라임이 로얀을 바라보았다. 순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냉기만 흐를 뿐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린 엘라임은 숲의 정령에 대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숲의 정령 포레스트는......" 이 세상에는 네 명의 정령왕이 다스리는 4대 정령 외에도 세 종류의 정령이 더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령왕과 정령계가 없어 버림받은 정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령왕이 없는 이들을 통솔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 숲의 정령 포레스트는 페어리들이 돌봐주었고 빛의 정령 윌오위스프는 천계의 천족들이 돌봐주었다. 하나 어둠의 정령 다크는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다. 처음엔 마족들이 그들을 통솔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의 정령 스스로가 이를 거부했다.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마족들의 품에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빛의 정령인 윌오위스프는 커다린 빛으로 된 구체 모양의 정령이었고 어둠의 정령인 다크는 흑빛으로 된 구체 모양의 정령이었다. 그리고 포레스트는 실프의 축소판처럼 생긴 정령이었다. 정령계가 없는 세 정령들에겐 큰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장점이라면 정령사에게 소환된 4대 정령들이 본신의 힘을 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세 정령은 본신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소환된 4대 정령은 소멸당할 경우 그들의 정령계에서 조금 쉰 후에 언제라도 다시 정령사의 소환에 응해 활동할 수 있지만, 세 정령은 소멸당하면 백 년이란 시간이 지나야 다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것은 어둠의 정령 다크였다. 숲의 정령과 빛의 정령은 각기 돌봐주는 존재들이 있어 소멸당했을 경우 비록 힘은 쓸 수 없지만, 천계와 빛의 숲에서 편히 쉴 수 있다. 하지만 어둠의 정령은 한때 마족의 수하였다는 이유로 돌봐주기는 이는 커녕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처지라 한번 소멸되면 다시 힘을 쓸 수 있기까지 백 년이라는 시간동안 어둠 속에서 지내야 했다. 어둠의 정령 다크에 대해 말하는 엘라임의 표정은 상당히 불쾌해 보였다. 그녀의 긴 설명이 긑나자 로얀은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숲의 정령은 잊어버리고 어둠의 정령 다크에 대해 생각하며 걸어갔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기 만하자 그들 사이엔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라임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그들은 또다시 다일리아를 향해 걸었다. 웅성웅성...... 축제 기간도 아니고 유명한 곡예단이 온 것도 아닌데 다일리아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로얀 일행이 있었다. 무사히 다일리아까지 오게 된 그들 일행은 쉴 곳을 찾아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엘라임이 아름다운 외모와 레아의 귀여운 외모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로얀으로 인해 그 누구도 그녀들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로얀 일행은 마침내 '햇살'이라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그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은 갈색 머리의 귀여운 소녀는 로얀 일행이 카운터를 향해 걸어가자 이내 다른 손님들에게로 달려갔고 카운터엔 볼살이 포동포동한, 넉살좋게 생긴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페어리와 정령왕이 함께하는 특이한 파티의 리더라 할 수 있는 로얀이 입을 열었다. "하룻밤을 묵었으면 한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먹도록 하지." 그러자 중년 사내는 카운터 밑을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냈다. 딸깍. 중년 사내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열쇠의 수는 일행의 구성이나 수와는 전혀 맞지 않게 단 한 개뿐이었다. "두 개." "하하, 죄송합니다. 요즘 용병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거든요. 그래서 방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성에 영주가 끊임없이 찝쩍거리는 몬스터들에게 화가 나서 몬스터마다 현상금을 붙인 것이다. 때문에 용병들이나 여행자들은 몬스터 헌터가 되어 이 마을로 몰려들고 있었다. 방이 하나란 말에 로얀은 열쇠를 주인을 향해 밀었다. 다른 곳으로 가보기 위함이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 열쇠를 밀던 손이 멈추자 중년의 여인은 넉살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하! 가족끼리 한 방을 쓰는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가족?" 로얀은 가만히 있었지만 엘라임과 레아가 발끈했다. 레아는 키가 작았지만 엘라임의 팔에 안겨 조금 전부터 여관 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족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었다. "예? 그러니까 이쪽 남자 분이 남편이고, 이쪽 여자 분이 부인... 꼬마 아가씨는 당연히 따님 아닌가요?" 남자들이 로얀 일행에게 찝쩍거리지 않았던 이유는 로얀이 풍기는 심상찮은 기운 탓도 있었지만 그들 일행이 너무도 단란(?)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로얀도 잘생긴 편에 속해 엘라임과 나란히 서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게다가 그들 중간에 끼어 있는 너무나도 귀여운 레아는 로얀의 딸처럼 보엿던 것이다. 레아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녀도 살 만큼 산 페어리였다. 엘라임 또한 냉기를 풀풀 날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여관 주인은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내가 로얀의 딸?" "아, 아닙니까?" 빠직. 레아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았다. 엘라임의 품에 안겨 있는채로 그녀는 작은 손으로 카운터를 탕탕 치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달칵. "어디에 있지?" "이층 오른쪽 복도 맨 끝 방입니다." 뚜벅뚜벅...... 로얀은 잔뜩 흥분한 레아와 여관 여인을 죽일 듯 노려보는 엘라임을 뒤로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의 행동에 평소 잘 흥분하지 않던 엘라임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얼린(?) 후 이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주인에 말이 사실이라면 어딜가더라도 방을 구하긴 힘들 것 같았기에 순순히 이층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자 레아도 허둥지둥 그들 뒤를 쫓았다. "정말 예쁜 따님을 두셨습니다." 여관 주인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레아의 몸이 움찔했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로얀과 엘라임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얻은 방은 깔끔했지만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로얀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로얀은 창문에서 벗어났다. "우씨! 내가 왜 로얀의 딸이라는 거야! 내가 로얀보다 훨씬 오래 살았는데!" 엘라임은 씩씩거리는 레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귀여웠기 때문이다. 뚜벅. "곧 비가 온다." 로얀의 말에 레아는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바라보았고,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 식사를 하러 갈 건데......" 그는 창가에서 턱을 손으로 받치고 박을 내다보고 있는 레아와 입구에 서 있는 엘라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안 먹을래." "정령은 밥을 먹든 안 먹든 상관이 없지. 나도 먹지 않겠어." 그녀들의 대답을 들은 로얀은 방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여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마을을 돌아다니던 그가 다시 돌아온 건 초저녁 무렵이었다. 한데 그의 손엔 두꺼운 책자가 들려 있었다. <몬스터 도감> 뚜벅뚜벅...... 로얀은 그 책을 품 속에 집어넣고는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 일행의 방이 있는 이층 복도 끝으로 향했다. "어? 왜 이리 늦었어!" 로얀을 반긴 건 레아였다. 그녀는 간편한 차림으로 엘라임과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두사람이 막 자려 할 때 로얀이 들어온 것이었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 흘렀다. 로얀이 잘 곳을 생각하니 뭔가가 어색해졌던 것이다. 쏴아아아......! 그때 밖에서 우렁찬 빗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거세게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뚜벅뚜벅...... 로얀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쏴아아아......! 문을 열자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렀다. 비가 안으로 튀졌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먼저 자라." 로얀의 말에 레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나갔다 왔으면서 이 빗속에 또 어딜 나간다는 건지...... "난 비가 좋거든." 물의 정령왕인 자신도 비를 좋아했지만 일부러 맞으러 다닐 정도는 이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로얀의 대한 판결을 내렸다. "바보였군." 그녀가 이불을 토닥거리며 정리하자 레아가 웃으며 품안으로 안겨들었다. 워낙에 괴물 같은 로얀이었기에 이 빗속에 나갔지만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레아는 피곤했는지 엘라임의 품에 안겨 금새 새근거리며 꿈나라로 향했다. 쏴아아아......! 여관을 빠져나온 로얀은 비를 맞으며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성 안을 걸어다녔다. 그런 그를 마을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무작정 걷던 로얀은 성의 외곽에 있는 작은 숲을 발견했다. 타박타박...... 물방울이 발목을 찰싹찰싹 때렸다. 로얀은 비를 좋아했다. 전쟁터에서는 비로 인해 몇 번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적이 그에게 다가와 무기를 휘두르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차에 뒤에서 몰래 다가들던 자가 물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그 소리로 적을 알아차린 적도 있었다. 물론 비를 좋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비는 무엇보다 로얀으로 하여금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몸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에게는 또 다른 생명이었다. 비를 맞으며 로얀은 두 개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르릉......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우우웅...... 두개의 검에서 백색 오러가 피어났다. 검을 뽑은 직후 마나 소드를 시전한 그는 아무도 없는 작은 숲의 중앙에 섰다. 쏴아아아......! 스팟! 빗속에서 로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 갔다. 콰가가강! 콰르르릉......! 백색의 오러가 내는 굉음은 하늘에서 터지는 천둥에 묻혀버렸다. 로얀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찌르고 베고 가르고... 몸 속의 마나는 끊이지 않고 샘물처럼 솟아났다. "나의 힘을 시험하겠다." 콰가가강! 콰르르릉......! 그는 느꼈다. 봉인이 풀린 전대 다크로얀의 힘이 개방된다 해도 그것이 무조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폭주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힘을 얻고 난 후 어느정도 힘을 다스리는 것도 것도 중요했다. 첫 번째 봉인은 거의 자동적으로 몸 안에서 다스렸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봉인이 풀린다면 네 번째로 가기도 전에 폭주할 지도 모른다. 그가 폭주한다면 얀도 레아도,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 모두가 사라질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왕이면 죽지 말고 복수를 끝내야 했다. 쏴아아아......! 현재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기 위해 로얀은 빗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3장 어둠의 정령 다음날 로얀 일행은 아침 일찍 다일리아를 떠났다. 이제 곧 어둠의 숲에 도착하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접근도 하지 못할 어둠의 숲을 향해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갔다. "힝... 이 숲은 언제와도 싫어."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어둠의 숲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레아였다. 어둠의 숲은 이름에 걸맞게 햇살이 숲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밤처럼 칠흑같은 것만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기괴한 모양의 나무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가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어둠의 숲에서 레아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페어리인 그녀로서는 이곳이 싫어 빠르고 안전한 페어리들만의 지름길로 로얀을 안내하려 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몬스터와의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로얀은 어둠의 숲을 정면 돌파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부스럭. 숲 속을 걷던 로얀 일행의 귓가로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어둠의 숲에 들어서면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엘라임이나 레아보다 더 빨리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부스럭. 그러나 로얀은 로얀은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뽑기는커녕 오히려 품속에 손을 넣었다. "취에엑!" 숲 속에서 나타난 몬스터는 오크였다. 초록색 피부의 오크들이 열 마리쯤 보였다. "취엑! 인간이다." 오크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어둠의 숲에서 인간을 구경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아니, 본다고 해도 대부분 무리를 지어 사냥을 나온 용병들이나 기사단이었다. 그러나 오크들은 본 레아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고 엘라임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로얀은 품속에서 '몬스터 도감'이라는 두꺼운 책을 꺼내 들더니 오크를 힐끔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오크라... 흠......" 그는 몬스터랑 싸워본 적은 눈으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신기한 뭔가를 발견한 듯 오크를 관찰했다. "취에엑?" 오크들은 인간이 공격은 커녕 갑자기 책을 꺼내 들자 당황했다. 그러다 인간이 자신들은 무시하는 것이라 판단한 오크들은 분노했다. "취엑! 인간, 죽어라!" 그들은 책을 보고 있는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탁. 로얀은 책을 덮고 품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몬스터라는 거 신기하군. 오크의 피는 초록색이라지?" 스르릉...... "너희들을 관찰하겠다."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빛을 뿜는가 싶더니 어느새 로얀은 오크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검날에 오크들은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고 모두 차가운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오크들에게로 다가가서 검으로 오크의 몸을 잘라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엽기적인 그의 행동에 엘라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레아를 바라보았다. "저 인간 원래 저러니?" "그냥 단순한 관찰인데 뭐." 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엘라임의 머리속에서는 로얀에 대한 생각이 더욱 안 좋게 자리 잡아갔다. 콰가가강! "꾸에에엑." 콰가가강! "키에엑" 로얀운 어둠의 숲을 거닐면서 오크 외에도 고블린이나 코볼트 등 여러 몬스터들을 만나는 족족 쓸어버렸다. 그는 몬스터의 씨를 말리는 듯 마구잡이로 죽이고 있었다. 심지어 움직이지 못하는 식인식물인 만드라고까지 가까이 다가가 죽였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 여러 몬스터의 피가 깔리자 엘라임은 그것들을 밟기 싫어 물로 깨끗이 씻어냈다. 로얀의 피를 깔고 엘라임이 길을 씻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콰가가강! "키에에엑." 또 다른 몬스터가 등장했다. 파드드득......! 날개가 달린 비행형 몬스터였다. "하피. 하반신은 독수리에 상반신은 인간 여성의 몸, 팔은 독수리의 날개." 로얀은 몬스터 도감에서 하피에 대한 정보를 읽고는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파드득......! 하피들이 날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로얀을 공격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로얀은 현재 어둠의 학살자로 몬스터들 사이에 조금씩 소문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크들과는 달리 영리한 하피들은 로얀이 남성체임을 감안해 일단 그에게로 가까이 접근해 자신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고 다가오는 하피의 얼굴은 예쁜축에 속했다. "......" 하피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몸을 밀착시켜 왔다. 그러나 로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엘라임은 '역시 남자들이란!'이라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지었고 레아는 무뚝뚝한 로얀이 어떤 방응을 보일지 기대감 어린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득. 이윽고 로얀이 교태 어린 몸짓을 보이는 하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남자와는 다른 신체군. 인간 여성의 몸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번득 그리고 다크리온과 에리오네가 빛을 뿌렸다. 푸화확! 하피의 몸이 이등분되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뒤로 로얀이 하피들을 도륙하기 시작하자 레아는 그려면그렇지라는 표정이었고 엘라임은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다. 콰가가강......! 로얀일행이 어둠의 숲에 들어선 지 어느덧 5일이 지났다. 그 동안 로얀은 아침이고 밤이고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밤에 야숙을 하는 그들 일행을 몬스터들이 쉴 틈 없이 공격해왔지만 로얀은 그들 모두를 가볍게 처리했다. 덕분에 레아와 엘라임은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녀들은 정말 편안하게 어둠의 숲을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5일 밤낮을 끊임없이 싸운 로얀의 얼굴에는 피로가 뭉쳐 있었다. 그의 몸은 몬스터의 체액과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가 보였다. 숲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강하고 큰 몬스터가 나왔기 때문이다. 쿵쿵쿵! "일곱 마리." 바스락. 로얀의 말대로 몬스터가 일곱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4미터 정도의 거대한 오우거들이었는데 손에는 두꺼운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네 마리." 또다시 로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풍성하게 자라있는 반대쪽 푸른 풀숲이 바스락거렸다. 바스락. 그리고 이번엔 거대한 트롤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우거와 트롤이 동시에 나타나는 건 정말 의외였다. 엄청난 덩치의 몬스터들이 로얀 일행을 둘러싸자 거대한 성벽이 둘러쳐진 것만 같았다. "로얀, 빨리 끝내줘." 흥측한 오우거와 트롤이 보기 싫어 레아가 그렇게 말하자 엘라임이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워터팩." 촤아악......! 물로 된 장벽이 그녀들 주위로 나타났고 레아는 그 속에서 마음 놓고 로얀과 몬스터 간의 싸움을 구경했다. 파팟! 로얀의 신형이 솟구쳤다. 콰가가강......! 부욱! "크어어억!" 쿠쿠쿵...... 이제까지 로얀에게 덤벼들었던 다른 몬스터들과 똑같이 거대한 오우거도 그의 검에 단번에 잘려나갔다. 후웅...... 로얀의 머리 위로 오우거의 방망이가 스쳐 지나갔다. 방망이를 피한 그는 오우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부우욱! "쿠워웍." 쿠쿠쿵...... 일곱 마리의 오우거를 순식간에 처리한 로얀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오우거의 육중한 몸과 튼튼한 가죽을 기르려면 마나 소드를 펼쳐야 했는데, 로얀은 마나 소드를 쓰지 않고 푸른색 오러 블레이드만 쓰고 있었다. 지난 5일간 너무 많은 힘을 썼기 때문이다. 파팟. 로얀은 남은 트롤 네 마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걱! 부우욱. 오우거보다 약한 트롤을 쉽게 처리한 로얀은 숨을 헐떡이며 나무 아래에 가서 앉았다. "후욱, 후욱......" 검을 검집에 넣고 로얀은 숨을 골랐다. 워태팩을 제거한 엘라임이 레아와 함께 로얀을 향해 다가왔다. 레아는 상당히 지쳐 보이고 자잘한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르는 로얀을 보다 못해 엘라임에게 말했다. "언니가 치료 좀 해줘." 페어리도 치료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에게는 턱없이 모자란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얀을 매우 좋게 보고 있는 엘라임은 딱 잘라 말했다. "싫어." "에이! 이제까지 우린 손도 까닥 안 했잖아. 로얀이 밤에도 지켜줬고." "......" 레아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망설이던 엘라임은 결국 큰 맘 먹고 로얀에게 다가갔다. 로얀은 자신 가까이 다가온 엘라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치료를 하기 위해 자신에게로 손을 가져오는 순간, 그가 짤막하게 읆조렸다. "리커버리." 