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의 이름은 시엔. 이름에 성이 없는 평민에 신을 믿지 않는 인간. 나는 나에게 빛을 내려주지 않는 신을 원망했다. 태어날 때부터 나에겐 눈이라는 것이 없었다. 전쟁터의 기억을 가진 삭막한 대지 위를 굴러다니는 해골처럼 나의 눈은 텅비어 있었다. 그리고 항상 어둠 속에 갇혀 지내던 나는 고작 열세 살의 나이에 용병일을 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여동생 레이나를 위해서였다. 열세 살에 나이에 용병이 되기 위해 나는 인간이 아닌 벌레가 되어야 했다. 벌레처럼 이 빌어먹을 세상을 살아가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 생각했다. 나의 하나뿐인 혈육이자 동생인 레이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워 앞을 보지 못하는 나에게 누나처럼 모든 걸 가르쳐주고 이끌어주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앞을 보지 못하는 내가 죽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것도 모두가 레이나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슬퍼할 것 같아서,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버려진 우리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지 의식을 차렸을 때에는 팔레인이라는 시골 마을에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빠진 우리를 구해 준 사람은 바로 그 마을의 대장장이 처크 할아버지였다. 그분은 우릴 친자식처럼 돌봐주셨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나에게 부모님의 얼굴이란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맑아지게 하는 환한 빛이 비치는 곳에서 살았다는 것과 나의 이름과 나이, 레이나의 이름과 나이는 기억했다. 그 당시 세 살이었던 레이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처크 할아버지에게서 검 두 자루를 받은 나는 용병이 되기 위해 도시로 향하는 상단 일행에 끼어 마을을 떠났다. 레이나가 지독한 병에 걸려 그녀의 약값을 마련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후 어렵게 용병이 된 나는 미친 듯이 싸웠다. 레이나를 생각하며 난 어떤 일이든 했다. 용병일로 번 돈은 얼마간의 쓸 돈을 제외하고는 모두 레이나에게 보내주었다. 간간이 오는 레이나의 편지가 나의 모든 힘의 원천이었다. 눈이 없는 나에게 레이나가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 나에게 친구라는 것이 생겼을 때부터였다. 바람 같은 그 녀석이 나도 모르는 새에 레이나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도착하는 편지를 나에게 읽어주었다. 그렇게 피의 전장에서 십 년...... 나의 얼굴 여기저기에는 줄이 그어져 있었고 전신에는 상처가 그림처럼 새겨져 있었다. 손끝으로 더듬어 느껴지는 몸 곳곳에 세겨진 홈이 나의 십 년간의 전장에서의 생활을 알려주었다. 나의 육체는 피에 찌들어 있었고 나의 영혼은 강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십 년간의 용병생활을 청선하고 팔레인으로 향했다. 편지를 통해 레이나의 병이 다 나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용병일을 할 이유가 없어졌기에 나는 당장에 용병일을 그만두고 레이나가 있는 팔레인으로 향했다. 카엔이라는 젊은 마법사에 의해 병이 나았다는 레이나는 그 마법사와 연인이 되었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어느세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행복감이 깃든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팔레인으로 돌아가는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변화는 언제나 외로웠던 내 옆에 지금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리아라는 엘프 여인이었다. 같은 용병이었던 그녀와 나는 많은 일을 함께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외모를 모르지만 엘프인 그녀는 아마도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녀는 지난 십 년 동안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나의추악한 외모를 보고도 나에게 다가와 준 유일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이 순간만큼은 신에게 감사하고 싶었고, 눈을 버리고 태어난 건 모두 이리아를 만나기 위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난 레이나의 말투에서 그녀도 이젠 성숙한 여인이 되었음을 느꼇다. 너무 기쁜 나머지 습한 동굴 같은 나의 눈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려내렸다. 내 옆에 이리아가 있듯 레이나 옆에도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카엔이라는 남자로 대륙에서 흔치 않은 마법사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 들으며 대화를 해보니 좋은 사람 같았다. 그날 우리 네 사람은 밤세도록 술을 마셨고 나의 앞에는 즐거운 일만 가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신은 끝내 나를 버렸다. 이리아가 실수로 내뱉은 레이나의 연인인 카엔의 정체에 대한 것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그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를 알아본 이리아 역시 드래곤이었다. 이리아는 카엔에게 유희를 방해해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리아 또한 나에게 그동안 즐거웠다고 얘기하고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드래곤들 사이에는 다른 드래곤의 유희를 방해한 경우 자신도 유희를 포기해야 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난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날 카엔이라는 이가 밖으로 나가면서 내뱉은 말이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에이! 유희를 망쳐버렸잖아! 젠장! 지우고 다시 시작해야겠군."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그는 곧 드래곤의 본체로 현신했고, 우리 마을에 브레스라는 것이 떨어졌다. 드래곤은 나와 레이나를 가지고 논 것이다. 단지 유희를 즐기기 위한 장난감으로 말이다. 난 어떻게 돼도 괜찮았다. 그러나 레이나만은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비정했다. 이리아의 단 한 마디로 인해 행복이 깨어지고 작은 마을이었던 이 팔레인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굉음과 함께 난 내 몸을 덮쳐오는 뭔가를 느꼈다. 그리고......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나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레이나에 대한 생각만이 머리속에 가득했다. 이리아의 배신도, 카엔에 대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레이나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신을 만난다면 나의 운명에 대해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죽음에 이른 나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들려왔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까? 그것은 머리속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이상한 음성이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한 카오스에게서 버림받은 존재. 천족도, 마족도, 어떠한 것에도 속하지 않는 정령왕이라는 존재다.] "......." [한 차원계를 멸망시킨 죄로 카오스에 의해 네오스의 어둠 속에 봉인된 나는 이제 쉬고 싶다. 나는 지쳤고 내가 쉬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내 존재 자체를 지우는 것이다. 나에게 미련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 그대 인간이여, 나의 존재를 그대가 모두 받아주었으면 한다.] "무, 무슨 말이지?" [나의 모든 힘과 기억을 그대에게 주고자 한다. 그러면 난 소멸하겠지. 그대는 받아들이겠는가?] "큭큭... 모든 것에게 버림받은 나에게 왜 그런 제안을 하지? 왜 이제 와서 이러냔 말이다!" 죽음에 이르러 다가온 이상한 존재의 말. 레이나와 나에게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다가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최소한 레이나만은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이곳은 어둠의 세계. 카오스를 제외한 다른 존재들은 내가 봉인된 이 어둠속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하나, 그대는 태어날 때부터 어둠속에서 살아왔고, 죽음에 이르러 그 어둠이 극대화되어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그의 말에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어찌 되었던 간에 나에겐 다시 한번 살아날 수 있는 기회와 엄청난 힘이 더불어 주어질 것이다. 모든 정령들을 다스리는 정령왕의 힘이니 말이다. 복수라... 아무리 정령왕의 힘이라도 힘들겠지. 정령왕과 계약해서 그들을 부를 수 있는 드래곤이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되니까. 뭐, 이 정령왕은 차원계라는 것을 붕괴시켰다고는 하나 그때의난 차원계가 뭔지도 몰랐다. 나는 그 존재를 향해 물었다. "내가 너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나는 하늘을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나를 내버려두고 레이나를 데려간 하늘이라는 걸 보고 싶다." 정말 하늘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슬펐다. "승낙한다." [그대는 나의 뒤를 이어 버림받은 정령왕 다크로얀이 될 것이다.] 고오오오.....! 그리고 뻥 뚫려 있는 나의 눈으로 뭔가가 빨려들어 옴을 느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했고, 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정신을 잃었다. "크아아아악!" 이날의 선택으로 인해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는 그저 하늘을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말이다. 1장 새로운 삶의 시작 수백 개의 차원계 중 네오스라는 곳이 존재했다. 그 세계는 거대한 땅덩어리 하나와 그것을 둘러싼 바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언제부터, 그리고 누구에게부터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그 큰 땅덩어리를 사람들은 모두 칸 대륙이라 불렀다. 칸 대륙은 대륙의 동서를 관통하는 드래곤 산맥으로 인해 두개로 나뉘고, 기후에 따라 또 다시 분리되었다. 즉, 드래곤 산맥 위쪽에 있는 대륙을 동서로 나눠 동쪽은 여름의 대륙, 서쪽은 봄의 대륙이라 부르고 산맥 아래쪽에있는 대륙 또한 각각의 대륙은 1년 내내 계절이 변하지 않고 각대륙이 가진 이름과 같은 계절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드래곤 산맥. 칸 대륙을 둘로 나누는 기준이자 거대한 산인 드래곤 산맥은 말 그대로 드래곤들이 사는 곳이였다. 도마뱀을 확대해 놓은 모습이라고 하는 드래곤들이 사는 드래곤 산맥은 사계절을 모두 지닌 신비한 곳이였다. 드래곤들이 사는 곳이기에 그곳에 가까히 갈 수는 없었지만 워낙에 많은 자원과 여러 가지 농사를 하기에 좋은 기후인 드래곤 산맥주위에는 거대한 도시가 많이 있었고, 심지어는 한 나라의 수도가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고 드래곤 산맥 위에는 거대한 땅덩어리가 허공에 떠 있었는데그곳은 드래곤들이 회의를 하는 곳이자 마계, 천계, 정령계로 갈 수있는 유일한 통로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현 칸 대륙의 정세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영토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혼란기였다. 봄의 대륙을 제외한 세 개의 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터져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 갔다. 지금은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암흑의 시대인 것이다. 가을의 대륙에 있는 팔란 왕국의 작은 시골 도시인 팔레인. 지금은 지도상에서 사라진 도시... 팔레인이 있던 곳은 황량하기만 했다. 그 모든 석이 드래곤의 브레스로 인한 것이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들... 신, 드래곤, 정령왕등등 많은 존재들이 인간계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신이나 마왕같이 인간계에 있기에는 그 힘이 너무 큰 존재들은 인간계에서는 그 힘이 반감되었다. 또한 창조주인 주신을 비롯한 최상급 신 네명은 인간계로 내려올 수조차 없었다. 자칫하면 차원계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팔란왕국은 작은 시골 도시가 사라진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래곤이 작은 마을 하나만 부수고 그친 것을 다행이라 여겻다. 이제 팔레인이라는 지명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대지가 되어버린 팔레인에는 혹 드래곤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요 근래 사람의 그림자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어두운 밤. 하늘 위에 뜬 두개의 달이 두 개의 눈동자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터벅! 팔레인이 있던 곳으로 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황량한 대지가 되었지만 팔레인의 입구를 알리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반쯤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커다란 나무가 드래곤의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였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쓸고 간 팔레인 마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난 것은 매우 젊어 보이는 사내였다. 마족이 기운이 젼혀 느껴지지 않는 그가 마족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의 그림자가 나무를 지나 입구에 드리워웠다. "다녀왔어... 레이나......" 남자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나라는 이름을 너무도 슬프게 부르는 이는 시엔이었다. 이제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었지만. 터벅터벅...... '여기서 큰 발짝으로 백 보.' 시엔...아니, 로얀은 마음속으로 한 발, 한 발 숫자를 세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많은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170 정도의 작은 키가 190에 육박했고, 원래 은발이었던 그의 머리카락은 흑색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게다가 훤히 뚫려 있었던 눈에는 검은색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눈동자가 있었다. "백 ......" 마을 입구에서 정면으로 백 보, 그리고 오른쪽으로 일곱발짝... 레이나가 살고 있었던 처크 할아버지의 대장간이 있던 위치였다. 역시나 대장간이 있던곳은 너무도 황량하기만 했다. 짖궂은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 대지 위에 앉아 있던 흙먼지를 내쫓았다. "레이나... 오빠가 돌아왔어. 동생 얼굴도 그릴 줄 모르는 나쁜 오빠가 돌아왔어." 휘오오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숨막히는 침묵이 주변을 맴돌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리게 만드는 목소리로 먼저 간 동생을 부르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그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로얀은 허리를 숙여 바닥의 흙을 한 줌 쥐었다.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쳐자 손에 있던 흙먼지가 바람에 휘날려 사라져 갔다. "......" 흙먼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나무를 엮어 만든 커다란 십자가 두 개와 커다란 나무작대기 하나가 바닥에 꽂혀 있는것이 보였다. 터벅터벅...... 로얀은 뭔가에 홀린 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세 개의 흙더미에 각각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한 군데에는 그저 작대기 하나만 꽂혀 있었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무덤임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세 개의 무덤 앞에는 비석처럼 보이는 나무판자가 바닥에 꽂혀 있었다. 나의절친한 친구 시엔과 그의 가족이 여기 잠들다. 그의 친구 얀이. 추신: 넌 신을 싫어했으니까 작대기 하나로 십자가를 대신했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얀... 단도술의 귀재이자 은빛 여우 얀이라는 이름으로 용병세계에서 유명한 그가 바로 자신의 옆에서 레이나의 편지를 읽어준 사람이였다. 얌체같이 읽어줄 때마다 얼마간의 돈을 요구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털썩! 로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대지를 두드렸지만 머리속을 가득 메운 슬픔 때문인지 고통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스윽. 그는 손을 들어 세 개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을 쓰다듬었다. 자신은 겉으로는 얀을 친구라 인정하지 않았지만 얀은 언제나 웃으면서 그를 친구라 불렀다. 얀은 정말 시원시원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비석을 쓰다듬던 그의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널 믿어도 될까......?" 그는 두려웠다. 얀도 만약 자기를 속인,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로얀의 중얼거림에 하늘이 화답이라도 하는 듯 어느새 밤이 지나고 타오르는 태양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로얀은 떠오르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가득 태양이 담겼다. 드래곤과 대등하거나 더 높은 존재라면 몰라도 평범한 생명체들은 태양을 정면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게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얀의 육체는 전대 다크로얀의 힘을 받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눈동자만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감각은 극도로 발달했고, 이전에는 기억할 수 없었던 다섯 살 이전의 기억도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로얀은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르륵! 태양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것일까? 그의 두 눈에서는 굵은 물줄기가 얼굴 선을 타고 흘러 내렸다. 로얀은 떨리는 손을 그 물줄기에 가져다 댔다. 흙을 만지는라 메말랐던 손바닥이 물줄기가 타고 들어오자 환하게 빛났다. "이게 눈물인가?" 그가 말을 하는 순간 태양은 원래의 둥근 모습을 다 보이려하고 있었다. "레이나... 오빠도 이제 해를 볼 수 있어. 오빠도 이제 투명한 눈물을 볼 수 있어." 주르륵! "하지만 오늘만 너를 위해 눈물을 흘릴게. 너무 야속하다고 생각하지 마. 그들을 죽일 때까지만이니까......" 솟아오른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의 고개도 하늘을 향했고, 그의 외침도 하늘을 뚫을 듯 허공을 갈랐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황량한 마을 안에서 그의 영혼은 괴로워했다. "큭, 으아아아아......!" [너는 다크로얀의 이름을 받았으나 정령왕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너의 힘을 나누어 묶어두었고 너에게 네 개의 목숨을 주었다. 목숨이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봉인이 풀릴 것이고 너는 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봉인이 풀리는 순간 너는 진정한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 될것이다.] 로얀은 팔레인을 떠나 말을 타고 3일을 꼬박 달려야 도달하는 도시인 그란티로 향하고 있었다. 무한한 수명을 얻은 그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도 드래곤이기에 단명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다시 살아나 복수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량하게 변한 팔레인을 보는 순간 레이나의 억울한 죽음이 가슴 가득 차 올랐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또 한번 레이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그린티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매우 느렸다. 변화된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대 다크로얀의 기억과 힘을 모두 물려받은 로얀은 그 외에도 전대 다크로얀이 미처 말하지 못한 정보들이 머리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데 이것은 로얀이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할 때마다 알아서 머리속에서 울러퍼졌다. 정말 신기한 기능이었다. 단점이라면 한 번 들었던 것은 똑같은 의문을 가져도 다시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로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 살이 하나 없는 새하얀 손... 손이 변해 있었다. 겉보기에는 훨씬 유약해진 듯하지만 온몸에서 느껴지는 힘이 과거 용병일 때의 상급 검사였던데 비해 너무도 강해져 있었다. 로얀이 느껴지기에 지금 자신의 실력은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중급의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와 그냥 검사와의 실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가장 구분되는 것이 소드 마스터는 검날에 기를 덧씌우는 오러 블러이드를 쓸 수 있다는 것과 평범한 사람들과는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인한 육체는 바디 체인지라는 것을 겪게 되면서 얻게 된다. 바디 체인지란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피부가 벗겨지고 뼈와 육체가 재구성되는 것을 말했다. 이 육체는 웬만한 독도 통하지 않았고 피부도 질긴 가죽 같은 단단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린티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로얀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 소드 마스터의 힘을 가지고 있었고 바디체인지를 겪었다는 증거가 너무도 확실했다. 하지만 그의 옷은 바디 체인지를 겪기 전과 달라진것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너무도 이상했다. 바디 체인지를 겪으면 입고 있던 옷이 엄청난 열기에 모두 재로 변하기 때문이다. 정말 보물같은 옷이 아니라면 분명 재가 되었어야 했으나 그의 옷은 멀쩡했다. 참고로 그의 옷은 가죽을 이어 만든 흔하디 흔한 여행복이었다. 가죽으로 기워 만든 싸구려 하드레어에 가죽 신발... 그 어딜 봐도 신기한 마법무구라고는 생각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또한 처크 할아버지가 주었던 롱 소드 두 자루도 그대로 허리에 매여 있었다. 십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깨끗이 손질했기에 아직도 광택이 났다. 검은 쇠로 만들었으니 재가 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이해가 되었지만 옷은 도져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옷이 타지 않은 이유를 머리속으로 생각해 봐도 전대 다크로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혼자 궁리를 해봐야 답이 나올 리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로얀은 전대의 다크로얀의 말대로 자신의 몸에 힘이 봉인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에 네 번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죽을 때마다 강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하던 로얀은 그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머리속에서 들려오는 전대 다크로얀의 말 때문이었다. [한 번의 목숨을 잃을 때마다 보다 강한 힘을 얻겠지만, 너는 그 대신 다른 하나를 잃어야 할 것이다. 또한 네 번의 목숨을 다하면 너는 큰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내가 너의 힘을 묶어서 봉인해 둔 것은 나와 같은 절차를 밟게하지 않기 위함이었다.힘을 천천히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네 번째 죽음을 겪은 뒤에 찾아오는 시련을 이기지 못한다면 너는 나와 같은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 네오스라는 차원계는 사라질 것이다.] 로얀은 고개를 저으며 처음 자신이 했던 생각을 지웠다. 만약에 레이나에 관한 기억을 잃는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끔직한 일이었다. 로얀은 전대의 다크로얀이 말한, 차원계를 붕괴시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전대 다크로얀의 지식과 기억을 종합해 보았다. 한데 그러고 나서 보니 전대 다크로얀이 행한 죄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한 차원계를 붕괴시킨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없앴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문득 어떤 두려움이 일었다. 도대체 다크로얀이라는 정령왕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엇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타탓! 이제 자신의 대한 생각이 대충 정리된 그는 힘차게 발을 굴렀다. 그의 발이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달리는 말보다 빠른 움직임이었다. 로얀이 있는 가을의 대륙은 몬스터가 잘 출연하지 않는 대륙이었기에 그의 발길을 잡는 것은 없었다. 로얀은 도착한 그란티는 도시라는 명칭이 붙은 마을답게 팔레인과는 달리 거대했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로얀은 성문을 향했다. 그리고 문앞에서 검문을 하는 경비병에게 용병패를 보여주고 무사히 통과한 로얀은 우선 옷가게로 향했다. 5실버가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칸 대륙의 화폐 단위는 100코버에 1실버이고, 100실버에 1골드, 100골드에 1레보였다. 1실버면 4인가족의 평민 한 가구가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가 제일 처음 의류점으로 간 것은 바디 체인지를 하면서 키가 커지고 덩치도 불었기에 원래 입고 있던 옷이 꽉 끼어서였다. 그는 간편한 여행복 옷을 몇벌 사고는 의류점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여관을 찾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다 '풀잎'이라는 여관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로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육체는 피곤하지 않았지만 그의 영혼이 피곤했기에 잠이라는 이름의 휴식이 필요했다. 다음날, 로얀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용병일 때의 생활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렇게도 했지만 그는 오늘 갈 곳이 있었다. 바로 용별길드였다. 마법사 길드도 컸지만 역시 가장 거대한 조직은 용병길드였다. 용병길드는 어느 나라를 가도 있었고, 그들은 서로 간의 연략을 주고받고 있었다. 용병길드에는 용병왕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그는 칸 대륙의 세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칸 대륙에 있는 검사들을 대충 종합해 보면 소드 마스터가 백명이었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세 명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가 얼마나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인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세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오래 전부터 그란티에 말뚝박고 운영되어 온 용병길드의 두꺼운 나무문이 열리며, 거대한 나무에 매미가 붙은 듯 초라해 보이는 작은 종이 가늘게 떨렸다. 딸랑! "와하하하......!" "정말 그랬단 말이야?" "하하하......!" 용병길드 안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손에는 거품을 가득 문 맥주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용병들로 일거리가 날 때까지 이곳에 눌러 있는 존재들이었다. 뚜벅뚜벅...... 나무 바닥을 울리며 로얀은 이곳 용병 길드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용병들은 그런 그의 얼굴만 힐끗 쳐다보곤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그들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호, 못 보던 얼굴이구먼. 용병일을 하려고 왔는가?" 그란티의 용병길드장을 맡고 있는 마크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인이었다. 그는 드위프 못지 않은 수염을 가지고 있는, 체구가 큰 사람이었다. 마크도 과거 용병생활을 했고, 십 년 전 용병길드의 길드장을 맡은 이후 수많은 용병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그의 눈은 정확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로얀이 이미 오랜 용병생활을 해왔다는 건 알아보지 못했다. 로얀의 손에 굳은살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법사라고 보자니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어 그런 것도 아닌 듯했기에 로얀이 용병인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깊이 잠겨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가 마음에 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로얀은 열세 살 때부터 팔레인에 왔던 상인을 따라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크를 만나 그는 용병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용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작은 사건을 계기로 그는 마크에 의해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그가 처음으로 검을 휘두른 대상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었다. 전쟁이 잠시 소강생태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전쟁터에서 만난 얀과 함께 몬스터를 잡으며 용병일을 했다. 물론 용병길드에서 의뢰를 받는 것은 모두 얀의 몫이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로얀의 성격 탓이었다. 그 때 그들의 파티에는 이리아도 함께였다. 어쨌거나 어렸을 적에 단 한 번 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로얀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에 마크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로얀은 복수의 대상이 드래곤인 만큼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만 알 뿐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전대 다크로얀의 기억은 사실 별거 없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폭주해 버렸기에 미친듯이 싸움만 했던 것이다. "용병왕은 드래곤을 죽일 수 있습니까?" "뭐......?" 전쟁터에서만 살았기에 별다른 지식이 없던 로얀은 마크를 향해 그렇게 진지하게 물었고, 그의 단 한마디에 소란스럽던 용병길드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갑자기 사일런스 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의 태도에 용병길드는 그만 발칵 뒤집혀졌다. "큭큭, 푸하하하......! "푸하하하! 크크......" 마크도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무리 용병왕이라고 해도 어린 해츨링을 잡을 수 있을 정도네. 성룡과는 동수를 이루거나 죽겠지. 물론 동수를 이룰 확률은 희박하지. 대부분 죽는다고 봐야 돼." "드래곤... 역시 강한건가." 로얀은 여전히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마크를 바라보았다. "일단은 용병왕부터 시작해야겠군." 그는 지금 상태에서 수련을 쌓아 힘을 기를 작정이었다. 목표를 정해 점점 힘을 키워갈 생각인 것이다. 그의 처음 목표는 용병왕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은 용병왕이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지 결코 용병왕이라는 칭호가 탐이 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길드 내에 있는 용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로얀의 중얼거림을 들은 용병들은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꽝......! "이 빌어먹을 자식이! 용병을 뭘로 보는 거야!" 용병 중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로얀의 말은 용병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모두 용병왕을 동경했고, 용병왕은 그들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를 웬 젊은 녀석이 모욕하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로얀은 그런 그들의 태도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용병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인상 좋게 웃던 마크도 로얀의 말에 기분이 상해 인상을 구기며 용병길드 벽에 붙어 있던 종이를 가리켰다. 종이의 윗부분에 '붉은 산적 퇴치'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A급 의뢰지. 혼자 완수한다면 용병왕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지. 됐지? 어서 꺼져." 마크의 말에 일어났던 용병들도 로얀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앉았다. "두목의 목을 따오면 되는 건가?" "그, 그렇지." 갑자기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 마크는 말을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순간 로얀의 몸이 거대해 보였던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들은 로얀은 용병길드를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다른 용병들은 좋은 안주거리가 생겨 즐겁게 웃으며 술잔을 나누었지만 단 한 사람, 마크만 굳은 얼굴로 로얀이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정신 나간 녀석이 진짜 산적 두목의 머리를 들고 삐걱이는 문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머아게 있던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로얀의 얼굴을 지웠다. 용병길드를 나선 로얀의 머리속에는 종이에서 보았던 한 남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도끼 레드'라는 이름의 남자의 얼굴이....... 사박사박...... 가을의 대륙이라는 이름답게 붉은 낙엽이 산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흡사 낙엽의 비가 내린 것만 같았다. 낙엽의 비가 고여 흘러내리는 강... 로얀은 그 사이를 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붉은 산적들의 소굴이 있는 붉은 산은 가을 대륙을 대표하는 나무인 단풍나무만이 자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산의 이름을 따 산적들이 자신의 이름을 정한 듯했다. 산적에 대한 정보는 돈이 드는 정보길드보다는 역시 왕국의 병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린티의 용병길드에 있는 의뢰들은 대부분이 마을 근처에서 일어나는 것일 게다. 그런고로 산적들로 인해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린티를 지키는 경비대 병사들이었다. 한 경비병에게 붉은 산적들에 대해 묻자 그는 그동안 쌓인게 많았던지 온갖 불평과 함께 산적들에 대한 정보를 쏟아놓았다. 붉은 산은 그린티에서 서쪽으로 한참 가면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둥근 산으로 하늘이 맑게 갠 날에는 그린티에서 희미하게 보이기도 했다. 한데 그곳은 정말 좋은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붉은 산만의 독특한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와의 국격과는 거리가 멀었고,발목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는 단풍 때문인지 몬스터도 살지 않았다. 붉은 산에 성을 세우면 적이 침입했을 때 상당히 든든할 거라는 걸 그린티의 영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온한 이곳에 전쟁이 일어날 일도 없거니와 성을 짓는데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붉은 산을 붉은 산적들이 차지해 버린 것이다. 붉은 산적들의 두목은 붉은 도끼 레드라는 남자였다. 그는 매우 뚱뚱한 채격에 거대한 체구를 자랑했고, 이름 앞에 붙은 명호답게 도끼를 매우 잘 썼다. 배틀액스라는 양날의 거대한 도끼를 쓰는 그는 엑스 마스터는 아니었지만 그에 근접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강한 힘과 도끼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붉은 산적들은 붉은 도끼 레드를 중심으로 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을 약탈했는데, 간혹 도시인 그린티에서 나오는 상인들을 습격해 강탈하기도 했다. 때문에 그란티에서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지만산적들의 소굴에 올라가기도 전에 번번이 병사들만 잃을 뿐이었다. 그란티도 변방에 위치한 도시인지라 병사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고, 발목까지 찬 단풍에 발이 묶여 있을 때 위에서 화살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져 병사들을 패퇴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매번 당하자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 그린티의 영주는 결국 용병길드에 의뢰를 청한 것이다. "저기인가?" 산 중턱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로 된 성벽을 본 로얀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곳이 붉은 산적들의 소굴인 듯했다. 사박사박...... 로얀은 멀리 보이는 산적들의 소굴을 보며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붉은 산적들은 지리적 요건을 좀더 많이 이용하기 위해 단풍과 같은 색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의 몸에서 원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눈동자밖에 없었다. 붉은 산 중턱에 위치한 산적 소굴에는 높은 망루가 하나 있었다. 입구 쪽에 위치한 이 망루에는 지금 세 명의 산적이 둘러앉아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망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적들의 집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점심 준비가 한창인 것이다. 주사위를 든 사내가 두 개의 주사위를 손 안에서 흔들다 잽싸게 말아 쥐었다. "홀!" "짝!" 다른 두 사람이 동시에 큰소리로 외치자 주사위를 든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변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펼쳤다. "홀이다." "크흐흑, 젠장!" 짝이라 회쳤던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동전을 내던지듯 떨구었다. 그는 오늘 일진이 안좋다고 생각하며 망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그의 눈썹이 꺾어졌다. "왜?" "무슨 일이야?" 여전히 바닥에 앉아 주사위 도박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물음에 그는 손으로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오고 있어." "뭐?" "에이! 돈 잃었다고 무슨 수작 부리냐?" "아냐! 진짜라고!" 장난으로 받아넘기던 두 산적은 동료의 격한 반응에 몸을 일으켜 망루 밖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단풍의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누구지?" "영주 영감이 용병길드에 의뢰했다던데, 용병이 아닐까?" "에라, 이 멍청아! 용병 혼자 어떻게 오냐?" 하긴 그의 말도 맞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용병이라도 산적들을 처리하려면 동료가 있어야만 했다. 게다가 붉은 산적들은 소규모의 어중이떠중이 산적이 아니었다. 혼자서 쳐들어 오는 것은 죽여 달려고 오는 것과 같았다. "그럼 뭔데?" "여행자 같은데?" 한 남자가 여행자라고 칭하자 다른 두 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행자?" "흐흐흐......" 이곳으로 들어오는 여행자는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호박이었다. 세 명의 산적들은 호박이 끝까지 굴러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여행자들은 그들에게는 특별 서비스요 짭짤한 용돈이었던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가난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요 근래에는 붉은 산적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드문지라 산적들은 굶주려(?)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박사박...... 흑발의 사내는 단풍을 헤치고 망루 바로 앞에까지 도달했다. 산적 소굴의 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흐흐흐! 오랜만에 돈 좀 만져보자. 어서 문 열어!" 그의 말에 다른 산적 두 명이 문을 잠그고 있는 나무를 들어 올렸다. 쿵......! 문 주위는 항상 그들이 낙엽을 번갈아 가면서 쓸었기에 천천히, 자연스럽게 열였다. 단풍의 강을 거슬러 올라 산적들의 소굴 앞에 도착한 로얀은 갑자기 문이 열리자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소굴 안쪽에서 세 명의 산적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모두 붉은 머리에 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척 봐도 그들이 산적인 걸 알 수 있게 생겨 먹었다. 