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서 명: 하얀 늑대들1 지 은 이: 윤현승 출 판 사: 파피루스 출판년도: 2003년 10월 17일 <지은이 소개/ 윤현승> 1978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휴학 중이다, 현재 온라인 게임 회사에서 게임 ‘테트라모프’ 소설 연재 및 배경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크문>, <다크문 2>, <헬파이어>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악몽 1 패잔병 2 패잔병들의 마을 3 팔콘 4 마을을 지키는 자 5 코홀룬 6 칼의 주인 7 고디머 백작 8 암살자 9 로일 울프 10 검은 기사단의 공격 <소개글, 서평> 가진 것이라고는 언변밖에 없는 카셀. 우연히 아란티아의 보건을 손에 쥔 카셀의 운명은? 카셀의 언변은 과연 그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일에 싸인 어둠 기사단,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카셀은 결국 영웅이 될 것인가! 수준급 말발의 사기꾼 기사(騎士)가 펼치는 예측불허 모험담이 펼쳐진다. 프롤로그 악몽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불이 탈 때 탁탁 튀어 오르며 귀를 자극하는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나무 냄새도 매캐한 연기도 없었다. 그녀는 화염에 휩싸인 도시 한복판의 시커먼 공간에 팽개쳐져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마저도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믿을 수 없었으나, 그녀는 극한 한기를 느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그녀는 양어깨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아무도 없어요?” 소리 질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눅눅한 어둠에 먹혀버렸다. 몇 번이나 외쳐 보았으나 나중에는 아예 목이 잠긴 듯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서워 숨을 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한 걸음 다가가면 공간이 한 걸음 물러섰고, 한 걸음 물러서면 공간이 한 걸음 다가왔다. 자신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단 하나, 접근하는 소리가 있었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끈적한 어둠을 뚫고 아주 멀리서 천천히 말 한 마리가 다가왔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펄럭이는 바람소리...... 잉크처럼 검은 암흑에 먹혀 형체가 반쯤 가려진 기사가 등 뒤에서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그 소리는 목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녀는 숨이 턱에 차올라 정신이 희미해 질 때까지 달렸다. 그러나 주위를 맴도는 말발굽 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한순간 추격하는 소리가 사라졌고,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색깔 없는 불길에 휩싸인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사거리의 중앙이었다. 교회 종탑의 커다란 황금종이 흔들렸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타던 집 한 채도 소리 없이 허물어졌다.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사거리의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구별해 내기 위해 좌우를 어지럽게 살폈다. 그러나 그 유령의 기사는 불타는 집의 지붕 위를 달려와 공중에서 그녀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기절이라도 하듯 뒤로 쓰려졌다. 그러나 바람대로 기절하기는커녕 정신은 더욱 말짱해졌고, 그녀는 그 끔찍한 공포를 코 앞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어둠을 묻혀온 듯,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는 커다란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급히 일어나려다 치마를 밟고 또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달아나기에는 검은 기사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검은 기사가 타고 있는 검은 말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푸욱 새나왔다. 그 입김조차 끔찍하리만치 차가웠다. 검은 기사는 도끼를 내리칠 것처럼 치켜들었다. 그녀는 신음 소리도 못 냈고, 묶인 채 단두대를 바라보는 죄수처럼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도끼를 내리치지 않았다. 대신 기사의 어깨 너머 아주 먼 곳에서 섬뜩한 하얀 한 줄기 빛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어떤 고통보다도 지독한 고통이 그녀의 전신을 관통했다. 가슴을 움켜쥐었으나 이미 통과해버린 빛의 흔적은 그녀의 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가 무거워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얼굴을 부딪히며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윤곽이나마 볼 수 있었던 어둠 속의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말에서 내려와 다가오는 검은 기사의 발자국 소리가 그녀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식은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암흑을 계속 견뎌야 했다. 비명도 지를 수 없었고, 무언가를 볼 수도 없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손가락 한 마디도 꼼짝할 수 없었고, 눈꺼풀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이 암흑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깬 채로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영원히 계속 될, 이승 이후에 받는 형벌과도 같았다. “아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새나오는 커튼이 부드럽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자기 전에 켜놓은 촛불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심을 태우느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움직이고 있는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꿈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실제로 뭔가 얻어맞은 것처럼 아직도 가슴의 한 곳이 찌르는 듯 아팠다. “괜찮으세요, 라틸다?” 놀란 그녀의 시녀가 방 문을 열고 달려왔다. 시녀는 차가운 물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괜찮아, 안나. 괜찮아.” “또 그 꿈을 꾸셨군요.” 안나는 물을 한 컵 따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순순히 받아 마시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꿈일 뿐이에요, 라틸다. 그건 그냥 꿈이에요.” 안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살짝 껴안아 주었다. 따뜻한 체온에 라틸다는 겨우 안심했으나, 꿈에서 놀란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조금도 꿈 같지 않아. 오늘도 안 자려고 노력했어.: 그녀는 촛불 옆에 놔둔 책을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넘긴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이후는 악몽만 떠올랐다. “안 자려고 너무 의식하지 마세요. 몸이 피곤하니까 그런 악몽을 꾸는 걸지도 몰라요. 처음 악몽을 꾼 것도 주인님께서 앓아 누웠을 때였잖아요. 그 때 라틸다 아가씨는 주인님을 간호하느라 며칠 밤을 못 주무셨죠. 최근에도 피곤한 일이 많았잖아요.” 안나는 애써 웃어보였다. 라틸다는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거 같아. 요새 너무 마음 쓰는 일이 많았으니까. 가서 쉬렴. 난 이제 괜찮아.” “사양하지 마세요. 원하시면 밤새도록 옆에 있어드릴 수 있어요.” “난 애가 아니야, 안나.” “그래요, 아직도 시집 못 간 노처녀일 뿐이죠.” 안나의 농담에 라틸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제 방에 가 있겠습니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부르세요.” “응, 그럴게.” 안나는 조용히 등불을 들고 방을 나갔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꿈에서 몸을 뚫고 간 그 눈부신 빛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찔린 듯이 아팠다. 그녀는 단지 이것이 꿈이길 바랐다. 그저 꿈이길...... 1. 패잔병 ‘뭣 때문에 내가 이 모양이 되었더라?’ 카셀은 누운 채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언제며, 이렇게 편히 누워 있어본지가 언제인지 새삼스럽게 떠올려 보았다. 아마도 마을을 떠난 후 처음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최근 한 달 간은 기억 나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있다면 칼보다 더 커다란 낫으로 풀을 베거나 군량을 짊어지고 이동한 것 밖에...... ‘천천히 생각해봐. 시간은 많으니까. 전에 훈련이 끝났다고 누웠나? 하루치 이동 끝났다고 휴식을 줬나? 창을 껴안고 대기조에 껴서 선잠 잔 건 제외하자. 그래, 기억났어. 고향을 떠난 후 처음으로 편히 누워보는 거야.’ 어디선가 수십 마리의 말들이 동시에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셀은 얼른 눈을 감았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전투가 벌어진 후 그는 옆의 용병이 칼에 맞고 쓰러질 때 휩쓸려 넘어졌는데, 그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비명과 고함 소리가 요란한 와중에도 그는 눈을 꽈악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말 달리는 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혹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무서웠지만 다행이 땅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이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 했어. 고향에서 얌전히 아버지 뒤를 따라 밀 농사나 지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카셀은 칼을 다룰 줄도 몰랐고, 특별히 달리기를 잘 한다거나 힘이 세지도 않았다. 농사 지을 때 요긴하게 쓰일 거라며 아버지가 말타는 법 하나는 제대로 가르쳐 주었으나, 직책없는 병졸이라고 말고삐도 못 잡게 하니 그나마 그 기술은 써먹지도 못했다. 오늘 치른 전투에 그가 승패에 영향을 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적에게 한 명을 더 베었다는 전적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네가 전쟁에 나가?’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고 큰 소리로 웃은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카셀은 동네 꼬마하고 목검으로 붙어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검술에는 천부적으로 재능이 없었으며, 그건 누구보다 아버지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단지 늦게 터득하는 타입이라고 굳게 믿어온 카셀이지만, 결국 수많은 철부지 자식 놈들이 으레 커다란 사고 한 번 칠 때서야 깨닫듯, 아버지가 옳았다. “아서라, 얘야. 너보다는 옆집 쟈넷이 전쟁에 나가겠다고 하면 덜 말리겠구나. 어차피 그런 전쟁이란 게 귀족들끼리의 땅 따먹기 싸움이니 우리 같은 농부들은 이럴 때일수록 얌전히 흙이나 파는 게 사는 길이란다. 드래곤 싸움에 끼어든 도마뱀 꼴이 될 필요는 없는 게야.” 아버지는 아들의 진지함을 알고 차분하게 말했지만, 쟈넷이라는 이름을 듣고 카셀은 되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그 일 때문에 검을 들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아픈 부분을 정학하게 꼬집어 비틀고 있었다. 하지만 카셀은 절대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건 효심에서 나온 기특한 행동 방식이 아니라, 예측되는 결과가 패배인 싸움이기에 처음부터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아버지, 혹시 루치 아세요?” 카셀은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말했다. “아, 그 전쟁 나갔던 친구?” “그 녀석이 돌아왔어요.” “어이쿠, 용케 살아 돌아왔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루치가 전쟁에 나가면 보름도 못 되어 시신만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하지만 루치는 자랑스럽게 말을 타고 번쩍이는 은빛 갑옷에 수행원을 셋이나 끌고 나타났다. 튀쳐나간지 석 달 만에 ‘붉은장미’ 백작 군대의 망토를 걸친 그의 모습을, 카셀은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녀석, 기사가 되었더군요. 아세요? 특별히 저보다 잘난 구석도 없던 애였잖아요.” “못난 구석이 많았던 녀석이었지. 성격이 포악한데다 남을 잘 속이지! 알지 않느냐? 그 애가 꼬셔서 하룻밤 몸을 허락한 여자애가 마을에도 한 둘이었냐? 스무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과부댁 치마 들추는 걸 자랑으로 여기니, 싹수가 노랗다 못해 말라 비틀어졌지.” “하지만 아버지! 기사라구요, 기사. 기사가 무엇인지는 아세요?” “하루에도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전쟁이라지? 계급이 높을수록 죽기도 잘 죽는 거란다. 루치야 눈치 하나는 끝내주니, 그 틈을 타서 죽은 자기 상관 자리를 꿰찼겠지. 원래 죽은 사람 자리에 들어가면 또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놈한테 자리를 비켜주게 되어 있는 게야. 넌 그런 게 부러우냐?” 아버지는 마치 눈에 훤히 보인다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카셀은 그게 미칠 노릇이었다. 조금이라도 아버지가 부러워하는 눈빛이라도 보였다면, 마음이 바뀌었을 지도 몰랐다. “아버지, 루치가 지금 누구랑 있을 것 같아요?” “글세, 아직 정복하지 못한 그 과부려나?” “쟈넷이에요.” “쟈넷?” 아버지는 그제야 놀란 눈이었다. “그래요. 제가 그렇게 열심히 사랑을 구호했어도 손길 한 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그 애가 지금 루치랑......” 카셀은 차마 그 뒷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맙소사, 그 눈부신 몸매를 그 녀석의 더러운 손이 탐하고 있다니! 하지만 그런 놀라운 이야기에도 아버지는 무덤덤했다. “허허, 그 녀석 참 손도 빠르다.” 마찬가지로 조금도 놀랍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쟈넷한테 좋아한다는 말이나 했냐? 맨날 침대에서 책이나 읽는 녀석이 여자와 놀아본 적이나 있어야지. 그래도 나는 쟈넷이 성실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 따위와 놀아나는 아이였을 줄은......? 으음, 난 그 애를 좋은 며느리 감이라고 봤는데, 안 되겠구나.” 카셀은 더 이상 아버지와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왔다.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보여도 좋았다. 아버지는 밀농사를 지어오며, 어떤 상인과도 손해보는 거래를 하지 않았고, 칼을 들고 날뛰는 미친 놈 마저 칼을 던지고 엉엉 울게 만들었다. 루치가 망나니였지만, 카셀의 아버지를 보면 우선 피하고 봤다. 마을의 어른들도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일이 터지면 촌장보다 그를 먼저 찾았다. 아니, 촌장부터 일 터지면 허겁지겁 아버지를 찾을 지경이었다. 그런 말재간을 가진 아버지를 말로 설득하려는 시도 자체가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다. 카셀은 집을 나온 후 당장 마을의 유명한 용병을 찾아가 검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미 몇 달 동안 꽤 많은 돈을 들이고 그에게 배웠는데, 그 솔직하기 그지없는 용병은 더 이상 그의 돈을 받기가 미안했던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는 검에 소질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제발 내가 애들 용돈 뺏어 쓴다는 말 좀 안 듣게 해다오.” 그런 말을 들은 후에도 몇 번인가 그를 찾아갔었는데, 언제나 거절당했다. 카셀은 당장이라도 전쟁에 끼어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려면 루치가 그랬던 것처럼 그 용병을 찾아가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팽개치고 찾아갔을 때도 여전히 그 용병은 고개를 저었다. “루치는, 으음, 이제는 기사 루치라고 불러야 하나? 기사 루치는 검에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 1년을 배워 나와 동등해질 정도였으니까. 물론 나 정도 용병은 전쟁터에 나가면 흔하지만, 스무 살 밖에 안된 녀석이 그 정도 검을 쓸 줄 안다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루치 정도면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살 수 는 있겠다 싶어서 용병 길드의 아는 사람을 소개시켜 줬단다. 하지만 너를 소개시켜 달라고? 맙소사, 그래도 너는 착하고 성실하며 이 마을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한다. 너를 용병 길드에 소개시켜 줬다간 난 이 마을에서 발 붙이고 살지도 못할 거야.” 그는 사정을 설명하며 카셀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 말을 들은 후 카셀은 그가 지나치게 양심적인 용병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젠장, 돈이라도 잔뜩 요구하면 모아놓은 저금을 모두 내줄 용의도 있었는데...... 하지만 무작정 아무 전쟁터에나 찾아가 나 좀 병졸로 써주시오, 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가는 길이 적병으로 오인되어 화살에 맞거나, 마을을 떠나자마자 최근 도처에서 출몰하는 산적이나 야적에게 돈지갑을 털린 채 뼈다귀로 뒹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전쟁터에 목숨을 내놓기보다 도적들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게 더 쉬운 세상이었다. 카셀이 마을을 떠난다는 말에, 귀도 잘 안들리는 촌장까지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뛰어나왔다. 카셀은 촌장이 보여준 의외의 격렬한 반응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지만, 너는 장래 촌장감이었단다. 그런 아까운 목숨을 귀족들의 별거 아닌 전쟁 놀음에 쓰는 건 안될 이이다. 네가 지금까지 공부한 걸 생각해보렴. 너는 칼을 배운게 아니라 학문을 익힌 거야. 그걸 잊지 말거라.” 지금 생각해보면 촌장의 소중한 충고를 따랐어야 했다. 사실 카셀은 이미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는 자신을 쓸모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필요로 해주고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루치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다. “사내 녀석이 자기 뜻은 펼치지 못하고 늙은이들 말에 휘둘리는 거냐?” 루치의 옆에는 수줍은 듯 팔짱을 끼고 있는 쟈넷이 있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 지, 언제쯤이나 미소 한 번 지어줄까 싶었던 그 도도한 표정을 잃어버리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카셀은 반쯤 이성을 잃어버렸다. 젠장할 놈, 간밤에 대체 저 천사에게 무슨 독약을 먹여놓은 거야? “지금 세상에 학문이 무슨 소용이냐? 내가 본 전쟁터란 건 지휘도 칼을 든 자만 할 수 있고, 작전을 짜는 이도 모두 갑옷과 방패로 무장하는 곳이었다. 거기에 펜대를 놀리는 샌님이 낄 자리는 없었어. 칼만이 마을을 지킬 수 있고 칼만이 여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 전쟁 중에 필요한 건 오직 힘이야. 네가 진짜 이 마을을 지키고 싶다면 넌 네 힘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아니면 착한 카셀은 어른들 말이나 잘 듣고 시키는 일이나 고분고분 잘 하는 거냐?” 루치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엉터리 같은 말이었지만, 건드리면 터지기 직전이었던 순간에 지르고 들어온 한 방에 카셀은 소리질렀다. “오냐, 루치. 전쟁에 끼어들어주마. 네 부하로라도 써 봐. 그럼 나는 순식간에 네 자리에 올라와 있을 거다.” 루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기 수행원에게 추천서를 써주고 그를 어느 어느 부대에 배속시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고 마을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카셀이 정말 마을을 떠나자 당황하며 말렸다. 심지어 쟈넷 마저도 루치가 그새 자기를 잊고 딴 여자를 찾아 다닌다는 것보다 카셀이 떠나는 것에 더 놀랐다. 만약 쟈넷이 말렸다면 안 갔을까? 물론 그녀가 밀 파 먹는 해충보다도 못한 루치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루치에게 보여줬던 미소를 딱 한번이라도 자기에게 보여주면 그는 루치의 도발을 무시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떠나려는 카셀에게 쟈넷은 형편없는 말재주로 그의 분노를 돋구고 말았다. “전쟁터에 간다고? 하지만 넌 칼 싸움도 못하잖아.” 그게 나름대로 그녀가 말리는 방법이었을까?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지만, 때로는 진실을 피할 필요가 있는 법이었다. 카셀은 그게 진실이라는 것을 한달 내내 잊어버리려고 애썼던 자신의 모습이 하나씩 떠올라 한심스러웠다. 마을 사람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시체들 틈바구니에서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죽은 척하고 누워있는 아들을 바라보면 분명 놀랄 것도 없다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테니까. “것 봐라, 이 녀석아.” 석양이 질 때까지 카셀은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었다. 바람이 가라앉으며 더욱 피냄새와 썩는 냄새가 심해졌지만, 더 이상 후각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냄새를 뛰어 넘은 끈적한 뭔가가 주위를 메웠다는 게 피부로 느껴지자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검은 사자’백작을 상징하는 깃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붉은 장미의 깃발만 그 밑에 쌓인 시체들의 무덤을 상징하는 듯 꽂혀 있었다. 카셀은 갑자기 이 많은 주검들 사이에서 반나절이나 누워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가 처져 벌떡 일어났다. 나무도 없는 황폐한 언덕에 서서 움직이는 그림자는 카셀 한 사람뿐이었다. 멀리 독수리가 한 마리 맴을 돌고 있었다. 멍청히 독수리의 움직임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나 휘청거렸다가 겨우 걸음을 옮겼다. 가지만 남은 음산한 나무 위에는 부리에 뭔가를 너덜너덜하게 물고 있는 까마귀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옆을 지나갈 때 까마귀들은 일제히 카셀을 노려보았다. “이봐, 난 아직 살아있어. 칼도 있으니까 가까이 오면 하나씩 목을 따주겠다.” 카셀은 전투 중에 칼을 쥐어 본 적도 없다는 사실도 잊고 소리질렀다. 알아들을 리 없는 까마귀는 붉은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위협이라도 가할 양으로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봐주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괜히 뒤가 근질거렸지만, 다행히 까마귀들은 살아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실 무서운 건 까마귀가 아니라, 아직 근처에 남아 있을 지도 모를 적병들이었다. 잔당을 처치하기 위해 전투가 끝난 후에 돌아다니는 병사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녀석들은 목숨을 구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목을 쳐버리지. 머리 가죽을 벗겨 자기가 얼마나 많이 죽였나 수를 세보기도하고, 귀를 잘라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해.’ 어디서 주워들은 지도 모를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자, 다리가 후들거려 걷기가 힘들었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으나, 묘하게 몸이 떨려왔다.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의 싸움은 벌써 3년 째 접어가고 있었고, 전투는 한 해에 십여 차례씩 벌어졌다. 그 중 자잘한 전투도 여럿 있었는데, 오늘 새벽에 벌어진 이 싸움은 최근 몇 달 간 있었던 전투 중 가장 큰 규모라고 들었다. 양쪽 다 오백 명이 넘는 병력으로 들판에서 맞닥뜨렸는데, 작전도 없고 화살도 오고가지 않는 순수한 칼만의 싸움이었다. 붉은 장미 백작 군이 된 이후 카셀에게는 그것이 첫 번째 겪은 전투이자 마지막 전투가 되어버렸다. 아군은 거의 전멸했고, 살아남은 아군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혼자 남는 게 무서워 아군을 찾아 다녔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헤매는 건 끔찍했다. 루치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간 군대는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최전방 부대였다. 그는 뒤늦게 루치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한 번 입대하고 나니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탈영을 했을 때 어찌한다는 경고 같은 건 없었지만, 카셀은 무서워서 그럴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풀을 베고 나무를 베고 군량을 지고 삽질을 하고 경비를 섰다. 그의 동료는 모두 돈이면 전 날 동료였던 친구도 베어 죽일 수 있는 용병들이었다. 카셀은 그들에게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했다. 전우애를 느끼는 것은 둘째치고 그들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적군보다 되레 아군의 용병들이 더 무서웠었다. 처음 부대를 배속 받고 들어갔을 때는 용병들의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무서워서 거기에 대응도 못했고, 놀리는 것도 묵묵히 다 받아냈었다. 그래서 더더욱 동료애 같은 걸 다질 겨를도 없었다. 물론 어느 순간엔가 그런 비웃음은 사라졌지만, 카셀은 단 한번도 그들을 전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도 전우도 아닌 아군을 찾아 나서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그는 생각을 고쳐먹고, 언제 적병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 언덕을 빠져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해가 서쪽 끝에 머리만 남기며 어둠을 예고하고 있었는데, 세 걸음에 하나씩 시체가 걸리는 곳에 오래 있을 만큼 공포가 둔해진 것은 아니었다. 움직이는 거라면 그게 뭐든 일단 발견하는 순간, 얼른 반대쪽으로 달아날 준비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머리 속에 온통 불안과 공포만 차있어 아름다운 석양도 핏빛으로만 보였다. 그래서 언덕의 불 탄 나무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남자의 초록색 튜닉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심장이 멎을 것처럼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타조 깃털이 꽂혀있는 풀잎 모자에, 피리를 들고 있는 그도 카셀을 발견하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셀은 비명이 나오려는 걸 내장까지 비틀어가는 심정으로 참아냈다. 곧 상대방이 칼이나 무기를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겨우 짧은 숨을 내쉬었다. 칼 한자루 주워들지 않고 내려왔다는 사실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미친 자식, 아무리 겁에 질려 있기로서니 칼 하나도 챙기지 않고 도망쳤냐?’ 그는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잊어버릴 만도 했다. 군인 생활을 한 짧은 기간 동안 그에게 주어진 건 나무 끝에 한 뼘 길이의 쇳조각이 고정된 창 한자루가 고작이었다. 멋지게 칼을 휘두르며 적과 맞서 싸울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낭만은 첫날 그 무기 한 자루를 지급 받으며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카셀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낄낄대고 웃던 보급관은, 어차피 찌르면 사람 죽이는 살상력은 똑같다고 위로해주었다. 다른 관점이긴 하나, 전투에 대한 한 청년의 낭만을 일격에 박살내버린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이긴 했다. 그러니 손에 칼이 없는 것이 익숙한 건 당연했다. 혹 바닥에 떨어진 칼이라도 눈에 띄었다면 ‘어이쿠, 맨손은 위험하니 이거라도 들고 다녀야겠다.’ 는 생각이 퍼뜩 들겠지만, 오랜 전쟁으로 무기가 부족한 양측 군대가 전투 후 바닥에 무기를 던져놓고 갈 리도 없으니 그런 행운도 없었던 것이다. “난 붉은 장미 백작의 병사요. 당신은 어느 쪽이오?” 카셀은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하여 소리쳤다. 어색하기 그지없을 거라 믿었던 자신의 목소리는 제법 근엄하게 들렸다. “난 소속이 없습니다. 유랑 시인이죠.” 유랑 시인도 약간 굳은 얼굴로 딱딱하게 말했다. “유랑 시인?” 어느 쪽에도 끼지 않고 전쟁을 관찰하며 나중에 그 격전의 모습을 시나 노래로 만들어 이야기하는 사람. 그는 언뜻 초록색 옷을 입은 병사를 발견하면 건드리지 말고 내버려둬도 된다는 명령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는 용병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와 전쟁에 대해 혼자 책을 읽고 공부한 내용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유랑 시인들이 지은 수많은 시와 이야기들이 전쟁에 환상을 품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잘못은 그들에게 있었다. 한 대 후려치고, ‘너 때문이야, 이 빌어먹을 놈아!’ 하고 몇 마디 퍼부어주고 싶었다. 그래도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 곳은 무슨 엉뚱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전쟁터 한 가운데였다. “전투는 끝났소. 더 볼 것도 없는 이 곳에 뭐 하러 남아있는 거요?” 카셀은 차갑게 말했다 “압니다. 그래서 짓고 있던 나의 노래도 거의 끝나가오.” “유랑 시인의 노래로 듣게 되는 나의 전투라...... 돈이 있다면 듣고 싶군.” ‘나의 전투’라는 건 순전히 실수였다. 착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지금까지, 만나본 적도 없는 붉은 장미 백작을 위한다는 생각도 안했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버텨왔으므로 ‘나’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도 있었다. 또 그것과 별개로 그는 노래와 시를 좋아하므로, 순수한 뜻에서 듣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랑 시인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유랑 시인은 긴장된 표정을 풀며 약간의 미소를 곁들여 물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듣고 평가해 보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갑자기 부드럽게 바뀌어 있었다. 카셀은 의아해 하며 대꾸했다. “말했지만, 난 돈이 없소.” “그리 보이는군요. 당신은 붉은 장미 백작군의 지휘관입니까?” 그제야 카셀은 유랑 시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피를 뒤집어 썼지만 격전장에서 멀쩡히 걸어 나오는 병사가 있다? 그렇다면 그건 남이 피를 묻히는 격전 속에서도 부상하나 입지 않은 검사인 셈이다. 또 이 대규모 전투를 자신의 전투라고 말하며, 패잔병이면서도 무덤덤하게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는 모습은 일개 병졸로 보일 수 없었다. “내 자세한 게급을 말할 수는 없소. 내 차림으로 나를 펑가하든 말든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오. 어쨌든 난 돈이 없으니 그 노래로 돈을 벌 생각은 않는게 좋겠소.” 카셀은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말했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을 하는 셈이지만, 자신이 패잔병에 칼 한 자루 지급 받은 적 없는 졸병이라는 것을 떠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그것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그 유랑 시인은 카셀이 꽤 계급이 높은 사람이라고 추측했는지 약간은 비굴한 미소를 보였다. 유랑 시인이란, 천성적으로 직책이 낮은 사람보다 높은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카셀은 그 눈빛을 보고서야 지금까지 자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 고마워요. 허구한 날 무심한 아버지와 이야기하다 보니 이런 느긋한 대처도 가능하군요.’ 이런 식의 무덤덤한 반응으로 의외의 좋은 결과를 얻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 험한 용병들도 이상하게 카셀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는 스물 두 살로 용병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나이가 어린 축은 아니었지만, 선이 가는 얼굴이라 자칫 무시당하기 쉬웠고, 실제로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용병들은 카셀에게 시답잖은 수작을 걸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몰랐지만, 어쩌면 이런 면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긴장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말투를 흉내내게 되었다.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 당사자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순간만큼은 쓸만한 버릇이었다. “지금은 돈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들어주고 이번 전쟁에 대한 묘사가 어떤지나 한 번 평가해 주십시오.” “그런 거라면 좋소. 나도 언덕을 돌아다니느라 조금 쉬고 싶었으니까.” 카셀은 대답하고 흙 위에 엉덩이를 철퍼덕 깔았다. 하지만 앉은 자리가 가시 방석이었다. 언제 적병이 나타날 지도 모르는 곳에서 노래나 듣고 있어도 될까? 불안했다. 그래도 내색할 수 없으니, 유랑 시인의 노래를 느긋하게 듣는 척 했다. 햇볕 아래 칼날들, 초록 풀잎 위의 말발굽 붉은 장미, 언덕에서 먼저 봉우리를 피웠으나, 검은 사자, 흔들리지 않는구나 말 한 마리 넘어지면, 쏟아지는 칼날들 흐르는 핏방울 붉은 장미 용맹하나, 차가운 검은 사자들. 아무도 지휘하지 않고, 아무도 후퇴하지 않고 포위하는 검은 사자의 모습을, 붉은 장미는 알지 못하고 동시에 진격하는 기병 스물, 어느 새 떨어진 붉은 장미의 기사들 검은 깃발을 든 기사들이, 무리를 헤쳐 자온다 붉은 장미의 둥근 진형, 스물 기병들에 무너지고 포위한 검은 사자, 그 위를 덮쳤네 작전 없는 전투는, 지휘관 한 마디로 승부가 났구나 검은 사자의 지휘관, 소리쳐 승리를 외친다 카셀은 그 시를 듣고 깜짝 놀랐다. 붉은 장미 백작 편에 있던 그로서는 무척이나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그것은 본인도 알지 못하는 이번 전투의 정확한 설명이었다. 카셀이 모르던 작전이 그 몇마디 시에 모두 담겨 있었다. 시인은 이것을 음으로 만들겠다며 가지고 있는 피리를 불었지만 카셀은 거기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멋진 노래요. 비록 우리가 진 이야기뿐이지만.” “저는 언제나 객관적 사실만으로 노래하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진 쪽에서도 그런 노래를 듣는 걸 원하니까요.” “이런 노래는 어디에서 들려주며 누가 돈을 지불하는 거요? 귀족들에게?” “저는 싸구려 시인이라 노래를 잘 만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귀족들에겐 불려나가지도 않죠.” “하긴, 흥겹게 들을만한 노래는 아니군.” “그래서 술집이나 돌아다니며 용병들에게 들려주거나, 카모르트 왕국에서 벌어지는 이 전쟁을 궁금해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팔기도 하지요. 내용에 상관없이 흥겨운 가락만으로 돈을 버는 친구들도 여럿 있죠.” “그런 노래는 많이 들어보았소.” 카셀은 자칫 고향 술집에서 들은 노래를 이야기할 뻔 했다. 하지만 그는 가급적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노래는 팔릴 만 합니까?” 많이 들어봤다는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유랑 시인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이 말했잖소? 가사는 중요하지 않소. 가락이 중요하지.” “옳은 말이군요.” 유랑 시인은 짐을 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이 근처에 있는 ‘패잔병들의 마을’로 갑니다.” “패잔병들의 마을?” “누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근처에 그 마을이 잇죠. 그 곳은 아직 소속이 정해지지 않은 용병들이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자 하는 패잔병들이 옵니다. 또 카넬로크나 아란티아 같은 타국의 여행자들이 꼭 들르는 곳이라, 노래를 사줄 만한 사람도 꽤 있죠. 당신도 가시겠습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같이 가겠소. 사실 난 칼도 잃어버려서 군인이랄 수도 없으니 당신이 특별히 거짓말할 일도 없을거요.” “하하, 그것 참 안타깝군요. 칼은 곧 자신의 신분이기도 할 텐데.” “그러니 아무 말 마시오. 군에 돌아가거나 내 칼을 찾기 전까지 난 패잔병일 뿐이오.” “어련하시겠습니까?” 유랑 시인은 꼼짝없이 속았는지 이제 노골적으로 상관 대접을 해주었다. 하지만 카셀은 그를 완전히 속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긴장을 늦추지도 않았다. “제 이름은 라우레입니다.” “난......그냥 케이라고 부르시오.” “그럽시다.” 라우레는 빙그레 웃으며 언덕을 내려가는 길을 안내했다. 해는 이제 산 너머에 완전히 잠겼고, 동쪽 끝에서 어둠이 몰려왔다. 카셀은 혹시 이 라우레라는 유랑 시인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 그러니까 별 거 아닌 계급의 졸병임을 솔직하게 말했어도 이렇게 친절하게 자신을 도왔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라우레가 어떤 청년인지, 몇 살이며 왜 유랑 시인이 되었는지 물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라우레는 스스로 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시인이었다. 최근에는 시를 만드는 일에 회의를 느껴 질이 떨어졌다지만 예전에 만든 노래 몇 개는 들어줄만 했다. 아니 사실 꽤 좋았다. 그는 두 백작의 전쟁 놀음을 광대에 비꼬는 ‘장미 꽂은 사자’ 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도 쉽고 재미도 있었다. 카셀은 금방 그 노래를 외웠는데, 라우레는 그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부탁해서 거기에 맞추어 피리를 불러주었다. 그것은 굳어있는 카셀의 마음을 풀어주는 버터와도 같은 멋진 음악이었다. 그는 금방 라우레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 전쟁을 좋아하는군, 당신은. 지금까지 벌어진 전쟁을 일일이 그렇게 따라다니기도 힘들었을 텐데, 용케 목숨을 부지하고 있구려. 훌륭하오.” 카셀은 진심으로 말했다.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에서 전쟁을 좋아하죠. 저는 사실 영웅서사시를 더 좋아합니다.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 긴 이야기를 한 번 써 볼 생각이죠. 재미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지금 벌어지는 전쟁보다 과거 이 아크랜드 전체를 뒤흔들었던 론타몬의 정복 전쟁을 더 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그 전쟁을 묘사한 몇 개의 노래에 반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봐도 좋아요.” “당신이나 나나 그 때는 어렸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셀은 전쟁이 터졌던 당시를 또렷이 기억했다. 전쟁에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을 작은 시골 마을일 뿐이었지만, 카모르트의 왕실이 무너진 여파는 그런 작은 마을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익셀런 기사단이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어린 아이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소문과 함께 악마의 추종자들이라 불리었던 제국의 기사들은 마을에서 한 끼 식사만 대접받은 뒤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고 사라졌다. 심지어 돈까지 지불했다. 검은 갑옷의 기사들에 대한 악독함만 익히 들었던 터라 어린 그 에게도 그 정중한 태도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칼을 든 인간이라면 무조건 험담을 하는 아버지 마저도 ‘기사라고 내세우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라고 말할 정도였다.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그 때 적군의 기사단을 보고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 “저는 당시 벌어졌던 수많은 전투와 거기에서 사라져간 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압니다.” 라우레는 꿈을 꾸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어둠 속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그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를 남겼다.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익셀런 기사단과 그 기사단을 이끈 위대한 기사 웰치의 이야기, 가넬로크에서 벌어진 드래곤 기사단과 익셀런 기사단의 접전, 그건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기사들의 전투였죠. 당시 가넬로크를 수호하던 드래곤들이 죽은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 그들이 살아있다면 지금쯤 이 대륙을 호령하는 건 가넬로크일 텐데. 하지만 역시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아란티아?” “아시는군요.” “나도 그 나라를 아주 좋아하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파라다이스라고 여기는 곳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 곳도 수도와 일부 도시만 살기 좋을 뿐, 변방의 작은 시골은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라고 들었소.” “예, 그렇죠. 성스러운 여왕이 지켜주는 작은 나라. 하지만 론타몬의 삼백기나 되는 익셀런 기사단을 오십 기로 막아낸 울프 기사단은 기사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 있어 살아있는 전설이죠. 특히 그들의 정예 멤버인 ‘하얀 늑대들’과 여왕의 수호 기사 이야기는 정말이지...... 저는 그들을 찬양한 노래를 아주 많이 알고 있어요. 들어 보시겠어요?” 그는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카셀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몸을 들썩거릴 만큼 좋아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아는 이야기와 그가 아는 이야기를 공유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카셀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 한 번 꼭 들어보고 싶군요. 하지만 지금은 그 노래 말고도 많은 노래를 들었잖소? 우리는 앞으로도 짧지 않은 여행을 같이 하게 될 것 같으니 차차 들읍시다.” 카셀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이런 멋진 이야기꾼을 왜 이제야 만난 걸까? 시골에서는 아무도 이런 얘기를 함께 즐기지 않았다. 만약 친구가 된다면 이대로 그의 시를 모조리 배워보는 것도 멋진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하죠. 소시지가 잘 익었네요. 드시죠.” 라우레는 나뭇가지에 꽂아 모닥불에 익힌 소시지를 내밀었다. 칼집 낸 부분이 벌어져 기름이 자글자글 끓는 것이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카셀은 이 친절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돕기 위한 친절인지 궁금했다. 이대로 속이고 있어야 할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제고 이 친절에 대한 보답을 하겠소.” 카셀은 여전히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대답해 주실 수 있습니까? 케이 당신은 붉은 장미 백작의 어느 부대를 지휘하셨습니까?” “나는......” 그는 망설였다. 진실을 말해도 이 친절이 계속 될까? 아니면 당장 소시지를 빼앗긴 채 엉덩이를 걷어 채일까? 유랑 시인도 제 한 몸 지키기 위한 검술은 익히고 있을 텐데, 괜한 자극은 위험했다. 하지만 카셀은 지금껏 남을 속이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이 살아왔다. 그는 양심과 현실을 놓고 저울질했다. 양심이 이긴다 해도 어느 하나 도움될 것은 없다. 만약 라우레가 변함 없이 친절을 베푼다면 그저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은 작은 기쁨을 얻겠지. 그는 고민하다가 대꾸했다. “나는 지휘관이 아니오.” “예?” 라우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것이 놀람과 실망 중 어느 쪽을 표현한 것인지는 이후 카셀의 머리 속에 풀지 못한 궁금증으로 오랫동안 떠다녔다. 불빛이라도 밝았다면 표정으로라도 그의 생각을 읽었겠지만, 소시지가 올려져 있는 모닥불만으로는 어려웠다. 라우레의 가슴에 화살이 박힌 것을 발견한 건 맞은 본인보다 옆에 있는 카셀이 먼저였다. 라우레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가 화살을 움켜지었다. 크게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지휘관이 아니라는 카셀의 고백에 동그랗게 떠진 눈은 감기지 않고 빛을 잃었다. 화살이 뚫고 있는 초록색 옷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그는 천천히 무너지더니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들이박았다. 전쟁터에서 바로 옆에 쓰러져 죽었던 병사들처럼, 그도 고통에 숨을 괴롭게 토해내며 천천히 죽어갔다. 카셀은 그가 눕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한 입 깨문 소시지를 떨어뜨렸다. 어둠 속에서 꿈지럭대면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가 요란하게 떠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맞출 수 있다고 그랬지?” “웃기지 마. 네가 맞추려고 한 건 소시지 들고 있는 놈이었어.” “내가 그랬나? 어쨌든 넌 내기에서 졌어. 돈 내놔.”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 몸을 가리다 만 옷을 입은 남자가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놀랍게도 그 웃음 소리만으로 그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다. 요즘 이 근처를 돌아다닌다는 도적들이었다. 군대가 지나갈 때는 꼼짝 않고 숨어 있다가 무장하지 않은 여행자나 패잔병들, 또는 무리에서 떨어진 병사들을 잡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스캐빈저들...... 아군 용병들과의 식사시간에, 도적들과 싸우다가 손가락을 두 개 잘린 용병이 언제고 그들을 찾아내 조져놓을 거라고 떠들던 소리가 기억났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조차 혼자 남게 되면 제일 무서운 게 그들이라고 했다. 이 근처를 자기 마당처럼 활보하고 다니는 팔콘이니 그레이독 같은 놈들은 작은 규모의 군대까지 조직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용병들끼리의 말에 따르면, 서로에게 칼을 겨누느라 바쁜 두 백작들이 치안 관리를 해줄 리도 없고, 국왕은 두 백작의 틈바구니에서 자기자리 지키기도 바쁘니, 대도시가 아닌 곳은 아예 도적들 세상이라는 것이다. 큰 집단은 몇 개 안되어도 소수의 도적단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제기랄, 차라리 적군에게 잡히지. 그럼 적어도 포로가 되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도적들에게 잡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어이, 이봐. 넌 패잔병이냐?” 분명 전쟁터에서 주웠을 낡은 칼 한 자루와 녹슨 헬멧으로 무장한 키 작은 남자가 건들거리며 나타났다. 모두 네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얼굴에 땟물이 질질 흘렀다. 활을 들고 동물 가죽 옷을 입은 더 작은 남자는 활을 한 번 더 시험해 보고 싶은지 계속 화살 통에 담긴 화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카셀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많은 전쟁 부상자들과 생존자들이 저 더러운 미소에 겁을 집어먹었으며, 그들이 장난으로 쏜 화살에 목숨을 잃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화가 났지만, 유랑 시인도 무서워 거짓말을 한 주제에 무장한 도적 셋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 거짓말 외에 뭘? 카셀은 라우레가 화살에 맞은 이후 숨을 안 쉬고 있었음을 깨닫고 겨우 숨을 토해냈다. “야, 니들 두목 이름 뭐냐?” 카셀은 쿵쾅거리는 심장이 제발 진정되기를 바라며, 애써 느긋하게 말했다. 분명 떨릴 거라 믿었던 그 목소리는 처음 라우레를 만났을 때처럼 굵고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새어 나왔다. “뭐?” 칼을 먼저 찔러놓고 대화를 시작하려 했던 도적들 중 첫 번째 녀석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 녀석은 나한테 자기 친구들이 있는 곳을 안내해주고 있었어. 차라리 나를 죽이지, 이놈들아. 그럼 최소한 난 두목한테 뒈지게 얻어터질 걱정은 안 하고 조용히 죽어버렸을 텐데.” 카셀은 혀를 쯧쯧 차며 라우레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친절을 베풀어준 유랑 시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만, 검게 뜬 눈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다. “너......어느파야?” 활을 든 도적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파? 웃기고 있네. 도적들이 언제부터 파를 나눴냐? 니들 두목 이름 뭐야?” 괜히 떠보려던 그들은 카셀이 외려 대담하게 나오자, 더욱 당황했다. “타이거다.” 카셀은 잽싸게 용병들에게 들은 산적 두목 이름을 떠올렸다. “내 두목은 팔콘이다. 부탁컨대 여기가 니들 구역이라는 말만하지 말아주라. 나는 이 놈을 잡아가려고 이런 냄새 나는 옷에 피까지 뒤집어 쓰고 반 나절이나 쫓아다녔다.” “뺏고 싶으면 그냥 죽이면 되지 그런 짓은 왜 해?” “이 놈 하나 잡으면 이 조그만 보따리만 가지고 끝이지만, 이 놈 친구까지 잡으면 한 달 수익은 가뿐이지. 팔콘이 무작정 힘만 쓰는 두목인 줄 아냐? 타이거? 그건 누구야? 이름도 못 들어봤네.” 카셀은 상대를 너무 자극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그들은 조금 주눅이 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멍청한 도적들이라도 급조한 거짓말로 오래 속일 자신은 없어, 그는 행동을 더 빨리 했다. 그는 라우레의 옷과 자신의 옷을 바꿔입기 시작했다. “뭐 하냐?” 한 명이 멍청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옷 갈아 입는다.” “왜?” “일일이 설명해 주랴? 내가 너희들 구역을 들어온 건 정말 미안한 일이다. 사실 니들이 나를 공격해도 할 말은 없어. 하지만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안 팔콘이 내가 죽은 걸 알면 나 같은 바보 같은 부하라도 챙기는 그 분 성격상 여길 가만 두지 않을 거다. 나도 아무 말 안 할테니 제발 너희들도 아무 말 하지 마. 이 옷? 이제까지 쫓아온게 아까워서 그런다. 이 옷 입고 이 녀석들 동료를 만난 다음, 난 그 녀석들을 죽이고 지금까지 고생한 대가를 얻는다, 그거야. 알겠냐?” 그는 모닥불에 구워진 소시지를 들었다. 다행히 모두 네 개였다. “자, 이거 먹고, 사과하는 대가로 이 피리도 가져.” 그는 어차피 빼앗길 물건이 될 라우레의 피리를 선심 쓰는 척 그들에게 내밀었다. 금이 가고 이마 부분이 녹 슨 헬멧을 쓴 산적이 무척 고마워 하며 받았고 다른 이들도 방금 구워진 소시지를 얼른 받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근방에 맛있는 냄새를 뿌리고 있는 이 소시지를 빼앗기 위해 라우레를 죽이기라도 한 것 마냥 허겁지겁 소시지를 씹어 삼켰다. “그런데, 어디로 가?” 헬멧을 쓰고 있는 산적이 물었다. “패잔병들의 마을.” “거긴 너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면 위험해. 모든 사람을 받아줘도 도적들은 안 받아주거든.” 그는 신경 써주는 척 말했다. 카셀은 대답 대신 자신이 입은 유랑 시인의 복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도적은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스스로 한 질문에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꼴이었다. “그럼 밤일 계속해. 수입이 좋으면 오는 길에 좀 나눠줄 테니,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도해봐.” 카셀은 마무리로 손을 흔들며 그들을 벗어났다. 하지만 지나치게 잘 속은 탓인지 그들은 뭔가 더 잘해주려고 했다. 아니면 수입을 나눠준다는 말에 혹 했던가. “우리가 안내해주지.” “뭐?” “가는 길에 우리 동료들을 만나면 그 차림도 위험해. 우린 혼자 돌아 다니는 여행자는 가리지 않거든. 칼을 들었든, 피리를 들었든.” “저런, 팔콘과는 다르군.” 카셀은 거절해야 하나, 이 위험한 도움을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했다. 가급적 뿌리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한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거절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고, 또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밤의 산길은 아주 위험했다. 언제 습격할지 모르는 늑대를 피해 다니기보다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게 더 안전한 법이다. “좋아. 주는 도움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결정적으로 그는 ‘패잔병들의 마을’이라는 곳의 위치를 몰랐다. 카셀은 그들을 마지막까지 속이기 위해 더욱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고 카셀은 이 도적들이,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난관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의 멍청함으로 미루어 위험하되 차라리 라우레보다 속이기 쉬운 상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나타난 위험 때문에 정작 자신이 전쟁터에 누워있던 내내 걱정했던 근본적인 위험은 간과하고 있었다. 그 위험은 도적들만큼이나 순식간에 찾아왔다. ‘칼을 쓸 줄 알았더라면......’ 카셀은 생각했다. ‘칼을 쓸 줄 알았더라면 노래부르는 시인을 상대로 거짓말 할 필요도 없었을 거야. 칼을 쓸 줄 알았더라면 이 네 명을 모두 죽이고 친절을 베풀어준 은인의 옷을 벗겨 입을 필요도 없었을 거야. 칼을 쓸 줄 알았더라면......’ 오늘 그 전쟁터에서 칼을 휘둘렀을 자신의 모습이 퍼뜩 떠오르자, 그는 생각을 고쳤다. ‘......어줍잖게 칼을 쓸 줄 알았더라면 지금 살아있지도 않겠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루 종일 후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를 쫓아다니던 생각은 더욱 그를 처량하게 했다. ‘애초에 마을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달 밝은 밤길을 걸으면 잡생각이 많이 나는 법이었다. 특히 조심성 없이 칼 휘두르는, 멍청한 데다 성질 더러운 산적들을 등뒤에 두면 누구라도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겠지. “그런데 이름이 뭐요?” 그를 뒤따르던 한 명이 물었다. “카엘.” 그는 가짜 이름을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산적들의 신상명세를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고, 대화가 길어져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날 것이 걱정되어 대답 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은근히 자신의 이름을 물어봐 주길 바랐는지 한참 동안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카셀은 무시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산적들끼리 뭐라고 뒤에서 수근거렸는데, 무슨 내용인지 들리지 않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타이거 두목은 언제고 팔콘이라는 사람과 만나길 원했지. 우리 두목은 이런 곳에 썩어있을 정도로 작은 그릇이 아니거든. 용병 노릇을 했다면 지금쯤 어느 쪽 백작에 붙어 있던지 한 자리 하고 있을걸. 하지만 용병이 싫으니 산적을 하는데, 이왕 할 거 크게 하자는 생각에 팔콘과 만나 힘을 합쳐볼 생각을 하시더라고.” 길에 자란 풀을 휙 휙 베며 도적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카셀은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대꾸해 줄까? ‘우리 두목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그건 너무 억지 티가 났다. ‘언제 한 번 내가 두목한테 말해보지.’ 그건 대화가 길어지게 만들 소지가 있었다. ‘피곤하니 나중에 이야기 하자.’ 대화를 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산을 벗어났고 갈림길이 나왔다. 그는 순간 당황했다. 당연했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몰랐고, 안내를 해준다던 산적은 등뒤를 따라오기만 했다. 당당하게 ‘패잔병들의 마을’에 간다고 해놓고, 길을 모른다고 둘러대는 건 앞뒤가 안 맞았다. 밤길이라 잘 안 보인다고 해야하나? 갈림길이 가까워 오며 점점 느려지는 그의 걸음에 맞추어 산적들도 걸음을 늦췄다. 그들은 카셀보다 빨리 가지도 않았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문득 그들이 안내하기 위해 따라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등골을 훑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느닷없이 목덜미라도 찌르려나? 이들을 너무 얕보았다. 물론 산적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런 낌새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고맙게도 갈림길에는 표지판이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표지판에는 엉성하게나마 화살표로 ‘패잔병들의 마을’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절벽’이라고 쓰여있었다. 평소에 봤으면 형편없는 농담이라며 웃었을 표지판이었지만, 지금은 위기 속에 멋지게 나타나 준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는 고민한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지판을 따라 패잔병들의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갈림길에서 다섯 걸음도 걷지 못하고 산적들이 불렀을 때도 그는 그 구원의 손길이 사실은 속임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이, 카엘.” “뭐요?” “그 쪽은 절벽이야.” “아, 그래?” “음, 우리도 처음에는 많이 속았지. 그리고 자네도 속는군.” 카셀은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산적들의 얼굴에는 요놈 잡았다, 하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레이도그 일당들이 길 모르는 여행자를 잡으려고 만들어 놓은 속임수였는데, 여기 ‘처음’지나가는 녀석들은 다 걸리더라고, 네 놈을 포함해서.” 활을 짊어진 녀석이 천천히 화살을 꺼내고 있었고, 다른 녀석들도 낡은 칼을 들었다. 닦지 않은 피가 달빛 속에서도 검게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카셀은 당장 떠오르는 거짓말이 없었지만, 특별히 당황하는 빛을 내비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괜히 입을 열면 말을 더듬으며 얼버무리는 말만 토해낼 것 같았다. ‘침착해라, 카셀. 의외의 급소를 찔렸지만, 이 놈들은 기본적으로 멍청한 놈들이야. 속일 수 있어. 이런 곳에서 죽지 않아!’ 카셀은 모기에 물린 듯 목을 긁적였다. 그리고 팔짱을 끼었다. “좋아, 난 무기도 없고 너희들의 공격을 맨손으로 받아야 할 형편이지. 길을 잘못 든 건지는 확인해 볼 때까지 모르겠지만, 싸움을 피하지는 않겠다.” 이게 왠 미친 소리냐? 그는 속으로 자기 말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굳이 벌어진 일을 수습하거나 토해낸 말을 주워 담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내뱉은 말은 비록 앞뒤 안 맞는 헛소리였을 지라도 그의 당당함에는 도적들도 주저했다. 달빛 아래 다섯 그림자는 오랫동안 대치 상태를 이어갔고, 카셀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난 ‘절벽’으로 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든지 등을 한 번 찔러보든지 알아서 해.” 카셀은 허풍으로 판돈을 부풀려 놓은 도박에서 히든 카드를 보여주는 심정으로 걸어가버렸다. 도적들은 대체 이 어처구니 없는 자신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런 행동이 옳았는지, 과연 그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 성공했을 지에 대한 궁금증 역시, 시인의 친절에 다한 진실과 함께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이, 카엘. 기다려 봐.” 도적 한 명이 말했다. 그 때 갈림길 반대편 숲 속에서 뛰쳐나온 말 탄 기사가 긴 칼로, 활시위에 화살을 먹인 산적의 목을 날려버렸고, 뒤따라 나온 세 명의 기사가 각각 다른 산적들을 창으로 찔렀다. 그들의 비명이 터졌지만 길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네 구의 시체가 표지판 아래 갈림길에 늘어졌다. 더움 속의 기사들은 말을 돌리더니, 산적들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 중 한 명을 말뚝을 박아놓은 듯 서 있는 카셀 쪽으로 다가왔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창을 밑으로 늘어뜨리고 공격할 의사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달아날 길을 미리 차단하고 있었다. 카셀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겁을 집어먹었다. 하룻밤 새에 속였던 두 그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몸을 떨었다. 차마 거짓말을 시도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든 건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의 모양이었다. 빛이 있다면 문양까지 선명하게 보였을 테지만 낮의 전투에서 아군을 헤집고 다니던 그 끔찍한 기사들과 같은 갑옷의 실루엣만으로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검은 사자 백작의 라이온 기사단이었다. 처음에는 왜 하필 그들이 이 순간에 나타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낮의 전투에서의 승자가 마음대로 필드를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당연했다. 도적들을 만난 것이 예상치 못한 불행한 우연이었던 것이지, 적병을 만나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순서의 차이만 있었지, 오히려 지금 것은 당할 일을 당하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나머지 기사들도 카셀의 길을 막고 있는 기사의 옆으로 다가와 마을 세웠다. 한 병이 물었다. “너는 이 도적들과 무슨 관계냐?” 아마 ‘너는 붉은 장미 백작의 잔당이냐?’ 라고 물었어도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얼어 있었고, 거짓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잡혀 있었습니다.” “유랑 시인이냐?” 그는 그제야 자기가 입고 잇는 초록색 옷이 전쟁터에서 조차 칼을 맞지 않을 방패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옷을 입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얼굴을 구별할 방법이 없는 어둠 속에서 그도 도적들과 같은 꼴을 당했을 것이다. 우선 그는 엉뚱하게 이 옷을 입게 해 준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렇습니다. 꼼짝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놀랍군. 이 놈들은 자기 사냥감을 살려두는 법이 없는데...... 네가 유랑 시인을 죽이고 옷을 빼앗아 입은 같은 일당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도적들과 달리 그 기사는 상황 판단이 아주 빨랐다. 다른 기사들도 투구 속의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압박했다. 카셀은 그들이 쉽게 믿지 않자, 냉정을 찾기 위해 애썼다. 다른 기사가 말했다. “일단 그 복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밤 중에 도적들이 들끓는 길을 떠돌아다니는 시인이라는 것도 우습군. 네가 유랑 시인이 맞다면 악기를 연주할 줄 알겠지. 증명해 봐라.” “제 악기는 피리입니다. 하지만 저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럼 시체를 뒤져보면 나오겠지.” 기사는 조금도 속아주지 않았다. 카셀은 아찔해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그럼 되겠군요.’ 라며 중얼거리고 시체의 몸을 뒤졌다. 그리고 도적의 품에 넣어둔 피리가 기사의 창에 관통되어 두 동강이 나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만 만세를 외칠 뻔 했다. 하지만 울 것 같은 얼굴로 두 조각 난 피리를 기사들 앞에 내보였다. “내 창 때문이군. 미안하게 됐네.” 기사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목숨 값 치고는 싸다고 해두죠.” “그럼 악기는 됐고, 노래나 한 곡조 뽑아봐라. 밤새 이 곳을 돌아다녔더니 피곤하군.” 부러진 피리가 긴장감을 떨어뜨려 줬는지, 다른 기사들은 그 기사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했다. 그는 저녁에 들었던 라우레의 노래를 되짚어본 후, 천천히 운율을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자기들이 벌였던 전투의 묘사가 나오자 그들은 상당히 재미있어 했다. 겨우 더듬거리는 일 없이 노래를 끝마쳤다. “어떻습니까? 저는 이 노래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기회도 못 갖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카셀은 일부러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꽤 재밌는 노래군. 하지만 그 노래는 오늘 전투를 겪은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노래야. 네가 적병인데 지금 위기를 벗어나려고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말하자 다른 기사들이 피식 웃었다. 처음에 카셀은 정체를 들통난 줄 알고 뜨끔했다. 그러나 곧 그 기사가 한 곡을 더 듣길 간접적으로 요청한 것임을 알고 안도했다. 모름지기 기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랑 시인의 노래를 한 곡 들을 때마다 최소한 은화 하나 정도는 떨어뜨려주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목숨을 담보하고 있는 이름없는 유랑 시인에게 노랫값을 주기에는 아까웠을 터였다. 그렇다고 한 곡 더 들려달라고 부탁하기도 애매하니 그런 식으로 돌려 표현한 것뿐이었다. 그 기사들은 카셀의 첫 번째 노래에 이미 속아넘어갔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만든 노래 중 그나마 평이 좋았던 노래였습니다. 제목은 ‘장미 꽂은 사자’입니다. 가락이 있으면 좋겠는데, 보시다시피 피리가 부러져서......” 그는 양해를 구한 후 라우레의 익히기 쉬운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 후렴 부분을 부를 때는 한 기사가 어깨를 들썩거릴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너무 노골적으로 두 백작을 놀리는 노래군. 내가 자네라면 절대 귀족들 앞에서 그 노래를 부르지는 않겠네. 하지만 아주 흥겨운 노래야.” 기사는 웃으며 멋쩍게 칭찬했다. “어디 가는 길이었나?” “패잔병들의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말에 타게. 마을 입구까지 데려다 주지. 노래 들은 값 대신이라면 어떨까?” 그들은 마침내 딱딱한 목소리에서 벗어나 웃음을 터뜨렸고, 카셀도 겨우 안도했다. 2. 패잔병들의 마을 라이온의 기사 네 명은 카셀을 패잔병들의 마을까지 데려다 준 후 잠시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밤이라 마을 전체 정격을 볼 수 없었지만, 큰 마을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름달이 하늘 천장에 붙어있는 늦은 밤에도 불이 켜져있는 집이 많았다. 대부분 수집이었는데, 기사들이 망설이는 것은 수집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그 웃음소리가 그들에게 술 맛을 떠올리게 해준 모양이었다. “한 잔 정도 하고 가도 되지 않을까?” 한 명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되겠지?” 다른 한 명도 망설이며 말했다. “하지만......” 군에서 알면 안 좋은 소리 들을 거야, 라는 말이 혀끝에서 걸렸다가 도로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넷은 토의 없는 긴 고민 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술집 앞으로 말을 몰았다. 술집 앞에는 덩치 큰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소매 없는 얇은 옷에 털이 덥수룩한 가슴을 드러낸 남자는 기사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쉬고 갈 거요?” “아니, 한잔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들의 마을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기사들은 투구를 벗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끝난 인연이지만, 그들이 가라고도 하지 않았고 간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도 놓치는 바람에 카셀은 하는 수 없이 까라 들어가야 했다. 게다가 그들은 기어이 그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의자에 앉혔다. “우린 한 잔 하고 갈 건데, 자네는?” “여기서 쉬었다 가야겠죠. 그리고 다음 여행을 준비하렵니다.” “좋아, 같이 한 잔 하지. 맥주?” “저는 돈이 없습니다.” “노래 값이라고 생각해.”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바로 갔다. 카셀은 어색하게 웃었다. ‘훔친 노래 치고는 비싸게 팔아먹었군.’ 카셀은 기사들과 눈을 마주할 자신도 없고, 음식 찌꺼기가 남아 있는 탁자를 내려다보기도 뭣 해서, 괜히 술 집 안을 훑어보았다. 늦은 밤에 왜 집에들 안가고, 남아서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바로 옆에 있는 사람 말도 잘 안 들릴 정도로 요란했다. 손가락 하나 길이 만한 코에 혹이 달린 노인과 지저분한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남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 지 한 마디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웃어댔고, 한 구석에서는 칩으로 쓰는 나무 조각을 탁자에 잔뜩 올려놓은 채 카드 도박에 열중하는 무리도 있었고, 용병 무리도 있었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주문이라도 이우는 듯 밥을 먹는 이상한 무리도 있었다. 아무도 다른 테이블의 손님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단을 눈 여겨 보지도 않았다. “여기 맥주 다섯 잔.” 기사가 바에 은화 한 닢을 내놓자, 밖에 세워놓은 뚱뚱한 남자만큼이나 덩치 큰 남자가 동전을 받아간 후, 금방 파인트 잔에 맥주를 가득 내왔다 그의 팔뚝에는 불꽃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고, 얼굴에는 커다란 흉터가 코 끝에서 턱 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기사가 내 준 맥주 잔을 양 손에 치켜들 때, 바에 앉아 술을 마시던 한 초췌한 남자가 그 기사를 발견하더니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놀란 눈을 한 그 남자는 허리에서 황급히 칼을 꺼내 기사를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기사는 흥미 없는 듯 맥주잔도 내려놓지 않고 말했다. “붉은 장미 군의 패잔병이냐?” 떨리는 칼을 든 그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나, 나는......나는......” “그 칼로 몇 명이나 죽여봤나? 두 자리 수 아래라면, 그냥 마시던 술이나 마셔. 필드에서 만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고.” 기사는 픽 웃고는 맥주잔만 들고 일행이 있는 탁자로 되돌아왔다. 칼을 꺼내든 패잔병은 주위의 비웃음을 받으며 멍청히 서 있다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맥주잔을 하나씩 치켜든 기사들은 단번에 잔을 반쯤 비우더니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냥 갔다면 내일까지 후회했을 거야.” 한 명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한 잔을 비우는 데는 오래 시간이 거리지 않았고, 그들은 기어이 한 잔씩 더 마시기로 했다. ‘딱 한 잔만’의 다짐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카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씹힐 것 같은 걸쭉한 맥주를 천천히 넘겼다. 술기운이 좀 올랐는지 그들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무겁던 입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팔콘이란 놈을 잡아야 하는거야, 말아야 하는거야?” “꼭 우리가 처리할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귀찮은 건 사실이잖아.” “난 어지간하면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놈들이 기사단을 직접 공격한 것도 아니고.” “것도 아니던데. 요즘은 과감하게 공격도 한다더라. 들은 얘긴데, 그 놈들 작전 쓰는 게 일개 도적집단이 아니라더라고. 우리가 피해 당한 일은 없지만.” “그레이도그 잡았다고 우리가 부러워하기라도 해야하나? 부하들한테 길을 막으라고 한 다음에 도망쳤다던 걸.” “나도 들었어. 하지만 장미 기사단에서 직접 퍼트린 소문인데 사실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 누구 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도적단이 전멸했다는데 증명할 사람도 없고, 그레이도그 목을 일 주인이나 매달아 놨다던 소문도 있던데?” 그 말을 듣고 카셀은 팔콘이 아니라 그레이도그를 사칭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했다. 넌 네 두목이 처형당했다는 소문도 못 들었냐? 에라, 죽어라......과연 그 도적 놈들은 그런 말이라도 했을까 싶었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 되는 불행을 탓했는데, 사실은 운이 아주 좋았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문제는 지금 장미 기사단의 평판이 아주 좋아졌다는 거지.” “인기는 전쟁이랑 상관 없어. 그리고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떠들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치안 관리는 우리가 하는게 아니잖아. 아, 그보다 요새 로즈 기사단이 한 곳으로 집결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크게 한 번 벌어질 것 같지 않냐? 우리도 조만간 소집된다더군.” “용병들 데려다 훈련 시킨 로즈 기사단이 모여 봤자지.” “요새는 그렇지도 않아. 로즈 기사단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놈들이 모였대. 두 달 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우리 쪽 보병 이백 명이 그 쪽 열 기 정도 되는 기사단에게 전멸 당했다더군.” “아무리 보병과 기마병의 전력 차가 있다고 해도 어디서 그런 말도 안되는!” “정말이야. 비밀을 유지하라고 상부 지시까지 있었어. 기억 안나? 거, 왜......” “어이!” 이야기의 도가 지나쳤는지 한 기사가 그 말을 꺼낸 기사의 말을 막았다. 무론 주위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뭐든지 듣고 이야기로 떠들어 댈 유랑 시인이 앞에 있었다. 카셀은 그들의 시선이 자기한테 꽂히는 걸 보고 어른 변명했다. “저는 제가 직접 본 현장 외에는 이야기나 시로 만들지 않는 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왜 그런 위험한 곳에 단독으로 있었겠어요.” 취하기도 했거니와 그들 스스로도 그리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어깨만 으쓱하고 넘어갔다. 글들이 세 번째 잔을 시킬 것이냐를 두고 고민할 때, 카셀은 어떻게 이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갈 것이냐를 두고 고민했다. 그가, 어서 열고 나갔으면 하는 술집 문을 바라보는 절묘한 타이밍에 마법처럼 문이 벌커덕 열리면서 한 여자가 뛰어들어왔다. 등쪽으로 길게 땋은 옅은 검은 머리에 어지간한 남자보다 키가 컸는데, 거의 온몸을 감싸는 갈색 망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길게 다리를 뻗을 때마다 힐끗 보이는 망토 안의 하얀 종아리를 보고, 떠들어대던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침침한 어둠 속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건만 그녀의 외모는 모두의 시선을 잡아둘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에게 집중된 남자들의 눈동자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혹시 칼 못 봤어? 이 집에 두고 온 것 같은데.” 주인은 느릿느릿 다가와 무표정한 어구로 대꾸했다. “우리는 분실물 취급 안 해.” “그건 딱 보면 아는 물건이야.” “어떻게 생긴 건데?” 그녀는 뭐라고 설명할까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손잡이에 푸른 돌이 하나 박혀있는데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거야.“ “마법 검이라도 되나? 본 적 없어. 만약 정말 그런 물건을 내 가게에서 잃어버렸다면 그냥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 보석 박힌 칼을 누가 얌전히 주인 찾아주겠어?” 주인의 불친절함에 화가 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의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땋은 머리가 시선의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모두들 자기 자리에 품질 좋게 생긴 칼 안 떨어져 잇나 살펴봐. 어서! 다들 내 이야기 들었잖아. 그건 아무나 가지면 되는 물건이 아니야.” 반사적으로 탁자 밑으로 고개를 속인 친절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예 살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슨 명화라도 감상하듯 그녀를 바라보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어떤 시선은 노골적이었고, 어떤 시선은 장난기가 넘쳤다. 라이온의 기사들은, 가게의 다른 손님들처럼 조소를 던지거나 그녀를 구경거리 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사도를 발휘하지도 않았다. 진지하게 그녀를 상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카셀은 왠지 그녀가 불쌍하여 힐끔거리는 시선으로나마 탁자 밑을 살펴주었다. 하지만 지저분한 고기 찌꺼기와 먹다 남은 빵 조각, 마루 바닥에 난 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코를 벌름거리는 용기있는 쥐 한 마리만 발견했다. “젠장, 내가 직접 뒤져본다? 훔쳐간 놈 있음 죽어! 각자 무기들 꺼내라고 하기 전에 좀 도와주면 안 되냐?” 그녀의 말에 술기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용병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무기라면 두 개가 잇는데, 낮에 쓰는 걸 꺼내야 돼, 밤에 쓰는 걸 꺼내야 돼?” 그의 농담에 손님들은 술집이 떠나갈 정도로 웃어댔다. 그녀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키운 티가 역력했다. “둘 다 써 본지 왜 됐으면서, 어디 뒀는지 기억이나 해?” 누군가의 농담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자, 다들 진정하고 저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각자 무기들 꺼내보라고. 근데 밤에 쓰는 내 무기는 좀 커서 꺼내기가 힘든데, 기다려 봐.” 술이 취할 대로 취한 한 명이 킥킥대며 일어나 바지를 내리려고 했다. “오냐, 어디 한 번 까 봐라. 내 기준에 안 맞는 길이면 잘라버릴 테니까.” 그녀의 강렬한 몇 마디에 바지를 내리려던 남자는 놀라 굳어버렸다. 일부는 죽는다고 웃어댔으며, 일부는 그녀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술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잠깐 동안 직접 술집 구석을 두리번거리더니 나가버렸다. 취객들은 잠시 어수선한 분위기로 방금 벌어졌던 이들을 서로 떠들어대거나 도로 자기들의 얘기로 넘어갔다. 술집은 원래대로 소란스러워졌다. 카셀은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에서 눈을 돌리고 입맛을 다셨다. 기사들은 말없이 남은 술을 비웠다. 일부 손님들은 서둘러 남은 맥주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 짧고 용솟음치는 욕구를 참지 못하는 두 놈은 방금 나간 여자를 잡아보자며 의기투합해서 술집을 나갔고, 또 다른 손님은 갑자기 볼일이 생각났다며 다른 술친구가 잡아 끄는 것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채로 밥을 먹던 일행은 아직 덜 비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쪽 테이블에서는 카드 도박을 하던 녀석들 중 하나가 다른 한 명의 멱살을 잡더니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쳤다. 소란스러움을 틈 타 속임수를 썼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얻어맞은 녀석은 아니라고 오히려 발끈해서 서로 멱살을 잡았다.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싸움을 부추겼고, 가게 주인은 신경도 안 썼다. 기사들은 티격대는 둘의 싸움을 시큰둥하니 구경하더니, 술 맛이 떨어졌다며 두 잔째에서 털고 일어났다. “저는 이 곳에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카셀은 반쯤은 진심으로 기사들에게 말했다. 기사들은 억지로 아쉽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이미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중에 어디선가 자네 노래를 들을 일이 있겠지?” “어딜 가나 제 노래를 들을 정도로 제가 유명해진다 해도 오늘받은 대가만큼 큰 노래값은 벌 수 없을 겁니다.” “그거 아주 기쁘군.” 기사들은 카셀의 예의 바른 인사에 뿌듯해 했다. 그는 마저 배웅이나 해주고 깔끔하게 보내버리려고 그들과 같이 술집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쨌든 이제부터 걱정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이 밤을 보낼 것인지, 그 후에는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게 오늘 겪은 이 많은 에피소드들보다 더 걱정되는 부분이긴 했다. 마구간에 말을 들이는 또 다른 여섯 명의 기사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게 더 걱정이었다. “이것 봐라?” 카셀의 인사를 받고 몸을 돌린 기사는 어둠 속에서 검게 보이는 붉은 망토를 두른 여섯 명의 기사들을 발견하고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피식 웃었다. 옆에 있는 다른 기사들도 갑자기 손목을 풀며 뒤로 몇 결은 물러났다. 붉은 장미 백작의 기사단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친구들께서 한 잔씩들 걸쳤나?” “그 쪽도 생각 있어 온 거 아닌가?” 카셀의 앞에 있던 라이온의 기사가 기세 좋게 한 마디 했다가 그들의 옆에 술집에서 모욕을 당한 패잔병이 동행으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셀을 비롯한 라이온의 기사들은 마을의 수많은 술집 중 하필 이 자리에서 로즈 기사단을 만난 게 우연이 아님을 금방 알았다. “저 놈들입니다. 우리 군대를 무시하고 무참히 살해한 놈들이죠.” “전쟁 중에 사람 많이 죽이면 그건 살인자가 아니라 영웅이지. 넌 옆으로 빠져 있어, 패잔병!” 라이온 기사단 중 한 명의 험악한 말에 지저분한 붉은 장미 백작군의 패잔병은 어깨를 움츠렸다. 양측 기사들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더니 별로 대화할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서로 칼을 꺼내 들었다. “술 깨 때까지 잠시 기다려줄 용의도 있는데, 어떤가?” “너희들이 한 잔 하고 올 때까지 기다려줄 용의도 있다. 죽기 전에 마지막 술 몇 모금은 해줘야지 않아?” 막 칼을 휘두르려 할 때 술집 앞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버럭 소리질렀다. “싸우고 싶거든 대로 한 복판에서 싸우시오. 우리 가게 앞에서 싸우지 말고.” 술집 관계자는 이미 그런 이을 수없이 겪어봤는지 열 명의 기사들을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기사들도 그 말에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그들도 밝은 곳에서 싸우길 원했다. 길을 지나던 많은 취한 사람들이 싸움이 벌어지는 분위기를 보고 모여들었다.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카셀은 엉거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첫 번째 기사가 칼을 휘두르자 어른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네 명의 기사들은 다른 여섯 명의 기사들을 맞아 낮에 있었던 전투의 연장을 시작했다. 카셀은 그 결말을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드물게도 이 마을에서 불이 꺼져 있는 몇 안 되는 두 채의 집 사이, 어두운 골목 안으로 카셀은 몸을 숨겼다. 이제 칼 부딪히는 소리도 기사들의 고함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목소리는 밤이 깊었는데도 여기저기에서 꽤 많이 들려오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도 힘이 풀려 그는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이렇게 힘든 하루라니! 어딘가 푹신한 침대에 얼굴부터 처박아 숨도 못쉬고 죽어도 좋을 정도로 깊이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관에서 쉴 돈이 없었다. 맥주 네 잔에 은화 한 개를 받는 다면 적어도 은화 네댓 개는 있어야 하룻밤 쉬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밀농사 지어봐야 두 가마니에 은화 스무 개, 또는 금화 한 개 받는데, 이런 번화한 마을의 물가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어도 별로 불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주위에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도, 쌀쌀한 날씨도 피곤함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 동안 힘든 군대 생활 덕에 이런 악조건 속에서 자는 것은 익숙했다. 그는 금방 잠들었다. 자세가 조금 불편하여 몸을 돌릴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목소리였다. “와이부.....엔......” 느릿느릿 그를 잡아당기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입트 주우 무......” 이건 뭔 소리냐 싶어 눈을 뜨자, 벌써 날이 밝아있었다. 황당함에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는 건 금방 잊어버리고, 그는 희미한 푸른 새벽빛을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꿈이 아니었다. 진짜 아침이었다. 낮잠 자고 일어난 것 마냥 몸은 피곤하고 눈은 묵직했다. 소란스럽던 소음도 사라지고, 술을 마신 후 취해 쓰러진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의 옆에도 누군가 칼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가난을 자랑처럼 온 몸으로 보여주는 부랑자였다. 자기 전에 주위가 하도 어두웠던 터라 자신이 먼저 와서 있었는지, 그 남자가 먼저 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다른 사람이 자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놀랐다. ‘이 사람이나 나난 생각해보면 다를 것도 없는 처지잖아.’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숨 더 잘까? 어제 그 기사들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이젠 피곤해 죽겠어. 다 관두자.”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귀에 익었다. 그가 앉아있는 골목 옆으로 지나가는 그 여자는 어젯밤 술집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던 장본인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다른 두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모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거구들이었다. “마스터가 알면 우린 죽을 거야. 이건 한 나라의 명예가 달린 이이고, 마스터는 우리를 믿었기 때문에 그 칼을 맡긴 거야. 그런데 잃어버렸어. 나는 이 마을에 있는 술집이란 술집은 다 뒤졌는데도 못 찾았고, 지금은 졸려서 죽을 것 같아.”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살 수 잇는 방법이 하나 있지. 칼을 잃어버린 사람은 로일이니까 모든 잘못은 그 녀석에게 있다고 하자. 마스터는 연대 책임을 안 물으니까 로일만 죽고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런데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어?” 옆에 잇는 남자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던멜과 함께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 중에 칼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나 하고 체크하고 있을 것야. 별로 소용 없겠지만.” 다른 한 남자가 상대적으로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로일만 죽여 버리라는 건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우선 나는 잠을 자야겠어. 안 그럼 내가 죽을 거야.” 여자가 말했다. “마을 전체를 들쑤셔놨어. 사람들이 우리가 뭘 찾아다니는 건지 알 지도 몰라. 이건 우리가 조금 경솔했어.”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가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 칼날이 검단 이야기는 안 했어. 어지간히 그 쪽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모를 거야. 게다가 알면 좀 어때? 정체도 모르는 암살자들한테 공격당한 데다가, 가이드가 죽었고, 우리는 보검을 잃어버렸어. 이 이상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있냐? 일어나면, 난 집에 가버릴 거야. 게다가 위가 누군지 아는 놈들이면 위를 건드릴 수나 있겠어?” 그녀의 한숨 섞인 한탄이 점점 멀어지면서 카셀은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슬쩍 들었다. “아니지. 보검을 잃어버린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들이라면, 사람들이 믿을......” 그 뒷말은 안 들렸지만, 그는 하얀 늑대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려 죽겠다면서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녀와 양 옆에 호위하듯 서 있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혹시나 하고 그들의 외모를 봐두려고 했으나, 곧 카셀의 시야에서 벗어나버렸다. “저 여자가 뭐라고 그런거야?”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크랜드에는 그 이름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기사단이 세 개가 있었다. 카넬로크의 드래곤 기사단, 이로피스의 왕실 기사단, 아란티아의 울프기사단이 그것이었다. 그 중 아란티아의 기사단은 그 위력을 역사상 단 한 번만 보여주었음에도 수많은 검사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었다. 상인들의 과장 섞인 소문에 의하면, 몇 년 전 새로운 울프 기사를 선발하기 위한 테스트를 치렀는데, 참가한 인원만도 천 명이라고 했다. 그 중 백 명도 안 뽑았다니, 어느 정도 뻥튀기한 얘기임을 감안하더라도 그건 대단한 수치였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울프 기사단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들로 이루어진 정예가 있는데, 그게 하얀 늑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안다 해도 그것은 십 년 전에 활동했던 과거의 인물들일 뿐, 지금의 하얀 늑대들은 본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특히나 카모르트에서는. 그는 눈물이 말라 뻑뻑한 눈을 비비다가 자리에 앉았다.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었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얀 늑대들 중 여자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아니 그보다 대체 그 이름만으로 가슴 벅찬 기사들이 왜 카모르트에 있단 말인가? 카셀은 갑자기 그 비현실적인 일이 눈앞에 나타난 실제 사건임을 인지했다. 잠깐 잊어버리긴 했지만, 당연히 그의 꿈은 기사였다. 그리고 방금 기사의 저점이라 할 수 잇는 세 명이 코 앞에서 지나갔다. 카셀은 그들을 따라가 ‘나도 당신들을 따라 가게 해주세요, 저 밥 되게 잘 해요.’ 라는 말로 매달려 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맙소사,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자고 일어난 새벽의 냉기에 카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시 차가운 맨 땅에 앉아있자, 차츰 그는 냉정을 되찾았다. 조그만 마을의 이름 없는 용병조차 인정해주지 않은 검술로 그런 기사단에 낀다는 생각도 우습고, 거기에 달라붙기 위해 생각해 낸 자신의 발상에서는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름만으로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 기사가 자신의 꿈이었음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가 어렸을 때 환상을 품은 기사란, 어제 맥주 한 잔의 친절을 베풀어준 라이온 기사단 같은 게 아니었다. 직접 보지 않았어도 그 위력에 겁에 질릴 만큼 유명한, 그러니까 익셀런 기사단 같은 것이었다. 칠칠치 못하게 칼 잃어버리고 그거 찾아 다니는 용병처럼 보이던 그녀였는데, 아란티아의 그 유명한 하얀 늑대를 언급하자마자 카셀은 그 평가를 바꾸었다. 명성이란 그런 것이었고, 그는 그런 명성을 가지고 싶었다. 그것이 허황된 꿈임은 알고 있었다. 그는 기사로서의 어떤 재능도 없었고 운도 없었다. 어제만 해도,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만나 공격 당하고 살기 위해 그들을 속이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잠들었었다. 지금도 이슬 젖은 바닥에서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있는 꼴인데, 무슨 기사의 꿈을 꾸겠는가? 그는 현시로 돌아왔다. 여전히 새벽의 날씨는 자다 깬 몸으로 버티기 괴로울 정도로 쌀쌀했다. 옆에 누워있는 부랑자도 추운지 몸을 떨며, 안고 있는 칼이 베게라도 되는 것처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무리 봐도 기사나 용병 같지 않은데 칼 하나는 아주 그럴 듯 했다. 그는 멍청히 부랑자의 칼 손잡이에 박혀있는 푸른 돌을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새벽빛을 반사하는 고급스러운 빛깔이 보통 보석이 아니었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그 칼의 모양새가 어제 만난 여자가 묘사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몸이 굳어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 물건이 눈앞에 있다는 것에 당황했고, 또한 의심스러웠다. 누군가 자기를 시험하는 못 된 속임수 같았다. 카셀은 그 칼이 정말 ‘그 칼’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고 있는 부랑자 옆으로 다가가 칼 손잡이를 슬쩍 잡아보았다. 가죽 끈이 칼집과 함께 칼까지 묶고 있어 칼날이 뽑히지 않았는데, 손잡이 끝 부분에 하얀 실루엣으로 새겨져 있는 늑대 그림이, 안고 있는 부랑자의 팔뚝 사이로 보였다. 아직 칼날이 검은 색인가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누군가 속이려고 작정하고 만든 모조품이 아닌 이상에야 이것은 그 여자가 찾던 그 칼이었다. 그 여자가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하얀 늑대’라면 그녀의 말로 미루어 이것은 아란티아 왕실의 보검이거나, 아니면 울프 기사단의 캡틴을 상징하는 검일 것이다. 카모르트처럼 국력이 약한 나라에게 있어 이런 칼은 옥새 이상의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주인에게 찾아주자!’ 약간이나마 망설였던 자신을 탓하며 그는 천천히 그 칼을 빼내기 시작했다. 찾아주면 최소한의 대가가 있을지 누가 아나? 아니, 이 정도 보물이라면 생각 이상의 커다란 보상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집 나간 대가로 벌어온 어떤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는 보상. 부랑자는 자고 있는 데도 칼을 단단히 잡고 있어 잘 빠지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당겼다. 그러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부랑자가 갑자기 단검을 들이댔다. 카셀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고 칼에서 손을 뗐다. 부랑자는 반쯤 감은 눈으로 보검을 끌어당기고 단검을 더욱 카셀 쪽으로 밀었다. 카셀은 얼른 두 손을 들어보였다. “이봐, 함부로 남의 물건 욕심 내다가 손가락 잘려나간 내 옛날 친구 얘기나 해줄까?”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덮은 부랑자는 단검을 겨눈 채 다른 쪽 손 손가락을 입 안으로 쑤셔 넣어 어제 먹다 낀 음식물을 빼내더니 트림을 길게 했다. 카셀은 당장 그의 칼도 무섭지만, 금찍할 정도로 지저분한 놈이라는 생각과 이런 놈에게 꼼짝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참으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사가 되고 싶은 꿈에 부풀었는데, 지금은 태어나서 본 중 가장 지저분한 부랑자놈에게 꼼짝도 못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 칼이 어떤 물건인지 아나?” 카셀은 손을 내리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랑시인도 속였고, 도적들도 속였고, 기사도 속였다. 이런 놈 하나 못 속인다면 당장 이런 곳에서 죽어도 아버지께 할 말이 없다. 아, 물론 아버지가 사기꾼이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좀 비슷할 뿐이죠. “비싼 물건이지. 너 같은 칼 한 자루 없는......유랑 시인 따위가 감히 노릴 정도로.” 그는 카셀의 몰골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너 아란티아라는 나라를 아나?” 카셀이 말했다. “나를 무시해? 내가 모르는 대륙의 나라를 대보시지.” 어이구, 그래 잘 났다. “그럼 하얀 늑대도 알겠군.” 카셀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을 노리고 있는 단검은 전혀 개의치 않고. “알지.” “그 기사단의 마크가 무엇인지도 아는가?” “늑대.” “그 칼을 훔칠 때 그 물건을 자세히 살펴 봤나?” 부랑자는 잠시 머뭇거리며 얼른 칼을 살펴보고 다시 카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늑대 그림이 있군. 칼집에.” “칼날에 박힌 보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지.” “그, 그래.” “어디서 주웠나? 밤새 찾아 다녔는데, 못 찾다가 겨우 찾은 게 너였다.” “술집에서......” “마을 입구 들어오는 첫 번째 술집이지?” 카셀은 어제 술을 마셨던 그 집을 언급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내 복장이 이런 것은 비밀 임무 수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를 죽이고 그 칼을 빼앗지 않은 것은 임무 중 사건을 저질러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서야. 사건투성이인 이런 마을에서라도! 그리고 분실물을 주운 죄 밖에 없는 너를 굳이 죽일 생각은 없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그 칼을 돌려 받고 싶었는데, 네가 일어나 버렸고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칼을 쉽게 내놓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나는 내 정체를 말해야 하는데, 만약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너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또 고민을 해야 해. 하지만 네가 입이 조금만 무겁다면 나는 내 정체를 말해주고, 가급적 문제없이 그 칼을 넘겨 받고 싶군. 그럴 자신이 있나?” 부랑자는 자신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하지. 나는 아란티아 하얀 늑대 기사단의 캡틴이자 검의 마스터 퀘이언의 수제자인 카셀이다. 지금 그 칼을 치우지 않으면 나는 네가 들고 있는 그 단검으로 네 목을 그어버리겠다.” 반만 떠있던 부랑자의 눈꺼풀이 큼지막하게 열렸다. 그는 천천히 단검을 밑으로 숙였다. 하지만 카셀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울프 기사단에 캡틴이라는 존재가 있는지 조차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을 모두 통솔함과 동시에 여왕을 수호하며 검의 마스터로 알려져 있는 퀘이언이라는 이름은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물론 자기 나라 왕의 이름도 모를 이런 부랑자들까지 알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단 상대의 기를 꺾을 정도는 충분했다. “좋아, 이제 그 칼을 돌려 주겠나?” “그래도......이 칼은 내가 주웠소. 다, 당신이 진짜 이 칼의 주인이라면 증거를 대보시오.” 그 말이 왜 안나오나 했다! 카셀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 칼 빼 본적 있나?” “아니, 이 가죽 끝은 한 번도 풀어본 적이 없소.” “잘 했어. 나도 그 칼은 어지간하면 쓰고 싶지 않아. 아란티아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빼보지 않았지. 하지만 한 번 칼날을 구경해봐. 칼날이 검은 색인 칼을 보게 될 거다.” 만약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마지막 도박은 성공한다. 아니면, 어떻게 될까? 이 멋진 칼을 든 부랑자의 손에 죽게 되는 걸까? 부랑자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죽 끈을 풀어나갔다. 카셀은 그 모든 것을 시큰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부랑자는 칼날을 뽑기 전에 카셀을 곁눈질했다. 카셀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눈에 힘을 준 것뿐이었지만, 놀랍게도 부랑자에게는 그런 의도로 뵈지 않았다. 칼날을 꺼내지도 못하고, 그는 두 손으로 칼을 내밀고 무릎을 꿇었다. 그는 덜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죽이지 마십시오, 기사님. 당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카셀은 코를 긁적였다. “칼날을 보지 않아도 되겠나? 내 말이 거짓말이라면 그 칼은 자네 것이 되는 거야.” “아닙니다. 어찌 제가 감히 의심을 하겠습니까?” “뽑아 봐. 지금까지 의심해놓고 왜 이제와 확인하지 않는가?”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그저 가난한 떠돌이입니다.” “뽑아 보라니까!” 카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탁입니다, 기사님. 제가 이 칼을 뽑으면 그 칼로 저를 벨 거 아닙니까? 압니다. 제발, 기사님. 제발.....” 부랑자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카셀은 그제야 그가 내민 칼을 넘겨 받았다. 떨리는 가슴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지만 그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약속은 잊지 않겠다. 그리고 이 칼에 너의 피를 묻히고 싶지도 않다.” 카셀은 휙 돌아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을 빠져 나왔다. 그 부랑자가 아직 자기를 쳐다보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는 두려움을 꾹 참았다. 마침내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는 비로소 승리감을 맛보았다. 성공했다. 비록 별 거 아닌 부랑자였지만, 이 정도로 한 사람을 완벽하게 거짓말로 굴복시켰다는 것이 그는 커다란 성취감을 느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칼의 주인을 찾아주고 뭔가 대가를 받아내는 것뿐이다. 아니, 사실 이쯤 되고 보니 대가 같은 건 필요 없고, 그 살아있는 전설의 기사들을 만나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닌 여자의 행방을 묻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그는 그녀가 졸려서 죽을 것 같아 자고 싶다고 말한 점을 생각해 제일 먼저 여관을 찾았다. 세 번째 여관에서 그녀를 맞았다는 여관 주인을 만났다. 그는 반가워하며 물었다. “어느 방에 묵고 있습니까?” “묵으려고 왔는데,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이 와서 데려가 버렸소.” 밤을 샌 게 틀림없는 여관 주인이 졸린 눈으로 대꾸했다. 카셀은 허탈해 했지만, 금방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간다고 안했습니까?” “코홀룬 쪽으로 간다던가? 나보고 말을 구할 수 있냐고 물어서 말 파는 곳을 가르쳐줬소. 묵을 거요, 안 묵을 거요?” “안 묵을 겁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카셀은 밖으로 나와 아무에게나 길을 물어 말 파는 곳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도 그 여자의 행방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미인이니 당연했다. “방금 떠났소. 코홀룬이 목적지랬는데, 잠깐 있어보자, 노르만트까지 간다고 했던가?” “수도로?” “슬쩍 주워들은 이야기요. 일행이오?” “비슷합니다.” 카셀은 적당히 대꾸하고 말똥 냄새 나는 창고 같은 집을 나왔다. 난감하게 되었다. 돈 한 푼 없이 노르만트로 간 그들을 쫓아갈 수도 없고, 코홀룬까지라면 걸어서 간다 하더라도 거리에 널린 게 어제 만났던 타이거나 그레이도그라든가 하는 도적들이었다. 그는 방법을 생각하며 멍청히 걷다가 마을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 낯익은 얼굴은 놀라며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을 불렀다, 옆에 투구는 쓰지 않았지만 망토만으로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덩치 큰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 낯익은 얼굴은 어제 술집에서 스쳐갔던 붉은 장미 백작군의 패잔병이었고, 다른 세 명은 로즈 기사단이었다. 라이온 기사단의 시체는 치우는 사람도 없어 고스란히 수집 앞에 누워있었다. “저 놈이 어제 이 기사 놈들과 같이 있었던 유랑 시인이오.” 패잔병이 말했다. 어제와 오늘을 통틀어 최악의 놈이라고 카셀은 생각했다. 라이온 기사단의 시체들 틈에는 로즈 기사단도 섞여 있었다.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는 유랑 시인이 어느 한 쪽에 붙어있는 것을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아남은 동료라면 당연히 남은 복수를 하고 싶을 텐데, 복수해야 하 대상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남은 분노를 어디에 대고 표출해야 할까? 그런 중에 마침 그 자리에 적절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앞뒤 재지도 않고 칼부터 겨누겠지. 카셀은 너무나도 명료하게 분석해내고 만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탓했다. 모르면 불안하지나 않지. 카셀은 칼을 품에 낀 채 그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상대가 눈앞에 나타났을 경우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최소한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 말씀에 그 상대가 단순한 위협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칼이라도 들었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노려보는 게 좋다고 하셨다. 그럼 상대방은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틈에 위기를 탈출할 방법을 떠올리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그런 충고는 사기쳐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상인을 상대로 하는 작전을 가르친 것이었다. ‘알겠냐, 카셀? 어떤 거래를 하든 불만족스럽다는 듯 찡그리고 있어야 제대로 된 거래를 할 수 있는 거란다. 표정은 칼보다 더 무서운 무기야. 넌 기본적으로 날 닮아 찌푸리면 무서운 얼굴을 하게 되니까 연습하면 쓸만할 거다.’ 상황은 아버지 말씀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카셀의 당황하지 않는 표정과 당당한 자세를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카셀은 의외로 빨리 위기를 모면할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전에 우선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별 거 아닌 정체를 조금이나마 아고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 다음에 그는 패잔병을 노려보았다. 저 녀석은 어제 그 여자가 들어온 걸 봤을까? 아니야, 먼저 나갔어. 그 다음에 그는 로즈의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저자들이 울프 기사단을 알까? 아니, 알 턱이 없지. 대륙의 누구도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해. 그럼 한 번 도박을 걸어볼 만 해! “로즈 기사단.” 카셀이 말했다. 그들은 개의치 않고 접근했고, 패잔병은 뒤에서 떠들었다. “검은 사자 놈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불어라, 이 멍청아. 함부로 남의 편 드는 유랑 시인 같은 건 언제 목이 달아나도 좋다고 떠들고 다니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알라고.” “내 말을 들으시오, 로즈 기사단의 기사들. 당신들은 나를 안내할 의무가 있소.” 카셀은 허리를 쭉 펴고 차분하게 말했다. 칼을 들고 다가오는 데도 그 위협에 굴하지 않는 모습에 로즈 기사단은 잠시 멈칫했다. “무슨 뜻인가?” “어제 조용히 이을 처리하고 싶었는데 당신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물러나야 했소. 하지만 또 나타나버렸군. 그렇게 된 이상 얘기를 좀 하고 싶소.” 기사 중 하나는 피식 웃으며 칼을 치켜들었다. “어제부터 우리는 좀 많은 일을 당했다. 대화는 생략하고 싶군.” “칼로 하는 대화라면 나는 적당히 할 줄 모르오. 아침부터 피를 보고 싶지 않소. 어지간하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소.” 다른 기사가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려는 기사를 저지했다. “넌 누구냐? 평범한 유랑 시인은 아닌 것 같은데.” 카셀은 대답 대신 칼을 들었다. “이제 내가 시험할 차례군. 이 칼을 보고 내가 누군지 모른다면, 나도 이 이상 대화를 길게 하고 싶은 생각 없소. 여기 와서 당신들만 여러 가지 험한 꼴을 당한 건 아니오.” 그 기사는 두 걸음 더 다가와 카셀이 뽑지도 않고 든 칼을 살펴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곧 처음 부랑자의 품에서 칼을 발견했던 카셀과 똑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두 거음 물러났다. “늑대의 문장이군.” “‘설마’라는 생각을 버리면 이 칼이 어느 나라의 기사단을 상징하는 것인지 알 거요.” 치켜들었던 칼을 슬그머니 내리며 그가 물었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 하지만 왜 카모르트에?” 완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지만 그들은 우선 함부로 대하는 말투를 거두어들였다. 패잔병도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모른단 말이오? 우리가 여기 온 게 비밀이었던가? 아니면, 잠깐, 그럼 이 쪽에서 먼저 의심해야겠군. 당신들은 붉은 장미 백작의 기사단이 맞소? 어제 라이온 기사단은 즉시 내게 도움을 제공하려 했지. 안타깝게 당신들이 죽였지만.” “우린 로즈 기사단이오. 이 망토와 문장이 그것을 증명하오.” “내 칼이 내 모든 것을 증명할 수는 없듯, 당신들도 문장만으로 당신 자신을 설명하 수는 없소.” 카셀은 일단 그들을 윽박질렀고, 그것은 아주 잘 통했다. 그들 셋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열심히 논의했고 대표 한 명이 대답했다. “우리 진지로 당신을 안내하겠소. 당신을 도울 방법에 대해서는 그 때 결정해도 되겠소?” 카셀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다. 맙소사, 그냥 간다고 하면 됐을 텐데!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에 있었다. 근처에 있는 진지라면 틀림없이 어제 싸움에 패한 병사들도 상당히 많을 텐데 그 중 그의 얼굴을 아는 이도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장 그것을 둘러댈 거짓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사들을 이만큼이나 속인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아직도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급한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말했다. “왜? 이번에는 내가 왜 유랑 시인 복장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거요? 시작하면 분명히 길어질 이야기를 길바닥에서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소. 어서 당신들의 진지로 갑시다.” 그들은 더 따지지 않고 동료들이 죽는 바람에 남게 된 말을 한 필 내주었다. 패잔병은 걸어오라고 버려두고 카셀을 포함한 넷만 말을 몰고 마을을 빠져 나왔다. 기사들은 앞장서 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불안했지만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것이 더욱 그들을 압박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처럼 잘 나가다가 막판에 뒤통수 맞는 일은 없어야 했다. 두 번이나 행운이 따라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들의 진지에 도착했을 때 우선 카셀은 아는 얼굴을 만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두 번째로 다행스러운 점은 따로 거짓말을 추가할 필요가 없게 된 점이었다. 진지에 남아있던 인원이 몇 명이었든 그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아무래도 어제의 패잔병들을 수습한 후방 지원부대 였던 지라 병사들이라 봐야 스무 명 안팎이었는데, 그 중 기사 복장을 한 사람은 다섯 명 정도였다. 세 명의 로즈 기사단은 끔찍한 참상에 분노를 터트리며 진지 주위로 급히 말을 몰아 생존자를 찾아 다녔다. “검은 사자 백작 군대의 소행이오?” 카셀이 물었다. “모르겠소. 뭔가 다르군. 기습을 당한 것 같소.” 그 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맙소사, 이건 우리 군대가 쓰는 화살이야.” 다른 기사가 긴장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카셀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겁이 났다. 캠프는 불에 탔고, 병사들은 화살이나 칼에 맞아 죽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 없어.” “사람은 죽이고 말만 가져간 모양이군.” “물건들 살펴봐.” “없어. 식량과 무기를 모두 털어 갔어. 이건 분명 도적들 소행이야. 기억 나나? 이틀 전에 우리 보급 부대가 도적단에게 기습 당했잖아. 여기에 쓰인 화살은 모두 그 때 훔쳐간 것들이야.” 때를 같이 하여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왔다. 칼을 든 도적들이 근처 수풀에서 뛰쳐나왔고, 언덕 너머에 엎드려 잇던 궁수들이 달려나와 활 시위를 당겼다. 순식간에 사오십 명 정도 되는 병력이 가사들을 포위했다. 그들은 뒤늦게 칼을 빼 들었지만 자기들을 겨냥하고 있는 활이 너무 많아 공격하거나 방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도적단이라기 보다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명령을 기다리며 묵묵히 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수들 사이로 한 남자가 잘 생긴 말을 타고 다가왔다. “칼을 내려 놔라, 붉은 장미 백작의 기사들. 네 동료들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너희는 보다시피 포위되었다.” 깔끔하게 기른 수염에 딱 벌어진 가슴, 두 개의 푸른 눈동자 사이를 가로지르는 긴 흉터가 멋스러운 남자였다. 그의 등에는 옮기기도 벅찰 것 같은 커다란 칼이 매어져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인지 알고나 저지르는 거냐? 한낱 도적패 주제에 군대를 건드리다니, 끔찍한 보복을 당할 것이다.” 로즈의 기사는 꼼짝없이 죽게 될 상황에서도 큰 소리로 외쳤다. “군대라면 수없이 쳐봤지만 보복하러 오지는 않더군.” 그 남자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시간 문제다. 그레이도그도 우리 손에 잡혀 지금 이름도 모를 어느 마을에 목만 매달려 있다.” “그레이도그, 러프 리버, 블랙 베어, 빌어먹을! 대체 이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도둑놈들이 공존해 가는 거야?”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팔콘이다. 그리고 난 백상들 안위도 생각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피 터지게 싸울 줄 밖에 모르는 기사 놈들은 조금도 무섭지 않아.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썩은 장미의 더러운 기사들. 무기를 버려라.” 3. 팔콘 ‘깃만 잔뜩 세운 채 으르렁대는 고양이는 피해가라. 그러나 풀숲에 엎드린 호랑이를 상대로는 자신의 두려움을 보이지 마라.’ 아버지가, 값을 깎으려고 발악하는 상인은 적당히 상대해도 되지만, 웃으며 좋은 가격을 제시하는 상인은 조심하라는 듯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어제 이후 아주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어디까지 유효 할지 카셀은 경험해보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실전에서 그게 통하긴 했지만, 모든 상황에 유효 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며, 이런 경우에는 그게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이 매뉴얼이 칼을 든 검사가 아니라 사기 칠 준비가 되어있는 장사꾼을 상대로 한 것이니 어디까지 맞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카셀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보검이 잇고, 해놓은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오히려 기사들이 당황하여 카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자, 더욱 침착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저들의 요구를 들어줍시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 화살부터 날렸을 것이오.” 기사들은 망설이다가 칼을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카셀은 말 옆에 채워둔 보검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당장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타이밍만 맞추면 제대로 먹힐 것 같은 괜찮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이제 모두 말에서 내려 두 손을 들고 서 있어. 난 절대 허튼 짓을 용납하지 않아.” 팔콘은 이런 일을 많이 겪어봤다는 듯 아주 느긋하게 하나씩 지적했다. 기사들은 다시 카셀을 보았고, 그는 대답대신 순순히 말에서 내렸다. 기사들도 시키는 대로 따랐지만,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팔콘이 부하에게 고개 짓을 하자 한 명이 칼을 들고 다가왔다. “팔콘이라는 자에 대해 아시오?” 기사가 카셀에게 물었다. “아란티아까지 전해질 정도로 유명한 도적은 아니오. 하지만 여기 오면서 두어번 이름은 들어봤소.” “그럼 지금 이런 행동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오? 우린 죽을 거요. 차라리 한 놈이라도 더 베고, 영광스럽게 죽는게 기사의 이름을 명예롭게 하는 길이오. 나는 그러기 위해 기사가 되었으며, 목숨을 다 할지언정 비열하게 항복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한 바 있소. 그것이 로즈 기사단의......” “살아있다면 그 명예를 더욱 드높일 수 있소.” 카셀은 예전에 읽은 적이 잇는 영웅 서사시의 한 구절을 따서 말을 이었다. “작은 명예를 위해 내던지는 죽음보다 더 큰 명예를 지키기 위한 생존이 때로 더 중요합니다.” 기사들은 특별히 그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수긍하지도 않았다. 책에서 볼 때는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는 대사였는데, 막상 입밖에 나고 보니 별로였다. 좀 떨떠름한 기분이었는데, 다가오는 도적의 칼날이 눈에 들어오자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그게 겉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카셀의 몸을 뒤졌고, 다음 기사들의 몸을 뒤졌다. 정확하게 칼날을 목에 대고 있어 함부로 저항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기사라는 직책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무릎 꿇고 앉아.” 그가 명령했다. 기사들은 더 할 수 없는 굴욕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카셀은 저항 없이 무릎을 꿇었다. 만약 카셀이 밀농사 짓다 아버지 말도 안 듣고 가출한 후 단 한번의 전투에서 아무런 전적도 올리지 못한 패잔병임을 알고 있다면, 기사들에게 있어 그의 행동은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보다 더 유명한 기사가 아무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어버리자, 그들도 기사의 체면을 가까스로 잊을 수 있었다. “그래도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녀석들이군. 지금까지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기사는 너희들이 처음이다.” 팔콘이 말한 후 말에서 내렸다. 기사가 분노하여 한 마디 하려하자 카셀이 저지하고 대신 말했다. “우리를 살려두었다면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오? 와서 말해 보시오. 우리가 무릎을 꿇은 건 그 말이 어떤 건지 궁금해서였소.” “무릎을 꿇은 주제에 아직 남아있는 명예라도 있는가?” “기사에게 소중한 게 명예와 맹세라면 당신 같은 도적에게 중요한 건 무엇이오?” 그것은 ‘기사에게 소중한 것이 명예와 맹세라면 왕에게 소중한 건 무엇인가’ 라는 영웅 서사시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 때 현자가 ‘왕에게 소중한 건 왕 자신입니다.’ 라고 말했고, 옆에 있는 위대한 기사는 ‘왕은 국가 그 자체며, 국가는 백성 그 자체입니다.’ 라고 말했다. 무릎 꿇은 기사들 앞에 눈물 흘리는 왕을 묘사한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와 닿았던 명작이었다. “뭐라고?” 팔콘은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어떤 종류의 도적인지 알고 싶소. 만약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돈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도적이라면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겠소.” 카셀의 말에 기사들은 기가 차서 입을 딱 벌렸다. 옆에서 칼을 든 도적은 당장 칼을 내리칠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주위를 포위한 다른 도적들도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팔콘은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나는 평범한 도적이 아니라는 건가?” “유명하긴 하더군. 이 지역 출신이 아닌 나도 당신의 이름을 들었을 정도거든.” “그래서?” “군대를 공격하는 도적떼! 보통 도적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이익이지. 군대를 공격하는 짓은 그런 단순한 원칙에 위배되오. 터무니없는 위험성에 비해 이익이 별로 안 남거든. 내가 도적이라면 가넬로크에서 이로피스로 이동하는 향료 상인을 공격하겠소. 그런데 왜 멍청하게 군대를 공격하는 것일까......? 그게 단순히 멍청한 짓이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겠소?” 카셀이 동의를 구하듯 묻자 팔콘은 어깨를 으쓱했다. “흥미롭군. 계속해 봐.” “당신의 부하들은 일반적인 도적패들과 달라. 마치 군사 훈련을 받은 것처럼 잘 조직되어 있고, 절도가 있더군.” 정말 그런 정도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말을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이었고 그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모두 한 가지 가정에만 기대고 있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팔콘은 보통 도적이 아니다.’ 이 가정만 틀리지 않으면 나머지는 틀려도 상관없었다. 기껏해야 빗나간 추측 정도에 머무르며, 그건 위험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정도로 말해두었을 때 얻는 다른 효과가 더 중요했다. “이렇게까지 말해놓으면 내가 궁금해 하는 걸 알 거요. 당신은 누구요, 팔콘?” “어떤 의미로 묻는 건지 물으면 나 스스로 평범한 도적이라고 선언하는 셈이겠군. 보아하니 자네도 보통내기는 아닌 모양인데, 내가 예를 갖추려면 그 쪽도 자기가 누군지 밝혀야 순서가 아닌가? 보기에는......” 팔콘은 카셀의 옷차림을 살핀 후 말을 이었다. “......노래꾼 같지만, 그 말솜씨는 신분 낮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야.” “내 신분이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평가될지 걱정한다면 나도 평범한 노래꾼이라고 고백하는 거겠지. 말로 하면 믿지 않을 신분이며, 나 역시 이런 복장으로 당신을 설득할 자신이 없소. 내 말에 잇는 나의 칼을 확인해 보시오.” “칼은 다 내려놓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팔콘은 짐짓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에 화가 났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서로 신뢰하지 않는 관계였소. 애초에 대화 한 마디 나눌 기회도 주지 않았잖소?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할 의무는 없었소.” “의무? 그건 강요였고, 협박이었다. 이건 심각한 문제야, 친구. 내가 시키는 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자와 대화하면 또 무얼 속이려 들지 누가 알겠나?” 팔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요즘이 명확했고 패기가 있었다. 단순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지만, 카셀은 정말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럼 처음부터 칼을 들고 이야기 했어야 옳을까? 나 역시 많이 양보했으니 그 쪽도 조금은 양보해야 하오.” “그런 말할 입장인가?” “아니, 나는 지금 당신을 시험하고 있소. 당신을 살려둬야 할지 어떨지에 대해서.” 그는 로즈 기사단에게 속임수를 쓸 때 훌륭히 써먹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순간 팔콘의 얼굴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무리하는군, 친구. 지금 나 겁주려는 건가?” 카셀은 뜨끔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이 정도에 겁 먹을 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소.” 팔콘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부하에게 명령했다. “저 자의 말에 있는 칼을 찾아봐.” 부하는 금방 카셀이 숨겨놓은 칼을 찾아 팔콘에게 가져다 주었다. 팔콘은 칼을 스윽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늑대 문장에 푸른 보석. 아주 좋은 칼이군. 어디 유명한 귀족의 보검이라도 되는가?” 굳이 알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기 때문에 카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팔콘은 칼을 꺼내보았다. 시원한 금속음이 울리면서 검은 빛의 칼날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그러고 보니 카셀도 그 검은 칼날을 처음 구경한 셈이었다. “이런 제기랄.” 팔콘은 아주 유쾌하게 한 마디 했다. “10년 전이었나?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을 이끄는 캡틴은 누구라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검은 칼날의 보검을 가지고 있다지. 지금 젊은 기사들은 모르겠지만, 한 때 물감으로 검게 칠한 칼을 들고 사기치고 다니는 놈이 있을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게 단순한 소문에 불과하거나, 내 눈이 명검도 알아보지 못할 벌레 구멍이 아니라면 이 칼이 바로 익셀런 기사단의 웰치를 벤 아란티아의 보검이겠군.” 그 말에 놀란 건 오히려 카셀이었다. 그 검의 내력이 그 정도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런 것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팔콘 역시 평범한 도적단의 두목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팔콘은 그 칼을 다시 부하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부하는 머뭇거리며 카셀에게 칼을 내주었다. “그럼 캡틴 울프, 하나 묻지. 뭐 하러 카모르트에 왔나?” “나쁜 짓 하러 온 건 아니오.” 팔콘은 잠시 카셀을 바라보았다. 적의는 없었지만 그의 속 마음을 꿰뚫어볼 것 같은 강한 눈빛이었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군. 그 자를 데려와라.”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그는 왔던 길로 말을 돌렸다.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부하가 물었다. 기사들은 그가 ‘어떻게 죽일까요?’ 라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놀랐다. 팔콘이 뒤를 돌아볼 때 카셀이 선수를 쳐서 말했다. “특별히 이 사람들을 동행할 필요는 없소. 보내주시오.” “명령인가? 내 얼굴을 본 기사 중에 살아남은 이는 없다.”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닐 거요.” 팔콘은 피식 웃었다. “좋다. 나머지는 보내줘라.” 그는 먼저 말을 타고 사라졌다. 긴 싸움이 될 거짓말의 처음을 잘 풀어낸 성취감에 카셀은 기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적 중 하나가 그에게 말을 내주었다. “나는 잊어버리고 당신들은 당신들의 진지로 돌아가시오.” 카셀은 말고삐를 잡아 끌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아란티아의 기사라도 이건 무모한 짓이오. 홀로 들어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같이 칼을 듭시다.” “보셨잖소? 내 칼을 이렇게 얌전히 돌려준 사람이오. 말했듯이 죽이고자 마음 먹었다면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 거요. 걱정하지 마시오.” 기사 중 한 명이 다른 도적들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반나절이면 지원군을 끌고 구하러 와줄 수 있소.” “내 몸 하나 간수하는 건 어렵지 않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카모르트 왕국의 손님이오. 우리가 모른 척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카셀은 벌컥 화를 냈다. “내가 다른 나라의 손님이라고 우대 받아야 한다면, 어찌 당신들은 나라의 주인을 보살피지 않는 거요? 왕국의 주인은 곧 왕이며 왕은 곧 백성이요. 언제부터 전쟁만 일삼는 두 백작의 군대가 나라 일을 걱정했소?” 그의 호통에 세 기사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같은 말을 카셀의 원래 신분인 농부로서 말했다면, 또는 빵 굽는 사람이나 밀 빻는 사람이 그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면,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러나 다른 나라의 대표쯤 되는 이가 그런 말을 하니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서 카셀은 통쾌함보다 오히려 씁쓸함을 맛 보았다. “아직 어리지만, 나도 한 때는 거친 사람들과 많이 지내봤소. 내 걱정은 말고 떠나시오. 이 이상은 나도 당신들의 목숨을 책임질 자신이 없소.” “면목이 없습니다, 캡틴 울프.” 카셀은 미소를 지으며 말에 올랐다. 그러자 기사들은 정중히 서서 카셀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처럼 강요해서 꿇은 게 아니었다. 카셀은 깜짝 놀랐다. “제 이름은 버트만입니다. 지금은 비록 백작의 군대 밑에 있으나, 언제고 진정한 기사를 꿈꿔 왔습니다. 부디 당신을 또 만나 제 꿈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이름은 이실랜드입니다. 오늘 봤던 당신의 용기는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 이름은 니셀루치입니다. 당신은 제게 진정한 기사의 명예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카셀은 자신의 어떤 점에서 이들이 이렇게 감동을 받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긴장하지 않기 위해 도적들에게 마구 떠들어 댔던 점에서? 아니면 마지막에 그들을 호통친 점에서? 아니면 단지 유명한 기사단의 캡틴 신분이라서 보여주는 예의? 어떤 나라의 어떤 기사단에도 무릎을 꿇는 예의는 없다. 심지어 이로피스 같은 규율이 엄격한 기사단에서는 왕을 제외한 다른 누구 앞에서도, 목을 베기 전에는 무릎을 꿇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일어나시오. 나는 그대들의 군주가 아니오.” 카셀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황한 모습을 감출 수 없어 얼른 몸을 돌려 자신을 안내하는 도적을 따라 가버렸다. 말도 빼앗기고, 무기도 빼앗겼지만 그 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카셀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팔콘이 거주하는 곳은 평범한 마을이었다. 바위 동굴 안에 숨겨져 있는 비밀의 공간이나 뾰족한 방벽을 세워둔 요새를 생각했던 카셀은 그 일상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자들도 있었고, 아이들도 있었다. 마을 뒤쪽으로는 작은 밭이나마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었고, 마을 앞에는 꽃과 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었다. 빨래줄에 널어놓은 하얀 이불보가 바람에 펄럭였다. 지붕에는 검은 버섯을 말리고 있었고, 하얀 연기가 굴뚝을 타고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좋은 곳이군.” 카셀이 말하자, 길을 안내하던 팔콘의 부하는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몇 년이나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다. 아무도 이 곳을 단순한 아지트라고 생각하지 않다. 집이라고 생각하지.” “혹시라도 누군가 공격해오면 너무 무방비가 되지 않소?” “이런 마을의 모습이 더 안전할 때가 많다. 또 그 정도는 감안하는 거야. 우리도 싸울 줄 모르는 바보들은 아니니까.” 마을 앞에는 경비 둘이 서 있었는데, 팔콘과 그의 부하들이 진입하자 즉시 똑바로 서서 인사했다. 정규군 이상의 군기가 확실히 잡혀 있었다. 그러나 팔콘을 반기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은 자연스러웠다. 누구도 그를 도적단의 두목으로 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에게 인사하자 그도 같이 인사했고, 아이들은 팔콘의 말을 줄을 지어 따라다녔다. 심지어 팔콘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녀석도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도적이 화를 냈지만, 저지하는 수준 이상이 아니었다. 어딜 봐도 마을의 영웅이나 인기 많은 기사 같았다. 갑자기 루치가 생각났다. 자신의 갑옷을 뽐내고 기사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마을을 누비고 다녔던 그는 여기에 비하면 깡패나 다름 없었다. 갑옷과 붉은 장미 문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예전에 마을 사람들의 골칫거리였던 불한당이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들 손대는 것도 여전했고, 술 먹고 탁자 뒤엎으며 싸움 거는 것도 여전했다. 달라진 거라면 그가 기사라는 것 때문에 아무도 그를 호통치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루치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카셀도 안 좋은 일을 여러 번 당했다. 하지만 카셀은 그를 상대하는 것부터 귀찮았고, 대항해봤자 힘 센 패거리를 이끌고 다니는 녀석을 당해낼 것 같지도 않아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상하게도 카셀이 저항을 포기하자, 오히려 녀석의 괴롭힘은 사라졌다. 왜 그런지 몰라도 그건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치 그 녀석, 로즈 기사단도 아니었잖아.’ 엉뚱하게 ‘기사’라는 것 하나만으로 로즈 기사단과 동일시 생각했던 것이 억울했다. 방금 전에 그냥 보내줬던 기사들에게 대신 화풀이 못 한게 좀 억울했다. 팔콘과 그의 부하들은 마을 제일 안쪽에 위치한 회관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제법 넓은 로비가 있었고, 벽에는 여러 종류의 무기가 걸려 있었다. 팔콘은 자신의 거대한 칼을 벽에 걸어두고 로비 한 쪽 의자에 앉았다. 대충 봐도 계급이 높아 보이는 다른 도적들은 팔콘이 앉은 후 차례로 의자에 앉았다. 팔콘과는 다리 다른 도적들의 눈빛에는 카셀에 대한 강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내 마을이 어떤가?” 팔콘이 물었다. “좋소. 카모르트에 이렇게 살기 좋은 마을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을 정도로.” “슬쩍 봐놓고 살기 좋은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나? 난 마을의 디자인을 물은 거였는데.” “지금 같은 흉년에, 귀족들에게 식량과 세금을 뜯기고, 관리들의 횡포까지 이어지는 와중에 밥만 잘 먹고 살아도 잘 사는 거 아니겠소? 이 마을 사람들의 얼굴 빛을 보니 밥은 잘 먹는 것 같더군.” 팔콘은 큰 소리로 웃었다. “뭐, 기본적으로 우린 세금을 안 내니까. 아란티아에는 이런 마을이 없나?” 카셀은 그가 과연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걸까 궁금했다. 하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들추고 싶어 안달하는 눈빛들이 사방에서 쏘아보는데, 괜히 그런 의문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정체를 들킬 게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이 완벽하다고 믿지 않았다. 단지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속여서 기어이 살아 남으리라는 각오로 버티는 것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스스로 잊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 나는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 캡틴이다! “아란티아라고 특별히 다른 곳보다 좋은 곳이랄 수 있나? 왕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마을은 카모르트처럼 관리들의 횡포가 심한 곳도 있고, 도적들도 많지. 하지만 작은 만큼 아주 관리가 잘 되는 편이니 그런 지역이 많지는 않소.” 그가 내뱉은 도적이라는 말에 팔콘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나를 도적이라고 보는가?” “평범한 도적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근본적으로 아니랄 수도 없지 않소? 이 마을도 어찌 보면 당신들이 노략질한 사람들의 피와 돈으로 건설된 건데?”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군. 미리 일러 두지. 아무리 당신이 아란티아의 뛰어난 검사라도 이 방안에 있는 우리 모두를 어쩔 수는 없다. 그 고압적인 태도는 문 밖으로 내던져버리는 게 어떤가?” “천성이 이런 거지, 당신들을 어찌해볼 생각으로 말하는 건 결코 아니오. 그게 그렇게 보인다면 당신이 나를 겁내는 거지, 내가 당신을 겁 주는 게 아닐 거요.” 앉아있는 도적들은 잠시 웅성거렸다. 팔콘은 팔짱을 끼며 그를 잠시 훑어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하나 궁금한 게 있다. 어째서 아까 포위당했을 때 나를 도발했지? 나는 그 때 얼뜨기 기사 놈들을 포함한 당신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어. 살려두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지. 놈들은 절대 무릎을 꿇지 않을 테니 무릎을 꿇으라면 덤빌 것이고, 그럼 나는 놈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주며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을 살려 주었지. 어떻게 내가 당신을 안 죽일 줄 알았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카셀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깨달았다. 기사들이 자신의 용기에 감탄했다고 했던 말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말했듯이 당신이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 인재인지를 두고 저울질 한 거요. 만약 당신이 대단한 인재라면 나를 알아볼 것이고 대화가 통할 거라 믿었소. 그리고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지.” “만약 그 판단이 틀렸다면? 내가 그레이도그처럼 싸움질이 좋아 도적질 하는 뚱보였다면 어쩌려고 했소?” 글쎄, 어쩌려고 했을까? 카셀은 대답 대신 잠깐 웃어 보이며, 처음 칼을 숨겨 놓을 때부터 생각했던 시나리오를 펼쳤다. “나는 당신들에게 내 칼을 내주지 않았소. 당신이 단순히 싸움질 좋아하는 뚱보였다면, 대화 대신 다른 방법을 쓸 요량이었지. 별 거 아닌 자의 별 거 아닌 부하들이라면, 숫자가 많다 해도 충분히 살아 남았을 테니까.” 그의 말을 의외의 반향을 일으켰다. 도적들은 놀란 눈이었고, 팔콘은 질린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오십이나 되는 인원을 상대로 싸울 생각이었다?” 너무 과장이 심했나 싶었지만, 되돌릴 길은 없었다. 카셀은 대꾸했다. “그렇소.” 도적들은 조용하던 분위기를 깨고 소곤댔다. 팔콘은 손을 내밀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카셀.” “당신이 누구든 내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마을의 지배자이며 이 마을에서는 붉은 장미 백작이나 검은 사자 백작도 내게 존칭을 받지 못하지. 당신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요. 그러나 우선 당신의 무모함과 대담함에 찬사를 보내도록 하지. 그럼 본론으로 묻겠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면.” “카모르트에는 왜 왔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 해를 끼치러 온 건 아니며, 진짜 이유는 밝힐 수 없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곳에서는 내가 규칙이며 원한다면 나는 당신의 무모함이 진짜인지를 확인해볼 의사도 있다.” “그럼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보시오. 왜 그런 걸 묻소?” “뭐라고?” “왜 그런 걸 묻는 거요? 도적이라면 사람들의 돈을 빼앗고 약탈하고 저항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게 일이며 그 외에는 신경도 안 써야 옳소. 당신이 함부로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내가 판단한대로 보통 도적 두목이 아니라면, 왜 카모르트 왕국의 일을 신경 쓰시오?” 갑자기 팔콘의 부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길이가 사람 키만하고 칼날이 초승달처럼 굽었으며 날이 한쪽만 있는 거대한 칼을 나무 바닥에 찍으며 소리쳤다.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군. 닥치고 팔콘께서 묻는 말에 대꾸나 해라.” “내가 대화하고 있는 상대는 도적 전체가 아니라 팔콘이다. 네가 대신 대답할 게 아니라면 나서지 마라.” 카셀의 기세에 눌려 큰 칼을 든 도적은 일어선 채로 굳었다. “앉아라.” 팔콘은 명령하고 카셀에게 말했다. “너무 내 부하들을 자극하는 발언은 삼가는 게 좋을 거다, 캡틴 카셀.” “칼을 쓸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당신과 이야기 하지도 않았소. 그리고 내게 아직 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오.” “좋다. 당신이 그 정도까지만 말한다면 나도 이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두지. 지금 이 나라는 두 백작의 전쟁으로 휘청거리며 그 틈을 타 다른 나라들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카모르트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건 평화를 지향한다는 아란티아라고 다르지 않지. 이런 시기에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의 수뇌부가 찾아 왔다면 나라를 걱정하는 누구라도 신경이 쓰이지 않겠나?” “그럼 나도 말해두겠소. 아란티아는 이 나라를 돕기 위해 나를 보낸 것이지, 다른 뜻이 있어 온 게 아니오.”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 의심까지 풀 방법은 없소.” 팔콘은 맑고 푸른 눈동자로 카셀의 갈색 눈동자를 주시했다. 방안의 공기가 숨막히게 조여 들었고, 시간은 더디 흘렀다. 카셀은 그 강렬한 눈빛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너 거짓말 하는 거지? 밀 한 가마니 어디가 팔아 먹었어?’ 라고 묻는 아버지의 눈빛에 대항했던 경험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라는 이상한 비교를 하면서. “식사는 했나?” 카셀은 그 엉뚱한 질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 시간을 방해한 건 당신이오.” “그거 미안하게 됐군. 여기까지 끌고 왔으니 적어도 한 끼 식사는 대접해야지.” 팔콘이 로비 밖에 서 있는 여자에게 손짓하자, 금방 준비된 음식이 나왔다. 식사는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군인들처럼 각을 잡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왔던 도적들은 식사가 준비되자 자유롭게 웃고 떠들었다. 고급스럽진 않더라도 이 시기에 맛보기 어려운 푸짐한 술과 고기가 있었다. 음식을 나른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도적들의 옆이나 무릎에 앉아 같이 술을 즐겼다. 음란하다고 할 만한 장면은 없었으나 아침부터 보기에 조금 민망하긴 했다. 카셀이 홀로 앉아 조금씩 우물거리며 음식을 주워먹고 있자, 한 여자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앉았다. 카셀이 보니 나이가 많아 약간 주름이 졌지만 아주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술집 여자나 창부는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녀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런 말은 안 했습니다.” 카셀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주물럭거려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뭡니까?” 기름에 튀긴 감자를 찍어먹으며 그가 물었다. “우리 마을 전사들이 어쩌지도 못하고 데려온 검사가 있대서, 구경 중이죠. 과연 몸집은 작지만 근육은 대단하군요.” 걸음마 배울 때부터 농사 지으면 다 이렇게 되죠. 그는 그 말을 해서 허를 찌르는 개그를 한 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규칙적인 생활과 제한된 식사, 그리고 혹사당하지 않을 만큼의 많은 노동이면 저절로 각 잡힌 몸매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훌륭한 농사꾼으로 만들어갔던 셈이었다. 그런 아들놈이 기사 되겠다고 뛰쳐나갔으니 겉으로는 심드렁하니 있었어도 속으로는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제 이름은 제이니에요.” “카셀입니다.” “좋은 얼굴을 당신 옷이 망쳤군요. 식사 끝난 후 절 따라오시죠. 훌륭한 검사라면 거기에 어울리는 옷이 필요할 거에요.” 카셀은 그녀의 망설임 없는 접근에 당황하며 팔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팔콘은 커다란 양다리에 향료를 뿌리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배는 고팠지만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긴장한 탓인지 계속 목만 말랐고, 간도 안하고 쪄낸 고기는 종이 조각 같았다. 무엇보다 그는 팔콘의 시선이 안 닿는 곳으로 달아나 온몸에 똘똘 뭉친 긴장감을 잠시나마 풀고 싶었다. “씻을 곳도 있소?” 카셀이 물었다. “따라오세요.” 제이니는 과감하게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별로 세지도 않은 힘이었지만, 마법처럼 쉽게 끌려갔다. 로비를 나서니 묘하게 상쾌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안의 후끈한 여기가 얼마나 답답했으며 자신이 얼마나 가슴 졸이며 앉아 있었는지 실감했다. 여전히 일상적인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고, 제이니는 부드럽게 마을 전체를 손으로 훑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는 난민이었어요.” “예?” “팔콘이 우리를 구해줬죠.” 제이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사람들의 옷도 깨끗했고, 길도 잘 다져져 있었다. 군대를 따라다니면서 보아왔던 수 많은 피폐한 마을에 비하면 천국 같은 곳이었다. “어떤 마을은 백작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싹 쓸어가기도 하고, 어떤 마을은 도적떼들이 습격해와 사람들이 학살 당하기도 하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한 번 터지면 마을이라는 존재 자체가 죽게 되죠. 사람은 살되, 마을은 그 생명을 잃게 됩니다. 여자들은 몸을 빼앗기고 남자들은 생명을 빼앗기고, 아이들은 꿈을 빼앗기고, 노인들은 살아온 인생을 빼앗기죠. 팔콘은, 살아남았으나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들을 모아 이 마을을 만들었어요. 비록 도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좋은 분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팔콘을 따르는 것이군요.” “그렇죠. 아까 두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모두 들었어요. 팔콘을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 분은 정말 이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분이에요.” “몰아세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이런 산속에 피해 살면서 나라를 걱정할 수 있죠? 나라가 걱정된다면 제일 먼저 앞장 서야지. 이런 작은 규모의 저항은 큰 관점에서 보면 도적질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의적을 다룬 시와 나라를 걱정하는 정치가들의 이론을 떠들었다. 그러나 제이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팔콘 마저 나라를 구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기 테죠.” 카셀은 더 할말이 없었다. 그의 이론은 그녀의 미소 앞에서 간단하게 무너져버렸다. 제이니의 집은 팔콘의 회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집이었다. 제이니는 수건을 한 장 내주며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나무 욕조가 있는 욕실로 안내했다. “좀 작죠. 하지만 제 집에 있는 욕조가 이 마을에서 제일 좋아요. 팔콘도 종종 이용하죠.” 그녀는 씨익 웃으며 욕실을 나섰다. “새 옷은 조금 이따 문 앞에 둘게요. 그 옷은 버려야겠어요.” “그래야겠군요.” 카셀은 옷을 벗으려다 아직도 욕실 앞에서 두 손을 배 앞에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는 제이니를 발견했다. “문을 닫아도 되겠소?” “원한다면 씻겨드릴 수 있어요.” “사양하겠습니다.” 카셀은 웃는 그녀를 애써 무시하며 문을 닫았다. 옷을 벗고 물에 몸을 담그니 피가 머리 쪽으로 솟으며 황홀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도대체 씻어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대로 잠들어 죽어버리면 그것만큼 멋진 죽음도 없으리. “옷은 문 밖에 둘게요. 남편 키가 당신과 비슷하니 다행이에요.” 제이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다시 욕조 끝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천장에 매달린 물방울이 한 방울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다시금 걱정거리가 머리를 쿡쿡 찔렀다. 여기까지 온 건 좋았는데, 이제 어쩐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10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생각하고 그는 다시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당장 문 밖에 칼을 들고 도적들이 서 잇다 해도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몸을 닦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제이니가 내 준 옷을 집어 다시 욕실 안에 들어갔다. 그것은 시골 집의 형편에 맞는 싸구려 옷이 아니었다. 평생 이런 종류의 옷을 입어본 적이 없는 그는 낑낑대다가 겨우 단추 구멍을 끼워 맞췄다. 바지를 추스르며 밖으로 나오니 제이니가 웃으며 서 있었다. “다행히 꼭 맞는군요. 이리 와 봐요. 뒤에 단추가 더 있어요. 아마 아란티아 기사 복식과는 달라 입기 힘들 거에요.” “기사? 남편 분이 기사입니까?” 단추를 끼워주는 그녀의 손길이 멈칫했다. 곧 그녀는 말없이 옷을 마저 입혀주었다. “기사였었죠. 자, 됐어요.” 그녀는 허리춤에 솜을 올리며 카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직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겨주더니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멋진 남자일 거라는 건 예상했어요. 면도를 안 했군요.” “칼이 없어서.” 사실은 수염까지 깎아버리면 너무 어려 보일 것 같아 놔둔 거였다. “괜찮아요. 나름대로 어울리는군요.”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에 카셀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서른 살이 넘은 유부녀엿음에도 고향에 잇는 스무 살의 쟈넷보다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귀족 흉내를 내는 쟈넷처럼 도도하지도 않았고,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남작 부인처럼 보석이나 화장으로 치장하지도 않았지만, 그들보다 더욱 여성스러웠다. 카셀은 언제나 쟈넷이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남편이 기사면 그녀도 과거에는 신분 높은 집안 사람이었을 것이다. 차림새가 어찌 되었건, 행동을 어떻게 하건 풍기는 고급스러움에, 카셀은 진짜 귀족의 품격이 어떤 것인지 진실로 깨닫게 되었다. “카을 차면 더 어울릴 거에요.” 그녀는 손수 카셀의 검까지 허리에 달아주었다. “옷 매무새만 봐도 당신이 기사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어요.” “누가 의심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죠. 당신이 누구냐는 당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까. 좀 전에 팔콘이 왔다 갔어요. 목욕이 끝나면 데려오라더군요.” “식사가 벌써 끝났나요?” “다들 자러 갔죠. 어제는 힘든 전투가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들이 어제 밤새 했을 일을 생각하자 카셀은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리고 잠깐 잊고 있었던 팔콘의 본업을 떠올리며 긴장감을 몸 구석구석에 채웠다. 팔콘의 집은 음식을 치우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지만, 도적들은 자리에 없었다. 제이니는 팔콘의 방 앞까지만 안내하고 주방을 돕는다며 가버렸다. 그는 잠깐 방 앞에서 망설이다가 노크를 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굵직하게 들렸다. ‘오라는 건 단 둘이 이야기 하자는 뜻이겠지?’ 팔콘은 그가 본의 아니게 시험했던 대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런 큰 인물을 상대로 1대 1로 신경전을 펼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문을 열었다. 팔콘의 방은 침대 하나에 책장과 의자가 놓여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이 나을 번뜩이며 벽에 걸려있었다. 칼, 도끼, 창은 물론이고, 쇠구슬에 뾰족한 가시가 박혀있는 철퇴나, 도저히 칼이라고 보기 힘든 기이한 모양의 날이 달린 무기도 있었다. 손잡이에 손 때가 묻어있고, 날에 금이 가거나 부서진 자국이 잇는 것으로 미루어 장식용은 아니었다. 팔콘은 술잔을 들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한 손으로 부드럽게 잔 속에 담긴 붉은 와인을 굴리는 폼이 그럴싸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니 훨씬 낫군.” 팔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이니가 주었소.” 팔콘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간직하시오. 그 곳은 제이니 남편의 유품일 테니.” “유품?” “죽었소.” “제이니의 남편도 기사라고 들었소.” “기사였었지.” 그는 그녀가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대꾸했다. “어느 가문의 기사였는지 물어도 되겠소?” “카모르트의 왕실 기사단 소속. 내가 캡틴이었고.” 카셀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앗 하는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왜? 놀랐소? 당신이라면 짐작했을 줄 알았는데. 놀랐다면 어느 쪽에서 놀란거지?” 팔콘은 부하들을 데리고 있던 아까보다 말투와 행동, 양쪽에서 모두 부드러웠다.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몰라도 쏘아붙이는 어조도 사라졌다. “둘 다. 하지만 카모르트의 기사는 이미지가 쉽게 잡히지 않소. 사실 전혀 본 적도,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어서.....솔직히, 나는 오히려 당신이 그것보다 훨씬 대단한 살마이라고 여겼소.” 팔콘은 시원스럽게 웃음 터트렸다. “과연 잘 나가는 기사단의 캡틴답군. 보통 왕실의 기사단 소속이었다면 기가 죽는데 말이야.” 카셀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일단 좀 앉겠소.” “그러든가.” 팔콘은 술을 한 모금 했고, 카셀은 의자에 앉았다. “씻고 나서 보니 좀 어려 보이는 군. 스무 다섯? 일곱?” “그 정도.” 그것보다 서너 살이나 더 어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나이에 그 유명한 기사단의 캡틴이라니, 놀랄만 하군. 당신의 대장인 퀘이언이라는 사람은 어떤가?”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범상한 사람일 거요. 그보다 제이니의 남편 이야기를 먼저 해보시오.” 카셀은 보지도 못한 사람을 소재로 거짓말을 끝없이 지어낼 자신이 없어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팔콘은 그 문제를 파고들지 않았다. “메오릭스. 아주 멋진 기사였소. 나 같은 별 거 아닌 캡틴보다 훨씬 위대한 기사지. 우린 처음에 적으로 만났소. 나보고 카모르트의 기사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소? 어떤 의미에서는 맞아. 나는 론타몬이 아크랜드 점령에 나섰던 당시, 익셀런의 기사단이었으니까.” “익셀런?” 카셀은 깜짝 놀라며, 거짓말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크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였다. 어린 시절 기사에 대한 모든 꿈과 로망을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는 익셀런의 기사가 바로 눈앞에 나이 든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한 때 모든 나라의 적이었으니 일부러 그런 놀란 눈을 하지 않아도 좋소.” 도적 두목은 술잔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어 깍지를 끼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모르트 국왕이 항복 문서에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지. 이 나라를 지탱하던 길터 장군이 익셀런의 캡틴 웰치에게 죽는 순간 카모르트는 이미 힘을 잃은 거나 다름없었다. 론타몬은 다음 타깃인 가네로크를 정복하기 위해 모든 병력을 그 쪽으로 돌렸고, 내가 속한 익세런의 한 부대가 노르만트를 공격했지. 당시 있었던 수많은 전투에 비하면 별 거 아닌 전투였어. 카모르트는 원래 왕이 군대를 소유하지 않거든. 그 싸움을 끝내고 서둘러 본 병력에 합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카모르트의 기사 중 하나에게 우리 부대 지휘관이 죽자 금방 끝나리라 여겨졌던 전투가 아주 길어지게 되었지. 녀석은 명예와 전투를 중시하는 익셀런 기사단의 약점을 파악하고 하나씩 일 대 일 대결로 쓰러뜨려갔지. 멋지지 않나? 나라면 금방 포기했을 거야. 그의 이름이 메오릭스. 나와 싸울 때는 이미 기운을 잃었고, 나는 그를 쉽게 잡았소. 하지만 죽이지 않았소. 당신도 기사라면 알 거야. 그런 인물을 죽이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지.” 이야기와 서사시로만 들었던 당시의 전투를, 당사자의 입으로 갑작스럽게 듣게 되니 카셀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그 당사자라는 게 익셀런의 기사라니! 이런aa 이야기는 하루 전부터 두근거리며 기다렸다가 긴장된 마음으로 손에 땀을 쥐며 들어야 하는데, 따분한 척 들어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중간에 많은 일이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나는 카모르트에 정식으로 망명을 요청해 기사가 되었고, 그와 난 절친한 친구가 되었소. 어떻게 생각하면 엉뚱하기도 하고 미친 짓이기도 했지만, 당신 정도 되면 내 기분을 이해할지도 모르겠군. 하여간 나는 원래 국적과 상관 없이 카모르트를 위해 열심히 싸워볼 생각이었소. 하지만 카모르트는 샤이필드 공작이 죽은 후 엉망이 되었지. 공작에게 의지하던 왕은 힘을 잃었고, 그 틈에 두 빌어먹을 백작이 전쟁을 벌이는 거요. 그 전쟁의 명분이라는 것도 웃기지만, 어찌 되었건 중요한 건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지. 그 두 녀석은 그 사실을 잊었어. 나는 왕에게 그 사실을 간언했지만 결과적으로 메오릭스와 함께 기사 직을 박탈당했을 뿐이었소. 나는 내 힘으로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하고 싶어 여러 가지로 노력했는데, 여기까지 온 거요. 도적이란 이름으로.” 이야기를 끝낸 팔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카셀의 눈에는 더 이상 그가 도적이 아닌 전쟁 영웅으로 보였다. “미안하오, 팔콘. 짧은 생각으로 당신을 욕했던 것을 용서하시오.” “상관 없소. 당신이야말로 나를 제대로 평가하셨소. 싸구려 도적도 아닌, 구원자도 아닌 팔콘이라는 인간으로. 아마 지금 쉽게 사과를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당신이야말로 진실로 기사요, 내가 되어보지 못한.” “나는......” 카셀은 하마터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기사가 아닙니다.’ 라는 말을 내뱉을 뻔 했다. 아버지와 똑같은 눈을 한 전쟁 영웅을 상대로 계속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팔콘을 제대로 평가해서 그런 대처를 한 게 아니었던 지라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팔콘은 잠시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 주위를 보시오. 이 벽에 걸린 수많은 무기들, 이것은 모두 나와 겨루어서 패배한 전사들의 무기를 빼앗은 것이지. 캡틴 카셀, 당신을 부른 이유도 사실 이것이었소. 나는 당신과 겨루어서 그 검을 빼앗기 위해 여기까지 안내한 것이오.” 예상했던 상황이었으나 카셀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팔콘은 부드럽게 말을 했다. “하지만 관두리다. 설사 내가 당신을 이긴다 해도 즐거울 것 같지 않군. 난 잠시 잘까 하오. 이 마을의 손님으로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시오. 원한다면 떠나도 좋소.” “이 마을의 비밀을 내가 떠들고 다녀도 좋단 말이오?” “나도 당신을 시험한 거요. 어쩌면 내 통찰력을 시험한 것일지도 모르지. 당신은 그럴 위인이 아니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카셀에게 아직 칼이 있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고 그는 등을 보이더니, 아예 침대에 누워버리기까지 했다. 카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내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밖에는 제이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구경이라도 하시겠어요?” 카셀은 대답했다. “그러죠.” 4. 마을을 지키는 자 제이니는 즐겁게 마을의 여기저기를 설명했다. 강한 군대를 양성하기 전에는 나그네들의 짐을 빼앗았지만, 나중에는 두 백작의 군수 물자를 훔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며 어떤 방식으로 다른 마을과 교역이 이루어지는지도 그녀는 카셀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얘기했다. 마을을 지키는 군대, 그러니까 도적들의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다른 마을과는 다른 결혼 풍습 등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카셀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제 이야기를 안 들으시는 군요.” 제이니가 약간 골을 내며 말했다. 그 모습이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웠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남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팔콘이 메오릭스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예.” “이 인간이!” 제이니는 버럭 화를 냈다. “제가 들려달라고 했어요. 팔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쩌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했어요?” “당신이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제이니는 한숨을 푹 쉬며 앞장서 걸어가버렸다. 그는 분명히 화가 난 거라고 생각하고 사과하려 했다. 그러자 제이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2년 전, 붉은 장미 백작의 기사단과 마주쳤죠, 그 때는 아직 정규군을 맞아 싸울 정도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죠, 다들. 메오릭스는 모두를 후퇴시키고 혼자서 그들과 맞아 싸웠어요. 그리고 죽었죠.” “유감입니다.” “그는 언제나 그랬어요.” 제이니는 허공에 자기 남편이 있다는 양 손을 내저으며 거칠게 말을 이었다. “언제나! 자기는 돌보지 않고 언제나 남의 걱정만 하고 내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죠, 잘 죽었어요. 나도 이제 돌아올지 안올지 모를 사람을 기다릴 일도 없으니까.” 카셀은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말없이 그녀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녀도 흥분한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메오릭스가......” “그 이야기는 그만해요!” “......카모르트의 기사였을 때부터 알고 지냈나요?” 카셀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짜증을 내며 대꾸했다. “우린 소꿉 친구였어요 전쟁이 벌어지면 어디나 그렇겠지만, 그때도 조혼이 유행했었죠. 나는 그 때 열 다섯이었는데, 메오릭스가 열 여덟이었을 때 우린 결혼했어요. 결혼 하자마자 전쟁터로 뛰어든 거죠.” “그럼 메오릭스는 누구보다 당신 곁에 있고 싶어한 걸 겁니다.” 제이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위로할 생각이면 그만 둬요.”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도 당신은 메오릭스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십 년 넘게 같이 산 부부보다 만나지도 못하고 이름만 들은 당신이 더 잘 안다고요?” “때로 같이 살았기 때문에 모르기도 하죠. 이건 주제 넘은 참견이겠지만, 제 생각을 말할 기회를 주십시오. 메오릭스는 당신과 결혼하자마자 기사가 되었습니다. 홀로 익세런 기사단 전체와 싸울 정도로 무모했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익셀런 기사단은 고전을 했고, 그 무모함 때문에 팔콘의 눈에 띄어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카모르트를 지키려 했고, 그 카모르트에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남편 분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팔콘이 죽으면 이 마을도 같이 죽습니다. 메오릭스는 팔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팔콘과 메오릭스는 같이 기사 직을 박탈당할 정도로 절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팔콘은 자기를 대신하여 희생하겠다는 메오릭스를 그냥 버려두고 갔겠습니까? 팔콘은 메오릭스의 책임까지 떠맡았을 겁니다. 메오릭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걸 거에요.” “아는 척 하지 마세요, 캡틴 카셀! 그 사이에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많아요.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려 내 인생과 그이의 죽음을 단순화 시키지 마세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카셀은 괜한 말로 그녀를 다치게 한 것을 즉시 후회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는 남녀 관계를 아기에는 너무 어렸고, 경험도 부족했다. 그것은 정말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미안합니다, 제이니. 저는 단지......”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내가 너무 말이 많았군요. 미안해요. 당신에게 화난 거 아니에요.” 그녀는 애써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너무 내 남편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저는 젊어진 남편이 돌아온 줄 알았어요. 당신이 목욕할 때는 욕실 밖에서 수줍은 소녀처럼 서 있었죠. 하지만 이 이상 내 남편의 이야기를 하지 말아요. 저는 그런 말을 모두 견딜 정도로 마음이 강하지 못해요.” 그녀는 할말을 잊은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따라와요. 이 시간이면 마을의 이야기꾼이 모두에게 떠드는 시간이에요.”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많은 아이들과 앞치마 입은 아낙들이 앉아있었다. 노인도 몇 앉아있었고, 그 중앙에는 수염긴 남자가 손짓을 크게 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한가한 시간이 많죠. 그래서 으레 이 시간이면 누군가 나와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 중에 저 사람이 제일 재밌게 얘기해서 다들 좋아해요. 본명은 자기도 잊어버렸다는데, 우리는 그냥 ‘덩키’라고 불러요.” “재밌는 이름이군요.” “얘기는 더 재미있어요. 들어보세요.” 덩키라는 사람은 한 쪽 다리가 잘려나간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 앞에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에게 허풍 섞은 자신의 경험담을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 하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 다른 고민 때문에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던 카셀도 금방 거기에 빠져들었다. 그건 ‘하늘 산맥’의 드래곤 중 한 마리가 길을 잃고 실수로 인간들의 땅에 떨어졌는데, 한 어린 마법사가 드래곤을 다시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낸 모험 이야기였다. 카셀도 아버지에게서 옛날 이야기로 들은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거기 나오는 어린 마법시가 어느새 덩키 본인이 되어 있었다. 결국 덩키는 자신의 유려한 말재주로 날뛰는 드래곤을 설득한 후 그 등에 타고 하늘 산맥으로 갔다는 이야기로 결말을 맞았다. 인간의 발이 닿은 적이 없는 하늘 산맥을 밟고 돌아온 위대한 영웅의 겸손한 마무리 인사가 있은 후에야 카셀은 정신 없이 이야기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오늘은 새로 온 손님이 있군요. 팔콘님도 반한 멋진 분이라는데 우리 그 분의 이야기를 청합시다.” 늙은 덩키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카셀을 지목했다. 모두 박수를 쳤고, 아이들은 더욱 환호했다. “당신이 아란티아의 기사라는 말을 듣고 다들 저러는 거에요. 이야기할 게 없다면 자기 소개만 해도 사람들은 흥분할 거에요.” 제이니는 안심시키며 그를 둥글게 원을 그린 모임의 중앙으로 안내했다. 맑고 초롱초롱한 어린 아이들의 눈빛을 감당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했던 거짓말은 모두 살아남기 위한 무기였지만, 이 자리에서 어떤 거짓말을 하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짓말 섞은 덩키의 이야기는 진실일까? 그래도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아무 말 못하는 카셀을 바라보며 제이니는 손을 살짝 흔들어 주었다. 그는 어색하게 미소 지은 후 말을 시작했다. “저는 말 재주가 없어 이 자리에 서기가 힘들군요. 아시겠지만, 저는 아란티아의 기사입니다.” 사람들의 작은 웃음소리. “제 얘기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뿐이니, 제가 아닌 이야기나 하겠습니다. 하늘 산맥 이야기가 나왔으니 저도 그 곳 이야기를 해보죠.” 아이들은 와아 하며 덩키 쪽을 바라보았다. 늙은 이야기꾼은 조금 당황하는 표정이었지만, 카셀은 웃으며 그에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아이들의 영웅을 추락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늘 산맥은 세상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있어왔으며 그 곳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화 속의 존재가 살고 있다고 전해져 왔다. 산맥 너머의 남쪽 땅은 누구도 가보지 못했으며 그런 신비감 때문인지 언제나 시인들의 적절한 소재였다. 그 곳이 땅 끝이라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이 있다는 설도 있고, 드래곤이나 날개 달린 엘프가 지배하는 숲이라는 설도 있었다. 아크랜드를 경계짓는 그 거대한 절벽과도 같은 산에 도전한 사람들은 꽤 많았으나 성공한 이는 없었고, 극히 일부는 아예 돌아오지도 못했다. 카셀의 이야기는 과거 하늘 산맥을 통과하려 했던 익셀런 기사단의 일화였다. 아란티아를 제외한 아크랜드의 모든 나라를 무너뜨린 그 막강한 기사단이 산맥 너머의 남쪽까지 침입하려 했던 일은 꽤 유명했다. 산맥 안으로 들어가 드래곤의 공격을 받아 기사단이 전멸했다는 둥, 엘프들의 마법에 홀려 미쳐버린 기사들이 아군을 공격했다는 둥, 없는 이야기 있는 이야기 다 섞인 그 소문들을 잘 섞어 카셀은 신비하게 풀어나갔다. 아이들은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고, 어른들도 팔짱을 끼고 시큰둥하니 듣다가 이내 이야기에 집중하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카셀의 주위에 몰려들었고, 카셀은 자신이 아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검으로만 드래곤을 잡았다는 슬레이어, 론타몬과 격전을 펼친 아란티아, 죽은 대현자의 핏줄을 이은 또 다른 현자에 대한 긴 이야기도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제 목이 아프군요. 그만 끝낼까요?” 도저히 그만할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카셀은 정중히 말했다. 아이들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긴장을 풀었고, 어른들도 그제야 현실로 되돌아가며 너무 오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자기 일을 하러 돌아갔다. “기사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고 해도 믿겠군요.” “한 때 그런 이을 꿈꾸기도 했죠.” 카셀은 제이니가 건네준 물로 마른 목을 적셨다. “이제야 이 마을이 의미하는 바를 알겠어요. 팔콘이 무얼 생각하는지.” “예?” “팔콘은 카모르트의 모든 곳이 이런 마을이 되길 원하는 겁니다.” “훗, 좋은 마을이지만, 그렇게 살기 좋은 마을은 아니죠.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모라 다들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감을 품고 살아요.” “그렇군요.” “당신 이야기 듣느라 벌써 점심 시간이 되었어요. 점심 먹으러 가죠.” 점심은 마을 사람들과 먹었다. 카셀은 이미 아이들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식사 시간 내내 아이들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기사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며, 검술은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아란티아는 어떤 곳인지, 아이들의 호기심은 바닥나지 않았다. 제이니가 옆에서 거들어주지 않았다면 카셀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은 채로 달아나 버릴 작정이었다. 점심 시간은 즐거웠고, 카셀도 오랜 만에 편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편히 있어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기사단이다!” 마을 입구에서 말을 타고 들어온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행복한 포만감에 웃으며 다 같이 그릇을 치우던 마을 사람들은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곧 항상 불안해 하던 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고 허둥댔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진정 해. 평소 훈련 받았던 대로 행동한다.” 제이니가 소리 높여 외친 후 카셀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이 마을이 들통나버렸군요.” 그녀의 허탈한 미소 뒤에 공포가 감추어져 있었다. 카셀도 그제야 무슨 일이 이어났는지 알았다. “기사단의 숫자는?” 금방 준비를 마친 팔콘이 나와 물었다. “기사단 열 다섯 기, 병사들은 약 쉰 명 정도입니다.” “이 곳임을 확신하고 온 것이군. 조금 힘들겠어.” “싸워볼만 합니다. 우리도 그 동안 많은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팔콘.” 비상을 알려오자마자 칼과 갑옷으로 무장을 마친 부하들은 투지 가득한 눈으로 팔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콘은 피식 웃었다. “우리가 기사단과 단 한번이라도 정면 대결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한 번 있었지. 메오릭스가 희생 되어 막았던......이번은 기습과 다르다. 전력을 다해 돌진 준비를 마친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는건 같은 전력을 갖춘 기사단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했더라도 이번만큼은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해.” 자기 키의 두 배 길이의 거창을 쥐고 있는 도적이 팔콘의 말에 화를 내며 말했다. “왜 싸우기도 전에 패배를 염두에 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에게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위가 없어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미 퇴로를 확보해두었다. 이 마을 북쪽에 뚫린 동굴을 타고 가면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지. 쓰고 싶지 않은 길이지만, 미리 말해두는 거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내가 허락하는 것이니까.” 팔콘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죽을 지도 모르는 싸움이다. 싸움이 두려운 사람, 가족을 둔 사람은 떠나라.”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안았다. 그러자 팔콘이 직접 지목했다. “데이, 블록, 라루. 너희 셋은 빠져라.” 셋은 동시에 반발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럴 때를 대비한 훈련은 무엇이었습니까?” 팔콘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혼자이거나 가족들 모두 성장하여 없어도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데이, 너에게는 부양해야 할 부모님과 아내가 있다. 블록, 네가 없다면 어린 네 남매는 어찌 되겠느냐? 라루, 임신한 어린 아내를 두고 이런 싸움터에 나서는 게 아니다. 게다가 너희셋 다 젊다. 살아남아 우리가 죽더라도 다른 이의 가족을 지켜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팔콘.” “내 명령을 듣지 않을 셈이냐?” 다른 이들이 나서서 중재했다. “가게, 블록. 내 아내를 부탁해.” “데이, 너는 내 부모님을 잘 돌볼 수 있을 거야.” “왜 하필 접니까?” 그들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팔콘은 셋을 보내고 칼을 찼다. 나머지도 그의 뒤를 따랐다. 회관 앞에는 카셀이 있었다. 팔콘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과는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이야기 하고 싶었소.” 하지만 카셀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한가지 묻겠소, 팔콘.” “나는 지금 시간이 많지 않소.” “그래서 더욱 묻고 싶소. 당신에게 있어 이 마을의 의미가 뭐요?” 카셀의 돌발적인 행동에 가장 당황한 건 뒤에 서 있던 제이니였다. 제이니는 카셀이 따로 도망칠 수 있도록 마을 내왔는데, 그 틈에 그가 팔콘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기사단이 곧 들이닥친다고 입구의 경비가 소리 지르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패닉 상태로 짐을 꾸려 뒷산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허둥대면서도 마을 사람 모두 같은 방향으로 뛰어가는 걸 보니 피난 훈련도 받은 게 분명했다. 카셀은 그런 모든 것을 대비한 팔콘에게 존경심 마저 느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팔콘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질문 그대로! 왜 이 마을을 만들었소?” “만들지 않았소. 이 마을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오.” “그럼 이 마을의 의미가 무엇이오? 도적이 된 당신에게 이 마을이 왜 있어야 하는 겁니까?” “이 마을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팔콘은 카셀의 코앞에 대고 소리질렀다. “아무 것도! 내게 중요한 건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뿐이야. 마을 같은 건 다시 지을 수 있다. 이제 대답이 됐나? 이제 떠나라, 캡틴 울프. 이제부터는 우리의 싸움이다.” “아니, 당신이 할 일은 마을 사람들을 살리는 겁니다, 팔콘. 메오릭스를 흉내 낼 필요는 없소.” “휴, 흉내?” 카셀은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기사단의 깃발이 붉은 장미인 것을 먼저 확인했다. “저들은 내가 막겠소.” “당신 혼자서? 미쳤군.” “나의 진짜 무기가 내 검이나 검술이라고 생각하시오?” 카셀은 제이니가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농사일 때문에 언제나 꾸준히 말 타는 연습을 해둔 것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같잖은 기사 흉내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진짜 기사다운 면모를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말머리를 기운 차게 바꾼 후 팔콘에게 말했다. “당신의 본명이 듣고 싶소, 팔콘.” 팔콘은 홀로 기사단을 향해 말머리를 돌린 카셀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데이릭, 휴스펠 데이릭.” “카셀 노이. 언제고 진짜 기사가 될 이름이니 기억하시오.” 카셀은 마을 입구 쪽으로 마을 몰았다. “진짜 기사?” 팔콘은 그가 남긴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 입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요, 팔콘?” 부하들도 당황해 했다. “일단 전투 준비는 한다. 제이니! 마을 사람들을 인도하여 동굴로 데려가라.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제이니는 걱정스러운 듯 카셀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부하들을 각자의 위치에 배치시킨 후 팔콘은 마을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카셀은 벌써 돌진해 오는 기사단의 정면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갈 때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공포가 가득 서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이야기에 흥분하던 맑은 눈동자였다. 아무리 서둘러 후퇴해도 저들 중 몇이 기사단의 말발굽을 피할 수 있을까? 카셀은 이것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을 속인 죄책감에 대한 사죄라고 봐도 좋았다. 다가오는 카셀의 말을 발견한 기사단의 창 끝이 치켜 올라갔다. 저들은 어떤 명령을 받고 이 마을을 쳐들어 오는 것일까? 카셀의 예상대로라면 그는 기사단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적으로 오인 당해 돌격해 오는 창 끝에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이다. 카셀은 검은 칼날을 뽑아 하늘로 치켜들었다.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앞발을 들어올리며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을 배로 모아 힘껏 소리질렀다. “나는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 캡틴 카셀이다! 멈춰라!” 햇빛을 반사하여 날을 번뜩이는 창 끝은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접근했다. 그는 겁에 질린 말을 달래며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칼만 들고 있었다. 기사단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 마을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달아나고 싶었다. 그는 고민했으나, 일부로 생각의 고삐를 늦추었다. 달아나기에는 너무 늦어 달아날 수 없는 위치까지 자신을 몰아넣었다. 무서워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욱 고삐를 당겨 말을 그 자리에 고정시킬 수 있었다. 기사들은 그에게 도달하기 열 걸음 앞에서야 비로소 말을 세웠다. 누런 먼지가 기사들을 뒤덮었고, 뒤에서 바람이 불어 그 먼지는 카셀도 뒤덮었다. 로즈 기사단의 눈에는 마치 안개 속에 한한 빛을 내는 검은 칼날의 성스러운 기사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이름을 밝혔다. 그 쪽의 이름도 밝혀라.” 카셀은 거역할 수 없는 강한 어조로 외쳤다. “나는 로즈 기사단의 리토르요, 캡틴 카셀.” 리토르는 창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마터면 공격할 뻔 했소. 우리는 당신을 구하러 왔소.” “그럼 그 곳에는 이실랜드나 니셀루치가 있겠군.” “그 둘은 부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소. 하지만 이 곳의 위치를 알려주며 당신을 구해주길 부탁했소. 늦지 않아서 다행이오.” 실로 다행이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그의 페이스였다. “뭐가 늦는 것이고 뭐가 다행이라는 것이오?” 카셀이 호통 치자, 리토르는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다른 기사들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카셀이 분명 자기를 구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저들은 도적이 아니오. 돌아가시오.” “우리는 이미 저 곳이 도적 팔콘의 소굴임을 학인했소.” “팔콘이 도적이라는 거요? 도적이 무언데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카셀의 말에 리토르는 마침내 짜증을 내며 적의를 드러냈다. “나와 지금 선문답을 하자는 것이오, 캡틴 울프?” “나는 지금 당신을 시험하고 있소, 기사 리토르. 도적이 뭔지 말 할 수 있다면 이 길을 터 드리리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이 곳은 통과할 수 없소.”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지 아시오? 아무리 나라의 손님이라도 이런 짓은 용서 받을 수 없소.” “용서?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지까지 내가 말해줘야 한다면 나도 더 이상 말로 하지 않겠소.” 카셀은 말없이 칼을 리토르 쪽으로 겨누었다. 모든 기사들이 놀라며 거두었던 창을 카셀에게 들이댔다. 하지만 카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오히려 정신은 맑아졌다. 리토르가 모두를 진정시켰다. 그는 이렇게 많은 기사들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카셀에게서 심상치 않은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울프 기사단은 개개인이 혼자서 열 명을 상대할 수 있고 그 중 정예인 하얀 늑대는 모든 울프 기사단 중 최고라고 들었소. 나는 그 명성을 검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리고 난 우리 기사단이 형편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우리는 임무를 수행중이고 당신은 그것을 방해하고 있소.” “당신의 임무는 나를 구하는 것이고, 그 임무는 끝났소.” “내 임무는 두가지였소. 당신을 구하고 당신을 납치한 도적단을 끝장 내는 것.” “그래서 말했잖소. 그들은 도적단이 아니오.” “도적단이 아니라고?” “도적단이 뭐냐고 물었잖소? 설명 못하겠다면 내가 해드리지. 도적이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그 물건을 빼앗고, 그 물건으로 자기 사욕을 채우는 악당들이오. 그럼 도적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은 도적일까, 아닐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팔콘은 나라의 또 다른 도적들의 물건을 훔쳤소. 그럼 그것도 도적질인 거요? 원칙상으로는 도적이지만, 이거 다시 그 도적들이 빼앗으면 누가 도적이 되는 거요?” 리토르는 카셀이 말하는 또 다른 도적이 자신의 군주를 비롯한 두 백작의 군대를 의미하는 것임을 깨닫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당신은 우리가 도적이라는 거요?” “백성들이 정말 무서워하는 게 도적이라고 생각하시오? 이 나라를 뒤집어 엎으며 국토를 모조리 전쟁터로 만들고 그걸 명목으로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가장 큰 나라의 두 도둑은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이오. 팔콘은 그 두 도둑들의 물건을 빼앗는 또 다른 도적이지. 그럼 같은 도적들끼리 서로 훔쳐간다면 누가 정의이고 누가 불의란 말이오? 아무도 어느 한 쪽으로 심판할 수 없소.” “그들은 우리 동료들을 죽였소. 당신도 그 자리에 있다면 알 거 아니오?” “맞소. 그렇다면 당신들은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을 죽인 복수를 한다는 뜻인가?” “당신의 궤변을 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만약 이 길을 막는다면 당신이라도 뚫고 지나가겠소.” “당신들의 작전 목적이 개인적인 이유라면 나에게도 개인적인 이유가 있소. 이들은 나를 진짜 나라의 손님으로 대우해주었고, 이미 당신들이 도적이라고 부르는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소. 그 정 때문에 나는 팔콘의 편에 붙어 싸우겠소.” “정말 그렇다면 아무리 당신이 대단한 기사라도 싸우겠소.” 기사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창을 앞에 내밀었고, 카셀도 칼을 앞으로 내민 채 말을 천천히 뒤로 몰았다. 이미 그 말을 내뱉었을 때는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팔콘의 작전 지휘 능력에 감탄했다. 그가 기사들의 기사를 막고 있는 동안 이미 팔콘은 로즈 기사단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뒤를 따라오던 보병 부대는 팔콘의 궁수 부대에 진로를 막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천천히 이루어진 작전이었으나 리토르를 비롯한 로즈 기사단의 눈에는 느닷없는 매복처럼 보였다. 리토르는 뒤늦게 알고 당황해 했다. 카셀은 칼을 겨운 채 말했다. “기사의 명예에 대해서라면 이미 살려서 돌려보낸 두 친구가 대신 강의해 줄 것이오. 항복하라는 말도 하지 않겠소. 돌아가시오.” “도적의 편에 들다니, 당신은 기사의 명예를 더렵혔소.” 리토르는 창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카모르트에 기사가 있었는가? 양쪽 백작 군이 서로 상대편 기사는 기사도 아니라고 떠들어 대는 통에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 가 있어야지.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기사도에 대해서 말하겠소.” 카셀은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매복해 있는 팔콘에게도 들렸다. “기사는 무장하지 않은 자를 공격하지 않는다. 기사는 약한 자를 보호하고 강한 자를 상대하여 물러나지 않는다. 기사는 충성을 맹세한 군주를 진심으로 따르되, 군주가 옳은 길로 가도록 보필한다. 기사는 뭇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지 않는다. 기사는 임자 있는 여자를 겁탈하지 않는다. 이건 아주 우스운 것 같지만, 나는 많이 보아왔으니 웃지 마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동료가 기사도를 어기는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다음 사항에 하나라도 위배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나를 공격해도 좋소.” 카셀은 칼을 집어넣어 버렸다. 창을 코앞에 둔 상태의 그 대범함에 리토르는 질려 버렸다. 칼을 들고 있으나 없으나 매 한가지이기 때문에 할 수 잇는 무모함임을 알 리 없는 그는 잠시 말을 잊었다. 다른 기사들도 카셀의 거침없는 비난에 할 말이 없었다. 더군다나 사방에 궁수가 버티고 있는 통에 싸우지도 못했다. “당신의 그 행동은 카모르트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었소, 캡틴 울프. 훗날 어떤 식으로 이 이이 평가될지 모르오.” 리토르는 말머리를 돌렸고, 다른 기사들도 말머리를 돌려 말을 몰았다. 팔콘의 화살 부대도 곧 활을 거두었다. 기사단이 보병 부대까지 몰고 사라지자, 카셀은 긴장이 풀려 말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다. 겨우 몸의 균형을 유지한 그는 수풀 속에서 말을 몰고 나온 팔콘을 발견했다. “피 한 방울 없이 이 싸움을 막았군. 난 적어도 어느 한쪽의 전멸을 생각했는데.” 팔콘이 감탄하며 말하자,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에 당신이 빠르게 손을 써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혼자 기사단 전체와 싸워야 했을 거요.” 팔콘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나선 거요?” “아니오. 말로만 설득할 수 있을 거라 믿었소. 실패한 거지.” “그럼 하나 묻겠소. 정말 기사단과 싸웠다면 이길 수 있었다는 거요?” 카셀은 잠깐 뭐라 대답할까 망설였다. 정말 울프 기사단의 캡틴쯤 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싸우지 않은 싸움의 결과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팔콘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환영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습니다, 기사 데이릭.” “내 이름은 팔콘이오.” “예, 팔콘.” 카셀은 농사일로 굳은 손을 내밀어 그의 검술로 단련된 손을 맞잡았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이 마을을 떠나야겠지. 일단 물러나긴 했으나 위치가 들통났으니 조만간 또 다른 습격이 있을 거요. 하지만 사람이 있다면 마을은 또 생기는 법이오.” “그럴 거요. 당신이라면 분명 어떤 곳에 마을을 만들든 살기 좋을 겁니다.” “고맙소. 아, 그런데......아까, 진짜 기사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오?” “별 거 아니오. 언젠가 또 거기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눌 날이 올거요.” “만약 내가 생각하는 뜻이 맞는다면 나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소. 당신은 이미 진짜 기사요. 직책이나 계급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한다 해도 말이오.” 카셀은 팔콘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 웃음 지었다. “고맙습니다. 떠날 시간이군요. 그럼 행운을 빌겠소.” “당신의 앞날에도 행운이 있길 빌겠소. 언제고 내 힘이 필요하다면 불러주시오.” “그러지요. 카모르트의 앞날에 영광이 있길.” “아란티아의 앞날에 영광이 있길.” 멀리 마을 앞에 제이니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카셀은 손을 높이 들어 그녀에게 인사하고 말을 몰았다. 더 이상 그들을 속이는 게 실어 서둘러 이 마을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 더 머물고 싶은 또 다른 아쉬움도 있었다. 그는 마음 한 구석의 아쉬움을 달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진짜 칼의 주인을 찾아. 5. 코홀룬 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말 상인이 준 정보에 의지하자면, 진짜 하얀 늑대들은 코홀룬이나 노르만트로 갔다. 그게 설사 거짓말이라도 패잔병들의 마을로 되돌아 갈 수 없으니, 카셀은 팔콘에게 빌린 말을 타고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사려 깊은 제이니가 옷에 금화를 몇 개 넣어두어 여행 경비는 부족하지 않았다. 고마운 제이니...... 그녀에게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 걸까? 코홀룬은 대도시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적과의 조우나 짐승들의 공격이 두려워, 돌아가더라도 마을과 마을 사이만 지나다니느라 사흘 거리를 닷새나 걸렸다. 계획은 좋았지만, 대신 묵어가기 위해 들른 마을의 피폐한 생활상을 봐야 했다. 전쟁의 여파는 수도 근처의 마을이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코홀룬은 그나마 번화한 곳이라, 전쟁의 타깃이 되지 않았다. 그런 도시들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인데 두 백작이 자신들의 목적을 잃을 정도로 미친 것은 아니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싸였는데, 출입하기 위해서는 은화를 두 닢이나 지불해야 했다. 그는 그 끔찍한 가격에 혀를 내둘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내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별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돈을 냈다.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기사들이 지불했던 맥주값에 비하면 싸다고 봐야 하니까. ‘자, 이제 어쩐다?’ 도시에 들어섰지만, 너무 넓어 어디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 지 막막했다. 거리는 활발했고, 사람도 많았으며 시장은 번잡했다. 촌구석에서만 살던 그는 언제고 이런 도시에 진출하고 싶었지만 막상 발을 디딘 그곳은 조금도 신기할 것 없는 더러운 곳이었다. 화려해 보이는 골목 바로 뒤쪽에는 더러운 구정물이 흐르고 부랑자들이 거적을 몸에 두른 채 뒹굴고 있었다. 도대체 죽은 건지 자고 있는 건지 구별이 안 갔다. 시장 바닥에는 팔뚝만한 쥐들이 돌아다니는데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말을 끌고 반나절을 멍청히 돌아다니다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에 일단 여관을 하나 잡아 묵기로 했다. 그는 특별히 말에게 좋은 여물을 주라고 마구간지기에게 부탁하며 은화 하나를 집어주었지만, 시큰둥한 대답을 보니 해줄 것 같지 않았다. 번화한 도시의 여관들이 으레 그렇듯 이 곳도 술장사가 같이 이루어졌다.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확 끼쳤다. 대낮이라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앉아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모조리 음침하고 지저분했다. 도로 나갈까 하다가 다른 여관이라고 다를까 싶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젊은 지배인이 그를 맞았다. “방을 하나.” “며칠?” “누굴 찾을 때까지. 언제까지 묵게 될 지는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틀 정도 묵을 것 같소.” “하루는 은화 넷. 사흘은 금화 하나.” “하루치씩 계산합시다.” 카셀은 일단 금화를 한 개 내주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2층 3호실이오.” 그가 걸어가자 홀에 있는 손님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따라다녔다. 약에 취한 것 같은 한 명이 이빨로 삑 소리를 내며 말을 걸어왔다. “어이, 친구. 칼 좋은 거 차고 있네.” 카셀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조심하는 게 좋아. 이 곳에서 그런 좋은 물건은 바로 표적이거든.” 그는 깔깔대고 웃었다. 카셀은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정말 가게 손님들이 바라보는 것은 카셀이 아니라 카셀의 칼이었다. 그들은 카셀에게 눈치 채이지 않으려고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관심까지 끊어버린 건 아니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는 아직도 웃고 있는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뭐라고 했지?”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하, 그거 좋은 물건이라고 했지. 어지간하면 숨겨가지고 다녀. 그렇게 자랑스럽게 보란 듯 내놓고 다니면 좀 훔쳐가주슈 하고 애원하는 거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벌써 몇 명이나 이 칼을 보고 그의 물건을 탐냈을지 모를 일이었다. 반나절을 시장 바닥에서 돌아다녔으니,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는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칼을 뽑았다. 약에 취한 듯 술에 취한 듯 눈동자가 풀린 그 남자는 헤헤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어이, 난 충고를 해준 거야. 감사는 못할망정 너무 하지 않아? 그리고 이런 곳에서 칼 보인다고 무서워할 사람 없어.” “충고 고맙군. 대신 나도 거기에 걸맞는 정보를 하나 주지. 이 칼날이 보이나?” “검군. 뭐야, 장식품이었어?” “검은 칼날에 하얀 늑대 문양이 보이지? 이런 물건을 누가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이 바닥에서 이런 물건을 아직도 얌전히 가지고 다닌다면 얼마나 많은 멍청한 도둑놈들이 이 칼에 죽었다고 생각하나?” 카셀은 거의 속삭이는 목소리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말했다. 그 남자는 긴장하며 그가 가까이 올수록 뒤로 물러났다. “뭐,뭐야? 난 그냥 정말 충고만 해준 거야. 그 물건에 관심 없어.” “나도 그냥 좋은 정보만 하나 준거야. 자네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 없어. 단지 나는 쉬고 싶은데 또 다른 귀찮은 일이 터질까봐 걱정해서 한 마디 해 주는 거야.” 그 말은 사실 그 남자보다는 그 술집에 있는 다른 녀석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모두 못 들은 척 하고 있었지만, 다 들리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에게서 제일 머리 떨어진 지배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으니까. 카셀은 도로 칼을 집어넣고 계단을 올라갔다. 칼을 보인게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을까? 그는 조금 걱정되었지만, 옷을 벗고 침대에 눕자 이내 그 걱정을 잊어버렸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여정은 정말 힘들었다. 그는 누운 채로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히 점검해보았다. 하나하나 돌아보기에 만만한 크기의 도시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곳 저곳을 돌아보기에 만만한 크기의 도시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있었다. 아란티아의 기사단이 직접 카모르트를 방문한다면 소문이라도 쓸만한 게 나올 것이다. 이 도시에 없다면 다음은 수도로 직접 가야 하는데, 최소한 여기서 얻은 정보가 유용하게 쓰이겠지. 남은 돈은 금화 세 개와 은화 열 두 개. 수도까지 가서 찾지 못하면 빈털터리가 될 판이었다.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돈 한 푼 쓰지 않는데 이 이상 어떻게 아껴 쓸 수 있을까? 노숙? 아,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자. 그는 목욕이라도 하고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운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눈을 뜨니 벌써 날이 저물어 있었다. 그는 황급히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시간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는 다시 나갈 채비를 갖추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멈췄다. 옆구리에 차고 있는 칼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 술 취한 인간의 말이 옳다. 이 칼은 너무 눈에 띈다. 그는 여행 중 구한 겉옷을 몸에 걸쳐 허리에 찬 칼을 감추었다. 더웠지만 중요한 건 목숨과 칼이지, 편안함이 아니었다. 술집을 빠져나갈 때도 신경 쓰이는 눈길은 없었다. 그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많아서 돌아다닐 때도 특별히 관심을 끄는 눈길을 받지도 않았다. 시장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어봤지만 특별히 아란티아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주로 전쟁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귀에 확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캡틴이 혼자서 칼을 들고 막아서니까 로즈 기사단 녀석들이 꼼짝도 못하고 멈췄다더군.” “맙소사, 혼자서 삼십 명의 기사단을 말이야?” “그래! 그것도 칼 한 번 안 휘두르고 기합 만으로. 내 생각에는 벌써 그 캡틴이란 작자가 팔콘을 자기 부하로 만들어버린 것 같아.” “있을법한 얘기지. 소문 들었어? 아란티아의 기사단 시험. 곰 한 마리 정도는 맨 손으로 때려잡고 장비 없이 성벽을 타 넘을 수 있어야 할 정도가 아니면 예비 시험도 볼 수 없다더군.” “내가 들은 건 더 심했어. 울프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여왕의 수호 기사인 퀘이언의 일격을 받아내지 못하면 그냥 죽어야 한다더군. 그 소문 있잖아. 그의 일격은 신의 일격과도 같아서 방패든 갑옷이든 모두 베어낸다고. 그걸 막을 정도가 아니면 합격이 아니래.” “하긴 그 정도는 되니까 로즈 기사단 전체를 혼자 막을 용기가 나오는 거겠지.” “그런데 카모르트에는 왜 왔대? 왕이 불렀나?” “내가 듣기로는 검은 사자 백작의 초청이라던데? 힘을 합쳐 이 나라를 먹을 속셈이래?” “아란티아가 침략 전쟁을?” “아니라는 법 있나? 맙소사, 말이 났으니 얘긴데 국토가 작아서 그렇지, 그 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차지 못할 나라가 어디 있겠나? 울프 기사단만 정면에 세우면 우리 같은 나라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해야 할 걸.” “쉿, 그런 이야기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마.” 곧 그들의 이야기는 전에 벌어진 귀족들 간의 전쟁 일화로 넘어갔다. 귀족들의 전쟁 이야기는 용병들 틈에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지만, 혹시라도 또 다른 아란티아 이야기를 해줄까 싶어 그냥 근처를 서성댔다. 골목 쪽에서 한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셀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그는 얼결에 그 눈길을 피해버렸다. 검은 눈썹에 푹 파인 커다란 눈동자는 아주 강한 인상인데도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인 듯 했다. 품에는 아주 긴 창을 끼고 있었다. 넓은 어깨에 구릿빛으로 탄 굵은 팔뚝의 근육은 탄력 있어 보였고, 짙은 갈색의 곱슬 머리는 가슴까지 늘어져 있었다. ‘아니야, 본 적이 있는 얼굴이야. 그런데 누구지? 저런 인상적인 얼굴을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에 있을 때 봤던 용병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우연히 짧게 스쳐지나 기억이 선명하지 않던가. 어떤 쪽이든 지금 만나서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 틈에 지나쳐 걸음을 빨리 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가 쫓아오고 있었다. 하늘로 치켜 세운 긴 창은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었다. 그것은 미행도 아니었다. 무조건 따라온다고 밝히고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와 부딪힌 사람들은 욕이라도 한 마디 하려다 그가 든 창과 그의 엄청난 근육질 몸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런 남자를 상대로는 거짓말 할 기회도 없을 거야!’ 카셀은 달렸다. 그러나 쫓아오는 이는 별로 힘도 안 쓰고 여유있게 거리를 유지하다가 번화가를 벗어나자 점점 따라붙고 있었다. 카셀은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그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눈빛 만으로 잡아먹을 것 같은 그의 험한 인상에 카셀은 그만 뱀을 본 개구리 마냥 다리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왜 따라오는 걸까? 생각할 수 있는 건 칼 도둑이었다. 아까 술집에서 말했던 그 남자의 말대로, 눈독을 들여놨다가 나중에 접근하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면, 뭐가 있을까? 아무렴 기껏 인파를 해치고 쫓아온 사람이 ‘우리 술집을 애용해 주세요.’ 라는 말이라도 할까? 카셀은 순간 칼을 집어 던지고 달아났을 경우 살아날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누군가 멱살을 잡아 골목으로 끌어당기기 전까지는 반쯤 그런 의견에 기울어졌었다. “헤이, 부자 양반.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시나? 쫓아오느라 고생했잖아.” 카셀은 골목에 몰아세우고 칼을 목에 들이댄 남자를 보고, 우습게도 반갑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쫓아오는 남자가 얼마나 무서웠었는지 카셀은 그 때서야 실감했고, 차가운 금속이 목에 느껴지자 그때서야 엉뚱한 일에 또 휘말려 들었음을 알았다. “쫓아와?” 술집에서 칼 도둑 맞지 않게 조심하라고 고맙게도 경고해 준 그 남자와 모르는 얼굴 넷이 주위를 순식간에 에워싸고 있었다. 카셀은 뒤늦게 그의 말을 되새기며 물었다. 이 녀석들이 쫓아온 거라면 지금도 쫓아오고 있을 그 덩치 큰 남자는 뭐야? 같은 패거리? “한 시간 전부터 네가 번화가에서 멀어지길 기다렸지. 알아서 와주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패거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카셀은 말 한 마디마다 술 냄새 풍기는 그 남자의 눈빛에서 아주 기묘한 살기를 느꼈다. 그는 웃고 있었고, 칼을 내놓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건 협상의 여지도 없이 목을 찌르고 칼을 훔쳐가겠다는 마을 대신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카셀은 길게 말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거의 외마디처럼 내뱉었다. “날 죽이면 니들 후회한다!” 진짜로 그럴 작정이었는지 그의 팔이 발작적으로 올라갔다가 카셀의 말에 멈췄다. “뭐?정말?” 그는 실실 쪼개며 뒤에 서 있는 자기 동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두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어떻게 후회하나 물어봐.” “시간 없어.” 그러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셀에게 말했다. “그럼 둘의 의견을 수렴해서! 세 마디 안에 설득해봐. 그럼 안 찌를게.” 어이구, 맙소사. 어차피 세 마디 밖에 할 말도 없었다. 이놈아! “난 경호원이 있다.” “뭐?” 세 마디 안에 설득하라는 말은 사실상 찌르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찌르지 않았다. 설득을 했든 안 했든 최소한 시간은 벌게 되었다. “경호원이 어디 있는데?”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항상 내 뒤를 따르고 있지. 날 죽이면 너희들은 내 경호원에게 죽을 거야.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이런 고급 칼을 들고 다녔다면, 이 칼을 노렸던 수 많은 얼치기들을 얼마나 죽였을 지에 대해!” 카셀은 일부러 말을 빨리 했다. “난 검술 같은 거 사실 할 줄 몰라. 그런데도 내 칼을 노렸던 놈들은 모두 죽었지. 왜 그렇다고 생각해? 내겐 언제나 뒤를 따르는 경호원이 있다. 날 놔주지 않으면 너희들도 끝장 나.” “거짓말 하지 마, 이 개자식아. 그럼 셋 셀 동안 한 번 불러내 보시지.” 그는 멱살 잡은 손을 들어올려 카셀을 더욱 벽 쪽으로 몰아세웠다. “하나! 둘!” 카셀은 눈에 핏발을 세운 그 남자의 고함 소리에 뭐라 시간을 벌 말도 찾지 못하고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망할 놈, 다섯까지만 이라도 세지. 그러나 셋으로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셋을 끝까지 세지 못했다. 그리고 멱살을 잡은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카셀이 눈을 뜨자 골목 입구 쪽에 거대한 창을 든 남자가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을 든 남자는 잠시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지금 상황 만으로 일이 어떻게 꼬인 건지 알 리는 없었다. 카셀은 아는 사람에게 말 하는 것처럼 잽싸게 말했다. “칼은 아직 안전하게 있소. 하지만 이 자들이 가져갈 생각인 모양이오.” 대꾸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창을 든 남자도 칼을 훔쳐갈 생각이 있다면 카셀을 둘러싸고 협박 중인 다섯 명과 경쟁자일 것이다. 카셀은 처음부터 그가 따라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제 이 두 패거리가 싸움만 붙으면 작전은 성공이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은 대꾸가 돌아왔다. “이 자들은 누군가?” 카셀은 담담하게 묻는 창을 든 남자의 물음에 즉시 대답했다. “보면 모르오? 칼 도둑이지.” 그 남자는 다섯 명을 스윽 훑어보더니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서라. 너희들이 훔쳐도 될 만한 칼이 아니다.” 다섯 명은 그 남자의 덩치와 목소리, 험한 얼굴에 잠시 주춤거렸다가 곧 기가 살아났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다섯이고 창을 든 남자는 혼자였다. “이 자식, 경호원이면 다냐?” 다섯 명은 일제히 칼을 뽑았다. 덩치 큰 남자는 쥐고 있는 철창을 앞으로 길게 내밀었다. “경고했다.” “하든지 말든지.” 한 명이 갑자기 뛰쳐나가자 카셀을 지키고 있는 한 명을 제외한 세 명이 즉시 뒤따랐다. 덩치 큰 남자는 네 명의 공격을 아주 여유 있게 막더니 두 걸음 정도 물러났다. 카셀이 보기에 그것은 후퇴한 게 아니라 창을 쓰기 위해 좁은 골목을 벗어난 것이었는데, 네 명의 패거리들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 모양인지 더욱 기세를 올려 골목 밖으로 달려나가 그를 포위했다. 카셀을 지키고 있는 녀석은 그 광경에 한 눈이 팔려 경계를 잠시 소홀히 했다. 지금까지 카셀이 술 냄새 풍기며 목에 칼을 들이댄 남자를 향해 내뱉은 모든 무모한 허풍은 오직 그 틈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토록 기다린 한 순간이 나타나자 다급한 카셀은 칼도 뽑지 않고 상대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얼굴을 가리고 물러났으니 얼마든지 더 칠 수 있었으나 카셀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났다. “멈춰라!” 창을 든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다른 이들의 비명 소리와 부딪히는 금속성이 들렸다. 하지만 카셀은 그 뒤에 그들끼리 싸우든 같이 차를 마시든 개의치 않고 길도 모르는 골목길을 달려갔다. 다시 번화가로 접어들어 인파에 파묻힌 후에야 그는 걸음을 늦추었다. 아직도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 뒤통수가 간질간질했으나 겁이나 뒤도 돌아볼 수 없었다. ‘그나저나 그 창을 든 남자는 누구였을까?’ 궁금했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이 칼을 노린 도둑일지도 몰랐고, 이 칼의 비밀을 알고 있는 기사일지도 몰랐다. 칼의 비밀을 알 정도의 기사라면 이 칼을 가지고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아란티아에 가져다 주고 사례를 받을 수도 있고, 암시장에 더 비싼 값으로 팔아먹을 수도 있다. 카셀처럼 검에 대해 무지하지도 않은 것 같으니 카셀보다 더 그럴 듯 하게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 흉내를 낼 수도 있다. 목숨을 부지한 것도 다행이나, 자신이 존경하는 기사단의 보검이 그런 식으로 악용되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카셀은 해가 완전히 진 후에야 여관에 도착했다. 패잔병들의 도시에 있던 그 술집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떠들며 술과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식욕이 뚝 떨어져 바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 복도에는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방으로 들어가는 두 남자가 있었다. 그는 좁은 복도에서 겨우 그들을 피해 방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촛불을 켜지 않은 어둠이 그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그는 탁자로 가서 촛불을 켜고 땀에 젖은 외투를 벗었다. 침대에 시커먼 그림자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오늘 하루 동안 놀랄 일을 모두 겪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충분히 단련 되었다고 하던가. 머리 속에서, 목청 터지게 비명을 지른 후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쓰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벗은 외투를 천천히 의자에 걸어놓는 행동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데 그 칼을 가지고 있는지 우선 묻고 싶소.” 의외로 정중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또 칼 얘기였다. 카셀은 멍청하게 칼을 모두에게 내보이면서 돌아다녔던 반나절을 저주했다. 코홀룬의 주민 여러분! 제가 엄청 비싼 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제 생각에 이 무기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보검 같습니다. 가지고 싶은 사람은 저를 베고 가져가십쇼. 카셀은 자신을 실컷 비웃어 준 후 상대의 목소리 톤에 맞춘 정중한 어조로 대꾸했다. “누군데 이 칼에 대해 아는지 먼저 묻고 싶소.” 촛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결코 큰 덩치도 아니었고, 거대한 창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창을 든 그 덩치 큰 남자가 지름길로 질러와서 방에 미리 버티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말투로 미루어 그 다섯 명 중 한 명도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자, 아란티아의 여왕 수호 기사인 퀘이언 간트만이 그 칼을 가질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이 그 칼을 가졌지. 나는 오륙 년 전이긴 하지만, 아란티아 여왕의 공식 방문 때 그의 얼굴과 그 칼을 잠깐 본 적이 있는데, 칼은 맞으나 당신은 아니오. 그러니까 당신은 하얀 늑대들 중 일 인이라는 것만 추측할 수 있지. 맞소?” “놀라운 추리력과 관찰력이군. 그렇다고 해두겠소.” 카셀은 의자를 끌어당겨 등걸을 품에 안은 자세로 앉았다. 왠지 그게 느긋해 보이는 자세라고 생각했는데, 앉고 보니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자세를 고치면 더 우습게 보일 것 같아 그냥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카셀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나는 코홀룬의 영주 고디머 백작의 기사, 앤플러요. 아이크 앤플러.” “나는 카셀이오. 하얀 늑대들의 캡틴.” 팔콘의 마을 이후 처음으로 내뱉은 그 말에 카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이런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가락을 튀겼다. “당신들이 왕실로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소.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로즈 기사단을 만났다는 소문도 들었고...... 음, 그 소문은 아주 재미있더구려. 여하튼 시간상 분명 이 곳을 지나쳐갈 거라고 생각하고 최근 경비를 강화하고 있었지. 그러다 우리 측 정보원 중 하나가 당신을 발견하고 이 여관에 묵은 것을 알려왔소.” “그런데 이 칼만 보고?” “하얀 늑대들은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소. 당신이 카이라도 숨기고 이 도시에 들어왔다면 몰랐겠지.” “찾은 건 나뿐이오? 그러니까......” 카셀은 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내 동료들은?” “그거야 당신이 알고 있지 않소? 왜 그걸......?” 카셀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사정이 생겨 흩어졌소. 그래서 무슨 볼 일이 있어 무례하게 내 방에 몰래 숨어 있었던 거요?” “미리 말해둬야 할 일이 있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은 ‘당신이 알고 있는 두 백작’ 중 한 쪽이 고용한 암살자들에게 목숨을 위협 받고 있소. 이 마을에 당신들이 나타난다는 정보는 나만 들은 게 아니라, 당신을 죽이려 하는 쪽도 들었을 것이오. 시간이 없어 무례를 범할 수 밖에 없었소. 나는 당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온 거요.” 카셀은 아까 창을 들고 자신에게 접근해 왔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신중하지 못했던 지난 반나절에 더더욱 화가 났다. “그럼 당신은? 신분을 밝혔으나 나로서는 그걸 액면 그대로 믿는 것도 무리요. 그리고 애초에 하얀 늑대들의 캡틴인 내가 누군가의 경호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소?” 카셀은 본의 아니게 그를 먼저 의심했다. 정말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숨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암살자라면 당신이 들어오는 그 순간 문 뒤에 숨어서 칼을 내리쳤을 거요. 그리고 혼자서 하얀 늑대들의 캡틴과 싸울 정도로 나는 무모하지 않소. 이래 뵈어도 이 도시에서 나와 일 대 일로 싸워 승리를 장담하는 검사는 없소.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아니겠소?” 카셀은 속으로, ‘하! 그러셔?’ 하며 비웃었다. 하지만 정중함을 잃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좋겠소?” “우선 군주님의 성으로 갑시다. 나는 군주님과 함께 왕을 섬기는 몸. 왕의 손님을 대하는 예의 정도는 알고 있소.” “좋소.” 카셀은 기세 좋게 대답해버렸다. 그리고 또 후회했다. 6. 칼의 주인 코홀룬이 패잔병들의 마을과 다른 점은 그 규모도 그렇고, 밤이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온통 술 취한 용병투성이던 작은 마을에 비해 이 곳은 술집만 벗어나면 조용했다. 또 불을 켜지 않은 곳이 많이 달빛에 의존하여 걸어야 할 정도로 밤의 거리는 어두웠다. 앤프러라는 검사는 카셀을 더욱 어두운 곳으로 안내했다. 그는 가끔 멈춰 주위를 심각하게 살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 데 굳이 저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신중했다. 저택 쪽으로 뻗은 큰 길을 걷던 그는 지름길로 간다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코홀룬의 마을 골목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 초행길인 카셀은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방향 감각이라도 예리하지 않았다면 카셀은 꼼짝 없이 속을 뻔 했다. 그들은 같은 길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같은 곳을 돌고 있었다. 앤플러는 갑자기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더니 칼을 뽑았다. 그는 무언가를 대단히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쫓아오는 녀석이 있소.” 카셀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같은 인기척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소. 못 느꼈소?” 검의 고수라면 이런 것도 느껴야 하는 걸까? 카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뭔가 불안했다. 그가 안내하는 길은 지름길이 아니었다. 아니, 무엇보다 그는 검의 달인이 아니었다. 스스로 말했듯 달인을 알아보는 게 달인이라면 그는 틀렸다. 그는 뭔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항상 거짓말로 위기를 넘겨서인지 상대의 서툰 거짓말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여럿이오. 어쩌면 당할 지도 모르겠군. 자, 서두릅시다. 조금만 더 가면 내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소.” 어둠 속을 안내할 양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이해할 수 없군. 왜 자기 영지 안에서 이렇게 숨어 다니는 거요?” 카셀은 그 손길을 거부하고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나를 지금 의심하는 겁니까? 시간이 없소. 서둘러야 합니다.”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당신은 앤플러가 아니야.” 순간 그는 거짓말이 들통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유의 당혹스러움이 보였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의 표정이 증거가 되어주었다. “당신, 누구요?” 카셀은 물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그는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안내하려는 골목 쪽에서 또 다른 검은 그림자가 접근했다. 그들의 손에는 긴 물건이 쥐어져 있었고,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칼이었다. “날 속였군.” 앤플러, 아니 이제 누구인지 모를 그 남자가 손을 내저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 카셀은 뒤를 돌아 달려갔다. “캡틴 카셀! 기다리시오.” 그가 외쳤지만, 카셀은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쫓아오는 쇠가 들렸다. 그는 골목 여기 저기로 방향을 바꾸면서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좀체 잡을 수 없었지만, 계속 한 방향으로 뛰는 것보다 그게 나았다. 밤이라 발 소리가 크게 났다. 과일 껍질을 밟으며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려 그의 위치를 드러내버렸다. 그는 잠깐 몸을 숨겼다가 그림자들이 달려가는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다시 달려갔다. 정말 속이려 든 걸까? 아니면 너무 앞질러 생각한 걸까? 그의 말대로 처음부터 죽이려 들었으면 방 안에 들어가는 순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살려두었다. 그렇다면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살려둔 것이다.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마을에 들어와서 세 번 째였다. 누구를 믿으란 말인가? 그는 걸음을 늦추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그를 쫓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불빛은 거의 없었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불이 밝혀진 쪽으로 걸어갔다. ‘자, 이제 생각 좀 해보자. 앤플러는 이 지방 영주의 기사라고 했다. 나를 초대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비밀리에 접근할 이유가 있을까? 비밀이라지만, 왕의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아주 성대한 환영식을 펼쳐야 하지, 이렇게 숨어서 처리하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앤플러는 믿지 말자. 달아난 건 멋진 판단이었다.’ 골목 앞에 앤플러와 또 다른 검사들이 길을 막으면서 카셀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이미 카셀이 달아날 방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앤플러는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밀었다.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일단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우리는 당신을 해치거나 공격할 생각이 없었소.” “거짓말이오.” 카셀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뒤에서도 두 명의 검사들이 길을 막았다.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쓸 줄도 모르는 칼을 꺼내지 않았다. “이들은 내 부하요. 혼자서 당신을 경호할 자신이 없어 부른거요.” “이렇게 은밀하게 일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는 거요?”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오. 암살자들이 알아채면 위험하니까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소. 설명이 부족했다면 사과하리다.”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 “어떻게 해야 날 믿겠소?” “진실을 말하시오.” “난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앤플러의 눈빛은 아직도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뭘 두려워하고 있소?” 옆에 있는 다른 검사들은 앤플러와 카셀을 번갈아 보았다. 앤플러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위치와 목적이 이미 노출되었소. 이 곳이 내가 관리하는 영지라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소.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들을 당해내긴 힘들 거요.” “그들이란 게 누구요?” “지금은 말할 수 없소.” “아니, 아직도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내 눈을 속일 순 없소.” 옆에 있는 다른 검사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길고 가는 칼날의 검을 내밀었다가 휙 돌려 칼집에 꽂아 넣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현인 듯 했다. “나는 아이크 앤플러, 고디머 백작님의 수호 기사요.” 카셀은 잠깐 혼동을 일으켰다. 앤플러라고 밝힌 사람이 아닌 다른 이가 자신을 앤플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보게, 아이크.” 앤플러라고 속인 남자는 앤플러라고 자신을 소개한 검사를 말렸으나 앤플러라고 자신을 소개한 검사는 그의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치며 말을 이었다. “이 분은 나의 군주이시자 코홀룬의 영주이신 고디머 백작님이시오. 앤플러는 나요. 본의 아니게 당신을 속이게 되어서 미안하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소. 사실 백작님 조차 위험에 처해있으니까.” 카세은 진짜 앤플러와 가짜 앤플러, 그러니까 고디머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카셀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굳이 당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지 않았소?” “당신이 진짜 캡틴 울프인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 말은 쉽게 했지만, 보검 한 자루 들고 있다고 그 사람이 진짜 그 칼의 주인인지 어떻게 알겠소? 당신이 그저 운 좋게 그 칼을 주운 사람이라면, 또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죽이고 그 칼을 뺏은 사람이라면? 만약 당신이 가짜라면 위험에 노출되는 건 나요. 이런 자리에서 길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저택을 벗어나면 나도 위험하긴 매 한가지이기 때문에 저지른 거짓이었소. 이제 나를 믿어주겠소?” 고디머 백작은 포기했다는 듯 두 손을 들며 대꾸했다. “그리고 백작님은 오직 왕실의 편이며, 다른 두 백작의 전쟁에 반대하는 편이오. 하지만 그런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간 아직까진 안전한 이 코홀룬도 전쟁터가 될지 모르지.” 앤플러가 부가 설명을 더해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얀 늑대들의 캡틴임을 가장한 스파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요?” “말하자면, 정확히 그렇소.” “진작 말했다면 좋았을 것을.” “미행이 있었소. 시간이 없었거든. 자, 오해가 풀렸다면 서두릅시다.” 그들이 등을 돌렸을 때 또 다른 검은 그림자가 양쪽 골목을 압박하고 있었다. 둘은 앞쪽에, 둘은 뒤쪽에, 그리고 골목 위쪽에도 한 명이 거미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낮에 카셀이 했던 복장처럼 검은 옷을 뒤집어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허리에서 칼을 뽑았다. “젠장, 쫓아와버렸군.” 백작이 말하며 물러나자, 앤플러가 칼을 뽑아 소리쳤다. “백작과 캡틴 카셀을 보호하라.” 검은 검사들이 양쪽에서 발을 맞추고 좁은 골목을 압박해왔다.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뚝 떨어진 검은 검사의 공격을 시작으로 양 쪽에서 동시에 네 명의 칼잡이들이 달려들었다. 좁은 곳에서 서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도 힘들었는지 잠깐 혼란이 이어진 후,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앤플러는 과연 코홀룬 최고의 검사라는 백작의 자신감 그대로 금방 한 명을 쓰러뜨리고 다른 한 명도 몰아붙였다. 하지만 다른 검사들은 그 검은 검사들을 당해내기 역부족이었는지 금방 쓰러졌다. “이 쪽으로.” 백작은 카셀의 손을 잡고 다른 쪽 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쪽에도 이미 검은 옷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칼을 얼굴 앞으로 한 번 세우더니 동시에 백작과 캡틴을 향해 달려갔다. “흩어집시다.” 카셀은 백작을 오른쪽 갈림길로 밀고 자신은 왼쪽으로 달아났다. 앤플러가 뒤따라 오자 카셀은 소리쳤다. “백작을 보호하시오. 나는 상관 말고.” 자신이 칼질 한 번 못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겨보려고 그런 말을 했지만, 뛰다 보니 후회 막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난 칼 싸움 못하는 놈이니 보호해주십쇼, 했다가는 백작에게 자신이 칼 훔친 놈이라고 고백하는 꼴이니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오늘 하루를 책임져 준 자신의 두 다리를 믿고 앞만 보고 달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큰 길로 빠져나가는 길이 보였다. 아까와 똑같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입구에 또 다른 검은 형체가 우뚝 서 있었다. 백작 쪽일까, 검은 칼잡이들일까? 어차피 어느 쪽이든 얼굴을 모르니 알아도 피해야 할지 도와달라고 해야 할지 말하기 애매할 것임이 틀림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골목 바깥쪽에서 카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사람은 안면이 있었다. 그는 덩치가 아주 컸고, 칼이 아닌 창을 들고 있는 남자였다. 낮에 그를 쫓아왔다가 얼결에 그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였다. 창을 든 남자는 다른 쪽 손에 든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카셀은 급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그러나 뒤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칼잡이 두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카셀은 지금까지 그렇게 빨리 달리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두 명의 괴한들은 뒤집어 쓴 로브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황소의 뿔처럼 두 손에 든 칼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급기야 한 명은 바닥이 아닌 벽을 타고 달려오기 시작했고, 땅을 달리는 한 명은 두 자루 칼을 꺼내 들었다. 서커스 같은 그 장면은 어둠을 배경으로 타깃이 된 장본인에게는 끔찍한 공포로 다가왔다. 앞뒤로 막힌 카셀은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비켜.” 창을 든 남자는 카셀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휙 잡아 던졌다. 카셀은 바닥에 코를 박았을 때 꼼짝 없이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창을 든 남자의 표적은 카셀이 아니라 달려드는 괴한들 쪽이었다. 그는 바닥에 두 다리를 우뚝 박고 고속으로 접근하는 두 명의 검은 괴한들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먹이감을 향해 달려드는 독수리처럼, 괴한들은 몸을 날려 창을 든 남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카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거대한 창이 마치 바람에 휩쓸리는 갈대처럼 휘는가 싶더니 날아드는 세 자루의 칼과 두 명의 인간이 거기에 튕겨 날아갔다. 동강난 시체들이 카셀의 옆에 떨어지며 피와 살점이 철퍽 튀었다. 동그랗게 뜬 시체의 허연 눈동자가 카셀의 겁에 질린 눈동자와 마주쳤다.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와 입을 막았다. 창을 든 남자는 죽인 괴한들의 시체를 발로 툭 차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그 놈들이군.” 그는 몸을 휙 돌려 다가오더니 이번에는 카셀의 몸을 과격하게 뒤졌다. 그리고 허리에 찬 칼을 발견하고는 조금의 거리낌 없이 뽑아보았다. “아까도 대뜸 나한테 강도 놈들을 떠넘기더니 이제는 암살자들까지 끌고 나타나는군. 말해봐. 이 칼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지? 그의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불 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강한 시선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라이온의 기사도 아니었고, 로즈의 기사도 아니었고, 심지어 팔콘도 아니었다. 모두 사선에서 죽음과 함께 싸워온 전사들이었는데도 디런 강한 눈빛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요?” 카셀은 얼결에 물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그의 당당한 자세, 그리고 그 놀라운 창 솜씨, 카셀이 가지고 있는 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 카셀은 갑자기 그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사실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이 날아간다 해도 그것만큼은 알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추측이 맞으면 그 질문의 대가가 죽음이라 해도 값어치가 있을 거라 믿고, 카셀은 그 딱딱한 표정의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먼저 대답해야 할 거요. 이 칼이 어떤 물건인지 안다면?” 창을 든 남자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배짱 좋은 놈이군. 허긴, 그 정도 배짱은 되어야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사칭하고 다니는 거겠지?” 정확히 대답한 건 아니었으나 이미 그 말에서 카셀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카셀은 확인 차 더듬거리며 물었다. “당신은 그럼......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하얀 늑대요?” 그는 카셀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며 말했다. “부하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시나, 캡틴 울프?” 환기시키지 않은 허공의 하얀 담배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타 들어가는 파이프 담배의 붉은 점만 어둠 속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셀은 방 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감당하기 힘들어 몇 번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덩치 큰 남자는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때로는 깊은 생각 끝에 뭔가 말하려 했다가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방 한 쪽에 세워둔 거대한 철창도 무언의 시선만큼이나 카셀을 압박하고 있었다. “성함을 여쭤볼 수 있을까요? 제 이름은 카셀 노이라고 합니다.” 침묵을 유지할 줄 알았던 덩치 큰 나자는 놀랍게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쉐이든 울프.”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글쎄.” “들어봐요, 저는 이 칼을 훔쳐서 달아난 게 아닙니다. 찾아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는 처음 이 방에 들어온 이후 두 번째로 그 말을 했다. 하지만 쉐이든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담배 연기만 허공에 길게 뿜어냈다. “그 이야기는 동료들이 오면 하지. 미리 말해두지만, 그 칼은 아주 중요한 물건이다. 그런 일은 지금껏 없었으나, 손을 댔다는 이유만으로 두 손목을 잘라낼 벌을 줘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게 됐거든. 그러니 기다리고 있어.” 카셀은 입을 다물었고, 방 안은 다시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아, 끔찍한 밤이야. 사흘 째 밤샘 탐색......” 머리를 길게 땋은 여자가 방문을 왈칵 열고 들어왔다가 쉐이든과 카셀을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카셀은 그녀를 발견하고 입을 따악 버렸다. 물론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그녀의 정체를 듣긴 했다. 하지만 쉐이든이라는 남자와 함께 있으면서 그녀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 때의 상황이 어제 본 것처럼 선명했다. 그제야 그는 쉐이든이라는 이 덩치도 이 여자의 옆에 서 있음을, 또 그녀의 인상이 너무 강해 그를 다시 봤을 때 누구인지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음을 기억해냈다. “누구야?” 그녀가 물었다. “우리의 캡틴.” 쉐이든이 대답했다. “아아!” 그녀는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도 그 때 그녀의 옆에 있던 또 다른 덩치였다. 한 명을 기억해내니 어둠 속이라 해도, 나머지까지 한꺼번에 기억났다. 골목에서 노숙한 채 몸을 떨고 있을 때 짜증을 내던 세 명 중 하나. 그리고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 세 명! “난 당신들을 압니다.” 그들이 말을 꺼내기 전에 카셀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봤죠. 당신들은 모를 겁니다. 저기 계신 레이디는 제가 있던 술집에 들어와 이 칼을 찾는다는 말을 했죠. 그래서 제가 이 칼이 당신들의 칼이라는 것을 알고 찾으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코홀룬에 전설 같은 이야기를 뿌리고 다니면서 말이지?” 문 옆에 서 있던 덩치가 등에 메고 있는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전설이요?” “우리도 들었어. 로즈 기사단을 기합만으로 무너뜨렸다느니, 도적단의 두목을 부하로 만들었다느니...... 믿을 만한 정보인지는 둘째치고, 재미있었어.” 여자는 말하며 웃었다. 그녀는 카셀이 앉아있는 의자 옆 침대에 털썩 앉았다. 침대의 탄력 때문에 그녀의 몸이 위로 아래로 크게 흔들렸고, 그녀의 머리카락도 흔들렸다. 카셀은 그녀의 묘한 매력에 잠깐 정신을 빼앗겼다가 이 와중에도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자신의 꼴이 한심스러워 고개를 저었다. “이단 모일 수 있는 멤버는 다 모였으니 얘기를 시작할까?” 여자가 말했다. “로일과 던멜은?” 쉐이든이 물었다. “외곽 성 쪽에. 새벽에 온다고 했어. 미리 얘기하고 우리끼리 결정해도 뭐라 그러지 않을 거야.” 그녀의 말에 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끼를 내려놓은 남자도 다가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녀가 먼저 말했다. “짧게나마 서로 소개하고 이야기에 들어갈까? 내 이름은 아즈윈 울프. 참고로 우리 기사단의 성은 모두 울프야.” “나는 게랄드 울프.” 도끼를 내려놓은 남자가 말했다. “제 이름은 카셀 노이입니다.” “카셀, 음, 부르기 좋은 이름이군. 패잔병들의 마을 출신인가?” “아니, 루우룬 마을 출신입니다. 지방이라 모르실 거요.” “그럼 그 칼을 어떻게 얻었지?” 카셀은 아직도 자기 품에 있는 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주웠습니다.” 그녀는 둘에게 작은 소리로 ‘거봐, 내가 거기에서 잃어버린 거 맞다 그랬잖아.’ 라고 작게 소리쳤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찾아주러 온 겁니다. 훔친 게 아니고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변명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 칼은 잠시 가지고 있어.” “예?” 소중한 물건이라며 급히 돌려받을 줄 알았던 카셀은 의외의 전개에 머뭇거렸다. 어쨌든 그들이 물건을 찾기 위해 그를 잡아둔 건 아님에 분명했다. 쉐이든도 그렇고, 아즈윈도 그렇고, 그들은 제일 중요한 칼을 돌려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칼을 다시 무릎에 올려놓는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를 해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그는 팔콘에게 붙잡힌 것보다는 안전한 처지라고 믿었다. 그는 점점 냉정을 찾아갔다. 그렇다고 긴장까지 풀어버린 건 아니었다. 사실 기사이거나, 기사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 전설과도 같은 존재를 앞에 두고 긴장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우린 소문으로만 네 이야기를 들었다. 과장되기도 하고, 앞뒤도 맞지 않았어.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도 거짓없이.” 아즈윈이 말했다. 카셀은 변명의 기회라 생각하고 진실로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모든 것을 말했다. 그러고 보니 패잔병이 된 후 처음으로 거짓말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유랑 시인의 이야기에서부터, 도적들을 만나고, 라이온 기사단을 만나고, 칼을 주운 후 찾아주려다 길이 엇갈렸으며, 얼결에 로즈 기사단에게 끌려 갔다가 팔콘을 만난 이야기까지. “그리고 코홀룬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터놓고 보니 지금까지 거짓말로 본의 아니게 모든 이를 속이고 다녔던 죄책감에서 벗어나 후련했다. 그들은 카셀의 이야기를 재미있어 했다. “놀랍군.” 게랄드가 말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정말 그렇게 말끔하게 속였단 말이야?” 아즈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지만, 정말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맑은 눈동자로 카셀을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거 정말이에요?’ 하고 묻는 감탄사와 같은 말이었다. “그럼 하나 물어봐야겠군, 카셀. 아까 낮에 널 협박하던 그 강도들은 뭐였지?” 쉐이든이 물었다. “그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는 당신이 칼을 훔치려고 오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카셀은 차근차근 그 때 일까지 설명했다. “쉐이든이 다른 사람에게 당할 때가 다 있군. 카셀이라고 했지? 너 재밌다아?” 아즈윈은 남자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속은 게 아니라 말려든 거야.” 쉐이든이 변명하듯 말하고, 말을 이었다. “여하간 이 친구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아까 나한테 잡힐 때도 뭐라고 했더라? 누구냐고 물으니까 나더러 칼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면 내 정체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강요했지. 마스터 외의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명령이라 얼결에 대꾸하고 말았다니까.” 쉐이든이 한 번 더 강조했다. “뭐, 좋아. 네 얘기는 다 들었으니 이제부터 우리 이야기를 해야겠군. 일단 그 칼의 유래부터. 르고라는 대장장이를 알아? 아니, 몰라도 돼.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 사람은 아란티아 왕실의 대장장이로, 우리가 쓰는 모든 무기를 만들어주는 사람이야.”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는 자신의 길지 않은 칼을 톡 쳤다. “그러니까 그 칼은 르고가 만들었는데...... 아니다, 이 이야기부터 하면 안되겠어. 다시 시작하지. 이건 내가 울프라는 성을 갖기 전의 이야기야.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의 이야기지, 아마?” 그녀는 쉐이든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왕실을 상징할 보검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현자라 불리는 마법사가 여왕께 마법의 금속을 선물했지. 위대한 영웅이 쥐었을 때 진정한 빛을 발휘한다는 신기한 금속인데, 어......, 예전에 마스터가 웰치를 꺾었을 때 태양만큼이나 환한 빛을 뿜었대나 어쨌대나. 그 성스러운 빛에 놀라 론타몬의 군대가 물러났다는 소문이 있는데, 나도 자세히는 몰라. 바로 그 금속에다가 가넬로크 왕실에서 선물로 준 드래곤의 보석까지 합쳐, 르고가 그 칼을 만들었어. 빛이 없어도 빛을 내는 보석인데,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검이야.” 카셀은 새삼스럽게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손잡이의 푸른 보석을 바라보았다. 앞뒤를 잘 정리하지 못한 아즈윈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러니까 그건 정확히 말해 왕실의 보검이었어. 하지만 여왕께서 왕실을 지키는 것이 울프 기사단이라면 이 보검은 마땅히 하얀 늑대들의 것이라 하여 마스터께서 하사 받게 되었지. 그 보검은 그 자체로 하얀 늑대들을 상징하는 보물인 셈이야. 우리는 카모르트 왕국의 초청을 받아 이 나라에 원군으로 왔고, 우리의 행동이 곧 여왕의 명령을 대신한다는 뜻으로 그 칼을 가지고 온 거야. 그게 없이도 특별히 우리의 임무가 바뀔 수는 없지만, 제대로 수행하기는 힘들어. 게다가 국가의 보물을 잃어버렸다면, 우린 마스터한테 맞아죽어.” “그 마스터란......?” “퀘이언 간트.” 카셀의 질문에 쉐이든이 짧게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파이프를 물고 하얀 연기를 푸욱푸욱 뿜어냈다. 아즈윈이 참다못해 파이프를 빼앗아 안의 재를 바닥에 털어 발로 비벼버렸다. 그러나 쉐이든은 입맛만 다시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섯 명의 사절단으로 왕실에 온 겁니까?” 왠지 그 모습이 우스웠으나, 카셀은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말했잖아. 사절단이 아니라 원군이야. 어, 내가 다섯 명이라고 말했나?” “이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을 언급했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음, 맞아. 머리 좋네. 하지만 우리는 오는 도중 시커먼 옷을 입은 놈들에게 공격 당했지. 우린 살아남았지만, 우릴 안내하던 카모르트의 사신이 죽어버렸어. 뭔가 안 좋은 일이 터졌구나 싶어 되돌아 가려다가, 그렇게 하면 그 시커먼 옷 입은 놈들 뜻대로 되는 것 같아 그냥 강행한 거야.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칼을 잃어버리게 된 거지. 이 자리에 없는 녀석의 실수로.” “그 시커먼 옷 입은 녀석이란, 아까 널 쫓아오다가 나한테 당한 놈들이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이 마을에도 있더군.” 쉐이든이 그녀의 이야기에 덧붙였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그 놈들이 또 공격해왔어?’ 라며 물어보았다. “대체 그 놈들 누구야? 누가 우릴 죽이려 드는 거지?” 아즈윈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모르겠어.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 공격은 저 자리에 잇는 카셀을 향한 것이었지. 외부에 알려지기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니까.” 쉐이든이 설명했다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아즈윈의 시선과 부딪혔다. 가만히 잇던 게랄드가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어떤 놈들이 우릴 공격하는 거야? 이 마을까지 쫓아올 정도라면, 지난 번 공격이 우연이 아니라는 거잖아.” “정확히 우릴 노렸지. 하지만 놈들의 목표가 저기 있는 친구였다면, 우리 얼굴을 완전히 알고 있는 건 아니란 뜻이 돼. 이건 나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정리 좀 해봐야겠어.” 쉐이든은 창가로 서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그 사이 아즈윈은 카셀의 옆에 더 가까이 앉아 물었다. “그보다 우리 칼을 여기까지 애써 가지고 왔다면 뭘 바란 거 아니야? 보상이라든가?” “그, 그런 건 없습니다.” 질문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즈윈이 가까이 왔다는 것에 놀란 카셀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특별히 다른 뜻으로 물어본 건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줄게.” 물론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아란티아에 데려가 기사 훈련을 시켜달라는 조건을 붙일 수도 잇고, 또는 추천으로 카모르트의 왕실 기사단 훈련병으로 넣어주게 해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종자로 부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얀 늑대들을 보좌해주다 보면 훈련병으로 있는 것보다 기사가 될 기회가 많을 테니까. 돈이라도 잔뜩 받으면 집에 돌아갈 면목이라도 생기니 그것도 좋았다. 카모르트의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녀본 후 그는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걸 온 몸으로 체험했다. 그러니 계속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기사가 되겠다고 발버둥칠 바에야 몇 년 치 농사 자금을 얻어내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순간 카셀은 지금 이 자리가 일평생 농사를 지어봐야 찾아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기사도 아니고 하얀 늑대들이야.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보상을 묻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농사 지을 자금을 달라는 요구를 한다고? ‘그걸로 만족할 수 있나?’ 카셀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 침착하게 하나씩 살펴보자. 이들은 우선 날 죽일 생각이 없다. 단순히 판단을 보류하느라 죽이지 않는다? 그건 아닐 거야. 난 안전해. 목에 칼이 들어온 건 아니니까. 시간을 벌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아직 내 페이스를 잃은 건 아니야.’ “우선 한 가지 여쭐 게 있습니다.” 카셀이 말했다. 창 밖을 바라보던 쉐이든도 고개를 돌렸다. 카셀은 긴장감을 숨기기 위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왜 이 칼을 가져가지 않으십니까?” “가져가야 하나?” 아즈윈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솔직히 그걸 기대한 걸지도 모릅니다. 아란티아의 귀족들은 그러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전 농부입니다. 당신들이 그 칼을 내놓으라고 하면, 전 얌전히 내놓았을 겁니다. 아무 이의도 달지 못했겠죠. 아니, 오히려 당신들과 만났다는 것만으로 평생 영광이 되었겠죠. 이건 진심입니다.” “호오, 그래? 더 말해봐.” “이 칼을 아직도 빼앗지 않는 건 이유가 있어서 아닙니까? 그러니까......제가 아직도 이 칼을 가지고 있어야 할 어떤 이유가 있는 겁니다. 맞습니까?” 아즈윈은 과장되게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정확해. 조금만 더 말하면 정답을 맞추겠는 걸. 어디 계속해봐.” 계속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뭔가를 더 기대하고 있었다. 창가에 서 있던 쉐이든도 어느 새 고개를 돌려 카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거의 말이 없던 게랄드도 노려본다고 해야 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이건 테스트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좋습니다.” 카셀은 호흡을 길게 한 후 말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죠. 당신들은 이 칼을 계속 제가 소유하도록 내버려두었지요.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암살자들에게 공격을 당했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사주를 받은 정체도 모를 암살자들에게. 그런데 암살자들에게도 하얀 늑대들이란 정체를 모르는 기사단일 겁니다. 거짓말 하고 다닌 저를 착각하고 공격할 정도니까요. 물론 암살자들이 절 하얀 늑대들로 착각하게 된 이유는 저 자신에게 있긴 하지만.” 카셀은 되는 대로 지껄여 보다가 뭔가 해답을 찾아냈다. 그리고 말을 더욱 빨리 했다. “저는 칼을 얻게 된 후 본의 아니게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고 사기 치고 다녔습니다. 저도 코홀룬에서 저에게 관련된 소문을 들었습니다. 조금 과장되고 왜곡되긴 했지만, 결국 미지에 싸여 잇는 하얀 늑대들이 제 행동에 의해 이미지가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기사단에게도 제가 캡틴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아, 맙소사!” 카셀은 그만 말을 멈춰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었는지 알아내자, 아즈윈이 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아즈윈은 고개만 끄덕여줬다. “세상에, 그러니까......공식적으로 카모르트에 알려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은 제가 되는군요.” “그래. 아직 본 눈이 적어 어떻게든 무마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쉐이든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로즈 기사단의 세 명. 아, 아니구나. 팔콘의 마을에서 쳐들어왔던 그 기사단 전부군요. 그리고......” 카셀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누구?” “고디머 백작.” “무슨 백작?” 그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칼을 든 남자가 들어왔다. 하얀 늑대들의 세 명은 거의 동시에 무기를 꺼내 칼을 든 남자를 겨냥했다. 그 남자도 물러서지 않고 가늘고 긴 칼을 뻗었다. “괜찮으시오, 캡틴 울프? 구하러 왔소.” 바깥 복도에도 많은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캡틴 울프라는 말에 하얀 늑대들은 모두 카셀을 바라보았다. 카셀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었다. “아이크 앤플러?” “맞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기사 앤플러. 그러나 칼은 내려놓으세요.” 카셀은 모두를 가리키며 침을 한 번 삼켰다. “이 쪽은 내 친구들입니다.” “친구들? 그럼......” “하얀 늑대들이오. 친구들, 모두 칼을 내려놓게.” “아.” 앤플러는 고개를 까닥한 후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하얀 늑대들도 무기를 내려놓았다. “여길 찾아오느라 힘들었소. 밤이라 길을 찾기가 힘들어 늦었소. 창을 든 남자와 함께 있다는 말에 잡히기라도 한 줄 알았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누구에게 잡히겠소? 허나 걱정해주셔서 고맙소. 그런데 백작님은 괜찮으십니까?” “팔을 조금 다쳤으나, 괜찮소.” “다행이군요. 그보다 오늘은 날이 늦었고, 서로 험한 일도 많이 당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로 미루는 게 어떻소? 오늘 나타난 암살자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부터 나를 만나고자 한 목적에 대해서도.” “그럽시다. 백작님도 서둘러 만나 뵙고 싶어하시니까.” “내일 저택으로 가면 되겠소?” “그러시오. 아무 때나 와도 좋소. 원한다면 경비병을 조금 남겨 두고 가겠소.” “고맙지만 필요 없소.” “하긴......” 앤플러는 이해한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다. “내일 뵙겠소.” 그는 인사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방 안에 정적이 흐르기 전에, 하얀 늑대들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집중되기 전에 카셀은 잽싸게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더 복잡해졌을 거에요.” 쉐이든이 갑자기 집어 던진다고 하는 편이 옳을 정도로 창을 세웠다. “나가 있어, 카셀.” “지, 지금?” “지금.” 카셀은 허벅지에 올려놓은 칼을 침대에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칼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한 번 쥐었다면 쉽게 내려놓아선 안 되는 물건이다.” 카셀은 찍 소리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칼을 들고 나가야 했다. 그는 문을 닫고 다시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달아나지 말라는 경고 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시 들어오라고 했을 때 카셀은 놀라 생각하지도 못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이 보상이 되었는지, 벌이 되었는지는 그 후 오래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해?” 카셀을 내 보낸 후 쉐이든이 물었다. 아즈윈은 키득키득 웃으며 문 쪽을 손가락질 했다. “아까 봤어? 우리들한테 명령을 내렸잖아.” “기분 나빴나?” “아니, 너무 자연스러웠지 않아? 솔직히 말해, 너라면 어땠겠냐? 봐, 저 녀석은 자기가 고백한 대로 칼질 한 번 제대로 못 하는 놈이었어. 우릴 모르지도 않지. 그런데 얼마나 간이 크길래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있지? 보통 사람들이 그럴 수 있나? 우리와 얘기할 때 봤어? 자기가 서 있는 건지 앉아 있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했으면서 할 말은 다 하더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들이 가끔 있긴 하지.” 게랄드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난 울프 기사단의 캡틴에 관련된 소문을 들은 후, 칼을 가진 놈이 누구던 간에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어줍잖은 날치기라 해도 처치 곤란한 놈만 아니었다면 내 생각은 변함 없었을 거다. 그런데 이건 아주 의외의 인물이 우리에게 주어졌군. 마스터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쉐이든은 방 안을 서성대며 말했다. “그 분도 지금 우리와 같은 생각일 거야. 조금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저 녀석은 천성이 리더 타입이야. 난 말 잘 하는 놈은 딱 질색이지만, 카셀은 조금 다르군. 말을 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더라고. 모르는 사이에 집중을 하게 돼.명령을 내리는 것에도 어색함이 없고.” 아즈윈이 말했다. “네 말도 맞아, 아즈윈. 하지만 나는 지금 한 가지 더 생각한 게 있다. 녀석이 지금까지 캡틴을 사칭하고 다녀서 우리 입장이 곤란해 진 건 사실이지. 그리고 동시에 캡틴이라는 자리, 얼굴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자리가 위험해진 것도 사실이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래. 우리 얼굴을 보고 살아남은 암살자들이 없었는데도 녀석들은 정확하게 코홀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캡틴이라고 알려진 자를 공격했다. 정보망이 확실하다는 뜻이야. 지금도 이 도시 전체에 암살자들이 깔려있다고 봐야 해. 그리고 그 놈들은 캡틴이 누군지 알아냈지.” 쉐이든은 조용히 아까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게랄드는 금방 수긍했다. “카셀이라는 친구가 타깃이 되겠군.” “눈을 치켜 뜨고 찾아다니던 표적이 나타나면, 그 표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별할 능력을 잃게 돼. 우린 아직도 암살자들을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 몰라. 그럼 이 쪽에서도 함정을 파야지.” “그럼 전에 말했던 대로 하자고?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데?” “그럼 네가 캡틴을 하던가” 게랄드는 즉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로일은 지금까지 강제로 캡틴을 맡은 것 때문에 너무 부담스러워 했어. 이제 그 짐을 줄여줘야 해.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 짐을 맡는 걸 꺼려한다면, 따로 짐꾼에게 맡기는 방법도 있지.” 쉐이든의 말에 아즈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물었다. “책임질 자신 있어? 그 어려운 울프 기사단 테스트를 통과한 기사들을 모조리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몰라.” “책임은 진다. 그리고 애초에 모든 것을 우리의 판단에 위임한 마스터의 책임도 있다고 봐야,지 안 그래?” 쉐이든은 공범이라도 만들겠다는 양 고개를 까닥했다. 아즈윈은 동의를 한다는 뜻으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쉐이든이 게랄드의 의향을 묻자, 그는 대답을 미루고 물었다. “카셀이라는 친구가 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달랑 칼 한 자루만으로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자신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고 믿게 만든 자다. 진짜 하얀 늑대들이 뒤에서 받쳐준다면, 왕실 사람이라도 속일 수 있겠지.”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나도 믿겠다. 하지만 이건 아주 위험한 도박이야.” “알고 있어. 그럼 본인의 의향을 들어볼까?” 쉐이든이 문을 열자, 카셀은 복도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늑대가 되고 싶지 않나?” 카셀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는 하마터면 싫다고 말할 뻔 했다. 가끔 터무니 없이 좋은 걸 던져주면 터무니 없이 나쁜 걸 받았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법이었다. “예?” “기사가 되고 싶지 않나?” 쉐이든이 물었다. “되고 싶습니다.” “그럼 기회를 주겠다. 그것도 우리들의 캡틴으로.” 첫 번째 놀라는 강도가 그렇게 컸는데도 두 번째 충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카셀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으나, 그 와중에도 그대로 입이 굳어버리면 상대가 그 말을 주어 삼켜버릴까봐 얼른 대꾸했다. “그런데 왜 그런 자리를 주시는 겁니까?” “글세, 왜라고 말해야 하나?‘ 쉐이든이 고민하는 사이, 카셀은 충격을 수습했다. ‘내가......뭐가 된다고?’ 캡틴이었다. 동네 골목 대장 한 번 해본 적 없는데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최정예인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된다고? 여남은 충격마저도 너무 커서 숨이 막혔다. ‘와우!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니! 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 어이쿠, 이거 밀밭에 콩 심을 일이구나. 네가 캡틴이라고? 그럼 이 비천하기 그지 없는 노이 가문의 농부인 나는 너를 어떻게 불러야 하냐? 캡틴 카셀이라고 불러드릴까?’ 일년 내내 농사 지어 일주일 후에 수확할 밀밭에 불이 나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으셨던 침착함의 화신인 아버지마저도, 이런 놀라운 일에는 할 말이 없을 거다. “일단 너는 스스로 울프 기사단의 캡틴을 사칭하고 다녔다. 그건 커다란 잘못이지.” 쉐이든이 말했다. “그건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대신 조건이 있다. 그게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되는 것이다.” “음, 따질 생각은 없지만 보통 그런 자리는 상이나 벌로 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저지른 일을 네가 수습하라는 뜻이야. 그리고 그 자리는 아주 위험하지. 숨기는 것 없이 말해두겠다. 그 자리에 앉는다면 너는 아까 골목에서 습격 당했던 그 암살자들의 시야에 완전히 노출 되는 것이다.” “그럼 이건 벌이군요.” “벌이라면 벌이지. 요구라면 요구라고 할 수 있고, 부탁이라면 부탁이라고 할 수 있고.” 쉐이든 대신 아즈윈이 말을 이었다. “그런 만큼 이 일이 끝나면, 좀 전에 말했던 대로 간단한 보상이 있을 거야. 아란티아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내줄 수도 있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해 줄 수도 있어.” “그 보상은 지금 말해야 하는 겁니까?” “원하는 대로 해.” 카셀은 당장 기사 훈련생을 머리에 떠올렸지만, 지금 꼭 그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중에 말하겠소. 하지만 당신들이 꼭 들어줄 수 있는 요구만 하겠소.” “좋아. 계약은 성립됐다.” 아즈윈은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그대의 이름은 카셀 울프이며, 일이 끝났다고 판단될 때까지 하얀 늑대들의 캡틴으로 임명한다. 이는 하얀 늑대들 개개인의 협의 하에 내린 결정이며 전원 동의 하에 우리가 스스로 번복할 때까지는 누구도 이 결정을 위반할 수 없다. 이상.” 카셀은 아즈윈이 내민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맹세를 위한 아란티아의 특별한 서약 표식인지 악수하자는 것인지 구별이 안 갔다. “손을 잡고, 너도 맹세해.” 그녀가 재촉했다. “아.” 카셀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가 상상하던 가는 손가락에 가는 팔뚝이 아니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팔뚝은, 가늘었지만 바늘로 찔러도 안 들어갈 만큼 탄탄해 보였고, 흉터 많은 손등은 남자처럼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가볍게 쥔 것 같은데도 아귀 힘이 대단했다. 카셀은 그녀가 했던 말을 따라 하며 선서했다. “하얀 늑대들의 협의 하에 내린 결정에 따라 나는 지금부터 하얀 늑대들의 캡틴, 카셀 울프이다. 나는 전원의 동의 하에 직위를 박탈당할 때까지 임의로 이 결정을 위반할 수 없다. 이상.” “좋아. 잘 했어.” 아즈윈은 지금까지의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지었다. 카셀은 캡틴이 되어서 기쁜 것인지 구별되지 않는 들뜬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어쨌든 그는 살아오며 지금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너무 안심 하지 마. 아직 우리는 완전히 너를 신뢰하는 건 아니야.” 게랄드가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은 금방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물론 나도 당신들의 신뢰를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카셀의 당당한 발언에 게랄드는 얼굴을 찌푸렸고, 쉐이든은 웃음을 터트렸다. 게랄드도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그럼 이제 당신들의 진짜 임무를 듣고 싶습니다. 왜 카모르트에 왔는지.” 카셀은 오해를 사지 않도록 얼른 덧붙였다. “비록 임시라도 일은 확실하게 해야겠죠.” “확실하게 해야지. 안 그러면 너뿐 아니라 우리 전체의 목숨이 위험하니까. 우리를 노리는 녀석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설명 해주지.” 이번에는 게랄드가 말했다. “우리도 사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온 게 아니야. 언제나와 같은 훈련 시간에 갑자기 마스터가 들어와서 말씀 하셨지. ‘너희들 카모르트에 좀 다녀와야겠다.’ 그래서 물었지. ‘왜요?’ 그랬더니, ‘카모르트에서 사신이 왔는데, 두 백작이 왕을 무시하고 전쟁을 벌인다더라, 그래서 그 내란을 진압하고 싶은데 그 왕에게는 진압할 군대가 없다, 해서, 아란티아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폐하께서 너희들을 지목하셨다. 다녀와라.’ 라고 하셨지.” 아즈윈이 참견했다. “그거보다는 길지 않았냐?” 게랄드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말했다. “요점만 말한 거야, 요점만. 너는 언제나 나의 의도를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려고 하는 게 문제야. 하여간, 그래서 우리는 폐하의 뜻이 적힌 문서 대신 그 보검을 들고 오다가 기습을 당한 후, 그 다음 얘기는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다.” “그럼 당신들은 카모르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온 셈이군요?” 카셀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 셈이지. 그래서 지금도 고생하고 있어. 뭘 해야 할지 통 알 수가 있어야지. 이대로 왕실로 쳐들어가면 되는지, 아니면 칼부터 찾아야 하는지, 아니면 아란티아로 돌아가야 하는지.” 게랄드는 말해놓고 보니 자기들의 쳐지가 한심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검술만 배웠지. 외교나 협상 같은 건 배우지 않았거든.” 아즈윈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눈 앞에 모여 있는 사람이 열 명만 넘으면 말이 안 나와.” 게랄드는 덩치에 맞지 않게 몸서리를 쳤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당신들을 안내하는 겁니까?” 카셀이 물었다. “아니야, 아니야, 정확하게 해두라고, 캡틴.” 아즈윈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너는 우리의 안내자가 아니라, 캡틴이다. 우린 지금 어설픈 판단이나 충동적인 결정으로 너에게 캡틴 자리를 내어준 게 아니야. 지금부터 어지간한 너의 독단은 모두 명령으로 듣고 따르겠다. 이상한 수작만 안 부리면 돼.” “물론 저는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하얀 늑대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임시든 어쨌든 그는 그들의 캡틴이었다. 기사가 되면 뭘 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다. 리스트로 작성하면 이틀은 걸릴 정도로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은 여자들 앞에서 폼 잡는 용도가 거의 다였다. 지금처럼 현실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맞닥뜨리게 되니, 결국 의지하게 되는 건 기사도가 아니라 지금가지 그의 생명을 지켜준 침착한 판단력과 냉정한 계산이었다. “그럼 첫 번째 할 일이 있습니다. 아까 잠깐 만나본 사람 있죠? 아이크 앤플러입니다. 고디머 백작의 기사죠. 우리는 내일 고디머 백작을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카셀은 즉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 그 사람 얘기를 했었지? 그런데 왜 우리가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지?” “두 백작의 전쟁을 막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당신들의 카모르트 입국을 가장 껄끄러워 하는 사람은 그 두 귀족입니다. 암살자들을 사주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둘 중 하나일겁니다. 그런데 고디머 백작은 그 암살자들의 존재를 알고, 저와 비밀리에 접촉하려 했습니다.” 카셀은 추측일 뿐이지만, 확신을 가지고 말을 마무리했다. “고디머 백작은 우리들을 공격한 그 암살자들의 배후를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수로 우리라고 말했으나, 나머지 하얀 늑대들은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의 제안에 셋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7. 고디머 백작 ‘등에 날개라도 달린 것인지 그들은 전장의 어디에서든 나타나 공격해왔고, 분명 숫자가 적은데도 더 많아 보였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다.’ 울프 기사단에 대한 적들의 두려움을 한 번에 표현한 묘사였다. 기사라면 누구든 두려워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는 이가 없는 기사단. 그리고 그 중 정예가 하얀 늑대들이다. 세상에는 그들을 위한 찬양시와 서사시가 넘쳐나고, 떠돌아다니는 소문은 부풀어져 있었는데도 어느 것이 과장이고 어느 것이 사실인지 구분이 안 갔다. 카셀은 그들을 직접 만나면 감히 쳐다보기 힘든 어떤 카리스마가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상상해 왔었다. 게랄드는 그저 수없이 보아온 용병들과 비슷한 덩치의 근육질이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은 분위기 있어보이긴 했다. 쉐이든은 좀 더 지적인 이미지였다. 짙은 눈썹에 파묻힌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맑게 빛을 냈다. 아즈윈은 처음 봤을 때 그대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가끔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힐 때면 촛불에 반사되는 그녀의 하얀 목줄기에 카셀은 숨을 멈췄다. 하지만 셋 다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특별한 모습은 없었다. 기대한 이미지와는 뭔가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실망한 쪽에 가까웠다. 기사단의 또 한 명의 멤버인 던멜은 파리하고 병약한 남자였다. 키는 컸지만, 근육은커녕 살집도 별로 없어 툭 건드리면 넘어질 것 같았다. 아침이 되어서야 나타난 그를 보고, 카셀은 얼른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카셀 노이입니다.” ‘이번에 새로 캡틴이 된 사람입니다,’ 라는 소개는 생략했다. 그는 소개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말았다. 금발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는 마치 상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맑게 빛을 내고 있었다. “던멜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말할 때는 얼굴을 보고 말하면 돼.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을 신경써주지는 않아도 될 거야. 던멜은 언제나 혼자 행동하고 우리를 보조해 주지. 그렇지, 던멜?” 아즈윈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보이자, 던멜은 메마른 미소로 응답했다. “아, 그렇군요.” 카셀은 어색하게 웃었다. 던멜의 허리에는 짧고 가는 칼이 두 자루 매여 있었는데, 효과적인 무기 같지는 않았다. “로일은?” 게랄드가 도끼를 등에 맨 가죽 끈에 고정시키며 물었다. 던멜은 고개를 저었다. 게랄드는 짜증을 냈다. “그 녀석, 또 어디로 샜군. 분명 나무 아래에 엎어져서 자고 있을거야. 아니면 자기가 해야할 일을 까먹고 있거나.”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찾아오잖아, 가자.” 아즈윈은 신경 끄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등에 둥근 방패를 메고 허리에는 날이 넓고 길지 않은 칼을 찼다. 쉐이든은 그 긴 철창을 숨길 곳이 없어 끝에 헝겊을 싼 후 세웠고, 나머지는 모두 무기가 보이지 않게 황토색 망토를 둘렀다. 그들은 카셀에게도 같은 색의 망토를 하나 내주었다. 그는 던멜이 양끝이 뾰족한 긴 나무 막대를 챙기는 것을 봤는데, 나중에야 그것이 활대라는 것을 알았다. 나무에는 이상한 문자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짐을 모두 챙긴 후 방을 나섰다. 문을 열기 직전에 카셀이 ‘밤에 노렸던 위험한 놈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이 이 마을에 잔뜩 깔려 있다는 말을 했었다. “잠잘 때 기습 당하거나 먹을 것에 독을 타지 않은 이상 그 놈들한테 죽을 일은 없어. 그리고 놈들도 반복 학습이 안 되는 바보들이 아닌 이상에야 또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쉐이든이 대꾸했다. 그의 창 끝에 두 명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던 광경을 생각하니 그의 말은 과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시장을 가로질러, 도시의 중앙에 있는 백작의 저택까지는 먼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길을 가는 동안 수상쩍은 미행자가 있었다. 카셀이 경고하려고 할 때 이미 다른 이들은 알고 다음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치할까?” 아즈윈이 물었다. 모두 대답이 없자, 쉐이든이 카셀의 등을 쿡 찔렀다. “캡틴한테 물은 거야.” “아, 음, 싸우는 문제라면 나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난 당신들 기준에서는 아예 검술을 모른다고 봐야 하는데.” “결정은 캡틴이 내려. 우리는 그 명령에 따른다. 어떻게 할까? 처치할까?” 그건 거의 강요에 가까웠다. 카셀은 그가 캡틴으로서 자신의 결단을 시험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몇 명 정도나 따라오고 있습니까?” 카셀이 되물었다. “확인된 것만 다섯 정도. 아마 더 있을 거야.” 쉐이든의 말에 던멜이 수화로 그의 말을 정정했다. “던멜이 그러는데, 일곱이라는군.” “우릴 공격할 것 같습니까?” 카셀은 신중하게 앞만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그럼 내버려 두는게 좋겠습니다.” “왜? 미행을 붙이는 건 질색이야.” “저 놈들 계속 당신들을 따라온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뒀다가 나중에 잡아서 그들의 배후를 조사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을 한 복판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구요. 하지만 이건 그저 원론적인 이야기니, 만약 달리 생각한다면......” “아니, 좋은 생각이야.” 쉐이든은 납득하고 더 따지지 않았다. 백작의 집은 이 정도의 대도시에 있는 저택 치고 작은 편이었다. 담장은 높고 쇠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경비가 특별히 삼엄한 것 같지는 않았다. 경비는 문 안 쪽에 있었다. “볼 일이 있습니까?” 문은 열리지 않고 눈 높이의 작은 덮개만 살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얼굴만 보이며 물었다. “백작님을 뵈러 왔소.” 카셀이 대꾸했다. “만날 약속이 되어 있소?” “있소.” “그런 말 없었는데?” “아니, 확인해보시오.” “누구라고 말해야 되겠소?” “어젯밤 찾아온 손님이라고 해주시오.” 그는 카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덮개가 덮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들은 대답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얘기를 듣자니 울프 기사단의 선정 과정은 아주 까다롭다더군요. 심지어 기사단의 숫자도 알려지지 않았어요. 울프 기사단은 몇 명쯤 됩니까? 하얀 늑대들은 그들의 정예 부대라는데 맞습니까?” “한 나라의 전략 규모가 그렇게 쉽게 밝혀져서는 안되지. 굳이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도 없고.” 게랄드가 무료한 듯 발장난을 하며 대꾸했다. “나는 알아둬야 하지 않습니까?” “아 참, 아란티아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야지.” “약간은 책을 통해서 알고 있어요.” “어디보자, 그 때 오백명 정도가 지원했던가? 그 중 1차 선발로 백 명 정도 뽑혔고, 그 다음에 사십여명 정도가 뽑혔지. 거기에 기존의 울프 기사단 중 아직 현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사 스무 명 정도가 합류했지. 그들이 현재의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이지.” “그럼 하얀 늑대들은?” “그것도 물론 선배들이 있어. 모두 네 명이고, 그 중 한 분이 지금의 마스터인 퀘이언이야. 나머지는......, 우리도 잘 몰라. 이름조차 숨겨져 있어. 하얀 늑대가 정예라는 말도 꼭 틀린 건 아닌데,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울프 기사단의 대표가 아니라 퀘이언의 제자, 훗날 여왕 수호 기사의 후보라는 편이 옳아. 전쟁이 터지면 그저 우리도 울프 기사단의 한 멤버로 싸울 따름이야. ‘하얀 늑대들’이라는 건 원래 개념이 없던 존재인데, 10년 전 전쟁 때 드러나 유명하게 된 거야.” “대충 그 구조는 알겠군요. 그럼 당신들과 울프 기사단의 다른 기사들은 어떤 차이가 있죠? 역시 검술의 차이?” “우리들은 마스터의 가르침을 직접 받고, 우리가 나머지를 가르쳐. 전쟁이 벌어지지 않으니 언제나 훈련만 있지. 가끔은 좀이 쑤셔 죽을려고 하는 녀석을 내가 훈련을 핑계로 죽도록 패놓기도 하지.” 게랄드는 자신이 해놓은 농담에 시끄럽게 웃었다. “그럼 당신은 어느 정도의 실력인가요?” “울프 기사단을 벗어난 다른 곳에서는 지지 않은 정도?” 갑자기 물었지만, 그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카셀은 그 정도란 게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얼마나 연습하면 당신들처럼 될 수 있죠?” “네가? 글쎄......, 아즈윈. 너라면 뭐라고 대답해 줄래?” 게랄드의 말에 아즈윈은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놓인 돌멩이로 공기돌 놀이를 하면서 대꾸했다. 그 모습만 보면, 하얀 늑대가 아니라, 심심해 미치기 직전인 시골처녀 같았다. “그런 건 아무도 몰라.” 그녀가 대꾸했다. 게랄드가 그녀의 대답을 받았다. “맞아. 우리 시험 볼 때 이야기를 해볼까? 정말 많은 녀석들이 모였지. 전국, 아니 전 대륙에서 난다긴다 하는 녀석들은 다 모였다고 봐야지. 그 중에는 정말 대단한 녀석들도 많았어. 훈련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주제에 칼만 들었다 하면 사람 하나 때려눕히는 건 가볍게 할 줄 아는 놈도 있었고, 매일밤 죽어라고 연습한 녀석이 연습은 게을리 하지만 재능있는 녀석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아즈윈도 처음에는 나보다 터무니없이 약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잠깐, 진실로 그랬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즈윈이 날카롭게 말했다. “예를 든 거야. 검술의 재능이라...... 그건 누구도 모르는 거야, 카셀. 네가 지금 당장 꽤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앞으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고, 지금 당장은 아무 실력이 없어 보여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 그건 누구도 몰라. 소질이 있다 없다는 현재라는 시간이 내릴 수 잇는 결론이 아니야.” 납득할 만한 답은 아니었지만, 그의 멋진 말솜씨에 카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마스터가 한 이야기 아니냐?” 아즈윈이 킥킥대고 웃었다. “이런 걸 인용이라고 하지.” 게랄드가 화내며 말했다. “인용을 했을 때는 인용한 사람의 이름을 달아. 아, 그리고 추가로 설명하자면, 어떤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있어. 그건 검술에도 당연히 있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검술에 천부적 재능을 가지지는 않았어.” 철문이 열리며 세 명의 경비와 검은 정장의 늙은 집사가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기사님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작은 저택의 정원까지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의상 반기는 게 아니라,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절제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는 얼굴에 넘쳐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살아계셨군요. 밤새 걱정했습니다.” “너무 심려를 끼쳐드렸군요.” 카셀은 인사하고 붕대를 감은 그의 팔을 발견했다. “다치셨군요.” “대수롭지 않소. 앤플러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몸이었죠. 들어가십시다. 할 이야기가 많소. 아, 이 쪽은 부하들?” 백작과 아즈윈과 게랄드, 던멜, 쉐이든을 가리켰다. 그들은 ‘부하들’이라는 말에도 전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러나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상하가 없습니다. 이들은 제 친구이고, 저는 그들의 대표일 뿐입니다. 하얀 늑대들에게 있어 캡틴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그거 흥미롭군요.” 백작은 감탄하며 문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카셀이 먼저 백작을 따랐고, 아즈윈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카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더니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보이며 미소지었다. 카셀도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카셀에게는 다른 게 아니라 그녀의 미소가 이 일에 대한 보상이 되어주고 있었다. “무기는 우리에게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늙은 집사가 모두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카셀은 못마땅해 하는 모두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장비하고 있는 칼을 풀었다. 아즈윈은 등에 맨 방패와 칼을 내줬고, 게랄드는 도끼를, 쉐이든은 창을 내주었다. 늙은 집사가 모두 들기에 무거워 다른 병사가 와서 거들었으나, 그들도 쉐이든의 창과 게랄드의 도끼를 들기 버거워했다. 게랄드가 한 마디 했다. “떨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병사들은 금방 기가 죽었다. 던멜은 자신의 칼 두 자루와 단검 네 자루, 그리고 활대를 내주었다. 화살은 없었다. “내 칼은 그대로 지니고 있겠소, 고디머 백작.” 카셀은 자신의 칼까지 가지러 오는 집사보다 빨리 말했다. 백작은 어렵지 않게 허락했고, 집사는 마지못해 물러났다. “자, 그럼 모두 응접실로 갑시다. 아직 점심 때는 안 되었지만 나는 당신들이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왔기를 바라오. 때마침 요리사가 아주 근사한 빵을 구웠거든. 올림산 차와 잘 어울릴 거요.” 백작은 들뜬 목소리로 그들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응접실 앞에는 앤프러가 어제와 다르게 정장에 면도까지 한 깔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제 그 격전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었다. 그 역시 칼은 없었으나 서 있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두 명의 시체를 도로에서 발견했소. 당신 솜씨요, 캡틴 울프?” 앤플러가 물었다. “그건 쉐이든의 솜씨요, 앤플러. 어제 소개를 드려야 했으나, 조금 늦었군요. 이 쪽은 아즈윈, 쉐이든, 게랄드, 던멜이요. 친구들, 이쪽은 백작의 수호 기사 앤플러.” 다섯 명의 기사들이 가볍게 악수하며 인사했다. 앤플러는 쉐이든의 손을 잡고 말했다. “칼도 아니고 창도 아니었소. 무슨 무기로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요?” “창.” “창으로? 시체에 남긴 상처는 창으로 낼 수 있는 건 아니오.” “난 죽은 몸을 둘러보는 취미가 없어 내 창이 그럴 수 있다는 건 잘 모르오.” 마주 잡은 둘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앤플러는 괜히 시비를 걸었구나 하는 후회를 할 정도로 이를 악물며 힘을 줬지만, 쉐이든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악수가 길군, 쉐이든. 들어가지.” 카셀이 툭 치며 말했다. 그는 금방 손을 놓았다. 모두 카셀과 백작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간 후 그도 그들을 따르며 앤플러에게 한 마디 했다. “미안하군. 누가 시비를 걸면 피하는 법을 잘 몰라서.” 앤플러는 가늘게 눈을 치켜 뜨고, 손가락 마디를 풀기만 했다. 응접실에는 벌써 꿀을 발라 예쁘게 장식한 빵과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았고, 나이 어린 예쁘장한 시녀가 빵을 잘라 모두의 앞에 한 접시씩 내려놓았다. “드시오. 너는 나가 보거라.” 시녀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나갔다. 문이 닫힌 후 카셀이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제일 먼저 빵을 뜯었다. 포크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는 그냥 손으로 먹었다. “아주 맛있군요.”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모두의 눈치만 보던 백작이 그제야 웃으며 대꾸했다. “이 빵은 루우룬의 밀로 정확히 하루를 발효시켜 만들었소. 내가 워낙 쿠키와 빵을 좋아해서 파티쉐를 따로 두고 있거든.” 카셀은 맨 입으로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촉촉한 빵을 한 번에 삼키고 물었다. “루우룬?” “아시오? 그 곳의 밀은 아주 질이 좋지. 나는 특별히 그곳과 거래하는 상인이 있어서 흉년이 들어도 이런 빵을 먹을 수가 있소.”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곳이오.” 카셀은 그리운 단어를 다른 사람, 그것도 귀족의 입으로 듣는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어색했다. “자,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합시다.”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뭔가 들어가니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는 빵을 더 먹고 싶었지만 워낙 백작의 표정이 진지하게 돌변하는 바람에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적의를 담고 있는 기사 앤플러의 눈빛이 몹시 걸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뭔가를 꾹 참는 얼굴이었다. 아까 쉐이든과 힘 싸움에서 패한 걸 분해하는 걸까? “제가 왕실의 대표가 될 수는 없으나, 어떻게든 돕고 싶습니다. 어제 같은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으면서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닙니다. 아, 물론 어제 운명을 달리한 당신의 경호 병사들에게는 유감을 표합니다. 여하간 우리들은 이 도시에 오기 전, 이미 그들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누구냐는 것에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공격당한 겁니까?” 카셀은 어제 논의되었던 부분을 즉시 짚었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분이구려, 캡틴은. 좋소. 나도 즉시 본론으로 들어가리다. 어제 말씀 드렸듯 그건 분명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 둘 중 하나의 소행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둘 다 일지도 모르죠.” “그들이 왜?” “짐작하는 바와 같을 거요. 전쟁의 시작은 다른 곳에 있었으나, 그건 구실에 불과하오. 그들은 왕의 힘이 더 약해져 결국에는 자기혼자, 또는 둘이 나눠서 이 나라를 가지게 되는 걸 꿈꾸며 이 난리를 피우고 있소.” “흐음, 둘의 전쟁을 그보다 더 간략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항상 그런 생각을 하니까.” 백작은 씁쓸하게 웃은 후, 말을 이었다. “지금 왕은 편들어주는 이도 없고, 힘도 없소. 왕실 기사단을 먹여 살릴 힘도 없는데다 최근 이로피스에 사신의 자격으로 떠난 기사단이 실종되는 사건까지 벌어졌지요. 이제 왕에게 남은 건 이 나라 왕이라는 직책뿐입니다. 아무도 왕을 올려다보지 않는데 왕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소? 그 작은 힘으로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소.” “다른 나라에 정식으로 원군을 요청하는 것?” “정확하오. 그나마 그 부름에 응한 건 아란티아 뿐이고...... 내가 알기로.” 카셀은 아직도 자기를 힘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앤플러를 의식하고 있었다. 카셀이 힐끔 올려다보자, 그는 팔짱을 풀더니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양해를 구한 후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체 왜 저럴까? 어제는 구해주려고 애쓰더니, 그 새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걸까? “왕이 바라는 건 타국의 원군으로 군대를 구성하여 힘으로 두 백작을 누르는 것이군요.” 카셀이 자신이 이해한 게 맞냐는 뜻으로 물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런 걸 밝히면 폐하의 입장이 곤란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비밀리에 왔다는 걸 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소. 그나저나 아란티아의 군대는 언제 옵니까? 당신들의 울프 기사단에 나의 상비군을 더 투입하고, 남은 왕실 기사단을 합치면......” 그의 말에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우리가 답니다.” 갑자기 아즈윈이 대꾸했다. “다, 다라니?” “우리가 아란티아의 원군입니다, 고디머 백작. 화장실이 어디 있죠? 아까부터 참느라 괴로운데.” 빙그레 웃는 아즈윈의 말에 백작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아래층에 있소. 하녀가 많으니 아무한테다 물어보면 될 거요.” “하녀들이 다들 이쁘더군요. 좋으시겠어요.” 농담인지, 비꼬는 건지 애매한 말을 남기고 아즈윈은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고 잠깐 차가운 바람이 방 안을 채웠다. “참으로......매력적인 숙녀분이군요. 기사라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백작은 적당한 단어를 찾아 헤매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소개 드렸다시피 그녀 역시 하얀 늑대입니다. 그보다 우리는 빨리 카모르트의 국왕을 알현하고 싶소.” “물론입니다. 당신들이 온다면 틀림없이 이 도시를 경유할 것이고, 그럼 나의 도움을 요청할 거라 믿었소. 마차와 말, 경비대까지 모두 준비했소.” “출발 시각은?” “원하는 대로! 나도 동행하겠소.” 그는 애써 웃었지만,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왔다는 원군이 고작 기사 다섯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한 명이 더 있습니다. 그가 아직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출발은 그가 도착한 후 하겠습니다. 그보다 고디머 백작, 참 예의 없는 부탁이긴 한데, 우리는 아침 식사는 물론 어제 저녁 식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간단히 허기를 때울 만한 거라도 있습니까?” 카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런 결례가 있나? 진작 말하지 그러셨소. 당장 식사를 준비하도록 이르겠소.” 그는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옆에 있는 작은 종을 울렸다. “뭘 좋아하나 모르겠소. 주방장에게 부탁하면 금방 준비가 될 거요.” 카셀은 대답 대신 뒤에 있는 다른 기사들의 의향을 물었다. 그러자 게랄드가 간단히 대꾸했다. “빨리 되는 걸로! 그리고 많이.” 음식 안 내놓으면 한 바탕 벌이겠다는 듯한 그의 어조에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방장에게 알려 제일 빨리 되는 음식으로 푸짐하게 식탁을 채우라고 이르게.” “예, 백작님.” 집사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후 천천히 방을 나섰다. 백작은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카셀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자기가 배가 고파 음식을 부탁한 거였는데, 예의 따지느라 말하지 않았다면 게랄드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갑자기 무섭기만 했던 게랄드가 편하게 느껴졌다. 아즈윈은 방을 나선 후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에는 장식용 철갑옷들이 장식용 칼을 바닥에 꽂고 묵묵히 반대편 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이 있다는 아래층은 쳐다 보지도 않고 창가로 갔다. 앤플러가 팔을 기대고 창문 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앤플러라고 했지?”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후 팔짱을 끼고 두 다리는 겹쳐놓은 채 건들건들 서 있었다. 앤프러가 힐끔 그녀를 쳐다보더니 흥미를 잃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이즈 앤플러요.” “아즈윈 울프.” “울프?” “하얀 늑대들이라고 소개했는데, 당연히 울프지, 그럼? 아, 우리한테나 당연한 거지, 당신들은 모를 수도 있겠군.” “그런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소.” “아까부터 캡틴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던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았나?” “말이 곱지 않군.” “난 나의 여왕한테도, 나의 마스터한테도 이렇게 말해. 아무도 내 말투로 트집 잡지 않아.” “좋아. 나도 상관하지 않도록 하지.” “바른 자세야, 기사 양반. 검술 경력은?” “20년.”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 같지 않은데?” “열 살 때부터 검을 들었으니까. 그 쪽은?” “난 15년.” “하, 그럼 그 쪽은 다섯 살 때부터 칼을 들었나?” 앤플러는 억지로 크게 웃었다. “내가 좀 어려 보이긴 하지만 이럴 때는 그런 게 참 기분 더럽단 말이야. 난 열 살 때부터 칼을 배웠어. 나이로는 너나 나나 별로 차이 안 나.” “그래서? 나에게 도전해 볼 생각인가? 관둬라. 난 여자와 검을 나누지 않는다.” “생긴 게 이래서 그런지 난 그런 말을 아주 자주 듣지. 어벙이 기사 양반, 그럼 하나 물어볼까? 대륙 최고의 검사가 누구라고 생각해?” 앤플러는 그제야 창 밖으로 고정된 시선을 돌렸다. “그건 누구에게 물어도 같다. 마스터 퀘이언 간트. 그래, 네 스승이겠지. 그걸 내 입으로 말하게 할 셈인가?” “아니, 틀렸어. 대륙 최고의 검사는 여자야. 네가 말한 마스터 퀘이언 조차 스스로 인정한 진짜 검의 마스터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네. 알겠나, 자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나, 아즈윈 울프?” “아까부터 눈 여겨 봤어. 난 그런 눈빛을 아주 잘 알아. 너는 우리 중 하나, 특히 캡틴과 검을 겨루고 싶어 안달이 난 거야. 맞지? 어제 만났을 때부터 그랬을 걸! 쉐디와 얼결에 겨룬 힘 싸움은 진짜 겨루기가 아니지. 그걸로는 당신의 부족함을 채울 수 없어. 20년! 20년 동안 검술로 단련해서 아마 이 지역에서 가장 강한 명성을 얻었겠지? 그럼 당연히 그걸 시험해보고 싶을 거야. ‘내 검술이 어디까지 통할까? 난 검술가들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에 위치한 걸까?’ 넌 그걸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어.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걸 알고 있어. 하지만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나는 다라. 난 그 안타까움을 너무 잘 알아. 누군가 상대해주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 내가 나선 거야. 어때? 틀린 거 있으면 말해봐.” “아주 많다. 첫째로 나는 너처럼 광적인 충동을 가지지 않았어.” “그래?” 아즈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난 너와 싸우고 싶은 게 아니라 네 캡틴과 겨루고 싶었다. 물론 정식으로. 나는 내 검을 들고 그는 그의 검을 들고.” “잠깐 잠깐, 이봐. 당신은 수많은 갤러리들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부류야? 그럼 내가 잘못 본 건데?” “난 내 검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함부로 그걸 잔재주로 격하시킬 생각은 없어.” “다행이군. 그럼 됐네. 그 칼을 들어. 내가 상대해주지.” 앤플러는 두말도 않고 거절하려 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자와 겨뤄본 적도 없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가 뒤로 물러서며 내뱉은 한 마디에 그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 남은 사람은 없다, 기사 앤플러.” 그녀의 웃는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두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을 펄럭이게 한다는 착각을 일게 만들었다. 그녀의 백 마디 말보다 그 표정 하나가 그의 전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당장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칼을 빌려주마, 아즈윈 울프.” 그가 말했다. “이제야 싸울 마음이 나셨나? 아주 좋아.” 그녀는 옆에 서 잇는 철 갑옷이 쥐고 있는 장식용 칼을 빼 들었다. “음, 좀 무겁군.” “그런 걸 들면......” “불공평하다고? 안 그럴 걸. 내 칼로 하면 힘 조절을 해서 죽이지 않고 끝낼 수 있지만, 이걸로 하면 그게 잘 안돼. 그러니까 더 조심하는 게 좋아.” 그녀는 크게 칼을 한 번 휘둘렀다. 넓지 않은 복도에서 위아래로 내리친 검의 위력에 윙잉 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두 걸음 떨어져있는 앤플러는 닿지도 않았는데 마치 베인 것 같아 급히 뒤로 물러섰다. 앤플러는 신중하게 칼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을 부드럽게 가슴 옆에서 쥐었다. 그의 길고 가는 칼은 예리하게 흰 빛을 반사했다. 한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아즈윈은 무거운 칼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앤플러가 선공으로 찌른 공격에 수많은 도전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평생 검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그는 함부로 칼을 뻗지 못했다. 장식용 칼의 무게로 미루어 금방 공격하지도 방어하지도 못할 텐데도 빈틈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이 기네. 망설이는 게 보여. 설마 공격 한 번 안 해보고 포기할거야?”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럴 뻔 했다. 그는 칼을 든 후 처음으로 결투 신청을 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몇 마디로, 이제와 그가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공격하지도 못했다. “안 와? 그럼 내가 간다?” 그녀의 칼이 살짝 올라갔다. 순간적으로 그의 칼이 뻗어갔다. 그것은 수 없는 연습 덕에 완성된, 머리보다 빨리 반응하는 손의 판단 덕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이 시작된 것을 본 후에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로 그의 반응 속도는 빨랐다. 백자그이 수호 기사가 되기 전에 겪었던 수많은 전투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여태껏 한 번도 상대보다 느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번에도 그는 빨랐다. 그녀는 그의 공격을 보지도 못한 듯 칼을 들어올린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칼날은 놀랍게도 그녀의 가슴 옆을 스쳐 통과한 듯 지나가버렸다. 그녀는 느긋하게 들어올린 칼날을 그대로 그의 어깨 쪽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젖혀 피했으나 언제 방향을 바꾸었는지 모를 칼날이 이번에는 허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그건 피할 수가 없었다. 날 없는 칼날이 그의 가죽 허리띠를 정확히 겨냥하여 후려쳤다. 몸이 픽 꺾이며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칼이 짧은 금속음을 울리며 떨어졌다. “괜찮나?” 그녀는 칼을 벽에 기대어 놓고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숨을 쉬기가 곤란하여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대신 손을 내저으며 의사 표현을 했다. “천천히 숨을 쉬어. 뼈는 치지 않았으니 괜찮아질 거야.” 그녀는 한결 부드럽게 말하며 그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는 겨우 고개를 들어 끄덕였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았다. “어떻게 피했지?” “그걸 어떻게 설명하지? 후후, 당신은 누굴 공격할 때 어떤 공격을 했다는 걸 설명할 수 있어? 난 그런 거 못하는데.”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고 웃었다. “바보가 된 느낌이오.” “이건 어떤 의미에서 경고였어. 말해두건데, 함부로 캡틴을 시험해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내가 그럴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소?” “당신은 나와 비슷했으니까. 그럴 것 같았거든.” 그녀는 두 손을 터고 몸을 폈다. “당신의 캡틴은 당신보다 강하오?” 그녀는 잠깐 생각해보고 대꾸했다. “우리 중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모두의 동의를 얻어 캡틴이 된 거야. 아무도 거기에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로.” 앤플러는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돌아서는 아즈윈도 혀를 낼름 내밀고 웃었다. 점심 식사는 급히 차렸다고는 생각이 안 될 정도로 푸짐하게 준비되었다. 앤플러는 속이 안 좋다고 빠졌고, 백작과 하얀 늑대 다섯 명만 식탁에 앉았다. 와인까지 준비되어 백작은 잔을 들었다. “카모르트를 위해 찾아온 여러분들의 행운을 빌며 건배하겠습니다.” “카모르트의 영광을 위해.” 카셀이 호응했고, 모두 잔을 부딪힌 후 식사를 시작했다. 쉐이든과 게랄드는 허기가 졌다고 말한 것 치고는 비교적 점잖게 먹었고, 아즈윈과 던멜은 와인의 향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맛을 보더니 감탄했다. “아주 좋은 와인이군요. 이런 와인은 아란티아에서도 먹어보지 못했어요.” “고맙습니다, 레이디 아즈윈. 물론 이 와인의 품격도 당신의 미모를 따라가지는 못할 겁니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맛의 와인은 어떻겠습니까?” 백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화를 리드했고, 아즈윈도 특별히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오. 이 맛도 훌륭해요. 한 잔 더 부탁 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잔을 내밀자, 집사가 깔끔한 동작으로 와인을 다시 채웠다. 접대에 능숙한 집사는 던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다가와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어이구, 언제부터 와인을 좋아하셨나, 레이디 아즈윈?” 게랄드가 비꼬는 투로 쏘아붙였지만, 아즈윈은 무시하며 말했다. “그런데 백작께서는 어째서 다른 두 백작처럼 전쟁에 참가하지 않나요? 최소한 어느 한 쪽에 편을 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전 기본적으로 폭력을 싫어합니다. 아, 압니다. 그런 사치스러운 말을 할만한 시기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저는 이미 끔찍한 전쟁을 한 번 경험했고, 이후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백작은 참으로 여린 분이시군요.” “별로 칭찬이 아닌 것 같군요.” “칭찬이에요. 제 주위에는 온통 우락부락한 거목들 뿐이라.” 그녀의 말에 고기를 포크에 찍어먹던 두 덩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둘을 보더니 키스라도 하듯 입술을 모아 쪽 소리를 내주었다. 게랄드는 콧김을 푹 내고 도로 음식에 신경을 썼고, 쉐이든은 웃음을 터트렸다. 카셀은 그들의 유쾌한 모습을 보며 같이 즐거워하다가 백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똑같은 나이프질 인데도 묘하게 고급스러웠다. 카셀은 그의 태도를 보고 하나씩 그의 행동을 익혔다. 그의 몸에 밴 부드러운 말투와 행동은 보는 것만으로 따라 할 수 없는 세련된 절도가 있었다. 사실 그의 신분으로는 귀족의 이런 모습을 볼 일이 없으니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무작정 따라 하던 카셀은 문득 백작의 그 행동들이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보고 한 번씩 따라했던 모습이었다. ‘본 적 있었나?’ 아버지는 동네 아줌마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셔서 재혼은 하지 않지만, 그는 어딜 가든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루치가 기사가 되어 돌아온 후 도도함과 순결을 빼앗아 가기 전까지는 누구한테도 콧대를 누그러뜨릴 줄 몰랐던 쟈넷도 아버지에게만큼은 고분고분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 외의 누구에게든 저렇게 상냥했던 것 같았다. ‘맞아, 아버지에게서 저런 귀족적인 모습을 봤구나.’ 그는 깨달았다. 그럼 아버지는 예전에 귀족이었었나 보지? 그는 미친 놈 마냥 혼자 실실 웃었다. 아버지의 출신은 마을에 오래 산 노인들 모두가 인정하듯, 대대로 농부였다. 카셀도 그 뒤를 이어 농부가 될 차례였다. 농부 치고는 공부를 참 많이 한 셈이었고,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는 많은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진짜 귀족에 비할 바는 분명 아니었다. 아, 아버지도 와인을 즐겨 드셨었지. 식사가 끝나고 접시를 물린 뒤 후식으로 과일이 나왔다. 카셀은 포만감에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지금 그 자세를 취하지 못하면 며칠 동안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카셀은 팔콘이 했던 것처럼 부드럽게 깍지를 켰다. “고디머 백작.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캡틴 울프?” “당신은 이 나라를 사랑하는 겁니까, 국왕을 사랑하는 겁니까?” 백작은 그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꾸했다. “당신의 나라와는 달리 카모르트의 국왕은 남자이며, 나는 완벽한 이성애자입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건강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소.” “그건 이 곳 하녀들을 보면 알 수 있소. 그리고 난 농담을 한 게 아닙니다.” 카셀은 몸을 당겨 깍지 낀 두 팔을 탁자에 기대었다. 그는 좀 더 가까이 백작의 눈을 대했다. 그의 잘 생긴 얼굴에는 부드러움을 가장한 강함이 숨어있었다.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쪽입니까?” 카셀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건 왜 묻는 거요? 진심으로 묻는 거라면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오.” “우리의 행동 반경을 묻는 거요. 나는 당신의 국왕께도 똑 같은 질문을 할 겁니다. 만약 나라를 선택해야 할지, 국왕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갈림길이 나온다면 우리는 어떤 길로 걸어야 합니까?” 백작은 진지하게 고민한 후 고개를 저었다. “그건 국왕 폐하께서 스스로가 선택하실 일이지, 내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니오.” “생각해야 할 때가 올 겁니다.” 카셀은 무겁게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끝이났다. 로일이라는 마지막 하얀 늑대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들은 한 방에서 쉬었다. 넷의 시선이 모두 카셀에게 집중되어 있자, 카셀은 그들의 무언의 시선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부족한 게 있었습니까, 기사님들?” “아니, 너무 완벽했어. 누가 봐도 넌 우리의 캡틴으로 보였고.” 아즈윈이 말했다. “솔직히 조금 조마조마 했거든.” 쉐이든이 말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했어?” 게랄드가 물었다. “무슨 얘기 말이오?” “누구를 선택할 지에 대한 이야기. 굳이 할 필요 없는 이야기 아니야? 백작이 뭐라고 대답하길 바랐어?” “게랄드 울프, 전 백작이.......” “아 그전에! 너는 비록 임시 멤버이긴 하지만 우리끼리는 절대 서로를 존칭하지 않아. 모두 이름을 부르고,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우위에 있지 않지. 하물며 캡틴이 마치 우리 부하인양 행동하는 건 어색하지 않아?” 아즈윈이 꺼낸 그 문제에 대해 카셀은 한참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문제를 말해볼까 했었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아즈윈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고맙소, 레이디 아즈윈.”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셔요, 캡틴?” “아즈윈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쾌한 여성이군요. 난 내가 얌전하고 순종적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즈윈을 바라보면 그런 건 아닌가 봅니다.” 카셀은 헛기침을 길게 하고 존칭을 생략했다. “얘기를 계속하자면, 난 백작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길 원했어. 그러니까 백작은 내가 원한대로 대답한 거야.” 아즈윈이, 전에 카셀을 심문할 때 그랬던 것처럼, 탄력으로 찰랑거릴 정도로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허리를 쭉 편 채로 앉아서 물었다. “그게 원하는 대답이었다고?” “그는 아직 우리를 신뢰하지 않아. 특히 아란티아에서 내준 원군이란 게 우리 다섯, 아니 여섯뿐이라는 것에 대단히 실망하면서 더욱 신뢰하지 않게 되었지. 지금은 편하게 대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우위에 서려고 할 거야. 지금 잘 대해 준 것을 거들먹거리면서.”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던데?” “그럼 다행이지.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런 경향이 있어. 그래서, 나는 미리 선수를 친 거야.” “그게 어떻게 선수를 친 게 되지?” 이번에는 게랄드가 물었다. “좀 이야기가 길어지겠군.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여섯명이라는 사실이 약점이 되어서는 안 돼. 오해 하지 마. 내가 말하려는 건, 이 전력이 다른 병력에 비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설명하여 설득하는 것보다 우리가 아란티아의 대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거야. 내가 ‘선택할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할 거냐’ 고 물었잖아. 그 말에 이미 우리는 카모르트의 운명을 결정할 순간에 옆에 있겠다고 간접적으로 언급한 거였어. 둘째, 당신은 그 선택의 순간에 끼어들 수 없다는 말을 미리 해 둔거야. 오직 왕과 우리만으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것이며 백작은 어시스트만 하는 거라고 스스로 못 박은 게 되지.” “만약......” “만약 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버렸다면, 나는 그를 호통쳤을 거야.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냐고. 그럼 우리의 입지는 더 탄탄해 졌을 거야. 물론 그의 도움은 구하기 힘들게 되더라도, 귀족이 고디머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들이라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지간한 카모르트 귀족들의 도움은 모두 구할 수 있어.” 카셀은 쉬지 않고 대답했다. 다들 말문이 막혔는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넌 방금 식사를 대접한 백작이라도, 도움이 안 되면 버리겠다는 이야기야?” 아즈윈이 질렸다는 듯 말했다. 카셀은 그녀의 찌푸린 얼굴이 마음에 걸렸지만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은 없어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너무 냉정했던 걸까?" “믿을 수가 없어.” 카셀은 그녀가 ‘너의 인간성이 그렇게 차갑다니 믿을 수 없어.’ 라는 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걸 어떻게 모두 계산해서 말할 수 있는 거지? 그거 정말 생각해서 한 말이야?” 그녀의 말에 카셀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안도했다. “갑자기 생각난 거였어. ‘왕과 그 땅의 기사들’ 이라는 책이 있는데,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한 장면만큼은 아주 인상적이었지. 포로로 잡힌 왕이 자기 때문에 항복하려는 군대 앞에서 자결하는 부분인데 거기 나온 대사를 인용했어. 정확히는. ‘누군가 내게 나라를 선택할 것이냐, 왕을 선택할 것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나라를 선택하리라.’ 였어. 사실 그런 말은 조금 상투적이지 않아? 난 책에서 너무 자주 나오는 대사라 어디서 인용했다는 걸 들키는 게 더 걱정이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걱정하는 카셀을 보자, 아즈윈이 두 손을 털며 침대에서 일어나버렸고, 게랄드는 고개를 저어버렸고, 쉐이든은 껄껄대고 웃었다. 쉐이든은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저 녀석은 내 창 앞에서도 할 말 다했던 놈이었어. 그 와중에 저런 걸 걱정한다는 게 간이 부운 거야, 아니면 천부적인 사기꾼인거야?” 게랄드도 말했다. “그래. 천하의 하얀 늑대들에게 사로잡혀 놓고도 요구 조건을 말하는 녀석이었지.” 카셀은 그들이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욕 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즈윈이 두의 말을 정리했다. “카셀, 전에 네가 검의 재능에 대해 물어봤지? 아직 네가 칼을 잡은 걸 한 번도 보지 못해 그 쪽에 소질에 대해서는 할 말 없지만, 네가 개발해야 할 소질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너는 정치가나 외교가가 딱이야. 나는 한 번도 너 같은 말재간을 가진 녀석을 본 적이 없어.” 카셀은 무릎에 올려놓은 아란티아의 보검을 내려다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까?” “그야 당연하지. 뭐, 중요한 건 상의하되, 나머지는 모두 뜻대로 해.” 아즈윈이 대답했다. “냐가 너희들의 의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만 하면 의견이 어긋나더라도 크게 문제가 있진 않을 거야. 하지만 지나치게 큰 문제가 터지면, 어제 했던 선언이 우리 모두의 동의 하에서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나는 네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 하지만 그걸 배신한다면 너는 나를 상대로 검의 소질을 시험해 봐야 할거야.” 아즈윈이 딱 잘라 말했다. 카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아즈윈이 검의 달인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명심할게.” 게랄드는 잠시 어깨를 펴며 창문에 기대어 섰다. 그는 하품을 길게 하며 아까부터 내내 창가에 서 있는 던멜에게 물었다. “밖은 조용해?”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랄드는 말 못하는 동료의 어깨를 토닥거리더니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침대에 앉아있던 아즈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난 좀 자야겠어. 하루하고도 한 나절은 안 잤어.” “나도.” 아즈윈은 누워있는 게랄드의 배 위에 머리부터 떨어뜨렸다. 게랄드는 짧게 신음 소리를 냈지만, 그녀가 그의 몸이 베게라도 되는 양 옆으로 밀어버렸다. 게랄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밀리는 대로 밀려났다. 그래도 침대를 양보하지는 않았다. 둘은 그 뒤로도 눈 감고 누운 채로 몇 번이나 넓지 않은 침대의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다가 겨룩 행복한 신혼 부부쯤 되는 듯한 다정한 자세로 잠들었다. 특별히 신체 접촉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카셀은 잠든 게랄드가 부러웠다. “던멜과 카셀도 좀 자둬. 둘 다 어제 못 잤잖아.” 쉐이든이 말하자, 던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즈윈과 게랄드가 열심히 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고 남아있던 넓은 침대에 누웠다. “카셀은?” “난 괜찮아. 그보다 아즈윈은 여기서 자는 거야?” “벌써 자고 있잖아, 왜? 아, 여자라서?” 쉐이든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으나 카셀은 조금 당황하며 대꾸했다. “특별히 안될 건 없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피부도 거칠고, 머리카락도 윤기 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카셀에게 있어 연약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우락부락한 남자들 틈에 무방비 생태로 잠들어 있는 것은 적응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자신을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그래. 심지어 목욕도 같이 하는 걸. 뭐, 나야 시커먼 남자들 틈에만 끼어있다가 가끔 보는 쏠쏠한 재미에 아즈윈의 행동을 뭐라고 하지는 않아.” 쉐이든은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미소 지었다. 어제 창을 휘둘러 적을 한 번에 내동댕이치는 잔혹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같이 목욕을 해?” 카셀이 놀라며 말하자, 쉐이든은 손을 내저었다. “아즈윈과 같이 생활하면서 특별히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잊어버린지 오래지만, 그래도 한 번은, ‘넌 여자 아니냐, 나야 좋지만 너무 그렇게 보여주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아.’ 라고 말했더니 이 녀석이 뭐라는 줄 알아? 