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로냐프 강 이 상 균 (Hitel street) 지음 하 얀 로 냐 프 강 0. 엘핀랜드. 이러한 철저한 계급 사회가 꽤오랜시간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귀족들은 귀족들 나름대로, 평민들은 평민들 나름대로 그 생활에 익숙해져왔다. 더욱이, 루지아 9세의 계급간 명예적 지위차의 심화정책 이후로는 귀족들은 평민들과 말 한마디 하는것 조차 커다란 수치로 여길 정도로 계급 사이의 지위 격차는 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로냐프 강 ------------------------------------------------------------------ }}{{ }}{{ 0. 엘핀랜드 ------------------------------------------------------------------ }} 0. 엘핀랜드 1. 역사. (1) 엘핀랜드의 역사서 엘핀랜드에 존재하는 역사서는 대단히 많다. 그만큼 이 세계는 문화적 으로 발전한 세계였고, 오랜 역사를 가진 세계였다. 하지만 본래 엘핀랜 드는 오래전부터 셋으로 갈라져 있는 세계였기때문에--이에 대한 설명은 뒤에 나온다--그 역사가 통합되지 못했고, 역사 해석의 체계적 통합과 의견의 타협등이 이루어 지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 저마다의 역사--물론 이것은 태고적 역사 부터 다룬것 이지만--를 가지고 있고, 문화의 소통 이 단절된 상태를 유지해왔다. 아펠르력 419년에 편찬된--아펠르력은 태초에 엘핀랜드를 창조했다고 전해지는 창조신의 이름을 따 만든 엘핀랜드의 역법이며 아펠르력 1년은 (그 전까지 사용하던) 엘핀랜드력 1390 년에 해당한다. 단, 아직도 엘핀 랜드력을 사용하는 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어둠의 제국 크실이 대표적이 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모두 빛의 왕국 이나바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때문에 아펠르력을 따르겠다--왕영 마법사이자 역사학자 였던 레 듄하임의 "엘핀랜드의 빛에 서다"란 책 서문에는 이런말이 있다. "엘핀랜드의 역사는 단호히 말하건대 셋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조금 도 구애받지 않을 뿐더러 서로의 역사를 이해해 주고 인정해 주어햐 한 다. " 엘핀랜드 고전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레듄하임의 말은 엘핀랜드의 역사를 가장 쉽고 명료하게 표현한것이라 하겠다. 가장 최근에 편찬된 "엘핀랜드의 역사"라는 책은 19년동안 2000여명의 역사학자가 만든 굉장한 서적이다. 4부 95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그 동안 이나바뉴 곳곳에 널려있던 서적들과 민담. 전설등을 모아놓은 책이 다. 물론, 민담이나 전설이라 해서 모두 실은것은 아니다. 그중 여러부분 에서 공통되는 것들, 다른 권위있는 책--대개는 레듄하임이나 설화학의 대가였던 호유우의 책--들에서 어느정도의 언급이 되어 있는 것들을 정 리해서 실었다. 그중에 어떤 부분은 이나바뉴 기사단을 동원하여 휴우젠 산 (이나바뉴의 북쪽 우스테커 지방에 있는 산으로 아주 신비롭다고 전 해진다)까지 모험을 해가며 얻은 자료도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서술할 이야기는 거의 모두 이 "엘핀랜드의 역사"를 기준으로 한 이야기임을 밝혀둔다. (2) 분열의 시작 -- 아펠르력의 발생 엘핀랜드를 만든 창조신 아펠르에게는 두명의 아내 사이에 사타루스와 케켄이라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다. 사타루스는 그당시 통합되어 있던 엘 핀랜드--그때의 역사 중심은 '신'이었다. 엘핀랜드가 셋으로 갈라지기 이 전의 인간의 역사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와 설화가 있으나 그중 어느것 도 확실한것이 없었다. 알 수 있는것은 이때의 엘핀랜드는 혼돈의 세계 였고, 힘이 약한 왕국 이나바뉴에 의해서 간신히 통치되고 있었다는것이 다--의 실질적 지배자 였으며 당시 이나바뉴의 왕인 셰리노아 2세의 딸 인 쥬르를 아내로 맞이했다. 케켄은 아름다운 쥬르를 사랑했고, 이 사실 을 안 사타루스는 매우 노하여 동생을 사막과 바위산 투성이인 엘핀랜드 의 동남쪽 구석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때부터 엘핀랜드는 갈라졌다. 흔히 사람들은 사타루스의 지배를 받 는 엘핀랜드의 기름지고 아름다운 영토부분을 빛의 이나바뉴라고 했고, 케켄의 지배를 받는 어둡고 침체된 동남쪽 대륙을 암흑의 크실이라 했다 --물론 이도 어떤 권위있는 역사학자가 만들어낸것 일지도 모른다--그리 고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쥬르가 지배하는 자그마한 왕국 로젠다로가 이 나바뉴와 크실 사이에 나타났다. 익히 알려진 바로는 이때가 아펠르력 1 년이며, 그때까지 사용하던 엘핀랜드력 1390년 이었다고 한다. (3) 이나바뉴의 번영 빛의 신 사타루스의 지배를 받던 이나바뉴는 눈부신 발전을 했다. 문 화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군사적으로도 이웃나라인 크실을 압도했다-- 로젠다로는 그 크기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나바뉴와 크실에 비할만 한 국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단지, 로젠다로의 전통있는 에우로페 성역 기사단은 이나바뉴의 옐리어스 나이트 못지않은 강한 초정예의 기사들이 라 한다--특히, 아펠르력 371년 이나바뉴의 전설적인 현제 루지아 2세부 터 개루너 5세에 이르는 80여년간은 이나바뉴 문화의 절정기였다. 유명 한 역사학자 레듄하임이 그의 유명한 역사서들을 편찬한것도 이때이고 뒤에 호유우로 그 눈부신 빛을 발한 설화학도 이때에 시작되었다. 유명 한 음유시인인 야론과 로느친이 활동한--물론 그때 당시에는 그들도 현 재의 음유시인들과 같이 천대 받기는 마찬가지였지만--것도 이때였다. 문화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경제.군사적으로도 이때만큼 발전한 때는 없 다. 이때, 이나바뉴는 루우젤 성을 중심으로 한 로냐프강 동쪽의 루우젤 지방을 제외한 전 지역에 통치력을행사했다. 도시들이 급격하게 발전했 고,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경제면에서는 루지아 2세가 기능공들을 시켜 만든 여러가지 새로운 농기구덕에 훨씬 많은 양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나바뉴의 수도인 퓨론사즈의 인구를 보면 루지아 1세때인 365년 보다 개루너 5세때인 459년은 거의 두배이다. 유명한 기사대장 나 이트 데로스에 의해 무용, 성실, 명예, 예의, 경건, 겸양, 약자보호의 기사 도가 정리 되어진 것도 이때이고, 그 전까지 형식적인 일로만 여겨져 오 던 '카발리에로'--이 '카발리에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에 다시 나온 다--제도가 실질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한것도 이때였으며 이나바뉴의 빛 의 수호자들, 국왕 친위대 옐리어스 나이트가 결성된것도 이때이다. 당시 7명의 기사들로 시작한 옐리어스 나이트는 현재에는 귀족으로서의 명예 와 기사로서의 용맹을 상징하는 이나바뉴의 하나의 특수 계급이자, 모든 젊은이들의 동경과 목표의 대상이 되어 있다. (3) 제 1차 천신 전쟁 아마도 그때의 이나바뉴는 스스로 번영의 술에 젖어 바로 옆에 있던 암흑제국 크실을 잊고 있었던것 같다. 아펠르력이 시작된지 500여년간 크실 내부잘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확실히 알 수 있는 자료는 크실의 왕위 계승자들의 이름뿐이다--물론 그것만 가지 고는 아무 의미도 없으니 이곳에 적어놓지는 않겠다--어쨌든, 어느새 인 지 모르게 크실은 거대해져 갔다. 그들은 이나바뉴에대해 비우호적 이었 고, 그때까지 크실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던 이나바뉴가 크실을 새로운 적으로 직시하게 된것은 아마도 아펠르력 507년 크실이 로젠다로에 대해 정치.경제등의 보이지 않는 힘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던것 같다. '제 1차 천신 전쟁'이라고 후에 역사 학자들에의해 이름 붙여진 이 최초 의 빛과 어둠의 무력 충돌은 로젠다로에서 상인들을 보호하기위해 따라 갔던 몇몇 근위대들의 무력 충돌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의 경과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나바뉴는 위대한 옐리어스 나이 트는 전혀 출전시키지도 않고 크실의 대군들을 이겨나갔다. 결국, 이나바 뉴 기사단이 필로폰강을 건너 하라데스 지방까지 진출하고는 하라데스 사막을 넘지 않음으로 해서 이 1차 천신 전쟁을 끝을 맺게되었다. (4) 루우젤의 병합과 제 2차 천신 전쟁 일방적으로 짧게 끝난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은 이나바뉴에 적지 않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대표적인것은 직업관의 변화 였다. 전쟁이 피끓 는 젊은이 들에게 보여준것은 그때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기사' 라는 직업이었다. 그들은 용맹했고,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언제나 세련된 모습으로 치장한 뛰어난 계급이었다. 많은 기사학교가 은퇴한 기사들에 의해 세워졌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물며 '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은 신비의 최정예 기사단' 옐리어스 나이트가 그들 의 동경의 대상이 된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나바뉴의 발전된 농업이 다소 흔들리기 시작한것도 이때부터 였다. 아펠르력 544년, 군사적으로 막강해진 이나바뉴는 루우젤지방을 병합 하기위해 대군을 파견한다. 당연히 짧은 시간내에 루우젤을 병합 하리라 생각했던 이나바뉴 기사단은 의외로 강력한 루우젤의 저항--형식적으로 루우젤은 이나바뉴의 한 지방이었지만 실제적으로 루우젤은 500년도 넘 게 (아마도 로냐프강 이라는 지형적 특성외에 이 지방 거주민들 특유의 배타국수적 주민성도 그 이유중 하나 였을것이다.)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 고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 양식과 통치 제도를 가지고 살아왔었다--에 고 전하기 사작했다. 1개월 남짓 예정되었던 기사단의 원정은 반년을 넘기 게 되었고 이는 크실이 다시한번 이나바뉴를 침공할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아펠르력 544년 겨울, 제 2차 천신 전쟁이 시작되었다. 크실의 대군은 큰 저항을 느끼지 못하고 30여년전 빼앗겼던 하라데스를 되찾고 필로폰 강을 건넌다. 한편, 결국 루우젤의 겐키트 7세를 죽이고 이나바뉴의 깃발 을 루우젤 성 꼭대기에 꽂은 이나바뉴 기사단의 동방 원정대는 즉시 대 열을 정비하여 크실의 대군과의 결전을 위해 나아갔고 이나바뉴 기사단 의 중앙군도 역시 수도인 퓨론사즈를 출발하여 체렌 평원으로 다가갔다. 옐리어스 나이트중 세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이나바뉴와 크실의 대군은 체렌 평원에서 맡붙었다. 수차례의 크고 작 은 전투끝에 이나바뉴는 뛰어난 나이트 져런스타르 기사대장의 전술과 용맹과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한 이나바뉴 기사단의 실력에 힘입어 또 다 시 크실에 대승을 거두게 된다--이 체렌 평원의 전투를 노래한 많은 음 유시인들의 곡들이 있다-- 여기서 다시 이나바뉴 기사단 동방원정대는 다른 많은 크실의 지역들을 통합한다. (5) 노예 제도의 발생과 전쟁 후의 사회 어느 세계, 어느 시대에라도 그렇듯이 이 제 2차 천신 전생이 이나바 뉴에게 가져다 준 전쟁의 결과는 양면적이었다. 제 1차 천신전쟁후에 얻었던 땅 보다도 훨씬 넓은 영토에서--그들은 루우젤의 큰 영역과 크실의 적지않은 부분을 새로운 영토로 편입시켰다- -얻어지는 그 전보다 훨씬 많은 농업 생산물과 낮은 노동 임금에 의한 가격하락. 전쟁 포로에 의한 노예제도의 발생. 결국 전쟁이 끝난 후의 이 나바뉴는 전쟁에 의해 훨씬 풍족해지고 부가 축적된 귀족과--물론 기사 계급도 그에 포함된다--훨씬 그 사회적 지위가 하락되고 생활 수준이 낮 아진 평민들의 두가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계급의 차이는 심해져만 갔다. 이나바뉴의 귀족문화는 유례없는 발전 을 시작했으며 귀족들이 더 많은 부와 만족을 누릴수록 평민과 노예는 그들이 존재할 가치까지 잃어가려 하기 시작했다. (6) 새 정부의 발생과 계급 구분의 심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귀족들의 사치와 허영. 그에 발 맞추던 이 나바뉴의 정치는 아펠르력 598년 루지아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달 라지기 시작했다. 젊고 개혁 의지에 넘치던 그는 원로원을 결성하여 정 치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려고 노력하는 한편, 귀족들의 부를 나라에서 흡수하는 여러가지 제도를 만들어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전반적인 이나바뉴를 다시 일으키려 하였다. 또한 그는 귀족들 역시 자신의 편으 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귀족들의 명예적 상승이 었다. 즉, 그는 기사나 귀족에 대한 많은 기록 서적들과 소설의 육성에 힘쓰고, 기사 학교에 많은 지원을 했으며, 또한 루지아 9세 자신이 나이 트 쥬렌크로스가 되는등 뒤족들의 '부가 따르지 않는'지위 향상을 꾀했 다. 덕택에 귀족들의 부는 그전보다 훨씬 감소했으며 사치도 그 정도가 훨씬 약해졌고, 반대로 평민들은 상대적으로 그 지위는 훨씬 낮아졌지만 경제적으로는 제 2차 천신 전쟁이 끝난 직후보다 훨씬 좋아졌다. (비록 귀족과 평민의 사회 지위적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가 되었더라도 말이 다.) 그의 정책은 실패하지 않았다. 물론 그전보다 훨씬 넓어진 영토 덕에 그 전과 같은 사회적 균형은 기대할수 없었지만 루지아 9세가 이루어놓 은 이나바뉴의 새로운 모습은 그때 당시로서는 최선의 형태였고, 현재의 이나바뉴가 있게되기까지 그의 공적은 결코 간과 할 수 없을것이다. 2. 정치와 경제. (1) 정치 잘 알려져 있듯이, 엘핀랜드는 세계의 세계나 다음이 없을 정도로--비 록 로젠다로는 이나바뉴와 여러가지 면에서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중립국으로서 이나바뉴와는 상호 교류가 크실 만큼이나 많지 않다--서로간의 보완이나 모방은 커녕, 기본적인 문화의 유통 조차도 되 지 않기 때문에 이나바뉴에서는 크실의 정치체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는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로젠다로와의 차이점을 통해 크실의 모습을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루지아 9세의 통치 아래서 이나바뉴는 전제군주제에서 군주 공화제라 는 대표 민주주의로의 커다란 변혁을 이루었다. 이나바뉴의 왕인 루지아 9세가 혼자 강권을 쥐고 이나바뉴를 독재해 나가는--사실 루지아 9세이 전의 모든 왕들은 그렇게 해 왔지만--것이 아니라 은퇴한 실무 귀족들 중에서 지혜로운--이 시점에서 루지아 9세가 노린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자들을 선출되어 '원로원'이라는 새로운 통치 기관 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국민관' 이라는 평민 대표기관과의 협의 아래 이나바뉴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행 사하게 된것이다. 비록 그 최종 동의권과 거부권의 행사 권한이 왕인 루 지아 9세에게 있고, 또, 루지아 9세 스스로가 원로원의 의결 의장을 겸했 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루지아 9세의 군주정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어쨌든 루지아 9세의 시도는 이나바뉴에게 있어 큰 변혁이었고, 또 그때당시 '어짜피 재력이 강한 귀족들의 참견을 피하지 못할 바에야 원로원을 만들어 그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인정해 주고 자신이 의장을 겸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독재를 하겠다'는 그의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뛰어난 정치 기술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경제 이나바뉴의 경제는 사회구조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합법적인 계급제도라는것이 의미하는것이 곧바로 경제의비 공평성을 뜻하는것이기 때문이다. 이나바뉴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농산물과 다른 상 품들의 유통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상인들의 넓은 판매망을 통해 이루 어 진다. 술집이나 여관은 어느 도시에나 있고, 대장간이나 병원, 작은 식료품점이나 서점등도 흔히 볼 수 있다. 자세한 경제구조는 이나바뉴의 사회구조를 안 후에 이해할 수 있다. 3. 사회와 생활. (1) 이나바뉴의 계층구조 이나바뉴는 제 2차 천신 전쟁(아펠르력 544-546)이후 급격한 사회구조 의 변동을 겪는다. 즉, 늘어난 영토와 새로이 발생한 '노예'라는 계급에 의해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의 큰 고랑이 파이기 시작한 것이다. 노예제 는 곧 합법화 되었고, 작위와 부를 함께 누리는 새로운 형태의 '귀족'과 왕을 중심으로한 그의 혈족--왕족--,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기사'라는 특수계급이 나날이 그 위치를 잃어가는 평민과 함께 뚜렷이 그들의 모습 을 갖추어 나갔다. 급기야는 루지아 9세의 정책에 따라 귀족계급과 평민 의 차이는 거의 하늘과 땅 정도로 까지 벌어져 버렸다. 왕족 ; 그들은 왕과 혈연적 인간관계를 갖춘자들로서, 물론 개중에는 정말로 그만한 직책과 부에 향응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 었지만 대부분 왕이 그와 이어진 어쩔 수 없는 친족관계 때문에 직위를 주어야 했던, 타락한 귀족들 만큼이나 쓸모없는 존재들이었다. 귀족 ; 루지아 9세 훨씬 이전--아마도 이나바뉴의 출현 초기--에 만들 어지기 시작한 소수의 이익집단이다. 그들은 정치에 직접적인 참여권한 이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또 그들의 이익을 요구했다. 루지아 9세에 의해 원로원을 구성하기도 한다. 후에는 더이상 어쩔 수 없이 비대해진 그들 계급은 쉽게 그들의 많은 부를 '명예'라는 이름의 새로운 재산과 바 꾼다--그것은 루지아 9세의 현명한 판단이었다--귀족들 내부의 작위 가 있었는데, 그것은 높은 순위부터 셰렌다이크, 뮤젠, 쇼온브루도, 라카 이드, 하이슨루스, 스케렉터, 코카즈나 순이었다. 기사대장등 몇몇 뛰어 난 기사들은 귀족계급의 작위까지 받기도 했다. 기사 ; 제 1, 2차 천신 전쟁을 거치면서 그 명예와 위치를 인정받은 기사계급은 '기사도'를 존중하는 무예집단이다. 그들중 몇몇은 독자적으 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기사단이나 총사대에 끼어서 활 동한다. 이나바뉴의 경우는 이나바뉴 기사단외에 뛰어난 기사들을 모아 놓은 최정예의 국왕 친위대 옐리어스 나이트와, 이나바뉴 총사대라 불리 우는 파아렐 나이트가 있다. 기사는 단순한 전투원이 아니다. 그들은 용 기와 힘 못지 않게 지혜도 뛰어나 그들중 뛰어난 기사들은 은 기사계급 특유의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기사가 되는것 만큼이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했다. 그들은 귀족과 버금갈 정도로 인정받는 높은 위치의 계급이고 귀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농토와 노비를 갖는다. 특수하게 이나바뉴에 서는 기사들 사이에서 항상 존재하는 '서열'--이것은 기사도가 지켜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고, 이나바뉴와 로젠다로에서는 통상 이 서열을 '바 스크'라 불렀다. 아마도, 이 제도 역시 엘핀랜드가 셋으로 분열되기 이전 부터 전해져 내려온 제도였기 때문에 크실에도 바스크 제도는 존재했을 것이다--과, 그들의 직위를 문자로 표시한 작위가 있었다. 그것은 높은것 에서 부터 차례로 '신전위', '성전위', '천전위', '익전위', '계전위', '찬전 위', '제전위', '형전위', 등으로 이어진다. 평민 ; 대부분 농수산업이나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였으며, 대장장이등 도 평민이었다. 또한 약제사나 의사, 법률가등도 평민이었다--이들 직업 이 평민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상위의 직업이지만, 역시 그들도 귀족들 이 보기에는 평민일 뿐이다--마법사들도 평민이었는데, 그들중 왕영 마 법사는 예외여서 그들은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궁중에서 생활했다. 이 왕영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 기사가 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평민이 귀족으로 지위가 상승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이 세계에서의 마법이란 매우 보잘것 없는것들이었다. 또한, 왕영 의술사등 평민들중 특별히 궁중 에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귀족으로 인정 받지 는 못했다. 천민 ; 천민계급은 대개 전쟁 포로에서 시작했으나 보통의 평민이 귀 족들의 농노로 전락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 그들 계급은 귀족들은 물론 높은 위치의 평민--법률가나 의사등--에게까지도 업신여겨지는 수 모를 겪는 계급이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사나 귀족이 될 수 없 었고, 계속해서 천민의 계급을 후대에 물려주게 되었다. 노예나 광대, 도 살업자등이 여기에 속했다. 또, 음유시인들이 철저한 천민 취급을 받는 데, 이는 아펠르력 356년, 무쇼로 1세때의 정책 덕분이었다. 그때의 음유 시인들의 노래는 엘핀랜드가 셋으로 갈리기 이전 시대로의 향수를 노래 한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책적으로 탄압을 받을 수 밖에 없 었다. 그러나 그후로도 300년도 훨씬 넘는 시간을 흐르면서 음유시인들 은 그들의 명맥을 유지해왔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계급 사이의 갈등 이나바뉴에서--크실의 사회구조 역시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이나바뉴에 한정한다-- 지배당하는 다수의 평민들과 그들을 지배하는 소 수의 귀족들 사이의 갈등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계급은 혼인등을 통해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즉, 평민이라고 하더라고 노예와 혼인한 평민은 그때부터 천민으로 그 지위를 강등당하고, 그의 자식들도 물론 천민이 된다--계급 외의 혼인은 회피하는것이 대부분 이었다. 예외가 하나 있었 는데, 왕족의 경우는 혈연관계를 중요시 하는 이익집단이기때문에 그들 의 경우는 그들과 혼인을 함으로 해서 그 위치가 상승되게 된다. 단지, 얼마나 높은 위치의 왕족과 혼인하느냐가 그 지위 결정의 관건이었다. 이를테면, 왕비의 경우는 --물론 주위의 엄청난 반대가 있겠지만 왕권에 의한 권위라면--한낱 시녀에서 왕비로 그 지위가 향상될 수도 있는것이 다. 이러한 철저한 계급 사회가 꽤 오랜시간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귀족 들은 귀족들 나름대로, 평민들은 평민들 나름대로 그 생활에 익숙해져왔 다. 더욱이, 루지아 9세의 계급간 명예적 지위차의 심화정책 이후로는 귀 족들은 평민들과 말 한마디 하는것 조차 커다란 수치로 여길 정도로 계 급 사이의 지위 격차는 심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3) 기사도와 카발리에로 제도 '기사도'는 이나바뉴 이전, 엘핀랜드의 시작때 부터 있었던 기사의 도 리였다. 나이트 데로스에 의해 정리된 기사도는 무용, 성실, 명예, 겸양, 경건, 약자보호를 그 기본적 모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의 기 사들은 그들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현재에는 이 덕목들을 철저 히 지킬뿐, 그 외의 정의는 행사하지 않는다. 몇몇 지각이 있는 기사들에 의해 흔히 지적 받고 '기사들의 도덕적타락'이라고 까지 기사도의 정의 수호정신은 비난받고 있다. '카발리에로'라는 제도가 있다. 이는 역시 데로스에 의해 하나의 확립 된 제도로 뿌리 박은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고, 전혀 그 색깔이 퇴색되 지 않은 기사도중 하나이다. 이 제도는 '명예'와 '약자보호'의 덕목이 그 주를 이루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사는 누구나 어느정도 지위와 기품을 갖춘 귀부인 한명에게 자신의 명예를 바칠 수 있다. 즉, 그 귀부인의 '카발리에로'가 되는것인데, 그녀 의 카발리에로가 된 이상 그 기사는 자신의 생명보다도 그 귀부인의 안 전을 생각해야 하는것이다. 모든 기사들은 겸양과 존경으로 그들을 섬기 는데, 대부분의 기사들은 그것에 연애감정을 더하고 있다. 아주 낭만적인 이 제도는 태고적 엘핀랜드에 존재한 제도였기 때문에 이나바뉴뿐만 아 니라 로젠다로에도 있고, 아마도 크실에도 있을것이라 예상된다. 이나바뉴만 해도 그 넓은 대륙 전체에 기사는 300명도 채 되지 않기때 문에 '카발리에로'를 갖는다는 것은 귀족의 딸이나 왕족으로서도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카발리에로의 아내가 되는 귀부인의 감상적인 사 랑이야기는 끊임없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노래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카 발리에로들이 그녀들을 아내로 맞이하기도 한다. 4. 기사 (1) 기사 제 1, 2차 천신 전쟁을 거치면서 그 명예와 위치를 인정받은 기사계급 은 '기사도'를 존중하는 무예집단이다. 그들은 단순한 전투원이 아닌 지 휘관의 자격으로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그들의 기품과 기사적인 능력에 따라 부와 지위를 인정받았다. 빛의 왕국 이나바뉴에서의 그들은 귀족과 버금갈 정도로 인정받는 높 은 위치의 계급이고 귀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농토와 노비를 갖는다. 이나바뉴 최고위인 신전위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사인 기사대장 나이 트 아켈로르는 셰렌다이크--귀족 제 1계급--나 뮤젠--귀족 제 2계급--들 의 귀족들과도 맞먹는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었고, 유일한 성전위를 가진 옐리어스 나이트의 바스엘드(지휘관) 나이트 슈펜다르켄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지위에 있는 기사였다. (2) 기사계급 기사가 된다는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평민의 경우라면, 수 만명 중에 겨우 한명 정도가 '기사'의 계급까지 갈 수 있었다. 귀족집안 의 자제라면 시작 자체를 '기사'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은 직 접 기사에게 가르침과 훈련을 받기 때문에 스스로 연습을 하는 평민들과 는 성장 속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옐리어스 나이트였고, 후에 이나 바뉴 기사대장이 되는 라벨은 불과 16세의 나이에 '나이트'의 위치에 올 랐지만, 평민이 16세에 그런 위치에 오른 경우는 이나바뉴의 역사속에 한번도 없었다. 전사/보병 ; 기사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평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 법은 두가지가 있다. '보병'으로써 왕궁에서 모집하는 보병대에 들어가는 방법과, 기사명을 하사받은 기사(나이트)가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기사단 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흔히 나이트가 거느리는 기사단의 보병을 '전사' 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전사'라는 계급은 실제로 존재한다기 보다 는 기사들 사이에서 편의상 사용하는 계급이었다. 그들은 견습기사가 되 지 못한 기사들로, 견습기사를 꿈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계급이었다. 일 반적 의미의 '보병'이었지만 어떤 작위를 받은 기사에 직접 소속된 '전 사'는 이나바뉴 왕궁에 소속된 직접 군인인 '보병'과는 달리 견습기사를 목표로 전투술을 익히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병보다는 훨씬 높은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 하나가 이끄는 전투 부대를 '기사단' 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평민 출신의 기사와, 귀족 출신의 기사가 성장속도가 다른것과 같이, 보병과 전사의 성장속도 역시 차이가 나기 마련이었다. 기병 ; 기병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처음부터 기병이었던 사람들과, 전사에서 기병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양쪽 모두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싸운다는 점에서는 견 습기사와 다를바가 없었으나, 그들의 전투력은 견습기사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전자는 왕궁에서 모집을 하 는 기병이고, 후자는 나이트가 가지고있는 기사단을 이루는 기병이다. '모두가 말을 탈 수는 없기 때문에' 기병대는 전사들중 실력있고 경력이 있는 전사들로 구성된다. 원칙적으로 기병대는 견습기사가 아닌 '기사'가 이끌게 된다. 견습기사 ; '견습기사'는 하나의 계급으로 인정을 받은, 기사와 평민 사이에 끼어 있는 계급이다. 정식으로 '페치'를 받고 견습기사가 되는순 간, 그들은 기병대를 제외한 전사(혹은 보병)들을 거느릴 수 있게된다. 견습기사의 위치까지 오르는것 역시 결코 쉽지 않았다--퀴트린의 1천4백 여기의 기사단 가운데, 견습기사는 2백여명 뿐 이었다. 기사 ; 견습기사에서 다시 기사가 되기까지는 그때까지와는 또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 계급부터는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며, 그들의 전투력은 견습기사와는 견줄 수 없게된다. 대개 그들 은 중앙 기사단에 소속되거나, 나이트의 기사단에서 활동하게 된다. 군주 나 영주로부터 '기사'로 인정을 받게되면 비로소 '하야덴'을 받게된다. 겉 모습에서는 견습기사와 기사는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그들이 하야덴을 뽑아 휘두르게 되면, 그때부터 그들은 견습기사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것이다. 나이트 ; '기사명을 받은 기사'가 나이트이다. 기사명을 하사받는다는 것은 '나이트 레이피엘'처럼 기사명으로 호명되는것이 허락된다는 뜻이 다. 또한 그들은 기사명과 함께 '바스크'를 하사받게 되는데, 바스크를 받는다는 것은 '이나바뉴의 기사' 서열에 든다는 것으로 매우 명예로운 일 이었다. (바스크를 받은 기사는 이나바뉴 전체에도 수백명에 불과했 다. ) 하지만 나이트가 다른 기사와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은 개인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사단'을 가지게 된다는 점 이었다. 나이트와 기사의 전투력의 차이는 말 할 필요가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기사 다섯명정도 의 전투력을 나이트 혼자서 가지고 있는것이 보통이라고 하겠다. 작위를 갖춘 기사 ; 그들 역시 '나이트'라 불리우지만 작위로서의 샤인 더를 가지고 있다는것이 나이트와는 달랐다. 가장 높은 샤인더인 신전위 의 샤인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나바뉴 바스크 1, 기사대장 아켈로르 뿐 이었고, 가장 낮은 작위인 형전위의 작위를 가진 기사라야 퀴트린을 포함해도 열명이 채 되지 않았다. (3) 기사단 중앙기사단도 마찬가지이지만, 대개 한명의 나이트가 거느리는 기사단 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나이트(바스엘드) (1명) | +------+-----+-----+-----+-----+ | | | | | | 기사 기사 기사 기사 기사 기사 (1명) | | | | | | 기 견습 견습 견습 견습 견습 (5-10명) 병 기사 기사 기사 기사 기사 대 | | | | | 전사 전사 전사 전사 전사 (30-70명) (괄호안은 한 부대를 이루고 있는 인원이다) {{ }}{{ }}{{ }} 프롤르그 아펠르력 643년 가을. 암흑제국 크실이 먼저 이나바뉴의 쥬렌다스 지방을 침공하면서 제 3차 천신전쟁은 그 거대한 역사의 장을 열기 시작했다. 쌍방 수백명의 기사와 수천, 수만의 군대를 잃은 이 대전쟁은 결국 그 어떤 승자도 존재치 않은 채 끝이 났다. 이 전쟁은, 그로부터 일어날 또 다른 전쟁의 예고였고, 외로운 혁명의 슬픈 실패의 암시였을 뿐이었다. {{하얀 로냐프 강 ------------------------------------------------------------------ }}{{ }}{{ 프롤프그 ------------------------------------------------------------------ }} 프롤르그. 이나바뉴와 로젠다로를 가르는 국경인 라르그 산맥 서쪽 끄트머리에는 겔러뷰온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다.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지형 이고 또 한쪽 면은 바다로 터져 있기 때문에 그 경치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겔러뷰온은 그래서 작은 어촌 마을이라기 보다는 귀족 들의 휴양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짙은 나무색의 나무판에'헤론도의 주점(Herondo's Pub)'이라고 검은 색 글씨로 두껍게 쓰여져 있는 현판이 저녁 바람에 비교적 단조롭게 흔 들리며 삐익--삐익 하는 소리를 냈다. 헤론도의 주점은 그 근방에서는-- 그 근방이라야 겔러뷰온이나 근처의 샨론정도 였다--꽤 유명한 주점이었 다. 한동안 시선을 창밖 풍경에 꽂아 두고 있던 어떤 낡은 도포의 사나이 가 중얼거렸다. 창 밖에는 겔러뷰온 특유의 저녁 석양이 타고 있었다. "... 전쟁의 냄새가 나는걸. " "...? 무슨 얘기지, 셴다르크 ?" 셴다르크라 불리운 사나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과 테이블을 마 주한 청년에게 향하게 했다. "... 전쟁의 냄새가 나. 아마... " "... 전쟁이라... " 셴다르크는 풋 하고 웃었다. 마치 자신의 느낌을 조소라도 하는듯이. "글쎄... 또 한번 전쟁이 터져도 마찬가지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지. " 그 상대편에 앉아 있었던 청년--그는 낡은듯 했지만 꽤 품위있는 복장 을 하고 있었다. 그의 파란색 케틀러스{{) 목에 감는 머플러의 일종. 원래는 기사계급의 악세서리 였지만 현재에는 꽤 많은이들--평민들을 말한다--이 이 케틀러스를 악세서리로 사용한다.}}는최고급품이었다--은 조용히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는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 빌어먹을 기사들을 빼면 말이야. " "... ? " 셴다르크는 그의 친구를 쳐다 보더니 피식 웃었다. "경이적인 일이군. 이나바뉴 총사대, 파아렐 나이트중 한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데 ? " "훗, 이나바뉴 총사대라고 ? 자네야 말로 나를 나이트로 보아 주다니 경이적인 일이군. " "...... " 셴다르크는 손으로 잔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다시 바 다건너 대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 하지만 이번엔 달라. 이번 전쟁은 그리 길지는 않을거야. " "길지 않다구 ? " "이번에도 마찬가지지. 모든이들이 허영에만 빠져 있을뿐... 긴 전쟁후 에도 아무도 어떤것을 얻을 수 없는 전쟁을 위해서 전쟁은 계속되겠지... " "자네의 눈에는 전쟁의 끝이 보이는가 ? " 셴다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 "이친구, 별 얘길 다 하는군... 그래. 자, 잔이나 들라구. 겔러뷰온의 아 름다운 일몰을 축하해야지. " 셴다르크는 고요히 웃으며 석양을 응시했다. 아펠르력 643년 가을. 암흑제국 크실이 먼저 이나바뉴의 쥬렌다스 지방을 침공하면서 제 3차 천신전쟁은 그 거대한 역사의 장을 열기 시작했다. 쌍방 수백명의 기사 와 수천, 수만의 군대를 잃은 이 대전쟁은 결국 그 어떤 승자도 존재치 않은 채 끝이 났다. 이 전쟁은, 그로부터 일어날 또 다른 전쟁의 예고였 고, 외로운 변혁의 슬픈 실패의 암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자세한 이 야기를 듣기 전에 우리는 하나를알고 시작하자. 이 전쟁의 끝은 이미 그 로부터 1년도 더 전에 이나바뉴의 어느작은 해변도시의 술집에서 예견되 었음을. {{ }}{{ }}{{ }} 친애하는 친구 톰 액스퍼드와, 아름다운 아아젠 큐트에게. 1. 짧은 만남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게 좋겠군. 휴가를 가보지 않겠나 ? 옐리어스 기사장에게는 내가 말해주겠네. " "......" "기간은 자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하지만 돌아 올때는 반드시 기사로서는 완벽한 나이트 레이피엘이 되어주게나. " "... 감사합니다. " 바람이 불었다. 퀴트린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켈로르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람이 거세어 지는군... 이번에는 긴 여름이 되겠어. " {{하얀 로냐프 강 ------------------------------------------------------------------ }}{{ }}{{ 1. 짧은 만남 ------------------------------------------------------------------ }} 1. 짧은 만남 셸큐러스강으로 물새들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저녁이 가까와 온 모양이다. 고요한 평야가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듯이 스르르 사라져갔 다. 나이트 사야카는 망루에서 어두워 오는 평야 저 끝을 응시하고 있었 다. 그는 훤칠한 키에 새하얀 레쥰드{{ ) 돌의 일종. 성이나 저택의 바닥에 많이 사용한다. 대리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를 세밀한 조각정으로 다듬은듯한 부드러운 얼굴을 가진 미남자였다. 나이는 24-25세 정도. 짙은 청색의 갑옷은 전투복 다리까지 내려오는 그의 하얀색 펜플{ 어깨에서 다리, 혹은 발끝을 넘겨 바닥까지 두르는 천. 역시 기사들만의 악세서리이며 우리들 세계의 망토와 비슷하다. }과 썩 잘 어울렸다. 아주 전형적인 젊은 나이트의 모습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작위는 없는지 그의 갑옷 어깨에 샤인더{{ 기사들에게 주는 작위의 문장. }}는 있지 않았다. "... 오늘도 역시..." 사야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려가야 할것 같다. 무언가 보이면 연락 하도록. " "넷 ! " 사야카의 옆에 서 있던 보초는 오른손을 가슴위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굽혀 사야카에게 경의를 표했다{{ 엘핀랜드에서 지켜지는 기사들의 인사법. 고개를 조금 숙이고, 허리도 약간 굽힌 상태에서 오른팔을 지면과 수평하게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이때, 시선은 인사를 받는 쪽의 무릎 아래에 둔다. 이것은 전통적인 방법은 아니며, 전통적인 방법은 팔을 수평하게 들지 않고 편안히 내린 상태에서 팔꿈치를 굽히고, 오른손을 펴 손바닥을 오른쪽 가슴에 살짝 가져다 대는 것인데, 이는 하야덴이나 리첼반을 손에 든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장에서는 불편하였다. 그래서 이 방법은 오래전에, 1차 천신전쟁 이후 현재의 인사법으로 대치되었으며, 크실과 로젠다로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인사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인사법은 기사만이 사용하며, 기사들은 상대가 기사가 아니더라도 유일하게 이 방법만을 사용하여 예를 취한다. }}. 사야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려했다. 그때였다. "사야카님, 저것...! " 다른편에 있던 또 한사람의 보초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 " 사야카는 급히 평야로 눈을 돌렸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똑똑히 보이 지는 않았지만 분명이 2기의 기마수가 이리로 달려 오고 있었다. 한명의 보초가 외쳤다. "주홍색 깃발{{) 엘핀랜드에서의 깃발은 전장에서의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주홍색은 승전, 푸른색은 패배. 검은색은 죽음. 빨간색은 급보. 주홍색과 푸른색이 동시에 섞여 있는 깃발은 기사와 기사의 1대1 대결, 렉카아드를 의미했다. }}이다 ! 승전이다 ! 승전 !" 사야카는 급히 물었다. "검은색 깃발은 없는가 ?" "검은색은 없습니다. 기사님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 " 사야카는 두명이 모두 주홍색 깃발을 들고 퓨론사즈의 성문을 향해 달 려 오는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결국 해냈군, 퀴트린... 역시 자넬 걱정한 내가 멍청했나 보군... ) 잠시 미소를 짓던 나이트 사야카는 그 커다란 펜플을 휘돌리며 돌아서 망루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펠르력 642년 여름. 루지아 10세가 이나바뉴의 왕위에 오른지 27년째 되는 해 이나바뉴의 변방지역에 약간의 반항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스로 "카아르"라 자 칭하는 그들의 세력은 급속도로 커졌고, 그 지역--카아르의 활동지역은 이나바뉴의 북서쪽 광산지대인 햐드지방 이었다--그들은 처음엔 단순한 농민 폭동인듯 했으나 그 지역의 마을 세네개를 통합하며 중앙정부의 주 목을 받기 시작했다. 카아르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몇몇 움직임들이 각 지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미약한 그들의 힘을 그저 방관하던 루지아 10 세는 그들의 세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대해 지자 그 이듬해 벨론{{)엘핀랜드의 계절은 우리의 세계와 흡사하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한번씩 나타나고서 1년이 지나는것이다. 1년은 18개월이고, 각 1개월은 40일로 교차된다.그 11번째 되는 달의 이름이 '벨론'이다.}}의열번째되는 날 이나바뉴 중앙 제 3, 제 4 기사단을 보내어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비록 카아르의 중심지역인 햐드는 진압되었지만 카아르는 사라지지 않았다. 퀴트린은 귀족들과 왕족, 기사들의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축하 음악을 뒤로 하며 연회장을 나섰다. 연회장 안의 혼탁한 분위기에 서 벗어나자 퀴트린은 가벼운 상쾌함을 느꼈다. '나이트'라는 직위때문에 그는 무거운 백색의 갑옷--그의 갑옷은 옐리 어스 나이트의 갑옷인 화려한 순백색의 그것이었다--위에는 역시 흰색 천에 금색 실로 무늬를 넣은 목에서 시작하여 땅에 끌리는 커다란 펜플 을 입었다{{) 이 복장은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식복 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서면 옐리어스 나이트는 반드시 이 예식복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거추장스럽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그도 자신이 기사임에 만족하는 흔한 기사들중 하나였던 것이다. 연회장을 떠나 왕궁 문밖까지 나왔다. 많은 가드들이 그를보고 예를 표시했다. 그의 옐리어스 나이트의 바스크는 13{{) 바스크는 기사들의 서열을 나타내주는 숫자이며, 한명의 기사는 전체 기사단에서 하나, 그리고 소속된 각 기사단에서 하나의 바스크를 갖게 된다. }}. 이나바뉴 전체 기사단의 바스크는104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20세밖에 안되는 나이때문이었다. 옐리어스 나이트라는것만 가지고도 그의 실력은 충분히 인정 받는것이다. 왕궁 문 왼쪽으로 돌면 화려한 정원이 있다. 그곳에는 퀴트린으로서는 이름을 하나도 모르는 많은 수십, 수백종류의 꽃과 나무들이 있었다. 퀴 트린은 천천히 걸어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휴우." 퀴트린은 길게 숨을 내 쉬었다. 온 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당연하다. 그토록 국왕 루지아 10세의 골머리를 앓게하던 카아르의 중앙지부가 쑥 밭이 되었으니 말이다. 퀴트린은 옐리어스 나이트로는 유일하게 그 전투 에 참가했었다. 실은 그가 자청한 것이었다. 아직 실전 경험은 없었지만 그는 이제 20세고, 옐리어스 나이트가 된지도 1년 반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의 도약을 위해 이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퀴트린의 생각은 적중했고, 그는 승리와 더불어 훨씬 더 많은 명예와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20세의 나이로 '형전위'의 작위를 받은것이다. 현재 "나이트 레이피엘"이라 불리는--퀴트린의 성은 섀럿 이었으나 역 시 기사인 아버지 섀럿경의 작위명과 일치하기 때문에 '레이피엘'이라는 어릴적 이름을 작위명으로 쓰고 있다--퀴트린의 목표는 빛의 이나바뉴의 총 기사대장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트 데로스나 나이트 져런스타르 {{) 제 2차 천신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나바뉴의 기사대장. 나이트 데로스와 함께 이나바뉴 역사상 최고의 기사로 추앙받는다. }}와같이 사후에도 추앙받는 위대한 기사가 되고 싶었다. 젊은 나이에 큰 야망을 가진 기사였다. 퀴트린은 조용히 꽃들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꽃이라고는 케이튼{{ ) 화려하지 않은 모양의 붉은색 꽃. 간혹 오래된 케이튼은 꽃나무를 이루기도 하는데, 이러한 케이튼은 대개 귀족들등의 정원 관상용으로 쓰인다. 아주 흔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으로 대중적인 꽃이다. }}밖에 모르는 그였지만 전쟁에서 막 돌아와 연회에서 풀려난 그에게는 꽃들의 모습이 무척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보였다. 문득 퀴트린은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퀴트린 ! " "......? " 퀴트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휙 돌아 보았다. 흰색 드레스 위에 갖은 보석들로 치장된 노란색 예복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 었다. 루지아 10세의 딸--루지아 10세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 다. 한명은 올해 24세인 듀포픈 왕자이고, 하나가 바로 18세의 이 소녀 이다--인 피엔젤 공주였다. 퀴트린은 꽤 오래전부터, 어렸을때부터 피엔젤 공주를 알아왔다. 아버 지인 섀럿경이 높은 직위의 귀족이라는 이유 외에도, 왕궁에서 만날 수 있는 몇몇 안되는 같은 나이 또래라는 이유로 피엔젤 공주는 퀴트린과 친해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그녀는 퀴트린에게 친구나 오빠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것 같았고, 왕궁 안에서라면 많은 사람들이 피엔젤 공주와 나이트 레이피엘의 관계를 이야기 했다.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 였지만, 곧 퀴트린이 그녀에게 카발리에로의 예를 취할것이라고 까지 이 야기 되었다. 오래전 부터 퀴트린은 피엔젤 공주를 대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생 각해 왔다. 퀴트린이 피엔젤에게 느끼는 호감이 어떤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카발리에로가 된다면 퀴트린의 지위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말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오래지않아 그녀에게 카발리에로의 예를 취해야 할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피엔젤 공주님. 여기는 무슨 일로... " 퀴트린은 허리를 굽혀 꽃들을 바라보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하게 피 엔젤 공주를 바라 보았다. "... 아... 그냥. 여기에 오면 퀴트린이 있을것 같았어요. " 언제부터인지 그녀와 퀴트린은 어릴적 친구가 아닌 공주와 귀족 자제 의 신분으로 돌아갔고, 말투 역시 상대를 존대하는 말투로 바뀌어져 갔 다. "앉는게 어때요 ? 우리... " "예. 그렇게 하죠. " 퀴트린은 피엔젤 공주가 권하는 의자--그것은 정원 장식용으로 하얀색 의 매우 화려하고 귀족적인 것이었다--에 앉았다. 거리감 이랄까. 짧은 시간 퀴트린은 또 다시 피엔젤 공주와 사이에 있는 아주 작지만 너무나 큰 공간을 생각했다. 분명히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카발리에로가 될 사람은 자 신 밖에는 없으며 그리고 또 그녀 역시 그러기를 바라고,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퀴트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그녀와의 사이에 막연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 승전소식 들었어요. " "아, 네. " "축하해요. 진심으로... " "...... "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명히 퀴트린에게의 감정의 확신과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퀴트린은 별반 특별한 느 낌을 받지 못했다. 마치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귀족에게 형식적인 축 하를 받는것 같이 덤덤할 뿐 이었다. "나... 많이 울었어요. 퀴트린이 싸우러 갈때. " 그녀는 두 손을 깍지를 껴서 무릎위에 올려 놓고 눈으로는 작게 자라 정원을 모두 덮고있는 이안{{) 키가 작은 풀꽃의 일종. 귀족들의 정원 장식용으로 쓰인다. }}을 살짝살짝 스치는 발을 보고 있었다. "...... " "혹시라도 다치면 어쩌나 해서..." "아아..." 퀴트린은 계속 등을 구부리고 앉은채로 눈앞의 꽃나무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엔젤 공주는 고개를 돌려 퀴트린을 보았다. 퀴트린에게도 그녀의 시 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참 예쁜 펜플이네요. 퀴트린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것 같아요. " 퀴트린은 아주 옅은 미소를 띄우고--물론 시선은 그곳에 고정된 채로 대답했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복이니까요.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펜플위에 샤인더를 받게 되나요 ?" "아니... 이미 제겐 옐리어스 나이트의 샤인더가 있습니다. '형전위'로서 의 샤인더는 어깨에 받게 되겠죠..." "이제 형전위가 되면... 그렇게 되면... " "......? " "왕녀의 카발리에로가 될 수 있는거죠 ? " "아..." 퀴트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이죠. " 퀴트린은 대답하고서 피엔젤 공주를 바라보고 웃어 보였다. 그의 시선 을 느낀 피엔젤의 얼굴에 홍조가 나타났다. 무엇 때문일까 ? 갑자기 피엔젤의 투명한 눈을 바라본 퀴트린은 가슴이 콱 저려오는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진심이 나타나 있었다. 그것 때문인 가 ? 그렇다면... 나이트 레이피엘, 아니 퀴트린에게 있어서 피엔젤공주는 무엇인가 ? 퀴트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표정이 스쳐갔다. "그럼, 기다리겠어요. " 피엔젤은 일어서서 정원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고 있던 퀴트린은 힘없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후우. " 퀴트린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그에게도 피엔젤 공주는 특별한 존재 였고, 그 또한 그녀의 카발리에로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를 대하 면 이런 묘한 후회와 비슷한 기분이 드는것이다. "나이트 레이피엘, "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트 레이피엘'이라 고 자신을 호칭할 수 있는 사람은 궁중에서도 몇몇 되지 않았다{{ ) 이렇게 상대 기사를 호칭하는것은 자신보다 낮은 바스크의 기사를 부를때이다. }}. 퀴트린은 즉시 일어 서서 뒤를 돌아 보았다. "여기에 있었군.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나 ? " 인자한 표정으로 퀴트린에게 말을 건 사람은 이나바뉴 바스크 1인 기 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였다. 그는 50대의 나이임에도 20대 못지 않은 건장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 다. 그의 몸을 싸고 있는 펜플은 목 위에서 부터 시작해서 바닥에 끌리 는 긴것으로 붉은색 이었고, 왼쪽가슴에는 이나바뉴의 기사 최고위인 '신 전위'를 상징하는 흰색 창모양의 문장--샤인더--이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나바뉴 최강의 기사였고 이나바뉴 기사단의 총수였다. 실력도 실력이 지만 그는 수하 기사들을 모두 신경을 써주는등 총수로서의 마음자세도 잘 되어 있어 많은 기사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었다. 퀴트린은 오른손을 가슴으로 올리고 허리를 굽혀 상급기사에 대한 예 를 취했다. "잠시... 피곤해서 쉬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켈로르님. 곧 들어가 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보기에도 무척 피곤해 보이는군. " "......" "내 부관들 몇몇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자네가 곧 피엔젤 공주님 의 카발리에로가 될거라면서 ?" "...! " 퀴트린은 순간적으로 아켈로르와 눈을 마주쳤다가 곧 피해 버렸다. 아 켈로르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퀴트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예. 저는 오래전 부터 진심으로 공주님을..." "퀴트린. " 아켈로르는 갑자기 퀴트린의 말을 잘랐다. "미안하네. 혹시라도 자네가 후회하게 될 말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말을 막았네. 자네는 빛의 이나바뉴의 최고 명예의 상징인 옐리어스 나 이트의 서열 13위의 기사네. 기사로서의 '형전위'의 작위를 받을 것이고 말이지... 또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고... 피엔젤 공주님의 카발리에 로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네. " "무슨 말씀이신지..." 아켈로르는 천천히 옆으로 돌아섰다. "생각할 시간을 갖는게 좋겠군. 휴가를 가보지 않겠나 ? 옐리어스 기사 단장에게는 내가 말해주겠네. (옐리어스 나이트의 바스크 1인 나이트 슈 펜다르켄의 이나바뉴의 바스크는 2로서 아켈로르와 막역한 사이였다) " "......" "기간은 자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하지만 돌아 올때는 반드시 기사 로서는 완벽한 나이트 레이피엘이 되어주게나. " "... 감사합니다. " 바람이 불었다. 퀴트린은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켈로르 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람이 거세어 지는군... 이번에는 긴 여름이 되겠어. " 셸큐러스강은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북동쪽으로 길게 뻗으며 이나바 뉴의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었다. 이나바뉴의 여러 주요 도시들 이 이 셀큐러스강을 따라 선재해 있었다. 이나바뉴의 수도인 퓨론사즈를 시작으로 파이센, 큐파, 헤라인드등의 거대한 상업도시나 공업도시들이 그것이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산 위로 한뼘이나 남아있던 해가 저물어 그 모습이 반원 모양의 절반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망루에서 밖에 볼 수 없는, 궁중 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수수한 석양의 모습을 보며 퀴트린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파이센의 어느 작은 주점 문을 열고 있었다. 퀴트린은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의 밖에 여행자의 복장을 입고있었 다. 그의 안쪽 펜플 안으로는 그의 하야덴{{) 질긴 금속으로 된 무기. 얇고 길며 끝이 날카롭고 뾰족하여 상대를 찌르거나 베는데 사용된다.우리 세계의 '검'과 비슷하다. 하야덴은 오직 기사들만이 사용하는 무기이며, 견습기사들이 사용하는 하야덴을 닮은 무기는 '페치'라 불린다. }}과 애프러더{{) 우리세계의 활과 비슷하다. 보통 활을 애필이라고 하고, 기사들이 사용하는 강궁을 애프러더라 칭한다. }}가 감춰져 있었다. 이번 여행은 신분을 철저히 숨긴 수업적 여행이기 때문에 퀴트린은 혹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것 같아 행자의 가죽모자를 더욱 깊숙히 눌러 썼 다. 그는 천천히 주점의 구석쪽에 앉아 간단한 마실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파이센의 사람들을 접해보고, 하룻밤 묵을 여관을 구할 생각이 었다. 파이센은 퓨론사즈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상 업이 아주 번창했다. 이나바뉴의 수도로 들어가는 거의 모든 공물은 이 파이센을 통했다. 그래서인지 파이센은 항상 활기로 넘쳤고, 여러 다른 도시들에서 모여든 장사치들이나 여행자들로 연일 장을 이루었다. '좋은곳이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만들어진 엄격함이 없는 자 연스러움... 아켈로르님이 내게 느끼라고 한것이 이런것 이었을까 ? ' 퀴트린은 잠시 궁중에서의 딱딱함과 이곳의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를 비교해 보았다. 그는 이렇게 아켈로르의 말대로 단신으로 여행을 나와있 긴 하지만, 아직도 왜 그가 퀴트린에게 이러한 제의를 했는지는 알지 못 했다. 오늘 저녁 잠잘 장소, 파이센... 아켈로르... 피엔젤 공주... 이것저것 생각하던 퀴트린에게 문득 여성의 목소리의 노랫가락이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는 어둠으로 뒤덮힌 하늘을 열었고 그의 창은 물보라치는 바다를 건넜네 흑색 말 갈기와 은빛 검광 체렌 평원은 그의 그림자에 잠겼네 아무도 그를 막지는 못하리 마지막 악마의 숨소리가 느껴질때 까지 그의 칼은 어둠의 커튼을 열고 어둠의 심장을 꽂을테니까 그가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날 어둠은 다시 저물고 은빛의 태양이 대지를 비추겠지 그대가 오는 날까지 기억은 영원한 것 이라오 그대, 체렌평원의 위대한 이나바뉴의 이름, 져런스타르여. 그 노래는 제 2차 천신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이트 져런스타르를 노래 한 곡 이었다. 퀴트린이 가장 존경하는 기사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퀴트 린은 그 곡을 끝까지 들으려 했다. 지금까지 궁중에서 들어온 그러한 화 려한 기록음악과는 달리 서툴고 다듬어 지지 않은 가사에, 악기라고는 파야스{{) 짐승의 잔 뼈에 얇은 여러개의 가죽끈을 달아서 연주하는 악기. 우리 세계의 하프와 비슷하지만, 크기는 무척 작으며, 품위가 없기 때문에 궁중음악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하나로반 주되고 있지만 퀴트린은 그 음유시인의 노래에 어떤 순수함을 느꼈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시인을 돌아보려 했다. 순간적이지만, 참으로 이상한 일 이었다. 자신은 기사이고, 한낱 천민인 음유시인과는 말조차 할 위치가 아닌데도, 퀴트린은 그 시인이 천민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생명으로 느껴졌다. 퀴트린이 고개를 돌려 시인을 쳐다 보았을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떤 낡은 하얀 옷을 입은 음유시인과 그 앞에 서 있는 상처투성이의 투 박한 짙은 녹색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였다. 이쪽으로 등을 돌려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허리에 찬 장식 없는 페치{{) 견습기사가 사용하는 무기. 겉모양은 하야덴과 비슷하지만 장식등의 거의 없이 투박하다. 그렇다고,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페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견습기사의 자격을 받았다는것이고, 견습기사 또한 오르기 매우 어려운 직위였기 때문이다.}}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갑옷을 보아 견습기사{{ ) 아직 기사로서의 작위가 허용되지 않은 수련중인 예비 기사. (설정편 4. 기사편 참조) }}임에틀림이 없었다. 그 기사는 앉아 있는 그녀의 발 앞에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고맙다고 답례하며 두손으로 동전을 집으려 했다. 그러자 그 기사는 그 의 투박한 갑옷 발로 그녀의 손을 밟아 버렸다. "아 !"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퀴트린은 순간적으로 불끈 했지만, 다음순간 그저 앉아 있기로 했다. 그도 역시, 천민은 핍박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인정하는, 흔히 평민 들이 말하는 '기사 타락의 시대'에 살고 있는 한명의 기사였기 때문이 다. 그 기사는 그녀의 발을 밟은 채로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는 손으로 그 녀의 턱을 받쳐서 고개를 들게 했다. "얼굴은 멀쩡하군. 몇살인가 ?" 퀴트린은 갑자기 이 주점안에 넘치던 사람들의 생명력이 사라졌다는것 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그 기사와 음유시인이 없는듯이 행동하고, 조금 도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평민으로부터도 그들 스스로의 핍박을 인정받 는 계급... 천민이란 정말 짐승만도 못한 위치였다. "여... 열아홉... " "열 아홉살이라. 아주 어릴때부터 노래쟁이 노릇을 해 왔겠군. 흠... " "......" "남자랑 자 본적이 있나 ?" 댕그랑 소리를 내며 그녀의 무릎에서 파야스가 굴러 떨어졌다. "있나 ?" "아... 아뇨. " 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여전히 주점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모른척 하고 있었다. "그렇군. 그럼 오늘 자게 해 주지. " 그는 그녀의 긴 머리채를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시인은 비명을 질렀다. '여기까지가 한계군...' 퀴트린은 기묘하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약자보 호. 나이트 데로스의 기사도의 덕목중 하나가 퀴트린을 자리에서 일어서 게 한 것이다. "이봐, " 퀴트린이 말을 걸었다. 주점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놀라서 퀴트린을 쳐다보았다. '이봐'라니... 평민도 같은 평민이 아니었다. 견습기사는 기사만 되면 평민을 떠나는 것이다. '이봐'라는 말은... "견습기사인 모양이군. 자네... " "...... ! 뭐, 뭐야 ? " 기사는 놀라서 뒤를 확 돌아 보았다. 순식간에 주점 안의 분위기가 싸 악 가라앉고 방안이 살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주점안의 사람들은 눈치 를 보더니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 점 안에는 바텐더와, 기사, 퀴트린, 그리고 음유시인밖에는 남지 않았다. "위대한 나이트 데로스가 세운 기사도의 여섯번째 덕목을 알고 있는가 ? " 기사도의 여섯번째--그것은 '약자보호'였다. 평민들도 모두 다 알고 있는 기사도의 덕목을 견습기사인 그가 알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는 얼굴가득히 비웃음을 띄운채 퀴트린을 바라 보았다. "물론 알고 있지. 그리고 세번째 덕목이 명예라는것 까지도. 내 명예를 거슬린 이상, 이제 네 놈은 죽은 목숨이야. 알고 있겠지 ? " 퀴트린은 아찔했다. 이런식으로, 그 알량한 배움--견습기사들이 쌓은 경험은 진실한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림도 없는 양의 배움이었다. 그 들은 기사의 칭호를 얻은 후에도, 다시 작위를 받기고 바스크를 받기까 지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의 수십배를 더 들여야 했다--을 내세워 저렇게 멋대로 행동하는 무리들이 앞으로 기사가 되기위한 수양을 하는 예비기 사들이란 말인가. 퀴트린은 이런생각도 했다. 혹 자신의 직속에 있는{{ ) 옐리어스 나이트는 단신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작위를 가진 나이트는 항상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수십명, 혹은 수백명. 지위 고하에 따라 수천명까지의 자신 직속의 휘하대가 존재했다. }} 기사들중에도 저런 무리가 섞여있지는 않을까... 성안에서는 상급기사들에게는 절대 복종하고, 귀부인들에게는 항시 예를 취하지만, 밖에 나오면 기사로서의 위치를 잃어 버리고, 자신의 힘만 믿고 저렇게 마음대로 난폭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기사라고 부르기 조차 메스꺼운 놈들이 있지는 않을까... 퀴트린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그 질문의 답은 단정할 수 '없다'였다. "안돼요. 제발... " 갑자기 옆에 서 있던 음유시인이 견습기사의 팔을 잡았다. "그를 죽여 서는 안돼요 기사님. " "뭐냐 ? 저녀석이 네 뭐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 " "아녜요. 그런뜻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면 안되쟎아요. 그건 나쁜짓 이에요. " "이런 빌어먹을 계집애가... 비켯 ! " 견습기사는 팔을 뿌리쳤다. 시인 은 비명을 지르며 저만큼 나동그라졌다. "저따위 평민 하나를 죽인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아 ! 짐승만도 못한 천민 계집애가 누구에게 명령이냐 ! " 퀴트린의 머리를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지금 자 신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느낀걸까. 그의 말이 틀린것은 아 니다. 기사나 귀족계급이 하늘이라면 평민이라는 계급은 땅에도 못미쳤 다. 하지만 퀴트린 자신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평민으로 취급을 받자 순 간적으로 핍박받는 평민들의 슬픔이 느껴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새,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느껴졌다. 기사 가 그의 투박하고 장식이 없는 페치를 꺼내든 것이다. 모양새는 없었지 만 한광을 발하는 것이, 그런대로 날카로운것 같았다. 시인이 비명을 지 르며 이번에는 퀴트린에게 매달렸다. "제발, 제발요. 잘못했다고 하세요. 당신은 죽을거예요. 네 ? 빨리요 ! " 퀴트린은 다시 한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때는 천민들과는 이야 기만 해도 메스꺼울것이라고 생각했고, 천민들은 모두 추하고, 교양없고 생각없이 살아가는 무리들이라 생각해왔지만, 지금 느낀것은 그것이 아 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이 있고, 생각도 있고... 또 이 미천한 음유시인은 정의감과, 남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가. "자아, 기사도를 따라서, 네게도 겸양을 보여주겠다. 난 하야덴을 사용 할테니, 너도 뽑아라. 뭐 ? 하야덴이 없다고 ? " 그는 혼자서 말을 하고 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살기 가득한 눈으로 다시 퀴트린은 응시 했다. "기회를 줬는데도 뽑을 수 없다면 할 수 없는거지. 자아, 간다 ! " '쓰레기같은 놈... 기사도를 이따위로 모욕하다니... ' 순간적으로 퀴트린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견습기사라는 위치 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 " 퀴트린이 호통을 치자 무언가 육중한것이 벽에 부딪히는것 같은 무겁 고 둔탁한 소리가 나며 주점의 기둥이 흔들렸다. 견습기사가 시위를 떠 난 화살처럼 직선으로 날아가 주점 벽에 부딪힌 것이다. 퀴트린의 투기 (鬪氣)가 힘이 되어 그 견습기사를 향해 그대로 방출된 것이다. "...... ! " 기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일어섰다. "그랬군... 이런 사술 (邪術)을 사용할 줄 아니까 내게 덤빈게로군... 야, 이 빌어먹을 놈아 ! 내 가 그따위 사술에 겁을 먹을줄 아느냐 ! " 퀴트린이 말했다. "입을 무겁게 해라. 기사의 생명은 명예와 경건이다. " "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젠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죽은 목숨이다 ! 내 명예를 걸고 널 토막 내고야 말겠다 ! " 시인이 비명을 질렀고, 바텐더는 고함을 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 람 살려 ! 큰일 났어요 ! " "더 이상 기사도를 모욕해서 날 화나게 하지 마라. 넌 기사로서의 자 격이 없다. 그 자리에서 네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내가 네 팔 하나 를 회수해 가겠다. " 견습기사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마음대로 그와 퀴트린 사이에 놓여져 있던 탁자를 난도질 하며... 퀴트린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음유시인을 힐끔 돌아보고 그녀가 자신의 검의 피해를 입 지 않는가를 확인한 후 허리로 손을 가져가 댔다. "죽어랏 ! " ... 기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다니... 퀴트린은 다시한번 그 견습기사에게 실망하며 그의 하야덴을 뽑아 들었다. 견습기사의 무기가 퀴트린의 어깨를 향했고, 퀴트린은 하야덴을 뽑은 속력으로 그대로 검을 올려쳤다. 짧고 날카로운 검의 파찰음이 들렸다. 다음순간, 견습기사의 페치를 쥔 팔이 공중으로 날아갔고, 퀴트린은 하 야덴을 등 뒤로 돌려 더 이상 기사의 몸에 자신의 하야덴이 닿지 않게 한 후, 무릎으로 그의 쓰러지는 몸을 받았다. "으아아아악 ! " 처절한 짐승같은 비명소리가 들렸고, 기사는 왼팔로 오른쪽 어깨를 쥐 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시인은 또 다시 비명을 질렀다. "... 네겐 기사는 어울리지 않아. " 퀴트린은 고통에 떨며 바닥에 허리를 오그라뜨린 채 쓰러진 기사를 바 라보았다. "네가 지금까지 피해입힌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게 좋겠군... Pellocs(섬광계 소독마법). " 퀴트린이 스펠을 외우자 옅은 노란색 섬광이 기사의 오른쪽 어깨를 감 쌌다. 곧, 뿜어져 나오던 피가 먿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는 하야덴을 집어 넣으며 음유시인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놀라서 아무말도 못한 채 두려운 눈으로 퀴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퀴트린은 생각했다. '내가 잘못했군... 이렇게 되면 나와 이 기사가 틀린점이 무엇 이지 ? ' "... 미안하게 됐군. 아까 져런스타르의 노래는 잘 들었소. 주인이 돌아 오면 탁자와 의자의 수리비로 사용하라고 전해 주시겠소 ? 나머지는 노 래의 보답이오. " 퀴트린은 500더프의 동전을 꺼내서 시인에게 건네 주 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점 밖으로 나왔다. 그의 기분은 매 우 착잡했다. 어둠이 천천히 파이센을 휘어감기 시작했다. 퀴트린이 바라 본 어두운 파이센의 하늘은 이제 더 이상 포용적이고 넓기만 한 하늘은 아니었다. 2. 만남은 운명으로 아아젠은 하늘을 읽을줄 알고 있었다. 밤 하늘은 사람의 표정과 비슷했다. 어느날은 환하게 웃고 있다가도 어느때는 잔뜩 찌푸리고... 어떨때는 슬퍼서 눈물을 뚝뚝 떨구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은 항상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구름은 항상 온 하늘을 치우침 없이 훑고 지나간다. 비가 내릴때도, 비는 온 하늘에서 평등하게 쏟아져 내린다. 대지라면 어느 장소에서나, 어떤 사람이나 햇볓의 따스함을 고르게 느낄 수 있다. 하늘에는... 지금 지상처럼 왕과 신하들도, 귀족과 평민도, 천대받는 천민도 없을것이다. 그리고, 물론, 기사와 음유시인의 계급 차이도 없을것이다. '기사와 음유시인의 계급차이도... ' 아아젠은 눈을 꼬옥 감았다. 마치 눈을 뜨면 보이는 현실을 피하고 싶기라도 한 듯이. {{하얀 로냐프 강 ---------------------------------------------------- }}{{ 2. 만남은 운명으로 ------------------------------------------------------------------ }} 2. 만남은 운명으로 퀴트린은 그날 밤 파이센의 어느 작은 여관에서 묵기로 했다. 궁중이 나 퀴트린의 집에--퀴트린은 이나바뉴 기사단 바스크 6인 나이트 섀럿경 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살던 집 역시 매우 호화로왔다--있는 네 기 둥에 금박이 입혀진 침대나 밝은 회색 슈샤헨{{) 주름잡힌 장식용 천. 커튼이나 침대, 혹은 귀부인들의 드레스를 장식하는데 사용된다. 제작이 어렵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귀족들만이 사용하곤 한다. }}으로장식된 방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그정도 각오를 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퀴트린은 자신이 하루동안 묵을 방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시트조차 없는 침대에, 방안에 벽지로 군데군데 기운 벽, 빛깔 좋은 그의 갤규스 나무책상대신 색이 다 벗겨져 볼품없는 날림 책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전쟁중에 막사에서 밤을 보낼때에도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이러한 방은 볼 기회가 없었다. 막연한 상상으로만 느끼고 있을 뿐 이었다. 퀴트린은 그래도 비교적 먼지 묻지 않은 쪽 벽에 자신의 애프러더를 기대어 놓고, 책상위에 장포를 벗어 깔아 놓은 후, 그 위에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을 벗어서 올려 놓고는{{ ) 옐리어스 나이트는 다른 기사단들과는 달리 국왕의 직속기사단인 황제 친위대였기 때문에 예의를 중요시 했고, 따라서 갑옷차림으로 다니지 않고 갑옷 위에 전투복이라는 형식의 그다지 질기지 않은 형식적인 다른 옷을 입었다. }} 은빛 갑옷과 방어도구를 정리 했다. 그리고나서 방에 딸린 작고 초라한 세면실에서 간단히 몸을 씻은 후에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삐걱거렸고, 양쪽 어깨와 등은 딱딱한 침대표면에 닿아 매우 불편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퀴트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퀴트린은 잠이들지 못했 다. 퀴트린의 머리 속에 여러가지 영상이 떠올랐다. 피엔젤 공주... 그녀 도 퀴트린과 마찬가지로 성 밖의 생활은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켈로 르님 ? 그분이라면 혹시 모른다. 그의 눈은 항상 인자했고... 그는 평민들 의 슬픔을 이해하고 있다고 퀴트린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평민들 이 오늘 저녁에 본 그 시인처럼 핍박받고 산다는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까 ? 최소한 퀴트린은 어느정도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업신여김을 받는 다는 사실은 인정했고, 나아가서는 별 문제가 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들도 생명이 있었고... 그들의 의지대로 행동했다. 왜 그들은 스스로를 핍박 받는 다는 사실을 정당하다고 느낄 까... 천민들은 그들의 지위가 천할뿐 이었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그가 저 녁때 그 견습기사를 향해 일어섰을때, 그 천한 음유시인은 진심으로 그 를 걱정하고 있었다. 퀴트린의 지금까지의 상상과는 달리, 천민들도 생각 할 수 있는 이성을 지니고 있었고, 용감한 이들도 있었으며, 정의감이나 동정심이 있는 이들도 있다는것을 오늘 퀴트린은 직접 느낀것이다. 퀴트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라면 뒤척거리다가 밤을 새울 수 밖에 없을것 같았다. 그때 문득, 퀴트린은 밤 거리에 나아가 보 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거리에는 퀴트린이 지금까지도 느끼지 못 했던 그 무엇이 있을것만 같았다.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거의 본 능적으로--갑옷과 하야덴, 전투복을 챙겨입었다. 다시 그 낡은 장포를 걸 쳤다. 잠시 머뭇거린 후, 그는 그의 애프러더는 놓고 가기로 했다. 그는 방안을 둘러본 후, 천천히 문을 닫았다. 어둠속에 가라앉은 파이센의 밤 거리는 매우 차갑고 습했다. 낮의 그 러한 들떠있는, 생명력 넘치는 파이센이 아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파이센의 밤을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렇군... 퀴트린은 중얼거렸다. 상업지구인 만큼, 범죄도 많은 것이다. 이렇게 계속 걷다가 퀴트린은 어떤 집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누굴까... 누가 이 깊고 위험한 밤에 밖에 나와 서 있는걸까. 퀴트린은 천천히,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몇발자국 걸어 나가자 마자, 그 그림자가 서 있는 곳에 병원의 표지가 달려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병원... 이 밤에...? 그때였 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그 병원 안에서 나왔다. 그는 아주 신 경질적인, 페르헨{{) 이나바뉴의 북서쪽에 있는 지방. 춥고 건조한 지역으로, 이 지방 사투리는 아주 억센 억양을 갖고 있다. }}지방 사투리가 섞인 얇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만 더 귀찮게 굴면 머리통을 박살 내 주겠어 ! 감히 어딜 들어오 려는 거야 ? " 이어서 콰당--하며 나며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 마자 그 그림자는 다시 문에 매달렸다. 아주 다급하게... 그의 목소리는 여자였다. "부탁입니다. 한번만... 제발 살려주세요. " 무슨 일인지 대충은 알것 같았다. 퀴트린이 걸어서 그 병원 앞까지 걸 어가자 그녀는 퀴트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엇 ? " "앗 ? 당신은... " 그녀는 그날 저녁에 만났던 음유시인이었다. 그녀도 그의 얼굴을 보지 는 못했지만, 겉에 입고 있는 장포로 퀴트린을 알아본 것이다. 퀴트린이 물었다. "무슨 일 입니까 ? " 퀴트린의 입에서 겸양의 언어가 나왔다. 그도 말 을 해 놓고는 자신에게 놀랐다. 음유시인에게... 천민에게, 같은 기사나 귀족들에게 쓰는 겸양의 언어가 나오다니. "아... 예. 제 친구가... 아파요. 그래서... " 그제서야 퀴트린은 그녀의 옆에 누워있는 다른 한명의 음유시인을 발 견했다. 그렇군... 퀴트린은 생각했다. 의사라는 사람이 진료를 거부한 것 이다. 그들도 평민이면서, 평민들을 업신여기는, 어떤 특수 계급을 이루 는 직업인들중 하나였다. 퀴트린은 다시 한번 천민의 비참함을 느꼈다. "친구를 좀 볼 수 있을까요 ? " "예 ? " 퀴트린은 무릎을 꿇고, 잠시 그녀의 옆에 누워있는 다른 음유시인을 보았다. 아주 흐릿한 달빛에 비춰져 보이는 얼굴 이었지만... 그 방랑시인 의 얼굴은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다. 핏기없는 하얀색... 독이었다. '이정도 독이라면... 아주 간단한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을텐데... 그렇 지 못한 천민들은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이 시시한 독 때문에 죽어가겠 군... ' 퀴트린이 생각하는 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친구 델피--중독된 방 랑시인의 이름일 것이라고 퀴트린은 생각했다--인데... 저녁 먹은 것이 잘못된 모양이에요. 갑자기 잠을 자다 말고... " 그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 의사는 이 음유시인과도 비슷할것 같은 작 은 키에, 하얗게 변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작고 뚱뚱한 몸은 잠옷으로 입혀져 있는 것이, 잠을 자다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한 손에 긴 곤봉을 들고 있었다. "이런 망할 년 ! 꺼지지 못해 ! " 아주 화가 난 듯이 그는 그녀를 향해 곤봉을 내리쳤다. 그녀는 짧게 비명을 질렀고, 퀴트린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곤봉을 막았다. 쉰듯한 짙은 금속음이 났다. 퀴트린의 바샤켄{{ ) 보호용구로 팔꿈치 이하 손등까지를 보호한다. 대개 갑옷에 포함된다. }}과 그의 곤봉이 부딛히는 소 리였다. "엇 ? " 순간적으로 의사가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그것이 갑옷과 곤 봉이 부딛히는 소리라는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갑옷... 기사 ? 퀴트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위에 입고 있던 장포를 벗 었다. 그의 장포 아래로 아주 하얗고 화려한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 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의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나바뉴 바스크 104, 나이트 레이피엘이오. 그녀를 치료 해 줄 수 있겠소 ? " 그의 표정이 갑자기 풀어지며 등이 앞으로 굽었다. "아, 아... 무, 물론 입니다. 들어오시죠, 기사님. " 퀴트린은 다시 장포를 입고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시죠. " "아... 저... 예. " 그녀는 친구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퀴트린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병원 안은 비교적 넓은 편 이었다. 퀴트린이 나이트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허둥지둥하며 시술을 준비하는 의사의 행동을 보기가 역겨운 퀴트 린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펴보았다. 방안은 깨끗하고 단정했다. 시술대는 하얀색 천으로 덮여져 있었고, 환 자용 침대와 의자는 하얀색 슈샤헨으로 장식된 세련된 것이었다. 방안은 청결함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하얀색 계통의 벽지로 단장되어 있었고, 시 술구 역시 깨끗하게 닦여져 정리되어 있었다. 퀴트린은 조금은 딱딱한 대기용의자에 걸터 앉았다. "환자를 봅시다. " 의사는 갑자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 미 조금전 음유시인을 냉정한 목소리로 내쫓던 그 의사가 아니었다. 그 는 자기 직업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확하고 신속하게 행동했다. 그는 능력이 있었다. 이런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다른 평민들을 업신여기는것도 무리는 아니군. 퀴트린은 이렇게 생각했다. 의사는 천천히 환자를 보더니 침대에 눕혔다. 음유시인의 더러운 옷이 침대에 닿자 그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 펴보던 의사는 입을 열었다. "프란젠의 독 입니다... 심하게 상한 음식에 벌레들이 옮기는 독 이지 요... 그렇게까지 위험한 독은 아니지만... 사흘정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해 두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그 음유시인이 물었다. "죽지는... 델피가 죽지는 않겠지요 ? " 의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불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지는 않지. 해독만 하면 나을 수 있으니까... " 시인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깔렸다.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천천히 내실로 걸어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는 가지고 온 약초를 조심스럽게 만져 변화 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이었 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마법을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이 더 효과적이고, 부작용이 적은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마 법사들이 은퇴 후 병원을 차리기도 한다. 그들은 변형시켜 그 효력이 떨어진 시약보다는 차라리 약초 그 자체를 이용한다. 그것이 마법사와 다른점이다. 시약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은 그 준비과정이 길면 안되기때문에 그 효력의 감소를 감수하면서까지 시약을 사용하는것이다. 의사의 손에서 조금씩 노란색 불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 얀색 섬광으로 그 분출되는 빛이 바뀌자 그는 다시 천천히 그 시약을 환 자의 몸에 얇게 발랐다. 그 모습을 본 퀴트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법수준은 자신과 비슷하리라... 하지만 그 신중함에 있어서 퀴트 린은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역시 그는 실력이 없는 엉터리 의사가 아니 라, 진실로 능력있는 의술사중 한명이었다. 약초를 다 바르고, 환자의 몸에서 섬광이 걷히자, 의사는 자리에서 일 어났다. "일단, 몸에 퍼져있는 독은 제거했습니다. 이제 투여할 약을 준비하겠 습니다. 독은 사라졌지만, 이미 독이 몸 안에 있는 내장을 자극했을것 입 니다. 그리고 고갈된 체력도 회복시켜야 겠고... 약간만 기다리십시오. " 그는 다시 천천히 내실로 걸어들어갔다. "휴우. " 음유시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퀴트린도 그제서야 환자에게서 눈 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벌써 저녁의 그 주점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퀴트린은 그녀를 두번째 본 것 이지만, 이제서야 찬찬히 그녀를 뜯어볼 수 있었다. 작은 키에 때 묻은 옷... 길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에는 아주 평범한 머리장식을 하 고 있었다. 본래는 아주 하얬을것 같은 햇볓에 그을린 손에는 투박하게 만들어진 파야스를 꼭 쥐어 들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을 바라보는 퀴트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문득 그를 돌아 다 보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기사와 음유시인... 두 계급은 사실은 서 로 얼굴을 마주보는것 조차 어려운 사이였다. 퀴트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쓰는 말은 여전히 겸양의 언어였다. "... 친구가 크게 위험한 상태는 아니니 다행이군요. " 그렇게 말하며 퀴트린은 속으로 이정도 독이라면 자신의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있었을것 이라고 생각했다. "예... "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로서는 퀴트린이 아니었더라면, 기사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기회는 평생 없 었을것이다. "제 이름은 퀴트린 섀럿입니다. 이나바뉴의 기사죠. 저어... 아가씨는 ? " 퀴트린은 그녀의 호칭을 불러야 할때 잠깐 멈칫했다. 마땅히 부를 호 칭이 생각나지 않은것이다. "제 이름은 아아젠 큐트예요. 집은 없고요... 그저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 "예... " 아마도 그녀는 퀴트린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을것이다. 왜 기사 가 단신으로 이런 도시에 와 있느냐. 어째서 방랑시인같은 천민의 목숨 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하얀색의 화려한 전투복, 직접 보지는 못했지 만 그녀도 퀴트린의 옷이 옐리어스 나이트 같은 지위가 높은 기사의 것 이라고 상상은 해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 하다못해 그날 저녁 생 명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감사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계급'이라는 거대한 벽이 그녀와 퀴트린 사이에 말 없이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열 아홉살이라고 했죠. "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말을 할 상대가 아닌 데... 이러한 생각을 하며 퀴트린은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는것이다. "네 ? " 그녀는 깜짝 놀라는 듯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 를 끄덕였다. "맞아요. " "저는 스물 하나인데...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는군요. " 퀴트린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20년과 그녀가 살아온 20년 은 얼마나 틀렸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퀴트린이 부드럽게 말해서 인지, 그녀는 갑자기 용기를 내서 말했다. 아주 작은...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 다. "저어... 기사님은 왜 이 곳에 와 계시죠 ? " 퀴트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냥 돌아다니는 중 입니다. 이것도 일종 의 수업이죠. " "...... " "이렇게 몇달 돌아다니다 성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생각할것도 있 고... 해서요. " "어딜 가실지는 생각해 놓으셨나요 ? " 퀴트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저는 퓨론사즈성 밖으로 나와본적이 거의 없습니다. 몇번의 전 투를 위해서를 제외하면... 전부 기사수업때 책으로만, 그림으로만 배운 지형이죠. 하지만... 일단은 루우젤 지방으로 한번 가 볼 생각입니다. " "루우젤... " 그녀는 입속으로 그가 말하는 지방을 되뇌어 보았다. "로냐프 강쪽으로 가셔야겠군요.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는 아직 한번도 가본적 없는곳 이지만... " 아아젠이 대단히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기사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저어... 