하나같이 검을 들고 있는 그들은 로얀의 주위를 빙 둘러싼 후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세 명 중 정면에서 검을 겨누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말했다. 얼굴은 얼마 전 그들이 가지고 놀더 주사위처럼 네모 반듯하게 생겼는데, 인상이 무척이나 더러운 남자였다. "흐흐흐... 남자 몸 더듬는 건 기분 더러우니깐 좋은 말 할 때 가진 것 전부 내려놔." "말로만 듣던 오크인가?" "뭐, 뭐야!" "킥!" 로얀의 말에 네모 얼굴의 사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다른 두 명의 산적은 키득거리며 웃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세 산적의 반응에도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붉은 도끼 레드라는 녀석의 목을 가지러 왔다." "......" 순간 키득거리던 두 산적도,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히던 산적도 굳어버렸다. 석화마법이라도 걸렸던 것 같던 그들은 순식간에 마법이 풀린 듯 인상을 버럭 쓰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젠장! 오늘 아무래도 정신 나간 놈이 왔나보다!" "키득! 그냥 죽이자." "내가 뒤질게." 네모 얼굴의 사내가 검을 들고 로얀을 향해 걸어왔다. 그것을 보고 로얀은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 모습에 네모 얼굴의 사내는 그가 모든 것을 체념했기에 그런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크크크... 죽기 전에는 꽤 사내답구먼." 로얀의 몸을 뒤지던 산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섬광이 번뜩였다. 스걱! 촤아아아......! 소나기가 내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선홍색 피가 허공을 수 놓았다. 그와 함께 어깨에서부터 잘려 아직도 아직도 검을 쥐고 있는 산적의 팔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런 산적의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로얀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 검이 들려 있었다. "끄아아악......!" "이런! 목을 베려고 했는데, 어쩌나? 눈으로 보는 것에 아직 적응이 않 돼서 말이야." "어, 어떻게......?" "죽여라!"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뒹구는 동료를 멍하니 바라보던 남은 두 산적이 검을 힘껏 움켜쥐고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것, 스걱! 촤아아아......! 후두둑! 핏방울이 비가 되어 낙엽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로얀은 어느새 한 자루의 검을 더 뽑아 날카롭게 빛나는 롱 소드를 양손에 각각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감겨 있는 그의 눈 때문에 그의 심정을 알 순 없었지만 그는 너무 침착해 보였다. 사박사박...... 천천히 눈을 뜬 로얀은 붉은 산적들의 소굴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운 좋게 팔 하나 잘린것으로 그친 네모난 얼굴의 사내가 품에서 피리를 꺼내 입에 불었다. 삐이이......! 그는 원독에 사무친 눈으로 로얀의 등을 쏘아보았다. 로얀은 등 뒤에서 들리는 피리소리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사박......! 그의 귓가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전쟁터를 누빈 맹인 검사였다. 그랬기에 그는 보통사람보다 감각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게다가 다크로얀에 의해 생긴 눈은 시력이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했고, 감각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졌다. 로얀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에겐 이제 시력이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한 눈이 있었지만 싸움에서는 아직 빛이 없는 것이 편했다. 그는 롱 소드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다가올 바람에 대비했다. "침입자다!" "죽여라!" "와아아아......!" 족히 백 명은 될 듯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얀은 모든 감각에 집중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서부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나는 긴장감이 어린 그들의 땀 냄새까지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하나라도 놓치면 죽는다!' 이것이 그가 맹인 검사로서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법이었다. 사바박......! '한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은 많아봐야 다섯 명!' 스걱! 피핏! "끄아악......!" 누군가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날카로운 로얀의 롱 소드가 손목을 잘라 버린 것이다. 그 뒤로도 롱 소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끊임없이 빛을 뿌렸다. 스거걱! "끄아악......!" 후두둑! 산적들이 뿌리는 피는 비가되어 단풍을 두들겼다. 붉은 빗물이 나뭇잎에 모이기도 했고 천천히 나뭇잎을 타고 흘러 내리기도 했다. 오늘따라 단풍이 더욱 붉게 보였다. '오른쪽 밑에서 위로 일직선!' 스걱! 촤아아......! 긴 검을 하늘 높이 들어 내리치려던 산적이 갑자기 턱밑에서 솟아오른 검날에 얼굴이 반으로 쪼개졌다. 반으로 쪼개진 산적의 머리통, 그 단면이 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꺼꺽......!" 얼굴이 쪼개진 산적은 두 개가 된 입술을 오물거리며 괴이한 소리를 내뱉으며 쓰러졌다. 사박! 사바박......! '겁먹은 건가?' 산적들의 공격이 없었다. 그들은 로얀이 움직일 때마다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로얀은 싸우면서 자신의 몸이 상당히 가볍게 느껴졌다. 아마 중급의 소드 마스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뒈지고 싶으냐? 물러나는 놈은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그 굵직한 목소리가 붉은 도끼 레드라는 놈의 것이라는 걸 짐작한 로얀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의 주위는 온통 붉은색이었다. "너의 목을 가지러 왔다." "크하하하! 별 미친놈을 다 보는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죽여라!" "와아아......!" '대장이 나타나면 병사들은 사기가 충전된다.' 우웅......! 스거걱! 촤아아......! 로얀은 눈을 뜬 상태로 검을 휘둘었다. 손끝에서 족히 세 명의 육체는 지나간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모두 허리를 갈라 버린 것이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검에서 푸른색 오러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소, 소드 마스터다!" "으아아아!" 푸른색 오러를 알아본 산적들은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도저히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끄응......!" 붉은 도끼 레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침음성을 흘렸다. 하나 상대는 고작 한 명이었다. 아무리 날아다니는 소드마스터라 해도 자신의 부하 중 살아있는 사람은 아직도 백 명이 넘었다. "상대는 하나다! 모두 공격해라!" " 하, 하지만 상대는...... 겁에 질린 산적들의 눈동자를 보던 로얀은 붉은 도끼 레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목을 내놔라." "크윽, 이런 미친놈! 우리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잊었느냐!" 웅성웅성......! 그가 말하는 비장의 무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산적들이 일순 동요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 속의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와아아아......!" 다시 사기가 재충전된 그들은 일제히 로얀에게 달려들었다. 흡사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모습이었다. "어리석군." 후웅! 스거걱! 촤아아......! 스거걱! 쏴아아......! 후두둑! 피가 하늘을 물들이고 잘린 수십 개의 사지가 춤췄다. 그리고 산적들과 붉은 도끼 레드의 눈이 찢어질듯 커졌다. "어, 어떻게 양손에서 오러를......!" 로얀은 양손에 들린 롱 소드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러를 두 개의 무기에 나누어 담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너의 목을 원한다." 그 말에 수하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자 레드의 안색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그는 급히 자신의 품에 뭔가를 꺼냈다. 마법 스크롤이었다. "흐흐흐... 쓰기엔 아깝지만, 너도 이제 끝이다!" 찌이익! "파이어 볼!" 그가 스크롤을 쓴 것으로 보아 아무나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상급의 마법 스크롤임을 알 수 있었다. 스크롤이 찢어짐과 동시에 3서클에 해당하는 파이어 볼이 발사되었다. 사람 머리보다 큰 커다란 화염구가 생성되자마자 로얀을 향해 날아갔다. 로얀은 처음 보는 마법에 잠시 눈이 눈이 흔들렸으나 이내 이전과 같이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양손의 검을 엑스 자 형태로 만들어 파이어 볼을 막기 위해 들어 올렸다. 쾅......! 츠츠측! 로얀은 낙엽을 부딪치며 멀찍이 밀려났다. 그리고 파이어 볼이 그의 오러와 부딪치며 소멸한 직후,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거대한 배틀 액스를 든 붉은 도끼 레드였다. 레드는 로얀이 파이어볼을 막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작전은 파이어 볼을 소멸시킨 직후 시야가 가려진 로얀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팟! 부우욱! 덩치에 걸맞게 레드의 몸에서는 좀더 색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가랑이에서부터 머리까지 정확히 반쪽으로 허공에서 갈라져 버렸다. "나에겐 여러 개의 눈이 있다." 로얀이 바닥에 내려서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윽. 로얀은 레드의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사사삭! 그들은 두려움에 빠져 사색이 된 채 바들바들 떨었다. 손에 들려 있던 무기는 바닥에 구른 지 오래였다. 로얀은 붉게 물든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파이어 볼을 막을때 붉은 불빛이 마치 눈 속으로 빨려드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에 의문을 품고 있을때! [다크로얀의 눈을 가진 너는 어떠한 것도 따라할 수 있다. 단, 너의 봉인이 얼마나 풀렸느냐에 따라서 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으며, 한번 흡수한 기술은 일단 쓰고나면 다시 다른 사람이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봐야 사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할해 기술을 훔져 몸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원하는 때에 단 한번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일회용이라는 단점이었지만 상당히 유용한 기술임에는 틀림없었다. "기술을 훔친다......" 그의 머리속에 파이어볼에 관한 마법적 수식이 원래부터 그가 익히고 있엇던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로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화르륵! "커컥!" "마,마검사!" 그의 몸 주위로 커다란 화염의 구가 생겨났다. 그러자 산적들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지만 로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흐르륵, 흐르륵! 여러 개의 화염구가 그의 몸 주위에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무리인가?" 화염구는 다섯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스윽. 로얀은 화염의 구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산적들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화르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섯개의 화염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으, 으아아아!" 콰카카캉! "으아아아......! 타오르는 불길에 살아남은 산적들은 이지를 상실했는지 광기에 휩싸인 채 로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스거걱. 촤아아......! 로얀의 검에는 인정이 없었다.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눈이 없었다. 그낭 붉은 산은 정말 붉게 타올랐다. 때마침 가을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붉은 산이 모조리 불탔을 것이다. 시원한 가을비를 맞으며 붉은 산적의 소굴 속에 로얀은 홀로 서 있었다. 쏴아아......! 그는 착 가라앉은 눈동자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툭! 툭! 그는 손아귀에 잇던 롱 소드 두 자루가 힘없이 낙엽 위로 떨어져 내렸다. "왜지......?" 로얀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산적들을 죽인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인간이 아닌 정령왕이 되어버린 것일까? 이젠 정말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말인가?" 이상한 감정과 함게 회의감이 들었다. 쏴아아아.....! "레이나...난 이제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거야......" 그때 처음으로 로얀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쏴아아.....! 그린티의 높은 하늘에서 빗물이 세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가을의 냄새를 머금은 빗방을이었다. 이 빗속에서도 그린티의 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정지!" "......" 경비병의 말에 비 때문에 검은 머리가 착 달라붙은 로얀이 멈추어 셨다. 이미 용병패를 보여줬는데도 가지 못하게 하다니... 그는 경비병을 응시했다. 비 때문인지 로얀의 눈빛은 섬뜩했다. "그, 그건 뭐지?" 경비병의 말속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로얀은 그가 카리킨 쪽으로 눈을 돌렸다. 똑똑......! 그가 들고 있는 주머니에서 붉은 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는 원래 색이 그런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병사가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로얀은 주머니에서 시선을 떼고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붉은 도끼 레드의 목." "......" 로얀의 말을 들은 경비병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가 멍한 표정을 띄운 채 어색한 걸음으로 길을 열어주자 로얀은 빗속을 걸어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영주가 용병길드에게 의뢰했고, 레드의 수급을 가져온 사람은 용병이었기에 길드장에게 수급을 념져줘야 했다. 그려면 길드장이 수급을 받아 영주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로얀이 그린티로 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당연히 용병길드였다. 딸랑! 빗소리 때문에 애처롭게 들리는 방울소리를 뒤로하고 로얀이 용병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용병들은 자리를 꿰차고 술잔을 들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똑, 또옥! 그들의 시선은 로얀이 쥐고 있는 주머니 쪽으로 가 있었다. 뚜벅, 뚜벅......!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마크도 펜을 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곳에 조각 미술관이라도 차린 걸까? 쿵! "붉은 도끼 레드의 목이오." 마크의 굳은 몸은 로얀의 그 한마디에 풀렸다. 용병은 눈칫 밥을 먹고사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용병들도 그제야 몸이 풀린 듯 로얀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 그런가? 저, 정말 해냈군." "......" 로얀은 마크가 서류를 정리하는 선반 위에 레드의 수급을 올려놓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크는 정말 이 남자가 레드의 수급을 가지고 오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고 보니 로얀이라는 이 남자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외모의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는 블랙드래곤과 마족의 특징 중 하나였다. 마족이 이런 식으로 중간계를 돌아다닐 리는 없을테고...... "호, 혹시... 드래곤... 헙!" 마크는 자신이 생각을 말하려다 입을 급히 두손으로 막았다. 유희를 즐기고 있는 드래곤의 진짜 정체를 발설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흠짓! 온몸을 떨던 마크는 자신의 목 언저리에 닿은 섬뜩한 검날을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그는 로얀이 드래곤이라 단정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금기를 어겼으니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했다. 이윽고 로얀이 입이 열리고 너무도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그 추악한 도마뱀들과 똑같이 비교하지 마라." "꺼꺽!" 마크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진득한 살기 때문이었다. 살기의 소용돌이가 마치 심장을 붙잡고 영혼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로얀이 검을 거두자 그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다시 물었다. "그, 그럼 인간이십니까?" "......" 마크의 떨리는 목소리레 로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인간이던가?' 아마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릴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이제 정령왕인 것이다. 로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마크는 이번에는 다른 하나의 경우인 그가 마족이란 추측을 해보았다. "이제 용병왕에 가까워진 건가?" 그는 마크가 자신을 드래곤이라 생각한 뒤부터 반말을 쓰고 있었다. 그 말 하나가 그의 신경을 얼마나 건드렸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물어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 마크는 로얀을 중간계를 여행하는 특이한 마족이라 단정지었다. 그러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려내렸다. 마크는 그것을 훔치며 입을 열였다. "용병왕이 되시려면 엄청난 적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누구지?"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 말에 로얀은 의아해 하며 마크를 바라보았다. "인간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 곳에서 살아남으십시오." "그것이 어째서 용병왕에 가까워지는 길이라는 건가?"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용병왕이지요. 도중에 관두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이 의뢰를 꼭 한번 해보십시오." 그는 말과 함께 무언가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을 조심스럽게 로얀에게 건넸다. 그것을 조용히 훑어 내려가던 로얀의 눈이 한곳에서 멈췄다. 엘레나 폰 크라우드! 팔란 왕국의 공주인 그녀를 해적들의 손에서 구출하라는 의뢰였다. 마크는 로얀이 서류를 다 읽었을 때 쯤에 입을 열였다. "엘레나 공주님은 해적왕 라이던이 이끄는 유령해적단에 납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왜지?" 일국의 공주를 해적들이 납치한 이유가 뭘까? 아무리 해적단이 강해도 한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순 없었다. "험험! 이곳이 처음이시군요. 가을의 대륙에는 이론 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론 제국은 가을의 대륙에서 가장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죠." 마크는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며 설명을 이었다. 마크의 말처럼 가을의 대륙에는 이론 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한데 이론 제국의 황제는 대륙 통일에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정복전쟁을 일으켜 주위의 작은 나라들을 모두 흡수했다. 그로 인해 이제 가을의 대륙에 남은 나라는 이론 제국과 팔란 왕국을 제외하면 힘도 없는 소국뿐이었다. 팔란 왕국을 정복하려던 이론 제국의 황제는 대륙 통일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정벌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권위보다 앞서는 교황이 명분없는 전쟁을 당장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이다. 팔란 왕국은 이론제국 다음으로 영토가 큰 나라였지만 국왕이 평화주의자라 별다른 움직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론 제국의 황제는 교황으로 인해 중간에 멈춰버린 팔란 왕국의 정복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야망이 너무나 컸던 이론 제국의 황제는 명분이 될 만한 거리를 생각하던 중 팔란 왕국의 공주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해적왕 라이던에게 영토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어떤 제약을 맺었다.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엘레나 공주는 납치되던 그날도 바다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면을 당하고 말았다. 많은 기사들이 공주를 호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적들의 수가 많았던 것도 그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해적왕 라이던이 소드 마스터였기 때문에 공주의 호위기사들로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론 제국과 계약을 맺었다고 짐작되는 유령해적단이 어째서 가장 쉬운 방법인 공주를 죽이는 것을 택하지 않고 납치하는 것을 택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엘레나 공주가 해적들에게 납치다아자 팔란 왕국의 국왕은 분노했지만 이론제국을 향해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건 이론 제국이 바라던 것을 들어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론 제국은 팔란 왕국이 먼저 공격해 오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 보복의 명분으로 왕국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팔란 왕국의 국왕은 즉시 해적들이 있는 곳으로 병사들을 파병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이번싸움에 A급 용병 세 명과 B급 용병 열 명을 고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한 용병 중 B급 용병 한 자리만이 남았습니다." 그의 말인즉 의뢰를 맡으려면 B급 용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A급 용병과 B급 용병은 돈 문제를 떠나 사람을 대우하는 것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었다. 로얀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용병 등급 같은 건 상관없다." "그, 그럼......?" "의뢰를 받아들이겠다." 로얀은 공주를 구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느 자신과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 해적왕 라이던과 붙어보고 싶을 뿐이었다. 마크는 로얀의 말의 환하게 웃으며 B급 용병패를 건넸다. 안 그래도 갈 사람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용병패와 함께 돈이 든 주머니도 건넸다. "산적 의뢰의 보상금입니다." 로얀은 용병패를 품속에 넣으며 돈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반짝이는 금색 동전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5골드... A급 의뢰치곤 상당히 낮은 금액이었다. 그란티의 영주는 정이 넉넉지 않았고 산적을 퇴치하는 의뢰였기에 금액이 적은 것이다. 로얀이 돈주머니를 품속에 넣으려 할 때 마크가 펜을 들며 그에게 물었다. "저...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용병패를 주었으니 패의 주인에 대한 신상을 적어야 했다. 로얀은 그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크로얀." 마크는 '다크로얀'이라는 이름 앞에 '흑안'이라는 글자를 덧붙었고, 그의 허리에 있는 검 두 자루를 흘깃보고 '검사'라고 적었다. "5골드군." 로얀은 이번 의뢰의 보수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왕국에서 온 병사들도 있다는데 용병의 보수가 너무 높아 그렇게 물은 것이다. 그의 말에 마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것이... 단풍기사단 5백 명이 갑니다." "적의 수는?" "대, 대략 2천 정도로 추정됩니다." 2천 대 5백, 이미 승부가 정해진 게임이었다. 게다가 해적들과 해상전이라니, 정말 무모한 싸움이었다. "험험! 단풍기사단은 모두 중급 검사 이상입니다. 대부분이 상급이죠." "적군." 아무리 그래도 수가 너무 적었다. 국왕의 단풍기사단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컸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마크는 로얀이 혹시나 의뢰를 거절할까 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팔란 왕국은 두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죠. 그 중 한 사람이 단풍기사단의 단장입니다. 또한 이번 싸움에 궁정 대마법사님께서도 오시죠. 아! 해적들에게서 빼앗은 보물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보상에 해당되죠." 로얀은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갈 생각이었기에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가면 되지?" 로얀의 한마디에 마크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일이 술술 잘 풀렸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머리속엔 눈앞의 사내가 마족일 거라는 생각은 날아가고 없었다. 2장 바다의 노래 "와하하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로얀의 인상이 점점 굳어졌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워크워'앞을 장악하고 있었다. 단풍 무늬 표식이 그들의 옷에 새겨져 있는것을 보아 단풍기사단인 듯 했다. 터벅터벅..... 로얀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워크워' 안으로 들어갔다. "와하하핫......! "허허헛! 자넨 누군가?" 로얀이 안으로 들어오자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노인은 마법사들의 특징인 커다란 모자를 쓰고 붉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로얀은 직감적으로 그가 이번 의뢰의 총 책임자임을 알아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힘 때문에 그가 궁정 마법사인 메리슨 에리드임을 알아본 것이다. 로얀은 미소를 담고 자신을 바라보는 메리슨을 바라보며 품속에서 B급 용병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다크로얀입니다." 상대가 노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높여져 나왔다. 메리슨은 흑발에 흑안의 사내가 신기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털털하게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용병 명단을 바라보았다. "아, 여기 있구먼! 출발은 내일 아침6시이니 그때까지 부두로 나와주게." "알겠습니다. 그럼......" 로얀은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워크워를 빠져나왔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장 대장간으로 향했다. 붉은 도끼 레드 일당를 소탕하면서 이가 빠진 검의 날을 세우기 위해 숫돌을 몇 개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몬드의 여관에서 눈을 붙였던 로얀은 5시가 되어 부둣가로 나갔다. 그가 한 시간이나 서두른 이유는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처얼썩......! 끼룩끼룩......! 로얀의 눈앞에 환상이 펼져졌다. 두 눈에 가득 담긴 광활한 바다가 소리치며 그를 부르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와 그의 발 밑을 간질이다가 저만치 물러나는 파도는 마치 수줍은 소녀의 손짓처럼 그를 유혹했다. "이게 바다인가?" 그는 태어나서 바다를 눈 안에 모두 담으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쏴아아아.....! 처얼썩......! 로얀은 짠 바다 냄새와 쌀쌀한 바람이 정겹게 느껴졌다. 마치 밀려오는 바다가 자신을 품에 끌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시원한 바다의 풍경에 힘을 빼고 몸을 맡기고 있던 그의 눈에 문득 작은 이슬이 맺혔다. "와아! 정말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군요. 어제 워크워에서 봤을 때에는 무척이나 무둑뚝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흠칫! 로얀은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하하, 좋은 아침! 전 렌이라고 해요." 170 정도 되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1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품안에는 하프라는 악기를 들고 있었다. 로얀은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헤에!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 '어머니......' 그의 입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대답했다. 갑자기 왜 어머니가 생각났는지 그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정령왕이 되고 나서부터 조금씩 머리속에 그려지고 있는 어머니, 자신을 버린 어머니... 하지만 로얀은 그런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런 험난한 세상에 눈이 없는 아이를 키워줄 부모가 있을까? 레이나를 넘겨 버린 것은 화가 났지만 그것도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이니까.... 그의 그런 마음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렌이 짓궃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이상한 소년이다.' 로얀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차! 이제 그만 가야죠." "응?" 렌은 부두에 닿아 있는 함선을 가리켰다. 세 척의 거대한 함선... 로얀은 그것들이 자신이 타고 가야 할 배임을 알아보았다. "너도 가는거냐?" "그럼요! 제가 이래뵈도 A급이라고요." 렌은 품속에서 A급 용병패를 흔들어 보였다. 로얀은 다시 한 번 렌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미약했다. 그의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렌은 웃었다. "전 음유시인이에요." "음유시인?" "네. 노래로 날씨를 조종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기도 하죠." "......" "항해를 할 때에는 폭풍을 대비해 연금술사들이 만든 바다의 향신료를 뿌려야 하는데 그건 무지 비싸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음유시인을 고용하죠. 음유시인도 비싼건 마찬가지지만 바다의 향신료보다는 낮거든요." "어째서지?" "헤헤, 항신료는 일회용이니까요." 눈을 감고 자신의 대해 설명하던 렌은 귓가로 잔잔히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뗬다. 사박사박...... "앗, 같이 가요!" 로얀은 모래를 밟으며 벌써 함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이 해안가에 새겨졌다. 로얀이 탄 함선은 거대했다. 용골은 굵고 튼튼해 보였고, 뱃머리가 뾰족하게 만들어져 있어 날렵해 보였다. 그리고 바람으로 나아가는 범선답게 함선은 거대한 세 개의 돛대를 중심으로 돛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뚜벅뚜벅...... "와아! 운이 좋은데요? 우리에게는 순풍이니 말이에요." 로얀은 검을 뽑아 뒤의 그림자를 베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함선에 오르면서부터 뒤를 졸졸 따라오는 렌 때문이었다. 그냥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싫은데 렌이 끊임없이 조잘거리자 로얀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멈칫! 쿵! 덕분에 바쁘게 입을 움직이느라 앞을 보지 못한 렌은 로얀의 등에 머리를 박았다. "아얏!" 콰당! 넘어진 렌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로얀의 그림자였다. "따라오지 마라." 씨익. "저랑 형이랑은 같은 방인데요?" 렌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형이라는 소리...안 했으면 하는군. 그리고 넌 내 이름을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너와 내가 같은 방이라는 걸 넌 어떻게 알지?" "선실 배정표를 보고 왔거든요. 또 형의 이름은 어제 선술집에서 들어서 알죠." 로얀은 여관을 나오자마자 바로 바다로 나왔기에 선실 배정표를 미처 보지 못했다. "형, 선실이 어딘 줄 모르죠?" "......" 알 턱이 없었다. 표정표의 모서리조차 구경하지 못한 그였으니까. "에헴! 그럼 절 따라오세요. 대가는 로얀 형에게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 "맘대로......" 로얀은 왠지 뜨거워지는 이마를 식히기 위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벌글 웃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설신은 한 방에 네 명이 머무를 수 있도록 2층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역시 우리가 일등이네요." 로얀과 렌이 머물게 될 선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털썩. 왼쪽에 있는 침대 일층에 걸터앉은 로얀은 허리에 찬 검을 풀어 베개 위에 올려둔 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렌은 메고 왔던 가죽 가방을 내려놓고 정리하고 있다가 침대가 들썩이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에에엑!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잘 테니 깨우지 마라." 로얀의 말레 렌은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아,안돼요!" "......" "바다를 보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형과 밤까지 바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요!" "난 그런 취향이 아니니 건드리지 마." "쳇, 쳇, 쳇!" 로얀의 차가운 반응에, 입에 헤이스트를 걸었는지 렌의 입술이 급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투덜거림에 잠을 자려던 로얀의 손이 위로 움직였다. 스르릉...... 맑은 금속음과 함께 롱 소드가 천천히 뽑히자 렌은 합죽이가 되었다. "......" 짐을 대충 정리한 렌은 토끼 걸음으로 살금살금 선실을 벗어났다. 렌이 나가자 로얀이 손이 움직였다. 탁! 그렇게 롱 소드의 빛이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움직이기도 귀찮고 할 일도 없었기에 잠을 잤던 로얀이 눈을 떴다. 배는 이미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는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건너편 2층 침대에는 배낭과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자고 있는 동안 같은 방을 배정받은 두 명이 들어왔다 나간 것이다. 로얀은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지만 귀찮아서 자는 척하고 있었다. 로얀은 손을 베개 위로 올려 뒤적거리다가 손끝에 잡히는 물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두 자루의 검을 허리에 찬 로얀은 방을 나섰다. 뚜벅두벅...... 방을 나선 로얀은 선실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끼루룩, 끼루룩......! 선실을 나온 그를 가장 먼저 반겨준 건 흰 갈매기 떼였다. 그는 나무로 된 갑판 위를 걸어 뱃머리 쪽으로 향했다. 간간이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그들을 볼 때마다 로얀은 눈썹이 날아다니는 갈매기처럼 변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단풍이 그려진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해상전과 해안가의 모래사장에서 싸움을 치러야 할 사람들이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그들의 갑옷은 풀 풀레이트 메일까지는 아니었다. 하나 지금 입고 있는 갑옷도 꽤 무게가 있어 보였다. 로얀은 전쟁터에서 저렇듯 생명보다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격어 보았다. 전쟁터를 자신을 뽐내는 현장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자들... 그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뚜벅뚜벅...... "엇, 형!" 로얀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뱃머리에서 함선의 가장 앞부분은 다른 곳보다 많이 흔들려 상당히 위험하기도 하고 멀미가 들기에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조용한 바다를 구경하고 싶었던 로얀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곳에는 달려오는 렌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히힛, 역시 바다를 보러 온 거지?" 끄덕.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는 렌을 향해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엘프." 로얀의 입에서 잔잔하게 흘러 퍼진 말. 그렇다. 렌의 뒤편에는 그를 따라 로얀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엘프가 있었다. 그녀의 긴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로얀보다는 작지만 여자치고는 큰 키에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엘프였다. 푸른색 눈동자와 뽀얀 피부... 그녀의 모습은 말로만 듣던 엘프의 아름다운을 능가했다. 금발의 엘프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서일까? 로얀의 눈동자가 그녀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고 무슨 감정이 일엇는지, 무엇 때문인지 그의 눈동자에서 은은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흠짓! 기운에 민감한 종족인 엘프는 로얀의 살기에 몸을 떨었다. 자신도 모르게 살기가 뿜어지자 로얀은 급히 그것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리아......' 자신을 가지고 논 드래곤. 한때는 정말 사랑했던 여인. 그녀가 엘프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머리속에 있는 이리아는 엘프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랐다. 렌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중간에 다리를 놓어주기 위해 나섰다. "형, 이분은 A급 용병이시자 엘프이신 세리나님이야." 뚜벅뚜벅...... 로얀은 렌의 말을 흘려버리며 세리나에게 다가갔다. 세리나는 그가 다가오자 미소를 지었다. 엘프다운 인사였다. 뚜벅뚜벅...... "엘프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군요." 로얀은 세리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스쳐 지나가 버렸다. 세리나는 태어나서 저런 부류의 인간은 처음 겪어 보기에 렌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뭘 잘못했니?" "아니에요." 렌은 발꿈치를 들어 세리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엘프에게 차인 적이 잇나보죠, 뭐." 빙긋. 세리나는 웃으며 렌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선실로 들어갔다. 렌은 그녀의 뒷모습과 제일 앞족에 위치한 돛대에 몸을 기대고 있는 로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뚜벅뚜벅...... 렌은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끼루룩, 끼루룩......! 혼자 남은 로얀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다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다의 향기에 취했다. 콰르릉......! 쿠쿠쿵......! 고오오......! "폭풍이다!" "와아아......!" 세 척의 거대한 함선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유령해적단이 있는 섬은 고작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한데 출발한 지 딱 하루 만에 폭풍을 만나다니, 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콰르릉......! 하늘이 놀란 건 바다다 요동쳐서일 것이다. 바다는 흰 거품을 뿜으며 이리저리 출렁였다. "어서 음유시인을 불러라!" 타타탁! 한 남자의 외침이 있은 직후 사람들이 발걸음 소리가 갑판 위를 울렸다. 끼이익! 잠시 후, 선실 안에서 렌이 뛰어나오더니 뱃머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위 사람들이 도와 주었다. 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뱃머리에 닿았다. "로얀 형!" 렌은 멀리서 로얀이 보이자 다급히 외쳤다. 그가 이런 위험한 시기에, 위험한 곳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여전히 뱃머리 가장 앞부분에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그곳에서 여유있게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단지 달라진 점이라면 일어서 있다는 것 정도였다. "렌 군!" 누군가의 외침에 렌은 로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서둘러 하프를 꺼내 들고는 돛대를 등을 기대고 자리에 앉았다. "허험! 후우웁, 후우우....." 헛기침을 하고 렌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리고 여자의 그것처럼 작고 가냘파 보이는 손을 하프로 가져갔다. 띠리링, 띠링...... 하프의 실이 그의 손에 따라 출렁이는 순간 그의 작은 입술이 열렸다. 