나도 근육 좋은 남자들 알몸 보는 게 좋아서 그런다, 라고 대놓고 말하더군. 본인이 좋다는 데야 누가 뭐라고 하겠어?” 쉐이든은 의자에 파묻히듯 몸을 뒤로 기대었다. 카셀은, 대자로 펼친 팔로 게랄드의 가슴을 짓누른 채 잠든 아즈윈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난 저 정도 되는 여자라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까탈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구나.”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기 좋은 성격과 외모지, 아즈윈은. 하지만 저 애의 모든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어.” “일관성?” “팀웍. 아즈윈은 팀웍을 흐리게 할 행동은 절대 하지 않고, 팀웍을 살릴 행동이라면 주저하지 않아. 게다가 아주 솔직해서 우리 같은 별스러운 성격을 잘 그러모아주는 역할도 해주지. 분위기 메이커랄까? 우리도 모두 아즈윈을 좋아하고 아즈윈도 우리 모두를 좋아해. 묘하게 나를 좋아해서 쉐디라고도 친근하게 부를 때가 많아. 게랄드도 가끔 게리니, 게랄이니 하고 제 멋대로 애칭으로 부르고. 그건 재미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내버려두지. 하지만 칼을 쥐고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아주 아름다워. 어쩔 때는 우리에게 매달려 어린애처럼 굴다가 어쩔 때는 모두의 어머니 같이 따뜻하게 품어주기도 하지. 어린애 같은 로일이 조직의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즈윈 덕이야. 그건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군. 그녀는 팀웍을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즐기고 싶다고 솔직하게 요구하기도 했는데, 내겐 아무래도 여자이기보다는 그 이상의 존재로 비춰져서 도저히 그러지는 못했지.” “즈, 즐겨?” 카셀에게는 아즈윈의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그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너도 벌써 아즈윈에게 반했나 보구나.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부분이야. 하지만 아즈윈과 정말 부담 없이 즐길 녀석이 있나 모르겠군. 아니, 로일이라면 가능할 일이야. 도대체가 종 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 음, 그런데 이 이야기에 네가 왜 좌절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는 이야기하며 카셀의 반응을 재미있어 했다. 그 모든 위기에서도 자신의 속마음을 보인 적이 없었건만, 만나서 이야기 나눈 지 하루 밖에 안 된 여자의 생활상이 생각과 다르다는 것에 심한 충격을 온 몸으로 내비치는 그였다. 8. 암살자 저녁이 되어도 마지막 하얀 늑대, 로일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 짧은 낮잠에서 깬 후 무료한 저녁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디너를 좀 더 크게 즐기자는 백작의 제안을 거절한 그들은 집사가 내준 간단한 음식으로 저녁을 때웠다. “그런데 우리 무기는 언제 돌려줄 거요?” 게랄드가 물었다. “이 저택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분은 기사 앤플러 뿐입니다.” 집사는 무기를 안 내주면 던저버리겠다는 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의 앞에서도 느긋하게 말했다. 자신의 협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는지, 게랄드는 말문이 막혀 유유히 빈 접시를 들고 문을 나서는 집사를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로일을 찾으러 가자.”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쉐이든이 말했다. “동감이야. 이 녀석, 내버려두면 언제까지 안 돌아올지 알 수가 없어.” 아즈윈도 동의했다. 그녀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카셀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마주 보았고, 그는 눈을 돌려버렸다. 그녀는 의아했지만, 왜 그러는지는 묻지 않았다. “모두 갈 필요는 없겠지. 던멜과 나와 아즈윈이 움직이도록 하지. 게랄드는 여기를 지켜.” “지킬 게 뭐가 있는데?” 게랄드의 말에 쉐이든은 카셀을 가리켰다. “아, 그렇군. 캡틴의 보디가드가 필요했구만.” 게랄드는 카셀의 어깨에 손을 처억 올려놓았다. “난 신경 안 써도 돼.” 카셀이 애써 예의를 지키느라 말했다. “아니, 높은 사람의 옆에 호위가 있는 건 당연한 거야. 경호가 필요 없는 마스터도 어디 공식적인 자리에 갈 때는 우리 다섯을 붙이고 이동한다구. 그보다 밖에 녀석들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 같은데.” 던멜이 손가락을 네 개 펼쳐 보았다. 게랄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모두를 돌아보았다. “아침부터 있었어. 놈들의 패턴을 생각하면, 이대로 얌전히 지켜 볼 놈들이 아니야.” “나가면 틀림없이 공격을 받겠지. 하지만 피하고 다닐 수도 없잖아. 난 상관 없어. 아니, 차라리 좀 공격해 왔으면 좋겠다.” 아즈윈이 자신 있게 말하자 쉐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만 암살자들은 때로 생각지도 못한 기습을 가하기도 하지. 정식 대결이라면 걱정할 게 없지만, 놈들이 우리를 계속 타깃으로 생각하는 이상 조심해야 해. 여기도 안전한건 아니야, 게랄드.” “알고 있어. 걱정 말고 로일이나 끌고 와.” 게랄드는 힘있게 대답했다. 하얀 늑대들이 나간다고 하자, 혼자만의 디너를 즐기고 있던 백작이 깜짝 놀라 배웅하러 나왔다. “가시는 거요?” “아닙니다. 동료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어 찾으러 나가는 겁니다.” 카셀이 대신 설명했다. “그리고 저는 여기 남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직 제대로 된 대접도 못했는데 떠나는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대접은 이미 충분합니다. 그리고 동료가 돌아오면 우리는 바로 왕실로 떠날 생각입니다.” “오늘 동료 분이 모두 합류한다면 내일 출발해도 좋겠군요. 저도 준비해야겠습니다.” 백작은 당장 집사를 불러 짐을 꾸리라고 명령했다. 개인의 욕심보다 왕실에 충성을 다하며 이 정도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백작이 동행을 한다면 분명 큰 힘이 될 테지만, 카셀은 왠지 꺼림칙했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자세히 몰랐으나, 지금은 백작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식사를 계속 하십시오. 그리고 떠나는 친구들에는 무기를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렇군. 집사, 기사단의 소중한 무기를 돌려주게나.” 집사는 다른 하인들과 함께 긴 창과 칼을, 받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내왔다. 게랄드는 저택을 떠나지 않는 자신에게는 여전히 도끼를 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자정이 되기 전에 돌아오지.” 쉐이든이 말한 후 일행은 저택을 떠났다. 카셀과 게랄드는 정원의 꽃 길을 따라 정문으로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자, 그럼 우리는 녀석들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볼까?” 게랄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카셀은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며 그를 따라가다가 방 안에 들어가자 바로 물었다. “게라드, 물어볼 게 있어.” “물어봐.” 게랄드는 뒤통수에 손을 기댄 채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퀘이언 간트라는 사람, 그러니까 너희들의 마스터란 어떤 사람이야?” “음, 캡틴 노릇을 한다면 그 정도는 기본으로 알아둬야겠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마스터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알지?” ‘캡틴은 알아야 한다.’ 라는 의무감에서 묻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의문점이었다. 기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란티아 왕실 경호원이니 하얀 늑대들의 기사 단장이니 소드 마스터니 하는 말은 많이 들었지.” 게랄드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소드 마스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를 뿐이지. 그건 자격 있는 누군가가 부여한 호칭도 아니고, 마스터가 원하는 호칭도 아니거든. 그래서 마스터는 그저 자신을 아란티아의 기사 정도로만 알아줘도 상관 없다고 말씀하시지.” “그건 대단한 자신감이군. 보통은 자기가 어느 정도의 지위만 가지면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쓰는데. 이를테면, 어느 지방 최고의 기사니, 어느 나라 최고의 마법사니......” “나도 사실 그런 녀석 중 하나였지.” 게랄드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카셀은 얼른 말을 고쳤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게랄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네 말이 맞아. 나도 그런 자부심 때문에 아란티아로 간 거였어. 최고라고 사람들이 떠받드는 검사가 직접 자신의 수하 기사를 뽑는다...... 재미있는 제안이지. 거기에서 그 퀘이언이라는 사람을 꺾으면 내 이름은 더욱 높아질 거라 믿었지. 대충 다들 비슷한 생각에서 그 시험에 응한 거야.” “그래서?” 카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른 의자에 앉았다. 게랄드는 카셀의 그런 모습에 의아해 했다. “뭐야?” “멈추지 마. 얘기 계속 해.”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려는 아이가 얘기를 재촉하는 포즈를 하고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 게랄드의 정확한 지적에 카셀은 얼굴을 붉혔다. 게랄드는 웃으며 허리를 세워 똑바로 앉았다. “그래, 좋아. 나도 진지하게 얘기해주지. 이런 이야기는 사실 아즈윈이나 쉐이든한테 들어야 재미있을 텐데. 난 던멜보다 말 재주가 없거든.” “던멜은 말을 할 줄 모르잖아.” “침묵의 미덕을 알잖아. 내 웅변은 그 침묵을 이길 수가 없지.” 카셀은 박수를 가볍게 쳤다. “방금 말만 들으면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거야.” “그거 아주 귀에 쏙 들어오는 칭찬이로군. 좋아, 바라는 건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니 그 부분만 이야기 해 주지. 다른 건 부디 아즈윈에게 물어봐. 아즈윈은 이런 이야기 하는 걸 아주 좋아할 거야.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얘기를 하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항상 입이 간지러워 못 견뎌 하거든, 그 애는.” 게랄드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마스터에 대한 소문의 일부는 맞아. 그 분은 정말 대단하지. 난 지금까지 그의 검을 딱 한 번 밖에 받아보지 못했어. 단 일격이었지.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는데, 그 일격을 받아내는 사람은 마스터를 이겼다고 봐도 좋아.” “왜? 한 번 이상 공격 못하나?” “네가 검을 잘 모르니 설명하긴 힘들군. 예를 들어, 이런 거야. 너에게 화살이 단 한 자루가 있고, 상대방은 칼을 들고 있어. 거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선택권은 너한테 있다고 치자. 너는 활을 아주 잘 쏘기 때문에 그 한 방으로 달려오는 어떤 적이든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그 하나뿐인 화살을 피해버린다면 너는 죽겠지. 비슷한 원리야. 마스터는 언제나 이 격 이상의 공격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이거든. 지금까지 그 일격을 막은 사람은 우리 중에도 로일 한 명뿐이었어.” “한 번의 일격만 막으면 된다면 그것만 피하면 이기는 거 아니야?” “맞아. 마스터는 스스로 그것을 인정했어. 하지만 로일도 그 일격을 막은 후 패배를 인정했지. 마스터는 우리를 상대로 진짜 공격을 하지는 않으신거거든. 그랬다가는 애써 얻은 제자를 죽일 테니까. 그나마 목검이라 모두 살아남은 거였어.” 게랄드는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여길 맞았지. 난 맞았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퍼렇게 멍들어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갈비뼈가 두 대나 나갔더라고. 아즈윈은 방패로 그 한 방을 막았다가 방패와 함께 팔이 부러졌고, 쉐이든은 창을 놓치고 항복했어. 던멜은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물러서버렸지. 한 가닥 한다는 녀석들이 모두 모인 중에 뽑힌 네 명이 그 목검 일격을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던 거야.” “로일은 막았다고 했지?” “아주 대담했지. 마스터의 공격에 공격으로 맞서면서 막았거든.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가로 손목을 다쳐 한 동안 칼을 쥐지 못했어.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면, 로일이 이긴 거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마스터가 진검을 들었다면 정말 로일이 막았을까? 그건 아니야.” “로일은 대체 누구야? 너희들이 평가하는 로일은 극단적인 부분이 많군. 어떨 때는 멍청하다는 듯 평가했다가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면 검의 달인인 것도 같고.” “둘 다 맞아. 멍청한 검의 달인이지. 녀석을 보고 있으면 어떤 천재도 자신의 천재성을 의심하게 되지. 우리 중 가장 자부심이 강한 아즈윈이 인정했다는 걸로 설명을 대신할까? 로일에 비하면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단지 노력이 뛰어난 수재였다나. 그건 나도 동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로일에게 진다는 뜻은 아니야. 우리 다섯은 서로 우위를 가릴 수 없어. 그래서 평등한 거지. 처음 있었던 격차는 마스터에게 수업을 받으면서 더욱 줄어들었어. 우리 같은 개성 강한 검사들을 모두 가르친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한 거야. 뭐랄까, 전혀 성질이 다른 재료로 완벽한 요리를 만들었다고 하면 되겠지? 아닌가? 아, 역시 내 말재주로는 이런 설명이 무리야.” 게랄드는 난감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충분히 전달되었어. 나도 그 분을 만나 뵙고 싶어. 힘들겠지? 여왕의 수호 기사를 만난다는 게.” “이 일이 끝나면 한 번쯤 놀러갈 수 있지 않겠어? 그래도 명색이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맡은 사람이잖아. 그리고 마스터는 사실 한가할 때가 많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럴까?” 카셀은 진심으로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게랄드는 그의 순진함에서 어떻게 백작을 상대로 한 과격한 언변이 나올 수 있는 걸까 궁금했다. “아, 이건 비밀이랄 것도 없고 굳이 알 필요도 없지만, 그런 마스터도 당하기 힘든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이 있어?” “마스터 스스로 인정한 몇 사람이 있지.” “누군데, 누군데?” 카셀은 더욱 눈동자를 밝혔다. “누구겠어? 마스터도 과거에는 하얀 늑대들 중 하나였어. 지금의 우리와 똑같이, 멤버끼리는 서로 우위를 정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당연히 지금의 마스터라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검사란 당시의 하얀 늑대들이지.” “그들이 아직 살아있단 말이야?” “여기서는 그들이 죽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냐? 물론 아니야. 현역에서 은퇴했다지만, 검을 완전히 놓은 것도 아닐것이고.” “그렇겠구나.” 카셀은 점점 현실성을 벗어나는 느낌이라 입맛을 다셨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봐. 난 마스터 이외에 그런 엄청난 인물들을 알아버리면 좌절하게 될 것 같아 더 파고들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알지도 모르지. 아, 한 명은 알고 있다. 아즈윈이 미친 듯이 존경하는 검사라 몇 번이나 그 얘기를 들었거든. 마스터께서 알면 아주 섭섭해 하겠지만, 만약 그 사람이 나타난다면 아즈윈은 두 번도 고민 않고 그 사람에게 엉겨 붙어 마스터라고 부를거야.” “여검사?”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 때도 하얀 늑대들의 멤버 중 한 명은 지금처럼 여자였대. 그리고 그 여자야 마로 진짜 여왕의 수호 기사가 될 자격이 있을 정도로 강했다더군. 여자라는 게 가장 커다란 이유겠지만, 아즈윈은 그녀의 강함에 반해서 오래 전부터 동경해 왔대. 너나 나처럼 ‘하얀 늑대들’이나 ‘울프 기사단’을 동경한 게 아니란 말이지. 눈 앞에 있는 커다란 산맥을 오르기도 힘든 데 다른 산맥을 넘겨다 볼 여유가 있겠냐마는 나도 그 여자는 꼭 만나보고 싶어.” 카셀은 입을 조금 벌린 채 멍청히 듣다가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나, 왠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내가 아는 세계에서도 최고라는 사람들 수십, 수백이 모인 중 가장 뛰어난 너희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과 그 스승을 능가하는 사람이라니. 머리 속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아, 그럼 너희들의 스승인 퀘이언의 스승이었던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람은 더 대단한 사람일까?” “물론 선대 여왕 수호 기사였던 만큼 지금까지 말한 모든 사람들의 우위에 있는 사람이겠지. 내가 그에 대해 전에 물어봤는데, 그 이야기를 하자 마스터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어. 아무도 그 이야기는 알지 못해. 우리도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어.” 카셀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당사자가 아닌 게랄드의 말 속에서도 어쩐지 퀘이언의 슬픔이 묻어 나오는 듯 했다. 그는 퀘이언이라는 사람을 더욱 만나고 싶어졌다. 아니, 그 전에 퀘이언의 검을 막고, 하얀 늑대들 모두가 인정한 천재인 로일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천재란 어떤 존재인 걸까? 해가 질 때까지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하얀 늑대들 일행은 로일을 찾을 수 없었다. 던멜은 마침내 고개를 저으며 그를 찾을 수 없다며 포기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도 찾아내는 그가 찾지 못한 데서야 아즈윈과 쉐이든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녀석이 우리를 찾아올 수 있을까? 끝까지 여관을 지키고 있었어야 했나?” 아즈윈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쁜 일이라도 생겼을까? 던멜이 찾아낼 수 없다는 이 도시에 없는 걸지도 몰라.” 쉐이든이 던멜을 바라보자, 던멜은 짧은 수화로 말했다. ‘도시 어디에서도 로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아즈윈은 막 문을 닫으려는 채소 가게에서 당근을 하나 사 입에 물었다. “중간 평가 한 번 해볼까? 카셀이라는 친구 어때?” 그녀는 당근을 씹으며 갑자기 말했다. “나쁜 녀석은 아니야.” 쉐이든이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즉시 대답했다. “거짓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녀석을 신뢰해?” “너도 솔직하지는 않군. 그 녀석 앞에서는 동료로 완전히 인정한 듯 하더니 아니었어?” “만난지 1년 이내의 녀석은 누구든 신뢰하지 않아. 난 너희들에게도 그랬었어. 카셀같은 말 잘 하는 녀석에게라면 특별히 더 신뢰를 쌓기 힘들지.” 그녀는 누군가를 베기라도 할 것 같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10년 지기에게도 배신 당하는 게 인간 관계라는 거야. 또 어제 만난 이성과도 평생을 사랑하며 살 수 있지. 자신의 안목을 너무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즈윈.” 쉐이든은 부드럽게 웃었다. “어머나, 아주 나중에 배신을 하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말하시네?” “지금은 카셀을 믿고 봐주는 게 좋다는 뜻이야. 운도 따랐고, 불운도 따랐으며, 우연이 겹체 우릴 만났어. 난 녀석과 이야기한 짧은 시간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녀석은 기본적으로는 착한 녀석이며 아주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맘 먹고 작정한다면 우리 넷 정도는 손쉽게 속일 수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면 위험한 상황에 닥쳤을 때 우리를 속이는 쪽을 선택할까, 아니면 우리를 돕는 쪽을 선택할까?” “너 역시 그건 알 수 없지 않을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카셀을 아주 좋아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몰라.” “녀석을 우리의 방패로 쓰겠다고 의견을 내놓은 건 나였지만, 모두 동의했다면 최소한 그 방패를 아껴줘야지. 희생양이 될지도 모를 친구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 좋지 않아.” 아즈윈은 쉐이든의 날카로운 지적에 당근만 우물거렸다. 쉐이든이 뭔가 말할 때 그녀는 항상 조용히 듣는 편이었다. “우리는 카셀을 이용하고 있고, 카셀도 살아남기 위해 지금 우리를 이용하고 있어. 이건 생존을 위한 계약 관계다. 녀석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저 이 계약을 깨더라도 비판할 수는 없는 거야.” 쉐이든이 차분하게 말하자, 아즈윈은 짧게 웃었다. “네 말이 옳아. 하지만 녀석이 만약 우릴 배반한다면 아마 난 참지 못할 거야.” “그런 일이 일어나면 게랄드가 먼저 일어나겠지.” 아즈윈은 먹다 남은 당근을 길바닥에 던져버리고,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기운 차게 외쳤다. “쉐디, 던! 여관에 가보자.” “던멜이 없다고 했잖아.” “나도 던의 느낌을 믿어. 하지만 로일이 우릴 찾으러 그 여관에 들렀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쓸만한 정보를 얻을 지도 몰라.” “그 녀석이 누구한테 물어 물어 우리를 찾아올만한 주변머리냐?” 쉐이든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제 와서 헛걸음 할 것도 없잖아.” 아즈윈은 벌써 여관 쪽으로 발걸음을 옳기고 있었다. 저녁 시간의 여관은 벌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앞치마를 입은 중년의 여인이 뚱뚱한 몸을 이끌고 그들을 맞았다. “하룻밤 묵을 거요, 마실 거요?” 용병과 상인을 상대로 장사한 경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거친 말투였다. 아즈윈은 남자들의 압력은 가볍게 받아 치지만, 여자의 카리스마에는 밀리는 편이었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 저녁까지 여기 묵기로 한 일행입니다.” “몇 호실?” “204호. 하지만 더 머물지는 않아요.” “미리 낸 돈은 안 돌려줘.” 여주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돈을 받으려고 온 건 아닙니다. 일행 중에 하나가 우리와 떨어졌는데, 혹시 우리를 찾지는 않았나요?” “그런 사람 없었는데?” “메모를 남겼다거나?” 여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손님들의 주문이 밀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얼굴에 노골적으로 짜증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혹시 우릴 찾는 사람이 찾아오면 영주의 저택으로 찾아오라는 메모를 남겨주시겠어요?” “알았수.” 아즈윈의 귀에는 그녀가 절대 기억해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들렸다. 결국 메모라도 적어서 여주인에게 주려다가 포기했다. 그들이 여관 문을 나서는 순간 그 메모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게 뻔했다. “이 곳 사람들은 하나 같이 친절함이라고는 끼고 살지를 않는구만.” 여관을 나선 아즈윈은 신경질적으로 침을 밭았다. 쉐이든은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했다. “돌아가자. 급한 것도 아니잖아. 녀석한테 무슨 일이 생길리야 있겠어?” “아니, 로일이 사고를 많이 일으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증발하는 일은 없었어. 뭔가 이상해.” 그녀가 턱을 쓰다듬으며 로일이 어디로 갔는지 추리하다가 마침내 머리를 쥐어뜯을 즈음, 내내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한 어린 아이가 접근했다. 못 먹어서 팔뚝이 젓가락만 한 지저분한 아이는 아즈윈의 옆구리를 쿡 찔러 그녀를 감짝 놀라게 한 다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즈윈이라는 분인가요?” 아즈윈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래.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검은 머리에 길게 머리를 땋은 예쁜 누나가 이 여관에 오면 쪽지를 건네주라고 어떤 사람이 그랬어요.” 아즈윈은 손바닥을 딱 쳤다. “로일이구나. 갈색 머리에 키가 나만한 이십 대 중반의 남자지?” “그건 잘 모르겠고, 아즈윈이라는 사람이 돈을 줄 거랬어요. 이 쪽지를 건네주면.” 아이는 적당히 묶은 쪽지를 내밀었다. 아즈윈이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아이는 얼른 쪽지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돈을 먼저 주지 않으면 쪽지도 주지 않을 거에요.” “거래를 할 줄 아는 아이구나. 얼마를 원하니?” “은화 두 개.” “심부름값 치고는 아주 많구나?” “저는 이 쪽지를 전달해주려고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 하고 기다리고 서 있었어요. 그 정도 가격은 된다고 생각해요.” “어머, 그러니?” 아즈윈은 재미있어 하며 은화를 두 개 내밀었다. 소년이 빼앗듯 그것을 가져가려 하자 아즈윈도 손을 얼른 뺐다. “동시에 주고 받아야지?” 아즈윈이 다시 돈을 내밀자, 소년도 쪽지를 내밀었다. 둘은 서로의 물건을 잽싸게 빼앗았다. 소년은 달음박질 치며 골목으로 달아나버렸다. “아무 것도 아닌 거면 어떡하려고?” 쉐이든은 소년이 사라진 골목 쪽을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그는 아즈윈이 관리하고 있는 여행 경비가 걱정되던 차였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잖아. 그리고 아니면 어때? 불쌍한 아이, 적선했다고 생각하지 뭐. 그 팔뚝 봤어? 얼마나 못 먹으면 그렇게 되니?” “그런 애야 카모르트 여행하며 수없이 보아 왔잖아. 정말 가난한 나라야. 이런 나라의 두 멍청이 백작은 무슨 돈이 있어서 전쟁을 몇 년씩이나 유지할 수 있나 몰라.” 쪽지를 펼쳐보니, 로일의 읽기 힘든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즈윈은 여관의 창문 쪽으로 다가가 새어 나오는 불빛을 이용해 눈을 찡그려가며 읽었다. ‘많이 줘서 심부름 시키면 돈만 챙기고 쪽지를 전달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돈을 조금만 줬어. 이 쪽지를 전해주는 아이한테 심부름 값을 조금 주렴.’ 쪽지의 시작을 보고 아즈윈은 웃음을 터트렸다. 쉐이든이 흥미로워하며 옆에 서서 같이 쪽지를 읽었다. ‘단독으로 행동해서 미안해. 이 쪽지가 전달되지 않더라도 던멜이 있다면 우리는 노르만트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도와줄 사람이 생겼어. 술을 배달해서 먹고 사는 가난한 부부인데, 알다시피 최근 이 근처에 안 좋은 일이 많이 터졌잖아. 용병 고용할 돈도 없고, 오히려 고용한 용병이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일도 많다더군. 그래서 내가 같이 가주기로 했어. 너희들과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벌써 이동하고 없더구나. 수도에서 만나자. 던멜이 있으면 나를 찾을 수 있겠지? 모두를 사랑하는 로일이. ps. 하루 종일 생각해봤는데, 역시 칼은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 “쪽지를 남길 줄도 알고? 나름대로는 신경 썼군.” 쉐이든이 낮게 큭큭 대고 웃었다. “하여간 멋대로라니까. 자기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그리고 좀 더 생각을 했다면 여관 주인에게 쪽지를 남겼으면 되잖아.” 아즈윈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아까 그 여주인 성격에 그 쪽지가 잘도 보관 되겠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동하면 되겠군. 돌아가자.” 쉐이든이 몸을 돌리자, 던멜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그들이 서 있는 여관 앞을 중심으로 골목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보이는 숫자는 여섯이었는데, 숨어있는 숫자는 더 있었다. 쉐이든은 느긋하게 자신의 철창을 내밀어 끝을 바닥에 찍었다. “참을성 있는 녀석들이군. 위가 저택에서 나오길 기다리기라도 한 거냐?” 아즈윈도 칼을 꺼냈다. “암살자들이야. 말하고 덤비지는 않을 거야.” 전에도 그랬었다. 하얀 늑대들은 영문도 모르고 칼을 던지는 암살자들과 혈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지붕위에 있는 검은 로브의 암살자는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붕에서 펄럭이는 로브는 유령처럼 음산하기까지 했다. “오래 기다리기는 했지. 꽤 유명한 친구들이더군. 그런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조무래기들을 시키지는 않았을 거야.” 놀랍게도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죽인 암사자들이 모두 남자라 당연히 이번에도 남자라고 생각했던 아즈윈은, 모두에게 버리라고 강조했던 편견을 자기가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칼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들 어느 집단인지 모르지만, 우릴 건드리면 쉽게 끝나지 않아. 정체 안 들키게 조심해. 나 혼자 가서 너네 조직을 박살내 버릴 수도 있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로브 안에 숨기고 있던 암살자의 고운 손이 드러났다. 어두 속이라 보이지 않은 그녀의 손이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는 주먹만한 불덩어리에 유난히 긴 붉은 손톱이 눈에 띄었다. “어, 마법?” 아즈윈이 놀라 한 걸음 물러설 때 마법사의 불꽃이 그들의 머리위로 떨어졌다. 셋은 일제히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불덩어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강한 폭발에 여관 창문이 안쪽으로 깨지며 근처를 가득 메우는 불길이 바닥을 꿈틀대며 기어갔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놀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모두 안으로 피하시오.” 쉐이든이 크게 소리치며 창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던지려는 방향에 있어야 할 마법사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관에 옮겨 붙은 불에 사람들이 난리를 피웠고, 그 사이 암살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젠장.” 쉐이든은 창을 바닥에 힘껏 박으며 화풀이했다. “아즈윈, 던멜.” 그는 둘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마법에 당한 건가 싶어 폭발한 자리를 찾아봤지만, 없었다. 애초에 그런 공격에 당할 둘이 아니었다. 쉐이든은 둘을 찾으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즉시 백작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던멜은 지붕 위를 달려 다음 집으로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는 골목 밑으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암살자들의 위치를 하나씩 체크한 후 옆집의 지붕 위로 길게 뛰었다. 기울어진 지붕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천천히 걸어가니 그 앞에는 마법을 썼던 암살자가 서 있었다. 검은 로브 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하얀 얼굴이 달빛에 반사되었다. “잘도 쫓아오는 군. 하얀 늑대들 중에는 곡예사라도 있었던 건가?” 던멜은, 당연하겠지만, 대꾸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며 양손으로 허리 춤에서 날이 구부러진 칼 두 자루를 꺼냈다. 그러자 그녀는 양팔을 펼쳤고, 그녀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던멜은 마법을 경계해 움직이지 않았다. “흥미로워. 난 기사단에 너 같은 녀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한테는 너 같은 부하들이 아주 많지.” 그녀가 손짓했다. 처음에 던멜은 그녀가 또 다른 마법을 쓰는 줄 알고 피할 준비를 했으나, 그것은 단순히 부하들을 부르는 신호였다. 좀 전에 일행을 포위했던 암살자들이 모두 모였는지 이미 그의 주위에는 여섯 명의 암살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던멜은 그들 전부보다 허공에 떠있는 마법사에게 더 신경을 썼다. “당장 없앨 계획은 아니었지만, 쫓아온 이상 하는 수 없지.” 마법사는 가는 손가락을 뻗어 던멜을 가리켰다. “죽여.” 여섯 명이 일제히 여섯 방향에서 던멜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할 수도 없이 동시에 뻗는 칼날을, 던멜은 짧은 칼 두 자루로 몸을 회전하며 모조리 막아났다. 여섯 자루의 칼이 한꺼번에 튕겼다. 암살자들은 당황하지 않고 다시 던멜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또 여섯 번의 공격을 모두 막더니 이번에는 반격까지 해서 한 명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던멜이 미처 칼을 뺄 틈도 주지 않고 당한 암살자의 동료들은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그는 칼을 찌른 암살자를 밀어 정면에서 달려드는 칼을 막았다. 그들은 동료의 죽어가는 몸에 서슴지 않고 칼을 꽂았다. 그는 발로 죽은 상대의 가슴을 밀어 칼을 뽑아 낸 후 뒤에서 달려드는 암살자의 칼을 피했다. 던멜이 상체를 완전히 바닥에 붙이고 이동하자, 암살자들의 눈에는 그의 몸이 사라져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던멜의 칼은 한 명의 목을 그었다. 그 때 하얀 빛을 띤 화살 한 자루가 던멜의 옆으로 날아왔다.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하자, 스쳐간 화살은 허공에서 커다란 호를 그리며 다시 그에게 날아왔다. 그가 몸을 옆으로 굴러 피하자 이번에는 살아남은 암살자들의 칼이 그의 몸에 내리 꽂혔다. 칼날이 지붕에 후두둑 박혔다. 그러나 던멜은 뒤로 물러나 아슬아슬하게 지붕 끝에 몸을 고정시켰다. 마법사가 조종하는 빛의 화살은 다시 곡선을 그리며 던멜에게 뻗어왔다. 던멜은 두 자루 칼을 교차시켜 화살을 조려보다가 그것이 가슴이 닿으려는 순간 칼을 동시에 휘둘렀다. 빛의 화살은 그의 칼에 두 동강났다. “음, 힘 쓰게 만드네.” 마법사는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화살을 양 손에 네 개씩 여덟 개를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너무 염려 마. 이것보다 많이는 못 만드니까.” 그녀는 혀로 붉은 입술을 적시며 손가락으로 던멜을 가리켜 보이니 하얀 빛을 내는 화살이 저절로 날아갔다. 네 개는 직선으로, 다른 네 개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리 쪽으로, 가슴 쪽으로, 어떤 것은 머리 위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던멜은 두 자루 칼을 가슴 앞에서 교차하고, 입을 굳게 다물더니 눈을 감았다. 그 때 지붕 위로 아즈윈이 뛰어올라왔다. 지붕 받침대를 잡고 낑낑대고 올라오긴 했지만, 던멜의 발 아래에서 올라온 거라 암살자들에게는 느닷없이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불규칙적으로 방향을 바꾸며 날아오는 화살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즉시 던멜의 등 쪽에 섰다. 그녀는 둥근 방패를 들고 작은 목소리로 던멜에게 말했다. “왼쪽으로 돌아.” 등을 대고 몸을 합친 둘의 움직임이 물이 흐르는 듯 하나로 보였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칼과 방패가 어둠속에서 교차하며 일곱 개의 화살이 반짝이는 가루로 부서져 지붕 위로 예쁘게 떨어졌다. 마지막 화살은 아즈윈과 던멜이 동시에 내민 칼에 부딪혀 깨졌다. 둘은 서로의 칼을 가볍게 한 번 부딪혀 주고 서로 등을 뗐다. “전에 우리를 노리던 놈들은 확실히 아니군. 그 때는 너 같은 잔재주꾼은 없었으니까.” 아즈윈이 말했다. 가볍게 화를 돋울 셈이었는데,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잔 재주꾼?” “마법사라면 과감하게 덤벼봐. 꼬장꼬장한 기술로 감질나게 굴지 말고! ‘루티아’에서 배운 마법이란 게 그게 다냐? 하긴 하늘 산맥의 마법도시 출신이라면 암살자들 틈에 있을 리도 없겠지.” 그녀는 하나 하나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했고, 마법사는 마침내 그 간단한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마법사의 손에는 아까보다 훨씬 커다란 불덩어리가 쥐어져 있었다. “이 마을을 불태우는 일 없이 조용히 끝내려고 했는데, 스스로 거부한다면 나도 참지 않아.” “하아,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시나, 레이디?” 아즈윈의 마지막 도발에 마법사의 불덩어리가 던멜과 아즈윈을 덮쳤다. 아즈윈은 짧은 순간 던멜의 어굴을 향해 간단한 수신호를 보냈다. ‘나를 잡아 줘.’ 던멜은 아즈윈의 등 뒤 쪽에 버티고 있었고, 아즈윈은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불덩어리가 얼굴까지 접근하자 팔을 크게 휘둘러 불덩어리를 후려쳤다. 폭발이 일어나며 아즈윈의 몸이 뒤로 밀려났으나 던멜이 막아주었다. 그리고 불꽃이 사라지기 전에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번에는 던멜의 뒤를 아즈윈이 쫓았다. 놀란 암살자들이 던멜의 움직임을 막으려 했으나 던멜은 지붕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보통 사람들의 몸으로는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몸 움직임을 보여주던 암살자들 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높이였다. 잠깐 암살자들의 눈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 있는 틈에 뒤따라오던 아즈윈이 둘을 동시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허공에 떠오른 던멜은 곧장 마법사에게 몸을 날렸다. 당황한 그녀가 양손을 내밀어 빛의 화살을 던졌으나 그것은 던멜의 어깨만 살짝 스쳤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다른 마법을 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코앞까지 도달한 던멜의 칼이 가차없이 그녀의 팔을 자르고, 다른 손에 든 칼은 그녀의 얼굴을 그었다. 던멜은 지붕을 건너 반대쪽 집에 착지했고, 그 사이 아즈윈은 남은 두 명 중 한 명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등을 뚫고 나온 칼이 달빛에 반사되었다. 다른 한 명은 칼을 뽑으며 노려보는 아즈윈의 눈빛에 놀라 물러나더니 펄럭이는 검은 로브와 함께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죽였어?” 아즈윈이 물었다. 던멜은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은 후 손가락으로 지붕 아래를 가리켰다. 둘은 동시에 2층 높이를 뛰어내렸다. 마법사의 시체가 있어야 할 곳에는 핏자국만 있었다. “도망가 버렸네.” 그녀는 피 묻은 칼을 헝겊으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던멜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즈윈에게 그들이 도망간 방향을 가리켰다. 던멜이 쫓으려 하자, 그녀가 어깨를 잡았다. “아니야. 녀석들의 목표는 애초에 위가 아니었던 것 같아. 갑자기 공격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작정이었던 거야.” 던멜은 수화로 물었다. ‘그럼 누가 목표야?’ 아즈윈이 빠른 속도로 대꾸했다. “우리가 아니라면 저택에 있는 누군가겠지. 이 정도 숫자가 더 몰린다면 그 저택 경비로는 못 막을 거야.” 던멜은 그제야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즈윈은 피를 닦은 칼을 칼집에 꽂아 넣으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런 싸움을 하러 카모로트에 온 게 아니었어.” 둘은 빠른 걸음으로 백작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고디머 백작은 앤플러에게 와인을 한 잔 따라주었다. 등불 두 개로 밝혀진 서재 안은 좀 어두웠고, 빛이 닿지 않는 서재의 구석은 음침했다. 하지만 백작은 이 서재를 좋아하며 가끔 이 곳에서 와인을 즐기는데 오늘은 앤플러도 함께였다. 앤플러는 잠시 와인의 향기를 음미한 후 잔을 입에 댔다. 입 안에 흘려 보낸 와인을 혀 끝으로 굴려보더니 이보다 더 기분 좋을수는 없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삼켰다. “아껴둔 와인이라 그런지 더 맛있군요.” 앤플러가 말했다. “나라의 큰 일을 치르기 전에 마시려고 지금껏 보관해 두었지. 나도 뜯기를 조금 망설였다네. 오늘 나의 행동은 과연 큰 일을 치르기 위한 과정인지, 아니면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어느 쪽이건 이 와인을 마시는 데는 망설일 이유가 없겠습니다. 좋은 쪽이라면 미리 축하하거나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마시면 되는 것이고, 나쁜 쪽이라도 안 좋은 일 당하기 전에 미리 마셔둔다는 핑계가 있지 않습니까?” “이를 테면 술 마시는 데 필요한 건 술이다?” “좋건 나쁘건 계기만 있으면 되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더 마시게.” 백작이 병을 내밀자 앤플러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중요한 일인 만큼 저는 정신을 말짱하게 유지하고 싶습니다. 한 잔 이상 마시는 과오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술 취해 휘두르는 검이 더 강하다고 마한 게 언제였더라?” “5년 전 일입니다.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지금은 아닌가?” “특히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눈 앞에서 저보다 터무니 없이 강한 자를 봐버렸습니다. 지금도 검술을 단련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 동안 안일했다는 생각만 자꾸 드는군요.” 고디머는 앤플러 대신 자기 잔에 와인을 따랐다. “하얀 늑대들 얘긴가?” “예.” “어떤가? 그들은 강해 보이던가?” “제가 감히 측정하기 힘들 정도로.” “내가 이 나라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할 정도는 되는가?” “정치가 한 명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열 명이 안 되는 숫자로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 대단히 뛰어난 검사지만, 정치가는 아닙니다. 일을 꾸미신다면 백작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이용할 계획이 아니셨습니까?” “맞아.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하얀 늑대들은 정치가가 아니므로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다고 했나? 아니야. 최소한 한 명은 정치가야.” “캡틴 카셀?” “자네는 같이 자리에 앉아 보지 못했군.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런 박력을 가진 정치가를 본 적이 없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렇게 서슴없이 하는 사람은 정치판에서 죽기 딱 맞지.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일세. 그는 누구도 함께 가질 수 없는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 칼과 혀. 난 솔직히 두려워. 나는 이 나라의 구원자를 왕실로 안내하는 걸까, 아니면 이 나라를 삼켜버릴 드래곤을 들이는 걸까?” 이미 저녁부터 많이 마셔 상당히 취해있는 백작이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질렀다. 앤플러는 와인 마개로 병을 닫았다. “오늘은 일찍 주무십시오. 내일은 바쁜 하루가 될 것입니다.” 그의 부드러운 말 뒤에 곧바로 등불이 닿지 않는 서재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앤플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이 어떻게 지금까지 거기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처음에는 없었지만 소리 없이 서재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내일은 바쁘지 않아. 아예 너에게는 내일이 오지 않을 테니까.” 놀란 백작은 와인 잔을 떨어뜨렸으나, 두툼한 양탄자 덕에 잔은 깨지지 않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앤플러는 당황하지 않고 레이피어를 뽑았다. “누구냐? 무례한 녀석이구나.” “경고하러 왔다, 고디머 백작.” 상체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다. 촛불에 반사된 탄탄한 근육은 칼로 후려쳐도 상처 하나 날 것 같지 않았다. 백작은 호기롭게 소리쳤다. “무슨 경고?” 그러나 복면을 쓴 남자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고 자기 말만 이어갔다. “하얀 늑대들을 가까이 하지 마라.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 자리에 있는 한 명의 목숨을 가져가겠다.”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는 둥근 것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먹만한 크기였는데,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단지 떨어뜨린 것뿐인데 나무 바닥에 금 가는 소리가 들렸다. 쇠구슬이었다. 구슬의 한 쪽에 가는 쇠사슬이 이어져 그 끝은 남자가 쥐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손에는 두께와 넓이가 비슷한 작은 방패가 들려있었다. 쇠구슬에서 시작된 쇠사슬은 거기까지 연결된 것이었다. “그런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있는 꼴을 보니 암살자구나. 누가 시켰는지 모르나, 상대를 제대로 알고 임무를 맡도록 해라.” 앤플러는 그런 종류의 무기를 어떻게 쓰는 건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애물이 많은 이런 좁은 장소에서 쓸만한 무기가 못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암살자는 쇠줄을 잡고 쇠구슬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증가하면서 윙윙 하는 바람소리가 났다. “물러서십시오, 백작님.” 앤플러는 말한 후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암살자의 손에서 쇠구슬을 벗어났다. 고속에서 튀어나온 무거운 쇠구슬은 손으로 휘두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직선으로 뻗어왔다. 앤플러는 거의 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결에 그것을 피했다. 쇠구슬은 금방 암살자의 손으로 되돌아가 다시 회전을 시작했다. 앤플러는 즉시 책이 잔뜩 쌓인 책장 뒤 쪽으로 몸을 피했다. 어설프게 상대가 공격해 들어오면 장애물을 이용해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봉쇄하고 자신의 특기를 살린 빠른 공격으로 반격할 계산이었다. 암살자의 손에서 다시 벗어난 쇠구슬이 앤플러가 숨은 서재 쪽으로 뻗어왔다. 앤플러는 고개를 숙이고 달려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쇠구슬은 책장을 뚫고 앤플러의 얼굴로 날아왔다. 가까스로 피했으나 이마를 스치며 그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부서진 하드커버 책들과 나무 파편이 앤플러의 몸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쇠구슬은 다시 암살자의 손으로 돌아갔다. 근육질의 암살자는 처음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앤프러는 하드커버 책 모서리에 맞아 부어 오른 이마를 어루만지며 다시 일어났다. 속도에서 져 본 적은 없었다. 오늘 아즈윈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 거리에 들어와 있는 적을 상대로 밀린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 암살자의 무기 앞에서는 그 거리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쇠구슬은, 생각이 많아 판단이 늦은 앤플러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머리가 인지하기도 전에 앤플러는 상체를 젖혔고, 쇠구슬은 가슴 옆을 스쳤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을 길게 내디디며 칼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혼신을 다한 일격은 거구의 다른 손에 든 방패에 막혔고, 가는 칼날이 부러져버렸다. 설마 막힐 줄 몰랐던 앤플러는 뒤통수 쪽으로 되돌아오는 쇠구슬을 발견하지 못했다. 뭔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분명 백작의 목소리였다. 앞으로 있을 정치적 문제에 대비하여, 아란티아의 문화나 기사 제도의 특징에 대해 게랄드에게 강의를 받던 카셀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있던 게랄드는 용수철처럼 튕겨올라 일어섰다. “무슨 소리야?” 카셀이 물었다. “누군가 이 저택에 침입했군.” 그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당장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뭔가 수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그는 문을 열지 않고 카셀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 보였다. 카셀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게랄드는 문을 벌컥 열었다. 다음 숨간 칼이 그의 배를 향해 찌르고 들어왔다. 문을 열기 저에 미리 예측하고 피해있던 게랄드는 적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겨 머리로 들이받았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입은 암살자였다. 어제 카셀을 공격하고, 전에 하얀 늑대들을 공격했던 바로 그들이었다. 휘청거리는 암살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 손에 든 칼을 빼앗았다. 문을 통해 들어온 다음 암살자는 오히려 게랄드의 검에 기습당해 픽 고꾸라졌다. 괴한의 몸에 박혀 잘 빠지지 않는 칼을, 게랄드가 억지로 뽑아내자 검붉은 피가 솟구쳐 나왔다. 카셀이 그 피에 놀라 숨을 들이키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게랄드는 고통에 머리를 움켜쥐고 일어나려는 첫 번째 암살자의 목 뒤에 칼을 내리찍었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과감하고 빠른 행동이었다. “여기 있을래? 아니, 날 따라오는 게 더 안전하겠다.” 게랄드가 손짓하여 부르자, 카셀은 무조건 따라갔다. 게랄드는 빠른 걸음으로 2층 끝 쪽으로 걸어갔다. 백작의 비명 소리가 난 곳은 그 곳이었다. “주, 죽일 필요까지 있었어?” 카셀이 물었다. “있었어.” 게랄드는 단호히 말했고, 그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둘은 백작의 서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때를 같이 해 서재 문이 열렸고, 백작을 마치 술 취한 부랑자 다루듯 질질 끌어내고 있는 거구가 걸어 나왔다. 다른 암살자들과는 달리 얼굴에만 검은 복면을 쓰고 다른 쪽의 근육질 몸은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꼴이 마치 맞는 옷이 없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나 키가 크고 덩치가 다부진지 한 손에 잡혀있는 백작은 어린애 같았고, 일반인보다 월등히 큰 게랄드가 보통 키로 보일 정도였다. 덩치 큰 암살자의 손에는 쇠사슬로 연결된 주먹만한 쇠구슬이 쥐어져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커다란 구슬 모양의 방패가 팔뚝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도 아까 날 공격한 놈들이랑 같은 부류냐?” 게랄드가 물었다 “그렇다고 봐야지. 내 임무에 너의 암살이 없었음을 다행으로 여겨라, 하얀 늑대.” 암살자는 아주 굵고 듣기 싫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자신이 있나 보네.” 게랄드가 말했다. 암살자는 콧방귀를 뀌더니 손에 쥔 쇠구슬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쇠사슬이 길게 늘어지며 바닥에 쇠구슬이 닿자 나무 바닥에 금이 갔다. 그의 손에 있어서 작아 보인 것뿐, 보통 사람은 두 손으로 들어도 들지 못할 무거운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내 임무에 네 암살은 없지만, 하지 말란 수칙도 없었으니......” 암살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있던 구슬이 마치 살아있는 양 튀어 오르며 게랄드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놀란 그가 고개를 옆으로 꺾자, 쇠구슬은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며 날아갔다가 암살자가 도로 당기자 이번에는 그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게랄드는 급히 고개를 숙여 그 공격도 피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공격이 두 번이나 이어지자 그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게랄드.” 카셀이 놀라 나서려 하자, 그가 소리쳐 말렸다. “물러서 있어, 캡틴. 복도가 좁아.” 그는 말한 후 다시 일어났다. “이 자식, 내 도끼만 있었으면 넌 벌써 죽은 목숨이었어.” “무슨 마술 도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없지 않나?” 암살자는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느긋한, 그러나 여전히 듣기 싫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쇠사슬을 잡고 구슬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게랄드는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쇠 공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순간 그것이 얼굴을 향해 뻗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또 한 번 고개를 옆으로 젖혀 피했다. 그리고 쇠사슬을 움켜쥐었다. “잡았다.” 게랄드의 환호에 암살자는 가소롭다는 듯 그대로 쇠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게라드는 그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팔뚝의 근육이 단단하게 각이 졌다. “힘 겨루기라도 할 셈인가?” 암살자는 두 손으로 쇠사슬을 쥐더니 한 번에 그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게랄드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쉽게 끌려가 버렸고, 갑자기 사라진 저항에 암살자는 뒤로 몸을 휘청하고 물러섰다.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한 게랄드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암살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 커다란 덩치가 뒤로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괜찮으시오?” 게랄드는 암살자와의 거리를 확보한 후, 쓰러진 백작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괜찮소. 나보다 앤플러가......” 곁눈질로 바라본 서재는 애초에 그 방이 어떤 방이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암살자가 빙글빙글 돌리던 쇠구슬이 이 서재를 어떻게 난장판으로 만들었을지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서진 책장과 가구 틈바구니에 쓰러져 있는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그것이 아마도 앤플러이리라. 그리고 그의 몸 주위에 축축하게 흐르고 있는 검은 것은 피일 것이고...... 소리를 들은 경비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암살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금 찢어진 복면을 만져보더니 부러진 이빨을 밭아냈다. “네 쇠구슬 못지 않지?” 게랄드는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암살자는 다시 피 섞인 침을 뱉고 쇠 공과 쇠사슬을 거두어 들였다. “너희들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이다. 잊지 말아라. 너희가 있는 곳에 곧 재앙이 뒤따를 것이다.” 암살자는 2층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게랄드가 금방 뒤를 따랐으나 카셀과 백작들 두고 움직일 수는 없어 쫓지 않았다. 게랄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가버렸어.” 카셀은 말없이 눈으로 대꾸하고 백작에게 다가갔다. 서재 안에 쓰러진 앤플러를 끌어안고 백작은 울고 있었다. 앤플러의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부서져 있었다. 둘은 백작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앤플러가 그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들이 노리는 건 애초에 나였소.” 부러진 팔을 고정시키고 붕대로 감은 고디머 백작은 식은 차로 입술을 적신 후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이미 한 번 암살자들과 부딪혔다고 했지 않소? 그 때 그들은 엉뚱한 카모르트의 사신만 죽이고 당신들은 상처 하나 내지 못했소. 몇 명이나 공격을 가해왔다고 했소?” “마흔 명 정도. 카모르트 남부 산을 넘던 중이었소.” 쉐이든이 대답했다. “마흔 명이 기습했는데도 암살에 실패했다면 이제 당신들이 수도로 진입하는 걸 막으려면 군대라도 끌고 와야 할 거요. 하지만 그 정도 인원을 썼다간 누가 배후였는지 들통날 게 뻔하지. 그래서 암살의 목표를 바꾼거요.” “백작으로 말입니까?” 카셀이 물었다. “물론 날 죽이진 못하오. 나 정도 지위를 가진 자를 죽이는 건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이건 위험한 일이지. 그리고 생각해 보시오. 죽이지 않는 게 더 효과적이오. 이번 일이 알려진다면 아마 어느 누구도 당신들을 도우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 암살자가 당신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하얀 늑대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그뿐이었소.” 그는 다시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아, 물론 나는 계속 당신들을 도울 것이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소.” “아닙니다. 아무래도 백작께서는 그 암살자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셀이 말했다. “나보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신의를 저버리란 말이오? 그것은 왕실에 대한 배반과도 같소. 그리고 앤플러는 뭣 때문에 죽어야 한 거요?” 백작은 화를 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보십시오, 백작.” 카셀은 차분하게 말했다. 여행 준비를 끝낸 하얀 늑대들은 모두 백작의 주위에 앉아 있었다. 카셀은 모두와 상의한 끝에 내린 결론을 말한다는 뜻으로,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앞으로의 정치적 외교에 있어 우리는 당신의 힘을 꼭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한 번이면 족합니다. 경제적 후원이나 여행을 같이 하는 것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어제와 같이 당신의 위험만 가중시킨 따름이죠. 그러니 지금은 암살자의 말을 듣는 것처럼 우리를 내쫓으십시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믿고 있겠습니다.” “내키지 않는군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리는 따로 노르만트를 향해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백작께서는 팔의 치료에 전념하시다가 왕의 호출이 있게 되면 수도로 오십시오. 그 다음은 당신의 뜻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당신이 정말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우리와 뜻을 같이 하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자신이 없군요. 하지만 당신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 또 다른 건 없소? 여행 경비라든가......” 카셀은 없다고 하려다가 아즈윈을 힐끔 쳐다본 후 말했다. “돈을 좀 빌려주십시오. 여행 경비가 떨어져가던 참입니다. 그 외에는 필요한 게 없습니다.” 백작은 의외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가 웃었다. “원하는 금액을 말씀하시오. 내 드리리다.” 저택을 나선 후에도 그들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수가 없었다. 마을로 로일을 찾으러 간 셋 중 쉐이든이 제일 먼저 저택에 도착했는데, 그 때는 이미 성문을 지키던 경비들이 모두 죽어있었다. 그가 여린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그곳에는 아주 덩치 큰 암살자와 키 작은 암살자 둘이 서 있었다. 키 작은 쪽은 알고 보니 던멜에게 팔을 잃은 마법사였고, 덩치 큰 쪽은 게랄드에게 한 방 맞은 암살자였다. 쉐이든이 창을 치켜들고 누구냐고 소리치자 그들은 어둠 속에서 증발해 버렸다. “속임수가 아니라, 마법일거야. 우리와 싸울 때도 그런 식으로 사라졌거든. 그런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가 있다고 했어.” 아즈윈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와의 싸움에서 패해 달아났다기 보다 처음부터 싸울 계획이 없었으며, 예정대로 움직인 거라고 봐야 해. 우리를 목표로 해서 싸움을 걸었다면 팔 하나 잃었다고 달아날리 없지. 그런데 이건 뭔가 수상해.” 어깨에 짊어진 창을 툭툭 치며 쉐이든이 말했다. “백작에게만 큰 죄를 진 셈이야. 그리고 그의 말대로 노르만트에 가면 아무도 우리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야.” 카셀이 멀어져가는 저택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위에 온통 적뿐인 세상, 뭐, 새로울 것도 없네.” 게랄드가 당당하게 말하자, 아즈윈이 툭 내뱉었다. “너야 워낙 인기가 없었을 테니까.” “그런 뜻이 아닌 거 알잖아.” “물론 알아.” “너 진짜!” 게랄드가 마침내 저택을 떠나면서 받아낸 도끼를 치켜들자, 아즈윈은 벌써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카셀은 소리 없이 웃었다. “마차를 빌리자. 이제 돈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리고 내게 말이 한 마리 있어.” “수완 좋더라. 아무리 내가 돈 없다고 우는 소리 했기로, 당당하게 돈을 달라고 할 줄이야.” 아즈윈이 게랄드를 피해 먼 곳에서 말을 건네자 카셀은 손을 내저었다. “노르만트로 가면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될 거야. 지금 미리 확보해둬야지. 그리고 이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의 진짜 싸움은 왕실에 안전하게 들어간 이후에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 “괜찮아.” 벌써 분노를 잊어버린 게랄드가 휘파람을 불면서 걷자 아즈윈이 어느 새 옆으로 다가와 카셀과 어깨 동무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는 캡틴이 있으니까.” 그녀는 웃었고, 카셀은 여전히 그녀의 미소 이상가는 보상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 때 갑자기 그녀는 그를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작은 목소리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카셀, 난 네가 좋아지고 있어. 모두들 그래. 그러니 우릴 배신하지 마.” 배신? 그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었기에 카셀은 조금 놀랐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진지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카셀은 그녀의 맑고 강한 시선을 똑바로 응시한 채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 여자에게 뭔가를 맹세할 때는 절대 눈을 쳐다보지 말라고.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다시 그 눈을 바라보면 평생 후회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난 네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해 줄 수 있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좋아.” 아즈윈은 그의 등을 세게 탁 치고 떨어졌다. 아버지의 말은 사랑에 대한 말이었지, 이런 기사 간의 계약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셀은 틀린 상황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대해서든, 기사에 대해서든. ‘걱정 말아요, 아버지. 짝사랑은 익숙하니까. 그리고 저런 대단한 여자를 노릴 만큼 대담하지도 않죠.’ 그는 유연한 걸음걸이로 앞서가는 아즈윈의 매력적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굳게 다짐했다. 9. 로일 울프 덜컹거리는 마차에 앉아 로일은 눈을 감고 부드러운 바람의 향기를 맡았다. 마부의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도 듣기 좋았고, 실뜨기하다 다투는 두 꼬마아이의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점심 식사라도 하고 이동합시다. 저녁이면 마을에 도착할 거요.” 마차를 몰던 남자가 말했다. 로일은 손을 흔들어 대꾸했다. 말을 세우고 마부와 그의 아내는 허리를 펴고 마차에서 내렸다. 로일도 오랜 만에 땅에 다리를 딛고, 기지개를 폈다. “뭘로 할까요? 아침에는 간단하게 빵과 데운 우유로 때웠으니 점심은 고기라도 구울까요?” 마차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오. 근처에 늑대들이 많아요. 고기를 구우면 냄새를 맡고 올 거에요.” 로일은 말했다. 지금까지 너무 평온했던 터라 늑대라는 말에 마차 주인은 깜짝 놀랐다. “늑대가 쫓아왔소?” “아니오. 하지만 냄새를 맡으면 올 거에요. 저녁이면 마을에 도착하신다고 했죠? 근사한 식사는 그때 편안하게 합시다.” 로일이 워낙 느긋하게 말하니 마차 주인도 안심했다. 결국 점심도 마른 고기에 우유, 빵으로 마쳐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물어보질 못했는데, 용병도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는 분이시오?” 마차 주인은 갈색 머리에 세상의 괴로운 일이라곤 겪어본 적이 없는 듯한 그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물었다. “저는 기사입니다.” 로일은 우유를 한 번에 들이키며 말했다. “기사? 그럼 전쟁 중이시오?” “저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잠시 방문했죠.” “글쎄, 그렇게 젊은 나이에 기사가 될 수도 있소?” “제가 동안이긴 하지만 적은 나이는 아니에요. 기사라는 직책은 3년 전에 가졌고요.” “대단하구려.” 마차 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치로 말했다. 그는 사실 로일이 기사가 아니라 기사 견습생인데 괜히 잘난 척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었다. 마차 주인은 시골에서 생산된 와인을 배달하여 배달비용과 중간 이익을 챙기는 상인이었다. 예전에는 다른 나라를 통과하는 것도 문제가 없었으나, 요새는 마을 하나 이동하는 데도 조심해야 했다. 실제로 도적질을 몇 번 당했는데, 그나마도 물건만 뺏는 양심적인 도적이었다. 소문에는 물건이고 목숨이고 모조리 빼앗는 도적들이 많다고 했다. 나날이 늘어나는 도적들 때문에 배달 비용은 늘었지만 그만큼 잦은 왕래가 힘들어 전체적인 수입은 저조한 편이었다. 코홀룬의 한 가게에서 그가 힘들게 술통을 내릴 때 옆에서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청년이 그의 일을 도와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로일이라고 밝혔고, 사람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보기와는 달리 힘이 좋아 술통을 마차에 모두 옮겨 실어주었는데, 그 후에 대가도 바라지 않고 가려고 했다. 처음에는 자진해서 나서는 도움을 꺼림칙하게 받아들였으나, 곧 그의 마음이 고마워 와인을 하나 따서 잔에 따랐다. 로일은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내 이름은 배리요. 이 쪽은 아내인 린다. 내 두 딸인 신디와 리비죠.” “딸이 아주 예쁘군요.” 로일은 와인을 마시는 그의 등에 매달려 애교를 떠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배리는 신디가 로일의 손장난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했다. “항상 여행을 다녀 낯가림이 있는 애들인데 금방 친해지는군요.” “전 아이들과 금방 친해지는 편이죠. 생긴게 이래서 자기 또래인 줄 아나봐요.” 로일의 말에 배리는 큰 소리로 웃었다. 다음 가게로 이동해서도 로일은 술통 나르는 일을 도왔다. 일을 하던 중 배리는 로일의 허리에 찬 칼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칼을 쓸 줄 아시오?” “예.” “잘 쓰시오?” “예.” 그의 거침 없는 대답에 잘난 척이라고는 끼어 있지 않았다. 배리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어느 정도로 잘 쓰시오?” “제 친구와 스승님 외에는 져 본 적이 없죠.” 배리는 로일이 말하는 친구라는 것이 어떤 이들인지 상상하다 그만 어린 아이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래도 제법 검을 쓴다는 그의 말을 믿고 제안한 일이 경호였다. “우리는 중간에 작은 마을을 거쳐 수도인 노르만트로 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가는 길에는 많은 도적들과 짐승들이 있지요. 부디 걸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이동중인데, 경호원이라도 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되어 주시겠습니까? 돈을 써서 구할만한 여유도 없고, 어설프게 용병을 구입해 쓰다가 되려 그 용병에게 당하는 일도 있고 해서......” 배리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로일은 쾌히 허락했다. “저도 어차피 노르만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는 경비도 부족한 터였는데, 잘 되었군요. 여긴 워낙 물가가 비싸서......아, 친구들도 같이 있는데 가도 될까요?” “좋지요. 마차 짐칸이 넓어서 서너 명이면 가능합니다.”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구한 말이 두 필 있으니 그건 걱정 없습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건 가이드와 음식이거든요. 최근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해 다들 지쳤어요.” “우리의 이해 관계가 제대로 얽혔군요.” 둘은 서로 의외의 장소에 서 도움을 줄 사람을 구했다며 기뻐했다. 로일은 즉시 친구들을 찾으러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갔다. 하지만 친구들은 없었다. 그들의 행방을 물어봐도 아는 이는 없었다. 이 놈의 마을에서는 뭘 물어보든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로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여관 주인에게 메모라도 남길까? 아니면 이 술배달 부부를 그냥 보내야 할까? 그러던 중 여관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다가 무참히 거절 당하는 꼬마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얘야, 내가 은화 한 닢을 공짜로 줄 테니 심부름 하나 할래?” 공짜라는 말에 지저분한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뭔가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즉시 경계했다. 로일은 그 자리에서 은화를 내주었다. “심부름을 마치면 더 많은 돈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로일은 아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미리 말해두고 자신의 사정을 적은 쪽지를 적어주었다. “오늘 하루 종일 서 있으면 이 여관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이름은 아즈윈이고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있어. 칼과 방패를 항상 소지하고 다니니까 금방 알아볼 수 있을거야.” “이 곳에는 그런 여자들이 많아요.” “아니야. 칼을 차고 다니는 여자 용병은 많지만, 아즈윈처럼 예쁜 여자는 없을 거야. 그 사람한테 쪽지를 전해주면 아마 심부름 값으로 최소한 은화 한 닢보다는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야. 알았지?” 아이는 자신감 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일은 그 아이가 틀림없이 일을 제대로 수행할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그들은 하룻밤을 길에서 보내고 다음날 첫 번째 마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배리의 두 딸, 신디와 리비는 로일을 아주 잘 따랐다. 여섯 살과 다섯 살인데, 말은 잘 안했지만 로일의 몸에 매달려 있길 좋아했다. 힘이 좋아 둘을 매달고도 가뿐하게 움직이는 로일과 함께 노는 걸 보통 즐거워하는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칼도 찾지 못한 채 동료들과 떨어져 가는 것이 불안했다. 걱정이 쌓일만큼 쌓이면, 그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런 사고 방식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가짐을 즐겁게 유지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잠간 동안이나마 지금 자신이 왜 카모르트에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성격을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아즈윈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그저 웃어버리고 마는데, 아즈윈은 항상 그 부분을 지적했다. 이번에 칼을 잃어버렸을 때도 걱정하는 그를 안심시킨 것도 그녀였고, 그 걱정을 잊어버리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려니 죄책감도 없냐고 구박한 것도 그녀였다. 그는 그녀를 아주 좋아하지만 비위를 맞추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이런 멋진 여행을 그녀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게 서운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동을 시작할 무렵, 멀리서 혼자 터덜터덜 걸어오는 나그네가 있었다. 배리가 마차를 몰아 천천히 다가가니 그는 길 옆으로 피해 서서 손을 흔들었다. 몹시 초췌하고 더러워 보였지만, 칼도 차고 제대로 된 복식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니 적어도 부랑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로일, 저 사람이 손을 흔드는데 어떻게 할까요?” 배리는 복장은 허름하더라도 칼을 차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로일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일 뿐인 것 같은데 도와주죠. 부상도 당한 것 같네요.” 신디와 같이 실뜨기를 하다가 복잡하게 얽힌 실을 풀지 못해 난감해하던 로일은 마차 밖을 스윽 내다보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뭐, 그럽시다.” 배리도 그 말을 듣고 보니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 생각하고 마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배리는 밀면 쓰러질 것 같은 그 나그네에게 물었다. “이틀이나 굶었습니다. 먹을 것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말을 꺼내기도 숨차 보였다. “좀 기다리시오. 린다, 아까 먹다남은 빵 있지?” 배리의 아내 린다가 빵을 두 조각 내주자 그 남자는 허겁지겁 먹다 목이 메였다. 안쓰러워서 내준 우유도 급히 마시다 콜록 거렸다. “음식까지 얻어먹은 주제에 염치 없는 부탁이지만, 다음 마을 까지만이라도 태워주시겠습니까? 사례할 건 없지만......” “괜찮소. 사람 하나 더 탄다고 무너질 마차 아니오.” 배리는 웃으며 짐 칸을 가리켰다. 그는 짐칸에 힘겹게 올라탔다가 한 구석에 앉아있는 로일을 발견했다. 그는 단번에 로일의 옷과 칼을 보고 직업 군인이나 용병이라고 짐작하고 악수를 청했다. “피오렌디노가의 기사, 워터스 피오렌디노요.” 갑자기 밝힌 그의 신분에 배리는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평민 출신으로 평생 높은 사람 앞에서 굽실거려야 하는 사람에게 기사란 짐칸에 태우기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배리는 벌써 그를 태운 걸 후회했다. 옆에서 그의 아내가 너무 티 내지 말라는 뜻으로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 쪽은 어떻게 되시오?” 워터스는 지저분한 금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웃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리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저는......으음, 밝히면 여자 친구한테 혼날 지역 출신의 기사, 로일이라고 합니다.” “여자 친구한테 혼나는 지역? 그거 재미있는 지명이군요.” 그는 특별히 캐묻지 않고, 짐칸에 이단으로 뉘인 술통들에 기대어 앉았다. 몹시 힘들어 보였다. “다치셨습니까?” 로일이 물었다. 그의 허벅지에는 붕대로 감은 상처가 있었다. 신디는 그것을 보고 로일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이틀 전에 다친 상처요. 그 아이가 뭐라는 거요?” “당신이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로일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맙소사, 돈을 위한 기사가 될 것인지, 정의를 위한 기사가 될 것인지 고민하던 차였는데, 어린 아이에게 내 속마음을 간파 당한 듯 하군요.” 그는 말을 너무 길게 한 탓에 몇 번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겨우 진정할 때 리비가 실로 얽힌 손을 로일에게 내밀었다. 로일은 그녀가 내준 문제를 힘겹게 풀어 이번에는 신디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신디는 너무나도 쉽게 실을 풀어 여동생에게 내밀었다. “기사 수행 중이십니까?” 로일이 물었다. “맞소. 알겠지만, 요새 카모르트는 어딜 가나 전쟁이잖소? 그 중 한 싸움에 끼었다가 내 실력의 부족함을 느끼고 여행 중입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데는 여행만큼 좋은 게 없지요. 무엇보다 나의 군주에게 어울리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라도 나에게는 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 생각했소. 당신은?” “저는 친구들과 함께 큰 일을 하러 여기 왔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를 하면 여자 친구한테 혼나니까 하지 않도록 하죠.” “여자 친구가 아주 특별한가 보군요?” “특별하죠. 나와 실력이 같은 친구 중에 유일하게 여자죠. 난 친구가 별로 없거든요.” 로일의 말에 워터스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여자도 기사요?” “예.” “여자 용병은 들어봤으나 여자 기사는 처음 들어보는군.” “나도 그 곳의 기사가 되기 전까지는 용병이었고, 여자 용병도 많이 보지 못했지요. 그러니 여자 기사 역시 처음이었죠.” 워터스는 또 몇 번 기침을 해댔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좀 누워서 쉬시지요.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로일의 제안에 워터스는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에 누웠다. 그 틈에 리비는 또 실뜨기를 로일에게 내밀었다. 로일은 마침내 리비가 내놓은 난감한 문제를 풀지 못하고 실을 얽혀버리고 말았다. 리비는 까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도적들이었소.” 워터스가 말했고, 배리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벌써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도적이요?” “그렇소. 이 근처를 휘어잡고 있는 놈들이라더군. 향료를 노르만트에 실어 나르는 여행자들을 사로잡아 물건을 빼앗는 광경을 목격하고, 가만 두면 그들의 목숨까지 위험해 보여 그만 나서고 말았소. 그 때까지는 타고 있던 말도 있겠다, 고작 도적 네 명 못 이기겠냐 싶어서 공격했지. 하지만 놀랍게도 그 놈들은 칼을 무기로 쓰는 게 아니라 늑대를 조련해서 무기로 쓰는 놈들이었소. 난 엉뚱하게도 늑대들과 싸워야 했지. 힘겨운 싸움이었소. 난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늑대들에게 물어 뜯겨 죽었소. 겨우 늑대 네댓 마리를 죽이고 나니 이번에는 산적들이 또 달려드는 바람에, 난 기사의 명예와 용기를 내던지고 달아났소. 내 칼에 늑대들도 죽고 동료들도 두명이나 죽은 통에 그 녀석들은 복수를 위해 하루 종일 나를 추적했소. 다행히 오늘 아침부터는 추적해 오지 않더군. 하지만 이 꼴이 됐지.” “대단하시구려. 말이 쉽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늑대 한 마리 나타나면 부들부들 떨어야 할 판인데 말이오.” 배리는 말 몰던 손을 늦춘 채 뒤를 돌아보며 경의를 표했다. 워터스는 별 거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나 정도 되는 기사면 도적들 몇 명은 우습지. 사실, 컨디션만 좋았다면 이런 험한 꼴이 되지도 않았을 거요.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도우려 했던 그 향신료 상인들을 결국 구하지 못했다는 거요. 나는 그 죄책감 때문에 더욱 힘들었소.” “그들은 당신이 도우려 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감사했을 겁니다. 지금은 쉬세요.” 로일은 그의 어깨를 도닥거려 주었다. 그는 누운 채 잠시 눈만 감고 쉬려 했다. 하지만 지친 그는 덜컹거리는 와중에도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도착해야 할 마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채 길은 풀이 마른 황무지로 접어들었다. 얼마나 전쟁이 자주 일어난 들판인지 건성으로 훑어보더라도 금방 다섯 손가락을 채울 만큼의 해골을 찾을 수 있었다. “끔찍한 곳이군요.” 로일은 참혹한 광경에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내내 장난치며 오던 신디와 리비도 이 곳에서는 조용했다. “두 백작은 서로 노르만트 근처의 땅을 차지하려고 여러 차례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오. 지금은 그런 싸움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쪽 영토 싸움을 하느라 이 곳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지만 그 대가는 몇 년이 지나도 회복하기 힘든 상처로 남았지요.” 배리가 말하자, 옆에 앉은 린다가 흐느꼈다. 그는 아내를 한 손으로 안아주었다. “린다의 가족이 여기에 살았었는데, 전쟁 통에 모두 죽었소. 그래서 여길 지날 때마다 이런답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부인. 제가 힘이 된다면, 이 땅에서 이런 전쟁이 없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소.” 신디는 한참 로일의 눈치를 보다가 엄마에게 다가가 말했다. “엄마, 나 오줌 마려.” “오, 그러니? 여보, 잠시만 세워주세요.” 린다는 얼른 눈물을 닦고 신디를 안아서 내려 주었다. 마차 옆에 내려놓고 기다렸지만 신디를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나해서 물으나, 신디는 로일을 가리켰다. “오, 저런. 내가 기사의 예의를 지키지 못해 숙녀를 난처하게 했구나.” 로일은 사과하고 얼른 짐칸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신디는 그래도 만족스러워 하지 못하고 더 먼 들판 쪽으로 걸어갔다. 린다는 팔짱을 끼며 웃었다.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지 않니, 아가야?” 신디는 한참 떨어진 곳에 흙더미에 몸을 숨기고 볼일을 보았다. 배리와 린다는 그 모습이 몹시도 귀여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둘의 미소는 곧바로 공포로 뒤바뀌고 말았다. 볼일을 마치고 옷을 추스른 신디가 다시 돌아오려 할 때 누군가 아이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괴한은 아이를 놔주지 않았다. 그 남자의 옆에는 늑대 두 마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은 공치나 했더니 하나 나타나 주었군.” 그가 말하자 주위의 다른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울퉁불퉁한 들판에 숨어있던 그들은 적어도 열 명은 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늑대를 한 마리씩을 끼고 있었다.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황무지에 개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 머리가 불쑥 불쑥 올라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마을에 거의 도착하여 안심하고 있는 두 부부에게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것도 늑대를 다스리는 도적 중 하나가 딸의 목을 팔뚝에 감아 들어올리고 있는 상태라면 더욱. 신디는 힘을 다해 바둥거렸지만, 팔뚝 굵은 도적의 몸을 잠깐 동안 흔들리게 하는 정도 밖에 안 되었다. 신디는 절망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배리와 린다를 미치게 했다. “신디. 오, 내 아기.” 린다가 거의 이성을 잃어 마차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가족이 모두 죽은 가슴 아픈 곳에서 딸이 똑 같은 죽음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었다. 그 때 그녀의 가족을 죽인 건 군대였고, 지금은 산적이었다. 배리가 뒤에서 잡지 않으면, 늑대들의 이빨 틈으로 뛰어갈 태세였다. “여보, 안돼. 그러면 안돼.” 배리는 몸부림치는 아내를 붙잡고 소리쳤다. “이보시오, 원하는 것을 말하시오. 내 딸만 살려주면 뭐든 하리다.” “뭐든?” 신디를 붙잡은 괴한 대신 옆에 있는 다른 도적이 다가왔다. 늑대를 거느리지는 않았으나 낫처럼 생긴 긴 무기를 쥐고 있었다. “뭘 실었지?” “와인과 곡주입니다.” “노르만트로 가는 거야?” “예.” “시가로 얼마나 나가?” “한 통당 금화 10개 값어치는 됩니다, 제발, 제 딸아이만은 살려주십시오.” “이런 젠장, 겨우 그거뿐이야? 다른 건 없어?” “현금으로도 금화 30닢 정도 있습니다. 드릴 테니 제발......” “그 놈의 제발, 제발 소리는 집어치워. 네 딸은 이 애 하나뿐이냐?” 배리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다가, 뒤에서 언제인지 잠에서 깬 워터스가 ‘하나뿐이라고 하시오.’라고 조언해 주어 겨우 대답했다. “예. 하나뿐입니다.” “이거 큰 일이군. 우리가 원하는 건 더 큰 아이인데, 네 마누라는 너무 나이가 들었잖아. 돈도 그거뿐이고, 성숙한 여자도 없다? 거래가 안 되겠는데?” 그 말을 한 남자가 수신호를 보내자 신디를 잡은 도적은 아이를 흔들어댔고, 신디는 또 한 번 비명을 터트렸다. 도적들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짐 칸에서 잠시 도적의 이야기를 듣던 로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켜보고만 있었다. 쉽게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칼을 어느 정도 쓰시오?” 워터스가 물었다. “저 아이가 인질로만 안 잡혔으면 이렇게 망설이지 않을 정도?” 로일은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워터스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나도 그렇소. 당신이 나 정도만 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텐데, 이거 인원이 너무 많군. 게다가 부상까지 입었으니...... 아, 오해는 마시오. 나는 사실 카모르트의 왕실 기사단이나 검은 사자 백작의 라이온 기사들과 겨루어도 진 적이 없었소. 내가 특별히 대단한 것이지, 당신을 얕보고 한 말은 아닙니다.” “상관 없습니다. 그보다 방법이 있습니까?” “일단 내가 나서 보겠소. 아무래도 이 마차 주인은 저런 야적 놈들과 거래를 할 줄 모르는 것 같으니까." 워터스는 숨을 길게 몰아 쉬더니 마차에서 내리며 소리쳤다. “성숙한 딸은 없지만, 여기 다 자란 아들이 있다.” 모두의 시선이 워터스에게 집중되었다. 도적 중 몇은 그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워터스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호기스럽게 말했다. “거래 조건을 하나 더 붙여 주지. 이틀 전 너희 부하들 몇을 지옥으로 보낸 내가 그 쪽으로 가겠다. 대신 그 아이를 놔주어라.” 배리를 놀리는 분위기에 즐거워하던 도적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한참 침묵으로 일관하던 도적들의 대표가 말을 꺼냈다. “생각지도 않은 수확이군. 멍청하게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는걸. 네가 죽인 늑대가 세 마리이고, 너에게 당한 친구가 두 명이나 된다, 이 개자식아. 넌 죽었어.” “분명 이 마차가 너희들을 통과할 것 같아 얻어 탄 척 되돌아 온 것이다. 너희들이 아이를 인질로 잡은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이제 나를 잡고, 그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 주어라.” “우리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나를 적으로 돌리면 너희들은 또 한 번 나와 격돌해야 하지만, 내 말대로 하면 난 내 무기를 모두 던지고 너희들에게 잡혀줄 테니까. 그건 아주 좋은 거래라고 생각 되는데?” “멍청한 녀석이군. 우리가 쉽게 속아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잘못 봤어.” 그가 고개짓을 하자 신디를 붙잡고 있는 녀석은 단검을 꺼내 신디의 목에 칼끝을 겨누었다. 워터스는 당황한 표정을 일순 지었지만 곧 침착하게 대응했다. “원하는 조건을 말해봐라.” “그런 거 없어, 이 새끼야! 넌 어차피 우리 손에 들어온 거야. 다시 말하지만, 넌 죽었어.” “거래를 원하지 않나? 나는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어느 후작의 영지를 조금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없는 것도 나는 줄 수 있다. 뭘 원하는가? 협박은 않겠다. 하지만 내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안다면 쉽게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의 거래는 도적들을 꽤나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은 의견을 나누지 못해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대로 안 되는군.” 워터스는 도적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겁에 질린 배리와 린다가 서로를 껴안고 있었고, 짐칸에 남아있는 로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일, 좋은 생각 있으시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인질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가는 동안 찔러 보리면 그만이니까.” 로일의 작은 목소리에 린다는 비명처럼 신음을 내질렀다. 워터스는 그의 무신경함을 탓하며 말했다. “인질이 없으면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몇 명입니까?” “도적들?” 워터스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 숫자를 헤아렸다. “도적들은 모두 열 일곱, 늑대는 스물 둘 정도 되오. 싸우면 내가 각각 셋 정도는 해치울 수 있소.” 짐칸에 가려 보이지 않는 로일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워터스는 답답함에 한숨을 쉬었고, 배리는 둘의 대화를 듣자 더욱 불안해했다. “좋다. 네가 먼저 무장을 해제하고, 우리 쪽으로 오면 그 다음을 상의해 보겠다.” 도적 중 하나가 다시 크게 소리질렀다. 워터스는 거래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장을 해제하면 여기 있는 모두는 확실하게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그들의 제안을 어떤 식으로 받아넘길지 고민했다. “잠깐, 좀 무모하긴 하지만, 내게 생각이 있습니다.” 로일의 말이 들렸다. “말해보시오.” 워터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걸음은 빠르시오?” “때에 따라선 아주 빠르지.” “그럼 저들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가는 게 어떨 까 싶습니다. 대신 아이를 데려온다는 조건으로 가는 겁니다. 저들도 쉽게 당신을 공격하진 못할 거고, 만약 공격한다면 도망치시오. 대신 신디를 꼭 데려와 주십시오. 어떻습니까?” “그 다음은?” “그 다음은......내가 알아서 하겠소.” “좋은 방법이란 그게 다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당신이 아이만 데리고 피해 준다면 제가 나머지를 모두 상대하면 되니까요.”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군.” 워터스는 화가 나 소리 질렀다. 도적들은 의아해 하며 혼자 떠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 반대로 하시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직접 칼을 들고 도적들 틈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고 모두 죽이시게. 의외의 인물이 갑자기 뛰쳐나가면 저 녀석들은 잠깐은 못 움직일 테니 할 수 있을 거요. 칼을 대고 있다 해도 인질을 그리 쉽게 죽이지는 못하니까. 나라는 존재 때문에! 그러니 자신 있으면 달려가 보시오. 그 사이 나는 이 두 부부를 지키도록 하지. 어떻소, 이런 작전은?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시오.” 워터스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이마를 짚은 후 차분히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인질 하나의 목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숨이오. 다시 말하지만, 이 일은 좀 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오. 아무래도 내가 경험이 더 많은 것 같으니 내 지시대로......”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갑자기 로일은 대단한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말했다. 리비를 안심시키는 속삭임이 들린 후 그가 짐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곧 돌아오겠소. 그때까지만 부탁 드리겠소.” 로일은 스쳐가며 워터스에게 말한 후 도적들 틈으로 걸어갔다. 칼은 꺼내지도 않았고,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으며 표정은 무뚝뚝했고,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용무 없이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워터스의 말대로 도적들은 예고없이 나타난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 “뭐냐, 이 녀석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도적들의 대표는 괜히 워터스에게 화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로일은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신디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늑대들은 그를 보고 으르릉거렸고, 드적들은 경계하며 무기를 치켜세웠지만 아무론 공격적인 자세도, 방어할 생각도 없이 걸어가는 그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가 바로 옆을 지나가는데도 멍청이 쳐다봐야 했다. 심지어 그가 걷는 방향에 걸리적거리고 서 있는 이는 약간 옆으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는 마침내 신디를 붙잡고 있는 도적 앞에 도달했다. “휴우, 왔다.” 앞으로 할 일 중 가장 큰 일을 끝냈다는 안도의 한숨처럼 보였다. 그 순진무구한 미소에 신디를 붙잡고 있는 도적은 잠시 자신이 손님을 맞이하는 건지 적을 맞이하는 건지 깨닫지 못했다. 로일은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을 내밀고 말했다. “이제 그 아이를 내려놔.” 협박의 어조는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고, 강요도 없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그는 신디를 곱게 로일에게 안겨줄 뻔 했다. 자신의 멍청한 생각에 당황한 그는 얼른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칼을 신디의 얼굴에 들이댔다. “이게 뭔 짓을 하려고?” “신디의 얼굴에 칼이 닿으면 넌 죽어.” 로일은 여전히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톤으로 말했다. “하아, 정말? 넌 네 주위에 있는 늑대와 내 동료들이 보이지 않아?” 로일은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눈 앞에 상대만 바라보았다. “보여. 하지만 모두 내 검의 영역 안에 있지. 이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 한다. 신디를 건드리면 널 죽이겠다. 이건 거래가 아니라 명령이야. 지금은 믿지 않겠지만, 나중에 깨달으면 늦는다. 내 말에는 어떤 과장도 협박도 없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시......” 그 도적은 분명 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한 번 더 협박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 틈에 자기 동료와 늑대들이 공격하면 이 어이없는 상황은 종료되니까. 그러나 신디의 목에 칼날이 닿는 순간 그의 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고, 화끈한 고통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리고 그는 하려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로일의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언제 칼이 뽑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늑대 중 두 마리의 목이 황토바닥에 떨어졌고 칼을 치켜들고 있었던 도적의 팔뚝이 잘려나갔다. 뒤늦게 바닥에서 일어난 먼지가 칼을 휘두른 곡선을 따라 로일의 몸을 한 바퀴 휘감고 지나갔다. 그가 말했던 검의 영역 안에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은 칼을 휘두른 본인과 신디가 다였다. 나머지는 죽었거나 신체의 일부를 잃었다. “자, 엄마한테 가자.” 로일은 머리에 피를 뒤집어 써 놀란 신디를 부드럽게 가슴에 끌어안았다. “눈 감아, 신디. 눈 감고 실 뜨기 한다고 생각해.” 신디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로일의 가슴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로일은 마차까지 직선으로 달려갔다. “놈을 죽여.” 당황한 누군가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앞을 막아내지 못했다. 얼결에 칼을 휘두른 네 명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바닥에 쓰러졌고, 늑대들은 함부로 입을 벌린 대가로 다시는 그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뛴 자리에는 피가 만들어진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네 명이 죽은 후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로일의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로일은 도적들이 마차 주위를 대대적으로 포위하여 달려들 줄 알았다. 그래서 워터스에게 두 부부를 부탁했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로일이 저지른 피의 질주를 보고 완전히 질려버렸다. 늑대들은 귀를 접고 꼬리를 감추었다. “당신, 누구요?” 제일 놀란 사람은 워터스였다. 그는 지금까지 그런 검 놀림을 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어린 아이라는 무거운 것을 안고 그렇게 정교하면서도 강한 검을 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워터스가 놀란 부분은 처음 도적의 품에 안겨 잇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휘두룬 발검술이었다. 그런 터무니 없는 공격은 그가 배운 검술의 영역에서는 있을 수 조차 없는 것이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밝히면 여자 친구한테 혼날 지역에서 온 기사입니다.” 로일은 나름대로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하지만 워터스는 도저히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정신이 아니었다. 신디는 울면서 엄마 품에 안겼고, 배리는 아내와 딸을 동시에 안았다. 짐칸에 겁에 질려 숨어있던 리비도 나와 엉엉 울었다. 로일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도적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놔두면 또 이런 죄 없는 가족들을 공격하겠죠?” “그렇겠죠.” “그럼 다 죽여야겠군요.” “예?” 로일의 말투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왜 놀라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냥 둡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좀 전에 실뜨기를 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워터스는 그가 누군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둘이 잠시 의견을 교환할 무렵 늑대를 이끈 도적들의 무리는 달아나고 없었다. 로일은 그들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한 후 누구도 마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가끔 뒤를 바라보며 농담을 건넸던 배리도 이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거의 열 명에 가까운 도적들을 눈 하나 깜짝할 순간에 베어버린 사람을 뒤에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로일은 그들이 형성한 어색한 분위기를,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곧 깨달았다. 그가 본 모습을 드러내면 언제나 사람들은 그에게서 등을 도렸다. 로일은 이제 이 마차에서 내릴 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런 검을 쓴다는 사람의 소문을 들었소. 나는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소.” 워터스는 지쳐 잠든 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가넬로크에 있는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은 말을 타면 혼자 말탄 기사 서른 명을 당해낸다고 하지.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의 캡틴은 혼자 백 명의 검사를 쓰러뜨린 적이 있다고 했어. 그리고 10년 전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겉으로 드러난 적이 없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정예, 하얀 늑대들은 그 멤버 하나하나가 당신 같은 실력이라고 들었소. 검을 뽑는 순간 칼날이 닿는 거리 안의 적은 모조리 죽는다는 검술은, 알려진 모든 검사 중 가장 뛰어난 시력자인 퀘이언 간트의 검술이라지. 들은 적이 잇소. 난 그건 절대로 과장이라고 생각했소. 원래 전쟁이 끝난 후에 도는 소문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아니었군. 그렇다고 당신이 마스터 퀘이언은 아닐 거요. 그의 나이는 마흔 살 가까이 되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얀 늑대들 중 하나요?” 그의 긴 추리에 로일은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할 말이 없군요.” “왕실을 찾아가는 길이오?” “맞습니다. 잠시 친구들과 떨어져 여행 중이지요.” “왜인지 물어도 되겠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좋소.” 워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얀 늑대들이 이 나라에 왔다면 그건 사소한 일이 아니겠군. 앞으로 이 나라에 커다란 일이 일어날 징조. 그럼 나는 이 여행을 끝내고 나의 군주에게 돌아가야겠소.” 마차가 크게 한 번 덜컹거렸고,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뒤에서 들려오는 이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이야기에 배리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그는 가끔 뒤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똑바로 쳐다보는 건 생각도 못했다. 아무래도 들어서는 안 될 대화를 듣는 기분이었다. 혹시 대화가 끝난 후 죽어줘야겠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었다. “그럼 아쉽게도 이별이군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기사 피오렌디노.” 로일은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워터스도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짧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아쉽소. 그리고 즐거웠소, 기사 울프. 나는 에노아 후작을 모시고 있소.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요.” 그는 힘 잇게 악수를 나눈 후 마차에서 내렸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배리. 저도 다음 마을에서 내리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괘, 괜찮습니다, 기사님.” 떨리는 목소리였다.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아버지가 그랬고, 그의 첫 번째 검술 선생이 그랬고, 친구들이 그랬다. 한 번 그를 두려워하게 된 이들은 절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로일은 자고 있는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친구와의 짧은 우정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새로운 친구를 만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울프 기사단의 될 때까지는. 10. 검은 기사단의 공격 카셀이 하얀 늑대들과 만나기 한 달 전...... 노르만트에서 이로피스로 떠나는 왕실의 기사단이 있었다. 기사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행렬이었고, 더구나 그들은 뭐에 쫓기기라도 하듯 급히 달리고 있었다. 대열을 유지하는 것도 잊고 정신 없이 달려오던 기사단의 캡틴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라 말을 세웠다. “라스는 어디 갔나?” 돌아보니 말만 따라오고 있었고 위에 있어야 할 라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싸움에서 부상당해 있었습니다. 우리 쫓아오다가 말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기사단의 캡틴인 프란시스는 마른 침을 삼키고 따라온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남은 인원은 일곱. 내가 홀리기라도 한 건가? 대체 우릴 공격한 그 검은 기사들은 누구지?” 캡틴 프란시스는 아직도 그들의 모습만으로도 식은땀이 났다. 한 시간 전 스무 명이던 왕실의 기사단은 단 두명의 검은 기사의 공격으로 모두 죽고 일곱 명만 남아있었다. 겪었으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온 기사단인가?” 프란시스의 말에 다른 기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갑옷 색깔은 같지만, 절대 그들은 아닙니다.” “대체 누가 우릴......, 왜 공격한단 말입니까?” 부하들이 캡틴에게 물었다. 프란시스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거기는 옥쇄가 찍힌 기밀 문서가 들어있는 곳이었다. 샤를 국왕이 비밀을 유지하라며 각별히 부탁했기에 그는 부하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사실 이로피스에 공식 초청을 받고 가는 길이 아니다. 국왕 폐하의 명령으로 원군을 요청하기 위한 사절단 자격으로 온 것이다.” 기사들은 놀라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사절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전쟁을 준비하십니까?” 카모르트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다. 왕은 서른 명 이하의 기사단만 데리고 있을 수 있으며, 따로 상비군을 둘 수 없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 원군을 요청한다면 그건 누군가와 전쟁을 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 적이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입니까?” 캡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발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국왕 폐하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이유는 없다. 말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겠다.” “괜찮습니다, 캡틴.” 부하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런 문제는 저희가 관여할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게 이유라면 저 검은 기사는 두 백작 중 한 쪽의 공격이라고 봐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조차 모르는 일을 다른 이들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 나도 내내 생각했다. 이 기밀 문서가 우릴 습격한 검은 기사와 연관성이 있는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속단을 내릴 수가 없구나.” 캡틴은 다시 말을 천천히 몰았다. “많이 따돌린 것 같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우리는 폐하의 유일한 희망이다. 만약 위가 공격당한 게 이 기밀 문서 때문이라면 가넬로크 쪽으로 간 친구들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프란시스는 지금까지 검술 훈련을 소홀히 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검은 사자 백작의 라이온 기사단이나 붉은 장미 백작의 로즈 기사단의 누구하고 겨뤄도 지지 않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때로 많은 이들이 왕실의 자존심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눈 앞에 나타난 검은 기사들에게 있어 그가 배워온 검술은 의미가 없었다. 죽을 각오로 적의 칼을 막은 후 창을 찔러 넣었으나 시커먼 방패에 막혀 부러졌고, 상대가 내리친 칼에 말에서 떨어지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말에 올라 겨우 살아남은 부하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나마 그것도 두 명이 희생하면서 이룬 성과였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도 빨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면 또 싸울 수 있을까? 그때도 도망가야 할까? 캡틴 프란시스는 제발 그런 선택을 할 순간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캡틴, 노르만트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한 명이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저도 그러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릴 쫓아오고 있으나, 길을 돌아가면 추격을 피해갈 수 있을 겁니다.” “너무 무모하다. 그리고 반나절만 더 가면 이로피스 국경에 도달한다. 그 검은 기사가 카모르트의 군대라면 함부로 국경까지 넘어 추격해 오지는 못할 것이다. 내 기억에 이로피스 남쪽 국경에는 우릴 보호해 줄 만큼 충분히 큰 도시가 있다. 거기까지만 가면 안전하다.” 그러나 그들은 반나절은커녕 한 시간도 더 가지 못했다. 두 명의 검은 기사들은 이미 그들의 길목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들 보다 말이 먼저 알아보고 반응했다. 검은 기사의 존재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마저 공포를 주고 있었다. “캡틴.” 부하 중 하나가 말했다. “달아나십시오.” “무, 무슨 헛소리냐?” “아시잖습니까? 스무 명으로도 이기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 일곱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있다면 여섯 명이 희생하여 둘을 막고 한 명이 이 일을 왕실에 알리는 것뿐입니다.” “말도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한 명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논쟁할 시간이 없습니다!” 검은 기사 둘은 천천히 말을 몰아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캡틴 프란시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절대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 너희들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게 하겠다.” 그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말을 돌려 힘껏 말을 몰았다. 지친 말은 주인의 마음을 알았는지 피로함을 잊고 달려주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부하들의 희생을 봐두려고 했으나,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부하들 여섯 명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프란시스는 칼을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기사의 말은 마치 하늘을 날 듯 달려와 순식간에 그의 옆에 도달했다. 검은 기사의 투구 안에서 후욱 하는 수증기가 짐승의 입김처럼 뿜어져 나왔다. “으앗! 프란시스는 겁에 질린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검은 기사는 막지 조차 않았다. 칼은 기사의 갑옷에 부딪혀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검은 기사의 거대한 도끼가 그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 공격은 실력 이전에 인간으로서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프란시스는 죽음의 공포보다 부하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 앞섰다. 도서명 : 하얀 늑대들2 지은이 : 윤현승 옮긴이 : 윤현승 펴낸이 : 윤현승 출판사 : 파피루스 출판년도 : 2004년 <지은이 소개/윤현승> 1978년생 대표작 다크문. 좋아하는것들 - 반지의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 스티븐 킹, 마틴, 에미넴, 브래드 피트, 디아블로, 사일런트힐, 소울칼리버, 터미네이터2, 파이트 클럽, 슈렉... <옮긴이 소개/윤현승> <차례> 11.늑대가 되기 위한 테스트 12.귀족의 달 13.노르만트로 가는 지름길 14.검은 사자 백작 15.사자의 아들 16.붉은 장미 백작. 17.카로르트의 국왕 18.12쏜즈 <소개글/서평> 가진 것이라고는 언변밖에 없는 카셀. 우연히 아란티아의 보검을 손에 쥔 카셀의운명은? 카셀의 언변은 과연 그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일에 싸인 어둠의 기사단, 그들의 정체는…? 한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카셀. 그는 결국 영웅이 될 것인가! 수준급 말발의 사기꾼 기사가 펼치는 예측불허 모험담! 본문 11. 늑대가 되기 위한 테스트 메마른 땅에 먼지를 일으키며 이동하는 포장 마차에는 하얀 늑대들과 얼마 전부터 캡틴을 맡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찝찝한 일 덕에 서로들 말을 자제한 탓도 있었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모두가 지루해 하는 여행이 이어지고 있었다. 게랄드는 진작 피곤하다고 마차 짐칸에 누웠지만, 계속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즈윈과 던멜은 짐칸 위에 나란히 앉아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말은 쉐이든이 몰았다. 카셀은 쉐이든 옆에 앉아 말 엉덩이만 계속 노려보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쉐이든이 말했다. “사실 많아.” 카셀은 팔렁거리는 말 꼬리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어떤?” “앞으로 할 일이라든가, 이 나라가 왜 이 꼴이 되었는가,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사소한 것들.” 카셀은 황량한 평야에 눈을 두고 말했다. “은근히 무거운 주젠데 뭐가 사소해?” “지금 제일 궁금한 건 하얀 늑대들이야.” “우리?” “아직 얼굴도 못 본 로일도 궁금하지만, 난 하얀 늑대라는 것 자체가 어떤 존재일까 궁금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어. 기사가 되고 싶다고 꿈꿔왔던 그 때부터. 너희들은 대체 누구지? 하나하나가 괴물같은 힘을 가졌다는 소문의 실체가 막상 코앞에 있으니 오히려 실감이 안나.” “나도 그런 소문들이 어떤지는 잘 안다. 들어보면 정말 우린 어디 땅 속에서 불쑥 솟아나온 전설 속의 기사 같더라. 하지만 우린 실존하고 있고, 지금 네 옆에 있어. 그리고 넌 본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지.” 쉐이든이 진지하게 말했다가 잠깐 자기 말이 앞뒤가 맞는지 따져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뭔 소릴 한 건지......” “하얀 늑대들을 뽑는 시험은 어떻게 본 거야? 시험이 있긴 있었어?” “정확히는 울프 기사단 시험이었지. 그건 정말 파격적인 제안이었어. 나이도, 국적도, 성별도, 계급도,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오직 검술과 기사 소양만 보고 뽑는다고 했는데, 출신 불명의 용병들이나 대대로 귀족의 피가 섞인적이 없는 평민들에겐 매력적이었지. 물론 출신 성분 확실한 귀족들이라도 명성 높은 아란티아의 기사시험에는 도전해볼만 했겠지. 나 역시 꽤 고위 관직에 있었지만,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란티나로 달려갔더럤지. 기한 내에 도착 못하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참.” 쉐이든이 자연스럽게 그 뒷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짐칸의 지붕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있던 아즈윈이 갑자기 뛰어내렸다. 그녀는 쉐이든의 목에 다리를 걸치고 목마 탄 자세로 착지했다. 쉐이든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휘청거렷다가 있는 힘을 다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너 이 녀석, 누구 목뼈 부러뜨릴 일있어?” 쉐이든이 버럭 화를 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아즈윈은 그의 말은 신경도 안 쓰고 그대로 올라탄 채 쉐이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매서운 눈매는 그녀의 일련의 동작을 귀여움 이상으로 빛을 내게 했다. 카셀은 그녀가 뭘 하든 독특하게 보였다. “그 얘기, 내가 해도 돼?” 그녀가 말했다. “아, 그러십시오. 동의는 왜 구하십니까? 아주 그냥 목을 부러뜨린 다음에 말 하지.” 쉐이든은 화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아즈윈은 다리로 그의 목을 졸라 말을 못하게 만든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어느 시골 마을의 청순가련한 꼬마검사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돼.”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하늘로 고개를 쳐들었다. 짐칸에서 게랄드가 자다말고 느닷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바닥을 손바닥으로 쿵쿵 내리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즈윈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꿈을 꾸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꼬마 검사는 천부적인 검의 재능을 가졌지. 장난 삼아 그 애에게 검을 가르친 모든 사내 녀석들이 나중에는 그 애에게 두들겨 맞았지. 아이의 놀라운 재능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자칫 제멋대로 클까봐 불안하기도 한 부모님께서 이왕 이렇게 된거 제대로 된 예절 교육과 함께 검을 가르치자는 뜻에서 검술 학원을 보냈지. 호신술 정도나 가르칠 생각이셨을거야. 하지만 그 분들은 검술 학원 선생과 첫날 겨루는 바람에 쫓겨난 딸을 다시 받아들여야 했고, 이 말썽 많은 딸내미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난감해 했지. 그러다 소녀는 아주 큰 스승을 만나게 되었어. 외팔이 무사였는데, 혼자 연습하는 소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지.” “얘야, 그 검은 누가 가르쳐 준 거냐?” 머리 색깔을 알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몰골에 옷을 아무렇게나 입은 데다 수염 때문에 얼굴의 반은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하지만 소녀는 목검을 하나 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열 세 살이 넘은 이후 이미 마을에서 그녀를 검으로 이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햇지만, 그 지저분한 남자는 가만히 서있는 것마저 힘들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혼자 배웠어요. ㅁ낳은 사람들이 저를 가르친지 하루도 못 되어 저한테 지니까 그건 배운 거라고 할 수 없죠.” 그녀는 당당했다. “그거 참 대단하구나. 이름이 뭐냐?” “아즈윈.” “나이는?” “열 다섯 살. 하지만 어리다고 깔보지 말아요.” “아니, 절대 깔보지 않는다. 깔봤다면 나는 그냥 내 갈길가기 바빴지, 굳이 멈춰서 너한테 이런 얘기를 물어보지 않았을 거란다.” 그는 바위에 앉아 가방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흐르는 개울에 담갔다. 주머니에 물을 모두 채운 후 그는 시원스럽게 물을 들이켰다. 다시 물을 채운 후 가죽 주머니를 다리에 끼고 뚜껑을 닫았다. 보통 사람의 동작과는 약간 달라 어색했지만 그녀는 왜 그런지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녀는 그의 손이 하나밖에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고, 칼까지 차고 있어 외팔이라는 게 티가 나지 않았다. “한 손이 없나요?” 아즈윈이 호기심에 물ㅇ■ㅆ다. “보다시피.” 그는 잡히는 게 없는 소매를 흔들어 보였다. 아즈윈은 왠지 동정이 생겨 그에게 다가갔다. “어쩌다가요?” “칼을 차고 싸움터를 전전하다 보면 몸의 일부를 잃는 일은 흔하지. 목숨이 붙어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전 검술을 더 배우고 싶어요. 그럼 저도 그렇게 되는 건가요?” “검을 들고 상대를 죽일 생각이면, 언제나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단다. 진검을 써본 적이 있니?” “아니오. 아무도 그런 비싼 물건은 주지 않으니까.” 그 남자는 칼을 스윽 뽑았다. 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였지만, 단박에 좋은 물건임을 알만큼 멋진 칼이었다. 남자는 거리낌없이 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잡아봐라.” “정말요?” “마음 바뀌기 전에.” 그가 웃어 보이자, 소녀는 얼른 칼을 잡았다. 손에 걸리는 묵직함에 전신이 짜릿해지는 기분이었다. “멋지네요. 전 언제나 이런 검을 하나 가지고 싶었어요.” “그래? 그럼 이번에는 네 목검을 내게 다오.” 목검부터 달라고 했다면 절대 내놓지 않을 그녀였지만, 진검을 손에 쥐자 자신의 볼품없는 목검은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는 목검을 몇 번 휘둘러보았다. “좀 가볍지만, 네가 쓰기에는 잘 다듬어져 있구나. 그럼.....” 남자는 바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손에 목검을 들었다. “너를 죽여볼까?” “예?” 소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지금 내 칼을 훔쳐갔잖니? 그러니까 너를 죽여야겟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소녀는 그의 억지에 소리를 질렀다. 방금까지만 해도 좋은 사람 이라고 생각했는데, 목검을 치켜 들고 잔혹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사람을 수십 명 베고 다음 희생자로 아즈윈을 택한 살인마 같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목검을 힘껏 휘둘렀다. 두 걸음이나 간격이 벌어져 있었는데도 그가 일으킨 바람이 살갗을 벨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봐줄것 같아요?” 아즈윈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치며 칼을 들었다. 조금 무겁지만 못 다룰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는 목검을 들고 있었고, 자신은 진검을 들고 있었다. 무서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상대의 보이지 않는 힘에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남자는 가볍게 목검을 휘둘러 칼을 내쳐 버렸다. 아찔한 고통에 소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손목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자 목검이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진검은 멀찌감치 날아가버렸다. 소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소녀는 저항하지도 못하고 소리 내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의 공포가 순식간에 평온했던 주위를 가득 메우더니 그녀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그녀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결국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는 놀라 흠칫했으나,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는 처음 이름을 물었을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이 느낌을 잊지 말거라. 네가 칼을 들었을 때는 언제든 네가 그 칼에 죽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 정말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려.” 아즈윈은 등산을 하듯 쉐이든의 등을 타고 내려운 후 카셀을 엉덩이로 밀어내어 자리를 만들더니 양해도 구하지 않고 앉았다. “그 사람은 누구였어?” 카셀은 마차에서 ㄸ■ㄹ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위치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은 채 물었다. “그 사람 말로는 떠돌이 용병이래. 처음 날 만난 것도 먼 곳에서 내가 검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어린 녀석이 대단하구나 싶어 호기심에 구경했데. 하지만 그대로 성장하면 내가 피맛을 보고 아무나 죽이는 괴물 같은 용병으로 크다가 뒤통수에 화살 맞고 죽을 것 같아 가르쳐보기로 결심했데. 그 일이 있은 후 내게 검을 대강 한 달 가르치고 1년 후 돌아와 또 한 달을 가르치는 식으로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자세를 봐주셨어. 하지만 이름을 가르쳐주진 않았지. 난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렀지. 내가 스무 살이 되니까 그 분이 제안하길, 혼자 여행을 다니다가 스스로 더 이상 발전할 길을 못 찾겠다고 생각하면 아란티아로 가보래.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어. 2년 동안 떠돌아 다니다가 울프 기사단을 뽑는다는 시험에 응했지.” “왠지 그 사람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네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또 너를 가르칠만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나 스스로도 그때에 비하면 검술이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선생님을 만나면 분명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바들바들 떨다가 칼을 놓쳐버릴 것 같아. 가끔 선생님과 마스터가 겨루면 누가 이길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지만 그 광경은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더라고.”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그 광경을 그려보려고 애쓰더니 곧 포기했다. “지금 와서 추측해보는건데, 아마 선생님은 울프 기사단 출신인 것 같아. 처음부터 내게 아란티아로 가라는 걸 보니까. 스승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두 명 외에 스승은 한 분 더 있어. 하지만 한 번도 만난적 없어. 선생님께서 가끔 그 분의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좀 더 많은 정보는 여행 중에 알았어. 그 사람이 하얀 늑대 중 한 명이었다는 걸 안 직후 아란티아로 향했지. 때마침 기사 시험이 있었다는 건 아주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였고, 난 그걸 운명이라고 생각해.” “그 사람이 누군데?” “아이린 울프. 전쟁을 겪긴 했지만 아란티아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는 그녀의 존재를 이렇게 말하지. ‘아란티아의 지배자는 여왕이므로 하얀 늑대들도 최소한 한 명은 여자여야 하는데 그 공백을 채우는 존재다.’ 라고. 하지만 하얀 늑대들이 싸우는 광경을 직접 본 몇 안되는 사람들 중 검술 좀 쓸 줄 아는 실력자는 이렇게 말하지. 하얀 늑대들이 펼치는 그 눈부신 전투 중에도 단연 돋보이는 움직임이 있다면 그건 아이린 울프다...... 하얀 늑대가 된 후 마스터에게 제일 먼저 물은 건 역시나 그녀에 대한 거였어. 마스터는 아주 간단하게 그녀에 대해 말했지. 아이린은 우리 하얀 늑대들 중 가장 검술이 뛰어났다. 그 친구가 높은 직책에 대한 책임감을 감당할 줄 알았다면 지금 너희들이 마스터라고 부를 상대는 내가 아니라 그녀였을 것이다...... 언제고 그 분을 만나면 나는 제일 먼저 이렇게 말할거야.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녀는 벌써 눈 앞에 아이린이 나타난 듯 빙그레 웃었다. “10년 전에 전쟁을 했다면 지금은 아줌마 아냐?” 눈치없게 게랄드가 뒤에서 끼어 들었다. “마스터도 지금은 마흔 살이 다 되었지만, 술배 나온 중년 아저씨들이랑 비교가 되냐? 아이린은 10년 전에 나랑 동갑이었어. 그러니까 마스터보다 훨씬 어리지. 당연히 네가 아줌마라고 깎아 내리는 여자들과는 달리 아직도 아름다우실 거야. 그리고 네 엄마는 아줌마 아니냐?” 게랄드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아름다운 건 어떻게 알아.’ 라고 중얼댔다. “그럼 다른 하얀 늑대들은? 내 말은, 선배들 말이야.” 카셀은 백작의 저택에서 게랄드에게 물었다가 답을 듣지 못했던 존재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건 몰라.” 아즈윈은 손가락으로 하늘에 뭔가를 그리며 말했다. “전에 마스터한테 이런 걸 물었거든. 아이린말고 다른 하얀 늑대들은 누구냐고? 그랬더니 마스터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더라고. ‘우리는 헤어질 때 내기를 하나 했다. 아이린은 네가 벌써 알아버렸고 나머지 두 친구도 굳이 비밀을 지켜줄 필요는 없으나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지. 내기가 종료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너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다. 모르는 게 더 재미있을 거다.’ 재미있다는데 굳이 알려고 발악할 필요는 없지. 마스터 말고도 울프 기사단의 나이 많은 이들은 알아. 그런데 그 사람들도 말 안 해주더라고. 재밌지? 그런 걸 비밀로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각서를 쓴 것도 아닌데, 아무도 말하지 않아. 이상한 불문율이야. 지금 울프 기사단들도 우리의 정체를 말하지 않아. 아마 이렇게까지 하얀 늑대들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우리 본인뿐일 거야. 이번에는 쉐디, 이제 네 얘기를 해봐.” “무슨 얘기?” “네가 울프 기사단 시험에 든 얘기. 아니면 네 과거? 재밌잖아. 우리가 언제 이런 얘기 해 본 적 있냐? 계기야 계기.” 쉐이든은 별로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로피스의 기사 수행을 돕는 기관의 사무관이었어.” 카셀이 물었다. “선생같은 거야? 검을 가르치는?” “사무직이야. 지금이 야 어쨌든 그때는 검을 배워본 적도, 할 줄도 몰랐어. 하지만 난 눈썰미가 좋았지. 남들이 칼이건 창이건 쓰면 어떻게 쓸 건지, 그 다음 동작을 금방 예측할 수 있겠더라고. 스무살까지 칼 한 번 잡아본 적 없지만, 기사라고 깝죽대는 놈들 한둘쯤은 이기겟더라고. 정말 솔직한 심정이었어. 내 그런 잘난 척을 듣고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의 정식 기사와 겨루게 되었지, 뭐....... 적당히 싸우고 대충 이겼어. 그 후 내가 이 길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계속 훈련을 쌓다가 기회가 되어 왕실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검술보다 위계질서와 기사도를 더 따지는 곳이었던터라 나한테는 맞지 않더군. 난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자꾸 그런 것만 강요하니, 그게 기사에게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못 견디겠더라고. 철이 없었지. 거기서 참고 버텼더라도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봐. 여하튼 그런 중에 아란티아에서 기사를 뽑는다는 소리는 듣고 왔는데...... 오, 맙소사, 얘기 정말 재미없었군.” 쉐이든은 괜히 말했다고 생각하며 괜스래 말고삐만 고쳐 쥐었다. 뒤에서 게랄드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얘긴 더 재미없게 해줄까? 난 용병이었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센 줄 알았지. 그러다 소식을 듣고 아란티아로 간 거야. 시험보러 온 놈들 다 쓰러뜨리고, 뽑는다는 놈들까지 쓰러뜨린 다음에 검술의 최고 경지에 있다는 퀘이언 간트를 쓰러뜨리고 다음 상대를 찾아 또 여행을 떠나자....... 가 목표였지. 알겟지만, 목표 달성은 실패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정도는 아니야.” 아즈윈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던멜은 우리도 아직 잘 몰라. 당최 자기 얘기를 안 하는 과묵한 친구라서.” 카셀은 그들의 말을 듣던 중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기 전에 잠시 그 허전함이 왜일가 생각해보았다. “긴장감.......” 카셀이 말했다. “에, 그건 뜬금없이 뭔 소리냐?” 아즈윈이 물었다. “그래, 긴장감.” “그게 왜?” “너희들 이야기에는 긴장감이 없어. 극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별거 아닌 일을 성취한 것을 별로 자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이야기 같아. 이런 것을 솔직하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너희들의 이야기는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없을 지경이야.” 쉐이든이 아즈윈에게 소곤댔다. “거봐, 재미없는 얘기라고 했잖아.” 그 말을 듣고 카셀은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아는 영웅사나 신화와 너무나도 달라서 그래.” “우린 전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니까.” 아즈윈이 말했다. “그래. 너희 스스로 그렇게 말했지. 대단한 출생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설의 검을 얻어 힘을 얻은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법사거 너 가져라 하고 신비한 비술을 준 것도 아니잖아. 그냥..... 머리 좋은 학자가 차근차근 공부해서 그 자리에 올랐다는 거잖아. 너희들 스스로 아무렇게나 말한 그 이야기를 유랑 시인이 들으면 어떻게 될까? 쉐이든, 처음 든 칼로 아로피스의 기사를 이겼다고?” “창이었지. 긴 게 좋아 보여서.” “그거야, 아즈윈도 그렇고, 재능으로 뭉친 그 힘......” 카셀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더 흥분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쉐이든이 조그맣게 웃었다. “난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어. 울프 기사단의 시험은 어떤 것 이었어? 토너먼트 시합이라도 돼?” 카셀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다시 물었다. “솔직히 토너먼트를 기대하고 가긴 했어.” 쉐이든이 그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 토너먼트를 했다면 그런 멍청한 짓도 없었겠지. 어쨌든 좀 의외이긴 했어.” 아즈윈이 말했다. “어땠는데?” 카셀이 물었다. “아주 지루했어.” 아즈윈이 대꾸했다. “동감이야. 첫 번째 시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거든.” 쉐이든이 동의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말했다. “마스터가 나타나기 전까지.” 정확히 입을 맞추자, 둘은 서로의 손뼉을 ? 소리 나게 마주쳤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그래, 그것부터 이야기 하는 게 좋겠군. 난 좀 합류가 늦은 편이었어.” 아즈윈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즈윈은 조금 늦게 합류한 편이었다. 아란티아 왕실에서 울프기사단을 공개적으로 모집한다는 공지는 다른 나라까지 금방 소문이 퍼졌다. 가장 빠른 소문이라는 것이 각지를 떠돌아 다니는 집시나 상인들에 의한 것이라면 한달 만에 지원한 삼백 명이라는 숫자는, 불가능한 수치였다.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즉시 모조리 왔다고 봐도 좋았다. 그 중에는 이미 다른 귀족에게 고용되어 잇는 기사이거나 유명 검술 학원의 강사도 있었다. 언뜻 봐도 다들 한다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즈윈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선생님’이 없었다면 충분히 자만할 만큼, 수많은 유명 검사들을 쉽게 이겼으므로 그녀는 기사 시험이나 용병 테스트 따위를 여러 차례 참여해 보았다. 아무래도 타고난 외모가 상당한 지라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그런 곳에서는 언제나 추근대는 남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노골적인 신체 접촉에 이은 뭔가를 노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즈윈은 과감히 실력을 드러냈고, 즉시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기죽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얌전히 있으면 죽이지 않겠다고 단검으로 협박한 한 용병은 그대로 팔을 베어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곳의 남자들은 누구도 수작을 걸어오지 않았다. 모두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있는 검사들은 모두 진짜였다. 진짜가 아닌 이들은 감히 이런 시험에 올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공고를 했던 대로 시험 감독관들은 그들에게 어떤 출신지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기사가 된 후 충성을 다하겠냐는 말조차 묻지 않았다. 감독관들은 응시할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간단한 검무와 신체 검사로만 확인했는데, 아즈윈은 그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웃옷을 벗었다. 감독관들은 사무적으로 그녀의 몸을 살핀 후 합격이라며 통과시켰다. 그 외에 아란티아에 어떤 이익을 줄 것인지는 따로 알아보지 않았다. 기사 소양을 본다는 말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다들 그 사실에 의아해했지만, 특별히 파고들지 않았다. 자기만은 울프 기사단에 뽑힐 거라는 자부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하나마나 한 형식은 없는 게 좋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보름이 더 지나자 소문은 더욱 퍼져 백 명이 더 모였고, 기한이 다 되었을 때는 거의 오백 명에 육박햇다. 응시자들이 모여있는 천막은 더 이상 사람을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돈이 좀 많은 기사나 귀족들은, 그래도 근처 여관에서 편하게 숙식을 해결했지만, 나머지는 아란티아 왕실에서 제공하는 들판의 큰 천막에서 공동 생활을 했다. 음식은 제공되었지만 각지에서 최고 검사 소리를 듣는 그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즈윈은 주최측에서 여자에 대한 배려를 꽤 해주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여왕의 나라라 그런지 아즈윈이 지원했을 때 여자 주제에 어딜 지원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다른 곳의 시험관과는 달리 이 곳은 그녀를 지원자 중 한 명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여자라 당하는 어쩔 수 없는 불이익까지 시험관들이 책임지지는 않았다. 시험 당일은 그녀의멘스일이었다. 그녀는 컨디션이 떨어질 때로 떨어져 걱정되었다. 시험 감독관에게 그런 말을 해서 자신의 시험일을 늦춰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오히려 이미지에 마이너스를 주게 될 것 같아 포기햇다. 복통까지 이어지니 그녀는 아예 이런 상태로도 시험에 합격해 버리겟다는 오기가 생겼다. 시험날 아침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여자도 꽤 있었다. 그녀가 대충 세어본 숫자만도 스무 명이었다. 또 옷을 잘 차려 입은 귀족들도 꽤 있었다. 집이라도 부수러 왔는지 끌고 다니기도 힘들 망치를 든 녀석도 있었고, 무기 하나 없이 맨 손으로 참가한 녀석도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만나본 수많은 검의 실력자들보다 더 많은 실력자들이 여기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험의 개시를 기다렸다. “내가 여기 온 건 울프 기사단의 명성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야.” “난 마스터 퀘이언과 겨루기 위해서지. 기사가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 않아.” “아란티아는 부자 나라야. 기사단이 되면 틀림없이 엄청난 보수를 받을 게 틀림 없어.” “별 놈들이 다 모여 있군. 이런 것들도 기사라고 뽑힌다면 나는 이 시험 자체에 항의 하겟어. 아란티아는 나를 정식으로 울프 기사단에 초청했어야 했어.” 가만히 앉아있어도 별의별 얘기가 그녀의 귀에 모두 굴러들어 왔다. 그녀는 그 잡담의 내용에는 그리 상관하지 않았다. 곧 그들이 모인 공터로 시험 감독관들로 보이는 세 사람과 그들을 호위하는 울프 기사단 세 명이 나타났다. 일순간 공터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들은 시험 감독관 보다 뒤따라오는 다른 세 명에게 시선을 두었다. 울프 기사단의 기사들은 생각보다 나이가 적었다. 10년 전에 활동했던 기사들이라면 좀 더 나이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결국 울프 기사단은 이런 공개 시험만으로 뽑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기사들은 절도 있고 강해 보였다. 울프 기사단과 겨루기 위해 이 시험에 참여했다는 녀석들도 곧 그 말을 철회해야 할 정도로 그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즈윈은 그들을 보자마자 손에 힘이 잔득 들어갔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당장 칼을 뽑아 겨뤄보고 싶었다. 시험 감독관은 긴 두루마리를 편 후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을 햇다. 모두의 긴장된 눈빛이 감독관 쪽으로 돌아갔다. “시험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지정된 장소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일주일을 보냅니다. 앞으로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술을 마셔도 좋고, 도박을 하든 책을 읽든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뭘 하든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공격을 시도하려 들면 그 즉시 퇴장입니다. 함부로 칼을 꺼내는 일도 삼가해 주길 바랍니다. 합격자와 실격자는 매일 해가 지기 전에 호명하고 내보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합격해서 나가는지 실격으로 나가는지 남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남은 이들은 왜 그들이 실격인지도 알수 없을 것이며 실격자들 역시 자신이 왜 실격인지알 수 없을 겁니다. 오직 합격자만아 지신이 왜 합격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원자들이 이 엉뚱한 시험 내용에 어리둥절해 했다. 몇 명은 성급하게 손을 들어 질문을 요구했다. 하지만 감독관은 한 발 더 빨리 말했다. “어떤 질문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실력을 직접적으로 검을 들고 평가 받는 것을 바라겟지만, 그건 자기 과시일 뿐입니다.” 감독관의 박력 있는 말에 들었던 손이 도로 내려갔다. 그의 말은 계속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곳에 지원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실력을 인정 받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검술 시합 한 번으로 간단히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방법은 가르쳐 드릴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할 일은 오직 두 가지 입니다. 지정된 장소를 벗어나지 않을 것, 이 곳에서 같이 생활하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 그것뿐입니다. 초조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오직 가능성과 실력만으로 뽑을 생각이며, 인원 제한은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 있는 모두가 합격할 수도 있고, 여기 있는 전원이 불합격될 수도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감독관은 그 말을 마치고 가버렷다. 곧 새로운 아침을 시작하는 나팔이 울리고 식사가 제공되었다. 아즈윈은 검투 시험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어지간한 녀석들은 지금 컨디션으로도 이기겠지만, 자신의 실력을 모두 내보일 수 없는 건 그녀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또 방금 봤던 울프 기사단 같은 실력자라면 장담할 수 없었다.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오백 명에게 제공되는 식사 치고는 질도 괜찮았다. 과연 부자 나라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첫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즈윈은 하루 종일 뭔가 벌어지길 기대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험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침에 말한 시험 내용이 거짓말이라 믿는 사람들이 긴장하여 서성대는 게 보이는 전부였다. 저녁쯤 되자 지루해진 아즈윈은 자신의 천막에 들어가 버렸다. 시험이 시작된 후에 그녀는 자기 외에 지원한 여자 용병 들과 같은 막사를 쓰게 되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굳이 그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고, 당연히 호명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가 지나갔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 식사 시간에 사람들은 이번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간밤에 혹시라도 시험관의 기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어떤 사람은 잠을 못 자 눈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떤 이는 이게 단순한 단체 생활 테스트이며 진짜 시험은 따로 가질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즈윈은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시험 내용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날 하루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가던 중 저녁 나절에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두 명이 칼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감독관이 찾아와 말리지 않았다며너 서로 죽였을 법한 격렬한 싸움이었다. “저 놈이 먼저 날 죽이려고 했어.” “헛소리 마. 사과를 깎아먹으려고 칼을 꺼낸 것도 잘못이냐?” “규칙을 어기고 칼을 꺼낼 정도면 뭔가 할 생각이었던 거 아냐?” “칼을 꺼낸 것 자체는 규칙을 어긴 게 아니야.” “네 얼굴에 거짓말이라고 써있어. 너, 나 쫓아온 현상금 사냥꾼 아니냐?” “뭣이 어째? 난 네가 말하면 깜짝 놀랄 가문의 이름 있는 기사다. 넌 방금 같잖은 누명으로 내 명예를 더럽혔다.” 둘은 다시 한 번 붙을 판이었다. 감독관은 즉시 펜을 들어 명단에 무언가를 적었다. 뭘 적는지는 다들 짐작하고 있었고, 그 둘도 깜짝 놀라며 서로 자기 잘못이 아니니 실격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감독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실격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과가 끝났다는 나팔이 울린 후 시험관은 정확히 그 두 사람의 이름을 호명했다. 둘은 시험관들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끌려나갔다. 처음 예고했던 대로 그들이 실격인지 합격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다들 실격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즈윈은 그들이 호명 되는 순간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진짜로 싸운 게 아니었다. 아주 격렬했고 수준 높은 싸움이었지만, 살기도 없었고 허점을 노리고 급소를 찌르는 공격도 없었다. 그들은 싸우는 연기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아즈윈 만이 아니었다. 두 명이나 호명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도 알았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시험에 어떤 힌트를 준것이라고. 사실상 시험은 지금부터라고. 사흘 째 아침이 밝았다. 사람들은 슬슬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지루함을 대화로 달래는 이들도 많았고, 긴장해서 마시지 않던 술을 꺼내는 이들도 있었다. 한달 전부터 만나 벌써 터놓고 얘기할 만큼 우정을 쌓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즈윈처럼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는 이도 많았다. 어쨌든 넓지 않은 공간에서 말 한 마디 건넬 사람 없이 멍청히 앉아있는 건 따분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들기 조차 힘들어 보이는 커다란 철창을 끼고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이 정도 무기를 가진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었으나 그의 앉아있는 폼은 아주 그럴싸했다. 근육도 다부졌고, 덩치도 크고, 눈매도 매서운 게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의 남자였다. 그녀는 순전히 남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어느 지방에서 왔어요?” 그녀가 말하자, 그는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대화 상대가 필요한 거라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 거요.” 안타깝게도 그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즈윈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와 좀 떨어진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 남자를 꼬실까 작전을 짜다가 그의 실력을 알아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좀 심심하잖아요. 같이 이야기나 하죠. 이 시험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먼저 떨어진 두 사람을 보면 왠지 엉터리 같지 않아요?” “그게 엉터리라고 생각하면 난 더 할 이야기 없어.” 아즈윈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할 말이 없을 뻔 했어요. 별 거 아닌 남자한테는 접근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둘에 대해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소?” 아즈윈은 속삭이는 소리로 남들이 들리지 않게 말했다. “그 둘은 아마 시험관들이 몰래 집어넣은 속임수였을 거예요. 또는 이번 시험의 힌트를 주기 위한 답안지의 일부이기도 하고요. 내 생각이 맞다면 아란티아의 시험 감독관들은 보통 수준이 넘는 녀석들이죠. 그리고 아란티아는 정말 대단한 기사단을 만들 생각임에 틀림 없어요.” 아즈윈은 이미 이 남자가 자신에게 넘어 왔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말했는데 호기심도 갖지 못한다면 이미 꼬실 가치가 없는 남자이므로 미련 없이 버릴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그 남자는 굳은 얼굴을 조금 피며 손을 내밀었다. “쉐이든 칸. 이로피스에서 왔다.” “아즈윈. 가넬로크에서 왔어.” 그녀는 그의 굵은 손을 잡고 악수했다. “둘이 제일 처음 만난 거야?” 카셀이 물었다. “그런 셈이지. 나머지는 모두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 만났거든.” “그럼 그 시험은 뭐야? 난 아직 모르겠는걸.” “나도 그 때까지는 정확히 몰랐어. 짐작만 하고 있었지. 대충 이런 방식일 거라고. 하지만 막상 그 과제가 나에게 주어졌을 때는 아주 당황했지. 그건 쉐이든도 마찬가지였어. 쉐이든이 호명된 건 시험이 시작된 후 나흘째였어. 이미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호명된 후였지. 웃기는 건 경망스럽게 칼을 뽑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사람들까지 불려나갔다는 거야. 이제 호명의 기준이 뭔지도 애매하게 되어버린 거지.” 쉐이든이 창을 길게 휘둘럿다. 따분함에 시험장 주위를 가볍게 달리던 아즈윈은 창을 휘두른 그를 발견하고 얼른 달려가보았다. 쉐이든은 긴장된 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는데, 누가 자기를 공격하기라도 했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짓이야? 그리 긴 창을 이렇게 사람 맣ㄴ은 곳에서 휘두르면 어쩌자는 거야?” 아즈윈은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란 다른 응시생들이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도록 일부로 큰 소리로 화를 냈다. 그리고 그를 한쪽으로 데려가 속삭이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 것도. 하지만 난 아무래도 시험에 한 번 들었던 것 같아.” “뭐라고? 누가 공격했어?”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넌 합격한 거야? 합격한 사람은 잣니이 합격했는지 알 거라고 했잖아.” “글쎄, 그것도 잘 모르겠어.” 쉐이든은 식은땀을 닦았다. 저녁이 되자 정말로 쉐이든은 호명되어 나갔다. 그게 합격인지 아닌지는 본인도 잘 모르는 얼굴이었고, 아즈윈은 하나 밖에 없는 친구가 사라져버려서 더욱 안타까웠다. 특히나 합격한 사람은 자신이 합격한 걸 알 거라고 했던 시험관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쉐이든은 불합격인 걸까? 밤이 되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아 밖을 돌아다니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들어 날시가 계속 맑아 별이 아주 잘 보여 예뻤다. 그녀는 울프 기사단의 하얀 갑옷을 입고 있을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지만,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쉐이든이 사라지자 그의 합격 여부와는 상관 없이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그 때 바람을 타고 서늘한 살기가 그녀를 덮쳤다. 그것은 끔찍할 정도로 강한 살기였고, 심지어 등을 찌르는 칼끝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실제로 칼이 닿은 건 아니었지만, 이즈윈에게 있어 그것은 중요 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놀라며 앞으로 한 바퀴 굴러 허리에 차고 있는 칼에 손을 올려놓았다. 칼을 꺼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알면서도 어둠 속에서 커지는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녀는 칼을 꺼내고 말았다. 사방에 켜놓은 횃불에 반사된 금속의 빛이 번쩍엿다. 느낌 그대로 누군가 있었다. 어둠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였는데, 그는 유심히 아즈윈을 쳐다보더니 휙 돌아서 가버렸다. “누구냐?” 그녀는 소리쳤다가, 저도 모르게 꺼낸 칼을 뒤늦게 발견하고 얼른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밤에도 자지 않고 교대로 지키고 있는 시험 감독관이 이미 그 모습을 본 후였다. 그녀는 놀라 감독관에게 뭔가 말하려다 이미 명부에 뭔가 적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판정의 불만을 품고 항의했지만 감독관은 언제나 적혀 호명되는 사람이 곧 실격은 아님을 강조하고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즈윈은 항의하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실격이 아니라잖아.’ 라며 비웃었지만, 막상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게 되자 이해가 되었다. 방금은 정말 불공평했다. 멍청히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공격 당해 칼을 꺼내다니..... 물론 정말로 공격 당한 건 아니라 더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다음날 하루종일 찜찜해 하며 저녁을 기다렸다. 낮에도 여기 저기에서 칼을 꺼내는 소리가 났고, 소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이는 이런 시험 내용을 못 견디겟다며 스스로 시험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일도 있엇다. 어떤 이는 자신의 소속과 출신을 말하며 우대해 줄 것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이 시험에 응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자기 같은 뛰어난 실력자를 놓치는 건 아까울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전부터 그런 말을 하는 이가 많았지만 실제로 감독관에게 요구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시험 감독관들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떤 미련도 갖지 않았다. 시험에 응하지 않는 자가 떠나는 것도 절대 말리지 않았다. 그 날 저녁에는 호명되는 숫자가 마흔 두 명에 달했다. 아즈윈도 그 중에 끼어있었다. 다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불려나올 때, 한 명이 갑자기 손뼉을 딱 쳤다. 그녀는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시험이 어떤 의미가 있는 지 이제야 알겠어. 그리고 난 합격 이야.” 아즈윈만 아니라 그 말을 들은 몇몇이 귀가 솔깃해 그의 옆으로 갔다.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소?” “설명할 수 없소. 여기에는 아직 맣은 사람들이 시험에 대기하고 있으니까.” 호명된 마흔 두 명은 감독관을 따라 시험장을 빠져나가 성의 바깥쪽 연병장에 대기했다. 저녁 노을이 짙었고, 감독관은 잠시 기다리라며 경비만 놔두고 어딘가로 갔다. “난 관찰력이 꽤 좋소. 오늘 감독관에게 이름을 적힌 몇 명을 모두 보고 있었소.” 깨달았다며 박수를 쳤던 사람이 말했다. 자신이 합격인지 실격인지 초조한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아마 이 중에는 칼을 꺼냈다가 불려 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불려 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오. 내 장담컨데,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느낀 사람은 모두 불합격이오.” 그 말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웅성거렸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요?” “그래서 당신은 합격이고 나는 불합격이라는 거야?” “합격의 기준이 뭔데 그런 말을 하는거요?” 마치 공동의 적이 된 듯 많은 이가 그를 몰아세웠다. 특별히 그를 도와줄 생각이 없던 아즈윈이었지만, 그의 말에 담긴 뜻을 깨닫고 큰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그거였구나.”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아즈윈을 향했다.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탁 치며 말했다. “난 합격이었어. 그것도 모르고 하루종일 발을 동동 굴렀다니.” 그녀는 숨을 터트리며 웃어댔다. 이제야 모든 궁금증이 풀렸고, 긴장도 풀렸다. 그리고 그런 시험 방식을 생각해낸 사람에게 경탄했다. “넌 뭔데 나서는 거야?” “여자 기사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아란티아가 아무리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해도 그런 규칙까지 어길 나라는 아니다.” 이번에는 그녀를 공격하기로 마음 먹은 불합격자들이 입을 모아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인식시켜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합격 판정은 시험관이 내리는 것이고, 나는 내가 합격임을 조금 일찍 알았을 뿐이야. 놀릴 생각은 없지만, 패지는 입 다물고 있어.” 그녀의 도발적인 언행에 각지에서 인정 받은 검사들의 분노가 극을 달했다. 그 때 한쪽에서 도끼를 바닥에 늘어뜨려놓은 덩치 큰 남자가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 여자 말이 맞아. 칼을 뽑지 말라고 한 건 애초에 속임수였어. 오늘 칼을 뽑지 않았던 녀석은 실격이야. 칼을 뽑은 녀석만 합격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나도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군.”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그의 덩치에 질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격한 녀석들은 조심하는 게 좋아. 이 시험이 어떻게 치러졌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실력으로 합격한 사람에게 함부로 까부는 건 위험한 행동이야. 그렇지 않나.?” 그는 아즈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즈윈은 즉시 대답했다. “마지막 말은 특히 마음에 드는군. 앞으로 아란티아의 기사가 되는데 친구가 될만 하겠어. 이름이 뭐야? 난 아즈윈이다.” “난 게랄드다. 다들 날 불의 용병 게랄드라고 부르지.” 그의 말에 그 자리에 모여있는 상당수가 숨을 몰아쉴 정도로 놀랐다. 아즈윈은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없어 그들의 반응에 조금 의아해 했다. “내 목표는 아란티아의 기사 따위가 아니야. 난 어디까지나 검술의 최고라고 추앙 받는 위대한 검사를 꺾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참가한 거지. 그러니 무기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이름 불려 나온 녀석들은 얌전히 돌아가 자기 하던 일이나 마저 해. 그렇지 않으면 내 불도끼 맛을 보게 될 테니까.” 그의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처음 이 시험의 비밀을 풀었던 사람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오직 아즈윈만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었다. 분위기상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참자 목구멍에서 크크큭 하는 비웃는 듯한 소리마저 새나왔다. “뭐가 그리 우스워?” 게랄드가 따지듯 물었다. “그럼 넌 불도끼라는 말이 안 우스워? 그거 웃으라고 한 말 아니었어? 불도끼가 뭐냐, 불도끼가?” 그녀의 말에 분위기는 더욱 싸늘해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배 아파서 못 견딜 정도로 웃어대기만 했다. 사실 그 동안 너무 긴장해 있던 탓에 기분 좋아 터트리는 웃음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에 게랄드도 웃었다. “맞아. 웃으라고 한 말이었어. 그런데 왜 아무도 안 웃는지 난 항상 그게 궁금해.” 그의 말에 아즈윈은 거의 허리가 꺾어질 듯 웃어댔다. 나머지는 왜 그녀가 웃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 입맛만 다셨다. 잠시 후 감독관이 누군가를 대려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아즈윈을 비롯한 몇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밤에 그녀를 공격하려 했고, 그녀가 칼을 뽑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가버린 남자였다. 오직 살기만으로 칼을 뽑게 만든 남자. 그 때는 시험 중이라 칼을 뽑아버렸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잊어버렸는데, 당시 그녀를 덮쳤던 그 살기는 보통 강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검기를 내는 자와 겨루면 감히 한 번이라도 칼을 맞댈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막강한 살기였다. 쉐이든이 왜 그렇게 놀라 창을 휘둘렀으며 한참후까지도 식은땀을 흘렸는지 이해되었다. 그도 역시 합격자중의 한명이리라. 마흔 살 정도에 검고 굵은 누썹, 조금 야윈 얼굴, 선한 눈매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조용히 시험 감독관에게 뭔가를 묻고 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두를 가만히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마 지금쯤 합격한 사람은 합격했음을 알고, 실격 당한 사람들은 아직 자신이 실격되었음을 모르고 있을 것이오. 자신이 합격했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 있게 앞으로 나오시오. 그리고 나와 갑시다. 아란티아 늑대들의 견습 기사가 된 것을 환영하겠소.” 아즈윈과 게랄드를 비롯한다섯 명은 거리낌없이 앞으로 나섰고, 여섯 명이 더 머뭇거리며 나왔는데, 그 중 두 명은 감독관에 의해 저지 당했다. “당신들은 아니오.” 둘은 심한 모욕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 둘을 잡지 않았다. 자신이 실격인지 합격인지 모르는, 나머지는 아직도 남은 일말의 희망으로 감독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독관은 잠시 인원을 체크하더니 고개를 끄덜엿다. “아홉 명 맞습니다, 마스터 퀘이언.” “수고했네. 자, 합격자들은 나와 같이 갑시다.” 잠깐 오고 간 시험관과 그의 대화에 다들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외국말이라도 한 듯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당신이 퀘이언이오?” 게랄드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아즈윈은 그가 돌발적인 사고르르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퀘이언을 꺾고 마스터의 칭호를 얻고 싶어한다고 선언했던 그였다. 아즈윈은 잘 모르지만, 불의 용병 게랄드라면 용병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마스터라는 칭호 이상이었다. 때문에 아홉 명 중에 용병 생활을 해 본 이들은 게랄드가 퀘이언에게 도전하는, 또는 기습하는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도끼를 쥔 게랄드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엇다. “그렇소. 내가 퀘이언이오.” 그는 웃으며 대꾸했다. 무장도 하지 않았고, 합격자들을 테스트 할 때처럼 살기를 내지도 않았지만 그의 위압감은 이미 상대를 발 아래로 굴복시키고 있었다. 그에게 도전하는 마음을 품는 순간 벌써 패배한 느낌이었다. 게랄드는 굴욕감과 경외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 때 아즈윈이 그의 손목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경련을 일으키듯 그의 팔이 꿈틀댔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도끼를 밑으로 누그러뜨렸다. “성급하지 않아도 돼. 기회는 많아.” 그녀도 게랄드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그를 진정시켰다. 게랄드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퀘이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으며 걸어나갔다. 아즈윈은 그의 미소 속에 담겨 있는 아주 웃기는 생각을 읽어냈다. 귀여운 녀석들이구나, 하는......... 아즈윈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터무니 없는 사람에게 검을 배우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퀘이언이 안내한 곳은 성 옆에 따로 건설된 연병장이었다. 그곳에는 먼저 합격한 다른 기사 후보생들이 벌써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제일 처음에 싸우는 척 한 후 불려나간 가짜 수험생 두 명도 있었다. 그들도 훈련생인 모양이었다. 쉐이든도 있었다. 아즈윈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쉐이든도 가볍게 손을 들어 대꾸했다. “시험이 완전히 종료할 때까지 여기에서 몸이라도 풀고 있으시오. 아직 두 번째 시험이 남아있는 데다가 그 시험은 통상적인 격투가 될 테니까.” 퀘이언이 말했다. “그거 반가운 일이군.” 게랄드는 전혀 반갑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렷다. “잠깐.” 그녀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한참 이야기에 집중하던 카셀은 그녀가 시선을 두고 있는 방향을 가는 실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카셀은 뭔가 검은 물체가 움직이는 것만 발견했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저 녀석들, 혹시 라이온인지 뭔지하는 기사단 아니야?” 마차의 속도를 약간 줄이며 쉐이든이 말했다. “난 안 보여.” “검은 감옷이야.” “검은 감옷이라고 다 라이온 기사단은 아니야.” 카셀은 점점 다가오는 검은 점들을 바라보다가 라이온 기사단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하얀 늑대들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아즈윈은 던멜이 앉아있는 마차 위로 올라가 다가오는 기사들의 동태를 살폈고, 게랄다는 짐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검은 기사들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사들의 병력 이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투 중이었다. 라이온 기사단은 마차와 부딪힐 듯 빠르게 다가왔다가 옆으로 말머리를 돌려 순식간에 마차 주위를 에워쌌다. 당장 창을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 “어디로 가는 나그네들인가? 상인들 같지는 않군.” 기사 중 하나가 물었다. 하얀 늑대들의 시선이 모두 카셀에게 집중되었다. 카셀은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우선 물었다.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들이오?” 투구 안의 눈썹을 찌푸리며 기사는 버럭 화를 냈다. “다시 한 번 그따위 질문을 하면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 이는 없을 것이다.” 카셀은 상대의 갑작스러운 공격적인 반응에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말고삐를 잡고 있는 쉐이든이나 짐칸 밖으로 머리를 길게 빼고 있는 게랄드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무표정한 표정이 카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나서기 좋아하는 아즈윈이 생글생글 웃다가 기어이 한 마디 내뱉고야 말았다. “어느 쪽이 못 살아 남는데?” 기사들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카셀과 아즈윈을 번갈아 보았다. 카셀에게 여자 단속 좀 하라는 눈짓 같았다. 이런 대우를 곱게 넘어 가는 일 없는 동료들으 ㅣ성격을 파악한 카셀도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모르트 안이라 해도, 당신들의 갑옷과 깃발에 주눅들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는 카모르트 사람이 아니오. 일단 모르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켜준다면 우리도 거기에 따른 예의를 지켜주겠소.” “내 창이 너희들의 목을 따는 데 형식은 필요 없다. 우리는 검은 사자 백작의 라이온 기사단이다.” “우리는 아란티아에서 왔소. 울프 기사단의 하얀 늑대들이며, 카모르트 왕실의 공식적인 초대를 받아 가는 길이오.” 기사는 순간 말문이 막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 하나가 대신 나서서 말했다. “그런 소식은 들은 적이 없소. 만약 정말 아란티아에서 왔따면 초청장이나 왕실의 사자가 함께 하고 있을 터인데?” “처음부터 왕실의 사신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청장은 없으며,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에 의해 죽었소.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얀 늑대들이라는 것 외에는 이 나라에 공식적으로 왔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소.” “그대들이 하얀 늑대들이라면 충분히 초청받아 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소. 그럼 하얀 늑대들이라는 건 어떻게 증거할 건가?” 기사는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 모습이 영 떨떠름 한 모양인지아즈윈은 또 한번 껴들었다. “그럼 그 인원으로 우릴 공격해봐. 우리가 살아남으면 하얀 늑대들이고, 너희가 살아남으면 거짓말이겠지. 자신 있으면 손해 볼 것 없잖아.” “아즈윈, 그만 해.” 카셀은 일이 커지기 전에 얼른 저지했다. 그러나 아즈윈은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짜증을 냈다. “저 쪽에서 먼주 무례하게 굴고 있잖아. 이 나라 기사들은 기사도도 없냐?” 그때 마차 않에서 게랄드가 무심히 말했다. “동감이야. 나도 우리가 무시당하는 꼴은 못 봐줘.” 마차 위의 던멜도 어깨에 매고 있던 칼이니, 허리에 매고 있던 단검들을 꺼내 보이고 있었다. 카셀을 윽박지르던 라이온의 기사만 자존심 때문에 물러서지 않고 있었고, 다른 기사들은 벌써 말을 뒤로 물렸다. 쉐이든은 짧게 웃었다. “어쩔 건가, 캡틴? 명령을 내리면 나도 합류하지.” 카셀은 쉐이든과 라이온의 기사를 천천히 번갈아 보다가, 작지만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길 가능성은 어느 정도야?” “이미 던멜이 거리를 다 재고 있었어. 마음만 먹었으면 여기 있는 녀석들 중 절반은 숨 한 번 내쉴 시간안에 던멜에게 죽었을 거야.” 카셀은 그가 말한 ‘거리’라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라이온의 기사들은 그의 말에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되면 싸울 필요조차 없었다. 동료들의 자신감이야 어찌 되었건 카셀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아 앞으로 나섰다. “아란티아의 보검이자 하얀 늑대를 상징하는 보검을 내 보이겠소. 굳이 이 칼을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마지막 인내심과 최대한의 예의입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싸울 생각이 없소. 그리고 당신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라오.” 카셀은 극도로 예의 바르게,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는 자세로 보검을 내밀었다. 기사는 망설이다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정중히 칼을 받아 신중히 훑어보았다. 알아서 보는 건지 보래서 보는 건지 모르지만. 그는 다시 칼을 내주며 사과했다. “이 곳에 안 좋은 일이 터져 비상이 걸려 있소. 이 지역은 우리 기사단이 관할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두 개의 팀이 생존자 없이 시체만 발견되었소. 처음에는 로즈 기사단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소.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와 같은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라는데, 자쳇 그게 우리 기사단이라고 오해 받을 소지가 있어 지금 범인의 행방을 쫓고 있는 중이오.” 카셀은 칼을 받아 들고 게랄드와 아즈윈에게 손짓했다. 싸움을 못해 아쉽다는 표정으로 게랄드가 짐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자, 기사들은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소믄으로만 들은 하얀 늑대들을 자세히 봐두려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밝혔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그대들이 온 쪽인데, 당면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말해 주면 앞으로의 여행에 도움이 되겠군요.” 카셀이 물었다. “최근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보이는 인간은 모두 학살한다는 소문이 있었소. 적들의 스파이 짓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괴이한 사건이라 조사하던 도중 우리까지 공격을 당한 것이었소.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도시 근처에도 출몰했다는 정보가 있었소. 조심하시오. 그들은 대규모로도 이동하지만 개별적으로도 이동하며 하나하나의 힘이 괴물같다 하오. 우리가 직접 보호해 주어야 옳겠지만, 이해해 주시오. 우린 지금 녀석들이 나타났다는 곳으로 급히 가던 중이었소.” “경호는 필요없소,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 우릴 경호할 수 있는 건 오직 우리뿐이니까. 그럼 잘 가시오. 우리는 하던 여행을 마저 해야겠습니다. 아마 우리가 왕성에 도달하면 이런 문제도 직접 접할 기회가 있을 것이오.” “왕이 내리는 명령에 어떤 실효성이 있을지 모르겠소. 만약 이 나라를 도우러 온 거라면 차라리 나의 군주를 찾는 것이 옳을 것이오. 검은 사자 백작께서는 아란티아의 귀한 손님을 대함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 믿소.” “우린 카모르트를 도우러 온 것이지, 개개인의 사유 재산을 보호하러 온 것이 아니오.” 카셀은 휙 돌아서 마차에 올라타 버렸다. 아즈윈은 통쾌하다는 듯 웃었고, 창피를 당한 기사는 자신이 어떤 창피를 당한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아 어색한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마차가 출발하고 아즈윈이 마차 위에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후한이 두렵지 않나, 캡틴?”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봐. 권력이라는 힘을 얻은 후에 그걸 휘두르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고 있거든.” “우리를 권력이라고 생가해 주는 거야? 기분 좋은데.” “사실 하얀 늑대들이 어느 정도인지 난 잘 몰라. 하지만 그 이름값은 아주 강한 무기지.” “그래? 난 잘 모르곘어.” 아즈윈의 말을 받아 쉐이든이 말했다. “이로피스에서 일했을 때도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하얀 늑대들과 전설의 울프 기사단의 용맹..... 개인적으로 당시 낵 소속되어 있던 왕실 기사단도 명성이나 실력 면에서 아크랜드 어느 기사단 못지 않았어. 하지만 전설처럼 남은 10년 전의 전투에서 명암이 갈렸지. 익셀런 기사단을 상대로 이로피스의 기사단은 배하고 울프 기사단은 승리했지. 그 차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커직 된 거야. 울프 기사단은 아크랜드 안에 있는 모든 기사단들의 정점에 서잇는 셈이라까? 난 카셀의 말에 동의해.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병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병력이 가진 이름값이 중요하기도 해.” “오호라, 마스터께서 항상 주장하는 이야기군.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하다? 난 동의할 수 없어.” 아즈윈이 파짱을 끼며 이의를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카셀이 나선 덕에 깔끔하게 끝냈잖아. 게다가 카셀은 마지막에 칼로 얻어맞은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를 녀석에게 주었지. 나중에 그걸 깨달으면 녀석이 얼마나 아파할까 생각하면 난 가슴이 다 후련한걸.” “뭐, 그 쪽에 관해서는 나도 마찬가지야. 카셀, 넌 멋진 녀석이야.” 카셀은 얼굴이 붉어져 손을 저었다. “그만해.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자. 그 이후 시험은 어땠어? 일 대 일 시합?” 쉐이든은 동생을 바라보는 형 같은 인자한 눈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런 건 없었어. 그리고 내쫓는 사람도 없었지. 시험관들은 스스로 떠나는 사람들만 체크하고 남아있는 사람 모두를 울프 기사단으로 임명했어.” “뭐야? 그럼 소문으로만 들은 ‘치열한 전투 중에 살아남은 사람만 기사로 뽑는다.’는 써든 데스가 아니었단 말이야?” 놀라는 카셀에게 뒤에서 게랄드가 자는 목소리로 대꾸햇다. “기사 시험이 전쟁인 줄 아냐? 그리고 그런 시험이었다면 기사단으로 뽑힐 충분한 자격을 가진 녀석들 중에 재수없게 우리랑 싸워 죽었을 녀석은 어떻게 되냐? 그리고 만약 우리끼리 싸웠다면 어땠겠어? 안타깝게도 나만 살아남는 불행한 일이 벌어져 하얀 늑대들이 결성되지 않았을 거야.” 아즈윈은 목에 손을 올리더니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저 자식이 방금 뭐라고 했는지 잘못 들었는데, 누가 대신 해석 좀 해 주겟어? 누구만 살아남아? 평생 없었던 두통이 뒤통수에서 시작되네, 그려. 마스터께서 비밀리에 나를 불러 말씀하시길 우리 중 한 명은 도대체가 재능이 없어 내다 버려야겟다는데, 누가 좋겠냐고 나한테 물으셨거든? 그래서 나는 대답해 줬지. 자기 도끼도 무거워서 휘청거리는 녀석이 하나 있어서 훈련을 못 하겠으니 좀 처리해달라고.” “아하, 그건 분명 내가 연습용으로 놔둔 도끼를 치우던 하녀 차림의 여검사를 말하는 걸 거야. 누구야, 그 여자는 대체?” 둘의 말싸움이 막 시작될 찰나에 카셀이 손을 흔들었다. “이야기나 마저 해줘. 로일과 던멜이 합류한 부분은 어디 간 거야?” 아즈윈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해주지 않자, 세이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둘의 싸움을 즐겁게 구경하고 있었다. “둘은 우리가 훈련생일 때 이미 울프기사단의 멤버였어. 하지만 상당히 독특한 녀석들이었지. 짐작 했겠지만!” 그리고 쉐이든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12. 귀족의 딸 마을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호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마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몰레이크(small lake)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로일은 궁금했지만, 베리에게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사실 그는 도적때를 만난 일이 있은 후 로일에게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일은 그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에, 굳이 대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스몰 레이크는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다. 노르만트 근처라 사람들이 꽤 모이고 더불어 가게들도 번잡할거라 예상햇지만, 의외로 조용했으며 거리에는 가게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배리가 와인을 배달해 온 술집이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가게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배리는 포장마차를 세운 후 말없이 와인 통을 내리기 시작했다. 부탁은 없었으나, 로일은 와인 통 내리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이 와인 상점은 노르만트의 큰 상인과 직접 거래하는곳이라 이 마을에서는 비교적 큰 가게입니다. 마을에 여관이 없는 관계로 많은 여행자들이 여기서 하룻밤 머물러 가기도 하지요.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에서 묵고 내일 떠나도로고 하십시오. 여기 주인과 잘 아니 하룻밤 정도는무료로 묶으실 수 있을 겁니다.” 배리는 로일과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으나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노르만트까지 배달한다고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여행을 이어갈 정도로 담이 크질 않습니다. 남은 와인까지 여기에 넘기고 우린 돌아갈 겁니다. 아니,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는것도 좋겟죠. 이번 일로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남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배리는 그제야 로일을 바라보며 힘없이 미소지었다.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밤 노르만트로 떠나겠습니다.” 로일은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사실 조금 놀란 것뿐이지, 당신을 특별히 적대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로일은 와인 통을 들고 안으로 날랐다. 와인 가게 주인은 배리를 대단히 반겻다. 와인을 아주 싼 가격에 간단히 시음할 수 있는 바에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여자가 앉아 있엇다.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시골 마을에 사는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옷을 입고 있는 데다, 밭일은 하지 않은 흰 얼굴이었다. 로일은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을 왕실에서 많이 봐와서, 그녀가 귀족이거나 귀족의 하녀라고 짐작했다. 그녀가 로일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 만큼 로일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와인 통을 모두 나르고 로일은 자신의 짐을 챙겼다. 출발할 시간이었다. 해가 거의 서쪽에서 지고 있었으나, 상관없었다. “배리의 은인이라면 하룻밤이 아니라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좋소.” 와인 가게 주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로일은 그 제안도 거절했다. “친구들이 저를 앞질러 갈까 걱정됩니다. 제가 미리 노르만트에 가 있을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 늦게 도착하면 길이 엇갈려 서로 찾기 힘들 거예요. 조금이라도 빨리 노르만트로 가는 게 좋겠습니ㅏ.”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에 앉아있던 여자가 그 말에 반응하며 로일을 바라보았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겨우 친해진 두 꼬마 친구들고의 작별의 아쉬워, 그는 하나씩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까 난 한 개도 안 무서웠어요. 정말이에요.” 신디는 훌쩍이며 로일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아. 알아.” 로일은 겨우 달래 아이를 떼어놓았다. 배리의 아내, 린다가 다가와 그에게 작은 보자기를 내주었다. 로일이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기어이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안을 살짝 보니 빵, 우유가 담긴 병 그리고 와인 한 병이 담겨 있었다. 구수한 냄새로 미루어 안 보이는 보자기 안쪽에 육포도 몇 조각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로일은 모두에게 손으로 인사하고 마을을 떠났다. 스몰레이크에서 노르만트까지는 걸어서 하루 거리였다. 마을 입구에 서서 그는 앞으로 갈 길을 가늠해 보았다. 늦지 않는다면 내일 오후에는 노르만트에 도착하니 운이 좋다면 친구들은 그 다음날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울프 기사단이 된 이후 거의 떨어져 본 적이 없던 터라 며칠 안 봤다고 벌써 그리워졌다. 하얀 늑대들......... 그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그의 실체를 본 후에 흔히 보게 되는 사람들의 반응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준 그들을, 로일은 오히려 의아해 했었다. 울프 기사단에 처음 들어간 이후에도 정점에 있어, 퀘이언 이외는 상대할만한 살마조차 없었다. 그러너 그의 앞에 아즈윈이 나타났다. 울프 기사단의 다른 후보생들과는 달리 그녀는 그를 전혀 두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자식, 너 뭐 한 거야?’ 아즈윈가의 첫 대결에서 그의 목검에 쓰러진 아즈윈이 놀란 표정으로 노려보며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겨루자고 말했다. 이번에도 그는 그녀의 어깨를 쳐 쓰러뜨렸다. 결국 그녀는 어깨를 다쳐 보름이나 검을 들지 못했으나 한 달 뒤에 또 대결을 요청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로일은 처음으로 아즈윈의 검에 쓰러졌다. 그녀는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그에게 소리질렀다. ‘내가 한 번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 그 후 몇 년이 지나고 아즈윈은 그야말로 로일과 같은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전력을 다해도 쉽게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게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즈윈보다 배우는 게 빨랐다. 한번은 진검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는데, 로일은 검을 든 이후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었다. 게랄드는 검술 외에도 상대를 압박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쉐이든은 울프 기사단에서 하얀 늑대들로 뽑힐 때까지 로일과 겨루지 않았다. 어차피 싸워도 어떻게 질지 눈에 보이니 굳이 그 결과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리고 아즈윈이 처음 로일을 꺾은 시기와 비슷하게 쉐이든도 그와 비슷한 경지에 이르렀다. 로일이 실력을 향상시키면 어느 순간 그들은 그를 따라와 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경쟁상대로 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상황이 미칠 정도로 기분 좋았다. “거기 가시는 기사 분, 멈춰주세요.” 스몰레이크 쪽에서 말을 탄 여자가 달려오며 소리지르고 있엇다. “무슨 일이십니까?” 로일은 약한 저녁 햇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와인 가게에 멍청히 앉아있던 그 여자였다. “당신이 배리라는 와인 상인을 이 마을까지 경호해 주었다던 그 분이신가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정중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경호랄건 없고, 동행했죠. 제가 거기에 뭔가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에요. 노르만트로 가신다면 부탁 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사례는 충분히 할 터이니 도와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사례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르만트까지 급히 가야 하므로 시간이 걸리는 일은 곤란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다면 당신의 일도 우리 쪽에서 도울 수 있겠군요.” “어떻게 그리 되는지 궁금하군요.” 로일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녀도 굳은 표정을 풀었다. “제가 모시는 분을 노르만트까지 경호해 주십시오. 같이 간다면 마차를 타고 이동하므로 노르만트까지 빨리 당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괜찮은 제안이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마을로 가면서 할 수 있을까요?” “그럽시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였고, 그의 예상대로 시녀였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귀족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부탁하려는 지는 얘기해주지 않았으나, 도와준다면 확실한 사례를 해주겠다고 몇번이나 약속했다. 안나는 그를 와인 가게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마을 변두리의 작은 집으로 안내했다. 창문 밖으로 노란 등불이 흔들리고 있었고, 안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와인 가게에서 머물다가 그 집 주인에게 너무 폐를 끼치는것 같아 그냥 이 집을 빌렸답니다. 저는 그 집에서 당신 같은 사람을 찾아 기다리고 있었고요.” “그래서 아까 저를 노려 보셨군요.” “아, 안 좋은 시선으로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같이 오면서 많이 친근해진 그녀는 빙그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문이 열리자, 살짝 피 냄새가 났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환자의 냄새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일은 경계하지 않고 않으로 들어갔다. “그 기사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아가씨.” 안나는 문을 들어서며 인사한 후 로일을 앞으로 안내했다. 로일은 탁자 앞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귀족 여인을 발견했다. 풍성하고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어깨에 늘어뜨린 그녀는 로일과 비슷한 나이의 성숙한 숙녀였다. 촛불에 반사되어 푸른 빛을 내는 목걸이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와 어울렸다. 그녀는 취기 오른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앉으세요, 기사님. 제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은 상황의 악화를 심적으로 견딜 만큼 강한 인간이 못 되는 것으로 받아주시면 고맙겠어요. 라틸다 쟌스테인입니다. 그 쪽은?” “로일이라고 합니다.” “그 쪽에 앉으세요.” 그녀는 와인을 한 잔 권했고, 그는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이 마을의 와인은 아주 품질이 좋죠. 당신을 그 와인가게에서 발견했다고 안나가 그러던데, 맞나요?” “와인을 배달해 오는 상인의 마차를 얻어 타고 왔습니다.” “그 배리라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모두 들었어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더군요. 수십 명의 도적들을 혼자서 물리친 사람이라고. 저도 그 도적들은 알아요. 늑대들을 데리고 있더군요. 하지만 나를 호위하는 기사들을 보고 달아나 버리더군요.” 그녀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손톱을 붉게 칠한 하얀 손과 붉은 와인을 담은 투명한 잔, 잔에 비친 파란 눈동자, 그녀의 주위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색을 강하게 발하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볼은 그녀를 더욱 어려 보이게 했으나, 쉽게 근접할 수 없는 도도함이 그녀의 긴 눈썹에 담겨 있었다. 건넛방에서 갑자기 한 남자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일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라틸다는 자신의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나를 지키다 부상당한 경호 기사예요.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 마을에는 의사도 없어서 줄곳 저러고 있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배리라는 상인은 당신을 아주 칭찬하더군요. 믿을 만한 사람이기도 하면서, 아주 강한 검사라는 말까지. 내가 찾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면 나는 당신에게 부탁하고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 부탁을 들어준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가를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어요.” 로일은 그녀의 제안에 안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안나는 배에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탁자 옆에 서 있었다. 라틸다는 손을 내저었다. “안나 너도 앉으렴. 이런 곳에서까지 그런 예절 안 지켜도 된다.” “예.” 안나는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끌어당겨 로일의 옆에 앉았다.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말이 어떤지 잘 모르겠군요.” 로일이 말했다. “조건 없이 상대를 돕는 사람이란 게 요새 있을까 싶지만, 배리는 그렇다고 했죠. 그러니 첫 번째 조건은 만족합니다.” “조건 없이 도운 게 아닙니다. 대신 저는 이 마을까지 공짜로 마차를 탈 수 있었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 상인을 돕고 나서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대신 이 도시락을 얻었죠.” 로일은 린다가 싸준 보자기를 내밀었다. 라틸다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아주 엄청난 대가를 받았군요. 오해 마세요. 비꼬는 것 아니에요. 당신이 그 여자의 딸을 구한 이야기도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건 그 여자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싼 도시락일 테니 정말 귀한 도시락이잖아요.” “그렇겠군요.” 로일은 그 도시락에 담긴 의미를 새삼깨닫고 감탄했다. “두 번째 조건이 사실 더 중요해요. 당신을 얼마나 강하죠?” “그건 아주 대답하기가 까다롭군요.” “음, 제 질문이 너무 애매하군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당신은 무장한 기사 열 명을 이길 수 있나요?” 로일은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을 떠올렷다. 그들 열 명을 상대로 혼자서? 아즈윈이 옆에서 돕는다면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무리였다. 울프 기사단 중에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하얀 늑대에 들지 못하는 실력자도 있다. 던멜 같은 경우가 그런 실력을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야 드러나 마지막 하얀 늑대가 된 케이스였다. 던멜은 맴버 중 가장 먼저 울프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언제나 주변에만 떠돌고 있어서 실력을 측정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말도 안 하니 어떤 배경으로 울프 기사단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고, 보여주지 않으니 어떤 검술을 어떻게 쓰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실력을 발견한 건 눈썰미가 좋은 쉐이든이었다. ‘저 녀석, 우리와 겨뤄도 안 지겠다.’ 다들 놀라 쉐이든이 지목한 그를 발견했다. 마스터에게 보고하지 않은 비공개 테스트로 쉐이든은 던멜을 불렀다. 테스트는 로일이 맡았다. 던멜은 순순히 겨루기에 응했는데, 로일은 그 겨루기가 아주 재미있었다. 던멜은 상상할 수 없는 각도에서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만 골라서 공격했다. 특별히 힘이 세거나 빠르지도 않았는데, 로일은 그의 움직임을 잡아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리고 그 비공개 테스트로부터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하얀 늑대들을 뽑는 테스트가 진행되었고 던멜을 제외한 지금의 하얀 늑대들의 멤버가 구성되었다. 그들은 던멜을 하얀 늑대로 추천했다. 마스터는 울프 기사단의 규칙대로 기존 멤버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즉시 던멜을 하얀 늑대로 임명했다. 그 정도 기사일지라도 무리 속에 파묻히기 쉬운 곳이 울프 기사단이었다. 로일은 그런 기사라면 열 명이 아니라 다섯, 아니 셋과 싸워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돈 주고 작위를 산 기사들로 구성된 기사단이라면 열 명이 아니라 기사단 전체와 싸워도 공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기사들이 어떤 존재냐가 중요하겠군요.” 로일은 머리 속에서 복잡하게 벌어진 상황을 열심히 정리한 후 대답했다. “못한다는 말씀은 안 하시는군요.” 라틸다는 그 대답에도 충분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좀더 설명해 드려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저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노르만트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조만간 왕실에 귀한 손님이 오는데, 거기에 대신 참가하는 것이죠. 가서 뭘 하란 건지도 모른 채로 떠난 여행이었죠. 내키지 않은 여행이었는데, 처음 며칠은 오랫만에 나온 외출이라 즐거웠죠. 그러다, 이 마을을 지나 노르만트로 가던 길에서 이상한 존재를 만났습니다. 그건 뭐랄까,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지만,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어요. 안나나 로저는, 아, 지금 옆 방에 누워있는 경호원이 로저예요. 라이온 기사단일 거라고 믿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니었어요. 그건 그냥 검은 갑옷을 껍질로 덮은 죽음의 사신 같은 거였죠.” “또 이 말을 꺼내게 되어서 죄송합니다만, 라틸다. 그건 라이온 기사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노르만트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검은 사자 백작의 소행입니다. 로저의 말이 옳아요.” 안나가 끼어들어 나직이 말했으나 라틸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너무 겁에 질려 상황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것 처럼 보이니? 아니야. 난 알 수 있어. 그건 절대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종류의 기사가 아니었어. 그리고. 안나. 사람들이 치켜세우듯이 보르는 ‘검은사자’ 라는 말은 내 앞에서 하지 말거라. 그의 이름은 뤼미에르야.” “죄송합니다.” 안나는 즉시 사괴했다. “그들에게 공격 당했습니까?” 얘기가 엉뚱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아 로일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물었다. “예,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죠. 그 검은 기사 두 명이 마차를 덮친건 매복도 아니었고, 갑자기 나타나긴 했지만 특별히 기습이랄 것도 없었어요. 그저 우리가 갈 길을 가로막고 있다가 달려온 거죠. 두 명이 열 명 넘는 기사들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병법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전 모르겠어요. 그런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눈 앞에서 벌어졌죠. 난 내 경호원들의 실력이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그들은 아버지가 제 신변을 보호히가 위해 특별히 가려 뽑은 실력자들이었어요. 로저도 아버지 직속의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당할 사람이 없는 훌륭한 기사죠. 하지만 그들을 상대로 했을 때는 소용 없었어요. 로저는 저를 구해 달아나는 게 최선이었죠.” “그들이 왜 당신을.....?” “그들이 라이온 기사단이라면 이유야 명백하지만,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이 길을 막은 채 지나가는 모든 이를 무작위로 공격하고 있던 중에 우리가 끼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요. 따지고 보면 그게 더 맞아요.” 로일은 와인을 모두 마셨고, 그녀는 빈 잔을 또 채워주었다. 병이 비자 그녀는 몇 번 흔들어 보더니 안나를 주시했다. 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라틸다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충 그림이 나오는군요. 그럼 제가 노르만트까지 가는동안 경호를 해드리면 되는겁니까?” “맞아요.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하는 걸로 하죠. 나는 대가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누군가를 돕는데 대가를 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도시락 같은 대가라면 좋겠군요.” “난 도시락 같은 건 쌀 줄 몰라요.” 그녀는 조금도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로일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언제 출발할 수 있나요?” “가던 중에 끌려 왔으니 당연히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잘 됐군요. 안나, 짐을 챙겨. 지금 출발하자.” 안나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지금은 밤입니다. 길도 잘 안 보일 텐데요.” “나도 알아. 하지만 내일이 지나면 로저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로저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메마른 시선으로 로일을 바라본 후 부탁했다. “로저를 좀 옮겨주세요. 안나는 짐을 마저 챙기도록 해. 나는 마차를 가져올 테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수줍은 듯 얼굴에 떠있던 홍조는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씩씩하게 자리에서일어났다. 노르만트로 떠나는 마차가 출발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달빛과 별빛이 길을 밝히고 있었으나 마음놓고 속도를 낼 정도는 아니었다. 두 팔을 걷어붙여 고운 팔뚝을 드러낸 라틸다가 마차를 몰고 있었고, 로일은 그 옆에서 말이 어둠속을 달리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등불을 들고 있었다. 안나는 객차에 뉘인 로저를 돌보고 있었는데, 가끔 그의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라틸다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마차의 속도가 느린 이유는 조명 때문이 아니라, 로저 때문이었다. 배경은 보이지 않고 등불에 의해 밝혀진 단조로운 길이 반복되니 할 일이 없는 로일은 금방 졸음이 왔다. “마부는 열심히 말을 몰고 있는데, 옆에서 졸아도 되는 거예요?” “아, 미안해요. 말을 타고 달리는 여행은 익숙하지 않아서요.” “걷는 여행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아까 안나가 데리러 갔을 때도 당신이 말을 타고 가버렸다면 못 따라갔을 텐데요. 노르만트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나요?” “어렸을 때 현상금이 걸려 달아나던 시절이 있었죠. 정복 전쟁이 있었던 시기였는데, 거의 5년 동안은 순수하게 걷는 여행만 했습니다. 하룻밤 안에 도착할 장소라면 별로 부담스럽지도 않아요. 하지만 걷지 않는 밤길은 무척 지루하군요. 게다가 제가 잠이 좀 많은 타입이라.” “잠이 많은 건 나쁜ㄴ 게 아니에요.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편히 잘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에요.” 그녀는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 말했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동의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는 자다가 정말 소중한 물건까지 잃어버렸는걸요. 가끔은 중요한 시합을 하는 도중에 잠들어 버렸다가 상대방에게 무시한다는 욕을 먹기도 하죠. 저는 잠을 줄일 필요가 있어요.” “그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하지만 지금은 잠들지 말아주세요. 여기가 바로 그 검은 기사들에게 공격 당햇던 지점이에요.” 갑자기 그녀는 입을 다물었고, 로일도 덩달아 긴장했다. 바람 소리와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가득한 들판에는 이름 모를 풀들만 춤을 추고 있었다. 로일이 거기에 등불을 비춰보자, 라틸다는 즉시 저지했다. “그러지 마세요. 저와 평소에 농담하고 저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기사들의 시체를 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 검은 기사의 모습을또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로일은 얼른 등불을 마차 앞 쪽으로 되돌렸다. 한참 동안 둘은 대화를 멈춘 채로 앞만 바라보았다. 로저의 괴로운 신음이 또 한 번 터지며 침묵이 깨졌다. “이 지역만 벗어나면 잠시 멈춰야 겠어요. 흔들리는 마차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로저가 견디기 힘들 거에요.” 로일은 옆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녀의 시선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 검은 기사들이 그렇게 두려운 존재였나요?” “이상한 질문만 하는군요. 당연하지 않나요? 저는 귀족의 딸로 집 안에서만 자라온 약한 여자에요. 지인이 죽는 광경을 바로 옆에서 바라봤는데, 그 공포가 쉽게 가실 거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아니죠. 하지만 나는 상대를 두려워하는 그 시선에 대해 아주 잘 압니다. 그런데 라틸다, 당신의 눈빛은 당신이 말하던 종류가 아닙니다. 뭐랄까, 제가 말을 잘 못해서 설명은 못 하겠지만, 당신은 뭔가 다른 것을 두려워 하는 것 같습니다.” 라틸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일을 바라보았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당신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군요. 배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험악하고 손 대면 베이기라도 할 것 같은 검사 같더니 막상 만났을 때는 예의 바른 기사 같고 지금은 마치 오빠 같은 말을 하는군요. 어느 것이 당신의 진자 모습인지 모르지만, 당신의 말은 상당 부분 옳다고 생각 되네요. 맞아요. 내가 두려운 건 그 검은 기사들이 제 경호 기사들을 죽였다는 현실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검은기사 자체에 있어요. 당신은 악몽을 꾸나요?” 갑자기 화제를 바꾼 그녀의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로일은 되물었다. “어떤 악몽 말씀이시죠?” “그냥 악몽이요. 사람들은 대게 하나씩 반복해서 꾸는 악몽이 있잖아요. 당신은 그런 악몽을 꾸나요?” “으음, 그런 거라면 하나 있죠. 누가 쫓아오는 꿈이죠.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자꾸 쫓아오기만 합니다. 현실에서의 저라면 절대 피하지 않을 텐데, 꿈 속에서의 전 무조건 도망가기만 하죠. 달아나다 보면 멍청하게도 항상 같은 장소 같은 타이밍에, 검은 구멍에 바지는데 한도 끝도 없이 떨어지다 보면 깨어나요. 별로 무서울 만한 것도 못 되는데 이상하게 깨어나면 식은땀에 절어있고 옆에 자던 친구들이 제가 신음 소리를 냈다느니 몸을 뒤흔들어 댔다느니 하죠. 그게 당신이 말하던 그런 종류의 악몽이겠죠? 당신의 경우는 검은 기사입니까?” “시큰둥하게 이야기 하다가도 항상 핵심을 짚어서 상대방을 깜짝 놀라게 하는군요.” “불쾌하셨따면 죄송합니다.” “불쾌하다는 게 아니에요. 내 주위에는 돌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투성이라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상대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군요. 맞아요. 내 악몽은 검은 기사예요. 어디인지 잘 모르지만, 불이 주위를 온통 태우고 있는데도 춥고 어두운 곳에 내가 서 있죠. 시작은 그렇게 해요. 너무 불꽃이 선명해서 저는 그 꿈의 시작을 정확하게 인지하죠. 그래서 그 불꽃을 보면 ‘아 또 시작됐구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꿈을 깨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가위에 눌린 것처럼 꿈이 꿈이라고 인식하면서도 일어날 수 없는 상태가 유지되죠. 그런 기분 알아요? 도망쳐도 그 자리고, 도망치지 않아도 마찬가지에요. 결국 언제부터인가 검은 갑옷을 입고 검은 도끼를 든 기사가 검은 말을 타고 나를 쫓아오죠. 아무리 달아나도 그 기사는 놓치지 않고 쫓아와서는 내 앞길을 막아버려요. 비명을 지르지만, 달아나지는 못해요. 그 커다란손이 얼굴로 접근해오면 기절해 버리고 싶지만, 꿈이라 그런 것도 안 되죠. 우습죠? 그러다 하얀 빛이 제 가슴으로 날아와 박혀요. 그건 너무 현실적인 고통이라 꿈에서 깨면 정말 가슴 한 쪽이 욱신거리고 아플 정도에요. 그리고 꿈 속에서 나는 그대로 죽어버리는데, 죽음의 순간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정말 끔찍한 꿈이에요. 깨어나면 마치 죽음에서 다시 깨어난 것처럼 안도하죠.” “그런데 꿈 속에서 보던 그 검은 기사가 얼마 전에 현실에서 나타났다?” “맞아요.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조차 없었어요. 내가 왜 그들을 라이온 기사단이 아니라고 확신하는지 알겠죠?” “예. 저라도 그게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예.” 악몽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안나 외에는 거의 말하지도 않았었다. 자기도 모르게 말해버렸지만,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로일의 자신감 있는 말투에 비밀을 털어놓은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검은 기사들을 만나 공격 당한 이후 한 잠도 자지 않았어요. 자면 분명 그 악몽을 꾸고 말 거에요. 이 악몽이 시작된 이후 이런 식으로 안 자려고 노력하다 보니 불면증이 생겼죠. 이제는 자고 싶을 때도 쉽게 잠들지 못해요. 취해서 스러질 정도로 마시면 잠은 들수 있는데, 다음날 숙취가 또 고통이죠. 느는 건 술뿐이더군요.” “전 술을 잘 못 마셔요. 친구들이 다들 말술인데 저는 몇 잔이면 취해서 바닥을 기어 다니죠. 그 꼴을 보고 싶어서 억지로 마시게도 하는데, 차라리 도망치느 쪽을 택합니다.” “유쾌한 친구들이군요. 친구들 이야기 좀 해 봐요. 아버지의 과잉 보호로 하도 곱게 자란 여자라서 친구도 변변히 사귀지 못했어요. 그나마 사귄다고 할 만한 인간들이라 봐야 사교계에서 보석많은 걸 잘난 척 하며 남편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인 양 떠드는 불쌍한 여인들 뿐이죠. 안나가 친구라면 친구지만 그 애는 날 주인으로 생각하지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요. 친구란 서로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걸 생각하면 난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죠. 어때요? 당신은 친구가 아주 많을 것 같은데.” “아니요. 저도 친구는 대여섯 명 정도에요. 나머지는 그냥 동료라고 봐야겠죠. 언제나 가까워질만 하면 다들 절 피해서.....” “그래도 좋아요. 그 대여섯 명의 이야기를 해줘요. 아까 술을 좀 마셨더니 졸립군요. 제가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만 이야기를 엮어주면 고맙겠어요.” 부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귀족 특유의 명령하는 어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졸린 눈을 하고도 도도한 시선을 유지했다. “어려운 부탁이군요. 친구들은 제 이야기만 들으면 자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를 하라니..... 졸음이 달아날만한 이야기라면 어떤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좋아요. 하나 생각 났어요.” 로일은 괜스레 긴장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의 행동이 귀여워 그녀는 말고삐를 늦추며 작게 웃었다. “제 친구 중에 창을 아주 잘 쓰는 기사가 있습니다. 쉐디라고도 부르는데, 제가 그렇게 부르면 때려요. 그래서 전 반드시 긴 이름으로 부릅니다. 어느 날 쉐디가 저에게 다가와, 만약 무기도 없이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할 테냐, 라고 말하길래, 제가 대답했습니다. 공격하면 반격하겠다....... 쉐이든은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다른 친구인 게리에게 가서 같은 걸 물었죠. 게리는 상관없다. 난 주먹으로도 이길수 있다, 라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전 그 말을 믿어요. 게리는 정말 그럴 수 있거든요. 쉐디는 제 유일한 여자 친구에게도 물었죠. 그녀는, 내가 못 이길 것 같아서 묻는 거냐고 막 화를 냈답니다. 말을 못하는 친구에게 물으니,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될 수 있으니 굳이 무기가 없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하겠다고 수화로 대꾸했죠. 쉐디는 모두는 불러놓고 갑자기 이렇게 화를 냈습니다. ‘왜 아무도 곰을 살려준다고는 대답하지 않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고, 라틸다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어떻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이해 못한 부분이 있나 보군요. 당신의 친구들은 모두 곰을 맨손으로 잡을 수있나 보죠?” “으음.” 로일은 고통스럽게 신음 소리를 낸 후 말했다. “그걸 이해시키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안타깝군요. 저는 쉐디의 그 말에 한참 동안이나 웃었는데, 역시 제 말솜씨로 상대를 웃게 하는 건 불간으한가 봅니다. 다들 제게 그런 지적을 해서 어느 날은 말을 잘 하는 방법을 교육받기가지 했다니까요. 물론 소용 없었지만.” “아니에요. 제가 이해 못했다고 해야 해요. 이야기의 즐거움이란 반쯤은 듣는 사람의 노력에 있는 거잖아요. 지금은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 즐거움을 갖지 못했나 봐요.” 그녀는 심각하게 말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로일은 그녀가 자신의 농담을 뒤늦게라도 이해했을 거라는 기대를 갖지 않았다. “왜 웃나요?” “우습지 않아요? 오 ㅐ그 농담이 실패했는지 서로 진지하게 의논 하는 상황이.......” 일번에는 로일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해하려 햇고,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알았어요. 그만 하죠. 웃느라 이제 잠도 많이 깼으니까.” 그녀는 어느 순간 검은 기사의 두려움을 벗어 던졌음을 깨닫고 놀랐다. 스몰레이크 마을에 갇혀 지내는 사흘 동안 검은 기사의 존재를 한 순간도 잊지 못했는데, 로일과 이야기를 나눈 짧은 시간 동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웃을수 있었다. 등불에 비친로일의 모습은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주황 불빛에 비쳐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가식 없는 순수함이 가득 넘치고 있었고, 헐거워 보이는 그의 미소와 느긋한 그의 말투는 꽉 조여있는 마음을 금방 느슨하게 풀어버렸다. 그녀는 그가 조성한 편안함 덕에 잠들어 버리지 않을까를 오히려 걱정해야 했다. 라틸다가 친구라는 말을 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하얀 늑대들을 만나기 이전에는 정말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 조차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평생 마음의 상처가 되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었다. 아버지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아이라도 보면, 그런 추억이 없는 그는 한참 동안이나 그 모습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배리의 아이들을 보고 그는 너무나도 그들이 사랑스러웠으며 또한 부러웠다. 약하디 약한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자라는 존재에 기대는 여린 마음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신디를 인질로 삼는 도적들에게 정을 두지 않고 배어버렸다. 자신의 실력이면 충분히 그들을 겁 주어 쫓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라리 아버지가 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농부나 상인이었다면 로일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재능이 발하는 빛에 가려 네 평범한 삶은 언제든 박살났을 것이다.’ 라고 단언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조용히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한 쪽 다리를 잃은 몰락한 기사였다. 그리 이름 있는 가문의 기사가 아니었음에도 그 잡쉰이 대한하여 언제나 아들을 앞에 앉혀두고 자신의 영웅담을 떠들어 대길 좋아했다. 로일은 그의 아버지가 이룩한 업적을 모두 외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에게 자기 같은 훌륭한 기사가 되라며 기사도와 검술을 가르쳣다. 로일이 열 살이 된 후 그의 아버지는 그를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빨리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보는 대로 모든 것을 따라 해내는 아들의 재능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차라리 자신에게 아무런 검의 재능이 없었다면 그저 아들이 칼을 잘 쓰는구나 하고 생각했겠지만, 정식으로 검을 배운 기사가 보기에 자신의 아들이자 제자인 로일은 너무나도 엄청난 재목이었다. 그는 자기 실력으로는 아들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서둘로 자신의 과거 인맥을 동원하여 그를 가르칠만한 스승을 찾았다. 아들을 떠나 보내던 날 아버지는 짧은 조언을 하나 해주었다. 그것은 로일이 일생 동안 담고 다니는 신조가 되었다. “절대 검을 즐기지 말아라. 네가 검을 휘두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면, 네 재능은 재앙이 될 것이다.” 어린 로일은 결국 유언이 된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거두어주누 기사가 가르치는 검술을 제대로 연마하지 않았다. 검술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갈 때마다 지나치게 즐거웠고, 검만 들면 누구든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윤리나 가치관이 아닌 아버지의 조언 때문에 그는 검술 수련을 중단했다. 하루는 수련을 맡은 기사가 불러 그의 해이한 정신을 탓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아주 뛰어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연마하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하는 법이다.” 로일은 솔직하게 아버지의 조언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사는 그 말을 비웃었다. “네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 때문에 너를 받아주었지만, 정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결국 제 아들이 무서워 내게 떠넘긴 주에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느냐? 검술을 배우러 왔다면 얌전히 스승의 말을 들어라.” 로일은 아버지를 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소리질렀다. “제 스승은 아버지뿐입니다. 그 외에는 누구도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 이미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배웠고 모든 것을 물려 받았습니다. 당신이 제게 가르쳐 주는 것은 그 기초에 보태는 경험에 불과합니다.” 물론 십 수년 동안 칼을 휘두른 검사가 어린 소년의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그럼 네 아버지에게 돌아가라.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과거의 영광만으로 살아가는 몰락한 기사의 아들이여. 네 재능이란 게 결국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 아이의 잔재주에 불과 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이로피스 내에서 널 받아주는 기사단은 없을 것이다.” 로일은 보통 상대방의 말에 같이 말로 맞서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 때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고야 말았다. “당신이 이로피스에서 제일 뛰어난 왕실 기사단의 기사라면, 이미 이로피스에서는 제가 배울만한 기사는 없습니다.” 말을 끝낸 후, 그 기사의 경멸하는 시선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로일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검술 같은 건 때려치우고, 아버지가 떠드는 과거의 영광에서도 벗어나 소작농이나 성인이 되어 볼 생각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만약 당시 집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평범한 농부로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어려서 잘 몰랐지만, 몰락한 기사가 예전의 사치를 감당하려면 빚을 얻는 방법 밖에 없었다. 계쏙 쌓인 빚을 갚을 길도 없이 괴로워하다가 결국 빚쟁이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은 아버지의 무덤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로일은 무덤 앞에 며칠을 앉아 있었다. 로일을 내보낸 것도 양육비가 없어서였다는 촌장의 말을 듣고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없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차가운 칼 한 자루만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죽인 사채업자는 근처에서 꽤 유명한 상인이었고 귀족들도 함부로 재어보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시장에 유통시키는 자본가이기도 했다. 얼마나 악독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그가 거느리고 있는 경호원의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정문에서부터 그는 출입을 거부당했다. 화가 잔뜩 난 열 다섯 살 짜리 꼬마가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온다는 데 들여보내줄 리가 만무했다. “난 아버지를 죽이라고 명령한 이 집의 주인만 죽이러 왔습니다. 나머지는 살려 드리겠으니 제 앞을 막지 마십시오.” “아무래도네 손가락을 하나쯤 잘라내야 정신을 차릴 것 같구나.” 용병은 로일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그러나 로일이 휘두른 검에 손목이 날아간 건 경호원이었다. 그는 비명을 질렀으나 곧 로일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로일은 상대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고 말했다. “부탁을 해야 할지 명령을 해야 할지 모르게습니다. 아마 내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경계심이 없을 텐데, 현실만 바라보십시오. 나를 그냥 지나가게 해준다면 당신은 아주 많은 사람을 살리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소리를 질러 동료를 불러모으면 나는 당신의 동료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결국 당신은 친구들을 죽이게 되는 셈입니다.” 칼끝을 목에 살짝 찌른 채 말하는 로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경호원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저택 안으로 들어간 후 복도에서 마주친 또 다른 경호원 두명과도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로일은 더 많은 사람이 나타날 것을 두려워해 서둘러 그 둘을 죽였다. 저택의 주인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뚱뚱한 상인은 달라는 돈을 모두 줄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자네가 평생 먹고 살아도 될만한 돈을 주겠네. 아직 어리니까 돈의 가치를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돈이라면 몇 백 명이 목숨을 내놓겠다고 나설 정도라네. 그래, 이건 어떨까? 내가 자넬 고용하겠네. 어린 나이에 그정도 실력이라면 아주 대단한 용병이 될 수 있을거야. 오오, 제발 현실을 바라보게. 미래를 생각해. 날 죽이면 자넨 평생 수배범이 되어 쫓겨 다니겠지만, 날 살려주면 평생 부자로 지낼 수 있어. 또 내가 죽는다고 자네 아버지가 돌아오는거낭니지 않는가?” 로일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비는 뚱뚱한 상인의 애원을 가차없이 끊었다. “당신을 살려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아.” 상인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 후 방을 나서자 복도에는 칼을 들고 달려오는 용병들의 숫자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 그는 몇 명을 더 죽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검을 휘두르는 게 너무 즐겁고 자신의 손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취해 왜 이 저택에 들어왔는지도 잊어버렸다는 것만 기억났다. 살아남은 경비도 많았으나, 나중에는 그가 저택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막는 이가 없었다. 상인의 예상대로 그는 즉시 지명 수배되었고, 사방에서 현상금을 노리고 공격하는 사냥꾼들이 있었다. 그러나 로일은 그 모든 사냥꾼을 죽였다. 때론 로일과 맞먹는 실력을 가진 뛰어난 사냥꾼에게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숲 속에 숨은 암살자가 쏜 독 화살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그는 살아남았다. 자신을 공격해오는 사냥꾼을 역습하는 걸 즐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어느날, 그는 가넬로크로 달아났다. 그는 아버지의 조언을 항상 기억했다. ‘절대 검을 즐기지 말아라.’ 운이 좋은 건지 때마침 론타몬의 정복 전쟁이 벌어져 그의 범죄는 조용히 잊혀지게 되었다. 가넬로크에서 그는 5년 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 계속 돈이 필요 했고, 정착을 위해서는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다. 전쟁은 끝났으나, 그 여파로 어지로운 정세에 용병의 수요가 아주 많았다. 검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그에게 있어 용병으로 벌 수 있는 돈의 액수란 대단한 유혹이었다. 5년 째 본격적인 훈련을 안 했다고는 하나 그의 실력은 이미 싸구려 용병들을 상대로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반 년 동안의 용병 생활로 그의 실력은 단숨에 사람들을 압도시키거나 경악시키는 수준으로 가다듬어졌고, 한 자리 약속할 테니 와달라는 약속을 하는 귀족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는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었다. 가급적 눈에 띄지 않도록 실력을 낮춘 게 그 정도였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정말 사람들이 경악할 만큼 대단한 실력자인가 의심스러웠다. 아버지도 두려워했고, 어린 나이에 몇 년 경험을 쌓은 검사들을 손 쉽게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 대단한 것 같기는 해도, 자신을 가르쳤던 기사의 말에 의하면 별 거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해 싸워본 적이 없었으며 그럴 만한 상대도 없었으므로, 실력을 재 볼 기회도 없었다. 그는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했다. 평생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검술을 써먹을 곳을 찾을 것인가. 어느 쪽 길을 걸어간다 해도 자신 없었다. 그는 가넬로크에서 가장 검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인다는 드래곤 기사단을 찾았다. 전쟁 속에 기사단을 수호하는 드래곤들이 모두 죽어버렸지만, 그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그럤던 것 처럼 또 한 번 정문에서 거절당했다. 드래곤 기사단이 되러면 우선 가넬로크의 귀족이나 귀족의 추천을 받은 기사나 종자여야 했다. 그는 기사단의 사무적인 일을 보는 관리관을 대신 찾았다. “가넬로크 태생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경력은 용병 생활 6개월에.... 특별히 기사단을 늘린다는 공고가 없음에도 찾아왔기에 대단한 자격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군.” 얼굴이 깡 마른 사무관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기사단이 되려고 온 게 아닙니다.” 로일이 말했다. “그럼 뭔가?” 가넬로크 왕실과 별도로 존재하는, 500명이 넘는 드래곤 기사단의 관리관은 이미 국가 권력의 한 축이었다. 그런 사람이 추천서도 없이 찾아온 스무 살짜리 청년을 상대해 줄 리 만무했다. 때문에 로일이 만나는 살마은 관리관 아래 있는 열 명의 사무관 중 한 명이 었는데 그나마도 진심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저는,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실력을 평가해보고 싶어 왔습니다. 가넬로크의 기사라면 제 실력을 측정하는 데 적절할 것 같아서......” 로일은 열심히 설명했지만,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사무고나은 경비를 불렀다. “경비, 이 미친 녀석을 당장 쫓아내게.”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저는.....” 로일이 당황하여 외쳤다. “너 같은 녀석, 너 같은 용병이 한둘인 줄 아나? 수없이 많은 이들이 전쟁터에서 굴러다니다가 어줍잖은 실력에 자부심을 품고 찾아 오지. 하지만 충고하건데, 얌전히 제 발로 나갈 수 있을때 나가는게 좋아.” 경비 둘이 다가와 로일의 팔을 잡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고, 이렇게 쉽게 쫓겨날 거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번에 쫓겨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칼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이 경비 두 명을 상대로 시험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드래곤 기사단을 지키는 경비병이니 보통 용병들보다 낫겠죠. 전 상관 없습니다.” 경비 둘은 깜짝 놀라 물러섰지만, 사무관은 좋을 대로 해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떤 뒷일 말입니까?” “이 경비 두 명이 죽으면 이 근처에서 훈련받고 있는 드래곤 기사단 오십 명이 당장 무장해서 달려올 거다. 원하는게 그런 전투라면 해도 좋다.” 사무관은 로일이 포기하게 만들 작정으로 말했으나, 오히려 그의 투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제가 원하는 방식도 아니고 이 경비병들에게 아무 원한도 없으나, 드래곤 기사단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뿐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일이 칼을 뽑자, 그제야 사무관은 그가 진심임을 알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비, 경비.” 그의 크지 않은 목소리에 열 명 정도 되는 경비가 창을 들고 달려왔다. “저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형식적인 시합을 요청한 겁니다.” 로일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릴 어디 도적단이나 용병단과 같이 보는거냐? 여긴 가넬로크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들이 모여 있는 신성한 곳이다. 한 때는 드래곤고 ㅏ함께 호흡하던 이 곳에서 귀족도 아닌, 심지어 가넬로크 인도 아닌 너와 정식으로 겨루어줄 기사는 없다.” “그럼 난 정말 당신을 베고 범죄자로서 드래곤 기사단과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이 가르쳐 준 방법입니다.” 로일이 경비 모두를 노려보며 말할때 누군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진정하게, 젊은이.” 경비들을 제치고 사무관의 방으로 들어온 이는 키가 크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의 남자였다. 차림으로 보아 고위관직자가 아닐 텐데도, 사물관이나 다른 경비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로일은 그가 기사단의 주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자네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네. 워낙 목청이 좋아서 옆방에서도 다 들렸지.” 사무관은 그제야 옆 방에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 데라둘 마치를 만나러 온 손님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기사단장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아닐세. 오래 머무를 생각이니 조금쯤 늦어도 상관 없어.” 그 남자는 괜찮다며 손을 저어보이고는 로일을 안내했다. “단 둘이 이야기 하고 싶군. 같이 가겠나?” 로일은 복잡해진 상황을 수습할 자신이 없어 순순히 응했다. “내가 이 친구의 머리를 식혀주고 오겠네. 괜찮겠지?” 그는 사무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무관이나 경비병들은 그래만 주면 대환영이었다. 그 남자는 로일을 기사단 건물이 있는 정원으로 데려갔다. 숲이 우거지고 잘 가꾸어진 꽃나무가 풍성하게 주위를 가득 매우고 있는 곳이었다. “이름이 뭔가?” “로일,. 이로피스 기사 레너의 아들입니다.” “그럼 왜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을 찾지 않고 가넬로크에 왔는가? 물론 그 쪽 기사단도 결코 자네 같은 인물을 쉽게 받아줄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니네만.”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 그 나라 어떤 기사단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한 때 이로피스의 현상범 수배자 명단에 오른 적이 있어서......” “그럼 가넬로크에서는 더더욱 힘들곘군. 드래곤 기사단은 3대 전의 가족 관계까지 조사하여 결격 사유가 없음을 확인한 후ㅇ야 겨우 견습생으로 받아들이지.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아크랜드에서 가장 고귀한 기사단이라, 자네 같은 범죄자는 기사단과 대면하기 조차 쉽지 않을 거야. 물론 그런 이들은 그런 자신감을 보여도 오만이 아니라고 할만한 실력이 있다네. 자네가 정말 검술에 자신이 있고, 그 실력을 테스트 해 볼 생각으로 왔다면, 탁월한 선택이었어. 이 곳 기사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하지만 못하지 않습니까?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니, 그 전에 자네가 진정 원하는 게 뭔가? 오직 드래곤 기사단의 누군가를 쓰러뜨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나? 아니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과정을 밟기 위해 여길 찾은 건가?” 그 남자는 아주 느긋하게 걸으며 로일의 머리 속을 훑어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로일은 자신의 말에 거짓이 없도록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이런 말을 하면 언제나 무시당하곤 하지만, 부디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까지 검술로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제가 검술을 제대로 쓰기 시작하면, 다들 저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제 실력을 완전히 숨기고 살아야 할 지, 이 실력을 써먹어야 할지, 써먹는다면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막강한 힘은 선한 목적으로 쓰이기 보다 악한 쪽에 쓰이기 마련이지. 내가 자네를 여기에서 만난 걸 우연이라고 지나치기가 힘들군. 그럼 내가 그 길을 인도해 보겠네. 자네는 지금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했는데, 한 번의 패배가 곧 죽음인 용병들 중에는 그런 이들이 많아. 길을 인도하게 전에 자네의 실력을 알 필요가 있겠어.” 그는 나무를 고정시키기 위해 박아놓은 말뚝을 마치 버터에 박힌 칼을 뽑든 쉽게 뽑았다. 로일은 굵은 나무를 두 손에 쥐는 일련의 부드러운 동작을 보며 절로 긴장했다. 단순히 남의 말 잘 들어주는 인자한 남자가 아니었다. “당신은 드래곤 기사단과 어떤 관계입니까?” 로일은 갑자기 궁금해져 물었다. “기사단의 캡틴 마치와 친구지. 며칠 신세 지려고 와 있었다네.” 로일은 그와 똑같이 말뚝을 하나 뽑아 그의 앞에 섰다. “두 가지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러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메이루밀. 다른 질문은?” “언뜻 봐도 당신은 지금까지 제가 꺾은 이들과 다릅니다. 당신을 이기면 전 어느정도 수준입니까?” “나 ㄴ이미 전장에서 은퇴했네. 그런 걸 물어봐야 난 대답할 수가 없어.”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무 막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젊은이가 먼저 시작하게.” 로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즉시 나무 막대를 휘둘렀다. 메이루밀은 머리를 젖혀 첫 번째 공격을 피하고 두 번째로 날아오는 공격을 나무막대로 막았다. 짧은 두 번의 격돌이었으나 로일은 적잖이 놀랐다. 근 6개월 동안 이 두번째 공격까지 막은 이는 한 명도 없었는데, 그 남자는 너무나도 쉽게 막아냈기 대문이었다. “적당히 맞아주고 아프다고 끝낼 검이 아니군. 이런 나무라도 맞으면 누구 하나 죽이겠어.” 은근히 도발적인 그 말에 로일은 두 손으로 나무 막대기를 꽉 쥐었다. 그러나 중년의 검사는 여전히 느긋하게 막대를 들어올리더니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한 대 치도록 하지. 아프지는 않을 걸세.” 로일은 속에서 울컥하고 분노가 치솟았다. 여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갑자기 그 생각이 말끔히 지워져 버렸다. 메이루밀은 흙 묻은 말뚝을 스윽 밀었다. 그것은 피할 필요 조차 없는 약해 빠진 공격이었다. 로일은 몸을 옆으로 휙 돌린 후 나무를 밑에서 위로 올려 쳤다. 바람 소리가 귀청을 울리며 흙먼지가 솟아 올랐다. 순간적이었으나, 그것은 상대를 죽이고자 마음 먹은 공격 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나무를 내밀고 있는 메이루밀은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고, 로일의 가슴에는 말뚝이 닿아 있었다. 로일은 검을 휘드른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이 공격을 허용해 온몸에 힘이 다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방금 건 아주 인상적인 공격이었네. 스치기라도 했으면 뼈가 부러졌을 거야.” 메이루밀은 나무 말뚝을 도로 있던 곳에 꽂아놓았다. 로일은 휘두른 나무를 그대로 늘어뜨린 채로 물었다. “어떻게......? 당신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있는 곳을 쳣죠. 그런데 왜 빗나갔습니까? 제 눈아 착시라도 일으킨 겁니까?” 그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한 수 접고 싸워준 쪽은 로일이 아니었다. “자네는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네. 자네는 내가 있는 곳을 친게 아니라, 잇어야 할 곳을 친거야. 빗나간 게 아니지.” “...... 무슨 뜻입니까?” “상대방이 어디로 피할지, 어떻게 공격할지 눈에 보이지 않는가 자네는? 아니, 모를 거야. 모르기 때문에 재능이지. 그건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자네가 굳이 알 필요는 없어. 내가 자네 스승은 아니니까. 설명해 주지. 나는 간단한 속임수를 썼네. 내가 왼쪽으로 피할 거라고 암시를 준 거고, 자내는 순식간에 그 암시를 읽더니 그 자리를 친 거야.” 로일은 한참 동안 그의 말을 되새겨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겟습니다.” “말햇듯, 알 필요는 없느ㅔ. 자네에게 그 해답을 줄 사람을 알고 있네. 따라오게나. 추천서를 하나 써줄 테니 그걸 들고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을 찾아가게.” 그는 편지를 하나 간단히 써서 밀랍으로 봉한 후 로일에게 주었다. 봉투에는 ‘퀘이언 간트에게, 옛 친구 메이루밀이.’ 라고 써 있었다. 로일은 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가 만나야 할 사람인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 데라둘 마차가 도착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잘 가게. 젊은 친구. 몇 년 후 다시 만날 때, 어느 정도 성장해 있을지 기대 하고 있겠네.” 아란티아로 향하는 한달 간의 여행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메이루밀과 겨룬 그 단 한번의 결투는 그가 지금까지 했던 수십번의 싸움을 모두 합친 것보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가 추천한 퀘이언 간트라는 사람은 어느 정도 일까?” 로일이 내민 편지는 아란티아의 모든 성문을 자동으로 통과해주는 허가서가 되었다. 울프 기사단 역시 까다롭기는 다른 유명한 기사단 못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행색이 초라한 검사라고 문전박대 하지는 않았다. 문을 지키는 경비는, 경계하되 찾아온 손님을 반드시 대기실로 안내해주는 친절함과 여유까지 보였다. “기다리십시오. 담당자를 모셔오겠소.” 잠시 후 대기실을 찾아온 기사수행원에게 그 편지를 내주자, 허겁지겁 대기실을 나갔고, 보통은 반나절이 걸리는 서류 작업이 안 시간도 안되어 통과되었다. 그는 아란티아의 여왕 다음으로 만나기 힘든 여왕의 수호 기사인 케ㅜ이언 간트를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퀘이언 역시 메이루밀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로일은 메이루밀과 만난 이야기를 상세히 해주었다. 퀘이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편지에는 자네를 울프 기사단에 넣어주라는 추천서가 들어있었네. 그러기 위해 온 거라고 생각하네만, 혹시 모르니 묻지. 자네 의향으 ㄴ어떤가?” “이 곳은 제가 최선을 다 해도 되는 곳입니까?” 로일은 조심스레 물었다. 당장 간방지다고 소리치며 쫓아낸다면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해야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그러나 퀘이든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메이루밀이 추천할 정도라면, 글쎄, 아직은 아닐 지도 몰라.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은퇴하고 새로운 기사로 물갈이를 하는 시기라서. 하지만 곧 자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걸세.” 그는 손을 내밀었고, 로일은 얼결에 그 손을 맞잡았다. “울프 기사단에 온 걸 환영하네.” 그는 처음으로 로일이 있을 자리를 마련해준 사람이고, 전력을 다해도 이기지 못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이후 처음으로 스승이라고 부른 사람이었다. 그는 금방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울프 기사단에 있는 기사들은 로일의 막강한 실력을 보고 호감을 느낄지언정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햇다. 그들은 이미 퀘이언의 검을 보고 배운 기사들이었던 터라 로일의 검은 터무니 없이 강한 수준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라틸다는 강둑 옆에 마차를 세웠다. 안나는 불을 피워 차를 끓였고, 라틸다는 로저의 상태를 보러 마차 않으로 들어갔다. 안나는 피곤한 눈으로 주전자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로일에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꿈 이야기를 하시던가요?” “하시더군요.” “그럼 당신은 정말 우릴 습격한 게 악몽 속의검은 기사라고 생각하세요?” 로일은 길게 생각지 않고 대답했다. “예.” 안나는 피식 웃었다. “당신이 아가씨의 더 깊은 사정을 알게 된다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 그들은 라이온 기사단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해야 하겠지만, 우선 전 라틸다의 말을 믿겠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아가씨의 옆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잠시 후 로저의 짧은 간호를 마친 라틸다가 모닥불 곁으로 왔다. “힘들어 하고 있지만, 오늘밤이 고비라는 절망적인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어.” 라틸다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안심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녀의 표정은 모닥불 빛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웠다. 안나는 말없이 찻잔을 꺼내 셋의 앞에 내려다 놓고 향기 좋은 차를 따랐다. “잠이 잘 안 오는 차에요. 주무실 생각이 있다면 마시지 않는게 좋아요.” 라틸다는 농담조로 말을 꺼냈다. “그런 거라면 당신이 마시지 않아야겠습니다. 저는 경호원으로써 당연히 깨어있어야겟지만,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로일도 농담처럼 말했으나 그녀는 굳은 인상으로 차를 마셨다. “아까 말 하지 않았나요? 난 자고 싶지 않아요.” “언제까지나 깨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겠죠.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자고 싶지는 않아요. 안나, 너는 조금 자두렴. 피곤해 보이는구나.” 반즘은 잠의 세계로 넘어간 안나는 멍하니 차를 마시다가 뒤늦게 놀라며 반응했다. “아닙니다. 제가 마차를 몰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자다뇨?” “그래 맞아. 어쩌면 나중에는 네가 마차르 ㄹ몰아야 할지도 몰라. 그러니 지금 자 둬. 나중에 교대해 주렴. 둘다 깨어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니?” 라틸다는 편안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안나는 몇 번이나 더 사양하다가 결국 강압에 가까운 권유로 모닥불 옆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좋은 애에요. 가끔 지나치게 형식을 따지지만 않으면 더 좋겠지만.” 그녀는 잠든 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계약적인 관계로만 보이지는 않는군요.” “어렸을 때는 더 친했어요. 서로 이름을 불렀죠. 지금도 가끔 이름을 부르긴 하지만. 내가 시집 갈 나이가 되니까 저 애가 먼저 신부 수업을 위한답시고 조신하게 행동하기 시작한 거죠. 원래는 둘다 장난을 좋아하고 이보다는 편한 관계였는데.” “그러고 보니 그 나이가 되도록 미혼이신가 보군요. 이상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귀족 여인들은 보통 스무 살 정도에 결혼 하거든요.” “맞아요. 제가 사교꼐에서 만났던 또래 중에 아직도 혼자인 사람은 저뿐이죠. 모두 열 일곱이네 여덟에 같은 수준에 속하는 가문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애 낳고 살고 있죠. 다들 그다지 행복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녀는 감정 없이 말을 이었다. “특별히 결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예전의 아버님은 제 결혼을 인생의 커다란 목표로 삼았었지만 지금은 별로 관심도 없죠.” “좋아하는 남자가 없나 보군요.” “좋아하는 남자라........ 당신은 인생을 자유롭게 사는 분이니 이런 걸 이해 못하겟지만, 좋아하는 살마이 있는 것과 결혼하고 싶은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에요.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 기분이야 당사자가 아니니 잘 모르겠지만, 그 사정은 잘 압니다. 제가 아는 분은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데도 주어진 숙명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는 분도 계시거든요.“ “당신은 어떤가요?” “저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사랑인지 우정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혼이니 뭐니 하는 진지한 얘기를 할 처지로는 안돼요.” 로일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는 잣니의 속내를 모두 털어내 버릴 것 같아 얼른 뒷말을 얼버무렸다. “진짜 사랑을 알고 결혼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겟어요? 하지만 당신 같은 남자를 남편으로 두는 여자는 아주 행복할 거에요.” 라틸다는 그의 수줍은 표정을 바라보며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만난 지 반나절도 안 되는 남자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것 아닙니까?” 로일은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아니 여자의 육감이에요.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직 저에 대해 아는게 없어요. 진자 저를 알게 되면 당신도 저를 실어하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평범한 용병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요? 그럼 다른 걸 묻죠. 노르만트에는 왜 가는 거죠?” “친구들을 만나러 갑니다. 그곳에서 합류하기로 했죠.” “아까 말한 그 친구들인가요? 같이 여행하나 보군요. 부럽네요. 어떤 여행인가요?” “거기까지 말슴 드리긴 조금 곤란하군요.” “아 미안해요. 너무 꼬치꼬치 캐물었군요. 그냥 졸려서 계속 얘기할 거리가 팰요했어요. 아시잔하요. 졸리면서도 못 자는 상태. 자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정신 없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상태. 제가 지금딱 그꼴이에요. 이해해 주리라 믿어요.” “그보다 조금이라도 잠을 보충하는 건 어때요? 많이 피곤할 테니까 꿈도 안 꾸고 잘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조금 이따 깨워 드리죠.” “내 상태는 내가 알아요. 아무리 피곤해도 악몽이 절대 피하기자 않는 순간이란게 있죠. 지금이 그래요. 그러니 지금은 잠들면 안되요.” 며칠 째 잠들지 못한 데다가 저녁에 마신 술기운까지 올라 충혈된 눈동자가 붉은 불빛에 비춰 더욱 붉어 보였다. 로일은 그녀의 늘어진 시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당신의 걱정이 검은 기사라면, 이런 게 도움이 될 지 모르겠지만, 그 검은 기사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엳리겠습니다. 음 어두워서 잘 보이려나?” “뭘 보여주실 건가요?” 라틸다는 졸린 눈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당신의 경호원을 살해하고 당신의 꿈 속에 나타나 당신에게 겁을 주는 존재보다 더 강한 존재가 옆에 있다면 안심하지 않을까요? 제 악몽은 실체가 없으며 뭘 두려워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지만, 당신의 악몽은 대상이 뚜렷하잖아요. 그러니 그 존재를 막으면 당신은 악몽을 꾸지 않아요.” 로일은 자신 없는 말투로 은근히 확신하고 있었다. 라틸다는 그의 말을 믿기 보다 그가 뭘 보여줄 지가 더 궁금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당신의 어떤 것을 보면 검은 기사를 잊게 될지 알고 싶군요.” 로일은 기사가 의례적으로 보이는 형식을 좇아 가슴에 손을 얹어 고개를 숙인 후 검을 뽑았다. 라틸다는 검이 뽑히는 금속성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불빛이 없으면 안 보이니가 더 떨어질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겁니다. 믿으십시오.” 그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더욱 세개 끌어안았다. “지금부터 세 가지 동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김 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난 검수렝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그래도 상관 없어요. 검술은 몰라도 안심시킬만한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첫 번재 동작은 검술의 가장 기본 동작입니다. 어떤 검사든 이것만 제대로 습득하면 불필요한 동작없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일은 크게 숨을 몰아 쉬더니 들어올린 검을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검을 모르는 라틸다가 보기에도 깔끔하고 절제된 동작이었다. 그녀는 작게 박수를 쳤다. “멋지군요.” 로일은 답례의 뜻으로 고개를살짝 끄덕였다. “두 번재 동작은 앞의 것과 같지만. 이것을 막을 수 있다면 그는 상당한 수준의 검사라고 자부해도 좋습니다. 전 어렸으 ㄹ때 오직 이 기술 하나 만으로 저를 공격하는 모든 사냥꾼들을 꺾었습니다.” 로일은 검을 크게 치켜들더니 같은 방식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바람이 갈라지듯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게 그의 검이 사라지다시피 밑으로 툭 떨어졌다. 라틸다는 반사적으로 놀라 뒤로 몸을 약간 젖혔다. 그녀는 눈만 똥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동작은 지금까지 제 친구와 마스터, 그리고 마스터를 소개시켜 주신 어떤 분 외에는 누구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 검은 기사도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목소리에 변함은 없었으나, 라틸다는 그으 ㅣ얼굴에 묻어있는 희미한 살기에 입을 다물었다. 로일은 두 번재 동작으로 내리친 검을 그대로 위로 올려 쳤다. 밑에서 치솟아 올라온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모닥불을 흔들었다. 칼을 휘두르기 전과 휘두른 후의 정지 동작 사이의 움직임을 그녀는 보지 못햇다. 또 두 번째 휘둘렀을 때와는 달리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아니 한 순간 주위를 맴도는 바람마저 멈춘 듯 정적이 어렸다. 로일이 칼을 꽂은 후 모닥불에 앉을 때까지 라틸다는 말을 잃었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겪어본 적 없는 묘한 광경이었다.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그녀는 바보 같은 질문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마법사른 보지 못했습니다.” “마법이 아니라면 더욱 신비하군요. 방금 그건 뭐였죠?” “악몽 속의 괴물도 사로 잡을 만한 검술입니다.” 로일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라틸다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그럴 만도 해요.”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그 검은 기사가 누구든 당신은 절 지켜줄 자신이 있나요?” “예” 로일은 대답햇다. “그럼 왜 진작 도와주지 않았나요?” 그녀의 메마른 눈동자에서 작은 눈물 방울이 흘러 내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럼 아무도 죽지 않았을 텐데.......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잣아들었다. 잠에 빠져드는 그녀를 향해 로일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로일은 사실 카모르트에 오고 싶지 않았다. 마스터가 일이 있다며 부를 대부터 그는 본능적으로 싫은 일을 시킬 거라고 직감햇다. “너희들 카모르트에 좀 다녀와야겟다.” 퀘이언이 햇빛 잘 드는 사무실로 하얀 늑대 다섯을 소환한 후 대뜸 말했다. “왜요?” 케랄드도 동물적인 본능으로 마스터가 싫은 일을 시킬 거라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퀘이언은 코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카모르트에서 사신이 왔다. 두 명의 백작이 왕을 무시하고 전쟁을 벌인다더군. 왕실으 ㅣ수호 가문인 샤이필드 공작이 죽은 후 왕이 힘을 잃은 틈을 타 급성장한 두 백작의 패권 다툼이지. 안타깝게도 왕은 둘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명령을 내릴 처지도 못 된다는군. 진압을 하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하지. 비밀리에 그 쪽 국왕을 만나 처리해야 할 일이니 소수 인원이 좋겠지? 폐하께서 너희들을 직접 지목하셧다. 다녀와라.” “파병입니까?” 아즈윈이 물었다. “그렇다.” “전통적으로 하얀 늑대들은 여왕을 수호하는 기사단이지, 다른 나라의 이권 다툼에 끼는 존재가 아니라고 들엇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나사면 오히려 지금까지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원군을 원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차라리 울프 기사단 전체를 이동시키시죠? 우린 여길 지키고.” 아즈윈이 자신의 뜻을 빙 돌려서 포현했다. “가기 싫으냐?” 퀘이언이 직접적으로 묻자, 아즈윈은 어깨만 으쓱했다. 로일이 그녀 대신 대답했다. “예 가기 싫어요.” 퀘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제로 시켜야겠구나.” 그는 벽에 걸린 보검을 내려 아즈윈에게 내밀었다. “이 검으로 내리는 명령은 곧 여왕을 대신하는 명령이다. 아즈윈을 캡틴으로 임명하며, 카모르트로 가서 그 나라 국왕에게 도움이 되고 오너라.” “오, 맙소사.” 보검으로 내리는 명령을 거부할 시에 처벌은 제명이었다. 퀘이언은 한 마디라도 거절 비슷한 말을 내뱉으면 규칙대로 하겠노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사색이 된 얼굴로 더듬 더듬 말했다. “카모르트는 가겠습니다. 마스터. 하지만 캡틴까지 하라시는 건 너무 가혹해요.” “좋다. 그럼 네가 캡틴의 권한으로 다른 녀석을 임명하거라.” “쉐이든은 우리 중 가장 믿음직스러우며 제가 가장 의지하는 기사입니다. 그에게 캡틴 자리를 넘기겠습니다.” 아즈윈이 보검을 불쑥 내밀자, 쉐이든도 당황하며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잠깐이지만 캡틴이 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를 제 인생에 있어 최고의 명예로 여기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부담스러운 직책입니다. 내란이 일어나고 있는 카모르트에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우리중 가장 전투 경험이 많은 게랄드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캡틴은 게랄드에게 넘기겠습니다.” 절대 자신의 페이스를 무너뜨리는 일 없는 게랄드 역시 보검의 힘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졌다.ㅣ 그는 보검을 멍청히 바라보더니 옆에 있는 다음 사람에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던멜이었다. 던멜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게랄드는 던멜의 옆에서 가기 싫음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로일의 가슴에 보검을 안겨주었다. “네가 해.” 로일은 거부하지 않고 보검을 뽑았다. “명령은 따르겠습니다, 마스터. 하지만 전 분명 가기 싫다고 말 했어요.”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너무 오래 여기 갇혀 지내왔어. 가끔은 외출도 해봐야지. 놀러 가는 셈 치거라.” 퀘이언은 여행 보내는 아버지처럼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를 보고 화를 낼 만큼 로일도 철 없진 않앗다. 그래도 아란티아의 사신과 함게 카모르트의국경을 넘을 때까지는 즐거운 편이었다. 마스터의 말대로 그것은 오랜만의 외출이엇다. 그러나 마차를 타고 넘은 언덕 뒤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얼굴을 가린 괴한들에게 습격 당했을 때부터 일이 서서히 꼬이기 시작했다. 열 명이나 당한 후에야 그들은 물러갔는데, 엉뚱하게 마차 않에 몸을 피해있던 카모르트의 사신이 화살에 맞아 죽어 있엇다. 너무 많은 숫자의 적들과 싸워 정신 없던 터라 그를 보호하는 것까진 신경 쓰지 못했다. “어쩌지?돌아갈까?” 캡틴으로서 로일이 모두의 의견을 물었다. “안돼.” 아즈윈이 단호히 반대하며 말했다. “이 놈들은 분명 우리가 카모르트로 못 오게 만들려는 누군가가 보냈어. 우리가 여기서 돌아가면 이건 그 놈의 뜻대로 움직이는 꼴이 되는 거지. 우린 계속 가야 해.” 로일은 지금도, 그 때 돌아가는 게 나앗다고 생각했다. 결국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칼까지 잃어버린 후에야 로일은 캡틴이라는 중책을 힘들어 했다. 다들 그의 괴로움을 알고 있었지만, 대신 캡틴을 넘겨받는다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어 돕지 못했다. 결국 로일은 그들을 인솔하지도 못하고 명령을 내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마스터가 알면 죽일 거야.” 로일은 퀘이언이 화낼 거라 생각하니 슬퍼졌다. 그와 같이 지내며 처음으로 로일은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 언제고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었다. 잃어버린 보검과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게 더 안타까웠다. 모닥불이 점점 약해질 무렵, 허기가 진 로일은 린다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다. 우유와 빵으로 배를 채우고 그는 잠시 주위를 살폇다. 이상한 조짐은 없었고, 풀벌레 소리 외에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안나는 풀밭에 누워 자고 있었고, 라틸다도 그 옆에 누웠지만 계속 불편해 하며 뒤척이고 있었다. 가끔 신음 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도 했다. 로일은 그녀를 자신의 다리에 눕혀주고 어깨를 도닥거려 주었다. 아즈윈이 가끔 해주면 기분 좋았던 그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금방 신음 소리를 멈추고 호흡을 편하게 했다. ‘노르만트에서 모두와 만나면 캡틴을 그만둔다고 확실히 말해야지. 누가 맡더라도 나보다는 나을 거야. 그리고 난 평소의 위치에 서서 최선을 다하겠어. 오기 싫었던 카모트르라해도 상관없어.’ 그는 다짐했다. 그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그녀는 불 타는 어둠의 광장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반복되는 악몽의 첫 머리였다. 그제야 그녀는 로일이 안심시켜 주는 말에 속아 마차 옆 모닥불 앞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자세로 얼마나 잠들었는지도 계산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또렷하게 현재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꿈은 더욱 무서웠다. 공포도 현실과 같았다. 달아날 수 없기에 현실보다 더욱 무섭기도했다. 로일을 탓하지는 앟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다. 그는 실제로 현실에서 그녀의 공포를 잊게 해주었다. 그러나 꿈 속의 공포 마저 없애주지는 못했다. 그의 검을 본 후 정말 악몽을 안 꿀 것 같았는데. 그녀는 모닥불 앞에 앉아있을 때처럼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것은 꿈이라고 속으로 외치며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사방에서 불 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모든 소리를 외면했다. 그러나 단 하나 외면할 수 없는 소리가 다가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말밥굽 소리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야. 저건 내게 아무 해도줄 수 없어.’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공포의 그림자가 그녀의 등을 덮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하늘 전체를 가득 메울 듯 긴 도끼를 든 검은 기사가 우뚝 서 있엇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달아났다. 결국 잡힐 걸 알면서도, 그녀는 계속 달렷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려 더 이상 걸음을 뗄 수 없을 때, 검은 기사가 불 타는 집 뒤에서 나타났다. 검은 기사만큼이나 검은 털을 휘날리는 말의 붉은 눈이 그녀를 태울 듯 노려보고 있엇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발 날 괴롭히지 마. 이제 그만해.’ 그녀의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검은 기사는 악몽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는 마지막 과정을 채우기 위해 도끼를 치켜들고 다가왔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말발굽 소리는 깊은 산의메아리처럼 중첩되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열 걸음을 채 남겨두지 않고 검은 기사의 말이 흥분하여 앞다리를 쳐들엇다. 검은 기사도 당황한 듯 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말은 라틸다에게 다가가길 거부하고 있었다. 어둠만 가득 차 있는 곳에 하얀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는 불 속에서도 한기를 느끼는 그녀의 등에 거친 털가죽이 덮였다. 그것은 아주 기분 좋은 따스함이었다. 그 동물은 크고 검은 눈동자로 도끼를 든 기사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옆에 섰다. 아주 거대하고 눈부시게 하얀 빛을 내는 늑대였다. 검은 기사는 몇 번이고 다가오려고 노력했지만 말은 끝내 거부했다. 늑대는 차분한 시선으로 검은 기사를 주시할 뿐, 공격하지도 않았고 으르렁 거리며 위헙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검은 기사도 말을 진정시킨 후 늑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곧 검은 기사는 말을 돌려 타는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늑대는 얌전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라틸다는 무섭기도 했지만, 그 신비한 따스함에 이끌려 늑대의 목을 끌어안았다. 늑대는 저항 없이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엿다. 둘은 차갑게 타는 불꽃의 한 가운데에서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끔찍한 악몽의한 귀퉁에였건만,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편안함을 느꼈다. 이대로 꿈이 끝나지 않길 바랄 정도로. 그래, 현실로 돌아가 악몽만큼이나 끔찍한 현실과 대면할 바에야.......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안나였다. 덜컹거리는 마차 객실 안에서 앞 좌석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로저였다. 커다란 늑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위가 눈부시게 밝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은 악몽을 안 꾸셨나 보군요.” 안나가 미소 지은 얼굴로 인사했다. “아, 안나. 잘 잤니?” “예, 로일 덕분에.” 그녀는 온몸에 붕대를 친친 감은 로저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나요, 로저?” “예, 모두 아가씨의 덕분입니다. 좋은 용병을 고용하셨더군요. 앓으면서도 그와 안나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녀는 아직도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멍하니 밖을 내다 보았다. 마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력으로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차는 누가 모는 거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몰겠죠.“ 안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로일이에요.” 그녀는 꿈 속에서 껴안았던 그 눈부시게 빛나는 늑대를 떠올렸다. “그럼 내가 자는 동안 옆에 있어준 사람은 너였니?” “예. 하지만 밤새도록 옆에 있어준 사람은 로일이에요.” “그러니?” 라틸다는 아직도 멍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며 안나가 내주는 물 주니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마차의 속도가 천천히 줄며 로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 보이는 도시가 노르만트인지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객실 창문으로 보이는 아침 햇살만큼이나 따뜻하게 들렷다. 그녀는 갑자기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그를 보면 멍청하게 웃어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자고 일어난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안나가 대신 대답했다. “일직선 길인데 굳이 멈출 필요는 없어요. 그냥 가세요.” “그냥 가려고 하는데, 앞에 왠 기사들이 몇 명 지키고 있군요. 그리고 우리 마차더러 세우라고 손짓하고 있어요.” 안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라틸다를 바라보았고. 라틸다도 긴장했다. 그러자 로저가 둘을 안심시켰다. “노르만트 근처를 지키는 왕실 기사단일 겁니다. 우릴 배웅하러 온 걸지도 모릅니다.” 라틸다는, 그래도 안심되지 않아 창문 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자고 일어난 눈으로 기사단이 들고 있는 깃발의 모양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얀 망토를 두른 것으로 미루어 적대적인 목적을 가진 기사단은 아닌 것 같았다. “로일, 기사단이 가지고있는 깃발의 모양이 보이나요?” “예, 음. 카모르트 각 귀족들의 문장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저 깃발의 문장은 검은 사자 백작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할까요? 안나와 로저는 전에 이 마차를 공격한 게 라이온 기사단이라고 했는데, 이번에 저들이 공격할까요?” “아니길 바래야죠.” 라틸다는 ㅊ아문 안으로 도로 머리를 집어넣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밤새 침착하고 매사에ㅐ 냉정하려 노력했던 안나는 금방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말은 쉽게 햇지만, 로저도 긴장되었는지 아픈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안나.” 그녀가 말했다. “네.” “거울.” “예?” “거울 달라고. 쟌스테인 백작의 딸이 자다 깬 얼굴로 뤼미에르 백작의 기사들을 만나야겠니?” 라틸다는 차갑게 말했다. 안나는 그제야 허둥지둥 거울과 빗, 간단한 화장도구를 꺼냈다. “로일, 마차를 더 천천히 몰아주겠어요?” 대답은 없었지만, 마차는 사람이 걸어가는 속도로 느려졌다. 그 사이 라틸다는 거울을 보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능숙하게 분을 바르고 눈썹을 살짝 세웠다. 안나는 그녀의 뒤에 앉아 빗질을 해줬다. 평소에 워낙 잘 손질되어 있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몇 번의 빗질만으로도 충분히 찰랑거리게 되었다. 곧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들이 마차를 완전히 세웠다. “이 마차는 누구를 태운 마차인가?” 강압적인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얼마 전 고용된 마부라 그리 잘 알지 못합니다. 원한다면 뒤에 가서 직접 나의 고용주를 만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용주의 이름도 모르면서 일하는 멍청한 마부라니, 누가 이 마차의 주인인지 참으로 궁금하군.” 말에서 내린 기사가 천천히 다가와 객실의 창문을 똑똑 두들겼다. “성함을 여쭤도 되겠소, 레이디?” 라틸다는 차가운 눈길로 기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의 이름부터 말하시오, 뤼미에르 백작의 기사. 그 잘난 이름이 내 마부에게 함부로 멍청하다고 말한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내가 판단하도록 하지.” 기사는 그녀의 독설에 깜짝 놀라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 기사는 그녀가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만한 귀족이 아닐 거라 판단하고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하얀 망토를 걸친 기사단의 리더가 백마에서 내려 다가왔다. 안나가 입을 가릴 만큼, 잘 생긴 금바의 기사가 빙그레 웃으며 라틸다에게 말했다. “누가 감히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에게 함부로 말을 하나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라틸다 위그 쟌스테인. 그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장미의 가시와도 같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라이온 기사단에게 또 다른 붉은 장미의 공격이기도 하겠군요.” “내게 검은 사자라는 이름을 함부로 내뱉지 말라고 오래 전부터 일러왔을 텐데요?”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분을 그 외의 이름으로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의외입니다. 노르만트까지 출타하신 쟌스테인 백작의 따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시다니...... 하지만 이런 꼴로 오신 걸 축복 드립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는 일단 공격해서 당신의 경비병들을 몰살시킨 후 오해였다고 보고했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신의 그 칼을 내 목에 대보시지 그러시오?” 라틸다는 지지 않고 으르렁댔다. “당신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어떤 기사가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당신에게 바친다고 나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언제고 당신의 혀가 당신을 파멸시키는 무기가 될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그 충고는 당신의 군주에게 가서 하시오, 기사 바딩. 그리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라이온 기사단이 수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거죠?” “이 충고는 기사로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한 선물입니다. 이미 당신은 장미를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 꽃을 바칠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아닌 다른 손님을 맞이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함이 아쉽군요.” 바딩은 느긋하게 미소지은 후 기사단에게 명령했다. “보내 드려라. 붉은 장미 백작의 따님께서 노르만트에 입성하신다.” 마차는 다시 움직였고, 내리막길을 약간 빠른 속력으로 이동했다. 노르만트로 들어가는 성문을 조금 남기고, 라틸다의 요청으로 로일은 다시 한 번 마차를 세웠다. “붉은 장미 백작의 따님이셨군요.” 로일이 말했다. “그래요. 바르다 위그 쟌스테인의 딸, 라틸다. 카모르트 영지의 5분의 1을 소유하고 권력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한 귀족의 핏줄이죠.”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로일의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에게 그게 어떤 의미로 비칠지, 이 말을 한 후와 이전이 어떻게 다르게 보일지 모르겠군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이름에 놀라 당신이 가버릴까봐 말하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미안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저와 당신의 계약 조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 눈에 당신은 여전히 친구가 없어 힘들어 하는 연약한 레이디로 보이는데요.” “내가요?” 라틸다의 검게 화장한 눈동자가 커졌다. “그래요.” “내가 어제 잠결에 그런 말이라도 했나요?” “안 그랬습니까? 아니, 최소한 비슷한 말은 한 걸로 기억합니다.” “하,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이 잘못 들었을 겁니다. 그럼 우리의 계약 관계는 여기에서 끝이겠죠? 고마워요. 언제고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찾아오면 제가 약속한 사례를 해 드리곘습니다. 안나, 마차를 몰거라.” 라틸다는 속내에도 없는 말을 해버리고 몸을 휙 돌렷다. 금방 그 말을 후회했으나 남에게 구걸해본 적 없는 그녀의무의식은 벌써 마차로 몸을 이끌었다. 그대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를 이 멋진 검사를 뒤에 두고...... 바보 같은 녀석, 어서 잘못 했다고 말해. 그리고 같이 가자고 부탁해 라틸다! “아직 제 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틸다.” 그 때 로일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제가 언제 손목을 허락한 적이 있나요?” “있든 말든 뭔 상관입니까?” 로일은 무안한 지 그녀의 손을 놓아주면서도 솔직히 말했다. 라틸다느느 재미있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무례한 말이군요.”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음,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슴해 보세요. 그 부탁을 들어드리곘습니다.” “무슨 거짓마...... 미안하지만 노르만트까지 바래다준 건 고마웠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부탁할 건 없습니다.” “잇을 거예요. 노르만트 내에서의경호라든가, 이야기를 해줄 친구라든가.” “제가 그런 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물론 이 곳은 뤼미에르 백작의 영지와 아주 가깝죠. 그러나 아버지와 뤼미에르 백작의 싸움이란, 서로의 명예를 드높여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벌이는 전쟁입니다.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일은 허다해도 직접적으로 영지를 공격하거나 서로의 혈육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죠.” 전쟁이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엇다. 심지어 싸울 장소까지 사전에 약속하는 전쟁인데, 백작의 딸인 자신이 수도에서 습격 당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괜한 오해를 당할 일이 없도록 그런 사고를 예방해주는 건 검은 사자 백작 쪽이었다. 이는 자신을 공격한 검은 기사들이 라이온 기사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노르만트는 오히려 바깥보다 안전해요. 돌아갈 때는 나중에 합류할 아버지와 같이 돌아갈 테니 이제 더 이상 경호원은 필요 없어요. 대화상대? 저기 있는 안나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죠?”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안나가 둘의 마싸움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라틸다가 짐짓 꾸짓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자, 안나는 얼른 객실 안으로 숨었다. 그녀는 끝까지 도도함을 잃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의 요구를 내게 강요하지 마세요. 당신이 뭘 원하는지 이제 알겠군요. 그렇다면 기사답게 당당하게 요구하십시오.” 로일은 정확하게 그녀의 바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로일과 더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먼저 부탁할 수는 없었다. 유치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버릴 수 없는 귀족으로의 자존심이었다. 무엇 보다 그녀는 절차 없는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로일은 부드럽게 웃으며 한 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럼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당신의 옆에 서서 좀 더 당신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녀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이런 부탁을 해줘서 너무나 고마웠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가 노르만트에 있는 동안 당신을 나의 수호기사로 임명합니다, 기사 로일.” “감사합니다, 레이디 라틸다.” 로일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노르만트로 안내하겠습니다.” “끄래요.” 그녀는 로일의, 다섯 걸음도 안 되는 짧은 에스코트를 받아들여 마차에 올랐다. 그것은 아주 오랜 만에 맛보는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떠난 이번 여행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13. 노르만트로 가는 지름길 카셀은 로일에 대한 모두의 서로 다른 평가를 정리해보았다. “로일은 내가 본 중 가장 검의센스가 뛰어난 녀석이야. 녀석과 검을 겨루면 마치 내 다음 행동을 들킨 것 같아서 언제나 녀석이 방어할 것을 감안하고 움직여야 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공격을 해야 하고, 방어를 할 때도 언제 검의 궤적이 바뀔지 몰라 방심할 수 없어. 녀석과 겨룬 후에는 몸보다는 머리가 피곤해져.” 아즈윈의 말이었다. 그녀는, 게랄드를 서로 장난 잘 치는 친구로, 쉐이든을 잘 따르는 오빠로, 로일의 경우는 애인이나 남동생, 심하게는 자식처럼 취급했다. 던멜은 아직 뭐라말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녀석은 이상할 정도로 보듬어주고 싶은 어린 아이 같았지. 뭐랄까, 동네마다 그런 애들 있지? 허구헌 날 애들한테 괴롭힘 당해서 흙 묻은 옷 입고 징징 짜는 애. 진짜로 우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첫인상은 딱 그거였어. 얼른 가서 위로해 주고 싶은 어린 아이. 모성애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애.” 그 말을 하며, 아즈윈은 가상의 로일을 앞에 새워놓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조금 달랐는데...... 언제 병들어 죽을지 모르는 환자 같은 모습이기도 했고, 너무 예리해서 닿는 것을 모조리 베어버릴 칼날 같은 모습이기도 했지. 극단적인 양면성, 내가 아는 로일의 모습은 그런 것이었지.” 쉐이든의 평가였다. 마차에 탄 이후 하늘 일 하나도 없이 짐칸에 누웠다가 뒹굴거리는 게랄드의평가가 어쩌면 제일 객관적이라 할 만 했다. “난 그냥 멍청한 녀석인 줄 알고 있었어. 하는 말마다 오해를 불러 일으키질 않나, 엉뚱한 짓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질 않나, 물건을 잘 잃어버리질 않나........ 하지만ㄱ ???을 뽑는 순간 녀석은 귀신으로 변해. 진짜 무서운 건 그런 검술을 쓸 때도 녀석의 표정은 평소의 멍청한 표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거야.” 카셀은 그 말을 듣자 더욱 로일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직 만나지 않은 기사에 대한 호기심은 거기에서 접고, 그는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해 보았다. 두 백작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국왕을 만나면 무슨 말으르 해야 하며,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그는 여러차례 아란티아의기사 예절을 쉐이든에게 물었고, 그 때마다 쉐이든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밤이 되어 노숙을 할 때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짧은 검술 강좌를 받기도 했다. 검에 대한 훈련은 게랄드가 시켜 주었는데, 진짜 검을 잘 쓰기 위한 훈련은 오랜 시간을 두고 다듬어야 하므로, 대신 ‘검을 아주 잘 쓰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포즈’ 만 가르쳐 주었다. 칼을 들고 걷는 방법과 검을 손에 얹어놓는 방법 등은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 카셀은 열심히 배웠다. 아즈윈은 그에게 춤추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춤은 아즈윈 외에는 누구도 출줄 몰랐으며 그것이 하얀 늑대가 가져야 할 기사소양은 아니므로, 굳이 배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카셀은 기꺼이 아즈윈의 손을 잡았다. “어 잘 추네?” 아즈윈은 금방 배우는 카셀에게 놀라며 말했다. “어렸을 때 여자애들 꼬시려고 아버지에게 배웠어. 하지만 아무도 나와 추려고 하지 않아 써먹질 못했지.” “그거 안 됐네.” 아즈윈은 카셀의 품 안에서 가볍게 몸을 한 바퀴 돌렷다. 그는 쓰러질 듯 넘어가는 그녀를 한 손으로 받아서 다시 일으켜 주었다. 허리를 젖히는 그녀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탄력이 있엇다. “어쩔수 없지. 인기가 없는 남자의 숙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카셀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 말은 이렇게 잘 추는 남자애를 알아보지 못한 그 여자애들이 안 됐다는 거야.” “어이쿠, 그거 아주 위로가 됩니다. 기사님” “그럼 좀 더 자신있게 춰봐.” 배울 필요 없는 춤이었으나, 카셀은 그녀와 춤 추는 시간이 너무 나도 행복했다. 다음날도 카셀은 마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기사도와 귀족 예절에 대한 강의를 받고, 마차에서 내려 쉴 때면 검을 그럴 듯하게 잡는 방법을 배웠다. 하얀 늑대들은 그의 열의에 감탄했다. 하지만 카셀에게 있어 그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기사에 관련된 책이라면 아버지 몰래 밀을 한 포대 팔아서라도 샀다. 다음날 아버지에게 들켜 죽도록 얻어 맞아도 밤새 읽은 그 책이 만족할 만한 내용이었다면 뿌듯해 하던 카셀이었다. 그는 오히려 이 마차 여행이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목적지가 가까워짐을 안타까워 했다. 갑자기 쉐이든이 마차를 세웠다. 아란티아의 행정 처리와 다른 나라 행정 처리의 차이점을 설명하던 그는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다. 던멜도 마차에서 내렸다. “왜 그래?” “화장실 가려고?” 카셀과 아즈윈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하지만 쉐이든은 대답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바닥에 나있는 자국에 손을 짚어 보았다. 말발굽이었는데, 보통 말보다 컸고, 패여 있는 자국도 깊었다. “이상한 것들이 여길 지나갔다.” 아즈윈은 팔짱만 끼고 나서지 않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거?” 쉐이든은 다시 몸을 일으켜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 없는 황폐한 평야를 둘러보았다. 이파리를 다 떨어뜨린 앙상한 고목만 언덕 위에 서서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 희미하긴 헀지만, 뭔가 타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났다. 쉐이든은 콧등을 찌푸렸다. “시체 태우는 냄새야. 멀지 않아.” “또 어디서 그 미친 백작 놈들의 군대가 전투라도 벌인 모양이지. 개입하려고? 좋은 생각이 아니야.” 게랄드가 귀찮은 듯 말했다.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냥 살펴만 보고 올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쉐이든은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 경사진 언덕 위에 있는 고목 나무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던멜과 카셀이 그 뒤를 따랐다. “떠나기 전에는 몰랐는데, 내가 살던 마을은 카모르트에서도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 곳을 벗어나니 내란의 피폐함이 가득했지. 난 전쟁에 환상을 품고 있었는데,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그런 일을 겪은 것에 이제는 치가 떨려. 가족들의 주검을 울면서 화장시키는 마을 사람들을 본 게 한 두 번이 아니야.” 카셀은 봐서 기분 좋을 리 없는 광경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말햇다. “여긴 마을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전쟁을 많이 치른 땅이라, 황폐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군.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풍경을 보게 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내가 멈춘 건 연기 때문이 아니야. 던멜은 그 이유를 알지?” 쉐이든은 중얼거리며 언덕 정상에 올랐다. “무슨 소리야?” “뭔가 아주 기분 나쁜 게 이 근처를 지나갓어. 그것도 아주 많이.” “어떤 이상한 거?” “최근 비 온 적이 있었나?” 쉐이든은 딴 소리를 햇다. “아니. 근 일주일 동안 한 방울도 안왔지. 원래 카모르트는이 시기에 비가 잘 안 와. 뭐, 좀 지나면 폭풍우가 자주 몰려오겠지만, 어쨌든 최근에는 안 왓어.” “비 떄문에 진창이 된 바닥을 말이 달리면 패인 자국이 생기지. 하지만 비도 안 오고 물 한 방울 없는 길에 패인 자국은 뭘까?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말발굽이 비정상적으로 커. 모양도 이상해. 말이 아닌 다른 커다란 짐승이 일부로 바닥을 할퀴면서 지나가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흔적이 있더군. 심상치 않아.” 고목 밑에 서자 언덕 아래에, 대충 세어봐도 오십 여 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엇다. 카셀은 시체를 보게 될 거라고 예상을 했는데도 그 숫자에 놀라 입을 막았다. 이것보다더 많은 시체가 깔린 벌판 한 가운데 반 나절 동안 누워있던 경험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런 끔찍한 광경에 내성이 생긴 건 아니었다. 생존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시체를 들어 불을 피워놓은 모닥불로 옮기고 있었다. 짐승 가죽 옷을 입은 남자였는데, 주문이라도 외우는 듯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체를 하나하나 들고 가는걸음도 몹시 무거워 보였다. 본인도 부상을 입은 듯 절룩거리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가끔 눈물을 닦기도 했다. 그의 옆에는 늑대가 두 마리 힘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역시 상처투성이였다. “도와드릴 일이 있소?” 쉐이든이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가죽 옷을 입은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허리에서 칼을 빼려 했다. 하지만 당황한 나머지, 뒤걸음 질을 치랴, 칼을 빼랴, 뺀 칼 휘두르랴, 여러 가지 행동을 동시에 시도하려는 바람에 넘어지고 말았다. “해칠 생각은 없소. 그냥 물어본 거요. 도와드릴 일 없소?” “없어! 당장 여기서 꺼져버려!” 그는 옷을 털며 일어나 욕을 내뱉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 이 많은 시첼들은 다 어떻게 된거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나는 이 근처를 주름잡는 늑대 도적단이다. 까불면 죽는 수가 있어.” 그는 최대한 험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도적이라면 뱃속 깊은 곳이 아릴 정도로 공포심이 박혀 있는 카셀이 보기에도 그 표정은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기사단에게 공격 받앗소? 누가 그런 거요?” 쉐이든은 점잖게 물었다. 도적은 흐느끼며 손을 내저었다. “날 내버려둬. 내 친구들이 다 죽었다구. 왜 괴롭히는 거야?” 쉐이든은 언덕을 내려갔다. 카셀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뒤를 따라갔고, 던멜은 그대로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말 없는 그 친구는 습관적으로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이런 거요?” 쉐이든은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비전문가인 카셀이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학살의 흔적이었다. 그 중 늑대의 시체도 많았는데, 목이 통째로 날아가거나 두 동강 난 조각도 ?ㅆ었다. 카셀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으려고 손을 올렷다가, 생존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도로 내렸다. 옆에 있는 늑대들은 낯선 사람을 보고 경계하고 있었으나 덤벼들거나 으르렁대지 않았다. 아무리 훈련된 늑대라지만 그건 마치 순한 애완용 개 같았다. “검은 기사였소.” 그 도적은 주저앉은 채로 말했다. 쉐이든은 그에게 물 주머니를 내주었다. 그는 한 모금 들이키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던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의 손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우린 그저께 아주 강한 기사를 만났소. 놈은 우리 늑대와 친구 서넛을 죽이고 달아났지. 바로 놈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했소. 그러다 그 녀석이 어제 다시 돌아왔소. 이름이 뭐였드라, 피오그래..... 어쩌고였는데.....” “이름은 넘어가시오. 그래서?” “어쟀든 그가 어떤 와인 상인의 마차를 타고 돌아왔소. 우린 복수를 하려고 했는데, 그는 터무니 없이 강한 검사를 데리고 온 거요. 그 남자는 와인 상인과 그 딸을 보호하려고 우리들을 아주 많아 죽였소. 난 세상에서 그렇게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처음 봤소. 보이지도 않았거든.” “그 자가 그런 거요?” “아니오. 그를 만난 건 어제였고, 동료들이 많이 희생되긴 했지만, 이번처럼 전멸된 건 아니었소.” 쉐이든은 뭔가 짐작하는 바가 있는지 얼른 물었다. “몇 살쯤 되는검사였소?” “모르겠소. 난 멀리 떨ㅇ져 있어서........ 글쎄, 스무 살 정도?” 그의 대답에 쉐이든은 카셀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셀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우린 두목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고, 두목은 우리 도적단이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그 자식을 죽여야 한다고 결정햇지. 그래서 모든 늑대와 부하들을 소환했소. 나도 물론 참가했고! 두목과 두목이 이끄는 늑대는 아주 강해서 어지간한 기사도 당해낼 수 없소. 와인 상인은 분명 스몰레이크 마을로 갓을 테니까 거길 공격하면 된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여기에 도달해서 마을을 어떻게 공격할까 작전을 짜고 있을 때, 기사들이 이동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린 거요.” 그는 그 때를 회상하기가 괴로운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사실 그 때 우린 도망갔어야 했소. 하지만 당시 우리는 모두 의욕에 가득 차 있었고, 이 정도 전력이면 기사단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요. 지나가는 검은 기사들을 보고 틀림없이 라이온 기사단이라고 생각하고 두목이 먼저 신호를 보냈소. 안 그렇소? 훈련된 늑대 서른 마리와 칼을 든 장정 육십 명이면 다섯 명이 아니라 열 다섯명 넘는 기사단인들 못 해치울까? 두목은 바로 저기 있는 고목에 서서 기사들을 불럿지. 그건 아주 간단한 유인 작전이었소. 언덕을 넘어올 때 이 병력으로 기습하면 문제 없다고 본 거지. 하지만 그 검은 기사들은 가던 길에서 멈추긴 했지만, 유인 작전에 말려들진 않았소. 그냥 그 중 하나가 두목 쪽으로 다가왔을 뿐이지. 정말이었소. 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오. 정말 한 명 뿐이었소.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두목이나 나나 친구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소. 그 기사가 타고 있는 말은 말이 아니었소. 말과 비슷한 어떤 동물이었던것 같아...... 음 나도 잘 모르겠소. 그 기사가 커다란 도끼를 휘둘렀고 두목이 죽었소. 우린 당황했지만 도망갈 생각은 없었소. 아직 무모함이 남아있던 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모두 덤벼들었지. 하지만 그 기사의 갑옷과 방패는 칼도 통하지 않았고, 그 검은 기사의 말은 늑대에게 물려도 아무렇지도 않았소. 마치 돌덩이와 싸우는 느낌이었소. 내가 밧줄을 던져 그 기사의 몸을 감았지. 우린 무장한 기사들고 싸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소. 그런 놈이야 말에서 끌어내리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 검은 기사는 내 밧줄을 잡더니 나를 밧줄 째 집어 던져버렸어. 어떻게 날아갔는지 기억나지도 않아. 깨어나 보니 내 친구들은 이렇게 죽어있더군. 반도 살지 못한 것 같소. 그리고 살아남은 늑대들은 이상하게도 저렇게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게 되었소. 이상한 일이야. 난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라이온 기사단이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였소?” “나도 모르겠소. 그냥...... 이상했어. 처음부터 그 기사 놈들은 이상했어. 갑옷을 입었지만, 그건 자기를 보호하려고 입은 게 아니라, 자기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입은 것 같아. 어쩌면 그 투구 안에는 우릴 벌 주러 내려온 죽음의사자가 숨어있던 걸지도 모르지.” 그는 이야기를 끝마치고 무릎을 끌어안더니 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주문 같은 말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얘기해줘서 고맙소. 도움이 필요하오? 혼자 하기에는 너무 많군.” “싫소! 내 친구들은 내가 모두 보내야 해.” 그는 강한 어조로 거절했다. 쉐이든은 굳이 싫다는 사람을억지로 돕지는 않았다. “그럼 한 가지 물읍시다. 노르만트로 가는 가장 빠른 깅리 어디요?” “동쪽으로 가면 강이 하나 있소. 그 강 옆에 나있는 길을 따라가면 금방이오.” 그 도적은 다시 일어나 죽은 늑대 한 마리를 어깨에 들처메며 말했다. “조심하시오. 그 검은 기사는 아직도 이 근처를 떠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고맙소.” 쉐이든은 짧게 인사하고 다시 언덕을 올라갔다. “어떻게 생각해?” 그는 뒤따라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카셀에게 말했다. “뭐가?” “어제 라이온 기사들이 말한 검은 기사 이야기와 저 도적이 말한 검은 기사. 물론 동일한 존재겠지?” “맞아 하지만..... 저사람 말대로 뭔가 이상해. 물론 정신 나간 도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겠지만.” “안 좋은 낌새가 보여. 관여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아, 그보다 아까 도적이 말한 ‘검술이 뛰어는 사람’은 왜?” “로일 같아.” “도적단의 습격을 받고 저항한 뛰어난 검사가 한 둘이겠어?” “로일은 상인의 부탁으로 노름나트로 간다고 했어. 시간 상으로 언제나 오늘 아침 이 근처를 지나갔을 거야. 그리고 그들이 와인 상인을 덮쳤는데, 그 안에서 수많은 도적과 늑대를 벤 검사가 있었다....... 우연이랄 것도 없어. 녀석은 우리보다 하루 앞서 갔고, 녀석은 가는 곳마다 사고를 일으키니까 그 사고는 그 녀석 거라고 해야 옳아.” 쉐이든은 마차 쪽으로 걸어가며 결론 지었다. 시체를 태우는 도적의 말대로 강이 나왔다. 강 옆에는 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마차가 지나가기에 딱 맞는 좁은 길이었다. 반대쪽에서 마차가 한 대 더 오기라도 하면 피해주기도 애매한 너비였다. 쉐이든이 해준 이야기를 듣더니, 아즈원은 눈쌀을 찡그리며 말했다. “도대체 그 검은 기사 이야기는 뭐야? 그리고 이 놈의 나라는 왜 뻑 하면 검은 갑옷이냐?” “론타몬의 익셀런 기사단이 검은 갑옷으로 아크랜드를 호령한 이후에 일부로 깃발을 검게 물들이거나 검은 값옷을 입는 기사들이 많이 늘었지. 아마 라이온 기사단 말고도 갑옷 검은 기사단은 많을거야. 뭐, 그래서 아란티아의 하얀 갑옷이 유난히 빛을 발하는 거겠지.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남자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정리가 안 돼. 쉐이든은? 알겠어? 앞의 ‘놀라운 실력의 기사’ 이야기랑 ‘검은 기사’ 이야기랑 고나련된 거야, 우연히 같이 일어난 거야?? “나도 모르겠다. 로일 만난 일이나 노르만트 입성 후에 여러 귀족들 상대할 작전을 짜느라 머리 아픈데, 이 일은 데체 뭔지......” 쉐이든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좋아. 내가 설명해 주지.” 게랄드가 잽싸게 나섰다. “내가 용병 단에 있을 때 얘기였어. 내동료 중에는 아주 실력 있는 놈들이 많았는데, 그중 제법 한다 하는 녀석들이 조직을 하나 만들었지. ‘우드라 나이트’ 라는 거였는데, 뭘 하기 위해 결성한 거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지나가는 기사나 용병 단을 습격하는 조직이야. 그러다 악명이 자자해지면 갑자기 해산하자는 거였어. 사람들은 소문 내기를 좋아하니까 그렇게만 하면 어느 순간 ㅅ라져 버린 우드라 나이트는 전설적인 악마의 조직으로 남게 되는 거야. 그 후 이러는 거지. ‘우리가 그 조직을 없앴다!’ 물론 그 조직을 직접 만든 장본인이므로 거짓말 지어내기도편하지 않겠어? 그명성으로 귀족이나 왕실에 고용되는 게 최종 목적이었는데..... 난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가입하지 않았아. 그리고 그런 엉뚱한 짓 하지 않아도 단 유명했으니까.” “정말 쓸데없는 짓 많이도 했다. 전에는 일 대 일로 누가 많이 해치우나 시합도 했다며? 사람 목숨을 뭘로 아는 건지.....” 아즈윈이 면박을 주었다. “어렷을 때 얘끼야, 어렸을 때! 지금은 안 그러는 거잖아.” 게랄드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런 종류는 아닌 거 같아. 무엇보다 그 많은 늑대들과 도적을 혼자서 죽였다잖아. 일단 그게 가능하긴 해?” 카셀이 물었다. “수자상의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무장한 기사라면 같은 기사가 아니고서는 상대하기 힘들지. 제대로 된 플레이트 메일로 중무장 햇다면 보통 도적 패들에게는 흠집 낼 무기도 없겠지. 얘기만들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도적들은 기사단과 제법 싸워봤던 것 같아. 그런 경험 있는 놈이 오십, 더군다나 기사를 두려워하지 안흔 짐승도 함께라면 힘들껄.” 게랄드는 열심히 설명한 후 또 끝에 변명을 붙였다. “아, 그렇다고 내가 힘들다는 건 아니야. 일반적으로 힘들다는거지. “아무도 뭐라고 안 그랬어.” 아즈윈이 또 한 마디 찔럿다. 놀랍게도 게랄드는 뒷통수만 긁적이고 맞서 싸우지 않았다. 쉐이든이 갑자기 말을 세웠다. 관성 때문에 아즈윈이 기우뚱하더니 마차 짐칸의 지붕 위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고양이처럼 즉시 균형을 잡고, 원래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카셀의옆에 소리 없이 착지한 후 한 손으로 카셀의 목을 감아 안전하게 몸을 고정시켰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가슴이 등에 밀착되자 그는 깜짝 놀랐다. “이번엔 또 왜 멈춰?” 아즈윈이 말했다. “또 그 말 발자국이 있어. 이 길을 지나간 모양이야.” 쉐이든은 마차 밑을 내려다보며 또박또박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것도 방금 전에.” “이거 슬슬 기분 나빠지는데? 그 검은 기사란 게 뭔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우리랑 가는 길이 같다?” 아즈윈도 쉐이든이 보는 곳을 봤지만, 뭘 보고 그렇게 금방 같은 말굽 자국이라고 알아내는지 신기할따름이었다. 쉐이든은 어제부터 있었던 일을 정리해보더니 말했다. “시간상으로 우리가 약간 뒤야.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어.” 아즈윈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우리한테서 도망치는거?” “그게 아니지. 만난 적도 없는 놈들이 왜 우릴 도망 다니겠어? 방향이 같은 거다.” “방향? 무슨 방향?”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이지. 어디겠어? 노르만트. 놈들은 수도로 향하고 있는 거다.” “흐음, 묘한 일일세. 대체 그 놈들은 뭐야? 우리랑 상관 있는 일이긴 해?” 아즈윈은 끌어안고 있던 카셀을 놔주고 턱을쓰다듬었다. 카셀은 아즈윈이 등에서 떨어지자 겨우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왜 카셀이 그러는지 몰라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은근히 순진한 그녀의 눈동자를 피해,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는 말했다. “이 나라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리랑 상관있는 일이야. 하지만 우리가 개입해야 할 일은 아니었으면 해. 아까 그 도적들의 시체들을 봐서 그런지 난 영 기분이 나빠.” “기분 좋고 나쁘고 간에......” 쉐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응시했다. 그는 모두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하자, 말을 이었다. “....... 피해 갈 타이밍은 놓친 것 같다.” “저거 굉장히 빠른데! 이쪽으로 오는거야? 우리한테?” 여전히 아늑한 짐칸을 벗어나지 않고 머리만 내민 게랄드가 물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우리 밖에 없는데, 좁은 길에서 이 쪽으로 오는 거면...... 우리한테 오는 거겠지.” 마치 날아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말이 꼬리 뒤로 일으키는 먼지는, 네 마리의 말이 전력 질주하는 마차가일으킨 먼지보다 더 많았다. 검은 갑주를 입힌 말에 검은 갑옷을 입은 덩치 큰 기사의 손에는 자루가 아주 긴 도끼가 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그 무기를 마차에 도달하기 직전에 두 손으로 옮겨 쥐더니, 말을 모느라 약간 엎드리고있던 상체를 쭉 폈다. 그 무기를 써본 적도 없고 심지어 들어 본 조차 없는 카셀이 보기에도 그것은 분명한 공격 직전의 자세였다. “엎드려.” 아즈윈이 카셀의 목덜미를 눌렀고,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둘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말이 마차의옆을 고속으로 지나가며 휘두른 거대한 할버드는 마차 뒤쪽의 짐칸을 긋고 지나갔다. 지지대가 부서진 마차의 짐칸은 성냐개비로 만든 나무 모형 마냥 주저앉았다. 짐칸 위에 타고 있던 던멜의 몸이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옆으로 몸을 피한 쉐이든이 다시 마차에 오르며 부서진 짐칸 쪽에 대고 소리쳤다. “게랄드, 괜찮아?” “안 괜찮아. 저 빌어먹을 자식, 겁도 없이! 죽었어.” 마차 바닥에 엎어져 도끼 날을 피했던 게랄드는, 자기 몸 위로 떨어진 국직한 나무의 부서진 파편을 번쩍 들어올려 옆으로 내던졌다. 마차를 지나간 검은 기사는 멀리서 말을 돌려 다시 마차 쪽으로 돌진했다. 쉐이든이 창을 들자, 짐칸에서 걸어 내려온 게랄드가 저지했다. “내가 한다.” 게랄드는 조금 흥분해 있었다. 그는 커다란 도끼를 치켜들고, 돌진해오는 말 앞에 우뚝 섰다. 마차를 부셔버린 그 힘앞에 그것은 너무 위험해 보였다. 아즈윈도 경고했다. “쩡면으로 맞서지 마. 저 자식, 세다.” “어이, 아즈윈. 지금 너 나보고 쪼잔하게 싸우라는 거냐?” 게랄드는 오히려 기세 좋게 외쳤다. 한 순간에 거리를 좁혀 달려 온 검은 기사는 마차를 부쉈던 그 힘으로 게랄드를 향해 할버드를 휘둘렀다. 동시에 게랄드도 치켜든 도끼를 내리쳣다. 보통 사람들은 들기 조차 힘든 두 쇳덩어리가 부딪히며 깜짝 놀라만한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 쪽의 무기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히 튀었다. 그리고 커다란 금속 조각이 공교롭게도 멍청히 구경하고 있는 카셀의 얼굴로 회전하며 날아들었다. 아즈윈이 팔을뻗어 날아오는 검은 쇳조각을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잡았다. “아.....!” 뒤늦게 놀란 카셀이 얼른 고개를 뒤로 뺐다. 날카로운 부분에 손바닥이 찢어졌으나, 아즈윈은 개의치 않고 상처 난 부분을 바지에 스윽 문지르기만 했다. “고마워.” 카셀은 얼른 말했지만, 아즈윈은 싸우는 광경을 보느라 대꾸하지 않았다. 게랄드를 지나쳐간 말이 몇 걸음 더 걷다가 뒤뚱거리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말의 목덜미에서 검붉은 피가 벌컥벌컥 흘러 나오고 있엇다. 그 거대한 말은 발작적으로 꿈틀댔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소리 없는 죽음은 오히려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죽는 것보다 끔찍해 보였다. 말 주인 조차 그 죽음을 신경 쓰지 않고 일어나 칼을 뽑았다. 그리고 또 성큼 성큼 게랄드를 향해 걸어왔다. “다짜고짜 덤벼는 놈이랑 굳이 대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누구냐, 넌?” 게랄드가 말했다. 검은 기사는 도저히 인간의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과연 그게 대꾸인지 그냥 내지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눈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틈새가 좁은 투구 안에서 새어나온 그 이상한 소리는 살아있는 존재의 목소리 같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게 할 만한 듣기 싫은 소음이 었다. 동물의 포효와도가깝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걸쭉흔 수프가 끓으면서 타는 소리였다. “너 이자식, 방금 욕 한거지?” 게랄드가 소리쳤고,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검은 기사의 칼이 예고도 없이 뻗어와 게랄드의 어깨를 찌르고 들어왔다. 게랄드는 피하면서 동시에 도끼를휘둘렀고, 상대도 그 묵직한 도끼날을 막아냈다. 둘은 잠깐 떨어져 상대를 노려보다가 금방 다시 달려들어격돌했다. “안 도와줘?” 카셀이 안타깝게 말햇다. 시합도 아닌데, 한 명에게 미룰 일이 아니었다. 숨돌릴 틈도 없이 벌어지는 엄청난 공방전에 카셀은 조마조마했다. “기다려봐. 저 흑기사 놈 좀 이상해.” 쉐이든이 말했다. “뭐가?” “저렇게 치열하게 싸우는데, 살기라든가 투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야?” “살아있는 놈 같지가 않아.” “뭐?” 둘의 무기가 부딪힐 때마다 살갗이 울릴 정도로 공기가 흔들렸다. 빗나간 칼이 케이크를 가르듯 바닥에 내리 꽂혔다가 금방 뽑혀 나와 다시 게랄드를 공격햇고, 또 게랄드는 그 터무니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공격을 손 쉽게 막았다. 계속 상대의 공격을 막기만 하던 게랄드는 짧은 기합과 함께 ㅅ검은 기사의 팔을 내리쳤다. 갑옷으로 무장한 팔이 잘려나갔고, 바닥에 떨어지며 빈 깡통 같은 소리를 냈다. 검은 기사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긴 했으나 고통스러워 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잘려나간 부분이 어디 있나 찾다가, 마차 옆에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그것은 싸우다가 단추 떨어졌다고 줍는 것만큼이나 넌센스였다. 게랄드는 이대로 달려들어 목이라도 날려야 하는지, 아니면 잠깐 기다렸다가 준비가 되면 다시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아프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는건지 망설엿다. 게다가 잘린 부분에서 피는 나지 않고 엉뚱하게도 굴뚝 옆구리가 터진 것처럼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다들 그 괴이한 광경을 멍청히 지켜보다가 카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결정을 내려달라는 요청이 담긴 눈빛이었다. 하지만 카셀도 이런 일이 어이 없긴 매 한가지라 뭐라 명령을 내리진 못했다. 떨어진 팔에는 아직 칼이 꽉 쥐어져 있었다. 검은 기사는 잘린 반대쪽 손으로 그 칼을 집었다. 그리고 몸을 돌리더니 또 게랄드에게 걸어왔다. 게랄드는 떫은 표정으로 도끼를 세웠다. 용병 생활을 시작하고 울프 기사단이 되었을 때를 통틀어 지금만큼싸우기 싫은 적은 처음이었다. 어디선가 쇠를 긁는 것 같은 나팔 소리가 들렷다. 어금니를 시리게 하는 듣기 싫으 ㄴ소음에 다들 목을 움츠렸다. 길이 아닌 평야쪽에 또 한명의 검은 기사가 말을 ㅁ타고 서 있었고, 가시가 불쑥불쑥 솟아 나있는 이상한 소라 모양의 나팔을 불고 있었다. 나팔의 구멍에서는 검은 기사의 잘린 팔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게랄드를 공격하려던 검은 기사는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공격을 중단하고 몸을 돌렸다. 도끼를 휘두르려다 멈칫 하던 게랄드는 어처구니가없어 황망히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고개를 젓거나 어깨만 으쓱했다. “보내 줘. 공격하지 않는 게 좋겟어.” 카셀을 쫓아가서 공격하려는 던멜을 저지했다. 아즈윈도 칼을 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의 말을 듣고 멈췄다. “왜? 저 자식이 저만 싸우고 싶을 때 싸운 다음에 가버리는데, 얌전히 보내주라고?” 게랄드는 도끼를 늘어뜨리고 외쳤다. “저걸 봐.” 카셀은 게랄드의 도끼에 목이 베여 죽은 말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찌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메마른 바닥을 적시고도, 남은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하지만 말 목에 한 뼘이나 벌어져 있던 상처는 어느새 아물어 있었다. 말은 조금 비틀거리더니 일어나 투레질을 했다. “안 죽었던 거야, 도로 살아난 거야?” 쉐이든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검은 기사는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마치 서커스 단원의 광대 같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팔을 든 검은 기사에게 달려갔다. “뭔가에 홀렸냐, 우리?“ 게랄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팔을 든 검은 기사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더니 말머리를 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잡거나 죽이는 게 더 좋지 않았어?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한 거야, 뭐야?” 게랄드는 여전히 아쉬워하며 그들이 사라진 쪽을 주시했다. 아직도 검은 잔영이 남아있는 듯 했다. “내 판단이 옳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갑자기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더라고.” 카셀이 말했다. “뭔데?” “모르는 길은 돌아가라고.” 아즈윈도 그의 말에 동의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 마스터도 그랬잖아. 아무리 약한 녀석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은 일단 피하랬지. 네가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 이상한 놈은 하여간 뭔가...... 대단히 이상했어.” 그들도 결국 정신 나간 듯 자기 동료의 시체를 불에 태우던 도적과 똑같은 말을 하고야 말았다. 조용히 있던 던멜이 다가와 수화로 모두에게 말햇다. 다들 그의 수화에 고개를 끄덕이자, 알아듣지 못한 카셀이 그가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아까 쉐이든이 한 말이랑 비슷해. 나도 같은 생각이고. 저 기사녀석, 살아있는 놈이 아니었대.” 아즈윈이 해석해 주었다. “그럼 그 기사가 유령이었다는 거야?” 카셀은 아무도 표현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어 버렸다. 점심을 먹기 위해 마차를 세운 곳에서 그들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조만간 노름나트에 도착하여 여독을 풀 수 있을 텐데 굳이 멈출 필요가 있겠냐고 게랄드가 말했으나, 쉐이든은 오히려 입성하면 쉴 시간이 없을 지도 모르니 쉴 수 있을 때에 쉬어두는 게 좋겠다고 대꾸했다. 카셀은 마른 빵으로 배를 채운 후 방금 끓인 차를 들고 강둑에 앉았다. 비가 오지 않아 수위가 낮아진 탓에 강바닥까지 보였다. 작은 물고기가 힘겹게 물살을 해치고 상류로 해엄쳐 올라가고 있었다. 게랄드가 베어버린 검은 기사의 잘린 팔을 보았는데, 금속 자체에서는 어떤 다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차갑고 불길한 기운은 남아 있었다. 그는 차를 비우고 잔을 풀밭에 내려 놓았다. 그리자가 그의 손등을 덮었다. 아즈윈이었다. “어쩐지 힘이 없는 거 같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옆에 앉았다. “무슨 소리야? 난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걸.” “그래, 그 팔의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래 보였지. 지금은 아니야. 무서워서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돼. 봤잖아. 좀 이상한 놈이긴 했지만, 게랄드가 이기는 거. 계산을 해 봐. 늑대를 수십 마리 ㅣ끌고 다니는 수십 명의 도적들을 꺾은 그 무지막지한 기사를 이긴 게 게랄드야. 네가 소유한 병력은 그런 게 다섯이지. 무서워하지 않아 도 돼.” “그런 거 아냐. 난 너희들을 병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ㄱ녀는 카셀의 말에 흐뭇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럼 뭐가 걱정이실까, 캡틴께서는?” “항상 날 캡틴이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아즈윈. 임시이고 내가 저지르느 일에 대한 대가로 이 임무를 맡는다고는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자리는 선물이나 다름 없어. 부담스러울 정도로 소중한 선물. 가끔 잠에서 개어났을 때 네가 옆에 누워있다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게랄드가 장난처럼 휘두르는 도끼가 내가 아는 모든 용병들의 검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 순간을 나는 소중히 여기고 있어. 하지만 난 하얀 늑대들이 아니야. 본의 아니게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그 사실을 망각하기도 했지만, 오늘 다시 한 번 깨달았어. 내가 지금까지 생존해낸 과정을 보고 너와 쉐이든, 케랄드는 날 캡틴으로 만들었지? 말을 잘 한다는 것에서 말이야. 하지만 특별히 내가 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검은 아예 쓰지 못하니, 검을 써야 할 상황이 오면 어떻게든 말로 해결하려고 노력 해왔지.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녀석을 봐. 한 마디 말도 없이 달려와 칼을 휘둘러 마차를 부셔버리는 놈이었어. 물론 세상에 그런 기사란 게 많지는 않겠지만, 모르는 일이잖아. 나 혼자 있었다면 난 그 놈에게 말을 걸 틈도 없이 죽었을 거야.” “능력을 한계를 느끼시나 보군요, 캡틴?” “아즈윈, 난 장난 하는 게 아니야.” “알아. 아니곘지. 카셀, 이렇게 생각해 봐.” 아즈윈은 그의 손을 잡아 당겨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녀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네가 혼자였을 때 만난 적들, 네가 혀를 굴려서 굴복시킨 적들을 생각해. 그들은 너보다 더 강했어. 네 말에 기ㅜ를 귀울이지 않았따면 틀림없이 널 죽였을 놈들만 만나왔지? 그런데 살아 남았잖아.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그들과 앞으로 만날 녀석들의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방금 봤잖아. 그 괴물 같은 기사는.......” “그 놈도 포함해. 그리고 한 가지 자꾸 빠뜨리는게 있는데, 너에게는 우리가 있어. 우리 중 단 한 명만 옆에 있으면 그런 놈들의 기습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 언제나 말했듯이 네가 우릴 배신하지 않으면 우린 절대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그리고 우린 널 말재간 때문에 캡틴으로 만든 게 아니라, 너의 배짱을 믿고 캡틴으로 만든 거야. 하얀 늑대들 네 명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네 뜻을 분명히 말했던 그 자신감을 잃어버리면 안돼. 캡틴 카셀이라는 그 이름만 기억해.” 카셀은 희미하게 웃었다. “위로해 줘서 고마워.” 아즈윈은 손을 놓았다. “고마워 하든 안 하든, 마음을 다잡는 건 너 스스로 할 일이야. 그런 것까지 내가 도울 수는 없지. 그보다 그 잘린 팔 같은건 들고 다니지마. 버려. 찝찝하게시리.” “혹시나 해서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럼 좀 숨겨 가지고 다니든가. 기념품도 아니고.....” “예. 그러겠습니다. 레이디 아즈윈.” 카셀은 잘린 기사의 팔을 내려놓다가, 아즈윈이 잡았던 손등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아즈윈의 손을 잡아당겻다. “피 나잖아!” “어, 그러네?” 아즈윈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카셀은 즉시 그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감싸주었다. “날 보호해 줘서 그런 거니 할 말 없지만, 자기 몸도 보살피지 않고 그러면 곤란해.” “이 정도 상처야 아무렇지도 앟아.” “금속에 베인 상처는 작아도 함부로 여기지 마. 이런 상처로 죽은 사람 많이 봤어.” 아즈윈은 재미있다는 양 웃었다. “아이쿠, 혼났내. 몇 년 만에 혼나본 거지?” 손수건의 매듭을 묶자, 그녀는 예쁜 정물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아즈윈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카셀이 물었다. “숙녀가말없이 사라질 때는 어디 가는지 묻지 않는 거야.” 아즈윈이 말했다. “아, 미안.” 카셀은 얼른 사과했다. 그녀는 웃으며 강에서 떨어진 곳으로 걸아갔다. 카셀을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금방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는 정말 걱정하고 있는 것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검은 갑옷 속에 검은 기사의 실체가 있는 건지 검은 연기만 가득 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자들이 과연 하얀 늑대가 노르만트로 향하는 것과 상관 없는 존재들일까? 카모르트로 오는 것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다 실패하더니, 결국 지원 세력을끊으려고 암살자들은 고디머 백작을 공격했다. 고디머 백작의 의견을 종합해 보자면, 커다란 세력을 가진 두 백작 중 하나가 그 암살을 사주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암살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 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검은 기사와 누가 사주했는지 모를 검은 복면을 쓴 암살자, 그리고 검은 사자 백작의 라이온 기사단. 연관성 없는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 붉은 장미 백작까지, 적은 넷이 되었고, 누가 진짜 적인지도 알 수 없다. 카셀은 노르만트로 향하는 게 왠지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즈윈은 볼일을 보고 바지를 올리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강한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여자를 훔쳐보는 음흉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녀는 벨트를 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둑 너머의 푸른 풀밭 너머로 말을 탄 검은 기사가 서 있었다. 마치 원래 있어야 할 배경처럼 너무나도 당연하게 검은 기사는 아즈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현실감 없는 존재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가 천천히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성급하게 뽑지는 않았다. 황량한 평야만 바라보다 나타는 풀밭이라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검은 기사가 서 있는 부분은 유독 풀이 생기를 잃어 축 처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단순한 눈의 착각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다. 그 흑기사는 확실히 존재만으로 기분 나쁘게 하는 기운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특히 쏘아보고 있는 상대방에게 그 영향력을 강하게 끼치는 것 같았다. 싸우기 좋아하는 게랄드가싸우길 망설였던 것처럼. 두 팔이 얌전히 붙어있는 걸 보니 게랄드와 싸운 놈은 아니었다. 아즈윈은 흑기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나 오래 대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생김새만 말이고, 말이라 할 수 없는 검은 기사의 전투마는 투레질을 하며 바닥을 앞발로 찍었다. 풀이 뜯겨져 주위로 흩어졌다. 달려와 아즈윈을 물어뜯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으나 기사는 고삐를 잡아 그 놈을 억제시키고 있었다. 검은 기사는 정확히 그녀를 향해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풀들이 옆으로 스르륵 갈라지며 기사와 아즈윈 사이에 뱀이 한 마리 지나갈만한 길이 저절로 생겼다. 바람도 없이 아즈윈의 옷자락이 펄럭였고, 커다란 동물이 입김을 뿜어댄 것 마냥 얼굴에 습기 많은후끈한 기운이 닿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눈은 검은 기사에게서 떼지 않았다. 치켜든 창으로 위협을 하지도 않았고, 다가오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좌우로 누웠던 풀들은 도로 원래대로 돌아갔다. 자연의 바람이 불어와 풀들을 훑었고, 잠깐 습기에 닿았던 그녀의얼굴도 차갑게 식혔다. 둘은 움직이지 않았고, 처음 거리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기사는 창을 든 반대쪽으로 안장 뒤에 있는 뭔가를 집어 아즈윈에게 던졌다. 그것은 그녀의 세 걸음 정도 앞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낸 후 옆으로 몇 바퀴 굴렀다. 투구보다 조금 큰 것이었는데, 풀밭을 붉게 물들이다 곧 구르는 걸 멈췄다. 