제가 어떻게 하더라도 보답 을 해 드릴수는 없을것 같네요... 하지만 루우젤까지 길 안내정도는 할 수 있을것 같은데... " 길 안내라. 퀴트린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손가락으로 그녀의 파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원래 기사들 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 최소한 자신의 몸시종과, 하야덴이나 애프러더, 혹은 리첼반{{) 긴 금속으로된 막대끝에 날카로운 하야덴등을 결합시킨 무기. 어느정도 수준 이상의 기사들만이 사용한다. 대개 기마격투용으로 쓰인다. 우리 세계의 '창(Lance)'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들의 관리를 위해서 무기관을 데리고 다닌다. 하지만 퀴트린은 지금 혼자였다. 원래 혼자 떠나야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글쎄요... 길 안내정도는 좋겠죠.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 하지만, 그 렇게 되면 아가씨는... 제... 시종정도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 기사의 시종... 그것조차도 음유시인이 가까이 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 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다가 퀴트린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숙였 다. "그렇게... 해도 된다면... 기꺼이...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전 내일 출발합니다. 짐을 꾸려서... 새벽까지 새요우거리의 여관 앞으로 오십시오. 로냐프 강까지 가는것으로 보수는 계산해 드리겠 습니다. " 그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퀴트린은 장포를 챙겨 입고 일어서 며 말했다. "친구분이 완쾌되길 기원하겠습니다. 그럼, " 퀴트린은 1000 더프의 동전 두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다. 주위는 새카맣게 되어있었다. 동이트기 직전 의 어둠이 밀려오고 있는것이다. 퀴트린은 장포 깃을 여미고는 자신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퀴트린은 애초부터 걸어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말같은 것을 빌릴 생 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방에 도착하자 마자 잠시 눈을 붙인 뒤에 애 프러더와 옐리어스 나이트의 펜플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부옇게 떠오르는 파이센의 아침은 무척 시원했다. 태양은 그의 자비로운 미소를 서쪽 종탑으로 부터 중앙광장, 그리고 동쪽 가수교까지 천천히 차례대로 비추어 주었다. 퀴트린이 천천히 여관의 문을 나서며 주위를 둘러보자, 문 옆에 바로 붙어서 서 있던 아아젠에 잠시 놀란 표 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퀴트린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 갑시다. " 퀴트린이 스스럼 없이 말했다. "네. 하지만... " "하지만 ? " 퀴트린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아아젠을 바라보았다. "저, 저는 기사님의 시종입니다. 그렇다면... 존칭은... " "아아, 존칭 말이군요... 그러죠. " 퀴트린이 대수롭지 않은듯이 대답했다. 아아젠이 다시 물었다. "... 호칭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 기사님... 이라고 할수는 없을것 같 은데... " 퀴트린은 잠시 궁중에서 자신의 시종들이 자신을 어떻게 불렀는지를 생각해 냈다. "그럼 '퀴트린님'이라고 하십시오. 쓰기 편한 호칭일테니... " "네. " 아아젠은 짧게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퀴트린과 아아젠은 같은 길을 가기 시작했다. 루우젤까지 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엘핀랜드의 대륙 중앙에는 '아슈벨의 늪'이라는 별명을 가진 거대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상당히 넓고, 아직 제대로 개척도 되지 않은 숲이 었다. 이 숲에는 인간 종족은 거의 살지 않고 있고, (물론 사냥꾼이나 모 험가들은 예외이다) 짐승들이나 때로는 위험한 몬스터들만 살고 있었다.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이미 어둠이 아슈벨의 늪을 깊게 덮고 있었다. "이 방향이 맞는지 모르겠군. 이미 어두워져서 더 이상 간다는건 불가 능 하겠어. " 뒤에서 말없이 그를 따르던 아아젠은 역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아슈벨의 늪... 이제 그만 가야겠군. 내일 아침에 해가 뜨는 방향 을 보고 다시 출발 하도록 하지. 마음에 드는 야영장소는 아니지만... " 퀴트린은 걸음을 멈추고 적당한 자리를 골라 짐을 내려 놓았다. 그는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을 벗고 그냥 갑옷위에 장포를 입고 있었다. 긴 여행에 전투복이 더러워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아젠은 퀴트린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먼저 퀴트린에 게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언제쯤이면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지요 ? " 퀴트린은 어깨를 으쓱 하더니 말했다. "글쎄. 내가 배운 지리로는 한 사흘정도 걸리지 않을까... 그 정도는 음 유시인들이 더 잘 알지 않았나 ? " 아아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녀와 퀴트린의 짐을 정리하고는 모닥불을 피울 나무를 줍기위해 일어섰다. "저희 미천한 시인들은... 외람된 말씀이지만... 싸움에 익숙하지가 않기 때문에 이런 숲으로는 오지 않아요. " "그렇군... " 그녀는 퀴트린에게 인사를 한 후 장작을 주우러 야영지에서 잠깐 나왔 다. 그 전날 비가 왔기 때문에 나무가 젖어서 불을 피울만한 나무를 구 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밤 새 태울만한 양의 나무와 마른 낙엽을 찾기 위해 상당히 먼 곳까지 가야했다. 그녀가 다시 캠프로 돌아왔을때 퀴트린은 무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녀는 하야덴이 발하는 한광을 보고 흠칫했다. 하야덴은 매우 날카롭고 긴 잘 다듬어진 것이었다. 손잡이는 순백색의 금속으로 입혀져 있었고 손가락이 닿는 부분에는 전투시에 손에서 미끄 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비늘모양의 알 수 없는 갈색 가죽이 붙어 있었 다. 끝부분은 둥그스름했고 거기에는 옐리어스 나이트를 상징하는 문장 이 붙어 있었다. "... 놀랐나 ? 이것이 하야덴이야--며칠 여행때문에 상처가 생겼을지도 몰라서 살펴보는 거야. " "네... " 아아젠은 짧게 대답하고는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바닥도 축축하고 나무들도 물기가 하나도 없는것은 드물었기 때문에 쉽게 불이 붙지는 않았다. 몇번 불이 붙었다가도 곧 꺼졌다. 아아젠은 꾸준히 낙엽 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퀴트린을 발견했다. "조...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죄송해요. 나무가 젖어서... " 퀴트린은 당황하는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장작 두어 개를 집어서 살펴보더니 내려 놓고 일어섰다. "잠깐 비켜 보지. " 그녀는 퀴트린의 말을 듣고 앉은 걸음으로 몇걸음 물러섰다. 퀴트린은 가볍게 손을 한번 뿌렸다. "Yehm Chen. (화염계 증열마법) " 그의 손끝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장작과 낙엽이 불꽃과 함께 타 오르기 시작했다. 아아젠이 놀랐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가 퀴트린을 쳐다보자 퀴트린은 잠시 불을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 다. "간단한 마법의 불이야. 마법의 불꽃은 자연 상태의 물이나 바람으로 꺼지지는 않지. " "네... " 그녀는 고개를 들어 퀴트린을 계속 바라보았다. 잘 다듬어진 머릿결. 부드러운듯 하지만 강함을 보여주는 눈썹. 꼭 다 문 입. 끝없이 깊고 냉정함을 느끼게 하는 눈. 기품때문에 더욱 더 커 보 이는 키... 하지만 그는 기사였고, 그녀는 천민중에서도 천대를 받는 음유 시인이었다. 기사의 시종의 자리조차도 너무나 과분한... 그러다 그녀는 퀴트린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녀는 매우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지 ? " "아, 아녜요... 저, 저녁 준비를 하겠습니다. "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짐으로 다가갔다. 여행중에는 하루에 두번, 그리 고 가끔 세번씩 식사를 하게된다. 야영지에서 떠나기 직전과 도착한 직 후였다. 여행중에 마을이라도 보이게 되면 한끼의 식사를 더한다. 그녀는 짐 옆에 앉아서 먹을 음식과 식수등을 꺼냈다. '안돼... 내가 왜 이러지. 그분은 기사야. 난 시종일 뿐이고... 지금의 위 치에도 충분히 만족해야 하는데... 난 지금도 너무나 행복한거야. ' 그녀는 잠시 퀴트린에게 등을 돌린 채로 눈을 감고 있다가 음식들을 들고 모닥불쪽으로 다가갔다. 퀴트린은 이미 원래의 자리도 돌아가서 방 금까지 만지던 하야덴을 다시 손질하고 있었다. 여행중이기 때문에 따뜻하거나 수분이 많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퀴트린이 기사이긴 했지만 그건 마찬가지였다. 여행을 나올때 가지고 온 마른 고기와 마른 빵등의 음식 뿐이었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저녁을 준 비했다. 마른 고기는 데운 물에서 딱딱함을 풀어야 했다. 그래서 최대한 부드러운 부분을 퀴트린이 먹을것으로 했다. 빵은 짐승 기름을 발라서 따뜻하게 덥혔다. 물은 차갑지 않은 정도로만 해야 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음식을 준비한 후에 퀴트린에게로 가져갔다. 며칠 안된 여행이었지 만, 퀴트린은 식사를 받을때 마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것 이 그녀에게는 큰 낙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였다. "고맙군. 아주 맛이있어 보이는데. " "감사합니다. " 퀴트린과 아아젠이 나눌 수 있는 말은 하루에 많아야 열마디 정도였 다. 그것도 대부분 퀴트린이 먼저 건네는, 여행에 관계된 말 뿐이었다. "같이 먹지. " "아... 아녜요. 퀴트린님이 다 드시고 나면...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그녀는 퀴트린이 그녀가 만든 음식을 먹는 모습을 곁눈으로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아아젠이 식기들을 정리했다. 퀴트린은 주위 환경을 보 기 위해 잠시 야영지를 떠났다가 돌아왔다. "별로 느낌이 좋지 않더니... " "네에 ? " 퀴트린은 장포를 걸친 채로 그냥 자리에 앉았다. "잘 하면... 오늘 밤에 한바탕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주위에 늑대(War Wolf)가 있는것 같아. " 아아젠은 놀란 눈으로 흐읍 하고 숨을 들이 마셨다. "괘... 괜찮을까요 ?" 퀴트린은 어깨를 으쓱 하더니 놓아두었던 하야덴을 집어 들었다. "내 하야덴은 아직 짐승을 베어 본 일이 없지만... 뭐, 별로 걱정할것은 없어. " "...... " "눈을 붙이는게 좋을거야. 어짜피 나는 못자게 될것 같으니... 한 사람 이라도 자는편이 낫겠지. " 퀴트린의 말은 명령이었다. 아아젠은 모닥불에 물을 뜨겁게 데워서 슈 렐린 나무 잎사귀로 차를 끓였다. 슈렐린은 이나바뉴의 북쪽 우스테커 지방의 휴우젠산 기슭에서만 자라는 야생 나무다. 슈렐린은 사람이 직접 기르면 결코 그 향기로운 잎을 피우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성스러운 찻 잎의 재료로 인식 되었다. 그 슈렐린의 잎사귀를 갖은 향료를 더해서 말 리고, 부스러뜨려 차로 쓴다. 구하기도 어렵지만, 휴우젠 산기슭의 주민 들 조차 맛을 보지 못하는것은 거기에 사용되는 독특한 향료 때문이었 다. 슈렐린은 궁중에서만, 그것도 이나바뉴의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차였 다. 아아젠은 뜨거운 슈렐린 차 한잔을 퀴트린에게 가져다 주고는 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아젠은 하늘을 쳐다 보았다. 오랫만에 바라보는 하늘이었다. 자신이 음유시인으로 이나바뉴 대륙을 돌아다닐때는 밤마다 볼 수 있는게 하늘 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퀴트린과 같이 다니게 된 후로는 하늘을 보 는일이 적어졌다. 하늘을 보는 대신 의지할 사람이 나타난 것일까 ? '아아, 모르겠어... ' 아아젠은 몸을 뒤척여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퀴트린은 그녀의 등 뒤 에 있게 되었다. 그녀는 고개만 살짝 돌려 다시 하늘을 보았다. 아아젠은 하늘을 읽을줄 알고 있었다. 밤 하늘은 사람의 표정과 비슷 했다. 어느날은 환하게 웃고 있다가도 어느때는 잔뜩 찌푸리고... 어떨때 는 슬퍼서 눈물을 뚝뚝 떨구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은 항상 균형을 이루 고 있었다. 구름은 항상 온 하늘을 치우침 없이 훑고 지나간다. 비가 내 릴때도, 비는 온 하늘에서 평등하게 쏟아져 내린다. 대지라면 어느 장소 에서나, 어떤 사람이나 햇볓의 따스함을 고르게 느낄 수 있다. 하늘에 는... 지금 지상처럼 왕과 신하들도, 귀족과 평민도, 천대받는 천민도 없 을것이다. 그리고... 물론, 기사와 음유시인의 계급 차이도 없을것이다. '기사와 음유시인의 계급차이도... ' 아아젠은 눈을 꼬옥 감았다. 마치 눈을 뜨면 보이는 현실을 피하고 싶 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아아젠의 눈앞엔 뚜렷한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 다. 눈을 감으면 감을수록, 분명히 그는 자신의 등 뒤에 있고 눈도 감은 상태에서도, 가슴 안쪽에 하야덴을 비스듬히 세우고, 긴 장포를 입고 한 손에 찻잔을 든 채 어둠속을 응시하고 있는 퀴트린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찻잔이 간간히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뭇잎 이 바람에 쓸려 움직이는 소리에 실려 들려올 뿐, 그 동안의 시간은 거 의 적막으로 메꾸어져 있었다. 아아젠은 갑자기 스윽하고 자신을 덮고있 던 얇은 담요가 어깨까지 올라오는것을 느꼈다. 퀴트린이 그녀의 담요를 다시 덮어준 것이다. 아아젠은 너무나 놀라서 숨을 들이 마셨다. 퀴트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잠들어 있지 않았군. " 아아젠은 당황해서 자리에서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워있었기 때문에 눌려 있던 머리를 재빨리 정리하며 아아젠은 놀란 목소리로 대답 했다. "죄, 죄송합니다. " "죄송할것까지는 없어. 내일 갈 길을 생각하면 잠을 자 두는 편이 좋 겠지만... 잠이 오지 않았나 ? " 아아젠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늑대(War wolf)라도 나타날까봐서 그랬나 ? " "아, 아니 그런것이 아닙니다. 저는... "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서 말을 끊어야만 했다. 자신이 왜 잠을 이루지 못했는가를 말한다는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도 퀴트린은 그 끊어진 말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 노래를 연주해 줄 수 있나 ? " "예, 예에 ? " "연주를 듣고 싶군. 해 줄 수 있나 ? " 물론 이었다. 퀴트린이 자신에게 연주를 청하다니... "하지만 제 연주는 퀴트린님의 귀를 더럽힐 뿐 일텐데요... " "아니, 괜찮아. " 퀴트린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러시다면... " 아아젠은 자신의 머리맡에 놓여 있던 짐 속에서 자신의 파야스를 꺼내 들었다. 아아젠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심호흡으로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어떤 곡을...? " "아무거나 괜찮아. 하지만 기사에 관한것은 피해 줘. 지금은 기사라는 걸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 무슨 뜻일까. 지금은 자신이 기사라는걸 생각하고 싶지 않다니... 아아 젠은 속으로 내심 생각하면서도 감히 질문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 녀는 천천히 파야스를 고른 다음 아주 능숙한 솜씨로 연주를 시작했다. 아아젠이 자신있게 연주할 수 있는 곡중에 하나인 '케론샤 언덕 너머로' 라는 곡 이었다. 슬퍼할 수 없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은빛 강을 건너며 한번도 돌아보지 않는 당신의 마음역시 이해할 수 있었지요 돌아오지 못할 당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하늘과 당신의 대지를 떠나세요 따뜻한 방안의 공기와 아늑한 행복의 저녁에게 작별 하세요 사자가 언덕으로 떠오르기 전에 당신은 떠나요 큰 강을 지나고 높은 케론샤의 언덕을 넘어서 무서운 안개가 당신을 휘어감는 숲속과 길고 긴 늪과 고통의 황야를 만나더라도 멈춰선 안돼요. 마침내 고생이 끝나고 찬란한 빛과 함께 돌아오실 날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케론샤 언덕은 이나바뉴의 북동쪽 루우젤이라는 지방에 있는 유명한 로냐프강에 있는 언덕이었다. 키가 큰 풀꽃들로 유명한 이 케론샤 언덕 은 베렌테른 평야의 석양과 더불어 로냐프강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중요 한 요소였다. 이 노래는 아펠르력 544년, 제 1차 천신전쟁 후에 이나바뉴가 루우젤 을 병합하는 루우젤 통합전쟁을 일으켰을때 이나바뉴 기사단과 맞서 싸 우러 나가는 자신의 카발리에로를 전송하는 어떤 루우젤 지방의 귀부인 이 지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 노래는 자신의 카발리에로를 보내는 슬픔을 오히려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그녀의 강하고 아름다운 가 사때문에 많은 음유시인들에 의해 오랫동안 불리워져 오고 있었다. 아아젠은 노래를 부르며 가슴 한 귀퉁이가 아련히 아파오는것을 느꼈 다. 아아젠은 이 곡을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수십, 아니 수백번을 부를 기회가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 가사의 한 마디 한마디가, 한 소절 한 소절이 이렇게 가깝고 솔직하게 와 닿은것은 처음이었다. 그녀 가 갑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감기는것을 느껴서 당황하는 순간, 퀴트린이 피식 웃었기 때문에 연주를 중단해 버렸다. "카발리에로에 대해서 알고 있나 ? " '카발리에로'라는 제도가 있다. 이는 역시 이나바뉴의 위대한 기사, 나 이트 데로스에 의해 하나의 확립된 제도로 뿌리 박은 채로 현재에 이르 고 있고, 전혀 그 색깔이 퇴색되지 않은 기사도중 하나이다. 이 제도는 '명예'와 '약자보호'의 덕목이 그 주를 이루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사는 누구나 어느정도 지위와 기품을 갖춘 귀부인 한명에게 자신의 명예를 바칠 수 있다. 즉, 그 귀부인의 '카발리에로'가 되는것인데, 그녀 의 카발리에로가 된 이상 그 기사는 자신의 생명보다도 그 귀부인의 안 전을 생각해야 하는것이다. 모든 기사들은 겸양과 존경으로 그들을 섬기 는데, 대부분의 기사들은 그것에 연애감정을 더하고 있다. 아주 낭만적인 이 제도는 태고적 엘핀랜드에 존재한 제도였기 때문에 이나바뉴뿐만 아 니라 로젠다로에도 있고, 아마도 크실에도 있을것이라 예상된다. 카발리에로가 되는 의식도 대단히 낭만적이다. 기사는 몸을 정결히 한 후 갑옷위에 예복을 입고 하야덴을 차고 귀부인을 만난다. 그리고 하야 덴을 바닥에 꽂아 놓고는 귀부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카발리에로의 청을 한다. 귀부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카발리에로가 되겠다고 하는 기 사를 마다하지는 않는다. 귀부인이 긍정의 대답을 한 후, 그 기사가 일어 서서 검을 뽑아들고 카발리에로의 맹세를 하는것으로 의식은 끝난다. 이 때, 반드시 4명 이상의 기사(Knight), 그것도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기사 들이 입회 해야했다. 그들이 이 의식의 증인이 되는것이다. 이나바뉴만 해도 그 넓은 대륙 전체에 기사는 300명도 채 되지 않기때 문에 카발리에로를 갖는다는 것은 귀족의 딸이나 왕족으로서도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카발리에로의 아내가 되는 귀부인의 감상적인 사 랑이야기는 끊임없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노래되어 오고 있고, 실제로 많 은 카발리에로들이 그녀들을 아내로 맞이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이 부 르는 노래속에 있는 카발리에로에 대해서 아아젠이 모를리가 없었다. "네. 조금은... " "그래. " 퀴트린은 조용히 웃고 밤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아아젠은 순간적이었 지만 그의 눈에서 짙게 가라앉은 공허함을 보았다. 그것은 아아젠이 이 나바뉴를 방랑하면서 노래를 부를때 자신이 부르고 싶지 않는 노래를 강 요하는 사람들때문에 그 노래를 부르고 나서 그들이 던져주는 몇십, 혹 은 몇 튜넨{{) 이나바뉴에서 사용하는 현금의 단위. 100 튜넨은 1 더프. }}짜리 동전을 받으며 느꼈던 것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왜 물어보신 걸까. 카발리에로라... ' 거기까지 생각하다 아아젠은 가슴속에 갑자기 냉기가 차는것이 느껴졌 다. 카발리에로. 그래. 퀴트린님 같은분을 카발리에로로 맞아들이고 싶어 하는 귀부인들이 얼마나 많을것인가. 아니다. 이미 어떤 뛰어나게 아름답 고 기품있는 귀부인의 카발리에로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역시, 나같은 것은 쳐다 볼만한 분이 아냐. 내가 왜 바보같은 생각 을... ' 그때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지, 자신이 주위에서 어떠한 강요를 받고있다고 느끼면 어떻게 할거지 ?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일이고... 자신이 승락하면 자신 을 비롯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것이라고 생각하면... " "... 하지만 저는 승락하고 싶지 않는다는 가정이겠죠 ?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젠의 경우에는 생각이 짧은것이 아니 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음유시인이라는 자신의 계급과 생활, 그 비참함에 익숙해진지 오래되었다. 퀴트린처럼 그것을 생각하고, 고민 할 처지가 아니었다. 퀴트린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신걸까. 무엇을 생각하기 위해서 스 스로 기사의 몸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오신걸까. 아아젠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으로 섣불리 대답할 종류의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퀴트린은 여전히 눈은 허공을 향한 채 말했다. "나에게, 내가 어릴적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친구가 있었지. 여성이었 어. " 퀴트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날에서 부턴가 우리는 친구가 아닌 귀족자제와 기사의 신분으로 돌아갔지. 그것은 아마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을거야. 주위에서 우릴 그렇게 만들어 놓은것이란 말이야. 사회와... 예법과... 제도라는 것 이지." 아아젠은 지금까지 이렇게 퀴트린이 길게 말하는것을 들어본일이 없었 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지금 당장은 아아젠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 았다. 아아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것은 피부로 느껴지는 삶의 고 통과, 살아 있다는 절망감. 그 위치에의 승복. 그리고 노래와 연주뿐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뜻인지 잘... " "주위에서는 어떠한 다른 관계로 그 여성과 나를 묶어두려고 한다는 말이야. " "어떤... 다른관계요 ? 아, 그렇다면 혹시... " 퀴트린은 아아젠을 슥 돌아보았다. 아아젠은 퀴트린의 눈길을 피하려 고 눈을 자신의 파야스로 떨구었다. "... 알아차렸나 보군. 그래. 카발리에로야. "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하늘은 옅은 색 구름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이미 밤은 꽤 깊어있었고, 온 숲이 잠이든듯, 간간히 스쳐가는 바람소리 에 섞여 들짐승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 주위는 아주 고요했다. 아아 젠은 자신이 손가락 하나로 파야스의 줄 하나를 긁으면 벼락이 치는 소 리처럼 들릴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카발리에로... ' 아아젠은 퀴트린이 입밖에 낸 단어를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누구 일까. 퀴트린을 카발리에로로 맞아들일 수 있는 귀부인은... 아주 높은 신 분을 가진 아주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일것이라고 아아젠은 생각했다. 뮤 젠(귀족 제 2계급)이나 쇼온브루도(귀족 제 3계급)의 작위를 가진 귀족의 자제정도일까. 아니다. 셰렌다이크(귀족 제 1계급. 셰렌다이크의 작위를 가진 사람은 그때당시 이나바뉴에 오직 4명뿐이었다.)의 외동딸정도일지 도 모른다. 아니면... 아아젠은 금빛으로 장식된 하얀색의 예복--그 복장 은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식복이었으나 보통의 평민들은 기사들의 가장 멋진 차림으로 그런 복장을 상상하곤 했다. 옐리어스 나이트가 기사들 중에서도 평민들의 최고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증거중 하나였다--을 입은 퀴트린을 상상했다. '아니면... 그래. 왕녀님{{) 황제의 딸, 즉 공주를 뜻한다. 지금 이나바뉴의 왕녀는 국왕 루지아 10세의 외동딸인 피엔젤 공주이다. }} 일 수도 있어. 퀴트린님을 카발리에로로 맞아들일 분이라면... ' 아아젠은 다시 아직 태어나서 본적도 없는 현 황제 루지아 10세의 외 동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은 막연한 상상으로 끝났지만, 아아젠 은 후에 그것이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는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아아젠의 퀴트린이 말을 한 그 귀부인에 대한 상상은 퀴트린의 가벼운 웃음으로 중단되었다. 퀴트린은 코웃음을 치듯 웃고나서 짧게 말 했다. "... 별 시시한 이야기를 했군. " 아아젠이 급히 아니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퀴트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젠 하고 싶어도 더 하지는 못할것 같군. " 퀴트린은 야영을 하느라 붙여놓은 모닥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불빛을 보고 찾아온 분들이 있어. 조심해. " "... 예 ? " 퀴트린이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아젠에게 말했다. 아주 작은 목 소리였지만 그것은 힘이었었고, 뚜렷한 명령이었다. "모닥불 가까이로 가. 어서 ! " 아아젠이 황급히 모닥불쪽으로 몸을 옮기는 순간 퀴트린이 들고있던 하야덴을 뽑아 들었다. 그의 하야덴은 달빛을 받아 차가운 빛을 뿜어냈 다. 퀴트린이 검을 든 채로 잠시 숲속을 응시한 후, 수풀속에서 퀴트린이 말한 '손님'들이 그 모습보다 먼저 상징적인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모 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아마도 아슈벨의 늪에 살면서 오랫동안 여행자 들을 습격했을만한 늑대들이었다. 퀴트린이 사람--기사이건 아니건 간에--이 아닌 짐승과 힘으로 맞서 는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퀴트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 화가 무쌍한 기사들의 하야덴을 상대로 싸우는 것 보다는 운동방법에 한 계가 있는 늑대들과 싸우는 편은 훨씬 쉬웠다. 곧, 불빛을 향해서 천천히 늑대들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한두마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생각보 다는 거대한 몸을 갈색이나 검은색의 가죽으로 덮고 있었다. 입 밖으로 드러낸 이빨은 날카로왔고, 불빛을 받아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눈은 파 랗게 한광을 뿜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씩 천천히 걸어나와 앞발을 조금 굽혀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린 상태로 퀴트린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 는 확연한 적의가 나타나 있었다.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틈이 보이면 뛰 어 오르겠다는 모습이었다. 퀴트린은 곁눈으로 아아젠을 보았다. 아아젠은 불 옆에 있어서 일단은 안전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 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면 퀴트린의 움직임이 동요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퀴트린은 그녀의 비명소리에 신경을 쓸 만큼 경험 이 없는 기사는 아니었다--퀴트린은 아아젠의 안전을 확인한 후 하야덴 을 좌우로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곧, 가장 앞에 있던 늑대 한 마리가 괴 성을 지르며 뛰어 올라왔다. 강하지만 날카롭고 높은 파찰음이 들렸다. 그 늑대는 비명도 지를 새 가 없이 퀴트린의 하야덴에 몸이 둘로 갈라져 버렸다. 워낙 빠른 속도로 잘리워 졌기 때문에 공중에는 피도 튀지 않았다. 아아젠은 속으로 마른 비명을 질렀다. 그에 이어 괴성과 함께 주위의 늑대들이 동시에 뛰어 올랐다. 퀴트린 의 하야덴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단 한 마리의 공격을 어깨 너머도 피했을 뿐, 나머지 늑대들은 퀴트린의 몸에 발톱 하나 대어보지 못하고 모두 시체로 뒹굴었다. 순간, 주위는 늑대들의 비명과 괴성으로 가득찼 다. 퀴트린이 발을 한 발짝 옮기고 다시 하야덴을 위에서 아래로 그어 한마리의 늑대를 갈랐다. 순식간에 캠프는 늑대의 시체로 붉게 장식이 되었다. '이제 한 마리... ' 퀴트린은 아까 미처 퀴트린을 공격하지 못한,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남 은 늑대를 응시했다. 늑대는 처음엔 죽일듯한 눈으로 퀴트린을 보다가 퀴트린의 눈에서 위압감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퀴 트린이 한발자국 다가서자 뒤로 홱 뒤돌아 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늑대가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며 퀴트린은 입을 열었 다. "다친데는 없나 ? " 아아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퀴트린은 검을 눈 앞으로 가져가 좌우로 돌려보았다. "별로 기분 좋지 않는 피가 묻었군... " "닦을 수건을 찾아오겠습니다. " 아아젠은 짐 속에서 다시 수건을 찾아 왔다. 퀴트린은 수건으로 하야 덴을 문질렀다. 대충 하야덴을 닦은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하야덴을 쥔 채 다른 한 손의 첫째와 둘째 손가락으로 검의 윗 중간 부분을 잡았다. "Yehmn Precsel Harrd. (화염계 소독마법) " 하얀색 불꽃이 하야덴을 손잡이 부분을 덮었다가 위로 화르륵 소리를 내며 타 오르다가 그 끝 부분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법의 불이 걷히자 하야덴은 다시 한광을 내며 말끔해 졌다. 잠시 그의 무기를 살펴보던 퀴 트린에게 아아젠이 매우 주저주저 하며 입을 열었다. "... 살아남은 늑대는... 없을까요 ? " 퀴트린은 잠시 아아젠을 바라보고, 주위를 쓱 둘러 본 후에 말했다. "아마 없을거야. 살아 있었다면, 그 살기를 내가 느꼈겠지. " "...... " "시체들을 정리해야 겠지. " 퀴트린은 하야덴을 집어 넣어서 나무에 기대어 세워놓은 다음, 늑대 시체에게로 다가갔다. 아아젠이 말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 아아젠은 황급히 퀴트린에게 다가가 퀴트린을 도와 조심스럽게 하나 하나씩 그것들을 치워서 옆 풀 숲에 가져다 놓았 다. 그녀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퀴트린으로서는 별로 신경을 쓸 것이 아니었지만, 일이 끝나고, 대충 캠프를 다시 정리 한 후, 원래 앉아 있었 던 자리로 돌아오자 그는 넌지시 아아젠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살아 있으면... 다시 습격할것 같아서 그랬나 ? " 아아젠은 조금 놀라서 대답했다. "아, 아뇨. "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것 같군... " 무표정한 얼굴로 퀴트린 은 모닥불을 응시했다. 아아젠은 퀴트린을 바라 보았다. 아아젠은 늑대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 의 얼굴을 보았었다. 물론, 그들은 퀴트린과 아아젠을 공격했고, 그들은 퀴트린의 하야덴에 죽을 목숨이었다. 하지만... 강한 기사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게 생명을 빼앗기는 그들... 아슈벨의 늪 속의 약탈자인 그들의 모 습에서 아아젠은 항상 업신여김과 비난을 받는 음유시인의 이미지를 보 았던 것이다. 퀴트린이 말을 이었다.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는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제도를 만들고,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 에게 그것을 지키기를 강요했던 걸거야. 그래. 제도라는 거지... " 아아젠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제도... 아주 잠깐동안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제도... 그렇다. 제도 이다. 그래서 아아젠은 영원히 퀴트린과는 이러한 관계로 만족할 수 밖 에 없을것이다. 아니, 오래지 않아 루우젤에 도착하게 되면... 그렇게 되 면 이러한 관계도 끝이 나고 마는것이 아닐까. "이제는 정말 눈을 조금 붙이지. 곧 새벽이야. 내일도 이 숲속을 걷게 될것은 확실하니까 말이야. " 아아젠은 언제나 그랬듯이, 퀴트린의 말에 따라 자리에 누웠다. 늑대들 의 생명... 퀴트린... 기사와 음유시인... 루우젤... 카발리에로... 이러한 생 각을 하다가 아아젠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아슈벨의 늪도 아아젠과 함 께 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3. 하얀 로냐프 강 조용히 바람이 불어와 풀벌레들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아주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퀴트린은 오후의 햇살에 따사로움을 느꼈다. 궁중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상쾌함이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케론샤의 정상에 다다른 것이다. 언덕아래로 푸른색의 로냐프 강이 보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하얀 햇빛을 받은 부분은 은색으로 반짝였다. 강 언저리에서 베렌테른으로 이어지는 곡면은 마치 물새의 등선처럼 자연스러웠다 --이제, 가을인것이다. 벌써 아아젠과 같이 길을 떠나온지 석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얀 로냐프 강 ------------------------------------------------------------------ 3. 하얀 로냐프 강 ------------------------------------------------------------------ 3. 하얀 로냐프 강 이나바뉴의 동북쪽에는 루우젤이라는 지방이 있다. 루우젤은 비록 제 2차 천신전쟁 당시 이나바뉴에 무력으로 병합되기는 했지만 이미 5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이나바뉴와는 분리된것과도 다름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등을 가 지고 있었다. 이것은 로냐프강이라는 지형적 특성외에도 그들 거주민들 의 배타적인 성격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다. 로냐프강은 루우젤 지방을 이나바뉴의 본토에서 지형적으로 분리해놓 은 장본인이다. 루우젤 지방을 서북에서 동남으로 가르고 있는 이 강은 엘핀랜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강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저녁시간에 베렌테른 평원에 걸쳐 보이는 로냐프의 석양은 물새떼와 더불어 절경을 이룬다. 이 로나프강 서쪽 귀퉁이 부분에 케론샤라는 작은 언덕이 있다. 이 언덕 역시 로냐프강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요소중 하나이다. 키가 큰 풀꽃들로 덮여 있는 이 언덕은 특히 다섯번째 달인 샤아, 여섯번째 달인 피로네사에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발한다. 조용히 바람이 불어와 풀벌레들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아주 부드러 운 바람이었다. 퀴트린은 오후의 햇살에 따사로움을 느꼈다. 궁중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상쾌함이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케론샤의 정상 에 다다른 것이다. 언덕아래로 푸른색의 로냐프 강이 보이고 있었다. 군데군데 하얀 햇빛 을 받은 부분은 은색으로 반짝였다. 강 언저리에서 베렌테른으로 이어지 는 곡면은 마치 물새의 등선처럼 자연스러웠다--이제 가을인 것이다. 벌 써 아아젠과 같이 길을 떠나온지 석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앉았다 갈까. " 퀴트린은 잠시 로냐프 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아젠은 말없이 발 밑에 짐을 내려 놓고는 옆에 퀴트린이 앉는것을 확인한 후, 자신도 자리 에 앉았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아래를 굽어보던 퀴트린이 문득 말을 꺼냈다. "이게 로냐프 강... 듣던대로 아름다운 모습이군. " "...... " "음유시인들이 노래 주제로 많이 쓰는 강이었지 ? ... 많이 알고 있나 ? " 퀴트린의 물음은 로냐프 강에 대한 노래를 많이 알고 있냐는 뜻이었 다. 아아젠도 태어나면서 부터 음유시인이었고, 당연히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다. "네. 조금... " "하지만, 로냐프 강이 주제로 많이 쓰이는건, 그 아름다움이라는 이유 뿐만은 아니겠지. " "... ? " 퀴트린은 오랜 여행에 피곤해진 한쪽 다리를 뻗어 자세를 바꾸었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군. 아펠르력 544년이야. 1차 천신전 쟁으로 막강해진 이나바뉴는 이나바뉴의 영토에 붙어 있으면서 독립되어 있는 루우젤을 병합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지... 항상 그렇지. 많이 가진 자는 더욱더 많이 가지고 싶어한다는 말이야. " 아아젠은 로냐프 강 이라고 하면, 대국 이나바뉴의 기사들과 싸우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루우젤의 많은 아버지와 아들들의 생각이 먼저 났다. 당연했다. 역사를 역사의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그 안에 감추어진 감상적인 모습들을 노래해야 하는 사람들이 음유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빠른 시간내에 루우젤을 병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이나 바뉴는, 글쎄... 그들은 루우젤의 주민성을 너무 우습게 보았지. 그래서 1 개월 남짓으로 예정되었던 기사단의 원정이 반년을 끌게 되고... 많이 가 진자의 욕망을 위해서 루우젤의 많은 젊은이들을 생명을 바쳐야 했고 말 이야. " "비극이에요... " 아아젠이 짧게 말했다. 퀴트린은 너무 길게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말을 끊었다. "어쨌든, 오늘은 오랫만에 침대에서 잘 수 있겠군. 마을로 내려가지. " 퀴트린이 먼저 일어섰고, 아아젠은 아무 말 없이 퀴트린의 뒤를 따랐 다. 로냐프강은 베렌테른 평원을 거치며 둘로 갈라진다. 그 하나는 동쪽 끝의 바레한 협곡으로 들어가 골짜기를 이루고, 하나는 베렌테른 평원의 남쪽으로 흐르다 작고 많은 세류로 흩어져 사라진다. 로냐프강이 둘로 갈라지는 어귀에 도시가 하나 있는데, 그 마을 이름은 '벤도루우젤'이었 다. 그것은 루우젤 지방 토속언어로 '루우젤의 영광'이라는 뜻 이었다. 벤도루우젤에 사는 사람들은 루우젤이 이나바뉴 동방 원정대에 의해 멸 망당한후, 그들에 의해 깨끗이 불 타 없어진 루우젤 성에서 살아남은 사 람들이다. 퀴트린은 자신이 생각했던것 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은 벤도루우젤의 거리를 보며 조금은 놀랐다. 그는 아아젠과 함께 어떤 허름한 옷 상점을 찾고 있었다. 행자의 복장이긴 하지만 음유시인과 같이 다니기 위해서는 그와 비슷한 옷을 사 입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옷 상점을 하나 발견한 퀴트린은 발을 멈추었다. "저기 하나가 있군. 가서 사 오도록 해. " 퀴트린은 아아젠에게 몇십 더프의 동전{{ ) 이나바뉴의 화폐는 모두 동전으로 되어 있었는데, 금화와 은화, 그리고 동화가 그것이었다. 가장 작은 화폐의 단위는 1 튜넨짜리 동화였고, 100 튜넨은 1 더프였다. }}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아아젠은 동전을 받아들고는 머뭇거렸다. "... 저어,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 혼자서는... " 퀴트린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아아젠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 " 아아젠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개의 상점에서는... 음유시인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 " 아. 그랬나.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따라오라는 듯이 걸어갔다. 그가 상점쪽으로 걸음을 몇걸음 옮긴 순간, 방금 그들이 들어온 성문쪽에서 기마수 1기가 빨간색 깃발을 들고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젠이 급히 몸을 비키자 그 기마수는 그대로 질주하여 반대 편으로 사라졌다. 그쪽은 이 도시의 주둔 기사단 본부가 있는 쪽이었다. '빨간색 깃발 ? 저것은 급보를 알리는 기마수가 아닌가. 무슨... 일일까 ? 내가 퓨론사즈를 떠나고 나서 이나바뉴에 어떤 일이... ? " 퀴트린은 잠시 기마수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다가 휙 돌아서서 상점으 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아젠은 퀴트린 곁에 서 있다가 말 없이 그를 따 랐다. 아아젠은 퀴트린이 문을 열자 상점 안이 무척 포근하다고 느꼈다. 작 고 아늑한 상점이었다. 문은 갈색 파라다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상 점 안 역시 파라다얀 나무로 되어 있었다. 파라다얀은 주위에 습기가 있 으면 습기를 흡수하고, 부족하면 다시 내 뱉는 나무였다. 앞 쪽 벽에는 가격이 표시된 옷가지들--갑옷은 옷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이 걸려 있 었고, 뒤쪽에는 차곡차곡 정리가 된 옷들이 벽장 칸칸이 쌓여있었다. 퀴트린과 아아젠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풍채가 좋은 상점주인은 뒤를 돌아서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가 활기찬 소리로 외쳤다. "어서 오십시오 !" 하지만 다음순간, 그의 얼굴은 초라한 그들의 행색에 찌푸려졌고, 눈이 잠시 아아젠의 손에 들려있던 파야스에 머물자 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뭐야 ? 우리가게에서는 방랑시인 나부랭이에게는 아무것도 팔지 않아. " 역시... 퀴트린은 아아젠이 방금 한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고는 자신 이 입고 있던 장포를 들춰보였다. 장포 안쪽에는 옐리어스 나이트의 화 려한 하얀색 전투복이 있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104, 나이트 레이피엘이요. " 퀴트린의 말이 떨어지자 주인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주위를 급하게 둘러보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이구. 안녕하십니까, 기사님. 몰라 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 차 림으로 다니시다니요... 더구나 일행도 없이... " "상관하지 마시오. 그보다 허름한 도포 한 벌을 주시겠소 ? 크기는 내 가 입을것으로 하시오. 새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저 뒤의 아이가 입 은것과 비슷한 것으로 말이오. " 퀴트린은 손이나 어깨짓으로 아아젠을 가리키지도 않고 조용히 말했 다. 그의 말을 들은 주인은 허둥거리며 말했다--그의 일생을 모두 이 상 점에 바친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작위를 받은 정식 기사가 찾아오는 일은 많아야 한두번일 것이다. "허름한 도포요 ? 아, 있기는 하지만... 그런것을 기사님께서 왜... ?" 거기까지 말하던 주인은 퀴트린의 눈빛을 보고 찔끔했다. 퀴트린이 조 금 미간을 찌푸리자 그의 눈에서 광채가 번쩍했기 때문이다. 그의 위압 적인 모습에 주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허둥거리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 알겠습니다요 !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 " 퀴트린은 한심하다는 뜻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퀴트린과 아 아젠이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주인이 안에서 낡은 황색 도포 몇개를 안 고 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 이정도면 될까요 ? 어느것이 기사님께 맞을 지 모르겠는데요... " 그는 퀴트린의 키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퀴트린의 키는--원래, 기사들 이라는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컸다--주인의 키에 팔뚝 하 나정도를 더 올려놓아야 할 정도였다. 잠시 옷을 고르던 주인은 그중 하나를 쑥 뽑아 손으로 들어보였다. "이 옷이 가장 큰 옷 같군요. 한번 입어보시겠습니까 ? " 퀴트린은 옷을 받아들었다. 어느 구석에서 썩다 나왔는지, 옷에서는 퀴 퀴한 냄새가 났지만, 퀴트린은 내색하지 않았다. "... 이정도면 될것 같군. 좋소.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 " 주인은 잠시 머뭇하다가 말했다. "반 더프 정도는 받아야겠습니다. " 아마도 주인은 머뭇거린 순간, 기사이니까 돈을 올려서 받으려는 생각 을 한것 같았다. 말도 안되는 액수였다. 이런 버리기 직전의 허름한 도포 가 반 더프라니... 그런 생각을 한 아아젠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는지 퀴트린이 은화를 꺼내 들었다. "10 더프를 드리겠소. " 주인의 얼굴이 다시 놀라움으로 커졌다. "단, " "...... ? " "내가 이 도포를 사는 이유는 내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요. 따라 서, 이 마을에 기사가 들어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요. "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느 분의 말씀이신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인의 손에 10 더프짜리 은화를 건네주었 다. 그는 그 냄새나는 낡은 도포를 자신의 장포 위로 입고는 돌아섰다. "고맙소. " 짧게 인사한 퀴트린은 아아젠과 함께 상점을 나왔다. 벤도루우젤에서의 하루는 빨리 지나갔다. 그날은 너무 늦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여관에서 잠을 청한 후, 퀴트린과 아아젠은 그 다음날은 로 냐프강가를 거닐며 로냐프강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로냐프강가 를 거닐며, 퀴트린은 내내 무표정이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아아젠 역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끔씩 힐끗거리며 퀴트린의 얼굴을 훔쳐 보았을 뿐이다. 그의 얼굴은 예상 외로 어두운 편이었다. 그 가 그날 입 밖에 내어놓은 말은 단 한마디였다. "빨간색 깃발이라... " 저녁이 되자, 퀴트린과 아아젠은 다시 여관으로 들어왔다. 여행자의 차 림이었기 때문에 역시 그날도 방을 얻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렵 게 방을 구해 들어갈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간 후, 아아젠은--언제나 처럼 --방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았다. 당연히 침대는 퀴트린의 차지였기 때 문이다. 그런데, 퀴트린은 위에 입은 장포만을 걷어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짐 속에서 하야덴을 꺼내는 것이었다. 아아젠은 조금 의아 스러웠지만 역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퀴트린은 천천히 하야덴을 꺼내더니 어깨에 하야덴을 비스듬히 기댄 채 방 다른 모서리에 주저 앉 았다.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아슈벨의 늪에서와 비슷한 모 습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잠시 앉아 있다가 퀴트린이 낮은 목소리로 입 을 열었다. "침대를 쓰도록 해. " 아아젠은 깜짝 놀랐다. 무엇인가 사양의 말을 하려는 순간, 퀴트린이 다시 말을 이었다. "놀랄것 없어. 오늘 밤, 뭔가 일이 일어날것 같아. 피 냄새가 나. " 말을 마치며 퀴트린은 하야덴을 쓰다듬었다. 기사의 육감이라는 것일 까. 아아젠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짧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자리 에서 일어섰다. "예. " 퀴트린의 말은, 아아젠에게는 여전히 명령이었다. 거역할 이유가 없었 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등을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나무로 만들어진 침 대이긴 했지만, 아아젠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다. 태어나서 처음 앉아보는 침대였기 때문이다. 너무 편한 느낌이 죄스러워 서였는지, 아아젠은 등을 기댄 채 두 손으로 다리를 감싸 안았다. 다리를 쭉 뻗는다는 것은 퀴트린 앞에서 대단한 결례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너무 편한 잠자리 였기 때문에 아아젠은 금새 앉은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이 들었던걸까. 아아젠이 눈을 퍼뜩 뜬 순간,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것은 창가 에 서서 벤도루우젤의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퀴트린이었다. 그의 눈은 먼 거리를 주시하고 있었고, 꼭 다문 입은 굳어진 어깨처럼 전투 직전의 기사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랬다. 퀴트린의 말 대로 무슨 일인가가 일 어난 것이다. 그녀를 깨운것은 퀴트린의 그런 모습이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오는 함성과 병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음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젠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퀴트린은 조용한 손짓으로 그 녀를 저지했다. 퀴트린은 아주 짧게, 그러나 정확히 바깥의 상황을 설명 해 주었다. "카아르. 이나바뉴의 영광에 거역을 하는 녀석들이야. " 아아젠도 아주 어렴풋이나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던것 같았다. 그들이 어떠한 집단인지, 어떤 목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아아젠의 얕은 지식과 사고방식 사이에서는 '좋지 못 한' 집단이라고만 짐작을 하고 있었다. 아펠르력 643년, 루지아 10세의 명에 따라 파견된 한명의 옐리어스 나 이트와─그 전투가 바로 퀴트린에게 '형전위'의 작위를 안겨준 전투였다 ─이나바뉴 기사단에 의해 중심지역인 햐드가 토벌된 카아르는, 햐드가 중앙 기사단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한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완전히 토벌되지 못한 그들의 잔당들은 산발적으로 이나바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거나, 혹은 도적의 무리가 되어 갔다. 카아르는 바로 '비참해진 이나바뉴 평민들의 생활'의 상징이었으나, 처음 카아르가 조직될 당시의 패기는 온데간데 없어진 상태에서, 같은 평민들을 습격이나 하며 근근히 이름을 이어가는 현재로서는 본래의 지지기반의 전부였던 평민들로도부 터도 외면받고 있었다.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나바뉴 기사단 루우젤 파견대와 카아르들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퀴트린의 눈썹 사이가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 전 투에서는 이나바뉴 기사단--이나바뉴 기사단이라고는 하지만, 루우젤에 파견되어 있는 기사는 모두 아홉명뿐 이었다. 그리고도 그 중에서 여섯 명은 로냐프강 상류의 전투용 성채에 있었으니, 아마도 카아르가 이곳을 습격했을당시 거리로 뛰어나와 하야덴을 휘두를 수 있는 기사는 두명이 나 세명정도였으리라--이 이기고 있는 듯 했으나, 100여명 정도의 카아 르는 도망을 치는 듯 하면서도 거리에 있는 집들이나 상점의 문을 부수 고, 값비싼 물건이나 여자들을 약탈해 가고 있었다. 아주 전형적인 악당 의 모습이었으나, 그들이 행하는 행동에 비해, 이나바뉴 기사단은 무력하 게 보였다. 거리의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퀴트린은 바닥에 의지하고 있던 하야덴 을 들어 허리께로 가져갔다. 이미 이 여관도 큰 소동이 일고 있었다. 퀴 트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아젠에게 말했다. "나오지 말고 여기에 있도록 해. 곧 돌아 올테니. " 아아젠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퀴트린은 전투복차림으로 거리로 나섰다. 카아르는 적인가 ? 퀴트린이 하야덴을 들어 첫번째 카아르를 베면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몇달 전, 카아르 토벌을 위해 햐드--당시 햐드는 카아르 활동의 중심지였다--로 진격해 나갈때 즈음에는 카아르는 확실히 퀴트린과 이나바뉴 기사단의 적 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당당했던 그들이 토벌된 후, 여행을 하면서 퀴트린이 생각한 그들에게는 연민의 일면도 있었다. 비록 가난이나, 땅에 떨어져버린 평민의 지위에 대한 고 통이나 분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어떤 형태의 조금은 무모한 이념을 가지고 있던 그들의 아우성이 여행중인 퀴트린에게 조금은 느껴졌기 때 문이다. 아아젠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지금 퀴트린이 베어나가고 있는 카아르는 그 전에 퀴트린이 만났던, 다듬어지지도 않은 단창을 들고, 조 금도 훈련되지 않은 검술을 가지고, 오직 신념 하나로 기사의 하야덴을 향해 뛰어들던 그들이 아니었다. 퀴트린은 생각했다. '카아르가 적이든 아니든... 이들이 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순간 퀴트린의 하야덴은 세번째 카아르의 몸을 두조각으로 갈라 내었 다. 카아르쪽은 갑작스런 강적의 출현에 적쟎이 당황하는 모양이었다. 다 시 네번째 카아르의 목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퀴트린의 하야덴이 한광을 뿌릴때 마다 카아르의 전력은 한명씩 줄어 갔다. 그런 퀴트린을 피해, 이제 적극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한 카아르는 물론, 이나바뉴 기사단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까. 넉넉히 잡아 이십명이 넘는 카아르 전사의 생명을 밤 하늘로 날려버 린 퀴트린과 이나바뉴 기사단은, 벤도루우젤의 정문에서부터 수십 젠터 {{) 이나바뉴에서 사용하는 거리의 단위.}}까지 그들을 쫓은 후, 더이상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들이 물러간 후에는 추격보다는 수습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카아르가 완전히 후퇴한것을 확인하고, Yehmn Precsel Harrd(화염계 소독마법)로 하야덴을 깨끗하게 소독한 퀴트린에게 짙은 갈색 갑옷의 기 사가 뛰다시피해서 다가왔다. 그는 오른팔을 들어 기사의 예를 취한 다 음 입을 열었다. 이나바뉴 기사단 루우젤 파견대의 기사중 하나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퀴트린도 오른팔을 들어 예에 답례했다. "이나바뉴 바스크 240, 나이트 에란드입니다.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 사합니다. " 퀴트린도 조용히 대답했다. "이나바뉴 바스크 104 나이트 레이피엘입니다. 별 말씀을... " 에란드는 30세가 갓 넘은듯한 나이의 인상 좋은 얼굴의 젊은 기사였 다. 나이트 레이피엘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그는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했다. 그가 큰 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순간, 퀴트린이 눈짓으로 그를 저지했다. 그러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한번 예를 취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옐리어스 나이트님이 여기에 오실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어쩐 일이십 니까 ? 그 전투복도 옐리어스 나이트의 것은 아닌것 같은데... 수행중이 십니까 ? " 퀴트린은 하야덴을 검집 속에 집어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수행이라면 수행이랄수도 있겠죠. 돌아다니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 었습니다... 가끔 이렇게 카아르들이 습격을 해 옵니까 ? " 에란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입니다. 벤도루우젤을 습격할 줄이야... 아시다시피 파견대의 대부 분은 외곽 성채에 있지 않습니까.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 이야기를 하면서 에란드는 손짓을 하여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기사단 을 벤도루우젤 시내로 후퇴시켰다. 천천히 걸어서 벤도루우젤로 복귀하 며 퀴트린이 물었다. "피해는 얼마나 되는것 같습니까 ? " 그의 눈에는 에란드가 지휘하는 견습기사들과 기사단에 소속된 병사들 이 거의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피해상황을 조사하는 모습이 비쳤다. 제법 큰 불이 붙은 집도 있었고, 거리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던 서민들도 있었다. 격퇴에는 성공했지만, 피해는 적지 않은것 같았다. 에란드는 어 두운 표정이 되었다. 잠시후, 퀴트린과 에란드가 일이 수습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에 전투복 차림의 견습기사 한명이 에란드에게 다가와 예를 취했다. 제 법 세련된 모습인것이, 견습기사 생활을 꽤 견실히 해온듯 했다. "불에 탄 집이 세채있고,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 에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획된 적은 ? " "세명을 생포했지만, 의식이 있는 놈은 아무도 없습니다. " 퀴트린은 약간 의아스러웠다. 분명히 평민 여자들을 약탈하는것 같았 는데, 인명피해는 없다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그 견습기사가 끝에 말을 덧붙였다. "평민들중 다섯명정도가 죽거나 다치고, 열 다섯명 정도 여자들이 끌 려간것 같습니다. " 에란드는 음. 하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퀴트린은 생각 했다. 평민들이 '인명피해'의 보고에 들어갈 수 없다는것이 생각난 것이 다. 묘한 기분이 되어 에란드를 바라보던 퀴트린은 고개를 돌려 거리를 바라보다가 흠칫하고 놀랐다. 자신이 오늘 묵은 여관이 불타오르고 있었 던 것이다. 퀴트린은 급히 에란드에게 말했다. "잠깐 가볼곳이 생겼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 퀴트린이 급하게 오른손을 올려 예를 취하자 에란드 역시 약간 놀란 표정으로 답례했다. "아, 성으로 가셔서 차라도 한잔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오늘의 답 례도 할 겸... " "아닙니다. 조금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일단은 실례하겠습니다.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 퀴트린은 에란드와 인사를 나눈 후, 뛰어서 여관 앞에 도착했다. 퀴트 린은 장포를 벗어 던지고 전투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기사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여관 앞으로 다가가자, 평민들은 그 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옆으로 비켜섰고, 경외심과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퀴트린은 여관앞에 도착하자 마자 주위를 돌아보 았다. 아아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어디있나 ? " 말이 끝나고 퀴트린이 주위를 돌아보자, 사람들 사이에서 초라한 행색 의 나이든 사람--그는 얼마 전 퀴트린과 아아젠이 묵을 자리를 찾을때 처음엔 거만하게 거부했던 그 주인이었다--이 앞으로 나와 퀴트린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2층에 묵었던 음유시인은 어디있나 ? "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퀴트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으나 주인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님. 보지 못했습니다. " 카아르에게 납치된건가. 퀴트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를 구해 내야 하나. 카아르의 은신처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퀴트린은 순간적으로 판 단해, 그것처럼 우스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 은신처의 위치를 안다 하더라도 음유시인따위, 아니 평민들의 목숨을 위해 카아르의 은신 처를 토벌한다는 것은 전혀 명목이 서지 않았다. '혼자... 가는게 좋을듯 하군. ' 퀴트린은 성큼성큼 불기둥이 치 솟은 여관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를 훔쳐보고 있던 평민들 사이에서는 감탄인지 공포인지 모를 탄성이 터져 나왔다. 퀴트린은 그런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에란드에게 부탁해 기사 단을 빌리는 것은 자신을 우습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퀴트린은 단신 으로 카아르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Trendard(Awaken)의 스펠을 사 용하면 의식 불명의 카아르에게서 은신처를 알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혼자 뛰어든다는 것은 역시 조금은 무모한 짓 이었고, 그래서 애프러더 (우리 세계의 활과 비슷하다. 보통 활을 애필이라고 하고, 기사들이 사용 하는 강궁을 애프러더라 칭한다)와 같은 장거리 무기가 필요한 것이다. 퀴트린의 애프러더는 아마도 자신이 묵었던 방 구석에 세워진 채로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애프러더는 갸드 혹은 다루네스등의 탄력이 있으면서 질긴 나무줄기에 역시 탄력이 있는 끈을 붙여 만드는 무기였다.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애 필등은 그렇지 않지만, 전투용으로 사용되는 기사들의 고급 애프러더는 '절벽위의 새'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카르드의 실--아카르드는 입에서 길게 뽑아내는 천연의 실로 절벽위에 둥지를 짓는다--을 이용해 만든다. 아카르드의 실이 사용된 애프러더는 구하기 매우 어렵고, 또한 최고급이 었으나, 불에 닿으면 탄력을 잃는 단점이 있었다. 퀴트린의 애프러더는 불의 영성에 어느정도 버티도록 스펠이 더해진 애프러더였으나, 이런 불 기둥 속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미지수였다. "Herrole Barnt.(기공계 방어마법) " 퀴트린이 스펠을 중얼거리며 손으로 작게 원을 그리자 엷고 투명한 푸 른 빛이 퀴트린의 주위를 감쌌다. 기공계 마법으로 퀴트린 자신의 몸 주 위에 대기를 엷게 하는 마법이었다. 대기가 엷어지면 화염에 휩싸이더라 도 화염이 태울 공기가 없기때문에 타격이 훨씬 줄어들었다. 적의 불화 살등의 공격속에서 돌진할때 기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대개의 기 사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서 마법사들등에게 이 마법(혹은 그 이상 의)을 부탁하지만, 퀴트린과 같은 높은 수준의 기사들은 낮은 정도의 마 법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었다. 퀴트린은 하야덴을 꺼내어 주위의 장애물들을 부수며 계단으로 나아갔 다. 여관안은 예상했던것 처럼 불바다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바닥에서 올라온 불기운이 곧 방을 덮치려하고는 있었으나, 운 좋게 퀴트린은 건 물이 전소되려하기 전에 도착한 것이다. '이정도라면 애프러더에는 문제가 없겠군. ' 퀴트린은 자신이 묵었던 방을 확인하고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쿵 하는 파열음과 함께 한쪽 경칩이 부서져 나가며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 로 들어선 퀴트린은 즉시 자신이 애프러더를 놓았던 구석을 바라보았다. "...... " 물론 애프러더는 있었다. 그것도 온전히... 그러나 퀴트린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애프러더 뿐이 아니었다. 두려운 표정의 아아젠이 퀴트린을 바 라보다가 그녀의 눈이 그와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퀴트린은 잠시 멈 칫 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나와. 하마터면 화염에 휩싸일 뻔 했군. " "예. " 아아젠은 불꽃이 애프러더에 닿지 않도록 꼭 안은 채 앉아 있다가 조 심스럽게 일어섰다. 지저분하지만 길고 탐스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이 군 데군데 그을려 있었다. 퀴트린은 천천히 기공계 방어 마법을 한번 더 걸 었다. "Herrole Barnt. " 시법을 끝낸 후, 퀴트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서서는 앞장서 서 불타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들어올때 보다는 불길이 번져 약간 위 험하다고 생각했는지, 퀴트린은 하야덴으로 주위에 있는 의자며 탁자따 위의 장애물들을 닥치는대로 베어 치웠다. 그의 애프러더는 여전히 아아 젠의 품 안에 있었다. 두려움이 없을 정도로 무지한 것일까. 문득 퀴트린은 자신이 방을 나 서며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나오지 말고 여기에 있도록 해. 곧 돌아 올테니. ' 그것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고개를 흔들며 퀴트린은 다시 생각했다. '어쨌든, 생포된 카아르에게 Trendard의 스펠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졌 군. ' 화염은 곧 여관을 덮었다. 밖에서는 평민들이 그 옆 집으로... 그리고 또 그 옆 집으로 번져가는 불길을 잡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퀴트린이 자리에 앉자, 에란드는 옆에 앉아 있던 갈색 구레나룻의 기 사를 소개했다. "이나바뉴 바스크 161, 나이트 아스테입니다. 루우젤 파견대 소속입니 다. " 그가 예를 취하자 퀴트린도 답례했다. "바스크 104 나이트 레이피엘입니다. 옐리어스 나이트입니다. " 아스테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은 그저 전투복이어도 화려하군요. 카아르의 습격이 끝난 밤, 퀴트린은 찾아온 에란드에게서 초대를 받았 다. 그는 퀴트린의 도움에 감사하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했고, 퀴트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행중인중데도 불구하고 선뜻 그의 초대에 응했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식복은 입을 수 없었으니--예식복은 쇼온브루도{{ ) 귀족 제 3계급. 셰렌다이크, 뮤젠 다음으로 높은 계급이다. }} 정도 의 귀족이나 혹은 왕족의 초대, 승전 파티정도의 중요한 의식이나, 왕 앞에 설때만 입는 옷 이었다--가지고 있는 옷 이라곤 허름한 장포외에 이 전투복 뿐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사들이 입는 짙은 감청색이나 갈색, 검은색의 두텁고 질긴 옷이 아니라,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은 역시 하얀색의 부드러운 천에 금색과 은색으로 치장한, 다른 기사들이 입을 수 있는 예식복수준의 아름다운 옷 이었다. 국왕 친위대로,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옐리어스 나이트는 실제 전투에 참가할 기회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2차 천신전쟁 전에는 옐리어스 나이트가 전투에 참전하면 이나바뉴의 기사는 바닥이 난 것이라고까지 생각될 정도였다--이러한, 전투원으로서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옷이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 퀴트린이 혼자서 수행을 다니고 있는지, 아무리 수행이라도 해도 하인이나 무기관도 없이 다닐정도로 중요한 수행인지등, 퀴트린이 당연히 예상했던 질문을 했고, 퀴트린은 적당한 말로 얼버무렸다. 퀴트린 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커다란 목표를 가지고 이 여행을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기도 했다. 루우젤 지방의 지방색, 로나프 강이 가로막고 있는 루 우젤 지방을 결국 이나바뉴에 속하게 한 루우젤 병합전쟁... 이러한 이야 기를 하다가, 기사 셋이 모였으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멀리 떨어진 궁정 으로 가게 되었다. 문득 에란드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레이피엘님께서는 혹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못들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퀴트린은 짐짓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랬구나... 벤도루우젤에 온 첫날, 붉은색 깃발을 꽂고 기마수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지금까지 무슨일일까 하고 걱정을 하던 퀴트린이었다. 사실, 에란드의 초대에 응한 것 이유의 대부분은 거기에 있었다. 에란드는 퀴트린의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전쟁이 시작된것은 아닙니다만, " 그는 퀴트린과 아스테보다 먼저 식사를 끝내고 고급 과일주를 맛보고 있었다. "하라데스 지방으로 크실의 대군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 그는 잠시 쉬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쟁이 멀지 않은것 같습니다. " 퀴트린이 물었다. "그 정보는 어디에서 나온겁니까 ? " 에란드는 반쯤 찬 술잔을 만지작 거리며 대답했다. "며칠전에 전령이 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극비리에 온 정보라 아마 평민들은 모르고 있을겁니다. 국경지방에 도는 소문은 헛소문이라고 공 문을 써 붙였으니... " 역시 그 기마수가 전령이었군. 퀴트린의 기사적 예감이 한번 더 적중 한것이었다. "뭐, " 에란드가 전운의 분위기를 털어내려는 듯이 갑자기 자세를 고 쳐 앉으며 말했다. "퀴트린님은 여행을 계속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크실의 전군이 다 모인다고 해도 이나바뉴 원정대 하나면 전멸당할테니 까요. 그런 오합지졸들을 상대로 옐리어스 나이트가 참전할 기회가 있겠 습니까 ? " 그의 호언에 구레나룻의 아스테도 껄껄대며 따라 웃었다. 기사들은 전 투계급이었기 때문에 항상 이런 호언을 하곤 했다. 그런 말들이 아군의 사기를 떨어지지 않게 하기도 하고, 투지를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웃 음이 멈추자 에란드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저도 중앙기사단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 열명도 채 되지않는 루우젤 파견대의 기사를 호출한다는 말인가. 퀴트 린은 크실의 집결이 생각보다 대규모일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란드의 말을 이어 아스테가 입을 열었다. "나이트 에란드도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긴 모양이군. 이 기회에 형전위 작위나 받아 오시게. " "제 주제에 형전위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 에란드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퀴트린은 형전위의 샤인더를 받기도 전 에 퓨론사즈를 떠나왔기 때문에 전투복은 빈 그대로였다. 작위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퀴트린의 눈 앞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아니... 이미 제겐 옐리어스 나이트의 샤인더가 있습니다. '형전위'로서 의 샤인더는 어깨에 받게 되겠죠..." "이제 형전위가 되면... 그렇게 되면... " "......? " "왕녀의 카발리에로가 될 수 있는거죠 ? " 그랬다. 그녀, 피엔젤 공주가 그렇게 말했었다. 누가 그렇게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기사도에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 니었지만, 정식 작위를 받은 기사만이 왕녀의 카발리에로가 되는것이 이 나바뉴의 오랜 전통이었다. 지난번 카아르 토벌출정에 출전한 퀴트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 상으로 '형전위'의 작위를 받았었고, 왕녀의 카발리에로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었다. 견습기사로 인 정받는 것도 힘들고, 그 견습기사에서 기사가 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나이트 레이피엘'등의 기사명을 하사받은 정식 기사{{) 기사명'을 하사받는것은 자신이 지휘할 기사대를 갖는다는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기사명'과 함께 받는것이 '바스크'였다. 바스크를 받는다는 것은 '이나바뉴의 기사' 서열에 든다는 것으로 매우 명예로운 일 이었다. 바스크를 받은 기사는 이나바뉴 전체에도 수백명에 불과했다.}}가 되는것은그것 보다도 더욱 힘든 일 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작위를 갖춘 기사가 되는것은 더욱 더 힘든 일 이었다. 가장 높은 샤인더인 신전위의 샤인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나바뉴 바스크 1, 기사대장 아켈로르 뿐 이었고, 가장 낮은 작위인 형전위의 작위를 가진 기사라야 퀴트린을 포함해도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퀴트린의 회상은 아스테가 잔을 들어 퀴트린에게 건배를 청해옴으로 해서 끝이 났다. 퀴트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당황한 듯 했지만, 곧 마주 잔을 들고 그의 잔에 부딪혔다. 잔끼리 부딪히는 소 리는 무척 맑고 투명했다. 에란드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정말 크실의 대군과 맞부딪히는 전투에 나간다니, 벌써부터 설레는군요. 어린애 처럼 말입니다. " "퀴트린님은 참전 경험이 있으십니까 ? " 아스테의 말에 퀴트린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 글쎄요.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퀴트린은 자신이 참전한 전투에 대해--햐드 지 방의 카아르 토벌전이 그가 참전한 주된 전투였다--이야기 하고 싶지 않 은 기분이었다. 그것보다, '크실'과의 전쟁에 그의 생각이 집중되어 있었 다. 가야한다. 퀴트린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 뿐 이었다. 그의 전 사적 육감이 이나바뉴의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제 2차 천신전쟁으로부 터 거의 100년. 그동안 이나바뉴는 부피적으로만 팽창했고, 경제적으로 만 부유해졌을 뿐, 기사단의 힘이나 군대의 숫자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 오히려 100년 동안의 평화를 유지해 오면서--또 그런 안정의 늪 속에 빠 져 있으며--군대의 기강은 해이해져 버렸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동안 크실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100년간... 작은 분쟁조차 없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크실이 오히려 퀴트린에게는 더욱 거대하게 느껴 졌다. 그날, 저녁에 성 안에 있는 파티에 참가해 달라는 에란드의 청을 정중 히 거절하고 돌아오면서, 퀴트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 '결국, 수행을 끝내지 못한 채로 돌아가야 할것 같군... 아켈로르님께서 내게 깨닫게 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4. 혼돈의 땅 하라데스쪽의 공격을 먼저 예상했던 이나바뉴는, 그 첫번째 전투인 쥬렌다스 방어전에서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다. 공격 자체가 예상 외였기도 했고, 숫적으로도 불리하기는 했지만, 오랜 기간동안 전쟁을 준비해온 크실의 기병대 앞에 이나바뉴 기사단은 너무나 무력했다. 이 전투는 아주 '일방적인 전투였다'라고 역사서에 기록된, 3차 천신전쟁의 첫번째 전투였고, 이 전쟁을 통해 이나바뉴 기사단의 치를 떨게 만들었던 '검은 갑옷의 기사'가 등장한 첫번째 전투이기도 했다. {{하얀 로냐프 강 ------------------------------------------------------------------ }}{{ }}{{ 4. 혼돈의 땅 ------------------------------------------------------------------ }} 4. 혼돈의 땅 이나바뉴 기사단의 쥬렌다스 파견대장인 이나바뉴 바스크 76, 나이트 카사드렛은 한 밤중에 문을 두드린 경비병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수초 간 경비병의 말을 입 안에서 반복해 본 후,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 했다. "기사들을 집합시켜라. 나이트 멜더는 내 방으로 오라고 해라. "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머리맡에 두었던 하야덴을 집어 들었다. 문득 하늘을 보니 새벽이 오려면 한참이 남은 아주 늦은 시각이었다. 갑옷을 챙기려다 말고, 그는 자신의 방 문 앞을 지키던 기사--물론 그는 기사명이 없는 기사였다--에게 물었다. "지금 성 안에 남아 있는 기사단은 얼마나 되지 ? "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아마 그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 던 모양이었다. "기사단 90명 남짓, 보병 1만8천기에 기병 5천기 정도입니다. " 카사드렛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백전을 겪은 노장이었다. 허를 찔렸 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크실의 집결지는 하라데스쪽 국경이라 들었다. 어찌된 일인 가... 그놈들이 무슨수로 체렌평원을 소리없이 건넜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하지만 그는 하라데스쪽, 이나바뉴 기사단 동방 원정대로 기사단을 파 견한것을 아쉬워 하지 않았다. 아니, 아쉬워 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적을 생각하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가 갑옷을 챙겨입고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전투복을 입을때 즈음, 열린 방문 앞으로 누군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헝클어진것이 아주 급히 나온듯한 모습이었다. "나이트 멜더, 파견대장님 앞에 대령했습니다. " 멜더라는 이름의 기사의 이나바뉴 바스크는 279. 스무살이 갓 넘은 매 우 젊은 기사였지만, 기사로서의 능력면에서는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기사였다. 아버지가 높은 신분의 기사나 귀족이었다면 벌써 중앙 기사단쪽으로--어쩌면 옐리어스 나이트로도--차출될 가능성이 있었던 기 사였으나, 어쨌든 현재에는 쥬렌다스에 파견이 되어 있었다. 나이트 카사 드렛이 가장 신용하고 아끼는 부장이었다. "보고를 들어 상황은 대충 알고 있겠지, 나이트 멜더. " "예. " 전투복을 갖춘 카사드렛은 하야덴으로 바닥을 쿵하고 울렸다. "긴 말을 할 시간이 없다. 선두를 이끌고 출진하라. 나도 곧 성 밖으로 나가겠다. " "알겠습니다. " 멜더는 급히 예를 취하고 뛰다시피해서 멀어져갔다. 카사드렛은 입술 을 깨물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라데스에서 이곳까지는 기병대만으로 달린다고 해도 하루 반은 걸리는 거리. 하라데스에 집결한 크실군이 움직였다면 이쪽으로 연락이 오지 않았을 수가 없는데... 무슨 수로 보병 7만기와 기 병 2만5천기를 끌고 움직임 없이 체렌평원을 건넜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 크실군의 목적은 뻔했다. 쥬렌다스는 하야덴과 페치, 방패의 재료로 쓰 이는 자햐이드라는 질긴 금속의 주생산지였다.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이 나바뉴의 손목을 잘라놓겠다는 속셈임을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쥬렌다스를 넘겨주게되고, 전쟁이 장기화 될 때에는 손실된 무기를 보충 할 수 없는 이나바뉴가 불리한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단순한 충동전이 아니라 장기화까지 감안한 공격이란 말인가... 마치, 전설처럼 들리던 천신전쟁을 다시한번 해 보자는듯 하군... 그럴리야 없 겠지만. ' "퓨론사즈로 전령을 띄워라 ! " 카사드렛은 급히 수도로 침략의 소식을 알리도록 명한 후, 자신이 직 접 중군을 지휘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병과 기병을 합쳐 2만3 천대 9만5천. 누가 보아도 퓨론사즈 파견대의 승리는 점쳐지기가 쉽지 않았다. 아펠르력 643년 가을. 암흑제국 크실이 먼저 이나바뉴의 쥬렌다스 지방을 침공하면서 제 3차 천신전쟁은 그 거대한 역사의 장을 열기 시작했다. 하라데스쪽의 공격을 먼저 예상했던 이나바뉴는, 그 첫번째 전투인 쥬렌다스 방어전에서 처참 한 패배를 기록한다. 공격 자체가 예상 외였기도 했고, 숫적으로도 불리 하기는 했지만, 오랜 기간동안 전쟁을 준비해온 크실의 기병대 앞에 이 나바뉴 기사단은 너무나 무력했다. 이 전투는 아주 '일방적인 전투였다' 라고 역사서에 기록된, 3차 천신전쟁의 첫번째 전투였고, 이 전쟁을 통해 이나바뉴 기사단의 치를 떨게 만들었던 '검은 갑옷의 기사'가 등장한 첫 번째 전투이기도 했다. 보고를 받은 이나바뉴 기사단 동방 원정대장인 이나바뉴 바스크 9 나 이트 바하론의 눈은 분노로 가득차 버렸다.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 카사드렛이... 죽었다고... "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기사 역시 온몸의 상처에서 피가 눈물처럼 흘 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수십개의 상처가 있었고, 갑옷은 몇몇 방 어구만 남았을뿐, 거의 다 부서져 몸에 걸쳐져만 있을 뿐 갑옷으로의 역 할은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도 최대한 분노를 삭히 고 눈물을 참고 있음이 바로 옆에서도 느껴졌다. "카사드렛을... 이놈들... " 카사드렛은 바하론의 오랜 친구였다. 어린시절부터 같이 자란 친구를 잃은 그의 분노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바하론은 친구의 죽음때문 에 경솔히 기사단을 움직일 정도로 작은 그릇을 가진 인재는 아니었다. "... 다시한번 말해 보거라, 나이트 멜더. 정말 단 한칼에 카사드렛의 목이 떨어졌단 말이냐 ? " 대답 대신 멜더는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통곡했다. 쥬렌다스로 파견을 온 후, 마치 아들처럼 자신을 아끼던 나이트 카사드렛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혼전속에서 마치 아무런 저항없이 들판을 달리듯 이 나바뉴 기사단 사이를 헤쳐온 그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는 이어서 아무 렇지도 않게 단 한번의 손짓으로 카사드렛의 머리를 베어버렸다--그것은 정말 놀라운 일 이었다--그 순간 카사드렛의 죽음을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그 죽음은 너무나 허무했다. "나이트 그렛쉔 ! " 바하론의 밑에 두줄로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중 하나가 일어섰다. "적의 움직임에 대해 다시 보고하라. " 바하론의 말에 그렛쉔은 무릎을 다시 꿇었다. "옛. 하라데스 건너편에 집결한 크실군은 어제부터 여전히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들중 일부가 떨어져 나와 쥬렌다스를 공격했다고는 생각하 기 어렵습니다. " "그렇다면 뭐란 말이냐... 쥬렌다스를 습격한 군대는... " 바하론은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하라데스에 집결한 15만의 군대와는 관계없는 군 대... 크실의 군대의 규모가 그렇게 크다는 말인가 ? 설마. ' 이나바뉴 기사단 동방원정대는 원래 6만정도의 인원을 확보해 놓고 있 었다. 지금 현재에는 이곳 하라데스에 14만정도의 군대가 집결 해 있는 데, 그것은 하라데스 건너편에 집결하기 시작한 크실의 대군 때문에 근 처의 파견대에서 모아 놓은 인원이었다. 만약 평원 건너편에 군집해 있 는 크실의 15만군과 쥬렌다스를 습격한 9만군이 관계가 없는 군대라면, 이나바뉴 동방원정대는 중앙기사단에 파병을 요청하여야만 했다. 바하론 은 친구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냉철히 앞으로의 일을 갸늠해 보았다. 쥬 렌다스가 습격된것으로 보아 하라데스쪽에서의 전투 역시 곧 닥칠 일이 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나이트 멜더. " "옛. " 나이트 멜더는 울음을 억지로 누르며,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 린 채 대답했다. "퓨론사즈로 떠나라. 급히. 호위기사 열명을 붙여주겠다. 최대한 빨리 퓨론사즈로 돌아가 원군을 청해라. " 당장 평원을 건너 크실의 대군이 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이때, 나이트 멜더같은 실력있는 기사를 굳이 수도로 돌려보낼 필요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당연히 예상된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역시 당연했다. 그는, 너 무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나이트 멜더, 자네가 없어도 동방원정대는 강하다. 동방원정대가 이곳 에서 버티고 있는동안 증원군을 이끌고 와 주기 바란다. 빠른 시일내에... " 멜더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채 오른손을 가슴까지 올려 예를 취했 다. "... 알겠습니다. " 그는 약간 머뭇거렸으나 곧 굳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물러나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바하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돌아가라. 그렛쉔은 남아서 나와함께 크실의 동태에 대해 이야 기를 해보자. " "옛. " 키가 호리호리하게 큰, 각진 얼굴의 참모 나이트 그렛쉔이 일어서서 바하론에게 다가가는것을 보며, 안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흩어져 각자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모두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나이트 멜더의 말을 되씹어 보고 있었다. 퓨론사즈 파견대장인 나이트 카사드렛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나 이트 멜더의 표현대로라면--빼앗아간 적장. 모두들 반은 두려움으로, 반 은 호승심으로 그의 출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트 카사 드렛이 이나바뉴의 빛의 수호에서 영원히 떠나간, 이틀째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라카이드{{) 귀족 제 4계급을 나타내는 작위명. 라카이드 헬로판이라고 하면, 귀족 4계급인 헬로판가의 주인을 뜻한다. }} 헬로판에게는 한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이 있었다. 장남인 쇼안은 이나바뉴 바스크 290의 기사로, 현재 이나바뉴중앙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고, 첫째 딸인 덴사는 쇼온부르도 베일러 집안에 시집을 갔다. 둘째는 뮤젠{{) 귀족 제 2계급. }}집안 출신인 기사와 곧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셋째였다. 이나바뉴의 귀족들은 대개의 경우 자신들의 지위때문에 비슷하거나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 계급 사이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들끼리 이미 오래전에 혼약을 해 놓고 둘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는 것이다--퀴트린과 피엔젤공주 역시 그런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셋째 딸인 레젠은 열 여섯살--이미 기혼자를 정하고도 남았을 나이였다--이었는데도, 혼약은 커녕 여자다운 면에도 조차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았다. 