푸르른 바다여 화내지 마요 그대 품에 잠든 아기가 깨려 하잖아요 그의 신비한 음성이 바다 가득 울려 퍼졌다. 로얀은 어느새 눈을 감은 채 렌 옆에 앉아 있었다. 띠리링, 띠링..... 잠시 동안 하프 음만이 바다의 바람을 탔다. 푸르픈 어머니여 흰 손 펴세요 어서어서 아이를 달래주어야죠 띠리링, 띠리링, 띠링...... "와아아아......! 렌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어느새 흐렸던 하늘도 푸르게 변해 있었고 미친듯이 요동치던 바다도 잔잔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로얀이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아쉽다는 듯 입술을 들썩였다. "한 곡 더 해봐." 그 말에 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유시인도 날씨를 조종하려면 많은 힘이 든다고요." 그의 목소리는 매우 가냘팠다. 그러자 로얀이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렌을 향해 물었다. "잠든 아이는 뭘 뜻하는 거지?" "그야... 바다에는 많은 정령들이 산다고 해요. 신비한 그 정령들은 아마 포근한 바다 위에서 모두 잠을 자고 있을 거예요." "네가 지은 거군." "물론이죠! 쿨럭!" 무리하게 대답하던 렌은 기침을 했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헤에, 그래야겠네요." "이번 싸움에서 너의 목숨만큼은 지켜주마." 씨익. 렌은 활짝 웃어 보이곤 선실로 들어갔다. 로얀은 눈앞에 펼쳐져진 바다를 보았다. "잠을 잔다......" 그의 눈에는 바다 위에서 뛰놀고 있는 푸른색 여자아이와 초록색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마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인 듯했다. 로얀은 폭풍이 쳤을 때를 떠올랐다. 출렁이는 바다를 타며 즐거워하던 정령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잠은 무슨......" 그도 정령왕인 이상 정령이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정령과 친한 엘프라 해도 계약한 정령이 아닌 이상에는 보기가 힘들었다. 굳이 보려고 한다면 볼 수는 있었지만, 그러려면 많은 마나를 소모해야 했다. 로얀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로얀이 탄 배가 몬드를 떠난지 정확히 이틀이 지나고 또다시 아침이 밝았다. 바람은 매우 잔잔하게 불어 배의 속도는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가는 함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분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형! 에제도 여기서 밤샜죠?" 그러나 로얀은 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도 뱃머리에 나와 가장 앞에 있는 돛대 기둥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렌은 로얀의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바다를 좋아하지만 로얀처럼 저렇게 심하진 않았다. 이건 중증이었다. 몬드를 떠나 항해를 하면서 로얀이 밤을 선실에서 잠을 잔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벌써 두 번의 밤을 거쳤지만 그는 선실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로얀은 렌이 또 옆에서 조잘거리며 따지려 들 것 같아 결국 입을 열였다. "난 바다를 처음 보았다." 그제야 렌은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바다를 볼 수가 없었다. 여행자가 아닌 이상에는 마을을 잘 나가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렌은 로얀이 바다와 떨어진 먼 곳에서 왔다고 생각했지만 팔레인에서 바다까지는 사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항구는 없었지만 바다는 팔레인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었다. "형이 살던 마을 이름이 뭐예요?" "......" 로얀은 팔레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바다를 응시했다. 번뜩! 그의 흑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바다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의 손은 어느새 롱 소드가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르릉...... "히이익!" 후닥닥! 렌은 검집에서 나오는 번뜩이는 검을 보고는 순발력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양손은 방어를 하기 위함인지 어느새 얼굴과 목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정이 뚝뚝 떨어지는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손을 들어봤자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로얀은 몬드에서 샀던 숫돌을 꺼냈다. 그리고 검을 갈기 시작했다. 치이익, 치이익...... 로얀이 검을 손질하자 렌은 다시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죽기 전의 마지막 발악이죠." 로얀은 렌의 실없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함선 세 척, 소형선 두 척." "네?" 렌은 갑자기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마중 나온 모양이다." "누가요?" "해적." "......" 슥슥슥. 둘 사이에 숫돌이 칼날을 스치는 소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렌이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으아아아아......!" 타타탓! 그는 간판 위를 달렸다. "해적이다!" "뭐!" 렌의 한마디는 함선 여기저기서 무료함에 질려 있던 사람들을 일깨웠다. 타타탁! 함선이 소란스러워졌다. 세 척의 함선 모두가 전투 준비를 하며 해상전을 파악하기 위해 들썩거렸다. 갑작스런 소동은 십여 분 동안이나 이어졌지만 바다 어디에도 해적선은 보이지 않았다. 뚜벅뚜벅...... "렌, 어디에 해적이 있다는 거니?" 렌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음성을 전하는 이는 엘프인 세리나였다. 그녀 뒤에는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한데 그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렌은 순간 당황했다. 설마 그 무뚝뚝한 로얀이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할 줄이야! "그, 그게... 로얀 형이 해적이 왔다고..." 그는 결국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렌의 말의 모두의 시선이 등을 돌린 채 검을 손질하고 있는 로얀의 등을 찔렀다. 세리나는 렌이 저 사람에게 속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녀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아무래도 네가 속았나 보다." "윽!" 렌은 세리나 뒤로 몰려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곤경에 처한 그를 구해 준 건 세리나의 맑은 음성이었다. "저... 렌이 너무 순진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시지 않겠어요?" "그, 그러죠." 남자들 모두는 세리나가 몸을 돌려 말하자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휘오오오! 세 척의 함선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파도를 가르며 힘차게 나아갔다. 촤아아......! "이,이......!" 렌은 폭발할 듯 얼굴이 붉어져 로얀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 그가 걱정되어 세리나가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로, 얀, 형!" "시끄러워." 스윽. 로얀은 숫돌을 내려놓고 흰 천을 꺼내 검날을 닦았다. 그 모습에 렌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으아아아! 제가 형 때문에 얼마나 창피를 당했는지 알아요!" 그러자 검 손질에 전념하고 있던 로얀이 처음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난 거짓말한 적 없다." 스윽, 스윽...... 그는 다시 검을 손질했다. 한데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렌의 뒤를 따라왔던 세리나는 로얀의 눈동자에서 그가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읽었지만 바다에는 해적의 해 자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건 푸른 대해뿐이었다. "흥!" 렌은 단단히 화가 난 듯 로얀을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세리나가 달래어 그 주변에 앉게 하고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이야기 소리에 간간이 로얀이 검을 손질하는 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두 개의 검을 모두 손질하는 데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동안에도 렌과 세리나는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스릉, 탁! 두자루의 검을 허리레 찬 로얀이 몸을 일으켰다. 스윽. 우두둑! 어벳밤부터 이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시원한 뼈 소리가 흘려나왔다. 로얀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근육을 풀었다. 그의 몸 풀기는 30분간 계속 되었다. 그려면서도 눈동자는 계속 바다 먼 곳를 주시하고 있었다. 우둑, 우두둑! 자신이 화가 났음을 보여주려는 듯 로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던 렌은 입이 너무 근질거려 결국 입을 열였다. "갑자기 왜 일어나신 거예요?" "그 녀석들이 오니까." "아, 진짜! 또 그 소리......" 인상을 와락 구기며 소리치던 렌의 목소리가 멈춰버렸다. 아니, 누군가의 의해 끊어졌다. 돛대 위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전방에 함선 세 척! 소형선 두 척!" 타타탓! 쿵쿵쿵! 새 개의 함선에서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흘려나왔다.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투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렌과 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로얀을 바라보았다. "마, 말도 안 돼!" 뚜뚜둑! 마지막으로 손가락의 마디를 푼 로얀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다섯 척의 배를 바라보았다. "그냥 보였다." 그냥 보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지금도 바다 저 멀리에 있어 매우 희미하게 보이는 해적선을 무려 2시간 전에 어떻게 볼 수 있었단 말인가? 해적선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지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고 있었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두 배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해적선은 그들 바로 눈앞까지 오게 되었다. 로얀의 황당한 대답에 멍하니 해적선을 응시하던 렌과 세이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렌, 어서 선실 안으로 들어가." 세리나는 그렇게 당부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옆 함선과의 사이에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은 후 그쪽으로 건너갔다. 로얀은 세리나가 뭘 하건 관심을 젼혀 두지 않고 해적선만을 응시했다. 그런 그를 향해 렌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얀해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로얀에게 거짓말했다고 화냈던건 일단 사과했다. 그런 렌의 귓가로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가." "싫어요." 렌은 로얀의 말에 딱 잘라 거절하며 바다를 보았다. "바다에서의 전투! 노래의 소재 거리로는 딱이죠!" "내 허락 없이 죽지나 마라." 로얀과 렌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싸움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로얀이 있는 함선은 단풍기사단의 단장이 타고 있는 함선을 기준으로 왼쪽 편에 있었다. 단풍기사단의 단장이 타고 있는 함선에는 대마법사인 메리슨과 세리나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선두에 서서 멀리서 다가오는 해적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세리나는 메리슨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실라페."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이루어진 새 모양을 한 실라페가 나타났다. "실라페, 바람의 칼날로 저 배의 돛대를 잘라줘." 세리나의 말에 하늘을 날던 실라페가 날개를 크게 펼쳤다. 쉐에에엑! 그러자 실라페의 날개에서 한 줄기 반월의 바람이 쏘아져 나갔다. 스팟!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해적선의 돛대가 싹둑 잘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자리를 떠나 옆으로 쓰러졌다. 그 거대한 돛대가 옆의 해적선을 덮쳤다. 쿠쿠쿠쿠쿵......! "으아아악!" 해적선이 크게 출렁였고 해적들의 비명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몇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돛대에 깔려 비명을 질렸다. 세리나의 최종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던 듯 그녀는 옆에 있는 메리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염의 불꽃이여, 바람마저 태우며 나아가 불의 장엄함을 뽐내라. 인페르노!" 화르르륵! 메리슨이 주문을 외우자 마나의 기운이 그의 손에서 화염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엄청난 화염으로 변해 해적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쾅! 화르르르......! "크아아악!" "부, 불이다!" 해적들은 갑자기 떨어진 불꽃에 허둥지둥,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쓰러진 돛대로 인해 함선 두 척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한 척에서 시작된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옆의 배에 옮겨 불이 붙었다. 그로 인해 두 척의 해적선은 순식간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메리슨은 마법을 쓰고 난 뒤 뒤로 물러났다. 5서클의 인페르노 마법을 펼친 그였지만 여유있어 보였다. 그는 현재 6서클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이기에 5서클의 마법을 썼다고 해서 쉽게 지치지는 않는 것이다. 세리나는 활활 타오르는 두 척의 해적선에게서 시선을 돌려 실라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러자 실라페는 그녀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는 사라졌다. 눈 깜작할 사이에 두 척의 함선을 잃어 분노한 해적들은 그 분노를 담아 불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피피핑! "불화살이다!" 화살에 기름을 바른 천을 묶어 불을 붙인 화살이었다. 그것은 따로 몸을 피할 곳도 없고, 모든 것이 나무로 된 배 위에서 펼치는 해적선에서는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실라페를 돌려보낸 세리나는 다시 입술을 열었다. 이미 예상 했던 공격이었던 것이다. "실라이론." 휘리릭! 세리나는 몸 속에서 쭈욱 빠져나가는 마나 때문에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그녀가 소환한 정령은 바람의 상급 정령이였던 것이다. 실라페보다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실라이론을 향해 세리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바, 바람의 장벽을 쳐춰." 그러자 바람의 상급 정령 실라이론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윽고 실라이론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는가 싶더니 강한 바람이 세 척의 함선을 감쌌다. 화살 같은 원거리의 물리적 공격을 막아주는 장벽이었다. 세리나는 창백한 얼굴로 메리슨을 바라보았다. "메리슨님, 최대한 버터도 10분이에요." "허허, 수고 하셨습니다. 뒷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세리나를 치하한 메리슨이 뒤에 있는 단풍기사단 단장인 레토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토는 반듯한 용모에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섞인 금발의, 중후한 인상을 지닌 40대 초반의 검사였다. "모두 돌격하라!" 촤아아......! 그의 외침과 함께 세척의 함선은 해적선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레토의 외침이 무색하게 배는 기어가는 수준을 겨우 면할 정도의 느린 속도로 나아갔지만 해적들은 돌격할 수 있는 함선이 한 척밖에 남지 않아서인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해적들의 남은 한 척은 멀리서 끊임없이 불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또한 인페르노로 인해 침몰한 두 척의 함선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해적들이 헤엄을 쳐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세 척의 함선에 달라붙어 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형선 두 척의 타고 있던 백 명의 해적들도 일제히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을 쳐서 함선으로 다가왔다. 채채챙! "와아아아.....! 세척의 함선이 무대가 된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세리나가 부리는 정령과 메리슨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흠... 임페르노라는 건 내 능력 밖인가?" 그는 다름 아닌 로얀이었다. 로얀은 인페르노의 마법수식이 흡수되지 않자 저 마법의 서클은 흡수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게 로얀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렌은 바다를 타고 올라와 그를 덮치는 그림자를 보았다. "형! 피해요!" "시끄러워." 스팟! 두개의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푸화확! 로얀은 덮치려던 해적은 허공에서 몸에 엑스 자의 검상을 그리며 피를 뿌렸다. "히이익!" 렌은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로얀은 생각을 접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해적들을 베기 시작했다. 그러다 돌연 몸을 돌린 그는 렌을 향해 물었다. "어째서 우리 측엔 궁수가 없지?" 그랬다. 로얀은 사움을 하면서 자신이 속한 편의 함선에서 해적선을 향해 날아가는 단 한 발의 화살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해적들은 너무도 쉽게 배 위로 올라왔던 것이다. 렌은 배 위로 올라오는 해적들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선실로 몸을 피하려고 걸음을 옮기다가 들린 로얀의 그 말에 손으로 누군가를 가리키고는 선실로 뛰어 들어갔다. "저기 있잖아요." 후닥닥! 로얀은 렌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가 가리킨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30대 중후반 정도 되어보이는 초록빛 머리카락의 남자로 커다란 롱 보우를 가지고 한 번에 두 발에서 세 발의 화살을 쏘았다. 한데 그가 쏘는 화살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쏘아져 나가 화살 하나에 꼭 한 명의 해적은 죽었고, 어찌다가 두 명이 꼬치처럼 꿰어 죽기도 한다. 가히 명사수라고 불릴만한 사람이었다. 로얀은 고개를 돌려 다른 함선에 있는 세리나를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입술까지 파리해서 금방이라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람의 장벽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다행인 건 저 남은 해적선 한 대가 물러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채챙....! 푸확! 로얀은 세리나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얼굴을 간질이는 나뭇가지를 베듯 해적들을 죽이며 활을 쏘는 남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뚜벅뚜벅...... 그가 다가가자 헌터로 보이는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오호, 반갑구먼." "......" "하하! 같은 용병끼리 인사나 하고 지내자고." 그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화살을 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여유있어 보였다. 로얀은 상대의 실력이 헌터 중에서 뛰어난 편에 속해 약간의 호감을 느낀 데다가 그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이례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다크로얀." "하하, 난 레인이라고 하네. 그리고 보시다시피 헌터지." 로얀은 활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레인을 보며 그가 아마 남은 한명의 A급 용병일 거라 생각했다. 로얀은 그의 뒤에서 다가오는 해적들을 처리했다. 레인은 자신의 뒤를 지켜주는 로얀을 보며 웃음 짓다가 조금 전 바다로 뛰어내리던 녀석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잠수하여 배를 파손시키기 위해 일부러 뛰어내린 것이다. 피피핑! 그의 손에서 떠난 세개의 화살이 물 위를 헤엄치는 해적 세 명의 머리를 관통했다. "메리스님!" 화살을 날린 레인의 외침에 메리슨은 단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배의 난간으로 향했다. 그가 타고 있는 함선에는 오러 블레이드를 검에 씌우고 싸우고 있는 레토가 있었기에 해적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전기의 사슬이여, 죽음으로 이어져라. 체인 라이트닝!" 파지지직! 그의 손에서 생성된 푸른 빛이 바다로 떨어졌다. 파지지직! "끄아아악!" "크아악!" 전기에 온몸이 감전된 해적들은 부들부들 떨다 사지가 뒤틀려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4서클의 체인 라이트닝이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전기의 사슬이여, 죽음으로 이어져라. 체인 라이트닝!" 파지지직! 메리슨은 계속해서 마법을 펼쳤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인은 고개를 돌려 다시 활의 시위를 당겼다. "저기도 이제 처리됐군." "저기까지 화살을 날릴 수 있겠습니까?" "응? 저기?" 레인은 갑자기 물어오는 로얀의 말에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멀리, 해적들의 함선 한 척이 떠 있었다. 레인은 문득 자신이 있는 함선을 둘러보았다. 간판에는 사지가 잘린 참혹한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로얀의 검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흠흠! 애로우 샷이라면 가능하겠는걸." "에로우 샷?" "헌터의 유일한 기술이라고나 할까? 화살에 마나를 담아 쏘아 보내는 것이지." "근데 왜 지금껏 마나를 담지를 담지 않았죠?" "그게... 헌터의 몸에 마나가 아주아주 미약해서 그건 단 한번만 사용할 수 있거든. 한 마디로 일격필살!" 로얀은 그의 말에 선실 안으로 들어가 돛을 잇는, 상당히 긴 로프를 가지고 나왔다. 한데 그것을 화살에 묶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레인은 그가 하는 양을 거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로얀은 로프가 묶인 화살을 레인에게 건넸다. "이걸로 저 함선까지 닿도록 해주십시오." 레인은 로얀이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로얀은 로프의 반대쪽을 돛대에 묶었다. "음... 해적들이 금방 칼로 자를 텐데?" "그 전에 죽이면 됩니다." "끙... 쩝! 그래, 알겠네." 턱! 레인은 함선의 난간 위에 조용히 발을 올려놓고는 활의 시위를 최대한 끌어당겼다. 그런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끼이익! 스스스...... 순간 푸른빛이 화살을 감쌌다. 그리고는 레인은 눈을 뜸과 동시에 시위를 놓았다. 피핑! 슈아아앙! 화살은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해적선과의 거리가 멀어 레인이 쏜 화살이 어떻게 되었는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었지만 헌터로서 거의 최고 수준에 이른 레인은 자신이 쏜 화살이 해적선 난간에 정확히 꽂힌 것을 볼 수 있었다. "후우, 꽃혔군. 이제 어쩔......" 레인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로얀이 이미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이미 로프 위를 달려 해적선의 대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함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크아아! 저 자식들은 뭐야!" 해적선의 함선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짐승의 포효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덥수룩한 수염에 큰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헤인이라는 이름의 해적으로 이번 출전의 총지휘를 맡은 사람이었다. 지금 그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싸움은 완전한 패배였기 때문이다. 이대로 라이던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크, 큰일났습니다!" "또 뭐야!" "이상한 놈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 헤인은 부하의 말에 급히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팟! "응?" 한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스팟! 그림자는 함선의 간판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꺼꺼꺽......" 푸화화확! 투퉁...... 헤인은 얼굴이 처참하게 잘려 떨어져 내렸다. 코가 있는 부분을 검이 가로로 지나간 것이다. 뚜벅. "넌 누구냐!" "이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은 사람." 해적들은 피를 뒤집어쓴 로얀의 섬득한 모습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그를 공격해 왔다. "와아아......!" 스걱! "크아악......!" 푸화확! 로얀의 검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그때마다 해적들의 몸에서 피가 튀고 시체가 간판위를 굴렀다. 해적들은 로얀을 포위하고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쑥. "......" 로얀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게 몸을 숙였다. 그의 눈 안 가득 해적들의 발이 보였다. 스거거걱! 푸화확! "끄아아아악......!" 로얀은 고통의 몸부리치는 해적들을 인정사정없이 베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몸을 회전시켰다. 빙그르르...... 스거거걱! "커커컥......!"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해적들의 시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뚜벅! 주춤! 강철의 심장을 가졌을 것만 같은 해적들이 로얀 한 사람에 의해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모여주다니......" 휘리릭. 바람이 로얀의 오른손을 감쌌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롱 소드를 휘둘렀다. "바람의 칼날!" 쉐에에엑! 그때,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실라페가 썼던 바람의 칼날이 그의 손에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유일한 사람인 레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스걱! 푸화화확! 한 줄기 날카로운 바람이 해적들의 몸을 훑고 지나가자 그들의 상반신이 양분되었다. 엄청난 피가 폭포로 이루었고 해적들이 상반신이 걸쭉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끝났군." 순식간의 백오십여 명가량을 죽인 그는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다 다시 멈췄다. "한 명이 남아 있었나?" "히이익!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해적들의 시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에 바람의 칼날에 베이지 않은 듯했다. 뚜벅뚜벅..... 로얀은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었다. "잘 가라." "으아아아......!" 로얀은 소년의 목 언저리에서 검을 멈추었다. 막상 죽이려고 검을 들긴 했지만 아직 어린 아이였기에 죽이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턱! 그는 소년의 뒷덜미를 잡아채 어깨에 들쳐 메고는 자신이 밟고 왔던 로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로얀은 선실 옆의 함선에서 쓰러진 세리나를 선실로 옮기는 메리슨을 보고는 자신도 선실로 걸음을 옮겼다. "피곤하군. 그 녀석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뚜벅뚜벅...... 로얀은 등을 돌려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실 안의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고 잘 생각이었다. 그의 머리속은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가 빨리 잠들고 싶은 것은 어쩌면 창백한 안색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엘프 때문에 자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선실로 돌아온 그는 피에젖은 옷을 갈아입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 위에 쓰러질듯 누웠다. 그가 잠든 사이 구석에 처박아 둔 옷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나와 선실의 바닥을 적셨다. 쏴아아아......!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거대한 함선 세 척을 두 개의 달이 비추어주었다. 어두컴컴한 밤바다는 고요하기만 했다. 큰 피해 없이 해벅선의 공격을 막아내고 큰 승리를 일궈낸 단풍기사단과 용병들은 갑판위에서 자그마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승리로 인한 기쁨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내일 오후쯤이면 해적들이 있는 흑섬에 도착하기에 미리 긴장을 풀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은 내일부터였으니 지금 옆자리에 있는 동료가 내일 밤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내일 전투에 지장이 갈 정도의 술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단 몇 잔의 술을 사람들은 불만없이, 나름대로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한창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싸움이 끝난 직후 자러 들어갔던 로얀은 아직도 꿈속인지 갑판 위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얀을 보러 온 몇몇 인물들은 모두 지정석이라 할 수 있는 뱃머리에 모여 있었다. 단풍기사단의 단장인 레토를 비롯해서 메리슨과 세리나, 레인과 꼬마 남자아이, 그리고 렌이었다. 그들 중 렌과 세리나는, 세리나가 정신을 차린 후 바다를 보며 바람이라도 쐬려고 밖으로 같이 나와 함선을 돌다가 뱃머리에 로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렌이 이곳으로 가자고 해서 온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레인이 뱃머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레인은 해상전에서 로얀이 펼친 기술에 대해 묻기 위해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함선 한척을 유령선으로 만들어 버린 로얀이 짐짝처럼 던지고 간 전직 해적이었던 소년이 있었다. 한데 이 네 사람이 만나고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메리슨과 레토가 로얀을 만나기 위해 찾아와서 이렇게 여섯 명이 뱃머리에 모여 있게 된 것이었다. "대체 로얀이라는 사람은 어떤사람입니까?" 레토는 해상전이 벌어졌을 때 우연히 옆 함선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쌍검술의 검사는 흔하지는 않지만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로얀만큼 빠르고 정확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해적들은 온몸을 떨며 피분수를 뿜었던 것이다. 해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로얀은 오로지 싸움만을 위해 태어난 투신 같았고, 지옥의 문지기라는 무시무시한 발록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 레토는 로얀이 B급 용병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나 그가 보인 움직임과 건장한 사내의 허리를 가볍게 베어버릴 정도의 힘은 결코 B급 용병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소드 마스터의 움직임을 보는 듯했다. 그것도 숙달된 중급의 소드 마스터의 움직임. 그는 로얀이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소드 마스터라면 적어도 A급 용병은 될 수 있었다. 한데 A급 용병보다 보수도 적을 뿐더러 대우도 다른 B급 용병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뭘까? '첩자?' 레토의 입장선에선 이론 제국의 첩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괴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돌연변이." 렌, 세리나, 레인의 로얀에 대한 평가였다. 모두의 시선이 레인에게로 모아졌다. 렌과 세리나가 대답을 한 직후 레인을 바라보자 메리슨과 레토도 덩달아 그를 바라본 것이다. "왜, 왜 그러시는지......?" 레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모이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는 렌이 눈을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레인 아저씨, 로얀 형을 알아요?" "아저씨라니! 난 아직 총각이라고! 그리고 로얀이라는 청년은 해상전 때 만났지." 아저씨라는 말에 굉장히 민감한지 레인은 발끈해서 외치고는 로얀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근데 왜 돌연변이라는 거죠?" 엘프인 세리나까지 레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해상전을 겪고 나서 로얀을 매우 좋지 않게 보았다. 어떻게 같은 종족인 사람을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무 자르듯 베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세리나의 말에 레인은 헤실거리며 말했다. "그야 그 녀석이 바람이 칼날을 썼거든." "......" 몇 초간의 정적. "푸하하하!" "하하하!" "호호호!" "허허허......" 레인의 말에 해적이었던 소녀을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반응에 레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끙... 진짜라고!" "푸하하! 아저씨, 사람이 어떻게 정령의 기술을 써요?" "호호호, 그건 렌의 말이 맞아요. 정령의 기술은 정령 고유의 기술이랍니다." 렌의 말을 세리나가 뒷받침해 주었고, 그 뒤로도 메리슨과 레토가 그를 놀려먹었다. 역사상 정령의 기술을 펼치는 인간은 단 한 명은 없었다. 정령왕이라면 자신의 속성을 지닌 기술을 모두 쓸 수 있을 테지만 로얀이 정령왕일 리는 없었으니 조금 전 레인의 말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건 엘프인 그녀가 그 기운을 느겼을 텐데 그녀는 그에게서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아무리 속성이 다르다 해도 정령왕에게는 인사를 하는 것이 법칙이었거늘 그녀가 소환한 정령들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웃음이 진정될 때쯤 렌이 레인이 옆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아인 누구예요?" "엇! 이 녀석, 취했잖아!" 레인은 화들짝 놀라며 잠든 소년을 흔들다 등에 업었다. 아무래도 자신만을 빼놓고 대화를 하다 보니 심심해서(?) 술을 들이켠 듯했다. "하하, 이거 참! 이 아이는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이 아인 해적인데 로얀이 저에게 주면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군요." 레인은 웃으며 소년을 등에 업고는 선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아직 어린 소년이 해적이라고 하자 놀라며 한편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어린 소년이 해적질을 하고 있는 이유는 십중팔구 강제로 끌려와 해적이 된 경우였다. "와아! 로얀 형이 적을 베지 않을 때도 있구나." "그사람도 사람은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군요." 렌은 신기해 하며 탄성을 터트렸지만 세리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생명을 중시하는 엘프의 입장에서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인 로얀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비록 싸움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녀 자신도 용병일을 하며 생명을 해한적이 많았지만 로얀처럼 아무런 없이, 짚단을 베듯 사람을 베진 않았다. "허허허! 아무튼 신기한 사람이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렌과 세리나의 반응에 메리슨과 레토는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만약 첩자라면 너무도 무서운 적입니다." "허, 양날의 검이라는 건가?" 그들의 반응에 세리나는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첩자 같지는 않아요. 그 사람의 눈동자는 너무도 슬퍼보였거든요." "헤에! 누나, 로얀 형이 싫은 건 아니지?" "슬픈 눈동자를 가진 것과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사람은 싫어." 세리나는 또다시 로얀이 싸우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휘두르는 검엔 살기가 너무 짙었다. 그녀는 그 기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쏴아아.....! 이렇게 파티는 막을 내리며 하고 있었고, 세 척의 함선은 여전히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3장 은빛 여우 얀 로얀이 잠에서 깨어난 건 해적들과의 해상전이 있고 하루가 지나서였다. 선실에서 눈을 뜬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밖으로 나와 뱃머리로 향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잠을 자긴 했지만 사람들의 말소리와 걸음소리, 무엇을 하는지 요란하게 들리는 쿵쾅거리는 소리때문에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갑판을 밟으며 걸어나온 로얀은 배가 돛을 내리고 해안가에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함선의 앞쪽으로는 칠흑의 돌을 쌓아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섬이 보였다. 섬 중간에는 돌산하나가 덩그러니 솟아 있었는데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아 삭막함이 느껴졌지만 마왕의 섬처럼 보이는 기괴한 모양으로 인해 요새로써는 최고로 보였다. 그리고 그 둘레를 흰 모래사장이 빙 두르고 있어 흑색의 돌산과 크게 대비되었다. 로얀과 일행은 무사히 해적왕 라이던이 있는 흑섬에 도착한 것이다. 여름의 대륙과 가을의 대륙은 몬스터가 많이 없는 곳이라 해적들 외에는 길을 가로막는 존재가 없었기에 이렇게 제 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흑과 백의 멋을 가진 흑섬을 바라보다가 해안가로 시선을 돌렸다. 단풍기사단과 사람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잠결에 들은 사람들의 말소리는 무거운 물건을 들면서 내뱉는 그들의 기합소리인 듯했다. 그리고 쿵쿵거리는 소리는 짐을 놓는 소리인 듯했다. "이제 일어났어요?" "넌 안 가냐?" 로얀의 말에 렌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의 뒤로 레인과 세리나가 보였다. "잠탱이 형을 두고 갈 순 없잖아요." 타탓! 레인은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 로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자네가 말 좀 해봐! 어제 분명 자네가 바람의 칼날을 썼지 않는가!" 마치 섬광처럼 빠른 움직임! 그가 얼마나 다급한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로얀은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난 파장을 알기에 담담히 말했다. "으아아......!" 그리고 그의 말에 절규하는 레인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바보 취급을 당했던가? "허허허! 레인, 그만 좀 하게나." "으아아......! 다가오며 말하는 메리슨의 모습을 보며 레인은 더욱 절규했다. 그러나 레인이 절규를 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 로얀의 눈은 해안가를 훑고 있었다. 뚜벅두벅...... 그의 발이 갑판에서 떨어졌다. "엇! 형, 어디 가요? 이제 모두 내려야 한다고요!" 렌의 외침을 뒤로하고 로얀은 선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턱. "선실에 두고온 짐을 가지러 갔겠지. 곧 올 게다." 메리슨을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자 렌은 로얀에게는 짐이 없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한데 아까부터 말이 없던 세리나가 해안가와 흑심 전체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이상해요." 그녀의 말에 모두 시선이 모아졌다. "명색이 유령해적단의 소굴인데, 우리가 온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한데 아무도 없다느 것이 이상하군요." 확실히 그랬다. 해적들 소굴인 흑섬에는 아무도 없었다. 높이 솟아 있는 돌산에는 해적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해안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해안가에 우뚝 솟아 있는 망루에도 사람이 없었다. 너무도 깨끗한 모래사장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음 그렇긴 하구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메리슨의 말을 받으며 레인이 오랜만에 해안가를 응시했다. 뚜벅뚜벅...... "응? 그게 뭐예요?" "창이다." 렌의 말에 선실에서 나온 로얀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윽! 그건 저도 안다고요?" 그의 양손에는 창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허어! 선장실에 있던 건가? "예." 함선마다 있는 선장실은 역시나 다른방과는 달랐다. 배를 책임지는 선장들이 머무는 선실답게 크기도 크고 여러 가지 가구와 아담한 장식까지 되어 있었다. 