화악. 밝은 빛이 로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빠를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상처뿐만 아니라 지친 체력도 회복되었던 것이다. 정말 큰 맘 먹고 그를 치료해 주러 왔던 엘라임은 자신의 눈앞에서 리커버리를 시전한 로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녀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로얀을 향해 손을 날렸다. 턱. 자신의 뺨을 향해 날아오는 엘라임의 손을 로얀이 붙잡았다. 엘라임은 남자인 로얀에게 손을 잡히자 흠칫 놀랐다. 촤악......!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 생성된 물이 벼락처럼 떨어지자 로얀은 엘라임의 손을 놓았다. 그의 머리를 타고 물이 뚝뚝 흘려내렸다. "흥!" 엘라임이 코웃음을 치며 휑하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자 레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로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엘라임과 레아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군.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피식.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엇! 로얀, 방금 웃었지!" 레아는 로얀이 하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가 지었던 미소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던 로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쿵쿵쿵......! 바스락. "우어어어......" 레아가 로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그의 뒤로 소의 머리를 한 거대한 미노타우로스가 양날의 배틀 엑스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큰 배틀 엑스를 로얀을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턱. 여전히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로얀은 자신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날카로운 배틀 엑스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손은 살갗조차 베이지 않았다. 스윽. 로얀이 배틀 엑스를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힘으로 누군가에게 밀릴 거란 생각을 아예 해본 적도 없던 미노타우로스는 적닪게 당황했다. 로얀은 배틀 엑스를 잡은 잡은 상태에서 미노타우로스를 그대로 바닥으로 메쳤다. 후웅...... "우어억!" 쿠쿵. 로얀은 바닥에서 나뒹굴고 잇는 미노타우로스를 보며 그가 놓친 배틀 엑스를 집어 들었다. 후웅...... 콰직! 그리고 그것으로 미노타우로스는 머리를 잘랐다. 엘라임에게 물벼락을 맞아 아직도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로얀은 다시 어둠의 숲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기다 그 뒤를 레아와 엘라임이 조용히 뒤따랐다. 레아는 사라진 로얀의 웃음을 다시 한번 보려고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지만 그것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쿠어어억!" 쾅......! 어둠의 숲 속의 터진 굉음. 괴기하게 뒤틀린 나무들 사이에서 몬스터와 인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는 오우거보다 크고 육중한 몸을 가진 자이언트였고, 인간은 두 개의 검을 가진 로얀이었다. 로얀은 검을 뽑지 않고 두 손으로 대형 몬스터인 자이언트의 손을 맞잡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강한 힘이 오가고 있었다. 근육질로 꿈틀거리는 자이언트는 땀방울을 연신 떨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언니, 자이언트랑 힘겨루기 하는 인간 봤어요?" "......" 레아는 팔짱을 낀 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로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의 숲 속으로 들어온 지 어느덧 6일이 지났다.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강하고 몸집이 또한 점점 커져 이제는 대형 몬스터가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자이언트가 나타났을 당시 로얀은 역시나 책을 꺼내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어디 관광 온 사람 같았다. 책의 내용 중 그의 관심을 가장 끈 것은 자이언트는 물리적 힘으로는 몬스터 중 가장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읽은 로얀은 검을 뽑지 않고 맨손으로 공격해 오는 자이언트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자이언트와 인간의 힘 대결은 십 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엇던 것이다.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자이언트의 힘을 받고 있던 로얀이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약하다." "크륵......" 자이언트는 갑자기 로얀의 손에서 흘러나온 힘에 뒤로 밀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기괴한 나무가 서 있는 곳까지 쭉 미끄러졌다. 파팟! 자이언트를 밀친 로얀은 그의 허벅지를 타고 위로 솟구쳤다. 번뜩! 가뿐히 땅 위로 내려선 로얀은 곧바로 레아와 엘라임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푸화화확! 그의 뒤쪽에서 갑자기 엄청난 피가 솟구쳤다. 엑스 자로 깊은 검혼이 새겨져 있는 자이언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였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낼 거면서 힘 싸움은 왜 했어?" 레아는 로얀 옆에 붙어 물었다. 엘라임은 일명 리커버리 사건 이후 로얀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긴 원래도 거의 말을 안했지만. "......" 로얀은 대답 대신 품속에서 책을 꺼내 펼쳐들고는 손으로 그 중 한곳을 가리켰다. 거대한 근육질 몸을 가진 자이언트는 힘에 있어서는 사이클롭스와 동수 이상을 이루는 괴력의 몬스터다. "힘을 시험해 볼려고?" "피해라." "응?" "키에에에엑!" 하늘을 나는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하늘을 나는 거대한 몬스터 다섯 마리가 나타나면서 어둠은 지금까지보다 더욱 짙어졌다. 촤라라락. 로얀은 책을 빠른 속도로 넘겼고 엘라임은 레아를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워터팩!" 촤아아악......! 땅에서 푸른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엘라임은 몬스터의 공중 공격을 대비해 지금까지의 워터팩과는 달리 자신들을 중심으로 반원형의 막을 쳤다. 그솓에서 엘라임과 레아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아직 앙금이 남아 있는지 엘라임의 방어막은 로얀을 감싸주지 않았던 것이다. "키에엑!" 괴성을 지며 등장한 다섯 마리의 몬스터를 보며 로얀은 책장을 넘겼고, 곧 그의 입이 열렸다. "드래곤의 아류 와이번. 지능이 낮고 매우 난폭함." 와이번...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드래곤보다는 훨씬 작은 몬스터. 드래곤과는 달리 앞발이 없고 브레스나 마법도 쓸 수 없었지만 날카로운 이빨엔 강한 독이 묻어 있었다. 와이번들은 자이언트의 시체를 보고 날아온 것이다. 아지언트의 육중한 몸은 맛있는 식사거리였다. 아무리 와이번이라 해도 자이언트와 싸우는 것은 위험했다. 그러니 언제 또 이런 진수성찬을 먹어볼 수 있겠는가? "키에에엑!" 와이번들은 자이언트에게로 다가가기 전 로얀을 향해 먼저 날아왔다. 엘라임과 레아는 물의 장벽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먼저 날아간 것이었다. 설마 이 작은 인간이 거대한 자이언트를 죽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와이번이었다. 지능이 낮고 난폭한 와이번이 생각이라는 것을 했을 리가 없지만 말이다. "드래곤의 아류인 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하다." 로얀의 눈이 번뜩였다. 다른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엘라임은 로얀의 바뀐 분위기를 알아보았다. "저 사람, 드래곤과 무슨 일 있었니?"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근데 오늘따라 로얀이 사냐워 보이네?" "사나워 보이는 게 아니라 슬퍼 보이는 거야." 그녀는 레아와는 달리 로얀의 눈동자를 보았다. 눈동자는 물들의 조화로 만들어진 구슬 같아서인지 오래 전부터 엘라임은 사람의 감정을 잘 느끼고 읽어냈던 것이다. 와이번이 로얀의 머리 워로 날아와 날카로운 이빨로 그의 머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콰가각! 로얀은 재빨리 그 자리에서 이탈하자 그가 있던 자리를 와이번의 날카로운 이빨이 갈아버렸다. 바닥에 이빨 자국을 선명하게 남긴 와이번이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 뒤로도 와이번 다섯 마리는 번갈아 가며 로얀에게 달려들었다. 한번 공격하고 하늘로 잽싸게 날아오르는 와이번의 행동에 로얀은 쉽게 공격할 틈을 찾지 못했다. 엘라임은 물의 장벽 안에서 이리저리 와이번의 공격을 피해 몸을 움직이는 로얀을 보다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물의 사슬." 츄아아악! 그녀의 음성을 뒤로하고 땅 속에서 수십 가락의 물줄기가 솟아오르더니 와이번에게로 빠른 속도로 날개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키엑!" 두마리의 와이번이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물의 사슬 속에서 발버둥쳤다. 스윽. 쿠쿠쿵! 엘라임이 손을 휘젓자 두 마리의 육중한 와이번이 땅으로 떨어졌다. 스릉. 그러자 로얀이 다그리온과 에리오네를 뽑아 들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스걱. 푸화확......! 와이번 두 마리의 목이 베어버린 로얀은 그 피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대로 엘라임을 향해 다가왔다. 물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방해하지 마라. 부탁이다." 빙글. 로얀은 그 말과 동시에 몸을 돌려 하늘을 날고 있는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스윽. 로얌의 말을 들은 엘라임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고 손을 내렸다. 로얀의 입에서 뜻밖에도 부탁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와이번을 죽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레아도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로얀을 바라보았다. '복수는 내손으로 한다.' 로얀은 와이번을 드래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드래곤과의 실전에 앞서 연습 상대로는 적격인 상태였다. 드래곤에 비하면 하늘과 땅만큼 힘의 차이가 났지만 공중을 자유자재로 나는 드래곤과의 전투에 앞서서는 좋은 연습상대임에 틀림없었다. "키에에엑!" 동료들의 죽음에도 와아번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난폭한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로얀을 향해 날아왔다. 후우웅! 강한 풍압이 전신으로 뻗어왔다. '지금이다.' 쿠가가각! 와이번이 또다시 바닥을 스쳐 지나가자 로얀은 그 등 뒤로 올라탔다. 퍼득! 스윽. 거대한 날개를 퍼득이며 하늘을 날아오른 와이번은 자신의 등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에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로얀은 중심을 잡기 위해 왼손에 들린 끝이 뾰족한 에리오네를 빙글 돌려 와이번의 등 위에 내리찍었다. 푸욱! "키에에엑!" 살이 찢는 고통에 와이번은 주변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고, 와이번에게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허공을 수놓았다. 와이번의 몸부린이 더욱 심해지자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아내고는 그대로 커다란 머리를 향해 달렸다. 그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욱. 베기 위해 만들어진 다크리온답게 와이번의 두꺼운 목을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푸확! 공중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떨어져 내렸다. 탓! 죽은 와이번의 시체가 땅으로 추락을 시작했을 때 로얀은 근처에서 날고 있던 와이번의 몸 위로 뛰어올랐다. 타탁. 정확히 머리 위에 착지한 그는 에리오네를 빙글 돌려 그대로 내리찍었다. 푸욱. 피핏! "키에에엑!" 에리오네가 작은 구멍을 만들며 와이번의 뇌를 관통하자마자 뇌수와 함께 붉은 피가 솟구쳤다. "꾸에엑!" 마지막 남은 와이번이 로얀의 힘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몸을 돌리려 했다. 탓! 그러나 옮겨 타기엔 너무 멀었다. 우우웅......! 로얀은 백광의 마나 소드를 다크리온에 생성시킨 후 남은 와이번을 향해 휘둘렀다. 콰가가강......! 다크리온에서 출렁이던 백광의 마나 소드는 굉음을 내며 와이번을 덮쳤다. 푸화화확! 밟은 곳을 잃은 로얀은 와이번의 시체와 함께 추락했다. 덕분에 그는 와이번이 뿜어낸 붉은 피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로얀은 지상으로 떨어지는 와중에 숲 전체를 볼 수 있었다. 한데 기괴한 나무들이 우거진 어둠의 숲 사이로 작고 둥근, 검은색의 뭔가가 언뜻 보였다. 문득언젠가 들은 적이 있던 어둠의 정령이라는 것들이 연상되었다. 타탁. 좀더 상대를 관찰하고 싶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로얀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바닥위에 내려섰다. 쏴아아아......! 붉은 피가 로얀에게로 퍼부어졌다. 그러나 피의 비는 와이번이 로얀과 비슷하게 떨어지면서 금세 그쳐버렸다. 뚝뚝! 로얀의 긴 흑발을 타고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붉은 피를 떨구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엘라임과 레아가 뒤따랐다. 레아가 자신 옆에 있는 엘라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언니가 좀 씻어주면 안 돼?" "......" 엘라임은 말 없이 운디네를 소환했다. 갑자기 엘라임과 레아가 걸음을 멈추고 운디네를 소환하자 로얀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운디네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뭐 하는 것이냐!" 서릿발처럼 차가움 엘라임의 음성이 운디네는 울먹이며 그녀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저분에게서 정령왕의 기운이......] 운디네의 말에 엘라임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러나 레아는 하급 정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령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엘라임도 로얀에게서 정령왕의 기운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정령왕의 기운을 지녔으면서도 인간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로얀... 그는 인간과 정령왕 사이에 태어난 존재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엘라임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령왕은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예로 실피드와 이프리트 사이에서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흑! 다른 분들과는 달리... 무서워요.] 운디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엘라임은 그녀를 돌려보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왕인 자신의 명령에도 머뭇거리까? "역시 두려워하는군." 로얀의 말을 들은 엘라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말뜻은 곧 그가 정령왕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하급 정령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인간이 스스로 혼돈의 정령왕이라 칭하고 다닌다는 이프리트의 말이 떠올랐다. 운디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단 한 존재, 레아는 영문을 몰라 엘라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들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왕의 말을 거부하는 정령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레아가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엘라임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사실이야" "그러면 언니가 직접 해주면 되잖아? 어휴 저 뚝뚝 떨어지는 피 좀 봐!" "싫어." "히잉...왜?" 터벅터벅...... 로얀이 몸을 돌려 옆의 숲으로 들어갔다. "피가 싫다면 씻고 오겠다." 바스락. 숲 속으로 사라지는 로얀을 보던 레아는 그가 처음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로얀이 사라지자 엘라임과 레아는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나무 밑으로 나란히 가 읹았다. 촤르륵! 졸졸졸...... 로얀은 신발을 벗고 시원한 냇가에 발을 담갔다. 어둠의 숲에 어울리지 않게 물은 깨끗했다. 망토 안에 있던 그의 옷은 많이 젖지 않았다. 담요처럼 몸을 감싸는 땅의 숨결이라는 망토는 정령왕의 작품답게 훌륭한 방수, 방어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핏방울도 유리에 물 떨어지듯 미끄러져 내려 항상 깨끗함을 유지했다. 촤악. 얼굴에 물을 적신 로얀은 옷을 하나하나 벗고는 오랜만에 목욕을 시작했다. 냇가의 중안은 로얀이 앉으면 목까지 올 정도의 깊이였다. 계곡의 물치고는 꽤나 깊다고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묵은 때를 벗긴 로얀은 물기 어린 몸을 원래 입고 있던 옷으로 대충 닦고는 짐 속에서 새 옷을 꺼내 걸쳐 입었다. 그리고 가죽으로 된 검은색 신발을 신고 두 개의 검을 허리에 찬 후 마지막으로 망토를 등에 두르려던 그는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따라올 것이냐?" 그의 차가운 음성이 맑은 냇가의 물소리와 함께 숲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숲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어둠의 정령 다크라고 했던가? 후웅. 쏴아아......! 로얀의 말에 사나운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검은 구체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백 개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 구체는 로얀이 말한 대로 어둠의 정령 다크였다. 모든 존재에게 배척당하고 다른 정령왕들이나 높은 존재들에게 수없이 소멸당했던 그들... 때문에 겁이 많기로 소문난 그들은 지난 6일 동안 로얀 일행을 따라다닌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있었지만, 그들은 애써 두려움을 몰아내며 로얀 일행을 따라다녔다. 한데 그토록 겁이 많은 그들이 왜 로얀 일행을 따라다닌 것일까? 엘라임도 어둠의 정령들이 자신들을 따라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소멸시키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녀도 이렇게 많은 수의 어둠의 정령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저희들이 보이시나요?] 검은 구체 속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은 어둠의 정령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로얀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보인다." 흔들! 그러자 이곳에 모인 어둠의 정령들이 동요하며 서로서로 웅성거렸다. [제, 제 말이 들리세요?] "들린다. 한데 왜 우리를 따라다닌 거지?" [그,그건......] 로얀은 두 손을 허리에 매여 있는 검 쪽으로 가져갔다. "적이냐?" [으아아......!] 모든 다크들이 조금씩 물러나 호들감을 떨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로얀의 동작 하나에 엄청 겁을 먹는 그들이었다. 로얀은 그런 그들의 반응에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 [자, 잠깐만요!] "뭐냐?" [당신에게서 정령왕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다른 정령왕들은 마냥 두려웠지만 당신은... 따뜻했어요.] "......" 한동안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건 로얀이었다. "나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혼돈의 정령왕......] 그런 정령왕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로얀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둠의 정령들은 로얀이 자신들을 보살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그들의 왕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로얀을 바라보던 어둠의 정령들이 이윽고 모두 그에게로 다가왔다. [저희들의 왕이 되어주세요.] "왕......" 그 말과 함께 로얀의 머리속으로 전대 다크로얀이 남겨둔 메세지가 스쳐 지나갔다. [난 해본 적이 없지만 카오스가 나의 머리속에 넣어둔 지식에는 왕이 없는 정령을 거두어들이는 방법이 있다. 수하를 둔다면 폭주를 막을 확률이 더욱 높아질지도 모른다. 정령들은 자신들의 왕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아쉽게도 얻을 수 있는 정령은 정령왕이 없는 세 정령 중 한 가지 속성의 정령뿐이다.] 로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정령들... "너희를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냐?" [......] 그 말은 곧 자신들을 받아준다는 의미라 어둠의 정령들은 모두 기뻐했지만 그들 또한 그 방법을 몰랐기에 금세 다시 침울해졌다. 그때 로얀의 머리속으로 또다시 전대 다크로얀의 메세지가 스쳐 지나갔다. [나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내 앞의 존재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 그러자 로얀의 입에서 평소와는 다른, 신비한 힘이 깃들어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은 내 앞의 존재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 파하하핫! 엄청난 빛이 로얀의 몸에서 폭사되는가 싶더니 그 빛은 세상을 한순간에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정말 한순간이었기에 어떠한 존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갑작스런 빛은 어둠의 정령 다크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칸 대륙에 퍼져 있는 모든 어둠의 정령들에게도 깃들었다. 그것은 눈을 한번 깜빡이는 것보다 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된 건가? 간단하군." 