그것은 늑대의 머리였다. 아즈윈은 늑대의 머리를 바라보는 잠깐 사이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가 검을 배우고 가출한 후 처음 만난 실전 상대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만큼으로도 보지 않는 악당이었다. 그의 이름은 버터 였는데, 귀여운 이름에서 도저히 연상되지 않는끔찍한 살인마였다.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죽이고 얼결에 상당한 현상금을 받을 때까지 그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저 어디 가면 검술을 배워볼 수 있을까, 어디 가면 선생님이 말한 대로 자기 한계를 발견할만한 여행이 될까 고민하며 산길을 걷던 중이었다. 듣기만 해도 담백한 이름의 그 악당은 아즈윈이 걸어오느 ㄴ길 앞에 방금 죽인 여자의머리를굴렸다. 내리막길을 따라 피를 뿌리며 떨어지는 둥근 물체를 보고 그녀는 잠깐 경직되었다. 처음으로 본 시체였고, 그 후로도 그것만큼 끔찍한 시체는 본 적이 없었다. 버터는 옷을 벗겨 가지고 놀던 머리 없는 여자의 시체를 옆으로 치우고 다음 희생자로 아즈윈을 겨냥했다. 한 손에는 도끼를,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는데, 집어 던진 도끼는 정확히 아즈윈의 머리를 향했다. 잠깐 멍하니 있던 그녀는 그 공격을 막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갑자기 분노가 치솟아 뒤도 가리지 않고 달려가 그를 공격했다. 그녀는 허벅지를 베이는 큰 상처를 어덩ㅆ지만 대신 버터의 배를 갈라버렸다. 그녀는 그의 쏟아지는 내장을 코 앞에서 바라보았지만, 언덕에서 굴러 내려온 여자의 머리만큼 잔인한 건 안이???다. 늑대의 머리를 바라본 순간 그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등골을 타고 올라온 차가운 뭔가에 몸을 절로 움츠렸고, 칼 손잡이에 올러놓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왜 하필 늑대였을까? 어차피 상대를 겁주기 위해서라면 사람의 머리가 낫지 않았을까? 그녀는 상대가 자신을 겁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한 거라고 처음에 생각했다. 그러다 쉐이든이 만난, 늑대들과 함게 전멸당한 도적 단의 이야기가떠올랐다. 이제 그 일은 검은 기사의 소행임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이 늑대의 머리는 그때 죽은 늑대의 것이었다. 갑자기 온 몸에 한기가 들었다. 그녀는 식은땀이 목 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검은 기사는 늑대의 머리를 던지기 전에 분명 아즈윈을 가리켰었다. 그것은 공격 자세도 아니었고, 실제로 어떤 공격도 없었다. 마법이었을까? 상대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도 마법이라면, 이것은 마법이었다. 그러나 아즈윈은 그것이 단순히 자신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늑대와 아즈윈........ 검은 기사는 창을 다시 거두어 들이고 말고삐를 당겨 옆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천천히 풀밭을 가로질러 멀지감치 사라져 버렸다. 아즈윈은 아직 뽑지도 않은 칼에서 손을 똈다. 카셀이 묶어준 손수건에 땀과피가 잔뜩 배어 있었다. 마스터 퀘이언과 겨룬 이래 이렇게 긴장한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바짝 마른 입안을 침으로 적셨다. 마차로 돌아오자 모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디서 잠이라도 한 숨 자고 왔......” 게랄드가 오자마자 대뜸 소리지르다 멈췄다. “너 왜 그래?못 볼거라도 봤나?” 쉐이든이 놀라 물었다. “왜? 내 얼굴이 이상해?” 아즈윈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핏기가 하나도 없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왜 이렇게 늦었어?” “늦다니? 잠깐 볼 일만 보고 온 건데.” “반 시간은 지났겟다. 어디 산책이라도 간 거라고 생각하고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너무 안 와서 막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어.” 아즈윈은 어이가 없어 뭐라 말을 잊지 못했다. 검은 기사와 마주쳤던 시간이 그렇게 길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쉐이든이 말한 대로 풀밭에 서 있던 시간이 반 시간이었다면, 그녀는 그 자에게 시간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녀는 모두를 모아놓고 방금 겪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들 믿을수 없어 했다. 게랄드는 오히려 화를 냈다. “죽여 버리지, 어울리지 않게왜 자제한 거야?” 항상 그의 말이라면 지지 않고 받아 치던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겠어. 공격은 커녕,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어. 그 순간 만큼은 내 자신이 아니었었던 것 같아.” 카셀은 그녀에게 물을 한 잔 내밀었고, 그녀는 고맙다고 말한 후 한 번에 들이켰다. “늑대 머리...... 그건 우리 하얀 늑대를 말한 걸까?” 쉐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럴 듯 하지만, 만난 적도 없는 그 놈들이 어떻게 우릴 알아” 게랄드가 눈쌀을 찌푸렸다. “마난ㄴ 적이 있건 없건 상관 없어. 놈들은 우릴 알고 있어.” 아즈윈이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노름나트로 가고 있는 거야.” 아즈윈이 적을 만나 솔직하게 도망가고 싶다고 말한 이후 하얀 늑대들은 놀라울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묵묵히 도끼를 쥐고 앞을 노려보고 있는 게랄드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천장이 내려앉은 마차의 짐칸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게랄드와 아즈윈은 먼 곳에 초점을 두고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 앉은 게 카셀이라 그는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쉐이든도 특별히 두 사람처럼 살기를 품지는 않았지만, 침묵만으로 모두의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던멜만 오직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이것이 진자 하얀 늑대들의 모습일지, 아니면 웃고 떠들던 처음의 하얀 늑대들이 진짜일지 카셀은 궁금했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얀 늑대들이라는 존재에 대해 정확히 이런 모습을 기대했었다. 옆에 다가가기도 힘들고 주위에 있는모든 이를 침묵하게 하는 파괴적인 힘과 카리스마, 그런대 막상 기대했던 모습을 그들이 보여주자, 카셀은 자신의기대가 틀렸던 때가 더 좋았다고 인정했다.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분위기에 못 이겨 카셀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문득 그는 처음 쉐이든을 만나 모두에게 둘러싸여 자신을 변명했던 여관 방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노르만트가 얼마 남지 ㅇ낳아서 하는 말인데......” 카셀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난 검은 기사 같은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 실제로 아즈윈이 싸워서 진 것도 아니잖아. 내 수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ㄱ이겟지. 하지만 게랄드가 이겼고, 난 더 이상 거기에는 관심 없어.” 다들 카셀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어떤 호응을 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쉐이든과는 아까 벌써 얘기해 뒀는데,노름나트에 들어가면 아마 이런 말할 시간이 없을 거야. 입성하는 순간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될 테니 비밀 얘기할 틈도 없을 거고. 그래서 미리 말해둬야 할 것 같아. 많은 말을 하고 싶고, 또 많은 이야기를 들어두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듣는다고 외울 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행동 지침을 하나 세워두고 싶어.” “이것만은 지키자, 같은거?” 쉐이든이 대꾸해 주었다. 카셀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대답 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그들의 시선은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바로 그런 거! 어떤 일이 터졌을 때, 너희들이 먼저 행동하면 내가 너희들을 좇을 것이소, 내가 먼저 행동하면 너희들이 나를 좇아 오도록 해. 그리고 검은 기사따위를 만났다고 갑자기 분위기 침울해지지 마. 앞으로 어떤 녀석을 만나든 상관 없어.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얀 늑대란 모드 ㄴ기사들에게 있어 현존하는 전설이란 말이야. 하지만 단지 전설 속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 씩씩거리다시피 말을 끝낸 카셀은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검은 기사의 잘린 팔을 휘두르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뜬금 없이 나타는 검은 기사 따위보다 너희가 더 강한 존재라는 걸 내게 보여줘.” 아즈윈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그거 보이지 말랬잖아.” 카셀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잘린 팔을 옆에 내려놓았다. “나중에 써먹을 지도 몰라.” “가보로 보관해라.” 아즈윈은 툴툴거렸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거 이상한 물건이야. 쉽게 버릴 수 없어. 봐. 이렇게 오랫 동안 햇빛에 노출 되었는데도 눈 속에서 꺼내온 것마냥 차가워.” 갑자기 또 조용해졌다. 카셀이 다시 뭔가 말하려 할 때 게랄드가 손을 내저었다. “좋아, 좋아. 네가 먼저 움직이면 우리가 따라가고,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네가따라온다! 기억해뒺.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그냥 맘대로 해도 된다는 뜻이겠네?” “캡틴이라 해도 의견을 대변하는 위치지, 명령하는 위치가 아니지 않아? 설사 너희들이 성급하게 일을 망친다 해도 그건 너희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난 그것을 따라 할 거야.” 카셀이 말하자, 그제야 아즈윈도 얼굴을 펴며 말햇다. “아마 일을 망친다면 게랄드가 망칠꺼야.” “아아, 아마 그럴 거야.” 게랄드는 아예 자신 있게 싱니해 버렸다. 그때 쉐이든이 모두에게 손짓했다. “이번에도 몇 명 오는군. 하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자들은 아니야.” 노르만트라고 생각되는 도시의 성곽이 보일 즈음에, 멀리서 하얀 망토를 걸친 기사 몇 명이 검은 사자의 깃발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캡틴?” 아즈윈이 그들의 접근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난 그래도 네 의견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라는 말은 하지 말고 대답해 줄래?” “음, 좋아.” “다음에 나를 엿 먹인 그 검은 기사 놈이 나타나면 말을 걸거나 견제만 해서 정체를 알아내야 할까, 아니면 그냥 공격해 버릴까?” 전투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카셀은 당연히, 네가 알아서 해, 라는 말로 대꾸할뻔 했다. 그는 잠시 생각햇다. 그녀는 이미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했음을 표정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그것만 고민했을 테니 해답이 나왔을때도 됐다. 그런데도 그녀는 카셀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엇다. “공격해. 그리고 일단 공격하면 반드시 이겨야 해.” 카셀은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허락해 주었다. “다른쪽 팔도 원하면 선물해주지.”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카셀은 그녀가 정말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얼른 거절했다. 백마를 튼 기사를 선두로 한 하얀 망토의 기사단은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서 완전히 멈추었다. 쉐이든도 마차를 세웠다. “아란티아에서 오셨소?” 백마를 탄 기사가 기운 차게 소리쳤다. “그럿소.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들이오?” 대답은 카셀이 했다. “우린 라이온 기사단에서 나온 사절단이오. 당신들은 하얀 늑대 들이????” 카셀은 딱 잘라 대답했다. “맞소.” 백마를 탄 기사는 손으로 다른 기사들을 제자리에 있게 하고 혼자서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무례하게 무리를 지어 마차를 에워쌋던 지난 번의 라이온 기사단과는 사뭇 다른 정중한 태도였다. “지금 백작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오. 우리에게 당신들을 호위할 영광을 주시겠소?” 기사는 투구를 벗으며 웃어 보였다. 무척 잘 생긴 금발의 청년이었는데, 그는 아즈윈에게 특별히 목례하는 예의도 보였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킥킥대고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도그는 동요하지 않고 근엄하고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카셀은 그가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첫인상을 단번에 잊어버렸다. 그리고 즉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전에 만난 검은 기사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던 터라 아예너 잘 만났다 하는 심정으로 그는 분노를 토해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그도, 카셀의 말에는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당신의 군주를 보러 온 게 아니오. 왜 당신이 우릴 호위 하겠다는 거요? 그게 영광인지 어떤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나는 그 영광을 라이온 기사단에 줄 생각은 없었소.” 그 기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고 애써 웃었지만, 설마 자신의 정중한 요청이 거절 당할 줄은 몰랐는지 말을 쉽게 잇지 못햇다. 예상치 못한 사태를 머리 속에서 정리한 라이온의 기사는 다시 정중한 제안을 이어갔다. “제 이름은 바딩입니다. 혹시 우리 쪽에 안좋은 감정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그 이유를 알면 앞으로 대하기에 편할 듯 하군요.” “물론 있소.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감정이니, 이 자리에서 말할 수는 없소.. 이 나라에 찾아온 목적은 당신의 국왕과 관련된 일이니 백작과는 상관 없소.” 카셀은 그에게 ‘당신 백작 부수러 왔다.’고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참았다. 쉐이든의말에 따르면, 이 곳을 찾은 건 자체가 기밀 사항이었다. 라이온 기사단이 여기 마중 나온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알고?그는 가급적 하얀 늑대들에 관한 정보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햇다. “개인적인 감정이라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럼 더더욱 만나보셔야 합니다. 제 군주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다른 느라에까지 전해져 있을 것이고, 당신들 역시 그 소문을 듣고 오해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 “오해?” “다른 나라에 살고 있으면 아무래도 정확한 소식을 듣기는 힘드니까요.” 카셀은 자신이 이 나라 사람이라 오해 같은 것 없이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을 하면, 눈앞의 기사가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지 궁금해졌다. 그 변명은 어떻게든 이요해 먹을 가치가 있는 약점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건 이 바딩이라는 기사와 겨룰 만큼 가벼운 소재가 아니었다. “좋소. 하지만 당신의 군주는 당신의 왕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겠소.” “좋습니다. 백작께서는 왕의 옆 자리에 계십니다.” 바딩은 당연하다는 듯 말한 후, 다른 기사들에게 호이ㅜ 포메이션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마차를 애워쌌다. 낡고 부서진 마차를 호위하기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기사들의 모습 이었다. 카셀은 이런 멋진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다는 게 솔직히 기뻤지만, 하얀 늑대들은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다. 바딩이라는 기사는 무언가 대단히 경계하며 주위를 살피느라 바빴다. 쉐이든은 조용히 그들의 위치를 파악한 후 카셀에게 말을 걸었다ㅣ. “카셀.” “응?” 카셀은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었으나 조용히 귀만 귀울였다. “이제부터는 너의 싸움이 될 거다. 칼을 쓰지 않는 전쟁에서 패하면, 아무리 훌륭한 검도 녹슬고 말아. 그리고 네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 그걸 잊으면, 우리 모두 위험해지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난 너를 베는 걸 선택하겠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한 번 했던 말이지만, 마지막 말에 카셀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꽉 쥐었다. 그러나 쉐이든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알아.” 카셀은 정말 쉐이든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대꾸했다. 아즈윈의 말 그대로 도적 단 오십을 벤 검은 기살ㄹ 꺾은 게 게랄드였고, 나머지는 모두 그와실력이 동일하다. 그것은 뒤늦게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하얀 늑대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잊지 않기 위해 그는 가만히 아란티아의 보검을 뽑았다. 한 치 정도 뽑힌 검은 칼날이 반짝였다. 그는 칼날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하얀 늑대란 존재가 녹슨 칼날이 될지 찬란히 빛나는 마법의 검이 될 지는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어설프게 팀을 이끄는 캡틴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쉐이든이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그뿐, 카셀을 겁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알아.” 그는 한 번더 반복하여 중얼거렸다. 칼날에 배인 붉은 피가 바지 위에 떨어졌다. 그러나 카셀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노르만트가 가까워졌다. 14. 검은 사자 백작 경험해본 가장 큰 도시라 봐야 고디머 백작의 영지 코홀룬인 카셀에게 노르만트는 정말 커다란 도시였다. 그 동안 쫓기듯이 다녔더너 그는 처음으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 근사한 도시 한 가운데를 관통하며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아란티아의큰 도시도이렇게 멋질까 궁금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옆에 바딩이 있어 묻지 못했다. “그 녀석, 먼저 도착했을까?” 아즈윈이 ‘로일’ 이라는 이름은 언급하지 않고 던멜에 게 물었다. 던멜은 찾고 있다는뜻의 수화를 했다. “만약 먼저 와 있다면 지금쯤 우리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자고 있거나 어디에 갇혀 있지 않는 한 알아볼 거야.” 게랄드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라이온 기사단의 호위를 받는 그들을 구경하러 나와 있었다. 물론 그들이 하얀 늑대들인지는 모르고 보는 듯 했다. 수근거리는 소리 중에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기사단을 끌고 오는 거야.’ 라는 말도 있었다. 아즈윈을 뺀 나머지는 로일이 어디에 있는 지 걱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게랄드는 귀찮아서 먼저 집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가 아즈윈에게 혼나기도 했다. “걱정 마. 그 녀석이라면 벌써 성에 도착해 다리 뻗고 자고 있을 지도 몰라.” 쉐이든이 아즈윈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말햇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불길한 생각이 드는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불안해. 내가 있어 줘야 해.” “하얀 늑대들 조차 두려워한다는 기사를 왜 걱정해?” 카셀이 물었다. “걔는 가끔 부드럽게 안아주지 않으면 정서 불안에 빠지는 녀석이거든. 어쩌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을지도 몰라.” 아즈윈은 진지하게 말했지만, 카셀은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싶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도 충분히 카셀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알아.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여하튼 그런 게 있어. 게다가 녀석은 오지랖이 넓어서 아무 일에나 끼어들거든. 우리 일도 바쁜데 상인 도와주겠다고 혼자 훌쩍 떠나버리는 꼴 좀 보라지.” 카모르트 국왕의 성은 노르만트 제일 북쪽에 있었다. 네 개의 터렛이 탑처럼 길게 뻗은 둥근 원통 모양의 성이었는데, 깊게 판 해자가 주위를 둘러치고 있었다. 어지간한 적의 공격도 하나 밖에 없는 도개교만 닫아버리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도록 튼튼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카셀은 문득 팔콘과 메오릭스의 익셀런 기사단과 카모르트 왕실 기사단 간의 명예를 두고 벌였을 그 승부를 떠올렷다. 바로 이 다리였다. 그는 괜한 전율에 주먹을 꽉 쥐었다. 카셀은 성에 들어가기 전 라이온의 호위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기사 바딩.” “왜 그러시오, 캡틴 울프?” “노르만트에는 우리의 동료가 한 명 먼저 당도해 있을 거요. 혹시 찾아오지 않았소?” “하얀 늑대들이 또 있었소? 흐음, 하지만 그런 소식은 못 들었소. 오늘 새벽부터 지키고 있었는데, 몇몇 상인과 다른 손님 외에 공식적으로 노르만트에 들어온 사람 중에 하얀 늑대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없었소.” “겉으로 보기에 그냥 여행자일 수도 있지 않소?” “물론 비밀리에 신분을 속이고 장사꾼인 양 들어온다면 우리로선 알기 어렵지 않겟소? 게다가 혼자서 우리 앞을 지나간 여행자는 없었소.” “그렇군요.” 카셀은 실망하며 대꾸했다. 그는 로일이라는 하얀 늑대들의 마지막 기사를 빨리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카셀보다 더 실망한 사람은 아즈윈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팔짱만 끼고 먼 곳만 응시했다. 바딩은 다른 기사들에게 혹시 자기가 모르는 사이 특별한 신분으로 노름난트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냐고 물엇다. 그 중 하나가 성문지기의 명단을 봤다며 바딩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여러 귀한 손님들이 와서다른 때보다 신분 검사를 철저히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괄목할 만한 신분으로 출입한 사람도 없었고, 신분 증명 없이 들어온 사람도 없었다는군요. 듣기로느 ㄴ다섯이라고 했는데, 여기 있는 인원이 모두가 아니었던 겁니까?” 바딩은 여전히 예의 바른 자세로 물었다. “한 명 더 있소. 사정이 있어 따로 이 곳을 찾았는데, 늦는 것 일지도 모르니, 혹시 오게 되면 우리에게 안내해 주셨으면 하오.” “여부가 있겠소?” “그런데 우리가 온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소? 왔다고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는데.” “고디머 백작께서 비둘기를띄워 알려주셨습니다. 덕분에 여러 분들을 만나기 위해 많은 손님들이 이 곳을 찾으셨습니다.” “고디머 백작을 만난 건 고작 사나흘 가량 전인데, 그사이에 손님이 모였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멀지 않은 곳에 여지를 둔 귀족이라면 서둘러 이 곳을 찾고 있을 겁니다. 전설의 기사단을 보고자 하는 기대가 보통이 아닙니다.” 도개교를 지나 안으로 진입하자, 크진 않지만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진입로의 좌우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길을 따라 나무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한 정원의 모양이 이곳 주인의 품성을 대변하는 듯 했다. “이 부서진 마차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군요.” 카셀이 말했다. “저도 이 곳을 좋아합니다. 제 군주님의 성은 이것보다 더 삭막 하거든요.” 바딩은 웃으며 솔직하게 말햇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카셀은 지금까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잘 생긴 외모에 부드러운 목소리 등 계속 좋은 이미지만 풍기는, 객관적으로 보면 괜찮은 남자인 바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게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그가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터렛이 있는 외 성벽을 지나 또 다른 성문을 지나자, 이전보다 더 큰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좀 덜 삭막한 모양의 성이 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성 앞에는 많은 기사들과 대신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마차가 도착하자 깨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하얀 늑대라는 존재가 한 나라의대신들 조차 고개를 숙이게 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는것에 카셀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대신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섰다. 카셀은 마차에서 내렸고, 다른 하얀 늑대들은 모두 그의 뒤에 섰다. 그가 캡틴이므로 당연한 배치였는데, 카셀은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밀 농사꾼의 아들에, 얼마전까지 붉은 장미 백작 기사단의 병사였다가, 한달 만에 패잔병이 되었던, 자신의 하찮은 존재감이 머리속에서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때 뒤에서 아즈윈이 그의 종아리를 발로 툭 걷어찼다. 카셀은 화들짝 놀라며 대신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햇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 카셀 울프 입니다. 카모르트 국왕 폐하의 앞날에 축복이 있길 기원합니다.” “카모르트의 국정 대신들을 대표하여 루오르가 인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캡틴 울프. 그리고 하얀 늑대들이여. 아란티아 여왕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모든 대신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카셀은 그들 중 자신의 아버지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그들은 마치 원로원에서 국왕을 대표하여 나온 것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들 뿐이었다. 그리고 라이온 기사단은 그들에게 예를 표하지 않았다. 그것은 카셀에게 있어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쉐이든과 함게 복습해 두었던 카모르트의 정치 체계를 다시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사실 그것에 대한 기본 토대는 열 살도 안 되었던꼬마였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내용이었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났다. 카모르트에는 원로원이 없으며 대신들은 전통적으로 각 귀족들의 추천을 받은 다른 귀족들이 맡게 된다. 귀족들은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권력도 없고 은퇴만 생각하는 하위 귀족들 중 나이 많은 이들만 골라 대신으로 추천한다. 물론 그들의 아들이나 손자들은, 추천한 귀족들이 대신 돌봐준다는 명목으로 데리고 있을 터이니 대신들은 볼모로 잡힌 자식들을 위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 ‘이런 머저리 같은 체계가 바뀌기 전에는 카모르트가 발전할수 없지.’ 딱 한 번 ㅈ어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가 화를 냈던 부분이었다. 머리가 굵어져 기사에 꿈을 키우던 중이라 카셀은 농부인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밀 농사꾼 주에에 무슨 정치에 그리 관심이 많으시냐고 따졌더니, 그런ㄱ ? 알아야 세금을 덜 내고 이용 당하지 앟ㄴ는다고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고디머 백작의 저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무기를 내놓아야 했다. 카셀만 자신의 무기가 아란티아의여왕을 대신한다는 증표이므로 그대로 지녔다. “국왕 폐하께서 알현실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저희들도 그 분을 빨리 뵙고 싶습니다.” 카셀은 다른 방해 없이 가급적 빨리 카모르트의 국왕을 만나고 싶었다. 그것은 쉐이든도 동의한 내용이었다. ‘다른 귀족들, 특히 검은 사자 백작이나 붉은 ㅈ아미 백작을 먼저 만나버리면 문제가 커져. 둘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 하지만, 둘 중하나를 먼저 만나면 다른 하나가 즉시 적이 될 수 있거든. 그리고 우리는 짐작만 하고 있을 뿐, 왕이 정말 우리에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그런데 왕이 제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 귀족이 선수를 치면 우린 엉뚱하게 이용당할 수도 있어. 그런 여러가지 돌발 사태를 사전에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왕을 직접 대면하는 거야.’ 쉐이든은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햇다. 간접적인 루트를 배제한 후 왕에게 카모르트의 사정을 들어 보고,직접 의견을 교환하고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 카셀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다행히 처음은 그의 생각데로 진행되었다. 왕을 만나고 싶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이, 대신들은 그들을 왕에게 안내했다. 카셀은 머리 속으로 왕과 해야 할 일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자신이 과거에 농사꾼이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애썼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다........ 나는 아란티아의대표다.’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카셀은 이미 작전은 어긋낫으며 앞으로 사워야 할 상대가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한 인물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왕의 옆에는 검은 사자 백작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오,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들이여.” 왕은 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으 ㄹ보이며 양팔을 벌려 그들을 환영 했다. 마흔 살가까이 된 얼굴에 갈색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알현실 내의 모든 조명을 비추고 있는 듯 반짝였다. 고생이 많아서라기 보다 웃음이 많아서 생긴 잔주름 많은 얼굴은 밝았고, 머리에 올린 왕관은 소박하면서도 화려하게 왕의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촛불 옆의 그림자처럼 검은 사자 백작은 어두운 표정으로 카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왕과 동일한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왕이 일어났음에도 태연히 앉아잇는 그의 모습은 무례하다 못해 곧 자신이 왕이 될 거라고 말하는 듯 했다. 왕관만 아니었으면, 그를 국왕으로 착각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누구도 그를 소개하지 않았으나카셀은 그가 검은 사자 백작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하얀 늑대들도 왕의 인사에 답레를 한 직후 왕이 아닌 검은 사자 백작을 응시했다. 모두의시선이 집중되었음에도 그는 카셀을 쏘아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바딩은 이미 자신의 군주가 왕의옆에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바보 같으니! 그는 긴장된 마음을 더욱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상대는귀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기 없는 유랑 시인도 아니었고, 간단한 속임수를 덥석 무는 도적 패거리도 아니었고, 자잘한 협박에 기가 죽는건달들도 아니었다. “아, 이쪽은 언제나 짐을 보필해 주는 누벨 덴 뤼미에르 백작이오.” 인사를 한 후 카셀이 계속 백작을 노려보자, 왕은 뒤늦게 그를 소개했다. 그제서야 백작은 자리에서일어났다. 이런 엉뚱한 상하의 위치를 보고 카셀은 지금까지 가져웠던, 왕실 사람들과의 신분 차이에서 오는 두려움과 패배감 대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인사했다. “백작께서 그 유명한 라이온 기사단과 검은 사자의 군대를 이끄는분이시군요. 이미 그 명성은 아란티아에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 나라를 마차로 가로질러 왔다면 나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을 터이니 굳이 말로 소개할 것도 없겠소. 허면 왜 이 먼 땅으로 굳이 놀러 왔나 묻고 싶군,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들...... 캡틴 카셀?” 갑작스러웠지만,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문제의핵심을 파고 들었다. 전쟁으로 치면 그것은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화살을 날린 기습과도 같았다. 그는 왕이 있건 없건 상관 없다는 자세였다. 카셀도 굳이 예절을 따라줄 생각은 없었다. 벌써 농부의 아들과 백작 간의대화라는 생각은 잊어버렸다. “아란티아와 카모르트의 동맹 관계에 대해 뭘 더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굳이 귀찮은 형식을 따져보자면, 저는 이 나라를 여행 하며 보아온 끔찍한 참상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도적들은 지나가는 여행자의 목숨을 먼저 빼앗은 후 시체의 몸을 뒤지나 어느 누구도 그 도적들을 잡아가지 않고, 어찌나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지 들판에 널려진 시체들을 치울 시간도 갖지 못해 그 위에 새로운 시체가 쌓이며, 마을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를 믿지 못하더군요. 그리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영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라 강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카셀은 왕의 표정을 살폈다. 공격의 화살은 백작이었으나 그것은 결코 왕을 비껴갈 수 없는 험담이었다. 그러나 왕은 어색한 미소만 지은 채 화를 내지도 카셀의 말을 막지도 않았다. “론타몬의 대륙 정벌 전쟁이 끝난 후에 있었던 서로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자면, 이 나라의실정을 알고도 아란티아가 어지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주 잘 알고 있군, 캡틴 울프. 내가 전쟁을 끝내면 모두 해결될 일이지, 굳이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 점을 아란티아의 여왕께서느 어떻게 받아들일지 묻고 싶소?” “나라의일을 국왕이 해결하지 않고 다른 이가 해결한다면 그건 국가입니까, 영지입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를 찾은 건 국왕 폐하의 초청이오?” “아니면 붉은 장미 백작의 초청이겠소?” 둘 다 단 한 차례의 호흡도 늦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카셀은 마지막에 일부러그 이름을 들먹이며 상대의 안색을 살폈으나 변함 없었다. 말은 더 많이 하고 있으나 이상하게 그는 검은 사자 백작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에 밀리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럼 국왕 페하의 손님이군. 그렇다면 당신들은 나의 손님이기도 하오. 아무쪼록 편히 지내도록 하시오.” 뭔가 더 말할 것 같던 백작은 차갑게 웃었다. 왕은 겨우 미소 지으며 왕자에 앉았고, 백작도 계단 한 칸 아래에 있는 의자에 뒤따라 앉았다. 대신들은 모두 좌우 여섯 명씩 섰고, 그 뒤에는 여덟 명의 경호원이 지키고 있었다. 하얀 늑대들과 라이온 기사단의세 명만 왕의 정 면에 서있었다. 바딩은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카셀은 그가 뒤에 서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행은 어땠소? 고디머 백작이 보내온 연락에 따르면 험한 일을 당한 것 같은데?” 왕이 물었다. “고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카모르트에서 보내주신 삿니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들에게 살해 당햇습니다. 그를 지키지 못한 점, 용서하십시오.” “그 일도 고디머 백작의 편지로 알고 있소. 그 역시 가장 아끼는 기사가 그 암살자들에게 살해 당해 슬퍼하고 있더군, 이럴 줄 알았다면 사신과 더불어 경호 기사들도 같이 보낼 것을 잘못 했소.” “아닙니다, 왕이시여. 이 나라에서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 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또한 폐하의 걱정거리가 있다면, 같이 사라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카셀은 각별히 검은 사자 백작을 염두에 두고 말했으나 여전히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고디머 백작과 사뭇 달랐다. 그는 카셀의 어떤 공격도 받아 치치 않으면서도 모든 공격을 막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같은 백작이라도 고디머 백작보다는 팔콘에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강함을 의심하지 않고 상대를 두려워 하지 않앗다. “먼 여행에 피곤하고 음식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고 고디머 백작이 말해주었소. 오늘과 내일은 푹 쉬고 자세한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도록 함이 어떻소?” 왕의 제안을 듣고 카셀은 즉시 거절했다. “휴식은 없어도 좋습니다. 우리들은 여왕 폐하께 전해드릴 폐하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두고 싶습니다. 그 분은 카모르트의 일을 몹시 궁금해 하십니다.” 처음에 왕과 단둘이 만나지 못한 이상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받기 전에 행동에 들어가고 싶었다. 비록 이 곳이 왕의성이긴 하나 암살자들의 공격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얀 늑대들의 실력을 안 이상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을 테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그 일은 예측하여 막는 것보다 암살자들이 행동 하기 전에 일을 끝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미 파티 준비를 끝냇소. 짐은 귀한 손님의 접대를 소홀히 하는 왕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소. 또 많은 귀족들이 당신들과 만나기 위해 이 곳에 머물러 있거나뒤늦게나마 이 곳으로 오고 있소. 누구보다 검은 사자 백작이 당신들을 맞이하고 싶어 이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오.” 카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했다.’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했다. 쉐이든이 걱정하고 있는 건 이 부분 이었다. 그들은 검으로 하는어떤 싸움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이런 정치적인 싸움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카셀에게 맡겼다. 그러나 경험이 없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주 간단하기 그지 없는검은 사자 백작의 작전에 말려 들었다. 최소한 오늘 저녁 파티가 끝나기 전까지 왕과 단둘이 만날 기회가 없게 된셈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백작은 필요한 모든 작전을 동원하여 왕과의 접촉을 막아낼 것이다. ‘조용히 들어와 올가미를 걸어야 할 사자 우리에 노래 부르면서 뛰어든 꼴이야. 우리 중 한 둘은 몰래 잠입해서 왕과 먼저 접촉했었어야 해.’ 카셀은 자신의 실수를 한탄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꺾이면 앞으로 그들은 얌전히 던져주는 먹이만 집어먹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지도 몰랐다. 하얀 늑대들을 검으로 죽일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가 증거하고 소문이 증거하고 암살자 40명이 역습 당함으로써 또 다시 증명 되었다. 검으로 죽일 수 없는 상대를 해치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피해버리는 것이다. 카셀은 검은 사자 백작의 의도를 짐작해냈다. 그는 하얀 늑대들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집으로 돌아갈 대까지 옆에서 지키고 있을 것이다. 카셀은 눈을 떴다. 고디머 백작이 당햇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도와줄 귀족들도 없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다른 귀족중에도 의지할 사람은 없었다. 카셀은 마지막 가능성에 도박을 걸었다. 지금 비록 검은 사자 백작의 눈빛에 위축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왕이 최소한 바보는 아니길. “그럼 파티는 어디에서 열립니까?” 카셀은 파티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물었다. “물론 궁 안이오.” 왕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카셀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천천히 말했지만, 속으로 ‘당신이 바보가 아니란 걸 보여주시오.’ 라며 외쳐대고있었다. “그럼 우리의 머물 곳도 궁 안입니까?” “물론 그렇소. 별관에 일부 귀족들이 머물고 있는데, 그 곳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머무를 수 있소.” “아란티아의여왕께서 카모르트 국왕 폐하께 전하고자 하신 선물이 있습니다. 그건 이 자리에서 펼쳐 보일 만큼 사소한 것이 안입니다. 폐하께서 안전하고 아늑한 장소를 제공하신다면 제가 가서 직접 드리겠습니다.” 왕은 자연스럽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셀에게만 보이는 날카로운 빛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카셀은 내내 그 눈빛을 기다렸다.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기에 꼭꼭 숨겨뒀는지 궁금하오. 아란티아의 여왕과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바, 아마 내가 오래 전 부탁 했던 귀한 것임에 틀림 없다소 생각하는데 그렇소?” 정말 그게 무엇인지 묻는 게 아니었다. 주위의 다른 이들을 숨기기 위한 연막이었다. 왕은 카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실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또 선물이란 포장 안에 감추어져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아, 내가 조금 성급했소. 파티가 끝난 다음에 잠깐 여가가 생길 터이니, 그때 받아도 되겠소?” “시간과 장소는 나중에따로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저희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파티를 기다리겠습니다.” 카셀은 검은 사자 백작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는 지루한 하품을 참고 있는 듯 무관심했다. 그러나 카셀은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왕을 능가하여 이 나라를 양분하는 세력의 한 축이다.’ 왕은 카셀과 백작 사이에 펼처진 긴장감을 무시하고, 기쁜 얼굴로 말했다. “들어라. 오늘 카모르트에 귀한 손님이 왔으니 모두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늘 저녁 준비된 만찬을 시작하도록 한다. 궁 밖으로는 나팔을 울리고, 궁 안에는 음악이 멈추지 ㅇ낳도록 하라. 모든 백성들이 내일 이 시각까지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허락하노라.” 모든 대신들이 고개를 숙여 대답햇다. 왕실의 시녀와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별궁의 방에 짐을 풀었다. 왕과 만날 때 외에는 무기를 소지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고, 파티를 위한 정장도 따로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아즈윈은 시녀를 불러 다른 정장으로바꿔달라고 말했다. “난 분홍색은 안 어룰리거든? 하얀 드레스에 빨간 천을 댄 디자인이 카모르트 전통 복식 중에 있을 거야. 그걸 갖다 뭐.” “찾아보겠습니다만, 그건 기사님처럼 키가 큰 분을 위해 만들어 진게 없습니다.” “그럼 화려한 치장 없는 걸로 줘. 난 하얀 색이 좋아. 레이스 달린 거 주면 찢어서 입을 거야.” 아즈윈은 반 협박을 가했고, 시녀는 거의 우는 얼굴로 달아났다. 아즈윈은 몸을 휙 돌리더니 카셀에게 말했다. “아란티아 여왕의 선물?” 카셀 대신 쉐이든이 대꾸했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여기 어디에 우릴 노려보는 놈이 있을지 모르니까. 던멜은 알현실 내에서도 수상한 시선을 느꼇데. 지금은 없는것 같지만 조심해야지.” “그래 좋아. 그럼 가급적 앞으로의계획을 이야기 하는 건 삼가도록 하자. 하지만 오자마자 파티라니 조금 웃기지 않아?” “우릴 위해 백작님께서 개최해 주신다잖아.” 쉐이든이 나직이 웃었다. “좋아. 그럼 신나게 즐겨줄 의무가 있지. 맘에 안 드는 나라의 별로 예쁘지도않은 성에서 하는 파티지만, 오랜 만에 맞는 즐거움을 피할 필요는 없지. 우리 여왕님은 도대체가 파티란 걸 몰라서 재미가 없다니까.” 아즈윈은 벌써 흥에 취해 즐거워했다. “네가 하도 졸라서 반년 전에 파티를 벌였었잖아.” 파티라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게랄드가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맙소사, 울프 기사단 ‘회식’ 말이냐?춤도 못 추는 그 인간들이랑 밥 먹은 걸 파티라고 하는 거야? 기껏 음악이 있고, 술이 있고, 음식이 있는 자리에서 왜 다들 검술 얘기야? 게다가 나랑 손 잡아주는 용감한 기사는 다 어디 잇고? 제발 이 나라에는 나와 춤추고 싶어하는 기사들이 많아야 할 텐데.” “그래, 네 성질 아는 남자라면 누가 춤을 추고 싶어할까? 여긴 네 외모 외에는 볼 줄 모르는 발정 난 토끼들뿐일 테니, 잘 해봐.” 아즈윈은 게라드의 시비에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해야 게랄드의 속을 확 뒤집어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카셀이 둘 사이에 끼어 들어 넷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보다 왜 고디머 백작이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왕실에 알렸느냐가 마음에 걸려. 또 이미 귀족이 모였다면 우리가 코홀룬에서 출발할 때 귀족들도 거의 동시에 왕실 쪽으로 출발 했다는 소린데 그럼 고디머 백작은 우리가 떠나자마자 즉시 다른 귀족들에게도 연락 했다는 소리 아냐? 왜 그가 일부러 그 사실을 알리려고 애썼을까?” “경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쉐이든은 들릴 듯 말 듯하게 말을 이었다. “카모르트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암살자들이 공격했어. 왕의 원군 요청으로 우리과 왔음을, 왕실의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뜻이지. 그것도 모르고 몰래 왕과 접촉하면 오해를 사게 돼. 그럴 바에야 모두에게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 거야.” 카셀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혼자 고민 했어. 그런데 쉐이든, 왜 캡틴을 하지 않아?”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나보다 현명하고 나보다 강한 자가 캡틴이 아니라는 건 어불성설이야. 그럼 난......” 카셀이 뒷말을 잇길 꺼리자, 쉐이든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세개 잡았다. “불편해?” “음. 조금은, 뭐랄까......” “캡틴은 리더지, 브레인이 아니야.” 쉐이든은 딱 잘라 말했다. 언제나 그를 안심시켜 주는 쉐이든이 없었다면 그는 이 멋진 직책을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우리가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쉐이든이 대꾸했다. “파티 얘기부터 해야겠지?” 그러자 아즈윈이 먼저 이야기했다. “우선 난 카셀을 경호할게.” “난 다른 귀족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지. 어쩌면 우리 편이 되어줄 사람도 있을지 모르니. 파티장 내에서도 따로 행동하는 게 좋겠어.” 쉐이든이 말했다. “그럼 난 뭘 할까?” 게랄드가 물었다. “게랄드는 시선을 끌어줘. 쉐이든이 자유롭게 행동하려면 누군가 한 명은 하얀 늑대들의 행세를 확실하게 해 주어야 해. 물론 나도 그러고 다닐 거지만, 전사로서의 이미지는 게랄드가딱이니까.” 카셀이 이야기 해주었다. “칭찬은 아니군.” 게랄드는 입맛을 다셨다. “우리의 대화는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자. 그러니 지금부터는 행동 지침대로만 하기로 해. 아, 한 명쯤은 마크 당하지 않고 움직였으면 좋을 텐데, 던멜도 이미 얼굴을 보여 버렸으니 힘들 것이고.......” 카셀이 고민하자, 던멜은 수화로 뭔가를 말했다. 카셀이 못 알아 듣고 아즈윈을 바라보자, 그녀는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 뜻을 해석해주었다. “방금 던멜이, 마크 당하지 않은 한 명이 있잖아 라고 말했어.” “아!” 카셀의 눈이 커졌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다들 알고 있는 그 이름을 굳이 이자리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대신 다른 말로 작전 구상을 마무리했다. “....... 이제 다들 좀 씻읍시다.” “동감이야.” 아즈윈이 제일 먼저 대답했다. 하얀 늑대들은 각자의 방에서 쉬기로 하고 흩어졌다. 아즈윈은 바로 옆방에 있으니 위험하면 부르라고 말했다. 씻은 후 카셀은 제일 먼저 침대에 주자 앉았다. 손님 대접을 얼마나 잘할 작정인지 모르나, 그가 이제껏 누워본 침대중 가장 좋았던 고디머 백작의 침대보다 더 편안하고 좋은 침대였다. 왕실의 파티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앞으로의 일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짐작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잠시 마음을 비우고 조금이라도 쉬어두려고 누웠다. 그러나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 속을 어지럽게 들쑤셔 편히 누워 있기가 힘들었다. 던멜은 로일을 찾으러 갔다. 도시가 넓긴 하지만, 억지로 숨어있지 않은 한 파티 전까지 찾을 수 있다고 그는 장담했다. 그는 그저 던멜이 자신의 말을 잘 전달하길 기다리면 되었다. 기본 정보는 쉐이든과 의논했고 카모르트에 대한 상식은 아버지의지식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임기응변에 의존해야 했다. “카셀, 넌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있ㅇ는 거냐?”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도적 놈이 쏜 화살이 유랑 시인이 아니라 내 가슴에 박혔다면 지금 일어나는 이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란티아의보검은 그대로패잔병들의 마을에 있는 노숙자의 손에 있을 것이고, 하얀 늑대들의 캡틴은 지금도 로일이라는 기사의 것이겠지. 그럼 이런 건 운명이라고 하는 거야?’ 카셀은 옆에 앉아있기라도 한 듯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 겁니까, 아버지?”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소리가 들려 카셀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시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검은 사자 백작님의 시종입니다. 백작님께서 뵙고자 요청하셨습니다.” “나를?” “예.” 문을 닫고 얘기할 성질이 아니라 그는 천천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얼굴이 반만 보이게 문을 열었다. 카셀보다 작은 키에 메마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뤼미에르 백작께서 나를 찾으셨소?” “예.” “무슨 일로?” “단 둘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단 둘? 다른 하얀 늑대들은 대동하지 말란 뜻인가?” “특별히 단 둘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상대가 상대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사단의 캡틴이라는 자가 단 둘이 보자고 말했는데, 동료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이 어떻게 보일까? 카셀은 조금 생각해보고 대꾸했다. “검을 가져오지 말란 말은 없었겠지? 좋소. 안내하시오.”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는 문 앞을 지나가며 아즈윈이 머무는 방문을 두들겼다. 대답이 없어 대신 쉐이든의 방문쪽으로 방향을 돌릴 때 문이 열렀다. 반쯤 열린 문틈에서 수건으로 몸을 가린 아즈윈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슴까지 늘어진 옅은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있었다. “급한 일이야?” 그녀는 급히 물었다. 땋지 않고 물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를 한 아즈윈은 카셀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카셀은 너무 놀라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좀....... 음, 검은 사자 백작에게 다녀올게.” “백작이?왜?어, 그보다 같이 가줄까?” “아니, 혼자 갈게. 목욕 중이었구나. 미안해.” “미안할 건 없는데, 정말 괜찮아?” “응, 괜찮아.” 카셀은 웃음으로 대답해주고,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종에게 걸어갔다. 아즈윈은 조금 걱정스러운 듯 그의 뒤통수를 바라 보았다. 특별히 그녀의 알몸을 본 것도 아닌데 카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전장으로 떠나는 것 만큼의 각오를 다져도 모자랄 판인데, 검은 사자 백작이 머무는 방 앞에 도달할 때까지 그의 머리 속에 떠도는 건 목욕 중에 뛰쳐나온 그녀으 젖은 얼굴과 수건 틈으로 살짝 보인 그녀의 가슴뿐이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덕분에 카셀은 긴장감 하나 없이 검은 사자 백작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옆에는 바딩이라는 기사가서 있었다. 긴 다리에도 불구하고 그의 칼은땅에 끌릴 만큼 길었고, 찌르면 내장을 한 번에 훑어 낼 만큼 날이 넓었다. 바딩은 카셀에게 눈인사를 보인 후, 백작에게 귓속말로 뭔가 전달하더니 방을 나섰다. “어서 오시오, 캡틴 울프.” 검은 사자 백작은 손을 내밀어 앞에 있는 편한 의자에 앉길 권했다. 카셀은 사양하지 않고 앉아, 다리를 꼬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백작은 살집이 좀 있었으나, 그것은 젊은 시절의 근육이 나이가 들면서 무뎌진 탓에 생긴 살이지, 게으름으로 붙은 살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검은 머리카락은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갈기처럼 일어나 있었다. 왜 그의 별명이 검은 사자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상대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카셀은 뺨을 긁적였다. “할 말이 있어서 나를 부른 게 아니었소?” “아니, 난 당신이 내게 할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부른 거요.” “내가 말입니까?” “할 말이 없소? 그럼 돌아가도 좋소. 캡틴 울프. 미안하게 됐군.” 검은 사자 백작은 부드럽게 깍지 낀 손을 가슴께에 올려놓고 왕이 옆에 있을 때처럼 느긋한 시선으로 카셀을 바라보았다. 어떤 감정 표현도없는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카셀은혼란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말에 대항할 수많은 말들이 서로 뒤엉켜 입 안에서 뒹굴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파티에서 뵙시다.’ 그것은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할 대꾸였다. 그 외 다른 말들은? 그는 적절한 말이 뭔지 하나씩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론타몬은 아직 망한 게 아니오. 다시 대륙 정벌 전쟁을 시작하면 카모르트는 10년 전 그 때처럼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니 싸움을 멈추고 국력 신장에 노력하는 게 어떻소?’ ‘당신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요. 그러니 당장 붉은 장비 백작과의 전쟁을 멈추고 자기 영지에 틀어박혀 조용히 지내시오.’ ‘난 질문할 게 없소. 부른 건 그쪽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당신이나 질문 하시오.’ ‘뭘 질문하란 거요? 지금 내 앞에서 당신이 앞으로 뭘 할 건지 다 고백하시오.’ 바보 같았다. 카셀은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럴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나 짧은 침묵으로 좌중을 긴장시키곤 했다. 마을의 말썽꾼 루치가 술에 취한 채 촌장이 아끼는 개를 몽둥이로 패 죽이고 그 목을 잘라 집어 던져 맞춘 사람이 하필 카셀의 아버지였을 때도 그랬다. 되려 놀라 몸이 구어버린 루치의 앞에서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옷에 묻은 개의 피를 닦았다. 루치가 달아나려 하자 아버지는 들리지도 않게 작은 목소리로말했다. “달아나지 마라, 루치. 지금 수습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주 힘들 거다.” 안되겠다 싶은 루치는 아예억지를 부렸다. “난 칼을 배웠수다. 이제 당신 말에 기 죽는 어린애도 아니구요. 하필 거길 지나간 당신 잘못이에요.“ “그렇게 과격하게 억지를 쓰는 걸 보니 잘못한 걸 알긴 아나 보구나.” 카셀의 아버지는 어깨의 피를 손바닥으로 털며 개의 머리를 한 손에 들었다. “칼 배웠다는 놈이 몽둥이로 개 죽였냐? 그래서 이제는 사람까지 죽이시겠다?” 어둠 속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근처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을 지배했다. 루치와 같이 취해 말썽을 일으키던 또래들도, 망나니들을 말리지도 못하고지켜보기만 했던 마을 사람들도, 호기심에 구경 나온 아이들도 긴장되어 둘의 대치를 구경했다. 루치가 비록 검술을 조금 배웠다고는 하나, 어렸을 때부터 쭉 두려워하던 사람까지 뛰어넘을 정도로 정신적인 성장을 이룬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들고 온 개의 머리를 불쌍한 개의 시체 옆에 두었다. “네가 순순히 죽은 개에게 사과할 놈도 아니고, 네가 사과한다고 죽은 개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네가 내게 사과한 다고 네 그 뭣 같은 성격이 고쳐질 리도 없겟지. 하지만 지금 이 사테를 정리할 필요는 있다. 자, 루치, 이제 난 누구와 이야기 해야 할까? 네가 말해봐라. 개를 살해한 루치 뱅상이냐, 아니면 네 아버지 게네치 벵상이냐? 그것도 아니면 네 칼과 이야기 해볼까?” 카셀은 눈을 떴다. 검은 사자 백작의 표정은 주름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카셀은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 오면서 생긴 의문인데, 우선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오? 아란티아에서는 사람 이름을 동물로 부르는 풍습이 없어서 그러는데, 나도 사자라 불러야 하오?” “나를 두려워하거나 공경하는 사람은 검은 사자라 부르지. 편할 대로 부르시오. 이 자리에서 호칭은 중요한 게 아니오.” “좋소, 뤼미에르 백작.” 카셀은 긴장감을 속이기 위해 침도 삼키지 않고 말했다. “당신 생각대로 나는 당시에게 궁금한 게 있소.” “말하시오.” “하지만 이 질문은 당신이 아닌 다른 백작에게도 하고 싶었던 거요.” 아주 미묘하게 백작의 포커페이스가 흐트러졌다. 거기에 용기를 얻어 카셀은 즉시 뒷말을 이었다. “묻겠소. 나는 이 나라와 관련된 많은 일들을 검은 사자라 불리는 뤼미에르 백작과 이야기 해야 하오, 붉은 장미라불리는 쟌스테인 백작과 이야기 해야 되오?” 질문이 끝난 후 의도한 대로 침묵이 있었다. 카셀은 흐트러지지 않고 곧은 시선으로 검은 사자 백작을 노려 보았다. 곧 백작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나라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은 건 아니군, 캡틴 울프? 이름보다 붉은 장미가 더 먼저 알려진 바람에 쟌스테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 하지만 당신은 잘못 짚었소, 캡틴.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 건 나요. 나는 그런 선문답을 하려고 당신을 부른 게 아니오.” “그건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시오, 백작. 당신은 내게 질문 할 기회를 주려고 불렀다면서, 다른 것을 위해 불렀다고 말을 바꾸는 겁니까?” “두 가지였소. 첫 버너째는 당신의 질문을 받기 위해서였지만 방금 당신의 질문은 내가 생각했던 질문이 아니었소.” “어쩄든 당신은 아직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소.” “내 두번째 용건, 즉 당신이 첫 번재 용건을 충족시켰을 경우에 하고 싶었던 두 번재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거요.” “나를너무 믿지 마시오.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의 뜻을 곡해할 수도 있소.” 검은 사자 백작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카셀은 턱을 긁적였다. 그의 웃음 소리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넘치는 자만 낼 수 있는 기분 좋고 속 시원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자신감을 무너트리기도 했다. ‘집중해라, 카셀. 상대의 표정을 읽고 마음을 읽고 절대 호흡을 늦추면 안돼.’ 카셀은 머리 속에 온갖 그림을 그려가며 배에 힘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카셀은 배에 손을 얹고 편안한 자세를 유지했다. “바딩이 말한 대로 당신은 하얀 늑대들 중 누구보다 조심해야 할 인물이로군. 라이온 기사단에도 당신처럼 말 잘 하는 기사가 있었다면 캡틴을 뽑느라 고민하지 않았을 거요. 좋소, 캡틴 울프.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하리다. 당신은 나에 대해 무얼 아시오?” 이 질문으로 카셀은 백작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 셈이었다. 카셀은 이후의 대화가 어떻게 전게될 지 예측했고, 상대방의 반응에 따른 몇 가지 선택지에서 어떤 말을 할지 정해두었다. “얼마 전에 두 백작 군의 전투가 있었던 패잔병들의 마을을 거쳐 코홀룬, 스몰레이크 마을을 지나오면서 들을 건 모두 들었소.” “그럼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 지 뻔하군.” “안 좋은 이야기들이었소. 이 의자에 앉아있는 게 불편할 정도로. 난 아란티아의 수호자 중 한 명으로서, 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좋아하지 않소.” “그럴 거요. 난 오해를 많이 사는 타입이라, 당신의 그 말에도 반박하기 힘들지. 하지만 하얀 늑대들이 여기 온 목적이 정말 이 나라를 위해서라면, 결국 당신들은 나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거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그는 결국 하얀 늑대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카셀은 그의 표정고 ㅏ말투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는 하얀 눅대라는 막강한 힘을 자신에게 빌려주어 붉은 장미 백작을 몰아내자고 제안할 것임에 틀림 없었다. 그는 처음에 완강히 거절하고 왕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며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엇다. 정말 검은 사자 백작을 적대하는 것이 옳은 길일까? “우리가 이 나라에 온 건 순전히 카모르트 궁왕과 아란티아 여왕ㅇ의 약속 때문이지,이 나라의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위해서가 아니오. 그런데 어찌 손을 잡고 안 잡고의 문제가 나올 수 있습니까?” “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두 존재를 제거하러 왔는데, 그중 하나에게 그런 말은 할 수 없겠지. 캡틴 울프, 나는 당신들이 온 진자 이유를 알고 있소. 나는 대물림 하여 얻은 재산과 권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선 게 아니오. 샤이필드 공작이 죽은 후 이 나라의 권력 체계가 무너지기 직전에 그것을 바로 잡은 것도 나요. 공작이 카모르트에서 가장 위대하다며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라고 칭송한 바딩이 스스로 나의 기사단에 들어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오. 어느 날 갑자기 졸부가 되어 군사력으로 권력을 차지한 쟌스테인 백작과나는 그 근본부터 다르지. 나는 쟌스테인 백작으로부터 이 왕실을 지키고 있는 거요. 아직도 이 나라에 놀러 왔다고 말하진 마시오. 당신은 나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거요.” 카셀은 아직도 판든을 보류하고 있었다. 대화는 생각대로 이끌어 가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검은 사자 백작은 그것까지 계산하고, 자신의 의도를 쉽게 드러냈는지도몰랐다. “나는 당신과 할 이야기가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소. 하지만 이 점은 꼭 이야기해 주셨으면 하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되겠지만, 이것만큼은 본인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좋소. 내가 할 말은 끝냈으니 이번에는 당신 차례요.” “쟌스테인 백작이 처음부터 왕좌를 노리기라도 했소? 나는 귀족은 아니오. 하지만 귀족들의 전쟁을 아주 많이 알고 있소. 목적은 다른 것에 있더라고, 계기란 게 꼭 그것과 관련된 건 아니었소. 뤼미에르 백작은 어떤 계기로 쟌스테인 백작과 전쟁을 시작했소?” “그건 긴 이야기 할 것도 없겠군. 그는 애초에 영지도 제대로 관리 못하고, 되려 자기 영지 내에 있는 상인에게 빌린 돈도 갚지 못해 백작이라는 지위라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은 불쌍하고 무능한 귀족이었소. 아들을 잘못 둔 탓에 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셋째 녀석이 하필 그 자의 외동딸에 한눈에 반하면서 일이 터졌지. 딸에 대한 사랑 하나는 자극했는지, 아니면 그 기회에 딸을 비싼 값에 팔아 치울 속셈이었는지 요구가 상당히 까다로웠지. 나는 그의 빚을 탕감해주고 내 영지의 일부를 꽤 장시간 임대하는 조건으로약혼을 해주었소. 그건 순전히 불쌍한 백작을 구제해주고 셋째의 상사병 치료비를 지불한ㄴ다는 생각으로 치른 대가였소. 하지만 아주 웃기는 일이 일어났지.” “파혼했군요.” “그건 내 자존심을 긁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내 못난 아들 놈이 또 난리법석을 떨 일이었지. 물론 그런 걸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소. 자식 놈 결혼 문제로 부모가 나서서 싸우다니, 그것 만큼 꼴 사나운 짓도 없지. 하지만 영지에 관한 문제라면 나도 물러서기가 힘들지 않겠소? 그는 딸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임대해 준 내 영지에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했소. 처음에는 나도 정중히 요구했소. 탕감해 준 빚은 없던 것으로 치더라도, 땅은 돌려주라고. 지금 하고 있는 이 얘기에 있어서는 어떤 가감도 없으니 알아서 판단해 보시오. 나는 참을 수 없어 군대를 이끌고 그 영지에 있는 소작농들을끌어냈소. 그건 과잉 진압이었을 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난 지금도 그 일을 후회하지 않소 .그 일이 있자, 쟌스테인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기사단을 이끌과 와 영지를 침입해, 내 군대를 공격했소. 아무리 봐도 이 일은 그가 전쟁을 벌이기 위해 일부로 핑계를 만든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지 않소?” 백작은 그 대를 회상하며, 지금도 마음에 안 든다며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그 뒤러는 당신이 아는 그 일들의 반복이었소. 끔찍한 일상이었지. 나도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카셀은 백작이 말하는 그 끔찍한 기분을 뼈저리게 맛보았었다. “이 자리에서 당신의 논리에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뤼미에르 백작. 당신의 입장도 잘 들었소. 하지만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이 나라의 정치에 개입하러 온 게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겟소. 우리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왕을 만나러 온 거요.” “내 두 번재 용건은 여기에서 끝이오. 이 후의 판단은 당신의 몫이오, 캡틴 울프.” “그럼 파티에서 또 뵙겠소, 백작.” 카셀은 푹신한 의자에서일어났다. “아, 그리고, 만약 나에게 굳이 어느 편에 서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원래 정의가 되어야 할 쪽에 서겠다고 대답하겠소. 나라의 정의가 국왕에게 없다면 누구에게 있겠소?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소신만큼이나 명령을 중히 여기는 기사들이오. 나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겟소.” “명령이라...... 천하의 하얀 늑대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존재도있었소?” 그것은 쉐이든이, 백작이나 국왕이 물어보리라 예상한 질문이었다. 아니, 그런 질문을 유도할 답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들이 누구를 위해 결성되었다고 생각하시오? 우리의 정의는 여왕에게 있소. 여왕이 이 나라의 누군가르르 지지하라고 명령한다면 하얀 늑대들은 그를 지지할 것이오.그리고 여왕 폐하께서는 카모르트의국왕을 도우라고 지시하셨소.” “옳은 말이오. 국왕을 도우시오. 그럼 결국 당신은 조만간 나를 찾게될 거요.”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셀으느 개의치 않고 문을 열고 나왔다. 문 밖에는 바딩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는데, 카셀에게 길을 비켜 주려고 벽에서 등을 땠다. 하지만 엉뚱하게 서로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카셀은 바딩과 거의 얼굴을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야 했다. 카셀은 당황하지 않고 옆으로 물러났으나, 바딩은 비키지 않고 미소만 보였다. 더 이상 그가 예의바르고 잘 생긴 청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큰 칼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아직도 백작님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가 물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이고 그것까지 당신에게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또한 나는 사사로운 감정을 공적인 일에 끼우는 사람이 아니오.” 카셀은 백작에 에어 이 말 잘하는 기사까지 상대할 체력이 없었다. 힘들었다. 이럴 때 조금만 집요하게 파고들면 그는 자신의 정체를 모조리 토해내 버릴 것 같았다. “캐물어서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하려고 당신을 기다린 게 아니었는데..... 좋습니다. 이런 무례를 좋아하지 않지만 핵심만 말하도록 하지요. 저는 카모르트 땅에서만 검을 배운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한 번도 진 적은 없으나, 언제고 저보다 뛰어난 기사에게 평가를 받고 싶었습니다.” 카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혹시 이 자리에서 검을 뽑는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막막했다. 대화를 생략하고 적을 휘두르는 적, 바로 그 검은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검을 겨누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오.” 바딩은 카셀의 말에 눈웃음을 지었다. “이 성에는 검을 겨룰 만한 너른 공터가 아주 많습니다. 언제고 시간만 정해준다면 나가죠.” “그럴 만한 시간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소. 파티장에서 뵙겠소.” “그럽시다.” 그제야 바딩은 길을 비켜주었고, 카셀은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벗어났다. 심장이 잠깐 동안 박동알 멈췄다가 뒤늦게 모자란 피를 온 몸에 보내려는 듯 격렬하게 박동했다. 나중에는 심장이 목구망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엎어질 때까지 그는숨이 터지는 걸 겨우 참았다. ‘넌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야. 농부의 자식이 아니야. 세상의 모든 기사들이 경외를 가지고 바라보며, 카모르트 최고의 권력자인 검은 사자 백작 조차 자기 편으로 애쓸려고 만드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다.’ 카셀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으로 악을썼다. 그리고 손의 떨림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된뇌었다. ‘넌 캡틴 카셀이다. 잊지 마라, 너는 캡틴 카셀이다!’ 15. 사자의 아들 로일과 라틸다, 안나, 로저는 붉은 장미 백작에게 신세르르 지고 있다는 이발관의 2층에 머물고 있었다. 의사가 따로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의사는 다른 일과 겸업한다. 라틸다는 엉망인 이발솜씨에 비해 병을 치료하는 건 어느 의사보다 뛰어나다고 그를 평가했다. 로저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굳이 그녀가 이발관을 숙소로 선택한 건 그녀의 신변 안전때문이었다. “카모르트의 방식은 모르지만, 붉은 장미 백작 정도 되면 왕실에서도 특별 대우를 해주지 않습니까?” 로일은 예전에 아란티아 왕실에서 초청되었던 귀족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왕실에 자기 방을 달라고 요구 하곤 했다. 그 때마다 여왕은 기꺼이 그들이 성에 머무르는 걸 허락했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요청하면 왕실에서는 제 방을 따로 내줄 거예요. 손님만 들이는 별궁이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곳에 신세지고 싶지 않아요. 왕실은 사실상 검은 사자 백작의 영역이죠. 적이 제공하는 방에 머물면 편하겠어요? 여기 이발사는 아버지께서 젊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에요. 또 그는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죠.” “제가 사는 곳에서도 이발사는 아주 돈을 많이 버는 사람에 속하죠.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사람이 당신에게 베푸는 식사나 대우가 보통이 아니군요.” “어렸을때부터 날 딸처럼 키운 정 때문이겠죠. 그보다 이 후의 이야기를 해두죠. 파티는 여섯 시부터 시작이지만 우리는 일곱 시에 나갈 거에요. 안나가 정장을 한 벌 줄 거에요. 원래 로저가 입어야 하는 건데, 로저는 지금도 침대에 누워있으니 당신이 입어줘야 겠어요.” 라틸다는 로일의 체형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말라 보이는데 은근히 근육질이군요. 로저가 덩치가 큰 편인데, 당신에게도 맞겠어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노르만트에서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선약이라면 먼저 볼일을 봐도 좋아요.” “예, 친구들을 만나야 하죠. 하지만 그 쪽에서 먼저 절 찾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틸다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걸까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좋아요. 대신 외출할 때는 꼭 내게 보고해 줘요. 노름나트 안에서만큼은 당신이 제 경호원이니까요.” 로일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라틸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갔다. 로일은 혼자 방 안에 앉아 칼을 풀어두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노르만트는 코홀룬보다 가게도 더 많았고, 사람도 많았다. 아란티아의 수도인 나디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카모르트의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무척 깨끗했다. 하지만 거의 같은 디자인의 집들이 길을 맞추어 세워져 있어 딱딱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로일은 안나가 옷을 갖다 줄 때까지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지저분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과일을 싣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노인이 아이들에게 욕을 내뱉었다. 빨래를 널던 아낙이 지나가는 여자와 수다를 떨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빨리 너는 일을 잊어버렸다. 탁자에 앉아 장기를 두던 노인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상대방에게 뭐라고 화를 내고 있었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야 어찌 되었건,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곳이 아니라 그런지 사람들의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성 내를 바라보는 것이 지겨워 성 외각의 가난한 소작농들의 집을 실눈으로 뜨고 바라볼 때쯤 그의 옆으로 지붕에서 뛰어내린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뱀이 타 넘듯 창문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온 그 남자는 경계심 하나 없는 로일의 가슴을 툭 쳤다. “던멜!” 로일은 반가워 그를 얼싸 안았다. 로일은 웃으며 수화로 의사소통 방법을 바꾸었다. ‘옆 방에 동행이 있어. 말을 하면 안되.’ 던멜은 상대방이 말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수화를쓸 줄 알았다. 로일도 수화를 알아보는 건 빠르지만 표현이 더뎌 대화는 주로 던멜이 이끌어갔다. ‘언제 도착했나?’ ‘오늘 오전에. 너희들은?’ ‘우리는 방금 도착해서 왕의 성에 있다. 찾는 게 조금 힘들었다. 네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면 더 오래 걸렸을거다. 동행이라는건 이전 도시에서 같이 왔다는 상인?’ ‘아니, 오다가 사귄 친구.’ ‘그건 나중에 묻도록 하지. 새로운 동료가 생겼다. 우리가 캡틴으로 만들자고 의논했던 바로 그 사람. 코홀룬에서 쉐이든이 보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해서 데리고 왔다. 이름은.’ 던멜은 수화와 입 모양으로 동시에 그의 이름을 표현했다. 로일이 대신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카셀?” ‘우리의 새로운 캡틴이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한다. 나도 지금까지 그의 행동에는 불만 없다.’ ‘모두 마음에 든다면 나도 불만 없다.’ ‘그 캡틴의 전언이다. 앞으로 네 행동에 참고하도록 해. 우선 우리의 적은 크게 둘. 첫번째 적은 반드시 칼을 들고 싸울 상대는 아니지만 염두에 둬. 우선 검은 사자 백작. 그는 왕실에 우리와 같이 있다. 계속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행동에 제한을 두고 있다. 지금 내 행동을 체크할 정도의 실력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상당히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은 붉은 장미 백작. 아직 만나지 못했으나, 이 나라 최고 실권자인 검은 사자 백작과 대립할 정도니까 아주 위험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 둘을 상대로 적절한 대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현실상 그렇게 하기 힘들기 때문에 캡틴이 내놓은 대안이 이거다. 모든 상황을 자신의 판단대로 할 것. 그러나 자기 외의 멤버가 자신의 판단보다 빠르게 다른 행동을 했을 시에는 즉시 그 행동을 따를것.’ ‘틀린 판단이라도 행동을 같이 하자는뜻이겠군. 알았다.’ ‘또 다른 적은 암살자와 검은 기사. 암살자는 우리가 카모르트에서 왔을 때 공격 해왔던 존재며, 검은 기사는 이유 없이 우리를 기습했던 적이다. 둘 다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우리를 공격했으므로 적이라고 상정한다. 만나면 칼을 써야 할 자들이다.’ ‘검은 기사?’ ‘혹시 조우했었나?’ ‘아니.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너희들을 공격했다면 반드시 우리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왜?’ ‘다른 이들도 공격 당했다.’ ‘그렇겠군. 염두에 두고 혹시 네가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나중에 알려주길 바란다. 그리고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 하얀 늑대의 기사가 한 명 필요하다. 견제 당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사람. 아주 적절하게도 네가 지금 그리 되었지.’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일단 네가 어떻게 왕실에 들어올 수 있을까가 문제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나와 함게 있는 동행,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이다. 지금 같이 왕실로 갈 예정이다.’ 던멜은 수화를 하던 손을 멈췄다. ‘왜? 뭐 잘못 됐어?’ 로일이 물었다. ‘어느 쪽에 놀라야 할지 몰라서. 지금 많은 귀족들이 우릴 보기 위해 왕실에 올라 온다더군. 로일 너도 왕실에 들어와야 하는데, 캡틴은 그 귀족들 중 한 명과 접촉해서 들어오는 방법을 말해줬다. 경호원으로 가장하여 속여도 좋고, 아니면 단순한 귀족의 동행으로 붙어도 좋고. 하지만 너는 벌써 누군가의 동행으로 있군. 게다가 그 누군가라는 게 우리가 견제해야 할 또 다른 적이라?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랄거다.’ 로일은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동행을 적이라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난 벌써 그 캡틴이 마음에 드는군. 그럼 구체적인 내가 할일이란?’ ‘네가 붉은 장미 백작 쪽에 있다면 설명하기 간단하다. 우선 네 ’동행‘과 언제 어느 장소에 함께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친해 지도록 하라. 그리고 오늘 저녁에 파티에 와서 옆에 있어 줘.’ ‘어려운 일은 아니군.’ ‘그러면 자연스럽게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우리의 편에 설 귀족들이나 우리에게 악의를 가진귀족, 또는 암살자를 고용해 우릴 공격한 자, 또 검은 기사에 대해서도. 뭐든 유용한 정보를 모아둬. 나머지는 나중에 따로 지시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너는 우리와 아는 척 해선 안돼. 너는 하얀 늑대가 아니다.’ “와우, 그건 작전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가슴아픈 일이군.” 로일은 소리를 내어 말했다. 던멜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오늘 저녁에 봐. 캡틴의 명령대로 잘 할 수 있을지 자신 없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해볼게. 아, 그리고 난 얼굴을 모르는데 그 새 캡틴을 어떻게 알아보지?’ ‘캡틴이 먼저 접촉해 올 것이다.’ 던멜은 고개를 살짝그덕여 인사하더니 로일의 작별 인사도 받지 않고 창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누가 문을 두들겼다. 던멜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도 놀라지 않은 그였지만, 그 소리에는 놀랐다. “안나에요. 옷을 가져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던멜이 왜 서둘러 사라졌는지 그제야 눈치챘다. 던멜은 언제나 모든 것을 그들보다 빨리 알았다. “들어오세요. 안나.” 로일은 방문을 열어주었다. 라틸다의 말대로 이발사는 붉은 장미 백작에게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노르만트에서 제일 비싼 마차를 빌려 두 마리의 하얀 말까지 구해다 주었다. “마부까지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라틸다 아가씨.” 머리가 벗겨진 그느 사람 좋은 미소로 제안했다. “괜찮아요. 너무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나중에 아버지께서 보답해 주실 거에요.” “백작님께는 오래 전에 이미 너무 많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보다, 물론 이런 건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백작님께서 예전같은 웃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힘도 군대도 없었지만, 웃음 많고 정 많았던 그때의 백작님이 더 그립스니다.” 라틸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죠.“ 마차가 출발하고, 이발사는 손을 흔들었다. 그는 마치 여행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처럼 걱정스러운 듯 마차가 보이지 않을 대까지 들어가지 않고 서 있었다. 라틸다도 그를 향해 마지막까지 손을 들어 주었다. “붉은 머리와 붉은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군요. 그건 어떤 상징적인 의미입니까?” 로일은 말을 몰며 라틸다에게 말했다. “비꼬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라틸다는 마부가 앉은 자리와 바로 통하는 작은 창문을 살짝 열고 대답햇다. 옆에 앉은 안나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로일은 가끔 그러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냐고 묻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안나는 단호히 심심하지 않다고 대꾸햇다.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옷이에요. 대신 참가한 거니, 옷차림도 뜻에 따라야죠. 저도 화려한 옷은 좋아하지 않아요.” “화려한 ???ㅅ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죠. 하지만 당신은 아주 잘 어울립니다. 백작님은 틀림없이 당신이 아름다워 보이라는 뜻에서 그 옷을 권한 거에요. 저라도 그러겠는데요.” “좋은 뜻으로 해석하려고 애쓰시는군요. 길은 알고 가는 거에요? 당신이 굳이 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에요. 이런 비싼 마차를 빌리면 보통 마부까지 같이 딸려와요.” “시내 구경도 할 겸 길도 알아둘 겸 해서 모는 겁니다. 너무 염려 하지 마세요. 게다가 저렇게 큰 성으로 뻗은 이 큰 길에서 길을 잃는다면 말을 몰 자격도 없죠.” 라틸다는 은근히 고집이 센 로일을 보고 웃어버렸다. “그런데 당신의 아버님은 예전과 지금이 다른 모습입니까? 아까 이발사 말을 들어보니까.......” “그 이야기는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겠어요.” 라틸다는 로일의 말을 끊었다. 로일도 미련 없이 그 이야기를 중단했다. 라틸다는 머뭇머뭇하다가 다시 로일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화 난 거 아니죠?” “예, 뭐가요?” 로일은 길가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방금 한 이야기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라틸다는 로일의 무심한 성격에 안심했다. 출발할 때 산자락에 걸려있던 붉은 태양은 왕실에 거의도달할 즈음에 완전히 저물어버렸다. 로일은 틀림없이 귀족이 타고 있을 다른 고급스러운 마차도 발견했다. 때론 화려하게 치장한 백마를 타고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 올린 귀족도 보였다. 로일은 그들에게 모두 길을 양보하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드러내 주면 다들 허겁지겁 길을 피해 줄 사람들이었으나, 로일은 신경도쓰지 않았다. 성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곧은 길에서 시종을 둘 데리고 있는 검은 머리의 키 큰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가 탄 말은 잘 손질되어 윤기가 번쩍이는 검은 말이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앞서서 지나가는 마차도 잠깐 세우도 뭔가를 물어보기에 성 앞을 지키는 경비라도 되나 싶어 로일은 말을 세웠다. “그 말에 타고 계신 귀부인께서는 누구신가?” 로일보다 나이는 많아 보이지만, 곱상한 얼굴에 눈썹이 좌우로 쳐저 어딘지 힘 없는 모습의 귀족이었다. 경비병은 아니었다. “쟌스테인 백작의 따님께서 타고 계십니다.” 로일은 정중히 대답해주었다. “아, 제대로 찾았군.” 그는 몹시 반가워 하며 당장 말에서 내렸다. 그는 스스럼없이 마차에 다가왔으나 로일은 경계하지 않았다. 칼을 차고 있으나 그것은 장식용에 불과했다. 시종 둘도 로일의 관점에서는 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에 속했다.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라틸다. 나요. 리제니.” 그가 마차 창문을 두들기자, 라틸다는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리제니는 함빡 담은 미소를 보였으나, 그녀는 큰 눈만 깜빡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제니라고 밝힌 귀족은 그녀의 시큰둥한 반응에 실망했지만, 로일이 보기에 라틸다도 놀란 표정을 숨기느래 이쓰는 중이었다. “오랜 만이군요. 리제니. 반년 만인가요?” 라틸다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햇다. “전에 에노아 후작님의 파티에서 뵙고 처음이죠.” “반년 전이군요. 그때보다 많이 말랐네요.” “당신은 그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졌소. 아니, 내가 당신을 처음 봤을때보다 항상 그 다음이 더욱 아름답소. 그래서 더욱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오.” “제가 당신과 멀어지는 것은 제 의지와 상관없는 일임을 알잖아요. 리제니. 절 기다리고 계셨나요?” “당신이 올 거라는 소식을 아버지께 전해 듣고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소.” “당신의 아버지께서 그 일을 알면 많이 섭섭해 하실거예요.” “아버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나의 아버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랍니다. 라틸다. 오랫동안 생각해왔어요. 에노아 후작의 파티에서 아무 말도 않고 멍청히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것만 바라본 이후 더욱 마음을 굳혔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라틸다는 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것을 당신도 알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이 자리에 같이 서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당신은 물론이고 저도 입장이 난처해져요. 가세요.” “당신의 약혼자였다는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나는진심으로 당시을 사랑합니다. 처음볼 때부터 그랬고, 그 후로 더욱 그 마음이 간절해졌지요. 당신은 지금 이 전쟁의 씨앗이 파혼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는겁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이 전쟁은 우리의 약혼과상관 없이 오직 아버님들끼리의 권력 다툼 때문에 일어난 문제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서라면 뤼미에르라는 성을 버릴 수도 있소. 나는 검은 사자의 아들일 뿐, 나 자신이 검은 사자는 아닙니다.” “저를 위해서 당신의 가문을 버리겠다고요? 저는 그런 남자라면 더더욱 신뢰할 수 없어요. 리제니, 나를 봐요.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약한 여인입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 싶은꿈이 있고, 귀여운 아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꾸미고 싶은꿈이 있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 우리가 맺어지면 모두에게 불행만 됩니다. 당신도, 나도, 아버님도, 당신의 아버님도.” 리제니는 그녀의 강한 어조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냥 가주세요. 부탁이에요. 당신이 정말 저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무얼 먼저 해야 할지 아실 거에요. 로일, 출발하세요.” 말을 출발시키려 하자, 리제는 다급하게 로일에게 손짓했다. 그 표정이 너무 간절하여 로일은 채찍질하려던 손을 내렸다. “라틸다, 그럼 이거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당신은 날 사랑합니까?” “저는 당신처럼 사랑이라는 단어를 남발하지 않겟습니다. 이것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때는 정말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르겟어요.” 리제니는 마차에 올려놓은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로일은 잠시 둘 사이를 지켜보다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리제는 늘어뜨린 손을 천천히 올려 멀어지는 라틸다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정말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로일이 말햇다. “알아요.” 라틸다는 짧게 대꾸했다. 그녀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눈물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안나가 손을 잡아 주자, 그녀는 숨을 들이키며 정면을 주시햇다. “괜찮아, 안나. 난 울지 않아.” 다리를 지나 로일이 모는 마차는 왕의성으로 들어갔다. 리제니는 라틸다의 마차가 완전히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길게 한숨을 수었다. 시종 중하나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힘내십시오. 쉽게 넘어오는 레이디는 진짜 레이디가 아닙니다.” 리제니는 힘없이 웃었다. “바보 같으니...... 이게 넘어오느냐, 넘어오지 않느냐 하는 유치한 남녀 간의 줄다리기로 보이느냐?” 그는 말에 올라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거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무얼 해야 할 지 알 거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이 전쟁을 끝내길 우너하고 있어. 그리고 축복 받는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한 거야. 아니, 그렇게 말한게 아니더라도 난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어.” “도련님이 이 전쟁을 끝내는 건 곧 주인님의 승리를 뜻하는 게 아닙니까? 그럼 레이디 라틸다는 자기 아버지의 패배를 원하는 겁니까?”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다. 그런 승리를 말하는 게 아니야. 화해시키길 원하고 있는 거지.” 시종들은 의외의 말에 놀랏다. 때마침 파티가 시작된다는 나팔이 울렸다. 두 백작의 전쟁을 화해시킨다...... 그것은 국왕도 하지 못한 일이다. 하얀 늑대들이 이 나라를 찾은 목적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었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가정은 왕의 부탁을 받아 두 백작을 화해시키는 목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제니는 아버지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는 아란티아와 전쟁을 했으면 했지, 절대 하얀 늑대들의 말을 듣고 붉은 장미 백작과 화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화해시키는 일 말이야. 라틸다가 날 과대평가해서, 너무 부담스러운 과제를 넘겨주었구나.” 리제니는 성의반대편으로 말을 몰아갔따. “파티는 안 가십니까?” “가서 뭘 하겠나? 사랑하는 여인 곁으로 가지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면 차라리 안 보느니만 못해. 가자. 이 일은 형과 상의해 봐야 겠다.” 시종들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때, 리제니는 말을 세웠다. 옅게 남은 빛에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 위로 또 다른 그림자가 덮였다. 그것은 살아있는 그림자와도 같고 바닥을 덮는 어둠과도 같았다. 순간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놀란 말이 앞발을 들었고, 그는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정작 말보다 더 놀란 건 자신이었다. 시종들도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호흡을 정지했다. 번화가를 벗어나 그나마 드문 인적도, 일행의 앞을 막은 검은 기사를 보고 다들 달아나 버렸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은 검은 기사의 주위는 미묘하게 사물이 틀어져 보였고, 오려낸 것마냥 바닥에 남은 그 자의 그림자는 시커멓게 뚤려 있었다. 리제니도 달아나고 싶었으나, ㄷ백작의 아들이라는 자존심이 그를 막았다. 기사가 타고 있는 검은 말은 앞발로 바닥을 긁더니 길게 숨을 몰아 쉬었다. 코에서 하얀 연기가 진하게 뿜어져 나왔다. “누구냐? 나는 검안 사자 백작의 셋째 아들, 리제니 덴 뤼미에르다. 정체를 밝혀라.” 그는 칼을 뽑으며 소리쳤다. “라이온 기사단이냐? 그렇다면 당장 소속을 밝혀라.” 뒤에 있는 시종이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바보같은 말을 햇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어느 쪽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창을 앞으로 세우고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리제니는 뒤늦게 달아날 생각으로 말고삐를 틀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겁에 질려 발이 얼어붙어 버렸다. 검은 말은 두 번의 도약만으로 리제니와의 거리를 반으로 줄이더니 이후 엄청난 가속도로 달려왔다. 이겨본 적은 없으나, 리제니도 연습 삼아 형이나 라이온 기사와의 몇 번 마상 전투를 겨룬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기사도 이렇게 빠르게 돌격해 오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의식할 수 없는 빠른 순간에 검은 기사의 창이 리제니의 배를 뚫고들어갔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창에 찔린 채로 허공에 떴다. 창 끝에 꿰인 리제니는 고통에 혼미한 정신으로 검은 기사의 투구를 바라보았다. 투구 안에는 암흑만 가득했다. 끔찍한 악몽처럼..... 검은 기사는 창 끝을 천천히 내렸다. 리제니의 몸은 창에서 서서히 미끄러져 창끝에 걸렸다. 기사가 창을 세게 털자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바닥에 둔탁하게 떨어졌다. 두 시종은 몸이 굳어 달아나지도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소리를 내고 있으나 의식이 멀어져 가는 리제니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도몰랐다. 어디서, 누가 그 광경을 봤는지 먼 곳에서 들리는 메아리처럼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답은 알 수 ㅇ벗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단지 라틸다를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생이 끝난다는 것이 안타까웠따. 검은 기사는 죽은 리제니의 등에 한 번 더 창을 꽂았다. 그의 몸은 조금도 반응이 없었으나 검은 기사는 두번이나 더 창을 찔러넣었다. 달아나는 두 시종을 발견했으나, 기사는 흥미를 잃은듯 말을 돌려 왓던 길을 되돌아갔따. 아무도 감히 그 검은 기사가 되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지 못했다. 16. 붉은 장미 백작 라틸다는 화이트 와인을 잔 속에 굴리며 귀족들과 대신들, 파티에 초대된 일부 노르만트의 부자 상인들을 하나씩 눈 여겨 보고 있엇다. 절반은 그녀가 아는 얼굴이었고, 아는 얼굴은 모두 보기 싫은 얼굴이었다. 대부분 검은 사자 백작 편이거나 중립인 귀족들만 있었고, 붉은 장미 백작을 지원하는 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중립이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 지지하는 쪽은 있기 마련인데, 당연히 여기 있는 이들은 대부분 검은 사자 백작과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중립 중에는 에노아 후작이나 고디머 백작 정도만 두 백작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현재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고디머 백작도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지리적인 위치상 아마도 검은 사자 백작을 지지할 게 틀림 없었다. 가끔 그녀의 외모에 호기심이 동한 남자들이 접근하기도 했으나, 그녀가 누구인지 알면 즉시 사과하고 물러나버리곤 했다. 수다떨기 좋아하는 여자들도 무리를 지어 접근햇다가 라틸다가 옆에 있으면, 더러운 구정물이라도 본 것 마냥 코를 찡그리며 물러나기도 했다. 고립되었으나,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검은 사자 백작다운 생각이네요. 이런 스탠딩 바티라면 있을 곳 없는 난 아주 나처해질 테니까요.” “더 늦게 와버릴 걸 그랬죠?” 로일은 햄을 올린 치즈 크래커를 하나 물고 대꾸했다. “오늘은 아란티아에서 초대된 기사들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겠어요. 이런 재미 없는 파티에 오래 남고 싶지 않군요.” “할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습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여기 오면 알 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라면 이렇게 얼굴 비추는 게 할 일인가 봐요.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아요. 귀족들에게는 이런 것도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고디머 백작이 알려줘서 아란티아의 기사들을 보려고 왔겠지만, 아버지는 진작 알고 계셨나 봐요. 난 고디머 백작이 까마귀를 날릴 즈음에 스몰레이크에 있었거든요. 고디머 백작이 알려온 게 사흘 전이라니까, 멀리 있는 귀족들은 오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귀족들만 왔겠죠.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결국 노르만트 근처, 그러니까 뤼미에르 백작의 영지 주변에 있는 귀족들만 참여하게 된 거죠. 제게 있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적이에요.” “안전상의 문제라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티장이라 검을 소지하지 못했는데도 그는 여유가 있었다. 또 이런 파티와 인연이 없는 사람 같은데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귀족들이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주위를 가득 메우는 왕실 파티라면, 어지간한 귀족들도 기가 질리기 마련이었다. 대게 그녀의 경호를 맡은 이들은, 보호할 대상이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이라는 부담을 등에 짊어진 채 허둥대기 일쑤였다. 로저는 그나마 나았지만, 파티석상에서는 몸에 석고라도 바른 듯 딱딱하게 굳어있곤 했다. 하지만 로일은 들뜨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파티가 지루한 라틸다와 거의 같은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단순히 둔한 거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이 든든했다. “걱정하지 않아요. 있다면 뤼미에르 백작이 어떤 식으로 절 망신 시킬 작전을 짰는지가 걱정이죠ㅣ. 유치한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지만, 얼마 전 큰 전투에서 승리한 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것도 상관 없어요. 아, 그보다 하얀 늑대라는 기사에 대해서 아세요?” 로일은 물로 입을 헹구며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빙 돌려 표현헀다. “뭐라 말해야 할까..... 남들 아는 것보다는 더 알고 있다고 하면 되겠군요.” “당신 같은 기사라면 그런 쪽의 지식이 저보다 많겠죠. 로저가 이야기 해 준 적이 있어요. 모든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며 10년 전 누구도 멈추지 못할 거라던 론타몬의 정복 전쟁을 막은 울프 기사단. 그 중 가장 정예가 하얀 늑대들이라죠? 저는 그 때 어렸지만, 아직도 익셀런 기사단이 이끄는 론타몬 군대의 웅장함을 기억해요. 드래곤이 아니고서는 그 전쟁을 막지 못할 거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하지만 드래곤이 아닌 ???란티아의 여왕이 그 전쟁을 막은꼴이 되었죠.” “표면적으로는 그랬죠.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나라의 연합으로 이뤄낸 성과입니다. 울프 기사단은 론타몬의 진로만 막고 다른 나라가 다시 군세를 회복하기까지 시간을 벌어준 게 다랍니다.” “그래요? 그건 제가 데려온 이야기꾼이나 광대에게서 듣지 못한 이야기군요.” “남들보다는 조금 더 많이 아니까요.” 로일은 얼버무리며 웃었다. 한참 동안 와인 한 잔을 조금씩 나눠 마시던 라틸다는 이제 사람들의 무시마저도 지겨워졌는지 아는 얼굴을 하나씩 로일에게 소개시켜주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디에르 자작이에요.” 라틸다는 노란 콧수염을 좌우 대칭으로 기른 남자를 가리켰다. 얼굴은 약간 메마른 쪽에 가까운데 배는 임신한 여자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가리기 위해 주름 있는 옷을 입은 게 애처로웠다. “돈으로 자작을 산 상인인데, 어찌나 돈이 많은지 각 나라마다 자신의 저택이 따로 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그 저택마다 부인을 따로 두는데, 부인이 몇 명이 있는지 알 수가 없데요. 아버님게서 빚이 있었을 때 그 빚을 갚아준다며 날 여섯 번째 부인으로 맞아준다고 접근했을 때가 있었는데...... 어디 보자, 지금 그옆에 있는 젊다 못해 어린 여자가 여섯 번째 부인일 거예요. 정말 끔찍한 인간이에요. 자신은 돈으로 울프 기사단을 고용할 수도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역시나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났군요.” “음, 제 생각인데, 만약 하얀 늑대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그 다음부터는 일평생 침대 신세를 지며 돈을 발가락으로 세야 할 겁니다.” 라틸다는 생각만 해도 통쾌한 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오늘 어쩌는지 한 번 봐야겠군요. 아, 그리고 저 옆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쟌더프 백작 부인이에요. 쟌더프 백작이 죽은 이후에 오히려 쟌더프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능력 있는 여자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한 쪽 손이 기형이었던 터라 그게 콤플렉스에요. 의도적이든 아니든 누가 그 일을 언급하기라도 하면 마음 속에 품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나더라도 기어이 복수하고 말죠. 저와 친했었는데, 아버님께서 그 손가락에 관한 농담을 하는 바람에 뤼미에르 백작의 편을 들고 있죠. 저와도 이제 껄그러운 관꼐에요. 아까 내쪽에서 먼저 인사했는데 아는 척도 안 하더라구요.” 파티장 문이 열리며, 나팔수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모두에게 알렸다. “에노아 후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다들 웅성거리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 이전에도 많은 귀족들이 나팔수의 호명과 함께 입장했으나 지금처럼 모든 귀족들이 호응 하는 일은 없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 둘과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 둘을 거느린 노인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답지 않은 강한 눈매와 두꺼운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뒤의 네 명도 어느 쪽이 경호원이고, 어느 쪽이 시종인지 함부로 구별할 수 없었다. 로일이 보기에 그 중 세 명은 검을 아주 잘 쓰는 자들이었다. “아까부터 에노아 후작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누구입니까?” 로일은 라틸다가 말해주기 이전에도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다고 생각했다. 아란티아의 귀족 중에 있던 이름은 아니었다. 분명히 카모르트 어딘가에서 들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백작을 제외하고 가장 큰 영지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죠. 샤이필드 공작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권력의 제 2인자로 이나라를 지탱하는 커다란 축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국왕과 단둘이 대화할 수 있는 분이죠. 짐작하시겠지만, 그 분은 아버지와 뤼미에르 백작 둘 모두 싫어하세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라틸다는 천천히 설명했다. 에노아 후작은 자신을 반기는 귀족들과 하나씩 차례로 인사하더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짧고 하얀 지팡이를 짚고 있었으나, 특별히 절룩거리거나 허리를 굽히고 걷지는 않았다. 후작이 라틸다 앞에 서자, 따라오던 시종이 당황하며 귀엣말로 무언가 조언했다. 로일은 그의 작은 목소리를 포착해냈다. “그녀와 이야기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후작님.” 하지만 노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인사했다. “오랜만이구나 라틸다. 2년 만이냐?” “안녕하세요, 후작님.” 라틸다는 치마를 살짝 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다른 귀족들에게 하는 것처럼 형식적으로 인사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반기고 있었다. “쟌스테인 백작을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네가 있구나.” “아버님은 내일 쯤 오실 겁니다. 제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그래. 백작이 와 버리면 우리끼리만 할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를 하지 못하겠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느냐?” “나쁘지 않게 지네요. 하지만 최근에는 악몽을꿔서 잠을 잘 못 자요.” “아, 그거 아주 괴로운 일이지.” 에노아 후작은 그녀의어깨를 토닥거려 주었고, 그녀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마치 친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 같았다. 로일은 자리를 피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저는 창가에 있겟습니다.” “그러시겠어요?” 라틸다의 승낙을 얻은 후 로일은 창가에 섰다. 커튼을 젖혀 창밖을 보니 뒤늦게 도착하는 귀족들의 마차가 두어대 어둠 속을 달려오고 있었다. 정원을 순찰하는 경비병들의 횃불이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로일은 먼 발치에서 파티장을 훑어보았다. 그는 진작 친구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파티장을 휩쓸고 다니며,그녀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귀족 청년들을 새침하게 따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그녀는 그들을 놀리는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었다. 아즈윈은 남자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 조차 자신의 무기로 쓰고 있었다. 울프 기사단 중에서 시합 중에 그녀의 다리를 구경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녀의 하얀 허벅지를 한 번 훔쳐본 극히 짧은 시간의 대가로 머리에 한 번 검으로 얻어 맞은 기사들은 절대 시합 중에 한 눈을 팔지 않는 집중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러번 당하는 이가 있었다. ‘남자들이 안달이 나면 날수록 더욱 신비한 여인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겠지.’ 밤에 술친구가 없어 외롭다는 말을 던지며 쫓아오는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아즈윈은, 로일을 발견하고도 눈웃음만 지었다. 곱게 차려 입은 모습에 로일은 달려가 볼에 키스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둘의 눈인사는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가는 정도로 끝났다. 쉐이든은 술잔 하나 들고 다른 손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키가 커서 눈에 띄었으나, 굳은 얼굴로 정면만 주시하는 모습이 무서워 다들 그를 피하고 있었다. 아즈윈보다 먼저 알아봤지만, 그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로일은 그를 마스터만큼이나 좋아하며 따랐다. 그는 언제나 직전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상황이 닥치면 순간에 일을 해결하는 타입이었다. 가끔은 기다리는 시간이 불안할 때도 있었으나, 그런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또 로일이 마스터 외에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훈련 상대이기도 했다. 그가 아예 모른척 하는 모습에, 작전 중임에도 마음이 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을 존중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랄드는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하나씩 시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원래 식탐이 대단했는데, 이 곳 음식은 아란티아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기름지고 맛도 좋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금욕을 중시하는 기사단이라, 이런 음식을 맛보기가 힘들긴 했다. 그래도 로일과 눈이 마주쳤을때는 던멜식 수화로 간단하게 말을 전하기도 했다. ‘혼자 놀아.’ 그다운 인사였다. 던멜은 파티장에 있었으나, 그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은폐물 하나 없는 이 밝은 파티장에서도 존재감을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던멜이었다. 사실 그가 맘먹고 사라지면, 하얀 늑대 중에서도 쉽게 위치를 찾아내는 이는 없었다. 그는 이 파티에서 조용히 주시하는 역할을 맡은 모양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로일이 혼자 창가에 머물러 친구들의 위치를 살피는 동안, 그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느 한참 동안이나 로일과 같은 각도로 파티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일은 그가 누군지 즉시 짐작했으나, 굳이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붉은 장미 백작의 따님을 경호하는 검사입니까?” 그가 물었다. 굵은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고, 어려 보이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로일은 들고 있던 햄 크래커를 베어 물었다. 질문을 한 남자도 조용히 와인을 입술에 적셨다. “맞습니다.” 로일은 대답했다. 라틸다는 아직 에노아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가끔 즐겁게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후작과 그녀가 이야기 나누는 것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엇으나, 둘은 그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사실 카모르트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세 귀족 중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있겠는가? “어디서 백작의 따님을 만났습니까?”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스몰레이크 마을에서.” “늑대들을 몰고 다니는 도적 단을 벤 게 당신입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그 도적 중 하나를 만났습니다.” “맞습니다. 그들고 ㅏ만났습니까?” “전투는 없었습니다. 대신 몇 가지 일이 있었으나,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긴 이야기죠.” 둘의 앞으로 와인을 나르는 시종이 지나갔다. 로일에게 말을 건 남자는 빈 와인 잔을 넘기며, 마치 그 시종에게 들으란 듯이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카모르트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말하면 여자친구에게 혼날 곳에서.”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여자 친구는 아주 무서운 분인가 보죠?” “대단히.” 로일은 강조했다. “또 아주 아름답겠죠. 제 이름은 카셀입니다.” “로일입니다.” 그제야 로일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맑은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턱수염을 약간 기르고 있었는데, 그것만 없으면 아주 어려 보일 것 같았다. 그 남자는 로일의얼굴을 확인하는 정도로만 살피고, 다시 파티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일도 그의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제가 잃어버린 물건은 잘 지니고 계십니까?” 로일이 물었다. “지금도 지니고 있습니다.” 로일은 그의 허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아란티아의 보검이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던멜에게 이미 들었으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하는 로일이었다. “어디에서 주웠습니까?”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술집에서” “어떤 노숙자가 가지고 있더군요.” “고맙습니다. 당신이 그걸 찾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정말 슬펐을 겁니다. 잘 보관해 주십시오. 아니, 이제 당신 물건이니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겠군요.” “아니죠. 저는 잠시 맡아두고 있는 거지 소유한 게 아닙니다.” 로일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장미 백작의 따님은 저 붉은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입니까?” 카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옆에 있는 노인은 에노아 후작. 유일하게 두 백작의 힘에서 벗어나 있는 커다란 세력의 귀족이면서 두 백작을 좋아 하지 않는다더군요.” 카셀은 새로 받은 와인을 한 모금 한 뒤 침묵했고, 로일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파티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고, 사람들의 말소리에 음악 소리가 묻혔다. 라틸다는 에노아 후작과 가벼운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로일을 찾고 있었다. 로일은 손을 들어 보였다. “앞으로의 상황 전개가 어떻게 되든 당신 뜻대로 행동하십시오. 우리 모두 거기에 맞추겠소. 그리고 우리가 먼저 행동하고 그것을 당신이 알아챈다면, 당신도 거기에 맞춰 주십시오. 만약 서로 어긋 난다면, 그 때는 임기응변으로 헤쳐나갑시다.” “던멜에게 들었습니다. 임기응변은 자신 없지만, 해보죠.” “허면 당신은 나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 무슨 뜻입니까?” 로일이 그를 바라보자, 카셀은 엄지로 약지를 접은 손등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던멜식 수화에서 ‘캡틴’이라는 뜻이었다. 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카셀이 말했다. 라틸다는 로일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그 사이 새 친구를 사귀셨나 보죠?” “아 이 분은......” 로일이 그를 뭐라고 소개할 까 망설일때, 그가 먼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했다. “이 기사 분을 발견하고 제가 먼저 접근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라틸다. 저는 기사 카셀이라고 합니다.” 라틸다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날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해오다니, 어느 쪽 귀족의 기사 인지 궁금하군요.” 그녀는 마치 보란 듯이 자기 쪽을 안 좋은 시선으로 노려보는 다른 귀족들을 힐끗 노려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들은 얼른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카셀도 라틸다의 피곤해 하느 ㄴ표정을 보고, 이미 그런 건 알고 있다는 뜻으로 미소 지었다. 에노아 후적 정도 되어도 라틸다와 대화를 나누기가 껄끄러울 텐데, 카셀은 신경도쓰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순식간에 라틸다의관심을 끌었다. “전 상대를 마주 보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시기하는 부류가 아닙니다. 그보다 전 여기 계신 기사 로일이 어디 소속인지 궁금합니다.” “아는 사이라서 접근한 게 아닌가 보군요. 로일은 제 경호원입니다.” “용병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건 왜 묻죠?” 말하는 게 시원스러워 호감이 갔지만,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라틸다는 경계심을 품고 물었다. 그 때 마침 음악이 멈추고, 나팔이 울렸다. 대신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샤를 국왕 폐하와 검은 사자 백작께서 입장하십니다.” 기사들은 정중하게 부동 자세를 취하고, 귀족들은 모자를 벗거나 한쪽 무릎을 구부렸고, 여자들은 치마를 살짝 올리며 몸을 낮추었다. 카모르트 국왕과 함께 검은 사자 백작도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왕은 손을 들어 간단히 답례를 하고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백작은 파티장 옆에 섰다. 온통 나이 많은 대신들 중에서 유독 나이 어린 대신이 커다란 두루마리를 펼쳐 큰 소리로 모두에게 알렷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 분들을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환영합니다.” 귀족들은짧게 박수를 쳤다. “오늘 여기에 자리해주신 분들을 소개합니다. 이 파티를 주최하셨으며 지금까지 국왕폐하의 보필을 자청하여 맡아주신 누벨 덴 뤼미에르 백작.” 커다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암부르, 그 먼 곳에서 가장빠른 마차로 달려와 주신 쟌 말로 에노아 후작게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다시 한 번 박수가터졌다. “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도 불구하고 작은 목소리로 묻는 카셀의 말에 라틸다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뜻이죠” “제가 여기 있는 기사 로일이 용병이나고 여쭙자, 왜 묻냐고 되 물었죠?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버님의 기사단에 아주 대단한 실력의 기사들이 있지요. 그런 검을 보고 자라, 다른 여자들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검을 볼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안다고 자부할 수도 없겠죠. 어떤 대답을 원하시나요?” 라틸다는 따지듯 물었다. 박수 소리와 함게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는 대신의 목소리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브로도에서 오신 파레 르 나세리 백작, 를레에서 오신 이네 르드봉 자작, 역시 를레에서 오신 얀 마지멜 남작, 드와리에서 오신 프란 폰 트리에 자작.....” 카셀은 라틸다를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고 있었으나, 얼굴 가득 여유를 담고 느긋하게 말했다. “저는 방금 로일과 보이지 않는 검의 승부를 나누었습니다.” 그 말에 로일은, 눈을 크게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하지만 라틸다는 카셀만 바라보느라 로일의 표정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로일은 카셀의 의도를 뒤늦게 눈치채고 곧 얼굴을 싹 바꾸었다. 그가 먼저 행동하고 있었고, 로일은 그를 따랐다. “대단한 실력자더군요. 저도 검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나, 이 정도 검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저에게올 수 있느냐고.... 그가 가진 검의 세계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세계로 안내하겠다고 제안하던 중이었죠. 용병이라고 했습니까? 특별히 당신에게 고용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이 분을 양보해 주셨으면 어떨까 합니다.” “무례하시군요. 처음 보는 사람의 경호원으르 데려가려 하다니!” 라틸다는 일부러 화는 표정을 지어 말했다. 동시에 카셀이라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도커졌다. 그의 말에는 묘하게도 듣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고, 가만히 듣다 보면 원하는 게 무었이든 들어줘야 할 것 같은 설득력이 있었다. “맞습니다. 무례하죠. 하지만 이 분의 실력은 제가 그런 무례를 감수할 만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단지 당신의 경호원에 불과하다면, 당신은 세상 어디에서도 이 정도의 경호원을 만나지 못할 겁니다.” 대신의 호명은 계속 이어지고있었다. “앤리 로 디에르 자작, 막스 칵를 남작, 메르소 드 쟌더프 백작 부인......” 라틸다는 호명되는 이름들을 건성으로 듣다가 뒤늦게 카셀의 말에 대꾸했다. “저도 로일의 검을 대단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세상은 넓어요. ‘세상 어디에서도’ 라고요? 그렇게 단언한다면 당신도 진짜 검술의 대가는 아닌 모양이군요.” 라틸다는 공격적으로 말했으나, 카셀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넓은 세상에도 정점에 이른 자가 있는 법이오. 만약 레이디께서 이 분을 단단히 붙들지 않는다면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의 이름을 몯 ㅜ읊은 대신에 두루마리를 접고 새로운 손님을 소개했다. “........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놀라시겠지만, 그 분들은 이미 이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 놀란 귀족들으 ㅣ웅성거림이 파티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옆에 있는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거나, 어디 숨어있는 사람이 없나 파티장의 구석을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라틸다는 이미 하얀 늑대들에 대한 흥미를 잃고 카셀의 말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어디로 대려 가신다는 거죠?” “데려가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니에요. 로일은 스스로 제 옆에 있어 주겠다고 말했으며, 저는로일을 구속하지도 않았어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로일이 당신을 따라간다면, 저는 최소한 로일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아야 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검사가 당신을따르고 있다면, 그 정도 권리는 당신에게 있습니다. 레이디, 나는 로일을 아란티아로 데려갈 겁니다.” 라틸다의 눈동자가 커졌다. 대신이 큰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두에게 소개합니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에서 오신 하얀 늑대들읿니다.” 귀족들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군중 속에 섞영있던 몇 명이 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중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비의 여인’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꼬셔서 오늘밤 침대로 꾀어낼가 고민하던 젊은 귀족이나 귀족 2세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또 쉐이든으 로고 한 명이, ‘내가 그랬지? 저 사람인 줄 난 알고 있었어.’ 라며 잘난 척 하기도 했다. “당신께 따로 제 소개를 드리고 싶었으나, 공개적으로 지명을 받았으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같이 소개를 해야 되겠군요. 나중에 또 뵙게 되길. 즐거운시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레이디.” 카셀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라틸다는 너무 놀라 그으 ㅣ인사를 받지도 못했다. 카셀을 포함한 다섯 명은 하얀 늑대들이 왕 앞에 서서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귀족들은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그들의 모습에 들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일, 저 사람과 보이지 않는 검술을 펼쳤다구요?” “예. 아주 엄청난 실력자더군요.” 로일은 어색한 거짓말로 둘러댔으나, 반즘 정신이 나간 라틸다는 그런 것은 눈치챌 수 없었다. 젊은 대신이 좌중을 조용히 시킨 후, 왕이 와인 잔을 들고 일어났다. “오랜 만에 한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소.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귀한 손님이 왔으니 모두 그들과 함께 즐겁게 마시고 즐기도록 하시오. 아란티아의 기사들이여, 카모르트에 온 것을 환영하오.” 왕은 술잔을 높이 들엇다. 귀족들도 모두 술잔을 들었다. “아크랜드를 수호한 아란티아에 영광이 있기를.” 모두 아란티아와 하얀 늑대들을 연호했다. 하얀 늑대들은 당장 파티의 중심이 되었다. 모든 귀족들은 그들의 옆으로 다가가 한 마디라도 더 말을 건네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거기에 제대로 대꾸를 해주는 사람은 카셀과 게랄드 뿐이었다. 던멜은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자, 다들 어쩔 수 없이 다른 네 명에게 접근했지만 쉐이든은 무서운 표정으로 팔짱을끼고 있으니 다가 가질 못하고, 아즈윈은 카셀의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옆에 꼭 붙어서 묻는 말에 아무 말도 해주질 않았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추근대던 남자들의 사과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뒷수습 하려고 쩔쩔 매는 것까지 즐기고 있음에 틀림 없었다. 로일은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와인만 마셨다. 벌써 술이 맣ㄴ이 올라 얼굴이 붉어졌지만 달리 할 게 없었다. 라틸다도 하얀 늑대들의 캡틴과 이야기했다는 충격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 쟌스테인 백작은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용케 알고 왔구나.” 굵은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쪽에서 접근했다. 라틸다는 그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으나 돌아뵈도 않고 대꾸했다. “왕의 손님을 맞이하는 파티에 당신의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뤼미에르 백작님. 비록 백작님께서 이 파티를 주최하셨다 해도요. 아니면 초대장이 없으니 쫓아내기라도 하실건가요?” “그러기야 하겠니, 라틸다?” 검은 사자 백작은 동의도 구하지 않고, 라틸다의 옆에 섰따. 라틸다는 의식적으로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로일은 뒷짐을 진 체로 그녀의 옆에 좀 더 가까이 섰다. 묘한 살기가 주변을 감돌아 지금까지와 달리, 그는 조금 긴장하기로 했다. 살기의 정체는 검은 사자 백작을 호위하고 있는 기사 세 명 중 한 명의 것이었따. 노르만트로 들어오기 전에 라틸다와 짧은 설전을 벌였던 기사, 바딩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느슨하게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으나, 당장에 칼을 뽑을 것 같은 살기를 내고 있었다. 상대가 검이라도 소지하고 있었다면 로일도 거기에 반응하여 방어 자세를 취했을 정도로 확실한 공격 자세였다. 로일은 곧 그가 일부러 그러고 잇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상대와의 거리를 재고있었다. 마치 울프 기사단 테스트처럼. 로일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세를 풀었따. “너도 하얀 늑대들을 구경하러 온 거냐?” 검은 사자 백작은 마치 아버지라도 된 듯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재미없는 귀족들의 얼굴만 구경하고 가는 것 보다는 훠씬 보람이 있군요.” “먼 길을 달려왔으니 한 가지 보람이라도 있어야지. 오는 길에 불편한 점은 없었느냐?” 라틸다는 고개를 획 돌려 검은 사자 백작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거짓말을 한다고 얼굴이 테를 낼 사람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럴 기미라도 보이면 그녀는 즉시 검은 기사에 대한 일을 추궁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라틸다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의하해 했다. “없었습니다.” “요새는 도적들이 하도 극성이라 나도 고민이 많구나. 쟌스테인 백작은 영지 관리를 어떻게 하나 모르겠다.” “두 분이 전쟁을 이어가는 동안에는 절대 이런 문제가 그치지 않을 겁니다.” 라틸다는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재미있는 충고를 하는구나. 그럼 내가 주는 조언을 네 아버지에게 전달하거라. 세상에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자신의 욕심을 줄이고 묵은 잘못을 사과한다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진다고 말이다.” “아버님께서 힘을 갖기 전이라도, 카모르트 사람드링 행복하겠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그리 생각하느냐?” “어려서 모른다고 하시려고요?” 라틸다의 당돌한 말에 검은 사자 백작은 입맛으루 다시며 웃었다. “그런데 경호원은 옆에 있는 그 친구 하나냐? 기사 바딩이 그러는데, 네가 마부를 데리고 이 자리에 서 있다고 하는구나. 내가 온 건 다름이 아니라, 네 경호 문제 때문이다. 내 영지나 노르만트에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무슨 망신이겠니? 내 기사단 중 몇 명을 추려 너에게 붙......” “필요 없습니다! 무리 지은 고양이를끌고 다니느니, 한 마리 호랑이를 데리고 있는 편이 안전하죠.” 라틸다는 백작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거절했다. “레이디 라틸다, 제가 보기에는 그는 마부 이상의 검술도 갖지 못한 자입니다.” 바딩은 농담이라도 즐기듯 여유 있게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이끄는 기사단 중 세 명을 추려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안전하게 모샤다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이 곳에는 붉은 장미 백작의 곤대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라틸다는 백작과 바딩이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망신을 줄 것인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욕을 하거나, 왕을 앞에 두고 붉은 장미 백작의 잘잘못을 논하겠지, 라고. 하지만 바딩은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허를 찔려, 그녀는 뭐라 대꾸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만 두거라, 바딩.” 백작이 그를 저지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거라, 라틸다.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언제라도 나를 원한다면 찾아오너라. 어떤 지원이라도 아끼지 않으마. 내가 아무리 정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들, 한 때 내 며느리가 될 뻔한 아이를 박하게 대하겠느냐?” “고맙습니다, 백작님. 하지만 저는 정말 상관 없습니다.” 검은 사자 백작은 곧 물러나, 파티장의 다른 곳에서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계속 했다. 라틸다는 약이 잔뜩 올라 로일을 노려보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뭘 말입니까?” “당신이 별 거 아니라느 ㄴ소리에 화나지도 않나요? 마부 이상의 검술도 갖지 못한 자? 방금 하얀 늑대들의 캡틴도 당신이 대단하다고 그랬잖아요.” “실제로 저는 바딩에게 그렇게 보였습니다.” 라틸다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렇게 보이다니요?” “약하게 보이도록 내버려 두었다고요. 저는 의식적으로 상대보다 강해 보이는 짓은 하지 않거든요.” “맹수는 포효하여 자신을 과시하죠. 그건싸우지도 않고 상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왜 자신을 작게 보이려고 한거죠?” “제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게 싸움을 피하는 방법이거든요. 언짢았나요” “그래요. 당신이 망신을 당하는 건 곧 내가 망신을 당하는 것과 같아요.” “음, 그러죠. 다음부터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라틸다.” 로일은 지나치게 진지한 얼굴로 라틸다의 말을 받아들였다. 라틸다도 곧 바딩의 말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그것은 망신이랄 것도 ㅇ벗었다. 오히려 이후에 만날 귀족들에 비하면 바딩과 검은 사자 백작은 아주 정중한 편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레이디 라틸다? 전에 봤을 때는 어린애였는데, 지금은 아주 성숙한 여인이 되었군.” 라틸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인상부터 찡그렸다. 파티장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이었건만 그는 예전에 안면이 있었다는 자신감 만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로일이 과감하게 그를쫓아내 주길 바랬지만, 로일은 그저 접근해 온 귀족을 위해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엔리 로 디에르 자작. 어디 계신가 했더니 제 등 뒤에서 접근해 오시는군요. 오랜 만입니다.” 라틸다는 한껏 비아냥 거리며 말했건만, 디에르는 오히려 자신을 환영해주는 소리라고 착각한 나머지 튀어나온 자기 배만큼이나 엄청난 친근감을 보이며 다가왔다. 그를 따르는 경호원 마저 하나같이 디에르와 똑같은 느글거리는 눈동자로 라틸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아버지가 옆에 있어도 그가 이렇게 다가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까부터 말을 걸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조금 자제했소. 지금은 다들 하얀 늑대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 조금 시간을 내었지.” 디에르는 꽤나 배려한다는 말투로 말했다. “붉은 장미 백작께서는 잘 계신지 모르겠소.” “내일 오시니 직접 보시죠.” “옆에 있는 분은?” “제 경호 기사에요.” “으음, 그럼 내 경호원들과도 말이 통하겠군. 이 셋은 내가 있는 도시에서 가장뛰어난 검사들로 둘은 브로도 지방에서 열린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까지 가지고 있소. 백작의 따님을 경호할 정도니 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만 하겠지.” 디에르는 로일에게 권했다. “옆에 가서 내 경호원들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게 어떤가? 난 레이디와 잠시 지난 일을 이야기 할까 하네.” 그는 허허 웃으며 음식 기름 묻은 손을 슬그머나 그녀의 어깨에 올려 놓았다. 라틸다는 당장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로일의 손이 그보다 더 빨랐다. 디에르의 손목을 움켜쥔 로일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는 숨 죽인 비명을 질렀다. 잘 훈련된 경호원 둘은 당장 품에 있는 단검을 꺼내려 했지만 로일이 꺼내든 놀라운 무기에 둘의 몸이 경직되었다. 과일을 찍어먹던 손가락 길이만한 포크였는데, 목에 닿은 차가운 금속은 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포크를 대지 않은 다른 한 명은 눈빛만으로 제압한 뒤 로일은 디에르 자작에게 말했다. “물러나십시오. 레이디께서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자작은 그 와중에도 화를 내고 있었다. “놔라, 이놈. 감히 경호원 주제에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냐?” “내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한 명 뿐이오. 디에르 자작. 어떻게 할까요, 라틸다?” 로일은 손에 쥔 힘을 조금도 배지 않고 물었다. 라틸다는 은근히 이 상황이 즐거워, 놀리는 투로 말했다. “놔드려요, 그러지 않아도뼈가 안 좋은 분이에요.” 로일은 자작을 놓아주고, 그의 경호원 목에 들이댄 포크도 되돌렸다. 자작은 로일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잡힌 곳을 주물렀다. “너무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여긴 검은 사자 백작의 영지인 도시에 나의 투자 도시이기도 한 곳이야. 내 명령 한 마디면 네 목 하나 따는 건 일도 아니야.” “어느 쪽이 제 목을 따는 겁니까?” 로일은 포크를 들이댔던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라틸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자작은 당장 단검을 꺼내 달려들려는 경후원을 저지한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넨 아직 내 위치를 모르는군. 자네가 얼마나 검에 자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지갑만 열어보이면 내 밑에 모일 용병이 얼마나 되는지 아나? 원한다면 하얀 늑대들도 대 밑으로 고용할 수 있어!” 그 말에 괜스레 라틸다가 화가 났다. “그런 무례한 말씀이 어디 있소? 당신이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 모르는 자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싶지 않지만, 나라에 오신 손님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럼 경호원 관리부터 먼저 하는 게 어떻소?” 점점 열리 올라 서로의 목소리 톤이 올라갈 즈음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섯 명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갑자기 모두 말을 멈추고 자작의 옆에 있는 여자에게 눈을 주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도 모르게 여기에 서 있거나, 아니면 아주 우연히 지나가는 것처럼 과장된 손 동작을 보이며 인사했다. “어머나, 미안해요. 남 얘기 듣는 건 취미가 아니지만, 갑자기 하얀 늑대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얼른 끼어 들었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 있네요. 이왕 왔으니 인사라도 해야겠죠? 아까 저한테 돈 몇 푼 준다며 아름다운 저택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앤리 로 디에르 자작님 맞죠?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요.” 아즈윈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얼굴에 품고 디에르의 코 앞까지 다가갔다. 안 그래도 키가 큰 아즈윈이 힐까지 신고 있으니 키가 작은 자작은 어쩔수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아, 아까는 제가 좀 무례했소. 용서하시오.” 디에르는 뒤늦게 사과했다. “하얀 늑대들을 고용하신다구요? 자, 얼마를 주실 건가요? 액수만 맞는다면 기꺼이 당신의 저택을 찾아 가겠습니다. 물론 아까처럼 밤일을 위해 간다는 소리는 아니니 너무 기대하진 마시길.” “사, 사과할 기회를 주시오. 아, 아즈윈 울프.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런게아니오.” “사과는 무슨 사과? 그냥 돈이나 달라니까. 얼마 줄 거요?” 아즈윈은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고 디에르는 울먹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즈윈은 멀뚱히 서 있는 디에르의 경호원을 힐끔 보다니 말했다. “이봐들, 자네 주인이 위험에 처했는데, 안 도와줄꺼야?” 그들은 머뭇거리며 거기에 뭐라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오래 수련을 한 검사들이며, 귀를 틀어 막고 살지는 않았으므로 하얀 늑대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기들의 실력으로는 하얀 늑대가 아니라 울프 기사단의 기사도 이기지 못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디에르 자작,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앞으로 경호원을 뽑으려거든 돈이 아니라 신의로 뽑으세요.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검사 분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지목한 양반이니까 건들지 마시고.” 디에르는 고개만 끄덕인 후 달아나듯 사람들 틈으로 걸어갔다. 아즈윈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디 라틸다, 본의 아니게 당신의 즐거운 대화를 방해했군요. 캡틴이 여기 멋진 기사가 한 명 있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습니다. 검술은 어떨지 몰라도 일단 보기에 무척이나 잘 생긴 분이군요. 지루한 파티장에서 발견한 보석이랄까? 춤은 출 줄 아세요, 기사님?” 로일은 빙그레 웃으며 가슴에 손을 얹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사님. 저도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과 춤이라도 한 곡 추고 싶지만, 보다시피 저는 제 주인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아, 그러셔야겠죠. 그리고......” 아즈윈은 라틸다의 옆에 바짝 붙어 소곤거렸다. “아까 같은 저런 남자가 접근하면 구두 끝으로 정강이를 걷어 차 버려요. 적중률 높은 최고의 공격 방법이니까.” 라틸다는 긴장된 마음을 풀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즈윈은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멋진 기사님. 나중에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겟군요.” 로일도 손을 들어보였다. “당신은 유난히 하얀 늑대들의 눈에 띄나 봐요. 이제 와서 묻는 건 우습지만, 혹시 당신 정말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라틸다는 카셀에 이어 아즈윈의 잔영에 싸여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떠돌이 여행자입니다. 당신이 아는 것 이상의 존재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앞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겠군요. 어쩌시겠어요?정말 아란티아로 가실 건가요? 저와 한 약속 같은 건 잊어버려도 좋아용. 제 생각에는 아란티아에 당신의 미래가 있는 것 같아요. 신중히 판단하세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다른 건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의 옆에 있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에요.” “그건 기쁜 일이지만, 당신을 제 옆에 두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게 아닌가 싶군요.” “제가 원하기도 했지만 또한 당신이 원해서 제가 있는 겁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는 언제든 떠나겠습니다.” 라틸다는 손을 내저었다. “오해 말아요. 당신이 싫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아란티아의 기사가 되는 건 당신 같은 검사들이 바라는 꿈이 아닌가요? 그런 꿈을 그렇게 쉽게 버린다는 건 제가 봐도 너무 아까워요.” “저는 먼 미래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사람이 못 됩니다. 언제나 눈 앞의 일에만 집중하죠.” “충고할 만한 일이 되나 모르겠지만, 그건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에요.”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라틸다가 원하면 언제든 전 떠나........” 라틸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따. “아니에요. 그만하죠. 미안해요. 또 내가 솔직하지 못했어요.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라틸다는 진심으로 말했다. 로일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라틸다의 옆을 지켜주었다. 카셀은 하얀 늑대들에 대해 묻는 사람들의 질문을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카셀은 특별히 잘 생기거나 카리스마 있는 외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려하게 치장한 아즈윈과 무서운 눈의 쉐이든, 근육질의 게랄드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하는 던멜, 이들이 형성한 무거운 공기를 배경으로 한 카셀의 모습은 유난히 강해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착각할 만 했다. 로일은 네 명의 중앙에 서 있는 그가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선이 가늘어 가장 하얀 늑대와 거리가 먼 외모를 가진 로일이었기에, 원래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카셀의 모습에 질투심마저 느낄 정도였다. 어떻게 저 네 명을 자기 손 안에 두고 움직일 수 있을까? 마스터의 눈에는 카셀이 어떻게 평가될까? 모두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반면, 검은 사자 백작만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는 파티에서 일부러 소외되어 한쪽에서 술만 마셨다. 가끔 그의 편인 귀족들이 다가가 말을 걸었으나 적당히 상대하다가 보내버리곤 했다. “허면 캡틴 카셀, 당신들이 이 나라를 빼앗으러 온 게 아니라고 어떻게 증명하겠소?” 여러 가지 질문이 오고 가는 중에 목소리를 높인 노인의 목소리였다. 하얀 늑대들과 이야기 하는 초반의 들뜬 분위기는 가라앉고, 조용한 음악과 귀족들의 숨 죽인 목소리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의 강한 어조는 좌중을 순식간에 집중시켰다. 파티장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소음인 양 차단하고 있던, 로일까지 그를 보게 될 정도였다. “질문을 하신 분의 성함을 여쭤도 실례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이 곳 귀족들의 신상명세를 잘 몰라서.” “나의 이름은 쟌 말로 에노아요. 하지만 내 이름이 이 자리에서 중요한 건 아니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 점을 우려하고 있소. 아란티아라면 이제 그 강대국 론타몬 조차 함부로 못 하며 모든 나라들이 두려워 하고 있는 대국이오. 그런 나라의 가장 유명한 기사단이 직접 이 나라를 방문했소. 그렇다면 그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해석될 만도 하지 않은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캡틴 울프?” 그것은 직접적으로 왜 왔냐고 따지는 말이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시비를 거는 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셀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안게 대꾸했다. “그 점을 염려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에노아 후작님께서는 우리 다섯 명이 이 나라의 운명 조차 바꿀 수 있다고 과찬해 주시는군요.” “나는 그런 좋은 뜻으로 말한 게 아니오.” 에노아 후작은 부드럽게 넘어가려는 카셀의 말을 꼬집었다. 그는 지팡이를 바닥에 쿵 찍으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국왕 폐하와 당신들의 여왕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약속 때문에 놀러 왔다고 믿는 이들도 있소.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소. 나는 솔직히 말했으니 당신도 솔직히 말을 해줘야 할 거요, 캡틴 울프.” “거짓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에노아 후작. 그러면 저도 당신께 묻겠습니다. 후작께오선 검은 사자 백작의편에 있브니까, 붉은 장미 백작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또 다른 세력입니까?” 에노아 후작의 도발적인 물음에 이은 카셀의 말에 거기 모인 모든 귀족들의 행동이 멈췄다. 먹고 마시는 손도, 대화에 열을 올리던 입도, 심지어 파티장을 후덥지근하게 달구던 사람들의 호흡 조차 멈췄다. 로일은 저도 모르게 검은 사자 백작의 눈치를 보았다. 검은 사자 백작도 마시던 와인을 내리고 카셀 쪽을 바라보았다. 어쩌자고 카셀이 저런 말은 하는지, 로일은 불안하기만 했다. “지금 날 도발하는 건가, 캡틴?” “그런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솔직해 지신다니 궁금한 걸 여쭈었습니다. 대답해 주시면, 저도 솔직히 대답하겠습니다.” “나와 샤이필드공작님은 샤를 3세 국왕 폐하께서 태어날 때부터 이 나라에 봉사를 해왔소.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뭐요? 내가 속해 있는 곳은 오직 카모르트 뿐이오.” “솔직한 답변이셨습니다. 그럼 저도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국왕 폐하를 뵙기 위해 찾아온 것 외에는 어떤 목적도 없습니다. 우리의 방문 자체가 아란티아 여왕님께서 카모르트 국왕 폐하께 드리는 선물일 뿐입니다.” 에노아 후작은 그 나이에도 건강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지팡이로 바닥을 또 한번 툭 쳤다. “적절하지 못한 질문과 적적하지 못한 답변의 연속이었군.” “예. 우리 둘 다 그랬습니다.” “그럼 이 재미없는 대화는 그만둠세. 나중에 캡틴 울프는 나와 또 한 번 그 일에 대한 논쟁을 즐길 수 있겟어. 국왕 폐하와의 일이 끝나고 내 영지로 초대할 때 한 번 찾아주지 않겠소?” “저는 인생의 지혜를 모두 품고 계신 분들과의 대화를 아주 좋아 합니다. 초청을 기다리겟습니다.” 긴장된 분위기는 순식간에 풀어지고, 다들 웃었다. 가장 안심한 사람은 로일이었다. 로일이 보기에도 카셀은 정말 하얀 늑대들의 캡틴답게 처신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캡틴으로 계속 있엇다면 지금의 카셀처럼 모두에게 지시를 내리고 에노아 후작과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했을까? 그는 자신이 시야가 좁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폭 넓게 주위를 살피고 미래의 일을 하나씩 대비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칼을 잃어버린 건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파티장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사실 파티장에서 상당히 먼 곳부터 시작된 그 요란한 소리가 계속 이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로일은 전혀 신경을쓰지 않고 있었다. 소란이 진정되지 않자, 경호원들이 뛰쳐나가고 대신들은 누군가에게 ‘안됩니다.’라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우습게도 대신들이 필사적으로 만류를 하는데도 정작 말려야 할 경비들은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었다. 그들이 게으르거나 대신들이 쩔쩔 매는 걸 구경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 아니었다. 파티장의 모든 귀족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경비들 조차 지금 들어오고 있는 누군가를 상대로는 함부로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검은 사작 백작과 바딩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바딩은 파티장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무기인 단검을 꺼내려고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아직도 먹고 있던 게랄드가 접시를 내려놓았고, 팔짱만끼고 있던 쉐이든이 팔짱을 풀었다. 카셀은 귀족들과 대화를 멈추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도 무슨 일인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장을 하고 파티장에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백작님.” 늙은 대신은 마지막까지 부탁했으나,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닫힌 문이 벌컥 열리며 붉은 색 플레이트 메일과 커다란 칼로 무장한 기사들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음악이 멈춘 실내에 철컥거리는 금속음이 울리며, 시끄럽던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다. 열을 맞춰 들어오던 기사들이 걸음을 멈추자, 파티장은 완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열 두 명의 기사들 사이로 그들과 같은 무장을 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붉은 수염과 붉은 갑옷은 라틸다의 붉은 드레스와 묘하게 어울렸다. 로일은 라틸다가 무척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정체를 알았다. “이건 어떤 종류의 장난인지 모르겠군, 쟌스테인 백작.” 검은 갑옷으로 중무장된 기사들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검은 사자 백작은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다. 바딩은 검은 사자 백작의 옆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는데, 백작도 그의 보호 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걷고 있엇다. “반년 만이군, 뤼미에르 백작. 나도 폐하가 있는 파티장에 이런 복장으로 오는 것은 싫었소. 솔직히 말하면 미친 짓이지. 허나 당신의 영지에 맨몸으로 들어오는 것도 미친 짓인 건 마찬가지지 않겠소? 둘다 미친 짓이라면 나는 안전한 쪽을 택하겠소.” 붉은 갑옷의 백작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자네의 명예를 중히 여기지. 그런데 자네는 내 명예를 중히 여기지 않는가 보군. 내가 설마 폐하의 도시에 들어온 귀족을 공격하리라고 생각 했는가?” “당신의 명예가 내 목숨만큼이나 가치있는 일인지 모르겠군. 사실 전에는 그랬었으나, 지금은 그렇다고 할 수 없소. 내 딸이 당신의 기사단에게 공격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내 목숨은 나 스스로 지키기로 했소.” “그게 무슨 소린가?” 검은 사자 백작은 눈을 부릅떴다. 붉은 장미 백작은 국왕을 향해 소리쳐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밖에 인사드릴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제 이름과 명예를 지키기 윟나 싸움 때문에 검은 사자 백작과전쟁을 벌임으로써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리는 점, 언제나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이 곳을 향하는 제 딸아이가 검은 기사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은 사자 백작은 화가 나 소리쳤다. “터무니 없는 모함이다, 쟌스테인 백작. 설마 검은 기사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들 그게 라이온 기사단의 공격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떤 오해에도 변명하지 않는 뤼미에르 백작께서 왜 그런 말을 하시오? 폐하, 이제 와 이런 복장으로 예를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내 내 딸을 공격한 건 명백한 도발입니다.” 붉은 장미 백작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국왕은 두 손을 내저으며 다가갔다. “둘 다 진정하시오. 특히 붉은 장미 백작은 일을 너무 과격하게 해결하려 하지 마시오. 나는 두 사람의 전쟁에 대해 일부는 이해하고 있으며, 조만간 해결을 할 거라고 믿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상황이 악화되는 건 원하지 않소.” “그렇다면 폐하. 뤼미에르 백작에게서 내 부하들이 죽고 내 딸이 위험에 처한 일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습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손가락으로 검은 사자 백작을 가리켰다. 검은 사자 백작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쟌스테인. 험한꼴 보이지 마라. 폐하와 모든 귀족들이 보고 있는 자리다. 최대한 너의 명예를 지켜줄 테니 지금 이 자리에서 물라나. 머리를 식히고 돌아오면 오늘 저지른 무례에 대한 잘못을 묻겠다.” “헛소리! 난 당신의 명예를 지켜줌과 동시에 당신이 먼저 사과하고 항복할 기회를 주려고 지금까지 전면전을 피해왔다. 당신이 믿고 있는 라이온 기사단과 검은 사자의 군대가 얼마나 과대포장 되었는지, 당신이 선대 때부터 지켜왔던 검은 사자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가르쳐 주겠다. 노르만트는 머무르지 마시오, 뤼미에르 백작. 나는 국왕 폐하께서 거처하는 이 도시를 건드리고 싶지 않으니까.” 붉은 장미 백작의 말에 검은 사자 백작도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는지 소리질렀다. “그런 말을 하고도 이 자리를 떠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느냐?” “이 파티장에서 피라도 보고싶은거요, 뤼미에르 백작?” 붉은 장미 백작이 두 걸음 다가왔고, 거기에 맞춰 바딩이 검은 사자 백작ㅇ의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붉은 장미 백작을 지키는 붉은 갑옷의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철컥하는 금속응이 유난히 크게 퍼졌다. 그들의 손은 이미 칼 위에 올라가 있었다. 놀란 여자들이 짧게 비명을 질렀고, 남자들도 겁에 질려 더욱 뒤로 물러났다. “둘 다 자제하시오. 손님이 있는 자리요.” 국왕이 엄히 말했다. 붉은 장미 백작은 그제야 왕의 옆에 서 있는 카셀을 발견했다. “안녕하시오, 쟌스테인 백작. 처음 뵙겠습니다.” 카셀이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하얀 늑대들......” 붉은 장미 백작은 가늘게 눈을 뜨고 그의 웃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래, 소문은 들었지. 내 부하들과 당신과 만났다고 하더군.” “아, 로즈의 기사 리토르. 만나 좋지 않게 헤어졌소.” “허면 왜 그 길로 나를 찾지 않았는가? 당신이 올 곳은 여기가 아니라 나의 영지였소.” 그의 몇 마디 말만으로 귀족들은 긴장했다. 그는 짧게 카셀과 시선을 주고 받은 후 즉시 파티장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가 지나가는 방향에 모여있는 귀족들이 좌우로 피해 길이 하나 생겼다. 길의 끝에는 라틸다와 로일이 있었다. “괜찮느냐, 라틸다?”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피처럼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웅장하여 라틸다의 모습은 왜소하다 못해 어린 아이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검은 기사의 공격을 받았다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요?” 라틸다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몰레이크의 와인 상인에게 들었다. 그 말을 듣고 한 번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지. 로저에게 확인해 봤더니, 확실히 라이온 기사단이 맞다고 그러더구나.” “로저는 지금 겁에 질려 검은 솥뚜껑만 봐도 검은 갑옷이라고 떠들겁니다. 그들이 라이온 기사단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아버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확인되지도 않은 정보에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라틸다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붉은 장미 백작은 주위 시선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모든 상황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너는.......” “그래요. 다 알아서 하시겠죠.” 라틸다는 아버지를 지나쳐 붉은 갑옷을 입은 열 두 명의 기사 쪽으로 걸어갔다. 기사들은 그녀를 통과시켰으나, 뒤따르는 로일의 길을 막았다. 육중한 플레이트 메일의벽에 박혀 로일이 걸음을 멈추자, 라틸다는 버럭 화를 냈다. “모두 비켜요. 바보 같으니! 이 사람은 나의 경호 기사입니다.” 따라오던 붉은 장미 백작이 물었다. “경호? 못 보던 기사인데, 누구냐?” “제 일입니다. 아버지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라틸다는 반항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붉은 ㅈ아미 백작은 코방귀를 끼며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제야 그들은 로일이 지나가갈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둘은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자네는 우선 딸 관리나 잘 해야겠군. 저래선 어떤 남자도 데려가지 않을 걸세.” 검은 사자 백작이 한 마디 했다. “당신 아들이나 잘 관리 하시오. 남의 딸에게 치근덕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 붉은 장미 백작도 받아 치고 파티장을 나섰다. 검은 사자 백작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 열 두 명의 경호원 없이는 어디에도 못 가는 자가 백작의 명예를 따지다니 우습지 않은가?”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다들 억지로나마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하얀 늑대들과 왕은 웃지 않았다. 검은 사자 백작은 카셀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이래도 어느 쪽과 대화해야 할지 내게 물은 건가?” 그는 왕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티장을 나섰다. 완전히 분위기가 식어버린 파티는 오래 가지 않았다. 17. 카모르트의 국왕 파티장에는 아직 뒤풀이를 즐기는 귀족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오늘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최근 서로 대화할만한 공통 화제라고는 두 백작의 피 비린내 나는 전쟁 뿐이었던 터라, 하얀 늑대들이라는 소배는 밤새 떠들어 댈 만한 매력적인 소재였다. 하지만 결국 그 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는 붉은 장미 백작의 선전 포고였다. 남은 음식과 식기를 치우는 시종들과 시녀들이 바쁘게 돌아다녔고, 거의 쉬지 않고 몇 시간이나 계속 음악을 연주했던 악단들도 유난히 힘들었던 하루를 끝내고 자신의 악기를 챙기고 있었다. 파티장 바깥에는 오늘 있었던 일을 빨리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귀족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성내 별궁 또는 노르만트에 따로 마련한 숙소로 돌아갔다. 왕실의 경비들은 귀족들이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경비 대장은 그들의 배치 위치가 맞지 않는다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아직 하얀 늑대들과 한 마디 이야기도 못했다며 따로 만날 수 없냐고 왕실의 시종에게 몰래 돈을 쥐어주는 귀족도 있었다. 북쪽 탑 꼭대기에는 카모르트의 국왕과 카셀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망루에 서서 횟불로 이어진 귀족들의 귀가 행렬을 구경하다가 왕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에노아 후작의 말을 고려한다면, 당신과 단 둘이 있는 게 위험할 수도 있겠군. 안 그렇소?” 카셀은 왕과 같은 방향을 구경하며 숨을 돌리고 있던 차였다. 귀족들의 파티를 접해본 건 처음이었고 나름대로 파티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었으나, 동네 잔치보다 못한 재미없는 구경거리에 탁한 공기는 견디기 괴로웠었다. 음식과 술은 그나마 나았었는데,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조금 배가 고팠다. “정말 걱정하시는 겁니까, 폐하?” 예전에는 이름만 들어도 송구스러울 대단한 사람들을 하도 많이 접했더니 이제 한 나라의 국왕과 단 둘이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지금은 쉬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 검은 사자 백작에 이어, 에노아 후작에, 붉은 장미 백작까지...... 특히 마지막에 나타난 쟌스테인 백작의 출현은 너무 예상 밖잉었다. 에노아 후작처럼 하얀 늑대들의 방문 자체에 의심을 품고 공격해올 귀족은 하나쯤 나타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한 대처는 이미 쉐이든과 상의해 두었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쟌스테인 백작은 내일에나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작전도 없이 적을 만난 꼴이니 카셀은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짜내느라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셀 수 없이 굴려봐야 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딸만 데리고 사라져 주었다. 그 를 상대할 몇 가지를 겨우 구상한 상태에서 가버려 조금 허탈하긴 했지만, 어설프게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재미있는 건 이런 혼란 속에서 로일이 붉은 장미 백작 쪽에 합류 했다는 것이었다. 한 명쯤 따로 행동할 사람이 필요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결과적으로 로일은 그쪽 스파이가 된 셈이었다. 혹시나 정체를 들키면 어쩌나 했지만 그의 실력이라면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쉐이든은 말했다. 하지만또한 아즈윈은, 로일이 뭔가 그럴 듯 하게 일을 풀어주지는 않을 테니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라고도 했다. “밑에는 왕실의 경비들과 제 친구들이 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의 위험 요소를 없에기 위해.” 카셀은 왕이 자기들을 의심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말했다. “내 수호 기사들이 하얀 늑대들을 막을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폐하, 이런 말씀 드리면 오해의 여지가 많겠지만, 하얀 늑대들이 원한다면 이 나라의 누구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그냥 믿어 주십시오. 우리는 폐하를 도우려고 온 거지 해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지난 몇 년 간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사이 나는 겁 밚은 토끼가 되어 버렸소. 이해해주시오. 그보다 두 백작을 본 소감이 어떻소?” “폐하의 근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더군요. 컨트롤 할수 없는 맹수를 마당에 키우고 있는 심정이시겠습니다.” 국왕은 난간에 손을 짚었다. 침묵은 그의 뜻을 대변했다. 카셀은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나 샤를 3세, 카모르트가 가장 위대한 귀족 정치를 펼치는 아크랜드의 강국이었을 때 있었던 국왕의 이름을 가진 나요. 헌데 내가 왕일 때 무슨 사건들이 있었소? 즉위식을 한지 1년 만에 론타몬 정복 전쟁의 첫 희생국가가 되어 치욕적인 항복 문서를 썼으며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겨우 국력을 회복한 후에는 두 백작 사이에 끼어 아무 말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소. 내가 과연 국왕의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 이것이 당연한 지위인가? 지금 와서 이런 의심을 하게 된 내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지 알겠소?” 그것은 특별히 왕이 무능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카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짧은 인생 경험에 비추어 보면 상황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며 자학하는 상대를 북돋아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는 계속 기다리기로 했다. 샤를은 한참이나 찬 바람을 쐬다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그보다 아란티아의 여왕은 잘 계신가? 처음 뵐 때가 5년 전이었지. 인상적인 만남이었어.” “어땠습니까, 폐하께서 본 아란티아의 여왕님은?” 카셀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여왕을 아주 잘 안다는 듯 상대의 이야기를 청했다. 왕의 말에서 그는 아란티아의 여왕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사실 하얀 늑대들도 여왕 새다니엘을 만나본 게 손가락을 꼽을 정도라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카셀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왕에 대해 잘 몰라도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론타몬이 물러난 후 각 나라가 서로 연합을 이루기 위해 모인 자리였소.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참가했는데도 긴장될 만한 쟁쟁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지. 사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그랬을 거요. 서로들 명성으로만 듣고 , 얼굴은 처음 보는 전쟁 영웅들의 첫 상견례이기도 한 자리였으니까. 이로피스의 왕실 기사단장이나 가넬로크의 드래곤 기사단 데라둘 마치, 당시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 퀘이언 울프까지. 죽은 익셀런 기사단의 웰치까지 모였다면 아크랜드의 최고 기사는 다 모인 셈이었소. 나는 그 중 퀘이언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소. 같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지만 당신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지. 뭐랄까.......”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카셀은 침을 삼키고 왕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기억이 잘 안 나는군. 그저 달랐다는 것만 기억나오. 특별히 당신과 그를 비교할 생각은 없었소. 어쨌든 가넬로크에서 열린 그 회의는 일주일간 계속 되었는데, 나는 첫째 날 밤 정원에서 발견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의 만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소. 비가 조금 내리는 정원이었소. 알지 모르겠는데, 가넬로크의 정원은 천상을 표현한 듯 아름답소. 그런 곳에 살짝 젖은 긴 금발의 여인이 하얀 옷을 입고 호수를 바라보고 서 있는 걸 우연히 훔쳐보게 되었소.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어..... 아니면 전설 속의 엘프라던가.”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옆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퀘이언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접근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가 내 유치한 사랑을 고백해 보았소. 그녀는 웃으며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지. 나는 많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런데도 마음은 편했소. 하지만 이야기를 오래 할 수록 불순한 마음으로 접근한 내 자신이 창피하여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소.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이야기하지 못할 거 같이 이런 말을 해버렸지. ‘처음 본 순간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소. 나와 함께 나으 ㅣ왕국으로 간다면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주겠소.’ 어린 아이의 숙스러운 고백 같았지. 그녀는 갸날픈 몸매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큰 웃음을 터트렸소. 그리고이런 말을 하더군. ‘당신은 지금 아란티아를 달라고하시는군요. 당신은 좋은 남자 같지만, 저는 아란티아 외에는 누구도 일생을 함께 하지 않기로 맹세했답니다.’ 그 말이 왜 그리 충격적이었는지, 난 한 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것 같소.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인사를 하며 그 정원을 떠난 후엿지.” 국왕은 약간은 즐거워 하며 약간은 쑥스러워 하며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말했다. “저도 여왕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누구든 여왕님을 마주하면 그런 신비로움에 휩싸여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죠. 여왕 폐하를 뵌 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불과한데, 만날 때마다 허둥대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모르죠. 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런 긴장감은 금방 잊어버린답니다.” 카셀은 아즈윈이나 쉐이든이 말한 여왕의 이미지와 지금 국왕이 말한 이미지를 결합하여 거짓말로 떠들었다. 그것은 카셀이 머리속에서 이미지 한 아란티아의 여왕이었다. 다행히 카셀이 말한 여왕의 모습은 왕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왕과도 거의 동일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카셀은 자신이 거짓말로 내뱉은 묘사에 감탄하여, 새다니엘 여왕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거겠지.” 그는 먼 과거를 회상하듯 웃음 지었다. “그럼 폐하는 그걸로 새다니엘 여왕님과의 만남을 끝내신 겁니까?” 카셀이 새삼스래 물었다.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소. 그런 회으가 여러 번 있는 게 아니니까.“ 왕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 말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느낌을 무시하신 겁니다.” “상대가 아란티아의 여왕인데도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거요, 캡틴은?” “때론 충실해야 할 때도 있는게 아닙니까? 폐하, 그 분과 만나 즐거웠다면 최소한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그 즉시 그 분과의 인연을 끊으려 했군요.” “무슨 소린지 난 잘 모르겠군.” 카셀은 크게 심호흡했다. 다시 한 번 머리 속에 이미지된 여왕을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내었다. 아즈윈은 세상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모두 쓸어 담은 것 같은 여왕을 이야기하며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 말이 있었다. ‘그 분은 외로워 해. 친구가 없거든. 가끔 내가 말 상대 해주러 찾아가면 어린 아이처럼 기뻐해.’ 그는 아즈윈의 그 말에서 유추한 여왕의 생각을 읽어 보았다. 아마도 여왕의 진짜 생각을 확인할 길은 없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사실여부가 아니었다. 카셀은 이 자리에서 국왕의 진심을 끌어내야 했고 그것을 위해, 아무리 하얀 늑대들이 존경하는 여왕이라 해도 이용해 먹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잊어버렸을지 모르나, 여왕 폐하께서느 ㄴ아직도 당신과의 짧은 만남을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가 와있습니다. 알현실에서 검은 사자 백작의 눈치가 보여 폐하께 마치 거짓을 말하는 양, 선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사실 선물은 진짜 있습니다. 하얀 늑대들, 세상 모든 기사들을 압도하는 다섯 명의 기사가 바로 새다니엘 여왕님께서 수 년 전에 한 번 만난 친구에게 보내신 선물입니다.” 샤를 왕은 말문이 막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가도 슬픈 표정으로 바뀌고, 슬픈 효정에서 난처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겠소?” 그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제가 여쭙겠습니다. 샤를 국왕 폐하. 아란티아에 원군을 요청할 때 폐하께서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원군 요청을 하셨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은 솔직해야 할 시점입니다. 앞으로 단 둘이 있게 될 순간이 언제 또 올 지 알 수 없습니다.” “난.......” 샤를 왕은 어젼히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카셀은 그가 말을꺼낼 때까지 꾹 참았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짧은 침묵의 시간은 왕뿐 아니라 카셀에게도 견디기 힘든 인내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샤를 3세, 카모르트 국왕은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던 자신의 속내를 오늘 처음 만난 카셀에게 말했다. “나는 두 백작의 군대를 진압하고, 그것을 위해 오직 왕만을 위한 군대를 모으고 싶소.” 카셀은 일단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추측을 다른 나라 국왕에게 떠들어 댄 것에 대해서 새다니엘 여왕에게 사과했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진짜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정말 왕에게 듣고자 한 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 아즈윈은 탑에서 내려온 카셀에게 대뜸 물었다. 주위에는 아직 왕의 경비와 시종이 있었으나, 카셀은 말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국왕 폐하의 첫사랑 이야기.” 쉐이든이나 게랄드는 무슨 엉뚱한 소리냐 했지만, 여왕과 많은 이야기를 해봤을 아즈윈은 알만하다는 눈빛이었다. 왕으 경비들은 카셀의 뒤를 따라 왕이 내려올 때까지 하얀 늑대들의 눈치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말을 걸고 싶은 데 용기를 내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왕실의 경비로 뽑히려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할까? 일개 용병으로 이런 자리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 검술을 가르쳤던 용병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의 백분의 일이라도 말해주면 그는 그 이야기의 백분의 일이라도 믿을까? 카셀은 그들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해주고 먼저 내려갔고, 친구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숙소에 돌아갈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모두 한 자리에 모인 방에서 게랄드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붉은 장미 백작이 오늘 데리고들어온 놈들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이 하나 있더라.” “그건 왠 뜬금 없는 소리야?” 아즈윈은 별로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면박을 주려 했으나, 게랄드가 말하는 게 더 빨랐다. “백작이 파티장에 이끌고 들어온 그 열 몇명되는 기사 놈들 있잖아 붉은 갑옷의.....” “그러니까 그게 어쟀다고?” “내가 우드라 나이트라는 조직에 대해 말한 적 있지? 그걸 제창한 녀석이 그녀석이야. 이름이 뭐였드라. 리, 리크? 리케? 기억이 안 나네. 하여근 그 당시 나랑 겨뤄서 유일하게 지지 않은 놈이었지.” “호오, 불의 용병 게랄드께서 인정하는 녀석도 있었나?” “용병 시절에도 경쟁자는 있었으니까. 혼자서 검을 단련한다는 게 말이 되? 내 경우에는 그 녀석과의 겨쟁이 검의 배움터였다. 만약 그 때 나와 같이 울프 기사단 시험에 응했다면 틀림없이 합격 했을 거야.” 게랄드의 말에 카셀이 긴장하며 말했다. “너와 같은 레벨이 그 열두 명 중의 한 명이란 말이야? 그럼 나머지도?” “그런 놈이 그렇게 흔할 리가 있겠어?아마 그 녀석이 리더쯤 되겠지. 내가 아는 그 녀석 성격을 고려해보면 대장이 아닌 채로 그 자리에 있을 리가 없어. 하여간 녀석이 나와 헤어진 후 게으림피우며 뱃살만 키운 게 아니라면 지금쯤 울프 기사단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않았을까 생각해.” “나머지도그럴까?” 카셀이 다시 묻자, 게랄드는 짜증 낸듯 말햇다. “울프 기사단의 실력이란 게 그렇게 흔하지 않다니까 그러네!” 쉐이든이 개입하며 카셀을 옹호했다. “우린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며 움직여야 해. 그들 열 두명이 모두 네가 아는 녀석과 같은 실력이라면? 자, 카셀, 그 경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글쎄, 우리가 그들과 직접적인 대결을 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또 혹시 모르지. 상관 없을 거야. 지금은 붉은 장미 백작의 전력을 미리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야.” “지금은 게랄드의 과겨 연인을 걱정할 때가 아니야. 내일 일을 생각해야지.” 아즈윈이 말햇다. 게랄드가 얼굴이 벌개지며 뭐라 한 마디 하려 할때 잽싸게 카셀이 말을 먼저 꺼냈다. 둘의 말싸움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별 해괴한 욕을 참고 들어줘야 했다. “내일은 아마 국왕이 국정 회의를 소집할 거야. 오늘 했던 이야기를 모두에게 하기 위해서. 아까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 대부분 쉐이든과 내가 예쌍했던 질문과 대답이었어.” “아무 말도 못하던 왕이 드디어 제 할 말을 하는 거야?” 아즈윈이 킥킥 대고 웃었다. “그걸로 웃으면 안돼. 국왕은 나름대로 고민이 많아. 그의 상황에서는 저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거야. 난 이해할 수 있어.” 아즈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카셀은 두 손을 비비며 천천히 다음 일을 이야기했다. “단지 내일 회의 때도 국왕이 소심하게 행동하는 게 걱정 돼. 붉은 장미 백작은 전쟁을 선포했어. 아무리 그게 노르만트를 배제한 백작끼리의 전쟁이라고는 해도 둘의 세력을 생각하면 결고 왕실이 안전할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우리 역시. 그것 때문에 국왕이 이보다 더 소심해지면 국왕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펼치지 못해. 우리는 할 일이 많아. 내일 회의 때 언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모르겠는데, 잊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일을 항상 고려해 두어야 해. 검은 기사와 암살자들.” 나름대로 긴장감이라도 조성해보려고 말했으나, 반응은 시큰둥 했다. 대체로 그들은 싸움 이야기라면 별 위험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아즈윈은 조금이라도얘기가 무거워지려고 하면 언제나 딴 얘기 하길 좋아했다. “아, 그보다 붉은 장미 백작의 딸, 이름이 라틸다라고 했지? 보통이 아니더라. 두 백작의 전쟁 발발 원인이 그 여자 때문이랬지?확실히 그 정도 미모의 여자와 파혼 당하면 내가 남자래도 전쟁 벌이겠더라. 그 여자의 경호원 누구는 좋겠네.” “남자란 누구든 외모를 따르지.” 게랄드가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말했다. “여자라고 안 따지는 줄 아냐? 너였으면 그 여자 경호원으로 있지도 못해!” 게랄드와 아즈윈은 또 재미없는 말싸움을 시작하려 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즈윈도 누구 못지 않아. 난 아즈윈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앞에 나타났을때 정신이 혼미했을 정도였어.” 카셀이 말했다. “거봐 들었지? 캡틴의 말은 언제나 옳아.” 아즈윈은 손을 내밀었고, 카셀은 얼결에 그 손을 마주 쳤다. 쉐이든도 작은 소리로 웃었다. 카셀은 문득 이 곳까지 오면서 보냈던 야영이 떠올랐다. 그 때는 아무 부담 없이 모닥불을 앞에 두고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어제만 해도 아즈윈과 춤을 추고 게랄드가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쉐이든은 정치에 대한 다양한 사고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카셀에게 있어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지나치게 즐거운 나머지 스스로 자기 처지를 살펴봐야 했을 정도였다. 이제 이 곳은 장소가 달랐다. 카셀은 아쉬웠으나 자제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쉴까?” “아니!” 아즈윈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로 놀라며 거절했다. “예쁘게 차려 입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는데 아깝게 벌써 자라고? 어차피 이런 옷 입은 모습 보여줄 사람 너희들 밖에 없단 말이야. 니들도 그런 옷 입은 거 오랜많이지 않아? 더 떠들다 자자.” “그래, 아즈윈이 드레스 입은 모습 당분간 볼 일 없을 테니 실컷 봐둬야겠지.” 쉐이든이 나직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를 불렀다. “여기 와인 세 병과 안주로 적당히 먹을 거 한 접시 가져다 주겠나?” 게랄드는 벌써 의자를 동그랗게 배치하고 있었고, 던멜은 이미 그 중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 지을 때는 누구도 밤늦게 대화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카셀은 지루한 밤을 홀로 책을 읽으며 지냈고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격렬한 토의른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같이 할 친구가 있었다. 왜 그 동안의 야영이 짜릿할 정도로 즐거웠는지, 그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 하는 거고, 될 일은 되도록 내버려 두는거야.” 게랄드는 아직도 멀뚱히 서있는 카셀의 목을 휘감아 끌고 와서 의자에 앉혔다. 그 날 밤은 늦게까지 잡담을 이어갔다. 언제나 이야기 하며 느끼고 있었지만, 하얀 늑대들의 평가는 아즈윈이 가장 정확하게 내렸다. 외아들인 카셀은 언제나 형제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쉐이든은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형의 이상형과 같았다. 그와 가벼운 언쟁을 펼치면 지더라도 화가 나지 않고 한 수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느긋했고, 말하는 상대를 배려했다. 게랄드는 그가 가장 이상으로 여기는 허물 없는 친구와 같았다. 그는 때로 과격한 농담을 하고는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더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절대 농담을 주워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농담으로 기어이 상대를 웃길 때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카셀은 그 모습 자체가 재미있었다. 게랄드는 누가 자기를 놀려도 꿈쩍도 안했다. 아즈윈과 가끔 말다툼을 해도 그것은 자신의 패배를 전재로 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감정적인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다른 분야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그는 다른 누가 자신을 놀려도 그 순간만 화내고 뒤끝이 없었다. 아즈윈은 단지 기억력이 없는 거라고 놀렸지만, 그 말마저도 게랄드는 금방 잊어버렸다. 아즈윈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 자신이 쟈넷을 그토록 좋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쟈넷은 예쁘긴 했지만, 고디머 백작이 데리고 있는 십 수명의 시녀들보다 예쁘지 않았다. 책 한 권 읽지 않은 쟈넷은 공통 화제를 만들기도 힘들어 같이 있으면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도 못했다. 농사 일도 싫어했고 언제나 꾸미기 바빴따. 하지만 아즈윈은 매일 저녁 책으로 밤을 지샌 카셀보다 많은 책을 읽어 그런 얘기로만 단 둘이 며칠 밤을 지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녀의 외모에 반하지만, 하룻밤만 이야기 하면 곧 그녀의 진짜 매력이 얼굴에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자신의 진짜 재능을 카셀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 거대한 창을 휘두르는 쉐이든에게도, 검은 기사의 한 팔을 날려버린 게랄드에게도 지지 않는 검술을 가진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이었다. 카셀은 오히려 그녀에게더 빠질까 봐 걱정이었다. 이런 엄청난 여자를 좋아했다가는 평생 혼자 살기 딱 좋으니까. 던멜은 말 할 수없었으나, 그게 그의 단점이 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콤플렉스로 여기지도 않았다. 대화를 하며 카셀은 그의 수화를 조금씩 배워갔고, 던멜은 쉬운 단어부터 조금씩 그에게 전달했다. 아마 그에 대해 더 맣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수화르르 더 익숙 하게 익한 후가 될 거라고 카셀은 생각했다. 짧은 만남을 가진 로일도 깊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그도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카셀은 순수하게 하얀 늑대들로만 이루어진 맴버 속에 있을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임시 멤버였으나, 그는 마치 진짜 자신이 있을 곳에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농사꾼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우울했지만, 이 꿈고 ㅏ같은 시간을 좀 더 즐기도록 흐트러지는 마음을 내버려 두었다. 와인은 금방 떨어졌고, 피곤한 눈의 시녀가 또 허둥지둥 세 병을 더 가져왔다. 쉬는 시간도 없이 떠드는데도 화재는 떨어지지 않았고, 누군가 길게 이야기 하더라도 듣는 이들은 지루해 하지 않았다. 가끔 게랄드가 썰렁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흐려놓긴 했으나, 가끔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누구도 내일을 위해 자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새 새벽이 왔다. 스무 개의 촛불이 밝혀진 검은 탁자 위에 리제니가 누워 있었다. 검은 사자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촛불 아래 핏기 없는 얼굴은 생전으 ㅣ자신감 없는 표정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언제나 난처한 듯 축 처진 눈썹보다 오히려 지금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은 게 백작이 원하는 아들의 얼굴이었다. “누가 발견했나?” 무슨 일이 터져도 동요하는 일 없는 자신의 평소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흔들리는 어조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저희 둘입니다.” 리제니의 시종 두 명이 고개를 숙이고 나섰다. “말해 보거라. 왜 막내가죽어있느냐?” 어둠 속에서 표정도잘 보이지 않는 백작의 표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단 한 명이 더듬거리며 전날 오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다른 한 명은 아예 입을 벌릴 자신감도 없었는지 백작의 옆에 우뚝 서 있는 바딩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검은 기사?” “예. 괴물 같은 말을 탄 검은 기사였습니다.” “라틸다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검은 기사를 만났다? 그것도 노르만트 내에소?” “예.” 검은 사자 백작은 턱을 어루만지며 다시 리제니의 시체 앞에섰따.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들의 뺨을스다듬었다. “난 리제니가 누굴 시종으로 대리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든지, 여자를 들고 다니든지 맘대로 하라고 했다. 설사 라틸다를 만나려고 성문 앞에 멍청히 기다렸다고 해도, 라틸다와 결혼하기 위해 성을 쟌스테인으로 바꾼다고 해도 나는 이 애를 용서한다.” 검은 사자 백작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억누른 분노가 어둠 속에서 잠든 침묵을 흔들었다. 두 시종은 백작의 뒷말을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고만 있엇다. “하지만 내 아들이 죽는 자리에서 싸울 생각도 않고 도망친 녀석은 용서하지 않는다.” 백작이 특별히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바딩은 준비하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시종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터트렸다. “백작님, 저희들은 이 사실을 백작님께 알려드리기 위해......” “조용히.” 바딩은 손가락에 입술을 댔다. 리제니의 두 시종은 피가 배어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바딩은 변명하려 애쓴 시종을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그리고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한 시종의 배에 칼을 찔러넣었다. 느릿느릿 움직였으나 시종은 단 한 차례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자신의 배를 뚫고 들어온 금속을 뒤늦게 손으로 잡았다. “뼌명할 기회도 챙기지 못하는 녀석이라니.” 바딩은 그의 가슴을 발로 걷어 찼다. 찌르고 있는 칼이 시종의 뼈를 부수며 빠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검게 빛나는 피가 샘솟았고 그는 배를 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죽는 순간까지 백작님과 도련님께 사죄해라.” 시종은 흘러나온 내장을 잡고 숨을 헐떡거렸지만 호흡은 점점 느려졌다. 바닥은 점점 피로 가득 찼다. “한 명 정도는 말 잘하는 목격자가 필요합니다. 저 녀석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바딩은 칼에 묻은 피를 닦았다. 백작은 대꾸하지 않았으나, 보통 그런 경우 바딩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바딩도 자신할 수 없어 덧붙였다. “일이 끝나면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얘기를 듣자하니 목격자는 꽤 많은 모양이니까.” 백작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리제니의 시체만 바라보더니 갑자기 아들의 몸을 덮고 있는 검은 담요를 젖혔다. 바람에 촛불이 몇개 꺼지고 리제니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났다. 창이 뚫고 지나간 커다란 구멍이 다섯 군대가 넘었다. 얼마나 큰 창이었는지 가슴 뼈가 부러져 튀어나오고 내장이 드러나 있었다. “백작님.” 바딩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어깨를 잡으니, 놀라울 정도로 크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백작을 본 적이 없는 바딩이었다. 백작으 생전에 막내 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나 둘째에 비해 그는 매사에 자신감도 없고 검술이 뛰어나거나 총명하지도 않았다. 백작의 성격상 능력 없는 아들이라면 피가 섞였다 한들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여기고 있을 거라고 바딩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붉은 장미 백작은 검은 기사가 라틸다 쟌스테인을 공격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닐 겁니다. 제가 노르만트에서 하얀 늑대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가 탄 마차는 부서져 있는 데다가 경호하는 병사 조차 따르지 않았습니다. 라틸다가 경호원이라고 주장하는 마부와 부상자만 있었지요. 붉은 장미 백작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일을 저지른 검은 기사라는 존재는.......” “더 볼 것도 없다, 바딩.” 백작은 다시 담요로 리제니의 몸을 덮어 주었다. “놈이 전쟁을 준비한다고 했나?” “놈이라니....... 붉은 장미 백작 말씀이십니까?” “검은 기사가 라틸다도 공격하고 리제니도 공격했는데, 라틸다는 살아남았고 리제니는 죽었다. 놈의 속셈은 뻔하지 않은가? 전쟁을 준비한다고? 원하는 게 그거라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바딩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검은 사자 백작은 주먹으로 벽을 쳤다. 살갗이 찢어져 피가 나는데도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들을 모두 소집하는 커다란 종이 울렸다. 한 달에 다섯 번 있는 카모르트의 휴일을 제외하고 회의는 매일 있었는데, 파티가 있은 다음날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의실 안에 카셀을 비롯한 하얀 늑대들이 있는 풍경에 대신들이 수군댔지만, 당신들이 왜 여기 있냐고 직접 나서서 물어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하얀 늑대들은 아직 말을 걸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카셀은 간밤의 피곤함에 하품을 길게 했다. 전염이라도 되듯 그 뒤를 이어 아즈윈도 하품을 하고 눈물을 닦았다. 밤을 지새고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벌써 회의 시간이라 그들은 오늘 있을 회의에 대한 작전도 세우지 못하고 왔다. 사실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온 것 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정치를 휘어잡고 있는 사람들의 나이가 많은 게 이상할 것도 없었으나, 카모르트의 대신들은 놀라울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첫날 마중을 나오지 않아서 보지 못했던 대신들 역시 굉장히 나이가 많았다. 사실 생각이 트여있고 의욕적으로 활동한다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왕이 들어오고 회의가 시작되니, 카셀은 대신들의 나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정말 원로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노인들이 젊은 정치가들의 트집을 잡기 위해 모인 것 같은 분위기에 카셀은 질릴 정도였다. 물론 대신 중에 젊은이라고는 한 명을 제외하고 없으니, 트집을 잡기 위한 대상은 국왕 샤를 3세였다. 그는 회의 내내 머리를 감싸 쥐고 하고 싶은 말을 삼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카셀은 그저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것은 다른 논의할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오. 어제 파티에서 있었던 붉은 장미 백작의 발언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오. 대신들은 그의 무례함을 따지고 싶어하겠지만, 짐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여기에서 논하고 싶소.” 샤를 왕은 회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핵심을 꺼냈다. 카셀은 또 한 번 하품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으나 눈물이 한 방울 주루룩 흘러나왔다. 회의가 진행된 이후 한 번도 하얀 늑대들의간섭이 없자 곧 대신들은 카셀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으나, 그는 조심했다. 아무리 권력 없고 힘이 약한 대신들이라 해도 그들은 왕실에서 잔뼈가 굵은 경험 많은 노인들이었다. ‘노인의 조언은 거울의 태양과 같단다. 환하게 빛나지만 누구도 듣지 않지. 촌장님을 보렴. 그렇게 현명하신데, 도대체 이 놈의 마을 사람들은 들어주질 않지 않냐?뭐, 노인이라고 다 같겠니? 글세, 예를 들어 볼까? 아, 정치계에 있는 원로원 노인들은 장마철의 태양이라고 해야겠다. 빛나지도 않는 주제에 무지 덥거든.’ 아버지의 말에 카셀은 어느 원로원에서 망신이라도 당했냐고 놀리듯이 물었다. 그것은 당연히 아버지가 원로원이라는 권력 기관과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척 당황했고, 못 들은 걸로 하라며 밭일을 하러 가버렸다. “붉은 장미 백작은 노르만트를 치지 않겟다고 약속을 했으며, 지금까지 두 백작의 전쟁 양상을 보더라도 노르만트가 피해를 입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사신을 보내 어제 한 말에 대해 문서로 확실한 약속을 얻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루오르라는 이름의 대신은 마치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말햇다. 카셀은 그가 어제 마중 나와 제일 먼저 인사했던 대신임을 떠올렷다. 아마도 그가 대신들 중 대표일 것이다. “그는 과격하긴 하나 명예를 중요시하는 백작입니다. 내버려둔다 해도 노르만트가 공격 당할 리는 없습니다.” 다른 대신도 말했다. 국왕은 어제 카셀과 약속했단 ‘그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 대신들은 그가 망설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최소한 카셀이 보기에는 그랬다. “1년 전에도 한 번 그는 전면전이라도 할 것처럼 떠들었으나, 검은 사자 백작에게 크개 패퇴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그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심려치 마시고 기다리심이 옳습니다.” “저는 이 문제보다 아란티아에서 온 국빈들을 위한 축제를 논의 했으면 합니다. 이는 왕실에 국한된 게 아닌 노르만트 전체의 축제와도 같으므로, 이 일을 기획자 한 명에게 일임하는 것보다 국정 회의에서 결정하면.......” “우리는 우리를 반기는 축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카셀이 갑자기 대신의 말을 끊으며 말햇다. 사실 그가 끼어들기로 약속한 시간은 아니었다. 모든 일은 왕이 주도하고, 적절한 순간에 소개하면 결정적인 말을 해주기로 햇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간 하얀 늑대들은 그야말로 손님으로 머물러 있다가 사라질 사람으로 취급되어 회의를 끝내버릴 것 같았다. 카셀은, 자기는 어찌 되든 상관 없으나, ‘진짜’ 하얀 늑대들이 무시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손님이 남의 집안 문제에 끼는 건예의에 어긋나는 줄 압니다. 그리고 지금 논의하려 했던 축제도 단지 하얀 늑대들을 ㅜ이한 환영이 아니라, 노르만트 시민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 될 것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축제 따위를 벌일 정도로 느긋한 시간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를 위한 축제를 거절하고 싶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소, 캡틴 울프?” 루오르 대신이 물었다. 어제 마중나와 인사할 때의 무표정하고 순종적이었던 얼굴은 어디 가고, 마치 전쟁을 십 수년 겪은 장수처럼 무섭게 굳어 있었다.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루오르 대신. 아니, 사실 어린애라도 알만한 문제일 듯 싶습니다. 두 백작의 전쟁이 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민심을 어지럽히며, 국왕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벌어지는 그 전쟁을 다시 지켜만 보자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카셀은 한 바탕 떠든 후, 대신들이 왕의 눈치를 살피고 왕은 대신들을 호통 치길 기대했다. 아니, 최소한 호응이라도 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눈치를 살피는 건 왕이었다. 그의 우유부단은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쟈넷을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쭈뼛쭈뼛 눈치를 보던 농사꾼 카셀 노이와! 어제 카셀은 첫사랑을 그냥 떠나보냈다고 고백하는 왕을 호통 쳤으나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캡틴 울프께서는,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루오르의 어조는 겸손했으나, 카셀의 귀에는 어디 한 번 의견을 내놔 보아라, 하는 것으로 들렸다. “붉은 장미 백작은 왕의 위에 선 자입니까? 그를 호출하십시오. 그리고 국왕의 명령으로 그를 이 자리에 세워 처벌하십시오.” “그 말만 들으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될지 모르겟소. 그러나 캡틴 울프, 당신은 스스로 이 나라의 문제를 잘 안다고 자부했으나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아직 카모르트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도 자세히 모르는 것 같소.” 카셀은 그의 안면에다 대고 ‘난 카모르트에서 20년이나 살았다, 이 늙은다’ 라고 외쳐주고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여유 있게 루오루 쪽으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회의장의중앙에 서게 되었는데,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주시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군중의 눈이 자기를 노려보고 있으면 창피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촌장은 절대 못 될 거라고, 차기 촌장으로 자신을 추대하는 현제 촌장에게 따진 적도 있엇다. 그러나 지금은 이 따가운 시선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을 합하여도 말 안 하고 부릅뜨고 있는 쉐이든의 시선 하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마 대신 게서는 이 나라의 자세한 정치적인 문제와미묘한 권력 관계를 내게 강의하고 싶으실 거요.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오랫동안 이 성안에 갇혀 지내는 당신들보다 외부에서 바라본 사람이 더욱 객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마 사태를 너무 단순화시켰다고 생각하시거나, 젊은 자의 오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당당히 제안하겠습니다. 국왕폐하의 힘으로 두 백작을 왕좌 아래 무릎 꿇게 하십시오.” 루오르는 카셀이 반역이라도 하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토끼 눈을 했다. 누가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겁에 질린 눈동자들이 가득했다. 다른 대신들은 몰라도 왕 조차 그런 눈동자를 하고 있다는 것에 카셀은 실망했다. “어쩌면 캡틴 울프의 말도 옳습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회의를 보기만 하던 대신이 말을 꺼냈다. 카멜이 성에서 보아온 중 가장 젊은, 어쩌면 유일하게 나이 어린 대신이었다. 카셀보다야 훨신 많겠지만. “하면 그 두 막강한 군사력을 상대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어제 에노아 후작님께서 하신 말씀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햇습니다. 아란티아의 위대한 기사들 다섯 명이 직접 이 나라를 방문했다면 이 나라를 배앗기 위한 목적도 있겟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두 백작을 상대할 만한 군대를 가지고 오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간응 합니다. 즉, 현실적으로 우리는 두 백작을 이 자리에 소환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어제 카셀과단 둘이 이야기하면서 왕은 대신들 역시 두 개의 파로 나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귀족들의 지명으로 대신의 자리에서 서게 되며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후원하는 귀족의 듯을 대변할 테니 검은 사자 백작이나 붉은 장미 백작 중 한 쪽의 편을 들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왕 앞에서 두 백작의 문제로 싸우지 않는 이유는 아예 그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왕은 두 개의 파에 속하지 않는 한 명을 언급했다. ‘난 두 백작의 군대를 진압하고,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병력을 모으고 싶소’ 어제 왕은 그 말을 한 직후,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의견이 아님을 털어놓았다. ‘대신들 중 게네 두나단이라는 친구가 있소. 오늘 파티장에서 귀족들을 소개했던 이인데, 기억하려나 모르겠군. 나의 먼 친척이자, 과거 왕실 기사단의 기사였소. 검술에 한계를 느꼈다며 몇 년 전 기사단을 그만두더니, 정치로라도 나를 돕고자 한 고마운 아이지. 두나단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두 백작의 힘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나에게 왕실 상비군을 양성할 것을 주장했소. 알지 모르겟으나 카모르트는 기본적으로 왕실 기사단과 작은 보병 군대를 제외하고는 전통적으로 군대를 주지 않소. 언제나 전쟁이 벌어지면 각 지방의 연주들이 가진 군대를 소환하는 방식이지. 이것은 전시에 많은 군대를 모으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식이면서 왕실 재정에 부담이 없소.그러나 그 방식은 론타몬의 정복 전쟁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소. 오직 몇 개의 익셀런 기사단이 왕실로 이동하는 각 귀족의 군대를 각개격파 해 버렸거든. 그런데도 귀족들은 그런 군대 소집 방법을 바꾸려 하지 않소. 나에게 군대가 생기면 자기들의 힘이 약해질 거라고 믿고 있소 .때문에 두나단은 지금 와서 내가 군대를 가지려면 귀족들의 견제를 받을 테니, 외부의 도움을 받으라고 했소. 많은 반대가 있을 테지. 그래서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 시켰소. 하지만 먼저 연락을 보낸 두 나라, 이로피스와가넬로크의 사신에게는 연락이 없고 당신들이 온 거요. 그나마 그 사신들도 왕실 기사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돌아오지 않으니 내게 군대라고는 성을 지키는 경비병이 다인 셈이오.’ 그의 말에는 은근히, 왜 원군을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는 원망이 담겨져 있었다. 카셀은 그에 대해 따로 위로를 하거나 변명을 하지 않았따. 나머지는 회의 시간에 대신들을 세워두고 하자고 말했엇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캡틴 울프?” 젊은 대신은 말 없이 회상하는 카셀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그의 당당한 태도가, 카셀은 마음에 들었다. 차라리 왕이 저런 모습을 가졌더라면 좋겟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 문제를 상의하기 전에 우선 나는 폐하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두 백작을 소환할 정도의 군대에 대해서 말입니다.” 샤를 왕은 카셀의 느닷 없는 말에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대신들도 당장 그 말에 항의할 준비를 했고, 카셀도 그 항의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것은 카셀이 의도한 설전이었다. 상대는 정치판에서 연륜이 쌓일 대로 쌓인 베테랑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것이 전혀 다른 개념의 전투였다. 그러나 엉뚱하게도카셀이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맘을 다잡자마자 문이 열리며 회의가 끊겼다. 문을 지키는 경비도 말 한마디로 물러서게 한 후 회의실 안을 성큼 성큼 들어온 그는 검은 사자 백작이었다. “폐하, 회의를 방해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검은 사자 백작은 회의실의 중앙에 서 있는 카셀을 어깨로 툭 치고 지나가 왕 앞에 섰다. 그의 좌우로 바딩과 무장한 기사가 각각 섰다. 바딩은 카셀을 돌아보더니, 눈인사를 했다. 한 번 겨뤄보자는 바딩의 말을 떠올리자, 등골을 타고 벌레가 한 마리 기어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백작은 우뚝 서서 좌중을 훑어보더니, 샤를 국왕에게 말했다. “공식적으로 쟌스테인 백작의 체포권을 부여해주시기 바랍니다. 폐하.” “갑자기 그건 무슨소리요, 뤼미에르 백작? 혹시 어제 파티장에서 있었던 발언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대에게 그런 권한을 줄 수 없소.” “그것 역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으나 폐하, 저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조차 쓰지 않습니다. 그가 왕실에 무례를 범하거나 위협을 끼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며,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읿니다. 그러나 이버 ㄴ일은 다릅니다. 그는 어제 제 셋째 아들을 암살했습니다.” 갑자기 회의실 안이 떠들썩해졌다. 둘은 카모르트의 다른 곳에서는 수백 명의 목숨을 내놓고 전쟁을 벌엿지만 노르만트에서는 결코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또한 명예를 중요시해 가족들의 안전은 서로가 보장해 주는 식이었다. 사실 카모르트의 귀족들이 벌이는 전투란 그런 식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체스를 두고 있엇다. 체스에서 진다고 상대방을 칼로 지르는 일은 없듯 전쟁에서 졌다고 패자를 죽이는 법은 없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아라면 백작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시겟습니까?” 루오르가 왕을 대신하여 말했다. 백작이 그를 노려보자,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상대할 때도 당당했던 늙은 대신의 얼굴이 흔ㄷ르렸다.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을 내보인 루오르는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가 들엇다. 백작은 코웃음을 치더니 대꾸했다. “어제 저녁 내 아들은 쟌스테인 백작의 딸과 만난 후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살해되었소. 이는 아들의 시종 두 명이 보았으며, 필요하다면 더 많은 목격자를 댈 수도 있소.” 백작이 바깥에 있는 시종을 들이려 하자 루오르 대신은 손을 저었다. “물론 백작의 말은 믿습니다. 굳이 목격자를 대지 않아도. 허나 검은 갑옷을 입고 노르마트를 진입할만한 기사는 오직 백작의 라이온 기사단 뿐이지 않습니까? 검은 기사에게 살해당했다는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어제 쟌스테인 백작은 모두가 있는 파티장에서 이런 말을 했소.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자신의 딸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걸 이유로 전면전을 펼치겠다고. 만약 그 말만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속았겠지. 나 조차도 내게 과잉 충성하는 기사가 그런 짓을 저질렀나 조사해 볼 참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로서 명백해 지지 않았소?그는 자신의 딸을 공격하여 그 검은 기사가 자기와 상관 없다는 증거를 남긴 후 내 아들을 살해한 게 틀림없소. 이보다 명백한 증거는 없소.” “그건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검은 사자 백작. 그 검은 기사가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투구 안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어야 하며, 아니면 그 검은 갑옷 안의 존재가 붉은 장미 백작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건 추측일 뿐이지 않........” “닥치시오, 루오르!” 백작은 갑지기 고함을 질렀다. 겨우 백작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애써 대신의 권위를 살려 말을 이어가던 루오르는 그 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실 루오르 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도 그의 호통 소리에, 아버지에게 한 소리 들은 어린 자식들처럼 기가 죽었다. 카셀도 숨을 죽일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회의장 전체를 압도했다. “내게 필요한 건 증거를 분석해 줄 사람이 아니라 옥쇄기 찍힌 소환장이오.” 그 말에 누구 하나 대드는 이가 없었다. 검은 사자 백작은 이미 대신들과는 이야기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왕에게 직접 말했다. “폐하, 붉은 장미 백작이 이 나라의 근심거리라는 건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사실입니다. 내 아들의 희생은 슬프나 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붉은 장미 백작의 싹을 잘라내지 않으면 그의 힘은 더욱 막강해질 것이고, 머잖아 이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악이 될 것입니다. 이는 제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그 아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제 의지입니다. 폐하, 제게 채포권을 주십시오. 그는 아직 폐하의 명령이 닿는 노르만트에 있습니다.” 왕좌를 꽉 쥐고 있는 왕의 손이 흔들렸다. 그는 백작과카셀을 여러 번 번갈아 보았고, 특히 백작의 뒤에 가만히 서서 왕을 주시하는 카셀의 눈치를 살폈다. 국왕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였기에 카셀은 그 시선에 대해 어떤 특별한 신호도 보내주지 않았다. 샤를 국왕은 아주 오래 고민했고, 겨우 입을 열었다. “뤼미에르 백작. 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수 없소. 루오르 대신의 말대로 정확한 증거 없이 체포권을 발동할 수 없소.” “어째서입니까, 폐하?” 백작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자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같았다. “검은 사자 백작, 아드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당신이 체포권을 제안할 수는 있어도 당신 스스로 그것을 행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카셀이 말했다. 백작은 고개를 서서히 꺾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분노를 참을 때까지 참는 모습을 일부러 내보이는 퍼포먼스였다. 눈에 핏발이 선 그의 눈을 보자, 카셀은 맨손으로 사자 우리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손님이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닌데 왜 여기 있는 건가, 캡틴 울프?” 그의 말에 카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견학 중이오.” 대신들 틈에 안 보이게 서 있던 아즈윈이 발작적으로 웃으을 터트렸다가 얼른 입을 가렸다. 그러나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백작은 인상을 구기며 카셀만 힘껏 노려봤다가 다시 샤를 국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습니다. 폐하께서 제가 아니라 외국에서 온 한낱 기사단 캡틴의 조언을 받겠다고 결심하셨다면 저는 이 후 단독으로 행동하겠습니다. 이는 제 명예와도 관련된 바, 누구의 방해도, 도움도 받지 않겠습니다.” 백작은 몸을 돌려 회의장을 나섰다. 나서기 직전 카셀으 스쳐가며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캡틴 카셀, 다시 만날 때도 그런 자세라면 나는 더 이상 아란티아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겟다.” 그의 뒤를 따르는 바딩은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묘하게 소름 끼쳤다. 카셀은 세개 닫히는 문을 바라볼 때까지 백작이 한 말의 의미를 되새겼따. 괜한 사람을 자극시켰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제 두 백작 모두 하얀 늑대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건 왕과 대신 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소, 캡틴 울프.” 루오르는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쉰 후 왕에게 말을 이었다. “폐하, 이런 말씀을 드려 안타깝지만, 하얀 늑대들이란 존재가 우리에게 손님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폐하께서 회의 참석을 허락하셨으나, 그 결과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정당한 체포권을 주어 붉은 장미 백작을 사로 잡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막강해도 거은 사자 백작은 왕실을 배반할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샤이필드 공작이 돌아가신 후 비어있는 왕실 수호 가문을 그에게 맡겨도 좋을 일입니다.” 다른 대신들도 동의했다. “하얀 늑대들은 이 나라의 정치에 참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회의실에 중앙에 서서 폐하의 명을 받들 수 있는 자격 조차 없습니다.” “폐하, 아란티아는 외부의 일에 관심이 없는 나라입니다. 폐하의 초청에 응해왔다면 그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지, 그 이상을 목적으로 해선 안되지 않습니까? 어제 파티장에서 있었던 에노아 후작님의역설을 새겨볼 일입니다.” 카셀은 대신들의 말에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후벼 파이는 것 같았다. 카셀은 어금니를 악 물고 그 모든 말들을 인내했다. 그러나 샤를 왕은 그를 돕지 않았다. 두나단은 카셀을 몰아세우는 것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나, 옹호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칼을 든 늙은 귀신들이 온 몸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왜 이런 대신들을 이기지 못하는 걸까? 칼끝이 목에 닿아있을때도 할 말을 다 했는데, 왜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걸까? 카셀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빠져 나와 보검을 얻고 쉐이든을 만날 떄까지 그는 자신의 목숨 하나를 담보로 눈 앞의 적들과 겨루었다. 지더라도 그는 목숨만 내놓으면 끝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입심으로 그런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꿈으로 여기고 있던 하얀 늑대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게 아니라 하얀 늑대들의 명예를 잃는 것이었다. 언제나 명예를 중요시하며 목숨을 내던지는 기사들의 영웅담을 가소롭게 보았으나 막상 그자리에 서자, 명예란 것이 자신의 영혼만큼이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패잔병이 되어 시체가 쌓인 언덕 위에 그는 홀로 서 있었다. 잔당을 처치하기 위해 나타난 적군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있었다. 그들은 칼을 치켜세우고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늙은 병사들이었다. 그에게는 아군도 없었고, 칼도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못 견딜 정도로 지금 상황이 두려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때는 뭘 하면 좋조, 아버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잘 알았소.”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쉐이든이 말했다. 카셀은 잠에서 깨어난 듯 움찔했다. 그는 성큼성큼 자신의 캡틴 옆으로 다가오더니 카셀을 공격하는 대신들 모두를 쏘아보았다. 그들은 처음으로 검은 사자 백작의 눈빛보다 무서운 눈빛을 구경하게 되었다. “땅신들이 어느 쪽을 두려워 하는지 역시 아주 잘 알았소. 그러나 한 가지 말해두지. 하얀 늑대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병력이오.” “말해, 캡틴. 우리에 대해.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으니까.” 아즈윈도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즐거운 것 같았다. 게랄드와 던멜은 마치 날아오는 화살을 모조리 몸으로 막아주겠다는 듯 카셀의 등을 지켰다. ‘또 잊어버렸구나. 바보 같은 녀석.’ 카셀은 힘없이 웃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친구들이 뒤에 있따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 그들은 이제 가장 위험할 때도 기꺼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밤새도록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카셀은 이 네 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반대도 있을 거라고 카셀은 믿었다. “폐하께, 그리고 여기 있는 대신들 모두에게 이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국정 회의에 여러 가지로 직접 참견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려야겠지만, 그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우리들은 아란티아의 대표나 사신의 자격으로 이 곳을 찾은 게 아닙니다.” 카셀은 샤를 국왕과 루오르, 특히 두나단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들 다섯 명, 하얀 늑대들이 곧 아란티아의 원군입니다.” 18. 12 쏜즈 평소에 손님도 그리 많지 않았던 작은 이발관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기사들이 이발관 입구를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커다란 창과 육중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을 보고 위화감을 느낀 사람들은 이발관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지도 못하고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급한 나머지 그 길을 지나갈 수 밖에 없느 ㄴ사람들도 행여 그 기사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달려갔다. “그래서 넌 이 아비가 오해를 한 나머지 있지도 않은 정보를 근거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소리냐?” 이발관 2층의 좁은 방에는 세 명의 기사와 한 명의 백작, 부상자 한 명, 그리고 그의 딸과 딸을 지키는 경호원이 있었다. 덩치 큰 남자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 상대적으로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은 더욱 왜소해 보였으나, 그녀는 되려 큰 소리로 아버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예. 왜 제 말은 안 들으면서 로저와 안나의 말은 철썩 같이 믿으시는 거죠? 아버지는 믿고 싶은 걸 믿고 계신 겁니다. 그들은 검은 사자 백작이 데리고 있는 라이온 기사단이 아니에요. 아무리 아버지가 그자를 싫어한데도 그가 바보가 아니라는 건 아실거 아니에요? 그런데 저를 공격할 때 검은 갑옷을 입힌 기사를 보내겠습니까? 아니요. 저라면 붉은 장미 깃발을 들고 있는 기사단을 보내겠습니다.” “그 자는 자신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자다. 나의 기를 꺾기 위해서라도 검은 갑옷에 광이라도 내서 나타날 사람이지. 그리고 넌 로저의 통찰력을 간과하고 있어. 로저의 용맹이 없었다면 너는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로저를 네게 딸려 보낸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구나.” 머리에 붕대를 감고 팔을 막대로 고정시킨 로저의 얼굴은 초췌하다 못해 시체 같았다. 라틸다도 그의 공을 인정했으나, 그는 사실 검은 기사를 만난 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로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건가요?아버님, 그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한 존재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 라이온 기사단이었다면 로저가 이끄는 경호 부대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겁니다. 설사 지금 아버님을 경호하는 12쏜즈도 그들을 당해내지는 못했을 거에요. 그런 자들이 라이온 기사단이라고요?말도 안 돼요.” 딸의 말에 붉은 장미 백작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뒤에 조용히 서 있던 금발의 기사가 백작 대신에 말했다. “라틸다 아가씨, 외람된 말씀이오나, 카모르트 내에서 우리 열 두 기사를 꺾을 존재는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먼저 사과 드리겠습니다. 만약 우리들 중 세 명만 아가씨의 경호대원 중에서 섞여 있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라틸다는 그의 생기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닫았다. 12쏜즈를 이끄는 캡틴인 링케는 얘기하면 절로 상대를 섬뜩하게 만드는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위협하지도 윽박지르지도 않는데 대화 상대를 몇 걸음 뒤로 물러나게 하는 이상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오직 붉은 장미 백작 뿐이었다. 아버지와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라틸다였지만, 링케와는 아니 12쏜즈들과는 말하길 꺼려했다. “당신들의 용맹을 굳이 그런 식으로 나서서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링케. 그러나 저는 로저가 여러분들보다 약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라틸다는 서둘러 말을 마치고 다시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초점 없는 링케의 눈은 오래 바라볼만한 것이 못 되었다. “아버님, 이 일에 관해서는 오히려 검은 사자 백작과대화로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가 있다면 칼이 아니라 말로 해결해야죠. 그 사람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어제도 나름대로는 절 배려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님도리제니가 찾아왔을 때, 잘해준거라고는 볼수 없지만, 최소한 예를 갖춰 주셨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에요. 그 분이 저를 해하려고 했다니, 누군가의 음모에요. 어쩌면 제 3자, 그러니까 다른 귀족이나 다른 나라의 소행일지도 몰라요. 이 나라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두 분을 싸움 붙이면 덕을 볼 어떤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멋진 작전 아니에요? 아버님게서 절 사랑하는 바로 그점을 이용하면 어려울 것도 없을 테니까! 그 점은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라틸다, 여기 와서 네가 어떤 소리를 들었기에 그런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붉은 장미 백작은 얼굴에 불만을 가득 품었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아. 딸의 소원이 정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 뤼미에르 백작의 의향을 물어보고 할 수 있다면 대화로 풀어가도록 하자꾸나. 네 말대로 그 검은 기사란 게 정말 뤼미에르 백작의 암살자가 아니라면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라틸다는 겨우 안도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얘기해 보시면 뤼미에르 백작님도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거에요.” “그 점까지 바뀔 리는 없다 얘야. 그건 하늘이 깨져도 바뀔 수 없어.” 붉은 장미 백작은 의자에 등을 걸치고 식빵을 하나 물었다. 그리고 라틸다의 뒤를 얌전히 지키고 있는 로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링케만큼이나 초점없는 눈으로 백작과 12쏜즈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보이지 않았다. 백작은 식빵을 입에 우겨 넣었다. “그보다 어제부터 널 졸졸 따라다니는 저 자에 대해 묻자꾸나.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이야기 하지 못했으니.......” 라틸다는 로일에게 손짓하여 자신의 옆에 서게 했다. “로일이라고 해요. 스몰레이크 마을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때 우릴 도와주신 기사죠. 또 혹시라도 안나와 제가 이 도시에서 해라도 당할까 봐 계속 제 옆에 있어 주었답니다. 로일, 인사해요.” 로일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로일이라고 합니다. 이로피스 출신으 ㅣ용병입니다.” “이로피스?” 백작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훑어보았따. “용병이라면 누구를 위해 일해보았지? 이로피스에 내가 아는 이름이 조금 있다만....” “없습니다. 실제로 활동은 가넬로크에서 했습니다. 드래곤 기사단에 들려고 했으나 출신 성분이 귀족이 아니라 테스트에도 들지 못했지요.” “가넬로크의 드래곤 기사단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지. 그럼 떠돌이로군.” 라틸다가 아버지의 과격한 언어 선택을 지적하려 했으나, 로일은 그 말을 금방 받아들였다. “맞습니다. 한 일이 년 정도 더 수행하다가 어디 정착할 생각입니다.” 로일은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능숙한 거짓말쟁이도 가려낼만한 눈매가 코 앞에서 노려보는데 이것저것 지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울프 기사단에 들기 전의 자신을 가정하여 사실만 말했다. 실제로 드래곤 기사단을 찾아갔다가 메이루밀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정착’이란 걸 해볼 생각도 있었으니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검을 배워 정착하기에는 유명한 귀족의 기사단이 되는 것도 좋지. 어느 정도 실력인가? 내 딸을 보호해준 대가로 간단한 추천서라도 써주겠네. 그게 아니면 일이 년 정도 더 떠돌아다니기에 충분한 경비를 지불해줄 수도 있네.” “대가에 관해서는 이미 레이디 라틸다와 상의를 끝냈습니다.” 백작은 재미있다는 양 팔짱을 꼈다. “나와 거래할 생각이 아닌 모양이지?” “현재 절 고용한 사람은 라틸다입니다. 백작님이 아니시죠. 그러니 대가에 관해서나 제 거취에 대해서는 모두 고용주하고 풀어나가겠습니다.” 백작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라틸다, 아주 재미있는 검사를 주웠구나. 난 이 자가 나라는 배경을 노리고 너헤에 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 로일이라는 자를 너는 어떻게 쓸 생각이냐?” 라틸다는 서슴치 않고 말했다. “제 경호 기사로 스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버님의 허락이 없어도 상관 없습니다.” “내가 붙여준 경호원들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구나. 링케의 말대로, 네가 원한다면 12쏜즈 두어 명을 붙여주겠다.” “필요 없습니다. 이제부터 제 경호 문제는 제가 직접 책임 지겠습니다.” 라틸다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뜻으로 다른 제안을 하려는 백작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라틸다의 고집을 알기에 백작도 따지지 않았다. “좋다 하지만 부디 그 자가 네경호를 맡을만한 실력이길 바라겠다.” “장담컨데 아버님께서 가장 자신하는 기사를 데려와도 이 자를 쉽게 대할 수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파티장에서 만난 하얀 늑대들 중 한명이 인정한 검사니까요.” “호오, 그러냐?” 백작은 그 말에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눈을 반짝이는 아버지를 보고 라틸다는 괜히 그 말을 꺼냈구나 하고 후회했다. “링케, 하얀 늑대들에 대해서 네 얘기를 조금 해보거라.” 백작의 말에 링케는 희미하게 웃었다. 라틸다는 그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깜짝 놀랐다. “하얀 늑대들 중에 제가 아는 이가 한 명 있더군요. 이름은 게랄드 하란. 저와 함께 용병생활을 했던 천재 검사였습니다. 농담이 전혀 우습지 않은 용병으로도 유명하죠. 한 동안 보이지 않아 전쟁터에서 죽었나 보다 생각했는데, 과연 그답게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신분으로 나타나는군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으나, 아마 그도 저를 알아봤을 겁니다. 용병들이란 게 대게 그렇듯 그 정도면 충분한 인사가 되었지요.” “그의 실력은 어땠나?” 백작은 딸이 궁금해 할 만한 것을 물었다. “대단했습니다. 많은 용병들이 그를 불의 용병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두려워했죠. 그와 전 아주 좋은 경쟁자였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는 확실히 대단한 검사라고 불릴만 하지만 결국 인간입니다. 그 사이 훌륭한 지도를 받았다면, 그 때와 마찬가지로, 저와겨뤄 밀리지 않을 정도는 되어 있겠지요.” 백작은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들었느냐?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사라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치자꾸나. 하지만 그건 10년 전 전쟁 영웅들 이야기지. 현제 맴버을을 뜻하는게 아니란다. 울프 기사단의 정예맴버 다섯이 그토록 대단하다면, 로즈 기사단의 정예이자 링케와같은 수준의 기사가 열두명인 12쏜즈는 어떠하겠느냐? 그들에 대한 환상을 품지 말거라. 그들이 가진 명성은 인정하마. 그 명성 만으로 적의 사기를 꺾을 정도겠지. 그러나 실제적인 실력이 그런 거냐 하면 그건 아니야.” 백작은 단언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나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나도 네 경호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 하지 않으나. 점심 식사를 준비했나 보더라. 먹고 집으로 돌아가자.” 라틸다는 고개만 끄떡이고, 그 외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로일도 지금까지처럼 무관심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틸다를 위한 마차와 마부는 따로 준비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말에 탔다. 백작이 말한 열 두 명의 기사 중 여섯 명만 그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열 두 명이 항상 함께 행동하는 건 아니었지만 라틸다는 아버지가 자기 영지 아닌 다른 곳에 있는데 그 중절반이 떨어졌다는게 의아해 물었다. “나머지는 어디 있나요?” “노르만트 외곽에. 남은 병력을 수습해서 바로 떠나야지.” “군대를 몰고 오셨나요?” 라틸다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그럼 뤼미에르 백작의 영지르 ㄹ맨 손으로 와야 하는 거냐?” 백작은 그런 걸 가지고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먼저 말을 몰고 앞서 가버렸다. 마차가 출발하고 좌우에 기사들이 따랐다. 마차에는 라틸다와 안나, 로일이 탔따. 라틸다는 로저도 같이 타라고 제안했으나 그는 굳이 말을 타고 호위대의 한 명으로 끼어있었다. “아물지도않았을 텐데, 저런 몸으로 말을 타면 상처가 벌어질 거야.” 라틸다는 몸도 가누기 힘들어 하면서, 말 위에 흔들흔들 올라잇는 로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헛된 자존심이야. 부상자가 마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내 말은 듣지도 않아.” “단순한 자존심 때문이 아니에요, 라틸다. 그는 최선을 보이는 겁니다. 부상을 걱정하는 건 약자들의 변명이죠.한 번 라틸다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더욱 그는 피할 수 없는 거에요.” 안나가 그를 두둔하고 ㄴ섰다. 라틸다는 피식 웃었다. “로저를 좋아하나 봐, 그치?” “예. 좋아합니다. 그는 기사도가 뭔지 아는 사람입니다. 제가 남자라도 아마 로저와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라틸다는 다른 뜻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안나는 그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 라틸다는 심드렁하니 마차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로즈 기사단의 행렬에 놀란 시민들이 줄을 지어 구경하러 나왔다. 이 곳 사람들은 붉은 장미 백작에 대해 어떻게 들었을까?어떤 소문을 들었을지, 어떤 악담에 노출되었을지 모두 알 수는 없었으나 단 하나 확실한 건,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들 조차도 로즈 기사단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라틸다는 그 사실이 씁슬했다. 성문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가장 선두에서 말을 몰던 붉은 장미 백작이 멈췄다. 지루하게 밖ㅇ만 쳐다보던 라틸다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흠칫 놀라며 얼른 안으로 집어넣었다. 백작을 가로막고 있는것은 다섯 명의 검은 갑옷 깃였다. 그들은 라이온 기사일 뿐, 그녀를 공격했던 ‘검은 기사’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그 검은 기사들을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 처럼 가슴이 떨렸다. 얌전히 수를 놓던 안나도 호기심에 밖을 보고 의아해했다. “라이온 기사단이군요. 무슨 일이죠?” 특별히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던 안나도 뒤쪽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기사들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좌우로 창을 든 보병이 열 명씩 다가왔고, 뒤쪽 역시 다섯 명의 기사들이 배치되었다. 누가 봐도 그것은 강제적인 포위였다. 붉은 장미 백작의 행렬을 구경하던 시민들은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보고, 집 안으로 도망치거나 골목 안으로 숨었다. 구경거리를 놓치기 싫은 사람들은 몸을 숨기고 눈만 몰래 내밀고 있기도 했다. 다섯 명의 로즈 기사단은 민첩하게 말을 몰아 단번에 마차 주위를 에워싸 보호했다. 그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으나, 로저는 말을 제대로 몰지 못해 마차 옆에 제대로 붙지 못했다. 링케는 느릿느릿 말을 몰아 붉은 장미 백작의 등 쪽에 섰다. 쏜즈 중 누구도 무기를 꺼내지 않았으나, 일사불란한 방어 포메이션 만으로도 포위하고 있는 창 병들의 기세를 되려 누를 정도였다. 그러나 라이온 기사단 역시 흔들림 없는 포위 대형을 갖추고, 로즈 기사단의 행동에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로일은 상황을 잠시 살피더니 라틸다가 눈치채지 못하게 의자 밑에 내버려두었던 칼을 꺼내 다리 위에 올려 놓았따. “이건 뭘 보여주기 위한 장난이냐, 뤼미에르 백작의 기사들?” 백작이 소리질럿다. “붉은 장미 백작, 아니 바그다 위그 쟌스테인 백작. 당신은 검은 사자 백작의 셋째 아들 리제니 덴 뤼메에르 남작의 살해범으로 체포하겠습니다. 무장을 해제하고 우리의 인도를 받으심시오.” 라이온 기사는 양피지로만든 두루마기를 펼쳐 읽은 후 그것을 백작에게 내보였다. 백작은 말에서 내리지도, 두루마리를 쳐다보지도않았다. “그것은 국왕 폐하의 명령이냐?” “아닙니다. 검은 사자 백작의 명령입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코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그럼 내가 그 명령에 응할 이유가 없다. 길을 열어라. 지나가겠다.” “안됩니다, 백작님. 이 명령은 당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강압적인 명령입니다.” “누가 감히 내게 명령을 내린단 말이냐? 내 딸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반년 동안 얼굴도 못 본 리제니의 죽음을 내 탓으로 몬단 말이냐?” 두렵긴 했으나, 호기심에 엉덩이를 들고 바깥에 고개를 내밀었던 라틸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의 큰 눈은 더욱 커졌다. “리, 리제니가?” 바깥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폐하의 이름이 걸려 있는 이 도로를 피로 물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쟌스테인 백작. 무장을 해제하십시오.” 라이온의 기사는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성명을 밝혀라, 뤼미에르 백작의 기사!” “샨메르입니다.” “기사 샨메르, 지금 당정 너의 군주에게 돌아가 내 말을 똑똑히 전해라. 나는 얼마 전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대화를 제의할 생각이었다. 어제의 일이 결코 나으 ㅣ무례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그 문제에 대해서도 조용히 대화하러 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이 시각 이후 나는 뤼미에르 백작과 어떤 협상도 하지 않으며, 어떤 대화에도응하지 않겟다. 또한 그의 명예도, 그의 목숨도 보장해주지 않겟다.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전하라, 기사 샨메르.” 샨메르는 손짓을 하여 검은 사자 백작의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를 불렀다. “지금 들은 대로 가서 백작께 전하라.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의 몸이 아니라 머리만 가져가야 겠다고도 전하라.” 기수는 대답하고 돌아갔다. “쟌스테인 백작. 정중히 당신에게 요구했으나 그것을 수용하지 않아 이렇게 된 점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으나 그것 역시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어쩔 수 없습니다. 모두 칼을 뽑아라!” 샨메르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칼을 뽑았고, 그의 말을 들은 라이온 기사단 열 명은 일제히 칼을 뽑았다. 그리고 창 병 스무 명이 창을 세워 한 걸음 다가왔따. 갑자기 붉은 장미 백작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렷다. 그는 마차에 타고 있는 라틸다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네가 말했느냐? 검은 사자 백작도 대화에 응할 거라고? 그러나 보거라. 이게 그 자의 속셈이다. 리제니가 죽었다? 그 자는 널 죽이려다 실패한 일을 만회하려고 자기 아들을 죽이고 그 일을 내게 뒤집어 씌우는거다. 그는 능히 그럴 자다. 내가 군대에서 벗어난 순간을 노리고 자기 부하를 총 동원했구나. 그래, 힘으로 상대하길 원한다면 내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 주겠다.” 붉은 장미 백작은 칼을 꺼냈다. 여섯 쏜즈의 칼이 한 호흡도 틀리지 않고 동시에 뽑혀 나왔다. “나는 분명히 당신에게 기회를 드렸습니다.” “네 이 녀석, 샨메르. 기사가 칼을 뽑았는데, 이것저것 확인할 일도 많구나.” 샨메르도 더 참지 않았다. “공격하라.” 라이온 기사단과 창 병은 동시에 마차 쪽으로 달려들었다. 육중한 철판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격돌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뒤엉킨 양쪽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붉은 장미 백작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가장 앞장서서 칼을 휘둘렀고, 그의 옆에는 링케가 붙어 백작의 빈틈을 막았다. 창병들은 훈련 받은 대로 거리를 유지하여 긴 창을 들이밀었으나, 오히려 링케는 그 창을 빼앗더니 그 주인의 목에 꽂아넣었다. 제일 처음에 목이 날아간 라이온의 기사는 샨메르였다. 링케는 붉은 장미 백작에게 달려드는 그를 두번도 부딪히지 않고 목을 날려버렸다. 머리를 잃은 샨메르의 몸이 말 위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뒤이어 다른 라이온 기사도 백작의 칼에 찔려 말 위에서 떨어졌다. 샤를의 거리라고 이름 붙여진 대로에 검붉은 피가 넘쳤다. 병사들의 비명과 기사들의 고함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부서진 방패 파편이 멍청히 구경하던 구경꾼 쪽으로 날아가 엉뚱한 희생자를 내기도 하며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라틸다는 마차 밑에 머리를 숙이고 눈을 질근 감았다. 안나는 병장기가 가까운 곳에서 부딪힐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때문에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노린 창 한 자루가 창문을 깨고 들어왔을 때도 안나와라틸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가 발 옆에 꽂힌 창 날을 발견하고, 라틸다는 안나처럼 비명을 질렀다. 검은 갑옷의 기사가 다시 창을 치켜 세우더니 이번에는 정확히 그녀의 머리를 노렸다. 라틸다는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온 검은 기사의 끔찍한 악몽이, 마침내 현실에서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마차에서 꽤 떨어져있던 쟌스테인 백작은 혼란 속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마차를 유린하고 있는 라이온 기사를 발견했다. 백작은, 도끼를 휘두르며 자신을 공격하는 기사의 목에 칼을 찔러넣고 소리질렀다. “내 딸을, 라틸다를 보호하라!” 그의 목소리는 난장판에 마차까지는 닿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치 그 명령을 누군가 실행이라도 하듯, 마차 안쪽에서 칼날 하나가 뻗어나와 마차에 창을 꽂아넣으려는 라이온 기사의 한 팔을 잘라냈다. 그 기사는 피를 뿌리며 힘없이 말에서 떨어졌다. 백작은 일순 숨을 멈췄다. 그 칼질이 누구의것인지는 명백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멀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온 기사의 팔을 벤 칼은 섬광처럼 번쩍이기만 했을뿐, 보이지 않았다. 백작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호령하며 기사들을 지위했다. 상황은 길게 가지 않앗다. 열 명의 기사가모두 말에서 떨어진 후 남은 대여섯 명의 창병은 싸울 의욕을 잃고 후퇴했다. 마차 주위에는 라이온 기사의 시체와 창병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주인 잃은 말은 멍청히 서서 투레질만 했다. “피해는?” 붉은 장미 백작은 피가 묻은 칼을 그대로 칼집에 꽂아넣으며 물었다. “없습니다. 아, 로저가 죽었습니다.” 링케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로저를 가리켰다. 로저의 가슴에는 창이 두 개나 박혀 있었다. 백작은 나직이 신음했다. “로저의 시체를 수습하거라. 라틸다는 괜찮으냐?” “조금 놀란 것 같습니다만, 부상은 없습니다. 제가 봤는데 로일이라는 자가 지켜주었습니다.” “나도 봤따.” “아가씨께서 놀라셨을 겁니다. 위로라도 해주지 않으십니까?” “강한 아이야. 이정도에 위로가 필요하면 내 딸이 아니지.”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12쏜즈 중 여섯 기사들을 둘러본 후, 백작은 겁에 질린 채 구경하고 있는 노르만트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보아라. 너희들이 직접 보고 들었듯이 이것은 검은 사자 백작이 시작한 싸움이다. 만약 그가 노르만트에 머물러있다면 나는 국왕폐하가 있는 도시라 하더라도 피해가지 않겠다.” 그는 말고삐를 틀어 성문쪽으로 향했다. 12쏜즈는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따. 붉은 피를 머금은 붉은 갑옷의 기사들의 행렬은 성문의 경비들도 막지 못했다. 노르만트에서 한 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백작이 직접 이끄는 군대가 머물러 있었다. 1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아까 보여준 막강한 힘을 생각하면 이 군대도 분명 정예군일 게 틀림 없다고 로일은 생각햇다. 병사들이 모여잇는 중앙에서 마차가 멈췄다. 백작을 향해 경례하는 병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로일은 멍한 시선으로 바깥을 응시하고 있는 라틸다의 무릎에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특별히 뭔가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로일이 물음에도그녀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은 하지 않았다. 로일은 처음 마차 안을 뚫고 들어온 창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것을 사과할 순간은 이미 지나버렸다. 로일은 그녀가 싸움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리제니라는 귀족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따. 창의 공격에 놀라긴 했어도 그녀는 두려움을 보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분의 죽음은 유감입니다.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는 분 같았는데......” 로일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정말 리제니가 죽은 걸까요? 내가 그냥 돌려보냈던 그 날 죽은 걸까요?” 혼잣말 같은 라틸다의 말에 안나가 즉시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 일은 절대 라틸다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어떤 음모이며 오해에요. 어쩌면 그 분은 죽은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검은 사자 백작이 주인님을 잡아들이려고 만들어낸 거짓말일지도 몰라요.” “뤼미에르 백작은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지 않아.” “아직도 그 사람들 두둔하는 건가요? 오늘 일을 보세요. 대화를 시도하려는 백작님을 다짜고짜 공격했잖아요.” 라틸다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로일은 더 위로할 말도 찾지 못했고, 위로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12쏜즈 중 하나가 깨진 마차의 창문을 살짝 두들겼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부분이 또 한번 부서져 바닥에 떨어져 소리 냈다. 라틸다는 그 소리에 흠칫 놀랐다. “로일이라고 했던가? 백작님께서 보자 하시는군.” “라틸다는?” 로일은 아직도 멍청히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를 걱정했다. “이 곳은 안전하다. 굳이 경호가 필요한 곳은 아니다.” “아니, 경호 때문이 아니오. 지금 라틸다에게는 제가 필요합니다.” 투구를 쓰느라 구겨진 머리카락은 지저분했고 얼굴에 묻은 피는 아직 닦지도 않아섬뜩한 그 기사는 무뚝뚝한 시서으로 로일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감정 하나 없는 눈이었다. “지금 이 자가 필요하십니까, 아가씨?” 그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아니오. 다녀오세요. 로일. 전 괜찮아요.”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있었으나 옆에 누군가가 있어주길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절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모르나 그녀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 해결하거나, 혼자 고민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로일은 노르만트에 당도할 때 스스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자아 준 것이었다. 지금도 로일은 그녀의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떠밀다시피 로일을 내보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따 봐요.” 로일은 하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그 기사를 따라갔다. 12쏜즈가 전투에서 보여준 것만큼이나 여기 있는 군대도 척척 맞는 손으로 다 함께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동을 시작할 때마다 게으름 피우는 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놈, 그걸 탓하는 놈, 일을 잘못해서 헤매는 놈으로 가득한용병단과는 사뭇 달랐다. 훈련이 잘 되고 규율이 엄격한 군대만이 보일 수 있는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훈련과 규율이 엄격한 울프 기사단도 뭔가 준비를 시작하면 서로 의사 교환을 하느라 요란하기 마련이었는데, 이 곳은 조용했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12쏜즈의 차분한 분위기와 닮아보였다. 하지만 아까 백작이 군대에 있다던 12쏜즈의 다른 여섯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로일은 다른 여섯 명도 아까 본 여섯 명과 같은 실력일지 궁금했다. 붉은 장미 백작은 작은 막사 안에 있엇다. 그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벗고 있었다. “아, 왓군, 거기앉게.” 로일은 겨우 엉덩이 하나 걸칠 수 있는 나무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갑옷을 벗은 후 백작은 시종과 기사를 낼보내고 침대에 앉았다. 그는 묵직한 체인 부츠를 벗어던지고 발을 길게 폈다. 그는 마치 벗었을 때의 홀가분함을 위해 부츠를 신고 다닌 듯한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이 복장을 정말 좋아하지만 입고 벗을 때가 문제야. 안 그런가, 로일?” 그는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전 그런 무거운 복장을 많이 입어보질 않았으나, 그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안 입을 수는 없지. 내가 애 플레이트 메일을 입는 줄 아는가?” 그는 안에 껴입고 있던 링 메일까지 벗어 던지고 겨우 한숨을 토했다. “그야 보호 장비이기 때문 아닙니까?” “나야 군의 제일 뒤쪽에서 명령만 내리면 되는 위치가 아닌가? 굳이 갑옷을 입고 앞에 나설 필요는 없어. 우리 군대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뤼미에르 백작의 군대와 한 번 이기고 한 번 패하는 전쟁을 하는 이유는 전력의 전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지. 아, 더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겠군. 뭐 마시겠냐?” “아닙니다. 곧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돌아가?어딜?” “제 주인에게 말입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무릎을 치며 웃었다. “난 언제고 자네 같은 검사가 하나 나타나 주었으면 했네. 요새 용병들은 돈만 밝히고 제대로 된 녀석은 하나도 없거든. 때론 돈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실력 있는 녀석을 찾아 내기가 힘들지.” 그는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물을 한 잔 가져오라고 시킨 후 말을 계속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지. 아까 잠깐 뿐이었으나 자네 실력을 구경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 딸아이는 크게 다쳤거나, 최악의 일을 당할 뻔 했지. 일이 년 방황한 후 정착한다고 했나?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그 일이 년 후를 지금으로 하는 건 어떤가?” 로일의 눈썹이 한쪽으로 꺾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 기사단에 들어오게.” “로즈 기사단에 말입니까?” “그래. 일단 거기에 들어오게. 그리고 반년, 아니 석 달만 적응 기간을 거친 후 나는 자네를 12쏜즈의 한명으로 불러들이겠네.” “이상하군요. 제가 들어가면 13쏜즈가 되는 겁니까?”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사실대로 말하자면 원래 이름은 9쏜즈였네. 세 명이 늘어서 이름도 바뀐 거야. 지금 그 후보가 둘 더있는데, 자네까지 합쳐 15가 디어도 좋지.” “괜찮은 제안입니다만, 절 고용한 사람은.......” “아 아, 또 그 소리. 설마하니 내 딸아이의 경호 기사를빼앗겠나? 그 문제라면 상관 없네. 자네를 일단 로즈 기사단에 넣은 후 고스란히 내 딸의 보디가드로 임명하면 되니까. 하는 일은 같고 직책이 높아지는 거야. 보수는 원하는 대로 주겠네. 아니면 정착할 땅과 집도 좋지. 덴모주에는 예쁜 처자들도 많아. 자네가 로즈 기사라는 직책을 가지면, 어렵지 않게 원하는 여자를 데려올 수있을 걸세. 아 나이가 어떻게 되나?” “스물 다섯 정도? 열 다섯 살 이후 나이 세는 걸 잊어버려서 정확히는 모릅니다.” “정착하기 좋은 나이군.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나이야. 어떤가, 내 제안이?” 로일은 잠시 고민하는 척 했다. 아니, 사실 고민하고 있었다. 스파이 역할을 맡게 된 지금 상황에서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이 유리할지, 안 받아들이는게 유리할지. 캡틴 카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로일은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이번에도 보류하는 쪽을 택했다. “그 제안에는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라틸다와 의논해 보기 전에는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흐음, 그럼 라틸다와는 얼마나 오래 있을 건가?” “그녀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때까지.” “악몽?” “모르십니까?” 붉은 장미 백작은 옅은 붉은 빛을 띈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 애가 자신의 모든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을 만한 나이는 아닐세. 장미 가시에 찔려 울면서 달려올 때가 좋았지. 뭐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는 게 원래 그렇겠지만. 그럼 신중히 생각해 보게. 다른 제안이 있다면 난 언제든 협상할 용의가 있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라틸다에게?” “예.” 붉은 장미 백작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겉으로는 강해보이는 척 해도 속은 여린 아일세. 잘 부탁하네.” 로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막사를 나왔다. 바깥에는 갑옷을 벗은 링케와 다른 12쏜즈의 기사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로일을 봤을 때는 지나가는 나무 한 그루 바라보는 것 이상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정확히 그의 얼굴과 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아직도 라이온 기사들과의 전투 후 묻은 피를 닦지 않고 있었다. “백작님의제안을 신중히 고려해보시오, 로일. 우린 언제든 당신을 환영하겠소.” 링케가 말했다. 로일은 천천히 고개를끄덕였다. “그리고 언제 가벼운 시합이나 한 번 해봅시다. 당신과 꼭 한 번은 겨뤄보고 싶소.” 다른 기사도 어투는 딱딱하나, 호의적인 목소리로말했다. 그러나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고 굳어 있었다. 로일은 그들이 호의를 가지고 있건, 악의를 가지고 있건 그 무표정이 싫었다. “좋습니다.” 로일은 대답하고 도망치듯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라틸다는 안나와 함게 로저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로일은 말 없이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녀는 로일이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았따. 로저의 관은 짐을 잔뜩 실은 마차의 한쪽 옆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핏기 하나 없이 하얀 로저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알아뒀으면 해요, 로일.” 라틸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썼으나, 젖은 눈썹에 모여 흐르는 한 방울까지 막지는 못했다. “날 지키려 했던 모든 경호원들이 죽었어요.” 라틸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로일의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절대 죽지 않아요.” ‘죽지 않습니다. 절대로.“ 로일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 서 명 : 하얀 늑대들3-에노아 후작 지 은 이 : 윤 현 승 펴 낸 이 : 신 현 호 출 판 사 : 파피루스 출판년도 : 2003년 11월 12일 <지은이 소개 / 윤 현 승> 판타지를 단순한 소설에 아닌 사회풍자적 요소를 집어넣은 전업 판타지 작가. <사진설명> 형체를 알 수 없는 늑대와 호전적인 분위기가 나는 장군 한 명이 서로 대치하면서 서있다. <차례> 제19장 에노아 후작 제20장 링 케 제21장 제너럴 세이게이 제22장 덴모주 제23장 드마르프 정원의 전투 제24장 블랙풋 제25장 장미 가시와 하얀 늑대 제26장 드레드 나이트(Dread Knight)(1) 에노아 후작 "오늘 회의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캡틴 카셀." 먼저 산책을 제안한 것은 두나단이었으나, 사실 그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오히려 카셀이었다. 궁극적으로 따지고 들면 하얀 늑대들이 이 나라를 찾게 된 것도 그가 왕에게 제안을 한 덕이었다. 그리고 카셀이 내내 왕실에서 찾아다니던 '도움을 줄 세력' 이었다. 나무 많은 정원에서 울리는 두나단의 목소리는 불협화음 없는 음악처럼 듣기 좋았다. "아마 나이 든 대신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헐떡이는 분도 있을겁니다. " 두나단의 유쾌한 말에 카셀은 웃었다. "당신은 다른 대신들과 사뭇 다르군요." "아무래도 어리니까요." 두나단은 역기를 들고 있는 사람처럼 깎아놓은 커다란 향나무 아래에서 멈추었다. "그거 아십니까? 저도 한 때 기사를 꿈꾸었습니다." "샤를 국왕께서 그 말씀을 하시더군요.""그럼 제가 울프 기사단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도 알겠군요." "아마 제가 울프 기사단이 되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겠지요.""그렇습니다. 당신들이 왔다고 했을 매 저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단지 제 위치가 이러하니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참았던거죠." "이해합니다 "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저는 당신들이 왔다고 했을 때 몇 백 명의 원군이 온 것보다 더 기뻤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이 회의에서 했던 그 말을 기대했습니다. 당신들 다섯 명이 원군 그 자체라는 걸, " "그건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말했습니다. 당연히 우리 다 섯 명이 몇 백 명의 기사단을 상대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왕실에는 군대가 필요합니다. " "예, 저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두나단은 천천히 걸었고, 카셀도 차분하게 밝은 공기를 호흡했다. 누가 쓴 책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하늘의 정원'이라는 책에는 여러 나라의 정원 구성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히 나타나 있었다. 왕실의 보안상 그림은 생략되었으나, 글만으로도 카셀은 그 정원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 중 카모르트 왕실의 정원은 이런식으로 묘사 되어 있었다. '돈 많고 품격 높은 독서가가 야외에 서재를 만들 작정을 하고 펼쳐놓은 것 같은 조용한 풀밭과 품격 있는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아크랜드의 일인자임을 누구도 부정 못할 정원사 와이즈는 가넬로크의 드래곤 기사단 관리청의 정원도 디자인 했는데, 그의 특기인 역동적인 힘을 자제하고 최대한 정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애썼다. 조용하면서도 품위 있고, 절친한 친구와 하루 종일 거닐고 싶은 산책로가 인상적이다. ' 카셀은 그 글을 하나씩 떠올리며 두나단과의 대화와는 별도로 산책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즐거워하는 표정은 두 나단에게 매우 색다르게 보였다. 이 젊은 정치가는 골치 아픈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는 기사단의 캡틴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사실 오늘 저녁에도 검은 사자 백작의 파티가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 두나단은 약간 숨 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파티를 이틀 연속으로?" 날개 짓 하는 드래곤을 표현한 나무를 감상하기 위해 카셀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확히는 사흘동안입니다. 지금도 당신들을 보기 위해 올라오는 귀족들이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파티를 주최하는 검은 사자 백작의 아들이 살해 당했으니, 파티를 열만한 분위기는 진작에 깨진 셈이죠. 해서 폐하께서는 그 파티를 취소하고 간단히 디너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폐하를 위한 군대를 소집할 생각입니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전통적으로 카모르트는 중요한 일을 디너타임에 결정하곤 했지요." "귀족들에게 군대를 요구할 겁니까?" "카모르트 왕실에 제대로 된 군대가 없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왕실 기사단이라는 존재가 있으나, 몇 년 전 왕실 기사단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와 캡틴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기사 직을 박탈당한 뒤로는 거의 형식적으로 변질되었답니다. 많은 훌륭한 기사들이 거기에 회의를 느껴 그만 뒀고, 저도 그 때 기사단을 그만 두었지요. 폐하께서는 제가 검술에 재능이 없다며 그만둔 줄 아시지만요. 그나마 가넬로크와 이로피스의 사절단으로 떠난 병력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피스 쪽으로 떠났다가 소식이 두절된 캡틴 프란시스는 이전 캡틴과는 실력 차가 있어도 폐하계 충성을 다하는 기사지요. 그가 없으니 당장 기사단을 새로 일으키는 것도 문제입니다. 왕실 재정으로 이를 채울 만한 용병을 구할 수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는 게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전쟁 한 번 치른 적 없는 노르만트 시민들에게 창을 쥐어줘야겠습니까? 귀족들의 손아귀에서 국왕 폐하가 벗어나기 위해 또 다시 귀족들의 힘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면 결국 그렇게 됩니다. " 카셀은 몇 년 전에 그만 두었다는 왕실 기사단이라는 말에 귀를 솔깃 세웠다. 데이릭과 메오릭스. 그것은 절대 잊을수 없는 이름이었다. 갑자기 카셀은 도적단과 팔콘을 만난 게 단순한 우연이었을 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누가 우릴 돕겠습니까?결국 두 백작의 힘에 거스르는 행동인데." 카셀은 두나단과 대화를 이어가며 잠시 그들의 이름을 잊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긴 곤란하지만, 도움을 줄 만한 분이 계십니다. 제가 우선 설득을 해보겠으나, 캡틴 카셀. 당신이 직접 귀족들을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 "제가 말입니까?" "폐하께서 직접 나서실 수는 없습니다. 잘못되면 역효과가 날 겁니다 " 순간 카셀은 두나단의 말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귀족들에게 벗어나기 위한 작전인데, 국왕이 귀족들에게 애원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귀족들에게 싫은 말은 카셀에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하얀 늑대들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 역시 필요하다면 누구든 이용해 먹으려 드는 정치가였다. 정치판에서 믿을 사람 따위는 없다. 카셀은 그 명제를 되새겼다."아실지 모르겠으나, 귀족들은 하얀 늑대를 돕지 않을 거요." 카셀은 잠시 말을 돌렸다.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으나, 카셀은 두나단의 속 마음을 더 파고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친구들 외에는 누구도 완전하게 믿을 생각은 없으나, 최소한 세부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해 신뢰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해 볼 일이었다."왜 그리 단언하십니까?" "고디머 백작의 선례를 모두 알고 있을 터, 그들은 제 2의 타깃이 되고 싶지 않을 겁니다 " "암살자 따위를 두려워하는 귀족이라면 두 백작에게 반기를 드는 무서운 행위는 꿈도 꾸지 못할 겁니다."간혹 시녀들이나 경비병들이 지나가면서 고개를 푸욱 숙이고 인사했다. 모르는 얼굴도 몇 있었고, 안면이 있는 경비들도 있었다. 둘은 누가 지나갈 때마다 말을 멈추며 주의했지만 사실상 자기들의 말은 누군가 듣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은 생략하거나 상징적으로 돌려서 말했다. "상관 없습니다. 강행 하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두나단의 그 말에는 거짓이냐, 진실이냐를 뛰어넘어 왕을 돕겠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였다. "좋습니다. " 카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저녁에 있을 회의에서 서로 맞춰야 할 몇 가지 약속만 정하고 그 외에는 말하길 삼갔다. 두나단은 굳이 이렇게까지 주의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결국 카셀의 말대로 했다. 둘은 서로의 진심을 모두 듣지도 못한 채 헤어졌다. 카셀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잠시 머리 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 멋진 정원에서 책 한 권 읽지 못하고 이런 고달픈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또 누가 암살자를 사주하여 자기들을 노리고 있으며, 특히 두 백작 모두 언급하는 '검은 기사'란 어떤 존재인지, 노르만트로 들어을 때 기습했던 그 검은 기사와 같은 존재인지, 의문점 투성이 였다. 암살자에 관해선 둘 중 어느 하나가 고용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암살자를 고용한 후 하얀 늑대들을 제거하면 누가 이익을 보게 되는 지는 불분명했다. 둘 다 이익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검은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을 죽이려 하고, 검은 사자 백작의 아들을 죽이고, 하얀 늑대들을 공격했을까? 갑자기 그는 검은 기사란 존재가 이 일과 완전히 별개일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와중에 모두가 걸려든 것?그건 말도 안 되었다. 노르만트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몰라도 노르만트 안에서 벌어진 암살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수천 명의 시민들 중에서, 아니 범위를 좁혀 왕실을 찾아오던 수십 명의 귀족들 중에서, 정확히 검은 사자 백작의 아들을 집어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계획된 살인이었다. '검은 기사들 때문에 두 백작이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피해는 단순히 어느 한 백작의 몰락이 아닐 것이다. 카모르트 전체의 위기라고 봐도 좋다. 그럼 제 3자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릴 직접 공격했다. 마치 알고 있었던 듯. 시간상으로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을 공격한 후고, 검은 사자 백작의 아들을 암살하기 전이다. 잠깐, 우리가 그 두 사건 사이에 끼었다는 건, 처음부터 우리가 목표가 아닌데 우연히 만난 것일 지도 몰라. 잠깐 만난 라이온 기사단은 검은 기사들이 불특정 다수를 공격했다고 증언했다. 그 증언이 가짜가 아니라면 우리도 그 불특정 다수 중 하나였을지도 몰라, 게랄드에게 한 팔을 잃은 후 아즈윈이 만난 두 번째 검은 기사가 늑대의 머리를 던진 게 의도한 거라면, 우리가 울프 기사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게랄드를 공격한 다음에서야 우리가 누군지 안 건가?우릴 공격한 건 계획적인 암살 시도가 아니었단 말이야?' 카셀은 곰곰이 생각하며 걷다가 정원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사람도 못 알아보고 지나쳐 버렸다. 그 남자는 카셀이 지나갈 때까지 내버려뒀다가 일부러 뒤에서 어깨를 잡았다. 카셀은 생각이 끊겨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인 바딩이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오, 캡틴 울프?" "아, 바딩. 안녕하시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둘 게 많아서‥‥‥ 그 보다 산책 중이셨소?" 카셀은 바팅과 길게 이야기 하는 게 껄끄러워 말을 빨리 했다. 키 크고 잘 생긴 외모에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는 가까이에서 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다. 그렇기 매문에 그를 바라 보고 있으면 못난 자신이 떠올라 심적으로 패배하는 기분을 맛 보게 되었다. 아마 수없이 많은 남자들이 바딩을 상대하면서 그런 생 각을 해왔을 것이다. 카셀은 자기만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도, 결국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혼자였습니까?" 바딩 이 물었다.""일행이 있었고, 난 볼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소. 내가 산책에 방해된 모양인데, 계속 하시오." 카셀은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경호하겠다며 따라나선 쉐이든을 찾았다. 그러나 정윈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블안감에 사로잡혀 갑자기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카셀이 서둘러 돌아가려 하자, 바딩은 기어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살짝 잡았는데도 카셀은 그에게 끌려가는 듯 했다."너무 피하지 마시오, 캡틴. 우연히 마주 친게 아닙니다. 아까부터 찾아 다니고 있었소." "나를?" 바딩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왜?""어제 말하지 않았소? 당신과 겨뤄보고 싶다고." 카셀은 일부러 화가 난 듯 눈살을 찌푸렸다."난 당신이 아무나 붙잡고 칼을 들이미는 예의 없는 기사라고 생각지 못했소." 아무나라니! 누가 천하의 하얀 늑대들을 '아무나' 라고 합니까? 저는 지금 라이온 기사단의 캡틴 자격으로 시합을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정식으로!" 바딩은 카셀의 허리에 차고 있는 아란티아의 보검을 발견하고 고개를 으쓱했다. "마침 칼도 가지고 계시는군요. 더구나 보는 사람도 없고‥‥어떻소?"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거나 등 뒤로 빼면 되려 시선을 집중시킬 테니 내버려 두었다. 사실 지금 손이 떨리는 건지 몸 전체가 떨리는 지도 구분이 안 되었다. '들키지 말아야 해, 카셀. 참아. 넌 이것보다 위험한 상황을 얼마든지 겪어왔어. 빌어먹을. 쉐이든, 어디 있어?' 카셀은 자연스럽게 한 손을 바지 춤에 찔러 넣고 뒤통수를 긁적였다"시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왕실의 정원에서 칼을 부딪히고 싶지 않소." "지금보다 적절한 시기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 측 기사들이 붉은 장미 백작을 체포하기 위해 떠났는데,모두 죽었습니다. 물론 붉은 장미 백작은 여유만만하게 노르만트를 떠나버렸습니다. 검은 사자 백작이 노르만트에 있다면, 국왕 폐하가 있는 이 도시라 할지라도 공격하겠다고 선언했지요. 이건 제 실수라고 봐야할 겁니다. 직접 갔어야 했는데, 백작님 곁을 지키느라 그만‥‥‥‥ "검은 사자 백작이 단독으로 행동한다고는 말했으나, 카셀은 설마하니 몇 시간도 안 되어 바로 기사단을 출동시켰을 거라고는 생각 않고 있었다. 그리고 체포하러 간 라이온 기사단을 꺾어버린 붉은 장미 백작의 힘도 그의 예상을 뛰어 넘어버렸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고 엉뚱하게도 평화로운 정원 한 가운데에서 카셀은 왕실에 발을 들인 후 가장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폐하께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또 이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제 군주께서는 성을 떠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겠죠. 저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떠날준비를 해야 하고, 내일 떠나면 언제 당신을 또 만날지 알 수가 없잖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시합을 요청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소." 바딩은 실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설마 하얀 늑대들의 캡틴께서 절차와 형식 따위에 목 메어 칼을쥐기 두려워하는 기사란 말입니까? 아니, 오해 마십시오. 비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제가 생각했던 하얀 늑대들과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 바딩은 허리에 손을 얹고 나팔을 불고 있는 꼬마처럼 깎아놓은 향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은 부드럽게 끝냈으나, 바닥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함을 내질렀다. 멀리서 지나가는 시녀들이 깜짝 놀라 이 쪽을 바라볼 정도였다. 자제력 있고 침착했던 지금까지의 모습을 한 번에 잃어버리고, 그는 칼을 꺼내더니 나팔을 불고 있는 꼬마를 베어버렸다. 그 커다란 향나무가 단 칼에 두 동강 나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한 가지 묻고 싶소, 캡틴 카셀." 그는 칼을휘두르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하얀 늑대가 맞기는 한거요?" 카셀은 순간 내장이 모조리 밑으로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선 정말 칼을 뽑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스스로 카모르트 최고의 기사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확신하는 자였다. 어설프게 칼을 뽑는 순간 바딩은 그의 실력을 모조리 간파해 버릴지도 몰랐다. '왼손으로 칼집을 잡아, 자, 날 봐. 이렇게 부드럽게 쥐어야 해. 꽉잡아서, 일부러 칼집에서 소리 나게 칼을 뽑는 건 자기를 과시하려고 털을 곤두세우는 고양이 같은 짓이야. 진짜 검사가 정말 좋은 칼을 뽑을 때는 소리가 나지 않아. 칼을 뽑을 때부터 휘두르고 도로 집어넣을 때까지, 한 번도 소리가 나지 않지. 하지만 그건 아주 어렵다. 나도 세 번 중에 두 번만 성공할 수 있어. 게다가 내 주무기는 칼이 아니라서 ! 그러니 폼만 가르쳐 줄께.' 카셀은 게랄드가 노르만트로 오는 이틀 간 가르쳐준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상대가 멍청한 놈이면 뽑아. 그리고 그 검은 칼날을 보여줘. 그리고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살벌한 인상을 지어. 그러면 도망 갈거야. 넌 인상 하나는 쉐이든과 방벽을 이루거든.잘 단련시켜 봐라. 그거 생각보다 꽤 무기 된다! 하지만 상대가 정말 강한 놈이라면 뽑지마. 뽑지 않아야 오히려 더 그럴 듯해. 로일이나 아즈윈을 봐. 그 두 녀석은 베기 직전까지 안 뽑지. 둘 다 자세는 좋지만 네 체형 에 맞는 건, 아즈윈의 움츠린 자세보다 로일의 어깨를 편 자세야.' 바딩은 아직도 카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셀은 호흡을 멈추고 천천히 칼집에 손을 올려놓았다. 일반적으로 칼을 뽑을 때처럼 몸을 수그리지도 않고, 양 발을 벌리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칼을 뽑는 법까지는 배우지 못했다. 그가 게랄드에게 '넌 정말 칼과는 안 맞는 녀석이구나.' 라는 핀잔을 스물 다섯 번 정도 들으며 배운 단 하나의 자세가 그것이었다. 그는 로일이 칼을 뽑기 직전의 자세를 복사하고 있었다. "바딩. 정말 나와 대결을 윈하시오?" 오른손은 칼을 뽑는 것과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늘어뜨리고 있었다. 기본기가 튼튼한 보통의 검사가 보기에는 조금 어정정한 자세였다. 그러나 게랄드는 그 자세를 모두 가르치고 난 후 겨우 손을 털며 말했다. '상대가 정말 강하지 않다면, 이 자세는 쓰지 마라.' 상대가 정말 강하다면, 이 자세의 의미를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바딩은 나무를 벤 칼을 방 끝에 대고 피식 웃었다.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긴 거요, 카셀?" "실 없이 이 보검을 뽑을 생각은 없소. 만약 뽑는다면 나는 당신을 반드시 죽일거요." "나는 그걸로 좋소." 바딩은 칼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카셀은 그 자세를 풀어버렀다. "하지만 난 싫소. 당신은 뤼미에르 백작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력이고, 나는 이 시점에시 그의 전력이 반감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바딩은 최후까지 얽매어 둔 자제력을 잃고 소러 질렀다 "피하지 마시오!" 카셀은 몸을 돌리고 아까 가던 길을 다시 걸어갔다. "이대로 당신의 등을 공격할 수도 있소. 내 모든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서라도! 결국 당신이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싸우게 만들 수 있소." 카셀은 그 말에 아찔했으나 여기에서 돌아서면 정말 그와 겨뤄야 했다. 차라리 바딩이 기사로서의 명예를 버리지 않길 믿는 편이 더 나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쉐이든이 이 광경을 보고 있기를 바랐다. 하얀 늑대들 중 누구라도! 나쁜 놈들, 항상 넷 중에 한 명은 옆에 붙어 있겠다더니 정작 필요할 때는 어디 가 있는 거야? "캡틴 울프!" 바딩이 소리치며, 정말 카셀의 등을 베기라도 할 것처럼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는 정말로 명예를 버리고 등 뒤를 공격할지,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참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에 놀라갑자기 뒤로 물러섰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의 고민이 담긴 첫걸음 이후 두 번째 내디딜 자리에 창이 하나 박혀 있었 다. 돌을 뚫고 들어간 철창은 펜 촉대처럼 끝이 파르르 하니 떨리고 있었다."원한다면 내가 상대해 주겠다. 바딩,"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에서 쉐이든이 뛰어 내려 풀밭을 가로질러왔다. 바닥에 박힌 창을 뽑으니, 흙과 부서진 돌 가루가 창 날에 딸려왔다가 도로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바딩도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쉐이든의 창은 바딩을 정확히 노린 것은 아니었으나, 노렸더라도 그는 피한 셈이었다. 쉐이든과 바딩은 둘 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얀 늑대들이라면 누구든 상관 없지." 바딩이 말했다. 쉐이든은 카셀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어떻게 할까? 난 싸움에 무조건 끼어드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캡틴처럼 도전을 피할 생각도 없어." 카셀은 쉐이든의 창을 살짝 쥐었다. "아니. 됐어. 난 이런 멋진 정원에서 피를 보고 싶지 않아." 바딩은 어처구니가 없어 뭔가 말하려 했지만, 멀리서 그들을 발견한 대신들이 뭔 일인가 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칼을 집어넣었다. "마지막에 좋은 인상을 남긴 것도 아니고, 시원하게 한 판 겨를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상태로 헤어지게 되었군. 좋소. 운명이 나를 이끈다면 다시 하얀 늑대를 만나게 되겠지. 그 때는 피하지 마시오, 캡틴 울프." 바딩은 멋진 미소 뒤의 살기를 살짝 내비쳤다. 쉐이든은 창을 팔에 끼우고 카셀 대신 대꾸했다."".언행을 조심하게, 캡틴 바딩.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을 사람은 없으니까.""살아남지 못하더라도 나는 오늘 당신의 캡틴이 드러낸 이빨을 꼭 보고 싶었소." 바딩은 정원을 가로길러 사라져 버렸다. 카셀도 그가 정원에서 벗어날 즈음에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쉐이든은 칼을 어깨에 젊어지고 뒤를 따랐다. "살려둘 필요 있었나? 적의 전력을 깎을 좋은 기희가 될 수도 있었어 ." "오늘 저녁에 귀족들의 힘을 빌려야 해. 그런데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를 죽여 안 좋은 이미지를 보일 필요는 없어." 쉐이든은 그 무거운 철창으로 어깨를 특툭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서 얻을 이익이 많을지, 저 녀석을 살러둬서 볼 손해가 클지 모르겠다.너도 봤겠지만, 저 녀석 상당히 강해." "상관 없어. 너보다 강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 그리고..."카셀은 쉐이든의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쳤다. "고마워." 하얀 늑대들이 참가한 이틀 째 파티는 취소되었다. 뒤늣게 도착한 귀족들은 불만스려워 했지만, 대신 국왕이 직접 주최하는 디너가 있다고 하자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러나 디너에 참석한 귀족들은 모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게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트린 유언비어가 아니라면, 겁 많은 시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는 와중에 크게 부풀어진 사건이라고 떠들어했다. "사실입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오늘 자신을 체포하러 온 라이온의 기사들을 전원 살해하고 이 노르만트도 안전하지 못할 거라고 선언했습니다. 소문도, 과장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적어도 오십 명은 됩니다. " 루오르 대신은 메인 디쉬도 나오기 전에 긴 데이블에 모두 모인 귀족들을 상대로 딱딱하게 말했다. 양송이로 만든 수프와 새우로 만든 전채로 간단히 식욕을 돋우던 귀족들은 패닉에 가까운 혼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그 일에 대해 떠들었고, 어제 파티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당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느작 여넘이 없었다. 그 때 국왕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소란이 잠시 진정되고, 귀족들은 모두 데이블에서 일어났다. 왕은 하얀 늑대들의 캡틴 카셀과 동행하고 있었다. "어제 참석했던 사람은 알겠지만, 이 분은 아란티아에서 온 하얀 늑대들의 캡틴, 카셀 울프요. 그리고 다른 하얀 늑대들은 테이블의 맨 끝에 앉아있소." 왕은 마치 음식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설명이라도 하듯 간단하게 소개를 끝내버리고 자리에 털씩 앉았다. 카셀은 앉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귀족들은 어제와는 달리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색해 말은 않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모두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있는지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소문으로도 들었을 것이고, 루오르 대신이 따로 또 설명했을 거요. 하지만 몇 가지 궁금한 점도 있을 테니, 거기에 대해서는 두나단 대신이 자세히 설명할거요. 그 다음, 그대들의 질문을 받겠소." 지금까지 와인을 입술에 간단히 적시기만 할 뿐,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앉아 있던 젊은 대신이 자리에 일어났다. "식사를 앞에 두고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점에 대해 우선 사과 드리겠습니다.제 말이 끝난 이후에 몇명이나 이 자리에 남아계실 지 모르나, 식사는 제가 준비한 발표가 끝난 후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국정 회의 때 누벨 델 뤼미에르 백작은 아들인 리제니 덴 뤼미 에르 남작의 살해 사건 용의자로 바르다 위그 쟌스베인 백작을 지목했습니다. 그는 체포권을 요구하였으나 증거가 없으므로 기각 되었습니다. 그러자 뤼미에르 백작은 자기 군대에 명령하여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습니다.그러나 실패했으며 많은 라이온 기사가 죽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도 아는 내용일 겁 니다. " 주방장이 조용히 들어와 전채에 이은 요리를 내놓을 지 묻자, 시종이 손을 저었다. 주방장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후, 두나단은 말을 이었다."쟌스데인 백작은 전면전을 선언했으며, 노르만트에 뤼미에르 백작이 남아 있다면 여기도 공격하겠다고 말한 후 떠났습니다. 이에 뤼미에르 백작도 내일 아침에 노르만트를 떠나 전쟁 준비를 하 겠다고 했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둘의 전쟁에 국창 페하는 어) 족 편도 들지 않습니다. " 거기까지는 귀족 중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말이었다. 국왕은 언제나 두 백작의 전쟁을 방관해왔다. 두나단은 호흡을 한 번도 늦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러나 만약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노르만트를 공격하거나 국왕 폐하를 해하려 든다면 왕실의 군대로 그들을 진압하겠습니다. " 예상대로 반응은 즉시 나타났다. "와, 왕실에 군대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오, 두나단 대신? 내가 알기로 왕실 기사단 조차 안 남아있을 텐데." 귀족 중 한 명이 큰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귀족들을 대신했다 "지금부터 구성합니다. " "두나단 대신의 말은 폐하의 뜻과 같습니까?" 샤를 국왕이 직접 대답했다. "같소. " 두나단이 다시 말을 받았다 "이 시각 이후로 두 백작 중 한 쪽 편에서 다른 한 쪽 백작을 지읜하는 이는 노르만트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 "엉뚱한 소리 마시오!" 귀족 중 한 명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귀족은 두나단의 말에 놀라다 못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 백작의 군대를 막을 수 있는 건 그들 자신 밖에 없소. 붉은 장미 백작이 그런 말을 했다면‥‥‥ 국왕께선 검은 사자 백작을 불러들여 그의 군대로 여길 방어하셔야 합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왕실이, 기사단이 아닌 상비군을 두는 것은 지금까지의 카모르트 전통에 위배됩니다. " "폐하께서는 신중히 생각하시고 결정을 내리십시오. 만약 지금 폐하께서 군대를 두시면 두 백작을 적으로 돌러게 될 지도 모릅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민간인도 서슴치 않고 학살한다고 했습니다. 용병들로만 구성되어 기사도도 모르는 로즈 기사단이 노르만트에 들어온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별어질 지 모릅니다. " "그게 무슨 뜻이오?마치 이 일이 모두 붉은 장미 백작의 탓인 것처럼 말씀 하고들 있지 않소?" 탁자의 끝에 앉아있는 다른 귀족이 또 일어나 그 말에 반발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붉은 장미 백작의 편에 있는 귀족도 있었다. "방금 두나단 대신이 말했듯, 이 일은 모두 검은사자 백작이 붉은 장미 백작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오? 게다가 국왕 폐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노르만트 내에서 단독으로 행동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있지도 않은 죄인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검은 사자 백작은 확신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는 분이시오." 탁자의 다른 쪽에서도 끼어들어 말했다. "그럼 1년 전에 로즈 기사단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민간인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불태운 사건은 어떻게 된 거요? 그것까지 명예로운 라이온 기사단의 확신에 찬 행동이라고 말하시겠구려." "그 일은 이 일과 상관 없소." 말싸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먹고 있던 수프 그릇을 상대에게 집어 던질 판이었다. 이쪽에서 말하면 저쪽에서 떠들고, 저쪽에서 떠들면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던 이가 갑자기 일어나 소리 질렀다. 처음에는한사람의 말이 끝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귀족들도 이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누가 무슨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기도 힘들 지경이 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못있겠군.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대여섯 명의 귀족들이 서로에게, 상대할 수 없는 족속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던져두고 나가버렸다. 떠나는 이들 중 한 명은 샤를 국왕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수저와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고 디너 테이블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끝까지 참으려고 애썼던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이 일을 붉은 장미 백작께 말씀드리러 가야겠습니 다. " "저 역시 제 영지로 돌아가 검은 사자 백작의 전쟁을 돕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폐하의 안전을 위한 일임을 알아주십시오." 둘은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더니 식당의 다른 쪽 문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더 이상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으나, 눈치를 보고 있거나 일어날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지, 앉아 있고 싶어 있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두나단은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곧 주방장을 불러 식사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주방장은 탁자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 요리를 몇 접시나 내어올 지 계산한 후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경솔한 선택을 하신 것 같습니다. 왕실에 군대를 들이는 대신 폐하의 편을 들 귀족들까지 잃으신 겁니다." 격렬한 대화가 끝날 때까지 끼고 있는 반지를 엄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던 귀족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을 적으로 가정하신 것 같은데, 그 두 분은 서로에게 창을 겨누고 있을 뿐 폐하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해서는 아마 그 두 분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 자신은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 또 다른 이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샤를 국왕은 지금 벌어진 과격한 상황에, 또 비아냥거리는 귀족들의 말에,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뒤에 서 있기만 한 카셀도 왕의 감정을 느낄 정도였다. "오늘의 디너는 카모르트 역사에서도 길이 남을 것입니다. 페하의 선백이 옮았는지의 여부를 떠나, 우리는 이 시간을 즐길 가치가 있습니다. " 한 명이 와인 잔을 치켜들었고, 다를 귀족들도 잔을 들었다. 카셀은 짧은 순간 잔을 들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체크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두나단과 약속한 첫 번째 행동 방침은 귀족들이 어떤 헛소리를 지껄이든 카셀이 개입할 때까지 다른 대신들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눈 뜨고 못 보는 루오르 대신이 굳은 표정으로 참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귀족들이 지금까피 했던 말은 사실 모두 일리 있는 말처럼 들렸고 모두 왕을 생각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셀은 왕의 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머지는 왕을 욕하든 식탁을 뒤집든 상관 없었다. 카셀은 와인 잔을 들고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즐거운 디너를 위한 시를 하나 읊어도 되겠습니까?" 마침 주방에서 잘 구운 양고기 요리가 나왔다. 한껏 왕을 몰아 세우던 귀족들은, 기대하던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말을 꺼내자 눈을 반짝였다. 두나단이 이번 사건에 대한 말을 식사의 서두에 꺼내지 않았다면 오늘의 화제는 단연 카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셀 이 의도한 순서에 의해 이제야 그가 나설 차례가 된 것이었다. "이것은 제가 카모르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터에서 만난 유랑 시인이 들려준 시입니다. 그에게 허가를 얻지도, 돈을 지불하지도 않았으나 대신 그의 이름을 이 자리에서 밝히겠습니다. 그의 이름은 라우레, 제가 지금까지 만난 가장 유쾌한 유랑시인 이었습니다. " 귀족들은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그 이름을 듣고 마치 유명한 예술가의 이름이라도 들었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박수를 쳤다. 처음에는 자기 대신 죽은 그 불쌍한 유랑 시인에게 보답한다는 의미로 귀족들 앞에서 이름을 알렸으나, 이 따위 귀족들에게 자기 시를 알리는 걸 그가 과연 좋아할까 의심스러웠다. '미안합니다, 라우레. 하지만 국왕도 듣고 있으니 그것만은 영광이 되길 바랍니다.' 카셀은 모닥불 앞에서 소시지를 구우며 들려주었던 그의 노래와 피리 소리를 떠올렸다. 단순한 가락의 단순한 가사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불렀다. 언덕 워의 장미 한 송이 노래 하는 사자 한 마리 내가 아는 노래 한 곡 사자가 부르는 노래 한 곡 노래 하는 광대 한 명 춤추는 장미 한 송이 흩날리는 갈기에 장미 꽃고 언덕 위에 춤추는 사자 보고 무서워 벌벌 떠는 광대 사자야 사자야 이제 그만 추어라 장미 가시에 네 귀가 다치는구나 사자의 포효에 광대는 주저앉고, 장미 가시애 찔리는 줄도 모르고 춤추는 사자 갈기에 몯은 피 언덕 위에 떨구니, 사자야 사자야 이제 그만 추어라 여긴 내가 사는 언덕이야 장미가 포효하니 광대는 주저않고 꽃잎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붉음을 과시하는 장미 메마른 언덕에 생기 잃은 꽃잎만 가득하구나 언덕 위의 사자 한 마리 노래 하는 장미 한 송이 내가 아는 노래 한 곡 사자야 장미아 이제 그만 춤추렴 광대는 나란다 노래가 끝나자 양고기 냄새 가득한 식탁에 정적만 머물렀다. 흥겨운 가락에 박자를 두들기기까지 했던 귀족들은 가사 내용이 심상치 않아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날 즈음에 그들은 경악에 가까운 열굴로 카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샤를 국왕 폐하께서는 왕실에 군데를 들이실 겁니다. 그리고 이 사태를 해결할 때까지 그 군대의 선두에 하얀 늑대들이 서 있겠습니다."아까 왕을 위해 건배를 권했던 귀족이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 났다. "하얀 늑대들은 이 나라를 빼앗기 위해 사단이 카모르트의 군대를 지휘한다는 건 말도 안 되오. 폐하, 카모르트를 아란티아에 바칠 생각이십니까? 그는 카셀을 손가락질 하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큰 위협이 되는 존재에게 군대를 맡기 신다니, 말도 안 됩니다. 페하, 진정하십시오. 아무리 나라의 손님이라도 이렇게까지 나라 일에 개입하게 두시면 안됩니다.", "브로도에서 오신 파레르 나세리 백작." 카셀은 어제 파티장에서 들었던 그 이름을 발음하며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을 위해 그는 귀족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워두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위협이 되는 사람에게 삿데질을 하는 건 조금 위험한 행동 아니오?' 나세리 백작은 잘려나가기라도 한 듯 황급히 손가락을 접었다. "오해가 있을까봐 말해두겠소, 나세리 백작 그리고 얀 마지멜 남작." 카셀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두 백작에게 이르겠다고 국왕을 협박한 귀족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당장 반지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와인 잔을 들며 나세리 백작의 말에 호응했던 귀족들은 모두 일순 긴장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카모르트의 귀족들이시여. 저는 카모르트의 국왕 폐하를 돕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하지만 미리 강조하죠. 하얀 늑대들은 군대의 선두에 서겠다고 했지, 그 군대를 소유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해결 되면, 미련 없이 아란티아로 돌아갑니다. 지난 천년 동안 그랬듯이 아란티아는 절대 다른 나라의 땅을 탐내지 않습니다. " 카셀은 그 말로 상대를 제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카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식탁 위의 양고기가 거의 식을무렵이 되어서야 나세리 백작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이 나라를 뺏고 안 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군대도 없이 두 백작을 적으로 돌리겠다고 하는 국왕 폐하와 캡틴 울프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노르만트를 떠나겠습니다. " 다른 귀족도 소리 나지 않도록 애쓰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저는 아무 힘도 없는 귀족입니다.영지 조차 붉은 장미 백작에게 선물 받아 겨우 꾸려왔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있을 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폐하." 계속 자제하고 있던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하얀 늑대들에게 대항하여 논리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또한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내린 두 백작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지도 못했다. 요리만 잔뜩 남은 식탁에 하얀 늑대들과 국왕, 몇몇 대신들만 남아 있있다. 그리고 마지멜 남작의 말에 호응하여 와인 잔을 들지 않은 귀족들도 아직 앉아 있었다. 카셀이 눈 여겨 봐둔 도움을 줄 만한 귀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 모두 떠나도 상관 없었다. 카셀은 오직 한 명의 행동만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안도했다. 그가 가장 남길 바라 던 한명은 조용히 접시에 담긴 양고기를 썰어 먹고 있었다. "훌륭한 연설이었소, 캡틴 울프. 하지만 너무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아 있군. 그래서야 어디 아군을 포옹하겠나?""제게는 덤불 속의 수많은 새보다 하늘을 높이 날고 있는 독수리 한 마리가 필요합니다, 쟌 말로 에노아 후작." 에노아 후작은 입에 넣은 양고기를 우물거렸다.. 그는 샤를 국왕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국왕도 손을 들어 답례했다. 국왕은 에노아 후작이 남아준 것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용케 내 가문의 문장이 독수리라는 걸 알아냈구려. 하지만 난 왕실 주방장의 요리를 너무 좋아해서 남아있는 거요. 나이가 들어 이빨이 안 좋다 보니 이렇게 부드럽게 구운 양고기의 유혹을 이겨 내기 쉽지 않아서,특별히 당신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오, 캡틴." 그는 어제 파티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호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카셀은 그의 강한 어조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힘을 느꼈다. 노인의 조언은 겨울의 태양과 같다라고 아버지는 말했으나, 에노아 후작의 말은 한 여름의 뙤약볕과도 같았다. "제 세 배를 사신 분과 지혜를 겨루고 싶지 않습니다, 후작. 이 자리에 남아있다면 국왕 폐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서겠죠. 도와 주십시오. 노르만트 시민에게 군복을 입힐 수는 없습니다. " "이상론자는 아니었군, 캡틴. 그러나 나 역시 몇 마디 말로 카모르트의 내노라 하는 귀족들을 쫓아낸 웅변가와 말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러나! 다시 말해두지만 나는 당신의 말에도 동의할 생각이 없고, 당신을 도울 생각도 없소. 또 10년 전 전쟁에서 자국이 침략 받을 때까지 꼼짝도 안했던 아란티아를 신뢰하지도 않소." 에노아 후작은 음식 접시를 물리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는 탁자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두나단을 보았다. 두나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둘이 주고받는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국왕 폐하의 자리마저 위험하게 되었군. 이는 모두 샤이필드 공작의 유지를 받들며 카모르트의 평화와 샤를 국왕 폐하를 위해서요. 내 군대를 빌려드리리다. " 조마조마하게 듣고 있던 루오르 대신과 샤를 국왕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소, 에노아 후작 " 국왕이 직접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에노아 후작은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하고 있던 시종이 그의 지팡이와 옷을 내주었다."캡틴 울프. 사실 '당신을 도울 생각을 가진 누군가' 가 아니었다면 이 디너에 참가하지도 않았을 거요." 카셀이 그게 누구인지 추측해 내기도 전에 에노아 후작은 말을 이 었다. "지금 파발을 보내 군대를 소집하는 데 사흘, 즉각 출발할 수 있는 선발대가 노르만트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 사흘, 나머지 군대가 오는 데는 총 열흘 정도 걸리오. 두 백작이 군대를 모아 부딪힐 때를 생각하면 그리 참기 어려운 시간도 아닐테지. 선발대의 숫자는 총 삼백이고, 후발대까지 합치면 일천 명이 조금 넘는군.", 갑자기 눈치만 살피고 있던 한 명이 끼어들었다. "를레에서 온 이네르 드봉 자작입니다. 제게 200 명 정도 되는 병사가 있습니 다. " "제게도 열 명의 기사와 백 명의 창병, 오십 명의 궁수가 있습니다. 두 백작의 군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 훈련 시켜둔 병력이니 부디 왕실을 지키는 데 써 주십시오." 두 귀족이 그 말을 하자 에노아 후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 기사들과 왕실의 경비병까지 끌어 모으면 천 오백 정도 되는 병력이 되는군. 어떻소, 캡틴 울프? 두 백작을 상대할 만 하오?", 그는 카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식당을 나섰다. 그것은 다른 어떤 말보다 카셀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자신이 있든 없든 군대를 맡긴다는 뜻이 었으니까. 준비된 음식은 많았으나, 식사를 계속 하는 이가 없어 후식도 없이 디너를 끝냈다. 왕은 굳이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접시만 치운 채 몇 명 안 되는 대신들과 하얀 늑대들만 두고 말을 꺼냈다. "돌아을 수 없는 강을 넘었소. 내가 군대를 갖는다는 것에 반감을 품고 두 백작이 진짜 노르만트를 침입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소." "기존의 규척이 깨질 때의 반대는 항상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법입니다. 그리고 이건 이미 예상했던 일입니다, 폐하." 두나단이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루오르 대신은 아직 불안한 얼굴이 었다. "캡틴 울프, 그대는 정말 두 백작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자신이 있는 거요?" 카셀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이 노르만트를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가정하에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만에 하나 쳐들어 온다 해도 그 것은 방어를 한다는 뜻이지, 전쟁 자체를 진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물었다. "양 쪽 군대의 병력은 어떻게 됩니까?" 루오르가 손짓하자, 다른 이가 당장 커다란 두루마리를 준비해 두나단에게 가져다 주었다. "다음은 검은 사자 백작의 병력입니다. 중무장 보병이 약 사천, 일반 보병이 오천, 궁수가 팔백, 기사가 오백 이십, 그 중 라이온 기사단이 백 오십입니다.공성기도 있다고 했는데, 아직 쓰인 적이 없어 정확한 수치는 모릅니다. 비상시에 동윈할수 있는 전력은 천이 더 있는데 성을 보호할 때 외에는 쓰지 않는 병력입니다. 붉은 장미 백작의 병력은 더 자세히 조사되었습니다. 중무장 창병이 , 중무장 보병이 이천, 일반 보병이 삼천 오백, 궁수가 천, 기사가 천, 그 중 로즈 기사단이 삼 백입니다. 숫자상으로는 장미 백작이 유리하나 대부분 용병들로 이루어져 있어 병사들의 질은 검은 사자 백작 쪽이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나단은 두루마리를 접고 말했다 "이 기록은 반년 전에 조사한 기록입니다. 그 사이 양측은 큰 전 투를 한 번, 자잘한 전투를 두 번 정도 치렀으니 전력에 변동이 심할 겁니다. 또 숨겨둔 병력을 생각하면, 아마 이보다 더 많을 겁니다. " "어떻게 생각하시오, 캡틴?그럴 가능성도 희박하고 솔직히 생각하고싶지 않지만, 만약 그 정도 병력이 노르만트로 쳐들어오면 막을 수 있겠소?" 국왕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 전쟁에 관한 문제라면 ‥‥‥" 카셀은 자연스럽게 쉐이든 쪽을 바라보았다. 아즈윈은 지루한 듯 턱을 받치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고, 게랄드는 디저트로 케이크를 하나 시켜다 혼자서 포크로 파먹고 있었다. 던멜은 말 할 거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쉐이든이 손을 들더니 카셀보다 빠르게 말했다 " 캡틴은 전략전술에도 능하오. 그 정도는 문제 없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모르트 측에서도 도움은 필요합니다." 쉐이든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끝내버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당연한 말이었다. 부하가 리더를 믿는 게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카셀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방금 쉐이든이 '먼저' 행동했다. 처음 노르만트에 와서 약속한 대로 먼저 행동한 쪽을 따라야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방금 그는 카셀에게 선공을 날린 셈이었다 '쉐이든, 그러기야?' 카셀은 그런 뜻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캡틴은 너야.' 쉐이든은 아주 간단한 던멜식 수화로 말했다.그 수화를 하지 않았어도 카셀은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생각할 필요가 있군요." 카셀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립게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그 느긋한 행동은 대범하고 여유가 넘쳐 보였으나, 그걸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작전 총 지휘를 맡아줄 장수 한 명." 카셀은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 장수가 지목한 참모 한 명, 실제 전쟁 경험이 많은 장수 세 명, 최전방을 맡아줄 만한 기사 열 명이 필요합니다. 나머지 병력 배치는 그 사람들과 논의하겠습니다. " 그 대사는 '마법사의 침략' 이라는 소설에서 따온 대사였다. 물론 마지막 대사에 '거기에 군사 만 명을 주면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드래곤이라도 막아내겠소' 가 더 있었다. 카셀은 부디 그 유명한 소설을 또 본 사람이 이 자리에 없기를 바랐다.샤를 국왕은 즉시 대답했다. "루오르 대신. 쟝 세이게이 장군을 불러 방금 말한 병력을 얘기 하시오."에노아 후작은 노르만트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며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의 경비대와 시종들이 분주히 짐을 나르고 마차를 준비했다. 후작이 막 마차에 오를 무렵, 두나단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에노아 후작님 ." "아, 게네. 만남이 너무 짧으니 안타깝군. 난 가볼 데니, 됫일을 잘 부탁하네, 왕실에는 도대체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후작님은 위험한 발언을 너무 함부로 하십시다. " 두나단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다고 누가 나한데 욕하지도 않더군. 그보다 지금부터 준비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늙은이 마중은 왜 나왔나?"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한들,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릴 시간 조차 없겠습니까?" "그런 건 념어가도 돼. 그보다 하얀 늑대들의 캡틴 말일세 " "예 후작님이 보시기에는 어떻던가요?" "몇 번 떠봤는데,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더군. 긍지 높은 기사도로 똘똘 뭉친 귀족이거나 검술만 아는 바보거나 혀만 굴릴 줄 아는 변설가라면 수없이 보아왔네. 하지만 그 자는 파악이 안 . 뭐랄까‥‥‥‥ 아주 어려워." 후작은 조금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저어버렸다. "후작님께서 어려워할 상대도 다 있습니까?" "난 그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는 사실도 믿기지 않네." "예?" 두나단은 캡틴 울프의 카리스마에 지금까지 압도당해 그런 의심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있다. "신은 공평하시지. 사람을 대할 때는 언제나 그걸 알아두는 게 좋아, 게네. 누구든 한 가지 재능에 비범하다면 다른 쪽 재능은 약해지기 마련이야. 똑 같은 양의 물을 저울의 어느 쪽에 기울이느냐 와 같지. 그런데 캡틴 울프라는 자는 내가 보기에,말하고 머리 쓰는 쪽에 모든 재능이 쏠려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그가 검술의 재능까지 천부적이라고?" 후작은 자문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건 말도 안되지." "하얀 늑대들은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어찌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단한 검술도 그들의 수준에서는 별 거 아닐 지도 모르죠. 아직 그들의 검술을 본 적이 없으니 그 쪽 판단은 보류하겠습니다만." "모를 일이야. 잘 봐뒀다가 나중에 얘기해주게. 신도 가끔 실수를 해서 접시 한쪽에 물을 잘못 따랐을 수도 있고‥‥‥‥ 내가 아까 파악이 어렵다라고 생각한 건, 사실 그가 살아온 배경 때문이야." "울프 기사단이라는 배경 발씀이신가요? 아니면 그의 성장 과정 같은 거 말입니까?""검술도 그렇고, 요리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고, 어떤 능력이든 그건 환경에 영향을 받아 발전되는 거야. 특히나 언어라는 건 그 스승이 전부라네. 천부적 웅변가? 그런 건 없어. 말이란 건 해서 단련 시켜야 얻을 수 있는 훈련의 대가야. 자네도 검을 배워봤으니 알걸세. 검술이란 게 훈련도 없이 얻을 수 있는 공짜 선물이던가? 언어 란 더욱그래. 대개는 부모의 영향이 아주 크지. 또는 아주 어린 시절에 대단한 선생을 만났거나." 두나단은 그의 분석을 재미있어 하며 웃었다. "하긴 캡틴 카셀이 말할 때 보면 가끔 섬뜩하더군요." "그는 뭔가를 말할 때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 내던질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지. 논리가 어찌 되었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듣는 상대는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침흘리기 마련이라네. 내 장담하건대, 그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죽는 상황을 수 없이 겪어본 사람이야." "하얀 늑대들의 기사라면 죽을 고비를 몇 번쯤 넘기지 않았겠습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그 정도 검술을 가진 자가 죽을 고비를 혀로 넘겼겠나? 그 자에게 정말 검술의 재능이 없다면, 저런 말재주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결국은 혀 한 번 잘못 놀려 단명할 운명이란 말일세 으음, 역시나 모를 일이야.그자의 부모를 한 번 보고 싶군." 두나단은 너무나 앞서 나가는 에노아 후작의 생각을 따라갈 수 가 없어 그저 고개딴 끄덕였다. 후작도 말이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는지, 곧 마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그는 창문만 살짝 열어 인사했다. "조심하게. 두 백작뿐 아니라, 하얀 늑대들도. 특히 카셀이라는 자는 절대 방심하지마." "그의 언행이라면 어떤 것이든 놓치지 않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두나단은 손을 들어 인사했고, 마차가 출발했다. 성의 정원을 지나 마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그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 보는 한 팔 없는 검은 기사가 있었다. 그는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말을 몰아 에노아 후작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검은 갑옷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링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로즈 기사단의 기사직을 제안 하셨겠죠?" 붉은 장미 백작의 영지는 노르만트에서 말로 이틀 거리에 있는 덴모주였다. 그 먼 거리를 마차 안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덕에 안나와 라틸다는 둘 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더구나 로저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쉽게 잊혀질 수 없는 슬픔이었는지, 간밤에 마차에서 야영 할 때도 안나는 참을 만큼 참다가 기어이 눈물을 보였었다. "예. 12 쏜즈에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 근 하루 동안 말이 없다가 처음 입을 여는 라틸다의 질문에 로일은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쏜즈에? 당신을 아주 높이 평가했군요. 거기에 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경력과 전적이 펄요한지 당신은 모르실 거에요.본 지 이틀도 안 된 사람에게 로즈 기사단의 최고 자리를 내어준다니, 아무리 파격적인 인사 조치를 취미로 하시는 분이라지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군요." "잠깐의 전투를 겪은 것이지만, 그들의 힘은 대단하더군요. 노르만트에서의 전투는 대단히 인상적 이었습니다. " "잘 보셨어요. 난 12 쏜즈가 합류한 전투에서 패했다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죠. 그 많은 전쟁터를 거쳤으면서도 죽기는커녕, 부상 한 번 입는 걸 못 봤어요. 