걸핏하면 아버지 눈을 피해 방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갑자기 남장을 하고는 소년같은 모습으로 하루 종일 성 안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깔 깔대며 웃는것은 예사였고, 남자 친구들--물론, 아주 어릴적 궁중에서 같 이 놀았던 그런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은 물론 오래전 부터 그녀를 여 자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이라도 만나게 되면 아직도 열살 먹은 어 린 애 마냥 뛰어 다니며 하는 게임등을 제안해 친구들을 당혹하게 했다. 아니다. 그런 게임만이라면 또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기사가 아 닌 그저 귀족이었기 때문에 검술은 전혀 알지 못했는데, 그녀는 그들을 졸라 목검으로 검술을 겨뤄보자는 이야기도 했다. 그녀의 행동은 성 안 에서 매우 유명했음은 물론이지만, 기사인 장남 쇼안의 말로는 '견습기사 정도의 수준'이라고 이야기 될정도로 대단했다. 막내딸이라, 아버지인 헬 로판도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하고 있기는 했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조 금씩 그녀를 통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벨 !" 이나바뉴 바스크 149, 나이트 라벨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막 옐리어스 기사단장 나이트 슈펜다르켄의 호출을 받고 성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말에 올라타려던 그는, 검은색 모자를 살짝 기대어 쓰고(그 모 자 안에는 그녀의 긴 머리가 말려져 올라가 있었다) 승마용 복장에 검은 색 조끼, 작은 펜플을 어깨에 걸친 레젠이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 뛰어오 고 있는것을 보았다. 집 문을 지키는 가드들은 모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니 또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열어준 것이이라. 라벨 앞에까지 뛰어온 그녀는 숨이 차는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녀는 언제나 밝게 웃는 표정이었다. 조용하게 입가에 미소만 머금어야 하는 귀족집안 딸들과는 표정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라벨은 그녀와 마 찬가지로 웃으며 말했다. "무슨일이세요 ? 오늘은 일이 있어서 검술 상대는 안되겠는데요. " "아, 알고 있었어. 아까 덴케이가 그러더라고. " 덴케이는 라벨 밑에 있는 견습기사로, 문을 지키는 가드였다. "그런데, 웬 예식복이야 ? 무슨 일 있어 ? " 라벨은 옐리어스 나이트의 하얀색 예식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모임은 슈펜다르켄이 급히 명령을 내린 옐리어스 나이트 전체의 집합이었기 때 문이다. 수행중인 나이트 레이피엘을 제외하고... "네. 중요한 일이어서요. " 라벨의 아버지는 코카즈나 계급으로, 레젠의 아버지인 헬로판보다 훨 씬 아래의 계급이었다. 자연스럽게 라벨은 그녀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있 는 것이었다. 그녀는 라벨의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킥킥대며 웃었다. 라벨 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웃, 웃지 마세요. 그렇게 이상해요 ? " "아, 아냐. 너무 귀여워서. 이렇게 귀여운 애가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하야덴을 휘두르는 옐리어스 나이트라는거야 ?" 나이트 라벨은 열 여섯살로, 레젠과 동갑이었다. 최연소 옐리어스 나이 트 였음은 물론이고, 중앙 기사단에서도 무척 어린편에 속했다. 키도 작 고, 얼굴도 동안인 미소년이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검기는 다른 선배 기 사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퀴트린은 그가 사용하는 하야덴--그의 하야 덴은 청옥색 보석이 박힌것이었는데, 자신의 키를 넘어갈 정도로 긴 하 야덴 이었다. 그래서 하야덴을 차고 다닐때에는 펜플 밑에서 손으로 들 어야만 바닥에 끌리지 않았다--에 '정열'이라는 뜻의 베락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쨌든, 지금의 라벨은 작은 키에 커다란 펜플을 늘어뜨린것 이,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식복을 모르는 사람은 왕영 신전의 사제정도로 착각을 할정도로 연약하고 작은 모습이었다. 본래, 키 자체도, 여자 치곤 아주 키가 큰 편인 레젠과 비슷한 정도였다. "그럼, 돌아와서 상대해 줄꺼지 ? " "물론이죠.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안에 들어가서 쉬시겠어요 ? 연습 실은 덴케이에게 얘기하면 이용할 수 있을거예요. " "알았어. 빨리 갔다와. " "네. 그럼. " 라벨은 그녀에게 인사하고 말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자 마자 말은 쏜살같이 문을 빠져나와 왕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곧잘 라벨에게 와 검술지도를 받곤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 릴적 친구중에 아직도 전처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편한 사람이었다. 아 주 어릴적에 팔뚝 길이의 나무 막대기 두개를 하나씩 나누어 들고 서로 대련을--물론 그때 그 둘이 사용하는 것은 어느쪽도 검술이 아니었다-- 할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라벨은 그녀의 가장 편하고 좋은 친구였다, 지금은 (그녀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이었겠지만)스승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으례히 그렇듯,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다른 옐리어스 나이트들에게 손 을 들어 예를 취한후 고개를 들자, 지난 몇달간 조금 허전했다고 생각한 자리가 채워져 있음을 라벨은 깨달았다. 큰 키에 꼭 다문 입. 형형하게 빛나는 눈. 라벨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선배 기사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퀴트린 형 !" 퀴트린은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우면서 라벨쪽으로 돌아섰다. 그 역시 하얀색 예식복 차림이었다. 긴 펜플에 군데군데 접힌 자국이 있 는것이 평소때의 깔끔했던 퀴트린과 달라졌을 뿐, 몇달도 넘게 보지 못 했던 그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뛰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퀴트린 도 라벨을 마주 안기위해 양팔을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굽혔다--라벨의 키 는 퀴트린의 가슴정도에 밖에 오지 않았다--퀴트린 역시 매우 반가운 표 정이었다. "라벨, 잘 있었지 ? " 아주 높은 상급 기사들에게는 정중한 예를 취하고, 절도있게 행동해야 하는 사람들이 기사들이었지만, 역시 친한 사이에서는 그들의 행동이 보 통의 귀족들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이렇게 같은 기사단--옐리어스 나 이트라는--에 소속된 사람들끼리 있을때는 더욱 그랬다. 퀴트린이 라벨과의 해후를 하고 있을무렵, 다른 한명의 기사가 예식복 차림으로 모임 장소에 들어섰다. 그 역시 반색을 하며 퀴트린을 반겼다. "야, 나이트 레이피엘 ! " 퀴트린은 한 손으로 라벨의 볼을 쥐고 장난스럽게 흔들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트 레이피엘 인사 올립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 퀴트린이 오른 손을 올려 예를 취하자 그 기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 역시 스물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 옐리어스 나이트였다. 퀴트린 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어보이는 아주 큰 키에, 우람한 체구. 검게 그을 린 강한 피부와 부리부리하게 큰 눈을 가진 호인형의 기사, 이나바뉴 바 스크 53, 나이트 이바이크였다. 이바이크가 크게 웃으며 퀴트린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쳤다. "그래. 여행은 어땠어 ? 이렇게 긴 휴가를 받다니, 나도 기사대장님하 고 잘 사귀어 봐야 겠는걸. " 퀴트린이 다녀왔던 이 여행은 이나바뉴 기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가 허락한 것이었다. 퀴트린과 나머지 옐리어스 나이트가 그동안 있었던 이 야기들을 나누고 있을때, 문 쪽으로 짧고 강한 수염을 기른 중년의 기사 가 들어왔다. 이나바뉴 바스크 2, 옐리어스 나이트의 기사단장 나이트 슈 펜다르켄이었다. 나이트 슈펜다르켄은 매우 큰 키에 튼튼한 어깨를 가진 중년의 기사였 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기사대장으로 있으면서, '성전위'의 작위를 받은 유일한 기사였다. 그 실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국왕 루지아 10 세에 대한 충성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옐리어스 나이트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항상 엄숙했지만 여유가 있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약간의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이었다. 그가 등장하자 너나할것 없이 옐리어스 나 이트들은 무릎을 굽혀 앉았고, 옐리어스 나이트 서열 2위인 나이트 하이 파나가 대표로 예를 취했다. 나이트 슈펜다르켄은 가볍게 인사를 받은 후, 우선 퀴트린에게 미소를 보냈다. "여행은 어땠나, 나이트 레이피엘 ? " 오른손을 들어 예를 취한다음, 퀴트린은 역시 미소로 답례하며 말했다. "좋았습니다. 오랫만에 바람을 쐰것도 그랬고...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 던 로냐프 강을 보았으니까요. 아름답더군요. " 슈펜다르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름다운 강이지. " 로냐프 강에 대해 뭔가 말하려던 슈펜다르켄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갑 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오늘은 급히 안건으로 들어가겠다. 어제 저녁, 국왕 폐하를 알현했다. " 그가 말을 끊자, 나이트 하이파나가 그의 말을 이었다. "... 아켈로르님과 함께 말입니까 ? " "음. 그렇다. 기사대장님과 함께 말이다. " '이나바뉴 기사단'의 이름 아래 여러개의 기사단이 파견되어 있었지만, 이나바뉴 기사단의 체계는 간단했다. 이나바뉴 중앙 기사단은 퓨론사즈 를 중심으로 수도와 주요 상업지구를 지키는--지킨다기 보다는 '대기'의 의미가 더 많았다--기사단으로, 이나바뉴 기사단의 근간인 만큼 전투력 이나 인원면에서 타 기사단을 압도했다. 중앙 기사단은 분쟁지역등에 지 원을 나가는 든든한 '지원군'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크실과의 국 경쪽에 있는 이나바뉴 동방 원정대가 규모상 중앙 기사단을 이어 두번째 였으며, 그 외의 파견대는 여러 지방에 산재되어 있었다. 이나바뉴 기사 단에 독립된 두개의 기사단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왕 친위대 옐리 어스 나이트와 이나바뉴 총사대라 불리는 파아렐 나이트였다. 옐리어스 나이트는 현재 열 아홉명. 이나바뉴 바스크와는 크게 관련없 이, 이나바뉴 기사단의 최고 실력자들만이 모인 집단이었다. 옐리어스 나 이트는 단독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었지만, 각기 적게는 백명부터 많게는 사오백명가량의 기사단을 그 각자의 휘하에 두고 있었고 그 기사단의 운 용을 전적으로 일임받고 있었다. 그 밑에 있는 견습기사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일천명 가량의 기사단이 옐리어스 나이트 한명이 소유한 기사단의 규모였다. 이나바뉴 총사대는, 옐리어스 나이트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펜플을 어 깨에 달지만, 황금빛 전투복과 황금빛 갑옷을 입는, 이나바뉴 기사단중 가장 화려한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복장은 옐리어스 나이트의 은백색 전 투복보다도 더 화려하긴 했지만, 사실 실력보다는 명예적인 기사단이었 다. 이나바뉴 총사대는 아주 높은 귀족집안 출신의 기사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직접 전투에 참가해 하야덴을 휘두르기 보다는 이나바뉴 '왕가의 상징'으로, 정신적인 힘의 원동력이 되는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사단이었다. 이나바뉴 총사대장은 국왕 루지아 10세의 아들인 듀포픈 왕자였고, 그를 중심으로 일곱명의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실력이 다른 이나바뉴의 기사들에 비해 형편없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들 역시 뛰어난 기사였음은 물론이고, 특히 셰렌다이크{{) 귀족 제 1계급. }} 세데나 집안 출신인 나이트 사야카는, 옐리어스 나이트들조차 놀라는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옐리어스 나이트와는 다르게 그 휘하의 직속 기사단을 가지지는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보고에 의하면, 적은 두군데를 동시에 공격해 왔다. 우리 이나바뉴의 쥬렌다스 지방과... " 나이트 슈펜다르켄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져 있었다. "... 로젠다로다. "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슈펜다르켄을 주목하고 있던 옐리어 스 나이트중 한명이 벌떡 일어섰다. 우람한 몸집과 구릿빛 피부의 나이 트 이바이크였다. "로젠다로 ! 그, 그런... " "무릎을 꿇거라, 이바이크. 아직 슈펜다르켄님의 말씀이 끝나지 않았 다. " 나이트 하이파나가 뒤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바이크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고개를 들어 슈펜다르켄을 향했다. "수도는...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은 안전합니까 ? " 그의 목소리는, 호탕한 얼굴답지 않게 떨고 있었다. 로젠다로. 로젠다로는 빛의 이나바뉴와 어둠의 크실에 끼어있는 중립국가였다. 중립이라고는 하나, 제 2차 천신전쟁 이후 크실이 너무나 강력한 고립정 책을 추진함에 따라, 로젠다로는 조금씩 이나바뉴의 정책을 가지고 중립 을 표방하는 나라로 변화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로젠다로의 힘은 미약하고 그렇다할 군대나 기사단은 없었다--단, '로젠다로 성역 수호대' 라 불리우는 에우로페 기사단은 신의 힘을 빌린(그들이 추앙하는 신은 창조신 아펠르의 딸인 쥬르였다) 마법을 사용하는 성기사들로, 매우 강력 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크실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 함부로 로젠다로를 넘보지 못하는 이유는, 로젠다로가 이나바뉴와의 중립지점 이라는 의미 외에 바로 이 에우로페 기사단이라는 만만치 않은 강적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하지만, 비옥한 토지와 넓은 평야, '중립국'이라는 특성을 이용한 상업도시들이 발전을 하고 있어서 로젠다 로는 경제적으로 매우 발전한 나라였다. 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발전된 로젠다로는 그래서 밝은 분위기의 나라였고, 그래서 이나바뉴와 같은 심 한 계급차이는 없었다. 나이트 이바이크가 흥분한 이유가 있었다. 로젠다로는 3년전, 이나바뉴 와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이나바뉴에 예물을 비롯한 사신을 파견한적이 있었다. 이때, 이나바뉴는 충실한 태도로 예의를 시키기 위해 외교단을 로젠다로까지 다시 호위하여 돌려 보냈는데, 이때 그 호위를 맡은 총 책임자가 바로 나이트 이바이크였다. (국왕 친위대 옐리어스 나 이트를 보냈다는것은, 국왕 스스로가 호위를 친히 지휘했다고 생각할 정 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나이트 이바이크가 이끄는 호위대는 물론 다시 로젠다로의 왕궁에서 국왕을 알현하고 손님으로써 며칠간 따뜻한 대접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 다. 이때, 이바이크는 로젠다로의 넷째 공주인 세렌을 만나게 된다. 그녀 의 정결한 태도와 순수한 영혼에 반하게 된 이바이크는, 호위대가 다시 이나바뉴로 돌아가게 되던 날 아침, 그녀에게 카발리에로로서의 예를 올 리게 된다. 비록, 몇몇 정치를 궁지로 몰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귀족 들은 '카발리에로를 이용한 국가적 동맹이다'라며 이바이크를 비난했지만 이바이크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위대한 영웅 나이트 데로스에 의 해 확립된 기사도는, 기사가 지켜야 할 것 세가지를 차례대로 명시해 놓 고 있다. 가장 중요한것은 바로 '카발리에로로서의 의무'이며, 둘째는 '국 왕과 영주에 대한 충성'이고, 셋째가 '자신의 명예'였다. 따라서, 만약 이 나바뉴가 전시라 할때라도 로젠다로의 세렌공주가 위험에 처하게 되면 이바이크는 이나바뉴를 등 뒤로 하고 로젠다로로 달려가야 할 의무가 있 는 것이다. 최소한 이바이크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로젠다로와 이나바뉴 의 강력한 '동맹'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기사도가 조금씩 쇠퇴해가고 있어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는것이 바로 이 '카발리에로'제도 였기 때문에 기사들은 카발리에로의 상대만은 스스로의 의지와 책임으로 선택하고 싶어했다. 이바이크가 자신을 비난 하는 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것은 그의 호쾌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 기사들의 '카발리에로의 명예'에 대한 태도때문이기도 했 다. 퀴트린의 생각에서는 그정도도 매우 다행이었다. 만약, 나이트 이바 이트와 세렌 공주 사이나, 혹은 그녀를 비난하는 소리를 어디에선가 직 접 듣게 된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결투를 신청할만한 불같은 성 격의 소유자가 바로 또 이바이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년동안 아직 그러한 일로 이바이크의 하야덴에 명을 끝낸 귀족은 아무도 없었 다. 휴가를 받는다거나, 추수 감사절등의 명절에 사신의 역할로 로젠다로 쪽으로 파견을 간다거나 하면 이바이크는 꼭 자진해서 로젠다로로 갔다. 그런식으로 만남을 유지하고 있던 중, 나이트 이바이크의 머리 위에 벼 락이 떨어진 것이다. "수도는...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 은 안전합니까 ? " 이바이크의 말에 슈펜다르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 나이트 이바이크. 포프슨은 점령당했다. " 이번에는 이바이크 외에도 다른 옐리어스 나이트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쉽게 포프슨이 점령당하다니 ? 로젠다로의 기사들은, 에우로페 나이트들은 뭘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 슈펜다르켄은 어렵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에우로페 나이트는 국왕과 함께 탈출하여 현재 이나바뉴의 국경을 넘 어 안전한 곳에 있다. 하지만... " 슈펜다르켄은 잠이 말을 쉬었다. "세렌 넷째 공주님은 적의 손에 넘어갔다. " 순간 다른 기사들은 이바이크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나가는 듯한 착각 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분노로 충혈되기 시작했고, 허리에서 지탱한 하야덴은 레쥰드로 만든 바닥을 지잉--하고 울리고 있었다. 슈펜다르켄 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가도 좋다, 나이트 이바이크. 너의 공주님을 지켜라. 옐리어스 기사단장의 이름으로, 옐리어스 나이트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행동을 허 락한다. 물론, 너의 기사단을 가지고 가도 좋다. " 이바이크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결코 무모한 사내는 아니었다. 일단, 적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바이크가 떨리는 몸 을 억지로 수그려 무릎을 굽히며,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적은, 크실의 군대는 어느정도입니까 ? " 슈펜다르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포프슨을 점령한 크실의 군대는 기병과 보병을 합해서 모두 10만 남 짓. 그들은 바로 쥬렌다스를 함락시킨지 하루 반 만에 다시 로젠다로를 점령했다. " 순식간에 방 안은 냉랭한 공기로 가득찼다. 단, 하루 반만에 두개의 방 어선을... 옐리어스 나이트들은 모두 표정을 굳히며 슈펜다르켄을 바라보 았다. "그들은 강하다. 규모상으로도 엄청난데다가, 여러분들이 느끼다시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동력을 가진 군대다. " 맞는 말이었다. 단 하루만에 쥬렌다스를 점령하고 곧 이어 로젠다로의 수도를... 과연 자신이 지휘하는 단지 일천여기의 기사단이 그렇게 움직 일 수 있을지, 지금 그 자리에 모여있던 옐리어스 나이트들은 모두 속으 로 생각하고 있었다. 상상하면 할수록 방 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 다. 기동력은, 군대의 규모를 두배, 세배로 만들어 준다는 것은 전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적의 공격은 크게 두갈래로 예상된다. "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슈펜다르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갈래는 지금 현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하라데스지방의 십 오만, 다른 한갈래는 바로 쥬렌다스와 로젠다로를 습격한 십만의 하나다. 현재 하라데스에 집결되어 있는 크실군은 그 구체적인 전력을 파악할 길 이 없다. 하지만, 로젠다로에 있는 크실군에는 특이점이 있다. 여러분들 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단 한번 하야덴을 휘둘러 나이트 카사드렛의 목을 떨어뜨린 기사가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아켈로르님은 중앙기사단 을 셋으로 나누고 싶어하신다. " "나누신다면... ? " 나이트 하이파나가 묻자 슈펜다르켄은 그를 잠시 응시했다가 말을 이 었다. "그렇다. 이번에는 중앙기사단의 원정이 아니라, '출정'이라는 표현을 써야할것 같다. " 다시한번 방 안은 짙은 침묵의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출정... 이 말 은 이나바뉴 중앙 기사단 전체의 원정을 의미하는것이었다. '제 3차 천신전쟁 !' 설마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이 말이 지금 옐리어스 나이트 모두의 머릿속에 비로소 현실이 되어 그 의미를 뚜렷이 각인하기 시작했다. 드 디어, 이나바뉴의 탄생이후 세번째 크실과의 전면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 었던 것이다. 나이트 슈펜다르켄은 거침없이 다음 말을 쏟아내었다. "갈리워진 중앙기사단중 둘은 급히 하라데스와 로젠다로로 각각 출정 하게 될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격멸이겠지만, 차선의 방법은 더 이상 크 실군이 국경을 넘어 이나바뉴의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것이다. 세 번째 기사단은 중군으로써, 기사대장 아켈로르님께서 직접 이끌고 출정 하실것이다. " '아켈로르님이 직접.' 나이트 라벨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미 이 전쟁은, 옐리어스 나이트가 단 한명도 출정하지 않은 채 끝낼 수 있었던 1차 천신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가 되리라는 것을 그를 비롯한 옐리어스 나이트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몇명의 옐리어스 나이트를 출정시킬것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하 지만, 최소한 두어명씩이 나뉘어진 기사단에 배속되었으면 한다. 우선, 여러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겠다. " 슈펜다르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명의 기사가 벌떡 일어섰다.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로젠다로로 가겠습니다. " 나이트 이바이크였다. 그로써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슈펜 다르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로젠다로로 가겠습니다. " "나이트 레이피엘. 특별한 이유가 있나 ?" 퀴트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슈펜다르켄은 어두운 표정에 아주 잠시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가 다시 입을 열면서 사라져 버렸다. "... 그렇다면 이나바뉴 제 1검사의 호승심이로군. 조심하게. " "... 명심하겠습니다. " 나이트 레이피엘, 퀴트린의 실력은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바였다. 그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은 오직 기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뿐이었 고, 그와 비슷한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기사는 옐리어스 나이트의 슈펜다르켄과 하이파나, 그리고 이나바뉴 총사대의 이나바뉴 바스크 24, 나이트 사야카 정도 뿐이었다. 그런 그이니, '나이트 카사드렛의 생명을 단숨에 앗아간' 그 기사를 보고 싶어하는건 당연했다. "로젠다로로 가겠습니다. " 세번째 지원자가 나왔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목소리의 나이트 라벨 이었다. 이번에도 슈펜다르켄은 다시 짧게 미소를 지었다. "나이트 레이피엘과 함께 출정하고 싶어했지. 좋아, 허락한다. " 라벨은 어린 나이때문에 거절당할까봐 조바심을 내던중이었다. 당장 뛸듯이 기뻤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만큼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나이 보다 속은 깊은 소년이었다. 곧 이번 원정에 참여할 옐리어스 나이트들이 결정되었다. 선발대의 역 할을 할 비교적 작은 규모의 두 기사단은 각기 나이트 이바이크, 레이피 엘, 라벨이 이끄는 로젠다로 원정대와, 나이트 하이파나와 나이트 쥬(이 나바뉴 바스크 38)가 이끄는 하라데스 원정대로 결정되었다. 옐리어스 기사대장 나이트 슈펜다르켄과 옐리어스 나이트 가이사로는 이나바뉴 기 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와 이나바뉴 총사대의 나이트 사야카가 이끄는 중군과 함께 뒤늦게 출발하기로 하였다. 무려 일곱명의 옐리어스 나이트 가 출정을 하기로 한 것이다. "부탁이 있어요, 퀴트린 형. " 기사들 사이에서는, 상급자에게는 '님'의 최고 존칭을 붙이고 하급자에 게는 '나이트'라는 말을 기사명 앞에 삽입하는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퀴트린은 특별히 라벨에게 '형'이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허락 한 것이었다. "부탁 ? " 모임이 끝나고, 각자 돌아가 출정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은 옐리어스 나이트들은 하나씩 인사를 하고 떠났다. 마침 돌아가려던 퀴트린은 라벨 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라벨은 평상시처럼 천진한 미소가 가득한 표정이 아니라, 조금 긴장한 진지한 얼굴이었기때문에 퀴트린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한 모양이구나. 라벨은 첫 출전이지 ? " 물론 진실된 의미의 '첫 출전'은 아니었다. 이런 큰 전투에는 처음이라 는 뜻 이었으리라. 라벨이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저어... " 퀴트린은 잠시 라벨을 내려다 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퀴트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가면서 천천히 이야기할까 ? " 라벨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옐리어스 나이트의 모임장소인 '사타루스{{) 신화 속에 나오는 창조신 아펠르의 첫째아들로, 이나바뉴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의 하늘'에서(사타루스의 하늘은 옐리어스 나이트들만을 위해 마련되어져 있는 장소로, 넓고 사방이 밀폐되어 있는 커다른 공간이었다. 신전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지만, 천정은 크게 뚫려 있어서 항상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사타루스의 하늘 근처에는 왕영 마법사들이 국왕의 명령으로 Tytban Reodpelq{{ ) 대기가 응축되는것을 막아, 눈이나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는 마법. 최소한 세명 이상의 마법사 들이 동시에 시법을 해야 완성이 가능하다. }}의 스펠을 걸어 놓았기 때문에 사타루스의 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지거나 눈이 내리는 일은 없었다. 이 공간에서 옐리어스 나이트들은 회의를 하거나 검술을 연마했다. 옐리어스 나이트 외의 다은 기사나 귀족들에게 출입이 금해져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 잠시 걷다가 라벨이 용기를 내어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여행은 어땠어요 ? 갑자기 돌아와서 놀랬어요. 아까 이야기를 얼핏 들으니 루우젤쪽으로 갔다 오신것 같던데... " 퀴트린은 라벨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아, 응... 그래. 나쁘지 않았지. 원래 돌아올 수 없었는데... 우연히 그 곳에서 크실의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서 곧장 돌아왔지. " 라벨은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 " "돌아오자 마자, 우선 슈펜다르켄님을 뵈려고 왕궁으로 들어왔어. 들어 오자마자 하이파나님을 만났지. 급한 모임이 있으니 참석했으면 좋겠다 고 하시더구나. " 그래서 항상 깔끔한 복장이었던 퀴트린 형의 펜플에 접힌 자국이 있었 구나... 하고 라벨은 생각했다. 아마도 전투복 차림으로 들어와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예식복을 위에 덧 입은 것이리라. "그럼 아직 아무도 못 뵈었겠네요 ? " "그래. 친한 친구들도 못 만났고... 우선 사야카님을 만나고 아버님을 뵈러 집에 돌아가야겠지. 내 걱정을 하실 분은 아니지만, 조금 죄송하군. 돌아오자 마자 다시 출정이라니... " 이나바뉴 바스크 24, 나이트 사야카는 퀴트린과 어릴적부터 친구였다. 셰렌다이크 세데나 집안 출신인 나이트 사야카는 퀴트린과 나이도 큰 차 이가 없었고, 어릴적 부터 검술 역시 비슷하여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 다. "아버님은 안녕하실거예요. 바로 어제 섀럿님을 뵈었거든요. " 라벨이 말하자 퀴트린은 미소로 대답했다. 퀴트린의 성은 섀럿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기사명을 '섀럿'으로 써야 하겠으나, 그의 아버지 역시 이 나바뉴 바스크 6의 기사, 나이트 섀럿이었기 때문에 퀴트린은 '레이피엘' 이라는 어릴적 이름을 기사명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야카님만 뵙고 그냥 돌아가실거예요 ? " "그럼 ? " 퀴트린이 되묻자 라벨은 빤히 퀴트린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 피엔젤 공주님은요 ? " "아, " 퀴트린은 대답대신 밝게 웃었다. 그제서야 지금 라벨이 꺼내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듯 했다. 아마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퀴트린과 피엔젤 공주' 사이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그 둘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라벨이 이렇게까지 해서 물어볼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주님은... 글쎄, 깨끗한 예식복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뵐 수 있지 않 을까 ? 그건 그렇고, 라벨,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강 알듯하다. " 퀴트린은 말을 마치고 호쾌하게 웃었다. 이렇게 웃어본것이 얼마만인 지... 정말 오랫동안 잃어버렸었다고 생각한 웃음이 라벨로 인해 돌아온 것이었다. 퀴트린의 입장에서 라벨은 정말 이상한 소년이었다. 동생같으 면서도 오히려 퀴트린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매력이, 그 의 가슴 높이에도 닿지 않는 작은 키의 소년에게 있었던 것이다. 퀴트린이 웃자, 오히려 라벨은 다시 심각해졌다. 그들은 어느새 기사의 왕궁을 지나 궁정쪽으로 발을 옮겨놓고 있었다. "... 퀴트린 형과 사야카님도 아직 가만히 계시는데... 제가 너무 건방져 보이죠 ? " 퀴트린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결국, 전에 얘기했던 레젠이라는 귀부인에게 예를 취할 준비가 된거 니 ? " 이번엔 라벨이 폭소했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식복을 입고는 있었지 만 아직 그의 웃음 소리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귀부인이라고요 ? 레젠이 ? " 문득 라벨의 눈 앞에 비스듬히 눌러 쓴 모자 속에 긴 머리를 감추고, 승마복 차림으로 목검을 휘두르며 평원으로 말을 달리는 명랑한 레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퀴트린은 예의상 그녀를 '귀부인'이라고 호칭했 겠지만, 라벨은 그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사그러들자, 라벨이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처음보다 훨씬 풀어 진 모양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하지만, 저도 어른 이라고요. 퀴트린 형과 함께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이제, 친구가 아니 라 남자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어요. " 퀴트린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만큼 라벨의 진심은 진지했던 것이다. "그래. 네 마음을 스스로 속여온것도, 10년이면 너무 긴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라... 언제니 ? 꼭 가 주지. " 라벨은 지금 레젠에게 카발리에로로서의 예의를 취하려 하고 있었다. 그 의식에는 반드시 작위가 있는 네명의 기사가 입회를 해야 하는데, 기 사 네명이 입회를 할 경우, 대부분 기사는 자신과 절친하거나 자신이 평 소에 존경해왔던 기사를 초청하게 되는 것이다. 라벨은 바로 그 '초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퀴트린이 불만없이 긍정의 대답을 해주자 라벨은 뛸듯이 기뻐했다. "와 주실거예요 ? 와앗 ! " 퀴트린은 그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출정은 3일 후, 그래서 오늘 저녁에 할 거예요. 저녁 쯤, 돌아가시는 길에 저희집에 들러주세요. 괜찮죠 ? " 퀴트린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 " "전부 옐리어스 나이트예요. 쥬님, 하이파나님...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기사는--놀라지 마세요--슈펜다르켄님이에요 ! " "슈펜다르켄님 ? " 옐리어스 기사대장 나이트 슈펜다르켄이 라벨을 총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퀴트린은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라벨의 기분을 헤아려 놀란 척 해 두었다. 라벨은 자랑스러운듯한 표정을 지었다. "거절당하지 않을 자신이야 있겠지 ? 그자리에서 거절당해서 증인으로 입회한 내 명예를 깎아 내리면, 그땐 당장 렉카아드를 신청 할꺼야. " 퀴트린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듣기에 따라서 조금 심하다 싶은 생각이 드는 이 농담은, 친한 기사가 카발리에로로의 예를 취하려 할때 흔히 주 고 받는 농담이었다. 라벨은 발을 멈추고 오른손으로 올려 예를 취했다. "그럼, 기다릴께요. 꼭 오세요. " 퀴트린이 답례하자, 라벨은 나는듯이 뛰어 자신의 말이 보관되어 있는 기마창쪽으로 향했다. 퀴트린은 미소를 띄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 휙 돌아서서 왕궁쪽으로 향했다. 나이트 사야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어, 퀴트린이 아닌가. " 퀴트린은 오른손을 올려 예를 취했다.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사야카님. " 이나바뉴 바스크 24, 나이트 사야카는 부드러운 천으로 동여맨 이마를 손등으로 훑고는 밝은 표정으로 퀴트린을 맞아 주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집에 하야덴을 집어넣은 그는, 대신 멀지 않은 테이블 위에 놓여 진 차가운 음료를 집어 들었다. 그는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 다. 사야카는 퀴트린에게 의자를 가리키고는, 자신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 다. 확실히 높은 귀족출신 기사들인 이나바뉴 총사대가 사용하는 '사타루 스의 대지'는 화려한 점이 있었다. 흠집하나 나지 않은 깊은 하얀색 레쥰 드 바닥이나, 벽에 걸려있는 화려한 금 촛대, 보석이 박힌 휘장등, 어쩌 면 이곳은 이나바뉴의 수도 퓨론사즈 왕궁 내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일지 도 몰랐다. "여행은 ? 어딜 갔었나 ? 떠나기 전에는 루우젤 쪽으로 갈것이라고 얘 기했었던것 같은데... " "루우젤에 갔었습니다.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 "음. 그래, 이렇게 일찍 돌아온걸 보니 운 좋게 전쟁 소식이라도 접했 던 모양이군. 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이곳으로 온건가 ? " "네, 집에 잠시 들렀다가... " 사야카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하야덴을 내려 허리에 찼다. 퀴트 린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 " 사야카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집, 말 많은 몸종 있지 않은가. 그녀석 때문이지. " 이나바뉴의 귀족들의 집에는 수 많은 하인들과 노예들이 살고 있다. 적게는 한두명에서부터, 사야카와 같은 높은 귀족들은 백명도 넘는 하인 과 노예를 거느리게 된다. 이 '하인'들의 계급은 원칙적으로는 평민이고- -당연히 노예는 천민의 계급이었다--그들의 신분은 역시 귀족들을 마주 쳐다볼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낮았지만, 그들은 귀족의 집에서 살기 때문 에 일반적인 평민보다는 훨씬 좋은 옷과 좋은 음식과 좋은 잠자리를 이 용할 수 있었다. 물론, 같이 살기 때문에 귀족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도 많았다--많은 귀족이나 기사들이 이 점을 이용해 평민들 사이에 떠 도는 소문등의 정보를 접할 수 있기도 했다--그래서 언제부터 인지 이 '하인'들의 위치는 일반적인 평민들의 위치보다는 한 단계 높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하인들 스스로가 집 안의 노예를 다시 자신의 하 인으로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야카가 거느린 몸종중에는 바한이라는 이름의 몸종이 있었는데, 그 는 또한 사야카의 밑에서 검술을 배우는 견습기사이기도 했다. 사야카가 말했던 그 '말 많은 몸종'이란 바로 그를 가리키는 말 이었으리라하고 퀴 트린은 생각했다. "그 뿐인가, 자네가 친히 하녀 하나를 주워왔다는 얘기도 해주더군. " 사야카는 말과 함께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여행이 사람을 바뀌게 했나보지 ? 평민이라면 벌레 보듯 하던 자네가 말이야. " "농담하지 마십시오. " 퀴트린은 웃으며 대답했다. ... 하긴, 귀족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며칠간은 이 야깃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기사 자신이 직접 하녀를 데려왔다는 일 은... 이런 경우는 퀴트린 스스로도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본래 아아젠과 퀴트린의 계약은 루우젤까지 그녀가 퀴트린을 안내하는 것으로 끝이 나 있었다. 루우젤에 도착한 그들은 우연히 벤도루우젤이 카아르들의 습격을 받는것을 목격했고 그 일로 인해 퀴트린은 크실의 침 공에 대한 정보를 얻고 수도인 퓨론사즈로 돌아갈것을 결심했다. 퀴트린 은 그간의 아아젠의 노고에 몇십 더프의 금화로 보답하려 했으나, 아아 젠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녀는 대담하게도 그 몇십 더프의 금화 대신 얼마간만이라도 퀴트린의 집에서 하녀로 써 줄것을 부탁해왔었다. "... 얼마간이라도 좋으니 퀴트린님 밑에서 퀴트린님을 모시게 해 주셨 으면 합니다. " 퀴트린은 여저히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말을 거절하려 했다. 음유시인 이... 천민중의 천민을 하녀로 쓸 수는 없는것이었다. 이나바뉴에서, '하 인'의 위치는 평민중에서도 높은 축에 속하는 평민으로 인식되었기 때문 에... "이유가 뭐지 ? " 퀴트린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있지 않았다. "... 얼마동안이라도 좋으니 높은 분들의 집에 있고싶습니다. 물론 거절 하신다면 지금 퀴트린님의 앞에서 불결한 몸을 사라지게 하겠습니다. " 아주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아젠은 퀴트린을 마주 쳐다본 후 고개 를 숙였다. 퀴트린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음유시인이라는 낮은 계급들 에게도 이런 용기가 있었군... 문득, 퀴트린의 눈 앞에는 벤도루우젤의 어 떤 여관이 불 타던 날, 갑옷을 입은 기사가 다가가자 몸을 떨고 눈을 마 주치지 않기 위해서 몸을 웅크리던 평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들중 몇몇은 땅에 엎드리기까지 했었다--퀴트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한달간 하녀로 일하는 것을 허락한다. 네 계급은 그동안 평민으 로 해 놓겠다. 네가 그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좋다. 단지, " 퀴트린은 잠시 말을 쉬었다. "어떤 중요한 일 때문에 나는 급히 퓨론사즈로 돌아가야 한다. 말을 타고 갈 것이다.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있다면 집에 있어도 좋다는 조건 이다. " 퀴트린은 말을 두필을 구해서 아아젠과함께 퓨론사즈로 돌아왔다. 아 무리 퀴트린이 무리를 하지 않고 천천히 달려왔다지만, 놀랍게도 아아젠 은 따라오지 못하기는 커녕 힘든 표정 한번 짓지 않고 퀴트린과 함께 말 을 달려서 퓨론사즈에 도착했다. 퀴트린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약속대로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아아젠이 말을 타 본것은 물론 그때가 처 음이었다. 레젠은 깜짝 놀랐다. 옐리어스 나이트가 하나... 둘... 셋... 라벨까지 옐 리어스 나이트라고 한다면 다섯명의 옐리어스 나이트가 라벨의 연습실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세요. " 레젠이 약간 당황하여 어색하게 웃자, 옐리어스 나이트들은 일어서서 정중하게 그녀에게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들중,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기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나바뉴 바스크 17, 나이트 하이파나입니다. 이쪽은 이나바뉴 바스크 2, 나이트 슈펜다르켄님이고... " 인자한 표정의 중년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이나바뉴 바스크 2라니...! 그렇다면 옐리어스 기사단장이란 말인가 ? 말괄량이 같던 레젠도 이 말에는 깜짝 놀랐다. "아, 예... " 레젠이 뭔가 반갑다는 말을 하려던 중, 하이파나의 손이 옆으로 옮겨 갔다. "이쪽은 이나바뉴 바스크 38, 나이트 쥬입니다. " 쾌활한 표정의 나이트 쥬가 가볍게 인사했다. 하이파나의 손은 계속해 서 옆으로 갔다. "이나바뉴 바스크 104, 나이트 레이피엘입니다. " 퀴트린이 고개를 숙이며 오른팔을 수평으로 들었다. 하이파나가 계속 말했다. "오늘, 나이트 라벨과 대련이 있다고 해서 관전차 왔습니다. 폐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 레젠은 라벨쪽을 휙 돌아보았다. 대련을 관전한다고. 날 놀림감이 되게 하자는 건가. 하지만 라벨은 밝게 웃는 표정으로 레젠을 바라보고 있었 다. "폐, 폐라뇨. 영광입니다. " 레젠의 말이 끝나자 라벨은 두 손에 쥐고 있던 하야덴중 한쪽을 레젠 에게 던져주었다. "자, 덤벼보세요. 선배 기사님들이 보고 계시니까 오늘은 봐주지 않을 거예요. " 레젠은 소름이 끼치도록 놀랐다. 봐주지 않겠다고. 라벨이 전력을 다해 하야덴을 휘두른다면 아마 레젠은 단 한번의 공격도 막아내지 못할것이 라는 것은 레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라벨이 퀴트린을 힐끗 보자 퀴트린은 라벨을 향해 웃어주었다. 라벨은 곧 고개를 끄덕이고 레젠을 쳐다보았다. 라벨의 표정은 굳게 굳어있었다. '진짜로 할건가 봐 !' 라벨의 표정을 보고 레젠이 생각했다. "안 오시면 먼저 가겠습니다 !" 라벨의 하야덴이 한광을 발했는듯 싶더니 어느 새 레젠의 바로 앞에까 지 와 있었다. '앗 ! ' 레젠은 급히 하야덴을 머리위로 들어 예상된 라벨의 공격방향을 방어 했다. 하지만 어느새 라벨은 몸을 움츠리고 하야덴을 레젠의 허리쪽으로 쓸어오고 있었다. 레젠은 있는 힘껏 몸을 돌리며 팔꿈치는 머리 위를 향 한 채 손목만을 이용해 하야덴을 허리쪽으로 향하게 했다. 최소의 시간 으로 방어 방향을 바꾼것이다. 하야덴끼리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옐리어스 나이트 사이에 서 박수갈채가 터졌다. "멋진 방어입니다. " 나이트 쥬의 목소리였던것 같다는 생각을 한 순간, 조금의 틈 없이 라 벨의 하야덴이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 레젠의 하야덴에 부딪히는 순간 의 미세한 탄력을 이용한 움직임이었다. 역시 라벨은 레젠의 상대는 아 니었다. 레젠에게는 다시 하야덴을 든 팔을 움직여 라벨의 하야덴을 향할 시간 이 없었다. 몸을 약간 비틀어 방금 막아낸 방향 그대로 라벨의 하야덴을 밀어내려했다. 하지만 어느새 라벨은 하야덴을 비틀어 등을 앞쪽으로 내 밀고 방향을 위로 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레젠은 몸을 뒤로 굽혀 하야 덴을 피해내려 했지만 덕분에 그녀의 하야덴은 하늘을 날아 버렸다. "...... " 갈채 소리와 함께 옐리어스 나이트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 두번의 공격... 두번 하야덴을 휘둘러 레젠의 하야덴을 튕겨버린것이다. 레젠은 조금 서운하다는 눈빛으로 라벨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가 온 힘을 다해 공격해준 것이 오히려 고맙긴 했지만, 역시 그렇게 쉽게 승부에서 진것 은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라벨이 웃어주겠지, 하고 레젠이 생각 하고 그를 바라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레젠님, " 레젠님 ? 비록 존칭을 한다 하더라도 옛 친구였기 때문에 레젠, 혹은 레젠양 정도의 가벼운 경어만 사용하던 라벨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극존 칭이 튀어 나왔다. 레젠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팍 소리와 함 께 그의 하야덴이 바닥에 꽂혔다. 이 비싼 레쥰드 바닥에 일부러 흠집을 내다니 ! 하지만 더 놀라운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견고한 레쥰드 바닥에 하야덴을 꽂아 세운 라벨의 실력이었다. 그가 갑자기 레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벨... ? "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어렵게 라벨이 입을 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채 였다. "... 당신의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습니다. " 카발리에로.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낭만적인 단어다... 라는 생각을 한 다음순간, 레젠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을 정도로 놀라버렸다. "라, 라벨. " "허락해 주십시오. " 라벨은 고개를 숙인 채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카발리에로를 가질 수 있다니... 웬지 눈물이 나려고했다. 미소를 띄우며 낮은 목소리로 나이트 하이파나가 말했다. "어서 대답하세요. " 레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느끼지 못한 새, 라벨을 제외한 옐 리어스 나이트 네명은 그녀와 라벨을 빙 둘러서 서 있었다. 그제서야 레 젠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카발리에로의 의식에 초대된 증인들이 라는 것을. 조금 망설이다, 레젠은 조용하게 대답했다. "네... 허락합니다. " 레젠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라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표정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이 방금 바닥에 꽂아 놓았던 하야덴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워 들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149 옐리어스 나이트 라벨은, " 그는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서 여러 기사님들을 모시고 라카이드 레젠님의 카발리에로 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 나이트 데로스가 만든 '카발리에로의 맹세'였다. 카발리에로의 의식은 기사가 '카발리에로의 맹세'로 그녀의 카발리에로가 되었음을 선언하는것 으로 끝마쳐졌다. '... 엄숙히 선언합니다'로 시작하는 이 맹세는 모두 1700여자로 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귀부인의 명예를 지키며, 귀부인 의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명예도 소중히 하겠다는등의 '명예'에 관한 맹 세와, 카발리에로로서의 '의무'에 관한 맹세로 나뉘어졌다. 기사에게 있 어서는, 카발리에로로서의 의무는 그 어떤것 보다 우선했다. (심지어는 국왕에 대한 충성보다도) 라벨은 단 한번의 흔들림이나 반복 없이 매끄 럽게 맹세를 끝마쳤다. 그것만 보아도 라벨이 이 의식을 위해 얼마나 오 랫동안 준비를 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 빛의 신 사타루스와 위대한 아펠르 신의 영광이 그녀와 함께 하시 길 기원합니다. " 라벨은 맹세를 마치고는 하야덴을 다시 검집에 집어 넣었다.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레젠과 그녀의 카발리에로를 축원하는 갈채가 기사들 사이에 서 터져나왔다. 라벨은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는 레젠을 돌아 보았다. "... 고마워. " 라벨이 고개를 돌려 돌아본 자리에는 말괄량이였던 레젠은 온데간데 없고 수줍어서 고개를 푹 수그린 소녀가 한명 서 있었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그가 눈을 돌리자 이번에는 퀴트린과 마주쳐 버렸다. 퀴트린이 낮게 말했다. "멋졌어. 축하한다. " 옐리어스 나이트들은 퀴트린을 시작으로 각기 한마디씩 돌아가며 라벨 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렇게, 또 한명의 카발리에로가 탄생한 것이 다. 이나바뉴 바스크 6, 나이트 섀럿경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중 '막내'라 불렸던 이스케는 매우 기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자질구레한 집안 일을 도맡아 하고 낮에는 쉴 틈 없이 바빴던 것이 불만은 아니었다. 단지 그 녀의 입장에서는 이야기 할 같은 또래의 하녀가 없었다는것이 불만이었 다. 자신과 같이 어린 하녀가 없는것은 아니었지만 섀럿경의 저택은 워 낙 넓었고, 자신이 일하는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하나같이 중년이거 나 나이가 경험만큼이나 쌓인 하녀들이었다. 일주일에 두어번, 우연히 마 주치는 같은 또래의 데판--그는 견습기사가 되고 싶어하는 하인이었다-- 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것이 유일한 그녀의 낙 이었었다. "다른 귀족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집에서도 식사는 일주일에 두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자 하시고 계셔. 알고 있지 ? 저 큰 부엌이 주인이신 섀럿님의 식사를 만드는 곳이고, 그 옆이 부인마님, 아랫쪽 조금 작은 부 엌에서 퀴트린님의 식사를 만들지. 네번째 부엌에서 만드는 음식은 우리 들이 먹을 수 있는것이고... 노예들은 우리들이 먹다 남긴것을 먹어. 노파 심에서 하는 말 이지만, 섀럿님이나 퀴트린님의 식사를 위해 만들다 버 리게 되는것을 노예들한테 주는 실수는 하지 마. 그랬다가는 그자리에서 페치에 몸이 두동강이가 나 버리게 될꺼야. 하야덴도 아니고, 페치에 맞 아 죽는건 너무 슬프지 않니 ? " 집안에 부엌이 자그마치 네개나 된다는 사실이나, 귀족들이 남긴 식사 를 노예들에게 주게되면 견습기사들의 페치 아래 죽게 된다는 이스케의 말이나 모두 놀라운 것 이었지만 아아젠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도 싫었 지만, 지금은 평민의 역할을 해야했다. 그녀는 이스케의 말에 고개를 끄 덕이며 힘 없이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도, 실은 방금 이스케의 입에 서 농담과 함께 나온 '노예'와 같은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농담이야. 호호, 얘 얼굴 굳어지는것 봐. 우리가 언제 검집에서 빠져 나온 하야덴을 볼 일이나 있겠니 ? 넌 하녀 일은 처음이라고 했지 ? 그 러니까 내 얘길 잘 들어 둬. 난 벌써 7년째 하녀 일을 하고 있으니까 말 이야. 너보다 한살 언니이기도 하고. " 그녀의 말이 많은것이 싫지는 않았다. 아아젠은 그녀를 따라 난생 처 음보는 화려한 금장식이 되어 있는 그릇들을 씻고 있었다. "네가 음식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음식 솜씨가 아무 리 좋다해도 갑작스럽게 들어온 애한테 음식을 맡기진 않을거야. 귀족분 들은 입맛이 아주 까다로워서 만드는 사람이 아무리 흉내를 내려해도 금 방 맛이 달라진걸 알아채시거든. 우리네랑은 혀 구조가 다르다나 ? 뭐, 그런 말들이야 주인님들 식사를 만든 부엌에서 일하는 늙은 여우--나이 를 먹어서 닳고 닳은 늙은 하녀들 말이야--들이 만들어 냈을지도 모르 지. 거기에 일하는 동안에는 가끔은 주인님들이 드시는것들을 맛 볼 수 있을테니까 말야. 내 말 틀리니 ? " 아아젠은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건성으로 응응 하면서 그녀가 씻어내는 그릇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그릇들의 모 양도 그렇지만, 그녀는 너무나 익숙한 솜씨로 그릇들을 씻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젠이 다섯개의 그릇을 씻는동안 그녀는 벌써 서른개도 넘 는 것들을 씻어서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케는 그런것쯤에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듯한 눈치였다. "어쨌든 네가 와서 참 기뻐. 이 일들은 어짜피 내가 혼자서 하던 일들 이었는데, 네가 해 주는만큼 내 일은 줄어들게 되는거쟎아. 하지만 무엇 보다, 항상 옆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는게 훨씬 더 기뻐. 너도 그렇지 ? " 이스케는 말을하며 그녀를 향해 웃어보였다. "아, 으... 으응. " 아아젠도 그녀를 마주보고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그녀 역시 꾸밈없이 밝은 소녀로구나... 귀족집에서만 살기 때문일까 ? 그녀가 음유 시인으로 이나바뉴를 떠돌때 그녀를 불쌍히 여기며 동전을 던져주는 평 민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때려서 담벼락 근처에서 내쫓고 지저분하다고 돌을 던지는 평민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음유시인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이스케는 여전히 이렇게 친절하게 나를 대해줄까 ? ... 어쨌든, 지금의 그녀는 퀴트린이 자신을 소개한 대로 평민으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로 너희들과 함께 지내게 될 하녀다. " 퀴트린이 하인들에게 아아젠을 소개하며 한 말은 꼭 한마디였다. 그녀 의 이름이 무엇인지--아마도 퀴트린은 그녀의 이름을 잊은지 오래였을 것이라고 아아젠은 생각했다. 맨 처음, 파이센에서 만났을때 그녀의 이름 을 이야기 한 이후, 퀴트린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일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출신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 았다. 그래도 하인들이나 하녀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퀴트 린이 직접 하녀를 구해왔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 기사가 한낱 하녀의 출 신성분이나 이름등에 관심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케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릇 닦는 일, 부엌 청소하는 일, 물 갈아 오는 일...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산더미처럼 많지만 아마 대부분 나랑 둘이서 하게될꺼니까 걱정 마. 그런데 제일 신나는 일이 뭔지 아니 ?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바로 시장에 가는 일이야. " 대부분의 귀족들과 몇몇 재산에 관심이 많은 기사들은 저택과 함께 넓 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신들의 식사의 많은 부분을 직접 자신들의 농장에서 생산된것으로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이트 섀럿은 재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국왕 루지아 10세에게 상으로 농토라도 받게 되면 즉 시 팔아서 자신이나 퀴트린의 기사단에게 나누어 주거나 하야덴이나 갑 주등의 물품을 사서 전력을 보강했다. 나이트 섀럿이 이끄는 2천5백여기 의 기사단은 이나바뉴 안에서 한명의 나이트가 이끄는 단일 기사단으로 는 강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1천4백여기의 퀴트린의 기사단도 마찬가 지였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이트 섀럿의 저택에서는 거의 모든 식사 를 시장에서 사 온 것으로 충당했다. "우리가 평상시에 입는 옷을 입고 시장에 나가면 평민들이 얼마나 부 러운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지 아니 ? 더더군다나 우리가 섀럿님의 집 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정말 얼마나들 부러워하는데. 아, 요즘엔 레이 피엘님의 집에 있다고 해야 더 부러워 하지만... 어느정도인지 알고 있니 ? 나이를 먹어서 감상적이 된 아줌마들은, 레이피엘님의 이름만 들어도 졸도할 지경이라니까. 아 참, 내가 방금 레이피엘님이라고 했었나 ? " 언젠가, 아아젠도 퀴트린이 스스로를 가리켜서 '나이트 레이피엘'이라 고 했었던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 퀴트린을 만났을때 부터 그녀는 퀴트린의 성이 '섀럿'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땐 막연히 기사로써 쓰는 이름이 다른것이려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또 이스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레이피엘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난것인지 궁금해졌다. "호호, 내 정신좀 봐. 레이피엘은 퀴트린님의 어릴적 이름이야. 정말 멋진 이름이지 ? 듀포픈 왕자님하고 비교해 봐도 떨어지지 않을 멋진 이 름이라니까. 난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데판이 그러는데, 퀴트린님 을 '나이트 레이피엘'이라고 한대. 원래는 '나이트 섀럿'이라고 해야 하겠 지만, '나이트 섀럿'은 우리들의 주인님하고 똑같은 이름이 되쟎아 ?-- 아, 그걸 이름이 아니고 뭐라고 하던데...--그래서 '나이트 레이피엘'이라 고 하나 봐. 너 데판이 누구인지 모르지 ? 나이는 나보다 한살 많은데, 견습기사가 되고 싶어해. 그래서 내 카발리에로가 되어주겠다나 ? 웃기 는 애지... 견습기사는 뭐 아무나 되는줄 아나 ? 나이는 퀴트린님하고 똑 같지만 실력은 하늘과 땅--그녀가 귀족집안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정도라 도 쓸 수 있었지만, 이정도 표현이 평민들이 쓰는 제일 잘 된 표현이었 다--차이지. 어쨌든, 가끔 기사님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내겐 좋은 친 구야. 너도 나중에 소개시켜줄께. 데판은 말 수가 적은 애를 좋아한다니 까, 널 좋아할 수 있을꺼야. 이제 그릇 다 씻었구나. 물 갈아 놓으러 가 자. " 그녀는 자신 옆에 놓여 있었던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씻어 놓 은것이 아아젠에 비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아아젠은 이스케가 든 그릇을 나누어 들어 주었다. 이스케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 둘은 그릇을 찬장안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는 빈 물통을 들고--나무 로 만들어진 둥글고 깊은 것이었다. 손잡이가 있었지만, 이스케는 긴 막 대를 손잡이 사이에 끼워 아아젠과 양쪽에 나누어 들었다. 아아젠과 이스케는 부엌 반대편으로 열린 문으로 나갔다.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맑은 물이 흐르는 우물이 있었다. 이스케는 계속 쉬지않고 재 잘거렸다. "그리고 보니 생각 나는게 있는데, 라벨님--알고 있니 ? 열 여섯살의 옐리어스 나이트 말이야--이 그 라카이드 헬로판님의 막내따님의 카발리 에로가 될거라는 소문이 있었어. 뭐, 둘은 옛날부터 친했으니까 별 문제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어리지 않니 ? 열 여섯살은... 결국 아무리 옐리 어스 나이트라고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쟎아. 어릴땐 누구나 똑같다구. 우 리나, 옐리어스 나이트나. 애고, 실례. 방금 한 말은 비밀이야. 난 오래살 고 싶거든. " 웃으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스케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어릴땐 누구나 똑같다구... 아아젠의 표정에 짧게 웃음이 스쳐갔다. "왜 그래 ? " "아, 아무것도 아니야. " 아아젠은 괜히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이스케를 향해 웃음을 머금었다. 이스케는 잠깐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웃는 표정의 아아젠이 싫 지는 않았는지 곧 다시 마주 웃음을 웃어주었다. 이번에는 아아젠이 먼 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스케, " "응 ? " "아직, 그 두번째 '신나는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어. " 그제서야 이스케는 생각났다는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 아참. 내 정신좀 봐. 그렇지. 두번째 신나는 일은 바로 주인분들의 식사를 가져다 드리러 가는거야. 저택 안으로 들어가볼 수 있는 기회거 든. 그 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니, 너 ? 게다가, 주인마님 방에서 나 는 향수 냄새라던가, 퀴트린님의 방에서 나는 기사 갑옷 냄새는 정말 너 무나 황홀하지--이스케는 그 냄새가 하야덴을 닦을때 사용하는 바스엘드 기름 냄새임을 알지 못했다--그러다가 퀴트린님이 '잘 먹겠어. 아주 맛있 을것 같군.'이라고 한마디라도 하시면 정말 그날은 황홀해서 잠도 못자는 날이 될거야. " 아아젠은 흠칫했다. 그랬다... 퀴트린과 그녀가 둘이서 루우젤을 향해 여행을 할때, 아아젠은 하루에 한번정도 들을 수 있는 바로 그 말을 위 해서 하루 종일을 걸었었다. 그 감정이 자신의 것 만이 아님을 알고 아 아젠은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이스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아직 이것 못 받았지 ? " 이스케가 손에 꺼내 든 것은 푸른 타원형의 원반 위에 하얀 창 모양이 비스듬히 서 있는 상징적 모습의 물건이었다. 크기는 손 바닥 위에 완전 히 올려질 정도였다. "새럿가의 문장이야. 새럿가에서 일을 하게 되면 모두 가지고 있을 수 있게되지... 신참은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미리 받아 두는게 좋 을거야.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거든. 어짜피 받게 되겠지만, 그때 까 지는 내것을 가지고 있도록 해. " 아아젠은 웃음으로 답하며 문장을 받아 들었다. 이스케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잃어버리면 안되는건 알고 있겠지 ? " "응. " 둘은 우물에 도착했다. 커다란 뚜껑 아래에 있는 물은 아주 차고 맑았 다. 우물 자체는 매우 깊었고, 그 주위에도 우물을 지키는 듯한 견습기사 가 두명 서 있었다. 이스케는 그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으며 물을 길었다. 그중 한명의 견습기사가 아아젠에게 말을 걸었다. "못보던 얼굴인데... 새로 왔어 ? " "... 네. " 아아젠이 얼굴을 제대로 쳐들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 다. 그녀가 짧게 대답만 하고 곧장 다시 물을 긷자 이스케가 웃음을 터 뜨렸다. "아아젠, 아직 이 사람 견습기사가 되지 않았어. 모습만 이렇게 하고 있는거지. 존칭 쓸 필요 없고, 그 앞에서 이렇게 수줍어 할 필요 없어. 가루스, 너 아아젠을 향해서 그렇게 음흉하게 웃지 마. 얜 순진한 애야. " 가루스라고 불리운 견습기사--그는 견습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는 기사였다. 경비까지 서고 있는것으로 보아, 곧 견습기사의 자리에 오를정 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듯이 보였다--는 씩 웃었다. "여전히 말이 많군, 이스케. 넌 다 좋은데 그놈의 가벼운 입이 문제야. " "내 입이 어때서. 여자만 보면 우선 침부터 고이는 네 입보단 낫지. " 둘은 꽤 험한--물론, 아아젠이 상상했던 귀족가의 평민들 수준보다 험 했다는 뜻이다. 이 보다 몇배나 더 험하고 심한 말들을 그녀는 십수년동 안 들어왔었다--말을 주고 받았지만 서로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그 가 루스라는 청년은 이스케 대신 우물 속으로 물통을 내렸다가 다시 끌어올 려 이스케와 아아젠의 수고를 덜어 주었다. "아. " 아아젠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가루스는 보란듯이 힘도 들이지 않고 물이 가득 차 꽤 무거울만한 물통을 한 손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와아. 가루스. 완력이 늘었는데. " 이스케가 말하자 가루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입은 견습기사의 화 려한--물론 평민들의 눈의 기준에서 화려한--갑주 안에는 근육으로 덮인 팔이 있을것이라고 아아젠은 생각했다. "건방진 말이지만, 이젠 완력만으로는 웬만한 견습기사님들한테도 지 지 않을걸. " 여기까지 말하고는 가루스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이 스케와 아아젠, 그리고 자신의 동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기회만 주어진다면, 퀴트린님 앞에서 내 힘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퀴트린님도 감탄하실걸. 그렇게 된다면 당장 견습기사 자리까지 는 당장 올라갈 수 있을텐데... 이스케, 힘 좀 써줄 수 없겠니 ? " 이스케는 웃었다. "착각은 너 혼자서 해. 퀴트린님은 아마 그정도 물통은 마법으로 손도 안 대고 끌어 올리실걸 ? 네가 평생 수련을 해도 퀴트린님을 감탄시킬 수는 없을거야.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 아아젠이 이스케에게 너무 심한말이 아니냐고 말을 하려는 순간, 가루 스의 표정이 변했다. "아, 빨리 가 봐. 오늘 이쪽 담당하는 견습기사가 오고 있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 보면 또 혼날거야. 지난번처럼 밤을 새워서 페치 를 일만번 휘두르는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단 말이야. 빨리 가. " 아아젠은 주위에 아무도 오고 있지 않은데 어디에 견습기사가 있다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스케의 손에 이끌려 즉시 우물을 떠났다. 한참을 걸어서 그 장소에서 벗어났을 때, 문득 그녀는 귓가에 말발굽 소 리를 들었다. 아아젠과 이스케가 우물을 떠난 반대쪽으로 견습기사 한명 이 말을 달려서 오고 있었다. 그를 보고 아아젠이 놀란 표정을 짓자 이 스케가 말했다. "가루스는 아마 곧 견습기사가 될거야. 견습기사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힘 센 사람'이 아니야. 기사로서의 육감과 빠르고 재빠른 눈, 그 리고 청각같은 기사들이 갖추어야 할 여러가지 기술들을 가져야 하는거 라고. " 아아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라고 말을 하 긴 했지만 이스케는 속으로 그의 정진과 끊임없는 노력에 감탄해 오고 있었음을 아아젠은 알 수 있었다. 이스케는 아아젠을 바라보며 살짝 웃 었다. "그가 견습기사가 되어 정식으로 페치--하야덴과 비슷한 모양의 물건 이지만 하야덴처럼 날카롭고 화려하지 않은 적당히 만들어진 무기이다. 견습기사 이하의 계급이 사용한다--를 받게 되는 날, 그에게 케이튼(아주 흔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으로 대중적인 꽃. 대개 평민들의 결혼식때 신 부의 치장등에 그 즙이 사용된다.)향을 넣은 레토라르를 만들어 줄거야. 멋지지 않니 ? " 아아젠은 레토라르라는 음식의 이름조차 처음 들어 보았지만, 그녀의 기분을 생각해서 적당히 이스케의 말을 이어 주었다. "레토라르 ? 재료는 어떻게 하려고 ? " "벌써 얼마전 부터 모아두고 있지... 부엌에서 말이야. " 그렇게 말하고는 이스케는 아아젠을 향해 한쪽눈을 찡긋 해 보였다. "이것도 역시 비밀이야, 아아젠. 알았지 ? " "퀴트린 ? " 왕궁의 궁정에서 천천히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고 있던 퀴트린은 자 신을 돌아보는 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살결 만큼이나 새하 얀 예복과 자그마한 황금의 왕관을 쓴 피엔젤 공주가 그의 뒤에 서 있었 다. 그녀의 눈은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 퀴트린은 오른팔을 가슴까지 올리고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했다. 피엔젤 공주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 난듯 손을 흔들어 자신의 주위에 있던 여섯명의 시종들을 모두 물리쳤 다. 시종들이 물러가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피엔젤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형전위의 작위는... 아직 받지 않으셨나요. " "아, 예. 지난번에 받았어야 하는데 그땐 돌아오자 마자 곧 다시 떠나 게 되었죠. 수행 때문이었어요. " 퀴트린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곧 다시 떠나게 되겠죠... " 피엔젤 공주의 말에 퀴트린은 말 없이 미소로 답했다. "무사히 돌아오실거죠 ? " "네. 물론. " 퀴트린은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려 하고 있었다. 우연한 일 때문에 끝마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게 된 짧은 여행이었지만 퀴트린의 마음 속에서는 작은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그 동요가 피엔젤 공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느낄 수 없었지만 퀴트린은 갑자기 피엔젤 공주가 멀리에 있다는 듯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놀라 는 것이었다. 그림으로 그릴 수 없을거예요 나의 사랑은 붓을 들면 화폭엔 눈물만 쏟아질 테니까요 햇살처럼 항상 거기에 있다는것만 기억하세요 당신이 느끼지 못하기를 바래요 나의 사랑은 어느새 루운은 저물고 하늘엔 보석이 박히네요 이 밤이 지나면 난 떠나지만 당신은 여기에 머물러 계세요 어쩌면 내일은 새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쟎아요 나의 사랑대신 짧은 인사말만 놓고 갈께요 그대여 그럼 안녕... 영원히. "어머, 아아젠 ? " 아아젠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입은 취침용 옷과 비 슷한 모양이지만 더 낡아서 그녀의 연륜을 보여주는 이스케가 놀란 표정 으로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아아젠은 우선 급히 눈가에 묻어 있는 눈 물 자욱부터 훔쳐 내었다. "노래를 부른게 너였니 ? 나도 실은 깜짝 놀랐어. 이런 밤중에, 그것도 이렇게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말이야. 너 노래를 썩 잘하는구나 ? " 파야스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것이, 아니 이젠 파야스를 사용할 수 없 게 된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아아젠은 생각했다. 하마터면 음유시인 이라는 것을 들킬뻔 한 것이다.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스케 는 놀랐다는 표정에 반갑다는 표정을 더하여 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노래를 했는데, 응응 ? 너 악기도 다룰 수 있니 ? 테샤아 같은 악기 말이야. 앗, 참. 그렇지. " 테샤아는 파야스와 비슷한 악기였지만, 큰 새 가슴 뼈 같은 길고 적당 히 굽은 뼈를 잘 다듬어서 사용하고, 가죽끈 대신 얇고 강한 실을 사용 해서 만든 악기였다. 전체적으로 파야스보다는 크고, 악기 가격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궁중악사나, 궁중악사 견습생들 정도가 각자의 가격에 알 맞는 테샤아를 사용하곤했다. 물론 음유시인에게 테샤아를 파는 악기상 들은 없었고, 그들이 테샤아를 갖는다는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었 다. 갑자기 놀랐다는 표정을 지은 이스케는 기다리라는 말을 아아젠에게 던지고는 그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어둠속으로 뛰어가 버렸다. 어둠속 의 저택 난간--그 건물은 하인들만이 사용하는 건물이었다. 그녀는 노래 를 부르며 듬성 듬성 아직 침침하게 불이 켜진 주인 집을 바라보며 노래 를 하고 있던 중 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어둠속에서 헉헉거 리며 이스케가 달려왔다. "이것 봐 ! 테샤아야. 어때, 멋지지 않니 ? " 아아젠 역시 테샤아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테샤아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연주할 수 있겠어 ? 나도 조금 배워보고 싶었지만 워낙 게을러서 배 우지 못했어. 응 ? 연주할 수 있으면 딱 한번만 쳐 줘 봐. " 아아젠이 놀란듯이 테샤아를 바라보고 있는것을 보고 이스케는 이상하 다는 듯이 웃었다. "왜그래. 테샤아를 처음 보니 ? 하긴, 내가 갖고 있는것이 이상하게 보 였겠지. 우리 섀럿가의 하인들은 이래서 행복하다니까. 일이 많고 힘이 들지만, 여긴 보상이 무척 좋아. 처음 들어와서 5년을 버틴다는건 무척 힘들지만, 5년을 버티면 하녀장--바로, 오늘 아침 그녀가 말한 '늙은 여 우'중 하나였으리라고 아아젠은 상상했다--이 원하는 선물을 하나씩 사 줘. 이게 내가 선택한 선물이지. 지금은 방 구석에서 장식품으로만 쓰고 있지만 말이야. " 아아젠은 천천히 손을 뻗어 테샤아를 받아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 졌다. 이걸 한번 퉁기면 파야스에서 듣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 름다운 소리가 나올테지--하고 아아젠은 생각했다. 이스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불렀던 노래는 뭐였니 ? 우리 섀럿가 하녀들은 노래를 많이 알 지 못해. 우리도 다른 귀족집 하인들처럼 평민들 술집에 가서 음유시인 들이 부르는 노래도 들어보고 그러고 싶은데, 만약 그러다 들키면 많이 혼나지. 행실이 나쁘다고 하녀장이 내쫓을지도 모르거든. 그렇지만 참 아 름다운 노래였어. 다시한번 들려줄래 ? " 네가 다른 귀족집안 하녀였다고 하더라도 아마 못들어본 노래였을거야 --라고 아아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노래는 아아젠이 만들어 낸 노 래였기 때문이다. 음유시인들은 죽을때까지 몇곡정도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한다. 무척 힘이 드는 일이긴 했지만 그런 음유시인들은 다른 음유시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는 등의 선생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었다. 아아젠은 그 노래가 처음 만들어 본 노래였다. 바라 보아서는 안될 사람을 바라보며 만든 노래이기 때문에 아아젠은 이 노래를 부를때마다 목이 메었다. "나... " "응응. " 아아젠이 입을 열자 이스케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 서 연주해 보라고 아아젠에게 말하고 있었다. "미안. 연주는 못해. " 아아젠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이스케는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안간 그녀는 무릎위에 비스듬히 테샤아를 기대 얹고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아아젠의 손을 덥썩 잡아 들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연주를 못... 아 ! " 그녀는 깜짝 놀라서 아아젠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손 등에서 보아서 는 아름답고 긴 그녀의 손은 놀랍게도 그 안쪽은 채찍으로 맞아서 문드 러진것 처럼 검붉게 엉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손이라면 연주는 커녕 감각을 느끼는것도 힘들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그래도, 집안 일은 할 수 있어. " 아아젠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스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아냐. 그런 뜻이 아니야. 하지만 네 손, 어떻게 된거야 ? " 아아젠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절대로 그녀에게 말 할 수 없었다. 문득 얼마전, 이미 자신의 생명이 되어버린 어떤 기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좋다. 한달간 하녀로 일하는 것을 허락한다. 네 계급은 그동안 평민으 로 해 놓겠다. 네가 그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좋다. 단지, ...어떤 중요한 일 때문에 나는 급히 퓨론사즈로 돌아가야 한다. 말 을 타고 갈 것이다.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있다면 집에 있어도 좋다는 조 건이다. " 아아젠이 퓨론사즈까지 그를 따라 말을 달리는 도중 그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이 말을 타는 기사이기 때문에 그랬을까 ? 아니면 그정도도 말을 타지 못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 아니면 역시 그녀가 따라오던 못 따라오던 그와는 관계없기 때문이었을까 ?--세번째 가 이유였을것이라고 아아젠은 생각하고 있었다--어떠한 고통이 있었어 도 그녀는 아픈 표정 한번 짓지 않았다... 고삐를 움켜 쥔 손에 감각이 사라지고, 또 거기에서 오랜 시간이 흘러 악기를 연주할 수 없는 음유시 인이 될때까지 말이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순백색 전투복. 곧 피와 땀으로 더럽혀질 옷 이었 지만 나이트 라벨은 펜플에 구김 하나가 가는것도 신경을 쓰며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태양은 어느새 높이도 떠올라 천정까지 한시간도 남겨놓고 있지 않았다. 라벨은 고개를 숙였다. '역시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일까. ' 라벨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북동쪽으로 길게 뻗은 길 모퉁이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정렬해서 서 있는 열 두명의 기사와 1백3십명 가량의 견습기사, 그리고 다시 7백여명의 전사--'전사'라는 계급은 기사 들 사이에서 편의상 사용하는 계급이었다. 그들은 견습기사가 되지 못한 기사들로, 견습기사를 꿈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계급이었다. 일반적 의 미의 '보병'이었지만 어떤 작위를 받은 기사에 직접 소속된 '전사'는 이 나바뉴 왕궁에 소속된 직접 군인인 '보병'과는 달리 견습기사를 목표로 전투술을 익히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병보다는 훨씬 높은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 하나가 이끄는 전투 부대를 '기사단'이라 고 칭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들이 숨을 죽인 채 자신들이 받드는 단 한명의 '나이트(작위를 받은 기사)'이자 그들의 바스엘드{{ ) 1천기 정도 이상급의 기사단의 지휘관. }}인나이트 라벨의입에서 출정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스엘드'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하야덴을 손질할때 사용하는 기름을 바스엘드라고 하고, 또한 어떤 기사단의 지휘관을 바스엘드라고 하기도 했다. 그 유래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바스엘드라는 말 자체가 사용되기 시작한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라벨이 한숨을 한번 내 쉬자, 그의 부관인 루델(그는 작위가 없는 기사 였다)이 말머리를 돌려 라벨에게 다가왔다. "라벨님. 안 오실 모양입니다. " 라벨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실망한 듯 한 표정을 짓자, 루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실 걱정하실지도 모른다고 출정 날짜를 가르쳐 주지 않은 분은 바로 라벨님이셨쟎습니까. " 라벨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북동쪽 길 모 퉁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 라벨의 눈썹 사이가 조금 찌푸려졌다. "라벨님, 시간이... " "잠깐만. " 라벨은 눈으로 모퉁이를 응시하며 손만 들어 루델을 저지했다. 그리고 나서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루델은 모퉁이쪽으로 다가오는 말이 몇마 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서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는 이제 다가오는 말이 세마리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라벨이 입을 열었다. "아냐... 그 분이 아냐. " 라벨이 한숨을 내쉬자 루델은 더욱 귀를 기울였다. 말 발굽소리는 우 아하고 부드러웠다. 경쾌하고 명랑한, 라벨이 기다리는 그 사람의 발굽소 리가 아니었다. 모퉁이를 돌아 오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어느 귀족집안 의 귀부인들이리라 하고 루델은 생각했다. 루델이 다시 눈을 들어 모퉁이 쪽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천천히 그 발 굽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색 기운이 은은하게 섞인 새하얀 예복. 슈샤헨으로 기품있게 장식된 옷차림으로 우아하게 말에 앉아 있는 귀족집안 소녀와 시종인듯이 보이는 두명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라 벨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젠 ? " 루델은 깜짝 놀라 라벨을 바라보았다. 라벨의 표정은 놀라움에서 반가 움으로 변해하고 있었다. "레젠 ! " 라벨의 눈이 틀릴리는 없었다. 루델은 급히 뒤로 돌아서서 하야덴을 뽑아 위로 치켜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기사단 8백여명의 함 성이 터져나왔다. 라벨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레젠에게로 달려갔다. 다 른때 같았으면 역시 휙 하고는 뛰어내려 라벨을 향해 마주 뛰어왔을 레 젠이지만 오늘은 어쩐일인지 두명의 시종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지금 그녀는 라카이드 집안의 훌륭한 딸 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라벨을 바라보았다. 여느때 같으면 장난 기로 반짝 거렸을 그녀의 눈은 깊고 그윽했다. 라벨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라벨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땅을 향해 있었다. "레젠님의 카발리에로, 옐리어스 나이트 라벨이 인사드립니다. " 그녀는 허리를 굽히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세요. " 라벨은 일어서서 멋적은듯한 웃음을 지었다. 더욱 더 커다란 함성이 라벨이 이끄는 라벨의 기사단에서 터져나왔다--우리의 바스엘드와 그의 공주님께 영광을--그들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 라벨이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레젠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하더니 손 을 올려 머리에 쓴 커다란 챙의 모자에서 하얀색 깃털 장식을 뽑아냈다. 따라왔던 두명의 시종들이 그녀를 도와주려 했지만 그녀는 혼자서 깃털 을 손에 쥐었다. 백색의 장갑으로 손을 감싼 그녀의 동작은 매우 아름다 왔다--레젠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라벨은 새삼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녀는 천천히 장식 깃털을 든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세요. 당신을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축복은 해 줄 수 있겠지요. " 라벨은 손을 내밀어 깃털을 받고는, 그의 베락스--나이트 라벨의 하야 덴--와 검집 사이에 그 깃털을 꽂아 넣었다. 라벨이 레젠을 바라보자 그 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 무사히 돌아오실거죠 ? " "물론입니다. " 라벨이 말을 마치자 레젠은 천천히 옆으로 돌아서 라벨의 기사단을 향 해서 섰다. "나이트 라벨은, 여러분들의 바스엘드이겠지만, 제게 있어서는 소중한 카발리에로예요. 그가 다치지 않고 영광스러운 소식을 가지고 올 수 있 도록... 여러분께서 지켜 주세요. " 그녀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함성으 로 하늘이 무너질 듯 했다. 8백여기의 기사단의 함성과 말발굽소리... 하 늘을 향해 솟아있는 그들의 하야덴과 리첼반. 그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 다. "...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기사단의 함성속에서 라벨이 레젠을 바라보며 말하자 레젠도 라벨을 마주 바라보았다. 레젠이 이렇게 작고 연약했던가. 라벨이 그렇게 생각했 을때 레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발리에로를 전장으로 보낼 준비가 끝난 것이다. 라벨은 나는듯이 뛰어 말 위로 올라갔다. 그가 하야덴을 꺼내 들 었다. "출정이다 ! " 나이트 라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그의 기 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벨은 하야덴을 하늘 위로 치켜든 채 본대 와 합류하기로 한 왕궁을 향하여 말머리를 돌렸다. "야, 라벨 ! " 라벨은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레젠이 그를 향해 서 있었다. 보 통의 사람들이라면 말발굽소리와 함성소리에 묻혀 듣지 못할 목소리였지 만, 라벨은 기사였기 때문에 귀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밝았다. "다쳐서 돌아오면 셀큐러스 강에 던져버릴거야 ! " 그녀는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라벨에게 외쳤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군... 라벨은 싱긋 웃고는 말 고삐를 움켜 쥐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149, 옐리어스 나이트 라벨의 8백여기의 정예 기사단 이 왕궁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아펠르력 643년, 그들의 함성이 하늘을 덮고, 그 하늘 끝까지 구름이 흘러가는 어느 맑은 가을날 이었다. 간신히 식기를 다 씻어 놓고 큰 그릇들부터 차례차례로 정리를 시작하 려던 아아젠은 누군가가 갑자기 손으로 어깨를 짚자 깜짝 놀랐다. "이스케 !" 