그의 말에 어둠의 정령들은 웅성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자신들의 몸 속에서 조금 전과는 다른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니, 가장 큰 변화는 그들에게 그들만의 정령 기술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하급 정령인 그들에게 생긴 기술은 상대의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는 능력인 쉐도우라는 기술이었다. 다른 이들의 기술을 복사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기술이 생긴 것이다. 로얀은 자신의 기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이곳에 모인 어둠의 정령들이 그의 앞에 도열했다. 칸 대륙에 퍼져 있는 많은 어둠의 정령들은 자신들에게도 왕이 생긴 것을 언뜻 짐작만 할 뿐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으리라. [혼돈의 정령왕이자 저희들의 왕을 뵙습니다!] 백 명이 내뱉는 어린 소년의 함성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로얀은 정령들을 대표하는 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어둠의 정령을 지목하여 불렀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네가 대표로 한다." [네? 저, 정말요?] 드디어 자신들에게도 왕이 생겼다.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 갱긴 것이다. 그런 왕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정령이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 이런 행운을 볼러온 것이다. [우우우우......]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우아아앙! 절 시켜주세요!] 아직 어린 소년 같은 다크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조르기도 하고 강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들의 격렬한 반응에 로얀은 얼굴을 찌푸렸다. "명령이다." 왕의 명령, 그것은 절대적이었다. 수십년만 년 동안 왕을 기다려온 어둠의 정령들은 그 어떤 정령들보다 굳은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이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를 앞으로 다크로드라고 부르겠다. 쉐도우로 나의 그림자 속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도록. 그리고 다크로드에 걸맞는 말투를 사용해라."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말투는 딱 질색이었다. 이런 타입은 레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예, 나의 왕이시여!] 굳은 음성으로 말하는 로얀의 명령에 다크로드가 된 어둠의 정령도 그에 걸맞게 대답했다. 언제 아이처럼 말햇었나 싶을 정도로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다크로드." [예.] "너희들을 어떻게 진화시키지?" 진화...하급 정령인 그들을 어떻게 중급으로, 상급으로 진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정령은 단계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단계마다 힘이 달라지는 생명체였다. 왕이 없을 때에도 어둠의 정령들은 위계질서가 잘 잡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하급 정령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왕이 생겼으니 하급부터 최상급까지의 정령이 모두 존재해야만 했다. 다크로드는 로얀의 말에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어둠의 정령은 모든 존재의 감정에 부응합니다.] "감정?" [빛의 정령이 기쁨이나 행복 같은 감정에 반응한다면 저희는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에 반응합니다. 이것이 저희를 진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로얀은 눈을 감고 다크로드가 말한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의 참담했던 과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분노가 솟구쳤다. 순간, 주위에서 그를 지켜보고 어둠의 정령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의 몸에서 마족의 마기보다 더 검은 칠흑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무의식적으로 앞에 도열해 있는 어둠의 정령들은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칠흑 같은 기운이 모든 다크를 감싸는가 싶더니 곧 그들에게로 흡수되었다. 화아악! 잠시 후, 로얀은 눈을 떴다. 그리고 앞으로 보고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의 앞에 있던 어둠의 정령 다크 백 명이 모두 모습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록 어른 주먹만 한 크기였지만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사신이 들고 다니는 낫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힘 또한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성공인가?" 스륵. 로얀의 중얼거림에 다크로드가 다가왔다. 그도 모습이 변해 있었다. [저도 어덯게 된 건지...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모든 다크가 중급 정령으로 진화한 것 같습니다.] 로얀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머리속으로 죽음의 낫이라는 기술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물끄러미 눈앞에 있는 다크로드를 관찰했다. "어째서 중급 정령으로 밖에 진화하지 못한 걸까?" [진화가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왕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감정이라 미약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고 슬퍼해야 강해진다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아니다...재밌군." 로얀은 다시 한 번 그들을 둘러보았다. 재미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뭉쳤으니 말이다. 로얀이 이들이 받아준 것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피식. 어쨌거나 지금까지 버림받은 생각한 로얀에게 절대로 배신할리 없는 어둠의 정령이라는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을 너희들과 함께하겠다." 로얀의 말에 백 명의 어둠의 정령들이 바닥으로 내려와 부복했다. "그리고 어둠의 중급 정령을 앞으로 데스라고 부르겠다." [예, 왕이시여] 그들의 음성은 좀더 어른스러워져 있었고 느껴지는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이렇게 어둠의 정령들과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4장 어둠의 신전 로얀이 몸을 씻고 돌아오자 엘라임과 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아래에서 로얀을 기다리며 대화를 하고 있던 그녀들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엘라임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는 로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어둠의 숲을 잔잔히 비추는 햇살에 로얀의 그림자가 출렁였다. 한데 그 그림자 속에는 또 다른 존재가 숨어 있었다. 게다가 똑같이 생긴 것이 백여 정도 더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정령이 로얀의 그림자 속에 있었기에 엘라임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 사신의 낫이라는 시클을 들고 있는 정령은 어둠의 정령 다크와 흡사한 기운이 풍겨나왔다. 하지만 로얀의 그림자 속에 있는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하급 정령인 다크와는 달리 중급 정령의 것이었다. "뭐, 뭐지?"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던 엘라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로얀의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었기에 엘라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스윽. 로얀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크로드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모든 정령들을 정령왕에 대해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더군다나 몇십만 년 동안 질려 살아왔던 어둠의 정령이 왕이 생겼다고 갑자기 변할 리가 없었다. 로얀은 자신의 식구이자 부하인 다크로드가 엘라임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자 기분이 나빠졌다. "다크로드." [네......] 로얀의 부름에 다크로드는 힘없이 대답하며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는 엘라임을 힐끔거리며 로얀 옆에 섰다. 아니, 둥실 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다크로드는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로얀이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이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마라." 힐끔.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가 엘라임을 쳐다보자 그녀의 싸늘한 눈동자가 보였다. "명령이다." [예!] 다크로드의 대답에 엘라임의 몸에서 엄청난 힘과 함께 정령왕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싸늘한 눈동자는 다크로드를 직시하고 있었다. "감히 중급 정령......" "까아아악!" 엘라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옆에 있던 레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다크로드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레아는 엘라임과 로얀이 무슨 일 때문에 살벌해졌는지 알지 못했지만 로얀의 그림자 속에서 나온 정령을 보고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다크로드는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어둠속에서 간간이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한데 무엇보다도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는 성인 남자의 주먹만한 몸집을 가지고 있어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레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으아아아......!] 다크로드는 레아가 달려들자 괴성과 함께 로얀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히잉, 어디로 간 거야?" 로얀의 그림자 앞에 주구려 앉은 레아는 손으로 그림자를 찔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턱. 그 모습에 로얀은 레아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머리가 손 안 가득 들어오는 듯했다. "너, 이 녀석도 무서운 거냐?" 그러자 다크로드가 그의 그림자 속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는 말했다. [페, 페어리의 여왕님이잖아요.] "앗, 나왔다!" 레아가 고개를 내민 다크로드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크로드의 겁 많은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의 행동이 납득이 가기도 했다. 레아는 페어리의 여왕이었고 페어리는 빛의 요정족이라 할 수 있었기에 어둠과 상반된 힘이었으니 중급 정령인 다크로드가 레아를 무서워 하는 것은 당연했다. 레아는 다크로드와 어둠의 정령이 같이 다녀도 좋아할 것 같았지만 엘라임은 달랐다. 그래서 로얀은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을 포함해 주위에 있는 어둠의 정령들은 모두 나의 가족이다. 이들을 건드리지 말았으면 한다." "당신이 어둠의 정령왕이라는 건가요?" "아니, 혼돈의 정령왕이다." "......" 엘라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로얀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런건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숲 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 같이 가!" 로얀의 그림자만 보고 있던 레아는 그가 몸을 움직이자 급히 그 뒤를 쫓았다. 엘라임은 조금 전 로얀이 말한 혼돈의 정령왕에 대해 생각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처음에는 레아를 보호하기 위해 일행이 되었지만 지금은 로얀의 정체가 도체가 무엇인지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로얀, 그 검둥이 좀 꺼내봐......" 아까부터 레아는 로얀의 팔을 잡고 흔들며 칭얼거렸다. 다크로드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크로드는 레아가 그럴 때마다 식은땀을 흘러야만 했다. 스오오오...... "안개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로얀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레아와 엘라임도 움직임을 멈추고 그 주위를 둘러보았다.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퍼져 있었다. "여긴 안개가 많은 지역이 아닌데?......" 주변을 둘려보던 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둠의 숲을 지나지 않고 곧장 빛의 숲에 닿을 수 있는 페어리들만의 길이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레아는 그동안 몇 번이나 어둠의 숲에 들러 주변을 살폈다. 몬스터들이 무섭긴 했지만 호기심을 억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이곳에 이런 안개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추악안 언데드들이 사는, 짙은 안개가 낀 곳을 피해 빛의 숲으로 안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라임은 손을 뻗어 안개를 쥐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거군." 로얀을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가득 차 있는 안개를 보고는 다크로드를 불렀다. "다크로드." 스르륵. [예, 왕이시여.] "알아보고 와라." 번뜩. 스르륵! 다크로드는 레아가 자신을 보며 눈을 번뜩이자 급히 로얀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다른 어둠의 정령 데스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다크로드가 다시 나타난 것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둠속에서 움직임이 활발한 어둠의 정령들에게 어둠의 숲은 그들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 숨어 다닐 수 있는 데스의 정찰 능력은 바람을 타고 다니는 바람의 정령과 비등할 정도로 뛰어났다. 고스트를 제외한 모든 존재에게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신전이라는 곳에서 사악한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어둠의 신전?" "어둠의 신전은 과거 마왕 아슈발트를 봉인해 둔 신전으로 언데드들의 서식지 중심에 있는 곳이야. 그곳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흐음......" 어둠의 숲을 훤히 꿰고 있는 레아가 로얀의 궁금점을 풀어주자 그는 말없이 안개를 바라보았다. "가자." "응? 어디로?" 레아는 로얀이 어디를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어둠의 신전으로 간다." "시, 싫어!" 로얀의 말에 레아가 강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언데들의 그 괴상한 외모는 레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로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둠의 신전으로 가면 데스 나이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언데드들의 서식지인 그곳이라면 틀림없이 데스 나이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데스 나이트보다 더 강한 몬스터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로얀을 도와준 건 뜻밖에도 엘라임이었다. 그녀는 레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레아, 우리 가보자. 어둠의 신전에 문제가 생겼다면 빛의 숲도 위험하잖아." 빛의 숲이 위험하다는 말에 레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숲에사는 페어리들의 여왕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결정됐군. 다크로드, 어둠의 신전으로 안내해라." 다크로드는 로얀의 명에 몸을 움찔거렸다. 레아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앞이 잘 보였지만 엘라임과 레아는 그렇지 못했기에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다크로드가 안내해 주는 대로 어둠의 신전으로 향했다. "안개가 더 짙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로얀은 시야를 방해받지 않았지만 확실히 안개는 그들이 어둠의 신전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더 짙어지고 있었다. 엘라임은 안개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데... 뱀파이어인가?" "우아아앙......!" 엘라임의 말에 레아는 울먹이며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엘라임은 그런 레아는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뱀파이어는 사람들을 유혹해 피를 빠는 몬스터답게 얼굴이 상당히 잘생기고 예뻤다. 평소 예쁘고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레아가 이렇게 까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뱀파이어는 무섭게 생기진 않았잖아?" "그, 그렇지만 박쥐 덩어리잖아!" "호호호......" 레아의 말에 엘라임은 오랜만에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고 페어리의 여왕답지 않게 울먹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 "뭔가가 다가온다." 로얀의 말에 엘라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로얀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다크로드에게 말했다. "모습을 감춰라." 스르륵. 로얀의 말에 다크로드는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그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바스락. "하하하! 이런 곳에서 여행자를 만나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검은 가죽 재킷에 진홍색 머리를 한 매우 매혹적인 남자와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요염한 여인이었다. 그들이 웃음 지으며 일행에게 다가오자 레아는 엘라임 뒤에 숨었다. 정령왕이나 페어리의 여왕이 두 남녀의 정체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상대방은 로얀 일행의 정체를 전혀 몰라봤지만 말이다. 두 남녀는 모두 뱀파이어였다. 피를 먹고사는 그들에게 있어 어둠의 숲에서 발견한 로얀 일행은 그야말로 맛있는 음식이자 보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보통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아주 교활하고 머리가 좋은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숲에 있는 이들은 피에, 특히 인간의 피에 너무도 굶주려 있었다. "호호, 반가워요." 두 명의 뱀파이어가 무척이나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좀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로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엘라임 뒤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민 채 그들을 바라보던 레아는 로얀이 그답지 않게 검의 손잡이에 손도 가져가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의아하게 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촤르르륵. 로얀이 품속에서 몬스터 도감이라는 책을 꺼내더니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찬찬히 뭔가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입이 열렸다. "뱀파이어라... 검을 쓸 필요도 없겠군." "큭!" 파팟! 로얀의 말에 뱀파이어 남녀는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아무리봐도 인간으로 보이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볼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던 일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상급의 뱀파이어였다. "어떻게 알았지?" "이 자식!" 여자 뱀파이어는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를 알았는지 궁금해 물었지만 꽤나 다혈질로 보이는 남자는 이를 갈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빛으로 로얀을 노려보았다. 자신들을 깔보는 듯한 그의 말 때문이었다. 주변의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파박! 남자 뱀파이어는 안개 속에서 로얀이 앞을 보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윽. 로얀은 뱀파이어를 가볍게 피하면서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여자 뱀파이어 쪽으로 집어 던졌다. "큭!" 날아간 뱀파이어는 몸을 회전시키며 착지했다. 덕분에 뱀파이어들끼리 부딪치는 일은 면했지만 그는 자존심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남자 뱀파이어가 자신의 동료인 듯한 여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한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크… 조용히 피를 내줬으면 고통은 덜했을 텐데,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블러드!" "호호호! 그 육신까지 씹어 먹어 드리지요. 블러드!" 파하핫! 외침과 함께 그들은 붉은 빛에 휩싸였다. '저들의 기술이란 것이 저건가?' 로얀은 두 뱀파이어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책에도 뱀파이어의 블러드라는 기술이 언급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저 뱀파이어가 전투 형태로 변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로얀은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레아와 엘라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콰드드득! 붉은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붉은 빛이 점점 사그라지는 듯 싶더니 두 뱀파이어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 그들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조금 전과 확연히 차이가났다. 파바바밧! 