노르만트에서 라이온 기사단을 상대로 싸우는 걸 봤다고 했죠? 그 와중에 한 명이라도 다친 사람이 있나요? 부상 중이긴 했지만 로저도 많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베데랑이에요. 하지만 죽었죠." 실수로 내뱉은 이름에 라틸다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무의식적으로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둘의 얘기가 오고 가는 중에 안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고통을 참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차를 많이 타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이렇게 강행하며 긴 시간동안 마차 안에만 있으니 견디기 힘든 모양이 었다. "힘드니?" "괜찮습니다. " 안나는 신물을 삼키며 대꾸했다 "너야 항상 그렇게 말을 하지." 라틸다는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호위 중인 쏜즈의 기사를 불렀다. "크라브지크, 잠깐 와봐요." 그녀는 다시 창문 안으로 고개를 돌리고 로일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칼 맞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자기들끼리 하는 연습 시합 중에 다치는 건 많이 봤으니까. 하지만 전투에서의 그들은 적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강하죠. 아버지께서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장담하는 이유도 그들 때문이에요."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크라브지크라는 이름의 기사가 다가왔다. 그의 등에는 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칼이 메어져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어디 계시죠? 오전부터 보이지 않더군요." "백작님께서는 다른 쏜즈의 기사들과 함께 길을 서두르셨습니다" "급한 일이 있나요?" "군주님께서는 전쟁을 선포하셨습니다. 군을 정비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크라브지크는 차갑게 대꾸했다. "좋아요. 아버지 일은 아버지 일이죠.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금 쉬어야겠어요." "안 됩니다, 아가씨. 이미 뒤쳐졌습니다. 점심 식사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주십시오. 더 지연시키기는 곤란합니다. "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 지연이죠? 급하면 경비대를 끌고 먼저 가시죠. 난 내 경호원이 따로 있으니까. 마차를 세워라!" 그녀는 큰 소리로 마부에게 명령했다. 크라브지크는 아주 잠깐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썼으나, 즉시 원래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의 표정 변화를 본 건 로일 밖에 없었고, 그도 로일과 눈이 마주쳤다. 안나를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리는 라틸다를 사이에 두고 둘은 서로를 잠깐 동안 강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곧 크라브지크는 호위하는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잠시 휴식이다. 짐을 풀고 식사를 준비하라." 이틀 간의 강행에 지친 병사들은 환호를 대신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도 밤을 새며 이동했고, 오늘은 새벽에 식사 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터라 다들 허기가 져 있었다. 말에서 내린 병사들은 물을 떠 수프를 끊이고 고기를 꺼내 구웠다. 서두르라는 명령도 없었는데, 손놀림은 아주 빨랐다. 로일은 두 여자의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다가 일손이 부족한 것 같아 라틸다에게 말했다. "좀 도와주고 올까요?" "안 돼요!" 라틸다는 짧게 끊어 말했다. 하지만 뒤늦게, 그녀는 너무 사납게 말했다고 생각하고 사과했다. "제가 신경이 좀 날카로웠군요. 날 고려하지 않고 움직이는 아버님께 화가 나 있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로일은 저런 일 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나의 기사'에요. 나에게 관계된 일이 아니면 다른 누가 시키는 일도 하지 말아요. 사람 좋은 당신 성격은 알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나는 괜찮은가요?" 라틸다가 대신 대답하려 했는데, 안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예, 괜찮아요. 전 천천히 기어가는 마차에도 익숙하지 않아요. 이렇게 빨리 가는 마차는 타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덜컹거리기도 하죠. 말을 자주 타는 저도 못 참겠는데, 오죽 하겠습니까?" 로일은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을 닦아주었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로일의 웃는 얼굴을 피해 수줍은 시선을 돌렸다. 로일이 아닌 다른이가 그런 배려를 했다면 냉정하게 손을 쳐냈을 안나임을 알기에, 라틸다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산 밑에 외딴 집도 보이고, 시냇물도 흘렀다. 딱히 풍경을 고려 해서 멈춘 것도 아닌데, 휴식을 취하기 좋은 장소였다. 안나는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라틸다의 끈질긴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언덕 풀밭에 누웠다. 속을 달랠 때까지 만이라고 했지딴, 따뜻한 햇살과 싱그러운 풀 내음의 힘에 굴복한 나머지 그녀는 그만 잠들어 버렸다. 로일과 라틸다는 그 옆에 않아 쉬었다""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하얀 늑대들의 캡틴의 제의도 거절하고 아버지의 제의도 거절하고‥‥ 당신은 어떻게 그 모든 유혹을 쉽게 거절하실 수 있나요?"" "12 쏜즈 입단 제의라면, 저는 거절했다고 말씀 드리지 않았는데요." "설마 울프 기사단의 제의도 거절한 사람이 거기에는 넘어갔다고요?그렇지 않을 걸요?말해봐요. 어떤 자신감을 가슴속에 품고 있기에 스스로를 팔지 많나요?' 로일은 집요하게 묻는 라틸다의 말을 어떻게 받아 넘길지 고민 했다. 다행히 그녀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좋아요. 당신이 명예에 이끌렸다면 처음부터 내 옆에 남아있지도 않았겠죠. 당신에게는 당신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빛의 마력은 라틸다도 지배해갔다. 그녀는 잠시 졸린 눈을 깜빡이며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감상했다. 졸음을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로일의 다리를 끌어다 그 위에 누웠다. 라틸다는 그가 뭔가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붉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제가 없는 그녀에게 이렇게 친근한 스킨쉽은, 경험해 보지 못한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악몽도 깜박 잊어버리고 잠들어 버렸다. 안나와 라틸다 모두 작은 슴소리만 내며 깊이 잠들어 있을 때쯤, 병사들의 식사가 끝나 출발을 준비하는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로일은 둘을 깨워야 할지, 그대로 자게 둬야 할지 고민했다. 그 때 마침 풀을 밟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크라브지크가 거대한 칼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의도에서인지 모르나, 그는 로일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섰다. "등 뒤에 서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 로일은 라틸다의 어깨에 가볍게 올려놓은 손을 떼고 옆에 놔 둔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래도 크라브지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캡틴 링케가 쏜즈를 모두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소. 기사 로일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무슨 뜻이오?" 크라브지크는 한쪽으로 누워 자고 있는 안나의 옆을 돌아 로일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거대한 양날 검을 품에 안고 앉아 있는 폼이 워낙 살벌하여, 두 여자 중 한 명이라도 눈을 떠 그 모습을 보면 비명이라도 지를 정도였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아마도 미래의 쏜즈의 기사가 될 사람이자, 라틸다 아가씨의 경호원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인 것 같군. 나로서는 무척 참기 힘들지만." 크라브지크는 차가운 눈동자로 말했다. "참기 힘들다니?" "당신과 겨루고 싶소." 그제야 로일은, 링케가 본즈의 기사직을 신중히 고려해 보라고 할 때 옆에서 겨루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크리브지크라는 걸 기억 해냈다. "무슨 이유로?" "그건 내가 묻고 싶소. 당신을 보는 내가 왜 이리 전의에 불타는 거요?" 로일은 좀 어이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좋소, 기사 로일.솔직히 아까 등 뒤에 섰을 때 베는 시늉이라도 해서 당신을 도발하고 싶었소. 하지만 그랬다가 라틸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시면, 내가 대단히 곤란해지니까 참았소.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크라브지크는 코 끝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자세에서 베면 당신은 막을 수 있소?" 라틸다가 무릎을 베고 누워 있지 않았다면 당장 일어나 칼을 뽑았을 정도로 끔찍한 살기가 로일을 덮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거기에 맞는 전투 자세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 변화는 없었으나, 상대도 그걸 알았는지 끌어안고 있는 칼의 손잡이로 손을 옯겨 잡았다."그 정도 무게의 칼이라면 라틸다를 깨우지 않고 막기는 힘들 것 같소. 하지만 어설픈 시도는 하지 마시오." 크라브지크는 한참 로일의 눈동자를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캡틴이 어떤 의미로 당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한 건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하지만 난 그러 참을성이 많은 편이 못 되니, 미리 사과 하겠소." "뭘 미리 사과하겠다는 거요?" 로일은 조금 화가 나 물었다. 크라브지크는 칼을 어깨에 젊어지고 물러섰고, 로일은 아직 자세를 풀지 많았다. 그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뿌연 먼지 속에서도 붉은 장미의 깃발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 군이 오고 있군. 아가씨를 깨우시오. 다시 이동해야겠소." 크라브지크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업무적으로 말했다. "이틀 만에 주무시는 거니, 조금 더 자게 두시오." "그럼 그대로 마차에 태우던가, 알아서 하시오. 지금 출발시키지 않으면 정말 곤란하니 서두르는 게 좋을거요." "당신은 부탁이라는 말을 절대 쓰지 않는군?" "검을 잡은 뒤로 그런 말은 써 본 적 없소." 크리브지크가 열걸음 밖으로 물러간 후에야 로일은 칼손잡이에 서 손을 뗐다. 이 쪽으로 다가오던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잠시 멈춰 섰고, 그 쪽 지휘관이 마차가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려 왔다. 지휘관은 크라브지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로일과 라틸다가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나, 그냥 무시 할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라틸다를 그대로 안아다가 마차 안으로 옮겼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그 와중에도 깨지 않던 라틸다는, 덴모주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잤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라릴다는 잠에서 깨어났다. 풀밭에 있있던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그녀는 로일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고, 안나는 차분하게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그녀가 일어나 졸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까지 안나와 로일은 흔들리는 마차 안의 정적을 깨뜨리지 않았다. 로일은 일어나는 라틸다의 머리를 피해 잠시 몸을 뒤로 젖혀주었고, 안나는 잘 잤냐고 살짝 목례만 했다. 밖을 내다보니 익숙한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덴모주였다. "잘 잤나요?" 로일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라틸다는 하품을 길게 하며 미소로 대답했다. 카모르트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가을 밀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고, 밭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풍차가 돌고 있었다. 풍차 근처에도 산발적으로 집들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은 완만하고 넓은 구릉지에 살았고 가장 높은 곳에 붉은 장미 백작의 성이 있었다. 현재 탑을 올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아직 미완성인 탑 꼭대 기에도 장미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성이었으나, 라틸다는 요즘 들어서 그곳이 자신의 안식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이 힘겹게 마차를 끌어올려 언덕에 이르자, 바로 마을 가운데로 진입했다. 사람들은 라틸다의 귀환을 자잘하게나마 환영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라틸다는 그들을 향해 손 조차 내밀어주지 않았다. 로일은 그들과 라틸다의 모습을 대조해보고 괜히 참견해보았다 "다들 좋아하는군요." "저게 좋아하는 걸로 보이세요? 제 눈에는 만들어진 웃음 같은걸요." 로일은 손수건을 흔드는 할머니를 보고 조금도 억지 웃음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지 할머니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쥐어 마차 쪽으로 내미는 게 조금 신경이 쓰였다. 목걸이의 문양이 이상했는데, 그것과 같은 문양의 상징물이 어떤 건물의 지붕 위에 걸려 있었다. 가넬로크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회관 지붕에 그것과 비슷한 상징물이 세워져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아란티아와 이로피스에서도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다른 모양의 상징물을 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식이었다. 굳게 닫힌 성의 철문이 열렸다. 잘 훈련된 군인들이 줄을 맞추어 기사단과 라틸다의 마차를 호위했다. 성 안쪽에는 십 여명의 시녀와 시종들이 나와서 라틸다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모두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한 눈을 하고 있던 그녀 였지만, 지금은 도도하게 허리를 곧게 펴고 그 들 앞을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아버님은?" 형식적으로 끝는 그녀의 말에 나이 많은 집사가 대꾸했다. "먼저 도착해 계십니다. 그리고 아가씨를 뵈러 온 손님이 세 분 있습니다. " 로일과 안나가 같이 내렸다. 안나는 잠깐 현기증이 나는지 로일의 어깨에 손을 짚었고, 로일은 부드럼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안나는 거부감 없이 잠시 로일에게 기대었다가 현기증이 가시자 다시 제 힘으로 섰다. 라틸다는 잠깐 그 쪽을 곁눈질했다가 집사에게 물었다. "손님이요?" "예. 이미 한 달쯤 전부터 아가씨를 뵙고자 청했었죠. 이 시기에 온다고 약속을 했는데‥‥‥ 라틸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사람들! 잊고 있었어요. 아버님께선 그 분들에 대해 아무 말씀 없으셨나요?" "없었습니다 " "다 큰 딸이니 알아서 하란 말쓸이시겠죠. 응접실로 들이세요 지금 만나겠어요." "지금 말입니까? 피곤하실 델데, 쉬시고 내일‥‥‥‥ ""그 정도로 공 들일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럼 누굴 먼저?" "셋 다. " 집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라틸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농담이에요. 먼지 도착한 사람부터 들이세요. 그리고 이 쪽은 내 새로운 경호 기사에요. 다들 얼굴을 익히도록 하세요. 이름은 로일이에요. 성의 어디에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니, 그리 아세요.""예 분부하신 대로하겠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지하실은‥‥ ""아, 그렇지. 지하실. 알았어요." 그녀는 빠르게 대꾸하고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로일은 시종들에게 살짝 목례했고, 그들도 무표정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모두 백작의 기사들 만큼이나 딱딱한 표정이었다. "성이 뭔지 알 수 있겠소, 로일?" 결코 반기지 않는 표정의 나이 든 집사가 물었다. 눈매가 매서워 오래 처다보기가 힘들었다 "레너 입니다. " "레너? 로일 레너라‥‥‥ 카모르트 이름이 아니군. 이로피스?' "정확합니다. " "이로피스에서는 흔한 성이니까. 붉은 장미 백작의 성에 온 걸 환영하오. 아가색 말씀대로 성 안 어디에도 출입을 허용하겠으나, 백작님의 방파 지하실은 출입을 금하겠소. 내 이름은 옹프르드 베네, 베네라고 부르시오."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간 라틸다가 손짓했다 "뭘 해요? 들어오지 않고?" 베네는 그를 안으로 인도하듯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시오." 안나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남았다. 고생 많이 했다는 위로의 말이 오고 갔다. 라틸다는 간단히 식당이 어디고, 어디가 아버지의 방이며 시녀 들이 거주하는 곳이나 주방, 화장실, 서재 등의 자잘한 위치를 가르쳐준 후 마지막으로 쇠로 주조된 커다란 괴물의 얼굴이 문 고리 대신 달린 철문을 가리켰다."저기가 지하실에요. 저 곳만 안 들어가면 되고, 나머지는 상관 없어요." "뭐 하는 곳입니까?" "나도 몰라요. 관심도 없고요." 로일도 더 묻지 않았다. 그는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아까 말한 손님이란 건 누굴 말하는 겁니까?" "아, 또 깜빡 하고 있었네. 오늘 온 세 사람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오십 명은 될 거에요. 귀찮아라. 화장은 하고 만나줘야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는 거겠죠? 그들이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건 오직 내 외모뿐일 테니까 " "누군데요?" "나랑 결혼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 라틸다는 계단을 오르며 말을 삘리 했다. 로일은 왠지 그녀가 집에 도착하자 말이 많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내 방은 2층이에요. 전에는 2층이 성의 제일 높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성을 더 높이 올리고 있어서 그렇지 않게 되었죠." 계단에는 돌을 나르다 떨어뜨린 조각들이 떨어져 있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쿵쾅쿵쾅 두들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공사 중인가 보죠?" "3년째에요. 이 속도라면 10년쯤 후에나 개축을 완료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난 10년 동안 돌다듬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야하죠.그 전에 집을 뛰처나가던가, 아니면 내가 2층에서 뛰어내리던가, 둘 중 하나를 심각하게 고려할 때가 오고 말 거에요." 그녀는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방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방은 깨끗하고 은은한 꽃 향기가 가득했다."또 향수 뿌려놨네." 그녀는 투덜대며 불편한 겉옷을 휙 벗어 던졌다. 그녀는 옷장을 열어 몇 벌의 옷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기를 반복하더니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다. 로일이 멍청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로일은 좀 늦게 깨닫고 얼른 몸을 뒤로 돌렸다. "죄송합니 다. " 라틸다는 그냥 보고 있어도 상관없었다는 투로 말하되, 옷을 갈아입었다. "어렸을 때는 정말 남자애들처럼 입고 다녔죠. 아버지도 특별히 그걸로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열네 살이 되어서 파티장에 가기 위해 불편한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런 옷들이 기본이 되어 버렸죠. 그래도 집에서 만큼은 편한 옷이 좋아요. 나중에 안나에게 말해서 로일에게도 편한 옷을 드리죠. 이제 됐어요." 로일이 돌아서자, 그녀는 깨끗하지만 장식 하나 없는 하얀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거울 앞에 앉더니 화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다지 공을 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 꽤나 실망하겠죠? 제가 화려한 귀족의 딸처럼 하고 나와 자기들의 눈요기 감이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왠지 이렇게 해서 그들의 실망한 얼굴을 보면 통쾌하죠." "제가 보기에는 그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인데요. 그들도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돈을 보고 결혼을 하자고 하는 거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만나본 적도 없고, 한 마디 얘기도 해보지 않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죠?" " 어느 어느 파티장에서 라틸다를 보고 한 눈에 반했을지도 모르" "그럼 그건 더더욱 말도 안돼요. 및 십 년을 같이 부대끼며 살 사람을 고작 얼굴 하나로 선택한다고요? 난 동화 속의 주인공을 꿈꾸 지는 않아요. 곧 이 얼굴도 늙어지면 주름투성이에 보기 싫어지겠죠. 그럼 그 때는 그런 여자와 어떻게 살건대? 디에르 자작처럼 새 마누라 들이려고? 맙소사... 난 밤새도록 이야기 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대화를 재미있게 이끌어나가는 남자가 아니라면 남편으로 삼지 않을 거에요. 그런 남자가 없으면 결혼도 안 할 거고요." "이번에 오는 사람들은 라틸다가 초대한 게 아닌가요?" "맛아요. 하지만 내 이상을 강요하려고 부른 건 아니에요. 끈질 기게 편지를 보내고 시종을 통해 선물을 보내오니, 한 번 만나주지 않으면 아버님의 입장이 곤란해질까봐 오라고 한 거에요. 그 동안 보내온 선물도 돌려줘야죠. 생각해보니 거절하려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건 조금 미안하긴 하군요." "백작님은 그런 식으로 찾아온 손님에 대해 아무 말씀 안 하시나요? 전쟁 준비로 바쁘다고는 하나, 딸의 결혼 문제인데‥‥‥" 라틸다는 빗질을 잠깐 멈추고 거울에 비친 로일을 바라보았다. "성장한 딸의 결혼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가 아버지의 입장이에요. 이건 좀 우습지 않아요? 바로 그 결혼 문제로 전쟁을 시작해 놓고 정작 거기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게? 전 리제니의 희생에는 아버지도 한 몫 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 점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는 빗질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일, 말해줘요. 내가 그 때 노르만트에서 리제니를 떨쳐낸 게 잘못이었던 걸까요?" 로일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로서는 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누군가 의도한 사진이라면, 라틸다가 어떻게 행동하셨든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 "솔직하시군요." 라틸다는 슬픈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잠시 그 사람들을 만나고 올게요. 그 동안 성 구경이라도 하세요." 돌로 만들어진 성이 으레 그렇듯, 실내는 대단히 조용했다. 로일은 라틸다가 한 질문을 계속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갖다. 돌 두들기는 소리와 돌 가루 섞인 삭막한 공기, 그리고 주방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가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점심도 먹지 않아 몹시 배가 고팠다. 로비로 내려왔을 때 그는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오는 링케를 발견했다. 링케도 그를 보고 살짝 목례했다. "여행은 즐거우셨소""마차로 하는 여행은 즐겨 하지 않습니다. "로일은 링케가 지하실의 철문을 굳게 닫는 것을 눈 여겨 보았다. 시선을 눈치 챘으나 철문을 툭 두들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는 뭐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내 부하 하나가 당신을 괴롭힌 줄로 아오." 링케가 그 말을 하며 먼저 걸어가니 로일은 저절로 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괴롭힌 정도랄 수는 없었소.""그래도 대신 사과하리다. 쏜즈의 기사들은 모두 격렬한 전장에서 베고 죽이며 자신의 입지를 굳힌 자들이오. 해서 조금이라도 강한 자가 옆에 있으면 겨뤄보고 싶거나 우위에 서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머리로 생각하고 하는 것들이 아니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오." 그런 말을 하면서도 링케는 말하기 위한 움직임 외에는 어떤 얼굴 근육도 움직이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들을 도발하는 어떤 행동이라도 했습니까, 제가?"그렇지 않아도 로일은 그게 궁금했다. "노르만트에서 라틸다 아가씨를 공격했을 때." "그거라면‥‥‥‥ 한 번 뿐이었소." "그래서 더욱 강렬했던 거요. 마차를 부수며 터져 나오는 그 검의 궤적을 본 건 나 하나만이 아니었거든." 링케는 주방을 지나 좁은 복도를 통해 뒷문을 향했다."단지 검의 움직임 만으로 놀랍다고 생각한 사람은 당신을 포함해 세 사람 밖에 없었소. 그러니 솔직한 심정으로 나도 당신과 겨루고 싶소. 백작께서 당신을 쏜즈의 기사로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나도 참지 않았을거요." 로일은 링케가 자신의 검술을 높이 평가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는 라틸다의 경호원으로서 아주 작게 남고 싶었다. "세 사람이라 했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굽니까?" "한 명은 라틸다 아가씨와 같이 있을 때 언급했었소. 게랄드 하란. 내 과거 용병 시절 동료였었소." 로일은 그 이름에 반응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다. "하얀 늑대들 증 한 명이라 그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소." 됫문을 열자, 커다란 공터가 있었고, 거기에는 웃옷을 벗어 젖히고 탄탄한 근육을 드러낸 덩치들이 수십 명 모여 노란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검술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 중 몇 명은 안면이 있었는데, 크라브지크도 있었다. "녀석이 불의 용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세를 떨칠 때 나는 얼음의 악마라는 별명으로 나름대로 유명했소. 용병들이 지은 별명이라 유치하긴 했어도 그 때는 그런 게 내 프라이드였소. 녀석은 검이든 창이든 일단 집으면 금방 능숙해졌소.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악마였지. 내가 그 녀석의 별명을 지으라면 불의 악마라고 지었을거요. 내가 보기에 무거운 무기, 특히 도끼를 쓸 때 그의 장기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제안했더니 엉뚱하게 내 실력을 압도적으로 상회해버렸지. 난 당장 내 별명을 내던져 버렸소. 그 때 그런 조언을 했던 게 얼마나 후회스러웠던지 ‥‥ 나와 함께 활동했을 때의 실력보다 발전했다면, 지금쯤 하얀 늑대들 사이에서 꽤나 높은 위치에 있을 거요, 장담컨대." "그리 대단한 자입니까?" "대단하다마다, 도끼를 휘두르는 힘이 말도 못하게 묵직해서 한번 막을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것 같았소." 게랄드의 이야기를 하는 링케는, 그래도 사람 같아 보였다. 그는 훈련장 주위에 쳐진 울타리에 팔을 기대었다. 훈련 증이던 남자들하고 목례를 했고, 링케는 손으로 가볍게 답례했다. 훈련은 조용하면서도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교단 위에 있는 몇몇 남자들이 가끔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다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한두 번 들렸다."나머지 한 명은 누구요?"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로일은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괜히 물었다. "죽였소." 로일은 순간적으로 죽었소라고 했는지, 죽였소라고 했는지 언뜻 구별이 가지 않아 되물었다."죽였다고 했소?""날 이겼거든. 그래서 죽였소." 로일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물었다."혹시 게랄드 하란이란 사람에게도 패했었소?" "여러 번." 링케는 짧게 대답했다. 로일은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더 이상 시도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기사단의 훈련을 바라보았다. 이 곳의 훈련 방식은 지금까지 접해본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울프의 기사들은 다 같이 모여도 개별 훈련에 가깝게 자신의 검술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래서 열이 모이면 열 모두 검술이 달랐다. 그러나 이 곳은 열 명 중 여덞은 같은 검술을 쓰고 같은 동작을 썼다. 하지만 그 수준이 꽤 높아 저 정도 인원이 동시에 같은 동작으로 공격해 들어가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굉장한 힘을 발휘할 것 같았다. 로일은 홀린 듯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훈련장 곳곳에 쏜즈의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조금후에 한 자리에 모이더니 곧 다같이 링케와 로일 주위로 다가왔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허름한 바지에 다른 훈련병들처럼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고, 모두 같은 은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억지로 키운 게 아니라 순수하게 검을 휘두르기 위한 근육이 매끈하게 단련된 남자들이었다. 그런 근육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쉐이든과 게랄드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로일은, 로즈 기사단의 정예라는 그들의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보고 싶었다. "안녕하시오." 로일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다들 고개만 까딱여 인사했다. "이 쪽부터, 데미로프, 크라브지크, 네프, 타르콘트, 알랭." 링케는 이름만 소개했고, 데미로프라는 남자에게 훈련 방식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누구누구의 검이 지나치게 산만하다, 어떤 녀석은 다리의 힘이 부족하다, 누구는 어디를 다쳤느냐‥‥‥ 그러나 나머지 네 명은 모두 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로일과 얘기하려고 여기에 온 것 같았다. 물른 이 대화가 끝날 무렵 로일은 크라브지크 외에는 이름을 모조리 까먹었다. "훈련에 한 번 끼어보겠소?"크라브지크가 엄지 손가락으로 훈련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라이온 기사단 삼백은 족히 상대할 수준으로 선발된 아흔 명이지만, 언제나 같은 검술만 지켜봐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녀석이 가끔 있거든. 그럴 때면 체계가 완전히 다른 검술을 보여줘야 틀에서 벗어날 수 있소. 당신이라면 그런 신선함을 부여할 수 있을 게요." 로일은 얼른 손을 저었다. "외부인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게 기사단 훈련 아니오?" "우린 그런 거 잘 따지지 않소." 네프라는 이름의 기사가, 들고 있는 목검으로 목을 두들기며 끼어들었다. 그의 눈빛도 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다른 이들도 로일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을 온 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바딩이라는 기사가 파티장에서 자신을 테스트 했을때나 라틸다를 무릎에 재우고 있는데 크라브지크가 등 뒤로 접근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로일을 억제시키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을 물러선 후 왼손을 늘어뜨렸다.특별히 검을 뽑으려는 자세는 아니었으나, 다섯 명의 눈빛이 일순 달라졌다. 거리상으로늘 한 걸음 물러선 것뿐이었지만, 묘하게 긴 거 리가 늘어난 듯 했다. 순간 거기 있는 전원이 그가 물러선 한 걸음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타리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 떨어져서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링케까지 반사적으로 일어나자, 서로 간에 놓인 긴장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로일은 실력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잠깐 잊어버린 것에 당황했으나, 이미 늦었다. 긴장을 늦추면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다섯 명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또 미묘하게 공격 거리밖으로 벗어나 있는 링케가 마음에 걸렸다. 쏜즈의 다섯 명도 로일의 보이지 않는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험 삼아 로일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섰는데, 오히려 그들 다섯 명이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피하지 않았다. "검은 어디서 배웠소?" 네프가 물었고, 로일이 시간차 없이 대답했다. "아버지에게 ." "기사였소?" 다른 이가 물었다 "이로피스의 기사였소." "이름은?" "알려주고 싶지 않소." "지금 그 자세는 우릴 도발하는 거요?" 사실 로일은 전혀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냥 서 있는 것이고, 어지간한 수준의 검사가 보기에는 조금 어정쩡한 직립 자세일 뿐, 어딜 봐도 검을 뽑기 직전의 자세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쏜즈의 기사들은 정확히 로일의 자세가 의미하는 바를 꿰뚫고 있었다. 로일은 무엇보다 그 사실 놀랐으나, 일부러 모른 척 했다 "당신들이 먼저 도발했소." "그럼 그건 시합을 받아들이는 행위로 봐도 좋다는 거요?" 로일은 그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원래 그는 누군가 시합을 걸어 오면 앞뒤를 젤 줄 몰랐다. 싸우면 안 된다고 이성이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으나, 본능은 벌써 범위 안의 쏜즈를 단 칼에 베는 각도를 계산하고 있었다 "뭣들 하는 짓이죠?"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다섯 명의 쏜즈는 준비하고 있던 공격 자세를 한 번에 지워버렀다. 모두의 사이에 놓여져 있던 팽팽한 긴장이 순식간에 깨졌다. 라틸다였다. 그녀는 로일의 옆에 서서 무서운 눈으로 모두를 노려보았다. "링케? 로일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나요?" "잠시 인사를 나눴습니다. " 링케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게는 그리 보이지 않더군요." "아니, 진짜로 인사만 나눴습니다 " 로일이 대신 변명을 했다.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 었으나, 사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좋아요. 전 로일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들 물러가세요." 쓴즈의 기사들은 예를 갖춰 인사하고 돌아섰다. 내내 대치 상태에 있느라 모르고 있다가,문득 로일은 링케의 목에 걸려있는 은빛의 목걸이가, 성에 들어을 때 본 할머니가 내밀었던 목걸이와 같은 모양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둥근 구슬에 뒤집힌 십자가가 박혀 있는 모양이었는데, 다른 쏜즈의 기사들도 모두 같은 것을 차고 있었다."링케와 아버지는 단순히 돈으로 계약된 사이가 아니에요." 로일은 계속 그것을 눈으로 쫓다가 라틸다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예, 제가 보기에도 더 긴밀한 관계 같더군요.""나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전쟁을 시작할 때쯤 어느 순간엔가 링케는 당연한듯이 옆에 있었고,그를 중심으로 쏜즈라는 그룹이 형성 되었어요. 전에 스쳐가는 말로 링케에게 왜 아버지께 그렇게 충성을 다하냐고 물었더니,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에, 라고 대꾸하더군요. 아마 죽을 고비를 아버지 덕에 넘겼거나, 갈 곳 없는 자신을 거둬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모든 쏜즈의 기사들도 링케만큼이나 아버지께 충성을 다하더라고요.""모두 똑같은 목걸이를 하고 있던데, 그것도 그 충성과 상관 있는 겁니까?" "무슨 목걸이요?" "은으로 만든 것 같은.." 로일이 설명하기 힘들어 하며 손짓으로 십자가 모양을 허공에 그리니 라틸다는 금방 알아들었다. "이 지역에 있는 신흥 종교에요. 전쟁이 터지거나 흉년이 들면 그런 종교야 열 다섯 개도 더 생겼다가 사라지곤 하죠. 그 이상은 몰라요. 쏜즈는 물를이고 아버지도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지만 저에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죠." 대화가 우울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 로일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만났던 남자들은 어땠습니까?" "예상대로의 남자였고, 예상대로의 대화에, 예상대로의 이별이었죠. 로일이라도 같이 있었더라면 덜 지루했을텐데." "제가 있었으면 아마 그 쪽 남자들이 불편했을겁니다. 웬 이상한 남자냐 하고요." "엄청난 경쟁자가 옆에 붙어 있다고 생각했겠죠." 라틸다는 유쾌하게 웃으며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 이름도 잊어버렸네. 보낼 때 '안녕히 가세요, 자작님.' 이라고 밖에 못했어요. 나중에 만나면 뭐라고 인사 해야하나?" "라틸다가 말한 그 이상형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상형 이었더라도 이번에 만났다면 거절했을걸요. 남자 만나 희희낙락거릴 상황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뭔가를 기대하는 얼굴로 앉아있는 남자를 냉정히 보내려니 괜스레 미안해지더군요. 그렇게 처음 두 명을 보내고 나니, 여기까지 찾아온 예의를 봐서라도 진지하게 대해주자라는 생각에 세 번째 남자와는 조금 긴 대화를 나누었죠. 그게 실수였지만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로일은 이야기 하며 다시 훈련을 시작하는 쏜즈의 기사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들은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로만 검을 휘두르거나, 다른 로즈의 기사들을 지도하기만 했다. 링케는 아예 앉아서 구경만 했다. 로일을 의식했는지, 그들은 결코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로일도 잠시 그 쪽에 대한 신경을 끄고, 라틸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상한 질문을 한 제 잘못일지도 몰라요. 책을 읽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영지를 관할하느라 바빠 그럴 시간이 없다고 그러고, 와인을 좋아한다기에 무슨 와인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카모르트에시 두 번째로 질 낮은 와인을 최고의 맛이라고 잘난 척 하질 않나‥‥‥‥ 와인에 대해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말하면 되지 않나요? 왜 그런 걸로 잘난 척 하려고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거기에서 말문이 막힌 나머지, 무엇을 위한 삶이 여자에게 가장 행복한 삶이냐고 무심코 물었죠. 원래 안나 외에는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는데, 하도 할 이야기가 없었던 나머지, 도가 지나친 진지함을 그에게 강요해 버렸던 거에요." "그 남자가 뭐라고 대답했을 지 무척 궁금하군요." "안정된 집과 편안한 가정, 든든한 남편과 부유한 삶. 그것이 여자가 원하는 모든 것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리고 자기는 그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하대요." "라틸다가 어떻게 반응했을 지 추측이 가는군요." 로일의 말에 라틸다는 유쾌하게 웃었다. 뭔가 잘못한 것 같아 찝찝했는데, 로일은 그 찝찝함을 그 한 마디로 날려주고 있었다. "맞아요. 작별 인사하고 보내버렸어요." "가란다고 순순히 가던가요?" "아, 참. 내가 말 안 했죠? 집사인 베네도 젊었을 때 꽤 이름을 날리던 검사였어요. 지금도 어설픈 검사들은 베네의 옷깃도 못 스칠걸요. 베네가 눈길 한 번만 주면 어지간한 남자들은 꼬리를 감춰요." "흐음, 아까 봤을 때 보통 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 "제가 작별인사를 했더니 안 가려고 버티는 그 사람을 로일도 봤어야했는데 ‥‥ 베네는 그를 조용히 끌어다가 이런 말을 했을거에요.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화 내는 젊은 귀족을 상대로 하는 베네의 말은 뻔해요. 당신은 아직 붉은 장미 백작의 영지 안에 있소.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겁니다. " 라틸다는 아예 베네의 말투까지 흉내 내고 있었다. 로일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뭡니까?" "답 같은 거 없어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여자의 행복은 어디 에 있으며, 남자의 명예는 어느 때 가장 고귀한가‥‥‥ 비슷한 질문이지만, 누구도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어요. 그저 제가 귀찮은 남자 쫓아 보낼 때 쓰는 질문이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울타리 근처에서 훈련하던 남자가 넘어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라틸다는 얼굴 앞으로 손을 휘휘 저어 먼지를 몰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아버지 밑에 있는 자식으로서 내 자신의 행복찾기 같은 건 의미 없어요.그렇다고 뭘 해야할 지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마냥 고민만 반복하고,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죠. 인생에 해답 같은 건 없어요." 그 말을 하는 라틸다는 굉장히 슬퍼 보였다. 그러나 로일은 아무런 위로도 할수 없었다. 지금까지 도망치는 삶만 살아왔으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논할 자격이 있을까? 로일은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며 씁쓸함만 맛 보고 있었다. 둘은 그저 조용히 서서 침묵만 이어갔다. 로일은 복수를 위해 처음 살인을 하고,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살기 위해 상대를 베기만 했던 과거를 돌아보다가 문득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우울하지만 붉은 저녁 해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이만큼 붉은 빛이 어울리는 여자도 없을 거라고, 로일은 생각했다. 그리고 아즈윈이 자신을 상대로 했던 몇 가지 행동들을 토대로 생각해 보건대, 그녀는 로일에게 뭔가를 바라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다. 그저 같이 있고 싶고, 지금 이 순간 바라보는 풍경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옆에 있다는 걸 이해했다. 그러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로일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여자들을 떠올렸다. 사실 일생을 통틀어 일 년 이상 지내본 여자조차 거의 없었다. 젊은 시절 스쳐 지나간 여자들은 있었어도 그의 옆에 머물러 주는 여자도 없었고, 하다못해 같이 식사를 해본 여자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 했다. 그것도 아즈윈과 아란티아의 여왕, 그리고 안면을 트고 지내는 여왕의 시녀들 정도? 그 대신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로일은 다른 여자의 행복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까 물었던 질문 말인데요, 이런 게 답이 될까 모르겠습니다. " 질문이요?" "여자의 인생에 있어서 행복이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라틸다는 빙그레 웃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에요?그냥 해 본 말이라니까." "그래도 말하게 해주십시오." "좋아요." "저는 몇 명의 여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한 명은 친구고, 한명은‥‥‥나이가 더 많은 친구죠. 제가 보기에는 둘 다 행복한 것 같 아요. 그게 여자로서 행복한 건지 인간으로서 행복한 건지 잘 모르 지만 " 라틸다는 특별히 로일과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로일이 자신을 위해 어떻게든 노력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고마웠다. 굳이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 했지만 로일의 생각은 과연 어떤가 궁금하여 듣기만 했다. "둘 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마음이 없냐고 바보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행복하지만, 남들은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은 둘을 불쌍하다고 했거든요. 그 질문에 여자 친구는, 지금 결혼을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할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은, 처음부터 자신의 위치에 있게 되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기에 결혼과 상관 없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아는 몇 명의 여자들은 다 결혼했어요. 그리고 다 행복했고, 자신있게 자기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했죠. 그리고‥‥ 남자들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로일은 한참 말하다 보니 핵심을 벗어난 것 같아 머리를 긁적였다. 뭘 말하고 싶어 얘기를 시작한 건지 잊어버렸다가 겨우 떠올려 그는 다시 말했다. "아, 그러니까 제가 말한 그 여자들 모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선택했고, 지금도 그 선택이 자기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어요. 그게 공통점이 었어요." 로일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가 말했을 때는 정말 멋있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제가 얘기하니까 이상하군요." 괜히 이야기 했나 보다 하며 라틸다를 바라보니 그녀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있었다. 그녀는 로일의 말을 질문에 대한 해답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훈련을 끝내고 잠시 쉬던 기사들이 이 쪽을 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였어요. 이건 안나와 이야기 해봐야겠네요. 그 애도 나와 같이 이 질문을 가지고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했군요. 왜 안나가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그녀는 얼른 치마를 불잡고 본관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 때 훈련장으로 통하는 큰 문이 열리며 창이나 칼, 방패를 든 병사들이 들어왔다. 줄을 맞춘 군대의 발소리가 성 벽에 찌렁찌렁 하게 울렸다. 백 여명즘 되는 병사들이 자리에 섰고, 그 지휘관이 링케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멀었지만, 지휘관의 목소리가 워낙 커 로일과 라틸다에게도 들렸다. "군대가 모두 집결했습니다 "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링케가 일어나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고, 거기에 대답하는 지휘관의 목소리만 들렸다. "예, 총 군대는 던마치 언덕에 집결해 있고, 로즈 기사단은 알토 , 증무장 보병은 마을에 대기 중입니다. 명령하신 대로 제가 임의 백 명의 정예 군을 뽑아 왔습니다. " 링케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길게 설명했고 이어 지휘관의 힘찬 대답 소리로 대화가 끝났다 "군대‥‥‥‥ 라틸다는 오래 기다려온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안나와 공유하겠다는 생각도 벌써 잊어버렸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후 12쏜즈를 자기쪽으로 불러모으는 링케를 바라보며, 라틸다는 화를 참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군대가 집결했어요." "백작께서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했으니 군대를 모으는 건 당연하겠죠." "그렇지 않아요!" 라틸다는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발소리를 거칠게 내며 걸었다."아버지께서 덴모주에 돌아오신지 반나절도 안 됐어요. 나는 아버지의 군대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모르지만, 모든 군대가 덴모주에 모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흘 이상은 걸린다는 걸 알고 있어요. 반나절 만에 저 만한 슷자의, 그것도 보병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가 없어요." 로일도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았다. "노르만트로 출발하기 전에 소집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맞출 수 없는 시간이라고요. 아버지는 뤼미에르 백작에게 전쟁을 선포하기 훨씬 전에 이미 전쟁 준비를 끝냈던 거에요!" 링케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뭔가 말하며 성으로 들어가는 라틸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으로 들어 가기 직전 로일은 뒤를 한 번 돌아봤는데, 정확히 링케와 눈이 마추쳤다. 그러나 로일은 금방 라틸다를 따라 성 안으로 사라졌다. "라틸다 아가씨께서 어디서 주워오신 녀석인지 모르나, 결코 평범한 녀석이 아닙니다. " 쏜즈의 기사 네프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링케의 주위에 몰려든 쏜즈의 기사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솔직히 저자가 여기 있다는 게 수상할 정도입니다. 뭔가 노리는 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 알랭이 말했고, 크라브지크가 받았다. "결코 보는 것만큼 어수룩한 자가 아닌 건 확실합니다. 아까도 우리와 대치 상태로 섰을 때 캡틴도 느꼈을 겁니다. 녀석은 우리 전체를 공격 대상으로 보고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링케는 감정 없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 순간 너희 전부를 잃고, 내가 백업으로 공격해야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단한자야. 이대로두고 보기만 해야한다 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결코 그 뜻에 반대하는 건 아니나, 백작께서는 정말 저 자를 쏜즈로 임명하실 생각입니까?' "더 지켜볼 일이나, 그러고 싶어하시는 것 같더군. 용병 출신인 둘란이나 루치 뱅상 같은 놈을, 딱 한 번 성과를 올렸다는 이유로 부관에 임명 시켜줄 정도로 파격적인 조치를 좋아하시는 분이다. 그 일 한 번으로 쏜즈의 기사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리고 너희들은 어찌 생각할 지 모르나, 나는 환영이다. 하지만 본인이 싫다고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저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습니다. 반드시 겨뤄볼 수만 있다면‥‥ "진정해라, 크라브지크. 시간은 많다. 나머지도 명심해서 들어라. 우선 눈 앞의 전투에 전념하도록. 어쩌면 우리의 상대는 하얀 늑대들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드뤼포처럼 팔을 다치거나 하면 안 되지 않나?" 하얀 늑대라는 말에 쏜즈의 기사들은 일제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얀 늑대들의 전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프가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 중에 그들과 일 대 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이는 없을 정도다. 너희들의 자부심은 알고 있지만, 그들의 힘은 생각하고 있는 한 최대치로 상정해 두는 게 좋다 " "그럼 캡틴은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얀 늑대 중 한 명이 옛날 전우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 한 명이 농담조로 물었다. 링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고,쏜즈의 기사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떠돌았다. 필요 이상으로 침묵을 길게 유지한 후에야 그는 대답했다. "알고들 있겠지만, 붉은 장미 백작을 뵙기 전에 난 다시는 검을 쥘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었다. 그러나 백작을 만난 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검술을 갖게 되었다. 게랄드 이야기를 했느냐? 만약 게랄드가 퀘이언을 스승으로 두었다고 해도, 게으름을 피웠다면 나를 꺾지 못할 것이다. 제너럴 세이게이 두나단은 아직 쟝 세이게이 장군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한 때 왕실 기사단장이었으나 그가 기사가 되었을 때 세이게이는 진작 은퇴했고 그 뒤 기사단장은 두 번이나 바뀌었다. 론타몬 정복 전쟁이 끝난 후에도 왕실 기사단의 참모로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도 손을 뗐다. 두나단은 다 늙은 장수를 이런 중요한 시기에 부른다는 게 못마땅했으나, 대신할 만한 장수도 없었다. 두나단은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왕실의 기사, 데이릭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다못해 이 로피스로 떠난 후 돌아오고 있지 않은 마지막 왕실 기사단장 프란 시스라도. 세이게이는 노르만트 외곽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크기는 컸지만 워낙 후미진 곳의 허름한 건물이라, 한 나라를 호령했던 장군의 화려한 은적 생활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몰락한 기사가 은둔해서 지내는 초라한 거처라고 생각되었다. 문지기나 시종도 없었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보았다. 혹시 집이 비어있을 때 찾아가게 될까봐 미리 서신까지 보내두었는데, 마중 나온 사람 하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나단은 말에서 내려 문을 열었다. 녹슨 문이었으나 경첩에는 기름칠이 잘 되어 있었다. 밝은 건물임에도 잡초가 나 있거나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최근까지도 잘 관리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계십니까? 세이게이 장군, 왕실에서 왔습니다 " 두나단은 괜히 음산한 기분이 들어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누구요?" 저택의 문이 열리며 땀에 젖은 젊은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왕실에서 왔소. 장군께서는 계시오? 미리 편지를 드리고 왔소 "편지는 잘 모르겠고, 왕실에서 왔다면 따라오시오." 두 남자 중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내가 무슨 소리 들렸다고 했잖아.' 라며 다른 한 남자를 툭 쳤다. 웃옷을 벗어 젖힌 그들의 몸은 근육으로 잘 단련되어 있었다. 기사를 그만 둔 후에도 운동과 간단한 검술 훈련은 쉬지 않았으나, 그들의 몸을 보니 괜스레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가구 하나 없이 말끔한 저택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 옆에 있는 문을 열었다. 서른 명쯤 앉을 수 있는 긴 식탁 끝에 한 노인이 쓸쓸히 앉아 차와 과자를즐기고 있었다. 하얀 머리에 멎지게 기른 흰 수염이 살짝 늘어져 있는 모습이 차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와 어울렸다. "쟝 세이게이 장군이십니까?" 노인은 다른 두 사람에게 손짓해서 가라고 하더니 두나단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상대해야 할 적은 둘인가?" "예?" 의자에 앉기도 전에 나온 질문에 두나단은 당황했다. 노인은 두나단이 진작에 올줄 알고 있었는지 대뜸준비된 찾잔을 하나 내밀더니 차를 따라주었다. "가넬로크에서 수입한 찻잎인데, 오래 돼서 맛은 없네." "아, 예." 두나단은 반사적으로 대답하고 겨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상대는?" 느긋하게 은퇴한 후의 근황을 묻고, 최근 왕실에서 벌어진 일들을 차례대로 설명하려 했으나 이미 때를 놓처버렸다.늙은 장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고, 너무도 쉽게 자기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입니다. " "뤼미에르 백작과 쟌스테인 백작이군, 대대로 가난해서 백작이라는 가문을 팔아먹기 직전이었던 쟌스테인 백작이 도대체 어떻게 뤼미에르 백작과 맞설 만한 군대를 모을 수 있었나?" "어디서 해적의 보물이라도 얻었나보죠." 두나단의 농담에도 노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두나단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고쳤다."그가 근거지로 삼는 덴모주에서의 수익이 상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그런 엄청난 부를 축적할 정도는 아니지만." "양쪽 병력은?" 두나단이 자기의 페이스로 대화를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결국 또 장군의 페이스대로 질문이 이어졌다. 두나단은 따로 자료를 준비해 온 게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더듬더듬 말해주었다. 보병이 몇 명인지, 창병이 몇 명인지, 기사가 몇 명인지. "그 정도 병력을 가지고 있는 적이 상대라면 내가 할 일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겠군 " "그렇습니다, 세이게이 장군. 두 백작은 최근 서로에게 전면전을 선언했고, 여차하면 노르만트라도 예외로 두지 않겠다 했습니다. 지금 힘으로 진압이 어렵다면, 일단 수도 방위를 우선시 해야합니다. 당장 쳐들어오겠다고 한 것은 아니나‥‥‥‥ "까다로운 일이군. 해서 내가 갖게 될 병력은?" 이미 그는 자신이 군대를 지휘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두나단도 차라리 얘기가 빨리 진행되는 것에 동의하고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에노아 후작 등 몇 명의 귀족들이 지원해주는 군대와 왕실의 군대를 합하면 천 오백 정도 됩니다 " "양쪽 귀족은 일 만이 넘는 군대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가질 군대는 천 오백이라, 그거 아주 흥미로운 수치로군." "거기에 하안 늑대들이 추가됩니다. ""하얀 늑대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 말인가?" "예, 국왕 폐하의 초청으로 현제 여기 와있습니다. 캡틴 카셀이라는 사람이 두 백작과의 싸움을 위해 왕의 군대가 필요하다 주장했습니다. 사실 폐하께서 장군을 추천하신 것도 결국 그 분의 의견 때문이었습니다. " 두나단은 그에게 대단한 병력을 넘겨준다는 의미로 말했다. 세이게이 장군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는 말도 하지 않고 식당을 나가버러니, 이제야 차를 한 모금 하려고 했던 두나단은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주장했는지 모르나, 좋은 의도 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이름이 뭔가, 자네는?" "게네 두나단. 왕실의 대신입니다. " "두나단.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 어째서 하얀 늑대들이 그 병력의 한 축을 차지하는가?그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설마 하니 자네 정도 되는 나이의 청년이 동화속에나 나올 만한 하얀 늑대들의 전설을 믿는 건 아닐 테고! 다섯 명 밖에 안 되는 마스터 퀘이언의 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얼마나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가? 설마 내가 그들의 명령이라도 들어야 하나?""그런 건 아닙니다. 장군. 단지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얻게 되는 전략적 효용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군의 커다란 사기를 가져와 줌과 동시에 적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장군께서 말씀하신 전설 속의 힘은 실제적으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 "터무니 없는 소리 !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병사들의 숫자와 전투에서 직접 몸으로 뛸 수 있는 힘이야." 장군은 뒤뜰로 통하는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무 벽을 타고 쿵쿵 울렸다."두나단, 잘 듣게. 나는 퀘이언이라는 자를 아네. 그러나 그는 평범한 기사보다 칼을 조금 더 잘 쓰는 훌륭한 기사일 뿐이야. 아마 하얀 늑대들도 같겠지. 그러나 내겐 그런 기사가 다섯 명이 아니라 오십 명이 있다네," 장군은 됫문을 열었다. 커다란 공터에 검을 연마하는 남자들이 잔뜩 있었다. 두나단은 지금까지 이 곳을 은퇴한 장수가 무료하게 지내는 저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국왕이 캡틴 카셀의 말을 듣더니, 한 차례 고민도 않고 세이게이 장군을 지목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을 불러 줄 것을 확신하고 "캡틴 쟈란!" 장군은 찌렁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훈련 중이던 남자 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부동 자세를 취했다.그 중 한 명이 "여기 있는 이들은 왕실 기사단이 무력화되었을 때부터 내가 따로 키워온 기사단일세, 그리고 이 쪽은 기사단의 캡틴인 트리제이 쟈란." 쟈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갑소." 두나단도 짧게 인사했다. 장군은 쟈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자신 있게 말했다. "하얀 늑대들이라고? 떠들기 좋아하는 유랑 시인들은 오십 명의 울프 기사단이 몇 백 명의 익셀런 기사단을 막았다고 하지. 그럼 조만간 여기 있는 나의 기사단 오십이 라이온 기사단과 로즈 기사단 수 백을 막는 장면을 보게 될 걸세. 그리고 캡틴 쟈란은 하얀 늑대 들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과장된 존재인지 보여줄 거야. 왕실에 그들이 있나?" 세이게이 장군은 두나단에게 한 마디 대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두나단은 마치 자신을 베기라도 할 듯 노려보는 쟈란의 눈빛에 질려 겨우 대답했다. "장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럼 가세. 날 이런 곳에 처박은 귀족들에게 아직 내가 살아있 다는 걸 보여주러." 왕의 성에서 숲을 하나 사이에 둔 지붕 없는 건물은 과거 왕실 기사단이 쓰던 훈련장이었다. 마상 전투를 익힐 수 있는 트랙과 삼십여 마리는 너끈히 키울 수 있는 마구간, 울타리를 쳐놓은 원형 경기장과 전술을 훈련할 수 있도록 바닥에 선을 그려놓은 돌 바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부서지고, 훈련 도구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 훈련장 특유의 열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 카셀은 쉐이든에게 조언을 구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장수와 기사들을 기다리며 카셀은 쉐이든과 아즈윈만 데려왔다. 혼자 가는 건 부담스럽고 전원이 가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아 쉐이든만 동반하려 했으나, 아즈윈이 기어이 따라오겠다고 했다. 최근 들어 그녀는 남아도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게랄드가 욕구불만이라고 놀리자, 당장 칼을 들고 한판 붙자고 할 정도였다.게랄드는 아예 그 말을 되돌려 받기 위해 그런 농담을 한 양 당장 도끼를 들었다. 나와 자식아, 오냐 기다렸다, 전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다. 까불지 마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말에 카셀은 화들짝 놀라 둘 사이를 뜯어놓았다. 호랑이 두 마리가 장난을 치면 구경하는 고양이는 그 모습이 싸 우는 건지 장난치는 건지 모르는 법이었다. 카셀은 거의 그런 심정으로 싸움을 말리긴 했으나, 쉐이든이 아무말도 안 하는 걸 보면 놔두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아즈윈의 불만은 점점 쌓여 갔다. 이런 자리에라도 끼게해주지 않으면 뛰쳐나가 성문이라도 부술 판이었다. 게랄드와 던멜은 따로 성을 돌아보겠다며 여기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던멜은 특히 이 곳의 구조를 알아둬야 한다고 강조했다.아즈윈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그 두 사람도 몸을 움직이고 싶어했다. 쉐이든은 아무 말 하지 않았으나, 속 마음은 또 어떨지 몰랐다. 카셀은 그들을 통제할 마음도 없고, 할 수도 없었으나 고삐를 조금 죄거나 풀거나 해야 했다. "엉망이야." 아즈윈이 대신 대답했다. 쉐이든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우선 수리를 좀 해야겠어. 하루면 될 거야. 하지만 훈련장이 이 정도로 허름해질 동안 관리가 안 되었다면 여기 병사들은 그만큼 긴 시간동안 훈련이 없었다는 거겠지. 당장이 문제야, 갑작스러운 훈련으로 그 공백을 채우는 건 무리야." 카셀도 녹슨 채 꽃혀 있는 칼, 먼지가 쌓인 목검, 날이 무뎌져 과일도 못 찍어먹을 창을 특툭 건드려보며 말했다. "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 병사의 칼과 농부의 곡괭이를 보면, 그 다음 결과를 알 수 있다‥‥‥‥ 내가 부서진 농기구 몇 개 교체 하자니까 원래 부지런한 농부의 삽은 조금 부서져 있다면서 한 말 이긴 하지만 " 카셀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아, 전부터 네 아버지 얘기를 자주 하는데 말이야, 어떤 분이야?" 아즈윈이 물었다 "농분데." 카셀은 숨길 것도 없이 짧게 털어놓았다. 전에는 이런 걸 숨기려 고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든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농부? 그럼 어떤 일을 했어?" "농부라니까 어떤 일을 하긴? 그야 밀 농사 지었지." "아니 내 말은‥‥‥ 농부가 되기 전에!" 아즈윈이 뭘 말하고 싶어하는 지 카셀은 알고 있었다.전부터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버지의 과거를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농부였다고 했어. 아버지 스스로 그했고, 마 을 사람들도 그했다더군. 뭐가 이상해?" 아즈윈은 조금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들이 이상하지 않다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아닌 것 같아서." 최근 들어 카셀도 점점 아버지의 과거가 수상적었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알 길이 없었다. 사실 아버지가 앞에 있어 멱살 잡고 물어본 데도 순순히, '내가 사실은 예전에 명문가의 사라진 외동 아들이었다. ' 라는 식으로 고백할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농부였다는 말을 믿는 것도 무리였다. 예전부터 조금은 의심했었지만,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보니 더욱 실감났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주위의 다른 농부들, 이를테면 쟈넷의 아버지라든가 촌장 같은 정말 평범한 농부들은 어디 촌구석 영주의 조카의 친구가 벌이는 생일 파티에 두 번쯤 초대된 꼬마만 지나가도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데, 아버지는 진짜 귀족이 말을 타고 지나가도 아는 체 안 하고 지나가버렸다. 하도 무시 하는 폼이 당당하니 그것을 본 귀족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또 보통 농부들은 그저 흙 파먹고 부지런히 살면 나머지는 신께서 정하는 대로 작물을 거둬들이리라 믿었지만, 아버지는 비가 얼마나 올지, 가뭄이 얼마나 오래 갈지 예측해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수확량이 안 좋으면, 그 때서야 하늘에 대고 손가락질 하며 소리 지른다. '이 정도로 노력했는데도 그러기요?' 정치에 관심 있는 농부는 본 적도 없었고 들은 적도 없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도 정치 얘기는 입 밖에 꺼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 숨겨놓은 얘기 보따리에서 왕실과 기사단의 비밀이 감질나게 새어 나오기도 했다. 지금 아는 카셀의 모든 정치적인 지식은 거기에서 나왔다고 봐도 좋았다. "내가 보기에 네 아버지는 그냥 농부가 아닌 것 같다." 기다리는 동안 카셀이 아버지 이야기를 하나씩 해주었고, 모두 들은 후 아즈윈이 단정을 내리듯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도 다 똑 같은 말을 하던걸. 아버지는 처음부터 농부였다고. 할아버지도 농부였고,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같은 땅의 같은 밀 농사를 지었다던 걸."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과거에는 뭔가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었을 거 같은데. 아니라면 오히려 이상하잖아." 둘이 괜히 심각해지자 쉐이든이 훈련장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약속했던 사람들이 오는군.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 이번에 올 장수인 것 같다. 아, 그리고, 카셀. 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그런 말재주는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닐거다. 일반적으로 언어란 건 그 사람의 부모에게서 나온 거야. 아버지가 그냥 농부셨다면 어머니는 어떨까 해서 " "어머니는 내가 두 살 때 병으로 들아가셨어. 젊었을 때부터 몸이 안 좋으셨대," "아, 미안." "괜찮아.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병사들을 이끌고 오는 두나단이 손짓하자, 카셀은 같이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그의 옆에는 벌써 전투라도 나갈듯이 무장하고 있는 장수와 기사들이 있었다.모두 카셀을 비롯한 두 사람을 적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고 있었다. 카셀은 작은 목소리로 쉐이든과 아즈윈에게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우리 집에 놀러 가자." "그거 좋군. 네 아버지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어‥‥"아즈원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즉시 그 미소를 지은 후 다가 오는 사람들을 무뚝뚝하게 바라보았다. 쉐이든도 이내 동료들과 카셀에게만 보이는 부드러운 표정을 던져버렸다. 그것은 이런 귀족들을 상대할 때 아주 효과적인 무기였다. 카셀도 금방 그것을 배워 딱딱하게 다가오는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상대에게는 이런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세상 모든 사람이 경외하는 기사 세 명이 팔장 끼고, 자기들이 다가오는 걸 노려본다는 게! 언뜻 봐도 그건 대성공이었다.두나단 마저 손을 흔들며 다가오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고, 나머지 병사들도 치켜 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은근 슬쩍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나이 많은 장수와 그 장수 옆에 있는 키 큰 기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두나단은 어색하게 웃으며 카셀과 악수하며 나이 많은 장수를 소개했다. "어제는 잘 쉬셨습니까? 이 분은 왕실 기사단을 이끌고 계시는 쟝 세이게이 장군입니다. 그리고 이 쪽은‥‥‥‥‥ "트리제이 쟈란이오. 세이게이 장군 수하 기사들의 캡틴으로 있소" 세이게이 장군보다 오히려 앞에 나서며 쟈란은 커다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단순히 예의 없는 젊은 캡틴의 인사가 아니었다. 그의 행동에 대해 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그것은 미리 약속된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셀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리 악수하고 싶지 않은 손이었지만, 놔두면 카셀이 고향에 돌아가서 밀 농사 지을 때까지 내밀고 있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잡아 주었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 카셀울‥‥‥‥"카셀은 끝까지 말도 마치지 못하고 쟈란이 후려친 손에 밀려 뒤로 휘청거렸다. 아프다기보다 너무 놀라, 그는 뺨을 움켜쥐었다. 쟈란은 자랑스럽게 치켜들었딘 손을 늘어뜨렸다. "아, 미안하오 설마 그 정도도 못 피할 줄 몰라서." 갑자기 뛰쳐나가려 한 건 아즈윈이었고, 쉐이든이 그녀를 말렸다.쟈란은 아즈윈도 힐끔 보고 감정 없이 웃어 보였다."하얀 늑대들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들었소. 그 전설 같은 이야기와 괴물에 비견되는 검술.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우리나라의 운명을 맡길 생각은 없소. 두나단 대신, 두 백작의 전쟁에 페하께서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신 것에 대해서는 크게 환영하며 이 후, 내 힘의 백 퍼센트를 쏟아붓겠소. 그러나 내 위에 세이게이 장군님이 아닌 다른 이가 서는 건 용납할 수 없소." 두나단은 카셀이 한 대 얻어맞았다는 것에 대해 더 놀라 쟈란의 말을 모두 알아듣지도 못했다. 세이게이 장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캡틴 쟈란과 같은 의견일세. 언제고 폐하께서 홀로 일어서 실 때를 대비해 힘을 비축해 두었고, 데이릭과 메오릭스가 떠난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많은 인재들을 선발했지. 이 앞에 있는 캡틴 쟈란도 마찬가지로 내가 키웠으며, 그는 이제 이 나라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검술을 익혔네.하얀 늑대들이 이 나라에 놀러 온 것은 내 상관할 바 아니나, 나는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도 명령을 받을 생각도 없네 " 두나단은 어쩔 줄 모르며, 뺨을 어루만지는 카셀과 느긋하게 허리에 손을 올린 쟈란을 번갈아 보았다. 카셀은 입 안의 찢어진 부분을 혀로 건드려보았다. 피가 조금 났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다. 더 큰 상처는 상대에게 얕잡아 보인 자신의 마음에 있었고, 그보다 더 큰 상처는 하얀 늑대들의 명예에 있었다. 카셀은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건달들에게 수도 없이 맞아 이력이 난 몸인 데다가, 지금쯤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에 끼어 있을 빌어먹을 망나니 놈인 루치 뱅상에게 항상무시 당해 왔으니, 지금 와서 깎일 자존심도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기사가 농부하나 두들겨 패 죽였다고 해도 뭐랄 사람 하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카셀이 과거에는 뭐였던 간에 현재에는 농부가 아니 란 것에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뒤에서 눈을 밝히고 쟈란을 노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앞으로 같이 힘을 합쳐야 할 장군이 벌써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고 나섰으며, 전투시 가장 선두에서 싸워줘야 할 기사단의 캡틴은 자신의 실력을 내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 녀석이었다. 카셀보다야 많은 나이지만, 카모르트의 왕실에서 워낙 나이 많은 귀족들만 상대하다 보니 서른 살 정도는 나이로도 보이지 않았다.또 검술은 어떨지 모르나, 그에게는 비슷한 나이에 있는 바딩이나 쉐이든에게 있는 카리스마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꼭두각시였다.진짜 상대는 세이게이였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모든 권력자는 더 많은 권력을 윈한다. 그리고 한 번 권력을 잃어본 권력자는 더욱 권력을 탐한다. 그걸 바탕으로 생각하면 세이게이의 행동을 금방 해석할 수 있었다. 두난단이 하얀 늑대들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나이 든 장수는 앞으로 있을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이 우위를 가지고 싶어 선제공격을 날린 것이다. 발언권과 지휘권, 그리고 군대를 소유함에 따른 권력 모두를 확보할 계산에서 ! 카셀은 세이게이의 앞에 선 쟈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입으로 쟈란을 자신이 '키워낸 기사' 라고 말했다. 카셀의 뺨을 친 건 쟈란 혼자 생각이 아닐 것이다. 세이게이 장군이 쟈란을 체스 말처럼 이용해 카셀의 앞에 던져 놓은 것이다. 자신은 안전하게 팔짱을 낀 채로. '아마도 속으로 체크메이트를 외치고 있겠지.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 카셀은 쟈란의 앞으로 다가가 거의 몸이 닿을 듯한 거리에 섰다. "한 대 더 쳐 보시오." 쟈란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뭐라 했소?""한 대 더 치라고." "못 할 것도 없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쟈란은 주먹으로 카셀을 후려쳤다. 카셀은 뒤로 몇 걸음 휘청거렸다가 기어이 주저않고 말았다. 쟈란은 팔장을 끼며 대꾸했다. "왜? 한 대 더 치라고 하면 내가 겁 먹을까 봐 그런거요, 아니면 보란 듯이 피할 생각이었소? 뭐,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실패한 것 같소만." 그의 말에 세이게이 장군을 제외한 병사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쉐이든과 아즈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않은 채로 카셀은 맞은 곳을 어루만지다가 일어났다. 그는 아프다는 걸 참거나 굳이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실제 고통 이상으로 인상을 구겼다. 입술이 터져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그는 말했다. "제너럴 세이게이 ." 카셀은 '아이구, 아파라.' 라고 일부로 큰 소리로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세이게이는 쟈란이 처음 한 대를 칠 때만 해도 카셀을 얕보던 표정이었는데, 이제 굳어 있었다. 카셀은 차라리 그가 자신의 속셈을 눈치 채 주길 바랐다. 그 정도도 눈치 못 채면 두 백작을 상대할 장수감도 못 된다. "당신은 솔직히 두 가지를 말하고 싶어 쟈란에게 날 공격하라고 했을거요. 하나는 이 후의 모든 지휘권을 당신이 가지며, 우리가 거기에 개입하지 않길 원한다는 것. 또 하나는 병사들이 하얀 늑대들의 힘에 의지하지 않길 원해서 환상을 깨고 싶었던 거요. 맞소? 아니, 이제 맞든지 틀리든지 상관 없지만." 카셀은 피 섞인 침을 밭아냈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요?'' 자신을 배제하고 말 하는 카셀을 보고, 쟈란은 기분이 상한 모양 이었다. 그러나 카셀은 여전히 쟈란을 제외했다."그런 뜻에서 당신은 두 가지 실수를 했소, 제너럴 세이게이. 이번 건 맞든 말든 상관 없지 만은 않을 겁니다. 하나는 애초에 난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려 했거나 지위를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 두나단이 뭐라 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작전 지휘를 맡아줄 장수를 원했지, 내가 부려먹을 장수를 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실수는, 뺨을 친 상대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었다는 겁니다. 당신이 굳이 나서서 깨줘야 할 환상 따위는 없었소." 카셀은 그제야 쟈란을 노려보았다. 이미 세이게이와는 할 말이 끝났으므로, 늙은 장수가 자신의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개의치 않았다 "캡틴 쟈란, 두 번째 치라고 한 건 첫 번째 것을 내가 못 피했던 게 일부러라고 변명할 생각으로 맞아준거였교‥‥‥" 카셀은 벌써 빨갛게 물든 뺨을 문지르며 또 한 번 피 섞인 침을 밭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쉐이든이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쟈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즈윈은 방패를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는데, 카셀은 특별히 그 모습을 눈 여겨 봐두었다. "세 번째 치라고 대지 않은 건, 그랬다간 내가 홧김에 당신을 죽여버럴 것 같아 그했소. 그렇다고 한 대만 맞고 끝내버리면 하얀 늑대들의 명성에 금이 갈 것이고, 한 대 더 맞아두면 내가 화 내는 것 에 어느 정도 명목이 서니까." 명목?" "쟈란, 당신도 기사라면 하얀 늑대들과 한 번쯤 겨루고 싶지 않나?" 쟈란은 순간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내 커다란 선물이라도 받은 어린 아이처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사실 그러길 기대했으니까." 카셀은 씨익 웃었다."그러기 위한 명목이오. 하지만 내가 나설 생각은 없소. 사실 나도 사람인지라 아까 두 대 맞은 게 상당히 화가 나니까 지금 내가 검을 잡으면 곤란할 것 같소. 나라의 손님으로 와서 누굴 죽일 수는 없으니까 처벌은 아직 화가 덜 난 내 친구에게 맡기고 싶군. " 카셀은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아즈윈!" 아즈윈은 진작 안 불러준 것에 화라도 난 듯 성큼성큼 다가와 카셀의 옆에 섰다. 카셀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후 굳은 얼굴을 한 세이게이 장군에게 말했다. "장군께서 직접 쟈란을 캡틴으로 키웠다고 했습니까?" 장군은 무슨 일이 벌어질건지 이미 예상하고 있으나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하고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쟈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손목을 풀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카셀?" 아즈윈은 조준을 끝낸 화살처럼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죽이지는 마. 하지만 하얀 늑대들이 어떤 존재인지 가르쳐줘." "전력 누수는 생각 안 해?" "안 해." 카셀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아즈윈은 끼고 있는 방패의 각도를 조종하며 쟈란의 앞에 섰다. 쟈란은 상대가 여자라는 것에 조금은 안심했다. 들기 조차 힘겨워 보이는 쉐이든의 철창을 상대하는 것 보다 두 뼘 길이 밖에 안 되는 아즈윈의 검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어이, 트리제이 " 아즈윈은 방패로.가슴 부위를 가리고 말했다."기사들의 멋진 대결을 상상하나? 포기해. 말은 저렇게 해도 캡틴은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다. 적당히 둘이 악수하며 끝낼 멋진 시합을 했다간 나중에 내가 혼날 거야,""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늑대 소녀?" 쟈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치욕적인 욕을 내던지며, 칼을 뽑았다. 그러나 아즈윈은 자기 할 말만 했다. "네 입에서 그만해 달라는 소리가 나오게 해주겠다. " 쟈란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칼을 가볍게 뻗었다. 아즈원도 방패를 슬쩍 내밀어 그의 칼에 부딪혔고, 둘은 그 소리를 기점으로 거리를 벌렸다. 구경하던 병사들과 두나단, 세이게이 장군 등도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쟈란은 발을 통통 굴리며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몸집에 걸맞지 않게 아주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칼을 내질렀다. 그 칼이 어찌나 빠른지 카셀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왜, 왜 싸움을 붙이신 겁니까?" 두나단이 카셀의 옆에 다가와 말했다. "기사들에게 있어 결투에 이유가 있습니까? 서로 원하는 싸움이니 내버려 두십시오." 그 말을 하며 카셀은 세이게이 장군을 바라보았다. 장군도 그를 노려보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의 눈빛을 읽었다. '후회하게 될 거다, 캡틴.' '후회하게 될 거요, 장군 ' 병사들 사이에서 커다란 환호가 들렸다. 쟈란의 일방적인 공격에 아즈윈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카셀은 아즈윈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를 완전하게 믿고 있었다. 단지 이런 식으로 밀리다가 겨우 이기는 건 오히려 결투를 안 하느니만 못했다. 그가 원하는 건 압도적인 결과였다. "걱정 마라, 캡틴." 카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쉐이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두나단이 듣고 있다는 것은 의식했다. "우리 다섯 중에 울프 기사단 모두가 가장 상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잘아. 아즈윈의 장난기가 발동하면 그 시합은 언제나 치욕적인 결과를 나타내지, 저 눈빛이 안 보여? 아마 캡틴 쟈란은 일평생 오늘 있은 시합을 후회하게 될 거다. " 쟈란의 공격 속도가 점점 올라갔다. 그는 마치 아즈윈을 가지고 놀 듯이 칼을 빠르게 휘둘렀고, 아즈윈은 그 때마다 겨우겨우 방패로 막아됐다. "아직인가, 울프? 얼마나 기다리면 제 실력을 보여줄 생각인가?' 쟈란은 벌써 이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부하 병사들도 환호하고 있었다. 두나단 대신도 하얀 늑대가 밀리고 있다는 것에 굉장히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하얀 늑대들에 대해 환상만 품고 있었지, 실제 싸움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쟈란의 공격이 워낙 대단해서인지 아니면 하얀 늑대가 기대보다 떨어지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승부는 점점 쟈란 쪽으로 기울어가는 듯했다. 아즈윈은 상대의 말을 듣더니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칼을 내밀 기회를 줘야 실력을 보여주던가 말던가 하지." "그거 미안하군. 내 공격을 용케 막는 걸 보니 실력이 바닥은 아니지만 나라고 사정 봐주면서 ‥‥‥" 아즈윈은 아무 것도 쥐지 않은 오른손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싸우는 도중에 칼을 집어 넣고, 왼손의 방패만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주먹으로 후려칠까 생각했는지 아냐, 쟈란? 칼을 쓰게 해달란 말야, 칼을!" "이, 이 자식 !" 쟈란은 당황하며 욕을 내뱉었다. 병사들의 환호도 멈췄다. 옆에서 보는 이들도 쟈란의 실력에 취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즈윈은 혀를 차더니 허리에 찬 칼이 아니라, 발목에 차고 있는 한 뼘 길이의 칼을 뽑았다. 보는 이들도 당황했고 세이게이 장군도 놀랐으나, 쟈란 본인만은 이미 분노로 앞뒤를 재지 않고 있었다.그는 아즈윈이 제대로 대결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칼을 두 손으로 쥐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러나 아즈윈은 바닥을 기듯이 미끄러지며 공격을 피하고, 주저앉은 자세로 그의 발등을 칼로 책었다. 발바닥을 뚫고 나간 칼날이 땅까지 박혔다. 쟈란은 짧게 비명을 질렀고, 발작적으로 뒤로 몸을 젖혔다. 그러나 그는 피가 배어나도록 이를 꽉 깨물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다리 쪽에 아직도 아즈윈이 주저않아 있었고, 쟈란은 고통 때문에 목표를 잃어버릴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즈윈은 마치 상대를 도발하듯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쟈란은 거꾸로 쥔 칼 끝으로 아즈윈의 얼굴을 찍었다. 그러나 아즈윈은 아주 쉽게 그의 칼을 방패로 막았다. 다시 한 번 내리찍은 칼은 또 방패에 막혔다. 세 번째도 동일한 방법으로 막혔다. 그 후로도 트리제이의 공격은 다섯 번쯤 이어졌다. 위에서 찍기도 하고, 옆으로 치기도 하고, 중간에 손으로 방패를 잡아당기고, 반대족 발로 걷어차기도 하면서 주저 앉아 있는 아즈윈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즈윈은 거의 힘도 들이지 않고 그 공격 전부를 막아내거나 비껴냈다. 그의 칼을 휘두르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무뎌졌다. 발등의 찔리 부분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고이고, 지탱하고 있는 다리는 힘을 잃어 휘청거렸다. 마지막에는 거의 몸무게로 짓누르듯 칼을 찔렀으나 아즈윈은 막지도 않고 피해버렸다. 결국 쟈란은 바닥에 칼을 꽃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래도 아즈윈이 꽃은 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즈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다리에 핀을 꽃아 넣고 고통스러워 꿈틀대는 개구리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처럼 그저 쟈란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지켜보기만 했다. 쟈란은 결국 칼까지 놓아버리고 발등에 박힌 단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러나 힘을 잃은 그의 손으로는 아즈윈의 아귀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시선으로 아즈윈을 노려보면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기사의 체면 따위는 모두 잊어버리고 코 앞에 있는 아즈윈의 얼굴을 향해 머리를 들이박았다. 그러나 그녀는 방패를 든 쪽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움켜쥐었다. "안 끝났다, 쟈란, 벌써 포기하지마. 난 아직 이빨을 보이지도 않았어." 아즈윈은 끊어오르는 포효를 숨기고 나직이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흔들러는 쟈란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가득찼다. 그녀는 발등을 관통 시킨 칼을 잡아 끌며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당연히 쟈란의 발도, 몸도 질질 끌렸다. "아악." 쟈란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그 뒤로도 처절한 그의 발버둥이 이어졌다. 발로 아즈윈을 걷어차려고 꿈틀대고 손으로 밀쳐내려 애쓰면서도 아즈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방패로 후려친 다른 쪽 발까지 부러졌다. 끌고 가는 자리에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그만 두시오." 쟈란의 부하 기사 중 하나가 참다 못해 나서려 하자, 쉐이든이 긴 창을 쭉 벌였다. "두 기사의 정식 대결이다. 어느 한 쪽이 멈춘다고 하기 전에는 끝이 아니야." "이건 대결이 아니오. 일방적인 공격이잖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 못했나? 대체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 한 거냐?" 원한다면 이번에는 자기가 나서주겠다는 뜻으로 쉐이든이 한 걸 음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반발했딘 그 기사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뭐라고 했지?' 그 때 아즈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다 죽어가는 쟈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졌소. 그만 하시오." 아즈윈은 발등에 찌른 칼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 말 하게 될 거라고 했지, 트리제이?" 그녀는 쟈란의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의사에게 데려가 칼은 그대로 꽃은 채로. 여기서 뽑으면 출혈이 너무 심해질테니 위험해. 그리고 뽑은 칼은 나중에 돌려줬으면 좋겠어." 그의 부하들은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아즈윈을 노려봤지만, 뭐라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쟈란을 업고 성 쪽으로 달려갔다. "잘잘못을 떠나, 지나친 처사였소." 두나단 대신이 겨우 말문을 열었다. 카셀은 손을 내밀어 그가 하려는 말을 막았다. 대신 세이게이 장군을 불렀다. "장군, 잠깐 단 둘이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저와 단 둘이 있을 웅기가 있다면 말입니다 " 부하들이 즉시 장군을 말렸으나 장군은 그들을 오히려 호통쳤다 "나를 겁쟁이로 만들 셈이냐?" 그는 한 명도 옆에 끼지 않고 카셀 쪽으로 다가왔다. 카셀은 예를 뜻하는 표시로 가슴에 손을 얹어 인사했다 "잠깐 같이 걷는 건 어떻습니까?" "좋소." 둘은 훈련장을 벗어나 성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한 동안 말이 없어 세이게이 장군조차 긴장할수 밖에 없었다. 단둘이었고, 방금 하얀 늑대들 중 하나가 자신이 키운 최고의 기사를 가지고 놀 듯 무너뜨렸으니 오죽 할까?장군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카셀은 그가 좀 더 긴장을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장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부하들의 반발이 클 거요." "맞습니다. "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한 거요?" "장군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물를 원하는 결말은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결국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 "내가 뭘 원했다는 거요?" "군대 통솔권!" 카셀은 장군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이런 악독하기 그지 없는 하얀 늑대들이 군대를 이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우리가 아군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겠죠. 그리고 군을 지휘하는 사람은 그런 하얀 늑대들이 아닌, 오래 전부터 카모르트를 지켜온 세이게이 장군이 되는 겁니다. 군의 사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겁니다. " 장군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 자리에 멈췄다 "그걸 의도하고 한 짓이오?" "당신이 키운 최고의 기사라 해도 우리에 비하면 이 정도요. 하나쯤 깎여도 전력 손실은 없습니다. 대신 군의 사기란 건 쉽게 끌어 올릴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덕분에 이런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지요. 병사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오고 갈 겁니다. 쟝 세이게이는 하얀 늑대들에 대항한 장군이라고. 당신의 용맹이 더욱 두드러질 필요는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은퇴했다가 돌아온 장수를 누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까? 그러니 마음 속 깊이 두려워하는 사자와 장미에 대항하여 싸울 준비를 하는 군대에게는 적어도 늑대에게 대항할 정도의 지휘관이 필요한 겁니다. " "결국 난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군." "그렇게 생각하지 맙시다, 장군.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었고,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었습니다. 그 외에 뭐가 더 필 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막강한 공동의 적을 가졌습니다. 그 적을 꺾기 위한 합의 과정 중에 이 정도 갈등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카셀은 사실 이 모든 것을 방금 떠올렸었다. 눈 앞에 쟈란을 혼내 줄 요량으로 아즈윈을 시킨 것뿐이었고 장군과 같이 걷자고 한 것도 말하자면 이 장군의 기를 어떻게 죽여버릴까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군의 기를 죽여 봤자 통쾌하기만 하지 도움 될 게 없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뭔가 이용해 먹자하는 생각이 떠올라 되는 대로 떠들어 본 것이었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한 행동과 말이 아니었다. "장군, 내가 힘이 되어 줄 테니, 이대로 당신이 지금까지 생각해 온 군대를 만들어 보십시오. 이 기회를 놓치면 카모르트는 결코 왕실의 군대를 얻지 못할 겁니다. " 세이게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하얀 늑대라는 존재를 오해했었소." 카셀은 그의 주름진 손을 꽈악 잡았다. "그렇다고 내가, 아니 우리가 당신의 편이 될 거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샤를 국왕을 돕기 위해 이 나라에 왔습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당신은 카모르트에서 지금껏 없었던 군사 권력자가 될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 힘을 악용한다면 하얀 늑대들의 이빨은 즉시 당신을 향하게 될 겁니다. 그 점은 잊지 말아 주십시오." "나 역시 국왕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것 외에는 어떤 욕심도 없소." 지금까지 얌전히 듣기만 하던 장군이 갑자기 묵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같은 경고를 하겠소. 이 싸움 이후 어떤 다른 욕심도 카모르트에 품지 않도록 하시오." 악수를 하던 카셀의 손이 순간 움찔하며 굳었다. 내내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한 대화의 끄트머리에서 늙은 장군에게 모든 것을 한 번에 뒤집혀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장수가 저 정도 배짱을 지녔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장군을 보낸 후 카셀은 돌아서서 멀리 떨어져 있는 쉐이든에게, 짬을 내어 잠깐씩 배워둔 던멜식 수화로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 ' 둘은 그 수화에 응답한 후 훈련장에 두나단 대신과 병사들을 두고 왔다. 아즈윈은 빙그레 웃었다. "어땠어?" "내가 상상했던 결투 장면은 아니었지만, 효과는 적절했어." "너도 아주 적절한 대처였어 " "아니야, 결국 너희들의 도움을 받았잖아." 카셀은 쟈란이 뺨을 후려칠 때 멋지게 막아낸 후, 놀라는 상대방의 면상에 대고 '무슨 짓이냐!' 라고 소리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말했다 "뭔 소리야, 그건? 널 도우려고 우리가 옆에 있는 거 아니야?" 아즈윈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따져 물었다. 쉐이든은 카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직이 말했다 "아직 어려서 넌 모든 것을 자기가 척척 해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모습을 동경하고 있겠지만, 네가 나이가 더 들면 남의 도움을 서슴없이 받을 줄 아는 게 얼마나 축복 받은 능력인지 알게 될 거다. " "남한데 손 벌리는 게 어떻게 능력이 되는 거지?" 카셀은 먼저 성으로 들어가는 쉐이든을 졸졸 쫓아가며 물었다.쉐이든은 그저 나이가 더 들면 알게 될 거다라는 말만 했고, 아즈윈은 '너 어리다잖아.' 라며 놀렸다. 하얀 늑대들이 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세이게이 장군은 두나단에게 물었다. "대체 저 자는 누군가?" "누구 말입니까?" "카셀 ." 두나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캡틴 울프 아닙니까?""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네." 두나단은 장군이 뭔가 됫말을 이을 것 같아 기다렸으나, 장군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만약 아란티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난 절대 지휘관을 맡지 않겠네. 저런 캡틴에, 저런 기사들이 우글거린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군." 두나단은 그가 뭔 소릴 하나 했더니 고작 그런 소릴 하는 거냐 싶어 대꾸했다."아란티아는 침략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장군 " "하지 않아?이보게, 대신. 지금 왕실에 자리 잡고 있는 다섯 명은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 하는 건가? 호의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 만약 캡틴 카셀이 이 나라를 먹겠다고 맘 먹으면? 방금 쟈란을 가지고 놀다 기절 시켜버린 그 여자 수준의 기사 다섯 명이 동시에 이 왕실을 장악하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두나단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에노아 후작의 경고는 이런 걸 뜻하는 건지도 몰랐다. 세이게이 장군은 부하들을 수습하여 훈련장을 빠져 나가며 말했다 "마지막에 큰 소리를 쳐두긴 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카모르트 국왕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말을 믿는 길 외에는 없을 걸세." 그 말을 들은 두나단은 하얀 늑대란 존재가 자기들 편에 있다는 게 그토록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던멜과 게랄드는 성의 3층 복도에 있었다. 던멜은 창문을 통해 성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몇 몇 위험 장소를 체크했다. 게랄드는 조금 지루한지 하품을 했고, 벽에 걸린 그림이나 구경했다. 던멜이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그는 말했다. "뭔가 건졌냐?" 던멜은 수화로 대꾸했다. '건졌다. ' "어떤 거?" '여긴 암살자가 숨기에 적절한곳이 너무 많다. 성벽이 높고 해자도 깊어 적들이 들어오기에 쉽지 않으나, 일단 들어오면 그 이후에는 속수무책이야.' "전쟁을 한다면 노르만트 성곽에서부터 막아야겠군,'그 쪽 성은 또 너무 낮다. 대군이 들어오고자 마음 먹는다면 한 시간도 못 버틸거다. ' "그럼 적들이 안 쳐들어오길 바라야 하는 거네."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성의 경비 몇 명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친구들?" 게랄드가 붙임성 있게 인사했다. '하얀 늑대들이십니까?"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 " 모두 네 명이었는데, 처음에 인사를 한 병사가 나머지의 의견을 대표하기로 한 듯 그는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여 말했다. "두 백작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니. 그냥 둘 중 하나라도 노르만트를 공격하면 거기에 맞서 싸우겠다는 거지."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거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 "일어난다면 우리를 지휘하는 건 여러분들인가요?" "아닐걸. 우리 같은 외부인이 왜 이 나라 군대를 이끌겠나?" "그럼 최소한 우리 편에서 싸우는 거지요?""음, 너희 편이라는 게 어떤 편인지 모르겠는데, 우린 카모르트 국왕을 위해 싸운다. " 병사는 몇 가지 면에서는 예상 하지 못했으나 마지막 답변에는 만족한 듯 안도했다. "그럼 같이 싸우게 되는 거군요." "그렇겠지, 아마." 그 병사는 용기를 얻었는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사실 우리들은 왕실 기사단의 후보였습니다. 막 기사단에 들어 가기 직전 기사단의 캡틴이 비밀 임무를 띠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계속 경비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이 곳에서는 기사단이 되기 전에 경비병으로 있나 보군," "특별히 뽑히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지요." "그래서?" "같이 싸우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검술을 가르쳐주실 수 없는지요. 사실 전쟁 준비로 병력이 소집된다는 말을 들은 후 다들 그걸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기사의 꿈을 안고 검술을 단련하면서 이 자리에 섰지만, 막상 검술훈련을 받을 만한 여건이 안 되어 거의 개별 훈련에 가깝게 단련하고 있습니다. 경비 대장도 일반 사병과 별로 다를 바가 없거든요." "그런 문제라면 캡틴과 의논해 봐야겠군." "예,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 병사들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병력이야 어찌 되었든 커다란 적과 싸운다는 데 사기가 바닥은 아니군 우리 때문인가?" 게랄드는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중얼거렸다. '네 경우는 용병 단에서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나?네가 그 전쟁에 참여하면 그것만으로도 아군에게 힘이 되었을 거다. ' 던멜은 수화로 말하고, 게랄드는 입으로 대답했다 "그야 그렇지. 어떤 놈은 노골적으로, '불의 용병이 우리와 함께 한다. ' 라고 고함을 치기도 하더군. 창피해서 후방으로 빠진 채 싸우지도 않았는데, 용병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워서 이겨버리더군. 그런데도 그 승리의 주역은 나였다고, 나의 용맹스러운 싸움에 감동했다며 말도 아니었지. 그 기뻐하는 얼굴에 대고 나 안 싸웠는데! 그럴 수도 없었지." 그는그 때 일이 생각났는지 킥킥대고 웃었다. 둘이 복도를 따라 코너를 돌아가는데, 한 병사가 잔뜩 떨어뜨린 창을 줍고 있었다. 키가 작은 탓에 군복도 잘 안 맞아 벗겨지려고 하는 어린 병사 같았는데, 애쓰는 꼴이 불쌍하여 게랄드가 도와주려고 나섰다 "혼자서 이 많은 걸 옮기긴 무리 아냐?" 그가 다가가자, 투구를 눌러쓴 병사는 웃으며 말했다. "졸병이라서요."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정과 행동으로 게랄드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전혀 살기도 없었고, 공격하기 전 자세도 없어 던멜 조차 예측하지 못했었다. 반쯤은 운이라고 아즈윈이 놀렸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칼날을 맨손으로 잡아냈다. 뒤늦게 내려다보니 칼 끝이 배에 닿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핏줄기가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게랄드는 반사적으로 도끼를 내리쳤다. 그러나 병사는 쉽게 피하며 뒤로 허리를 돌려 재주를 두 바퀴 굴렀다. 다시 자세를 잡은 그의 손에는 창이 두 자루 쥐어져 있었다. 아까는 하나 들기도 벅차 낑낑대더니 지금은 젓가락 다루듯 양손에 끼고 휘두르고 있었다. 투구가 벗겨진 그의 얼굴은, 자세히 보니 어린 것도 아니었다. "좀 힘들게 되어버렀군." 그는 발음도 안 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게랄드와 던멜을 노려보았다. 눈빛에 창을 어떻게 찔러 넣을까 하는 살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쪽 패거리구나! 오냐, 난 니들이 아직 포기했다고는 생각 안 했다. " 게랄드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던멜이 뒤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앞으로 성큼성큼 나섰다. 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던멜이 처치하는 게 그들간의 암묵적인 약속이었으나, 지금 게랄드의 머리 속에 그런 게 떠오를 리 없었다. 그 젊은 암살자는 당장 두 자루 창을 치켜세우고 고속으로 휘둘렀다. 좁은 복도 안에서 피할 곳도 없이 몰아붙이더니 순식간에 게랄드의 목과 가슴 두 곳으로 창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게랄드는 피하지도 않고 두 자루 모두 도끼로 쳤다. 두 자루 창 모두 동강났을 뿐 아니라, 암살자의 팔뚝까지 베였다. 암살자는 휘청거리며 물러 났다 "이번에는 세 자루를 들고 싸워볼테냐?" 게랄드는 바닥에 있는 창들을 상대에게 걷어차 주었다. 암살자는 두 번이나 공격을 실패하고 나니 발 앞으로 굴러오는 창을 봐도 주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표가 자신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알았다. "기습에 실패하면 그냥 오라더니 이런 거 였군." 그는 천천히 됫걸음질치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런 우연은 없을 것이다. 그 때는 반드시 너부터 죽여주마." 그는 게랄드를 지목하여 말한 후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커튼이 닫혀 있는 창문 밖은 3층이었는데,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뛰어 들 준비를 했다. "가긴 어딜 가, 이 자식아!" 게랄드는 커다란 도끼를 치켜세우더니 수직으로 집어 던졌다. 도끼는 위잉 하는 귀를 울리는 바람 소리를 내며 직선으로 뻗어갔다. 창문을 뚫고 달아나려던 암살자는 그 소리에 놀라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 순간 코 앞까지 날아든 도끼를 발견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달아나던 남자의 이마에 도끼가 박혔고, 아직 남아있는 관성에 의해 그는 등을 창문에 부딪혔다. 유리가 박살 났으나 그의 몸은 창살에 부딪힌 후 복도로 튕겨 들어왔다. 부러진 창살과 깨진 유리가 창 밖 안, 양쪽으로 후두두 쏟아졌다.게랄드는 숨을 씩씩 몰아쉬더니 던멜을 바라보았다. 던멜은 수화로 뭔가 말하려 했다 '내가 하‥‥‥' 그러나 게랄드는 일부로 그의 수화를 보지 않고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던멜도 손을 털어버렸다. 머리가 박살 나 두개골 안 쪽이 반즘 보이는 그 남자의 얼굴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다. 게랄드는 피가 손에 묻든 말든 상관 않고 그의 얼굴을 잡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목덜미도 살폈고 손이나 어깨도 살폈다. 그러나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암살자가 몸에 어떤 표식을 하지 않는 건 당연했지만, 게랄드는 뭔가 찜찜했는 지 입맛만 다셨다. 나중에야 손의 쓰라린 고통을 느끼고 헝겊으로 상처를 감쌌다. 그는 결국 뒤에서 말없이 쳐다보는 던멜의 시선을 못 견디고 말했다. "알아 너한데 맡겼으면 죽이지 많고 사로 잡았을 거야. 미안하다. 내가 증거를 없앴다. 이제 됐냐?젠장." 던델은 힘없이 웃어 보이더니 아까부터 던지려고 준비했던 단검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게랄드도 픽 웃어버리고 시체 머리에 박힌 도끼를 뽑았다. 찍혔던 부분이 벌어지며 피가 벌컥 솟아나왔다. 순간 게랄드는 시체의 눈동자에서 뭔가를 보았다. 잘못 봤나 싶어 시체의 얼굴쪽으로 고개를 바짝 붙였다. 한 순간 시체의 눈동자에 떠 오른 그림이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발바닥이 있네?" 암살자의 갈색 눈동자에 마치 피부에 새긴 문신처럼 선명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검은 발바닥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게랄드는 뭔가 심상치 않아 던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단검 줘봐. 눈알을 빼보자. 어떤 단서가 될 지도 몰라." 던멜은 아직 게랄드가 뭘 보고 그러는지 몰라 같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단검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역시 게랄드가 본 것을 봤다. 던멜은 놀라며 자리에시 벌떡 일어났다. "어이, 칼 달라니까." 게랄드가 재촉했다. 그러나 던멜은 오히려 시체 쪽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래? 너 이 발바닥 문장이 뭔지 알아?" 던멜은 고개를 저었다. "아는 눈치인데 왜 그래? 말해봐. 네가 아는 조직이냐?" 던멜은 대답도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게랄드가 달려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러냐니까." 그 순간 던멜은 들고 있던 단검으로 게랄드의 목을 겨누며 그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그러나 그 와중에도 게랄드는 던멜의 배 쪽에 도끼 날을 붙인 상태였다. 만약 죽이고자 마음 먹었다면, 둘 다 서로를 죽였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대처였다. 게랄드는 천천히 던멜의 배에서 도끼를 때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네 과거를 건드리기라도 했냐? 저 검은 발바박을 눈깔에다 집어넣은 암살자 조직이 네 엄마를 죽였어?아니면 네가 과거에 저 조직의 일원이었나?아님 저 놈들한데 돈 꿔줘서 달아난 적이라도 있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서로의 과거에 대해 창피해 하거나 경계한 적은 없잖아. 네가 저 쪽 암살자였다 해도 우리는 상관 하지 않아 " 던멜은 떨리는 손으로 게랄드의 목에서 칼을 뗐다. 게랄드가 다른 말을 더 하려 할 때, 갑자기 쉬익 하는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시체 쪽이었다. 정확히 죽은 남자의 눈에서 하얀 연기가 나는 듯 하더니 온 몸으로 번졌고 이어 기름에 불씨를 던져놓은 것처림 불길이 확 일어났다. 폭발적으로 일어난 열기에 놀라 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시체가 한 줌 재가 되어버리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저 쪽에 마법사가 있다고 했지? 그럼 저런 것도 이상해 하면 안 되는거냐?" 게랄드가 던델에게 물었다. 던멜은 시체에 불이 붙은 것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에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있었다. 게랄드가 보아온 몇 년 간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낸 던멜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던멜의 어깨를 꽉 쥐었다. 던멜은 그의 입술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좀 더 생각을 정리해 둬. 그리고 이 일에 관한 애기는 모두가 있는 곳에서 하자. 알았지?" 던멜은 머못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덴모주 로일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루 종일 지루함과 싸워야 했다. 덴주의 성에 도착한 이후 한 번도 백작을 보지 못했고, 라틸다도 뭔가 바쁜지 로일과 같이 있어주지 않았다. 안나 조차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들렸다 온다고 하니, 로일과 같이 이야기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종들은 그가 식사를 하든 혼자 훈련장을 거닐든 정원의 장미 꽃을 따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일은 공사중인 성 여기저기를 둘러보기로 했다.성을 둘러싸듯 올라가는 네 개의 탑은 전망대 외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었다. 터렛(turret)으로 쓸만한 공간확보도 되어 있지 않았다.고작 미관상 좋아 보이라고 돈 많이 드는 이 작업을 십 년에 걸쳐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해서 로일은 탑의 용도를 알아보기 위해 몇 번이나 탑을 오르락 내리락 하고 각 탑이 어떤 식으로 차이가 있는지,혹시 보이는 전망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완공에 가깝게 올라간 건 두 개의 탑뿐이니 자세한 비교를 하기는 어려웠으나,특별히 괄목할 점은 없었다. 단지 두 탑 모두 본성을 대칭으로 같은 위치에 있었고, 공사 중인 나머지 두 탑도 본성을 가운데 끼고 있다는 게 특이했다. 즉, 탑 네 개는 본성을 중심으로 정사각형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깔끔해 보이긴 하겠지만, 이런게 의미가 있나?" 로일은 아직 공사의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아 안전 턱이 없는 벽에 손을 대 바깥을 내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렀다. "뭐가 깔끔하다는 건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로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 걸음쯤 뒤에 붉은 장미 백작이 있었다. 백작이 본인의 성 어디에 있든 이상 할 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등 뒤 다섯 걸음 이내에 들어왔는데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백작님 ." "좋은 아침 일세." 백작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옆에 섰다. 탑 위에서는 성뿐 아니라 덴모주의 다른 부분도 모두 한 눈에 내다보였다. 로일도 백작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마을 외곽에는 모여든 군대가 줄을 맞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급품을 나르는 마차가 여러 번 마을의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고, 멀리 던마치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는 마을 안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막사를 짓고 대기하고 있었다. 어림 잡아도 합하면 오천 명은 될 것 같았다. 로일은 십 년 전 론타몬 정복 전쟁 이후 이렇게 많은 군대는 처음 보았다. "내 성이 어떤가? 잘 지내는지 모르겠군." 백작은 군의 이동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성이 아주 인상적이군요." "깔끔해 보인다고 한 건 이 탑에 대한 이야기 인가?" "탑이 왜 필요한지 몰라 혼잣말 한 겁니다. " 솔직히 로일은 재력과 권력을 어느 정도로 과시하려고 백작이 이런 성을 만드는 걸까 의문이었다. 보통 중축을 하여 성을 뽐내는 건 그 지역이 평화로울 때 남는 재력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작은 전쟁과 성의 축조를 동시에 진행시키고 있었다. 영지의 밀밭이 꽤 넓긴 하나 그둘을 모두 소화시킬 정도로 많은 양의 곡물을 수확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도 들겠지. 틀린 말은 아니야." 천장이 덜 만들어진 탓에 높은 곳에서 부는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백작의 붉은 망토가 뒤로 펄럭거렸고, 로일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보다 라틸다와는 잘 지내나? 보통 까다로운 아이가 아닌데." "그럴 리가요. 저에게 무척이나 잘 대해줍니다. 단지 백작께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에 화가 많이 나 있더군요." "내가 전투에 나서면 언제나 그러지. 하지만 그 애도 더 커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피를 흘리는지 이해하게 될 거야. 탑의 불필요성에 대해서 물었었나?""나름대로 조사해봤는데, 탑에 특별한 기능이 없더군요. 또 이 많은 군대를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을까도 궁금하고요." 백작은 로일의 어깨를 친근하게 토닥거리더니, 반만 만들어진 난간에 허리를 구부려 손을 짚었다. "이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건설한게 저 풍차일세. 풍차란 것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건축물이라, 처음 그걸 지으니 마을 사람들은 악마의 재단이라도 되는 양 두려워하더군. 자네는 아란티아에서 왔으니 풍차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조사해 봤는데, 그 곳은 풍차뿐 아니라 수차도 있다더군 .""수차라는 건 못 봤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이 지역에 맞는 게 어떤 걸까 공부했으니‥‥‥‥ 저 풍차의 건축 양식은 가넬로크에서 가져왔다네. 돈이란 건 생각보다 벌기 쉬운 거야.따져 생각하면 대체 왜 다들 가난한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음, 그건 과거의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네. '가난한 쟌스테인'이라는 이름을 버리게 된 계기는 저 풍차 덕이었고, 군대를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부를 축적한 건 이 지방의 밀이 다른 어느 곳보다 질이 좋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야.덴모주의 밀을 바닷가 도시에 팔아 소금이나 해산물로 바꾸어 그것을 다시 코흘룬이나 노르만트에 팔면서 중간 이익을 챙졌는데, 그 이익의 절반을 이 마을 사람들한데 풀었지. 다른 지역에서 붉은 장미 백작을 어떤 식으로 논 하는지 모르지만, 이 곳 주민들은 나를 아주 선량한 군주로 알고 있지." 백작은 손을 펼쳐 마을을 가리켰다. "보게나. 군대가 마을 안에 주둔해 있는데도 마을 사람들 누구든 눈 하나 깜짝 하나?다들 일상 생활을 하고 있다네.물론 용병 녀석들이라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몇 놈을 사형시키니 그런 문제도 없어지더군. 일한 만큼의 수익을 돌려주니 농부들은 더 열심히 일했고, 밀 생산량이 늘면서 수익은 더 늘었지. 이 지역만을 관할하는 밀 상인이 있을 정도라네.카모르트 곳곳에 도적들이 있다고 했나? 감히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보호하는 상인을 누가 공격할 수 있겠나? 나중에는 중간 상인들 마저 안정적인 수익을 얻으려고 이 곳과 고정적으로 거래하게 되더군. 부는 부를 남고, 나는 그 부로 이런 군대를 키웠네." "놀랍군요. 그런 건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저에게 알려줘도 됩니까?" "이런 것도 비밀이랄 수 있겠나? 아니야. 많은 영주들도 그걸 알아. 그러나 누구도 그걸 실천하지 못해 왜냐고?귀족들은 기본적으로 게으른 데다가 베푼다는 건 생각도 못하거든. 나와 비슷한 상술을 가진 영주라 봐야 뤼미에르 정도지. 개인적으로는 싫지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와 아주 비슷한 사람이지." "왜 뤼미에르 백작과 전쟁을 하십니까?" "라틸다와 함께 있으면서 그 이야기도 못 들었나?" "들었습니다. 리제니 남작과의 약혼 문제라든가, 영지 문제라든 가. " "자네가 보기에는 어느 쪽 잘못 같나?" "둘 다입니다. 그런 이유로 전쟁까지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맙소사, 자네가 내 아들이었다면 이대로 얼싸안고 바로 내 자리를 물려줬을 걸세. 정말 솔직한 친구로구만. 어느 누가 내게 그 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또한 얼마나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가?" 그는 유쾌한 듯 허공에 대고 외치며, 부드러운 눈길로 로일을 바라보았다 "맞아, 전쟁까지 벌일 필요는 없었어.사람들이 아는 그 따위 건 이유랄 수 없지, 그런데 왜 전쟁을 하냐고? 자네는, 상대가 칼을 들고 앞에 서 있는데 겨뤄야 할 목적이라도 얘기하나?서로가 한 지역을 지배하는 군주이고, 서로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이유란 건 필요 없는 거야.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딸의 약혼 문제로 싸우고 있다고 뤼미에르가 믿고 있겠나? 내가 영지를 빼앗아서? 내가 그의 군대를 공격해서? 다 헛소러지! 그 핑계들 조차 핑계야. 알 수 있겠나? 뤼미에르도 어떤 계기가 필요 했던거야. 그래서 그걸 핑계 삼아 자신의 군대를 부풀리고 왕을 지키겠답시고 왕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 거지." "계기? 뭘 위한 계기 입니까?" "그는 나를 제외하고 나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군대를 가지고 있다네. 론타몬 정복 전쟁 이후 내내 자신의 세력을 누르고 있던 샤이필드 공작이 죽고 뒤를 이을 만한 에노아 후작도 이제 늙어 견제 할 힘이 없다? 그럼 권력의 마지막 단계가 뭐겠는가?" "왕위를 노린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왕과 같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호 가문이 되던가‥‥ 본의는 아니지만 난 그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준 셈이지, 난 왕위를 노리는 터무니 없는 짓은 할 생각 없지만, 결국 우리 둘 다 싸움을 하는 이유는 같아. 다들 우리의 전쟁을 욕하고 조롱하라지," 붉은 장비 백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힘! 남자로 태어나 힘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건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거야 "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로일은 할 말이 없었다. 전쟁을 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꼬집었는데도, 되려 칭찬하는 사람에게 무슨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 고집세고 자기 주장강한 라틸다가, 아버지 상대로는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백작이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그 힘은 바로 저 자신감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로일, 너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쉐이든의 나무 창에 찔려 쇄골이 부러졌던 어느 날, 병실에 누워 있는 로일을 찾아온 마스터가 말했다. 로일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감이 부족하다니? 가끔 친구들에게 지기는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검술을 최고라고 믿었다.마스터도 인정했고, 계속 다듬어 나가면 결국 스승인 자신도 능가할 거라고 말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자신감이 부족하다니? 그건 그대로 마스터가 내 준 숙제가 되었고, 로일은 아직 그 숙제를 풀지 못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장담하십니까?" 로일은 언덕 쪽으로 이동하는 군대를 살피보며 말했다 "승리?" 백작은 명령한대로 군대가 이동하고 있는가 확인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애초에 로일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그걸 위해 온 모양이었다. 다른 기능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탑은 주위를 살피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런게 왜 네 개나 필요한 건지 아직도 의문이었으나, 질문할 순간을 놓쳐 다시 묻지 못했다 "이런 멍청한 놈들. 그 쪽으로 가면 밀 밭을 지나가잖아.대체 지휘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이동하다가 밀밭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삼백 명쯤 되는 병사들을 발견하더니, 백작은 지휘관이 앞에 있으면 한 대 쳤을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저거 보게. 저런 단순한 행군도 못 하는 놈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데, 내가 자신 있을 수 있겠나?" 화가 난 듯 했으나, 그는 금방 웃음으로 화를 풀어버렸다. "이런 말 다른 병사들에게 하면 큰일나겠지딴, 뤼미에르 백작의 군대는 나의 군대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네. 훨씬 오래 전부터 훈련을 시켜왔으며, 대대로 그 쪽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와 병사가 많아 사기도 훨씬 높지. 숫자만 많다 뿐이지, 그 쪽에 비하면 나의 군대는 용병들만 모아놓은 오합지졸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네. 그런데도 내가 왜 승리를 자신 하는 지 아나?" 펄럭이는 그의 붉은 망토와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묘하게 어울렸다. 카모르트의 일부를 지배하는 영주에 불과한데도 그 기백 만큼은 한 나라의 왕 같았다. "로즈 기사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확실히 백작께서 구성했다는 12 쏜즈는 쉽게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아흔 명의 정예 기사들도 훌륭하고요." "그리 생각하나?그것도 옳아. 내게 있어 유일하게 뤼미에르보다 나은 전력이 있다면 바로 그들일 거야. 그러나 그런건 한 가지 조건에 불과해. 내 진짜 자신감은 바로 여기에 있다네." 처음에는 가슴을 가리키려는 건 줄 알았으나, 백작은 목걸이를 쥐어 보였다. 둥그런 구슬에 뒤집힌 십자가가 박힌 불안한 균형감을 가진 종교적 상징물. "로즈 기사단이 많이 가지고 있는 목걸이군요. 이 지역에 유행하는 종교라고 ‥‥" 백작은 웃었다. 누가 그러던가, 종교라고? 라틸다? 아, 그 애는 뭐든 그런식으로 단순화 시키지. 이건 종교가 아니야. 진실일세." 백작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깊이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따라오게." 로일은 뭔가 불안했지만, 시키는 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보수하느라 바쁜 인부들을 격려하며 백작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난 육년 전 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뭔가를 보았네.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 어떤 전쟁에도 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얻었어. 미래를 봤다고 해도 좋고, 미래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해도 좋다. " 백작은 탑에서 내려와 붉은 장미가 가득한 정원을 가로질러갔다. 미로처럼 굽은 길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앞서가는 그의 걸음은 이상할 정도로 빨라 로일은 그 뒤에 따라 붙는 것만으로 숨이 찰 지경이었다 그는 성의 로비에 들어와서야 걸음을 늦추고, 낮은 어조로 로일에게 말했다. "난 전쟁에서 승리할 걸세.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예언이야." 백작이 멈춘건 지하실로 향하는 철문 앞이었다. 붉은 장미 백작의 붉은 망토에 묻은 장미 잎이 바닥에 흩날리며 떨어졌다. 그는 철문에 손을 짚고 말했다."기사 로일. 처음 했던 내 제안이 하나 있었지. 기억하나?" "합니다. " "그럼 지금 다시 묻겠네, 내 기사단에 들어오지 않겠나?" "그 질문에 대해서라면 이미 답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왜 저를 이 곳으로 데려왔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나는 자네를 지하실로 안내하겠네."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내 입으로 말해줄수는 없네.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그리고 쏜즈의 기사라면 들어갈 자격이 있지." "들어가면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는 겁니까?" "나는 나의 힘을 얻었고,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네 " 바람도 없는 실내에 붉은 장미 백작의 머리카락이 흔들린다는 착각이 들었고, 갑자기 마스터 퀘이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로일, 너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 "결코 자네가 아는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될거다.하지만 그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라고 장담하지. 나는 강요하는게 아닐세. 그래, 자네 말을 빌어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 뿐이야." 로일은, 잡는 사람을 물어버리겠다는 듯 이빨을 드러낸 괴물 모양의 문고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 생각했던 대답을 꺼내는 데 힘들었다는 것에 로일은 대단히 불쾌했다. "만약 백작님의 제안을 따르게 되면 저의 군주는 라틸다가 아닌 붉은 장미 백작이 됩니다. 그럼 제 원래 목적을 잃습니다. " 붉은 장미 백작은 철문에 짚은 손을 떼며 팔장을 꼈다. 그러나 화가 난 표정도 실망한 표정도 아닌 진지한 눈으로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난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해야겠군. 내 군대의 일부가 남을 것이고 베네가 있지만, 그래도 경비가 상당히 약해지게 되네. 쏜즈도 한 명 남지 않아. 그러니 라틸다를 지켜주게. 그 애는 내 딸이 아니야" 지금 백작의 모습은 사람들이 묘사한 것처럼, 전쟁에 미친 군주로 보이지 않았다.그저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내 전부지." "백작께서 전쟁의 승리를 장담하는 것 이상으로 라틸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 "고맙네." 백작은 빙그레 웃으며 로비 밖으로 나갔다. 그는 혼란스러웠다.이런 사람을 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쟁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딱히 백작이 카모르트의 왕좌를 빼앗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어떤 나라에나 있을 법한 권력 싸움에 불과했고, 그걸 굳이 하얀 늑대들이 나서서 끼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로일은 당장 이 성과도 없는 스파이 짓을 그만두고 친구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서른 명은 앉아도 남을 거대한 식탁에서 혼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으려니, 로일은 쓸쓸함을 넘어 우울할 지경이었다. 하인들은 로일이 그만 내오라고 할 때까지 열심히 음식을 날라다 주었으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틸다는 어디 있습니까?" "화실에 계십니다. " "화실이요?" "아가씨 방이 있는 2층 복도 끝 쪽에 있습니다.차를 내올까요?" 빈 그릇을 내가는 하녀는 군인처럼 훈련 받은 어조로 빠르게 대답했다. "차는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 로일은 황량할 정도로 아무 것도 없는 빈 식탁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마침내 라틸다를 만나기로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로비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쏜즈의 기사들이 앉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냥 찬 바람 부는 테이블에서 차나 마시는걸 택했을 것이다. 둘은 전에 봤었고, 한 명은 처음 보는 이였다. 훈련 중에 다친 건지, 전투 중에 다친 건지 셋 모두 부상이 심했다. 하지만 등을 펴고 앉아있는 모양새가 조금도 환자 같지 않았다. 셋은 계단과 계단 난간에 기대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뭔가를 얘기하다가 로일이 나타나자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당신 얘기를 하고 있었소." 로일은 기억을 더듬다가 그 말을 하는 기사의 이름이 네프라는 걸 겨우 생각해냈다."내가 얘깃거리를 안겨줄 정도로 뭔가 저지른 거라도 있소?" 로일은 일부러 그들의 어조에 맞추어 차갑게 말했다. 우호적으로 다가오면 얼마든지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데도 굳이 딱딱하게 나오는 자세에 괜히 화가 났다. "난 드뤼호요. 처음 뵙소. 끝내지 못한 임무를 마무리 하고 오는 길이라 늦었소." 드뤼포는 왼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로일이라 하오. 다쳤소?" "전투 중에 다치는거야 비일비재 아니겠소?" 쏜즈의 기사는 다치는 일이 없다고 한 라틸다의 말이 생각났다. "한 모금 태우시겠소?" 네프는 피우고 있는 파이프를 내밀었다. 독한 연기가 코를 확 찔렀다. 로일은 쉐이든이 항상 입에 물고 있는 담배 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했는데, 이건 그것보다 더 심했다. "난 담배를 좋아하지 않소." "이건 그것과 다른 거요. 피워보면 좋아할 거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네프는 더 권하지 않고 그것을 도로 입에 물었다. "좀 지나가도 되겠소?" 좁지 않은 계단이었으나, 덩치 큰 남자 세 명이 막고 있으니 비집고 지나가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드뤼포가 말했다 "지금 뒤뜰에 가면 크라브지크가 혼자 훈련하고 있을 거요. 가보시오. 그는 당신과 시합을 하길 원하고 있소." "거절하겠소." "기사가 시합을 거절하는 일도 있나? 어제 얘기를 들어보니 겁많은 양반도 아닌 것 같고, 아까부터 성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보니 바쁜 것도 아닐 텐데, 왜 거절하시오?" "난 시합을 거절하는 일은 없소. 하지만 이렇게 억지로 거는 시비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소." "억지로 거는 시비라면 피한다? 대체 뭘 지키고 싶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요?" 드뤼포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웃었다.로일은 울컥 하고 속에서 화가 치밀었는데,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게 더욱 화가 났다. 참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갑자기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실내에서의 흡연은 금지다. " 집사인 베네가 때마침 지나가며 셋에게 말했다. "내일 싸움터에 나가는 기사들인데, 좀 봐주시오.베네." 네프가 양해를 구하며 말했다. "전에도 양탄자에 구멍을 내지 않았던가? 스스로 끄지 않으면 꽃병의 물이라도 끼얹을 테니 알아서 하게들. 아니면 캡틴 링케를 불러다 따로 얘기를 할까?" 베네는 느리고 또렷한 말투로 말했고, 쏜즈의 기사 셋은 그 이상 이의를 달지 않고 파이프의 불씨를 비벼 껐다. 네프는 계단에서 일어나며 로일에게 말했다. "우리는 내일 떠나니, 그 전이라면 언제든 찾아오시오. 누굴 지목하든 우리는 응할테니 ‥‥‥":베네가 네프와 로일 사이에 끼어들었다. 베네는 굳은 얼굴로 네프를 향해 손가락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말 없는 그의 명령에 그들은 토를 달지 않고 물러섰다. "라틸다 아가씨의 방으로 가는 길인가?" "화실로 가는 길입니다. " "가면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 보내 주게나. 점심 때부터 아무 것도 드시질 않았으니‥‥‥" 늙은 집사는 됫짐을 지고 로비를 가로 질러갔다. 라틸다가 말한 베네 만의 카리스마가 뭔지 확실히 느껴졌다. 라틸다는 밥 먹는 시간을 잊어버리고 있을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바빴다. 앞치마와 두손은 물감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탐스럽게 찰랑거리던 붉은 머리는 뒤로 질끈 묶어 놓고 있었다. 로일이 문가에 서서 한참이나 보고 있었는데도 그녀는 모르고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다. 로일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서 있다가, 벽에 잔뜩 걸린 그림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기가 뭐해서 훓어보는 정도였는데, 이내 자신이 이 방에 온 목적을 망각 할 정도로 정신을 빼앗겨 감상했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로일의 그림자는 자연스럽게 라틸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그림 감상에 열중하느라 자신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는 로일을 내버려두었다. 결국 둘이 서로에게 말을 건 것은 로일이 그 방에 들어온지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림을 좋아하나요?" 잠시 붓을 놓고 쉬던 라틸다가 물었다. 로일도 마지막 그림을 감상하던 중이 었다. "아니오. 그림을 이렇게 열중하며 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아, 죄송해요. 허락도 안 받고 들어와서." 라틸다는 오히려 흐못하게 웃었다. "괜참아요. 그보다 그림 어때요?" "뭐랄까, 음‥‥‥‥ 이런 정적인 물건을 바라보는 게 즐거울 수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 "이거 영광이네요.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오래 바라볼 그림을 그렸다는 게." "모두 라틸다가 그린 건가요?" "제가 그렸죠. 어렀을 때부터 그림 하나는 정신 없이 그렸거든요. 한 삼 년 잊고 있었어요." 라틸다는 물감 묻은 손을,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손 떼 묻은 인형을 접하는 눈빛으로 내려다 보았다. "오랜만에 그려서 붓이 낯설지만, 그리운 느낌이 좋네요." "왜 갑자기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요? 잊어버렸다더니 ," 로일은 그녀가 내내 물감 묻혀가며 그리고 있던 그림을 감상하며 물었다. 새롭게 그리기 시작한 그림은 정물이나 풍경 위주의 예전 그림과는 사못 다른 사실적인 묘사에 충실한 작품이었다. 그것도 완성되면, 어린애 하나 울릴만한 살벌한 그림이 었다. "로일 때문이에요." "저요?" "인생에 대한 대답을 해주셨잖아요. 그 말을 듣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을 설계해보았죠. 항상 미래를 생각한다고 자부해왔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인생을 바라보니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지더라고요. 아버지의 일, 지금 제가 처한상황도 모두 제가 하고 있는 일에서 뭔가를 찾을 때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새 그림도 멋지군요. 이건 어떤 주제로 그런 건가요?" "고마워요. 솔직히 말해 새로 시작하는 그림의 첫번째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굉장히 오래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기념으로 로일을 그려볼까 했는데, 사람은 그려본 적이 없어 망칠까봐 그만 두었어요. 그 대신 제 악몽을 그려보기로 했어요. 공포란, 실체를 마주하지 않을 때 더 무서운 법 아니겠어요? 제 안에 있는 모습을 끄집어 내어 이 존재가 현실의 로일보다 못하다는 것을 직시해 보려고요. 좋은 생각이죠?" 라틸다는 아버지와 닮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로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한쪽으로 젖혔다. "악몽?" "악몽 속의 검은 기사. 로일은 아직 그 검은 기사를 본 적이 없죠? 일부러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봤는데, 이런 이미지에요.막상 그려놓고 보니 우습군요." 로일은 갑자기 입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로일에게 있어 '검은기사' 하면 떠오르는 건 수 년 전 용병으로 활동할 때 봤던 론타몬의 기사가 다였다."라틸다,혹시 익셀런 기사단을 본적이 있나요?" "있죠. 저도 먹은 나이가 있는데, 아크랜드를 휩쓸고 지나간 그 검은 폭풍을 모른다면 말이 안되죠." "제가 보기에 지금 그린 이 검은 기사는 익셀런의 기사를 묘사한 것 같은데요." 라틸다는 그 쪽은 생각도 못 해봤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 진짜 그러네? 무의식 중에 흉내를 내버렸나? 하지만 전 론타몬의 흑기사는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어요. 그러고 우릴 공적한 '검은 기사'는 얼마 전에 봤죠. 당연히 최근 이미지가 선명하니 이 그림이 십 년 전 한 번 겪었을 뿐인 추억에 잠식당했다고는 생각 안 드는데요." "하지만 전 익셀런 기사단을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저나 안나는 그 검은 기사를 라이온 기사단이라고 생각했다지요? 저는 익셀런 기사단이라고 생각합니다.단지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갑옷의 모양이 매우 흡사해요." 둘은 잠깐 동안 각자의 머리 속에 담긴 의문을 풀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둘 다 해답을 얻지 못했다."안나는 아직 안 돌아왔나요?" 라틸다는 다시 붓을 들고 그림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예." "집에 들르는 일로 늦을 아이가 아닌데. 걱정이군요."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었거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군요." "로일은 그런 말을 정말주저 없이 하는군요. 부디 그런 일이 없 길 바라야겠어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집중하고 싶으니 잠시만 혼자 있게 해주시겠어요?" "아, 죄송합니다. " "괜찮아요. 그림을 끝내면 또 같이 얘기해요." "아, 그리고 베네가 식사하러 내려오시랍니다 " "한 시간쯤 후에 식당에서 먹을 데니 준비해두라고 하세요. 하지만 늦더라도 부르러 오지는 말라고 하고요. 내일 아침 식사는 같이 해요." "좋습니다. " 로일은 문을 닫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일층 로비로 내려가면서 계속 라틸다의 그림만 떠올렀다. 그리고 검은 기사들을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로일이 라틸다를 버리고 친구들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 놈의 검은 기사 때문이었다. '친구들도 검은 기사와 만났더랬지?'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 나지 않았다. 우연일 가능성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검은 기사가 라틸다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가정해 볼 때 친구들 보다는 자신이 그 쪽 정보를 먼저 얻을 수 있었다. 아침에 붉은 장미 백작과 나눈 이야기 중에도 친구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정보가 많았다.덴모주로 스파이 짓을 하러 온목적을 만족시킬 만한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리스트를 캡틴에게 전해줄 방법이 없었다. 심부름꾼을 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으나, 백작을 훌륭한 군주로 생각하는 마을 사람 중에 적당한 인물을 찾는 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마을을 경유하는 상인을 시키는 것도 정보가 샐 위험이 컸다. 결국 자신이 직접 이 성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라틸다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렀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아직 실행되지도 않은 셈이다. 철컹 하는 소리에 로일은 고개를 들었다.전에 잠깐 그랬던 것처럼 굳게 닫혀있던 지하실 문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고, 안에서 링케가 걸어 나왔다. 우연이겠지만, 로일은 문득 그게 의도한 만남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리고 쏜즈의 다른 기사들처럼 링케도 한 번 겨루 자는 말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링케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기만 하고 지나가버렀다.로일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는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 버린 채 한 동안 지하실의 철문을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아까 쏜즈의 기사들이 뿜어내고 간 역한 탄 냄새가 아직도 공기를 맴돌고 있었다.이른 아침이 되자 나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렸다. 로일은 졸린 눈으로 밖을 내다보았는데, 언덕 쪽에 모여있는 군대가 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 로즈 기사단이 서고 보병 부대와 궁수 부 대가 뒤를 이었다. 높은 성 위쪽에서 내려다보이는 행군 장면은 웅장했다. "일 만‥‥‥" 대충 헤아려 보니 군대의 숫자는 그 정도 되었다. 한 나라의 군사 규모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 군대가 또 다른 비슷한 병력과 싸우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 씁씁했다. 전쟁은 십 년 전 한 번으로 족했다. 친구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안나가 어제도 안 왔어요." 아침 식사를 하는 라틸다의 잠옷 차림은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언제나 성숙한 여인의 모습만 보다가 갑작스러운 호출에 그녀의 방에 들어간 로일은 잠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안나가 오지 않았다는데 왜 웃죠?" 라틸다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 라틸다는 빵 조각을 수프에 찍어먹으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아버지가 떠나는데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을 겁니까?" "조만간 또 만날 텐데 뭣 하러 인사해요?" "항상 당연한 듯 승리하고 돌아오시니 그러나본데, 이번은 다르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같아요. 아버님께서 12쏜즈가 끼어있는 전투에 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겠어요. 그리고 전 분명히 이 전쟁을 반대했어요. 차라리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영토 싸움을 하는게 나았죠. 이건 아니에요.응원이 되어버릴 작별 인사를 할 수야 없죠." 로일은 라틸다의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빵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라틸다는 그의 손가락 끝을 눈으로 좇았다. "라틸다는 아버지의 전쟁이 의도한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어제 내내 생각해 봤는데,잘들어봐요. 아버지는 제가 출발하기도 전에 전쟁 준비를 마쳤어요. 그리고 검은 기사가 절 공격했고, 아버지는 그게 라이온 기사단이라고 억지를 부려 전쟁의 계기를 마련한 거에요. 어찌면 그 검은 기사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12쏜즈 중 몇 명이었을 지도 모르죠. 그 엄청난 실력의 기사가 카모르트에 실존하는 존재라면 그런 게 이상할 것도 없죠. 저 붉은 갑옷 대신 검은 갑옷을 입히면 누가 또 알아보겠어요?그런데 왜 허락도 안 했는데 보란 듯이 내 침대 옆에 앉아 빵을 빼앗아 먹는 거죠?" "식사에 초대하지 않았나요?" "식사에 초대했지만, 레이디의 침대에 앉아도 된다고 히락하지는 않았는데요." "입고 있는 잠옷이 너무 귀여워 레이디라는 생각이 사라지는군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옆에 호위하고 서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모습으로 있으니 여동생이 늦잠 자다 일어나 아침 먹고 있는 느낌이군요." "여동생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없어요. 있으면 그럴 것 같다는 거죠." 로일은 라틸다의 괜한 시비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 친구 사이처럼, 둘은 서로에게 던진 농담을 굳이 상대방에게 납득시키지 않고도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로일은 빼앗은 빵을 마저 입에 우겨넣으며 말했다. "몇 가지 관점에서는 아주 그럴 듯한 추측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중간에 백작께서 뤼미에르 백작과 타협을 시도하려 했던 건 이해가 안 되는데요." "뭔가 절 설득할 계기가 필요했을 거에요. 하지만 저도 그 부분은 이해가 안 되네요." 그 검은 기사들이 12쏜즈라니, 정말 그렇다고 생각 하십니까? 저야 본 적이 없으니 ‥‥‥‥ "아니오. 느낌상 그들은 결코 인간이 아니었어요. 쏜즈의 기사는 가끔 보면 인간 같지 많은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 인간이 아닌 건 아니니까. 악몽 속의 기사가 고스란히 걸어 나온 것 같은 괴물들은 분명 아니죠.""좋아요. 이건 어때요?사실 잔스테인 백작께서 라틸다의 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하려고 했던 것과 검은 기사는 완진히 별개의 사건인 겁니다. " 라틸다는 달걀 후라이를 포크로 찢어먹다가 한 쪽은 로일에게 내밀었다. "그건 아주 신선한 생각이네요. 계속 해봐요." 로일은 그녀가 내민 계란을 받아먹고 말을 이었다. "그 검은 기사라는 존재는 사실 어느 어느 종교 집단에서 소환지 킨 마물들인 겁니다. 그런데 우연히 두 백작의 전쟁을 보고 그들의 싸움을 부추기기 위해 끼어 들었죠. 아직도 이동 중인 저 군대 보셨 죠? 저것과 같은 병력의 군대가 카모르트 한 가운데에서 전쟁을 벌인다고 생각해보세요. 모르긴 몰라도 그 피해 규모는 오히려 론타몬이 쳐들어온 것 이상이 되지 않겠습니까?혼란을 틈 타 그 종교 집단이 이 나라를 잡아먹으려는 거죠." "암울한 얘기를 되게 재밌게 하는군요, 로일은.그리고 그 어느 어느 종교 집단이라는 건 뭐에요?설마 이 마을에 정착하고 있는 그 종교를 비꼬는 거에요? 베네한데 물어보니 그 종교도 뿌리 없는 사이비는 아니라네요. 론타몬에서 유래되었고, 크진 않지만 아크랜드 여기저기에도 다 있는 종교래요. 심지어 아란티아에도 있다던걸요" "그걸 염두에 둔 건 아니에요. 그럼 종교 집단 대신 제 3국의 공격이란 걸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나쁘지 많아요. 그럼 다른 건 다 로일이 맞다 치고 검은 기사는?내 악몽 속에 동일하게 드러난 그 존재를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요. 내가 무슨 예지자라도 되요?" "그런가요?" 라틸다는 우유를 마시고 남은 건 로일에게 내주며 갑자기 말했다 "론타몬의 익셀런 기사단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그렇잖아도 그 그림을 베네에게 보여줘 봤어요. 베네는 아주 흐뭇하게 보더니 나보고 용케 십 년 전 기억을 끄집어 내어 그렀다면서 어린 시절에 한 번 본 걸 어떻게 이리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느냐고 그러더라고요." "제 생각이 맞았다는 건데, 그럼 더 이상하군요. 왜 아무도 그 검은 기사를 보고 익셀런 기사를 떠올러지 못했죠? 저나 베네는 그림만 보고도 알았는데." "그들을 직접 본 다음 살아남은 사람이라 봐야 안나와 로저가 다에요. 안나도 저와 비슷한 기억이었고, 로저는 그 검은 기사를 본 후 생사를 헤맸었죠. 오래 전 기억을 끄집어낼만한 여력이 아닌 거에요 " 로일은 하마터면 친구들을 떠올리며 검은 기사를 본 게 당신들 만은 아님니다, 라고 말할 뻔 했다.왜 친구들 조차 검은 기사가 익셀런 기사단과 비슷한 모습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라틸다는 식사를 마친 후 냅킨으로 입을 닦다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들은 익셀런 기사단과 닮지 않았어요. 그래서 로저가 기억을 하지 못했어요.만약 기억했다면 라이온 기사단이라고 억지를 쓰지 않았겠죠." "그럼 나와 베네의 경우는요?라틸다가 그림을 못 그려서 그렇게 오해했다는 겁니까?" "농담 아니에요! 로저는 론타몬 정복 당시 전쟁에 참가했으며 물론 익셀런 기사단과 생사를 다투는 싸움까지 했었어요. 그럼 저나 로일보다 더 그 검은 갑옷에 대한 기억이 선명했을 테죠. 그런데 왜 떠올리지 못 했을까7 그건 그 검은 기사들이 익셀런 기사들과 다르기 때문이에요. 모습이 아니라 분위기에서." 라틸다는 벽에 걸어놓은 완성된 그림을 들고 와 품에 안고 로일에게 앞면을 보였다. "사람이란 실제 모습보다 당시의 상황이나 분위기 쪽으로 기억이 선명한 법이에요. 같은 남자가 같은 상황에서 멋지게 보일 수도 있고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죠. 그런데 로저가 같은 모습의 검은 가옷을 봤으면서도 그림으로 본 로일보다 오히려 기억을 못 하는 건 그 갑옷 자체의 모양보다 검은 기사에게 풍기는 힘에 압도되었다고 봐야죠. 안 그래요?" "그럴 듯 하군요." "그럴 듯 한 게 아니라고요. 로일도 직접 그 검은 기사를 보면 절대 익셀런 기사단을 떠올리지 못할 걸요. 내가 왜 악몽속에서 걸어 나온 괴물이라고 표현했는지 잘 알 거에요." 라틸다는 다시 그 그림을 벽에 걸어뒀다. "그걸 또 걸어 두려고요?" 로일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만, 바로 그 검은 기사가 악몽에 등장하는 거 아닙니까? 거기 걸어두고 주무실 수나 있겠어요?" "글쎄요, 어쨌든 이 집에 온 이후 악몽을 꾸지 않았으니까 자신 있게 도전해 봤어요. 날 봐요. 검은 기사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하잖 아요." "장족의 발전입니다. " 라틸다는 창가에 손을 짚고 멀리 먼지를 일으키며 이동하는 군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악몽을 꾸지 않은 건 로일을 만난 후부터에요." "예? 뭐라고 하셨나요?" 먹고 난 후의 식기를 치우던 로일이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그보다 안나의 집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같이 가주세요.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되네요." "그러죠. 그런데 이 성을 나가려면 집사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나요?" 라틸다는 입을 가리고 옷었다."당신도 이미 베네의 힘에 지배당해버렸군요. 남자라면 누구든 그의 마력에 지배당하죠. 아버지 외의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는 일 없는 쏜즈 조차 베네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하죠." "몇 번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라틸다가 말한 베네의 분위기가 뭔지는 잘 알겠더군요." "그래도 내 명령을 들어야 하는 처지죠. 베네의 허락은 안 받아도 좋으니, 어서 옷 갈아 입고 외출 준비해요." 로일은 식기를 담은 쟁반을 들고 방을 나갔다. 라틸다는, 돌아가 신 어머니께서 클 때 입으면 꼭 어울릴 거라며 꽃을 수놓아 준 하얀 잠옷을 벗었다. "귀여워?" 그런 말은 장미를 귀에 꽃고 망아지 흉내를 냈던 아홉 살 때 아버지에게 들은 후 처음이었다. 그 후 너무 빨리 성숙해버린 자신의 여성적인 모습에 누구도 감히 그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심지어 아버지 조차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군대가 모두 사라진 후의 마을은 황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한 국가가 전쟁을 치르면 그 여파가 있건 없건 사람들은 쉽게 일상을 이어가기 어려운 법이었는데, 이 크지 않은 시골 마을은 몇 천 명이 넘는 병력의 군대가 머물다 갔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마치 마을 자체가 하나의 군대 같았다. 그래서 본대가 떠난 후 진지를 지키는 후방 부대라는 느낌이었다. 마을 안에 있는 이상한 상징을 지붕에 달아놓은 종교 회관도 로일이 의심했던 사이비 집단은 아닌 모양이었다. 회관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들은 마치 놀러 갔다 온 양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고, 다음 모임을 약속하며 헤어지고 있었다. 가끔 라틸다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라틸다는 그들에게 간단히 손만 흔들어 주고 지나갔다. 안나의 집은 비어있었다.로일은 식탁에 엎어진 잔을 들어 뒤집어 보았다. 집 전체에 흐르는 공기는 삭막했고, 온기라고는 없었다.그리고 희미하게 안좋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로일이 어제 한 번 맡아본 냄새였다. 그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 건지 떠올리자 불길한 기분이 스밀스밀 기어올랐다. "적어도 하루는 이 집에 아무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 라틸다는 안나의 어머니 방을 들어갔다 나온 후 곧 동의했다. "편찮으신 어머니가 누워있던 침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깨끗하네요. 게다가 아주 안 좋은 걸 발견했어요." 라틸다는 방 안에 놓인 긴 연초 파이프를 꺼냈다. 모양은 달랐지만, 역시나 그것은 쏜즈의 기사들이 어제 피원던 파이프와 똑같은 냄새를 냈다."이 건?" "마약이에요. 즈쿨라라는 건데, 저도 한 번 해 본 적 있어요." "마약도 해 봤어요?"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 수척해져 갈 때 안나가 궁여지책으로 이걸 구해오더군요. 써봤는데, 징신이 몽롱한 게 금방 잠이 들더라고요. 깨어나 보니 하루가 통째로 지나가 있었어요. 하지만 악몽을 꾼 것만큼이나 기분이 나빠져서 그 뒤로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중독성이 대단히 심해 딱 한 번 써본 저 조차도 가끔 이걸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라틸다는 파이프에 코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고는 얼른 고개를 떼었다."하지만 이건 아주 많이 쓰였군요. 안나에게는 특별히 돈을 많이 주는데도 살림살이가 그리 좋지 않은 걸 보면 이걸 사는데 돈을 모두 써버렸나 보네요." 로일은 어제 일은 얘기하지 않고, 안나에 대한 것만 물었다."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왜 아무도없죠? 안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삽니까?" "아뇨. 안나는 아버지와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어요." 라틸다는 파이프를 치워버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걱정되네요." "옆집에 한 번 물어보죠." 옆집 사람도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심지어 그 즈쿨라라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안나의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라 그런 위험한 물건에 손 댈 리 없다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마약을 구할 수 있는 곳을 가보겠습니다. 라틸다는 먼저 성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어딜 찾아보려고요?" "술집이나 됫골목이면 알 수 있을까요?" "이 마을에 됫골목이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구하는 루트도 없는데 어떻게 안나의 아버지가 그린 물건을 손에 넣었겠습니까?""모르죠. 이 마을에는 상인들도 많이 오고 가니까. 그 쪽을 통하면 다른 나라의 물건도 구할 수 있어요." "일단 찾아보고 없으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안나가 라틸다의 시녀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안 좋은 일이야 있겠습니까? 보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라틸다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걱정이에요. 나는 항상그웃음 뒤에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거든요." 로일은 라틸다를 성문 앞까지만 배웅해 주고 다시 마을로 갔다. 로일은 제일 먼서 쏜즈의 기사들이 썼던 그 파이프를 떠올렸다. 코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라틸다가 말한 즈쿨라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자리에 있다 해도 대 놓고 물어보기 껄끄러운 데, 그나마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마을에서 즈쿨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술집을 뒤지거나 여관 주인에게 문의했다가 나중에는 마을 사람 하나 하나에게, 마지막으로 종교 회관까지 찾아가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즈쿨라를 몰랐다. 로일은 오히려 그 사실을 수상히 여겼다. 안나는 비록 백작의 딸을 보필하는 시녀라고 해도 특별히 대단할 것 없는 신분이었으며 그녀의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의 신분이었다. 라틸다가 그녀에게 봉급을 많이 준다고 해도 마을에서의 위치가 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즈쿨라라는, 로일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마약을 그녀의 부모님이 구할 수 있었다? 그럼 그 물건은 구하기 쉬운 물건이라고 봐야 옮았다. 게다가 본즈의 기사들은 계단에 앉아 보란듯이 피웠으니, 마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로일은 라틸다에게 자신 있게 찾아보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할 수 있기는 커녕 이름 조차 아는 이가 없다니 ! 성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야 로일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건 너무 간단해서 로일이 자신의 둔한 머리를 탓할 지경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옆집 사람이 하루 동안 없어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심지어 그 집 사람이 마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마약에 대해 아는 이도 없었다.아직 조사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이 작은 마을에 비밀이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그런 비밀이 이토록 완벽하게 숨겨질 수 있겠는가? 한두 사람을 속이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를 속이는 일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 ' 해가 져서 사위가 어두워졌다. 로일은 서둘러 성 안으로 들어갔다.라틸다는 장미 정윈에 등불을 들고 서있었다. 그녀가 안전하게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괜히 안심이 되는 로일이었다. "안나는 찾았나요?" 라틸다는 피곤한 눈으로 물었다. 하루 종일 로일의 소식을 기다리며 정원에서 시간을 보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니오. 대신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아냈습니다. 어쩌면 너무 엄청난 사실을 알아내서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죠?" 라틸다는 금방 피곤한 눈을 번쩍 떴다. "여기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 "방으로 가요." 라틸다는 로일의 손을 잡아 끌었다. "궁금하군요. 힌트라도 줄 수 없어요?" 라틸다가 성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며 작은 목소직로 물었다"즈쿨라를 사용하는 사람은 어쩌면 안나의 가족만이 아닐 지도 모르겠어요."무슨 뜻이죠?" "우선 쏜즈의 기사들은 공공연히 그걸 사용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지만, 그 마약에 대해 묻는 마을 사람들 전원이 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어떤 비밀을 숨기려고요" "어떤 비밀이오? 이런 시골에?" 로비에 들어선 둘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라틸다는 이 시골 마을에 얼마나 신경 쓰셨습니까?" "전 이 마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부터 도시에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전쟁을 좋아하는 바보로 바뀐 후 부터 더욱 싫어졌죠. 그런데 이 마을에 제가 어렇게 정을 주겠어요 ?" "바로 그겁니다. 쏜즈의 기사들이 즈쿨라를 피운다는 것도 모르셨죠? 라틸다는 이 마을에 대해 저만큼이나 모르고 계십니다." 둘은 로비를 가로질러 라틸다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에 섰다. 그리고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로일은 앞으로 해야할 이야기를 산더미처럼 껴안고 있었다. 그래서 2층을 향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반쯤 기울인 채로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라틸다는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지하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 장난을 치다 귀중한 걸 깨뜨린 어린 소녀처럼 안절부절 못하던 라틸다는 손을 감싸 쥐고 비볐다.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망설이더니 지하실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문이 열린 지하실 앞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상반신에는 피를 잔뜩 묻힌 전라의 여인이 엎어져 있었다. 라틸다는 아닐 거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이미 마음 속으로 믿고 있던 사실을 확인했다. 안나였다. 라틸다는 그녀를 끌어 안고 피로 굳어버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창백한 얼굴에 가슴과 등, 목덜미에 칼자국이 길게 나 있는 그녀는 분명 라틸다의 시녀 안나였다.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전부 그녀의 상치에서 나온 피라고 하기에는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인간의 피가 아니다 ' 로일은 곧 옷을 벗어 안나의 몸을 덮어주었다. 라틸다는 충격에 뭐라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안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러나 호흡이 약했다.피 냄새와 더불어 안나의 집에서 났던 그 기분 나쁜 냄새가 올라왔다. 즈쿨라의 연기. 누가 또 이 곳에서 즈쿨라를 피운 게 아니라면, 그것은 열린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퀴퀴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에 섞인 냄새였다."안나, 정신을 차려요." 로일은 라틸다에게서 그녀를 넘겨받아 바닥에 눕힌 채 머리를 안았다. 그 때 안나가 살짝 눈을 떴다.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일‥‥‥‥ 당신을 보게 되리라 믿었어요." 그녀는 들기도 힘겨워 보이는 손으로 로일의 목을 끌어안았다."그래서‥‥‥ 계속 위로 올라왔어요. 로일이 있으니까‥‥‥‥ 이제 전 괜찮은거죠?" "예. 이제 아무도 안나를 해치지 못합니다. " 안나는 힘없이 미소 지으며 다시 정신을 잃었다. 로일은 그녀를 라틸다에게 맡기고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하실 족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계단은 지옥으로 연결되는 듯 끝도 없이 깊었다.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로일." 베네의 목소리였다.그는 여러 개의 장식용 칼이 걸린 거실의 벽 쪽에 서 있었다. "안나가 어떻게 된 거죠7" 라틸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떻게 된 것임을 묻기보다 그 아이를 치료하는 게 우선일 듯 합니다, 아가씨." 베네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라틸다는 더 쏘아붙이려 했으나, 로일이 그녀를 말렸다. "집사의 말이 옳습니다. 어서 옮겨야겠습니다 " 베네가 손짓하자 덩치 큰 시종이 둘 달려와 안나를 안고 갔다. 그리고 무장한 경비 두 명이 다가와 두꺼운 쇠 문을 천천히 닫았다. 라틸다는 안나를 들고 간 시종들을 따라가기 전, 로일에게 명령했다. "지하실 안에 들어갔다 오세요. 그리고 거기에 뭐가 있길래 안나가 이 꼴이 되었는지 알아보고 오세요. 반드시!" 라틸다는 눈을 부릅뜨고 베네를 노려보고는 치마를 붙잡고 뛰어 갔다. "아가씨에게 미움을 받아버렸군." 베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라틸다의 명령을 받아들여야할 입장입니다, 베네. 저 지하실에 뭐가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말할 수 없네. 아가씨의 손님이라 내가 자네에게 너무 신경을 안 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네만, 지금부터 알아두게. 이 성에서 쓸데 없는 호기심은 접는 게 좋아." "이건 제 호기심이 아니라, 절 고용한 군주의 명령입니다. ""난 자네의 군주보다 높은 분을 모시고 있네. 내가 들어야 할 명령이 아니야." 로일은 베네와 쇠문 앞의 경비 둘을 번갈아 보았다. 로일은 이 성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칼을 뽑았다. "강제로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성급할거 없네,로일. 안나가 저 모습으로 돌아온 건 나도 놀랐고 그 원인은 따로 알아봐야겠으나, 지하실의 문제라면 자네가 끼어선 안되네. 이 성에서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지하실에 대해 알게 될 걸세. 서두르지 말게."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겠습니다 " "아마 백작님께서 돌아오시면 답을 주실 걸세. 그 이상은 내 소관이 아니야. 만약 그래도 내 말을 들을 수 없다면 다시 한 번 아가씨에게 갔다 오게. 일선에서 물러난 내가 젊은 자넬 이길 수는 없을 테지만, 자네가 한 수 접고 싸울 정도로 이 늙은이의 젊은 시절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네.그러니 아가씨께 집사를 죽여도 되냐고 허락을 받게나." 베네는 벽에 걸린 레이피어를 내리더니 칼 끝에 달린 안전 볼을 떼어냈다.뾰족한 칼끝이 촛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저도 그 지하실에 대해서 굳이 알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나는 절 믿어주는 사람이고 전 절 믿는 사람은 누구든 친구로 여깁니다. 하루 종일 찾아 헤맨 친구가 저 꼴로 돌아왔는데, 멍청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만큼 당신의 말에 설득력이 있진 않군요." 로일은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조만간 자네의 그 선택이 현명했다는 걸 알게 될 걸세." "그건 당신이 제게 해줄 말이 아닙니다. " 로일은 라틸다가 걸어간 복도 쪽을 향했다.아직도 피 냄새가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드마르프 평원의 전투 드마르프 평원은 노르만트에서 말타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사막과도 같은 넓은 평원이었다. 흐르는 물도 없고 바닥도 물이 고일 만큼 단단하지 않아 곡물을 키우기에도 힘들었다. 그래서 아무도 살지 않고, 여행자들도 피해가는 곳이었다. 그 넓은 평원에 두 귀족의 군대가 들어섰다. 양 진영에 거의 5천명 넘는 군대가 포진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서로 화살을 날려도 닿지 않을 공간을 남겨 두고 두 군대의 움직임이 멈췄ㅁ. "지금까지 이 정도의 군대가 서로 부딪힌 적이 있었는가?" 검은 사자 백작은 평원의 동쪽 끝에 말을 타고서 아군의 병력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라이온 기사단 다섯과 중무장한 보병들, 검은 사자가 그려진 깃발을 든 기수가 가슴을 활짝 편 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아닙니다. 우리도 그들도 3천 이상의 병력을 끄집어 낸 적이 없습니다. 서로 군대를 아끼기 위해 애썼지요." 바딩이 대답했다. "이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바딩? 자네도 나의 일방적 승리를 점치나? 내 아부하기 좋아하는 전략가들처럼 말이네." "아닙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자신 있게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전부터 검은 사자의 군대보다 자신의 군대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전군을 이끌고 직접 나온 것을 보니 뭔가 있는 게 틀림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처럼 후방에 또 5천 정도 되는 군대를 남겨두었습니다. 지금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 "패한 후의 변명을 할 핑계가 아니라?"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일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숨겨놓은 저력이 어느 정도일지 오늘 보게 될 것이고, 그 것이 검은 사자 군대의 드러난 힘보다 더 크다면 우리가 패할 겁니다. " 바딩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놀랍군. 저 많은 군대를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끌고 오다니. 난 적어도 일주일은 더 있어야 될 거라고 생각 했는데... 덕분에 나의 군대는 다 모으지도 못했지 않은가?" "미리 준비한 겁니다. " "미리?" "붉은 장미 백작은 덴모주에 병력을 모아두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단기간에 군대를 소집할 능력이 안 되지요. 말씀하신 대로 자신의 병력을 모아 여기까지 오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합니다. " 바람이 불어 먼지를 일으켰다.바딩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바람에 밀려 깃발이 넘어지지 않도록 기수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바딩은 깃발의 흔들림을 확인했다. 서풍이었다. 약하지 않은 바람을 맞서게 되어 위치가 그다지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바딩이나 장수들은 그 정도 바람에 연연해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붉은 장미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지휘관들보다 자신들의 능력이 우수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장수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왔다는 것은 이미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군대를 모아놓았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 검은 사자 백작은 깔끔하게 수염을 깎은 턱을 쓰다듬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장수들은 왜 아무도 보고하지 않았지?자네만 알고 있었나?" "설마 그렇겠습니까? 백작님께서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대신 겁이 좀많죠. 예, 바로 지금 짓고 있는 백작님의 바로 그 표정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어제 그 말씀을 드렸더라면 그 보고를 한 친구가 온갖 호통을 다 들었을 겁니다. "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 !" 검은 사자 백작은 호통을 쳤고, 거 보라는 듯 바딩은 웃었다. "자네라도 없었다면 대체 난 누굴 믿고 저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쟌스테인 녀석을 맞아 싸웠을 지 모르겠군." "돌아가신 샤이필드 공작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그 분께서 살아계셨다면 백작님이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불렀다 한들 전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 "나 역시 공작이 가장 아끼는 기사를 빼올 만큼 어리석지는 않네." "알고 있습니다. " 백작은 말고삐를 쥐고 허리를 길게 폈다. "피곤하군." "어제 너무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 "아무리 나라도 내 병력 전체를 이끌어냈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나?" "레앙에 두고 온 병력이 아직 많습니다. 전체 병력이라고 할 것 까지야‥‥‥‥ "내겐 그렇게 보이네 " 백작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자지 않고 잠깐 생각을 했는데‥‥‥ 음, 자네가 언제 날 찾아왔지?" "육 년쯤 전입니다. " "공작이 죽고 난 한 달 후였지." "많은 사람들이 절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제가 공작님을 살해한 거라고 떠들기도 했지요. 아마 백작님께서도 조금은 그런 생각을 하셨을 줄로 압니다. " "아니야. 난 한 번도 자네가 날 찾아온 목적이나 이유에 대해 따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새삼스럽긴 하지만 어제 곰곰이 그걸 떠올려 봤지. 물론 당시의 나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지. 자네 정도의 실력자라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거절 못했을거야. 하지만 왜 나였을까? 에노아 후작도 있었고, 심지어 국왕 폐하 밑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나였나?"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는군요." 바딩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검은 사자 백작님이 아닌 다른 누가 절 담을 그릇이 되겠습니 까?" "확실히 그렇지. 무엇보다 자네는 샤이필드 공작 밑에 있을 때도 검은 갑옷을 입었고." "익셀런 기사단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습니다. " "카모르트 최고의 흑기사가 카모르트 최고의 흑기사단에 온 게 너무나도 당연했기에 나도 저울질 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네.지금도 그래 " 또 다른 사자의 깃발을 들고 이동하던 기마병이 검은 사자 백작에게 달려왔다.그는 말에서 내려 깃발을 다른 기수에게 넘긴 후 백작 앞에 무릎 꿇었다 "저 쪽에서 먼저 공격해 올 기세가 없어 선공을 시작하려 합니다. " "모든 지휘 권한은 이미 장수들에게 내렸다. 예정이 바뀐다면 그 권한 역시 그들에게 있다. 뜻대로 하라고 전하라." "예 그리고? . ." 병사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지금 드마르프 평원에 와 있습니다. " "캡틴 울프가?" 검은 사자 백작의 한 쪽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예, 북쪽 언덕 위에 있는 것을 우리 쪽에서 발견했습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어 붉은 장미 군대 측에서도 발견했을 겁니다. " "우리 쪽 눈에 잘 띈다는 것은 그 쪽에서도 우리가 잘 보인다는 뜻이겠지요. 이 전쟁을 구경이라도 할 모양입니다." 그 이름만으로 분노하는 백작과는 달리 바딩은 손님이라도 맞이 하는 양 말했다. "혼자인가?" 백작은 감정을 다스러며 물었다. "옆에 다른 두 명이 더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그 쪽은 이 전쟁의 영향권이 아니라 여러 명을 대동한 게 아닌 듯 합‥‥‥‥ "그게 아니지! 하얀 늑대들의 캡틴 정도 되면 전쟁의 여파가 와도 별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가 봐라. 그들에게 신경 쓸 것 없다. " 기수는 말에 오른 후 다시 깃발을 옮겨 받았다. 바딩은 다른 병사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직이 말했다. "저 쪽 진영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캡틴 울프는 칼 한 자 루 없이도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서로 싸우기도 바쁜 와중에, 누가 하얀 늑대들에게 감히 덤비려고 달려들겠습니까?" "그렇군." "하지만 그 캡틴이라는 자는 사실 검술로는 별 거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동시에 울리며 바딩의 목소리가 묻혔다.백작은 군대가 이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대꾸했다."응? 뭐라 했나?" "아닙니다, 아무 것도. 혼잣말이었습니다. " 바딩은 그냥 고개를 저으며 캡틴 카셀이 있는 언덕 쪽을 바라보았다. 말을 타고 있는 작은 점 세 개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바딩은 당장 달려가 그들 중 하나에게 창을 휘두르고 싶은 총동이 울컥 솟아나왔다.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 지 몰랐다. 검은 사자 군이 진군을 시작하자, 맞은 편에서 붉은 장미 군도 움직였다. 양측 모두 방패와 창을 앞세운 일진이 발을 맞추어 거리를 좁혀왔다.. 장미 백작 군이 일으킨 먼지가 검은 사자 군쪽으로 노랗게 몰려왔다.그러나 검은 사자 군은 동요하지 않았다. 곧 검은 사자 군은 이동을 멈추고 방패를 세웠다. 뒤따르던 궁수 부대가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거의 같은 타이밍에 붉은 장미 군의 궁수들도 활시위를 당겼다. 검은 사자 군에서 효시를 쏘아 올랐다. 삐이익 하고 울리는 자극 적인 소리에 맞추어 거의 동시에 화살이 푸른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로 솟아 올랐다.동시에 붉은 장미 쪽에서도 화살이 날았고, 공중에서 서로 교차한 후 양 진영으로 떨어졌다. 방패 병의 방패에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혔다 "최근에야 그 소식을 들었는데, 자네 따로 기사단을 키우고 있다 더군" 화살의 정확도나 숫자 면에서 월등히 앞서는 아군의 궁수들에게 만족해 하며, 검은 사자 백작이 물었다."예. 여러 전투에서 접한 소식에 따르면 로즈 기사단에 정예군이 따로 있어 그들이 나선 전투에서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 "12 쏜즈를 말하는군. 쟌스데인이 항상 옆에 끼고 다니지." "전에 노르만트에서 붉은 장미 백작을 체포하지 못한 것도 그들 때문이었습니다.저는 그들과 정면으로 승부할 만한 기사들을 따로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 기사단을 옆에 두었더라면 붉은 장미 백작은 그 때 노르만트에서 붙잡혀 지금쯤 감옥에 있을겁니다. " "나에게는 비밀로 하고 키우고 있었나?" "특별히 비밀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고작 열 명 정도 선별하는 것까지 보고해야 할 정도로 백작님 일과가 한가하지는 않지 않습니 까?" "자네가 내 일을 대신 한 것에 뭐라 하겠나? 그런데 그들도 물론 검은‥‥ 갑옷이겠지?" 검은 사자백작은 '검은' 이라는 단어를 슬쩍 강조했다 "제가 가려 뽑아 키웠다고는 해도 그들 역시 라이온 기사단입니다.검은 갑옷은 당연합니다 " "그래, 열 명의 검은 기사들‥‥" 검은 사자 백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붉은 장미 군의 붉은 기사들이 먼저 앞으로 달려 나왔다. 화살이 떨어진 검은 사자 군은 방패병과 창병을 앞세워 그들의 진로를 막아 섰다. 붉은 장미 군의 보병들도 백여 명 정도 되는 로즈 기사단의 뒤를 따라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백작님?" 바딩은 전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상한 생각? 무슨 이상한 생각 말인가?" 백작은 바딩이 생각하는 바를 짐짓 모른 체 하며 물었다. 바딩 역시 그가 모른 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했다. "과잉 충성하는 라이온 기사들이 쟌스데인 백작의 딸을 공격했다는 것 말입니다 " "설마 그런 생각을 했겠나? 게다가 자넨 언제나 내 옆에 붙어있었지 ." "항상은 아니었지요." 검은 사자 백작은 큰 소리로 웃었다 "괜히 한 번 해본 말일세. 사실 검은 기사 같은 거야 이제 어찌 되든 상관 없네. 리제니의 복수는 애초에 쟌스테인을 향한 거야. 간 단하지 않은가? 쟌스테인을 죽인 후에 검은 기사의 존재가 보이지 않으면 내 이론이 맞는 거야. 그 녀석이 죽은 후에도 검은 기사가 나타난다면, 내가 틀리는 거겠지," 백작은 피곤한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길게 했다 "다만 그 검은 기사 놈들이 자네 앞에 나타나길 바랄 따름일세." 두 군대의 선두가 마침내 서로 부딪혔다. 로즈 기사단은 검은 사 자 군의 창과 방패를 둘고 선두를 무너뜨렸고, 뒤따르는 보병들이 흐트러진 진영 안으로 뛰어들어 마음껏 유린했다.라이온 기사단이 뒤이어 로즈 기사단을 맞아 싸우면서 전투는 완전히 혼돈 양상으로 바뀌었다. "해서 그 열 명의 기사단은 어디 있나?지금 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나?" "아님니다. 그들은 따로 임무가 있어 다른 곳으로 보냈습니다. " "나도 모르는 임무가 있나?" "전투가 끝나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 "그게 중요한 일이라면, 미리 말을 했어야 순서가 맞지." "제가 늦게 말씀 드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이해하실 겁니다. " "그럼 저 쪽 진영에는 12 쏜즈가 참여하고 있나?"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저 중 어던가에 끼어 있을겁니다. " 초반에 밀린 형세가 계속 이어지며 검은 사자 군에게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 때 평원 오른쪽에서 또 다른 군대가 몰려왔다. 슬쩍 세어봐도 백 기는 족히 넘는 라이온 기사단파 일반 기마병이 삼백이었다. 탁 트인 평원에서 설마 옆구리를 공격당할 줄 몰랐던 붉은 장미 군의 측면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같은 방향에서 속도는 느리지만 기마병과 비슷한 숫자의 보병들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면 서 붉은장미 군대는 양쪽에서 적군을 맞아 완전히 갇힌 꼴이 되었다. 그들은 이 작전에 아무 대처도 없어 보였다 "저들에게 숨겨 놓은 작전이 있을 것 같은가?" 검은 사자 백작은 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있다 해도 쓰기에는 늦었습니다. 저쯤 되면 이미 무너진 승기를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 "그럼 끝났군. 저 쪽에 쟌스테인이 있다면 정중히 잡아 내 앞에 대령하도록." "지시는 어제 내려 두었습니다. " "역시 뭐든 자네가 알아서 해 주는군." 그제야 백작은 긴장했던 얼굴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이렇게 끝냈으면 좋았으련만.오히려 이런 규모의 전투를 시작해 준 쟌스테인에게 감사 해야겠군." 바딩은 조용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쟁터를 주시했다. 혼돈 상태는 계속 유지 되었고, 검은 사자 군에 휩싸인 붉은 장미 군대의 형상은 바뀌지 않았다. 바딩은 열 세 살 때부터 전쟁터에서 컸고,같은 나이의 누구보다 많은 전쟁을 경험해 보았다. 그래서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도로 일어나는 경우도 겪어봤고, 거의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무너지는 경우도 겪어보았다. 지금은 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얼마나 피해를 줄이느냐가 더 중요한 시국이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모래를 씹은 듯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무너지지 않는군요." 바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알아듣고 검은 사자 백작이 물었다. "무너지지 않다니?" "이렇게 완벽하게 작전에 걸려들면 설사 병력이 더 많다 하더라 도 진영이 무너지고 사기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그 시점부터는 후퇴하기 바쁘게 되고 달아나는 적의 등을 치는 게 마지막 할 일이 되지요. 그러나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 "최후까지 희망을 잃지 말라는 훈련이라도 시켜 놓았나 보군.""용병들입니다. 그런 희망 따위는 살고 난 다음에나 있다고 배운 자들입니다." 마침내 바딩은 전투의 핵심을 읽었다. 작전은 실패한 게 아니었다. 적들도 이 단순하며 묵직한 기습에 당황했음에 틀림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양쪽에서 몰려오는 군대를 마치 개미 지옥처럼 빨아들이며 되려 검은 사자군대를 잡아먹고 있었다. 전투의 중앙에 쌓이는 시체는 붉은 장미 군대 것이 아니었다. "경호 부대. 전원 백작님을 호위하여 후퇴하라." 바딩이 굳은 목소리로 명령했다.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한 검은 사자 백작은 그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손을 저었다 "아직 갈 때가 아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쟌스테인을 맞이하겠다. " "그 반대가 될 지도 모릅니다. 백작님,우선 노르만트 쪽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전 곧 뒤따르겠습니다. " 백작은 커다랗게 뜬 눈으로 바딩을 노려보았다."바딩,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겠나?" "우리가 졌습니다." 바딩은 짧게 끊어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검은 사자 백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따악 벌렸다. 언제고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구경하고 싶었는데, 의외로 원하는 것을 보고 나니 바딩은 엉뚱하게도 이 상황이 즐거워졌다.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서 웃었다가는 당장 목이라도 날아갈 판이니 자제했 다. 그래도 속으로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도 오래 막지 못합니다." 바딩은 전쟁터 한 가운데를 다시 주시했다. 전투의 핵심은 로즈 기사단이었다. 검은 사자군의 병사가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두 동강이 되어 떨어겼다. 말이라도 벨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칼을 든 로즈의 기사가 있었고, 그 뒤에 한 자루 은빛 창을 들고 있는 또 다른 붉은 갑옷의 기사가 있었다. 투구 속에 감추어진 그의 눈빛과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바딩의 시선이 부딪혔다. 바딩은 그를 보고 씨익 웃었다. 분명히 상대도 웃고 있을 거라고 바딩은 생각했다. "가십시오." 아직도 검은 사자 백작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바딩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검은 사자 군의 한 가운데를 들고 한 기의 붉은 갑옷이 이 쪽으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붉은 갑옷의 기사는 들고 있는 창을 치켜 세우더니, 달려오면 숨을 헐떡거릴 만한 먼 거리에서 집어 던졌다. 그의 손에서 떠난 창은 검은 사자 백작의 뒤통수를 노리고 직선으로 뻗어왔다. "방패를 다오." 바딩은 방패 병의 방패를 빼앗아 백작을 향해 날아가는 창을 막았다. 창은 방패를 뚫고 바딩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줬다. 창 끝이 떨리는 힘에 방패를 든손이 파르르 하니 떨렸다. 그는 백작이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방패를 옆으로 던져두고 칼을 꺼냈다. "멈춰라 " 붉은 갑옷의 기사는 달리는 말의 고삐를 잡아 당겨, 바딩에게서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남겨두고 멈췄다. 상대와의 거리를 확인한 후, 바딩이 말했다. "검은 사자 백작의 수호 기사, 바딩이다. 그 쪽은?" "그 이름은 들어 잘 알고있다, 바딩. 나는 12 쏜즈의 네프다‥‥ " "네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도 대단한 실력자인 모양이군.로즈 기사단에는 자네 같은 이가 수없이 있나?" "열 두 명 있다 " "그거 참 암울한 이야기군." 바딩은 칼을 내밀고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쏜즈의 숫자를 열 하나로 줄이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라, 기사 네프. 이번 전투는 너희들의 것이다. 오늘은 그걸로 만족하라‥‥ " "우리는 전쟁을 길게 끌 생각이 없다. 그러고 네가 여길 막고 있다 해도 그건 내게 장애물이 될 수 없다." 바딩은 마지막으로 네프에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여준 후 날개 모양이 좌우에 달린 검은 투구를 썼다. "그럼 우리 이대로 누가 더 센 지 말싸움이나 계속 하려나?그 사이 나의 군주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달아날 테니 나로서는 원하는 바지." 바딩의 도발에 네프는 주저하지 않고 칼을 꺼냈다. 바딩이 먼저 말을 몰아 달려나갔고, 네프도 한숨에 고삐를 잡아당겨 튕겨나갔다.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터의 굉음을 묻어버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둘은 말을 되돌려 한 번 더 칼을 부딪혔으나, 어느 한 쪽도 밀리지 않았다.다른 한 명의 붉은 기사가 당도하는 것을 보았지만, 바딩은 눈앞의 적을 막느라 거기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 붉은 기사는 바딩을 엄호하기 위해 남아있던 창병 다섯을 순식간에 베어 죽이더니 바딩에게 달려왔다. "12쏜즈의 기사 크라브지크다. 네프가 질 리는 없으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으니 나도 합류하겠다. " "오냐, 이왕이면 너희 열 두 명 모두 데려와 겨뤄보자." 바딩은 두 명을 상대함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바딩은 유연한 동작에 힘을 실어 크라브지크의 거대한 칼을 모조리 막아내고, 오히려 반격까지 하니 두 쏜즈의 기사는 당황했다. 시간을 끌어 상대 하기도 힘들고 성급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두 명인 자기들 쪽이 불리할 지경이었다. "물러나라. 네프, 크라브지크." 우렁찬 목소리에 둘은 미련을 두지 않고 무기를 접었다. "기사 바딩 인가?" 바딩은 겨우 숨을 돌리고 세 번패 쏜즈의 기사를 맞았다. "그렇다" 말이야 자신있게 했지만 여기에 한 명이 더 가세하면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다. 12쏜즈란 것이 이토록 대단하다면 방금 전쟁터에서 벌어진 그 터무니 없는싸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앞뒤로 나뉘어 들어간 군대가 저 열두 명의 기사에게 되려 반격 당했다면 같은 수준의 기사가 막지 않으면 막을 수 없었으리라. 슷자 싸움이야 어찌 되었건 사실상 오늘의 전투는 저 열 두 명에게 당한 것이었다. 바딩은 자신의 정예 기사 열 명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벅차 보였다면, 사양하겠다. 위험하지도 않았는데, 적의 도움을 받을 이유가 없지." 바딩은 투구를 고쳐쓰며 말했다. "사양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나를 포함한 세 명을 상대할 텐가?" 그 쏜즈의 기사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바딩 쪽으로 말을 몰았다. 바딩은 말을 천천히 뒤로 몰아 정말 세 기사가 달려들어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섰다. "이미 뤼미에르는 달아나버린 것 같군." "기사라면 적군의 군주라도 예를 갖춰라. 이름은 뭔가, 본즈의 세 번째 기사여?" "링케. 네가 알만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오늘부터 쏜즈의 기사라면 이름을 외워두기로 했다.크라브지크, 네프, 그리고 링케." "카모르트 최고의 기사가 우리의 이름을 알아준다니 차마 죽일 수가 없군. 더구나 아직 전쟁은 끝난게 아니니." 이미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검은 사자 군은 성급하게 등을 돌리지 않았다. 달아날 때 무기를 내던지면 그 뒤는 학살뿐이었다. 패잔병들의 신중한 행동에 승리한 붉은 장미 군도 쉽게 쫓지 못했다. "기사 바딩, 가서 뤼미에르 백작에게 전해라. 붉은 장미 백작께서 마지막 기회를 주신다고." "거절한다. " "네가 직접 대답할 위치가 아닌 줄 안다. " "그럼 설마 하니 검은 사자 백작께서 고개를 숙이길 기대했단 말이냐?" 링케는 투구가 덜컥거릴 정도로 세게 웃었다."너와는 제대로 겨룰 일이 기대되는구나. 하지만 이 자리는 너와 나 둘을 위해 마련된 장소와 시간이 아니다, 캡틴 바딩."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군, 캡틴 링케." "돌아가라, 그대의 군주에게로." 바딩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돌렸다. 쏜즈의 세 기사는 적의 등을 보면서도 공격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정말 우리 셋을 상대했어도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대단한 실력자입니다 " 네프의 말에 크라브지크도 거들었다."제 대검을 이렇게 쉽게 막는 사람은 우리 열 둘 외에는 처음이었습니다. 저 정도 되는 기사를 살려 둬도 되는 겁니까?우린 어쩌면 이번 전쟁의 승리와 저 자의 목숨을 바꿨어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 "샤이필드 공작 밑에 있을 매부터 카모르트 최고의 기사라 불리던 자다. 그런 자를 즉이는 건 붉은 장미 백작께도, 우리에게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 더군다나 셋이서 덤벼들어 죽이는 건 더욱 우습지 않나?" "그럼 혼자 하셨어도 될 일입니다. 강하지만, 캡틴만큼은 아닙니다. " "그의 실력을 과소 평가 하지 마라. 그는 자네 둘을 상대로 최선을 다 한 건 아닐 게야. 시간을 끌기 위해 여력을 남겨 뒀겠지." 링케는 말머리를 돌려 다시 아군의 진지로 향했다. "그리고 기사는 싸우지 않은 전투의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크라브지크, 오늘이 억울했다면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혼자서 바딩을 상대해라. 기회를 주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건 다음 일정이야. 성급히 굴지 마라." 링케는 언덕 높은 곳에 아직도 서 있는 세 마리 말 위에 타 있는 구경꾼을 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네프와 크라브지크도 멀리 떨어져 있는 세 명의 하얀 늑대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카셀은 지형이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두 백작 군대의 마 지막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옆에서 게랄드가 하품을 하고 있었고, 쉐이든은 창을 쥐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두 군대의 전투를 꼭 보고 싶다고 해서 카셀이 나서자, 혹시나 해서 두 명이 따라와 주었 다. 세이게이 장군은 이 전투를 끝낸 군대가 곧장 노르만트로 진격 해 올 가능성에 대비해 수도 방위를 맡고 있었다 "돌아가자 " 카셀이 말머리를 돌렸다. 게랄드는 즉시 뒤를 따랐으나, 쉐이든은 잠시 전쟁터의 한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터를 관망하는 게 아니라 누구 하나를 찾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 게랄드가 물었다. "왠 놈들이 우릴 사정없이 노려보길래 같이 노려봐 줬다. " 쉐이든은 적당히 둘러대고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게랄드가 농담으로, 가서 쿡 찔러주고 오지 그래, 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카셀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흔들리는 말 위에서 혀를 깨물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그들은 가장 빠른 지름길을 이용해 노르만트의 성을 향했다. 거의 성에 당도해 말의 속도를 줄였을 때야 카셀은 입을 열었다. "로즈 기사단이었지?" "맞아. 일반 병사들로 어찌해 볼 수준이 아니더군." 쉐이든이 대답했다."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병사들까지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저런 병력이 쳐들어오면 작전이고 뭐고 없겠어, 못 막는다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겠더군." 카셀이 성문 쪽으로 다가가자, 성벽 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가 이를 발견하더니 성문을 열었다.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카셀이 말했다. "난 차라리 검은 사자 백작이 이기길 원했어. 그는 대화로 풀어 갈 수 있는 존재야. 하지만 붉은 장미 백작은 아니야." "어느 쪽이 이기건 풀어가기 힘들긴 마찬가지다.솔직히 검은 사자 백작은 널 싫어하잖아. 지금은 사태를 주시하는 게 좋다. 그보다 검은 사자 백작이 이 쪽으로 올 텐데, 어떻게 할래?" "그 부분은 어제 세이게이 장군과 얘기해 둔 바가 있어." 셋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계 하기로 했는데?" 성문 안 쪽에는 창살 문이 또 있었고, 올라간 창살 문은 말을 타고 있는 쉐이든이 머리를 구부려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쉐이든이 안으로 들어선 후 묻자, 카셀은 갑자기 손을 내저었다. "아, 미리 상의하지 않아시 미안해." 평소에 여유로웠던 노르만트 시민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일상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집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이가 많았다. 카셀은 드마르프 평원 쪽을 향하고 있는 동쪽 성문을 향 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제는 던켈의 일 때문에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서 말 못했어." 암살자가 게랄드를 공격한 후,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아직 공격할 의사가 있다는 건, 이제 암살 외의 다른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얀 늑대들이 카모르트에 들어온 후 가장 먼저 접한 문제 임에도 불구하고, 카셀은 검은 기사들과 두 백작의 문제 때문에 사실 암살자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던켈은 그 암살자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그는 말하길 꺼려했다. 하얀 늑대들은 그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그리고 어제가 되어서야 그 얘기를 언급했다 '그 암살집단의 이름은 블랙 풋 Black Foot 이야.' 던켈이 이야기 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가끔 아즈윈이나 쉐이든이 수화로 말을 받긴 했지만 대체로 그의 말을 끊거나 끼어들지는 않았다. 카셀도 반쯤은 알아듣고 있었으므로 굳이 누군 가 그의 수화를 해석해 주지 않았다. 즉, 이 대화를 알아 듣고 있는건 누가 몰래 숨어서 보고 있다 해도 네 명뿐이었다. '눈동자에 검은 발바닥의 모양을 새기고 있지. 문장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대신 거기에는 마법이 담겨 있다. 비밀을 발설하거나, 임무 수행 중 죽거나, 또는 길드를 배신하고 달아나면 즉시 불에 타버리지. 살아 남으려면 눈동자를 뽑아버려야 하는데, 잘못 건드리면 마찬가지로 마법이 발동된다. ' 그 말을 끝내자 마자 아즈윈은 키스라도 할 듯 던멜의 얼굴에 눈을 가까이 들이대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혹시나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맞아 난 과거에 블랙 준의 일원이었어.' 아즈윈이 '내가 맞다고 했잘아.' 라며, 투덜대는 게랄드에게 은화 한 개를 받아내고 있었다.'하지만 눈에 검은 발바닥 무늬는 없어. 있다면 진작 불에 타 죽었겠지.' 던멜이 말하자, 아즈윈은 은화를 든 손을 멈칫했고 게랄드는 즉시 그것을 되돌려 받아냈다. 던멜은 둘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희미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난 울프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에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런 죄책감을 안고 너희들을 대할 수 없었다. 설마 하니 이 곳에서 내 과거 조직을 만날 줄은 몰랐어. 물론 난 과거의 조직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조금도 없다.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울프 기사단에 들어왔는지 너희들이 알게 된다면 나는 너희들을 대함에 더욱 힘들어 질 거야.' '네 과거를 말하는 게 곤란하다면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그보다 그들의 행동 양식이나, 우릴 죽이라고 의뢰할 만한 인물이 누군지 추측할 수 있나?' 쉐이든이 수화로 말했다 '없다. 조직 내에서도 누가 누굴 목표로 하고 있는지 서로 알 수 없어. 그리고 검은 발바닥의 마법에 의해 누가 의뢰했는지 발설할 수 없다. 딱 한 명 길드 마스터를 제외하고 ' '그 쪽 조직의 위치는?' '원래는 론타몬에 있다. 아마 위치는 바뀌었을 거다. 결국 내가 그 쪽 일윈이었다고는 해도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어.' '알았어. 생각나는 게 있거든 나중에라도 말해줘 ' 쉐이든의 그 말을 끝으로 이후, 던멜의 과거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거운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때문에 카셀은 오늘 일에 대한 것을 상의하지 못했고, 같이 행동하게 될 세이게이 장군하고만 이야기 했다. "그런 것과 별개로 중요한 일이라면 상의 했었어야지." 쉐이든은 자신을 배제하고 일을 진행시킨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표정 만으로 카셀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않는 것 같았다. 아즈윈의 과감한 감정 표현과 게랄드의 썰렁한 농담, 던멜의 과묵함에는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쉐이든의 무표정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오기가 생졌다."이번에는 내가 먼서 행동했어."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항상 쉐이든에게 끌려 다니기만 하니 괜히 한 번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약간 앞서 나가던 쉐이든이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행동해?" "그래. 너희들은 모두 침묵하 있었고, 내 말을 들을 준비를 안 했으니까 내가 먼저 행동했어. 그러니 이번에는 너희들이 와야지. 말 안 한 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카셀이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쉐이든은 픽 웃었다.둘 사이에 하얀 말 한 마리가 끼어들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백마를 아즈윈이 옆에 와 있었다. "우후, 캡틴께서 화 나셨네?" 그녀는 항상 보이던 그런 유쾌함을 과시하며 물었다. "전투는 어떻게 되었어?" "우리 예상과는 달리 검은 사자 백작이 패했어." 게랄드가 대답했다."그 붉은 머리 아저씨, 자신만만하게 전쟁하겠다고 그러더니 정말 이겼네. 그래서 이 후는?" "캡틴이 알아서 하겠지 " 게랄드가 놀리는 투로 말하자, 카셀은 보검을 든 손을 휘저었다. "자기들이 내 말 안 들어줘 놓고선 화만 내는 거야? 난 내 할 일을 한 거다. " "누가 내 사랑스러운 캡틴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 너희 둘 다 말좀 가려서 하지 못해!" 게랄드와 쉐이든에게 손가락질 하는 아즈윈이 더 얄미워 보이는 카셀이었다.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노르만트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오늘 전투가 벌어지기 이틀 전이었다.왕실은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이토록 빨리 전쟁 준비를 마친 것에 놀랐으나,카셀은 다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모두를 진정시켰다. '애초에 미리 준비를 했으니까 자신 있게 나온 걸 겁니다.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지요.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그 점을 상기하십시오.' '하지만 언제 창 끝이 우릴 향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 세이게이 장군이 말했고, 국왕이나 대신들은 걱정스러워 했다. '지금 우리 병력은 어떻소? 그들을 막을 수 있겠소?' '수성에 전념을 한다 해도 그 엄청난 병력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왕실의 병사들은 아직 훈련이 덜 되어있어 개개인의 전력도 떨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 장군은 무뚝뚝한 어조로 솔직하게 말했다. 카셀도 부정하지 않았다. '왕실 경비대의 훈련을 하얀 늑대들이 맡고 있다고 했소. 나는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데, 어떻소?' '고작 이틀 간 자세를 봐줬을 뿐입니다. 그 정도로 몇 달 쉰 공백을 채우는 건 무립니다. ' 카셀이 대답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느쪽이 이길지 지켜봐야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힘으로 그들을 누르는 것보다 그 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 카셀의 말에 즉시 세이게이 장군이 이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이쪽에 최소한의 군사력이 있을 때 통할 이야기요.' 국왕도 충분히 그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다. '원군은 어떻게 되었소?' '약속한 병력 중 이 백 명의 보병만 당도했습니다. 나머지는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두나단이 말했다. '당장은 큰일이 없다 해도, 앞으로가 걱정이군 ' 왕은 여전히 소심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전전긍긍해 했다. 카셀은 아무 말도 하지 많았다. 그 역시 같은 일로 고민하고 있었다. 모두와 함께 동쪽 성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지금도 카셀은 그 걱정을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장군과 네가 상의한 바는 어떤 거냐? 이 쪽으로 도망처 올 게 분명한 검은 사자 백작을 성 안으로 들일 생각인가?" 쉐이든이 물었다. 동쪽 성문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이 네 명의 하얀 늑대들을 보고 부동 자세를 취했다. 성문의 위쪽 망루에 던멜과 세이게이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국왕의 명령은 아직 유효해. 이 성으로는 누구도 들이지 않겠어." "그럼 따로 우리에게 말 할 것도 없는 생각이었군." "동의 하는 거지?" "네가 행동을 했으니 우리는 따라야지." 쉐이든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캡틴 카셀!" 그저께부터 왕실 기사단으로 임명된 세이게이 장군의 부하 기사들 중 하나가 다가와 보고했다. "지금 동쪽에서 검은 사자 백작이 경호원들을 이끌고 이 쪽을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망루에 오르십시오." "알겠소." 카셀은 굵은 목소리로 대꾸하고 모두와 같이 계단을 올람다. 일부 병사들은 깃발과 창을 두세 개씩 쥐고 있었다. 그들도 카셀이 지나갈 때마다 '캡틴 울프 라고 공손히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셀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정말 쫓아내도 되겠어?" 아즈윈이 말했다. 계단을 몇 개씩 한꺼번에 뛰어오를 때마다 그녀의 한 갈래로 땋은 머리가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비록 오늘 전투에서 졌다고 해도 그 자의 어마어마한 후방 병력이 여기에서 하루 거리 밖에 안 되는 영지에 있어.거기가 레앙이던가? 괜히 쫓아냈다가 나중에 복수 당할걸." "못 해." 카셀은 단언했다 "우와, 그냥 막 확신해 버리네? 뭘 근거로?" "붉은 장미 백작도 마찬가지야. 어느 쪽도 우릴 공격하지는 못해. " 카셀은 세이게이 장군에게 살짝 목례하며 그 옆에 섰다. 이미 검은 사자 백작과 그 경호윈들은 성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세이게이 장군이 동의를 구하는눈짓을 보내자, 카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장군은 손을 올렸고, 망루에 대기하고 있던 다섯 명의 지춰관이 동시에 깃대를 세웠다.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오십 명의 병사들이 팔에 끼고 있던 깃발과 창을 일제히 치켜세웠다. 밖에서 보면 성 안에 꽤 많은 병력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제 작전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카셀은 두 백작을 상대로 그런 속임수를 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으나,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간단한 속임수지만, 상대가 애써 병력을 파악하려 애쓰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으리라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카셀도 동의했었다. "장군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병력이 있다는 것만 상대에게 보여주면 된다더군.. 사실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는 건 우리 만이 아니야. 저들도 우릴 적으로 삼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거야. 그리고 정말 국왕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노르만트를 함부로 공격하겠어?우리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한 쪽은 적이 둘이 되는 셈인데," 카셀이 설명했다. "반대로 어느 쪽도 우릴 신경 안 쓸 수도 있지. 만 명을 가지고 있는데, 몇 백 명을 염두에 두겠어?" 쉐이든이 조용히 카셀의 옆에 섰다. 카셀은 검은 사자 백작이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조심스립게 고개를 내민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그런지 확인해 봐야지." 점은 사자 백작의 검은 말은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들어을 정도로 멋진 말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카모르트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데 카셀은 지금 타고 있는 말이 그 말 이라고 확신했다. 오고 가는 농담 중에 라이온 기사단의 갑옷이 검게 된 이유가 저 말의 털 빛깔에 맞추기 위해서라는 게 있을 정도였는데,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럴 가치가 있어 보였다. 딱히 백작이 컨트롤 하지도 않는데, 그 검은 말은 바닥에 네 다리를 박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꼿꼿이 세운 그 말 위에 바딩 정도 되는 기사가 앉아 있다면 능히 홈만으로 병사 일백 명은 쫓아낼 성 싶었다. 검은 사자 백작은 좌우로 뒤따라온 경비병들이 세 명씩 서자 숨을 고른 후 큰 소리로 외쳤다. "성문을 열어라." 이미 그 문제에 대해서는 명령을 내려줬을 테지만 확인 절차를 밟기 위해 성문지기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카셀은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 후 그가 검은 사자 백작을 맞이 하기 위해 나서려 하자, 세이게이 장군이 어깨를 잡았다. "내가 하겠소." 이미 대처에 대해서는 합의를 했으니 누가 나서도 상관 없었다. 카셀은 많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어 물러났다. 사실 검은 사자 백작처럼 까다로운 상대를 대신 맡아준다면 환영할 일이었다. 카셀의 관점에서 그는 지금까지 만나본 중 가장 거북한 대화 상대였다. 물론 아버지는 제외하고. "나는 카모르트의 장군 쟝 세이게이 장군이오. 검은 사자 백작 오랜만이구려 ." 장군은 망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쟝 세이게이! 그대가 또 그 자리에 설 정도로 카모르트에 인재가 없었는가? 비록 패했으되, 캡틴 웰치와 정면 승부를 벌였던 길터 장군의 영혼이 울고 있겠군 "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으나 검은 사자 백작의 몇 마디 말에 장군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서 성문을 열고 나를 맞으시게, 세이게이 장군. 긴 이야기는 안에서 하고 싶군." 카셀은 장군이 그럽시다, 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만큼 장군은 백작의 첫마디에 기가 꺾여 있었다. 하지만 장군은 과감하게 거절 했다. "그럴 수 없소, 백작. 폐하께서는 당신과 붉은 장미 백작 둘 모두 노르만트에 입성하는 것을 금지하셨소. 이미 들었다고 알고 있소만? 특히나 전쟁에 패해 후퇴하는 이를 받아들이면 이후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를 일이라서 " "나를 받아들이지 않아 터질 일은 생각지 않는거요? 대체 왕실에서 그 동안 어떤 회의가 오고 갔단 말인가? 통탄한 일이로군, 아직도 모르겠소? 내가 없을 경우 노르만트에 벌어질 일을 예상할 인재가 왕실에 없단 말이오?" 검은 산자 백작은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아니면 그 의견 조차 캡틴 울프를 대변하는 말이오, 장군?" "나는 오직 국왕 폐하의 의견을 대변할 뿐이오." 검은 사자 백작은 장군의 옆에 카셀이 있나 살폈으나, 카셀은 뒤로 한참 물러나 있어 그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백작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 말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오늘 전투에서 패했다 해도 내겐 아직 일 만의 군대가 있소, 장군. 난 단지 한 번의 전투에 패했을 뿐이지, 전쟁에 패한 건 아니오. 그런데도 날 패잔병 취급하는 거요? 또 내가 혹 못된 마음을 먹고 그 일만의 병사를 움직인다면, 고작 왕실의 경비 몇으로 어찌 이 넓은 노르만트의 성곽을 막을 수 있겠소?" "경비의 슷자는 중요한 게 아니오. 또 난 그 숫자가 적다고 생각하지도 않소이다. " 장군은 보란 듯이 성 외부에 내보인 깃발과 창을 가리켰다 "어디서 윈군이라도 끌고 왔소?" "날 퇴물로 치부하느라, 나름대로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고는 생각 못했나 보구려, 백작 " 장군은 이제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백작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셀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말재주와 협상에 관한한 검은 사자 백작은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뜨려도 기어올라올 만한 자였다. "그 정도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니 꽤나 처량 하군, 세이게이 장군. 그럼 어디 그 깃발과 창이 아닌 병사들의 얼굴이라도 모두 보여보시게. 그래, 지금 그 정도 병력으로 감히 나 뤼미에르를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 백작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러쳤다. "협박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물러나시오. 우린 당신을 공격하고 싶지 않소?' "우리? 거기에 당신이 아닌 다른 누가 또 있소?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우리'라는 단어를 선택한 거요? 지금 날 쫓아내는 게 당당한 자신의 의견이라면 어디 '나'라고 직접 지칭해 보시오. '나 쟝 세이게이가 검은 사자 백작을 성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물아내고 있다!' 라고 말할 자신이 없는 건가?" 백작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게 도발하고 있었다. 장군은 카셀이 말리기도 전에 머리를 망루의 바깥으로 한참 더 내밀었다. "그렇소, 검은 사자 백작. 이것은 내 의견이오. 모든 책임을 지고 내가 당신을 이 곳에 들이지 않을 거요." 검은 사자 백작은 일부러 크게 웃으며 말했다 "가소롭고도 불쌍하도다, 늙은 장수여. 오기를 부릴 곳이 없어 내게 소리를 지르며, 다시 얻은 장군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참으로 무리하는군. 장군, 지금 그대에게 필요한 건 벽난로 앞의 안락 의자와 같이 늙어갈 개 한 마리뿐이오. 칼 한 자루 들힘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대체 뭣 하는 짓이오?" 세이게이 장군은 백작의 말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직 나이가 들어간다는 괴로움을 겪어본 적이 없는 카셀은 백작의 말 어디에 이토록 늙은 장수의 힘을 빼버릴 마력이 있는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셀은 나서지 않았다. 장군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적으로 더 강한 남자였다. 속 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장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백작의 말에 대꾸했다. "백작, 지금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알아야 할거요. 그런 말을 하여 내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생각 하는 거요, 아니면 내가 백작의 말에 수긍하고 성문을 열 거라 생각 한거요? 그저 자기 만족에 불과할 뿐이오. 그런다고 성문이 열리지는 않소." 카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앞에 서 있을 때 친구들도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을까?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 주고 언제나 뒤에서 아무 말 하지 않는 하얀 늑대들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열리지 않는 성문에 골머리 않았던 게 하루 이틀 이야기는 아니지" 백작은 기분 나쁘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창과 깃발을 들고 있는 병사들도 긴장하며 팔을 떨었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무장하고 있는 병사들도 장군의 눈치를 살폈다. 장군 역시 지금까지의 격렬한 언쟁보다 되려 백작의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장군의 긴장된 분위기는 병사 들에게도 전염되었고, 병사들은 이제 뒤에 서 있는 카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셀은 팔장을 낀 채 고개를 떨구고 뭔가 생각하는 척 했다.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 었다. 카셀은 타이밍을 기다렀다 "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불상사가 언제 터질지는 두고 볼 일이오. 장군, 정말 국왕 폐하가 홀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백작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거기 있는 병사들이나 뒤에 숨어있을 대신들도 그리 생각하는 가? 정말 지방 영주들에게 끌어낸 얼마 안되는 원군이나 왕실의 경비병 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로 나나 쟌스테인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듣거라,노르만트의 병사들이여.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그대들이 따르는 군주가국왕 폐하며, 내가 모시는 하늘 아래 단 하나 뿐인 군주가 국왕 폐하라면 지금 성문을 열었어야 했다.이후에 들이닥칠 장미의 군대가 나만큼이나 자비심이 많길 빌어야 할 것이다. " 백작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경비병들도 차례로 백작의 뒤를 따랐다. 성 내의 병사들은 숨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세이게이 장군도 돌아서는 백작의 뒤에 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백작이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가준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쏜즈의 기사 열 둘도 꺾지 못한 군대로 국왕 폐하를 지키겠다는 건 억지 아닙니까, 뤼미에르 백작?" 카셀이 장군의 옆에 서서 소리 높여 말했다. 세이게이 장군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검은 사자 백작은 우뚝 섰다. 그는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말을 완전히 돌렸다. "캡틴 울프. 그대가 거기에 있다는 건 내 진작 알고 있었지. 그 참견하기 좋아하는 혓바닥을 지금까지 묶어두느라 고생이 많았군." 백작은 숨기고 있었던 적의를 한꺼번에 카셀에게 토해냈다. 카셀은 괜히 나섰나 하는 후회가 불쑥 일어났다. 어쩌면 카셀이 나오길 바라며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이대로 두면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장군이나 국왕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가 떨어질 지 몰랐다.그래서 카셀은 지금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오히려 나서지 않느니만 못 할 결과를 낳을 것이다. "뤼미에르 백작, 당신을 이 성에 들이면 쟌스테인 백작은 그가 스스로 경고했던 대로 이 곳으로 쳐들어 올 거요. 하지만 막을 수 있습니까? 당신의 그 군대로? 우리의 군대로는 당신의 군대도 막을 수 없소. 그런데 검은 사자 군을 꺾은 붉은 장미 군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이오?아니면 최소한 나와 내 친구들이 12 쏜즈를 막아낼 테니, 나머지는 백작의 군대로 막아줄 수 있소? 아니, 그건 너무 힘들지. 그런 거 보다 차라리 지금부터 이 쪽을 향해 올 붉은 장미 백작과 협상하는 게 더 쉽지 않겠소?" "어리석은 소리! 쟌스테인과 협상 따위를 할 국왕 폐하가 아니네 ." "나라면 할 거요." "허면 현 시점에서의 그 자잘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먼 훗날의 내 분노를 받아들일 생각인가, 캡틴?" "그럼 공격해 오시오. 노르만트라는 땅덩어리는 어디로 달아나지도 못하니까." "그 작은 병력으로 이 쪽 대군을 맞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하얀 늑대라는 존재가 대단하다 그 뜻인가?" "검은 사자 백작은 레앙을 비우고 여길 쳐들어 올 정도로 어리석 은 위인이 아니란 뜻이오." "이 낮은 성벽을 공략하는 데에는 레앙을 비울 필요도 없다. " "그건 모를 일이오. 헌데 애초에 이 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이유를 잊으신 건 아니오? 당신의 말이라면 지금이라도 추격대를 따 돌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 백작은 무섭게 치켜 뜬 눈으로 카셀을 한참이나 노려보았고, 카셀도 지지 않고 그를 보아보았다. 옆에서 보는 이가 더 긴장될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렸다. "캡틴 카셀, 다음에 날 다시 만날 때는 아마도 그 쪽에서 날 올려다보고 있을 걸세 " 그는 마침내 말머리를 돌려 달려갔다. 옆에 붙은 경호 기사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냥 보내지 그랬소, 캡틴?" 장군이 지금까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물러서면 앞으로 더 힘들어집니다. 그 보다 붉은 장미 군의 진로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곧 정찰병이 돌아을거요. 승리한 쪽이든 패배한 쪽이든 군대가 우리 쪽을 향하면 황색기를, 그리고 둘 다 다른 쪽으로 간다면 흰색기를 흔들라고 해뒀소. 기습을 당할 일은 없소. 하지만 만약 검은 사자 백작이 예고했던 대로 붉은 장미군의 진로가 노르만트 족을 향한다면 우리는 끝장이오." "예, 최소한의 수성을 하려면 적어도 에노아 후작의 원군은 와줘야겠지요. 하지만 붉은 장미 백작은 어설프게 노르만트를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장군이라면 노르만트를 공격하시겠습니까?" "아니, 나라면 이 기세를 몰아 레앙을 무너뜨리고 노르만트는 차후 생각해 보겠소. 그야말로 이 곳은 굳이 지금 손댈 필요 없는곳 이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 카셀이 뒤를 돌아보니, 아즈윈이 쉐이든에게 이번 전쟁의 경과를 자세히 듣고 있었다. 쉐이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아즈윈은 목을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언제봐도 아름다웠다. 그녀가 무심코 카셀 쪽을 보자 그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 었다. "그리고 정말 이 곳을 공격해 온다 해도 그리 쉽게 무너 지지만은 않을겁니다. " 곧 정찰병이 전쟁터 쪽에서 말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고, 그는 흰 기를 흔들고 있었다. 블랙 풋 (Black Foot) 던멜은 언제나 지나치게 높은 곳에 있거나, 인기척 없이 구석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방에서 다른 하얀 늑대들과 함께 한 두 시간 얘기한 후에도 그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더욱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그날도 밤이 되니 아예 모습이 안 보였다 "지붕에 있을걸." 아즈윈은 횃불을 켜놓고 병사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그녀와 캡틴 쟈란의 대결은 의외의 반항을 일으켰다. 모두들 그녀가 저지른 사악한 대결에 겁이라도 집어먹을 줄 알았지만, 많은 성 안의 경비병들이 그녀에게 경술을 배우고자 스스로 청했다. 사실 거기에는 트리제이 쟈란의 대범함도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런 대결을 원한 게 아니었소. 침대에 누워서 계속 그런 생각만 했소. 나도 소설 속에나 나오는 위대한 기사들의 로망을 따르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룰을 지키는 시합을 하고 싶었었소.' 어제 그는 다친 쪽 발을 쩔룩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쟈란의 부하 기사들과 왕실의 병사들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런 대결을 성사시키지 못한 건 내 잘못이었던 것 같 소.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리다. 그런데 내가 따로 정중히 시합을 요청했다면 당신은 받아 주었겠소?' '내가 대결을 피할 사람으로 보이던가?' '아니오.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 같은 명성을 가진 기사라면‥‥‥‥ '가슴을 펴고 다가와 요청하는 기사의 손을 내치는 사람이 아니야, 난! 그리고 사과해야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캡틴이고. 뺨을 후려친 상대도 기억 못 하냐?'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소.' 아즈윈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둘러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리 다친 쟈란은 휘청거리며 강제로 귀를 그녀에게 들이대게 되었다. 그녀는 친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다리로 시합 같은 건 무리지만 배울 수는 있을 거야. 당장 서 있을 정도로만 회복해 둬.' 아즈윈이 팔을 풀어주자 쟈란은 허둥지둥 물러나며 옷깃을 여몄다.언제나 그럴싸하게 기사도를 발휘하는 그도 사실은 일평생 여자와 살 한 번 맞대보지 못한 총각에 불과했다.둘의 재회를 긴장하고 보고 있던 쟈란의 부하들 중 몇 명이 간간히 웃음을 터트렸다. 쟈란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어쨌든 캡틴 울프에게도 사과를 전해주시오.' '캡틴은 그런 거 신경 잘 안 써. 오히려 내가 너무 과하게 복수했다고 생각할 걸.' '그럼 다행이고‥‥‥ 아, 또 하나 부탁드릴 게 있소.' '해 .' '내 부하 기사들의 수업을 맡아 주실 수 있겠소?' 아즈윈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자신을 무참하게 짓밟은 이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이토록 겸손한 면을 지닌 그를 지나치게 비하해서 생각했던게 떠올라 그녀는 되려 당황했다. '뭐, 배울 의향이 있다면야..' '고맙소.'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그다지 배울 의향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쟈란보다 더 아즈윈을 대함에 거리낌이 큰 것 같았다. 그럴 때 왕성한 배움의 의욕을 보인게 왕실의 경비 병사들이었다. 이전부터 가르쳐주는 게랄드와 아즈윈이 합세하니 왕실의 훈련장은 활기를 띠었다. 이내 그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름대로 자기들끼리 훈련의 중심에는 캡틴 쟈란이 서게 되었다. 쟈란은 절룩거리면서도 매시간 훈련장에 나와 그들을 지휘했고, 대장이 그러니 부하 기사들도 꾸물거리며 훈련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발등을 찍어버린 아즈윈은 더더욱 미안해졌다. 하지만 쟈란은 인생의 교훈을 얻은 상처니 괜찮다며 정중하게 말했다. 대체 그 웃기는 대결에서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모르겠다며 아즈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처해진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주자, 카셀이 아즈윈 대신 나섰다. 카셀은 세이게이 장군과 작전 회의를 하는 자리에 그를 불렀고, 스쳐가는 말로 대뜸 말했다. '아, 그리고 왕실의 경비병 중에서 자질이 뛰어난 병사들을 골라 새로운 왕실 기사단을 꾸려주시오, 캡틴 쟈란 ' '내, 내가 말이오?' 왕실의 높은 사람들만 잔뜩 있는 자리에 불려 나와 영문을 모르던 쟈란은 대단히 놀랐다. 그는 자신의 뺨을 때린 사람에게 태연하게 높은 직책을 주는 캡틴 카셀을 오히려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카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미 두나단 대신과 루오르 대신께서 당신의 행적을 살펴본 바 캡틴의 자리에 앉아 있기에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이 비상 체제가 끝날 때까지 임시로 왕실 기사단의 캡틴을 맡아주시고, 그 후에도 실종된 캡틴 프란시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정식으로 국왕께서 직위를 내려주실거요.' 쟈란은 애써 침착해 보이려고 부동자세를 취한 채로 그러마고 대답했다. 카셀은 마지막에 그 일에 아즈윈이 끼어있다는 것만 말 해주었고, 그는 큰 감동을 받았다. 카셀로서는 비어있는 왕실 기사 단의 캡틴으로 적합한 인물이 나타나 준 게 되려 고마웠다. 그 후 병사들의 훈련은 더욱 사기가 올라갔다. 게랄드는 의욕 넘치는 초짜들을 가르친다는 것에 신이 났다 '울프 기사단 놈들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거든!' 어쨌든 이 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간다는 것에 카셀은 안도 했고, 지금은 던멜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지붕에 있어? 지붕엔 왜?" 훈련을 받던 병사들은 카셀을 보자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왕실 내에서 그를 대하는 정중한 태도에 많이 익숙해졌다지만, 여전히 이런 건 신분 낮은 농부가 받기 부담스러운 예우였다. '항상 주위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한가 봐." 아즈원은 뒷짐을 지고 훈련장을 걸어가며 말했다. "우리도 던이 뭘 생각하는 지 잘모른다는 거 알잖아. 안그래도 자기 표현이 부족한 녀석이었는데, 그 암살자 사건 뒤로는 더욱 표현이 줄었어. 가끔은 잡담도 하고 농담도 하고 그했는데 말야." 카셀은 등불 옆에 서서 훈련장을 훑어보았다. "병사들 훈련은 어떤 거 같아?" "꽤 괜찮아. 애초에 왕실의 경호를 맡을 정도로 재능 있는 자들의 모임이라 배우는 것도 빨라." "하지만 숫자가 모자라겠지?" "내일부터는 원군으로 들어온 병사들도 훈련에 참여한다고 했는데, 그 숫자 다 합쳐봐야 저쪽 백작 군대에서 한 부대 정도겠지. 정면 대결은 무리야. 세이게이 장군은 거기에 대해 뭐래?" "지금 지도 펼쳐놓고 머리를 감싸 쥐고 있어. 조만간 머리털을 모두 뽑아버리고 말 거야." 아즈윈은 웃다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카셀은 그녀의 손가락 끝을 쫓아갔고 별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기 있다. " "뭐가?" "던멜 ." "아‥‥‥‥ 난 안 보이는데?" "저기 세 번째 탑 지붕."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위치는 대강 알았다. "저게 보여?" "사람이라는 것만 식별될 정도야. 하지만 저 높이의 지붕 위에 있을 사람이 던멜 말고 누가 있겠냐?" "어, 고마워 가볼게." 카셀이 가려 하자, 아즈윈이 갑자기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어이, 캡틴. 잠깐." 하도 그런 일을 많이 당해 이제는 당황하지도 않고 카셀은 대꾸했다. "선생이 다른 남자에게 이러고 있으면 제자들이 질투할 걸.""호오, 별 걸 다 신경 쓰셔? 이봐, 캡틴. 머리가 빠지는 건 세이게이 장군만이 아닌 것 같더라. 너 요새 매일 밤 뭘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는 거야? 어제도 밤 샜지?" "알고 있었어?" "그럼! 옆구리가 허전해서 누굴 껴안고 자면 좋을까 고민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불이 켜 있는 네 방을 봤지. 양초 값이 공짜니까 마구 쓰고 보는 건 아닐 데고 대체 뭘 그리 열심히 하는 걸까 궁금해서 다음날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온갖 책이 스무 권쯤 쌓여있던 데?" 아즈윈은 뒤에시 껴안은 채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공부하는 거야. 그보다 껴안을 사람 없어서 잠이 안 오면 언제 든 와. 안아주는 것뿐이라면 언제든 응해줄 테니까." 카셀이 대담하게 말하자 아즈윈은 죽는다고 웃어댔다. "그런 농담 누구한테 배운 거야? 게랄드가 그러래? 걔는 주제에 밝히면서 내가 안아달라면 꼭 도망가더라?응?그래서 그러는 거야?" "아니야 네가 항상 이런 걸로 날 놀리니까 나도 익숙해져야 하잖아, " "에이, 설마 농담이기만 하겠어? 캡틴처럼 멋진 남자라면 나는 언제든 준비 되어 있어." "그만 좀 해둬.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순진해서 그런 말 내 뱉으면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 앉는다고. 놀리는 거라면 다른 소재도 많잖아." "넌 좀 더 여자에게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성 안의 시녀들 중에서 널 탐내는 여자가 아주 많아. 물론 옆에 내가 있으니까 감히 못 건드리고 있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 "뒤에서 덮치는 건 제발 너 하나로 족해. 그보다 난 시녀들이 무서워서 날 피하는 줄 알았어," "수줍어서겠지." "고향에 있던 여자들도 그래서 날 피하는 거였을까? 아니라고 보는데?" "넌 도시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타입이야.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돼 " "그거 아주 도움 되는 말이군." 카셀은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아즈윈, 캡틴이랑 연애질 그만 하고 와 봐. 의논할 게 있어." 멀리 있는 게랄드가 손짓했다. 의욕이 넘치다 못 해 폭발하는 게랄드는 최근 덩치 좋은 병사들만 가려 뽑아, 소수 인원만으로 성문을 지키는 전략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즈윈은 카셀의 뺨에 살짝 키스하고 등에서 떨어졌다. "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 너무 고민만 하고 살면 일찍 늙는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게랄드 쪽으로 뛰어갔다. 땋아 늘어뜨린 그녀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여전히 카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카셀은 그녀의 입술이 닿은 뺨을 어루만지며 허발하게 웃었다. "잘 하긴‥‥‥‥ 칼날을 목에 달고 다니는 기분인데. 카셀은 아즈윈이 가리킨 탑으로 올라갔다. 던멜은 탑 지붕 꼭대기의 제일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카셀은 창문에서 지붕으로 올라 가는 곳에 발을 디뎠다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아찔해서 눈을 감았다. 대체 이런 곳이 왜 좋다는 거야? "던멜 " 카셀은 상대가 목소리를 키울 필요가 없는 대상인 걸 알면서도 크게 그를 불렀다. 던멜은 이미 카셀이 지붕에 오르려고 낑낑댈 때 부터 알고 있었다. 겨우 지붕에 오른 후 카셀은 균형을 잡고 손을 흔들었다. 이마에는 식은 땀이 맺혀 있었다. 던멜이 수화로 간단히 말했다. '조심해.거기 미끄러워.' 카셀은 이제 간단한 수화를 알아들으니 곧 대꾸도 했다. '그 쪽으로 간다 ' 그 순간 바닥을 잘못 밟아 뒤로 미끄러졌다.카셀은 필사적으로 몸의 균형을 앞으로 유지하려 했으나 경사가 밑으로 향하고 있는 곳에서 이미 넘어지기 시작한 몸을 앞으로 당기기란 불가능했다. 이미 몸은 뒤로 갈수 없는 곳까지 갔고, 갑자기 발 밑이 허전해졌다. 순간 카셀은 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모든 위험 속에서도 온갖 우연과 필사적인 노력 덕에 살아 남았던 것이 이 한 순간 별 거 아닌 사고로 끝장날 상황이었다. 단숨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던멜은 카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카셀을 지붕 위에 패대기 치듯 끌어당기며 자신도 옆으로 쓰러졌다. 카셀은 머리를 들이박으면서도 몸이 고정되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던멜은 다시 일어나 손을 잡고, 그를 지붕의 앉기 쉬운 곳까지 인도해주었다.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지붕에서 실족사 했다는 대단한 뉴스거리를 제공하고 세상 하직할 뻔 했군." 카셀은 길게 숨을 몰아 쉬었고, 던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카셀은 앉은 후 몇 번이고 자세의 안정성을 따져본 후에야 바닥에 짚고 있던 손을 뗐다.그리고 수화로 말했다. 그의 수화는 아주 단순했고, 어려운 단어는 피해가야 했다. '높은 곳, 좋아?' '좋아해.' '왜? 안 무서워?' 난 떨어지지 않아.무섭다는 건 자신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있기 때문이지.' 모르는 단어는 카셀이 즉시 입으로 물었고, 던멜은 어둠 속의 달 빛 만으로도 그 입 모양을 알아 채고 대답했다. 카셀은 이번 대화에 서 '가정' 이라는 단어를 배웠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그런 식으로 단어를 익혔다. 던멜은 같은 질문을 반복할 때도 짜증내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오히려 굳이 익힐 필요가 없는데 수화를 익히려 하는 카셀을 대단하게 여졌다. '난 별로 먼 미래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너도 그 쪽까지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넌 길지 않은 시간 동안만 나와 함께 할거다. 이 일이 끝나면 우리는 헤어질 테니까. 내 수화를 반이나마 배울 즈음에 넌 그 수화를 더 이상 써먹을 곳이 없어질 거다. 그런데도 그리 열심히 배우는 이유가 뭐지?' 특별히 던멜이 그걸 의도해서 말을 꺼낸 건 아니었으나, 새삼 하얀 늑대들 중한 명이 '넌 완전한 하얀 늑대가 아니다' 라고 말하니 카셀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잠깐 얼떨떨해 하다가 카셀은 더듬더듬 수화로 말했다. '지금은, 하얀 늑대. 그래서, 배운다. ' 맞아. 넌 하얀 늑대지. 누구도 부정 안 해.' 카셀은 모르는 손 모양이 나와 또 입으로 물었다 "거 절?" "아, 부정 !" '그래 누구도 부정 안 해 ' 카셀은 다시 수화로 말했다. '하얀 늑대, 계속, 못 해. 안다. 하지만, 배우고 싶다. ' '하얀 늑대들로 계속 있는 건 아니지만, 배우고 싶다고?' '하얀 늑대들로 계속, 아니지만 배우고 싶다. ' '왜 굳이 배우려고 해?' '대화. ' '대화를 위해서?' '대화를 위해서.' 카셀은 금방 던멜의 수화 를 따라했다 '이 정도 의사 소통이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또 주위에 친구들도 도와줄 것이고.' 카셀은 또 '의사 소통'이라는 단어를 몰라 쩔쩔 맸다. 던멜은 웃으며 그 뜻을 설명해 준 후 말했다. '사실 난 이 수화를 울프 기사단에 가르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그 고통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누구도 너처럼 이렇게 열심히 수화를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거든. 아직도 내가 수화로 말하면 통역이 필요한 녀석들이 반이야.' 카셀은 웃음을 터트렸다.' 넌 벌써 내 농담을 듣고 웃을 수 있는 정도니까 굉장히 빠른 거다. ' 하얀 늑대들 중, 제일 잘 하는 사람, 누구?" '쉐이든. 속도가 조금 느릴 뿐 거의 나와 같다.나머지 셋도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 알아 듣는 건 내가 아무리 빨리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로일은 표현이 조금 서툴지.' '아즈윈, 어떻게 생각해?' '아즈윈에 대해서?' '아즈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어떤 면?' '날 껴안아.' 던멜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난 여자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아. 성적인 욕망을 버린 지도 오래고. 하지만 가끔 그런 모습을 보면 유쾌해서 좋지. 적응하면 아즈윈 만큼 편한 여자도 없다. 또 자유분방하지만 아무나 껴안는 건 아니야. 내가 보기에 아즈윈은 널 좋아하는 것 같다. '날 좋아해?' '어떤 의미에서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까? 아즈윈은 우리 모두를 좋아해. 하지만 로일과 쉐이든은 각별해, 나나 게랄드를 그 둘과 다르게 대하지도 않지만, 가끔 로일이나 쉐이든을 껴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약간 다르지. 아즈윈 쪽에서 안아준다는 표현이 정확할 거야.' '안아준다, 그런 의미?' '너에게도 그런 말을 했구나?' '안아주고 싶다, 그 말, 내게도 했다. ' '그 말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아. 자기 딴에는 밝히고 성적으로 개방적이라고 떠들지만, 사실 스킨쉽 좋아하는 고양이에 불과해." '아즈윈에게는, 적응할 시간, 더 필요해.' '그보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안했다.' '어떤 질문?' '대화를 위해서라면 굳이 수화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질문. 카셀은 잠시 생각했다가 최대한 쉬운 단어를 찾아내어 말했다.'던멜을 알고 싶어서.' '나를? 내 어디가 궁금해서?' '설명 못 해, 그것까지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던멜은 고개를 갸웃하자, 카셀은 추가로 설명하기 위해 열심히 손과 머리를 움직였다. 던멜은 그의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제 그의 말은 상당히 앞뒤가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의 세계, 이해해야 한다. 그 사람의 세계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난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 그래서, 너의 말, 배워야 한다. ' '납득할만한 이유군.' '하지만 오늘은 그만. 힘들다 나 갈래,' 카셀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던멜은 카셀이 나타나늘 순간 제일 먼저 그가 뭔가 추궁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아직 암살자 집단에 대해 왕실에 말하지 않았으나,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하얀 늑대들이, 특히 캡틴인 카셀이 떠안고 있었다. 그 일이 번져 왕실에 피해가 가면 책임은 당연히 그에게 돌아간다. 카셀은 서둘러 그걸 해결하고 싶어할 것이고, 그 사건의 열쇠는 던멜이 쥐고 있었다. 그러니 던멜을 찾아온 카셀이 할 이야기란 그 쪽일 것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카셀은 열심히 던멜의 수화만 배우고 볼일 다 봤다며 가려했다. 이게 의도한 거였는지 던멜은 판단이 안 섰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기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니 오히려 그는 의심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말도 안 통하는 벙어러와 친구가 되고 싶겠는가? 게다가 던멜이 가진 분위기는 아무래도 접근하기 힘든 쪽이었다. 울프 기사단 내에서도 꽤 많은 이들이 던멜을 가까이 하길 꺼려했다. 의도야 어찌 되었건 이제 그건 상관 없었다. 카셀은 최소한 노력하고 있었다. 던멜은 그 노력에 보답하고 싶었다. '난 여기 있을 데니, 친구들에게 대신 전해 줘.' '뭘?' '놈들이 오고 있다. ' '누구?' '블랙 풋.' 카셀은 지붕을 내려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카셀은 실제로 던멜과 이야기 하는 내내 블랙 풋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 놀라움은 컸다. '많아?' 한 둘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야.' '목표는 우리?' '게랄드가 공격 당한 건 나도 의외였다. 하지만 코홀룬에서도 목표는 우리가 아니었다. ' '그럼 누구?' 던멜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수화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카셀은 금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 그리고.' 던멜은 수화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카셀은 그게 왠지 쑥스러워서 말을 하길 꺼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블랙 풋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까먹고 있었던 거다. ' 던멜은 한 차례 웃었다가 다시 진지하게 수화를 이어갔다. '블랙 풋은 강하다. ' '너희들을 상대한 것, 세 번. 모두 너희에게 졌다. 강하다? 그리 생각 안 해.' '우리가 월등한 것뿐 아마 일반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란 유령 과도 같을 것이다. 나 역시 그 곳 출신이었고, 그 곳의 수제자였다. 마스터 퀘이언 이전의 내 스승은 블랙 풋의 길드 마스터였지.' 카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던멜의 수화는 계속 되었다. '우릴 노린 암살 집단이 블랙 춧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당황 했던 이유는그곳에 내가 알던 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르했던 이들, 나와 동료였던 친구들, 그곳에 있을 때의 내 자신에 대한 미련도 없고, 지금 거기 있는 암살자들 중 내 얼굴을 아 는 이들도 없을 테지만, 나로서는 블랙 풋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놀랄 수 밖에.' '이해한다. 내 고향사람들, 여기서 만나면, 날 못 알아봐도, 나, 당황할 거다. ' '내가 가진 암살 기술, 그 족의 고수들도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날 가르친 블랙 풋의 길드 마스터는 마스터 퀘이언과도 정면 대결을 할 정도로 강했다. '그럼 그 길드 마스터는?' '죽었다. 아란티아의 여왕 앞에서, 퀘이언에게. ' '블랙 풋, 그럼, 지금, 네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 '어째서?' '블랙풋의 길드 마스터, 그 수제자, 모두 퀘이언에게 죽었다 남은 이들, 암살 기술, 안 가지고 있을거다. ' '난 안 죽었어.' '블랙 풋의 암살자, 아니다 년, 하얀늑대다. 그러니까, 블랙 풋의 수제자, 죽었다.' 죽었다라는 표현을 잘못 쓴 것인지, 아니면 의도해서 쓴 것인지 던멜은 알기 힘들었다. 카셀은 그 말만 마치고 지붕을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곧 지붕 끝에서 멈췄다. 밑에서 개를 끌고 왔다 갔다 하는 경비병들이 개미 처럼 작게 보이니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멋지게 대꾸하고 퇴장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내려가는 방향이 너무 위험했다. 균형을 잡느라 좌우로 펼친 손으로는 도저히 수화를 할 수 없어, 카셀은 입을 열어 말했다. "도, 도와줄래?" 던멜은 입으로만 웃으며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경비견을 끌고 이동하는 경비병 두 명이 오늘 아즈윈과 게랄드에게 배운 훈련 내용을 서로 이야기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선생인지에 대한 논쟁이 타오를 무렵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들 옆을 획 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둘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 옷에, 머리를 완전히 감싼 두건을 쓴 그 그림자는 바닥을 기듯 정원을 가로질렀다. 무슨 소리를 들 은 경비견이 귀를 쫑긋 세웠다. "왜 그래?" 경비병은 개가 살피는 족을 무심코 돌아보았다. 그러나 개도 경비병도 뭐가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그치만 난 기사 아즈윈 쪽이 더 좋아." 경비병들이 다시 자기들끼리의 얘기에 열을 올리며 횃불이 없는 쪽으로 사라지자, 정원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는 곧 왕이 기거하는 성 쪽으로 달려갔다. 풀을 밟는 소리만 사각사각 내고 인기척은 전혀 풍기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도 자신의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검은 옷의 형체는 정원에시 벗어나 성벽에 등을 기대고 찰싹 붙었다. 성벽에 타오르고 있는 홰불이 동그랗게 솟은 가슴과 가는 허리를 그림자로 만들어 또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어느 쪽이 그림자이고 어느 쪽이 실체인지 모를 검은 형체가 횃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착지한 곳은 하수도 안이었다. 주위를 살핀 후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바닥에 흐르는 구정물을 피해 하수도를 타고 달렸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녀는 네 개의 칼날이 손등쪽에 달려있는 크로우를 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칼날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이 사이로 쉬익 하는 바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안에서 같은 소리로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네 방향에서 이어지는 하수구가 만나는 곳이었는데, 방 한 칸보다 조금 큰 공간이었다. 왕실의 부엌 바로 아래 쪽 하수도였다. 촛불 하나 분량도 안 되는 한 줌의 빛만 존재하는 곳에 네 명이나 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있었다. "늦었군, 헤더 " 복면을 벗으며 다가가는 그녀에게 그 중 한 명이 말을 걸었다. 가래가 끓는 듯 듣기 싫은 그의 목소리에도 헤더는 친근하게 대꾸 했다. "안녕하십니까, 옌스?" 옌스는 앞니가 부러져 있었고, 뺨과 입술의 찢어진 상처에는 딱지가 앉아 있는 남자였다. 험상궃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고, 죽인 사람의 숫자도 조만간 세 자리가 될 암살자였으나,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며 후배들을 챙겨주는 착한 남자라는 걸 헤더는 잘 알고 있었다. "어때? 왕실에는 들어갈 만 하던가?" 그는 쇠사슬 끝에 달린 쇠구슬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과연 왕실 경비더군요. 병사들의 수준이야 어찌 되었든, 체계적으로 경비가 갖추어져 있어요.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처음 찾아봤던 딱 하나. 더 이상 없습니다. 메첼 예정대로 퇴로는 확보됐습니까?" 헤더는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끝이 구부러진 나무 지팡이를 든 여자 마법사의 옆에 않았다. 지팡이 끝이 불규칙적으로 환해졌다가 밝아지길 반복하고 있었는데, 이 곳의 유일한 불빛은 거기에서 나오고 있었다 "성의 정원을 통해 이 자리로 되돌아 왔다가 하수도를 타고 성 밖 까지다. 미행하긴 힘들고, 달아나긴 쉬워. 중간에 계획이 틀어진다면 각자 행동할 수 밖에 없어. 다른 퇴로는 없다. " 메첼은 한 쪽 손목 아래가 없었다.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지금은 퀭한 눈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뺨에는 보기 싫은 흉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항상 꾸미기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코홀룬에서의 임무중 그흉터를 얻은 후로는 입술 화장 한 번 하지 않았다. 헤더는 그녀의 붉은 입술과 남자를 몸살나게 하면서도 허락하지 않는 요염함을 항상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그 때와 비교해서인지 아파 보였다. 그리고 냉정한 그녀답지 않게 자신의 잃어버린 팔에 대한 대가를 누군가는 치르게 될 거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헤더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피곤해 보여요, 메첼." "난 괜참아." "이번 작전은 복수가 아닙니다. 우리의 임무에는 당신의 말을 자른 '그 자'를 죽이는 게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상관 안 해." 메첼은 대꾸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헤더? 정말 우리가 하얀 늑대들을 피해야 하는가?" 하수도 내의 세 번째 사람이 헤더에게 불만을 말했다. 그는 얼굴이 가늘고 코가 길었고 눈썹은 좌우로 치켜 올라가 항상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헤더는 리겐이 뒤 이어 하려는 말을 즉시 막았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게 하지 마세요. 무조건입니다, 리겐. 그들의 명성은 거짓이 아니었고, 우리가 그 명성에 대항하여 정면 승부 할 이유는 없어요. 잭은 내 충고를 듣지 않아 죽었고, 여러분들도 잭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그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겐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암살자라면 누구라도 최고의 표적이라고 인정할 만한 하얀 늑대들이 눈 앞에 있다. 평소에 시키는 일만 하던 옌스 조차도 코홀룬 작전 때는 자진해서 그 일을 맡았을 정도였고, 저런 상처를 얻은 것도 고디머 백작에게 경고만 하고 오라는 말을 듣지 않아서였다. 그런 매력적인 사냥감을 버리고 오라는 게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 있다. 리겐은 작전을 짤 때부터 계속 그 소리였고,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잭이 하얀 늑대들에게 죽었다는 증거도 없잖아. 혹시 아나? 정체를 들켜서 왕실 경비병들에게 죽었을 지도 모르고, 하얀 늑대들이 네 명 정도 달려들어 즉였을지도 모르지." "억지 쓰지 마세요." 헤더는 짧게 끊어 말했다. "뭐가 억지야?" "잭은 하얀 늑대들의 암살 임무를 띠고 왕실에 잠입했고, 사흘 동안의 정찰 끝에 적절한 타이밍을 골랐다고 마지막 연락을 보내왔죠. 물론 제 경고는 무시하고 말이죠. 그런데 엉뚱한 사고를 당했다는 건 억지에요. 내 생각에 잭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시간에 공격했는데도 실패한 겁니다. " "잭의 창술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 하지만 그 녀석은 너한데도 번번히 꺾이는 약골이야. 그런 녀석이 죽었다고 나까지 하얀 늑대들에게 겁을 집어먹고 피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 "리겐. 그만해 둬." 헤더가 한 마디 더 하려고 할 때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휘 저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이번 임무를 끝낸 후 네 욕심을 채우도록 해. 그 때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그런 식이면 동기 부여가 되지 않잖소, 마법사 양반. 임무도 아닌 일로 사람을 죽이는 건 프로 암살자가 할 짓이 아니오." "그럼 내가 의뢰하지. 내 팔을 자른 놈을 정확하게 지목할 테니, 그때 죽여." 메첼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니 리겐도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옌스를 맨손으로 내동댕이쳤다는 놈들과 무모한 싸움을 하고 싶지 많아." 옌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리겐을 노려보았다. 리겐은 입 꼬리가 올라가는 미소를 보이며 손을 한 바퀴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단검이 손가락 사이로 세 개쯤 비어져 나와 있었다. 그의 위협적인 행동에 헤더와 옌스는 금방이라도 뒤로 피할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는 돌발적인 짓을 잘 했고, 그가 단검을 손가락에 끼면 범위 안에 있는 자는 목숨을 내놓고 있다고 봐야 했다. "내 특기는 어디까지나 암살이니까 정식 대결 같은 건 안 해." 그는 다시 손을 접었고,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단검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네 번째의 남자에게 말했다. "조만간 블랙 풋 내의 서열도 바뀔 테니 기대해, 발락." 짧은 회색 머리에 가는 눈을 한 발락은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리겐을 힐끗 봤다가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도 헤더처럼 몸에 착 붙는 검은 옷을 입었는데, 필요한 근육만 붙어 잘 빠져 있는 그의 몸은 옌스와 다른 의미에서 단련된 몸이었다. 송곳처럼 특 튀어나와 하는 말마다 거슬리는 리겐의 행동이 헤더는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팀에 넣고 싶지 않았지만, 잭 마저 죽은 마당에 리겐까지 빼면 작전을 짤 수가 없었다. 현재 블랙 풋 내에서 가장 뛰어난 멤버 다섯 명이 모였는데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바닥까지 떨어진 길드의 명성이 어디까지 추락할 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까지 떨어진 명성을 한꺼번에 회복할 길이기도 했다. 그만큼 길드에서는 이 일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고, 헤더는 자신의 취향대로 팀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변동 사항은 없습니다. 리겐, 옌스가 길을 뚫고, 메첼은 엄호, 제가 표적에 접근하겠습니다. 발락은 퇴로 확보. 질문?" "만약 하얀 늑대들과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만나게 되면?" 리겐이 또 하얀 늑대들에 대해 묻자 옌스가 한 마디 했다. "리겐!" 그러나 헤더는 그 질문을 받아들였다. "아니, 좋은 질문이에요. 그들이 성 안에 있고 만에 하나 우리의 침입을 알아챘다면 불가피한 싸움도 있을 수 있겠죠." 헤더는 부디 리겐이 사고를 치지 않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최대한 방어 위주로 싸우세요. 그것도 둘 이상이 모였을 때만 허락합니다. 정면 대결은 무조건 피하도록 하세요. 다른 질문?" 리겐도 더 묻지 않았고, 나머지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헤더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명령을 내렸다. "시작합시다. " 리겐과 옌스가 즉시 부엌으로 통하는 하수도로 들어갔고, 메첼은 성 외곽으로 통하는 하수도로 들어갔다. 발락도 뒤따라 움직이려 할 때 헤더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발락, 사실 길드 마스터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저는 당신을 이 작전에서 제외했을 겁니다. " 발락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이해할 수가 없군. 언제나 나와 함께 움직이길 원했지 않나?" "당신은 블랙 풋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마스터 칼스텐과 테마르가 돌아오지 않고, 현 길드 마스터가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 이상 당신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나, 하얀 늑대들은 우리가 판단하는 것 이상으로 강합니다. 메첼은 하얀 늑대들의 멤버 중에 우리보다 더욱 뛰어난 암살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다고 했으며 그 자가 자신의 한쪽 손을 빼앗았라노‥‥‥" 발락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걱정 마라. 난 죽지 않는다. 마스터 칼스텐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난 블랙 풋을 지킬 것이다. " 발락은 얼굴에 두건을 쓰고 메첼이 들어갔던 하수구로 들어갔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그의 됫모습은 항상 든든했지만, 오늘만큼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블랙 풋에서 뿐 아니라 모든 암살자들 사이에서 최고라 불리는 칼스텐도 아란티아로 떠난 이후 사라졌다. 확인할 길은 없었으나, 그의 실종은 분명히 하얀 늑대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블랙 풋의 모든 암살자들은 칼스텐이 어떤 모습으로든, 설사 나이가 들어 예전의 기량을 갖추지 못한 모습으로라도 돌아오길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발락이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예전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일을 성공시켜야 했다. 헤더는 복면을 쓰고 하수도의 위로 뛰어을라갔다. 두 명의 병사가 지나가고 좀 걸음이 느린 한 명의 병사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리겐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기척을 완전히 죽이고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그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블랙 풋 내에서도 헤더와 발락 외에는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경비를 선 병사들의 숫자가 적어서 그는 금방 표적이 있는 층까지 올라갈 수 있있다. 계단에 선 경비들은 다른 곳의 경비들보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벽에 붙어 이동하는 리겐의 움직임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계단 입구에 선 병사 하나가 길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리겐은 죽일까 생각하다가 괜히 시체 하나 만들어 흔적을 남걱둘 필요는 없어 그냥 지나갔다. 리겐은 정확한 인원 조차 파악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조직인 블 랙 풋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증거를 남기지 않고 표적을 해치우는 것에 있어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발락에게 밀려 언제나 2인자로 불렸다. 늙어서 임무에 끼지 못하는 길드 마스터도, 위험하고 중요도가 높은 작전이면 언제나 리더가 되는 헤더도, 길드의 유일한 마법사인 메첼도, 리겐을 대단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길 때 한 명을 뽑으라면 결국 발락을 선택했다. 죽었을 게 틀림없는 칼스텐에게 어렸을 때 조금 배운 정도로 그런 믿음을 준다는 게 리겐은 마음에 안 들었다. 그 때 나타나 준 게 하얀 늑대였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이 것은 신이 내려준 기회였다. 이보다 멋진 타이밍에 이보다 멋진 사냥감이 나타나줄 수 있을까?그것도 찾아가기 힘든 아란티아를 벗어나 자신의 앞마당에 얌전히 걸어 들어와주니, 길드 마스터 밖에 모르는 암살 의뢰인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안 늑대들이 카모르트의 국경을 넘을 당시 시도한 첫 기습에 실패한 후 길드 마스터는 최근 성과가 가장 좋은 리겐에게 그 일을 맡겼었다. 그러나 리겐은 다른 암살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그 일을 일부러 맡지 않았다. 사실은 사냥감의 값어치를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옌스와 메첼이 코홀룬에서 당했고, 암살이 아닌 정식 대결에서 가장 능하다는 잭이 노르만트에서 죽었다. 헤더마저 인정했듯, 아무리 발락이라도 그들을 죽이긴 힘들 것이다. 블랙 풋의 가장 뛰어난 실력자들이 속속 실패하며 하얀 늑대라는 존재는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존재로 평가되었다. 리겐이 노리는 바대로! 그에게는 스치기만 하면 열 걸음도 못 걷고 거품 문 채 쓰러져 발버둥치다가 죽게 할 만한 독이 잔뜩 묻어있는 단검이 스무 자루가 있었다. 자신의 서열을 높이기 위해 발락과 시합을 하게 된다면 절대 이런 무기를 못 쓸 것이다. 오직 죽여도 되는 표적에게만 쓸 수 있는 무기다. 설사 검의 신이 강림한다 한들 독이 묻은 단검 스무 자루를 전부 피할 수 있을까? 리겐은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하얀 늑대들 중 하나가 눈 앞에 나타나주길 기대했다. 그런 간접적인 방법이 무시무시한 실력을 지닌 발락과 정식 승부를 거쳐 서열을 따내는 것보다 더 쉬운 길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3층이었다. 카모르트 국왕은 취침시, 침실 바깥에 여러 명이 서성이는 걸 싫어하므로 서너 명 정도의 경비만 둔다고 헤더가 말해주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단과 입구에 배치된 경비병의 숫자로 보면 적어도 이 층에는 다섯에서 여섯 명의 경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리겐은 벽에 찰싹 붙어 발소리 내지 않고 이동하며, 복도에 있을 경비를 살폈다. 몇 명이든 죽이는 건 간단하지만, 소란스러워지면 표적을 몰래 납치해 달아나는 게 불가능해지므로 정확한 상황 파악을 필요로 했다. 특히 의뢰인은 어떤 경우에도 표적이 죽는 걸 원하지 않으니 , 이제부터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시간을 맞췄다면 옌스도 곧 반대편에서 올 것이다. 둘이 동시에 복도로 진입하면 다섯 명 정도의 경비를 소리 없이 전별시키는 것은 충분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기름 등불로 희미하게 밝혀진 왕의 침실 입구에는 창을 든 병사 한 명만 서 있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창을 품에 끼고 있는 폼이 꼭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검게 보일 정도로 진한 갈색의 곱슬 머리가 가슴까지 쳐져 있었고 드러낸 어깨와 팔뚝은 옌스 못지 않은 근육으로 울퉁불퉁했다. 손등 쪽을 보호해 주는 쇠를 덧댄 검은 장갑을 양손에 끼고 있었으나, 그 외에는 갑옷도 투구도 착용하지 않았다. 리겐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래층까지의 경비가 철저했으니 이 층은 경비가 없어도 좋다는 것도 아닐 테고, 저건 무슨 속임수지? 우리가 온 걸 들킨건가?' 리겐은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자신의 추측만으로 후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우선 기다리기로 했다. 곧 옌스가 반대편 복도 끝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그도 리겐과 같은 의심을 하는지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작전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서로 간에 타이밍을 잘 맞추나에 있었다. 헤더는 벌써 표적의 방 창문으로 접근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최종 목적이 암살이라면, 잠입에 가장 뛰어난 헤더가 창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지난번 암살도 잭이 아니라 헤더가 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하얀 늑대들을 경계한 나머지 자신의 실력을 과소 평가했다. 잠입해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게 더 문제인 납치는 근본적으 로 얘기가 다르다. 이 경우 문 앞에 경비가 버티고 있다면 달아나는 건 불가능하다. 러겐과 옌스가 경비를 黑두 죽여야 하는 것도 헤더가 표적을 납치해서 달아날 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옌스가 손가락으로 의견을 물었다. 리겐은 조금 망설이다가 강행을 결심하고 검지로 문 앞의 경비를 가리켰다. 리겐은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소리 없이 하나를 죽이고 문을 열어 표적을 확인한다. 표적이 있다면 헤더가 이미 방치할 준비를 마쳤을 것이고, 표적이 없다면 즉시 퇴각하여 다음 작전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내가 먼저 가겠다. ' 리겐은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낸 후 즉시 달려나가 독이 묻은 단검을 던졌다. 하얀 늑대들에게 쓰기 위해 남겨둔 스무 개 중 하나였다. 아까웠지만 지금은 충분히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단검은 경비병의 얼글 옆을 지나가 벽에 부딪혔다. 빗나갈 지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던 리겐은 달려나가던 걸음을 멈추느라 휘청거렀다. 방금 자다 일어나 숙취에 통퉁 부운 눈으로 던져도 열 걸음 안에 있는 거라면 움직이는 고양이도 놓치지 않는 그였다.특별히 리겐이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매뉴얼대로 만약을 대비하고 있던 옌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쇠구슬을 경비병에게 집어 던졌다. 경비병은 그제야 팔짱을 풀고 자세를 잡더니 날아오는 쇠구슬을 철로 만든 창으로 툭 쳐냈다. 거의 힘도 안 들이고 날아가는 쇠구슬의 방항만 바뀌니 묵직한 쇳덩어리는 벽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혀 돌을 한 움큼 박살냈다. 옌스는 급히 쇠구슬을 자기 쪽으로 되들리고 혹시라도 올 반격을 대비해 왼손에 친 방패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창을 든 경비병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리겐은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한 즉시 두 자루의 단검을 준비했으나 던지지 않았다. 옌스도 되돌아온 쇠구슬을 또 던지지 않았다. 그 경비병은 리겐의 단검을 고개만 젖혀 피했고, 날아가는 도끼 만큼이나 무거운 옌스의 쇠구슬을 한 손으로 막았다. 이것만으로도 뭔가 이상한 자였는데, 그는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소리도 치지 않았다. 둘 다 어리둥절했다. 그 경비는 창을 두 손에 가법게 쥐고 묵묵히 옌스와 리겐을 바라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눈빛이 너무 강렬하여 리겐은 저도 모르게 압도당하는 듯했다. 리겐은 쥐고 있는 두 개의 단검을 던지고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그는 그제야 스무 자루 단검을 모두 써야 할 상대와 만났다는 걸 알았다. "옌스. " "어." 엔스는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해서인지 "하얀 늑대다." "뭐?" 엔스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리겐은 오히려 기뻐했다. "아까 헤더가 말했지? 피치 못할 상황이고, 둘 이상일 때만 수비위주로 싸워라‥‥‥‥ 지금이 그 때 아냐?" 옌스도 다짐한 듯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둘은 약간 뒤로 물러섰다. 창을 든 경비는 고개를 까닥여 뼈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블랙 풋이냐?" 굳이 이야기 할 필요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리겐도 죽여야 할 상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러나 리겐은 대답했다 "우릴 아나?" "그럼 너희 둘도 눈동자에 발바닥이 그려져 있겠군 " "잭이 너무 많은 정보를 남겨주고 죽었군." "너희들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묻고 싶다. 설마 이나라 국왕을 암살할 생각은 아닐테고, 납치하러 왔나?" 리겐은 속으로 뜨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에 단검을 세 자루씩 들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건 그가 애타게 기다려온 바로 그 상황이었다. "누가 의뢰했나, 불랙 풋의 암살자들이여?" "대답 이전에 이름을 알고 싶다, 하얀 늑대의 기사!" 리겐은 단검을 쥔 양손을 뒤로 끌어당겼고, 옌스는 쇠사슬을 빙글빙글 돌렸다. 쇠구슬이 허공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쉐이든 울프." 창을 든 경비병은 표정 변화 하나없이 대답했다. 희생자의 이름만 알아두면 더 이상 표적에 볼 일은 없었다 "나는 리겐이다. " 지금까지 타깃을 상대로 자기 이름을 밝힌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이번에는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른손에 있는 단검들을 한꺼번에 집어 던졌다. 옌스도 리겐의 공격을 신호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쇠사슬의 한쪽 끝을 놓았다. 스치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즉사시킬 독을 묻힌 단검 세 개와 투구를 써도 두재골을 박살낼 쇠구슬이 무서운 속도로 창을 든 경비병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어떤 움직임이 사이에 있었는지 옌스는 보지 못했다. 그저 세 개의 단검이 모조리 튕겨 바닥에 떨어지고 자신의 쇠구슬 마저 방패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튕걱 나온 것만 봤다. 하얀 늑대가 휘두른 창의 끝이 바닥에 끌리며 불꽃을 일으켰다. 작은 바람이 복도에 일며 그의 손 안에서 맴돌던 묵직한 청창은 다시 그의 옆구리에 고정 되었다. 옌스는 허공에 뜬 쇠구슬을 힘껏 끌어당겨 머리 위로 크게 한 바 퀴 돌렸다. 그것은 상대에게 호흡을 되돌릴 여유도 주지 않는 공격이었고, 옌스가 가장 자신 있는 비장의 기술이었다. 정식으로 훈련 받은 뛰어난 기사도 앞에서 날아오는 공격에만 익숙하지, 이렇게 횡으로 날아오는 기술은 받아본 적이 없다. 옌스는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언제나 이 기술로 죽여왔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정확히 구 슬의 궤도를 읽고 있었다. 하얀 늑대는 쇠구슬이 아닌 쇠구슬 뒤에 연결된 쇠사슬을 후려쳤다. 쇠구슬은 그의 창에 걸려 빠르게 원을돌며 감겼다. 쇠구슬이 스스로 쇠사슬에 걸려 매듭을 만들자, 쉐이든은 창을 확 잡아당겼다. 순간 옌스는 쉐이든 쪽으로 두 걸음이나 끌려갔다. 옌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바닥에 발을 고정시켰으나, 쉐이든은 무서운 힘으로 자 보다 몸부게가 두 배는 더 나갈 법한 덩치를 잡아당겼다. 쇠사슬을 풀지 않으면 꼼짝 없이 끌려가 그 창에 찔릴 판이었다. 그 때 옌스도, 쉐이든도 모르는 엉뚱한 곳에서 메첼이 나타났다. 그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메첼의 지팡이 끝에서 화살과도 같은 불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옌스와 줄다리기 하고 있는 창에서 한쪽 손을 놓아 길게 뻗어오는 불줄기의 끝을 움켜잡았다. 가죽 장갑이 순식간에 타오르며 그 쪽 어깨의 반이 불꽃에 휘감겼다. 그 순간 그 불꽃을 뚫고 리겐이 천장에서 쉐이든의 머리 쪽으로 뚝 떨어졌다. 리겐을 먼저 발견한 건 옌스였고, 옌스는 러겐을 돕기 위해 쇠사슬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표적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졌고, 리겐은 하얀 늑대의 머리에 단검을 완전히 꽃았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한 손이어서 그런지 쇠사슬을 잡아당길 수 있었던 옌스는 이내 갑작스러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 째 경비병 쪽으로 끌려갔다. 그 사이 리겐의 독 묻은 단검은 허공을 그었다. 옌스라는 짐을 달았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창 날이 리겐의 어깨를 들고 벽에 박혔다. 옌스가 다시 균형을 잡았을 때, 리겐은 두 자루 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러고 창에 꿰인 채 벽에 매달려 있었다. 몸의 절반이 불꽃에 휘감긴 쉐이든은 불 붙은 팔을 세차게 휘저었다. 마치 입김에 날려 가는 촛불처럼 그 커다란 불길이 한 번에 공기 중으로 떨어져 나갔다. 머리카락이 상당 부분 탔고, 옷과 피부가 그을려졌지만, 그리 큰 화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창 하나로 리겐과 옌스를 한꺼번에 잡아둔채로 메첼을 노 보았다. 메첼도 지팡이 끝을 쉐이든을 향하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그리 쉽게 날리는 상대에게 완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옌스, 뒤!" 메첼이 다급히 소리쳤다. 옌스와 리겐이 쉐이든의 창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을 때 옌스의 뒤로 다가온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창으로 옌스의 등을 찔렀다. 옌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뚫고 나온 창을 움켜쥐고 손목에 차고 있는 방패로 찌른 경비를 후려쳤다. 그 경비는 비틀거리며 물러났으나 이미 다른 경비가 칼을 휘둘러 그의 배를 또 베었다 "침입자다!" 왕실의 경비병들이었다. 리겐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않은 채로 자기들의 군주를 빼앗겨 주는 멍청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이제 작전 성공은 고사하고, 자기 목숨부터 챙겨야 할 판이었다. 그것도 힘들겠지만. 그 순간 왕의 침실 문이 폭발했다. 쉐이든은 리겐의 어깨에 박힌 창을 뽑아내고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 ." 단순히 문만 부서지는 게 아니었는지 문 안쪽에서 하얀 연기가 파도처럼 터져 나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연기는 쓰러진 리겐과 옌스를 감추고 경비들의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그 연기 안쪽에서 검은옷을 입은 누군가가 쉐이든 쪽으로 날아와 칼날이 네 개가 달린 갈퀴 같은 무기를 휘둘렀다. 쉐이든은 연기에 가려진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창으로 그 무기를 막았으나, 뒤이은 발차기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쉐이든은 가슴을 걷어 채여 뒤로 한 바퀴 굴렀다. "움직이지 마시오." 뒤이은 공격에 대비하며 쉐이든은 경비들에게 소리쳤다. 연기 속에서도 적을 쫓아가려 했던 경비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러고 쉐이든은 주저않은 자세로 자신을 공격했던 자를 향해 급한 대로 앉은 채로 창을 집어 던졌다. 창은 연기를 뚫고 날아가다가 검은 복면을 쓴 또 다른 암살자의 칼에 맞아 방향이 굴절되었다. 쉐이든이 상대를 확인하려 했으나, 곧 연기가 둘 사이를 메웠다. 연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남은 이들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났는데, 경비에게 창을 찔린 덩치 큰 암살자도, 쉐이든의 창에 어깨를 찔렸던 암살자도 핏자국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마법사도, 그리고 쉐이든을 공격했던 검은 옷의 암살자도, 창을 막아낸 암살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문질렀다. 순간적이었지만 착 달라붙은 그 검은 옷 너머로 보인 그 암살자의 몸매는 여자의 것이었다. 그리고 연기 속에서 몸을 날린 그 놀라운 움직임은 지금까지 봤던 블랙 풋 암살자 들중에시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아즈윈을 참고로 추측건대, 여자를 천대하는 암살자들의 세계에서 왕을 납치할 정도로 중요한 임무에 끼어 있다면 그 여자는 정말로 강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쉐이든의 창을 쳐 낸 자도 분명 블랙 풋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암살자이리라. 쉐이든의 말을 듣지 않고 성급하게 연기 안쪽으로 달려가려 했던 왕실의 경비 두 명이 목을 베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벌컥벌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충실히 그의 말을 따른 나머지 경비들은 납작 엎드린 채로 연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실 경비대 대장입니다. 저희들이 늦었습니까? 시키는 대로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만‥‥‥" 한 명이 일어나 아군의 시체를 살피며 안타깝게 말했다 "아니, 적절한 때에 나타나 주었소." "모두 사라졌군요. 마법 일까요?" "코홀룬에서 한 번 봤을 때는 마법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닌 것 같소." 쉐이든은 바닥에 떨어진 핏나국을 가리켰다. 핏자국은 복도 끝의 창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흔적을 따라가지 않고 창만 회수한 채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경비대장은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폐, 폐하께서‥‥" 왕이 자고 있어야 할 침대가 비어있었다. "맙소사 이, 이건‥‥‥ 어서 추격대를‥‥‥" 경비대장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걱정 마시오. 그보다 다친 병사들을 살펴보시오" 쉐이든은 그를 진정시키느라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경비대장은 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쉐이든은 그 사이 마법의 불길에 탄 머리카락을 몇 개 뽑아 보았다. 꼬부라진 머리카락에서 특유의 탄 냄새가 풍겨 올라왔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시커멓게 녹아버린 장갑을 벗었다. 생각보다 화상의 정도가 심했다. "더 못 가겠어." 엔스는 무릎을 꿇었다. 움켜쥐고 있는 옆구리에서 피가 물 흐르듯 새고 있었다. 경비병에게 찔린 자리 였는데, 다른 곳에도 검 상이 두 군데나 더 있었다. 일반 사람이었다면 아까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치명상들이었다. 일행은 모두 걸음을 멈췄다. 발락은 보따리로 싸서 짊어지고 있던 사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절해 있어 소리는 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 헤더가 다가가 그의 상처를 보려 하자 옌스는 손을 내저었다. "못 간다는 거 알잖아" 옌스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평소에도 듣기 거슬리는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생김새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누구나 싫어하는 그였으나, 해더는 그를 혐오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측은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다가 복면을 벗고 그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당신의 희생은 분명 우리 길드의 희망이 되어줄 것입니다" 옌스는 씁쓸히 웃었다. "마스터 칼스텐께서 오실 때까지는‥‥‥ 살고 싶었는데‥‥‥" 그는 마지막까지도 호흡을 잇고자 애썼지만, 곧 풀밭에 고개를 떨구었다. 헤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그의 죽음을 바라보았다."미안하지만, 헤더, 서두르자. 나도 조금씩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어." 약한 소리 하는 법 없는 리겐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하얀 늑대의 창에 뚫런 어깨에서 옌스 못지 않은 출혈이 있었다. 헤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옌스의 손을놓고 일어났다. 발락은 다시 보따리를 어깨에 멨다. 옌스의 시체는 그의 호홉이 끝난 지 오래지 않아 마법으로 불타 올랐다. 성의 경비들은 즉시 그 위치를 파악하고 달려왔으나, 암살자들은 이미 성을 벗어나 있었다. 노르만트의 외곽 성을 빠져나을 때까지 추격의 기미가 없어 헤더는 안도했다. 발락 역시 쫓아오는 이는 없다고 했고, 메첼이나 리겐도 근방에 어떤 적도 느끼지 못했다. 실질적인 작전은 끝났고, 이제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의뢰인에게 납치한 샤를 국왕을 데려다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종료된다. 그러나 성공을 확신한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저 앞에 있는 놈이 하얀 늑대라는 것에 내 단검 모두를 걸어도 좋아." 리겐은 길을 막고 서 있는 어둠 속의 존재를 향해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그럼 난 저 놈이 내 팔을 자른 놈이라는 것에 내 지팡이를 걸지." 메첼은 리겐 이상으로 분노를 풍기고 있었다. 밤이라 더욱 강렬해 보이는 지팡이의 불길이 주위를 환히 밝혔다. 쫓아오는 기미가 전혀 없었기에 헤더는 몹시 당혹스러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떻게 하겠나, 헤더?" 발락도 샤를 국왕을 담아놓은 보따리를 옆으로 던져놓고, 허리에서 짧은 검 한 자루를 꺼냈다. 그는 결코 리겐처럼 싸움을 밝히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싸울 일이 닥쳤을 때는 무척이나 과감했다. 헤더는 크로우를 손목에 꽉 조이며 대꾸했다. "상대는 하얀 늑대입니다. " 손등에 달린 네 자루의 칼날이 달빛과 마법의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낮의 더운 날씨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초원을 훑고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인기척 하나 없이 그들을 추격해와 길을 막고 있는 적이 하얀 늑대임을 의심차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무기는 들지 않고 팔장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발락과 비슷해 보였다. 기사라면 육중한 갑옷에 말을 타고 거창을 끼고 있는 모습 만을 봐온 헤더에게는 그런 가벼운 복장의 남자가 하얀 늑대의 기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리겐, 참을 만 한가?" 아직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은 리겐에게 발락은 차갑게 물었다 "가지고 온 단검을 모두 쓰지도 못하고 죽을 놈으로 보이나, 내가?" "아직 허세를 부릴 정도는 되겠군. 메첼 당신은?" "마법사에게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발락." 메첼도 지팡이를 상대에게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네 명으로 한 명을 이기지 못하면 블랙 풋은 오늘로 끝내는 게 낫다. 망설이지 마라, 헤더. 책임은 내가 진다. " 헤더는 그래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발락은 바로 행동 로 나섰다. "리겐, 아직 표적을 조준할 수 있다면 네 단검을 모조리 던져라. " 전부?" "그 정도쯤 퍼부을 상대는 된다고 생각 안 하나?" 불만스럽게 콧김을 내뱉더니 손가락 끝에 단검을 네 개 식 끼웠다. "발락, 하나만 묻자." "짧게 해라." "이 단검에는 달루노이의 독이 발라져 있다. 이 단검들로 너와 겨뤘다면 내가 이길 수 있었을까?" "아니 ." 발락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리겐은 허탈하게 웃더니, 즉시 두 손을 세게 휘둘러 단검을 던졌다. 상대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고 여덟 개의 늑대를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발락이 달려나갔다. 하얀 늑대는 허공으로 뛰어 올라 단검을 모조리 피했다. 발락은 이미 그것을 예상하고 같이 점프해 공중에서 맞닥뜨렸다. 하얀 늑대가 쥐고 있는 두 자루 검과 발락의 길지 않은 검이 허공에서 여러 번 부딪혔다. 둘은 착지하자마자 서로 같은 방향으로 풀밭을 달렸다. 달빛 아래에서 서로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지나간 후에 흐트러지는 풀의 움직임 밖에 없었다. 자세를 낮추고 둘의 움직임을 노려보고 있던 헤더가 한 순간 길게 뛰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얀 늑대는 갑자기 뒤에서 덮치는 크로우의 공격을 침착하게 막더니 바닥에 손을 짚고 발로 둘을 동시에 걷어찼다. 헤더는 몸을 숙여 피하고 발락은 팔 등으로 막았으나 둘 다 다음 공격을 피하기 위해 물러서야 했다. 그 틈에 리겐이 다시 단검을 던졌고, 하얀 늑대는 바닥에 짚은 손의 힘만으로 뛰어올랐다. 단검은 바닥에만 박혔다. 내내 옆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메첼은 상대가 시야에 들어오자 주저하지 않고 지팡이를 휘들러 끝에 맺힌 불덩어리를 내던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공증에서 몸의 방향을 바꾸더니 불덩어리를 피해 버렸다. 힘을 잃은 불덩어리는 바닥으로 떨어져 폭발했고, 칙근 비가 온 적이 없어 메말라 있는 풀밭을 순식간에 불태웠다. 그가 추락하는 자리에는 발락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든 두 자 루 칼과 발락이 든 한 자루 칼이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헤더는 즉시 거기에 합류해 다시 상대의 등을 공격했으나 그의 두 자 루 칼은 마치 온몸에 둘러쳐진 방패치럼 그녀의 크로우를 모조리 막아냈다. 급기야 두 자루 칼이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더니 그녀의 얼굴과 목을 그었다. 발락이 견제하지 않았다면 그나마 목이 붙어 있지 못했을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헤더는 뒤로 물러서더니 칼날에 베인 복면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 준비를 했다. 그 때 마지막 단검을 모조리 집어 던질 생각인지, 양손에 단검을 대여섯 개씩 쥐고 있는 리겐을 발견했다.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리겐의 얼굴 뒤로 어둠 속의 누군가가서 있었다. 리겐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풀밭에 픽 고꾸라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 자는 리겐의 등에 박힌 칼을 뽑더니 사라져버렸다. '한 명이 더 있다!' 헤더는 급히 주위를 살폈으나, 바람에 흩날리는 가는 풀잎 사이로 이질적인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이제 발락은 혼자 하얀 늑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메첼이 다시 지팡이를 겨냥하고 있었으나, 둘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마법을 사용 할 수가 없었다. 옮겨 붙은 불길에 주위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헤더도 그 불빛을 이용해 또 한 명의 적이 어디 있는지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왕을 잡아놓은 보따리를 풀었다. 거기에 기절해 있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목에 크로우를 들이댔다. "뭠춰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자를 죽이겠다. " 그녀는 목청껏 소리질렀다. 그것은 발락을 공격하는 하얀 늑대와 함께 리겐을 죽인 정체불명의 적, 둘 모두에게 하는 경고였다. 이제 발락도 힘에 겨운지 자꾸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발락의 움직임은 여느 때처럼 좋았다. 자신이 원하는 기술을 원하는 타이밍에 썼고, 몸도 가벼웠다. 그러나 상대는 그것보다 훨씬 빨랐고, 발락이 사용하는 블렉 풋의 암살 기술을 모조리 사전에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헤더는 자신의 크로우 기술도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발락의 주무기는 원래 크로우였다. 그걸 사용하면 저렇게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기를 바꿀만한 여유가 없었다 "멈춰라! 내 말이 들리지 않나?" 그래도 상대는 멈추지 않았다. 불길이 점점 타오르며 이제 어둠을 뚫고 상대의 얼굴도 식별이 되었다. 그 때 그녀의 목으로 섬뜩한 금속의 차가움이 닿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한 명은 살려둬야 되느라 안 죽이는 거니까, 그 이상하게 생긴 무기 치워." 여자의 목소리였고, 목에 닿은 그 칼에는 리겐의 피가 묻어 있었다.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바로 그 자를 찾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쉽게 등 뒤를 허용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헤더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 전에 당신들이 모시는 왕이 죽을 거요." "년 왕 얼굴도 모르냐? 왕은 지금 성에서 잘 자고 있어." 등 뒤의 여자는 재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 자는 뭐지?" "왕의 경비병 중에서 왕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하나 뽑아서 거기 재워두고 있었지," "그런 거짓말이 통할 것 같나?" 순간 헤더는 목소리로 위치를 파악하고 상대의 턱을 걱냥해 머리를 세게 뒤로 젖혔다. 그러나 등 뒤의 여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피해버렸고, 되려 들이대고 있는 칼을 그었다. 헤더는 상대가 피할 거 라는 걸 짐작한 터라, 목으로 들어오는 칼날을 크로우로 막고, 즉시 그것을 등 뒤로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고 칼은 다시 목에 들어와 있었다. 첫 번째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듯, 또 등 뒤를 허용했기에 헤더는 바짝 긴장했다. '한 번 더 그런 장난하면 안 참을 거다?" 자신의 필사적인 저항을 장난이라고 표현한 것에 헤더는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에 닿은 칼날의 위치가 아슬아슬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 이제 네 동료에게 멈추라고 말해주실까? 너희들을 더 이상 죽이고 싶지 않거든." 그 떼 리겐의 시체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폭죽이 올라가며 내는 소리처럼 요란하여 메첼도 발락도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잡혀있는 해더를 발견한 둘은 즉시 뒤로 물러났다. 발락을 공격하던 하얀 늑대도 상대가 저항 없이 물러서자 공격을 멈추었다. "미안해요, 발락. 헤더는 막막하게 말했고, 발락도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자에게 말해라. 우리는 동료가 인질로 잡혀 있다고 해서 멈추는 멍청이들이 아니라고." 헤더를 잡고 있는 여자는 깔깔대고 웃었다 "누가 인질로 잡고 있냐?괜히 심각한 척 하지 마라, 이 눈깔에 발바닥 붙이고 다니는 놈들아. 그리고 인질이란 불리한 쪽이 잡고 있는 거야." 그 여자는 붙잡고 있는 헤더를 놓아줘 버렸다. 그리고 크로우를 낀 헤더가 두 걸음 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도, 칼까지 집어넣었다. 헤더는 마음만 먹으면 상대가 숨 한 번 쉴 동안에 얼굴과 뱃가죽을 만나게 해줄 수도 있었으나, 그 터무니없는 여유에 질려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구나 두 번이나 자신의 등 뒤에 섰던 여자니, 대충 생각해도 그녀의 정체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당분간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그러니 캡틴이 올 때까지 기다려." 그 여자는 팔장을 끼고 말했다. "마치 언제라도 우릴 죽일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 메첼이 지팡이의 끝에 맺힌 붉은 기운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아, 넌 한 번 본 적 있지, 코홀룬에서?그 때 겪어보고 아직 모르겠나? 네 마법으로는 우릴 이기지 못해." "그런지 안그런 지 어디 시험이라도 해보‥‥‥" "시끄러! 이러쿵저러쿵 안 떠들어도 너희들은 선택할 기회가 있다. 우리랑 계속 싸울지 아니면 얌전히 우리 말을 들을지." 마법사는 복수심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아즈윈은 즉시 그녀의 말을 끊으며 귀를 후비는 척 했다 "나도 솔직히 니들 그냥 죽여버리고 싶지만, 캡틴 명령이라 참는 거야. 어차피 네놈들 작전도 여기까지 왔으면 그른 거 아니냐?안 그래?" "어떻게 우리 작전을 알았지?" 메첼이 물었다 "거기 있는 내 친구가 너희들 잠입하는 거 알아냈지." 아즈윈은 발락의 옆에 서 있는 던멜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체 저 놈은 뭐지? 코홀룬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그녀의 말에 메첼은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하얀 늑대잖아. 이상한 애네? 몰라서 물은 거야?" 아즈원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그녀는 던멜에게 자기 쪽으로 오라는 뜻으로 수화를 보냈다. 메첼이나 발락은 당연히 둘의 수화를 못 알아보았다. 그러나 중간에 끼어 있는 헤더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알아보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 타닥타닥 타는 불빛에 비춰진 던멜의 얼굴을 발견하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녀는 달려가 던멜의 앞을 막았다. 아즈윈은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검을 던지려 했으나, 그건 공격을 위한 행동이 아닌지라 멈칫했다. 그녀는 완전 무방비 상태로 던멜을 향해 수화를 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던멜은 공격 자세를 잡았다가 즉시 풀었다. '누구냐?' 그가 수화로 되물었다. '헤더 입니다. ' 그 말을 들은 던멜의 수화를 하던 손이 굳어 아무 의사 표현도 못했다 "헤더 ! 무슨 일이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발락이 물었다. 헤더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뺨을 타고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아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을 꿇었다 "테마르..... " 카셀과 게랄드가 도착했을 때 암살자들과 아즈윈, 던멜은 대여섯 걸음씩 떨어져 있긴 했으나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한 바탕 벌어지고 있을 줄 알고 잔뜩 벼르고 있던 게랄드는 그만 김이 새버렸다 "끝났냐?" 게랄드가 물었다. 새로운 하얀 늑대의 등장에 다른 암살자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그러나 무릎을 꿇은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가라앉은 분위기라 게랄드도, 던멜과 그 여자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카셀도 지켜보기만 하다가 왕의 대역을 맡아준 병사에게 다가갔다.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참여해준 사람이었는데 목숨에 지장이 없길 빌었다. 다행히 그는 깊이 잠 든 것처럼 편안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암살자들은 왕의 납치가 목표지, 암살이 아니었다. 그럼 과연 누가 암살자들을 사주하여 왕을 납치하려 했는가? 그건 지금부터 알아볼 일이었다. "이 녀석들과 이렇게 노닥거릴 만한 일이 뭐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설명 좀 해봐." 게랄드가 아즈윈을 툭 치며 물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던멜의 본명을 알아냈어." "본명? 던멜이 아니라 멜던이라던가‥‥‥" 아즈윈은 게랄드의 복부를 팔꿈치로 찍어 말을 막았다 던멜의 앞에 무릎 꿇고 있던 헤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겨우 웃는 얼굴로 말했다. "테마르, 당신이 살아 돌아오길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던멜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화로 대신 말했다.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하긴 당신이 저를 가르쳤을 때 제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으니까요. 헤더입니다. 당신이 딸처럼 키워주셨 던 바로 그 아이입니다 ' '안다 ' 던멜도 겨우 수화로 말했다. 헤더는 그의 짧은 대꾸만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암살자가 지어서는 안 되는 감정 표현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암살자로 살아왔으니까. '마스터는 살아계십니까?' '칼스텐은 죽었다. ' 헤더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수화를 하는 손이 흔들렸다. '누가 죽였습니까?' '마스터 퀘이언.' 헤더의 눈빛이 변했다. '하얀 늑대들은 마스터 퀘이언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 '맞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스승을 죽인 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계십니 까?' 던멜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발락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헤더, 내가 알아듣게 말해라. 그 자가 테마르라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테마르께서 말씀하시길, 마스터 칼스텐은 돌아가셨답니다 " "누구에게?" "퀘이언." "헛소리 !" 발락은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소리 지른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헤더가 제일 놀랐다. "테마르, 당신과 마스터 칼스텐이 아란티아로 떠난 후 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모두들 살아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소. 그런데 칼스텐은 죽고, 당신은 원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거요?" 던멜은 입 모양 만으로 그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조용히 하세요 발락." 헤더는 발락을 저지했다. 무척 혼란스러원지만, 그녀는 그를 만나면 반드시 하려고 몇 년이나 묵히고 묵힌 말을 꺼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테마르. 우선 돌아와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마스터가 되어 주십시오." "닥쳐라, 헤더.칼스텐 외에는 누구도 우리의 위에 서지 못한다. " 발락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칼스텐이 돌아가셨다면, 그 분의 뒤를 이을 수 있는 건 테마르 뿐입니다. " "난 인정할 수 없다. " "인정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칼스텐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테마르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 그녀의 말에도 마찬가지로 던멜은 침묵했다. 아니 지금은 아예 그녀의 입을보고 있지 않았다. 헤더가 보기에 던멜은 이미 둘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고 가는지 미루어 짐작했고, 그 대화를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지금 당장 그 분의 후계자를 죽이면 다음 후계자인 내가 마스터가 되겠군." 발락은 칼을 꺼내 들었다. 동시에 주위에 있던 하얀 늑대들 전원이 칼을 뽑았다. 잠시 상황을 관망하던 메첼도 황급히 지팡이를 치켜들었고, 헤더도 얼결에 크로우를 치켜세웠다. 오직 던멜과 카셀만 무기를 들지 않았다. 짧은 순간 헤더는 앞뒤에서 겨냥하고 있는 아즈윈의 검과 던멜의 도끼가 주는 소름 끼칠 만한 압박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누군가 무기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이 자리에 시체가 세 구 정도 생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다들 팽팽한 긴장감 사이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나섰다. "블랙 풋의 문제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소만, 내 생각에는 본인의 의사를 묻는 게 좋을 것 같소 " 카셀은 조용히 모두를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연스럽게 상황은 카셀이 지배하게 되었고, 헤더는 겨우 크로우를 늘어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무기를 접었다. 곧 모두의 시선이 던멜쪽으로 돌아갔다. 던멜은 잠시 고민하다가고개를 저으며, 헤더에게 수화로 말했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말할 정도로 상황이 간단하지 않으니 간단히 말하겠다, 헤더. 칼스텐의 죽음에 나의 책임이 큰 이상 나는 블랙 풋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불꽃의 주문을 담지 않은 깨끗한 눈동자를/ '그리고 지금 나는 블랙 풋의 암살자가 아니라, 하얀 늑대란다. 미안하구나.' 던멜은 수화를 하던 손을 힘 없이 늘어뜨렸다. 헤더도 그 이상 자신의 바람을 강요하지 않았다 "저 자가 뭐라 그했나?" 메첼이 물었다. "돌아오길 거부하셨습니다. " 헤더는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블랙 풋의 암살자들이여, 던멜의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 없으나, 지금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할 말이 많소." 카셀은 암살자들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할 말을 이어갔다. "미리 경고하지만, 당신 세 명의 사활은 나와 나의 친구들이 쥐고 있소. 그러니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길 바라겠소. 특히 레이디께서는 함부로 마법의 주문을 외우려 하거나 지팡이를 움직여 오해의 소지를 일으키지 말았으면 하오." 메첼은 카셀의 손짓 하나에도 어깨를 움츠렸다. 이미 네 명이 던멜 하나를 당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 정도수준의 기사가 세 명 더 있다고 가정하면 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흥분해 있었으나, 발락과 메첼은 그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항복한 것은 아니나, 세 명의 암살자들은 카셀의 말을 들어보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당신들은 카모르트 국경 근처에서도 우릴 죽이려고 했지, 맞소?" "맞습니다 " 헤더가 대답했다. 발락이 대답할 줄 알았던 카셀은 시선을 헤더에게 돌려 물었다. '코홀룬에서도?" "맞습니다. " "그럼 그 의뢰인은 누구요?" "말할 수 없소." "난 경고한 걸로 아는데?" "그럼 죽이십시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말해버리니 카셀도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실수로라도 의뢰인의 이름을 말하면 스스로를 죽이는 마법을 걸고 다닙니다. 당신들이 죽인 나의 동료들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봤을 겁니다. 의뢰인의 이름을 들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암살자들은 모두 그런 마법을눈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하나 안 하나 죽는게 마찬가지라면 저는 길드의 존속을 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의뢰인의 이름을 발설하는 어쌔신 길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 합니다. " 헤더는 던멜 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테마르께서 우리의 적임을 안 이상 이 일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아직 아란티아의 여왕의 암살을 의뢰한 자가 누구인 지 발설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것은 목숨 이전의 문제입니다. " 헤더의 말에 아즈윈과 게랄드는 눈을 동그랗게 했다 던멜은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그럼 아무 것도 말해줄 수 없다는 거요?" 카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 헤더는 여전히 대답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럼 됐소. 대충 누군지도 짐작하고 있으니 확인이 필요했을 뿐이오. 그럼 다른 한 가지를 더 묻겠소. 검은 기사에 대해 아시오?" "검은 기사?물론 라이온 기사단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건 아닐 테죠?" 헤더는 눈셉을 꿈틀거렸다. "내가 어떤 의미로 말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것 같군." "알고 있습니다. " 헤더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들이 우리 쪽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터지니 그 쪽으로 생각하게 되더군. 더구나 우릴 죽이려고 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 검은 기사는 카모르트 각지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우리도 그들이 누구인지 조사해보던 차였지만 아직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럼 당신들과는 전혀 별개의 존재란 거요?' "우린 비록 이런 일을 하고 있으나 그래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인간이 아니죠.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갑옷의 모양이 익셀런 기사단의 것과 똑같다는 것 외에는." "익셀런?" 카셀은 어이 없어 하며 되물었다. "아까 접촉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카셀은 아즈윈과 게랄드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그들은 이미 던멜의 임무란 것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카셀은 됫말을 잇지 못해 괜히 헛기침만 했다. "자, 이제 필요한 걸 다 물었으니 우릴 죽일 셈인가요?" "죽일 거라면 어쩔 생각이오?" 애써 잡아놓은 암살자들에게 아무 것도 얻지 못하니 카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림 최소한 하얀 늑대들의 캡틴 하나는 죽여놓고 같이 죽겠소.그럼 최소한 우리 길드의 명성은 올라 갈테니." 카셀은 암살자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간걸 그제야 알았으나 이제 와서 물러서는 건 꼴이 우스웠다. 그래서 그는 얼른 억지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런 맙소사, 농담이었소. 더 이상 공격하지도 않겠다는데 무슨 명분으로 내가 당신들을 죽이겠소?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어떨지 모르겠군 " 카셀은 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 었다. "던멜, 이후의 처분은 너에게 맡기겠다. " 카셀은 얼른 아즈윈과 게랄드를 끌고 말이 있는 곳으로 피해버렸다. 제일 긴장했던 사람은 정작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메첼은, 하얀 늑대들이 스스로 떨어져주자 겨우 참았던 숨을 토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테마르였군. 내 팔을 베앗아간 자가 우리 길드를 이끌어갈 후계자였고, 나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 던멜은 수화로 메첼에게 말했고, 헤더가 해석해 주었다 "사과하지는 않겠답니다. " 헤더는 당황해 하는 메첼을 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던멜의 앞에 아주 가까이 다가섰다. 던멜은 눈물이 어려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짧은 수화로 물었다. '지금 길드의 마스터는 누구냐?' "제라르입니다." 그녀는 입으로 말했다. '칼스텐의 빈 자리를 그가 지키고 있군.' 던멜은 씁쓸히 웃었다. 헤더는 어린 아이가 매달리듯 그에게 붙어 서서 말했다. "진심으로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컸다는 걸 꼭 보여드리고 싶었답니다. " 던멜은 마치 아버지가 딸의 머러를 쓰다듬듯 그렇게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둘은 한 동안 서로의 눈동자만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어떤 수화도 나누지 않았다. 둘은 그것만으로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발락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반지를 드리겠습니다. 만약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실 생각이 든다면, 반지가 그 길을 인도할 겁니다. " 헤더는 끼고 있던 반지를 내준 후 그를 한 번 껴안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마치 더 남아있으면 망설이게 될 자신을 일부러 채찍질 하는 것처럼‥‥‥‥ 메첼은 정말 자기들을 살려주는 건지 불안해하며, 그녀를 따랐다.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딩신을 마스터로 인정하지 않겠소." 발락은 경고하듯 말하고 역시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던멜은 그녀가 내 준 반지를 어루만지며 바람 부는 풀밭에 멍청히 서 있었다. "그 애 몸매를 봐. 아무리 봐도 스무 살은 되어 보이지?더 되면 더 되지, 덜 되진 않았을 거야. 그런데 십 년 전에 쟤를 딸처럼 키웠다면, 대체 던멜의 나이가 몇 살이라는 거야?" 아즈윈이 게랄드와 구시렁거리며 열심히 손가락을 세어보고 있었다. 게랄드는 자기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쉐이든과 비슷한 나이라고 추정했고, 아즈윈은 마흔이 넘을 거라고 주장했다. "저 얼굴에 마흔이면 나는 대체 뭐라는 거야?" 엉뚱하게 게랄드가 화를 내면서 둘의 싸움은 다른 방향으로 번졌다.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심각해져 있던 자신이 한심스러워 지는 던멜이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상대는 아무래도 두 백작 만이 아닌 것 같아." 카셀이 모두를 불러놓고 말했다. "근데 넌 용케 검은 기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구나. 갑자기 블랙 풋의 암살자들에게 그런 걸 묻고." 아즈윈이 말했다. "그럼 넌 생각 안 하고 있었어? 난 항상 머리 속에 담고 다녔는데‥‥‥‥ 그보다 그들의 갑옷이 정말 익셀런 기사단과 같은 모양이었어?" "봤을 당시에는 전혀 연관성을 못찾았는데, 지금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구만. 그런데 너 혹시 아직도 내가 잘라놓은 그 검은 기사의 팔 가지고 있지 않냐?" 게랄드가 팔장을 끼며 말했다. "아, 서랍 속에 " 카셀의 대답에 게랄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카셀이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아즈윈은 던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너 정말 예전에 여왕님을 죽이려고 그했냐, 어? 쉐이든한데 이르면 넌 죽었다. ' 라며 협박하고 있었다. 던멜은 쩔쩔매며 변명하려 했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아즈윈은 수화를 못하게 손을 내저으며 방해했다. 그건 말 못하게 입을 막는 것보다 더 치사한 장난이 었다. "너희 중 누가 말을 모는게 제일 빠르지?" 카셀이 갑자기 물었다. "던멜이랑 쉐이든이 비슷비슷할 걸. 하지만 말이 빨라야지, 기수가 좋다고 될 일이냐? 그건 왜?" 게랄드가 말했다."로일을 데려와야겠어. 이미 붉은 장미 백작이 여기 와 있는데 거기 있을 필요가 없어." "그래! 그 녀석, 그러고보니 왜 안 오는 거야?" 던멜에게 장난치던 아즈윈이 로일이라는 말에 얼른 끼어들었다. "모르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급한 일 때뿐에 오지 못 하는 걸지도." "아니면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잊어버렸거나 " 아즈윈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누가 가든 해가 뜨면 바로 떠나는 게 좋겠어. 우리에게는 그리 시간이 많은게 아니니까." 카셀은 아직도 기절한 채 풀밭에 누워있는 왕 닮은 병사를 말에 싣고 노르만트로 향했다. 그러나 다음 날, 누구도 로일을 데려오기 위해 덴모주로 향하지 못했다. 카셀의 말대로 그들에겐 시간이 많은게 아니었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는 이미 노르만트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장미 가시와 하얀 늑대 아즈윈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쉐이든은 밖에서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 쉐이든이 바라보는 시선이 거북한 지 그녀는 아랫 배를 쓰다듬던 손을 올려 똑같이 팔짱을 꼈다. "뭘 그리 훑어보고 그러냐? 매너 없는 자식." 쉐이든은 고개로 방향을 지시하고 그 쪽으로 걸어갔다. 아즈윈은 그를 따라 걷다가 다시 아랫배를 쓸었다. "어젯밤에만 해도 괜찮지 않았나?" "괜찮았지. 아침부터 이러네." "지금은 좀 덜한 편이지?" "내일이면 더 심해지겠지. 젠장 다음 주인 줄 알았는데‥‥‥ 쉐디, 넌 근데 왜 남의 멘스 날짜는 기 억하고 그러냐?" "대강 이번 주라는 것만 알았어. 그리고 너 말고도 기사단에 여자는 있어. 그런 것도 기억 못하면 까다로운 녀석들 관리하기 힘들지. 더구나 그 애들은 여자라는 걸 콤플렉스로 아는데‥‥‥ 너라도 있으니 덜하지만, 용병 단에 있을 때는 남장을 하고 다녔다잖아." "하앙, 내가 여자인 걸 온통 뽐내고 다니니까 왠지 남자처럼 하 고 다니는 게 창피했나 보지? 하지만 걔네들 나 싫어하잖아."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것과 기사로서 존경하는 건 달라. 어쨌든 년 여성 기사가 닮아야 할 표본이나 다름 없으니까." "그 친구들이랑은 나중에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얘기해 볼 일이야. 근데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는 왜 내가 이럴 때 쳐들어오고 그러냐?" "글쎄다. 가서 물어봐." 쉐이든은 성의 없이 대꾸했다가 아즈윈에게 걷어차였다. "머리나 깎아라. 절반만 그을려져서 꼴 보기 싫다. " 왕성의 전망대에서는노르만트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 성 너머에 포진된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한 눈에 보였다. "생각보다 많은 슷자는 아니군. 이천명 조금 모자라." 아즈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강 슷자를 헤아려 보았다. "그래도 노르만트를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한 슷자지." 쉐이든은 아군의 군대가 삼백이 겨우 넘는다는 사실을 주지시켰 다. "카셀은?" "게랄드와 함께 회의실에 있다. " "대신들이 난리 났겠군." "절대 쳐들어오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 카셀도, 세이게이 장군도, 물론 나도 그리 생각했고." "완전히 혀를 쩔렀군." "우선 캡틴 쟈란에게 군대를 배치하라고 했는데, 이 후는 어찌 될지 나도 모르겠어." "우리도 대기하고 있어야겠지? 참, 던은 뭐하고 있어?" "방에 ." "몇 년 쩨 숨겨온 일을 엉뚱하게 여기 와서 들켜버렸으니 오죽 하겠어? 우릴 보기도 꺼려지겠지." "이제 와서 마음 쓰는 게 더 우스운 일이지." "그러게 말이야. 이제 맘 먹고 여왕 암살을 작정하면 마스터도 못 막을 경지에 올라와 놓고 죄책감을 갖는 건 앞뒤가 안 맞잖아," 쉐이든은 그녀를 쏘아보았다. "르런 말은 던멜에게 하지마." "해줘 버릴 거야. 겨우 그런 일을 몇 년 째 숨기고 있었다는 게 나는 더 열 받아." "아직 말하지 않은 일도 많을 거다. 과거는과거.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상처를 네가 나서서 후벼 팔 건 없어. 혼자 털고 일어나게 내버려둬." 아즈윈은 혀를 베에 내밀고 또 쉐이든처럼 팔짱을 꼈다. 장미의 군대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즈윈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이번에는 후방에 설 거야," "너 있는 곳까지 적이 안 가게 하마." 쉐이든은 여동생을 괴롭히는 오빠처럼 아즈윈의 잘 빗어 내린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아즈윈은 장난스럽게 머리로 쉐이든의 가슴을 들이박았다. 다시 머리를 정돈하다가 그녀는 장미 군대 쪽에 서 달려오는 세 기의 기사들을 발견했다. 점으로만 보였는데, 그들은 곧장 성문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일까?" 아즈윈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계속 빗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롯밤 사이에 저 정도 군대를 들일 수 있단 말이오? 짐의 눈과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들은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임에 틀림 없는데!" 샤를 국왕은 흥분하여 떠들었다. 카셀은 침묵했고, 루오르 대신이 열심히 변명해주었다. "밤에 군대를 이동시키는 건 품격 높은 귀족의 군대가 할 짓이 아닙니다. 붉은 장미 백작은 애초에 국왕 폐하께 지킬 예우를 잊어 버린 게 틀림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이 나라의 신하임을 망각하고 군대를 노르만트에 들일까 무섭습니다. " "그럼 루오르 대신이 생각하기에 그들과 싸우는 게 좋겠소?싸우면 이길 거라 생각 하시오? 말해보시오. 구체적으로!" "저, 전투에 관한 한은 세이게이 장군께 물어보심이‥‥‥" "그럼 그 따위 하나마나 한 소리는 집어 치우시오, 루오르 대신. 대체 붉은 장비 백작이 예의가 있고 없고가 여기서 왜 중요한 거요?" 루오르는 대신을 맡은 후 처음으로 자기를 호통치는 샤를 국왕을 보았다. 카셀은 이 급박한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늙은 대신이 얼떨떨해 있는 동안 국왕은 세이게이 장군에게 물었다. "어떨 것 같소, 장군?백작 군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겠소?" 장군은 고개를 숙인 채 겸손하게 말했다. "이미 저와 캡틴 울프의 예상이 어긋났습니다. 때문에 이 후 상황이 어찌 될 지 추측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를 보니 이 곳을 직접 치려고온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투석기 같은 공성 무기도 없으며, 특별히 성을 넘을 사다리를 준비해 온 것 같지도 않습니다. 캡틴 울프의 생각은 어떻소?" "그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만, 쳐들어오지 않을거라 섣불리 확신을 갖는 건 좋지 않습니다 " 카셀도 나직이 말했다.이제 그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데 한결 여유가 있었다. 옆에서 보기에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흔들림없는 캡틴 울프의 모습이었으나, 카셀 본인이 남들에게 보일 수 없었던 심적 부담감은 많이 줄어있었다 "장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쳐들어을 생각은 없을 지 모르나, 또 그렇다고 노르만트를 관광하러 이천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온 것 도 아닐 겁니다. 저 정도 슷자의 병력을 노르만트로 돌렸다면 다른 목적이 있을테니, 우선 그 목적이 뭔지 알 때까지는 기다리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만큼은 카셀도 발언을 신중히 했다. 사실 카셀은 자신의 예측이 빗나간 것에 대해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설마 붉은 장미 백작이 검은 사자 백작의 영지인 레앙을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그 쪽을 무너뜨려 전세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잡은 후에야 노르만트를 찾아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략의 초보인 카셀도 그게 가장 유리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 전쟁 경험이 많은 붉은 장미 백작이 왜 굳이 그런 이점을 포기하고 노르만트를 찾아온 걸까? 곧 그의 의혹은 풀렸다. "레앙이 공격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 두나단 대신이 작은 쪽지를 하나 들고 회의실 안으로 급히 들어 왔다. 그는 레앙과 덴모주에 있는 자신의 부하가 날려보낸 까마귀가 도착할 시간이라며 회의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레앙의 사정을 아는 일은 회의만큼이나 중요하므로, 결석이 허락되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자의 성이 공격 당하는중, 전세는 사자에게 대단히 불리.' 