이스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아젠 뒤에 서 있었다. "놀랐니 ? " "으응, 그렇게 갑자기 다가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쟎아. "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도와줄께. " 아아젠이 조금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자 이스케는 익숙한 솜씨로 식기 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개 식기의 물기를 제거하고 반듯하게 옆으로 쌓아 놓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점심 먹고, 모두 앞 뜰에 모이래. 알고 있니 ? " "아니, 몰랐어. " 자연스럽게 물에 담겨진 그릇들에 가까이에 있던 아아젠이 식기의 물 기를 제거하고 이스케는 그것을 건네받아 정리하기 시작하던 참 이었다. "퀴트린님이 돌아오시자 마자 출정하신대. " 아아젠은 흠칫 하고 놀랐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았다. 출정... 전쟁에 참가한다는 말 이었다. 아직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녀 역시 전쟁이라는 것이 난잡하고 잔인한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출정하기전에, 식구들을 모두 모아놓고 얼굴을 보신 다음 가실거야, 아마... 아직 퀴트린님은 카발리에로가 아니니까. " 출정을 하기 전, 카발리에로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귀부인에게 출정의 허락을 받는 예식을 한다. 대부분의 기사는 단신의 몸으로 귀부인에게 출정 허락을 받지만, 자신의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 기사는 자신이 이끌 기사단을 정렬시킨채 허락을 받는 의식을 진행한다--나이트 라벨의 의식 이 그러한 것이었다--또한, 그런 의식을 하기 전, 가족들과 하인을 모아 놓고 출정을 알리는 형식의 예식을 진행하곤 하였다. 아아젠은 대꾸 없이 그릇의 물기를 제거하는 손만 놀리고 있었다. 이 스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뭐 하긴, 이번 전쟁이 끝나면 카발리에로가 되시겠지... 멋지지 않니 ? 퀴트린님이 왕녀님의 카발리에로가 될거란 말이야. " '아... ' 불현듯 그녀는 아슈벨의 늪에서 자신이 상상한 것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피엔젤 왕녀... 퀴트린은 아직 그녀가 멀리서 모습조차 보지 못했 던 그 왕녀의 카발리에로가 될 사람이었던 것이다. '역시 바보같은 생각이야. 내가 무슨 생각을... ' 아아젠이 문득 생각에서 빠져나왔을때 그녀는 이미 마지막 그릇을 닦 고 있었다. 이스케는 아아젠이 다른 생각을 하는동안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 참 바보같은 생각이지. 퀴트린님이 전쟁에서 상처를 입을 분이 아 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전쟁을 나가실때는 불안해. 하지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거야. 퀴트린님이 떠나시는 날엔 늙은 여우들중 몇몇은 눈물까지 흘리곤 하니까 말야. " 그렇지... 전쟁터는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곳이지... 하고 아아젠은 생각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스케, 그럼 전쟁중엔 누가 퀴트린님의 식사를 만들게 되지 ? " "아, 그건 왕궁 요리사들이 파견되어가서 만들어. 그리고 우리들중 요 리를 만드는 사람이 한명 거기에 가게 되지... 그 사람은 물론 양념정도 로 맛만 보기 위해서 가는거야. 꼭 한사람... 대개 남자가 가지. 누가 갈 지는 퀴트린님이 결정하실거야. 이따가 하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이야. 정하시지 않으면 하녀장 맘대로겠지만. 왜 ? " 아아젠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 려 이스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이스케, 부탁이 있어. " 이스케는 갑자기 아아젠이 진지한 표정이 되자 놀란 모양이었다. "뭔데 그래 ? " 셀큐러스 강. '이나바뉴의 젖줄'이라 불리우는 셀큐러스강은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북동쪽으로 길게 뻗으며 이나바뉴의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었 다. 이나바뉴의 여러 주요 도시들이 이 셀큐러스강을 따라 선재해 있었 다. 이나바뉴의 수도인 퓨론사즈를 시작으로 파이센, 큐파, 헤라인드등의 거대한 상업도시나 공업도시들이 그것이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6, 나이트 섀럿의 저택은 퓨론사즈의 '이니아의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왕궁을 제외하고는 위치상 가장 높은곳에 있는 저택이었다. 그는 뮤젠 집안의 둘째딸인 다엘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자, 그의 방을 그의 집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정했다. 셀큐러스 강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셀큐러스 강은 그 커다란 크기에도 절대 급히 흐르 지 않았고, 피로네사{{) 여섯번째 달.}}와에이큐런{{) 일곱번째 달.}} 내내 비 가 내리는 일이 있어도 결코 넘치지 않았다. 그만큼 깊고, 풍부한 수량을 가지고 있는 강이었다. 나이트 섀럿은 그의 아들에게 셀큐러스강의 위엄과 권위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의 아명(어릴적 이름)을 레이피엘이라고 정한것도 그런 의미에서 였다. '레이피엘... ? ' 퀴트린은 마치 성의 망루와도 같이 높은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통해 (그의 창은 한쪽 벽의 중간을 완전히 뜯어내 만든 창 이었다. 그래서 저 녁 무렵엔 셀큐러스강에 반사된 석양이 그의 방을 가득 메우곤 했다.) 셀 큐러스 강을 바라보고 있던 참 이었다. 회색 슈샤헨으로 가득 장식된 밝 은 색채의 그의 방은 기사라기보다는 귀족집안 어린아이의 방 같았다. 간혹 퀴트린은 자신의 방 한가운데에서 하야덴을 휘두르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물론 그에게는 혼자만의 연습실과, 옥상을 개조한 격투장도 있 었다--그의 방은 아버지인 섀럿경의 방과는 달리 고급 바스엘드 기름 냄 새로 가득했다. '레이피엘이라고... ' 퀴트린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어릴적 이름을 불러보고 있었다. '레이피 엘'은 이나바뉴를 만들었다는 사타루스의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었다. 신화에는 레이피엘이 가슴속에는 정열과 진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입으로 는 안정과 정의를 이야기하는 신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사타루스의 아내인 쥬르를 사랑한 아펠르의 둘째아들 케켄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 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사타루스가 케켄을 바위로만 덮인 거친 엘핀랜드의 동남쪽 구석으로 몰아낼때, 사타루스의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이 바로 레이피엘이었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결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그 깊은 곳에서 물의 끓어오름이 있는, 셀큐러스강과 레이피엘이 닮은점이었다. '레이피엘은 이상을 가지고, 현실을 이야기 한 신이었다. ' 물론 나이트 섀럿이 그의 이름을 지을때에는 전혀 그런 사실을 고려하 지는 않았다. 신화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레이피엘의 용맹과, 불의를 조금 도 용서하지 않는--겉으로는--그의 상징적인 성격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 이었다. 그러나 문득 지금의 퀴트린은 자신의 이름 속에 숨어있던 이중 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퀴트린이 20년이 넘은 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마음속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을때는 없었다. 그는 최고의 기사가 되기를 원했고, 기사대장 아 켈로르처럼, 아니 위대한 나이트 데로스처럼 용맹과 지혜로 역사 속에 기억되기만을 원했었다. 그가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뿐 이었고, 그 어 떤것도 자신을 속박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퀴트린은 달 랐다. '아켈로르님이 말씀하시려고 했던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는 알 수 있 겠군... ' 퀴트린은 자신의 여행이 미완성인 채 끝난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마 아켈로르도 이렇게 의문만을 가진 채 퀴트린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것이다. 퀴트린이 문득 고개를 들려 자신이 입고 나갈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과 갑옷을 바라보려던 순간, 누군가 밑층에서 자신의 방 으로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이른 점심식사를 방금 끝냈으 니, 아마도 슈렐린 차를 가지고 하녀가 올라오리라. 하지만 계단을 밟는 발 소리는 언제나 자신의 차를 가지고 오던 하녀들의 익숙한 소리가 아 니었다. 퀴트린이 고개만 돌린 채 자신의 방문을 응시하고 잠시의 시간 이 지나자, 그 발소리는 퀴트린의 방 바로 앞에 멈추더니 문을 두르렸다. "들어 와. " 퀴트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곧 문이 열였다. 어설프지만 하녀복장 을 입은, 역시 어설프만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못보 던 하녀가 서 있었다. 슈렐린 차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있기 보다는 파야 스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모습이 더 어울릴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여기에 와서는 처음 보는군. " 아아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퀴트린이 한쪽 구석에 있는 레쥰드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키자 그녀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슈렐 린을 내려놓았다. "하녀 생활은 어때. 원하던 일인가 ? " 아아젠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원하던 일입니다. 더 없이 행복합니다. " 퀴트린은 이정도의 대화로 말을 끝내려 했다. 슈렐린 차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피어 올라왔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 퀴트린은 슈렐린 차를 집어 든 채 아아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 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역시 그녀는 음유시인이어야 하는걸까. 그러 면서 퀴트린은 그녀의 모습에서 어딘가 본 듯한 이미지가 떠오르는것을 느꼈다. 아주 평민적인것.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는 않았기 때문에 퀴트린 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전쟁에 데리고 가 주실수는 없나요 ? " 퀴트린의 눈썹 사이가 조금 찡그려졌다. "전쟁에 ? " 아아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 나를 수행하는 하녀로 말인가 ? " 아아젠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부탁이 무리란것은 그 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퀴트린은 그녀를 보았을때 자신을 스쳐 간 영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 전장은 내가 전에 갔었던 수행과는 많이 다르다. " 그렇게 말하고나서 잠시후 퀴트린의 입가에는 보일듯 말듯 한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아아젠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을 보 지는 못했다. "물러가라. " 퀴트린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손에 슈렐린 차를 든 채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아아젠은 그의 뒤에서 깊숙히 인사를 한 후 뒷걸음 쳐 서 멀어져갔다. 그녀가 되도록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문을 닫 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퀴트린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그의 눈은 멀리, 꿈결처럼 얼마전 보았던 어떤 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 것은 커다란 강 이었다. 셀큐러스강 만큼이나 커다랗지만, 멀리에 있다는 이유로 알려져 있지 않은, 셀큐러스강 처럼 궁중음악의 소재가 되지는 못하지만 평민들 사이에서 불리우는 천한 노랫 가사에는 가끔 등장하는, 그 강을 건넜던 수 많은 기사들을 희생시킨 아픔을 가지고 있는, 퀴트린 의 정리되지 않는 마음 속에서 어렴풋이 이미지로만 그려져 있는 그런 강 이었다. 퀴트린은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녀는 로냐프 강을 닮았어. ' 이스케의 말은 정확했다. 우스꽝스럽게도 퀴트린이 엘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을 입고 집안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물을 흘리는 늙 은 하녀들이 보였던것이다. 하지만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도 콧 등이 시큰해져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점 이었다. '내가... 감히 퀴트린님의 출정을 슬퍼할 수 있는 존재인가. ' 아아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발 아래를 바라보는 순간, 무엇인지 툭 하며 자신의 바로 옆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었다. "이스케... ? " 이스케의 표정은 눈물을 참느라고 조금 일그러져있었지만, 그녀의 눈 에서는 커다른 방울로 맺힌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아아젠은 부 드럽게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스케가 작은 목소리 로 말했다. "... 고마워. 아아젠. " 퀴트린은 저택의 문 앞에 있는 작은 광장의 단상 위에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방금 아버지인 섀럿경과 어머니께는 출정허락을 받고 나왔고, 지 금 이 자리에는 집에서 일하는 하녀들과 하인들이 모여있는 자리였다. 문 밖에는 퀴트린의 기사단이 모여서 자신들의 바스엘드가 나와 출정 명 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 그리 길게 이야기 할 필요도 없고 시간도 많지 않기 때문에 이야 기는 여기에서 끝내겠다. 모두들, 아버님과 어머님을 부탁한다. " 퀴트린의 인사는 짧고 간결했다. 그의 목소리는 전쟁에의 투지로 떨리 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눈은 벌써 피바다의 전장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 른다고 아아젠은 생각했다. 퀴트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하인을 가운데 이번 전쟁을 수행할 사람을 지적해 주겠 다. " 귀족이나 기사가 자신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들의 이름을 기억한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하녀장 정도의 이름 만 알고 있을 뿐 이었다. 퀴트린도 마찬가지였다. 퀴트린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앗. ' 아아젠은 깜작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퀴트린의 손은 정 확히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명이다. " 퀴트린은 말을 마치고 휙 돌아서서 정문 앞에, 자신의 견습기사가 데 리고 있는 말 쪽으로 걸어갔다. 주위에서 퀴트린에게 인사를 하거나 그 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 이스케. 믿을 수 있니 ? 너하고 내가 뽑혔어. " 이스케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된거니 ? 나도 믿지 못하겠어... " "기쁘지 않아 ? " 아아젠이 묻자 이스케는 아아젠의 손을 꽉 잡았다. "기쁘지 않을리가 있니 ! 퀴트린님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 " 아아젠이 웃는 낯으로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무서운 하녀장의 목소 리가 들렸다. "이스케. 그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있니 ? 당장 가서 네 짐을 챙기 고 떠나도록 해라. 섀럿가의 문장은 절대 빠뜨리지 않도록 하고. 섀럿가 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라. " 역시 수십년을 이 저택에서 지낸 하녀다왔다. 퀴트린이 경험이 없는 하녀들을 지적한것이 놀랍기는 했지만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이스 케와 아아젠에게 짧은 시간동안 그녀들이 퀴트린을 수행하는동안 행동해 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바깥에서 퀴트린의 기사단, 1천 4백여기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곧 출정을 할 모양이었다. 5. 하라데스 전투 "포위망이 무너진다 ! " 포위망이 무너진다고... 나이트 쥬는 이를 악물었다. 옐리어스 나이트가 이끄는 기사단이 이렇게 무력하다니... 그가 하야덴으로 다시 한명의 기사를 쓰러뜨렸을때였다. 수라도같은 전장 한가운데를 달려 쥬에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쥬는 순간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느낄 수 있었다. '놈이다. ' {{하얀 로냐프 강 ------------------------------------------------------------------ }}{{ }}{{ 5. 하라데스 전투 ------------------------------------------------------------------ }} 5. 하라데스 전투 하라데스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중앙 분지에 커 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황토의 하라데스 사막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하 라데스 사막과 필로폰 강 사이에 있는 하라데스 평야였다. (흔히 하라데 스라고 말하면 그 평야를 이야기한다) 이 하라데스 지방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도 아니었고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적 요지도 아니었다. 단지 1, 2차 천신전쟁때 전투가 시작된 곳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이고 상 징적인 의미를 가질 뿐 이었다. 현재 하라데스는 다시 둘로 나뉘어져 필 로폰 강과 하라데스 평야의 일부는 이나바뉴에, 그 나머지 하라데스 평 야와 하라데스 사막은 크실에 속해 있었다. 이나바뉴와 크실의 접경에 또 하나의 군사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 는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바로 체렌 평원이었다. 2차 천신전쟁때 위대한 나이트 져런스타르가 이끄는 이나바뉴 기사단이 크실의 대군을 패퇴시키 고 전쟁을 마무리 지은 곳이었다. 이곳은 평원이긴 하지만 밤 부터 아침 늦게까지 짙은 안개가 끼는 곳이었고, 나이트 져런스타르는 그 안개를 이용하여 크실을 공격했다고 전해진다. 하라데스 평야의 일부가 바로 이 체렌 평원으로 이어지는데, 하라데스 지방을 우회하여 흐르는 필로폰 강 이 꺾이어져 다시 체렌 평원과 만나는 곳이 바로 이나바뉴와 로젠다로의 국경이었다. 하라데스 평야와 체렌 평원은 이렇듯 이어져 있기 때문에 양쪽에서의 움직임을 역시 양쪽에서 관찰 할 수 있었다. 체렌 평원과 하 라데스 평야의 안개가 없었다면 이 장소는 서로에게 전투를 하기는 매우 부적합한 장소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말 위에서 안개속으로 다가오고 있는 적군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이 나바뉴 바스크 17, 옐리어스나이트 하이파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나이트 쥬에게 말했다. "첫번째 전투. 어떻게 해서든 이 전투를 이겨야 해. " 이나바뉴 바스크 38, 옐리어스 나이트 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어째서 저런 대군으로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 하이파나는 대답대신 애프러더를 뽑아 왼손에 쥐었다. 그는 유명한 애 프러더의 달인이었다. 매우 어려운 전투를 단 한발의 애프러더로 적장의 심상을 뚫어 전세를 역전시킨적도 많았다. 애프더러는 이나바뉴 최고의 실력자였고, 하야덴 역시 이나바뉴의 최고수준으로 꼽히고 있었다. 옐리 어스 나이트 바스크 2인 그가 선발대로 온 것만 보더라도 이나바뉴는 이 전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 실은 나도 아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네. 안개속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뚫어보고 있다는 저 느낌도 싫고... 어쨌든 우선은 정면으로 부 딪혀 봐야지. 그들의 힘을 우선 알아야 하니까. " 그들은 크실의 작전에 빠져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 빠져든다 해도 탈출할 구멍이 있는 작전은 그들에겐 작전이 아니었다. 나이트 하 이파나와 나이트 쥬가 둘이서도 뚫지 못할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일 단 계산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옐리어스 나이트라는 기사들은 실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강한 존재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나이트 하이파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것을 보 며 나이트 쥬가 입을 열었다. 아직 나이트 하이파나는 아무런 명령도 내 리지 않았고, 그것은 나이트 쥬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하라데스를 지키고 있었던 이나바뉴 동방원정대가 15만. 나이트 쥬 가 이끄는 중앙 기사단의 하라데스 원정대의 선봉이 4만. 그중 현재 이 하라데스 평야에 서 있는것은 2만 뿐이었다. "... 14만이 모두 움직이는 걸까요 ? " "그렇게 무모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네. 하지만 10만은 되는것 같군. " 안개속에서,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이나바뉴의 기사단을 향해 천천히 전 진해 오는 크실의 대군을 보며 나이트 쥬는 하야덴을 불끈 움켜쥐었다. "싸우는 척 하고 후퇴하는것이 좋겠습니다. 숫적으로 너무 불리합니다. " 나이트 하이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모한건 저쪽도 마찬가지이군. 기본적인 전투 방식을 완전히 무시한 거야. " 전통적인 전술에서는 우선 적은 숫자의 군사로 적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탐색전을 하기 마련이었다. 나이트 하이파나는 당연히 적도 그렇게 나오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기사단과 나이트 쥬의 기사단을 포함한 2만 기만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서서히 크실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격명령을 내리면 순식간에 쌍방의 기사단이 맞붙을정도의 거리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나 이트 하이파나가 입을 열었다. "좋다. 싸우는 척 하고 후퇴한다. 지금쯤은 저쪽도 우리가 숫적으로 열 세라는 것을 알고 있을것이다. 나이트 쥬, " "예. " 나이트 하이파나가 말을 이었다. 눈은 여전히 크실의 기사단을 응시하 고 있는 채 였다. "먼저 후퇴한다. 내가 뒤를 맡도록 하지. " "집결지는 하라데스 성입니까 ? " 하이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 나이트 쥬가 말머리를 돌리고 하야덴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조용히 퇴 각명령을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하이파나는 하야덴을 뽑아 들었다. "1진, 돌격 ! " 나이트 하이파나의 2천2백여기의 정예 기사단을 앞세우고 이나바뉴 중 앙 기사단 하라데스 원정대의 선봉이 안개속의 크실을 향해 돌격하기 시 작했다. 나이트 하이파나의 외침은 하라데스 전투의 시작을 알린 외침이 었다. 퇴각을 하면서도 나이트 쥬는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크실은 우리가 싸우는 척 하고 후퇴한다는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놓아줄 수가 있나 ? 10만이나 되는 숫자를 가지고 ? 그렇다면 역시 10만기의 기사단으로 탐색전을 한 셈인가 ? ' 하지만 탐색전으로 생각하기에도 크실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숫자였기 때문에 이나바뉴 기사단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 고, 또한 그것은--알 수 없게도--크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하라데스성으로 들어가 다시 본군인 동방원정대와 합세하자. ' 나이트 쥬가 하이파나가 자신의 후방에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다 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반대편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 리가 들리기 시작한것이다. 그는 급히 자신의 기사단에 속해있는 기사를 불렀다. "엘파켄 ! " "예 ! " 엘파켄--그는 나이트 쥬의 기사단에 속한 기사명이 없는 기사였다--은 나이트 쥬의 바로 뒤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하이파나님께 알려라 ! 퇴각의 전방에 적이 나타났다 ! " 이 말은 놀라운 말이었다. 적의 함정에 빠져들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 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마치자 마자 쥬는 다른 기사를 불렀다. "에덴하보트 ! " "예 ! " 나이트 쥬의 등 뒤에서 달리고 있던 또 한명의 기사가 대답했다. "전방을 맡아라. 널 믿겠다. " "알겠습니다. " 에덴하보트는 곧 기사명을 받을만한 실력을 가진 기사로, 나이트 쥬의 기사단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과 통솔력을 갖추고 있었다. 앞에 어떠한 적이 나타나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일단 나이트 쥬는 에덴하보트를 앞 세운 것이다. 협공을 당한다는것은 전술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상항이 된다. 적은 전방에서만 공격과 방어를 수행하지만 아군은 전후방 모두에 있어 공격 과 방어를 해야한다. 적의 숫자가 두배로 불려져 느껴지는 것이 협공을 당하는 상황이다. 더욱이 이렇게 이동하는 중의 협공이라면 갑작스레 선 두가 멈추어 서게 되었을 경우 아군끼리 충돌하게되는 위험과 혼란도 따 르게 되었다. 나이트 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최선의 방법은 돌파다. ' 나이트 쥬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진 속도를 늦추었다. 일단 선두를 에 덴하보트를 선두에 두었으니 멈추거나 밀리지는 않을것이다. 나이트 하 이파나는 엘파켄의 연락을 받았으니 아마 상황에 대처할 준비--10만의 기사단을 맞아 싸우는--를 하고 있을것이다. 그렇다면 나이트 쥬가 해야 할 일은 기사단의 허리에서 머리와 꼬리의 충돌이 없도록 하면서 상황을 보아 돌파할 수 있는 쪽으로 기사단의 공격력을 집중시켜야 하는것이다. 대단히 정확하면서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전방의 적은 얼마인가... 4만 ? 5만 ? ' 그제서야 나이트 쥬는 지금 선발대가 맞서 싸우고 있는 크실의 군대는 하라데스 사막에 집결 해 있던 크실의 전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발대를 전멸시킬 생각이군. 무서운 놈들. ' 이렇게되면 그래도 비교적 약한곳은 전진을 하고 있는 앞부분이 된다. 나이트 쥬가 돌격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느 낌이 틀렸던걸까. 5만정도로만 예상을 하고 있던 적의 숫자가 지금은 7, 8만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접근해 오는 속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아차. 적이 전속력으로 돌격해 오고 있구나. 앞 뒤로 기사단이 길게 늘어 선 것이다. 이놈의 안개... 이 안개때문이다. ' 짙은 안개가 나이트 쥬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귀로, 그 리고 느낌으로만 상황을 판단해야 했다. 하지만 판단을 번복하기에는 너 무 늦었다. 적의 전진 속도는 나이트 쥬의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인가. 하라데스에 집결 해 있던 크실의 군대는 15만기가 아니었던가 ? 이 숫자는 8만... 아니... 9만은 족히 될 것이다. ' 실패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겠구나라는 생각을 나이트 쥬가 한 순간, 그의 시선은 전방의 훨씬 앞에 꽂혔다. "..... ! " 적의 맨 선두에 압도적으로 빠른 속력으로 기사 한명이 단신으로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나이트 쥬는 입술을 깨물었다. "돌격 ! 탈출구를 찾아라 ! " 나이트 쥬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나바뉴 기사단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 해 들어갔다. 선두에 서 있던 기사들은 기마 돌격용 리첼반--창--을 꺼 내들었다. 맨 선두에 서 있던 에덴하보트는 리첼반 대신 하야덴을 뽑았 다. 적 가운데에서 튀어나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에덴하보트 역 시 전속력으로 그 기사를 향해 달려나갔다. '굉장한 위압감이군... ' 조금의 흔들림 없이 이쪽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오는 크실의 기사를 보 며 에덴하보트는 움찔했다. 말 등에서 몸을 숙이고 긴 하야덴--그 크실 의 기사가 들고있는 하야덴은 보통 보아오던 하야덴보다 훨씬 길었다-- 을 비스듬히 앞으로 향한 채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에 양 기사단의 선두에 튀어나와 있던 두명의 기사가 맞붙었다. 강한 파찰음과 함께 일격을 교환한 후, 에덴하보트는 움찔했다. 그의 하야덴에서 전해져 오는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평생의 동 경의 대상이었던 바스엘드 나이트 쥬의 혼신의 일격을 받은것 같은 착각 이 들었다. 에덴하보트가 그 기사를 바라보았다. 온 몸을 눈만 남기고는 모두 검은색 갑옷으로 감싸고 있는 기사였다. 그 기사의 입에서 낮은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 꺼져라. " 눈 깜짝 할 새에 그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이 에덴하보트의 왼쪽 어깨로 다가왔다. 막을 시간이 없었다. 그정도 힘에 이정도 속력이라니... 에덴하보트는 자신의 하야덴으로 어깨를 방어하기 보다는 그 검은 갑옷 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적이다. 이런 기사가 크실에 있었다니... 에덴하보트의 수준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모습을 그는 그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서 느꼈다. 검은 갑옷. '아, 검은 갑옷이다. ' 그 순간 에덴하보트의 머릿속에는 얼마전 쥬렌다스 전투에서 나이트 카사드렛의 목을 단 한번 하야덴을 휘둘러 떨어뜨렸다던 그 검은 갑옷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어떻게 된걸까. 이 검은 갑옷의 기사가 바로 그 기사인가 ? 그는... 그 는 여기에서 말을 달려 사흘은 걸리는 거리의 로젠다로에 있던것이 아니 었던가 ? ' 이런 실력의 기사가 크실에 두명이나 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에덴하보트는 죽음의 순간까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로젠다로의 수도를 멸하고 또 곧장 이리로 달려왔다 는 건가 ? 정말 믿을 수 없어... 악마의, 케켄의 힘의 수호를 받고 있는 기사단이다... ' 에덴하보트의 생각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미처 하야덴을 들어 방어를 하지 못한 채 에덴하보트의 몸은 왼쪽 어깨에서 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직선으로 그어지며 둘로 나뉘어졌다. "샤란드 ! 후방을 엄호해라 ! " "옛 ! " 나이트 하이파나의 명령에 샤란드가 말을 뒤쪽으로 돌렸다. 그와 함께 그가 이끄는 기사단 3백여기도 모두 뒤로 돌아섰다. 선두의 돌파보다 후 방을 공격당하는 것이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 후방을 보호하는것이다. 크실은 강하다. 나이트 하이파나는 공포가 자신을 엄습해 오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진 속도가 눈에 띄게 늦춰진 것이다. 나이트 쥬가 이끌고 있는데... 그 용맹한 나이트 쥬도 뚫지 못할 정도 로 전방의 적이 강력하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앞쪽을 바라볼 때였 다. 앞과 뒤를 오가며--엘파켄의 기마는 최고 수준이었다--연락을 전하 던 엘파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하이파나님, 에덴하보트가 전사했습니다 ! " "에덴하보트가 ? " 에덴하보트라면 나이트 쥬의 기사단에서는 바스엘드--기사단의 지휘 관, 즉 여기에서는 나이트 쥬 자신을 의미한다--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 하다는 기사가 아닌가. 하이파나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파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쥬님이 직접 선두로 나서셨습니다 ! " '쥬가 직접 ? ' 첫번째 기사가 쓰러졌다고 해서 바스엘드가 직접 선두에 나서다니... 나이트 쥬가 그렇게 감정적이 될때가 있던가 하고 하이파나는 생각했다. 나이트 쥬는 냉철한 판단과 뛰어난 통솔력으로 유명한 기사였었다. 그는 다시 뒤로 돌아 전방으로 가려던 엘파켄의 뒤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엘파켄, 에덴하보트를 쓰러뜨린 기사는 누구인가 ? "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 엘파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 "검은 갑옷이라고 ? " 하이파나가 놀라는 것을 뒤로 하고 엘파켄은 말을 돌려 앞쪽으로 사라 져갔다. 하이파나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자신이 자신의 기사단에서 가장 신임하고있는 샤란드를 다시 불렀다. "샤란드 ! " "예 ! " "기사단을 맡아라. 나는 나이트 쥬를 엄호하러 가겠다 ! " "알겠습니다 ! " 바스엘드가 기사단을 떠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본적 전술 에서 어긋나는 것이었다. 전투중에 바스엘드가 기사단을 떠나는 일은 보 통 세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렉카아드'라고 불리는 양 기사단 바스엘드 끼리의 일전 때였고, 한가지는 자신의 기사단을 둘 이상으로 나누었을 때이고, 마지막 하나는 바스엘드가 전사했을 경우였다. 하이파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애프러더에 벨폰{{ ) 애프러더나 애필에 사용하는 무기. 금속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작고 얇은 막대기 끝에 하야덴 의 끝 부분을 닮은 날카로운 금속을 붙여서 사용한다, }}을 장전하고 전진하는 기사단의 앞쪽으로 향했다. 이나바뉴의 제1궁사 하이파나의 벨폰은 '아카르드'라는 별병을 가지고 있었다. 아카르드는, 최고급 애프러더를 만들때 사용되는 아카르드라는 새의 실에서 따 온 별명이었다. 그의 애프러더는 결코 빗나가는 일이 없 었고, 일단 명중하면 페가드--방패--나 갑옷 따위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 에 그가 쏘아낸 황금색의 벨폰은 '아카르드'라 불리우며 이나바뉴의 여러 궁사와 기사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결국 함성 속에서 두 기사단이 맞붙게 되었다. 나이트 쥬는 공포에 치 를 떨었다. 모두가 검은색 갑옷을 입은 그 기사단의 파괴력은 마치 악귀 와 같았다.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은채로 이나바뉴의 기사단을 헤집고 들어왔다. 나이트 쥬는 벌써 세명째 적의 기사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바 닥에 쓰러져 나가는 기사들은 이나바뉴의 기사들이 훨씬 많았다. 이나바 뉴 기사단의 퇴로에 나타난 크실의 기사단은 그 각자 각자가 모두 기사 급의 전투력을 갖고 있는것 같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숫적으로 열세 인데 이대로 가다간... 나이트 쥬는 순간적으로 적의 바스엘드를 찾았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길은 적의 바스엘드를 쓰러뜨리는 일 뿐이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평시에는 물론, 전시에 전쟁터에서 바스엘드는 매우 중요한 기사였다. 바스엘드가 쓰러지면 그 기사단은 붕괴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 다. 바스엘드가 기사단의 중심이고 모든 명령 체계의 중심이 바스엘드에 게 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항상 존경받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바 스엘드의 패배--혹은 죽음--은 기사단 전체의 사기를 완전히 가라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바스엘드가 이긴쪽의 기사단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올랐다. '렉카아드'라는 제도가 있다. 기사단 끼리 정면으로 맞부딛히기 전, 기 사단 한쪽에서 주홍빛과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깃발이 올라올때가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이 렉카아드를 의미한다. 평시때의 렉카아드는 '결투'를 의미하지만 전시때의 렉카아드는 양쪽 기사단에서 선발된 기사들의 일전 을 의미한다. 양쪽의 기사단의 규모가 비슷하고 전투력이 호각세를 이루 며 뾰족한 승리의 방법이 없을때 이 렉카아드를 전투방법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리고, 이 렉카아드에서 승리한 쪽은 그 전투에서는 승리했다고 생각해도 좋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렉 카아드에 바스엘드가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었고, 이 경우 바스엘드가 쓰러진 쪽의 기사단은 전멸하다시피 하여 그 전투에서는 패하게 되는 경 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이트 쥬는 일단 적의 바스엘드를 찾았다. 이미 때는 늦어 전세는 크 실 쪽으로 기울어진것 같았지만 적의 바스엘드를 쓰러뜨림으로 해서 전 세를 뒤집을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 나이 트 쥬와 나이트 하이파나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두가지였다. 전 멸할때까지 싸우거나, 아니면 해체 명령을 내려서 각자 퇴로를 찾는 방 법이었다. 나이트 쥬가 적의 바스엘드를 찾았을때 그는 온 몸의 피가 얼어 붙는 듯한 착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바스엘드역시 자신을 발견하고 전속 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좌우로 하야덴을 휘두르는 것 같이 보일 뿐인데... 그가 말을 달려오는 곳에는 마치 풀이 깎이듯이 이나바뉴의 기사들이 쓰러져 갔다. 그랬다. 그는 마치 여유있게 풀을 베 는것 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나이트 쥬는 하야덴을 불끈 쥐었다. "네가 옐리어스 나이트냐. "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나이트 쥬의 바로 앞에서 말을 멈추고 입을 열 었다. 주위는 함성과 하야덴과 페치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나이트 쥬는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 "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색 투구 안에서 그 기사의 표정은 웃고 있는것 같았다. "겨루자. 옐리어스 나이트의 솜씨를 보여라. " 나이트 쥬는 들고 있던 리첼반을 집어 던졌다. "나는 이나바뉴 바스크 38 옐리어스 나이트 쥬. 네 이름도 알고 싶다. "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대답대신 그의 긴 하야덴을 좌우로 흔들어 보 였다. "내 이름은 파스크란. 내 바스크를 알고 싶거든 나를 쓰러뜨려라. " "건방진 녀석이구나. " 나이트 쥬는 기합소리와 함께 하야덴을 뽑아들고 검은 갑옷의 기사에 게 달려들었다. 그의 동작은 나는듯이 빨랐다. 상대의 가슴에 하야덴이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순간, 일격의 파찰음과 함께 나이트 쥬는 손 목이 시큰해져 옴을 느꼈다. 그가 몸을 돌려 하야덴을 피한 후 자신의 하야덴으로 나이트 쥬의 하야덴을 내리 친 것이다. '빠르다 ! ' 나이트 쥬는 그 일격으로 중심을 잃었지만 곧 말 고삐를 잡아 당기며 방향을 바꾸어 적을 마주보고 섰다. '굉장한 놈이다. ' 나이트 쥬가 다시 하야덴을 가슴 앞으로 세워 든 순간, 이번에는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이 번쩍하는 한광을 발했다. 정확하게 나이트 쥬의 목을 노리고 하야덴을 뻗은것이다. 하지만 나이트 쥬도 이나바뉴의 기사 를 대표하는 옐리어스 나이트였고, 그렇게 쉽게 급소를 공격 받을리가 없었다. 그는 바로 눈앞까지 상대의 하야덴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내려져 있던 하야덴을 들어올렸다. 다시한번 파찰음이 들렸다. 쥬가 어깨를 흔들어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하야덴을 뒤집어 등으로 상대의 하야덴을 밀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시큰한 고통을 오른쪽 팔꿈치 까지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상대의 하야덴을 밀쳐 낸 방향은 정확했다. 그정도 속도로 찔러왔다면 하야덴이 튕겨졌을 경우 중심을 잡는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것이다. 나이트 쥬는 팔의 고통을 참으면서 굽혔던 팔을 펴며 그대로 하야덴을 베어내었다. 쥬가 그의 공격을 기다린 것은 이미 이 공격을 하기 위함이 었다. "앗 ! " 나이트 쥬는 자신의 하야덴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보며 눈을 상대의 하야덴을 돌렸다. 놀랍게도 검은 갑옷의 기사는 그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몸을 돌려 쥬의 하야덴을 피해낸것이다. 오히려 그 긴 하야덴은 한광을 발하며 나이트 쥬의 옆구리쪽을 쓸어오고 있었다. 나이트 쥬는 안간힘을 써 왼손에 쥐어져 있던 페가드--방패--로 그의 공 격을 막아내었다. 강한 파열음이 들리며 쥬는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페가드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둘로 갈라졌고, 그 충격에 떠밀려 그는 말에서 밀 려 떨어진 것이다. 그는 몇 바퀴를 구른 후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갑옷의 기사는 그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던 듯 하야덴을 그의 방향 으로 향한채 앞에 서 있었다. 말에서만 떨어진 것으로 이미 이 싸움은 나이트 쥬의 패배였다. '어떻게 하야덴이 튕겨진 상태에서 다시 공격을 할 수 있었지 ? 저렇 게 긴 하야덴을 가지고 중심을 잃지 않다니... ? ' 나이트 쥬는 부숴진 페가드를 집어던지고 두 손으로 하야덴을 감싸 쥔 채, 말 위의 검은 갑옷의 기사를 올려다 보았다. '그럼, 처음부터 내가 방어할 방법을 읽고 있었다는 말인가 ? ' 나이트 쥬는 오싹하고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갑옷 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말 위로 올라와라. " 나이트 쥬는 이를 악물었다. 간혹 선의의 결투--그것은 결투라기 보다 는 대련연습이었다--에서 말 아래에 떨어진 상대에게 말 위로 올라갈 시 간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트 쥬는 나는 듯이 말 위로 다시 올라섰다. 말 아래에서는 그에게 전혀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강하구나. " 나이트 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적을 향한 진심의 경의였 다. 그는 확실히 나이트 쥬보다 강했다. 투구 속에서 그의 얼굴이 웃은 듯 했다. "아직 멀었다.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이 곡선을 그리며 쥬 의 어깨를 쓸어왔다. 이번 공격은 다른 어떤 공격보다도 빨랐다. 쥬는 혼 신의 힘을 다해 두손으로 쥔 하야덴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야덴 이 튕겨지자 쥬는 두어걸음 말을 탄 채 뒤쪽으로 물러섰다. "제법이구나. 옐리어스 나이트라는건 허명이 아니었군. " 검은 갑옷의 기사의 입에서 경의를 표하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나이트 쥬는 오히려 그의 공격에 놀랄 뿐이었다. 그는 역시 검은색 말을 타고 말의 왼쪽에 긴 리첼반을 걸고 있을 뿐, 한손에 하야덴을 든 채 한 손은 비어 있었다. 그는 페가드--방패--를 사용하지 않는 완전 공격 위주의 기사였다... 그랬다. 그는 항상 한 손만을 이용해서 나이트 쥬를 공격하고 있었다. 보통, 기사들은 한손에는 하야덴을, 한손에는 페가드를 사용한다. 강한 힘을 위주로 하는 기사는 날이 두꺼운 하야덴을, 빠른 속도로 상대를 공 격하는 기사는 얇은 하야덴을 사용한다--나이트 라벨의 하야덴이 옐리어 스 나이트에서는 가장 얇았다--간혹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는 기사가 있 었는데, 그런 기사는 힘과 기교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사였다. 두 손으 로 하야덴을 잡음으로서 훨씬 빠르고 정확하며 파괴적인 하야덴을 사용 할 수 있게 되지만 페가드가 없기 때문에 하야덴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해야했다. 이나바뉴에서 가장 기교적인 기사라 불리우는 이나바뉴 제 1검사 나이트 레이피엘과 로젠다로의 넷째공주 세렌의 카발리에로인 옐리어스 나이트 이바이크가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는 전형적 공격형의 기사였다. 나이트 라벨도 가끔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기교적이거나 파괴적인 하야덴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단지 어린 나이 때 문에 완력이 부족해서 였다. 어느쪽으로 공격이 들어올것인가. 나이트 쥬는 하야덴을 가슴에 세운 채 온 정신을 집중하여 검은 갑옷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서 있던 그가 하야덴을 들어 다시 가슴을 찔러왔다. 나이트 쥬는 그 공격을 맞받 아 치지 않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힘으로 하는 공격을 맞받아 치면 승 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한 손으로 말 고삐 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며 오른 손으로 하야덴을 검은 갑옷의 기사를 향 해 찔러갔다. 하지만 검은 갑옷의 기사는 여유있게 몸을 비틀며 그의 공 격을 피해냈고, 오히려 뻗은 하야덴을 회수하지 않은 채 나이트 쥬의 등 뒤에서 크게 원을 그리게 했다. 하야덴은 나이트 쥬의 기울어진 어깨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나이트 쥬는 한 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 있는 상태로 몸 중심이 뻗은 하야덴 쪽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 공격 은 몸을 비틀어 피해낼 수 없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는 그 짧은 시간에 매우 정확한 판단을 해낸것이다. 나이트 쥬는 고함소리와 함께 눈을 질 끈 감으며 하야덴을 뒤집어 잡았다. 팔 하나를 상대에서 내주는 대신 다 음 공격 기회를 잡으려는 심산이었다. 그 다음 순간, 그는 왼쪽 손목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과 동 시에 맑고 투명한 금속끼리의 충격음, 그리고 윙윙 거리는 하야덴의 공 명 소리가 들렸다. 말의 피와 자신의 피가 섞인 뜨거운 액체가 그의 얼 굴 위에 끼얹어 진것도 그때였고, 말의 긴 비명소리가 들린것도 그때였 다. 나이트 쥬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그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 덴이 빗나간것이다. 그때, 쥬는 하늘에서 무언가에 튕겨진 채 날고 있는 금속 막대기를 보았다. '아. 아카르드다 ! ' 왼쪽 손목이 고삐를 잡은 채 두동강이 난 말의 머리와 함께 떨어져 내 렸고, 나이트 쥬 자신도 의지할 손이 없었기 때문에 바닥으로 굴려졌다. 이나바뉴 제1궁사 나이트 하이파나의 황금색 아카르드가 검은 갑옷의 기 사의 하야덴을 튕겨낸 것이다. 나이트 쥬는 바닥에서 몇바퀴를 구른 후, 힘겹게 일어났다. 여전히 한 손에는 하야덴을 든 채였다. 잘리워진 왼쪽 손목에서는 무섭게 피가 뿜 어져 나왔다. 여전히 말 위에서 여유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던 검은 갑옷 의 기사는 나이트 쥬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이 좋은 녀석이군. " 그는 몸을 휙 돌려 반대 방향으로 말을 달려갔다. 쓰러진 적을 죽이지 는 않는다는 뜻인가. 그때 쥬는 나이트 하이파나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 "해체다 ! 모두 흩어져 퇴로를 뚫어라 ! 집결지는 하라데스 성이다 ! " 함성소리와 함께 기사단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완패다. 그것 도 전멸에 가까운 완패다... 하고 나이트 쥬는 중얼거렸다. 피는 여전히 손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는 검은 갑옷의 기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펠르력 643년, 하라데스 전투라 불리우는 대전에서 이나바뉴와 크실 쌍방이 맞붙은 하라데스 평원의 첫 전투는 압도적 숫자로 이나바뉴 기사 단을 포위한 크실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하라데스 원정대 4만명중 이 전투에 참전한 2만명의 기사단은 거의 전멸했고, 원정대의 핵심을 이루 던 나이트 하이파나와 나이트 쥬의 기사단 역시 전멸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에덴하보트를 비롯한 다섯명의 기사가 이 전투에서 정체불명의 검 은 갑옷의 기사에게 목숨을 잃었고 두명의 기사는 그의 하야덴에 쓰러지 지는 않았지만 단신으로 많은 크실의 기사들을 상대하다 행방불명 되었 다. 옐리어스 나이트 쥬는 왼쪽 손목을 잃은 채 간신히 하라데스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이나바뉴의 하라데스 파견대와 크실의 기사 단이 정면으로 맞붙어야 할 차례였다. 방 안은 어두웠다. 모두가 긴 침묵속에 빠져 있었다. 나이트 하이파나 가 입을 열자 그 소리가 스스로에게도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느껴진것 만 보더라도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나오 기를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이트 하이파나의 목소리는 그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공기만큼이나 무거웠다. "...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 그 한마디 말로, 다시 주위는 고요해졌다. 한참동안이나 지겨우리만큼 침묵이 이어진 후 이나바뉴 동방원정대장 겸 하라데스 파견대장인 바스 크 9 나이트 바하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작전을 계획하도록 하죠. 총체적인 작전을 말 해 보시오, 나이트 쥬. " 창백한 얼굴의 나이트 쥬가 일어섰다. 그의 눈은 분노와 의지로 타오 르고 있었지만 시선은 레쥰드 탁자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빗소리가 세 차게 들려왔다. "... 요점은 크실 기사단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 크란의 기사단을 부수는 것입니다. " 나이트 하이파나는 순간 방 안을 메우고 있던 공기가 무너져 내리는것 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긴장을 할만도 했다. 옐리어스 나이트 가 바스엘드로 있는 1천여기의 기사단을 순식간에 전멸시키다시피한--아 무리 그것이 숫적으로 압도적 우세였다하더라도--기사단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을 기사는 아무도 없을것이다. 나이트 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적은 강합니다. 필요없는 자만심이나 우리 스스로를 안심시킬 수 있 는 자위요소를 고려할 시간은 없습니다. 이미 하라데스에 와 있는 기사 단 19만중 2만은 사라졌다고 봐야 합니다. " 나이트 쥬의 말은 그의 말투만큼이나 냉혹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크실의 군세는 이곳 하라데스에만 20 만은 넘게 집중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선발대를 포위했던 그들, 파 스크란의 기사단은 바로 쥬렌다스와 로젠다로를 습격했던 악마의 기사단 임이 틀림 없습니다. " "믿을 수 없어... " 커다란 회의용 레쥰드 탁자에 앉아 있던 기사중 하나가 중얼거렸지만 쥬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해 나갔다. "숫적으로는 우선 많은 차이는 없습니다. 우리는 17만, 적은 20만 남 짓... " "틀렸어. 최소한 25만은 된다고 보아야 해. " 나이트 하이파나가 자리에서 앉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기 사들의 시선이 하이파나에게 가 꽂혔다. 하이파나는 이 장소에 있지 않 은 옐리어스 나이트의 바스엘드, 나이트 슈펜다르켄을 제외하면 옐리어 스 나이트 중에서도 최고의 서열을 가지고 있는 기사였다. 그의 발언은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가 가진 실력만큼. "... 자위적 요소를 고려하지 말자고 한건 자네가 아닌가. " 나이트 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창 밖에는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마법의 불꽃을 장작 끝에 붙인 채 성 위 에서 적을 감시하고 있는 첨병들이 보였다. 비는 방금보다도 더욱 세차 게 내리는듯 했다. "맞습니다. 숫적으로도 약간 불리하다는것은 모든 분들이 느끼고 있으 실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렇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는 중앙군 이나, 로젠다로 원정대에게 도움을 요청할 방법은 없습니다. " 1차 천신전쟁 당시에는 잘 훈련된 작은 새를 이용하여 아군 상호간의 통신을 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벌써 2차 천신전쟁때에는 이나바뉴와 크실 상호간에 그 연락 방법을 무력화 하기 위한 연구한 방법이 연구되고 실 전에 사용되었다. 기사들에게 공중에서 애프러더로 움직이는 표적을 공 격하는 훈련을 시킨것이다. 나이트 하이파나 자신이 그 기술에 있어 이 나바뉴의 최고 실력자였기 때문에 새를 이용한 고전적인 통신방법은 불 가능하다는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이 세계는 마법이 그리 잘 발달 되어있지 않은 세계다--예컨대, 이제 와서는 이런 원거리의 유일한 통신 방법은 뛰어난 기사나 기사단이 아군측 기사단의 엄호나 도움을 받고 적 진을 돌파하여 직접 연락을 아군에게 취하는 방법 뿐이었다. "그럼, 우선 기본적인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 나이트 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안의 침묵은 무겁다 못해 공포스럽 기까지 했다. 회의가 열리고 있는 하라데스 성의 방 안이 순간 창백한 백색으로 번 쩍였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이나바뉴와 크실의 대 군이 맡붙은 하라데스 대전이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엘파켄은 작전 지시가 내려졌을때 부터 자신의 생사따위는 안중에 두 지 않았다. 이 작전은 엘파켄과 그가 지휘하는 기병대의 전진 속도에 바 로 작전 성공여부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작전 순간에 새로 모시게 된 자신의 바스엘드를 바라보았다. 나이트 그렛쉔. 나이트 바하론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기사였다. 그는 하라데스 성 문 바로 앞에서 말에 탄 채 자신이 지휘하게 될 6만여기의 기병대에게 하는 말을 막 마치려던 참이었다. "... 여러분의 기마 솜씨에 이 하라데스 파견대 전체의 생사가 달려있 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적과 싸우지 말아라. 우리의 목표는 적진을 우선 돌파하여 적의 가장 빠른 기사단을 원거리에 몰아내는 것이다. 전투는 선두에서 돌파구를 찾는 일부 기사들로 충분하다. " 주위는 고요했다. 어젯 밤에 내린 비로 하늘의 별들은 더욱 하얗게 빛 나고 있었다. 나이트 그렛쉔은 기마 돌격용 리첼반을 꺼내 두손에 들었 다. "가자, 출정이다 ! " 곧 성문이 열리고, 나이트 그렛쉔과 엘파켄이 이끄는 6만여 기사단이 적진을 돌파하기 위해 그 문을 나섰다. 그들은 앞 뒤로 긴 타원형 대오 를 이루고 있었다. 선두에는 나이트 그렛쉔이 직접 섰다. 어떻게든 크실 의 기사단을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렛쉔의 기사단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이트 쥬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지휘할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차분 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 전투에서 그가 이끌게 될 기사단은 모두 4만여 기. 그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옐리어스 나이트 쥬는 조금은 긴장된 모습의 자신이 이끌 기사단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시 살아 돌아오고 싶은 사람은 지금 나서라. "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도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트 쥬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번 작전이 실패한다면 이 4만여기의 기사단의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것이다. 어쩌면 나이트 쥬 자신까 지도...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는 않았다. 나이트 쥬는 싱긋 웃었다. "가자. 어둠의 놈들에게 빛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보여주자. " 나이트 쥬는 하야덴을 꺼내 들었다. 한쪽 손목이 없는 상태의 그는 이 미 페가드를 들수 없었다. 하야덴을 든 상태에서는 말 조차 움직이지 못 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회의에 참석했던 하라데스 파견대의 모든 기사들 이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결국 그 누구도 그를 말릴 수는 없었던 것이 다. 나이트 쥬의 의지는 확고했던 것이다. 쥬가 손을 높이 쳐들었다. "출정이다 ! " 나이트 쥬를 선두로 4만여기의 하라데스 파견대 최정예 기사단이 성문 을 나섰다. 이미 성문 밖은 먼저 성문을 나선 그렛쉔과 엘파켄의 기사단 을 막기 위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이트 쥬는 하야덴을 꽉 쥐었다. "간다, 이놈들... 옐리어스 나이트의 명예가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겠다. " 나이트 쥬는 바로 옆 기사에게도 들릴지 모를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그의 눈이 분노와 전의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작전의 요점은 간단했다. 우선 잘 훈련된 나이트 그렛쉔의 기사단을 중심으로 혈로를 뚫고 크실의 포위망을 탈출한다. 그렛쉔과 엘파켄이 워 낙 뛰어난 기마솜씨를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이끄는 기사단이 포위망을 뚫었을 경우 크실의 기사단중 가장 빠르고 강한 기사단이 그들을 뒤쫓게 될것이다. 현재 하라데스 파견대가 가장 목말라 하는것은 현재의 전장 소식을 다른 파견대에 알리는 것이라는 것을 크실 역시 알고 있을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필사적으로 그들의 탈출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가 장 강한 기사단이--두말 할 것 없이 그 기사단은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 크란이 이끄는 기사단일 것이다--포위망에서 벗어나 원거리로 그들을 추 격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번째 기사단인 나이트 쥬의 정예가 그 뒤를 쫓게된다. 사실 두려운 것은 파스크란의 기사단이기 때문에 나이트 쥬가 이끈다면 포위망을 뚫는것은 불가능 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된 것이다. 포위망을 돌파한 두번째 기사단은 즉시 파스크란의 기사단을 뒤쫓게 될것이고, 그 렇게 되면 앞 뒤에서 호응하여 돌출된 파스크란을 고립시킨다. 며칠전, 하라데스 파견대의 선발대가 전멸되었을때의 상황을 다시 연출하는 것이 다. 그쯤 되면 크실의 기사단은 포위망을 포기하고 파스크란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때, 남아 있던 하이파나의 기사단이 나오게 된다. 남아 있는 크실의 기사단이 파스크란을 엄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성 을 지키는 기사단은 파견대장 나이트 바하론의 2만 뿐이었다. 이 작전에 는 이나바뉴 하라데스 파견대의 거의 전원이 투입되는 것이었다. 물론, 나이트 그렛쉔이 포위망을 뚫지 못했을 경우 이 작전은 물거품이 되고, 또 하이파나의 기사단이 엄호에 실패했을때에는 나이트 쥬의 기사단이 오히려 협공을 받게 될것이다. 나이트 쥬가 이끄는 정예 기사단이 죽음 을 각오한 것은 이런 경우의 일 때문이었다--하지만 물론 모두 각자 각 자의 머릿속엔 아카르드의 기사 하이파나가 엄호에 실패하지는 않을것이 라는 생각이 새겨져 있었다.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채 엘파켄은 다시 선두로 나섰다. 자신의 눈 앞 에 끝 없이 다가오던 크실의 기사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명, 등을 돌린 채 돌격용 리첼반을 꽉 쥐고 있는 기사만 보일 뿐이었다. 돌파는 성공적이었다. "그렛쉔님 ! " 엘파켄의 외침에 그렛쉔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도 웃고 있었다. "성공입니다 ! " 그렛쉔 역시 온 몸이 적과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 채였다. 그는 결코 전진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최대한, 될 수 있는대로 멀리 추격대를 끌어 내야 했다. 그렛쉔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엘파켄에게 물었다. "엘파켄, 쥬님의 기사단은 어떻게 되었나 ? " 엘파켄은 그 와중에서도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쥬님의 기사단도 돌파를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성공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 엘파켄은 다시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적의 끄트머리에 있던 6만기 정도의 기사단이 포위망을 이탈하여 저 희를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운 속도입니다. " 성공이구나. 나이트 그렛쉔은 속으로 사타루스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 한 발자국이라도 더 먼 곳으로 적을 끌어내야 한다 ! 전진 ! " 나이트 그렛쉔은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기사단을 돌아보며 외쳤다. 어둠 속에서 전력이 5만여기로 줄어 든 그렛쉔의 기사단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이트 하이파나는 아홉명째 크실의 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의 움 직임은 생각보다 좋았다. 하이파나의 하야덴은 마치 물이 흐르듯 춤추듯 움직였다. '좋은 실력이군. 이 자리에서 죽이기는 아까워. ' 하지만 그 순간 하이파나의 하야덴은 정확히 상대 기사의 목줄기를 관 통했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상하다. ' 하이파나는 방금 자신이 하야덴에 쓰러진 기사를 잠시 내려다 보고는 고개를 들어 전장을 훑어 보았다. 분명히 나이트 쥬의 기사단은 탈출하 여, 먼저 탈출한 나이트 그렛쉔의 기사단의 뒤를 쫓는 기사단을 다시 뒤 쫓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포위망은 조금도 흐트러 지지 않았다. 그들은 포위망에서 이탈한 기사단을 엄호할 생각이 전혀 없는것 같이 보 인 것이다. 물론 나머지 크실의 기사단이 돌출한 기사단을 엄호하러 가지 않게 하 는것이 하이파나의 임무이긴 했지만, 현재 하이파나의 기사단은 적과 정 면으로 충돌하여 전투를 벌일 뿐, 그들이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 지는 않고 있었다. 막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트 하이파나는 애 프러더를 꺼낸 후, 아카르드를 날려 원거리에 있던 크실의 기사를 한명 더 쓰러뜨렸다. 그 주위가 동요하는 것을 보며 하이파나는 씩 웃었다. 그 기사는 운이 좋게도 어느 기사단의 바스엘드였던 모양이었다. '물론 지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추격을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엄 호를 나갈 수 없다. 적을 포위한 나이트 쥬와 나이트 그렛쉔이 패배한다 는것은 계산에 조차 있지 않지만, 크실의 기사단이 분리되지 않는 이상 현재의 우리 역시 그들을 이길 수는 없다. ' 2만여기의 기사단이 성을 지키기 때문에, 지금 하이파나가 이끄는 기 사단은 5만여기였다. 하지만 크실은 6만기 정도가 이탈하여 나이트 그렛 쉔을 쫓기 시작했을 뿐, 20만이 조금 안되는 기사단이 여전히 하라데스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상태로는 하이파나가 나머지 크실의 기사단을 공격하여 승리한다는 것은 숫적으로 쉽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 검은 갑옷의 기사가 이끄는 기사단만 패퇴시키 면 크실의 전력은 반감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그렛쉔과 쥬가 성으로 돌아올때에만 엄호하면 되겠지. 운이 좋으면 성 안과 밖에서 나 머지 크실군을 협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 하이파나의 머릿속에는 이제 5만의 기사단으로 20만의 크실군과 팽팽 히 맞서는 것 만이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이파나는 이 전투의 결과가 그렇게 비참하고 공포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예상대로 검은 갑옷의 기사가 적진 선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트 그렛쉔은 미소를 지었다. 적의 기사단의 후미에는 벌써 나이트 쥬가 이 끄는 이나바뉴의 기사단이 바짝 붙어 있었다. 이쯤이면 되었다... 하고 나 이트 그렛쉔은 생각했다. 엘파켄이 외쳤다. "그렛쉔님 ! 후미에서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 " 그렛쉔의 예상보다는 약간 빠른 교전이었다. 그렛쉔은 고개를 끄덕이 고는 하야덴을 하늘을 향해 쳐들었다. "반전 ! " 함성소리가 높게 울려퍼지며 선두에 섰던 기사단부터 차례로 말을 멈 추고 뒤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나이트 그렛쉔과 엘파켄은 말을 달려 순 식간에 기사단의 선두가 되어버린 후미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예상대로 적의 기사단은 선발이었던 그렛쉔의 기사단과 나이트 쥬의 정예 기사단 사이에 끼어 협공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 작전은 성공한것이다. 하지만, 승리에의 전율로 붉게 상기되어있던 그렛쉔의 표정은 곧 딱딱 하게 굳어졌다. 마치 물결이 치는것 처럼 자신의 기사단 사이가 귀퉁이 에서 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물러선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놀라운 솜씨와 속도로 기사들을 베어내며 길을 터 내고 있었다. 다른 기 사들의 하야덴보다 한배 반은 긴 하야덴. 칠흙처럼 어두운 검은 빛의 갑 옷으로 눈을 제외한 온 몸을 감싼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크란이 조금의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렛쉔은 페가드를 든 왼손을 좌로 흔들며 몸을 앞으로 숙여 하야덴 끝을 그 검은 갑옷의 기사를 향하게 했다.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쓰러지더라도 전세는 이미 우리쪽으로 기울었다. 이 포위망을 빠 져나가기 위한 발악을 할 뿐이다. ' 검은 갑옷의 기사는 그 기세를 멈추지 않고 하야덴을 그렛쉔에게 향한 채 돌격해 들어왔다. 그것은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그렛쉔은 당장이라도 말을 돌려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렛쉔은 이를 악물고 같이 말을 달렸다. 몸을 최대한 낮추어 페가드 로 가슴을 가리고 하야덴을 앞쪽으로 찔러갔다.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는 페가드가 없었다. 양쪽이 모두 리첼반을 사용하지 않는 돌격자세였기 때 문에 그의 하야덴을 자신의 페가드에 맞추기만 한다면 타격을 나누어 받 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승산은 그렛쉔 자신에게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두 기사는 서로의 하야덴으로 상대의 심장을 노리며 말을 부딪혀 갔다. 두 기사 모두 기마술에 뛰어났기 때문에 눈 깜짝 할 새에 둘 사이는 좁 아지고 있었다. 그렛쉔은 눈을 부릅뜬 채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을 노려보았다. 그의 긴 하야덴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가 겨눈 하 야덴은 망설임 없이 그렛쉔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페가드의 중앙을 향해 다가왔다. 그의 하야덴은 길었다. 상대의 몸에 닿는 시간은 아마도 검은 갑옷의 기사가 빠를 것이다. 순간 나이트 페가드를 쥔 나이트 그렛쉔의 왼손에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중압감이 느껴졌다. '앗. 이럴리가. ' 하지만 다음 순간 그렛쉔은 가슴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고 자신의 몸이 공중에 뜬 채 말을 떠나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렛쉔의 하야덴은 허 공으로 뛰쳐 올라갔다.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은 너무나 파괴적이었 다--그의 하야덴은 거리낌없이 그렛쉔의 페가드와 그의 갑옷, 그리고 그 의 가슴 한복판을 단숨에 꿰어 버린 것이었다. '자신을 보호하지도 않았군. 처음부터 단 한번의 공격으로 나를 쓰러뜨 릴 자신이 있었던 거야. 분하지만, 실력의 차이가 너무나 크구나... ' 그의 몸에서 순간적으로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이 빨려 나가듯 뽑 혀 버렸다. 놀라운 팔 힘과 속도였다. 가슴과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천천 히 그렛쉔의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바하론님... ' "물러서지 마라 ! 공격 ! " 나이트 쥬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한 손으로 말을 자유롭게 다룰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버리고 두 다리로 서는게 편하겠지만, 그래도 나이트 쥬는 이 기사단의 바스엘드였기 때문에 말에서 내릴 수는 없었다. 전방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나이트 그렛쉔의 기사단이 전진도중 반전하여 공세로 전환하는것을 확인하고, 나이트 쥬는 대열을 옆으로 넓 게 퍼뜨려 검은 갑옷의 기사가 이끄는 기사단을 포위해 갔었다. 하지만 앞 뒤 협공을 받고 곧 무너질줄만 알았던 그 기사단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후위를 일방적으로 방어만 하고, 선두에서 접전을 벌이며 물러서지 를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포위망이 무너진다 ! " 포위망이 무너진다고... 나이트 쥬는 이를 악물었다. 옐리어스 나이트가 이끄는 기사단이 이렇게 무력하다니... 그가 하야덴으로 다시 한명의 기 사를 쓰러뜨렸을때였다. 수라도같은 전장 한가운데를 달려 쥬에게 다가 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쥬는 순간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느낄 수 있었다. '놈이다. ' 그는 하야덴을 다시 고쳐 잡았지만 온 몸이 떨려오는것은 어쩔 수 없 었다. 단 세번 하야덴을 서로 교환하고 자신의 손목을--신궁 아카르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목숨을--빼앗아간 상대였다. 나이트 쥬는 그 순 간 죽음을 각오했다--옐리어스 나이트 답게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리라-- 옐리어스 나이트가 창설된 이래, 적의 하야덴 아래 쓰러진 기사는 지금 까지 아무도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나이트 쥬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검은 갑옷의 기사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질풍처럼 나이트 쥬의 가슴을 노리고 바 로 하야덴을 찔러왔다. '나 혼자 죽을 성 싶으냐 ! ' 나이트 쥬는 손목이 없는 왼팔을 들어 하야덴을 막으려 했다. 기사에 게 있어서 손목이 없는 팔은 없는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하 야덴을 약간 비스듬히 눕힌 채 검은 갑옷의 기사를 마주 찔러갔다. 바로 세우는 것보다 길이는 약간 짧아 지지만 그렇게 하면 상대의 잔 동작에 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또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번의 파찰음이 들렸다. 나이트 쥬는 손이 허전해지는것을 느끼며 오른손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하늘을 보았다. 두토막이 난 자신의 하야덴이 공중에서 반대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두번의 파찰음과, 하야덴을 아직도 꽉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한번의 일격으로 자 신의 하야덴을 부러뜨리고, 밀린 손목 사이로 다시 하야덴을 찔러 넣었 을 것이다. 나이트 쥬는 망연자실하게 자신의 마지막 남은 손목이 하늘 에서 떨어져 내리는것을 바라보았다--짧지만 느껴지기엔 아주 긴 시간이 었다. 나이트 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검은 갑옷의 기사가 하야덴으로 자신을 겨냥하며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잘리운 두 손목을 바라보고 나이트 쥬는 머리를 들 었다. 이상하게도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미소를 띄우며 검은 갑옷 의 기사에게 말했다. "이기지 못했네. 하지만 바스크를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 " 낮은 목소리가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서 흘러나왔다. "... 나는, " 나이트 쥬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증오는 없었다. 분노나 질투도 없 었다. 오히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강한 기사를 만났다는 역설적 인 기쁨이 그를 채우고 있었다. "크실 기사단 바스크 1, 크실 기사대장 나이트 파스크란이다. " 기사대장 ! 그랬구나... 이 놈이 크실에서 가장 강한놈이었구나. 이런 젊은 목소리를 가진 기사가 기사대장이라니, 크실은 이 전쟁을 위해 엄 청난 개혁을 단행했었음을 나이트 쥬는 짐작했다--내가 싸웠던 기사가 바로 크실의 기사대장이었군... 그는 만족했다는 표정의 미소를 지었다. 슈칵--하는 파찰음이 들리고, 나이트 쥬의 머리가 하늘로 날았다. 하라 데스 대전은 종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이트 하이파나의 신궁 아카르드는 벌써 열세명째 적의 기사를 쓰러 뜨렸다. 하지만 적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다. 나이트 그렛쉔과 나이트 쥬 가 기사단을 이끌고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성을 떠났고, 나이트 바하론 이 2만여기를 이끌고 성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에 성 밖에서 크실의 20만 기의 기사단을 상대하는것은 하이파나의 단 5만기 뿐이었다. 물론 그들 은 검은 갑옷의 기사가 이끄는 악마적 기사단처럼 강하지는 않았지만 이 미 숫적으로는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 기사단은 전멸에 가깝게 패퇴시켰겠지... ' 나이트 그렛쉔과 나이트 쥬가 그들을 포위공격했음에도 크실군은 단 6 만여기의 기사단을 전혀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예상외여서 하 이파나의 기사단이 고전을 하고 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검은 갑옷의 기사의 기사단은 지원군 없이 포위공격을 받을것이 니 일단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이번 작전의 핵심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검은 갑옷의 기사가 이끄는 기사단의 격멸이었다. 혼전과 혼전이 거듭되는 동안 적지 않은 양쪽의 기사단이 쓰러져갔다. '쥬가 돌아올때가 되었는데... ' 양쪽에서 쓰러지는 숫자는 이나바뉴가 조금 적기는 했지만 엇비슷했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양쪽 군사력의 비율은 커져만 갔다. 양쪽에 서 모두 1만기의 손실이 있으면 이나바뉴군은 4만기가 되지만 크실군은 19만으로 별 피해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은 성으로 접근하려 했 고, 하이파나와 그의 기사단은 그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중이었 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파나는 속히 검은 갑옷의 기사단을 패퇴시키고 나이트 쥬가 돌아와 협공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때, 하이파나의 눈에 멀리 밤 하늘에 흙먼지가 날리는 것이 보였다. 수만의 기사단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쥬가 돌아왔다 ! ' 하이파나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모두 힘을내라 ! 아군이 돌아온다 ! " 하이파나의 독전에 이나바뉴 기사단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한층 강하 게 크실의 공격을 방어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 하이파나의 얼굴 은 흙빛이 되었고 그의 심장은 얼음처럼 식어갔다. 그 기사단은 선두에 질풍처럼 달리는 온통 검은색으로 덮힌 기사를 세운 기사단이었기 때문 이다. '검은 갑옷의 기사... 설마. ' 그들의 전력 손실은 거의 없는것 같았다. 언뜻 보아서 그들의 군세는 5만여기를 넘고 있었다. '그럼, 나이트 쥬는 ? 그렛쉔은 ? ' 나이트 하이파나의 머릿속에는 절망의 그림이 그려져 가고 있었다. 나 이트 쥬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포위망을 돌파해 왔다면 그들 의 뒤를 이나바뉴의 기사단이 쫓고 있었을것인데, 그들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멸한 쪽은 이나바뉴 기사단이었던 것이다. '6만으로 자신들을 포위한 9만을 부술 자신이 있었던거로군... 그래서 지원을 나가지 않았던 거야. ' 나이트 하이파나는 멍한 눈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의 기사단을 바 라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나이트 쥬의 기사단은 그 뒤를 쫓고 있지 않았 다. 아마도 전멸했거나 바스엘드를 잃고 뿔뿔히 흩어졌으리라. 그의 머릿 속에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많고 항상 자신에 차 있던 옐리어스 나이트 쥬의 모습이 떠 올랐다. '잘 가게. 친애하는 나의 옐리어스 나이트여. ' 나이트 쥬가 말머리를 돌렸다. "성문을 열어라 ! 퇴각이다 ! " 패전이 이나바뉴 기사단 하라데스 파견대를 엄습했다. 하라데스 평원 은 더욱 깊은 밤으로, 핏빛 죽음의 노래로 깊어져 가고 있었다. 제 3차 천신전쟁에서 빛의 이나바뉴와 어둠의 크실의 양 대군이 맞붙 은 첫번째 대전인 하라데스 전투는 크실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 다. 하라데스 성이 크실의 손에 넘어감으로 해서 이나바뉴는 체렌평원으 로 통하는 통로와 하라데스 사막과 하라데스 평원을 비롯한 모든 하라데 스 지방을 크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다행히도 파견대장 나이트 바하론 과 옐리어스 나이트 하이파나는 몇몇의 기사단으로 혈로를 뚫어 중앙 대 륙으로의 탈출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나바뉴는 스무명에 가까운 기사들 과 국왕 친위대 옐리어스 나이트중 한명이 전사하고, 10만여기의 기사단 이 몰멸하는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옐리어스 나이트중 한명 이 역사상 최초로 적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최대의 치욕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나바뉴의 기사단이 모든 곳에서 패전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 은 아니었다. 쥬렌다스로 원정을 나간 이나바뉴 중앙 기사단의 원정대는 또 다른 크실군을 만나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 }}{{ }}{{ }} 6. 로젠다로의 하늘 "... 훨씬 전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기사로서 죽음을 맞이하는것만은 허락해 주십시오. " 쿼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가 친히 너의 생명을 거두어주마. 일어서라. " 프렌스크는 아무 말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였던 모습과는 다르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당당했고, 그의 고개는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쿼어즈의 어깨 너머, 창 밖으로 보이는 로젠다로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손으로 정복한 아름다운 나라의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얀 로냐프 강 ------------------------------------------------------------------ }}{{ }}{{ 6. 로젠다로의 하늘 ------------------------------------------------------------------ }} 6. 로젠다로의 하늘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그날 밤은 달이 뜨지 않아 매우 추운 밤이었다.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두 견습기사는 가을답지 않은 쌀쌀한 날씨에 장작불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크실 놈들도 오지 않겠지. " 나머지 한 견습기사가 대꾸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거라는걸 뻔히 알텐데 ? 내가 크실의 바스엘드 라면 이런 날에 공격하겠어. 달도 없겠다... " 손을 앞으로 해 가슴을 덥히던 그 견습기사는 이번엔 등을 돌려 등 쪽 을 불에 쬐었다. 훈훈한 기운이 갑옷 안까지 전해져왔다. "한심하지 뭐. 이렇게 성 안에 갖혀 있는 이나바뉴 기사단 꼴이라니... 가끔 정찰병이나 띄우는게 고작이니 말이야. " "하는 수 없지. 지원대가 오기까지는 이렇게 가만히 기다릴 수 밖에. 적은 20만 가까운 숫자이고, 우리는 여기에 와 있는 로젠다로 기사단까 지 포함해도 겨우 7만 아닌가. 게다가, 상대는 단 10만기로 에우로페 나 이트들이 이끄는 로젠다로 최정예 기사단을 부순 기사단이란 말이야. " "그래, 바로 그거야. 난 그 점을 믿을 수가 없어. 물론 옐리어스 나이 트 보다야 못하겠지만 에우로페 나이트가 그렇게 무력할 수가 있나 ? 한 번의 전투에서 둘씩이나 목숨을 잃다니. " "쉿. 말 조심해. " 그는 아무도 있을리가 없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에우로페 나이트가 들으면 당장 렉카아드라도 신청하려 할 말이야. 그 분들 입장에서는 동료의 죽음을 본것 아닌가. "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로젠다로를 공격한 다음에는 이쪽으로 국경을 넘 지는 않는 모양이군. 사실 걱정 했었는데... 하라데스에 집결을 했다고 들 었는데, 갑자기 쥬렌다스가 함락되어서 깜작 놀랐쟎는가. " "그래. 깜짝 놀랐었지... 쥬렌다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자 로젠다로에서 원군 요청이 와서 정신 없었지. 용의주도한 놈들이야. 양쪽 을 동시에 공격해서 우리가 로젠다로에 파병할 시간이나 여유를 주지 않 았으니까 말이야. " 로젠다로는 이나바뉴와 크실 양 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중립국이었다. 창조신 아펠르의 첫째 아들인 사타 루스와 결혼한 여신--신화에는 이나바 뉴의 공주였다고 이야기되고 있으나 신화일 뿐이었다--쥬르가 통치하기 시작되었다고 했다. 본래는 양국 사이에서 평형을 이루며 무역을 하는 부유한 국가였지만 1, 2차 천신전쟁이 모두 이나바뉴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현재에는 정책적으로 이나바뉴와 가까와질 수 밖에 없었다. 크실 은 우선 이나바뉴의 쥬렌다스 지방을 공격한 후, 쥬렌다스에 최소한의 주둔군만을 남겨 놓은 채 곧바로 이 로젠다로로 진격했다--아마도 로젠 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를 의식한 공격이었을것이다--그리고 이나바뉴가 로젠다로로 빠른 시일내에 지원을 올 수 없도록 이 공격은 최단시간내에 이루어졌다. 마치 양쪽이 동시에 공격을 받은것 처럼. 기사단의 기동력은 병력 자체를 두배, 세배로 늘여준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도 사용되는 기사들 사이의 격언이었다. 로젠다로는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수도 포프슨 전투에서 로 젠다로 기사단은 최정예의 에우로페 나이트를 전원 출전시키면서 크실에 대항했지만 크실은 너무나 강했다. 결국 국왕은 에우로페 나이트 두명이 생명으로 뚫은 혈로로 탈출을 시도했고, 넷째 공주인 세렌과 몇명의 귀 족들이 그들에게 포획된 채 이나바뉴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이 현재 머물고 있는곳은 이나바뉴와, 전에 로젠다로와의 국경이었던 라르그산맥 너머의 다쟌이라는 작은 성이었다. 두 견습기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조금씩 날이 밝아져왔다.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벌써 날이 샜군. 교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겠는걸. " "그래.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야전 침대에라도 눕고 싶군. " "잠깐, 기다려 봐. " 한명의 견습기사가 방금 말을 꺼내려던 그의 동료를 저지했다. 둘 다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진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멀리서 말 발굽 소리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최소한 5만기. " 먼저 입을 연 것은 동료를 저지했던 견습기사였다. "미네온님께 알려야겠어. 빨리 ! " 예상보다 훨씬 빨랐지만 결국 로젠다로에 주둔하고 있던 크실의 대군 이 다시 움직인것이었다. 다쟌의 성주인 미네온은 이나바뉴 바스크 160의 기사이기도 했다. 그 는 보고를 받자마자 크실은 새벽이 오기 직전의 짙은 어둠을 틈타 공격 을 해 왔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혹, 자신들의 기사단에게 Ebarado{{ ) 섬광계 마법. 잠시동안 어둠속에서도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준다. }}의 스펠로 어둠속을 볼 수 있게 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이트 미네온이 맨 처음 취한 행동은 로젠다로의 병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병력을 성 위에 집결시키고 애프러더를 장비하게 한 것이었다. 그들의 의도가 그러하다면 어둠이 있는 동안의 야습은 지켜내고 새벽을 기다리는것이 우선이라고 판단된 것이다. "로젠다로의 병력이 참전을 원하고 있습니다. " 나이트 미네온의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기사로 꼽히는 기사이자, 미네 온의 첫째 아들인 이나바뉴 바스크 283, 나이트 레다스가 미네온 앞에 섰다. 