한데 군함의 선장실에는 어김없이 무기들이 장식용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선장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간 것은 군율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장이 배의 갑판에 나가 있었던 탓에 선장실에는 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뿐더러 여기 잇는 사람들은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행동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뚜벅뚜벅..... 로얀이 선수를 다가가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안에 있던 창의 날이 정면으로 세워졌다. 후웅...... 그의 오른손 근육이 불끈거리는가 쉽더니 창이 그의 손을 떠나며 무거운 바람소리를 내었다. 쉐에에엑! 퍽! 멋지게 날아간 창은 모래사장에 박혔다. 한데 보통 모래에 박히는 소리와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얀은 그가 던진 창이 바닥에 꽂힘과 동시에 남은 창을 들어올렸다. 스윽. 후웅...... 쉐에에엑! 퍽! "......"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해안가에서 짐을 나르던 사람들도 행동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로얀의 주변에 있던 레인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몸이 굳어버렸다. 그들은 혹시 로얀에게 정신병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취이익! 취이잇! 로얀이던진 창이 꽃혀 있던 곳에서 붉은 액체가 튀어 올랐다. 액체는 햐얀 모래사장을 온통 붉게 불들이고 있었다. "많이도 숨어있군." "꿀꺽!" 사람들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파파팟! 그때, 마법처럼 눈앞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땅 속에서 수십명의 해적들이 솟아오른 것이다. 해적들은 얼굴에 천을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래사장 속에서 메리슨과 나머지 일행이 모두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다가 갑작스런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이 발각됐다는 것을 깨닫고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해적들로 인해 해안가는 순식간에 싸움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쿵! 채챙......! 짐을 나르던 단풍기사단과 용병들은 들고 있던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후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해안가에서 물건의 운반을 지휘하고 있던 레토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적의 매복이다! 모두 맞서 싸워라!" "와아아.....!" 채채챙......! 매복해 있던 해적들의 출현에도 레토는 기사단의 단장답게 침착하게 대처했다. 함선의 뱃머리에서는 메리슨을 비롯한 사람들이 로얀을 각기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슨은 떨리는 목소리로 로얀에게 말했다. "자, 자네... 어떻게 알아차린 건가?" "보이더군요. 모래알이 들썩이는 것이." 그의 말에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래 속에 매복해 있는 적도 숨을 쉬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잘 훈련된 자들이었기에 그렇게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 바로 앞에서 짐을 부리던 기사들이나 용병들도 해적들의 매복을 알아차릴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 형은 괴물이었어." "내 태어나서 자네 같은 돌연변이는 처음 보는군." 렌과 레인의 말에 로얀은 한마디로 끊었다. "반은 죽겠군." 그의 말에 메리슨이 무슨 말인지 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곧 그 말의 뜻이 눈앞에 드러났다. 촤아악......! 파팟! 바다 속에서 잠수하고 있었던 해적들이 치솟아 올랐다. "와아아......! 채채챙......! 사방에서 협공을 받은 단풍기사단의 기사들은 순간 당황했었지만 일국의 기사답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해적들을 상대해 나갔다. 파팟! 가벼운 복장에 날카로운 단도를 쥔 해적이 솟아올랐다. 그의 앞에 있던 단풍기사단의 기사가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해적이 훨씬 빨랐다. 푸욱! 푸쉬쉬......! "크아악!" 해적의 단도는 기사의 목을 꿰뚫고 붉은 피를 머금었다. 기사의 무거운 갑옷이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기사들은 그 무게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발목까지 푹푹 모래에 빠졌다. 단풍기사단이 무거운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해안가를 다니고 있는 이유는 기사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갑옷은 검과 마찬가지로 기사를 상징하는 무구이기 때문에 절대 버려선 안된다고 교육받았다. 그랬기에 지금같은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갑옷을 벗어던지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해적들은 무척이나 가벼운 차림에 양손에 단도나 짧은 숏 소드만을 들고 기사들을 가볍게 요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래시장에서의 전투에 숙련된 이들이었기에 날랬다. 그리고 단도나 짧은 소드로는 단단한 플레이트 메일과 철 투구를 뚫을 수가 없었기에 기사들의 목만을 노렸다. 그토록 당당하던 단풍기사단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하나둘 모래사장에 쓰려져갔다. 모래사장에는 기사들의 시체만 한 구, 두 구 늘어나고 있었다. 푸푹! "크악!" 쿵! 갑옷의 무게 때문에 묵직해진 기사의 몸은 모래 안에 머리를 박을 때마다 커다란 소리를 내었다. "크으윽! 모두 힘을 내라!" 우웅......! 후우웅......! 레토는 부하들의 죽음을 보며 비통에 찬 음성을 터트렸다. 그의 검에 맺힌 푸른색 오러가 빛을 뿌리며 해적들의 몸뚱이를 두동강 내었다. 푸화확! "헉헉......" 아무리 소드 마스터인 그라 해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모래사장에서 싸우다 보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푹. 레토의 발이 엉켜 오른쪽 무릎이 모래에 잠겼다. 파팟!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해적의 공격에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피잉......! 툭! 레토의 시야에 머리에 화살을 꽃은 채 모래에 몸을 묻은 해적이 들어왔다. 고개를 둘러보니 함선 위에서 레인이 활을 들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레토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리슨은 난처한 듯 싸움터를 바라보았다. 워낙에 뒤섞여 싸우다 보니 마땅히 쓸 만한 마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 옆에 서 있던 세리나 역시 지난번 해상전 뒤로 휴식이 필요했기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싸움터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활을 쏠 만한 한 힘도 그녀에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레인은 계속해서 활을 쐈다. 이런때를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라도 한듯 그의 화살통에는 화살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커다란 짐 속 또한 화살이 대부분의 자리를 자지했다. 스르릉......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뽑았다. 검날에 겁에 질린 렌의 얼굴이 비쳤다. "끝날 때까지 여기에 있어라." 팟! 그가 함선 밑으로 뛰어내렸다. 상당히 높은 높이었지만 그는 가볍게 착지했다. 타탁! 하얀 모래가 그의 발목을 묶여두려 손을 뻗기도 전에 그의 몸은 그 자리를 떠났다. 스거걱! 부우웅! "크아악! 그느 거칠 것이 없었다. 그에게 달려드는 해적은 한 명도 예외없이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진하는 그를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어떠한 방어구도 입지 않고 맨몸으로 짧은 무기를 휘두르는 해적들은 로얀의 쾌검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빠른 움직임은 모래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았다. 로얀은 해적들을 베며 푸른색 오러를 뿜어대는 레토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붉은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화려한 검이라도 날이 없다면 그저 장식용에 불과하지." "......" 레토는 로얀의 말에 찬물을 뒤집어 쓴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 기사들의 갑옷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레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숙달된 기사들보다 로얀을 비롯한 B급 용병들이 훨씬 잘 싸우고 있었다. 보통 신분이 높은 기사라면 일개 용병의 가르침에 분노를 터트렸겠지만 레토는 달랐다. "모두 갑옷을 벗어라!" 레토의 말이 해안가에 울려 퍼지자 싸움 중에 기사가 갑옷을 벗는 기괴한 상태가 벌어졌다. 상관의 말은 절대적이였기에 기사들은 허둥지둥 갑옷을 벗었다. 벗는 도중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아 죽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사들은 갑옷 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와아아아.....! 갑옷을 벗은 기사들은 기합을 터뜨리며 힘차게 해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계속해서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다가 벗고 나니 몸이 가벼워져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바뀐 기사들의 움직임과 기세에 해적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로얀은 그것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곧장 해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타탓! 레토는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얀이 처음으로 웃었기 때문이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밤마다의 차가운 바람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흰색 막사를 툭툭 쳤다. 스산한 바람이 지나다니는 길에 햐얀 막사가 우뚝 서 있었다. 해안가 위쪽에 세워진 여러 개의 막사 위로 달빛이 비쳤다. 다른 막사들과는 달리 유난히 커다란 흰 막사에 달빛이 강렬하게 비치고 있었다. 막사 안에서는 지금 여러 개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후우... 모든게 제 제 잘못입니다." "휴우... 지금은 잘 잘못을 따질 때가 아닐세." 메리슨의 위로에도 레토는 단풍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적의 매복을 예측하고 미리 대비하지 못한 그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싸움 도중 갑옷을 벗으라고 로얀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전멸을 면치 못하지 못했으리라. 메리슨과 일행은 매복해 있던 해적들을 모두 해치우고 이곳에 전쟁터에서 흔히 쓰는 막사를 지었다. 그리고 지금 막사 안에는 메리슨과 레토를 비롯해 기사단의 부단장과 세리나와 레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의 피해로 인해 작전을 다시 짜야 했던 것이다. 일단 기사들은 간단한 보호구를 제외하고는 갑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돌산으로 올라가 싸워야 했기에 플레이트 메일은 짐만 될 뿐이었다. 또다시 과오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안가에서의 적의 매복으로 단풍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해상전에서도 사상자가 있었기에 현재 용병을 포함해 240명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적의 수는 대략 1,300명. 더구나 그들은 마왕의 성과 같은 튼튼한 요새 안에 있었다. 메리슨이 이끄는 무리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상화이 이렇다 보니 누구 하나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레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얀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해얀가의 싸움을 통해 첩자가 아닐 거라 믿었다. 아니, 로얀이 적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레토는 로얀이라면 이 상황을 풀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섬을 둘러본다며 나갔다고 하더군요." 레인의 말에 레토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다시 로얀이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막사 안의 공기는 무겁기만 했다. "후우웁! 하아....." 모두들 앞으로의 일 때문에 시름하고 있을 때 로얀은 검은색 바위 위에서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바다의 향기가 가슴 가득 담기는 것만 같았다. 한데 짙은 어둠이 몸을 휘감은 어두운 밤에 검은 바위에 서 있으니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쏴아아......! 눈을 감고 밀려왔다 나가는 파도소리를 듣던 그의 귓가로 미세한 소리가 잡혔다. 투툭! 작은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달빛에 언뜻 어떤 그림자가 보였다 사라졌다. '해적인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흑섬에 동물이 살 리 없었다. 흑섬에서 살아 숨쉬는 것은 사람들뿐이었다. 해적이라는 사람. 스윽 로얀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흑섬 위를 오르던 로얀은 그림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나 그림자의 정체는 사람이었다. 등을 보이고 암벽을 타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움직임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젊은 남자인 것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이 그들을 관찰하듯 지켜 보고 있었다. 로얀은 그를 뒤쫒아 암벽을 탔다. 남자는 아직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아 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치 못한 듯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흑섬 중앙에 잇는 돌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저기가 해적들의 소굴이군' 잠시 후 돌산의 정산에 도착한 로얀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해적들의 소굴을 바라보았다. 화톳불이 해적들의 소굴을 밝혀주고 있었다. 돌산 중턱에는 평평한 땅이 있었다. 그 위에 작은 집들이 여기저기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보초를 서고 있는 해적들만 해도 백 명은 넘는 듯했다. 스슥. '어디로 가는 거지?' 로얀은 그림자의 주인이 다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느 해적들의 소굴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해적이라 그런지 그의 움직임은 상당히 재빨랐다. 그의 뒤를 따라갈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로얀의 발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응?' 어느 정도 내려가자 그림자의 주인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멀리 거대한 동굴만 언뜻언뜻 보였는데, 아직 해적들의 소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공주가 잡혀 있는 곳인가?" 로얀은 눈앞에 모습을 보인 거대한 동굴을 바라보았다. 괴물의 입처럼 생긴 동굴 입구는 굉장히 컸는데, 그 앞에는 보초로 보이는 네 명의 해적이 두 개의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동굴릐 입구부터 시작해서 아래쪽으로 길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저것은 해적들의 소굴로 들어가는 길인 듯했다. 로얀은 저 동굴 안에 공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림자의 주인을 덮쳐야만 했다. 상대가 상당히 재빨랐기에 뒤에서 빠르게 덮쳐야 했다.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팟! "읍!" 무사히 그의 입을 막는 데 성공한 로얀은 그림자의 주인을 데리고 벽에 붙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흑섬의 돌이 워낙에 들쭉날쭉하다보니 몸을 숨기기에는 좋았다. "묻는 말에 맞으면 고개를 끄덕여." 흠짓. 갑작스런 적의 공격에 당황해서인지 해적의 몸이 떨렸다. 한데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억지로 로얀의 손을 조금 밀어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엔?" "......" 정령왕이 된 이후로 처음으로 크게 놀란 로얀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신의 과거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 얀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의 손이 풀리자 얀으로 짐작되는 인물이 몸을 돌려 로얀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용병세계에서 은빛 여우라 불리는 얀이었다. "제길! 그 정떨어지는 무뚝뚝한 목소리는 시엔의 것이 맞는데......" 얀은 상대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얼굴의 소유자가 아니자 욕을 뱉었다. 자신을 덮칠 때까지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상대방은 고수이다. 얀은 해적들을 이용하기 위해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정떨어지는 목소리라 미안하군. 과거에는 시엔이었지만 지금은 로얀이다." "뭐?" 턱. "읍!" 로얀은 급히 손을 들어 얀의 입을 틀어 막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굴입구를 지키던 해적들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로얀과 얀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해적들을 보며 로얀은 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고 검을 뽑으려 했다. 휘이익......! 퍽! 휘이익......! 퍽! 날카로운 단도가 얀의 손끝에서 튀어나가 다가오던 두 해적의 미간에 꽂혔다. 해적들은 몸을 바르르떨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자 남은 두 명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했다. 피리였다. 적의 기습을 알리는 도구였다. 휘이익.....! 퍽! 그러나 그들의 손보다 얀의 손과 단도가 빨랐고, 날카로운 단도는 그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씨익. 얀은 웃으며 로얀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곱슬거리는 금발, 장난기 어린 목소리까지 그는 변한것이 없었다. 로얀은 얀의 옆에 떠 있는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를 바라보았다. 그가 단도가 훨씬 빨라진 것은 실프의 힘임을 알 수가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어이, 어이! 난 네가 어떻게 살아 있으며, 네 모습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가 더 궁금해. 난 네가 죽은 줄 알고 무덤까지 만들었다고." 얀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해적들이 오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얀이 동굴 쪽으로 가자 로얀은 그가 용병으로서 공주를 구하러 온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갔다. 얀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적들의 미간에 박혀 있는 자신의 단도를 회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도 단도만은 반드시 회수하던 그였다. 동굴의 벽 쪽에 횃불이 꽂혀 있어 동굴 내부는 어둡지 않았다. "히힛! 있다, 있어!" 얀은 안으로 달려가 품속에서 커다란 가죽으로 된 자루를 꺼냈다. 그의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로얀이 눈살을 찌푸렸다. 로얀의 눈앞에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보석들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해적들이 약탈한 물건들을 놓아두는 금고같은 곳인 듯했다. 로얀은 얀의 뒷모습을 보다 한숨을 쉬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돈을 밝히는 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가 은빛 여우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단검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약삭빠르게 이곳저곳에서 돈을 챙기는 그의 수전노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밖으로 나온 로얀은 자신의 검 한 자루를 뽑았다. 하얀 검신이 달빛에 빛났다. 우웅! 롱 소드가 푸른 오러를 머금었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동굴 옆에 있는 벽 쪽으로 향했다. 휘익! 쾅! 그가 검을 휘두르자 푸른 오러가 출렁이며 흑색 돌벽을 강타했고, 돌벽은 굉음과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삐이이이......! 흑색 돌산 가득 피리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밑에 있는 해적들이 이렇게 큰 굉음을 못 들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타탁! 얀은 굉음에 놀라 급히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의 손에 들린 자루는 그 짧은 시간에 많이도 담았는지 꽤나 불룩해져 있었다. "야! 이 자식, 너는 어떻게 내가 잘되는 걸 못 보냐? 얀은 왔던 길로 산을 내려가는 로얀의 뒷모습을 보며 그를 뒤쫓았다. 멀리서 해적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헥헥......! 로얀이 산책을 하던 바위 위까지 내려온 얀은 숨을 헐떡이고, 그 앞에는 로얀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었다. "이 자식, 완전 괴물 됐잖아? 헉헉......" "작은 복수였다." 지금 이 순간 로얀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친구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짓는 사람말이다. 그의 얼굴엔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헉! 뭔 복수?" "전쟁터에서 레이나의 편지를 읽어주는 데 네가 얼마의 보수를 요구했더라?" "아...그, 그게... 네가 편지를 외울 때까지 밤새도록 읽게 했잖아!" 로얀은 십 년간의 용병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레이나의 편지였다. 싸움을 할 때에도 그 편지를 떠올리기 위해 얀에게 편지를 외울 때까지 읽어달라고 한것은 사실이었다. 하나 그 보수는 1실버.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로얀의 급료는 1실버였다. 급료를 모두 가져가면 레이나에게 보낼 약값이 없어지기에 얀은 처음에는 50코버만 받았다. 그리고 남은 50코버는 레이나에게 줬던 것이다. 로얀이 전쟁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4실버를 받는 용병이 되어 있었지만 얀의 보수는 너무도 비쌌다. 그는 로얀의 급료가 오르자 1실버를 모두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도 없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 있는 추약한 외모 때문에 언제나 무시받던 로얀이 유일하게 말을 튼 친구는 얀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얀은 그때를 생각하다 얀 옆에 떠있는 실프를 보았다. "정령술도 배웠냐?" "흐흐흐, 당연하지. 이몸이 이제 너도 요리......" 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로얀의 검 때문이었다. 한데 그것이 그냥 검이라면 웃고 넘어갔겠지만 그 검에는 푸른색 오러가 어려 있었던 것이다. "큭! 괴물 같은 자식. 쳇쳇!" 로얀이 검을 거두자 얀이 주위의 돌을 툭툭 차며 그렇게 투덜거렸다. 오러는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의 정령인가?" "어? 그래.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 예쁘지? 사랑스럽지?" 실프는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긴 머리를 드리우고 있는, 매우 귀엽게 생긴 정령이었다. 얀의 실프를 본 로얀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바다에서 노는 실프를 질리도록 봤기 때문이다. "나의 절친하면서도 사랑스런 친구. 인사해." "앞의 수식어... 너의 목을 벨 수도 있어." "하하! 이런 깍쟁이 같으......" 스윽. 얀의 목에 닿은 두 개의 검에는 모두 오러가 맺혀 있었다. 만약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테지만 얀은 이 녀석이라면 이런 일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제길! 연약한 내가 참아야지. 실프, 인사혀." 로얀은 검을 거두고 실프를 바라보았다. 한데 실프는 어느새 얀 뒤로 숨어 있었다. [까악......!] "응 실프, 왜 그래?" 실프는 몸을 떨고 있었다. 두려움에 잔뜩 질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그치만 무서운데......] 로얀은 실프의 말을 들으며 얀을 바라보았다. "그냥 돌려보내." 얀은 실프가 갑자기 몸을 떨며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프가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면 지금 실프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질 못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미얀하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실프, 돌아가." 실프는 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그런 실프의 모습에 얀은 로얀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로얀은 얀에게 넌지시 물었다. "실프도 말을 하냐?" 로얀은 얀이 실프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의아해 물어본 것이었다. "뭐? 쯧쯧... 역시 정령에 대해 모르는구나. 정령은 상급 정령이상부터 말을 할 수 있어." 얀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승리의 미소를 드리운 채. "정령들 모두가 말을 하긴 하는데 정령 고유의 말이라서 같은 정령이 아니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 로얀은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두 개의 달을 눈동자에 담았다. 그는 바람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난 인간이 아닌 정령이었지....." "뭐?" "아냐. 너에게 전해줄 말이 많다. 따라와." "엥, 어디 가는데? 아! 넌 어떻게 여기에 왔냐?" "그만 조잘대고 그냥 따라와." 로얀이 앞장서서 막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그 뒤를 얀이 따랐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점점이 새겨졌다. 얀과 함께 막사로 향하면서 로얀은 그에게 최근 이야기, 즉 자신이 어떻게 여기 흑섬에 오게 되었는지부터 말하기 시작했는데 얀이 알면 곤란한 부분은 적당히 꾸며서 둘러댔다. "아아! 네가 흑안의 검사 다크로얀이었구나!" "어떻게 알았지?" "네가 워낙에 발이 넓잖아." 얀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얀의 모습에 로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고, 잠시 후 현재의 이야기를 모두 끝냈다. 막사까지는 꽤나 먼 데다가 매우 천천히 걸었기에 아직도 막사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로얀은 이제 묻어두었던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드래곤의 브레스가 팔레인에 떨어졌고 그 순간 로얀은 자신이 죽었다고 말했다. "헉! 유, 유령!" 후닥닥!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얀은 엄청난 속도로 로얀에게서 물러났다. "유령이 그림자 있는거 봤냐?" 그 말에 슬그머니 다시 다가와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도 죽었던 인간이 되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윽! 그럼 너 리치가 된 거냐?" "리치가 살점 붙은 것 봤어?" "하긴, 검을 쓰는 리치도 돌아본 바가 없지." 리치라는 것은 마법사들이 무한한 생명을 위해 악마와 계약해 다시 살아난 존재로 언데드인 스켈레톤처럼 뼈밖에 없는 존재였다. 얀은 로얀의 정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너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구나!" 로얀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얀의 말에 장난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화를 내지 않고 다시 해안가에 찍혔다. 로얀은 걸어가며 아직 말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빛이 다시 생명을 주었고, 영원한 생명과 함께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대가는 뭔데?" 얀은 다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는 언제나 거래와 관련된 일에는 냉정했다. 로얀의 얼굴은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어떠한 것을 받았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더구나 생명을 공짜로 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건 없다." "하아... 정말이냐?" "그래. 단지 영원한 세월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거겠지." "젠장할 녀석!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 영원히 사는 거라고." "너도?" "난 다르지. 암암!"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일단은 안심이 되어서인지 얀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럼 이름은 왜 바꾼 거냐?" "아아! 다시 태어나는 조건이 다크로얀이라는 이름을 받는 거였어." "뭐? 살다살다 멸 희안한 일도 다 있군." 얀은 로얀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죽었다가 살아났고, 강인한 육체와 눈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없었던 눈이 생긴 것이 친구로서는 기쁘긴 했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항상 어떠한 행운이나 힘에는 그에 걸맞는 대가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얀은 친구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이젠 뭐 할거냐?" 얀의 질문에 로얀은 다시 과거사를 꺼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진행될수록 얀의 얼굴은 차겁게 식어갔다. 이리아와 레이나의 애인이라는 카엔이 드래곤이었다는 것이 충격이었지만 그들에 의해 팔레인이 사라졌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너무도 단순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친구인 로얀이 끔직이도 아끼던 동생 레이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드래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그래." 얀은 로얀에게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과 살벌한 눈동자가 로얀의 얼굴 바로 옆에 있었다. 턱! "너! 이럴 생각으로 다시 살아난 거냐? 레이나가 하늘에서 퍽이나 좋아하겠다. 너 미쳤냐!" "......" "말해 봐!"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 그래, 고작 소드 마스터의 힘으로 드래곤 두 마리를 잡으시겠다고?" 너무도 무모했다. 기껏 살아났다 다시 개죽은당하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떻게 드래곤을 죽인단 말인가? 더구나 한 마리도 아닌 두마리를! "강해질 거다." '나에겐 네 개의 목숨과 봉인된 힘이 있다.' "나에겐 무한한 생명이 잇으니 그동안 강해질 거다. 어떻게든 죽인다!" 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꼭 그렇게 해야겠냐?" "난 레이나를 위해 살아왔다."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어? 너의 인생 좀 살아봐. 언제까지나 레이나만 부르며 살 건데!" 로얀은 가만히 얀의 말을 들었다. "십년이다. 넌 십 년 동안 레이나를 위해 피 속에서 살아왔다. 그정도면 오빠로서 충분히 할 만큼 한 거다." 로얀은 멱살이 잡힌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간간이 구름이 꼈지만 밤하늘은 너무도 맑았다. 그 밤하늘에 로얀의 슬픔에 젖은 듯한 촉촉한 음성이 번져 나갔다. "하늘을 보고 싶었어." "뭐?" "내 운명을 이렇게 만든 하늘을 보고 싶었다." "......" "그리고 난 다시 살아났을 때 희망을 품고 있었어. 나처럼 레이나도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난 레이나의 얼굴을 본적이 없어. 이대로 저승에 가서 바보같이 동생도 못찾으면 안되는 거잖아!" 새롭게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로얀이었다. "그날... 마을로 돌아왔을 때 드래곤 옆에 있던 레이나는 너무도 행복한 것 같았어. 그런데... 그런데!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그들을 찾아내 죽이겠어. 내 영혼이 부서진다 해도 죽이겠어!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죽여버릴 거다!" 스륵. 얀은 잡았던 멱살을 놓고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득한 살기가 내비치는 로얀의 눈동자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로얀이 되버린 시엔이라는 녀석은 한번 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족종 중에서도 상 독종이었다. 얀은 마음을 씻어내려는 듯 입 안 가득 바닷바람을 담았다. "하아......" 스윽. 얀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다시 몸을 돌린 그는 손을 들어올렸다. 턱. 그의 손이 로얀의 어개를 잡았다. 얼굴은 웃고 잇었지만 그의 손을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로얀의 몸전체에서 느껴졌다. "내 친구가 드래곤 슬레이어라니!" "......" 로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런 얀의 모습에 로얀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새겨졌다. "드래곤 몸뚱이는 보물이니까 나도 좀 줘야 한다. 그리고 내 허락 없이 이상한 데서 죽지마라. 천하에서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비참하게 죽으면 내가 쪽팔리잖아." "고맙다....." 그 말에 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가 오른팔을 로얀의 어깨에 둘렀다. "이거 천하의 무정남인 너에게서 고맙다는 소리도 다듣고,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더 오래 살텐데?" "제길, 한 번도 안 져요. 아까 가자고 한데나 가자고." 피식. 로얀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얀과 나란히 걷던 그는 차마하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거저 얻은 힘이 아닐지도 몰라. 봉인이 풀릴 때마다 뭔가를 잃어야하니까......' 4장 어둠속에서 천 명을 베다 메리슨과 사람들은 아직도 막사 안에 모여 앉아 있었다. 막사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단풍기사단의 절반이 죽은 지금 이 인원으로 해적들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용병들은 돈을 받고 이 일에 고용됐으니 책임감이 같은 게 없었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팔란 왕국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공주를 구출할 결심을 하고 있었고, 또 반드시 그래야 했다. 기사들이 생각한 것은 전면전이 아닌 몰래 소굴로 침투하여 공주만 빼내는 것이었다. 공주가 있는 곳은 이제 몸을 회복한 세리나가 정령을 소환하여 알아볼 수 있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안으로 침투하는 것이었다. 해적들의 소굴은 마왕의 성처럼 솟아있는 돌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서 여간해서는 접근조차하지 못했다. 세리나가 실프를 소환해 알아보니 역시나 공주는 해적 소굴 가장 중심부에 있었고, 지키는 사람도 한두 명이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자신들이 해적들의 이목을 끌 동안 용병들과 메리슨이 공주를 구하라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메리슨은 그 의견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말이 이목을 끄는 것이지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엇다. 처음에 흑섬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이 정도 인원이면 해적들은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곳에 도착해 보자 상황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기사들의 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으니 그들이 실행할 수 있는 작전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과 같은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작전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메리슨은 기사단장 레토를 보며 눈을 감았다. '정령 다른 방법니 없단 말인가?' 터벅터벅...... 그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막사의 입구가 열렸다. "엇!" 들어온 사람을 보고 가장 반긴 건 레토였다. 막사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로얀이었다. 흠짓. 레토는 어정쩡하게 일어선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어! 안녕하쇼?" 로얀의 뒤를 이어 한 남자가 들어왔는데 그는 해적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토는 더 이상 들어는 사람이 없자 안도하며, 해적으로 보이는 자의 인사를 무시한 채 로얀을 향해 물었다. "첩자를... 잡아온 것입까?" "처, 첩자라니! 어딜봐서 내가 해적 같다는 거야!" 얀이 발끈해 외쳤다. "어딜 봐서라니......" 레토의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얀의 전신을 훑었다. "이, 이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은 거라고......" "일?" "도둑질이지." 레토가 의하해 하며 묻자 로얀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도둑질이라니!" 격렬한 얀의 반응을 뒤로 하고 세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사람은 누구죠?" "친구." 로얀의 잘막한 대답에 모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에게 친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오오오!" 얀이 로얀을 제치고 나와 세리나의 손을 잡았다. 덥석! 흠짓.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하하, 전 얀이라고 합니다. 용병세계에선 은빛 여우라고 불리고 있죠. 나이는......" 스릉......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레토가 검을 뽑았기 때문이다. 레토는 얀이 로얀의 친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에게 손을 잡힌 세리나가 당황하자 기사도가 발동해 자동적으로 검을 뽑은 것이다. "자네 너무 무례하군!" "쳇! 나한테 이러면 안 될 텐데요?" 얀은 이들의 상황을 로얀을 통해 상세히 들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당신들은 공주님을 구하러 왔지만 기사단 절반이 해적들의 습격을 받아 죽는 바람에 마땅한 방법이 없어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요?" 레토는 검을 넣고 로얀을 살짝 쏘아보았다. 그런 얘기까지 했냐는 의미였다. 그의 입장에선 얀은 제삼자였고 아무리 로얀의 친구라 해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흐흐! 저에게 공주님을 구하는 건 물론이고 해적들을 몽땅 죽일 수 있는 묘책이 있는데......" "뭐!" 얀의 말에 로얀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특히 메리슨과 레토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험험! 일단은 앉아서 말하죠." 얀은 누가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의자를 빼내서 세리나 옆에 앉았다. 로얀도 얀의 건너편인 레인 옆에 앉았다. "저 녀석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가능합니다." 얀은 로얀을 힐끔 바라본 후 자신의 묘책에 대해 말했다. 먼저 얀과 엘프인 세리나가 물의 정령을 소환하여 해적 소굴에 비추고 있는 불빛을 모두 없앤다. 여기서 불빛이란 해적 소굴을 비추고 있는 화톳불을 말하는 것이다. 물의 정령으로 모든 불빛을 없앤 후 음유시인인 렌이 힘을 발휘해 달을 구름으로 가린다. 다행히 하늘에 구름이 간간히 보이니 렌이 구름을 조금만 몰고 와 두 개의 달을 가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또 희미하고 작은 구름이라도 달빛을 약하게 만들면 된다고 얀은 덧붙여 말했다. 메리슨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흠...불빛을 모두 없애서 뭘 하자는 겐가?" "훗! 그런 후 로얀을 들여보내 몽땅 죽여야죠." 쾅.....! "지금 장난치는 건가!" 레토가 탁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작전이었다. 불빛을 다 꺼트린 후 로얀을 투입시킨다니! 아무리 로얀이 강해도 그 또한 어둠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해적들은 천 명이 넘었다. "자자, 진정하고 자리에 앉게나." 메리슨이 연장자답게 레토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혔다. 실제 나이는 세리나가 훨씬 많았지만..... 레토의 반응에 얀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그렸다. "게다가 해적왕은 소드마스터라고요." 세리나는 엘프답게 얀의 눈동자 속에 보이는 진실함을 집어내었다. 이것은 엘프의 특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얀의 말에 거짓이 없다 해도 그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그것이 가능하긴 한가요?' "물론! 그리고 내 친구는 어둠속에서도 해적들이 보이거든요." 얀의 장난기어린 미소가 마음에 걸렸지만 메리슨은 별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뜻은 친구의 말이 옳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라고 볼 수 있었다. "알겠네. 로얀군은 어떻게 하겠나?" "메리슨님!" 레토는 그런 황당한 작전을 말리려 하였지만 메리슨의 눈빛은 확고해 보였다. "해보죠." 