장군과 캡틴의 의견이 틀린 게 아닙니 다. 단지 붉은 장미 백작의 전력이 우리의 예상을 상회했던 거죠. 그는 레앙와 노르만트 양쪽에 모두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 "병력을 분산시키고도 양쪽 다 꺾을 자신이 있다는 거군."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는 뭔가를 깨달았고, 카셀도 동시에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분산시킨 게 아닙니다. " 카셀이 말했다. "무슨 소리요, 캡틴 울프?" 왕이 물었다. "모든 전력은 레앙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아보이는 저 병력도 붉은 장미 백작에게 있어서는 그리 많은 슷자가 아닌 겁니다. " "난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소, 캡틴."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세이게이 장군이 설명했다. '노르만트는 애초에 병력을 쓰지 않고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외곽 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숫자는 대략 천 오백에서 이천. 붉은 장미 백작은 그 슷자로 노르만트를 점령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 "즉, 우리에게 원군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겁니다. " 카셀이 추가 설명했다.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성문을 철저히 관리하지 않았던 거요?" 왕은 쳐들어올 수 있다는 가정이 더욱 확실해지자 몹시 당황했다. "관리 했어도 소용 없었을 겁니다. 첩자를 노르만트에 둬서 몰래 빠져나가 연락을 취하든 까마귀나 비둘기를 날리든, 우리가 모르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든! 원한다면 노르만트 내의 사정은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겠죠. 중요한 건 쟌스테인 백작이 충분한 자신감이 있 기 때문에 레앙에 투입할 병력의 일부를 이쪽으로 끌고 온 겁니다. " "바꾸어 말하면, 그는 저 이천을 빼고도 레앙을 점령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군이 카셀의 말을 받았다. "그럼 우리는 어찌하면 좋겠소?" 왕이 불을 바라보며 물었다. 루오르 대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너무 사태를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지금 당장 붉은 장미 백작이 쳐들어 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루오르 대신. 히든 카드를 쥐고 있는 건 저 쪽입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 카셀은 루오르 대신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대신은 뭔가 격렬한 반발을 기애했는지 조금은 싱겁다는 표정이었다. "한심하군. 국왕인 내가 백작의 말을 기다려야 하다니‥‥‥‥ 아, 그런데 깜박 잊고 있었군. 어제 침실을 바꾸라고 한 건 어떤 연유에서 였소, 캡틴? 경비들 사이에서는 침입자가 있었다는데?" "처치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비병이 두 명 희생되었습니다. " "허어, 저런. 나중에 따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주시게 여봐라, 그 경비병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족에게 돌려 보내고, 따로 위로금을 전달토록 해라. 그리고‥‥‥"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였다. 한 병사가 달려와 멀러서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급한 전갈이 있습니다. " "말하라." 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명했다. "반시간 전, 붉은 장미 백작의 진영에서 세 기의 기사들이 동쪽 성문 앞으로 달려 왔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두 기사는 즉시 되돌아 갔고, 한 명이 단독으로 들어와 폐하께 고할 일이 있다며 자신의 이름과 직책을 밝혔습니다." 좋지 않은 느낌에 두나단은 입맛이 씁쓸했다. 쳐들어올 게 확실 하다 해도 아직 처들어온 건 아니었으므로, 정식으로 요청하는 알현을 거절하는 건 힘들었다. 두나단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폐하?" "여러 대신들은 어찌 하면 좋겠소?" 왕은 우선 모두의 의견을 물었다. 다들 백작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말했고, 카셀도 동의했다. "그래, 그 기사의 이름은 뭐라 하더냐?" 국왕은 결정을 내렸고, 병사에게 물었다. "붉은 장미 백작 휘하에 있는 쏜즈의 기사, 링케라고 합니다." "들라 이르라." 드마르프 평원 전투를 승리로 이끈 로즈 기사단, 그 중에서도 12 쏜즈에 대한 소문은 이미 성 안의 경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중 캡틴인 링케가 성 문을 들어서니 그의 자잘한 움직임에도 경비병들은 한껏 긴장해 있었다. 링케는 성문에서부터 무장을 해제하라는 말에 순순히 창과 칼을 내려놓았다. 갑옷을 입는 것만 허락되었고, 그는 기꺼이 투구까지 벗어 한 손에 들었다. 옅은 금발 머리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눈동자는 더욱 병사들의 시선을 짓눌렀다. 그는 겁 먹은 노르만트 시민들 사이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왕의 경비들은 성의 경비들보다 더 심하게 경계했으나 링케는 개의치 않았다. 붉은 갑옷과 붉은 망토는 왕실의 복도를 훑으며 지나갔고, 호기심 많은 시녀들도 슬쩍 그의 모습을 봤다가 이내 숨어 버렸다. 그는 왕실 경비병 다섯 명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경비병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창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여어 , 링케!" 복도 한쪽 난간에 엉덩이를 기대고 앉아있던 게랄드가 손을 흔들었다. "천하의 하얀 늑대께서 나 같은 미천한 기사를 기억해 주시나?" 링케는 즉시 게랄드를 알아보고 말했다. "네가 언제부터 자기를 낮출 줄도 알았었냐?" "사람이란 변하는 거니까." 게랄드는 느릿느릿 걸어와 링케의 앞에 섰다. 덩치 두 명이 복도를 서로 막고 있으니 경비병들은 가슴이 갑갑할 지경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안내하지. 모두들 볼 일 봐도 좋아." 게랄드가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경비병들은 이런 부담스러운 임무에서 해방되는 것은 환영이지만,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 불쑥 물러나기도 애매해서 머뭇거렸다. "어서 !" 게랄드가 명령조로 말하자, 그제야 경비병들은 물러났다. "걸으면서 얘기하지." 링케는 순순히 앞장 서는 게랄드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 둘의 발걸음 소리만 울렸다. "잘 지내고 있냐?" 게랄드가 물었다 "너만큼은 아니지. 게랄드 하란," "하란이라‥‥‥‥ 그 이름도 기억해주네. 난 네 이름만 기억하기도 힘들었거든. 그런데 난 너라면 좀 더 큰 일을 저지를 줄 알았는데, 고작 한 가문의 기사 밖에 못하고 있었나? 왜, 그 우드라 나이트라고 말이야‥‥" "어렸을 때 놀던 얘기는 관두지. 그런데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시선을 받는 내가 너에게는 '고작'으로 보이나?울프 기사 단은 할 만 한가 보군." "나야 재미 있지. 넌 재미 없어 보이고." "크게 한 번 사고를 당한 뒤로 검에 재미를 잃었다. 예전에 너와 겨뤘던 일들은 이제 기억도 잘 안 나, 게다가 난 진 시합은 머리에 새겨 두는 편이 아니라서 " 게랄드는 숨 죽여 웃었다. "그래, 그 일이 억울한가?" "억울하지는 않아. 아, 바우만 기억하나?" "아, 아토피스의 용병 녀석 ! 꽤 강했지만, 어찌나 잘난 척이 심했는지 그놈이 입만 열면 화딱지 나서 두들겨 패버리곤 했지." "날 꺾은 몇 안 되는 녀석 중 하나였던 것도 기억 하나?" "그했어? 그런데 그 녀석은 왜?" "죽었다 " "어느 전쟁터에서?" "아니, 나한테. 그 외에 날 한 번이라도 꺾었던 녀석들은 모두 찾아내서 죽였다. 목숨을 걸긴 했지만, 정식 시합이었으니 그들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다. " 게랄드는 잠시 대꾸하지 않았다. 링케는 더욱 낮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넌 언제나 나를 앞서갔었지. 너에게 패배한 시합은 기억해 두고 있지 않지만, 내가 널 한 번도 꺾지 못했다는 것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 게랄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합이라면 언제든 받아주마, 링케. 하지만 노르만트는 처들어 오지마라. 오랜 친구를 적으로 두고 싶지 않아." "친구? 너와 내가 친구였던 적이 있었나?" 링케는 회의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단 한 번도!" 그는 게랄드의 갈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회의실 문을 소리 나게 열었다. 링케는 당당하게 회의실에 들어왔으되 무례하지 않았다. 그는 왕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들라 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뜸 왕관이라도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던 게랄드는 의외의 진지한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났다. 게랄드는 카셀의 옆에 섰고, 카셀은 묵묵히 링케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름을 밝히시오, 붉은 장미 가문의 기사." 루오르 대신이 명령했다. "붉은 장미 백작을 모시며, 로즈 기사단의 캡틴이자 12쏜즈 중 한 명인 링케입니다. " "이름 외의 성은 없나?" "없습니다." "이름을 보니 이로피스 출신인 모양인데, 어쩌다가 카모르트 귀족의 밑에 있게 되었소?" "저는 이 자리에 절 소개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오직 제 군주의 뜻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 "이 곳은 국왕 폐하의 앞이며, 그대는 자신을 밝힐 의무가 있소." 링케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루오르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고집스럽게 다시 물었다. "어느 나라 출신이오?" 링케는 고개를 숙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샤를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의 군주가 폐하께 전하는 뜻을 고해도 되겠습니까?" 루오르 대신은 대단히 불쾌하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어찌 감히 폐하께 직접 말하려 하는가?절차를 지키시오. 그리고 그대의 군주가 폐하께 전할 말이 있다면 인장이 박힌 문서를 제시하시오." "왜 그런 절차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대의 말이 어찌 그대 군주의 말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소?" "기사단의 캡틴이 군주의 뜻을 대변할 위치가 못된다는 뜻입니까?" "그럼 그대가 로즈 기사단이라는 것은 어찌 증명하겠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나와 겨루게 하시오. 나의 갑옷과 나의 검이 증명하겠소." 루오르 대신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내뱉는 링케를 노려보더니 으르렁거렸다. "이 자리에 하얀 늑대들이 있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이오?" "알고 있소. 원하신다면, 캡틴이라는 자와 내게 무기를 주고 단 둘이 대면 시켜주시오." 링케는 카셀과 게랄드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대신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런 말을 감히?' 라는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왕은 턱에 손을 괴고 둘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말했다. "절차야 어찌 되든 좋다. 캡틴 링케,쟌스테인 백작이 전하는 말을 고하라." 링케는 마지막까지 하얀 늑대둘을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샤이필드 공작이 죽은 후 비어 있는 카모르트 국왕 폐하의 수호 가문에 붉은 장미 백작을 임명해주실 것이며 검은 사자 백작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길 원하십니다. 그 후 검은 사자 백작의 공격으로부터 노르만트를 지키기 위한 경호 부대를 주둔시키겠습니다 " 꽤나 장황하게 떠들 줄 알았던 링케는 막 세 가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짧은 발언에 대한 파장은 아주 컸다. 두나단은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고, 샤를 국왕도 불편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그것은 이 노르만트를 점령하겠다는 뜻이오?" 예의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루오르는 국왕 대신 나서서 말했다. 그는 흥분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링케는 국왕만 바라보다가 됫말을 이었다. "제 군주의 뜻은 여기까지입니다. " "받아들일 수 없다. " 국왕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신중히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이것은 폐하께 충성하는 영주의 조언이기도 하며, 이 나라 군사력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는 군주의 제안이기도 하며, 노르만트를 포위하고 있는 군 사령관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 국왕이 할 말을 잇지 못하자, 루오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무엄한 녀석. 당장 저 녀석을 잡아들여라!" "원한다떤 잡혀드리겠소. 하지만 책임질 수 있겠소, 대신?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군은 즉시 공격을 시작할 것이오. 폐하, 그래도 좋습니까?" 링케는 침착하게 말했다. 국왕은 말을 하지 못했고, 자기도 모르게 멀찌감치 서 있는 카셀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카셀도 이 엄청난 기사를상대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말했다. "방금 노르만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 없는데, 그 펀 우리 하얀 늑대들에 대해서도 같은 경고를 한거요. 캡틴 링케?" 링케는 그의 말에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두들기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아,붉은 장미 백작께서 캡틴 울프에게 전하는 말이 있소. 아란티아와 적이 되고 싶지 않으니 즉시 노르만트를 떠나시오. 오늘 밤이 지난 후에는 왕성에 누가 있든 개의치 않겠다‥‥‥‥ 들으셨소?" 카셀은 그 말에 무척 놀랐으나 대답에 지체하지 않았다. "들었소." "그럼 됐소." 링케는 국왕에게 다시 무릎 꿇어 인사하더니 허락도 받지 않은 채 회의실을 나섰다. 누구도 그를 붙잡거나 불러 세우지 않았다. 카셀은 입술을 깨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기사가 하기에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 꾹 참았다. "저 자를 당장 잡아들여야 합니다. " 루오르 대신이 외쳤다.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아직 붉은 장미 백작을 설득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 다른 대신이 말했다 "저 자가 방금 한 행동 만으로 충분히 처벌 받아 마땅하오." "그 처벌의 대가가 뭔지는 알고 있잖습니까?" 회의실은 대신들의 목소리로 한바당 요란해졌다. "캡틴 울프.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겠소?" 샤를 국왕이 모두를 진정시킨 후 물었다. 카셀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빠르게 말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세이게이 장군, 전군에 수비 태세를 갖춰 주십시오. 같이 가자, 게랄드." 카셀은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카셀은 발을 재게 놀려 복도를 가로질렀다. 게랄드도 빠른 걸음으로 카셀의 옆에 붙었다. "좋은 생각 있어? 돌려 말했지만, 쳐들어오겠다고 한 거잖아." "솔직히 말해줘, 게랄드. 장군은 낙관적으로 사태를 보고 싶어 솔직하게 말하려 하지 않아. 이대로 쳐들어오면 우리 못 막지?" "대답을 아는 질문 아냐?" "그래, 알아. 젠장!" 입구에 다다르니 링케는 벌써 말에 오르고 있었다. 그는 카셀과 게랄드를 힐끔 보더니 픽 웃어 보였다. 그는 서두르지도 않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를 머리에 쓰더니 말머리를 노르만트 시내로 돌렸다. 링케에게 뭔가 말하기 위해 서둘러 걸어왔다고 생각하던 게랄드는, 정작 링케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카셀을 의아하게 쳐다봤 다. "게랄드." "말해 ." "저 녀석 잡아." "잡아서 뭐해?" "죽이든 살리든 네 뜻대로 해. 하지만 저 자를 멀쩡하게 군대로 보내면 안 돼." "무기도 없이 사신의 자격으로 들어온 기사를 잡으라고?" "아니, 노르만트 내에서 그러라는 게 아니야. 모든 군대가 보는 앞에서! 카모르트의 군대도, 장미의 군대도, 모두 보는 앞에서 녀석을 쓰러뜨려." 게랄드는 입맛을 다셨다 "그건 아즈윈에게 트리제이 쟈란을 쓰러뜨리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냐? 하라면 하겠지만‥‥‥‥ "그것과 달라, 녀석이 왜 들어왔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런 간단한 메시지를 전하러 굳이 기사단의 캡틴이 직접 올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직접 왔어. 처음에는 노르만트의 군사력을 살피려고 온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야. 처음부터 우리 쪽 군대는 파악하고 있는데, 굳이 그걸 확인하려고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 놈은 여기 있는 군대와 대신들에게 공포를 확산시키기 위해 온 거야. 일부러! 그 목표가 누구겠어?" 게랄드는 뭔가 알 듯 하면서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야. 녀석의 목표는 처음부터 우리였어. 여기 있는 군대에게 '하얀 늑대들을 데리고 있어 봐야 너희에게 희망 같은 건 없다. ' 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온 거라고. 우리가 비무장인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서 저런 거지만... 생각해봐.하얀 늑대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가는 저 녀석의 모습이 성의 경비나 노르만트의 시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겠어?" 게랄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하게 돌러 말하지 마, 캡틴. 일테면 사기 싸움에서 밀리지 말자는 거 아냐." "그래. 하얀 늑대들이 머물고 있는 이 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줘. 하얀 늑대들이 아란티아에 놀러 온 관광객이 아니라는 걸 가르처주는 거야." "어차피 나도 저 녀석을 그방 보내는 게 좀 껄끄럽긴 했어." 링케는 성문 앞에서 다시 무기를 돌려 받았고, 느긋하게 성문이 열러길 기다렸다. 그 사이 그는 차가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비병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병사들은 모두 한 걸음씩 물러났다. 성문이 열린 후 링케가 나간 후 병사들을 그 틈으로 벌레라도 한마리 들어올까 황급히 닫았다. 캡틴 쟈란은 그 모든 과정을 하나씩 지시하고 있었다. 내내 긴장하고 있다가 성문이 닫히자 비로소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와 칼을 대본 것도 아니고, 말 한 자리 나누지도 않았는데 묘하게 눌리는 기분이었다. 바로 저 카리스마가 드마르프 평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구나.' 전에 세이게이 장군 밑에서 검술 수업을 쌓을 때는 카모르트 내에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카모르트 최고라는 바팅과도 맞붙어도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할 거라 스스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몸이 성하다 할 지라도 지금 링케와 싸우면 몇 번 버티지도 못하고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일단 아무 사고 없이 그를 보낸 것은 안심이지만, 정작 그 뒤가 걱정이었다. 병사들은 고작 기사단의 캡틴한 명 지나간 것만으로 얼어있었다. 분하지만, 자신의 리더쉽으로 지금의 병사들을 원래대로 되돌이기에는 부족했다. "캡틴 쟈란. 모든 병사들이 밖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오." 어디선가 갑자기 카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뜬금 없는 부탁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어서! 그리고 성문을 여시오." "들어을 사람이 있소?" "아니, 나갈 사람이 있소."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시키는 대로 성문을 열고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성의 갤러리로 올라서라고 했다. 열린 성문을 통과해 말을 타고 나간 사람은 다름 아닌 게랄드였다. "무슨 일인지 다시 한 번 여쭤도 되겠소?" 쟈란이 물었다 "저 자를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내가 공격하라 지시했습니다. " "사신 자격으로 온 기사를 공격한단 말입니까?" "이유야 만들면 되는 거고, 중요한 건 양 군대에 우리 하얀 늑대 라는 존재를 주지시켜 두는 데 있소." 실제로 그랬다. 명성으로만 보자면 아직도 하얀 늑대라는 존재감이 훨씬 더 컸다. 그러나 쟈란도,다른 병사들도 잠시 '저 무서운 기사가 이끄는 군대가 쳐들어오면 우리가 막기 힘들거야.', 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정작 더 강하고 무서운 기사를 바로 옆에 두고도..."그리고 저 자가 저 쪽 군대의 중심이오. 짐작뿐이긴 하지만 정황을 살펴보건대, 이대로 저 자가 돌아가면 반드시 저 군대는 노르만트를 칠 요. 그걸 막아야 하오." 멀리 게랄드의 말이 링케의 말 옆으로 다가갔다. 링케도 가던 길을 멈추었고, 둘은 잠시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은 노르만트의 병사들은 물를이고 백작 군의 병사들도 보고 있었다.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잠시 후 둘은 동시에 무기를 치켜들었다. 링케는 말을 뒤로 몰았고, 게랄드도 상대와 거리를 벌였다. 장미의 군대 쪽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세 명이나 말을 몰고 달려 나왔다. 자란은 깜짝 놀라 밑에 대고 성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도우러 가야겠소." "다친 몸으로 어딜?" 카셀이 막았다. "그럼 캡틴 울프라도 나서시오. 이대로 부하가 혼자서 여럿을 상대하는 걸 보고만 있을 셈이오?" "누누이 말하지만 하얀 늑대들은 내 부하가 아니라 친구요. 어쨌든 걱정 마시오. 저들도 기사고, 아마 링케라는 자는 절대 다른 이의 힘을 빌어 게랄드와 싸울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요."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둘은 그런 관계요. 서로 검술을 가르쳐줬던 용병 시절의 친구였거늘, 아무리 적이 되어 만났다 한들 일 대 다수의 싸움을 하지는 않을 겁니 다 " 카셀의 말대로 링케와 게랄드 쪽으로 달려갔던 로즈의 기사들은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본대 앞에서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붉은 장미 백작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병 장기를 부딪히거나 북을 치기까지 했다. "우리도 응원을 해야 하지 않겠소, 캡틴 쟈란? 전쟁은 벌써 시작 되었소." 카셀이 말했다. 쟈란이 손을 높이 치켜들자,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성루의 병사들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양 군대의 함성이 대지를 진동시켰다."내 실력 따위로 당신들을 평가할 수 없겠으나, 캡틴 카셀....12쏜즈라는 자들은 드마르프 평원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 하지 않았소? 기습으로 등 뒤를 공격 당했으면서도 저 기사들을 중심으로 뭉친 장비의 군대는 사자의 군대를 꺾었다 들었습니다. 그런 자를 이길 수 있겠소?" "전에 아즈윈이 당신을 상대할 때 정식으로 대한 게 아니 라 장난을 쳤다고 한 걸 기억하시오?" "그런 치욕적인 일을 벌써 잊어버렸겠소?" 카셀은 수염이 잔뜩 자라있는 턱을 쓰다듬으며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실어 쉐이든처럼 말했다. "만약 아즈윈이 당신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지 지금부터 잘 봐두시오." 카셀도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지만, 노르만트에 오기 전 검은 기사와 싸울 때의 게랄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링케가 아무리 강해도 그 검은 기사보다 강할 거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길 빌었다. 게랄드는 성문을 나선 직후 링케를 불러 세웠다. 링케는 따라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즉시 멈췄다. 아니, 따라오지 않았다면 섭섭했을 거라는 표정으로 쥐고 있는 창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대뜸 공격 하지는 않고,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이건 네 의지냐, 아니면 네 캡틴의 명령이냐?" 게랄드는 찌르면 충분히 닿을 거리까지 무방비로 들어간 후에 대꾸했다 "성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반쯤은 명령 때문에 움직인 거였는데, 여기 와서 생각해보니 완전히 내 의지였던 거 같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를 그냥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내가 아까 말을 안 했던가, 아니면 하다 말았던가?나는 널 친구로 생각한 적 없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섭섭하게도 그했지. 그리고 널 꺾은 녀석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녀석이 없다는 것도 아주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한 녀석 살아있으니 마저 처치하고 가라고 나와준거야." 게랄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고맙지? 자식아." 링케의 눈썹이 한 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굳이 나와주지 않아도 내가 찾아갈텐데, 왜 서두르나?" "나 성질 급한 거 하나는 알아주잖아. 네가 내 빵 훔쳐 먹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범인은 따로 있는데, 너만 죽어라고 패줬었지." 링케의 굳은 입술에 감정 섞인 미소가 피어 올랐다. "좋은 거 기억나게 해줬다‥‥‥‥ 어련하겠냐?이 빌어먹을자식." "아하, 이제야 옛날로 돌아갔구나, 이 녀석!분위기 잡느라 인상쓰는 네 놈 새끼 모습이 어찌나 꼴 사나웠는지 보기 역겹더라." "그했나? 그럼 잠시 옛날로 돌아가 주지." 링케는 말을 뒤로 몰아 거리를 늘렸다. 게랄드는 도끼를 세우고 같은 속도로 말을 뒤로 되돌렸다. 그 때 멀리서 붉은 갑옷 입은 기사들이 달려 나왔다. "캡틴 링케,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 한 명이 말했다. 거대한 칼을 한 손에 든 거한과 가늘지만 무척 긴 칼을 쥔 기사였다. "괜참다. 돌아가라, 백작님께 늑대의 머리를 곧 대령한다고 알려라." "예 " 둘은 군말 않고 돌아갔다. "늑대 머리? 이런 젠장 맞을! 그건 꽤 멋진데, 난 뭐라고 하냐? 장미 꺾어간다고 하면 우습잖아." 게랄드가 말하자, 링케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네놈 새끼 농담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우습지 않군." "방금 웃은 주제에 딴말 하네." 게랄드가 불만스럽게 말할 때 장미의 군대 측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노르만트의 성 쪽에서도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의 대결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많군. 와라, 게랄드." 링케가 말했고, 게랄드가 먼저 움직였다. 나중에 움직였지만 말의 움직임은 링케 쪽이 두 배는 더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링케는 창을 강하게 후려쳤고, 게랄드는 가까스로 막았다. 그러나 창 끝이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상처가 길게 났다. 링케는 말을 멀리서 되돌려 머못거리는 게랄드를 향해 다시 창을 찔러 넣었다. 이번에도 게랄드는 막기만 했고, 창 날은 그의 옆구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가 한 번 공격할 때마다 장미의 군대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링케는 천천히 말을 진정시키고 다시 처음의 간격을 유지했다. "아직 몸이 안 풀린 거라면 기다려주마." 링케가 말했다 "아, 괜찮아. 한 번 더 공격해도 돼." 게랄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불의 용병 게랄드께서 상대를 배려해 세 번의 공격 기회를 헌납하셨지?" 링케는 차갑게 웃었다. '너야 아니겠지만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고, 이건 그 예의다. 너는 아마 기억 못할 테지만, 사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네가 칼보다는 도끼가 내게 맞는 무기라고 조언해 준 것 덕이야. 의도야 어찌 되었건 그건 내게 아주 큰 도음이 되었다. 아직 고맙다는 말을 안 했지? 거기에 대한 감사의 뜻이다. 어떠냐? 눈물 나지않냐?" "집어치워! 공격을 허용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아." "별로 감사의 표시가 안 되었나 보네. 그럼 세 번제 안 해 준다?" "바로 그런 점이 난 싫었다. 주제에 남을 배려하는 꼴이라니 ‥‥‥‥ 다른 녀석들은 그런 너를 좋아했겠지만 내 눈에는 오만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오늘 네 잘난 면상에 창을 꽃아주겠다. " 링케의 독설에도 게랄드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네 프라이드가 나는 마음에 들었었다. 내 이런 면이 오만으로 보였다면 그건 네가 나만큼이나 강했기 때문이었어. 영광으로 알아도 좋아." "곧 죽어도 헛소릴 지껄일 놈이지, 너란 놈은 " "그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지. 링케, 대체 지난 몇 년 동안 뭘 했길래 실력이 하나도 안 늘었냐?" 링케는 눈을 부릅뜨고 말고삐를 잡아 당기더니 아까보다 더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창 날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을 때까지 게랄드는 꼼짝도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도끼를 두 손으로 쥐고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게랄드가 누르는 힘을 버티지 못한 말이 휘청하고 엉덩이를 늘어뜨렸다. 게랄드는 잠깐 균형을 잃었으나 어느 정도 예상한 말의 음직임 이기에 충분히 도끼를 휘두를 수 있었다. 게랄드의 도끼는 링케의 창을 부러뜨리고 링케의 투구를 깨뜨리고 링케의 뺨을 한 뼘이나 그었다. 말이 밀릴 정도의 힘으로 투구를 얻어맞은 링케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육중한 갑옷이 바닥에 둔탁 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쓰러진 링케는 일어나지 못했다. 백작의 군대에서도, 노르만트의 성곽에서도 함성은 없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12 쏜즈의 기사들이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붉은 갑옷의 기사들이 링케가 쓰러지자마자 게랄드를 향해 달려 나왔다. 그 중 처음 링케를 도우러 왔던 세 명 중 하나인, 거대한 칼을 든 기사가 다짜고짜 칼을 들어 게랄드를 내리쳤다. 그러나 그 거대한 칼을 게랄드는 한 손에 든 도끼로 후려쳐 떨궈됐다. 그 기사는 자신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즉시 칼을 되돌려 다른 공격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게랄드는 도끼를 내리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물러나라. 이건 오랜 친구들끼리의 시합이 었다. "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캡틴 링케가 잠시 쉬시는 동안 내가 대신 상대해 주겠다. " "이거 용기 있는 놈일세?" 게랄드는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쓰러져 있던 링케가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나며 말했다 "크라브지크. 진지로 돌아간다. " "예 ." 그는 말을 돌리는 순간까지 게랄드를 노려보았다. 링케는 뺨을타고 줄줄 흐르는 피를 닦지도 지혈하지도 않고 말에 올랐다. 게랄드는 비틀거리되, 결코 부축을 받지 않고 자기 진지로 돌아가는 링케의 됫모습을 바라보자니, 이겨도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게랄드는 어찌 됐든 상관 없다는 듯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기분 좋게 노르만트 쪽으로 돌아갔다. 노르만트의 성에서 커다란 함성이 울렸다. 성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병사들이 주먹을 불끈쥐며 게랄드의 이름을 연호했다. 게랄드는 손을 내민 병사와 악수하거나 마주 쳐주기도 했다. 그는 카셀이 있는 망루까지 올라갔다. "고생했어. 좀 다쳤군." 카셀이 게랄드의 뺨을 가리키자, 그는 손등으로만 쓰윽 문질렀다. "마지막 공격에서는 좀 아슬아슬하긴 했어. 말이 왜 그리 힘이 없어?" 게랄드는 약간 얼이 빠져 있는 쟈란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겼다는 결과에만 환호하는 병사들과는 달리 쟈란은 게랄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하고 있기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세상에는 이런 기사가 있었다‥‥‥‥ 게랄드는 멍하니 있는 쟈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고, 얼결에 내민 그의 손바닥을 소리 나게 짝 때렸다. 그제야 쟈란은 정신을 차리고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방심했나?" 백작은 링케의 패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천의 병력은 지금도 검은 사자 백작의 영지인 레앙을 공격하고 있고, 현재 노르만트를 포위하고 있는 이천의 병력 중앙에 한가로이 앉아 차를 즐기고 있는 붉은 장미 백작이었다. 그는 사실 링케가 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오히려 찻잔을 내밀고 마실 거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방심 따윈 없었습니다. 그게 제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차는 사양하겠습니 다. " 지혈을 위해 뺨을 누르고 있어 약간 발음이 뭉개졌으나, 링케는 똑똑히 대답했다. 방에 대고 있는 거즈가 금방 붉게 물들었다. "변명은?" "없습니다. " "네가 지는 덕분에 군의 사기가 많이 깎였다. 지는 일 없는 12 쏜즈의 캡틴이 단 한 방에 나가떨어졌으니 오죽 하겠나? 어때? 다시 싸우면 네 입지를 회복할 자신 있나?" 차의 향기가 막사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백작은 찻잔을 치우고 의자에 기대어 턱에 손을 얹었다. "없습니다. 그 자가 저보다 강했고, 그 폭은 단시간에 메워질 만 한 정도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 "네가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할 정도로 큰 일이 터진 건 아니야. 하지만 그 상처는 서둘러 치료해 둬야겠군. 가보게." "예, 그런데 제 패배 때문에 계획이 수정되는 겁니까?" "기사가 싸우면 가끔 질 때도 있어야지. 하지만 그런 게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건 백 년 전 얘기다. 익셀런 기사단이 드래곤 기사단의 수호 드래곤을 몽둥이로 때려잡은 이후로는, 그런 일 대 일의 대결은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없게 되었지." "하얀 늑대들의 캡틴 퀘이언이 익셀런의 캡틴 웰치를 쓰러뜨렸을 때도 여전히 기사 간의 대결은 중요했습니다. "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아무래도 년 얼굴에 입은 상처보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 큰 것 같구나." 링케는 대꾸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공격을 시작할테니 그 때까지 잠시 쉬도록 해라. 네 잘못으로 입은 상처 때문에 대열에서 빼주지는 않겠다. " "하얀 늑대들은 어쩌시겠습니까?" "왕만 빼앗으면 끝나는 싸움이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예. 그럼 전 잠시 쉬겠습니다. " 링케가 나간 후 백작은 피식 웃으며 은빛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크게 이변이 없는 한 레앙은 한 달 안에 점령할 수 있었고, 동시에 한달 동안 검은 사자 백작은 영지에서 꼼짝도 못할 것이다. 그 사이 노르만트에 온 것이고, 점령에는 이틀 이상 걸리지 않을 거라는게 그의 계산이었다. 링케가 당한 것과 하얀 늑대들이 12 쏜즈보다 강하다는 건 예상 외였지만, 전투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은 못 되었다. 우선 노르만트, 그리고 레앙‥‥‥‥ 그릿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붉은 장미 백작의 계획이 었다. 검은 사자 백작만 무너뜨리면 그를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사실상 카모르트를 지배하는 게 된다.물론 그에게 있어 카모르트는 작은 시작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으나, 변수는 었다.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디, 군대도 막을 수 있나 볼까, 하얀 늑대들?" 백작은 지금 상황이 못 견디게 즐거웠다. 드레드 나이트 (Dread Knight) (1)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이동을 준비했다. 노르만트 쪽에서는 많은 병사들이 성곽의 갤러리에 서서 깃 발을 휘날리거나 창을 들고 자기들의 숫자가 많다는 걸 보여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많은 병사가 없다는 걸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작전의 지휘는 프레드릭 장군이 맡았다.붉은 장미 백작과 먼 친척 관계였는데, 드마르프 평원 전투에서 장군이 죽는 바람에 얼른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이번이 첫 전투였다. 가끔 붉은 장비 백작은 이런 파격적인 승진 조치를 취했는데, 누가 지휘봉을 쥐고 있든 실질적인 군대의 지휘를 맡는 것은 결국 쏜프의 기사였기 때문에, 부하 장수들은 아무도 거기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생기는 공석에 끼어들기 위해 상관이 죽기를 은근히 바라는 부하들도 있었다. 루치 뱅상도 그런 이 중 하나였다. 그는 드마르프 평원의 전투가 있었을 때, 개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당시 지휘관이 화살에 맞아 죽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물론 그게 싸움의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친 건 없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병사들이고 용병 들이고 지휘하는 장군보다 12 쏜즈와 로즈 기사단의 움직임만을 쫓으며 싸우느라 장군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저 자리에 오른 프레드릭 장군이라고 같은 처지가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휘관이 된 것을 뿌듯해 하며 모든 이가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하길 바랐다. "둘란 부관은 어디 있나?" 프레드릭 장군은 투구를 쓰며 물었다. 루치는 얼른 대답해주었다 "드마르프 평원 전투에서 사망했습니다 " "그래? 그럼 자네는?" "둘란 부관의 후임으로 들어온 루치 뱅상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어느 귀족 출신인가?" "용병단 출신입니다. 그 전에는 로즈 기사단에 잠시 있었습니다, 프레드릭 장군님." 루치는 프레드릭이 금새 자신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알았다. 특히 마지막에 붙여준 장군이라는 어감을 좋아한다는 게 표정에 금방 드러났다. 음식 타박이 심한 이전 장군에 비하면 비위 맞추기 좋은 상관이었다. "그럼 이번 작전은 모두 꿰고 있겠군, 실수 하는 일 없도록 하게." 그는 친위를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 "지금 레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비하면 사소합니다. 얼마 나 피해를 줄이느냐에 오히려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요." "상대에는 하얀 늑대들도 있다고 들었네." "우리에게는 12쓴즈의 기사 중 일곱 명이 있고, 로즈 기사단도 오십 기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방비도 안 되어 있는 성 하나 치기에 너무 많은 병력입니다. 뛰어난 기사 다섯 명 정도가 상대 편에 있다고 문제가 되겠습니까?" "자네 말하는 게 꼭 붉은 장미 백작 같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 "작전 개요를 좀 들어보도록 할까?" 프레드릭 장군은 기지개를 쭉 펴며 말했다. 딴에는 긴장하지 않은 척 하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지만, 미숙한 장수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터가 역력했다. 루치는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겸손하게 그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상관의 비위에 거슬릴 만큼 난 척 하지 않으면서도 시키는 일은 척척 해내는 것! 그게 루우룬 마을의 농부 출신 용병이 순식간에 이런 자리에 오를 수 있던 비법이었다. "남쪽 성으로 쳐들어가는 척 하면서 후방 군대는 동쪽과 서쪽의 성문을 공격합니다. 그 중간에 성벽을 기어오르는 군대가 포함됩니다. 붉은 장미 백작의 말씀에 따르면 저 성에는 오 백 명도 안 되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전투 경험 없는 일반 시민들뿐. 성벽만 넘으면 그 후에 할 일은 서둘러 항복 문서를 받아내는 겁니다. 작전이랄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용병들이 성 벽을 넘은 후 노르만트의 부녀자들을 잡아다 닥치는 대로 자기 성욕을 채울 게 걱정입니다. 최근 전투가 이어지며 여자라는 것을 맛 보지 못해서 ‥‥‥‥ "당장 전투보다 그런 게 걱정이라니, 과연 우리의 병력이 강하긴 한가 보군." "드마르프 평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레앙으로 가는 길목의 검은 사자 백작 군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았던 바로 그 군대가 그대로 온 겁니다. 사기 면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었죠. 장군님께서는 바로 그 군대의 지휘관이신 것입니다. " "그렇구먼." "작전 개시 시각은 해가 지기 직전입니다. 지금 시작할까요?" 루치는 정중히 물었다. 어차피 자다 깨어보니 장군이 되어있는 사람이 할 일이란 게 그런 것 밖에 없었다. 비위를 맞추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럼 그렇게 할까?" "예." 루치는 장군의 명령을 받은 척 하며, 나서서 병사들에게 직접 소리질렀다. "전군 앞으로!" 움직여야 할 군대는 질서 있게 움직였고, 움직이지 말아야 할 군대는 참을성 있게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가 이 정도로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딱 한 부대가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루치는 명령 전달이 늦은 걸까하며 잠시 기다렸다가 문득 그 부대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정가운데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한명 있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병사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저, 저건 뭔가? 검은 사자 백작의 기사가 쳐들어 오기라도 한 건가?" 프레드릭 장군은 멍청한 소리를 했다. 갑옷은 검은 색이었으나 그것은 결코 라이온 기사단이 아니었다. 루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지금까지 무수히 소문만 뿌리던 바로 그 검은 기사들이었다. 그것은 뻔히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자연 재해와도 같은 것이었다. 어떤 병사도, 어떤 기사도 그 검은 기사의 진로를 막지 못하고 있었다. "맙소사, 백작님을 불러라!" 프레드릭 장군은 더듬거리며 말하며,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려다 그만 거꾸로 떨어졌다. 자신이 알기에 가장 빨리 전선에서 탈락한 지휘관이 드마르프 평원 전투에서 화살 맞고 죽은 장수였는지, 아니면 방금 말에서 떨어지며 목매가 부러져 평생 침대 신세를 지게 된 프레드릭 장군인지, 루치는 구별할 수 없었다 "궁수는 전원 포트에 올라와 있어라. 방패병들, 왜 그 쪽에 몰려 있어?" "침착하라. 훈련 받은 대로만 하면 돼." "창병들은 전원 한 곳에 집결!" 성벽에 몰려 있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로 울렸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자리를 찾지 못한 병사들도 일부 있었으나 대부분 준비를 끝냈다. 그들은 공성 전투에 대비한 훈련을 짧은 시간이나마 착실하게 받아왔고, 전투가 시작되는 지금 무얼 해야 할 지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방금 전까지 그런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사기가 급격히 올라 다들 의욕적으로 변했다. "게랄드의 공격이 아주 잘 먹혀 들어갔군 " 뒤늦게 성 망루에 올라온 쉐이든이 말했다. 카셀은 팔장을 끼고 이동을 시작하는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살피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아주 좋아. 나는 이 사기에 밀려 적들이 움직이지 않길 바랐어. 하지만 역시 내 생각대로만은 안 되는군." "붉은 장미 백작은 아주 과감한 전투를 즐기는 사람이야. 사기가 조금 깎였다고 예정된 전투를 피해갈 사람은 아니란거지." "내 판단 미스일까?" "링케를 잡은 건 아주 적절한 지시였다. 게랄드도 잘 해 줬고." 게랄드는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콧김을 푹 내쉬었다. "당연하지. 그보다 이제 진짜로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별 수 있나? 적들이 싸우려 몰려오면 우리도 맞아야지. 병사들이 게랄드 네가 가르쳐준 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승률은 반반이야." "그렇게나 이 성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카셀이 의심적게 물었다. 그는 붉은 깃발로 덮여있는 적들의 움직임을 보고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성 안 쪽을 지키고 있다는 이점을 생각하면 당연한거지." "아, 그런데 붉은 장미 백작이 과감한 전투를 즐긴다‥‥ 라는건 어떤 의미야? 저 사람의 전투를 본 적이 있어?" "드마르프 평원에서 봤잖아 " "그것만 보고도 알아?" "레앙을 아직 점령하지도 않은 채, 노르만트로 군대의 일부를 돌린 걸 봐도 마찬가지야. 검은 사자 백작이 전투에 무지한 사람이 아니라면 성을 어떻게 지키는지 정도는 알 거다. 또 그 정도 군사력으로 막는 데에만 전념하면,붉은 장미 백작이 아무리 압도적인 전투력을 가지고있다 해도 최소한 한 달은 걸릴거다. 그러니 붉은 장미 백작은 그 군대의 일부를 과감하게 노르만트로 돌린 거지. 레앙에서의 반격도 있을 수 있지만, 그는 무시한 거야. 노르만트를 빼앗은후에도 레앙을 계속 밀고 나갈 자신이 있다면, 전투는 거기서 끝난 거나 다름 없지. 그가 요구한 대로 국왕이 붉은 장미 백작을 수호 가문으로 인정하면 다른 귀족들도 검은 사자 백작에게 등을 돌릴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구나. 몰랐어." 카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쉐이든은 가만히 카셀을 바라보다가 스쳐가는 말로 툭 내뱉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배워가는 과정이다. 우울해 할 것 없어." "그래 ." 카셀은 성의 없이 대꾸했다가 갑자기 쉐이든이 한 말을 속으로 곱셉어 보았다 '과정?' 조만간 끝날 캡틴인데 당장 해내지 못하면, 과정이란 게 무슨 소 용이란 말인가? "아, 그보다 그런 걸 세이게이 장군에게 말하지 않아도 돼?" "전투를 한두 번 치러본 장수도 아닌데 모르겠어?" 창을 짚고 호기 있게 서 있는 쉐이든의 모습은 하얀 늑대들을 상 징하는 모든 단어를 함축시켜 놓은 듯이 멋있어 보였다. 어던지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비교되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카셀이었다. 깡패처럼 쭈그리고 앉아있는 게랄드가 옆에 있어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던멜은?" "어디 있겠지 ." "아즈윈은?" "몸이 안 좋대. 쉬라고 했어." 게랄드는 감정 없이 짧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자의 몸이란 정말 불편하군 " "핸디캡이란 거지. 생각해봐. 그 정도 재능에 그 정도 핸디캡도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따라가겠어?" 카셀은 적군의 상황을 살피는 척 했지만 둘의 대화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그들의 별 거 아닌 대화에도 배울 점이 많았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내가 성 문을 열고 나가 있을까? 일직신 상으로 들어오는 건 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게랄드가 말했다. "링케를 쓰러뜨린 것으로 충분해, 그 이상 영웅 행세 할 필요 없어. 더구나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병사들을 써먹지 않으면 그 이후는 어쩌겠나?" "조금은 지켜봐야겠군." "그보다 링케는 왜 살려뒀어?" "죽이는 게 나았을까?" "어떤 여파가 있게 될까?글쎄, 나도 모르했군, 그냥 왜 안 죽였는지 모르겠다는 거지, 전략상 물어본 건 아니었다 " "나도 모르겠다.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아서‥‥‥ 라고 해둘까?" "그 책임은 아마 네가 지게 될 거다 " "알아. 그 녀석 자기가 싸움에 진 상대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저절로 그렇게 될거다. " 게랄드는 킥킥대고 웃다가 카셀을 불렀다. "어이, 캡틴. 전부터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막상 너한데 말을 안 한 게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 "응, 원데?" 카셀은 갑자기 붉은 장미 백작족에서 유난히 검은 갑옷이 눈에 띄는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그는 그만 입을 따악 벌렸다. 쉐이든도 곁눈질로 상황을 느긋하게 살피다가 즉시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앉아 있느라 바깥을 보지 않는 게랄드만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너 이대로 울프 기사단에 들어오지 않을래? 검술은 무리겠지만, 네 재능은 충분히 아란티아에서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때? 이 일이 끝나면 우릴 따라가지 않을래?" 카셀은 그 말에 더 놀라야 할지, 검은 기사의 출현에 놀라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게랄드도 뭔가 싶어 밖을 내다보았다가 이내 도끼를 치켜들었다. 쉐이든이 말했다. "그래, 나도 카셀에게 그걸 제안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를 할 시점이 아닌 것 같군. "저 놈들, 우리 마차를 공격한 놈들이랑 같은 놈들이겠지?" "팔 잘린 녀석 어디 있나 찾아봐 " 쉐이든이 농담처럼 말했다. 카셀은 주먹을 꽉 쥐며 손을 부르르 떨었다. "셋, 넷‥‥‥‥ 다섯. 저 놈들 저렇게 많았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 명이 넘는 군대가 그 다섯 명의 기사들에게 밀려 후퇴했다. "어라, 저 놈들을 공격하네. 우릴 도와주는 꼴이 되잖아." 게랄드는 군대의 움직임을 살피며 말했다. 그러나 쉐이든은 군대 쪽이 아니라 노르만트 안 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야. 저건 자기들 사냥감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인 것 같군." 귀를 거슬리게 하는 괴이한 소음이 노르만트 전체에 울려 퍼졌다. 노르만트에서 제법 높은 건물에 속하는 교회의 첨탑에 검은 말을 탄 검은 기사가 올라가 있었다. 기울어진 지붕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거대한 말은 마치 맹수처럼 포효했고, 그 위에 탄 기사는 검은 연기가 피어나오는 나팔을 불었다. 또 한 번 등골이 오싹해지는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던 검은 기사들이 그 소리를 듣고 일제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노르만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쉐이든이 지체하지 않고, 성곽의 병사들을 향해 소러쳤다. 성루에서 있던 쟈란도 검은 기사들의 접근을 발견하고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던 참이라 즉시 그의 명령을 받았다 "전군 전투 준비!" 쟈란은 확인 차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공격 목표는 저들입니까?"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 그들이 누구든 상관하지 말고 공격하시오." 쉐이든은 다급하게 소리친 후 창을 치켜들었다 "카셀, 넌 성으로 가. 아즈원이 거기 있을 거다. 게랄드, 여길 공격하려는 놈들을 막아줘." "너는?" "나팔을 든 녀석이 저 놈들의 리더 같아. 그 때도 저 놈이 부르니까 물러갔었지. 내가 처리하겠다. " "그런데 어떻게 여길 들어왔지?" 게랄드도 도끼를 끼고 물었다."낸들 아나?지붕 위에 올라가 있으니 뛰어넘‥‥‥‥ 잠깐, 저 교회 높이가 어느 정도야?" 쉐이든은 눈어림으로 높이를 재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성문을 막고 지켜도 소용없겠어. 저 말, 이 성곽의 높이 정도는 뛰어넘을 거야." "말도 안 돼!" 카셀이 말했으나 쉐이든은 듣지 않았다 "서둘러, 카셀. 놈들은 화살도 칼도 통하지 않을 거다. 여기 있으면 지켜줄 사람이 없어." "난‥‥‥" 카셀은 순간 '나는 하얀늑대들의 캡틴인데 어떻게 도망쳐?' 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거것말이 반복되니 이제 쉐이든에게 마저 거짓말을 하려 했던 것이다. 카셀은 입을 다물었고, 쉐이든도 그의 됫말을 들으려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밑에 대기 하고 있는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나도 준비 해야했군." 게랄드도 계단을 내려갔고, 이제 망루에는 카셀 혼자 남게 되었다. 갑자기 온 몸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이런 위급한 순간에 정말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그는 발가벗겨진 심정이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그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카셀은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굴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꾸욱 감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쉐이든의 말대로 성 쪽으로 가는 길뿐이었다. '그래, 가서 아즈윈의 보호나 받아야겠지.'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려 애쓰며 말에 올라 달려가면서도 결국 카셀은 뒤를 툴아보았다. 검은 말 하나가 날아오르는 듯 성을 뛰어 넘고 있었다. 게랄드와 싸우다 한 팔을 잃은 검은 기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바로 그 놈들이었다. 쟈란의 명령과 함께 수십 개의 화살이 허공을 날아 검은 기사들에게 내리 꽂혔다. 그들 중 둘은 검은 방패로 화살들을 막았지만, 창과 할버드를 들고 있는 다른 기사들은 아예 무시하고 몸으로 화살을 받아냈다. 튕겨나가는 화살도 있었으나, 분명 몇 개는 투구와 가슴의 보호 장비를 뚫고 박혔다. 그러나 검은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쟈란은 천 명이나 돌격 준비를 하고 있던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이 몇 명 되지 않는 기사들에게 밀려 달아난 게 금방 납득이 되었다. 화살이 통하지 않는데, 다른 무기라고 통할 리 없으니 쟈란의 선택은 하나 밖에 없었다. "성문을 사수하라. 놈들이 들어오게 해선 안된다. " 검은 기사들의 말은 날아가는 화살을 달려가서 잡으라 해도 가능할 정도로 빨랐다. 순식간에 그 먼 거리를 달려오니 궁수들이 두 번째 화살을 잴 시간 여유도 갖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에 거의 다다른 후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쟈란은 마지막 순간까지 설마하는 생각으로 눈 앞에서 벌어질 상황을 외면하려 애썼다. 검은 말은 달려오는 힘을 이용하여 새가 도약하는 것만큼이나 높이 뛰어올랐고, 순식간에 성벽을 넘어 성곽 뒤쪽에 착지했다. 한 마리는 겨우 성루에 앞발만 닿았는데 워낙 빠르다보니 그 탄력으로 됫발까지 저절로 올라왔다. 나머지 한마리는 도약력이 조금부족한 나머지 성벽에 부딪혀 나가 떨어졌으나, 그래도 거기에 타고 있던 검은 기사는 튕겨나가는 힘으로 성벽을 기어올라왔다. 당황한 병사들은 급한 대로 창으로 그들을 공격했으나, 그들이 휘두르는 할버드에 두 동강이 나 시체만 밑으로 떨어졌다. 침착하게 두 번째 화살을 준비한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그러나 화살의 거의 대부분이 튕겨나갔고, 그나마 갑옷을 뚫고 박힌 화살도 검은 기사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화살을 온 목에 꽃은 채로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이고 있었다. "비켜라!" 멀리서 게랄드가 달려가며 창을 집어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바닥에 닿을 듯이 낮게 날아가던 창이 검은 기사의 몸에 닿기 직전 솟구쳐 올라갔다. 화살만큼이나 빠른 그 창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검은 기사는 자신의 방패를 들이대어 창을 막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 십 발의 화살을 받아낸 후에도 흡집 하나 나지 않던 그 단단한 방패는 게랄드의 창에 뚫리더니, 그걸 쥐고 있는 검은 기사의 투구 까지 뚫고 들어갔다. 검은 기사의 육중한 몸이 잠깐 들리는 듯 하다가 도로 착지했다. 방패와 투구를 동시에 꿰고 지나간 창이 검은 기사의 뒤통수를 빠져 나와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검은 기사 하나를 해치운 것에 환호했으나, 정작 게랄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상대에 맞게 싸우자고, 검은 친구." 검은 기사는 창에 뚫린 방패를 천천히 잡아당기고 있었다. 쇠가 찣어지며 투구에서 창이 빠져 나왔다. 뚫린 뒤통수에서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 올랐으나 그는 공격 당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어깨와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히 서 있었다. 검은 기사는 창이 박힌 방패를 먼져버리고 커다란 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 광경을 보던 쟈란은 그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야지 '라고 웃으며 접근하는 게랄드나, 구멍 난 투구에서 피 대신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갤러리를 걸어가고 있는 검은 기사나, 그가 보기에는 똑같은 괴물이었다. 성벽 아래에서도 그 괴물 중 하나가 자신의 부하들을 한 곳에 무더기로 몰아넣고 창을 꽂아 넣고 있었다. 병사들은 나름대로 저항 하고 있었으나, 찔러도 도로 튕겨 나오는 갑옷을 입은 기사를 상대로 싸운다는 건 불가능했다. 심지어 그가 타고 있는 말조차 전투에 참여하여, 앞발로 병사들을 내리찍고 있었다. 대항하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덤비는 자체가 무모한 싸움이었고, 학살에 가까웠다. 그래도 훈련받은 병사들이다 보니 십 수명이 희생당한 후에도, 기어이 달려들어 창을 찔러 넣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찔린 창을 쑥 빼더니 그 창으로 자기를 찌른 병사를 찔러 죽였다. 지금까지 일말의 희망으로 버티 던 병사들은 그 광경에 완전히 겁에 질렸고, 이제 뒷걸음질 치는 병사들까지 생겼다. 죽지 않는 적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고, 승산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쟈란은 후퇴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 순간 뭔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부러진 칼날이 허공을 날고 그 뒤를 따라 검은 기사의 투구가 성벽밑으로 떨어졌다. 머리 없는 검은 기사가 뒤로 휘청거리며, 허공에다 부러진 칼을 마구 휘둘러댔다. 터진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림 잘린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벌컥벌컥 새어 나왔다. 게랄드는 휘두른 도끼를 접고, 검은 기사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곧 허우적대는 움직임마저 사라진 검은 기사는 힘없이 쓰러졌다. 게랄드는 발로 걷어차 갑옷 안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비었군. 갑옷만 살아움직인 건가? 어쨌든 목이 날아가면 죽는 다 이거지?" 게랄드는 씨익 웃더니 갤러리 위를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3충 높이 되는 곳에서 뛰어내렸다. 그 밑에는 말 위에서 병사들을 마구 베어 넘기는 검은 기사가 있었다. 검은 기사는 뒤통수에서 떨어지는 게랄드의 접근을 알아채고 즉시 창 끝을 위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창 날 은 게랄드의 어깨만 스치고 지나갔고, 게랄드는 들어올린 도끼를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도끼는 검은 기사의 어깻죽지부터 허리, 그리고 그 밑에 있는 말 머리까지 한 번에 치고 지나갔다. 머리 잃은 말이 한 번 크게 날뛰었다가 바닥을 사정없이 들이박았고, 몸의 절반이 날아간 검은 기사는 떨어지는 충격과 말 무게에 짓눌려 박살 났다.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병사들이 혹 그 연기가 닿으면 큰 일이라도 날까봐 발을 들며 물러섰다. 부서진 검은 갑옷이 꿈틀 했으나, 곧 멈췄다. "다음 어디 있어?" 게랄드가 목청껏 소리쳤다. 그 모든 광경을 멍청히 바라보던 쟈란이 손가락으로 왕성 쪽을 가리켰다. "왕성 쪽으로 들어갔소." "알았소. 그보다 여길 잘 지켜주시오. 백작 군대가 완전히 물러 난 건 아니니까." "나머지 검은 기사들은?" "우리들에게 맡기시오." 게랄드는 허락도 받지 않고 쟈란의 말을 빼앗아 타더니 왕성 쪽으로 달려갔다. 한바탕 휩쓸고 간 폭풍에 쟈란을 비롯한 병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쟈란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모두를 지휘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사망자들을 수습하라. 적은 아직 바깥에도 있다. 경계를 철저히 하라!" 쟈란은 절룩거리며 망루에 오르면시 다친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늑대에게 얻은 상처였다. 새삼스럽게도 그 싸움에서 고작 이런 상처만 얻었다는 게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쟈란은 멀리 붉은 장미 백작 군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들은 검은 기사들에게 놀라 후퇴한 위치에서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그 군대의 지휘관이라도 지금은 관망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현명한 선택을 내렸다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 쳐들어 온다면 꼼짝 없이 성문을 내줘야 할 판 이었다. 쟈란이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 엉뚱하게도 코 앞에 거대한 뭔가가 불쑥 나타났다. 쟈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가 다리가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도 검은 기사였고 깃털 없는 날개가 달린 말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검은 기사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것은 차라리 허공에 떠 있는 죽음의 신이 었다. "오, 맙소사." 쟈란은 동그랗게 눈을 떴고, 자신의 주위가 완전히 어둠에 잠식 되는 것을 보았다. 검은 기사가 타고 있는 말이,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귀에 들렸다.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식할 수 없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쟈란은 숨을 쉬지 못했고 허리 아래가 사라진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뜨지 못했다. 쉐이든은 교회 쪽으로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도로를 내달렸다. 나팔을 든 검은 기사는 아직도 교회 첨탑에 올라가 있었다. 거리에 나와 있는 노르만트 시민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밖에 나와 전쟁의 경과를 구경하려던 용기 있는 소년이나 자신이 뭔가 도움이 될까 싶어 무기를 들고 거리에 나선 혈기 왕성한 청년들도 검은 기사의 괴이한 나팔 소리에 모두 집 안으로 숨어버렸다. 그건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누군가를 보호하기는 힘들었고,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나팔을 든 검은 기사가 나머지의 리더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팔소리는 분명 성 외곽에 있는 검은 기사들을 모조리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노르만트일까?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돕기 위해?' 자기 편을 죽이면서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다. '검은 사자 백작을 돕기 위해?' 그렇다면 레앙으로 가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공격해야지. '왕을?' 무슨 이유로? '아니면 우리가 목표인가? 그 때 우릴 해치우지 못한 것을 염두에 두고?' 쉐이든은 말을 세웠다. "너희들은 누구냐?" 쉐이든은 나직이 말했다. 굳이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까마득히 높은 첨탑 위의 검은 기사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검은 기사는 나팔을 집어넣고 허리에 차고 있는 긴 칼을 들었다. 동쪽 하늘에서 다가오는 어둠이 그 검은 기사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쉐이든의 말이 겁에 질려 됫걸음 질치기 시작했다. 쉐이든은 말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겨우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우고 다시 첨탑을 올려다보니 검은 기사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었다. 검은 기사는 벌써 교회 아래에 내려와 있었다. 뛰어내릴 때도 착지할 때도 기분 나쁠 정도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쉐이든은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상대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으나, 호흡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숨을 몰아 쉬고 창을 앞으로 뻗었다. "말해라 넌 누구냐? 무엇을 위해 여기에 나타났느냐?"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검은 기사는 대답 대신 쉐이든이 창을 내미는 것과 똑같은 자세로 긴 칼을 내밀었다. 상당히 크고 무거운 칼이었는데도, 끄트머리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칼날을 내민 방향으로, 뭔가 끈적거린다는 느낌이 드는 차가운 공기가 쉐이든의 얼굴을 휙 쓸고 지나갔다. 차갑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뜨거운 공기였는지도 몰랐다. 코 앞에서 입김을 분 것처럼 대단히 불쾌했다. 타고 있는 말은 그것을 단순히 기분 나쁜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인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제 고삘를 잡아당겨도 말을 듣지 않았다. "곤란하게 됐군." 쉐이든은 말에서 내려 옆에 섰다. 검은 기사는 천천히 쉐이든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칼을 치켜 세웠다. 검은 말은 맹수처럼 입김을 푹푹 품어내며 앞발을 굴렸다. 그 꼴을 보니 주인보다 말이 더 살아있는 존재 같았다. 그 검은 말은 느닷없이 뒷발을 구부리더니 공중으로 크게 뛰어 한 걸음에 쉐이든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 것은 마법을 써서 날아왔다는 생각이 들 징도로 깜꼭 놀랄 만한 도약이었다. 쉐이든은 급히 몸을 돌려 말에 깔리는 걸 피했으나 뒤이어 휘두르는 검은 기사의 칼은 완전하게 피하지 못해 그만 창을 놓치고 말았다. 검은 기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쉐이든에게 칼을 내리쳤고 그는 옆으로 굴러 피했다. 단단한 흙 바닥이 거인의 곡괭이로 내리 찍은 듯 부서졌다. 검은 기사는 몇 번이나 칼을 내리쳤고, 그 때마다 쉐이든은 아슬 아슬한 간격으로 피했다. 칼을 피하면 곧장 거대한 말발굽이 떨어졌다. 겨우 창이 떨어진 곳까지 굴러가 다시 집어들 때, 검은 기사는 등을 돌린 쉐이든을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동시에 쉐이든도 창을 찔러 넣었다. 두 자루의 무기가 서로의 목을 노리고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오직 철창만 목표물에 꽂혔다.. 쉐이든이 '됐다. '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 늘어진 큰 칼이 그의 목을 노리고 휘어졌다. 겨우 피하고 물러서니, 검은 기사는 목을 찌르고 있는 창을 한 손으로 잡아당겨 뽑으려 했다. 그러나 쉐이든은 놓아주지 않고 되려 상대를 통째로 말 위에서 들어올렸다. 그리고 창에 꿴 채로 바닥에 패대기 쳤다. 갑옷이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으나 검은 기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 손에는 자신의 칼을, 한 손으로는 쉐이든의 창을 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쉐이든도 그를 찌른 창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검은 기사는 쉐이든의 얼굴을 향해 칼을 휘둘러댔다. 칼이 상당히 길어, 창의 간격을 위협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칼 끝이 쉐이든의 얼굴 앞을 스쳐갔다. 검은 기사는 창을 뽑는 것을 포기하고 두 손으로 칼을 높이 들더니 갑자기 목을 꿰뚫고 있는 창의 중간을 내리쳤다. 워낙 강하게 제련된 무기라 부러지지는 않았으나, 철창이 크게 흔들리며 쉐이든은 그만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검은 기사는 두 번째로 칼을 들어올려 이번에는 쉐이든을 향해 직접 휘둘렀다.. 쉐이든은 고개를 숙여 피하고 오히려 적의 품으로 달려들면서 꽃혀 있는 창을 힘껏 밀었다. 뚫린 창이 검은 기사의 목 뒤쪽으로 길게 빠져 나왔다. 쉐이든은 고함을 지르며 창을 완전히 상대의 목에 관통시켰고, 큰 칼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검은 기사의 몸에 바싹 달라붙었다. 검은 기사는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상대에 대한 칼 공격을 포기하고, 철갑으로 무장된 팔을 휘둘렀다. 쉐이든은 뺨을 얻어맞았으나, 대신 발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검은 기사가 휘청거리며 밀려 날 때 쉐이든의 손에는 상대의 큰 칼이 들려 있었다. "이래도 안 죽나 보자." 쉐이든은 거대한 검을 부드럽게 휘둘렀고, 검은 기사의 목이 덜커덕 떨어져 나갔다. 그순간 뒤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검은말이 쉐이든에게 달려들었다. 쉐이든은 휘둘렀던 큰 칼을 되돌려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검은 말의 목을 후려쳤다. 그러나 달려드는 탄력이 고스란히 살아있어 머리 없는 말은 그대로 쉐이든을 깔고 뭉갰다. 그 사이,목을 잃은 검은 기사는 비틀거리며 벽에 손을 짚었다가 주전자에서 김 빠지는 요란한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친천히 무너졌다. 평일 오후면 언제나 교회 앞을 항상 맴돌던 정적이 잠깐 동안이나마 내려앉았다. 잠시 후 몸뚱이만 남은 거대한 말을 발로 밀어 쓰러뜨리고 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겁 먹은 나머지 얼어 있었던 말이 투레질을 하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쉐이든은 검은 기사의 투구에 아직도 끈질기게 박혀 있는 철창을 뽑아내고 말 위에 올랐다. 왼손이 찌릿하게 아팠다. 손목관절을다친 모양이었다. 말에게 깔렸으니 어디 부러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으나 이제 당분간은 왼손을 쓸 수 없었다. 쉐이든은 웃옷을 벗어 약간 찢어낸 후, 그것으로 왼손을 감쌌다. 그리고 검은 기사가 나팔을 불었던 교회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그 검은 기사는 단순히 이 곳이 높아서 올라가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팔을 분 검은 기사는 동료들을 바로 교회의 뒤쪽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은 왕성이었다. 쉐이든은 창을 옆구리에 끼고 오른손만으로 고삐를 잡아 말을 힘껏 몰았다. (하얀 늑대들 4권에서 계속) 감사합니다..... 도 서 명 : 하얀늑대들 4권 캡틴카셀 지 은 이 : 윤현승 펴 낸 이 : 신현호 출 판 사 :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 2003년 12월 14일 <지은이 소개/ 윤현승> 1978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휴학 중이다, 현재 온라인 게임 회사 JOYIMPACT에서 게임 '테트라모프' 소설 연재 및 배경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크문><다크문 2><헬파이어>이 있다. <사진설명> 늑대의 반쪽 얼굴과 그림자 드리워진 대지의 배경 속에 장군복장 인물의 뒷모습이 그림자져 있다. <차례> 제27장 드레드 나이트(Dread Knight)(2) 제28장 지하실 제29장 사자의 역습 제30장 암브루 제31장 레 앙 제32장 나이트메어 제33장 귀 환 제34장 함락된 도시 제35장 폭 로 제36장 캡틴 카셀 에필로그 카셀의 아버지 <소개글, 서평> '다크 문'의 감동을 넘어 선 새로운 야심작! 작가 윤현승이 쏟아내는 언어의 마술. 가진 것이라고는 어변밖에 없는 카셀. 우연히 아란티아의 보검을 손에 쥔 카셀의 운명은? 카셀의 언변은 과연 그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일에 싸인 어둠의 기사단, 그들의 정체는....? 한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카셀. 그는 결국 영웅이 될 것인가! 27.드레드 나이트(Dread Knight)(2) 꿈결에서 들려오는 듯 주위를 쩌렁쩌렁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카셀은 돌아보지 않고 말을 독려하기만 했다. 그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는 성까지 직진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사실 카셀은 아까부터 주위를 돌아보며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다. 검은 기사의 나팔 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모두 집 안으로 숨어 단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심지어 창 밖으로 고개 조차 내밀지 않았다. 사실 카셀도 지금 당장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침대에 처박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텅 빈 거리와 방해물이 전혀 없는 도로는 사막 못지 않게 삭막했다. 노르만트 전체에 끔찍한 공포가 내려맞아 있었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큰 소리로 다가왔다. 그래도 카셀은 돌아보지 못 했다. 이대로 등을 창에 필려도 모르고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달리는 데에만 집중했고, 카셀은 오직 성에 도착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성까지 가면? 대체 노르만트에서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도와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카셀을 태운 말도 뒤에서 쫓아오는 것이 뭔지를 직감하고 있는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 카셀은 속으로 외했으나 끝내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온통 주위를 검은 색으로 물들일 것 같은 검은 갑옷의 기사가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방패를 취고 따라오고 있었다. 저게 익셀런의 기사와 같은 갑옷이라고? 멍청한 놈들, 같긴 뭐가 같아? 카셀은 자신의 기억과 완전히 괴리되어 있는 흑기사에게 잠깐 동안 정신을 빼앗겨 몸을 일으키고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말이 고매를 당기는 힘에 놀라 비틀거리며 속도를 갑자기 줄였다 상대적으로 속도를 올리고 있는 검은기사가 카셀 족으로 빨려들 듯 다가왔다. 칼끝이 뒤로 젖혀졌고, 그칼이 어딜 걱냥하고 있는 지는 명백했다. '숙여라. 피할 수 있어!' 머리 속이 내린 명령인지, 피한 후에 머리가 그것을 남득시키기위해 설명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했든 칼날은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카셀이 모는 말은 다시 속도를 늘려 달렸으나, 검은 기사는 오히려 카셀보다 빠르게 옆을 획 지나갔다. 습기를 잔뜩 먹은 끈적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할고 지나갔다. 카셀은 고매를 세게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그리고 거의 본능적으로 칼날이 스치고 간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초에 긴 머리카락은 아니었으나, 윗부분을 만져보니 따끔할 정도로 짧게 잘려 있었다.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비껴갔는지는 계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동안 친구들의 검술을 보면서 몸이 적절하게 반응한 것이라고 짧은 시간이나마 생각했으나 그건 터무니 없는 망상이었다. 또 한 번 그렇게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것이다. 검은 기사는 카셀을 한참이나 지나친 후에야 말을 되돌렸다. 꽤 먼 곳이었으나 거기까지 달려간 시간도 순식간이었으니 되돌아 공격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카셀은 말을 세운 채 호흡을 정지했다. 말도 힘들었는지 타고 있는 카셀의 몸이 들썩일만큼 숨을 크게 몰아 쉬고 있었다. 두 번이나 운이 따라줄 리 없었다. 혼자 남게 되었을 때부터 느껴왔던 희미한 공포가 점점 형체를 가지고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알고 있었고 항상 대비하고 있었으나, 지금처럼 그 사실이 절실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칼을 뿐 건 아니었으나, 그는 나름대로 목숨을 건 싸움 속에서 살아남았다. 칼 도둑이 목에 칼을 들이댔을 때도 필사적으로 그들을 속이기 위해 노력했고, 무턱대고 대결을 청하는 바딩을 상대로는 최소한 칼을 를을 준비 자세라도 보여 주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 것도! 달려오는 검은 기사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카셀은 움직이지 못 했다. 그래서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검은 기사의 목에 칼을 처박은 던멜을 보았어도 반갑지 않았고, 검은 기사의 말을 발 뒤꿈치로 내리찍어 머리뼈를 부숴버리는발차기를 보고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청히 말고삐를 잡고만 있었다. 기습이 성공적이었음에도 던멜과 검은 기사의 싸움은 오래 갔다. 던멜은 가지고 있는 칼을 모조리 검은 기사의 몸에 박았지만, 그래도 그 괴물은 던멜에게 칼을 휘둘렀다. 던멜도 팔을 크게 베였고, 방패에 채여 땅바닥을 뒹굴었다. 싸움은 더욱 빨라지고 격렬해졌다. 하지만 던멜이 방패를 든 팔을 베어낸 후 싸움은 끝이 났다. 무게 중심을 잃고 잠깐 머뭇거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던멜은 단숨에 다른 쪽 팔과 한쪽 발목까지 잘라냈다. 베인 곳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검은 기사는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쓰러줬다. 몇 토막을 내 놓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던멜은 한참이나 부서진 갑옷 앞에 서서 경계했다. 카셀은 처음으로 던멜이 지쳐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았다. 상대의 죽음을 확신한 후에야 던멜은 손가락으로 왕성을 가리켰다. '성으로 가자.‘ 카셀은 정신을 차리고 말을 몰았다. 던멜은 가볍게 뛰어 카셀의 등을 잡고 말 위에 올라섰다. 말발굽 소리가 또 들렸다. 이번에는 둘이었는데, 곧 셋으로 늘었다. 카셀이 놀라 몸을 움츠리자, 던멜이 어깨를 꽉 잡았다. 고매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빼라는 뜻이었다. 검은 기사의 칼을 피한 후 자기도 모르게 지금까지 온 힘을 다해 고삐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손바닥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변해 있었다. 왕성의 도개교는 아직 내려져 있었고 그 앞에는 아즈윈이 서 있었다. "카셀, 안으로 들어가." 그녀는 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국왕을 옆에서 지켜." 그 말이 카셀의 가슴을 찔렀다. 결국 이 자리에서는 아무 것도 할 게 없으니 피해 있으라는 뜻이었다. 당연한 말이었고, 카셀을 배려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셀은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던멜은 말에서 뛰어내려 아즈윈의 옆에 착지했다. 아즈윈과 던멜은 달려오는 검은 기사 셋의 진로 앞에 서서 다리를 지켰다. 카셀은 성 안에 들어선 후 그 모습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카셀은 가끔씩 자신이 진짜 하얀 늑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캡틴 울프라 불렸고, 카모르트의 귀족과 기사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우러러 보았다. 게랄드와 쉐이든이 그에게 아란티아로 같이 가자고 말할 때는 정말 기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이 순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절대 하얀 늑대가 될 수 없었다. '박리를 올릴까요, 캡틴?‘ 도개교를 지키는 수문장이 급히 물었다.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소용 없으니 내버려 두시오. 어차피 저들은 모두 성벽을 뛰어넘었소." 믿는 눈치가 아니었으나, 카셀은 지쳐 따로 설명해줄 여력이 없었다. 이대로 아즈윈의 거짓말을 이어가기 위해 국왕에게 가야 하는 걸까? 그러나 싸움터에서 등을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국왕의 옆에 간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끔찍한 답이 기다리는 자문이었다. “한 팔이 없는 놈이군." 아즈윈은 중얼거리며 던멜의 어깨를 툭 쳤다. 던멜은 그녀의 얼굴, 정확히는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그녀는 한 번 더 말했다. "게랄드가 팔을 잘라낸 그 놈이야." 던멜은 세 흑기사 중 팔 한 족이 없는 한 명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즈윈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 방패와 칼을 들었다. "나는 엄호만 할게, 던. 앞에서 싸워줘." 아즈윈은 자신의 안 좋은 컨디션을 솔직히 인정하고 던멜을 앞에 내세웠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은 전투시 팀원 중에 하얀 늑대가 끼어 있으면 그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그 중에서도 아즈윈이 있다면 전원이 아즈윈의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떤 규칙이 아니었다. 효을성의 문제였다. 그녀는 네다섯 명이 펼치는 소규모 전투에서의 상황 판단이 아주 빨랐고, 명령을 내릴 때도 과감했다. 그래서 울프 기사단사이에는 아즈윈이 사실상 캡틴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던멜은 양손에 칼을 한 자루씩 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검은 기사 셋 모두 창이나 할버드 같은 긴 무기를 들고 거대한 말을 타고 있었다. 낮은 위치에 있는 두 사람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아즈윈은 배에 힘을 꽉 주고 던멜의 등을 특 했다. 던멜은 그것을 신호로 달려 나갔고, 아즈원이 바로 뒤를 따랐다. 검은 기사들은 던멜의 빠른 움직임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창을 휘둘렀다. 던멜은 뛰어올라 두 기사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양손으로 휘두른 칼날에 검은 기사의 투구가 한 뼘씩 잘려져 나갔다. 사람이었다면 충분히 치명상이겠지만, 그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던멜은 최소한 둘 중 하나의 목을 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둘 다 그 날카로운 공격을 피해낸 것이었다. 던멜의 공격이 실패하자 백업으로 달려오던 그녀는 세 기사들 틈에 낀 꼴이 되었다. 사실 아즈윈은 던멜이 공격에 실패한 순간 피했어야 했다 아니, 평상시의 아즈윈이었다면 오히려 던멜에게 시선을 빼앗긴 검은 기사들 중 한 명을 베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 가지 선택중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고, 세 기사의 말에 포위되어 버렸다.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한 아즈윈은 순간 아찔했다. 빗나가더라도 바닥을 깎아내는 엄청난 힘으로 세 기사의 창과 할버드가 아즈윈을 내리찍었다. 그녀는 방패로 막고 몸을 굴려 피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할버드에 등을 크게 베이고 창날에 어깨를 스쳐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움직임을 멈출 때 세 개의 거대한 무기가 아즈윈의 머리와 심장을 노리고 내리 꽂혔다. 그녀는 보지도 않고 몸을 틀어 피했다가, 뒤이어 내리찍는 말발굽을 피해 옆으로 굴렸다. 둘에게서는 완전히 벗어났으나 한 팔이 없는 검은 기사는 그녀가 달아나는 방향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는 할버드를 등 뒤까지 끌어당기더니 방패를 들이대는 아즈윈의 얼굴에 휘둘렀다. 이런 무거운 공격을 정면에서 막으면 어찌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꼼짝 없이 방패를 들이대는 수 밖에 없었다. 쇠끼리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그녀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등부터 떨어진 자리에 핏덩어리가 퍽 튀었다. 아즈윈이 마지막까지 세 명의 신경을 자신에게 집중 시키는 사이, 던멜은 뒤에서 도약하여 다시 아까 그 검은 기사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검은 기사들은 보지도 않고 던멜이 공격할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던멜은 그 피하는 방향 쪽으로 칼을 휘둘렀다. 두 개의 검은 투구가 주인을 잃고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목 없는 두 기사와 아직 공격 당하지 않은 한 명의 검은 기사는 착지하는 던멜에게 들고 있는 무기를 집어 던졌다. 한 명은 눈이 아직 달려있으니 할 수 있다 치더라도, 목도 없는 녀석들까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장소를 예측해냈는지 던멜은 하마터면 창에 꽂히거나 할버드에 두 동강 날 뻔 했다. 그는 바닥을 두 바퀴 굴러 벌떡 일어났다. 아까 카셀을 구하다 베인 팔에서 흐른 피가 구른 자리를 따라 뚝 뚝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는 아즈윈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으나, 입가를 타고 붉은 피가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닥을 짚은 손은 희미하게 떨렸고, 등과 어깨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및어진 옷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목 없는 두 기사가 말 위에서 떨어졌다. 마지막 남은 검은 기사는 동료가 줄었다는 것에 크게 동요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냥 던멜에게 던진 후 나무 다리에 박혀 있는 창을 뽑아 들기만 했다. 말 달리는 소리가 빠르게 접근했다. 쉐이든과 게랄드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말 달려 오고 있었다. 검은 기사는 즉시 뒤를 들아 달려오는 두 명을 향해 창을 들이댔다. 그러나 어느 쪽 공격도 막지 못했다. 쉐이든의 긴 창 날에 목이 날아가고 게랄드의 도끼에 몸이 동강 난 검은 기사의 갑옷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검은 연기를 뿜는 검은 투구는 아즈윈의 바로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던멜은 아즈윈이 흠칫 하고 놀라는 것을 보았다. 수없이 많은 적을 직접 베어 봤을 것이고, 목 잘린 시체야 용병 시절 볼 만큼 봤을 텐데 왜 빈 투구가 굴러가는 것에 놀라는 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아즈윈은 굴러가는 투구 쪽에서 억지로 시선을 뗐다. 게랄드와 쉐이든이 동시에 말에서 내려 아즈윈의 옆으로 다가왔다. 게랄드는 그녀의 심각한 상처를 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괜찮나?" 쉐이든이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좀 아프군 " "입에서 피가 나는데." 그가 피를 닦아주려고 그녀의 입술에 손을 가져가자, 그녀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까 땅에 떨어질 때 혀를 깨물었나 봐."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핏덩어리에 가까운 침을 한 번 밭아냈다. 그녀는 잠시 고통을 인내하더니 말했다. "남은 놈들 또 있어?" "나팔 든 녀석은 처치했다." 쉐이든이 대답했다. "내가 둘. 성곽을 공격하던 놈들이었어." 게랄드가 말했다. 그리고 던멜은 손가락을 하나만 펼쳤다. 아즈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게 셋. 그럼 총 일곱 인가?" 쉐이든이 창으로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하나 더 있군 " 해가 서쪽에 걸려 있고, 땅거미가 지고 있는 저녁이었다. 순간 하얀 늑대들 전원이 빈혈이라도 일으킨 듯 일시적으로 주위가 어두워졌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즈윈은 느닷없는 광도의 변화로 말미암아 이마를 짚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말을 타고 지붕 위에 올라서 있는 그것은 또 한 명의 검은 기사였다. 갑옷에 쓰인 읽을 수 없는 괴이한 글자에서 기분 나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빛이 아니라, 빛을 살라먹는 암흑이었다. 깃털이 없는 날개를 가진 검은 말은, 그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검은 말은 소리 없이 활공하더니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나팔을 든 녀석은 대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게랄드가 중얼거렸다. 날개 달런 말을 탄 검은 기사가 팔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빛을 삼키는 암흑이 팔을 따라 흘러나왔다. 넷은 일제히 경계하며 무기를 앞으로 세웠다. 공격은 없었다. 주위로 검은 기운이 스물스물 뿜어져 나을 따름이었다. 발바닥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검은 안개가 짙게 깔렸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것 같은 기분 나쁜 공기가 호흡을 방해했다. “마법이다. 놈을 막아!" 그 묘한 광경에 잠깐 정신이 팔려 있던 쉐이든이 얼른 소리쳤다. 아즈윈이 제일 먼저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즉시 던멜의 등을 쳤다. 그제야 던멜도 고개를 털며 들고 있는 두 자루 검 중 하나를 집어 던졌다. 칼날이 둥그렇게 회전하며 날개 달린 말을 탄 검은 기사의 머리로 정확히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검은 기사는 마치 어린 아이가 장난으로 집어 던진 공을 받듯 쉽게 던멜의 칼을 잡았다. 주위를 파고드는 검은 연기가 칼날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썩은 나무 토막처럼 소리 하나 나지 않고 칼날은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이번에는 쉐이든과 게랄드가 동시에 창과 도끼를 던지려 했다 하지만 아즈윈이 말렸다. "밑을 봐." 바닥에는 검은 안개가 물결치고 있었고, 그 안에서 팔이 하나 불꼭 올라왔다. 다섯 손가락을 좌 편 철갑을 낀 검은 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늪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거꾸로 보는 것처럼, 목 없는 검은 기사가 떠오르고 있었다. 목도 팔도 없이 일어나 흐느적거리는 검은 갑옷은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 만큼이나 끔찍했다. 어디선가 빈 깡통이 통 통 튕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을 굴러온 검은 기사의 머리가 머리 없는 기사의 목 위로 날아올라갔다. 잘려나간 팔도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여 있는 것처럼 몇 번 바닥을 구르다가 떨어진 부분에 달라붙었다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던 부분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처음부터 한 쪽 팔이 없었던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들은 다시 무기를 집어 들었다. 성루 위에 있던 병사들과 대신들은 두려움에 떨며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호기심으로 창문에 붙어있던 시녀들은 부서진 갑옷이 달라붙는 광경을 보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기절해 버렸다. 과거에 기사단에 있었던 만큼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두나단 조차 다리가 후들거렸다. 유령처럼 말을 몰고 오던 검은 기사를 봤을 때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나타날 마지막 기사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어린 아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초여름에 약간 더운 날씨였건만, 어떤 이들은 이를 딱딱 부딪히며 양팔을 감싸고 있었다. 두나단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고, 묘하게 가슴이 답답하며 호흡 하기가 괴로웠다. 보는 것 이상의 공포가 성 전체를 마비시켰다. 하얀 늑대들을 도와보려고 활을 준비했던 궁수들은 화살을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있었고, 창을 쥐고 있는 병사들은 창 끝을 늘어뜨렸다. 카셀은 성 안의 상황과 바깥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 역시 무섭기는 기절한 시녀들 못지 않았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카셀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보다 굴욕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내내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따끔한 느낌에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노르만트에 입성하기 직전 스스로 하얀 늑대들의 캡틴임을 자각하기 위해 칼날을 쥐었던 차리였다. 아물기 시작한 자리가 또 찢어져 연하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네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 쉐이든이 한 그 말 때문에 아즈윈이 엔간히 좀 하랄 정도로 책을 읽었고,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애썼다.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카셀은 칼날까지 쥐어 상처를 냈었다. 상처의 고통이 느껴지자, 어제 들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모든 말이 떠올랐다. '그걸 잊으면, 우리 모두 위험해지고, 그런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난 너를 베는 걸 선택하겠다.' 카셀은 또 한 번 그 때처럼 칼을 뽑았다. 내가 이걸 가지고 있을 자격이 있었던가? 갑자기 카셀은 모든 것에 회의를 느꼈다.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부랑자를 협박해 칼을 갖게 된 건 모두 운에 불과했나? '어설프게 팀을 이끄는 캡틴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카셀은 턱이 아릴 정도로 세게 이를 꽉 물었다. ‘그래, 없는 게 낫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다. 그게 아닐 바에는, 차라리 죽어.' 하얀 늑대들은 검은 기사 셋과 그 셋을 도로 일으킨 마지막 검은 기사들의 길목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아즈윈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몫을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 쉐이든이 창대로 목을 툭툭 치며 대꾸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네가 여자라는 게?" 아즈윈은 피식 웃었다. "어쨌든 미안해. 상대가 상대이니 말해두는 거야." "괜찮잖아. 이것도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게랄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안개처럼 깔린 어둠을 뚫고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쉐이든이 목을 벤 나팔을 든 검은 기사였다.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검은 기사는 아직도 던멜의 단검을 몇 개 몸에 박고 있었다. 말 한 마리가 집과 집 사이를 건너 뛰며 지붕이란 지붕은 모조리 박살내며 뛰어오더니, 검은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몸에 던멜의 단검을 박고 있는 검은 기사가 그 말 위에 훌쩍 올라탄다. 동강난 창을 든 검은 기사는 게랄드가 세로로 쪼개어 놓았던 자였다. 그 역시 검은 안개 위를 미끄러지듯 걸어오다 도개교 앞에서 멈췄다. 그렇게 하나씩 성 앞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합쳐 일곱이었다. 게랄드는 깎지 못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마스터가 하얀 늑대로 있는 동안은 언제고 인간이 아닌 것들과 싸우게 될 거라고 했는데, 지금이 그 때인가 보지." "우리가 좀 안이하게 지냈던 대가일지도 모르고." 쉐이든이 목을 크게 움직이더니 다친 왼손을 접은 채, 오른손으로만 창을 몇 바퀴 돌렸다. 그를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이 물러났다. 창 끝에서 반사되는 하얀 빛이 그의 눈빛에 비쳤다. 게랄드는 어깨에 메고 있던 도끼를 천천히 내밀었다. 던멜은 부서진 칼 한 자루 대신 더 짧은 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애초에 맨손으로 검은 기사의 말을 박살낸 그였기에 무기를 뭘 들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팔뚝에서 흐르는 피가 소매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으나 그는 그 상처를 아예 잊고 있는 듯 했다. 아즈윈은 방패를 내밀고 칼을 뒤로 늘어뜨렸다. 그녀는 모두의 등 뒤에서 상황을 주시했고, 모두가 그녀의 신호에 맞추어 움직일 준비를 했다 부상당한 그녀의 전투력은 제하더라도, 이 곳에서 그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했다. 검은 기사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으나, 그들은 하얀 늑대 네 명이 무기를 내밀고 있는 범위 안으로 쉽사리 들어오지 못 했다. 팔 하나 잘려도 개의치 않고 싸움을 이어가는 그들이었건만, 지금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검은 기사들의 리더도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아즈윈은 상황이 결코 자기들에게 불리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에게 부상이 없을 경우의 얘기였다. 실력의 반의 반도 내지 못할 그녀는 모두에게 짐만 될 것이고, 한 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던멜과 쉐이든도 결코 최상의 상태랄 수는 없었다. 아즈윈은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 깜박거리며, 가장 제 컨디션을 가지고 있을 게랄드를 중심으로 한 전투 방법을 계산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키지 않았으나, 이 쪽에서 먼저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이미 보통 수준의 검사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쉐이든은 왼쪽 세 명을 마크하고 있었고, 던멜은 아직도 검은 기사의 리더를 겨냥하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게랄드가 검은 기사들 전체를 막는 거대한 댐이 되어 주어, 이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즈윈은 자기 때문에 겨우 유지되는 평형 상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다. 그녀가 더 버티지 못하고 공격 명령을 내리려 할 때 누군가 뒤에서 다가왔다. 발소리가 들렸으나 미묘한 균형이 깨질 게 두려워 쉽사리 고개를 돌리지 못 하던 그녀는, 그가 바로 옆에 다가온 후에야 카셀이라는 걸 알았다. 모두 그가 왔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카셀은 하얀 늑대들 정 중앙에 섰다. 검은 기사들은 일제히 새로 출현한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노려보았다. 모두에게 분산되어 있던 검은 기사들의 압박이 카셀에게 집중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마비될 만큼 끔찍한 시선의 중심에서 카셀은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비딱한 자세로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게랄드가 노르만트에 오기 전 만나 베어줬던 검은 기사의 팔이었다. 아즈윈이 그렇게 버리라고 해도 버리지 않았던 쇳덩어리는 바닥에 한 번 닿더니, 몇 번 바닥을 튕겨 한 팔이 없는 검은 기사의 팔에 달라붙었다. 그 검은 기사는 자신의 팔을 되찾았음에도 오히려 공격을 당한 듯 움찔 하며 뒤로 물러났다. 카셀은 검은 기사들을 쭉 훑어보더니 약간 등을 뒤로 젖힌 자세로 칼 손잡이에 왼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오른손은 부드럽게 밑으로 늘어Em렸다. 누가 봐도 그것은 도발하는 자세였다. 그리고 네 명의 하얀 늑대에서 다섯 명의 하얀 늑대로 전력이 급상승하는 광경이기도 했다. 갑자기 성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겁에 질려 있던 성의 병사들은 일제히 응원이라도 하듯 하얀 늑대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와 알아듣기 힘들었던 그 말은 곧 하나로 합쳐졌다. "울프!" "울프!" "울프!" 완전히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 중 일부는 과감하게 몸을 밖으로 드러내고 창과 깃발을 흔들었다. 느낌뿐인지 모르지만, 주위의 검은 기운이 옅어지는 것 같았다 카셀은 주위의 함성이나 검은 기사들의 반응을 완전히 초월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검은 기사의 리더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하얀 늑대들 전원의 눈빛에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검은 기사들을 만난 누구도 보이지 못 했던 감정이었다. 하얀 늑대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날개 달린 말을 한 검은 기사가 말 머리를 돌렸다. 검은 말은 날개를 활짝 펴더니 지붕 위로 한 번 날아올랐다가 그곳을 발판 삼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음 지붕에 착지할 때쯤에는 검은 기운에 가려 이미 보이지 않았고, 다른 검은 기사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남은 자리에는 부러진 그들의 무기만 남아있었다. 울프를 연호하던 병사들은 검은 기사들이 사라졌어도, 생각 없이 환호를 지르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겁을 먹은 나머지 어떻게든 외로이 싸우는 하얀 늑대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억지로 소리를 지른 것에 불과했다. 상황은 종료되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승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점차 정신을 차린 그들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달려 나오거나,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쉐이든은 아직도 자세를 잡은 채로 서 있는 카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카셀을 보호하면서 싸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카셀이 먼저 행동했고, 규칙대로, 나머지는 모두 거기에 따른 것뿐이었다. 검은 기사들의 전력은 다섯 명의 하얀 늑대들을 상대한다 해도 충분했고, 오히려 방금 물러난 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카셀의 도발을 보고 공격을 했어야 차라리 이치에 맞았다. 일찍이 그의 무모함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방금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이게 무슨 것이냐?” 그는 카셀의 어깨를 잡았다. 카셀은 마치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앞으로 픽 쓰러졌다. 오히려 쉐이든이 놀라 그를 일으켰다. 게랄드가 껄껄대고 웃었다. "연습한 것 중 가장 완벽한 자세였어. 칭찬해 줘야겠는데?" "웃을 일이 아니야! 이제까지 카셀 네가 했던 모든 위험한 행동에는 근거가 있었으며 네가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나는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한 행동은 그렇지 않았어." 쉐이든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카셀은 검은 기사가 내보인 어둠 속의 눈빛보다 쉐이든이 더 무서웠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아즈윈은 저렇게 피를 흘리고 서 있는데, 난 멍청히 성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게. 바보 같은 짓인 줄 알지만......, 아니야. 변명하지 않을게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었어. 그보다 아즈윈은 괜찮아?" 그제야 다들 아즈윈이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벅지와 장딴지를 끓게 물든 바지 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고여 있었다. "날 알아주는 건 캡틴 밖에 없다니까." 그녀는 눈에 띄게 창백해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보다 누가 좀 안아줄래? 아, 이건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그녀는 농담처럼 말하고, 지금까지 똑바로 서 있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쉐이든은 그녀를 품에 안고 성이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누가 의사를 불러와라 어서!" 방금 전까지 카셀의 자세를 칭찬하며 여유를 가겼던 게랄드의 표정은 아즈윈을 본 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콧김을 푹 내쉬더니 타고 온 말에 올라탈 준비를 했다. 쉐이든이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려고?" "그 녀석들, 멀리 못 갔을 거다." "쫓아가도 소용 없다는 거 알잖아. 내버려둬." 쉐이든이 무서운 얼굴로 그를 호통쳤다. 그러나 게랄드는 차갑게 웃었다. 카셀은 그의 그런 미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즈윈을 그 꼴로 만든 놈들을 얌전히 보내주라고?" "지금은 그렇게 해." 쉐이든은 '지금'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곧 상처를 치료하는 도구를 잔뜩 젊어진 병사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쉐이든은 깨끗한 붕대를 꺼내더니, 직접 아즈윈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래, 놈들은 또 올 테니까." 게랄드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말했다. 잠시 상황을 정리하고 밥이나 먹고 오자며 그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러나 의사를 못 미더워 한 쉐이든이 직접 아즈윈의 부상을 치료하고, 그녀를 염려해 다들 그 방에 모이니 결국 하얀 늑대들 다섯은 같은 방에 모이게 되었다. 어깨 죽지를 따라 한 템이나 및어진 상처였다. 쉐이든은 그녀의 웃옷을 찢어버리고 상처를 바늘로 꿰맸다. 카셀은 왠지 그녀의 부상이 자기 때문인 것 같아 그녀의 상처만큼이나 가슴이 아팠다. 아즈원은 희미하게 의식을 차리고 있었고, 예전처럼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아녀자를 벗겨놓고 사내 자식들이 둘러 모여 뭔 짓들을 하는 거야?" 그녀는 웃었지만 길지 않았다.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하지만 신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녀가 아파서 몸을 꿈틀댈 때마다 카셀도 똑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상처가 깊어. 뼈도 다쳤으니 오래 갈 거야." 쉐이든은 치료에 전념하느라 고개를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놈들이 후퇴했는지는 모르나, 머지 않아 또 올 거다. 하지만 지금 전력으로는 그 놈들도,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도 막지 못 해. 그 전에 우리가 뭔가 해야 해. 말해봐라, 카셀." 문득 카셀은 쉐이든이 자신을 캡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에 대답을 머ant거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닐 지도 몰랐다. 그러나 카셀이 내세우는 자신감은 언제나 하얀 늑대들의 지지에 의해서 이뤄친 것이었다. 그것도 누구보다 쉐이든의 믿음이 강했다. 카셀은 힘없이 말했다. "난...... 별로 생각해 둔 게 없어." 쉐이든은 그를 노려보더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카셀, 아까 너의 행동은 정말 불필요한 짓이었다. 놈들이 물러났으니, 결과적으로는 다행인지 모르나 그건 옳지 않았어. 그건 네가 할 일이 아니었다. 넌 우리와의 약속을 어긴 거야." 모두의 시선이 이렇게 따갑기는 코홀룬에서 처음 모두를 접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카셀은 눈을 둘 곳이 없어 아버지에게 혼날 때처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할 일은 우리를 인도하는 거지, 우리 대신 싸우는 게 아니야. 생각해 둔 게 없다고? 이제는 네 의무마저 잊을 셈이냐?“ "루오르 대신은 검은 사자 백작과 연합하는 게 어떠냐고 했어." 카셀은 겨우 말을 꺼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의견을 말한 건 아니었다. "세이게이 장군은 어떻게든 이 병력으로 버텨보겠다고 그러고. 하지만 아까 캡틴 쟈란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로는 굉장히 침울해 있어. 겨우 구성해 놓은 왕실 기사단도 검은 기사들에게 많이 당했지 국왕은 걱정만 하고 있고, 두나단은 여기저기에 까마귀를 날려보고 있지만 별 소득은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네 생각은?" 카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원군이 필요해." "원군은 오지 않는다면서?" "에노아 후작에게 가봐야 해." "암브루에? 연락도 안 된다며?" "그러니까 직접 가서 알아봐야지.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가 보겠어." 카셀은 숙었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마지막 말에 쉐이든은 인상을 구겼다. "또 직접 행동할 셈이냐?" "기억 안 나? 원군을 요청할 때도 에노아 후작은 전폭적인 지지를 한다는 게 아니었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군대를 내주지 않는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전령은 결국 원군이 없다라는 말만 우리에게 전해줄 거야. 그 다음은 어떻게 해? 또 다른 전령을 보내 놓고 기다려? 에노아 후작이 만약 우러를 무시하고 있다면 내가 직접 가서 설득해야 해." "그렇다고 반드시 네가 갈 이유는 없어 대신 중에 누가가도 되고.......“ "에노아 후작이 마음을 돌렸는데 대신 중 누가 그를 설득할 수 있겠어? 루오르? 두나단?" "아니면 우리 중 한 명이 가도 되지." "너희들은 이 성을 지켜야지 내가 빠지는 게 나아.“ 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 아니야. 노르만트에는, 어쩌면 원군보다 캡틴 울프라는 존재가 더 필요할지 모르니까, 아까도 우리가 검은 기사들과 맞서고 있을 때는 겁에 질려 있던 병사들이 네가 나서자 모두 정신을 차렸지 너는 이미 이 성의 정신적 지주야." "실질적으로 한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잘못된 판단이든 아니든 상관 없어. 내가 하게 해줘. 아무 것도 못 하는 캡틴 따위는 필요 없어." 쉐이든이 뭐라 하기 전에 카셀은 단호히 말했다. 게랄드는 눈동자만 굴려 쉐이든과 카셀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쉐이든은 아즈윈의 상처를 마저 꿰맨 후 실을 가위로 잘랐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아무 것도 못 하는 캡틴 따위는 필요 없지." "쉐이든.......“ 게랄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끼어들자, 쉐이든은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있어봐. 카셀은 방금 캡틴으로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기 스스로 이 일을 한다고. 이게 임시로 맡은 캡틴의 마지막 명령이 될 지도 모르는데, 들어줘." 카셀은 그의 말에 숨을 들이켰다. 게랄드도, 던멜도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쉐이든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아란티아의 보검은 아직 네게 맡겨두마. 에노아 후작을 설득할 때 필요한 도구가 될지도 모르니까.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그 칼은 돌려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걱정 마라. 코홀룬에서 약속했던 보상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카셀은 친형 같았던 쉐이든의 모습이 갑자기 달라 보여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처음에 말리려고 했던 게랄드도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즈윈은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던멜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고만 있었다. '하얀 늑대들 전윈 동의 하에 우리가 스스로 번복할 때까지는 누구도 이 결정을 위반할 수 없다.' 코홀룬에서 아즈윈의 손을 잡으며 했던 맹세였다. 그러나 지금 그 결정이 번복되고 있었다. 카셀은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어, 쉐이든." "던멜, 네가 카셀과 같이 가 줘. 로일도 데려와야 해. 암브루까지 말로 이틀. 원군을 얻는다면 카셀은 거기에서 바로 원군과 함께 노르만트로 오면 되겠지. 내가 알기로 거기에서 덴모주까지 또 하루. 던멜은 즉시 덴모주로 가서 로일을 데려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던멜의 공백이 상당히 크겠지만, 우린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로일이 필요해 늦어도 나흘. 원군을 위해 잠시 비워두는 시간으로는 그렇게 길지 않아." 로일을 데려와야 한다는 건 이 일과 별개의 얘기였지만, 이상하게도 카셀에게는 로일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야겠으니, 너는 나가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하얀 늑대들 중 일 대 일 대결에 가장 능하다는 로일이 오늘 카셀이 서 있었던 그 자리에 섰다면, 진짜 하얀 늑대들 다섯 명과 검은 기사 일곱 명의 대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니 카셀은 더욱 힘들었다. 쉐이든이 화를 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주제 넘은 행동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던멜은 내일 떠날 채비를 하겠다며 먼저 나갔고, 게랄드는 밥을 먹겠다며 뒤따라 나갔다. 쉐이든은 아즈윈의 상처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소독하고 나갔으나, 셋 중 누구도 카셀을 위로하지 않았다. 아즈윈은 엎드린 채 측은한 눈길로 카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셀은 그 시선마저 괴로워 일어나 방을 나가려 했다. "잠깐 거기 앉아." 묘하게 강압적인 말투라 카셀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셀은 얼른 그녀를 말리려고 어깨에 손을 짚었다. "누워 있어. 아직 몸이 안 좋.......“ "네 탓이 아니야." 그녀는 카셀의 손을 꽉 잡으며 힘없이 웃었다. "지금 일어난 어떤 일도 네 잘못이 아니야.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돼." "그런 게 아니야, 난 그저.......“ 카셀은 그 뒷말을 잇지 못 했다. 아즈윈은 지금까지 장난쳤던 것과 달리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누가 뭐래도 넌 우리의 캡틴이야." 카셀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붕대를 감은 등을 쓸어 안았다.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즈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가끔씩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를 달래줄 뿐이었다. "괜찮아....... 모두 잘 될 거야." 다음날 던멜과 카셀은 누구의 배웅도 받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 오직 쉐이든과 게랄드만 새벽 안개를 들고 달려나가는 두 마리의 말을 지켜봤다. “애초에 못할 짓을 저지른 건 우리였어." 게랄드가 말했다. "우리가 지나치게 카셀에게 정이 들었던 걸지도 모르지." 쉐이든은 감정 없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저 녀석이 캡틴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지금쯤 아란틴아에서 사과나 깎아먹고 있겠지." “마찬가지야. 저 녀석도 지금쯤 집에서 그 이상한 아버지와 함께 농사나 짓고 있었을 테지." "어제는 왜 그랬어? 하도 노골적으로 카셀을 몰아붙이길래, 뭔가 생각이 있구나 싶어 끼지 않았는데 말이야." 쉐이든은 길게 하품을 하며 대답을 잠시 미뤘다. 카셀과 던멜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후퇴했던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도 안개에 묻혔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봐라, 게랄드. 어제 그 검은 기사들, 무섭지 않았냐?" "베고 나니까 더 끔찍한 놈들이었지. 다시 살아날 땐 정말이지 암담하더라. 떨리는 거 숨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하면 네가 웃을까봐 아무 말도 안 했다." "카셀은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죽지 않을 정도로만 무서웠을거다." "그야 그렇겠지. 근데 그게 어쨌다고?“ “그게 눈에 보였어? 아니, 오히려 검은 기사들을 향해 올 데면 와보라고 호통이라도 칠 태세더군. 지금까지 카모르트 왕실의 대신들이나 귀족들에게 허풍 떠는 카셀의 모습은 가짜였지만, 어제 그건 가짜가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녀석의 진짜를 왔어." 게랄드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서 카셀을 엄하게 내친 거야?" "녀석에게 하얀 늑대들의 캡틴 자리를 빼앗아 버렸지 그럼에도 다시 캡틴으로 돌아온다면.......“ 쉐이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 한 마리가 성의 탑 쪽으로 날아갔다. 두나단의 편지를 실어 나르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게랄드가 뒷말을 재촉했다. "돌아온다면?“ "그 녀석 나이가 몇 살인지 기억 나?" 쉐이든은 엉뚱한 걸 물었다. "스물 두 살이었나? 세 살? 그 정도쯤이지, 아마." "기대되지 않아? 그 정도로 어린 녀석이 임기응변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 녀석이 이런 위기를 겪고 이런 경험을 방고 더 나이가 든다면 말이야....... 하얀 늑대라는 방패가 없는 녀석이 정말 하얀 늑대들의 캡틴으로 돌아온다면 말이다 녀석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지 않냐?" 쉐이든은 유난히 흥분하며 말했다. "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과했잖아. 정말 무서워서 달아나 버리면 어쩌려고?" “그럼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겠지." "혼자 잘난 척 하지 마. 난 진작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카셀은 임시로 캡틴을 맡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잖아." "그렇다고 정말 캡틴이 될만한 그릇도 아니었지." 게랄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복도의 끝에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대신이 한 명 있었다.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달려오는 그는 두나단이었다. 손에는 편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는 숨을 돌린 후 말했다. “캡틴 카셀은 어디에 있소? 덴모주에 있는 내 첩자가 소식을 보내왔소. 그 곳이 지금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에게 포위 당해 있다고 하오." 놀라서 허둥대는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로 둘은 무덤덤하게 그 말을 들었다. 쉐이든이 안개 쪽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쩐지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없더라니." “검은 사자 백작이 멍청히 당할 사람이 아니긴 했어,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면, 두 사람이 떠날 게 잘된 일이야 안된 일이야?" 게랄드가 물었다. "낸들 알겠냐?" 두나단은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 해, 설명을 해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해주지 않았고, 두나단은 답답한 나머지 소리 질렀다. “무슨 소리들 하는 거요? 붉은 장미 백작 군이 물러갔소? 두 사람이 떠나다니? 캡틴 카셀은 어디 있는 게요?” 28.지하실 지하실에서 돌아온지 이틀 동안이나 안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라틸다는 밤새 그녀의 옆에서 간호했고, 집사 베네는 시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라틸다의 음식을 가져오는 등 그녀를 보살폈다. 그러나 갈 때마다 무시 당했다. "아가씨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군." 집사는 쟁반을 들고 내려가다, 계단에 암아 있는 로일에게 방을 하나 건네며 말했다. 로일은 빵을 받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안나는 라틸다의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했습니다. 드러난 책임은 모두 당신에게 있잖습니까?" “그래, 미움을 받을 거면 나 하나가 낫지." 베네는 변명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라틸다의 성장을 아버지의 심정으로 지켜본 사람은 붉은 장미 백작만은 아닐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라틸다의 차가움에 얼마나 가승이 아플지 로일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로일은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았다. "베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겁니다." 당장 소리지를 줄 알았던 그녀는 조금 생각해보더니 그 말에 수긍했다. "좋아요. 한 번 베네와 직접 상의해보도록 하죠." 라틸다는 로일을 동행하고, 당장 집무실로 베네를 찾아갔다. 베네를 이해해주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으나, 그건 로일의 착각이었다. "지하실에 뭐가 있죠?" 그녀는 베네의 얼굴을 보자마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베네에게 먹이를 받아먹던 새장 속의 까마귀 두 마리가 놀라 파닥거렸다. "진정하십시오, 아가씨." 베네는 그녀가 직접 쳐들어왔다는 것에 굉장히 놀란 얼굴이었다. 로일은 둘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라틸다가 베네의 집무실을 잘 찾지 않는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라틸다는 시녀나 마을 사람, 심지어 살고 있는 성에 대해서도 거의 무관심했다. 요새 들어서야 비로소 관심을 쏟는 모양이었다. "백작넘께 어찌해야 할지 여쭙는 편지를 그저께와 어제에 걸쳐 두 번이나 보냈습니다. 아무리 길을 잘 찾는 까마귀라도 정해진 장소를 오고 가는 데에는 이틀이나 걸리는데, 백작님께서는 지금 전장에 계시고 항상 위치를 이동하시지요. 편지를 받은 전령이 다시 백작님께 그 편지를 전달해야 하니, 답장이 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 "허락은 무슨? 대체 당신이 이 성에서 전장에 나간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의 일이란 게 뭐죠? 지금 책임자는 당신이니 뭐든 맘대로 할 수 있잖아요." 라틸다의 날카로운 음성에 맞춰 까마귀가 깍깍 대고 울었다. "지하실은 예외입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그때 시녀 한 명이 문을 두들겼다. "실례하겠습니다, 베네 집사님. 아, 라틸다 아가씨, 로일, 안녕하세요." 리자라는 시녀였다. 그녀는 로일이 만나본 중 가장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필요한 말 외에는 절대 하는 법이 없었고, 인사를 할 때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로일이 홀로 식사를 하고 있으면 항상 그녀가 시중을 들어주었는데, 개인적으로 한 대화라고는 한 마디도 없었다. 전에 로일이 실수로 꽃병을 떨어뜨렸는데도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침착하게 행주로 물을 닦고 꽃을 다시 꽂았다. 그 일련의 과정 동안 숨소리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을 보고 로일은 하마터면 그녀에게 검술을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할 뻔 했다. 그녀가 들어와 인사하면서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실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베네는 잠시나마 라틸다의 공격에서 빠져 나와, 겨우 숨을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방금 안나가 깨어났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틸다는 안나의 침실로 달려갔다. 리자도 짧게 목례하고 물러났다. 베네와 로일은 두 여자가 휩쓸고 간 후 남은 정적 속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자네에게 강요하기는 어렵지만, 로일. 아가씨 좀 어떻게 진정시킬 수 없겠나?" “말씀을 하시죠, 지하실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으로, 이 성에서 쫓겨날 각오하고 다 불어버리고 싶다네." 베네는 두 손을 털며 마지막 남은 먹이를 까마귀에게 모두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틸다가 그린 그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검은 기사의 그림." "익셀런 기사단을 말하는군. 왔네. 잘 그렸더군." “그건 익셀런의 기사가 아닙니다." 로일은 그 말을 하며 베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간이라도 이상한 표정 변화가 생기면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베네는 진심으로 궁금한 미소만 지었다. "내 기 억이 잘못 된 건가? 그럼 그게 뭐란 말인가?" 한 눈에 상대의 진심을 꿰뚫어 보는 쉐이든의 안목이 부러운 시점이었다. 로일은 오히려 이 나이 든 검의 고수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닙니다. 안나의 상태나 보러 가시죠." 창백한 얼굴의 안나는 멍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틸다와 베네, 로일, 그리고 리자를 포함한 시녀 두 명이 방에 있었으나 안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누구하고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모두 나가요." 라틸다는특히 베네를 지목하며 말했다. 시녀 둘은 군소리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고, 베네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십시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긴 후 나갔다. 뒤따라 로일도 나가려 하니 라틸다는 즉시 불러 세웠다. "어딜 가요? 로일은 나가지 않아도 돼요." 그녀는 옆에 맞는 로일의 어깨를 한 대 때렸다. “이런 말 할 때의 모두란 건 항상 로일을 제외한다는 걸 알아두세요." “평생 보살펴 준 사람보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는 남자를 더 신뢰하면 베네가 무척 섭섭해 할 겁니다." "섭섭해 하래죠." “그리고 지하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난 비밀이 있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요? 저는 제게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나요." 로일은 ‘어쩌면 당신이 무관심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려다 집어삼켰다, 그녀는 안나의 손을 잡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나, 이제 아무도 없어." "라틸다 아가씨." "그래, 말하렴." 안나는 미소 지으려 애썼지만 얼굴 근육이 굳어져 잘 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라틸다는 떫은 표정으로 로일을 돌아보았다. 안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깨어나서부터 계속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해보려고 했는데,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안나, 어제가 아니라 그제야. 넌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어." "세상에! 그럴 리가요." "생각나는 것만 말해봐." "글쎄요, 어머니를 보러 집에 간 다음부터 기억이 안나요. 그 다음에는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고, 계단을 계속 오르고 있었죠. 빛을 향해 달려간 기억 밖에...... 그리고 로일의 얼굴을 봤어요." 안나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로일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라틸다. 하지만 정말 기억이 안 나요." "나한데 미안할 게 뭐가 있니? 우선 몸이나 회복해두렴. 얘기는 천천히 하자꾸나. 그보다 필요한 거라도 있니?“ "물이요. 그리고, 으음 , 배가 고프네요." 안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기다려." 라틸다는 베네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고 로일과 함께 복도에 잠시 나왔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떻게 생각해요?" “조만간 기억이 돌아올 겁니다. 기다려야죠, 그 때까지는." 로일은 깨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그게 아니라 왜 안나가 기억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서 묻는 거에요.“ "큰 충격을 받아서일까요?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겁니까? 전 어제있었던 일도 잘 기억 못할 때가 많아서 말입니다.“ "장난하지 말아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지하실에서 기어올라왔다고요. 사소한 일은 잊어버릴 수 있지만, 그런 큰 일은 짧은 시간에 잊어버릴 정도로 인간의 기억력이 약하지 않아요.“ "그럼 라틸다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누군가 최면을 걸어 기억을 빼앗았던가, 마법을 걸었을 거에요.“ "제가 한 말보다 더 수상한데요?“ 별 의미 없는 로일의 지적에 라틸다는 왠지 뜨끔 했다. "그럼 다른 게 뭐가 있죠?“ "제가 단편적으로나마 기억을 완전히 잃어본 건 술을 마시고 뻗었을 때였죠. 노래를 부르며 모두를 웃겼다는데 어떤 개그를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더군요. 친구들은 평생 놀림감으로 써먹겠다며 아직도 뭘 했는지 가르쳐주지 않죠.“ 라틸다는 그 부분에서 웃어야 할 지 화내야 할 지 무척 난감해졌다. 어쨌든 이 문제에 관한한은 로일에게 의지할 부분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안나는 처음부터 다친 곳이 없었던 만큼 회복도 빨랐다. 가끔 두통을 호소했으나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녀는 스스로 일어나서 걸어 다닐 정도로 회복에 의욕을 보이는 듯 했다. 라틸다는 무척 기뻐하며 가져온 아침 식사를 탁자에 내려다놓고 말했다. “이틀이나 누워 있었으니, 그런 건 천천히 해도 돼. 하지만 정말 다행이구나. 네가 단지 날 안심시키려고 회복된 척 한 줄 알았어.” 안나는 라틸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바닥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어요. 처음에는 걷지도 못 하는데, 이게 어디서 묻은 걸까 이상했는데, 걸어보니 걸어지네요. 어떻게 된 걸까요?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서워져요. 어디 이상한 곳에 다녀온 게 아닐까 하고.” 둘은 침대에 앉은 채 식사를 하며 그 이야기를 이어갔다. "몽유병이라도 생긴 거니?" “모르겠어요. 하지만 또 그럴까봐 무서워요.” “그럼 오늘 밤에는 내가 같이 있어줄게." "아아, 말도 안돼요. 시녀가 주인의 보호를 받는다는 적도 없어요." "괜찮아. 너도 내가 악몽으로 고생할 때 도와주었잖니?“ "라틸다나 저나 자는 것에 문제가 있군요. 끔찍한 꿈에 몽유병이라니! 아, 그런데 요새는 어떠세요?" "어제는 당근 씹어먹다 체해서 물 마시는 꿈을 줬지.“ 안나는 소리 없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피부도 좋아지셨군요. 다행이에요.” 라틸다는 그녀가 미소를 되찾았다는 것을 더욱 다행으로 여겼다. "네가 고생해 준 덕분이지." “그런 말씀 일부러 하지 않으셔도 돼요. 로일 때문이죠?" 안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고, 둘은 중간에 서로 해야 할 그러네 아니네 하는 형식적 인 말들은 생략했다. “그래. 같이 있으면 좋아. 편안하고. 로일과 함께 있고 나서부터 악몽을 안 꾸게 되었지. 신기하게도." "저도 로일을 좋아해요. 항상 경직된 남자만 봐서 그런지 느슨하게 풀어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셔요. 남자로서 좋다는 뜻이 아니니까. 저는 신분 높은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는 소녀가 아니랍니다. 그게 저와 라틸다의 차이죠." "무슨 소리니, 그게? 그리고 로일은 신분 높은 사람이 아니야." "자기 입으로 용병이라고 하긴 했죠. 내기 할까요? 로일은 굉장한 가문의 외동 아들이거나 유명 기사단의 기사일 거에요. 이를 테면 가넬로크 집정관의 아들이라든가,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 같은." "그럴 지도 모르지. 자신이 대단하다는 걸 억지로 숨기려고 허둥대는 걸 보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난 부디 그가 정말로 별거 아닌 용병이길 바라고 있어.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꿈꾸는 소녀라는 건 무슨 소리야?" "세상 어떤 귀족도 라틸다만큼 남자 보는 눈이 높은 여자는 없을걸요.“ "내가 백마 탄 잘 생긴 기사에게 안기는 꿈이라도 꾸고 있다는 거니?" "세상에는 백마도 많고 잘생긴 기사도 많지만 라틸다가 원하는 '밤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남자' 같은 건 없어요. 그건 저 같은 여자가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이상이랍니다." 라틸다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구나." "라틸다께서 우릴 모두 옛날로 데려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라틸다는 우유를 마시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니, 그게?" 안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식사나 계속 하세요." 몹시 신경이 쓰였으나, 안나의 몸이 모두 나았을 때나 자세히 물어보려고 말을 아꼈다. 성의 주인이 전쟁을 떠났어도 탑을 세우는 공사는 진행 중이었다. 로일은 아직 천장도 벽도 세우지 않아 사방이 낭떠러지인 탑의 끄트머리에 팔장을 끼고 위태롭게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일은 이 곳이 마음에 들어, 자주 여기를 찾았다. "위험하게시리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라틸다는 옷깃을 여미며 그의 옆에 싫다. 내려다보니 생각 이상의 높이에 아찔해져 그녀는 급히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곳에서 백작님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았죠."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라틸다를 잘 지켜달라고 하시더군요." "흥, 딸이 그렇게 걱정되시면 아예 나가질 말든가." 그녀는 조금 용기를 내어 로일이 뭘 보고 있는 건지 다가가 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는 마을뿐 아니라 덴모주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마을사람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안나의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의 행동을 계속 관찰했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더군요. 아침에 일을 나가서 저벽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될 뿐. 되려 사람들이 절 의심하고 있으니 대놓고 물어보기도 힘들더군요." “난 다들 날 속이고 있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베네도, 시녀들도 시종들도 모두 다!" 로일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안나는 뭐라 안 했습니까?" "재촉하지는 않고 있어요. 그런데 몽유병으로 밖을 나다닌 것 같아요, 어제 밤에." 라틸다는 둘이 한 이야기를 간략히 해 주었다. “그냥 들어 넘길 일은 아니군요." 로일은 라틸다보다 되려 심각하게 여기며 깊이 생각했다. 라틸다는 그가 무슨 놀라운 사실을 발견해줄까 싶어 기다렸으나 그는 그저 생각만 깊이 했다. 그 사이 그녀는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머리가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곳에서 보니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덴모주도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전쟁에 대한 소식은 뭐 없습니까?“ 로일은 먼 곳을 주시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갑자기 물었다. "얼마 전에 드마르프 평윈의 전투011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짤막한 소식은 있었어요. 그 외에는 저도 잘 몰라요." "지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군요. 그럼 저 북쪽 땅에서 힐끔힐끔 보이는 말 탄 병사는 대체 뭘까요? 언뜻 봐도 검은 사사 백작의 정찰대 같은데.......“ 로일이 가리킨 곳까지 보일 정도로 라틸다의 눈은 좋지 않았다. "언제부터 있었나요?“ "방금 전부터요." "심각한 건가요?" "그럴 겁니다." 하도 느긋하게 말하니 라틸다는 처음 얼마 동안은 정말 별 거 아닌 일로 여졌다. 그러나 곧 그가 한 말의 의미가 뒤늦게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냥 두고 봐도 되는 게 아니잖아요!” 라틸다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관고, 로일은 계속 기마병이 나타날 지점을 주시했다 만약 이게 정말 심각한 일이고 급히 서둘러야 하는 일이라면, 이미 서둘러 봤자 대처하기에는 늦었다. 그래서 그 병사들을 본 게 한참 지난 시간임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로일은 그저 자신의 생각이 틀리길 기대하며 상황을 주시하기만 했다. 라틸다가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문이 열리고 열 명의 병사들이 북쪽으로 달려갔다. 로일은 탑 위에서 기마병이 뛰어가는 방향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저녁 때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소규모 군대가 머물다 간 흔적은 남아 있었으나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습니다." 병사는 라틸다에게 직접 보고 했고 그녀는 혹시 모르니 경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전쟁을 떠난 후 남아있는 많지 않은 병사들이 전원 성문 족에 집결했고, 곧 성의 모든 횃대에 불이 올라갔다.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겠죠?" "그럴 겁니다." "척들어 온 걸까요?" "이 곳의 병력을 알고 있다면 주저 하지 않을 겁니다.“ 로일은 라틸다의 모든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베네. 지금 성에 머물고 있는 병력은 어느 정도 되죠?" 라틸다는 손톱을 물어뜯다가 베네에게 말했다. “오십이 조금 넘습니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떠나셨군요, 아버님은." "모두 가려 뽑은 병사며, 쟌스데인 가문에 오래 전부터 충성을 맹세한 이들입니다. 결코 최소한의 병력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셨고, 그 족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는 이상 상대방이 전쟁터에서 밀리 떨어진 델모주를 직접 공격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만약 낮에 나타난 기마병들이 검은 사자 백작의 것이라면 백작님의 생각이 틀렸다 할 수 있으나, 결코 아가씨의 경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알아요. 아버지를 탓하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었어요. 마을 외곽에서부터 경비를 세워두세요. 그리고 쳐들어온다면 마을 주민들을 모두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성문을 잠가버리세요. 지금 병력으로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최선이겠죠?" "예." 베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즉시 동의했다. 라틸다는 모든 인원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 안나에게 돌아갔다. 로일은 그녀의 옆에 계속 붙어 있었다. “로일, 정확히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건 대답해 주셔야 해요. 당신은 용병이 아니라, 아주 유명한 기사단 소속이시죠?” 라틸다는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발뺌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로일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 "라이온 기사단이나 로즈 기사단만큼 강하겠죠?" "예." “그럼 이런 상황에 대처하라는 훈련도 받았겠죠?" "받았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방금 라틸다가 모두에게 지시했던 대로 하겠습니다." 라델다는 안나의 방문 앞에 멈춰서 확인을 받았다. "저 좋아하라고 거짓말 하는 건 아니겠죠?" 자신 있게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사실은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로일은 그녀에게 확신을 안겨주었다. "아닙니다." "고마워요." 라틸다는 잠 든 안나의 옆을 지키다가 하품을 길게 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적이 다가오는 기미는 없었으나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긴장이 이어진 탓에 그녀는 금방 피로해졌다. 안나가 편히 자고 있으니, 그녀도 졸음을 이기기 힘들었다. '잠깐만 자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안나의 손을 잡은 채로 눈을 감았다. 안나가 일어나 방문을 나선 것은 꿈이었다. 아니, 꿈이라고 생각했다. 라틸다는 꿈인지 현실인지에 대한 구분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그녀를 쫓아가 보았다. 안나는 눈을 감고 있거나 어린 시절 유모가 겁을 주려고 해준 얘기에서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유령처럼 걷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부드럽고, 흔들림은 전혀 없었다. 묘하게 그 뒷모습이 아름다워 라틸다는 그녀를 부르지 않았으나, 걸어가는 방향이 점점 수상해지며 기겁했다. 안나는 난간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는 폼이 너무나도 우아해 잠옷은 마치 하얀 드레스처럼 보였다. 이미 그녀는 아무도 없는 로비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지하실 문 앞에 서 있는 경비는 마치 그녀를 파티장으로 초대하는 문지기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주었다. 어두운 계단을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돌 부스러기가 많은 돌계단이었지만, 그녀는 맨발로 거기를 내디뎠다. 고통을 느꼈다면 잠에서 깨어날 법도 한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의 어둠 속을 걸어갔다. 라틸다는 내려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경비는 안나가 지하실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히 문을 닫으려 했다. 라틸다는 닫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그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하실의 두터운 문은 닫히고 그녀는 그 문을 세게 두들겼다. 그 경비는 베네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현실처럼 말했다. ‘아가씨는 이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동굴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창백한 얼굴에 왜소한 몸매였다. 마치 병에 걸려 죽어가던 육 년 전의 모습 같았다. '라틸다, 그 곳은 들어가선 안 된다.' '왜 안 되나요?' '너도 알잖니?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대체 지하실 안에 월 감춰둔 거죠? 뭘 감춰뒀길래 저렇게 잠가놓는 건가요?' '얘야, 난 한 번도 저 지하실을 잠가두지 않았단다.' '그럼 저 경비는 뭐에요?‘ '네가 알고 있다는 것을 거부하지 말거라, 얘야' 라틸다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뭔가 희미하게 기억이 날듯 말듯 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건 어찌면 안나만이 아닐 지도 몰랐다. 라틸다는 아버지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동굴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미 지하실에 가본 적이 있단다.' 누군가 머리를 세게 후려친 것 같은 충격에 라틸다는 눈을 떴다. 모든 것이 다 꿈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지나친 현실감에 그녀는 몸서리를 했다. 그것은 단순한 꿈으로 그치지 않았다. 마치 검은 기사의 악몽처럼 꿈은 현실과 일치되었다. 손을 잡고 있어야 할 안나가 침대에 없었다. "안나!" 라틸다는 외마디처럼 내지르며 당장 안나의 방문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실을 가로질러 계단을 내려갔다. 꿈에서와는 달리 지하실 앞에는 경비가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 한번도 경비가 서서 지하실을 막은 적은 없었다. 무의식 중에 누군가 지키기 때문에 지하실에 내려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라틸다는 날 듯 말 듯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으나 어느 순간엔가 두꺼운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전진할 수가 없었다. 안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지하실에 대한 공포가 섞여 그녀는 움직이지 못 했다. "라틸다, 비명 소리를 듣고 왔어요." 로일이 뒤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라틸다는 계단의 중간에 서서 지하실 쪽을 가리켰다. "안나가 저 안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간 걸 봤나요?“ 라틸다는 도저히 꿈에서 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로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기도 싫었다. "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난 알아요. 안나는 저 안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가 봐야겠군요." 고맙게도 로일은 두 번 묻지 않고 지하실 쪽으로 걸어갔다. "위험하지 않아요?" 라틸다는 괜스레 겁이 덜컥 나 로일의 소매를 잡았다. "뭐가 있든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베네가.......“ 라틸다는 스스로 베네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을 저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하지만 저 문은 잠겨 있어요." 그 말을 듣고도 로일은 스스럼없이 문을 잡아당겼다. 그 철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라틸다는 깜짝 놀랐다 꿈 속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열려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링케가 몇 번 여길 드나드는 걸 봤지만, 한 번도 잠그는 걸 본적이 없었습니다. 전부터 알았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지요. 이제 확실해졌군요. 이 문은 잠긴 적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 라틸다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라틸다는 한 번이라도 이 문을 열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 지만.......“ "12 쏜즈의 기사들이 즈쿨라를 태운다는 걸 아십니까? 그것도 이 성 안에서." "정말이에요?" "전에 잠깐 말했지만, 라틸다는 이 성과 이 마을에 대해 저만큼이나 모릅니다. 아니, 한 달도 머물지 않은 제가 오히려 더 많이 알고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 라틸다는 여전히 열린 지하실 문을 바라보며 상황을 정리하지 못 했다. "그 문은 닫힌 적이 없습니다. 로일의 말이 맞지요. 그저 암묵적으로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룰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전에 안나를 구해왔을 때처럼 베네는 거실의 끝에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틸다는 즉시 겁 먹은 표정을 지웠다. "잠긴 적이 없다고요?" 베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난 이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거죠? 비밀의 장소가 아니었던가요?" "사실 맘만 먹으면 누구나 저 지하실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시종들도 한두 번 들어갔다가 들킨 나머지 혼나거나 쫓겨나기도 했죠. 그러나 백작님은 저 문을 잠가둔 적이 없습니다. 가끔 제가 관리하긴 하지만, 제 눈이 벗어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럼 왜 저는 못 들어가게 했습니까?" 로일이 물었다. "자네에게도 제안이 있었던 걸로 아네." 베네는 손에 든 작은 쪽지를 흔들어 보였다. "내일쯤 도착할 줄 알았던 편지가 밤에 도착했습니다. 까마귀는 밤에 편지를 나르지 않는 법인데 말이죠.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성의 주인은 라틸다다. 지하실의 문제건 뭐건 모두 알아서 하게 해라. 그리고 라틸다는 이미 지하실에 내려가 본 적이 있으니, 집사가 나서서 막을 필요는 없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이미 백작님께서는 라틸다를 후계자로 지목하신 겁니다. 이제 저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겠으니 알아서 처.......“ "잠깐만요. 내가 지하실에 내려가 본 적이 있다고요?" "편지에 쓰인 내용 그대로입니다, 라틸다." 베네는 이미 아가씨라는 호칭을 생략하고 있었고, 그 다음 호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주인님(Lord)'이 될지, '여백작님(Countess)' 이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라틸다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부르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로일은 베네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라틸다는 편지가 아버지의 필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크게 한 번만 끄덕였다. "좋아요. 아버지께서 착각하셨을 수도 있고, 지금은 그런 걸로 티격태격할 시간이 없어요. 저는 내려가봐야겠어요. 안나를 구하러." "구한다라...... 아가씨, 지하실 아래에 괴물이라도 살고 있는 줄 아셨습니까? 게다가 안나는 혼자 내려간 거지, 누가 데려간 게 아닐 겁니다." "안나가 내려가는 걸 보셨어요?" "아닙니다. 라틸다께서는 보셨습니까?“ "봤어요." 라틸다는 억지를 쓰며 소리쳤다. 베네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라틸다는 지하실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막을 건가요, 베네?" "아닙니다." "거짓말 말아요. 당신은 내가 여길 들어가지 않길 원하고 있잖아요" "지금은 아닙니다." "그럼 로일도 데리고 들어가겠어요."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원하신다면 그러십시오. 백작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이 성의 주인은 라틸다입니다." 라틸다는 뭔가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든 것을 허락하는 베네를 한껏 노려봤다가, 로일의 손을 잡아 끌었다. "로일, 따라와요. 오늘 난 지하실 안에 뭐가 있는지 확실히 봐야겠어요." "정말 지하실을 보고 싶으십니까?“ 베네가 물었다. 라릴다는 강한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베네는 조용히 거실에 있는 등불을 가져오더니 앞장섰다. "좋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부디 백작님께 실망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왜 갑자기 아버지를 들먹이는지 라틸다는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으나, 당장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꿈 속에서 보았던 병약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 명이 걷는 발소리가 약간 휘어져 있는 계단의 벽면을 타고 울렸다. 그녀는 계단의 구조가 나선형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밑으로 갈수록 추워지고 있었다. 뜨거운 지옥의 불길이라도 올라올 줄 알았던 그녀로서는 이 묘한 한기에 당황했다. 로일의 말 그대로 지하실에 있는 것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한 게 아닐 지도 몰랐다. "이제부터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전 안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뿐 그 아이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길 바라겠어요." 라틸다는 내려갈수록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쌀쌀맞게 대꾸했다. 베네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작님께서 편찮으셨던 시기를 아실 겁니다. 원래 그 전부터 병약한 분이셨으나, 오륙 년 전쯤에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죠. 부인께서도 오래 전 돌아가시고, 유일한 핏줄인 딸은 시집 보내기에도 작위를 물려받기에도 너무 어렸지요. 지금이야 이런 웅장한 성을 가지고 있으나, 당시에는 빚도 갚지 못해 절절 매는 가난한 귀족에 불과했습니다. 병환 중이시면서도 뒤에 남을 외동딸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셨습니다. 그 때 일은 라틸다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알아요.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죠." "그 때 발견한 게 즈쿨라였습니다." "그 마약이 아버지의 병과 무슨 관계가 있죠?" “단순한 마약이 아닙니다 전 의학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으나, 그건 태워서 피우면 마약이 되지만, 零아서 상처에 바르면 약초가 되며, 달여서 마시면 보약이 됩니다. 놀랍게도 그 약은 백작님의 병을 호전시켰죠." “맙소사, 의지로 병을 이겨내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아버님께서는 병에서 호전 된 후 원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거든요." 라틸다의 말을 로일이 받았다. "저에게도 이 마을의 종교적 상징물을 보여주시며, 자신은 미래를 보았다고 하셨죠. 저는 그것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네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일은 모두 병이 치료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라틸다. 하지만 그 약은 약효가 뛰어난 반면 지독한 중독성이 있어 매일 먹어야 했고, 처음에 한 뿌리만 써도 되던 것이 나중에는 두 뿌리가 필요하고 몇 개월이 지나자 서너 뿌리를 먹어도 효력이 나타나지 많게 된 겁 니다. 아시겠지만, 즈쿨라는 그리 많이 재배되는 풀이 아닙니다. 우연히 이 성의 뒤에서 자라던 걸 뽑아 쓴 게 바닥나고 난 후, 저는 즈쿨라를 찾아 다녔답니다. 해답은 성 밑으로 연결된 동굴이었습니다." 계단의 끝에는 작은 나무 문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렸다는 증거로 밝은 문고리는 반질반질 했다. 베네는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만든 복도와 녹슨 촛대 위의 촛불이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여기가 그 때 발견한 동굴이군요." 라틸다는 금방 눈치채고 말했다. “천연 동굴이었지만, 무너질 염려도 있고 해서 몇 번의 공사로 기둥과 벽을 세웠습니다. 예, 지금 생각하시고 계신 대로입니다 저는 바로 즈쿨라의 천연 재배지를 발견한 겁니다." 복도를 지나 마지막 문을 열자, 돌 벽에 촛불을 반사하며 빛을 내는 작은 식물들이 이슬처럼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동굴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바람에 물결처럼 출렁이는 손가락 두 마디 밖에 되지 않은 이끼 같은 풀들이 즈쿨라였다. 벽을 따라 네 명의 중년 여인이 쭈그리고 암아 작은 삽으로 어느 정도 자란 풀을 파내고 있었다. “파낸 후에도 보름쯤 지나면 또 자라 있습니다. 백작님께서 스스로 즈쿨라의 효능에 만족하셔서 주민들이 이걸 쓰는데도 관대하십니다. 마을 사람들이 백작님을 지독히 잘 따르는 이유도 어느 정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일하던 여자들은 작은 삽을 내려놓고 잠시 일어나 베네와 라틸다를 보고 인사했다 라틸다는 얼결에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로일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라틸다를 대신해서 말했다. "주민들만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즈쿨라는 대단히 비싸니까요." "상당한 양이 외부로 거래되지." "엄청날 돈이 들어올 거고요." 베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의 판매와 중간 거래 이익만으로 그만한 군대를 키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2 쏜즈에 들어왔다면 자네는 즈쿨라를 피워보게 되었을 걸세." "그들이 이걸 제게 권했던 이유도 이제 알겠습니다. 거절하자 바로 대결을 청했던 것도, 링케가 붉은 장미 백작을 만난 후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도.......“ "대체로 이것과 관련된 거라고 생각하네." 로일은 다시 생각에 잠졌다. 베네는 이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으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좋아요. 즈쿨라에 대한 이야기는 됐어요. 안나는 어디 있죠?" 라틸다가 로일의 생각을 자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베네는 침착하게 그녀를 동굴의 더 안 쪽으로 안내했다. 즈쿨라 타는 냄새가 점점 독해졌고, 이제 그 연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라틸다는 짧게 기침 했다. "여러 가지로 효과적인 식물이지만 기본적으로 즈쿨라는 마약입니다. 적당히 양을 조절하지 안으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지요. 저도 안나의 일을 따로 조사해봤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그리 되었습니다. 중독 증상이 심한 사람은 이 안으로 데려와 회복될 때까지 즈쿨라의 양을 조절하게 됩니다. 안나는 어머니를 찾아 여기 왔다가 사고를 당한 겁니다." 지저분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 여럿이서 뒤엉켜 누가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들에 안나가 있었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파이프에 담긴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라릴다는 안타까운 비명을 내지르며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즈쿨라는 환각 작용까지 일으키지. 안나의 경우에는 그 연기에 굉장히 민감한데 그만 여길 와서 피워버린 모양이야." 베네는 씁쓸히 로일에게 설명했다 라틸다는 안나를 끌어안았으나, 안나는 그녀를 못 알아보았다. "로일, 안나를 같이 좀 옮겨요." 라틸다가 부르기도 전에 로일은 벌써 다가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팔을 늘어뜨린 안나를 등에 업었다. 지하실 족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병사 하나가 베네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베네에게 뭔가 말하려다 라틸다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급한 일이라면 어서 말해라." 베네가 재촉했다. "적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병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간결한 말로 설명했다. "생각보다 빨리 시작했군." "우리가 대비를 하기 전에 움직일 생각인가 봅니다. 서두르죠." 로일은 안나를 업은 채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라틸다는 즈쿨라 연기를 너무 마신 탓인지, 지금 알아버린 성의 비밀들을 견디기 힘든 탓인지, 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 그러나 로일은 오히려 평소보다 머리가 밝아진 느낌이었다. 베네는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전체를 알고 있지는 못했다. 지금 그가 말했던 어떤 것으로도 안나가 피를 뒤집어 쓴 채 지하실을 올라온 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29.사자의 역습 적들은 신중하지만 아주 빠르게 덴모주로 접근해왔다. 어둠을 틈 타 야습을 해올 거라던 예상과 달리 그들은 매우 정직하게 횃불을 들고 성 문 쪽으로 다가왔다. 기습을 염두에 두고 있던 베네는 오히려 불안해하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 록 병력이 적다 해도 이 정도 성벽의 높이라면 우리 쪽 한 명이 저 쪽 백 명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저 움직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라틸다도 성벽의 터렛 위에서 근심스럽게 횃불의 이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요?" "예상보다 적의 접근이 빨라, 그냥마을 회관의 지하에 피신시켰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사악한 용병 무리라면 모를까, 적어도 한 백작의 수하로 있는 정규군입니다. 포로의 가치도 없는 여자와 아이들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저들의 목적은 이 성과 붉은 장미 백작의 유일한 후손인 레이디 라틸다입니다. 그러니 걱정은 접으시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 계십시오." "조금만 더 여기 있게 해줘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군요." 베네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로일에게 말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아가씨를 잘 부탁하네." 로일은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하지만 로일은 눈 앞에 벌어진 이 위기 상황보다 지하실의 상황이 더 신경 쓰였다. 강한 권력도 재력도 군사력도 가지지 않은 힘없는 귀족이 어느 날 갑자기 카모르트의 이인자로 떠오르는 데에는 즈쿨라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원래 병약했던 쟌스데인 백작은 육 년 전 병에 걸렸다. 즈쿨라는 죽어가던 그를 살려주었고, 동시에 대단한 부를 안겨 주었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잘 모르지만, 이 비슷한 시기에 리제니와 라털다가 만났다. 둘은 약혼을 했고, 검은 사자 백작은 약혼 선물로 영지를 선물했으나 쟌스데인 백작은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다. 그 뒤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이 그 영지를 두고 싸움을 시작했고, 그 규모가 커진 나머지 지금은 카모르트의 운명을 결정 짓는 전쟁이 되어버렸다. 검은 사자 백작이 영지를 선물할 때만 해도 쟌스데인 백작은 붉은 장미라는 화려한 호칭을 달 자격 조차 없을 정도로 기반이 약한 귀족이었다. 리제니가 라틸다를 보고 사랑에 빠진 나머지 먼저 약혼을 제안한 쪽은 검은 사자 백작이었다. 그러니 끓은 장미 백작이 전쟁을 시작한 거라면 영지를 돌려주지 않은 시점일 것이고, 검은 사자 백작이 전쟁을 시작한 거라면 돌려주지 않는 영지를 강제로 되돌려 받았을 시점일 것이다. 전쟁을 시작한 계기가 무엇이든, 즈쿨라와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로일은 잠시 생각이 막힌 틀에, 먼 곳에 시선을 둔 그녀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뚝하게 서 있는 콧날이 횃불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은 이런 위기 순간에 조차 잠시 정신을 빼앗겨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시녀인 리자가 차와 준비한 쿠키를 가져왔다. 리자는 무뚝뚝하게 아무 말 없이 라틸다의 찻잔을 채워 내밀었고, 곧 로일에게도 주었다. 로일은 부드럽게 거절하며 물었다. “다른 시녀들은 모두 자고 있습니까?” "침실에 있지만, 아마 잠을 이루고 있지는 못할 겁니다." 그녀는 대꾸하며 로일에게 내밀었던 찻잔을 베네에게 대신 주었다. 베네도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가 곧 생각을 바꾸어 마셨다. "자네는 안 마시나? 기나긴 밤이 될 거야." "괜찮습니다. 저는 밤샘에 익숙합니다." "이럴 때야말로 젊음이 힘이지." 베네는 희미하게 웃으며 리자가 내민 쿠키를 하나 들었다. 리자는 모두에게 인사한 후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로일은 차를 마시는 라틸다에게 다시 눈을 들렸고, 순간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라틸다의 외모란 게 단순히 아름다움으로 끝날 부분이 아닐 지도 몰랐다. 그녀 스스로 그걸 무기로 내세운다면, 굳이 붉은 장미 백작이 나서지 않아도 이 나라에 이 정도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가 그걸 증명했다. 로일이 여자의 외모에 대해 무감각하기도 하거니와 옆에 붙어서 그녀의 자다 일어난 모습이나 잠옷 입고 머리를 금적이며 뒤뚱거리는 모습까지 봐버려서 그런지 그는 여지껏 라틸다의 미모를 자각하지 못 했다. 그러나 그녀의 파티 드레스를 입은 모습만 봐 온 남자라면 며칠 걸리는 먼 거리를 달려와 청혼을 할 만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발전시킨 로일은 턱에 손을 올리고 숨을 멈췄다. 만약 끓은 장미 백작이 딸을 무기로 내세울 생각을 했다면? 즉, 리제니의 사랑 조차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면? 그럼 약혼도, 약혼 선물로 영지를 받은 것도, 약혼을 파기한 것도 모두 의도한 거라 할 수 있었다. "오, 맙소사," 로일은 스스로 해낸 생각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러나 그의 외마디는 주위의 시선을 끌지 못 했다. 덴모주 근처를 배회하던 횃불의 무리가 마침내 직선거리로 마을에 진입하면서, 여기 저기에서 경비들도 로일과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몰려오는 군대의 총 숫자는 이백 정도였다. 밤이라 말도 없었다. 숨겼을 지도 모르나, 공성기도 없었다. 여길 점령하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지금 병력의 배 이상은 있어야 했고, 끓은 장미 백작의 원군이 덴모주로 돌아오기 전에 퇴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 오늘밤 안으로 공격을 끝내야 할 텐데, 로일은 그 방법이 궁금했다. "라틸다 한 가지 여줘봐도 되겠습니까?“ 로일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틸다는 횃불의 무리가 접근해오자 더할 수 없는 긴장감에,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고 있었다. 베네는 이 성벽을 넘어오지 못할 거라고 계속 안심시키고 있었다. "물어보세요." "검은 사자 백작에게 아들이 몇 명 있습니까?" "세 명이요. 막내가 죽었으니 이제 두 명이지만요. 왜 그런 걸 묻죠?" 라틸다의 한족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로일은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아들이 셋이라면 굳이 리제니를 목적으로 한 건 아니었을지 모른다. 셋 중 한 명만 걸려들길 기대했다면,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도박에 전략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만한 게임이 될 수도 있다. 로일은 자신의 추리를 결론지었다. 즈쿨라로 인해 건강을 회복하고 재력을 확보한 붉은 장미 백작은 전쟁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라틸다와 리제니를 약혼시켰다......? 로일은 거기까지 생각한 후 뭔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한 부분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즈쿨라로 그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세상에 만병통치약 따위는 없다. "로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라틸다가 물었으나 로일은 자기생각에 빠져 알아듣지 못했다. 로일은 턱을 굳게 닫고 초조하게 좁은 터렛 안을 서성거렸다. 중간에 끼워 넣어야 할 사슬이 한 조각 더 있었다. 즈쿨라로 건강을 회복한 것, 리제니와 라틸다를 만나게 한 것 사이에는 뭔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라틸다는 그의 행동에 더욱 불안해졌다. "로일!" "예?" 로일은 건성으로 대꾸했다가 라틸다의 화난 눈을 보고 끼고 있던 팔장을 풀었다. "불안하게 그러고 있지 말아요. 지금 로일은 쳐들어오는 군대가 걱정되지도 않아요?" "아,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정도 숫자로는 절대 성벽을 넘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네?" 베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일과 베네의 예상대로 횃불을 들고 마을을 관통해 오던 이백 여명의 적병들은 화살이 닿을 거리 안으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참이나 그대로 멈춰서더니 횃불을 하나씩 했다. 그러나 단지 횃불을 아끼기 위해서일 뿐, 어떤 작전을 위해서 조명을 없애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성 쪽에서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으므로 어둠을 들 타 일을 벌이기는 힘들었다. “당분간은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우선 들어가 쉬십시오. 상황이 변하면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 베네의 제안에 라틸다는 피곤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있겠어요." "저들은 분명 우리가 가장 피곤할 시간인 새벽에 공격해 올 겁니다. 필요 없는 늙은이는 그 순간까지 망이나 보고 있으면 되지만, 총 지휘관은 그 때 팔팔한 정신으로 있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니 제 말대로 조금이나마 눈을 붙여 두십시오. 오래는 말고요.“ 베네는 설득력 있게 말했다. 사실 하루 종일 안나 때문에 신경을 쓴 데다가 아까 불편하게 자다가 깨는 바람에 라틸다는 몹시 피곤해 있었다. “좋아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수상한 일이 벌어지면 즉시 말씀해 주셔야 해요." "이상한 일이 있으면 나팔을 길게 한 번 불게 하겠습니다. 침입이 있으면 두 번 불 데니 서둘러 터렛으로 와 주십시오. 하지만 세 번 불면 아주 위급한 상황이니 성 안에 그대로 계시던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항상 강조했던 비상 나팔 얘기군요. 알았어요." 라틸다는 로일과 동행하여 터렛을 내려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아까부터 뭘 그리 생각하는 거에요?" 라틸다는 안나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물었다. 안나는 약에 취한 건지, 단순히 잠 든 건지 모르지만 침대에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안나를 간호하던 리자는 라틸다의 명령으로 곧 방을 나갔다. 리자는 나가는 순간 강한 시선으로 라틸다를 노려보았으나, 둘 다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라틸다, 악몽을 언제부터 줬죠?" 로일은 한참이나 더 생각하다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또 뭘 묻는 거에요? 지하실에서 나온 뒤부터 계속 이상하게 행동하는 알아요? 저도 베네의 설명이 완전하게 납득이 가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를 생각할 시기가 아니.......” "말씀해 주십시오." 로일은 진지하게 부탁했다. 라밀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병에 걸렸을 때부터요.......“ 로일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침내 잃어버린 추리 사슬의 한 부분을 찾아냈다. 그것은 라틸다의 악몽이었다. 그 순간 로일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백작의 병, 지하실의 즈쿨라, 라틸다의 악몽, 리제니와의 약혼, 그리고 검은 사자 백작과의 전쟁. "자, 이제 대답하세요. 아까부터 뭘 생각하고 있으며, 왜 이상한 걸 묻는 건지.“ "라틸다, 아무래도 제가 알아서는 곤란한 사실을 하나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아아, 제발 답답하게 굴지 말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를 더 확인하기 전까지 라틸다에게 말씀 드리기 곤란한 내용입니다.“ "뭘 확인하겠다는 거죠?“ "라틸다의 악몽." "와우, 내 꿈 속에 들어가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아니죠. 제가 라틸다의 꿈 속에 들어갈 수는 없죠. 하지만 라틸다가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꿈속에서 걸어 나온 존재가 있잖습니까?“ 라틸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로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라틸다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로일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워 강요하지도 못 했다. 로일의 말대로 알아서는 곤란한 어떤 사실을 아는 것이 두려워졌다. "라틸다.......“ 안나가 깨어났다 그녀는 반만 뜬 눈으로 라틸다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 괜찮니?" 안나는 입을 우물거리며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 눈물을 터트렸다. 라틸다는 얼른 그녀를 안아주었다. "죄송해요, 라틸다.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그 연기를 들이마시고 싶어져서 걸어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그 지하실에 있는 거에요. 돌아가려고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안나는 안타깝게 말을 이었고, 라틸다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아무 말도 하지 마.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래도 안나는 계속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안나가 겨우 진정하고 라틸다의 품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갑자기 나팔 소리가 들려 둘은 깜짝 놀라 포옹을 풀었다. 곧, 두 번째 나팔 소리가 길게 들렸다. 로일은 창문을 통해 터렛과 성벽에 대기 중이던 경비병들이 화살을 쏘는 광경과 덴모주 마을 족에 대기 중이던 횃불의 무리가 곧장 성 안 쪽으로 밀려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오늘 밤 안으로 뭔가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이 정도로 조용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터질 줄은 몰랐다. 성벽을 오르거나, 성문을 부수려는 시도도 없었다. 어둠속이라 어떤 상황이 펼쳐져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성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곧 세 번째 나팔 소리가 들렸다. 라틸다와 로일이 거실로 달려 내려갈 때, 베네도 로비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러와 고함 소리가 한 데 섞여 조용한 밤을 흔들어 놓았다. "어떻게 된 거죠?" "성문이 열렸습니다." 베네는 자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 쪽에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성문을 담당하는 병사 다섯 명이 모두 죽어 있었고, 무방비에 놓여져 있던 성문이 누군가의 조작으로 스스로 열렸습니다. 제가 성문을 열고 밖으로 달아나는 누군가를 발견했는데, 얼굴이나 옷차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체 누가......?" 배신자라는 말에 라틸다는 몹시 혼란스러워 했다. 오늘밤 그녀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고 있었다. "우리 족 경비로는 단 몇 분도 버터지 못 할 것입니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어디로요? 뒷문이라는 것도 없을 텐데요.“ "라틸다도 아시는 한 군데가 있습니다.“ 베네는 벽에 걸린 레이피어를 집어 들고 지하실 입구로 걸어갔다. "아까 말씀 드렸지요? 이 성의 지하실은 바깥 쪽과 통해 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하지만 내가 이 성을 떠나면.......” 라델다는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 해 하나마나 한 말을 내뱉었다. "이 성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라틸다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성은 다시 빼앗으면 됩니다. 그러나 라틸다가 잡히거나 그보다 더 안 좋은 일을 당하면 밖에서 필사적으로 지키는 병사들의 희생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알았어요. 로일, 안나를 데려와 주세요." "그럴 시간 없습니다." 베네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안나도 두고 가야 한다면 난 차라리 여기 남겠어!" 그녀는 단호히 그 손을 뿌리쳤다. "안나는 시녀 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 가장 소중한 친구에요." 라틸다는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그 때 로일이 계단을 올라서며 말했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금방 뒤따라 갈 데니 먼저 가십시오. 베네, 라틸다를 부탁 드립니다." "그러지." 베네는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라릴다는 로일에게 조심하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베네의 손에 이끌려 지하실로 들어갔다. 라틸다는 좀 전에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들으며 천천히 내려갔던 그 계단을 넘어질 듯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내려갔다. "잠깐만요." 라틸다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호흡을 잠시 정돈하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굽을 부러뜨려 구두를 다시 신더니,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잡아 베네에게 내밀었다. "잘라요." 베네가 살짝 칼집을 낸 부분을 기준으로 그녀는 허벅지까지 치마를 주욱 찢었다. "자, 가요." 이번에는 라틸다가 앞장 섰다. 뒤따르는 베네는 그제야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님께서 원군을 보내주기까지 며칠이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무 문을 열며 라틸다가 물었다. “오후에 까마귀를 날려보냈으니 사흘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 드린 대로 까마귀가 길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즈쿨라가 피어있는 곳을 지나니, 돌로 만든 동굴이 점점 커졌다. 두 사람이 내는 발소리도 동굴 끝에 다다를수록 점점 커졌다. 밖에서 새어들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코 끝을 간질였다. "적들이 즈쿨라를 보고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까요?" "저들은 사흘 안에 물러날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적 군주의 딸을 납치하기 위한 작전이기도 하지만, 밀리고 있는 전세를 잠시 누그러뜨리기 위한 작전이기도 합니다. 저 인원으로 덴모주를 점령하고 있을 여력이 안 될 데니 금방 떠날 겁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즈쿨라의 효용성을 알아볼 리가 없죠." 라틸다는 달리면서 말을 빨리 했다. “말해봐요, 베네. 내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 하세요?" “라틸다께서 평소에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누구보다 전 잘 알고 있습니다." "알다니요?" “덴모주에 직접 신경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백작님께서 읽은 책들을 모두 섭렵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네, 당신에게 이 성에 대해 모르는 일이 있기나 한가요? 놀랍군요. 그럼 내가 아버지의 뒤를 잇더라도 이 즈쿨라를 써야 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뜻대로 하십시오." "태워버리겠어요." 라틸다는 동굴 입구에 들어서며,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멀리서 들리는 함성 소리가 메아리 쳐서 울리고 있었다. 음의 벌레 우는 소리에 섞여 갑옷 입은 기사들이 움직일 때 내는 특유의 쇳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기고 있던 등불 하나가 갑자기 주위를 밝혔다. 라이온의 기사 여섯 명이 동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베네는 즉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레이피어를 겨냥했다. 비록 상대가 노인이었으나 기사들은 경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 한 명만은 무덤덤하게 베네의 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투구도 쓰지 않고 멋진 금발을 휘날리는 그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라틸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검은 사자 백작의 바로 옆에 항상 붙어있어야 할 기사가 왜 여기에 있는 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기사 바딩." 검은 사자 백작의 수호 기사 바딩은 가슴에 손을 얹어 기사로서의 예절을 보인 후 말했다. "오랜 만입니다, 레이디 라틸다." ‘로일 울프, 그대가 누군가를 지키는 싸움을 해보길 기다리겠다.' 아란x아의 여왕 새나디엘은 웃는 얼굴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로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지키는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싸웠고, 울프 기사단이 되고 나서부터 주위의 모든 이가 자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강자들이었다. 로일은 여전히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여왕이 말한 대로 누군가를 지키는 싸움을 할 때였다. 안나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창 턱에 겨우 기댄 그녀의 자세는 너무나도 가냘퍼 보였다. 로일은 손을 내밀었다. "지금 가야 합니다." 안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저 때문인가요?" 안나는 뜬금 없이 그런 말을 했다. 로일은 잠깐 동안 그게 무슨 뜻인가 싶어 머뭇거렸다. 그는 검은 사자 군의 이번 기습이 아마 드마르프 평원 전투 이전에 계획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안나는 그저 심각한 죄책감에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그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로일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해볼게요." 안나는 로일의 손에 의지해 발을 디였으나 그만 무릎이 꺾여 쓰러졌다. 로일은 그녀의 몸을 지탱해주더니 그대로 안아 올렸다. "시간이 없으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로일은 그녀를 안은 채로 달렸다. 안나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아직도 약에 취해 엉뚱한 말만 내뱉고 있었다.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이에요." 계단을 내려왔을 때 로비 안 쪽으로 검은 사자 군의 군복을 입은 남자 세 명이 달려들어왔다. 한 명은 어깨에 부상을 당해 있었고 칼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며, 셋 다 대단히 흥분해 있었다. "무기를 내려놓아라."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안내하라."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은 어디 있나?" 조용한 로비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들의 목소리와 더러운 피를 묻힌 그들의 발은 이 조용하고 깨끗한 공간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 곳은 라틸다의 보금자리였고, 전쟁과 별개로 더럽혀져선 안 되는 곳이었다. 로일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계단에 안나를 내려놓았다. 안나는 힘겹게 난간에 손을 짚었다. 로일은 안나나 스스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칼을 꺼냈다. “한 번만 경고하겠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은 자는 하얀 늑대 자신뿐이다." 피를 보고 흥분한 자들에게는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로일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로일은 상대가 먼저 칼을 휘두르게 내버려두고 즉시 칼을 세 번 휘둘렀다. 들이밀었던 세 자루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예쁜 그림이 그려진 하얀 벽지에 피가 붉게 물들었다. 로일은 칼을 집어넣고 다시 계단 족으로 걸어갔다. 혼자서 억지로 힘을 쓰며 내려오던 안나가 계단 거의 끄트머리에서 넘어질 뻔 하다가 겨우 로일의 부축을 받았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로일은 다시 그녀를 안아 올려 지하실 안으로 들어간 후 문을 잠갔다. 이 작은 걸쇠가 많은 시간을 벌어줄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며 안나는 흔들리는 충격에 작은 신음을 됐지만, 로일은 그녀를 배려하여 천천히 달릴 수가 없었다. 안나도 멈춰달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목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주기만 했다. 나무문을 열고 즈쿨라 밭을 지날 때, 로일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옆에는 안나를 발견했던, 즈쿨라에 중독된 사람들의 방이 있었다. 로일은 문득 안나의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약에 중독되었다는 어머니는 괜찮으신가요?" “엄마는 죽었어요." 로일은 다시 물었다. "죽어요?" "아까 기억 났어요. 모든 게 다 기억 났어요.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어요. 로일, 이 지하실 아래에는 한충이 더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저는 그 아래에 있다가 탈출 했어요." 안나는 로일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 로일.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 곳에 모든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내 몸에 돼지 피를 뿌렸어요. 난 비명을 질렸지만, 그 사람들은 상관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뭔가를 향해 기도했어요." "그 사람들이라니 누굴 말하는 겁니까?" “마을 사람들!" 로일은 자신이 세워놓은 가설의 한 부분이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안나는 손가락으로 방 끝에 있는 또 다른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문에는 12 쏜즈나 붉은 장미 백작, 일부 마을 사람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의 문양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로일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것은 단순히 거꾸로 세워진 십자가에 둥근 원이 달려 있는 모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장에 꽂혀 있는 칼을 상징하고 있는 문양이었다. 방 안에 있는 눈동자가 풀린 사람들이 로일과 안나를 바라보고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무덤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바로 그런 모습이리라. 로일은 뒷걸음질 쳤다. 위협할 만한 어떤 것도 없는데, 그는 겁이 났다. 지하실 입구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문이 부서진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지하실로 들이닥치는 게 너무 발랐다. 로일은 처음 들어온 세 명 중 한 명이 지하실로 안내하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은 라틸다가 지하실로 달아날 걸 알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그럼 베네와 라틸다 둘 다 위험했다. 로일은 더욱 속도를 내 달렸다. 안나는 자신이 떠올린 기억 때문인지, 흔들리는 충격 때문인지 아까보다 더 크게 신음 소리를 내며 울먹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동굴 밖의 달빛이 보였다. 아무도 없었으나 적어도 열 명 이상이 머물다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모래에 찍힌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대여섯 명은 아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달빛에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은 그런 발자국들과 두 명의 목 잘린 시체가 다였다. 떨어진 머리를 찾을 것도 없이 둘 모두 아는 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내가 늦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로일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라틸다 아가씨는요?" 안나는 두 구의 시체 중 하나가 라틸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로일이 지하실로 막 들어설 무렵, 베네와 라틸다는 바딩과 바딩이 데리고 온 라이온 기사단을 마주하고 있었다. "왼쪽에 작은 샛길이 있습니다." 베네는 가는 칼을 앞으로 세우고, 라틸다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못 해요." 라틸다는 베네가 그 다음에 할 말을 예상하고 즉시 대꾸했다. 그러나 눈빛은 다섯 걸음 앞에 서 있는 바딩을 향하고 있었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이 당당한 눈빛에 반했을 것이다. 베네는 깔깔대고 웃으며 진흙탕을 뒹굴던 어린 라틸다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했던 터라 만나는 모든 남자들을 굴복시키는 외모를 지녔더라도 그녀가 성장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겁에 질렀으면서도 겉으로 눈빛 하나 변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그녀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 되었다 베네는 뿌듯한 마음이 앞섰다.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 하나는 남자도 못 당해냈던 분이 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 때야 남자애들도 무섭지 않았죠. 하지만 운동 한 번 제대로 못 한 지금 다리로 저 훈련 받은 군인들을 따돌리는 건 무리에요." 라틸다는 베네에게 작게 대꾸한 후 큰 목소리로 바딩에게 말했다. "이 곳은 나 조차도 오늘 아침까지 몰랐던 비밀 입구인데 어떻게 알게 되었나 모르겠군요, 바딩." 바딩은 파티장으로 안내하려는 기사처럼 고재를 살짝 숙였다. "그건 가면서 이야기 하시지요, 레이디 라틸다. 당신이 지금 당장 항복하여 제 인도를 받는다면 편안하게 레앙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원한다면 옆에 있는 사람 한 명 정도의 목숨은 살려드리지요." 베네가 고개를 저었다. "엉뚱한 제안은 거두게, 기사 바딩. 목숨을 전제로 항복할 분이 아니시네." "늙은이가 나설 자러가 아닌 줄로 안다. 물러나라." 바딩은 라틸다에게 했던 느긋한 목소리를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라틸다는 즉시 손을 내밀었다. “멈춰라. 내가 아직 너희들의 캡틴과 이야기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동굴 안에서 한 번 더 메아리 쳤고, 라이온의 기사들은 멈칫했다. 바딩도 손을 내밀어 그들의 전진을 막고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성문을 열어주고 그대를 여기로 안내한 우리 족 배신자를 알고 싶다는 뜻이었어요. 레앙까지 가는 도증이 아니라 지금 당장 듣고 싶군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옆에 있으니." 라틸다는 바딩의 옆으로 다가온 시녀를 보고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놀란 빛을 숨기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물었다. "내게 원한이 있다면 먹을 것에 독을 타면 그만일 텐데 왜 이런 짓을 했니 , 리자?" 리자는 성에서 시중을 들 때나 지금이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딱딱하게 말했다. "아가씨께는 원한이 없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원한을 품은 건 붉은 장미 백작입니다." "아버지를? 왜......?" "이 지하실을 따라오셨다면 즈쿨라에 중독된 사람들을 발견하셨을 겁니다. 어떤 말씀을 들으셨을지 모르나,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들입니다. 제 어머닌 거기 한달 전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죽었죠. 죽기 직전까지 즈쿨라 태운 연기를 한 모금이라도 더 빨기 위해 애쓰는 처참한 얼굴로! 그 때부터 이 일을 계획 했습니다." "내게...... 말해줬더라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리자, 난.......“ 라틸다는 목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떨리고 있어 말을 끝까지 잊지 못 했다 리자는그녀의 말이 끝날 떼까지 기다렸다가 차분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라틸다 아가씨, 당신은 분명 친절하지만, 과연 성에 있는 시종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관심이나 있었나요? 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문제만 끌어안고, 마을 일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죠. 그런데 말을 해서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리자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고, 라틸다는 도저히 그녀의 차가운 눈을 보고 변명할 수가 없었다. 리자는 눈을 감고 그 자리에 무릎을 끊었다. "물론 저는 같이 일했던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살아있을 정도로 염치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이 성을 함락시킨 건 어머니를 죽인 붉은 장미 백작에 대한 복수이고, 이건 무관심한 라틸다 아가씨께 제가 하는 복수입니다. 그리고 아직 아가씨를 사랑하는 제가 드리는 작은 충고입니다. 기사 바딩이시여, 부터 저와 했던 약속을 지금 시행해 주십시오." 바딩은 칼을 꺼내, 굳은 목소리로 목을 내민 채 무릎 끊은 시녀에게 말했다. "리자, 비록 적군의 시녀에 불과하나 그대의 용기는 기사인 나로서도 흉내내기 어렵구나. 고통은 없을 게다." 바딩은 망설임 없이 리자의 목을 내리쳤다. 붉은 피가 다섯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라틸다의 얼굴까지 튀었다. 목 없는 리자의 몸이 모래 밭 위로 서서히 고꾸라졌다. "아아.......“ 시체를 본 적도 있고, 눈 앞에서 칼에 절려 죽은 사람은 많이 본 라틸다였다. 그러나 이토록 선명하게 잘린 목을 들이대고 죽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안나와 함께 항상 그녀의 옆에서 시중들던 소녀의 머리였다. 라틸다는 떨리는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베네가 라틸다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가십시오, 라틸다. 그리고 어딜 가더라도 잊지 마십시오. 당신 붉은 장미 백작의 후계자이며 미래의 여백작입니다. 어서!" 라틸다는 걸음을 떼지 못하다가 다시 한 번 호통치는 베네의 목소리에 놀라 달렸다. "라틸다, 지금 잡혀주는 게 레이디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이오. 달아나지 마시오." 바딩은 목청껏 소리질렀으나, 라틸다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쫓아가려는 방향에는 베네가 지키고 있었다. 바딩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늙은 집사가 뭘 믿고 무모한 도박을 선택했나? 내가 레이디를 죽일 잔혹한 기사로 보였나?" "그건 자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네. 라틸다 아가씨를 잡아갈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녀의 높은 긍지마저 앗아갈 수는 없네." 바딩은 픽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리자의 피가 아직 묻어 있는 칼을 휙 그었다. 그는 이런 다급한 와중에 늙은이를 상대로 전력을 다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베네는 그 묵직한 검을 레이피어로 슬쩍 막더니 공중으로 쳐올렸다. 방심했던 바딩은 자칫 칼을 떨굴 뻔 했다. 뒤따른 베네의 공격이 뺨을 가늘게 베고 지나가 그의 하얀 얼굴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 옹프르드 베네. 붉은 장미 백작의 수호 기사로서 마지막 결투를 신청하는 바다." 바딩은 뺨의 상처를 손등으로 닦으며 칼을 치켜들었다. "붉은 장미 백작의 수호 기사는 링케라고 알고 있는데?" "그는 쏜즈의 캡틴이라네. 그것과는 다르지." 바딩은 늙은 집사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받아들이지." "캡틴,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옆에서 부하 기사 중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 기사들 중 다른 한 명이 저지했다. 그는 바딩이 키운 열 명의 라이온 기사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고, 바딩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 비앙이었다. "물러나라, 우리들은 캡틴 바딩의 명령을 따르는 정예 기사들이다. 임무보다 캡틴의 명령을 우선하라." 비앙의 강한 몇 마디 말에 동료들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 비앙이 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바딩도 비앙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맙네, 비앙." 바딩은 베네 쪽으로 칼을 내밀었다. 싸움은 아주 빠르게 시작되었다. 등불 두어 개만 밝혀있는 어둠 속에서 뻗는 베네의 가는 칼날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발랐다. 바딩은 아슬아슬하게 피한 후 즉시 칼을 위둘렀으나, 베네는 한 발 빠르게 범위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베네는 자기보다 스무 살은 젊은 바딩을 계속 해서 뒤로 밀어붙였고, 바딩은 그 검의 속도를 당해내지 못 하고 몇 번이나 얻어맞았다 그나마 맞은 부분이 갑옷인지라 겨우 부상은 입지 않았다. 부하들은 자신의 캡틴이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밀리는 것을 본 적이 없던 터라 무척 놀랐다. 정식으로 제안한 결투가 아니었다면 진작 끼어들어 캡틴을 도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지친 것은 베네였다. 그는 안타깝게 자신에게 외쳤다. '아, 늙어버린 나의 몸이여.' 결국 모래 위에서 힘들게 움직이던 발이 멈추고, 레이피어는 바팅의 장갑을 낀 손에 붙잡혔다. "이 정도면 예의를 지킨 줄로 아오. 무시해서 미안했소, 기사 베네." 바딩은 칼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라틸다는 달리기를 멈췄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괴로웠다. 그녀를 보내는 베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아직도 리자의 원망하는 눈빛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사건이 자기로 인해 일어난 것만 같아 괴로웠다. “난 잘못한 거 없어. 그렇지, 안나? 그렇죠, 로일? 난 그냥 현실에서 눈을 돌린 것뿐인데.' 그녀는 걸어서라도 이 곳을 벗어나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나마도 몇 걸음 내밀지 못하고 그녀는 멈춰야 했다. 밀밭으로 빠져나가는 숲의 길목에 십 여명의 시커먼 그림자가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라틸다가 접근하기 훨씬 전부터 활을 들고 있다가 그녀가 나무숲에서 빠져 나와 달빛에 노출될 때 활시위에 화살을 올려놓았다. “다가오는 이는 멈추고, 성명을 밝혀라. 아군과 적군을 불문하고 대답이 없으면 즉시 쏘겠다." 라틸다는 절망적으로 눈을 감고 그만 무릎을 꿇었다. "이름을 밝혀라, 밝히지 않으면 쏘겠다." 라틸다는 손을 들며 대답하려 했으나, 숨이 턱까지 차올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때 뒤에서 다가오는 검은 기사가 대신 대답했다. "쏘지 마라. 캡틴 바딩이다." 궁수들은 일제히 시위를 늦추었다. 바딩의 뒤를 따라 검은 갑옷을 입은 라이온 기사단이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아무 것도 젊어진 것 없이 맨몸으로 달려온 그녀를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쉽게 따라온 그들이 괴물처럼 보였다. 라틸다는 거친 호흡을 몰아 쉬며 바딩을 올려다보았다. 바딩도 지친 나머지 잠깐 동안 말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라틸다가 무슨 말을 꺼낼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레이디 라틸다. 이제 그만 해 두시오. 나는 죽이지 말았어야 할 과거의 명예로운 기사를 죽이고 오는 길이오. 그것도 당신을 지키기 위해! 맙소사, 솔직히 말하리다. 당신이 그런 훌륭한 기사의 희생을 받아들여 살아남을 자격이 있소?" 바딩은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겨우 말을 꺼냈다. "자기 손으로 두 사람이나 죽여놓고 그걸 내 탓으로 돌릴 생각인가요?" “당신 말은 듣고 싶지 않소. 그러나 나는 샤이필드 공작 앞에서 선언했던 기사도 역시 잊지 않았소. 그대에게 레이디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명예를 제안하겠소." 바딩은 허리에 차고 있는 한 템 길이의 단검을 라틸다 앞에 떨어뜨렸다. "자결할 기회를 드리겠소, 레이디 라틸다. 사실대로 말씀 드리겠소. 당신이 죽으면 이 작전은 실패요. 나는 당신을 인질로 잡아 붉은 장미 백작에게 항복을 권유할 생각이오. 지금까지 끓은 장미 백작의 행동으로 보건대, 당신이 잡혀있다면 그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할 거요. 물론 당신의 아버지는 항복의 대가로 죽을 것이고 당신은 구차한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오.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을 존경하고 있소. 지금까지 콧대만 센 귀족 여인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드높은 긍지와 꺾이지 않는 자신감을 좋아했소. 부탁이오, 라틸다. 당신이 아직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내가 당신께 드리는 최대한의 자비요." 라틸다는 흙 묻은 단검을 집어 들었다. 예전이라면 그 단검을 집어 던지며 호통이라도 쳤겠지만, 지금은 바딩의 말도 옳은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르고 죽었더라면 나았을 그런 것들이 아직 지하실에 있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죽고 싶었다. 리자의 목 잘리는 광경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베네의 죽음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칼을 거꾸로 쥐었다. "안돼요!" 검은 갑옷 뒤에서 누군가 달려오더니 곧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렀다. 라이온의 기사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벌써 칼을 꺼내 경계했고, 숲 입구에 활을 쥐고 있던 궁수들은 일제히 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바딩은 쫓아온 두 명을 금방 알아보았다. 한 명은 익히 잘 알고 있는 라틸다의 시녀 안나였고, 한 명은 전에 파티장에서 본 적 있는 라틸다의 마부였다. 바딩은 그의 존재 자체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안고 있던 안나를 내려놓고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 안나는 잠깐 휘청거리더니 라틸다의 마부에게 기대어 말했다. “어떤 경우라도 죽는 건 안돼요. 라틸다, 저 자가 무슨 말을 했건지 말아요." 바딩은 비장한 마음으로 내준 자신의 제안이 무시되자, 인상을 찌푸렸다. “마부와 시녀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바딩은 손을 들었다. 바딩과 안나 사이에 있던 라이온 기사들이 좌우로 물러나니, 둘은 뒤에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의 표적이 되었다. "난 시녀가 아니에요. 난 라틸다의 친구에요." 안나는 작은 두 손을 꽉 쥐고 악을 했다. 바딩은 듣는 척도 않고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화살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라틸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부러진 화살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라이온의 기사들과 바딩은 눈을 크게 떴다. 안나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 튕겨 나왔고, 안나의 앞에는 로일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빗겨나간 화살 하나가 그의 뺨을 스쳤는지 피가 흘렸고, 허벅지에도 화살이 하나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쳐낸 화살이 적어도 네 개는 넘 었다. 바딩은 순수하게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어 다시 한 번 궁수들에게 활을 쏘라 명령하고 싶었다. 바딩도 정신을 집중하면 화살 한 자루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그건 검의 달인이 되면 세 번 중 한 번쯤 성공할 위험한 장난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휘두르는 칼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베네의 가는 칼을 막아내느라 식은땀을 흘린 바딩이기에 더욱 실감한 사실이었다. 로일은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움켜잡았다. 마지막 순간에 쳐낸 것인데, 하필 튕겨나간 자리가 그의 히벅지 쪽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화살을 뽑아냈다. 깊이 박히지 않았으나 무시할 만한 상처는 아니었다. 뺨에서 흐르는 피도 입술을 타고 흘렀다. 날아오는 화살은 어둠 속에서 작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일은 거의 절반은 운으로 네 개를 쳐냈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화살은 그저 지나가주길 바랐다. 안나는, 두 번째 화살 공격을 대비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는 로일의 어깨를 짚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로일은 그녀를 저지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만 멈추었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핏자국이 그녀가 걷는 자리마다 떨어졌다. 로일이 운에 맡기고 막는 걸 포기했던 그 화살 증 하나가 안나의 심장 쪽 가슴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심장 고동에 맞추어 화살이 꿈틀거렸다. "라틸다.......“ 안나는 오래 걷지 못 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끊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힘든데도 로일에게 안겨왔어요." "안나!" 라틸다는 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으나 그 외에는 어떤 것도 하지 못 했다. 라이온의 기사들도, 바딩도, 로일도 심장에 화살을 박은 채 입을 여는 그녀의 말을 막지 않았다. "살아야 해요. 그리고 우리 둘이 같이 꿈꿨던 미래를 이루셔야 해요." 안나는 그 말을 마친 후에도 잠깐 동안은 라틸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 했다. 안나는 숨을 거두었고, 박동하던 화살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로일이 칼을 든 채 두 걸음 앞서나갔다. 궁수들은 다시 활을, 기사들은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바딩도 검을 꺼냈다. "로일, 칼을 거두세요." 라틸다는 손을 내밀었다. 방금까지 단검을 손에 쥐고 힘 없이 떨고 있던 그녀는 어느 새 강한 눈동자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바딩, 당신의 제안은 거절하겠어요." 그녀는 바딩에게 단검을 내밀었다. "대신 제가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하죠. 이대로 잡혀가겠어요. 당신이 말했던 구차한 삶을 살게 될지 어떨지는 내가 선택할 테니까요. 대신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살려주세요. 당신의 목적은 저 하나라고 하썼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라이온의 기사 한 명이 바딩에게 귀엣말을 했다. "명령은 전멸이었습니다." "우릴 막는 성의 경비들은 전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별이라는 명령에 일반인은 끼지 않았을 터. 나팔을 울려 후퇴 명령을 내려라." “예”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기사 중 하나가 뿔 나팔을 길게 불었다. 웅장하고 커다란 소리가 두어 번 울려 퍼졌다. "됐소. 당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어디 스스로 입증해 보시오." 바딩은 라틸다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인도했다. 그러나 라틸다는 그 손길을 뿌리쳤다. "나 혼자 걷겠어요." 바딩은 손을 떼고 부하들 중 셋에게 그녀의 길을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라틸다는 마지막순간 칼을 들고 서 있는 로일을 돌아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일은 묵묵히 사라지는 그녀를 눈으로만 좇았다. 라틸다가 사라진 후에도 로일과 라이온 기사들 사이의 긴장은 계속 유지되었다. 바딩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레이디 라틸다의 부탁대로 너도 살려주겠다. 물러나라." "그건 당신과 라틸다의 약속이었지, 내가 한 게 아니었소." "보아하니 너도 대단한 실력의 기사인 것 같군 반드시 죽여야 하건만, 널 죽이고 나면 분명 난 또 후회하겠지. 오늘은 보고 싶지 않은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았어." 바딩은 손을 내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내가 가거든, 죽여라." 남아있는 네 명의 라이온 기사들과 궁수 다섯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그를 보냈다. "기사 바딩, 라틸다의 안전을 보장하라." 로일이 큰 소리로 말하자, 바딩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들릴락말락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고 약속 따위를 운운하느냐?“ 그가 사라진 후 기사들은 칼을 들고 궁수들은 활을 들었다. 이미 로일의 검술에 한 차례 놀란 후라 방심은 없었다. 로일도 그들 모두를 상대하는 건 자신 없었다. 운은 두 번 따라주지 않을 것이고, 다친 다리로 기사 다섯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조금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틸다를 구하러 가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난 라틸다의 경호 기사다." "평범한 기사라고 생각되지 않는군. 대체 화살을 어떻게 막았지?" "원한다면 다시 한 번 보여주겠다. 그리고 다시 화살을 장전하는 시간 안에 너희 모두를 베어버리지." 화살을 맞은 허벅지가 점점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승부를 건다면 가급적 빨리 하는 게 좋았다. 그래서 로일은 일부러 상대를 도발했으나 그들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원한다면 우리들 한 명 한 명과 대결하게 해 줄 수도 있다. 캡틴 바딩은 널 처벌하라고 하셨으나, 우리는 너 같은 실력자를 그냥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한 명씩 상대 해준다면 그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로일이 신경 쓰는 건 눈 앞의 기사 넷이 아니라 뒤에 버터고 있는 궁수 다섯이었다. 마스터 퀘이언 조차 화살을 겨냥하고 있는 적진에 있을 때는 일단 물러나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현명한 가르침을 따를 수가 없었다. "고마운 제안이나, 필요 없다. 내겐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로일은 칼을 치겨들고 눈을 감았다. 몇 걸음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으나 그는 주위의 모든 것을 느겼다. 기사들 넷의 호흡과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의 울림, 바람소리, 멀리서 이동하는 군대의 이동까지. 그의 신비한 침묵을 보고 기사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 했다 사실 로일은 제일 먼저 범위에 들어오는 기사를 베고 옆으로 피한 후 궁수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상대 측에서 화살을 먼저 쓴다면 그는 기꺼이 아까의 운을 믿고 이 무모한 싸움을 전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일은 등 뒤에서 접근하고 있는 제 3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 예상치 못 한 존재가 화살을 볼 때도 로일은 인기척 조차 느끼지 못 했다. 팽 하고 시위가 등기는 순간, 로일은 꼼짝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등을 돌아 화살을 막기에도, 좌우로 피하기에도 늦었다. 그러나 화살은 로일의 머리 위를 날아가, 활을 당기고 있는 궁수 한 명을 정확히 꿰뚫었다. 화살을 맞은 궁수가 쓰러지기도 전에 화살이 하나 더 날아갔고, 두 번째 궁수가 쓰러졌다. 순간 나머지 궁수 세 명은 여기에 로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시위를 놓았다. 그러나 조준이 흐트러진 화살은 로일 쪽으로 뻗지 못 했다. 로일은 즉시 기사들 네 명에게 달려들었다. 바딩이 뽑은 정예 기사들은 침착하게 맞섰으나, 화살에 맞을 위험에서 벗어날 로일을 상대하기에는 네 명으로도 역 부족이었다. 순식간에 한 명의 목이 날아가고, 다른 한 명의 활이 떨어져 나갔다. 또 다른 화살이 계속 날아가 네 명째의 궁수를 정확히 쓰러뜨렸다. 겁에 질린 마지막궁수는 화살을 잰 채로 나무 뒤에 숨었다. 그사이 로일은 또 세 번째 기사의 갑옷을 들고 배에 칼을 필러 넣었고, 마지막 한 명은 바닥에 떨어진 다른 검을 집어 목에 찔러 넣었다. 숨어있던 마지막 궁수는 어느 새 자기 앞 쪽으로 다가온 누군가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로일은 갑옷에 박혀 잘 빠지지 않는 검을 손에 쥐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 실수도 없이 이런 어둠 속에서 활로 상대를 정확히 맞춘 실력자였다. 무엇보다 집중하고 있는 로일에게 기척도 들키지 않고 등 뒤에 선 자였다. 만약 그 자가 로일의 목숨을 노린다면, 로일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화살 두 대 정도 맞을 각오 하고 상대의 위치를 찾아내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적을 모두 해치운 후에 즉시 로일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이런 엄청난 사람이 한 명 더 있을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해 로일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던멜!" 던멜은 기운이 빠진 로일의 팔을 부축하여 옆 나무에 내려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노르만트에 있어야 하지 않아?" 오랜 만에 보는 던멜의 수화를 잘 알아듣지 못 해 로일은 두 번 정도 그 말을 반복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모두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 원래 캡틴 카셀과 함께 오기로 되어 있는데, 중간에 내가 먼저 여길 오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긴 얘기할 시간이 있나? 나도 너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듣긴 힘들겠지 ' "맞아. 저건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야. 그리고 그들은 내가 지키고 있던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을 납치해갔어, 한심하군. 천하의 하얀 늑대라는 녀석이 고작 화살 몇 개를 막지 못 해 이 꼴이 되다니." 로일은 한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떤 검사도 활을 당해내기는 힘들지. 잘난 척 하길 좋아하는 게랄드도 상대 측에 궁수가 있으면 아즈윈의 방패를 빼앗아서라도 몸을 보호하려고 하잖아, 다리를 다친 것 같은데 괜찮아?' "아파. 하지만 뼈를 다친 건 아니야." '약초가 좀 있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해.' 던멜은 품 안에서 작은 약 봉지를 꺼냈다 로일은 그 봉지를 통 째로 받아내더니 말했다. "던멜, 하지만 난 아직 돌아갈 수 없어." 로일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라틸다를 구해야 해. 미안해. 설명할 수는 없어. 내가 그녀를 구해야 할 의무도 없겠지. 하지만 난 그녀와 약속을 했고 지켜야 해. 난 이미 한 명을 지키지 못 했어. 끝까지 날 믿어준 내 친구를 지키지 못 한 거야," 로일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던멜은 약한 듯 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그가 눈물을 보이는 것에 무척 놀랐다. 던멜은 괜찮냐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로일은 눈물을 닦고 말을 이었다. "새나디엘 여왕님은 내게 다른 사람을 지키는 싸움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었지. 왜 그런 걸 물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나는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남아있어." 던멜은 로일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 했으나 그의 선택을 방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어깨를 짚은 손을 했다. '같이 가 줄까?' 던멜의 말이 어둠 속에서 신중하게 바닥을 살피며 걸어오고 있었다. 던멜은 갈기를 쓰다듬어 겁에 질린 말을 진정시켜주었다. "아니, 어차피 어디로 가는 지는 알고 있어, 그보다 해 줄 얘기가 있어" 로일은 긴 이야기를 짧게 간추려 덴모주와 붉은 장미 백작에 관련된 자신의 추리를 말해주었다. 던델은 로일의 말이 끝나자 경악했다. "나도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직접 성의 지하실로 들어가 보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될 거야. 그걸 확인하고 모두에게 내 말을 전해줘. 캡틴 카셀이라는 친구는 중간에 오다가 헤어졌다고 했었지? 어딜 간 거야?" '에노아 후작의 영지 암브루에 원군을 청하러. 원래 같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중간에 이 쪽으로 이동하는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발견했지.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서 나만 떨어져 지름길로 온 거야. 명령이었지. 난 반대했지만, 하도 고집을 부려 어쩔 수가 없었어.' 던멜은 다시 싸움을 준비하는 로일을 보고 물었다. '그런데 설마 군대에 뛰어들어 그 여자를 구하려는 건 아니겠지?' "안 될까?“ 로일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던벨은 난처하게 웃었다. '무모하게 굴지 마. 내 말을 빌려줄게. 몰래 따라가. 그리고 기회를 틈 타 구해내도록 해. 그게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끝까지 기다렸다가 그 여자가 갇힐 때를 기다려. 가장 경비가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이 가장 경비가 허술한 순간이 되니까.' "네가 하는 말이니 확실하겠지." '로일, 언제나 충고하는 거지만, 제발상대가 열 명 이상이면 물러나는 법을 배워. 항상 그런 식으로 싸우니까 마스터께서 불안해 하시는 거야.' 로일은 절룩거리며 걸어가, 아직도 화살을 가슴에 박은 채 쓰러져 있는 안나의 시신을 편히 눕혔다. 지금도 깨우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던멜은 그가 안나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아주는 동안, 손수건을 꺼내 허벅지의 상처를 동여매어 주었다. "부탁이 하나 더 있어. 이 여자의 이름은 안나야. 여기서 성 쪽으로 직진하면 내가 말했던 그 성의 지하실이 나와. 그 곳에 데려가줘. 다시 돌아와 묻어줘야 해." '친구?‘ "너무 짧은 우정이 되어버렸지만." ‘그래, 알았어. 지금 구하러 가는 사람 역시?' 로일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어쨌든 끝나거든 즉시 노르만트로 와라. 우린 어느 때보다 네 힘이 필요해.' "알았어.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 '아즈윈은 그 사과를 안 받아줄 거다. ' "알아. " 로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몰아 곧바로 바딩이 사라져간 쪽으로 달려갔다. 던멜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돌아섰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의 세계에서도, 성 안 쪽에서 벌어지는 분주한 분위기는 확실히 느껴졌다. 공기의 진동으로, 그리고 횃불의 이동으로. 성 안에 머물러 있던 군대가 지금 후퇴하고 있었다. 결국 카셀도, 로일도 던멜과 헤어졌다. 로일은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그가 설사 백작의 딸을 구하는데 실패해도 본인이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카셀은 달랐다. 그는 당당하게 괜찮다고 말했으나 불안했다. 결과적으로 그 때 흩어진 덕에 로일을 도울 수 있었으나, 던멜은 아직도 카셀의 옆에 있어주지 못 한 게 안타까웠다. 30.암브루 암브루의 중앙에 있는 에노아 후작의 저택은 일 천 명좀 되는 군대가 휩쓸고 지나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금이 가고 부서져 있었다. 마을에는 민간인과 병사들을 구분하지 않은 시체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뭔가를 두려워하며 말을 타고 지나가는 카셀을 굉장히 경계했다. 저택 안에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몇 명이 흘렸을지 모를 핏자국이 긴 시간 동안 노출되어 흙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검게 굳어 있었다 하늘은 비가 올 것처럼 어두컴컴했고, 먼지 섞인 공기는 들이마시기 힘들 정도로 묵직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걸까? 암브루는 카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밀었다. 쉐이든은 이틀 걸릴 거라고 예상했으나, 카셀은 사흘 째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암브루로 향하는 이정표를 발견했다 밤에도 달렸고, 중간에 금화를 다섯 개나 더 엄어주고 타던 말을 새 말로 바꾸기도 했으나 계획 했던 시간 안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던멜과 헤어진 후 혼자 밤길을 달리며 카셀은 점점 커지는 공포에 사로 잡혔다. 이 길의 끝에 뭐가 있을까? 암브루에 토착한다 해도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해결될까? 마지막 순간에는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싶은 충동 마저 일었다. 정신이 멍해지는 밤에는 심지어 이대로 달아나 보검을 팔아 일이 년 농사 비용을 마련해 보자는 생각까지 들곤 했다. 아침이 되어 마른 빵만 우걱거리며 먹다가 목이 메어 기침을 터트렀을 때는 갑자기 모든 것이 서러워 울고 싶기도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고,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줬던 하얀 늑대들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돌아오면 임시 캡틴을 해준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다.......‘ 쉐이든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오기가 생겨 허공에 대고 상 같은 거 필요 없어!' 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울면 체력이 떨어져. 우는 건 나중에 하자.' 그것은 카셀이 암브루에 오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에노아 후작의 저택에 도착한 지금 카셀은 그 어느 때보다 울고 싶었다. 물를 이 곳에 도착하면 모든 일이 극적으로 해결될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군으로 와줬어야 할 일 천 명의 군대가 이 곳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자, 카셀은 모든 것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시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일이 터진 후에 치운 것인지 모르지만, 과거에 정원이었을 저택의 공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깨진 창문을 통해 안을 바라보니 어지간한 가구들은 모두불 타버렸고, 일부는 훔쳐갔는지 남아있지 않았다. 일이 벌어진 직후, 부서진 저택 내부에 대한 경비라 봐야 가장 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사람들의 양심이란 것에 떠넘겨졌을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카셀은 힘 없이 공터를 가로질러갔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지만 저택에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거에 에노아 후작을 모셨을 병사나 기사도 없었고, 시녀나 후작의 가족도 없었다. 저택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뒤뜰에는 급히 만든 게 분명한 무덤이 스무 개쯤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화장 한다고 생각하는 카셀은 저택 뒤에 무덤을 만든 것에 깜짝 놀랐다. 푯말이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작지만 정성을 들인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시신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에노아 후작을 대신하여 죽은 그의 가족들을 이곳에 매장하였다. 이후 이장할 때나 화장할 때를 대비하여 그들의 손에 이름을 대신할 물건을 쥐어두었다. 그들에게 안식이 있기를...... 쟌의 친구가,' 쟌이 누구더라? 카셀은 휘갈겨 쓴 글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가을의 그 많은 시체들이 방치 되어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이 곳을 찾아와 영주의 가족들을 친절히 매장했을 리는 없다. 카셀은 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그 이름을 떠올렸다. 쟌 말로 에노아 후작. 에노아 후작을 쟌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한 누군가의 호의인 모양이었다. 그게 누굴까? 카셀은 그 후 몇 번이나 저택의 주위를 맴돌다가 기운이 빠져 그만 주저앉았다.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노래로라도 부르고 싶었으나, 그에게 음유시인의 재능은 없었다. 그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잊고 멍하니 서쪽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차가운 돌 위에 닿아있는 엉덩이가 저릴 즘에 누군가의 발 소리가 들렀다. 카셀은 조심성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상당히 큰 중년의 남자였다. 두 눈은 파랗고, 길게 기른 금발 머리를 뒤로 묶어 허리까지 늘어뜨러고 있었다. 칼을 한 자루 차고 있었으나 바지 춤에 손을 찌른 느긋한 분위기라, 낯선 사람인데도 카셀은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친근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카셀의 옆에 않았다. 마흔 살쯤 되어 보였지만, 눈만은 아이처럼 밝았다. "다 타버린 정원을 감상하기 위해 이 먼 곳을 일부러 찾은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인가? 캡틴 울프." 그는 옆에 암은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말을 결었다. 카셀은 잠깐 할 말을 잊었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칼을 얻었을 때 생판 모르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하얀 늑대라고 믿게 만들었던 때가 떠올랐고, 하얀 늑대들을 상대로 당당히 뜻을 관철시켰던 코홀룬에서의 자신을 떠올렸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인정해주지 않아 홀로 버려진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중년의 남자는 쉐이든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보는 순간 카셀을 캡틴이라고 불렀다. "왜 나를 캡틴 울프라 생각한 거요? 그리고 당신은 누구요?" 카셀은 그가 자기를 알아보는 이유를 금방 짐작했다. 그는 코홀룬에서 그랬던 것처럼 칼을 버젓이 내밀고 뭔가에 공격 당한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카셀이 캡틴이라는 걸 알고 접근한 거라면 조금도 위험할 게 없었다. 그리고 칼만 보고 대뜸 캡틴이라고 그러는 걸보니, 그는 울프 기사단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닌 것임에 틀림 없었다. 정말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데 그 칼을 가지고 있냐고 따졌을 테니까. "그 칼." 그는 카셀의 허리 쪽으로 고개 짓을 했다. "난 당신을 모르오." "나도 모르네. 아란티아를 방문한지는 거의 4, 5년이 다 되어가니까. 그 사이 울프 기사단도 물갈이 되었을 것이고, 캡틴도 퀘이언이 아닌 다른 누구일 데니 그 칼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지. 하지만 자네는 울프 기사단의 캡틴을 하고 있기에는 너무 젊지 않나 싶군." "그건 나한테 따질 문제가 아닐 거요. 날 캡틴으로 만든 사람은 하얀 늑대들이지 내가 아니니까." 카셀은 일부러 귀찮은 듯이 말하며 상대를 떠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카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 마침내 그만 하라고 말을 꺼낼 즈음, 그가 말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무슨 소리요?" "자네는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아니야." "뭐라는 게요?" 카셀은 생각 없이 대꾸했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카락 긴 중년 남자의 칼이 어느 틈엔가 옆구리에 닿아 있었다. 저렇게 말끔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 이 전쟁의 폐허와도 같은 저택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 칼의 모양만 보고 너무나도 쉽게 울프기사단의 캡틴을 알아봤다는 것, 그리고 아무 기척도 소리도 없이 칼을 뽑아 자신의 옆구리에 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이 남자가 적당히 상대해서는 안 되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카셀이 상대의 도발에 화들짝 놀라는 순간, 그에게 자신의 패를 모조리 보여준 꼴이 되었다. 칼을 대고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면 나중에라도 이 남자를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살이 난 저택의 모습을 본 순간, 모든 희망을 잃고 멍청하게 있었던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더 이상 하얀 늑대라는 방패가 없었다. 처음 유랑 시인의 칼에도 겁을 내던 패잔병 신세였다. '아직 뭔가 잘못된 건 아니야.' 카셀이 침을 삼키고 자세를 추스르자, 그는 웃으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너무 당황하지 말게. 애초에 그 칼은 아무나 쥘 수 있는 칼이 아니니, 그 칼을 자네가 가지고 있다면 어떤 이유가 있어서겠지.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네. 난 오랜 만에 본 후배에게 가벼운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 그 작은 손짓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강해서 카셀은 그만 옆구리에 칼을 들이댄 그 남자 옆에 도로 않게 되었다. 형식적인 절차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울프 기사단의 인사라는 게 그런 겁니까?" "울프 기사단의 테스트를 통과한 자라면 이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뭔가 반응이 올 거고 난 그 반응을 인사 대신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미안하게 됐군. 난 이전 울프 기사단이었네." 그는 아침밥으로 뭘 먹었다는 걸 말하는 정도로 자신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이제는 은퇴했고, 가끔 거기에 놀러나 가는 신세야. 이름은 메이루밀, 하지만 다들 루밀이라고 부르지. 자네는?" "카, 카셀입니다. 그럼...... 혹시 당신은 하얀 늑대였습니까?" 루밀은 웃음을 터트렀다. "처음부터 울프 기사단에는 하얀 늑대라는 존재 같은 건 없었다네. 그걸 모르는 걸 보니 자네는 확실히 울프의 기사가 아닌 모양이야. 하얀 늑대란 여왕 수호 기사의 후보일 뿐, 특별히 호칭을 달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네. 외부에서 그렇게 부르길 좋아하는 거지. 아니, 아니지 지금은 또 달라졌겠지. 구분하기 좋게 말하자면, 나는 울프 기사단의 고문이며, 하얀 늑대는 아닐세. 조금은 설명이 되었나?" 카셀은 언뜻 쉐이든에게 그 비슷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나 고개를 Rm덕였다. "자, 카셀. 그럼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착해 보이는 젊은이의 정체가 뭔지 말일세."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카셀의 비밀을 끌어냈다. 만약 카셀이 하얀 늑대들을 동행한 캡틴의 자격으로 여기에 있었다면, 절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루밀이 눈곱만큼이라도 위협적인 자세로 비밀을 엿들으려 했다면, 목숨을 내놓을 지언정 카셀은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밀은 고민을 들어주는 촌장님처럼 차분하게 카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가음에만 품고 있기 힘든 무거운 고민들을 단지 누군가 들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던가. 카셀은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고통을 공유해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웠다. 카셀은 전쟁에 패배하여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칼을 주운 후 코홀룬에서 하얀 늑대들을 만나고 노르만트에서 겪은 많은 일화들을 간단히 줄여 이야기했다. 결정적으로 비밀인 부분은 뺐지만, 말을 하는 내내 카셀은 몇 번이고 이런 걸 말해줘도 되나 싶었다. 마치 지금까지 몸을 보호하고 있던 갑옷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루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기도 하고 설명이 미흡한 부분에서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는 타인의 말을 아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대체로 그런 류의 사람은 웅변을 잘 하는 사람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잘 끄집어낼 수 있었다. 결국 카셀은 검은 기사들의 일까지 이야기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아주 자세하게 듣고 싶은 이야기들뿐이군. 그 와중에 살아남다니 자네의 영혼에는 내가 모르는 힘이 존재하는게 틀림없어.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자네가 캡틴 울프라고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겠군 아까의 무례를 용서하게, 캡틴." "전 캡틴이 아니에요." "왜 그리 생각하나? 검술이 약해서?" 루밀은 카셀이 이야기 하며 몇 번이나 강조했던 부분을 살짝 건드렸다. "부족한 수준이 아니에요. 저는 검을 제대로 배운 열 살짜리 꼬마 애에게도 가끔 진다고요." "아마 자네가 아란티아로 가서 울프 기사단을 방문하게 된다면 열 네 살짜리 꼬마애가 울프 기사단에 끼어 있는 걸 보게 될 걸세. 그럼 그 꼬마에게 지는 검사는 검사로서의 자격이 없나?"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루밀!" 루밀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난 자넬 놀릴 생각은 없네. 그저 예를 든 것뿐이야. 자자, 마음을 편히 갖게. 우린 사실 아주 긴 이야기를 나눠야 해. 나도 자네도 이런 곳에 머물러 있을 만큼 한가한사람들은 아니네만,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 부족한 시간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게지. 자, 어디서부터 해볼까? 그러고 보니 검술에 재능도 없는 캡틴이 왜 옆에 호위도 붙이지 않았나? 내가 현역이라면 자네 같은 캡틴을 결코 혼자 보내지 않았을 텐데." "호위라면 있었습니다. 중간에 헤어졌지요." "무슨 일로?" 카셀은 이 긴 이야기를 또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해 하며 물었다. "검은 사자 백작과 끓은 장미 백작의 전쟁이 카모르트에 벌어지고 있는 건 아십니까?" "귀를 막고 다니지 않는 이상에야 어찌 모를 수 있겠나! 드마르프 평원 전투에서 붉은 장비 백작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까지 들었네." "최근까지도 붉은 장미 백작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으로 보였죠. 조만간 노르만트를 대대적으로 공격해올 것 같아 저는 원군을 부르러 암브루에 왔습니다." "그런데 원군을 대줘야 할 암브루 땅은 폐허가 되었고, 에노아 후작마저 사라졌다? 몹시 당황했겠군." 카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인 던멜과 전 암브루를 향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발한 첫날 정오름에 끓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상당히 대규모였죠. 덴모주에 뭔가 벌어지지 않은 이상에야 다 잡은 승기를 내팽개치고 이동할 리가 없을 겁니다. 저와 던멜 둘이 생각하기에 그럴 만한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본거지가 위험할 때겠지.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가 역습을 시작했나 보군." "그냥 당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역습의 내용이 뭔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델모주에는 또 다른 하얀 늑대인 로일 울프가 있었습니다. 왜 그가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는 생략하죠.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로일?' 루밀은 금방 아는 체 했다. 카셀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아십니까?“ “gi얀 늑대 중에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친구지. 아마 그 친구도 날 알 거야. 자네 말마따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계속 얘기해보게." 카셀은 되려 로일과 루밀이 서로를 알고 있다는 그 부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하던 말을 계속했다. "던멜과 전 서로 상의했습니다. 우리가 계속 암브루로 가야 할 것인지, 덴모주로 가야 할 것인지 둘 다 급한 일이었는데, 한 군데씩 들러서는 늦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흩어지는 쪽을 택했죠. 비교적 안전한 암브루에는 내가 가겠다,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덴모주에는 네가 가라...... 하지만 던멜은 계속 같이하자고 했죠." “나라도 반대할 걸세. 캡틴의 안전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나?” 카셀은 우울하게 한숨을 쉬었다 "모두에게 보호 받는 위치가 캡틴이라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자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상당히 부족하군. 사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캡틴이란 건 울프 기사단에서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해. 가장 강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던가, 특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규칙 따위도 없었어. 대신 책임감만 엄청나게 몰려 있던 위치지. 내가 울프의 기사였을 때 하얀 늑대들이라고 할 만한 친구들은 모두 네 명이 있었는데, 모두들 서로 캡틴을 안 하겠다고 난리였지." "그때도 그랬습니까?“ "그래. 내기해도 좋아. 지금 하얀 늑대들도 캡틴 하길 싫어하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란 그만큼이나 맡기 까다로운 위치다. 그러니 평범한 울프의 기사가 그 위치를 맡기는 힘드니까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에게 그 일이 떨어진 거야. 다들 거절했고, 나중에는 결투해서 지는 녀석이 맡자는 말까지 나왔다네. 그러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퀘이언이 반강제로 캡틴을 떠맡게 된 거야." 카셀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됩니다. 모든 검사들의 추앙을 받는 마스터가 억지로 맡은.......” "갖다 붙이면 되는 칭호가 마스터인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울프 기사단 중 거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어차피 기사단 내에 검술의 천재들이야 넘쳐 나는데 캡틴까지 강할 필요가 있겠나? 왜 아까부터 '나는 약해, 나는 약해.' 이러면서 궁상을 떠는 겐가?" 루밀은 놀리는 듯이 말했고, 카셀은 화가 불쑥 치밀었다. “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다를 것도 없지. 어했든 던멜이라는 친구는 결국 자네 말을 듣던가?" “로일을 데려오는 일도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길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죠."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몰라, 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도적들을 두 번이나 만났거든. 한 놈들은 얌전히 내게 어디로 가느냐며 묻더군. 암브루로 간다니까 위험한 곳이니 가지 말라고 충고를 해주지 않겠나? 하지만 난 가봐야 하니 가야겠다고 했다네." "그게 왜 도적 입니까?" "군대가 지나가면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더군. 차림은 도적 집단인데, 하는 짓은 군대나 다를 바 없더군. 날 공격하지도 않겠다는데 그런 군대나 다름없는 놈들을 건드릴 수야 없지. 그래서 얌전히 충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지. 그런데 그 다음 산을 넘으니까 당장 돈 내놓으라고 칼을 들이대는 놈이 있더군. 이름이 레쉬했던가, 렝상이했던가? 뭐, 달아난 들개 떼들이 무리 지어 사람을 습격해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도는 판국에 연속해서 도적 두 번 만난게 이상할 것도 없지. 어했든 이번에는 오합지졸들이었고, 두 놈의 손가락을 베어버리니까 달아나더군 "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얘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울렁거리는 카셀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당신은 왜 암브루에 오셨습니까?" "자네의 얘기에도 등장하는 놈들 때문이지. 검은 기사를 쫓아서 왔다네." 카셀은 순간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마을에는 오직 에노아 후작의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의 주검만 있었다. 마을을 습격했을 어떤 군대의 시체나 다른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정예 군대라도 원군을 준비하는 중인 마을을 공격하여 사상자가 없을 수 있을까? 카셀은 두 백작 중 어느 한 쪽이라고 미루어 짐작했으나, 증거가 없어 확신하지 못 했다. 그러나 아무 흔적이 없다는 것 때문에 카셀은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미 해답은 루밀이 말해주기 전에 알았다. "나는 몇 해 전부터 검은 기사의 흔적을 찾아 대륙을 떠돌아 다니고 있었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그들의 갑옷이 과거 익셀런 기사단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 정도야. 하지만 직접 만난 사람들은 누구도 익셀런 기사단이라는 걸 떠올리지 못 하지. 난 이게 론타몬의 기사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나라를 직접 찾아가 물어봤지만, 자기들은 그 일과 관계 없다고 극구 부인하더군. 십 년전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익셀런의 기사가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부수고, 나그네나 상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걸세. 적이었으나, 기사도 하나는 철저한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러던 중 일 년 전,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이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접전을 벌였다는 소문이 있어 찾아가 봤네. 외부에는 비밀이었으나, 나는 나름대로 정확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그린리히라고 아는 친구도 있었거든. 물어보니 그것들은 이로피스, 카모르트 뿐 아니라 가넬로크에서도 간혹 나타난다고 하더군. 그 싸움으로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의 피해가 보통이 아니었다지. 하지만 결국 자세한 정체는 끝내 밝혀내지 못 했다더군. 죽이고 나니까 갑옷이 모두 계가 되어 사라져버렸다나?“ 카셀은 베어도 부서지지 않은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그럼 당신은 검은 기사들을 쫓아 여기로 왔습니까?' "열흘인가 보름쯤 전이었지 아마? 흔적을 물아 카모르트까지 왔다가 세 기좀 되는 검은 기사가 북쪽으로 이동하는 걸 발견했네. 나는 즉시 추적을 시작했으나 내 말로는 그 괴물 같은 말을 쫓아갈 수 없었지. 하지만 방향만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여기로 향하는 걸 대강 짐작했다네." "아마 그 매라면 에노아 후작이 왕실 파티를 끝내고 가는 시기였을 겁니다." "와보니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더군.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으나, 그 일에 대해 제대로 대답해 준 건 한 농부뿐이었어. 그는 아주 간단히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네. 그들은 서족 석양의 어둠을 들고 달려온 죽음의 사신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맞고서도 죽지 않았겠는가....... 나도 젊은 시절 검 꽤나 썼지만, 절대 그런 놈들과는 만나고 싶지 않아." 루밀이 말을 끝낸 후 잠시 대화가 멈추었다. 카셀은 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 괴로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도 꺼내지 못했다. "우리 둘 다 원하는 것을 여기에서 얻지 못했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루밀?" 카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힌트라도 얻으려고 물었다 "우선 에노아 후작을 찾아볼 생각일세.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이기도 하니, 검은 기사의 문제와는 별도로 걱정이 되는군. 자네는?" "원군으로 와줄 만한 군대가 이미 당해버렸다면, 전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서둘러 노르만트로 돌아가야죠. 헛걸음을 한 것 같군요." 카셀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밀은 가만히 그의 행동을 지켜보더니 칼을 꺼내 그의 목에 들이댔다. "자, 여기까지 얘기를 들었으니 이제 자네를 베도록 하겠네. 혹시 마지막으로 할 말이라도 있나?" 칼을 꺼내 목에 대는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카셀은 그걸 뻔히 보면서도 피할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아까 옆구리에 칼을 댈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는 칼을 꺼낼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게랄드가 검사의 최고를 묘사할 때 그런 표현을 썼었다. "무슨 짓입니까?" 겨우 입술을 떼고 할 수 있는 말도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갑자기 노르만트를 떠나 암브루에 도달할 때까지 한숨도 못 잤다는 게 생각났다. 그리고 이 정체도 불확실한 남자를 상대로 뭘 떠들었는지 이제야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정말 과거의 울프 기사단이었다고 믿어줬나? 나도 거짓말이 상당히 늘었군. 여기 저기 사기 쳐 먹고 다니던 보람이 있어." "하, 하지만 당신은 울프 기사단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자네는 얼마나 아나? 그럼 지금부터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 흉내를 내볼까? 그런다고 해서 자네가 그걸 눈치챌까? 어림 없는 소리. 난 검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자네가 스스로 검술에 재능이 없다고 내게 말해줬으니 나야 편하게 칼을 겨눌 수 있게 되었지." 루밀은 칼날로 카셀의 목을 툭툭 두들기며 한심하다는 양 말을 이었다. "여보게, 카셀이라는 친구. 지금까지 내게 했던 얘기가 정말이라면 말일세. 거짓말로 여기까지 버텨 하얀 늑대들의 임시 캡틴을 해먹을 정도라면, 왜 내게는 사실대로 말해버린 건가? 너무 속이기 쉬워도 의심스러운 법일세, 진작 자네를 베어버릴 수 있었건만, 너무 순진하니 이거 벨 수가 있어야 말이지." 카셀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가 하는 말은 아플 정도로 제대로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한 순간 하얀 늑대들, 특히 쉐이든에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에 침울한 나머지 카셀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캡틴의 위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칼날이 목에 들어온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잃었더라도 여전히 한 가지만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카셀은 잃어버린 권력을 아쉬워하는 늙은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목숨이 아까운 나머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젊은이에 불과했다. "그럼 날 베서 얻는 게 뭐요?" 카셀은 하나씩 상황을 정리해 가며 말했다. "그 칼 아란티아의 보검이라면 영지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은 벌어들일 수 있지." "그럼 이 칼을 얻기 위해 날 죽이겠다는 거요'f' 루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셀은 하나씩 지금까지 그와 했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두두 가지 가정을 해 보자. 이 사람은 대단한 수준의 검사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별 거 아닌 검술의 소유자라고 했다. 이건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정말 보검을 훔칠 생각이면 지금 날 죽여도 된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날 죽일 생각이 없다.' "자네가 하얀 늑대들의 칼을 가지고 있다는 게 확실해줬으니까 말일세." 카셀은 루밀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짜 웃음이었으나, 카셀은 상대에게 기분 좋게 터트린 웃음으로 들리길 원했다. "이보세요, 루밀. 좋아요. 당신의 의도는 아주 훌륭했고, 당신은 제게 아주 즐거운 가르침을 내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란티아의 보검으로 영지를 산다는 부분은 조금 억지였습니다. 당신의 거짓말은 아직 더 손 볼 곳이 필요하군요." 루밀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카셀. 자넨 내가 장난하는 것을 보이나?" “맞습니다. 장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장난의 의도가 뭔지도 알고 있습니다." 카셀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긴장돼 꽉 쥐고 있는 손은 보이지 않게 등 뒤로 숨겨두었다. “당신에게 성스러움으로 기억 되어있을 보검의 현재 소유주가 못 미더우셨겠지요. 당신은 제가 잊고 있었던 걸 가르쳐 주셨어요. 고맙습니다, 루밀." 루밀은 좀 어이가 없다는 듯 칼을 접었다. "그런 말은 내가 칼을 집어넣은 후에 하는 거라네." "어차피 안 벨 게 보이는데, 이래저래 매 한가지 아닙니까? 어쨌든 죄송합니다.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힘도 없는 캡틴이 자신의 정체를 떠벌린다는 건 안될 말이죠. 사실 너무 힘들어서 아무에게나 이 일을 떠들어 버리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지켜온 비밀을 털어놓은 첫 번째가 당신이었다는 게 다행이군요." 루밀은 허리에 손을 엄고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이 저택을 배회하는 젊은이가 보이길래 뭔가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어서 왔지. 왔더니 아란티아의 보검을 차고 있질 않았겠나? 해서 괜히 나서 봤네." 루밀은 카셀의 등을 툭 치며 위로했다. "내가 자네보다 긴 인생을 살면서 얻은 교훈이 뭔지 아나? 죽음으로 자신을 지킬 수는 있어도 죽음으로 친구를 지키기는 힘들다는 걸세 쉽게 인생을 포기하지 말게나. 그건 자네를 믿고 있을 친구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짓이야." 그는 그제야 처음 카셀을 만났을 때처럼 웃었다. 그제야 안심하고, 카셀은 여유 있는 척 하던 연기를 벗었다.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말해 저는 이 칼을 왜 제가 발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칼이 눈에 들어왔을 때 모른 척 했다면 전 아무 일도 겪지 않았을까요?" 루밀은 내려놓은 짐을 어깨에 매고 대답했다. "자네가 칼을 찾아? 아니야. 칼이 자네를 찾았을 걸세." "예? 무슨 뜻인지 잘‥‥‥‥ "자네가 내게 해준 얘기대로라면, 제일 먼저 그 칼을 발견한 사람은 패잔병들의 마을에 있던 그 이름 모를 부랑자일세. 그런데 그자는 그걸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자네는 그걸로 지금 캡틴이라는 이름을 가겼네. 같은 물건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도구로 쓰이지 않지. 그걸 명심하게." 루밀은 짐을 챙켜 저택 바깥으로 통하는 문으로 걸어갔다 카셀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루밀, 그보다 노르만트에 와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많은 힘이 될 겁니다. " "은퇴한 기사는 데려다 뭣에 쓰려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신이야 말로 당신의 힘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검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당신의 검술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습니다. 루밀, 부탁입니다. " "캡틴 카셀, 너무 그렇게 부탁만 하지 말게. 아무리 은퇴했다고 해도 캡틴의 명령이라면 따라야 하는 게 늑대의 이름을 받은 자들의 숙명이야. 그 명령은 받아들이겠네. 하지만 그 전에 에노아 후작을 찾아내는 게 내겐 더 급해. 현패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현역들이 해결해야지, 가급적 발리 노르만트를 찾아가겠지만, 내 힘을 너무 기대하지는 말게." 루밀은 말에 올랐고, 카셀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습니까?“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오지 않을 도움을 기다리는 건 캡틴이 할 짓이 아니야." 그가 모는 말은 느긋하게 밀밭을 가로질러 천천히 멀어져 갔다. 성을 나선 후 하늘은 금방 비가 올 듯 먹구름이 몰려왔다. 하지만 카셀이 암브루를 떠나 산을 넘을 때도 비는 오지 않았다. 차라리 쏟아지면 좋으련만, 뭘 그러 크게 준비하는지 우르릉 천둥 소리만 들렸다.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카셀은 빈 손이었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조차 막막했다. 아즈윈도 그를 격려했고, 메이루밀도 그를 격려했으나 실질적으로 나아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틀 전 던멜과 헤어질 때, 그는 카셀에게 자신의 단검을 내주었었다. 둘은 길지 않은 얘기를 수화로 주고 받았다. '아란터아의 르고라는 대장장이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단검이야 받아라.' 카셀은 즉시 거절했다. '그런 귀한 걸 받을 수는 없어, 그리고 그건 네가 써야지.' 던멜은 어깨에 매고 있는 가늘고 긴 활대를 툭 쳤다. '내겐 이게 있다. 그리고 주는 게 아니야. 빌려주는 거다. ' 던멜은 강제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만약 정말 위급한 상황이고 네가 어찌해볼 겨를도 없는 적이 나타난다면 그 단검을 거꾸로 쥐고 손목 족에 칼날을 감춰두어라.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적의 목덜미를 찔러. 힘이 된다면, 찌른 채 당겨라. 그 단검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사람을 죽여보거나 심지어 피 터지게 주먹질을 해 본 적도 없는 카셀은 절대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던멜은 그 이상 카셀의 입 모양이나 수화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카셀은 그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고마워.' '카셀, 나는 처음에 네가 캡틴이 되었을 때 진심으로 널 인정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었지 그저 모두의 의견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내 의견을 표현하지 않은 거 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바꿨다.' '그런다고 내가 캡틴은 아니지. 쉐이든의 말이 옳다.' '캡틴이든 아니든 딘 나의 친구다.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준 소중한 친구다.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살아 돌아와.' 카셀은 자신의 입 모양을 보려고 눈동자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그의 얼굴에 대고 자신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지금 카셀은 허리에 숨겨둔 단검을 더듬어 위치를 확인했다. 졸린 나머지 멍한 정신으로 말을 몰아 산을 올라가고 있는데, 뭔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수군거리는 말소리는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카셀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그들 중 하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얼굴에 검댕을 묻힌 그도 화들짝 놀랐고, 카셀도 놀랐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소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적들이었다. 카셀은 '이랴,' 하고 외치며 힘껏 말을 달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으나, 모조리 옆으로 빗나갔다. 상대가 형편없는 활 솜씨를 가졌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몸을 잔뜩 숙인 채 계속 말을 독려했다. 또 한 차례 표적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 한 화살들이 주위를 지나갔고, 말이 크게 꿈틀했다 돌아보니 엉덩이에 화실이 하나 박혀 있었다. 말도 겁에 질렸는지 아픈 것도 모르고 계속 달렸다. 그러나 속도가 점점 처졌고, 마침내 말은 걸음을 멈추더니 무거운 엉덩이를 바닥에 깔아버렸다. 카셀은 얼른 말에서 내려 화살이 박힌 엉덩이를 살폈다. 피가 뒷발을 타고 흘러 말발굽까지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미안해. 곧 돌아와서 구해줄게." 카셀은 말을 버린 채 숲 속으로 달렸다. 그러나 산 속에서 산적들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은 어느 새 가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카셀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멈췄다. 막아선 도적이 말했다. "죽을래, 아니면 가진 걸 다 내놓을래?" 카셀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미 네 명의 도적들이 활을 카셀에게 겨냥하고 있었고, 다른 세 명은 뒤를 따라와 칼등을 손바닥에 탁탁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카셀처럼 숨을 헥헥 대면서도 아닌 척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두목이 누구요?" 카셀은 얼른 물었다. 살아날 수만 있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주더라도 괜찮았다. 보검은 언제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외에 가지고 있는 금화 네댓 개는 목숨 값이라고 할 만한 양도 못되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나머지 모두 내줘 버리면 필요가 없어진 그를 도적들이 얌전히 보내줄 리는 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두목?" 사실 카셀은 도망치는 내내, 잡혔을 경우를 상정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말하는 꼬락서니들이 예전 유랑 시인 라우레를 죽였던 도적들과 다를 게 없는 놈들이었고, 그런 류의 놈들에게 잘 계산된 전략은 되려 통하지 않을 것이다. 카셀은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사 로 잡을지 알고 있었다. 계산을 시작했다. 루밀을 만났던 게 무척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해 왔고, 바로 그런 게 필요한 순간이었다. 계산이 끝나고 카셀은 두 손을 펼쳐 들었다. "두목이 누군지 알고 싶소." "나다. 왜?“ 길을 막은 그 남자는 키가 굉장히 크고 하나씩 톡톡 처서 부러뜨려보고 싶은 갈비뼈를 드러낼 정도로 메말랐다. 들고 있는 칼은 꽤나 길고 켰고, 칼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루밀이 손가락을 벤 놈들이 누구인지 알만 했다. 카셀은 속으로 지금부터 할 말을 빠르게 연습해보았다. '난 암브루의 에노아 후작을 상대로 거래하는 중계 상인이오. 날 살려준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소. 내게 편지 한 장을 써줄 여유와 하루의 시간을 주시오. 그럼 당신이 당장 이 짓을 그만둘 수 있을 만한 돈을 줄 수 있소. 물론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시가로 금화 이백 냥짜리 보검도! 암브루를 통째로 살 수 있는 내가 고작 당신에게 푼돈을 뜯긴 다음에 죽어야겠소? 난 상인 짓을 하면서 혼자서 도적들을 수없이 만나 보았소. 솔직히 말하지. 지금까지 날 산채로 잡은 도적들은 모두 부자가 되어 있소. 목숨 값이었으니, 복수할 생각도 없소. 쉽게 말해, 당신은 행운의 여신을 만난 거요. 그러니 활을 잠시 거두고 거래를 시작해 봅시다....... 이 정도가 좋겠지? 이 녀석들 머리로 미처 진의 여부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빨리 말해버리자.' 카셀은 그 말을 하는 사이 상대가 맥을 끊을 경우에 대해서도 두 가지 정도 다를 대응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런 준비를 쓸 틈도 없이 또 한 무리의 궁수들이 도적들의 얼굴에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카셀은 물론이고, 카셀의 말을 들어보려던 도적들의 두목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조용한 기습이었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카셀을 노리던 도적들은 일제히 활과 칼을 버리고 두 손을 들었으나, 정체 불명의 궁수들은 다른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활을 겨냥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통안 죽음만큼이나 무거운 침묵이 숲 속을 채웠다. "이름이 뭔가?" 궁수들의 대장이라고 생각되는 남자가 다가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어조로 도적들의 두목에게 물었다. "레, 렝상이오." 렝상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찰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렝상의 앞으로 다가간 그 남자는 뒷덜미를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암브루의 군주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틀을 타 도적질을 하는 무리가 있다는 소문을 이틀 전에 들었는데, 그게 자네였나, 렝상?" “다, 당신의 구역인 줄 몰랐소. 목숨만 살려주시면.......” "구역? 재밌는 말을 하는군. 누가 그런 걸 정했지?" 궁수들의 대장은 서두르는 감 없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잠시 잡아둔 저 손님에게 해를 끼쳤다면, 목숨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 일 벌이기 전에 찾아왔군. 보상하는 뜻에서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지만 암브루에서 다시 한 번 네 얼굴을 보면 그 때는 어떤 이유도 따지지 않을 것이고, 어떤 보상도 없을 거다. 가거라." 렝상은 떨어뜨린 칼을 주울 생각도 못 하고 허둥지둥 부하들과 함께 그 자리를 했다. 정체 불명의 궁수들도 그제야 활시위를 늦추었다. 그들의 대장은 놀라 서 있는 카셀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실종된 암브루의 군주를 찾아 헤매다 만나게 된 사람이 당신이라니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군, 캡틴 울프."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는 웃어 보였다. 그 남자와 에노아 후작이 친구 사이라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실 기사단의 캡틴쯤 되면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에노아 후작과 어떤 식으로든 알고 지내지 않았을까? 서로 친근하게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에노아 후작 저택의 무덤을 만든 쟌의 친구란 사람이, 과거 왕실 기사단의 캡틴인 휴스펠 데이릭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카셀은 내민 손을 잡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를 덥석 끌어안아버렸다. 그 남자는 무척 놀랐으나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웃으며 카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저야 말로 당신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데이릭. 아니, 팔콘." 팔콘은 포옹을 풀고 그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이런 곳에 서서 짧은 인사만 주고 받을 순간이 아닌 것 같군. 잠시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 가지 않겠소? 제이니가 당신을 보면 무척 좋아할 거요." 31.레앙 레앙 안으로 덴모주에서 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바딩과 그의 군대가 들어온 시각은 저녁 무렵이었다. 최근 며칠 동안 붉은 장미 백작의 공격에 시달려온 레앙 사람들은 말해주지 않아도 그 공격이 멈춘 게 바딩의 성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딩의 귀환을 환호했다. 그러나 바딩은 검은 사자 백작의 저택에 돌아올 때까지 굳은 얼굴을 유지했다. 그를 반겨주는 것은 검은 사자 백작의 세 아들 중 둘째인 쟈크였다. “항상 웃는 바딩은 어디 가고, 아버지만큼이나 딱딱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나?” 검은 사자 백작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리제니가 막내고, 첫째는 변두리 영지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걸 좋아해 이곳에 없었다. 어찌면 쟈크가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목되기 위해 쫓아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바딩은 쟈크를 보고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백작님은 어디 계시고?" “바딩, 지난 번에 내가 자델 따르는 여자 하나 내 방에 재웠다고 아직도 화가 나 있나7 그만 해 두게. 이제 난 그 여자 이름도 몰라. 게다가 금화도 몇 재 쥐어서 돌려보내줬으니 무슨 문제가 있는가? 고작해야 가난한 상인의 딸인데.......” 바딩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자, 쟈크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버님은 방에 계시네. 막내가 죽은 이후 그 녀석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방에 박혀있는 일이 많으시지. 심지어 레앙이 공격 당할 때도 거기에 계시더군. 처음에는 섭섭하게만 생각했다가, 이제 그 녀석이 징징 짜는 걸 다시 보고 싶기라도 하신 모양이야. 그보다 바딩, 역시 자네의 전술에 또 한 번 탄복했네. 설마 레앙이 공격 당하고 있는 와중에 역으로 린모주를 쳐서 그 공격을 빼다니...... 적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일 거야. 어떻게 그리 빠른 대처를 할 수 있었나? 그 기막힌 전술을 나도 배우고 싶군." "나는 드마르프 평원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할 거라 생각했고, 본대를 무너뜨린 후 즉시 덴모주까지 점령해버리면 전쟁을 단 시간내에 끝낼 수 있었소. 계산 밖으로 그 전투에서 졌기 때문에 고작 역습이라는 초라한 단어를 붙이게 된 거지, 대단한 게 아니오." 쟈크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한 잘난 미소를 보고 싶지 않아 바딩은 미리 불러둔 시녀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려 뽑은 아이들이냐?" "예, 모두 레이디의 시중을 들어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입니다." "붉은 장미 백작의 따님이시다. 너희들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공손하게 모시도록 해라." 시녀들은 숙일 만큼 숙인 고개를 더욱 깊이 숙여 인사한 후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마차에서 걸어 나온 라틸다는 허름한 옷차림에 험한 마차 여행으로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도도함은 변함이 없었고, 걸음걸이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시녀들에게도 권위 있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내가 걷겠다. 너희들은 내가 묵을 방을 안내하기만 해라 " 그녀를 부축하려 했던 시녀들은 그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에 놀라 물러섰다. 그녀가 도망치지 못 하도록 마차 옆을 둘러싸고 있던 경비들 조차 그녀가 지나가는 길목 앞에 서지 못 했다. "맙소사, 리제니가 죽고 못 살았던 이유가 있었군. 꾸미지도 않은 여인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이냐?“ 쟈크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쟈크는 레앙에 사는 처녀들은 물론이고 멀리서 초대되어온 귀족 여인의 몸을 빼앗는 일까지 있는 남자였다. 그 뒷수습에 검은 사자 백작이 수없이 골머리를 않는 것을 보아온 터라, 바딩은 쟈크의 눅눅한 시선에 대해 미리 경고했다. "귀한 손님이오." "인질일 뿐이잖아. 어느 방에 묵지? 손님 방인가?" 쟈크는 벌써 뭔가를 계산하며 별관으로 사라지는 라틸다를 주시했다. 바딩은 가만히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병사들과 시녀들이 물러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느닷없이 쟈크의 멱살을 잡았다. 고생이라고는 한 적이 없는 쟈크의 얼굴은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바딩은 그의 얼굴에 칼집을 두어 군데 내주고 싶었다. "잘 들으시오, 쟈크 덴 뤼미에르 남작. 만약 라별다의 몸에 손가락이라도 하나 까닥하면 나는 기사의 명예를 걸고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소." 쟈크는 그의 불타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순간적으로 겁에 질렸다. 하지만 이내 그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자신을 죽일 수는 없을 거라는 현실적인 계산을 끝낸 후에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바딩 역시 죽이지도 못할 상대에게 화를 내 봤자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멱살을 놓았다. 쟈크는 목을 쓰다듬었다. "아버지께서 자네를 너무 추켜세워주신 것 같군, 바딩. 자네는 여길 스스로 찾아왔으며 스스로 충성을 맹세했다는 걸 잊지 말게. 그리고 아직도 자네가 샤이필드 공작을 암살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 나도 나름대로 조사하는 중이니 조심하게." "원한다면 언제든 백작님께 건의 드려 나를 해고하시오. 사람들이 그렇게도 추켜세워주던 바딩을 몰아낸 위대한 남작이라고 길이 기억될 거요." 바딩은 한 마디 해 주고 돌아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말에 쟈크가 뭔가 깨달았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쟈크는 검은 사자 백작의 후계자라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대단히 똑똑했으나, 상황을 언제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 또한 은혜를 잊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두려움을 잊는 자이기도 했다. 검은 사자 백작은 그가 즐겨 찾는 방의 편안한 의자에 푹 파묻혀 앉아 있었다. 취하도록 마시는 일 없는 그의 얼굴이 취기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돌아왔나, 바딩? 라틸다를 잡아 왔다고?" 백작은 식사 했냐는 정도의 어조로 물었다. "별채에 모셨습니다. " “잘 대해 주게. 아비를 잘못 만나 고생이 많아, 그 애도. 리제니 만큼이나 불쌍한 아이지," 검은 사자 백작은 마지막 와인을 잔에 따른 후, 팔짱을 낀 채로 리제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쟈크가 말한 것처럼 특별히 어떤 감정을 담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측 피해는?“ "스무 명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많군." “상대는 오십 명 정도 죽었습니다. 지키고 있는 성을 빼앗은 상황을 생각하면 많은 희생자는 아니지요." "자네의 그 정예 기사단은7" 약간 비꼬는 투로 말한 것 같아 바딩은 대답을 잠시 머뭇거렸다. "네 명이 죽었습니다. " “실력에 자신 있어 하디니, 그 쪽에 쏜즈 기사단이라도 있었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라틸다의 경호 기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자에게 모두 당했나 보군. 누구였나?" 바팅은 그가 전에 만났던 파티장의 마부였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어쨌든 그는 마부가 아니었다. “이름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겁니다." 이미 검은 사자 백작은 그 일에 흥미를 잃고 다른 질문을 했다. "쟌스레인이 이 일을 알고 대응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은가?" "제가 덴모주에 도착했을 무렵에 이미 레앙을 공격하던 주력 군대와 노르만트를 포위하고 있던 군대가 후퇴했다고 들었으니, 아마 대응은 굉장히 빠를 겁니다. 늦어도 일주일? 무모하게 달려든다면 사흘 정도 후에 레앙을 재침공하려 하겠지요. 그러나 그가 조금만 현명하다면 공격이 아닌 협상을 제안할 겁니다. 백작님께서는 붉은 장미 백작이 협상을 제안할 때 우위를 점하시는 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글쎄, 그가 정말 라틸다 하나 때문에 전쟁을 포기할 거라고 믿나?" "라틸다 때문에 시작한 전쟁입니다. 그녀만 구할 수 있다면 항복문서를 쓰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난 그가 자기 딸 때문에 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리제니의 파혼 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니듯.” 그렇게 알고 있던 바딩은 백작의 의미심장한 말에 놀라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닐세, 바딩 피곤할레니 쉬게. 역시 내게는 자네 밖에 없어.“ 칭찬으로 말했을 테지만 바딩에게는 그렇게 들리 지 않았다. 방을 나서며 그는 백작의 후회를 읽을 수 있었다. 백작은 유약한 막내를 싫어했다. 차라리 여자를 물건처럼 여기더라도 과감한 행동과 냉철한 판단이 서 있는 둘째가 후계자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째를 변방으로 내쫓는 쟈크의 행동을 묵과했다 어찌 보면 쟈크는 백작과 가장 짧은 꼴이 많은 남자였다. 유약한 리제니는 항상 쟈크와 비교 당했다. 리제니는 그런 콤플렉스 덕에 쟈크를 많이 따르고 그의 많은 면을 배우려 노력했으나, 정작 쟈크는 동생을 귀찮은데 억지로 기르는 애완 동물 정도로 취급했다. 백작 역시 리제니에게 큰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죽은 후에야 막내 아들이 후계자로 가장 적절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욱 상실감이 클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은 후회를 불렀고, 후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을 올리던 전쟁의 열의를 앗아갔다. 복수란 성취될 때 가장 허탈한 것이지만, 그는 복수에 조차 별 의욕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곤란합니다, 뤼미에르 백작. 그래선 나의 복수도 끝낼 수 없으니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음식 접시에 엎어지려는 걸 겨우 참은 후 어떻게 씻었는지도 모르고 침대에 누우니, 숨 두 번 내쉴 동안에 잠들어버렸다. 하지만 기사가 되기 전 용병 생활로 단련된 그의 몸은 아직도 비상시가 되면 저절로 일어나 칼을 취두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든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옷은 벗고 있으되 칼은 언제나 침대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 젊음이라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내게 쓰게. 그럼 나는 자네에게 기사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명예를 선사하도록 하지.' 겉으로 보기에 다 늙어가는 샤이필드 공작의 그 강렬한 몇 마디 말 때문에 바딩은 그의 밑에서 평생 봉사할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짐했다. 그의 기사도와 그의 성실함에 왕실 기사단의 누구도 바팅을 함부로 보지 못 했고, 나날이 높아지는 그의 명성은 마침내 카모르트 최고의 기사라는 호칭에까지 이르렀다. 바딩은 샤이필드 공작이 죽은 후, 즉시 검은 사자 백작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를 칭송하던 수많은 기사들이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라며, 그를 나무랐다. 검은 사자 백작은 바딩이 스스로 자기에게 온 것을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부와 권력을 선사했으니, 나중에는 그런 것들을 위해 바딩이 공작을 암살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물를 누구도 그의 면전에 대고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바딩은 만에 하나의 일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 라틸다의 옆방에 묵고 있었다. 잠결에 그녀의 비명을 들은 후에 즉시 달려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라틸다는 침대에 숨을 거철게 내쉬며 앉아 있었다. 하얀 잠옷에, 목덜미가 땀으로 젖어있는 그녀는 신비함을 과시하였고, 창문에서 내러쬐는 달빛에 비친 그녀의 툴은 머리카락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잠시나마 다른 생각을 한 자신을 증오하며 바딩은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하고 다가갔다. "괜찮으시오? 악몽이라도 꿨소?" “다가오지 말아요!" 라털다는 소리질렀다. 레이디의 말이라면 즉시 수용하는 기사도의 반사적인 버릇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의 목소리가 주는 위압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됐든 바딩은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비명 소리가 나서 달려와 본 거요. 악몽이라도 꾸셨소?" “당신조차 악몽만큼 끔찍하니 나가주셨으면 좋겠군요." 라틸다는 몸을 부들부들 별면서도 당차게 말했다. 바딩은 짧게 숨을 몰아 쉬었다 바딩이 레앙에 도착할 때까지 가겼던 우울함은 사실 라틸다가 그에게 가진 증오 때문이었다. “라틸다, 날 싫어하는 것 정도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내가 죽인 세 사람 매문에 더욱 날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셋?" 라틸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단추가 풀어져 가슴 선이 약간 드러났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옷깃을 여몄다. 바딩도 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당신의 시녀와 집사와 경호원을 말하는 거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시녀와 성에서 당신을 보호하려고 희생된 수십 명의 경비병들도 있고." “맞아요. 당신은 내 또 다른 아버지라고 할 만한 분을 죽였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친구를 죽였어요. 당신이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일어난 일이죠. 당신을 증오해요. 하지만 그 증오가 풀릴 때까지 당신 의도대로 되진 않아요." 억지로 사악하게 보이려고 꺾은 그녀의 붉은 눈썹마저도 예뻐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에 순간적이나마 가지고 있던 감상적인 생각을 모조리 버렸다. “그리고 왜 나의 경호 기사를 죽였다고 생각하시죠? 그를 죽였다고요? 그럼 그를 죽이기 위해 남겨두고 온 당신의 부하 기사 네 명이 돌아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실명하실 거죠?" “좋소. 수정하겠소. 두 명이었소, 됐소?" 바딩은 특 내뱉으며 라틸다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강한 척 애쓰지만 그녀도 어절 수 없는 여자였던지 덩치 큰 남자가 접근하자, 본능적으로 다리를 덮고 있던 양은 이불로 제일 먼저 가슴을 가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눈빛을 가리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 었다. 바딩은 의자를 끌어 당겨 침대 앞에 두고 앉았다. "그래서 당신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거요? 여길 오는 이틀 동안 계속 그 말을 했었지. 자신을 구해주러 올 사람이 있다고. 당신의 경호 기사가 살아남았다고 칩시다. 허면 그 사람이 일만의 군대가 들이닥쳤어도 무너지지 않았던 레앙의 경비를 들고 이백 명이 지키고 있는 이 저택에 잠입하여 당신을 데려갈 거라 생각하오? 내가 당신의 경호 기사였다면 여기까지 호송되어 오고 있는 도중을 노렸을 거요. 그래서 나도 그 때를 가장주의해서 지켰지. 하지만 공격해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심지어 접근하는 이토 없었소. 하나 묻겠소, 라틸다." 바딩은 더 이상 라틸다에게 레이디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당신의 경호원이었던 기사, 이름이......?” "로일." "로일. 전에 노르만트에 데리고 나타났던 로일은 내가 보기에 그다지 대단한 실력자는 아니었소. 하지만 그건 내 눈썰미가 생각보다 낮았던 탓일 테지. 어쩌면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 그 실력을 감출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고. 말해보시오, 라틸다. 로일이라는 사람은 누구요?" "그건 어떤 호기심에서 묻는 건가요?" "순수하게 기사로서 묻는 거요." “그럼 솔직하게 말씀해 드리죠. 난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가 그를 고용한 게 아니라, 그가 직접 내게 온 거에요." “그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구하러 오길 바라는 거요? 세상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는 듯 도도한 표정을 짓고서 어린 소녀도 꿈꾸지 않을 자신만의 기사를 생각하고 있는 거요? 라틸다, 난 지금 당신 때문에 몹시 화가 나 있소. 차라리 날 보고 한 눈에 반하는 골 빈 여자였다면...... 차라리 자신이 처한 상황에 겁을 집어 먹고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할 여자였다면, 내가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 거요." 라틸다는 그가 흥분하고 있는 이유를 몰라, 대꾸하지 못했다. 바딩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 일어났다 “미안하오. 기사도 아닌 자에게 기사로서의 기분을 이해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바딩은 씁쓸히 라틸다를 바라보며 그녀가 인질로 잡혀오며 보여준 이틀 간의 모습을 떠올했다. 마차에 탄 채 피곤하면서토 흐트러지지 않고 전쟁 나온 기사들이나 먹을 만한 더러운 식사를 서슴지 않고 받아 먹으며 체력을 유지했고, 온통 더러운 남자들 틈에 끼어있어 여자로서 괴로운 사항이 한둘이 아닐 텐데도 그녀는 불평 하나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 그녀의 높은 프라이드와 내면의 아름다움이 숨겨지는 게 차라리 가엾은 여인이여.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스스로 수호 기사가 되고팠을 테지만, 그는 고백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녀를 인질로 잡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내가 들어온 게 기분 나빴다면 문 밖에 경비라도 한 명 세워두던가, 시녀를 밤새 지키게 하겠소. 좋을 대로 하시오." "맘 먹고 들어온다면 누가 지키고 있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당신이 말한 대로 난 날 구해줄 기사님을 기다리는 나약한 여자일 뿐인데, 관두세요." 바딩은 그녀에게 자결하길 제안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그의 모든 말을 비뚤어지게 들었다. "좋소." 바딩은 짧게 대꾸하고 방을 나섰다. 그래도 그는 라틸다의 옆방에 머물렀다. 자다 일어나는 바람에, 몹시 피곤했음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창가에 않아 있기만 했다. 그 짧지 않은 시간동안 침착함을 되찾아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자꾸만 라틸다의 차가운 눈동자만 떠올랐다. 그리고 밤만 되면 떠오르는 샤이필드 공작의 죽기 직전의 눈빛이 그 눈동자와 엇갈려 보였다. 공작은 노환에 따른 병으로 죽었다고 외부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살 당했다. 훈련하느라 늦는 바딩보다 먼저 식사를 하던 공작은 바딩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의자에서 떨어졌다. 공작은 마지막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바딩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음식을 만든 주방장은 이미 달아났다. 그러나 암살에 쓰인 독약은 아주 독특했고, 그걸 구할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주방장을 잡았고, 그 주방장을 고용한 이를 잡았다. 엄청난 인력과 돈을 소비한 바딩의 수색을 거쳐 최종 의뢰인이 블랙 풋이라는 암살집단임을 알아낸 건 채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누가 블랙 풋을 의뢰한 것인지 추측해 내는 것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검은 사자 백작의 밑으로 들어왔다. 이제 복수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두 백작의 전쟁이 끝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선물을 그 의뢰인에게 안겨줄 생각이었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창문의 커튼을 내리려 했다. 마을 가까운 곳 하늘이 끓게 물들고 있었는데, 그 쪽이 동족이었다면 태양이 뜨고 있다고 착각할 뻔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바딩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점점 붉어지는 하늘의 바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바딩이 놀란 건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건 뭐야?“ 항상 웃지만 절대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 없는 바딩이 화재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고 비명처럼 내질렀다. 날개를 퍼덕이는 검은 물체가 그 불길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바딩이 나간 후 라틸다는 홀로 이불을 끌어안고 나직이 신음 하고 있었다. 그건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쥐어짜내는 고통의 소리였다. 어떻게 바딩에게 당당하게 소리지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의 앞에서 울지 않았을까? 마차에 잡혀 끌려오는 동안 그녀는 죽을 만큼 무서웠다. 그러나 참았다. 몸에 배어있는 귀족적인 당당함이 그녀를 지켜주는 유일한 방패였다. 비굴함을 보이지 말자 도도함이 사라지는 순간 방패는 사라진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주위를 둘러만 모든 적들이 그 부분을 들고 공격할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계속 그런 말을 되뇌며 자신을 추슬렀다. 그런 순간을 겪은 후 익숙한 저택이라는 공간에 들어서자, 그녀는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바딩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에 대한 증오도 거짓된 것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안나의 죽음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자신의 무능력함을 증오했다. 그녀는 잡혀 있는 게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웠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이후 아버지가 전쟁에서 패해 자신이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질 것도 두렵지 않았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현실에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그녀는 약하지 않았다. 또 그녀는 모든 것을 견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지금까지 괴롭혀왔던 악몽에는 맞설 수가 없었다. 불 타는 도시 한 가운데에 서서 검은 기사에게 쫓기고 어디선가 날아오는 하얀 빛 줄기에 가슴이 관통 당해 죽는 그 꿈이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 이제 그 꿈을 꿔도 그녀를 안아줄 안나도 없었고, 신비한 빛의 커다란 늑대도 나타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일이 없었다. 커다란 침대 한 구석에서 옹색하게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있던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몸을 떨었다 가끔은 미처 제어되지 못하고 터져 나온 작은 신음 소리에 본인도 놀라곤 했다. 그래서 정작 조용히 문을 열고 접근한 남자의 손길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그가 바딩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건드린 대가로 호되게 쏘아붙여줄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는 바딩이 아니었다. "누구시죠?" 그 남자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미소라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벽에 손을 짚은 채로 한참이나 쭈그리고 앉아있는 라틸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깨에 짚은 손을 들어 그녀의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친근하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 라틸다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피할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외롭게 혼자 우는 고운 장미를 어떻게 쓰다듬어야 가시에 다치지 않을까 오래 고민했지. 하지만 의외로 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군. 내 이름은 쟈크다. 검은 사자 백작의 아들이자 그 모든 권력을 이어받을 후계자다. 내 동생이 그대 때문에 아주 많은 가슴않이를 했지. 내가 그 고통을 이어 받아 그대를 위로해줄까 하는데, 어떤가?“ 라틸다는 울다가 웃는 꼴이 바보 같아 보일까봐 참았을 뿐, 그의 말에 그만 큰 소리로 웃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저렇게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되겠냐 마는, 그 표현을 저렇게 멋없게 하는 남자 또한 드물 것이다. "이름은 들어 잘 알고 있고, 여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역시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지요. 쟈크 덴 뤼미에르 남작. 허나 물러나십시오. 난 지금 대단히 울적하니 이대로 계속 구석에 주저앉아 혼자 궁상 떨게 내버려 두시죠. 그 닿기만 해도 소름 끼칠 손길은 거두시고." "아, 레이디 라틸다. 뭔가 커다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지금 그대를 편히 안아주거나 스스로 옷을 벗어줄 거라 기대하고 온 게 아니야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 온 거지." "무슨 제안?" 라틸다는 당장 그의 빰을 후려칠 준비를 하고 물었다. 느글느글하게 웃는 모습은 그가 싫어하는 류의 남자들을 모조리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끔찍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들은 것만으로 모욕적일 정도로 과격했다. "라틸다, 내게 하롯밤의 즐거움만 제공하시게. 난 원래 한 번 건드린 여자를 두 번은 잘 안 건드리니까 설사 싫더라도 조금만 참고, 또 내 생각인데 아마 그대는 오히려 두 번째를 기대하게 될 거야." 라틸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례의 도가 지나쳐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군요. 그게 어떻게 제안이라는 단어로 쓰일 만한 태토인지는 모르나, 거절하겠습니다." "오호, 그럴 수 있을까7" "제가 비명을 지르면 바딩은 달려오겠죠. 아까도 그랬으니까." "그래, 그렇게 해. 그럼 난 얌전히 물러날 지도 모르지. 그리고 넌 적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적의 손을 빌리는 거지. 그것 참 추하군. 아까도 비명을 한 번 지르던데....... 본의 아니게 바딩과 하는 대화를 들었지. 그레, 스스로 몰아낸 사람을 자기가 필요해졌다고 태도를 바꿔 도움을 청한다? 그럼 소리 질러봐. 있어도 나야 상관 없긴 하지만, 바딩은 뭔가 급한 일이 생겼는지 지금 갑옷을 챙겨 입고 뛰쳐나갔으니까 " 라ㅌ;ㄹ다는 겁 먹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라 자신 없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레이디로 대해주는 남자와 상대하는 방법만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막무가내인 남자에 대한 대처 방법은 몰랐다. “비명을 지르던 얌전히 당하던 결과는 같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반드시 저지르고 돌아갈 거니까. 그 다음은 알아서 해. 바딩에게 이르던, 아버지께 이르던. 아니 일만 대군도 던져버리고 항복할 쟌스데인 백작에게 이르던. 그러니 제안하지 내가 볼 일을 끝낼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난 너에게 상처 하나 내지 않고 돌아가마. 잠깐, 잠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저지르면 필연적으로 상처를 입히게 되는 몸인가, 혹시? 호오, 리제니가 아직? 그 녀석이라면 그럴 만 하지. 울보 녀석이 죽은 다음에 남겨 준 선물이 이 정도로 클 줄이야!" 참고 참은 마지막 순간에 흐르는 한 방울 눈물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자신이 무력할 수 있을까? 베네가 죽고, 리자가 죽고, 안나가 죽었을 때처럼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로일, 언제고 구해준다고 했던 때가 있었죠. 지금이 그 때에요. 왜 오지 않나요? 아버지는 항상 날 지켜주겠다면서 왜 지금 오시지 않나요?' 라틸다는 저도 모르게 닫혀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창문을 깨고 뛰어 들어와 구해주러 왔다라고 말해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쟈크는 그녀의 눈망울을 보고 비웃었다. "어딜 보나, 레이디? 그댈 구해줄 사람은 없어." 쟈크는 그녀의 목을 잡고 뒤로 밀었고, 뒤이어 우악스러운 손길 로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녀는 쟈크의 말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구해주러 달려와 줄 기사 같은 건 없었다. 바딩이 지적했듯 그런 남자를 꿈꾸는 건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하는 소녀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라틸다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힘을 주어 그녀를 제압하려던 쟈크는 의외로 그녀가 손과 다리에 힘을 주지도, 바둥거리지도 않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곧 쟈크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시도하기 시작했다. 입을 막았던 손으로 그녀의 크지 않은 가슴을 주물렀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군살 하나 붙어있지 않은 그녀의 허리 선을 쓰다듬던 손은 그녀의 허벅지와 종아리 위를 기어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그렇게 끔찍한 기분은 아니었다. 특별히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유지했다가 그 남자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온 건 아니 었으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첫 번째를 경험하고 싶은 건 아니 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지금 이 느낌을 정확히 기억하기 위해 그녀는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의 손이 닿아선 안될 부분에 닿자, 그녀는 전신을 관통하는 놀랄 만큼 지독한 불쾌감을 느꼈다. 순간 라틸다는 동굴 한 가운데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누군가그녀 앞에서 돼지를 죽여 심장을 꺼내 그 위에 단검을 박았다. 마치 자신의 가승에 칼을 꽂는 듯한 현실적인 고통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눈을 깜박거리자 방 안이었고, 추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훑어내는 쟈크가 다시 보였다. '뭐였지?' 그 기분 나쁜 느낌과 함께 뭔가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기억을 차단했다. 떠올려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대신 그녀는 어금니를 꽉 물고, 호흡이 가빠져 가는 쟈크를 노려보았다. 그가 바지를 내리고 다리를 강제로 벌리는 순간, 그녀는 쟈크의 턱을 잡았다.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긴 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하고 싶은 걸 해." 그의 입에서는 역겨운 고기 냄새가 났다. 리제니를 닮은 눈동자는 욕정에 젖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라틸다는 소곤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쾌락을 즐긴 후에는 패배감과 수치심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기대하겠지? 웃기지 마. 난 아무렇지도 않아. 대신 내 위에서 헐덕거릴 네 얼굴을 반드시 맥리 속에 담아 두겠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기억해라. 난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이자, 그의 후계자다." 라틸다는 그런 말로 남자의 성욕을 제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순간을 무마하려고 내뱉는 값어치 없는 협박이 아니었다. 그녀는 외부에서 올 어떤 도움도 기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혼자 하기로 했다. 지금 힘이 없다면 나중이 있다. 라틸다는 입술을 깨물고 누운 채로 쟈크를 노려보았다. 절대 눈을 감지 않으리라. 반드시 이 순간을 기억하리라. 쟈크는 그 독기서린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려단 일을 마무리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라틸다는 비명이 아니라 당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피하지 마라, 쟈크!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봐.“ 쟈크는 벌거벗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타더니 그녀의 얼굴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닥쳐." 라틸다는 오히려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음산할 정도로 그녀의 웃음 소리는 날카로웠다 "진작 그랬어야지 작은 상처로 끝나면 나도 싱겁지. 네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날 겁탈하고, 날 더렵혀. 넌 할 수 있다, 쟈크. 아니면 벌써 시들어 자신이 없어진건가?" “닥치라고 했지!" 쟈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시 한 번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충격에 잠깐 정신을 잃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고개를 되돌려 쟈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가 났으나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는 쟈크를 발견했다. 지금 밑에 깔려 있는 여인이 두려운 게 아니라 미래에 성장해 있을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통해 더욱 자신을 다잡았다. 이 전쟁은 아버지가 패할 것이다. 이 순간 인질이 된 그녀는 앞으로 몇 번이고 이런 일을 당할 지도 모른다. 쟈크는 오늘 실패하면 내일 또 올 것이고, 그래도 실패하면 오기로 다른 남자를 시컥서라도 그녀를 기어이 더럽히고 말 것이다. 그녀는 오직 살아남는 것만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등을 떠밀던 베네의 목소리를 떠올렀다. 미래에 붉은 장미의 호칭을 이어받을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 될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끓은 장미의 여백작, 라틸다 위그 쟌스데인. 라틸다는 또 한 번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곳을 들고 달려올 기사 따위는 없었다. 대신 를불에 비춰진 벌거벗은 둘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쟈크, 지금의 두 백작처럼 미래에 카모르트 왕국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할 후계자의 모습을 봐라, 우습지 않아? 저 꼴을봐. 얼마나 추한지." 라틸다는 깔깔대고 웃으며 창문을 가리켰다. 쟈크는 저도 모르게 그 쪽을 봤다가 벌떡 일어났다. 라틸다는 벗겨진 몸을 가릴 생각도 않고 상반신만 일으켰다. "여자와 몸으로 밖에 대화할 줄 모르는 녀석을 설득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 그 더러운 물건 좀 치워줬으면 좋겠군." 그 말까지 하지 않았어도 쟈크는 돌아갔을 것을 기어이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내 쟈크의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라틸다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오냐, 네가 원한다면 이것보다 더 한 굴욕을 주지. 넌 차라리 내게 얌전히 몸을 바쳤어야 해 아니, 앞으로 네가 먼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겠다. 년 오늘 밤을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 쟈크는 피가 흐르는 입을 움켜잡은 채 쓰러진 라틸다의 배를 또 한 번 걷어찼다. 그녀는 비명도 내지 못하고, 숨을 들이키며 몸을 동그랗게 감쌌다. 쟈크는 발로 그녀의 얼굴을 짓밟고 또 한 번 배를 걷어찼다.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피가 예쁜 그림이 그려진 벽지에 튀었다. 쟈크가 문을 세게 닫고 나간 후 라틸다는 터져 나오는 웃음과 고통 중 어느 것을 먼저 표현해야 할 지 몰라 한참 동안 숨을 참았다. 곧 그녀는 웃었다. 지쳐서 더 이상 웃을 수 없을 때까지 웃었다. 창문에는 아직도 촛불에 반사된 그녀가 누워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멈추었다. 입에서 흐른 검붉은 피가 침대를 적시고 있었다. 하긴 이 핏자국이 사실 다른 피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리 괴로운 고통이랄 수도 없었다. "그래, 안나. 난 꿈을 꾸지 않아. 현실을 바라보고 있어. 네 말이 모두 올아. 세상에 내가 원하는 남자 따위는 없어. 아니, 그런 걸 꿈꾸는 것부터가 남자에게 의지하려 했던 내 약한 부분일 거야. 그렇지? 그렇지, 안나?" 라틸다는 서글퍼 울었다. 웃을 때는 느끼지 못 했던 복부의 고통이 찾아왔다. 침대에 쓰러져 우는 그녀의 입 안에서 침 섞인 피가 흘러내렸다. 쟈크의 발에 채인 눈은 울면서 더욱 부어올라 이제 시야를 가릴 지경이었다. 얻어맞은 뺨이 쓰라려 더 이상 침대에 대고 있을 수 조차 없었다. 그 동안 참아온 피로가 채 풀리기도 전에 악몽을 꾸었고, 다시 잠을 자기도 전에 이런 일을 당해 피로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시 악몽에 빠질 바에야 이대로 고통 속에서 울고 있는 편이 나았다. 언제부터 악몽을 꿨지? 갑작스러운 의문은 아니었다. 안나와 라틸다는 막연하게 그것을 아버지께서 병에 걸렸을 때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로일이 뜬금없이 그걸 묻자, 라틸다는 새삼스럽게 그 시기를 다시 체크해 보았다. "아니, 병에 걸리셨을 때가 아니라, 나았을 때야. 그 매부터 악몽을 줬어, 로일이 나보다 먼저 눈치 채고 그걸 물은 거야.“ 그녀는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깜짝 놀랐다. 일은 지하실에 대해 말하다가, 그걸 알아낸 거야. 하지만, 나조차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지하실에 대해서 어떻게?“ '거짓말, 넌 들어가 본 적이 있어. 아버지도 들어가 본 적이 있다고 말했어.'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변명했다 '뭔가 잘못 아신 거야.' '현실의 아버지는 잘못 아셨다 치더라도 꿈 속에서 나온 아버지는?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했잖아. 마약을 해 본 적도 있어. 안나가 불면증에 좋을 거라며 가지고 왔지. 하지만 그게 처음이 아니었어. 그래서 그렇게 쉽게 중독이 된 거야. 아무리 즈쿨라가 약효가 세다지만 한 번 들이마신 걸로 바로 또 마시고 싶어지는 게 아닐거야' '맙소사. 무슨 소리야, 그게? 스스로도 모를 말을 지껄이지 말자. 꿈 속에 나온 아버지 말을 믿으라는 거야? '꿈에서 안나가 지하실로 내려간 것까지 봤잖아. 만나지도 않은 검은 기사를 꿈 속에서 미리 만나기도 했지. 나에게 있어 꿈을 무시하는 건 현실을 무시하는 것과 같아. 온 마을 사람들이 즈쿨라를 사용했어. 그런데 나만 쓰지 않았다고? 목숨을 버리면서 했던 리자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니? 난 덴모주의 모든 것에 무관심했어. 아니, 무관심하려 했어. 그건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야. 아버지가 지하실에서 얻은 게 단순히 즈쿨라 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 라틸다는 느닷없이 몰려오는 기억에 머리를 움켜잡았다. 잊어왔던 기억이었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모른다고 믿어왔고, 스스로를 완벽하게 속여왔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아버지는 병 때문에 즈쿨라를 썼다. 그리고 때론 그 즈쿨라를 직접 캐오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가곤 했다. 라틸다는 호기심 때문에 그를 몰래 뒤쫓아 지하실로 가본 적이 있었다. 베네를 따라간 게 처음이 아니라, 그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는 그대로 즈쿨라를 태운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버렸다. 성에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보다 더욱 깊이 내려가는 계단이 또 하나 있었고, 아버지가 갑자기 건강해지게 된 또 다른 이유가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라틸다는 즈쿨라에 취한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알았다. 안나가 왜 피투성이가 되어 지하실 계단을 올라왔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6년 전 그것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을 차단시켜 버렸다. 그녀는 보지 않은 것이라고 자신을 속였고, 그 대가는 악몽이었다. 그것은 묻어둔 기억의 무덤 틈에서 비어져 나온, 사실이라는 시체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라틸다는 흐느끼며 양손으로 어깨를 움켜쥐었다. 악몽은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꿈 속에서 느꼈던 그 극도의 공포를 바로 지금 맛보고 있었다. 안나가 옆에 있어줘도 이 순간의 그녀를 다독여줄 수는 없었다. 안나는 오직 악몽에서 깨어난 그녀만을 보듬어 줄 수 있었을 뿐, 악몽 속에 있는 그녀를 건져 올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침대의 가장 구석으로 밀려나 무릎을 감싸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숨을 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쟈크에게 겁탈 당한 채 허탈감에 빠져 자기를 불쌍히 여기며 멍청히 누워있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몰랐다. 차라리 바딩에게 매달려 옆에 있어달라고 부탁하여 자존심을 던져버린 게 나았을 지도 몰랐다. 그녀는 모두를 거부하고 혼자가 되었고, 이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멍청하게 스스로 떠올린 기억에 빠져 익사 당하고 있었다. 라틸다는 침대 위를 기어가다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고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엉금엉금 창가로 갔다. 그곳은 3층이었고, 머리부터 떨어지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높이였다. 라틸다는 계속 안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안해, 안나. 살아있겠다는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불어오며 커튼이 펄럭거렸다 그녀는 맨 살에 닿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그대로 달빛을 맞으며 멈춰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충동적인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 채 열린 창문을 뛰어내리지도 않았고, 생각을 바춰 침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삶을 버리려는 그 순간, 그녀는 도저히 현실이라고믿기 어려운 존재를 보았고, 그 존재도 느닷없이 열린 창문에 놀라며 경직된 채 좁은 베란다에 서 있었다. 라틸다는 괴로운 숨을 토하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가슴까지 늘어진 붉은 머리카락 만이 그녀의 발가벗겨진 몸을 감싸주었다. 창문 밖의 남자는 입고 있는 검은 로브를 벗어 몸을 감싸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라틸다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아직 현실감을 찾지 못했고,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가 발견하게 될 것은 멍청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닌 목뼈가 부러져 있는 시체였을 거라는 걸 말해주지도 못했다. 그저 손을 내밀어 그를 만져보고 눈 앞에 있는 그가 자신이 그토록 창문을 통해 들어와 주길 바라는 사람이f었다는 것만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바보 같이 책망하는 소리만 했다. "늦었어요, 로일." 하지만 그 책망이 기쁨의 극단적인 표현임을 잘 아는 로일은 그저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죄송합니다, 라틸다." 32.나이트메어 깨어나보니 짙은 어둠 속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눈이 어둠에 적응되기를 기다리며 잠들기 전까지 뭘 했는지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반가워하는 제이니가 포옹을 해주었던 것과 그를 반기는 팔콘의 부하들과 함께 식사를 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잠깐 쉰다며 의자에 암아 등걸에 머리를 기댄 것까지는 생각 났다. 막사의 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카셀은 멍한 정신으로 비틀거 리며 밖을 나섰다. 얼마나 잔 걸까? 팔콘의 부하들이 만들어놓은 커다란 막사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만들다 만 통나무 집들이 서 있었다 아마도 이 곳이 팔콘의 두 번째 마을인 모양이었다. 그 위대한 도적은 아직도 자신의 뜻을 펼쳐 나가고 있었다. 달빛이 밝아 어지간한 물건들의 형체는 보였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말이 묶여 있는 곳으로 갔다. 말들도 선 채 잠들 어 있었는데, 인기척이 나자 몇 마리는 눈을 떴다. 그 중 한 마리가 카셀을 알아보고 앞발로 땅을 갈았다. "화살 맞은 곳은 괜찮니?" 카셀은 말의 콧잔등을 긁어주었다. 아직 뒤뚱거리는 걸 보니 카셀을 태우고 달릴 정도는 못 되었다. "말 도둑인가 했소? 이른 새벽부터 여긴 어인 일이오, 캡틴 울프?“ 생소한 목소리가 기지개를 펴며 그를 맞았다. "뉘시오?' 카셀은 발발함을 느끼고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자고 있어 아직까지 내 소개를 못 했군 워터스 피오렌디노, 에노아 후작의 기사요." 그가 친근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카셀도 자기 소개를 하며 악수했다. "카셀 울프, 을프 기사단의 캡틴이오." 그 말을 하는 순간 카셀은 모래를 씹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결코 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는지 아시오?" "팔콘을 만나 잠든 시간이 저녁이었소." 저벽부터 새벽까지....... 그 말만 듣고서 카셀은 고작 예닐곱 시간 정도 잤다고 생각하고 안도했다. "그게 그저께였으니, 만 하루 하고 반나절을 갔군. 그렇게 자기도 힘든데, 대단하구려. 난 한 번에 하루 이상은 배고파서라도 못자거든." 워터스는 허허 웃었다. 카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 했소? 하루?" "뭐 잘못된 거 있소?" 카셀은 가슴이 철렁 내려맞는 것 같았다. 자느라 늦게 도착했다고 쉐이든에게 말해야 하는 끔찍한 상상에서 헤어나려고 카셀은 머리 위로 손을 휘휘 저었다. "가봐야겠소. 팔콘은 아직 자고 있소?“ “팔콘은 원래 새벽 잠이 없소. 그런데 가다니 어딜? 난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팔콘도 그렇고." "아, 그럼 작별 인사라도 해야겠소. 말도 한 마리 빌려야 하니, 팔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시오." 카셀은 그가 에노아 후작의 기사라는 사실도 잊고, 오직 시간이 없다는 초조한 심정에 그를 앞세워 팔콘에게 갔다. 팔콘은 자신의 막사에서 제이니가 내준 뜨거운 수프를 먹고 있었다. 둘은 카셀과 워터스가 안으로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팔콘은 수프를 옆으로 내려놓고 멋쩍게 웃었다. "혼자 먹다 들킨 것만큼 창피한 것도 드물지. 같이 드시겠소?" "난 아침 식사 시간이 항상 해가 뜬 다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소7" 워터스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제이니는 웃으며 대꾸했다. "피오렌디노 씨도 드실 음식을 가져오죠." "아, 워터스라고 좀 불러주시오. 항상 그 긴 이름 발음하기 귀찭지도 않소?“ "그런가요? 전 어감이 좋아 괜찭은 걸요." 제이니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였다. 왕실을 오고 갔던 몇몇 귀족 여인을 본 후에야, 카셀은 제이니만큼 귀족적인 여자도 없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막사 입구에 서 있는 카셀을 안으로 안내했다 “오래 주무시더군요. 죽은 게 아닌가 싶어 숨소리 체크까지 한거 아세요?" "중간에 깨워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너무 곤히 주무셔서 그러지도 못 했어요. 얼마나 몸을 혹사 시켰길래, 영혼을 잠시 서랍속에 넣어놓은 것 마냥 안 일어날 수 있나요? 앉아요. 식사를 내올 테니....... 오래 굶어 허기가 질 거에요" 그녀의 미소 앞에서 도저히 거절할수 없어 카셀은 탁자 옆에 앉았다. 그는 워터스와 팔콘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적단의 대장과 에노아 후작의 기사가 같은 자리에 있다니,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보군요."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 워터스 는 피식 웃었다. 팔콘이 수프를 한 수저 떠먹고 말했다. “그때 카셀 당신을 보낸 후 우린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야 했소. 무로 시작했던 마을인지라 다시 마을을 만드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 하지만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좀 더 안전하고 나은 생활을 제공하고 싶었소. 그래서 에노아 후작에게 힘을 빌릴까 하고 여길 찾아왔소. 하지만 우리가 왔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에게 공격당해 마을이 엉망이 되었으며, 에노아 후작은 실종되었다고 그러더군." 팔콘은 검은 수염에 묻은 수프 자국을 닦아냈다. 카셀은 저도 모르게 수염을 깎지 않은 턱을 더듬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도 할 겸, 머물렀다가 아예 여기에 정착하려고 마을을 짓고 있던 터였소. 그러다 워터스 피오렌디노라는, 되다만 기사 양반을 만나게 된 거지." 워터스가 팔콘의 말을 받았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난 당신과 당신의 부하들이 단순한 도적 떼라고 생각했소. 난 도적을 무척 싫어하거든. 얼마 전에는 늑대들을 몰고 다니는 도적들과 싸웠고, 그 다음에는 렝상이라는 놈을 만났고....... 여하튼 나는 팔콘의 부하들을 보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칼을 뽑았지." "물론 난 기사 피오렌디노를 잘 알고 있었지 내가 먼저 알아봤지만, 솔직히 그 자리에서 죽였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소." "허허, 누가 할 소릴? 당신이 캡틴 데이릭임을 알아보지 못 했다면 난 당신 부하들을 모조리 죽였을지도 모르오." "허풍 심한 건 여전하군." 둘은 껄껄대고 웃었다. 카셀이 심각하게 듣고만 있으니 무안해진 워터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나 역시 실종된 에노아 후작을 찾아 다니고 있었소." "찾지 못 했소?" 워터스는 조심스레 묻는 카셀의 얼굴을 보고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렇소. 당신도 에노아 후작을 찾아 여기 온 거요?" "원군을 요청하러 봤소. 후작께서는 열흘쯤 전 우리에게 원군을 약속하셨소. 하지만 원군은 오지 않았고, 직접 찾아오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요." 카셀의 말에 워터스는 입맛을 다셨다. "지금 두 백작의 전쟁 상황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소. 설마 붉은 장미 백작이 왕실을 직접 공격할 줄은 몰랐소."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상 진짜로 공격을 한 건 아니었소. 대신 검은 기사들이 공격했지." 워터스는 팔장을 끼며 즉시 검은 기사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나도 소문을 들었소. 그들이 노르만트를 직접 공격한 거요?“ "그렇소." "어떻게 막았소?" “노르만트에는 하얀 늑대들이 있소. 그런 괴물들이 쳐들어 온다고 쉽게 무너지지는 않소. 그러나 대규모 군대마저 막을 수는 없지." 팔콘은 먹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내가 가진 군대가 도움이 된다면 원군으로 내주고 싶을 정도군. 국왕페하께서 힘들어 하시겠어, 두 백작에 이어 검은 갑옷을 입은 괴물들이라니."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팔콘이 가진 군대로는 이 마을 하나 지키기에도 벅찼다. 카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남자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제이니가 방 두 조각과 두 그릇의 수프를 내왔다. 별로 입맛이 없었으나, 수프를 한 입 뜨니 금방 식욕이 살아나 그는 순식간에 합과 함께 한 그릇을 비워버렸다. "고기라도 구울까요?" 제이니는 동그랄게 뜬 눈으로 물었다 카셀은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냥 수프나 한 그릇 더 주십시오. 곧 떠나야 합니다." "떠나다니 어딜?" "노르만트로. 원군을 얻지 못 했으나, 제 자리는 지켜야 하니까요." 제이니는 무척 아쉬워했으나, 말 없이 카셀이 내민 수프 접시를 고 다시 막사 밖으로 나갔다. 팔콘은 턱을 쓰다듬다가 물었다. "혹시 붉은 장미 백작이 노르만트를 침략하지 않겠다며 내건 조건이 있소?" "샤이필드 공작의 죽은 후 비어있는 왕실의 수호 가문으로 자신을 임명해 주고, 검은 사자 백작을 왕실의 적으로 지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 "확실히 에노아 후작의 군대가 성에 머물러 있다면 감히 제안하지 못할 요구군." "후작의 군대라면 숫자상의 병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요. 헌데 팔콘은 어떻게 에노아 후작과 아시오? 