미네온으로서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로젠다로의 기사들이 비 록 전투에 패해 나라를 떠나 타국에 몸을 맡기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 엔 끊없는 투지와 크실을 향한 증오가 새겨져 있었으리라는것을 짐작했 기 때문이다. "라즈파샤님이 뵙고싶어 하셨습니다. " 로젠다로 바스크 3,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는 로젠다로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최정예의 에우로페 나이트중에서도 가장 용맹하고 강한 기사 로 알려져 있었다. 로젠다로 바스크 2인 에우로페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 스가 지난 전투에서 정체불명의 크실의 기사에게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는 실질적인 로젠다로 기사단의 대표였다--로젠다로는 전통적으로 기 사단 바스크 1을 국왕이 겸하고 있었다. 로젠다로는 이나바뉴나 크실에 비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종교적 결속력이 더 강한편이었고 국왕의 통치 방법 역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로젠다로의 기사단은 '성기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기사들이었고, 그래서 종교도시이자 로젠다로의 제 2도시인 슈리온의 이름을 따 에우로페 나이트를 '슈리온 성역 수호 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국왕이 기사대장을 겸하는 것 역시 신에대한 충 성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 바스크 1은 상징적 의미였으며 실제 로 기사대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사는 바스크 2의 기사였다. 기사대장 이 전사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로젠다로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미네온은 눈만을 돌려 창문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새벽이 오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듯 했다. "레다스, 적의 병력은 정확히 파악이 되었느냐 ? " 나이트 레다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둠때문에 정확하게 파악은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대략 6, 7만기 정 도로 보입니다. " "전부 오지는 않았군... 우선 위협만 주겠다는건가. " 미네온의 하얀 턱수염 끝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 레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새벽을 기다려 나아가 싸운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있는것은 아닙니 다. 물론 무턱대고 성을 지키는 것 역시 승산이 있는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 미네온이 그의 아들의 흐려진 말꼬리를 이었다. "... 이쪽으로 지원군이 오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지. " 레다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 다. 이나바뉴 중앙 기사단에서 파견을 나간 두 갈래의 선봉대는, 각기 하 라데스와 로젠다로로 진격해 갔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었다. 이나바뉴의 입장에서는 로젠다로를 점령한지 단 며칠만에 다시 험준한 라르그 산맥 을 넘어 이나바뉴의 땅을 습격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고, 그 작은 확 률을 고려하여 다쟌을 지원하러 가기보다는 하루빨리 로젠다로와 로젠다 로의 넷째 왕녀를 되찾는것이 더 중요했던것이다. 나이트 미네온은 자신 들의 관점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랐지만 어쩐지 크실이 곧장 이쪽으로 진격해 올, 이런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실제로 일 어난 것이다--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일찍. "미네온님. "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를 가진 기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앳된 얼굴에 빨갛고 갸름한 입술, 마치 소녀를 연상시키는 듯한 아름다 운 모습의 젊은 기사였다. 로젠다로 바스크 3, 나이트 라즈파샤였다. "... 싸우실것 아닙니까. 참전시켜 주십시오. 저희의 병력은 4만기나 됩 니다. " 몸을 의탁하고 있는것은 로젠다로의 기사단이었지만, 사실 다쟌에 주 준해 있던 이나바뉴 기사단은 3만기가 채 되지 않았다. 손님의 군대를 내어 쓰지 않으면 솔직히 이 전투는 힘든 전투였다. 미네온은 고개를 끄 덕였다. "국왕께서는 안녕하십니까 ? " 국왕은 나라와 왕녀를 잃고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에우로페 나이트의 두명까지 잃은 탈출의 충격으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라 즈파샤는 미네온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 그의 표정은 비장했다. 나이트 미네온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승산이 없 는 공성전 보다는 이 믿을만한 로젠다로 제 1기사와 협력하여 크실에 대 항할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283, 나이트 레다스는 첫번째 적과 일곱번 하야덴을 교환한 후, 그를 쓰러뜨리면서 문득 성문이 열리기 전 차가운 표정의 로 젠다로의 기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 절대 상대하지 말아야 할 적은 오직 한명, 저의 나라의 기사대장의 생명을 빼앗아간 정체불명의 기사입니다. 그는 온 몸을 검은색 갑옷으로 감싸고 있을테니 찾기가 어렵지 않을겁니다. 그를 만난다면... 절대 대적 하지 마십시오. " 결국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공성전을 마치고, 새벽이 오는것과 동시 에 다쟌의 성문이 열렸다. 열린 성문 밖으로는 나이트 레다스가 지휘하 는 이나바뉴 기사단 2만여기와, 나이트 라즈파샤가 이끄는 로젠다로 기 사단 3만여기가 성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나바뉴 기사단은 그렇다 치고라도, 로젠다로 기사단은 두명의 인원이 줄어든 '슈리온 성역 수호 대' 에우로페 나이트들이 기사단의 선두에 일렬로 정렬한 채 적을 향해 돌격하였다. 그들은 결코 몸을 아끼지 않았고, 최강의 기사들이 선두에서 돌격하는 로젠다로 기사단의 파괴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순식간에 전세 는 단 3만여기의 로젠다로 기사단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공격력이군. 아무리 최정예의 4만기라고는 하나, 이렇게 까지 강할 수가 있나. 이런 전력을 갖고서도 로젠다로가 며칠만에 수도 포프슨을 적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인가 ? ' 나이트 레다스는 속으로 그들의 전투력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새벽, 다쟌의 이른 아침 밝아온 하늘 빛에 모습을 드러낸 크실의 기사 단은 대략 8만기. 5만기, 아니 로젠다로의 단 3만여기의 기사단이 크실의 기사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다쟌 성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새벽 을 지나고 아침 햇살이 전장을 비추기 시작할때까지 계속되었다. 약간의 피로함을 느낄 즈음, 나이트 레다스는 크실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적을 추격할 것인가--만약 추격을 시작한다면 레다스에겐 대부분의 적을 섬멸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다쟌의 기사단은 소수였고, 추격을 나간 사이 성이 공격을 받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멀리에서 하야덴의 한광을 뿌리고 있는 나이트 라즈파샤를 바라보았다. 멀리에서 그의 시선 을 의식했을리는 없지만, 라즈파샤도 레다스를 바라보았다. '진격. ' 라즈파샤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수도와 왕녀를 빼앗긴 복수를 하겠다 는 건가... 라즈파샤는 거침없이 자신의 기사단에게 추격을 명했고, 레다 스는 약간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기사단에게 역시 추격 명령을 내렸다. 크실의 기사단은 이제 전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전투를 포기 하고 후퇴하는 크실의 기사단은 빨랐고, 언뜻 보아도 충분히 오랜시간동 안 훈련된 기사단임을 알 수 있었다. 레다스와 라즈파샤의 연합 기사단 은 한나절을 그들의 선두와 적의 후미에서 약간의 교전을 벌였을 뿐, 추 격과 도피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라즈파샤님 ! " 기사단이 어느 언덕을 달려 올라갈 즈음, 달리는 말 위에서 레다스가 외쳤다. 이미 다쟌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뒤였다. 혹 이것은 함정이 아닐 까... 그렇지 않아도 20만 규모의 기사단중 단지 8만기만으로 이나바뉴를 공격해 온 것이 석연치 않았는데, 이렇게 성에서 멀어져 버리니 불안해 진 것이다. "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습니다 ! " 실은 라즈파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등을 돌리고 도망 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적의 군세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투는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 싸운 시간이 짧았고 아군의 규 모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크실에 큰 타격은 주지 못한것이 그에게는 못 내 아쉬웠다. 그러나 라즈파샤는 레다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 다스의 하야덴이 하늘을 향했다. "정지 ! " 레다스의 명에 따라 이나바뉴의 기사단이 추격을 멈추기 시작했다. 기 사단의 전진이 멈추고 아주 짧은 시간 후, 레다스와 라즈파샤는 아쉬운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적의 기사단을 바라 볼 뿐이었다. "... 좋은 기회를 놓쳤군. 너무 성급했어. " 라즈파샤가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크실 의 후미를 돌아보며 기사단을 반전 시키려는 순간, 레다스의 비명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라즈파샤님 ! 적의 선두에 ! " 레다스의 외침을 듣고 라즈파샤는 휙 몸을 돌려 적이 멀어져간 방향을 보았다. 적이 올라가기 시작한 언덕 끝에서 한떼의 기사단이 갑자기 모 습을 드러낸 것이다. "역시 함정이었다. 적의 증원군이야 ! " 라즈파샤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나. 이곳까지 우리를 유 인해 내어 증원군과 합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쟌 성을 노릴 생각이었나. 라즈파샤는 등이 오싹했다. 로젠다로 최정예의 에우로페 나이트의 전원은 바로 이곳에 있었고, 국왕이 머물러 있는 다쟌 성은 텅 비어 있 었던 것이다. "반전 ! 즉시 퇴각하라 ! " 라즈파샤는 자신의 기사단에게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로젠다로의 기사단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 랍게도, 그들과 연합하고 있는 이나바뉴의 기사단은 반전하기는 커녕 함 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문득 돌아본 레다스는 승리에 찬 표정으로 하야 덴 대신 돌격용 리첼반을 꺼내들고 있었다. 레다스의 입에서 천둥같은 호령이 터졌다. "돌격 ! 적을 섬멸하라 ! " "...... ? " 라즈파샤가 다시 언덕위를 바라보니 방금 언덕위에 나타난 3만여기의 기사단은 무서운 기세로 크실의 기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크 실의 증원군이 아니라 이나바뉴의 기사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크 실은 양쪽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협공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레다스는 갑작스런 아군의 출현에 적지않게 기쁘면서도 그들이 누구인 지 의아스러웠다. 그의 시선은 적진의 선두에서 하야덴을 휘두르는 기사 에게 꽂혔다. 거기에는 자신의 키와 비슷한 길이의 은빛 하야덴을 휘두 르는 기사가 있었다. 그의 하야덴은 불필요한 동작이 없이 주위의 기사 들의 급소 급소를 차례로 찔러가고 있었다. 그의 하야덴은 시간이 지날 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갈수록 경쾌하고 점점 빨라지는 쾌검의 기사--그의 하야덴을 보지 않 더라고 그 말 위에 앉은기사의 키만으로도 그 기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열의 하야덴 '베락스'의 기사, 옐리어스 나이트 라벨이 적 진 한가운데서 크실의 기사단을 섬멸하고 있었다. 후에 '다쟌 언덕의 전투'라고 불리운 이 전투는 어둠을 틈타 다쟌을 습 격한 크실의 대패로 끝났다. 크실은 의외로 완강한 이나바뉴와 로젠다로 연합 기사단의 반격에 급히 퇴각했고, 아침이 오기 직전 다쟌 언덕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선발인 옐리어스 나 이트 라벨의 기사단과 마주쳐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하고 전멸 에 가까운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처음 다쟌을 공격해 온 8만여기의 기 사단 중 온전하게 로젠다로로 퇴각에 성공한 기사단은 3만기 정도의 규 모 뿐이었다. 라벨은 건장한 체격의 서글서글한 기사가 말에서 뛰어내려 무릎을 꿇 고 예를 취하는 것을 보며 급히 자신도 말에서 뛰어 내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쟌 성주 미네온의 아들인 레다스라고 합니다. " 라벨도 오른손을 올려 예를 취했다. "이나바뉴 바스크 149, 나이트 라벨입니다. 옐리어스 나이트입니다. " 그렇게 이야기 하며 라벨은 상대편에게 보이지 않게 약간 양미간을 찌 푸렸다. 레다스의 뒤에 집결한 기사단원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 고 있는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옐리어스 나이트다... 저 사람이 옐리어스 나이트야... 그들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경외심이라기 보다는 신기한 눈 으로 쳐다보는 그 많은 시선들을 감당해 내기엔 라벨은 너무 어린 나이 였다. 레다스와 몇마디 겸양의 말을 나누던 라벨은 문득 뒤에 서 있다가 천 천히 앞쪽으로 걸어 나오는, 자신의 입술만큼이나 붉은 갑옷 차림의 긴 머리에 창백한 얼굴의 기사를 보았다--강하다--나이트 라벨이 그를 처음 본 순간 느낀 느낌이었다. 강한 기사만이 강한 기사를 알아본다고 했던 가. 그 기사는 오른손을 올리고 허리를 가볍게 굽혀 예를 취했다. "로젠다로 바스크 3, 나이트 라즈파샤입니다. 에우로페 나이트입니다. "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라벨은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는 기쁨에 웃어 보였다. 그와 라즈파샤가 몇마디 말을 나누는 중, 문득 레다스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 로젠다로 원정대는 로젠 다로 쪽으로 가는줄 알고 있었는데요. " 라벨은 자신이 지휘한 3만여기의 기사단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로젠다로로 갔었죠. 사실 다쟌이 공격받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요. 원정대 선발 지휘관인 레이피엘님이--다른 사람의 앞이었기 때문에 라벨은 '퀴트린 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이쪽으로 와서 병력 지원을 요 청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쩌면, " 라벨은 잠시 말을 쉬었다. "이쪽 전투를 의식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원을 요청하려고 3 만여기를 꺼내 주신것이 이상했거든요. " 라즈파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다스가 말을 이었다. "... 여기에서 이야기는 이쯤 해 두죠. 다쟌 성으로 잠시 가셔서 쉬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출정은 하려고 하더라도 식사 한끼 정도는 하고 가셔 야죠. " "그래요.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로젠다로는 레이피엘님 과 이바이크님이 탈환하실거란 말이에요. 저도 싸우고 싶거든요. " 레다스는 손을 들어 기사단을 반전시켰다. 라즈파샤는 그 어린 옐리어 스 나이트의 전투력에 감탄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 었다--오늘, 로젠다로를 멸망시킨 바로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없었다. 그래서 전투를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로젠다 로 주둔군에 있는 것일까 ? 왜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을까 ? 로젠다로의 기사 라즈파샤가 이런 생각을 하며 말머리를 다쟌성으로 돌릴 즈음, 그의 생각 속에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크란은 이미 하 라데스성을 폐허로 만들고 로젠다로 원정대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로젠 다로로 진격하고 있었다. "레이피엘님, " 옐리어스 나이트의 순백색 전투복을 입고 긴 펜플을 바람에 날리며 말 위에 앉아 적진을 주시하고 있던 퀴트린은 나이트 네이서스가 무엇을 이 야기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엷게 미소를 띄우며 나이트 네 이서스를 바라보았다. 50세에 가까운 백전노장, 이나바뉴 바스크 182 나 이트 네이서스는 의미있는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주홍색과 푸른색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공격 명령을 내리면 당장에라도 맞붙을 거리--이나바뉴와 크실의 기사단은 상대방이 바라보 이는 언덕위에 각기 포진하여 있었다--에 정렬해 서 있는 적의 기사단을 향하고 있었다. 퀴트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적의 전력은 파악 되었나 ? " "예. 채 8만이 되지 않는것 같습니다. " "8만이라... " 퀴트린은 엷게 미소를 띄웠다. 퀴트린, 이바이크, 라벨이 이끄는 이나 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선발 병력은 8만여기. 그 중 라벨이 3만 기를 이끌고 다쟌으로 달려갔으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기사단은 5만 기 뿐이었다. "8만기의 숫자적 우세를 접어두고 렉카아드를 하려 하다니... " "지난번 전투 때문이것 같습니다. " 조용한 목소리로 나이트 네이서스가 말했다. 나이트 네이서스는 나이 가 나이인 만큼 직접 선두에서 적의 기사단과 혈전을 벌이기 보다는 많 은 전투 경험으로 지휘관에게 조언을 하는 부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 다. 나이트 레이피엘, 이바이크, 라벨등 최강의 기사들이 지휘하는 로젠 다로 원정대의 전투력은 어디에 비할 바 없었으나 단지 셋 모두가 젊은 기사들이기 때문에 경험이 많지는 않았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나 바뉴 기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는 자신의 부장으로 수십년간 전투를 같 이 했던 나이트 네이서스를 퀴트린이 지휘하는 로젠다로 원정대에 붙여 둔 것이다. 퀴트린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의 눈은 승리를 확신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전투에서 맞붙어 본 크실의 기사단은 그가 생각했 던 것 보다 훨씬 무력했다. 아니, 그들이 무력하다기 보다는 로젠다로 원 정대가 너무 강한것이었다. 이나바뉴의 역사에 옐리어스 나이트 세명이 동시에 참전한 경우는 없었고, 그들의 개인 기사단을 앞세운 원정대의 강력함이란 많은 훈련을 받은 크실의 기사단에서도 상상하기 힘든것이었 다. "... 강한 기사가 나올것 같은가 ? " 퀴트린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트 네이서 스는 잠시 적진을 바라보았다. "... 상관 없지 않습니까 ? " 그의 말에 퀴트린은 자신의 오른쪽에 서 있던 나이트 이바이크를 바라 보았다. 그는 불타는 눈으로 크실 적진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자신이 카발리에로의 예를 취했던 로젠다로의 넷 째 왕녀 세렌의 생각으로 가득하리라. 퀴트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적진 한가운데의 주홍빛과 푸른빛의 깃발이 열리며 몸집이 거대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검은 갑옷은 아니로군. "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혼잣말이 퀴트린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곳 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검은 갑옷의 기사를 만나지 못했다. 퀴트린은 지 금까지 작은 두번의 전투와 큰 한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나이트 카사드렛 의 생명을 앗아간 그 검은 갑옷의 기사의 기사단만이 크실의 핵심이며 최정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디에 있을까. 퀴트린이 생각하는것은 바 로 그것이었다--물론, 퀴트린 역시 그때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이미 로 젠다로를 떠나 하라데스에서 이나바뉴군을 패퇴시켰다는것은 짐작하지 못했다. 퀴트린은 천천히 그의 시선을 나이트 이바이크에게 옮겼다. 순간 기마 격투용 리첼반이 땅에 떨어지며 투명한 금속음을 냈다. "내가 나가겠어, 나이트 레이피엘. " 이바이크가 그의 하야덴--그의 하야덴은 날이 두껍고 무거웠으며 무척 날카롭고 잘 다듬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하야덴이라기 보다는 페치에 가까울 정도로 장식이 달려있지 않은 것이었다--을 꺼내든 것이다. 퀴트 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바이크가 내 뱉듯 다음 말을 이었다. "저런 조무라기를 쓰러뜨리는데 드는 시간도 아까워... 그 시간만큼, " 이바이크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세렌 공주님은 더 크실의 손에 잡혀있게 될거란 말이야. " 이바이크는 차분한 목소리로 펜플 안, 목 주위에 감겨 있던 케틀러스 (목에 감는 머플러의 일종. 원래는 기사계급의 악세서리 였지만 현재에는 꽤 많은이들--평민들을 말한다--이 이 케틀러스를 악세서리로 사용한다) 를 풀어 내어 하야덴의 손잡이에 둘러 매듭을 지었다. 그의 케틀러스는 모양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하얀 천에 금색 실을 정성들여 넣은 것으로 비교적 그의 하얀색 옐리어스 나이트의 예복과 전투복에 어울리는 편이 었다. 바느질이라고는 해 본적이 있을리가 없는 로젠다로의 세렌 공주가 자신의 카발리에로를 위해 며칠을 만든 케틀러스였다. 렉카아드나 전투 참가하기 위해 출정할때, 많은 경우 카발리에로를 떠 나 보내는 귀부인들은 자신이 몸에 지니거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의미있 는 물건을 주곤 했다. 손수건일 수도 있었고, 작은 노리개나 반지등일 경 우도 있었다. (나이트 라벨이 출정할때 레젠이 모자에 달린 깃털 장식을 떼어 그녀의 카발리에로에게 건네준 것도 그런 의미였다.) 지금, 세렌 공 주가 크실군에 잡혀있는 지금, 그녀의 생사 조차 확인할 수 없지만 이바 이크는 그녀에게 그런 물건을 받는 대신 예전에 그녀에게 받았던 케틀러 스를 하야덴에 감아 쥔 것이다. 이바이크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모양 정말 볼품 없죠 ? " "...... " "왕영 재단사를 시켰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하다못해 하녀에게라도 시켰더라면 훨씬 나았을텐데... " "...... " "... 그래도, 하나쯤은 제가 만들고 싶었단 말이에요. 기사님이 쓰실것 을. " "...... " "역시 기분이 언짢으신거죠 ? 마음에 안 드세요 ? " "...... " 이바이크는 뚫어지게 그 케틀러스를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 아무런 말 을 하지 못했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가슴이 너 무나 벅차 올라 할 말을 찾지 못했던것 뿐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반 만큼만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면. 나이트 이바이크는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는것만을 안타까와 하고 있었다. 퀴트린이 천천히 하야덴을 꺼내 들었다. "렉카아드가 끝나는 즉시 돌격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일시에 쓸어버리 게 말입니다. " 이바이크는 대답대신 퀴트린을 보고 씨익 웃었다. 마음을 알아줘서 고 맙다는 표정이었다. "간다 ! " 기합소리와 함께 이바이크는 말을 몰아 쏜살같이 크실의 기사를 향해 달려나갔다. 나이트 이바이크는 젊은 옐리어스 나이트였다. 퀴트린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어보이는 아주 큰 키에, 우람한 체구. 검게 그을린 강 한 피부와 부리부리하게 큰 눈의 호인형의 얼굴과 떡 벌어진 어깨를 가 지고 있었다--기사의 전투복이나 갑옷을 입지 않는다면 나뭇꾼이나 대장 장이정도로 보였을 것이다--그의 하야덴은 힘. 라벨의 하야덴은 불필요 한 동작 없이 깔끔하고 재빠르게 공격하는 쾌검이었고, 퀴트린의 하야덴 은 화려한 기술로 유명했다. 이바이크의 하야덴은 힘의 하야덴이었다. 그 는 퀴트린과 마찬가지로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고 두 손으로 무겁고 두꺼 운 하야덴을 쥐었다. 퀴트린의 생각대로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공중에서 하야덴이 교차 되자마자 상대의 하야덴은 부러지며 그의 손을 떠나갔고, 이바이크의 하 야덴은 단 한번의 공격으로 크실의 기사의 하야덴과 페가드, 갑옷과 몸 을 단숨에 두조각으로 만들었다. 퀴트린은 힘차게 손을 들어올렸다. "공격 ! " 퀴트린의 하야덴이 전방을 향함과 동시에, 함성소리와 함께 5만기의 이나바뉴 기사단이 크실군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렉카아드에서 패 한 크실의 기사단은 그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나바뉴 기사단은-- 특히, 렉카아드에 참전한 이바이크가 지휘하는 기사단은--반대로 사기가 오를대로 올랐다. 퀴트린은 최전방에는 서지 않고 기사단의 중간쯤,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달렸다. 전체적인 전세를 보기 위함이었다. 선두에는 이 바이크가 서 있었다. 그의 하야덴이 한번 휘둘러 질때마다 한명씩의 크 실의 기사가 사라져갔다. 나이트 이바이크의 하야덴을 받은 기사들은 베 어지기 전에 하늘로 날아오르듯 주위로 나뒹굴었다. 그의 하야덴은 절망 적일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숫적으로는 적지만 기세로 이나바뉴 기사단 은 크실의 기사단을 압도했고, 렉카아드에 패한 크실의 기사단은 전의를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로젠다로 탈환에 나선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가 첫번째로 탈환한 성은 로젠다로에서 이나바뉴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위치적으 로 매우 중요한--이나바뉴에서 로젠다로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 르그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그 산맥을 넘자 마자 도착하여 대열을 재 정비 할 수 있는 성이 바로 이 성이었다--펫파 성이었다. 이나바뉴의 기 사단이 성 앞 언덕에 나타나자 크실은 성문을 열고 평지에서 그들을 맞 아 싸우려 했다. 하지만 렉카아드에서 패한 크실군은 무참히 부숴져내렸 고, 하루와 반을 성 안에서 버텨낸 다음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퀴트린은 잠시 성에서 라벨을 기다리기로 했다. 어짜피 선봉이라는 것은 로젠다로 전체를 탈환하는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퀴트린은 조금 욕심을 내 고 싶었고, 그런 욕심을 내기엔 5만여기의 기사단은 너무 적은 숫자였다. 라벨의 3만기와, 그가 이끌고 올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그렇게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결국 그 판단은 놀 라운 기동력을 가진 크실 기사대장,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크란이 이나 바뉴 기사단의 로젠다로 탈환전이 끝나기 전에 로젠다로로 돌아올 수 있 는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실 바스크 47, 나이트 쿼어즈는 그 얇은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 다. "역시 문제는 그녀석이로군. "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머리 바로 아래에서 묶어 내린 호리호리 한 체격. 날카로운 눈매와 긴 코, 진홍색의 얇은 입술을 가진 그의 얼굴 은 침착함을 넘어서서 냉혹함까지 주위에 뿌려내고 있었다. 그의 표정 에는 냉소가 어려 있었다. 뒤를 돌아 창문 밖,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을 감싸고 있는 라엘만 협곡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쿼어즈는 중얼거리듯 이 말했다. "... 이미 알고 있었다. 이나바뉴의 기사들중 경계해야할 용사--이 표현 은 오직 크실에서만 쓰는 표현으로, 기사중에서도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기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셋 뿐이다. 기사대장 아켈로르. 그리고 옐리어스 나이트의 하이파나와 이바이크. 정보를 가져온 첩보단 쪽에서 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지만 내 생각엔 그렇다. 문제는 그렇게 세명이 다. " 쿼어즈가 등을 돌려 서 있는 쪽으로는 회색과 녹색, 자주색등 여러가 지 색의 갑옷과 펜플을 걸친 기사들이 마주본 채 서로 몇발자국씩 떨어 져 두줄로 서 있었다. 그 줄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은 기사가 한명 있었 다. 투구를 벗은 채 얼굴엔 고통이 역력한 그 기사는, 본래 예를 취할때 에는 오른 주먹과 오른 무릎을 바닥에 대어야 함에도 왼쪽 주먹을 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른쪽 팔은 잘리워져 나간듯 했다. 쿼어즈는 손에 들 고 있는 술잔을 조용히 탁자위에 내려 놓았다. "어쨌든 고맙다. 내 생각이 옳다는것을 알게 해 줬으니 말이다. 이젠 미련한 곰을 저 라엘만 협곡 속에 쳐박아 버리는것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전에, " "나이트 프렌스크, 그대는 하야덴을 들어야 할 오른팔이 잘리워졌다. 펫파성 전투 참패의 책임을 묻지 않더라도 이젠 무엇으로 크실에 그 충 성을 보일것인가 ? " 나이트 프렌스크라 불리운 그 기사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이 없 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린 쿼어즈는 갑자기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 한팔로 위대한 크실의 깃발이라도 붙잡아 흔들어 볼 셈인가 ? 북 이라도 치겠나 ? 아니면 부엌에서 수행하는 하인들의 수발을 들 셈인가 ? "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 기사의 명예는 어디에 두고 ?" 차가운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렸다. 쿼어즈가 하야덴을 꺼내 든 것이다. "... 각오는 되어 있겠지 ? " 방안의 공기는 그 훨씬 전 부터 냉각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차가 와 질 여유가 없었다. 해는 벌써 협곡속으로 가라 앉은지 오래였다. 쿼어 즈가 하야덴을 꺼내들었음에도, 이상하게도 방 안은 살기로 채워지지는 않았다. 쿼어즈가 말을 시작하고나서 처음으로 프렌스크가 입을 열었다. "... 훨씬 전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기사로서 죽음을 맞이 하는것만은 허락해 주십시오. " 쿼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내가 친히 너의 생명을 거두어주마. 일어서라. " 프렌스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였던 모습과는 다르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당당했고, 그의 고개는 뻣뻣하게 서 있었다. 눈은 쿼어즈의 어깨 너머, 창 밖으로 보이는 로젠다로의 하늘을 바라보 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손으로 정복한 아름다운 나라의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 나이트 프렌스크. 그대는 용맹한 크실의 기사였다. " 쿼어즈의 입이 다물어짐과 동시에 그의 하야덴이 방 안에서 은빛 곡선 을 그렸다. 프렌스크의 머리는 잠시 그의 목 위에서 머물더니, 이내 중심 을 잡지 못하고 흔들거리며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나서 야 그의 몸은 무릎부터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Yehmn Precsel Harrd. (화염계 소독마법) " 하얀색 불꽃이 쿼어즈의 하야덴을 손잡이 부분을 덮었다가 위로 화르 륵 타 오르면서 끝 부분에서 사라졌다. 불꽃이 사라지자 그의 하야덴은 다시 전과 같은 한광을 발했다. 앞 뒤로 하야덴을 뒤집어보며 나이트 쿼 어즈가 중얼거렸다. "나이트 각센, 나이트 이베론, 나이트 바란슈다스, 셋은 여기에 남아라. 지시할것이 있다. 나머지는 프렌스크의 시체를 거두고 각자 위치로 가서 명령을 기다려라. " 쿼어즈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앞에 두줄로 정렬해 있던 크실의 기사 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이트 쿼어즈는 내 려 놓았던 술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 사냥을 시작해야지. 그래... " 기사도나, 바스크에 관한 제도가 태초에서부터 있었던것과 마찬가지로 사형제도 역시 태초에서부터 있었다. 인간들이 신의 지배를 벗어나면서 부터--물론 이 시점은 역사학자들의 관점에서 조명된 것이지만--인간은 죄를 범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법이 만들어졌다. 법--태초 의 법은 문서화 된 그것도 아니었다--에 따른 인간대 인간의 심판에서 죄에 구형되는 최고의 형벌은 사형이었으나, 최고의 처벌은 아니었다. 귀 족이나 기사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스러운 처벌은 계급 강등과 함께하는 사형이었다--귀족이나 기사계급이 죄를 지으면 사형을 집행할때 무릎을 꿇지 않고 선 채로 머리를 잘리운다. 하지만 평민들이나 그들 이하의 계급은 무릎을 꿇은 채 그들의 죄 값을 치렀다. 따라서 무릎을 꿇리운 채 목이 쳐 지는것은 최고의 치욕이었으며, 따라서 포로로 잡은 기사를 사형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그의 명예를 보아 선 채 머리를 잘랐다. 물론, 천민계급은 하야덴이나 페치에 머리를 잘리워 죽는 일 보다는 주인의 채 찍이나 몽둥이에 맞아 죽는 '사형'이 훨씬 많았다--나이트 프렌스크의 죽 음은 기사로서 죽은 죽음이었다. 아마도 그는 죽어서도 원통하지는 않았 으리라고 나이트 쿼어즈는 생각했다. 밤 이었다. 별들이 수 놓아진 밤 하늘의 새카만 적막이 마치 그가 사랑한 소녀의 머릿결 같다고 나이트 이바이크는 생각했다. 그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와 커다랗지만 날카로운 기사의 눈. 억센 팔과 날렵한 옐리어스 나이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몸집. 그 호탕함과 쾌활함으로 이름 난 기사 이바이크의 모습은 전에 없이 침울해 보였다. '세렌... ' 나지막히 그는 로젠다로 넷째 왕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녀는 이 바이크보다 다섯살 아래였다. 이바이크가 그녀를 처음 만난것은 3년전인 아펠르력 640년 봄, 그가 스물 다섯살일때의 일이었다. '퓨론사즈를 떠나온 후, 오늘까지 내 하야덴 아래 사라져 간 목숨은 마 흔 셋. 이제 또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아야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오. ' 슈캉-- 하는 파찰음이 들렸다. 이바이크가 하야덴을 뽑아 든 것이다. '이 하야덴이 서른 조각으로 갈리워지고 온 몸이 피와 먼지로 뒤덮여 도, 그런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찾아 갈 것이오. 지금은 당신의 생사도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엔 당신의 차가운 시신이라도 만나러 갈 것이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날은 크실의 마지막 기사까지 내 하야덴 아래 쓰러진 날이 될 것이오. ' 나이트 이바이크는 자신의 하야덴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그 날도 그랬 다. 자신의 입이 떨어지도록 무던히도 바라면서 그는 뽑아 낸 하야덴을 으스러지도록 움켜쥐고 있었다. 하야덴의 한쪽 면에는 놀라서 그렇지 않 아도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떠진 세렌 공주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세렌 공주님, " 그가 그날 아침, 꺼낸 첫마디의 말은 그것이었다. "... 그래요. 맞습니다. 만난지 며칠 되지 못했지요. 실례인줄 압니다. " 그 커다란 몸집에 입혀진 옐리어스 나이트의 순백색 예복이 우습게 보 였던 걸까. 청순한 그녀의 얼굴에는 다음순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다시 이나바뉴로 떠난다면 저는 평 생 후회할것만 같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이바이크의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쉰 듯했다. 수만여기의 기사단을 지 휘하던 통쾌한 바스엘드의 목소리는 어디로 간걸까. 이바이크는 그 다음 말을 하기전에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의... " 돌로 만든 층계 바닥이 부서지듯 흔들렸다. 바닥에 꽂아 놓은 그의 하 야덴이 부르르 떨린 것이다. 이바이크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습니다. " 그 순간 길었던 그 적막과 고요를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 었다. 그 긴 기다림의 끝은 세렌 공주의 울먹임으로 끝이 났었다. "저도... 오늘 기사님을 떠나 보내면 어떡하나 하고... 그리워지면 어떻 게 하나 하고... " 엄청난 죄를 지을 뻔 했구나 ! 그 다음 순간 이바이크는 깨달았다. 이 말은 그녀 역시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는 말이라는것을. 용기를 내지 못 하고 그냥 그렇게 떠나 갔으면 고귀한 세렌 공주의 눈물을 떨구는 상상 도 할 수 없는 죄를 지었으리라는 것을. "누구냐 ! " 나이트 이바이크의 회상은 자신의 뒤쪽에서 바스락거림이 인 것을 마 지막으로 끝이 났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기사나 견습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것이 그에 게는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급히 닦은 눈물 자욱이지만 밤이 깊었으니 또렷이 보이지는 않겠지. 이바이크는 발걸음 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자신 의 등 뒤쪽에서는 짧은 두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중 한명이 갑자 기 바닥에 엎드렸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별 구경을 나왔다가 그만... " 기사를 따라온 수행원 일행이겠군. 이바이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 멋적게 하야덴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서 있던 여자 의 소매를 잡아 끌어 같이 엎드리게 했다. "용,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 나이트 이바이크는 아직 화가 난 듯 하지만 방금 전 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시간에 밖에 나다니는 것은 금지 되어 있었다는것을 모르느냐. " 호탕한 모습의 평소의 그 라면 당연히 용서를 해 줬을 일이다. 아니, 앉아서 더 구경을 하고, 하지만 일찍 들어가라고 한마디 해 준다음 오히 려 자리를 비켜 주었을 그였다. 지금 이바이크는 화가 난것이 아니라 조금 쑥스러운 것이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 그 둘은 두려움에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이바이크가 약간 난감해 하고 있는 순간, 저쪽에서 하얀 그림자가 다가왔다. 친숙한 느낌의 향이 코 끝 에 느껴졌다. 슈렐린 차 향기. 전장의 밤 한가운데에서 맡을 수 있는 가 장 사치스러운 향기였다. "나이트 레이피엘 ? " "무슨 일이십니까 ? 이바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는 웬일이지 ? " 하야덴 하나만으로 무장한 채 퀴트린이 다가오고 있었다. 걸어오다 적 당한 거리에서 멈춰 선 그는 가볍게 오른 손을 올려 예를 취했다. "생각할 것이 있어서 주위를 돌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 " "아, 아니... " 퀴트린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두명의 여자를 보고나서 다시 이바이크 를 바라보았다. "이 두명 모두 제가 데리고 온 몸종입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 " 이바이크는 헛기침을 했다. "일어나라. " 어색하게 한마디를 내뱉고 나서 이바이크는 막사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밤에 돌아다니려 하길래 주의를 주려고 했을 뿐... 자네를 수행하는 종들이라면 자네가 잘 간수하게. " 퀴트린은 멀어져 가는 이바이크의 뒷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세렌 공주님의 생각을 하고 계셨군... 그가 앉았던 자리에 묻어 있던 짙은 그 리움이 퀴트린에게는 느껴졌다. "일어나라. 오늘 있었던 일은 신경쓰지 말고... 참, " 퀴트린은 자리를 떠나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 슈렐린 차는 네가 타도록 해. 맛이 없더군. " 퀴트린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걷던 방향을 향했다. 내일 이면 라벨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겠지...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은 이제 겨우 말을 달려 5일 거리에 있었다. 라엘만 협곡. 산등성이에 등을 대고 반원형으로 만들어진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 은, 뒷쪽에서 공격받을 위험이 없다는 요새적 장점과 더불어 그 자신을 감싸고 있는 라엘만 협곡으로 인해 중립국의 수도다운 안전성을 자랑하 고 있었다. 그 라엘만 협곡을 바라보며 마주한 포프슨 평원을 앞에 두고 퀴트린은 조용히 옅은 아침 안개속의 포프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벨이 입을 열 었다. "... 어렵군요.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는게 좋겠어. 무작정 공격은 유리하지 않아. 네가 데리고 온 증원군에 로젠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가 있었다고 했지 ? " "네. 그렇지 않아도 퀴트린형을 만나뵙고 싶다고 계속 얘기해 왔어요. " 퀴트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리쪽은 라즈파샤의 증원군을 포함해서 11만. 아직 파악되지 않은 적은 15만정도... 거기에 적은 라엘만 협곡이라는 천연의 요새를 페가드 로 가지고 있다. " 라벨은 퀴트린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다시 안개속을 바라보았다. 안개 는 무척 짙게 깔려 있었다. "여섯명이 밤에 정찰을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돌아오지 못할것 같군요. " "그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것보다는... " 말을 마치자 갑자기 퀴트린의 표정이 굳었다. 라벨은 급히 퀴트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기사 ? " 퀴트린의 입에서 낮은 신음같은 소리가 나고 나서야 라벨은 미세하게 땅의 진동을 따라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기사. 하지만 단신이었다. 그 말발굽 소리는 포프슨 평원 건너 이나바뉴의 국 경에서부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 라벨이 왼손으로 옐리어스 나이트 전투복의 긴 펜플을 어깨 뒤로 젖히 자 오른손으로 가볍게 쥔 정열의 하야덴 '베락스'가 문득 드러났다. 퀴트 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보겠다. 넌 이바이크님을 불러줘. " 퀴트린은 말을 마치자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라벨은 베 락스를 든 오른손을 약간 올리며 예를 취하고는 즉시 자신의 말에 올라 타 이바이크의 막사가 있는 기사단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퀴트린은 급히 말을 달려 다가오는 말을 향해 말을 달렸다. 무언가 불 안한 느낌이 들었다. 기사로서의 육감. 불길한 소식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 말을 달렸을때, 퀴트린은 말 위에서 쓰러진 채 말을 몰고 있는 기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흙 먼지와 피, 땀으로 범벅이 된 갑주위에 얹혀진 희미한 백색의 전투복.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의 몸 자체보다도 더 튼튼히 말에 고정되어 있는 황금색의 애프러더, 신궁 아 카르드가 보였다. 퀴트린이 존경해 마지않던 옐리어스 나이트의 2인자, 나이트 하이파나가 그 말 위에서 숨이 끊어질듯 한 상태로 자신의 군영 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 그 말뿐이었나 ? " 나이트 이바이크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 퀴트린의 목소리 역시 무거웠다. 그 옆에 서 있던 라벨은 거의 울먹이 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 이바이크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 이를 깨물었다. 막사 침대위에 누워있는 하이파나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했다. 펜플은 이미 뜯겨져 나가 한쪽 어깨에 걸린 부분만 남아 있었고, 피와 흙먼지로 물든 전투복 역시 대부분 찢어져 나가 있었다. 옐리어스 나이트의 갑옷 역시 가슴과 다리, 오른 손의 바샤켄{{ ) 보호용구로 팔꿈치 이하 손등까지를 보호한다. 대개 갑옷에 포함된다. }}만 남 긴 채 모두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부숴져 있었다. 오히려 남은 갑옷의 조각들은 날카롭게 찢어지거나 끊겨 하이파나의 몸을 긁거나 속에 박혀 있었다. 이바이크가 입을 열었다. "하라데스 파견대와 원정대의 선봉은 완패했다... 적의 주력 6만기는 이곳, 로젠다로쪽으로 향했다... 라는 말만 남겼다는거지, 나이트 레이피 엘.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젠다로 파견대를 따라 온 왕영 의술사는 벌써 침상에 누워있는 하이파나의 상체 갑옷을 열고 그의 살 가죽에 박 힌 갑옷 조각과 벨폰의 앞부분등을 제거해 가기 시작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탈진된 상태이고, 온 몸에 다섯 군데의 골절이 있는데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회복에는 많은 시간 이 필요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놀라운 정신력입니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 거기까지 말하다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옐리어스 나이트'를 보통의 기사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국왕 친위대에 대한 불손한 말이었기 때문 이다. "그렇게 상처 입은 몸으로 6일 낮과 밤을 달려왔는데, 당연히 그렇지 않겠나. " 퀴트린은 짤막하게 말했다. "... 하지만, 호위하는 기사도 없이 이렇게 단신으로 오실 정도로 기사 단이 전멸했을까요 ? " 라벨이 말했다. 이바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처음에는 몇 기의 기사가 수행했을테지... 하지만 6일 낮과 밤 을 달릴정도의 체력을 가진 기사가 이나바뉴에 얼마나 있겠나. " "... 자신이 탄 말에 체력 회복 마법을 계속 시법하면서 말이야. " 퀴트린이 말하자 라벨은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나 바뉴 최고의 기사들, 옐리어스 나이트 세명중에서도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말을 타지 않고 6일 낮과 밤을 걷거나 뛰는것은 가능 했을지 몰라도 말이다. 본래 회복 마법은 쉽지 않은 마법이다. 하지만 하이파나는 하야덴이나 리첼반을 들고 직접 싸우기 보다는 애프러더를 사용하는 기사이기 때문 에 비교적 옐리어스 나이트 중에서는 완전한 기사에 덜 가까왔다. 그의 마법은 이나바뉴 기사단 전체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이파나가 말에서 내리는 순간 그의 애마--하이파나의 말 역시 보통의 말은 아니었 다--가 절명한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는 하이파나의 마법력 도 또한 바닥이 났던것일것이다. "어쨌든, " 이바이크가 입을 열었다. "확실한 정보를 얻은 셈이군. 적의 증원군도 6일정도 안으로 이곳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야. " "... 이 평원에서 적을 대비할 6일의 시간을 하이파나님이 벌어주신 셈 이네요. " 이바이크의 계산은 이러했다. 하이파나는 하라데스성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잠시 중앙 평원으로 몸을 피한 후 거기에서 이쪽 로젠다로로 달려왔 다고 했다. 크실군의 주력 6만은 아마도 며칠정도의 짧은 휴식을 취하고 이쪽으로 진군을 시작했을것이다. 하이파나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이 곳으로 달려왔고, 그들은 휴식을 취하며 올테니 6일, 짧아도 5일정도의 시간이 그들과 만날때까지 남아 있을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이 6일간, 평원에서 이나바뉴 로젠다로 원정대의 11만으로 6만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퀴트린은 약간 미소를 띄우며 이바이크를 바라보았다. "...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 " 이바이크와 라벨이 퀴트린을 바라보았다. 퀴트린은 말을 이었다. "6일 안으로 포프슨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말로 말입니다. " 그의 말에 이바이크가 동의했다. "좋아, 그 6일동안 어떻게 저 마법의 페가드--은유적으로 로젠다로의 포프슨을 지칭한 말이다--를 부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고. " "그렇다면 우선, " 퀴트린이 말했다. "어떻게 저 포프슨이 점령당했는 지부터 아는것이 순서일것 같습니다. " 막사 안에 있던 모든 기사들의 시선은 그때까지 가만히 한 구석에 서 있던 창백한 얼굴에 얇고 빨간 입술을 가진 기사에게로 쏠렸다. 로젠다 로 바스크 3,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였다. 아침의 짧은 일전이 끝난 후 크실군이 만든 협곡을 건널 다리가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끝이 없었고, 너무 성급하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그들은 다리를 완성시키고 나서 막사 를 걷을 준비를 하고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야습일것이다--포프슨 성 망루에서 크실군을 응시하고 있던 로젠다로 바스크 2,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 옆에 있던 나이트 라즈파샤가 눈은 다리 건너편의 크실 진영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저렇게 대담할수가 있습니까 ? 바로 눈 앞에서 협곡을 건널 교각을 만들다니요. " 퓨네스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저렇게 교각이 완성될때까지 우리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것에 대 해서는 그들이 의아해 하지 않을까 ? 결국 마찬가지이네. " "그럼, 원래의 계획대로 오늘 밤, 야습을 시작하겠습니다. " "좋아, 에우로페 나이트의 실력을 보여주게. "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겨우 10만 남짓일 뿐입니다. " 라즈파샤는 예를 취하고 몸을 돌려 성 망루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이트 퓨네스는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승리는 확 실했다. 크실군은 잘 훈련되어 있는것 같았지만, 복장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몇번의 전투를 거치고 이리로 달려온것 같았다--연락 은 없었지만 아마도 펫파등 몇개의 성은 점령당했을 것이다--그리고 나 서 조금의 휴식도 갖지 않고 또다시 교각을 건설한 것이다. 그들이 협곡 으로 둘러싸인 포프슨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그 교각을 건 너오는 수 밖에 없다. 에우로페 나이트들을 앞세워 교각을 건너기만 하 면 그들의 진영이 나온다. 평야에서 그들을 맞아 싸운다면 지친 그들은 쉽게 이길 수 있을것이다--이것이 로젠다로 군의 작전이었다. 성문이 열리고, 다섯명의 에우로페 나이트들이 이끄는 12만의 기사단 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성 안의 최소 전력만을 남겨 놓고 로젠다로 군의 총공세가 시작된것이다. 나이트 라즈파샤와 나이트 벨리드가 선두 에 선--바스엘드가 기사단의 맨 선두에 서는것은 로젠다로 기사단의 오 랜 전통이었다--로젠다로군은 순식간에 다리쪽으로 접근해갔다. 야습은 성공적이었다. 다리위의 크실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세명을 벤 라즈파샤는 약간 이상 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만든 교량이 무용지물이 되어가는데도 이상하 게도 그들의 저항은 필사적이기는 커녕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 의 체력 손실이 큰 탓일까. 로젠다로군은 별 손실 없이 다리를 건너 크 실의 막사 진영에 도착했다. "조금... 느낌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 함정이 아닐까요 ? " 옆에서 말을 몰던 나이트 벨리드--그 역시 에우로페 나이트였다--가 하야덴으로 다시 한명의 적을 쓰러뜨리며 라즈파샤에게 물었다. 함정 ? 라즈파샤도 그 말을 듣는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야습이었기 때문에 시야가 어두워 처음엔 알지 못했던 것이지만, 생각했던것 보다 적의 숫 자가 너무 적다는 생각을 라즈파샤 역시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함성소리가 사방에서 일제히 들리기 시작했다─아차, 포위된 것일까─ 라즈파샤는 급히 말을 멈추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벨리드가 그를 쳐다보 았다. 순간 라즈파샤는 눈을 찌푸렸다. 벨리드의 등 뒤에서 무언가 검은 물체가 쏜살같이 벨리드를 향해서 달려들고 있었다. "나이트 벨리드, 뒤다 ! " 벨리드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온 몸을 검은색 갑옷으로 덮고 있는 기사가 자신을 향해 보통 크기의 한배 반 정도되는 긴 하야덴을 겨눈 채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저녀석이 크실군의 바스엘드다--그의 몸에서 분 출되는 중압감이 벨리드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저할 시간이 없이 벨리드는 하야덴을 돌려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향했다. 한번 하야덴이 교차했다. 벨리드는 하야덴끼리의 충돌 후 깜짝 놀라 말을 움직여 두세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충격으로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 까지 저려왔다. 굉장한 힘이었다. 나이트 벨리드가 물러서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다시 하야덴을 찔러 왔다. 왼손에 든 페가 드만으로는 막을 수는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 벨리드는 페가드를 손에 든 채 팔꿈치를 굽혀 바샤켄을 페가드의 뒤에 밀착시켰다. 우선 일격은 피하고 볼 셈이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의 두번째 공격이 벨리드를 엄습했다. 엄청난 충격이 엄청난 속도로 벨리드의 페가드로 파고 들어왔다. 나이트 벨리드는 굽힌 왼쪽 팔을 가슴 앞쪽으로 당기며 충격을 완화하려 했지만 그정도 기술로 완화될 정도의 힘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부숴진 페가드와 바샤켄--바샤켄은 안쪽에 벨리드의 왼쪽 팔뚝을 담은 채--이 공중으로 날았다. 하지만 벨리드는 팔꿈치 바로 밑에서 팔이 잘리워져 나간 통증도 느끼 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검은 갑옷의 기사의 하야덴은 공중에서 반원을 그리며 무서운 속도로 벨리드의 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함정... 이정도의 함정에 빠지다니. ' 벨리드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로젠다로 기사단이 자랑하는 에우로페 나이트중 한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하지만 벨리드는 죽는 순간에도 알지 못했다. 함정은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반전 ! " 아직 자신이 가장 아끼던 기사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라즈파샤는 갑자 기 닥친 적의 포위 공세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는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에우로페 나이트들은 후미에서 전체를 엄호하라 ! " 그는 자신과 에우로페 나이트들과 더불어 기사단의 후미에서 후퇴하는 기사단을 보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것 처럼 신속한 후 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은 단지 5만도 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포위 를 당했기 때문이겠지. "라즈파샤님 ! " 어디선가 라즈파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너온 교각이 파괴되었습니다 ! " "뭐라고 ! " 사소한 실수가 아니구나... 라즈파샤는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완전히 계획된 작전에 빠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라즈파샤는 다급 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 뒤는 협곡--절벽과 다름 없는--이었고, 적은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 었다. 왼쪽을 맡고 있던 기사단이 무너져 내렸다. '설마 벨리드가 쓰러졌을까 ? ' 바스엘드에게 문제가 생긴 기사단은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지금 로젠다로의 왼쪽 진영이 그런 모습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든, 숫적으 로는 우세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퇴로는 ? 라즈파샤는 눈 앞의 기사를 쓰러뜨리고 문득 다시 뒤를 돌아 보았다. '교량이 무너졌다... 그렇다면 성으로 돌아갈 뒤쪽의 퇴로는 없... ' 뒤를 돌아본 라즈파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불타오 르는 교량 뒤로 보이는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 성 안에서 불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이 점령당했다 ? ' 본래 크실군은 그 절반이 다리가 놓인 협곡의 안쪽에 잠복해 있었다가 로젠다로 군이 교량을 건너자 그 다리를 파괴하고 협곡을 기어올라 직접 성으로 향한 것이다. 포프슨에는 최소의 전력만이 남아이었다. '대부분의 전력을 다리를 건너게 한 다음 그 다리를 파괴해 고립시키 고, 그 시간을 벌어 미리 건너왔던 기사단으로 성을 공격했단 말인가. ' 라즈파샤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포프슨이 점령되 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보시다시피 포프슨 평야에서 포프슨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군데에 있습니다. 크실의 진공소식을 듣고 저희 손으로 파괴한 다리--크실이 만 든 다리는 바로 저희가 먼저 파괴했던 그 다리가 있었던 위치에 있습니 다--와, 협곡이 가장 좁은 서쪽에 있는 또 하나의 다리입니다. 그 다리는 대군이 지나갈 수는 없고 대개 길을 잘 아는 행상들이나 상인들이 이용 하는 길 입니다. 그 길은 숲속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워낙 상황이 급박 했기 때문에 크실군이 알아 채리지 못했으리라 급히 예상하고, 국왕님과 왕족들, 귀족들은 기사대장님--로젠다로 나이트 바스크 2, 나이트 퓨네스 을 가리키는 말이다--과 나머지 에우로페 나이트들의 호위하에 탈출을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 퀴트린은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스는 국왕을 호위하다 전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누가 그를 쓰러뜨렸는지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 다. "아시다시피, 그 검은 갑옷의 기사였습니다. 그놈은 악마에 가깝습니 다. " 나이트 라즈파샤의 얇고 새빨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침상 에 누워있던 하이파나가 움찔했다. 그의 입에서 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 왔다. "... 그 녀석이... 쥬를... " "쥬님을 ? " 나이트 라벨과 퀴트린이 깜짝 놀라 하이파나 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다시 하이파나는 정신을 잃었다. 혹시 나이트 쥬가 당했다는 말인가 ? 라벨의 눈 앞에 하이파나의 긁힌 상처와 항상 성실하고 호쾌한 선배기사 옐리어스 나이트 쥬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계속하십시오. " 나이트 네이서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문득 라즈파샤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그 탈주로까지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리 쪽 퇴로를 끊긴 제 기사단의 포위망이 조금 느슨해지는듯 하더니 서쪽 숲에서 함성소리가 들렸습니다. 결과는... 퓨네스님이 생명으로 퇴로를 지 키는 틈을 타 국왕님을 호위한 에우로페 나이트들과 3만여기의 기사단만 이 살아남아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 네이서스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퀴트린을 쳐다보았다. 퀴트린은 시 선은 라즈파샤를 응시하고, 표정도 바뀌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트 네이서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 "... 예. " 퀴트린이 상대해야 하는것은 공포의 대상인 '검은 갑옷의 기사'만이 아 니었다. 다리를 만들어 적을 끌어들이고 그 퇴로를 차단한 후, 미리 준비 해 두었던 기사단으로 상대의 기사단이 빠진 성을 공격하고 그 퇴로까지 막아 놓다니... 이런 치밀한 계획을 세운 지략가 역시 퀴트린이 당장 상 대해야 할 적이었다. 네이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라데스에서 우리의 파견대를 격파한 기사단은 바로 그 검은 갑옷의 기사로 생각할 수 밖에 없을것 같군요. " 말 그대로였다. 쥬렌다스에서 나이트 카사드렛의 목을 벤 기사가 이끄 는 기사단의 기동성은 퀴트린 역시 익히 들은 바였다. 이번에는 이바이 크가 말했다. "지금 포프슨에는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없겠지만 그 미지의 '전략가' 는 있을법 해. 우선 그 둘이 합쳐지기 전에 하나를 먼저 쓰러쓰리는것이 유리하겠군. " 퀴트린도 동의했다. "있을 법 한것이 아니라 아마도 있겠지요. 그는 지금 벌써 우리를 공 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어쨌든, 방법을 모아봐야겠어요. 전쟁을 시작한 것은 크실쪽이었다. 2차 천신전쟁 이후, 또 오랜 기간의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내며 이나바뉴는 전쟁에 대해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에 반해 크실은 철저한 준비 후 이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일 것이다. 적이 우리를 아는것에 비해 우리는 적에 대해 아는것이 너무 없 다는것이 큰 문제라고 라벨은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는 아직 이나바뉴의 카사드렛과 로젠다로의 퓨네스등 이름 난 기사들을 쓰러뜨린 '검은 갑옷 의 기사'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회의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몇가지 의견이 오고 가긴 했지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그런 묘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이나바뉴의 기사들이 미지의 '전략가'를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아아젠, 아아젠 ! " 이제는 이스케의 호들갑스러움에 익숙해진 아아젠은 밝지는 않지만 어 색하지 않을정도의 웃음으로, 만난지 오래지 않았지만 오래된것 같은 편 안한 친구를 맞아주었다. 그녀는 식기를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슈렐린 차야. " 이스케는 주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짤막하게 요점만 말했다. 급하긴 한 모양이구나... 이스케의 입에서 사설 없이 요점부터 튀어나오다니. 아아젠 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이스케는 입을 다물지 않았 다. "아아젠, 요즘 너 자주 웃는것 같다. 예전에는 웃는 표정 한번 보려면 며칠씩 기다려야 했는데... 좋은 일 있니 ? " "좋은 일은 무슨... " 하긴, 음유시인으로 이나바뉴 대륙을 떠돌때 보다는 마음이 따뜻해졌 다는것은 사실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평민들의 발에 채이고, 식사때마 다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먹어야 했던 생활에 비하면 여유가 생길 수 밖 에 없었다. 물론, 가끔 자신의 진짜 신분--지금 그녀는 평민 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이 생각날때면 가슴이 서늘해질 때도 있었다. 이스케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 견습기사라도 한명 만나는거 아니니 ? " 아아젠은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말이야. 그럴리가 있니. " "아냐, 너 정도면 얼굴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예법에 익숙하지 않 은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그런건 아주 높은 분들에게가 아니라면 오히려 귀엽게 보일 수도 있단말이야. " 아아젠은 그저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아아젠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슈렐린 차라고 하지 않았니 ? " 이스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제서야 그녀가 여기에 온 까닭 이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 참, 내 정신좀 봐. 슈렐린 차야. 그것도 이번에는 두 잔. " "두 잔 ? 가끔 새럿가의 집에서 일할때엔 섀럿경과 귀부인이 두 잔을 원할때가 있기는 했지만 퀴트린은 항상 차를 혼자 마셨기 때문에 두 잔을 달라고 하는것은 처음이었다. 물 양과 슈렐린 차 잎 양을 조절할때 애를 먹겠는 걸... 게다가 끓이는 시간도. 아아젠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향이 좋게 타 져야 할텐데... ' 아아젠의 머릿속에 그녀가 오랫동안 사모해 왔던--그 감정은 아직 입 밖으로 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그 기사가 지나가듯 던진 말이 떠올랐 다. 별 빛이 하늘 가득한 아름다운 밤 이었다. "... 슈렐린 차는 네가 타도록 해. 맛이 없더군. " 아아젠의 얼굴에 가볍게 홍조가 인 것은 이스케도 보지 못했다. 아아 젠은 슈렐린 차를 타기 위해 천천히 찬장의 그릇을 꺼내기 시작했다. "로젠다로는, "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어떤 나라입니까 ? " 그의 말에 라즈파샤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나라였지요. " 나라였지요... 과거형으로 말하는 라즈파샤의 말에는 설움과 나라를 앗 아간 크실에 대한 적의가 담겨져 있었다. 끝까지 싸우겠구나, 이 기사는. 퀴트린은 문득 라즈파샤는 생명이 꺼져갈 순간까지 로젠다로를 위해 싸 울 기사라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퀴트린은 약간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 다. "로젠다로는 자유로운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 라즈파샤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자유롭다는건 약간 어색한 표현인것 같군요. 자유는 이나바뉴를 상징 하는 말이 아닐까요 ? 로젠다로는 이나바뉴와 크실, 양 대국 사이에 끼 인 자그마한 나라라 그다지 입지가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 저녁 식사후의 긴 회의가 계속됐지만, 역시 결정된것은 아무것도 없었 다. 회의가 제자리를 맴돌고 나아갈 방향이 보이지 않자, 혼수상태에 빠 진 하이파나--그들이 하이파나의 옆에서 회의를 계속했던것은 하이파나 에 대한 경의때문이었다--를 대신하여 의장격을 맡고 있던 퀴트린이 잠 시 휴식을 제안했다. 잠시의 휴식 후 다시 본 막사로 모이기로 한 것이 다. 그 사이 퀴트린은 라즈파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슈렐린차를 대접하 려고 자신의 막사로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라즈파샤가 말했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되는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로젠다로에는 필요 이상으로 경직된 예법과 의식같은것은 이나바뉴에 비해 적은 편이 라고는 할 수 있지요.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지요. 제가 말씀드린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 2차 천신 전쟁이 끝난 후, 루지아 9세의 정책은 계급간의 경제 격차를 감소시키는데 집중되었다. 그 결과로 경제적으로 나라는 안정이 되었지 만, 계급간의 정신적인 지위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로젠다로나 크실에 비해 이나바뉴에 특히 더 계급의 차이가 크고 그 고랑이 메워질 수 없을만큼 깊이 파여진것도, 타국인들이 보았을때에는 필요 없을정도로 많고 복잡한 격식과 예법, 예절과 의식등이 존재하는것 도 사실 이 때문이었다. 루지아 9세의 정책은 정책으로서는 성공했지만 그 후에 나타날 부작용 역시 품에 안고 성공했던 것이다. 나이트 라즈파샤가 말을 이었다. "... 이나바뉴의 예법과 의식이 잘못되어 있거나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 닙니다. 물론 멋지게 보이고 그만큼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습니다. 단지 복잡하고 치장이 많아서 가끔은 불편할때가 있을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퀴트린은 어깨짓으로 그의 말에 동의함을 표시했다. "맞는 말이지요... 옐리어스 나이트들 조차 가끔은 불편하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 옐리어스 나이트는 이나바뉴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격식과 예절을 중 요시하는 집단이고 그 예법을 지키는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기사들이었 다. "누가 오는군요. " 라즈파샤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막사 문쪽을 바라보았다. 퀴트 린도 알고 있었다. 매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하지만 허약한 몸짓으로 이쪽으로 걷는 발 소리가 느껴졌었다. "슈렐린 차를 가지고 오는 하녀인 모양입니다. " 라즈파샤는 빙그레 웃었다. "역시 명차는 오래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군요. " "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한것 같군요. " 라즈파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막사 문 밖에서 가볍게 찻잔과 그릇을 담은 쟁반이 달그락 거리며 놓여지는 소리가 들린 다음 기어 들어가는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입니다. " "들어와라. " 잠시후 문의 역할을 하고 있던 막사 장막이 조심스럽게 걷히고 슈렐린 차가 담긴 쟁반을 든 하녀가 고개를 숙인 채 걸어 들어왔다. 라즈파샤는 약간 알싸한 슈렐린 차의 향기가 방 안에 가득 퍼진다고 생각했다. "멋진 향 이군요. 마시기도 전에 가슴 속이 따뜻해 지는것 같습니다. " 슈렐린은 이나바뉴의 북쪽 휴우젠산 기슭에서만 자라는 야생 나무의 잎사귀로 만든 차였다. 이나바뉴의 궁중에서만 맛볼 수 있었을 뿐, 아마 도 태어나서부터 로젠다로를 떠난 적이 없는 라즈파샤로서는 처음 맡아 보는 슈렐린 차 향이었을 것이다. 퀴트린이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자 하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찻잔을 들고 잠시 향기를 음미하던 라즈파샤는 문득 이렇 게 말했다. "아름다운 하녀로군요. " "예 ? " "아, 그녀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 라즈파샤는 자신이 한 말을 반복했다. "아름답다고요... " 이나바뉴의 계층 체계와 같은 사회구조를 로젠다로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급 차이라는 것은 이나바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아서--이것 역시 루지아 9세의 정책 덕분이었다--로젠다로의 기사나 귀족들은 어렵 지 않게 평민들과 이야기를 했고, 호탕한 성격을 가진 기사라면 별 거리 낌 없이 자신이 거느린 견습기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병사들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이나바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이나바뉴에 서 살고 있었기에 퀴트린에게 라즈파샤의 말은 어색하게 들렸던 것이다. '아름답다는 표현을 그녀에게도 쓸 수 있는 걸까. ' 라즈파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퀴트린은 슈렐린 차 를 입으로 가져갔다. '... 내가 로젠다로의 기사였다면 그녀에게 아름답다고 말을 했을까. ' 퀴트린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고 있었다. 곧 이어서 회의를 계속해야 할 시간이었다. 순백색의 슈샤헨으로 덮인 침대는 본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 전란이 포프슨 성을 휩쓸고 지나가긴 했지만 성 자체, 특히 자신의 방만은 그 전과 다름이 없었다. 주인까지도 그 전과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로젠다로의 넷째 왕녀--였던-- 세렌은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 역시 하얀색 슈샤헨과 금색 무늬로 장식된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밝고 순진한 미소, 밝고 맑은 웃음이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얼마 되 지 않는 기간동안 훌쩍 커버린 느낌이었다. 하루에 다섯번, 밥을 먹을때 와 일어날때, 잠자리에 들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시종까지도 볼 수 없 었다. 항상 언니들과 사촌들, 귀족들의 중심에서 있던 그녀는 이제 외로 움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누굴까... 로젠다로의 기사들은 아닌것 같은데. ' 창 밖을 통해 보이는 라엘만 협곡 건너 포프슨 평원에는 많은 기사-- 그녀는 눈 대중으로 병력의 숫자를 파악하는 능력 같은 것은 당연히 가 지고 있지 않았다--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로젠다로의 기사들도 아니었 고, 그렇다고 열마 전 이 포프슨을 점령한 크실의 기사들 역시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나바뉴 인가 ? 이나바뉴의 기사단이 로젠다로를 탈환하러 온 것일까 ? 그녀는 망설이면서 손 끝으로 걷고 있었던 긴 슈샤헨─커튼 과 같은 것이다─을 조금 더 넓게 벌리고 눈을 창 가까이로 가져갔다. 이나바뉴의 기사단... 그렇다면 혹시 이바이크님이 ? 스물 세살, 세렌 공주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나타났다. 그녀는 멀리에 서도 나이트 이바이크의 모습은 쉽게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고 있 었지만, 생각보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수천, 수만명의 기 사단 속에서 자신의 카발리에로를 찾던 세렌 공주는 결국 슈샤헨을 걷은 손을 내렸다. 잠시동안의 침묵을 깬것은 라벨이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 " 방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모두 라즈파샤를 쳐다보았다. 포프슨 성의 구조상 그 방법이 가능하냐는 표정이었다. "... 가능은 합니다. 성 위에 세워진 초소를 파괴할 수만 있다면. " 크실군은 포프슨을 점령한 후 성 위쪽 산에 초소를 세워 놓았다. 포프 슨은 원래 등을 산에 기대고 반원형으로 지어진 성이었기 때문에 그 초 소가 있으면 성 뒤쪽에서 공격하는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그 초소가 없 다고 하더라도 포프슨은 라엘만 협곡이라는 천연의 장애물로 둘러 싸여 져 있기 때문에 공격이 매우 어려운 성이었다. 크실은 그에 초소를 더해 완벽을 기한 것이다. 의견을 냈었던 나이트 이바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소가 있었군요. " 이바이크가 낸 의견은 무모하긴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성공할 가능 성이 있는 의견이었다. 크실군이 가장 자신이 있고, 공격 하기가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한 성의 뒷편, 산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어떠한 방법으로 적의 시선을 산 위쪽에서 떼게 할 수만 있다면 작전은 성공할 수도 있었 다... 크실군이 새로 설치한 초소만 없었다면. 혹시 그 미지의 '전략가'가 포프슨을 점령한 후, 포프슨 성 주위의 지형을 살피고나서, 산 뒤쪽에서 의 공격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리 초소를 세워 놓은 것이 아닐 까 하고 라벨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정말 용의주도한 녀석이다. ' 다시 회의가 계속된 후 아직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퀴트린이 말했 다. "저도 이바이크님의 의견이 그래도 지금까지의 의견 중에서는 가장 좋 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 퀴트린은 세렌공주가 적의 손에 잡혀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도 냉정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이바이크에 대해 새삼 감탄하고 있 었다. 로젠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제가 포프슨을 지킬때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입 니다. 성공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요. " 초소만 없었다면 성공했을텐데... 퀴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네이 서스를 쳐다보았다. 퀴트린, 이바이크, 라벨등 이나바뉴 최정예의 기사들 이 이끄는 로젠다로 원정대에 참모격으로 참가한 기사대장 아켈로르의 부관, 50세에 가까운 백전노장 나이트 네이서스도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는 깊이 생각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에는 시간은 너무 늦었고, 또한 이바이크의 생각 은 포기하기에도 아쉬웠다. 자신만만한 적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 여 경계를 늦추고 있는 배후. 어쩌면 그 곳이 포프슨의 유일한 약점이었 을지도 몰랐다. "라벨이 단신으로 침투한다고 하더라도 들키지 않고 초소를 습격할 수 는 없을것입니다. " "그렇겠지... " 퀴트린의 말에 이바이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문제는 초소였다. 라벨이 머리가 아픈듯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작지만 또렷하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 뭔가 하나 잊어버리고 있는것 같군. " 모두들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얼굴 전체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고, 통증을 참느라 온 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입가에 약간 미 소를 띄우며 나이트 하이파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파나님 ! " 라벨이 가장 먼저 일어서서 하이파나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하이파나 는 제법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오, 라벨. 첫 출전인데도 무척 잘해냈구나. 이젠 제법 늠름해졌어. " 그는 로젠다로의 따가운 햇살에 그을린 라벨의 얼굴이라도 만지려는듯 손을 들었지만 아직 손을 들 정도의 체력이 회복되지는 못한 모양이었 다. 라벨은 당장 눈물이라도 터트릴듯한 표정이었다. "정신이 드신거죠 ? 어떻게 된거예요 ? 하라데스 파견대는 ? 쥬님은 ? 호위기사들은요 ? " 하이파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라벨의 뒤에서 퀴트 린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만둬라 라벨. 그 말을 하셔야 했다면 벌써 하셨을거다. " 하이파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것은 퀴트린이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문득 라벨이 돌아 본 퀴트린의 얼굴은 기쁨으로 떨리고 있었다. "레이피엘님 ? " 하이파나는 자신의 침상을 둘러싼 기사들을 돌아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트 레이피엘은 내 말을 이해한것 같군. 이바이크 ? " 그제서야 이바이크도 하이파나의 말 뜻을 알아들은것 같았다. 그는 갑 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아카르드 ! " 이나바뉴의 제1궁사, 이나바뉴 바스크 17 나이트 하이파나가 그의 애 프러더에서 쏘아낸 벨폰은 '아카르드'라는 별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애프러더는 결코 빗나가는 일이 없었고, 일단 명중하면 페가드--방패-- 나 갑옷 따위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쏘아낸 황금색의 벨폰은 '아 카르드'라 불리우며 이나바뉴의 여러 궁사와 기사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 어 왔다. 초소를 공격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아카르드가 있었던 것이다. 라카이드 헬로판가의 장남 쇼안 헬로판은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는 소 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나바뉴 중앙 기사단 소속 기사로, 이번 전투에 중군에 소속되어 참여하기로 했다. 지금 그는 오후에 있는 기사 단 소집에 나가기 위해 갑옷을 손보고 있는 중이었다. 중앙기사단의 갑 옷은 녹색과 황색이 어우러진 색이었고, 전투복도 마찬가지였다. "레젠 ? " 레젠 헬로판은 얼마전부터 전에 없이 우울한 표정이었다. 항상 생기발 랄하고 여자답지 않은 장난기로 가득찼던 레젠을 보아온 가까운 사람들 은, 그녀의 변한 모습에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 녀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쇼안은 요즈음 항상 그래왔듯이 밝 은 웃음으로 그의 막내 누이동생을 맞았다. "내 방에 온건 오랫만인것 같구나. " 레젠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입은 옅은 연두색 드레스에 붙어 있던 슈샤헨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엔 어색하다 못해 우습게까지 보였던 그녀의 드레스 차림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고 생각한순간, 문득 쇼안의 눈 앞에는 몇주일전 어느날 아침, 그녀가 멍 한 표정으로 문을 들어선 그 다음날 아침의 레젠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뭐라고했니, 레젠 ? " 엔나 헬로판은 그녀의 딸이 한 말이 믿겨지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 다--그녀는 아주 어릴때부터 그랬다--어릴적 친구들과 어울려 목검을 휘 두르며 말을 달리고, 남자처럼 웃으며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가끔, 예식 이나 무도회가 있어 드레스를 입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런 옷들을 매우 불편해 했고, 예식이 끝날때 까지 간신히 참아낸듯한 표정으로 집에 오 면 그 옷들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기 일쑤였다. 아마도 그녀는 퓨론사즈 의 귀족집안 귀부인들중에는 유일하게 승마복이 드레스보다 많은 아가씨 였을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놀란표정을 짓자 레젠 은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이 한 말을 반복했다. "제 승마복들, 전부 왕영 승마원에 기증해 달라고 했어요. 아니면 버리 시던지요. " "하지만 레젠, "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무슨 꿍꿍이 속일까 하고 생각했다. "이제 승마는 하지 않을거란 얘기니 ? " 레젠은 잠시 말을 쉬었다. "... 승마를 하지 않을거란 얘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전처럼 망아지처럼 뛰어다니지는 않을거라구요. " 망아지처럼이라... 엔나 헬로판은 조금은 의아스러웠지만 속으로 웃었 다. 레젠이 왜 이런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그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승마복들을 몇벌을 제외하고는 전부 왕영 승마원 에 기증해 버렸고, 그녀는 그 다음날 퓨론사즈 성내의 양장점에서 자신 에게 맞는 드레스를 여덟벌이나 주문했다. 그 다음날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예법이라면 질색을 하던 그녀가 자청을 해서 자신에게 예법을 가리킬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엔나 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녀는 점점 숙녀다와졌고, 그 날 이후 몇주일이 지난 지금, 그녀는 근처에서 소문난 아름다움과 정숙함을 갖춘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레젠의 옛날 모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 었다. 아버지인 라카이드 헬로판에게 있었던 마지막 걱정이 사라진 것이다. 문득 상상에서 깨어난 쇼안은 레젠에게 침대쪽에 있던 의자를 권했다. "거기 앉아.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니 ? " 레젠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의자로 다가가 우아한 자세로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쇼안은 문득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 농담을 걸고싶은 기분 이 되었다. "어때, 오랫만에 대전이나 해줄까 ? 네가 나무로 만든 하야덴을 휘두 르는걸 본지도 꽤 지난것 같다. " 레젠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숙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젠 웃는 모습까지도 숙녀다와졌군. 그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양의 예법 을 어떻게 다 배웠는지 신기할정도였다. "그게 아냐, 오빠. 