로얀의 잛은 대답에 메리슨은 다시 한번 수염을 쓰다듬었다. 로얀이 더 이상의 질문을 거리는 것 같아 메리슨은 얀에게 물었다. "그럼 우린 뭘 준비하면 되겠나?" "해적 소굴 주위로 기사들을 대기시켜 놓으십시오. 소굴에서 도망쳐 나오는 해적들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아! 어둠 속에서는 친구 녀석의 검에 눈이 없으니 밤에 아군을 표시할 수 있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표식이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마법으로 투구나 갑옷에 살짝 표시해 두면 어두운 곳에서 빛날테니까 말일세." 작전이 대충 짜여지자 왠지모를 소외감을 느낀 레인이 손을 들었다. "난 뭘 하면 되겠나?" "헌터시군요." 끄덕. "그냥 구경이나 하세요." "......" 레인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달빛도 비치지않는 어두운 밤에 화살을 날릴 순 없었다. 그러다 같은 편이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싸움에서 그의 역할은 없는 것이다. 레인은 밀려오는 소외감에 몸을 떨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 당장 시작하죠." "지금 말인가?" "구름도 적당히 깔렸고, 오늘밤이 딱 좋습니다." 얀이 웃으며 막사를 나가자 로얀도 몸을 일으켰다. "렌은 내가 깨우겠습니다." 그가 막사에서 나가자 메리슨이 남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다.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안지 않는가? 난 왠지 로얀이라는 친구가 일을 낼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먼. 레토 자네도 그럴 것 같지 않은가? 허허허.....!" 그러면서 메리슨이 기사들과 용병들에게 마법으로 표식을 해주기 위해 막사를 나서자 그 뒤를 따라 세리나와 레토, 기사단의 부단장이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레인을 홀로 남겨두고 막사를 향했다. 혼자 남은 레인의 어깨 위로 사람들이 나갈때를 틈타 막사안으로 들어온 쌀쌀한 바닷바람이 내려앉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선이 어디 있어요!" 렌은 검은 바위 위에 서서 로얀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역시 그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렌은 막사에서 곤히 자고 있다가 로얀이 깨워 해적 소굴이 보이는 이곳까지 나온 것이였다. 그리고 그들의 작전을 들은 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러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세운사람이 도대체 누구예요!" 렌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레인을 향해 묻자 레인은 얀을 쳐다보았다. "으하하하! 이 천재님이 세웠지." "아저씨 이거죠?" 렌이 얀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들어 귓가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빡! "이것이 어른에게 못 하는 말이 없어!" "크윽!" "연주나 해!" 렌은 다시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제발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을 멈춰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었다. "에휴....." 하지만 로얀이 아무반응도 보이지 않자 렌은 어쩔 수 없이 근처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하프를 꺼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렌은 투덜거리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작전이 실패해서 형이 죽어도 난 몰라요." 렌은 로얀을 향해 그렇게 한마디를 톡 쏘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프 위에 손을 얹어놓았다. 띠리링..... 그와 때맞춰 바위 위로 올라오고 잇는 세리나를 향해 얀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하죠. 운디네!" 하급 정령 중 실프와 운디네만 소환 가능한 얀은 운디네를 불렀고, 바위 위로 올라와 자신의 정령을 소환했다. "엔다이론." 그러자 물로 이뤄진 작은 아가씨의 형상을 한 운디네와 커다란 늑대의 모습을 한 엔다이론이 나타났다. 세리나가 엔다이론에게 운디네을 소환해 달라고 말하자 그는 다섯 개의 운디네를 소환했다. 엔다이론이 부릴 수 있는 운디네의 수는 다섯이 한계였기에 그 정도밖에 부르지 못한것이다. "그럼 부탁한다." "부탁해." 얀과 세리나의 말에 운디네들은 웃으며 해적 소굴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엔다이론이 말없이 소굴을 향해 사라졌다. 일정한 형체가 없는 정령들은 몸을 숨기가가 편해 마나를 잘 감지하는 서클이 높은 마법사나 실력이 좋은 정령술사가 아니라면 들킬 염려가 없었다. 띠리링, 띠리링..... 잠시 후,연주를 끝낸 렌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두 개의 달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힘이 약해 가까스로 달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얇은 구름을 움직였지만 달빛은 확연히 줄어들어 흑섬에 짙은 어둠이 내려 앉았다. 조금 전의 연주로 모든 힘을 다한 렌은 매우 지쳐 보였다. 아직 나이 어린 그가 구름을 움직여 달빛을 막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렌의 눈빛은 어느새 해적 소굴 쪽으로 들러간 로얀에게로 향해 있었다. "엇! 어디 가세요!" 얀 또한 아무 말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렌이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얀의 손에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로얀과 처음 만났던 동굴 쪽이었다. "정말 가능할까요? 아무리 괴물 같은 형이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텐데." 해적들의 소굴이 보인다고는 하나 상당한 거리가 있어 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지 않는 렌은 휘척휘척 걷고 있는 얀을 향해 외쳤다. 얀은 그런 렌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걱정하지마. 어둠은 녀석을 배신하지 않아." "네?" '20년이 넘는 세월을 동거동락한 녀석을 어떻게 배신하겠어? 쿡쿡!" 여전히 뜻 모를 말을 하는 얀이었다. 흑섬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렌이 달빛을 가리는 것은 시작으로 횃불들이 하나하나 빛을 잃기 시작했다. 정령들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어둠은 점점 짙어져만 같다.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은 흑섬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흑섬의 주인인 해적들이 갑작스런 사태에 허둥지둥 거리고 당황하고 있었다. 갑자기 화톳불과 횃불의 불이 꺼진 것도 모자라 달빛도 구름에 가려 발 밑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이 그늘을 벌하려 하는 것일까? 심지어는 집 안에 커둔 촛불까지 순식간에 모두꺼졌다. 푸른 물줄기가 어디선가 쏘아져 나와 불꽃을 모두 잠재운 것이다. 그렇다! 해적들이 마지막에 본 것 한 줄기 푸른 빛이었다. 해적들이 그 푸른 빛이 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자연스레 정령을 쓰는 엘프를 생각해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해적들은 적의 기습인가 싶어 모두 밖으로 나가고 모두 밖으로 나왔다. 1,300명의 해적들이 일제히 모습을 내타내자 해적 소굴이 순식간에 꽉 들어차 상당히 비좁아 보였다. 물론 공주와 노예로 팔기위해 잡은 사람들을 지키는 해적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해적왕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해적왕 라이던은 1,300명에 달하는 부하들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적의 습격을 예상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해적들은 달마저 빛을 감추고 있자 당황하여 허둥지둥댔다. "뭐, 뭐야! 젠장, 빨리 불을 켜!" "빌어먹을! 적은 어디에 있는 거야!" "빌어먹을! 하늘은 또 왜 저 지랄이여!" 거친 인생을 사는 해적들답게 걸쭉한 욕설이 마구 오갔다. 서로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 속에서 생전 처음으로 장님경험을 하는 그들이었다. 저벅저벅...... 어느새 소굴 근처로 다가선 로얀은 눈을 감았다. 하나의 감각을 막음으로써 다른 감각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서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려왔을까? 로얀은 문득 자신의 심장이 평소 이상으로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다가올 피의 향연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입구를 지키는 보초 다섯 명 또한 소굴 안을 기웃거리며 갑작스런 사태에 얼떨떨해 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스걱! 촤악.....! 붉은 피의 느낌이 로얀의 피부 가득 느껴졌다. 붉은 피를 두 눈으로 집접 본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기에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뿌려지는 피가 낯설었지만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피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나 자신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던 그였다. 실제로 지난 십 년간의 용병생활 동안 전쟁터에서 힘이 다할때마다 그를 정신차리게 해준 것은 동료들의 함성도, 적의 고함도 아니었다. 피였다. 붉은 피가 그의 정신을 깨워주었고 혈향이 그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무, 무슨 일이야!" 살을 도려내는 섬득한 소리에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해적들이 당황하여 외쳤다. 그들은 어둠속에서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끼며 약해지는 인간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로얀은 침착하게 한곳에 모아두었던 해적들의 검을 잡았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망루를 향해 날렸다. 휘익.....! 퍽! 검은 해적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생명을 잃은 해적의 몸뚱이는 망루 아래로 떨어져 나갔다. 쿵......! "으아아! 무 무슨 일이야!" "어, 어서 모두에게 알려야 해!" 휘익! 퍽! 쿵! 로얀이 던진 검이 또다시 다른 해적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제 세 개의 검만이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휘이익.....! 퍼퍽! 쿵, 쿵......! 로얀의 손에서 떠난 두 개의 검이 거의 동시에 두 해적의 심장을 꿰뚫으며 그들의 목숨을 앗았다. 이제 남은 검은 하나! 삐이이! 삐이이......! 두 개의 망루에는 각각 한 명씩의 해적이 남아 급하게 피리를 불며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휘익......! 퍽! 로얀은 나머지 한 개를 우측에 있는 망루로 쏘아 보내고는 소굴 깊이 들어갔다. 좌측 망루 위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해적은 무시해 버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피리소리는 자신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로얀의 손에는 어느새 뽑아 든 허리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검이 들려 있었다. 저벅저벅..... "어, 어디야!" 웅성웅성...... 적이 쳐들어오면 불게 되어 있는 피리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해적들은 적을 맞이하는 함성을 터뜨리지 않았다. 단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둠속에서 적은 보이지 않았다. 부욱. 푸화화확! 로얀의 피부와 옷에 튄 해적들의 피가 뜨뜻한 감각을 남기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의 양손에 들려 있는 검이 각각 한 명씩의 적을 벤 것이다. 천 명이 넘는 해적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살 떨리는 섬뜩한 소리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만들어 놓았다.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꿈이 아니라 마치 죽어 저승이라는 곳에 온 것 같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오오오...... 서늘한 바람만이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따따딱......! 몇몇 해적들은 밤바람이 차가워서인지 이를 부딪치며 덜덜 떨었다. 푸욱. 스거걱. 푸화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서도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그때마다 짙어지는 혈향으로 해적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료들을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상대가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해적들은 덜덜 떨며 힘이 빠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사삭. 해적들이 보이는 모든 행동은 자살행위였다. 그들의 행동은 로얀의 검을 향해 이리로 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스거걱. "끄르륵....." 해적을 벨 때마다 그들의 붉은 피가 로얀의 온몸에 느껴졌다. "뭐, 뭣들하느냐! 어서 주위를 밝혀라! 불을 켜란 말이다!" "모 모두 물에 젖어 부, 불이 붙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불을 붙을 붙이면 될 거 아니냐! 어서 불을 붙일 곳... 끄아악!" 해적 사이에서 꽤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이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기고 말았다. 로얀의 검은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을 싫어했다. '어떻게든 빛은 다시 살아난다. 그전에 모두 죽여야 해!' 로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덩달아 그의 검도 이전보다 더욱 사나고 매서워졌다. 오러 블레이드는 쓸 수가 없었다. 오러의 푸른 빛이 로얀의 위치를 적들에게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스거걱! 스거걱! "끄륵....." "으, 으아아아.....!" 살을 가르고 뼈를 가르는 섬득한 소리가 돌산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몇몇 해적들은 이성을 잃었는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날뛰거나, 검을 뽑아 미친 듯이 휘둘렸다. 한데 그 검에 동료들만 잃을 뿐이었다. 동료끼리 죽고 죽이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로얀은 찢어지는 듯한 해적들의 비명소리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해적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화륵! "돼, 됐다!" 한 해적이 물에 젖지않은 불을 붙이자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적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하나 해적들에겐 불행이요, 로얀에게는 천운인 일이 벌어졌다. 마침 그때 로얀이 횃불을 밝힌 해적 바로 뒤에 있었던 것이다. 뎅겅! 횃불을 밝히고 환하게 웃던 해적의 목이 허공을 날랐다. 화륵. 퍽. 횃불이 바닥을 구르자 로얀이 재빨리 그것을 발로 꺼트렸다. 잠깐 빛을 보았던 해적들은 미처 주위를 둘러본 새가 없었다. 몇몇이 로얀의 얼굴을 보긴 했지만 보지 못한 사람들은 주위에 적이 없자 더욱 깊은 공포에 휩싸였다. 불이 켜졌음에도 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건 바닥을 뒹구는 참혹한 동료들의 시체뿐이었다. '큰일날 뻔했군.' 파팟! 로얀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렸다. 스거걱! 그에 맞춰 겁에 질린 해적들의 검도 바람을 갈랐다. "끄아악.....!" 절망과 공포의 감정만이 돌산을 올리고 있었다. "저, 적은 한 명이야!" 스거걱! 로얀의 얼굴을 봤던 해적의 외침에도 해적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로얀은 그렇게 외치는 해적을 향해 달려가 단숨에 베어버렸다. 그리고 멀리서 적이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외치는 해적들은 땅에 떨어진 해적들의 검을 발로 차 죽여버렸다. 푹! 로얀이 검이 앞에 있던 해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로얀은 자신의 검을 빼내기 위해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걷어차고는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옆에 있는 해적을 베었다. 부욱!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밤하늘 아래 로얀은 아름다운 피의 바다를 돌산위에 만들어갔다. 그에 따라 모든 대기와 땅 속을 다니던 정령들과 미세한 생물들이 몸을 숨겼다. 피에 혈향이 진동하는 가운데 돌산이 울었다. 부서져 내리는 달빛 아래 로얀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한 장에 지옥도를, 한 장의 지옥도와 함께 용병세계에 잊쳐지지 않는 흔적을 새길 것이다. 삐이이......! 적의 침입을 알리는 피리소리가 찢어질 듯한 고음을 내며 요란하게 울렸다. 희미한 달빛이 전부인 해적 소굴 안에서 들리는 피리소리는 혼령의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챙강! 죽어버린 시체에게 더 이상 무기는 필요없다는 사실을 아는지 평생동안 주인의 정신에 감응하며 적의 피를 먹고 살았던 검이라는 물건은 바닥 위로 떨어지며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파팟! 현란하게 움직이는 두 개의 검이 피의 길을 만들었다. 부우욱! 챙강! 툭! 두 생명의 불꽃이 꺼졌다. 그 중 하나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지만 다른 하나는 묵지간 금속음을 토해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해적단의 소굴은 시체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체들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틈을 밟으며 해적들을 베는 로얀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끄아악!" 푸우욱! 푸하학! 로얀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다 발생한 일이었다. 그 모든 원인은 공포라는 이름의 어둠이었다. '전쟁터에서의 인간은 같은 동족이 아니다. 피에 미친 짐승일 뿐이다.' 십 년 동안 용병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의 생각이었다. 시체는 쌓여만 가고, 그에 따라 붉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룬 채 돌산 밑으로 똑똑 떨어져 내렸다. 돌산에 풀 한 포기 안 나는 것은 토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돌산에 붉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렸다. 붉은 피가 돌산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게 로얀의 귓가로 들려왔다. "헉헉! 허억......" 로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가 정령왕의 이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정령왕이 된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인간에 더 가까웠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 동안 검을 휘두른 후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었다. "후욱. 후욱....." 휘이익. 부욱! 로얀은 숨을 고르며 오른 손목을 회전시켜 휘둘렀다. 어느새 해적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툭. 앞으로 나아가려던 로얀의 발끝에 오묘하면서도 기분 나쁜 느낌이 신발로 전해져 왔다. 죽은 사람의 딱딱해져 가는 피부... 비록 로얀이 신발을 신고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 물컹거리면서도 묘한 시체의 느낌은 그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륵! 시체 때문에 잔깐 움직임을 멈쳤던 로얀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뭔가가 타오르는 듯한 퀴퀴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횃불' 피이잉.....! 퍽! 로얀이 횃불이라고 생각했던 물건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그 물건이 향한 곳은 산적들의 집이었다. 화르륵! 물건의 정체는 불화살이었다. 나무로 만든 해적들의 집은 불화살을 꽂은 채 서서히 타올랐다. 화륵! 피이잉.....! 퍽! 또다시 불화살이 날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 불화살을 맞아 붙은 집 바로 맞은편 집에 화살이 박혔다. 화르륵! 로얀의 후각으로 전해지는 냄새의 농도가 짙어졌다. 예전과는 달리 눈이 있는 그는 갑자기 밝아진 환경으로 인해 눈이 부심을 느꼈다. "뭣들 하느냐! 집에 어서 불을 붙여라!" 우렁차고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가 불화살을 쏜 장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두목님! 집에 불을 붙이면 저희는......" "이 자식들아! 죽으면 모든 게 헛방이야! 어서 불을 붙여라! 명령이다!" "두목!" 음지에 사는 인물들일수록 상관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그리고 의리라고 하는 집단의식도 끈끈한 편이었다. 유령해적단의 두목 해적왕 라이던! 소드 마스터라고 알려진 그가 드디어 몸을 일으킨 것이다.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부하들의 처절한 비명소리에 더 이상 안에 처박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늦었다' 로얀은 직감했다. 이미 곳곳에는 불이 붙고 있었다. 혼자서 저 불들은 끄는 건 무리였다. 물의 정령들은 해적소굴에 있던 모든 불들을 끈 후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계약자의 마나가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시간이 시간인 만큼 달이 기울고 있었다. 두 개의 달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곧 타오르는 태양이 뜬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의 정령왕이라 해도 태양을 끌 순 없을 것이다. 해적들의 집들이 타오름에 따라 쥐위의 광경이 드러났다. "헙!" "헉!" 그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서로를 죽이며 싸우던 해적들의 동작도 마법에 걸린 듯 멈추어 버렸다. 마계의 가장 깊은 계곡이 이런 모습일까? 검은 돌로 이루어진 땅은 시체들로 포장되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피가 연결하고 있었다. 목이 잘리고 사지가 잘린 시체들... 허리가 잘린 해적의 시체에선 내장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우욱!" 해적들은 참혹한 광경을 보다 입을 가리며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화급히 물러났다. 아무리 거친 인생을 살았던 해적들이라 해도 이런 광경에는 참지 못하고 속의 것을 게워냈다. 스륵. 로얀은 눈을 떴다. 더 이상 눈을 감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해적왕 라이던은 참옥한 시체들의 참혹한 모습보다는 상대방의 모습에 놀랐다. 그들의 주변에는 이제 갓 성인이 된 듯한 젊은 검사 한 명만이 서 있을 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체들의 땅 위에 젊은이 홀로 서 있었다. "으음......" 해적왕은 짐중한 표정으로 로얀을 바라보았다. 참혹한 시체의 바다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다른 자였다면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지만, 어쩐지 저 청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느낌이 들었다. 로얀의 모습에선 강한 힘이 느껴지는 강한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흑발은 붉은 피에 절어 착 달아붙어 있었고, 흑색 눈동자 아래로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온 피가 뚝뚝 떨어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옷은 피로 염색한 듯했다. 해적왕 라이던은 30대 후반의 중년 남자였다. 그는 해적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건을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두건은 검은색 검은색에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로얀보다는 작은, 175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하나 결코 가볍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상어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사냥꾼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스릉...... 해적왕 라이던은 자신의 무기인 검을 뽑았다. 그것은 날이 상당히 휘어 있는 시미터였다. 오로지 상대를 베기 위해 만든살인병기! 그 시미터가 활활 타오르는 해적 소굴의 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우웅.....! 라이던의 검 위로 오러 블레이드가 치솟았다. 초급의 것으로 보이는 오러는 대장간의 화로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푸른 빛깔에 붉은색을 섞은 듯 보이는 것이었다. 해적들은 전투를 위해 태어났다는 마계의 발록처럼 보이는 젊은 침입자와 라이던의 검에서 치솟은 오러 블레이드를 보며 자신의 검을 고쳐 잡았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적을 향해 검광을 뿌렸기에 그의 팔에는 힘이 없었다. 우웅! 우웅! 온 힘을 쥐어 짜내듯 로얀은 두 개의 검에 동시에 오러를 생성시켰다. 흠짓! "두, 두 개의 오러 블러 블레이드라니!" 역시나 라이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러나 그는 시미터를 바로잡으며 마음 가다듬었다. 더 이상 놀라움에 정신을 잃고 있을 수도 잇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꿀꺽!" 팽팽한 긴장감이 주변을 감싸안았다. 해적들은 커다란 도박판 위에 몸을 던졌다. 삼백도 채 남지 않은 해적들이 자신의 두목에게 목숨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던은 긴장감을 해소시키려고 시미터를 장난감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너의 이름은 뭐지? 두 개의 검에 오러를 퍼붓는 괴물은 들어본 바가 없다." 라이던의 물음에 로얀의 입이 열리며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크로얀." "응? 다크로얀이라... 들어본 적이 없다. 용병인가?" 라이던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다크로얀이라는 희한한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세계에 퍼져 있는 백 명의 소드 마스터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크로얀이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보았다면 그 특이한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B급 용병 다크로얀이다. 잠이 오니 빨리 끝냈으면 한다." 무미건조한 그 음성에 라이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로얀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한 B급 용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두 개의 오러 블러이드를 쓰는 괴물 같은 소드 마스터를 B급 용병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라이던은 로얀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로얀이 자신보다 약한 자를 깔보는 자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너 같은 새끼들이 가장 재수없지!" 그의 입에서 해적 특유의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파팟! 라이던은 로얀을 향해 미친듯이 달렸다. 시체들을 밟으며 날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엄청나게 빨랐다. 어릴 때부터 바위가 널린 흑섬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다 보니 생긴 감각이었다. 무섭게 다가오는 라이던을 보며 로얀은 제자리에서 점프했다. 팟! 퍽. 로얀의 발이 라이던의 어깨를 지그시 밟고 더욱 멀리 날아갔다. 시체가 없는 평지에서 싸우고자 그의 어깨를 빌린 것이었지만 로얀에게 어깨를 밟힌 라이던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큭! 죽여버리겠어!" 샤샤샥. 라이던의 움직임은 바람과도 같았다. 차아악! 시미터가 늘어나듯 오러를 풍기며 로얀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까깡......! 로얀은 오러를 뿜어내는 시미터를 오른손에 들린 검을 들어 막았다. 까깡! 까깡! 라이던의 손목 회전과 팔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져 갔다.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번갈아 가며 휘둘렸지만 손이 점점 뻐근해짐을 느꼈다. 손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 아파 왔다. '몸이 버티질 못한다. 서둘러야 해!' "흡!" 쿠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로얀의 검이 라이던을 덮쳤다. 그의 두 개의 검은 조금 전과는 다른 오러를 뿜고 있었고 길이도 길어져 있었다. "헉! 주, 중급의 오러!"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해주듯 오러를 머금은 두 개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라이던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하나를 흘려보낸 뒤 남은 하나를 시미터를 휘둘러 막았다. 로얀의 움직임이 매우 둔해져 있어 피할 수 있있던 것이다. 카캉......! "크으윽!" 하지만 오러는 무거웠다. 초급의 오러로 막기에는 무리인 감이 없지 않았다. 손마디가 찌릿찌릿 아파왔다. "잘 가라, 해적왕 라이던." 로얀은 작게 속삭이듯 말하고는 검을 휘둘렀다. 손이 저려와 검을 내리고 있던 라이던은 그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흐흐흐, 과연 그럴까? 실드!" 화아악! 카가강.....! 라이던의 오른쪽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금반지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하얀 막이 감쌌다. 실드라는 방어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였다. 라이던은 강탈한 물건 중에서 우연히 고가품인 아티팩트를 발견하고 경매로 팔아버릴까 하다가 혹시 싶어 자신이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티팩트가 지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쾅......! 너무 무리하게 휘둘렀는지 로얀의 검이 실드와 부딪치며 그만 폭발해 버렸다. 아무리 잘 관리했다고는 하나 로얀의 검은 십 년의 세월을 겪은 검이었다. "큭!" 로얀의 입에서 처음으로 짤막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서진 검의 파편들이 그의 왼팔에 박힌 것이다. 두 개의 검을 같이 휘둘렀는데 하나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완전히 부서진 검에 비하면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 주르륵. 해적들의 피가 아닌 로얀의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팔에 박힌 검의 파편이 반짝이는 가운데 그 사이로 그의 붉은 피가 주르륽 흘러내렸다. "크하하! 죽어라!" 번뜩! 로얀의 머리 위로 붉은 불빛이 번뜩이는 시미터가 으르렁 거렸다. 시미터가 로얀의 머리를 가르려는 순간! "실드." 화아악! 깡......! 로얀의 몸을 흰색 빛이 감쌌다. 라이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스윽. 로얀은 부서진 자신의 검을 내려보았다. 팔레인에서 처크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물건이자 이제는 단 하나뿐인 팔레인의 물건... 많은 추억과 과거의 잔재가 묻어있는 검이었다. '이제는 버려야 한다. 과거의 추억에 얽매여선 복수를 할 수가 없다.' 챙강...... 박살이 나고 두 동강이 난 검들을 던져 버린 그는 자신의 발 밑에 떨어져 있는 한 자루 검을 집어 든 후 그것을 수평으로 세워 라이던의 머리통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멍하게 있던 라이던은 그가 어떻게 실드를 썼는지 대한 궁금증은 지워버렸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조금 물러선 라이던. 그러나 어디로 가든 로얀의 검은 변함없이 이마 정 중앙을 겨누고 있었다. 이윽고 적막한 사막의 바람 같은 로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졌다, 해적왕 라이던. 애로우샷!" "뭐?" 피용...... 퍽! 로얀의 검에서 푸른 빛이 쏘아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라이던의 이마를 관통했다. 어느새 라이던의 머리엔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끔뻑거렸다. 쿵..... 라이던의 몸이 바닥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으아아아.....!"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해적들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주위가 불꽃으로 인해 밝았기에 길을 찾는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더군다나 동이 트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돌산을 에워싸고 있는 단풍기사단과 용병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렇기에 로얀은 떠오르는 태양을 처다볼 뿐 해적들을 뒤쫓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팔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내 피도 붉군." 그런 말을 중얼거린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피의 강을 뒤로하고 공주가 잡혀 있다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나 그곳으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갔을 것이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5장 엘레나와의 만남 흑섬의 돌산에 여신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햇빛을 받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같혀 있던 그 소녀의 이름은 엘레나 폰 크라우드. 엘레나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였다. 마른 편인 가느다란 체구에 신이 정성을 들여 조심스럽게 만든 듯한 이목구비... 가을의 대륙에서 제일 미녀라고 불리는 그녀였다. 그러나 160도 안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 눈을 뿌려놓은 듯한 새하얀 피부는 그녀가 병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오랫동안 동굴 안에 갇혀 있었지만 그녀의 미모는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새하얀 치마는 더렵혀져 있었지만 여타 귀족가의 아가씨와는 달리 동굴을 나서며 맨 먼저 옷을 털거나 외모를 가다듬지 않았다. 그녀가 맨 처음 밖으로 나와 한 일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녀 옆에는 메리슨이 있었고 레토가 앞장서서 호위하고 있었다. 세리나와 레인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를 보호하는 것은 단풍기사단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엘레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때 그녀의 눈앞에 끔직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는 동굴을 빠져나오기 전 메리슨과 레토가 되도록 앞을 보지 말라는 이유를 이제야 알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에 시체가 뒤엉켜 있었고 피는 강을 이루고 있었다. 엘레나의 발끝에도 피가 살짝 닿았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밝은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 투정부리는 것은 여기까지 자신을 구하러 온 많은 사람들을 욕보이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레나 공주는 미모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무척이나 고운 소녀였다. 올해 18살이 되는 그녀는 밝고 명랑한 성격에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뚜벅뚜벅......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자 메리슨과 레토는 제발 그가 공주앞에 나서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모습이 너무도 섬뜩했기 때문이다. 검은 흑발을 길게 드리운 그는 다크로얀이었다. 전신에 피칠을 한 그의 모습은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전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로얀은 엘레나 공주 앞으로 걸어갔다. "일 끝났으면 이제 가지." 그는 너무도 피곤해 잠이 몰려왔다. 때문에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한데 그렇게 차겁게 내뱉고 되돌아 가는 로얀을 엘레나가 작은 입술을 열어 붙잡았다. "감사해요. 로얀이라고 했던가요?" 흠짓. 함선을 향해 걸어가려던 로얀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귓가를 갈질인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소녀의 목소리......! 엘레나는 메리슨에게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천 명의 해적들 사이로 혼자 뛰어든 남자가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인사를 건넨 것이었다. 스윽. 덥석! 로얀은 뭔가에 홀린 듯 멍한 눈을 한 채 다시 뒤돌아 걸어오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와락! 그리고 그가 그 손을 끌어당기자 가냘픈 소녀인 엘레나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해 그의 품에 안겼고,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주위의 기사들과 사람들 모두 굳어버렸다. 로얀은 자신의 품에 안긴 엘레나의 긴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들어 쓰다듬었다. 검의 파편이 다닥다닥 박힌 왼팔은 축늘어진 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엘레나가 밝고 착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일국의 공주로서 이런무례한 행동에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힘껏 로얀을 밀치려던 그녀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저미는 듯한 목소리에 그만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 말 한마디에 사람의 마음을 이리도 슬프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엘레나는 로얀의 목소리에 담긴 진득한 슬픔과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파편이 박힌 채 축 늘어진 그의 왼팔이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다. 왜 그런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챙......! "로얀 군! 당장 떨어지게!" 아무리 로얀이 이번 임무의 일등공신이라 할지라도 일국의 공주를 안은 건 죽어 마땅한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피가 엘레나 공주의 옷에도 옮겨 묻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어둠 속에서 빛이 되었던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듯했다. "로얀, 그녀는 레이나가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 정지된 시간은 깨져 버렸다. 멀리서 싸늘한 표정을 지은 얀이 다가오고 있었다. 로얀은 엘레나를 자신의 품에서 떼어내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본다고 알 수는 없었지만 부드럽고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목소리도, 그녀에게서 느겨지는 분위기도 똑같았다. "나를 믿어. 그녀는 엘레나 폰 크라우드. 맞죠, 공주님?" 엘레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로얀은 믿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얀과 엘레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얀은 로얀의 부탁을 받고 몇 번 그의 마을에 가본 적이 있었다. 자유분방한 그였기에 로얀이 언제 한번 들러 동생이 잘 지내고 있는지 봐 달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레이나와 엘레나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슬픔 속에 빠져 있는 친구를 어서 꺼내주기 위해 싸늘한 표정으로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허허! 자네 너무 피곤한 것 같으이. 그 상처도 치료해야 겠네." 메리슨이 다가와 로얀의 오른쪽 어깨를 잡으며 그의 왼팔을 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는 그의 팔은 빨리 치료하지 않으며 앞으로의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탁! 로얀은 메리슨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돌렸다. 얀이 자신에게 이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또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레이나, 그 아이는 하늘에 있었다......' 피의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발자국으로 남긴 채 해안가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슬퍼보였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엘레나의 눈동자가 그 뒷모습을 밝혀주었다. 쏴아......! 투퉁! 파도에 떠밀려 배 밑이 돌에 부딪혔다. 작은 배 한 척이 바다에 떠 있었고 그 위에 얀이 올라타 있었다. 배 위에는 커다란 보다리도 가득 실려 있었다. 그가 해적들에게서 가져온 물건들이었다. 더나려는 얀을 로얀이 배웅해 주고 있었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왼팔 때문에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얀은 배 위에서 로얀을 보며 외쳤다. "너 처량하게 계속 그럴래! 드래곤 목 따온다며! 어서 팔부터 치료하고 함선으로 돌아가봐." "넌 어디로 가지?" "흐흐... 이 몸은 이제 여름의 대륙으로 간다. 너를 만나고 많은 생각을 했어. 그리고 결정했다. 네가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마. 기대해!" "그늘이라... 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으이구, 그놈의 궁상은! 아무튼 여름의 대륙에서 기다리마. 