혹시 저택에 있는 그의 가족들 무덤도?" “맞소. 기사로서 메오릭스를 동경하여 카모르트의 왕실 기사단에 들길 원했으나, 차라리 내가 별거 아닌 기사였다면 모르되, 익셀런의 기사였던 나를 받아줄 카모르트의 왕실이 아니었소." "하지만 왕실 기사단만큼은 국왕의 권한인 걸로 아는데?" "대신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 하지만 그 대신들도 결국 귀족들의 힘에 묶여있지 않소? 메오릭스도 적극 추천했으나, 그의 작은 힘으로는 무리였소. 그러나 결국 내가 기사단의 캡틴까지 역임하게 된 건 에노아 후작 덕분이었소. 우리는 서로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고, 지금까지 친구처럼 지내왔소. 기사단을 그만 둘 때도 그 사람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군." 적군의 기사를 받아들이는 귀족의 배려라는 따뜻한 이야기라면 향긋한 차 한 잔과 모닥불이 있는 곳에서 듣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은 카셀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러제니가 다시 수프를 한 그릇 가져왔다 카셀은 이것만 먹고 길을 떠나야겠다는 말을 하려다 갑자기 검은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익셀런과 똑 같은 갑옷을 입은 공포의 기사들. 카셀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팔콘, 과거 익셀런 기사였던 분께 여쭙고 싶은 게 있소." "도움이 되는 거라면 뭐든." "그들은 무엇을 위한 기사단이었소? 전쟁이었소?“ 옆에서 워터스는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팔콘의 옆에 암은 리제니도 당연한 걸 묻는 카셀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익셀런 기사단은 대륙을 단 일 년 사이에 휩쓸어 버린 전쟁 신의 군대와 같은 존재였다. 기사도나 익히려고 만든 론타몬 황실 기사단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리제니나 워터스와 달리 팔콘은 카셀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신중히 생각했다. 그 시간 동안 카셀은 재촉하지 않고 진득하니 기다렸다. "아니오." 그 대답에 워터스는 무척 놀랐고, 카셀은 예상했다는 듯 천천히 그의 얘기를 들었다. "흔히 아는 전쟁과 다른 의미에서 만들어진 게 익셀런 기사단이 오. 모두 우리가 인간과의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을 테지. 눈치 챈 이들이 있다면 딱 하나, 가넬로크의 드래곤 기사단일게요." "드래곤이군요." 카셀은 책에서 페이지가 닳도록 읽은 역사상 가장 최대 규모였던 두 기사단의 격돌을 떠올렸다. 이로피스의 왕실 기사단을 쥐었다고는 해도 드래곤이 수호해주는 가벨로크의 기사단 마저 익셀런이 이길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 했다. "그렇소, 우린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전투를 훈련 받았소. 즉, 익셀런 기사단의 존재 목적은 드래곤 사냥이었소." 덴모주에 있는 던멜은 로일이 부탁한 대로 안나라는 시녀의 시신을 지하실에 숨겨두고, 붉은 장미 백작의 성에 있는 탑에 올라가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싸움이 끝나길 기다리며 회관 지하에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해가 뜨자, 모두 나와 성 쪽으로 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성의 하민들 정도가 다였고, 경비들은 거의 대부분 시체로만 남아있었다. 그들은 성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끊었다. 단순히 병사들이 죽음이 슬픈 걸까, 아니면 영주의 성이 함락된 게 슬픈 걸까? 너무 멀어 입모앙을 읽을 수 없어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의 뒤쪽 숲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실 성보다 이 지하실이 안전한지 궁금해했다. 점심 때가 되자,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가 덴모주에 당도했다. 습격을 당한 시각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대처는 굉장히 빠른 것이었다. 본거지가 습격 당하는 와중에 반격을 시도한 검은 사자 백작 쪽이나, 습격 당한지 반나절 만에 영지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붉은 장미 백작 쪽이나 기동력은 어느 나라의 군대 못지 않았다. 만약 이 두 백작이 싸우지 않고 손을 잡는다면, 현재 약소국으로 취급되는 카모르트가 백 년 전 이름을 떨쳤던 강대국으로 거듭 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온 군대는 즉시 성을 정비하고 시체를 치웠다. 부서진 성문은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 나서서 고치기 시작했다. 인명 피해 외에 물질적 피해는 그게 제일 큰 것이었다. 근거지를 불태우는 게 아니라,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을 납치하는 게 목직이었다면 굳이 다른 것을 부술 이유도 없었겠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건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수확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밀밭을 모조리 태워버렸다면 붉은 장미 백작은 딸을 빼앗긴 것 이상으로 큰 타격을 받았을 텐데,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는 거기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협상의 여지를 남겨둔 거구나.' 던멜은 두 백작의 관계를 따져보았다 검은 사자 백작은 의외로 강한 끓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지금의 전력으로 이기지 못할 거라고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딸을 잡아 항복을 요구할 것이다. 밀밭을 태우지 않은 것은 복수심에 불탄 쟌스데인 백작이 앞뒤 가리지 않고 총공세로 나오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지, 단순한 기사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밀밭을 태울 각오로 쳐들어 온 것이라면, 백작의 딸도 죽였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할 만큼, 대단한 책략가가 검은 사자 백작에게 있으니, 장기전으로 가면 분명 붉은 장미 백작이 불리하다. 드마르프 평원의 전투도 로즈 기사단의 질적인 막강함으로 승리하긴 했으나, 전략은 검은 사자 군대 쪽이 위였다. 이제 그들도 로즈기사단의 힘을 알았으니, 슬슬 그것을 상회하는 작전을 구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는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싸움은 없을 것이다. 허나 로일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두 백작 간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던멜은 반드시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다시 밤이 되었다. 이후 끓은 장미 백작의 또 다른 지원군이 돌아왔으나, 그들은 약간의 휴식만 가지고 도로 떠났다. 그래도 성에는 이백 여 명의 병력이 남아 철저히 경비를 싫다. 깊은 밤이 되어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횃불을 들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던멜은 기척을 죽이고 자연스럽게 그 인파에 묻혀 조용히 따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주고 받는 말을 입 모양을 통해 보았다. 어둠 속이라 중간 중간에 알아볼 수 없는 말이 조금 있었다. “......장미 백작의 따님께서...... 됐다는군. 큰일이 아.......” "그보다 우리가 해...... 그게 문제가 된 거라면 아직......“ "몰라, 시체도 아직 발견 안...... 즈쿨라를 쓰겠다는 걸 말린 것뿐이잖아. 사실 안나를 그렇게 한 건...... 만약 이번 일이 우리가 임의로 올린 재물 때문이라면 그건 아주 큰 사건이야. 백작님께서도...... 않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둘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던델에게 그건 상관 없었다. 동굴에 들어선 후 던멜은 어둠 속에 완전히 몸을 숨기고, 일반인으로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발 소리만 내며 이동했다. 동굴 안에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널려 있는 방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 다가가 몸은 괜찮냐고 묻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했으나, 중독자들은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곧 그들은 그 방 안 족에 있는 다른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에는 핏줄이 툭 불거져 있는 커다란 심장을 칼로 꽃아놓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상징적인 그림을 단순화 시킨 작은 은 목걸이를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차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안으로 질서 있게 들어갔다. 던멜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문이 닫힐 무렵 미끄러지듯 쓸려 들어갔다. 아무도 그의 동행을 눈치 채지 못 했다. 안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라틸다는 로일을 끌어안은 채 울먹이며 말했다 “로일, 모든 것이 다 기억이 났어요. 지하실에 뭐가 있는지, 안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알겠어요. 그래서 죽으려고 했어요." 로일은 자제력을 잃고 흔들리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다...... 알고 있습니다, 라틸다." "다요?" 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평소와 다름 없는 미소가 약한 여자처럼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싹 씻어버렸다. 어찌 보면 그건 그녀를 외면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라틸다에게 레이디로서의 풍모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런데 옷은 왜?" “아무 일도 아니에요." 라틸다는 로일이 준 로브로 몸을 감싸고 다시 침대로 갔다. 시녀들이 내 준 여벌의 옷이 아직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며칠이나 묵으라고 옷을 네 벌이나 주느냐고 따지려 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나름대로의 배려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로브를 벗어버리고 옷을 입었다. 아직도 손이 후들후들 떨려 단추를 제대로 잠글 수가 없었다. 뒤에서 로일이 다가와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 그게 복수든 다른 문제들, 전 당신의 기사입니다.” 라털다는 옷을 다 입지도 않고 몸을 돌려 로일에게 물었다. “그럼 한 가지만 여줘볼게요. 로일, 당신은 누구죠?” 로일은 대답하길 망설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그러나 눈빛은 맑았고,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유혹하는 건 아니니 염려 말아요. 아니, 사실 그래도 상관 없어요. 난 지금까지 태어나 나 자신이 이렇게 혐오스러워 진 적은 처음이니까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겠죠. 하지만 로일, 내 말을 들어주세요. 내 심장 소리를 느껴봐요. 내 체온을 느껴봐요. 난 무서워요. 여자라는 존제가 이렇게 약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언제나 당당한 척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로일이 구해주길 기다렸어요. 내 믿음이 흔들렸고,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는 나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쓰러지고 싶은 모든 유혹을 이겨냈어요. 당신이 누구라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것이고 당신을 대함에 변함이 없을 거에요. 그러니 말해 주세요.“ 그녀의 가슴에 올라가 있는 손을 들어 로일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흘러내린 옷을 끌어올려 그녀의 몸을 가려주었다. "처음부터 속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불순한 목적이 없었다고도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지피겠다는 약속을 위해 당신 옆에 남아있었던 것 만큼은 거짓이 아닙니다. 라틸다 저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하얀 늑대입니다.“ 라틸다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미소 지었다. "안나가 말한대로 당신은 아주 유명한 기사단의 기사였군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이 날 속였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내게 주었으니까요.“ 그녀는 옷을 다 입었다. 네 벌 중 가장 편한 옷인데도 달리기에는 불편하여, 베네와 함께 지하실에 내려갈 때처럼 치마를 찢고 찢은 부분은 묶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제가 들어왔던 곳으로 가면 됩니다. 성 뒤쪽 하수도 밑이라 조금 더러울 거에요." "상관 없어요. 도망쳐 나가는 길목에 지옥이 있다 해도 관계 없어요." 라틸다는 겁 없이 창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삐끗하고 넘어졌다. 로일이 겨우 잡아주긴 했으나, 일어나는 데는 한참이나 걸렸다. "아직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군요." "걸을 수 없으면 차라리 조금 쉬었다가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창문을 나가면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니까." "아니에요. 긴장 때문에 이러는 거에요. 움직이기 시작하면 차라리 나을 거에요." 그녀가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일어날 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고함 소리, 개가 짓는 소리, 사람들의 발 소리....... 로일이 신중하게 창문 옆에 붙어 밖을 보니 분주하게 저택의 경비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굳이 그들의 목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뭣에 저렇게 놀라 새벽부터 바본지 금방 알았다. "불이 났군요." “로일이 저지른 건가요?" 바딩이 말했던 대로 로일이 이 성을 잠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시에 불을 지르고 그 혼란 틈에 들어온 사람이 로일이었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굳이 불을 지르지 않아도 잠입하는 데는 문제 없었습니다. 덕분에 빠져나가는 길이 어렵지는 않겠군요." 로일은 바깥에 사람이 없기를 기다렸다가 베란다로 몸을 내밀었다. 불 타는 도시는 소란스러웠으나, 저택 정원에는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로일은 즉시 라틸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 나무 타 본 적 있습니까?“ "어렸을 때만요." "지금도 그 감각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길 바래야겠군요. 제가 먼저 내려갈 테니 뒤따라 오세요. 혹시 떨어지더라도 반드시 받아줄 테니, 걱정 말고요." 로일은 라틸다의 손을 꽉 쥐었다가 먼저 베란다 옆으로 뻗어있는 나못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멀었으나 로일은 살짝 몸을 뻗어 그것을 잡아챈 다음 창문 안에서 펄럭이는 커튼을 끌어다가 서로 묶었다. 그것은 라틸다를 위한 배려였다. 로일 자신은 그 나뭇가지를 이용하지 않고 훨씬 더 밀러 떨어진 굵은 나무로 뛰어 거의 추락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밑으로 내려갔다. 라틸다가 눈 한 번 깜빡일 동안에 그는 나무 밑에 내려가 있었다. 그는 주위를 확인한 후 손짓했다. 라틸다는 호흡을 진정시킨 후 로일이 베란다 쪽으로 끌어당겨준 나뭇가지를 잡았다. 자신의 가는 팔로 얼마나 오래 몸을 버틸 수 있을 지 자신 없었으나 그녀는 떨어지더라도 로일이 받아준다는 말을 믿고 거기에 매달렸다. 그녀의 몸을 버티지 못한 가지가 밑으로 추욱 늘어졌다 라틸다는 밑을 내려다 보지 않고 다음 가지로 손을 뻗었다. 팔뚝은 금방 지쳤고, 곧 얼마 버터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순간 3층높이에서 떨어지면 아무리 로일이라도 받기 어렵다는 걸 인지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떨어진다 해도 로일에게 최소한의 부담을 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팔을 놀려 더 굵은 가지로 몸을 이동시켰고, 다음에는 더 낮은 곳에 있는 가지로, 그리고 마침내 나무를 발로 끌어안았다. 벗걱진 나무 껍질에 종아리가 긁히고 허벅지가 까졌다. 몸이 밑으로 걷잡을 수 없이 미끄러지며 옷과 함께 살갗이 찢겨졌다. "손을 놓아요." 로일이 밑에서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라틸다는 눈물이 날 만큼 고통스러워 이 곳의 높이가 얼마나 될지 계산도 하지 않고 로일의 말대로 손을 놓았다. 그녀의 몸은 뒤통수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일은 결코 낮지 않은 곳에서 떨어진 그녀를 받아내며 쓰러졌다. 둘은 풀밭에 여러 번 굴렀으나,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대신 나무를 끌어안는 동안 긁힌 자리에서 흐르는 피로 치마가 금방 젖었다. "좀 심각하군요." 로일은 그녀의 허벅지를 손수건으로 감싸주었으나, 오래 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걸을 수 없으면 말해요." "길을 수 있어요." 라틸다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라렸으나 못 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다. 로일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낮춘 채 빠르게 뛰었다. 로일은 담장 족에 붙었다가 라틸다가 뛰어 넘기에는 조금 무리라 생각하고 계속 벽에 붙어 달렸다. 소문에 듣자니 이 담장에는 원래 화려한 장미가 자라고 있었는데, 끓은 장미 백작과 전쟁을 시 작하면서 모조리 태워버렸다고 했다. "어떻게 여길 빠져나가죠?" "들어을 때는 담을 타 넘었는데, 둘 다 나가려면 뒷문으로 가야겠습니다. " "거기에는 경비가 많을 거에요." "들어을 때 보니 동족 문에는 경비가 네 명 밖에 없었습니다. " 그녀는 네 명도 많지 않냐고 따지지도 못 하고 손에 이끌려 뛰어갔다. 다행히 지금은 두 명 밖에 없었다. 로일은 칼을 뽑아 뭔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그것을 라틸다에게 내주었다. "제가 먼저 뛰어가면 이걸 가지고 즉시 따라오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보고 같이 싸우자는 뜻이에요?" 라틸다는 진지하게 물은 것이었으나, 로일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었다 "자, 갑니다. " 로일은 칼집을 빼 들더니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왠 놈이냐?" 누군가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걸 봤으니 경비들은 놀랄 만도 했다. 그들은 즉시 창을 꼬나 들고 달려오는 로일을 향해 찔렀다. 로일은 칼집 만으로 창을 쳐내고 그들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것만으로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둘은 바닥에 픽 쓰러졌다. "이게 하얀 늑대의 검술인가요?" 라틸다는 로일의 뒤를 따라오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건 그냥 기습이었습니다." 로일은 라틸다의 손에서 칼을 받아 들고 철문을 열었다 "누구냐?" 먼 곳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들켰군요. 서두릅시다 " 로일은 라틸다를 떠밀다시피 문 밖으로 내보더니 쓰러뜨린 경비가 떨어뜨린 창을 집었다. "누군가 달아난다. 잡아라." 순식간에 열 명 가까이 되는 경비병들이 로일에게 달려왔다. 일은 창을 거꾸로 쥐고 크게 소리쳤다. "제일 먼저 달려오는 자는 죽이겠다. " 그런 경고를 듣고 멈출 그들이 아니었다. 로일은 좌우를 살펴 제일 가까이 접근한 경비병을 향해 쥐고 있는 창을 집어 던졌다. 정원 풀밭을 가로지르며 한 자루의 창이 정확히 그 남자의 얼굴에 박히더니 허공에 서너 걸음쯤 날아가 내동댕이쳐줬다. 로일은 즉시 두 번째 창을 집어 들고 또 한 번 소리쳤다. "두 번째 가까운 자는 누구냐?" 놀란 경비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은폐물을 찾아 흩어졌다. 로일은 창을 든 채로 문 밖으로 나갔다 "이제 어디로 가죠?" 로일을 쫓아가는 데 익숙해진 라틸다는 이제 아예 주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변한 것에 대해서는 로일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불이 난 반대쪽으로 갑시다. " 로일의 공격이 끝난 후에도 잠깐 동안 경비병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창을 얼굴에 꽃은 경비병이 꿈틀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백작의 아들 쟈크가 다급히 달려오며 말했다. "누군가 경비병을 죽이고 저택을 빠져나갔습니다." "누군지 못 봤나?" "얼굴은 못 봤으나, 한 명은 여자였습니다." 쟈크는 그 말만으로도 누군지 알았다.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이 있는 방을 확인하라. 캡틴 바딩은 어디있나?" "지금 화제가 난 곳으로 가셨습니다. " "그래?" 쟈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모두에게 명령했다. "활을 쏙 줄 아는 자들을 최대한 모아라.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레앙 시내 한가운데 들어서서는 그리 조심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불 날 곳으로 몰려가, 오히려 안 난 곳은 조용했다. 경비들도 쫓아오지 않았다. 로일과 라틸다는 아직 불이 난 것도 모르는지 촛불 하나 켜있지 않은 마을 복판을, 소리 내지 않고 뛰어가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었으나 타오르는 불길에 주변이 완전한 어둠에 싸이지는 않았다. 서쪽의 붉은 빛이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동쪽을 밝혀주고 있었다. 라밀다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걸음을 늦추었다. 로일은 그녀가 지친 거라고 생각하고 같이 속력을 줄였다.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군요. 왜 불이 난 건지 모르지만, 덕분에 달아나기는 쉬워졌습니다. 아마 경비대들은 저 불이 난 곳으로 우리가 달아난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로일의 말을 듣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온 시내의 골목을 돌아보고 있었다. 로일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쫓아오는 병사들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대로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낮이 되면 달아날지 아니면 이대로 제가 숨어들어왔던 하수도를 통해 달아날 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라틸다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가 다시 걸어가야 할 방향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 타오르고 있는 레앙의 서쪽을 바라보았다 "똑 같아.......“ 그 말을 내뱉는 라틸다의 목소리는 극도로 떨리고 있었다. “똑같아....... 똑같아요, 로일. 맙소사, 이럴 수는 없어!" "라틸다! 왜 그래요? 뭐가 똑같다는 거에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나 레앙은 지금 불 타고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화재가 일어난 곳과 달리 이 곳은 아직 깨어난 사람이 없어 조용했다. 그것은 그녀가 항상 꾸는 그 악몽의 첫 부분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악몽이에요. 로일, 제가 말했던 그 악몽이 시작되고 있어요. 아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로일, 지금 내가 자고 있는 건가요? 이제 악몽이 현실감을 뛰어넘어 로일까지 끌어들인 건가요?" 안나가 코 앞에서 죽었어도 울지 않기 위해 참아내던 라틸다가 울고 있었다. 로일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라틸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 "아니에요, 이건 악몽이에요. 이건 정해져 있는 순서에요. 여긴 악몽을 꾸었던 그 도시 한 가운데였어요. 아아, 왜 몰랐을까? 그 악몽의 도시가 레앙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이제 곧 검은 기사의 말발굽 소리가 들릴 거에요. 나는 달아나겠지만, 금방 잡힐 데죠. 그리고 하얀 빛에 맞아죽을 거에요. 이제 알겠어요.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었어요. 이 순간을 위한 예지였어요." 라틸다는 그대로 주저앉아 어린 소녀처럼 울었다. "일어나요, 라틸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아니, 설사 꿈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꿈 속에 제가 있었습니까? 당신이 검은 기사에게 쫓겨 다닐 때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로일은 그녀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았다. "내가 왜 당신을 돕겠다고 나섰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는 하얀 늑대로서 필요한 아주 결정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와줘 본 적이 없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당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강한 듯 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당신의 눈빛에 저는 무의식적으로 당신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라틸다, 당신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라틸다는 떨리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제 꿈 속의 하얀 늑대. 그게 당신이었군요.“ 로일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라틸다는 그 손을 잡았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어디에서 들려온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곳에서 중첩되어 울렸다. 라틸다는 순간적으로나마 잊고 있었던 공포를 다시 떠올리며 로일에게 매달렸다. 로일은 칼을 꺼내 어둠 속을 겨냥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줬다. 갑자기 주위가 더 깊은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눈의 착각이 아니었다. 이미 안개 같은 어둠의 둘의 발등을 덮고 있었다. 라틸다는 로일의 어깨를 꽉 잡았다. 로일은 점점 소리가 커지는 골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으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검은 말을 타고 다가왔다. 그것은 라틸다가 그린 그림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로일 역시 그 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익셀런의 기사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럼 익셀런 기사단의 최종 목표는 가넬로크였던 것이오?' 카셀은 날카롭게 물었다. 팔콘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당시 진행 상황이 너무 빨랐소. 나야 카모르트에서 멈췄기에 그 이후 상황은 겪지 않았으나, 어했든 익셀런 기사단은 가넬로크를 정복한 후, 아란티아를 향해 가지 않았소?"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이 익셀런 기사단을 꺾은 것은 너무나도 극적인 전개여서 유랑 시인들 사이에서는 신화처럼 읊어지지만, 역사가들을 오히려 드래곤 기사단과의 전투를 더욱 수준 높은 전투로 평가했다. 그 전투에서 가넬로크를 수호하던 드래곤들이 모두 죽었고, 익셀런도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그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탓에 울프 기사단에게 패했다는 역사가도 적지 않았다. 카셀이 잠깐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워터스가 참견했다. "잠깐, 그럼 론타몬이 전쟁을 일으킨 게 아크랜드 정복이 아니었단 말이오?" "처음에는 단순히 론타몬이 모든 나라에 제국으로 인정 받기 위한 자존심 싸움이었다가 발전한 거니 정복 전쟁이라 해도 틀린 건 아니오. 하지만 익셀런 기사단의 멤버로서 느낀 건데, 론타몬의 군대와 별개로 익셀런은 그 이후를 대비하고 있던 건 분명했소. 그리고 이상한 점 중하나는, 어디 보자, 지금도 가지고 있긴 한데 그게 어디 있더라?' 팔콘은 오래된 액세서러가 잔뜩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들어 안에 든 걸 모두 꺼냈다. 팔콘은 그 중 은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당시 우리는 의무적으로 이 목걸이 차야 했지," 카셀은 목걸이를 들어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모양도 아니었고, 값비싼 물건도 아니었다. 카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건 그냥, 거꾸로 된 십자가에 구슬을 박아놓았군. 익셀런 상징 문구는 칼과 방패를 엇갈려 겹친 그림이잖소?” "맞소. 하지만 목걸이는 그걸 차게 했소." "익셀런과 상관 없다면 종교?" "그렇다고들 하더군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 안 나지만......, 아마 당시 유행하던 종교적 상징물인 건 분명하오." 둥근 구슬에 거꾸로 세워진 십자가가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종교였는지도 기억 안 나오?" 카셀이 물었다. 할콘은 어깨를 으쓱했다. "십 년 전에는 워낙 사회가 혼란스러워 수십 가지 사이비 종교가 난립하던 시기였소.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할 정도로 내 머리가 좋진 않거든." 워터스가 카셀에게 받아 살펴보다가 제이니에게 넘겼다. 그녀는 잠깐 살펴보더니 그 목걸이를 알아보았다. "이거 본 적 있어요. 마을 사람중한 명이 이 종교의 대단한 신자라 알고 있어요. 요새 그 종교 믿는 사람이 꽤 많다더군요. 왜 그 패잔병들의 마을에도 그 종교 가진 사람 꽤 있을 거에요. 제가 이상한 종교 아니냐고 물으니까 버럭 화를 내며 다른 나라에도 신도가 굉장히 많다고 당장 사과를 요구할 정도였죠." "무슨 종교인지는 아십니까?" "원래 종교란 건 신자 자신이 그 본질을 제일 모르는 법이잖아요. 막상 거기에 대해 물어보면 아는 게 없어요. 단지 자랑스럽게 말하길, 이 종교는 죽지 않는 자들을 지배하는 신께서 돌보시기 때문에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게 교리라더군요." "우와, 죽지 않는 게 믿음의 목표라니 그 종교, 무척 단순하면서도 과격하군요." 워터스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카셀은 그 말에 더욱 눈을 빛냈다. "죽지 않는 자?" 카셀은 부서진 갑옷을 붙이고 다시 살아나는 검은 기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카셀은 검은 기사가 나타났던 시기를 하나씩 짚어보았다. 출현했던 순간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것은 불규칙적이고 개연성 없는 출현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든 출현 시기와 일치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사람 어느 마을 출신이죠? 패잔병들의 마을?" 카셀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아뇨, 덴모주에서 왔어요." 제이니의 대답에 카셀은 외마디를 내질렸다. 던멜은 덴모주의 성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의 문이 닫힌 후 잠시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곳은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듬어지지 않은 돌을 그대로 벽으로 쓰고 있는 천연 동굴이었다. 문만 크기에 맞게 달아놓은 것뿐, 밑으로 내려가는 길은 다듬어지지 않아 험했다. 좀 낙차가 큰 바위에는 작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으나, 보통사람들이 내려가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횃불 하나에 의존하여 잘도 그런 험한 길을 내려갔다. 동굴 안은 별고 깊었으나, 이상하게 후끈한 바람이 안을 맴돌고 있었다. 던멜은 벽에 붙어 들키지 않게 이동하여 마을 사람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제일 법은 동굴의 중앙에 모이고 있었다. 중앙이라 봐야 둥근 바위가 여기 저기에 솟아 있었고, 바닥에는 발목 정도 찰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개울의 끝에는 바닥이 보 이지 않는 시커먼 연못이 하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이 축축한 돌 바닥 위에 모여 있었고, 그 중 백작의 병사들도 몇 섞여 있었다 동굴의 한 족 벽에는 아까 문에서 봤던 그 그림의 확대된 모양이 돌 위에 새겨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뭔가를 태운 역겨운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소매가 긴 하얀 옷을 입은 대머리의 노인이 벽에 새겨진 그림 아래 있는 편평한 돌 앞에 싫다. 그는 벽의 조각을 바라보고 크게 절한 후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닙니다. 백작님은 돌아오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을 잃지 않고 이 곳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틀린 게 아닙니다. 여러분, 죄책감을 가지지 마십시오. 어찌면 더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우리의 믿음 덕에 이 정도 피해로 끝났다고 생각하십시오. 백작의 따님과 가장 가까운 시녀 대신 여기 자진해서 나온 시녀가 있습니다. 그녀가 오늘의 재물이 되어줄 것입니다." 대머리의 노인은 지팡이로 다가오라고 명령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여자가 수많은 마을 사람들 앞에 수치심 하나 없이 싫다 그녀는 술에 취한 듯 취청거리는 몸으로 편평한 돌 위에 다가가더니 노인 앞에 무릎 끓었다. 노인은 뭐라고 말하며 그녀의 머리 위에 지팡이를 댔다가 떼었다.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가끔씩 목걸이를 손에 꽉 쥐고 기도했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던멜이었으나, 이 의식이 굉장히 조용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이비 종교가 갖는 요란함은 조금도 없었다. 절규하는 광신도도 없었고, 사람을 홀리기 위해 연주되는 음악도 없었다. 그 대신 동굴 전체를 감싸는 신비한 분위기에 던멜 조차도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발가벗은 여인이 재단 위에 눕자, 곧 마을 사람들은 무릎을 물었다. 대머리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던멜은 그의 말 하나라도 놓칠 세라 더욱 계단 가까이에 다가갔다. "이전의 집회가 실패한 건 안나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님을 뵐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중간에 기절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심 가득한 신도는 오늘 그 믿음의 증거로서 자신을 희생한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돼지의 피와 돼지의 심장을 쓰지 않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몇 번이고 그 말에 머리를 숙였고,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는 이도 있었다. 하얀 헝겊에 싸인 은빛 칼이 노인 앞에 대령됐다. 벌거벗은 채 돌 위에 누워있는 여인은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에게 공포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려 의식 을 진행하려는 노인이 더 겁에 질린 듯 했다 뾰족한 칼날이 작게 부푼 여자의 가슴을 겨냥하고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감고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며 뭐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뭔가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던멜은 흠칫 놀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다들 기도 하느라 바쁜지, 뭔가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도 없었다. 의식을 진행하는 노인조차도 자기가 뭔가를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던멜은 단검을 꽉 쥐었다 구체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던멜은 몸을 움츠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존재감만으로 몸서리치게 불쾌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은 아니었다. 바로 노르만트에서 똑 같은 기운을 가진 존재가 그와 그의 친구 앞에 나타났었다. 로일이 지하실에서 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존재였다. 노인은 주문을 외우길 멈추고 누워있는 여인의 가슴에 닿아있는 칼끝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우리에게 영원불멸을 약속하신 군주께 이 모든 것을 바치리다. 그 분의 승리와 그 분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시길!" 노인은 마침내 칼을 밑으로 힘껏 내리꽂았다. 검은 말은 크게 날개를 한 번 펼쳤다가 로일의 앞에 멈춘 후 도로 접었다. 로일은 칼을 내민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겁이라도 주듯 말이 한 걸음 더 다가왔으나 그래도 로일은 칼날의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검은 기사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기묘한 소리가 새나왔다. 곧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로 변했다. "물러나라 " 사방의 벽을 타고 울린 그 목소리는 라틸다의 귀를 찢는 것 같았다. “당신이 물러나시오. 그 모습으로 라틸다를 데려갈 수는 없소." 로일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는 이미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주저하지 않았다. 검은 기사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주위의 어둠이 그의 손바닥 앞으로 밀집되기 시작했다. 로일은 순간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막을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로일의 가슴을 밀었고, 그의 몸은 허공으로 내던져겼다. 로일은 바닥을 수 차례나 구른 후에야 멈줬다. 아절한 고통 속에서도 로일은 기절하지 않았으나, 쉽게 일어나지도 못 했다. 결국 검은 기사와 라틸다 사이에는 어떤 방패도 세워져 있지 않았다. 검은 말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라틸다는 도저히 투구속에 감춰진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로일의 말이 옳았다. 이것은 꿈도 아니었고, 검은 기사도 꿈속에서 걸어나온 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 곳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올 사람은 로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아버지를 따라간 라틸다가 본 것이 바로 이 검은 기사였다. 안나가 겁에 질린 나머지 기억을 잃어버린 것도 이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검은 기사는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그녀를 해치기 위한 손길이 아니었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자꾸나, 라틸다. ' 라틸다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아니,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라틸다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 기사와 싸웠던 그 많은 경호원들은 죽지 않았을 텐데, 리제니도 죽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 라틸다는 손을 조금 내밀었다가 도로 접었다. "아버지께서 그 때 절 공격하셨군요. 그리고 전쟁의 명분을 위해 저를 제외한 모두를 희생시킨 거군요. 그 검은 기사의 탈을 쓰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건가요?" 라틸다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 모든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애썼다. 바로 이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였다. 공포가 현실을 넘자, 갑자기 모든 것이 슬퍼졌다. "제 진짜 아버지는 육 년 전 병에 걸렸을 때 돌아가신 거군요. 마약의 힘을 빌어, 뭔가 다른 것의 힘을 빌어 살아있는 척 하지만, 당신은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전 그걸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바보 같은 리자, 그 애는 그것도 모르고 나에게 복수하려고 목숨을 끊었군요." 검은 기사는 내밀었던 손을 도로 접었다. 라틸다는 힘없이 웃었다. "물러 가세요. 지금 절 지키고 있는 사람은 로일입니다. 당신이 아니에요." 검은 기사는 말고삐만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라틸다를 둘러싼 어둠이 점점 옅어져 갔다. 쓰러졌던 로일이 일어나면서 라틸다를 향해 소리쳤다. "라틸다, 뒤로 물러서시오." 라델다는 로일을 돌아보았다. "괜참아요. 전 이제.......“ "젠장, 붉은 장미 백작! 딸을 보호하시오." 로일은 어둠 속에서 순간 몸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검은 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말 높이로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검은 기사는 손바닥을 뻗어 로일의 가슴을 찍었다. 검은 기운이 로일의 전신을 감싸며 또 한 번 로일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로일이 공격한 건 검은 기사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화살이었다. 로일의 검에 몇 개인지 셀 수 없는 화살들이 부러져 나갔고, 일부는 검은 기사의 등과 검은 말의 엉덩이에 박혔다. 하지만 검은 기사와 로일이라는 방패를 빗겨간 화살은 또 하나의 표적을 향해 멈추지 않고 뻗어갔다. 라틸다는 허공에 떠 있는 로일과 검은 기사 사이로 한줄기 빛을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하여 눈이 부셨다. 그녀를 괴롭히던 악몽의 정체가 아버지였다는 것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에 박힌 흰 빛의 정체도 명백했다. 그것은 안나를 죽인 것과 거의 동일한 위치를 뚫은 화살이었다. 검은 기사는 즉시 말머리를 뒤로 돌렀다. 화살을 본 것은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였다. 그들은 생각보다 발리 로일과 라틸다가 달아난 방향을 알아채고 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검은 사자 백작의 둘째 아들인 쟈크가 서 있었다. "화재를 낸 곳 반대편일 거라 생각했지 궁수들, 재장전 하라." 그는 자신 있게 소리치며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궁수들은 다시 화살을 됐다. 검은 기사는 화살에 맞아 호흡을 멈춘 채 바닥에 손을 짚은 라틸다를 돌아보았다. 붉은 피가 그녀의 가슴을 적시고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레이디 라틸다, 그 때 내 말을 듣고 얌전히 몸을 내주었다면, 이런 사고는 없었을 거요." 쟈크는 다시 손을 들었고, 궁수들은 일제히 활 시위를 당졌다. 검은 기사의 망토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주위가 짙은 어둠으로 다시 물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일제히 꺼졌다. "뭐냐?" 쟈크가 당황하여 외쳤다.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 다른 궁수들도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시위를 당기던 손을 놓아버렸다. 다시 한 번 스무 개에 가까운 화살들이 아무 방향으로나 쏟아졌고, 일부는 다시 리틸다와 검은 기사 쪽으로 날아왔다. 검은 기사가 손을 내밀자, 날아오던 화살들은 힘을 잃고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의 손은 쟈크를 비롯한 궁수들을 향했다. 실타래에서 풀려나가는 것처럼 가늘게 뿜어져 나가는 점은 연기가 쟈크와 병사들을 모조리 하나로 묶었다. 비명 소리는 없었다. 뭔 가가 터지는 소리만 들렸고, 그 자리에는 방금 도축을 마친 고깃덩어리와 구별 못할 살점과 핏덩어리만 굴러다녔다. 누구도 그 중에서 쟈크의 시체를 분리해 내지 못할 것이다. 검은 기사는 말에서 내려 라틸다에게 다가갔다. 라틸다는 힘없이 손을 내밀었고, 검은 기사는 그 손을 잡았다. 그녀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화살을 뽑으려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라틸다는 아버지라고 생각되지 않는 검은 기사를 불렸다. 검은 기사는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 죽거든......, 제, 제가 주, 죽거든......, 아, 아버지가 사......,살아.... 났을 때처럼...... 살아나게 하지...... 마, 말아주세요. 그, 그냥...... 죽게 해, 해주세요. 부, 부탁 드려요. 날......, 살리지 말아요" 그것은 그녀의 유언이 되었다. 라틸다는 고개를 떨구었다. 검은 기사는 그녀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망토가 펄럭였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그는 곧 비틀거리며 일어나 라틸다의 시체를 말에 올렸다. "그녀를 내려놓으시오. 당신이 라틸다를 데리고 있을 자격은 없소" 로일은 칼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검은 기사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검은 기운이 그의 손바닥 앞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체도 없이 스무 명을 핏덩어리로 날려버린 마법이었다. 로일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칼을 앞으로 세웠다. 라틸다를 구하지 못 했다는 좌절감과 곧 즉음이 그를 덮칠 거라는 공포가 뒤섞여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네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마스터 퀘이언이 지적했던 부분은 이 부분일 지도 몰랐다. 검은 기사는 팔을 펼쳤고, 순간 어둠을 가르고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뭔가가 로일을 향해 뻗어왔다. 로일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뒤이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암흑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분명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었으나, 끈적한 진흙탕 속에 검을 박은 것처럼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로일의 몸을 밀어냈다. 로일은 끝까지 그 힘을 버틸 수 없었다. 그는 골목의 벽까지 밀려났다. 엄청난 압력이 그의 전신을 눌렀다. 온몸의 뼈가 다 부서지는 것 같았다. 곧 그의 등을 버터고 있던 담마저 무너졌고, 로일은 벽돌과 함께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검은 기사는 한 번 더 공격하려다 곧 힘없이 팔을 떨구고 말 위에 올라갔다. 검은 말은 힘차게 날개를 펴더니 몇 길 높이의 지붕 위로 뛰어올라갔다. 라틸다를 품에 안은 검은 기사는 그녀의 붉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검은 말은 맹수처럼 크게 포효하고, 하늘 로 날아올랐다. 바딩이 현장에 도착한 건 화재가 진압되고 아침 해가 뜰 무렵이었다. 이상한 물체가 레앙 동쪽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본 직후, 바딩은 즉시 저택에서 온 병사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레이디 라틸다는 어찌 되었나?“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병사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굉장히 망설였다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잡기 위해 남작께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출동하셨습니다." "누가 탈출했다고? 어떻게? 경비들은 모두 그녀를 위해 길을 내주기라도 했단 말이냐?" 바딩은 불을 끄느라 정신 없던 마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이 엄청난 사태를 받아들이느라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듣기로는 누군가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같이?" 바딩은 도저히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가 곧 생각을 고쳤다. 라틸다가 내내 구하러 올 거라고 말한 한 명이 있었다. "백작님께 가서 화재를 진압했다고 전해드려라 아직도 화재의 이유는 모르겠다고 하고. 굳이 이유를 물으면 마법이라고 해라." "예?" 병사는 이성적인 기사가 노골적으로 마법이라고 지칭하니 농담이라도 한 줄 알고 말대답을 했다. 바딩은 그를 확 보아보았다. “그럼 넌 집 다섯 채가 통째로 무너지고 근처가 쑥대밭이 된 화재를 무엇으로 설명하려느냐? 더구나 목격자 한 명 없이!" "죄, 죄송합니다." 병사는 얼른 사과하고 저택 쪽으로 말을 몰았다. 바딩은 말을 몰아 라이온 기사 세 명을 대동하고 레앙의 동쪽으로 달려갔다. 바딩은 현장이 너무나도 조용하다는 것에 놀랐다. 망치로 반나절 동안 깨부순 것처럼 벽이 무너져 있고, 누군지 확인할 길이 없는 시체 스무 구가 사방에 널려 있었는데도, 누구 하나 내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부서진 벽은 불이 난 쪽과 비슷했다. 불을 낸 누군가가 오고 갔다는 증거일 지도 몰랐다. 시체의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찢어진 갑옷과 조각 난 활의 파편 등으로 미루어 검은 사자 백작의 궁수들임에 틀림없었다. 아까 보고한 병사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시체들 중 하나는 쟈크였다. 그러나 바딩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근처를 수색하라. 레이디 라틸다의 시체가 있나 확인하도록." 바딩은 수많은 전투 현장을 지켜보았으나, 이런 광경은 본 적이 드물었다.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용병 시절 봤던 마법사가 낀 전투에서였다. 그 때 최고라고 칭송 받던 기사들도 마법사의 지팡이 앞에서는 몰려오는 파도 앞의 모래성일 따름이었다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검술도 마법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전투에 무지한 쟈크가 이끌었다고는 하나 궁수 스무 명으로 포위하여 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있겠는가? 더군다나 상대는 분명 라틸다라는 짐을 안고 있을 텐데! 이건 마법사의 소행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런 마법. "캡틴 바딩,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 바딩이 스스로 키운 열 명의 라이온 기사 중 가장 신뢰하는 비앙이라는 기사가 말했다. "누구냐?" 바딩은 벽이 무너진 곳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측 병사는 아닙니다." 비앙은 신중하게 칼을 꺼내 들고 있었다. 비앙이 신중할 때면 다른 라이온 기사들도 긴장했고, 그건 바딩도 마찬가지였다. 가보니 부서진 벽돌 위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죽은 것도 아니고, 기절해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바딩은 먼지에 싸여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 말했다. “자네가 이 모든 일을 저지른 마법사는 아닌 줄로 안다, 라틸다의 경호기사?" "난 마부가 아니다." 그 남자는 눈을 깜박이며 하늘만 보다가 곧 바딩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비앙은 즉시 칼을 그의 목에 들이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천천히 일어나 먼지를 털기만 했다. 칼을 겨눈 비앙이 무안할 정도로 무심한 반응이었다. "라틸다는?" 바딩은 뽑을 칼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물었다. "죽었다 " "누가?" "저기 죽어 있는 너의 부하들이 " “그럼 내 부하들을 저 꼴로 만든 네 쪽 마법사는 누구냐?" “마법사 따윈 없다. 라틸다를 구하러 온 또 다른.......” 그는 바팅이 생각하는 마법사를 뭐라고 지칭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또다른 누군가라...... 같이 가줘야겠다. 묻고 싶은 게 많군." "그럴 시간 없다. 난 라틸다를 구하러 가야 한다.“ "라틸다는 죽었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육신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할지 모를 그녀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가야 한다. 물러나라." 순간 손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교차하며, 비앙이 겨누고 있던 칼이 어느새 비앙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비앙은 놀라 손을 들고 물러섰다. 로일은 그의 칼을 등 뒤로 던지더니 바닥에서 자신의 칼을 집어 들었다. "그래, 그랬었지." 바딩은 뒤에서 달려들려는 자기 부하들을 손으로 저지하고 앞으로 나섰다. "라틸다가 아무리 철없는 레이디라 할 지라도, 어설픈 실력자를 경호 기사로 쓸 리가 없지. 왜 내가 그걸 몰랐을까? 허면 너는 왜 라틸다를 죽게 내버려두었나?" 바딩은 그를 호통했다. 로일은 눈을 감고 대꾸하지 못 했다. "살아있는 육신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지금 영혼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거냐? 넌 이미 레이디의 경호 기사로서 자격을 잃었다." “난 지금 그런 말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말짱한 정신이 아니다. 그냥 막지 말라는 말만 하겠다, 캡틴 바딩." "원한다면, 좋다. 덴모주에서 회피했던 결투를 이 곳에서 마무리 지어 주겠다. " 바딩은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로일은 칼을 겨누지 않았다. "그럼 넌 살아남지 못 한다. " “카모르트 방에서 나 바딩을 이길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 바딩은 힘을 실은 검을 내리쳤다 로일은 느닷없는 공격을 느긋하게 막아내고 가볍게 검을 횡으로 그었다. 별 거 아닌 공격이었으나, 바딩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바딩은 즉시 거리를 두고 목을 짚었다. 옅게 피가 배어 나왔다. 그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끄러운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로일은 자신의 공격이 불만족스러웠다는 듯 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둘의 격돌이 있었고, 로일은 또 한 번 바딩의 얼굴을 그었다. 바딩의 전력을 다한 방어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로일은 자신의 공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바딩, 네가 생각보다 강한 녀석이었던 거냐, 아니면 내가 약해진 거냐? 젠장, 고작 이런 실력이었으니 그녀를 지키지 못한 거였나, 아니면 내가 지키는 싸움을 할 줄 모른다는 그 분의 저주였나?" 로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며 다시 칼을 내밀었다. 바딩이 상대가 내민 검을 두려워하기는 아홉 살 때 처음 검을 쥐었던 이후 처음이었다. 그의 두려움을 알았는지 옆에서 비앙이 나섰다. "캡틴, 돕겠습니다. 지금은 결투를 할 때가 아니라, 범죄자를 체포해야 할 시점입니다. " 바딩은 거절했다. "비앙,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언제고 최고의 검사를 만나 최고의 시합을 한 후 죽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라고." "캡틴, 아무리 그게 소원이라도 지금은 그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 자가 최고라는 건 말도 안 됩니다. " "최고의 검사라는 게 어디 마법의 검을 쥐고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있을 신이라더냐? 너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저 자의 몸에서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검의 기운이?" 바닝은 이제 두려움도 잊고 오히려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나의 부하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질문이다. 이 싸움이 끝나면 내가 죽더라도 그대를 최고의 예우로서 보내주겠다. 그대는 누구인가? 전쟁터에서 떨어져 나온 용병이라 하여도 좋다. 이름 모를 작은 가문의 기사라 하여도 좋다 솔직하게만 대답해라." 로일은 짧은 침묵 후에 대답했다. "나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하얀 늑대다." 비앙을 비롯한 라이온의 기사는 기겁을 하며 놀랐으나, 바딩은 그럴 즐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 캡틴이 가짜일 거라고는 생각했지. 하지만 다섯 명이라는 숫자가 맞지 않아 결론을 내리지 못 했는데, 이제야 알갰군. 여기 진짜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있었어." 바팅은 강한 어조로 모두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이 싸움에 나서지 마라, 그리고 내가 지더라도 저 자를 공격하지 마라. 그리고 비앙 " 그는 비앙을 따로 불러 말했다 "너에 대한 나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고 들어라. 내 비밀 서랍에 그 동안 내가 모아온 자료들이 있다. 만약 내가죽거든, 그 서류들을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 어느 쪽 세력에도 속하지 않는 귀족에게 전해라. 남아있는 가장 강한 권력자에게." "캡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비앙은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 동안 고마웠다. " 이미 바딩은 목숨을 포기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나 로일의 앞에 선 바딩의 모습은 결코 죽음을 각오한 기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비앙은 이 위대한 두 기사 간의 결투가 고작 세 명의 목격자를 두고 일어난다는 것에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바딩은 긴 시간을 뜸들이지 않고 곧장 로일을 공격했다. 로일은 검을 피하고 막는 데 주력하다가 곧 반격에 나싫다. 그러나 바딩은 순식간에 그것들을 막고 칼을 내밀었다. 묵직한 검이 오고 가고, 칼날이 닿을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잠깐 기다려라." 바딩은 갑자기 싸우다 멈추고, 가슴을 둘러싼 무거운 갑옷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자세를 달리 하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력으로 돌격했다. 훨씬 더 큰 병치와 검으로 밀어붙이니 로일도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옆으로 피했다 싶으면 어느 새 따라붙은 검이 위협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칼날이 춤을 추고 둘이 발고 지나가는 자리에 부서진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가라앉은 새벽의 공기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언제 반격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로일의 빠른 검을 상대로 바딩의 집중력은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정신적으로 지쳐버린 바딩이 너무 빠른 승부를 내려고 양손에 쥐고 휘두르려는 것을 로일은 놓치지 않았다. 손목을 얻어맞은 바딩은 검을 놓쳤다. 로일은 그의 목에 칼을 겨냥했고, 바딩은 두 손을 늘어뜨렸다. 그러나 아직도 눈빛 만은 살아있었다. "정말 목숨을 걸 자신이 있다면, 다시 검을 들어라." 로일은 칼을 접고 뒤로 물러났다. 바딩은 자신 있게 미소 지으며 비앙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앙은 즉시 검을 건네주었고, 바딩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보아라. 모든 하얀 늑대들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이다." 로일은 칼을 양손에 쥐고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바딩도 양 다리를 바닥에 붙이고 칼날을 세웠다. 들은 거의 동시에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두 줄기 바람이 엉킨 듯 서로의 중간 지점에서 한데 엉켰다. 로일의 칼날이 바딩의 배를 들고 나와 있었다. 바딩은 칼을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바딩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타고 나의 이름을 빌려라. 레앙을 빠져나가는 데 있어 누구도 막지 않을 것이다. " 바딩은 배에 꽃힌 칼끝을 잡고 자기 힘으로 뽑았다. 입에서 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으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는 로일에게 자신의 피가 묻은 칼을 내주었다. 로일은 바딩의 배려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가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그는 입을 열지 않고 카모르트에서 가장 빠르다는 바딩의 검은 말에 올라탔다. 말은 처음에는 말을 듣지 않았으나, 바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곧 진정했다. 로일의 인도에 따라 말은 천천히 성문 을 향해 걸어갔다. 바딩은 쓸쓸히 그 됫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로 쓰러렸다. 비앙이 달려왔다. “캡틴 바딩!" 바딩은 자기 주위를 둘러싸며 무릎 끓은 부하들을 올려다보았다. “비앙, 너무 감상적인 유언이 아니라면 부탁 하나 하겠다. 살아계실 때 지켜드리지 못한 죄를 죽어서 지킬 수 있겠냐 마는, 샤이필드 공작을 화장하여 계를 뿌린 호수에 나의 계를 뿌려다오." "예, 캡틴 바딩." “너무 슬퍼 마라. 하얀 늑대들 중 가장 강한 이와 겨루었거늘, 어찌 후회가 있겠느냐?” 바딩이 조용히 숨을 거둔후, 그의 부하들은 무릎을 끓은 채 검은 사자 백작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날 때까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백작은 바딩의 시체를 보고 기겁을 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기사의 명예를 건 시합에서 패하셨습니다." 비앙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감히 레앙에서 바딩에게 시합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 사이 너희들은 월 했느냐?“ "캡틴 바딩의 유언이셨습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구냐? 누가 바딩을 죽였느냐?"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 "누구라 하더냐?" "서로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비앙은 울음을 참기 위해 애쓰며 말을 이었다. "캡틴께서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검은 사자 백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떨었다. "그랬군." 뒤에서 보고하러 온 이가 말했다. "레앙에 불을 지르고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을 납치해 간 이도 그자와 동일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쟈크 남작께서도.......“ 피투성이가 된 시체들 중 쟈크의 시체를 찾아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얼굴을 보고 알아낸 것은 분명 아니었다. 백작은 아들과 수호 기사를 동시에 잃었다는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노르만트에 있어야 할 캡틴 울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검은 사자 백작 군의 지휘관이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 노르만트에는 캡틴 울프가 없습니다. " "뭐라고?" "우리 쪽 스파이의 정보에 따르면 나흘쯤 전 캡틴 울프는 노르만트에서 모습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어제 까마귀가 그 편지를 보내주었습니다." 검은 사자 백작은 분노의 눈길로 바딩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지휘관, 지금 우리 쪽 남은 군대가 얼마인가?“ “살아남은 병력 중 5천은 지금 레앙에 있고, 또 다른 5천은 현재 드마르프 평원에 재집결 하고 있습니다." “레앙을 지키는 병력 1천만 빼고 전원 노르만트로 진격한다." "배, 백작님 . 그리 하시면.......“ “상관 없다. 만약 역습을 당해 레앙을 빼앗긴다면 나 뤼미에르 백작의 다음 영지는 노르만트가 될 것이다." "예, 백작님." 지휘관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물러갔다. 검은 사자 백작은 분노를 끊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캡틴 카셀, 아란티아와 전쟁을 하는 한이 있어도 너를 내 앞에 무릎 꿇려 목을 치리라." 33.귀 환 의식을 완전히 끝마치기까지는 몇 시간이 더 걸렸다. 희생된 여인이 재단 위에서 피를 흘리고 흐르는 피가 재단에 흐르게 내버려 두는 동안 긴 기도 시간이 있었다. 던멜은 끈질기게 모두가 다 나갈 때를 기다렸다. 동굴이 완전히 비고 횃불이 모두 꺼져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자, 던멜은 움직였다. 아직 이 동굴에 대해 풀어야 할 숙제는 남아있었다. 그러나 던멜은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 때 던멜은 뭔가 동굴 족으로 접근해오는 것을 눈치챘다. 던멜은 시각도 청각도 아닌 느낌에 의지하여 접근하는 자의 반대편에 숨었다. 그 자는 횃불도 촛불도 들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마치 환하게 밝혀진 대낮의 광장처럼 활보하고 있었다. 던멜은 눈을 감고 피부로 전달되어오는 느낌에 최대한 집중 했다. 이렇게 강렬한 기운을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붉은 장미 백작이다. ' 그는 파티장에서 검은 사자 백작을 호령하던 붉은 갑옷의 중년 남자를 떠올렸다. 뭔가가 부서졌다. 귀가 들렀다면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려 귀를 막아야 했을 그런 굉음이었다. 던멜은 피부에 닿는 그 강한 진동 만으로도 바위가 깨지는 소리임을 알았다. 갑자기 동굴 안에 빛이 들어왔다. 붉은 수염을 가진 남자의 양손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횃대를 움컥쥐자, 기름도 태우지 않고 푸른 빛이 옮겨 붙었다 그의 발 아래에는 의식에 쓰던 편평한 바위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있었다. 그는 그 위에 백작과 똑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눕혔다. 푸른 조명 아래로 보여서인지 더더욱 창백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에게서는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이 없었다. 그것은 시체였다 '누구였더라?' 던멜은 기억을 더듬다가 대강 백작의 딸일 거라고 짐작만 했다. 그리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레앙으로 떠난 로일이 갑자기 걱정되었다. 붉은 장미 백작은 자신의 딸을 눕혀놓고 눈물을 터트렸다. 그리고 일어나 서성거리다가 팔을 신경질적으로 휘두르기도 하고, 발로 바닥을 걷어차기도 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에는 뜨거운 바람이 일어났고, 발이 닿는 곳은 박살 나기도 했다. 던멜은 그 무서운 광경에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고, 최대한 기척을 죽이기만 했다. 던멜은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는 하얀 늑대 중 하나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무섭다는 이유로 여기에 숨어있다는 것이....... 하지만 그가 뭘 할지 지켜봐야 한다는 변명을 해보았다. 백작은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허공에 대고 주문을 외우다가 갑자기 고개를 저으며 절규했다. 그것은 무서운 광경이기도 했으나, 굉장히 서글픈 광경이기도 했다. 순수하게 딸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게 없었다. 마침내 백작은 뭔가 결심하고 양팔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몸이 푸른 불길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길은 검게 변했다 대단히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불빛은 검은 색이었고, 검은 색이면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었건만 그것은 하얀 태양 빛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이었다. 갑자기 동굴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던멜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안정하게 서 있는 동굴의 일부가 무너져 돌멩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피해야겠다.' 던벨은 기척을 완전히 죽이고 이동하면서, 백작이 뭘 계속 하는지 보려고 고게를 그 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던멜은 걸음을 멈췄다. 완전히 기척을 죽이고 있었음에도 백작은 던멜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검은 불꽃에 휩싸인 붉은 장미 백작이 입을 열어 말했다. 던멜은 그 순간 뒤돌아보지 않고 동굴의 입구 쪽으로 달렸다. 숨어있는 걸 들킨 이상 싸움을 택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던멜은 달아나는 걸 선택했다. ‘마법사는 절대 상대하지 마라.' 현재 그의 마스터인 퀘이언과 과거 그의 마스터 인 칼스텐이 동시에 내려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 이후 던멜은 실제로 많은 마법사들과 싸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으나, 그들은 그저 마법을 칼이나 화살 같은 무기로 쓰는 전사일 뿐, 진짜 마법사는 아니었다. 순간 던멜이 달아나려고 하는 방향에 놓여있던 집채만한 바위가 산산이 부서졌다. 던멜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몇 바퀴 굴러 다시 일어나 달려갔다. 검은 불꽃이 사라지며, 동굴은 완전히 어두워줬다. 침묵과 어둠이 그를 공격했고,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후려쳤다. 그는 몸을 굴리고 바위 벽에 붙어 뛰어가며 입구에 도달했다. 하지만 등을 떠미는 뜨거운 공기에 문과 함께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뜨거운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옷과 머리카락이 타버렸다. 던멜은 고통에 몇 바퀴를 굴렀다. 그의 주위에는 아직도 약에 취한 즈쿨라 중독자들이 잔뜩 있었으나 던멜은 상관하지 않고 달렸다. 더 이상 공격은 없었다. 던멜은 숲으로 달려갔다. 진동은 동굴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은 비가 홍수처럼 쏟아질 것 같은 엄청나게 두꺼운 검은 구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 구름들은 성의 바로 위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공사 중이던 부분이 부서져 밑으로 떨어졌다. 성 좌우로 올라와 있는 탑 위로 번개가 떨어지더니, 두 개의 탑이 하얀 불꽃에 타올랐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탐이 없는 두 곳에도 번개가 연이어 떨어졌다. 놀랍게도 먼저 타오르는 두 개의 탐과 똑 같은 높이의 하얀 불빛이 허공에 타오르며 함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성을 감빠는 네 개의 하얀 불기둥이 있었다. 지진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고, 마침내 성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던멜은 먼 곳에서 그 거대한 파괴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무너진 성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그 폐허 안으로 들어가지 못 했다. 던멜 역시 무슨 일이 벌어줬는지 아는 게 두려웠으나, 임무를 끝내기 위해 다시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의 일부도 상당히 무너져 있었다. 조만간 나머지 성한 부분도 무너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지하실 안의 중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돌에 깔려 죽어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을 구해주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성이 또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마법이 아니라 순수하게 지반이 약해진 탓이었다. 던멜은 횃불을 하나 들고 그 끔찍한 장소로 다시 들어갔다. 붉은 장미 백작은 죽어 있었다. 대신 던멜은 그가 죽기 전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앞서 있던 모든 지진의 원인이 던멜 앞에서 몸을 일으겼다. 그리고 길게 숨을 토해냈다. 던멜은 덴모주의 외곽으로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으나 누군가 쫓아오는 기미는 없었다. 로일이 부탁한 일과 백작이 저지른 일의 뒷 처리를 끝내두었으나, 이대로 덴모주를 떠나도 될 지 여전히 불안했다. 그러나 여기 말고도 가봐야 할 곳은 많았다. 암브루로 달려가 카셀을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이 제일 급했다. 또 로일에게 백작과 백작의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것도 중요했다. 노르만트로 돌아가는 일 역시 미룰 수 없었다. 그러나 던멜은 셋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다. 그는 끼고 있는 반지를 들었다. 블랙 풋의 암살자 헤더가 노르만트에서 헤어지기 전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 반지를 드리겠습니다. 만약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실 생각이든다면, 반지가 그 길을 인도할 겁니다.' 그는 반지를 돌 위에 내리쳤다. 보석 부분이 유리처럼 조각조각 깨졌다. 햇빛에 반사된 거울처럼 끓은 빛이 반짝하더니 구슬 만한 크기를 한 빛의 뭉치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꽤 빠른 속력으로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말 위에 올라 빛을 쫓라갔다. 그 빛이 멈춘 곳에 블랙 풋의 근거지가 있었다. "정말 이렇게 급히 떠나야겠소?" "당신에게는 휴식이 필요해요." 팔콘과 제이니 둘 다 새벽부터 떠나려는 카셀을 막았다. 카셀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여기에 있기에는 너무 커다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가야 합니다." 제이니는 해라도 뜨면 가라고 몇 번이고 말렸으나,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이 제이니는 그에게 그날 먹을 도시락과 저녁으로 먹을 질 좋은 빵을 내주었고, 팔콘은 자신이 가진 말 중에서 가장 빠른 말을 주었다. 카셀은 산을 내려가면서 잠깐 말을 돌려 뒤 를 돌아보았다. 마치 뭔가를 두고 갔다는 듯....... 곧 그는 말머리를 돌려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상태로 노르만트까지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소." 워터스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쉽게 무너질 사람은 아니니 , 걱정 마시오." 팔콘이 말하며 돌아서자,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갔나?“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새벽부터 무리하지 마시오, 쟌." 팔콘이 말하니 노인은 지팡이를 휘휘 저었다. "도둑 놈 주제에 후작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왕실의 대신들이 알면 기절할 일이야. 그나저나 늑대들의 대장은 내가 원군을 보내지 않아 실망하던가?“ "실망하는 빛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더군요. 그런데 왜 여기 있다는 걸 숨기라고 그러셨소? 당신이 살아있는 걸 알면 그나마 걱정이라도 덜 텐데." "원군도 보내주지 않는 사람이 살아있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제이니, 나 좀 부축해 주게 이 두 젊은 것들은 늙은이를 공경할 줄 몰라." 제이니는 웃으며 그의 옆에 서서 팔을 내밀었고, 후작은 거기에 팔을 얹었다. “두 분 다 에노아 후작님을 너무 좋아하셔서 괜히 숙스러워 저러는 거라고요. 원래 남자들이란 이상한 것에 자존심을 세우는 법이거든요." "지나친 배려는 무례함을 불러오지 데이릭, 자네는 좀 더 제이니에게 관심을 쏟는 게 좋아. 이 아이가 없었다면 그저 도둑 놈으로 끝날 놈이 제이니 덕에 그나마 의적이라는 표 딱지를 붙이고 다니는 게지." 팔콘은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에노아 후작은 제이니의 팔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겼고, 둘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캡틴 데이릭, 자네라면 캡틴 울프를 돕겠나?" "원군도 없는데 뭘 돕소? 그리고 내 이름은 팔콘이오." "난 지금 왕실 기사단의 캡틴에게 묻는 게야." "그런 건 쟌, 당신이 정하는 거죠. 그리고 이제 힘도 모두 잃은 양반이 뭔 수로 들겠다는 거요?" 일찍 일어난 팔콘의 부하들이 그들의 산책을 보며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기사의 힘이 점에 있다면 귀족의 힘은 땅에 있지. 암브루는 어디 가지 않았네. 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내 아들과 손자 놈들이 죽었다는 게 슬픈 일이긴 하지만." "모두 죽은 건 아닐 겝니다. " "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세. 데이릭, 자네 생각을 말해 보게, 캡틴 울프에 대해서." "과거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소. 자신의 이름은 카셀 노이이며, 언제고 진짜 기사가 될 이름이니 기억하라고. 그는 캡틴 울프가 아닐 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워터스가 깜짝 놀랐다 "왜 그런 생각을?" “적어도 검술에 있어서는 내 부하들보다 못할 거요. 이틀 전 그 도적들을 만나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그를 봤지 나였다면 혼자서도 모두를 상대만한 놈들이었는데, 그는 달아나고 있더군." “맞아, 그랬군. 어쩐지 이상했소. 전에 내가늑대를 이끈 도적들과 싸울 때 만날 하얀 늑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지. 기억 나시오? 그 때 그가 보여준 검술은 내가 듣도보도 못한 엄청난 것이었소. 그래서 날 당연히 이 자도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더군. 나보다 터무닌 없이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워터스가 혼자 중얼거리게 내버려두고, 팔콘은 에노아 후작에게 말했다. “적어도 그는 지금 카모르트를 위한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었소. 그건 그의 인간성 문제도 아니고, 지위의 문제도 아니지. 그 때 본 그의 모습과 오늘 본 그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찾으라면 바로 그 점이오. 그는 사명감이 뭔지를 알고 있는 자요. 마치 노르만트를 지키기 위해 다리를 지키고 서 있던 메오릭스를 바라보는 것 같았지. 뭔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는 자...... 진짜 기사란 그런 거 지." 제이니는 메오릭스라는 이름에 잠시 걸음을 멈췄고, 에노아 후작도 멈췄다. “데이릭, 자네 덕에 결심이 섰네 피오렌디노, 다녀와야 할 곳이 있다. 스몰레이크라는 작은 마을을 아느냐?” "제가 얼마 전까지 거기 있었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워터스는 당연히 안다는 뜻으로 말했다. “그 곳 와인 상점에 고디머 백작이 있을 거다. 사실 처음부터 캡틴 울프를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그였다네. 지금 시기에 스몰레이크에 머물러 내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으니 만날 수 있을 게다. 편지를 하나 써 줄 데니 가지고 가거라." "지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워터스는 즉시 자신의 막사로 뛰어갔다. "그리고 캡틴 데이릭, 아니 팔콘. 자네에게도 도움을 한 가지 청해야겠네." "쫓겨난 왕실 기사단의 캡틴이 뭘 할 수 있다고?" 팔콘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제이니가 버럭 화를 냈다. "지금까지 항상 국왕 폐하를 생각하며 이 나라를 위해 싸워온 사람이 막상 기회가 주어지니 피하는 건가요? 닥치고 도와 드려요." 팔콘과 에노아 후작은 그녀의 과격한 말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좋소, 쟌. 부탁할 게 뭐요?" "자네가 키운 군사력을 좀 써야겠네 같이 노르만트에 가세." "이제 와서 너무 늦은 게 아니오?" "아니길 바래야지." 블랙 풋의 템플은 덴모주에서 이틀 거리에 있는 깊은 산속이었다. 그리고 던멜은 헤더와 메첼, 그리고 블랙풋의 길드 마스터 제라르가 보고 있는 작은 석실에 있었다. 그리고 석실 한 가운데에는 발락이 쓰러져 있었고, 메첼이 다가가 치료해 주었다. 던멜은 약간 비틀거리다가 곧 천천히 걸어가 제라르의 손을 잡았다. "데마르, 십 년 전, 아란틴아의 여왕을 암살하기 위해 떠난 너의 임무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딱 하나 만은 대답해 다오. 마스터 칼스텐은 후회 없는 싸움 끝에 죽었느냐?" 길드 마스터 제라르는 보지 못 하는 자였고, 던멜은 말하지 못하는 자였으니, 그들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의사 소통은 헤더가 이어줬다. 그러나 이 질문만큼은 던멜이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려 직접 대답해 주었다. "그래, 그랬군 " 제라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네. 나는 발락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고,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었어." 헤더가 조용히 말했다. "발락도 만족할 겁니다. " "나의 뜻을 이해해 주어서 고맙다." 제라르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헤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테마르, 이제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로군. 블랙 풋에 하얀 늑대들을 암살하라고 의뢰한 자에 대해 물었지? 자네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던멜은 그의 손등에 그가 생각한 사람의 이름을 썼다. "그럼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자가 맞네." 제라르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의 의뢰를 받아들여 암살에 성공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지. 카모르트에서 그 자가 없어짐으로 해서 이런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다면, 누구인지 알게야." 던멜이 놀라기도 전에, 제라르의 주름 가득한 손이 그의 손을 꽉 쥐었다. "해답은 그리 벌지 않은 곳에 있네. 그 의뢰인이 바라는 최종 목적을 생각하면 먼저 암살한 카모르트의 귀족에 이어 왜 하얀 늑대들까지 암살하려 했는지 명백해지지. 그리고 완성 단계에 이른 커다란 음모의 한 줄기를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을 거야." 던멜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제라르가 의미하는 사람을 알아냈다. 그러나 굳이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언급하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눈에 검은 발을 새기고 있는 이상. "돌아가거라. 데마르. 너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결코 블랙 풋이 나타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다시는 블랙 풋으로 돌아오지 말거라." 던멜은 제라르의 손을 마지막으로 두들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은 헤더가 직접 배웅했다. 블랙 못의 많은 암살자들이 노려보았으나, 둘은 개의치 않았다.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 하십시오." 던멜은 고개를 저으며 수화로 말했다. '내가 발락에게 준 선물을 그가 이해한다면 그는 칼스텐의 뒤를 있는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블랙 풋의 길드 마스터는 네가 되어야 할 것이다. ' '그런 큰 일은 무리입니다. ' '제라르의 손을 잡는 순간 느겼다. 그는 곧 죽을 것이고, 이후 블랙 풋에 많은 변화가 있겠지. 그 때까지 네가 겪어야 할 시련이 아주 많을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알고 있습니다. ' '영원한 이별은 아니길 바란다. 난 더욱 성장한 너를 보고 싶구나.‘ ‘물른이죠. 발락이 제라르의 아들이라면, 저는 테마르의 딸입니다.' 헤더는 눈물을 참기 위해 애쓰며 웃어 보였다. 딘멜도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있거라.' '부디 몸 조심 하시길.' 던멜은 바위 산을 빠져 나와 말을 놔둔 곳까지 달려왔다. 시작이 노르만트였다면, 결말 역시 노르만트에서 있을 것이다. 던멜은 말을 달리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카모르트에 벌어질 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하얀 늑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을 지도 몰랐다. 팔콘과 헤어진 후, 카셀은 말에서 내리는 순간 지쳐 쓰러져도 좋다는 각오로 말을 달렸다. 체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탓에 저녁 무렵 말에서 내리는 순간, 카셀은 낮에 먹은 제이니의 도시락을 모조리 토해냈다 개울물에 얼굴을 씻고, 입을 헹궜지만 속은 나아지지 않았다. '쉴까? 아냐, 됐어.' 그는 긴 고민도 하지 않고 다시 말을 몰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이러다가 노르만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멈췄다. 팔콘은 정말 좋은 말을 주었으나, 녀석에게도 휴식은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해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원군도 없이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월까?' 카셀은 검은 구름 사이로 힐끗 보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캡틴이니까? 생각해보면 하얀 늑대들 중 누구든 캡틴이 될 수 있었다. 쉐이든은 말할 것도 없이 말을 할 수 없는 던멜도 묵묵히 모두를 리드할 수 있는 캡틴 감이었다. 아즈윈은 동료들을 부드럽게 이끌 줄 알았고, 캡틴 게랄드 하면 유쾌한 하얀 늑대들이 바로 떠올랐다. 최소한 누구든 카셀보다는 나았다. 카셀은 그들의 대변인일 뿐이었다. '자책하지 마.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 난 나름대로 가치가 있어.' 카셀은 루밀의 말을 되새기며, 우울함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악했다. 결국 그런 고민들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에 잠들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뜬 후 카셀은 짧게 중얼거렸다. "가자." 카셀은 무거운 팔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걸어 말에 올랐다. 중간에 마을을 몇 개 지나쳤지만 그는 쉬지 않았다. 몇 번 토하고 나니 음식을 먹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가끔 물 대신 와인만 들이켰는데, 덕분에 공복감은 면했지만 속은 더 울렁거렸다. 저녁이 되자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이 몰려왔고, 해가 떨어짐과 동시에 비가 쏟아졌다. 처음부터 거센 빗줄기로 시작하더니, 밤이 되어도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결국 커다란 나무 밑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바람과 함께 좌우로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는 고스란히 모두 맞아야 했다. 카셀은 모포를 두르고 몸을 떨며 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비를 맞으면서도 깜빡 졸았는데,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는 다시 눈을 했다.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무척 차고 셌다. 그의 주위에는 눈에 불을 밝힌 짐승들이 가득했다. 팔콘의 말은 겁에 질려 몇 번이나 앞발을 들며 울부짖었다. 들개들이었다. 카셀은 아직 잠이 덜 깨 개들이 왜 자기를 포위했는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의 개란 항상 사람에게 충성하는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곧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생각을 달리했다. 전쟁 통에 주인을 잃은 개들이 야성을 되찾아 늑대처럼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 알고 있었다. 카셀은 허리를 더듬거리며 단검을 들었다 개들은 굶주림에 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노르만트는 말을 타고 반나절만 가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을 잃는다면 언제 노르만트에 당도할 지 모를 일이었다.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카셀은 개들을 협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웃음이 나왔다. “말만 앞세우는 멍청한 녀석아, 듣지도 못할 놈들을 상대로 뭘 하려고? 오냐. 캡틴 카셀께서 실력 발휘 한 번 해보자. 나도 칼이란 걸 들었다 피를 흘리며 싸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게 가르쳐다오.” 개들은 당장 말에게 달려들었다. 말은 크게 놀라 앞다리를 치켜 세웠다. 카셀은 고함을 지르며 개에게 달려들었다. 옆구리에 단검을 찔린 개는 몸부림치며 옆으로 굴렀고, 카셀도 같이 진흙탕을 굴렀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입과 눈으로 들어왔고, 차가운 물이 그를 적셨다. '찌른 다음에 당겨라.' 무의식 중에 카셀은 던멜이 해준 충고를 그대로 실현했다. 손을 따라 종이 찢어지는 느낌이 짜릿하게 전해지며 뜨거운 내장이 카셀의 얼굴로 쏟아졌다. 그 다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팔을 물리고 다리를 물리고 하는 와중에 카셀은 미친 듯이 팔을 휘둘러 개의 목을 베었다. 처음에는 피가 뒤고 내장이 살에 닿으니 징그러웠으나, 나중에는 기분이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중에는 죽은 개의 목에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단경을 찌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에 개들이 예닐곱 마리가 죽어있었고, 말의 뒷다리에 채인 개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말도 허벅지와 다리를 물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카셀은 허벅지 근육이 당겨 다리를 펼 수가 없어 왜 그러나 하고 내려봤더니 다리를 문 채로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카셀은 이빨이 박힌 매의 턱을 벌려 옆으로 던졌다. 차라리 피를 흘리자 그 동안의 피로가 씻겨나간 듯 기분이 좋았다. 카셀은 의미 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뒤로 발라당 쓰러졌다. "봐, 이졌지? 아란티아의 늑대가 개 떼들한데 질 리가 없잖아." 카셀은 소리를 지르며 계속 웃었다. 흥분이 가라암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졸음이 쏟아줬다. 카셀은 나무 쪽으로 기어가 물에 젖은 모포를 끌어안았다. "나도 뭔가 할 수 있어. 그렇지?" 어딘지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카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머리가 띵 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몸은 전날보다 훨씬 더 무거웠고, 근육은 딱딱하게 뭉쳐 있었으며, 안 아픈 관절이 없었다. 그래도 카셀은 죽을 힘을 다해 말에 올랐다. 말은 방향을 지시하지도 않았으나 스스로 자기 갈 길을 갔다. 그게 노르만트 쪽인지, 아니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지도 몰랐다 겨우 조금 정신을 차리니, 너른 평야가 나왔고, 전날 온 비에 진흙으로 더럽혀진 푯말에는 ‘노르만트‘라고 쓰여 있었다. 카셀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을 몰았다. 저녁이 되어 산 마루에 도달하자, 노르만트가 보였다. 익숙한 성의 전경을 보는 순간, 카셀은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울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계속 눈물이 났다. 노르만트는 이미 공격 당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성문을 뚫었고, 사방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카셀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너무 늦었어. 멍청아, 늦은 거야." 34.함락된 도시 붉은 장미 백작군의 상당 부분은 만 하루 째 노르만트 앞에 집결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천 명 정도였다가 곧 삼천으로 늘었다가 마지막에는 오천이 되었다. 아직도 흩어진 군대가 명령을 받질 못해 우왕좌왕 하는 시점이라고 되면 모일 수 있는 군대는 모두 모였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 정도 대근이 모였어도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가 이미 드마르프 평원 족에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임시 막사로 지어진 작전 회의실 위에는 열 명의 붉은 장미 백작 수하 장수들이 모여 있었고, 밝은 탁자의 작전 지시 판에는 아무 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뭘 해야 하는지도 다들 모르고 있었다. 다른 장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숫자는?' "삼천.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숫자지, 더 모이면 상당할 것 같소." "우리 쪽 숫자가 많을 때 선공을 날리는 건?" "병력 자체가 파악이 안되어 있는데, 그건 조금 무리요." "하지만 백작께서 안 계신 상황인데, 이렇게 멍청히 있다가 먼저 기습을 당할 수는 없지 않소. 백업 부대라면 미친 척 하고 움직이겠지만, 주력인 우리가 무너지면 모든 게 끝장이오." "백작께서 안 계시기 때문에 더더욱 섣부른 행동을 금해야 하는 거요." "로즈 기사단은 어쩌고 있소?" "모두 모여있으나 마찬가지로 캡틴 링케로부터 연락이 없어 움직이지 못 하고 있소." "총 지취관이 없다고 이토록 명령 체계가 단숨에 무너지다니." 지휘 막사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때 팔장을 끼고 있던 젊은 장수, 루치 뱅상이 탁자 쪽으로 몸을 수그려 말을 꺼냈다. 그는 얼마 전 노르만트 전투에서 낙마하여 실려간 프레드릭 대신 장군이 되어 있었다. "노르만트로 진격하는 건 어떻소?" 그의 의견은 귀족 출신 장수에 의해 즉시 기각 당했다. "무슨 엉뚱한 소릴? 나라 전체의 적이 되고 싶은 게요?" 루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전에도 한 번 그러려 했으니, 이번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해 본 거요." "백작께서 그런 작전을 당시 지시했던 건 전략상의 협박 정도였지, 정말 노르만트를 함락 시킬 생각은 없었을 거요." 루치는 괜한 논쟁으로 힘을 빼지 않고 포기했다. 회의는 지루하게 길어졌고, 루치는 잠시 쉬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노르만트의 성이 보였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두 백작도 차마 건드리지 못 하는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카모르트의 수도....... 그러나 루치의 눈에는 정복해야 할 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루치는 붉은 장미 백작에게서 직접 작전 지시를 받은 적이 있어, 노르만트에 병력이 거의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코 앞에 함성 한 번이면 차지할 땅이 있고, 뒤통수에서는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뭘 더 망설이란 말인가? 루치는 저 멍청한 장수들을 모조리 목 베고 당장 오천의 군대를 진군시키고 싶어 안달이 났다. 전날 시원하게 비가 내려 공기는 무척 차고 습했다. 루치는 잠시 말에 올라 군대를 살피며 기분을 전환시켰다. 그는 전투 몇 번 만에 장수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만족하지 않았다. 왕위를 노리는 터무니 없는 짓까지는 할 생각 없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왕의 성을 무너뜨린 장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싶긴 했다. 그 기회는 벌판을 가로질러 로즈의 기사 한 명이 달려오는 걸 발견하면서 찾아왔다. 루치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지친관 루치 뱅상입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쏜즈의 기사시여." 등에 은빛 창을 젊어지고 있는 붉은 갑옷의 기사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휘관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쏜즈의 기사 네프다. 캡틴 링케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왔다. 현재 이 곳에 몇 명의 군대가 집결되어 있는가?“ "대략 오 천이며 이백 오십 여명의 로즈 기사단도 함께 있습니다." "충분한 병력이군.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노르만트를 공격한다. 지휘관들에게 알려라." "지금 당장 말입니까?“ 루치는 머리 위에 있는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며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나, 네프는 긴 논쟁을 하지 않았다. “빠를수록 좋다” 루치는 알았다고 하려다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어 말을 고쳤다. "총 지휘관이 없는 데다가 각 부대의 지휘관들만 모두 열한 명입니다. 오천의 군대를 이동시키는데, 서로 의견 조율을 하고 작전 논의만 하는데 반나절은 걸릴 것입니다.“ 네프는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휙 던져주며 말했다. "본즈의 이름으로 권한을 줄 터이니, 아무나 총 지휘관을 맡아라. 그리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노르만트를 함락 시켜라. 만약 그렇게 못할 시에는 내가 직접 너희 지휘관들을 모조리 목 베어버리겠다.“ 루치는 그 정도 협박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넘기고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백작 님께서는?“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예의상 물어본 거라 루치도 더 캐묻지 않았다. 네프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루치는 그의 검을 내려다보고 큭큭 대고 웃었다. 지나치게 빨리 찾아온 기회니, 잠시 여운을 즐기기 위해 멈춰 하늘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막사로 돌아갔다. 그들은 후퇴할 것인지, 전투를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반복되는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루치는 탁자를 두 손으로 내리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방금 본즈의 기사가 명령을 하달하고 갔다. 모든 군대는 노르만트로 진격한다." 지휘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 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루치는 본즈의 문장이 박혀 있는 네프의 단검을 탁자에 내리꽂았다. "그리고 모든 지휘권한은 내게 있다. " 그 단검은 어떤 말보다 설득력이 강했다. 사실 어제의 용병이 다음날 한 부대의 대장이 되는 등, 지금까지도 느닷없는 승진 조치가 있어 왔다. 지휘관이었던 이가 총 지취관이 되는 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다. 따지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지휘관들도 쏜즈의 검 앞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루치는 미리 반발을 없앨 협박을 가했다.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분하겠다. 전군 출병 준비." 노르만트 왕실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모든 대신들이 호출되었고, 세이게이 장군과 하얀 늑대들의 대표로 쉐이든이 참석했다. "붉은 장미 군의 위치는?“ "상당히 접근해 있습니다. 서쪽에 오백, 북쪽에 천, 남쪽에 오백정도의 군대가 몰려 있으며, 동쪽에는 약 삼천 명 정도의 군대가 포진되어 있습니다." "지금 최종 명령만 준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폐하,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입니다. 이미 선전 포고를 내린 상태며, 항복을 권유할 생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국왕은 머리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힘 없이 쉐이든을 바라보았다. "캡틴 울프에게서는 연락이 없소? 원군을 데리러 갔다 하지 않았소?“ “오지 않았습니다." 쉐이든의 짧은 대답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보다 국왕을 실망시켰다. "세이게이 장군 장군의 힘으로 저 군대를 막을 수 있겠소?“ 지금까지 항상 낙관적이던 장군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병력으로는 한 시간도 막아낼 수 없습니다.“ 말 많던 대신들도 침묵 했고, 국왕은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자신의 뜻을 말하길 계속 주저하던 두나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시를 포기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다른 대신이 당장 소리를 질렀으나, 세이게이 장군이 말렸다.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망설이던 두나단은 장군의 배려에 용기를 얻어 말했다. "정보로는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가 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내일? 어피면 오늘? 계속 승기를 잡고 있었던 붉은 장미 백작 군이 굳이 서둘러 노르만트를 공격하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은 지금 우리가 모르는 어떤 계기로 인해 되려 쫓기고 있는 상황이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할 마지막 방법으로 국왕 페하를 사로 잡는 방법을 택한 겁니다. 그럼 검은 사자 백작도 함부로 노르만트와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공격할 수 없게 됩니다." 과격한 발언이긴 하나 틀린 건 없었다. 다들 수긍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국왕도 계속 하라는 뜻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그걸 노리고 있다면, 반대로 페하만 안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노르만트를 포기하십시오, 폐하. 그리고 왕성만을 지키는 겁니다. 아무리 오천의 군대라도 이 안에만 숨어있다면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대신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위급한 상황이라 그런지 두나단의 의견을 매우 그럴싸했다. 국왕도 얼른 세이게이 장군에게 물었다. "어떻소, 장군? 가능하오?“ "방어 위주로 지어진 성은 아니지만, 하루 정도라면 우리 쪽 병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루오르 대신이 얼른 장군의 의견에 이어 말했다. "그리고 검은 사자 백작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그는 기꺼이 폐하의 신변을 보장할 겁니다. 이번 전쟁으로 왕실의 적이 누구인지는 명백해지지 않았습니까? 또한 경은 사자 백작은 분명 샤아필드 공작의 뒤를 잇는 수호 가문의 자격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원래 검은 사자 백작 측의 귀족 출신이었던 터라 항상 그런 주장을 펴왔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두의 동의를 얻는 진 처음이었다. "검은 사자 백작에게 노르만트를 지켰다는 영광을 준다면 더욱 황실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이번만큼은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왕실이 단독으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두나단 역시 거기에 적극적이었다. 계속 듣고만 있던 쉐이든은 조용히 세이게이 장군을 불렀다. "우리는 따로 작전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럽시다. " 장군도 동의하며, 국왕에게 인사한 후 회의실을 나섰다. 장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적이 누구인지도 모호해졌군. 검은 사자 백작을? 고양이를 죽이려 사자를 끌어들이는 격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군.“ “그건 어디까지나 오늘 하루 동안 이 성을 지켰을 때의 얘기요, 장군. 눈 앞의 적에 신경 쓰도록 합시다.” "왕성 만을 지킨다라....... 두나단의 의견은 확실히 근거는 있어. 당신 생각은 어떻소?" "화살은 넉넉히 있습니까?“ 장군은 너무 간단한 사실을 잊고 있던 터라, 그만 걸음을 멈춰버렸다. 쉐이든은 냉정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배후의 적군이 압박해 온다면 필사적이 될 수 밖에 없소. 게다가 그들은 검은 사자 백작과 전쟁을 벌이며 성을 무너뜨리는 법을 습득한 자들이오. 보셨겠지만, 열 대가 족히 넘는 공성 무기를 가지고 있더군요. 아무리 성문을 굳게 닫아둔다 해도 그들은 전력을 다해 성벽을 넘어올 거요." "창고를 뒤지면 최소한의 화살은 나을 거요." "궁수도 모자라오." "일반 병도 어느 정도 활은 쏠 줄 아오." "어느 정도라면 어느 정도요?" 장군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럼 나보고 저 희망 가득한 회의실에 들어가, 생각해보니 못하겠다 라고 말하라는 거요?" "아니, 현실을 보고 다른 대처 방안을 세우자는 거요. 우선 왕성에 수비력을 집중시키자는 의견에는 동의하오. 모든 병사들을 이곳으로 집중 시키고, 노르만트 시민들을 성의 지하실로 대피시키시오. 왕을 빼앗기만 하면 끝나는 싸움이지만, 흥분한 병사들이 죄 없는 시민들을 해치지 않길 기대할 수는 없소." "그 다음은?" 쉐이든은 창가에 서서 먼 곳에 까마득히 깔려 있는 적병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익셀런 기사단 삼백이 카모르트의 보병 이천을 무너뜨리면서 아크랜드 대륙 정벌 전쟁이 시작되었소. 그건 나보다 세이게이 장군이 더 잘 알 거요." "과거의 패배는 쓰라리게 기억하고 있지. 그건 갑자기 왜 들추는게요?" “그리고 익셀런 기사단 삼백을 울프 기사단 오십이 꺾었소.” "갑자기 왜 무슨 소릴.......“ "장군께서는 그 얘기에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진지하게 묻는 쉐이든의 눈을 보고 장군은 그냥 할 말을 잃었다. "친구들과 잠깐 얘기 좀 해봐야겠소. 장군께서는 총력전을 준비해 주시오." 쉐이든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게랄드, 아즈윈, 쉐이든, 셋은 한 방에 모여 잠깐 동안의 침묵으로 서로에게 의견을 물었다. "결국 카셀은 오지 않았군. 던벨도, 로일도, 누구 하나 도우러 오지 않았어.“ 아즈윈은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다. 카셀을 내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 녀석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뭔가 했을 거다." 쉐이든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결과론이야. 녀석이 원군을 데리고 왔다면 달라졌을 것이고, 던멜이 로일을 데리고 왔어도 뭔가 달라졌겠지. 당시 우리가 생각하던 최선의 선택이었는데, 맞아 떨어지지 않은 것뿐이야.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너희들이 나랑 같이 있다는 것에 있어. 나랑 같이 있어. 잘 된 놈들이 없었거든." 게랄드가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아즈윈이 면박을 주었으나, 게랄드는 여전히 유쾌하게 웃었다 "그보다 아즈윈의 부상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어찌지?' “난 움직일 수 있어." 아즈윈이 말하자, 게랄드는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아즈윈은 비명도 못 지를 만큼 괴로운 나머지, 입만 벙긋거렸다. "움직일 수만 있는 비 전투원은 성안의 시녀들로 충분해. 너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지 말고, 얌전히 환자처럼 엎어져 있도록. 그보다 작전은?" 게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도끼를 들었다. "왕성으로 모든 전투력 집중. 그 후 방어에 전념." 쉐이든이 짧게 설명했다. "뭘로 방어 할거래? 돌? 화살? 공성에 대비한 게 아무 것도 없잖아." "그게 문제지. 하지만 우리가 나선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쉐이든은 어깨를 으쓱하며 옆에 걸어놓은 철창을 쥐었다. 게랄드는 그의 생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나? 지켜야 할 의리라던가.......“ "최소한 카셀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야지." "쫓아낼 때는 언제고?“ "기다리기 위해 내보낸 거지." "변명 하긴.......“ 게랄드는 씨익 웃었다. 아즈윈은 아직도 게랄드가 후려친 등이 아파 인상을 구긴 채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엄하게들 죽지 마." "설마 이런 곳에서 죽을라고? 사랑하는 아즈윈을 미망인으로 만들었다가 무슨 큰 일을 당하려고?" 게랄드가 도끼를 어깨에 얹은 채 한 손을 내밀자, 아즈윈은 그 손에 이끌려 그를 껴안았다. "그래, 나 미망인 만들지 말고......," 그녀는 뒤이어 쉐이든을 껴안고 그의 볼에 살짝 키스해주었다. “......둘 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 그러고 얼른 아란티아에 돌아가 마스터의 엉덩이를 걷어 차주자. 정말 지랄 같은 임무를 내려줬다고.” 쉐이든이 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죽을 곳은 아란티아의 여왕 님 앞이야. 그러니 이 싸움도 결국 그 분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자." “그래, 난 정말 이 말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이런 자잘한 전투에서 써도 되나 모르겠다? 해도 돼? 허락을 맡고 싶어." 게랄드가 도끼를 내밀며 묻자, 쉐이든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게랄드는 힘 있게 쉐이든의 창에 도끼를 부딪히며 외쳤다. "아란티아의 여왕을 위하여." 아즈윈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검을 빼, 둘의 무기에 부딪혔다. "좋아 나도 허락하지. 아란티아의 여왕을 위하여 " 쉐이든도 거기에 합세했다. "아란티아의 여왕을 위하여." 셋의 무기가 하나가 되어 좁은 방의 천장에 닿았다. 거대한 함성의 물결이 노르만트의 성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전방의 모든 병사들은 엄청난 반격을 예상하고 방패로 무장하고 달려왔으나, 공격은 없었다. 괜히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에 기어오른 병사들은 그 황량함에 할 말을 잃있다. 외곽 성벽을 지키는 병사가 없었다. 어떤 제지도 없이 들어온 선발대는 오히려 진군을 멈추었다. "장군을 불러라!" 선발대의 기사가 목청껏 외쳤다. 이미 그런 현상은 각 성문마다 벌어지고 있었다. 후방에 안전하게 있던 루치는 즉시 말을 달려왔다. "뭔가 이상합니다 일단 후퇴해서 상황을 살피심이.......“ 기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루치는 그의 말에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저물어 가는 태양이 그를 제촉했다. “외곽성벽 방어를 포기한 것뿐이다. 아마 모든 병력은 왕성에 집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장군?" 방금까지만 해도 같은 직급의 지휘관이었으나, 이제 루치는 완벽하게 상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출세 중 가장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하긴? 진격한다 뻔한 작전이지 않나? 오히려 쉬워진 거다. 왕성 하나만 무너뜨리면 돼." 루치는 이미 노르만트의 집들은 부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었으나, 한 번 더 강조했다. 루치는 어쩌면 이 집들이 모두 자기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르만트 중앙에 솟아있는 국왕의 성은 성벽도 그리 높지 않고, 외부의 공격에 버틸 수 있도록 튼튼하지도 않았다. 서쪽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미 노르만트는 살육과 파괴의 현장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다수 시민들은 이미 어딘가로 대피한 것 같았으나,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이가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붉은 장미 군의 병사라는 건 대부분 여자와 돈과 음식에 굶주려 있는 용병들이었다. 덴모주에서 지켜지는 군기가 점령지에서까지 지켜지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서쪽에 이어 북쪽에서도 약탈을 뜻하는 소음과 불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루치는 빨리 왕성을 점령하고 그 약탈을 중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개 안 되는 터렛과 갤러리 위에 왕의 병사들이 창과 활로 무장하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활 시위에 화살을 재지도 않고 조용히 바깥상황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방패를 하나 들고 루치는 앞으로 나가 크게 소리질렀다. "노르만트는 이미 함락되었다. 성문을 열고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맞으라." 그 때 성문 위족에서 나이 든 장수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국왕 페하께서 계신 곳이다. 예의를 갖추라. 그리고 나는 붉은 장미 백작과 직접 대화하고 싶다. 나는 왕실의 장군, 세이게이다." 루치는 다 진 상황에서도 예의 따지는 멍청한 늙은이를 상대로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 총 지휘관 루치 뱅상이다. 지금 나는 백작의 모든 뜻을 대신하고 있다. 성문을 열어라. 내가할 말은 오직 그것밖에 없다. 다른 협상의 여지를 내비친다면 너희들은 삼천의 군대가 쏟아내는 총 공격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루치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 친구들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했다. 그의 앞에서 아이들은 항상 두 손을 비비며 자비를 구했다. 그런 아이들을 더욱 짓밟으며 그가 배운 것은 약한 자를 굴복시키는 방법이었다. 불리한 자가 제시하는 협상이란 대체로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꾸며내는 거짓말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 성벽의 노인이 그랬다. 그는 루치를 설득시킬 만한 어떤 조진도 제시할 수 없었다. 루치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즉시 총공격을 명할 생각이었다. "좋다. 성문을 열겠다. " 장군은 손을 내저어 명령했고, 진짜로 도개교가 밑으로 내려왔다. 루치는 진격 명령을 내리려던 손을 어색하게 들었다가 접었다. 도개교 입구를 통해 오른손에는 두 자루의 할버드를 한꺼번에 쥐고 왼손에는 커다란 방패를 든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도개교의 중간쯤에 서더니 등에 매고 있던 철로 만든 가장 묵직한 창을 바닥에 힘껏 박아놓았다. 또 두 자루 할버드 중 한 자루는 철창을 꽂은 반대편에 소리 나게 내리꽂았다. 그리고 방패와 할버드를 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 녀석이 쓰러질 때까지 아무도 다리를 넘을 수 없다는 뜻인가?" 루치는 비웃으며 말했으나, 이미 성루의 장군은 보이지 않았다. 루치는 입맛을 다시며 상대방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다리를 비켜주지 않는 영웅들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보았으나, 그런 것에 환상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실적으로 보면 저건 군의 사기 문제일 뿐, 전략상 대단할 것도 없는 작전이었다. 성문을 뚫기 위해 희생할 병력이 천 명이라면, 열린 다리로 뛰어드는데 필요한 병력은 열 명이었다. 설사 저기 서있는 기사의 힘이 전설 속에 나을 만한 괴물이라 해도 오십 명이면 끝날 일이었다. "로즈 기사단!" 루치는 부르자, 당장 여섯 기사들이 말을 몰아 루치의 옆에 섰다. 한달 전만 해도 자기 쪽에서 굽실거려야 했던 기사들을 손짓 하나로 불러낼 수 있는 자신의 위치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저 자가 기사도를 가르쳐 줄 생각인가 보다. 가서 저 자를 쓰러뜨리고 노르만트의 왕성을 접수할 용감한 기사가 있느냐?“ 기사들은 과감히 서로 하겠다고 나섰다. 루치는 제일 왼쪽에 있는 기사를 지목하여 내보됐다. 그는 당장 달려가 다리 위의 남자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다리 위의 기사는 할버드를 크게 한 번 휘둘러 로즈의 기사를 말 위에서 떨어뜨렸다. 응원하던 아군의 목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낙마한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 두 번째 로즈의 기사가 달려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쉽게 결말이 났다. 두 번째 기사는 목이 날아가 도개교 밑에 흐르는 작은 개울까지 굴렀다 주인 잃은 두 마리 말이 도개교 위에서 서성대다가 한 마리는 입구 안으로 들어갔고, 한 마리는 로즈 기사단 쪽으로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제가.......“ 한 명이 또 나서자, 루치가 저지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건 시합이 아니다. 기사토를 논하거나 내 의견에 반대하지 마라. 너희들 전원이 가라. 놈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정면 대결을 하게 해서 시간을 끌 셈인 것 같군. 끌려 다닐 필요 없다." 루치가 고갯짓을 하자, 로즈 기사 여섯은 내키지 않아 하다가 곧 도개교를 향해 달려갔다. 병사들은 그 동안 보아온 로즈 기사단의 용맹을 다시 한 번 보길 기대하며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 함성은 또 한 번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달려간 로즈의 기사들은, 멀리서 보기에 뒤에서 줄을 묶어 잡아당긴 것처럼 한꺼번에 말에서 떨어했다. 목이 베어 터져 오른 핏방울을 몸으로 받으며 서 있는 남자는 여전히 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주인 잃은 말들만 방황했다. 루치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군대는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렸다. "하얀 늑대다." 그 소리는 점점 피져 모두의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전달되었다. "하얀 늑대.......“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 병사들 사이에 커다란 공포가 내려맞았다. 그건 루치도 마찬가지였다. 도끼를 든 기사가 링케를 한 번에 내리친 그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왜 불리한 건 줄 알면서도 도개교를 내렸는지 알았다. 저런 엄청난 인물이 다리에 떡 하니 버터고 있으면 감히 누가 달려들겠는가? 옆에서 다른 지취관도 당장 이런 소리를 했다. "후퇴해서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어떻습니까? 눈 앞의 적도 적이지만,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두렵군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루치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빠른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까지 챙겨온 그 수많은 기회보다 지금 당면한 기회가 더 큰 걸지도 몰랐다. 루치는 그걸 놓쳐 후회할 짓은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장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휘관이 묻자, 루치는 대꾸했다. "드래곤을 죽인 자에게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따로 칭하는 이유가 뭔가? 왕을 죽인 자를 킹 슬레이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뭔가? 그건 그만큼 그 대상이 죽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그럼 하얀 늑대를 죽인 자는 뭐라고 불릴까? 울프 슬레이어?" 루치는 큭큭대고 웃으며 손을 들었다. 궁수들이 활시위에 화살을 재고 중무장 보병 부대가 전진했다. "나는 저 자에게 군대 하나를 상대하며 장렬히 전사했다는 영웅의 이름을 선물하겠다. 아마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그를 찬양하는 시를 읊을 것이고, 카모르트 역사에 그를 기리는 역사가 몇 줄 쓰여지겠지. 나는 그 대가로 기꺼이 영웅을 죽인 사악한 장수로 이름을 떨치겠노라." 루치는 큰 소리로 명령했다 "전군, 돌격하라. 다리 위의 하얀 늑대를 죽이는 자에게 노르만트를 영지로 선물하겠다!" 게랄드도 성의 뒷문으로 가는 법은 뜰에 멍청히 서서 쉐이든이 혼자서 군대를 모조리 도맡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절대 이 곳에 있지 말아야 할, 아니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열 두 명이 나타나 그의 길목을 막고 있었다. 게랄드는 도끼를 낀 채 팔장을 끼었다. "지금 당장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두 가지가 의문점이 있는데 말이다. 물어봤자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으니, 어떻게 들어을 수 있었는지는 묻지 않으마, 링케. 뭐 하러 들어왔는지나 묻자. 지나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붉은 갑옷의 기사 열두 명은 게랄드 만큼이나 느긋하게 무기도 꺼내지 않고 서 있었다. 링케는 허리에 찬칼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국왕을 암살하러." "암살 치고 열두 명이면 너무 요란한 거 아니냐?“ "요란해야 좋지. 우리가 그랬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었거든.“ "그건 붉은 장미 백작의 뜻이냐?" "아니 , 그는 죽었다." 게랄드는 전혀 새로운 뉴스에 고개를 갸웃했다. "죽어? 그럼 밖에 있는 저 군대는 뭐야?" "양동 작전이라고 해두지." "무척이나 스케일 큰 농담이군." 게랄드는 혀를 내둘렀다. "우리는 이 곳에서 너를 만나길 기대하지 않았다." 게랄드는 일제히 검과 창과 방패를 지켜 드는 열두 명의 붉은 기사들을 바라보며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다. "어지간하면 사정 좀 봐주지? 동료를 몇 붙이는 건 좋은데, 이건 좀.......“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는 건 당연하지 않나, 게랄드 하란?“ 게랄드는 도끼를 양손에 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좋아. 일 대 다수의 싸움은 진력이 나도록 해봤으니까. 잠깐, 근데 너 전에 나한데 당한 얼굴의 상처는 채 없어졌냐?" 링케는 그 질문은 무시하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희생 없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넷 정도는 도끼에 맞아줘라. 그 때 빈틈이 생길 거다." 게랄드는 이 과격한 명령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링케는 여전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자, 이 정도 작전을 노출 시켜줬으면 어느 정도 공평하겠지?" 링케가 칼을 뽑으며 신호하자, 열한 명의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한 명 한 명이 카모르트에서 만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실력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게랄드를 에워쌌고, 게랄드는 그들을 사방에 두지 않기 위해 발을 빨리 놀려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게랄드를 쉽게 놔주질 않았다. '이 자식, 한 명을 집중 공격하는 훈련을 했군.' 그들은 게랄드를 민첩하게 포위하면서도, 서로의 경에 방해 받지 않을 정도의 간격을 계속 유지했다. 그들은 마치 스물두 개의 팔과 열한 개의 분열된 몸을 가진 한 명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동시에 움직이는 수준이 이 정도까지 되면, 단순히 여러 명과의 대결이 아니었다. 도끼와 창이 교차했고, 정면의 칼을 방어하고 나면 뒤통수를 노리고 또 다른 무기가 찌르고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게랄드는 과감한 도끼질로 상대의 방어를 무너뜨리며 물러섰다. 링케는 그 포위망 안에 섞여있지 않았다. 게랄드는 처음부터 링케를 친 번째 타깃으로 생각했는데, 그는 한참 뒤 쪽에 물러나 있었다. 게랄드는 갑자기 정지하며 싸움의 흐름을 일순간 끊었다. 쏜즈의 기사들이 잠깐 동안 머뭇거리는 타이밍을 노리고 게랄드는 한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그랗게 싸고 있는 좌우에서 창을 필러 넣었으나 그는 거의 무시하고 눈 앞의 기사의 목을 날려버렸다. 결국 포위망에서 탈출했으나 기사들은 계속 그의 주위로 따라붙었다. 탈출하면서 팔을 조금 찔렸으나, 그는 그 부상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이 몰려드는 기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게랄드는 뒤로 물러서며 또 한 명의 목을 쳤다. 하지만 잠깐 멈춰선 대가로 가슴을 칼에 베이고 어깨를 창에 스쳤다. 게랄드는 뒤로 점프하듯 피했다. 등 뒤를 치는 것은 벽이었다. "둘." 게랄드가 중얼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를 듣고 링케가 대꾸했다. “어디까지 셀 수 있을까?" "물론 열 둘까지지." "벌써 지친 건 아니고?" 게랄드는 도끼를 세우고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는 심지어 눈을 감기까지 했다. 너무 빈틈이 많아 그를 둘러싼 아홉 명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링케, 내가 너한테 그 동안 실력이 하나도 안 늘었다고 말했었지?“ 링케는 대꾸하지 않고 신호했고, 동시에 아홉 명이 칼을 내질렀다. 사라졌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게랄드는 크게 앞으로 몇 걸음을 달려나갔다. 부채꼴로 감싼 포위망의 중앙이 들리며 두 명이 옆구리를 감싸며 고꾸라졌다. 어느 새 게랄드는 링케의 앞에 서 있었다. 충분히 무서운 속도의 공격이었으나 링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검만 내밀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냐, 게랄드 하란?" "넌 아직도 용병 티를 벗지 못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잘 봐둬라, 링케. 지금부터 네가 볼 사람은 불의 용병, 게랄드 하란이 아니라 하얀 늑대의 기사, 게랄드 울프다." 일곱 명의 기사들은 동료 네 명이 당한 후에도 조금도 물러서는 기색 없이 다시 게랄드를 감싸기 시작했다. 게랄드는 다른 기사들을 무시하고 링케를 향해 도끼를 내질렀다. 링케는 첫 번째 공격은 막았으나 두 번째는 막지 못 했다. 링케의 오른쪽 팔이 피를 흩뿌리며 허공을 날았고, 게랄드는 그를 걷어차며 뒤로 돌며 도끼를 수직으로 쳐올렸다. 그의 등을 노리던 세 자루 창이 부러졌다. 게랄드는 피하지 않았다. 다섯 번째 기사의 목이 날아갔고, 여섯 번째 기사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게랄드의 손에서 마치 채찍처럼 휘어지는 도끼는, 공격 범위 조차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길게 뻗어나갔다. 일곱 번째 기사는 가슴에 박힌 도끼를 손으로 움겨쥐고 반격을 시도했으나, 되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푸른 정원은 순식간에 피로 범벅이 됐고, 벽에는 목이 잘리며 뿜어져 나간 붉은 핏자국이 추상적인 예술 작품처럼 얼룩졌다. 여법 번째 기사는 바로 그 벽에 내던져지며 빼앗긴 자신의 창에 배를 찔했다. 아홉 번째 기사는 거대한 칼을 휘두르며 끝까지 게랄드를 괴롭히던 크라브 지크였다. 그의 무거운 공격을 계속 받아내느라 팔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그의 검은 두 동강이 났고, 열 번째 기사와 함께 목이 잘려 쓰러졌다. 게랄드는 숨을 몰아 쉬며 열한 번째 기사와 남은 한 손에 쥔을 지방이 삼아 서 있는 링케를 노려보았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들도 몇 있었으나, 모두 전투 불능이었다. “한 가지만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게랄드." 링케는 반만 뜬 눈으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난 나름대로 아주 강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니더군.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이들이 너무 많아. 그 중 너는 나를 충분히 좌절시졌다. 나는 언제나 죽을 힘을 다해 훈련했고, 그 목표의 끝은 너였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눈으로 들어가 게랄드는 잠깐 한 쪽 눈을 비볐다. 얼굴이고 팔이고 그의 것이 아닌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피가 또 들어갔나 싶어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했다. “그런데 세상에는 너만 있는 게 아니더군. 나는 돈도 몇 푼 안 되는 용병 짓을 하다가 드래곤 기사단을 만났고, 목숨 대신 양팔을 잃었다. 지금 너에게 당한 지금처럼 말이야. 사실 목숨보다 자존심을 빼앗기는 순간이었지." 링케는 힘줄이 너덜거리는 팔을 움켜쥐며,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웃었다. 손가락 틈으로 붉은 피가 주루룩 흘러나왔다. "누군가 날 돕더군. 붉은 장미 백작, 그는 내게 팔을 주었고, 또 이전보다 두 배, 세 배에 가까운 힘을 주었다. 그 힘이면 드래곤 기사단이든 울프 기사단이든 문제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군. 얼마 전에 나는 네 친구 놈에게 또 한 번 패배했다.“. "친구?" “그래, 창을 들고 있는 그 놈에게 교회 앞에서 말이지.” 여전히 회복되지 않는 어두운 시야 너머로, 굵은 핏줄에서 피를 벌컥 벌컥 뿜어내고 있는 목 없는 기사와 다리가 없는 녀석이 휘청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게랄드는 그제야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 진짜 주위가 어두워진 것임을 알았다. "네가 아직 처치하지 못한 이 친구 이름은 드뤼포라고 하지.“ 링케가 소개한 열한 번째 기사는 거대한 할버드를 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한 번 당신에게 빼앗겼던 팔은 당신의 캡틴이 돌려주었소.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정원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본즈의 기사들이 모두 일어났다. 링케는 은 목걸이를 들어 입을 맞추며 말했다. "우린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섬기는 열두 사제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뿔 나팔을 길게 불었다. 처음에는 낮고 우렁찬 평범한 나팔 소리가 울리더니 점점 귀청을 및을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은 안개가 주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풀 빛이 가득해야 할 정원은 순식간에 밤처럼 어두워졌고, 나무들은 생기를 잃고 축 늘어졌다. 제일 먼저 드리포의 갑옷이 물감에 담근 하얀 천처럼 어둠을 빨아들였다. 잃어버린 목이 공처럼 통통 튀어 목 없는 기사의 머리에 돌아가 붙었다. 그것은 분명 한 번 봤던 광경이었다. 그제야 게랄드는 그들이 어떻게 성벽을 넘어 이 곳에 있을 수 있는지 알았다. '링케, 이게 네가 생각한 강해지는 방식이냐?" 게랄드가 말했다. 링케의 몸도 점점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너 같은 재능 많은 이가 납득할수 없는 방법이겠지. 자, 와라, 게랄드. 다시 한 번 열둘이다." 처음에는 인간의 목소리였으나, 마지막 부분에서는 더 이상 무슨 발음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괴이한 소음으로 변했다. 부서졌던 자신의 몸을 모조리 원래대로 붙인 열두 명의 검은 기사가 게랄드의 주위로 다가왔다. 아즈윈은 성 전체를 흔드는 적들의 함성 소리를 듣는 순간, 도저히 참지 못 하고 잠옷을 벗어 던졌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옷을 갈아입고 검과 방패를 챙겼다. 붕대가 옷에 스칠 때마다 눈물 날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그녀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기운차게 복도를 나섰으나 그녀는 몇 걸음 걷지 못 하고 벽에 손을 짚었다. "부상자 좋아하시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 때 듣는 것만으로 등의 상처가 또 및어지는 것 같은 끔찍한 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아즈윈은 성의 정원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넘어졌다가 일어나길 몇 번 반복했다. 입안에 피가 고였다. 처음에는 반사적으로 뛰었으나 점점 정원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뭘 망설이고 있냐, 아즈윈?' 그녀는 입에 고인 피를 밭아냈다. 시뻘건 핏덩어리를 보자 모든 용기가 한 번에 꺾였다. 그녀는 결국 정원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멈춰버렸다. '무서운 거야?' 그녀는 어떤 막강한 적을 만나도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한 번 패했다면 오히려 투지를 불사르는 그녀였다. 딱 한 번,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한 사람은 그녀의 어린 시절 검술 스승이었던 외팔이 무사였다. 그는 그녀에게 공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그 이후 그녀는 공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이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싸움의 승패와는 상관 없이 그녀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존재가 한명 더 있었다. 그건 그녀가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첫 번째로 해치운 살인자였다. 그는 여자의 자른 목을 그녀에게 굴리며 낄낄대고 웃었다. 그건 가끔 그녀의 악몽에까지 등장하는 공포를 지금까지 안겨주었다. 잃어버렸던 그 공포가 다시 살아난 건 검은 기사를 본 다음부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하며 질책했다. 싸움에서 패한 것도 아닌데 검은 기사를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밖에 있는 존재가 무서운 게냐, 네 안의 공포가 무서운 게냐?" 금발의 긴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묶은 중년의 남자가 복도를 걸어왔다.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배낭을 고쳐 맸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왔더니 여기 울고 있는 꼬마 숙녀가 있구만." "누구요?" 아즈윈은 눈을 부릅떴다. “어제 몰래 성 안으로 잠입했다가 오늘 아침까지 부엌에 숨어있던 사람. 그리고 지금은 이상한 나팔 소리를 추격해서 달려온 사람. 자, 이제 자네 얘길 해볼까, 기사 울프? 자넨 지금 밖의 존재가 무섭지? 난 지금 몇 달, 아니 몇 년 패 저 검은 기사를 추적해왔는데, 목격자 전원이 그들은 무섭다고 했네. 자네가 무섭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그러니 솔직하게 말해보게." “이 와중에 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소. 그리고 내 이름은 아즈윈이요.” “그렇군, 아즈읜 울프. 그럼 지금 성문을 막고 있는 기사는 쉐이든이고, 저기 문 밖에 있는 기사는 게랄드인가?" 왕실에 들어와 조금만 귀를 세우면 그 정도 이름은 금방 들을 수 있을 데니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당신이 누군데 참견하는 지 몰라도 그럴 시간 없소. 그리고 난 저 괴물딱지들이 조금도 무섭지 않소." "정말?" 무슨 의도였든, 아즈윈의 귀에는 놀리는 투로 들렸다. 그녀는 홧김에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그가 더 빨리 자신의 검을 뽑아 그녀의 목에 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살기 하나 나타나지 않은 그의 공격에 아즈윈은 그만 얼어붙었다. "이것 보게. 내 이런 간단한 공격도 대응하지 못할 거면서 나가 뭣 하겠나? 방패 노릇 하려고? 아서 그건 개죽음이지." "부상만 아니.......“ 그녀는 부상 때문이라는 변명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칼을 집어넣고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게랄드는 용병 생활을 통해 수없이 패배를 겪으며 성장했다지. 쉐이든은 너무 늦게 시작한 탓에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진다는 것에 공포가 없어. 하지만 아즈윈이라는 아이는 지나치게 재능이 뛰어난 나머지, 아직 진짜 패배를 맛보지 못했다더군, 그렇기 때문에 별 거 아닌 상상에 빠져 두려움을 갖는 거 아닌가? 솔직히 말해 보거라, 아즈윈. 뭐가 무서운 거냐?" "제가 무서운 건......,“ 그의 눈빛 속에서 아즈윈은 자신이 처했던 모든 공포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처음 침대에서 뛰쳐나오게 한 공포를 능가하지 못 했다. "친구들이 위험에 처했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그렇군. 그래야 하얀 늑대답지." 아즈윈은 순간 그의 말투나 표정이 퀘이언과 너무 똑같아 그만 마스터라고 부를 뻔 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글쎄, 뭐랄까? 자네 캡틴이 암브루에서 보낸 원군이라고 해두지.“ 그는 빙그레 웃었다. "카셀이?" "자네들을 걱정하며 부탁하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내 할 일을 잠시 제쳐두고 노르만트로 달려왔다네." 그는 가방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난 항상 가장 위험한 순간이면, 이게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다네. 정작 쓰지는 않았지만. 루터아의 마법사 친구가 선물한 걸 십년이나 가지고 다닌는데, 지금 써도 아까울 게 없겠어." 그는 그 가루를 아즈윈의 머리 위에 뿌렸다. 한 알 한 알이 보석처럼 빛나는 하얀 가루가 그녀의 머리를 타고 몸 여기저기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마치 발가벗은 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묘한 황홀함을 느꼈다. 등의 고통 같은 건 완전히 사라졌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아즈윈이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난 그저 은퇴한 울프 기사단의 자문역이자, 제자 키우느라 고민 많은 퀘이언의 친구일 뿐이네." 그의 대답에 아즈윈은 픽 웃었다. 아즈윈이 문을 열자, 저녁의 붉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가 물었다 “도와줄까?" "현역에게 맡기십시오." 아즈윈은 목덜미를 주무르며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쉐이든이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의 훈련병으로 있을 때였다. '피를 싫어하나, 아니면 사람을 죽여본 게 처음인가?' 훈련병으로만 구성된 병력으로 근처 도적 떼 소탕 작전에서 쉐이든은 제일 앞에 서서 스무 명이나 되는 도적들을 죽였다 피를 뒤집어 쓰고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아군이 보기에도 끔찍했다. 그런데 정작 돌아와 한 시간 동안이나 물로 몸을 씻고 있으니, 훈련병들의 대장인 기사 그린리히가 다가와 물었다. '둘 다요.' 쉐이든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린리히는 한참이나 침울한 표정으로 물을 끼얹는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자네 신을 믿나?' '어머님께서 신자라 저절로 그리 됐소.' '그럼 신께 기도하게.' '사람을 죽이는 건 아무리 그럴 듯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용서 받을 수 없는 거요. 난 그래서 신에게 기도할 수 없소.' ‘그럼 자네의 종교관은 달라져야겠군. 기도를 바꿔봐. 신은 그렇게 인간처럼 속 좁은 분이 아니잖나? 오늘 내가 저지른 죄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런 말은 어떤가?’ 쉐이든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어머니께서 그 기도를 들었다면 당장 당신 엉덩이를 걷어 찼을 거요.' 그린리히는 목청껏 웃어댔다. '쉐이든, 난 그 동안 자네를 지켜보았네. 그 뛰어난 실력, 그 잠재력, 배운 지 1년 밖에 안 되는 실력으로 이미 왕실 기사단의 정식 기사들을 뛰어넘어 버렸지. 이미 자네는 훈련병이 아니야.' '하지만 난 항상 당신에게 지는데?' '미안하지만 난 최고거든 ' 그린리히는 껄껄대고 웃었다. '중요한 건 자네의 발전 방향이야. 자네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서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 해. 기사도를 배워야 하고 궁중 예절을 익혀야 하고 검술 외의 다른 경험을 쌓아야 하지. 아무리 빨라도 3년 이야. 배워서 나를 것 없는 교육이긴 하지만, 자네 같은 천재에게는 그런 건 시간 낭비라고 보여지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아란티아로 가게. 피를 싫어한다면, 전쟁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야!' 그의 말이 옳았다. 아란티아에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아란티아가 아닌 곳은 그렇지 않았다. 쉐이든의 창과 창을 든 팔은 핏물에 담갔다 빼낸 것처럼 젖어 있었고, 방패에는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 다리의 좌우에는 베이고 절린 시체가 쌓였고, 도개교 밑의 해자에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산을 이뤄 쌓여 있었다. 적병의 지취관은 계속 진군을 명령했고, 쉐이든은 범위 안에 들어오는 모든 적을 베었다. 때론 화살이 날아오고, 때를 말을 탄 기사가 달려들었다. 적들도 쉐이든이 지쳤다고 생각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허벅지와 팔뚝이 욱씬거렸고, 온 몸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창을 휘두른 이후로 이렇게 힘든 건 로일을 처음으로 이졌던 승부를 빼고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력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는 창을 크게 한 바퀴 돌려 몰려오는 군대를 향해 힘차게 뻗었다. "어떤 명목에서건 오늘 제가 죽이는 사람 숫자만큼 절 영서치 마옵소서." 게랄드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크라브지크였던 기사의 부러진 칼을 도끼로 막고 뒤로 몇 걸음이나 나가떨어졌다. 숫자는 아까와 같았지만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채로 비틀대며 겨우 한 명의 점은 기사를 해치운 게 다였다. 게랄드는 계속 방어에 전념하며 그 쓰러뜨린 한 명을 주시했다. 검은 연기가 갑옷 바깥으로 새나간 후 다시 일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랄드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가, 도끼에 기대어 일어났다. "이봐, 링케. 말 할 수 있냐? 아니면 알아들을 수는 있나?" 잠시 검은 기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들은 일제히 링케 쪽을 바라보았다. 알아들을 수는 있다는 뜻이었다. 곧 링케는 손을 내밀며 쇠를 긁는 소리로 말했다. "즈누이브." 게랄드는 대충 그게 말하라는 뜻이라 생각하고 말했다. "군주를 잃은 녀석들이 월 위해 이 곳을 공격하려 하느냐? 그렇게 해서 얻는 게 춰야? 붉은 사자 백작과의 의리 때문? 명예?" 거칠긴 하지만 링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게랄드." 그리고 그 이상한 목소리와 원래 링케의 목소리가 중첩되어 울렸다. "요에 부뭄쿠브 우드라?" ‘우드라를 기억하고 있나?’ 게랄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사이 그는 천천히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상대도 그걸 알고 있었으나 내버려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검은 기사 열 명을 상대로 혼자서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기억한다. 있는 대로 나쁜 짓을 저지른 다음에 나중에 그것을 해치운 게 바로 자기들이라고 선전하고 다닐 요량으로 만든 조직이었지." 곧 그의 목소리에서 괴물의 것은 사라지고 링케의 것만 남았다. 그러나 메아리처림 울리는 것은 여전했다. “그 핵심인 네가 나가버리자 널 믿고 모인 조직원들이 모두 떠나버려 시작도 못한 조직이었지." “변명이야 이름이 유치하다고는 했지만, 내가 미쳤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다니게." “그 연장선이다. 이미 이 검은 기사라는 존재는 카모르트 전체에 널리 알려진 집단이 되었지. 이제 하얀 늑대마저 죽이고 카모르트 국왕까지 해치운 유명한 악당이 될 차례다 다음 이름은 레드 바이퍼라고 해두지. 뭘 위한 공격이냐고? 거추장스럽게 이유 갖다 붙일 생각 없다. 돈 때문이다. 붉은 장미 백작에게 붙어있었던 이유도 그가 이 세상을 지배할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고, 이제 그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 혼자서라도 그걸 얻으려 한다." “......쿠시에주 루 러파즐우트.” 마지막에는 다시 괴물의 언어로 변해있었다. 게랄드도 잠깐의 휴식을 끝내며 일어났다. "링케, 네 놈이 항상 내게 지는 이유는, 내가 항상 여력을 남겨두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러고 늑대가 정말 강한 건 무리를 지었을 때지." "특히 무리에 암컷이 끼어 있을 때 가장 강하지." 검은 기사들은 갑자기 끼어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일제히 돌렸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2층의 복도에서 옅은 검은 머리를 등 뒤로 땋은 여자가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정원으로 뛰어내리더니 칼과 방패를 양손에 쥐고 바로 자세를 잡았다. "아즈윈, 창피한 말이지만, 너 오길 정말 애타게 기다렸다.“ 게랄드가 도끼를 끝까지 지켜 세웠다. "지친 건 아니지?“ "너 오면 쓰려고 조금 힘을 아껴뒀다." "그럼 세 번째 포메이션으로." "그건 로일이 있어야 하찮아." “그 동안 쉰 대가를 치러야지 내가 로일의 파트까지 맡는다.” 아즈윈은 검은 기사들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게랄드도 반대편에서 마주 보고 뛰어왔다. 둘이 서로 만나는 장소까지 검은 기사들의 공격이 무섭게 이어졌다. 할버드가 정원 바닥을 긁어 올리고 칼은 아즈윈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친 게랄드가 조금 뒤쳐졌으나, 아즈윈이 충분히 거기까지 커버하여 빠르게 움직였다. 둘은 서로에게 등을 맞댄 후 원을 그리며 크게 무기를 휘둘렀다. 검과 창이 둘을 찔렀으나, 모든 공격은 아즈윈이 막았다. 그리고 그녀는 되려 반격까지 하며 상대의 무기를 부쉈다. 순식간에 두 검은 기사가 쓰러지자, 즉시 둘은 서로에게서 떨어져 크게 원을 그리며 달렸다. 그러나 누구도 둘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 했다 "아즈윈, 내가 이 놈들한테 네가 있는 하얀 늑대들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나 있었는지 아냐?" 게랄드는 검을 휘두르는 검은 기사의 품 안에 파고 들어 갑옷과 함께 통째로 허리를 베어버린 후 말했다. 아즈윈은 발로 걷어찬 검은 기사의 헬멧을 밟고 허공에 뛰어오르더니 검을 좌우로 크게 베며 착지했다. 허공에 있는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창을 교차하여 찌른 두 검은 기사는 목이 날아가 비틀거렸다. 검은 연기가 피 대신 사방으로 흩어 졌다. "전투 중 잡담 금지! 일곱 번째 포메이션으로 변경," 아즈윈은 명령을 내리고 게랄드와 같은 선상에 서더니 링케를 공격했다. 링케는 괴성을 내지르며 둘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더니 검을 좌로 그었다. 그러나 이미 아즈윈이 그의 왼쪽 다리를 베고, 게랄드가 그의 옆구리를 반 토막 내고 지나간 후였다. 둘은 마치 엉켜있는 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검은 기사들 사이를 헤집었다. 심지어 혼돈을 일으킨 기사가 자기 편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팔이 베이고 목을 반 치 이상 잘렸어도 움직이는 기사들이었으나, 철저하게 갑옷을 부수는 게랄드의 도끼 앞에서는 그들의 불사에 가까운 힘도 의미가 없었다. 황혼이 지기 시작하는 왕실의 정원에는 세 개의 그림자만 서 있었다. 링케는 다리와 옆구리에서 검은 연기를 피처럼 흘리며 무릎 꿇고 있었다. 게랄드가 그 앞에 싫다. 링케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그는 예측하고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의 빈 갑옷은 조용히 옆으로 무너졌다. "아무리 르고가 만든 칼이라 해도 이런 괴물들이랑 싸우고 나니 날이 엉망이 되어버렸군." 아즈윈은 칼날을 살핀 후 집어넣었다. "날이 더 상할 거다. 쉐이든이랑 함께 두 번째 포메이션을 써야지." "이 놈들 안 살아날까? 그 때처럼." "자기네 군주가 사라졌다더라.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그 군주란 붉은 장미 백작인 것 같지만." "뭔 소리야,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쉐이든에게 합류해야지." 둘은 나란히 정원을 가로질러 도개교가 걸려 있는 성의 정문으로 향했다. 카모르트의 국왕은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올라선 터렛 위에 서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한 명의 기사가 도개교에 서서 몰려오는 보병들을 모조리 쳐 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시체가 쌓여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고, 다리는 피로 물들었다. 도개교 밑에 떨어진 시체의 숫자는 수십에 이르렀고, 이제 선두의 보병들은 달려들 엄두도 내지 못 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개미지옥과 같았다. 적의 지휘관은 혼자 다리를 지키는 쉐이든에게 약간의 경외감도 갖지 않고 끝없이 활 공격을 명령 했다. 그러나 쉐이든은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내고 다시 창을 휘둘러 적을 쓰러뜨렸다. 한 부대의 보병이 공격을 끝내자, 또 다른 중무장 보병 부대가 전진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공격해온 부대보다 휠씬 기가 죽어 있었다. 군대와 군대가 싸울 때는 패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공격해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상황에서 용기를 가질 병사들은 없었다. 더구나 무모한 화살 공격 때문에 명령대로 전진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병사까지 있으니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군인의 슬픈 숙명대로 명령이 떨어지자, 움직였고 다시 한 명 대 오십 명의 전투가 일어났다. "세이게이 장군, 내 젊은 시절 꿈이 뭔지 아시오?" 국왕은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도 난간을 손으로 꾸욱 쥐고 굳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엇이었습니까?" "기사였소. 왕의 지휘를 가겼다 해도, 전장의 선두에 선 기사가 되고 싶었소. 십 년 전 메오릭스라는 기사가 홀로 저 다리 위에서 익셀런 기사단과 싸웠을 때도 나는 이 곳에 숨어 있었고, 이제는 다른 나라에서 온 기사의 보호를 받고 있군." "폐하." 장군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한 남자의 꿈은 어디 가고 여기 나약한 왕만 남아있는가?" 국왕은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그러나 곧 그는 어금니를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적어도 이 위대한 싸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때 장근은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기이한 표정 변화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얀 늑대의 힘에 놀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죽였어도 줄지 않는 적병의 숫자를 겁내는 것도 아니었다. 공포의 기사들이 침략해온 얼마 전에도, 그들은 하얀 늑대들의 등 뒤에 숨어 응원만 했다. 이번에는 또 이 엄청날 대군을 묵묵히 혼자서 맞서고 있는 하얀 늑대에게 보호 받고 있었다. 그들도 왕실을 지키는 병사를 꿈꿔왔고, 그에 걸맞는 훈련을 받아왔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못 하는 자기들의 처지에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저 많은 병사들을 해치울 화살도, 무기도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병력 차이가 열 배가 넘는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수치심이 분노를 끌어냈고, 분노는 용기를 일궈내고 있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명이 창으로 바닥을 세게 쿵 쳤다. 그러자 옆에 있는 병사가 거기에 맞춰 바닥을 울렸다. 쿵. 쿵. 쿵. 함성은 없었다. 오직 쉐이든이 해치우는 적병들을 바라보며 묵묵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쿵. 쿵. 쿵. 곧 왕성 전체에 규칙적인 소리가 반복되어 울렸다.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린 것은 붉은 장미 백작의 일반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지휘관들, 특히 총 지취관인 루치가 그랬다. “처음부터 저 다리는 무시하고 총공격을 했었어야 했는데........” 이제 그럴 타이밍도 아니었다. 이미 아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 엄청날 병력 차이를 꺾을 정도로 왕실의 병사들의 끓어오르는 기운이 피부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눈 앞의 현상에 현혹되지 마라." 루치는 자기를 타이르는 말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적은 하나다. 보라. 이제 지쳐 있다. 적들은 공격할 힘이 없기 때문에 성벽 뒤에 숨어있다. 쇼를 보여주는 시간은 지났다. 우리는.......” 그의 기운 한 연설을 한 번에 잠제우는 술렁임이 군대 전체를 감쌌다. 다리 위에 서 있는 건 한 명이 아니었다. 창과 방패로 지금까지 이백 여명의 병사들을 다리 밑으로 떨군 하얀늑대의 옆에 도끼를 어깨에 길어진 남자와 땋은 머리를 등 뒤로 넘기는 여자가 있었다. 도끼를 든 쪽이 캡틴 링케를 쓰러뜨린 하얀 늑대라는 게 분명하니 방패를 든 여자도 하얀 늑대라는 건 틀림없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않고 서 있기만 했다. 그래도 그 위압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겁 먹지 마라. 세 명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건 전쟁이다. 우리 쪽이 오천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루치는 크게 소리질렀다. “전원 성벽을 돌파한다. 다리를 포기하라. 성을 무너뜨려라. 일직선 상이 아니라면 저런 터무니 없는 작전은 먹혀 들지 않는다. 붉은 장미 백작의 용맹한 전사들이여, 우리는 이 곳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오늘 승리하기 위해서 왔다.” 이 곳에서 물러나면 그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가파른 지위상승을 거치며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패배하면 남는 게 없었다. 여기 있는 모든 병사를 희생해서라도 그는 승리해야 했다. “모두 창과 칼을 들어라. 그리고.......” 루치가 크게 소리치다가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휘적거리며 병사들을 헤집고 나와 루치 옆에 섰다. 금발에 밝은 눈동자였으나, 몰골이 지저분하여 며칠은 딘지 않은 용병 같았다. 루치는 순간 정신 나간 병졸이 튀어나온 줄 알았다. "뭐냐, 니 놈은?" 그는 말에 올라 있는 루치를 힐끔 올려다보더니 나직이 대꾸했다. "종알종알 잔말 더럽게 많군 " "뭐, 뭐라고?" 루치가 어이가 없어 잠깐 옆에 있는 다른 지휘관을 보았다. 그들도 황당하긴 매 한 가지라 말문이 막혔다. 루치는 칼을 뽑아 들었다.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튀어나와 장군의 연설을 방해했다면 충분히 즉결에 처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 칼을 더럽힐 가치도 없는 녀석 같으니!" 그는 칼을 치켜든 루치가 아니라, 도개교의 하얀 늑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네가 죽으면 이 싸움이 끝나나?" 루치는 그제야 수상쩍은 기운을 느꼈다. 일반 병졸이 아니었다. 루치는 칼을 치켜든 채로 물었다. "넌 누구냐?" "저기 세 명이 있군. 난 그 네 번째다." 루치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고, 그보다 아주 약간 빠르게 지저분한 남자의 칼이 그를 치고 지나갔다. 닿지 않아야 할 거리에서 뻗은 칼이 루치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피 묻은 총 지휘관의 팔뚝이 병사들의 머리 위를 날아 전날 내린 비로 고인 물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루치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그는 돌아서서 모두에게 말했다. “나는 하얀 늑대의 기사, 로일 울프다! 원한다면 나 혼자 너희 모두를 상대해 주겠다. 와라." 그 기백에 놀란 병사들이 뒤로 와르르 물러났다. 선두에서 밀리니, 뒤쪽에서는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 로일은 휘적휘적 도개교 쪽으로 걸어갔다. 아즈윈이 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저 자식, 늦어놓고 큰 소리네?" "미안." 로일은 짧게 대답하더니 셋의 앞에 섰다. 총 지취관은 말에서 떨어졌으며, 다리 위에는 하얀 늑대의 기사 네 명이 서 있었고, 성 위의 병사들은 창으로 바닥을 치며 주위를 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노르만트의 북쪽에서 긴 나팔 소리가 퍼졌다. 합에 있는 병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다." 순간 붉은 장미 백작의 병사들은 크게 술렁이더니, 군대 전체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오는 군대의 함성 소리가 점차 노르만트를 조여오자, 기어이 군을 이탈하는 병사들이 생기면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게 하얀 늑대들임은 누구도 부인 못할 것이다. 이후 몇 천이나 되는 군대를 노르만트 외곽으로 완전히 쫓아낸 것은 북쪽에서 내려온 검은 사자 백작의 군대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점은 세이게이 장군이 모두에게 명령을 내린 그 순간이었다고 봐야 옮았다. "전군 총 공격이다!" 터렛에 버터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가지고 있는 모든 화살을 보아 보냈고, 다리 뒤에 버터고 있던 병사들이 파도처럼 쓸려나갔다.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얀 늑대들은 다리 옆으로 물러나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특히 아즈윈은 게랄드가 떼어놓을 때까지 포옹을 풀지 않았다. 로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던멜은' 쉐이든이 대답했다. "아직 오지 않았어." "덴모주와 레앙에서 많은 일을 겪었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하지만 던멜이 나보다 많은 일을 조사했을 거야." "우리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주고 받았다. 저녁 해가 지며 금방 어둑어둑해졌다 넷은 왕성으로 개선 장군처럼 들어오는 검은 사자 백작과 라이온 기사단의 행군을 바라보았다. "흥, 다 끝나니까 들어오네," 아즈윈이 비꼬는 소리를 했다가 갑자기 놀란 눈 과대로 굳어졌다. 라이온 기사단은 죄인을 호송하는 나무 창살로 이루어진 마차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창살 틈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녀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쉐이든이 당장 달려가 라이온 기사단을 세우고 물었다. “저 안에 갇현 자가 누구요?” 그 기사는 즉시 창으로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접근하지 마시오. 쟈크 덴 뤼미에르 남작의 살해 혐의와 검은 사자 백작의 암살 미수로 체포한 중죄인이오." 게랄드가 당장 도끼를 집어 던질 기세로 물었다. "똑바로 얘기해 누구라고?" 그 기사는 일순 겁에 질렸으나, 대답은 제대로 했다. “캡틴 울프요." 35. 폭로 임시 감옥에 갇힌 채로 카셀은 노르만트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 간밤에 맞은 비 때문인지, 온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고 머리가 명 하니 어지러웠다. 전쟁의 함성 속에서 카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백작과 이야기 하게 해달라고 해도 그를 지키는 기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감옥 지키는 인력 조차도 라이온의 정식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아예 귀를 막은 것처럼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카셀은 확 협박이라도 할까, 아니면 이대로 변명이라도 할까 망설였지만 둘 다 포기했다. 대신 이불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거부되었다. "감기에 걸린 것 같소. 이불 한 장도 못 주시오?"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던 기사가 저녁 무렵, 교대하기 전 말을 꺼냈다. "미안하오. 당신에게는 수저 하나도 주지 말라는 명이 있었소. 도구라는 걸 주면 이 감옥도 안전한 게 아니라면서 말이오.“ “하얀 늑대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게요? 나도 인간이란 말이오. 탈옥할 생각도 없고, 그저 몸을 보온할 도구만 달라는 거요.” "환상?" 그 기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맞소. 난 환상을 품었고, 그 환상은 정확했소. 오늘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 오천이 고작 한 명의 하얀 늑대 때문에 성으로 진입을 못했다고 그러더군. 당신 부하의 실력이 그 정도면 당신은 오죽할까? 난 지금 이렇게 당신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죽을 지경이오." 카셀은 그 얘기를 듣고, 나무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당장 기사들은 들고 있던 창에 힘을 주었고, 그는 얼른 얼굴을 뒤로 뺐다. "전쟁에 대해 물읍시다. 그 막았다는 한 명이 누구요?“ "나도 모르오. 듣기만 했소." “그럼 무엇으로 싸웠다 하오? 남자였소? 무슨 무기를 썼다 하오? 창이었소, 도끼였소?" "남자였고, 창이었다 그랬소." 쉐이든이구나. "지금 전황은 어떻소?" "경은 사자 군이 적의 잔당을 소탕하고 있소. 전쟁은 승리했소.“ 카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털썩 않았다. 당연히 기뻐야 옳았지만, 카셀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죽을 힘이 다해올 필요도 없었다. 전쟁은 그가 없어도 승리했다. 그리고 그는 엉뚱하게 이 곳에 갇혀 있었다. 암부르에서 며칠 걸려 달려왔던 카셀은 노르만트가 공격 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절망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싸움이 끝나길 멍하니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그는 별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를 발견했다. 그것은 어떤 우연의 일치였는지 모르나, 당장 급한 나머지 카셀은 즉시 나무 뒤로 숨었었다. 검은 말은 며칠 째 말을 달리며 비까지 맞은 카셀의 말보다 더 힘이 없어 보였다. 또 그 위에 타고 있는 검은 기사 역시, 감기 기운 때문에 내쉬는 콧김이 뜨거운 카셀보다 더 아파 보였다. 카셀은 겁에 질려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검은 기사 쪽으로 달려오는 한 무리의 기사단을 발견했다. 같은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것은 라이온 기사단이었다. 그들 역시 노르만트로 향하고 있었으니, 검은 기사와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셈이었다. 카셀은 경고해 줄 마음에 당장 말을 달려 라이온 기사단이 가는 길목을 막았다. 그게 실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검은 사자 백작이 당하든 말든 무시했어야 했다. 그의 출현을 본 라이온 기사들은 말을 세운 후 뒤따르는 마차를 즉시 보호했으며, 다른 병사들은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오. 그대들을 공격할 의사가 없소. 하지만 이 길을 지나가선 안 되오. 피하시오.' 카셀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경고했다. 그 때 호위 받던 마차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검은 사자 백작이었다. '용케 내가 오는 방향을 알고 있었나 보군, 캡틴 울프. 날 암살하러 왔나?' 카셀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검은 기사가 다가오고 있다는 다급함에 소리를 질렀다. '이럴 시간 없소, 백작. 우린 이 곳을 벗어나야 하오.' '노르만트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나를 막고 있다? 그건 어떤 의미지, 캡틴?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을 구해 가더니 이제 쟌스데인과 손을 잡은 건가?‘ 카셀은 크게 손을 내저었다.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거요? 쟌스데인 백작의 딸은 파티장에서 만난 이후로 얼굴도 본 적이 없소.' 그 말을 하는 사이 카셀의 등 뒤로 검은 기사가 나타났다. 모든 말이 일제히 놀라 앞발을 들었고, 기사들도 뒷걸음질 쳤다. 내내 비들거리며 말을 몰던 검은 기사의 말이 날개를 활짝 폈다. 카셀은 검은 기사가 자신을 공격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카셀을 지나쳐 검은 사자 백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백작이 뭐라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병사들이 화살을 쏘았다. 검은 기사는 몸은 물론이고 머리에도 화살을 맞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검은 기사는 기어이 검은 사자 백작의 어깻죽지에 칼을 찔러 넣었다. 동시에 주위에 있는 기사들의 창이 수없이 검은 기사의 몸에 박했다. 백작은 비명을 질렀다. 검은 기사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검은 기사는 괴성을 질렀고,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연기는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다들 그 괴이한 광경을 보더니 찔렀던 창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의 형상은 마치 기운을 잃은 것처럼, 검은 사자 백작 쪽으로 쓰러졌다. 검은 형상도 검은 연기도 모두 사라지고 검은 기사와 검은 말은 힘없이 늘어졌다. 검은 사자 백작을 찔렀던 칼도 검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백작은 상처를 손으로 누른 채 신음하다가 손가락으로 카셀을 가리켰다. ‘저 자를 잡아라.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 해도 너희들이 못 이길 상대가 아니리라 ' ‘무슨 오해가 있는 줄로 아오. 내 말을 들으시오, 백작. 나는.......' 카셀은 변명하려 했으나 소용 없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증인이다. 그래, 내 아들을 둘이나 죽이고 쟌스데인의 딸을 암살하려 했던 검은 기사들이 하얀 늑대들의 캡틴과 한 편이란 말이지?'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터는 게 고작인 몸으로 그의 억지 논리에 반박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그는 말 한 마디 제대로 꺼내보지 못 하고, 아란티아의 보검을 빼앗겨야 했다. 생각해 보니 다른 모든 일보다 그 순간이 더 후회스러웠다. 카셀은 찬 바람에 몸을 떨며 몸을 웅크렸다. 그 때 누군가 모포를 덮어주었다. 카셀은 누가 그것을 주었을까 궁금했지만 입을 뗄 힘도 없어 그저 모포로 몸을 두르기만 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올려다 보니 라이온의 기사였다. 그는 아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 얘기가 있소. 하지만 당신 상태가 몹시 안 좋아 보이니 내일 다시 오겠소. 만약 정신을 차리거든, 바딩의 부하 비앙을 다시 찾아주시오." 바팅? 카셀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눈을 크게 뜨려 했으나 뜰 수가 없었다. 그를 태운 감옥 마차가 움직였다. 카셀은 모포를 끌어 안은 자세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나 보니 나무 창살 대신 쇠창살이 가로막혀 있었다. 카셀은 이 곳이 직감적으로 왕실 얼에 있는 지하 감옥임을 알았다. 창문이란 게 없어 카셀은 시간을 계산할 수가 없었다. 아까는 아침이었으나, 지금은 언제일까? 저택? 밤? 아니면 다음날 아침? "이런 빌어먹을, 아무리 형편 없는 죄수라도 제대로 된 대우를 해줘야지, 이게 무슨 것이냐?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나 있는 거냐?" 날카로운 목소리의 여자가 간수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질렀다. 옆에 있는 다른 남자가 그녀를 말렸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녀석이 무슨 죄가 있겠냐? 이봐, 가서 이불과 따뜻한 먹을 걸 가져와." "제일 고급으로! 네가 쓰던 거 가져오면 죽여버릴 줄 알아," 그녀는 카셀이 있는 감옥 앞에 오더니 또 한 바탕 말싸움을 벌였다. "현실적으로 계산해 볼까, 경비병들7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세 놈 죽이고 여길 탈출하는 데 얼마나 힘을 쓸 것 같냐? 10 퍼센트? 웃기지 마. 당장 나가 있어. 알아서 면회 끝나면 나가 줄 데니까." 여자의 말에 기사는 무척 당황하며 말했다. “하, 하지만, 기사 아즈윈. 우린 명령을......” “좋아. 기사가 명령을 수행하다 죽는 것만큼 영광된 것도 없지." 갑자기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고, 기사들이 우루루 뒤로 물러나는 소리도 들렸다. 카셀은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말했다. "아즈윈, 됐어." 아즈윈은 칼을 집어넣고 창살을 손으로 잡았다. “이봐, 괜찮아? 너 벌써 죽은 것 같다!" "그렇게 안 좋아 보여?" “그래.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너한테 못해 준 거 있어? 말해 박살내줄게. 아아, 꼴 사나운 모습 보여서 미안. 하지만 네가 그로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는 거 보고 너무 화가 났어," “난 괜찮아. 하지만 이불은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조그만 참아. 원가 잘못 되어서 갇힌 모양인데, 곧 꺼내줄 테니 걱정 마. 아란티아의 여왕님을 제외하고는 세상 누구도 하말 늑대를 건드릴 수는 없어." 카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즈윈의 옆에 있던 쉐이든이 나직이 말했다. "카셀, 날 불 수 있겠니?" 그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쏟아질 것 같았다. 이 꼴로 돌아온 것을 가장 보이기 싫은 사람이 쉐이든이었다. 그를 볼 면목이 없어 카셀은 다시 바닥에 누어 모포를 끌어안았다. 쉐이든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네게 못할 말을 했구나." 카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계속 대답을 기다렸다가 둘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셀 ." "미안해. 생각 중이야." 카셀은 짧게 대답하고 모포를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둘은 하는 수 없이 나갔고, 카셀은 이불에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카셀이 머물고 있는 감옥의 옆방에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팔이 잘려나가 겨우 응급 조치만 한 채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붉은 장미 백작의 총 지휘관 루치 뱅상이었다. 그는 병졸인 것처럼 신분을 속여 목숨을 부지하고, 이 곳에 갇혀 있던 중이었다. 자신의 군대를 박살낸 그 괴물 같은 놈들을 가까이서 봐두려고, 창살에 매달렸다가 '카셀‘이라는 이름을 듣고 그는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을 때, 그는 얼른 카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카셀. 너 루우른 마을의 카셀 노이냐? 어이!" 모포를 뒤집어 뜬 탓에 못 듣는 것 같았으나, 사실 확인할 것도 없었다. 그는 분명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괴롭혀 온 그 약골 카셀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아버지를 담아가기 시작하더니, 스무살이 넘어서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녀석이 되어 있었다.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 했지만, 사실 루치의 패거리들은 솔직하게 카셀이 무섭다는 말까지 했었다. 간수가 이불을 가지고 돌아와 창살 틈으로 카셀에게 던져주었다. 마치 우리에 갇힌 맹수를 대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하얀 늑대의 캡틴은 벌써 잠들어 버렸는지, 이불을 줘도 그것을 덮지 않았다. "이보오, 간수 저 사람의 정체가 뭐요?' “보면 모르나?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더라." “언제부터?" 루치가 묻자, 간수는 귀찭은 듯 손을 내저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잠깐 기다리시오. 혹시 저 자가 무슨 죄라도 지었소?" 루치는 돌아서는 간수를 한 번 더 불러 세웠다. "나도 자세히 몰라. 누굴 살해했다던가?" “검은 사자 백작과 캡틴 울프가 사이가 좋소?" “둘이 서로 잡아먹지 않는 게 다행이라더군. 근데 뭐가 그리 궁금해?" 루치는 머리 속을 스치는 번개 같은 생각에 큰 소리로 말했다. “검은 사자 백작을 만나게 해주시오. 일이 잘 되면 당신에게도 한 몫 주겠소” “호오, 얼마나 줄 생각인데? 아니, 그보다 왜 만날 생각인데?” “가서 여기 캡틴 울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전해 주시오." “어찌 아란티아의 기사를 카모르트의 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거요?" 검은 사자 백작의 요청으로 모든 대신들과 국왕은 긴급 국정 회의를 시작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왕실의 수호 가문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고, 국왕은 신중히 고려해보기 위해 보름의 기간을 달라고 했다. 샤이필드 공작의 경우에는 한 달의 기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시켰으니, 이번 경우에는 굉장히 서두르는 셈이었다. 회의를 지켜보며, 두나단은 검은 사자 백작을 끌어들이자고 주장한 자신을 저주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왕실의 힘만으로 위기를 극복했어야 했다. 물론 그의 군대가 없었다면 오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겠지만, 스스로 사자를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천의 끓은 장미 군 대신 오천의 검은 사자 군이 노르만트를 점령하고 있는 것뿐,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캡틴 울프를 처벌하자는 말에는 즉시 반대했다 그것은 검은 사자 백작을 환영하는 대신들 조차 반대했다. “그는 붉은 장미 백작의 편에 서서 이 나라를 위협했소. 그리고 나의 수호 기사 바딩과 내 아들 쟈크를 살해하였으며, 이 나라의 큰 근심 거리였던 점은 기사라는 놈들과도 한 패라는 증거가 있소. 그 건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백작은 반대하는 대신들을 향해 강력히 주장했다. "카모르트의 법에 따르면 그런 죄를 지은 자는 사형이오. 그러나 검은 사자 백작, 설사 그 모든 의혹이 사실이라 한들 정말 그를 처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두나단은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상대는 이제 맘만 먹으면 국왕을 내를고 자신이 직접 왕좌에 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였다 이제 두나단은 이런 반대를 하는 데에도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다행히 백작 자신도 마음에 걸렸던 터라 경솔하게 두나단의 의견을 묵살하지 많았다. “그럼 그냥 놓아주자는 뜻인가?" “그는 아란터아의 상징이자,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를 건드렸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어쩌실 겁니까? 그를 감금하는 것조차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 대신들은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나누었고, 백작도 잠시 침묵했다. 그 때 회의실로 시종이 조심스레 들어와 백작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백작은 그걸 보더니 눈을 크게 했다. "두나단 대신, 당신은 지금 아란티아의 분노를 걱정하며 캡틴 울프를 감쌌는데 만약 그가 아란티아에서 온 게 아니라 카모르트 출신이라면 어찌겠소?" 대신들은 크게 술렁거렸고, 국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만약을 말씀드린 겁니다, 폐하. 저는 이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몇 가지 증거 자료를구해오겠습니다. 저녁에 다시 한 번 회의를 속행시켜 주십시오." 백작은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남은 대신들은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저마다 웅성거렸다. 왕은 루오르 대신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그라고 뭔가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두나단은 예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에노아 후작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난 그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네.‘ 두나단은 골똘히 그 때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손들을 깨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 로일은 돌계단에 앉아 빵을 씹어먹고 있었다. 씻지도 않은 지저분한 남자가 칼을 옆에 끼고 앉아있으니 시녀들은 무서워서 지나가지도 못 했다. 적군의 장군을 단칼에 베어버린 로일에 대해 아는 병사들도 경외심을 담아 인사하긴 했으나, 가까이 가진 않았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돌계단을 이용하지 못 했다. "지름길 하나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군. 사람 하나 죽이고 나면 비킬 건가?" 로일은 긴 머리의 중년 남자가 옆에 않는 걸 쳐다보지도 않았다. 로일은 그의 목소리 만으로 그가 누군지 알았다. "아즈윈에게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와 계셨습니까, 메이루밀?" "이틀 전부터." "왕성에 머물라고 누가 허락을 내줬던가요?" "사람들의 출입이 하도 많아 나 같은 것 하나는 있어도 신경 안 쓰더군. 그리고 내가 어디 머물기 위해 사람들의 허락을 받을 사람인가?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로일. 가넬로크에서 보고 5년 만인가?“ "좀 더 될 겁니다. " "실력은 나아졌나?'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루밀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그래, 그렇게 실력이 나아졌다면서, 지금 뭘 고민하고 있는 겐가?" 로일은 한참이나 먹던 합만 우물거렸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을 그러고 있었건만 루밀은 재촉하지도 지루해하지도 않고 기다렸다. “마스터 퀘이언은 제게 자신감이 모자라다 하셨습니다.” "중요한 요소지." "여왕님은 제게 누군가를 지켜본 경험이 있냐고 물었지요. 제가 뭐가 부족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루밀은 빙그레 웃다가 칼로 그의 목을 후려쳤다. 카셀이나 아즈윈을 시험할 때처럼 슬쩍 댄 게 아니라 진짜로 로일을 죽일 듯이 강하게 휘두른 것이었다. 로일은 앉은 채로 칼을 뽑아 그것을 막았다. 먹던 빵이 허공에 정지되어 있다가 계단을 굴러갔다. 두 자루의 칼이 서로의 얼굴 앞에서 십자로 교차되어 파르라니 떨했다. 루밀은 힘을 주느라 이를 악 문 발음으로 말했다. “로일, 솔직히 말해줄까? 퀘이언이 말한 비밀을?”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잖습니까? 그 사이 절 본적도 없으면서." “내가 너에 대해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그럼 뭘 아십니까?“ 둘의 전력을 다한 겨루기가 계단 위에서 이루어줬다. 루밀이 힘을 가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로일도 일어났다. 균형이 무너지면 누구 하나의 몸이 두 동강 날 정도로 강한 힘이 팽팽히 맞섰다. “퀘이언의 편지에 너에 대한 고민이 막 한 마디 적혀 있더군.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더라고 말이야." "거짓말! 제 친구들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친구들을 상대로 제가 여력을 남겨뒸다고 생각하시다니 마스터도 늙으셨나 보군요." "암, 늙었지. 하지만 멍청한 네 녀석의 실력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게다." 루밀은 점점 힘을 더해 로일을 밀었고, 로일은 악착같이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로일, 너는 항상 이겨왔겠지?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강해서, 모든 사람들이 너를 두려워했다고 내게 이야기했지. 그러나 마침내 안주할 방을, 너와 맞먹는 실력을 가진 친구들을 찾았지. 그러다 너는 그 녀석들마저 너를 두려워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야. 그래서 그 녀석들 실력에 너를 맞추기 시작한 거야. 아닌가?" "아닙니다!" 로일은 고함을 지르며 루밀의 검을 세게 튕겼다. 루밀은 즉시 뒤로 밀려나며 자세를 낮췄다. 로일은 숨을 헐떡대며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루밀은 짧은 미소를 짓곤,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로일,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친구들이 싸우는 모습을 모두 보았다. 네가 걱정할 정도로 약한 애들이 아니야. 전력을 다해라. 당분간은 네가 앞설지도 모르지만, 그 애들은 분명히 쫓아온다. 하얀 늑대들의 수준을 네가 낮추지 마라." 로일은 한참이나 루밀을 노려보다가 곧 칼을 집어넣었다. "정말입니까, 루밀?" 로일은 확신이 필요한 듯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전력을 다해도 됩니까?" "오히려 네 친구들이 도와줄 거다. 녀석들은 네가 아무리 강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다. " 로일은 가늘게 떨리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은퇴한 늙은이라면서, 정작 검을 휘두르는 루밀의 힘은 그를 흴씬 뛰어넘고 있었다. “루밀, 경험이 부족한 후배의 입장에서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격은 어떻게 막죠?" "마법 얘기냐?' "비슷합니다." 루밀은 또 공격 자세를 슬쩍 잡았다. 로일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그는 크게 웃었다. “넌 공격해오는 상대의 그 다음 움직임을 읽을 줄 아는 아이다. 공격 범위와 공격 속도를 안다면 마법이라도 활이나 검과 다르지 않지." "어렵군요." “원래 전쟁터에 마법사가 나타나면 도망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루밀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나중에 또 이야기 하자며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로일은 문득 이 정도 실력자가 단순히 울프 기사단의 조언자에 불과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그의 정체에 대해 물으려 했다. 그러나 루밀은 벌써 한참 떨어진 곳에서 시녀에게 밥을 어디서 먹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로일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떨어뜨린 방을 주웠다. 병사 하나가 황급히 들 계단을 뛰어가다가 로일을 알아보고 물었다. “하얀 늑대의 기사 분 아니십니까? 다른 분들은 찾아도 안 보이는군요." "맞습니다. 친구들은 다들 캡틴을 만나러 갔을 거요," "그 캡틴 문제입니다. 지금 소식을 듣고 왔는데, 캡틴 울프가 처형된다고 합니다. " 로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형?' "참수형이라는군요. 카모르트에서는 오직 역적만 참수형에 처합니다. " 로일의 눈썹이 살짝 꺾여 올라갔다 "언제요, 그게?" "내일 정오입니다. " 로일은 저도 모르게 허리에 찬 칼을 꽉 쥐었다. 36.캡틴 카셀 눈 앞에 보이는 것과 머리 속에 들어있는 생각들이 엉켜 카셀은 현실과 꿈을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창살이 때로 비가 내리는 창문으로 보이기도 했고, 꿈틀거리는 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흙더미가 몸을 덮어 깔리는 꿈에서 깨어보면 짓누르고 있는 건 모포였다. 카셀은 이 정도로 심하게 아파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더욱 괴로웠다. 한참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으려니까 환각까지 보였다. 머리에 활 달린 곰이 어슬렁어슬렁 창살 앞을 왔다 갔다 했고, 술 마시는 오리가 곰과 체스를 두기도 했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건 간수와 라이온의 기사였는데, 다시 보니 오리가 맞는 것도 같았다. 나중에는 소가 하품하며 팔굽혀 펴기를 하기도 했다 깨어나서 봤으면 죽어라 웃었겠지만, 카셀은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무서웠다. "체크메이트. 어이, 얼간이. 어디 피해보시지." 하품하는 소가 뜬금없이 카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카셀은 눈을 감고 무시했다. 한참 있으니 누군가의 웃음 소리가 들렀다 곧 감옥 안은 조용해졌다. "알아듣지 못하는군요." 깊은 후드를 쓴 남자 세 명이 카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울렸고, 얼굴은 뒤집어 뜬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목이 아파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카셀의 상태를 보고 간수에게 약을 갖다 달라느니 옷을 갖다 달라느니 하는 말을 주고 받았다. "캡틴 울프, 당신을 돕고자 여기 왔소. 날 알아 보시겠소?“. 한 명이 말하자, 다른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도 나를 알아보지 못 했소." "큰일이군, 피오렌디노. 캡틴 울프가 이 꼴이면 기사 비앙이 가져다 준 자료도 아무 쓸모가 없다. " "재판은 내일입니다, 백작. 이대로 검은 사자 백작이 왕실의 수호 가문이 되고, 캡틴 울프가 처형되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세 명의 남자는 카셀을 죽은 시체 취급하며 자기들끼리 대화하다가 가버렸다. 긴 얘기를 주고 받았으나, 카셀은 중간에 깜빡 잠이 들어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귀찭게도 중간에 누군가 또 깨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카셀, 말만 해라. 너 하나 구출하는 건 일도 아니야.“ 산처럼 덩치 큰 남자였는데, 누군지 얼굴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는 게랄드의 것이었다. 그의 옆에 있는 것은 놀랍게도 제이니였다. 왜 그녀가 여기 있을까? 카셀은 나름대로 그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애썼다. "너 처형된대. 그것도 카모르트 법률에 따라 국왕이 보는 앞에서! 그게 말이 돼?" 자세히 보니 아즈윈이었다. 당장 얼굴이 생각나는 여자라고는 아즈윈과 제이니와 쟈넷이었는데, 쟈넷을 빼고 두 여자의 얼굴은 이상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로 놓고 봤으면 하나도 안 닮았을 텐데, 성격이 비슷해서일까? 고향의 쟈넷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혹시 지금도 루치의 품을그리워 하려나? 그런 건 이제 관심 없지만....... "카셀 노이, 미안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란 건 너무 하지 않았냐?" 헛것이 보이다 못해 이제는 루치까지 말을 걸어왔다. 루치는 깔깔대고 웃으며 간수의 안내를 받아 감옥 밖으로 나갔다. 카셀은 기운을 차려보려고 애썼다. 그의 앞에는 다 식은 죽과 빵이 있었으나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방을 입에 넣었으나 종이를 씹는 느낌이었다. 방을 먹다 지쳐 엎드려 있으니, 로일이 보였다. 파티장에서 딱 한 번 본 얼굴인데 이렇게 확실히 얼굴을 기억해내는 걸 보니 이건 환상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로일은 아즈윈이 항상 말한 그런 어수룩함과는 달리 무서운 말을 했다. "친구들이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군, 자기를 캡틴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녀석이 무슨 캡틴이야? 나는 라틸다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모두가 걱정되어 이 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카셀?" "난 원래부터 캡틴이 아니었소. 당신들이 시킨 거지." 카셀은 로일에게 대답했지만, 대답을 받은 이는 메이루밀이었다 "내가 말한 걸 벌써 잊었나, 카셀?" 카셀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로일이 이야기하고 떠난 지 한참 된 후에야 대꾸한 걸까, 아니면 메이루밀이 로일과 같이 나타난 걸까? 하지만 로일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로일이라는 인물조차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보이는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카셀, 아란터아의 늑대들은 정해진 리더를 따르는 게 아니라 리더라고 스스로 생각하는자를 따르게 되어 있다. 그게 울프 기사단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아란티아의 보검이 자네의 적법함을 인정했음을 잊지 말게." "이제 저에게는 칼이 없습니다. " "그게 저절로 돌아오길 기대하나? 자네 스스로 되찾아야 자네의 물건이지. 처음 그 칼이 어떻게 손에 들어왔지?'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메이루밀의 얼굴을 올려다 보니 어느 새 그의 얼굴은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씁쓸히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생각해 보니 너랑 함께 술을 마셔본 적이 없구나." "아, 아버지?“ "돌아와라. 한 잔 하자." 카셀은 그 말에 번적 정신이 들어 눈을 및다. 아무도 없었다. 로일도, 루밀도, 체스를 두던 오리와 소도, 그리고 아버지도.......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카셀은 숨을 헐떡이며 땀에 흠뻑 젖은 몸을 모포로 감쌌다.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차가운 바람이 같이 불어 들어왔다. 카셀은 떨리는 몸을 더욱 감쌌다. 문을 앨고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짧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셀, 알아둬야 할 일이 있다. 우리들을 암살하려 했던 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상하게도 카셀은 들리지 않는 그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카셀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고, 그 역시 지금까지 봤던 환상처럼 사라졌다. 카셀은 모포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다 식은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먹지 않아 옆으로 치워놓은 방도 허겁지겁 삼켰다. 조금도 맛은 못 느꼈지만 상관 없었다. 뭔가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카셀은 악에 받힌 눈으로 창살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돌아갑니다, 아버지." "계판장이 아니라 공개 처형장 같군." 아즈윈은 원형 극장과도 같은 좌석의 제일 앞에 다른 하얀 늑대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특별히 오라고 부탁하지도 않은 루밀은 와 있었으나, 던멜은 아직 소식도 없었다. “쉐디, 넌 카셀을 탈옥시키자는 내 의견에 반대했지? 왜인지 지금이라도 말해줄래?" “탈옥수가 되면 더욱 곤란해져. 무엇보다 저들은 카셀을 처형시킬 수 없어. 원군을 보내준 아란티아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국왕은 우리의 편을 들어줄 거야. 굳이 이런 재판을 여는 것도 아마 이번에 수호 가문이 되는 검은 사자 백작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겠지." 재판장에는 거의 삼백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왕실의 기사들과 라이온의 기사들, 여러 귀족들과 대신들, 노르만트의 부유 상인들은 원형 좌석의 앞쪽에 맞아 있었고, 증인이라고 나선 사람들과 단순히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제일 변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죄인을 세우는 동그랗고 델은 석판 맞은 편에는 검은 사자 백작과 국왕이 나란히 않아 있었다. 백작은 노르만트로 오면서 만난 검은 기사를 해치우느라 다펄다는 팔에 붕대를 감은 것 빼고는, 예나 지금이나 폼 하나는 당당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셀은 팔을 묶인 채 비틀거리며 간수의 도움을 받아 제판장에 들어섰다. 그는 묶인 채로 원형 재판장의 의자에 앉았고, 눈에 뜨일 정도 힘들어했다. "젠장, 힘도 없는 애를 저렇게 묶어 놓다니!" 아즈윈이 당장 따지려 하자, 쉐이든이 말렸다. "카셀은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야. 아무도 힘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즈윈은 카셀이 앉아있는 들바닥에 늘어붙은 검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재판이 끝낸 그 자리에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죄인의 목을 친다는 것이 그렇게 잔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즈윈은 참고 또 참았지만, 입에서 짐승 으르렁거러는 소리가 새나왔다. 덕분에 그들 주위에 밝아 있던 대신이나 기사들은 밀적이 자리를 피했다. 카셀의 등 뒤에 커다란 도끼를 들고 검은 두건을 쓰고 있는 두 명의 사형집행관이 서면서 재판 준비가 마무리 되었다. 곧 루오르 대신이 나와 좌중을 조용히 시키고 국왕과 검은 사자 백작을 소개했다. 백작에 대해 노르만트를 구한 영웅이라는 식의 긴 소개에 아즈윈은 어이가 없었으나 사람들은 환호했다. 곧 루오르 대신은 카셀을 소개했다. “오늘 우리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라는 사람의 재판을 열기 위해 모두 모였습니다. 하늘이 내려다 보는 가운데 죽어 마땅한 그의 죄를 오늘 이 자리에서 공정하게 심판할 것입니다.” 루오르는 나름대로 천장 없는 재판장의 유래를 설명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았으나, 그 말이었다. “뭐야, 저 늙은이가? 방금 뭐라고 했어?” 벌떡 일어난 그녀를 향해 재판장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라이온의 기사들이 그녀를 막기 위해 나섰다. 아즈윈도 칼을 뽑을 태세라 개시 선언도 하기 전에 재판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겨우 쉐이든이 그녀를 말리자, 다시 루오르 대신이 말을 꺼냈다. "흥분하고 있을 줄로 아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신들 역시 공범이니 내 말을 끝까지 듣는 게 좋을 거요. 우선 캡틴 울프, 즉, 죄인 카셀의 죄를 고하겠소. 증거 되지 않는 물증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반박할 자격이 있으며, 반박한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오. 오늘 국정 재판에 처음 참가하는 이들은 이점을 상기하기 바라오. 진행은 나 루오르가 하나, 판결은 국왕 폐하께서 내리시며 누구도 이 결정을 거부할 수 없소. 그럼 재판을 시작하겠소.“ 루오르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긴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갔다. "우선 카셀의 죄명은 반역이요. 그는 역적인 붉은 장미 백작의 편에 서서 국왕 폐하를 해하려 했다는 점에 있소." '말도 안돼!" 아즈윈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이의를 제기할 기회는 따로 드리겠소, 기사 아즈윈." 루오르는 그녀의 발언을 저지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얼마 전 검은 사자 백작의 영지 레앙에 나타나 쟈크 덴 뤼미에르 남작을 암살하고 붉은 장미 백작의 딸을 납치해 갔소. 레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그의 모습을 본 자가 많이 있소. 그러나 밤이었고, 가장 주요 목격자인 캡틴 바딩이 살해되어 그 점은 확인할 수 없는 바요. 그러나 몇 가지 정황증거로 미루어 캡틴 바딩을 살해한 사람은 분명 캡틴 카셀임에 분명하오. 검은 사자 백작은 이 죄에 대해 카셀에게 묻고 싶어하시오." 로일은 나직이 쉐이든에게 말했다. "쟈크를 죽인 자는 검은 기사고, 캡틴 바딩을 죽인 사람은 나야." "레앙에서?" "정당한 대결이었어." 로일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고, 몸에 이곳 저곳에 하얀 붕대를 감은 게랄드가 팔장을 낀 채 말했다 "온갖 죄를 갖다 붙일 생각인가보다. 일단 들어봐. 나중에 한꺼번에 퍼부어 주자 " 루오르는 카모르트의 위대한 기사 바딩에 대한 짧은 추모를 한 후, 두루마리를 계속 읽었다. "두 번째, 노르만트를 침략하여 국왕 폐하를 위협했고, 리제니 덴 뤼미에르 남작의 살해 혐의를가겼으며, 또한 수많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검은 기사들과 공모했다는 죄요. 원군을 보내기 위해 노르만트로 달려오던 뤼미에르 백작을 검은 기사와 함께 공격하려 했다는 데 사실이오? 확실히 말해 보시오, 카셀. 붉은 장미 백작과 검은 기사들 중 어느 쪽 편에 든 것인지? 아니면 둘 다요?" 카셀은 침묵했고, 다른 하얀 늑대들도 침묵했다. 아즈윈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쉐이든에게 물었다. “붉은 장미 백작과 그 검은 기사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하지?" “변명으로 밖에 안 들릴 거다. 로일, 넌 어떻게 생각해?” “사실상 끓은 장미 백작은 검은 기사와 거의 다른 패턴으로 움직였다. 레앙에 나타나 불을 지른 게 그 자라는 걸 설명할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방법을 찾지 못한 넷은 자연스럽게 루밀쪽을 봤지만, 그는 마치 불 난 집 구경하듯 팔짱만 끼고 있었다.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나?" 루밀은 조용히 대꾸하며 경고를 덧붙였다. "너희들 마음 다 아는데, 조심해야 할 거다. 지금 너희들이 함부로 나서면 카모르트와 아란티아 간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저 정도 정황 증거로 타국의 기사단 캡린을 자기네 법으로 처형한다는 게 조금 우습구나. 검은 사자 백작이라는 자가 좀 모자란 자더냐?' 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내가 아는 한 그는 확신이 서기 전에는 행동하지 않는 자입니다." 루오르는 세 번째 증거를 이야기했다. 그 말을 모두 듣는 순간 쉐이든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처음 두 가지 증거는 세 번째를 말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번째,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은 사자 백작께서 직접 지명한 증인에게 말을 듣는 편이 나을 거요. 루우룬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며 이번 전쟁에서 붉은 장미 백작의 편에 서서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어제 총 지휘관으로 나섰던 기사요. 이름은 루치 뱅상 그가 말하길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카셀이라는 자는 자기 마을의 농부였다고 하오." 그의 말에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웅성거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들도 크게 놀랐고, 힘없이 늘어져 있던 카셀도 고개를 들어 증인인 루치를 보았다. 루치는 하나 밖에 남지 않는 팔을 흔들며 재판장에 나섰다. 그는 검은 사자 백작과 국왕에게 큰 동작으로 인사를 한 후 카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카셀. 하지만 진실 앞에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군." 그는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말했다. "제 이름은 루치 뱅상이며 이틀 전 전투에서 노르만트를 침략했던 바로 그 장수입니다. 여러분들의 증오가 얼마나 심할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 사기꾼 대신 제가 저 자리에 밝아 심판 받고 있어도 할 말 없지요. 그저 자잘한 변명의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오직 붉은 장미 백작이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에 속아 노르만트 침공을 명령했으며 거기에 제 뜻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 일에 대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랑하는 카모르트라는 나라가 한 명의 사기꾼에게 농락당하는 꼴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섰습니다. " “말 똑바로 해라! 사기꾼이라니? 너는 네가 하는 말에 책임질 자신이 있나?" 게랄드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루오르가 말리려 했으나 루치는 느긋하게 손을 내밀어 직접 대꾸했다. “있소. 여기 암아 있는 이 말 많은 사기꾼은 루우룬이라는 마을에서 나와 같이 자란 친구이자, 석 달 전만 해도 밀 농사를 짓던 농부의 자식이며 두 달 전에는 끓은 장미 백작 군대의 용병이었소. 내가 그 쪽으로 소개장을 써주어 알고 있소. 증거? 직접 물어보시오. 어디 뭐라고 대답하나 봅시다. " 천하의 캡틴 울프가 기운이 빠져 암아 있는 것만으로 충격적이었던 군중 앞에서, 루치는 과격하게 카셀의 턱을 잡아 세웠다. “카셀, 말해봐라. 넌 어느 마을 출신이냐?" 아즈윈이 고개를 저었다. “카셀,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있어." 그러나 카셀은 표정 없이 대꾸해버렸다. “루치, 나를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하지만 네가 있어준 덕에 오늘의 내가 있었지." 루치는 검은 사자 백작 쪽으로 손을 펼쳤다. 백작은 콧방귀를 뀌더니, 천천히 카셀에게 다가갔다. 그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재판장에 모인 모두에게 말했다. "몇 가지 죄에 대해서 증거를 따로 제시해야 한다면 그리 하지. 아무래도 다른 나라의 고위 관직자를 함부로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카모르트 국민을 카모르트의 국왕께서 직접 처벌하시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 검은 사자 백작은 고개 숙인 카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깃들였다. "캡틴 울프, 아니 카셀. 네가 성 밖에서 나를 내쫓을 때, 언제고 네 녀석이 나를 올려보게 될 거라고 말했지?" 카셀은 뜨거운 숨을 몰아 쉬기만 했다 백작은 마침내 판결을 내렸다. “고작 농부 주제에 왕실에 들락거리며 수많은 귀족들과 국왕 폐하를 속인 그 죄만으로 충분히 죽어 마땅하다. 카셀 노이,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노라." 최종 동의를 내리는 사람은 왕이었으나, 그는 백작의 선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폐하? 결정을 내리십시오." "시간이 필요하오, 백작." "이 재판장은 판결에 긴 고민을 두는 곳이 아닙니다. 고작 농부에 불과한 자가 폐하께 조언했고, 페하의 결정을 움직였으며, 노르만트의 운명을 가지고 뒤흔들었습니다. 그런 자에게 무슨 고민이 필요하며 어떤 아량을 베풀려 하십니까?" 카모르트의 국왕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때 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정한 재판이라면 상대 쪽 변호도 들어야 마땅하지 않소?" 검은 사자 백작은 가만히 루오르를 바라보았고, 루오르는 끄덕였다. “그 말도 올소. 해보시오, 기사 쉐이든.” “우선 캡틴 바딩은 그가 죽인 게 아니오. 레앙에 있었던 여기 있는 로일이고, 로일은 그와 정식으로 대결을 펄쳤소." 검은 사자 백작은 눈을 치켜 뜨고 있는 로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럼 캡틴 바딩을 살해한 대가는 당신이 받아야하겠군, 로일 울프. 카모르트 최고의 기사를 어둠 속에 잠입하여 몰래 죽였다는 건 심각한 문제요.” "그가 먼저 대결을 요청했고, 나는 그 대결을 받아준 거요.“ 로일이 대꾸했으나, 자신의 목소리가 어른에게 말대답하는 어린애처럼 들려 끄트머리에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바딩은 비웃는 투로 말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바딩의 시체뿐이었고, 그 말을 증거할 사람은 없다. " 로일도 그 때 일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입은 뗐으되, 할 말이 없었다. 검은 사자 백작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아, 그리고 내가 캡틴 바딩에게 선물했던 말도 도난 당했더군. 그런데 그 말이 지금 왕실 마구간에 있던데, 그건 당신이 바딩을 죽여 홈쳐낸 건가?" "그가 선물했소!" 검은 사자 백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청중에 대고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들으시오. 이 자는 자기가 죽인 자가 자기에게 카모르트 최고의 명마를 선물했다고 말하는군. 아니면 선물을 받은 직후 살해한 것인가? 어느 쪽인가, 로일 울프?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은 검술 외에는 어떤 조건도 보지 않는다더니, 살인자와 도적들만 뽑았는가?" 검은 사자 백작은 분노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로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좋소. 내게도 제대로 된 증거가 없고, 그 족도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면 첫 번째 사건에 대해서는 그 죄를 묻지 않도록 하지. 루오르?" "알겠습니다, 백작 그럼 검은 기사와 붉은 장미 백작의 편에 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소?" 이 곳에 앉아 있다면 누구든 카셀을 변호할 자격이 있으나, 검은 사자 백작의 눈 앞에 나설 만큼 용감한 이는 없었다. 때문에 루오르는 직접 하얀 늑대들을 지목하며 물었고, 쉐이든이 대꾸했다. “당신들이 점은 기사라 부르는 존재는 붉은 장미 백작과 동일 인물이었소. 검은 사자 백작 앞에 검은 기사와 동시에 나타난 건 우연의 일치였을 거요." "기사 쉐이든 울프.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을 증언한다고 나서지 마시오. 나는 그가 나를 공격하는 걸 직접 본 사람이고, 내 부하들이 모두 나를 증언할 것이오." “당신의 부하들은 당신 만을 증언하겠지!" 아즈윈이 나섰으나 검은 사자 백작은 손을 내저었다. "듣자니 노르만트에 검은 기사들이 쳐들어 왔다더군 그런데 그 무서운 괴물들이 캡틴 카셀이 나서자,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다고? 믿을 수 없군. 같은 편이라 미리 약속한대로 물러난 게 아니라? 이거 굉장히 의심스럽지 않은가? 아, 물론 그런 게 아니라고, 왕실의 모든 병사들이 증언하겠지. 그럼 그들 모두가 당신들에게 훈련을 받아 정이 든 나머지 거짓말을 하는 거라 내가 주장하면, 그대는 어찌 답변하겠나? 나도 같소, 기사 아즈윈. 내 부하들의 증언은 신성하오." 아즈윈은 이를 악물고 검은 사자 백작의 말을 참아냈다. 그러나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검은 기사와 끓은 장미 백작이 동일한 인물이었다고? 그것만큼 수상하고 엉터리 변론도 없군. 궁지에 처해했다고는 하나, 꾸며낸 증거로 하늘이 내려다보는 신성한 법정을 더럽히지 마시게." "그건 마법이오." 로일이 다시 말했다. "마법?' 검은 사자 백작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어가 나와주었군. 좋소. 내가 물러나지. 마법에 내가 어찌 당해내겠나?" 청중석에서 마저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일은 굴욕감에 칼 손잡이에 손을 올렸으나, 쉐이든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 칼을 꺼내면, 오히려 검은 사자 백작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캡틴 카셀이 사실은 가짜였다는 건 어떻게 설명하겠나? 어찌 보면 그건 당신들이 카모르트 국왕을 속였다는 건데, 그 죄를 같이 물어야겠소? 이건 심각한 문제요." 쉐이든은 숨을 크게 몰아 쉬고, 백작의 말에 대답했다. 그의 말에 놀란 것은 오히려 그 자리에 있는 하얀 늑대들이었다. “그부분에 대해서만은 확실히 해두겠소. 그는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맞소." 검은 사자 백작은 한참 쉐이든과 눈싸움을 벌였다. 강한 인상은 다 서로에게 지지 않았다. "이제 사기꾼을 돕기 위해 성스러운 하얀 늑대마저 거짓말을 할 생각인가?" "거짓말이 아니다. 우린 한 달 전 코홀룬에서 카셀을 처음 만나 캡틴에 대한 맹세를 하고, 권한을 부여했다." 아즈윈이 말했다. 그러자 루치가 한 족 밖에 안 남은 손을 휘두르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여자 기사 양반. 부디 여자답게 처신하시오. 아니면 아란티아의 여자들은 모두 다 댁처럼 나서길 좋아하는 거요? 내 경험을 살릴 것도 없이 당신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오. 손바닥만한 영지의 귀족이라도 기사 직을 수여할 때는 많은 절차가 필요한 법이오. 그런데 한 달 전만 해도 붉은 장미 백작의 용병이었던 이가 언제 아란티아에 다녀왔단 말인가?" "남은 한 팔을 간수하고 싶다면 그 주둥이 닥쳐라!" 로일이 그를 노려보며 한 마디 하자, 루치는 백작의 뒤로 물러섰다. 마즈윈이 로일의 말을 받아 카셀의 등 뒤에서 도끼를 세우고 있는 두 사형집행관을 지목했다. 한 명은 옷이 맞지 않을 정도로 뚱뚱했고, 한 명은 균형 있게 말랐는데 둘 다 정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너희 둘 다 도끼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대륙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죽일 줄 알아." "사람들을 윽박지른 후에 모두를 납득시키는 그런 게 아란티아의 기사도인가?" 검은 사자 백작은 여유 있게 청중의 시선을 즐기며 둥근 재판장위를 거닐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아무나 붙잡고 캡틴을 시킬 수 있는 게 울프 기사단의 캡틴 자격 심사라는 건데, 그거 아주 재미있군.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고작해야 사기꾼 하나를 감싸기 위한 억지로 밖에 안 보이는군. 이런 재미 없는 쇼는 그만 두고, 그대들의 나라로 돌아가시오. 카모르트는 이번에 도와준 일에 대해 크게 감사할 것이며, 나 왕실의 수호 가문 뤼미에르 백작이 앞으로 두 나라 간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전해주시게." 검은 사자 백작은 허리에 차고 있던 아란티아의 보검을 뽑아 멀리 떨어져 있는 쉐이든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뤼비에르 백작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이었다. 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뤼미에르 백작 아무리 그런 말을 한다 해도 하얀 늑대들은 결코 캡틴을 버리고 가지 않소." "끝까지 거짓말을 이어갈 생각인가?" 검은 사자 백작과 쉐이든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기싸움에 메이루밀이 끼어들었다. "카셀이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아니라는 문제에 대해서만 한 마디 하겠소, 누벨 덴 뤼미에르 백작." "넌 누구냐?" 검은 사자 백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누구인지 보다 거기 있는 죄 많은 청년이 누구인지 신경써 주시오, 백작. 아까부터 캡틴이 아니라 하시는데, 그건 하얀 늑대들의 맹세를 무시한다는 뜻이오? 늑대의 이름이 이토록 가벼이 여겨지는 일에 한탄 하노라," 메이루밀은 아예 의자 위로 올라가 모두에게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격과 실력이 된다면, 울프 기사단은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따지지 않소. 또한 하얀 늑대 전원의 동의와 마스터의 허락이 내려진다면, 그게 누구든 울프 기사단의 캡틴 자격을 갖게 되오. 그게 적국의 기사였든, 이름 없는 용병이었든, 농부였든 상관 하지 않소. 그렇소, 뤼미에르 백작. 우린 강도와 도적 조차 조건만 된다면 받아들이고 있소. 그게 아란티아의 늑대들이오."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맹세의 무거움을 가르쳐주겠소." 쉐이든은 창을 들고 일어나 크게 소리했다. "카셀 노이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며,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권한을 주었다." 아즈윈도 칼을 치켜들었다. "캡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희생도 각오할 것이다." "그 대가가 전쟁이라면 감수하겠다. 물론 그 전쟁의 선두에는 내가 있을 것이다." 게랄드가 도끼를 세웠다. 마지막으로 로일이 덧붙였다. "나의 검도 모두와 함께 할 것이다." 메이루밀은 모두의 굳은 의지와 함께 빙그레 웃으며 쉐이든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나 메이루밀 울프가 과거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이 갖는 마스터의 권한으로서 이 맹세를 증거하리라. 카셀 노이를 울프 기사단의 캡틴으로 임명한다. " 루밀의 마무리에 청중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검은 사자 백작은 물론이고 하얀 늑대들마저도 놀란 눈을 했다. 메이루밀은 모두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리 놀래? 다 짐작하고 있지 않았었나?' "설마 설마 했었죠. 왜 말 안 했어요?" "은퇴한 녀석이 하얀 늑대의 이름을 빌리는 꼴이 우습잖아." 아즈윈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 않아 있는 카셀의 얼굴을 보았다. 힘없이 고개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검은 사자 백작은 나직이 신음하다가 들고 있는 보검을 들었다. 그것은 루밀의 정체에 대해 놀라느라, 하얀 늑대들 전원이 방심한 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하얀 늑대들은 다섯 명이었는데, 한 명은 어디 갔나? 전원이 아니었던 고로, 그 쪽 논리에 따르면 결국 카셀은 그대들의 캡틴으로 인정된 게 아니겠지? 그럼 아직 카모르트의 백성이니, 내 명령은 유효하다 죄인의 목을 쳐라." 백작은 명령했고, 두 명의 사형집행관 중 뚱뚱한 쪽이 도끼를 치켜세웠다. 이미 백작과 사전에 얘기를 주고 받은 모양인지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네 명의 하얀 늑대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으나 이미 구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늦었다. 도끼는 정확히 카셀의 목으로 뚝 떨어졌다. "안 돼!" 아즈윈은 다급히 외치며, 칼을 집어 던졌다. 그래 봤자, 휘두르는 도끼를 막기에는 늦었다. 그러나 모든 하얀 늑대들을 대신하여 옆에 있는 마른 사형집행관이 뚱뚱한 사형집행관의 손을 막았다. 도끼는 카셀의 목 위에서 멈췄고, 날아가는 아즈윈의 검이 뚱뚱한 남자의 손목에 박혔다. "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마른 사형집행관은 아즈윈의 검을 쑥 빼더니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 무게 많은 집행관은 네댓 걸음이나 뒤로 나가 떨어졌다. 마른 집행관은 아즈윈의 검으로 카셀의 밧줄을 끊어주고, 검은 도로 아즈윈에게 살짝 던져주었다.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와중에 오직 카셀만은 느긋하게 손목을 주물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란티아의 보검을 쥐고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주시하는 검은 사자 백작을 힐끗 쳐다보며 수화로 말했다. '던멜, 내 칼 도로 뺏어와.' 카셀이 기절하듯 쓰러져 있는 감옥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사람은 던멜이었다. 그는 카셀을 보자마자, 짧은 수화로 말했다. '검은 기사는 끓은 장미 백작이었다. 그는 카모르트가 아니라, 그 이상을 지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스스로 생명을 포기했다. 하지만 블랙 풋을 고용해 우릴 죽이려 했던 자는 따로 있었다.' 던멜은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사라졌다. 카셀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기가 생겼다. 그는 그 직후 음식을 씹어 삼켰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변론한 힘을 회복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를 재판장으로 데려가기 위해 간수와 경비병들이 왔을 때, 검은 두건을 쓴 두 집행관 중 한쪽이 던멜이었다. 던멜은 짧은 수화만 보여주었고, 카셀은 고개만 끄덕였다. '대기 중이다.' 제판 내내 카셀은 오한을 참으려고 온 몸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목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려 루오르 대신이 한 마디 한 마디할 때마다 귀가 울렸다.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루치가 나와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는 그야말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참고 기회가 올 때를 기다렸다. 기회는 한차례 있었다. 그러나 카셀은 나서지 못 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자격 여부를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아란티아의 늑대는 스스로 리더라고 생각하는 자를 리더로 따른다.' 루밀의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끌어올릴 때 쉐이든이 결정적인 힘을 주었다. '하얀 늑대들은 결코 친구를 버리고 가지 않는다.' 카셀은 밧줄이 풀린 손목을 주물럭거리며 놀란 눈을 한 네 명의 하얀 늑대들을 보고 생각했다. '나 역시 너희들을 버리지 않는다.' 던멜은 그에게 보검을 내밀었다.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사형 집행관에게 보검을 빼앗긴 검은 사자 백작은 두건을 벗는 던멜의 얼굴을 보고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뒤늦은 분노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검은 사자 백작." 카셀이 입을 열자, 모든 기사들과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고, 소란스러웠던 좌중들도 침묵했다. 재판장은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카셀은 재판을 중지시키려고 다가오는 루오르를 눈빛으로 밀어내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제기한 내 죄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하지만 뤼미에르 백작, 당신은 당신 자신의 수호 기사가 가진 명예를 더럽히는 짓을 했소." "무슨 헛소리냐, 카셀?" 백작은 자못 흥미롭다는 양 팔짱을 끼었다. “바딩과 로일은 서로 목숨을 내 건 기사 간의 시합을 했소. 그걸 살해했다 라고 말하는 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바딩을 모욕하는 짓이오." "네 친구들은 네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는데, 듣기만 한 네가 어찌 그걸 아느냐?“ 카셀은 갑자기 목청을 터트리며 청중을 향해 소리쳤다. "자리에 있다면 대답하라, 기사 비앙. 모시던 캡틴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을 할 셈인가? 일어나 그 때 본 것을 그대로 고하라.“ 들어본 적도 없는 비앙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걸 보고 다들 어리둥절해 할 때, 라이온 기사 중 하나가 투구를 벗어 얼굴을 내보이며 말했다. "캡틴 바딩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자의 한 명으로서 그 싸움에 대해 말씀 드립니다. 캡틴 바딩은 목숨을 내걸고 로일 울프와 대결을 펼쳤으며, 그 대결은 지금까지 이 대륙에 있어본 적이 없는 위대한 승부였습니다. 바딩은 죽기 직전, 자신에게 멋진 시합을 안겨준 로일에게 자신의 말을 선물했습니다." 검은 사자 백작이 당장 손가락으로 비앙을 가리키며 뭐라 말하려 하기 전에 카셀이 더 크게 말했다. 그 동안 않아왔던 터라 목소리는 다 쉬었지만 그 기백은 모든 귀족들을 호통치던 그 때의 카셀과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신은 로일 울프를 모욕했소, 뤼미에르 백작.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모두 버린 채 자신에게 도전해 오는 기사를 베어야 했을 로일의 고뇌를, 당신은 고작 살해라는 단어로 깎아 내릴 줄 밖에 모르는가?" 그 말을 듣던 로일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카셀은 하얀 늑대 모두를 돌아보더니 다시 백작 쪽으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던멜이 감옥에 갇힌 그에게 보여준 수화를 고스란히 백작에게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로, 카모르트에 원군으로 오는 하얀 늑대들을 암살자를 동원하여 죽이려 했소?" 재판 내내 흥분하지 않았던, 검은 사자 백작은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카셀, 이제 네 죄를 무마하려고 더 큰 거짓말을 동원하는구나." “당신은 국왕을 보호하고 있는 모든 방패막이를 하나씩 철저히 무너뜨리며 오래 전부터 이 나라를 지배할 준비를 해왔소. 노르만트 주변의 모든 귀족들을 자기 수하로 두고, 유일하게 자신을 방해할 에노아 후작을 고립시켰소. 붉은 장미 백작이 의외의 변수였는데, 당신은 오히려 그를 이용해서 더욱 국왕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두었소. 그 때 갑자기 나타난 아란티아라는 원군은 분명 당신 계획의 방해꾼이었겠지." "거짓말로 왕실을 흔들었던 네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 국왕 폐하의 판단에 맡기겠다. 캡틴 울프로서 내 말에 한 치 거짓말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내 목을 처도 좋소!" 아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으나, 카셀은 국왕 족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처음 저와 단둘이 얘기 했던 순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이 혼자 서실 기회입니다, 폐하." 카모르트의 국왕이 떨리는 입술을 떼려 하자, 백작이 소리했다 "닥쳐라, 카셀. 네 녀석은 그런 조언을 할 자격이 없다." 카셀은 지지 않고 받아 쳤다. “당신은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소. 그리고 그 준비 과정의 시작이 샤이필드 공작의 암살이었다면 이 재판장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오." 검은 사자 백작의 눈동자가 커졌다. "궁하니까 이제 없는 죄를 만들어서 내게 뒤집어 씌울 생각인가?" 갑자기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위엄 있게 말했다. "멈추시오, 뤼미에르 백작. 캡틴 울프의 말을 더 듣고 싶군." "페하, 그는 이미 폐하를 한 번 크게 속였던 자입니다 저런 거짓말을 믿으실 생각입니까?"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이 곳은 재판장이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을 끝까지 할 권리가 있지." "증거도 없는 말에 흔들리시면, 왕실의 기강이 크게 무너질 줄로 아옵니다. " 검은 사자 백작이 말하며 루오르 대신을 노려보자, 루오르는 이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두루마리를 들고 나싫다. 하지만 두나단 대신이 그를 잡아 끌며 대신 말했다. "진상 조사는 따로 있을 거요, 백작. 또한 캡틴 울프의 오늘 재판은 보류될 것입니다." "착각하지 말라, 두나단. 그는 캡틴 울프가 아니고, 우리는 그 문제로 이 재판을 시작했다. 그리고 카모르트의 긴 역사 동안 언제나 이 자리에서 판결을 내려왔고, 처벌해왔다. 느닷없이 증거도 없는 죄를 묻는 자리가 아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며, 던멜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카셀의 옆에 싫다. 라이온 기사들도 움직였고, 왕실 기사단도 눈치를 보며 나섰다. 청중 중 한 명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커다란 싸움이 일어날 판이었다. "증거라면 내가 제시하겠소." 로브를 쓴 한 남자가 옆에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손을 들며 재판장 쪽으로 나셨다. 웅성거리는 와중에도 두나단은 침착하게 손을 내밀어 물었다. "이 재판장에서는 누구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소. 그대의 이름과 함께, 가지고 있는 직함을 말하고, 지위가 없는 자라면 사는 지역과 영주의 이름을 말하시오." "나는 나자신의 영지에 살며 나의 영지는 코홀룬이오. 폐하, 너무 늦게 찾아 뵈어서 죄송합니다. 고디머 백작이 인사 드리겠습니다." 그는 귀족다운 풍모를 풍기며 재판장 앞에 섰다. “당신이 말한 결정적인 한 순간의 도움이란 게 이런 것이길 바라겠소, 캡틴 울프." 그는 카셀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카셀은 자기도 잊어버린 그 말을 기억해 준 것이 한없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럼 그 증거에 대해 말씀해 보시오, 고디머 백작." 두나단 대신이 말했다. "이미 한 번 발언한 바 있는 라이온의 기사 비앙은 캡틴 바딩이 죽기 전에 물려준 자료를 가지고 있었소. 그는 내게 이 자료를 넘겨주었소. 그 자료에는 샤이필드 공작을 암살하기 위해 쓰였던 독약과 그 독약을 공작이 먹는 음식에 넣었던 요리사가 명시되어 있소. 또한 요리사를 고용했던 사람과 그 사람을 고용한 조직의 이름, 그리고 그 의뢰인을 적어두었소. 독약의 출처를 따라가는 추리 과정 속에서 의뢰인이 밝혀지는 부분은 사실 소설처럼 재미있었소. 이것이 진실임을 스스로의 명예로서 증거한 자필 문서니 증거로 받아주시오. 그의 필체는 누구보다 뤼미에르 백작이 알고 있을 데니, 확인하셔도 좋소." 검은 사자 백작은 핏대 선 눈으로 고디머 백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고디머, 이런 식으로 내게 반기를 들어 무사할 것 같은가?" “무슨 소릴? 이건 나의 뜻이 아니오. 바딩은 당신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후 그 순간, 당신을 공작과 똑 같은 독약으로 죽이려 계획했었소. 그가 평생을 주군으로 모시고 싶었던 샤이필드 공작이 죽은 후,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대의 부하 기사로 들어간 이유가 뭐겠소, 뤼미에르 백작? 이건 바딩의 복수요." 두나단 대신은 고디머 백작에게 받은 서류를 훑어본 후 왕을 보이고, 다시 검은 사자 백작에게 확인하라고 내밀었다. 그러자 백작은 느닷없이 그 서류를 찢어발겼다. 깜작 놀란 두나단이 말렸으나, 백작은 그를 손으로 밀쳐 쓰러뜨렸다. “모든 라이온 기사들은 무기를 들어라. 원하는 게 전쟁이라면, 그래, 바라는 대로 해주지." 재판의 결과에 마음이 흔들린 라이온의 기사들이었으나, 이미 명령에 익숙한 군인들인 터라 그들은 시키는 대로 무기를 빼 들었다. 재판장의 경비들과 왕실 기사들은 즉시 거기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으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이 자리에서 울프 기사단을 죽여 아란티아와 전쟁이라도 할 셈이오?" 고디머 백작이 놀라 말하자, 검은 사자 백작은 사악한 미소를 보였다. “카모르트의 수호 가문으로서 그것 하나 못할까?” 왕이 직접 백작 앞에 나서 소리쳤다. "나는 아직 수호 가문 직위를 누구에게도 내려주지 않았다, 뤼미에르. 그런 걸 결정할 권한은 그대에게 없다." 이미 이성을 잃은 검은 사자 백작은 즉시 칼을 빼 들어 왕의 목에 겨누었다. “그럼 강제로라도 하게 할 수 있소. 아니, 내가 왕위를 갖는 것도 좋겠지." 불행히도 왕의 옆에는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아주 멀러 떨어진 곳에서 겨냥하고 있는 화살 한 자루가 백작의 팔을 꿰뚫었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어뜨렸다. 언제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이 재판장 안으로 들어왔는지 모르나, 오십 여 명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로 라이온의 기사들을 겨누고 있었다. 백작의 팔을 정확히 꿰뚫은 궁수는 멀리서 걸어오며 말했다. “이미 복수는 바딩이 끝낸 듯 하지만, 이건 날 왕실 기사단 캡틴직에서 몰아낸 것에 대한 선물이오, 뤼미에르.” 재판장까지 걸어온 후에야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 보았다. "캡틴 데이릭!" 제일 먼저 두나단이 그를 알아보았고, 백작의 칼에서 벗어난 국왕이 그에게 달려갔다. “데이릭, 자네가 와줄 줄이야 " "에노아 후작의 뜻이었습니다. " "후작이?" 그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카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캡틴 울프! 에노아 후작의 전언이오. 약속했던 원군 대신 새로운 원군을 보냈으니 유용하게 써주길 바란다, 이상." 그는 미소 지었고, 카셀도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검은 사자 백작을 향하게 되었다.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이 런 걸 계획한 게 아니었어," 백작은 피가 흐르는 팔을 쥐고 가쁜 호흡으로 됫걸음질 쳤다. 백작은 샤를 국왕을 살기 띤 눈으로 힐끗 봤다가 그가 앉았던 왕좌를 다시 돌아보았다. “한 발만 내디뎠으면 끝날 일이었는데!" 맴도는 시선이 모두 그를 비난하고 있었고, 마지막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카셀이었다 "너만 없었다면.......“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파멸시킨 거요." 팔콘의 부하들에게 활로 조준 당한 라이온의 기사들은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캡틴 바딩을 따라왔지, 백작을 따른 게 아니었었다. 백작은 다친 팔을 움켜잡았다. “모든 게 계산대로였는데......, 모든 게. 다른 나라의 원군 조차 내 뜻대로 할 수 있었거늘, 어찌하여 농부의 자식에게.......” 그는 무척 고통스러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카셀은 처음 그가 화살을 맞은 자리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쥐고 있는 부분은 화살 맞은 부위기 아니라, 이틀 전 검은 기사의 칼에 찔린 자리였다. 눈이 침침해진 딘인지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카셀은 눈물이 나와 몇 번 눈을 깜빡여 보았으나 오히려 주변의 어둠이 진해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재판장 주변으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검은 사자 백작은 숨을 토해내며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 재판이 끝난 후 한 자리 시켜주겠다고 약속 받은 루치는 황급히 쓰러진 백작에게 달려갔다 "거, 검은 사자 백작이시여, 괜찭습니까?" 그 순간 검은 사자 백작은 루치의 목을 움켜잡았다. 루치는 그의 팔을 두 손으로 잡고 바둥거렸으나, 벗어나지 못했다. 검은 사자 백작은 커다랗게 뜬 눈으로 계속 숨만 내뱉었고, 그 숨결에 검은 연기가 섞여 나왔다. 루치는 목이 막혀 비명도 못 지르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몸을 떨었다. 다음 순간 폭발하는 화산의 용암처럼 검은 연기가 바닥을 기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검은 연기에 놀란 목소리가 아니었다. 거의 동시에 반대쪽에서 또 여러 명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고, 곧이어 사방에서 일어난 혼란이 삼백 명의 청중 모두를 뒤흔들었다 바닥의 흡을 들고 오래 전 이 곳에서 처형되었던 시체가 일어서고 있었다. 뼈마디마저 썩어버린 형체 없는 시체들은 바닥에 흐르는 검은 연기를 뒤집어쓰고 일어나더니, 점점 살점이 붙어나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기사들이 그 시체를 내리쳤으나, 그것은 몸에 박힌 창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옆의 다른 병사가 그 놈을 창과 칼로 찔렀으나 이미 한 번 죽은 것들을 또 죽일 순 없었다. 어디선가 기분 나쁜 뿔 나팔 소리가 들렀다. 게랄드가 외마디처럼 내뱉었다. "링케!" 한 번 노르만트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뿔 나팔 소리에 왕실의 병사들과 노르만트의 시민들은 패닉을 일으켰다.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괴물 말의 울음 소리가 들렀다. 아즈윈은 게랄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녀석들 부서진 갑옷 어쨌어?" 게랄드는 어금니를 꽉 깨문 목소리로 말했다. "땅에 묻어버렸는데, 이제 다시 합쳐지고 있겠군 " 검은 사자 백작의 목에 잡힌 루치는 마치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 지더니 그의 손 안에서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검은 사자 백작을 꿰뚫은 화살은 타버린 재처럼 날아갔고, 붕대를 감은 팔부터 검은 철갑으로 싸이기 시작했다. 입과 코와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주저앉아 있는 백작을 강제로 일으켰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백작은 이제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것은 아무리 익숙히 알고 있어도 저절로 공포부터 떠올리게 하는 검은 기사의 모습이었다. 커다란 검은 투구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암흑이 하늘을 가리고 어둠이 재판장에 내려앉았으며, 공포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훈련 받은 기사들도 시체를 상대로 싸우는 법은 알 리 만무했고, 언제나 질서 있게 움직이는 팔콘의 부하들도 시체를 향해 화살을 쏘는 무의미한 짓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움직이던 시체들은 이제 원숭이처럼 몸을 낮추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의 등 뒤를 덮쳤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의자에 걸려 넘어지고 넘어진 사람에 걸려 넘어지며, 깔린 사람 위에 깔렸다. 병사들은 아무렇게나 칼을 휘두르다, 시체에게 칼을 빼앗기거나 심지어 동료를 찌르기도 했다. 용기를 내어 움직이는 시체를 공격했던 병사들 조차 부서진 시체들이 다시 합쳐져 그의 발목을 잡으면 거의 우는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말의 울음 소리가 가까워지며, 그 소러의 정체를 아는 병사들은 또 한 번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하얀 늑대들도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그들은 밑에서 올라와 발목을 잡는 시체들을 발로 걷어차고 목을 날려버렸다. 게랄드는 자기한데 다 덤비라고 소리지르며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물러나라. 한 번 죽은 놈을 또 죽여봤자, 소용도 없어." 쉐이든이 게랄드에게 외치며 옆으로 기어오는 시체를 창으로 찔렀다. 국왕도 이미 처형장 밑에서 뼈와 씩은 살점으로 이루어진 시체가 일어나자, 체면을 버리고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팔콘이 당장 칼을 휘둘러 그 목을 치며 왕을 보호했으나 떨어진 목이 다시 합치지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 카셀은 검은 기사의 군주를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검은 기사는 등을 쪽 펴고, 투구 너머의 심연과도 같은 시선으로 카셀을 응시했다 카셀은 굵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얀 늑대들은 캡틴을 보호하라." 그의 목소리를 들은 아즈윈이 제일 먼저 카셀의 왼쪽에 붙었고, 쉐이든과 게랄드도 즉시 계판장 위로 뛰어올라왔다. 메이루밀과 로일은 머리 둘 달린 거대한 시체를 힘을 합쳐 세 동강을 내주고 거 기에 합류했다. "죽지 않는 놈들이야. 싸워도 소용이 없어." 쉐이든이 말했고, 아즈윈이 그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열두 놈들이 또 올 거다. 이 시체들과는 차원이 달라. 그 놈들이 끝없이 재생할 것을 생각하니 환장하겠군." 카셀은 검은 기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이윽고 검은 기사의 손놀림에 따라 검은 연기들이 꿈틀거렸고, 그 연기를 흡수한 시체들의 몸이 근육으로 부풀어 올랐다. 검은 기사는 웅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주 투이트 코티즈!" 게랄드가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링케가 했던 말이군. 근데 뭔 소리야?" 카셀른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 그렇게 말하고 있어." "너, 저걸 알아 들어?" 게랄드가 놀라 물었으나, 카셀은 대꾸하지 않고 모두의 보호에서 벗어나 검은 기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했다. "나는 네가 두렵지 많다. 두려운 건 이미 다 지나갔어." 카셀은 천천히 아란티아의 보검을 뽀ㅃ았다. 보검의 검은 칼날이 카셀 눈동자에 아로새겨졌다. 그는 칼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모든 병사들은 들으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않는 적이 아니라 이미 죽었어야 할 불쌍한 영혼들이다. 그대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여기에서 져버릴 생각인가? 눈 앞의 적을 공포에 담아 부풀리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즈윈은 순간 카셀을 비롯한 자기들의 주위에 검은 기운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두웠던 사방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쉐이든도 그 밝아지는 이유를 몰라 시선을 위로 향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직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죽은 자들은 산 자를 죽일 수 없다. 그대들을 죽이는 건 오직 스스로의 공포뿐이다. 싸워라. 그 이후는 모두 하얀 늑대가 맡겠다.“, 카셀은 강한 의지를 담은 시선으로 검은 기사를 바라보며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죽지 않는 자들을 지배하는 군주여! 죽은 자들을 놔주고 물러나라.“ 빛이 일어나고,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다. 시체들에 검을 먹던 기사들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시체들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을 들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기사단으로서의 힘을 꺾을 수 없었다. 검은 기사의 군주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카셀에게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카셀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농부의 자식이 아니다.“ 카셀은 검은 기사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뛰어넘는 강한 어조로 소리쳤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 카셀 울프다.“ 카셀의 보검에서 하얀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것은 대단히 강한 빛이었으나, 조금도 눈 부시지 않았다. 모두 놀랐으나 가장 놀란 건 메이루밀이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생전 저 빛을 또 한 번 보게 될 줄이야." 검은 기사의 군주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가 즉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의 몸에서 뿜는 검은 기운이 칼의 빛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어둠이 역류하는 온천처럼 바닥에서 뿜어져 올라왔고, 보검의 빛이 닿는 부분을 제외한 모든 곳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카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로일, 저 자와 싸워본 적 있지? 네가 마무리 지어라." 열두 검은 기사가 모는 말이 하늘을 날 듯이 점프하여 재판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단숨에 하얀 늑대들이 있는 재판장까지 밀고 왔고, 병사들을 향해 검과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을 뿐, 그 안까지 진입하지는 못 했다. 왕실 기사단과 라이온의 기사들이 그 길목을 막고 있었다. 카셀은 찰을 로일에게 내밀었다. 로일은 말없이 카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 칼을 쥐었다. 강한 빛은 로일의 손에 들어갔어도 계속 이어졌다. "고마워, 캡틴." 로일은 검은 기사를 향해 준비 자세도 없이 정면으로 걸어갔다. "위대한 영웅이 들었을 때 빛을 발하는 검이라 했지." 메이루밀은 네 명의 하얀 늑대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 빛을 잊지 마라 로일 뿐 아니라, 너희들 중 누가 들었어도 빛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검은 기사의 군주는 손을 휘둘렀고, 거기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부채꼴로 뿜어져 나갔다. 바닥의 석판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쩌억 갈라졌고, 부서진 돌이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정면에 있던 로일이 그 공격을 모조리 받아내 뒤에 있던 모두는 그저 물러나는 걸로 끝날 수 있었다. 로일의 팔과 가음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베인 게 아니라 안에서 살갗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로일은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검은 기사를 향해 말했다. "라틸다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면, 최소한 그녀의 영혼을 편하게 해주고 싶소, 쟌스데인 백작," 검은 기사는 또 한 번 팔을 휘둘렀고, 로일은 그 품 안으로 뛰어 들었다. 하얗게 빛을 뿜는 칼날이 어둠을 베고 허공을 베고 검은 기사의 갑옷을 베었다. 빛의 덩어리가 로일의 몸을 감싸듯 부서졌고, 검은 기사의 몸은 두 동강이 났다. 부서진 검은 갑옷은 마치 불 위 에 올라않은 것처럼 바닥에서 계속 꿈틀거리며 하얗게 타 들어갔다. 투구에서 괴이한 검은 형상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던멜이 델모주 성의 지하에서 봤던 그 존재였다. 그러나 그 거대한 기사의 형상은 하늘로 올라가다가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고, 순식간에 형체를 잃어버렸다. 보검의 빛이 사라졌고, 동시에 주위의 모든 어둠이 말끔히 씻겨나갔다. 일어난 시체들은 모두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땅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라이온의 기사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검은 기사들도 힘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마치 불에 탄 패처럼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아즈윈은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고, 쉐이든과 게랄드는 둘의 묵직한 무기를 어깨에 걸쳤다. 던멜은 겨우 긴장에서 풀린 카셀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왕도 팔콘의 보호 아래 안전했다. 로일은 검은 기사를 벤 보검을 들고 천천히 카셀에게 되돌아왔다. 카셀은 손을 내밀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수고했어, 로일." 로일은 카셀에게 보검을 내준 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의 검을 뽑아들더니 뒤로한 철음 물러섰다. 다들 그의 엉뚱한 행동을 주시했다. 로일은 칼을 바닥에 짚더니 무릎을 꿇었다. “아직 하지 못한 맹세를 하고 싶다. 이 결정은 전원의 동의에 상관 없이 오직 내 개인의 의견이며, 나는 어떤 반대에도 상관하지 않겠다. 나 로일 울프는 카셀을 캡틴으로 모시겠다." 카셀은 깜짝 놀란 나머지 그에게 무릎 끊지 말라고 말리지도 못했다. 아즈윈은 빙그레 웃으며 코홀룬에서 했던 맹세를 흉내내어 로일처럼 칼날의 끝을 바닥에 댄 채 무릎을 꿇었다. “이제부터 그대의 이름은 카셀 울프이며, 하얀 늑대들의 캡틴으로 임명했다 임기는 카셀이 스스로 물러난다고 할 때까지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나의 캡틴, 카셀!" 던멜도 한 쪽 무릎을 끊고 고개를 숙였고, 쉐이든은 창을 바닥에 찍은 채 말했다. "이것이 임시 캡틴을 지낸 후 우리가 주는 보상이다, 캡틴 카셀." 쉐이든은 천천히 한족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게랄드도 유쾌한 목소리로 외치며 거대한 도끼와 함께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댔다. "늑대의 이름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 캡틴 카셀!" 카셀은 자신을 둘러만 하얀 늑대들의 맹세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재판장에 있는 모든 라이온의 기사들과 왕실의 기사들마저 자신의 무기를 세우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카셀은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그가 바라던 임시 캡틴으로서의 보상이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에노아 후작이 도착한 후 모든 것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후작은 팔콘에게 왕실 기사단의 캡틴을 제안했고, 대신들도 찬성했다. 팔콘은 거절했으나, 왕이 직접 손을 잡고 부탁하니 여러 번 거절하기 곤란해졌다. 카셀은 팔콘에게, 메오릭스를 왕실 기사단으로 복직시켜 명예를 되찾아 달라는 조건으로 그 자리를 받아들이라고 부탁했다. "제이니가 좋아하겠군." 팔콘이 말했다 카셀은 팔콘과 악수하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죠. 그저 친절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생각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왕실의 수호 가문을 정하는 일이었다. 이번 같은 문제를 염려한 모든 대신들은, 왕에 충성을 다하는 귀족을 빨리 찾아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물론 그 중심에는 에노아 후작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늘고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대신 고디머 백작을 추천했다. 후작의 강한 지원을 받는다면 어렵지 않을 테지만, 백작은 그런 중한 직책을 맡는 걸 두려워했다. “고작 당신을 도운 게 다인 내가 왕실의 수호 가문이 된다는 건 좀 억지 아니오?" 고디머 백작은 짐을 싸는 카셀에게 와서 고민을 토로했다. “받아들이십시오. 이미 전 당신이 보여준 왕실에 대한 충성을 국왕께 보고 해줬습니다. " 카셀이 웃으며 말하자, 백작은 놀라 말했다. “맙소사, 어쩐지 폐하께서 너무 적극적이다 싶었소." 카셀은 큰 소리로 웃었다가 기침을 했다. 아직 감기가 완쾌되지 않은 탓이었다. "아란티아로 돌아 가시오?" “돌아가는 게 아니죠. 저는 원래 그곳에서 온 게 아니니.” 고디머 백작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본명이 카셀 노이라고 했소? 당신이 루우룬 마을 출신이라고 해서 떠오른 건데, 우리 집 방에 쓰이는 밀이 거기에서 재배된 거라고 내가 말할 거 기억하시오?" “기억이 날 듯도 하군요. 그게 왜......?" “그 밀을 대주는 농부 이름이 노이였거든. 절대 밀 값을 깎을 수 없는 농부라며, 항상 내 집사가 불만을 토로한 탓에 잘 기억하고 있소." 카셀은 혹시나 했던 그 이름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아버지께서 말쓸하신 사기 쳐 먹기 좋은 큰 도시의 귀족이 당신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날 정오에 카모르트의 국왕까지 직접 배웅하는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하얀 늑대들은 노르만트를 떠났다. 갈 길을 가야겠다는 메이루밀과 헤어진 후 하얀 늑대들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단히 논의했다. 의외로 제일 먼저 던멜이 의견을 말했다. ‘덴모주로 가야 한다.' 로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왜지?“ 던멜은 말을 세우고 길게 수화로 말했다. “쟌스데인 백작은 즉은 자신의 딸을 덴모주 성의 지하 재단에 눕혀놓고 어떤 의식을 치켰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보지 못 했다. 하지만 나중에 가보니 쟌스데인 백작은 죽어 있더군. 대신 그 여자는 살아났다." “그럼 우리가 해치운 그 검은 기사는 뭐였지?” 아즈윈이 묻자, 카셀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 검은 기사는 뤼미에르 백작의 몸에도 깃들어 있던 거야. 그럼 처음부터 쟌스데인 백작의 몸과도 별개로 움직일 수 있는 어떤 다른 존재였다는 거겠지. 그럼 덴모주 쪽에.......” 카셀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로일이 갑자기 말을 달렸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모두 로일의 뒤를 따랐다. 로일은 무너진 성의 틈으로 라틸다를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팔을 걷어 붙이고 성의 뒤뜰을 삽으로 파고 있었다. 그녀는 로일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슬픈 미소로 반겼다. "친구들과 같이 왔군요." "살아 있었군요." "살리지 말아달라는 제 부탁을 아버지께서 들어주지 않은 거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죽는 게 두려워졌어요. 지금 제가 살아 있는 거냐고 누군가에게 묻고 싶지만 이제 이 성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렸어요. 꼭 돌아올 줄 알았거든요." 라틸다는 자신의 팔뚝에 자해한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발갛게 물들었다. "로일, 말해줘요. 저도 이제 죽음에서 부활한 괴물이 된 건가요? 그렇다면 왜 칼을 델 때마다 이렇게 아픈 거죠? 왜 본즈의 기사들처럼 상처가 낫지 않는 거죠?" 로일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라밀다, 당신은 괴물이 아닙니다. 당신은 살아 있는 라틸다 그 자신이에요.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죽는 순간 그의 힘에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줬어요. 검은 기사들도, 걸어 다니는 시체들도. 하지만 당신은 여기 살아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당신 앞에서 죽었잖아요." 로일은 무너진 탑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어쩌면 즉은 자를 살리기 위한 거대한 재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죽은 자를 걸어 다니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자라 해도, 죽은 자를 산 자로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마 다른 커다란 희생이 필요했겠죠. 쟌스데인 백작은 스스로의 생명을 당신에게 불어넣은 것입니다." 라틸다는 계속 울음을 참으려다 결국 주저앉으며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로일은 등을 감싸며 위로했다 "라틸다, 이제 당신이 이 곳의 군주입니다. 새로 얻은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마십시오." 라틸다는 울음을 참고, 로일의 손을 잡았다. "그럼 검은 기사는 모두 죽었나요?" "예, 제가 죽였습니다. " 라틸다가 그에게 내 준 것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상징하는 목걸이였다. "아버지의 것이에요. 다른 이의 것과 달리 이상한 문장이 쓰여 있더군요." "이걸 왜 제게?" "내가 만약 악의 힘에 노출되어 아버지처럼 된다면, 로일, 다시 한 번 돌아와 주세요. 그리고 당신이 했던 일을 다시 한 번 해주세요" 로일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눈물 젖은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강했다. 멀리서 둘의 대화를 바라보던 쉐이든이 팔짱을 낀 채 카셀에게 말했다. "메이루밀이 말하길, 검은 기사의 문제는 카모르트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고 하더군. 즉, 이 일은 큰 일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아, 그런데 카셀. 너 그 검은 기사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었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어?“ "몰라. 그 순간 그냥.......“ 카셀은 허리에 찬 아란티아의 보검을 쥐었다. “그냥 칼이 내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그런 기분이었어. 나도 그 이상은 몰라." 아즈윈은 입맛을 다셨다. “너, 아란티아로 돌아가면 이것저것 할 일 많겠다?” “물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길 바래." 카셀은 약간 자신감. 없이 말했다. 아즈윈은 그의 허리를 감쌌다. “이런 힘든 일도 버텼으면서 무슨 걱정이야?" “난 원래 이런 일에 낙관적이지 않아서 하는 말인데, 왠지 아란티아로 돌아가면 카모르트에서 했던 고생은 별 게 아니었다라고 말하게 될 것 같아." “난 이런 거지 같은 꼴 또 당하고 싶지 않아." 아즈윈은 벌써 혀를 내둘했다. 쉐이든은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카셀. 우선 여왕님을 뵙고, 아란티아에서 살게 되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게 될 거다." “그래, 나도 여왕님을 뵙고 싶어. 하지만 그 전에 아버지를 뵙고 싶어. 루우룬 마을은 여기에서 이틀 거리야. 어차피 아란티아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들렸다 가자." 카셀은 모두에게 말했다. 아즈윈은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카셀의 아버지라!" 로일과 이야기 하던 라틸다는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 하며 로일에게 인사했다. "잘 가요, 로일. 난 아직 아버지와 안나의 장례를 치러주지 못 했어요. 내일까지 모든 일을 끝내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시작하시 리라 믿습니다, 레이디 라틸다." “그 후로 모든 것이 행복했다는 동화 속 주인공 행세는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게 내 운명이라면 절대 꺾이지 않겠어요." 라틸다는 작은 미소를 보였다. 로일은 마지막까지 그녀를 돌아보며 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도 손을 들어 하얀 늑대들 모두를 먼 발치에서 배웅했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끓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저녁 노을이 그녀의 끓은 머리카락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얼굴에 묻은 흙과 눈물을 밀고 일어난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카모르트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카셀은 새로운 힘을 얻은 사람은 수호 가문이 된 고디머 백작 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모르트에 다시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생기는 건 아마도 여백작 라틸다 쟌스데인이 딛고 일어서는 시기가 될 거라 예상했다. 무엇보다 끓은 장미라는 이름은 그녀와 어울렸다. 에필로그...카셀의 아버지 루우룬 마을에는 매년 그랬듯 올해도 추수를 앞두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다음달 힘든 일정을 위해 많은 농부들이 비를 핑계 삼아 휴식을 취하느라 마을은 무척 한산했다. 그런 조용한 마을에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쓴 여섯 명의 말 탄 기사들이 나타났으니, 작은 소동이 벌어질만했다. 그러나 그 공포의 여섯 기사 중 하나가 촌장에게 인사하는 예의를 보여, 창문에 기대어 몰래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또 그는, 도시로 달아나고 싶어 안달이 난 나머지 비 오는 날에도 밖을 서성대며 한숨 쉬는 쟈넷에게 손까지 흔드는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지루한 시골 마을의 작은 사건이었다. 여섯 명의 기사는 루우룬에서 제일 질 좋은 밀을 생산하기로 유명한 농부 노이의 집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창문 밖으로 은은한 촛불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무척 기대되는데?" 아즈윈이 빗물에 잔뜩 젖어있는 손을 털며 물었다. "내가 너무 부풀려 말했나? 사실 오면서 생각해 보니 정말 평범한 분이시거든. 글쎄, 어쩌면 난 너희들을 소개했을 때 놀랄 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카셀은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곧 문이 열렸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카셀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팔을 활짝 펴고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피 묻은 식칼을 한 손에 들고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고 그럴 마음이 박 가설다 아버지는 칼을 까닥거리며 한참이나 카셀의 얼굴을 뜯어보기만 했다. 아즈윈은 게랄드의 눈치를 봤고, 게랄드는 로일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못 했다. 번개가 치며 주위가 한 번 크게 번적거렸다. 카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버지, 석 달도 안 됐는데 설마 제 얼굴도 못 알아보세요?" 카셀의 아버지는 뭔가 대단히 떨떠름한 소식을 들었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날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니 내 아들 카셀이 맞긴 한가 보군." 카셀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버지,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기 때문에 크게 고생했어요. 빗 속에 계속 세워두실 거에요?" "아, 그거 잘 됐구나. 다 큰 자식 놈 엉덩이 때리기도 뭐 한데 그냥 벌 받는 셈 치고 거기서 비나 맞아라." 카셀이 난감해하며 친구들을 돌아보니, 쉐이든이 뒤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카셀의 아버지도 웃으며 피 묻은 식칼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손님들이 있는 것 같으니 우선 들어와라. 다들 덩치가 산만 하니 내 좁은 집에 초대하기도 민망하구만.” "괜찮습니다. 아늑하고 좋아 보이는데요." 첫 번째로 아즈윈이 들어오며 말했다. 카셀의 아버지는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능력 없는 내 자식이 유혹해온 며느리 감은 아닌 것 같고, 이렇게 아름다운 처자가 작은 시골 마을에는 어인 일이신가?" “능력 없는 남자의 유혹에 넘어간 아버님의 며느리 감일지도 모르죠." 아즈윈이 유들 맞게 대꾸하자,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모두를 안내했다. “자, 마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지. 다들 식탁에 앙아. 수건은 거기 마른 게 몇 장 있으니 쓰고. 아, 이런. 의자가 모자라는군. 카셀, 거기 침대 밑에 있는 간이 의자 좀 꺼내라, 손님들을 오래 세워두면 안 되지. 그리고 넌 서 있어. 벌이다" 카셀은 시키는 대로 하다가 마지막 말에 벌컥 화를 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환영해야 하지 않아요?" "환영?" 카셀의 아버지는 돼지고기를 썰던 식칼을 도마에 사정없이 내리 꽂고는 소리쳤다. “가지 말라던 전쟁터에 나갔다 이제야 돌아온 주제에 환영이라 했느냐?" 칼 꽂는 소리에 놀란 카셀은 말문이 탁 막혔다. "전쟁터에 나간 후 뭘 겪었느냐? 사람 목숨을 숫자로만 기억하는 군관을 만났느냐, 아니면 몇 백 명 단위의 병사들을 체스 판의 말로 밖에 볼 줄 모르는 장군을 만났느냐? 시체는 얼마나 봤으며, 얼마나 많은 슬픔을 겪었느냐7이 놈아,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아들을, 두 다리 쪽 펴고 기다리고 있을 아비가 어디 있겠느냐? 불호 자식 같으니라고. 그런데 환영이라고? 순서가 잘못 되었다, 카셀. 내가 환영하기 전에 네가 먼저 할 말이 있을 텐데?" 카셀은 결국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모두 다요." “그래, 그래야 순서가 맞지. 살아 돌아온 걸 환영한다, 카셀."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두 부자는 웃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아버지는 다시 식칼을 들어 고기를 설었다. 화로 위에는 수프가 끊고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게랄드는 그 냄새를 즐기며 말했다. "카모르트 대신들을 호통치던 카셀을 단숨에 휘어잡는 걸 보니 분명 아버님이 맞으시군요. 성함을 좀 알 수 있을까요?" "내 이름은 에밀일세. 자네 이름은?" "게랄드 울프. 이 쪽부터 차례로 던멜, 로일, 아즈윈, 쉐이든입니다. 모두 성은 울프지요." "내가 알기로 무더기로 울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려면 아란티아의 그 기사단 밖에 없는데?" 아버지의 말에 카셀은 자랑스럽게 친구들을 소개했다. "그 기사단 맞습니다, 아버지. 하얀 늑대들이죠." "이번 전쟁터에서 사귄 친구냐?' "예." "내 말 안 듣고 나간 것 치고는 성과 한 번 좋구나. 여기에는 꽤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겠어." 카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로 모자라죠." 아버지는 한참이나 하얀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물었다. "다들 밥은 먹었냐?" 게랄드가 즉시 대답했다. "주십시오." “어쩐지 오늘 돼지고기를 많이 사오고 싶더라니. 카셀, 넌 또 왜 앉아 있냐? 끊고 있는 수프나 그릇에 떠라. 늑대들이라도 몸이 차면 감기 걸려. 따뜻한 걸 먹어둬야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카셀은 다시 일어나 국자를 들었다. 아즈윈이 일어나 그를 도와주었고, 던멜은 말없이 벽난로의 장작에 불을 지폈다. 로일이 슬그머니 일어나 아버지의 식사준비를 도왔고, 쉐이든은 그들이 들어오면서 빗물로 더럽혀 놓은 바닥을 닦았다. 돼지고기로 만든 볶음 요리와 방, 수프로 때우는 식사였으나 간만에 먹는 따뜻한 음식에 다들 기뻐했다 카셀의 아버지는 오랜 만에 활기 넘치는 식탁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카셀은 아버지에게 그 동안 겪은 일들을 간략히 줄여서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말하던 그는 점점 흥분해서 식사를 끝마친 후 차를 마실 때는 손짓 발짓까지 하며 얘기에 열을 올렸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들으며 중요한 순간 마다 고개를 끄덕였고, 때론 진심으로 기뻐하고, 때론 슬퍼했다. 중간에 다른 친구들도 얘기에 끼어들었고, 그 와중에 그들은 서로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사실 그 동안 이런 얘기를 주고받을 시간이 없던 터라 차라리 좋은 기회가 되어 주었다. 차가 떨어진 후에는 이불을 끌어안고 모닥불 앞에서 얘기를 이어갔고, 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얘기는 마무리 되었다. "무척이나 신나는 얘기 같긴 하지만, 내 생각에 결코 깔끔하게 마무리 된 것 같지는 않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카셀은 그 말에 동의했다.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잠시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는 크게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는 내일쯤 그칠 데니 오늘은 자고 가야지? 좀 더 두꺼운 이불을 내주마." "아, 그런데 에밀? 우리 얘기에 한 가지 등장 인물이 빠졌답니다. 그 부분을 채워주셔야겠는데요?" 아즈윈은 아버지를 못 가게 잡고 물었다 "누구 말인가?" "카셀의 아버지, 에밀 노이! 우린 그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답니다. " "과거에 무얼 하셨습니까? 제 생각에는 결코 평범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쉐이든이 물었고, 끝으로 카셀이 모두의 말을 종합했다. "아버지는 그냥 농부가 다른 사람이시죠?' 카셀의 아버지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도로 앉았다. 모두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웠다. "카셀, 넌 오늘로 완전히 집에 돌아온 게 아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셀은 머뭇거렸다. "예, 아란티아로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대견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너도 노이 집 안의 핏줄임에는 분명하구나." 그는 눈을 감고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래, 내가 한 3년 외지로 여행을 다녀봤다는 게 다른 농부와 다르다면 다를 거야. 난 그 시간 동안 아주 많은 것을 경험했고, 아주 많은 것을 얻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도 만났단다." "어머니...... 말씀이신가요?“ 카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후 얘기를 이어갔다. “네 할아버지께서도 젊은 시절 여행을 떠났듯, 나 역시 여행을 떠난 거란다. 막 네 나이 때였지. 지금도 잘 납득이 안 가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가만히 있자니 피가 끊어올라서 도저히 이 루우룬 마을에 붙어있지를 못 하겠더구나. 난 그 여행 동안 아내를 얻었고 아내는 자유를 얻었지. 그리고 우리 둘은 너를 얻었단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우습지만, 아버지는 항상 그 얘기만 하면 우울해 하셨어요. 그래서 묻지도 못했죠.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죠?" "네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보거라. 그 여자에게 사랑에 빠진다면, 그게 아마 네 어머니와 꼭 담은 사람일 게다. 물론 이 말은 네 할아버지가 한 말인데, 정확히 들어맞았단다. 네 할아버지란 분은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떠올리려다 그만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못된 양반이었지. 여행을 떠나는 건 허락했는데, 3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버리겠다고 경고했거든. 덕분에 나는 하늘 산맥도 넘어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단다." "하늘 산맨은 아무도 넘지 못해요, 에밀." 아즈윈이 즉시 이의를 표명했으나, 그는 씨익 웃었다. "정말 그럴까? 그럼 아직 하얀 늑대란 존재도 대단한 친구들은 아니었군." 아즈윈은 굉장히 무시 당한 기분이었으나, 뭐라 따질 구석이 없어 대신 따져달라고 쉐이든을 탁탁 때렸다. 그러나 쉐이든도 침묵을 유지했다. "카셀, 내가 특별한 사람이길 원하니? 농부인 아버지는 네게 의미가 없는 게냐?" "아뇨, 그릴 리가요." 카셀은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과거에 뭘 했든 무슨 상관이냐? 나는 네가 아란티아로 떠나 뭐가 되든 상관 하지 않겠다. 얌전히 내 아들 카셀로 돌아와 준다면 말이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카셀은 말했다. “아무리 큰 권력을 얻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재산을 얻는다 해도, 아버지, 저는 반드시 루우룬으로 돌아올 거에요." “굳이 다짐할 필요 없단다, 아들아, 내가 그랬듯, 너도 나이가 들면 농사가 짓고 싶어질 거야. 노이라는 핏줄이 원래 그러거든."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한참 듣던 게랄드가 실망하며 말했다. "그럼 결국 농부란 겁니까, 에밀?“ "아니, 뭘 기대한 건가, 자네는?" “이런 맙소사, 나는 적어도 집 나간 명문 귀족의 외동 아들이나 유명한 기사단의 캡틴이라고 생각했었소. 와아, 이거 뭔가 대단히 속은 기분이네." "스스로 판 함정이겠지." 아버지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밤은 깊었고,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다섯 병의 기사와 그들의 캡틴은 작은 농가의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들었다. 잠시 잠에서 깨어 쓸쓸히 비 오는 밤하늘을 바라보던 에밀에게, 쉐이든이 다가가 그 앞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사정이 계신 것 같아 언급하지 않았으나, 한 가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에밀. 저도 기록상으로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만, 이십여 년쯤 전 최초로 가넬로크 출신도 귀족도 아닌 자가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을 맡을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사람의 이름이.......” "지금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이 누군가?“ 쉐이든의 말을 끊고 그가 물었다. "데라둘 마치입니다. " "그것 보게. 그런 멋진 녀석이 캡틴이 되었는데, 미첬다고 내가 사지에 뛰어들겠나?" 쉐이든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 쉐이든의 손을 꽉 잡았다. "카셀을 보호해주게. 아직 한 없이 어리기만 해서 불안해 죽을 지경이군." "그렇게 보이지 않으시던데요." "아침마다 출항하는 고깃배가 언제나 꺼지지 않는 등대를 바라볼 때의 안정감을 아나? 항상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가 밤 하늘에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에 얼마나 위안을 얻는지 아는가? 큰일을 하러 떠나는 아들 앞에서 언제나 강한 모습으로 있어야 할 아버지가 어찌 흔들릴 수 있겠나“ 그의 눈에는 작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쉐이든은 카셀이 이야기해 준 그의 어떤 모습보다 지금 그의 모습이 더 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걱정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카셀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릴 지키는 게 카셀이 될 겁니다." 빗줄기는 점점 약해했고, 곧 새벽이 밝아왔다. 구름을 들고 따가운 아침 햇살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하얀 늑대들 1부, 캡턴 카셀 끝) 도 서 명 : 하얀늑대들 2부 5권 아란티아의 여왕 지 은 이 : 윤현승 펴 낸 이 : 신현호 출 판 사 :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 2004년 3월 15일 <지은이 소개/ 윤현승> 1978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휴학 중이다, 현재 온라인 게임 회사 JOYIMPACT에서 게임 '테트라모프' 소설 연재 및 배경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크문><다크문 2><헬파이어>이 있다. <사진설명> 늑대의 반쪽 얼굴과 그림자 드리워진 대지의 배경 속에 장군복장 인물의 뒷모습이 그림자져 있다. <차례> 프롤로그 - 마스터 퀘이언 1.제이메르 (1) 지옥 도끼 (2) 아버지와 아들 (3) 간격을 보는 자 (4) 과거의 그림자 (5) 흔적 2.빌리 (1) 그레이 타운 (2) 어둠 속의 검은 갑옷 (3) 블랙을 부르는 자 (4) 론타몬의 기사 3.카셀 (1) 비가 그친 후 <소개글, 서평> '다크 문'의 감동을 넘어 선 새로운 야심작! 작가 윤현승이 쏟아내는 언어의 마술. 가진 것이라고는 어변밖에 없는 카셀. 우연히 아란티아의 보검을 손에 쥔 카셀의 운명은? 카셀의 언변은 과연 그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일에 싸인 어둠의 기사단, 그들의 정체는....? 한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카셀. 그는 결국 영웅이 될 것인가! 마스터 퀘이언 미세한 바닥의 진동은 주위의 소음을 잡아먹고 쉰다섯 명 울프의 기사들은 침묵으로 다가올 폭풍을 인내하고 있었다. “숫자는?" 바닥에 세워 둔 창에 이마를 대고 있던 퀘이언이 물었다. "삼백 정도? 이 정도면 가넬로크의 기사단을 무너뜨릴 때 전력 그대로라도 봐도 좋겠군. 조금이라도 우릴 얕보길 바랐는데, 위험하게 됐어." 동료 울프 기사에게 보고를 받은 퀘이언은 뒤통수를 긁적이다 말했다. "오십 대 삼백. 한 명 당 여섯이군." "아, 내가 열을 상대할 데니 누구 하나는 둘만 상대해도 돼." 메이루밀이 기지개를 펴며 말하자, 울프 기사단 전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싸움이 가까워졌고, 잠깐 동안 주위를 환기시켰던 웃음소리는 다시 잦아들었다. 아무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나 하나 둘씩 하얀 갑옷을 장비하고 말에 올라탔다. "병력 차이는 둘째 치고, 우리 캡틴은 직위를 임명 받은 지 반나절 밖에 안 되었고, 저쪽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온 웰치라는 자가 캡틴이야, 이건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문제지. 어떻게 생각해, 캡틴 퀘이언?" "그런 걸로 우리 쪽이 불리할 거면 애초에 캡틴을 떠맡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 놈들 아무리 봐도 전력을 다해 온 야. 왜지? 한 번도 군사력을 노출 시킨 적이 없는 아란티아를 공격해 오면서 레 익셀런 전체가 온 거야?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각 게이트는 개방시켜서 싸움도 하지 않았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 저건 아무리 봐도 사자가 토끼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태도가 아니야. 사자가 사자를 대할 때의 자세지." "뭣 때문에 우리 쪽 기사단을 그렇게 높이 평가한 거지?" 퀘이언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메이루밀은 볼 것도 없다는 눈빛으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 중 누군가가 미 리 전력을 노출시켰던 게지." 메이루밀과 퀘이언은 동시에 남은 하얀 늑대 두 명을 번갈아 보았고, 그 중 하나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렸다. 메이루밀이 못마땅한 듯 뭔가 한 마디 하려고 하자, 퀘이언이 말렸다. "됐어. 실사 저들이 오늘 소규모 병력으로 왔다 해도, 우리의 힘을 본 후에 저 이상의 병력을 끌고 오게 될 거야. 차라리 잘 된 거다. 오늘 저들에게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주자." 게이트의 뒤에 모여 있는 울프 기사반은 그의 짧은 연설에 꽤나 감명 받은 눈빛이었다. 퀘이언은 말에 오른 후 헛기침을 하고 연설의 마무리를 했다. “그건 그렇고 누구 나와 캡턴 바꾸고 싶은 사람?" 메이루밀이 장난스럽게 칼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캡틴 퀘이언." 뒤이어 두 명의 하얀 늑대가 말 위에 오르며 긴 칼을 세워 '캡틴 퀘이언'을 연호하자, 울프의 기사 전원이 따라서 외쳤다. 퀘이언은 한숨을 쉬고 하얀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사되는 거대한 성문 앞에 섰다. 아란티아의 상징인 늑대의 깃발을 들고 있는 게이트의 수문장이 캡틴 울프의 명령을 기다렸다. 곧 퀘이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바퀴가 구르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골드 게이트가 열렸다. 문에서 그러 벌지 않은 곳에 일렬로 서서 대기하고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보였다. 게이트를 지키는 병사들은 그 엄청난 위압감에 겁을 집어 먹었다. "아란티아의 여왕을 위하여." 퀘이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발굽 소리에 파묻혔으나, 울프의 기사들 하나하나가 같은 말을 내및고 있었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공포의 빛도 실려 있지 않았다. 게이트를 지나 익셀런 기사단 앞에 나서는 그들을 위하여, 아란티아의 병사들이 길게 뿔 나팔을 불었다. 그 날 아란티아의 골드 게이트 앞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설이 되었고, 익셀런의 웰치는 퀘이 언의 검에 패배했다. 그 후9년. “마스터 퀘이언. 메이루밀로부터 편지입니다. 블루 게이트에서 보내왔군요." 울프 기사단의 사무를 총괄해 보는 데마가 지저분한 편지 봉투를 한 장을 들고 왔다. 메이루밀를 되는 사람이 봉인도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에 대해, 데마는 항상 보안이 걱정이라며 지적하곤 했다. "루밀이?" 퀘이언은 책상 앞에 않아 편지를 뜯었다. 길지 않은 내용을 읽은 후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재미있는 내용이라도?" 데마가 물었다. “항상 시답잖은 내용으로 종이 낭비하던 친구가 오랜만에 편지다운 편지를 보내왔다. 제자 녀석들이 울프 기사단의 캡틴 감을 하나 데려온다는군." 데마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카모르트에서 말입니까? 하지만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이를 어떻게? 여왕께서 허락하실 지가 궁금하군요." "캡틴이 반드시 여왕의 수호기사가 된다는 규칙은 없었다. 누구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 루밀이 써놓은 말증에, 하얀 늑대들 전원이 동의하고 따르는 인물이라는 부분이 특히 흥미롭군. 그 제멋대로인 다섯이 인정했고 루밀이 보냈다면 굳이 나를 거치지 않아도 캡틴이 될 자격은 충분하지." “마스터와 맞먹는 실력자일지도 모르겠군요." 데마가 농담처럼 말했다. "루밀은 그의 어디가 어떻게 캡틴 감인지에 대해서는 써두지 않았어. 내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뜻일 게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정식캡틴을 정할 때가 온 것 같아 걱정이었으니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군." 퀘이언은 흡족하게 웃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분수대 앞에 서있는 하얀 로브의 마법사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수대를지키는 정원사가 그 마법사를 보고 인사했고, 시녀들도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데마, 오늘 루티아에서 손님 이 오기로 되어있나?" 퀘이언은 그 날 일정을 잘 기억하지 못 하는 편이라 항상 데마가 챙겨주는 편이었으나, 이렇게 중요한 약속까지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님니다. 하지만 저 마법사가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보겠군요." "루터아의 마스터가 연락도 없이 나디움을 찾다니, 심각한 일인 모양이군." 퀘이언은 창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그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하늘 산맥에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소, 마스터 데다인?" 거리가 꽤 되지만, 충분히 그 강한 눈빛을 느낄 수 있는 마법사였다. 수염은 없으나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 남자는 대답했다. “십 년 전, 아란티아에 제공했던 도움에소, 마스터 퀘이언. 우린 도움이 필요하오.” "루티아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소? 요청은 언제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소.“ 그의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마치 마법을 쓰는 동작처럼 차분하면서도 리듬감이 있었다. 그 마법사는 주저하지 않고 대꾸했다. "하얀 늑대들을 빌려주시오.“ 퀘이언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 데마에게 작은 목소리로 여왕께 이 일을 알리라 명한 후 다시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마법사에게 외쳤다. "들어오시오, 마스터 데다인. 나도 급하고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인사하였으나, 그런 중요한 일에는 차 한 잔 마시며 공을 들여 얘기할 필요가 있겠소. 무엇보다 이 곳에는 지금 하얀 늑대들이 없소.“ 마법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강한 눈빛은 마치 화가 난 듯했다. “그럼 어디 있소?” 퀘이언은 대답했다. “카모르트에. 지금 오고 있는 중이오.” 1.제이메르 지옥 도끼 "자네 이름은?" "제이." “젊어 보이는군. 경력은?" "8년." "허어, 꽤 많군. 몇 살때부터 용병 일 시작했는데?" “난 용병이 아니다. 사냥꾼이지." "현상금 사냥을 8년이나?" “열여섯 살 때부터." 덜컹거러는 마차 안에서 오고 가는 짧은 대화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나, 국경까지 가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잡담 속에서 여덟 명의 남자들은 서로의 이름과 경력을 밝히게 되었다. 해서 다섯 번째로 이름을 밝힌 남자가 제이였는데, 자신의 화려한 전적을 과장하는 다른 용병에 비해, 그는 이름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아직 말 하지 않은 용병 중 하나가 제이의 말을 받았다. "그럼 지금은 스물 넷 정도 된다는 소리군 좋은 나이야. 여자로 치면 남자를 유혹하기에 절정에 오른 나이이고, 남자로 치면 힘 쓰기 딱 좋은 나이지 사냥꾼이라는 직업은 용병보다 빨러 은퇴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열여섯 정도에 일을 배우는 게 좋았을 거야." 그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길게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나이 매 죽인 사람이 적어도 아흔 아홉은 되었지. 제이, 넌 몇 이나 죽였나?" "세어본 적 없어." 제이는 이미 그런 얘기에 흥미를 잃었는지 흔들거리는 마차 짐칸의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말을 안 해서 시선을 끄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아서 대꾸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서로의 대화에 무관심한 남자였다. 툴은 빛에 가까운 갈색 머리였는데, 마차 안이라 그냥 갈색으로만 보였다. 이것저것 넣어둔 지저분한 배낭에는, 사냥꾼이라면 가지고 있게 마련인 활도 들어있지 않았다. 말을 꺼낸 남자는 그런 제이를 관심 밖으로 밀어두고, 다른 용병에게 말했다. "난 사실 가넬로크에서만 용병 생활이 15년째야. 10년 전 전쟁에서 익셀런의 기사들과도 꽤 겨뤄봤지, 그 때는 내가 스무 살 밖에 안 되는 애송이였던 터라 그 흑기사 놈들을 둘 밖에 해치우지 못 했지만 말이야. 뭐, 지금이야 다시 붙으면 꽤 해볼 만 하겠지만." 그는 그런 과거가 별 것 아니라는 것처럼 얘기하며, 은근히 잘난 척 했다 용병들은 그가 과장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으나 대놓고 따지는 이는 없었다. 사실 입에 올리는 것도 꺼릴 만한 기사단의 이름을 서슴지 않고 내및는 남자를 상대로 시비를 걸만큼 답이 큰 용병은 이 마차에 없는 듯싶었다. "이름이 뭔가?" 아직 자기 소개를 하지 않은 나이 꽤나 되는 남자가 모두의 의견을 대신하여 물었다. 그 남자는 마차 제일 뒤쪽에 암아 있었고, 상당히 무거워 뵈는 철퇴를 쥐고 있었다. 가끔 심심하면, 그는 가시달린 뭉툭한 부분을 바닥에 쿵쿵 적어 괜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곤 했다. "베이렌." 용병 생활 15년째라는 남자가 이름까지 밝히자, 마차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이름 없는 용병 술렁이리기 시작했다. 동요하지 않은 이는 제이라고 이름을 밝힌 후 눈을 감고 있는 사냥꾼과, 베이렌의 이름을 물었던 철퇴 든 남자뿐이었다. "베이렌....... 가낼로크에서 가장 유명한 웅병 중 하나지, 자네도 그 시답갈은 탈옥수 '지옥도끼'를 잡으려고 이 마차를 탔나?" 철퇴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베이렌은 그가 말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 도끼를 '시답지 않다.'라고 부르는 데다가, 그 정도로 무거운 철퇴를 무기로 쓸만한 유명한 가넬로크의 용병이라면 난 헹게르라는 작자 밖에 모르는데?" 또 한 번 술렁임이 있었다. 헹게르는 지저분한 금발을 뒤로 쓸어넘겼다. "이름만 들어도 우스운 탈옥수 하나 잡자고 가넬로크 최고 용병 두 명이 모이다니! 베이렌이라는 자가 오는 줄 알았다면 난 오지 않았을 거야. 굳이 그런 자와 사냥감 경쟁을 하고 싶지 않거든." "덕분에 명성 있는 헹게르를 뵙게 되니 나로서는 영광이지." 두 용병이 마차 양족에서 웃어대니 사이에 껴 있는 용병들은 고개만 숙였다. 최근 '지옥 도끼' 라는 별명을 가진 흉악벌이 외부의 도움을 받아 지하 감옥에서 탈출했다. 탈옥하는 과정에서 그를 돕던 자는 모두 죽었으나 정작 지옥 도끼는 살아남았다. 더구나 간수와 경비병을 포함해 여섯이나 죽었고, 추적하던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가 두 명이나 그에게 살해당했다. 한 번 잡힌 죄수는 절대 탈출시키는 법이 없다는 명성이 자자한 지하 감옥의 소장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그를 잡으려고 사냥꾼을 한 다스는 고용해서 보냈으나, 모조리 소식이 끊기거나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렇게 지옥 도끼라는 탈옥수가 도망가는 한달 동안 현상금이 다섯 배나 뛰어 이제 그를 산채로든 시체로든 잡아오기만 하면 금화로 오백이었다. 그것은 당장 웅병 짓 때려치우고 정착할 만한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연히 많은 용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갑자기 현상금 사냥꾼으로 변했다. 그 중에는 돈이 아니라 명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나서는 이도 있었다. 지옥 도끼라는 자는 운이었던 실렦이었던, 드래곤의 기사를 두 명이나 죽였다. 그런 현상범을 해치우면, 몇 년을 쌓아야 얻을 명성을 단숨에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마차에 타고 있는 용병들도 대체로 그런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웅병이 두 명이나 같은 마차에 탔으니 다른 다섯 명은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이 두 사람과 떨어져서 행동하는 게 최선이었다.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국경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반나절은 더 가야 하니, 누군가 의아해 하며 마부에게 물었다. "왜 멈추지? 휴식 같은 건 없어도 돼." 모자를 깊이 눌러쓴 마부는 하품을 길게 하고, 옆에 내려둔 가죽 가방에서 담배 파이프를 꺼냈다. 국경까지 간다고 광고하며 이전 마을에서 용병들을 끌어 모을 때도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대던 그였다. 그 후 서너 시간이 흘렸으니 한 대 피울 때가 되긴 했다. 그는 아주 느긋하게 담뱃잎을 파이프에 넣고 부싯돌로 마른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더니 파이프에 불을 옮겼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이라는 용병도 갑자기 파이프를 꺼내더니 똑같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양족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괜한 분노가 제이를 향했으나, 제이는 눈을 감고 모두의 시선을 무시했다. 마부는 담배 연기가 새는 입을 열었다 "좀 쉬려고 마차를 세줬다. 당신들이야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아주 머니까." "멍청한 마부 녀석, 우린 한 시가 급해." 한 웅병이 당장 담배 피우는 마부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태세로 말했다. 구부정한 등을 길게 편 마부는 생각보다 병치가 커서 그 용병은 후려치려던 손을 슬그머니 접었다. 마부는 세상사 다 초월한 사람처럼 말했다. "지옥 도끼라는 자를 찾으러 온 게 아냐? 그럼 급할 거 없어.“ 그 대답에, 물어본 용병은 한 마디 더 하려다 곧 입을 다물었다. 그 마부는 발이나 끌고 다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덩치가 좋았다.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는 손은 상처투성이였고, 팔뚝은 어지간한 남자는 두 손으로도 다 못 잡을 정도로 굵었다. 무엇보다 그가 말을 부직는 좌석 옆望에는 도끼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아까는 분명 없었다. 아마좌석 아래에 숨겨놓은 거겠지만, 지금은 당당히 꺼내놓은 모양이었다. 그 도끼는 그 마부 정도 되는 근육이 없는 사람은 감히 취두를 엄두도 못 낼 정도로 크고 무거워 보였다. 그 용병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다 암아 있는 다른 용병의 다리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맙소사, 아니, 어째서?" 그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떠들었다. 다른 용병들은 의아해하며 넘어진 용병과 마부를 번갈아 보았다. 카지만 마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담배만 물고 있었다. 구석에서 파이프를 물고 있던 제이라는 사냥꾼은 입에서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 말했다. "낌새가 수상해서 일부러 이 마차를 탔는데, 역시 너였나?“. "오호, 알면서 탄 녀석도 있었나?" 마부는 앞니가 하나 빠진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상황을 읽어낸 용병들은 일제히 무기를 꺼냈다. 좁은 짐칸 안에서 서로의 무치가 다른 이의 얼굴을 찌를 판국이었다. 베이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진정하고 무기 접어!" 용병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마부는 여전히 파이프를 입에 물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베이렌은 상기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한 명씩 마차에서 내려. 요란 철지 말고." 긴장을 풀지 않은 용병들은 아주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여러 전투를 치러본 경험 많은 용병들이라 그런지, 일단 진정한 후의 움직임은 상당히 민첩했다 그들은 어느새 무기를 들고 마부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마부는 느긋하기 그지 없었다. 제일 볼안에 떨면서 몸을 떠는 건 마차를 끄는 두 마리 말이었다. "어이, 정말 네가 지옥 도끼냐?" 베이엘은 험을 잔뜩 준 목소리로 물었다. "형이 지어준 별명이긴 한데 그 이름만 들으면 아주 미처버리겠군.“ 지옥 도끼는 머리를 금적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베이엘이라고 했나? 난 테고의 동생, 트레고라고 한다.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겠군." "좋아, 트레고. 우릴 왜 마차에 태원지? 스스로 위험을 초래하는 짓을 굳이......?" 트레고는 웃음을 터트렸다가 담배 연기에 숨이 막혀 심하게 콜록거렸다. 여차하면 담배 파이프가 현상금 오백을 받는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지는가도 싶었다. 겨우 호흡을 추스르고 트레고는 말했다. "이런 걸 위험하다고 하면 그 지하 감옥에서의 탈출은 꿈도 못 꾸지, 베이렌, 난 널 아주 잘 안다. 명성만큼의 실력이 안 따라준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걸. 아까마을에서 네가 내 마차에 타는 걸 보고 굉장히 기뻤다." 베이렌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제서야 트레고는 파이프를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잠시 주위를 살폈다. 다섯 명의 용병들이 마차 주위를 에워빠고 있었고, 마차 안에 는 베이렌과 헹게르,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제이가 있었다. 제이는 여전히 담배 파이프만 물고, 끼어들지 않았다. 트레고는 제이를 보고 귀까지 및어질 것 같은 미소를 지었고, 제이는 답례로 연기를 푸욱 내뿜어 둘 사이의 시야를 가로 막았다. 헹게르가 철퇴를 들며 말했다. "이제 알겠군. 지금쯤 국경에는 온갖 용병들이 곽 깔려 있을 거다. 아니, 드래곤의 기사까지 죽이는 바람에 아마 드래곤 기사단의 일부도 버터고 있을 테지. 온갖 현상금 사냥꾼에...... 아무리 강한자라도 그걸 들고 가지는 못 하겠지. 하지만 바로 그런 자들을 태운 마차의 마부라면 의심을 받지 않을 거다. 그래서 우릴 태운 거지, 트레고?" 트레고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훌륭해. 맞았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이론이야." "하지만 잘 속여놓고 왜 굳이 여기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까? 그건 모르겠군." 트레고는 깍지 않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일주일 전이었던가? 난 이미 그 때 국경을 넘어 카모르트 땅을 밟았지.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되돌아 온 거라고?" 베이렌이 놀라며 물었다. "사실 탈출이 너무 쉬었었거든. 난 적어도 힘겨운 전투를 뚫고 겨우겨우 국경을 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못 믿했나? 진짜야. 난 아무 것도 안 하고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서 국경을 넘어버렸다니까?" 트레고는 재미있지 않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싱겁게 해결되어 버리니, 내가탈출하면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 계산해 봤지. 스물 아홉이더군. 난 형에게 백 명은 죽이면서 탈출할 거라고 편지를 보됐었는데, 그 약속을 못 지키게 되지 않았겠어? 그래서 숫자 채우려고! 아, 사실 이 마차로 이런 사냥을 한 게 세 번째야. 세 번제 만에 꽤 큰 물고기를 낚게 되었군. 대검의 베이렌과 철퇴의 헹게르." 트레고는 콕콕 대고 웃었다. 베이렌은 사람 죽이는 걸 게임처럼 말하는 용병들을 수없이 봤지만, 이 녀석처럼 진심으로 즐기는 눈빛을 가핀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끔적하리만치 잔인한 미소였다. "넌 국경을 넘었을 때 그대로 달아났어야 했다 이런 장난은 오늘로 끝이야." 베이렌은 호기롭게 말했으나, 통할 상대는 아니었다. 헹게르는 높지 않은 짐칸의 천장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갑자기 들고 있는 철퇴를 트레고의 얼굴로 찔러 넣었다. 트레고는 고개를 젖혀 피하더니,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려 땅바닥 위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토끼가 들려 있었다. 날이 없더라도 충분히 그 무게만으로 상대의 뼈를 부술 만한 거대한 도끼가 그의 손바박 위에서 바람개비처림 부드럽게 돌았다. "엔간하면 도망치지 마라. 쫓아다니기 귀찮다." 트레고의 협박 비슷한 말에, 용병들 중 누구도 먼저 그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 했다. 트레고는 그들이 겁을 먹 못 움직일 것을 노리고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나, 어쨌든 용병들이 멈칫하는 순간을 이용해 가장 가까운 한 명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내리쳤다. 두개골이 부서지며 피가 뒤쪽으로 퍽 튀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용병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며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같이 호흡을 맞춘 적도 없는 용병들끼리인지라 적절한 포위 공격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에 방해만 되었고, 트레고는 능숙하게 모두의 공격을 피하고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 날이 몇 번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고, 금방 다른 두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살아남은 두 명 중 한 명이 겁에 질려 뒷걸음치다가 달아나자, 트레고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하나 집어 그에게 던졌다. 칼은 정확히 등에 맞아 그 용병은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도망가지 말했잖아." 트레고는 짜증 내는 목소리를 냈다. 이제 하나만 남았다 그나마 그는 싸우지도 달아나지도 못 한 채 칼만 내밀고 있었다. 마차에서 베이렌과 헹게르가 내려 합류하기도 전에 일어난 순식간의 일이었다. "내가 상대하지 ." 베이렌이 나섰다. "둘이 같이 하지?" 트레고가 장난스레 웃으며 제안했다 "시끄럽다. " 베이렌이 고함을 지르며 큰 찰을 머리 위로 휘두루더니 자세를 잡았다. 트레고는 껄껄대머 어깨를 으쓱했다, "왜 내가 상대를 배려하는 말을 하면 다들 놀라울 정도로 똑 같은 말을 하는 걸까? 시끄러워? 시끄럽긴 뭐가 시끄러워?" 베이렌은 그의 말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애쓰며, 우런찬 함성을 내질렸다. 동시에 커다란 칼이 트레고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트레고는 몇 번 몸을 트는 것만으로 그 날카로운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보다 못한 헹게르가 철퇴를 들고 달려들었다. "나도 같이 한다." 둘은 자존심을 버리고 트레고를 쓰러뜨리는 것에 집중했다 이미 사냥감을 잡는다는 수준의 싸움이 아니었다. 달아나 봤자 죽는다면 그 자리에서 상대를 죽이는 게 더 확률 높은 서바이벌이 되어버렸기에 피하지 않는 것이었다. 몸을 떨던 한 명의 용병은 이 수준 높은 2 대 1 의 싸움에 함부로 끼지도 못 하고, 그만 달아나기 위해 마차에 올라갔다. "내 마차 놔두지 못 해!" 트레고는 둘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그것을 발견하더니 허리에 찬 단검을 집어 던져 그 용병의 머리를 맞췄다. 그는 고삐를 잡을 기회도 얻지 못하고 옆으로 픽 고꾸라졌다. 그 사이 베이렌과 헹게르는 뒤로 물러섰다. 베이렌은 침을 꿀꺽 삼키고 헹게르의 눈치를 보았다. 싸우는 내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방금 단검을 던지는 것을 보고 둘은 확신했다. 트레고는 둘을 상대하면서도 봐주고 있었다. 두 용병은 이미 지쳐버렸다. 실력의 차이가 너무 확실해지자, 그들은 싸울 의욕조차 잃어버렸다. 트레고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또 웃음을 터트렸다. "뭐랄가......, 단숨에 죽이는 게 너희들을 위해서 더 나았나 보군. 내 배려하는 마음은 언제나 비뚤게 받아들여진다니까? 난 최소한 실력을 끝까지 발취할 수 있게 기다려 준 거 였지만, 너희들은 아마 속으로 봐줬다고 생각하는 걸 거야. 그렇지? 안 그래?" 트레고는 툭 툭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내뱉었다. 헹게르는 그런 모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더니 베이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방패가 되어줄 데니 넌 나와 함께 저 놈을 베어버려라." 동료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키지 많았지만, 이 경우에는 그의 철퇴보다 자신의 대검이 유효한 무기였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또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을 판국이니, 이것저것 잴 때가 아니었다. 베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죽음은 반드시 용병계의 전설이 될 것이다.“ 트레고는 둘이 속삭이는 모습을 보더니, 도끼를 겨드랑이에 잠시 끼워두고 박수를 했다. "오호, 뭔가 할 생각이군. 난 둘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 걸 택할 줄 알았어." "까불지 마라. 오늘 넌 여기서 죽는다." 헹게르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의 앞에 서더니 있는 힘을 다해 철퇴를 휘둘렀다. 두 묵직한 쇠붙이가 부딪힐 때마다 말들이 깜짝 깜짝 놀랄 정도로 커다란 쇳소리가 울렸다. 헹게르의 바로 뒤에는 베이렌이 따라 불어 기회를 노렸다. 기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휠씬 빨리 왔다. 헹게르는 철퇴를 크게 내리쳐 트레고가 옆으로 피하는 틈을 타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베이렌은 헹게르의 등을 찔했다. 물론 목표는 그가 끌어안았을 트레고였다. 그러나 트레고의 도끼는 베이렌의 검보다 더 발랐다. 헹게르의 목이 날아갔고, 베이렌의 검은 엉뚱하게도 동료의 등만 찌른 상태였다. 트레고는 이미 그 작전을 간파한 듯 느긋하게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죄책감 갖지 말라구. 내가 먼저 죽였으니 넌 그냥 시체에만 칼을 찌른 거야." 베이렌이 급히 등에 박힌 칼을 뽑으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트레고가 그의 팔을 내리쳤다. 일부러 그런 건지 모르나, 팔은 완전히 잘리지 않고 부러진 뼈가 살갗 밖으로 드러났다. 베이렌은 칼을 놓치고 비명을 지르며 쓰리졌다. "어디 도망가 봐." 트레고는 실실 웃으며 도끼 자루를 손바닥에 탁탁 쳤다. 베이렌은 신음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뒤로 끌다가 또 넘어했다. 뼈가 부러져 덜렁거리는 양팔은 이미 그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지르며 팔꿈치로 바닥을 기었다. 트레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베이렌이 겁을 집어먹은 눈으로 돌아보는 순간 도끼를 내리했다. 척추가 부러지고 몸이 및어지는 순간에도 베이렌은 죽지 못 하고 계속 비명을 질렀다. "그만 해라." 크지 않은 목소리가 마차에서 흘러나왔다. 트레고는 도끼질을 멈췄다. 짐칸에서는 아직도 담배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트레고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고 도끼에 묻은 피를 흔들어 털었다. 그사이 베이렌은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트레고는 도끼를 어깨에 젊어지고 짐칸에 다가갔다. “한 명 또 있었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남자는 제이였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은 꺼내지도 않았고, 심지어 트레고를 처다보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방비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굳이 죽이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다. 트레고가 물었다 "왜 안 도왔냐?"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죽을 각오를 한 싸움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그럼 이제라도 나와서 싸우지 왜 그러고 있어?" 그제야 제이는 트레고와 트레고의 발 아래 피투성이 되어 죽어 있는 베이렌을 돌아보았다. 제이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거 마저 피우고." "하!" 트레고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의 옆자리에 않았다. "맛있게 피워라. 그게 네 마지막 담배가 될 거다. " "넌?" 제이는 앞 좌석에서 끄지 않아 아직도 파란 연기를 내고 있는 트레고의 파이프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너 죽이고 피울 거다 " “너에게 있어 마지막 담배가 될 텐데?" “멍청한 놈. 넌 이미 내가 휘두를 도끼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다. 맘만 먹으면 세 동강도 내 줄 수 있어." “해 봐. 다섯 걸음이야. 네 도끼로는 안 닿는다." 트레고는 제이라는 녀석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도 겁을 내지 않는 고수인가 생각했으나, 사실 단순히 정신 나간 놈이 아닌가 의심했다. 트레고가 물었다. "다섯 걸음이 무슨 뜻이야?" “너와 나의 거리다." 둘의 거리는 길게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데 다섯 걸음? 트레고는 굳이 그런 걸로 말싸움 하지 않았다. “맘대로 해라. 나도 좀 쉬었다가 너 죽이고 다음 마차를 구성해야겠다. "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죽일 계획이었다고?" 제이가 텁텁한 입을 혀로 출어 침을 뱉어내며 물었다. "백 명 정도?" "너도 크게 되긴 글렀다. " "왜?' "정말 크게 될 녀석이면 몇 명을 죽이느냐에 신경 쓸 께 아니라, 누굴 죽이느냐에 신경 써야지." 트레고는 웃음을 터트했다. 왠지 그가 마음에 들었따. “사실 이 장난질만 끝내면 아란티아에 갈 생각이었다.” "아란티아? 거긴 왜?" "울프 기사단이란 걸 알고 있나?" "그런 게 있다는 것 정도만." "내 형이 지금 그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지 나와 같이 가자며 탈옥시켜 줄 인원을 보내준 거고. 뭐, 다 죽어버렸지만, 베고는 부하들이 아주 많으니까, 아마죽으라고 보내온 인원이었을 거야. 테고는 같이 울프 기사단 시험에 응시하자고 하더군." “소문은 들었다. 5년쯤 전에 시험이 있었다고. 지금도 있다던?" 둘은 마치 술이라도 한 잔 나눌 것처럼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트레고의 도끼에는 방금 죽인 사람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조만간 또 한 명의 목숨이 이 짐칸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 둘 다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어느 쪽도 그게 자기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듣자니 그 시험은 대대적인 물갈이를 위해 선포한 거였고, 사실 울프 기사단은 항시 뽑는다 하더라고. 게다가 전과가 있다던가, 다른 기사단이었다던가 하는 건 묻지 않는다지? 그래서 그 곳에 가볼 생각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 같은 법죄자를 뽑을 리가 없잖아, 멍청아." 트레고는 화를 참기 위해 목덜미를 주물럭거렸다. "너 아까부터 나한데 하는 말이 아주 거칠군. 네가 마음에 들어서 살려주려고 했더니." "내가 살려둘 생각 없었으니까 관 둬." 트레고는 슬슬 파증이 나기 시작했다 "할리 빨고 끝내라. 담배 피우는 놈 베고 싶지 않다. " 제이는 부드럽게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정말 저 담배 안 피워도 되냐? 난 좀 오래 피우는 편인데, 같이 피우지?" 트레고는 이제 이 멍청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가 했던 ‘다섯 걸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담배만 느긋하게 피우는 그가 상당히 멀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다섯 걸음 정도로. 트레고는 도끼를 쥔 손에 힘을 확 주고 물었다. “야, 죽이기 전에 하나 묻지. 아직도 너와 나의 거리가 다섯 걸음이냐?” “아니, 이제 세 걸음. 그래도 네 도끼는 안 닿는 거리다. 한 걸음 더 다가오면 그 때 담배를 내려놓도록 하지.” 그리고 또 한 번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았다. “그래, 그냥 그렇게 죽을 때까지 몇 걸음인지 읊으면서 담배나 피워라." 트레고는 기척 하나 내지 않고 한 순간 몸을 돌려 도끼를 휘둘렀다. 둘의 사이는 위낙 가까워 그가 휘두른 도끼는 마차의 짐칸까지 박살냈다. 부서진 나무 조각이 트레고의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나 트레고는 도끼 자루를 통해서 전해져야 할 살과 뼈를 베는 감촉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차가웠으나, 곧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끔찍하게 뜨거워졌다. 불에 데인 것 같은 고통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갔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는 제이는 트레고의 배에 꽂은 검을 뽑았다. 피가 벌컥 뿜어져 나왔다. 휘두른 도끼를 되돌릴 힘도 없었는지, 트레고는 그대로 바닥에 코를 쳐 박았다. 제이는 담뱃재를 바닥에 털었다. "안 닿는다고 했지?“ 그는 파이프를 문 채, 트레고를 마차 안 쪽까지 질질 끌어다 팽개쳐 두고 천천히 죽게 내버려두었다. 그러고 피가 약간 묻은 자신의 배낭을 매고 앞 좌석에 앉았다. "주, 죽여라." 트레고는 고통스럽게 말했다. 제이는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말을 출발시켰다.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처절한 보, 복수를 맛보게...... 될 것이다.“ 트레고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나 제이는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나중에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까지도 그는 묵묵히 마차만 몰았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 했던 악명 높은 흉악범은, 제이가 그 마차로 국경까지 가는 반나절 동안이나 괴로워하다가 숨이 끊어졌다. 물론 제이는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시체도 상관 없이 그 돈을 준다고 했는데, 언제쯤 받을 수 있나? 나흘 안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제이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물었다. 경비대에서 나온 병사는, 핏 속에서 히우적대다가 익사한 것 같은 시체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마차 주위에는 지옥 도끼를 죽이려고 며칠 째 기다리던 용병들과 사냥꾼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있었다. 대부분은 그 시체가 가짜라고 떠들어했으나 지옥 도끼를 본 적이 있는 몇 명은 그 시체가 진짜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제이는 그런 소란 속에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경비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선 사무실로 들어오시오." 경비대장은 병사들에게 시체를 안으로 치우라고 해두고, 제이를 경비대 사무실로 안내했다. “현상금 중 삼백은 드래곤 기사단이 걸었소. 지금 연락 받고 이 쪽으로 오고 있으니, 사흘이 아니라 세 시간 안에 받을 수 있을 거요. 여기서 기다릴 거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경비대의 병사들 역시 지옥 도끼라는 자는 현상 수배로 붙은 그림으로 밖에 보지 못 해 제이가 거짓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시간도 안되어 나타난 드래곤 기사단 중 몇 명이 시체를 확인한 후 두 번도 묻지 않고 제이에게 삼백의 금화를 넘겨주자, 그제야 경비대 사람들도 제이의 얼굴을 다시 봤다. "이 포악한 자를 어떻게 죽였나?" 가슴에 끓은 드래곤의 문장을 새긴 기사가 물었다. 제이는 입맛 다시며 허리에 찬 검을 손으로 툭툭 두들겼다 "시체를 보면 알 수 있잖아." 그 기사는 허탈하게 웃었다. "훌륭한 검술을 가졌나 보군. 행정상 필요한 절차니 이름과 가문 말해주게." "사냥꾼이라 가문은 없고, 이름은 제이메르. 나머지 이백은 언제?“ “그건 우리 족에서 건 현상금이 아니라 원로의회와 이 자가 탈출한 감옥의 간수장이 건 돈이오. 직접 가거나, 여기서 기다리면 한 달 안에 받을 수 있소." "그럼 필요 없다 " "갈 길이 급한 모양이군." "여행에 필요한 돈이 금화 삼백이면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거지." “그럼 혹시 해서 묻는 건데, 드래곤 기사단에 오시 않겠나?" 그의 말에 경비대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행인 기사들도 크게 놀랐다. 하지만 당사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드래곤 기사는 귀족 가문만 받는다고 들었다. 난 그런 고귀한 가문의 자식이 아니야." 뒤에서 듣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이 녀석, 드래곤 기사에 대한 예를 갖추어라." 그러자 제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사는 동료를 저지하고 웃으며 말했다. "호탕하게 말하는 게 난 오히려 듣기 좋군. 좋아. 편하게 얘기하지. 나도 그 쪽이 좋으니까. 내 이름은 브란더다. 제이메르라는 이름을 들으니 결코 하찮은 가문의 이름이 아닌 듯 하군. 아버지의 이름을 들을 수 없겠나?" "아버지의 이름은 대고 싶지 않다. " 제이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혹시 우리 기사단이 성에 차지 않는 건가? 죽은 두 사람을 모욕할 생각도, 변명할 생각도 없지만 이 자에게 죽은 드래곤의 기사 두 명 때문에 입단을 꺼려 한다면 다시 고려해 봐라. 직접 기사단을 찾아와 우리 쪽의 정규 기사들을 보면 생각이 바뀔 거다." 제이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확실히 당신은 내 두 걸음 안에는 들어을 수 있겠군." "두 걸음" 그가 의아해했지만, 제이는 설명하지 많고 대꾸했다. “직접적이지는 많지만, 난 드래곤 기사단에 대해서라면 상당히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둘째로 따로 가 볼 곳이 생겼다." “어디로? 카모르트라면 관두는 게 좋아. 그곳은 이비 전쟁이 끝나 당신 같은 실력 있는 사냥꾼이 가서 할 일이 없을 거다. 기껏해야 도적 떼거리 소탕 정도의 일거리뿐이니." 그는 국경 마을로 찾아온 제이의 행로를 지레 짐작하고 조언했다. 그러나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란티아로 갈 거다." "아란티아? 드래곤 기사단의 제의를 무시하고 울프 기사단으로 가겠다는 건가?" 그 기사는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난 특별히 어느 기사단을 더 높이 평가하지 않아. 하지만 난 가넬로크에서 태어나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어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여행을 겸해서 떠나는 거다 그들이 소문뿐인 형편 없는 기사들이라면 다시 돌아오지. 그 때도 받아준다면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문을 두들기도록 하지."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다른 동료 기사들을 보고 제이는 픽 웃었다. "아마 힘들 듯 하지만." 제이는 받은 금화를 허름한 가죽 가방에 넣고 어깨에 했다. 기사는 그를 보내기 아쉬운지 경고했다. “그런 큰 돈을 가지고 이 마을을 나가기 쉽지 않을 거다. 벌써 당신이 현상금을 탔다고 소문이 돌았어, 원한다면 국경까지 우리가 경호해 주지." "고맙지만 됐다. 그보다 질 좋은 담배를 파는 곳이나 알려줘.“ 기사는 모른다고 했고, 제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날 다른 사냥꾼에게 사냥 당할 정도로 허술한 사냥꾼이 아니다." “그리 보이는군." 둘은 서로에게 미소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아버지와 아들 뒤에서 덮친 녀석을 보지도 않고 칼을 휘둘러 베고 되돌린 칼을 앞에 있는 녀석의 배에 찔러 넣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딴은 후 제이는 눈을 감았다. 남아있는 녀석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자는 접근하지 않았다. '쫓아갈까?' 그러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제이는 잠시 기다리다가 피를 닦았다. 칼날에 묻은 검붉은 피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된게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제이의 기억에 사냥꾼을 처음 시작할 떼도 사람을 죽인 것에 당황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가끔 제이보다 경험 많은 다른 사냥꾼들은 가끔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아무리 그 상대방이 살인범이거나 강간범이라 해도 손이 떨렸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나 제이는 단 한 번도 죽인 상대의 피를 보고 역겹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생명이란 것을 너무 가벼이 여기지 않나 싶었으나, 제이는 그런 문제를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은 특수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기인해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된 게 아닌가 스쳐가며 생각하는 정도였다. 제이의 첫 번째 기억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이었다. 바닥이 보이고 다시 천장이 보인 후 그는 등부터 떨어져 나뒹굴었다. 제이는 아프다기보다 놀라서 울었고,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다. 네 살밖에 안 되는 그를 그의 아버지가 집어 던진 후에 벌어진 일이라는 건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친명하게 새겨진 그 기억의 한 단면은 지금도 악몽 속에서 가끔 보이곤 했다. 사냥꾼을 하고부터 세상 무서울 게 없는 그도 높은 곳은 오르지 못했다. 그 후 어린 시절의 보든 기억은 얻어맞는 것만 남아 있었다. 입에서 나는 피 맛이 어머니께서 해 주신 음식 맛보다 더 뚜렷이 기억났다. 어머니도 술 취한 아버지에게 굉장히 많이 맞았다. 그래서인지 남의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제이도, 가끔 마누라에게 주먹질하는 남자를 발견하면 앞뒤 재지 않고 가서 칼을 들이대기도 했다. 어쨌든 아버지는 제이가 성장하고부터, 술에 취하지 많아도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런 게 무섭기만 할뿐이었다. 증오라는 감정은 훨씬 이후에 생겼다. “아버지는 젊은 시질 아주 유명한 기사였단다. 하지만 지금은 그 권위를 잃었지, 그래서 그 때의 권위를 우리에게나마 내세우기 위해 저러는 거란다. 네가 크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제이메르." 어머니는 항상 그런 식으로 제이를 타일렀다. 제이는 어머니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제이는 언제고 어른이 되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를 줄도 아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서른 살의 어머니는 마을의 스무 발 처녀들보다 더 젊어 보였고, 또 아름다워 보였다 그건 단순히 열 살도 안 된 제이의 어린 환상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어머니를 사모하는 많은 멋진 남자들이 그녀를 유혹했고, 심지어 밤에 도망가자는 말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두 거절했다. “난 당신을 좋아하지만 그건 이성 간의 효기심이 아니라 우정이었습니다. 돌아가세요. 남편이 알면 당신을 죽일 지도 몰라요." “그런 겁쟁이는 무섭지 않습니다." 제이는 그 남자가 대단해 보였다.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많는 남자가 다 있다니! 그 날 밤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유혹해서 집으로 끌어들였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마루에 쓰러졌으나, 어린 제이는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를 때린 후 제이를 노려보았다 마치 나서지 말라고 경고하는 눈빛 같았다. 다음날 아버지와 그 남자는 제이가 잡일을 돕는 술집에서 마주쳤다. 그 남자는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협박했다. “소문 들어 알고 있다, 티온. 사실은 귀족인 여자를 네가 납치해서 데리고 산다며? 지금이라도 그 분을 놓아드려라. 그 분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는 게 어떠냐?" 아버지는 자기보다 덩치 큰 그 남자의 협박을 비웃기만 했다. "그나마 이어가던 네 재미없는 인생을 계속 맛보고 싶다면 주둥이 닥처라. 내가 칼을 뽑기 전에." "들 줄 아는 게 술병 밖에 없는 녀석이 그런 말을 잘도 하는 구나." 그 남자뿐 아니라, 술집에 있는 사람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그런 아버지였으나, 제이는 진짜로 아버지가 죽으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굴렀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남자는 근처 마을을 관장하는 경비대의 검사였다. 그는 자신 있게 점을 빼 들고 아버지에게 들이댔다. "네가 이 칼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나 볼까?"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제이에게 말했다 "가서 불 쏘시게 좀 가지고 오너라." 제이는 영문도 모르고 벽난로에 쓰는 끝에 시커먼 재가 굳어 있는 쇠꼬챙이를 가져다 주었다. 아버지는 그걸 마치 칼처럼 치켜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조금 취해서 비틀거리는 폼이 잡아 주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았으나, 알아듣기 쉬운 발음으로 말했다. "날 죽이고 내 마누라에게 새 인생을 선물해 보거라 이건 정식 결투다. 이 술집에 있는 모두가 증인이다 그러니 내가 널 죽이든, 네가 날 죽이던 그건 죄가 아니다. 어떠냐? 해볼 데냐?“ 장난처럼 칼을 들었던 그 남자는 아버지의 말을 듣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이냐7" "겁 나냐?" 아버지는 비웃는 미소를 흘렸다. "좋다!" 아버지는 그에게 선수를 양보했다. 남자는 술집 바닥까지 부숴버리겠다는 각오로 크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몸을 틀어 피하고는 불쏘시개로 그의 목구멍을 꿰들었다. 술집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 남자는 숨을 컥컥 내쉬며 나무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치료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아버지는 술집이 난장판이 되었는데도, 마시던 술만 계속 마폈다. "사람 죽는 걸 처음 보지?“ 아버지가 말했다.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버지는 웃었다. “잘 봐둬라. 아무리 덩치 큰 녀석도 동전보다 작은 구멍 하나만 몸에 내놓으면 저렇게 죽는 거란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에게 내려준 유일한 인생의 조언이자, 가장 쓸만한 가르침이기도 했다. 어머니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당해낼 장정 역시 이 작지 않은 시골 마을에는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제이 역시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또 아버지가 무턱대고 그를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 가끔은 술 속에 사냥을 데리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굉장히 변덕스럽긴 했지만, 제이는 그 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가 술에 취해 사냥감을 쫓던 중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며 그나마 가진 그 작은 행복 마저 깨어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가엾이 여겼는데, 아버지는 값싼 동정 따위 필요 없다며 지팡이로 쓰는 막대를 휘둘렀다. 제이도 마냥 보고만 있지 않고 어머니를 감쌌으나,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는 더욱 힘을 주어 제이를 두들겨 팼다. 검술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던 남자가 신체의 일부를 잃는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사냥꾼 생활을 해 본 지금에야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상처 입은 마음의 결과가 아내와 자식에 대한 구타라는 것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왜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사는 걸까? 왜 저렇게 아름다운 어머니가 저렇게 포악한 아버지의 아내가 된 걸까? 열 살쯤 되어서야 제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한 관계를 알게 되었다. "이 마을에 티온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있다고 들었소만." 하루는 왕실에서 왔다는 기사들이 제이가 일하는 술집을 찾아와 물었다. 술집 주인은 제이를 가리키며 대꾸했다. "저 아이가 티온의 아들이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잘 생긴 기사가 제이의 손을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네가 기사 티온의 아들이구나. 아버지에게 안내해주겠니?" 여관 주인은 뒤에서 비웃으며 말했다. "그 티온이라는 자가 과거에 기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하고 있소. 그냥 성격 더러운 깡패일 뿐이지. 그 녀석 마누라는 잘난 남편 무서워 적 소리 못 하는 멍청한 여편네고.......“ 여관 주인의 말에 왕실의 기사 중 한 명이 칼을 뽑았다. "네가 욕한 그 여자가 과거 집정관을 지낸 우페르의 손녀딸 아나샤라는 것까지 알고 그 따위 말을 지껄인 거라면 이 자리에서 널 죽인다 한를 아무도 내 죄를 붙지 못 할 것이다. " 여관 주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시에 뭘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이름 없는 가문에서 쫓겨난 기사라고만 알았다. 나름대로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 게 그나마 출신 기사단을 모욕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한 걸까? 그들은 왕실에서 왔으나 왕실 기사단이 아니었다. 가델로크에는 왕실 기사단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그들은 자신의 과거 동료를 찾으러 온 드래곤 기사단이었다. 그들을 만난 아버지는 아주 잠깐 동안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당장 돌아가시오. 제이메르 이 자식, 모르는 사람 집에 데려오지 말했잖아." 그는 습관적으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제이는 어깨를 움츠리고 얻어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기사의 손이 아버지의 주먹을 잡았다. "그만 두십시오, 티온. 십 년 전의 당신이라면 아이를 때린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듣자니 레이디 아나샤도.......“ "무슨 소릴 하려고 찾아온 게요, 카르?" 그는 살기 띤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카르라는 기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닙니다. " 그는 천천히 아버지의 손을 놔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캡틴께서 부르십니다." "캡틴?" "데라둘 마치 입니다." "데라둘이? 그 사람이 이제 캡틴이란 말이오?" 아버지는 굉장히 놀란 얼굴이었다. “드래곤들이 잠에서 깨어나 경계 태세를 갗추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론타몬 측에서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모은다는 정보가 왔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티온. 그래서 캡틴께서 과거의 기사들을 소집하시는 중입니다." 아버지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빠졌고, 카르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티온, 의회에서는 당신의 잘못을 용서하고자 합니다. 집정관의 따님을 강제로.......“ 카르는 옆에 제이가 있는 것을 보고 말을 얼버무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나샤는 당신을 용서하였고, 이 곳에서 아들까지 낳았으니 누가 그것을 죄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캡틴 데라둘은 당신이 충분한 죄값을 치렀으니 이제 돌아와도 좋다고 의회에 보고했습니다." "고마운 일이군. 하지만 돌아가시오." 아버지는 어깨에 올린 카르의 손을 내치고 돌아섰다. "이 다리로 뭘 하겠소? 난 과거의 기사가 아니라, 범죄자일뿐이오.“ 티온은 절룩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받아버렸다. 