남자 뱀파이어가 진흥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로얀에게로 쇄도해 왔다. 그의 움직임은 엄청나게 빨라 그의 눈동자가 붉은 잔상을 남길 정도였다. "블러드!" 남자 뱀파이어는 로얀 바로 앞에 당도했을 때 이상한 말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우뚝 멈추었다. 푸욱! 그의 날카로운 손톱은 로얀의 왼쪽 어깨 위로 지나갔다. 로얀의 손에 잡힌 그의 심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붉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로얀 때문이었다. "쓸 만하군." 로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남자 뱀파이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워낙에 목소리가 작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로얀이 보인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에 듣지 못한 것이다. 너무도 오랜만에 나타난 인간 사냥감에 그들 뱀파이어 부부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을 나왔다. 어둠의 신전에서 풍기는 어둠의 기운이 오늘따라 너무도 강했기에 힘도 충만해져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라 생각했던 로얀은 인간이 아니었다. 동족... 그것도 자신보다 오래 살았을 것이 분명한, 진한 피를 가진 뱀파이어였다. 아니, 그는 뱀파이어의 시조라 불리는 드라큘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강할 수는 없었다. "쿨럭." 남자 뱀파이어가 붉은 피를 토해 냄과 동시에 로얀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손톱이 더욱더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퍽! 남자 뱀파이어가 뭐라 말하려 할 때 그 심장은 터져 나갔고, 뱀파이어는 고개를 떨구었다. 푹. 로얀은 뱀파이어의 가슴에서 손을 빼내며 그의 식어버린 육체를 밀었다. 털썩. "으으윽, 이, 이......!" 여자 뱀파이어는 붉은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두 손의 손톱을 앞세운 채 로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엄청난 속력으로 움직이는 로얀의 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자리에 멈춰섰다. 로얀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 여자 뱀파이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엘라임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는 레아가 그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자신 품으로 끌어당겼다. 퍽! 로얀이 아무 거리낌 없이 여자 뱀파이어의 머리를 터트리자 피의 뇌수가 그의 몸을 적셨다. 여자 뱀파이어는 비명조차 질러 보지도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꼭 그렇게 싸워야겠어? 그리고 당신 정체가 뭐야!" 엘라임은 더 이상 로얀을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기술을 쓰는 데다가 이번에 그가 보여준 행동은 심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냥 검으로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터벅. "또 젖어버렸군." 로얀은 자신의 몸을 적신 뱀파이어의 피와 뇌수를 바라보며 레아와 엘라임에게로 다가갔다. 레아는 엘라임의 품속에서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그를 처다보았다. "우아앙! 로얀도 박쥐 덩어리였어?" 확! 그는 레아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계속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다시 어둠의 신전으로 향하지." 레아는 로얀이 갑자기 원래의 형태로 돌아와 있자 죽은 뱀파이어들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 했다. 턱. "대답해." 엘라임은 몸을 돌리려는 로얀의 팔을 잡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진실된 대답을 듣기 위함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방금 건 단지 기술을 따라했을 뿐이야." "......? 기술을 따라하다니? 블러드는 뱀파이어 일족 고유의 기술이었어." 그녀는 로얀의 말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다크로드, 다시 길을 안내해라." 스륵. [예.] 그러나 다크로드는 로얀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어둠의 정령의 아버지이자 왕이 된 로얀에게 의심이라든지 이상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얀은 여전히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엘라임의 손을 잡고 내려놓았다. 그녀의 피부는 피부는 매우 부드러웠고 시원한 느낌이 났다. 그의 행동에 엘라임은 놀라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썩은내가 심해지고 있다. 레아를 보호해라." 후각도 다른 사람보다 발달한 로얀은 점점 심해지는 시체 썩은 냄새를 맡았다. 그가 몸을 돌리자 다크로드는 허공에 둥실 뜬 채로 길을 안내했다. 로얀의 뒷모습을 보며 엘라임도 레아의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레아가 그런 그녀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로얀이 한 말이 무슨 뜻이야?" "박쥐 덩어리 아니래." "진짜지?" "그래." 엘라임은 재차 확인하듯 묻는 레아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혼돈의 정령왕이라 자칭하는 다크로얀의 등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의 존재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아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아니, 로얀은 만약 레아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을 막을 위인이었다. 로얀이 적어도 자신들에게는 위헙을 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며 엘라임은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썩은 냄새와 갖자기 악취가 로얀의 후각을 자극했다. 뒤따라 오는 엘라임과 레아도 그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많군" 악취가 풍기는 곳에 도착한 직후 로얀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로얀 일행은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시체들의 바다였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모여 있다가 로얀 일행이 나타나자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언데드 대군들... 그들 끝에 어둠의 신전으로 보이는 지붕이 힐끗 보였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들의 시선을 받으며 로얀 일행은 어둠의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달그닥! 우어어어......! 언데드들도 로얀 일행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은 느리기로 소문난 좀비보다야 빨랐지만 그래도 느리긴 마찬가지였다. 레아는 엘라임 뒤에서 조심조심, 두 손을 질끔 감고 걸어가고 있었다. 흉측한 좀비가 보기 싫었던 그녀는 아예 눈을 감고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그닥! 우어어......! 레아는 괴기한 소리에 움찔거리며 눈을 살짝 떴다. 그녀의 눈 안에 징그러운 언데드들이 가득히 들어찼다. "꺄아아아......!"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서 엄청나게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언데드들이 향해 덮쳤다. 화아아악! 그리고 비명과 함께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젓는 레아의 손끝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와 언데드들 사이를 누볐다. 그러자 그 빛은 모여 있는 언데드들을 모두 녹여버리며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쿠어어어......! 콰드득! 초록 피부가 듬성듬성 불어 있는 좀비는 그대로 녹아버렸고, 스켈레톤은 가루가 되어 부셔져 내렸다. 순식간에 앞이 훤히 뚫리며 거대한 어둠의 신전이 한눈에 보였다. 로얀이 멍하니 레아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외면해 버렸다. 레아가 사용한 것은 페어리의 기술이었다. 빛을 다룰 줄 아는 페어리 중에서도 그녀는 여왕이었기에 강한 빛을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도 않는 기술이었는데 정면으로 다가오는 언데드들이 너무나 징그러워 무의식 중에 사용하게 된 것이엇다. 로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페어리의 여왕이 사용한 기술이라 그런지 그의 머리속으로 흘러 들어오지는 않았다. 끼아악......!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로얀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신전에 있는 거대한 동상이 살아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언데드들에게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로얀 일행이 레아의 힘으로 인해 보이게 되자 가고일들이 움직인 것이다. 가고일... 어둠의 신전을 지키는 문지기인 듯했다. 악마를 상상하며 만든 가고일들은 돌로 된 단단한 육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매우 민첩했고, 상대가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질긴 몬스터였다. 끼아악......! 스윽. 로얀은 에리오네의 그립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후웅...... 스륵! 하지만 로얀이 검을 뽑기도 전에 가고일은 커다란 물방울에 하나 둘 갇히기 시작했다. 엘라임의 힘이었다. 총 여섯 마리인 가고일이 모두 물방울 속에 갇히자 엘라임이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콰드드득! 끼아아......! 물 속에 갇힌 가고일들은 물의 압력이 점점 강해지자 괴로운 듯 괴성을 질러댔다. 콰드득! 이윽고 물의 압력에 완전히 박살난 가고일들은 돌 부스러기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로얀은 물끄러미 엘라임과 레아를 바라보았다. 외모만 본다면 작은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았지만, 신분이 신분인 만큼 그녀들이 가진힘은 로얀이 막연하게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강한 것이었다. 그의 시선에 엘라임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제 그 혼자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로얀은 몸을 돌렸다. 언데드들이 사라진 자리를 또다시 좀비들과 스켈레톤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스릉...... 그는 에리오네한 자루만 뽑아 들었다.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성검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상대하기에는 언데드들이 너무 많았다. "다크로드." 스르륵. 로얀의 말에 흑색 로브를 걸친 조그마한 다크로드가 고개를 숙이며 부복했다. "모두 처리해라." 로얀의 명령을 들은 다크로드는 몸을 일으며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왕의 명이시다. 모두 처리하라!] 스르륵. 스거걱! 쿠어어어......! 콰지직! 다크로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언데드들의 그림자 속에서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들이 모습을 나타내는가 싶더니 그 즉시 그림자의 주인을 베어버렸다. [흑! 저 녀석의 명령을 들어야 하다니......]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리는 어둠의 정령들의 불평에 다크로드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쳇! 저 거만한 폼 좀 봐.] [히힛, 뭐 어때? 우린 왕의 멍령이 우선이야.] [그런, 그럼! 이제 마음껏 노는 거야! ] [와아아아......] 어둠의 정령 데스들은 한동안 웅성거리다가 로얀의 명령을 상기하며 곳곳에 널려 있는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반월!] 중급 정령데스들이 일제히 중얼거리며 사신의 낫인 시클을 휘둘렀다. 슈아아악! 그 모습은 마치 바람 계열의 마법인 원드시커가 흑색을 띠며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파괴력만큼은 죽음의 반월이 훨씬 앞섰다. 날카로운 흑색 날이 수십으로 나누어져 언데드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와 함께 어둠의 정령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데스들은 무척이나 즐거운 듯 언데드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가차없이 그들을 베어버렸다. 그들의 작은 낫은 휘둘러질 때만큼은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너는 안가냐?" 로얀은 신나게 날아다니는 데스들을 보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다크로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갑니다!] 휘릭. 다크로드는 뭔가 찔리는지 힘차게 대답하고는 잽싸게 하늘을 날아 언데드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로얀은 에리오네를 말아 쥐었다. "홀리웨폰." 성검이라 그런지 에리오네는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가늘게 떨었다. 무기에 성속성의 빛을 담게 해주는 마법인 홀리웨폰은 교황의 힘과 에리오네의 힘이 어우러져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후우우웅......! 거기다 백색오러까지 씌우니 마치 거대한 빛의 기둥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타탓! 로얀이 언데드들을 향해 뛰어들자 그 모습에 엘라임과 레아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레아는 에리오네가 내뿜는 빛에 눈을 뜬 것이었다. 레아는 자신이 귀여운 인형처럼 여기던 어둠의 중급 정령들이 히히덕거리며 언데드들을 학살하고 다니자 굳어버렸고, 엘라임은 백 명의 중급 정령이 일제히 낫을 휘두르는 모습에 굳어버렸다. 콰가가강! 쿠어어어......! 로얀이 에리오네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들이 형체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콰가가강! 그의 앞길을 맏는 존재는 이제 없었다. 모두 에리오네의 빛에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감에 다라 어둠의 신전은 점점 가까워 갔다. [침입자...죽인다.] 로얀은 갑자기 들려온 쇠를 긁는 것 같은 목소리에 어둠의 신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로얀이 그렇게 만나기를 고대하던 데스 나이트들이었다. 보통 흑갑을 입고 있다고 전해지는 이들이었지만 지금 로얀의 눈앞에 있는 이들은 특이하게도 붉은색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발음도 정확했고 느껴지는 힘도 강했다. 죽은 기사의 영혼으로 만든 존재들...그들은 기사일 때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모두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중급은 되어 보였다. 파핫! 로얀이 몸을 날렸다. 앞을 가로막는 언데드들은 관심 밖이었다. 그의 눈엔 오로지 데스 나이트들만 보였다. 후웅. 콰가가강......! 그는 바닥으로 내려서면서 데스 나이트 한 명에게 에리오네를 내리찍었다. [크아아악......!] 그 강하다는 데스 나이트는 로얀의 단 일 검에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로얀은 데스 나이트의 명성이 조작된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검이 성검이고 교황이 걸었다고 할 수 있는 홀리웨폰에 마나 소드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다. "시시하군." [천계의 명을 받은 것이냐?] "나의 의지다. 죽음의 반월!" 후웅. 쇄에에엑! 데스나이트를 약한 몬스터로 확정지은 로얀은 남은 세 명의 데스 나이트를 향해 자신의 기술을 펄쳤다. 그러자 밝은 빛의 반월에 흑빛이 살짝 감도는 기괴한 모양의 칼날이 데스 나이트들을 덮쳤다. 지금가지 그가 쓰던 기술들과는 달리 이 '죽음의 반월'은 자신만의 기술이었다. 그러자 문득 어둠의 정령을 받아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어둠의 정령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생겨난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헬파이어!" 그가 자신의 기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사이한 목소리가 신전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불길이 그를 덮쳤다. 화르르......! 지옥의 염화가 영혼마저 태우려는 듯 하자 로얀은 손을 내밀었다. "프로텍션." 화아악. 콰가가강! 로얀의몸을 새하얀 빛이 뒤덮는가 싶더니 그 위로 헬파이어라는 파도가 휘몰아쳤다. 그때, 어둠의 신전에서 검은 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크크크! 정통으로 맞았으니 아무리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해도......" 섬득한 목소리를 흘리며 걸어 나오던 누군가는 눈앞의 상황에 몸을 주춤했다. 헬파이어의 열기를 뚫고 신전의 침입자가 덮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하하하......! 후우웅! 로얀은 옴몸의 빛을 두른 채 마법을 시전한 이에게 거대한 빛의 기둥을 휘둘렀다. "카이져 실드!" 카카캉! 어둠의 신전의 대장으로 보이는 그 존재는 금빛 막을 형성하여 로얀의 검을 막았다. 이윽고 금빛 막을 형성한 존재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붉은 갑옷의 특이한 데스 나이트들처럼 그 존재 역시 푸른 빛덩이 같은 눈동자가 아닌 붉은 눈을 하고 있는 리치였다. 리치는 마법사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 채 영원한 세월을 살아가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존재로,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리치가 되기 위해선 마법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야 했기에 로얀의 눈앞에 있는 리치도 당연히 마법적 능력이 뛰어났다. 더군다나 리치는 오랜 세월 동안 마법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두근두근..... 로얀은 이상하게도 마족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리치를 보자 아련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카이져 실드와 헬파이어를 펼치는 리치의 마법 능력은 최소한 8서클. 로얀은 6서클까지만 복사할 수 있었기에 리치의 마법은 당연히 복사할 수가 없었다. 정말 꺼림칙한 상대였다. "프로텍션이라... 그렇다면 교황청에서 온 팔라딘이냐?" 어둠의 신전의 현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리치는 강한 신성력을 뿜어대는 로얀의 에리오네와 그가 펼친 프로텍션을 보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 로얀은 리치에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후웅. 찌르기를 위한 뽀족한 검이라 휘두를 때의 파괴력은 다크리온보다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것은 홀리웨폰이 커버해 주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무시하는 로얀의 태도에 리치는 노기 띤 목소리로 외쳤다. "이노옴! 플레어!" 화르르륵! 콰가강......! 7서클의 화염계 마법인 플레어! 초고온의 마법이 로얀을 덮쳤지만 그는 또다시 그것을 몸으로 받아내며 리치에게로 돌진했다. 이번에는 에리오네의 특징을 살려 리치의 몸을 찔려 나갔다. 흠짓. "카이져 실드." 쾅......! 이번에도 리치는 별다른 주문 없이 시동어만 외치며 마법을 펼쳐 로얀의 공격을 막아냈다. 리치는 지금 매유있어 보였지만 내심으로는 크게 놀라고 있었다. 프로텍션이든 카이져 실드든 간에 막을 생성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마법은커다란 단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 로얀은 하얀 빛을 뿌리는 프로텍션을 갑옷처럼 두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괴물 같은 녀석이군." 몬스터로 치부되는 자신의 처지는 생각치도 않고 리치는 로얀을 향해 질렸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런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얀이 수없이 많이 들어본 말이었기에 그는 리치의 말을 흘려버리고는 자신의 궁금한 점을 물었다. "대장인가?" 그는 어둠의 신전의 대장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대장? 크크크... 그래, 지금은 내가 대장이겠지" "그런가? 그렇다면 죽어라" 로얀은 말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마검은 다크리온은 언데드인 리치까지 힘을 줄 수도 있기에 에리오네만으로 상대했다. 게다가 이까짓 리치 정도는 에리오네 정도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나 소드에 홀리웨폰을 두른 에리오네는 언데드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천적이었던 것이다. 콰가가강......! 로얀이 리치를 서서히 몰아가자 신전 이곳저곳이 파괴되었다. 콰드득! 뼈밖에 없는 리치가 입을 꽉 다물자 우두둑거리는 경쾌한 뼈소리가 흘러나왔다. 벌써 수십 합을 겨룬 두 사람이었다. 무사 대 무사의 싸움이 아니기에 수십 합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여튼 그들이 꽤 오랜 시간동안 겨룬 건 사실이었다. 로얀은 휘둘러 리치를 몰아붙었고 리치는 카이드는 카이져 실드로 버티다 간간이 마법을 난사했다. 그러길 몇 차례, 아무리 대 마법사 급의 리치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움직임이 더뎌지고 있었다. "죽어라!" 리치는 혼신의 힘을 짜내 마나를 모으며 마법을 떠올렸다. 파지직! "소닉 바스터!" 7서클의 바람 계열의 마법... 뇌전의 힘이 살짝 가미된 이 마법은 음속의 바람이 날아가 상대를 찢어놓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마법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로얀은 프로텍션이 여러 차례 강한 마법을 받으며 서서히 부서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리치는 생각 외로 질긴 몬스터였다. 기이이잉! 소닉 바스터의 바람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로얀의 몸을 강타했다. 그는 에리오네를 들어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가는 에리오네의 검심으로 소닉 바스터의 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파삭! "호오......!" 리치의 눈이 반짝였다. 로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하얀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잉...... 츄아악! 소닉 바스터라는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난 후 로얀의 왼쪽 어깨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주 깊숙이 베인 듯했다. 