나의 이름이 대륙에 펴질테니 쉽게 찾을 수 잇을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얀은 싱글벙글 웃고 있엇다. "그리고 엘레나 공주님은 결단코 레이나와 닮지 않았으니까 이상한 소리는 좀 하지 말고. 레이나가 훨씬 예뻤다고. 쿡쿡... 그만 난 간다!" 얀은 배 안에 잇던 두 개의 노를 양손에 들었다. 그리고 휘적휘적 노를 저어 어느 정도 바다로 나간 뒤 돛을 활짝 펼졌다. 힘든 전투를 마친 그들을 신이 인도해 주려는지 바람은 순풍이었다. 얀이 탄 배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로얀은 해안가에 서 있었다. 쏴아아아......! 세 척의 함선은 다시 항구를 향해 출발했다. 단풍기사단이 절반이나 죽었기에 함선이 세 척이나 필요하진 않지만 비싼 함선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배를 움직일 사람이 없어 놔두고 가지만, 해적들의 배도 조만간 왕국에서 회수해 갈 것이다. 세 척의 함선에 용병을 포함한 240여 명이 나누어 타다 보니 꽤나 널찍했다. 로얀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뱃머리 근처에 있는 돛대에 봉을 기대고 앉았다. 그가 왼팔엔 흰 붕대가 친친 감겨 있있다. 스윽. 로얀의 왼팔 위로 보랏빛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져다 댄것이다. "앉아도 되나요?" 보랏빛 머리카락의 주인은 엘레나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로얀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한해진 그녀는 그의 시야를 들긴 했지만 자신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자 어색하게 웃으며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침묵이 답답했는지 엘레나가 먼저 입을 열였다. "정말 해적을 천 명이나 상대하신 거예요?" "......" 로얀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 있을 동생과 너무도 똑같은 음성을 가진 그녀가 계속 마음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로얀의 그런 무신경한 반응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엘레나는 이번에는 사적인 질문을 조심스럽게 건냈다. "저... 레이나라는 분은 연인이세요?" "동생이다." 처음으로 대답을 했지만 그 음성만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엘레나는 로얀이 공주인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고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드디어 대답해 줬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엘레나는 밝게 웃으며 다른 질문을 건넸다. "동생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 "동생 분이 사시는 곳은 어디예요?" "동생은 이 세상에 없다. 더 이상 묻는다면 아무리 공주라 해도 베겠다." 살벌하게 말하는 로얀이었지만 엘레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엘레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미얀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는 동안 동생 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면 안 돼요?" 로얀이 동생에 관한 이야기에만 대답을 했기에 엘레나는 또 다시 그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그녀도 어째서 일개 용병인 로얀에게 이렇게 관심이 가는지 알지 못했다. 영혼의 이끌림이라고나 할까? 두 사람 사이엔 뭔가 단단한 인연의 끈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스오오...... 로얀의 전신에서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엘레나를 고려해서인지 상당히 미약했다. 그는 처음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흠칫! "흑......" 돌변 로얀의 전신을 감쌌던 살기가 허공으로 산화해 버렸다. 엘레나가 그의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녀가 떨구는 이슬을 본 순간 로얀의 머리속은 햐얗게 변했다. "미, 미얀하다." "흑......" 로얀이 평생 몇 번밖에 하지 않은 '미안하다.'라는 말이 그의 입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 말에 더욱 서글프게 울었다. "나, 나와 레이나는 팔레인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 로얀이 레이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엘레나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로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울엇던 것이 거짓이라도 했던 듯 그녀는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로얀은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만 묻지. 어째서 나에게 온거지?" 그는 어째서 공주인 엘레나가 하찮은 용병이 있는 이곳까지 직접 왔는지 묻고 있었다. 빙긋. "당신이 너무 슬퍼 보였어요. 그런데 제 가슴이 너무도 아팠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헤헷, 어서 이야기해 주세요. 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다." 안 그래도 레이나와 너무도 똑같은 음성을 가진 엘레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그였다. 그 와중에 오빠라는 말까지 그녀에 입에서 튀어나오면 그 혼란은 급증할 것이다. 복수를 위해 택한 길, 누구에게도 깊은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엘레나가 또다시 자신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 아닌가! 로얀은 레이나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줬다. 레이나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한데 그 아이와 닮은 엘레나가 눈물을 글썽이자 로얀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마음대로 해라." 엘레나는 다시 생글거렸고 로얀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처음 만난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쏴아아아......! 끼룩끼룩......! 갈매기가 로얀과 사람들의 귀환을 반겨주며 노래를 불렀다. 함선이 줄줄이 몬드의 항구에 정박하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 그들이 반기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다스리는 영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뚜벅뚜벅...... 로얀은 배가 정박한 직후 제일 먼저 거기에서 내려왔다. 그 뒤를 엘레나가 내려왔고, 뒤이어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한데 로얀의 뒤를 따라 배에서 내리는 엘레나 공주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로얀의 과거를 모두 들은 엘레나는 자신의 단순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의 아픈 기억을 들쑤셔 놓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로얀 형과 공주님... 무슨일 있었어요?" 두 사람의 뒤에서 지켜본 렌이 메리슨과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허허, 글쎄다......" "만약 그가 공주님에게 또 한 번 무례를 범한다면 목숨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겠다." 메리슨은 웃음으로 넘겼고 레토는 그렇게 차갑게 내뱉으며 검에 새겨져 있는 왕국의 문양을 쓰다듬었다. 덜거덩, 덜거덩...... "와아아아...... 휘이익! 배에 실린 반짝이는 보석은 용병들이 내렸고, 기타 여러 가지 짐들은 단풍기사들이 내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항구도시 몬드의 시민들은 휘파람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반겼다. 처음 조건대로 용병들이 해적들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나눠가졌지만 얀이 워낙에 많이 들고 간 터라 그리 많은 양은 아니였다. 로얀은 보석 하나 챙기지 않고 부둣가를 걸었다. 뚜벅뚜벅...... "와아아아......!" 사람들이 로얀 앞으로 달려들며 그에게 환영의 뜻을 내비쳤지만 그의 몸에서 은은히 퍼져 나오는 살기와 번뜩이는 눈동자에 모두 겁을 먹고 주춤거리며 길을 열어주었다. 타탁! "자, 잔깐만......!" 로얀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려고 하자 엘레나가 급히 달려와 그를 멈춰 세웠다.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녀를 에워싸려 하자 뒤따르던 레토와 단풍기사들이 급히 달려와 급히 사람들은 막았다. "수, 수도까지 같이 가실 거죠?" 그녀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외치는 소리에 로얀은 아무 말없이 등을 돌려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그렇게 무사히 공주 구출 의뢰를 마친 로얀은 5일 정도를 소비해 팔란왕국의 수도인 팔란에 도착했다. 용병의 보수라든지 임무를 완료한 보고를 하려면 수도로 가야 한다는 용병길드장의 말 때문이었다. 보수는 받을 생각이 없었고, 이제 용병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보고 같은 것도 필요없었다. 하지만 그는 머리속에서 메아리치는 엘레나의 말 때문에 수도까지 같이 가야했다. 어차피 새로운 검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수도로 향하는 길에 엘레나는 로얀에게 죽은 동생에 대해 물은 것을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항구도시 몬드에서 봉면을 당할 뻔했던 이후 레토와 단풍기사단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아 그럴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로얀은 기사단과 멀리 떨어져 용병들과 함께 오고 있는 도중이라 그럴 기회가 없었다. 결국 엘레나 공주는 수도 팔란에 도착할 때까지 로얀에게 사과를 하지 못했다. 로얀은 도착 직후 국왕 레이언 폰 크라우드를 만났다. 그가 천천히 용병들에게 작위를 하사하고 보수를 주기 위함이었다. A급 용병인 레인은 작위는 거부한 채 돈만 받아서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렌과 세리나도 작위를 받지 않고 봅의 대륙에 있다는 빛의 숲으로 가벼렸다. 빛의 숲은 엘프들이 사는 곳으로 세리나의 고향이었다. 렌은 음유시인으로서 엘프들의 삶과 그곳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렌은 로얀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그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꼭 놀러 오라며 손을 흔들던 렌의 모습이 로얀의 머리속에 기억되었다. 로얀을 포함해 살아남은 B급 용병은 모두 다섯 명. 이 중 세명이 작위를 받고 한명은 레인처럼 돈만 받고 떠났다. 로얀은 다른 용병들보다 훨씬 높은 작위를 주겠다는 국왕 레이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대전을 빠져 나갔다.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많은 대신들과 기사들이 반발했지만 국왕 레이언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엘레나는 아무래도 아버지 레이언의 성격을 물려받은 듯햇다. 로얀은 기사 작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단 하나, 왕성의 대전에서 국왕의 옆에 앉아 있던 엘레나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아주 잠시 그의 발걸음을 지연시켰을 뿐이다. 다그닥, 다그닥...... 덜그럭! 팔란의 거대한 시장거리를 걷던 로얀 옆으로 마치 마차가 지나갔다. 로얀은 부서진 검을 대신할 무기를 사기 위해 팔란의 왕성을 나와 시장으로 직행한 것이었다. 왕에게 보수로 검을 청했다면 얼마든지 좋은 검을 얻을 수 있었을 테지만, 갑갑한 황성과 동생을 생각나게 하는 엘레나 곁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는 그동안 용병생활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을 이번에 검을 사는데 모두 쓸 생각이엇다. 검을 살 생각을 하니 순간 해적들의 보물을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이윽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선 로얀은 검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그다가 마음에 드는 검이 없어 고개를 젓고는 다른 대장간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왕국의 수도라서 그런지 대장간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반나절이 지났다. 그동안 로얀이 둘러본 대장간 수만 해도 다섯 개나 되었다. 도시가 워낙에 크다 보니 대장간을 찾는 데 걸린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 많은 대장간 중 마음에 드는 검이 있는 곳도 몇 군데 있었지만 그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살수 없는 검들뿐이었다. 이 때만큼은 보수를 받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결국 어두워질 때까지 검을 구하지 못한 로얀은 오늘 하루를 묵을 여관을 찾으려 가던 중에 몇 채의 큰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낡은 대장간을 발견했다. "여기에도 없다면......" 이제 팔란에서 둘러보지 않은 대장간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여기에도 마음에 드는 검이 없다면 다른 마을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로얀이 마지막으로 찾은 대장간은 다른 대장간과 마찬가지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간판이 없었고, 수도에 있는 대장간치고는 초라해 보일 정도로 작고 아담했다. 뚜벅뚜벅...... 대장간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허허! 첫 손님이구먼." 로얀의 발걸음소리에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아무래도 대장간의 주인인 듯했다. 로얀은 그를 스윽 훑어보고는 벽에 걸려 있는 무기를 보며 말했다. "인간이 아니군." "허허! 드워프 처음 보나?" 모습을 보인 이는 드워프였다. 작은 키에 듬직한 체구, 겨울의 대륙에만 살며 술을 좋아하고 작은 키에 수북한 수염이 특징이었다. 한데 이곳 주인은 드워프 중에서도 꽤나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다. 로얀은 고개를 돌려 드워프 노인의 눈을 응시했다. "아니 드워프도 아닌데......?" "......" 로얀에게 느껴지는 그의 기운은 보통 드워프가 가질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기운이 거대해서가 아니라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이 친숙한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친숙한 기운이라면? 또 드워프가 인간의 마을에서 장사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더군다나 드워프가 하는 가게라면 사람들이 북적거릴 텐데 너무도 한적했다. 처음에 이 가게가 오늘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검을 사러 왔습니다." "허... 내가 뭐라고 생각하나?" 드워프는 로얀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정령." 로얀의 짤막한 대답에 드워프 노인은 일순 안면을 굳히더니 곧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자네, 정체가 뭔가?" 한눈에 자신을 알 수 있는 존재라면 결코 인간일 리 없었다. "인간이 아닌 자. 검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로얀은 상대가 훨씬 연장자이기에 말을 높였다. "허... 내 수십만 년의 세월을 살면서 자네 같은 인간은 처음이구먼. 맞네, 난 정령이지. 아, 검이라고 했나? 잠시만 기다리게." 자신의 정체를 정령이라 밝힌 노인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안으로 들어갔다. "땅." 어둠 속으로 사라진 정령 노인을 보며 로얀이 작게 내뱉은 말이었다. 잠시 후 정령 노인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왔다. 쿵...... 끼이익! "열여본 지가 오래되서 삐걱거리는군." 정령 노인이 상자를 열자 뽀얀 먼지와 함께 검 두 자루가 나타났다. 하나는 새하얀 검집에 담겨 있는 검이였고 하나는 칠흑 같은 빛을 뿜어내는 검집에 담겨 있는 검이었다. 로얀의 눈썹이 휘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검들이 로얀이 이제까지 본 검 중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명검으로 보였다. "보통 검이 아니군." "끌끌... 바로 맞쳤네. 하나는 성검 에리오네고 다른 하나는 마검 다크리온이라네." "성검과 마검이라......" 성검과 마검! 성검은 천계의 신들이 만든 검을 뜻했고, 마검은 마계의 마왕들이 만든 검을 뜻했다. 무한한 세월을 산다고 할 수 있는 신과 마왕들 중에서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 중 몇몇 천계의 신과 마계의 마왕들은 무기나 갑옷을 제작하는 취미를 가졌다. 하지만 고귀한 신이나 자존심이 강한 마왕들은 못마땅하다는 눈빛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그 취미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취미로 인해 한때 세상에 다섯 개의 마검과 다섯 개의 성검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역시나 오랜 세월을 결쳐 신과 마왕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물건답게 그것들은 드래곤의 무기가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내구력을 지니고 있었다. 드래곤들은 보통 드위프에게 무기를 만들라고 시키지만 그렇지 않은 드래곤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가기에 별종이라 불릴 만한 드래곤이 많았다. 드워프의 모습으로 변해 집접 무기를 제작하는 드래곤들도 그 중에 하나였다. 중간계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이 만든 물건보다 뛰어난 마검과 성검이 두 개씩이나 있었으니 로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도 용병생활을 하면서 마검과 성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정말... 파는건가요?" 마검과 성검의 가격을 메기자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나온다. 아니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었다. 성검과 에리오네는 전설의 금속인 오르하르콘에 천사의 깃털을 첨가해 만든 검이었다. 그리고 마검 다크리온 역시 전설의 금속 오르하르콘에 마왕의 뼈를 넣어 만든 검이였다. 성검과 마검은 강도만 단단할 뿐 다른 파괴력이나 힘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설혹 신의 육체라도 벨수 있다는 정도였다. "끌끌... 돈은 걱정 말고 골라보게. 단! 성검이든 마검이든 자신의 주인을 가린다네. 만약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팔이 타들어갈 걸세." 많은 사람들이 성검과 마검을 얻었으나 그것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역사상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성검은 빛을 가장 많이 지닌 사람을 주인으로 택했다. 마검은 어둠을 가장 많이 지닌 사람을 주인으로 택했다. 정령 노인은 로얀을 호기심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두 개의 검을 모두 선택하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 어둠과 빛을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존재는 없었다. "뭐? 허허허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네. 성검은 빛을, 마검은 어둠의 속성을 지닌 자의 검이라네. 검이 선택할 정도로 강한 두 개의 기운을 지닌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 "만약에 말입니다." "끌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두 개의 검을 공짜로 주지." 정령 노인의 말이 끝난 직후 로얀은 손을 뻗었다. 턱! 스릉...... 그가 처음잡은 검은 성검 에리오네였다. 에리오네가 뽑히자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보통검보다 검폭이 좁고, 길이는 평범한 롱 소드보다 조금 긴데다가 끝이 유난히 뾰족한 검이었다. 에리오네의 검신엔 부드러운 곡선이 검 끝까지 새겨져 있었고, 그립 위에는 깃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웅웅...... 에리오네가 맑은 검명을 토해 내었다. "호오! 에리오네가 자네를 주인으로 인정한 모양이구먼. 축하하네." 성검 에리오네를 왼손에 쥔 로얀은 이번엔 오른손을 마검 다크리온을 향해 뻗었다. "그, 그만두게!" 턱! 로얀이 마검을 손에 쥐는 순간, 정령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르릉...... 에리오네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마검 다크리온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길이는 비슷하지만 검폭은 훨씬 넓었다. 그리고 양날이 매우 비슷하게 서 있어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검임을 알 수 있었다. 다크리온의 검심엔 피가 잘 빠져나가게 두 줄로 굵은 선이 파여 있었고 그립 위에는 괴상하게 생긴, 눈알같이 보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웅웅...... 검붉은 다크리온의 검신이 떨렸다. 에리오네가 터트린 검명이 맑고 잠잠했다면 다크리온의 검명은 매우 거칠었고 팔이 떨릴 정도로 힘이 넘쳤다. 정령 노인은 살며시 눈을 떴다. "헉!" 성검과 마검을 양 손에 쥐고 있는 로얀의 팔이 이전과 다름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붙어 있는 것에 정령 노인은 신음을 흘렸다. 로얀은 두 개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다 그것들을 부딪혀보려했다. 그러자 정령 노인이 손을 휘휘 저으며 다급히 말렸다. "자, 잠깐......!" 멈칫. "......?" "두, 두 개의 힘은 성질이 워낙에 상극이라 부딪히면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네." 정령 노인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그 말을 들은 로얀은 두개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다 다시 검집에 넣었다. 로얀은 두 자루의 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정령 노인이 공짜로 준다기에 더욱 흡족했다. "자, 잔깐! 잠시만 기다리게!" 인사를 하고 대장간을 나서려는 자신을 붙잡은 정령 노인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자 로얀은 마검과 성검을 각기 다른 옆구리에 찼다. 검집에 들어 있는 상태였음에도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닿지 않으려고 웅웅거리며 울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찬 것이다. "휴우... 이것도 들고 가게나." 안에서 다시 나온 정령 노인이 그에게 건네준 것은 망토였다. 갈색 천으로 만든 듯한 그것은 아무런 특징이 없는 수수한 모양으로 평범의 극을 달렸다. 하지만 그 크기가 무척이나 커서 190에 육박하는 로얀이 둘러도 발목까지 내려올 것 같았다. "이것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군요." "허허! 내가 만든 거라네. 가져가게." "정말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가져가게나. 내 수십만 년을 살면서 자네처럼 특이한 인간은 처음 봤으니까 말일세." 정령 노인의 말은 들은 로얀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대장간을 나섰다. 문 박으로 나가 망토를 둘러본 로얀은 그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로얀이 빠져나간 대장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때, 대장간 깊숙한 곳에서 매우 어린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할아버지, 혹시 노환이라도 드신 거 아니예요?" "허허허, 노환이라니... 팔러 나온것도 다 팔았으니 가게를 정리하고 가봐야겠구나." "피이! 노환이 아니고 뭐예요? 성검과 마검도 모자라 땅의 숨결이라는 할아버지의 작품도 주셨잖아요." "두 개의 검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 않느냐." "우우우! 정령왕씩이나 되는 할아버지의 물건이 보통 물건이에요? 역시 노환이야." "끌끌... 그러는 너는 7만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느냐." "윽! 정확히 7만 하고 천 살이에요! 훨씬이 아니라고요!" "허허... 그러시오, 할멈?" "꺄아아! 그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칫, 칫! 저 갈 거예요." 할멈이라는 소리에 격하게 반응하던 소녀의 음성은 정령 노인의 다음 말에 잠잠해졌다. "그 인간을 따라갈 셈이냐?" "......" "갈 생각이구나?" "누, 누가 간다고 했어요! 흥!" 정령 노인은 소녀가 그 말과 함께 이곳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인간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을 게 분명한 소녀는 틀림없이 그를 따라갓을 것이다. 이미 몇만 년을 봐왔으니 아마 자신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허허, 녀석도 참. 응? 허허허허......!" 정령 노인은 대장간을 둘러보다 뭔가를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놔뒀는지 로얀의 가죽 주머니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 금은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끼익! "어서 오세요" 뚜벅뚜벅...... 어리게 보이는 소녀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손살같이 튀어나와 허리를 구십 도로 숙였다. 어려 보이지만 상당히 교육을 잘 받은 듯했다. 그녀의 모습을 뒤로하고 로얀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곳은 입구와는 달리 중년 여인이 맡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의 주인인 듯했다. "1인실 하나." 빙긋. "용병이신가 보군요. 1실버입니다." 역시나 비쌌다. 1실버라니......! 밤이 늦은 데다가 수도라 그런지 방이 빈곳이 없었다. 게다가 공주의 무사 귀환 파티가 3일간 열리는 덕분에 다른 날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그는 호화로워 보이는 거대한 여관들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숙박비는 너무도 비쌌다. 여비로 1실버만을 남겨두고 가지고 있던 돈을 정령 노인에게 모두 줘버렸기 때문에 그의 수중에 현재 딱 1실버밖에 없었다. 1실버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은 로얀는 여주인이 건네주는 카운터 키를 받았다. "이층으로 올려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뚜벅뚜벅...... 끼익! 이층의 복도를 따라 걷던 그는 가장 안쪽의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이었지만 안은 정말 호화스러웠다. 사치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쿵. 문을 닫은 로얀은 커다란 침대 위에 앉았다. 푹씬한 느낌이 몸으로 젼해져 왔다. 펄럭. 그는 어깨를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고 허리에 찼던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를 풀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스르릉...... 먼저 다크리온을 뽑은 로얀은 드워프 모습을 한 정령 노인에게서 선물받은 망토를 집어 들어 그 검을 닦기 시작했다. 망토를 선물한 정령 노인이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흥분할 정도의 행동을 로얀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희대의 보물이 헝겊 조가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로얀은 전쟁터에서나 어디서든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고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할 때에는 검을 다듬었다. 그랬기에 숫돌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필수였다. 망토로 다크리온을 닦던 로얀은 뭔가 허전함을 느꼈는지 품속에서 작은 숫돌을 꺼냈다. 치치칙.....! 오르하르콘으로 만들어진 마검 다크리온의 검신은 숫돌로 갈 필요가 없었지만 로얀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아기를 돌보는 엄마처럼 정성을 들여 손질했다. 웅웅...... 다크리온이 싫은지 검명을 토해 냈지만 로얀에겐 그런건 먹히지 않았다. 치치칙......! 날카로운 다크리온의 검날에 죄없는 숫돌만 우수수 부서져 나갔다. "뭐?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정말 기가 막히게 예쁜 여자가 걸려들었대." "오호... 얼마나 예쁘기에?" 커다란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하던 로얀은 정령왕이 되면서 이전보다 더 발달한 청각으로 인해 곤혹스러웠다. 이 호화스러운 방은 이층 복도 구석의 여관 건물 뒤편에 있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어두운 뒷골목과 맞닿아 있었다. 카운터 있던 여주인이 로얀이 용병처럼 보이자 이런 곳에 방을 내준 듯했다. 로얀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동네 건달들의 말소리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달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두 명의 건달은 로얀이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빛이 없는 골목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키의 건달들은 프란이었고, 빼빼 마른 데다가 키만 멀대같이 큰 건달은 시폰으로 팔란의 골칫거리들이였다. 평소 귀가 얇고 떠들기 좋아하는 프란이 잡혀있다는 여자에 대해 말하자 꺼벙한 시폰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완전 천사 같은 얼굴인데, 제길! 상품 가격이 떨어진다고 손가락 하나 못 건드리게 한다니까." "와아, 그 정도라니......!" 그들의 두목은 눈이 매우 높았다. 그런 그가 상품이 상급이라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 여인의 미모가 대단하다는 것을 뜻했다. "근데 살짝 돈 년이야." "뭐?" "자기가 이 나라의 공주라고 외치는 거야." "킥, 공주라면 지금 파티 장... 커컥!" 시폰의 말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층에서 이곳에서 이곳까지 뛰어내린 로얀의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얀은 언제 착용했는지 몸에는 땅에 숨결을 두르고 양 허리엔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매달고 있었다. 시폰은 183 정도의 꽤나 큰 키였지만 지금 그는 190에 육박하는 로얀의 손에 들려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윽고 로얀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내하라." "네놈은 뭐냐!" "너, 너는...." 스릉, 웅웅...... 역시나 시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당당하게 외치던 말 많은 프란도 굳어버렸다. 로얀의 검집에서 빠져나온 다크리온이 푸른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당장라도 죽일 듯했기 때문이다. "커컥! 어, 어딜 안내......?" "조금 전에 말했던 여자가 잡혀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이, 일단... 이, 이 손을......" 쿵. "케켁!" 시폰은 지면으로 내려오자 기침을 토하며 붉게 달아올라 있는 목을 쓰다듬었다. 스윽. 웅웅...... "따, 따라오십시오." 오러를 머금은 다크리온이 약간 움직이며 빛을 뿌리자 눈치 빠른 프란이 급히 나서서 로얀에게 허리를 굽실거렸다. 비굴한 모습을 보인 프란은 로얀을 안내했다. 아직도 로얀의 섬뜩한 눈빛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뚜벅뚜벅...... "여깁니다." 몸을 떨며 앞서가던 프란의 말에 로얀은 바닥을 보았다. 그를 안내하던 프란은 어느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고, 다시 그 집 안에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바닥에 깔린 커다란 담요를 치우고 나타난 작은 문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후웅...... 퍽. "컥!" 쿠당탕! 로얀은 자신을 안내해 준 프란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그가 방구석에 처박히는 것을 본 로얀은 바닥에 있는 작은 문을 당겨 열었다. 끼익! 화르륵. 문을 열자 밑으로 향하는 긴 계단이 나타났고, 벽이 붙어 있던 횃불이 그의 등장을 반겼다. 뚜벅뚜벅...... 딱딱한 길이 돌로 된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로얀의 얼굴은 싸늘했고, 그의 눈동자는 횃불보다도 더 이글거렸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로얀의 귓가로 거친 남자들의 목소리가 가깝게 울려왔다. "헤헤! 두목, 이거 만져 보기만 하면 안 될까요?" "이 새끼가! 이년만 팔아넘기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단번에 청산할 수 있단 말이다!" "쩝, 그래도 너무 아쉬운데요." "키킥!" 뚜벅뚜벅...... 건달들의 말을 들은 로얀이 발걸음이 빨라졌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그는 작은 나무로 된 문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너머에서 건달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소리의 음성으로 짐작컨대 일당은 모두 네 명.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모두 네 명의 것이었다. 스르릉...... 겁집에 넣어두었던 다크리온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웅웅웅......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 콰가각! 중급 소드 마스터가 뿜어내는 오러의 힘을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문이 감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무문이 힘없이 부셔져 나가고 로얀의 시야로 문 너머의 광경이 들어왔다. 거대한 탁자를 중심으로 네 남자가 둘러앉아 있었는데, 술을 마시는 중이었는지 방 여기저기에는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탁자 위엔 불그스럼한 육포가 널브러져 있었다. "웬 놈이냐!" "누구냐!" 뚜벅. 웅웅...... 로얀의 다크리온이 거친 검명을 토해 냈다. 그의 눈동자는 어두운 지하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그런 그에게는 자신에게 다가오며 말하는 건달들을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로얀의 눈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구석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너무도 가냘퍼 보이는 소녀는 족쇄에 매인 천사처럼 쇠사슬에 묶여 구석에 쓰려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레나 폰 크라우드. 이 나라의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의 그녀가 이렇게 더럽고 퀴퀴한 곳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이곳으로 끌려오면서 저항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상해 있었다. 게다가 숨소리조차 미약해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빠득. 로얀의 입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살기가 지하 방 안을 잠식해갔다. 웅웅...... 다크리온이 주인의 기분을 읽었는지 미친 듯이 울부짖엇다. 처음 여관에서 엘레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설마 했었는데 정말로 그녀가 이곳에 잡혀 있는 것이엇다. "모두 죽인다." 지독한 살기를 풀풀 흘리고 있는 로얀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음성은 사람의 그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뭐, 뭐?"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고 건달들에게 다가가며 말하는 로얀의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였다. 스거걱. 푸화화확!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고 그들의 눈동자에 맺친 초첨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세 건달들은 찍소리 한번 못 해보고 모두 운명을 달리했다. "으아아아!" 남은 건달 한 명이 품 속에서 짤막한 대거를 꺼내 로얀에게 달려 들었다. 그의 괴성이 처절하게 들려왔다. 스걱. "끄아아악......!" 대거를 쥔 손목이 절단되어 피를 뿌리며 술병과 육포가 널려 있는 탁자 위로 뒹굴었다. 부부욱! 그리고 다크리온이 그의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푸화화확! 허리가 잘린 걸달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하지만 로얀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엘레나를 향해 걸어갔다. 스거걱. 굵은 사슬은 다크리온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쇠사슬을 잘라낸 로얀은 조심스럽게 엘레나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으음......" 그의 손길을 느낀 엘레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이미 건달들의 비명소리로 인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로얀은 엘레나가 깨어나자 그녀에 얼굴에 가 있는 자신의 손을 거두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막았다. 그녀의 하얀 손이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햐얀 피부 위로 이슬이 떨어져 내렸다. "미안내요... 미안해요, 오빠....." 말라버린 그녀의 입술이 힘없이 열리며 흘러나온 목소리에 로얀의 심장이 뛰었다. 그 목소리가 아련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레이나의 목소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로얀이 그렇게 떠나버리자 그에게 끝내 사과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파티가 한창인 떠들썩한 분위기를 틈타 몰래 황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로얀을 찾기 위해 팔란의 거리를 헤메고 다녔다. 단지 로얀에게 미얀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한데 후드를 눌러 쓰고 혼자 다니는 그녀를 건달들이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건달들은 그녀의 후드를 벗겨보고는 급히 이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건달들의 완력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때의 격한 저항으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 건달들은 평소에는 아무 여자나 잡아 노예시장에 팔기로 유명한 악질적인 녀석들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난 엘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힘이 다했는지 스스로 눈을 감았다. 너무 지친 그녀는 로얀을 보자 마음이 풀려 잠이 든 것이다. 스윽. 로얀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흘러내린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는 작게 속삭였다. "미안... 다시는 널 잃지 않겠어. 다시는!" 레이나와 너무나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엘레나를 보며 로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얀은 엘레나를 등에 업고 붉은 피가 뿌려져 있는 어두운 지하를 조용히 빠져 나갔다. 6장 슬픈 운명 엘레나를 등에 업은 로얀은 왕성 안으로 몰래 잠입했다. 정문으로 들어갔다가는 소란스러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큰 소란은 정신을 잃은 엘레나에게 해만 될 뿐이었다. 왕성으로 무사히 들어간 로얀은 그 길로 엘레나가 머무는 궁으로 향했다. 그는 공주가 머무는 곳이 어딘지 몰랐지만 왕성을 돌아다니는 시녀는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로얀이 지나가는 시녀 하나를 붙잡았다. 마침 그 시녀는 공주의 시중을 드는 시녀 중 한 사람이라 그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엘레나가 머무는 궁으로 갈 수 있었다. 당연히 시녀의 뒤에서는 로얀의 검이 번뜩이고 있었다. 로얀은 엘레나의 궁이 보이면 가리키라고 말했다. 시녀는 그의 말을 충실히 지켜 성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손가락으로 궁을 가리켰고, 더 이상 그녀가 필요 없어진 로얀은 그녀를 기절시켰다. 창문을 통해 무사히 엘레나의 방으로 들어간 로얀은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놓은 뒤 조용히 왕성을 빠져나갔다. 끼루룩......! 아침을 반기는 새들이 재잘거리며 노래했다. 그 소리에 엘레나는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오, 오빠!" 엘레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그녀의 작은 가슴이 들썩였다. 한데 그녀의 눈동자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 소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주며 희미하게 보이는 입술로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 아주 작아진 엘레나는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너무도 짧았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속을 하얗게 만든 강한 빛과 함께 그 소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어째서 잠에서 깨면서 오빠라고 외쳤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잠시 조금 전 꾸었던 꿈을 생각하던 엘레나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얀의 모습은 그녀의 방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걸국 어딘가로 떠나버린것일까?' 지난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같이 있으면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 함께 걸으면 즐거워 지는 사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짓게 만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로얀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잔혹한 흑안의 검사라고 불렀지만 그녀에겐 그 어떠한 햇살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이것이 사랑일까?' 엘레나는 아직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사랑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로얀의 옆에 있고 싶었고 지친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엘레나는 힘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에게 시녀들이 다가왔다. 