드래곤의 기사들은 멀뚱히 집 밖에 서 있다가 자기들끼리 의논했다. "명성은 들었으나, 저런 노인네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우리 기사단이 힘없는 건 아닙니다, 카르." 하지만 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 말게. 비록 다리 하나가 저렇다고는 해도 여느 젊은이는 감히 손도 못 댈 실력을 아직 숨기고 있을 게다. 젊었을 때 그의 힘은 기사단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었거든." “그래 봤자 아무 여자나 건들다가 집정관 딸까지 손을 델 거 아닙니까? 전 애초에.......” "말 조심하게." 카르는 다시 한 번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제이를 의식하며 부하 기사의 말을 막았다. 그 남자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 몸에 멍 자국이 있구나. 누가 이랬니?" "아빠가." 제이의 말에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젊었을 때도 성격은 포악했지만 아이를 때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 "밭에, 일 하러." "안내 해주겠니?" 제이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얻어야 할 것 같아서 문으로 달려갔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는데 안에서 아버지의 울음 소리가 들렀다. 제이는 너무 놀라 얼른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반사적으로 제이는 문을 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이는 기사들을 어머니가 일하는 밭으로 데려갔다. 어머니를 만난 기사 카르는 거의 반 시각 동안이나 그녀 앞에 무릎 끓고 울음을 터트렸다. 전날 밤에 맞아 부어터진 입술로 미소 짓는 어머니의 모습에 감정이 복받쳐 올라온 모양이었다. 제이는 어른이 저렇게 펑펑 우는 건 처음 봤다. 아버지의 울음과 기사 카르의 눈물은 어떻게 다른 걸까? 어느 쪽 이건 어린 자기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인 것 같았다. "울지 말아요, 카르. 난 괜잖아요. 그보다 제이메르를 봐주세요. 아직 어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부모를 잘못 만나 고생하고 있어요. 언젠가 저 애를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레이디 아나샤. 원하신다면 드래곤 기사단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반드시." “드래곤 기사단의 후보생은 열두 살부터인가요?그럼 3년 후에 다시 와 주세요. 그 때까지는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카르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이에게 돌아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티온의 아들, 아니, 아니다. 아나샤의 아들, 제이메르. 나는 후배 된 도리로 너의 아버지를 벌 할 수 없구나. 나는 기사이기 이전에 네 어머니를 짝사랑하던 어린 남자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 분노를 대신할 충고를 너에게 해 주고 가마. 지금 네 머리 속에 담겨 있는 분노를 절대 겉으로 꺼내지 말아라. 참고 참고 또 참아서 3년 뒤 나를 다시 만났을 때를 위해 아껴두거라. 네 아버지에게 아들이 크고 있다는 걸 절대 알려선 안 된다." 기사 카르는 그 말을 남기고 마을을 떠났다. 제이는 어렴풋이 그가 자신의 스승이 될 사람이라는 걸 짐작했다. 그는 3년 후를 기다리며 며칠 동안은 패 가슴이 설레었지만, 곧 악몽이 3년 간 지속되는 것을 깨닫고 실망했다. 3년 후, 제이는 열두 살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 겨울이 되어도 카르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마을에 나타나는 상인들은 대륙에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드래곤 기사단뿐 아니라 가넬로크의 모든 군대가 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소식도 있었다. 제이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맞고 살았고, 이제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곤 했다. 어머니도 더 이상 예전처럼 아버지의 폭력을 묵묵히 인내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부싸움을 하는 다른 여자처럼 가끔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지르곤 했는데, 그 때 돌아오는 건 더 큰 폭력이었다. 십 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하며 그녀는 폭력에 길들여지지 많기 위해 애썼지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힌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나이의 마을 아낙들보다 더 늙어 보였다. 더 이상 귀족적인 여인의 향기를 풍기지도 않았고, 마을남자들마저 그녀를 함부로 여겼다. 끝내 카르는 오지 않고 해를 넘기던 겨울이었다. 그 날은 눈이 아주 많이 왔다. 아버지는 도박으로 겨우내 입에 풀칠할 생활비를 모두 날려버리고 절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방금 돈을 다 써버렸으니 이제 좀 아껴서 생활하라.'였다. 어머니는 어이가 없어 힘없이 대꾸했다. "이 이상 아껴 볼 게 어디 있다고 아껴 써요? 이제 마을 사람들이 저에게 일거리도 주지 않아요. 겨울이라 맡에 자라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대체 우린, 또 제이메르는 뭘 먹고 살라는 거에요?" 티온은 금방 부서질 것 같은 계단 옆에 웅크리고 밝아있는 제이를 노려보았다. "저 녀석도 다 컸어. 자기 먹을 건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돈 벌라고 시키면 되잖아." "제이메르는 이미 자기가 벌어야 할 몫 이상을 벌고 있어요. 술집에서 일하고, 추운 날씨에도 항상 산에서 나무를 해오잖아요." "그럼 저 녀석 돈을 좀 쓰면 되겠지. 젠장, 수프에 대체 뭘 넣었기에 아무 맛도 안 나?" 아버지는 멀건 수프를 휘적거리며 소리질렀고,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로서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제는 열두 살짜리 아들의 돈까지 빼앗고 싶으세요? 저 앨 보세요. 이제 이 동네에서 키가 제일 크다고요. 당신은 아들 얼굴이나 본 적 있어요? 마을에서 저 애만큼 잘 생긴 애도 없어요. 그런데 저 허름한 옷 꼴 좀 보세요. 생활비에 보탠다고 제 옷 하나 안 사는 애에요. 키는 크지만 몸 마른 건 안보이세요? 당신은 아버지 자격도 없는 사.......“ 그 때 아버지는 먹고 있던 수프 그릇을 집어 던졌다. 이마에 그릇을 맞은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했다.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아버지는 고함을 질렀고, 어머니는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계단에 앉아있는 제이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동정 하는 게 아니었어....... 그 때 처형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였어........” 제이는 왜 그게 심한 말이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말이 아버지에게는 다른 어떤 욕보다 더욱 모욕적으로 들렸음에 분명했다. 아무리 심한 구타가 있더라도 최소한의 한계라는 건 있었으나, 그 날 아버지의 모습은 적군 포로를 대하는 사악한 용병처럼 보였다. 그는 주먹질을 하다 못 해 식칼로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을 난도질 했다. 어머니는 수치심이 아니라 정말 죽음에 공포를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다. 칼날 앞에서 몸부림치는 와중에 그녀는 온몸을 베였다. 나체가 된 그녀는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 눈이 오는 바깥으로 쫓겨났다. 놀란 제이가 달려나가자, 아버지는 문을 닫고 그 앞에 섰다. "내버려 둬라. 네 어미는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있으니까." 밖에서 들여보내 달라는 어머니의 비명과 필사적으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넓지 않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눈보라가 창문을 흔들었고, 밝은 집은 바람에 삐걱거렸다. 아버지는 무표정하게 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는 순간 불쌍한 어머니를 구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 하고, 아버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가 더 궁금해줬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제이는 모두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지금 이런 일을 저지를 정도의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제이는 또래 중에 제일 셌다. 힘도 가장 썼다. 엄마가 매일 맞고 산다며 놀리던 네 살 많은 마을의 건달 녀석을 맨 주먹으로 반 죽음을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를 밀치고 어머니를 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아버지는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정도 거리를 달려들면 절름발이에 식칼 하나 든 남자 하나 해치우지 근할까 싶었다. 제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제이의 눈에 아버지와 자신의 사이에 있는 또 다른 공간을 보였다. 지금도 잘 설명할 수 없으나, 당시에도 그것은 아버지의 식칼이 그리는 칼날의 거리 정도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섯 걸음이 아니라 두 걸음이었다. 뭐가 어떻게 두 걸음인지는 몰랐으나, 그 두 걸음 안 쪽으로 들어가면 칼에 찔릴 거라는 걸 직감했다. 제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뭣에 놀랐는지도 모르고 픽 웃으며 돌아섰다. 아마도 겁을 먹고 움직이지 못 하는거라고 생각했는지, 식탁으로 가서 마시던 술을 마저 마셨다.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어머니의 처량한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걸어놓은 문고리가 덜컥거리는 소리도 점점 뜸해지더니 이제 바람에 흔들리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제이는 움직이지 못 했다. 아버지는 식칼을 식탁에 꽂아둔 채 술을 바시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식칼의 거리는 두 걸음으로 보였다. '지금 문 쪽으로 걸어가면 죽을 거야. 안돼.' 제이는 그런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눈동자로 촛불을 반사하는 칼날만 계속 주시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냐?" 수저를 빨며 아버지가 물었다. 입가에 묻은 끈적한 수프 찌꺼기가 갑자기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틀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카르의 약속이 떠올랐다. ‘지금 네 머리 속에 담겨 있는 분노를 절대 겉으로 꺼내지 말아라.......’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음 속으로 아버지에게 뭔가를 말했다. 물론 그 말은 4년이 지난 후의 그 무더운 여름 날이 오기까지는 절대 꺼내놓지 많았다. 대신 제이는 일부러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 감기 걸렸어요. 저대로 있으면 죽어요." "죽을 테면 죽으라지." 아버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그릇을 모두 비운 후에 다시 말했다. "들여보내 줘라." 제이는 얼른 문을 열었다. 이미 어머니는 기력을 다해 몸을 떨지도 많았다. 제이는 침대에 어머니를 눕히고 벗은 몸으로 껴안았다. 어머니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그는 밤새도록 울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 죄송해요." 그녀는 다행히 죽지 않았으나, 감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때 크게 않은 후로 그녀는 죽는 그 날까지 기침을 멈추지 못 했다. 제이는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는 거기에 대해 소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이가 열 네 살이 되던 해에 론타몬이 가넬로크로 쳐들어왔다. 시골이라 직접적인 영향권에서는 벗어났다 해도 마을 사람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아버지는 집 안에 칼을 몇 개 들여놓았다. 제이가 호기심에 가까이 가면 불호령이 떨어져 먼 발치에서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진짜 칼을 보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쟁은 전쟁이고 일상은 일상이었다.. 어머니는 한 여름에도 기침을 하는 몸으로 계속 일을 했다. 제이도 남의 밭일을 돕거나 방앗간에서 무거운 것을 나르는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는 힘도 세고 일도 착실히 잘 해, 방앗간지기라는 그럴 듯한 직책도 얻게 되었다. 조만간 이 마을에도 론타몬의 군대가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퍼진 가을, 평소 제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동네 깡패가 옆마을 깡패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여섯이었고, 모두 제이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그 중에는 스무 살짜리도 있었다. 또 물레방아 일을 끝내고 집에 가던 터라 제이에게 무기라고는 지팡이 하나가 다였으나, 상대는 목검이나 심지어 진짜 검까지 있었다. 제이는 겁이 덜컥 났다. 맨주먹이라면 심하게 얻어터질 각오 하고 어떻게든 붙어보겠지만, 칼이 있다면 전혀 얘기가 달랐다. "야, 제이메르. 지금이라도 무를 끓고 빌어라. 그럼 앞니 다섯 개 부러뜨리는 걸로 용서해주겠다." 제이에게 앞니 두 개가 부러져 그렇지 않아도 볼품 없는 얼굴이 더 엉망이 되어버린 녀석이 말했다. 제이는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두들겨 팬 건 그가 펴 마을 여자를 숲 속으로 물 가 이상한 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것도 아니었으나, 구해준 건 절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여기서 칼에 맞는다 해도 그건 사과할 일이 아니라 계이는 생각했다. "못 해." "그럼 죽어, 이 새끼야." 그는 칼을 휘둘렀다. 제이는 급히 뒤로 물리나며 나무 지팡이를 치켜세웠다. 패거리는 제이의 낡은 지팡이를 보고 비은었다. 제이는 그들과 몇 걸음 간격을 유지하려고 뒷걸음질 치다가 멈췄다. 그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다섯? 아니, 여섯 걸음?' 실제로는 두 걸음 밖에 안 떨어져 있었으나, 마음 속에 보이는 또 다른 간격은 그 정도로 멀었다. 그들이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제이는 이 표한 광경을 보고 즉시 지난 겨울 봤던 아버지의 식칼이 떠올랐다. 한 명이 진검을 휘둘렀다. 제이는 고개만 슬쩍 피해 칼을 피했다. 악이 오른 그들은 겁만 주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어디 하나 베어 버릴 양으로 제이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그들과의 거리가 세 걸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조금 겁이 났지만, 아버지가 보였던 그 두 걸음 간격을 생각하면 이건 위험한 축에도 들지 않았다. 제이가 예상한 대로 칼이 움직였고, 그는 그것을 쉽게 피했다. 그들의 눈에는 제이가 아슬아슬하게 놀라운 스피드로 검을 피하거나 막는 것처럼 보였으나, 제이가 느끼기에 그들은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칼을 휘적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몇 번 피하고 보니 재미있기까지 했다. '내 쪽에서 거리를 줄여볼까?' 제이는 호기심에 그 중 한 명과의 거리를 한 걸음으로 줄인 후 마침내 '0' 으로 만들어보았다 제이는 들고 있는 지팡이로 녀석들 중 하나의 목을 찔렀다. 뒤에서 칼을 찌르고 들어오는 녀석과도 거리가 갑자기 두 걸음으로 바뀌었다. 제이는 얼른 몸을 젖혀 피하고 그의 칼을 빼앗았다. 제이는 천천히 움직였으나, 그 남자는 자기가 왜 칼을 빼앗겼는지 모르고 있었다. 거리를 다시 '0' 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자, 제이는 저도 모르게 빼앗은 칼로 그의 배를 찌르고 있었다. 그것은 허무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놀라 다친 두 명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칼에 찔린 녀석 은 오히려 살아남았으나, 지팡이에 목을 찔린 녀석은 결국 숨을 못 쉬고 죽어버렸다. 경비대에서는 정당방위이기도 하고 문제를 많이 일으키던 놈들이 죽은 것이니, 그 사건을 크게 취급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어요." 제이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검을 닦는 그는 흥미 없다는 듯 대꾸했다. 제이도 더 말하지 않았다. 물를 나중에 어머니에게 크게 혼났지만 그녀도 곧 잊어버렸다. 대신 그 일이 일어난 후 마을 사람들은 제이를 무서워했다. 원래는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였던 터라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게 된 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제이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그러고 마을 사람들과의 교류가 줄어드는 것에도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에서 그가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수군거리면 상당히 불쾌하긴 했다. 어머니는 그와 마주서기만 하면 울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굳은 심지를 가진 자상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녀는 할머니처럼 늙어버렸고, 아버지는 기침을 토하는 그녀와 같은 침대에 자기 싫다며 바닥으로 쫓아냈다. 제이는 어머니에게 자기 방을 내주고, 자신은 방앗간이나 풀밭에서 잤다. 그녀는 그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결국 제이의 배려는 받아들였다. 가끔 아버지는 절룩거리는 다리로 뒤뜰에 나가 검을 휘두르곤 했다. 제이는 정술을 배우고 싶었으나, 마을에서 그를 가르칠만한 사람은 아버지 하나였다. 그러나 계이는 절대 아버지에게 가르쳐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는 그를 가르쳐주지도 않을 것이다. 제이는 그저 눈으로 그 자세만 배웠다. 그러나 자세만 배운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제이는 실전을 익히기로 했다. 실전에서도 그에게 두 걸음 안으로 들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이는 그 첫 번째 실전에서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그는 그 실전을 비밀로 해두었다. 어머니가 알면 또 혼낼 테니까.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싫어했지만, 론타몬의 군대가 마을 근처를 배회한다는 소문을 듣고 하는 수 없이 그에게 경비대 앞에 나서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돈을 요구했고, 사람들은 얼마 간 돈을 모아 내주었다. 그는 그 돈으로 여자를 사 어머니를 내평개친 침대에서 같이 갖다. 처음 일주일 동안 어머니는 미칠 것 같다고 제이에게 하소연하며 울더니, 나중에는 지쳤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제이도 더 이상 그게 끔찍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가여웠다. 그럴 때면 제이는 열두 살 때 했던 다짐을 다시 떠올리곤 했다. 곧 마을 사람들은 마을로 들어오는 산 자락에 론타몬의 깃발이 찢겨져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스무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시체가 오랜 시간동 안 방치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그런 것인지 그들로서는 알 수 없었다. "기사 티온이 그러는데, 한 명이 한 거래." 마을에는 군대 하나를 무너뜨린 정체 불명의 검사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론타몬의 군대가 곧 복수하러 올 거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아무 일도 없이 그 일은 시간에 묻혀 잊혀졌다. 가넬로크가 론타몬에게 넘어갔으며 드래곤 기사단이 익셀런 기사단에게 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무렵, 제이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에위니라는 이름의 그녀는 옆 마을의 스무 살 처녀였는데, 밤마다 그가 자고 있는 방앗간을 찾아왔다. 제이는 그녀의 순수한 접근이 의심스러워 노골적으로 따졌다. "내 어디가 좋아서 밤마다 찾아오는 거야? 미리 말해두는 데 난 여자도 관심 없고, 너 줄 돈도 없어!"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암 말도 안 하다가 가끔 그런 귀여운 말을 하는 게 좋아." 제이는 자신을 귀엽다라고 말하는 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제이도 그녀와 괘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제이는 어럼풋이 그게 사랑이라고 느겼다. 비가 오는 어느 날 그녀는 제이 앞에서 옷을 벗었고, 둘은 처음으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에위니는 제이메르를 제이라고 불렸고, 그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사냥꾼 생활을 하는 8넌 동안 제이가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찾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석 달 동안 이어진 들의 관계는 꽤 오래간 셈이었다. 어쩌면 상처밖에 남지 않은 어린 시 절 중 가장 행복한 추억이라면 그녀를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은 엉뚱한 일로 헤어지게 되었다. 사흘에 한 번씩은 어머니와 함께 자는 아들이 통 오질 않으니 걱정한 어머니가 밤에 갑자기 방앗간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자기 눈에 한 없이 어려 보이는 아들이 모르는 여자와 알몸으로 뒹굴고는 보습은 마음이 여려질 대로 여려진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어머니는 에위니를 빗자루로 두들겼고, 영문도 모르고 맞던 그녀는 놀란 나머지 벗은 채로 달아나고 말았다. 제이는 어머니를 말렸다. "진정하세요. 제 여자 친구에요." "이 녀석 무슨 짓을 한 거냐, 대체?" “제가 아직 어린 건 알지만 우린 서로 좋아하고, 또.......” “그런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 이 못된 녀석, 넌 이 어미를 배신한 거야. 그래, 너도 곧 날 떠나버리겠지. 다들 그랬듯이. 날 이런 촌 구석에 던져놓고 한 번 찾아오지도 않는 나의 아버지처럼, 날 평생 레이디로 떠받들겠다고 다짐했던 그 수많은 기사들처럼! 그래, 너도 그럴 거야. 너도 날 배신할 거야. 티온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 남자들 모두 그랬던 것처럼.......” "제발 제 말 좀 들어요, 어머니!" "내 눈 앞에서 다른 여자와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티온 하나로 족해. 너까지 그러면 안 돼. 안돼........“ 그녀는 비명을 지르듯 울었다. 제이는 어머니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얼결에 그녀의 얼결을 때렸다. 효과는 있었다. 그녀는 즉시 울음을 그쳤다. 대신 커다랗게 뜬 눈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손찌검을 해버린 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전 다른 여자와 사귈 권리가 있어요. 저도 이제 다 컸다고요." "때, 때렀어.......“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식칼에 옷이 찢겨나갔던 그 때처럼 공포에 물든 눈을 하고 있었다. 제이는 너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아, 어머니. 그건...... 죄, 죄송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래...... 잊었구나. 너도 그의 아들이라는 걸." "어머니, 그게 무슨?" 제이가 어머니의 가냘픈 어깨를 잡으려고 하자, 그녀는 돌려 달아나 버렸다. 그 후 어머닌 다시는 제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 왕실로부터 몇 문장 적히지도 않은 짧은 편지가 한 장 날아왔다. 어머니의 아버지 우페르와 드래곤 기사단의 카르가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두 사람 중 어느 쪽의 죽음에 더 큰 좌절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편지가 계기가 되어 알아 누운 어머니는 곧 죽음을 맞이했다. 제이는 더 이상 때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날은 제이의 열여섯 살 생일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어머니의 침대 밑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쥐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티온을 죽여도 될까요?" 그녀는 입은 열지 못 했으나 눈만은 크게 했다. 제이는 그 동안 비밀리에 모은 돈으로 구입한 칼을 꺼냈다. 아직 한 번도 사람의 피를 먹지 않은 칼날은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다. 제이는 어디선가 들은 드래곤 기사단의 정식 규율대로 칼을 바닥에 꽂고 무릎을 꿇었다. “아나샤의 아들, 제이메르가 레이디 아나샤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아나샤는 고개를 짧게 한 번 끄덕인 후 숨을 거두었다. 그 모든 의식은 반대편 침대에 앉아있는 티온의 코 앞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티온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방금 뭐라 했느냐?" 제이는 천천히 바닥에 꽂은 칼을 들었다. “당신이 있던 기사단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칼을 들고 나와라. 어머니의 시신에 당신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 제이메르는 말하고 즉시 밖으로 나갔다. 티온은 절룩거리며 칼을 들고 뒤따라 나왔다. “오냐, 네 장난은 수위를 넘어갔다. 오늘은 정말 크게 혼날 줄 알아라." 그는 기세 좋게 검을 크게 두 번 휘둘렀다. 바닥의 풀잎이 검이 일으키는 바람에 딸려 올라갔다. 제이가 한 가지 계산을 잘못한 건 티온이 검술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을 거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제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두 살 때부터 숨겨온 자신의 분노를 조용히 토해냈다. "언제까지 내가 어린 아이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미안하지만 이건 남자 대 남자의 싸움이다." 터온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비웃었다. "그래. 나이 좀 들었다고 어깨 너머로 내 검술을 조금 배웠나 보구나. 그리고 또래 중에는 힘깨나 뜬다고 잘난 척 하겠지. 멍청한 녀석, 너와 난 거쳐온 경험부터 다르다. 좋다. 네 바람대로 이제 난 너를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 정식으로 검을 휘둘러 보지." "실전이라면 몇 번 해봤다. 안타깝게도 이 마을에는 익셀런 기사단이 쳐들어오지 않아 기사라는 것과 겨뤄보지 못 했지만, 훈련 한 번 제대로 하는 일 없는 당신 같은 수준이라면 이미 여러 명 해치워 봤다." 그 말에야 비로소 티온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럼 론타몬의 병사들을 해치운 그 한 명이...... 너였나?" "실전은 충분히 거쳐봤어." "웃기지 마라. 그 정도 죽여본 걸 실전이라고?" 제이는 손가락을 세 개 펼치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열네 살 때 이후, 한 번도 내 세 걸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 했다. 심지어 내가 반걸음 앞까지 다가갔을 때조차도." 제이는 칼을 천천히 들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이제 티온이 제이를 공포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티온은 뒷걸음질 쳤고, 제이는 천천히 간격을 좁혔다. 제이는 언제고 그가 그런 표정을 보이면 아주 통쾌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만 더욱 피부에 와 닿았다. 더 빨리 했어야 했는데....... 왜 망설인 걸까?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제이는 지난 몇 년 동안 가슴속에 품고 절대 꺼내지 많았던 말을 마침내 토해냈다. “당신의 아들이 성장했다." 제이는 검을 내리그었다. 그 뻔히 보이는 검을 티온은 막지 못했다. 어머니의 시신을 침대에 두고 제이는 집에 불을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달려왔으나, 제이가 버터고 있어 길어온 물을 끼얹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불구경을 하다가 제이가 노려보니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한 사람만큼은 돌아가지 많았다. 에위니였다. 그녀는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불이 꺼질 때까지 같이 있었다. "나 결혼한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들었어. 축하해," 제이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축하는 무슨. 아버지 빛 대신 팔려가는 거야." “그래도 너라면 잘 살 거야." "너는?" "난 이 마을을 떠날 거야. 그리고 검술을 좀 더 단련하고 싶어." "검술 학교에 들어갈 거니?" "아마 그곳에서 날 가르칠 사람은 없을 거다. 그냥 내가 유명한 검사들을 찾아다니는 게 좋겠어. 사냥꾼이 어떨까?" “그런 것 하면 오래 못 살 걸?" 제이는 피식 웃었다. 에위니는 그의 볼에 살꼭 키스하며 말했다. "만약 살아 돌아오게 되면 나한테 와. 그 때쯤이면 내 나이 많은 남편이 늙어 죽어있을 지도 모르니까." “고맙지만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죽은 녀석은 필요 없어." "죽은 다음에는 나도 너 필요 없어." 제이는 미리 싸둔 가방을 짊어졌다. 그리고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걸어갔다. "어디로 잘 거니?" 에위니는 따라가지 않고 목소리만 높여 물었다. "전에 경비대에 보니까 현상금 걸린 녀석의 그림이 붙어 있더라. 그 놈이나 잡으러 갈 거다." 에위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죽은 녀석은 필요 없다고 네가 말한 치 꼭 기억해!" 제이는 대꾸하지 않고 손만 높이 흔들었다. 에위니는 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손을 계속 흔들었다. 간격을 보는 자 "열 걸음." 제이는 장작불 위에 고기를 구우며 출 속에 숨어있는 녀석과 떨어진 거리를 재어 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제이에게만 보이는 간격이며, 실제 거리는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조금도 위험할 게 없는 간격이라 계속 무시하고 있었으나, 열흘 째 따라오고 있으니 이제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그가 지옥 도끼를 해치우고 받은 현상금을 노리던 용병들 몇 명은 열흘 전 가넬로크 국경을 넘을 때부터 쫓아오기 시작하더니, 다음날 새벽 공격해왔다. 그들 나름대로는 아주 적절한 기습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제이는 밤새 푹 자고 일어나 잘까지 닦아두고 있던 참이었다. 상대가 공격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검의 간격이 보이는 그에게 있어 기습은 의미가 없었다. 물론 상대가 제이와 맞먹는 실력자이거나 원거리 무기를 가진 자라면 위험한 게 당연했지만, 이번에 그를 기습한 자들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제이가 국경을 넘어 카모르트 변방을 따라가다 다시 산을 올라가는 동안 이 미묘한 인기척이 계속 따라 왔다. 적당한 빈틈을 보이면 공격해 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이는 일부로 경계를 허술할 척 연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적자는 섣불리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동료가 당한 모습에 겁을 먹고 신중을 기한다고 보기에는 열흘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냥 쫓아오는 거라면 아예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추적자는 계속 아홉에서 열 걸음 정도 되는 공격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이는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활을 쏴라. 위치라도 알 게." 그는 고기를 모두 굽고 한 입 뜯어먹으며 중얼거렸다. 곧 열 걸음이라는 간격도 사라져 버렸다. 달아난 건 아니었다. 이 열흘 간 간격이 사라진 건 모두 열 번이었다. 즉, 쫓아오는 자는 계속 잠지지 자며 따라오는 것이었다. 제이는 상대가 자고 있다는 걸 확신해도, 깊은 잠에 들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불을 피워놓은 채로 주위에 신경을 쏟으며 갔고, 열 걸음이라는 간격이 살아나면 즉시 잠에서 깨곤 했다. 체력적으로 제이가 훨씬 불리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제이는 이런 추격전이라면 열흘이 아니라 한 달도 자신 있었다. 사냥꾼 생활이 8년 계 되다 보니 사실 선잠 자는 게 침대에 누워 자는 것보다 더 익숙했다. 곧 숨어서 따라오기에는 힘든 평지가 나을 데니, 이 기묘한 추적은 내일이 되면 끝날 것이다. 상대가 계속 이 열 걸음이라는 간격으로 따라온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상대가 그걸 받은 금화라면 오늘 밤 공격할 거라 추측했다. 그런데 그 자는 또 잠들어 버렸다. 아마도 내일도 추적을 계속 할 셈인 것 같았다. 제이는 되려 이 쪽에서 수색을 나서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포기했다. 이런 어두운 곳에서 위치를 알 수 없는 적을 찾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현상금을 탄 사냥꾼이 그 현상금을 목표로 하는 또 다른 사냥꾼에게 공격 당하는 일은 잦았다. 사람들이 사냥꾼을 더러운 놈들이 라고 싸잡아 욕하는 이유는 그런 사냥꾼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이도 이런 추적을 많이 받아보았다. 그러나 제이는 피하지 않았다. 돈이 목적인 녀석들의 패턴은 똑같았다. 하루나 이틀쯤 따라오다가, 제이 쪽에서 허점을 보여주면 공격....... 이번 추적자처럼 이상한 놈은 처음이었다. 이 자는 공격 하지도 않았고,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냥 따라오기만 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 이냐?' 제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잠깐 존 것만으로도 제이는 항상 충분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제이는 모닥불에 장작을 더 올려놓고, 몇 분 더 졸다가 일어나길 반복했다. 언제나 그랬듯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열 걸음 간격이 보였다. 몇 번이나, 애송이 사냥꾼이 겁에 질려 다가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정도 간격을 꾸준히 유지하는 걸 보니 절대 보통 놈은 아니었다. 현상금으로 치면 최소 천 정도? 제이는 자치 자신을 보통 현상금 이천이라고 값어치를 매기고 있는데, 아직까지 천오백이상의 현상금을 매길만한 사냥감은 만나보지 못 했다. 가끔 지옥 도끼처럼 현상금 백 정도의 녀석이 오백 정도로 높이 평가되는 경우도 많았다. 감옥에서 탈출하기 전 현상금이 백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트레고도 저평가되던 인물이긴 했다. 그래도 제이는 그가 진짜로 현상금 오백 정도의 가치가 되는 실력자이길 원했다. 제이는 사냥꾼 생활을 하는 동안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위험하다고 할 만한 상황은 두 걸음 간격인데, 지금까지 두 걸음까지 접근한 녀석조차 거의 없었다. 애초에 제이는 세 걸음 정도 접근하면 먼저 베어버렸으니까. 그나마 그 두 걸음이라는 것도 상대가 활을 쓸 때 나온 상황이었다. 제일 위험했던 건 폭력단 두목을 죽여 보복을 당할 때였다. 추적자 중에 '매발톱'이라는 놈이 있었는데, 숨어서 먼 거리에서 쏘는 활은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제이는 사흘 동안이나 달아나다가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장소, 즉 화살로 겨냥하기 힘든 곳을 찾아냈다. 그러고 즉시 상대와의 간격을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매발톱은 상대가 도망자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역할을 바꿨다는 것도 모르고 숲 속으로 따라 들어왔다가, 화살 한 번 날려보지 못 하고 제이에게 목을 베여 죽었다. 그 때 제이의 나이가 스무 살이었다. 아무리 유명한 현상금 사냥꾼도, 아무리 현상금이 많이 붙은 유명한 범죄자도 제이에게는 목숨을 위협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검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녀석들이라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이 들어, 가끔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다니는 기사들과 겨루기도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실전 경험 많은 용병들 보다 형편없었다. 드래곤 기사단 정도면 전력을 다해야 할 거라고는 생각했으나, 가슴 아플 추억이 떠올라 그곳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어느 새 현상금으로 그가 벌어들인 돈이 금화로만 천 단위를 넘었다. 돈을 쓸 데가 없어 그는 그 돈을 꽤 신용 있고 이름 있는 상인에게 부탁하여 모조리 에위니에게 보내주었다. 1년쯤 후에 다시 그 상인을 만나 에위니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누가 돈 보내달랬냐?' 라는 한문장만 쓰여 있었다. 제이는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택한 후 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돈은 그냥 그 상인에게 맡겼다. 원한다면 써도 좋다고 덧붙이면서. 그 상인이 그 큰 돈을 건드리지 않고 답장까지 날라다 준 신용의 대가는 제이가 생각하기에 천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그런 큰 돈을 가지고 다니면 사냥꾼의 표적이 되는 귀찮은 일을 겪게 되니 오히려 없는 게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그 상인은 공짜로 돈 받는 건 질색이라며 거절했다. 둘은 그 문제로 오랫동안 싸우다가 결국 투자한 걸로 하자는 합의를 보았다. 제이는 어차피 그냥 줄 돈이었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제이는 얇은 모포와 물을 물이는 그릇 등을 싼 배낭을 다시 매고 칼 두 자루를 허리에 찬 후 산을 내려왔다. 다시 추적이 시작되었다. 평지가 가까워 오자 제이는 열흘이나 따라온 추적자를 어떤 식으로 처리할 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습을 할까? 아니야. 이렇게 오래 따라왔으니 뭔가 할 거야. 놈이 먼저 행동하게 내버 려두자.' 제이는 문득 열흘이나 같은 간격을 유지한 추적자의 인내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고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산을 빠져 나와 평지를 지날 떼 기척이 희미해지더니 아란티아의 첫 번째 마을에 들어설 무렵, 완전히 사라져 버렀다. 당연히 어떤 접촉이 있을 거라 기대한 그는 맥이 탁 풀렸다. '누구였을까?' 막상 기척이 사라져 버러자, 몹시 허전했으나 그렇다고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재미있게도 첫 번째 마을의 이름은 블루 타운(Blue town) 이었다. 게다가 여관과 식당을 겸하는 술집 이름도 블루 비어(Blue beer)었다. 가게 앞에는 몇몇 현상범의 얼굴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지옥도끼의 얼굴도 있었다. 이 곳에는 아직 현상금이 오르기 전인 금화 200이 적혀 있었다. 가게 주인은 앞머리가 벗겨졌고, 키가 작은 중년의 남자였다. 제이가 블루 타운이라는 마을 이름에 대해 묻자,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아란티아의 실질적인 국경이라 할 수 있는 블루 게이트 앞이라 그런 거요." “문을 넘으려면 통행세라도 내아 하나?" 제이가 다시 물었다. "레드 게이트는 도로 사용료를 내아 하지만, 다른 게이트는 상관없소. 대체로 형식적인 거지. 일반 여행자라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소. 뭘 드시겠소?" "이 집에서 제일 잘 하는 걸로.“ "그럼 당연히 스데이크지." 그는 주방에 주문을 해두고, 제이에게 말을 붙였다. "아란티아는 초행이신가 보군요?" 제이는 언제나처럼 짧게 대꾸했다. "무척 살기 좋은 나라라는 소문만." "굶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게 살기 좋은 나라 아니겠소?" 주인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허허 웃었다. 주인이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는 동안 제이는 안을 둘러보았다. 따분한 식당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춘 특별할 것 없는 곳이었다. 그의 시선을 읽은 주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원래 외부 손님이 많지 않은 곳이오." 주인은 스테이크와 포크를 제이의 앞에 내놓았다. 제이가 막 시선을 접시 쪽으로 돌리자, 술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익숙한 살기가 느껴지는 존재였다. 제이는 고치를 입에 넣다가 말고 옆에 풀어놓은 칼로 손을 가져갔다. 열 걸음의 간격을 가진 자였다! 그 자의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바에 앉아있는 제이의 옆 자리에 스스럼 없이 앉아 주인에게 말했다. "맥주랑 치즈. 그리고 오늘 밤 묵을 방도 하나 주세요." 자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주문만 하는 그 자에 대해 그는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 그 자는 여자였다. 특별히 아닐 이유는 없었으나, 열흘이나 험한 산길을 쪽아온 그 추적자를 제이는 당연히 남자일 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 이렇게 가까운데도 여전히 검의 간격은 열 걸음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처음 아버지를 통해서 보게 된 이 이미지 상의 거리를 제이는 '검의 간격'이라고 불렀고, '걸음'이라는 단위로 표현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제이만의 특별한 기슬이었다. 그러나 사냥꾼이 되고부터는 이 간격을 보는 기술을 좀 더 섬세하게 갈고 닦을 필요가 있었다. 보통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 실제 간격이야 어피 되었길, 머리 속에서는 검과 검 사이의 거리가 한 걸음으로 보였다. 싸우지는 않지만 서로 죽일 각오를 하고 검을 맞대면 두 걸음, 세 걸음은 견제하는 동작에서, 다섯 걸음은 서로 칼을 들 때 나오는 거리였다. 예외도 있으나 대체로 그랬다. 검을 본 경험이 늘면서 머리 속의 공간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고, 이제는 열 두 걸음까지도 봤다. 당연히 상대와의 거리가 늘어날수록 제이는 안전했다. 이제는 상대가 검을 뽑아도 여섯이나 일곱 걸음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제이의 실력이 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거의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우면서도 검의 간격은 열 걸음이 유지되고 있었다. 싸울 의사가 없다면 간격도 없어야 하고, 의사가 있다면 많아야 다섯 걸음이어야 했다. 이 상태에서 열 걸음은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제이는 천천히 고기를 씹으며 그 여자를 힐끔거리고 쳐다보았다. 그녀는 맥주 맛이 형편 없는데 치즈 맛 덕분에 당신 산 줄 알라며 가게 주인과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며칠 동안 산을 헤매친 온 덕에 지저분한 건 제이와 비슷하지만, 묘하게 더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피부에 잔주름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나이는 꽤 든 것 같지만, 당당한 눈매와 어깨를 편 자세는 상당히 단련된 젊은 용병처럼 보였다.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으나, 눈썹이 진하고 길며 얼굴 선이 뚜렷했다. 어깨 바로 위에서 찰랑거리는 짧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미소는 금방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아직 아버지의 폭력에 길들여지지 않았던 시절의 어머니를 닮았다. '누구지?'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에 제이는 되려 기분이 나빠겼다. 그는 오른손으로 고기를 집어먹는 척 하며 왼손으로 칼을 집었다. 그리 고 천천히 검의 간격을 좁혔다. 검이란 느닷없이 취두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 기척도, 준비도 없이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는 검사 따위는 없었다. 커다란 전투에도 흐름이란 게 있듯, 개인 간의 싸움도 확대해서 보면 그런 흐름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검의 간격이란 그런 것이었다. 상대도 준비가 되고 자신도 준비가 되었을 때야 비로서 간격이 좁아진다. 그리고 가장 가까워지면 그제야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제이에게 있어 느닷없는 공격 같은 건 없었다. 동시에 검을 룬아 서로에게 달려들 떼가 다섯 걸음이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멍청히 앉아있을 때 뒤에서 기습으로 찌르면 그 경우에 앉아있는 녀석에게는 검의 간격이란 없지만, 뒤에서 찌르는 녀석은 한 걸음이라는 검의 간격이 생긴다. 기척 없는 공격도 같다. 상대가 열 걸음을 유지하고 있을 때 제이가 한 걸음까지 접근하면 마치 등 뒤에서 공격하는 것과 같은 기습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홉 걸음, 여및 걸음, 일곱 걸음....... 치즈를 집어먹던 그녀가 노골적으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제이는 신경 쓰지 않는 척 했다 그녀는 다시 맥주를 마셨다. '눈치 챘나?' 제이는 이렇게 별은 간격을 좁혀 들어갈 때면 풀이 넓게 펼쳐져 있는 초원을 연상했다. 그리고 마치 여우가 토끼를 잡아먹기 위해 자세를 낮추듯 그렇게 다가갔다. 그러나 다섯 걸음으로 다가갔을 때 그 토끼는 갑자기 내달려 열 걸음 되는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치즈를 뜯어먹었다. 제이는 놀라숨을 몰아 쉬었다. 칼을 뽑으려는 순간 누군가 강제로 저지시킨 기분이었다. "어디 불편하시오? 고기가 맘에 안 든다거나?" 주인이 물었다 "아니오. 물이나 갖다 주시오." 제이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토끼를 향해 걸어갔다. 신중해야 한다. 성급하게 한 걸음으로 줄였다가 상대가 알아버리면, 어깨를 거의 맞대고 있는 이런 자리에서 무척이나 위험한 싸움을 해야 했다. 아홉, 여덟, 일곱, 여섯....... 그 때 또 토끼는 열 걸음 밖으로 물러섰다.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여자도 '간격을 보는 자' 다. 그리고 그녀가 만드는 검의 간격은 치즈를 찍어먹고 있는 포크에서 나오고 있었다. '맙소사, 포크의 간격이냐?' 제이는 홧김에 거리를 단숨에 다섯 걸음으로 좁혀 들어갔다. 이번에는 달아나지 앉았다. 토끼는 여우를 스윽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한 걸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제이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 칼을 뽑았다. 가게 주인과 손님들은 칼 소리에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고, 제이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몸은 그대로 하고 얼굴만 제이 쪽으로 돌렸다. 입은 계속 치즈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제이는 그녀의 밝은 눈빛에 압도당한 나머지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그녀는 초원 위에서 풀을 뜯는 토끼가 아니었다. 거대한 호랑이였다. 주위에서 보기에는 서로 쳐다보고만 있는 것 같았으나, 제이는 그녀와 머리 속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공격을 해도 칼이 막히고 포크에 목이 찔리는 모습만 상상 되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언제든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는 제이를 억누르고 있었다. 순간 간격이 사라졌다. 제이는 여전히 그녀의 목을 베기 직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녀로부터 나오는 살기는 없어졌다.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고 미소 지었다. “먹던 것부터 마저 먹고 얘기할까? 나나 너나 너무 오래 산 속에서 머물렀잖아. 게다가 난 어제 굴었거든. 네가 불을 피울 기회를 주지 않아서." 그녀가 열흘이나 추격해온 바로 그 사냥꾼임은 분명해졌으나, 제이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치즈를 모두 먹고 따로 주문한 우유까지 마신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위층 방으로 와. 몇 호실이에요, 주인장?" "4호실." 주인은 아직도 칼을 들고 있는 제이를 경계하며 조심스레 대꾸했다. 그녀는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제이는 겨우 호흡을 다스리고 자리에 앉았다. 주인은 가만히 물을 한 잔 내주었다. "괘, 괜찭으시오?" "괜찭소. 아, 그러고 방금은...... 미안하게 됐군." 그는 내키지 않는 손으로 식은 고기를 한 점 먹었다. 그러나 도저히 목구멍을 넘어가질 않아 포크를 내려놓았다. '대체 뭐 하는 여자야?" 제이는 바를 두 손으로 쾅 내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리친 자리에는 금화 한 개가 놓여져 있었다. "밥값이나 방값은 그걸로." 제이는 주인에게 하루치 매상을 안겨주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당신은 누구지?" 제이는 문을 벌책 열고, 대뜸 물었다. 그녀는 웃옷을 벗고 있어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리지도 않고, 한심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굉장히 무례한 아이네. 노크 할 줄 몰라?" 제이도 조금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할 그런 거 관심 없으니, 상관 없어. 당신이 누군지 먼저 말해." "흐음, 넌 일단 예의라는 걸 논할 단계가 아닌 것 같구나. 그럼 나도 거기에 맞춰줄 필요 없지." 그녀는 계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제이의 목까지 밖에 오지 않는 키었지만, 제이가 남자로서도 월등히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 역시 결코 작은 키가 아니었다. "내 이름은 아이린이다. 너는?" "제이." "제이라....... 좋은 이름이네." 그녀는 그의 가슴을 확 밀쳤다 "자세한 인사는 나중에 하자." 제이는 휘청거리며 문 밖으로 쫓겨났고, 그년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이름 따위를 물어본 게 아니다, 당신은 누군데 검의 간격을 보는 거지?“ 문을 잠그지 않았으나, 제이는 그냥 밖에서만 소리쳤다. 안에서 옷을 벗는 소리와 함께 심드렁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의 간격이란 게 뭔데?" “방금 나와 그걸 겨루었잖아." “아아, 그걸 넌 간격이라고 부르냐? 난 그냥 눈싸움이라고 부른다.”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때? 당신은 나와 착 붙어있었는데도 아주 먼 거리에서 견제하는 것처럼 간격을 유지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아니, 그보다 열흘 동안이나 열 걸음을 유지하며 쫓아온 이유가 뭐야?" “열 걸음이란 건 또 뭐야? 그런데 네가 나가는 길에 앞서 있었던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사냥꾼들 틈에 껴서 날 추적한 게 아니고?" "그 친구들한테서 너에 대한 정보를 얻었지. 마침 아란티아로 가던 길이었는데, 그 녀석들이 계속 나와 가는 길이 겹치길래. 물어보았거든. 뭐 하러 이 길로 가냐고. 그랬더니 아주 유명한 사냥꾼 녀석이 자기들 돈을 훔쳐가는 바람에 그걸 되찾으려고 쫓아가는 거라더군. 그래서 여행 도중에 심심할 일은 없겠다 싶어 동행한 거야. 물론 그 정보를 준 녀석들은 네가 죽였더군. 무슨 관계였냐, 그 놈들이랑은?" "내 돈을 빼앗으려고 했다. 아니, 그보다 심심해서였다고? 제이는 고작 그런 이유였냐 싶어 화를 내려다가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 열흘 간 저 여자와 열 걸음이라는 간격을 유지하며 서로를 견제한 덕에 여행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좀 더 근사한 뭔가를 기대했는데, 고작 재미라고 표현하니 조금 실망이었다. 다시 문이 열렸다. 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어 아까와는 달리 보통 서른 살쯤 된 여인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강한 눈매에서 나오는 매력적인 미소는 어느 젊은 여자 못지 않게 생동감이 있었다. "자, 이제 들어와. 할 얘기가 있으니 무례함에 대한 사과도 않고 민폐 끼치며 떠드는 거겠지?" 제이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우선 사과는 했다. "일단 사과하지. 하지만 당신의 몸이나 훔쳐보려고 그랬던 건 절대 아니다 " “좋아. 나도 일단 사과하지. 열흘이나 널 따라다닌 건 네가 어떤 녀석 인지 보려고 그랬던 거야." "시험한 건가?" "비슷해. 처음에는 진짜로 장난이었는데, 나중에는 아니었다. 열 걸음이라는 표현을 썼지? 그럼 잠시 그 표현을 빌리도록 하지. 내가 그 열 걸음이라는 간격을 유지하는 게 이상했나? 그러는 너는 어떻게 그 간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지? 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앉아."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고 제이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칼 좀 줘 볼래?" 제이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안심시켰다. "안 훔쳐가, 그런 고물. 게다가 두 자루나 있네," 그 말을 한 후 그녀는 자신의 검을 제이에게 획 던져주었다. "그리고 칼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지. 안 그래?" 제이는 그녀가 내 준 칼을 슬쩍 뽑아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돈에는 전혀 욕심이 없는 그였지만, 이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칼은 당장 훔치고 싶을 정도였다. 손잡이에는 장식이 전혀 없었으나, 칼날 면에 새겨진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신비로움을 발휘하고 있었다. 더 쥐고 있으면 정말 갖고 싶어질 것 같아 우선 그녀 에게 칼을 돌려 주고 자신의 칼도 내주었다. "대체 및 년이나 쓴 거야, 이 칼?" 그녀는 날이 빠져 잘 베어지지도 않을 칼날을 보며 지적했다. "석 달 정도?" 제이는 대충 셈해 보고 대꾸했다. "칼이 엉망이거나, 네가 칼을 함부로 다루거나, 아님 아주 많이 쓰거나, 아님 셋 다지?" "대충 그렇다. 난 칼에 애착을 갖는 편이 아니라서." “그건 네가 제대로 된 칼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그녀는 칼날의 균형을 잡아보고 날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그래도 꽤 비싸게 주고 산 검인데.......” 제이는 계속 자신의 무기를 험담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아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러자 그녀는 또 가늘게 실눈을 하고 웃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아들의 투정을 받아주는 어머니의 눈빛 같았다 "도로 내놔." 제이는 몹시 불쾌해져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너 몇 살이냐? 꽤 어려 보인다?" "사냥꾼이 나이는 뭣에 쓴다고 기억하나? 칼 줘." 그녀는 갑자기 뒤로 몸을 젖히더니 호흡을 멈췄다. 계속 싱글벙글 웃는 그녀의 표정에서 갑자기 피 냄새가 날 정도로 진한 기가 뿜어져 나왔다. 물론 제이의 눈에는 그것이 순식간에 한 걸음으로 좁혀온 정의 간격으로 형상화 되어 보였다. 제이는 뒤로 몸을 피했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얼른 허리에 찬 예비용 찰을 뽑아 들자, 그녀의 살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칼을 슬쩍 던져주었다. "그렇게 과격한 반응은 또 처음 보네. 신기해라." 제이는 받은 갈을 집어넣지도 않고 물었다. "재미로 그런 거면 나도 참지 않아!" “참지 않으면 나와 붙어보려고? 아서라. 실력의 차이는 너보다 네 손이 더 잘 아나 보다. " 어느 순간엔가 그의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이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유쾌한 듯 바라보며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언뜻 보면 남자를 유혹하려고 다리를 내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 많은 여자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넌 방금 '어떤 기사단'의 1차 테스트에 합격한 거란다. 그 시험은 꽤 엄격하지. 물론 난 열흘 동안 널 쫓아다니며 네가 이 정도 테스트는 통과할 거란 걸 알았어. 방금 건 확인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당신 정체가 뭐야?" “아아, 정말이지 난 솔직하지 못한 녀석은 막 질색이라니까! 너 정도라면 9차 테스트도 무난하게 합격할 거라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정한 3차 테스트에는 들지 못할 것 같다 그건 정신적으로 성숙한 녀석에게만 내줄 수 있는 기회인데, 넌 아니야. 이제 가봐." 제이는 뭔지 모르지만, 화가 나서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근거가 전혀 없는데다가 그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말재주가 없었다. “아이런! 내 원래 이름은 제이메르다. 할 말을 정리해서 내일 다시 오지." "난 이른 새벽에 떠날 거야." 아이린은 웃었고, 제이는 뒤를 돌아 밖으로 나갔다. 제이는 그 발 밤은 자지 않고 계속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누굴까? 그녀가 말한 어떤 기사단이란 어딜 말하는 걸까? 그녀는 나의 어디가 솔직하지 못하다는 걸까? 내가 겨루면 이길 수 있을까?' 새벽까지 뒤척이며 내린 결론은 실력의 상하는 제쳐 두더라도 이미 자신은 정신적으로 그녀에게 패배했다는 걸 알았다. 겨루기 전에 제압당한 건 처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진 적이 없으니, 이 묘한 감정을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기도 애매했다. 그러다 점점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녀석'이라는 부분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방문을 두들겼다. "제이메르다. " 한참 후에 졸린 눈의 아이린이 하품을 하며 나왔다 "내가 새벽에 떠난다고 했지, 언제 한밤중에 떠난다고 했냐?" "대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녀석이란 게 뭐야?" "바로 이런 점이 성숙하지 못한 점이라는 거다 대체 이 빌어먹을 매너는 어디에서 배워 먹은 거야? 평생 사람만 죽이면서 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관계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나 보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밤새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 하나 있으니 들어봐." 아이린은 한숨을 쉬며 팔짱 끼었다. "말해봐 "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줘 당신이 말했던 나의 솔직해야 할 부분은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어깨를 기댄 아이린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재미없고 딱딱하게 자존심 세워서 바락바락 소리 지르지 말고, 더 솔직하게 말해봐." 제이는 인상을 구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아이린에게 제발 가르쳐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승이란 존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자신을 압도하는 실력자가 나타났다. 절대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던 그 기회가 찾아온 것에 너무 당황하여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런 마음까지 꿰뚫어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무섭기까지 했다. 그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 불합격이야." "뭐가?" 제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색하지 않는 것도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라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넌 1차 테스트에는 합격할 거야.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려운 2차 테스트도 합격할 것 같다. 하지만 넌 분명 3차에서 떨어질 거야. 그렇게 결과가 뻔한 재능 없는 녀석을 괜히 받아줬다가 나중에 처분하기 곤란해져 " "대체 그 2차 테스트라는 게 뭔데?" 제이는 몹시 다급해린 나머지 울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넌 아무 암시도 주지 않은 1차도 쉽게 통과했다. 2차도 암시 없이 통과해야 해. 물로 내가 심사할 때의 얘기지만." "그 3차라는 것도 당신이 말한 '어떤 기사단' 의 방식인가?" "맞아. " 시험이라는 말에 은근히 가슴 속의 뭔가가 불타기 시작했다 제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강한 시선을 그녀에게 향했다. 괜한 오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지 못 하고 있었다. “그, 그럼 그 9차 테스트라는 걸 지금 해 봐. 그리고 당장 3차 테스트를 하면 될 거 아니야? 그게 설사 복숨을 내 건 시험이라 해도 난 상관 없다. 그리고 만약 그 테스트까지 떨어지면 나는 당신에게 순수한 검술로 도전하지. 이대로 패하고는 물러서지 않.......” 그녀는 갑자기 제이의 뺨을 툭 쳤다. 그는 금방 말문이 막혔고, 그녀는 그가 입을 다시 열길 기다려주지 않았다. "두 가지만 말해두지 우선 넌 반드시 3차 테스트에서 떨어질 거다. 그건 네 본성이 말해주고 있어. 그러고 테스트에서 떨어진 처분 못할 괴물을 풀어줄 바에야 난 널 죽이겠다."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제이였다. 그 정도를 감수해서 스승이란 걸 얻는다면 그는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또 하나는?" "날 마스터라고 부르고 말 좀 곱게 써라. 그리 하면.......“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테스트를 시작하겠다." 제이는 이 생소하기 그지 없는 경칭에 머못거리다가 말했다 "뜻대로 하겠소, 마스터 아이린." “년 방금 목숨을 내게 맡긴 거다.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거야." 그녀는 창문을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잠 못 잤다고 했지? 해가 뜬 후에 떠날 테니, 그 때까지 자 뒤, 나도 더 잘 거니까."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요?" “너 어디로 가고 있었냐? 난 나디움으로 가고 있었다. 방향이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7" "나디움?" "아란티아의 여왕이 살고 있는 곳이지." "거기에 울프 기사단이 있소? 그럼 맞소." “그래. 우리가 갈 곳은 거기야. 그 때가 되면 너의 2차 테스트가 끝나 있을 거다. 3차 테스트는 나디움에서 하겠다." "어떤 테스트든 통과해 보이겠소!" "그 자신감은 높이 사주지." 그녀는 하품을 길게 하더니 제이의 얼굴 앞에서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과거의 그림자 블루 게이트라는 곳은 국경의 첫 관문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다. 사실 이 있으나마나 한 성문을 지나가지 않고도 아란티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많아 보였다. 또한 적군이 맘만 먹으면 성문을 반나절도 다고 있기 힘들 정도로 문의 두께도 얇고 걸쇠도 작았다. 블루 비어의 가게 주인이 말한 형식적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성문의 독특한 문양과 성벽에 새워진 처음 보는 동물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으나, 제이는 그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처음 가넬로크를 떠날 때 가졌딘 아란티아란 나라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런을 만나는 순간 증발해 버렸다. "그 2차 테스트라는 건 언제 할 거요, 마스터?" 성문에 들어선 시각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새벽부터 그 때까지 아무 말 않고 걷기만 하니, 말수 적은 제이라도 그 기나긴 침묵이 불편했다. "말했찮아. 이 테스트는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고 나서야 테스트라는 걸 알게 될 것이고, 넌 분명 합격할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따라오기나 해. 아니면 넌 이 아줌마랑 오순도슨 수다라도 떨고 싶은 거냐? 그런 거면 대화의 시작은 네가 열어야지.“ "관두시오." 제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블루 게이트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여기 말고도 블루 게이트는 두 곳이 더 있다고 아이린이 게이트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설명해주었으나, 제이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여행자 분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깨끗한 제복을 입은 나이 든 경비가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디움으로 가요. 그런데 여긴 언제 와도 한가하군. 혹시 나한테 남긴 편지라도 있나요?" 아이린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물었다 "성함이?" "아이린." 나이 든 경비는 젊은 경비에게 손짓으로 명령했고, 젋은 경비는 2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아란티아는 언제나 평화롭군요. 제일 경비들이 지루해 하는 걸 보니.“ 아이린이 웃으며 말하자, 나이 든 경비도 허허 웃었다.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게 가장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지도 않답니다. 국경을 넘어 이 곳에 살려고 오는 다른 나라 유랑민들도 늘었고, 들짐승은 여전히 극성이죠. 게다가 새롭게 골치를 썩히는 도적단들 매문에 저희들도 싸움에 나가늘 일이 꽤 있지요. 그레이 타운이라는 곳에서는 실제로 괴한들이 술집 하나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2층에 올라가 있던 젊은 경비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뛰어내려왔다. 고는 무척 상기된 얼굴로 아이린을 새삼 다시 쳐다보았다. 나이 든 경비는 들고 온 편지를 빼앗으며 그 젊은이의 머리를 탁 치며 혼 냈다. "무슨 호들갑이냐, 이 녀석?" 나이 들 경비는 그가 뭣 매문에 놀랐는지 편지 발신인을 보고 알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고 말했다. "제 나이가 이런 고로 기억력이 엉망인 터라, 즉시 알아봐야 할 분을 못 알아봤군요. 자, 레이디 아이린. 펀지가 세 통 있습니다. 하나는 1년 전 깃으로 발신자는 퀘이언 칸트, 또 하나는 반년 전으로 메이루밀 쉘츠, 마지막 하나는...... 저런, 사흘 전 것이군요. 아즈윈 울프라는 기사가 남긴 것입니다. 아, 이제야 기억 납니다. 반드시 전해달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큰일날 뻔 했군요." "아즈윈? 울프 기사단인가요? 처음 듣는 이름이네?" "예. 다를 하얀 늑대들과 함께 사흘 전에 이 곳을 지나갔지요. 한 달쯤 전 카모르트에 중요한 일로 떠났는데 이제야 돌아온 거랍니다. 물론 우리 같은 경비대가 무슨 일로 갔다 왔는지는 모르지만요." 아이린을 대하는 경비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이름을 밝힌 후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이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대화하는 상대방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편지에 적힌 발신인이 아니었더라도 경비들은 충분히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줬을 것이다. "좀 앉아서 읽고 가도 되겠지요?" 그녀가 묻자, 경비는 얼른 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차라도?" “아니, 곧 떠날 겁니다. 제이는?” "나도 됐소." 제이는 아이린의 앞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 편지는 몇 문장 안 되는 짧은 내용이었으나, 아이린은 그것만 보고도 크게 웃었다. 다 본 후 탁자에 던져놓은 것을, 제이는 살짝 훔쳐보았다. 멋진 필체로 굵게 쓰인 거라 겉눈질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아이린, 그 때의 약속을 못 지킨 건 너 밖에 없는 첫 같다. 이 편지 보거든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얌전히 돌아와 내 일이나 도와라....... 퀘이언.' 그 다음 편지는 조금 심각한 내용이었는지, 아이런은 웃지 않았다. '이 편지를 보거든, 검은 기사에 대해 조사해봐라. 아무래도 우리가 끝을 냈다고 생각한 그 일이 다시 일어날 모양이다....... 루밀.“ 마지막 편지는 약간 길었는지 한참 읽어보았다 제이가 계속 힐끔거리는 걸 눈치 챈 그녀는 아예 그 편지를 읽어주었다. "이 곳에 들러 가끔 편지를 찾아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편지를 남깁니다. 꼭 뵙고 십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아즈윈이....... 이건 꼭 연애편지 같지 않아?" 경비가 다가와 물었다. “답장을 남기시겠습니까? 마스터 퀘이언과 아즈윈 울프께는 직접 배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아뇨. 고맙지만 괜찮아요. 내가 그 쪽으로 가는 길이니까." 경비는 금방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경비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을 보고 뭔가를 깨달았다. 편지에 나오는 세 명이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이 정도쯤 되고 보면 그녀의 정체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마침 또 다른 여행자들이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 든 경비 대신 젊은 경비가 그들을 맞았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론타몬. 그레이 타운까지 가는 길이오." 그들은, 통과하는 것을 막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대로 인상을 험하게 구기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막을 생각이 없던 경비가, 아란티아에 온 용건만 형식적으로 묻고 통과시켜주니 그들은 되려 멋쩍어 했다. 그 사이 나이 든 경비는 아이런을 배웅했다 "최근 도적 떼들이 늘고 얼마 전 가넬로크에서는 '지옥 도끼'라는 별명의 현상수배 범이 이 쪽으로 달아날 지도 모른다고 알려왔습니다. 아직 이 성문을 지나지는 않았으나, 어쩌면 다른 블루 게이트를 통해 아란티아 내로 들어갔을지 모르니 주의하십시오. 듣자니 굉장히 위험한 자라고 합니다." 지옥 도끼라는 이름에, 막 성문을 통과하려던 험상궂은 사내들이 아이린과 제이를 노려보았다. 제이는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걱정 마세요. 지옥 도끼라면 여기 있는 젊은 아이가 벌써 해치웠으니까." 아이린은 마치 자랑하는 것처럼 떠 벌렸다. "정말이오?" 경비가 물었다. 제이는 그린 걸로 떠드는 걸 좋아하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내 직업이 원래 사냥꾼이오. 가넬로크 내에서 처리된 일이니 굳이 당신들이 걱정할 일은 없소." "그거 다행이군요. 이 쪽으로 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걱정하던 참이었소. 이제 저 수배 전단은 떼어도 되겠군. 그나저나 그 자를 해치웠다면 현상금은 굉장히 많이 받았겠구려. 여기에 적힌 금액 만도 이백인데!"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는 듯, 그 나이 많은 경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길을 비켜주었다. 계이는 아직도 뒤에서 노려보는 괴한들의 얼굴을 기억해두고 아이린을 따라 성문을 나왔다. 반나절 동안 마을 두 개를 지나치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제이는 아이린이 생긴 것답지 않게 입이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 나니 오히려 대하기는 편해졌다. 제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알겠소. 마스터, 당신은 울프 기사단의 기사요. 그렇지 않소?”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자가 1년 전에 온 편지를 이제야 받아볼 정도로 나다니고 있어도 될 거라고 생각해?" 아이린은 앞만 보고 걸으며 대꾸했다. "아님 전직 기사단이거나!" “그렇다고 해뒤. 그런데 딘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고 있었어?" 언제 잡았는지 모르지만, 제이는 어깨에 토끼 한 마리와 새 한 마리를 엮어 매고 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 두 마리를 툭툭 치며 대꾸했다. “저녁 식사도 생각하고 있었소." “그럼 추적자들이 생겼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었소?" 아이린은 꽤 놀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게이트에서부터 계속 따라오더라." “여섯이오. 네 생각에 게이트에서 마주쳤던 녀석들 같소.” “이러쿵저러쿵 해도 꽤나 자기 할 일은 철저하군. 그래서 어쩔거야?" 제이는 어둑어둑해진 서쪽을 바라보더니, 토끼와 새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털씩 주저앉았다. 아이린이 물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잡으려고7" “뻔한 패턴이오. 반나절이나 쫓아왔다면 굳이 식사 시간을 노리진 않을 거요. 아마 우리가 잠들어 있는 틈을 노리겠지. 그러니 그전에 배를 채워둘 거요. 몰래 쫓아오는 주제에 연기를 보여줄 수 없으니 놈들은 익힌 음식을 못 먹을 테고, 밤이 되면 놈들의 체력이 떨어질 거요." "식사 시간을 노리지 않을 거라는 어떻게 알아?“ "경험상." 제이는 능숙하게 토끼 가죽을 벗기고 새의 깃털을 뽑았다. "전에 산속에서 널 따라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말이야, 이런 일에 굉장히 능숙하군." 아이린이 그의 앞에 다리를 죽 펴고 앉으며 말했다. "어느 쪽이 능숙하다는 거요? 사냥 당하는 거, 아니면 식사 준비하는 거?" "앞부분에 대해서 말했지만, 둘 다라고 해둘게.“ “당신보다 나이는 훨씬 어릴 지라도 경험상으로는 이 쪽이 베테랑이오." 제이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리다고 생각한 적 없어. 내가 특별히 많다고 여긴 적도 없고. 너 몇 살이지? 스물 셋, 다섯? 난 그럼 그것보다 열 살 정도 밖에 안 많아, " 그런 말을 하며, 아이린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제이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나이 많은 여자의 미소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자신을 저주했다. 반나절이나 몰래 쫓아와서 밤에 습격하는 것 치고는 마무리가 굉장히 미숙한 추적자들이었다. 발소리는 있는 대로 다 내고, 심지어 서로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자는 척 하고 있기가 무안할 정도였다. 칼을 뽑는 소리가 들릴 즈음에 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습을 하려고 접근한 녀석들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제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아이린은 아직 자는 척 하고 있었다. 어쩌면 진짜 자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일 명치 큰 녀석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달려들어 칼을 내리쳤다. 녀석의 나온 배를 생각하면 꽤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제이에게 그런 공격은, 검의 간격으로 치면 네 걸음에도 미치지 못 하는 허술한 칼질이었다. 그는 아주 쉽게 공격을 막고 주먹으로 상대의 얼굴을 후려쳤다. 칼은 그 다음에야 뽑아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왜 우릴 따라봤지?" 한밤 중에 칼을 들고 나타난 여섯 명을 대하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제이를 보니, 그들은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말 못 하는 놈들이냐?" 제이가 목청을 높이니 그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달아날 생각도 하지 많았다. 쓰러졌던 남자가 코피가 흐르는 코를 움켜잡고 일어났다. 그가 고갯짓으로 신호하자 모두 칼을 치켜 들었다. 제이는 이런 사태를 굳이 대화로 풀 생각이 없었다. "앉아라, 제이메르." 꺼져가는 모닥불에 얼굴이 끓게 보이는 아이린이 누운 채로 말했다. "내가 앉으면 이 녀석들이 공격할 거요. 물른 당신도 꽤 위험에 처해있고." 제이는 아이린의 뒤에서 칼을 세우고 있는 적을 가리켰다. 그 자는 성공적으로 다가갔다고 혼자 생각했는지 제이가 자기를 가리키자, 무척이나 놀랐다. "네가 앉았다고 저 녀석들이 너에게 위협을 끼칠 만한 실력자들이냐?" "아니오." "그럼 됐잖아. 얘기나 좀 들어보자." 아이린은 기지개를 펴듯 허리를 쪽 펴고 앉았다. 그리고 아직도 칼을 쳐들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야, 찌를 거면 발리 찌르고 안 그럴 거면 내려놔라. 신경 쓰인다."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모든 녀석들이, 코를 움켜잡고 있는 남자가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 역시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습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한 계획은 생각을 안 해들 모양이었다. 코를 잡고 있는 남자의 명령이 늦어지니, 다른 녀석들은 전의를 잃고 칼을 늘어뜨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잘못 건드렸다.'하는 후회가 역력히 드러났다. "이제 이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제이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않으며 물었다. "글쎄다. 어떻게 할까?" 아이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괴한들에게 울었다. "어디서 온 애들이냐?" "우린...... 우린 지옥 검의 부하들이다. " 코피를 닦으며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지옥 검? 제이메르, 네가 아는 애냐?" “비슷한 이름은 들어봤소." 제이는 입맛을 다셨다. "혹시 돈 뺏으러 왔냐?" 아이린이 물으니 리더인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린 동료의 복수를 위해 온 거다." “동료? 복수? 이건 또 뭔 소리야?" 아이린이 의아해 하자, 제이가 대강 짐작하고 말했다. “아마 내가 지옥 도끼라는 현상금 걸린 흉악범을 죽였다는 말을, 아까 블루 게이트에서 듣고 따라온 모양이오. 아까 듣기로 론타몬에서 왔다던데.......” 기습했던 녀석들의 리더는 약간 자신감을 얻어 말했다. “그렇다. 지옥 검의 동생인 지옥 도끼는 나와 친구이기도 하지. 그래서 너를 죽여 그의 죽음을 위로하겠다." “그런 개 자식을 위로할 거면, 어디 한 번 해봐라!" 제이는 화가 나 버럭 소리 지르며, 아이린에게 무언으로 허락을 구했다. 아이린은 한참 동안 그 리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진짜 천구의 복수를 위해서냐?" “사나이의 복수다. 여자는 이해하지 못하지." 리더라는 녀석은 이제 기세가 올라 목소리를 더 높였다. “복수를 위해서 몰래 쫓아와 밤에 급습을 한다? 솔직하지 못한 애네.” 아이린은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제이에게 말해다. “제이메르, 처음 네가 하려고 했던 대로 처리해라. 별로 얘기할 가치가 없었다." "난 그런 줄 알고 있었소, 마스터." 제이가 다시 칼을 뽑으며 일어나자, 그들은 우루루 뒤로 물러났다. "이곤, 그 여자부터 베어버려 !"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의 리더는 아이린의 등 뒤에 서있는 남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그렇지만.......“ 이곤이라는 사내는, 처음 아이린에게 한 소리 들은 후로 내내 꼼작도 못 하고 있었고, 다시 명령을 들은 지금도 무방비의 그녀에게 감히 칼을 켜누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방패가 둘 사이에 가로 막혀 있었다. "그냥 팍 찔리. 다섯 명이나 죽여봤다는 놈이 여자 하나도 못 죽이냐?" 아이런은 그 말을 뱉은 리터를 한 번 노려보더니, 눈을 가늘게 하고 미소 지었다. 어떤 다른 위협도 그 미소만큼 그를 겁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마치 마법처럼 얼어버린 그를 내버려두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곤이라고 했냐, 너?“ 늘어뜨린 칼을 세우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절필 매는 이곤은 고개만 끄덕였다. "꽤 잘 생긴 아이로군. 마누라는 있어?" 이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있다. " "내가 물어보면 '레이디'라는 경칭을 붙여 대답해라. 어머니는 있냐?" “......예, 레이디." "돌아갈 집은 있고?" "있습니다, 레이디." “너희틀 복수 때문이 아니라, 아까 현상금이란 말 때문에 돈 훔치려고 온 거지?" "에......, 예." 갑자기 리더가 소리쳤다. "이곤, 이 빌어먹을 자식 ! 닥치지 못해?" 그 남자보다 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아이린이 소리쳤다 "지금 아이린이 말하고 있다! 입 닫아." 그녀는 으르렁거리는 듯 제이에게 명령했다. "제이메르, 저 녀석 또 입 열면 베어버려." "분부대로! 마스터." 제이는 그녀의 말 몇 마디에 기가 죽은 녀석들의 표정 변화가 하도 재미있어 그녀의 명령에 적극 호응해 주었다. “론타몬에서 왔다고 했으니, 이제 갈 방향은 지옥 검이라는 녀석이 있는 곳이겠구나. 거기가 어디지?" 아이린이 다시 이곤에게 물었다. "그, 그레이 타운입니다, 레이디 ." 이곤은 충실히 대답했다. “그럼 지옥 검이라는 녀석은 왜 아란티아에 온 거지?" 아이린이 묻자, 이곤은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제이가 끼어들었다. "그런 건 리더가 더 잘 알고 있지 않겠소?" "아, 그렇군. 하지만 그런 중요한 기밀 사항을 말할 리가 없지. 그러니 내가 물어볼 때마다한 명씩 베어라. 마지막남은 녀석은 대답해 주겠지, 뭐." “리더부터 베야 하오?" "이런 위험한 일에 희생하는 게 진정한 리더의 역할이란 거지, 안 그래?" 아이린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이가 보기에도 그녀에게는 검의 간격이 없었다. 그냥 일어난 게 다였다. 하지만 괴한들의 리더는 마치 배고픈 호랑이가 이빨을 갈다가 몸을 일으킨 것을 본 것 마냥 황급히 대꾸했다. "지옥 검은 지옥 도끼와 이랄 말에 합류하여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을 찾아간다고 했소. 그 기사단은 전과자도 테스트를 거쳐 받아들인다고 했으니, 과거를 청산할 좋은 기회라고.......“ 아이린은 팔짱을 끼고 그 얘기를 듣더니 제이에게 물었다. "사실인 것 같애?" "지옥 도끼가 죽기 전에 한 말과 비교해보면, 맞는 것도 같소.“ "그래?" 그녀는 잠시 그 자의 다리 끝에서 머리 끝까지 훑어보았다. "좋아. 가도 좋다." 그녀가 허락을 내리자, 그들은 아직 검을 들고 있는 제이의 눈치를 몇 번 살피다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과거를 청산해? 울프 기사단이 외부에 그런 식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게 참 서글픈 일이로군." 아이린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모닥불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나와 지옥 어쩌고 하는 형제들의 인연이 아직 끝난 게 아닌 것 같소. 내가 지옥 도끼 트레고를 죽이지 않았다면 블루 게이트 앞에서 녀석은 친구들과 감동적인 재회를 가졌을 텐데, 좀...... 묘한 기분이군." "원한다면 그레이 타운에 잠깐 들러볼래?" "지옥 검이란 놈을 만나서 내가 동생 죽였다고 시비라도 걸라는 거요?" "가는 길목이라서 물어본 거야 " 그녀는 다시 누워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피곤한 밤이군." "앞으로 그 게이트라는 것을 몇 개나 지나야 목적지에 닿는 거요?" “그레이, 레드, 골드, 화이트. 네 개 남았군. 갈 길이 머니 쉴 수 있을 때 항상 쉬어둬." 그 대답을 끝으로 아이린은 망토를 몸에 덮고 바로 잠들었고, 제이는 모닥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제이는 더 이상그녀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았다. 현재의 모습 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마스터.' 그는 점점 그 호칭이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방금 장작을 올려놓았늘지 모닥불은 활활 타고 있었고, 아이런의 망토가 몸에 덮여 있었다. 노숙을 했음에도 땀 발 정도로 따뜻한 아침을 맞은 게 적응되지 않아, 그는 않은 채로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녀의 망토에는 나쁘지 않은향기가 배어있었다. 가끔 세수를 하고 목이나 얼굴에 뭔가를 바르던데, 아마 그 냄새인 것 같았다. 제이는 새삼 자기 몸에서 나는 악취가 신경 쓰였다. 그는 피워놓은 모닥불에 수프를 끊이고 빵을 준비했다. 아이린은 음식이 식을 때쯤에야 돌아왔다. 그녀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제이 옆에 않았다. 그는 굳이 어디 갔다 왔냐고 묻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 마른 방을 반 조각 뜯어내며 그녀가 말했다. "어제 그 놈들이 돌아오기라도 했소?" "진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거냐?" 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는 합을 문 채로 가방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흔적이라도?" "그런 건 없어. 느낌이야." 그녀는 입술로만 웅얼거려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말했다 "확인해 볼 일이 있어. 좀 먼 길로 돌아가야겠다." "나야 상관 없소." 식사를 끝낸 후 그녀는 걷는 속도를 더 빨리했다. 걷는 데 이력이 난 제이도 숨이 찰 지경이었다. 제이는 말을 타는 게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그 '두 번째 테스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녁즘 되어서야 그녀가 뭔가를 찾으면서 이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말을 타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라고 그는 생각했다. "뭘 찾는지 여줘도 되겠소, 마스터? 그런 거라면 내가 도울 수 있을 거요." 아이린이 마침내 걷기를 멈춘 높은 언덕 위에서 제이가 물었다. 그녀는 붉은 석양 쪽을 한참이나 주시하다가 말했다. "피 냄새가 나." 제이는 진짜 그런가 하고 코를 킁킁했다. 아이린은 눈을 감고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불길한 과거의 그림자가 일어나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해 제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는 언덕에서 내다 보이는 넓은 평야를 손으로 만지듯 가리켰다. "여긴 9년 전 아란티아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쟁이 있었던 곳이야.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과 론타몬의 2만 대군이 벌인 브루크담 계곡 전투, 익셀런 기사단의 드래곤 헌팅 전투, 아란티아의 골드 게이트 전투 같은 유명한 싸움 덕분에 이곳 네나드로스 평원 전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 하지만 다른 어떤 곳보다 치열하고 비참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야. 그래서 난 이 곳에 올 때마다 심장 한 쪽이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이 라도 죽었소?" 제이가 눈치 없게 묻자, 아이린은 작게 웃었다. "아니, 하지만 당시 전쟁 영웅 중 가장 위대한 기사가 죽은 곳이지. 오늘은 마치 그 날의 피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 “마스터가 찾아봐야 할 곳이란 게 여기였소?" "무언가 날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아란티아로 돌아온 거야. 그게 이 곳을 다시 찾아봐야 한다는 불안감 때운이었을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수수께끼 같아서 그 말 자체를 난 잘 모르겠소. 그건 그렇고 여긴 땅도 편평하고 불도 피우기 쉬울 것 같은데, 야영 준비를?" "미안하지만, 이 곳은 가급적 빨리 벗어나고 싶어. 힘이 남는다면 조금 더 이동하자." "난 이대로 밤새 걸어도 상관 없소." 아이린은 그의 머리를 헝클며 웃었다. 다음날 정오가 지난 후 비가 몇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오후가 되자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여행에 익숙한 그들도 이 정도 비에서 움직이는 건 힘들었다. 불행히도 아이린이 뭔가를 찾는다며 길에서 벗어나 이동하는 바람에, 근처에 마을도 없었다. "이 정도 비를 노상에서 만난 건 정말 오랜 만이군 앞도 잘 안보여." 아이린은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빗줄기가 워낙 세서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둘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이 곳 지리는 모르지만 이제부터 길은 내가 앞장 서겠소." "어디로 가려고?" "비를 피할 만한 곳으로." "금방 그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저녁쯤 되어야 그칠 것 같소." "어떻게 알아?" "경험상." 제이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제이는 조금 위험한 길도 건너고 물이 차오른 웅덩이도 건너뛰었는데, 아이린은 아주 쉽게 그런 길을 따라왔다. 그녀를 부축할 걸 각오하고 안내하는 길이었으나, 그녀는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제이는 산 쪽으로 올라가더니, 옆으로 새지도 않고 직진해서 바위 동굴 하나를 찾아냈다. 아이린은 진흙탕에 빠진 발을 힘겹게 빼내며 말했다. "아란티아에는 와본 적도 없다며? 여긴 어떻게?" "아침에 날씨가 좋지 않아 혹시나 해서 기억해둔 자리요." 제이는 먼저 바위에 오른 후 손을 내밀었다. 아이린은 내민 도움을 거절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단숨에 높은 바위를 올라갔다. 동굴은 둘이 머물러 있기에는 좁았으나, 입구가 약간 땅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적어도 비가 들이칠 염려는 없었다. 제이는 배낭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꺼내놓았다. 어두웠으나, 마치 다 보이는 것처럼 능숙하게 물건들을 일렬로 정리하더니 웃옷을 벗었다. "옷은 벗어두는 게 좋을 거요. 젖은 몸으로 있으면 감기 드니까." 아이린도 스스럼 없이 옷을 벗었다. 그녀도 노숙을 해 본 경험이 많아 이럴 때 어찌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옷은 바위 위에 말려두고 둘은 젖은 망토를 짜서 몸을 두르고 않았다. 아이린은 머리에서 빗물을 짜내며 말했다. "이런 일 오래 했다고 했지? 언제부터 사냥꾼을 한 거야?" "열 여섯." 제이는 젖은 빵을 반으로 포개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꽤 어렸을 때부터 험난한 생활을 시작했군." "그게 그러 험한 생활이었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소.“ "실력이 출중해서?" 제이가 빵을 씹으며 노려보자,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비꼬는 건 아니야. 하나만 물어볼까?"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에 있어서 한 번이라도 져 본 적이 있나?" "없소." 제이는 주저 없이 대꾸했다. "누군가를 두려워해 본 적은?" 제이는 즉시 아버지를 떠올렸으나 고개를 저었다. "없소." "그 동안 몇 명이나 죽였지?" "세어 본 적 없소." “사람들 얼굴 기억해?" "전혀." "역시 넌 세 번째 테스트는 합격할 수 없겠어.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어때?" 제이는 인상을 구겼다. 왜인지 이유라도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 봤자 돌아올 대답은 '테스트가 끝나면 저절로 안다.' 정도일 테니까. 제이는 화난 목소리로 적당히 대꾸하고 말을 끝냈다. "포기할 생각 없소." "그래, 그래. 한 번 해본 말이었어." 아이린은 남은 빵을 보두 입에 우겨 넣었다. 제이의 예상과는 달리 해가 떨어진 후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제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지금 당장 비가 그친다고 해도 이동하는 건 무리일거요. 없는 강도 생길 판이니." "여기서 밤을 새야겠군. 불을 피울 순 없나?" "무리요. 너무 급하게 이동하느라 마른 장작을 마련하지 못 했소. 여름이 이렇게 서늘할 줄도 몰랐고." "아란티아의 여름은 그렇게 더운 편이 아니지. 게다가 지금은 좀 춥군." 아이린은 일어나더니 자신의 망토를 제이가 어깨에 덮은 망토에 겹쳤다. 그리고 제이의 앞에 앉더니 그의 손을 끌어당겨 뒤에서 끌어안게 했다. 제이는 그녀의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가만히 있었으나, 그녀의 등이 가슴에 당자 조금 당황했다 아이린은 뒤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좁은 동굴 안에서 젊고 잘 생긴 남자와의 로맨스라니, 기분 좋은데 이건 회춘할 만한 일이야." 제이는 그녀의 포근한 미소를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버리면 앞으로 다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다행히 아이린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목에 머리를 기대어 최대한 편한 자세를 유지했다. 제이도 그녀가 기대는 편이 더 편하긴 했다. "결혼은 아직 안 했소, 마스터?“ “할 뻔 했지." "어떤 남자였소?" "궁금해?" “당신 같은......, 드센 여자라면 어떤 남자를 좋아하고, 어떤 남자가 좋아할까 궁금해서." 사실 ‘당신 같은 멋진 여자를 어떤 남자가 유혹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서.'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내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여자라면 고향을 떠난 후 살 냄새도 맡아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이미 이런 자세만으로도 가슴속에 있는 욕망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멋진 남자였지. 아주 강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약한 남자." “당신보다 강한 남자였소?" 제이가 묻자, 아이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대꾸했다. "유치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거부하마." 갑자기 말문이 막힌 제이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럼 죽었소?" "나도 몰라. 전쟁이 끝난 뒤로 연락이 끊겨서." 아이린은 한숨을 길게 쉬더니 눈을 감았다. 까칠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목을 스치며 지나가자, 제이는 괜스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고 있는 에위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들었던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제이메르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그녀가 물었다. "있소." "어디에?" "고향에." "돌아갈 건가?" 그에 대한 대답은 고향에서 떠나면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물으니 쉽게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안 돌아갈 거요." 돌아가기 싫어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돌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지, 스스로도 알수 없는 대답이었다. 제이는 마치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나는 평생 떠돌아 다니는 팔자라 그녀를 다시 찾아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오. 그리고 이미 난 그녀를 잊어버렸소." “여자에 대한 질문을 망설임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남자만큼 믿음직한 남자도 없지. 제이메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오랫동안 기다릴 줄 안단다. 그러니 및 년이 지난 후라도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꼭 고향에 돌아가라."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그리 좋은 장소도, 좋은 자세도 아니라고 생각하오. 날 유혹할 생각이 아니라면." “유혹한다고 해도 넘어올 남자도 아니면서! 안 그래? 중요한 건 마음이야. 너도 아직 멀었어." “혹시 이런 게 테스트라면 난 거절하겠소." 아이린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빗소리와 어우러진 그녀의 웃음 소리는 유쾌한 음악과도 같았다. “잘 테니 잘 끊어안고 있어. 테스트는 아니지만, 이런 것도 마스터에 대한 예우야." 그녀는 정말 그 상태 그대로 잠들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안고 있던 제이는 두 손으로 그녀를 살꼭 끌어안았다. 이미 여자를 앞에 두고 있다는 생각은 잊어버렸다. 살끼리 닿는 느낌은 너무나도 편안했다. 새벽에 잠든 그는 그녀의 등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금방 눈을 떴다. 여전히 웃옷을 입지 않은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동굴 입구에 섰다. 떠오르는 태양이 동굴 안쪽으로 흘러 들어와, 붉게 타는 동상처럼 그녀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제이는 잠깐 동안을 그러는 곡선과 끓은 빛을 내는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등뒤로 다가갔다. “마스터." “응?” 아이린은 뒤는 돌아보지 않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붉은 동쪽만 바라보았다. 지평선의 태양이 비 온 후 습한 냉기에 노출된 들의 몸을 따스하게 감쌌다. 제이는 몇 분이나 말하길 주저했고, 아이린은 새벽의 끓은 빛이 평원을 훑으며 떠오르는 시간 동안 그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조금만 더 안을 수 있게 해주시겠소?“ "네가 고향에 두고 온 여자 대신이라는 건 싫어.“ "그런 건 아니오. 단지.......“ 이럴 때 제이는 말재주가 없다는 것을 한탄해야 했다. 이런 게 남자의 욕망과 상관 없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꺼내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쉬이 말을 꺼내지 못 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돌아보지 않고도 몸을 천천히 젖혀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어떤 세심한 배려를 바탕으로 한 승낙의 말을 들은 것보다 안심하고, 그는 그녀의 목 뒤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제이는 그 느낌의 비밀을 알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포근함이었다. 아버지에게 얻어맞아 침대에 쓰러져 있는 그를 말없이 다가와 안아주던 어머니의 향기였다. 제이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또 다시 피 냄새가 나." 아이린은 목을 끌어안고 있는 제이의 손을 풀더니, 배 쪽을 끌어안게 했다. 어느 남자 못지 않은 단단한 배 근윽이 느껴졌다. "비가 온 후에도 그런 걸 알 수 있소?" "네가 경험이라고 말하는 그것과는 조금 달라. 이건 느낌이야." 아이린은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이 섞인 그녀의 호흡에 제이는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그녀는 돌아서 그의 빰에 살짝 키스하고 말했다. 그의 욕심대로 그녀를 안은 것이지만, 그녀도 안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고속으로 이동해야겠다. 여기서 그레이 적어도 이틀거리지만, 우리는 하루 안에 가야 해." "그런 거라면 내게 맡기시오. 당신이 따라올 수 있다면." 다시 여행이 시작되었다. 제이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물로 엉망이 된 길을 뛰어가듯 걸었다. 가끔 아이린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오히려 재촉했다. 초행이고 진흙투성이의 길이라 체력 소모가 몇 배나 더 심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아이린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른 시간에 그레이 게이트에 도착했다. 해가 떨어진 지 한참 된 시간이라, 커다란 철문은 굳게 받혀 있었다. 아이린은 소러를 질러 사람을 불렀다. 횃불은 성문 왼쪽에 하나밖에 켜 있지 않아 성문 외의 다른 부분은 잘 보이지 않았다. 성문 위록에서 경비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이라 문은 닫혔소. 급한 일이 아니라면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 쉬고, 내일 새벽에 오시오." "급한 일이에요. 이런 건 싫지만, 가급적 내 이름을 밝히고 내게 주어진 권한으로 성문을 통과하고 싶은데요?" 경비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함을 말씀해 보시오." "아이린." "성은?" "성은 없어요." “그럼 곤란합니다.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군요." "당신 이 성문에서 몇 년이나 근무 했지요?" 경비는 잠깐 멈칫했다. "2년이오. 그런 건 왜 묻는 거요?"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어요. 그레이 게이트에서 5년 이상 근무한 사람을 찾아 내 이름을 말해 주세요." 아이린은 그가 화나지 않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경비는 머뭇거리다가 기다리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아 다른 나이 많은 경비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이린, 아이린 울프가 맞소?" "울프라는 성은 오래 전에 반납했으니 빼주세요." "괜찮으시다면 횃불 옆으로 와주시겠소?" 시키는 대로 아이린이 횃불 아래 서자, 경비는 크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말 아이린이었군. 나 모르겠소? 나 머피요." "머피!" 아이린은 굉장히 반가워하며 말했다. “레드 게이트의 성문지기가 왜 이런 곳에 있어? 좌천 당했어?" “나도 늙었다 이거지, 기다리시오." 곧 성문이 열리며, 몇몇 경비들이 나와 그녀를 맞았다. 제이는 문만 있는 성벽이라고 생각한 안 족에 꽤 넓은 공간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이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란티아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게이트가 이런 구조지 블루 게이트가 좀 작은 편이었던 거야. 가장 높고 가장 큰 건 골드 게이트지만, 구조 자체는 같아. 이곳 경비들은 1년 내내 이 곳에서 생활해야 하니까 안에 갖춰야 할 모든 시설은 다 있어. 허락만 해주면 술집도 들여놓을 걸?" 머리를 숙여야 하는 2층의 작은 방에서 머피라는 검은 콧수염을 기른 경비가 그녀를 맞았다 들은 웃으며 가볍게 포옹했다. “어제 비가 온 탓에 여름인 주제에 날씨가 몹시 쌀쌀해졌구먼. 따뜻한 차라도 내야겠어. 조금만 기다리시게." 머피는 그녀에게 앉기를 권하고 제이에게도 의자를 내주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소, 아이리." "당신도 많이 늙었군, 머피." "그래도 이 일을 하기에는 아직 쌩쌩하거든. 아직도 이 게이트에서 나랑 팔씨름해서 이길만한 사람이 없다니까!" 머피는 갈색에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이는 사십 대의 남자였다. 그의 유쾌한 미소는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했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최근 그레이 게이트 근처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안 좋은 일?" 머피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흉악범 하나가 그레이 게이트를 지나간 것 같소. 우리야 기본적으로 모든 여행객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설사 알아봤어도 통과 시켰겠지. 그런데 그 수배자 명단이 글쎄, 그 놈 통과하고 이틀이 지난 다음에 왔더라고. 받자마자 퍼뜩 생각이 났지만, 그렇게 늦게 줘서야 조치할 방도가 있나?" "그 수배자라는 게 혹시 지옥 정이라는 자요?" 제이가 끼어들어 물었다. "맞소. 테고라는 자요. 잘 아는군 나흘 전인가, 사흘 전인가, 그레이 타운에서 술집을 점거해서 난동을 부린 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은 후 출동했는데, 아마 그 자일 거요." "잡았어?" 아이 린이 제이 대신 물었다. "달아났지. 아직 못 찾았소. 술집 주인은 어떤 실력 좋은 기사 두 명이 나서서 쫓아냈다는데, 또 다른 잡혀있던 인질들 말이 그 놈들도 한 패라더군. 혹시나 해서 조사했었소. 물론 증거가 없어 놔주긴 했지만. 뭐, 그 두 사람은 즘 수상하긴 해도, 가게 주인장이 하도 옹 호를 해줘서 내버려줬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그 지옥 검이라는 놈은 부하들도 계 많아, 우리 경비대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것 같소." 머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게 안 좋은 일이라면 안 좋은 일이었소만?" 그러나 아이린은 그런 얘길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런 현실적인 일 말고, 좀 더 이상한 일 말이야." "그런 건 모르겠는데?" 머피는 아이린과 제이 몫의 차를 내온 부하 병사에게 물었다. "이상한 일 있었어?" 그 부하 병사는 싱겁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그거 있잖습니까." "그거? 아아.......“ 머피가 고개를 끄먹이자, 아이린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뭐 있어?" “좀...... 이상한 일이긴 한데, 중앙에 보고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 그는 조금 망설였고, 그녀는 재촉했다. "무슨 일?" “열흘쯤 전이었나? 검은 기사 한 명이 여길 지나갔었지. 막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의 저녁이라 아직 횃불을 켜지 않은 어둠 속이었소.” "검은 기사?" 아이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재미있게도 그 자는 익셀런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더군. 우린 그 때 굉장히 당황했는데, 그렇다고 규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닌데, 쫓아낼 수도 없지 않나? 더군다나 지금은 론타몬과 적대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 자가 특별히 우릴 공격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물었지. 당신은 무슨 일로 이 곳을 지나가느냐, 그랬더니 대답하길, '골드 게이트로 간다.' 라고 대답했소. 이상하지 않나? 나디움을 간다는 것도 아니고, 화이트 게이트로 간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마을을 간다고는 것도 아니고 골드 게이트라니! 무슨 일로 가느냐고 물었지. 그는 말해야 하냐고 되묻더군. 형식적인 절차이고,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그러니 그자는 왜 가야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대답할 수도 없다고 그러더구먼." 머피를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었다. "뭔가 분위치도 이상하고....... 하필 그 날 따라 횃불도 켜지 않아 투구를 쓴 그 기사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지. 그렇다고 계속 붙잡아 둘만한 핑계거리도 없어 통과시킬 수 밖에 없었소. 또 혹시나 해서 레드 게이트 족 경비와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그 자가 거길 통과했다는 소식은 없었소. 그 후 검은 기사에 의한 어떤 사건 사고가 있다는 말도 듣지 못 했고. 잠깐 있어보자....... 방금 말한 그 술 집 주인도 검은 기사가 나타났다는 말을 하긴 했는데, 그건 피해 신고가 아니라 그냥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 잡담 정도였지 " 머피는 입맛을 점점 다시며 물었다. "이런 일도 당신이 말한 이상한 일이랄 수 있나?" 아이린은 활장을 끼고 있다가 차를 한 보금 했다. "그 외에는?" "아아, 갑자기 당신이 먼저 물어서 얘기 순서가 틀렸소.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다른 거 였다고."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시 긴 얘기를 준비했다. “사실 그 일보다는 최근 있었던 다른 일이 더 이상하다면 이상했을 거요. 내가 당신을 성문 아래에서 발견한 것에 왜 그리 놀랐는지 아시오? 당신이 몇 년인지 셈하기도 힘든 시간 만에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야.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인물들을 연이어 만났기 때문이오." "나만큼이나 놀랄 일이었나?" 아이린이 무거운 분위치를 쇄신하려고 농담조로 물었다. "사흘 전에 하얀 늑대들 여섯 명이 지나갔소." “그 얘기는 블루 게이트 경비한데 들었소. 어디 보자...... 닷새쯤 전이었나? 카모르트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흐음, 시간적으로 우리가 이틀 거리를 따라 잡았군 " “그 말 뿐이었소? 그럼 그 경비도 놀랄 타깃을 잘못 잡았군." "무슨 타깃?" “내가 방금 말했잖소. 여섯이오, 여섯. 하얀 늑대들이 카모르트로 떠날 매는 분명 다섯 명이었소. 그런데 돌아올 때는 여섯 명이 되어 있는 거요. 그것 참 이상한 일 아니오?"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블루 게이트의 성문지기는 그런 얘기 안 했는데? 여섯 번째는 그냥 동행인이 아니고?" "나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소. 그런데 그 다섯 명 전원이 그 새로운 한 명을 '캡틴'이라고 부르더군. 보기에 무척 어려 보이던데 어떻게 캡틴이 될 수 있었는지 나도 모르지만.......“ "하얀 늑대들은 원한다면 자기들의 캡틴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건 참 놀랄 만한 일이군.“ “그것뿐이 아니었소. 그 날 동시에 이 성문을 통과한 사람은 다름 아닌 블루 게이트의 하이로드(Highlord)탈룬드였소. 매년 한 번씩 지나가지만 공교롭게도 하얀 늑대들과 같은 시간에 나타난 거요. 그런 거물들이 이 좁은 장소에 같이 있으니 내가 다 숨이 막힐 지경이더군." "하이로드가? 여왕을 뵈러 가나?" "뭐, 언제나처럼 마차에 선물을 산더미처럼 쌓아가지고. 그러고보니 어제 폭우를 어떻게 대처했나 걱정이오." 제이가 말없이 앉아있자, 아이린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하이로드란 건 각 게이트를 관장하는 영주 같은 거야. 다른나라에는 없는 귀족 체계지. 아란티아에는 하이로드와 로드, 두 종류의 귀족 밖에 없거든." "문 하나 관리하는 귀족 치고는 이름이 너무 거창하지 않소?“ 제이는 관심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이린은 참다 터트린 것처럼 웃었다. "그래, 제이메르. 그 말 참 멋지다. 그 얘기 탈룬드한테 해주면 거품 물고 기절하겠지?" 머피는 당황하여 두 손을 내저었다. “단신이 그런 말 하면 농담 같지 않아서 걱정이군. 제발 그러지 마시오." "알았어, 알았어. 놀랄 만한 사람 더 있어?" "있소. 뭐 사실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퀘이언이라는 영웅을 곁에서 잠시나마 모신 적이 있고, 탈룬드는 해마다 보는 사람이니 크게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난 이틀 전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을 만났소." 그는 긴장감을 고조시킨 후 말했다. "하늘 산맥의 루티아에서 온 마법사가 어제 이 곳을 찾았소." "루티아의 마법사가?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네. 마법사가 게이트에는 왜 와?" "아아, 정말이지 여기서 앞으로 50딘을 더 근무한다 해도 이 세 인물이 하루 간격으로 게이트를 통과하는 광경은 보지 못할 거요.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야. 루터아의 마법사라니!" 그는 무척이나 흥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말을 이었다. "난 마법사라는 건 하얀 수염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는 비교적 젊더군. 아아, 그래 봤자 나만큼은 나이를 먹었겠지만....... 가슴에 주먹만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빼고 나면 특별히 신기할 것도 없는 차림이 없는데, 그 자를 보고 있으면 절로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지 않았겠어? 여하튼 그는 오자마자 내게 하얀 늑대들이 여길 지나갔냐고 물었소." "루터아의 마법사가 하얀 늑대를 찾았다?" 아이린은 심상치 않은 뭔가를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하루 전에 지나갔다고 하니 무척 안타까워하며 어느 길로 갔냐고 또 물었소. 그래서 레드 게이트로 가는 직선상의 길로 갔다고 했지 내가 '만약 나디움에서 오는 길이라면 오는 중에 만났을거 아니오?' 라고 물었는데, 그는 '난 길로 오지 않았소.‘ 라고 대답하대? 하하, 길로 오지 않았으면 대체 어디로 왔다는 건지 모를 일이군." 그는 연신 웃으며 말했다. "일반인의 방법으로 생활하지 않으니 마법사라 불리는 게지. 그럼 오늘 새벽의 불길한 기운은 그 마법사 때문이었나?“ "루티아의 마법사가 어째서 불길하다는 거요?“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니야. 고마워. 이것저것 알려줘서.“ 아이린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 대화를 끊었다. 머피도 과감히 호기심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어디서 묵을 거요? 그레이 타운까지는 두 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 그냥 여기에서 묵는 게 어떻소?” 머피는 기꺼이 그녀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보다 말을 두 필 구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하지만 밤에 이동하는 건 권하고 싶지 않소. 골드와 레드 게이트 사이는 길이 잘 닦여있지만, 아시다시피 여기에서 레드 게이트까지는 흙 길이라 아마 어제 비로 엉망이 되어 있을 거요. 밤에 가다가 말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위험하지. 그냥 오늘밤은 쉬고 내일 일찍 가는 게 어떻소?" 제이도 머피의 말에 동의했다. "내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소 아이 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설명하긴 힘들지만 하루라도 더 빨리 가야할 것 같아. 내일 아침에 떠오를 태양이 만약 피를 머금었다면 지금 떠나지 못한 것을 굉장히 후회할 것 같거든." 머피는 그녀의 고집을 아는 지라 더 권하지 않았다. 그저 아쉬움을 달래며 둘을 출구로 안내해 주기만 했다. 그리 그는 털빛이 고운 말 두 마리를 내주었다. "경비대가 가진 말 중 가장 빠른 말이오. 힘도 좋고, 겁도 없어 밤길을 가기에는 그만이지. 하지만 절대 속도를 내진 바시오. 이 좋은 말들이 진흙탕에 빠져 발목이 부러지면 난 오늘밤 당신을 말리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할 거요." 아이린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발 위에 올랐다. "참, 레드 게이트와 연락을 취한 게 언제지?" "이틀 전이오." "파발이 오는 시간이 있으니, 그림 최소한 나흘은 공백이군. 고마워. 조만간 또 보지." 그녀는 제이가 말에 오르는 것을 보지도 않고, 바로 말을 달렸다. 머피는 달리지 말라는 충고를 듣지 않는 그녀의 뒤를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는 굳이 서두르지 않고 머피에게 물었다 "아이린은 어떤 분이시오?" "그것도 모르고 동행하고 있소?" 머피가 수상쩍게 바라보니 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느닷없이 만나 느닷없이 테스트를 받고 있는 중이오." "테스트?" "1차는 합격했고, 지금 2차 테스트를 하고 있다더군. 난 그게 뭔지 모르지만.“ 머피는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면 당신은 지금 울프 기사단 입단 테스트를 받고 있는 거요." “그 비슷한 말을 듣긴 했는데, 마스터에게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소?" "있다마다 자네는 아이린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 했나 보군. 아, 물론 외부인은 그 이름을 잘 모르고, 현직 울프 기사단들도 과거 울프 기사단의 이름은 잘 알지 못하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나처럼 10년 전 론타몬과의 전쟁에 직접 참가해 본 사람만이 하얀 늑대 아이린 울프의 진짜 활약을 알고 있지.“ 제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군." 그는 머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힘있게 말을 달렸다. 머피는 뒤에서 말이 다치지 않기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했다. 흔적 "이게 마스터가 말하던 그 '흔적'이란 거요?" 그레이 게이트를 통과하고 지의 휴식 한 번 없이 하루 동안 꾸준히 말을 달리던 중 제이는 갑자기 말을 세웠다. 그리고 길을 벗어나 한참이나 언덕 쪽을 거슬러 올라가더니 썩기 시작하는 시체 몇 구를 찾아냈다. 아이린은 이틀 전 내린 비로 지형조차 알아보기 힘든 곳에서 흙에 파묻힌 시체를 찾아낸 제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발자국이라도 있었나?" "비가 와서 바닥이 엉망이 되어 발자국이 남았어도 찾아보기 힘들었을 거요. 하지만 이 곳에 적어도 스무 명 이상인 사람들이 반나절 이상은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었소. 조심성 없는 무리들이라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여러 가지 표식을 남겨 놓았지." 제이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이린은 시체를 한참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모르는 녀석들이야. 진흙에 묻어있는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고." "원한다면......?" 제이가 시체라도 들추려 하자 아이린은 즉시 거부했다. "얼굴 확인해 본다고 달라지진 않아. 하지만 누군지 이 자들을 죽인 이는 무지막지하게 힘 좋은 녀석이었나 보다.“ 다섯 구의 시체는 모조리 두 동강 나 있었다. 제이는 어떤 무기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자세히 조사하고 싶었지만 아이린은 반대했다. "그 정도의 가치 있는 시체는 아닐 거다." 제이도 굳이 비위 상하는 짓을 나서서 하고 싶지 않았다. “보기에 사나흘 전에 죽은 것 같소." "우리가 그 지옥 검의 부하란 놈과 만났을 때군. 어쨌든 내가 찾는 건 이런 종류의 흔적이 아니야. 지나쳤거나 아직 나오지 않았겠지." "뭘 찾는 건지 가르쳐주면 좋겠소만?"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아마 직접 보기 전에는 나도 그게 뭔지 알 수 없을 거야." 제이는 통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목덜미만 긁적거렸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지?" 아이 린이 말에 오르며 물었다 "하루 먹을 정도. 빵도 우유도 떨어졌고, 마른 음식뿐이오. 그나마 젖어버려 냄새도 나고. 마을을 하나 들러야 할 것 같소. 사실 난 아란티아가 낙원 같은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반쯤은 여행하는 심정으로 온 건데, 이대로 여행을 끝내면 아란티아는 평원과 길만 있는 곳이라고 기억할 거요." 제이가 말에 오르며 대답했다. 아이린은 마치 커다란 잘못이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벅지를 딱 때렸다. "아, 그건 정말 미안하다. " 그녀는 미처 신경 쓰지 못 한 점을 한탄했다. "이 길을 벗어난 아란티아는 아주 멋져. 남쪽으로 하루 정도만 걸어가면 하늘 산맥도 보이고 아란티아를 가로지르는 몰비강도 볼 수 있지. 그 강을 따라가면 서쪽의 바다로 통해. 그 쪽 항구가 또 죽이지." "그런 걸 보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불평하는 건 아니었소. 오히려 난 당신을 마스터로 따른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 이것보다 더 혹독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이런 정도의 고난이라면 평범한 여행이니까." 제이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아이린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레드 게이트만 통과하면 보고 싶지 않아도 남쪽의 멋진 눈덮힌 산을 볼 수 있어. 어쨌든 이 일이 끝나면 이것저것 보여줄게 그리고 이건 테스트와 별개니까 걱정 마." 제이는 ‘당신과 함께라면 그렇게 하겠다.'라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냥 퉁명스럽게 길을 서두르자고 말했다 제이는 이런 자신의 성격을 조금도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요즘 들어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고쳐보고 싶어했다. 낮이 되어 비교적 땅이 말랐으나, 여전히 말은 제 속도를 내지 못해 걷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린은 더 빨리 가지 못 하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러자 제이는 이 이상의 속도로 가려면 날개 달린 말을 타고 가야 할 거라고 충고했다. 머피가 내 준 말은 제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말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하루 온종일 걸을 수 있는 체력을 가진 말은 구하기 힘들었다. 아이린도 그걸 아는지, 최선을 다하는 말을 닦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해가 떨어진 후 첫 번째로 만나는 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 오기 전에 더 큰 마을이 있었으나, 아이린이 조금이라도 더 이동하자고 해서 최대한 올 추 있는 곳까지 온 게 이 곳이었다. 길 옆에 있는 마을이라 그런지, 다른 마을이었으면 진작에 문을 닫았을 시각까지 영업을 하는 상점이 있었다. 제이는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사기로 하고, 아이린은 먼저 가서 여관방을 잡기로 했다. 앞으로 여행에 필요한 짐을 젊어지고 여관 족으로 가고 있을 때, 제이는 이상한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 검은 기시가.......” 두 사람이 말하고 있었는데, 대화 중간에 섞인 검은 기사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제이는 잠깐 천천히 걷는 척 하며 그 이야기를 들으려 했으나, 곧 다른 화제로 대화가 넘어가 버렸다.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어 그냥 여관으로 향했다. 제이는 짐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마스터가 먼저 와서 방을 잡았을 텐데." 술집 주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마스터 이름이 아이린?"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3층 4호실이오." “......방을 하나뿐?" “하나 더 드려야 하오?" 주인은 여자와 남자가 왔으면 당연히 방이 하나여야 한다는 투로 물었다. 제이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도 보지 않는다면 방이 하나들 침대가 하나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차라리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그게 나았다. 뭔가 떨떠름했으나, 제이는 가급적 그 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아, 그보다 아까 상점에서 검은 기사 어쩌고 하는 말이 오고 가던데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나?" "혹 그 검은 기사에 대해 아시오?" 손님이 오든지 말든지 졸린 눈을 끔뻑이던 가게 주인은 필요 이상으로 놀라며 물었다. 제이는 오히려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세상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한 둘인가? 누구였는지 설명해줘야 알지." "그게 말이오." 여관주인은 그동안 이런 얘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어 입이 간지럽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는지 즉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틀 전이었소." "폭우가 내리던 날이군." “바로 그 날이오. 왠 장정들이 한 스무 명쯤 들어오더니 방이란 방은 다 달라고 하더군. 나야 비가 와서 장사도 안 되던 터라 얼싸 좋구나 하고 손님을 들였지. 그런데 그 일행 중 하나가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겠소? 그것도 전투 중에나 입을 플레이트 메일이었소. 비가 오는 데 왠 갑옷이냐 싶었지만, 손님에계 폐가 될까봐 묻지는 않았소. 그런데 그날 밤 저녁 식사라도 내주려고 계단을 올라가는 데 그 검은 기사가 내려오더군.” 주인은 그 때를 회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자의 투구 속을 당신도 봤었어야 했소. 그 자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고, 얼굴도 없었소." "어두워서 못 본 게 아니고?" 주인은 계단 쪽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폈다. 정확히는 촛불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분명히 보았소. 그 검은 기사는 투구가 비어있는 자였소. 아니 비었다기보다 안이 어둠으로 차 있다고 해야 하나? 아아, 목 없는 기사에 관련된 전설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런 게 내 가게에 나타나다니 기절할 노릇이지." "그래서 사고라도?" "그게 이상한 게.......“ 주인은 뭔가 그럴 듯 하게 설명하려고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가 그냥 내뱉었다. “......아무 이상한 일도 없었소. 그 검은 기사는 빗 속으로 나갔고 그 뒤를 다른 동료 두 명이 뛰쳐나갔지. 한 명은 굉장히 예쁘게 생겨서 여자라고 생각 했는데, 나중에 흠뻑 젖어서 검은 기사를 도로 데리고 들어오는 걸 보니 남자더군." 제이는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새는 첫 같아 다시 확인 차 물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침 일찍 떠났소. 이상하지 않소?" 그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 재차 물었으나, 제이가 반응이 없자 그냥 말을 이었다. "난 사실 그날 밤 너무 무서워 벌벌 떨다가 그 손님들이 아침에 퇴실하는 것도 안 봐버렸소. 뭐, 방값은 선불로 받았으니 상관 없었지." 제이는 몇 가지 더 물어보았으나, 주인은 그 이상 아는 게 없었다. 그러 중요한 것도 아닌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는 사실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생활한 탓에 남이 가진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그 검은 치사라는 문제도 아이린의 문제지 자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자신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마스터 만의 일일까?' 그건 아직 알 수 없었다. 아이린은 잠들어 있었다. 며칠은 더 강행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던 그녀였으나, 역시 피곤한 일정이긴 했다. 아니면 앞으로 계속 될 힘든 일을 미리 대비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이도 그런 자세에는 공감했다. 큰일이 일어날 예감이 들면, 자둘 수 있을 때 자두는 게 좋다. 제이도 짐을 대충 한 쪽에 치워두고 반대편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언제인지 모르나,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눈을 었다. 새벽의 찬 공기를 맞으며 아이린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제이는 시린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물었다. "떠날 준비를?" "아니, 더 자 둬 아직 출발할 시간은 아니야." 마치 꿈결처럼 아이린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관 주인 말이 이 마을에도 검은 기사가 왔었다고 그랬소." 제이는 반쯤 자는 목소리로도 할 말은 다 했다. "알아. 그래서 깼어." 제이는, 어떻게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은 갖지 못 했다. "나도 참 둔해졌군. 이토록 사악한 힘이 거쳐간 마을에서 멍청하게 곯아떨어지다니." 그녀는 창문을 닫고 제이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자. 내일은 아주 힘든 일이 벌어질 거야." 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제이의 눈꺼풀을 무겁게 잡아당쳤다. 그는 아침까지 깨지 않고 편히 잠들었다 쌀쌀한 아침이었으나 날씨는 아주 밝았다 어제에 비하면 제법 말도 속도를 내어 달릴 수도 있게 되었다. 반나절 동안 말을 달렸을 때 제이가 갑자기 말을 세웠다. 아이린은 그가 뭔가를 발견했을 때의 행동 패턴에 익숙해진 탓인지, 금새 멈추고 물었다. "이번엔 어떤 거야?" 제이는 북쪽 언저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누군가 저 쪽에서 캠프를 차린 것 같소. 저런 곳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캠프?" "회색 연기가 올라가는 게 보이지 많소?" 아이린은 한참이나 눈을 가늘게 집중해서 봤지만, 보이지 않앗다. 하지만 제이가 있다고 하면 있는 거라고 믿고 굳이 확인하려 하지는 않았다. “말로 가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닌데 어쩌시겠소?" “가보자 평범한 캠프라도 저런 곳에서 머물고 있을 정도라면 근처에 안 좋은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지 모르고, 저 캠프 자체가 수상한 존재라면 우리로서는 잘 된 거지.” “시간 낭비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오." “으음, 그도 그렇군. 너라면 어쩔래?" 아이린은 짧은 고민을 하다가 판단을 제이에게 즉시 결정을 내렸다. “가 봅시다. 거기에서 바로 북쪽으로 돌아 시간낭비를 줄여볼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자. 제이가 안내했고, 아이린은 뒤만 따라갔다. 과연 반 시간쯤 이동하니 하늘로 올라가는 회색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곧 사라쳤다. 어떤 캠프인지 몰라도 굳이 그 연기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피운 게 아니라, 그저 음식이나 하려고 피운 게 분명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겠지만, 사실 그걸 발견한 건 순전히 제이의 시력과 관찰력 덕분이었다. 게다가 그는 처음 가는 길인데도 여러 번 와본 것처럼 곧잘 길을 찾아내곤 했다. "검술의 재능이 없는 놈이었다면 정말 옆에 끼고 다니기 좋겠군. 보온용으로도 쓸 만 하고."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제이가 뒤를 힐끔 쳐다보니 아이린은 속으로 뜨끔했다. 제이의 성깔에 그런 말 들으면 왠지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이는 듣지 못했다. "방금 뭐라 하지 않았소?" "아무 것도 아니야 " "재능 어쩌고 그런 건 같은데.......“ "내가 그다지 방향 감각이 무던 편은 아니지만, 네 덕에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아 편하다고 중얼거렀어. 그건 훌륭한 재능이야." "그것뿐?" "신경 쓰지 마. 중요한 말 아니었으니까." 아이린은 황급히 손을 흔들며 앞을 가리켰다. "일반 여행자의 캠프 치고는 상당히 큰 규모 같지?" "깃발도 보이는데, 아는 문장이오? 게다가 무기를 가진 자가 많이 있소. 이대로 들어가는 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소만." 제이는 주위를 경계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린은 제이가 말한 깃발을 조금 후에야 발견하고 거기에 그려진 문장을 살폈다. 그녀는 그 문장을 보더니 오히려 경계를 풀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블루 게이트의 하이로드인 탈룬드 의 상징이야. 와보길 잘 했군. 그레이 게이트의 머피가 우리 도착 하기 사흘 전에 하이로드가 지나갔다고 했던 말 기억 나? 우리가 그 사흘 거리를 따라잡은 거야 역시 패쓰파인더가 하나 있으니 금방이군." "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이 있소." 제이가 접근을 꺼리자, 아이린은 안심시키려고 말했다. "위험하지 않아 "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는 않았으나, 제이는 그것이 옮은 판단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두어 개의 커다란 텐트와 세 척의 마차가 언덕 너머에 보일 정도가 되자, 둘의 앞에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경비들이 열 명이나 나타났다. 그 중 약간 끓은 빛이 도는 갈색 수염을 기른 키 큰 병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예의를 갖춘 후 말했다. “길이 따로 있음에도 이 쪽으로 접근한 것에는 이유가 있어서 일거요, 낯선자여 안 좋은 일을 당해 방문객을 환영하지 못함을 사과드리며, 그대의 이름을 묻겠소." 아이린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가슴에 손을 올려 예를 보이고 말했다. "내 이름은 아이린이고, 이 쪽은 내 제자 제이메르에요. 멀리서 하이로드의 문장을 보고 일부러 찾아왔지요. 안 좋은 일이라 했나요? 도울 일이 있다면 돕고 싶은데요. 하이로드께 제 이름을 말씀드리면 아실 거에요." "좋소. 잠시 기다리시오." 갈색 수염의 병사는 다른 병사들에게 계속 경계하고 있으라 명령한 뒤 물러났다. 제이도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주 실력이 뛰어난 병사들이오. 일이 잘못되면 꽤 힘들게 싸워야 할 거요." 제이는 병사들 모두가, 검의 간격으로 치면 세 걸음까지 다가온 것을 눈치챘다. 보통 이 정도 인원이 포위를 하면, 각자의 실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두의 검의 간격이 들쑥날쑥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 자들은 그 간격을 전원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공격해 오면 한 번에 막아내기가 힘들 것이다. 호흡이 맞지 않는 엘리트 집단보다 손발이 잘 맞는 일반군대가 더 강하다는 걸, 제이는 자기 만의 방식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린의 생각은 달랐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군대는 어린 아이가 쥐고 있는 칼 한 자루보다 안전하단다. 일이 잘못 되어도 싸울 일은 없어. 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상정하는 구나." "적어도 코 앞에 창을 들고 있는 상대를 두고 안심하지는 않소." “겉으로는 경계하지 않는 척 하고 속으로는 찌를 계산을 하는 게 오히려 위험하지," "검을 사이에 두고 예를 따르라는 거요?“ "기사라면!" "난 기사가 아니오." "배워." 제이는 그녀와의 말다툼을 일제감치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캠프에 다녀온 병사는 둘의 앞에 서더니 고개를 저었다. "군주께서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 하십니다. 또 아는 사람이라 해도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소. 돌아가 주시오." 제이는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아이린이 항상 볼 일을 끝내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곤 했으므로, 이번에도 그럴 거라 짐작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이는 말고삐를 잡고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공격 당했군요. 그렇죠?" 그 병사가 대답하길 주저하자, 아이린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설마하니 아란티아 내에서 블루 게이트의 군주를 공격할 세력이 있을 리는 없고,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다면 외부인이겠군. 그게 누구죠?” 갈색 수염의 병사는 묘한 시선으로 아이린을 노려보더니, 일렬 막아선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열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끝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이는 병사들이 보이는 검의 간격을 미리 읽어내고 칼을 뽑아 아이린의 앞을 보호했다. “훈련 받은 군대는 위험하지 않다고 했소, 마스터?" 제이는 진작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투로 말했다. 갈색 수염의 병사는, 제이는 쳐다 보지도 않고 아이린에게만 말했다. “어떻게 우리가 공격 당했는지 알게 되었소?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할 상황이라 창을 세운 채 대화를 해야 하는 점을 양해하시오." 제이는 헛소리 말라고 해주고 싶었으나, 아이린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우린 방금 여기에 도착했어요. 당신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당연히 모르죠. 추측이에요. 지금 당신들의 행동 전부가 그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언제나 여유가 넘쳐야 할 하이로드의 병사들이 어째서 경직된 얼굴로 서 있는 것이며, 낯선 방문객과 술 한 잔 하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는 블루 게이트의 탈룬드가 어째서 손님을 거절 하시나요?" 아이린은 앞에 있는 제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칼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말을 찬찬히 들어보던 갈색 수염의 병사는 조금 당황해 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은퇴한 기사에게 과거의 직책을 묻는 건가요, 아니면 아까 말해 됐던 내 이름을 다시 문는 건가요? 난 아이린이라는 이름 외에 나를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군요. 가자 제이메르." 아이린은 말 위에 훌쩍 뛰어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제이는 마지막까지 혹시 벌어질 일을 대비해서 창을 든 병사들의 시선을 살피고 검의 간격을 읽었다. 창을 집어 던진다 해도 막을 준비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까지 일정하게 유지했던 검의 간격은 아이린이 등을 보이자 오히려 흐트러졌다. "군주께 전할 말씀이 있다면 전해 드리겠소." 갈색 수염의 병사가 소리쳐 물었다. "사람 이름도 기억 못하는 바보한데 남길 말 없어요." 아이린은 그 말을 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군주를 욕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말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았다. 오히려 갈색 수염의 병사와 부하들은 캠프 쪽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뭔가 알아볼 게 있어서 찾은 거 아니었소? 이대로 가기에는 조금.......“ “차라리 잘 됐어, 하이로드쯤 되는 귀족을 만나려면 예의 갖추는데 반시간은 걸릴 테니까. 이런 식으로 해두면 내가 원하는 짧게 들을 수 있을 거야." “원하는 얘기? 아무 얘기도 못 듣고 왔잖소, 지금?" 아이린은 일부러 고삐를 당겨 말이 천천히 움직이도록 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내기해도 좋아. 이삼십 분 안에 아까 그 녀석이 달려올 거야," 이삼십 분이 아니라 십 분도 안 되어 갈색 수염의 병사가 말을 달려왔다. 아이린이 말을 세우자, 그는 거의 넘어질 정도로 바쁘게 말에서 내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아이린! 군주께서 모셔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까 저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릴 기회를 주십시오. 제 이름은 아레르입니다. " 아이린은 눈은 화난 듯 했지만 입으로는 웃으며 말했다. “사과는 필요 없어요, 캡틴 아레르. 당신들이 그런 자세를 보였다면 아마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괜찭아요." 아레르는 절절 했고, 아이린은 그런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복수라고 생각하니, 제이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릴 뻔 했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도 될까요?" 아이린은 웃음기를 거두었다. “어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괴한들?" 아이린이 턱을 쓰다듬자, 제이가 생각난 바가 있어 물었다 "혹시 지옥 경이란 놈이었소?"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소. 하시만 그들 중 둘은 무서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소." 아레르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하이로드께서는 나디움으로 가시는 길이었나요?" 아이린은 확인 차 물었다. "일 년 만에 여왕님을 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 "탈룬드는 새나디엘 여왕의 아름다움에 중독된 사람이죠. 말이 일 년이지, 내 생각에는 그 일 년도 다음 만날 때 가져갈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대강 맞습니다. 나디움에서도 이 시기에 방문할 것을 알고 울프 기사단의 기사 한 명을 보내주었답니다." 울프 기사단이라는 말에 제이는 귀가 솔깃해졌다. "울프의 기사가 있는데도 당했다? 그 괴한이라는 게 단순히 도적은 아니었나 보군요." 아이린은 의아해했다. "요새는 그레이 게이트 안쪽에도 도적들이 나도니 문제가 심각하긴 합니다만, 도적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예의까지 지킬 줄 아는 자였습니다. 정식으로 결투까지 요청하는 걸 보니 기사였거나, 최소한 기사도를 배운자겠지요. 그리고 저는 '실력 있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지금 부상 중인 기사 배롤 울프도 그들 중 하나와는 전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그게 전력인지 아닌지는 감히 제가 평가할 수준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어마어마한 대결이긴 했습니다." 아이린은 그가 말하려는 바를 미리 짐작하고 말했다. “그럼 배롤은 그 대결에서 당한 게 아니라, 다른 이에게 당했군요. 엄청난 실력을 가졌다고 한 게 두 사람이었다고 했으니까." "처음에 나타난 그 두 사람, 다음에 나타난 이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습니다." 아이린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제이를 돌아보았다. 제이도 순간 긴장하여 말고삐는 고쳐 쥐었다. 지금까지의 소문은 이상하긴 했지만, 해는 끼치지 않고 지나갔다는 게 다였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많았던 그 자의 행적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익셀런의 갑옷을 입었던 가요?" "아, 듣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소. 또 그들 말고도 꽤 훈련을 받은 것 같은 병사들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매복해 있었지요. 난 캡틴 울프가 시키는 대로 주위에 있는 매복을 대비하느라 자세한 이야기는 알지 못 합니다. 만약 싸움이 일어났다면, 기사 배롤까지 당한 상태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을 지도 모릅니다." "잠깐, 캡틴 울프라고 했어요?" 아이린이 눈을 깜빡였다. "예. 제가말씀은 드리지 않았군요. 이 위험한 상황에서 캡틴 울프가 스스로 인질이 되어 전투가 무마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잡아간 후 말없이 물러났지요. 군주께서 지금 레이디 아이린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고 걱정하시는 이유가......." 아이린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잠깐잠깐, 뭔가 이상차군요. 캡틴 울프라면 게이트 두 개 지나면서 얘기를 잠깐 들었는데, 분명 하얀 늑대들과 같이 있다고 했어요. 그럼 그 친구들이 같이 있는데도 당했다는 거에요?" "아, 그건 아닙니다. 캡틴 울프는 혼자였습니다. " "왜?" "중간에 무슨 사고로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도 영문을 모르겠다며 동료를 찾다가 군주님을 찾아왔다더군요. 무슨 사고인지는 저도 듣지 못 했습니다." 아이린은 신음 소리 비슷하게 침묵을 유지하다가 화가 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캡틴이 잡혀갔다는 건 무슨 소리죠?" "아까도 말했지만, 들을 상대로 우리 경비대가 싸우는 건 무리였었습니다. 우리는 포위 당해 있었고, 지휘를 할 만한 기사 배롤도 쓰러진 상태였던 터라.......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사실 검은 기사에게 당한 상처는 꽤 컸습니다. 캡틴 울프는 그와 우리 모두를 살리는 대신 인질이 되는 쪽을 택한 겁니다." 아아린의 화가 난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가 싸웠나요?" "아니,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상황이.......“ 아이린은 또 그의 말 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그녀의 말이 점점 과격해졌다. “그 녀석, 부상을 당해서 안 싸웠나?" 아레르는 고개를 저었다. "배롤은 싸우게 내버려 두었고?" "예. 그렇긴 합니라만.......“ “울프의 기사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부상을 입는 싸움을 했는데, 캡틴이라는 자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인질이 되었다?” 아이린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런 경우라면 검에 자신이 없더라도 기사의 명예를 위해 검을 뽑았어야지! 캡틴이라는 자가 검을 아예 못 쓰기라도 한다던가?" “그게 상황이 조금...... 여의치 않았습니다. " "보검은?" “아란티아의 보검말씀이시죠? 인질이 되기 전에 배롤 울프에게 맡겼습니다. 지금 그는 부상 중임에도 절대 그 칼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캡틴 울프의 이름은?" "카셀이라 하더군요." 아이린은 그 이름을 되뇌며 중얼거렸다. “울프라는 이름을 단 자가 싸우지도 않고 적에게 잡히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내 장담컨대 그 녀석은 울프 기사단의 두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아니, 첫 번째도 통과하지 못할 자다. 현역 하얀 늑대들의 안목이라니. 왜 그런 녀석을 캡틴 감이라고 카모르트에서 일부러 데려왔단 말인가?" 아이린은 입을 반쯤 열었다가 홍분을 진정시켰다. “아직 보지 않은 자를 평가해선 안되겠지. 우린 먼저 가겠어요, 아레르." "하지만 군주께서.......“ “나디움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지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인사는 그 때 가서 천천히 하자고 전해 주세요.” 아이린은 이번에도 볼일만 끝내고 말머리를 획 들려 달려갔다. 제이는 출발하기 전에 잽싸게 아레르에게 물었다. “당신들을 공격한 검은 기사가 울프의 기사를 꺾었다고 했소?” "그렇소." 제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그럼 그 녀석을 해치우면 되겠군." 아레르가 고재를 갸웃하며 무슨 소러냐고 물으려 할 땐, 이미 제이가 말을 전속력으로 달린 후였다. 하이로드를 만난 후 아이린 은충분히 빨리 가고 있는데도, 초조해 했다. 그리고 이제는 앞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늘었다. 제이는 처음에 자기가 잘 따라오는 지 확인하는 줄 알았지만, 그녀가 돌아보는 건 동쪽의 지평선 족이었다. 마치 뭔가에 쫓기는 눈빛이었다. 말을 먹이려고 멈추고 나서야 제이가 물었다. “걱정하던 일이 하이로드가 공격 당한 일이었소?" “아니. 그건 걱정하던 일이 터질 거라는 암시라고 봐야지. 그 전까지는 잘 몰랐지만, 이번 일로 확신했어. 좋지 않은 일이 아란티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럼 뭘 걱정하는 거요? 검은 기사?" “모르겠다. 그럴 지도. 게이트 수문장들이 하는 말이라던가, 내 친구가 블루 게이트에 남긴 편지라던가....... 하나 같이 그 검은 기사에 대한 얘기군. 내 마음의 불안이 그 쪽에 관련되어 있는 걸까?" 아이린은 계속 모르겠다는 말만 했다 밝았던 하늘에 또 한 번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횃불이라도 켜지 않으면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둠이 내려 앉았다. 처음에는 무리해서라도 이동하던 그들의 곧 말의 안전을 위해 쉬기로 결정했다. 아직은 곳곳에 폭우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어제 꽤 편히 쉬었음에도 제이는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오늘은 각별히 주위를 기울이느라 정신력의 소모가 컸던 탓이었다. 그러나 똑같이 고생한 아이린은 피워놓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잠들지 않았다. 체력이라면 당연히 제이가 더 위일 것이고, 아이린이 힘이 남아돌아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뭔가 아주 걱정하고 있어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이는 그녀가 내내 뒤를 돌아보던 모습이 떠올라 말했다. “쫓아오는 게 있어서 걱정이라면 내가 보초를 서겠소. 마스터는 조금 주무시는 게 어떻소?” “괜찮아. 어차피 잠도 안 올거야.” 아이린은 피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이가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내 걱정은 말아라. 네가 먼저 잠이나 자 둬. 나중에 내가 졸릴 때쯤 깨울 테니까. 그 때나 부탁하자.” “알았소. 꼭 깨우시오.” 제이는 망토를 어깨까지 끌어당기고 잠들었다. 아이린이 그를 흔들어 깨운 건 새벽이 오기 전이었다. 깨자 마자 끈적한 호흡이 들리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이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칼에 손을 가져갔다. 모닥불은 아주 옅은 불길만 남아 있었고, 아이린은 묘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니 땀으로 축축했다. 다른 쪽 손은 칼을 들고 있었다. 제이가 끈적한 호흡이라고 느끼는 숨소리는 그녀가 내는 게 아니었다. "적이오?" 제이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뭔가 있어." "어디에?" "나도 모르겠다. 넌 알겠어?" 희미하긴 하지만 피부를 잡아당기는 묘한 힘을 느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방에 흩어져 있어 어디라고 짚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검의 간격을 잴 수 없는, 경험해 보지 못한 힘이었다. 제이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마치 어둠 자체가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약간의 불씨를 남기고 있던 모닥불은 완전히 꺼져버렸다. 묶어놓지 않았다면 진작 달아났을 정도로 겁을 먹은 말이 앞뒤로 서성거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리를 내지는 않아 불안함이 더욱 가중되었다. '겁 먹었구나.' 제이는 자신의 상태에 놀라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겁을 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피가 공포라는 감각을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를 겁 줄 만한 대상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마법사다." 아이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런 게 마법사의 힘이라고? 내가 만난 이들의 마법이란 건.......“ 8년 동안 제이는 마법사라고 불리는 자들을 세 명이나 사냥했다.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꺼리는 사냥감이없고, 덕분에 현상금이 보통 범죄자의 두 배나 되는 게 마법사였다. 그러나 제이는 그들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쓰는 불과 얼음의 마법이라는 건 훈련된 궁수가 또는 화살만도 못 했다. “거의 모든 마법사들은 루티아에서 마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 곳 출신이라고 모두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지. 하지만 루티아에서 마스터로 인정한 마법사들이라면 달라. 나는 오직 그런 이들만 마법사라 부른다." 아이린은 긴장된 숨을 몰아 쉬더니 제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야지 뭐 하고 있어? 내가 너무 겁을 줬나?" "난 겁먹지 않았소." 제이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아직 큰 소리 칠 힘은 남아있나 보군. 얼어버린 줄 알고 걱정 했거든." "내가 뭘 해야 하오?" 제이는 억지로 호기롭게 말했다. 당장 칼을 춰두를 자세였다. 그러나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서두르면 안 돼. 이미 우리는 녀석의 마법 안에 들어와 있어." "마법?" “말을 봐라.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소리도 못 내는 게 보이지 않나? 사람도 마찬가지야. 네가 평범한 녀석이었다면 지금쯤 손가락 빨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겠지." 끈적한 호흡은 그녀가 말하는 중간에도 계속 들려왔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 마법이 아니다. 이런 마법이 전쟁터 한 가운데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봐라. 만 명을 학살 시키는 마법이란 건 바로 이런 거야." 제이는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이미 그런 건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꾸욱 잡더니 말했다. "걱정 마라. 루티아의 마법사들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나도 그렇게 약하지는 않아." "알고 있소, 마스터는......, 과거의 하얀 늑대지 않소?" 아이린은 큰 소리로 웃었다. “막상 또 과거라고 그러니까 섭섭하네. 맞아. 하지만 벌써 이빨이 무뎌 진 건 아니야."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방향을 잡지 않고 아무 곳에나 대고 소리쳤다. "들어라. 네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면 네 시체를 확인해서 정체를 알아내겠다. 모습을 드러내라." 대답이라도 하듯 후덥지근한 바람이 아이린의 얼굴로 불어왔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동물이 숨을 몰아 쉬는 것 같았다. 제이는 말로만 듣던 드래곤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않아 그들을 향해 불을 뿜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졌다. 아이린은, 그러나 어둠 속에 설사 진짜 드래곤이 있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강한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칼을 바닥에 거꾸로 박아 넣었다. "제이, 울프 기사단에 도전할 생각이 있느냐?"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제이는 이런 상황 속에서 그런 걸 길게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없소. 난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은 거지, 기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좋은 자세다. 나도 공명심에 들뜬 녀석이라면 진작 던져버렸을 거야. 그러나 네가 기사도를 알기 전까지 나 역시 널 진짜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제이는 기사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기사도를 버린 남자의 피가 자기 몸에 흐르고 있는 이상. “상대가 마법사라면 나도 전력을 다하겠다. 제이메르, 내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나를 보호해라. 다가오는 게 뭐든, 망설이지 말고 베어버려." 그녀는 칼에 손을 얹은 채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몸 주위에 있던 검의 간격이 사라졌다. 즉, 그녀는 스스로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었다. 제이가 그것을 눈치 챔과 동시에 어디선가 시커먼 것이 아이린을 향해 곡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게 뭔지 보지도 않고, 제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칼을 위둘러 그것을 막아냈다. 손목이 저릴 정도로 아찔한 충격이 전해졌다. 어떤 공격인지 생각할 여지도 없이 제이는 또 한 번 같은 공격을 막아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적이 내리치는 투명한 도끼를 막는 것 같았다. 제이는 그 두 번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숨을 토해냈다. 손목은 물론이고 팔목까지 저려왔고, 복부를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 마냥 속이 울렁거렸다. 게다가 점의 간격이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이 이상공격이 날아오면 막아내기 힘들었다. 힘은 둘째 치고 정신적으로 너무도 피로했다. 제이는 만약 이번에 날아을 공격을 막아내지 못 하면 몸으로 받아낼 생각으로 아이린의 앞에 섰다. 또 한 번 공격이 날아왔다. 상하좌우, 어떤 규칙도 가지지 않는 빠른 공격이 제이의 얼굴 앞으로 날아들었다. 어둠 속이라 더더욱 목표물을 포착하기가 힘들었다. 제이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몸이 느끼는 감각만으로 칼을 휘둘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힘에 밀려 제이는 뒤로 휘청거러며 물러났다. "수고했다, 제이메르." 아이린의 손이 쓰러지려는 그의 등을 잡아주었다. 모닥불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제이의 등 뒤가 붉은 빛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린 제이는 붉은 털을 휘날리는 거대한 짐승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짐승이 아니라 아이린이었고, 붉은 털이 아니라 불꽃과도 같은 붉은 빛이었다. 그리고 빛은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과 상관 없이 그녀의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펄럭였다. 그녀의 칼날에는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이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을 반사한 그녀의 눈동자 마저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린은 천천히 제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이는 그 불길과도 같은 빛에 데기라도 하듯 흠칫 놀랐다 그러나 그 빛은 아무런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제이를 뒤로 끌었다. "피해 있어라." 어둠 속에서 또 같은 공격이 날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좌우 그리고 앞에서 세 개였다 그 검은 물체를 보고 제이는 급히 손을 쓰려 했으나, 그 쪽 방향에는 아이린이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빠른 공격을 보고도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 검은 물체는 붉은 빛을 받아 처음으로 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가 뭔지도 모르고 처했던 그것은 박쥐 같은 날개를 가진 조그마한 괴물이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날개를 러덕이며 불규칙적으로 날아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제이는 왜 그걸 그렇게 막아내기가 어려웠는지 알았다. 그리고 속도도 화살만큼이나 빨라, 제이는 세 번이나 그 공격을 막아낸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사실 세 번째는 거의 운에 가까웠었다. 아이린은 시커먼 박쥐를 보고도, 뒤에서 보고 있는 제이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칼을 들었다. 또한 아이린의 주위에는 제이에게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많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포크로 검의 간격을 만들어내더니 이제는 검을 들었는데도 검의 간격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이는 검은 박쥐가 날아온다는 사실도 잊고, 검의 간격에 대한 생각도 잊고 그녀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리게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어찌보면 격렬한 춤 사위 중간에 갖는 약간의 공백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순간 그 느린 칼날이 제이의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빠르게 뻗었다. 칼 끝을 따라 붉은 빛이 파도처럼 춤을 췄고, 박쥐 같은 괴물들은 그 붉은 빛에 부딪혀 사그라져 버렸다. 아이린은 칼을 위두를 때와 마찬가지로 정지한 것처럼 느리게 옆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갑자기 왼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제이의 눈에도 풀숲에 서 있던 뭔가가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그것은 펄럭이는 로브였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괴물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이린과 그것은 한참이나 서로를 견제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곧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 쪽이 먼저 물러나며 싸움이 끝났다. 아이린이 가진 칼도 붉은 빛을 잃었다. "뭐였소?" 제이는 아직 칼을 집어넣지 못 하고 물었다. "불부터 피워." 아이린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루티아의 마법사는 아니야. 그 곳 출신 중에 저런 끔찍한 마법을 쓰는 자는 없어." 모닥불이 커진 후에야 그녀는 불 앞에 서서 말했다. 그녀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 박쥐 같이 생긴 이상한 게 바로 그 자의 마법이었소?" 제이가 물었다. 아이린은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칼을 줘 봐." 제이는 지금까지 공격을 막아낸 칼을 내주었다. "넌 아주 잘 한 거야. 아까 그 검은 것에 스치기라도 했다면 네 몸은 미라가 되었을 거야." 모르고 있었는데, 그 칼은 마치 바위에 백 번쯤 두들긴 것처럼 금이 가 있었다. 게다가 1년 정도 방치해 둔 것처럼 녹슬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게 아직 진행 중이었다. 그녀가 칼을 불 속에 던져 넣자, 칼날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제이에게 그것은 사냥꾼 생활을 하며 부러진 스물다섯 자루 째의 검이자, 가장 기분 더럽게 부러진 칼이라 기억 되었다. "그런데 마스터는 마법사였소?" 제이가 그녀의 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평범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나, 아직도 붉은 빛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내가 현역이었을 때 내 상대는 칼을 쓰는 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마법을 배울 수는 없었지. 칼이 대신 해 준 것뿐이야," “마법을 쓸 수 있는 검?" "정확히 말하면 그렇지 않지만, 그런 정도로 알아둬." "어쨌건 방금 공격한 자가 마스터가 말한 진짜 마법사라는 존재라면, 난 다시는 마법사와 마주치고 싶지 않소. 마스터가 쫓아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쫓아낸 게 아니야." 아이린은 제이의 망토를 빼앗아 몸을 감싸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물러난 거지. 만약 방금 서로가 전력을 다해 부딪혔다면 나와 그 마법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었을 거야, 그리고 십중팔구 죽는 쪽은 나였겠지. 녀석도 그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물러났을까?" 아이린은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서글픈 눈망울로 해가 뜰 때까지 생각을 거듭했다. 제이는 왜 물러났는지 보다 그게 누구였고 왜 공격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리나 아이린은 그런 의문은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어찌면 그녀는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이는 그녀와 같이 밤을 새며 그녀의 고민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나도 강한 여자였다. 그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이 무척 괴로웠으나, 아침 해가 뜰 무렵 아이린은 그에게 생각도 못한 말을 했다. "네가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야. 고마워."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그러나 제이는 그녀가 어떤 점을 고마워했는지 알 수 없었다. 레드 게이트는 이름 그대로 붉은 색이었다. 그러고 지금까지의 게이트와는 달리 성문도 크고 성벽도 높았다. 만약 게이트의 온전한 모습을 보았다면 잠시나마 감상할 가치가 있는 아란티아의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제이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열린 성문 안쪽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린과 제이는 연기를 발견하는 즉시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나고 안은 조용했다. 제이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물 주머니를 꺼내 헝겊에 적셨다. "하이로드를 공격한 자들의 소행인 거요? 아니면 어제 그 마법사?" “마법사가 왔다는 느낌은 없어. 또 하이로드를 공격한 자들이라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라고 했어. 군대 수준의 병력이 모여 있는 게이트를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야." 제이는 젖은 헝겊을 내주고, 자기도 헝겊을 하나 물에 적셨다. “하지만 그들은 이비 하이로드가 데리고 있는 병력도 제압했잖소?" “어쨌든 확인해보자." 아이린을 쫓아 코를 막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제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빗물이 옅게 남아있는 바닥에 커다란 동물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른 방에도 희미하게 자국이 남아 있었고, 게이트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늑대 발자국이 있소." “아란티아에는 늑대가 많아. 괜히 왕실의 문장이 늑대인 건 아니지." 아이린은 그를 재촉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겠지만, 아란티아에는 이렇게 거대한 늑대가 다 있소?" 제이는 발자국의 자기 손바닥을 대보았다. “어지간히 큰 늑대의 발자국보다 두 배는 더 크군. 이런 발바닥을 가진 놈이라면 적어도 키가 내 허리 높이는 넘는 괴물이오. 황소도 잡아먹겠군. 이런 것도 아란티아에는 흔한 정도요?" 아이린은 그리 관심 없다는 듯 코를 가리고 먼저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가득 찬 연기에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가려 게이트 안은 무척 어두웠다. "살아남은 사람 없어요?" 그녀는 소리 질렀다. 대답은 없었다. 즉시 발 아래 몇 명을 발견했으나 모두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녀가 다시 쉬었다가 수색을 계속하려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안쪽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났다. 들어가 보니 부서진 탁자에 깔린 남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고여 있었고, 그 피가 묻은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아이린은 나무 탁자를 들어올렸고, 뒤에서 도우러 온 제이가 그를 끌어냈다. 그는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으나, 제이는 당장 그의 상처를 살피는 것보다 데리고 나오는 것을 우선했다. 제이가 바깥으로 나와 그를 바닥에 눕히자, 아이린이 달려와 즉시 물었다. "누가 이랬어?" 병사는 기침을 토해내며 말했다. "검은 기사가.......“ 아이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다른 살아남은 사람은?" "나도 모르겠소. 많이들 도망친 것 같긴 한데, 싸움이 벌어지고 난 금방 칼에 맞았고....... 눈을 떠 보니 사방이 연기로 가득 차 있어서......, 게다가 아까 봤던 대로 난 움직이지 못 했소.“ 그는 기억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혼자 호흡할 수 있도록 허리띠를 풀어주고, 제이와 함께 게이트 안으로 다시 들어가 생존자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 반시간을 더 찾아 헤맸으나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 연기에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와중에도 둘은 서른 명이나 밖으로 끌고 나왔으나 모두 죽어 있었다. 하지만 화재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불은 사건이 벌어진 후에 일어난 것 같았다. 그나마 불길은 크게 번지지 않고, 연기만으로 끝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은 포기했으나, 아이린과 제이는 질식하기 직전까지 할 수 있는 한 수색을 했다. 살아남은 병사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혼자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이린은 얼굴에 묻은 검댕을 소매로 적당히 닦고, 망연히 게이트를 바라보는 병사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요? 자세히 말해봐요." 그 병사는 혼란스러워 했고, 조금 앞 뒤가 안 맞는 말을 하더니 겨우 상황을 정리했다. "스무 명쯤 되는 일행이 있었소. 아니, 좀 더 되는 것 같은데, 내가 담당하지는 않았으니까. 그 중 하나는 검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자였소. 그의 차림이 뭔가 수상했지만, 게이트 출입 규칙대로 통행세와 도로 사용료만 물리기로 했소. 하지만 그들은 돈이 없었던 모양이오. 좀 많은 인원이긴 하나, 통행료가 그리 비싼 것도 아닌데 돈이 한 푼도 없다더군. 한 명은 화를 냈고, 다른 하나는 화내는 사람을 말리느라 게이트 안이 조금 소란스러웠소. 나는 그 때부터 사건을 지켜봤소." 그는 지금 생각해 봐도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고 동의를 구하듯 말을 이었다. “갑옷은 언뜻 봐도 굉장히 고급스러운 것이었소. 솔직히 말해 그 자의 투구만 팔아도 통행료는 나오겠더라고. 누가 그 갑옷을 보고 익셀런의 기사 아니냐고 수군대긴 했지만, 나야 본 적이 없으니....... 어쨌든 그들은 통행료로 물 론을 마련할 데니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소. 그리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 그들끼리 뭔가 논의하더군. 우리는 기다렸소. 그런데 그 일행 중 하나가 우리에게 작은 경고를 보내왔소. 그들이 범죄자라는 거요." "잠깐, 앞뒤가 안 맞는군. 일행 중 하나가 자기네들이 범죄자라고 알려왔다고요?" "쪽지를 보내왔소. 그 쪽지가 어디 있었는데.......“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잃어버렸군. 하지만 짧게 적혀 있어 기억하고 있소. '범죄자들, 통과 시키지 말 것.'" 아이린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어 다시 물었다. "그 자가 누군데, 자기들 스스로를 범죄자라 칭한단 말이죠?" "스무 살에서 스물 다섯쯤 되는 청년이었는데 그 일행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소. 무척 정중한 말과 행동을 보이긴 했는데, 뭔가 종 어색하긴 하더군....... 일단 그런 쪽지를 보내왔다면 맞든 틀리든 조사를 해보는 게 올지 않겠소? 결과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당시 우리들은 이미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것까지 대비했었소." 그는 기침을 몇 번 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이 다시 와서 돈은 나중에 갚을 테니 통과를 시켜달라고 말하더군. 그래서 우리 측 수문장은 당신들이 가진 칼이라도 맡기면 통행세는 나오겠다고 말했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했소. 그 사이에 뭔가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지금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군. 확실치는 않지만......, 칼을 맡길 바에야 싸움을 택하겠노라며 무기를 들이댔던 것 같소. 이미 그런 것까지 대비를 했기 때문에 우린 크게 당황하지 않았소." "전투가 있었군." 제이가 말하자,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드 게이트의 병력은 상당 수준일 텐데, 겨우 스무 명을?"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겨우? 이보시오, 당신은 레드 게이트의 병사들을 얕보고 있군. 방심해서 당했다고도 하지 않을 것이고, 기습을 당했다고 변명하지도 않겠소. 우리는 아란티아에서 골드 게이트의 병력 다음으로 강한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는 자들이오. 심지어 이 게이트를 지키는 오십 여명 병사들 중에는 울프 기사단 시험에서 아쉽게 불합격 했던 자도 있소. 다시 지원하기 위한 예비 기사라고 할만 하지. 우리가 약한 게 아니라, 그들이 강했던 거요." 그 병사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아이린과 제이가 끌어낸 동료들의 시체를 살폈다. 그는 그 중 몇 구를 가리켰다. “저 중 열 명 정도는 게이트의 병사가 아니라, 그들이오. 게이트 안에서 우리의 공격을 받으면 스물이 아니라 이백이라 해도 못 당하는 게 정상이오. 그러나 그들 중 셋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적이었소. 특히 검은 갑옷을 입은 자는....... 나처럼 싸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많아 기절해 버린 병사가 할 말은 못 되지만, 그자의 실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소. 그가 휘두르는 할버드는 돌로 된 벽을 부수고 달려드는 병사들의 방패를 부수었지. 그가 입은 갑옷은 창도 들을 수 없었고, 설사 칼에 맞는다 해도 죽을 것 같지 많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였소. 한 마디로 유령 같다고 할까?" 아이린과 제이는 그가 결코 연기에 취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 불이 났소. 어디서 어떻게 불이 났는지 모르나, 다행히 그 불길이 우리를 구해주었소. 연기가 모두의 시야를 가렸고, 경비대 중 절반은 그것에 숨어 달아날 수 있었소. 난 아까 말했듯이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무거운 것에 깔려 있었고, 부상까지 당해 있어서 달아나지 못 했지만." "불이 났다?" 처음부터 이 화패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연기는 많이 났으되, 게이트 자체가 불길에 휩싸이지는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기를 이용해 다른 이들이 달아났다는 게 더더욱 이상한 점이었다. 아이 린은 당연히 이 불은 적이 낸 거라고 생각했었다. "불은 누가 냈죠?" "나도 모르오. 아, 우릴 공격한 그 괴물 같은 세 명 증 하나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소. 카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그가 불을 냈으니 가만 안 두겠다고. 이 연기를 보고 다른 군대가 올지 모르니 서둘러서 골드 게이트로 가야겠다고 했소. 아, 저런!" 그는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쳤다. “단신들이 누군지 모르나, 골드 게이트로 가는 길이라면 그 쪽에 이 사실을 전해 주시오. 그들 셋이 골드 게이트로 가고 있다고! 내 생각에는 멋모르고 통과시켰다가는 나디움까지 갈 것 같소."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제이가 갑자기 물었다. “혹시 거대한 늑대는 통과하지 않았소?" 병사는 무슨 소리냐는 듯 반름 감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늑대가 이 근처에 나타난 적도 없고?" “늑대야 밤이 되면 간혹 나타나지만, 일상적인 일이라....... 그런데 거대한 늑대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요? 석 달쯤 전에 꽤 큼지막한 늑대를 잡은 일이 있긴 하오."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놈이오." 병사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난 우리 애들에게 얘기해 줄 때도 그런 늑대를 출현시키지 않소.” 아이린은 왜 또 그 늑대를 이야기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늑대의 발자국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성문을 통과한 늑대가 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소. 그가 언제 이 곳을 통과했소?" “두 시간? 한 시간?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정도는 지날 것 같소. 기절해 있었으니 그 이상이었을 지도 모르고, 그 연기 속에서 내가 아직 살아남았으니 그보다 덜 지났는지도 모르지." 아이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정말 서둘렀고, 이보다 더 빨리 여기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두 시간 차이라니, 안타까워할 만도 했다. "보시오, 마스터. 그 검은 기사가 여길 나타난 게 가장 먼저고, 그 다음에 거대한 늑대가 지나갔고, 그 다음에 우리가 나타났소. 이 과정들이 우연의 일치인 것 같지는 않소. 게다가 어젯밤에 있었던 그 정체 불명의 마법사......." 제이는 그 광경이 떠오르는 것 같아 잠깐 멈칫 했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해 보시오, 마스터. 당신이 정말 두려워 한 일은 레드 게이트가 부서지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오. 바로 그 검은 기사가 나디움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 아니오?" 아이린은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래, 맞아. 그리고 나디움에는 여왕이 계시지." “그럼 불안해 할 것 없잖소. 나디움에는 그토록 강하다는 울프 기사단이 있는데." “그게 단운히 검은 갑옷을 입은 자라면 이 곳 레드 게이트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병사?" 그 병사는 아이린의 말에 피식 웃었다. "패배한 병사가 무슨 변명을 하겠소?" 아이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나디움에 적의를 품고 접근한 군대가 레드 게이트를 통과한 건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익셀런?" 제이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조차 골드 게이트 앞에서 울프 기사단을 맞아 패배했지. 겨우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한 명에 뛰어난 검사 두 명이 더 있다고 해서 불안해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거야 설사 그 검은 기사가 정말 론타몬의, 바로 그 익셀런 기사라 해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겠지. 골드 게이트는 익셀런의 3백 기사들에게도 열리지 않았던 곳이니까." 아이린은 짧게나마 당시를 회상하다가 말을 이었다. “맞아. 그런데 내가 패 이렇게 불안할까? 왜 이번 일로 나는 화이트 게이트가 무너지는 꿈을 꾼 거지?" 아이린은 그 말을 하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제이는 꿈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꿈은 자신이 눈으로 발견한 흔적만큼 신빙성이 있게 느껴졌다. 어제 그녀가 보여준 붉은 빛의 마법을 보고 나니, 그녀의 어떤 말도 모두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도로 성문 밖으로 나가더니 말을 끌고 돌아왔다. "난 먼저 나디움으로 가했다. 넌 이 병사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줘." 제이는 즉시 거절했다. "같이 가겠소." "이 사람을 여기에 두고 갈 거냐?" 제이가 아직 않아있는 병사를 내려다 보니, 병사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제 괜찭소. 이 연기를 보고 근처에서 누군가 도우러 올 거요. 인심 좋은 마을이 많으니까." 그래도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난 지름길로 갈 거다. 널 그곳으로 데려갈 순 없어." "어떤 길로든 난 갈 수 있소." "내가 지금부터 갈 곳은 네가 지금까지 다녀왔던 그런 길이 아니야." 그녀는 남쪽에 있는 산자락을 주시했다. 며칠 전 그녀가 말했던 대로 레드 게이트를 통과하니 남쪽에는 꼭대기가 하얀 산들이 보였다. 병사는 얼결에 그녀가 바라보는 쪽을 보더니 놀란 목소리를 했다. “트라카스트 산을 통할 생각이오?" "나디움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지." "미쳤소? 거 긴 하늘 산맥과 연결된 산이오. 그 산에 들어가서 살아남았다는 사람은 들어본 적 없소. 아니, 어떤 인간도 들어갈 수 없다 했소." 병사가 흥분하여 말했다.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제이 너를 데려가지 못 하겠다는 거야.“ "상관없소. 지금까지 나를 거부한 산은 없었으니까.“ "하늘 산맥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린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제이가 입만 열고 대꾸를 못 하니 그녀는 타이르듯 말했다. "넌 이대로 길을 따라 골드 게이트를 통해서 나디움으로 와라. 간단한 신분 검사만 통하면 골드 게이트는 통과할 수 있고, 화이트 게이트에는 내가 미리 연락을 해두겠다. 너는 큰 길을 따라 달려와라. 금방 찾아올 수 있을 거야." “마스터, 당신은 나를 제자로 두었소. 제자를 이런 식으로 팽개칠 수는 없는 거요!" 아이 린은 제이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 제이메르. 내 제자로 들이지 못하더라도 난 너를 울프 기사단에 추천하겠다. 그럼 넌 퀘이언의 제자가 된다. 울프의 기사를 꺾고 싶나? 너는 충분히 자질이 있어. 그 정도면 만족하지?" 듣고 있던 병사는 눈을 동그랗게 했다. 그 역시도 울프 기사단을 동경하여 아란티아에 왔으나, 실력이 모자라 레드 게이트에서 근무하며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수많은 검사들 중에서도 재능 있다고 소문난 검사들이 이 곳을 찾아왔다. 막말로 별의별 용법 나부랭이들이 울프 기사단을 꺾겠답시고, 레드 게이트를 통과한다. 그러면 레드 게이트의 병사들은 웃으며 자기들이나 이겨보라고 장난삼아 시비를 걸곤 했다. 개 중에는 무시하고 곧장 골드 게이트쪽으로 가는 이들이 있으나, 대부분은 자신의 실력을과시하기 위해 시합에 응한다. 그리고 패배 후 충격을 받고 쓸쓸히 돌아가거나 그대로 레드 게이트에 남아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이곳 레드 게이트만 해도 그 정도로 뛰어난 경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차울프 기사반이란 최종목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니, 단지 테스트에 한 번 드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이들도 꽤 됐다. 제이에게는 그런 엄청난 특권이 뚝 떨어진 것이었다. 그 병사로서는 귀를 의심할 만한 충격적인 소식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제이는 어젯밤에도 그랬던 것처럼 단박에 거절했다. "싫소." 아이린은 다시 한 번 그를 설득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란티아로 들아와 몇 가지 놀라운 일을 겪었고, 안 좋은 일도 겪었으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것만를 믿지 못 할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제이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느닷없는 그 눈물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난 당신이 아니면 누구의 제자도 되고 싶지 않소." 제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이린은 항상 그에게 솔직하게 행동하라고 요구했고, 제이도 조금씩이나마 자신을 바꿔가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만큼은 절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사람을 베고, 죽이고, 그 목숨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먹고, 그 돈으로 새로운 검을 사고....... 지난 8년 간 그런 식으로 지내며, 그는 스스로가 무서울 정도로 목숨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점점 감정은 무뎌지고, 슬픔과 외로움 같은 건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런 건 없어도 되니까....... 그럼에도 단하나 잊혀지지 않는 아픔이 있었다. '난 버림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카르에게, 마을 사람들에게, 친구에게, 에위니에게. '난 괜찭아,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 모든 것을 잊고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불쑥 솟아나 그의 심장을 움켜쥐곤 했다. 아이린이 그와 헤어지겠다는 말을 하는 순간, 꾹꾹 눌러왔던 그 아픔이 갑자기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시절, 어떤 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소. 몇 년 만 참으면 데리러 오겠다, 널 제자로 만들어 내가 소속되어 있는 기사단에 넣어 주겠다고." 만약 그 때 그가 데리러 왔다면....... 그가 자신을 데리고 가 기사로 만들어 주었다면? ‘그럼 어머니는 살았을까?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을까?' 사냥꾼 생활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머리 속에 그려본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었소. 난 그 때부터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내가 스스로 길을 개척하기로 마음 먹었소. 그런데 당신이 나를 먼저 찾아왔소. 비록 부탁은 내가한 것이긴 하나, 허락을 해주지 않았소? 세 번째 테스트에서 떨어지면 죽이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그런데 이제와 나를 버릴 수는 없소."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지 많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이의 검술을 본 이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고, 모든 것이 검의 간격으로 보이는 그에게 있어 이미 안정적인 일상 생활이란 지루함의 전쟁터였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를 충족시켜줄 기둥이었다. 그는 그 기둥이란 게 무엇인지 알지 못 했으나,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스승이었다. 자신을 깨우쳐주고, 인도해주고, 때로는 호통을 쳐줄 마스터! “마스터......, 난......,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이어가다 기어이 눈물을 쏟았다. "제발 날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아이린은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제이, 드디어 네가 솔직해졌구나." 그녀는 제이를 살짝 안고 등을 토닥거렀다. “그리고 내가 널 잘못 봤나 보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보는 안목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 했구나. 난 네가 세 번째 테스트를 통과할 자질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니었어. 미안해, 울프 기사단 어쩌고 한 건 사과하겠다. 넌 이미 내 제자야 그리고 난 절대 제자를 버리지 않아.” 아이린은 포옹을 풀고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니 이제 마스터의 말을 들어라. 나디움에서 만나자 내가 먼저 가 있겠다." 제이가 뭐라 말하려 하자, 그녀는 그의 량에 살확 손을 했다. 그리고 먼저 말을 이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넌 나디움에 올 때 혼자와선 안 돼.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지금 그 검은 치사 일행에게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붙잡혀 있는 것 같다. 뭔가 미심적은 캡틴이긴 하지만, 하얀 늑대들이 인정했다면 그는 캡틴이 맞다. 그러니 그를 구출해라. 알았지?" 제이는 목이 매인 탓에 쉽게 대담하지 못했다. "대답은?" 아이린이 대답을 강요했다. "예, 마스터." 제이는 힘을 쥐어짜서 겨우 대답했다. "좋아." 아이린은 그의 볼을 톡톡 치고 말에 올랐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 검은 기사와는 절대 싸우지 마라. 변명 같지만, 나 역시 피해 가는 게야. 그러니 딘 절대 그들과, 특히 검은 기사와 정면 대결을 해선 안 돼, 캡틴만 구해라." "예, 마스터." "나중에 보자." 자기 볼일이 끝나면 언제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던 그녀였으나, 이번만큼은 제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산자락부터 눈이 쌓여 있는 높은 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구요?" 병사가 물었다. 제이는 눈물을 닦고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린 후 대답했다. “나의 스승이오. 말에 타시오. 근처 마을까지 태워 드리겠소." “아까도 말했지만 난 정말 괜찭소. 오히려 이린 꼴이기에 더더욱 여길 지켜야 하지 않겠소?" "좋을 대로." 제이도 말에 올랐다. 비가 그친 후의 쌀쌀함은 진작 사라졌고, 다시 여름의 더운 습기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날씨였다. 제이는 힘껏 말을 몰았다. 마스터가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그런 적을 만나면, 강한 적을 찾아 헤매던 자신의 혈기 왕성한 피가 가만히 있어 줄 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제자로 인정해 주니, 사실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는 기분이었다. “블루 게이트에서 닷새 거리, 그레이 게이트에서 사흘 거리, 레드 게이트에서 두 시간.......” 특별히 목표를 정하고 추적한 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제이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따라온 게 되었다. 추적한 시간을 계산해 보니, 이제 언제 따라잡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따라잡느냐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2.빌리 그레이 타운 "야, 너도 가진 거 여기다 다 집어넣어." 빌리는 누군가 몸에 손을 대는 걸 싫어했다. 철 들기 전에는 누가 머리를 치기라도 하면 잠깐 이성을 잃고선 덤벼드는 일도 많았다. 나이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는 지금에야 많이 자제하는 편이지만, 본래의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빌리는 어제 밤을 새서 걸어와 오늘 새벽, 아란티아의 그레이 게이트를 통과했고, 아침에 그레이 타운에 도착했다. 그는 몹시 피곤했고,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많고 침대에 몸을 던져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면 일어날 힘도 안 남아 있을 것 같아서, 최소한의 요기라도 하려고 억지로 바에 앉았다. 식당 안으로 쳐들어온 열 명 정도의 괴한들은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순식간에 술집 안을 점거했다. 왜 하필 이 식당이었을까? 작은 마을도 아닌데, 여기가 가장 돈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한 걸까? 어했든 그들은 빌리가 멍한 정신으로 접시에 담긴 구운 감자를 수저로 파먹는 동안 술집 손님들을 협박하여 금품을 뜯어내고 있었다. 빌러에게 온 남자는 거만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돈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 빌리는 반쯤 잠에 취해 감자 껍질을 벗겨 속을 파먹는 건지, 속을 파내고 감자 껍질을 먹는 건지도 구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니 맨 정신이어도 접수하기 힘든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몇 번 부르다 참지 못한 도적은 빌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야 이 자식아! 내 말 안 들려?" 먹던 감자가 바닥에 특 떨어진 후에도 빌리는 잠깐 상황이 쉬이 파악되지 않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그 도적은 그의 뺨을 후려쳤다. "죽고 싶어?" 그는 협박하며 소리했고,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자가 혀를 차며 말렸다. "야, 적당히 해둬. 이 술집이 필요한 거지, 돈이 필요한 게 아니.......“ 그 리더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 하고 황급히 칼을 뽑았다. 빌리의 칼이 그 도적의 목을 뚫고 있었다. 도적은 숨을 컥컥 대며 들고 있던 금품 보따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빌리는 반만 뜬 눈으로 목을 찌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바에 암은 자세로 다리를 쭉 뻗어, 발로 그의 얼굴을 밀었다. 목뼈에 칼날이 닿아 스치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칼날이 완전히 빠져 나오자, 들린 목을 따라 핏줄기가 벽을 한 번 적셨다. 그러고 그 남자는 목을 움켜쥔 채 마루 바닥에 픽 쓰러졌다. "너, 너, 너, 뭐야?" 반항은 전혀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그들은 느닷없이 동료 하나가 죽자,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들은 강도질을 멈추고, 허둥지둥 빌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빌리는 졸린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이야 말로 뭐냐? 아란티아는 평화로운 나라라고 들었는데, 술집에서 버젓이 강도질 할 만큼 치안이 엉망인 나라였나?" "우린 아란티아 인이 아니다. 내가 모시는 분의 이름만 말하면 다리를 후들거리며 잘못 했다고 사과할 놈이 어디서 큰 소리냐? 당장 칼을 버려라." "그럼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기사단의 이름을 말해볼까?" 빌리는 픽 웃다가 하품을 길게 했다. "관둬라, 멍청한 놈들. 얌전히 이 술집을 떠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빌리는 다시 돌아서 바닥에 떨어진 감자 대신 새로운 감자를 포크로 찔렀다. 열 명이 넘는 상대를 보고 오히려 목숨을 살려주했다는 남자를 상대할 정도로 도적들의 리더가 담이 크지는 못 했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술집을 떠날 수도 없었고, 왠지 자기를 건드리지 않으면 자기도 건드리지 많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 같았다. 도적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곧 술집의 다른 손님들에게 다시 소리쳤다. "물건 다 내놓은 놈들은 당장 이 쪽으로 모여! 어서!" 손님들은 겁에 질려 찍 소리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도적들은 술집 손님과 술집 주인, 종업원까지 열두 명을 모두 묶어놓은 후에, 다시 빌리의 동태를 살폈다. "야, 너랑 너는 2층에 다른 손님들 없나 살펴보고 와." 리더는 부차 둘에게 명령을 내린 후 빌리의 옆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빌리는 마지막 감자까지 모두 먹고 길게 한숨을 쉬며 물을 들이켰다.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너 아까 기사단 어쩌고 했지? 혹시...... 아란터아의 울프 기사단이냐?" 순간 빌리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어쩔 거냐?" "음, 잘 됐다 내 이름은 더프다. 내가 모시는 캡틴이 울프 기사단에 들어가고자 한다. 소개해 주면 한 턱 단단히 내겠다." "이제는 도적들도 캡틴이라는 말을 쓰냐? 웃기는군.“ 빌리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더프는 나직이 신음하더니 다시 말했다. "울프 기사단이 최강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내가 모시는 캡틴도 만만치 않아. 그는.......“ 빌리는 물컵을 천천히 내려놓더니 칼을 옆으로 획 그었다. 더프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직도 붙어있나 확인해보려고 목을 더듬거렸다. 빌리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프 기사단이 최강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지껄이지 마라." 갑자기 2층 계단에서 두 명이 한 데 등쳐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향했다. 방금 올려 보낸 두 명이었다 위층에 묵고 있는 손님이 있다면 팔 다리를 묶어 끌고 내려와야 할 그들이, 오히려 엉망으로 쥐어터 진 얼굴을 하고서 바닥에 늘어졌다. 두 명이 자신의 목뼈 강도를 실험하듯 구른 계단을 따라, 하얀 다리에 아무 것도 신지 않은 하얀 발이 따라왔다. 빌리와 도적들의 두목은 무의식적으로 그 하얀 다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 매끈하게 근육이 붙은 다리의 주인은 긴 금발 머리의 남자였다. 하지만 긴 눈썹과 하얀 피부, 긴 목은 아무리 봐도 여자로 보였다. 빌리는 용케 그를 여자로 착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더프는 그 다리만 보고 잠깐이나마 호흡을 멈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어쨌든 목소리는 분명 남자의 것이었다. "울프 기사단을 함부로 여기는 녀석들이 여기도 있네?" 그 남자는 긴 금발을 쓸어 넘기며 바에 슬쩍 걸터 앉았다. 단추가 풀려 가슴이 살짝 드러난 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뿐 다리로 앉아 있는 꼴이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듯한 여자의 모습 같았다.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매혹적인 움직임에 침을 삼키는 도적들이 있을 정도였다. 빌리는 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한 마디 했다. "여자냐 남자냐?" 금발 남자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입술에 떠오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오해 받은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너 말 되게 짜증나게 한다? 이 강도 놈들 대장이냐?" 빌리는 아까 울프 기사단이냐는 질문에 대한 것과 똑같이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쩔래?" 특별히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일일이 자기 소개하기 귀찮아서였다. “다섯 셀 동안 저 손님들 포박 풀고 무장 해제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 빌리는 그 말을 듣더니 실제 도적들의 리더인 더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단다. 저 녀석이 나한데 칼 들이대면 난 네 놈들을 죽이겠다. 시키는 대로 해라." 빌리는 다시 금발의 남자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됐냐?" 그는 빌리가 말하는 투가 뭔가 이상해서 물었다 "어느 쪽이 두목이냐?" 빌리는 졸립다 못 해 입도 벙끗하고 싶지 않아 손을 내저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둘이 알아서 해라. 주인장, 난 위층 아무 방에 서나 자고 있을 데니, 계산은 나중에 합시다." 빌리는 팔을 뒤로 묶인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대체 이 와중에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는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으나, 빌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계단 밑에 쓰러져 있는 두 남자를 밟고 2층으로 흐느적거리며 올라가버렸다. 금발의 남자는 이 엉뚱하기 그지 없는 남자의 등 뒤를 한참이나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니들, 내가 내려올 동안 여치 있는 사람 한 명이라도 죽이면 다죽일 거다! 진짜야. 어이, 주인장. 너무 적정 말고 있으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는 빌리를 부르며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쨌든 술집 주인은 그 둘에게 일말의 기대라도 품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빌리는 아무 방으로나 들어가 휘청거리다가 웃옷만 벗고 침대에 풀씩 쓰러졌다. 뒤따라 그 금발의 남자가 들어와 그를 흔들었다. "어이, 이봐. 잠깐 얘기 좀 하자 너, 뭐 하는 놈이냐?" 빌리는 눈을 감은 채 인상만 구겼다. "너야 말로 뭐 하는 놈이냐? 자게 내버려둬." "내 이름은 슈벨이다. 이로피스에서 왔지." “난 빌리다." "아, 빌리. 너 보통 녀석 아니지? 저런 도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면서 어떻게 안전할 수 있었지? 아니, 그보다 너 좀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냐? 도망치던가, 항복하던가, 싸우던가 셋 중에 하나를 해야 할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 것도 안 하냐?" "귀찭아서." 빌리는 정말 귀찮은 듯 손을 휘적거렸다. "잘 테니, 내 방에서 나가." "니 방? 임마, 여긴 내 방이야. 네가 멋대로 들어온 거야. 여긴 방금 전까지 내가 자던 침대고." 빌리는 한쪽 눈만 뜨고 코 앞에 있는 수상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귀가 두 개 달리고 눈에는 붉은 단추가 박혀 있는 하얀 토끼 인형이었다. 슈벨은 황급히 그 인형을 빼앗았다. “나, 난 이게 없으면 잠을 못 자는 거뿐이야. 오해 하지 마." “오해 같은 거 안 했어. 그게 없으면 잠을 못 자는 녀석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으니 제대로 맞췄네." 얼굴이 붉어진 슈벨이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빌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 이 방은 네 방이고, 이 침대도 네 거다. 하지만 제발 부탁하건대 그냥 자게 해줘," 빌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슈벨은 인형을 끌어안은 채 입맛을 다셨다. "언제 깨워줄까?" "깨우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델리는 정말 잠들어 버렸다. 슈벨은 엎어져 있는 그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말 재밌는 녀석일세." 그는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창문 아래를 내다보았다 스무 명이나 되는 녀석들이 말을 타고 왔는데, 그 중 한 명은 멀리서 봐도 월등히 덩치가 컸다. 커다란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걸 보니, 그가 이 일당들의 진짜 두목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1층에 있던 녀석은 그저 진짜 두목의 명령을 대신 수행하는 조장 같은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타고 온 말을 마구간에 집어넣더니 한꺼번에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슈벨은 뒤통수를 긁적이다 자고 있는 빌리에게 말했다. "너 오래 자긴 그른 것 같다. " 슈벨은 그 사이 옷을 입고 장갑을 끼고 갈을 차 혹시 있을 지 모를 전투를 준비했다. 또 토끼 인형을 얼른 배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슈벨의 예상대로 그들은 10분도 안 되어 찾아와 빌리의 잠을 깨웠다. "문을 열어라." 슈벨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 말이 나오자마자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까 1층에 있던 도적들의 리더, 더프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졌다. 슈벨은 씨익 웃어주고는 허리에 차고 있는 칼에 손을 슬쩍 올려놓았다. "무슨 일이지?" “둘 다 내려오라는 캡틴의 명령이다.” “볼 일 있는 쪽이 올라와야지." “밑에 나의 동료들이 서른 명이나 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아." 슈벨은 턱을 긁적이다가 자고 있는 빌리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한 명은 자고 있는데? 좋아 협상하자. 네가 이 녀석을 깨우고 있을 테니, 네 놈의 두목을 불러와라," “두목이 아니라 캡틴이다!" 그가 강조했다. “요새는 강도 놈들도 캡틴이냐? 진짜 지랄들 하고 있네." 슈델의 말에 그는 콧김을 푸욱 내뱉더니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경고했다. "좋아, 캡틴께 네 말을 그대로 전달해 주지. 미 리 말해두지만 두 손 잘려 바닥을 기다가 캡틴의 발가락을 핥고 싶지 않으면 고분고분하게 말 듣는 게 좋아. 게다가 내 동료들 중에는 너 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를 뒤에서 덮치는 걸 좋아하는 놈들도 꽤 있으니까." "아, 그러셔?" 슈벨은 칼을 휘둘렀다. 놀란 도적 조장이 세웠던 손가락을 접은 후에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을 정도로 빠른 칼놀림이었다. 잘려나간 손가락이 바닥에 특 떨어졌다. "협상 결렬이다, 이 개 자식들아 일 분 안에 이 술집에서 전원 나가지 않으면 서른 명이고 삼백 명이고 모조리 작살낼 거다." 슈벨은 자기 손가락이 어디로 갔는지 찾는 더프를 밖에 두고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물론 그가 노렸던 대로, 그들이 말하는 캡틴이라는 자는 금방 위층으로 올라왔다. "얘기 좀 할까?" 굵은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열려 있다." 슈벨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않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문이 좁아 보일 정도로 덩치 큰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화가 나서 갈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이 덩치 큰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니 ,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다. "다들 밖에서 기다려라." 뒤에서 당장 쳐들어갈 것을 기대하고 있던 도적들은 불만 있는 얼굴들이었으나, 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다들 물러난 후에 그는 문을 닫고 의자를 끌어다 슈벨의 앞에 앉았다 나무 의자가 불안할 정도로 그는 무거워 보였다. "내가 무섭지 않나?" 의자에 앉은 그의 첫마디였다. “오호, 무서워해야 하냐?" 슈벨은 되려 어처구니 없어하며 대꾸했다. "아냐, 날 무서워하는 녀석이었으면 굳이 내가 직접 오지도 않았지. 내 이름을 아나?" “몰라.” "내 이름은 테고다. 이로피스에서 지옥 점이라고 알려져 있지." "난 이로피스에서 왔지만, 그런 이름은 모르겠는데?" "사회에 무관심한 녀석이군. 나에게 걸린 현상금이 금화로 오백이다. 아무도 죽일 수 없었기에 그렇게 큰 돈이 걸린 거지." "그래서?" "넌 생긴 것답지 않게 베짱이 좋은 놈 같다. 내 부하를 시켜주마. 나는아란티아의 나디움으로 가는 중이다. 내 부하들은 각지에서 난다 긴다 하는 범죄자들인데, 모두 나를 따르고 있지. 같이 나디움으로 가기 위해." “나디움? 거긴 왜?" "울프 기사단이 되기 위해." 슈멜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웃음 소리가 계속 이어지니 기어이 테고는 인상을 구겼다. "왜 웃는 건가?" 슈멜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긴 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이봐. 네 현상금이 얼마가 걸렀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울프 기사단에 대해 얼마나 알지?" 테고는 쉽게 대꾸하지 못 했다. "글쎄, 왠지 네 앞에서 소문으로 들은 정보 만으로 안다고는 못할 것 같군." 그는 팔짱을 끼고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순간 삐걱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나 테고는 황급히 다시 자세를 고쳐 않았다. 다행히 의자가 부서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거봐, 제대로 알지도 못 하는 기사단에 가서 뭘 어찌려고? 물론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은 실제로 과거를 묻지는 않아. 연쇄 살인범이었건 다른 나라의 왕을 죽였건! 하지만 애초에 그런 녀석은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 한단다. 왜냐? 검에 순수한 열정도 없이 사람 죽이는 칼질만 배운 녀석은 실력에 한계가 있거든." "흥! 난 아직 아무에게도 지지 않았다. 이로피스의 왕실 기사단이든 론타몬의 익셀런 기사단이든! 나보다 한 수 아래인 내 동생 트레고도 드래곤 기사단 두어 놈쯤은 가볍게 해치울 줄 알지. 그래서 내 목표는 울프 기사단 밖에 안 남게 된 거다 지금 이 마을에 온 것도 동생을 기다리기 위해.......“ "야, 검 지옥. 너 뭔가 이상한 착각하는 거 아니냐?" "지옥 검이다. " 슈벨은 웃기도 지켰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건 대강 넘어가. 잘 보라고, 멍청한 친구. 이로피스 왕실기사단의 숫자가 몇 이지? 오십? 백? 천만에. 사백 명이다, 사백명! 드래곤 기사단은? 드래곤이 있을 때는 숫자가 적었지만, 지금은 오백 명이나 되지 익셀런 기사단도 삼백이야. 그 중 한 명과 싸워서 이겼다고? 그래서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의 실력을 평가한다고? 멍청한 놈. 네가 싸워 이긴 놈이 그 기사단에서 제일 강한 놈인지, 제일 약한 놈인지 어떻게 알아?" "상관 없다. 그래서 최강인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에 도전한다는 거잖아." 테고는 허리에 차고 있는 거대한 칼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마치 당장 울프의 기사가 나타나면 한 번 겨뤄보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최강? 너 아직도 내가 하려고 하는 발의 의미를 모르겠냐? 숫자 얘기를 좀 더 해 보자. 울프 기사단이 몇 명이냐? 이백? 백? 오십밖에 안 된다. 그래. 그 오십은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지. 그럼 익셀런 기사단 삼백 중 오십을 추려내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울프 기사단이 최고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 천만에. 너희 놈들이야 유랑 시인들이 전설에 취해 흥얼거 리는 노래나 듣고 역사를 판단하지." 테고의 얼굴에는 이제 살기까지 깃들여줬다. 그러나 그는 쉽게 칼을 뽑지 못 하고 있었다. 본능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이 연약해 보이는 남자에게 갈을 겨누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너 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언제인지 빌리가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켰다. "아, 잘 잤냐?" "너 때문에 했다. 뭔 웃음 소리가 그렇게 요란하냐?" 빌리는 졸린 눈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물었다. "슈벨이라고 했던가? 이로피스 쪽 이름이군. 어디 가는 길이냐?" "나디움." "거긴 왜?" "울프 기사단에 가려고." "방금 한 말과 앞뒤가 안 맞는군. 남이 간다는 건 비웃으면서 너는 왜 가?" 슈벨은 씨익 웃어 보였다. "너희 둘에게 재미있는 걸 가르쳐 주겠다. 지금부터 절대로 칼을 꺼내지 마라. 물론 난 너희 둘을 절대 절대 절대 공격하지 않겠다. 알았지?" 빌리는 시큰둥하니 들었고, 레고는 가만히 슈벨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슈벨은 마치 노래라도 한 곡조 뽑으려는 듯 둘 사이에 서더니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허리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양 옆에 있는 남자에게 극단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레고는 시키는 대로 검을 꺼내지 않고 얌전히 의자에 않아있었다. 하지만 빌리는 깜짝 놀라 칼을 꺼냈다. 만약 슈벨이 검을 조금이라도 뽑았다면 빌리는 서슴지 않고 그의 목을 쳐버렸을 지도 모를 정도로 과격한 반응이었다. 슈벨 역시 빌리의 빠른 대처에 놀랐다. 아니,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있는 테고는 커다란 어깨를 들썩였다. "둘 다 뭘 하는 거냐?" 슈벨은 데고의 말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칼에서 손을 떼었고 빌리는 긴장된 손으로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다. 둘 다 제 자리에 앉은 후에야 이 표한 긴장감이 풀렸다. 슈벨이 말했다. "방금 울프 기사단의 첫 번째 테스트가 있었다. 테고 넌 불합격이고, 빌리 넌 합격이야." 테고는 순간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 따위 테스트가 어디 있어? 방금 칼을 꺼내지 말라고 했잖나?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네 이상한 자세에 칼을 꺼냈을 것이다." "맞아. 칼을 꺼내면 안 된다고 했지. 그 말 자체가 함정이다. 이 테스트는 칼을 꺼내야만 합격하는 테스트였어," "지금 둘이 짜고 나한데 장난 치는 거냐?" "테고!" 슈벨은 어린애를 호통치는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범죄자든 뭐든 간에 네가 사람들을 죽인 경험이 많은 놈이라면 슬슬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냐? 아니면 넌 그 엉터리 같은 지옥 검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닐 자겼도 없는 녀석이야. 넌 나보다 약하다. 얘기 끝!" 테고는 어이가 없어 입만 벙긋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자식들! 밑에는 내 부하들이 서른 명이나 있다. " "아하, 패배를 인정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 가장 비열한 방법을 쓰시는군, 캡틴 테고. 네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부하들이 해주길 바라냐?“ 테고는 더 이상 말 대꾸도 하지 못 했다. 자존심 때문에 일어서지도 못했고, 뭔지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분노를 드러내지도 못했다. 그는 인정하지도 많았고, 현재 느끼는 감정이 뭔지 정확히 인지하지도 못 했다.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 하도 오랜만이라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슈벨은 그를 완전히 무시 해버리고 빌리를 돌아보았다. "자, 이제 이름 되고 보니 네 정체가 궁금해 지는데? 물론 나의 테스트 방법이 정확하다고 할 순 없겠지. 원래 테스트는 마스터 퀘이언이 직접 하는 거니까. 난 흉내만 내 본 거였고. 하지만 넌 충분히 마스터 퀘이언의 테스트도 통과할 실력자인 것 같다. 그러고 론타몬에서 왔다고 ? 흐응....... 지금 내가 머러 속에 떠올리고 있는 어떤 기사단의 이름을 말하면 실례가 되려나?" "나 역시 네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물론 넌 분명 울프 기사단이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알고 있지. 그럼 내가 세웠던 여러 가지 가정 중에 네 정체는 하나로 좁혀지는군. 넌 울프 기사단의 테스트를 치렀다가 떨어진 기사지?" "두 번째 테스트에서." "방금 것이 첫 번째 테스트였다면 그 두 번째 테스트라는 게 궁금해지는군. 얼마나 어려웠기에 떨어졌나?" "정확히 말하면 중간에 포기했어." "포기?" "난 항상 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 프라이드만큼은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지. 심지어 대륙 정벌 전쟁 당시에 내가 스무 살이 아니었단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모든 영웅들이 전력을 다해 자신의 실력을 드러냈던 그 전쟁들은 끝나고 말았으니까. 그 보상 심리로 울프 기사단 시험에 들어간 거야. 까짓 간단히 시험을 통과하고, 마스터 퀘이언이라는 자를 해치우면 그 때 못지않은 명성을 얻을 것 아닌가?" "나랑 똑같은 생각을 가졌군." 테고가 괜히 끼어들어 말했지만, 둘은 무시했다 "그런데 왜 포기했지?" "거대한 벽이 하나 버티고 있더군." "벽?" "로일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지. 수많은 기사 후보생들이 그를 보고 좌절했고, 많은 이들이 자신감을 잃고 중도 포기해버렸지 첫 번째 테스트에서도 기존 울프 기사단이 슬쩍 끼어들었었는데, 난 그 로일이라는 자가 두 번째 테스트에서 끼어든 현역 울프의 기사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그에게 겁을 먹지 않는 게 두 번때 테스트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니까. 그러나 그건 아니더군. 그 괴물 같은 놈을 밀어붙이는 놈은 얼마든지 있었다. 몇몇은 바로 그런 놈들을 보고 또 포기해 버렸지." "듣고 보니 한심하군. 강한 자가 있으면 그것에 도전하는 게 기사로서 당연한 게 아닌가?" "넌 그 녀석들을 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야." 슈벨은 머리에 손을 얼고 의자에 등을 기댄 후 발을 이었다. "게다가 최고라고 믿었던 나정도 실력자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여자까지 만나면 거의 미치지. 이런 말 하면 기사로서 레이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난 여자라면 당연히 집에서 밥이나 하고 애나 남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거든. 여자 용병이라 봐야 보통 여자보다 좀 더 센 정도? 내가 만나본 여 검사라는 건 그런 거였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 왔던 여자라는 존재에게 농락당해 봐라. 대결이 아니었어, 대결이 ! 농락이었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너는 보를 거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즈윈이라던가?" "듣고 보니 울프 기사단이라는 건 정말 규율이 엉망인 곳 같군." “당신의 기사단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 그럼 아까 하던 질문을 다시 해볼까, 빌리? 왜 익셀런의 기사가 아란티아에 왔지?" 놀란 건 테고였다. "익셀런?" 물론 둘은 그를 고려해서 친절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또 빌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길 귀찮아했다. 그러다 테고에게 물었다. "야, 혹시 술집 주인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했냐?" "했을 리가! 난 이 술집에서 적어도 보름은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미리 술집을 점거해 둔 거지." 슈벨이, '잘났다.'라고 말하며 시비를 걸었고, 테고는 당장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그러나 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손을 내저었다. "차를 마시고 싶어서 물은 거다! 주인이 죽었으면 해 줄 사람이 없잖아." 잠을 반 시간도 자지 못한 빌리는 비틀거리며 방문으로 향했다. 빌리는 차를 마시고, 레고는 3인분의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슈벨은 둘 사이에 앉아 맥주를 들이켰다. 데고의 부하 서른 명은 좁은 술집의 몇 안 되는 탁자와 의자에 껴 않아 빌리와 슈벨을 뒤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테고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그 서른 명의 칼이 동시에 둘을 겨눌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빌리와 슈벨은 그걸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직도 포박당해 있는 손님들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포박에서 풀려난 술집 주인은 겁에 질린 채로 음식과 차를 내주고 있었다. 빌리는 한 잔을 모두 마시고 다음 잔을 받으면서 말했다. "골드 게이트 전투에 대해 아나?" "그걸 모르는 녀석은 아크랜드 인간이 아닐 걸." 슈벨이 그렇게 말하니 데고는 무척 당황했다 슈벨은 한심스러워 하며 설명해 주었다. "익셀런 기사단과 울프 기사단이 싸웠다는 그 전투 얘기야. 그걸 골드 게이트 전투라 부르지. 또 최고라고 집중 받던 익셀런 기사단이 순식간에 이 인자로 추락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 그제야 테고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빌리도 더 이상 추가 설명하지 않고 요점만 말했다. "나 역시 당시의 익셀런을 동경하여 마침내 그 기사단에 들어갔다. 지금도 나자신이 익셀런의 한 명이라는 게 자랑스럽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놈의 이인자라는 소리는 영 듣기 싫더군."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진 게 사실이니까. 게다가 익셀런은 언제나 시인들의 입에서 악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왔고! 딱 보기에도 울프 기사단의 하얀 갑옷은 익셀런이 입는 점은 갑옷의 반대 성향으로 충분하잖아. 아, 그래서 그 복수를 하려고 왔구나! 그렇지?" 빌리는 한심한 표정으로 슈벨을 바라보았다. “익셀런의 기사도를 추락시키는 말은 하지 마라." "기사도 좋아하시네. 술집 손님들이 인질로 잡혀있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주제에." "졸렸으니까." "아하! 그 기사도라는 게 말짱하게 깨어있을 때만 통하는 거냐?" 장난처럼 내뱉는 슈벨의 말에도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고 여졌는지, 빌리는 즉시 사과했다 "그건 확실히 내 잘못이군. 다행히 아직 피해자는 없는 것 같으니 뒷수습을 할 기회는 있을 거라고 본다. " 슈벨은 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자존심을 굽히고 잘못을 인정하는 건 확실히 기사도에 충실한 모습이군. 뭐, 사실 나도 정신 못 차리게 졸리면 가끔 엉뚱한 짓도 하니까." "그건 그렇고 너는 왜 돌아왔나? 5년 전에 포기했던 것을 다시 도전할 셈인가?" "아니. 울프 기사단을 다시 만나 몇 놈 죽일 거다. 그리고 내 프라이드를 보상 받아야겠어." "뭔가 이룬 게 있었나 보군." "그런 것도 없이 다시 나타날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슈벨은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목적이 비슷한데, 나랑 같이 가자. 마침 혼자 다니기가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어때, 빌리?" 빌러는 남자를 유혹할 것 같은 그의 표정과 자세를 보고 말했다. "넌 여자라고 놀림 받는 것에 발끈하기 보다 네 행동 자체를 고치는 게 좋겠다. " 슈벨은 틱에 델 손을 떼더니 눈을 무섭게 치켜 떴다. "난 원래 이래왔어. 이걸 꼭 여자가 하는 행동이라고 누가 정했냐? 내 맘이다. " 아직도 잠에 취한 듯 잡은 눈으로 빌리가 말했다. "아니, 보고 있자니 솔직히 귀여워서. 너도 그렇게 보이는 건 싫지 않아?" 슈벨은 목덜미를 주물럭거리더니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아, 생각해 보니 나 혼자 실력이 올랐다고 착각한 걸지도 모르겠군. 그걸 시험하기에 익셀런의 기사라면 상당히 적절할 것 같은데, 어떠냐?" 빌리는 차를 한 모금 해서 입을 헹구더니 대꾸했다. “한숨 자기 전에 몸 푸는 것도 나쁘지 않지."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내내 듣고만 있던 데고도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뒤에서 이 황당할 정도로 스케일 큰 대화를 듣고 있던 도적들 역시 테고처럼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칼 두 자루 쓰냐? 아니면 예비용?" 슈벨은 눈동자만 움직여 빌리가 허리에 차고 있는 두 자루 칼을 내려다보았다. “걱정 마라. 다른 한 자루는 너에게 블 일 없을 거다." 빌리는 차가운 눈동자로 대꾸했다. “마법 검이라도 되시나? 그런 게 있으면 처음부터 꺼내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슈벨이 칼을 뽑으려고 허리에 손을 가져갈 때 술집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네댓 명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와르르 들어왔다. 뒤에서 그들을 밀친 두 명의 괴한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캡틴! 마을 여자들을 몇 명 데리고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테고는 둘이 대결한다는 것에 집중해 있던 터라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알아서들 먹어 치워." 그와 동시에 슈벨이 소리쳤다. "풀어줘." 나중에 들어오는 바람에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남자들이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저 계집애 같은 놈은 뭐야?" 슈벨보다 먼저 반응한 에고가 입 조심하라고 경고하려 했다. 동시에 다른 도적들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예측하고 목을 움츠렸다. 그러고 데고의 경고와 도적들의 예측을 넘어선 빠른 움직임으로 슈벨은 바에 올려져 있던 포크를 집어 던졌다. 스테이크나 겨우 찍을 만한 포크가 회전하며 날아가 녀석의 이마에 박혔다. 아프다기보다 놀란 그 도적이 머리에 박친 포크를 빼는 동작은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안쓰러웠다. 곧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진 그를 부축하는 동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슈벨은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풀어주랬지! 여기 묶어놓은 사람들도. 지금 당장. 어서!" 도적들은 당황하여 데고의 눈치만 살폈다. "얘들이 너만 본다, 캡틴 테고? 어쩔래?" 슈벨이 비꼬듯이 말하자, 데고는 상관 없다는 투로 말했다. "풀어줘라." 도적들은 어수선하게 움직여 묶인 이들을 풀어줬다 그들은 머뭇거리며 술집 입구로 걸어가더니, 곧 문을 열고 황급히 달아나버렸다. 아무도 슈벨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에이, 흥 다 깨했다. 나중에 하자." 슈벨은 손을 털며 말했다. 빌리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내키지 않아 칼을 접었다. "그러지." 둘은 도로 바에 앉았다. 술집 주인은 서른 명이나 되는 덩치들을 분위기만으로 제압해버린 이 두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망설였다. 그러나 둘은 술집 주인에게만큼은 어떤 강압도 하지 않고 그저 손님 처럼 말했다. "차 한 잔 더." "맥주 한 잔 더." 어둠 속의 검은 갑옷 빌리는 또 한 번 사람들의 목소리에 잠에서 됐다. 이번에는 비교적 오래 잡지만, 몇 번이나자다 깨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레이 게이트에서 나온 병사들이 그의 침대 및을 점거하고 있었다. 슈벨은 그들의 몇 가지 질문에 대강 대답해주고 있었다. 빌리는 그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길 기대하며 자는 척 했다. "그럼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거죠?" 병사는 몇 번이나 확인했고, 슈벨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아, 진짜 아까부터 말하는 거 하고는....... 우리가 그 놈들 숨겨 주기라도 했다는 거요, 뭐요? 거 이상한 사람들일세." "아,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소. 하지만 목격자들 말이 당신네 두 사람이 그들의 두목 같았다고 해서. 술집 주인이 아니라고 해주긴 했지만 우리로서는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소." "이해는 하는데, 이렇게 우리한데 시간 낭비할 틈에 그 놈들 쫓아가기나 하시오. 듣자니 나디움 쪽으로 갈 첫 같던데. 아니면 내가 잡아주길 기대하는 건가?" "그럴 리가." 한 병사는 동료들에게 고갯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에 방해가 되어 미안하오. 그리긴 협조에 감사 드리겠소." 그들이 나간 후 슈벨은 욕을 내뱉었다. "그 녀석들 모두 달아났나 보지?" 빌러가 침대에 걸터앉아 말했다. "인질들을 풀어주는 바람에 이렇게 경비대까지 출동할 게 뻔 한데, 이 마을에 오래 있긴 힘들겠지. 잘 잤냐? 그런데 넌 왜 당연하다는 듯이 내 침대에서 자고 있냐?" "아, 참. 여기 내 방 아니었지?" 미안해하는 표정은 조금도 짓지 않고, 빌리는 하품을 길게 했다. "주인장이 우리 둘한테는 숙박비와 밥값은 안 받겠다고 하더라. 어지간하면 옆방 써라." 빌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팔을 기댔다. "벌써 저녁이군. 방은 필요 없다. 난 곧 떠난다.“ "지금 출발하려고? 급한 일 있어?" "특별히 급한 건 아니지. 하지만 기사단에는 반년 동안만 휴가를 냈다. 론타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두 달이나 걸렸어. 돌아갈 두 달을 생각하면 이런 곳에서 어물거리고 있을 틈이 없지.“ "좋아. 나도 특별히 여기에 정 붙이고 머물 생각은 없으니까. 가자." 슈벨은 그와 같이 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동행인으로 너한테 그다지 맞지 않을 텐데?" "상관없어. 게다가 우린 아까 하려고 했던 대결이 남아 있잖아." 빌리는 그런 걸로 말싸움은 하고 싶지 많았다. 그리고 아마 슈벨이 알아서 지겨운 나머지 떨어져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둘은 옷을 입고 짐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주인은 그들에게 멋진 저녁 식사와 질 좋은 와인을 내주었고, 더불어 야식으로 쓸 도시락까지 내주었다. "하룻밤 묵어도 괜잖은데, 정말 이 시간에 떠나시했습니까?" 주인은 낮에 있었던 일에 고마워하며 해줄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빌리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소." 둘은 조만간 편히 앉아 밥 먹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느긋하게 저벽 식사를 즐겼다. 주인은 들을 가만히 보더니 소리를 죽여 말했다. "혹시 레드 게이트로 가는 길입니까?" "나디움으로 가려면 당연히 거 길 거 쳐야 하지 않나?" 5년 전이긴 하지만, 한 번 아란티아를 관통해 화이트 게이트까지 통과해 본 적이 있는 슈벨이 말했다. "그 쪽으로 가는 길이라면 조심하십시오, 두 분 다. 사실 어제 내 술집에 이상한 손님이 하나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빌러와 슈벨은 식사를 끝낸 후 주인이 서비스로 내 준 맥주를 들이키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었죠. 하지만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웠던 건 처음이었답니다. 어찌 보면 오늘 그 도적들이 나를 묶었던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웠던 것 같군요. 그러니까 어제 해가 떨어질 무렵이었는데, 철컹 철컹 하고 쇳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침 술집 안에 손님들이 잔뜩 있던 시간이었고, 이상한 일이 일어날 징조도 없는 일상적인 하루였죠." 주인은 더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슈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얘기에 집중했다. "그 소리는 마치 동굴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울렸고, 때마침 음산한 바람이 술집 문을 흔들었습니다. 덕분에 뭐가 나타났는지 아직 보이지도 않는 시점부터, 나뿐 아니라 사람들 두가 겁에 질렸습니다. 유령이라도 나타난 줄 알고 어떤 이는 당장 달아나려고 까지 했죠. 그 때 문이 열리고 그 쇳소리를 내는 주인공이 나타났습니다." 주인은 이야기에 긴장감을 주려고 잠깐 끊었다가 이었다. 빌리도 굳이 슈벨처럼 집중력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점점 그 얘기에 흥미가 생겼다. “그것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습니다. 그냥 사냥꾼이나 여행하는 기사들이 입는 것 같은 가벼운 가죽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무거운 그런 갑옷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 좋은 기사라도 전쟁터 한 가운데도 아닌데 그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풀 세트로 갖춰 입고 돌아다닌다는 게!" "난 그런 거 입으면 반나절도 못 서 있겠더라." 슈벨이 수긍했다. "그렇지요? 해서 전 속으로 유령이거나 괴물이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할 거라 생각했죠. 그 기사는 천천히 내 쪽으로 왔는데, 전 그냥 지금 이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답니다. 도망치고 싶어도 다리가 얼어붙어 달아날 수가 있어야 말이죠. 저만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할버드를 쥐고 있는 손을 슬쩍 긋기만 하면 당장 가게 안의 다섯 명은 목이 날아갈 판이었는데, 누구도 달아날 엄두를 내지 못 했지요. 저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 창피한 일도 아니었죠." 슈벨은 맥주까지 내려놓고 얘기를 듣고 있었고, 빌리는 다 마신 줄도 모르고 빈 잔을 입술에 대고 있을 정도로 집중했다. "저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였습니다. '골드 게이트는 어느 쪽으로 가지?' 저는 얼결에 대답했습니다. '레드 게이트 너머에 있습니다.......‘ 세상에 그런 멍청한 대답이 어디 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웃길 지경입니다, 그려. 허허 그가 다시 묻기를, '그럼 레드 게이트는 어느 쪽에 있는가?', '여기 서 서족으로 큰길을 따라가면 있습니다. ', '서쪽은 어디인가?' 저는 이 이상한 문답에 의아해하며 조금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와 같은 시각이라는 걸 강조하듯 그는 창 밖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를 문 밖으로 안내했지요. ‘따라오십시오. 보이십니까? 저기 태양이 지는 쪽이 서쪽입니다.' 그런데 그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는 태양이 있는 쪽을 보지 않고 묻더군요. '나는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가리켜라.' 저는 노을 지는 서록으로 손가락을 치켜들었죠. 그러자 그는 다시 철컹거리고 그 쪽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심지어 고맙다는 말까지 남기지 뭡니까7" 얘기를 들은 둘은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했다. 태양은 점점 저물고, 맥주는 떨어졌다. 슈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얘기이긴 한데, 그 얘기를 왜 해주는 건데?" "같은 길을 향하는 것 같아 조심하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추측이긴 한데.......“ 주인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말했다. “당신이 론타몬의 익셀런 기사단이라고 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 갑옷은 익셀런 기사단의 갑옷이었습니다. 아, 물를 이 얘기는 아까 그 경비대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경비대에 알리든 말든 난 상관 없고,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는 얼마든지 있다." 빌리는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하지만 제 기억력이 그러 나쁜 편은 아닙니다. 십 년 전일이긴 하나 익셀런 기사단 백 여 명이 바로 이 그레이 타운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린 모두 죽었구나 했죠. 그런데 그들은 조용히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쉬더니 우리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린 적군이 지나간 것인지 아군이 지나간 것인지 구별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멋진 기사단의 갑옷을 잊어버릴 리가 없지요." 슈벨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익셀런은 군기가 엄하기로 유명하지. 다른 군대 같으면 자국 내의 마을을 지나갈 때도 온갖 민폐 다 끼치고 가는데, 익셀런은 절대 그런 것을 하지 않거든 그렇지 않나?" "지금은 또 그렇지도 않아. 군기는 엉망이고, 예전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지." 빌리는 툭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고마웠소, 주인장. 하지만 그런 얘기가 내 여행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 그는 자리에 은화 몇 개를 내려놓고 짐을 젊어졌다. "아, 음식값은 공짜였소." 주인은 얼른 그 돈을 도로 집어주었다. "그건 당신이 제안한 거래고, 나는 그걸 승낙한 적 없다." 빌리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슈벨도 짐을 젊어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 녀석 역시 익셀런의 기사란 거겠지. 잘 쉬다가오. 얘기 재미있었어. 그냥술집 그만 두고 이야기꾼으로 나서보지 그래?" 슈벨은 가벼운 걸음으로 빌리의 뒤를 따라갔다. "어이, 빌리. 내 생각에 저 주인장의 말은 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하루 일찍 떠나긴 했지만, 그런 엄청난 갑옷을 입고 이동했다면, 내일쯤 우리랑 마주칠 지도 몰라." "그게 뭐?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늙은 기사일지 누가 알아? 마주쳐도 상관 없어." 빌리는 설사 그 검은 기사가 바로 옆을 가로 가고 있다고 해도 모른 척 하고 지나갈 것처럼 무뚝뚝하게 걸어갔다. "잠깐만. 내 말 종 끌고 올게. 어이, 기다리라니까!" 슈델이 허둥지둥 마구간에서 발을 끌고 왔더니, 빌리는 벌써 마을 밖을 나가고 있었다. 슈벨은 '젠장할 놈.' 이라고 한 마디 내뱉고, 말을 타고 쫓아갔다. "그런데 넌 말도 한 마리 없이 여행하는 거냐?" 슈벨은 그를 따라잡은 후 즉시 말에서 내린 후 물었다. "말은 필요 없다. " "돈이 없는 거 아니고?" "난 아란티아를 생각 없이 스쳐가고 싶지 않아." "십 년 전 선배들이 휩쓸고 지나갔던 전쟁의 흔적을 직접 살피고 싶은 거야?" 빌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너 말이 너무 많다는 생각 안 드나?" "별로. " "난 말 많은 녀석은 딱 질색이다 더불어 말 잘 하는 녀석도 질색이고. 남자라면 언제나 행동으로, 침묵으로 자신을 보여야 하는 거다. 혓바닥만 나불거리는 놈 따위는 남자 자격도 없어," “그럴싸한 말이긴 한데, 난 말 많은 놈 아니라니까 그러네." 빌리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다시 빠른 보폭으로 걸어갔다. "야, 배낭 줘. 내 말에 실어줄게. 어이!" 그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빌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슈벨도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말없이 뒤 따라갔다. '이 녀석과 같이 여행 하는 거 상당히 지루하겠는걸.' 슈벨은 약간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빌리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동행을 결심했으나, 오래 같이 다녀도 그리 많은 부분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당장 그날 밤부터 슈벨이 지루할 일은 없게 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은 당연했다. 슈벨이 따라와서 정신을 산란하게 하지 않았다면 빌리는 충분히 이 일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아마 먼 길로 우회해서 갔을 것이다. 지옥 검 테고와 그 일당들이 반나절이나 먼저 떠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레이 타운에서 멀리 벗어날 리는 없었다. 테고는 며칠 머물기 위해 술집을 장악했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경비대에 쫓겨 마을을 떠났더라도 별리 가진 않았을 것이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건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었고, 최소한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는 기다릴 게 분명했다. '짐작했어야 했는데.' 빌리는 조금 후회하며 괜히 이렇게 된 걸 슈벨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슈벨은 오히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걸 환영하고 있는 얼굴이 있다. “에에, 그러니까 우리 보고 무기 버리고 항복하란 뜻이겠지?" 슈벨은 테고의 부하들이 열 다섯 명 정도나 몰려 와 둘이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테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우린...... 도움이 필요하다. " 아무도 대답하지 많다가 한 멍이 등 떠밀려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 모두가 칼을 꺼내거나 위협을 주려는 행동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술집에서 둘의 실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눈치챈 바가 있다면, 아무리 자기네 족의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유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둘을 공격하려 했다면, 적어도 기습이라는 방법을 택했어야 했다. 포위도 아니고 매복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슬쩍 나타나 길을 막은 건 분명 적의를 가지고 나타난 자들이 취할 방법은 아니었다. "무슨 도움?" 슈벨은 참을성을 가지고 꼬박꼬박 대꾸하고 있지만, 빌리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당장 그들을 베고 지나가고 싶었다. "캡틴이 죽었다. " "테고가?" "그렇다." 문답은 슈벨이 했지만, 빌리도 거의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세상사가 그렇듯 누가 느닷없이 죽는 건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전날 저녁에 멀쩡히 맥주 한 잔 걸쳤던 친구가 다음날 길 가다 발을 헛디뎌 시냇물에 빠져 죽었다고 해도 그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벼락 맞아 죽었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랄 수는 없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둘과 정겹다 못 해 살벌한 대화를 나누었던 테고란 녀석이 지금 죽었다는 게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밤 중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도움을 청하는 부분까지 합치면 상당히 수상했다.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뭔가 뒤로 꿍꿍이 속이 있는 거짓말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죽었는데?" 슈벨은 이 정계의 근거가 될 만한 또 다른 정계가 그럴 듯 하지 않을 경우, 즉시 베어버릴 생각으로 차분히 물었다. "왠...... 검은 기사가 우리 앞에 나타나서 공격했는데, 캡틴이 제일 먼저 죽었다." "어떻게 죽었다고? 좀 자세히 말해봐." 검은 기사라는 단어에 슈벨은 칼 쪽으로 반쯤 뻗었던 손으로 괜히 목덜미를 턱을 긁적였다. 물론 그 도적들은 방금 자기들의 목숨이 날아갈 뻔한 사실은 알지 못 했다. 계속 슈벨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하는 뚱뚱한 남자는, 이번 질문만큼은 대답하길 망설였다. 하지만 주위에서 또 등을 떠미니 겨우 대꾸했다. "우리 중 다섯 명 정도가 먼저 달려들어 공격을 했고, 그 중 하나가 캡틴이었다. 그런데 다 죽었다." 슈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이 부실하군. 그게 다냐?" "다다. 한 찰에 다섯 명이 동시에 죽었다. 그래서 우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검은 기사라는 녀석이 어떻게 생겼나?" "어둠속이라 자세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검은 갑옷이 마치 익셀런 기사단의.......“ 갑자기 빌리가 소러쳐 그의 말을 끊었다. “닥쳐라! 아까 그 술집 주인도 그렇고 네 놈들도 그렇고 검은 갑옷이라는 말만 나오면 익셀런을 들먹이는구나. 론타몬의 익셀런이 나 말고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그러고 어떤 멍청한 기사 놈이 이런 길 거리에서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다니겠느냐?” 당장 칼을 뽑을 기세라 뚱뚱한 남자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 정말이오. 나도 론타몬 출신이고 이름은 그린우드요. 거기에서 현상 수배로 금화 오십이 걸리는 바람에 이로피스로 도망쳤다가, 지옥 검이라는 자의 부하로 들어온 것뿐이오. 난 어렸을 때부터 익셀런 기사단을 자주 왔소. 갑옷 디자인이 십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는 것도." "어둠 속이라서 잘 못 봤다면서?“ "그 독특한 모양까지 못 알아 볼 정토는 아니었소.“ 계속 그가 우기자, 빌리는 기어이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놀라 뒤로 물러났고, 몇 명은 칼을 뽑았다. 싸우려고 꺼낸 게 아니라, 겁에 질려 꺼낸 거라 봐야 옳았다. 슈벨이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 여기서 열다섯 대 둘의 싸움이 벌어질 뻔 했다. 슈벨은 아무리 자기들 쪽이 실력의 우위에 있다 해도 어둠속에서 그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 확인해 보자. 나도 아까부터 그게 신경 쓰였던 참이야.“ 슈벨의 말에 빌리는 칼을 집어넣었다. "만약 거짓말이라면 함부로 익셀런의 이름을 입에 올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테고의 부하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대답은 못 했다. “그 쪽으로 안내해 봐. 그런데 너희들은 두목이 죽었다면서 왜 이런 곳에 있었냐?"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우연히 마주친 것 같지는 않았으나, 정말 그렇다고 말하니 조금 의외였다. "우리들을 왜?" "캡틴이 되어 주시오." 상당히 그럴 듯한 이유를 댈 줄 알았던 그들은 정말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슈벨은 깔깔대고 웃었다. "웃기지들 마라. 나나 빌리가 미쳤다고 도적단의 두목을 하겠냐? 그냥 그 검은 기사가 있는 곳으로나 안내해라." 그러자 다른 녀석이 나서서 말했다. "정말이오. 우린 단순히 테고의 부하라서 아란티아까지 온 게 아니오. 그가 아란티아의 기사가 되면 우리의 죄를 묻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정식 관직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따라온 거요. 하지만 그 자는 죽었고, 우리는 이 곳에서 마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소." "안 쫓겨. 조웅히 블루 게이트를 통과해 다른 나라로 가면 돼." 이번에는 뒤에 있는 다른 녀석이 또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후퇴하고 싶지 않소." "시끄러!" 갑자기 빌리가 소리질렀다. "난 기사다. 만약 여기가 론타몬이었다면 나는 의무감으로라도 너희를 모조리 죽여버렸을 것이다. 죄를 없애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녀석들이, 깔끔하게 과거를 지우고 자기는 편하게 살아? 못하는 소리가 없군. 검은 기사가 있는 곳까지만 안내해라. 그 다음에는 나도 모른다." 어느새 빌리는 모두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복종했다. 몇 면이 횃불을 밝혔고, 먼저 길을 걸었다. 얼마 안 가 다른 데고의 부하들이 합류했고, 그들은 서로 심각히 상의했다. 슈벨이 빨리 가자고 재족하자, 모두 같이 움직였다. "이 녀석들, 우릴 함정으로 이끈다는 생각 안 해?“ "네가 나와 비슷한 실력자면 된다. 그럼 서른 명 정도의은 전혀 문제가 안 돼." "너무 자신하지 마. 포위 공격을 훈련 받은 녀석들이라면 문제 있어." "범죄자들이 훈련은 무슨.......“ 빌리의 느긋한 말에 슈벨은 질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정도 가자, 그들은 횃불을 끄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들의 앞에는 약간 경사가 급해 반대쪽이 보이지 않는 언덕이 있었다. 다들 목소리 하나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조심조심 걷더니, 언덕 끄트머리에 가서는 아예 바닥에 몸을 찰싹 붙였다. 슈벨과 빌리도 얼결에 그들처럼 포복해서 언덕 끝에 이르렀다. 거짓은 아니었다. 검은 기사는 있었다. 그리고 빌리는 그 검은 기사가 진짜로 익셀런의 갑옷을 입고 있다는 점에 입을 다를지 못했다. 어둠속에 커다란 할버드를 치켜세우고 평야에 우뚝 서 있는 검은 형체는, 마치 뭔가를 상징하는 예술가의 조각상 같았다 놀란 둘에게 테고의 부하 중 하나가 소곤거렸다. "내가 말했지 않소." "근데 왜 꼼짝도 않고 있지?" 슈벨이 물었다. "모르겠소. 데고를 죽인 후 그 자리에서 이동을 않더군. 근처에 시체 중 하나가 테고요." 어둠 속이라 바닥에 늘어진 시체 중 어떤 게 테고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죽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슈벨이 보기에도 그 검은 치사에게는 술집 주인이 말한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느낌 만으로 거부감이 들어 쳐다보기 조차 싫었는데, 어쩌면 테고는 그런 느낌에 겁을 집어 먹은 나머지 앞뒤 안 가리고 싸움을 건 모양이었다. "테고는 우리 같은 범죄자들이 알아서 캡틴으로 받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소. 물론 당신 두 사람 앞에서는 얌전한 척 했으나, 그가 전력으로 싸우고자 마음 먹는다면 광적인 살인마라는 게 뭔지 구경했을 거요. 그가 한 번 미친 척 하고 날뛰면, 기사단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할 정도지. 그런 그가 단 한 번도 칼질을 못했소. 그 지옥 검이라는 별명이 붙은 테고가 말이오." "첫 번째 테스트조차 통과하지 못한 놈으로는 측정이 안 돼. 그나저나 저 괴상한 기사 놈은 뭘 하려고.......“ 슈벨은 상황을 좀 더 파악하기 위해 좀 더 앞으로 기어갔다. 이 쪽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아도 각별히 주의하는 그였다. 그러나 갑자기 빌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거기 익셀런의 갑옷을 입은 자 들으라!" 슈벨이 깜짝 놀라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 "뭐 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거기 엎어져서 뭐 하는 것이냐?" 빌리는 오히려 호통쳤다. "내가 저 자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할 이유가 있나?" 빌리는 한 순간이나마 음을 낮추고 있었던 게 수치스러웠다는 듯 가슴에 묻은 흙을 털고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슈벨은 잠깐 어안이 벙벙하여 엎드린 채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네." 슈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겁에 질린 도적이 말렸다. "안 가는 게 좋을 거요. 저 자는 괴물이오. 익셀런의 갑옷을 입은 게 확인되었으면 그냥 가는 게.......“ "너 괴물이란 게 뭔지 알아?" 슈벨의 눈동자는 오히려 의욕적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난 5년 전에 그 괴물이란 놈을 보고 한 번 좌절했던 몸이다. 그러고 그 자를 꺾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훈련을 거듭하여 이제야 이자리에 섰다. 그런데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났다고 물러나라고?" 슈벨은 몸을 획 들려 빌러와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둘은 그 자와 다섯 걸음도 남기지 않은 거리에서 멈췄다. 빌러가 입을 열자, 동상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을 줄 알았던 검은 투구가 둘 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대의 이름을 밝혀라. 나는 익셀런 기사단의 빌러 매트니다." 점은 기사는 대답이 없었다. 옆에서 슈벨이 거들었다. "내 이름은 슈벨 레프만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말을 못하는 건 아닌 것 같더군. 우리는 적의를 가지고 온게.......“ "이름.......“ 슈벨이 말을 하는 도중에 그 검은 기사가 말을 꺼냈다. 슈벨은 얼른 하던 말을 접고, 그가 하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검은 기사는 고개를 다시 갸웃했다. 이런 느린 움직임으로 어떻게 다섯 명이나 되는 거구들을 한꺼번에 베어 넘쳤다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빌리는 칼이라도 뽑을 듯한 기세로 소리질렀다. “그럼 어떻게 그 익셀런의 갑옷을 입고 있는가?" "이게...... 익셀런의 갑옷인가?" "지금 장난 치는 거냐?" "아니다. 난.......“ 빌리의 윽박지르는 말에 검은 기사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술집 주인이 말한 대로 그 검은 기사는 유령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리는 게 당연했다. 사실 슈벨은 검은 기사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뒤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 아랫배가 시큰거릴 지경이있다 그런데 빌리의 그 당당한 태도는 그런 분위기를 충분히 압도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난 이미 이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때는 나의 이름도, 내가 소속되어 있는 기사단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난 이름이 없었나? 난 기사단이었나?" 검은 기사는 우주의 진리에 관한 질문을 받기라도 한 듯 자신의 이름에 대해 고민했다. 슈벨이 물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 자들을 죽였어?" 검은 기사는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투구 안에서 몇 번 맴돌다가 새나오는 소리 같았다. "나를 공격했다. " 달빛이 구름을 및어나 그들을 비추었다. 슈벨은 무심코 그 투구 안을 바라보았다가 그 동안 참았던 공포를 견디지 못 하고 뒷걸음질 쳐버렸다. 빌리는 물러나지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놀랐다. 투구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어둠만 있었다. 눈동자도, 코도, 입도 아무 것도 없이 시커먼 어둠만 있었다. 눈동자도, 코도, 입도 아무것도 없이 시커먼 어둠만. 만약 테고가 이런 걸 보고 놀랐다면 엉겁결에 공격했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그 검은 기사는 상대방이 도망쳤더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테지만, 테고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슈벨도 무의식 중에 잘을 뽑으려다가 참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을 바꿨다. '왜 참아야 하지?' 그는 자문하고 소리 내어 대답했다 "참을 필요가 없잖아 " 빌리와 검은 기사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슈벨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의 죽음이란 건 원래 느닷없이 찾아온다고들 하지. 지난 몇 년 동안 사실 언제 죽었어도 상관 없는 훈련을 거쳐 내 목표를 위해 여기에 싫다. 내 목표를 위해서....... 그러니 난 여기에서 죽는다 해도 별로 상관 없을 것 같아." 갑자기 슈벨이 칼을 뽑았다. 빌리가 손을 펼쳐 그가 나서려는 걸 막았다. "갑자기 왜 그러나?" 달빛을 받은 슈벨의 얼굴은 상당히 아름다워 보였다. 그 얼굴에 여자였다면 당장 껴안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안 느껴져, 빌리? 이 자의 정체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아. 이 자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자체에 더 흥미가 가 난 오랫동안 이런 자를 만나길 기대했다. 내가 로일이라는 자를 얘기했지? 그 자가 지금 더 뛰어난 실력을 쌓았다 해도 이 자를 능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 마스터 퀘이언 조차." "헛소리다. 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럼 물러나 있어. 내가 이 자의 힘을 눈으로 보여주겠다." 밀쳐내는 슈벨의 의지는 너무나도 강하여, 빌리는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다를 부분은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슈벨에 말에 동의했다. 저 검은 기사가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슈벨은 죽을 것이다. 그걸 알고도 칼을 뽑고 앞으로 나서는 슈벨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건, 싸울 수 있는 공간을 내주기 위해 뒤로 물러나는 게 다였다. "이름이 없다고 했지? 내가 네 이름을 지어 주마. 이제부터 널 블랙이라고 부르겠다." 슈벨은 묶은 머리를 등 뒤로 넘기고 칼을 내밀었다. "블랙?" 검은 기사가 물었다. "그래, 블랙. 너에게 도전하겠다. 방금 네가 죽인 이 녀석들처럼 날 죽여봐라." 검은 기사는 슈벨의 검 족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일이군." 그는 슈벨의 검에 대비하지 않고 낮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 난 여기 있는 다섯이 먼저 공격해 와서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러나 너에게서는 나를 죽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하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넌 죽는 거야." 설마설마 했던 빌리였다. 그러나 슈벨은 진짜로 검은 기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검은 기사는 할버드를 틀어 그것을 막아냈다. 빌리가 보기에도 검은 기사는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그저 반사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반격했다. 슈벨은 아슬아슬하게 옷을 스쳐 피했다. "그거면 된다, 블랙." 슈벨은 유쾌하게 소리치더니 과감하게 검은 기사에게 달려들어 공격했다. 마치 춤을 추듯 빠른 동작으로, 갑옷을 입은 탓에 느린 검은 기사의 좌우를 조여 들어갔다. 어찌나 움직이는 속도가 빠른지, 검은 기사가 몸을 트는 것보다 더 빠르게 옆으로 달려갈 정도였다. 소름이 끼쳤다. 빌리는 사실 익셀런 기사단 중에서도 실력으로 치면 상위 클래스였다. 그러나 그런 상위 클래스에 해당하는 기사들 중에서도 과연 슈벨의 저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만약 그 술집에서 슈벨과 싸웠다면 저 끔찍할 정도로 빠른 발을 쫓아갈 수 있었을지 자신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처음에는 조금 밀리는 것 같은 검은 기사는 할버드의 긴 사정 거리를 이용하여 슈벨의 움직임을 막았다. 완전히 자기 페이스로 넘어왔다고 방심했던 슈벨은 그만 그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충분히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순간이었으나, 검은 기사는 그를 집어 던지는 것으로 끝냈다. 바닥에 뒤통수를 부딪힌 슈벨은 벌떡 일어나나 싶더니 도로 픽 주저앉았다. 그 뒤로도 두 번이나 더 일어나려는 시도를 하려다 그만 포기해버렸다. 슈벨은 검은 기사를 바라보며 뭐라 말하려 했다. 아마도 왜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숨이 찬 나머지 그는 그 말도 내뱉지 못 했다. "이번에는 내가 도전하겠다." 빌리는 허리에 차고 있는 두 자루 칼에 손을 가져갔다. 왜인지 그는 어떤 칼을 잡을 지 짧은 순간 망설였다 그리고 그 중 한 자루를 뽑아 검은 기사의 앞에 섰다. 이번에는 그 검은 기사도 처음부터 싸울 자세를 잡았다. 할버드를 치켜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하늘을 지고 있는 검은 산 같았다. '내 안에서 적을 확대시키지 마라.' 빌리는 생각이 많아 발이 굳어버리기 전에 몸을 먼저 움직였다. 열두 살 때부터 15년 동안이나 밤낮 없이 검을 휘둘러 온 자신을 믿었다. 만약 실력이 부족해 죽는 거라면 조금도 미련이 없었다. 익셀런을 대표하여 울프 기사단을 만나러 왔다는 목적은 진작에 잊어버렸다. 이건 빌리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에 대한 도전이었다. 슈벨은 뒤통수를 바닥에 들이받아 띵한 머리를 짚고, 빌리와 검은 기사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달빛 아래에서 번쩍이는 빌리의 검을 바라보며, 슈벨은 이런 엄청난 실력자와 술집에서 겨루려 했던 몇 시간 전의 자신을 질책했다. 이런 자들이 익셀런의 기사라면 대체 왜 십 넌 전 골드 게이트 전투에서 울프 기사단에 패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슈벨은 곧, 빌 리가 노리는 바를 읽어냈다. 그는 절묘하게 공격의 방향을 계산하여 상대를 함정으로 몰아넣어 가고 있었다. 마치 체스를 두는 것처럼, 최후의 체크메이트 한번을 위해 수많은 암시와 견제를 보여주었고, 검은 기사도 그 함정에 조금씩 끌려 들어갔다. '아, 지금!' 검은 기사가 전력을 다해 할버드를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빌러가 된 것처럼 정의 궤적을 봐오던 있던 슈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타이밍이라면 그 동안 준비한 최후의 일격이 제대로 먹힐 순간이었다. 빌리는 절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피할 수 없는 각도와 타이밍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만큼 충실한 느낌이 든 적이 없을 멋진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 일격은 검은 기사의 손에 붙잡혀 버렸다. 칼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그 잡은 쪽 손을 내주고 상대의 숨통을 끊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선택이었다. 검은 기사는 기꺼이 그것을 선택했다. 빌리도 그걸 완전히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검도 부러뜨릴 만한 강한 일격이 손에 잡힐 거라는 건 전혀 예상치 못 했다. 아무리 림이 좋고 손을 철 장갑으로 보호하고 있다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또 반사 신경만으로 그 속도를 따라잡는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마지막 공격을 읽었구나.' 보고 있는 슈벨과 검을 찔러 넣은 빌리는 동시에 그 생각을 했다. 그 검은 기사는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었다.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슈벨의 발을 쫓아갈 정도로 빨랐다. 또 빌리의 작전을 한 눈에 꿰뚫어 볼 통찰력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길 수가 없었다! 빌리는 다음에 날아올 결정타를 기다렸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잡았던 칼을 놓아주었다. 이미 패배했다고 생각한 빌리는 굳이 자유로워진 칼을 다시 휘두르지 않았다.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멀뚱히 서서 검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왜......?" 빌리는 슈벨이 바닥에 머리를 부및힌 후 하려고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질문 자체가 의미 없었다. 그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상대를 살인마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나을 수 없는 해답이었다. 슈벨도 그 자가 자신을 살려둔 의미를 이해했다. 검은 기사는 둘의 시합을 정식으로 받아준 것이었다. “당산은...... 기사였군." 빌 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 검은 기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억나진 앉지만, 익숙히 들어본 말이군." "머리는 기억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오." 빌리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후 말했다. "사과하겠소. 나는 당신을 익셀런의 갑옷을 입은 사기꾼이거나 살인자, 심지어 괴물이나 술집 주인이 말한 대로 유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이제 어느 쪽이든 상관 없소. 당신은 기사이며, 나는 당신에게 목숨을 빚졌소." 슈벨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그렇다, 블랙. 무작정 싸우려 했던 걸 사과하지." 검은 기사는 둘의 인사를 받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미묘하게 느껴오던 건데, 그는 대단히 정중했다. 아직 유령 같은 음산한 기운 때문에 실감은 잘 나지 않았지만. "그런데 당신은 왜 골드 게이트로 가려고 하지? 술집 주인이 그러던데." 슈벨이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 나는 게 없다. 단지 골드 게이트로 가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다." 검은 기사는 먼 하늘을 바라보더니, 과거를 추억하는 노인처럼 말했다. "그곳에 만날 사람이라도?" "만날 사람?" 검은 기사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얀 늑대!" 빌리와 슈벨은 등시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하얀 늑대를 만나러 간다고?" "하얀 늑대 중 가장 강한 자. 골드 게이트에 그 자가 있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 그래서 그 곳에 가는 거다." 활기차게 말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하얀 늑대 중 가장 강한 자라면 누굴 말하는 거지? 마스터 퀘이언? 로일?" 슈벨은 아는 이름을 모두 대보았다. 물론 그가 아는 로일은 아직 테스트 중이었을 때의 로일이었다. 울프의 기사가 된 건 당연하겠으나, 하얀 늑대가 되어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실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성장했다면, 틀림없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일의 이름까지 대 본 것이었다. 그리고 하얀 늑대 중 가장 최고라면, 슈벨이 아는 한 로일일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 검은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되었든 하얀 늑대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라면 분명 그 기사단의 캡틴이겠지. 그리고 그 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골드 게이트를 통과해야 할 것이고! 당신이 어떤 사고로 기억을 잃었는지 모르나, 기사로서의 본능이 가장 중요한 부분만 기억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 되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머물고 있소?" 빌리가 설명해 주며 물었다. "나는 골드 게이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아란티아의 길은 무척 쉬워. 서족으로 큰 길만 따라가면 나디움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차례로 만날 수 있지." 슈벨이 즉시 가르쳐주었다. "서쪽은 어디지?" "태양이 지는 곳이지, 어디긴 어디야?" 검은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태양을 볼 수 없다." "아, 그랬었지."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슈벨과 빌리는 이 검은 기사를 더 이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직감했고, 지금 그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묘하게도 그에 대한 동정심이 피어 올랐다. 시합에서의 패배를 겪은 후 갖은 경외감과 함께. "내가 안내해 드리겠소. 하얀 늑대를 꺾기 위해 가는 거라면 나와 목적이 동일하다고 봐야지." "나도 물론 동행한다. " 슈벨과 빌리는 마치 사명이라도 받은 듯 동시에 뜻을 함께 했다. 검은 기사는 허락을 내리지도 않았고 거절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둘은 그의 침묵을 승낙으로 보았다. 슈벨이 말을 끌고 와 앞장 섰고, 빌리와 검은 기사는 나란히 걸었다. 철컹 철컹.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는 그 무거운 발소리가 이어졌다. 둘은 뒤에 남은 자들에게 어떤 강요도,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들 뒤에는 과거에 범죄자라 불리던 스물 다섯 명의 사내들이 말없이 따르고 있었다. 블랙을 부르는 자 여름이긴 해도 아침이 되니 꽤 쌀쌍해 모닥불을 피워두고 쉬어야 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며 주위가 밝아졌다. 슈벨과 데고의 부하들은 뭔가 얘기했고, 간혹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빌리는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모닥불 주위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검은 기사의 옆에 앉았다. 빌리는 달빛이나 횃불이 아닌 태양빛 아래에서, 처음으로 그의 투구 안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안쪽은 심연의 어둠만 가득 차 있었다. 그저 아무 것도 없다면, 투구 안쪽이 보여야 옳았다. 안에 뭔가가 있다면 그 형체가 보여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것은 빈 갑옷이 살아 움직이는 것보다 더 끔찍한 모습이었다. 슈벨은 검은 기사를 블랙이라고 불렀고, 데고의 부하들은 그를 로드 블랙이라고 지칭했다. 또 그들은 둘을 각각 캡틴 슈벨, 캡틴 빌리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테고 대신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빌리는 그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슈벨은 내버려 두었다. 자기 혼자 그런 문제로 따지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찭기도 해서, 빌리 역시 호칭에 대한 문제는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역시 검은 기사를 블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이 이름 없는 기사는 그걸 자기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블랙의 주위에는 항상 어둠이 섞여 있었다. 태양이 뜨더라도 그 미묘한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의 그림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짙었다. 그 이상한 현상을 눈치 챈 건 빌리 뿐이었으나, 그걸 모르는 테고의 부하들도 검은 기사에게 접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슈벨 만큼은 괜히 집적대며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블랙이 계속 ‘모른다.'로 일관하니 그도 금방 지쳐버렸다. 슈벨이 블랙을 상대하는 동안, 빌리는 해가 떠오른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때 하얀 물체 하나가 그 지평선을 따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빌리는 그저 들짐승 한 마리가 달리고 있나 보다하고 집중하지 않고 흘려 보냈다. 그러나 잠시 후 그 광경의 진실을 알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단순히 들짐승 한 마러가 지나갔다고 무심코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빠른 속력이었다. 멀어서 쉽게 분간하지는 못 했지만, 지평선 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것은 바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던 것이다. 만약 그 하얀 물체가 빌리의 바로 옆을 지나왔다면 바람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할 수준이었다. "왜 그래? 뭐 있어?" 슈벨은 빌리가 먼 곳을 보며 멍하니 있자, 궁금해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당연히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상에서 말보다 더 빠른 게 있나?" 뜬금없이 빌리가 물었다. “난 못 봤지만, 어딘가의 뭔가는 있겠지, 뭐." 슈벨은 무성의하게 대답했고, 빌리도 잘못 본 거겠거니 하고 잊어버렸다. 슈벨은 자기 대답 때문에 화가 났나 싶어 호랑이 같은 건 더 빠르지 많을까하며 뒤늦게 수습하려고 했다 빌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뭐였을까 혼자서만 고민했다. 블랙은 무척 걸음이 느렸다. 갑옷을 입었으니 당연하지만, 그가 그리 서두르지 않는 탓도 있었다. 덕분에 데고의 부하들은 쉬엄쉬엄 갈 수 있다며 좋아했다. "캡틴 슈벨,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은 무뚝뚝한 빌리보다는 딱 보기에 편해 보이는 슈벨을 더 잘 따랐다. 슈벨도 그들을 굳이 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를 여자 보듯 하는 녀석은 가만 두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그들도 행여나 다리만 보면 여자 같아서 흥분돼, 라는 말 같은 건 절대 내뱉지 않았다. "다녀와. 이 쪽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을 테니 알아서 쫓아오고. 참, 나는 와인을 한 병 부탁해." "예, 캡틴 슈벨." 그들은 뒤통수를 금적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 때 빌리가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 쪽으로 가는 둘을 불러 세웠다. "너희들, 돈은 있나?" "예?" "돈 있냐고? 마을로 가면 돈을 주고 사 와야 할 것 상식도 없는 녀석들은 아니겠지?" 잠깐 대답을 멈칫하더니 녀석은 약간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반드시 사서 와라. 만약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 먹을 것을 구해 온다면 사형이다." 빌리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경고했다. 약간 겁을 먹은 얼굴로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녀석들도 잘 들어라 나는 너희들에게 나를 캡틴이라고 부르라고 허락한 적 없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즉, 내가 너희들의 책임자다. 그런데 내 책임하에 있는 너희들이 내 이름을 더럽히는 행등을 한다면 나는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항상 사형이다. 그 외의 다른 형벌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것이 불만인 자는 떠나라. 나는 오히려 그 쪽을 추천하겠다." 빌리는 이보다 더 딱딱할 수 없는 말투로 마무리 짓고 앞서 가는 검은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 슈벨은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들었지? 나도 저런 건 절대 못 말린다. 나도 니들 따라오라고 한 적 없으니까 알아서 해." 테고의 부하들은 자기들끼리 조금 웅성거리더니 다시 셋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슈벨은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릴 따라오면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해. 나름대로 기사가 되고 싶기는 한가 봐." “근본은 더러운 녀석들이다. 저런 놈들은 절대 기사가 되지 못해. 드래곤 기사단이 괜히 혈통을 문제 삼아 어설픈 놈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줄 아나? 거긴 실력 좋은 녀석들을 일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자기들의 명예를 더럽힐 가능성이 있는 놈들은 모조리 버리는 거야. 그건 차별이 아니라 그들 기준의 테스트라고 봐야지." “이봐, 나도 내 할아버지가 마구간 청소부였어. 아버지께서 상인을 해서 돈을 벌었고, 그 다음에 내가 검을 배운 거지. 위아래로 나 말고는 검을 쥔 적도 없는 핏줄이지. 하지만 난 강하잖아." “맞아. 너 같은 종류의 실력자는 받아들이지 않아. 그게 기사단의 방침이다." 슈벨은 빌리의 등을 툭 쳤다. “딱딱 끊어서 말하지 좀 마라, 자식아! 그거 은근히 기분 나쁘다." "내가 네 말투 가지고 뭐라 했느냐?" “네 게성이다 그거지. 좋아 에에, 그럼 익셀런 기사단의 개성은 뭐냐? 드래곤 기사단은 혈통을 중시하고, 이로피스는 명예를 중시하고, 울프 기사단은 실력을 중요시한다. 나도 테스트의 마지막까지 남은 게 아니라서 모르지만, 듣자니 그 녀석들은 검술 수업도 없다더군. 자체 개발이지. 자, 그럼 익셀런은 뭐지?" "기사도다." “누가 들으면 다른 기사단은 기사도도 없는 줄 알겠다?" “울프 기사단은 실력을 중시한다고 했는데, 그럼 다른 기사단은 실력을 중시하지 않느냐? 어느 쪽을 최우선으로 하느냐의 문제겠지. 익셀런은 다른 어떤 기사단보다 기사도를 중요시하고 군기를 엄격히 한다." 빌리는 한참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슈벨의 말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슈벨의 말은 테고의 부하들이 캡틴 대접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대신 끌고 오고 있었다. 그는 말 위에 올라탔다. "잠시 마을에 다녀오겠다." "왜? 네 먹을 건 부탁 못 했냐?" "확인해 봐야겠어." "뭘?" 빌리는 대답하지 않고 마을 쪽으로 말을 몰았다. 슈벨은 잠시 기다려줄까 하다가 금방 따라오겠거니 하고 먼저 갔다. 빌리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아까 먹을 것을 구하러 간다던 두 녀석의 목이 들려 있었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그 머리 둘을 풀밭에 휙 던져놓았다 테고의 부하들은 깜짝 놀랐다. "이게 기사도를 가장 우선하는 익셀런의 방침이다. 모든 죄의 대가가 이런 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사형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는 그게 마지막 경고라는 뜻이다." 슈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 녀석들이 뭘 했기에?" "두 녀석은 분명 돈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돈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녀석들은 있다고 말했지. 내가 사형이라는 말을 했는데도 그 녀석들은 자기들 말을 수정하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지도 않았고, 내게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는 건 너도 같이 있었으니 알 거다." 테고의 부하들은 잘린 동료 둘의 머리와 빌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들판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우린 지금부터 울프 기사단과 싸우러 간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런 싸움에서 캡틴의 명령을 듣지 않는 녀석은 적군보다 위험하다. 그런 녀석은 지금 물러나라. 그게 목숨을 유지하는 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는다." 빌리는 말에서 내린 후 물러나는 녀석이 있나 살폈다 사실 빌리는 이 말을 끝내면 전부 다. 혹은 최소 대여섯 명은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겁은 먹었으되, 달아나는 녀석은 없었다. 빌리는 픽 웃더니 가죽 주머니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 한 녀석을 지목하여 던져 주었다 "가서 마른 고기와 우유, 방, 치즈를 사와라." 슈벨이 얼른 덧붙였다. "와인도." “그래, 와인도." 빌리는 획 돌아서 한참 앞서 있는 블랙의 뒤를 따라갔다. 돈을 받은 테고의 부하는 다른 친구 한 명과 뛰는 걸음으로 마을 족을 향했다. "멍청한 녀석들이군." 빌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가?" "죽으러 간다는 데도 쫓아오고 있잖아." “테고라는 놈을 따라온 것부터 보면 당연한 결과지. 녀석들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를 따르고 싶어서 여길 온 걸 거야. 그러다 너를 만난 거고." "카리스마?" “테고라는 놈이 인덕이 있어서 저 애들을 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만큼이나 겁을 주는데도 너를 따라오는 마음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봐. 우리도 저 검은 기사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잖아?" "난 저 자의 정체가 궁금할 뿐이야.“ "그건 그래." 슈벨은 길게 기지개를 폈다. 그들의 느린 여행은 그 날 하루 종일 이어줬다. 밤이 되자, 슈벨이 검은 기사에게 하루 쉴 것을 요청했다. 식사 시간이 될 때도 멈춰주던 그는 당연히 자야 한다는 요구도 들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어딜 봐도 살아있는 존재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서서 움직이는 걸까? 빌리 역시 자지 않고 블랙의 옆에서 계속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 하는 그를 상대로 뭔가를 묻는 의미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가급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상식을 벗어난 존재에 대해 고민해 봐야 남는 건 두통뿐이니까. 어둠 속에서 하얀 물체가 그의 시야에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어?" 극히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빌리는 벌떡 일어났다. 치음에는 눈에 뭐가 끼어 잠깐 시야가 흐릿해진 걸 착각했나 싶었다. 그러나 가벼운 물체가 흙을 사박사박 밟고 뛰어가는 소리까지 무시할 수 없었다. 돌아보니 슈벨은 모닥불 앞에서 쭈그리고 암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보초를 서는 녀석들이 및 명 서 있기는 했으나, 그들 역시 그 하얀 것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은 선 채로 졸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피곤한 눈으로 하품을 하거나 눈을 비비고 있었다. 만약 기사단이었다면 즉시 호통 한 마디 하고 싶은 안일한 자세들이었다. 하지만 빌리는 무시했다. 블랙은 여전히 할버드를 바닥에 세우고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나타났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빌리밖에 없었다. 빌리는 근처 바위 위로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점점 뭔가를 봤다는 확신이 흔들렸다 '아무리 털빛이 하얗더라도 이런 어둠 속에서 그렇게 하얗게 보였을 리는 없겠지. 잘못 본 거야.' 빌리는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바위 아래로 살짝 뛰어 내려왔다. 착지한 곳의 코 앞에 길고 조용한 호흡을 내뱉는 거대한 짐승이 있었다. 빌리는 착지한 자세 그대로 굳어 눈만 동그랗게 떴다. 만약 이 동물이 아까 그 지평선을 스쳐갔던 하얀 물체라면 도망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빌리는 얼른 허리의 칼을 찾았다. 평소에는 잠 잘 때도 차고 있던 두 자루의 칼이 하필 이 순간에는 없었다. 아까 가죽백에 긁힌 자리가 아파 잠깐 풀어둔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죽도록 후회스러웠다. 보초를 서는 멍청한 녀석들은 모조리 선 채로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슈벨은 깨어 있을까 했지만, 졸기만 하던 그는 아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소리라도 질러 모두를 깨울까?' 하얀 털의 동물은 차분한 눈동자로 빌리를 주욱 훑어보았다.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 눈동자는 사람처럼 초롱초롱 빛을 냈다. 또 모닥불에 반사되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아름다운 빛이 털을 따라 흐르며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하얀 색이라기 보다 은빛에 가까운 긴 털이었고, 방금 목욕을 시킨 듯 깨끗했다. 무척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늑대였다. 어른이 올라타도 될 정도였다. 말보다 약간 작았는데, 말 목을 무는 것만으로 목 뼈를 부러뜨릴 만큼 큰입에, 온 몸을 감아도 될 정도로 탐스럽게 긴 꼬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우습게도 빌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는 이 순간에 말까지 잠들어 있었다. 선 채로 꾸벅거리는 꼴이 툭 치면 옆으로 픽 쓰러져 네 다리를 허공에 휘적거리면서도 계속 잘 것 같았다. 빌리는 그제야 다들 게으르거나 피곤해서 잠든 게 아니라, 강제로 잠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누가?' 빌리는 굳이 근처에 마법사가 있는지 찾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이 은빛 털의 늑대에게 말했다. "네가 그런 거냐?" 등물에게 말을 거는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늑대는 귀를 쫑긋 세우더니 옆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덩치가 그렇게 큰 데도 움직이는데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렸던 흙을 밟는 소리도 이 정도 큰 등물이 움직인 것에 비하면 거의 들리지 많았던 셈이었다. '내가 위협을 끼칠 만한 존재라서 물러난 게 아니다. 뭘 경계하고 있는 거지?' 뒤에서 흙을 밟는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블랙이었다. 제3자의 입장에 선 빌리 조차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둘 사이에 오고 갔다. 으르렁거리지는 않았으나 늑대는 콧잔등을 한껏 찡그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만약 그 분노의 타깃이 자신이었다면, 맨 정신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시선이었다. 얼굴 없는 검은 기사도 할버드를 들어올렸다. 단순한 위협용은 분명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당장 휘두르지도 않았다. 빌리는 둘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곧 늑대는 뒤로 크게 도약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일시에 사라지며, 빌리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쉬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으나,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그 늑대의 정체가 뭐요, 블랙?" 블랙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예상된 답이었다. 빌리는 그것으로 또 하나의 궁금증이 늘었나 보다 하고, 더 묻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블랙은 그 뒤를 이어 말해 주었다. "늑대가 내게 돌아가라고 말했다.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 "늑대가?" 빌리는 그 '돌아갈 곳'이라는 게 어디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 그 질문의 답도 모른다고 할 것이기에 붙지 않았다. 자고 있던 보초가 깨어났다. 그는 자기가 잠깐 존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하품만 한 번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창을 고쳐 쥐었다. 말도 깨어나 투레질을 했다. 하지만ㄹ슈벨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래도 강제로 잠든 게 아니라, 진짜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분명 내가 골드 게이트를 가려 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 블랙은 천천히 사기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묻고 싶은 게 잔뜩 있었으나, 빌리는 원래 뭔가를 캐내려고 굳이 상대방을 귀찮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고 이건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해도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블랙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어서 모른다고 하는 건 분명 아니었다. 어쨌든 이 순간 빌리는 머리 속으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상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고민하면 두통 밖에 남는 게 없다.‘ 다음날 정오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방 그치겠거니 하고 별 생각 없이 이동했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졌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근처 마을에 머물기로 했다. “마을에서 어떤 작은 문제도 일으키지 마라." 빌리는 마을에 들어가기 전 스물세 명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슈벨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어 벌써 외우고 있었으나 빌리는 그들이 몇 명인지 조차 제대로 세어보지 않았다. 무척이나 불성실한 캡틴임에도, 그들은 빌리의 명령이라면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빌리는 여관방에 하루만 묵어가기로 계약하고,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했다. 여관 주인이 수상하게 여길까봐 그는 검은 기사에게 망토까지 두르고 3층의 제일 구석진 방으로 데리고 갔다. 투구의 검은 기운이 방안의 촛불을 흔들었다. 평야에 있을 때는 몰랐으나, 막상 침대나 가구 같은 일상적인 사물에 둘러싸여 있으니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블랙의 괴이한 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전날에는 같이 밤을 지냈으나, 오늘은 도저히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혼자 있게 해드리겠소. 비가 그치면 이동합시다. 옆방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시오." 빌리는 말하고 옆방으로 건너왔다. 슈벨은 당연하다는 듯 같은 방으로 따라왔다. 그리고 수건으로 긴 머러를 털며 구시렁댔다. "여긴 목욕탕도 없군. 그냥 몸만 말려야겠어." 빌리는 그가 젖은 머리를 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 실수로 여자로 태어날 녀석을 남자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패 웃는지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많이 올 것 같군 " 빌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내리는 힘이 어찌나 거센지 두들기는 빗줄기에 창문이 깨질 것 같았다. "급한 것도 아니잖아. 블랙이야 비가 오든 말든 상관 안 하겠지만." 슈벨은 하품을 길게 했다 빌리도 꽤 졸렸으나 굳이 지금 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블랙은 누굴까? 인간일까? 마법사?" 그는 빌리가 어제 밤새 고민하다가 포기한 문제를 이제야 들먹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블랙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런 의문을 가져야 옳았다. 아마 그 과정에서 겁에 질려 달아날 것이고....... 그러나 무심한 둘은 가급적 그런 문제는 접어두고 나중에 알겠거니 하고 따라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빌리는 자기도 그렇지만, 슈벨도 어지간한 둔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둘 다, 진실에 다다르면 블랙을 떠나야 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억지로 무시한 것인지도 몰랐다. 블랙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지금에서야 슈벨은 은연중에 무시하려 애쓰던 궁금증을 공개적으로 토의하자고 나선 셈이었다. “마법사라기 보다 마법에 걸린 쪽이겠지." 빌리는 어제 내린 결론 중 하나를 꺼내 보였다. "아, 진짜 그렇겠네." 빌리는 갑자기 다른 걸 물었다. "지난5년 간 어디에서 지냈나, 넌?" "산 속이나 검술 학원. 다른 곳도 여기저기. 날 가르치거나 나와 대등하게 겨를 만한 녀석이 없어서 무의미한 시간들도 많았지. 그런데 그건 왜?" “그럼 떠도는 소문은 못 들어 봤겠군." "카모르트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정도?" “바로 그 내전에 검은 기사가 개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검은 기사? 블랙 같은?" "블랙 같은지 어떤지는 나도 몰라. 이로피스에서도 비슷한 소문 이 있었어. 사람들이 꾸며낸 얘기 같아서 유심히 듣지 않았지. 사실 그 때는 여길 찾아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고 할까?" "너도 참 게으르구나." 슈벨은 젖은 옷을 옆에 벗어두고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수건을 목에 걸고 가슴을 가리고 있는 폼은 정말 귀여웠다. 그를 보고, 수건 너머에 부푼 가슴이 있고, 금발을 풀고 있는 여자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다리에 털도 없었다. 저기에 그가 잘 때마다 끄집어내는 토끼 인형을 끌어안으면 그럴 듯한 그림이 나올 만 했다. "그런데 너 몇 살이냐?" 빌리의 질문에 슈벨이 인상을 구겼다. "왜 또 시비냐? 스물 여섯이다!" 빌리는 이틀 안 깎았더니 벌써 따끔하게 자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보다 세 살 밖에 안 어린 녀석이 수염이 그리 없나? 편하긴 하겠다." "그 면도 내가 해줄까?" 화가 난 슈벨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칼을 집어 들었다. 빌리는 손을 내저었다. "너도 그 쪽에 콤플렉스가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괴롭힘을 많이 당했나 보군. 그러니까 오히려 더 이상하다. 이제 누구도 널 함부로 못 할 텐데, 왜 여자 짧았다는 얘기만 나오면 신경이 곤두서지?" 빌리가 특별히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라고 여졌는지. 슈벨은 들었던 칼을 내려놓았다. "그런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미안하군. 우리가 그런 아픈 과거의 얘기를 할 정도의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는 너도 네 과거 얘기는 안 하잖아." "안 물어봤으니까." "하!" 슈벨은 자기가 말발에서 밀리고 있다는 게 참을 수가 없는지 손가락을 하나 치켜세우고 물었다. “그럼 네 첫경험은 언제냐? 부인은 있어?" "열여섯 살 때. 부인은 없다." “제일 먹기 싫은 음식은?" "오이." 슈벨은 그만 말문이 막혀 고개만 저었다. "왠지 내가 한심해지는군." "나도 그리 생각하던 참이었다." 빌리는 다시 창문 밖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네가 세상을 등지고 훈련에 전념할 때 여러 가지 일이 있었나 보더라.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이 검은 기사 무리를 전멸시켰다는 얘기도 있었고. 하지만 소문이라 덧붙이고 부풀린 얘기가 있어 진실이 뭔지는 모를 일이지. 헌데 그런 소문 중에 사악한 마법사가 검은 기사를 만들었다는 애기도 있었지. 갑자기 그 얘기가 생각나는군." "블랙이 그렇다는 거야?" "내가 알겠나? 소문에는 검은 기사가 여자와 아이도 구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는 괴물이라 했다, 그런데 블랙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 지금까지 본 것처럼. 그래서 그 소문을 갑자기 떠올리지 못 했었나 봐." 블랙이 머무는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렀다. 곧 나무 바닥을 울리는 무거운 발걸음이 있었다. 둘은 동시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 블랙은 벌써 계단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어딜 가는 거야?" 슈벨이 쫓아가며 불렀다. 검은 기사는 언제나처럼 느리지만 차분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밝은 계단이 갑옷의 무게를 버티느라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때마침 저녁 식사를 준비해 올라가던 여관 주인이 무슨 불편한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블랙의 투구 안을 보고 깜짝 놀라 그는 쟁반에 있는 음식을 떨어뜨렸다. 식기가 부서했고, 안에 든 음식이 바닥에 쏟아졌다. 주인은 블랙이 지나가는 길을 방해하지 앉으려고 얼른 계단 옆에 찰싹 붙었다. "아, 친구가 안색이 좀 창백해서 바람 쐬러 가는 허니 신경 쓰지 마쇼." 슈벨은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해주, 블랙의 뒤를 계속 따라갔다. 검은 기사는 바닥을 요란하게 때리는 빗 속을 들고 계속 걸어갔다. 슈벨과 빌리는 근 몇 달 동안 맞아본 적이 없는 강한 빗줄기 안으로 뛰어들어 그를 따라잡았다. "블랙, 대체 어딜 가는 거요?" 빌리가 폭우의 소음을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여 물었다. "내가 정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블랙이 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빌리는 깜짝 놀랐다. "우리 얘기를 들은 거요?" "근처에 있는 모든 사물의 소리가 들린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도, 개구리가 우는 소리도, 나와 너희들을 따라오는 그 스물세 명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도, 옆방에 있던 너의 목소리도....... 모든 소리가 저절로 내 머리 속에 흘러 들어온다." 빗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블랙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내가 정말 만들어줬다고 생각하나?"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그건 그냥 추측이었소." "사과할 일은 아니다.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한 비밀을 풀고 싶은 거다. 내가 누군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 빌리는 그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슈벨이 빗소리를 이기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모든 소리가 들린다 아주 먼 곳에서 나를 쫓는 발소리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부르는 이가 있다고?" 빌리는 자기들이 아닌 다른 이가 또 블랙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블랙은 마을을 벗어나 평야로 걸어갔다. 겨우 해가 질 시각이었으나, 밤이나 다름 없는 어둠이 있었다. 어둠 속을 쫓아가는 게 꺼려했으나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도 없었다. 빌리는 마을 쪽에서 비치는 횃불이 어느 쪽에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옆에 있는 슈벨도 켜우 찾을 수 있을 정도니, 검은 갑옷의 기사는 아예 어두운 배경 속에 녹아 보이지 않았다. "블랙, 거기 있소?" 빌리가 소리쳤다. 슈벨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 갔지?" "어디 있소, 블랙?"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 빌리는 그 족으로 음을 틀었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물이 잔뜩 고여 있는 진흙 바닥이 굉장히 미끄러웠다. 슈벨이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 빌리는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질퍽하게 흙이 묻은 손이었으나 슈벨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블랙은 그들에게 그리 떨어진 곳에 있지도 않았고, 더 이상 걷지도 않았다. “당신을 부르는 자를 찾았소?" 빌리가 울었다. 블랙은 거대한 할버드를 들어 정면을 가리켰다. 문득 빌리는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그 할버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가리킨 짙은 어둠 속에 뭐가 있는 지는 보이지 않았다. 슈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최대한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블랙의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나 그 곳으로 접근하지 말라며, 본능이 그들을 막았다. 뭔가가 있었다. 빌리는 어제 봤던 그 은빛 털의 늑대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랐다. 그 늑대는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한 느낌이었지, 위험을 끼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둠속에 있는존재는 그것과 정반대였다. 아무 위협도 가하지 않다가 느닷없이 목숨을 앗아갈 죽음의 사자 같은 느낌. "말하라, 나를 부른 자여." 블랙이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듣는 것만으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어둠 너머에서 들려왔다 "옆에 있는 둘은 누구냐?" 슈벨과 빌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빗방울이 몹시 차게 느껴졌다. "나를 돕는 자다." 언제나 느긋하게 말을 하는 블랙이었으나, 이번에는 시간차를 두지 않고 대답했다. "살아있는 자가 도울 일이 아니다. 물러나라." 그가 명령했다. 무기도 없이 따라나선 슈벨이 고함을 질렀다. "몸을 숨기고 있는 주제에 어디 감히 내게 명령을 내리느냐? 용건만 말하고, 너야말로 물러나라." 처음에는 대답이 없다가 작은 웃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웃음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빗소리를 멈추게 할 정도로 커졌다. 슈벨은 괴로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살아있는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의 연약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치 그 사악한 목소리가 직접 형체를 갖추고 지나간 것처럼, 끔찍한 뭔가가 슈벨과 빌리의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순간 둘들의 몸이 굳어 버렸다. 겨우 손가락만 까닥거릴 수 있었고, 눈동자를 거우 움직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숨도 쉬기 곤란한 와중에 둘은 호흡을 잠시 멈출 만큼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블랙과 그 사악한 목소리를 내는 주인공 사이에 떨어지던 빗줄기가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더 이상그들주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빌리는 코로만 숨을 겨우 토해냈다. 어둠 속에 회색 로브를 입은 자가 있었다. 후드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마법사였다. 블랙은 잠시 빌리와 슈벨을 돌아보았다. 투구 안의 눈동자도 보이지 않건만, 왠지 부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캡틴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더구나 갑옷 조차 익셀런의 것이었으니, 빌리는 그 걱정 어린 시선에 몹시 복잡한 심경을 맛보았다. “나를 불러 할 말이 있었다면 말하라." 블랙이 말했다. 회색 로브의 존재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품은 의문에 해답을 주기 위해 왔다." “나의? 그렇다면 대답하라, 나를 부른 자여.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내가 가진 의문의 전부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존재에 대한 의문은 모든 인간이 갈子하는 질문이다. 그 무의미한 질문이 어째서 너에게 남아 있는가?" "대답하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이 없다면, 나는 너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인가?" 블랙의 목소리가 커졌다. "스스로를 하찭은 마법의 피조물로 격하시키지 말지어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답을 말할 권리는 내게 있지 않다. 또한 그대에게 있어 그것은 중요치 않다." 블랙은 할버드를 든 반대쪽 손을 천천히 들어 보였다. "비록 이런 모습이긴 하나, 나의 본능이 너를 거부하고 있다. 나를 도구로 써서 좋지 못한 뭔가를 이루친자 하는 사악함이 엿보이는구나! 질문을 바꾸겠다. 너는 누구냐?"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서쪽을 가리켰다. "누구냐는 질문은 접어라. 모든 해답은 그대가 처음 가고자 했던 곳에 있다. 의문을 품지 말고 하고자 하는 바를 실행하라." 마법사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마치 허공에 덕서 움직이는 것처럼 몸의 흔들림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기억하라.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그대의 의지였다. 잊지 마라.......“ 마지막 부분은 거의 들리지도 않고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멈춰있던 빗줄기가 갑자기 밑으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빌리와 슈벨은 물살에 휩쓸려 그만 자리에 주저않았고, 슈벨은 대여섯 걸음 정도 떠내려가기까지 했다. 빌리는 급히 달려가 슈벨의 손을 잡아주었다. "괜찭나?" 빌리가 그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아....... 어. 괜찭아 이대로 조금만 앉아있을게." 흠뻑 젖은 슈벨은 힘 없는 목소리로 손을 내저었다. "빌리." 블랙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말하시오, 블랙." "골드 게이트는 얼마나 남았는가?" "지금 같은 속도로는 열흘 이상을 가야 하오." "부탁을 한 가지 해아겠다." "하시오." "그것보다 떠 빨리 가게 해줄 수 있겠나?" 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이 빗속을 뚫고 가는 건 무리요.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하도록 합시다." 블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빌리는 슈벨을 부축해서 마을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블랙이 그들을 따라왔다. "어이, 빌리." 빌리에게 몸을 기댄 채 걷는 슈벨은 힘겹게 말했다. 이미 블랙이 주위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굳이 목소리를 작게 하지도 않았다. "우리 아주 괴상한 일에 끼게 되었군. 그렇지 않아?" "즐거우면서 괴로운 척 하지 마라." "이런 건 즐겁지 않아.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일의 최종 도착지에 울프 기사단이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런 과정쯤은 충분히 받아 들일 수 있어. 단지 죽도록 고생한 지난 몇 년보다 최근 며칠 동안 벌어진 사건 몇 재가 더 힘드니 좀 웃겨서 그래." "아, 그건 나도 그래." 빌리는 론타몬의 왕실에 있는 마법사를 떠올렸다. 그 역시 루티아에서 왔으며,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현자이자, 전시에 커다란 전력이 되는 강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나타난 사악한 목소리의 주인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익셀런의 갑옷을 입고 있는 블랙을 대하면, 현재 익셀런의 기사 중 누구도 감히 검술을 논하지 못할 것이다. 대체 얼마나 더 놀라야 이 일의 마지막에 닿을 수 있을까? 빌리는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했으며, 최고에 이르기까지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자신의 실력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론타몬의 기사 블랙의 걸음은 여전히 느렸다. 빌리는 돈이 조금 들이더라도 말을 구해 블랙을 태우려 했다. 그러나 어떤 말도 겁에 질려 블랙을 태우려 하질 않았다. 또 블랙의 무거운 갑옷을 버틸 만한 힘 좋은 말을 시골 마을에서 구하기는 힘들었다. 슈벨의 것도 늙은 말이라 블랙을 태우는 건 무리였다. 더구나 전날 내린 비로 흙 길은 엉망이었다. 말은 커녕 사람도 이동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아란티아는 살기 좋은 곳이라더니 무슨 길이 이 모양이지?" 여행 중 불평 한마디 없던 빌리도 마침내 한마티 했다. 슈벨은 질척거리는 신발 밑의 진흙을 털어내며 변명 비슷한 말을 했다. "아무리 아란티아라도 여긴 이 나라의 변방이야. 보든 도로가 잘 닦여 있길 바라면 안 되지. 그리고 지금까지 길을 생각해 봐라. 이 도로도 직선으로 잘 놓여 있던 길이었어. 어제 비가 보통 비가 아니었던 게지." 슈벨은 힘겹게 쫓아오는 부하들을 보고 말했다. "좀 쉬어가자. 다들 지쳤어." 빌리는 한참이나 앞서 가고 있는 블랙을 보았다. 블랙은 평지를 걸어가나 진흙탕을 걸어가나 느린 걸음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의 걸음이 느리니, 그가 굉장히 빨리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더. 최소한 마른 땅은 있어야 저 녀석들도 편히 쉬지." 빌리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슈벨은 모두에게 말했다 "들었지? 조금만 더 참자고." 그들은 힘차게 대답하고 열심히 쫓아왔다. 얼마 가지 않아 바위가 드문드문 놓여 있는 곳이 나타났다. 슈벨은 점심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해두고, 빌리의 옆에 않았다. 블랙은 아직 더 가고 싶은 건지, 아니면 앉아있는 게 오히려 불편한 건지 바위 끝에 우뚝 서서 동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방향 감각을 잘 잡지 못 했는데, 지금도 가야 할 서쪽이 아닌 그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 게이트부터는 길이 제대로 닦여 있어. 통행세를 내야 하긴 하지만." "통행세? 도로 이용료 같은 건가? 얼마지?" "으음, 기억이 잘...... 한 사람당 은화 하나던가?" 빌리는 새삼 모두의 음자를 새어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금화 셋은 필요하겠군." “다 네주게? 알아서들 내라고 해. 설마 하니 돈 한 푼 없이 여기 왔겠어?" 슈벨은 항상 혹 달고 다니듯 귀찭아 하면서도 억지로 떼내지 않는 것을 신기해하며 말했다. 마침 테고의 부하, 아니 이제 빌리와 슈벨의 부하들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캡틴 빌리. 우리가 가진 돈을 모아왔습니다. 어차피 이제 개인적으로 쓰일 돈도 아니고 해서.......“ 꽤 묵직한 가죽 주머니에는 금화와 은화가 잔뜩 들어 있었다. "금화가 열 하나에 은화가 서른 둘입니다. 다들 도망자들이라 특별히 많은 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께 두 녀석도 사실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원래 버릇이 그런 놈들이라.......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불만 없습니다. 오히려 미리 돈을 모아두지 않은 저희 잘못이라 여기고 이렇게.......“ 수염 덥수룩한 그 남자는 뒷말을 흐렸다. 슈벨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빌리는 알지 못 했다. "이름이 뭐냐?" "그린우드입니다." "알았다, 그린우드." 빌리는 그 가죽 주머니 안에 자기가 가진 전 재산인 금화 아홉 개를 모두 집어넣었다. "이제부터 이 돈은 앞으로의 여행에 계속 볼 터이니 네가 관리하도록 해라." 그린우드는 몹시 당황했다. "아니, 저 그런.......“ "그리고 전부터 보니 네가 다를 녀석들의 의견을 잘 수렴하는 것 같으니, 일이 있으면 모두의 의견을 모아내게 보고해라. 앞으로 너를 서전트(Sergeant) 그린우드라고 부르겠다." 빌리는 짧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돈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사형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않겠다. 하지만 책임을 다할 거라 믿는다. " 그린우드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니, 옆에서 슈벨이 거들었다. "대답해야지, 서전트?" "예, 캡틴 빌리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린우드는 그제야 대답하고 물러났다. "너 솔직히 말해봐 익셀런에서도 꽤 높은 계급 아니었어?" 슈벨은 모두에게 돌아가 자신의 계급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그린우드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말했다. "그래 보이나?" "나는 저 녀석들과 친하게 지낼 수는 있어 또 나를 무시하지 않게 할 수도 있지. 블랙은 모두를 겁줄 수 있고, 우리를 굴복시킬 수는 있지. 하지만 너는 모두를 따르게 할 수 있군. 저 녀석들은 나도 캡틴 슈벨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 마음속의 캡틴은 너 하나인 거야. 그 점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캡틴 빌리?" 슈벨이 씨익 웃자, 빌리는 입맛만 다시다가 자리에 않았다. "사실 그런 계급이 싫어서 물러난 것이었는데, 여기 와서도 흉악범 놈들에게 직위를 얻게 되는군." 비가 온 후의 차가운 공기가 마음에 드는지 슈벨은 연신 코를 벌름거리다가 말을 했다. "말해봐. 익셀런의 캡틴은 어떤 사람이야? 알고 보니 네가 캡틴 이었다는 둥의 말은 하지 말고." 빌리의 눈썹이 살짝 꺾여 올라갔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그건?" “네가 진짜 익셀런의 캡틴이라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는 거아. 너무 그럴 듯 하거든. 그래서 그런 식상한 거짓말은 하지 말고 진짜 캡틴이 누군지 말해달라는 거지." 빌리는 슈벨의 이리저리 꼰 농담에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함부로 그런 말 하지 마라. 익셀런의 캡틴이란 다른 기사단의 캡틴처럼 만들어진 직위 같은 게 아니다. 그 자리는 진실로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론타몬에서 가장 성스러운 직위다. 나 같은 기사가 맞을 자리가 아냐." "그래, 아니라고 했잖아." 슈벨은 왠지 자기가 빌리를 입심으로 꺾은 것 같은 부듯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익셀런 캡틴은 그럴 만한 자야?" "전혀." 빌리는 딱 잘라 말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슈벨이 계속 뒷말을 기다리자,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 캡틴의 자리에 있는 자는 왕실에서 임의로 선정한 허약한 녀석이다. 왕의 친척이자, 왕실에 입김이 센 귀족의 맏아들이지. 귀족 치고는 검술이 뛰어나나 결코 자부심이 뛰어난 익셀런의 기사들을 이끌 만한 인물은 아니다." 빌리는 곧 고개를 저었다. “나도 참 소심하군. 정면에 대고는 아무 말 못 하고 충성하는 체하면서, 다른 나라의 엉뚱한 녀석에게는 이런 말을 지껄이고 있다니." 항상 농담하려 드는 슈벨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말을 받아들였다. "네가 모시고 싶은 캡틴 감이 그 기사단에는 없는 거야?“ "없다. 나보다 검술이 뛰어난 자도 있고, 나보다 리더십이 뛰어난 자도 있지만, '익셀런의 캡틴은 없다. 기사란 건,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지. 내가 울프 기사단을 싫어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검술 만으로 기사의 모든 자질을 테스트 하는 건 용병 집단이지, 기사 따위가 아니야! 그런 녀석들이 대륙 최고라고 평가 받는 걸 보고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아란티아에 온 거고?" "비슷해." 슈벨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않아있는 빌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역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다. 네가 정말 아란티아에 온 건 그런 걸 보려고 온 게 아닌 것 같아.“ "뭐라고?" 빌리는 슈벨의 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슈벨은 여유 있게 검지 손가락을 흔들었다. "넌 첫 번째 이유를 감추려고 일부러 두 번째 이유를 부각시키는 거야.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익셀런에 네가 모시고 싶은 캡틴이 없다고. 너, 혹시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이라면 그런 캡틴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 빌리가 갑자기 일어나 슈벨의 멱살을 잡았다. "너야 말로 과거의 널 내친 기사단에 복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다시 받아달라고 가는 거 아닌가?" 슈벨은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까불지 마, 빌리, 이제라도 좀 솔직해 보시지. 어쩌면 넌 네가 가장 존경하는 익셀런의 캡틴 웰치를 꺾은 마스터 퀘이언을 보러온 걸지도 몰라, 안 그래?" 빌리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슈벨은 거치에 맞서 잘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손을 앉고 벨 테면 베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하지만 빌리 역시 휘두르려고 칼을 꺼낸 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오래 된 도자기를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로 칼날을 쓰다듬어 보였다. 그 칼은 빌리가 항상 꺼내던 것과는 모양이 달랐다. 두 자루 칼 중 다른 한 자루였다. "이 칼은 익셀런 기사단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캡틴 웰치에게 주어졌던 검이다. 그러나 웰치는 자신에게 맞는 무기는 따로 있다며 기사단의 상징으로서 벽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십 년 간 누구도 이 칼에 손 댄 적이 없지." 그토록 소중한 갈이라면서, 빌리는 그걸로 바위를 내리쳤다. 불꽃이 번쩍 튀어 올랐다. 그러나 칼날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울프 기사단에 아란티아의 보검이 있다면 익셀런에는 론타몬의 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보여주러 여기까지 왔다." 태양을 반사하며 하얗게 빛을 내는 칼날은 방금 바위를 내리친 진동으로 아직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빌리는 천천히 그 칼을 집어넣었다. "내가 익셀런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는 아니다. 그러나 내 의지를 전하자, 모두들 그 뜻을 받아들여 주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익셀런의 대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온 나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군." 슈벨은 한 손을 들어 즉시 사과했다. "미안하군 네 큰 뜻을 너무 과소평가 했나 보다." 빌리도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나도 좀 흥분했나 보군." 빌리는 자리에 밝아 그린우드가 갖다 준 죽과 마른 고기를 먹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만든 요리였지만 맛은 엉망이었다. 빌리는 말없이 배를 채웠고, 슈벨은 반만 먹다가 나머지는 버렸다. 그린우드가 요리를 만든 녀석을 호통치고 있었다. 슈벨은 말없이 육포만 뜯어먹는 빌리의 뒤통수에 대고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쯤 연 입을 그냥 다물어 버렸다. 그는 진실로 빌리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빌 리가 그랬던 것처럼 숨기는 것 없이 자기 생각을 모두 털어놓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차라리 빌 리가 정말 별거 아닌 이유로 아란티아를 찾아왔기를 바랐다. 그래야 농담처럼 자기도 울프 기사단에 되돌아가는 목적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유에 비할 수 없이 거창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창피했다. “마차가 있으면 되겠군." 빌리가 말했다.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슈벨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를 못 했다. "응? 무슨 마차?" “블랙을 말에 태우지 못한다면 마차에 타고 가면 되지 않겠냐는 거다. 길이 좀 엉망이긴 하지만, 마차를 못 끌고 갈 정도는 아니겠지. 그리고 레드 게이트에서부터는 길이 잘 뚫려 있다고 했으니 괜찭을 거다." “아, 그런 간단한 해결책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군." 슈벨은 도망치듯 빌리의 곁을 떠나 블랙에게 말했다. “블랙,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어. 마차를 타고 갈 거다. 괜찮겠지?" 블랙은 대답하지 않고 할버드 끝으로 동쪽을 가리켰다. 그 모습은 마치 어제 빗 속에서 회색 로브의 마법사를 가리키는 포즈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가 가리킨 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뭐가 보여?" 슈벨은 괜히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게 익숙한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뭔가가 뭔데?" “힘......, 마법......, 사람? 아니면 다른 어떤 것?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다고?" 슈벨은 그가 가리킨 방향을 잠시 돌아보더니 말했다. "잠깐 살펴 보고 온다." "왜 그래?" 빌리가 입에서 우물거리던 육포를 꺼네며 물었다. "블랙의 과거를 알아낼 단서를 얻으러," 빌리가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으나, 슈벨은, "금방 올게." 라고 한 마디 하고 가볍게 말에 올라 동쪽으로 달려갔다. 빌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슈벨이 가지고 돌아올 뉴스를 미러 알았다면 빌리는 그가 돌아오길 안절부절 못 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 면을 고려하면, 슈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나름대로 빌리에 대한 배려인 셈이었다. 슈벨은 반 시간도 안 되어 돌아왔다. 말에서 내리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그는 빌리를 보고 힘있게 웃어 보이더니 바위 위에 서 있는 블랙에게 소리쳤다. "당신의 말이 맞았어. 아무러 갈길이 바빠도 신경 써서 봐줘야할 존재인건 분명하더군." "뭐였나?" 블랙과 빌리가 거의 동시에 물었다. "블루 게이트를 관장하는 하이로드의 행렬이다.“ 슈벨은 둘 다 깜짝 놀라길 기대했으나, 블랙은 침묵으로, 빌리는 무관심으로 반응했다. "하이로드가 뭔데?" "이런. 아란티아에 대해 공부도 안 했어? 시간 없으니 간단히 설명해주지. 아란티아에는 다섯 개의 게이트가 있고, 각 게이트는 한 명의 하이로드에 의해 관리된다. 그러니까, 하이로드라는 귀족 다섯 명에게 아란티아의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거야. 그중 화이트 게이트를 관리하는 하이로드가 바로 아란티아의 여왕이라 불리는 새나디엘인 거야. 좀 알겠냐?" "상당한 귀족인 건 알겠는데,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지?" 론타몬의 왕과도 자주 만나는 빌리의 위치에서는 그 정도 귀족이 지나간다는 것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아란터아의 독특한 체계에 대해 모른다면, 하이로드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올 법 했다. 슈벨은 그를 놀래줄 다른 뉴스가 있으므로, 굳이 그것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 정도 귀족이 이런 거리를 나다닌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야. 당연히 이 길을통해 레드 게이트 족으로 가는 하이로드의 목적은 뭐겠냐?" "뭐지?" "머리 좀 굴려보고 대답해라. 이 길은 나디움으로 통하는 길이야. 즉, 하이로드 탈룬드는 지금 여왕을 만나러 가는 길인 거다." "우리와 가는 방향은 같군. 지금 만나서 좋을 게 없겠는걸." 빌리는 막 식사를 마치고 이동할 준비를 갖춘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호의를 가지고 나디움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 마주치면 필연적으로 안 좋은 갈등이 벌어질 텐데, 이런 병력으로 그런 귀족이 이끄는 군대와 싸울 수도 없지."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하면 넌 그 생각을 바꾸게 될 거다." 슈벨은 이번에도 안 놀라면 자길 쳐라 하는 착오를 보이며 말했다. "블루 게이트의 하이로드가 왕실을 방문한다면, 당연히 왕실 측에서 경비대를 보내주지 않겠냐? 나디움의 경비대라면 하나밖에 없지. 울프 기사단이다." 빌리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슈벨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너처럼 늦게 깨달은 게 아니라 행렬을 보는 즉시 연상작용으로 그걸 짐작해냈지. 그래서 혹시 내가 아는 얼굴이 경호를 맡고 있나 해서, 조심스럽게 그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상당한 병력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더군. 나는 그들 근처를 조용히 맴돌며 정말로 울프의 기사가 같이 있나 확인했다. 울프의 하얀 갑옷을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 멀어서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제일 앞에 있는 하얀 갑옷의 기사는 분명히 울프의 기사였어. 난 거기까지만 알아내고 물러나려 했지. 그런데 그 기사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야 만 거야. 캡틴 울프!" "캡틴 울프?" 빌리는 드디어 슈벨이 원하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이로드의 마차에 같이 타고 있더라.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더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조금 엿들었어.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호위하는 병사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거기에서 사람 말을 구별하는 게 어렵지만은 않았지 호위하는 병사 중의 누군가도 마차 안에 대고 캡틴 울프라 부르는 걸 분명히 들어뒀지. 중간에 이름도 잠깐 나왔는데, 카셀이라던가 뭔가 하는 것 같더라." "퀘이언은 아니군." "퀘이언은 이제 여왕의 수호 기사야. 엄밀한 의미에서는 울프 기사단에서 은퇴한 몸이랄까?" “그런데 왜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이런 곳에 있지?" 빌리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하이로드를 경호하러 왔나 보지 아무렴 어떠냐! 안 그래?" 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틀의 목적은 울프 기사단 전체였다기보다 캡틴 울프였다. 가장 큰 행운인지도 몰랐다. “블랜, 이게 당신이 말하던 그 힘이란 거였어. 그렇지?" 슈벨이 유쾌하게 말했고, 블랙은 언제나처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빌리는 길게 고민했고, 슈벨이 판단을 제촉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이 길을 지나갈 거야. 어쩔래?" “만약.......” 빌리는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골라가며 말했다. “만약, 울프의 캡틴에게 정체 불명의 남자가 갑작스럽고 무례한 시합을 요청한다면 받아들여줄 것 같나?” 슈벨은 즉시 로일을 떠올렸다. 로일은 밥을 먹거나 자다 일어난 순간이더라도 결투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실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울프 기사단이라면 당연히 캡틴을 맡은 자가 가장 강할 것이다. 로일이든 아니든 상관 없었다. 슈벨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그 자이거나, 최소한 그 자보다 강한 자일 것이다. 그러니 시합을 피하지 않을 거야." “이 검을 써도 되는 자일 테지?" “또한 내 인고의 시간을 받아줄 기사이기도 하고." 빌리는 즉시 돌아서 모두를 불렀다. "너희들의 캡틴이 처음으로 명령을 내리겠다.