엘라임과 레아는 로얀이 아주 멀리서 싸우고 있는 데다가 언데드와 어둠의 정령으로 인해 그가 보이지 않았기에 현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로얀은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리치를 바라보았다. 해골인 그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쉐도우." 휘릭. "응?" 리치는 로얀이 갑자기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리자 순간 당황했지만 그는 곧 로얀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몸을 돌렸다. 상대의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는 기술인 쉐도우는 강한 마나를 다루는 이들에겐 단박에 발갈될 수 있었다. 어떤 존재건 몸에 희미하게나마 마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리치는 바로 그 마나의 기운으로 로얀을 찾아낸 것이다. 리치는 단번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마나를 끌어 모았다. "끝이다. 헬파이어!" 화르르륵! 그러나 실은 로얀도 쉐도우가 리치에게 발각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리치가 카이져 실드를 펼치지 않을 때를 그림자 속에서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콰하하항......! 로얀은 헬파이어의 불꽃을 뚫고 나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프로텍션이 산산히 부셔져 내렸다. 초고온의 헬파이어에 화상을 입은 것보다는 프로텍션이 부서지면서 여기저기 찢겨진 상처가 더 심했다. "죽음의 반월!" 슈아아악! 쇄에에엑!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로얀이 숨겨둔 한 수를 펼치자 흑색 칼날은 바람을 가르며 리치의 뼈마디를 조각조각 부숴 놓았다. 이 숨겨둔 한수에는 실피드가 등장해 사용한 바람의 칼날도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뼈만 있는 리치는 그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후욱, 후욱......" 로얀이 뜨거운 입김을 뱉어냈다. 데구루루...... 그때, 로얀의 옆으로 리치의 머리가 굴러왔다. 리치는 정말 고래 심줄처럼 질긴 몬스터였다. "크크크... 곧 그분이 깨어나신다. 그분이 강림하는 날 세상은 암흑으로 변하리라. 크하하하!" 바삭. 로얀은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 발을 들어 리치의 해골을 부숴버렸다. 리치는 라이프 배슬이 부서지지 않는 않는 한 불사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이 리치에게는 라이프 배슬 자체가 없는 듯 했다. 곧 어디서 뭐가 깨어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치가 죽어버린 어둠의 신전은 고요하기만 했다. 대장을 죽인 이상 끊임없이 나오는 언데드들에게는 흥미가 사라진 그는 몸을 돌려 엘라임과 레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의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15장 빛의 숲 검은 장발의 차가워 보이는 로얀과 즐거운 듯 밝게 웃는 분홍 머리카락의 작은 소녀 레아, 그리고 그런 그녀를 웃으며 바라보는 푸른 머리결의 엘라임이 빛의 숲으로 들어섰다. 리치와의 싸움 이후 좀비나 스켈레톤을 제외한 다른 강한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기에 로얀 일행은 언데드들을 무시하고 빛의 숲으로 향했던 것이다. 밝은 빛을 싫어하는 데스는 거대한 나무 그림자 속에서 로얀을 따라왔고 다크로드는 여전히 로얀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로얀은 리치와의 싸움에서 꽤나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 아직 로얀과 서먹한 사이임 엘라임이 치료해 줄 리 없어 레아가 그를 치료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레아와 엘라임은 그가 저번처럼 리커버리로 상처를 치료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간단한 지혈과 응급처지만 하더니 곧 묵묵히 걸어가는 게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레아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더 이상 리커버리를 쓸 수 없다는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레아와 엘라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로얀이 기술을 흉내 낸 것뿐이라는 말을 했지만 그녀들은 아직까지도 그 말의 정확한 뜻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페어리인 레아는 자신의 고향인 빛의 숲에 들어서자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피로가 싹 가신 듯했다. 엘라임도 가분이 한결 좋아 보이는 게 여전히 로얀을 제외하고는 모두 좋아 보였다. 사박사박...... 세 사람이 밟고 지나가는 길에 깔려 있던 꽃잎이 발에 붙어 허공을 날았다. 레아가 발걸음도 가볍게 일행의 선두에서 앞장서서 걸어갔다. 사사삭. 로얀의 귓가에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적의 수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적이다." "어?" 꽃을 보며 즐거워하던 레아는 로얀이 그 말과 함께 검의 그립에 손을 가져가자 그를 말리려고 타박타박 뛰어왔다. 빛의 숲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엘프들이 빛의 숲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나타나는 몬스터들도 모두 그들의 의해 퇴치되었던 것이다. 몬스터가 아니라면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들은 엘프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숲속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움직임이 매우 민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숲의 요정족이며 평화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라 해도 로얀이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엘프들은 몰살이었다. 때문에 레아와 그녀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엘프들이 걱정되어 로얀을 말리려고 그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사사삭. 엘프들로 보이는 이들이 로얀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수풀 속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화살촉을 로얀 일행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풀 숲 사이로 보이는 뽀얀 피부와 뾰족한 귀... 역시나 엘프들이었다. 스릉. 우우웅. 그러나 레아의 움직임보다 로얀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다크리온을 뽑음과 동시에 검에 백광의 오러를 피워 올렸다. 피피피핑! 로얀의 오러를 본 한 엘프가 화살을 쏘자 덩달아 다른 엘프들이 일제히 활의 시위를 놓았다. 헌터들의 기술인 애로우 샷이 일제히 로얀 일행을 덮쳤다. 로얀 일행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얼떨결에 화살을 쏜 엘프들도 당황했다. 그들은 로얀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기술을 쓰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를 하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활을 쏜 것이었다. 로얀은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순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레아를 보았다. 아무리 페어리의 여왕이라 해도 그녀에게는 화살을 막을 시간이 없었다. "워터팩." 촤르르륵. 쏴아아아......! 그의 말과 함께 로얀 일행의 주위로 거대한 물의 장벽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 순간, 달려오던 레아는 그 자리에 멈춰 로얀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엘라임은 아예 돌이 되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물의 정령의 기술을 쓰다니! 게다가 이 엄청난 두께, 여러 장의 워터팩은 적어도 상급 정령의 것이었다. 놀라긴 엘프도 마찬가치였다. 정령의 친화력이 높은 그들이 었건만 지금까지 어떠한 정령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물의 정령의 기술이 갑자기 나타나다니! 엘라임은 정령왕답게 완벽하게 기운을 감추고 있었고, 페어리의 여왕인 레아도 본신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프들은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엘프들은 갑자기 생성된 워터팩에 자신들이 쏜 화살들이 가로막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로얀이 아닌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처럼 빛나는 엘라임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본 엘프들은 물의 정령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모두 숲 속에서 나왔다. 그들은 엘라임이 워터팩을 펼쳤다고 확신한 것이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은 여성체로 알려져 있었기에 로얀이 워터팩을 썼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분명 그가 워터팩이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을 뵙습니다." 엘프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하자 물의 장벽 속에서 로얀이 엘라임을 바라보더니 장벽을 거두었다. 엘라임은 로얀을 보며 입술이 떨었다. 도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레아에게서 듣기로는 이프리트의 불꽃도 뿜은 적이 있다고 했다. 물의 정령왕과 불의 정령왕의 힘을 쓸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던가? "......" 그녀의 시선에 로얀이 다크리온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엘프들과의 대화는 엘라임과 레아의 몫이었던 것이다. 엘라임은 아직도 얼어 있었기에 엘프들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나 엘프들은 물의 장벽이 걷히자 이것으로 엘라임의 대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화사한 웃음을 담은채 말했다. "빛의 숲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엘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빛의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로얀의 눈에 어둠의숲의 괴기하게 뒤틀린 나무들과는 달리 빛의 머금은 듯한 열매를 머금은 듯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커다란 나무 위에는 집으로 보이는 것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마치 나무의 일부분인 듯 자연과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는 집들이었다. 엘프들은 인간과는 달리 수백 년의 세월을 사는 종족으로 숲의 요정이라는 명호답게 숲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이런 점은 백 년에 한 번 나무를 잘라 집과 가구를 만드는 그들의 특성에서도 잘 나타났다. 엘프들은 백 년에 한 번 나무를 자르기 전에 큰 제사를 지낸 후 자른 나무의 몇 배나 되는 수의 나무를 심었다. 숲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들의 마음은 어찌 보면 집착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연을 아끼는 만큼 엘프들은 자연을 훼손하고 이용하기만 하는 인간을 적대시했다. 그런 그들의 마을에 인간(?) 세 명이 엘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고 있으니 당연히 모든 엘프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한 엘프가 로얀 일행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먼저 앞질러 가자 로얀 일행은 마을 중앙에 멈추어 섰다. 그러나 일행 중 그 누구도 엘프들의 시선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레아는 산뜻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는지 눈을 감고 기분 좋은 미소을 짓고 있었고, 엘라임은 앞에 서 있는 로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로얀은 모든 인간들이 죽기 전에 보고 싶었다는 엘프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손이 검이 그립 쪽으로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의 원수인 드래곤이 엘프의 모습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이다. "크윽!" 갑자기 로얀이 오른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며 인상을 찌푸렸다. "로얀,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로얀은 레아의 물음에 머리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곳으로 오자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튼 엘프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는 있는 로얀은 그들의 시선을 흘러버렸다. 그때, 그의 귓가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얀 형!" 그것은 몇 달 전 해적들에게서 엘레나 공주를 구하는, 일행의 마지막 용병 의뢰에서 지겹게 들은 목소리로 짧게 기른 갈색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소년 음유시인이 그 주인이었다. 분명 로얀과 헤어지기 전 렌은 엘프인 세리나를 따라 빛의 숲으로 간다고 말했다. 과일 바구니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던 렌은 엘프들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곳에서 용병 의뢰에서 인연을 맺었던 로얀을 본 것이었다. 엘프들 속에서 서럽다면 서러운 생활을 했던 렌은 동족이자 형인 로얀을 보자 기쁜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달려가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마음이야 그것도 내팽개치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그 와중에 찾아올 엘프들의 잔소라거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로얀은 자신에게로 달려와 눈물을 글썽이는 렌을 보고 살작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숲의 향기를 만끽하던 레아는 로얀과 친분이 있는 사람은 처음 보기에 눈을 빛냈다. 혹시나 로얀의 과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로얀, 이 꼬마는 누구야?" "누가 꼬마라는 거야!" 렌은 로얀 뒤에 서 있던 작은 소녀가 자신을 가리키며 꼬마라 말하자고 말하자 발끈했다. 아무리 봐도 레아는 렌보다 나이를 더 쳐줄 수가 없었다. "로얀 형, 이 버릇없는 꼬마는 누구야?" 빠직. 꼬마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레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로얀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것을 감안해 화를 꾹 참았다. "꼬마 인간, 죽고 싶어?" 살벌하게 말하는 귀여운 꼬마 소녀를 보며 렌은 피식 웃었다. "로얀 형, 얘 너무 버릇없다." "......" 렌의 말에 로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렌과 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빠직. "호호호! 로얀, 저 꼬마 반만 죽여도 되지?" 이렇게 말해 준 것만 해도 그가 렌을 상당히 배려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렌이 그와 인연을 맺지 않았더라면 로얀은 일절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아 앞에 커다란 빛 덩이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커다란 주먹이 형상을 갖춰가자 렌은 왠지 모를 불안감과 함께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을 흘렀다. "이, 이게 뭐지?" 렌이 빛 덩이로 생성된 두 개의 커다란 주먹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레아는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각오해라. 꼬, 마, 인, 간, 아!" 후우웅...... 그녀의 말이 끝난과 동시에 날아가는 두 개의 커다란 주먹. 퍼억! 경쾌한 타격음. 뻐억. 렌은 끝임없이 날아오는 빛의 주먹에 이리저리 얻어터져야만 했다. 주먹에 몰매를 맞는 순간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바라며 로얀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다른 엘프들도 레아가 빛을 다루자 신기하게 바라보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인간 중에서 빛을 저렇게 다루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퍽! 퍽! 퍽! 아무튼 렌이 그렇게 한참을 맞고 있을 때...... "허허허... 요란하게 인사를 하시는군요." 긴 수염을 드리운 나이든 엘프가 다른 엘프들의 호의를 받으며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존대에 비로소 엘프들은 로얀 일행이 심상치 않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토토, 오랜만이야." 빛의 주먹이 허공에서 멈추는 것과 동시에 렌은 바닥을 굴렀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레아의 말에 늙은 엘프는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허허! 오랜만입니다, 페어리들의 여왕이신 레아님. 그리고 전 토토가 아니라 토시트라고 합니다. " 그렇게 레아에게 인사를 건넨, 전 엘프들을 다스리는 장소인 토시트가 이번에는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미리 연락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저희 마을을 방문해 주신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을 환영합니다." 엘라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토시트는 마지막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물의 정령왕과 페어리들의 여왕과 여행을 하는 인간... 정말 인간일까? 로얀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엘프들은 토시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곧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로얀 일행을 안내해 왔던 엘프들도 레아가 페어리의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이나 놀랐고, 이제 막 깨어나려 했던 렌은 꼬마 소녀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에 부들부들 떨며 다시 기절했다. 렌은 의식의 끈을 놓는 그 순간 직감했다. '난 이제 죽었다.' "혹시 위대한 존재이신지요?" 토시트는 그의 정체에 내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얀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 위대한 존재라는 말은 흔히 드래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자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얀의 눈썹이 살짝 치겨 올라갔다. "나를 도마뱀과 비교하지 마라" 그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오자 그 기운에 토시트는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흑발에 흑안, 게다가 드래곤을 벌레 보듯 말하는 것으로 보아 마족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토토, 로얀은 정령왕이야" 그들의 궁금증을 레아가 풀어주었다. 그녀는 이제 로얀을 정령왕으로 인전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토시트를 더욱 미궁 속으로 빠뜨려 놓았다. 아니, 모든 엘프들이 의아하게 여겼다. 검은 흑발에 남청체 정령왕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 "그냥 그렇게 알아둬. 그리고 시르 좀 줘." 그들의 반응에 레아는 시르를 요구했다. 시르는 빛의 숲에서만 자라는 나무의 진액으로 만든 사탕의 이름이었다. 스윽. 토시트는 아직도 약간은 못미더운 듯한 눈빛으로 로얀을 쳐다보고 있었다. 엘프들은 상대의 눈동자를 통해 상대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지만 토시트는 로얀에 눈동자에서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공허한 어둠... 그의 눈동자에서는 어둠만이 보였다. 하지만 토시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인 엘라임이 부정하지 않으니 로얀을 정령왕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시트는 어쨌거나 정령왕인 로얀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본 죄가 있기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험험!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런데 레아님은 이번에도 가출이십니까? " "아니야. 그냥 여행이라고." "허허! 그럼 페어리 마을에 연락을......" 레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여왕이 되고 나서부터 페어리 마을에 오래 붙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자유분방한 그녀는 많은 페어리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매일같이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한번 붙잡혀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레아는 얼굴을 굳히며 소리쳤다. "안 돼! 절대 안 돼! 토토, 알았지?" "허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파티를 시작해야지요." 토시트가 겉모습만으로는 귀여운 손녀딸 같은 레아가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겼다. 로얀은 뻗어 있는 렌의 발목을 잡고 그를 질질 끌며 따라갔고, 엘라임은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로얀의 정체를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엘프들의 파티라는 것은 인간들의 파티와는 많이 달랐다.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정도로 인간들의 파티에 비하면 상당히 조촐했다. 그러나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엘프답게 노래와 춤은 빠지지 않았다. 그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모두들 한가족처럼 즐거워했다. 레아는 장로인 토시트 옆에서 시르라는 사탕을 할짝이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 달콤하면서도 묘한 맛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토시트에게서 엘프 마을에 있는 거의 모든 시르를 받아내었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로얀은 파티에서 세리나를 만났지만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만남을 끝냈다. 