시녀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시녀는 바로 로얀이 지난밤 기절시킨 여인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사들에게 흑안의 다크로얀이 공주님을 들쳐 업고 왕성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기사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흑안의 다크로얀이 무엇 때문에 다시, 게다가 어떻게 공주를 들쳐 업고 왕성에 나타났단 말인가? 또한 확인해 본 결과 엘레나는 자신의 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거짓을 고한 시녀는 그 죄로 인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엘레나가 석방시켜 주었지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축 처진 모습으로 방문을 열었다. 파티의 주인공이 자신인 이상 파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오늘만큼은 꼭 참석해야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방을 나선 엘레나는 눈앞의 누군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녀는 두 배는 되는 듯한 커다란 키의 청년. "흑, 오빠......" 로얀을 본 엘레나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에게 다가온 엘레나가 품에 안기자 로얀은 그녀의 여린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안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시녀들은 그 모습에 몸이 굳었지만 그 누구도 로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엘레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두려운 존재가 로얀 바로 그었다. 두 개의 달이 허공에 뜨고 어둠이 대기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팔란의 시장에는 여전히 마차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공주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 때문이었다. 성정이 곧고 어진 왕으로 이름 높은 레이언은 후실을 두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왕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는 공처가였던 것이다. 엘레나를 낳으면서 숨을 거둔 왕비를 사랑하고 있는 레이언에게 자식이라고는 엘레나 한 명뿐이었다. 그렇기에 팔란 왕국의 지방 귀족들까지도 엘레나 공주를 꼬드기기 위해 급히 수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엘레나 공주의 마음을 훔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얼굴 도장이라도 찍기위해 급히 수도 팔란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얀은 엘레나의 호의기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가 연회장으로 가면서 한 마지막 말이 생각나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밤 엘레나를 방 안에 눕혀 놓고 왕성을 빠져나왔다가 아침 일직 다시 왕성 안으로 들어가 국왕 레이언을 만났다. 국왕을 만나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로얀이 자신의 이름을 대고 만나기를 청하자 기사는 놀란 얼굴로 국왕에게 그의 방문을 알렸다. 그러자 국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당장 로얀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국왕 레이언이 있는 곳으로 간 로얀은 그에게 엘레나의 호위무사가 되길를 청했고, 레이언은 그의 청을 수락했다. 천 명의 호휘보다 로얀 한 명이 훨씬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로얀은 일단 지켜주겠다고 다짐한 이상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있고, 드래곤은 몇천 년을 사는 생물이라 복수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백 년이니까. "멈추시오." 연회장 입구를 지키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커다란 창으로 로얀의 앞을 막았다. 누더기처럼 보이는 망토를 걸친 긴 흑안의 로얀은 상당히 수상해 보였으니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그를 가로막는 것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정령 노인이 준 망토는 갈색 중에서도 바닥에 있는 흙과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다. 망토를 몸에 두르고 흙더미 위에 있으면 엄청난 위장술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볼품은 없어 지금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을 향해 로얀은 왕이 주었던 금으로 된 패를 보여주었다. 그 패는 왕이 친히 하사한 것으로 왕족이나 매우 높은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패였다. 한마디로 일급의 신분증이었다. "흠흠! 연회장으로 가시려면 검을 맡겨주십시오." "팔이 탈지도 모른다." 로얀의 섬뜩한 말에 병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려내렸다. 그 말은 곧 팔이 잘릴 거라는 소리로 들렸고, 그것은 엄연한 협박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진땀을 빼고 있는 그 병사의 귀에다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헉! 흑안의 다크로얀!" 헛바람을 들이키며 놀란 외침을 토하는 병사를 뒤로하고 로얀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도 놀라 미처 막지 못했던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그를 뒤쫓진 않았다. 무서웠다. 하룻밤 사이에 악명높은 유령해적단을 궤멸시킨 장본인... 아직도 그가 왜 B급용병이었는지에 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소드 마스터인 해적왕 라이던마저 죽인 인물이었다. 그가 하룻밤 사이에 죽인 사람의 수만 해도 천 명. 물론 서로가 서로를 죽여 쌓인 시체를 포함해서였지만 사람들에겐 그가 단신으로 그 모두를 죽였다고 알려졌다. 또한 해상전에서 해적함선 중 대장선을 박살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 사실은 살아 돌아온 용병들과 단풍기사단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다. 보수와 작위를 모두 마다한 그가 갑자기 왜 공주의 호위기사가 되었는지는 확실히 많지는 않았지만 엘레나 공주의 미모의 반해 그랬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사람들이 그를 가장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소문의 주인공인 로얀을 일개 병사 따위가 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연회장 내로 들어선 로얀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한 향수 냄새와 사람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뚜벅뚜벅...... 미끈한 대리석이 깔린 바닥을 로얀은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갑작스런 로얀의 등장에 연회장 가득 울려 퍼지던 음악이 멈췄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움직임도 함게 멈췄다. 두 개의 검을 허리 양쪽에 찬, 검은 머리에 흑안을 가진 남자... 팔란 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흑안의 다크로얀이었다. 로얀의 눈에는 동물처럼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모여 있는 귀족들의 모습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의 모습이 그의 눈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엘레나 폰 크라우드, 레이나를 너무도 닮은 소녀... 실제 레이나의 모습과는 다르다지만 그 느낌만은 똑같았다. 연회장으로 들어서면서 본 엘레나의 모습은 새장에 갇힌 새 같았다. 그녀는 많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지만 로얀에겐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뚜벅뚜벅...... 로얀이 걸어오는 것을 본 엘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오늘 아침 로얀이 자신의 호의기사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뒬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마치 최고급 신성마법을 받은 듯 다시 예전처럼 활달해졌다. 엘레나는 로얀에게 이번 파티에 파트너로 참석해 줄 것을 청했지만 그는 그 부탁을 단박에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엘레나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로얀과 실랑이를 벌였지만 그의 답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밤이 되었고, 엘레나는 당장 파티장에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엘레나는 끝까지 변하지 않는 로얀의 태도에 풀이 죽은 모습으로 뒤돌아 서며 한마디를 내뱉고 가버렸다. "오늘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형처럼 웃어야겠지... 하아! 갑자기 파티장에서 눈물이 나오면 어쩌지......" 이 말은 로얀의 머리속 깊이 새겨졌고, 그가 파티장으로 가지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덥석.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로얀은 엘레나의 손을 허락없이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연회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네놈이 감히 누구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꽤나 높아 보이는 귀족의 모습의 로얀의 눈에 비쳤다. 보석이 치렁치렁 달린,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목을 날리기 전에 꺼져." 추춤. 뼈까지 시리도록 섬득한 로얀의 음성에 당당히 나섰던 그 남자는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뚜벅뚜벅...... 로얀은 그대로 엘레나를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구, 국왕폐하!" 로얀이 있을 때에는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이 원성이 갑자기 빗발쳤다. 가장 장석에서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내고 앉아 있던 국왕 레이언은 자신의 딸인 엘레나가 로얀에게 끌려(?) 갔지만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허험! 음악이 왜 끊겼는가? 어서 다시 파티를 시작해라." "폐, 폐하......" 국왕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본 귀족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왕이 그렇게 말했으니 조용히 파티를 즐길 수밖에...... 로얀은 엘레나의 손을 잡고 연회장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밤이라 꽃들이 빛을 뿌리진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로얀은 엘레나의 손을 놓고는 몇 발짝 떨어져 섰다. 그런 그를 보는 엘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절 이리로 데리고 오신 이유이 뭐예요?" "아까 말한 것이 이런 뜻이 아니었나?" "흠흠! 전 충분히 즐거워하고 있었다고요." 그의 싸늘한 말에 엘레나는 심술이 났는지 본심과는 다른 말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럼 데려다 주지." 로얀은 손을 내밀자 엘레나는 급히 말을 꺼냈다. "이미 오빠가 연회장을 한바탕 휘저어 놨는데 또 가면 어떡해요?" "......" 그 말에 로얀이 손을 거두려 하자 엘레나가 얼른 그것을 붙잡았다. "저를 위한 파티였는데... 책임지세요." 혀를 빠끔히 내밀며 말한 엘레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로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로얀에게 춤을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경할할 노릇이었다. 일국의 공주인 그녀가 할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로얀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넌 공주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행동은 행동은 전혀 아니잖아요." 확실히 로얀은 행동은 무례를 넘어 범죄에 가까웠다. 반말을 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평범한 여인에게 해도 범죄가 되는 행동을 공주인 엘레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로얀은 그녀의 막나가는(?) 행동에 결국 저항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춤을 춰본 적이 없다. 차라리 마음에 안 드는 귀족이 있으면 말해." 그는 문득 전쟁터에서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탈출하는 것이 지금의 생황보다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면요?" "오늘밤 안에 처리해 주겠다." 엘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 손을 잡았다. "피이... 그냥 이걸로 할래요. 오빤 그냥 발만 맞춰줘요." 엘레나의 환한 미소를 뒤로하고 로얀과 엘레나는 달빛 아래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다. 그들의 추억을 밤하늘에 뜬 두 개의 달과 촘촘히 박힌 별들이 관중이 되어 지켜보았다. 이 일을 기짐으로 로얀과 엘레나는 좀더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두 사람은 같은 건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로얀은 하늘을 지붕 삼아 엘레나가 묵는 방의 지붕 위에서 지냈다. 그들의 묘한,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커다란 건물 안에 로얀의 방으로 배정된 곳이 있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한 번도 자지 않았다. 눈을 가지게 된 이상 밖에서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로얀은 엘레나는 이런저런 추억을 쌓았고, 떠오르는 태양과 사라지는 석양을 함께 보았다. 그렇게 시간은 화살같이 빠르게 지나가 어느덧 로얀이 왕성에서 지낸 지 석 달이 되었다. "오빠!" 지붕 위에서 푸른 하늘을 보고 있던 로얀은 밑에서 들려오는 맑은 음성에 몸을 일으켰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엘레나였다. 세상에서 그를 오빠라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엘레나 한 사람뿐이었던 것이다. 타탁. 로얀은 지붕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엘레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성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지난 석달 동안 항상 이렇게 지냈기에 로얀은 싫은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그저 엘레나가 이끄는대로 다녔다. 엘레나는 로얀에게서 과거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맹인이었다는 것도 들었다. 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앞이 안 보이는 맹인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눈이 없는 것과 눈이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눈이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래도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주지만 눈이 없는 사람은 괴물로 여겨 고립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녀가 성을 산책하는 것은 로얀과 논다는 의미보다는 그에게 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라는 이유가 더 컸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기에 로얀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석 달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로얀의 머리카락은 하나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였다. 찰랑거리는 부드러운 흑발... 로얀의 외모로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지만 성의 시녀들은 그를 호감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눈동자는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섬뜩하게 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해적들을 목각인형 베듯 천 명을 베었다고 말이다. 엘레나와의 생활은 항상 아침 일찍 성을 산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엘레나가 여러 가지 수업을 받을 때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밥을 먹을 때에는 항상 함께였다. 공주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후 지금까지 이론 제국은 별다른 움직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황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 제국의 침략 전쟁을 멈추게 한 교황이 봄의 대륙으로 돌아간 이상 이제 곧 팔란 왕국을 향해 시꺼먼 손길을 뻗칠 게 틀림없었다. 로얀은 엘레나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기 시작한 지 딱 석 달째되는 날은 두 개의 달이 유난히 밝게 보이는 날이었다. 엘레나가 머무는 궁전은 많은 나무와 꽃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중 맑은 물이 노래를 부르는 분수대가 있는 곳은 항상 엘레나와 로얀이 달을 구경하는 곳이었다. 분수대에 비친 달을 구경하는 곳이었다. 분수대에 비친 두 개의 달이 흐르는 물에 흐물거렸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 로얀은 여전히 달을 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달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될까요?" 분수대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조금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항상 자러 가기 전에 투정을 부렸지만 오늘따라 더욱 완강하게 싫다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로얀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그녀를 끌고라도 방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로얀은 오늘따라 유독 고집을 부리는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때, 로얀에게서 뜻박에 대답이 들려왔다. "눈 감아." 아무리 친남매처럼 지내는 엘레나와 로얀이었지만 그들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남이자 다 큰 남녀였다. 두근두근..... 엘레나의 심장이 보통 때보다 크게 두근거렸다. 그녀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피팟! 부우욱! 후두두......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눈을 감았던 엘레나의 귓가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너무도 궁금해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 그녀의 동그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로얀은 두 개의 검을 양손에 뽑아 들고 서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세 사람이 검은색으로 색칠한 예리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엘레나를 노리고 이곳에 잠입한 암살자들이었다. 그 세 명은 옷으로 보나 무기로 보나 어쌔신 같았다. 이곳까지 잠입해 들어온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어쌔신임을 알 수 있었다. 로얀 바로 앞에는 토막토막 잘린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조금 전 엘레나를 죽이려던 어쌔신들의 시체였다. 참혹한 관경을 본 엘레나는 조금 전 로얀이 왜 눈을 감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흑섬에서 더 참혹한 광경을 봤던 그녀였지만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눈 감아. 오늘 밤 악몽을 꿀 생각이 없다면." 로얀의 말에 엘레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우웅...... "소, 소드 마스터였나! 로얀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맑은 검명을 토해 내며 푸른색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팟! 로얀은 엘레나를 위해 이자들을 빨리 처리하기로 했다. 휙! 그의 미간으로 작은 단도가 날아들었다. 깡......! 로얀은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가볍게 휘둘러 그것을 쳐내고는 단도를 날린 상대를 다크리온으로 수평으로 갈라버렸다. 로얀에게 암기는 통하지 않았다. 소리까지 죽여 날아오는 암기가 아니라면 그의 귀를 속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로얀의 실력을 안 나머지 두 침입자는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다. 헤이스트라도 몸에 건 듯 그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빨랐다. 하긴, 일국의 공주를 암살하는 일에 고작 다섯 명이 왔으니 그만큼 실력도 굉장할 것이다. 우웅......! 에리오네가 푸른 오러를 뿌렸다. "헉! 두, 두 개의 오러!" 부욱, 부욱! 촤아아......! 붉은 피가 아름다운 정원에 후두두 떨어졌다. 로얀의 손놀림은 왠지 더 빨라진 듯했다. 성검과 마검의 힘이었다. 떨어지는 암살자들의 시체를 보며 로얀은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처음으로 시험해 보는 검의 성능은 기대 이상이었다. 생긴 것에 비해 상당히 가벼웠고, 적을 벨 때 손에 흘러오는 느낌도 좋았다. 스윽. 로얀은 묘하게 자신의 몸을 움찔거리게 만든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까마귀가 왠지 꺼림칙해 죽여버리려던 로얀은 엘레나를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 피를 볼 만큼 본 그녀에게 죄없는 동물의 피까지 보여주기는 싫었다. "그러니까 일찍 자라고 햇잖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엘레나는 그대로 로얀에게 다가와 그의 품에 얼굴을 숙이고 묻었다. 그녀의 작은 떨림이 로얀에게 전해져 왔다. "나... 오빠를 사랑하면 안 돼?" 흠짓. 쪼르륵. 분수대의 맑은 노랫소리에 맞추듯 엘레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녀가 오늘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도 아직 이 사랑이 이성을 향한 사랑인지 가족을 향한 사랑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 엘레나도 로얀이 여기서 머무는 것은 단지 그녀가 그의 죽은 동생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얀에게 마음이 어떻든 엘레나에게 있어 그는 피 한 방울 섞이진 않은 남... 하지만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위의 관경은 참혹했지만 로얀은 엘레나의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잡았다. "날 좋아해도 되지만 사랑하지는 말아줘." 스윽. 엘레나는 로얀의 품에서 벗어났다. "헤헤! 저 자러 갈래요. 방금 제가 한 말은 모두 잊어주세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떨림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그렇게 말한 엘레나는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로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위에 널브러진 암살자들을 둘러보았다. 뒤처리를 해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에 붉은 고깃덩거리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론 제국의 황제인 이론 폰 클라스. 초대 황제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야심이 많다고 해야 할까 욕심이 많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인물이었다. 그의 목표는 하나, 가을의 대륙의 통일이었다. 십여 년 동안 치열한 전쟁 준비를 마친 그는 주위의 작은 왕국부터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팔란 왕국과 작은 왕국 두 개만 남게 되었다. 드디어 대륙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었다. 그의 나이 45세. 아직도 혈기왕성한 그는 두 개의 작은 왕국은 무시하고 이론 제국 다음으로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팔란 왕국을 치기로 했다. 이론 제국의 수도인 이시스는 팔란 왕국과 이론 제국 국경 근처에 있었기에 치러 가기에도 매우 편리(?)했다. 하, 지, 만! 갑자기 끼어든 교황이라는 작자가 황제인 이론의 심기를 마구 흩으려놓았다. 한참 대륙 통일의 꿈에 부풀려 있던 그에게 교황이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이론 황제는 봄의 대륙에 있는 교황이 가을의 대륙으로 왔다는 소식과 함께 전쟁을 멈추라는 전서를 받은 것이다. 교황은 이유없는 살생이라며 전쟁을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칸 대륙에 하나밖에 없는 교황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칸 대륙에서 교황의 영향력은 제국의 황제라도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컸다. 대륙을 통일한다고 해도 교황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껍데기뿐인 통일이었다. 교황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같은 신을 믿고 있는 다른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시름하던 이론은 팔란 왕국의 대륙의 거의 모든 바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해도 전쟁만큼은 하지 않는 바보 같은 팔란 왕국의 왕이 딸만큼은 지독하게 아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시간은 가고 교황의 시선아래 다급해진 이론 황제는 팔란 왕국의 골칫거리인 유령해적단의 라이던을 이용하기로 했다. 엘레나 공주가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조사를 통해 알아냈기에 해적과 계약을 맺을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생각과는 달리 일은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라이던에게 바다로 나들이 나온 공주를 공격하여 죽이라고 했지만 빌어먹을 라이던이 그의 말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엘레나 공주를 공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라이던이 갑자기 엘레나를 잡아 가두고는 원래 받기로 한 것보다 더 많은 대가를 이론 제국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공주를 죽이겠다고 했다. 이론 제국의 황제는 큰 고민에 빠졌으나 결국 일단은 레이언을 움직이고 보자는 생각에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교황이 눈치를 채기 전에 어서 빨리 공주를 죽여야 했던 것이다. 하나 라이던이 엘레나 공주를 죽이기 전에 이론 제국의 계획은 로얀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이론 제국의 황제가 라이던의 요구를 수락하는 전서를 보내려던 바로 그날, 해적들은 모두 죽었고 엘레나 공주는 무사히 구출된 것이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이론 황제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가을의 대륙에 있던 교황이 봄의 대륙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같이 큰일을 벌이면 아무리 봄의 대륙의 있는 교황이라 해도 눈치를 챌 것이기에 결국 부릴 때마다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어쌔신 길드에게 엘레나 공주의 암살을 의뢰했다. 어쌔신의 제일 덕목은 의뢰자의 신상에 관한 것만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공주 암살 사건에 대한 것을 설사 교황이 눈치 챈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증거가 없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이론 제국의 흉계임을 짐작할 것이다. 그려면 드디어 팔란 왕국의 국왕도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론 제국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쳐들어온 팔란 왕국을 부셔버린 뒤 반격이란 명분으로 팔란 왕국을 완전히 삼켜버린다는 것이 황제 이론의 완벽한 계획이자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생에 무슨 원한을 졌는지 떠났다던 그 이상한 괴물이 갑자기 돌아와 호위기사를 자청하고 엘레나 공주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론 황제의 계획은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사전에 그런 실력자가 있다는 말을 안 했다는 이유로 돈을 한 푼도 내주지 않았다. 황제 이론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어쌔신 길드 마스터와 반짝이는 머링에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 있는, 음흉하게 생긴 꼽추가 서 있었다. 이론의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 괴물이 소드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1급 어쌔신이 다섯 명이나 되지 않았나?" "그는 두 개의 오러를 썼습니다. 또한 그에게 암기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1급 어쌔신이라고는 해도 특기인 암기를 모조리 피해 내는 괴물 같은 중급의 소드 마스터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주, 중급... 끙......" 이론 황제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제국에도 중급의 소드마스터가 몇 명 있었기에 그 힘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론의 얼굴에 잔잔한 주름이 펴졌다. "흐흐흐... 황제페하." "뭔가, 멀로?" 이론 황제는 꼽추 노인의 쇠 끌리는 듯한 괴이한 음성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른 나라에서 연금술사를 배척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연금술사를 받아들였다. 멀로라 불린, 반짝이는 머리의 꼽추가 바로 궁정 연금술사였다. "황제폐하께서 명하신 그것이 완성되었습니다." "뭐, 뭣이라!" 그 말에 이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멀로의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런 그의 반응에 어쌔신 길드 마스터는 눈동자를 굴리며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어쌔신 길드는 암살과 정보, 두 가지를 다루는 길드인 터라 대륙의 어지간한 일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지만 지금 황제가 하는 말은 그 길드 마스터조차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제국에서 극비리에 행하고 있었다는 결론이었다. 멀로는 황제의 격렬한 반응에 머리를 긁적였다. "한데... 그것이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한번 만들어봤다면 대량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닌가? 혹 연구 비용이 모자란 건가?' "아닙니다. 그 물건이 완성되었지만, 왓김에 여러 가지를 마구잡이로 넣다가 완성된 것이라......" "흠... 그럼 성분을 연구하면......" 이론 황제의 말에 멀로는 난처한 얼굴로 답했다. "워낙에 위험하고 신비로운 물건인지라 그것이 불가능할 듯합니다." "끙... 그렇다면 그것을 그 괴물 같은 다크로얀이라는 녀석을 죽이는 데 사용해야겠다." "헉!"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걸 고작 그런 곳에 쓴다고 하니 멀로의 눈이 떨렸다. 비록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모든 것을 허비해 만든 물건이 겨우 정체불명의 사내 하나를 제거하는 데 쓰일 거라는 황제의 말을 들은 멀로는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멀로의 떨림에 이론은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까운가?" "아, 아닙니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시간이 없어." 이론은 멀로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어쌔신 길드 마스터를 향해 다가갔다. "그쪽에서 이번 일을 해줬으면 하는군. 역시 1급 어쌔신으로 5명. 의뢰 내용은 좀 다를 거네." "알겠습니다. 황제폐하." 그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어쌔신 길드 마스터는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의뢰 요금도 엄청 받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황제 이론과 멀로, 그리고 어쌔신 길드 마스터는 의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로얀과 엘레나가 머물고 있는 궁에서는 로얀만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어쌔신 침입이 있었다는 것을 알렸지만 왕은 공주의 호위를 보강하지 않았다. 그만큼 팔란 왕국의 국왕이 그를 믿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늘도 로얀과 엘레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일주일 전 그날, 수줍은 그녀의 고백이 있었지만 엘레나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로얀을 대했다. 그날의 일은 완전히 잊은 듯한 그녀의 행동에 로얀은 안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성을 나가 마을을 구경하고 있었다. 때문에 밤이 깊어지자 피곤했는지 엘레나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로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쏴아아......!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부딪치며 바다의 파도 소리를 연출했다. 쏴아......! 로얀이 문득 팔을 들어 엘레나의 얼굴을 나무에 기대게 하려고 했다. 그 바람에 눈을 뜬 엘레나는 그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있자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스윽. "적이다. 저번처럼 다섯명.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 "싫어요. 오늘은 오빠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안 잘거예요." 엘레나의 투정에 로얀은 손을 들어 그녀에 머리를 흩트려놓고는 두 개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파파팟! 역시나 나타난 인물들은 검은 복장을 한 어쌔신 다섯 명이었다. 지난번에 왔던 인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 자들... 로얀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번과 같은 수준의 어쌔신을 같은 수로 보낼 정도로 이론 황제가 미친놈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외에 무언가가 더 있다는 얘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창.....! 불길한 느낌을 떨쳐버리려는 듯 그는 검을 힘주어 뽑았다. 타타탓! 어쌔신 네 명이 일제히 로얀을 향해 날아왔다. 풀잎을 스쳐 지나가는 엄청난 속도였다. 채챙......! 부우욱! 그들이 발이 빠르다면 로얀의 검은 허공을 날아다녔다. 엘레나는 로얀이 싸우는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걱정되는 한편 사람들이 죽는 모습이 무서웠기 때문에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했다. 엘레나의 눈동자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어쌔신에게로 향했다. 로얀에게 덤비지 않는 그 어쌔신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었다. 유리병을 불신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던 어쌔신은 고개를 젓더니 다른 손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익......! 타타탓! 그러자 어느새 네 명에서 두 명으로 줄어든 그들이 휘파람을 분 어쌔신 뒤로 몸을 날렸다. "너희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로얀은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후후후... 잘 가라, 다크로얀." 퐁! 유리병을 들고 있던 어쌔신이 병마개를 따고는 그것을 로얀을 향해 던졌다. 그런 그의 머리속에는 길드 마스터가 유리병을 말해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이름은 없다. 단지 상급의 소드 마스터도 죽일 수 있는 엑체라는 것. 또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게도 상당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죽음의 물약이라고만 했다. 물건은 녹지 않으나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대로 빛이 되어 부서져 버린다고 멀로라는 꼽추가 말하더군." 로얀은 피하지 않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유리병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저 맹물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바디 체인지를 한 그는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로얀의 뒤에서 그 액체를 바라보고 있던 엘레나는 문득 지난날의 꿈이 생각났다. 그리고 빛에 사라지는 소년이 지금의 로얀과 겹쳐 보였다. 팟! 그의 옆을 지나 검은 그림자가 흘러갔다. 스윽. 로얀은 몸을 돌려 뒤에서 덮쳐오는 그림자를 배려 했다. 엘레나가 갑자기 뒤에서 뛰어들어올 줄 몰랐던 그는 다른 어쌔신이 등 뒤에서 자신을 덮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멈짓! 그의 검이 멈추었다. 엘레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멈춰버린 그의 검을 지나 그녀의 몸은 로얀 앞에 섰다. 촤락......! 퉁, 데구르르...... 로얀의 눈앞으로 긴 보랏빛머리카락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 석 달 동안 함께 있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몸에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맑고 투명한 액체가 유리병에서 나와 엘레나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아니, 옷에 묻자마자 액체는 증발을 했는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박사박...... 가을의 대륙답게 공주의 정원에도 낙엽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엘레나는 낙엽을 밟으며 로얀을 향해 걸어왔다. 와락! 그녀는 얼굴을 로얀의 품에 묻었다. 엘레나는 자신의 몸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녀의 음성이 로얀의 귓가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오빠가 아무리 뭐라 해도 난 오빠를 사랑할래. 미안......" 파직! 그 순간, 엘레나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듯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와락! 로얀은 자신의 품안에서 부서지는 엘레나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의 입술도 눈동자도 떨려왔다. 부스스슥...... 그러자 원래부터 반짝이는 가루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그녀의 몸은 별빛이 되어 무녀져 내렸다. 휘오오!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어 엘레나의 빛을 안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름다운 별이 허공에 뿌려졌다. 엘레나의 부드러운 옷을 안고 있던 로얀의 음성이 떨려왔다.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음성이었다. "으, 으으아아아......!" 콰가가강! 성검이 가늘게 떨고 마검이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파핫! 로얀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번뜩! 멍하니 서 잇던 세 명의 어쌔신들은 모두 핏덩이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 흐르는 피를 밟고 허공을 수놓은, 엘레나가 만든 별을 보던 로얀은 그 별을 잡으려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손을 저었을 뿐이다. 챙강...... 성검과 마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크흐흑! 으아아아아......!" 비통한 로얀의 음성은 성 안 가득 울려 펴졌다. 또다시 잃어버렸다. 또다시 몸조차 지켜주지 못하고 잃어버렷다. 또다시...... 7장 첫 목숨, 널 위해 쓸게 수염을 말끔하게 깎은 팔란 왕국의 국왕 레이언 폰 크라우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오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 양쪽에 메리슨과 레토가 서 있는 가운데 방 안에는 단풍기사단의 기사들과 은빛 풀레이트를 걸친 왕국 수호기사들이 빽빽히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한 사람에게 꽃쳐 있었다. 흑안의 다크로얀... 엘레나 공주의 호위기사를 자정했던 그. 그는 공주의 옷만 가지고 찾아와 그것이 엘레나의 시체라고 했다. 국왕 레이언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옷을 든 로얀의 눈동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엘레나가 머무는 궁에서 격렬한 전투의 흔적과 더불어 어쌔신의 시체도 찾아냈다. 국왕 레이언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지금처럼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그가 깨어나길 기다린 것이다. 레이언은 힘겹게 왕좌에 앉아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흑안의 다크로얀이라 불리는 검은 흑발에 흑안을 가진 소드 마스터, 그가 자신의 딸을 지켜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날의 기억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위의 기사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로얀의 처형을 외치고 있었다. 레이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왕국을 떠나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어째서 나를 찾아왔나?" 로얀의 지금 행동은 죽여달라고 찾아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 로얀은 무릎을 꿇지도 않고 당당하게 서서 한 나라의 국왕인 자신을 처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강한 뭔가가 느껴졌다. 