물어볼게 있어. " "하야덴과 기사도 외에 물어볼것이 있단 말이지 ? " 쇼안은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레젠의 시선은 자신의 손끝에 가 있 었다. "이번 전투에 출정한다고 들었어. " 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정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오늘 오후 기 사단 소집에 나간 후, 돌아와서 자신의 개인 기사단--쇼안 역시 이나바 뉴 바스크 290의 작위를 받은 기사였다--7백여기를 소집할 생각이었다. "혹시... 앞서 간 기사님들의 소식은 듣지 못했어 ? " 쇼안은 보이지 않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카발리에로라는 열 여섯짜 리 꼬마 옐리어스 나이트를 걱정하는 모양이군. "글쎄. 원래 일반 시민들에게는 해줘서는 안되는 안되는 이야기인데... " 레젠은 쇼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도 벌써 여러군데에 이 이야 기를 물어보았을 것이다. 군사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와는 다른, 많이 미화되고 이나바뉴에 유리한쪽으로 왜곡된 이야기만을 그녀 는 들었을것이다. 그녀가 원하는것과는 다른... '어느쪽이 승리하고, 어느쪽이 패배했는지에는 관심이 없겠지. ' 쇼안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라데스쪽으로 간 선발대는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모양이야. 하지만... " 쇼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젠다로로 간 선발대는 승리를 거듭하고 있지. 몸이 다친 기사는 아 무도 없어. 물론 너의 꼬마 기사님도 말이야. " 레젠은 고개를 숙이고 윗이빨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지만, 얼굴 에 홍조가 나타나며 웃음이 지어지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 를 끄덕였다. "그래서 중앙 기사단은 우선 하라데스쪽으로 병력을 투입할것 같아. 우선 하라데스를 탈환해야지... 로젠다로는 현재의 병력으로 우선 위협만 하는것이 좋아. 벌써 쌍방이 많은 기사들을 잃었으니까. " 쇼안이 웃으며 그의 막내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끄 덕였다. "라벨님을 만나면 네 얘길 전해줄까 ? " 라벨의 이나바뉴 바스크는 149. 나이는 어리지만 쇼안보다는 서열상 상위의 기사였기 때문에 그는 라벨을 가리켜 존칭을 사용한것이다. "아니. 그를 보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건 조용히 기다리는것 뿐이야. " 많이 성장했구나... 이젠 정말 한명의 여인이 된거로구나. 쇼안은 따스 한 눈길로 그녀의 동생을 바라보다 눈을 돌려 창밖을 향했다. 기사단 소 집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레젠님. 깊은 밤 이지만 아직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일 저녁에 있을 총 공격 에 대한 긴장감 때문인것 같습니다. 내일, 드디어 잃어버린 로젠다로의 수도, 아름다운 포프슨을 탈환합니다. 그래서인지 기사단들도 모두 긴장하고 있는것 같아 저희 예하 개인 기 사단은 푹 쉬도록 해 두었습니다. 내일은 더 힘든 전투의 날이 밝아올테 니까요. 이바이크님도, 언제나 냉정한 표정의 레이피엘님도 긴장한 모습 입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나바뉴를 전부 뒤져내도 그 둘과 같은 강한 기사들은 찾아낼 수 없을테니까요. 밖에는 별이 많고, 공기엔 이안{{ ) 풀꽃의 일종. 귀족들의 정원 장식용으로 쓰인다. }}의 짙은 향기같은 흙 냄 새 가 묻어 옵니다. 레젠님이 좋아할 만한, 전쟁 한 가운데에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조용하고 아름다운 밤 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잠의 여신의 달콤한 품에 안겨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겠죠. 아니면, 무엇인지 그리워 창 밖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실것도 같습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신건 아닐까요--무엇이든 좋습니다--언젠가는 저도 그리로, 아름다운 레젠님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요. 저도 눈을 조금 붙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다면--물론, 승리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우선 병사를 시켜 이 편지를 부치겠습니다. 말이 빨리 달린다면 스무 밤을 지내기 전에 레젠님의 손 에 도착하겠죠. 내일, 저를 지켜 주시겠습니까. 레젠님이 항상 예뻐해 주시던 제 베락스--정열--에 꽂힌 당신의 영광 을 위해, 이나바뉴와 국왕--루지아 10세--님을 위해 내일 싸우겠습니다. 지켜 주십시오. 643년 가을, 멀리 포프슨 평원에서 당신의 카발리에로로 부터. 이나바뉴 바스크 53, 나이트 이바이크는 막사 안의 침상에서 번쩍 눈 을 떴다. 막사 장막이 걷혀지며 위병이 뛰어들어온것은 그와 거의 동시 였다. "밖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 " 이바이크는 서둘러 침상 옆에 세워 놓았던 하야덴을 집어 들었다. '아차, 너무 깊이 잠이 들었구나. ' 문득 밖을 보니 시간은 아직 새벽이었다. 한 밤중까지 회의를 거듭한 후,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깊이 잠에 든 것이다. 잠이 깊이 들면 기사 로서의 직감이 둔해지는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즉시 기사단을 소집하고 나이트 레이피엘에게 사실을 알려라. 내 갑 옷은 어디에 있지 ? " 지시를 받은 위병은 지체없이 막사에서 뛰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연 락병의 복장을 한 기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야영지의 좌로부터 적군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둠때문에 규모는 파 악이 되지 않습니다. " 좌로부터라고... 이바이크는 생각했다. 숲에 둘러싸인 작은 다리를 이용 해 공격해 온 것이로군. "각 기사단에게 당황하지 말라고 전달하라. 곧 가겠다. " 이바이크는 빠른 동작으로 갑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여섯명째 크실의 기사를 쓰러뜨린 라벨은 적의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마치 지난 밤 그들의 회의가 있었음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크실 기사단은 탐색전 정도의 접촉이 아니라 전면적인 공격을 해왔다. 잠을 자지 않고 편지를 쓰고 있었던 라벨이 가장 먼저 그들의 접근을 알아 차 렸고, 그래서 그는 연락병들을 띄워 각 막사에 사실을 알린다음 당장 움 직일 수 있었던 자신의 개인 기사단을 이끌고 먼저 전투에 나선 것이었 다. 이것은 이나바뉴 기사단이 전투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 한 것이었다. "루델 ! " 베락스--'정열' 이라는 뜻으로, 라벨 의 하야덴이 가진 별칭이었다--가 미친듯이 움직여 다시 크실의 기사 한명을 쓰러 뜨렸다. 라벨은 자신의 부관인 루델을 찾았다. 두어번 정도 더 그의 이름을 불렀을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불 쑥 피범벅이 된 리첼반이 솟아 올라왔다. "여기 있습니다 ! " "본대로의 연락은 어떻게 되었나 ? 이대로는 버티기 힘들것 같다 ! " 라벨이 급히 소집해 온 기사단은 자신의 개인 기사단 8백여기와, 이나 바뉴 기사단의 1천여기 뿐 이었다. 거의 5대 1, 10대 1이 넘는 싸움이었 고, 실력 보다는 경험이 부족한 라벨이 맞서기에는 벅찼던 것이 사실이 었다. 라벨과 그의 기사단은 조금씩 뒤로 밀리면서 로젠다로 선발대의 본대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루델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수천, 수만기의 함성소리에 묻혀버렸다. 후방에 나이트 이바이크의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돌격 ! " 하야덴과 하야덴, 하야덴과 리첼반이 서로 부딛히고 부러지는 속에서 도 이바이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돌격 명령과 함께 이나 바뉴의 기사단은 맹렬한 속도로 크실군에 부딛혀 갔다. 라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새벽이 밝아올 듯도 한데, 아직 주위는 칠흙처럼 어두웠다. 대 혼전이 계속되고, 몇명째 적의 기사들을 쓰러뜨렸는지 기억할 수 조차 없을때 즈음, 퀴트린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싸우고 있는 기 사들 사이의 밀집도가 증가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포위 당했나 ?' 아닌게 아니라 크실의 기사단은 이나바뉴 기사단을 삼면으로 포위 한 채 점차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포위당하지 않은 한면은 바로 라 엘만 협곡 쪽이었다. 이대로 밀려서 협곡에 도달하게 되면 이나바뉴의 기사들은 당황하여 혼란에 빠지게 될 상황이었다. 퀴트린은 입술을 깨물 고는 우선 나이트 네이서스를 찾았다. "네이서스 ! 하이파나님을 지켜라 ! " 지금 하이파나의 막사는 로젠다로의 라즈파샤가 지키고 있었다. 네이 서스까지 그리로 보낸것은 퀴트린이 지금 혈로를 만들어 탈출을 해야 할 것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는 패전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시간이 점점 지나면 크실 기사단 보다는 이나바뉴 기사단이 훨씬 더 많은 타격을 입을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명의 기사를 하야덴으로 겨누었을 때, 퀴트린의 옆에서 날카롭게 리첼반이 꽂혀져 들 어왔다. 날카로운 파찰음이 울렸다--힘이 좋은 기사였다--말에 탄 채 몸을 뒤 로 젖히고, 하야덴 손잡이의 바로 윗 부분으로 그 리첼반을 걷어 올린 퀴트린은 말을 왼쪽으로 회전시키며 리첼반으로 찔러온 기사를 바라보았 다. 퀴트린의 한배 반은 되는듯한 몸집의 그 기사는, 퀴트린의 키 만한 거 대한 페가드를 한손에 들고 나머지 한 손에 리첼반을 들고 있었다. 검붉 은 빛의 갑옷을 입은 그는 기묘한 웃음을 지으며 퀴트린에게 말했다. "네가 이바이크냐 ? 생각보다는 작은 키로구나. " 퀴트린은 대답하지 않고 하야덴을 들어 그 기사를 향했다. 크실의 기 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이베론. 이나바뉴의 바스엘드와 겨루고 싶다. " 퀴트린은 이바이크는 아니었으나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바스엘드임은 틀림이 없었다. 퀴트린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크실의 기사 이베론의 리첼반이 숨김 없이 퀴트린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져 왔다. 퀴트린은 여유있게 몸을 옆 으로 움직여 어깨 위로 리첼반을 피해 낸 다음, 하야덴을 들어 리첼반의 머리 아래쪽을 찔렀다. 강하지 않은 충격음이 들리며 이베론의 리첼반이 하늘을 날았다. 이베 론이 찔러 들어간 힘이 하늘쪽으로 향하자 힘을 회수할 시간이 없이 리 첼반이 이베론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퀴트린은 다시한번 하야덴을 하 늘 위로 찔러 올려 리첼반을 꿰었다. 이베론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이었으나, 그 얼굴은 곧 분노로 바뀌어갔 다. 그는 말 안장 옆쪽에 매달아 두었던 하야덴을 꺼내 들었다. 그 하야 덴 역시 보통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하야덴의 한배 반은 되는 길이의, 두 배 정도는 되는 두께를 가진 하야덴이었다--이바이크님이 사용하는 하야 덴보다 더 크겠는걸--퀴트린은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이베론은 그 거대한 하야덴을 꺼내 들고도 페가드 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바이크도 역시 두껍고 긴 하야덴을 사용하기 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 하면 이베론이 가진 힘은 정말 놀라운것이었다. 곧 이베론의 하야덴이 퀴트린의 왼쪽에서 쓸어치듯 엄습 해왔다. 퀴트린은 하야덴을 왼손으로 고쳐 잡고 하야덴을 수평으로 한 채 바닥을 향해 내리 찍었다. 그의 하 야덴에는 방금 이베론으로부터 탈취한 리첼반이 꿰어진 채 였다.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퀴트린이 바닥에 내리 꽂은 리첼반으로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이베론의 하야덴은 그대로 리첼반과 퀴트린의 하 야덴까지 밀어내 버린 것이다. 리첼반은 공중에서 둘로 나뉘어졌다. "네 힘은 이게 전부냐 ? 듣던것 하고는 다르구나. " 퀴트린은 뒤로 잠시 밀린 다음 하야덴을 다시 오른손으로 바꿔 잡고는 즉시 이베론을 찔러갔다. 이베론은 하야덴을 눕혀 들어 퀴트린의 하야덴 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퀴트린의 하야덴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 이며 이베론의 어깨를 찔러갔다. 이베론의 어깨갑옷이 날아 올랐다. 이베론은 깜짝 놀랐다. 퀴트린의 하야덴은 방어하고 있는 그의 하야덴 과 페가드 사이로 찔러져 온 것이다. 그 정확함과 속도는 전율할 정도였 다. 퀴트린은 일단 하야덴을 회수했다. 이베론은 힘은 뛰어났지만 기술적 인 면에서는 퀴트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퀴트린의 두번째 하야덴이 이베론의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이베론은 급히 페가드를 돌려 그의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퀴트린의 하야 덴은 옆쪽에서 쓸어오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노출된 그의 손목을 향해 급히 직선으로 찔러져 왔다. 처음부터 퀴트린이 노린것은 페가드를 쥐고 있는 왼손이었던 것이다. 이베론의 굵은 팔뚝이 중간께에서 부터 잘리워 져 나갔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페가드와, 그것을 쥔 이베론의 왼팔이 바 닥에 떨어져 내렸다. 이베론은 괴성을 질렀다. "이놈 ! " 이베론은 몸을 돌린 다음, 하야덴을 쥔 오른손을 길게 뻗어서 공격해 왔다. 이번 공격에는 이베론의 체중과 남은 모든 힘이 담겨져 있었다. 퀴 트린은 힘으로 맞서지 않고 몸을 옆으로 약간 돌린다음 하야덴을 비스듬 히 뻗어 이베론의 하야덴에 교차시켜 나갔다. 하야덴의 끝 부분끼리 닿 으려는 순간--정면으로 비스듬히 부딪혔다면 아마도 퀴트린의 하야덴은 멀리 튕겨져 나갔을 것이다--미묘하게 퀴트린의 하야덴이 흔들리며 이베 론의 팔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퀴트린은 몸을 앞쪽으로 숙이자 그의 하 야덴은 이베론의 팔을 발판삼아 직접 이베론의 가슴으로 뛰어 들었다. 작지만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퀴트린은 어깨를 움찔했다. 이베론 이 공격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하야덴이 가슴을 관통했어도 그 하야 덴을 쥐고 있던 퀴트린의 팔에도 역시 약간의 무리가 온 것이다. 짧은 시간동안 퀴트린과 이베론의 눈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다. 이베론의 일그러진 표정은 경이와 감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 베론의 육중한 몸은 천천히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퀴트린이 이베론의 가슴에서 하야덴을 뽑아 내고 잠시 그의 시체를 바 라보고 있을때, 등 뒤에서 퀴트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피엘님 ! " 나이트 네이서스의 개인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에리엔과 테바였다─ 그 둘은 모두 작위가 없는 기사였다─이었다. 방금 이베론과의 렉카아드 를 하기 전에 나이트 하이파나를 지키기 위해 네이서스와 함께 자리를 떠났던 기사들 이었다. 에리엔과 테바는 자신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 두어명의 기사들과 싸우 고 있었다. 퀴트린은 급히 그쪽으로 돌아가 그중 한명을 베어내었다. 에 리엔은 계속해서 하야덴을 휘두르며 외치듯 말했다. "포위가 된것 같다고, 탈출해야 한다고 네이서스님이 전하라고 하셨습 니다 ! " 퀴트린이 있지 않은 반대편 쪽, 크실의 공세는 더욱 더 거세어 지고 있었다. 이바이크가 있는 쪽은 그런대로 막아지고 있는것 같았지만 라벨 쪽의 방어선은 언제라도 무너질 기세였다. 이쪽은 방금 퀴트린이 크실의 바스엘드를 쓰러뜨렸기 때문에 크실의 기사들이 당황을 하고 있었고, '이 기고 있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곳은 이곳 뿐이었다. "에리엔 ! " 퀴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이트 라벨에게 가라. 이바이크님께 후위를 맡긴다고 전해라. 내가 선두에서 탈출로를 찾겠다. " "옛 ! " 퀴트린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벨폰을 공중에서 쳐서 떨어뜨렸다. "테바 ! " "옛 ! " 붉은 구레나룻을 기른 테바가 대답했다. "다시 나이트 네이서스에게 돌아가라. 네이서스와 라즈파샤님이 양쪽 에서 하이파나님을 호위하도록.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이탈한다. " "옛 ! " 생각 같아서는 결판이 날때까지 싸우고 싶었지만, 삼면이 포위가 된 상태에서 라엘만 협곡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퀴트린과 그 가 이끄는 개인 기사단이 최선방에 서고, 나이트 이바이크의 기사단이 후미를 방어하는 상태에서 이나바뉴 기사단은 크실의 포위망을 뚫기 시 작했다. 어둠속에서의 전투라 쌍방에 얼마의 피해가 났는지는 알 수 없 었지만 이나바뉴의 퀴트린은 직감으로 이나바뉴의 패전임을 느낄 수 있 었다. 하루만 늦게 공격했었더라도... 퀴트린은 계획이 수행되기 바로 전 날 습격이 있었다는것에 대해 안타까와 하면서 계속해서 앞을 가로막는 크실의 기사단을 부수어 나갔다. 새벽이 오려 하고 있었다. 아침 노을빛인지, 핏빛인지 모를 붉으스름한 여명이 포프슨 평원으로 다가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 7. 하늘에서 만나기 위해 엘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 그랬다. 양 어깨와 팔, 등에 벨폰 다섯발이 꽂힌채 자신의 피인지 남의 피인지 모를 피를 뒤집어쓰고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자신의 카발리에로가 거기에 있었다. '이바이크님 ! ' 그녀에게 기쁨과 동시에 슬픔이 가슴 깊은곳까지 전해져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그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자신의 카발리에로가 저렇게 많은 상처를 입고 있다는 슬픔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잠시 멈춰졌던 그녀의 눈물이 다시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그 참혹한 모습에 당장이라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아야 해. 이바이크님이 어떻게 싸우시는지, 난 보아야만 해-- 그녀는 이나바뉴의 기사, 옐리어스 나이트 이바이크를 발견한 다음부터 결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얀 로냐프 강 ------------------------------------------------------------------ }}{{ }}{{ 7. 하늘에서 만나기 위해 ------------------------------------------------------------------ }} 7. 하늘에서 만나기 위해 "그 병사는 이쪽으로 옮겨. 빨리 빨리 움직여 ! 한번 꾸물댈때마다 생 명이 하나 없어진단 말이야 ! "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를 따라온 의학사들은 다섯명. 그중 기사들만을 위해 따라온 왕영 의학사는 두명이었다. 한명의 왕영 의학사 는 막사에 들어가서 하이파나와, 방금 전 전투에서 어깨와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이바이크를 치료하고 있었고, 나머지 네명은 모두 야전에 펼친 다섯개의 커다란 막사에서 기사들을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만 해도 수천명에 달했기 때문에 의학사들은 자신들이 데 리고 온 준의학사들과, 심지어는 기사들의 수행원들까지 모두 치료에 동 원하고 있었다. 이스케는 자신이 돌보고 있던 어느 기사--엷은 녹색의 갑옷이 다 부숴 진채 신음하고 있던 그 기사는 왼쪽 가슴에 작은 짐승 뿔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트 라벨의 개인 기사단 소속 견습기사인것 같았다--가 눈을 갑자기 뜨자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 다. "정신이 드세요 ? 상처를 많이 입으셨어요. " 그는 복부를 리첼반에 관통당한 채였고, 아직 그 리첼반을 뽑아 내지 도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의 차례가 되기는 멀었기 때문이다. 마침 하얗게 소독이 된 수건들을 들고 그 근처를 지나가던 아아젠을 보자, 이 스케는 그녀를 불렀다. "아아젠, 이쪽에도 수건 하나만 줘. 이 분이 방금 눈을 떴... " 그 순간이었다. 눈을 번쩍 떴던 그 기사는 입에서 분수처럼 검붉은 피 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스케는 비명을 질렀다. "진정해, 이스케 ! " 이스케는 너무나 놀랐는지 아아젠의 팔을 붙들고 놓을줄을 몰랐다. 아 아젠은 소독된 수건 중 한장을 꺼내고, 나머지는 옆에 놓아둔 채 그 기 사에게도 다가갔다. 쏟아내는 피로 숨이 막히면 안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우선 고개를 옆으로 젖혀 놓았다. 입 안에 고여서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핏덩어리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스케는 기절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지만, 아아젠은 비교적 차분했다. 이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녀도 평생 음유시인으로 살면서 참혹한 모습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 다. "피, 피가... 저렇게 많은 피가... " "조용히 하란 말이야, 이스케. 차라리 의학사님을 불러와. 어서. " 이스케는 처음 보는 아아젠의 강하고 차분한 모습에 놀라면서도 흥분 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리가 거의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우선 피를 멈추게 해야 해. 이대로 놓아 두다간... ' 아아젠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디엔가 지혈을 위해 가져다 놓은 약 초들이 있을법도 했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곳에, 치료를 마치고 잠들어 있던 기사의 옆에 남은 지혈초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아아젠은 급 히 그것을 집어왔다. 이 세계에서의 의학이란 사실 치료 마법의 발전된 형태와 별반 다를것 이 없었다. 마법은 약초등의 시약들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치료는 약초를 이용하여 시법자--의학사--들의 치료 마법력을 증폭시켜 사용할 뿐이었 다. 아아젠에게는 마법적인 능력이 있거나, 그것을 개발한 적은 없었지만 음유시인 세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몇가지 치료법을 알고 있었다. 우선 그녀는 지혈초를 입에 넣어 씹었다. 마법적으로는 자극을 주지 못하지만 이렇게 해서 약초의 효능을 조금은 높일 수 있었다. 짧은 시간, 약초를 씹어 낸 아아젠은 이스케에게 말했다. "이스케, 조금만 도와줘. 이 기사님을 일으켜 세워야 해. " 이스케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아젠을 도와 기사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는 검은 피를 거의 다 토해 내고 이제 선홍색의 붉고 따뜻한 피를 입 에서 흘려내고 있었다. 아아젠은 씹은 지혈초를 입에 넣고 턱을 들어 올 렸다.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약초를 먹이는 방법이었다. 그리고는 등과 가슴의 부서진 갑옷을 떼어내고 직접 손으로 두드렸다. 그의 몸 안에서 잠시 희미한 빛이 일다 사라져 갔다. 약초가 효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이제 그는 더이상 피를 토해내지는 않았다. "됐어. 이제 피를 쏟지는 않을거야. " 이스케는 놀랍다는 눈으로 아아젠을 바라보았다. "아아젠, 넌 이제보니... " 아아젠은 머리카락부터 옷까지 피범벅인 채로 이스케에게 웃어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어디에서 주워 들은것일 뿐이야. "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웃어본게 얼마만인지... 하고 생각했 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빨리 이 금속으로 만든 막대를 뽑지 않으면 정 말 죽을지도 몰라. 이젠 정말 의학사님이 필요하겠어. " 금속으로만든 막대라고 ? 그녀가 리첼반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것 에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스케는 언제쯤 이 기사의 차례가 돌아올지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것 같았다. 그때, 막사 장막이 걷히고 역시 입은 갑옷에 온통 피칠을 한 기사가 들어왔다. 하얀색 전투복이 피에 젖어 그의 모습은 한층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아젠은 그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것 같았다. '퀴트린님이... 상처를 입었다 ? ' 막사로 걸어 들어온 기사는 퀴트린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는 피를 뒤집어 쓰고 있을 뿐, 상처를 입은것 같지는 않았다. 아아젠은 안도 의 한숨을 내 쉬었다. 퀴트린이 들어오자 막사에 있던 의학사들은 물론 누워서 신음하던 기사들까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다 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은 모두 일어나 오른손을 들어 기사의 예를 표하려 했다. 하지만 퀴트린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바델록 ? 어디있나 ? " 이나바뉴 기사단은 포프슨 평야에서의 전투에서 패퇴하여 한참 남쪽으 로 떨어진 분지까지 도달한 다음, 다시 진을 쳤다. 크실의 기사단은 포프 슨을 두고 추격을 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멀리까지 나서서 추격 을 하지는 않았다. 퀴트린, 이바이크, 라벨등의 기사는 잠시 다시 모였다 가 각자의 기사단을 점검하기 위해 흩어졌다. 그때 퀴트린은 자신이 아 끼던 세명의 기사중 한명--바델록--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 투복을 갈아 입지도 않은 채 막사로 뛰어 들어온 것이다. 저 뒤에서 의 학사 한명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일어서 오른팔을 올리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바델록, 여기에 있습니다. 바스엘드님. " 퀴트린은 즉시 그리로 갔다. 그는 왼팔이 손목 위에서 부터 잘리워져 있었는데, 그 외에도 온몸에 상처를 입어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방금 전 전투에서 크실 기사단의 방어선을 뚫기위해 퀴트린과 함께 최전방에 섰던 기사였다. 퀴트린이 가서 보니 하야덴의 독이 올라 그의 왼팔의 남은 부분은 푸른 빛으로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퀴트린은 그를 앉힌 후, 그를 돌보고 있던 의학사에게 말했다. "치료는 ? " "지, 지금 하고 있지만 상처가 큰데다 독까지 올라 시약을 만드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 그렇지 않아도 그는 열심히 큰 약초 덩어리를 손으로 주무르고 있는 중이었다. 퀴트린은 바델록을 바라보았다. "하야덴은 한손으로도 충분히 쓸수 있다. 기사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 았겠지 ? " 조금은 냉정한 표정으로 퀴트린이 묻자 바델록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에 억지로 밝은 빛을 띄웠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모두 언젠가는 바스엘드님과 같은 위대한 기사가 되겠다는 꿈을 버린적이 없습니다. " 퀴트린은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왼손에 작은 노란색 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델록, 너는 원래 페가드를 손으로 들지 않고 팔에 부착하곤 하니, 왼손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더 이상 깊이 팔이 절단된다면 페가드를 사용할 수 없게된다. 고통스러워도 참을 수 있겠나 ? " 바델록이 진지한 표정으로 퀴트린을 바라보았다. 퀴트린이 입을 열었 다. "좋다. Yehmn Precsel Harrd. (화염계 소독마법) " 퀴트린이 왼손을 바델록의 팔꿈치께로 가져간 다음 마법을 시법하자 하얀의 마법의 불꽃이 그의 절단된 부분부터 퀴트린의 손이 있는곳까지 타 올랐다. 으윽, 하는 신음소리가 바델록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곧 마법의 불꽃이 걷혔고, 그의 팔은 푸른 빛을 잃고 정상적인 팔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에 이어 오른 독 때문에 절단된 부분의 혈관이 막혀 나오지 않던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혈은 할 수 있겠지 ? " 퀴트린이 묻자 의학사는 허리를 굽히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퀴트린은 바델록의 어깨를 두드렸다. "쓰러지면 안된다. 포프슨을 탈환하기 전 까지는. " 퀴트린은 여기에 와서야 치료를 하는 사람들의 손이 너무나 모자란다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명 되지 않는 의학사들은 이리저리 뛰어 다 니면서 상처입은 기사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퀴트린은 자신의 마법력이 바닥이 날때까지는 자신도 치료를 돕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나바뉴에 서도 몇몇 안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였다. 문득 몇명에게 간단한 치료 마법과 소독마법을 시법하던 그는 자신들 을 따라 온 시종 두명이 어떤 견습기사를 간호하고 있는것을 발견했다. 라벨의 기사단에 속해 있던 기사인것 같았다. 그는 복부 깊숙히 리첼반 이 꽂혀져 있었다. 퀴트린은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걸 뽑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 누군가가 다가오자, 의학사인줄 알고 입을 열었던 아아젠은 깜짝 놀랐 다. 레쥰드를 깎아 낸 듯한 표정의 퀴트린이 자신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그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피는 멈춰져 있었다. 하지만 리첼반을 뽑아 낼 경우, 리첼반은 단순히 꽂혀 있는것이 아니라 그 기사를 관통하여 있었기 때문에 마법이 아니라 약초로는 지혈이 힘들것으로 보였다. "한번 정도의 치료 마법은 사용할 수 있겠지... " 혼잣말로 중얼거린 퀴트린은 주위에 있던 이스케와 아아젠에게 말했 다. "어깨를 붙잡아라. 움직이지 못하도록. " 두명이 기사의 어깨를 붙잡자 퀴트린은 왼손에 치료 마법의 스펠을 모 은 채 그 기사의 가슴에 대고, 오른손으로 리첼반의 머리 부분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아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윗 이빨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강하군... 겁에질려 벌벌 떨고 있는 이스케에 비 해 아아젠의 침착함은 놀라울 정도였다--부드러움속에 강함을 감추고 있 는 로냐프 강이라. 퀴트린이 리첼반을 뽑아내자 견습기사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몸을 움찔했다. 그는 이어 왼손에 모아져 있는 마법을 쏘아냈다. "Requtre Iraniul Wendtq. (치료 마법) " 황색 구체가 그의 복부에 덮였다. 잠시 밝아졌던 그 빛은 그의 몸 속 으로 스며들듯 사라져 갔다. 아직 체력을 회복했거나 완전히 치료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어느정도 지혈에는 성공 한 것이다. 문득 퀴트린이 중얼거렸다. "... 이미 지혈초를 삼켰군. 내부에서도 치료가 시작되었어. 이런 치료 방법은 정상적인 의학사는 사용하지 않을텐데... " 음유시인과 같은 천민 계급들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창상등의 상처에 대해서 나름대로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고 있 다고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났다. 퀴트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급하게 아아젠이 물었다. "저, 혹시... 다치신 곳은 ? " 퀴트린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아아젠을 바라보았지만 곧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다칠것으로 생각했나 ? " 이스케가 아아젠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떻게 그런 질문을 기사에게 할 수 있냐는 뜻이었다. 아아젠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 후회를 했지만 그 말을 하지 않고는 그가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하지만 고맙다. " 퀴트린은 던지듯 한마디 말을 남기고 다른 기사에게로 걸어갔다. 고맙 다... 자신을 걱정해 준것에 대해 고맙다는 뜻이었을까 ? 아아젠의 가슴 이 따뜻한 느낌으로 벅차올랐다. "그런것에 관심을 가져서 뭘 하니 ? 저분은 우리 이름들도 기억하지 못하실 거란 말이야. 상처를 입으실 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 라도 우리같은 것들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말씀 해 주실것 같니 ? 정신좀 차려 얘. 그리고 또 말이야, " 이스케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아젠 자신도 퀴트린의 말 한마 디에 기뻐하고 감격스러워 하는것이 얼마나 의미없는 일인지 알고 있었 고, 이스케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또 오늘부터 한동안은 잠을 못 이루겠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전력의 손실은 약 2만기 정도로 집계되었다. 라즈파샤의 증원군까지 포함하여 11만 이었던 이나바뉴 기사단의 관점에서 보면 적지 않은 피해 였다. 하지만 이 숫자도 네이서스의 판단이 빨랐기에 최소화 될 수 있는 손실이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가 이끄는, 케켄의 수호를 받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을 수 없이 강한 크실의 주력부대가 로젠다로에 도달하기까지 는 이제 겨우 5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아펠르력 643년, 가을이 지나고 이제 겨울이 오려 하고 있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24, 나이트 사야카는 맑은 하늘에 간간히 뿌려져 있 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에 느껴지는 추위는 이제 겨울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게 했지만, 아직 낮의 햇살은 그렇지 못했다. 아침과 저녁의 찬 바람 때문에 비교적 늦게 행군을 시작하고 일찍 끝내야 했기 때문에, 이나바뉴 기사단 중군의 행보는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선발대가 있는것 아닌가. " 이나바뉴 바스크 1, 이나바뉴 기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가 입을 열었 다. 그의 눈에도 사야카는 조바심을 내는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은 이제 막 로젠다로의 국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라데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무표정한 얼굴을 멀리 보이는 로젠다로를 바라보며 옐리어스 나이트 가이사로가 말했다. 이나바뉴 기사단의 중군은 또 둘로 나뉘어 한편은 옐리어스 기사단장 나이트 슈펜다르켄과 나이트 멜더--그는 죽은 나이트 카사드렛이 남긴 기사였다--등이 쥬렌다스를 경유해 하라데스로 가고, 나머지 한편인 아켈로르와 사야카, 가이사로등이 로젠다로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나이트 슈펜다르켄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로군. " 농담처럼 들리는 아켈로르의 말에 가이사로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슈펜다르켄님을 믿지 못하다니오. " 아켈로르는 옐리어스 나이트 가이사로의 표정이 재밌다는듯이 웃었다. 슈펜다르켄은 이나바뉴에서 유일하게 '성전위'의 작위를 받은 뛰어난 기 사였다. "단지, 이쪽은 걱정이 되지 않으니 자연히 하라데스쪽이 걱정이 되었 던겁니다. " 정말, 놀라울 정도로 로젠다로로 향하는 길목의 크실군은 깨끗하게 정 리가 되어 있었다. 로젠다로 원정대의 선발대는 최소한의 병력을 점령한 성에 주둔시켜, 포획한 물품과 포로들을 관리시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포프슨까지도 탈환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마지막으로 아켈로 르가 보고를 받은것은 그들이 포프슨 평원에 도착했을때 였지만.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중군은 로젠다로의 국경에 거의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정말 대단했어. " "그래. 보초만 아니었다면 술도 한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 한 보초가 이렇게 말하자 나머지 한명은 입맛을 다셨다. 어느 시대, 어 느 나라의 군대든지 승전 후의 식사는 후하고 넉넉한것이었다. 팽팽한 긴장이 지난 후, 풍족한 식사를 마친 그들은 이제 오늘 보초가 돌아왔기 때문에 동료들과는 달리 술을 마시지 못했다는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놀라운걸. " "뭐가 ? " "이나바뉴 기사단의 그 꼬마 기사 말이야. 그렇게 어린 놈이 그렇게 빨 리 하야덴을 휘두르다니... 굉장하지 않아 ? " 말을 꺼낸 보초가 들고 있던 마텐--질긴 금속 등으로 만든 긴 막대 끝 에 다시 날카로운 금속을 붙여 만든 무기. 외견상으로는 작은 리첼반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무기만의 공격력으로 비교하면 리첼반과는 비교할 수 없다. 마텐과 리첼반의 관계는 페치와 하야덴의 관계와도 비슷하나, 페치도 그 자체로 상당히 높은 지위와 명예를 상징하는 반면, 마텐은 기 병만 되면 누구든 얻을 수 있다는 다른 점이 있다--을 좌우로 휘둘러 보 였다. "자네도 봤어 ? " 그 보초는 휘두르던 마텐을 멈추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서 잘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봤어. 굉장했다고. " 여기 까지 말하고,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어쩌면, 각센님과 맞먹을 정도인지도 몰라. " 그 말을 듣자 나머지 한 보초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말이야 !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그는 상대방이 놀라는 표정을 짓자 시원스레 웃어보였다. "농담이라고, 농담. 감히 그런 꼬마와 크실 기사단 서방 원정대장인 각 센님을 비교할 수 있겠어 ? 게다가, 각센님의 하야덴은... " 농담이라는 그의 말에도 주위를 소심하게 살펴보던 그는, 갑자기 동료 의 말이 끊기자, 옆을 돌아 보았다. "각센님의 하야덴은 ? 자네, 말을 왜 하다 마는거야 ? " "...... " 그는 말이 없이 상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 그 보초는 마치 조각상처럼 멈춰 있는 상대방에게 다가갔다. "이봐 ? " 저녁 어스름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방금까지 호탕하게 웃던 표정 그대로였다. 단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 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상대방의 목을 좌에서 우로 아주 얇고 긴 금색 막대가 관통하여 있는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뭐지 ? 이곳까 지 벨폰이 날아올리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 보초가 상대방의 어 깨를 짚자, 그의 몸은 쓰러지듯 무너져내렸다. 그제서야 그는 알 수 있었 다. 벨폰이다 ! 어떻게 이런곳에 벨폰이 ? 그는 너무나 놀랐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도 길지는 않았다. 바로 다음 순간, 그 역시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또 하나의 황금색 벨폰에게 목을 관통당하고 만 것이다. 크실 바스크 47, 나이트 쿼어즈는 웃지 않았다. 그 주위의 여러 기사들 과 부관들이 웃고 있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시 소리를 내어 웃던 크실의 기사들은, 쿼어즈의 얇은 진홍빛 입술이 조금 씩 떨리고 있는것을 눈치채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 중 한명의 기사가 용기있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실일이 아닙니다. 새벽에 대패당하고는 밤에 역습해오다 니요. 무모한 공격일 뿐입니다. " "나이트 각센, " 쿼어즈의 입이 열리고, 그의 가늘고 얇은 눈이 각센을 향했다. 하지만 여전히 타는듯한 붉은 머리의 나이트 각센은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이나바뉴군은 대패당하지 않았다. 우리는 나이트 이베론을 잃었지만, 그들은 이바이크는 커녕, 조무래기같은 기사 한명 잃지 않고 안전하게 후퇴해갔다. " 각센은 섬찝했다. 이베론을 잃은것은 크실로서도 큰 손실이었다는 것 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쿼어즈님은 오늘 승리의 회식을 기사단에게 내리시지 않으 셨습니까. " "그건 내일, 또 한번의 총공격을 위한것이었다. 최소한 오늘 밤에는 공 격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배불리 먹고, 술과 승리에 취한 기사단으로 지금 그들과 맞서 싸우는것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모하 다. " "그, 그러나... " 나이트 각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로젠다로의 라엘 만 협곡이 보이는 포프슨 성의 방 안은 차디찬 공기로 채워지기 시작했 다. 텅 빈 공간에 적군의 함성이 엷게 스며들었다. 말을 마치고 창 쪽으로 돌아섰던 쿼어즈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나이트 각센, 성 문을 나아가 싸워라. " "예 ? " 포프슨 성이 난공불락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요새와 같은 지형적 잇 점때문이었다. 지금, 쿼어즈는 그 지형의 우위를 포기하고, 성문 밖의 전 투를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린것이다. 각센이 당연히 이해를 하지 못할것 이라는걸 미리 알고 있었는지, 쿼어즈는 주저하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적은 무모하지 않다. 어쩌면 이 시간이 우리의 방비가 가장 허술할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포프슨을 기습하는것이 불가능 하다 면, 처음부터 공격을 시작한다는 것을 상대편에게 알려주겠다... 지금 이 나바뉴는 그렇게 포프슨으로 다가오고 있다. 상대의 지휘관은 결코 어수 룩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은 기사다. " 상대방이 노리는것이 있기 때문에 정면으로 공격해 온다면, 처음부터 계략을 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뜻이었다. 각센은 무릎을 꿇고 오른 주 먹으로 바닥을 짚었다. "나이트 각센, 출정하겠습니다 ! " "아마도, " 각센이 일어서기 전에 쿼어즈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각센, 네가 만나게 될 기사는 이나바뉴 기사단의 바스엘드, 이바이크 자신이 될 것이다. 조심하는게 좋을거다. " "알겠습니다. " 각센은 일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자, 그의 예하에 있던 기사 들도 모두 쿼어즈에게 예를 취하고 각센을 따라 방을 나섰다. "나이트 바란슈다스, " "옛. " 바란슈다스는 이베론과 비슷한 체격을 가진 기사였다. 그는 자신의 이 름이 불리자 서 있었던 자리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서쪽의 숲으로 가라. 적군의 공격은 그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 "옛. " 바란슈다스도 명을 받고 나갔다. 바란슈다스와 그가 이끄는 기사들도 방을 나서자, 방 안에는 몇명의 기사밖에는 남지 않았다. 이베론이 죽고, 바스엘드를 잃어버린 기사들이었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왕성을 지킨다. 각자의 기사단을 이끌고 이 로젠 다로 왕성을 둘러싸 지켜라. 이바이크가 각센을 쓰러뜨린다면, 반드시 로 젠다로의 왕성으로 올 것이다. 이곳에는... " 기사로써 지켜야할 가장 소중한, 군주의 명령보다도 소중한것이 있기 때문에... 라고 말을 맺지는 않았다. 지금, 쿼어즈는 바로 그 기사의 명 예를 무기로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크실의 '전략가'는 정면으로 공격해 올것입니다. 정면으로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이미 침투에 성공한 이바이크님의 기사단이 성문을 열테 니 더 좋겠지만, 아마도 그런 기회를 얻을 수는 없을것입니다. 크실의 기 사단중 가장 강한 기사로 승부해올것입니다. " "그렇다면... 어쩌면 좋은가 ? " 퀴트린은 계속해서 네이서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이서스는 조용 히 미소지었다.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가장 강한 기사로 대적하는 수 밖에 는... " 퀴트린은 그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네이서스가 하고 싶 은 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트 쿼어즈의 예상은 대부분 적중했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두가지가 있었다. 초소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나이트 하이파나의 신궁 아카르드가 있었다는것, 그래서 완전히 믿고 있었던 등 뒤가 결국 엔 가장 위험한 곳이 될 것이라는것과,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 대에는 이바이크와 어깨를 견줄만한, 어쩌면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옐 리어스 나이트 레이피엘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야덴의 날끼리 부딪히자, 나이트 각센은 어깨가 깊게 저려옴을 느꼈 다. 하지만 다음순간, 상대방의 하야덴은 구부러지듯 휘어 다시 각센의 가슴을 엄습했다. 순간적으로 하야덴을 움직여 상대의 하야덴을 튕겨내 려 했으나, 팔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왼손에 든 페가드로 날카 로운 동작을 막아내는 방법 뿐이었다. '강하다... ' 기사로서의 명예때문에 입 밖으로 그 말을 내지는 않았지만 각센은 상 대방이 정말 강하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각센은 입가로 쓴 웃음을 흘렸 다. '소문대로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는군. 오직 공격만을 전투의 전부로 생 각하고 있군... 이 녀석에게 공격의 기회를 줘서는 안되겠다. ' 각센은 페가드를 앞으로 뻗어 상대방의 시야를 가린 후, 하야덴을 오 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쓸어갔다. 퀴트린은 몸을 아래로 숙이며 하야덴을 비스듬히 눕혔다. 충격음은 컸지만, 이상하게도 부드럽게 각센의 하야덴 은 윗쪽으로 튕겨져 올랐다. 가슴이 비었다 ! 각센이 놀란순간, 퀴트린은 하야덴을 들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벨폰 을 하나 쳐서 떨어뜨렸다. 그 벨폰이 각센을 살린것이다. 각센은 그 기회 를 놓치지 않으려고 다시 퀴트린에게 달려들었다. 퀴트린은 다시 하야덴의 깊숙한 부분으로 각센의 하야덴을 받아 밀쳐 냈다. 한치의 빈틈도 없는 방어였다. 그 방어는 곧 바로 공격으로 이어졌 다. 각센은 몸을 뒤로 밀쳐내며 퀴트린의 하야덴을 피했다. 퀴트린의 하 야덴은 각센의 페가드 윗 중간 부분을 잘라내고 다시 퀴트린의 가슴께로 돌아갔다. 각센은 뒤로 밀려났던 몸이 앞으로 나오면서 그 기세 그대로 하야덴을 찔러갔다. 퀴트린은 다시 방어자세를 취했다. 퀴트린이 예상했던것과는 달리, 각센과의 일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나이트 네이서스의 말이 맞 은 것이다--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 승자가 되리라는것을 짐작 하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해뜨기 전, 새벽녘의 어둠은 그 추위에 못지 않게 짙었다. 바란슈다스는 이미 그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도 숲 속에 가리워진 다리 를 건너는 발자국 소리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이트 쿼어즈의 지혜 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대단하군. 적의 양동작전을 그 짧은 시간안에 판단하다니 말이 야. 하지만 이바이크 놈은 각센님에게 빼앗길테니 내가 세울 공은 그다 지 크지 않겠군. ' 바란슈다스는 쿼어즈가 내린 명령을 기억해 냈다. '반드시 적이 다리를 건넌 후 공격을 시작해라. 서쪽 숲 속에 숨겨진 다리는 좁고 길다. 그들이 모두 다리를 건넌다면 그 좁은 다리는 바로 막힌 퇴로가 되고 말것이다. ' 그의 말대로였다. 이나바뉴의 가장 강한 기사라는 옐리어스 나이트 이 바이크가 각센과 일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쪽에서 바란슈다스와 상대 할 기사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을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좁은 다리 를 건넌 후 퇴로가 끊긴 이나바뉴 기사단은 몰살당할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자. 그들이 모두 다리를 건널때까지... ' 바란슈다스가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승리의 기쁨에 젖어있을때쯤, 새 벽 어스름 빛 밑에 몇천기가 모여 한 덩어리처럼 보이던 상대편 기사단 의 한 가운데가 열리고 검은 점 하나가 크실의 기사단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왔다. 우리가 매복해 있다는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 그 기사는 순식간에 크실의 기사 한명을 베었고, 두번째 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등 뒤에 또 다른 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전혀 망설 임 없이 바란슈다스를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단 두명의 기사로 크실 기사단을 향해 뛰어온다는 말이냐 ? 어리석은 것들 ! " 바란슈다스는 그 거대한 몸을 말 위에서 일으켜 하야덴을 든 손을 높 이 들었다. "공격하라 ! 적의 퇴로는 차단되었다 ! " 쌍방의 함성이 울리며 둘로 나뉜 기사단이 서로 맞붙었다. 새벽이 오 기 전, 포프슨 성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것이다. "루델, 그동안 많이 늘었는걸. " 이나바뉴 바스크 149, 옐리어스 나이트 라벨의 하야덴은 어둠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상대는 라벨의 하야덴을 눈치 챌 새도 없이 두 조각 으로, 세조각으로 갈리워졌다. 라벨은 그 짧은 시간에 열명도 넘는 상대 를 베어내고, 자신의 부관격인 루델을 찾았다. 자신과 닮은 움직임을 가 지고 있기 때문에 어둠속에서라도 그를 찾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아까 크실군을 발견했을때 자신보다도 먼저 적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내심 불안했던 라벨이었다. "고맙습니다. " 루델은 하야덴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의 어린 바스엘드를 바라보 며 싱긋 웃어 보였다--어둠속의 웃음이라 보이지 않았을테지만--그는 아 직 작위는 없었지만 이번 원정에서 공을 세운다면 라벨의 추천 여부에 따라 작위를 받을 수도 있는 기사였다. 그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날카로 운 곡선을 그리는 하야덴, 세련된 예절을 보며, 라벨은 전부터 틀림없는 옐리어스 나이트 감이라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루델과의 짧은 격려를 주고 받은 라벨은 곧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몸집의 그는 하야덴을 곧게 세우고 라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 기사단의 바스엘드로군. ' 라벨도 사양하지 않고 마주 하야덴을 들었다. 옐리어스 나이트중에서 도 가장 빠른 하야덴을 사용하는 라벨은 상대가 힘으로만 부딪혀 온다면 그 누구와 싸워도 대등하게 싸울 자신이 있었다. 라벨 역시 하야덴을 곧게 세워 상대의 하야덴에 부딪혀 갔다. 하지만 두 하야덴의 끝이 서로 충돌하려는 순간, 라벨은 다시 하야덴을 흔들어 하야덴의 좁은 부분으로 상대 하야덴의 넓은 부분을 밀쳐냈다. 바란슈다 스의 하야덴이 주춤하는순간, 라벨은 하야덴을 눕힌 채 비스듬히 쓸어 내려가 바란슈다스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아랫부분을 찔렀다. 바란슈 다스는 하야덴이 밀쳐진다는것을 느끼기도 전에 손에서 하야덴을 놏치고 만것이다. 라벨은 하야덴의 방향을 바꿔 지면과 수평하게 눕힌 다음, 두 손으로 잡은 하야덴을 그대로 스치며 페가드 안쪽을 찔러갔다--나이트 라벨은 퀴트린이나 이바이크처럼 아주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는것은 아니 지만 가끔은 이렇게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기술이 화 려하거나, 힘을 이용한 하야덴을 사용하기 때문은 아니었고, 단지 어린 나이때문에 완력이 다른 기사들에 비해서 부족하기 때문이었다--이 모든 동작이 단 한번 서로가 마주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각센이 직접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 어린 옐리어스 나이트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바란슈다스의 표정은 놀라움과 분노 로 일그러졌다. 이 싸움 역시 누가 승자가 될지는 뻔한 싸움이었다. 그리 고 바란슈다스가 그처럼 감탄했던 쿼어즈의 계략은, 이미 산등성이를 타 고 포프슨 성 안쪽으로 직접 공격해 들어가는 나이트 이바이크의 기사단 에 의해 깨어지고 있었다. 라벨의 역할은 이바이크가 무사히 잠입해 들 어갈 수 있도록 크실의 기사단--바란슈다스의 기사단--을 상대하는것 뿐 이었다.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크실의 입장에서는 이나바뉴의 기사단 1만여기가 포프슨 성 안에 갑작 스럽게 나타난 것이었다. 더군다나 최선방에 서서 마치 악귀처럼--그들 의 눈에는--크실의 기사들을 베어내는 키가 큰 기사는 전해듣던 생김새 로보아 바로 이나바뉴의 최고의 기사라는 이바이크임이 틀림 없었다. 포 프슨 성의 정문은 분명히 각센님이 막고 계실텐데... 난데없이 나타난 이 나바뉴 기사단 때문에 포프슨 성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바이크님, 진정하십시오. 그렇게 흥분해서는 이바이크님 자신이 위 험합니다. " 맑지만 냉철한 로젠다로의 기사 라즈파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즈파 샤는 자신의 기사단의 지휘는 퀴트린에게 넘기고, 홀로 이바이크를 따라 포프슨 성 안쪽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자신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로젠다로의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스가 지켜내지 못한 조국의 수도를 자 신의 손으로 되찾겠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나바뉴 기사단 의 두뇌 역할을 하는 나이트 네이서스의 부탁이 더 컸다. "이바이크님은 대개는 냉정히 판단을 하시는 분이지만, 가끔 감정을 절제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는 무모함도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라즈파샤님이 부디 이바이크님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 네이서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이 명예를 걸고 지켜온 포프슨 성이 크실군과 이나바뉴군, 그리고 로젠다로군의 시체로 덮여가는것을 보면 그의 몸속에서도 피가 거꾸로 솟으려 했지만, 이바이크의 마음은 그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라즈파샤는 이바이크의 눈에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무서운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바이크의 귀에도 라즈파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못들은척 계 속해서 앞을 가로막는 크실의 기사들을 향해 하야덴을 휘둘렀다. 이바이 크도 역시 스스로 지나치게 서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그의 감정은 그를 스스로 냉정하게 되도록 하지는 못 했다. 그는 한 손에는 하야덴을, 다른 한 손에는 격투용 리첼반을 들고 있었고, 거의 방어를 생각하지 않고 끝없이 크실의 기사들만을 베고, 찌 르며 쓰러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몸은 크실 기사들의 피와 자신의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의 등과 어깨에는 이미 두개의 벨폰이 꽂혀 있었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지난 밤 전투에서 얻은 상처가 가끔 쓰릴 뿐이었다. 이바이크 자신이 그의 기사단을 이끌고 포프슨 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 온 후, 스스로 공격명령을 내린 직후부터 현재까지 그는 이십명도 넘는 기사들을 벌써 쓰러뜨렸다--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그는 공격 에 공격만을 거듭하며 계속해서 포프슨 왕성쪽으로 전진해 들어가고 있 었다. 크실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이바이크의 하 야덴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포프슨 성 안으로 들어올때 부터 기사도의 자비심을 버렸었기 때문에 그의 하야덴과 리첼반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 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로젠다로의 넷째 왕녀 세렌을 구출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한명의 기사의 생명이 리첼반에 가슴을 뚫리고는 비명과 함께 사 라져갔다. 이바이크는 리첼반을 버리고 두손으로 하야덴을 쥐었다. 포프 슨 왕성 앞 수십 젠터{{ ) 이나바뉴에서 사용하는 거리의 단위. }}까 지 전 진 을 한 후였다. 크실 기사들의 저항은 더욱 강력해져갔지만 이바이크에게는 어떠한 의미의 두려움도 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앞길을 막는 기사들은 그 누구라고 쓰러뜨리고 전진한다. 한발자국씩... 한발자국씩... 만약 살아 있다면, 세렌 왕녀는 저 높은 포프슨 왕성 안에 붙잡혀 있을 것이다. 크실 바스크 47, 나이트 쿼어즈는 포프슨 왕성에서 가장 낮은 망루에 올라 포프슨 성 전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계략이 패배 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바이크가 이끄는 이나바뉴의 기 사단이 어떻게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그것은 지금에 와서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남쪽 성문은 열렸다. 아마 도 각센을 패배했을것이다. 서쪽 숲이 불로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것으로 보아 바란슈다스는 아직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것 같았지만, 그 작은 전 투의 승패는 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정도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 --얼마간동안 크실의 영토에 소속되어 있었던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픈 은, 이제 다시 적국 이나바뉴의 손으로 돌아가게 될것이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피와 시체로 덮여가고 있는 포프슨을 바 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주위에는 이제 단지 네명의 기사만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이트 쿼어즈 자신의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이었고, 크실 기사단 서방 원정대의 나머 지 기사들은 모두 어디에서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 불을 질러라. " "... 예 ? " 쿼어즈의 말에 등 뒤에 서있던 기사들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포프슨 왕성에 불을 질러라. 포프슨을 이나바뉴에게 넘겨주느니, 모두 태워 없애 버리겠다. " "...... " 모두 말이 없었다. 쿼어즈는 자신의 마지막 지시를 내린 후, 그들에게 돌아섰다.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하달한 후, 너희들은 나와 함께 왕성 위층으로 가자. " 그의 눈은 창백한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쿼어즈의 얇은 입술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이나바뉴 기사단을 쓰러뜨리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타격은 입혀야 한 다. 패배한 크실의 기사들에게 긍지는 필요없다. " 쿼어즈를 바스엘드로 받들고 있는 기사들은 그가 한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쿼어즈는 기사로서의 자긍심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나바뉴 기사단의 바스엘드를 쓰러뜨리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젠다로의 넷째 왕녀인 세렌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 서 자란 포프슨 성이 피로 물들여지는것을 보는것은 이번이 두번째였 다... 지난번, 기사대장 나이트 퓨네스와 라즈파샤가 이끄는 로젠다로의 기사단과 에우로페 나이트가 포프슨을 사수하려던 그 전투. 그리고 지금 세렌의 눈 앞에 펼쳐진 전투가 그 두번째였다. 새벽이 다가와 하늘이 검 은 빛에서 조금씩 푸른 빛을 머금기 시작하며 참혹한 모습의 성 안이 보 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에 고여있던 눈물을 훔치고, 창문 밖 으로 보이는 전장을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찾을 수 있으리라. 짧지 않은 시간동안 부모님이나 형제들보다 더욱 그리워했던 모습을 이 번에는 찾을 수 있으리라--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공을 향해 팔을 내젓듯이 전장을 달리던 그녀의 눈이 한점에서 멈춰 섰다. 그 자리에는 키가 큰 기사 한명이 열명도 넘은 크실의 기사에게 둘러싸여 하야덴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페가드 없이 두손으로 하야덴 을 쥐고 앞뒤로 찌르고 베며 크실의 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본래는 눈이 부시도록 하얀 백색이었을 그의 전투복은 피로 물들고, 이리저리 찢기어져 있었다. 펜플 역시 어깨에서부터 절반으로 나뉘어져 주인이 몸 을 움직이는대로 이리저리 쓸려다니고 있었다. 엘리어스 나이트의 전투 복... 그랬다. 양 어깨와 팔, 등에 벨폰 다섯발이 꽂힌채 자신의 피인지 남의 피인지 모를 피를 뒤집어쓰고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자신의 카발리 에로가 거기에 있었다. '이바이크님 ! ' 그녀에게 기쁨과 동시에 슬픔이 가슴 깊은곳까지 전해져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그를 발견했다는 기쁨과, 자신의 카발리에로가 저 렇게 많은 상처를 입고 있다는 슬픔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잠시 멈춰졌 던 그녀의 눈물이 다시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그 참혹한 모습에 당장이 라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보아야 해. 이바이크님이 어떻게 싸우시는지, 난 보아야만 해--그녀는 이나바뉴의 기사, 옐리어스 나이트 이바이크를 발견한 다음부터 결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의 나이트 쿼어즈였 다. 이름도 모르는 무서운 크실의 기사였지만, 그녀도 그가 크실의 바스 엘드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세명의 기사가 방으로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크실의 기사가 문을 닫자 쿼어즈는 오른손 을 가슴 높이까지 올려 예를 취한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세렌 공주에게 말했다. "왕녀님, 미안하오. 이곳이 크실 기사단과 이나바뉴 기사단의 바스엘드 의 마지막 장소가 될거라는걸 이해해 주셔야겠소. " 창문 밖에서는 끝없이 함성과 하야덴, 리첼반, 페가드가 부딪히는 소리 가 들려왔다. 가끔씩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세렌은 핏빛으로 물 들어 있는 크실 기사단 서방 원정대 바스엘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가 밝아지면서 퀴트린은 크실의 기사단은 숫적으로만 우세했지 거 의 모든 지휘관들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이대로 전투 를 계속한다면 쌍방에 별 의미없는 희생만 치를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크실군에게는 퇴로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퇴로인 남쪽 성문은 이미 퀴트린 자신이 부수고 들어와 장악하고 있었다. 결코 좁지 않은 성 안이었지만, 사방에 이나바뉴와 크실 쌍방의 기사 들의 시체가 쌓여있고, 온 성안이 피투성이였다. 이미 서로 수만기의 희 생을 치렀으리라.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가 들렸다. "레이피엘님 ! " 역시, 새하얀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에 온통 피칠을 한 라벨이었다. 라벨도 적지 않게 많은 잔 상처를 입은것 같았다. 퀴트린은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했다. 얼마전까지만 해 도 기사라기 보다는 장난꾸러기 소년에 가까웠던 라벨은 이제는 정말 의 젓한 이나바뉴의 옐리어스 나이트의 한명이 되어 있었다. "라벨, 크게 다친곳은 없는 모양이구나. " 라벨은 싱긋 웃었다. 아직도 성안에서는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예. 왼쪽 다리에 벨폰을 한발 맞기는 했지만, 괜찮아요. 달리는건 제 가 아니라 이 말이이까요. " 라벨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전투중인데도, 꽤 여유있는 표정이었다. 라벨도 역시 기사집안 출신이라 기사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는듯 했다. "너도 크실군의 바스엘드중 한명을 만났을텐데, 용케 상처 없이 이곳 까지 들어왔구나. " 라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예. 몸집이 커다란 기사였어요. 아마 이바이크님만큼 큰것 같던데요. 적이기 때문에 더욱 커 보였을지도 모르지만요. " 이제 전투는 종반으로 치닫고 있는듯 했다. 거의 완전한 이나바뉴의 승리이지만, 이나바뉴 기사단 역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퀴트린이 급히 입을 열었다. "이제 공격을 그만하고 포위만 하도록 하자. 적의 바스엘드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 지금부터의 전투는 전투가 아니라 살육이 될거야. " 라벨은 이해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저의 기사단에게는 공격을 중지하도록 하죠. 지금 성 안에는 누구 누 구가 있죠 ? " "나와 너, 이바이크님과 라즈파샤님. 그렇게 넷으로 나뉜 기사단이지. 일부는 네이서스가 지휘하여 포프슨 평원에서 하이파나님을 호위하며 대 기하고 있을거야. " "예. 명령을 내릴께요. 그런데... " 라벨이 자신의 기사단에 속해있는 루델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 간, 그의 눈이 커지면서 입이 다물어졌다. 퀴트린도 라벨이 바라본 방향 을 보다가 똑같은 표정으로 굳어져버렸다. 포프슨 왕성이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 크실군이 왕성을 태울셈인가 ! " 퀴트린은 짧은 시간안에 놀란 표정에서 다시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 다. 지금은 흥분하기 보다는 빠른 시간안에 저 불길을 잡는것이 중요했 다. 물론 로젠다로의 오랜 수도였던 포프슨의 왕성도 중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걱정되는것은, 만약 살아있다면 저 왕성 안쪽에 바로 나이트 이바이크의 세렌공주가 있다는것이었다. "라벨 ! 너의 기사단으로 남은 크실군을 포위해라. 나는 왕성으로 가겠 다 ! " "옛 ! " 라벨이 손을 들어올리는 동시에 퀴트린도 손을 들어 올렸다. 이나바뉴 기사단은 각자 자신들의 바스엘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십명을 쓰러뜨렸는지 셀 수도 없었다. 어느새 말에서 내렸는지 기억 도 없었다. 지금, 이나바뉴 바스크 53, 나이트 이바이크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있고, 아직은 날이 많이 나가지 않은 자신의 크고 무거운 하야덴 을 휘두르고 있다는것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체력이 바닥이 나고 있다 는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왕성이 불타기 시작했다는걸 알고난 다음부터는 이바이크는 더욱 흥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야덴을 휘두르며 오직 왕성 문만을 향해서 돌진 했고, 그래서 지금은 드디어 왕성문 앞에 서 있게 되었다는것이 기억났 다. 이바이크는 거침없이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를 베어버리고는 왕성 문 을 열었다. 왕성 안으로 들어온 그는 등 뒤에 그를 따라서 왕성으로 들 어오려던 크실의 기사들을 보았다. '너희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 ' 이바이크는 기합소리와 함께 방금 자신이 들어온 성문을 바깥쪽으로 밀어내 닫았다. 문 바깥에서는 대여섯명 이상의 크실의 기사들이 들어오 려고 마주 문을 밀고 있었지만 이바이크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문을 밀어 닫은 다음, 긴 걸쇠를 걸어 놓았다--오랜시간 버티지는 못하 겠지만, 얼마간의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이바이크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건 세렌 공주의 신변이었다. 포프슨 전투의 승패나 이나바뉴의 영 광은 그 다음이었다. 나이트 데로스에 의해 정리된 기사도에 의하면, 이나바뉴의 기사들이 가지는 세가지 의무는 각기 그 서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서열은 나 이트 데로스가 스스로 창안해 낸것이 아니었다. 나이트 데로스가 한 일 은 기사도를 만든 일이 아니라, 엘핀랜드에 오래전 부터 전해져 내려오 던 기사도를 정리하고 명문화 시킨 일이었다. 그래서 이 제도는 형태나 의식은 조금은 변형되었을 지언정, 로젠다로나 크실에서도 별 다름없이 적용되고 있었을것이다. 기사가 가지는 세번째 중요한 의무는 자신의 명예에 대한 의무였다. 기사도라는 것은 명문화된 그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명예를 주제로 쓰 여져 있으며--물론 기사도에는 명예 이외에도 많은 덕목들이 설명되어 있다--기사는 자신의 명예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명예 는 넓은 의미로 쓰이는것이어서, 예법, 예절등이나 덕목존중, 기사도 자 체의 준수등 역시 명예를 지키는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두번째 의무는 기사로서의 의무였다. 기사는 국왕에게 충성하고 국가 의 평안을 수호하는것을 근본적인 목적으로 해야 하며, 기사 서열등의 체계가 뚜렷하게 지켜질 수 있는 이유도 이 두번째 이유에 있었다. 두번 째 의무는 기사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무는 바로 카발리에로로서의 의무였다. 자신이 모든것을 바쳐 보호하기로 맹세한 그 귀부인의 명예가 기사로서 가장 소 중히 해야 하는것이었다. 로젠다로가 크실에게 침공당하고, 포프슨이 함 락되어 세렌 왕녀가 크실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옐리어스 기사대장 나이트 슈펜다르켄이 이바이크에게 자유행동을 허가한것은 이 때문이었다. 카발리에로로서의 의무가 기사로서의 의무보다 우선하기 때 문에 이바이크는 이나바뉴가 크실과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더라도 자신 이 지켜야 하는 세렌공주를 구하기 위해 단독적으로 행동해도 되는것이 었다. 그리고 지금, 이바이크는 세렌공주를 구출하기 위해 기사단에서 떨 어져나와 단독적으로 행동하고 있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문을 닫고 돌아선 이바이크는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한 왕성 안에서 붉은 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것을 알 수 있었다. 이바이크는 거침없이 하야덴을 들었다. "내 이름은 쟈로엘. 크실 기사단 서방 원정대장 쿼어즈님을 바스엘드 로 모시고 있는 기사다. 이 위로 올라가고 싶거든 나를 쓰러뜨려라. " 작위도 없는 기사정도가 나를 가로막는다는 말인가. 쟈로엘이 하야덴 을 들어 이바이크를 향하는 것을 보며 이바이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 다. "로젠다로의 세렌 넷째 왕녀님은 어디에 계시지 ? " 그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도 쟈로엘의 눈에는 살기는 없었다. 마치 모든것을 포기한것 처럼--그의 눈이 보이고 있는것은 투지 도, 분노도, 명예도 아니었다. 단지 덤덤함일 뿐이었다. "왕성 탑의 맨 윗층에 있다. 나를 쓰러뜨리면--" "고맙다. " 짧은 파찰음이 들리고, 쟈로엘의 머리는 하려던 말을 다 맺지 못한 채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그는 처음부터 옐리어스 나이트 이바이크의 상대 가 될만한 실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바이크의 하야덴에 제대로 대항 하지도 못한 그는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왕성 탑의 맨 윗층--이바이크는 뛰기 시작했다. 자신과 승부를 할 수 없는 기사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지금의 이바 이크에게는 그런 이유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일과 해야하는것은 오직 하나. 세렌을 향해 달려가는 일 뿐이었다. 이제는 더 여유가 없었다. 퀴트린과 라즈파샤는 바스엘드를 잃고 전의 를 상실한 크실군을 포로로 잡고 있었고, 라벨과 네이서스는 휘하 기사 단을 지휘해 왕성에 붙은 불을 끄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불은 왕성에만 붙지 않고, 포프슨 전체에 붙기 시작하려 하고 있 었다. "이... 나쁜놈들. 포프슨을 아주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는거냐 ? " 라즈파샤가 하늘을 향해 절규했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곳. 그토록 지 키려 노력했고, 빼앗긴 다음에는 목숨을 바쳐서 되찾으려 했던 로젠다로 의 수도가 불타고 있는것이다. 퀴트린 역시 그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 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 그는 이바이크가 가장 걱정이었 다. 불길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하게 번진곳이 바로 왕성이었고, 이바이크와 함께 포프슨 성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온 라즈파샤의 말에 의 하면 이바이크는 단신으로 그 왕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가 무모 하게 행동하고 있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무사하겠지... 이바이크님이니까. ' 퀴트린은 왕성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기사단을 바라보 았다. 자신의 기사단 역시 많은 타격을 입었다. 이대로 포프슨 성이 불타 없어진다면... 이 많은 희생에 비해 얻는것은 너무나 보잘것 없는것이 될 것이다. 크실의 그 '전략가'는 끝까지 쉽게 이 포프슨을 넘겨주지는 않았 다. 왕성 탑의 맨 윗층.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왕성의 가장 윗층까지 뛰어올라와 숨이 턱에 닿았지만 이바이크는 멈추지 않았다--이상하게도 이곳까지 올라올 동안 별 다른 저항은 없었다. 마지막 층에 있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 문 뒷편에 그렇게 그리던 세렌공주가 있는 것이다. 이바이크는 자 신의 하야덴에 감겨있는, 피로 붉게 물든 케틀러스--세렌 공주가 손수 짜 선물해 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단번에 문을 발로 차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에는 정말 세렌 왕녀가 있었다. 그것도 조금도 다치지 않은 모습 으로... 그녀가 입은 금빛 슈샤헨으로 장식된 옷처럼 창백한 표정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하지만, 그녀는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녀의 바로 옆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머리 바로 아래에서 묶어 내린, 호리호리 한 체격의 기사가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바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세렌 공주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난관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세렌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무엇인지 이바이크에게 말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슬픔과 놀라움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주륵 흘러 내릴것 같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녀는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양 손을 입쪽으로 들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이바이크의 왼쪽 옆구리, 오른쪽 등, 오른쪽 다리에 묵직한 통증이 느 껴지며 정신이 잠시 흐릿해진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것을 느낀것도 바로 그때였 다. 일어서야 하는데... 세렌 왕녀의 바로 앞에까지 와서 넘어지다니... 이 바이크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헉. " 이바이크가 붉은 피를 입에서 토해냈다. 그리고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세렌 공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려는 것이었 다. 그녀의 높은 비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이바이크는 자신이 뒤에서, 그것도 동시에 세명에게 공격당했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때의 이바이크라면, 등 뒤에서 들어오는 공격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살기때문에 충분히 공격을 눈치챌 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렌 공주를 직접 눈으로 본 순간이기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 흔들렸고, 몸과 마음이 모두 너무나 피로해져 있었다. 더구나, 세렌 공주 옆에 서 있는 기사가 자신의 마지막 상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 신경을 그쪽으 로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트 이바이크. 등 뒤에서 공격한것에 대해서는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순간, 나 크실 기사단 서방 원정대장 나이트 쿼어즈 와 그 휘하 기사들은 기사임을 포기한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너를 쓰러 뜨리는것... 미안하다. " "헉. " 이바이크는 바닥에 쓰러진 채 다시 한모금 피를 뿜어냈다. 피는 새빨 간 색이었다. "... 네가 목숨으로 지키려 하던 로젠다로의 왕녀는 무사히 이나바뉴의 품에 넘겨 주겠다. " 정신이 혼미해져왔다. 의식이 빠져나가려 하고 있어... 이게 마지막인 가. 여기서 죽게되는것인가. 어쩌면, 왕성에 혼자 들어서서 문을 잠근 순 간부터 이바이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땐 그 랬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렌 공주를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 뿐, 자신 의 생명은 관심 밖이었다. "안돼요, 절대 안돼요 ! "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이바이크에게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운 목소리...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비명을 외치고 있 었다. 세렌... 세렌 공주의 목소리다. 세렌 ! 이바이크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고개를 들을 수 없었지만 자신의 머리 위로 하야덴이 내리쳐 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즉시 쓰 러진 상태에서 몸을 구르고, 손에 놓쳤던 자신의 하야덴을 들어 머리 위 로 치켜 들으며 그 공격을 막아냈다. 등에 하야덴 하나가 여전히 박혀 있는 상태로 몸을 굴렸기 때문에 이바이크는 그 날카로운 하야덴이 자신 의 몸 속을 헤집는 고통을 또 한번 느껴야 했다. "어헉. " 이바이크가 다시 피를 뿜어냈다. 쿼어즈는 움직이지 않은 상태로 다시 하야덴을 들어올렸다. 더 이상 이바이크에게는 피하거나 공격을 막아낼 힘이 없을 것이다. 쉰듯한 충격음이 들렸다. 쿼어즈의 일격이 레쥰드로 만들어진 바닥을 내리 친 것이다. 쿼어즈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이바이크는 살기 가득 한 눈으로 쿼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피로 너무나 범벅이 되어 얼굴의 형상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이바이크는 그 살기어린 눈을 돌려 뒤를 돌아 보았다. 뒤에는 기사 세명--방금 이바이크에게 일격씩을 가한 ─이 서 있었다. 이바이크는 주저함 없이 하야덴을 들어 첫번째 기사를 베어갔다. 그의 표정에는 공포는 없었다. 그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고, 그 스스로가 옐리어스 나이트 이바이크─아무리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의 상대 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하야덴을 들어 이바 이크를 맞찔러왔다. 자신의 생명과 이바이크의 상처를 교환하겠다는 표 정이었다. 그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이바이크는 몸을 돌려 그의 하야덴을 피해내고, 몸을 굽히며 휘두른 하야덴 그대로 그의 허리를 베어냈다. 그 기사의 토막한 상반신은 공중 에서 잠시 정지한듯 하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하반신은 사방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하반신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이바이크는 이 미 두번째 기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두번째 기사 역시 첫번째 기사와 마찬가지로 하야덴을 길게 눕혀 직선 으로 이바이크를 찔러왔다. 이바이크는 다시 몸을 비틀며 하야덴을 피하 고 그의 가슴을 찔렀다. 두번째 기사는 가슴과 입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 졌다. 그때, 왼쪽 어깨에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세번째 기사의 급습을 미쳐 피하지 못한것이다. 이바이크는 다시 하야덴을 들어 세번째 기사를 내리쳤다. 그는 하야덴을 두손으로 들어 이바이크의 공격을 막아냈다. 역시, 보통때의 이바이크였다면 방금의 공격을 막는다는것은 그 크실 의 기사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했을것이다. 이바이크의 공격은 하야덴을 단숨에 부러뜨리고는 바로 그 기사의 가슴에 안겼을것이기 때문이다. 하 지만 지금의 이바이크는 완전히 바닥난 체력과 혼미해져오는 정신, 온몸 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싸우며 또한 하야덴으로 크실의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는것이다. 이바이크의 두번째 공격은 그 기사의 목을 정확히 관통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왼쪽 팔에 격렬한 통증이 전해져왔다─세렌 공주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그리고는, 그는 자신의 왼쪽 팔이 어깨 바로 밑 에서 부터 잘리워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바이크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트 쿼어즈는 일격으로 이바이크의 팔을 떨어뜨리고 그 의 등을 향해 다음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바이크가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의지대로 몸이 움직여지지는 않았 다. 그는 완전히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몸을 비틀었지만, 쿼어즈 의 하야덴은 다시 이바이크의 돌아선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이바이크의 잘리워진 왼쪽 팔에서는, 얼마 남지 않았을것 같은 피가 다시 뿜어져 나 왔다. 이바이크는 뒤로 돌려져 있던 하야덴을 그대로 들면서 쿼어즈의 가슴 쪽을 쓸어갔다─이것이 마지막이다─이바이크의 하야덴은 쿼어즈의 가슴 을 왼쪽 옆구리에서 오른쪽 어깨로 훑고 지나갔고, 쿼어즈의 하야덴은 이바이크의 왼쪽 옆구리를 깊숙히 찔렀다. 쿼어즈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이바이크를 바라보며 쓰러졌다─하야덴의 실력만을 두고 이야기 한다면, 쿼어즈 역시 이바이크와 일대 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 다. 이바이크도 방금의 공격을 받고, 그 충격으로 밀려 쓰러졌다. 이것으로 끝인가. 앞으로 쓰러진 이바이크의 눈에 세렌 공주가 보였다. 그녀는 울고 있 었다. 이바이크는 하야덴을 쥔 채 한 팔로 세렌 공주쪽으로 기어가기 시 작했다. 세렌 공주는 달려와 이바이크를 안았다. "이바이크님... " 세렌 공주는 이바이크의 무거운 몸을 창가 쪽으로 끌었다. 조금이라도 밝은 곳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리라. 이바이크역시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입에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저... 나, 당신을 구했습니다. 이젠 너무나 행복합니다... 라는 말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짧은 몇마디의 말 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렌 공주의 눈물이 이바이크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결국 세렌 공주님을 울리고야 말았군요. 저는 정말 많이도 모자란 카 발리에로였습니다─이 말 역시 이바이크의 입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렌 공주 역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릴 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이바이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었던것이다. 그때였다. 이바이크가 반쯤 감기웠던 눈을 번쩍 뜨더니 한쪽 밖에 남 지 않은 팔 안쪽으로 세렌 공주를 안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는 반쯤 일어선 상태에서 하야덴을 어깨 뒤로 들어 올렸다. 죽은줄 알고 있었던 나이트 쿼어즈가 일어서서 하야덴을 던진 것이다. 이바이크가 하야덴을 던진것과 쿼어즈가 하야덴을 던진것은 거의 비슷했다. 이바이크가 던진 하야덴은 쿼어즈의 왼쪽 가슴을 정확히 관통하여 깊숙히 박혔고, 마찬가 지로 쿼어즈의 하야덴은 이바이크 의 복부를 관통했다. 이바이크의 몸이 그 충격으로 뒤로 밀려 나갔다. 세렌 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이바이크의 몸은 힘 없이 그대로 등 뒤에 있던 창문을 부수고 왕성탑의 바깥으로 날아올랐다─이바이크와 세렌공 주의 눈이 마주친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바이크의 얼굴이 웃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그랬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당신을 구했습니다. 