그들 사이는 여전히 서먹했고 싸늘했다. 여자인 세리나가 로얀을 알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파티는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으나 로얀은 저녁 식사를 마친 직후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가버렸다. 원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데다가 다른 사람보다 귀가 밝다 보니 엘프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가 파티장을 벗어나자 그를 뒤따라 가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뚜벅뚜벅...... 나무로 만든 집답게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빙글. 방 안으로 들어선 로얀은 몸을 돌려 자신을 따라온 엘라임을 쳐다보았다. 끼익. 문이 닫히자 나무로 만든 집 안은 이제 로얀과 엘라임만의 공간이 되었다. "나에게 볼일이 있나?" 로얀은 무심한 눈동자가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존재에게 반말을 쓴 것이... 그는 자신의 보이는 대로 존댓말을 사용할지 안 할지를 결정했다. 엘라임이 아무리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보기에는 20대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랬기에 자연스럽게 반말이 나온 것이었다. 스윽.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어떠한 결의를 띠고 로얀의 흑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정령왕다운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오늘이야말로 들어야겠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지?" 그녀의 음성에서 강력한 압력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로얀은 이미 그녀의 기운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지만, 나는 혼돈의 정령왕이다. " "무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4대 정령왕 외의 정령왕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이제 똑같은 질문은 사양한다." 로얀의 무뚝뚝한 대답에 엘라임은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주먹에 힘이 절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의 정령의 기술과 불의 정령의 힘을 쓴거지?" "그대로 따라했을 뿐."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스오오오...... 엘라임의 기운이 거세졌다. 차가운 바다 폭풍이 불어닥치는 것만 같았다. "사실이다." 로얀은 말을 하면서 검의 그립을 어루만졌다. 지금은 싸움을 말릴 레아도 없었기에 엘라임이 조금이라도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다면 가차없이 그녀를 벨 생각이었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살아가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정령왕에게는 갈아가는 이유인 사명이 있었다. 엘라임의 경우에도 그녀는 세상의 원소 중 하나인 물을 관장하고 다스리기 위해 태어났다. "혼돈의 정령왕은 무슨 일을 하지?" "이간이 일이 끝나면 생각해 볼 생각이다." "......" 처음보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 로얀. 그가 말하는 인간의 일이란 드래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엘라임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녀는 로얀을 보며 분노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존재인 자칭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 이런 정령왕은 수십만 년의 세월을 살아온 엘라임의 기억속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엘라임은 인간의 일이라는 말을 할 때 그의 눈동자가 흐려지며 슬프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도 레아도 로얀의 슬픈 과거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물은 곧 마음이고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다. 덕분에 상대의 눈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은 로얀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느낄 수가 있었다. 무한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일생을 누구보다도 잘 느낄 수가 있었다. 무한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일생에 이토록 강한 슬픔을 지닌 존재는 없었다. 보는 그녀도 슬퍼지는 것만 같았고, 그 때문에 로얀을 보면 항상 화가 났다. "정말 정령왕이라면 인간계에서 소멸하는 순간 정령계로 돌려 보내지겠지." 촤르륵. 엘라임의 두 손을 푸른 물줄기가 감싸더니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로얀의 손은 이미 다크리온의 그립에 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낭 것만 같은 이때에 로얀은 이곳을 향해 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곳에 서 있으면 위험하다. " 로얀이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엘라임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잔뜩 화가 난 그녀가 로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당신을 시험해 보겠다." 끼익. 턱! 엘라임의 외침과 함께 방문이 열렷고, 문 앞에 있던 엘라임은 로얀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터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문에 떠밀려 몸을 휘청거렸다. 갑자기 누군가가 힘차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엘라임은 순간 당황하며 로얀이 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앞으로 넘어지려던 그녀는 로얀의 허리를 살짝 숙여 받음으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로얀은 자신에게로 넘어지는 엘라임을 얼떨결에 받은 것이였다. 로얀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렌이었다. 렌은 로얀이 그동안 무슨일을 겪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다가 엘라임이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여 허둥지둥했다. "서, 설마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로얀 형이......" 렌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로얀이 인간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정령왕인 엘라임과 인간인 로얀 사이가 진한(?) 듯하자 큰 혼란에 휩싸인 것이다. 팟. 그러자 엘라임이 로얀의 품에서 벗어나며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나가버렸다. "당신이라는 존재, 정말 싫어!" 그러나 로얀은 검의 그립에서 손을 치우며 아무 표정 없이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타탁. "이 바보!" 그때 레아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파티 도중 빠져나가는 로얀과 엘라임을 보고 그들을 따라와서는 페어리 특유의 기술로 창가의 몸을 숨긴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온 즉시 렌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얀 빛을 내뿜는 커다란 주먹을 생성시켰다. "우연이긴 했지만, 일단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들어줬으면 눈치를 봐서 얼른얼른 나가야지! 하여튼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레아는 모든 책임을 렌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렌은 지금 정령왕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노래의 소재로 쓸 생각에 살짝 들떠 있었디에 레아가 무슨 행동을 하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응?" "그냥 좀 맞자." 휘잉. "자, 잠깐!" 퍼퍽! 퍽! 주먹들이 가차없이 렌의 이곳저곳을 두드려대며 한밤에 시퍼런 멍을 그려내었다. 렌이 구타당하는 것을 외면한 채 레아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과는 달리 사뭇 진지했다. "로얀, 언니를 벨 생각이었지?" "......" 레아에게 있어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엘라임과 로얀이 잘어울리는 것 같아 내심 잘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건만 로얀은 엘라임을 동료로도 생각지 않는 듯했다. 그때 만약 렌이 문을 열고 나타나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면 로얀은 필시 엘라임을 베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아는 렌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컥, 그만 좀......"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렌은 바닥을 뒹굴며 호소했다. 그러자 레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넌 더 맞아야 돼!" 그녀의 외침에 렌은 바닥을 뒹굴며 고통에 찬 신음성을 토했다. 뚜벅뚜벅. 로얀은 떠들썩한 레아와 렌에게로 다가와 그들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린 뒤 발로 방문을 차서 열어 그들을 밖에 내려놓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로얀! 언니도 동료라고!" 로얀은 박에서 들려오는 레아의 음성을 뒤로하고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허리에서 떼어낸 후 침대의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망토를 벗은 그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내일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를 만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이제 레아와 엘라임과 함께 여행할 이유는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 레아와의 여행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있는 곳까지라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이제 곧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순간 엘라임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루만져 주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 로얀은 눈을 감으며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지켜야 할 존재가 늘어나면 나의 복수는 멀어질 뿐이다." 이 한마디와 함께 로얀의 방엔 침묵이 찾아왔다. 16장 깨어나는 어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빛의 숲에 새로운 하루를 해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 따사로운 햇살을 초록 입사귀들이 탐스럽게 집어 삼켰다. 로얀 일행이 빛의 숲에 있는 엘프의 마을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났다. 엘프들의 환영 파티가 있었던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밝은 것이다. 로얀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간단한 운동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파티 도중 로얀이 빛의 숲으로 온 이유를 알게 된 세리나가 오늘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게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기에 싸움에 앞서 몸을 풀고 있었던 것이다. 세리나의 말에 따르면 엘프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중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는 동급인 셈이었다. 우두둑!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몸을 풀 때마다 시원한 뼈 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치와의 싸움에서 입었던 상처는 레아의 치료 덕분에 모두 나아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로얀이 한창 몸을 풀고 있을 때 금발의 아름다운 엘프 세리나가 다가왔다. 그녀의 음성은 엘라임처럼 싸늘했지만 저번 용병일을 할 때보다는 한결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물의 정령왕과 페어리의 여왕을 대동하고 나타났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얀은 세리나를 보고는 나무 옆에 세워두었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집어 들어 허리에 맸다. "지금 갈 수 있을까?"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 엘프와 결투를 벌인 뒤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 일만 끝난다면 레아와 엘라임과도 이제 같이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그녀들과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 마음을 가다듬고 싶었다. 그에게 복수만큼 중요한 것은 없엇던 것이다. 세리나는 잠깐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가요" 로얀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누군가가 달려왔다. "헥헥... 나도 같이 가!" 레아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엘라임이 따라오고 있었다. 원래는 렌도 따라오려 했으나 그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세리나는 로얀에게 말하는 말투와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아와 엘라임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로얀이 레아에게 여기 있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레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를 앞질러 가버렸다. "......"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엘라임과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그것은 정말 순간이었다. 로얀 일행은 세리나의 안내를 받아 이른 아침의 빛의 숲을 거닐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엘프는 엘프 마을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가는 듯했다. 그들은 세리나를 따라 부지런히 발을 옮겨 커다란 언덕 하나를 넘었다. "저기예요." 로얀 일행은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퍽! 퍽! 퍽! 묘한 소리가 숲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희미하게 누군가가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요란한 타작음이 들려왔다. 처음에 로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엘프가 검술 수련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 그것이 아니었다. 시력을 조절할 수 있는 그가 자세히 바라보니 엘프는 뭔가를 나무에 매달아놓고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초록빛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체구, 그리고 봉긋 솟은 가슴...... 그는, 아니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엘프는 여자이고, 나무에 매달린것은 육중한 크기의 멧돼지였다. 그녀는 목검으로 멧돼지를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였나?" "네. 타니아 언니는 엘프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분이세요." "쿡! 그럼, 그럼! 정말 특이하니까. 근데 로얀은 그녀가 여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타니아라는 엘프 이야기가 나오자 레아와 엘라임은 그녀를 아는 듯 미소를 지었다. "특이한 건 맞는 것 같군. 돼지를 목검으로 두드리는 엘프라......" "뭐? 지금 타니아가 뭘 하고 있는지 보여?" 터벅터벅...... 로얀은 아름다운 세 여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시야에 잡힌 목표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행동에 세 여인은 그가 타니아를 보자마자 검을 휘두를 것 같아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갔다. 사전에 아무 이야기 없이 갑자기 검을 휘두르는 것은 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대륙에 현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단 세 명. 그 중 한 명인 타니아는 보통 엘프와는 달리 고기를 먹는 특이한 엘프였다. 여인의 몸으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특이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미리 잡어두었던 멧돼지를 통째로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목검으로 그것을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돼지를 다지던 그녀는 엘프답게 귀가 밝아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가 싶더니 상대방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를 본 타니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근처에 놓아두엇던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가느다랗고 긴 레이피어가 햇빛에 번득였다. 타니아가 자신을 보고 레이피어를 뽑자 로얀은 에리오네를 뽑았다. 요즘 들어 왠지 모르게 에리오네만 사용하게 되는 그였다. 타니아가 로얀을 보고 레이피어를 뽑으며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엘프도 자신을 잘 찾아오지 않는데 지금 찾아온 이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성되엇다. "잠깐!" 그들사이로 서둘러 달려온 레아가 끼어들었다. 스윽. 레아의 모습을 본 타니아가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곧 레이피어를 내렸다. "레아님! 게다가 엘라임님까지" 그녀는 반가움에 화사한 웃음을 띄었다. 사실 그녀들은 상당히 친분이 깊었던 것이다. 오래 전 레아가 빛의 숲에서 탈출을 감행할 때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레아의 소개로 엘라임까지 만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들 세 명은 상당한 친분을 쌓았던 것이다. 레아와 엘라임도 웃음을 띄었다. "로얀도 우리 동료야." "네? 그렇다면 드래......" 텁! 키가 작은 레아가 빛의 손을 순식간에 생성시켜 타니아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윽고 빛의 손을 떼어낸 레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대련 한 번만 해줘라." "대련이요?" "응. 로얀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흐음......" 타니아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로얀의 몸을 훑어보다 그의 허리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검을 유난히 바라보았다. 형태가 전혀 다른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다니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실력자란 말인가?' 타니아는 흥미가 일었다. 검의 길을 걷는 그녀에게 있어 강자와의 대결은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물론 대련을 받아들여야죠. 호호... 진작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란 걸 알았다면 제가 오히려 부탁했을 거예요." "그, 그래." 레아는 타니아에게 말하며 이번에는 로얀 옆으로 다가갔다. "이건 진짜진짜 대련이라고!" "걱정 마." 스윽. 로얀은 손으로 레아가 앞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막은 후 타니아를 향해 걸어갔다. 이미 로얀과 타니아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있었으므로 대련은 곧바로 시작될 듯했다. 레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걱정스런 시선은 타니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파핫! 서로 무기를 들고 대치하고 있던 그들의 싸움은 로얀이 먼저 달려 나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 타니아는 여유있게 자신의 레이피어에 마나 소드를 생성시켰다. 우우웅......! 하얀 오러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멀리서 그들의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세리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급으로 알려져 있는 타니아가 로얀에게 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로얀은 특이하게도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하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일 뿐이었다. 소드 마스터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실력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로얀과 타니아의 싸움은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차창......! 타니아의 체이피어와 부딪진 백광의 오러를 머금은 에리오네가 빛의 봉이 된 듯 우웅거렸다. 그 모습에 세리나는 경악했다. 로얀과 헤어진 지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어떻게 그사이에 중급의 소드 마스터에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었단 말인가? 그것은 드래곤이 옆에 붙어서 지도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리나의 머리속엔 어느새 한 가지 의문이 자리 잡았다. '로얀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로얀은 타니아와 검을 부딪침과 동시에 그녀의 레이피어를 걷어내며 틈을 노렸다. 타니아는 로얀의 힘과 속도에 당황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즉각 대응에 나섰다. 타니아는 로얀의 에리오네를 봉쇄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레이피어를 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침착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로얀의 에리오네는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찔러 들어왔다. 