레이언은 처음 로얀을 봤을 때부터 그가 정말 마음에 들어 공주의 짝으로까지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죄인으로 서 있었다. 정말 비통한 심정이었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후우우... 난 그 아이의 아비이기에 앞서 한 나라의 국왕이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라네." 레이언은 사랑하는 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론 제국 황제의 생각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말에 로얀의 말라버린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이론 제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의 한마디에 기사들이 술렁였다. 감히 배신하겠다는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레이언이 손을 들어 술렁이는 기사들을 진정시켰다. "레나의 복수를 하려 하는가?" 그는 엘레나 공주의 애칭을 부르면서 복수를 거론했다.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만은 로얀의 눈동자에 담긴 복수심을 알아본 것이다. 로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지금까지 로얀에게 분노를 표하던 기사들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어렸다. "이곳에 온 것은 복수를 허락받기 위함입니다." 로얀의 말에 국왕 레이언은 턱을 손에 괴었다. 그의 몸은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허! 허락이라......" "......" "군사를 내어주겠다." 그 말에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레이언은 주위의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로얀을 바라보았다. 그건 로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금 두 사람만의 독대를 하고 있었다. "혼자 가겠습니다." 그의 굳은 의지가 눈동자를 통해 레이언에게 전달되었다. "음... 자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군." "폐하는 성군이십니다." 로얀은 등을 돌렸다. 레이언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레나에게 좋은 아버지가 있었군요." "자네가 죽는다면 내가 일어설지도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한 마디씩을 주고받았다. 뚜벅뚜벅...... 술렁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로얀은 대전을 뒤로하고 성문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앞을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그의 몸에서는 죽은자의 냄새가 풍겨 나와 무척이나 섬뜩했던 것이다. 팔란은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다. 끼이이......!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를 뒤로하고 로얀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떠남을 새들이 배웅해 주는 것만 같았다. 빽빽히 들어선 나무 사이를 걷던 로얀은 길가의 틈지막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신비한 소녀를 보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엉덩이까지 길게 기른 로얀의 배 정도밖에 오지 않는 작은키의 어린 소녀는 햐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데 소녀의 피부는 정말 눈부시도록 맑고 투명했다. 아기자기한 이목구비, 초롱초롱한 초록색 눈동자... 소녀의 모든 외모는 인간의 것이 아닌 듯 정말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보다 귀여움이 물씬 풍겨 나오는 꼬마 아가씨였다. 소녀는 로얀이 다가오자 바위 위에서 뛰어 내려오더니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박사박...... "어?" 그러나 로얀은 소녀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윽!"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소녀는 입을 부풀리며 성큼성큼 걸어가 로얀의 앞길을 막았다. "이렇게 깊은 숲 속에 어린 소녀가 혼자 있는데 그냥 지나갈 수 있죠?" 스윽. 로얀의 손이 검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분홍 머리카락의 소녀는 당황했는지 토끼 눈 같이 눈동자를 흐렸다. "그 망토를 만든 사람이 제 할아버지예요!" 소녀는 급히 손을 들어 로얀의 등을 가리고 있는 갈색 망토를 가리켰다. 그가 정말 검을 뽑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로 대장간에서 땅의 정령왕과 대화를 나누던 소녀였던 것이다. 로얀은 검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었다. 그 정령 노인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너도 인간이 아니군." 소녀는 얼마 전 대장간에서 들었던 것과는 달리 너무도 싸늘한 로얀의 음성에 황급히 대답했다. "그, 그래요! 전 페어리들의 여왕인 레아라고 해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힌 레아라는 소녀는 로얀을 뚫어져라 처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어떤 판정을 기다리는 죄인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로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용건이 뭐지?" "아... 그게......" "경고한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마라." 사박사박...... 로얀은 레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레아는 자신의 시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로얀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그 손길을 피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쳇! 쳇! 치사해서 안 따라간다. 흥." 화악! "베에......" 레아는 빛에 휩싸이면서도 로얀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한데 그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순식간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현재 로얀의 상황을 모르는 레아는 너무도 냉정한 그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휘리릭......!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낙엽만 바람에 날렸다. 로얀이 향하는 곳은 이론 제국의 수도 이시스였다. 그곳으로 향하는 그의 영혼은 조용히 타올랐다. 그의 머리속엔 온통 이론이라는 황제의 목을 베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해도 이론 제국과 맞써 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얀은 지금 그렇게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론 제국의 황제는 팔란 왕국이 처들어올 거라 확신하고 전쟁에 앞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평소에는 지방에서 잘 움직이지 않던 귀족들까지 자신들의 병사들을 이끌고 모조리 수도로 올라와 있었다. 이론 제국에는 5서클의 마법사 두 명과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로얀이 성검과 마검을 지닌 중급의 소드 마스터라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면으로 처들어 갈 생각이었다. '엘레나... 나의 첫 목숨... 널 위해 쓸게.' 이론 제국의 수도인 이시스는 비옥한 토지 위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였다. 팔란 왕국과 이론제국의 경계에 근접해 있는 이시스는 산업이 발달된 도시로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데 지금은 특히 이론 제국의 황제인 이론에 의해 큰 파티가 열리고 있었기에 여기저기서 모여든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당연히 제국의 궁전이었다. 이시스의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백색의 아름다운 성. 제국의 궁전은 이시스의 거대한 대로 정면에서 보였는데, 대로 양옆에 커다란 궁전은 이시스의 대로 위를 묘한 느낌의 사내가 걷고 있었다. 흑발에 흑안, 양 허리에 차여 있는 두 개의 검... 흑안의 다크로얀이라 불리는 로얀이었다. 다른 도시라면 이렇게 밤에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을 테지만 이시스는 지금처럼 두 개의 달이 동그랗게 뜬 밤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만큼 치안 유지가 잘 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로얀은 이시스로 들어온 직후 제국의 궁전을 향해 직선으로 뻗은 대로 위를 걷고 있었다. 이시스로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다크로얀이라는 B급 용병패 대신 과거에 쓰던 시엔이라는 이름으로 된 B급 용병패를 내밀자 쉽게 통과되었던 것이다. 로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길을 피해 주었다. 저절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로얀은 그저 걷기만 했다. 로얀의 눈동자에 거대한 제국의 궁전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창......! "멈춰라!" 제국의 정문답게 정문은 몇 대의 마차가 지나가도 될 만큼 거대했다. 그 앞을 수십 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로얀이 점점 다가오자 문 양쪽에서 창을 들어 엑스자로 그 앞을 막았다. "무슨 일이냐?" 병사들 중에서 대장 격으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앞을 나서며 물었다. 그러자 로얀은 두 손이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을 향해 나아갔다. "이론의 목을 가지러 왔다." 번뜩! 순식간이었다. 섬광이 비치더니 거구의 사내 가슴이 엑스자로 그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궁전 앞을 적셨다. 큰 대로와 연결되어 있는 제국의 궁전 앞에서 갑작스럽게 살인이 일어나자 즐겁게 시장을 보는 사람들의 몸이 경직되었다. "까아아악......!" 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이시스의 하늘로 울려 퍼짐과 동시에 겁 많은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아 대비했다. 하지만 그 수는 그히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로 올러나기만 했을뿐, 피하기는커녕 궁을 지키고 있는 병사를 죽인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제국을 상대할 순 없기 때문이다. 성문은 지키는 병사들은 너무도 놀라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잠깐의 순간 그들의 혼은 세상과 하직했다. 푸화화확! 로얀은 병사들의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어느 때보다 빠르고 힘이 넘치는 그의 검은 튼튼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나뭇잎 베듯 베어버렸다. 삐이이익......! 성벽 위에 병사가 침입자를 알리는 신호를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뚜벅뚜벅...... 로얀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투영된 커다란 문뿐! 우웅! 우웅! 에리오네와 다크리온이 푸른 오러를 뿜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로얀의 눈동자가 성문을 향해 예리하게 빛났다. 콰가가각! 쾅......! 푸른 빛 오러 블러이드의 물결에 거대한 성문은 종이처럼 구겨지며 박살이 나버렸다. "까아아악......!" "으아아......!" 그 놀라운 장면에 대로에 서 있던 사람들은 조금 전과는 달리 일제히 숨을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여기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대로에 남은 건 큰 남자들이나 여행자, 용병뿐이었다. 저벅! 저벅! 쿵쿵쿵......! 로얀이 부서진 성문을 밟고 들어서니 육중한 무게를 가진 뭔가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그것의 정체는 풀 플레이트 메일로 전신을 무장한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이 로얀을 둘러쌌다. "정체를 밝혀라!" "이론은 어디에 있지?" 로얀의 음성은 메말라 있었다. 아니, 메마름을 초월한 서늘한 냉기를 풍기고 있었다. 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로얀이 황제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자 분노했다. 기사로서 다른 이가 자신의 주군을 욕보인다는 것은 참을수 없는 치욕이었다. 투구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그는 얼굴을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 감히! 저자를 체포해라!" 일단은 체포해서 일의 배후를 밝혀야 했다. 혼자서 제국에 검을 들이대는 미친놈이 어디에 있겠는가? 쿵쿵쿵......! 무거운 갑옷을 걸친 백여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두 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쓰는 괴물 같은 소드 마스터였다. 로얀은 두 손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스거걱! 부우욱! 그의 푸른 빛 오러에 잘리지도 않는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검은 마검과 성검이었다. 푸화확! "끄아악......!" 풀 플레이트 메일을 전신에 둘렀건만 기사들은 무참하게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아니, 단단한 검조차도 로얀의 검에는 종이 잘리듯 잘려나갔다. 투구 사이로 죽어가는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두근두근...... 로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아무리 휘둘러도, 아무리 죽여도 마음속을 지배하는 분노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분노는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부웅. "크아악......!" 그의 오른손에 들린 다크리온이 기사들의 몸 속을 구경하고는 가늘게 검신을 떨었다. 마찬가지로 기사들의 피를머금은 에리오네도 검신을 떨었다. 하지만 에리오네가 검신을 떠는 이유는 다크리온처럼 피에 취해서가 아니라 로얀에게서 느껴지는 슬픔과 분노 때문이었다. 지금 로얀이 상대하고 기사들은 은빛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로얀의 검에 죽은 기사들이 벌써 50명이 넘어 푸른 잔디를 깔아놓은 궁전 입구가 피로 물들었다. 저벅! 저벅! 쿵쿵쿵......! 로얀이 죽인 것보다 몇 배나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왔다. 은빛기사단의 단장인 크루도는 제국의 다섯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으로 궁전의 외곽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사들이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나머지 은빛기사단 2백 명을 모두 이끌고 로얀의 앞에 나타났다. 챙......! 투구 속에 가려진 크루도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거대한 바스타스 소드가 푸른 오러를 머금었다. 로얀은 크루도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조금도 관심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들을 모조건 베어 넘길 뿐이었다. 그의 검은 기사들의 육체 사이의 갑옷까지 입은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로얀을 향해 뛰어갔다. "크와왁......!" 그의 입에서 몬스터의 괴성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지금 평소 한 손으로 휘두르는 바스타드 소드를 두 손으로 쥐고 휘두를 만큼 화가 나 있었다. 부하들의 죽음에 분노한 것이다. 로얀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몽둥이 같은 거대한 대검을 다크리온을 들어 막았다. 쾅......! 온 힘을 다해 휘두른 크루도의 바스타드 소드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끼릭, 끼릭...... 그리고 검끼리 부딪치며 굉음이 흘렀다. "......!" 크루도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자신의 검을 믿어지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 바스타스 소드에 비하면 훨씬 작은 흑색 검이 자신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상대는 그것을 한 손으로 쥐고서 말이다. 상대의 힘이 자신을 능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세상과 하직했다. 콰직! 로얀의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가 날카롭게 날아가 크루도의 머리를 꿰뚫었다. 단단한 은빛 투구를 뚫고 나온 에리오네는 드레곤의 비늘도 뚫을 수 있다는 듯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크르륵... 어, 어떻......" 머리에 에리오네를 박고 있는 크루도의 입에서 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쿵......! 그의 바스타드 소드가 지면을 울렸다. 푸확! 로얀은 에리오네를 크루도의 머리에서 빼내었다. 뎅겅! 그는 이미 죽은 크루도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스윽. 피를 뒤집어쓴 로얀의 눈동자가 붉에 빛났다. 그러나 정령 노인에게서 받은 망토에는 피 한방울도 묻지 않았다. 유리에 빗방울이 흘러내리듯 바닥으로 흘러내린 것이다. 터벅! 주춤주춤...... 로얀이 한 발짝 떼자 기사들의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움직였다. 그러나 로얀에게 겁을 먹은 기사들은 한 기사가 검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치는 소리에 마음을 바로잡았다. "우린 제국의 기사들이다! 제국을 위해 목숨을!" "와아아아......!" 쿵쿵쿵......! 로얀의 귀에는 그들이 무슨 소리를 내뱉든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두고 있는 곳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기사들 뒤편에 있는 거대한 문. 저문을 넘어 좀더 들어가면 파티가 열리는 거대한 연회장이 있을 것이다. 황혼의 궁이라 불리는 거대한 건물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로얀은 파티가 열리는 곳을 사람들에게 물어 미리 알아왔다. 그곳은 성에서 파티를 열면 항상 사용하는 궁이라 사람들에는 유명했던 것이다. 터벅터벅...... 로얀은 천천히 걸엇지만 기사들은 미친듯이 달려왔다. 스걱! "끄아악!" 부욱! 푸화확! 로얀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피가 길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기사들의 육중한 시체들이 달빛에 반짝였다. "와아아아......!" 푸걱! 푸화확! "크아악......!" 다크리온과 에리오네는 빛을 뿌리며 허공을 날아다녔다. 뚜벅! 로얀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 제국의 궁전에 들어왔을 때 부쉈던 문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콰가가각! 쾅......! 역시나 문을 박살내 버린 로얀은 그 문의 잔해를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앞에도 뒤에도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철걱, 철걱! 역시나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지만 커다란 망토를 두른 제국의 근위대가 나타났다. 모두 2백 명. 그들 하나하나가 상급 검사의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었다. 도열해 있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요새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근위대의 기사들은 모두 4백 명이었지만, 나머지 2백 명과 근위대의 대장과 부대장은 황혼의 궁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 적의 침입은 궁 안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상대가 단 한 명뿐이었기에 한창 파티를 즐기고 있는 황제 폐하와 귀족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포는 필요없다. 죽여라!" 창......! 다른 기사들이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데 혼자 푸른색 망토를 두른 한 기사의 말에 2백 명의 근위대는 일제히 검을 뽑았다. 엘레나의 죽음으로 벌이는 파티... 용서할 수 없었다! 타탓! 로얀이 처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와아아아......!" 그의 움직임에 따라 기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부웅, 부웅...... 콰가가각! 그의 검에는 눈이 없었다. 그러나 로얀의 전신은 엄청난 속도로 휘두르는 검에 의해 푸른 빛 막이 형성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근위대의 빨간 망토가 펄럭이며 이리저리 춤추었다. 망토의 최후는 출렁이며 지면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끄아아악......!" 푸화화확! 로얀은 달렸다. 그도 느끼고 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기사들... 이대로라면 환혼의 궁전에 도달하기도 전에 먼저 지칠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궁안을 뛰어다녔다. 어서 이론을 찾아 죽여야 했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덩달아 기사들의 시체가 쌓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타타탁! 얼마나 달렸을까? 얼마나 휘둘렀을까? 로얀은 드디어 황혼의 궁 정문에 도착했다.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었는데 특히 왼쪽 다리에 깊은 검상을 입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기사들의 피와 그가 흘리는 피가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혼의 궁은 정말 컸다. 한데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로얀의 눈동자는 더욱 붉게 빛났고,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로얀의 심장은 더욱 미친 듯이 날뛰었다. "와아아아아......!" "절대로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막아라!" 푸우욱! 콰가각! 로얀의 오러가 더욱 강하게 날뛰었다. 두 개의 검이 마구 울어댔다. 흠 하나 없던 그의 얼굴에는 자잘한 검상이 가득했다. 로얀은 지옥에서 뛰쳐나온 사람 같았다. "하악, 하악, 후우욱......"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서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의 몸은 만싱창이가 되어 있었다. 쿵쿵쿵......! 황혼의 궁을 지키는 근위대 2백 명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 중에는 기사단의 단장인 사엘과 부대장인 레온이 있었다. 그 두 사람 모두 초급의 소드 마스터였다. 철벽으로 된 단단한 성벽처럼 도열해 있는 그들을 보며 로얀은 입을 열였다. "죽인다. 반드시 이론의 목숨만큼은 가져가겠다." 움찔! 그는 이미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섬뜩하고 두려웠다. 푸른 망토를 두른 사엘은 자신이 다 죽어가는 검사에게 잠시나마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외쳤다. "죽여라!" "와아아......!" 쿵쿵쿵......! 로얀은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한 발, 한발을 내딛었다. 황혼의 궁으로 향하는 계단은 꽤나 높았다. 그 계단을 반쯤 올라왔을 때에는 이미 기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웅웅...... 주인을 걱정하는 것일까? 섬검 에리오네가 울었고, 마검 다크리온마저도 슬프게 울었다. 스윽. 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로얀의 시야를 가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정면에 늘어선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모든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타타타탁! 그 틈을 타 피로 물든 백색 계단을 로얀은 엄청난 속도로 올라갔다. 그의 혼백 속에는 백만 대군의 검이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로얀은 양손에 들린 검을 눕혀 잡았다. 그 상태 그대로 그가 앞으로 나아가자 날카로운 날이 기사들의 몸을 베었다. 부우욱.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하악! 후욱, 후욱......" 사엘과 레온을 비롯한 기사들은 갑작스런 그의 움직임에 실수로 길을 내주고 말았다. 로얀의 눈앞에 황혼의 궁의 문이 다가왔다. 콰가가각! 콰쾅......! 금빛 거대한 문을 로얀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단숨에 부숴버렸다. 피로 물든 그의 혼이 무섭게 빛났다. "크아악......!" 로얀은 미친 듯이 울부짓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을 반기는지 화려한 불빛이 그의 전신을 비추었다. 그의 몸에 묻은 피가 붉게 빛났다. "까아아악!" "으아아아!" 한장 파티를 즐기고 있던 귀족가의 여인들과 남자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호의호식하며 자란 귀족들은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벌벌 떨었다. 음악이 멈추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황제는 입을 쩍 벌렸고, 그런 그를 로얄 나이트들이 둘러쌌다. "뭣들 하느냐!" 로얄나이트들 속에서 겁에 질려 고래고래 고함치는 황제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을의 대륙을 통일이나 한 듯 큰소리치며 술을 마시고 즐기던 황제가 지금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뚜벅뚜벅...... 뚝, 뚝! 로얀은 피를 흘리며 걸어갔다. 타타탁! 우르르...... 로얀을 따라왔던 기사들이 황혼의 궁 안으로 들어섰고, 황혼의 궁전 안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몰려왔다. 5서클의 마법사 두 명과 사엘, 레온을 포함한 제국의 네 소드 마스터가 모두 나타났다. 크루도는 로얀에게 이미 목숨을 잃었기에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네 명뿐이었다. 로얀은 주위에는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기사들과 병사들로 가득차 있었다. 5서클의 두 마법사의 손이 화염으로 빛났다. 그들의 행동에 로얀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마법사들이 이곳에서 마법을 쓴다는 것을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황제 이론이 얼마나 겁에 질렸으면 황혼의 궁이 부서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도 마법을 허락했을까? 두 마법사의 입에서 궁안을 울리는 음성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불꽃이여, 폭발을 불러라. 파이어볼!" 화르륵! 로얀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붉은 구체가 담겼다. 로얀은 마검과 성검을 들었다. "두 개의 검은 성질이 위낙에 상극이라 부딪치면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네." 정령 노인의 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챙! 콰하하항......! 마검 다크리온과 성검 에리오네가 서로 부딪치자 찢어질 듯 한 비명을 지르며 폭발했다. 그리고 그 폭발의 여파에 두 개의 파이어 볼이 휩싸였다. 쾅! 쿠구구궁......! 거대한 폭음이 들려오고 황혼의 궁이 크게 흔들렸다. 스윽. 폭발의 여운이 지나가고... 로얀의 괴이한 눈동자가 로얄 나이트들 틈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 이론을 바라보았다. 이론은 섬뜩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주르륵. "쿨럭!" 로얀이라고 해서 폭발의 여파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속이 모두 뒤집힌 것만 같았다. "어, 어서! 어서 죽여라!" 타탓! 이번에는 네 명의 소드 마스터가 날아올랐다. 군부의 총책임을 맏고 있는 중급의 소드 마스터 샤이니어스가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는 이론의 정복전쟁의 핵심인물이자 선봉에 섰던 대장군이었다. 공작의 위치에 올라 있는 그도 파티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까깡! 샤이니어스의 푸른 오러와 로얀의 푸른 오러가 맞부딪히자 불꽃이 튀었다. 로얀은 샤이니어스와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에리오네를 들어 왼쪽에서 날아오는 샤엘의 검을 막았다. 까까깡......! 로얀의 심장이 급박하게 뛰었다. 그의 몸이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느려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힘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고, 오러의 빛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번뜩! 샤이니어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촤악! 흥......! 다크리온을 쥔 로얀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샤이니어스가 그의 오른팔을 베어버린 것이다. 어깨까지 깨끗하게 잘린 로얀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비틀. "으드득!" 로얀의 몸이 기우뚱했다. 그는 이를 깨물고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고통에 찬 음성을 막았다. 푸푹!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엔 샤엘과 레온의 검이 그의 복부와 가슴에 박혔다. "쿨럭! 크으윽......" 로얀은 왼손에 들린 에리오네를 자신의 품에 들어와 검을 박고 있는 레온을 향해 내리찍었다. 퍽! "크르륵......" 레온의 머리가 위에서 턱 밑으로 뚫려버렸다. 푸화확! 로얀은 레온의 머리에서 에리오네를 뻬내고는 비틀거렸다. 그리고 레온을 발로 차 밀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레온의 검은 로얀에 복부에 여전히 꽃혀 있었다. 샤이니어스의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죽어라!" 그는 자신의 검을 들고 로얀을 향해 다가갔다. 부우욱! 로얀의 허리가 이등분되어 버렸다. 푸화확! 끔직한 광경... 로얀은 쓰러지면서 죽음에 대한 역겨움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하악, 하악... 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쿠쿵. 로얀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눈을 부릅뜬 그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려들 것만 같았다. 샤이니어스는 이미 허리가 두 동강 난 로얀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보고서야 안심했다. 그는 로얀의 손에 쥐어 있는 에리오네와 멀리 떨어져 있는 다크리온을 바라보았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빛났다. 검을 가진 기사에겐 검이 곧 목숨이었고, 뛰어난 명검은 가장 탐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허허허! 과연 샤이니어스 공작이로군." 샤이니어스는 이론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는 황제에게 로얀의 검을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황혼의 궁이 다시 화기애애해지려 할 때! 두근두근...... 로얀의 심장이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뛰었다. [첫 번째 목숨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첫 번째 사슬이 풀렸다. 너는 강한 힘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것이며, 네가 잃은 것은 생명을 해할 때 느끼는 인정이다.] 로얀에게만 들리는 전대 다크로얀의 목소리. [불은 갈라져도 다시 타오른다. 물은 갈라져도 다시 흐른다. 바람은 갈라져도 다시 불어온다. 그 누구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순 없다. 너의 영혼이 순리이다. 너는 혼돈의 정령왕 다크로얀이다!] 휘오오오......! 황혼의 궁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로얀의 심장은 더욱 급박하게 뛰었다. 8장 외전 <독종 이야기> 삐그덕, 삐그덕...... 오늘도 짜증나는 고물 집의 비명소리가 나의 신경을 긁었다. 용병길드...... 그린티에 있는, '용병길드'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이 집은 나의 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꼴에 2층짜리 건물이다. 1층에서는 용병길드의 일을 보고 2층은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혼자 살기엔 꽤나 넓은 집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어째서 결혼을 하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의 이름은 마크, 그래도 과거에는 잘 나가는 용병이었다. 이 건물을 맡은 지 이제 갓 한 달이 지나고 있었지만 난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있었다. 나의 천부적인 재능? 개뿔이다. 어릴 때부터 영감탱이의 일하는 모습을 질리도록 보았고, 용병일을 하며 늘어난 수완 덕택에 용병길드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전대 그란티 길드장은 나에게 마크라는 이름을 지어준, 나의 아버지가 되는 영감탱이였다. 그 영감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한 달 전 용병일을 청산하고 나는 이렇게 그란티 용병 길드장이 된 것이다. 용병길드를 총괄하는 곳에서 어느 정도 건물 유지비를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용병길드에선 의뢰비에서 일부를 조금 때어먹었고, 그것으로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건 물론 나도 마찬가지. 갑자기 죽은 영감을 난 원망하지 않는다. 어차피 30대 후반의 검사인 나는 퇴직할 때가 다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 퇴직이 영감이 죽어 갑자기 찾아왔다는 게 문제였지만. 비는 억세게 퍼붓는데 길드 안은 귀가 따갑게 시끄러웠다. 적당한 일거리가 나타날 때까지 길드 안에 죽치고 앉아 있는 용병들 때문이었다. 이 자식들은 이 신성한(?) 나의 집에서 도박판을 벌인것도 모자라 술판까지 따블로 벌이고 있었다. 쩝! 나도 에전엔 그랬고, 저놈들이 술을 팔아주니 나야 좋긴 하지만...... 용병길드는 거친 용병들만 상대하는 술집 역할도 했지만, 이렇게 대낮부터 찾아와 떠들어대고 있으니 골이 다 띵했다. 안 그래도 찜찜하게 내리는 비가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끼이익! 쏴아아아......!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나의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 때 빌어먹을 고물 문이 열렸다. 한 동안 퍼붓는 빗소리가 귀를 따갑게 때렸다. "하하! 이거 비가 장난이 아니구먼. 자네가 드디어 정착하고 길드장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네, 마크." 아니, 이 목소리는? "엇, 짠돌이 알!" "하하! 오랜만이군, 그래." 역시 녀석이다. 그는 나의 지기로 조그마한 상단의 주인이었다. 과거 녀석의 상단을 호위해 준 계기로 알게 되었는데 나이가 비슷해 친구 사이가 된 것이다. 상인답게 살짝 휘어 올라간 그의 눈썹은 꽤나 약삭빨라 보였다. 아, 이건 저 녀석에게는 비밀이다. 저 자식은 한 가지 일로 삐치면 일 년은 기본으로 가는 좀생이니 말이다. 얼씨구! 한데 오늘은 이상한 놈과 같이 왔다. 두 눈에 눈알이 들어있지 않은 쪼그마한 아이였다. 왜소한 체구에 이제 갓 열살을 넘긴 듯한 어린 소년... 서커스라도 하려는 걸까? 그 아이의 등엔 커다란 롱 소드가 매여있었다. 그것도 두 자루씩이나. 검들은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지만 꽤나 실력이 좋은 장인이 만든 것인지 반짝이는 예기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 꼬마는 뭔가? 서커스단에 팔려고?" "쯧쯧,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게." 나와 알의 대화에 관심을 가지는 용병은 없었다. 잠깐 눈이 없는 아이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 용병들에게 눈이 없는 사람은 별거 아니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눈을 잃고 사지가 잘린 용병은 수두록했으니까. 뚜벅뚜벅! 그그그그......! 알이 괴상한 아이의 작대기 같은 손을 잡고 나에게 다가왔다. 맹인 생활이 오래돼서 일까? 그 꼬마는 잠시 주춤거리다 보통 사람처럼 잘 걸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꼬마 녀석의 등에 매여 있는 검 때문에 바닥에 긴 줄이 그려지며 갈렸다. "팔레인에서 데려온 아이인데 여동생의 약값을 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라네. 그리고 이 아이가 무슨 일이든 한다기에 너무 딱해 데려왔지. 아이치고는 몸에 독기가 있어." 이런 씨팔! 누가 그런 거 물어봤냐! 저 바닥 값이나 물어내! "그래서 상단의 잡일이라도 시키려고?" 저런 병신 같은 꼬마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하하하! 아닐세. 저 검을 보면 모르겠나? 이 아이는 용병이 되고 싶어한다네." 흠, 용병이라... 뭐, 뭐? "그럼 잘 부탁하네!" 뚜벅뚜벅...... 끼이익. 쿵! 빌어먹을 자식! 지 할 말만 다 내뱉고 그 자식은 횅하니 나가버렸다. 그리고 내 앞에 멀뚱히 서 있는꼬마... 빌어먹을! 오늘 재수 옴 붙었다. 으아아아! 다 지끈거린다. "어서 여기서 껴져! 너 같은 병신이 뭘 할 수 있겠냐!" 으으으...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젠장, 잠이나 자야겠다. 알이 어째서 저런 꼬마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는 안 봐도 머리속에 훤히 그림이 그려진다. 마을과 도시를 오가며 장사를 하는 장사꾼은 마을 사람들의 신뢰와 믿음을 얻어야 한다. 저 녀석은 분명 팔레인에서 저 병신이 불쌍하다며 소년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지켜보는 팔레인 사람들의 마음은 그 자식에게 사로 잡혔을 것이고. 하지만 저런 병신을 어디다 쓸 것인가? 노예로 팔고 싶어도 사가는 사람이 없을 테고, 길가에 버리자니 상단을 따라온 다른 마을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 쓰였을 테니 결국 나에게 떠맡기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겠지. 젠장,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으으으! 이럴 때에는 역시 잠이 최고지. 암암! "하아아암!" 얼마나 잤을까? 그리고 보니 떠들어 제치던 용병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빈대 같은 용병들이 돌아갈 정도로 벌써 어두운 밤이 되었던 것이다. 화르륵! 랜턴에 불을 붙여 그것을 들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삐그덕, 삐그덕...... 짜증나는 소리가 또 다시 울려 퍼졌다. "끄응! 날 잡아 집을 손보든지 해야... 으히힉!" 타탁! 헉! 일층으로 내려온 나는 랜턴을 떨어뜨릴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나의 집은 홀라당 타버렸을 거다. "너, 너 이 자식! 왜 여기에 있는거야!" 내 앞에는 랜턴의 불빛을 받고 서 있는, 아침의 그 눈알이 없는 병신 꼬마가 서 있었다. 그 아이가 목소리 때문인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빌어먹을! 밤에 보니 더 무섭다. "어서 꺼져!" 그그그......! 꼬마가 검을 들고 다가왔다. 그 모습이 나의 발걸음을 몇 발짝 뒤로 몰리게 만들었다. 밤에보니 정말 더럽게 무섭게 생긴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 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저를 용병으로 만들어주십시오. 전쟁터에서 칼받이라도 되겠습니다." "뭐? 뭐, 뭐야! 이 미친 새끼!" 정말 미친것이 분명하다. 눈알을 잃으면서 정신적 충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이 병신 꼬마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병신아, 그란티에는 제르라는 날건달이 있다. 그 녀석을 이긴다면 전쟁터로 보내주마.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 검은 나의 것이다." 꽤나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듯한 롱 소드 두 자루... 솔직히 탐이났다. 그리고 어서 저 꼬마를 내쫓고 싶었다. 나의 말에 꼬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등에서 검을 풀었다. "약속 지키세요." 뚜벅뚜벅...... "뭐?" 나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벌써 길드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버렸으나까. 니미럴, 소금이라도 왕창 뿌려야겠다! 흐흐... 그건 그렇고, 검 두 자루를 팔아서 오랜만에 재미 좀 봐야겠군. 하지만 나의 그런 생각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확히 일주일 후 그 병신 꼬마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온몸이 퉁퉁 부은 그 꼬마가 처음 한 말은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나의 처음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때 길드 안에 있던 용병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꼬마의 말을 증명해 주었다. 용병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 아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날건달 제르는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갔다고 한다. 자세히 물어보니, 저 병신같은 꼬마가 마을 대로에서 제르를 목이터지게 외치자 불같은 성격의 제르는 꼬마를 질질 끌고 가 마구잡이로 팼단다. 그 다음날 피투성이가 된 꼬마가 비틀거리며 대로로 나와 또다시 제르의 이름을 부르자 잔뜩 흥분한 제르는 또다시 달려와 꼬마를 반쯤 죽여놓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기를 닷새. 남은 이틀 동안은 너무심하게 다쳐 한동안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약속한 지 정확히 일주일 만에 꼬마는 제르를 이겼다. 완벽한 승리!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꼬마는 제르를 이겼단다. "너, 너 어떻게 이긴거냐?" 나의 물음에 병신 꼬마가 입을 열였다. 저 괴물 독종의 말에 따르면 녀석은 일주일간 제르의 공격 패턴을 모두 기억했단다. 눈으로 본것이 아니라 제르가 내 뻗는 주먹의 바람소리, 그가 내딛는 발걸음 소리등등... 아이는 눈이 아닌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해 제르를 서서히 쇠사슬로 묶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검을 넘겨 주었고, 약속대로 전쟁터로 보내주었다. 용병을 전쟁터로 내보내면서 군관에게 돈을 쥐어준 것은 그때가 내 생애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의 눈에서 그 병신... 아니, 독종은 사라졌다. "이봐 독종! 너 이름이 뭐냐?" 저 녀석이라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비록 눈이 없는 병신이지만, 미친놈인 저 녀석이라면... 전쟁은 미쳐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시엔...입니다." 그리고 소년은 군관을 따라 내 시아에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