이젠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바이크의 몸은 잠시 왕성탑에서 뒤로 멀어진 다음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렌 공주는 그의 몸이, 포스슨 왕성 탑에서 가 장 높은곳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녀 는 눈물을 삼켰다. '이바이크님... 그렇게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밖에는 만 나뵙지 못했군요. ' 하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기사 를 카발리에로로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로젠다로의 창조여신 로르에 게 감사하고 싶을정도였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나기 위해 헤어졌었던 겁니다. 이 렇게 다시 만나도록... 우리, 다시 한번 헤어지지만, 또 다시 한번 만난다 면 그때엔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것이 좋겠습니다. 세렌 공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이 전 쟁만 없었다면 그날 오후의 날씨는 너무나 화창했을것 같다고 세렌 공주 는 생각했다. 그래요, 다시 한번 헤어지는거예요. 하늘에서, 하늘에서 만나기 위해, 그곳에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 위해 헤어지는겁니다. 세렌 공주의 몸이 공중에 떠 올랐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두려움이나 공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다시 이바이크를, 그 쾌활하고 호탕 한 웃음을 만날 수 있다는 행복감만이 온 몸에 가득했을 뿐이었다. "모양 정말 볼품 없죠 ? " "...... " "왕영 재단사를 시켰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하다못해 하녀에게라도 시켰더라면 훨씬 나았을텐데... " "...... " "... 그래도, 하나쯤은 제가 만들고 싶었단 말이에요. 기사님이 쓰실것 을. " "...... " "역시 기분이 언짢으신거죠 ? 마음에 안 드세요 ? " "...... " 이바이크는 뚫어지게 그 케틀러스를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 아무런 말 을 하지 못했었다. 단지 가슴이 너무나 벅차 올라 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반 만큼만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 다면. 나이트 이바이크는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는것만을 안타까와 하고 있었다... {{ }}{{ }}{{ }} 8. 크실의 이름, 파스크란 라벨은 여전히 슈렐린 차를 손에 든 채 말하고 있었다. "아깝네요. 그녀의 손은 마치 궁정악사의 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예뻤는데 손 안쪽은 채찍으로 맞은것처럼 검붉게 문드러졌다니. 그정도면 악기는 커녕 감각도 느끼기 힘들것 같던데. 형은 몰랐던 모양이죠 ? " 퀴트린도 슈렐린 차를 집어 들었다. "몰랐지. 하녀의 손을 그렇게 유심히 보는 기사는 너밖에 없을거다. " "제가 일부러 봤나요. 찻잔을 보려다 보니 보인거지. " 라벨이 웃자, 퀴트린도 그를 따라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랬다. 궁정악사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음유시인이었다. {{하얀 로냐프 강 ------------------------------------------------------------------ }}{{ }}{{ 8. 크실의 이름, 파스크란 ------------------------------------------------------------------ }} 8. 크실의 이름, 파스크란 이나바뉴 바스크 53, 옐리어스 나이트 이바이크와 로젠다로의 넷째 왕 녀 세렌의 장례식은 전투가 끝난 그날 저녁에 치뤄졌다. 모두가 숙연한 분위기였고,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카발리에로의 의무를 다한 이바 이크와, 사랑하는 사람과 생명을 같이한 세렌 공주의 영혼 앞에서는 모 든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나이트 라벨은, 존경하던 선배 기사의 생명 을 앗아간--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린--포프슨 성문 앞, 이바이크 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다 기절해버렸다. 다시는 찾아올것 같지 않던 밤이 되었다. 승전의 기쁨보다는 옐리어스 나이트 한명을 잃었다는 허탈함과 슬픔이 이나바뉴 기사단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했고, 야영지 어디에서도 웃음소 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스케는 하루종일 울어 부은--전에, 취침 시간에 별을 보러 밖에 나왔다가 이바이크에 들켜 꾸중을 들은것 뿐, 그녀와 이 바이크는 전혀 친분이 없었는데도--눈으로 아아젠의 막사를 찾았다. "... 이스케 ? " 아아젠 역시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이스케 이상 으로 감정이 풍부한 음유시인이었던 그녀였기에, 새벽녘에 있었던 전투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는 가슴이 속부터 저려와 잠들 수가 없었 다. 불타는 성탑 위에서 품에 하야덴을 안은 채 떨어져 내리는 기사. 그 가 바닥에 떨어져 숨지는 순간을 지켜보다, 같이 몸을 던져 자신의 카발 리에로에게 안기는 왕녀. 일부러 만들려 하지 않아도, 아아젠의 머릿속에 는 새로운 노래 한곡이 계속해서 만들어져 불리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 " 이스케는 입을 열지 않고 그냥 아아젠 앞에 서 있었다. 아아젠은 부드 럽게 입을 열었다. "... 잠이 오지 않은거니 ? " 이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아아젠이 섀럿가의 하녀로 왔을때 엔 그렇게 일에 능숙하고 모든 점에서 언니처럼 보이던 이스케가, 시간 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의지하는 동생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젠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매만 진 그녀는 이스케의 손을 잡았다. "나가자. 나가서 바람이라도 잠깐 쐬자. " 이스케는 아아젠에게 손을 잡힌 채 막사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하늘 에는 포프슨 성이 토해놓은 회색빛 연기가 드문드문 뿌려져 있었다. 라 즈파샤님의 마음이 가장 아팠을거야... 로젠다로의 수도, 아름다운 포프슨 이 폐허로 변해있는 모습을 보며 아아젠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둘은 막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 말이야, " 이스케가 입을 열었다. 항상 밝은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이 스케가 훨씬 이스케 답다고 생각해왔지만, 어쩌면 이렇게 슬픈 표정의 조용한 이스케가 진정한 그녀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고 아아젠은 생각했 다. "전쟁이 끝나면 무사히 돌아갔으면 좋겠어. " 아아젠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이야. 당연히 그래야지. " "나 말고--우리야, 페치를 들고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 하나 다칠 일이 있겠니--데판 말이야. " 문득, 아아젠은 남자답지 않은 작은 키에, 하지만 밝은 웃음이 솔직해 보였던 데판이 기억났다. 그는 본래 섀럿가의 하인이었지만 언제나 견습 기사가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이번 전투에는 퀴트린의 개인 기사단 전 사대에 끼어 로젠다로에 까지 따라왔다. 가끔 막사 근처에서 마주치면 눈으로 인사를 하거나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미소로 인사할 뿐, 서로 말 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에 대해서는 단지, 그가 이스케를 좋아하고 있다는 정도만을 알고 있었다. "그애가 무사히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래서 내게 나의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다고 청을 한다면 들어주고 싶어. " 아아젠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카발리에로는 오직 바스크를 가진 기사 만이 될 수 있다는걸 너도 알고 있쟎니... 데판이 네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다고 하는 말이 농담이라는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아 ? 이스케. 아아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바이크님의 죽음때문에 감정이 풍부한 이스케가 많이 감상적이 되었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카발리에로. 카발리에로라... 갑자기 아아젠의 마음 한 구석에도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잠시 바 쁜 생활중에 잊고 있었던것이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래. 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 퓨론사즈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때엔 퀴트린님도 누군가의 카발리에로가 되겠지. 이스케는, 전에 아아젠에게 이바이크의 왕녀의 카 발리에로가 될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벌써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아아젠은 그녀가 퀴트린을 만난 그 순 간부터 오늘에 오기까지 그가 했던 말들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의 말들이 그녀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행복이었고, 살 아갈 수 있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는 그녀와는 너무나 커다란 계급차이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결코 바라 보아서는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다그치고 인식시키는 것은 포기한지 오래되었다. 아아젠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자, 이번에는 이스케가 아아젠을 바라보 았다. "아아젠, 미안해. 잠도 못자게 밤중에 불러내서는, 갑자기 엉뚱한 말이 나 늘어놓고 말이야. " "아냐, 괜찮아. " 이제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의 마음 을 놓아둔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저 이렇게 평생을 바라보고 있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퀴트린이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그래서 아이를 가지고 나이를 먹어가고... 그런 모습들을 평생 어디선가 지켜볼 수만 있 다면, 그녀도 또한, 그것들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것 같았다. 이런 생각 을 하고 나자 그녀는 오히려 편안해 질 수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가장 슬픈 선택이 될 수 있다는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이스케, 노래 불러줄까 ? " 이스케가 고개를 갑자기 들더니 세차게 끄덕였다. 유난히도 이스케는 아아젠의 노래를 좋아했다. 그녀 또한, 단지 오늘 저녁 먹을 끼니를 벌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진심으로 자신의 노래를 듣 고 싶어하기 때문에 부른다는것 자체가 기쁨이었고, 그래서 그녀에게는 이스케가 더욱 소중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노래지만, 한번 들어볼래 ? 조용한 노래라 지금 네가 듣기에 꼭 듣기 좋을것 같아. "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너와 나 밖에는 아무도 모 르는 노래야... 아아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스케는 고개를 더욱 세차게 끄덕였다. 아아젠은 조금 웃으며 고맙다는 뜻으로 이스케의 손을 잡았다. 그림으로 그릴 수 없을거예요 나의 사랑은 붓을 들면 화폭엔 눈물만 쏟아질 테니까요 햇살처럼 항상 거기에 있다는것만 기억하세요 당신이 느끼지 못하기를 바래요 나의 사랑은 어느새 루운은 저물고 하늘엔 보석이 박히네요 이 밤이 지나면 난 떠나지만 당신은 여기에 머물러 계세요 어쩌면 내일은 새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쟎아요 나의 사랑대신 짧은 인사말만 놓고 갈께요 그대여 그럼 안녕... 영원히. 이 노래는 아아젠이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사람을 바라보며 만든 노래 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를때 마다 목이 메었다. 길지 않은 노 래가 끝나갈 무렵, 이스케의 눈에 별빛이 묻어나와 맺히는것을 아아젠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아젠 역시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라 와 자신의 눈에 맺히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 너무 아름다운 노래야.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데... 왜 슬픈 거지. " "이스케. " 아아젠도 자신의 목소리의 끝 부분이 흔들리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 다. 나도 슬퍼... 너 처럼 누군가의 죽음과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동 받아 서 슬픈것이 아니라, 너무나 바보같은 이유때문에 슬픈거지만, 나도... 나 도 슬퍼. 어느새 이스케와 아아젠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 리고 있었다. 고마워, 이스케... 정말 고마워. 아아젠은 계속해서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번 전투에서 이나바뉴 기사단의 로젠다로 원정대는 1만 5천기 이상 의 손실을 입었다. 3만기 이상의 크실 기사단을 포로로 잡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얻은 것이라고는 폐허로 변해버린 포프슨 성 뿐이었다. 나이트 이바이크가 사라진 자리 역시 굉장히 컸지만, 이나바뉴 기사단은 그를 잃은 상심하기 보다는 이제 곧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야 했다. 원기 를 조금씩 회복해, 이나바뉴 기사단의 정신적인 바스엘드가 된 하이파나 의 말에 의하면, 이제 곧 나이트 카사드렛, 나이트 쥬등 많은 기사들의 생명을 앗아간 크실의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크란이 이끄는 기사단과 마추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포프슨 성 바깥쪽, 라엘만 협곡 건너편 포프 슨 평원에 진을 친 이나바뉴 기사단은 우선 막사를 그곳에 설치하고 기 사단을 다시 정비해 나가고 있었다. "라벨님 ! " 자신이 지휘할 개인 기사단의 훈련 모습을 조금 높은 언덕에서 지켜보 던 나이트 라벨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루델이 밝 은 표정으로 말을 탄 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루델. 무슨 일이야 ? " 누구보다도 자신의 바스엘드를 가장 존경하는--기사들의 세계에서 '존 경'이란, 나이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개념이었다--루델은, 이 몇달 새에 라벨이 부쩍 커버린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라카이드 레젠 헬로판의 카 발리에로가 되고, 출정후 몇번의 전투를 거치고... 그리고 며칠 전 동료 기사의 죽음을 경험한 그는 그 얼마 사이에 어른이 된 모습이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라벨은 잠깐 마주보다 다시 훈련장 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델의 표정을 보니, 급한 일을 아닌것 같다는 몸짓 이었다. "레이피엘님이 찾으십니다. 바스엘드님들의 소집인것 같습니다. " "아, 그래. 고마워. " 나이트 라벨은 손을 들어 루델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말을 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오늘쯤엔 하이파나님이 일어나셨을까. 오늘, 약간 안개가 내린 포프슨 평원의 아침 공기는 제법 상쾌했다. "대단하군. " 한참동안이나 포프슨 언덕에서 상대편 기사단을 바라보던 퀴트린은 마 침내 감탄의 의미를 담은 말을 꺼내 놓았다. 그의 옆에서 말을 타며 퀴 트린을 수행하던 네이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 이나바뉴 기사단은 라엘만 협곡을 등지고 포프슨 평원, 언덕 아래 정 렬해 있었다. 이나바뉴 기사단의 전투 준비는 이미 며칠전에 끝이 나 있 었던것이다. "쥬렌다스를 함락시키고, 곧장 이곳 포프슨으로. 그리고는 하라데스를 공격하고는 곧바로 포프슨으로 돌아오다니... 더더군다나 그 긴 행군을 끝마치고도 저렇게 잘 정렬된 모습이라니. " "많은 훈련을 거친 크실의 최정예 기사단인것 같습니다. 적의 전력은 단지 6만기일 뿐이지만, 정면으로 맞붙었을때 저희쪽 9만의 기사단이 숫 적으로 우세할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것 같습니다. " 퀴트린은 네이서스의 말에 동의한다는듯이 말없이 상대편 기사단을 바 라보고 있었다. "조심해라, 나이트 레이피엘. " 퀴트린과 네이서스의 뒷편에 말을 탄 채--사실, 그는 아직 말을 탈 정 도로 회복이 되지는 않았다--역시 같은 모습으로 크실 기사단을 바라보 고 있던 나이트 하이파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도 이야기 했었지만, 저 기사단의 진실한 무서움은 저들의 바스 엘드에게 있다. " 네이서스는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것 같은 착각을 했 다. 며칠 전, 포프슨 승전 후 막사에게 가진 회의에서 나이트 하이파나가 이야기했던 내용이 생각난것이다. 나이트 쥬를, 옐리어스 나이트를 마치 견습기사 상대하듯 베어버린 크실의 바스엘드. 지금 현재로 이나바뉴 기 사단에게 있어서 '파스크란'이라는 이름은 누구도 입 밖에 내고 싶어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만약, 그들이 렉카아드로 승부를 내려고 한다면, " 하이파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 피하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나이트 레이피엘. " 퀴트린은 쓴 웃음을 지었다. 렉카아드를 피한다는것은 기사로서는 너 무나 치욕적인 일이었고, 또한 기사단 전체의 사기에도 커다른 영향을 미쳤다. 바스엘드 이하 기사단이 강한 단결력과 공격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바스엘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라는 확신이 승리에의 맹신을 유도하기 때문이었다--마치 신앙인것 처럼. 하지만 지금 하이파 나는 그런것들을 모두 포기하고서라도 렉카아드를 피하는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것이다. 렉카아드에 패배한 기사단이 그 전투에서 패배 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이파나는, 크실의 바스엘드 나이트 파 스크란의 힘을 본 적이 있는 그로서는 지금 이나바뉴의 누구도 그를 쉽 게 이길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렉카아드의 정면 승부를 어쩌면 두려워 하고 있는것이다. "... 크실군이 막사를 세우고 있습니다. " 네이서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크실은 오늘만큼은 전투를 시 작하지 않을 생각인것 같았다. 시간은 이미 흘러 저녁무렵이 되어가고 있었다. "... 그렇군. " "오늘은 공격해 오지 않는것이 당연할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네이서 스 ? " 네이서스는 잠시 침묵했다. 하이파나의 말은 오늘 밤의 야습을 제안하 는것이었다. "섣불리 공격하는것은 좋지 않을것 같습니다. 며칠을 달려와 지친 상 대를 공격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전술입니다. 저들도 예상하고 있을것입 니다. 그리고... " 네이서스는 왼손을 들어 일부는 정렬한 채 나머지를 보호하고 있고, 일부는 막사를 세우고 있는 크실의 기사단을 가리켰다. "... 우리가 생각하는것 처럼 저들이 지치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 하이파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서스의 말대로, 전혀 흐트러짐 없이 정렬해 있는 크실의 정예 기사단은 조금의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알겠다. 나이트 네이서스. 네 말도 맞다. " 네이서스는 하이파나를 돌아보았다. "오히려, 오늘 밤은 그들이 야습을 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라면, 크실의 검은 갑옷의 기사라면 공격해올지도 모릅니다. " 포프슨 평원에서 크실 기사단과 이나바뉴 기사단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옐리어스 나이트가 넷--이제는 셋이지만--이나 참전하고 있는 이나바뉴 기사단 역시, 단지 선봉일 뿐 아니라 크실의 기사단처럼 정예 임이 틀림 없었다. 온 몸을 검은 갑옷으로 감싸고 있던 크실의 기사대장, 크실 바스크 1 나이트 파스크란은 막사 바깥에 가져나 놓은 의자에 앉은 채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뒤에 서 있던 기사를 불렀다. "나이트 다피안트. " "옛. " 서른살 즈음 되어 보이는 그 기사는 평범한 몸집에 평범한 모습을 하 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파스크란을 제외하고는 크실 최고의 하야덴을 사용하는 기사로 인정받고 있는 크실 바스크 60, 나이트 다피안트였다. "1만기로 이나바뉴 기사단을 야습하라. " "예. " 파스크란은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 역시, 지금까지 싸워온 이나바뉴군 과 이들은 다를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프슨은 폐허가 되어 있었 다... 아마도 나이트 쿼어즈가 점령당하기 직전에 포프슨 성에 불을 질렀 을것이다. 그의 성격이라면. 이유야 어쨌든, 지금 눈 앞에 있는 이나바뉴 기사단은 자신과 나이트 쿼어즈가 점령한 포프슨을 다시 탈환한 기사단 이었다. "야습은 탐색을 하기 위함일 뿐이다. 상대의 바스엘드의 실력을 알고 와라. 그리고, " 파스크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검은 갑옷을 입고 가도록. 그 갑옷을 보면 이나바뉴의 바스엘드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 "알겠습니다. " 다피안트가 오른손을 올려 예를 취했다--'기사도'라는것은 이나바뉴와 로젠다로, 크실이 서로 갈리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 나라의 형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전체적인 기사도의 줄기는 모두 같았다- -다피안트가 명령을 받고 돌아서려 하자, 파스크란은 작은 목소리로 중 얼거렸다. "난 막사에서 쉬겠다. 너무 오래 있지는 않도록. " "옛. " 나이트 다피안트는 명을 받고 옆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말에 올라타, 자신의 기사단 쪽으로 말을 달렸다. 밤은 깊어 주위는 매우 고요했다. 야습이 있을것이다. 네이서스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퀴트린의 기사적 직감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퀴트린은 나머지 기사단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하 면서도, 나이트 라벨의 기사단을 야영지 좌우에 매복했다. 평원에서 기사 단을 엄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성하게 자란 키가 큰 풀꽃들 뿐이었 지만 밤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어느정도의 엄폐를 가능하게 했다. "우선, 시간을 버는것이 최우선입니다. " 휴식에 들기 전, 라즈파샤가 선공을 제의했을때, 네이서스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었다.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본대가 이미 이쪽으로 출발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20만 이상의 전력을 가진 본대가 도착하면, 아무리 케 켄의 수호를 받는 악마의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숫적으로 우리가 완전한 우세에 서게 됩니다. 도착하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도착 할때까지는 버텨내는것이 우선입니다. " 네이서스의 말이 끝나자 라벨이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본대는 기사대장 아켈로르님이 손수 지휘하시고 있습니다. 파아렐 나이트--이나바뉴 총사대--사야카님도 출정한것으로 알고 있고, 저희 옐리어스 나이트중 한명인 가이사로님도 참가하고 있을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기사들이 그분들을 수행하고 있을테니, 저희의 승리는 확정적입니다. " 로젠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는 얇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수 도 포프슨을 잃어버린 지금, 그로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크실 기사단을 멸하고 싶은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네이서스의 얼굴에는 오랫만에 따 뜻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마도 수십년간을 같이 싸워온 기사대장 나이 트 아켈로르라는 이름때문이었으리라. 퀴트린은 이생각 저생각으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는 1만 5천기 이상의 기사들이 생명을 잃거나 크게 다쳤 다. 크실의 기사들 역시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희 생을 치르면서 까지 얻으려 했던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은 이제--당분 간은--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도시가 되고 말았다. 그럼, 이 전투는 결국 승리한 것인가 ? 승리했다면 무엇을 얻은 승리인가 ? 이바이크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것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 기꺼이 버리려 했다--단신으로 포프슨 왕성을 공격해 들어갔었다--결국, 두 사 람의 주검만이 결과로 남았지만 그는 분명 승리한 것이다. 그가 가장 소 중히 하고 있던 가치를 위해, 세렌 공주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얻은 것이었다. '카발리에로라... ' 퀴트린은, 스스로에게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물어보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속에 꽉 채워져 있었다. 문득, 슈렐린 차 한잔이 생각났지만 그는 하녀를 부를까 하다가 금방 그만 두 기로 했다. 하녀를 부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늦은시간이라고. 수행을 따라온 하녀들의 휴식을 위해 내가 슈렐린 차를 포기한것인가. 퀴트린은 조금은 차갑게 웃었다. '어느새 내가 하녀들을 마치 귀족인양 생각하고 있군. 라즈파샤님의 영 향이 컸던 모양이야. ' 이나바뉴는 로젠다로와 크실, 어느쪽에 비교해도 계급사이의 지위가 가장 큰 나라였다. 그것은 아펠르력 598년 루지아 9세가 왕위에 오르면 서부터였다. 그가 제정한 제도는 귀족과 평민, 천민 사이의 빈부 격차를 줄이는데에는 크게 성공하였지만 사회적 지위라는 격차는 더욱 엄청나졌 다. 이나바뉴에서는 귀족들이 평민들과 얼굴을 마주하는것 조차 상상할 수 없지만 로젠다로는 그렇지 않았다. 작지만, 비교적 자유롭고 지위 격 차가 그렇게 크지 않는 로젠다로는, 귀족들이 이유없이 출신성분이 낮다 는 이유만으로 평민을 업신여기지는 않는 나라였다. 로젠다로의 최상위 계급에 속하는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가, 지난번에 퀴트린과 담화를 나누다 들어온 하녀를 가리켜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것은, 그가 로 젠다로에서 살았던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퀴트린은 처음에는 라즈파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이상하 게도, 라즈파샤의 이야기를 들을때엔 자신이 얼마전에 떠났었던 루우젤 까지의 짧은 여행이 기억나는것이었다--그 여행이 로젠다로를 닮았기 때 문이었을까. 그때였다. 퀴트린은 문득 크실의 기사단이 움직이고 있다는것을 느꼈 다. 기사의 육감과, 뛰어난 청력때문이었다. '왔다 ! ' 퀴트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옐리어스 나이트의 갑주를 입 은 채 침상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는 급히 순백색의 전투복을 걸치고, 하야덴을 집은 후,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라즈파샤와 하이파나에게 전해 만 들었던 '검은 갑옷의 기사'를 만날 순간이었다. "... 이미 예상하고 있었군. " 말 위에서 다피안트는 이나바뉴 기사단 야영지 좌우에 기사들이 매복 하고 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손을 들어 기사단의 전진을 멈추었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다피안트는, 예상은 했지만 이들 역시 잘 훈 련된 강한 기사단이라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복을 한 적은 더이상 공 격을 하지 않았고, 단지 중앙에 서 있던 말 한마리가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 위에 탄 기사는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라벨. 이나바뉴 바스크 149, 옐리어스 나이트이다. 네 이름 을 알고싶다. " 저런 꼬마 녀석이 옐리어스 나이트라고. 다피안트는 코웃음을 쳤다. 어짜피 정면공격을 해야 했다. 렉카아드를 할 경우는 둘중 하나가 쓰 러지거나 항복을 할때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이나바뉴쪽에서는 자신이 입은 검은 갑옷을 파스크란일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기 때문에 바스엘드 가 나설것이고, 이나바뉴의 바스엘드와 정면으로 렉카아드를 할 경우엔, 다피안트는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는 라벨의 질문을 묵살했다. "공격 ! " 다피안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 기사단의 함성소리가 밤 하늘을 울리 며, 또다시 양쪽의 기사단이 맞붙었다. 쌍방이 전력은 1만기였고, 그 전 투는 탐색전과 비슷한 양상을 띄었고, 그래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라벨 역시, 렉카아드로 승부를 결정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우 선 바닥에 리첼반을 팽개쳐 버리고 하야덴을 두손으로 쥐었다. 라벨의 '베락스'가 옐리어스 나이트의 하야덴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빠른 속도 때문이었고, 자신의 기술인 속도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 는 두손으로 베락스를 쥐어야 했다. 상대는, 라벨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나이트 쥬의 생명을 앗아간 기사였다. 퀴트린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절대 총력으로 싸워서는 안된다. 그의 실력을 가늠할 뿐이다. 방어 위 주로 싸우다, 몇번 하야덴이 부딛히면 즉시 후퇴해라. " 라벨은 베락스를 고쳐 쥐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는 그의 바로 앞에, 하 야덴을 비스듬히 세운 채 말을 타고 서 있었다. 라벨이 주저함 없이 곧게 하야덴을 찔러갔다. 지극히 직선적이고 단순 한 공격이었지만--정면으로 찌르는 기술은, 하야덴을 배울때 가장 기본 이 되는 기초적인 기술이었다--이 공격은 라벨로서는 최고의 공격이었 다. 정면으로 찔러 온다는것을 알고서도 막을 수 없을정돌 빠른 속력의 찌르기였기 때문이다. 다피안트는 상대 기사가 직선으로 자신의 가슴을 노리고 하야덴을 찌 르는것을 보고 더욱 기가막혔다. 견습기사라 할지라도 저런 공격은 하지 않을것이다라고 그가 생각하는 순간, 짧은 파찰음이 들리고 자신의 어깨 갑옷이 길게 찢겨 나갔다는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 ! " 그가 놀라서 하야덴을 다시 들어 올렸을때, 라벨은 이미 하야덴을 회 수한 후, 두번째 공격을 전개하고 있었다. 두번째 공격 역시 처음과 같은 찌르기였고, 이번에는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하야덴이 들어왔다. "이놈 ! " 다피안트는 벼락같이 외치고는 하야덴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 동작이 미쳐 시작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왼쪽 옆구리의 갑옷이 살짝 찢겨져 나갔 다--이번 공격은 깊지는 않았다--다피안트가 내리친 손이 방어를 할 위 치에 도달해 있었을때, 베락스는 이미 주인을 보호할 위치로 돌아가 있 었다. 정말 경악을 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조심해야겠군. 꼬마라 할지라도 옐리어스 나이트라는것은 잊어서는 안 돼. 다피안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왼쪽 위에서 오른쪽으로 하야덴을 휘둘러 라벨의 어깨를 노렸다. 라벨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피하며 하야덴으로 다피안트의 공격을 방어했다. 라벨의 예상보다 다피 안트의 하야덴은 훨씬 빨랐다. 하야덴이 서로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앗 ! " 라벨은 깜짝놀라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야덴이 충돌하는 순간, 라 벨은 하마터면 베락스를 놓칠뻔 한것이다. 상대 기사의 공격은, 속력도 속력이었지만 아주 강한 힘이 실려져 있었다. '... 강하다. ' 라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두어번의 공격을 주고 받았을 뿐 이지 만, 라벨은 최소한 몇번의 공격끝에 승부를 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즉시 라벨은 말을 돌렸다. "후퇴 ! 야영지를 방어하라 ! " 라벨의 손이 올라가자 크실 기사단과 맞붙어 싸우던 이나바뉴 기사단 은 공격을 멈추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다피안트 역시 손을 들어 더 이상 추격을 하지 않았다. 그 꼬마 옐리어스 나이트는 보통이 아니었다... 지난번 하라데스에서 보았던 쥬라는 옐리어스 나이트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군. 다피안트는 생각했 다. "반전 ! 진지로 돌아간다 ! " 다피안트가 외치자 크실 기사단 역시 공격을 멈추고 돌아섰다. 첫번째 탐색전은 끝났다. 라벨은 후퇴하여 야영지로 돌아가며 문득 뒤를 돌아보 았다. 그러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역시 돌아서서 라벨을 바라보았다- -강했어. 하지만, 쥬님을 쉽게 쓰러드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아닌것 같은데. 라벨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영지로 돌아가면 퀴트린 형과 이야기를 해 봐야지... 이 전투를 지켜 보고 있었을거야. 라벨은 생각했다. 다피안트는 오른손을 주먹을 쥐어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파 스크란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어땠나 ? " "강했습니다. " 다피안트의 대답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간결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 말은 파스크란의 고개를 끄덕이기에 충분했다. "그 어린 기사는 라벨. 이나바뉴의 옐리어스 나이트입니다. 적은 나이 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의 하야덴을 사용하는 강한 기사입니다. 실전경 험이 아직 부족해 용병에 약하다는것이 약점이지만, 렉카아드에서는 뛰 어난 실력을 발휘할겁니다. " 파스크란의 뒷편에 서 있던 밝은 회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나 서며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짧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을 가진 기 사였다. "... 렉카아드에서는 다피안트와 맞먹을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인가, 나이 트 아사란 ? " 연회색 갑옷의 기사, 크실 바스크 66 나이트 아사란은 정보수집및 분 석 능력이 뛰어난 기사였다. 하야덴이나 애프러더의 실력은 그다지 인정 받고 있지 못하지만, 정보수집에 따른 작전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치 밀함에서는 나이트 쿼어즈에 뒤지지 않는 전술가였다. 아사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에는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나바뉴의 옐리어스 나이트나 파아렐 나이트--이 나바뉴 총사대의 다른 이름. 나이트 사야카등이 속해있는, 왕족이나 높은 귀족 출신의 기사들로 구성된 이나바뉴의 기사단이다--의 누구라도 다피 안트님과 겨룰 수 있습니다. 이나바뉴 기사단을 얕잡아 보시면 안됩니다. " "음. " 파스크란은 다피안트의 어깨를 거두어 그를 일어서게 했다. 아사란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쿼어즈님이 포프슨 성을 이나바뉴에게 내어준것은 아마도 이나바뉴 기사단을 쉽게 생각했기 때문일것입니다. " 포프슨을 공격하기 전, 파스크란과 쿼어즈, 다피안트, 각센, 이베론, 바 란슈다스와 아사란등 크실 최일류의 기사들이 모여있었던 10만여의 기사 단의 전략 총책임은 역시 나이트 쿼어즈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로젠다 로의 기사들--에우로페 나이트--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던 쿼어즈 와 그들 로젠다로의 기사 하나하나의 능력을 인정했던 아사란은 전략적 측면에서 매번 충돌했었다. "이나바뉴 기사단의 선발대 바스엘드는 아마도 쿼어즈님이 생각한대로 이바이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나바뉴 기사단에는 이바이크 말고도 경계해야 할 기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 파스크란은 입고 있었던 투구를 벗었다. 투구 속에 숨겨져 있던 긴 머 리카락이 흘러내려왔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매우 젊은, 기사라기 보다는 차라리 법률가나 의사의것일것 같은 부드러운 선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 지만 그가 온몸에서 뿜어내는 중압감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아마도 그의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 때문이었으리라. 크실의 기사대장 파스크란 은, 마치 당장 불꽃이라도 발할듯한 뚜렷한 빛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파스크란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다피안트에게로 돌렸다. "나이트 다피안트, 네가 상대한 옐리어스 나이트와 나를 비교할 수 있 겠나 ? " 다피안트의 입가에 짧은 순간 웃음이 흘렀지만, 그것은 잠시였을 뿐, 그의 얼굴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기사는 굉장한 속도의 하야덴을 사용했습니다. 페가드를 사용하지 않고 양손으로 하야덴을 쥔것으로 보아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기사인듯 했습니다. 물론 그도 강했지만... 그의 속도 역시 파스크란님을 따라가기에는 무리일것 같습니다. " 파스크란은 아직 완전히 만족한 표정은 아니었다. 다피안트 역시 마찬 가지였다. 그가 상대한 기사는 이나바뉴 기사단의 바스엘드가 아닌, 단지 어린 옐리어스 나이트였기 때문이다. "파스크란님, 천천히 다음 전투에 대한 지시를 내려주실때 입니다. " 파스크란은 고개를 돌려 아사란을 바라보았다. 크실의 젊은 기사, 아사 란. 파스크란의 큰 신임을 받고 있는 기사였다. 그는 남들의 눈 앞에서 하야덴을 꺼내 드는것을 싫어해, 혼자 연습을 하기 때문에 그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뛰어난 기사임은 틀림 이 없었다. "... 이나바뉴 기사단의 중군이 도착할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 습니다. 하라데스도 언제고 다시 이나바뉴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 파스크란이 이끌고 있는 크실의 기사단은 크실의 최정예였다. 사실, 전 쟁을 시작하기 전 크실의 생각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많은 훈련을 쌓 은 크실의 기사단은, 두번의 패배 후--1, 2차의 천신전쟁 후-- 이번만큼 은 이나바뉴를 상대하기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되어 전쟁에 나섰다. 하지 만 전력미상의 옐리어스 나이트가 출정하자, 상황은 크실이 예상한것 처 럼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기사대장 파스크란이 이끄는 최정예의 기 사단만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을 뿐, 나머지 기사단은 이나바뉴에 크게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다. 이나바뉴의 국왕 친위대 옐리어스 나이트가 출 정할 정도로 이나바뉴가 이 전쟁에 총력을 쏟는다면, 이나바뉴 총사대, 파아렐 나이트가 출정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파아렐 나이트까 지 전투에 임하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지리라...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파견대의 중군에는 최소한 한명의 파아렐 나이트는 파견되어 있을것이라고 아사란은 생각했고, 실제로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나바뉴 바스크 24, 파아렐 나이트 사야카가 중군에 속해 로젠다로로 향하고 있었던것이다. "... 그렇다. 중군이 빠른 시간내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선 발대만으로도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데, 중군이 도착한다면 우리의 상 황은 더욱 힘들어질것이다. " 다피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 밝으면 바로 전면전에 들어간다. 숫적의 열세는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 파스크란은 한손으로 긴 머리를 잡아 목께로 들어올리고, 다른 손으로 는 벗어서 옆구리에 끼어 놓았단 칠흙색 투구를 집었다. "선봉엔 내가 서겠다. " 마지막 말과 동시에 파스크란은 다시 투구를 썼다. 크실의 기사대장-- 검은 갑옷의 기사--파스크란으로 돌아간 것이다. 전투는 새벽에 시작되었다. 파스크란이 이끄는 크실 기사단은 진열을 갖춤과 동시에 이나바뉴의 진영으로 곧장 돌격해 들어왔고, 퀴트린과 하 이파나의 지휘아래 이나바뉴 기사단도 반격의 태세를 갖추고 공격에 나 섰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크실의 기사단은 정면으로 충돌해 왔고, 이 나바뉴 기사단도, 각 기사단의 바스엘드가 이끄는 정예의 개인 기사단을 선두에 세워 정면으로 맞섰다.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앞에 처음 나타난--그들의 눈에는 두번째로 보이겠지만--기사대장 파스크란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는 기사단의 맨 선두에 서서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이나바뉴 기사단의 정 중앙을 향해 직선으로 달려왔고, 그는 많은 저항을 느끼기도 전에 이나 바뉴 기사단의 한가운데를 돌파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하는것이 좋을것이다. 파스크란이 온몸에서 뿜어내는 중압감 때문에 이 나바뉴 기사단을 그를 향해 페치나 마텐을 들어 그를 저지하려 하는 사 람들은 극히 적었고, 설령 용기를 내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파스크란의 하야덴에 순식간에 짚단처럼 쓰러져 갔다. 퀴트린은 라벨, 네이서스등과 함께 기사단의 중앙에서 전황을 살펴보 고 있었다. 전위에는 라즈파샤, 후위에는 하이파나--아직 그는 선봉에서 전투를 치룰 수 있을정도로 회복되지는 않았다--가 있었다. 이나바뉴 기 사단이 숫적으로 크실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긴 시간은 되지 않았지 만, 방어를 위주로 전투를 진행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아직 중앙의 기 사단은 적을 맞아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 역시, 다른 녀석이었군. " 퀴트린의 말에 라벨은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다 네이서스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라벨님. 바스엘드가 직접 탐색전에 나가지 않았으 니 우리쪽도 전력을 모두 보여주지 않은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보다, " 네이서스는 고개를 돌려 이나바뉴 기사단의 중앙을 거침없이 직선으로 뚫고 들어오고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 저 검은 갑옷의 기사를 저지하는것이 급선무입니다. " 네이서스의 말에 퀴트린도 동감을 표했다. "그래. 라즈파샤님으로는 힘겨운 상대인것 같다. 라벨, " "예. " 라벨이 그의 하야덴, 정열의 베락스를 꺼내 쥔 것을 확인하고 퀴트린 도 역시 하야덴을 빼어 들었다. "로젠다로 원정대의 총지휘권을 임시로 네게 맡긴다. 나는 저 놀라운 크실의 바스엘드를 최대의 경의로 맞아 주겠다. " 라벨이 퀴트린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라벨은 짧게 웃어보이고 곧 고개를 돌리며 베락스를 높게 쳐들었다. "공격 ! 크실 기사단을 섬멸하라 ! " 라벨의 외침과 동시에 이나바뉴 기사단 전체에서 함성이 일었다. 이나 바뉴 기사단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뀐것도 그것과 동시였다--이나바뉴 기 사단의 총반격이 시작된것이다. 퀴트린은 이나바뉴 기사단의 정중앙을 휘젓고 들어오고 있는 상대 바 스엘드를 향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그를 제압하는것이 이번 전투의 관건이라고 판단된것이다. 그를 향해 다가갈수록 퀴트린도 역시 그 존재 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기의 구체가 파스크란을 감싸 고 있는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파스크란의 바로 앞에 서자, 퀴트린은 말 을 멈추었다. 파스크란도 그를 발견하자 말을 멈추고 똑바로 퀴트린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침묵이 흘렀다. 퀴트린은 파스크란이 그 짧은 시 간동안 검은 투구속에서 자신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을것 같다는 생각 을 했다. 파스크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네가 이나바뉴의 바스엘드냐. " 은빛으로 치장된 순백색의 화려한 전투복.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 와 무게. 옐리어스 나이트중에서도 대단한 기사라는것을 파스크란은 느 낄 수 있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104, 옐리어스 나이트 레이피엘이다. " 다시 잠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은 비웃음과도 같았다. 겨우 104의 바스크를 가진 기사가 바스엘드란 말이냐... 칠흙색 투구 안쪽의 파스크란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듯했다. 본래, 바스크는 기사의 실력, 연령, 출신성분에 의해 결정된다. 오래전 부터 있었던 제도였기 때문에 바스 크의 기준은 이나바뉴, 크실, 로젠다로 가 모두 비슷했지만, 크실은 두번의 패전--1, 2차 천신전쟁--후 실력과 통솔력을 갖춘 젊은 기사를 중용하기 위해 바스크를 실력에 의해 나누는 정책을 택했다. 뛰어난 실력--퀴트린의 하야덴과 비교될 수 있는 기사는 이나바뉴 안에서도 기사대장 아켈로르, 옐리어스 기사단장 슈펜다르켄, 파아렐 나이트 사야카정도 뿐이었다--을 갖추고서도 퀴트린은 104의 바 스크를 가지고 있고, 파스크란은 기사대장의 바스크인 1을 가지고 있을 수 있던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크실의 기사 나이트 쿼 어즈는 바스크 104의 퀴트린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크실 기사대장, 바스크 1 나이트 파스크란이다. " 파스크란도 예를 갖춰 퀴트린에게 자신의 이름과 바스크를 밝혔다. 퀴 트린이 천천히 하야덴을 들자 파스크란도 그의 한배 반 정도 되는 긴 하 야덴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곧, 기합소리와 함께 파스크란의 첫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스크란은 망설이지 않고 하야덴을 곧게 뻗어 퀴트린의 가슴을 노렸 다. 퀴트린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거의 경험한적이 없었던 빠른 속력 의 공격이었다. 퀴트린은 하야덴으로 마주 치지않고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해냈다... 라벨의 베락스보다도 훨씬 빠른 공격이다... 퀴트린은 생각했 다. 퀴트린이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두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두번째 하야덴 역시 기교 없이 왼쪽 어깨를 노리고 쓸어 들어왔다. 몸을 흔들어 피하기에는 하야덴이 쓸어오는 범위가 너무 넓었기 때문에 퀴트린은 하 는 수 없이 하야덴을 들어야 했다. 강한 파찰음과 함께 두 하야덴이 충돌했다. 퀴트린은 손등에서부터 팔 꿈치, 어깨에까지 강렬한 충격이 전해져 오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 역 시 이바이크님에게 결코 떨어지지 않겠어... 참으로 대단한 기사로군. 퀴 트린은 방금의 충격으로 두어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 감탄한것은 파스크란도 마찬가지였다. 퀴트린은 파스크란의 두번의 공격을 가장 안전하고 신속하게 방어할 수 있는 방법 으로 방어를 해낸것이다. 그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더욱이 이 두번 의 공격으로 파스크란의 실력을 가늠해 낼 수 있었다. 다시 기합소리와 함께 파스크란의 하야덴이 퀴트린을 찔러왔다. 퀴트린은 베어져 오는 세번째 공격은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피해 버 렸다. 그리고는 하야덴이 자신의 가슴 앞을 지나간 동시에 하야덴을 뻗 어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허공을 벤 파스크란의 하야덴은 원을 그리지 않고 내려온 길 그대로 다시 위로 뻗어왔다. 파스크란은 짧은 순간 승리 를 확신했다... 본래부터 이것이 파스크란의 생각이었다. 일격은 속임수. 반격을 다시 반격하는것이 파스크란의 목적이었다. 파스크란의 긴 하야 덴이 퀴트린에게 닿았어야 하는 순간, 파스크란과 퀴트린의 귀에는 동시 에 날카로운 파찰음이 들렸다. 놀랍게도 퀴트린의 하야덴이 그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처음부터 퀴트린의 하야덴은 아래로 내려간 파스크란의 손목을 노리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파스크란의 반격이 무효가 된 것 이다--그점에서는 퀴트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럼, " 씩 하고 퀴트린이 웃어보였다. 이제 내가 공격할 차례인가... 하는듯한 웃음이었다. 퀴트린의 공격이 펼쳐져 들어왔다. "...... ! " 파스크란은 눈을 크게 떴다. 빠른속도로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하야덴 이 분명이 셋으로 보인것이다. 그가 들고 있었던 하야덴은 하나 뿐이었 는데... 라벨이 속력, 이바이크는 힘이라고 하면, 퀴트린은 화려한 기교의 기사였다. 파스크란은 하아덴을 들어 셋 모두를 향해 동시에 하야덴을 내리쳤다.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파스크란을 엄습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몇번의 파열음이 들리고, 파스크란은 반짝이는 은 빛 물체가 하늘로 날아 오른다는것을 느꼈다. 손에 쥔 무게가 가벼워 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하늘로 자신의 하야덴의 머리 부분이 날아 오른것 이다... 내 하야덴이 부숴지다니 ! 파 스크란은 눈을 부릅뜨고 떨어져 내리 는 반쪽의 하야덴 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러진 반쪽짜리 하야덴을 쥐고 고개를 돌려 상대 바스엘드를 쳐다본 순간, 그의 입에서는 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퀴트린 역시 부러 진 하야덴을 손에 쥐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군. " 탄복의 말은 파스크란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퀴트린이 고개를 끄덕였 다. "너 역시. "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양쪽의 기사단 역시 완전한 호각세를 이루며 전 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서로 승리없는 소모전이 될것 같았다 --그들의 바스엘드들이 벌인 무승부의 렉카아드 처럼. 파스크란이 뒤로 돌아섰다. "반전 ! " 기사단의 기수를 돌리는 명령을 내리는 파스크란의 뒷모습을 보며 퀴 트린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기사단을 거둘때였다... 실력으로는 바스엘 드나 기사단이나 엇비슷하다는것을 확인한 이상, 이 전투는 이정도에서 끝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된 것이다. "후퇴 ! 진지로 복귀한다 ! " 퀴트린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나바뉴의 기사단도 하야덴과 페치, 애프 러더와 리첼반을 거두고 전장에서 몇발자국씩 물러섰다. 퀴트린은 후퇴 할때는 맨 후위에서 자신의 기사단을 보호하며 돌아가는 파스크란을 바 라보고 있었다. '아깝군. 저렇게 뛰어난 기사를 적으로 두어야 한다는것이. ' 퀴트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로젠다로 평원의 두번째 전투는 쌍방이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는것에서 끝났다. 이나바뉴와 크실의 전력손실 역시 엇비슷했다... 이것이 퀴트린과 파스크란이 직접 만난 첫번째 전투였다. "라벨님이라고 ? " 부상자 막사에서 새벽녘에 있었던 전투에서 상처입은 기사들을 치료하 는 의술사들을 돕고 있던 아아젠은 이스케의 말에 조금은 놀란 표정이었 다. "그래. 퀴트린님이 말씀하셨나봐. 방금 데판이 전해주던걸. " "너, 데판하고 부쩍 친해진 모양이다 ? " 아아젠은 조심스럽게 이스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스케는 잠시 얼굴에 홍조를 띄었지만 이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해지긴, 뭘... 똑같지. 친해져서 이득이 될것 없는 사람아냐. 내가 데 판 녀석 따위와 잘되기를 바라는건 아니지, 너 ? " 데판 녀석 따위라고... 요즘들어 휴식시간만 주어지면 데판을 만나러 가는것 같더니. 이바이크님이 전사한 이후로 며칠동안은 많이도 우울해 하더니 이젠 많이 괜찮아진 모양이구나. 아아젠도 이스케를 마주 바라보 며 웃어주었다. "그건 그렇고, 라벨님이라고 했니 ? " "응. 왜, 전에 내가 얘기한적 있쟎아. 헬로판가 막내 따님의 카발리에 로가 된 열여섯살의 옐리어스 나이트. 우리 퀴트린님하고는 본래부터 친 했다고 얘기 했었쟎아. " 그제서야 아아젠은 언젠가 그 이야기를 이스케가 했다는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는 기사이기는 하지만. "아. 알아. 들은적이 있는것 같아. 하지만... " 이스케가 아아젠의 말 가운데에 끼어들어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는지 알고 있다는 투였다. "가는 방법은 데판이 알려줄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슈렐린 차나 잘 타렴. 퀴트린님이 라벨님 앞에서 망신이라도 당하지 않도록. 아 차, 실수. " 자신이 모시는 기사를 향해 불경스러운 실수를 고의적으로 하고는 이 스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아젠도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싫지 는 않았다. "그래. 슈렐린 차라면 맡겨 둬. " 이 전쟁에 수행을 따라온 이후, 아아젠도 귀족들과 기사들, 귀족집안에 서 일하는 하인이나 하녀들과, 견습기사들의 생활에 많이 익숙해 질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전장에서의 생활이라고 할지라도... 그만큼, 아아젠 에게도 여유가 생긴것이다. 아직 음식을 만드는 일등에는 익숙해지지 않아서--아무래도, 태어나면 서 부터 귀족 집안의 하녀였고, 또 몇년동안 섀럿가에서 일했던 이스케 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그녀는 대개 이스케를 도와 잔일을 하거나 부 상자 막사에서 의술사들을 도왔다. 그리고 하루에 한번정도 슈렐린 차를 만들어 퀴트린의 막사로 가져가는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오늘은 퀴트린 이 슈렐린 차를 두잔을 만들어 라벨의 막사로 가져오라고 지시한것이다. '오늘도, 퀴트린님을 뵐 수 있어. ' 아아젠은 이스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퀴트린의 막사로 차를 가져가것은 하루에 한번, 혹은 며칠에 한번씩은 꼭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느끼는 설레임은 변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하이파나의 막사에서 잠시 회의를 가진 이나바뉴의 기사 들은 저녁식사후 모두 자신의 기사단에게 휴식을 지시하고는 스스로도 막사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날 대기는 라벨의 기사단이 하기로 했으나, 라벨의 기사단 역시 경계와 당장 기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사단을 남 기고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전투가 있었던 날, 쌍방이 휴식을 취하는 것은 이나바뉴나 로젠다로, 크실 어느 나라에서나 상식적인 일이었다. 퀴트린은 식사후 잠시 하이파나의 라벨의 막사에 들러 차나 한잔 같이 마시고 가기로 했다. 지난번 전투에서 이바이크를 잃은 후, 라벨이 정신 적으로 많이 성장한것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어른스러워진것이 조 금은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또 요즘은 전투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 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퀴트린은 원래 전장에서도 막사앞에 특별히 경계병이나 견습기사를 배 치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일수도 있었지 만, 한명의 병력이라도 휴식을 더 취하게 하는것이 기사단 전체에 도움 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퀴트린의 모든점을 본받고 싶어 하는 라벨에게 그점 또한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였고, 라벨 역시 현재에 는 막사 앞에 한명의 경계병도 배치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해 서 알고있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퀴트린은 라벨의 막사 앞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 앗. " 라벨의 막사를 돌아, 입구쪽으로 다가오던 아아젠은 막사 앞에 서 있 는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퀴트린이 막사앞에 서 있었던것 이다. 아아젠이 고개를 숙이고 머뭇거리는 사이,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 지내는건 어때. 힘들지는 않나 ? " "예...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 아아젠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는것 같이 작은 소리였다. 퀴트린은 고 개를 끄덕였다. "들어와라. " 퀴트린이 막사 장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아젠도 퀴트린의 뒤를 따라 막사안으로 들어섰다. "퀴트린 형 왔어요 ? " 라벨은 책상 위에서 무엇인지 쓰고 있다가 밝은 웃음으로 퀴트린을 맞 아 주었다. 그는 일어서서 퀴트린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아아젠에게 슈렐린 차를 올려놓을 탁자를 가리켰다. "야아, 굉장히 향이 좋은데요. 싸아 하는 향기가 아주 품위 있어요. 아 직 손도 대지 않았는데 막사안에 향이 가득 찬것 같네요. " 퀴트린이 웃었다. "그래 ? 가끔 너와 차를 같이 해야겠구나. 네가 이렇게 좋아할줄은 몰 랐는데 말이야. " 라벨이 슈렐린 차 찻잔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아아젠은 많이 익 숙해진 몸놀림으로 탁자위에 조용히 찻잔을 올려 놓았다. 퀴트린이 먼저 찻잔을 집어들었다. "식사후에 마시는 슈렐린 차가 내겐 가장 소중한 것중 하나지. 너는 뭘 낙으로 삼고 전장 생활을 버티고 있는거니 ? " 라벨은 씩하고 웃어보였다. "글쎄요. 레젠님한테 쓰는 편지가 낙이라면 낙일것 같네요. " 라벨은 손짓으로 등 뒤의 책상을 가리켰다. 아마도 퀴트린이 들어왔을 때, 그는 편지를 쓰고 있었으리라. 퀴트린은 아아젠에게 눈짓하여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아젠은 정 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막사를 나갔다. 슈렐린 차를 한모금 맛본 라벨은 문득 퀴트린에게 물었다. "수행온 하녀예요 ? " 퀴트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벨은 가볍게 고 개를 갸우뚱했다. "손에 말 고삐 자국이 있네요. 말을 탄적이 있었던것 같은데요. " "하녀 손바닥까지 관심을 갖다니, 라벨 ? " 퀴트린의 대답은 반쯤은 농담같았다. 그녀가 말을 타본적이 있었을리 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음유시인이었는데. "아니에요. 정말 있었어요. 그 하녀의 손에 있는 상처는 분명히 심하게 말을 탔을때 말 고삐때문에 입은 화상이었어요. " 말 고삐에 입은 화상이라... 라벨의 말을 무시하려는 퀴트린은 가슴이 싸아 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말 고삐에 입은 화상. 틀림없었다. 그 녀와 함께 루우젤에서 퓨론사즈로 돌아올때, 퀴트린은 한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으며 빠른 속력으로 말을 몰았고, 그녀는 처음 말을 타는 사람 답지 않게 끈질기게 퀴트린의 뒤를 쫒아왔었다. 신기한 일이군... 하고 그 저 퀴트린은 생각했을 뿐이었었다. "좋다. 한달간 하녀로 일하는 것을 허락한다. 네 계급은 그동안 평민으 로 해 놓겠다. 네가 그 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만두어도 좋다. 단지, ...어떤 중요한 일 때문에 나는 급히 퓨론사즈로 돌아가야 한다. 말 을 타고 갈 것이다.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있다면 집에 있어도 좋다는 조 건이다. " 잠시동안의 생각은, 라벨의 밝은 목소리로 끝이 났다. 라벨은 여전히 슈렐린 차를 손에 든 채 말하고 있었다. "아깝네요. 그녀의 손은 마치 궁정악사의 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예 뻤는데 손 안쪽은 채찍으로 맞은것처럼 검붉게 문드러졌다니. 그정도면 악기는 커녕 감각도 느끼기 힘들것 같던데. 형은 몰랐던 모양이죠 ? " 퀴트린도 슈렐린 차를 집어 들었다. "몰랐지. 하녀의 손을 그렇게 유심히 보는 기사는 너밖에 없을거다. " "제가 일부러 봤나요. 찻잔을 보려다 보니 보인거지. " 라벨이 웃자, 퀴트린도 그를 따라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랬다. 궁 정악사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음유시인이었다. 크실 바스크 66, 나이트 아사란이 기사대장의 호출을 받고 기사대장의 막사로 찾아갔을때 파스크란은 투구도 벗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 다. 아사란은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주먹을 쥐어 바닥에 댔다. "나이트 아사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 파스크란은 손짓을 하여 아사란을 일어나게 했다. 방안에는 이미 나이 트 다피안트가 들어와 서 있었다. "... 어떻게 생각하나, 나이트 아사란 ? " "이나바뉴 기사단은 강했습니다. 정면으로 충돌해서 이길 수 있는 상 대는 아니라는것도 알았습니다. " 이들 역시 이나바뉴 최강의 기사단이라는 말인가... 이미 크실은 많은 지역에서 전투에 패배하고 있었고, 건재한 기사단은 이 크실 기사대장이 이끄는 정예 기사단 뿐이었다. 파스크란이 물러선다면 크실은 이 전쟁에 서 패하는 분위기가 될것이었다. 기사가 너무 적어... 파스크란은 중얼거 렸다. 쿼어즈, 각센, 이베론, 바란슈다스가 모두 함께 있었을때의 크실 기 사단에 비해서 단 세명이 6만여기의 기사단을 이끄는 현재는 로젠다로를 함락시킬때 보다는 약한 형상이었다. 파스크란은 아사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났기 때문이다. "모험을 해보는것이 좋겠습니다. " 파스크란과 다피안트는 그가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말 없이 그를 바라 만 보았다. "이나바뉴 기사단은 선발대입니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식량과 보급품을 갖고 퓨론사즈--이나바뉴의 수도--를 출발했을리 가 없습니다. 중군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많지 않 은 양의 보급품을 없앨 수 있다면 전세는 쉽게 우리쪽으로 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파스크란은 앞으로 기울여 놓았던 몸을 들어 자리에 깊숙이 파묻었다. "이나바뉴 기사단의 중군이 언제 도착할것이냐 하는것이 관건이군. 선 발대가 쓰러지기 전에 중군이 도착한다면 그 작전은 쓸모가 없어지니 말 이야. 뭐, 하긴... " 파스크란은 잠시 말을 끊고 아사란과 다피안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 다. "... 중군이 도착해 협공을 받는다면 작전이 실패하기 전에 우리는 어 짜피 이 전투에 지게 되겠지만. " "그들은 최대한 시간을 끌려 할것입니다. " 다피안트가 말하자 파스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 운에 맡겨보자. 중군이 언제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이나바뉴 기 사단을 쓰러뜨릴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믿어보자... 파스 크란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아직 육안으로 보일 거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기사대장 아켈로르, 옐리어스 나이트 가이 사로, 파아렐 나이트 사야카가 이끄는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 의 중군은 그 시간 포프슨의 바로 앞에까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레젠님, 하이파나님께서 말씀하신 파스크란의 기사단과의 첫번째 정면대결은 무승부로 끝나버렸습니다. 지난 새벽, 위대한 사타루스님의 가호를 받고 있는 이나바뉴 기사단은 용감히 싸웠지만 그들, 크실의 기사단들도 용감 했습니다. 지금은 적이지만, 그들의 용기와 용맹에도 찬사를 보내주고 싶 습니다. 하이파나님의 병세는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왕영 의술사들의 덕분이 기도 하겠지만 하이파나님 스스로가 굉장한 의지를 갖고 계시는 모양입 니다. 네이서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하이파나님을 말리고는 있지만, 그분은 끝끝내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서십니다--그분의 신궁 아카르드가 기사단에 큰 위안과 힘이 되어주고 있는것은 사실입니다만--저도 약간 걱정을 하고는 있습니다. 지금쯤 퓨론사즈는 겨울로 접어들려 하고 있겠군요. 퓨론사즈보다 따 뜻한 이곳, 로젠다로에도 벌써 새벽녘에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 습니다. 멀리,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퓨론사즈쪽을 바라 봅니다. 그 하늘 어디에선가 레젠님이... 편지를 쓰다말고 라벨의 손이 멈칫했다. 설마... 새벽녘에 전투를 치루 고서는 기사단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서 바로 그날 밤에 다시 야습을 시 작한다는 말인가 ? 라벨은 크실 기사단 쪽에서 느껴지는 살기를 흩트리 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일어서며 옐리어스 나이트의 전투복을 챙겼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들의 기운은 더욱 강해졌다--이제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루델 ! " 라벨은 급히 전투복을 챙기며 옆 막사에서 쉬고 있을 루델을 찾았다-- 오늘밤에는 라벨의 기사단이 대기를 하고 있을 차례라, 루델은 아마 자 고 있지 않을것이다. 곧, 깜짝 놀란표정의 루델이 라벨의 막사 앞에 나타 났다. "전투준비를 해라. 전투가 시작될것이다. 사람들을 보내 퀴트린님과 네 이서스님, 라즈파샤님쪽에도 알려라. " 루델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아직 루델은 라벨이 느끼는것을 느낄 수 있을정도로 기사로서 뛰어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는 지금은 아무것도 느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는 곧 표정을 굳힌 그는 짧은 소리로 그 의 바스엘드에게 대답했다. "예. " 루델은 급히 예를 취하고 돌아서서 자신 휘하의 기사들에게 빠르고 정 확한 말소리로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긴박했다. 이바나 뉴 기사단은 퀴트린, 하이파나등 기사들을 비롯한 대부분이 전투후의 깊 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때였다--위험하다--라벨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고 있었다. 라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이트 라벨의 부관, 루델이 보낸 병사가 퀴트린의 막사앞에 도착했을 때, 퀴트린은 막 잠에서 깨어 있었다. 그 역시 크실의 기사단이 움직이려 하고 있다는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병사에게 지시하여 라벨에게 다시 전달한것은 먼저 나아가 맞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이트 네이서스에게 선두로 오라고 해라. 나와 라벨이 선두에 있겠 다. " 하루에 두번의 전투를 감행한 크실 기사단의 공격은 전투의 상식을 벗 어난 것이었고, 퀴트린은 네이서스에게 그들의 공격은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그는 기사단의 선두에 라벨과 나란히 서 서 다가오는 크실의 기사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이나바뉴 기사단은 완전한 진영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만큼 크실의 야습은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 그대로 충돌해올 모양입니다. 새벽과 꼭 같은 모습입니다. " 퀴트린도 동감이었다. 전투를 시작하자 마자는, 새벽보다는 조금 불리 하게 전투가 진행되겠군... 하고 퀴트린은 생각했다. "준비는 됐니, 라벨 ? " 라벨은 하얀색 깃털 머리장식이 꽂힌 베락스를 들어보이며 씩 웃었다. 퀴트린도 그를 마주보며 웃어 주었다. "그럼 가자.... " 우선, 강하게 부딪혀 후진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퀴트 린은 하야덴을 꽉 쥐었다. 베락스가 하늘을 향하며 라벨의 목소리가 크 게 울렸다. "공격 ! " 이나바뉴 기사단이 함성과 함께 크실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쌍 방 기사단의 선두가 맞붙자 마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밤 하늘, 별빛 이 내린 포프슨 평원에서 다시 한번 전장의 붉은 냄새가 격하게 풍겨왔 다. "아아젠, 아아젠 ! " 아아젠은 전투가 끝난 새벽녘부터 줄곧 부상자 막사에서 일했기 때문 에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눈을 떴을때, 그녀는 어두워야 할 막 사가 막사 밖의 불길로 뿌옇게 밝아져 있다는것을 알았다. 이스케는 다 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 ! 이쪽이 공격을 받고 있어 ! " "... 공격을 ? " 아아젠이 몸을 일으키자, 그녀도 역시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병기 소리와 병사들의 고함소리, 전장 특유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 몇 달간 기사단을 따라다니며 전쟁을 보아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서 전쟁을 느끼는것은 그녀로서는 처음이었다. 순간 말하지 못할 공포가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왜 이곳을 ? 이곳에 있는 기사들이라고는 모두 부상자들 뿐이 쟎아. " "나도 잘 모르겠어. 빨리 나가야 해. 이곳은 모두 불길에 휩싸일거야. " 파스크란이 노리는것이 바로 후방의 보급대라는것, 전방에 포진하여 필사적으로 파스크란의 기사단의 접근을 막을 이나바뉴 기사단은, 아직 전열을 갖추지 못한 중앙때문에 후방과의 연락이 쉽지 않을것이라는것. 보급품을 모두 불태워버리면 이나바뉴 기사단은 오랜시간 이곳에서 버틸 수 없게 된다는것. 그래서 파스크란은 나이트 아사란의 기사단을 이리로 보냈다는것. 이 모든것들 중에서 아아젠이 이해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우선 이스케가 이끄는 대로 막사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지옥이 있었다. 전장의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보급 막사의 대부분에 불길이 올라 있었 고, 얼마 되지 않는 수비대와 상처입은 부상자들이 필사적으로 크실 기 사단의 진군을 막고 있었다--물론 속수무책이었다. 크실 기사단는 매우 잘 정돈된 모습으로 습격을 해 왔고, 숫적으로 불리한 수비대와 부상자 막사에서 간신히 하야덴과 페치를 쥐고 뛰어나온 상처입은 기사들은 그 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살육에 가까왔다. "위험해, 이스케 ! 멀리 가 있어 ! " 누군가가 이스케의 어깨를 짚자 이스케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아아 젠도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어깨부분이 부숴진 갑옷을 입고 날 이 몇군데 나간 페치를 들고 있는, 견습기사인듯이 보이는 기사가 서 있 었다. 그는 머리와 어깨, 팔과 가슴 몇군데에 이미 깊고 얕은 상처를 입 고 있었다. "가루스 ! " 이스케가 그를 알아보고 놀란듯이 그의 이름을 외치자 아아젠은 그제 서야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섀럿가에서 견습기사가 되는 훈련을 받던 기사. 언젠가 우물가에서 그의 완력을 자랑하며 막 섀럿가의 하녀로 들 어온 아아젠에게 농담을 걸던, 이스케가 케이튼 향을 넣은 레토라르를 만들어 주고 싶어하던 그 가루스였 다. 이스케가 놀란 표정을 보며 가루스는 입가에 잠시 웃음을 흘렸다. "난 정말 운이 없는 놈인것 같아. 하필이면 우리가 병기고 담당인 밤 에 적이 습격해 오다니 말이야. 아직 견습기사도 되지 못했는데... " "... 가, 가루스. 괜찮아 ? 피를 많이 흘리고 있어. " 가루스는 이스케의 말에 손등으로 뺨에 흐르던 피를 훔쳤다. "이정도는 괜찮아. 하지만 너희는 멀리 가 있어. 여기는 위험해. " "피부터 닦아야 해. 싸우다가 피가 눈에 들어가면 앞도 잘 보이지 않 을거야. " 아아젠이 말하자 가루스는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그럴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몸짓이었다. "괜찮아. 나보다는 데판 녀석 걱정이나 하라고. 데판도 마찬가지로 이 곳 어딘가에서 싸우고... " 말을 채 끝내기 전에 가루스는 페치를 들며 앞으로 뛰어 나갔다. 정면 에서 말을 탄 기사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싸우려는 모양이야 ! " 하야덴과 페치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 기사과 전사들의 비명소리와 고 함소리가 여전히 생소하게, 하지만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아아젠은 이스 케의 손을 잡았다. 이스케의 눈에는 공포때문인지 슬픔때문인지 모를 눈 물이 어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아아젠도 눈길을 가루스에게 돌렸다. 가루스는 땅에 선 채, 자신에게 말을 달려오는 밝은 회색빛 갑옷의 기 사를 향해 페치를 곧게 들고 있었다... 기사야. 아아젠은 느낄 수 있었다. 길고 화려한 하야덴. 펜플과 튼튼해 보이는 갑옷. 자신에 넘친 몸짓. 기 사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걱정 하지마. 가루스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것은 너도 보았쟎아. 기억 안나니 ? 그때, 우물 앞에서 우리가 물을 길러 갔을때... 가루스가 단 한 팔로 그 물통을... " 아아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아젠과 이스케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 이 터져 나왔다. 그 회색빛 갑옷을 입은 기사는 말을 멈추지도 않은 채 하야덴을 단 한번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가루스의 부러진 페치와 그의 머리가 하늘로 솟아 오른것이다. 그 기사가 말을 달려 그의 앞을 지나가 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가루스의 몸은 그녀들이 서 있는 곳에서 몇 젠터 떨어진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가... 가루스. " 이스케의 입에서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아아젠에게도 겨우 들릴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바로 앞에서 벌어진 죽음의 광경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아젠도 마찬가지였다. 데판도... 데판도 지 금 이순간 저런 모습이 아닐까 ? 이스케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데 판도 ? "피해야 해, 이스케 ! " 단 한번의 하야덴으로 가루스의 생명을 빼앗은 회색 갑옷을 입은 크실 의 기사--그가 크실 바스크 66, 나이트 아사란이라는것도, 처음부터 백명 의 가루스라 할지라도 상대가 되지 못했으리라는것도 그녀들은 알 수 없 었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이스케를 아아젠은 힘껏 끌어당겼다. 우선은 피해야 했다. 이스케도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아아젠을 따라 움 직였다. 아아젠은 아직 불길이 일지 않은 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을 옮 겼다. 불길은 계속해서 번져나갔다. 발걸음 딛는곳마다 사람들의 시체와 핏 자국들이 떨어져 있었다. 아아젠 역시 이렇게 참혹한 광경은 본적이 없 었다--전쟁--전쟁인 것이다. 그녀는 지금, 더이상 가까울 수 없는 곳에서 전쟁을 경험하고 있었다. 불길과 크실군을 피해 걸음을 옮기다가, 아아젠은 반가운 사람을 만났 다. 페치를 들고, 역시 온몸이 잿가루와 흙, 땀과 피로 범벅을 한 데판이 었다. "데판 ! " 아아젠도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 보다는 데판이 훨씬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보자 마자 그쪽으로 달려왔다. "이스케, 아아젠 ! " "데판... " 살아있었구나. 기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지만 이스케는 그저 그에게 겨우 들릴정도로 그의 이름을 한번 불렀을 뿐이었다. 너무 놀라서인지, 그녀는 움직일 힘도, 감정을 나타낼 힘도 나지 않았다. "어서 피해. 저쪽으로 가면 안전할거야. " "어떻게 된건지, 데판은 알고 있어 ? " 아아젠은 이스케에 비해서는 비교적 차분한 편이었다. 그녀 역시 다리 가 떨리도록 공포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데판에게 물었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모시는 견습기사님 말씀으로는... " 데판은 잠시 말을 쉬고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 아직 크실의 기사단은 보이지 않았다. "... 우리가 포위된 모양이야. " 그는 순간적으로 아아젠의 얼굴에 스치는 공포를 읽고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나바뉴 기사단은 절대 지지 않으니까. 반드시 퀴트린님이 이쪽으로 와 주실거야. 그때까지만 버텨내면 돼. " 데판에게도, 아니 그곳에 있는 누구에게도 나이트 레이피엘이라는 이 름은 절대적인 힘과 신뢰를 상징하고 있는 말이었다. 아아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서 가봐. 나는 병기고 막사쪽으로 가봐겠어. 병기고를 불태우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무기들을 그들에게 넘겨 줘서는 안되거든. " 병기고라고... 아아젠은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지 만 무기가 중요할것이라고는 생각했다. 병기고 막사는 기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막사 쪽에 있었다. '병기고 막사 ! ' 병기고 막사 바로 옆에는 퀴트린의 개인 물품을 보관하는 막사가 있었 다. 퀴트린이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나 갈아입을 전투복등이 있는 곳이 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퀴트린이 전장에 갖고 온 슈렐린 차가 바로 그곳 에 있었다. 아아젠의 귓전에는 잠시 그날 저녁, 라벨의 막사에서 들었던 퀴트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스쳐갔다. "식사후에 마시는 슈렐린 차가 내겐 가장 소중한 것중 하나지. " 지켜야 해. 아아젠 속의 누군가가 아아젠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켜야 해. 그 것만은 반드시 지켜야 해. 내가, 그분 앞에서는 너무나 초라한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것이야... 내 생명과 바꿔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지켜야 해. "아아젠 ? " 이스케는 아아젠의 표정이 조금 창백하게 변하는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젠이 천천히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냐고, 왜 그러느냐고 이스케 가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데판, 이스케에게 안전한 곳을 알려줄 수 있지 ? " 데판은 약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런데, 너는... 아, 아아젠 ! " 아아젠은 데판이 고개를 끄덕이는것을 본것과 동시에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데판이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의 한쪽 팔에는 이스케가 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잡지 못 했다. "어... 어쩌겠다는거야. 그쪽에는 병기고 막사가 있단말이야. 크실군의 목표는 바로 그... " 데판은 놀라움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이스케도 마찬가지였다. 아아젠은 뛰었다. 슈렐린 차를, 퀴트린님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슈렐린 차를 반드시 지켜야 했다. 크실의 기사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것이라는것 이나, 그 기사들은 그렇게 강했던 가루스 조차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의 그녀에게는 전혀 관계가 없는것들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한가지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숨이 턱에 닿을때까지 뛰었고, 결코 뛰는것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피엘님 ! " 이미 전면전은 시작되었다. 상황은 새벽과 비슷했지만, 정렬되어 전투 에 임하고 있는 이나바뉴 기사단의 숫자가 적어서 형국은 이나바뉴의 열 세였다. 하지만 조금 더 버티면 나머지 기사단이 태세를 갖추고 합세해 올것이기 때문에 퀴트린은 그다지 현재의 열세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 다. 그러는 와중에 네이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방 보급대가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 " 퀴트린은 눈을 부릅떴다. 보급대가... 퀴트린은 아차 싶었다. 이 공격이 이리도 급박했던 이유는 역시 후방의 공격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위함이 었다는걸 퀴트린은 이제서야 깨달은것이다. 보급대는 기사단의 후방에 있기 때문에 수비대 외의 방어는 되어있지 않았다. 완전히 허를 찔린 것 이다. 중군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식량과 병기등을 보급하는 보급대가 격멸당한다면 퀴트린이 이끄는 로젠다로 원정대는 크게 패하게 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이서스가 급히 말했다. "라즈파샤님의 기사단이 후방을 보호하러 갔습니다만, 후방의 공격 역 시 전방 못지 않게 강력합니다. " 둘로 나뉘어진 상태에서도 이정도 전투를 펼칠 수 있다면 정면을 공격 한 기사는 반드시 파스크란일것이라는 것을 퀴트린은 알 수 있었다. 하 지만, 지금은 파스크란을 상대하기 보다는 우선 후방의 보급대가 급했 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네이서스, 라벨을 도와 전방을 맡아라 ! 나는 후방으로 가겠다 ! " "예 ! " 네이서스는 말을 마치고 다시 리첼반을 휘둘러 길을 열고 라벨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밤은 어두웠고, 함성소리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나바뉴 기사단은 전위와 후위에서 포위당하여 공격당하고 있었고, 방어가 비교 적 약했던 후방의 보급대는 괴멸되어가고 있었다. {{ }}{{ }}{{ }} 9. 슬픔의 소곡: 하얀 로냐프 강 이나바뉴의 음유시인이 지었다고 하는 이 노래는, 후에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로젠다로의 국가로 지정되었다. 슬픈 노래 가사와 조금은 조잡한 음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노래는 로젠다로의 자유와 평등을 상징하는 노래였고, 또한 가장 용감한 사랑의 노래였다. 국가로 지정된 다음, 이 노래는 슬픔의 소곡: 하얀 로냐프 강이라고 불리워지며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하얀 로냐프 강 ------------------------------------------------------------------ }}{{ }}{{ 9. 슬픔의 소곡: 하얀 로냐프 강 ------------------------------------------------------------------ }} 9. 슬픔의 소곡: 하얀 로냐프 강 아직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는 한번도 치루지 못했다. 그만큼 퀴트린과 이바이크, 라벨이 이끈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 선발대는 강력하 게, 또한 빠르게 크실이 점령하고 있었던 로젠다로를 평정하고 지나갔던 것이다. 이나바뉴 바스크 92, 옐리어스 나이트 가이사로는 침상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이제 곧 포프슨일텐데... 오늘 안에는 포프슨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그의 예상을 깨고 원정대의 중군은 저녁까지 로젠다로의 수도, 포프슨을 찾아내지 못한 채 야영에 들어갔었다. 기사로서의 전투본 능이 그를 깨우고 있는것일까 ? 가이사로는 다시 한번 몸을 뒤척였다. '... 이대로는 잠이 오지 않을것 같군. 밖에 잠시 나가라도 보아야 겠 다. ' 잠이 오지 않자, 가이사로는 차라리 밖에서 잠시 바람이라도 쏘이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 따라 야영지는 조금은 들뜬 분위기인것 같았 다. "가이사로님 ! " 장막이 걷히며, 자신 휘하에 있는 기사가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온것 은 바로 그때였다. "불꽃이 오르고 있습니다. 포프슨 성 쪽인것 같습니다 ! " "포프슨 쪽이라고 ! " 가이사로는 벌떡 일어났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것이 틀림 없었다. 그 전투는 분명 로젠다로 원정대의 선봉과, 크실의 기사단일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가이사로는 침상 옆에 세워두었던 자신의 하야덴을 집어 들었 다. "사람을 시켜 급히 아켈로르님과 사야카님께도, 그리고 다른 기사들에 게도 알리고, 내 기사단을 급히 정렬시켜 대기시켜라. " "예. " 전투가 일어났는데도 살기를 느끼지 못할 거리. 아마도 자신의 생각보 다 포프슨을 훨씬 먼 모양이었다. 가이사로는 급히 갑옷을 챙기기 시작 했다. 퀴트린은 즉시 자신의 기사단을 둘로 나눠 그중 수백여기로 이루어진 기사단을 끌로 급히 보급대 쪽으로 향했다. 비록 수백여기이기는 하지만, 퀴트린의 최정예의 개인 기사단이었고, 한명 한명이 견습기사급의 뛰어 난 전투술을 갖춘 기사들이었다. 급한대로, 이 병력으로 후방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그는 중간에서 라즈파샤의 기사단을 보았지만, 그 역시 다른 기사단을 맞아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방으로 공격해 온 크실 기사단의 대부 분의 병력은 그곳에 있었고, 일부만이 병기고 막사 쪽으로 향한 모양이 었다. 퀴트린이 후미에 가까이 갈 수록, 그는 사태가 상상보다도 더 커졌음 을 알 수 있었다. 