로얀은 싸움에 임함에 있어서는 항시 전장에 있는 병사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금 그의 검은 평소처럼 더욱더 매서웠다. '이 엘프를 꺾음으로써 모든 인연이 끝난다. 이제 복수만이 남는 것이다!' 파팟! 순간, 로얀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타니아에게로 파고들었다. "죽음의 반월!" 슈아아악! 검은색의 날카로운 바람! 섬득한 칼날이 폭풍이 되어 타니아에게로 날아갔다. 그 폭풍은 로얀의 에리오네에서부터 시작된것이었다. 후웅! 콰가가가......! 타니아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흑색 폭풍을 향해 허공을 찢듯 레이피어를 힘껏 그었다. 그러자 레이피어에서 강한 빛과 함께 폭풍이 몰아쳤다. 그것은 그저 마나 소드를 휘둘러 만든 것이었지만 보통 이들에겐 놀라운 기술처럼 보였다. 그녀가 만들어낸 폭풍이 로얀의 흑색 폭풍과 부딪치는가 싶더니 곧 두 개의 폭풍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동시에 소멸했다. 쾅......! 팟. 타니아는 힘겹게 로얀의 공격을 받아쳤지만 그의 공격은 여기서 끝난것이 아니었다. 허공으로 솟구친 로얀이 타니아를 향해 에리오네를 겨누자 뾰족한 에리오네의 날이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맑은 하늘의 햇살을 받으며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에로우 샷!" 그리고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헌터들이 쓰는 기술인 에로우 샷이 로얀의 에리오네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것도 한두 발이 아닌 수십발의 에로우 샷이 타니아를 향해 쏟아졌다. 로얀이 에로우 샷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빛의 숲에서 엘프들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쏜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엘프들이 쏘았던 에로우 샷을 이번 공격에 모두 써버렸다. 콰가가가강......!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자 레아가 질끈 감았고 엘라임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타니아는 살며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검술을 겨룰 상대를 찾지 못해 항상 따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로얀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엄청난 실력에다가 황당하기 그지없는 기술들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정말 오랜만에 흥이 났다. 타탁. 땅 위로 부드럽게 착지한 로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타니아가 흙먼지 속에서 에로우 샷을 모두 피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이번에 에로우 샷을 펄친것은 타니아의 힘을 빼놓음과 동시에 그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와아, 정말 강하구나!" 흙먼지가 걷히고 타니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로얀은 이미 예상을 했었지만 너무도 멀쩡한 타니아의 모습에 흑색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스윽. 타니아는 레이피어의 날을 로얀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눈이 독사의 눈동자처럼 매섭게 빛났다.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주고야 마는 그녀의 성미가 작용한 것이다. 그녀가 이번에는 자신이 반격하기 위해 로얀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응?" 뭔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속에서 솟아난 푸른 물결들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기술이었다. 타니아는 급히 고개를 들어 엘라임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무슨 연유인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츄아악. "흑!" 땅 속에서 솟하난 물줄기가 이번에는 두 팔을 묶었다. 로얀은 지난번 와이번과 싸울 때 그들을 묶어두었던 엘라임의 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결국 타니아는 온몸이 물줄기에 의해 포박당하고 말았다. 스윽. 웅웅웅...... 에리오네가 빛을 뿌리며 가늘게 떨렸다. 로얀은 오러를 흩날리며 천천히 타니아를 향해 다가갔다. "인연의 사슬을 끊겠다." 허공을 향해 자갑게 내뱉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정말 타니아를 죽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레아와 엘라임이 급히 뛰어가 말리려 했지만 로얀의 에리오네는 이미 허공울 가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깨끗한 찌르기 공격. 에리오네의 날이 당장이라도 타니아의 하얀 목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타타탁. "자아암깐! 멈춰요.....!"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귀가 밝은 로얀의 귓가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타니아를 향해 공격하려던 로얀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고, 순간 그의 손이 멈추었다. 그렇게 엘프의 마을에서 달려온 이에 의해 그의 손이 멈추었다. 로얀은 타니아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마음이 복잡해 몸이 무의식중에 움직인 것이다. 검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로얀은 미간을 찌푸리며 에리오네를 겁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타니아의 몸을 묶고 있던 물줄기를 소멸시켰다. 그렇게 그들릐 싸움은 로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레아가 달려와 로얀을 향해 외쳤다. "로얀! 방금 타니아를 죽이려 했지!" 이번이 엘라임 때를 포함해 벌써 두 번째였다. "......" 로얀은 레아를 한번 스윽 보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공격을 멈추게 했던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레아의 뒤를 이어 로얀에게 가까이 다가온 엘라임은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위터팩에 이어 또다시 그가 자신의 기술을 썼기 때문이다. 타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레이피어를 내려놓았다. 이들은 묘한 분위기 속에 렌은 숨을 진정시키며 다급히 말했다. "큰일났어요! 엘프 마을로 언데드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고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로얀과 타니아는 황급히 엘프마을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 뒤를 세리나와 엘라임, 레아가 뒤따랐다. 그 중 레아는 특히 굳은 얼굴이었는데, 이곳은 자신이 다스리는 페어리족의 땅이기도 했던 것이다. "같이 가!" 걸음이 느린 렌은 안 그래도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끊어질것만 같았는데 잠시 쉴틈도 없이 그들이 자신만 혼자 놔두고 모두 뛰어가 버리자 고함을 지르며 어기적어기적 뒤를 따랐다. 언제나 푸름과 성스러운 빛을 잃지 않던 빛의 숲이 붉은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질렀다. 창공을 삼킬 듯한 화염의 이글거림 위에서 하늘을 가득 메운 가고일 떼가 괴성을 질렸다. 나무들리 풍성하던 비옥한 대지는 점차 질흙으로 변해 갔고, 그 위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좀비와 스켈레톤이 지나갔다. 좀비와 스켈레폰의 발이 대지의 닿기 전에 먼저 빛의 숲을 짓밟은 존재들이 있었다. 마왕의 군대라는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들이었다. 총합 백명은 되어 보이는 그들이 선봉에 서서 빛의 숲을 짓밟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최상봉은 헬하운드들이 맡았다. 헬하운드는 지옥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동물형 몬스터로 인간에게 친숙한 개의 모습이었지만 개보다 훨씬 크고 이빨도 매우 예리했다. 그들은 빛의숲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불을 뿜었다. 지금 빛의 숲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은 바로 이들 헬하운드들이 질러놓은 것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돌진하는 헬하운드 뒤로 데스나이트와 헬나이트가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철거덕, 철거덕......!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한 명이 움직이는 듯 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헬하운드와 데스 나이트, 헬나이트가 지나가고 그 뒤를 따르는 좀비와 스켈레톤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 거구의 덩치에 목이 없는 몬스터인 듀라한은 자신의 목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른 한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든 몬스터였다. 이들은 전생에 나무에 맺힌 것이 많은지 앞으로 걸어나가면서 거대한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나무를 베어 넘겼다. 쿠쿠쿵...... 나무를 무 자르듯 베어 넘기는 듀라한이 백오십여 명, 그 뒤로 이제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수가 좀비와 스켈레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마계의 마왕이 중간계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이라면 드래곤들이 빛의 숲으로 도우러 와야했다. 하지만 중간계의 지킴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들은 언제나 누군가가 피해를 봐야 도우러 오는, 매우 게을러 터진 종족이었다. 우어어어......! 죽은 자들의 진혼곡이 빛의 숲 가득 울려 퍼졌다. 피피핑......! 진혼곡의 연주를 방해하려는 듯 마나를 담은 수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메웠다. 이곳은 그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이곳 말고는 엘프들이 살아갈곳이 없었다. 그것은 페어리족도 마찬가지였지만, 겁이 많은 이들은 빛의 숲 깊숙한 곳에서 잘 나오지 않았기에 지금의 상황을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활은 하늘은 향해 쏘아야 멀리 날아가고 힘을 얻게 되는 병기다. 엘프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누며 팔을 들어 올렸다. 쏴아아아......! 엘프들이 구름이 되어 화살의 소나기를 쏘았고, 그 화살 소나기들은 언데드들에게 날아가 박혔다. 수천 발의 화살은 거희 모두가 좀비와 스켈레톤만을 박살냈을 뿐 진정한 마왕의 군대라 할 수 있는 선봉의 몬스터들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지금은 비상사태인 만큼 엘프들은 눈물을 머금고 빛의 숲의 나무를 베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장벽을 만들어 방어막을 구축했다. 이것은 빛의 숲과 어둠의 숲의 경계를 순찰하는 엘프가 이들 무리를 발견하고 알린 즉시 구축된 것이었다. 그 장벽 너머로 길게 나열한 엘프들에게서 비장감이 감돌았다. 절반 정도는 최후의 방어막이라 할 수 있는 마을의 울타리에 있었지만, 거의 모든 엘프 주병력이 이곳에 나와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성인 엘프 모두 다 엔데드들에게 맞서기 위해 투지를 불태웠다. 최전방 방어책의 대장으로 보이는 엘프가 장벽 위로 올라왔다. 큰 키에 레이피어를 든, 초록 장발의 남자 엘프였다. 그는 단단한 나뭇잎에 마법을 건 초록색 갑옷과 투구를 걸친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다시 장전!" 끼리릭......! 모두의 힘줄이 당겨졌다. 그들의 눈은 이 순간 매의 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팔이 모두 하늘로 향하자 장벽 위에 올라가 있던 엘프가 레이피어를 위로 들어 올렸다. "모두 힘을 아끼지 말고 에로우 샷으로 공격한다!" 팍. 그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자 환하고 노란 불빛을 담은 수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메웠다. 그러나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는 마왕의 군대 중 상급에 속하는 이들답게 피해를 입지 않았고, 헬하운드는 워낙에 민첩해 모두 피해 버렸다.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는 헬하운드들이 불을 뿜으며 엘프들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모두, 우리의 고향이자 생명의 어머니인 빛의 숲을 위해 싸우자!" 타탁! 대장으로 보이는 엘프가 장벽에서 뛰어내리자 장벽이 갈라졌다. 그리고 장벽 너머에서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던 엘프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 맞추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 대부분이 레이피어를 들고 있었지만 간간히 할버트를 든 엘프도 눈에 띄었다. 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자 나무를 쌓아 만든 장벽은 다시 메워졌다. 스윽. 선두에 선 초록 장발의 엘프 대장은 레이피어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화염을 토해 내며 달려오는 헬하운드의 모습이 비쳤다. "모두 돌격!" "와아아아......" 그렇게 엘프들과 언데드 간의 전쟁이 일어냈다. 화르륵......! 백오십 명 가량의 엘프들은 질서 정연하게 일제히 돌격했지만 뜨거운 화염을 토해 내며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헬하운드에 의해 진열은 초반부터 흐트러져 버렸다. 콰직. 화르륵......! 커다란 송곳니가 할버드를 힘차게 휘두르던 한 엘프의 어깨에 박혔다. 육중한 육체를 자랑하는 헬하운드가 어깨를 물며 올라타자 그 엘프는 땅으로 쓰러졌고, 헬하운드는 그대로 불을 뿜어 엘프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콰지직! 그리고 헬하운드는 엘프의 가슴을 물어뜯으며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붉은 피가 대지를 적섰다. 엘프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뛰어난 활솜씨 외에도 정령술과 마법이 있었다. 촤아아악......! 쿠쿠쿵! 물의 정령이 불을 뿜는 헬하운드에게 물을 쏘았고, 땅의 정령이 땅을 가라앉혀 헬하운드의 다리를 묶어놓았다. 푸푹. 다리가 묶인 헬하운드에게 엘프들이 다가가 레이피어를 박아넣거나 할버드로 목을 날려버렸다. 장벽 너머의 엘프들은 명령에 따라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많은 엘프들이 주문을 외웠다. 피피피핑! 쏴아아아......! 스거거걱! 화살이 하늘을 메우고, 바람의 정령이 장벽 너머로 날아드는 가고일을 바람의 칼날로 갈라놓았다. "파이어 볼!" 화르르륵! 뒤에서 주문을 외우던 엘프들이 일제히 시동어를 외치자 주위의 불의 정령들도 불길을 내뿜었다. 콰가가강! 엄청난 불길이 언데드들에게로 쏟아졌다. 마법과 정령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자 언데드들이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고 많은 수가 죽어나갔다. 더불어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도 주춤거렸다. 장벽 안으로 들어가려는 헬하운드와 그들을 막으려는 엘프들간의 싸움은 참혹했다. 많은 수의 엘프들이 숲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화르륵. 콰직. "모두 대열을 갖춰라! 땅의 정령의 계약자들은 더욱 서둘러 헬하운드의 발을 묶어라!" 쿠쿠쿵! "와아아......!" 푸푸푹. 만약 지금 싸움을 하늘에서 본다면? 참혹하고도 장엄하며 잔혹하게 아름다울 것이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들과 엘프들의 싸움...... 장벽 너머로 길게 늘어선 엘프들이 빛의 화살을 쏘았고, 마법에 능통한 엘프들이 그 뒤에서 파괴력이 높은 화염계 마법으로 불의 정령과 공동으로 불꽃을 날렸다. 그리고 마법사와 궁수들을 공격하려는 가고일들을 바람의 정령들이 막았다. 장벽 밖에서 헬하운드와 싸우는 엘프들은 이리저리 피하다 땅의 정령이 헬하운드의 발을 묶으면 그들에게 다가가 숨통을 끊어 놓았다. 그들이 민첩한 헬하운드들을 이리저리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물의 정령 덕분이었다. 화염을 쏘는 헬하운드의 입을 물의 정령이 물을 뿜어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빠르고 커다란 헬하운드의 공격을 모두 막기란 불가능해 적지 않은 수의 엘프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헬하운드의 피와 엘프의 피가 강을 이루고 대지를 적셨고, 빛의 숲은 고통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화염의 불길 속에서 엘프들은 숲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처절한 싸움을 계속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날아오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까아아악......! 거다란 와이번 떼였다. 한데 그들 등 위에는 데스 나이트가 타고 있었다. 두두두......! 그리고 대지를 울리며 달려오는 뼈로 된 말들, 그 위에는 흑색 갑옷을 걸친 거구의 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라 불리는 흑기사들이었다. 이들 흑기사들은 아군인 좀비든 스켈레톤이든 가리지 않고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듀라한과 데스 나이트, 헬나이트는 두 갈래로 갈라져 길을 비켜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마왕의 군대들의 장엄함에 엘프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로 끝없이 펼쳐진 언데드의 바다 끝에서 타오르는 한 줄기 어둠의 불꽃이 비쳤다. 평화롭기만 하던 빛의 숲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언데드들의 발 아래 성스러운 대지가 짓밟혔고, 그들의 손에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빛의 기둥 같은 나무들이 부서져 내렸다. 비옥하던 대지는 몬스터들의 피와 엘프들의 피로 바다를 이루었고 숲의 정령과 많은 요정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사렸다. 죽음의 기사라 불리는 흑기사들은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그들은 땅의 정령이 바닥을 움푹 파이게 만들어놔도 그것을 홀짝 뛰어넘고는 질주를 거침없이 계속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스피어는 엘프의 가슴을 꿰뚫었고 푸드덕거리는 해골 말은 엘프의 몸을 으깨어 버렸다. "크아아악.....!" 여기저기에서 엘프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악.....!"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벽 너머에서 주로 마법과 정령을 부리던 여자 엘프들은 와이번을 탄 데스나이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날카로운 와이번의 이발은 엘프의 몸을 찢어 발겼고 데스 나이트의 본 소드는 엘프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키에에엑! 스거거걱. 바람의 정령이 와이번을 찢어놓으면 그위에 타고 있던 데스 나이트는 바닥에 착지해 눈에 보이는 엘프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지옥이 연출되고 있었다. 키에엑! "실라페!"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와이번을 탄 데스 나이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한 엘프소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쿠하항......! 팟! 그녀와 계약한 바람의 정령 실라페가 날아와 바람의 장벽을 쳤지만 거기에 부딪힌 건 와이번이지 데스나이트가 아니었다. 데스 나이트는 와이번의 등에서 몸을 날려 그녀에게로 날아갔다. 그의 손에 들린, 뼈로 이루어진 본 소드가 번뜩였다. "꺄아악!" 엘프 소녀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데스 나이트를 보고는 급히 몸을 숙였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카카캉......! "괜찮니?"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에 몸을 움크리고 있던 소녀는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타니아님!" 엘프 중 유일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타니아의 검이 달려드는 데스 나이트를 벤 것이었다. 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데스 나이트는 그녀의 마나 소드에 간단하게 베었다. 타니아는 웃으며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안심해. 든든한 지원군을 데려왔으니까" "예?" 싱긋 웃으며 말하는 타니아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흑발의 흑안 두 개의 검... 어제 엘프의 마을로 온 인간 남자였다. 이 인간이 든든한 지원군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곧 이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페어리의 여왕인 레아였다. 그리고 멀리서 달려오는 세리나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렌은 보이지 않았다. 엘프 소녀는 든든한 지원군이라는 말에 세 여인을 가리킨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하늘을 날아오는 엘라임과 레아보다 로얀이 이곳에 더 빨리 도착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럼 한바탕 해볼까나?" 타니아는 웃으며 레이피어를 뽑라 들고는 장벽 너머로 몸을 날렸다. 왠지 즐거워 보이는 그녀였다. 스윽. 엘라임도 허공에 몸을 띄웠다. 그러자 그 주위로 물줄기가 회전하며 그녀를 감쌌다. 엘라임이 타니아 뒤를 따라 장벽 너머로 사라지자 세리나도 실라페를 소환하여 와이번과 맞섰다. 멍하니 그녀들이 활약상을 지켜보는 구출(?)된 엘프 소녀를 뒤로하고 로얀은 아직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물러나 있어라." 실상 레아는 이런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아는 그 말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도 도울래." 레아는 한 가지를 놓고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본 힘을 쓰기로 말이다. 그녀가 본 모습으로 변한다면 그 기운을 읽고 페어리들이 이쪽으로 몰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천군만마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페어리는 치료에 능했고 빛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어 어둠의 종인 엔데드들에게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페어리들이 몰려온다면 자신은 더 이상 로얀을 따라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로얀과 헤어지는 건 싫었지만 빛의 숲이 파괴되고 엘프들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레아는 지체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현신." 화아아앗! 그녀의 몸을 밝은 빛이 감쌌다. 천상의 신라도 강림하는 듯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를 감싼 빛이 점점 걷히고 드러난 모습! "......" 로얀도 놀란 눈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을 등에 달고 햐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 분홍빛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는 어느새 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그녀의 몸에서는 밝은 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순간, 세상이 정지한 듯 모든이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언데드들도 자신의 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그녀가 내뿜는 빛에 무의식적으로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악! 레아가 본 모습으로 돌아간 직후, 숲 속이 들썩거리더니 이곳 저곳에서 빛의 구가 솟아올랐다.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요정들이 밝은 빛을 뿜으며, 눈이 어지러울 만큼 많은 수가 나타났다. 후우웅...... 레아는 본 모습으로 돌아가자마자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다섯 개의 빛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여, 왕, 님!" 그들은 페어리들의 다섯 장로로 여왕인 레아를 바로 밑에서 받드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가출(?)을 하는 레아 때문에 언제나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알았어, 알았어 이번싸움이 끝나면 군말하지 않고 돌아갈게. 그러니까... 여왕으로써 명령한다. 모두 엘프를 도와 빛의 숲을 지켜라." "순순히 돌아오신다고 하니 이번만은 넘어가겠습니다. 에헴, 모두 여왕님의 명을 받들어라!" 다섯 장로들은 순간적으로 개방된 레아의 힘을 느끼고는 혹여라도 레아가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서 전 페어리를 이끌고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빛의 숲을 침범한 언데드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레아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빛의 숲을 위해 마땅히 싸워야 했다. 아무튼 레아의 명령에 페어리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다친 엘프 옆에 붙어서 그들을 치료하는가 하면 허공에서 빛의 화살을 만들어내 언데드들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얀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레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네 본 모습이냐?" "응." "아니, 아니! 인간이 감히 여왕님께!" 다섯 엘프 장로는 호들갑을 떨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자신들의 여왕에게 반말을 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얀은 친구니까 괜찮아." "세, 세상에! 친구라니요!" "시끄러워! 계속 그러면 또 여행갈거야!" "여행이 가출입니다." 그 뒤로 그들의 언쟁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자 로얀은 시끄러워 그 자리를 뜨려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어둠의 빛을 쏘는 녀석을 해치워. 그러면 이 녀석들이 모두 마계로 돌아갈 거야!" "......" 파팟! 로얀이 몸을 날렸다. 페어리들이 쏘는 백광의 빛의 화살과 엘프들이 쏘는 노란빛을 띠는 마법과 화살들을 뒤로하고 그는 장벽을 넘었다. 피피피핑! 쿠쿠쿠쿵......! 그의 눈에 엘라임이 헬하운드를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들의 뜨거운 화염은 엘라임에겐 간지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 주위에서 생겨난 물줄기는 거대한 용처럼 헬하운드에게로 날아가 그들을 갈아버렸다. "꺄하하핫!" 콰가가강......! 타니아는 흑기사들을 신나게 베며 그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한 술 더 떠 흑기사의 해골 말을 빼앗아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활약에 힘을 얻은 엘프들은 모두 흑기사와 남은 헬하운드는 다른 엘프들에게 맡기고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로얀은 그들의 전투를 바라보다 멀리 보이는 검은 빛은 빛을 바라보았다. "다크로드." [어떠한 명이라도 받들겠습니다, 왕이시여!] 그의 말에 그림자 속에서 다크로드가 나오는가 싶더니 로얀의 뒤로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들이 병풍처럼 그를 둘러싼 채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의 등장에 몇몇 엘프가 활을 쏘다가, 또는 할버드를 휘두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스릉. 로얀은 이번에도 에리오네를 뽑았다. 역시 어둠의 종들을 해치우는 데에는 성검인 에리오네가 월등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의 눈동자는 멀리 보이는 어둠의 빛 쪽으로 향해 있었다. "너희들은 길을 뚫는다. 그리고 저곳까지 단숨에 돌파한다." [예! 명령을 받듭니다.] 스으윽. 힘찬 대답과 동시에 백 명의 어둠의 중급 정령 데스는 사신의 낫이라 불리는 시클을 번뜩이며 날아갔다. 그리고 정면에서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들에게 그것을 휘둘렀다. [죽음의 반월.] 슈가가각! 바람의 칼날과 거의 흡사한 날카로운 흑색 바람이 데스 나이트와 헬나이트들 사이를 누볐다. 그것이 바람의 칼날과 다른 점이라면 수십 발이 동시에 나간다는 것과 색깔이 흑색이라는 것이었다. 우어어어......! 철거덕, 철거덕! 그들의 공격에 한순간 길이 뚫리자 로얀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이 언데드 사이로 들어간 직후, 순식간에 그가 들어간 입구가 다른 언데드들로 가득 채워졌다. 콰가가강......! 천둥 소리가 흘렀다. 후둑, 후두둑......! "비......" 어둠의 정령들과 듀라한의 싸움 속으로 뛰어들었던 로얀은 갑자기 떨어져 내리는 비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부를 통해 비의 시원함이 느껴졌고 코를 통해 비의 싱그러운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하늘은 밤처럼 어두웠다. 하늘 가득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그 구름들 속에서 빗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고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상으로 하강했다. 쏴아아아......! 우어어어......! 언데드들이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이 좋은지 괴성을 질렀다. 웨어 울프들이 보름달을 보고 더욱 강하고 광포해지는 것처럼 이들은 검은 하늘에서 힘을 얻었다. 강한힘을 느끼며 광분하는 듀라한을 보며 로얀을 에리오네를 빙글 돌리며 걸어갔다. "나도 비로 인해 힘이 나는군. 죽어라." 번뜩! 쿠쿠쿵. 쾌속한 움직임! 어디서 번개가 친 것일까? 뭔가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구의 듀라한 몸이 갈라져 있었다. 어둠 덕분에 듀라한의 힘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소멸이라는 그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다크로드, 좀더 빨리 전진한다." [예, 왕이시여!] 슈가가각! 로얀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의 정령들이 앞을 가로막은 듀라한들에게 달려들었다. [죽음의 반월.] 수거거걱! 쿠쿠쿵......! 쌓아올렸던 모래가 무너져 내리듯 듀라한들이 몸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둠이 정령들이 만들어주는 길을 걸으며 로얀은 종종 자신에게 도끼질을 하는 듀라한을 벌레 죽이듯 베어 넘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듀라한 무리까지 뚫자 로얀과 데스 앞을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많은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보였지만 그들은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로얀과 데스의 힘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로얀과 어둠의 정령은 그렇게 언데드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콰가가강! 우어어어......! 달그닥, 달그닥! 스거거걱. 느릿느릿 다가오는 좀비도 달그닥거리며 다가오는 스켈레톤도 로얀의 성검 에리오네에 녹아내리거나 데스의 시클에 난도질당했다. 콰가가강! 로얀의 눈에 점점 검은 빛이 가까워졌다. 그 거대한 빛 쪽으로 다가갈수록 온몸이 찌릿찌릿해져 오는 것을 그는 느꼈다. 드래곤의 기운을 능가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대한 기운이었다. 언데들로 바다를 이루고 산을 이루던 길을 로얀과 어둠의 정령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에는 언데드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어둠의 빛을 뿌려 언데드들을 조종하는 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 콰가강......! [왕이시여, 앞의 존재는 무척이나 위험한 자입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다크로드는 자신의 왕의 안전을 위해 충고를 했다. 하나, 그런다고 로얀이 왔던 길을 되돌아갈 리는 없었다. "전진한다. 너희는 나를 믿고 따르라." [예......] 콰가가강! 로얀은 더욱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언데드들이 사라지며 그의 시야로 서서히 어둠의 빛을 뿜는 존재가 보였다. 이제 그의 시야를 막는 언데드는 좀비 몇 마리와 스켈레톤 몇 마리를 더해 총합 열 마리밖에 되지 않았다. "죽음의 반월!" 이제 곧 언데드들을 조종하는 존재들 만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존재감이 커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로얀이 휘두른 죽음의 반월에 의해 열 명의 언데드가 단박에 소멸되고, 드디어 적의 대장이자 이 일의 원인 제공자인 이를 볼 수 있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여기 있는 모든 언데드들의 주인! 흠칫! 그 존재에게로 다가간 로얀의 몸이 떨렸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여자였다. 윤기 흐르는 긴 갈색머리를 드리우고, 백옥 같은 피부에 붉은 입술은 어찌 보면 아픈 환자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한데 로얀은 그 여인을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크크크...이거 놀랍군. 인간이 여기까지 오다니."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쏴아아아......! 로얀과 여인은 이미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여인은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원래는 푸른빛이었던 듯하지만 지금은 흑색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의 존재에게 몸을 빼앗긴 것 같습니다.] 다크로드가 묻지도 않았는데 친철하게 얘기해 주었다. 하나, 로얀에게 그런 것이 중요치 않았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잊었던 기억이 순간 머리속에 그려졌다. 오래 전 스스로 가슴속에 봉인해 둔 이가 전해주던 느낌, 그 사람의 향기...... 잊을 수 없는 향기를 가진사람, 증오했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원망했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 손에 쥔 에리오네가 가늘게 떨렸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로얀의 왼손이 말아 쥐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어머니......" 17장 (외전) 친구 와아아아......! "크으윽!" 정말 짜증이 솟구치는 아침을 맞이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전장의 함성소리는 이젠 환청이 되어 이렇게 매일 아침 나의 단잠을 깨우는 것이었다. 이곳은 가을의 대륙에 있는 스크라이언이라는 대평원이었다. 넓게 펼쳐져 있는 푸른 풀 밭은 지금쯤 붉게 변해 피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따뜻한 집도 없고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가족도 없는, 오로지 전장의 함성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내가 이곳 전쟁터에 있는 것은 나의 직업이 용병이기 때문이다. 나라 사이의 전쟁의 승패는 고용한 용병의 질(?)과 수가 판가름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쪽 나라건 고용된 용병들에게는 애국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대가를 위해 검을 휘두르고 피를 내줄 뿐이었다. 허험! 하지만 난 이들 냄새나는 용병들과는 다르다. 아주아주 멋진 명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이얀 폰 크라이센! 이것이 나의 이름이었다. 척보아도 정말 끝내주는 이름이 아닌가? 게다가 이름에 성이 붙어 있다는 것은 귀족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가장 높다는 황족이였다. 나의 나라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잔혹한 대륙, 여름의 대륙에 있었다. 그런 고귀한 신분인 내가 여기 있느냐 하면...... "도련님!" 이런! 너구리 자식이 왔다. 아! 그리고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내 말투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흠흠! 한 달 동안이나 이 빌어멀을 전쟁터에서 몸을 굴리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환청에 잠을 깬 나에게로 그 너구리가 다가왔다. 커다란 초록색 로브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상당히 젊은, 내 나라에 속해 있는 마법사였다. 한마디로 나의 쫄따구였다. 아니, 아버지의 부하이자 나를 감시하는 감시자였다. "에휴... 알았어, 알았어!" 툭툭. 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초록색 로브를 입은 그를 지나쳐 갔다. 그는 그 지옥 같은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여름의 대륙에 있는 몰딘 왕국의 황태자인 나를 정신 나간 아버지가 어느 날 이곳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뭐, 세상 사는 법을 배우고 오라나?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와 함께 딸려온 건 지금 나의 뒤를 다라오고 있는 초록 로브의 마법사와 기사 한 명, 그리고 서클은 낮지만 마법사이자 학자로 이름 높은 영감탱이뿐이었다. 물론 이들의 신분도 여기선 나와 같은 용병이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은 틈만 나면 나에게 정치와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영감탱이가 있는 곳이었다. "여어, 레닌! 누가 자넬 찾더군." 갑자기 머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싸, 이런 횡제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는 초록 로브의 마법사 레닌을 찾는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으음... 알겠어." 레닌은 날 힐끔 바라보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련님, 오늘도 땡땡이를 친다면 저도 더 이상은 참지 않겠습니다." "아아 염려 마." 그럼, 내가 잘 놀아줄 테니까! 레닌은 이제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의 입가엔 웃음꽃이 피었다. 매일 영감탱이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기사 녀석에게서 검술을 배우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 팔팔한 나이에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냔 말이다? 난 미래의 왕이 될 몸이란 말이다! 학문이야 왕이 되고 나서 천천히 익혀나가면 되는 것이고 검술이야 깔린 게 기사들인데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이곳 전쟁터에서만 봐도 나는 그냥 흉내만 내고 나의 부하들이 알아서 나를 보호해 주었다. "하암......" 사람은 그저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끄응... 그나저나 이곳에서 뭘 해야 잘 놀았다고 칭찬받을까? 냄새나는 용병들만 모여 있는 이 전쟁터에서. 타박타박...... 용병들로 거칠어진 대지를 한참 돌아디던 나는 실망감으로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사는 게 다 재미가 없어질 정도였다. "크윽!" 후웅......! 그러다 내 귀에 누군가의 신음소리와 함께 무거운 뭔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호기심 많은 나이의 나는 그쪽으로 발길을 돌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후웅, 후웅! "응?" 나의 눈에 비친 것은 이제 14살 정도로,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나야 레닌과 나의 부하들이 나를 포함해 고용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다고 했기에 나는 멀리서 소년의 모습을 구경했다. "크압!" 등만 보이고 잇던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양손에 들려 있는 롱 소드를 휘둘렀다. 14살의 소년이 들기엔 무거운 롱소드를 두 자루씩이나 들고 휘두른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다름이었다. "......!" 하지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에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두 눈... 덕분에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려 있었다. 후웅. 스핏. 맹인 소년은 검을 들고 미친 듯이 휘둘렸고, 종종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소년은 점점 혈인이 되어갔다. 그러나 붉은 피가 온몸을 적시도록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한 번뿐인 인생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죽자라는 나의 좌우명처럼 편하게 살면 될 것이 아닌가? 한데 저 소년은 어째서 저렇게 처절하게 휘두르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뚝뚝. 털썩!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피로 목욕을 한 그 작은 소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소년의 작은 두 손은 여전히 롱 소드의 그립을 잡고 있었다. "얀......!" 멀리서 레닌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눈이 없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레닌은 다른 용병들이 근처에 있을 경우에만 나의 애칭을 불렀는데, 마침 이곳은 용병들의 막사와 가까운 곳이었던 것이다. 타타탁. 턱! "헉헉... 도, 련, 님!"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레닌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저녀석을 치료해 줘." "네?" 왠지 그러고 싶었다. 항상 내 마음대로 하고 살았던 나였다. 하지만 나와는 정반대로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나와 동갑으로 보이는 소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눈도 없으면서 왜 이런 전쟁터에 나온 것인지 알고 싶었다. 레닌은 쓰러진 소년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 나의 말대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마법사가 쓸 수 있는 힐링이라는 치료마법이었다. 그리고 내 앞의 누워 있는 눈이 없는 소년도 함께 감싸 안았다. "크윽......" 정신을 잃었던 소년이 눈을 떴다. 그의 손엔 여전히 두 검이 쥐여 있었다. "여어, 일어났냐?" 흠칫. "넌 누구지?" 하! 은인도 몰라보고 녀석은 일어나자마자 검을 꽉 움켜쥐며 나를 바라보았다. 소리로 내가 있는 곳을 발견한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눈이 없으니 그냥 고개를 돌렸다고 해야하나? "걱정하지 마, 적은 아니니까. 그보다 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눈이 없으면서 왜 전쟁터로 온 거지?" 궁금한 것이 있으며 참지 못하는 나였기에 이제 막 일어난 소년에게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스윽. "나에게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터벅터벅...... 눈이 없는 작은 소년은 전혀 아이 같지 않은 소리를 내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너덜너덜한 소년의 옷 사이로 보이는 살결은 언뜻 보아도 칼자국으로 정신이 없었다. '살아가는 이유? 내가 해야 할 일? 나에겐 뭐가 있지......?' "자, 잠깐!" "......" "난 얀이라고 해! 우리 친구하자" "전쟁터에서 친구는 짐일 뿐이다. 나의 이름은 시엔... 네가 이름을 말해 주었기에 말해주는 것뿐이다." 터벅터벅...... 여린 소년의 발걸음 소리가 나의 귓가를 울렸다. 이것이 시엔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내 인생의 자우명은 바뀌었고, 그날 이후 옆 막사에 묵고 있던, 용병세계에서 유명한 단검술의 고수로부터 단검술을 배웠다. 이것이 기사의 검보다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검술의 고수라는 그 사람은 전쟁터에서 꾀만 부리던 날 알고 있었는데, 덕분에 그를 설득하는 것은 무진장 힘들었다. 그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훗날 나의 스승이 될 사람이 시키는 대로 뭐든 했다. 물론 나의 부하들이 손을 걷어붙이고 결사 반대했고, 내 예비(?) 스승과 대판 싸움을 할 뻔도 했지만 난 결국 내가 원하던 대로 단검술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저 눈이 없는 소년, 시엔처럼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기 위해 나는 살 것이다. 지금 단검술을 익히고 전쟁터를 누비고 바람은 맞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즐겁다. 내게 살아가는 이유를 알려주고, 나의 검을 찾아준 내 친구 시엔에게 감사한다. 나에게 많은 것을 준 시엔에게 뭔가를 보답하고 싶었던 나는 그와 여동생을 편지로 이어주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잇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녀석과 나의 사이는 더 가까워졌고,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끈끈한 뭔가로 이어져있는 친구가 되었다.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처음 단검술을 배우기 위해 단검을 잡았을 때 들었던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과거 바보 같던 나에게도 살아가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나는 지금 몰딘 왕국의 왕좌에 앉아 언젠가 나에게 드래곤의 몸뚱어리를 선물로 가져오겠다던, 이제는 다크로얀이라는 불리는 나의 친구 시엔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