주위는 온통 불바다였고, 주위는 수비대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중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의 시체도 보였다--크실 기사 단은 하인들이나 하녀들 등, 전진을 방해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베어버린 모양이었다--언뜻 보니 병기고 막사쪽은 그래도 불이 덜 오른것이 살아 남은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병기고 막사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병기창을 구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아주 불리하다. 이미 우 리에게는 이제 더이상 전투를 계속해낼 식량이 없을것이다. ' 그쪽을 제외한 식량 저장 막사등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지 는것이 아닐까. 퀴트린은 검은 갑옷의 기사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 다. "모두 돌격태세 ! 병기고를 수비해내야 한다 ! " 퀴트린은 말을 타고 달리며 소리쳤다. 불길속에서는 조금이라도 떨어 진 거리에서도 상대의 빠른 공격은 식별해 내기가 어려웠다. 그는 이어 서 리첼반을 모두 버릴것을 명령했다. 지금은 리첼반의 길고 둔한 공격 보다는 하야덴의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 유리할것 같았다. 예상대로였다. 그대로 잠시 말을 달려 도착한 병기고 막사 주위에는, 이제 백여기도 남지 않은 수비대가 크실 기사단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 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퀴트린의 공격 명 령이 떨어졌다. "돌격 ! " 퀴트린의 외침과 동시에, 함성을 지르며 이나바뉴 기사단은 즉시 크실 기사단의 후방을 직선으로 돌파해 내기 시작했다. 이나바뉴 기사단을 강 했다. 퀴트린이 맨 선두에 선 수백여기의 이나바뉴 기사단은 얼마 지나 지 않아 크실의 포위망을 뚫고, 갇혀있던 수비대에 닿을 수 있었다. 한편, 크실 기사단의 중앙에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기사가 있 었다. 그 기사단의 바스엘드였다. "놀랍군... 파스크란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솜씨야. " 크실 바스크 66, 나이트 아사란이었다. 그는 혼잣말 처럼 중얼거리다 손을 높게 들었다. "반전 ! " 지금, 크실은 이나바뉴 기사단의 보급대를 밀어 붙일곳까지 밀어 붙였 다. 병기를 끝끝내 탈취하지 못한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식량등을 모두 태웠다는것만 가지고도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급히 움직이지 않으면 불 은 곧 병기고 막사에 까지 번지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무리해서 퀴트린과 부딪힐 필요가 없었다. 아사란은 반전 명령을 내리고 기수를 돌렸다. "우회하여 본진과 합류한다 ! " 아사란은 공격해 들어온 쪽을 피해--그쪽은 이미 불길로 휩싸여 발 딛 을 틈이 없었다--다른 쪽으로 기사단을 몰아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퀴트린은 그를 추격하지 않았다. 퀴트린 역시 불길로 부터 병 기들을 지키는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긴것 같군... 나이트 레이피엘. ' 아사란은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힐끗 뒤를 돌아 퀴트린을 바라보았다. 퀴트린은 급히 자신의 기사단을 지휘하여 번지는 불을 막고 있었다. "물을 가져와 !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불을 꺼라 ! " 퀴트린은 자신도 말에서 내려 기사단을 독려하고 있었다. 수십개의 병 기고 막사중 이미 몇개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일단 물러간 크실의 기사 단이 다시 역습을 해 올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퀴트린은 우선 병기들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퀴트린님 ! " 퀴트린은 자신의 등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 고 뒤를 돌아 보았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돌아본 그의 뒤에는, 온몸에 검은 그을음을 뒤집어 쓴 여자가 있었고--그녀가 자신을 수행온 섀럿가 의 하녀라는 것을 그는 조금 후에야 생각해 낼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옆에는 아직 견습기사의 복장을 하지 않은 전사 한명이 그녀를 말리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용 없어, 이스케 !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병기일 뿐이야 ! 그녀를 구할 수는 없어 ! " 아주 낯설지는 않은 얼굴이, 자신의 기사단에 소속된 병사인듯 했다. 지금 그는 하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곧 다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퀴트린님 ! 그애가... 그 바보 같은 애가 저 막사에... " 다시 그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퀴트린에게 손짓 으로 어떤 막사를 가리키고 있었찌만, 그녀의 목소리는 주위에 있는 기 사들의 함성속에 묻혀 버렸다. 병기고 막사중 하나가 불길에 휩싸여 무 너져 내린것이다. 그애라고 ? 막사가 무너져 내렸지만, 다행히도 기사들이 신속하게 피해내어 언뜻 보기에는 다친 사람들은 없는것 같았다. 불길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다. "모두 조심해라 ! 막사가 무너진다 ! " 퀴트린은 이렇게 외치면서도 방금 그녀가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 애라면... 방금 그녀와 함께 자신을 수행온 그녀를 말한것일까 ? '바보같은 일이군. 하녀따위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말인가. 지금, 당장 전위에서는 수없는 기사들이 쓰러져 갈텐데... 하물며, 본래 음유시인이었 던 비천한... ' 음유시인. 음유시인이라는 말이 생각나자, 갑자기 라벨의 말이 떠올랐 다. "아깝네요. 그녀의 손은 마치 궁정악사의 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예 뻤는데 손 안쪽은 채찍으로 맞은것처럼 검붉게 문드러졌다니. 그정도면 악기는 커녕 감각도 느끼기 힘들것 같던데. 형은 몰랐던 모양이죠 ? " "... Herrole Barnt(기공계 방어마법) ! " 퀴트린이 마법을 시법하자, 엷고 투명한 푸른 빛이 퀴트린의 주위를 감쌌다. 기공계 마법으로 퀴트린 자신의 몸 주위에 대기를 엷게 하는 마 법이었다. 대기가 엷어지면 화염에 휩싸이더라도 화염이 태울 공기가 없 기때문에 타격이 훨씬 줄어들었다. 적의 불화살등의 공격속에서 돌진할 때 기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시법이 끝나자, 퀴트린은 병기고 막사 바로 옆의 막사로 뛰어들었다. 등 뒤에서는 비명과도 같은 기사들의 외 침소리가 들렸다. "퀴트린님 ! " 그는 하야덴을 뽑아들고 눈앞에 있는 장애물은 닥치는대로 부수며 막 사 쪽으로 뛰어 들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퀴트린은 스스로 그 렇게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막사는 불길이 끝까지 치 솟아 있었고,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것 처럼 위태위태하게 보였다. 날카로운 파찰음이 들리며 퀴트린의 하야덴에 의해 막사 장막이 둘로 갈라져 날았다. 퀴트린은 즉시 막사 안에 들어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막사 안은, 말 그대로 불바다였다. 커다란 막사는 불길과 연기로 덮여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바닥에는 가득히 천정에서 떨어져 내 린 물건들과 잿더미가 뒤엉켜 타고 있었다. 무엇인지, 희미하게 막사 반 대편에 웅크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보였다. 퀴트린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나무등을 하야덴을 쳐 내며, 급히 그 쪽으로 발을 옮겼다. 생각했던대로였다. 막사 한 구석에는 그녀--자청하여 자신의 하녀가 되기 전 까지는 음유시인 이었던 그녀--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미 그녀의 양 어깨 위에는 불에 타 떨어져 내린 나무 기둥등이 쌓여 있었 다. 운이 좋은 것인지, 아주 큰 상처는 없는것 같았지만, 연기등에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있는것 같았다. 퀴트린은 우선 그녀의 위에 있던것들 을 치워내고, 즉시 마법을 시법했다. "Herrole Barnt. " 만약 자신이 하이파나였다면 우선 체력회복 마법등을 시법했겠지만, 아직 퀴트린은 그정도의 마법 실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기사로 서 이정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것은 굉장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퀴트 린은 회복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것이 아쉽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그녀의 몸 주위에 퍼지자, 퀴트린은 그녀를 한손으로 들어 어깨에 들쳐 업었다. 막사는 곧 무너져 내릴것 같았다. 달칵. 발을 옮기려던 퀴트린은 무엇인지 자신의 발 밑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 리가 나는것을 들었다. 문득 아래를 내려보니 자신의 발 밑에는 슈렐린 찻잎과, 찻잎을 담는 그릇의 파편이 뒹굴고 있었다. 슈렐린 찻잎... 퀴트 린은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다음순간, 그녀를 어깨에 올린 채, 그는 급 히 막사 밖으로 통하는 문을 향했다. '... 벤도루우젤에서는, 찻잎 대신 애프러더가 있었을 뿐이군. ' 자신의 하녀를 구하기 위해 불붙은 막사로 뛰어 들었다면 그 말을 믿 으려 하는 기사들이 몇명이나 될까. 퀴트린은 계속 하야덴을 휘두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역부족인가. 라벨은 자신의 전투 경험이 적음을 마음 깊은곳에서 부터 한탄하고 있었다. 중앙이 전열을 갖췄지만, 퀴트린이 후위로 가면서 부터 이나바뉴 기사단의 전위는 상대에게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라 벨이 약한것이 아니라, 상대편의 바스엘드가 너무 강했던것이다. 베락스는 이미 수십명의 피를 머금고 빛을 잃어하고 있었다. 라벨은 전투가 시작된 직후 리첼반을 버리고 베락스를 꺼내 들었고, 곧 페가드 까지 포기했지만 체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최전방에서 최강의 적을 맞아 싸우기에는 라벨은 경험도, 나이도 부족했다. 라벨이 한계를 느끼고 있을때 즈음, 전위의 중앙이 부풀어 오르기 시 작했다. 누군가가 중앙에서 전위로 나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피엘님 ! " 불에 타고 그을린 펜플이 후위의 격전을 말해주고 있는듯했다. 퀴트린 이 다시 전위로 돌아온것이다. 그는 즉시 이나바뉴 기사단의 최전방에까 지 나섰다. "라벨, 네이서스에게 전위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혼자 전위를 지키느라 수고했다... 이제 후위는 걱정 없으니, 다시 싸워보자 ! " 라벨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많이 기울어 있었 다.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퀴트린도, 크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동의 를 표한 라벨도 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방법은 한가지, 렉카아드 뿐이라는 것이었다. 퀴트린은 하야덴을 크게 휘둘러 다시 한명, 크실의 기사를 베어내고 눈으로 파스크란을 쫓았다. 이 기세와 이 속도. 바스엘드에 대한 절대적 인 신뢰에서 오는 기사들의 용맹. 이 기사단을 직접 지휘하는것은 크실 기사대장 파스크란이 분명했다. "레이피엘님 ! 좌편이 ! " 라벨의 외침에 퀴트린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지금, 이나바뉴 기사 단은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서서--등 뒤 멀지 않은곳에 라엘만 협곡이 있 었기 때문에 이러한 진형이 된 것이다--상대를 맞아 싸우고 있었다. 기 사단의 우측에는 라벨이, 중앙에는 퀴트린이 있었다. 그러던 중 좌편이 무너지기 시작한것이다. '... 파스크란 ! ' 퀴트린은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리첼반을 가볍게 쳐 떨어뜨린 다음 즉시 말을 돌렸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난 새벽의 승부에서는 결국 승패를 가르지 못했고, 그와의 렉카아드에서 승리할 확 신또한 없었지만 지금 퀴트린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병기 를 제외한 모든 보급대를 잃은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선발 은 지금 라엘만 협곡을 등진 채 괴멸 위기에 처해 있었다. "...... ! " 좌편을 향해 말을 몰며 앞을 가로막는 크실 기사들을 하야덴으로 쳐 쓰러뜨리던 퀴트린은 자신의 전방 몇 젠터 앞이 둘러 갈라지는것을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서로 뒤엉켜 싸우던 이나바뉴와 크실의 기사단이 갈라지며 낸 가운데에는 칠흙같은 검은 갑옷을 입고 보통의 하야덴의 한 배 반은 되는 길이의 긴 하야덴을 가슴 앞에 세운 파스크란이 자신을 향 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나와의 렉카아드를 기대했던 모양 이군. 퀴트린은 손에 쥔 하야덴을 더욱 힘있게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퀴트린과 파스크란은 다시 마주설 수 있었다. 말 위 에서 서로 상대를 응시하던 끝에 퀴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다시 만났군. " 파스크란은 천천히 하야덴을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 이 전투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너와는 꼭 결판을 내고 싶었다, 나 이트 레이피엘. " "마찬가지다. " 최강의 적과 겨뤄보고 싶은것은 기사라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더욱이, 퀴트린에게는 이 렉카아드의 승패에 전투의 승패까지 걸려 있었다. 기합소리와 함께 파스크란의 긴 하야덴이 퀴트린을 찔러왔다.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상대라는걸 지난번 대결때 알았기 때문에, 퀴트린은 급히 몸을 돌려 하야덴을 피해냈다. 예상했지만, 파스크란의 하야덴은 곧게 찔 러오다 급히 방향을 선회하여 퀴트린의 옆구리를 노렸다. 엄청난 속도였 다. 퀴트린은 당황하지 않고 하야덴을 마주 찔렀다. 자신의 몸을 상대의 공격에 노출시킨 채 같이 하야덴을 찌른 것이다. 긴 하야덴을 이용해 공 격하느라 몸이 앞으로 숙여진 파스크란도 무방비 상태인것은 마찬가지였 다. 조금 놀랐는지, 파스크란은 휙 소리가 나도록 빠른 몸동작으로 하야 덴을 가슴 앞으로 회수해갔다. 가벼운 충격음이 들리고, 퀴트린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 파스크란은 공 격 방향을 다시 바꿔 퀴트린의 하야덴을 막아낸것이다. "이런 무모한 점도 있었군. " 파스크란이 중얼거렸다. 퀴트린은 조금 미소를 지었다. "너정도의 상대라면, 내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리는건 불가능하 다는걸 알고 있다. " 파스크란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된 무모함이었군... 파스크란 의 두번째 공격이 들어왔다. 파스크란의 하야덴은 좌에서 우로, 다시 우 에서 좌로 크게 흔들리며 퀴트린의 가슴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 번에도 퀴트린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흔들리는 파스크란의 하야덴 속 으로 자신의 하야덴을 꽂아 넣었다. "...... ! " 파스크란은 움찔했다. 다시 퀴트린의 하야덴이 셋으로 보인것이다. 바 로 지난번에 보았던 그 기술이었다. 짧은 시간에 여러번의 충격음이 들 린 후, 퀴트린과 파스크란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파스크란은 손목이 시 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퀴트린의 다 음 공격이 바로 펼쳐졌다. 그의 하야덴은 다시 셋으로 갈리워져, 하나는 오른쪽 어깨를, 다른 하나는 가슴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왼쪽 옆구리 를 노리고 있었다. 파스크란도 역시,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지 않고 그를 쓰러뜨리는것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는것을 깨달았다. 기합소리와 함께 파스크란의 하야덴이 가슴 앞으로 쭉 뻗어졌다. 퀴트 린에게는 그 반격이 의외였던듯,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으나 자신이 펼 친 공격은 회수 하기에는 너무 많이 전개되어 있었다. 옆구리에 약한 통 증을 느끼며 퀴트린은 공격에서 이탈했다. 파크스란은 어깨를 가린 갑옷 과바샤켄--보호용구로 팔꿈치 이하 손등까지를 보호한다. 대개 갑옷에 포함된다--이 날아갔고,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의 위치만을 보면 퀴 트린이 더 불리한 곳에 입었지만, 깊이는 파스크란이 더 깊은듯 했다. 이번에는 거의 동시에 두명의 입에서 기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는 상대를 향해 하야덴을 겨누고 곧게 찔러갔다. '힘이나 속도에서 나는 파스크란을 능가할수는 없다. ' 서로 맞찌르는 순간 퀴트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하야덴을 약 간 비스듬히 세웠다. 힘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옆으로 흘려 보내려는 생 각이었다. 두개의 하야덴이 서로 격한 소리와 함께 충돌하는 순간, 퀴트 린은 하야덴에 큰 힘을 주지 않고 그대로 파스크란의 하야덴을 자신의 하야덴 위로 통과시켰다. 힘이 분산되었기 때문에 파스크란의 하야덴은 전처럼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퀴트린은 그대로 파스크란의 하야덴 의 아랫부분, 그의 손목을 노렸다. 하지만 퀴트린의 하야덴이 파스크란의 손목에 닿으려는 순간, 파스크 란의 하야덴이 휙 하고 뒤집혔다. 덕분에 퀴트린의 하야덴은 그 힘에 밀 려 아래를 향하게 되었다. '... 앗. ' 퀴트린은 급히 하야덴을 집어 올리려 했지만 이미 파스크란의 하야덴은 방향을 바꿔 퀴트린의 목 바로 옆에 와 있었다. 피하는 수 밖에 없었 다. 휙 하며 눈에는 섬광만이 보일정도의 속력으로 파스크란의 하야덴이 퀴트린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왼쪽 귀 밑에서 부터 목 아래까지 길고 가는, 피로 만들어진 선이 그어졌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파스크란은 그 공격을 피해낼 수 있음에 적쟎이 놀랐다. 그는 처음부 터 퀴트린의 반격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공격은 확실히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기 때문이다. 무엇인지 말하려는 순간, 파스크란은 급 히 몸을 돌려 퀴트린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퀴트린의 하야덴이 아 래에서 위로 엄습해온 것이다. "...... " 파스크란의 얼굴에 피가 확 끼얹어지며, 묵직한 통증이 왼쪽 팔의 바 깥쪽에 느껴졌다. 퀴트린의 하야덴은 파스크란의 왼팔을 스치며 지나가, 어느새 다시 주인의 가슴 앞으로 회수되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퀴트린이 노린것은 파스크란의 가슴이나 목이 아니었다. "... 굉장하군. " 어느정도 퀴트린과의 거리를 벌려놓고 파스크란이 중얼거렸다. 퀴트린 도 동감이었지만, 그는 하야덴을 고쳐 쥐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였다. 포프슨 평원 너머에서 작지만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함성소리 속에는 말발굽 소리도 섞여 있었고, 그쪽 하늘에는 뽀얀 먼 지가 오르고 있었다. 파스크란과 퀴트린은 서로가 상대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것일 것이다. 파스크란은 고개를 돌려 그쪽의 하늘을 응시했다. 말이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릴 정도의 규모. 저렇게 먼 거리에서도 들리 는 함성. 적게 잡아도 10여만기는 넘는 크기의 기사단이 망설임 없이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방향상으로 보아 하라데스나 크실쪽에서 오 는 증원군일리 없었고, 증원군일 수도 없었다. 잠시 그쪽을 바라보던 파 스크란은 퀴트린에게 말했다. "... 이나바뉴 기사단의 중군이냐 ? " 퀴트린도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쉽지만, 그런것 같군. " 파스크란의 얼굴은 검은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굳게 닫 은 입 안쪽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듯 했다. 거의 다 이겨놓은 전투에서 물러서야 하다니... 이제, 퀴트린과 라벨이 이끄는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 다로 원정대의 선발대가 로젠다로 원정대의 중군과 합세할 경우 파스크 란의 승산은 거의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스크란은 아쉬운듯 퀴트 린을 한번 더 바라보고 말머리를 돌렸다. "퇴각하라 ! 포프슨 평원을 건너 집결한다 ! " 그런 모습을 보며 퀴트린은 아무런 명령도 하달하지 않았다. "... 운이 없었다, 파스크란. " 퀴트린의 말에 파스크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퀴트린을 마주보았다. "... 기다려라. 너와 만큼은 반드시 승부를 내겠다. " 다음순간, 파스크란은 말을 달려 크실 기사단 쪽으로 멀어졌다. 전과 같은 모습으로, 맨 뒤에서 자신의 기사단을 보호하며 퇴각할 모양이었다. 퀴트린은 퇴각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크실 기사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패색이 짙었던 이나바뉴 기사단은 중군이 도착하여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보급대가 불에 타 더이상 전투 수행이 불가능할 것 처럼 보였던 보급 문제도 중군의 도착으로 인해 타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극적인 중군의 도착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중군이 보고 달려온것은 바로 원정대의 보급대에 질러진 불꽃때문이었기 때문이 다. 파스크란의 퇴각명령으로 크실 기사단은 모두 퇴각한 후, 이나바뉴 기 사단이 전열을 정비하고 중군과 만난것은 벌써 새벽이 가까이 오는 시각 이었다. 아켈로르, 사야카, 가이사로등을 만난 라벨은 기뻐서 어쩔줄 몰 랐다. 전쟁이 시작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라벨은 그들을 만난것이 몇년이나 지난 느낌이었다. 그것은 옐리어스 나이트 가이사로도 마찬가 지였다. "라벨, 얼마 못본 새 어른이 된것 같구나. " 웃으면서 그렇게 이야기한 가이사로였지만, 역시 그들도 같은 옐리어 스 나이트였던 이바이크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다. 라벨은 천천히 막사쪽으로 걷고 있었다. 밤을 새워 치뤄낸 전투 때문 에 몸도 마음도 매우 피곤한 상태에 있었다. 이제 중군이 도착했으니... 크실군도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겠지. 라벨은 그렇게 생각했다. 막사에서 한나절 푹 쉬고 싶었다. '바보같긴, 힘들때마다 레젠님이 생각나다니. ' 문득 레젠 생각이 나자 라벨은 힘없이 웃었다. 사실 이 원정은 라벨로 서는 첫 출정이기도 했고, 그래서 퀴트린등 다른 기사들 보다는 더 많이 긴장하고 더 쉽게 피로를 느끼는것이 당연했다. 어린 나이의 라벨이 지 금까지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것은 레젠이라는 정신적인 지주가 있었던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카발리에로가 된 많은 기사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귀부인들에 대한 명예를 힘으로 승화해 낼 수 있었고, 그래 서 더욱 강한 기사가 될 수 있었다. 라벨은 문득 자신의 베락스를 펜플 밑에서 꺼내 보았다. '레젠님의 머리에 꽂혀 있을때엔 순백색이었는데. ' 베락스에 꽂혀 있던 레젠의 깃털 모자장식은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 었다. 라벨이 잠시 그 깃털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라벨님, " 라벨이 고개를 돌리자, 중앙 기사단 소속의 갑옷을 입은 키가 큰 기사 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라벨은 금방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쇼안형 ? " 라카이드 헬로판가의 장남, 쇼안이었다. 그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라벨 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가슴까지 올렸다. "쇼안형이라뇨. 전장에서는 제게 존칭을 쓰셔서는 안됩니다. 이나바뉴 바스크 290, 나이트 헬로판이 인사드립니다. " 라벨은 당황하여 그를 저지하려 했다. 라벨과 그는 어려서 부터 친분 이 있었고, 또한 라벨은 코카즈나 계급 귀족 출신 이고 쇼안은 라카이드 계급의 귀족이었기 때문에 라벨이 항상 존칭을 사용해 왔었다--쇼안이 기사로 입문하지 않았다면 쇼안이 라벨에게 존칭을 사용할 기회는 평생 한번도 없었을것이다--하지만, 전장에서 기사와 기사로 만나면 라벨은 바스크 149의 기사였다. "그러지 마세요. 나중에 서로 하야덴을 들고 전장에 있으면 모를까, 이 건 너무 어색하쟎아요. " 쇼안은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그는 라벨이 귀엽다는듯이 바라보다 가 펜플 안쪽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받아라. 이걸 전해주려고 널 찾았다. " 라벨은 휘하 기사단의 바스엘드였고, 쇼안은 중앙 기사단, 기사대장 아 켈로르가 이끌고온 기사단 휘하의 기사일 뿐이었다. 쇼안이 만나기 위해 그를 찾지 않았다면 전투가 끝이 나도록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라 벨은 물끄러미 쇼안의 손 위에 놓여진 포장된 작은 물건을 바라보았다. "... 이게 뭐죠 ? " "내 말괄량이 막내동생이 전해달라는거다. 나도 뭐가 들었는지는 아직 모르겠고. " 라벨의 표정이 순간 갑자기 환해졌다. "레젠... 아니, 참 레젠님이요 ? " 쇼안을 만나자 갑자기 카발리에로가 되기 전에 사용해왔던 평어가 튀 어나왔다. 쇼안은 그런것에는 개의치 않는듯 했다. "그래, 어서 풀어 봐. " 라벨은 조심스럽게 레젠의 선물을 받아들고 포장을 뜯어냈다. 어찌나 꼼꼼히 포장되어 있는지, 먼 길을 달려온 쇼안의 품 안에서도 조금도 흐 트러짐이 없었다. "이건... " 포장 안에 들어있던 것은 레이델{{ ) 기사들이 전장에 가지고 나가는 천으로 만들어진 손수건. 보통 케틀러스 안쪽이나 바샤켄의 안쪽, 혹은 말 안장에 집어 넣고 다닌다. 오래된 전통이라 지금은 지키지 않는 기사들이 더 많았 지만, 기사들의 악세서리 같은것중 하나였다. 원래는 전장에서, 머리등에 상처를 입으면 피가 앞 을 가리는 수가 있는데, 그럴때 흐르는 피를 닦아내는 용도로 쓰이던 것이었다. }}이었다. 쇼안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몇날 며칠을 방안에서 뭘 하던가 싶더니, 그걸 만든거로군. 케틀러스같은 화려한 것을 만들 능력이 없으니 그정도라도 만들었겠지. " 착각이었을까 ? 라벨이 그 레이델을 받아 든 순간, 라벨은 그 레이델 에 레젠의 온기가 남아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빙긋 웃었다. "... 그 보다,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몰라요. " 라벨은 몸을 돌려 북쪽을 향했다. 저 멀리, 하늘 끝 어딘가에는 오래전 에 떠나온 이나바뉴의 수도 퓨론사즈가 있었다. "레젠님은 제가, 레젠님이 준 선물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다는것을 알 고 있을거예요... 이 레이델을 만들어 준건, 절대 다치지 말라는 레젠님 뜻이겠죠. " 쇼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넌 정말 멋진 기사를 카발리에로로 갖고 있구나. 라고 자신의 막내동생에게 마음 속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라벨은 북쪽을 향해 오른팔을 굽히고, 손을 가슴 높이까지 올렸다. 멀 리 떨어져 있어 이 인사를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의 마음은 반드시 퓨 론사즈에까지 닿을것이라고 쇼안은 생각했다. 계절은 겨울로 성큼 다가선것 같았다.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라벨에게 는 조금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나바뉴 바스크 1, 이나바뉴 기사대장 아켈로르의, 자신과 수십년을 같이 싸워온 부관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라고 라벨은 생각했다. 앞으로 수십년이 흐르면, 자신과 루델의 관계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고 생 각하던 라벨은 곧 다시 네이서스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 지금, 파스크란과 함께 있는 크실의 전략가는 중군의 도착에 충분 히 대비하지는 못했을것입니다. 이 호기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 이나바뉴 바스크 182, 나이트 네이서스의 목소리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켈로르, 사야카, 퀴트린, 라벨, 하이파나, 가이사로, 로젠다로의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까지 모두 그의 뜻에 동의하는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나바뉴 기사단은 숫적으로 크실의 완전 우위에 서 있었다. 중군이 합세한 후, 처음에는 이바이크의 소식때문에 중군 전체가 침울 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수는 없었다. 모든 기사들이 모인 첫번째 회의에서 네이서스는 바로 그날 밤의 야습을 제의했다. "... 기사들이 너무 지치지 않았을까요 ? " 그래도, 라벨은 조금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새벽과 밤에 걸친 두 번의 전투, 그리고 고작 하루를 쉬어서 다시 전투를 시작한다는건 라벨 의 생각으로는 무리였다. 네이서스는 고개를 저었다. "라벨님, 어제, 크실의 야습도 우리에게는 예상 밖의 공격이었습니다. 전장에서는 언제나 상식의 예외가 존재합니다. 기사들에게 피로가 쌓여 있다는것은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이 공격이 결국 쇄기가 될 수 있다면 그편이 오히려 나은것입니다. " 자신이 살아온 생보다 절반밖에 되지 않는 나이의 어린 옐리어스 나이 트에게도, 네이서스는 언제나 깍듯한 자세로 대했다. 라벨은 생각에 잠겼 다. "그래, 라벨. 이제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해도 되는거다. 이미 우리가 기세에서부터 모든 우세를 점하고 있어. " 하이파나가 말했다. 아직 완전히 체력이 회복된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는 어느정도 체력도 보충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안정되어있었다. "... 이 전투가 결국 이번 전쟁의 절정이 되겠군요. " 절정이라는 뜻은, 다르게 생각하면 이제 내리막기를 가게 된다는 뜻도 되었다. 가이사로는 선발대만으로 로젠다로를 탈환한 퀴트린과 라벨--그 리고 이바이크에게--에게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켈로르가 입을 열었다. "결정한다. 오늘 새벽, 로젠다로 원정대는 전력을 다해 크실 진영을 공 격한다. 이번 전투로 이 전쟁의 마무리를 시작하기로 하자. " 상대는 크실 기사대장이 이끄는 크실 최정예의 기사단이었다. 이 기사 단을 패퇴시킬 수 있다면, 이 전쟁은 사실상 이나바뉴의 승리로 굳어지 게 되는것이다. 이미, 이나바뉴는 이 전쟁을 시작하며 크실이 일시 차지 했던 성들의 대부분을 탈환해 내고 있었다. 아켈로르의 말에 모든 기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켈로르에게 예를 취하고는 회의장으로 쓰였던 아켈로르의 막사를 나갔다--이제 전쟁이 끝 나간다. 모두가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로젠다로 를 탈환하며 숱한 전투를 거쳤던 퀴트린과 라벨에게는 더욱 특별한 두근 거림이었다. "저어, 아아젠. " 기사들의 저녁식사를 특별히 성대하게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래서 이번 저녁 시간은 길고, 식사는 훌륭했다. 아아젠도, 이스케도 곧 전투가 있을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투 직전의 식사는 어느때보 다 화려하다는것 정도는, 이제 그 둘도 깨달을 수 있었던것이다. 아아젠은 이스케의 말에 밝게 웃어보였다. "왜 ? " 이스케는, 이번에는 꽤 용기를 내어 아아젠에게 말을 걸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몇번이나 말을 꺼내고는 그대로 삼켜 버렸던 이스케였다. "... 왜 그랬었니 ? " "왜 그랬냐니, 뭘 ? " 아아젠은 식사를 끝낸 식기를 씻던 손을 멈추고 이스케를 바라보았다. 이스케는 아아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신이 닦고 있던 그릇만 보고 있었다. 식기는 이제 거의 다 씻어져 몇개 남지 않았다. "... 불붙은 막사로 뛰어들었었쟎아. " 지난밤 전투에서 퀴트린의 개인막사로 자신이 뛰어든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아아젠은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띄웠다. "그것말이지. " 이스케의 말대로라면, 퀴트린이 다시 그 막사로 뛰어들어 자신을 들쳐 업고 나왔다고 했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믿지 않았다--퀴 트린님이 나 따위를 위해 불속으로 뛰어드시다니--하지만, 이스케와 데 판이 정색을 하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 주위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많 은 사람들--견습기사 이하의 기사거나, 다른 기사들을 수행온 하녀, 하인 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녀 역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 라고 생각하자 이번에는 눈물이 나왔다. 그때,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었 기 때문에 그때를 기억할 수 없었다는것과, 그렇게 까지 해서도 결국 슈 렐린 차는 구하지 못했다는것 때문이었다. "... 슈렐린 차 때문이었어. " 아아젠은 누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것을--사실, 그 막사속에 하녀 한 명이 있어야 하는 이유따위에 관심 을 가질 사람은 많지 않지만--이스케 에게 처음 털어놓았다. "슈렐린 차라고 ? " 이스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아젠은 말 없이 자신 앞에 놓인 마지막 그릇을 닦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이번에는 드디어 아 아젠이 먼저 일을 끝냈다. "아아젠, 벌써 끝난거야 ? " 아아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이스케가 모든 일에 익숙했 고, 아아젠은 서툴렀기 때문에 항상 이스케가 아아젠을 도와주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드디어 이스케보다 아아젠이 먼저 일을 끝낸것이다. "야아, 이제 정말 섀럿가의 하녀가 된거로구나. 멋지다, 아아젠. " 아아젠은 이스케의 칭찬을 웃음으로 답했다. "일, 이제 끝난거지 ? 우리 잠깐 밖으로 나갈까 ? " 아아젠이 먼저 산책을 제의했다. 얼마 안 있으면 데판을 만날 시간이 었고, 이스케도 어짜피 밖으로 나가야 했다. 둘은 같이 막사 밖으로 나왔 다. 공기가 제법 차가왔다. 지난번과 같은 공격을 대비한 것인지, 아니면 중군과 합세했기때문에 규모자체가 커진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보급대를 수비하는 기사들은, 어제 밤까지에 비해서 훨씬 많았다. 아아젠 이 먼저 말했다. "이상하니 ? 슈렐린 차를 지키려 했다는것이. " "응, 약간. " 아아젠은 고개를 숙였다. 이스케는 그녀와 퀴트린이 로냐프 강이 있는 루우젤까지 같이 여행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 그리고, 슈렐린 차에 얽힌 그녀의 추억과 사연도. 아아젠이 대답하지 않자, 이번에는 이스케가 갑자기 명랑해졌다. "알았어, 아아젠. 더이상 묻지 않을께. 그럼, 그것 대신, " 이스케가 아아젠의 손을 잡았다. "노래 불러줘. " "... 노래 ? " 이스케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아아젠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스케에 게 노래를 불러주는것은 아아젠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어떤 노래가 듣고 싶어 ? " 그들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일이 끝난 밤에 함 께 가벼운 산책을 하는것이 아아젠과 이스케의 그동안의 낙이었다. 이스 케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았다. "... 지난번 그 노래. " "... 지난번 ? " 아아젠이 묻자 이스케도 아아젠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왜, 있쟎아. 제목은 네가 말해주지 않았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기억 안나 ? 지난번에 내가 듣고 울었쟎아. " 울었다는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스케를 보며 아아젠은 쿡 웃었 다. 이제야 어떤 노래를 말하는건지 그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이번엔 울어도 난 몰라. " "안울어, 안울어. " 이스케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자, 아아젠은 그녀를 보며 가볍게 한번 웃어보이고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림으로 그릴 수 없을거예요 나의 사랑은 붓을 들면 화폭엔 눈물만 쏟아질 테니까요 햇살처럼 항상 거기에 있다는것만 기억하세요 당신이 느끼지 못하기를 바래요 나의 사랑은 어느새 루운은 저물고 하늘엔 보석이 박히네요 이 밤이 지나면 난 떠나지만 당신은 여기에 머물러 계세요 어쩌면 내일은 새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쟎아요 나의 사랑대신 짧은 인사말만 놓고 갈께요 그대여 그럼 안녕... 영원히. "... 노래라고 하기엔 너무 짧지 ? " 아아젠이 약간 머쓱해져서 말했다. 이스케는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의 여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이스케는 역시 천천 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그런데, 그 노래 제목이 뭐야 ? " "나도 몰라. 어디선가 들었는데... 곧 잊어 버렸어. " "그래... 제목을 알면 참 좋을텐데. " 이스케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하늘에는 별들이 많이 박혀 있었다. 별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스케가 말했다. "아아젠, 그럼 그 노래 제목 내가 붙여도 돼 ? " "제목을 ? " 이스케가 손뼉을 쳤다. 재미있는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어짜피 우리끼리 아는 노래니까, 우리끼리 부르면 되는거 쟎아. 많이 알아봤자 데판까지. 우리끼리 부르고 들을 노래의 제목을 우 리가 붙이는거야. 어때 ? " 이 노래에 제목을 붙여주겠다는건 고맙지만... 이 노래는... 아아젠은 또 다시 눈물이 나오려 하는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밝은 표 정이 되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네가 붙여봐, 이스케. 틀림없이 좋은 제목을 생각 해 낼 수 있을거야. " "응응. 그래. " 이스케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아젠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다시 퀴트린을 떠올렸다. 그래... 이젠 죽어도 좋아. 그분이 나를 구해주 셨는걸. 이대로 죽어도, 난 영원히 행복할거야--진심이었다. 하지만 아아 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가슴 한 구석은 계속 아려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 죽어도 좋을것 같은데... 내가 평생 누릴 수 있는 행 복을 한 순간에 모아 모두 누려본 기분인데. "그래, 이건 어때 ? " 아아젠의 생각은 이스케의 말로 끝이났다. 그녀는 아아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약간 짧은 느낌이 들쟎아... 그래서, '슬픔의 소곡' 어때 ? " "슬픔의 소곡... " 좋은 제목이었다. 그것으로 하기로 하자--항상 고마워, 이스케--아아젠 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젠 그분을 위해 악기를 연주할 수도, 노래 를 부를 수는 없지만, 이제는 그분을 위해 정성을 다해 차를 탈수도 없 지만. 그렇게 슬프지만. 그분을 혼자서 사랑할 수는... 있기에. 이나바뉴 기사단 로젠다로 원정대의 총공세는 그날 새벽에 시작되었 다. 이나바뉴 기사단은 전위를 둘로 나눠, 그중 하나를 파아렐 나이트-- 이나바뉴 총사대--사야카가, 나머지 하나를 퀴트린과 라벨이 맡았다. 네 이서스는 비교적 많은 피로가 쌓인--사실, 피로가 쌓인것은 먼길을 달려 온 중군도 마찬가지였다--퀴트린의 기사단을 중앙으로 빼내어 조금이라 도 더 쉬게 하려 했지만, 퀴트린은 자신이 꼭 나서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퀴트린의 심중에는 아직 끝을 보지 못한 파스크란과의 승부가 있었 으리라. 퀴트린이 강력하게 전위를 주장하자, 네이서스도 그를 끝까지 끈 질기게 말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퀴트린과 사야카가 이나바뉴 최고의 기 사들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중앙은 아켈로르와 하이파나, 옐리어스 나이 트 가이사로가 맡았다. 라즈파샤는 로젠다로의 기사들을 지휘하며 후방 을 맡았다. "... 다친곳은 괜찮아요 ? " 라벨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괜찮아. 왕영 의술사에게 보였지만 전투에 큰 지장은 없을거라고 했 어. 그리고, " 퀴트린은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 크실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 상처를 입은건 나 뿐만이 아냐. " 이나바뉴 제1검사의 호승심이란. 라벨은 씩 웃었다. 바스엘드가 쓰러지 면 기사단은 괴멸되지만, 기사대장 아켈로르가 기사단 전체를 지휘하게 된 지금, 퀴트린은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물 론 렉카아드도. 새벽녘, 동이 트기 직전의 어둠이 포프슨 평원을 덮고 있었다. 라벨은 그날 따라 유난히 많이 끼는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라벨의 생각을 퀴트린이 읽었는지,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라벨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라벨. 지금은 야습을 감행하기엔 가장 좋은 상태야. " 지금 이나바뉴 기사단은 조심스럽게 한발자국 한발자국 크실 진영에 다가가고 있었다. 크실 진영에서는 아직 큰 동요는 보이지 않고 있는것 이, 야습은 성공할것처럼 보였다. 왼쪽을 보니, 사야카가 지휘하는 기사 단도 발소리를 죽이고 전진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퀴트린이 돌격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휙휙 하 는 몇줄기 파공음과 함께 크실 진영에서 벨폰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차, 발각되었나. ' 보초를 서던 크실의 기사들에게 전진이 발각된 모양이었다. 퀴트린이 나 사야카도, 워낙 큰 숫자의 기사단이라 본래 처음부터 완전한 위장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돌격 ! " 하늘을 향했던 퀴트린이 하야덴이 앞으로 숙여지며 전방을 향하자, 퀴 트린이 이끌고 있던 이나바뉴 기사단은 물밀듯이 크실 진영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사야카의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발각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급했고,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크실 기사단을 공격했다. 크 실 기사단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 ! " 퀴트린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것은 바로 그때였다. 퀴트린은 급 히 하야덴을 하늘로 세웠다. "정지 ! 전진을 멈춰라 ! " 퀴트린의 명령에 이나바뉴 기사단은 돌격을 그만두고 방어태세를 취했 다. 앞서 나간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사는 비었습니다 ! 아무도 없습니다 ! " 퀴트린과 라벨이 마주보았다. 라벨의 얼굴에 순간 공포가 스쳐갔다. "반전 ! 퇴각한다 ! " 퀴트린이 기사단에게 퇴각명령을 하달했지만, 이미 이나바뉴 기사단은 크실 진영 아주 깊은 곳까지 와 있었다. 벨폰 공격을 받고 다급하여 최 대한 빠른 속도로 진입한것 때문이 었다. 퀴트린의 목소리와 함께 사방에 서 함성 소리가 들리며 벨폰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나바뉴 기사단은 그 짧은 시간안에 포위를 당하고 만 것이다. 라벨이 외쳤다. "포위당한것 같아요 ! " 사방에서 함성소리가 가까와지며 안개속에 숨어있던 크실 기사단이 포 위망을 좁혀왔다. "당황하지 마라, 라벨. 포위당했다 하더라도 숫적으로는 우리가 압도적 으로 유리하다 ! " 퀴트린이 뒤를 돌아보니 아켈로르가 이끄는 중앙과는 단절된 모양이었 다. 퇴로를 뚫어야 했다. "라벨, 침착하게 퇴로를 찾자 ! 결코 많은 인원의 기사단을 희생시켜서 는 안된다 ! " "예 ! " 라벨은 페가드를 가슴앞에 세워 벨폰을 방어하고, 베락스를 든 채 최 전방으로 말을 달려 나갔다. 이렇게 완벽한 포위를 당한것은 라벨로서는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라벨도 이나바뉴 최강의 옐리어스 나이트중 한사 람이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24, 파아렐 나이트 사야카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포위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숫적으로 완전한 우세에 있는 이나바 뉴 기사단이 패배하지는 않을것이다. 얼마나 적은 희생을 치루고 포위망 을 뚫을 수 있느냐가 그에게 관건이었다. 바스엘드를 쳐야한다. 사야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격은 퀴트린과 라벨이 받고 있는 쪽이 더 두터웠으나, 오히려 밀리 는것은 사야카가 있는 쪽이 더 밀리고있었다. 바스엘드가 있는것이 확실 했다. 사야카는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쪽에서는 붉은기가 감도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기사들을 독전하고 있었다. 사야카는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하야덴을 들었다. 살기를 느꼈는지, 크실의 기사도 리첼반을 멈추고 사야카를 바라보았다. "이나바뉴 바스크 24, 파아렐 나이트 사야카다. " "파아렐 나이트라고... 이나바뉴 총사대란 말이냐 ? " 사야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예를 누구보다도 소중히 생각하는 그였 고, 파아렐 나이트였기 때문에 상대의 이름을 듣고도 자신의 이름을 밝 히지 않는 기사에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 눈치를 챘는지, 그 도 리첼반을 가슴에 세우며 입을 열었다. "크실 바스크 60, 나이트 다피안트다. 이나바뉴 총사대의 실력을 한번 보겠다. " 말이 끝나자마자 다피안트는 바닥에 리첼반을 던지고, 하야덴을 꺼내 들었다. 곧 다피안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야카는 하야덴을 사용함에 있어 퀴트린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는 특별히 괴력을 가지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을정도의 빠르기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리고서도 기사대장 아켈로르, 옐리어스 기사단장 슈펜다르켄에 이은 이나바뉴 최고의 기사라는 호칭을 얻은 이유는 퀴트린과 비슷한 화 려한 하야덴을 쓰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선 다피안트의 공격을 직접 맞받아 내었다. 그의 실력을 가늠 하기 위해서였다. '...... 이 기사 역시 굉장한 기사로군. ' 일격을 받아낸 사야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격을 받아내자마자 사야 카는 하야덴을 눕혀 곧게 다피안트의 가슴을 노렸다. 사야카의 하야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져 들어왔다. 다피안트는 몸을 흔들어 공격을 피해내려했다. 하지만 사야카의 하야덴은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다시 왼 쪽을 노리고 들어왔다. 다피안트가 몸을 피하려 했던 자리였다. 깜짝 놀 란 다피안트는 세워 두었던 하야덴을 움직여 하야덴의 등 쪽으로 사야카 의 공격을 막아냈다. 사야카는 공격이 상대의 하야덴에 가로막히자 한발 자국 뒤로 물러섰다. 한발 멀러선 사야카는 잠시 눈을 돌려 전장을 훑었다. 전세는 불리했 다. 포위망은 조금씩 좁혀져 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가 승부를 빨리 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일갈 소리와 함께 다피안트의 공격 이 다시 펼쳐졌다. 다피안트의 하야덴은 빙글 돌아 사야카의 어깨를 노렸다. 아니, 어깨라 기 보다는 페가드를 노린듯 했다. 사야카는 망설임 없이 페가드를 그의 하야덴쪽으로 던졌다. 그는 바샤켄에 페가드를 고정 시키지 않고, 손에 든 채 싸우고 있었다. 상대가 쉽게 페가드를 포기하자 다피안트는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 순간 하야덴을 직선으로 뻗어 사야카의 목을 노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야카는 그 하야덴을 향해 왼손을 뻗어 왔다. "...... ! " 순식간에 다피안트의 하야덴은 사야카의 왼팔에 적중했다. 하지만 그 새 사야카는 다피안트의 가슴쪽으로 뛰어들며 왼팔을 굽혀 부드럽게 다 피안트의 하야덴을 끌어들였다. 다피안트가 적중 시킨것은 그의 팔이 아 니라 바샤켄의 윗부분이 되었다. 금색 장식이 붙어있는 사야카의 바샤켄 이 둘로 나뉘어져 공중에 떠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피안트는 복 부에 부드럽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충격을 느꼈다. 사야카의 하야덴은 그의 가슴 아래를 파고든 것이다. 다피안트는 울컥 하고는 피를 입에서 머금어 냈다. ... 이길 수 없었다. 그 역시 파스크란님과 견줄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 었다니... 이 전쟁에서 크실이 승리하기에는 이나바뉴의 기사들 중에는 너무나 강한 기사들이 많구나. 다피안트는 고개를 돌려 사야카를 쳐다보 았다. 다피안트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 기사단이 후퇴할만한 여유는 생겼다. 내 임무는 이것으로 끝난것이 다... 다피안트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가장 침울한 표정을 지은것은 다름아닌 나이트 네이서스였다. 비록 성 공하기는 했지만, 그가 제안한 야습이 상대에서 간파되었다는것은 그로 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것이 당연했을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이나바뉴 기사단은 수천기의 기사를 잃었고, 또한 그와 비슷한 숫자의 크실 기사 들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적을 격멸시키기는 커녕, 대부분의 병력은 유유 히 크실 국경쪽으로 후퇴해갔다. 결국, 파스크란을 비롯한 크실의 최정예 기사단의 셋중 둘 이상이 살아서 다시 크실로 돌아간것이다. 기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 그럴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전투에서 승리했고, 로젠다로 원정 대는 임무을 완수했으니 오히려 칭찬을 해 주어야겠지. " 그것이 꼭 네이서스의 잘못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날아온 벨폰까지 모두 상대의 전략가--그는 크실 바스크 66, 나이트 아사란이었 다--의 계산이었다면, 급히 크실 진영으로 뛰어든 퀴트린과 라벨, 사야카 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네이서스는 예를 갖춰 아켈로르에게 감사를 표했 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아켈로르가 입을 열었다. "이틀 후, 우리는 퓨론사즈로 개선한다. 그동안 정말 수고가 많았다. 직접 출정한건 오랫만이었는데, 실제로 치룬 전투는 두어번밖에는 되지 않는것이 아쉽군. 아마도 원정대의 선발대에 너무 빠르고 강한 기사들을 배치한것이 실수였었던것 같다. " 모두들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켈로르는 후퇴해가는 크실 기사단을 다시 쫓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 크실 국경을 향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아마도 후퇴를 결심한것 같았다. 이제, 하라데스쪽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관건이었지만, 우선 로젠다로는 완전하게 탈환한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었다. "... 라즈파샤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 갸름한 얼굴의 에우로페 나이트 라즈파샤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 다. "말씀 낮추십시오--기사대장님께서. 저는, 우선 이나바뉴 기사단과 같 이 복귀하여, 국왕님을 만나뵌 뒤 다른 에우로페 나이트들과 합류해서 로젠다로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 아켈로르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좋을대로 하십시오. 같이 개선하게 된다니 기쁘군요. " 그는 말을 마친 뒤 퀴트린과, 바로 그 옆에 서 있는 라벨쪽으로 고개 를 돌렸다. "나이트 레이피엘, 정말 훌륭했다. 퓨론사즈로 가게되면 제전위--지금 퀴트린이 가지고 있는 형전위의 작위보다 하나 위의것--를 받게될것이 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 퀴트린은 오른손을 올려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 "... 라벨, 너도 어린 나이에 많은 성장을 한것 같아 대견스럽구나. 슈 펜다르켄 그 늙은 영감이 기사 고르는 눈 하나는 확실히 좋은 모양이다. " 라벨을 중앙기사단에서 발탁하여 옐리어스 나이트로 키운것은 바로 옐 리어스 기사단장 나이트 슈펜다르켄이었다. 라벨은 고개를 숙였다. "많은 격려와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 아켈로르는 웃는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들 수고했다. 아침나절과 오후에는 기사단을 다시 정비해 떠날 채비를 갖추고, 저녁때는 축배를 들기로 하자. 선발대의 보급대는 모두 타 버렸지만, " 라벨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켈로르의 말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원정대에게는 창피한것이 사실이었다. 아켈로르는 말을 계속했다. "... 중군에서 가져온 물품은 아직 뜯지도 않은 상태이니, 모든 기사들 에게 축하주와 음식을 내리도록 하겠다. 저녁, 최소 인원을 남겨 경계시 키고 모든 기사들에게 술을 하사하도록 한다. " 이제 정말 전쟁이 끝나가나 보구나... 라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락하고 포근한 느낌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허무한 느낌도 들었다. 그것 은, 퀴트린의 경우는 더욱 더했다... 무엇인가가 가슴 깊은 곳에 짙은 앙 금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퀴트린은 잘 알고 있었다. 크실 기사대장 파스크란과의 렉카아드. 결국 퀴트린은 끝까지 그와 승 부를 가르지는 못했다. "모두들 수고했다. " 퀴트린이, 자신의 개인 기사단과 자신을 수행온 섀럿가의 모든 사람들 을 소집해 놓고 한 첫마디 말은 우선 감사의 말이었다. 휘하 기사단에게 긴 말을 하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것을 퀴트린의 개인 기사단에 소속 된 기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퀴트린의 말은 길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것은 몇달 전, 퓨론사즈에서 출정할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 퓨론사즈로 복귀한다. 오늘 저녁 축하주 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 바로 그 다음날 다시 원정때 온 먼 길을 다시 돌아가게 되니, 지나치게 긴장이 풀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 기사단 전체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기쁨은 여러가지였다. 전쟁에서 이겼다는것과, 크실군을 완전히 패퇴시켰다는것이 가장 컸지만, 퓨론사즈로 돌아간다는것과 오늘 저녁에 있을 축하연회도 그들의 기쁨중 하나였다. 또, 어디에선가 들린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바스엘드 가 제전위의 작위를 받을것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기쁨이었다. 새로운 작위나, 피엔젤 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법도 한데, 그대로 퀴트린이 이야기를 끝낼 눈치를 보이자 앞에 서 있던 기사중 한명이 앞 으로 나섰다. "바스엘드님, 기분이 어떠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 앞으로 나선 기사는 바델록이었다. 지난번 포프슨 평야 전투에서 패퇴 했을때 왼손을 잃은 기사였다. 하지만 그는 바샤켄에 페가드를 부착한 후, 계속해서 전투를 치뤄왔다. 실력이야 어쨌든, 의지와 투지만큼은 대 단한, 아직 바스크를 받지 못한 기사였다. 퀴트린은 싱긋 웃었다. "글쎄, 아직 승전했다는 실감이 확실히 나지는 않는다. 바라는게 있다 면 막사에서 편히 앉아 슈렐린 차를 한잔 하고 싶은데, 너희들이 모두 태워버린 덕분에 그 희망은 갖지 않는것이 좋겠다. " 퀴트린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기사단을 책망 하는 투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개인 기사단은 이번 원정을 통해 항상 기사단의 최선봉에 서서 상대를 맞아 싸워왔고, 또한 그만큼 의 기냥이 늘어났다. 퀴트린은 오히려 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듯 했 다. 모두가 웃는 가운데, 한명만이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 우울한 표정을 보고 있던 옆 사람이 그의 팔을 툭 하고 쳤다. "기분좀 풀어봐 아아젠, 또 왜그러는 거야 ? " 아아젠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슈렐린 차는 드릴 수가 없쟎아. " 이스케는 아아젠의 손을 잡았다. "그것때문이었어 ? 퀴트린님께서 하신 말씀은 농담이 섞인 말이야. 꼭 슈렐린 차를 마시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을거라고. " 아아젠은 억지로 응응 하며 이스케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그것 뿐 만이 아니야. 너무 큰 욕심같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그분께 꼭 슈렐린 차를 드리고 싶었어. 꼭--아아젠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연회가 무르익어감에따라 기사들을 수행온 하녀들과 하인들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준비해야 하는 음식의 양도 그렇고, 지나가면서 하는 인 삿말도 답해주기가 급할정도였다. 아아젠과 이스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서도, 이스케는 조리기 하나를 분리해 내, 그 안에서 무엇인 가를 만들고 있었다. 레토라르인듯 했다. 아아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 로, 지나가며 이스케에게 말을 건넸다. "... 데판에게 가져다 줄거니 ? " "응 ? 아, 으응. " 이스케는 조금 당황한듯한 목소리였다. 내게도 숨기려 하다니. 데판은 유난히 이스케가 만든 레토라르를 좋아했다. 음식을 가져다 주는것은 모 두 하녀들의 몫이니, 데판에게 이 음식을 가져다 주는 일 또한 쉬운일이 었다. 평소에는 먹이기 힘든 음식을 이런 복잡한 틈을 타 연인에게 가져 다 주려는 이스케의 마음을 읽고는 아아젠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아젠, " "응 ? " 아아젠은 막 비워져서 들어온 식기를 닦기 시작했다. 사실, 사담을 할 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지금은 바쁜 시간이었다. 이스케 역시 조리그릇을 이것저것 열어보며 불을 조정하고 있었다. "줄것이 있어. " 아아젠이 고개를 돌려 이스케를 바라보았다. "뭔데 ? " 이스케도 고개를 돌려 아아젠을 마주보더니,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종이에 꼼꼼히 싸여져 있었다. 아아젠은 그것을 펴 보았다. "... 이건... 슈렐린 찻잎 ? " 안에 들어있는것은 검게 그을리기는 했지만 분명히 슈렐린 찻잎이었 다. 겨우 한잔이 나올 정도의 적은 분량이었지만. "이걸, 어디에서 구한거야 ? " 이스케는 갑자기 아아젠의 얼굴빛이 환하게 변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사실, 네가 슈렐린 차를 꺼내려 간다는것을 대강은 짐작했었어. 그 다 음날--그러니까, 어제--그 막사를 철거하면서, 잿더미 속에 있었던걸 데 판이 슬쩍해다가 준거야. 네가 목숨까지 기꺼이 버려가면서 지키려던 찻 잎이 이렇게 형편 없어졌다는걸 알면 네가 많이 실망할까봐 건네줄까 말 까 했는데, 역시 지금 네 표정을 보니 건네주는 편이 훨씬 나았구나. " 분명, 높은 열이 가해져 변색까지 되어있는 잎이었지만, 이것으로도 아 아젠은 감지덕지였다. 맛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그분에게 가장 기쁜 날,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차를 드릴 수 있다는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고마워, 이스케 ! " "그 말은 데판에게나 하렴. " 아아젠이 아주 밝게 웃었다. 이스케는 그 얼굴을 보며 그녀가 저렇게 밝게 웃은게 언제였지... 라고 생각했다. 그랬다--그것은 꽤나 오래전 일 이었다. '그래.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어. 하지만 아아젠, 너무 많은것을 기 대하지는 마. 그분은, 우리들의 주인님은, 우리들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않는다는걸, 너도 알고 있지 않니 ? ' 이스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아젠은 기쁜 마음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밤이 꽤 깊어지고 있었다. 모든 기사들이 승전에 환희에 젖어 웃고 떠들며 마시고 있을때, 바스 엘드들이 모인 아켈로르의 막사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라벨은 나이가 어려 술을 많이 마시지 못했을 뿐, 모두들 오늘만 큼은 충분히 마시고 즐기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가이사로가, 옐리어스 나이트들의 이야기를 즐겁게 풀어나가던 중이었 다. 퀴트린은 아주 짧은 순간 날카로운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 ? 기분 탓인가. ' 아직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마신 술 이라 기사로서의 느낌은 충분히 둔해져 있었다. 퀴트린은 고개를 흔들었 다. 자신의 옆에는 언제나 처럼 라벨이 앉아 있었다. "라벨, 누가 제일 보고 싶니 ? " 퀴트린의 질문에 라벨은 붉어진 얼굴로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물론 레젠... 아, 아니, 국왕님을 뵙고싶죠. 당연히. " 라벨의 대답에 모두가 웃었다. 예를 갖추자면 국왕에 대한 충성을 먼 저 나타내는것이 옳은 일이겠지만, 술도 들어간데다 아직 나이가 어린 라벨은 무심결에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가이사로가 얼굴을 조 금 찌푸렸다. "라벨, 방금 네가 한 말, 복귀하자마자 슈펜다르켄님께 보고하겠어. " 가이사로의 농담에 모두가 웃었다. 이번에는 하이파나가 말했다. "... 사야카가 늦는군. 잠시 막사에 갔다 온다더니. " "파아렐 나이트 아닙니까. 퓨론사즈까지는 꽤 먼 길이라고요. " 가이사로는 본래 농담을 잘했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는 옐리어스 나이 트에 어울리지 않을 인물일지도 몰랐다.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때 였다. 막사 장막이 걷히고, 누군가가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사야카님 ! "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온 사람은 파아렐 나이트 사야카였다. 그는 가슴 과 왼팔, 다리에 제법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 었던 의식복은 바닥에서 굴렀는지 흙과 피로 젖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 " 하이파나가 깜짝놀라 외쳤다. 사야카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 이며 앉았다. 아켈로르에게 일을 보고하는 자세였다. "침입자입니다 ! 그것도 굉장한 실력을 가진... 순식간에 당해버렸습니 다. " "침입자라고... " 아까 느낀 살기는 바로 이것이었나. 퀴트린은 사야카를 응시했다. "하지만 제가 상처를 입은만큼, 상대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멀리 가지 못했을것입니다. " 아켈로르가 물었다. 그는 결코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 그의 생김새는 어떻지 ? " "칠흙같이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복장이나 실력으로 보아... " 순식간에 막사 안에는 죽은듯한 침묵이 흘렀다. "바로 그, '검은 갑옷의 기사'가 아닌가 합니다. " 결국 왔군. 나와의 승부를 내기 위해서 였을것이다--그렇게 생각하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퀴트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이트 레이피엘 ? " "파스크란이 확실합니다. 저와 내지못한 렉카아드의 승부를 결정하려 고 찾아왔을겁니다. " "그렇다면... " 네이서스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다. 퀴트린은 그의 말을 잘랐다. "제가 있는 막사를 찾을겁니다. 그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있을겁니다. " "하지만, 레이피엘. 그는 큰 상처를... " 사야카가 무엇인가 말하기도 전에 퀴트린은 아켈로르에게 예를 취하고 막사를 빠져 나왔다. 그의 뒤를 따라 다른 기사들도 일어섰다. 파스크란... 자신의 기사단을 안전히 후퇴시킨 후, 단신으로 잡입해왔단 말이냐. 이렇게 무모하게... 퀴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젠은 단 한잔밖에 없는 슈렐린 차를 들고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 다. 막사에 퀴트린이 없을지도 몰랐다--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만약 퀴 트린이 막사에 없다면, 그녀는 슈렐린 차를 막사 안에만 놓고 나올 생각 이었다. 조금 후에 퀴트린이 돌아오면 이미 식어버린 슈렐린 차는 마시 지 못하지만, 방안 가득 채워진 차의 향기는 느낄 수 있을것이라고 그녀 는 생각했다. 막사 바로 앞에까지 가서, 그녀는 막사 뒤에 그림자가 앞으로 고꾸라 진 자세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견한 순간에는 깜짝 놀랐지만 그녀는 다음순간 술에 너무 취한 견습기사 정도가 되겠거니... 하고 생각 했다. "기사님 ? " 아아젠은 그의 옆으로 가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은 퀴트린의 막 사이니, 멀리 떨어지라고 할 참이었다. 그 가까이에 다가간 그녀는 소스 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발 밑이 그가 흘린 피로 흥건했기 때문이 다. "다, 다치셨어요 ? 어디 보여보세요. " 그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밤인데다가, 그가 새카만 색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혀 그의 상처를 볼 수가 없었 다. 검은색의 갑온은 그녀는 본적이 없었다... 견습기사가 맞는 모양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거, 걱정하지 마세요. 전 부상자 막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제가 상처 를 봐 드릴께요--우선 밝은 곳으로 가요. 상처를 보아야 하니까요. 그 후 에, 제가 의술사님들을 불러올께요. " 아아젠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몸은 생각보다 상당히 무거웠다. 아아젠은 잠시 생각한 다음 일단 그를 불빛이 있는 막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로 했다. 예상대로, 퀴트린의 막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본래 막사 앞에 경계 병을 배치하는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사에는 경계병도 없었다. 그녀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누군가가 있다면 의술사님을 불러달라고 도 움을 요청할텐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하기 보다는 우선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슈렐린 찻잔을 책상위에 놓은 다음, 그 를 바닥에 눕힌 후, 능숙한 솜씨로 갑옷을 해체했다. 벌써 한참동안이나 부상자 막사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그정도 일은 그녀에게는 익숙한 일이 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왼쪽 옆구리가 하야덴 처럼 날카로운 것에 찔린듯 깊게 상처가 나 있었다. 이런 상처는 우선 더이상 피를 쏟지 않 게 하는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본래, 음유시인 이었을때부터 알고 있던 지식과, 부상자 막사에서 익힌 것 때문에 그녀 는 의술은 아주 약간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길이가 긴 치마의 아랫부분을 뜯어냈다. 그녀가 입은 치마는 슈샤헨등이 달려있 지 않았기 때문에 지혈을 하기 위한 천으로는 비교적 적당한 편이었다. 우선 그녀는 천을 상처 부위에 감은 후 힘있게 눌렀다. '지혈초가 있던가 ? 아아젠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들을 뒤져내었다. 다행히도, 어 느 주머니 바닥에서 전에 쓰던 지혈초 몇조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즉시 그것을 입에 넣어 씹었다. 약초에 자극을 줘, 효능을 조금 높이는 방법이었다. 잠시 지혈초를 씹어낸 아아젠은, 그것을 뱉아 내 상처 부위 에 대고 천을 둘렀다. 간신히 피가 멎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나 마 의식은 있었고, 단지 피를 너무 흘려 체력이 떨어진것 뿐인듯 했다. 잠시 그녀가 그를 지켜보자,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아젠이 입을 열 었다. "... 정신이 들어요 ? " 그는 잠시 투구속에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계속 말 을 이었다. "잠깐 기다려요. 다행히 피는 멎었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거예요. 제가 의술사님을 모셔올께요. " "아니, " 그는 손을들어 아아젠을 저지했다. "그럴필요 없다. 이대로 잠시 있으면 체력이 회복될거야. " "하지만, " 아아젠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그는 손짓을 해 그녀에게 조용히 하 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녀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멀리에서 이리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왼손에 가지고 있던 하야덴을 오른손으로 바꿔 쥐었다. 짧은 시간이 흐르자, 그 발소리 는 한명이 아니라 네명의 것이라는것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곧 발소리는 점점 커져, 이제는 아아젠에게도 들리게 되었다. 아아젠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그 기사는 여전히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 했다. 그때, 막사의 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장막이 휙 소리가 나며 걷히고, 네 명의 기사가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기사대장 아켈로르, 퀴트린, 사 야카, 그리고 라벨이었다. 퀴트린은 멈칫했다. 사야카가 큰소리로 외쳤다. "파스크란 ! " "어떻게 된거지 ? " 라벨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누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 준건가 ? 라벨의 눈은 아아젠을 향했다. 아아젠은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상, 상처를 입고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 치료를... " 아직 그녀는 자신이 치료해준 사람이 적의 바스엘드라는 사실도, 적을 유리하게 하는 행동은 그 자리에서 즉시 사형에 처해진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사야카가 하야덴을 꺼내들었다. "겁도 없이 이곳까지 뛰어들었단 말이냐. " "흥분하지 마라, 사야카. 적이기는 하지만, 그는 크실의 기사대장이다. " 크실의 기사대장이라고 ! 아아젠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자신이 치료 해준 사람이 이나바뉴의 숱한 기사들의 생명을 앗아간 적국의 기사대장 이라는 말인가. 파스크란이 입을 열었다. "... 난 단지 나이트 레이피엘과 승부를 가리기 위해 왔을 뿐이다. 나이 트 사야카라고 했나 ? 그대를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대가 공 격을 해 와 상대했을 뿐이다. " 막사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퀴트린이 고개를 돌려 아켈로르를 마주 보았다. 그와 눈을 잠시 마주친 아켈로르는 고개 를 끄덕였다. "나이트 파스크란, 나는 이나바뉴 바스크 1, 이나바뉴 기사대장 나이트 아켈로르이다. 네가 렉카아드를 위 해 왔다면 허락하겠다. 렉카아드가 진 행되는 동안 다른 이나바뉴의 기사들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것을 약속한다. " "아켈로르님, 하지만, " 사야카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하자, 아켈로르는 손짓을 하여 사야카 를 막았다. 이번에는 퀴트린이 입을 열었다. "... 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넌 상처를 입었다.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다 르다. 그래도 렉카아드를 하겠다는건가 ? " 파스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는 지혈을 받았으니, 아주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회복할 수 있다. 충분히... " 다시 사야카가 말했다. 그는 조금도 분이 풀리지 않은듯한 모습이었다. "좋다. 그럼 그동안 크실의 기사를 치료한 정신나간 하녀부터 베면 되 겠군. "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아아젠을 향했다. 아아젠은 너무나 놀라 비명도 질러지지 않았다. 퀴트린과 라벨은 다음순간 동시에 아켈로르를 바라보 았다. 짧은 순간 아켈로르와 퀴트린의 눈이 마주쳤다. 아켈로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적을 이롭게 하는일은 발견되는 즉시 사형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 다. 나이트 레이피엘. " 라벨은 고개를 돌려 다시 파스크란을 응시했다. 어리고, 정이 많은 라 벨이기는 했지만 하녀의 목숨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상황이 편하지는 않 았기 때문이다. 퀴트린은 아아젠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아켈로를를 향했다. 그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 꼭 지금 쳐야 합니까 ? 제가 데리고 온 하녀입니다. " 아켈로르는 잠시 퀴트린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 즉결이다. " 아켈로르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사야카가 앞으로 나섰다. "싫다면 내가 쳐 주겠다, 나이트 레이피엘. " "아니, " 아켈로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직접해라, 나이트 레이피엘. 네 하녀다. " "예. " 퀴트린은 짧게 대답하고는 하야덴을 뽑아 들었다. 아아젠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지켜 보았다... 죽는것은 두렵지 않아. 지금 죽는 다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을 수 있는걸거야. 더군다나, 퀴트린님의 손 에 죽게 된다면... 아아젠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다면, 그분에게 내 노래를 들려드리고 죽고 싶은데. 언젠가 그분을 모시고 로냐프강까지 여행하던 날 밤에 불 렀던것 처럼, 그분께 내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까--왜 바보같이 눈물이 나오는거지. 가장 행복해야 하는 순간, 그분의 은빛 하 야덴에 내 삶을 끝내는 순간에, 왜 바보같이 눈물이 나오는거지. <그림으로 그릴 수 없을거예요 나의 사랑은> "... 일어서라. " 퀴트린이 짧게 말했다. 아아젠은 고개를 들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로 퀴트린을 바라보았다. 사야카가 날카롭게 외쳤다. "일어선 채 베겠다는건가, 레이피엘. 일어선 자세로 목을 베일 수 있는 건 귀족이나 기사들 뿐이라는걸 잊었나 ? 더군다다 그 하녀는... " <붓을 들면 화폭엔 눈물만 쏟아질 테니까요> 퀴트린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일어나라. " 아아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똑바로 퀴트린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낯설었나... 항상 훔쳐만 보던 그분의 얼굴을 처음 정면으로 보 아서 그런가. 레쥰드 조각처럼 깨끗한 얼굴이 지금은 무척 낯설어보여. <햇살처럼 항상 거기에 있다는것만 기억하세요> 그녀가 일어선것을 확인하자 퀴트린은 하야덴을 어깨 위로 치켜 들었 다. 눈을 감을까. 눈을 감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까... 아니야. 그럴 수 없 어. 조금이라도 더, 조금만이라도 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고 죽을꺼야. 마지막 순간, 내 눈에 비친 모습이 그분의 모습이도록. 그분의 모습만은 죽어서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당신이 느끼지 못하기를 바래요 나의 사랑은>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퀴트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도 역시 아아젠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아젠 큐트, " <어느새 루운은 저물고 하늘엔 보석이 박히네요> 아아젠... 아아젠 큐트. 저것이 내 이름이었던가 ? 그분의 입에서 나온 것이 내 이름이었던가 ? 그분이... 그분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셨다는 말 인가 ? 아아젠은 미소를 지었다. 온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가득 퍼 지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 다. <이 밤이 지나면 난 떠나지만 당신은 여기에 머물러 계세요> 퀴트린의 하야덴이 더욱 높게 치켜 올라갔다가, 자신의 목을 향해 다 가왔다. 느낄 수도 없을만큼 짧은 시간이었을텐데, 아아젠은 그 순간이 무척 길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마 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한 감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분의 손에 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가 감사합니다... 아아 젠은 눈물이 흐르는 눈을 결코 퀴트린의 얼굴에서 떼지 않았고, 하야덴 은 그녀의 목으로 다가왔다. 팍.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 이 지났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걸까. 이미, 죽 은걸까 ? 눈 앞에서 퀴트린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 간, 그녀는 방금 그녀의 목을 향했던 하야덴은 그녀의 바로 앞 바닥에 곧게 꽂혀 있고, 퀴트린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 당신의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습니다. " 카발리에로... 어디에선가 들어본, 친숙한 단어였다. 카발리에로라고... 마, 맙소사. 카, 카발리에로라고 ? 다음 순간, 아아젠은 너무나 깜짝 놀라 두어걸음 뒷걸음질을 치며 비 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사야카가 외쳤다. "제, 제정신이냐, 나이트 레이피엘 ? " 라벨조차도 퀴트린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 레이피엘님, 농담을 하시는거죠 ? " 오직 한명, 나이트 아켈로르만이 묵묵히, 자신의 하녀 앞에 고개를 숙 이고 무릎을 꿇은 퀴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퀴트린이 다시 조용히, 하 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 아아젠은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아켈로르가 조 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대답을 할 차례라오, 아아젠양. " 아아젠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켈로르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아켈로르 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 하지만 도저히 그럴... 그럴수는... " 아켈로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카발리에로의 의식은 신성한거라오. 나이트 레이피엘은 진심으로 당 신의 카발리에로가 될것을 바라고 있소. " 아아젠은 퀴트린과 아켈로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사야카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이 의식은 무효입니다. 카발리에로의 의식에는 반드시 작위를 받은 기사 네명이 입회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나이트 레 이피엘을 제외하고는 오직 세명의... " "... 크실 바스크 1, 나이트 파스크란, 크실의 기사대장이 카발리에로 의식의 입회인으로 부족하다는건가 ? " 묵묵히 이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던 검은 갑옷의 기사, 파스크란이 입 을 열었다. 분명히 그는 크실의 작위를 받은 기사. 기사대장의 호칭까지 가지고 있는 그는 입회인의 자격에 부족할 수가 없었다. "그런... " 사야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켈로르는 다시 아아젠에게 말했다. "... 대답을 할 차례라오. " 아아젠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이, 보잘것 없는 내 생의 마지막 말이 될지라도... 그래. 마지막 말이 될지라도 할 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 네. 기꺼이... " 아아젠의 입이 열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퀴트린은 벌떡 일 어나며 바닥에 꽂혀 있던 하야덴을 뽑아 들었다. "이나바뉴 바스크 104, 옐리어스 나이트 레이피엘은, " 그는 하야덴을 가슴 앞에 세우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 자리에서 여러 기사님들을 모시고 라카이드 레젠님의 카발리에로 가 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 "나이트 레이피엘, 너는... " 사야카가 하려던 말은 퀴트린의 목소리에 가려 끝을 맺지 못했다. "여러분도 아시다 시피, 카발리에로로서의 의무는 국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시 됩니다. 따라서, 아아젠님을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나 나이트 레이피엘이 생명을 걸고 싸울것입니다. " 퀴트린의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아아젠은 여전히 눈물만 흘리 고 있을 뿐이었다. 눈물은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 가거라, 나이트 레이피엘. " 아켈로르가 몸을 약간 비켜, 퀴트린이 지나갈 길을 열어 주었다. 즉결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을 보호해야 하는 퀴트린이, 지금 이나바뉴 기사단 에 있을 수는 없었다. 퀴트린은 아켈로르와 사야카에게 예를 취하고는 아아젠을 앞세우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 퀴트린님. " 아아젠이 입을 열자, 퀴트린은 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입술 앞에 가져 다 대었다. "아무말도 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 퀴트린은 손짓을 하여 자신의 말을 그쪽으로 오게했다. "... 이렇게 될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 그는 아아젠을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하고는, 즉시 자신도 말에 올라탔 다. 꿈이 아닌가 ? 퀴트린님이 나의, 이 미천한 음유시인의 카발리에로가 된건가 ? "어디로... 어디로 가는거죠 ? 저때문에 퀴트린님은 이나바뉴로 돌아갈 수 없는것 아닌가요 ?" 퀴트린은 그냥 웃음으로 대답했다. "... 우선, 로냐프강으로 가는게 어떻겠습니까 ? 그곳에 가면, 왜 제가 아아젠님의 카발리에로가 되고 싶어 했는지 아실 수 있을겁니다. " 퀴트린은 말을 달렸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오늘도 날씨는 맑을 모양 이었다--안개가 낀 포프슨 평원에는 바람이 있었고, 몇가닥, 산자락을 비 추던 햇살 조각들은 어느새 휘파람이 되어 평원 위를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면 내일은 새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쟎아요 나의 사랑대신 짧은 인사말만 놓고 갈께요 그대여 그럼 안녕... 영원히. > 이나바뉴의 음유시인이 지었다고 하는 이 노래는, 후에 길지 않은 시 간이었지만 로젠다로의 국가로 지정되었다. 슬픈 노래 가사와 조금은 조 잡한 음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노래는 로젠다로의 자유와 평등을 상 징하는 노래였고, 또한 가장 용감한 사랑의 노래였다. 국가로 지정된 다 음, 이 노래는 슬픔의 소곡: 하얀 로냐프 강이라고 불리워지며 후세에까 지 전해지게 되었다. < 끝 > {{하얀 로냐프 강 ------------------------------------------------------------------ }}{{ }}{{ Epilogue... ------------------------------------------------------------------ }} Epilogue... 몇년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쓰기 시작하고...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고... 포기하고를 수도없이. 시작하고 계절이 몇번이나 바뀌고나서 야 이 글을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내용도 없는 글을 쓰다보니 제 글버릇도 여러번 바뀌었 고, 전에 쓴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여 생긴 모순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제가 처음 의도한대로 글이 써지지 않았다는것도 큰 아쉬움을 남기게 합 니다. 글을 완결짓지 못하고 전체의 절반, 2부로 나뉘어진 글의 1부만으 로 글을 끝맺음 하게 되었다는것도 아쉽습니다. 그래도, 글을 맺고 나니 기억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글의 제목을 놓고 몇날 며칠을 고민했던 기억. 벤도루우젤에서 글이 멈춰져서 일년동안이 나 글을 펼쳤다 덮었다 하던 기억. 팬레터 한통에, 그 다음회 연재분을 밤 새워 썼던 기억. 후배의 부탁에, 파스크란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다가 살아나, 후에 사야카 대신 기사대장 자리를 꿰 차게 될 라벨과 라엘만 협곡에 파 묻히는 비참한 죽음에서 왕성탑에서 떨어지는 비교적 멋진 죽 음으로 바뀐 이바이크. 생일 날짜에 맞추기 위해 며칠전 철야를 하던 기 억들...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여기에서 하얀 로냐프 강을 끝내기로 하겠습니 다. 2부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줄거리만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지 금까지, 이 조잡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제게 용기를 주셨던 모든 분들 께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1997년 7월 20일 새벽. 이 상 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