“ 묵직한 음성에 부하들은 일제히 빌리의 앞에 줄을 지어 섰다. 조금도 훈련을 받지 않았으나, 제법 자세는 잡혀 있었다. 문득 슈벨은 이 녀석들도 자기들과 비교해 약해 보이는 것뿐이지, 실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현상 수배범들임을 떠올렸다. 기본 바탕이 되는 녀석들이라면 길지 않은 훈련만 시켜도 충분한 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긴 설명을 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전원 전투 준비." 3.카셀 비가 그친 후 마치 카모르트에서 에노아 후작에게 원군을 구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폭우와 같았다. 이번에야 얌전히 침대에서 빗소리만 들어서 몰랐으나, 다음날 일어나 비가 쓸고 간 흔적을 보니 그것보다 더 심한 폭우였던 것 같았다. 카셀은 비가 그친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동료들이 있는 들판의 헛간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헛간 문을 열기도 전부터 뭔가 수상했다. 안으로 들어간 후 카셀은 멍청히 서서 한참이나 부서진 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바닥에 부서진 나무 조각과 흙묻은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카셀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짚단을 밟고, 주위를 살졌다. 핏자국도 있었다. 카셀은 짚단 위에 털씩 주저앉았다. 아침을 먹지 않아 몹시 배가고 팠으나 뭔가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카셀이 카모르트 국경을 넘어 블루 게이트로 들어온 건 닷새 전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캡틴 울프라는 계급을 할고 아란티아로 입국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였으므로 몹시 설레었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아란티아는 다섯 개의 게이트로 이루어져 있는 나라야. 블루, 그레이, 레드, 골드, 화이트. 각 게이트의 이름에는 모두 주위 환경의 색깔을 그대로 담아놓은 거야." 아란티아 국경을 넘어서면서부터 아즈윈은 카셀에게 게이트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었다. 아란티아에 대한 모든 것을 듣고 배우는 것에 열심 인 카셀이라, 얘기하는 사람도 즐거워했다. 아란티아의 내륙 구조나 정치 체계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쉐이든이나 아즈윈이 열심히 카셀을 가르쳤고 블루 게이트가 가까워 오니 게이트에 대해서 설명하는 중이었다. 카셀은 이 많은 지식들을 한꺼번에 공부해야 한다는 것에 몹시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자 게랄드는 자기처럼 몇 년 살아도 모르는 녀석이 있으니 부담 갖지 말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별로 위로는 되지 않았다. "블루 게이트 앞은 과거에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레이 게이트는 성벽을 쌓아 올린 돌의 색이 회색이라고, 또 레드 게이트는 주위에 붉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색깔 이름들이 붙은 거래." 카셀은 아즈윈의 말을 주의 깊게 듣다가 블루 게이트 앞을 살펴보았다. "강은 없는데?" "몇 천년 전 얘기야. 아란티아가 처음 생겼을 때! 아직 하늘에 드래곤이 날아다니고, 하늘 산맥에 사람들이 들어가던 시대의 이야기지. 내가 살아봤던 건 물론 아니고." 아즈윈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점이라면 레드 게이트의 설명은 틀렸어 " 쉐이든이 정정했다. "아니야! 맞아. 그건 게이트 수문장에게 직접 들은 얘기야." "지금 이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블루 게이트 앞에는 실제로 강물이 흘렀던 흔적은 분명 남아있지. 그게 아무리 수 천년 전 얘기라 해도 말이야. 그러니 블루 게이트에 대한 말은 맞아. 그레이 게이트는 정말 돌이 회색이라 그런 이름이 붙은 건지는 잘 모르지만, 레드 게이트에는 붉은 강물이 흐르지 않았어." 쉐이든은 '내 말이 맞아.‘라고 바락바락 우겨대는 아즈윈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붉은 강물이 아니라 붉은 피가 흘렀다고 봐야지. 레드 게이트라는 건 천 년 전에 마법사들끼리의 전쟁 중에 생긴 이름이야 그 때 죽은 드래곤의 피가 성벽을 적셔 몇 년 간이나 붉게 보였다고 하더군. 그 전의 이름은 고대어로 '유아우'지금 말로 바꾸면 옐로우 게이트인 거야. 그 근처는, 지금도 그렇지만, 곡창 지대거든." "누가 그래?" 아즈윈은 자기 설명을 무시당한 게 무척 신경 쓰인 나머지 손가락질을 해대며 따졌다. "여왕님께서." 쉐이든의 짧은 대꾸에 아즈윈은 단박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카셀은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여왕이라는 단어는 모든 질문의 해답이자, 논쟁의 끝을 명하는 주문 같았다. "여왕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도 모두 맞는 건 아닐 텐데, 아즈윈은 항상 그 분을 들먹이면 입을 다물어 버리더라?" "아니야. 여왕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셔 루터아의 현자들도 곤란한 일이 생기면 여왕님께 여쭈러 와. 몇 년 전 전쟁 복구를 위해 가넬로크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모든 나라의 왕들이 아란티아의 여왕 없이는 회의를 할 수 없다고 말했거든." 카셀은 카모르트의 샤를 국왕이 얘기해줬던 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단 한 번의 만남에도 그 때를 환상처럼 품고 산다고 어린 아이처럼 말했었다. 또 아즈윈의 이야기를 들으면 여왕은 마치 동화 속에나 나을 만한 요정 같았다. 아즈윈은 여왕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내세우곤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첫 번째로 존경하는 사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블루 게이트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카셀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아즈윈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은퇴한 이전 하얀 늑대들 중한명이라고 했지? 이름이......." "아이린." "그래, 아이린. 한 명은 여왕 수호 기사인 마스터 퀘이언이고, 또 한 명이 우릴 도와준 메이루밀이라면, 은퇴한 하얀 늑대들 중 다른 한 명은 누구야? 네 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별 거 아닌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물었으나, 다섯 모두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 했다. 쉐이든은 난감해 하며 아즈윈을 돌아보았고, 아즈윈도 입맛만 다셨다 외부에 절대 공개되어선 안 될 정치적인 비밀까지 강의해 준 것을 보면, 이게 비밀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건 아닌 듯 했다. 즉, 그들도 모르는 것이었다. "몰라?" 아까부터 지루함을 휘파람으로 해소하던 게랄드가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전에 울프 기사단 설명할 때 모른다고 그러지 않았냐?" "아, 난 게랄드만 모르는 줄 알았거든," 별 의미 없이 대답이었으나, 게랄드는 상처 받은 얼굴로 휘파람 불기를 중단했다. "잰 원래 기사단 일에 무관심해," 아즈윈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몰라 메이루밀도 겨우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는걸. 특별히 비밀로 된 건 아니지만, 굳이 누가 가르쳐 주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현 울프 기사단 중에는 십 년 전 전쟁에도 참가한 사람이 있긴 하지. 하지만 심술 맞게도 그 한 명의 이름은 안 가르쳐 주더라고. 뭐, 누구든 간에 하얀 늑대들 중 최강은 아이린이니까 별로 상관 없어." 블루 게이트 앞에서 말을 세우고, 카셀이 물었다. "그 말을 마스터 퀘이언이 들으면 좀...... 그렇겠다?" “그렇긴 뭐가 그래? 마스터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 중 세 번째야. 그러니까 만족해 하실 거야 " "어렸을 때 널 가르쳤던 그 이름 없는 외팔의 검사는?" "네 번째!" "그럼 다섯 번째는?" 카셀이 장난스럽게 계속 물었다. 아즈윈은 말에서 내리는 쉐이든의 허리를 슬쩍 감빠며 대답했다. "쉐디지! 이만큼 나를 무뚝뚝하게 대하는 남자도 드물거든.“ "그럼 여섯 번째는?" “그야 나의 캡틴님이시지! 팔씨름도 나한테 지는 주제에 큰 소리치는 용기 가 존경스러워서!" 아즈윈의 호탕한 웃음에 카셀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게랄드가 뒤에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럼 난 일곱 번째냐?" "넌 순위 권 밖이야!" 둘은 티격태격했고, 카셀은 곤란해하며 둘의 싸움을 말렸다. 그러나 다른 셋은 언제나 그했듯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아니, 하얀 늑대들이 돌아오셨구려," 블루 게이트의 수문장이 달려왔다. "돌아왔수다. 우리한데 남긴 편지는 없소?" 게랄드가 기세 좋게 탁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는 벌석 이 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차를 내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쉐이든은 즉시 그 명령을 철회했다. "네가 타다 마셔." 나이 많은 수문장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하얀 늑대들을 접대하는 건 우리로서도 큰 기쁨이오. 그보다 마스터 퀘이언으로부터 하얀 늑대들에게 전하라는 편지가 있었소." 그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얼른 위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서는 편지 업무도 하나 봐?" 카셀은 게랄드 옆에 암아서 물었다. "아, 쉐이든이 정작 중요한 걸 설명 안 했군. 게랄드께서 설명해 주시겠다. 게이트라고 해서 특별히 출입국 심사 같은 걸 하는 게 아니야. 애초에 세워진 목적에서 변질됐다고 봐야겠지만, 각 게이트의 역할은 주위 마을에 대한 경비야 아란티아를 쳐들어오는 군대가 아닌 이상에야 도망자든 범죄자든 누구든 통과시키는 게 게이트의 규획이지." 게랄드가 자랑스럽게 그런 설명을 하는 동안, 말 해줘야 하나 망설이던 수문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범죄자들도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보다시피 가넬로크에서 현상 수배가 들어온 지옥 도끼라던가.......“ 아즈윈이 억지로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와, 누구누구가 불의 용병이었다는 것과 비슷한 작명 센스구만." 민망한 나머지 게랄드는 차만 마쳤다. 카셀은 게랄드의 실수를 만회해 주려고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럼 이 곳에는 아무나 편지를 남길 수 있나요?" 나이 많은 수문장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만약 그 편지를 찾아보는 사람이 여기에 편지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면! 적어도 3년은 보관해 두니까 충분히 편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죠. 물론 그 정도로 오래 보관하는 편지는 드물지만 말입니다." "그럼 은퇴한 기사들도 찾아와 편지를 남기겠군요. 혹시.......“ 수문장은 즉시 카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채고 대답했다. "예, 그 중 한 분은 마스터 퀘이언과도 직접적인 연락을 주고받는데, 우리 블루 게이트를 이용하십니다. 메이루밀이라고 여러분도 아실만한 이름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 분이 얼마 진 보낸 편지 중 하나를 나디움으로 보냈답니다." 카모르트에서 당장 급한 일 때문에 메이루밀과의 재회를 제대로 갖지 못 했던 로일이 놀라 물었다. "우리보다 먼저 여길 오셨습니까? 자주 오나요?" "반년에 한 번 정도? 이번 편지는 다른 이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 이긴 해도 보통은 편지를 받아보기 위해서는 직접 오지요. 왜, 편지를 남기시겠습니까?" 로일은 그러려고 하다가, 그냥 고개를 저어버렸다. "아닙니다. 때가 되면 또 만날 테니까." 하얀 늑대들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게이트의 병사들이 속속 몰려오는 가운데, 카셀은 진짜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메이루밀 같은 분이 이 곳을 이용한다면 다른 울프 기사단도 이용하겠군요." "보통은 그렇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지요. 잠깐, 그렇던가?" 수문장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 다른 병사에게 물었으나, 그들도 잘 몰랐다. 카셀은 아즈윈을 힐끔 한 번 보고 말했다. "아즈윈.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네가 존경하는 그 분에게 여기다 편지를 남기면 나중에 봐주지 않을까?" 아즈윈은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로 외쳤다. "왜 그걸 몰랐지?" 그녀는 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황급히 몇 마디를 씨서 수문장에게 내주었다. 옆에서 게랄드가 연애편지 쓰느냐고 또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아즈윈은 상기된 얼굴로 수문장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하기 바빴다. "반드시 전해 주셔야 해요 반드시!" "물론 그 사람이 찾아오면 그리 하겠소." 성격이야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예쁜 아즈윈이 이마를 들이받을 정도로 얼굴을 맞대고 말하니, 늙은 병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갈 거야?" 게랄드는 차를 한 잔 더 달라고 부탁한 후 말했다. "아니, 바로 갈 거다. 이미 많이 지체되었어." 쉐이든은 말을 끌고 나가며 말했다. "우리 없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급해서?" 게랄드는 며칠 째 쉬지 못한 불만을 토로했다. “한 달 동안 녹슬어 버린 검술을 보고 좋아할 녀석들이 오십 명이 야." 쉐이든은 게랄드의 대꾸도 듣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봐! 우리도 한 달 동안 논 건 아니잖아." 게랄드는 투덜대면서 반쯤 풀었던 짐을 도로 꾸렸다. 아즈윈은 그 사이 편지를 꼭 전해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나 더 했다. 및 년 후에 방문할지 모를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난처함에, 수문장은 그저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셀은 게랄드에게 몇 번이나 검술에 재능이 없다는 지적을 들어가면서도 기어이 칼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해서 야영을 하거나 잠깐 쉴 때가 되면 번갈아 가며 한 명씩 경술을 가르쳐 주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캡틴의 명령인지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 다섯 명에게도 카셀을 가르치는 일이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하얀 늑대들 모두가 카셀이 배워나가는 진도를 분석해본 결과 그에게 가장 잘 맞는 무기는 역시나 칼이었다. 촛불 아래에서 책을 많이 읽을 탓에 눈이 안 좋아 활을 제대로 배우는 건 무리였다. 힘은 보통 남자만큼은 되나, 도끼나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도 무리였다. 쉐이든의 말마따나 무턱대고 휘두르기에는 창만한 무기가 없으며, 일년 검술을 배운 녀석보다 한달 창을 배운 녀석이 더 강하다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역시 캡틴 하면 칼 아니냐는 아즈윈의 주장이 그럴 듯 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검을 잡는 자세는 로일이 가장 깨끗해. 저 녀석 언뜻 보면 그냥 멍청하게 서 있는 것 같지만, 발바닥 위치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어. 그것까지 네가 배우는 건 힘드니까, 무조건 따라 해. 적이 보고 로일과 너, 둘중 어느 쪽이 더 강한 쪽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그게 가장 현실적으로 써먹기 좋다고 봐." 아즈윈은 카셀의 관절 하나하나를 수정해 주며 열심이었다. 카셀이 따라 할 수 있도록 멍청히 서 있는 역할을 하는 로일은 그런방식에 대단히 불만이 많았다. "자세를 잡는 건 의미 없어. 상대방을 찌르기 위한 자세만이 중요한 거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 아즈윈은 로일과 격렬히 논쟁하더니 결국 그가 따로 카셀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남들을 가르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고 보면, 로일도 캡틴을 강하게 만드는 것에 상당히 열의를 보이는 셈이었다. 블루 게이트를 통과한지 이틀 제 되는 날이었다. 열심히 칼을 내리치는 연습을 하는 카셀을 보고 게랄드는 무의식 중에 툭 내뱉었다. "예전에 비해서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캡틴....... 우리 같은 수준 높은 사람들에게 훈련을 받는 것 치고는 정말 진도 느리다.......“ 카셀은 내리치던 칼을 멈췄고, 아즈윈이 게랄드를 노려보았다.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 건 실례다. 느릴 뿐이지, 조금씩 안정적인 자세를 갖춰 가고 있잖아." 게랄드는 얼른 대꾸했다. "특별히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어쨌든 우리가 카셀을 캡틴으로 인정한 건 검술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바보! 그거랑 같냐? 캡틴, 주위의 잡음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카셀은 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좀 쉴게." 그리고 그는 터벅터벅 밀리 떨어진 바위 위로 걸어가 않았다. 아즈윈은 게랄드에게 꿀밤이라도 먹일 듯한 손짓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게랄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리를 말에게 먹이던 쉐이든이 축 늘어진 카셀을 보더니, 그대로 자기 말과 카셀의 말을 끌고 갔다 "아즈윈, 캡틴이랑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어디?" "네나드로스 평원. 여기서 한 시간 거리야. 금방 돌아오도록 하지.“ "거긴 왜?"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아란티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두 군데 있지. 하나는 골드고, 하나는 그 곳이야." 아즈윈은 아직 웨이든의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그냥 알았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말에 타, 카셀. 같이 갈 곳이 있다." 영문을 몰랐으나, 카셀은 쉐이든이 시키는 대로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게랄드가 물었다. "거긴 왜 가는 거냐?" 아즈윈도 고개를 저었다. 로일도 특별히 그 평원에 왜 캡틴이 가야 하는 걸까 의문이었다. 그 때 불을 피우고 물을 끊이고 있던 던멜이 수화로 말했다. ‘마스터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네나드로스 평원은 아란티아에서 가장 슬픈 전쟁이 있었던 곳이라고.’ 그제야 아즈윈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랄드와 로일은 아직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즈윈이 추가로 설명했다. "론타몬의 대륙 정복 전쟁 최고의 영웅이 누구라고 생각해? 모두들 마스터를 지목하지 하지만 정작 마스터는 그게 아니래. 최종적으로 론타몬의 대규모 군대를 박살내버린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 데라둘도 아니었고, 가장 전설로 크게 남은 하얀 늑대들도 아니라는 거야. 우리 같은 기사가 영원히 가음에 남겨둬야 할 위대한 영웅은 적군이었다! 마스터는 그렇게 말씀하셨어. 아마 쉐이든은 카셀에게 그 사람을 말해주고 싶었을 거야.......“ 쉐이든과 카셀은 말을 타고 달려 평원이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가슴이 시원할 정도로 넓게 트인 평원을 보고, 카셀은 쉐이든이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 여길 데려온 거라고 생각했다. "여긴 네나드로스 평원이야. 아란티아를 침략해온 론타몬 군대의 마지막 전쟁이 있었던 곳이지." "론타몬의 마지막 전쟁?" "골드 게이트 전투에서 익셀런 기사단이 물러난 건 아란티아 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치면 도입부에 불과해. 너도 울프 기사단과 익셀런 기사단에 대한 역사를 공부했으니 론타몬이라는 거대한 군대를 완전히 무너뜨린 건 울프 기사단이 아니었다는 걸 알 거다." "알아. 아란티아가 그 대군에 맞서 저항한 사이에 군대를 재건시킨 이로피스와 가델로크의 협공에 패배한 거 지. 아마 아란티아에서 후퇴하던 5만 대군이 가넬로크 국경에서 드래곤 기사단의 공격을 받아 싸워 패배한 게 사실상 전쟁의 마지막이었지?" “그래. 골드 게이트 전투와 그 마지막 전쟁 사이에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거기에는 미처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전투가 있었어. 그러니 그런 게 일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는 힘들겠지. 나 역시 울프라는 성을 얻기 전까지는 모르던 내용이다." "그럼 네나드로스 평원 전투에서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보지?" "캡틴 웰치가 죽었다. " “그는 마스터 퀘이언에게 죽었다고 했잖아. 울프 기사단과 익셀런 기사단이 처음 맞닥뜨린 골드 게이트 전투에서." 카셀은 어떤 역사가에게 물어도 똑같은 대답이 나을 부분에 대해 아니라고 하는 쉐이든을 되려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상당히 오해가 있는 부분이긴 하지." 쉐이든은 작게 소러 내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스터는 골드 게이트 앞에서 분명 캡틴 웰치를 쓰러뜨렀다. 네가 카모르트에서 보인 그 보검의 빛과 함께! 하지만 그 빛이 그친 후에 우리에게 벌어진 그 사건처럼, 싸움이 극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이야기 속에서 항상 뭔가 크게 터지고 그것으로 모든 게 설명되는 클라이막스를 원하잖아. 아란티아의 보검이 발하는 빛과 함께 말에서 떨어진 웰치! 거기까지 들은 다음에 '하지만 웰치는 그 후에도 살아 계속 전투를 이어갔습니다.'라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지. 역사가 반드시 정확하게 기술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네가 아는 전쟁의 정보라는 것도 소설이나 노래지 않아?" 카셀은 자신의 짧은 식견을 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웰치는 그 전투에서 패했으나, 죽은 건 아니었어." "그럼?" 쉐이든은 평원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캡틴 웰치는 그 후에도 여러 전투에서 수많은 전적을 세우며 활약했다. 하지만 한 번 울프 기사단에 패한 것만으로 그의 모든 명예는 가려지고, 오직 패장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지.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싸웠고, 마침내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거야. 오히려 마스터 퀘이언에게 극적으로 패하고 죽는 게 나았을 정도로 초라한 죽음이었지. 그는 수많은 가넬로크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끝까지 저항하다가 수십 개의 창에 찔려 죽었다더군. 아무도 그를 위로하는 노래를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죽음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기 에 더욱 슬픈 운명이었다는 거다. 오직 나디움의 도서관에만 '적이지만 위대한 캡틴'이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어. 가서 읽어보도록 해." 카셀은 울프 기사단만큼이나 익셀런 기사단을 좋아했다. 그래서 카모르트의 팔콘이 과거의 익셀런이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만큼이나 가슴이 설레었던 것이다 쉐이든의 이야기를 들은 후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평야를 내려다보자니, 왠지 모르게 그 날의 전투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려왔다. "카셀, 마스터 퀘이언은 울프 기사단의 캡틴으로 있으면서도 결코 자신을 캡틴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적인 웰치를 보고 그가 진정한 캡틴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 쉐이든이 카셀의 어깨에 활을 걸었다. "검술을 배우는 것에 너무 초조해 하지 마. 뭐, 호신술 정도는 배워둬야지 다들 너에게 월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뿐이니까, 그 기대에 호응하지 못 하는 것을 미안해 할 건 없어." 카셀은 자기도 모르던 초조함을 단번에 짚어낸 쉐이든의 통찰력에 깜짝 놀랐다. 카셀은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을 보며 대꾸했다. “그저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내가 혼자 있을 때 가지게 될 무기가 없다는 것이 불안해서 그래." "그 부분은 분명 네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지, 느리더라도 계속 단련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널 가르치는 것에 짜증을 내지는 않을거다. " 쉐이든은 먼저 말에 오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네 무기는 너의 검이 아니라, 바로 하얀 늑대들의 이빨이다." "그건 절대 잊지 않아." 카셀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네나드로스 평원을 잘 봐두었다. 느낌뿐이긴 하지만, 웰치가 죽는 슬픈 전쟁이 벌어졌던 그 날의 피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쉐이든이 어째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굴이 이 먼 곳까지 데려왔는지 알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려 깊은 마음에 감사했다. "참, 지금 내 검술이 엉망이다, 엉망이다 그러는데 어느 정도나 엉망이야?" 카셀이 쉐이든의 뒤를 따라 말에 오르며 물었다. 쉐이든은 이 중대한 시점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무척 고민하다가 물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그가 다음에 할 말이 무서워서 카셀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냥 게랄드의 대답이 더 속편하군." “그러든지." 쉐이든은 웃으며 먼저 말을 달렸고, 카셀도 금방 뒤쫓았다. 카셀은 앞으로 아란티아를 천천히 여행하면서, 이런 식으로 친구들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흘 후 폭우가 닥친 다음 벌어질 상황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그건 쉐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카셀에게 자신이 마스터로 모시는 퀘이언이라는 자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차츰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로 캡틴 웰치를 부각시킨 것이기도 했다. 또한 아즈윈은 그녀가 그토록 만나길 원하는, 은퇴한 하얀 늑대 아이린이 제이메르라는 현상금 사냥꾼을 데리고 사흘 후 이 평원을 찾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거기에 대한 어떤 자잘한 힌트라도 있었다면 그녀는 당장 그 평원에 캠프를 차려 사흘 정도의 시간을 기꺼이 감수했을 것이다. 그레이 게이트에 도착하니 근처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가 세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꽤 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카셀은 그레이 게이트를 지키는 경비대라고 생각했으나, 쉐이든의 말을 들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꽤 대단한 손님이 찾아온 것 같군. 저 문장은 분명 블루 게이트의 하이로드 탈룬드지?" 아즈윈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매년 여름마다 나디움을 찾아왔으니 지금쯤 올 때가 되긴 했지.“ 카셀은 쉐이든이 강의한 아란혀아의 귀족 체계에 대해서 속으로 잽싸게 복습을 했다. 아란티혀아에는 단 두 종류의 귀족만 있고, 그 중 각 게이트를 관장하는 하이로드는 다섯뿐이다. 블루의 탈룬드, 그레이의 큐디노르, 레드의 아라딜, 골드의 비노클라스, 그리고 화이트의 새나디엘. 게이트 내의 모든 업무는 이 네 명의 하이로드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 된다. 그 중 가장 중앙에 있는 하이로드인 여왕에게 다른 하이로드들이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면서 아란티아의 중앙 집권이 이루어진다. 여왕의 강력한 지배 체제는 모든 군사력을 가진 네 하이로드의 충성에 의해 유지되는 셈이었다. 아즈윈은, 새나디엘 여왕의 카리스마 한 방으로 네 늙은이들은 알아서 충성한다라는 이론에 입각하여 이 정치 체제를 설명해 주었으나, 카셀은 달리 생각했다 여왕에게는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세력을 옆에 끼고 있다. 그게 울프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화이트 게이트를, 즉 여왕을 지키고 있는 한 어떤 하이로드도 감히 반란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레이 게이트 안에 정말 하이로드 탈룬드가 있다면 하얀 늑대들을 대하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게랄드는 굳이 신경 블 월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앞으로도 그런 권력가들과 많은 인연이 있을 테니 미리 익숙해져야 한다고 카셀은 생각했다. 어느 쪽 권력이 위인지도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건 하얀 늑대들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문제였다. 카셀 스스로 하이로드 위에 서야 할지,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할지,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로일!" 게이트 안으로 들어선 로일을 보고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뜸 달려든 남자가 있었다. 펄럭이는 하얀 옷에, 가슴과 양팔에는 늑대의 문장이 새겨진 둥근 철갑이 덧대어 있었으며, 커다란 칼을 허리에 차고 있는 기사였다. 검은 눈 위를 덮는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입고 있는 하얀 옷과 대비를 이뤄 깔끔해 보였다. 카셀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기 소개를 하지 않았으나, 카셀은 그 남자의 정체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울프의 기사였다. ‘바로 그 전설 속의.......’ 카셀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웃음을 터트릴 델 했다. 이미 그런 전설에나 나을 만한 기사 중 다섯과 한 달이나 생사고락을 같이 하지 않았던가? 그리 생각해두니 마음은 편해졌으나, 두근거림이 바로 사라지지는 많았다. 어했든 그 검은 머리의 남자는 카셀이 여섯 번째로 만나는 울프의 기사였다. 아, 물론 은퇴한 기사 메이루밀을 빼고 여섯 번째. "대충 지금쯤 돌아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군! 카모르트에서의 일은 잘 끝났나?" 그는 로일과 악수를 나누며 물었다. "그럭저럭. 그 사이 훈련은 게을리 하지는 않았겠지?" "그 말을 안 해줬으면 섭섭할 뻔 했다! 지금 당장 칼을 총아도 난 상관없어. 어때?" 그는 정말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아즈윈이 스쳐가며 그의 어깨를 자기 어깨로 툭 쳤다. "하이로드가 계신 곳이다, 배롤. 경거망동 좀 하지 마라." "일일이 이런 것에 신경 쓰실 분인가? 오히려 기운 좋은 젊은이들이라고 반길 거다." 배롤이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녀는 큰 소리로 게이트 안에 대고 외쳤다. "하이로드 탈룬드! 하얀 늑대들이 왔습니다!" 게이트에 사람이 들어오면 손이 비어 있는 경비가 제일 먼저 나가 손님을 맞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먼저 들어온 게이트의 다른 통행인을 맡고 있던 병사가 그 일을 후임 병사에게 맡기고 달려 나왔다 "아즈윈 울프! 어서 오십시오. 머피가 그대들을 직접 맞이하겠소이다." 아즈윈은 검은 콧수염을 기른 나이 많은 경비와 악수했다. "언제나처럼 당신이 맞아주는군. 하이로드께서는?" "위에 계시오. 들어가십시다. 자!" 머피는 허둥지둥 모두를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안내했다. 배롤은 게랄드와 주먹을 부딪히며 인사하고, 던멜에게는 가볍게 목례하고, 쉐이든하고는 소리 나게 손바닥을 부딪혔다. 그 다음으로 들어오는 카셀을 보고 배롤은 멈칫했다. "인사해라, 배롤. 우리들의 캡틴이다." 게랄드가 소개했고, 카셀이 먼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카셀 울프라고 합니다." “캡틴이라니, 무슨?" 배롤은 즉시 카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카모르트에시 오셨소?" "그렇습니다." “마스터의 동의도 구하지 많은 자가 울프의 이름을 가질 수는 없소. 더군다나 캡틴이라니? 쉐이든, 설명이 필요하군." 배롤은 카셀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쉐이든을 불러 세웠다. 카셀은 조금 당황했으나, 당장 이 문제로 뭐라 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정도의 반발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쉐이든 역시 굳이 그를 납득시키려 들지 않았다. “만나는 녀석마다 하나씩 설명할 시간 없어. 나디움에 가거든 한꺼번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게랄드도 계단 옆에 멈춰 서서 한 마디 했다. “마스터의 동의 없이도 하얀 늑대 전원의 동의가 있다면 캡틴으로 인정 되는 거야." "누가 그래?" 배롤이 단효하게 의문을 표하자, 게랄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물었다. "누가 그랬냐?" 2층에 먼저 올라가 있는 아즈윈이 머리만 난간 밑으로 내밀었다. 길게 땋은 옅은 검은 빛 머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흔들렸다. "야, 배롤. 캡틴한데 시비 걸면 나한데 죽는다 하얀 늑대가 가지는 권한에 대해 불만 있으면 가까운 갈 놔두고 말로 하지 말라구." 로일한테도 당당히 시비 거는 배롤이었으나, 눈을 가늘게 깔고 협박하는 아즈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만을 품었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나, 배롤은 카셀을 한 번 더 쳐다보기만 할 뿐, 입은 열지 않았다. 카셀은 그가 또 뭐라 따지기 전에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갔다. 다섯 명의 덩치에 가려 의자에 않아있는 키 작은 하이로드는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얼른 그 다섯의 왼쪽 끝에 싫다. "하얀 늑대들이 하이로드 탈룬드께 인사 드립니다." 쉐이든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나머지 네 명도 고개를 숙였다. 카셀도 그들을 따라 즉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이런. 나디움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한 귀한 손님을 벌써 만나게 되었군." 카셀은 고개를 살짝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가져온 게 분명한 고급스러운 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뭔가를 마시는 노인이 있었다. 하얀 수염이 한 자나 되고 머리에는 둥근 모자를 썼으며,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카셀은 이런 사람과 어느 쪽 권한이 더 위냐를 두고 고민을 한 자신이 창피해졌다. “또 새나디엘 여왕님을 만나러 가시는군요. 너무 자주 가시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얼마나 머무르려고요?" 정중한 인사를 끝내자마자 아즈윈은 그의 앞자리에 털씩 앉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로일과 게랄드도 의자를 끌어다가 벽 쪽에 앉았다. 하지만 던멜과 쉐이든은 아즈윈의 뒤쪽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카셀은 다섯 명의 자세만 보고도 어떤 방식으로 하이로드라는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눈치 했다. 공식적으로 해야 할 행동은 상위 계급에 대한 예우였다. 그러나 여왕과도 친구처럼 지낸다는 아즈윈의 당돌한 성격을 탈룬드는 가볍게 받아들이는 거고, 로일처럼 무덤덤하게 있어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우선 카셀은 쉐이든 옆에 서는 것을 택했다. "아아, 자주 뵐 수만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인들 못 갈까? 길이 멀어 일 년에 한 번 뿐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골드 게이트의 비노클라스가 부럽겠습니다?" "그럼 게이트를 서로 바꿀까?" 둘은 큰 소리로 웃었다. “향기 좋은 술이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아즈윈이 부탁하자,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한 잔 권할 참이었지. 이보게, 잔을 다섯 개 준비해주게. 아니, 잠깐만." 탈룬드는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명했다가 카셀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했다. 하얀 눈썹 아래로 깜빡이는 검은 눈동자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내가 요새 눈이 안 좋아 가끔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일이 있긴 한데, 왜 다섯 명이어야 할 하얀 늑대들이 여섯으로 보이는고?" 카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울프 기사단의 캡틴으로 아란티아에 온 카셀이라 합니다." "캡틴? 울프 기사단의 캡틴은 쉐이든이 아니었나?" 쉐이든의 눈썹이 치컥 올라갔다. "언제부터 그런 엄청난 착각을 하셨습니까?" "배롤이 그러던데? 내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은 마스터 퀘이언이냐고 물었더니 사실상 캡틴은 쉐이든이라고 하더군." 배롤의 불만 섞인 눈빛의 의미는 그런 뜻이었다. 카셀은 다시 일층으로 내려갔을 때 대해야 할 배롤의 눈빛이 걱정되었다. 카셀은 애써 웃으며 탈룬드에게 말했다. "아직은 인정 받아야 할 부분도 많고 많은 이들에게 검증 받아야 겨우 진짜 캡틴이라는 명칭을 달 수 있겠으나, 지금 당장은 아란티아 최고의 기사 다섯 명이 캡틴이라고 불러준다는 것만으로 제 자신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탈룬드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벌렸다 "아흔 살이나 되어도 가진 거라고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하나뿐인 내 눈이 다 시원할 인물이구려, 캡턴 울프. 만나서 반갑소. 여봐라, 술잔은 여섯 개를 준비하거라." 시종은 곧 고개를 숙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자, 앉으시오. 갈 길은 바쁘나 잠시나마 아란티아의 여왕께 바칠 술을 몰래 뜯어 맛이나 봅시다." 그는 장난스레 웃으며 모두에게 의자를 권했다. 쉐이든과 던멜도 그제야 자리에 앉았고, 카셀은 아즈윈이 직접 내 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렴풋이 알기로도, 하얀 늑대들 전원이 동의를 하면 누구든 울프의 기사가 될 수 있다고 들었네. 외부인이 개입해선 안 될 문제네만, 혹 몇 년 동안이나 정하지 못한 캡틴을 외부에서 모셔온 이유라도 있는가?" "이야기 하자면 책 네 권은 써야 할 정도로 깁니다." 아즈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간단히 얘기하자면, 우리 모두가 캡린의 매력에 반했다고 해야 할 겁니다." "내가 그런 종류의 논쟁을 두고 마스터 퀘이언, 마스터 메이루밀 이 둘과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얘기한 적이 있지, 캡틴의 조건이 무엇일까? 퀘이언은 모두를 단숨에 제압하는 카러스마라고 주장했고, 메이루밀은 어떤 상황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과감한 결단력이라고 주장했지. 하지만 나는 사람들 모두를 감동시키는 인간성이라고 봤거든. 그럼 기사 아즈윈은 내 의견에 동의하는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해두죠. 그런데 탈룬드께서는 이전 하얀 늑대들과도 많은 대화를 하셨나 보군요. 아이린은 그 문제에 대해 뭐라고 하셨나요?" "아이린? 그게 누구지?" 아즈윈이 개구리 잡아먹는 뱀처럼 눈을 치켜뜨자, 탈룬드는 술잔이 왔다며 상황을 얼버무렸다. 그는 직접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며 변명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사람 이름 외우기도 쉽지 않다네. 퀘이언은 매년 만나고 있고, 메이루밀은 해마다 내게 편지를 보내주니 이름을 기억하지만 다른 이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만나고 만난 적이 없는 걸. 자네도 이 나이 되어 보게," "저는 탈룬드처럼 오래 살 생각 없어서 말이죠! 솔직히 이 생활하면서 오십 먹을 때까지 살길 바라는 건 사깁니다. " 아즈윈은 얌전히 술잔을 받아 고급스러운 술의 향기에 미소 지었다. “무슨 재료로 만들었기에 이리 향이 좋습니까?" "음식이 정말 맛있다면 그 재료는 비밀로 하는 게 좋다네." 탈룬드는 아즈윈이 술잔에 입술을 대기 힘들만한 말을 던져두었다. 자기를 무섭게 노려본 복수였지만, 아즈윈은 그 수준 높은 반격을 이해하지 못 했다. 탈룬드는 조용히 웃으며 카셀에게도 술을 내주었다. "새로 온 캡틴에게 다른 선물은 나중에 전달하기로 하고, 우선내 술을 받게." "선물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술이라도 충분히 감사할 일입니다." "아란티아에서 로드가 주는 선물은 어떤 다른 이유도 없는 한 호의의 표시라네. 그러니 나중에 내가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을 겸손의 의미로 거절하는 실례를 저지르지 마시게, 캡틴 울프.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니, 더더욱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지." 거부할 수 없는 부드러운 명령에 카셀은 술은 받았다. 다른 이들도 한 명씩 술잔을 받았다. "유쾌한 아란티아의 늑대들과 새로운 캡틴을 위해." 탈룬드가 말하며 건배했다. 카셀이 그 날 마신 술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멋진 향이 있었다. "나디움으로 가는 길이라면 같이 가는 게 어떤가?" 이것저것 잡다한 얘기를 늘어놓다가 일행 모두가 길을 떠날 채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탈룬드가 제안했다. 하시만 아즈윈이 거절했다. "엉덩이 무거운 분이랑 같이 다니기엔 우리 성질이 너무 급해서 말입니다." "아란티아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여행 하는 게 그리 나쁜가?" 탈룬드가 농담처럼 말하자, 쉐이든이 아즈윈을 거들었다. “하이로드를 경호하는 영광은 아래층에 있는 배를 울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먼저 가서 기다리게나. 나중에 만나세, 아, 게랄드. 지난 번에 해준 농담은 정말 재미있었네. 다음 농담을 기다리지." 게랄드는 무척 기뻐했다.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해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게랄드는 그 얘기를 시작도 하지 못하고 아즈윈에게 떠밀려 내려갔다. 배롤이 그레이 게이트의 수문장 머피와 얘기하다가 배웅을 하러 나왔다. "먼저 떠나게?" “한 달은 걸릴 탈룬드의 관광에 동행할 수는 없잖나?" 쉐이든이 설명해 주었으나, 배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로일이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몇 가지 볼만한 기술을 개발했나 보지?" "이름하여 대 로일 파괴 검술이지. 걱정하지 마라 다른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 참, 로일이 나한데 쓰러지면 그 자리는 내가 올라가는 거겠지?" 배롤이 큰 소리로 웃어대며 말했다. 카셀은 그의 호탕한 웃음이 어딘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정작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럼 나디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배롤." 카셀은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배롤은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얹고 자세를 낮추었다. 카셀은 뒤에서 그가 뭘 하는 지도 모르고 앞서 걸어갔다. 하지만 배롤이 그 동작을 갖추자, 하얀 늑대 세 명이 동시에 반응했다. 지금까지 수화로 조차 한 마디 하지 앉던 던멜이 카셀의 등쪽을 막아섰고, 쉐이든이 창을 뻗어 배롤의 길목을 차단했으며, 로일은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올렸다. 한 박자 느리긴 했으나 벌써 문 밖에 나가 있던 게랄드와 아즈윈도 돌아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카셀밖에 없었다. “응?" 카셀은 한참 후에야 뭔가 살벌한 기운이 자기 주위에 가득하다걸 보고 주위를 살폈다. "캡틴에 대한 첫 번째 테스트를 굳이 네가 할 필요는 없다." 쉐이든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로일을 검술로 꺾겠다 어쩐다 하고 큰 소리 치던 배롤이었으나, 다섯 명의 하얀 늑대가 동시에 견제해 들어오니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 하고 즉시 칼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그는 쉐이든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테스트는 당연히.......“ "나중에 설명하지." 쉐이든은 머피가 보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했다. 던멜도 돌아섰고, 로일도 검에서 손을 뗐으나 아즈윈은 화를 풀지 않았다. "배롤, 내가 캡틴에게 시비 걸지 말라고 했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그는 아즈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겁을 먹는 것 같았다. 울프의 기사라면 당연히 엄청난 수준의 실력자일 테지만, 이 다섯 명을 앞에 두고 있으니 그가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아즈윈, 난 괜찮아. " 카셀은 웃으며 말했다. “배롤, 지금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 드릴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 때 당신의 분노를 제가 직접 받아들이겠습니다." 배롤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했다. 아즈윈은, '그런 식으로 약하게 대하면 안 돼.'라고 주장했으나, 이 상황을 빨리 끝냈으면 싶어 카셀은 서둘러 게이트를 나섰다. “카셀,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울프 기사단 녀석들, 자기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면 우선 시비부터 건다 " 게이트를 나와 말에 오르며 쉐이든이 말했다. "시, 시비라니?" “시험 삼아 진짜로 칼을 휘두르는 녀석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아즈윈이 손가락을 하나 세우고 말했다. 쉐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항상 우리 중 하나가 옆에 있을 테지만, 혹 그렇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하는 말이다. 만약 상대방이 울프의 기사고, 네가 캡틴 울프라는 것을 밝혀야 하는 상황이라면 반드시 네가 검을 쓸 수 없다고 말해라." 카모르트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검술을 잘 하는 것처럼 허풍을 떨었던 것과 정반대의 상황에 카셀은 조금 혼란을 느꼈다. 게랄드마저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 말 듣고 보니 진짜 그렇겠네, 나라도 어디서 캡틴이 하나 굴러들어왔다고 하면 어디 나보다 더 잘 싸우는 놈인가 보자, 하고 도끼를 한 번 집어 던져 볼 거야." "그런 끔찍한 말은 때고 경고해 줘도 되지 않아?" 사색이 된 카셀의 말에 게랄드는 껄껄대고 웃었다. "뭐, 만약을 대비한다는 거다. 기사단 녀석들이 모두 네가 캡틴이라는 걸 인정하고 덤비지 않을 때까지는 네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만약이란 거야, 만약." 카셀은 제발 그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물론 카셀은 잊고 있었을 데지만, 그가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길 바라면 그 만약의 사태는 반드시 일어나곤 했었다. 그 일은 폭우가 쏟아지는 이틀 뒤에 일어났다. 누구도 날씨를 예측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쉐이든은 아침부터 하늘빛이 수상하다고 했고, 던멜은 한두 시각쯤 후에 비가 내릴 거라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엄청난 비가 올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를 피할 만한 장소를 먼저 구한 게 실수였는지도 몰랐다. 그건 쉐이든이 결정한 일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의 잘못이랄 순 없었다. 비가 올 거 같다며 쉐이든이 급히 들판에 보이는 아무 헛간으로나 들어갔다. 짚단을 저장하는 허름한 창고용 건물이었는데,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아즈윈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걸 대단히 못마땅해 했다. 본인이 고생하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아란티아의 멋진 여행을 기대하고 있을 카셀이 고생하는 걸 불평하는 것이었다. 카셀이 괜찮다고 하자 아즈윈은 이런 곳에 헛간이 있다면 근처에 분명 마을이 있을 데니 자기가 찾아오겠다고 나싫다. 하지만 카셀은 자기 때문에 그녀가 빗 속을 헤매게 될 게 걱정이라 당장 자기가 나섰다. "그런 일이면 캡틴이 나서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말을 했나 후회되긴 했다. 당시에는 그게 심사숙고 할만한 수준의 얘기는 아니었다. 그걸 아즈윈이 거절할 수도 있었고, 카셀이 그 말을 안 할 수도 있었다. 누구도 그걸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잽싸게 갔다 오면 되겠거니 하고 밭을 따라 말을 발리고 보니 작은 마을이 하나 보였고, 여관도 쉽게 찾았다. 그 때 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카셀은 미리 여섯 명을 위한 방을 세 개 예약해두고 빗줄기가 약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게 한 시간째였다. 도저히 뚫고 갈 엄두가 안 날 정도의 어마어마한 폭우였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탄한 길이었던 곳에 강물이 하나 생겼다. 카셀은 지붕이 부서지도록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관을 운영하는 중년의 여주인이 뒤뚱거리며 나와 말했다. "이봐요, 이 빗속에 친구들이 오긴 힘들 것 같군요. 그러니 예약된 방은 취소하고 그냥 혼자서라도 들어와 쉬어요. 여기 있다가 비에 다 젖겠네." 처마 아래이긴 해도 바닥에 된 빗물로 바지가 흠뻑 젖어 있었다. "들아가긴 해야 돼요. 친구들이 들판의 헛간에 있어서. 제가 먼저 와서 여관을 잡는다고 왔거든요." “그리 헤어지는 게 걱정이면 처음부터 같이 오지, 왜 혼자 왔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카셀은 복잡한 얘기를 정리할 자신이 없어 그냥 얼버무렸다. "세상 살다 살다 이렇게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긴 또 처음이네." 여주인은 더 설득하기도 귀찮았는지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들 기다릴 텐데." 카셀은 애타게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아니 이제는 비가 그쳐도 헛간을 찾아가긴 힘들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지면 익사 당할 만큼 빗물이 불어 있는 밭 한 가운데를 뚫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상황이 급박하고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런 위험은 위험이랄 것도 없었다. 말이 없다 해도 못 갈 거리는 아니었으니까. 카모르트에서 혼자 말 타고 달려가다 들개들 만났을 때만큼 위험한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아서들 있겠지." 카셀은 오히려 그들이 자기를 걱정하고 있을 게 걱정이었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하얀 늑대들이 이런 빗 속에서 위험을 당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해서 카셀은 자기만 편한 곳에서 잔다는 죄책감 속에서 그냥 밤을 흘려 보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보니 비가 그쳐 있었다. 없던 강이 생겨 흐르는 것 치고는 마을의 피해도 그러 커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다시 짐을 챙겨 마을을 빠져 나왔다. 어제 이 마을을 찾아 말을 타고 왔던 길은 물이 불어나 있어, 도저히 통과할 수가 없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길을 빙 돌아가야 했다. 카셀은 그 허름한 헛간이 밤새 비 때문에 부서졌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 정도 빗줄기였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카셀은 그저 친구들의 강인함을 전적으로 믿은 탓에 사고가 일어날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카셀은 황급히 말에서 내려 헛간 쪽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기 전, 카셀은 바닥에 난 발자국을 발견하고 얼른 발을 뗐다. 비가 그친 후에 난 게 분명한 발자국이었다. 특별히 친구들의 발 크기를 재 본적은 없으나 유난히 큰 자국이 게랄드의 것이라는 추측은 해보았다. 헛간이 부서지긴 했지만, 비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카셀은 겨우 안도했다. 그 안도는 문을 연 순간 무너졌다. 카셀은 멍청히 서서 부서진 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린 나무 조각과 어지럽게 흐트러진 짚단을 밟고 주위를 살폈다. 핏자국이 나 있었다. 카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그 끝에 목이 날아간 말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말 목은 시체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카셀은 목을 움켜쥐고 넘어가지 않는 침을 겨우 삼켰다. 다섯 마리여야 할 말이 한 마리뿐 인 것도 그렇고, 그 한 마리의 목이 떨어져 나간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 다섯 마리 말과 함께 있어야 다섯 명이 없는 것도 그렇고......, 모두 이상한 점 투성이였다. 카셀은 너무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젯밤 뭔가가 일어났다. 그리고 다섯 명의 하얀 늑대들은 캡틴을 남겨둔 채 사라져 버렸다 "다들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카셀은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6권으로 계속) 도 서 명 : 하얀늑대들 2부 6권 아란티아의 여왕 지 은 이 : 윤현승 펴 낸 이 : 신현호 출 판 사 :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 2004년 3월 15일 <지은이 소개/ 윤현승> 1978년에 태어나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휴학 중이다, 현재 온라인 게임 회사 JOYIMPACT에서 게임 '테트라모프' 소설 연재 및 배경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크문><다크문 2><헬파이어>이 있다. <사진설명> 늑대의 반쪽 얼굴과 그림자 드리워진 대지의 배경 속에 장군복장 인물의 뒷모습이 그림자져 있다. <차례> 프롤로그 - 마스터 퀘이언 3.카셀 (2) 하이로드의 마차 (3) 레드 게이트에서 일어난 일 4.빌리 (1) 쫓아오는 자 (2) 쫓아가는 자들 5.제이메르 (1) 캡틴과 사냥꾼 (2) 제이메르의 선택 6.쉐이든 (1) 비가 오는 날 (2) 마스터 타냐 7.빌리 캡틴 빌리 <소개글, 서평> '다크 문'의 감동을 넘어 선 새로운 야심작! 작가 윤현승이 쏟아내는 언어의 마술. 가진 것이라고는 어변밖에 없는 카셀. 우연히 아란티아의 보검을 손에 쥔 카셀의 운명은? 카셀의 언변은 과연 그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일에 싸인 어둠의 기사단, 그들의 정체는....? 한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카셀. 그는 결국 영웅이 될 것인가! 3.카셀 하이로드의 마차 얼마나 오랫동안 헛간에 않아 멍청히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흘러간 시간만큼 위험한 존재가 다가온다는 불안함이 머리 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냥 기다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카셀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해괴한 문제는 말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건 친구들이 폭우가 오는 밤에 너무나도 할 일이 없는 나머지 벽을 부수고, 짚단을 집어 던져 헛간을 어지럽히며 논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떤 사고가 일어났다는 첫 번째 증거였다. '습격?' 흔적을 살펴 증거를 수집하거나 당시 상황을 유추해내는 걸 배워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카셀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심히 바닥을 살폈다. 흔적은 아주 많았다. 아니, 오히려 흔적이 지나치게 많기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에 흩어진 짚단과 발자국들이 있었다. 바닥에는 긁히거나 페인 자국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건 이 헛간을 사용하는 농부가 냈을 오래된 흔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 그런 흔적이 생겼는지 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무거운 물건을 끌고 가면 비슷한 흔적이 나는 것 같긴 한데, 그 무거운 물건이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짚단 위에 털썩 앉았다. 누군가 습격을 했다 치더라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건 블가능했다. 한 병 한 명이 군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한 기사들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 다섯을 모조리 사라지게 할 만한 기습이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카셀은 쉐이든과 게랄드 둘이서 몇 백 명의 군대와 싸우는 장면은 상상할 수 있어도, 하얀 늑대 다섯 명이 기습을 당해 쓰러지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보았다. '엄청난 불상사가 벌어져 친구들 중 누군가 다치거나 죽었다 치자. 그럼 나머지는? 론타몬이 쳐들어 온 것 외에는 몇 백 년 동안 외부의 침략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란티아에 군대라도 쳐들어 왔다면? 그래, 그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 정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무리 하얀 늑대라도 순자싸움에서는 당하기 힘들겠지. 그래서 다섯 명 전원이 싸워서 졌고, 상대는 피해가 없다?' 바닥에 핏자국이 있었으나, 그친 어디까지나 말의 것이었다. 사람의 피는 없었다. 카셀은 양쪽 다 다친 사람 없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는 가정은 빼기로 했다. 카셀은 가정의 가장 중심에 있으며, 유일하게 핵심적인 흔적을 가지고 있는 말의 시체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특징 있는 말은 아니었으나, 며칠 째 같이 이동하다 보니 최소한 누구 말인지는 알아볼 수 및었다. 그 말은 쉐이든의 것이었다. 나머지 말은 어디 갔을까? 그리고 왜 하필 쉐이든의 말이 남아 있었을까? 말은 거대한 절단기로 단번에 잘라낸 것처럼 동강나 있었다. 게랄드가 거대한 도끼로 내리찍는다 한들 이렇게 깨끗하게 자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카셀은 동강난 말의 안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꼴이 우스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보니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깨어져 있었다. 바깥쪽으로 깨친 거라 유리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늦게 발견한 것이기도 했다. 흐트러진 물건들과 부서진 나무 조각들, 그리고 깨진 유리창을 보자니, 이것이 전투의 흔적임을 더더욱 확신했다. 시체도 없고, 피도 없었으나 누군가 여기서 싸움을 했다. 그것도 헛간을 들어 흔들어 놓은 것처럼 만들어 놓은 대규모 전투였다. 카셀은 세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첫 번째 가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얀 늑대들은 비가 오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카셀을 걱정한 나머지 이 헛간을 떠나, 마을로 캡틴을 찾으러 갔다 그 사이 길이 엇갈렸다. 이 싸움의 흔적은 하얀 늑대들과 아무 연관성이 없다....... 세상에는 우연의 일치라는 것이 있으니까. 말의 시체도 그 우연의 한 고리 속에 집어넣으면 머리 않을 필요 없이 추리는 끝난다. 두 번째, 하얀 늑대들은 이 곳에서 누가를 맞아 싸웠다. 그 사이 쉐이든의 말이 죽었다. 적은 달아났고, 모두 그 적을 쫓아갔다....... 그러나 카셀을 잊어버리고 적을 쫓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한 명은 캡틴을 기다려주었을 것이다. 세 번째, 분명코 말이 안 되지만, 누군가 하말 늑대들을 공격했고 다섯 명 전부가 당했다. 인질로 잡혀갔든 시체가 되어 끌려갔든, 하여간 하얀 늑대들 전부가 동시에 사라진 것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습격이 있었다면 말 한 마리 죽은 것 정도는 쉽게 납득이 갔다. 누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지는 여전히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이런 저런 추측을 거듭하다 정오가 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곳에서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마을로 되돌아가 친구들이 자기를 찾으러 오지 않았는가를 알아보아야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손님은 안 왔는데?" 어제부터 찾아온 손님이라고는 카셀 뿐이라 여주인은 생각도 안하고 즉시 대답했다. 하얀 늑대들이라면 어딜 가든 눈길을 끄는 인원 구성이라한 번 보면 잊기도 힘들 텐데, 마을 사람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카셀은 마을 입구에 서서 폭우로 엉망이 된 마을 외곽의 밭을 바라보았다. 올해 밭농사 다 망쳤다고 욕 하며 농기구를 끌고 나온 농부들이 몇 보였다. 그는 그제야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사라졌다. 어쩌면 무슨 사정이 생겨 캡틴을 버라고 갈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그들이 헛간 안에서 맞닥뜨린 어떤 선택지에서, 혼자서 나디움을 찾아올 수 있으리라 믿고 과감히 카셀을 버리는 쪽을 택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미 아즈윈과 쉐이든은 그에게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아란티아의 지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었다. 무엇보다 나디움까지는 외길이라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모른다 해도 물어물어 못 갈 것도 없었다. 카셀은 말고삐를 꽉 쥐고 서쪽으로 별은 길로 말머리를 향했다. 이 곳은 도적들이 날뛰는 치안이 엉망인 카모르트의 국경 지대도 아니었고, 전쟁이 터졌던 십여 년 전의 아란티아도 아니었다. 위험한 요소라고는 들짐승의 습격이 다인 평화로운 나라였다. 그 평화를 동물들에게 강요할 처지에 놓이지 않길 빌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괜찭아. 아무렇지도 않아." 나디움까지는 말을 타고 보름 거리였다. 아즈윈이 말한 대로 그 보름은 느긋한 여행길이 되리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러나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불안했지만 막상 혼자서 여행을 시작하니, 오히려 걱정 한 보따리 안고 기다리던 것보다 마음은 더 편했다. 몸을 움직이니 머리도 밝아지고 날씨도 밝아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그렇게까지 큰 일을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말고삐도 느슨하게 늦추고 느긋하게 주위 경치를 바라보는 여유까지 생겼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얻은 지 한 시간 만에 카셀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너무 기본적인 문제라 친구들과 여행할 당시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혼자가 되어서야 표면으로 드러난 현실이었다. 돈이 없었다! 어제 친구들 모두와 하룻밤 묵을 방을 예약하기 위해 가져온 돈과 비상금으로 몇 푼 가지고 있었던 게 다였다. 돈은 던멜과 쉐이든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카셀은 서둘러 머리 속에 상황을 넣어두고 계산을 시작했다. 여름이니 노숙을 한다 치자. 먹을 것은? 다른 경비는? 레드 게이트에서는 통행료도 내야 하는데, 그 돈은? 사태의 심각성이 피부에 와닿자, 카셀은 다시 말고삐를 세게 잡았다. 말은 그것을 정지 명령으로 알아듣고, 멈춰버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싸늘한 바람이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마을 속의 황량함이 바람을 타고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돈도 없이 계속 갈 수는 없었다. 앞뒤를 살펴도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보이는 평야에 오래 서 있는 것도 불안해서, 그는 쫓기듯이 생각을 정리했다. 레드 게이트까지는 대략 이들 거리고, 그 정도면 당장 가지고 있는 돈으로 충분히 갈만한 거리였다 중간에 마을을 거친다 치더라도, 모자라지 않다. 그 다음에 레드 게이트에서 도움을 청한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 기꺼이 나디움까지 안내해주지 않을까? 그 정도 호의를 보이지는 않더라도 허리에 아란티아의 보검을 차고 있는 사람을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방법이 아니야." 카셀은 혼자 중얼거렸다. 저울질 해봤자. 대뜸 한 나라의 보물을 들이 밀고, '내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다.' 라 말했을 경우....... 경비병이 '어서 오십쇼.' 라고 인사를 할 가농성과 체포를 할 가능성을 재보면 어느 쪽으로 기울겠는가? 그 따위 재볼 것도 없는 멍청한 저울질은 그만두자. 게이트의 병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체포를 당할 거라면, 신분을 숨기고 나디움까지 간 다음에 당하는 게 낫다. 적어도 거기에서 체포를 당하면 하급 경비가 아니라 꽤 높은 관리가 맞아줄 것이다. 그럼 경위를 실명할 기회가 있겠지. 카모르트의 짧은 정치를 경험해 본 카셀은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일일수록 낮은 계급에 있는 사람은 건너뛰는게 좋다. 또 어쩌면 카셀이 캡틴이라는 게 나디움에 미리 진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레드에서는 모를 일도 화이트에서는 안다친 생각했다. 아니, 더 운이 좋다면 친구들이 거기 미리 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레드에서 정체를 밝히는 방법은 제외하기로 했다. 한다면 화이트에서 하자. 그럼 어떻게 화이트 게이트까지 가는가? 한 사람 정도 먹을 걸 제공해 주는 인심 좋은 여행자를 기대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카셀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 넓은 평야에서 지나가는 여행자를 우연히 만난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블루 게이트에서 그레이 게이트를 향하는 여행자들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만난다 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활면 영지 하나는 거뜬히 사들일 만한 값어치의 칼을 들고, 모르는 사람의 양심에 모험을 걸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아란티아 내에서 자신의 신분을 입증할 확실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 불안해졌다. 아, 이럴 때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떠날 수 있는 배장이 있다면 좋으련만! 보검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칼의 소유자임을 증명해 줄 사람이 모조리 실종 되었으니, 냉정히 따지고 보면 그는 보검 도둑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돈을 벌면서 가볼까?" 카셀은 그 말을 내뱉은 동시에 소리 질렀다. “소심한 자식! 세상에서 제일 강한 기사단의 캡틴이라는 자식이 그런 생각밖에 못 하냐? 나가 죽어라!" 불쑥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구들 외에도 그의 얼굴과 신분을 아는 이가 한 명 있었다. 그것도 아주 굵직한 사람으로....... 하이로드 탈룬드! 그도 나디움으로 간다고 했으며, 그 느린 마차로 폭우를 들고 앞질러 가지 않은 이상에야 그는 아직 카셀보다 뒤에 처져 있을 게 분명했다. 카셀은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이로드의 행렬을 발견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었다. 화려한 장식의 마차 세 대는 비 온 후 따갑게 쬐는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리고 있었고, 하이로드의 행렬이라는 것을 알리는 거대한 깃발이 먼 곳에서도 알아보기 쉽도록 펄럭이고 있었다. "못 보고 지나치는 게 더 힘들겠다." 못 만날 것을 걱정했던 카셀은 안도했다. 마차 세 대를 지키는 병력은 오십 정도 되고 그 선두에는 블루 게이트에서 봤던 울프의 기사 배롤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달려갔더니, 울프의 기사는 즉시 손을 내밀어 정지 명령을 내렸다. 마치 적이라도 맞이하는 듯 강압적이었다.카셀은 얼른 말을 세우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으나 그의 굳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특별히 대환영 받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나, 이런 냉담한 반응이 있을 줄은 몰랐다. "볼 일이 있어서 되돌아 왔소?" 하얀 갑옷을 입은 울프의 기사는 캡틴에 대한 어떤 예우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이런 사람에게 ‘너 좀 나디움까지 데려다 주시오.'란 말을 꺼내는 건 무척이나 곤란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카셀은 잠깐 어물거렸다. “일이 생겨 일행과 헤어지게 되었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바에야 아무 말이나 내는 게 낫겠다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는 쉐이든이 해 준 충고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굳이 거질말을 할 필요도 없고,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될 울프의 기사와 기 싸움을 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몸을 잠시 의탁하려 하는데, 하이로드를 뵐 수 있겠소?" "부하들에게 버림 받은 건가?" "버림 받은 게 아니라, 거기에는...... 사정이 좀 있소." “그렇다고 갈 곳을 잃어 방황하는 캡틴이라니....... 혼자가 되었다고 굳이 몸을 의탁할 필요가 있나?" 상당히 가시 돋친 말투였다 카셀은 정곡을 절려 대답할 말을 못 찾았으나, 다행이 배롤은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따라 오시오. 나머지는 그대로 이동하라." 배롤은 뒤따르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두고, 카셀을 세 대 중 중앙에 있는 마차로 데려갔다. 배롤은 말에 탄 채로 마차 옆에 붙어 창문을 두들겼다. "하이로드, 손님이 한 명 왔습니다." 창문의 커튼이 걷히고 이틀 전에 봤던 인자한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니, 캡틴 울프가 아니신가?" 그는 즉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잠시 마차를 세워라." 배롤은 두 말 않고 시키는 대로 명령을 전달했다. 오십 명의 병사들이 손짓 하나에 얼 하나 흐트리지 않고 멈췄다. 카셀은 말에서 내린 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 좋은 일로 예정보다 일찍 뵙게 된 점을 사과 드립니다." "내게 있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찌 사과를 받을 일이란 말인가? 길을 가던 어린 아이가 찾아와도 반가운 게 나라는 인간인데, 다를 이도 아니고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아무리 바쁜 일이라도 가던 길을 멈추는 게 당연하지. 안 좋은 일이 무언지 얘기해 볼까? 우선 그 말을 나의 병사들에게 받기고 마차에 같이 타지 않겠나, 캡틴 울프?" "감사합니다." 카셀이 말고삐를 내밀자, 갈색 수염을 기른 한 병사가 다가와 그것을 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캡틴 울프. 저는 아레르라고 합니다. 하이로드의 경호 대장이지요." "아, 경호 대장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미소가 멋진 중년의 병사였다. 카셀은 웃으며 그에게 살짝 목례를 해 보였다. 그러고 옆에 있는 배롤에게도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차가운 시선을 마지막으로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밖에 생각이 안 되는 눈빛이었다. 어딘지 카모르트의 기사 바딩을 연상시키는 행동이었다. 배롤도 울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바딩처럼 대단한 실력자일 것이고, 이런 냉랭한 태도가 처음 카셀을 만났을 때의 바딩과 비슷한 행동이라고 가정한다면, 배롤이 가진 적의는 명백했다. 그 때 그랬던 것처럼 분명 배롤은 카셀에게 도전을 해을 것이다. 카셀은 그 전에 배롤에게, 자치가 검 자루 쥐는 법이나 겨우 배우고 있는 초보자라는 것을 알릴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말할 시점이 아니었다. 카셀이 하이로드의 마차에 오르자 잠시 멈췄던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마차 안의 카셀은 폭우가 있던 날의 이야기를 탈룬드에게 간단히 해주었다. 탈룬드는 심각히 얘기를 듣더니 대뜸 웃으며 엉뚱한 말을 했다.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더니 혹시 이야기꾼 출신이 아닌가 의심스럽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나?" 카셀도 덩달아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얘기를 듣는 걸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또한 제게 그런 얘기를 해주는 걸 좋아하셨죠. 아버지께서 상당한 이야기꾼이셨는데, 지기에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카셀은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친구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만, 우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나디움까지 혼자 가기 벅차 의지할 곳을 찾다 보니 하이로드 탈룬드 외에는 생각나는 분이 없었습니다." "울프의 캡틴이 거할 안식처가 나라니, 기분 좋은 밀이지. 걱정 말고 나와 함께 나디움으로 가세. 보름 후 화이트 게이트는 귀한 손님을 두 명이나 받게 되는군." 카셀은 속으로 안도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여행도 제대로 못 하는 처지가 조금 한심했으나, 지금은 안전한 여행길을 확보했으니 그걸로 됐다. 카셀은 모닥불 앞에 밝아 병사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닭다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과연 엄청난 계력을 가진 아란티아의 하이로드답게 일반 병사들에게도 고기가 지급되었다. 카셀이 괜히 특별한 취급을 받으며 밝을 먹는 건 분명 아니었다. 카셀 혼자서 생각하는 이론이긴 한데, 하이로드 본인이 먹는 음식의 질을 한 단계 낮추면 병사들 전부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질이 한 단계 높아진다. 그 반대를 실행하는 귀족들을 수없이 봐온 카셀이기에,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부터 탈룬드라는 노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분명 카셀만 맛있는 걸 먹고 있어서 병사들이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굴은 탓에 게걸스럽게 먹는 걸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시선도 아니었다. 아마도 평소에 말로만 듣던, 또는 자기가 머리 속으로 이상적으로 꾸며놓았던 캡틴 울프라는 존재가 고작 이런 어린 남자였나 하는 실망감의 표출인 듯싶었다. 배롤은 그들처럼 수군대며 훔쳐보는 것도 아니며, 탈룬드처럼 자상하게 봐주지도 않았다. 그는 묘하게 카셀을 노려보는 일이 많았다. 좀 친해져 보려고 몇 마디 말을 걸면 딱딱하게 대꾸하거나, 아예 대답하지 않기 일쑤였다. 그러니 무시하면 그만인 다른 병사들의 시선까지 불편해졌다. 거기에 대고 뭐라 변명할 처지가 아니라, 카셀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계속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카셀은 입으로 넘기는지 코로 넘기는지도 모르고 닭을 먹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 때 뒤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배롤이 서 있었다. 그는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올려놓고 카셀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횃불에 붉게 비친 그의 자세는 굉장히 분위기 있어 보였다. "식사는 하셨소?" 카셀이 어색하게 뭇으며 물었다. 배롤은 카셀의 옆에 털씩 않았다. "아직." 식사를 담당한 병사가 다가와 그에게 반 마리 분량의 닭과 닭고기 수프를 내주었다. 그는 후루룩거리며 요란하게 수프를 떠먹고 고기를 뜯어먹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당신은 울프의 기사가 아니군. 아니, 적어도 대단한 수준의 검사는 아닌 게 틀림 없소." 병사들은 그의 말을 듣고 무척 놀라는 얼굴이었다. 카셀 역시 먹던 닭다리를 떨더뜨릴 정도로 놀랐다. 다행히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그 얘기는 단 둘이 있을 때 합시다." "왜? 여럿이 있으면 못 할 얘기요?" “단 둘이 있는 게, 당신한데 무서운 것도 아니잖소?" 카셀은 자기도 모르께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하고 말았다. 배롤은 입을 우물거리며 카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에게 그 강한 시선을 돌렸다. 병사들은 얼른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배롤은 다시 닭을 뜯기 시작하더니,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지." 그가 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카셀은 가시방석에라도 않은 듯 불편했다. 곧 그는 그릇을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별이 잘 보이는 편평한 풀밭으로 안내했다. "얘기할 게 있으면 해 보시오." 배롤은 대결을 하는 듯 거리를 벌여놓고 말했다. 카셀은 그가 칼을 뽑는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얼른 말했다. "카모르트의 가장 뛰어난 기사도, 두어 번 만나고 나서야 알아낼 사실을 어떻게 대번에 알아냈는지 모르나......, 당신 말이 맞소. 나는 칼을 쓰지 못 합니다." 배롤은 이미 놀랄 것도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당신이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되어 있는 건가? 마법사인가? 그래서 그 다섯에게 주문을 걸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나?"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게 아니었다. 배롤은 지금 카셀을 비꼬고 도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창피해 하지나 화를 내길 바라는 건지도 몰랐다. 카셀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쉐이든이 말한 대로 울프의 기사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면 일단 검을 휘둘러보는 자들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참 막 나가는 조직 같긴 한데, 거기에도 어느 정도의 룰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룰을 깨뜨리고 나타난 게 카셀이었다. 카셀은 스스로 배롤의 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인정했다. 그래서 지금 그가 하는 말에 대해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되려 어떻게 하편 그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또 블루 게이트에서 아즈윈에게 그런 폭언까지 당했으니 더욱 이런 행동에 납득이 갔다. "그렇소. 마법이었소." 카셀은 지금부터 내뱉는 말을 수습할 수 있을 지 자신 없었으나 일단 말해 두었다. 배롤의 눈썹이 치격 올라갔다. 눈에는 의심이 한 바가지 정도 흘러 넘치고 있었다. "마법?" “당신이 생각하는 루터아의 마법사 같은 건 절대 아니오. 그냥 나 스스로도 설명할 자신이 없기에 마법이라 한 거요." “질 나쁜 농담이군. 루티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울프의 기사 앞에서 그런 농담은 삼가는 게 좋소." "농담은 아니오." 카셀은 그런 목숨 건 농담은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요. 당신이 아는 하얀 늑대들이 누구에게 힘으로 굴복 당할 존재들이오?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설마!" 배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놓고 칼을 뽑지 못 하게 막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하고 카셀은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나를 친구로 인정했고, 또 캡틴으로 인정했소.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을 설명하긴 나도 쉽지 않소. 또 내가 여기서 열심히 그 과정을 설명한다 해도 당신이 그걸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소. 그럼 뭐라 설명해야겠소? 그러니 마법이라는 단어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지 않겠소?" 그는 조금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차라리 그 부분에 대해 뭔가 따져주길 카셀은 기다렸으나, 그는 그나마도 말하지 않았다. 괴롭기 그지 없는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불만은 많은 주제에 입이 무거운 기사만큼 힘든 대화 상대는 없을 거라고 카셀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란티아의 보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는 수 없이 카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가 대화의 돌파구를 열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상대에게 자신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아란티아의 보물이자, 울프 기사단의 상징이지," "그게 지금 나에게 있소." 카셀은 스스럼없이 칼을 꺼냈다. 배롤은 어깨를 아주 미묘하게 움츠렸고, 그건 카셀이 예상한 반응이었다. 울프의 기사라면 당연했다. 하얀 늑대들도 마스터 퀘이언이 캡틴을 하라고 대뜸 이 칼을 내밀었을 때 기꺼이 받은 이는 로일 밖에 없었다고 얘기해줬다. 로일의 성격이라면 보검이 아니라, 세상을 멸망시킬 신의 점이라 해도 주면 받겠지만....... 보통의 울프라면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지도 않고, 정말 울프의 기사들을 지배할 캡틴 감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소. 그러나 하얀 늑대들은 나를 캡틴으로 인정했고, 이 보검도 나를 주인으로 인정했소." 카셀은 칼끝을 잡아 손잡이 쪽을 배롤에게 내밀었다. “나는 강요하지 않겠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울프 기사단을 동경하고 기사가 되길 꿈꾸어 온 별 볼일 없는 농부에 불과했었소. 그런 내가 감히 당사자 앞에서 그 보검을 가지고 있을 자신이 없군. 당신이 맡으시오." 배롤은 손을 내밀어 손잡이를 잡았으나 끌어당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카셀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보검이군." “그건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카셀은 그가 보검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원래 임시적으로 캡틴을 맡고 있었던 로일이 가지고 있던 거요. 몇 가지 우연이 겹쳐 내게 왔고, 결국 지금 내가 맡게 되었소." “하얀 늑대들은 당신이 이걸 가지고 있는 걸 아무렇지도 많게 여기고 있소?" “그들에게 있어 나는 캡틴이었고, 캡틴이 보검을 소지하고 있는건 당연하오." "그럼 그 소중한 보검을 왜 내게 서슴없이 주는 거요?" “당신은 나를 캡틴으로 인정하지 않고, 캡틴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울프의 기사 앞에서 보검을 소유할 정도로 나는 담이 크지 않소. 또한 이 칼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가지고 계시오, 원한다면!" 카셀은 마지막 말을 특히 강조했다. 배롤은 손잡이를 잡은 손을 당길까 놓을까 꽤 오래 고민했다. 사실 카셀은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캡틴이라는 유일한 증거물이 사라지는 셈이긴 하지만 하이로드가 함께 하고 있는 이상 굳이 그런 증거물은 필요 없었다. 아니,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편이 옳았다. 배롤이라면, 카셀의 손에 있는 것보다 더욱 안전하게 지켜즐 것이다. 문제가 터지면 목숨이라도 걸고! 배롤은 손을 떼는 걸 선택했다. 카셀도 대충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아란티아의 보검이라는 물건은 하얀 늑대들조차도 맡기를 꺼려하는 물건이었다. "원래 당신이 가지고 있으니 끝까지 당신이 맡고 있는 게 좋겠군.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캡틴으로 인정한다는 뜻을 아니오." 카셀은 끝까지 그의 프라이드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칼이 카모르트에서 고생을 한 친구가 아니었다. "나 역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위대한 기사들의 머리 위에 설 생각은 없었소. 우선 나는 당신과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고, 와중에 차츰 하얀 늑대들과 나 사이에 있었던 것과 같은 마법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을 따름이오." 배롤은 뭔가 다툼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카셀이 정중하고 솔직하게 나오니, 할 말을 쉽게 찾지 못 했다. 그는 끝까지 굳은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이토록 무시하는데 화가 나지도 않소?" "왜 화가 나겠소? 나는 기본적으로 울프 기사단을 동경하는 소년에 불과했었소.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차라리 내게 있어 행복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까지 반응은 절대 기대하지 않았으나, 카셀은 별빛 아래에서 반사된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드러나는 것을 포착했다. 밝은 곳이었다면 분명히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은 그런 표정....... "자세한 얘기는 나디움에서 쉐이든이 차차 설명해 준다고 했으니 그 때나 들으면 되겠지. 그런데 하얀 늑대들은 모두 어디 가버린거요?" 배롤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걸 나도 몰라 이렇게 된 거요." "안 좋은 일은 아니오?" "아니 길 빌고 있소." 배롤은 잠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가 마차가 있는 곳으로 되들아 갔다. 뭔가 더 할말이 있는 듯 멈췄던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셀은 그가 벌어지고 난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들 덕에 저항력이 많이 생겼다는 하나, 그래도 역시 강한 기사들 앞에 서면 숨쉬기가 괴로운 카셀이었다. 하지만 아란티아에서 만난 첫 번째 울프의 기사와의 첫 번째 진지한 대화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래왔겠지만, 하이로드 탈룬드의 마차 행렬은 지루할 정도로 안전하고 무난한 여행을 이어갔다. 카셀은 앞으로도 이 지루함이 이어지길 빌었다. 병사들의 꺼림칙한 눈빛도 사라졌다. 원래 배롤의 행동 때문이었으니, 그가 대우를 해주자 그런 문제는 즉시 해결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배롤이 진짜로 카셀을 캡틴으로 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탈룬드가 하도 극진하게 캡틴, 캡틴 하고 부르니까 마지못해 캡틴이라는 호칭을 달아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게 어떤가 싶었다. 경비 대장 아레르 만큼은 카셀을 처음부터 변함없이 정성스럽게 대해주었다. 수시로 물이 마시고 싶은가, 불편하지는 않은가, 원하는 게 있는가를 물어왔다. 그 때마다 매번 카셀은 괜찭다고 했지만, 또 한 시간만 있으면 와서 묻곤 했다. 화이트 게이트에 도착할 보름동안 과연 이 질문이 몇 번 이어질 지 계산해 보는 것도 지루함을 타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어주었다. "이건 비밀인데 저도 사실은 울프 기사단에 지원하려 했습니다. 실력도 부족하고 결혼한 몸이라 모험을 할 수도 없어 결국 안정적인 삶을 택해버리긴 했지만 아직도 그 꿈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습니다." 잠깐 시간이 남았을 때 아레르가 몰래 다가와 말했다. 친절의 내막을 알고 나니 그의 행동이 부담스러워 지는 카셀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솔직함이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순수함에 거짓으로 응하고 싶지 않았다. "하이로드를 모시는 일도 울프 기사단 못지 않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셀은 겨우 그런 격려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해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레르는 희미하게 웃었다. 배롤이 휴식을 끝내고 다시 출발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레르는 인사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앞으로 저런 사람을 얼마나 만날까? 모두들 자기 머리 속에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캡틴 울프의 이미지를 내게 강요하겠지, 그 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자신을 어떻게 과대포장해서 살아남을지 고민했던 과거가 어떤 면에서는 쉬웠다.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험성에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필사적으로 한 가지만 밀어붙이면 되니 자신의 가치관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과 다른 의미에서 힘들었다. 카셀은 울프 기사단을 욕되게 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 조언을 들을 만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결국 카셀은 힘내자는 자기 위로를 끝으로 그런 고민을 마무리했다. 하이로드의 길을 막는 기사가 한 명 나타날 때까지는 정말 그것 하나가 고민의 모든 것이었다. 나디움까지만 가면 친구들을 만나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도 곧 눈 앞에 닥친 일로 무너져버렸다. "지금 가는 마차는 길을 멈춰라!" 기합만으로 군대를 멈추게 할 만한 우렁찬 목소리였다. 몇몇은 놀라 멈추고, 몇몇은 직접적인 정지 명령이 아니었던 터라 계속 이동하는 바람에 대열이 약간 흐트러졌다. 하지만 배롤은 침착하게 손을 내밀어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하이로드의 마차를 명령으로 세우려 하는 무례한 자가 누구냐? 그 이유가 부적절하다면, 용서치 않겠다." 배롤의 목소리 역시 상대방 못지 많게 컸다. 카셀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멀어서 상대측 기사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건 간에 마차가 멈춘 위치가 좋지 않았다. 길의 오른쪽은 언덕이 있었고, 왼쪽은 우거진 수풀이 있었다. 양족 다 시야를 가리고 있어 어지간한 병력을 숨길 수 있었다. 괜한 걱정인가 싶었으나, 최소한 배롤이나 아레르는 이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다. "기습이 있을 것 같소, 캡틴 울프?" 언제나 느긋한 탈룬드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 병력을 공격할 무모한 도적 떼가 아란티아 내에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울프의 기사도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두 명이지!" 탈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카셀은 뜨끔했지만 그를 더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 하지 앉았다. “내 이름은 빌러 매트니다. 그 족에 울프의 기사가 있는가?" "나다." "무례하게 길을 막은 점은 사과하지. 나는 아란티아 귀족의 행렬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대의 이름을 밝혀주면 가급적 큰 마찰 없이 그 쪽과 얘기하고 싶다." 빌리라는 남자는 의외로 상당히 정중했다. 그러나 배롤은 가차없이 대답했다. “도적 같아 보이는데, 따지는 것도 많구나. 내 이름은 배롤 울프다." “그쪽에 캡틴 울프도 있는가?" 배롤은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 밖을 내다보던 카셀은 자기를 부르는 말에 깜짝 놀랐다. 배롤은 잠깐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있다.” 카셀은 우선 그가 자신을 캡틴으로 인정해 줬다는 면에서 감사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거라는 불안감에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를 내게 보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빌리가 말했다. “울프의 캡틴을 그딴 식으로 오라 가라 말한다면, 이미 나와 마찰 없이 얘기하긴 그른 것 같다. 타당하고 논리적인 이유를 말하라. 내 판단 하에 그럴 듯하다면, 캡틴에게 전해주겠다. 그 이후의 판단 또한 캡틴에게 맡기고 나는 빠지도록 하지." "좋다, 기사 배롤. 나 빌리 매트니가 캡틴 울프에게 정식으로 대결을 요청하.......“ "거절하겠다." 배롤은 빌리가 '요청한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끊어버렸다. 빌리는 조금 황당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시합을 하자는 뜻이다." "거절한다고 했다.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마라. 네가 무슨 권리로 감히 시합을 요청한단 말이냐?" 빌리는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가 뒤따르며, 빌리 옆에 한 남자가 섰다. 얼굴은 예쁘지만 목소리만큼은 어느 남자 못지 않았다. “언제부터 울프 기사단이 형식과 절차를 따졌나, 배롤 드로이?" 배롤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슈벨? 슈벨 레프만?" "그래! 네가 가진 울프라는 성을 대신 가지고 있어야 할 기사다. 5년이나 지났는데, 이 미천한 녀석을 기억해 주니 영광이군." “그 독특한 얼굴을 잊을 리가 없지." 슈벨은 웃는 듯 화난 듯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문제는 넘어가지, 그나저나 믿을 수가 없군. 다섯 번 겨뤄 다섯 번 모두 내게 패했던 녀석이 어떻게 울프라는 성을 달 수 있었지? 엉? 말해봐라, 자식아!" "두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닐 거다. 물론 네가 그 테스트의 의미를 알 리가 없을 데니 굳이 말할 이유도 없지." 배롤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잘 알지! 그 테데스트를 어떻게 통과하는지, 아주 잘 안다." "그런 녀석이 왜 떨어졌나?" 슈벨은 빌리보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런 건 상관 안 해. 현재 누가 더 강하냐의 문제 아니겠나?" 배롤은 콧김을 푹 내뱉었다. "기다려라." 그는 말을 돌려 카셀과 탈룬드가 있는 마차로 되돌아왔다. “하이로드 탈룬드, 제 지휘권을 아레르에게 위임하고 지금부터 저는 자유 행동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뭐, 뭘 하려고 하는가?" 탈룬드는 약간 겁을 내며 물었다. 기사들 간의 시합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울프의 기사는 절대 이런 도전을 피하지 않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역시나 그도 울프의 기사였다. 탈룬드는 불안했으나, 고개를 끄덕 였다. “나는 허락하겠네. 하지만.......” 그가 카셀을 보자, 배롤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캡틴, 허락하시겠소?"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카셀은 그러라고 형식적으로 대답하려다, 문득 이 대답이 아주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이려니 넘기기에는 뭔가 이상한! "늑대의 이빨을 드러내지 마시오." 카셀은 대꾸했다. 배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건......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이오?"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내가 설명해야 하오?" 카셀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배롤이 머뭇거리자 카셀은 그의 의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앞에 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소. 전력을 다하지 마시오." 배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어젯밤에 말한 당신이...... 아니군."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우리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정도로 당신과 나의 신뢰가 구축된 건 아니지 않소?" 배롤은 피식 웃었다. "사과하리다. 당신이 하얀 늑대와 함께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군." "앞으로는 울프의 기사들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오. 조심하시오." 배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아주 복잡한 심경이겠으나 기분 나쁜 표정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럼 곧 돌아오지." 배롤은 힘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몰아, 델리가 서 있는 지점과 마차와의 중간 지점으로 달려갔다. 마차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려다 생각을 바꾸어 카셀은 마차 밖으로 나갔다. 탈룬드가 왜 그러냐고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슈벨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카셀은 어느 정도 위험하지 않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아레르가 걱정이 되었는지 따라왔다. "그 사이 마스터 퀘이언에게 많이 배우셨나, 울프의 기사 양반?" 슈벨은 확실히 남자라고 하기에는 얼굴 생김이 상당히 예뻤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지금 서로 기를 세우고 맞서는 다른 두 남자에 밀리지 않았다 배롤은 상대의 비꼬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에서 내렸다. "무슨 일로 돌아왔나, 슈벨?" “난 아란티아에 오면 안 되냐?" 카셀은 좀 더 앞으로 다가가 둘의 대화를 자세히 들었다. "돌려 말하지 마라. 윈하는 게 복귀라면 다시 테스트에 들게 해줄 수도 있다. 너 정도 실력자가 떨어진 건 사실 우리로서도 안타까운 일이었으니까." 배롤은 아주 정중한 말로 슈벨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나보다 더 강한 것처럼 말하지 마라, 자식아. 계급이 위인 것처럼 말하지도 말고." 둘의 대화는 컸으나, 카셀에게까지만 들리는 정도였다. 아마 반대편에 말을 타고 있는 빌리 매트니라는 기사에게도 들릴 것이다. 기사인지 도적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았지만....... 배롤은 갑자기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아마도 카셀에게 더 멀리 떨어지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카셀은 두 남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 기사는 누군가?" 배롤은 빌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듣고 놀라지나 마라. 익셀런의 기사다." "익셀런?" 놀란 사람은 배롤이 아니라 뒤에서 듣고 있던 카셀이었다. 카셀은 빌리를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했다. "그 기사단에서 여길?" "네 뒤에 있는 캡틴 울프와 겨루기 위해서 왔다고 해두지....... 근데 저게 진짜 네 캡틴이야?" 슈벨은 수상쩍게 카셀을 바라보았다. "아니 라면 어쩔 것이며, 맞는다면 어쩔 거냐?" 배롤의 대꾸에 슈벨은 목덜미를 주물럭거렸다. "오냐, 네가 울프의 기사가 되었다고 기세가 올랐나 본데, 여기에서 오늘 박살을 내주마." "시합 형식이 아니라도 좋은가? 그러니까, 죽어도 좋냐는 질문이다." 배롤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뭐가 어째?" 슈벨은 즉시 칼을 뽑았고, 동시에 배롤도 칼을 뽑았다. "5년 전을 상상하고 있나 슈벨? 울프의 기사가 되어 내가 받은 훈련이 뭔지 상상한다면, 너는 감히 나에게 시합을 청하지 못할 것이다." 배롤의 말에 슈벨은 미소 지었다 카셀에 눈에는 뭔가 못된 장난을 벌일 준비를 마친 사악한 사춘기 소년의 눈동자 같았다. "글쎄, 캡틴을 이 시합에 내보내지 않고 나선 걸 후회나 하지 마라." 싸움을 시작한다는 의미로 들은 서로의 검을 허공에 X 자로 부딪혔다. 그 순간 슈벨은 탐색도 없이 바로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가볍게 칼을 댔던 배롤은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쳤다.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배롤도 반격했다. 그러나 슈벨은 순식간에 몸을 피하고 왼쪽을 공격했다. 배롤이 왼쪽을 따라가면 어느 새 오른쪽에 가 있고, 오른쪽을 막으면 다시 왼쪽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뒤에서 보는 카셀의 눈에는 슈벨이 가끔 사라져 보일 정도였다. 잠깐 허점을 보이는 순간 슈벨은 배롤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켜우 검은 피했으나 뒤따라 걷어차는 발길질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배롤은 뒤로 한 바퀴 굴러 겨우 일어났으나 온몸에 흙을 뒤집어 써 하얀 옷이 더러워졌다. 슈벨은 승리의 환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냈다. "울프의 기사란 게 겨우 이 정도라면 대체 난 뭣 때문에 그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훈련을 했는지 모르겠군." 배롤은 가슴에 묻은 흘을 털며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다. "역시 넌 울프가 되었어야 할 인재였어. 다시 물어도 될지 모르겠군, 두 번째 테스트의 의미를 알았다면 왜 테스트에서 떨어졌나?" "같잖은 기사단에 들어가기 싫어서였다. 됐냐? 싸움 중에 이것 저것 묻지 마."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어." 배롤은 다시 슈델에게 검을 휘둘렀다. 슈벨은 압도적인 빠르기로 상대를 제압했다. 겨우 그의 공격을 몇 번 막던 배롤은 또 한 번 걷어 채여 쓰러졌다. 한참 누워있던 배롤은 또 흙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카셀이 보기에 그것은 보통 치욕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울프라는 명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카셀은 보고 있는 병사들이 동요를 일으킬 게 걱정되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길 왼쪽에 있는 수풀 사이로 사람의 얼굴이 슬쩍 보였다. '매복!' 카셀은 못 본 척 하고, 즉시 아레르를 불렀다. "예, 캡틴 울프?" "눈빛을 돌리지도, 대답도 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지금 수풀에 매복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처하지는 말고 병사들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키십시오." 아레르는 그 말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갔다 그리고 병사들 하나하나에게 조용히 알렸다. 카셀이 혹시나 해서 보니, 과연 병사들은 정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슈벨과 배롤의 전투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각자 쥐고 있는 창에 힘을 주고 있었다. "야, 배롤. 어떻게 된 거냐?내가 지나치게 강해진 게 아니라면 넌 분명 5년 전보다 더 약해진 거 같은데? 혹시 힘을 아끼고 있나? 죽기 전에 드러내 보시지!" 슈벨은 호통쳤다. 카셀은 배롤이 즉시 맞받아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전력을 다 하는 거 맞아. 네가 강해진 거야." "뭐야?" "하지만 슈벨, 그래서 더더욱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러니까......, 네가 정말 울프 기사단에 합격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다면 묻는 거다. 넌 정말 혼자 힘으로 훈련해서 울프 기사단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나?" "지고 있는 녀석이 할 말은 아는 듯 하다만?" "더 강해지길 원했다면 년 선택을 잘못 했다. 혼자 있으면서 그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했다면 너무나도 아까운 재능이다." "너 지금......“ 배롤은 슬쩍 칼을 들어올렸다. "지금까지는 배를 드로이였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배를 울프다. 너에게 울프 기사단의 두 번째 테스트가 갖는 의미를 가르쳐 주겠다." 미묘하게 자세가 바뀌었다. 카셀은 그 변한 자세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둘의 격돌이 다시 시작되었다. 특별히 더 발라진 것도 아니고 더 강해진 것 같지도 않았다. 슈벨이 소리질렀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마!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뿐이잖아." 슈벨은 배롤의 공격을 받아내고 다시 빠르게 검을 날렸다. 하지만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다. 여전히 슈벨이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팔을 베이고 어깨를 베인 쪽은 슈벨이었다. 슈벨이 당황하는 빛이 역력한 것을 보니, 카셀은 뭔가 배롤이 유리해졌다고 생각했다. 자기 눈으로 싸움의 양상을 알 수 없으니 다른 이의 눈으로 그것을 확인해야 했는데, 멀리서 보고 있는 빌리도 무척 당황해 하고 있었다. 카셀은 손에 땀을 쥐고 싸움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너 이 자식, 아까는 오른발 안 움직였구나!" 슈벨은 칼을 휘두르면서 느닷없이 소리쳤다. "그게 내 예전 버릇이었으니까 배롤 드로이라는 녀석에게는 그걸 적용해 봤지. 그럴 듯 하지 않았나?" 이제 비꼬고 도발하는 족은 배롤이었다. 슈벨의 움직임이 더 커지고 더 과격해졌다. 배롤은 침착하게 그 빠른 공격들을 다 막아냈다. "그만!" 갑자기 빌리가 소리켰다. 슈벨은 얼결에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났고, 배롤도 굳이 그를 쫓아가지 않았다. "내가 불리해 보였나?" 슈벨이 말했다. "아?" 카셀은 빌리가 왜 둘의 싸움을 중지시켰는지를 알고 외마디를 내질렸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기사가 있었다. 카모르트에서 봤던 바로 그 검은 기사가 빌리를 지나쳐 슈벨과 배롤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붉은 장미 백작의 12 쏜즈가 변한 바로 그 검은 기사! 카셀은 잠깐 잊었던 어린 시절의 악몽을 되돌아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체 왜 검은 기사가 아란티아까지 쫓아왔는가? 아까부터 느껴온 그 불안감의 정체는 바로 이 자에게서 기인하고 있었다. "익셀런?" 배롤도 고개를 갸웃하며 슈벨에게 물었다. "저 녀석도 익셀런의 기사냐?" 여태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으나, 그 질문에 슈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은 기사에게 말했다. "블랙, 이 일은 우리 둘에게 맡기기로 했잖아," 검은 기사는 빌리를 지나, 슈벨을 지나치더니, 가늘게 눈을 뜨고 노려보는 배롤까지 무시하고 지나쳐 왔다. 그리고 정확히 카셀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했다. 검은 기사가한 걸음 내디디면 쇳소리가 공기를 진동시켰고, 그 소리 하나하나에 카셀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막을 수 없는 화살이 날아오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오만가지 추측이 머리 속을 멤돌았다. 카셀은 겁에 질린 나머지 돌아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캡틴 울프가 적에게 등을 보일 수 없다는 자존심으로 버텼다. 카셀은 주먹을 꽉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은 새로 등장한 적에 대해 경계를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검은 기사의 무서움을 알지 못한다. 만약 검은 기사가 칼질을 시작한다면 아무리 많은 습자의 병사들이라도 도살장에 묶여 백정의 칼을 기다리는 돼지와 다를 게 없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저렇게 침착할 수 있는 것이다. 수풀 속에 있는 매복 병들은 내버려 두고라도, 50명밖에 안 되는 하이로드의 중무장 보병들로는 검은 기사 하나를 막지 못한다. 몇 백 명의 카모르트 병사들도 검은 기사 몇 명을 저지하지 못 했다. 그 때 검은 기사의 목으로 하얀 칼날이 접근했다 위협용이었으나, 검은 기사는 보지도 않고 뒤쪽에서 접근하는 칼을 할버드의 손잡이 부분으로 막았다. 배롤이었다. 그는 칼날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캡틴에게 볼 일이 있다면 나를 거쳐라!" 카셀은 그 자에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 피하라고 경고하려 했다. 당장 다음순간에 벌어질 끔찍한 참사가 머리 속에 그려졌다. 그러나 그런 갑작스러운 공격은 없었다. 검은 기사는 뒤를 돌아보며 배롤에게 대꾸했다. "내가 볼 일이 있는 건 네가 아니다." 카셀은 소리 지르려던 입을 다물었다. 특유의 울리는 목소리는 분명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배롤이 막아선 검은 기사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볼 일을 내게 거치라는 거다." 배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검은 기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크지 않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막지 않길 바란다. 이 검을 치우지 않으면,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검은 기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배롤의 검을 할버드로 쳐냈다. 그리고 빌리와 슈벨에게 말했다. "미안하군. 너희들의 사냥감인 듯 한데, 내가 빼앗게 되었군." 배롤은 카셀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말하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카셀은 지금 다른 어떤 것보다 검은 기사가 '말을 한다.'는 사실에 경악한 나머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사람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지, 이렇게 타인과 의사 소통을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풍기는 기묘한 공포는 노르만트에서 만났던 그것과 동일했으나 뭔가가 달랐다. 그것이 뭔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배롤의 검과 검은 기사의 할버드가 격돌했다. 카셀은 움찔 하며 얼른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배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카셀로서는 측정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검은 기사의 할버드와 맞부딪힌 배롤은 뒤로 네댓 걸음이나 나가떨어졌다. 비틀거리다가 겨우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는 걸 보니 그 역시 상대의 힘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앙이었다. "으음." 배롤은 신음하더니, 다시 자세를 갖추었다. 그 순간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것 같은 할버드가 주욱 늘어나는 것처럼 휘어져와 배롤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배롤은 놀라며 고개를 숙여 피하고 다음에 이어지는 공격에 뒤로 점프했다. 그 결과로 배롤은 슈벨의 옆에 다다르게 되었다. 슈벨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으나 휘두르거나 배롤을 견제하지는 않았다. 배롤은 아픈 손을 주물럭거리며 물었다. "저 녀석, 어디서 나타난 놈이냐?" 슈벨이 대답했다. "친근한 듯이 묻지 마, 자식아. 그리고 널 쓰러뜨리는 건 나여야 하기 때문에 경고하는데, 포기해라. 혹시라도 네 캡틴의 실력이 한 수 위라면, 맡기는 게 좋아. 검은 기사의 목표는 처음부터 네 캡틴 하나였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상태라 카셀도 그 소리를 작게나마 듣고 있었다. “나를 원해?" 카셀은 몹시 당황했다. 카모르트에서 복수를 하기 위해 살아 돌아온 거라는 확신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실종된 하얀 늑대들이 사실은 저 자에게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불쑥 올라왔다. "싸우다가 포기하는 건 해본 적이 없어," 배롤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칼을 들고 검은 기사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움직여, 관절을 푸는가 싶더니 카셀에게 말했다. "캡틴, 뒷일을 맡기리다." "에?" 카셀은 눈을 동그랗게 했다. 배롤은 뭔가를 결심했고, 그 결심이 뭔지 눈에 보이자 카셀은 다급해겼다.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게 울프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했다. 하지만 카셀은 그의 긍지 높은 도전에 대해 멈추라는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목숨을 내걸고 전투에 임하는 기사를 무슨 수로 막겠는가? "아아, 이건 로일한테 쓰려고 아껴둔 건데.......“ 그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점은 기사의 앞에 싫다. 의식을 진행하는 것처럼 칼을 얼굴 앞에 세워 잠시 눈을 감았다. 검은 기사도 두 손에 할버드를 치켜들었다. 배롤이 눈을 및, 검은 기사도 그 눈을 주시했다. 배롤은 아주 낮게 상대의 품 쪽으로 파고들더니 칼을 올려 쳤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그것을 막고 날이 있는 할버드의 반대쪽으로 후려쳤다. 그러나 배롤은 이미 방향을 돌려 검은 기사의 다리 쪽을 쳤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거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카셀은 보지 못 했다. 그러나 검은 기사의 할버드가 올라간 후, 배롤의 몸이 뒤로 날아 바닥에 거꾸로 처박히는 것만은 깃털이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천천히 보였다 "배롤!" 카셀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검은 기사도 잠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허벅지 쪽의 베인 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배롤은 배에서부터 가슴까지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고, 피가 솟아올라오고 있었다. 카셀은 당황해 하는 병사들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전원 전투 준비! 자리를 지키고 하이로드의 보호를 우선하라."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의 어떤 기사나 캡틴보다 크고 우렁찼다. 아레르가 그 명령을 반복했고, 당황한 병사들은 서둘러 칼과 창과 방패를 들었다. 배롤은 정신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었으나, 눈을 뜨지 못 했다. "아레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시오." 카셀은 상처를 손바닥으로 막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의 등 뒤로 아레르가 아닌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존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검은 기사였다. 아직도 허벅지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으나, 점점 연해졌다. 카셀은 그간 할버드를 치켜들어 자신의 목을 내리칠 거라 생각했고, 만약 그렇게 되면 어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이 상황은 카셀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훌륭한 실력 이다." 검은 기사가 말했다. 카셀은 아직도 검은 기사가 말을 한다는 사실이 적응 되지 않았다. 검은 기사는 굵고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자와 려루면서 잊었던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울프의 캡틴을 만나려 한 건 그런 이유 계문이었나 보군. 어떤가? 부하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점을 들어 나와 겨루지 않겠나?" 그 순간 아레르가 칼을 들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의 뒤에는 부하 다섯 명이 따르고 있었다. "멈춰라 캡틴 울프에게 해를 끼치는 자는 내가 용서치 않겠다." 검은 기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레르가 달려오는 쪽으로 할버드의 날을 돌렸다. 매복한 적이 있고, 군대 하나와도 싸울 만한 검은 기사가 있으며 유일하게 검은 기사와 싸울 만한 울프의 기사는 쓰러졌다. '전멸 당한다!' 카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명령했다. "아레르, 그 자리에 멈추시오!" 아레르는 거의 반사적으로 달리던 걸 멈췄다. 뒤따르던 병사들도 우루루 멈췄다. 카셀은 다급하게 말했다. "목표가 정말 나 하나뿐인가?" 검은 기사는 카셀의 당당한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물론 카셀은 투구 속 어둠 너머에 있는 그 자의 눈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의 강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대가 나를 충족시켜줄 존재라면.......” 검은 기사가 대답했다. “좋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겠다. 캡틴 울프의 명예를 걸고!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말하라." “나머지는 건드리지 마라." "상관없다." 카셀은 검은 기사의 대답을 듣자마자 빌리와 슈벨에게 소리쳤다. “들었나? 매복해 있는 병사들을 모두 원위치 시켜라." 빌리는 손을 들면서 말했다.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니, 약속을 지켜라 어쩌라 하는 논의는 생략하도록 하지. 애초에 그 쪽에서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예비였다. 이 매복이 불쾌했다면 사과하겠다. 서전트 그린우드, 돌아와라."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스무 명이 불복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라기 보다는 도적들 같은 얼굴이었다. 게다가 뭔가 대단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빌리의 명령이 어찌 되었건 간에, 이들은 한바탕 싸움을 벌일 준비를 했던 게 분명했다. "내 스스로 그 쪽으로 가겠다. 그러니 다친 동료를 보살필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 검은 기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빌리도 말 없이 카셀을 기다려주었다. "아레르, 배롤의 상처를 봐주시오." 아레르가 달려왔고, 뒤따라 가죽 배낭을 젊어진 병사가 달려왔다. 배롤은 겨우 눈을 뜨고 있었다. 입에서 흐르는 피가 뺨을 타고흘렀다. 그가 힘겹게 말했다. "가면...... 다, 당신은...... 죽을 거요." "아마도." 카셀은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을 풀어 그의 손에 쥐어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칼은 당신이 맡도록 하시오." "그럴 수는.......“ “당신이 이렇게 되는 동안 아무 것도 못 히필 뒤에서 바라보기만한 힘 없는 캡틴이군요. 미안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런 정도네요." 카셀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자를 따라가는 게 꼭 죽는 길은 아닙니다. 그러니 배롤, 내 걱정은 말고 꼭 살아 하이로드를 지키십시오....... 보점을 지키십시오." 배롤은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캐, 캡틴.......“ 카셀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만약 하얀 늑대들을, 내 친구들을 만나거든 이 얘기를 전해 주십시오." 배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해 고개만 끄덕였다. 카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레르가 뒤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카셀은 웃었다. “당신은 내가 검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군요. 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배롤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이로드의 경비대를 이끄는 캡틴은 당신이잖습니까?" 카셀은 손을 들어 인사하고 돌아섰다. 익셀런의 기사와 과거 울프 기사단 시험에서 떨어진 자, 그리고 검은 기사....... 카셀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빌리에게 물었다. "익셀런의 기사라 했소?" "그렇다. " 빌리는 짧게 대답했다. "그럼 기사 대 기사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 주겠군." 카셀은 빈 손을 들어 보였다. 허리에 칼도 없었다. 빌리는 오히려 콧살을 찡그렸다. "무기를 뺏는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 그건 상관 없소. 자, 갑시다 원하는 게 나였으니, 나로 뭘 할 지 궁금하군." 카셀은 그 말을 툭 던져두고 자기가 먼저 걸어가 버렸다. 가급적 빨리 탈룬드와 배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그리고 천천히 걷는 검은 기사를 힐끔 노려보았다. 그의 주위에만 어두움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만 봐도 분명히 ‘그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자는 카셀이 알고 있는 그런 사악하기만 한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이 검은 기사가 12 쏜즈처럼 누군가가 변해서 된 괴물이라면 그 본래의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카셀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스스로 이 길을 선택했다고 믿고 싶었다. 캡틴 울프가 싸우지 못한 나머지 인질이 되었다는 치욕적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레드 게이트에서 일어난 일 "캡틴 울프!"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었으나, 카셀은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그렇다고 급히 걸어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당당하지만 꾸준하게 걸음을 옮겼다. "멈추라니까!" 몇 번의 부름을 계속 무시했더니 나중에는 성난 목소리로 변했다. 카셀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슈벨이라는 남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대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뻐 보였다. 남자다운 면이 없다고 사람들이 말할 외모이긴 했는데, 어떤 관점에서 보면 굉장한 미남이었다. 그러나 배롤과 막상막하의 실력을 봐버린 지금, 카셀의 눈에는 '무서운 사람‘으로만 보였다. 그 옆의 빌리라는 남자는 딱히 카셀 앞에서 실력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말하는 모양새를 보면 슈벨과 비슷한 수준의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바로 뒤를 따르고 있는 검은 기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자가 들고 있는 할버드가, 언제 변덕을 부려 자신의 목을 베어도 카셀은 부주의했다고 자신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 갈 거야? 도망 가는 거냐?" 슈벨은 짜증을 내며 물었다. 카셀은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비딱하게 섰다. 카셀은 여기까지 걸어오며 계속 저 두 사람을 어떻게 상대할 지 고민하고 있었다. 검은 기사는 말이 안 통할 데니 내버려두더라도, 말이 통하는 쪽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처 방법이 필요했다. 하이로드의 행렬을 막을 정도로 무모한 자들이긴 해도 예의를 지키는 걸보니 칼을 들이대고 대화를 시작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이런 실력자들을 상대로는 허풍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카셀은 이미 경험해 보아 잘 알고 있었다. 캡틴이라는 권위가 통하지 않을 것이며, 장황한 말을 늘어놓아 머리 속을 헤집어 놓는 방법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어설프게 히를 놀리다가는 그 혀를 베어버릴 사람들이었다. 배롤과 마찬가지로 쉐이든의 충고를 따라야 할 때다. "도망치는 거다 " 카셀은 대답했다. 우선 가급적 빨리 자기에게 검술 같은 건 염소 발톱만큼도 없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중에 비굴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해도, 진솔하게 대화할 만한 상황 역시 아니었다. 고로 약간의 대담함이 필요했다.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비굴하지 않게....... 그런 일을 위해서는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는 아즈윈의 성격을 카피하기로 결정했다. 도망치는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대꾸에, 슈벨은 자신을 희극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것처럼 카셀과 같은 포즈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복잡한 미소가 가득했다. "너 울프 기사단의 캡틴 아니었냐?" "맞다." "그러면 왜 도망가?" "설명 안 해." 이미 이 눈치 빠른 녀석의 눈에는 의심의 빛이 드러났다. 하지만 카셀은 물러나지 않았다. 언제나 자기 페이스로 밀고 나가는 아즈윈이라면 자기에게 불리한 부분이 있어도 머리 속에서 그 부분을 지워버리고, 유리한 점만 자연스럽게 드러낼 것이다. 그녀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쓸 줄 알았다 자기 다리에 눈독을 들이는 남자라면 허벅지를 슬책 까 보이고 그 틀에 손목을 잘라버리는 여자였다. 그런 대담함과 자신감이 필요했다. "너 캡틴 아니지?" 슈벨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물었다. "캡틴 맞아." "로일 알아?" 시험이라도 하듯 그가 또 물었다. "안다." "하얀 늑대냐, 그 녀석?" "그렇다." "그럼 네 부하겠네?" "친구다. 울프 기사단에는 상하의 개념이 없다. 그러는 너야말로 로일을 어떻게 아냐?" "질문은 내가 한다. 아즈윈은?" "안다. " "하얀 늑대냐?" "그렇다. " "또 누가 있냐? 설마 쉐이든, 프란츠, 게랄드도?" "프란츠는 아니지만 나머지 둘은 맞다. 너 도대체 어떻게 그 이름을 다 아냐?" "이런 젠장. 들었어, 빌리? 날 이겼던 놈들은 다 하얀 늑대가 되어 있고, 나한데 진 녀석은 울프가 되어 있다. 이거 생각해 보니까 무지 열 받네." 카셀은 갑자기 그의 행동이 아주 재미있어졌다. 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무심함, 대담함, 자신감. 카셀은 계속 그 말을 되뇌었다. "로일은? 그 녀석 여전히 세? 너보다 세?" 카셀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 지 예상은 했으나, 그 예상을 수정해 줄만한 설명은 해줄 필요가 없었다. "나보다 세다. " "어느 정도로?" 슈벨은 눈까지 반짝이며 물었다. "그만." 뒤에서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던 빌리가 칼을 뽑았다. 카셀은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을 앞에 두고 입으로 강함을 논하는 것은 기사가 할 짓이 아니다." 그는 뽑은 칼을 카셀에게 잡기 쉽도록 가볍게 던져주었다. 꽤 묵직한 칼이었다. 이 검에 비하면 로일이나 아즈윈의 것은 상당히 가벼운 축에 속했다. “겨루자는 거냐?" 카셀은 잠시 이 멋진 칼을 만져보다가 물었다. "물론이다. 아까 했던 말의 약속을 지켜라." 빌리는 카셀의 세 걸음 앞에 섰다. 로일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는 슈벨도 별 말 없이 물러났다. 점은 기사도 멈춰서 기다렸으며, 지금까지 그들을 따라왔던 부하들도 시선을 카셀에게 못 박고 있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저절로 가슴이 움츠려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잘못 선택한 걸까? 허풍을 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캡틴이 아닌 척 비굴한 인질이 되어 우선 살아남는 걸 도모했어야 했을까?' 그레이 게이트에서 할룬드를 만나 마스터 퀘이언과 메이루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카셀은 좀 더 안일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과감한 결단력!' 메이루밀이 했던 말이었다. 잘못된 판단인지 아닌지는 당면한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 밀고 나가야 했다. 아즈윈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검술이 있고, 그 하나의 무기 만으로 누구에게나 당당하다. 그녀를 카피한다면 그 강한 자신감을 카피하는 거다. '그럼 내가 가진 무기는 무엇인가? 그건 울프의 캡틴이라는 직위 그 자체다. 설사 내가 아무리 바보 같은 녀석이라 해도 그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좋다." 카셀은 빌리에게 받은 칼을 세우며 말했다. 빌리도 고개를 굳게 끄덕이더니 차고 있는 다른 칼을 꺼줬다. "이건 익셀런의 캡틴 만이 가질 수 있는 론타몬의 보검이다. 이걸 써도 되겠지?" "그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익셀런의 캡틴과 울프의 캡틴이 겨루는 신성한 대결의 장이 되는군." "싫은가?" "아니, 전혀. 하지만 년 그 칼을 나와의 대결에 쓰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빌리는 픽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카셀은 빌리가 자세를 잡기를 기다려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자세 잡는 거야 게랄드에게 수십 번 구박 받으며 연습했으나, 지금은 최대한 허술하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 지금 이 순간만큼 눈 앞의 적이 강하기를 간절히 바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또한 지금만큼 상대가 자신의 허술함을 알아주길 바란 적도 없었다. 이미 빌리는 카셀의 엉뚱함에 대해 황당해하고 있었다. 카셀은 이때다 하고, 고함을 지르며 칼을 크게 내리쳤다. 빌러는 긴장된 자세를 풀어버리더니 카셀의 칼을 쳐냈다. 카셀은 손목에 아찔한 고통을 느끼며 칼을 놓쳐버렸다. 빌리는 칼날을 즉시 카셀의 목에 들이댔다. 살갗에 닿는 금속의 느낌이 서늘했다. 그러나 카셀은 속으로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상대의 칼이 배를 부셨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찌르지 않았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형편없는 실력을 보이면, 빌리가 그런 행동을 취할 거라 계산했었다. 확신은 없었지만. "장난 치는 거냐?" 빌리가 화 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진짜 실력이다." 카셀이 대답했다. "뭐야?" "말했지 않나? 그 보검을 꺼낼 걸 후회하게 될 거라고." 빌리는 정말 목을 찌를 듯 어깨를 들어보였다. 하지만 찌르지는 않았다. “그 새끼, 짜증나지? 내가 때려줄까?" 슈벨은 조금은 장난 섞인 말로 물었다. 그는 이미 카셀의 실체를 파악한 듯 했다. 정체가 밝혀지라고 한 짓이었으나, 막상 그리 되니 모두의 앞에서 발가벗겨 진 기분이었다. 카셀이 떨어뜨린 칼을 주워온 남자가 빌리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그는 조금 뚱뚱하고 두툼한 입술에 가는 눈을 가졌다. 처음에는 순해 보였지만, 귀엣말을 하며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참 기분 나쁘게 하는 인상이었다. 빌리는 그 남자의 말을 모두 듣더니 씁쓸히 웃으며 다가왔다. 이제 경계할 필요 조차 없다고 생각했는지 빌리는 칼을 모두 집어 넣어버렸다. "저 녀석이 그러는데, 너 같은 녀석은 숨 다섯 번 내쉴 동안에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다는군. 하지만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인질도 아니고 네가 특별히 우리에게 못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 네 진짜 정체를 말해봐라." 카셀은 그가 그런 말을 하기를 간절히 빌어왔다. 드디어 흐름이 넘어왔고, 지금부터는 카셀의 영역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는 단 한 치의 거짓도 없을 데니 잘 들어라. 검은 쓰지 못하지만 나는 하얀 늑대들 전원이 인정한 캡틴이며 이름은 카셀이다." "너무 형편없는 거질말이니 따지고 싶지도 않군." "익셀런의 기사라고 했나, 빌리?' "그래서?" "네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저 악마가 왜 너와 함께 있나?" 빌리는 콧잔등을 긁적였다. "갑자기 다른 얘기 하지 마라.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처음 내가 거래한 자는 저 기사였다. 그러니 다른 얘기가 아니다." 카셀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블랙의 정체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안다. 카모르트의 내전을 주도한 한족 세력이었지." 쇠끼리 무겁게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를 내며 검은 기사가 다가왔다. "나와 같은 자가 카모르트에 있다고 했나?"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위를 묵직하게 울리는 근엄한 목소리였다. 듣는 것 만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와는 너무도 달랐다. 카셀은 그 위압감에 눌려 잠깐 숨을 들이 삼켰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모르는 어떤 마법의 힘으로 살아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그럼 나는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시체란 뜻인가?" 검은 기사는 뭔가 기대하는 듯 고재를 앞으로 숙였다. "조금 다르지만, 자세히 설명할 자신은 없다. 내가 겪은 검은 기사는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해도 좋으나, 살아 있는 자가 변하여 그리 된 것 같기도 했다." 그건 그가 원하던 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검은 투구를 천천히 뒤로 되돌렸다. "여전히 해답은 골드 게이트에 있군." 그는 무거운 걸음을 북쪽으로 옮겼다. 슈벨이 서둘러 잡았다. “그 쪽 방향이 아니야, 블랙. 그보다 익숙한 뭔가가 뒤에 남아있다고 했잖아, 쟤 아냐? 울프의 캡틴인데." 블랙은 카셀을 꽤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여전히 뒤에 남았다. 그러고 그것을 봐도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지 않아 골드 게이트로 안내하라." "잠깐, 그러면 저 녀석은 왜 잡아왔어? 너를 충족시켜주는, 어쩌고 했지 않냐?" "아니다. 내게 있어 그리 의미가 없는 자다." 두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는 동안, 빌리는 카셀의 처분을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옆에는 아까 카셀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버리겠다는 남자가 조언하고 있었다. "똥 쳐 바른 것처럼 혓바닥 잘 놀리는 녀석은 목에 사슬 묶어서 질질 끌고 다니면 나중에 캡틴의 신발도 혀로 핥아줄 겁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캡틴 빌리." 빌리는 팔장을 끼고 카셀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라는데, 어쩔 건가, 캡틴 카셀?" 카셀은 그의 눈에 맺힌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내버려둘 수도 없다 죽일 수토 없다. 데려가 봤자 필요 없다...... 그런 망설임! “그게 내가 선택할 문제냐, 캡틴 빌리? 나는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야 더 할 말 없지." 카셀은 손을 내밀었다. "뭐?" "칼 줘 봐. 아까 됐던 칼 말고, 론타몬의 보검으로." 옆에서 배 나온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라. 이 썩다만 죽정이 같은 새끼야." "아버지께서 입이 험한 녀석의 협박은 속에 든 게 없는 걸 감추려는 썩은 조롱박의 발악이니 굳이 들어둘 필요가 없다고 했지. 중요한 얘기 하는데 나서지 마라." 중간에 빌리가 없었으면 칼에 찔렸을 만한 협박이긴 했다. 그 남자는 더 없이 화가 나 얼굴을 붉혔다. "왜 내가 너에게 보검을 주어야 하지?" 빌리가 물었다. "울프의 캡틴이 익셀런의 기사도를 시험하고자 한다." 카셀가 입을 닫자마자, 빌리는 두 자루 칼을 동시에 꺼줬다. 어찌나 뽑는 속도가 빠른 지 칼 손잡이를 잡은 것과 다 뽑은 후의 칼날만 보였다. 그리고 너무 근접해서 갈을 뽑는 바람에 날이 목을 치고 지나간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는 목이 아직 붙어있는지 만져보고 싶었다. 빌리는 무서운 눈으로 보검의 손잡이 쪽을 내밀었다. 다른 손에는 금방 내리칠 높이에 칼을 쥐고 있었다. "기사도에 목숨을 거는 익셀런의 기사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너 역시 목숨을 걸어라. 엉뚱한 것 마라." "걸겠다!" 카셀은 망설임 없이 빌리의 칼을 받았다. “난 울프의 기사를 동경하여 지금 이 지위에 오른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익셀런을 존경하는 어린 소년이기도 했다. 그대가 아는 기사도에 어긋남이 있다면, 나를 베어라." 카셀은 지금까지 친구들에게 배운 그럴 듯한 자세로 칼을 들었다. 그것은 로일이 적을 상대하기 전에 잡는 기본 자세였다. 빌리는 약간 긴장하며 손에 든 칼에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며, 너희들이 화이트 게이트에 도착한다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동시에 처음 말한 대로 원하는 바를 충족 시켜 주겠다. 론타몬의 보검에 맹세한다. 너희들은 내가 아닌 다른 하얀 늑대와 대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리의 양 눈셉이 가늘게 떨렸다. 옆에서 조언하는 남자가 또 끼어 들었다. "속지 마십시오. 캡틴의 손을 더럽히기 싫으시면 제가 베어버리겠습니다." "멍청한 놈." 빌리는 카셀이 아닌 그에게 소리질렀다. "처음부터 베어버렸으면 모르되, 보검에 맹세한 자를 어떻게 해 친단 말이냐?" 빌리는 자신의 칼을 집어넣고, 손을 내밀었다. 카셀은 순순히 보검을 내주었다. "네가 10년 전 어린 내가 봤던 익셀런이길 간절히 빌었다. 약속은 지킨다." 카셀이 웃어 보이자, 빌리는 굳은 표정을 조금도 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언제라도 벨 수 있기에 살려둔 거다. 실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녀석이 기사도 운운하는 건 역겹다." 빌리는 슈벨과 블랙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카셀은 한숨을 내쉬며 바지춤에 손을 넣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쉬고 싶었으나 노려보는 눈이 많았다. 특히 빌리의 옆에서 계속 조언했던 뚱뚱한 남자의 눈이. 그의 이름은 그린우드였다. 가끔 그를 서전트라고 부르는 걸 보니 나를대로 직책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언행은 결코 가지고 있는 직책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 날 저녁 식사로 닭고기 스프를 담아 내줬는데, 일부러 그릇을 엎어 카셀의 신발을 적셨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어, 미안.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어쪄나?" 였다. 카셀은 실로 오랜 만에 살의를 느꼈다. 빌리는 무뚝뚝했으나 정중했고, 슈벨은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는 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지만, 이런 일까지 그들에게 고자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린우드도 그걸 알고 저지른 짓이려니 생각하니까, 더욱 화가 났다. 검은 기사의 걸음이 워낙 느려 그들은 하루 동안 얼마 가지 못했다. 노숙을 하며 카셀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잡혀 있는 꼴이 서글펐으나, 피곤하여 금방 잠들었다. 아침 일찍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다음 마을에서 수레를 하나 구했다. 슈벨이 자기 말을 매달아 수레를 몰았고, 검은 기사만 거기에 탔다. 빌리는 모두와 걸어가겠다고 했지만, 카셀은 포로의 예를 갖춰 타도 좋다고 허락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카셀도 걷는 데에는 자신 있었고, 굳이 적의 배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슬슬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걸 확신하면서 카셀은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 보았다. 가는 속도가 느려 생각할 시간이 많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발리 가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 화이트 게이트로 가면 울프 기사단이 있을 데니, 모든 처리를 그 쪽에 맡기는 게 속이야 편하다. 그러나 여전히 보검도 없이 캡틴 울프임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이 속도로 여행을 하면 상당히 먼 훗날에 겪게 월 상황이니 우선 급한 일을 위해 접어두었다. 급한 건 그린우드였다. 그는 기회가 생기면 카셀을 죽이고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넘어갈 만한 위인이었다. 간혹 진짜 그럴 의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상한 행동을 하다가, 근처에 빌러나 슈벨이 있으면 아닌 척 넘어가곤 했다. 솔직히 카셀은 그를 앉혀놓고 왜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냐고 대놓고 묻고 싶었다. '혹시 그 썩은 조롱박 욕 때문에 그런가?' 짚이는 건 그거 하나였다. 그러나 정말 그런 걸로 자기를 죽이려 한다면 끔찍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늦게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매사에 남의 말이라면 귀를 닫고 살만한 놈에게는 사과를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린우드는 식사 시간마다 시비였고, 길을 걸을 때는 뒤에서 수군댔다. 안 들리면 무시하겠으나, 가끔 일부러 들리게끔 '칼도 못 쓰는 놈이 폼은 뒈지게 잡는다니까.', '엉덩이 한 번 토실토실하다.'라는 식으로 놀리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카셀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참는 것이었다. "내일 정오면 레드 게이트를 통과하게 되오. 그리고 이 속도면 골드 게이트까지도 닷새 정도면 충분할 것 같소." 밤이 되어 빌리는 행군을 멈추고, 검은 기사 블랙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카셀이 보기에 블랙은 적어도 세 번 이상이나 '골드 게이트에 간다.' 라는 말을 했다. 대체 거기에 뭐가 있기에 저렇게 재촉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슈벨이 가끔 하는 스쳐가는 말로, ‘또 그 말이냐?’라고 하는 걸 보니,카셀과 만나기 전에도 그런 말을 해 왔던 것 같았다. 카셀은 다른 일행과 가급적 밀리 떨어져서 않았다. 어느 정도의 감시는 있었으나, 근방을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자유였다. 이런 탁 트인 곳에서 무리하게 도망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듯했다. 그 점에서는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 카셀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른 빵을 불에 굽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빌리의 부하들은 식사를 준비하고 구운 빵을 일 인분씩 잘랐다. "야, 빵." 각자의 몫을 분배하던 그린우드가 방을 멀리서 휙 던져주었다. 어둠 속인데다 갑자기 날아오는 거라 그는 그만 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런 것도 못 받냐?" 그린우드가 킥킥대고 웃었고, 다른 녀석들도 따라 웃었다. 카셀은 한숨을 내쉬고, 떨어뜨린 빵에 손을 내밀었다. 흙이 잔뜩 묻어 있겠지만 안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계속 되는 이런 장난으로 이미 한 끼를 굴은 터라, 무척 배가 고팠다. 누군가의 발이 그 방을 밟아버렸다. 웃던 남자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새 걸로 가져와," 슈벨이었다. 잘 웃는 자가 화나는 얼굴로 바꾸었을 때야 사람이 화가 나면 얼마나 표정이 구겨지는 지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린우드는 굽실거리며 빵을 갖다 바쳤다. 슈벨은 그 방을 받아 카셀에게 내밀었다. "원한다면 사과도 받아내어 주지." "그건 됐어. 고맙군." 슈벨은 콧김을 푸욱 내쉬고, 그린우드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조심스러운 자세로 돌아가는 그린우드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슈벨이 말했다. "너도 우습다. 이건 칼을 쓸 줄 안다 모른다 따지기 이전의 문제야. 왜 화를 내지 않나?" 카셀도 그린우드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화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아니, 오히려 화내지 않고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게 가장 기사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분노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멍청한 녀석에게는 화를 낼 수는 없는 거야." 슈벨 앞에서 자세를 급격히 낮췄던 그린우드는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다른 녀석들에게 상관 행세를 하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슈벨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새끼가 제일 싫어. 넌 당하고만 있을래? 오늘 하루 종일 그했지, 저 녀석?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보려고 아무 말 안 했더니 넌 끝까지 가만히 있더라. 보고 있는 내가 화나서 결국 나서 버렸잖아." 카셀은 손을 휘휘 저었다 여름 벌레가 사방에 날아다녔다. "익숙해." "뭐? 이런 게?" 카셀이 무안해 할 정도로 슈벨은 놀란 목소리를 띤다. "너 진짜 약골인가 보구나." "저런 부류의 녀석들은 나라는 인간을 첫 상대하면, 이상할 정도로 동일한 반응을 보이더군. 그럴 때마다 나는 죽고 싶을 만큼 화가 나고 창피하지. 왜 아니겠어?" 카셀은 빵을 한 입 법석 물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조만간 해결될 일에 화를 내고 있을 만큼 체력이 남아돌지 않아. 이런 건 내버려두면 돼."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슈벨은 모기가 물었는지 팔과 목을 긁적였다. 카셀은 방을 뜯어 먹기만 했다. 슈벨이 계속 서 있으니, 카셀은 암은 자리의 한쪽을 내주었다. "앉을래?" "좋아." "물어볼 거 있어?" 슈벨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아즈윈을 안다고 했나?" "알지." "여전히 아름다운가?" 카셀은 새삼 그를 다시 보았다. "무슨 뜻으로 그런 걸?" 슈벨은 큰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그야 궁금하니까....... 그런 여자는 딱 보면 기억에 남게 되잖아."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쓰는 게 더 수상쩍었으나, 카셀은 굳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친 '기억에 남기는 댁이 한 수 위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런지 아닌지는 예전부터 본 게 아니라 모르겠지만, 지금 봐서는 출충하지." 카셀은 친절히 설명했다. "음, 그렇겠지. 내가 봤을 때는 스무 살 정도였으니까 지금쯤 굉장히 성숙해 있을 거야. 어떤가? 조금은....... 뭐랄까, 여자다워졌나?" "아즈윈이라면 이렇게 대답했거야. 여자다운 게 뭐냐?" 슈벨은 크게 납득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나 보군. 하긴 그게 그녀다운 걸 게다." 기뻐하는 슈벨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카셀의 그런 시선을 의식하고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카셀은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부분을 캐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횃불과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만으로 충분히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돌아보지 말고 들으십시오!' 뒤에서 누군가 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순간보다 뒤를 돌아보고 싶어질 때가 있을까. 카셀은 그 말을 듣자 주먹을 꽉 쥐고 유혹을 참아냈다. '이 목소리는 당신에게만 들립니다. 또 당신은 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듣기만 하고, 알겠으면 머리에 손을 대십시오.‘ 카셀은 멀리를 긁는 척 하며 뒤통수에 슬쩍 손을 올렸다. 슈벨은 이것저젓 생각할 게 많은 밤이라느니, 자기는 사실 한 때 시를 쓰는게 소원이었다느니 하는 별 거 아닌 얘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카셀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하고, 뒤에서 들리는 이상한 목소리에 집중했다. '지금 당신은 위험에 처해 있군요.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왜 당신이 그 무리에 끼어 있는지 물을 시간이 없는 게 아쉽군요. 하지만 어쩌면 잡혀 있는 쪽이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아직 모르고 있겠으나, 지금 상황이 대단히 위험해졌습니다. 그러니 불편하더라도 그 안에 계십시오. 당장은 당신을 해하고자 하는 존재가 오히려 당신을 지켜주는 방패가 될 것입니다. 지금 바로 당신을 구하는 건 문제가 아니나, 그 이후 혼자 힘만으로 마법사의 손에서 당신을 보호하는 건 역부족입니다.' 귀를 통하지 않고 의미가 이해된다는 것은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거부감은 없었다.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를 이 이상한 목소리는 조금도 구체적인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이란 무엇이며, 마법사란 또 누구인가? 듣기만 하라는 건 너무도 심술궂은 명령이었다. '저는 당신 친구의 부탁으로 여기 오게 되었으며, 그에 의해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크게 부상을 당해 저와 같이 행동을 하지 못해 저 혼자 당신을 찾아 다녔습니다. 우선 당신의 안전을 확인했으니, 저는 다시 그를 도우러 가겠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걸 원할 거라 생각합니다.' 슈벨이 뭐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셀은 듣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특별히 귀를 기울인다고 잘 들리고, 무시한다고 안 들릴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잘 들릴 것 같았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자를 경계하십시오. 그는 죽음에서 되살아 난 존재이며, 살아있는 자들이 지배하는 이 땅에 돌아와선 안 될 자입니다. 그가 골드 게이트와 화이트 게이트를 통과하게 둬선 안 됩니다. 만약 게이트를 넘어 아란티아의 여왕을 만나면 상상도 못할 끔찍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모릅니다. 저지 하십시오. 당신이 캡틴 울프라면.......“ 마지막 말에 카셀은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야, 쉬이든이라는 기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냐? 왜 못 들은 척하고 그래?" 그렇게 묻는 슈벨을 내버려 두고, 카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렸을 법한 장소로 달려가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대신 아주 먼 곳에서 밝게 빛을 내는 동물이 있었다. 그것은 늑대였다. 은빛 털이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빛을 내고 있었다. "아!" 카셀은 소리 내어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빛나는 늑대는 고개를 슬쩍 저었다. 아무 말도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카셀은 다른 것은 다 무시하더라도 대체 다친 친구가 누구냐는 질문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늑대는 까닥하고 인사하더니 언덕 뒤로 사라져버렸다. "뭐냐, 너? 도망치려고 달리는 거면 끝까지 갈 것이고, 아니면 말지 왜 뛰다가 멈춰?" 슈벨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안 도망가." 카셀이 대꾸하더니, 슈벨을 확 돌아보며 물었다. "저 블랙이라는 자, 정체를 모른다고 했지?" "그래." "난 알 것 같아." "뭐? 누군데?" 카셀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아까부터 쥐고 있느라 눅눅해진 빵을 씹었다. 이 말 많은 슈벨이라는 참자는 의외로 남의 말을 기다릴 줄 아는 침착함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확실해지면 말해주지. 지금은 말해 봤자,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아." 카셀은 얼버무리고 논의를 끝내버렸다. 슈벨이 싱겁네 어쩌네 화를 내도 무시했다. 카셀은 갑자기 변덕을 부려 다음날 아침부터 수레에 타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제안했던 일이니 빌리는 그러라고 허락했다. 곁는 걸 힘들어 하는 다른 녀석들은 당연히 곱게 보지 않았다. 말을 모는 슈벨도 의아해 했다. "지친 거냐?" "뭔가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카셀은 덜컹거리는 수레에 앉아 블랙을 노려보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어도 블랙은 반응이 없었다. 그에게는 얼굴도 없었고, 눈동자도 없었으므로 시선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려본들 동요를 이끌어 낼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나를 보나, 캡틴 울프?" 거의 포기할 즈음에 블랙이 말했다 카셀은 얼른 헛기침을 한 번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른다고 해놓고, 어째서 악착 같이 골드 게이트로 가려고 하지?" "머리 속의 누군가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게 기억을 잃어버린 나 자신인지 아니면 나를 조종하는 다른 자의 의지인지는 모르지만. 그보다 어제 또 나타난 그 늑대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하고 간 거지?" 뭔가를 추궁하려던 카셀은 갑자기 따지고 드는 말에 놀랐다. "늑대?" "그 늑대는 내게 악의를 품고 있다. 다시 접근하면 죽일 것이다. 만약 그 늑대가 접근해서 말을 걸거든 그렇게 말해줘라." 앞에서 말을 몰던 슈벨은 둘의 대화가 신경이 쓰이는 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숨겨야 할 것이 드러나면 과감히 드러내는 게 차라리 좋을 것 같아 카셀은 말했다. "숨길 것도 없지. 그 늑대는 내게 여기 있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당신 정체에 대한 비밀을 슬쩍 가르쳐줬지." "나의 비밀? 내게 말해주지 않겠나?" "카모르트에서 당신과 비슷한 검은 기사에 대해 알고 있다고 내가 말했었지?" "그랬지." “그들은 당신과 거의 같지만, 단 한 가지가 다르다." "같은 점은 뭔가?" "어제 말한 대로, 죽었다는 점이지. 그리고 당신의 분위기." "죽었다는데, 왜 나는 지금 살아 움직이는가?" "움직이는 것과 살아있는 것은 동일한 말이 아니다. 나는 카보르트에서 몸이 동강난 검은 기사들의 잘린 부분이 붙어 도로 일어서는 것도 보았다. 그러니 당신이 죽어 있다가 살아났다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좋아. 내가 원래 죽은 존재라는 건 나 역시 예상하고 있었던 바다. 그 다음은? 분위기라 했나?" “당신의 주위에는 온통 어둠의 기운 뿐이야, 그건 당신이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들과 거의 비슷한 존재라는 걸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지." 블랙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나와 같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네 말대로라면 나도 카모르트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건 아니지. 내가 처음 당신과 같은 종류의 기사를 봤던 시기 이전부터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각 지역마다 출몰했다는 소문은 많이 있었다. 들은 얘기지만 정보 출처는 정확하니 뜬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이로피스에서 나타난 건 확실하고, 아마 가넬로크에서도 나타났을 거다. 그러니 당신이 '아란티아에 나타난 검은 기사'라면 오히려 지금까지의 소문과 일치하는 게 아닌가?" 검은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그럼 다른 나라의 검은 기사들은 무슨 짓을 했는가?" "살인." 블랙은 잠시 말을 잊었다. 카셀은 그가 그 부분에서 당황하는 빛을 유심히 봐두었다. "그리고 카모르트에서는 반역의 선두에 싫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한 녀석들이었지. 그들의 리더는 어떤 종교적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 검은 기사가 된 귀족이었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의 존재이고, 결국 그렇게 된다는 ???ㄴ가?" 얼굴을 볼 수 없는 블랙이었으나, 어조에서는 씁쓸함을 엿볼 수 있었다. 카셀은 손가락을 그의 얼굴 앞에 세웠다. "그래, 당신의 그런 면이 내가 지금부터 말할 그들과 당신의 다른 점이다. 내가 본 검은 기사들은 눈 앞의 살아있는 존재를 살아있게 두지 않았어. 게다가 그것들은 이상하게도 보고 있을 당시에는 익셀런의 갑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 인상을 기억해 내어 그림이라도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을 보여주면 즉시 알아내지만, 신기하게도 보고 있는 그 순간에는 익셀런이라는 걸 떠올릴 수가 없지. 뭐랄까, 너무 무서워서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해야 하려나?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딜 봐도 익셀런의 기사다. 내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전부 끌어올릴 정도로 정확하게!" “...... 뭘 말하고 싶은 건가?" 블랙이 말했다. “당신이 진짜 익셀런의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카셀은 힘을 실어 말했다. 슈벨이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너 지금 블랙이.......“ 슈벨은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어 하고 싶은 말을 잇지 못했다. 카셀은 그가 할 말을 대신 했다. "죽었다가 일어난 존재라는 가정과 이 곳이 아란티아라는 것을 고려해 봐라. 그럼 블랙이라는 검은 기사가 사실 십여 년 전에 죽었다가, 최근 살아난 익셀런의 기사라는 건 오히려 이상할 게 없지 않나?" 카셀은 턱으로, 블랙이 쥐고 있는 할버드를 가리켰다. "론타몬의 대륙 전쟁에서 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무기가 바로 그것과 같은 종류지. 모르고 넘어갔으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여러 가지로 겹치고 보면 우연인 것 같지도 않다. 어떤가, 로드 블랙? 당신 캡틴 웰치가 살아난 존재라면, 또한 그럴 듯 하지 않나?" 카셀은 스스로의 추리를 내보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바로 그 미소가 굳어졌다. 블랙은 천천히 자신의 할버드를 들어 올렸다. 무척 느린 동작이었으나 그 묵직하고 시커먼 날이 다가오니, 카셀은 그 위협을 이기지 못 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고 날카로운 날은 카셀의 목 앞에서 멈췄다. 카셀은 어느 새 수레의 제일 뒤로 물러나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내가 왜 골드 게이트로 가는지도 말해보라." 이것이 바로 진짜 잡한 자가 보이는 위협이었다. 자신의 힘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단순한 동작하나에 힘을 싣는 이런 모습에 비하면, 그린우드의 욕설과 협박은 유치한 장난이었다. 또한 블랙은 단순히 힘으로 카셀을 누르는 게 아니었다. 카셀은 얘기를 하면 언제나 대화의 흐름을 보곤 했는데, 블랙은 흐름을 자기 쪽으로 당쳤다가 필요하면 풀어주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지금까지의 대화를 곱씹어보니 말로 제압하고 있는 쪽은 카셀이 아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지금 할버프를 들이댄 시점이 절묘했다.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잠깐 넋이 나가있던 카셀은 서둘러 마음을 수습했다. 그리고 그에게 끌려 가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 없는 용기를 끌어내 말했다. “당연히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익셀런의 기사가 살아나 골드 게이트로 간다면, 그건 패배를 설욕하려는 것 외에 뭐가 있지?" 슈벨이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리 예의 바른 말이 아닌 것 같군, 캡틴 울프. 블랙이 진짜 익셀런의 기사라면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할 말 아냐?" 그의 말이 옳았다. 목에 들이댄 칼날은 아직 회수 되지 않았다. 카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카셀이라고 불러라." 카셀이 말했다 "뭐라고?" 슈벨이 또 뒤를 돌아보았다. "카셀이라고 불러. 캡틴의 자격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대화다. 직책은 빼자." "엉뚱한 놈이네." 슈벨은 묵직한 날을 들이댄 블랙을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블랙은 나직이 웃었다. 둘은 블랙이 고함을 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놀랐다. "카셀. 그래, 카셀. 네가 슈벨이 지어준 내 이름을 부른다면, 나 역시 너를 이름으로 대하는 게 옳겠지. 그러나 캡틴 웰치의 무기일지도 모를 이 할버드는 어찌 할 거냐, 카셀? 내가 벤다면......? 그냥 죽을 텐가?" 블랙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블랙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선 나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말이야 조금 살벌하게 했으나, 블랙은 지금 장난을 치고 있었다. 슈벨과 카셀은 그런 게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당신에게 있어 나 하나 죽이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하지만 그리 하면 내가 걸었던 약속을 당신이 어기는 바가 된다. 또 블랙, 당신이 어째서 골드 게이트로 가려는지 나는 모른다. 당신 스스로 모른다고 했고! 한 가지 더 말해둘까? 그 늑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을 골드 게이트로 보내지 말라고!" "앞뒤가 안 맞는군. 화이트 게이트에 도달하면 약속을 지키겠다면서 막아?" “그것은 약속을 이행하기 전의 조건이다. 화이트 게이트에 도착하면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지, 거기까지 얌전히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아니었어."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리 할 텐가? 힘으로?" ‘아즈윈을 카피하라.' 카셀은 그 부분을 다시 떠올렸다. 상대가 장난을 친다면 그게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받아준다. 카셀은 할버드의 날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걸 세게 밀었다. 약간 흔들렸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블랙은 정말 터무니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셈이었다. "힘으로는 무리군.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겠어." 블랙은 또 한 번 웃었다. "다른 방법이 뭔지 궁금하군, 카셀." "기대해라, 블랙. 그리로 동시에 너의 정체가 뭔지 알아내겠다." "알게 되면 꼭 내게 먼저 얘기해라." 블랙은 할버드를 내려놓았다. 카셀은 목을 쓰다듬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슈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화이트 게이트로 안 보내겠다고 설치는 녀석을 왜 이렇게 끌고 다녀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다음부터 이런 첫 할 거면 허락부터 받고 해라. 알았지?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죽으면 곤란하잖아." 슈벨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죽일 마음이 있는 자에게 지금의 카셀은 너무나도 쉬운 표적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여전히 블랙보다 그린우드가 더 위험했다. 더더욱 블랙의 결에 있어야겠다고 카셀은 다짐했다. 슈벨이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 쓰느라 말고삐를 당겼다 놓았다 하는 통에 말의 걸음이 무척 느려져 있었다. 빌리와 그의 부하들은 금방 그 수레를 따라잡게 되었다. 원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가던 이동이라 빌리는 수레의 속도가 늦춰진 걸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슈벨은 빌리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딴 소리를 했다. "레드 게이트에 거의 당도할 시간이다." "아, 그래?" 빌리는 뒤따르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서전트 그린우드, 돈은 준비 되었나?" 꼴도 보기 싫은 그린우드가 카셀이 않아있는 수레 옆을 지나쳐 빌리에게 갔다. "예. 레드 게이트의 통행료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이전 마을에서 알아보니 한 사람 당 은화 하나에 말과 수레가 은화 둘 정도랍니다." "싸다고 할 만한 액수는 아니군." 빌리가 중얼거렸다. "아, 슈벨, 수레의 속도를 백 올려도 된다. 예정보다 많이 늦어줬어." "아, 그러지." 슈벨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살짝 채찍질했다. 다시 빌리 일행과 거리 차가 났다. "아까 말했던 조건......, 그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 주겠나, 카셀?" 블랙이 물었다. "화이트 게이트까지 도착하면 하만 늑대와 대결하게 해주겠다던 약속에 대한 조건이지. 말장난이라고 했나? 내 경우에 그저께 있었면 약속은 사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억지로 맺은 약속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내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래, 해석해 봐라. 빌리와의 약속이 아닌 나와의 약속으로." "내기 하자. 네가 화이트 게이트까지 도착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흥미롭군. 내가 도착하면?" “당신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도착 못 하면?" "못 하면 당신은 어딘가에 또 다른 시체로 남아 뒹굴고 있겠지. 하지만 미리 하나 말해두지. 화이트 게이트에 도달해 내가 약속을 실행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카셀은 최대한 쉐이든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은 자는 없으니까." 블랙은 또 한 번 웃었다. 어둠속에 가려진 투구 안의 얼굴이 보인다면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네가 일방적인 내기를 거는군. 동의할 수 없다. 또한 너의 신병을 나와 슈벨, 빌리가 확보하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억지 약속이 정식으로 지켜질 수 없지." 나름대로는 신경 써서 말한 건데도, 블랙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카셀은 황급히 그가 믿어줄 만한 말을 했다. "나는 론타몬의 보검에 맹세했다." "거친 맹세는 기사들 세계에서 항상 존재한다." "믿지도 않을 거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한 가지 조건을 붙여주면 믿는 걸로 하지." "말해봐라," “만약 화이트 게이트에 내가 도착했고, 네가 약속을 시행해서 내가 하얀 늑대와 겨루게 된다....... 그런데 네가 데리고 온 하얀 늑대가 내게 패배한다....... 여기에 대한 조건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럼 너도 죽어라. 그 정도 조건은 들어줄 수 있겠지?자신이 있다면." "자신 있다." "없는 자신감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게 내 눈에는 보인다." 블랙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투구 안의 심연을 카셀의 눈 앞에 들이댔다. 그의 말대로 카셀의 마음속을 꿔뚫을 것 같은 시선이 느껴줬다. 블랙은 즐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토록 믿는 그 자신감의 실체가 무너진 후에도 네가 그럴 있는지 지켜보겠다, 캡틴 카셀." 도둑질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비슷한 어떤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면서도,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억제하느라 죽을 힘을 다했다. 하지만 레드 게이트는 얼마 남지 않았고,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으나, 일단 노리는 건 한 가지였다.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카셀은 미친 척하고 그린우드의 옆으로 다가갔다 "뭐야?" 그린우드는 억지로 인상을 구겼다. "별 건 아니고......, 한 대 맞아라." 카셀은 그의 普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리고 쓰러진 그의 위에 올라타 몇 대 더 쳤다. 싸움에 아주 능숙한 건 아니었지만 농사를 지어온 몸이라 완전 약골은 아니었다. 그린우드는 발버둥쳤지만 쉽게 일어나지는 못 했다. 하지만 곧 누운 채로 주먹을 휘둘러 카셀의 얼굴을 쳤다. 둘은 바닥을 뒹굴다가, 빗물이 고여있는 웅덩이에 처박혔다. 싸움 구경하기 좋아하는 주위 녀석들은 말릴 생각은 않고 함성을 질렀다. 그린우드가 쓰러진 카셀 위에 올라탔고 주먹으로 갈기며 욕을 내질렀다. "이 자식이 어디다 주먹을 휘둘러? 앙? 죽고 싶어, 이 새끼야?" 순식간에 단검을 뽑아 든 그린우드의 손을, 뒤에서 급히 달려온 빌리가 막았다. "그만해라." "하, 하지만 이 자식이 먼저.......“ 그린우드는 변명을 몇 마디 했으나 빌리의 화난 눈빛을 보고 물러났다. 빌리는 진흙투성이가 된 카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그랬는지는 굳이 묻지 않도록 하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 들 줄은 몰랐군." 카셀은 도움을 거절하고 혼자 일어났다. 그의 다른 쪽 손에는 그린우드의 가방속에 얌전히 있어야 할 돈주머니가 있었다. 훔치는 건 자신 없었지만, 해 놓고 발뺌 하는 것과 아무 짓도 안 한 것처럼 연기하는 것은 능숙했다, "복수 치고는 유치하지 않냐? 내가 뒤에서 찌르는 법이라도 가르쳐줄까?" 수레를 끄는 슈벨은 깔깔대고 웃었다. 카셀은 침을 탁 뱉었다. 피 섞인 침을 보니 후련하기까지 했다. 블랙은 카셀 록으로 투구를 향하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드 게이트가 가까워져 왔다. 카셀은 얼얼한 눈과 부운 뺨을 만지며, 먼 곳을 응시했다. 빌리는 슈벨의 옆 자리에 털씩 앉았다. "어이, 얼굴은 좀 괜찮나?" 빌리가 집칸에 앉아있는 카셀을 보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빌리도 별 상관하지 않았다. "어깨는 어떤가, 슈벨? 배롤이란 녀석에게 베인 곳 말이다. 치료하는 것 같지도 않더군." 빌러가 슈벨의 어깨에 손을 대며 물었다 슈벨은 몸을 움츠리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아직 낫진 않았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야. 그런 게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여서 하는 말이다. 너, 그 배롤과 계속 싸웠으면 어땠을 거 같나? 블랙이 중간에 끼지 않고.......“ "이제 와서 그런 걸 묻는 저의가 뭐냐? 네가 질 것 같았나? 웃기지 마. 녀석이 처음에 제대로 된 승부를 하지 않고 힘을 아켰다고 해도 그건 녀석의 잘난 척이었을 뿐이야. 거의 잡았었어." 사흘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보아온 둘의 관계는 친구 관계도 아니고, 상하 관계도 아닌 이상한 관계였다. 어절 때 보면 친구 같긴 했다. 하지만 미묘하게 그 경계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는 행동을 보면 빌리가 상관 같긴 했지만 슈벨은 결코 그를 윗사람 대하듯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방진 동생이 형을 따르고, 인자한 형이 동생을 이끌고 있다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또한 둘은 형제간이 아니었다. 의형제를 몇은 사이도 아니었다. 카셀은 도저히 둘이 서로를 대하는 분위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빌리가 말했다 "우리가 손도 대지 못한 블랙을, 배롤은 공격했다. 블랙도 사실 아찔했을 거다. 그렇게 낮은 자세에서 위로 쳐올리는 공격이라니! 다리와 허리힘에 자신이 없다면 흉내도 못 별 엄청난 기술이었지. 그런 공격이 갑자기 왔다면 막아낼 수 있었을 것 같아?" "지금 시비 거냐?" 슈벨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으르렁거렸다. "슈벨, 난 너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 자잘한 일에 일일이 화내지 마라. 그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줄 아는 녀석일 거야, 넌." 빌리는 그의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잘 들어봐. 화이트 게이트에는 그런 녀석이 오십 명이 넘게 있는 거다.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나는 적어도 나 하나가 울프의 기사 몇 명을 상대할 거라 생각하고 움직여 왔는데, 그게 아니더라 이 말이다." 슈벨은 빌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사실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빌리는 수레에 얌전히 않아 얼굴에 묻은 진흙을 밖고 있는 카셀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본의 아니게 듣고 있던 카셀은 둘의 시선을 받고 또 한 번 침을 밭아줬다. 이건 분명히 들으라고 하는 얘기였다. "저 녀석이 노리는 바를 생각해라, 왜 순순히 우리의 인질이 되어 화이트 게이트까지 가겠다고 한 걸까? 저 녀석은 우리들만으로는 아무 것도 못할 거라고 단단히 믿고 저러는 거야." 슈벨은 카셀에게 물었다. "정말 그러냐?" "정말 그렇다고 말하면 믿어 줄 거냐?" 카셀은 일부러 틱틱 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빌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즉, 너는 적어도 우리의 실력을 화이트 게이트의 병사들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고 계산하는 거겠지. 잘 들어둬라, 캡틴 울프. 레드 게이트나 골드 게이트에서 우리를 저지하려 든다면 큰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물론 우리 둘 만으로는 무리지. 또 저기 있는 스무 명 정도의 오합지졸로 군대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여기에 블랙이 가세했을 경우를 생각해라. 게이트를 통과할 때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걸 말하고 싶었다." 빌리는 자신의 칼을 툭툭 쳐 보였다. 카셀은 또 한 번 피와 흙이 섞인 침을 뱉어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어련하겠나?" 빌리는 픽 웃었다. 슈벨도 웃으며 말했다. "야, 너무 겁주지 마라." 그제야 카셀은 둘의 관계를 이해했다. 둘은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들은 곧 레드 게이트에 도착했다. 레드 게이트의 병사들은 아주 눈치가 빨랐다. 그들은 이 얼굴 험한 일행들을 보고 바로 뭔가 안 좋은 녀석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나름대로 현상금 수배자 명단을 살피거나 일부러 질문을 길게 끌어 유도 심문을 했다. 그러나 슈벨이 워낙 능청스럽게 여행자 행세를 하니 게이트의 규칙대로 그들의 통행에 대한 제재는 없었다. 그린우드를 비롯한 다른 부하들도 더할 것 없이 얌전했다. 무기를 들고 있다고는 하나 반입금지 품목은 아니었다. 쉐이든의 말대로 이들은 군대가 오기 전에는 어떤 검사들도 막지 않을 것이고, 게이트의 병사들은 이 정도 인원을 군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카셀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떨떠름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한 병사가 다가왔다. 눈매가 날카로운 갈색 머리의 남자였는데,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편한 거라도 있습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없습니다." 카셀은 정중히 대답했다. 그는 카셀 주위에 다른 병사들이 없는 것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말하기 곤란한 뭔가가 있다면, 신호를 보내십시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카셀은 갑자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면 눈치가 생기는 템이지 게이트 수문장과 얘기하는 저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분명 나머지 모두는 범죄자요. 그렇지 않소? 그런데 당신은 차림새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좀 다르군. 내가 잘못 짚은 거요? 좀 더럽긴 해도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아란티아 왕실의 복장인데, 왜 이런 무리에 끼어 있소?" 그는 꿰뚫어볼 듯 눈을 밝혔다. 카셀은 짧은 시간 동안 망썰였으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냥 같이 여행하고 있는 중이오. 아무 문제 없소." 그 병사는 여전히 카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여긴 레드 게이트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군대가 지키고 있소. 기다리고 있겠소." 카셀은 얼른 돌아서 블랙이 타고 있는 바깥의 수레로 돌아왔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빌리의 협박에 못 이겨 아무 것도 못 하는 게 더 찝찔해졌다. "이곳 게이트 병사들을 보호하려고 그러나?" 블랙이 말했다. 카셀은 대답하지 業 했고, 블랙이 말을 이었다. "저 병사는 자신 있게 말했으나, 빌리와 슈벨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저 게이트 안에 몇 명이나 있을까? 특히 나라는 존재를 당할 수 있는 병사가 있을까? 너의 눈에는 그런 고민들로 가득 차 있군. 빌리의 협박이 제대로 통했어." 카셀은 화를 내며 말했다. "슈벨에게 들었어! 당신은 주위의 모든 소리를 들을 줄 안다더군. 지금 그걸 또 증명해 됐고. 그런데 그런 당신을 옆에 두고 내가 무슨 딴 마음을 먹을까봐? 난 아무 것도 할 생각 없다." "오만이다, 카셀." 카셀은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캡틴 카셀!" 그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또 할버드가 밀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카셀은 움찔하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블랙은 다시 낮고 굵은 어조로 말했다. "어떤 연유로 네가 그런 호칭을 달게 되었는지 모르나 내 기준에서 너는 캡틴의 자격이 없다." 적이 하는 그린 말을 귀담아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블랙의 말에는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있었다. 카셀은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그 병사는 너에게 도움을 제공하려 했다. 그건 단순히 너라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패 생판 알지도 못하는 너를 구하려고 그냥 통과해버리면 그만인 저들을 잡으려 하겠는가? 그게 이 게이트를 지키는 병사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 게이트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생명을 느낄 수 없는 내 마음에도 전해져 온다. 너는 느껴지지 않는가?" 게이트의 망루에 있는 병사들 몇 명이 수레에 밝아있는 블랙과 카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기만 있으면 당장 칼을 빼 들고 모두를 체포할 준비가 되어있는 병사들이 적어도 이백 명은 버터고 있을 것이다. 블랙은 할버드를 들어 게이트 쪽을 가리켰다. "이 게이트의 병사들은 단순히 돈을 받고 고용된 병사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명감에 불타는 훌륭한 병사들이다. 그런데 캡틴 울프라는 자가, 감싸준답시고 저들의 의지를 무시하고 있는가? 고작 그런 작은 그릇으로 아란티아라는 거대한 나라를 지킬 자신이 있는가?" 처음에는 단순히 윽박지르거나 놀린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계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 카셀은 어느 새 그의 설교를 새켜듣고 있었다. 블랙은 고개를 돌려 게이트 안을 바라보았다. "돈이 없어 통과를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군. 네가 그랬겠지?" 블랙은 웃었다. 근엄함 스승이 제자의 아둔함을 질책하며 웃는 것처럼, 아버지가 아들의 실수를 보고 웃는 것처럼 그렇게 웃었다. "힘으로는 못 하니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다른 방법이란 게 고작 도둑질인가? 그걸로 나의 전진을 막을 셈이었나? 캡틴의 직위를 버려라, 카셀. 너는 자격이 없다. " 손이 떨렸다. 쉐이든이 가르치고 싶었던 게 이런 것이었을까? 게랄드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것이었을까? 아즈윈이 했던 말이 있었다. '우리에게 인정 받았다면 당연히 정식으로 캡틴이 된다. 그러나 마스터 퀘이언은 다른 테스트를 시작할 것이다.' 로일이 경을 가르치며 별 것 아닌 것처럼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울프 기사단의 세 번째 테스트! 마스터가 직접 지시할 그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너도 하얀 늑대의 이빨을 갖게 될 거다.' 방금 블랙은 카셀을 테스트했고, 불합격을 선고했다. 적이, 그것도 악마의 힘으로 죽음에서 되살아났을지 모를 검은 기사가 그런 선고를 내려봐야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도 카셀은 좌절감에 몸이 떨렸다. "블랙, 잠깐 시간이 필요하오." 빌리가 다가와 말했다. "그린우드 이 멍청한 녀석이 돈을 잃어 버렸다는군. 난처하게 됐소. 잠깐 시간만 주면 어떻게든 해보지. 지금 슈벨이 외상으로 안되냐고 거래를 해보고 있는데, 그도 안 되면......, 응? 무슨 일이 있소?" 빌리는 겁에 질런 카셀과 블랙을 번갈아 보았다. 블랙이 대꾸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기다리도록 하지." 빌리는 카셀에게 뭔가 말하려다가 그냥 게이트 쪽으로 돌아갔다. 블랙의 낮은 웃음 소러가 이어졌다. "네가 해낸 일로 번 시간은 반나절 정도일 것이다. 아니 빌리처럼 수단 좋은 기사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리 없지. 잠깐이면 해결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레드 게이트의 병사들은 골드 게이트에서 어떤 사건을 벌일지 모를 위험한 자들을 멀쩡히 눈 뜨고 통과시킨 바보들이 되는 거지. 자, 어떻게 할 텐가? 그 기회를 캡틴울프라는 자가 날려버릴 것인가? 게이트를 지키다 죽었다는 영광을 네가 무슨 권리로 빼앗으려 하느냐? 오만이다, 카셀. 네게 그럴 자격은 없다." 블랙은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어찌 할 데냐, 카셀?" 캡틴의 직위를 시험 당하고 있었다. 다른 울프의 기사에게 마스터 퀘이언에게, 아란티아의 여왕에 의해 치뤄져야 할 그 시험을 엉뚱하게 익셀런의 갑옷을 입은 괴물에게 당하고 있었다. 카셀은 숨을 토해냈다. "블랙. 만약 당신이 진짜 나의 적이라면 당신은 실수한 거다." 카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여 다 구겨진 종이 족지를 하나 꺼냈다. 거기에 숯으로 짧게 '범죄자들, 통과시키지 말것.'이라고 적었다 그러고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실수인지는 나중에 묻도록 하지." 블랙이 뒤에서 말했다. 카셀은 조용히 자신에게 말을 건네온 병사에게 다가가 그 쪽지를 건했다. 빌리와 슈벨은 잠시 몇 가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팔아버리는 건 어떨까?" "그래. 그러자. 그린우드 저 자식 옷부터 벗겨서 팔아. 저 녀석이 잃어버렸으니까. 넌, 임마, 그런 것도 간수 제대로 못 하고 서전트라는 직위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나가 죽어라." 슈벨의 말에 그린우드는 쩔쩔 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분명히 가방 안에 잘 넣었고, 오늘 아침에도 있는 걸 확인했는데.......“ 그린우드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카셀을 노려보고 소리 질렀다. "저, 저 녀석이 그랬을 지도. 아까 나랑 뒹글었을 때!" “닥쳐." 빌리는 소리쳤다. 그건 카셀을 의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이트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나올 말이 아니기에 막은 것이었다. 빌리는 철저했다. 물론 그는 카셀이 신고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카셀의 쪽지를 받은 그 눈치 빠른 병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러났다. 카셀은 조만간 벌어질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수레로 돌아갔다. 그러나 눈치가 빠를 건 게이트의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슈벨이 할려와 카셀의 어깨를 잡았다. "너 방금 저 경비병한데 뭐 줬어?" 카셀은 무시했다. 슈델은 힘을 주어 그의 어깨를 끌어 당겼다. "말해!" "너희들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했다." "이 개 자식!" 슈벨은 카셀의 멱살을 잡았다. "빨리 안 쪽에 말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위험해질 거다.“. 슈벨은 황급히 멱살을 놓고 게이트 족으로 되돌아갔다. "너 조금 이따 두고 보자." 슈벨이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게이트 안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중에 게이트 병사가 칼을 맡기라는 말과 슈벨이 칼을 맡길 바에야 싸움을 택하겠다는 말이 들렸다. 그 즉시 움직이지 말라던가, 무기를 버리라던가 하는 요란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비명 소러가 들렸다. 금속성이 울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아주 빨랐다. "생각 이상으로 대처가 빠른 게이트 병사들이군.“ 블랙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쥐고 있는 할버드가 수레에 끌리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나를 따르는 자들이 안에서 싸우는 데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지. 카셀, 이 곳에서 네가 싸움을 일으킨 자들의 죽음을 지켜봐라. 그리고 저들의 죽음을 책임 져야 한다." 카셀은 어금니를 악 물고 말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희생 없는 전투란 없다. 그 희생을모조리 젊어질 줄 알아야 비로소 리더의 자격이 생긴다. 친구가 그런 말을 했지. 나는 이 싸움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실수한 거라고 내가 말했지? 나는 이 일을 계기로 하얀 늑대의 이빨을 갖게 될 것이다.“ 블랙은 수레에서 내려 카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성장하지 않는 녀석이라면, 나는 게이트로 가기 전에 너부터 베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카셀을 벨 듯 할버드를 크게 들였다. 그러나 곧 그 끝은 어깨 뒤로 넘어갔고, 그는 할버드를 젊어진 채 말했다. "나를 따르는 자, 나를 무서워하는 자....... 그 두 부류는 살려두었으나, 나를 적대시 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그 세 가지 중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군." 블랙은 천천히 게이트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나와 경쟁하고 나를 배우려는 자라는 건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되기 이전에도 그런 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곧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고함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카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게이트 바깥으로 누군가 떠밀려 나가떨어졌다. 게이트의 병사였다. 그는 배에 박힌 칼을 쥐고 힘겹게 일어나려다 도로 고개를 숙였다. "선택을 후회하지 마라." 카셀은 눈물을 밖고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방금 죽은 병사의 칼을 쥐었다. 게이트 앞에 걸린 붉은 깃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천년 전 드래곤이 피를 뿌렸다는 바로 이곳에 또 한 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잘못된 선택일 지라도 일단 들어섰으면 전진하라."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다시 고였다. 그러나 카셀은 멈추지 않았다. “행동해라, 카셀. 너는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다." 게이트 안은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뒤엉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블랙이었다. 그가 휘두른 할버드에 두 명의 병사가 동시에 나가떨어지고 돌로 세운 기둥이 부서졌다. 부서진 기둥의 파편에 맞아 기절하는 병사가 있을 정도였다. 그린우드도 있었다. 그는 게이트의 병사 중 하나를 쓰러뜨린 후 가슴을 밟고 칼을 박아 넣었다. 그는 괴상한 웃음을 터트리며 빙글 돌려 칼날을 뽑았다. 뿜어져 나온 피가 그의 발목을 적셨다. 그는 다음 상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 캡틴 울프께서도 납시셨나?" 그는 칼을 흔들며 카셀에게 다가왔다. "난 알아. 내 돈을 훔친 건 너지?" "그래." 카셀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 너 때문에 캡틴 빌리에게 내 신뢰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넌 처음부터 없었던 게 나았어." "그럴 지도.......“ 카셀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대꾸했다. "이 혼란 속에 너 하나 죽었다고 이상할 것도 없겠지." 그는 카셀 앞에 서더니 잘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카셀이 쥐고 있는 칼이 그의 배를 먼저 찔렀다. 그린우드는 들었던 칼을 힘 없이 내리그었다. 하지만 험을 잃은 칼날은 카셀의 어깨에 닿아 미끄러졌다. 설마 찔릴 줄은 몰랐다는 듯 황당해 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카셀은 말했다. "로일이 방심한 적을 찌르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더니 정말이군." 카셀은 그의 배에서 칼을 힘 있게 했다. 그린우드는 배를 움켜쥐고 뒤로 휘청거렸다. 카셀은 다리를 약간 벌려 자세를 잡고 칼을 들어올렸다. 카모르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배운 거라고는 그거 하나뿐이었다 물론 아즈윈은 그런 단순한 훈련이라도 최소한 반년은 해야 겨우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년 후를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그는 들어올린 칼을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게랄드의 말이 옳았다. 지금 힘으로 사람을 베는 건 무리였다. 칼날은 그린우드의 쇄골에 박혔다. "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카셀은 다시 칼을 들었다. 그리고 로일이 가르쳐준 것으로 공격법을 바꾸었다. 그는 칼날을 고쳐 쥐고 도망치는 그린우드의 뒷덜미를 찔렀다. 뼈가 부서지는 느낌이 손에 전해졌다. 칼날은 목뼈를 비껴나가 살갗을 및었다 그린우드는 계속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극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무리였다. 카셀은 그린우드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저 정도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아있는 게 더 힘들 것이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여 칼을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베는 순간에는 몰랐지만, 카셀은 잠란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너, 이 자식. 이러려고 우릴 얌전히 따라왔나?" 슈벨이 앞에 있었다. 그의 칼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카셀은 무표정한 눈으로 말했다. "이게 내 선택이다." "후회할 거다." "안 해." 카셀은 칼을 집어 던졌다. 슈벨은 그 칼을 쳐냈다. 카셀은 도망쳤다. 게이트의 다른 병사가 슈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카셀은 순식간에 따라 잡혔을 것이다. '모든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구조가 같다 그러면 여기에도 2층이 있을 것이다.' 블랙의 그 엄청난 공격 속에서도 게이트의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 명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메웠고, 다른 한 명이 쓰러지고 그 시체를 밟고서라도 또 다른 병사들이 싸웠다. 빌리와 슈벨도 세 명 이상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힘들었는지, 포위당하면 서둘러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블랙이 말이 맞았다. 이 곳의 병사들은 단순한 의무감으로 여길 지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실력자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블랙의 칼에 죽을 인물들이 아니었다. 카셀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모두 싸우러 내려가는 통에 위를 지키는 병사는 없었다. 카셀은 안에 있는 탁자를 넘어뜨리고 그 위에 책과 건초를 집어 던졌다. 2층은 사방이 모조리 돌로 막혀 있어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질 염려는 없었다. 마시려고 준비해둔 건지 접대용으로 쓰는 건지 모를 술병들이 책장의 책 사이에 꽂혀 있었다. 카셀은 술병을 들어, 넘어뜨린 탁자와 책 위에 뿌리고 등불에 있는 기름도 여기 저기에 흩뿌렸다. 물이 담긴 꽃병을 건초에 집어 던지고 탈 것 안 탈 것 가리지 않고 어지럽혔다. 그리고 그 위에 화로에 담겨 있는 숯불을 던져 놓았다. 처음에는 금방 꺼질 것 같더니 곧 불이 화르륵 타올랐다. 마지막으로 카셀은 그 위에 병사들의 옷가지를 올려놓았다. 시커먼 연기가 순식간에 위층을 가득 메웠다. 그는 기름을 묻힌 헝겊을 부서진 의자 다리에 묶어, 거기에도 불을 붙였다. 그걸 든 채로 그는 밑으로 내려갔다. 싸움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천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은 병사들은 잠깐 싸움을 멈추고 천장부터 차기 시작한 연기를 바라보았다. "불이다." 누군가 소리쳤고, 제일 먼저 빌리의 부하들이 게이트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달아나지 않는 건 빌리와 슈벨, 블랙, 그리고 게이트의 병사들이었다. 위에서 불이 붙은 거라 밑으로 연기가 내려오는 시간은 약간 더뎠다. 그러나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점점 아래층의 천장부터 점은 연기가들어차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조금 허둥대다가 불을 끄려고 물통을 찾았다. 카셀은 마치 레드의 경비병인 것처럼 소리쳤다. "후퇴하라. 이 연기를 보고 다른 곳에서 경비대가 올 것이다. 지금은 모두 후퇴하라. 게이트는 불타지 않는다. 후퇴하라!" 검은 연기에 당황한 병사들은, 명확한 판단력을 가지지 못 했다. 그들은 결국 게이트 밖으로 달아났다. 블랙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공격하지 않고 무기를 접었다. 빌리와 슈벨도 칼을 늘어뜨리고,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카셀을 노려보았다. "카셀 네가 그랬나?" "그렇다." "너 이 자식.......“ 슈벨이 칼을 들자, 빌리가 막았다. "그만해. 차라리 잘 됐어." "뭐가 잘 돼?" "그보다 이 연기를 보고 다른 경비대가 오면 곤란해진다. 지금은 서둘러 골드 게이트로 가는 게 먼저야." 슈벨은 신경질적으로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게이트를 나섰다. 블랙이 뒤따라 나간 후 빌리는 카셀에게 말했다. "이런 짓을 하고 무사할 것 같은가?" "어떤 짓? 불을 지른 거 말인가, 게이트에 알린 거 말인가? 내가 무슨 조치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한 건 네 착각이었다. 그리고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경고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랬지." 빌리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너를 소중한 인질 대접하는 건 포기한다." 빌리도 나가고, 카셀은 연기로 어두워진 안을 돌아보았다. 죽은 병사들이 사방에 늘어져 있었다. 그 중에는 블랙의 할버드에 두 동강이 난 끔찍한 시체도 보였다. "죄송합니다." 그는 사과하고 게이트를 나섰다. 희생 없는 전투는 없고, 잘못된 선택이라도 머뭇거려선 안 된다....... 그러나 카셀은 이 모든 일에 심한 자책만 느겼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4.빌리 쫓아오는 자 "남은 병력은?" 빌리가 물었다. “열한 병 입니다." 그린우드 대신 서전트가 된 레이너가 대답했다. 가끔 빌리에게 훈련을 받는답시고 자기들끼리 검술 대련을 하는데, 그 중 제일 나는 의욕적으로 떠들 줄 아는 그린우드가 더 나았다. 객관적인 상황만 전달하는 그의 말투는 상실감을 더욱 늘려놓았다. 빌리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담배 가진 거 있나? 파이프랑." 그는 갑자기 슈벨에게 물었다. "난 5년 전에 끊었어. 너도 피우는 거 못 봤는데?" “한 일년 끊었었지 갑자기 입에 뭔가를 물고 싶어 미칠 것 같군. 누구 가진 사람 없나?" 부하들 중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불까지 붙인 파이프를 내주었다. 빌리는 한 모금 길게 빨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수레를 회수해 왔으니 블랙의 느린 걸음을 걱정할 건 없지만, 이제 이 길은 포기해야겠어. 골드 게이트까지는 외길이라, 우릴 쫓아올 군대에게 목을 내놓는 꼴이 될 거다." "만나도 우리가 불리하다고는 볼 수 없지 않아?" "전쟁이라도 벌이자는 거냐?" "게이트 하나를 무너뜨렸으면 이미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골드 게이트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하자. 더 이상의 트러블을 일으키는 건 사양한다. 그리고 레이너, 카셀을 밧줄로 묶어라." 빌리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하더니 레이너에게 명령했다. 카셀의 얼굴에는 연기 속을 들고 나오느라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누구의 것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 피도 묻어 있었다. 레이너도 분명 카셀을 무시하는 부류 중 하나였으나, 이제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 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카셀은 동료를 죽이긴 했으나, 그게 험한 인생을 살아온 범죄자 녀석들이 두려워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되려 자기 동료를 죽인 것에 대해 분노를 느껴야 했다 복수라도 할듯 노려보아야, 녀석들의 행동 패턴에 어울린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아무 저항도 없이 밧줄에 묶이는 카셀에게 접근하길 꺼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얌전히 대해 주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따라줘야겠군. 필요하다면 재갈이라도 물리겠다." 다분히 협박하는 어조였으나, 카셀은 대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으로 카셀이라는 인간을 분석하자면 그는 검술을 숨기고 있는 어느 정도 수준을 넘는 실력자여야 했다. 그래서 그린우드가 그를 괴롭힐 때도 어찌 하나 내버려 두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린우드를 죽이는 걸 보니, 이제 막 검술을 배워 좀 어색한 자세로 나무 기둥을 때리는 동작 이상은 보여주지 못 했다. 처음 빌러와 겨를 때보다는 진지했으나, 숨기고 있던 힘을 드러낸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미숙했다. 그럼 검술을 속인 게 아니었다. 분석되지 않는 녀석....... 저렇게 허약한데 어떻게 저렇게 자신감이 넘칠 수 있을까? 허풍이라고 하기에는 꾸밈이 없어 보였다. 담배 파이프 하나를 모두 태우는 시간이 지났고, 빌리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이 라고! 그는 녀석의 진짜 모습이 어떤 건지 궁금해졌다. "이동한다." 골드 게이트로 향하는 큰 길은 과연 통행료와 도로 사용료를 지불해야 할 만큼 잘 닦인 길이긴 했다. 예정대로 수레를 좁은 길로 뺐으나, 그 길을 이용하지 못 한다는 게 무척 아쉬웠다. 데리고 있는 부하가 반으로 줄었고 경비대가 추적해 올 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빌리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잠시 참았던 담배를 피우니 고민도 연기와 함께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담배를 못 끊지....... 빌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순간에 옆에 슈벨이 있다는 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는 짓이 방정맞은 것 같아도 말없이 옆에 있어주면 의지가 되었다. 아직 친구가 되기에는 넘지 못한 벽이 있었으나, 그걸 굳이 넘어뜨려야 할 의무도 없으니 오히려 편안했다. 카셀은 더 이상 수레에 타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밧줄에 양손이 묶인 채 걸었다 저항하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았으나 그게 얼마나 오래 갈 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빌리는 카셀을 억지로 힘들게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카셀이 자신감을 잃고 본 모습을 드러내면, 지금까지의 모습이 약자의 허풍이었는지 강자의 자신감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남쪽 델리 병풍처럼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산이 줄지어 있었다. 여름인데도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있는 걸 보니 보통 높은 산이 아닌 모양이었다. 밀어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 뒤쪽에 흐릿하게 보이는 산의 윤곽은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림으로만 보고 얘기로만 듣던 하늘 산맥이었다. 지금 위치에서도 충분히 그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러니 인간의 출입을 거부하는 신의 산맥이라고 하는구나.' 남쪽 산을 바라보던 카셀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여기에 와본 적이 있어,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리는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묻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동은 해가 져서야 멈췄다. 빌리는 가혹하다 싶을 만큼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저택 식사 때 슈벨이 기진맥진한 모두를 대신해 말했다. “나야 수레에 타고 있어 편하지만, 너무 급히 가는 거 아닌가? 누가 쫓아온다고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길에서 벗어났으니 게이트의 병사들은 따라오고 싶어도 못 올 거다." "안전을 기하는 거지. 내일부터는 다시 속도를 줄인다. 그러니 오늘은 좀 참아." "그 말은 나한테 하지 말고 저 녀석들한테 해." "알아서들 하겠지." 빌리는 빌린 파이프를 또 물었다. 그리고 다시 카셀을 돌아보았다. 중간에 휴식 한 번 없었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묶인 부위를 몇 번이나 살펴보는 걸 보아 몹시 아프긴 한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불을 피운다 하며, 잠깐 어수선해졌다. 다들 허기가 져 음식이 채 되기도 전에 빵을 나누고 마른 고기를 뜯었다. 군대였다면 그런 모습을 용납하지 않았을 테지만, 빌리는 우선 그들을 내버려두었다. 오늘만큼은 그들에게 군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빌리는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어둑어둑해지는 동쪽에서 쫓아오는 깃발이나 군대가 일으키는 먼지는 보이지 않았다. 슈벨의 말대로 위험할 건 없어 보였다. 먼저 여행해본 친구의 말대로 이 곳은 정말 따분할 정도로 재미없는 곳이었다. 남쪽 산맥의 웅장함을 감상하는 것 외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평야였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평야 주위에는 강이나 작은 시내가 흐르고 강 주위에는 가을의 수확을 기다리는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런 기름진 땅을 천 년 동안이나 다른 나라가 탐내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아니면, 탐낼 수 없었던가. 듣기로는 10년 전 전쟁에서 론타몬조차 아란틴아를 침공할 예정은 없었다고 했다. 예정된 그들의 진군은 가넬로크에서 끝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생각을 바꾼 론타몬의 황제는 그 엄청날 국력의 태반을 아란티아 정벌에 쏟아 부었고, 결국 실패했다. 다른 나라는 이렇게 될 것을 알기에 이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던 걸까? 론타몬에서는 그 일을 전쟁의 패배라고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아란티아의 저주, 또는 여왕의 저주라고 불렀다. 결과적으로 론타몬의 실패 덕에 향후 몇 십, 아니 어쩌면 몇 백 년 동안 어느 나라도 아란티아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다들 정신없이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형식적인 인원 체크를 하던 레이너가 소러쳤다. "어이, 두코! 두코, 어딨나? 누구 본 사람 없어?“ 다들 새삼스레 주위를 살폈다. 열한 명이어야 할 인원이 열 명만 남아있었다. "아까 저 쪽으로 장작 주우러 간 것 같아," 한 명이 말했다. "혼자서? 언제 갔어?“ “한참 됐는데?" 레이너는 신음을 내더니 두 명을 지목했다. "식사는 나중에 하고 같이 좀 가자." 그는 칼을 챙겨 다른 두 명과 두코가 갔다는 방향으로 갔다. 그들은 한 시간증 후에나 도착했다. 남겨 놓은 식은 수프와 빵을 내밀며 슈벨이 물었다. "없나?" "괘 넓게 수색해 봤는데 없습니다. 이제 어두워서 사물을 분간하기도 힘들고.......“ "내가 갔다 오지." "아마 어디서 길을 헤매고 있겠죠. 그러실 것까진 없을 겁니다." "괜찮아 하루 종일 암아 있어서 몸도 풀 겸 산책하러 가는 거니까." 슈벨은 수레에 묶인 말을 풀어서 올라탔다. 담배를 태우고 있던 빌리가 말했다. "어차피 여기에서 묵을 텐데, 아침 해가 뜬 다음에 가지 그래?" "아니, 지금 가겠어. 멍청한 녀석이 어디에서 다쳐서 낑낑대고 있는 거라면 빨리 찾아봐야갈아." 빌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슈벨이 말을 달리려고 할 때 뜻밖에도 블랙이 그의 앞을 막았다. 방금 전까지 옆에 있었던 터라 멀리 앉아있던 빌리도 깜짝 놀랐다. 슈벨의 말이 앞발을 세우며 흥분했다. "왜 그래, 블랙?" 슈벨은 얼른 말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오랫동안 수레 뒤에 태우고 다녀 지금은 많이 익숙해진 줄 알았으나, 슈벨의 말은 여전히 블랙을 무서워 했다. 블랙이 물었다. "칼은 챙겼는가?" 슈벨은 잘 때도 풀지 않는 칼을 보여주었다. 블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라." 슈벨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위험한 일이라도 예언하는 거야?" 블랙은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남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동쪽을 바라보았다. 방향을 구별할 줄 모르는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느낌대로 투구의 방향을 잡고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군." "그런 말을 할 때가 다 있네? 느낌이니 일어날 것 같다니....... 덕분에 가벼운 밤 산책이 모험거리가 되어 버렸군." 블랙이 길을 비켜주었고, 슈벨은 즉시 말을 달렸다. 빌리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자리는 준비하되, 전원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쳐서 졸렸던 눈들이 다시 동그랗게 떠졌다. 카셀도 자려고 폈던 다리를 도로 접고 있었다. 빌리는 계속 그를 주시했으나, 특별히 수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슈벨은, 저녁에 하늘 천장에 걸려 있던 반달이 서족에 질 무렵에야 돌아왔다. 모두 그의 옆으로 둥글게 모였다. 슈벨은 말에서 훌쩍 뛰더니 안장 뒤에 싣고 있는 시체의 머리에 손을 했다 볼 것도 없이 두코의 시체였다. "수풀 속에 숨겨져 있더군, 달이 밝지 않았더라면 흔적을 찾기도 힘들었을 거다." 빌리는 몇 명의 도움을 받아 말에 걸려 있는 두코의 시체를 끌어내렸다. 시커멓게 벌어진 목의 자상을 보고, 시체를 내렸던 녀석들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그었군." 빌리가 말했다. "아플 겨를도 없이 죽었을 거다. 보니까 목을 비튼 흔적도 있어." "비틀어서 소리를 못 내게 죽인 후 목을 벤 건가?" "그 반대일지도." "어디 에 죽어 있었나?" "발견한 곳은 드문드문 나무가 있는 곳이었는데, 옮겨진 거야. 핏자국을 보니 죽은 장소는 여기에서 밀지 않은 곳이더라, 그리고 웃긴 건 그 자러가 주위에 숨을 곳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였다는 거다 이상하지?" 슈벨의 말을 듣고 정말 이상해 하는 사람은 빌리 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다른 녀석들을 위해 슈벨은 추가 설명을 했다. “모르겠냐? 숨어있을 곳도 없는 곳인데 뒤에서 접근하여 목을 땄단 말이다. 낮에 레드 게이트에서 싸울 때 보니까 두코 이 녀석도 꽤 하던 놈이었지. 멍청히 서 있다가 당할 녀석은 아니었다." 슈벨은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두코를 죽인 건 상당한 실력자다. 너희들은 오늘 낮의 그 격렬한 전투에서도 살아 남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방심하지 마라.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가 두코를 죽인 거다 그게 한 명인지 한 팀인지는 모르지만." 슈벨은 모두에게 경고해두고 허리를 켰다. 그가 말을 다시 수레에 묶으러 가는 동안 빌리는 레이너에게 야간 보초를 서는 차례를 짜두라고 명령했다. 카셀은 여전히 아까 앉아있던 곳에 얌전히 밝아있었다. 시체를 본 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 그들을 공격했다면 그는 당연히 자신을 구해주러 온 누군가를 기대해야 했다. 표정을 잘 감추는 건지, 정말 기대하지 않는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다. 지금까지의 카셀을 보면 당연했다 그는 이전에 잡혀 있는 중에도 화이트 게이트에서 승부를 보려고 했다. 또는 레드 게이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결코 누군가 자기를 구해주길 기다리지 않았다. 지금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말에 겁을 먹는 쪽이지, 뭔가를 기대하는 쪽이 아니었다. "우리를 노리는 놈이 있다고 생각하나?" 빌리는 슈벨을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물었다. “그 외에 무슨 다른 게 있어? 도적 떼가 노린다면 한 명만 죽인 게 말이 되냐? 지금 상황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슈벨은 묶인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카셀을 돌아보며 말했다. 빌리도 카셀을 보며 말했다. "저 녀석 때문이겠지. 우리가 이 쪽으로 향한다는 흔적을 남긴건가?" "네가 손을 묶어 버리고 나서부터 거의 만사를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더군. 말을 몰고 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고 있는 중에 수상한 행등은 하지 않았어." “나도 못 봤다. 또 내가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놈도 아니고. 가끔은 정말 고문이라도 해버리고 싶은 녀석이야." "네가 그러지 못할 걸 알고 저러는 거야. 만약 네가 그럴 놈이었으면, 아마 거기에 걸 맞는 다른 행동에 들어갔을 걸." 슈벨은 그 모습을 상상하더니 웃어 보였다. "왜 웃어?" "아니, 뭐랄까, 전혀 근거는 없는데, 칼을 못 쓰긴 하지만 이상하게 저 녀석 진짜로 울프의 캡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랑은 안 맞는 짜증나는 성격이긴 한데, 시간을 두고 만나면 정들 것 같기도 하군. 우선 잠이나 자두자. 정 안 되면 까짓 저 녀석 목에 칼이라도 들이대지 뭐. 우릴 공격한 개 자식은 나와라!" 슈벨은 앞에 카셀이 있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을 보여주었다. "정말 그러라고 하는 말이냐?" "못할 것도 없지." "네 녀석도 분석을 끝낸 인간상인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니군. 그보다 요새 그 토끼 인형을 안 끌어안고 자던데 잃어버렸냐? 아니면 그런 버릇 없애기로 했나?" 슈벨은 손을 내저으며 돌아섰다. "남의 사생활에는 접근 금지." 빌리는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는 아까 피우던 파이프의 담배를 마저 태워 없앴다. 담배 연기에 반사된 달빛이 빌리의 얼굴로 쏟아졌다.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존재에 대한 긴장감이 모두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다. 블랙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 이후 가장 긴 밤이 이어졌다. 블랙은 남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파란 빛이 번쩍 하고 하늘을 가득 채웠다. 번개가 친 거라고 생각했으나, 천둥소리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빌리의 부하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모두가 무기를 들고 비명을 지른 녀석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의 옆에는 아직도 모포를 덮은 채 한 명이 누워 있었다. 끈적하게 마른 피가 모포를 적시고 있었다. 레이너가 모포를 걷었다. 두코의 시체처럼 목이 베인 채 눈을 크게 뜬 남자가 공허한 시선을 하늘에 보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브록이었고, 말은 없지만 남을 잘 챙겨주는 장남 같은 녀석이었다. 또 요리도 그나마 제일 잘 했다. 이제 그들은 아침마마 끊여주는 브록의 콘수프를 맛 볼 수 없게 되었다. "보초들 안 서고 뭐 하고 있었나?" 슈벨이 버럭 소리 질렀다. "서, 서고 있었습니다. 시간당 두 명씩....... 브록도 새벽 정도에 교대했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살아 있었는데......, 그, 그렇지 않나?' 레이너가 변명했다. 처음 시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른 녀석도 황급히 변명을 거들었다. "제가 잠들 때만 해도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코까지 골았는걸요." "그럼 언제 죽었다는 거야? 그보다 바로 옆에서 죽었는데, 몰랐다는 게 말이 돼?" 빌리가 흥분한 슈벨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해둬 이 녀석들 잘못이 아니야."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누가 공격을 할 수 있었다는 거야? 눈을 뜨고 있었다면 당하지 않을 일이었잖아 " "나도 뜨고 있었다." 빌리는 모두가 있는 곳에서 하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흥분한 슈벨이 말을 멈췄다. 빌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나도 계속 이 쪽 방향을 보고 있었어. 하지만 공격하는 낌새는 느끼지 못 했다. 녀석들 잘못이 아니야." 슈벨은 자신이 깨어 있을 때 당한 건 분명 아니라고 투덜대고 있었다. 빌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졸음이 쏟아지며 또 만사가 귀찮아지려 했다. 의욕을 가져보려고 빌리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브록을 다른 곳으로 옮겨라. 이동을 준비한다. 그리고 다들 주위에 어떤 이상한 신호라도 발견하면 지체 말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내게 보고하라. 별 거 아닌 일이라고 넘겨 짚고 무시하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 우릴 쫓아오는 놈은 그 들을 노릴 것이다." 약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한꺼번에 죽었다면 그 죽은 수치에 대해 현실감을 느끼지 못 하지만, 한 명씩 줄어든 빈 자리는 꽤 크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빌리도 그랬다. 블랙은 수레에 앉아 있었다. 빌리는 졸린 것보다 심적으로 피곤하여 블랙 옆에 털씩 앉았다 수레가 삐걱거리고 흔들렸다. 슈벨도 수레로 와 말을 모는 자리에 않았다. "이 건 사냥꾼 소행이다." 빌리가 말했다. "사냥꾼?" 슈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냄새가 나." 빌리는 물을 한 컵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론타몬에서 가장 유명한 사냥꾼이 하나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녀석이 벌어들인 현상금만 해도 금화 이천이 넘는다 하더군. 그런데 어느 날, 녀석은 대담하게도 왕실로 이등 중인 익셀런 기사단을 공격했다." “현상금이 걸려 있는 범죄자를 잡는 녀석들이 기사단을 공격해? 의뢰라도 받았나?" "사냥꾼이 그런 짓을 하면 그건 사냥꾼이 아니라, 암살자지. 어쨌든 녀석의 그런 공격은 무모하긴 했어도 무척 대담한 공격이었다. 두 명이나 되는 기사를 죽인 후 녀석은 산채로 붙잡혔다. 그리고 왜 그랬냐는 심문에 녀석은 이렇게 대답하더군. 그냥!" "그냥 뭐?" "그냥 그랬다는 거야. 사냥감이 눈앞에 있는데 현상금 계산할 시간이 어디 있었냐 이거다. " "웃기네, 줘, 엄청난 도전 정신이군. 아무리 그래도 기사단 하나를 통째로 사냥할 생각을 품다니." 빌리는 그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당연히 두 명이나 살해했으니 그 대가는 사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녀석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우리 중 하나와 정식으로 싸워 이기면 살려주했다는 제안을 했다. 내가 추측하기에 사냥으로 다져진 녀석의 검술 정도면 익셀런 증에서도 중간쯤은 가겠다고 생각했거든 반반의 확률만 잘 맞추면 그는 세 번째 익셀런 기사를 죽이고도 살아남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게 되는 거였지. 그런데 그 재수 더럽게 없는 녀석은 나를 지목하더군." “확실히 기습에 능한 녀석이라면, 정면 대결을 할만한 실력은 부족하겠지." “난 두 번 정도 녀석을 봐줬다. 제대로 키우면 상당한 수준의 기사가 될 것 같아 죽이기 아까워서." “내 눈앞의 녀석이 유령이 아니라면, 사냥꾼이 했겠지?" "녀석은 끝까지 자존심을 살려 나와의 대결을 회피하지 않았어. 나는 그 강한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했다." “죽였군? 흐음, 재미있는 얘기이긴 한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빌리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깎지 못한 수염이 꽤 많이 자라 있었다. "지금 우릴 공격하는 그 사냥꾼 놈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말하는 건데, 녀석은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 만약 죽이려 든다면, 화살을 쓰는 게 낫지 왜 칼을 쓰겠나?" "듣고 보니 그러네.“ “저 녀석들을 봐라. 이백 명이나 버터고 있는 게이트의 경비대에도 덤볐던 배짱하며, 동료들 절반 가까이가 어제 죽었는데도 물러서지 않는 오기....... 그런데 밤 사이 두 명 죽은 것으로 완전히 겁에 질렸어, 화살로 죽었다면 오히려 상대를 죽이겠다고 날뛸 녀석들이 말이야. 이런 사기 저하는 결국 우리까지 잡아먹을 거다." "난 겁 먹지 않았어!" 슈벨이 어린아이처럼 부정했다. 빌리는 그의 가슴을 손등으로 툭 쳤다. “그거다, 슈벨. 그 사냥꾼 놈의 목표는 우리 둘이야. 그 익셀런을 공격했던 사냥꾼 놈이 그러더라고. 제일 약한 놈부터 하나씩 기습으로 죽여나가면, 결국 제일 강한 놈도 겁에 질릴 거라고 계산했다고. 그럼 자기 실력보다 더 위인 녀석도 죽일 수 있다나? 우릴 공격하는 놈도 같다. '우리'가 공포에 절어있길 바라며 부하들을 이런식으로 죽이는 거야. 내가 왜 과거의 얘기를 했느냐고? 최악의 경우, 우리 둘만 남게 되었을 때 결국 그 사냥꾼 놈이 택하는 마지막 사냥은 일 대 일 대결이다. 그 상황에서 나나 네가 자제력을 잃는다면, 녀석이 바라는 대로 되는 거야." "신기할 정도로 멀리까지 내다보는 구나, 너는? 난 그냥 어떤 녀석인지 잡히기만 해봐라 하고 있었는데." "가정이다." 빌리가 얘기를 마무리 짓자, 슈벨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한 가지 틀린 가정이 있다." 가만히 있던 블랙이 말했다. 슈벨의 웃음소리가 쏙 들어갔다. "뭐요?" 빌리가 물었다. "지금 우릴 노리는 사냥꾼이 최종적으로 고립시키려 하는 건 너희 둘이 아니다. 나다." 슈벨를 입만 딱 벌렸다. 빌리도 차마 뭐라 할 말을 못 찾지 못 했다. 눈치 빠른 슈벨은 금방 이해하고 말했다. “사냥꾼 놈은 우리조차 저 녀석들과 같은 사냥감 중 하나로 본다 이거야?" 블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렇다. 난 빌리가 말하는 상당 부분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빌리는 아직 내가 본 한 가지를 모르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 사냥꾼은 밤 사이 나를 공격하려 했다." "맞소?" 빌리가 물었다. "내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친 곳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칼을 꺼내더군. 나토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뭔가를 계산하는 것 같더니 금방 물러나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다가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고, 물러나는 소리만 들었다. 아침에 죽어있던 병사는 아마 내가 그 소리를 듣기 전에 죽은 거라 생각한다." “왜 말하지 않았소?" “다가오는 소리라면 너희들에게도 경고했을 테지만, 물러나는 소리였기에 말하지 않았다. 조심하라, 빌러. 그리고 슈벨. 그 자는 나에게도 버거운 상대일 것이다." 슈벨과 빌리는 입을 다물었다. 주위의 모든 소러를 듣는다는 블랙이 놓렸다는 사실보다 블랙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둘은 알게 모르게 자기들도 공포에 전염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비가 온후 얼마 동안은 서늘했지만, 지금은 여름의 햇살이 머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흐르는 땀에 금방 옷이 축축해졌고, 모두 지쳐 걸음이 느려줬다. 빌리는 점심 때가 되어서야 수레를 정지시켰다. 레이너를 중심으로 몇 명은 보초를 싫고, 나머지는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배고픔에 되려 활발했던 저녁 때와 사뭇 다르게 지금은 다들 늘어져 있었다. "힘드냐?" 슈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주저앉아 있는 카셀에게 물 주머니를 내주었다. 카셀은 사양 않고 한 모금 마신 후 근 하루 만에 처음으로 입을 뗐다. "나만 힘든 건 아닐 거다." 식사 준비 하나하나에도 일일이 신경 쓰는 빌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멀리 가지 마라. 근처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면 바로 보고하고." 슈벨도 약간 높은 곳에 올라서서 주위를 잠시 살폈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고 확신하고, 그는 카셀 옆에 다시 앉았다. "세수라도 할래?" 빌리의 부하들이 그릇을 닦고 감자를 씻는 시냇가를 가리키며 슈벨이 물었다. "허락해주면." 카셀이 힘없이 말하자, 슈벨은 그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밧줄이 닿은 부분은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잠깐 이리와 봐." 슈벨은 가방에서 약초를 꺼내 조금 씹어서 그 위에 얹었다. 카셀은 무척 쓰라린지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슈벨은 그 모습을 보고 씁쓸히 미소 지었다. "너무 안 그러려고 애쓰지 마라. 레드 게이트에서의 너에 대해서는 화가 많이 났지만, 그렇다고 너를 괴롭힐 생각도 없어. 너와 친해질 생각도 없지만, 너와 적대시 하고 싶지도 않다." 슈벨은 붕대까지 감아준 다음에 말했다. "물이 안 닿게 해. 저녁쯤에 붕대를 갈아주지." "고맙다." 슈벨은 그가 시내로 내려가 세수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성수를 대하는 성직자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물을 떠서 얼굴에 했다. 손을 씻은 다음 천천히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서야 슈벨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가 물을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카셀에 대해서는 모두 빌리에게 맡기고 있으나, 이건 조금 가혹한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빌리는 뭘 노리고 있는 걸까? 혹시 카셀이 무너져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닐까? 정말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면 차라리 고문을 하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 슈벨은 카셀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검도 못 쓰는 이 멍청한 녀석에게 점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부터 슈벨은 그가 캡틴 울프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셨다. 그는 쓰러뜨려야 할 적이었다.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슈벨은 당장 칼을 뽑아 주위를 살폈다. 카셀도 물 떨어지는 얼굴을 들었다 "물가에서 나와." 슈벨은 얼른 명령했고, 카셀은 마지막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시키는 대로 했다. "슈벨, 이 쪽으로!" 빌리가 불렀다. 슈벨은 카셀을 불러 빌러 쪽으로 갔다. 그 곳에는 한족 다리가 잘린 레이너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쓰러져 있었다. "맙소사!" 슈벨은 당장 달려가 그의 잘린 곳을 지혈했다. "기절하면 안 돼. 아무 말이라도 해라." 그는 상처를 조이며 말했다. 빌리가 말을 시켰다 "레이너, 정신 차려라. 누가 공격했지?" “모, 못 봤습니다. 누가 다가오는 소, 소리가 들려...... 으윽!" 묶인 곳을 세게 조이니 그 고통을 참지 못 하고 레이너는 비명을 질렀다. 슈벨은 다른 녀석에게 소리쳤다. "내 가방에서 약초 꺼내와 그리고 아무나 가서 물을 끊여라. 레이너, 계속 말해.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모, 모습은 못 봤습니다....... 그냥, 돌아서 보니 누군가 공격했고...... 그, 그 다음부터는 기, 기억이.......” 레이너의 주위에 모여 있는 빌리의 부하들은 하나 둘씩 카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카셀은 물 묻은 얼굴을 더러운 소매로 닦고만 있었다. 다리 잘린 부상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침착하다 못해 차가웠다. "하, 하얀 늑대의 소행 같습니다."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다른 녀석들도 웅성거리며 저마다 말을 꺼냈다. "자기들의 캡틴을 구하려고 그 놈들이 나타난 겁니다." “하얀 늑대는 싸움에 임하면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제, 제가 듣기에는 열 걸음 떨어친 곳에서도 상대를 벨 수 있다고 합니다. 레이너도 분명.......“ “닥쳐. 활을 들면 열 걸음이 아니라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런 것에 동요하지 마." 슈벨이 버럭 소리질렀다. 하지만 그 역시 모두를 진정시킬 말을 찾지 못 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고 있는 카셀은 슈벨이 묶어준 붕대에 손을 얹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를 공격하는 자는 빌리와 슈벨과 블랙을 경계하는 자다. 그래서 조무래기들 먼저 각개격파하는 것뿐이야. 만약 내가 아는 누군가가 나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면 굳이 이런 행동은하지 않는다. 정면에서 나타났을 거야. 그러니 그 자는 너희들이 걱정하는 하얀 늑대는 아니야." 그토록 선해 보이던 카셀의 미소는 이제 살인마의 미소처럼 모두를 겁주고 있었다. "네가 할 줄 아는 거야, 그런 식으로 말만 앞세우는 게 다지. 밧줄 가져와라." 빌리는 직접 카셀의 손을 도로 묶었다. "레이너를 수레로 옮겨라." 급한 대로 지혈 시키고, 끊는 물에 소독시킨 헝겁에 약초를 대어 잘린 부분을 묶는 게 응급조치의 전부였다. 서너 명이 힘을 합쳐 레이너를 들어 수레로 옮겼고, 나머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서성했다. 칼은 들고 있었지만, 지금상태로는 레드 게이트에서 싸웠던 것처럼 용맹스러운 전투는 무리일 것 같았다. 사냥 당하고 있다는 상황에 겁을 먹은 것도 있지만, 카셀의 말에 주눅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은 새삼스럽게 자기들이 잡고 있 청년이 얼마나 거물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밑바닥 인생을 살면 녀석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런 것에 약했다. 슈벨이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교활한 녀석이다. 우리의 이동 속도를 늦추려고 일부러 부상자를 만든 거야.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레이너를 공격한 게 누군지 못 봤나?" "잠깐 다른 곳을 보고 있긴 했지만, 한 사람의 다리를 베고 달아날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었다. 젠장할!" 빌리는 괜히 바닥에 튀어나온 나무 뿌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어쩔래? 이런 식이라면 정말 나와 너, 블랙만 남게 돼. 진짜로 카셀을 인질로 삼아 우리의 방패로 삼아야 할 판이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군." "이동한다." 빌리는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슈벨에게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한 시간 정도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여기에서 먹을 걸 사고 휴식을 취한다." “마을에? 우리 모습을 노출시켜도 되겠어?" "큰 길에서는 거의 반나절 거리나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야. 거기까지 게이트의 병사들이 경계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또 모두들 지쳐 있어." "그렇긴 하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아란티아 전체에 수배 당할 만한 죄를 저지르고 왔어. 또 우리 얼굴을 본 녀석들이 적어도 오십 명은 레드 게이트에 남아있고. 눈 앞의 적에 현혹되어서 정말 커다란 적을 잊으면 안 돼," 빌리는 지도를 접으며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눈앞의 적에게 더 관심이 가는군." 휴식도 없는 힘든 이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빌리는 조금만 더 가면 마을에 도착한다며 모두를 독려했다. 레이너는 수레에 누워 가끔 까무러칠 듯 비명을 지르곤 했다. 슈벨도 경계에 참여하느라 수레는 다른 이가 몰았다. 빌리의 얼굴에는 예전 같은 여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여유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마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풀숲을 지날 때였다. 좁다 보니 경계를 침범해 허리 아래를 가릴 정도로 풀이 많이 자란 길도 많았다. 근처에 높지 않은 산이 많아 풍경도 좋은 곳이었고, 가끔 산들바람이 불어와 시원했다. 개울이 항상 옆에 흘러 언제든 쉴 수 있다는 것이 모두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보이니, 다들 경계가 흐트러져 있었다. 빌리가 그럴 때일수록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기 직전이었다. 대열의 제일 뒤에 있던 녀석 하나가 이유 없이 풀썩 넘어졌다. 비명이라기보다 당황하는 소리로 '어?' 하는 외마디를 내질렀다. 수레에 걸터 않아있던 슈벨이 벌떡 일어났다. 빌리도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뒤를 돌아보며 칼을 빼 들었다. 명령은 없었으나, 빌 리가 칼을 때자 나머지도 일제히 칼을 들었다. "으아아아.......“ 엎어진 녀석이 갑자기 길 옆까지 끌려가더니 무성하게 자란 풀숲으로 사라졌다. 파랗게 자란 풀들이 그가 끌려가는 방향대로 차례로 넘어졌다. 겁에 질린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내가 봤어!" 슈벨은 수레에서 뛰어내려 풀숲 쪽으로 달려갔다. 끌려간 녀석의 목소리는 풀숲의 중간쯤에서 멈췄다. 그 자리만 수풀이 푹 꺼져있었다. 슈벨은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어 꺼낸 칼로 주위에 있는 허리 높이의 풀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리핀 바닥에 신경을 최대한 집중하고 언제든 갈을 춰두를 수 있게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바닥이 보여도 안심이 안 되었다. 적은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세 명이나 살해한 놈이었다. 이런 장소는 그런 자에게 최상의 사냥터였다. 슈벨이 조심조심 걸어 도착해 보니, 이미 끌려간 녀석은 목이 베여 죽어 있었다. 터져 나온 피가 주위에 있는 넘어진 풀과 품에 스며들고 있었다. 다리에는 밧줄이 묶여있었다. 약간 늦게 빌리가 도착했다. "봤어. 약간 붉은 색이나 갈색 비슷한 머리에 어깨에는 가방을 하나 매고 있더군.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풀숲으로 엎드려서 모습을 감추었어." 슈벨이 말했다. 빌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봤어. 아마 이 녀석을 밧줄로 묶어 여기까지 달린 것 같다." "기운도 좋지, 빌어먹을 자식!" 길에서 여기까지 끌려온 방향으로 풀이 넘어져 작은 길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죽은 녀석의 손에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붙잡은 풀들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남은 부하들도 칼을 들고 수풀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빌러와 슈벨이 멈춘 것을 보고 주위를 경계했다. '두 수레로 돌아가라. 아직 녀석은 근처에 있다. 작은 소리만 나면 갈을 휘둘러도 좋다." 빌리의 명령이 약간 늦긴 했어도 모두가 방심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수레에 앉아있던 블랙이 일어나 손가락으로 수풀 족을 가리켰다. 빌리는 그 손짓의 의미를 알고 다급하게 모두에게 외쳤다. “빠져나가!" 그 순간 한 명이 짧은 비명과 함께 풀숲 안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그의 옆에 있던 녀석의 무릎이 픽 꺾였다. 마치 거대한 물고기에게 잡혀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둘의 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묘하게 굴절된 비명 소리가 가까운 산에 메아리 치며 끓은 핏줄기가 풀 위로 튀었다. 당황한 다른 녀석들은 서둘러 풀숲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길까지 도착하는가 싶던 녀석의 뒤로 누군가 솟구쳐 올라와 목에 칼을 댔다. 그 사냥꾼이었다. 슈벨이 말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는 배낭까지 매고, 맨 몸인 빌리보다 더 빠르게 풀숲을 달리고 있던 셈이었다. 잡힌 녀석은 약간 저항했으나, 사냥꾼은 목을 살짝 돌리며 칼날을 댔다. 그 두 가지 동작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빨라 그냥 특 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베인 목에서 핏방울이 터져 나왔다. 그 피 안개를 뚫고 사냥꾼은 다른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탁 트인 길로만 나오면 안전할 거라고 여겼던 모두가 싸울 엄두도 내지 못 하고 뒷걸음질쳤다. 슈벨이 욕을 하며 달려왔으나, 그 사냥꾼은 멍청하게 방어 자세도 잡지 못 하는 한 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전멸 당한다.' 사냥꾼의 등 뒤를 보며 빌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수레에 있던 블랙이 할버드를 치켜 들어 사냥꾼에게 집어 던졌다. 묵직한 무기가 회전을 일으키며 사냥꾼을 덮쳤다. 그 사냥꾼은 즉시 칼을 뻗어 날아오는 할버드를 막아냈다. 그러나 그 엄청난 힘을 견디지 못 하고 풀숲 안으로 나가떨어졌다. 슈벨과 빌러는 동시에 그가 쓰러진 장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누군가 쓰러져 풀이 눌린 흔적만 있었다. 둘은 숨을 가볍게 몰아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아남은 이는 네 명뿐이었다. 레이너까지 합쳐 봐야 다섯 명. 그들은 모두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하루도 되지 않아 병력의 절반이 단 한 명에게 사냥 당했다. 그리고 그 사냥꾼은 아직 정체도 밝혀지지 않았다. 한 순간 지나간 소나기에 온몸이 흠뻑 젖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괴물이나 마법사는 아니었군." 빌리가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아니, 난 차라리 그 쪽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 슈벨도 명달아 중얼거렸다. 그는 블랙의 할버드를 주위 수레로 터덜터덜 가지고 돌아갔다. "불랙 그나마 당신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서 전멸 당할 뻔 했군.“ 블랙은 할버드를 넘겨 받으며 말했다. "그러기 위해 녀석이 이 자리를 택했다면, 아무래도 마을로 숨으려는 마음의 빈틈을 노린 거라고 봐야지. 공포가 녀석이 만들어낸 최고의 함정이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빌리는 생각을 정리하며, 남은 부하들의 숫자를 헤아리다가 뭔가 어색해 고개를 갸웃했다 있어야할 것이 없어지면, 없어진 것이 무엇민지를 알아채기보다 먼저 허전함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지금의 빌리가 딱 그랬다. "이런 제기랄." 마침내 빌리마저 자제력을 잃고 욕을 내뱉었다. 카셀이 사라졌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끊어진 밧줄만 남아있었다. 쫓아가는 자들 "멀리 못 갔을 거다." 빌리는 짐을 수레 위에 올려놓았다. 슈벨도 단검 몇 개를 허리에 차고 두꺼운 셔츠나 가죽으로 덧댄 장갑은 모두 벗어버렸다. 반팔인 셔츠와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겉으로 보기에 말라 보이는 몸이었으나 벗으니 꽤 근육질이었다. 빌리도 허리에 찬 쇠 벨트를 풀고 론타몬의 보검과 자신의 검 두 자루만 찼다. "금방 찾아오도록 하지. 나머지는 모두 기다려라." 수레에 누운 레이너는 고통 속에 실신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네 명이었다. 빌리는 긴 명령은 하지 않고 즉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그 중 하나가 막았다 그들도 몸에 있는 무거운 건 수레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검도 볼 줄 모르는 녀석 하나 잡아오는 거다. 여럿이 갈 필요는 없어." 빌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오히려 저희들을 시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캡틴 울프라는 자 옆에는 우리를 공격했던 그 사냥꾼이 같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캡틴 빌리께서 직접 나서시는 거고, 캡틴 슈벨도 같이 가는 거겠죠. 두 분이 같이 행동할 만한 수준의 사냥꾼이니까." 빌리는 허 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저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이대로 싸움에 패해 물러나고 싶지 않습니다." 슈벨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멍청한 놈들. 꼭 마음에 상처 받는 말을 들어야 말 들을래? 수준이 달라, 수준이! 여태까지 죽은 네 친구들 꼴 되고 싶어?" "그래서 더더욱 물러설 수 없다는 겁니다." 의외로 강하게 나왔다. 슈벨도 그 기세에 잠깐 눌려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처음에 스물다섯이었는데, 지금은 다섯 명만 남았습니다. 아니, 레이너가 저 꼴이니 네 명뿐이라고 해야지요.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는 역할을 맡고 싶지는 않습니다. 같이 싸우게 해주십시오." 다를 녀석들도 얼른 나섰다. "저도 싸우고 싶습니다."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우리들은 스물 다섯 명 중 가장 강하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 아니겠습니까?" 어느 새 그들을 누르고 있던 공포가 사라졌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빌리는 웃었다. 슈벨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구겼다. "야, 야. 그만해 둬라. 여긴 누가 지키냐?" "그 사냥꾼이 여길 또 오겠습니까? 이미 목표는 달아났는데." "얼씨구? 이 놈 이제 대드네?" 빌리가 중간에서 말렸다. "됐어. 좋아. 모두의 이름을 말해라. 이제 너희들의 이름을 외워둬야겠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하자." "디븐입니다." "하우입니다 고향에서는 데쓰 하우라고 불리었죠.“ "클락입니다." "브리지나일. 그냥 나일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지금까지 빌리를 설득했던 녀석을 끝으로 소개가 끝났다. "좋아, 디븐, 하우, 클락, 나일. 뒤쳐지지 않도록. 우리는 아주 빠르게 추격할 것이다. 캡틴 울프가 우리 손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다." 빌리의 짧은 연설에 넷은 동시에 '캡틴 빌리'를 외쳤다. "슈벨, 먼저 출발해라. 바로 뒤따라가겠다." 슈벨은 불만이었다. "왜 굳이 귀찮게 일을 벌이나, 벌이기를?" "네 걸음을 못 따라오는 녀석이라면 버려라. 녀석들은 그걸 감수할 것이다." "좋아. 몇 명이나 따라오나 보자. 너도 조심해.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한 시간 안에 잡아버릴 거다." 슈벨은 카셀이 달아났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즉시 네 명이 그 뒤를 따라갔다. "잠시 다녀오겠소, 블랙." 블랙은 고재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의 눈에 서려있던 공포가 사라졌군. 그만큼 너에게 신뢰가 있다는 뜻이겠지." "내 가치관을 바꿔야 할 것 같소. 나는 인간이란 한 번 그 성격이 결정되면 영원히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흉악범들 주제에 저런 용기를 가음에 품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 "아니, 어피면 단순히 네가 사람을 잘못 파악한 걸지도 모른다. 저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런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을 잘못 만나고 환경을 잘못 만나, 자신의 용기와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거지. 지금 너도 나라는 위험한 조건과 아란티아라는 생소한 장소에서 본래의 침착함을 발취하지 못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네가 끝까지 너의 모습을 지키는 것은 네가 원하지 않았던 또 다른 동반자 때문이지." 블랙은 전혀 말을 하지 않다가 가끔씩 입 밖에 내는 말이 너무나도 철학적이어서 깜짝 놀라게 할 떼가 있었다. 블랙은 재촉하며 말했다. "놓치겠다. 어서 따라가라. 수레는 내가 지키고 있겠다." 빌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블랙, 아무래도 나는 당신과 만날 운명에 이끌려 아란티아에 온 것 같소."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즉시 슈벨의 뒤를 따라갔다. "도망치는 게 미숙하군." 슈벨은 발자국이 찍힌 바닥에 손을 대며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빌리도 그 자국을 발견하고 말했다. "역시 그 사냥꾼 녀석이 데리고 가고 있나?" "그것까지는 몰라. 흔적은 한 명 분밖에 안 되니까. 하지만 그 한 명분의 흔적은 마치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슈델은 이미 잡은 거나 다름없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도 꽤 빠르군. 우리도 서둘러서 달린 건데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잖아." 빌리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무가 점점 늘고 근처에 산이 있다 보니 위로 향하는 길도 많았다. 멀지 않은 곳에 높은 바위산도 있었다. "그건 그래. 어제 오늘 무척 고달픈 행군을 했는데도 내 결음에 안 잡히는 걸 보니.......“ 슈벨이 뒤를 힐끔 보니 약간 뒤쳐져서 따라오던 네 병이 이제야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슈벨은 그들을 덕으로 가리켰다. "저거 봐. 훈련된 건 아니지만, 저 녀석들도 체력이라면 자신 있는 애들일 텐데, 벌써 지쳤잖아." "사실은 나도 조금 힘들군." 빌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솔직히 말했다. 슈벨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거야, 그거. 다 지쳤어. 결국 놈도 지쳤다는 거야. 얼마 안 남았다. 발자국이 적힌 흔적을 보니 발을 질질 끌면서 달러고 있는 것같아. 다친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발을 떼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는 걸 거야." 슈벨은 쫓아온다고 용감하게 말했던 네 명이 신음을 낼 정도로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네 명 중 브러지나일 만은 제법 잘 따라왔지만, 클락, 하우, 디븐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잘 쫓아오지 못 했다. "이런 추적에 익숙한 건 아니지만, 나라도 금방 찾을 만 하군." 빌리가 바로 뒤를 따르며 슈벨에게 말했다. "그래서 뭐?" 슈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전략의 기본에 대해 말하는 거다 지나치게 공격하기 쉬운 적의 주위에는 다른 적이 있다." "다른 적이란 건?" "사냥꾼 얘기다. 그 녀석이 벌써 카셀과 합류했다면 이건 함정일지도 몰라." 슈벨은 걸음을 멈추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땀으로 젖어있는 앞머리가 찰랑거렸다. "걱정 하지 마. 이건 추적에 익숙한 녀석이 일부러 내는 흔적이 아니야. 미숙하게 흔적을 감추려고 애쓴 흔적이지. 우리 앞에 있는 건 카셀이다. 그것만 생각하자. 나를 믿어라. 녀석이건 그 사냥꾼이건, 우릴 함정으로 이끄는 흔적을 남겼다면 내가 그 속임수까지 간파하겠다." "자신 있어 보이는군." "사냥꾼이라는 족속들과의 줄다리기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해봤어. 내가 대체 누굴 상대로 5년 동안 훈련을 해왔을 거라 생각하나?" 그러나 슈벨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빌리도 함정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이 느닷없는 공격에 대해서는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사냥꾼은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뒤에 있었다. 슈벨과 빌리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바라보고 얼어붙었다. 제일 뒤에 있던 클락의 목에 이미 칼이 꽂혀 있었다. 클락의 머리 뒤에 노려보는 눈동자만 드러낸 그 사냥꾼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클락의 코와 입에서 흐르는 피가 턱을 흘러 목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하우와 디븐은 모르고 있었다. "둘 다 엎드려." 슈벨은 소리치며 하우와 디븐에게 경고했다. 영문도 모르고 둘은 반사적으로 엎드렸다. 사냥꾼은 클락의 목에서 칼을 뽑아내고 죽어가는 그의 몸을 옆으로 밀쳤다. 슈벨은 달려가며 칼을 집어 던졌다. 사냥꾼은 아직도 피가 떨어지는 단검으로 그 날아오는 칼을 가볍게 쳐냈다. 빌리가 무기를 놓친 슈벨의 앞으로 나싫다. 사냥꾼도 피하지 않고 단검을 내밀었다. 빌리는 부드럽게 허리에서 칼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나일! 칼을 내게 다오." 슈벨은 브러지나일에게 칼을 받아 빌리의 옆에 섰다. 사냥꾼은 잠시 멈칫 하더니 도로 길 옆의 나무 뒤로 사라졌다. 잠깐의 정적이 주위를 메웠다. 엎드려 있던 다른 두 명도 뒤늦게 칼을 뽑고 있었다. "카셀을 추적하고 있던 건 우직만이 아니었군." 빌리는 칼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블랙이 없으니, 이겐 우리 둘을 배제하고 사냥하는군." "어찌 보면 대단한 참을성이지. 끝까지 자기 페이스로, 가장 강한 자를 살려둔다......“ "어찌 보면 좋은 걸 알았다. 그 사냥꾼 놈은 아직 카셀과 합류한 게 아니야. 즉, 카셀은 지금 혼자서 달아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먼저 카셀을 잡으면 이 싸움은 바로 끝이야." "동의한다. 정면 대결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계속 싸움을 이끌어 갈 사냥꾼과 기사도를 논할 이유는 없지." 빌리도 동의하고 다시 속도를 내어 전진했다. 뒤쳐지면 표적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남은 세 명도 죽을 힘을 다해 따라붙었다. 슈벨은 몇 분도 안 되어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핏자국이었다. "이게 카셀의 피라는 것에 내 토끼 인형을 걸겠어." 슈벨이 말했다. "어디에 어떻게 다쳤다는 건가?" 빌리도 핏자국을 발견했지만, 그 이상은 상상하지 못 했다. 슈벨은 흐트러진 자갈과 자갈밭 여기저기에 불쑥불쑥 솟은 바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쪽 바위에서 떨어진 거야. 아마 이 쪽 돌밭 위를 뒹굴다가 팔꿈치나 무릎을 찍은 거겠지," 멀지 않은 곳에서 개울이 흐르는 소리가 들렀다. 슈벨은 그 쪽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름대로 신경 색서 달아나고 있군. 숨을 곳이 많을 것 같은 곳으로 계속 달리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대로 산 쪽으로 몸을 숨길 생각인 것 같군." 슈벨은 우거진 나무 틈으로 보이는 바위산을 가리켰다. 아까 작아 보이던 바위 산이었지만, 여기까지 오고 보니 그래도 제법 높이가 있었다. 빌리가 경고했다. "주위를 더욱 경계하라. 이름에서 놈의 공격이 다시 있을 것 같다." 슈벨이 손짓 했다. "핏자국을 보니 여길 지나간 건 몇 분전이야 아마 개울 쪽에 있을 거다." 빌리는 바위산 쪽을 가리켰다. "똑똑한 녀석이니, 오히려 우리가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고 반대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흔적은 확실한가?" "다치고 목 마르고 지친 녀석이 물가로 가지 않았을 리가 없어. 그럴 때는 머리로 생각할 수 없는 법이지, 몸이 먼저 물소리에 반응하는 거야." 빌리는 처음부터 이린 추적을 슈벨에게 전적으로 맡긴 만큼 그이상의 이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핏자국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지나간 방향은 틀림 없었다. 산 아래로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개울가에는 자갈과 둥근 바위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늘어져 있었다. 흐르는 수량은 많지 않았으나, 밝고 차가운 물에 절로 기분이 유쾌해질 만했다. 물이 흘러내려오는 상류 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도시락이라도 싸와서 피크닉을 즐기고 싶었다. "디븐, 브리지나일. 둘은 하류 쪽을 살피고, 하우는 상류 쪽을 봐라. 털끝 하나라도 움직이는 게 보이면 소리를 질러라, 빌러,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카셀은 내가 잡아오지." 슈벨은 약간 높은 곳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며 말했다. "어디 있는지 보이나?" “보이지는 않지만, 대충 알 것 같다. 추적은 끝났어." 슈벨은 개울물을 찰박찰박 튀기며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조금 자세를 낮추어 상류 족으로 달려갔다. 그는 반대편 개울가에 떨어져 있는 헝겊 조각을 주워 빌리에게 흔들어 보였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피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아주 작게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렀다. 경계하고 있던 앞이나 옆이 아닌 뒤쪽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다면 절대 들을 수 없을 만한 작은 소리였다. 그러고 소리와 별개의 인기척이 그의 등골을 훑었다. 빌리는 즉시 칼을 뽑으며 뒤로 돌아섰다. 햇빛에 반사된 칼날이 빌리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몸을 돌리며 급히 내민 칼로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허술한 공격이 아니었다. 적어도 머리를 두 동강 낼 만한 힘이 실려 있었다. 공격을 막는 순간, 빌리는 방금 슈벨이 미끄러져 내려간 경사로까지 밀려나 버렸고, 그만 균형을 잃고 굴러 떨어졌다. "빌리!" 놀란 슈벨이 개울을 다시 건너왔다. 빌리가 당하는 순간, 디븐, 하우, 브리지나일은 즉시 뒤를 돌아 칼을 뽑았다. 그러나 빌리의 옆에 붙어있던 브리지나일은 사냥꾼에게 걷어 채여 똑같이 경사로에서 떨어졌다. 디븐과 하우는 겁에 질리지 않고 민첩하게 사냥꾼의 공격을 막았다. 그래서 둘은 적어도 처음과 두 번째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었다. 아란티아에 오기 전에도 그들은 여러 격전을 치뤄왔고, 아란티아에 온 후에도 험한 이동 중 살아남은 대단한 검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 번째 공격까지 막아내지는 못 했다. 사냥꾼이 들고 있는 두 자루의 칼이 교차하며 디븐의 목을 긋고 하우의 가슴에 박혔다. 둘의 몸뚱이가, 앞서 두 사람이 본의 아니게 이용한 경사로에서 굴러 내려왔다. 넘어지면서 빌리는 머리를 부딪친 상태였다. 그는 혼미한 정신으로나마 일어나려고 했지만, 도로 넘어지고 말았다. 사냥꾼이 경사로로 뛰어내려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칼을 들어 빌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슈벨이 고함을 지르며 빌리의 앞에 서며 칼을 휘둘렀다. 사냥꾼은 빌리에게 향하던 칼날을 즉시 되돌려 슈벨의 검을 막았다. 슈벨은 상대가 검을 막자마자 몸을 한 바퀴 돌려 아래 위로 두 번 칼을 내리쳤다. 사냥꾼은 갑작스레 날아오는 그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 버렸다 놀란 슈벨이 거리를 두려고 견제로 내민 공격에 바로 반격해 들어오기까지 했다. 거의 허리가 꺽일 정도로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바로 목을 그어버릴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오기가 생긴 슈벨은 멈추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밟기만 해도 굴러다니는 미끄러운 자갈 위라 그가 특기로 삼는 속도 싸움을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힘들기는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냥꾼의 두 자루 칼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슈벨의 공격을 X 자로 교차하며 막았다. 슈벨은 숨을 몰아 쉬며 힘을 다해 칼을 내리 눌렀다. 그러나 사냥꾼의 두 자루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넌 누구냐?“ 슈벨이 물었다. "사냥꾼이다. 너도 사냥꾼이냐?" 사냥꾼이 물었다 "사냥꾼의 사냥꾼이다, 새끼야." "어떻게 두 걸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 "두 걸음? 뭔 소러를 하는 거냐?" 슈벨은 칼을 떼어 몸을 옆으로 돌리며 히리를 노렸다. 그러나 상대는 한 쪽 칼로 그것을 막고 바로 반대쪽 칼로 슈벨의 목을 찔렀다. 두 자루 칼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녀석은 처음 봤다. 마치 별개의 검술을 익힌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때 빌리가 옆으로 끼어 들었다. "수단을 가리지 않은 건 저 녀석이었다. 거기에 일일이 정면 대결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빌리는 즉시 슈벨의 공격을 보조했다. 반사적으로 빌리의 도움을 거절하려 했던 슈벨이었다. 그걸 알기에 먼저 그런 말을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싸움을 멈출 필요는 없었다. 슈벨은 혼자서 상대할 때보다 더욱 의욕적으로 공격을 펼쳤다. 묘한 일이었다. 보통 훈련을 같이 받지 않은 이상, 둘이 하나를 공격하는 건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슈벨과 빌리는 달랐다. 마치 오래 전부터 함께 같이 싸워봤던 것처럼 서로의 허점을 완벽히 보조해 주었다. 슈벨이 옆을 공격하면, 빌리는 정면을 공격했고, 빌 리가 큰 공격을 내리치면 슈벨은 즉시 빌리의 빈틈을 막아 섰다. 사냥꾼은 갑자기 왼손에 든 칼을 수직으로 가볍게 던져 놓았다. 그건 공격도 아니고, 방어도 아닌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상황에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인 터라, 슈벨은 머리 위로 올라간 칼 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순간 사냥꾼은 빌리의 칼을 막더니 바닥의 자갈을 걷어잡다. 자갈을 피하느라 두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젖힌 순간 허공에 던져 둔 칼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느닷없이 밑을 향한 칼날에 놀라 빌리가 뒤로 물러났고, 동시에 사냥꾼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몸놀림으로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섰다. 셋 모두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셋 모두 서로의 실력에 놀라고 있었다. "너 정도 실력의 사냥꾼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넌 누구냐? 하얀 늑대냐?" 빌리가 높은 위치에 서 있는 사냥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냥꾼. 그 외에는 아무 것도.......“ 그는 말 끝을 흐렸다. "카셀을 구하러 온 거냐?" 빌러가 물었으나, 사냥꾼은 칼을 들어 경고만 했다.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둘 다 죽이겠다." 잠깐 숨을 돌린 슈벨이 칼을 치켜 들고 소리쳤다. "어디 해 봐. 아까는 잠깐 당황했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상대해 줄 테니." 사냥꾼은 잠깐 슈벨의 눈을 바라보더니 돌아섰다. 그러고 바위 뒤로 뛰어내려 모습을 감추었다. "멈춰, 이.......!" 슈벨은 빌리가 말리기도 전에 바위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개울을 벗어난 승 족에서 누군가 달리는 소리가 났으나 쫓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면 대결에 익숙하지 않아서 각개격파를 한 게 아니 었군." 빌리도 바위 뒤쪽으로 따라와 슈벨의 뒤에 섰다. 그는 숨을 몰아 쉬기만 했다. 그냥 놓친 게 몹시 분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일 대 일에 가장자신이 있기 때문에 한 명씩 상대한 거였어."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렇게 헤주면 되잖아!" 슈벨이 버럭 소리쳤다. "이제 어절 셈인가?" "상황은 같다. 카셀 녀석은 부상당했을 것이고, 밀리 못 갔다. 아까 개울 위족으로 절룩거 리며 걸어가는 걸 봤어. 5분이면 따라잡을 수 있다. 녀석만 잡으면 그 놈은 우리에게 와야겠지. 그 때 다시 상대해 주겠다. 녀석이 자신 있어 하는 일 대 일로!" 슈벨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개울을 건넜다. 이제 혼자 남은 브리지나일은 처음 따라 나설 때의 용기를 완전히 잃고 친구들의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돌아가 있어라." 빌리가 명령했다. 이번만큼은 브리지나일도 그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렇게 산세 좋고, 물 좋은 곳에 사람이 사는 건 당연했지만, 막상 사람이 눈에 띄니 없어야할 게 있는 것처럼 어색했다. 턱수염을 잔뜩 기른 나무꾼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산 길을 따라 달리는 슈벨과 빌리를 보고 순진한 눈을 깜빡였다. 옆에 있는 조수도 신기한 듯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너머에서는 집도 군데군데 보였다. 산으로 올라가는 잘 닦인 길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이 곳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이었다. 카셀은 이 길을 따라 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다친 다리로 험한 지리를 달리다가 아까처럼 다치는 것보다 길을 따라 달리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빌리와 슈벨은 거의 달리는 속도에 가깝게 걸었다. 그런데도 카셀의 흔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개울을 빠져나오면서 금방 잡힐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별리 가 있었다. 또 다친 다리 치고는 아주 이동 속도도 빨랐다. 아니, 그보다 이동 거리가 너무 길었다. "속았다." 슈벨이 말했다 "뭐가?" "다친 게 아니야 아무리 녀석이 어마어마한 정신력을 발휘한다 해도 다친 다리로 이렇게 멀리까지 달릴 수는 없어." 슈벨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다친 게 아니면?" 빌리도 덩달아 걸음을 늦췄다. 슈벨이 욕을 내뱉으며 밑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이제 주위에는 나무도 드물었고, 큼지막한 돌들이 길 옆에 벽을 만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속았어. 지쳐서 판단력이 흐트러진 건 녀석이 아니라 나였어." "왜 그래? 설명해봐," 빌리가 재촉했다. 슈벨은 땀에 젖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카셀 녀석은 절대 추격전에 능한 녀석이 아니야. 억지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 곳곳에 있었지. 나는 그길 보고 자신있게 쫓아간 거야. 마치 초보 사냥꾼을 가지고 노는 기분이랄까? 그 때까지는 함정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건 확실해. 그러다 나는 다친 흔적을 발견했지. 기억 나? 나는 드디어 놈을 잡았구나 했지. 다친 다리로 멀리 못 갔을 거라고." 거기까지만 들고도 델리는 슈벨이 뭘 속았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맙소사." "그래! 카셀 그 녀석이 다쳤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뒤를 신경 쓰기보다 앞을 신경 쓰기 시작했어. 녀석만 잡으면 싸움은 끝나는 거라고. 그리고 결국 덜미를 잡혔고, 되려 우리가 사냥 당해 버렸지. 다친 녀석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또 여기까지 왔다. 녀석은 비록 검을 못 쓸 지라도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거야. 나와 이런 경주를 할 정도로." 슈벨은 계속 바닥을 발로 걷어차며 먼지를 일으켰다. "젠장할 자식! 녀석은 자기가 미끼가 되어 우리를 사냥꾼의 표적으로 만들어 놓은 거다. 암 것도 할 줄 모의는 것처럼 내숭 떨던 그 자식이 ! 빌어먹을 개 자식!" 빌리는 잠깐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건 너무 무리한 추측이야. 녀석은 중간에 그 사냥꾼 놈과 접촉이 없었다. 방금 네 말대로라면 카셀은 그 놈과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작전을 봤어야 해. 하지만 거리삼이나 시간상으로나 둘에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내 생각에 카셀이 처음부터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아. 도망치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 거야." 슈벨은 검은 돌을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작은 들 몇 개를 놓았고, 세 번째에는 좀 큰 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은 돌을 가리켰다. "이게 카셀이고, 그 뒤가 우리, 큰 돌이 사냥꾼 놈. 처음 탈출을 시작할 때부터 녀석의 머리 속에 이런 궤도가 그려진 거겠지. 쫓기는 놈이 과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있었겠느냐 만은, 만약 그 상황을 그리고 이걸 연출했다면 녀석은 분명 정신 나간 놈이 아니면 천재다. 아니, 천재라기보다 정말 과감한 전략가지. 그리고 그 사냥꾼 놈은 우리보다 더 빨리 카셀의 작전을 읽어낸 건 아닐까? 우릴 그렇게 제 때에 공격한 건 우연일지도 몰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둘만 남게 된 거다." 빌리는 슈벨이 펼쳐놓은 돌의 위치를 살피다가 작은 돌을 걷어차 버리고 거기에 큰 돌 두 개를 올려놓았다. "좋아. 그럼 지금 상황은 이렇게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되어 있을 지도 몰라." 슈벨은 세 번째 큰 돌을 제일 앞의 검은 돌과 뭉쳐놓았다. 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 빌리는 마지막까지 이 추적을 슈벨에게 맡겼다. 슈벨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기들을 가리키는 돌을 분리시켜 하나를 카셀 앞에 놓았다. "흩어지자. 내가 앞질러 갈 데니, 너는 계속 따라가." "괜찮겠나? 그 사냥꾼, 혼자서 상대하기는 좀 무리다." "그건 날 배려한 말이냐? 솔직히 말해, 너는 좀 자신 있는 거지?" 빌리가 대답하지 않자, 슈벨은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맨바닥 위에서라면 지지 않아. 어서 따라가라. 쫓아가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다. 카셀도 지친 건 분명하니까. 만약 내가 앞질러 가는 경로 예측에 실패해서 엉뚱한 길로 빠져버리면, 나머지는 모두 너에게 맡긴다. 살아있으면 블랙이 있는 곳에서 만나자." "좋다." 슈벨은 길이 없는 곳으로 달려가더니 나무 뒤로 사라졌다. 앞질러 간다더니 어떤 길을 따라갈 셈인 걸까? 빌리도 산길을 따라 계속 달려갔다. 과연 그의 말대로 카셀이 달린 흔적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 숨어있다거나 함정 같은 건 없었으나 빌리는 방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습격에도 징조 같은 건 없었다. 반 시간쯤 달렸을 즈음, 갑자기 흔적이 끊겼다. 빌리는 잠깐 멈춰 싫다. 곧 발자국 없이 달아날 수 있는 길은 바위 산 족으로 가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빌리는 길을 벗어나 큼직큼직한 바위가 뭉쳐 언덕을 이루고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다친 다리로 걸어갈 자리는 아니었다. 둥근 바위는 잡을 곳도 없고, 미끄러지면 중간에 세워줄 돌출 부도 없었다. 까마득한 절벽은 아니었지만,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면 머리뼈 안에 든 것을 콧구멍 밖으로 모두 쏟아낼 정도는 되어 보였다. 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그의 머리를 흩트렸다. 길이라고 하기 힘든 바위 위에서 빌리는 잠시 벽에 붙어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발을 뗐다. 길의 왼쪽은 바위 벽이었고, 길의 오른쪽은 절벽이었다. 그리고 발 아래는 딱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슈벨이 이런 길을 앞질러 가려면 반대편에 올라가 있어야 하는데, 시간상 그건 무리일 것 같았다 게다가 카셀이 이 쪽 방향으로 길을 꺾을 것까지 예상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결국 슈벨은 카셀을 앞지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빌러는 마침내 카셀을 따라잡았다. 그는 빌리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이 좁은 길을 조심조심 건너가고 있었다. 빌리는 소리 내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카셀은 몇 걸음만 더 가면 다시 평지로 이동하게 되고, 또 죽을 을 다해 달릴 것이다. 빌리도 이제 더 달리고 싶지 않았다. 이 긴 추격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운은 빌리보다 카셀을 택했다. 조심스럽게 옮기던 빌리의 발걸음에 채인 작은 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작은 들이 몇 번 둥근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굴러 내려갔다. 그 소리를 듣고 카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무서워도 떼지 못 하던 걸음을 허둥지둥 옮겨놓았다. "멈춰라. 이 거리면 칼을 던져서라도 맞출 수 있다." 빌리는 소리쳤다. 물론 그런 건 무리였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카셀이 거기에 겁 먹고 멈추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작정 소리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카셀에게는 그런 협박이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셀은 반대편 평지까지 한 걸음을 남겨놓았다. 자신의 걸음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녀석을 또 언제까지 따라가야 하는 절망감에 빌리는 어금니를 악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걱정은 바로 끝이 났다. 슈벨이 반대편 길목에 서 있었다. 그는 칼을 카셀의 목에 들이댔다. "그만하자. 진짜 생각 같아서는 널 여기서 집어 딘지 싶으니까." 슈벨이 말했다. 카셀도 결국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슈벨은 손을 내밀어 카셀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았다. 빌리도 겨우 끝난 이 추격을 마무리 짓기 위해 좁은 길을 천천히 가로질러갔다. 그 때 그는 슈벨의 뒤에 불쑥 튀어나온 또 다른 사람의 윤곽을 발견했다. 카셀의 진로를 앞질러서 달려온 사람은 슈벨 한 명 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카셀을 앞지르려던 게 아니라 슈벨의 뒤를 쫓아온 건지도 몰랐다 거기에는 사냥꾼이 칼을 쥐고 서 있었다. "뒤!" 빌리는 다급하게 소리했다. 슈벨은 그 소리만 듣고 카셀에게 대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부딪혔다. 적의 위치를 확인하지도 않고 휘두른 칼이었던 터라 험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다음 공격은 전혀 예측하지 못 했다 사냥꾼은 슈벨의 멱살을 잡더니 머리를 얼굴에 들이받았다. 그리고 다시 멱살을 잡아당기더니 뒤통수를 바위에 부딪쳤다. 힘을 잃은 슈벨은 칼을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빌리가 칼을 뽑으며 달려왔다. "멈춰라." 사냥꾼은 쓰러진 슈벨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멈추지 마! 너라면 이 녀석 이길 수 있어. 그러니까 그대로 달려와." 슈벨은 코피를 흘리면서도 소리쳤다. 그러나 빌리는 움직이지 못했다. 카셀은 천천히 쓰러진 슈벨의 옆에 서더니 그가 떨어뜨린 칼을 주워 들었다. "죽이는 게 좋을 길, 카셀? 놔두면 나는 또 너를 따라갈 거다. 너희 둘 다. 그러니 해 봐 " 사냥꾼의 우악스러운 손에 목덜미를 잡힌 채 칼날이 목에 닿아 있는데도 슈벨의 눈빛은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코피가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았고, 머리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카셀은 사냥꾼의 어깨에 손을 대고 말했다. "죽이지 마시오." 사냥꾼은 고개를 저었다. "이 자의 말대로다. 살려두면 또 쫓아온다. 죽이는 게 나아." "이 자를 죽이면 저기 있는 남자가 복수를 위해서라도 달려올 거요." 사냥꾼은 빌리 쪽을 슥 쳐다보더니 말했다. "별로 질 거 같지 않은데?" 슈벨이 몸을 비틀며 악을 썼다. “그래, 질 것 같지 않으니까 나 죽이고 붙어 보라니까. 어서!" 사냥꾼은 카셀 쪽을 바라보았다. 패 죽여선 안 되는가?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아서 하겠소. 그러니 죽이지 마시오." 카셀은 슈벨의 칼을 들고, 아직 낭떠러지를 길 왼편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빌리에게 말했다. "빌리, 난 당신도 슈벨도 죽이고 싶지 않소. 그러니 내 말대로 해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지금까지의 추격전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말해라." 빌리가 말했다. “당신이 가진 그 또 다른 칼을 꺼내시오." 빌리는 망설임 없이 론타몬의 보검을 꺼냈다. 카셀은 벼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저기에 던지시오. 그 검이라면 이 정도높이에서 떨어져도 부러지지 않을 거라 믿소."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빌리는 보검을 던져버렸다. 카셀도 그 정도로 순순히 그가 말을 따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슈벨은 거의 비명에 가깝게 악을 썼다. "이 병신아! 시키는 대로 하냐? 어? 이 거짓말쟁이 자식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냐? 그 칼, 네 목숨보다 소중한 거 아니었어?" 빌리는 피식 웃었다. "카셀은 우리에게 벗어나려고 당연한 노력을 한 거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그는 슈벨에게 말하고 이어 카셀에게 말했다 "나는 저 칼을 찾으러 도로 이 산을 내려가야겠다. 그러니 슈벨을 풀어줘라." 카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들고 있는 칼을 빌리에게 던져주었다. 빌리는 날아가는 칼의 손잡이를 정확히 잡아냈다. 카셀은 정중히 부탁했다. "물러나 주시오." 빌리는 천천히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의 끝에 도달하자, 이번에는 사냥꾼에게 부탁하는 카셀이었다. "이제 풀어주시오. 칼도 없이 당신을 상대하지는 않을 거요." 목에 댄 칼을 베고 사냥꾼은 뒤로 물러섰다. 카셀도 다섯 걸음 정도는 물러나 있었다. 슈벨은 당장 달려들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진짜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미안하게 됐소." 카셀은 그 말만 하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 뒤쪽으로 이어진 길로 향했다. 사냥꾼이 그 뒤를 따랐다. 슈벨의 무기는 칼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품 안에 있는 단검을 뽑았다. 그러나 결국 던지지 못 했다. 그는 팔을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미안하다. 내가 모두 망쳤어. 내가 멋대로 길을 안내하다가 함정에 빠졌고, 내가 인질이 되는 바람에 다 잡은 녀석을 놓쳤다. 미안하다.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 슈벨은 산을 내려오며 몇 번이고 사과했다. 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서 걸었다. 그는 바위산 쪽을 올려다보더니 아까 카셀을 잡을 뻔했던 벼랑이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칼이 떨어줬을 만한장소가 가까워져 갔다. "그 때 왜 그냥 공격하지 않았어? 나는 기습을 당했다 치더라도 너라면 이길 수 있지 않았나? 솔직히 말해봐. 너, 나보다 강하지 않아? 블랙과 네가 싸울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어. 우리는 직접적으로 겨뤄본 적은 없지만, 난 은근히 너와 내가 비슷하길 바랐거든 그래서 그렇게 억지로 강한 척 했던 거야. 그런데 사실은 너 나 이길 자신 있는 거지? 그렇지?" "아니, 그런 생각한 적 없어. 네가 나를 강하게 생각한 것만큼이나 난 너를 강하다고 여겼다. " 주위에 나무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던진 거라 어디로 날아갔는지 위치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빌리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계속 주위를 살피기만 했다. "말해 봐봐. 너, 그 사냥꾼과 겨루면 어땠을 것 같아? 어?" "글쎄, 죽어라 싸우면 확률은 반반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녀석도 제대로 실력을 발취한 건 아닐 테니, 아마 내 쪽이 좀 불리할 거라 생각해." "세상 기사들 다 이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런 자신 없는 대답하기냐?" 빌리는 빙그레 웃으며 슈벨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제일 자신 있게 말한 거다. 그 절벽에서 그 사냥꾼과 겨루었다면 내가 졌을 거다. 나는 지쳐 있었는데 녀석은 안 지쳐 있었다. 또 네가 죽었다면 내가 어찌 제정신으로 실력 발취를 하겠냐? 그 상황에 있어서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너도 구하고 나도 살기 위해서." "너무 냉정하게 말해버리니 한 개도 안 믿어져." 슈벨은 여전히 투덜거렸다. 빌리는 그를 가볍게 밀어내고 다시 칼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슈벨은 그의 등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왜 울프 기사단으로 돌아간다고 했는지 말 안 했지?" "글쎄, 뭐라고 그랬더라? 기억 안 나는데?" 빌리는 별로 관심도 없어 보였다. 슈벨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자 때문이었어." 그제야 빌리는 고개를 돌렸다. 슈벨은 얼굴이 붉어졌다. "젠장, 괜히 말했나?"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예전 울프 기사단 테스트 때 아즈윈이라는 여자를 봤지. 그 얘기 했던 거 기억 나?" "음, 무척 강한 여검사였는데, 져서 비참했다는 말 비슷하게 한 것 같군." "그래, 비참했지. 동시에 반해버렸고....... 그 때 막 스무 살을 넘긴 주제에 내가 품었던 여자들 숫자가 적어도 한 다스는 되거든. 오해 하지 마. 나는 여자를 돈으로 산 적 없어. 모두 내게 반해서 스스로 옷을 벗은 여자들뿐이니까." "음,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 하지. 많은 여자들이 널 보면 쉽게 넘어갈 거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렇지 않더라 이거야.“ 슈벨은 두 손을 불끈 쥐며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검을 쓰는 여자 같은 건 정말 매력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이런 말하긴 정말 쑥스럽지만, 아마 그게 내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여자를 수없이 품어본 놈이 할 말이 아니군." "그럼 어떻게 해? 내게 있어서 육체적 사랑은 사랑의 기준이 아니었다." 빌리는 뭔가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 그 족으로 걸어갔다. 슈벨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꿈적도 안 하더라? 난 내 실력으로 그녀를 굴복시키면 어떻게든 내게 넘어올 거라는 유치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카셀 녀석이 말했던 대로 그녀는 하얀 늑대가 되어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무래도 내가 아닌 것 같았거든. 그녀는...... 떡대를 좋아하더라고. 덩치 큰 남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런....... 실력으로 커버하기에는 또 로일이라는 놈 때문에 좌절했고.......“ 슈벨은 머리를 세게 헝클었다. "결국 난 두 번째 테스트의 합격을 포기했다. 합격하기 바로 전날, 그만두겠다고 말했지. 같이 있다가는 결국 다른 강한 녀석들의 그늘에 파묻혀 버릴 거고, 내가 아무리 발전을 거듭해도 그런 틀 안에서는 그녀보다 더 강해지지 못 하게 될 것 같았어." "흐음, 그래서 기사 배롤이 한 말에 발끈했군." “무슨 말?" "혼자 힘으로 훈련해서 울프 기사단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했냐....... 그런 비슷한 말." "아아, 그거? 맞아, 그래서 화가 났지. 이런 씨....... 기억력도 좋다. 왜 그런 생각을 떠올려서 더 화나게 만드냐?" 론타몬의 보검은 바위 위에 꽂혀 있었다. 가끔 부는 바람에 손잡이 부분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려진 나뭇잎을 뚫고 바닥으로 뻗어 내려온 몇 줄기의 햇살 중 하나가 우연히도 칼을 정확히 비추고 있었다. 손잡이의 보석이 반사되었다. 그것은 마치 잊혀진 성스러운 동굴 속에 박혀 있어야 할 전설의 검처럼 보였다. 슈벨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래서 돌아온 이유는? 그 여자에게 강해줬다는 걸 보여주려고?” 빌리는 검이 꽂힌 바위 위에 올라서며 물었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처음에는 좀 비장한 심정이긴 했는데, 네가 아란티아를 방문했던 목적에 비교 당하니까, 굉장히 유치해지더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말을 못 했어." “그럼 왜 지금 와서 말해?" "아까 그런 망신을 당했지 않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창피한 일은 모조리 당해두려고." 빌리는 칼을 뽑으려고 힘을 주었다가 잘 되지 않자 위치를 바꾸었다. "아무리 저 높이에서 떨어쳤다고, 바위에 칼이 꽂히네. 되게 좋은 칼인가 보다. 도와줄까?" 슈벨이 물었다. "아니, 됐어." 빌리는 칼을 비틀어가며 힘을 더 주었다. 조금 숨을 몰아쉬고 고쳐 잡으며 그가 말했다. "나도 사실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어. 네 말대로 선배들이 어디에서 죽었나 보러 오는 여행자의 심정이었다는 편이 옮았지." "뭐야? 그럼 네가 처음에 장난처럼 말게 게 맞았네." "사실대로 말하면 창피하잖아." 빌리는 마침내 칼을 뽑았다 뒤로 넘어질 듯 취청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빌리는 칼날이 상한 부분은 없나 손가락으로 만져보거나 눈을 가까이 대고 살펴보았다. 슈벨의 눈에 그의 모습은, 또한 성스러운 검을 찾으러 돌아온 영웅 같아 보었다. "좋은 계기가 되었다." 빌리가 말했다. "무슨 계기?" "내 생각에 드디어 너와 나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진 것 같다." "벽?" 빌리는 그 부분을 심각하게 얘기해주고 싶지 않았다. "녀석들을 쫓아가자." 슈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무슨 수로?" "아까처럼 쫓아가자는 말이 아니야. 카셀은 분명 나디움으로 가는 걸 게다. 그럼 결국 골드 게이트를 통과해야겠지. 아까 지도를 보니까 블루나 그레이, 레드 게이트는 굳이 게이트를 통과하지 않아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골드 게이트는 다르다.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 나디움으로 가는 방법은 하늘 산맥을 통과하는 방법뿐이더라," 슈벨은 아까 다친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늘 산맥을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했지.......“ 빌리는 힘 있게 칼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해. 우리가 먼저 골드 게이트에 도착하면 녀석들은 싫어도 우리와 다시 한 번 만나게 된다. 복수는 거기에서 시작하도록 하지." 슈벨은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난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했어." “가자. 블랙이 기다리고 있어.” 5.제이메르 캡틴과 사냥꾼 제이는 사실 레드 게이트를 통과한지 두 시간 만에 빌리 일행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경비대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큰길을 벗어났으나, 스무 멍의 흔적을 찾아내는 건 제이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 스무 명을 덮쳐 한 명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이는 마스터의 명령을 따라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제일 처음 한 명을 해치운 후의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일행 중 누가 제일 강한 녀석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제일 먼저 확인한 게 슈벨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 숨겨둔 시체를 찾아낼 줄 알았다. 또 밤중에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그의 주위에 쉽게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은 빌리였다. 그는 통솔력 있는 지도자였다. 제이는 제일 마지막까지 그 둘을 남겨놓으려고 했다. 캡틴 울프라는 자를 찾는 건 아주 쉬웠다. 그는 묶여있었고, 슈벨이란 자가 그를 부르길 카셀이라고 했다. 동쪽 하늘에 번개가 쳤다. 그는 또 한 번 비가 올 것 같아 불안했는데, 천둥 소리가 없었다. 번개가 아니었을 지도 몰랐다. 제이는 그 불빛의 정체가 뭔지 불안한 나머지 한 동안 기다려보았다. 그러나 그 푸른 볼빛은 두 번 하늘을 밝히지 않았다. 제이는 모두가 잠들었을 무렵, 그들에게 접근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갔는데도, 그는 한 명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것은 검은 기사였다. 계속 소문으로만 들은 바로 그 검은 기사였다. 마스터조차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검은 기사. 그들은 그 검은 기사를 블랙이라고 불렀다. 제이는 블랙을 앞에 두고 하루 종일 머리 속에 담고 있었던 마스터의 경고를 잊어버렸다. 그는 블랙을 향해 순식간에 검의 간격을 좁혀 들어갔다. 아이린만큼 강한자라면 분명 어떤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검의 간격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냥 조용히 응시하다가 무기를 들어 보였다. 본능이 그를 건드리지 말라고 제이에게 명령했다. 것은 검의 간격을 따지기 이전의 문제였다. 그는 물러났다. 만약 마스터가 검은 기사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그는 블랙을 보면 물러났을 것이다. 블랙이 한 번 전해준 공포는 계속 머리 속에 남았다. 그래서 그는 이후의 사냥에도 신중을 기했다. 한 명씩, 한 명씩, 자신이 블랙에게 가진 공포보다 더한 공포가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길 기대하며 천천히 숨통을 조여 들었다. 실제로 그의 상대는 열한 명과 두 명이었으나, 정작 머 리 속에 적으로 가정한 건 블랙 하나뿐이었다. 풀밭에서의 싸움이 그것을 증명했다. 제이는 그 기습에서 상황을 끝내려고 했다. 빌리나 슈벨도 풀밭을 은폐물로 삼고 싸우면 그리 힘든 적은 아니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블랙이 집어 던진 할버드 한 방에 계산이 어긋나 버렸다. 그들이 마을로 숨어버리면 곤란한 상황에서 카셀이 도망쳤다. 그를 구하기에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블랙과 겨루기 위해 머리 속에 구상한 모든 작전이 깨져버렸다. 그래서 카셀을 따라 산길을 달리면서도, 그는 수레에 남겨진 블랙을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가면 일 대 일 싸움을 할 수 있게 된다. 마스터조차 두려워하던 그 녀석을 해치우면 나머지 테스트는 두고 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사냥을 시작했어도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아이린의 테스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는 고민했다. 블랙이 던진 할버드를 막아낸 손이 아직도 찌릿찌릿했다. 이런 느낌을 버리고 등을 돌린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마스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카셀이 달아난 건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라 그도 당황했다. 하지만 달아나는 흔적 위에 쫓아가는 빌러 일행의 흔적이 겹쳐 있는 걸 보니 앞서 있는 자의 의도가 조금 눈에 보였다. 제이는 그 의도가 정확한 지 확인하기 위해 뒤따르며 한 명을 해치웠다. 뒤이어 카셀이 부상당한 흔적을 슈벨이 발견했다. 바로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던 제이도 처음에는 진짜로 그가 다친 줄 알았다. 만약 그렇다면 여태까지 쫓아온 게 무의미해진다. 다시 저 둘을 상대로 한 위험한 사냥을 시작해야 했다. 제이는 모험을 걸었다. 캡틴 울프는 스스로 함정을 파 있다고. 그 모험이 틀리면, 위험한 건 제이가 아니라 카셀이었다. 결국 모든 상황은 카셀이 만들어냈고, 제이는 거기에 맞춰서 움직인 게 되었다. 정말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뒤따라오는 이가 의도를 파악해 줄 거라고 믿고 자기 스스로를 미끼로 던지는 것은 정말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제이는 그가 상당한 검의 고수이거나, 전투에 경험이 많은 나이 든 장군쯤 되는 이로 머리 속에 그려볼 지경이었다. 들어 둔 바가 없고, 먼 발치에서 나마 그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가까이서 본 그를 캡린 울프라고 믿지 못 했을 것이다. 높은 곳을 싫어하는, 아니 정확히 말해 무서워하는 제이로서는 마지막 벼랑에서의 싸움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마치 마지막 한 수를 두기 위해 다를 모든 말을 희생시키는 한 판의 숨 막히는 체스 게임 같았다. "이봐요. 어디까지 갈 거요?" 지금까지의 일을 곱씹으며 앞서 걷다가 뒤에서 카셀이 부르자 그제야 제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셀은 지쳐서 다리까지 휘청거러고 있었다. 하긴 그 정도로 오래 달렸으면 누구라도 그릴 법 했다. 사실 제이도 조금 힘들었다. "그들이라면 아마 쫓아오기 힘들 거요. 그러니 여기서 조금 쉽시다." "누구지? 너를 잡고 있던 자들." 제이가 물었다. "얘기 하자면 좀 기니까 나중에. 먹을 거라도 있소?" 제이는 가죽에 만 치즈와 물 주머니를 내주었다. 카셀은 사양 않고 모두 받아먹었다. 그제야 그는 살 것 같다는 듯 다리를 폈다. "누가 보낸 분이시오, 당신은?" 카셀이 물었다. “마스터 아이린." "아이린? 혹시 이전 하얀 늑대 말하는 거요?" "아마 그럴걸." 카셀은 놀라 혀를 내둘렀다. "맙소사, 아즈윈이 들었다면 정말 깜짝 늘랄 일이군. 그 분은 지금 어디 계시오?" 제이는 하늘 산맥 쪽을 가리켰다. 별리 평원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산 위에서 봐도 하늘 산맥의 첫 번째 산은 굉장히 높고 웅장했다. 그런 산에 감히 올라가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하늘 산맥은 아무돗 못 간다고 그러던데?" 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야 나도 모르지." 카셀도 굳이 알려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며 말했다. "아즈윈은 항상 레드 게이트를 통과하면 하늘 산맥이 보인다고 네게 말해주었소. 그 산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고 전설이 있다며 도착하면 그런 얘기들을 해주겠다고 들떠 말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레드 게이트를 통과하고 그런 생각이 나니 눈물이 다 나더군요." 카셀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 이름은 카셀 울프입니다. 당신은 울프 기사단인가요?" 제이는 내민 손을 잡지 않고 물었다 "아니. 난 그냥 사냥꾼. 넌 정말 캡틴 울프인가?" 카셀은 내민 손을 접지 않고 대꾸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검을 쓸 줄 모르더군. 배롤 울프라는 자가 싸울 때도 싸우지 않았다면서? 묶여 있는 내내 관찰했는데, 칼을 썼으면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그러지를 않더군." "지금은 조금 힘드니 나중에 얘기 합시다. 하지만 한 가지 얘기해 두자면, 나는 정말 칼을 못 씁니다. 그러니 시험해 본다며 칼을 휘두르지 마시오." "난 굳이 휘두르지 않아도 그런 건 알 수 있어," "아아,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무시하는 말투였는데도, 카셀은 웃어 보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으니, 제이는 참 속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카셀은 아직도 내민 손을 접지 않고 말했다. “당신 이름을 듣고 싶군요." "제이메르." 그제야 제이는 카셀의 손을 잡았다. 카셀은 힘없이 웃으며 가볍게 악수했다. "제이메르. 좋은 이름이군요. 누가 보됐건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말이 없으신 분이군요." "불필요한 말은 그다지 안 하는 편이라." "차라리 낫군요. 저도 많은 말 할 힘은 없으니까. 이제 다음 계획은 있나요, 제이메르씨?" "골드 게이트로 간다. 마스터가 먼저 나디움에 가서 기다린다고 했으니 나도 뒤따라가야지." "잘 됐군요. 같이 갑시다. 우선 좀 쉴 수 없을까요?" 제이는 앞써 걸으며 말했다. "여긴 안 돼. 밤이 되면 추워진다." "아, 그렇겠군요." 카셀은 제이의 뒤를 졸졸 쫓아 내려왔다. 경험 많은 전략가? 제이는 아까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카셀은 어린 아이 같은 녀석이었다. “마스터 아이 린은 어떤 분이죠, 제이메르 씨?" 제이는 지친 카셀을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좀 천천히 걸었으나 그나마도 잘 쫓아오지 못 했다. 아까는 정말 용케 잘 도망갔구나 싶었다. 하지만 끝에 붙인 호칭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제이메르씨' 라는 말을 벌써 다섯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제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이, 카셀." "예?" "네가 얼마나 고귀한 가문인지 얼마나 계급 높은 기사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서 예절을 기대하지 마라, 끝에 캡틴이라는 호칭을 달아주길 바라지도 말고! 그러니 너 역시 나에 대한 예절은 잊어라. 난 그런 거 싫으니까." "아, 그거 다행이군. 나도 그 쪽이 더 편할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내 아버지는 농부야. 일상적인 기준에서 고귀한 가문이랄 수는 없지." 카셀은 웃어 보였다. 제이는 마른 입술을 적시고 다시 걸었다. "그보다 아까 다친 척 연기한 건 의도한 건가? 그것 때문에 슈벨이라는 자도 추적에 혼선을 빚었고 나도 잠깐 네 의도를 파악하는데 애를 먹었다." "아, 그거?" 카셀은 소매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팔꿈치를 보여주었다. 피가 굳어 딱지가 앉은 자리에서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진짜로 넘어졌고 진짜로 피를 흘린 거야, 그리고 그 순간 다리를 다친 척 하는 게 유리할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그거 참.......“ 넘어진 건 우연한 일이겠지만, 그 순간 그걸 이용할 생각을 한 건 분명 보통이 아니었다. 제이는 뭔가 적절한 말을 찾다가 그냥 아무렇게나 말했다. "운이 좋았군." "뭣보다 당신이 나를 찾은 게 운이 좋은 지겠지." “마스터 아이린도 궁금해하던데, 다른 하얀 늑대들은 어디 갔나?” "그 얘기도 좀 하자면 길어." 카셀은 다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골드 게이트까지는 많이 남았으니까 앞으로 이야깃거리 떨어질 일 없으니 다행이군. 안 그래? 난 당신이 누군지도 궁금하거든." "사냥꾼! 그 외에 뭘 더 말해주길 바래?" 제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카셀은 또 뭇었다. 제이는 그 멍청한 웃음을 보자, 잡혀 있을 때 보여주던 박력은 다 어디 간걸까 궁금해졌다. 하얀 늑대들의 캡틴을 만나면 아이린을 만났을 때처럼 뭔가 극적인 사건이 하나 벌어질 거라 생각했던 제이는 조금 실망했다. 제이는 카셀의 체력이 회복될 동안 개울가에서 조금 쉬기로 했다. 그 사이 그는 물고기를 잡았고, 카셀은 잡아온 물고기를 손질해 불 위에 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더 잡아온 물고기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며 카셀이 물었다. "좀 의외라서. 난 골드 게이트까지 이 지치고 다친 캡린의 식사와 잠자리를 챙기면서 가게 될 줄 알았다." 카셀은 되려 그 말을 하는 제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내가 배고파서 식사 준비하는 것도 잘못되었나?" "아니. 아, 소금 필요하지?" 제이는 소금이 든 나무통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개울가에서 바라본 산은 무척 아름다웠다. 가델로크에도 이런 곳은 많았지만, 산너머 배경으로 바위 산과 하얀 산이 보이는 것 하나 만으로 전혀 다른 풍경처럼 보였다. 카셀은 고기가 익는 동안 불 앞에 않은 제이에게 친구들과 헤어지고 배롤과 만난 후 다시 빌리를 만난 얘기를 짧게 해주었다. 제이는 가만히 얘기를 듣다가 다 익은 고기를 치켜들었다. "음, 너 얘기 참 재미있게 하는구나." 카셀토 고기를 하나 들 껍질을 벗겼다. 하얀 속살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걸 덥석 물고 그는 대답했다. “정말 아란티아에 와서 두 번째 듣는군." "정말이다 난 말 하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듣는 건 좋아한다. 그래서 가끔 돈 주고 얘기를 사서 듣기도 하는데, 너만큼 말 잘 하는 이야기꾼은 드물 거다." “그 쪽 길로 나가도 될 것 같아?" 농담처럼 묻자,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셀은 제이를 무척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제이는 오히려 그게 더 어색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카셀은 물고기를 머리부터 씹으며 물었다. "아, 그보다 아까 했던 질문! 아이린은 어떤 분이야?" 그의 질문에 제이는 먹던 고기를 입에서 했다. 따져보면 그녀와 헤어진 지 사흘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한 달은 된 것 같았고, 또 보고 싶었다. 어떤 사람이었지? 제이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왜 그녀를 이렇게 그리워하게 되었을까? 단순히 강한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았다. 헤어지면서 복받쳐 오르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스승으로 삼을 만한 여자다." 제이는 수없이 떠오르는 다른 말은 삼켜버리고 짧게 대답했다. 오래 생각하는 건 괴로웠다. 그러나 카셀은 거기에서 대화가 끊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전에는 스승이 없었나? 그럼 검술은 누구에게 배웠어? 그 무서운 두 사람을 상대할 정도라면, 엄청난 스승을 모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었다." "혼자 배운 거라고? 그게? 대단하네."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제이는 사람의 표정을 잘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속기도 잘 속았고, 사기도 몇 번 당했다. 말발이 안 되어서 잡아놓은 현상범의 현상금을 못 받기도 하고, 의뢰 받은 일을 처리해놓고도 인정을 못 받기도 했다. 물론 그를 속이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긴 하지만, 잘 속는 건 사실이었다. 해서 카셀의 저 솔직한 부분이 정말 솔직한 면인지 제이는 판단하지 못 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는 지나치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어 주 있었다. 경계심을 세우려고 해도 자꾸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둘이 마주 앉아있는 지금의 모습이 뭔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방금 전까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카셀에게 있어서 제이는 위험한 사람이어야 옳았다. 더욱이 잡혀 있다가 풀려 나온 사람이라면 아직 주위를 경계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믿지 말아야 했다. 한 번은 의뢰를 받아 귀족 여인을 한 명 구해준 적이 있었다. 집에 그녀를 묶어 놓은 사내 녀석들은 칼로 그녀를 위협해 겁탈하고 상처 입히고 겁을 주었다. 제이가 받은 의뢰는 그녀를 제외한 모든 납치범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허름한 2층 저택에 있는 인질범들을 모두 해치우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세 걸음 안으로 들어온 이는 없었다. 묶여있는 여자는 피 붙은 칼을 들고 나타난 제이를 보더니 오히려 인질범들에게 잡혀 있을 때보다 더 겁을 집어 먹었다. 구해주러 온 사람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박무가내였다. 어쩌면 그것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라는 동물을 모조리 적으로 삼을 만한 일을 당했으니까. 결국 그녀를 다시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인질범들을 해치우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다른 일도 비슷했다. 그의 일 처리 방식은 사람을 구할 때나 현상법을 사냥할 때나 똑같았다. 그가 나타나면 언제나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 너무 과격한 행동에 범인이 인질을 죽이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가 칼을 들고 나타나면 잡힌 쪽이건 구해준 쪽이건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얼마 전에 지옥 도끼를 잡았을 때 나타난 드래곤의 기사 같은 경우였다. 그의 실력을 보면 그런 식으로 스카우트 하려는 자도 있었다. 카셀은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제이는 그게 어색했다. "넌 내가 이상하다거나......, 그...... 무섭다거나 그러지 않나?" 카셀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제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상황에서 봤다면 그랬을 지도. 아니면 네가 적이었다면......, 무서워했겠지. 그러면 나는 네가 무서워서 얌전히 생선 뜯어먹고 있지도 않았겠지." 제이는 그가 잘못 이해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달리 설명하길 포기했다. 이럴 때면 제이는 또 한 번 말재주 없는 자신을 탓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카셀은 알아서 이해하고 말했다 "아, 다른 뜻으로 한 말이라면! 사실 너랑 비슷한 검사를 잘 알거든. 혼자서 배워서 거의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만한 검사. 이름은 로일인데, 그 친구도 스승이 없었어." "로일....... 그 자도 하얀 늑대인가?" 카셀은 다 먹은 생선 찌꺼기를 버리고, 새 것을 들었다. "맞아." "그 자를 보면 나 정도는 별로 무섭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카셀은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수준에서는 그런 걸 구별할 수 없어." "그럼 넌 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지? 나를 믿을 만한 존재라고 판단하는 건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카셀은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또 네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어쩌겠어? 맘만 먹으면 나를 죽일 수 있는 검사를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리고 나는 너를 보는 순간 아군이라고 생각했어." 뭘 근거로? 또 그 판단이 들리면 어쩌려고? 제이는 떠오르는 모든 의문을 접었다. 얘기를 길게 하면 더더욱 의문만 커질 것 같았다. "먹으니까 졸리네." 카셀이 말했다. "더 가면 좀 더 쉬기 편한 곳이 나올 거다. 거기까지는 가야해." 제이는 다시 배낭을 맸다. "알았어." 카셀은 순순히 제이가 가는 대로 따라왔다. 여전히 자지의 어딜 믿고 이렇게 따라오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추적해 올까?" 해가 지고 잘 곳을 정했을 무렵, 카셀이 물었다. “그 두 사람? 쫓아오지 못 한다. 아니, 나라면 아까 그 벼랑에서 놓친 시점에서 포기했다 하지만 우린 서둘러서 가야 한다." "왜?" "그들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어디로 갈 지 안단 말이야? 여긴 이렇게 산도 많고, 길도 험한데?" 카셀이 놀라 말했다. "아까의 민첩한 판단력은 어디 갔나? 우리가 갈 곳이나 그들이 갈 곳이나 같은 방향 아니야?" 카셀은 그의 말을 듣고서야 무릎을 쳤다. "골드 게이트! 아아, 몸이 편해지니 그걸 생각 못 했군. 큰일났네, 어서 가서 알려줘야 하는데.......“ "지금 넌 골드 게이트를 걱정하나? 그곳 병력이면 몇 명 쳐들어오는 건 문제 없지 않나?" "익셀런 기사단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곳이니까." 카셀은 씁쓸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 레드 게이트의 병력으로도 블랙은 막지 못했어. 골드 게이트라고 다를 수 있을까? 그는 검은 기사다. 카모르트의 수도도 열 명 정도 되는 검은 기사를 막지 못 해 무너졌다. 그런데 블랙은 내가 겪었던 그 검은 기사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 "나로서는 납득하지 못할 말이군. 네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골드 게이트를 너의 지취 아래 두고 전투를 준비해야 순서에 맞지 않나?" "아니, 골드 게이트의 병력은 내가 지휘할 수 없어." "지휘권 문제?" "아니, 나는 아직 공식적으로 캡틴 울프로 임명된 게 아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떤 요구를 하거나, 명령을 내릴 수가 없어." “그건 또 웃기는 상황이군 " "복잡한 상황이지." 제이는 복잡한 상황이라는 말에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럼 우선 우리는 골드 게이트를 걱정하기보다 나디움까지 직행해야겠군. 거기에 마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데니 그녀에게 모두 말하면 돼." "그 전에 녀석들에게 잡히지 말아야지." "내 걸음이라면 절대 잡히지 않아. 하지만 네가 그걸 쫓아오지 못 하겠지. 그 부분은 좀 고민해 봐야겠군." 제이는 모닥불을 피우고 자리에 누웠다. 카셀도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제이도 피곤했지만, 카셀은 정말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제이는 망토를 벗어 그의 몸에 덮어주었다. 밤이라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다. 다음날부터 카셀에게는 무척 괴로운 시간이 계속 되었다. 제이는 그의 걸음걸이를 생각해서 속도를 늦추었지만, 너무 더뎠다. 점심 때쯤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여행자를 맞이할 만한 식당이나 여관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대부분 통나무로 만들어진 집이었고, 특이하게 몇몇 집은 붉은 흙으로 지어져 있었다. 카셀이 은화 한 개로 마을 아낙과 흥정해서 살은 달걀 몇 개와 우유 한 컵을 얻어 왔다. 그들은 돈의 가치를 높이 쳐주지 많아, 인정에 호소해 음식을 얻었다는 편이 옳았다. 둘은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암아 쉬었다. “그들이 우리보다 훨신 좋은 길로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적어도 우리는 그들보다 두 배는 더 빨리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원이 준 만큼 더 빨리 달릴 수도 있고........” 제이가 앞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팔짱을 끼었다. “녀석들이 골드 게이트에서 기다릴 생각을 못하면 좋겠군. 역시 무리야. 아무리 계산해도 우리가 먼저 도착하는 건 불가능하다. 몇가지 빠른 방법도 있지만 아마 녀석들이 먼저 그 방법을 썼을 것 같군." 제이는 한숨을 쉬며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미안해. 내 걸음이 느려서 그런 거겠지?" 카셀이 사과했다. 제이는 얼굴을 하늘로 들고 눈을 감았다. “네 탓을 할 거면 구하지도 않았다. 아, 그보다 레드 게이트에서 말이다." "응?" “왜 갑자기 게이트 병사들을 움직일 생각을 했지? 네 얘기를 들은 것과 내가 마스터와 레에 도착했을 때 상황을 종합해 보면, 너 굳이 그들이 적이라는 사실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랬지? 얌전히 있었으면 안전하게 골드 게이트까지 도착했을 텐데?" 카셀도 제이의 옆에 않아 나무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블랙이......, 그러니까 그 검은 기사가 나를 도발했어." "도발?" "사명감이랄까, 의무랄까, 그런 말들로 나를 부추겼어. 어쩌면 나는 그와의 머리 싸움에서 진 걸 지도 몰라." "그 블랙이라는 자도 웃기는군. 조용히 있었다면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을 게이트를 굳이 왜 널 도발시켜 싸워?"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네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나는 이해하지도 못 하겠군. 그래, 넘어갔지." 카셀은 웃었다.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찬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땀을 식혀주었다. 멀러서 지게를 진 노인이 산을 내려왔다. 허리까지도 차지 않는 작은 키의 소녀가 '할아버지'하고 뒤뚱거리며 달려갔다. 힘겹게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던 노인은 갑자기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그 소녀를 번적 안았다 노인이 뭐라고 말했고, 소녀는 깔깔대고 웃었다. "아, 또 한 가지! 늑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어. 그들을 골드 게이트로 보내지 말라고." "늑대?" 제이는 즉시 레드 게이트 근처에서 발견한 늑대의 발자국을 떠올렸다. "그 뒤로는 또 안 나타났나?" "아니, 전혀. 으음, 늑대가 내게 말했다고 했는데도 전혀 안 놀라네?" "늑대가 말하는 것 정도는 내가 레드를 통과하기 전에 겪었던 그 끔찍한 일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늑대, 너희들이 레드 게이트를 통과한 후 바로 쫓아간 모양이다. 시간상으로 정리하면 네 쪽과 나 쪽의 거리 차는 한두 시간 정도. 그럼 늑대는 그 중간 거리에 있어야 했지 하지만. 나도 늑대를 보지는 못 했다." "정체도 모르는 늑대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분석하겠어?" 카셀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품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고목에 등을 기댄 이상한차림의 두 청년을 구경하며 지나가곤 했다. 둘은 개의치 않았고, 마을 사람들도 오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제이는 달걀 껍질을 벗겨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너는 정체도 모르는 늑대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냐?" "나쁜 늑대 같지 않았거든. 게다가 내가 하얀 늑대의 캡틴인데 털이 하얀 늑대가 그런 말을 해봐, 안 듣게 되겠어?" "동화책을 너무 많이 봤군, 수컷이었냐? 나이는?" "모르겠어. 그냥 의미만 전달되는 목소리라서 성별이나 나이는 잘.......“ “그런 것도 모르는 상대를 믿나? 늑대가 너를 이용해 먹거나 나쁜 쪽으로 이끌었으면 어절 뻔 했어?" 카셀은 뺨을 끍적였다. "듣고 보니........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고. 늑대가 말을 건넨다, 그 늑대는 밤에도 은빛을 발하는 신비한 마법의 하얀 늑대다, 내 친구의 안부를 알고 있다......, 이런 복합적인 환경 안에서 대뜸 어떤 명령을 들으면 대개 듣게 되지 않아?“ "복합적인 환경, 그것 참 써먹을 만한 말이군. 그러니까 그런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한 거짓말을 하면 어떤 사람이든 알면서도 속게 된다 이거냐?" 제이는 자기가 한 말이 앞뒤가 맞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달걀을 하나 까며 중얼거렸다. "도대체가 아란티아로 건너온 뒤로 명확하게 설명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나는 아이린이 왜 하늘 산맥으로 가 버렸는지 모르겠다. 왜 너와 헤어졌지? 왜 너에게는 구하라고 명령했으면서, 나를 추적해 오지 않았지?" 카셀은 입 안 가득 문 계란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오며 제이는 그에게 간략히 아이린과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었다. 블루 게이트에서 그녀를 만났으며, 중간에 어떤 흔적을 발견했고, 하이로드 탈룬드를 만난 얘기나 배롤의 이야기도 했다. 카셀은 그 부분에서 흥분하며 배롤이 살아있는지 묻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 얘기가 레드 게이트 얘기였다. 그녀와의 이별 이야기는 가급적 짧게 끝내버렸지만....... "물론 그녀가 날 구해줄 의무 같은 건 없지. 하지만 그녀가 전대 하얀 늑대라면 왜 자신 있게 쫓아와 너와 함께 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네 실력과 그녀의 실력이라면, 상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해볼 만 했을 것 같군 봐, 너 혼자서 그들의 부하들을 모조리 해 치웠잖아." "쉽게 말할 성질이 아니야." 사실 제이도 그 부분이 궁금하긴 했다. 그녀가 검은 기사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던 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직접 겨뤄보지는 않았으나 이기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린이라면? 어둠 속에 나타난 그 회색 로브의 마법사와 겨룰 때처럼, 아직 자기에게 모두 보여주지 않았을 숨겨진 힘을 끌어낸다면 그 검은 기사를 이기지 못했을까? 그녀는 정말 검은 기사를 피한 걸까? 그 자가 그토록 세단 말인가?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제이는 생각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되려 카셀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그 블랙이란 자는 얼마나 강한 자던가?" "이미 빌리나 슈벨이나 너는 내 수준으로 측정하고 말고 할 실력이 아니야. 블랙도 그렇고. 하지만 그 자에게는 실력 미상의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이기지 못할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도 생각해. 사실 카모르트의.......“ 그는 갑자기 말하다 말고 뭔가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곧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져. 어했든 블랙은 손쉽게 울프의 기사 배롤을 꺾었어. 그것만으로도 내 상상을 뛰어넘는 기사지." “하얀 늑대들과 비교하면 어떨 것 같나?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그 블랙과 겨룬다면?" 카셀은 금방 우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계한 매문에 입 안이 거칠었는지 물을 한 모금 하고 대답했다. "그래. 블랙은 대단한 자야. 하지만, 내 친구들이....... 하얀늑대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진다는 건 상상을 못 하겠어." 카셀은 제이에게 물 주머니를 내주며 긴장감 있게 뒤를 이어 말했다. "그 친구들이 정말 실력 발휘를 할 때는 이런 말을 하지.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는 자는 없다....... 들어보니 그 친구들은 서로에게도 그 이발을 드러낸 적이 없대. 그런 일이 벌어지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라나? 블랙은 이미 살아있는 존재가 아닐 테지만,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믿고 싶어." 제이도 물을 한 모금 했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에 닿자, 처음 아란티아를 찾아온 목적이 바로 울프 기사단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제이는 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얼얼해지며 동시에 울프 기사단 중에서도 최고라는 하얀 늑대와 겨루고 싶다는 욕구가 울꺽 올라왔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강한가? 인간의 수준을 넘는 존재라고 인정해 놓은 블랙에게도 질 것 같지 않다고? 존재 자체를 달리 결정해 둔 것 같은 카셀의 생각에 분노가 일었다. 수레에 남아있었을 블랙을 해치워 버리고 카셀을 따라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 분노와 후회를 카셀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행복한 녀석들이군, 네 친구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믿어주는 캡틴을 뒤서." "고마워." 카셀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우선 이동하자. 어쨌든 우리는 그들보다 더 빨리 골드 게이트에 도착해서 나디움에 가는 걸 막아야 해.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고, 걷다보면 빨리 가는 방법이 생각날 지도 모르고 말이야. 말이라도 두 마리 살 돈이 있으면 좋겠군." "그 생각은 나도 해봤지만 소용없다. 말이라면 그들도 쉽게 구할 거고 아마 벌써 골드 계이트를 향해 최대로 빨리 달리고 있겠지." 카셀은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들은 말을 탈 수 없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살아있는 말은 블랙을 태울 수가 없거든. 그들이 최대로 빨리 가려고 해 봤자, 수레에 블랙을 태우고 달리는 방법뿐이야. 그러니까 우리에게 말이 있다면 빌리보다 더 빨리 골드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다는 거지." 카셀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쩍였다. "결국 또 돈 문제군. 처음 친구들 잃어버렸을 때도 돈이.......“ 제이가 꺼낸 돈 주머니를 보고 카셀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커지는 걸 보니 제이는 뭔지 모르게 재미있었다. "돈이라면 많이 있지. 중간에 무거워서 한 금화 100 개 정도 버리고 왔을 만큼." 제이가 말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만큼은 카셀도 제이 못지 않았다. 제이는 마음 놓고 속도를 냈고, 카셀도 뒤쳐지지 않았다. 길만 좋다면 당일 중으로 골드 게이트에 도착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두 개의 산이 막고 있었고, 말을 달리기에는 곤란한 지형도 몇 군데 있어. 걷거나 밀리 돌아가면서 시간이 약간 지체 되었다. 보름달로 향하는 반달 아래에서 둘은 완만한 산 정상에 올랐다. 산악 지대가 끝나고 평원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고 그 평원을 가로지르는 곧게 뻗은 길도 발견했다. 그러나 저 길을 이용하는 건 아직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그는 다른 쪽 길을 찾았다. 약간 뒤쳐져 있던 카셀이 천천히 말을 독려하며 제이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카셀은 당근을 씹으며 말했다. "걸어온 것보다 다섯 배는 더 빠르게 온 것 같은데, 어때?" "나 혼자 뛰어온 것 정도 밖에 안 돼. 중간에 달린 것보다 말을 끌고 온 시간이 많아서." "너 정말 발이 빠른 모양이구나." 카셀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먹다 남은 당근을 제이에게 내밀었다 그가 거절하니, 카셀은 대신 말에게 당근을 줬다. 제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말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에위니도 말을 무척 좋아했다 집이 가난해서 말 한 마리 가지지 못한 것을 무척 슬퍼했었다. 지금은 아마 부자 남편 덕에 원하는 말을 얼마든지 타고 다닐 수 있을 테지만. 달빛을 받으며 산을 타면, 걷든지 뛰든지 말을 타든지 많은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카셀도 고삐를 느슨하게 쥐어 말이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이도 마찬가지로 이것저것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칼을 들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얻어 맞는 일이, 칼을 든 후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만이 기억 났다. 그나마 비 오는 날 아이린을 안고 있었던 기억은 괜앉았다. 그 후 불쑥 카셀이 말한 하얀 늑대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본 적도 없는 상대를 머리 속에 그려두고 겨루는 의미 없는 짓도 해보았다. 그러나 형체 없는 하얀 늑대라는 이미지는 곧 아이린으로 변했다. 그는 아이린을 이길 수 없었다. "여기에서 노숙하자. 내일 저백름에는 골드 게이트에 도착할 거다." 산 아래는 산 위보다 어두웠다. 말을 타고 이동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리고 그 날 하루는 충분한 양을 걸었다. “빌리 쪽은 언제쯤 골드 게이트에 도착할까?" "곧은 길을 달렸다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 저녁?" “마주칠 지도 모르겠군." "말을 푹 쉬게 둬. 내일은 꽤 강행군을 하게 될 테니까." 불을 피우고, 구운 소시지 몇 개로 저녁을 대강 때웠다. 먼저 잔다고 누운 카셀은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도로 일어났다. "잠이 잘 안 오는군. 노숙이 익숙해 질 때도 됐는데........“ 제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달이 너무 밝아서 그래." 카셀도 명달아 하늘을 보았다. "반달인데 무슨?" "그럴 때가 있어. 몇 년이나 이런 생활을 한 나도 가끔 달이 밝으면 잠이 잘 안 들 때가 있더라. 오늘은 나도 잠이 잘 안 올 것 같다." 카셀은 하품을 길게 하고 말했다. "그럼 얘기나 하지, 뭐" 모닥불을 부시던 제이의 손길이 굳었다. "얘기? 무슨 얘기?" “그냥 이런 저런 얘기. 모닥불을 앞에 놓고 친구와 함께 있으면 의례 하는 그런 얘기. 야, 지금 내가 그런 걸 설명해야 하냐?" 제이는 그가 말한 단어 중 하나에 신경이 쓰여 눈을 찌푸렸다. "친구?" 카셀은 깎지 않아 듬성듬성 자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직은 친구라고 말할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좋아, 어짜피 나도 친구는 그리 많지 않으니 네가 거절한다 해도 상처받지 않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런데 내 생각에 너는 친구가 아주 많을 것 같군. 상대가 내가 아면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 웃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아. 고향에서 내 친구라고는 오직 책뿐이었어 여자애들은 나를 피했고, 남자애들은 책만 읽는 나를 계집애 같다며 놀렸지. 아아, 나름대로는 검술 연습도 열심히 했고, 농사일도 열심히 했는데도 내 또래 애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나를 꽤 좋아했던 것 같다. 촌장님은 나를 다음 촌장으로 지목할 정도였거든." 카셀은 어색하게 웃었다 "너는 어때, 제이메르? 난 오히려 너 같은 남자가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과묵하고, 잘 생기고, 키 크고, 근육질에, 검술도 뛰어나고.......“ "친구라고는 있어본 적도 없어." 언제나 적, 아니면 사냥감만 주위에 두었던 제이였다. 그것도 8년 동안이나....... 누군가와 같이 불 앞에 앉아 잔 것도 아이린이 유일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린은 조금 다른 개념으로 같이 있었으니 어색함이 덜 했다. 카셀도 어떤 면에서는 의무감에 같이 지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점점 그 기준이 애매해지고 있었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밤을 지낼 사람이 앞에 있다는 건 확실히 신선한 체험이었다. 사실 아이린도 언제나 밤이 되면 다음날을 대비하기 위해 일찍 잠들어 버렸었다. 밤을 보내기 위해 긴 얘기를하자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래. 얘기하는 게 싫다면, 나도 강요는 하지 않도록 하지." 카셀은 웃으며 말했다. 제이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이는 내밀었던 손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그냥 주먹을 쥐며 되돌렸다. 카셀은 얌전히 뒷말을 기다렸다. "괜찮다면 재미있는 얘기라도 들려주겠나? 뭐, 옛날 얘기라던가....... 아니면, 음...... 아무튼, 아무거나." 제이는 그런 부탁을 한 게 무척 어색해서 괜히 물 주머니를 들어 입술을 축였다. 대체 왜 자기가 긴장하고 있는 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그냥 무시하면 알아서 물러날 녀석일 텐데........ 제이는 분명 카셀의 눈에 이상하게 비쳤을 거라 생각하고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카셀은 제이의 얼굴을 보더니 모닥불에 타고 있는 긴 나뭇가지를 하나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건 아버지께서 젊었을 때 겪은 일이야. 20년쯤 전이었지. 내가 사는 마을 뒷산에는 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무덤에는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무덤을 판다는 소문이 있었대. 그 여자는 나이가 오백 살은 되었다고 소문이 난 마녀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와 동네 친구들은 그 마녀의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담력시험을 하기로 한거야. 그 날은 올때미도, 풀벌레도 울지 않았지.......“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밤 늦도록 이어졌다. 말도 꾸벅거리고 잠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얘기가 끝났고, 카셀은 또 한 번 하품을 했다. 그는 나무 토막을 베게 삼아 누웠다. "이제 좀 잘 수 있을 것 같군." "아, 그래. 얘기 재미있었다." 전혀 재미가 없었지만 예의상 하는 말로 들릴 어투였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오해가 있을까 미안했는데, 카셀은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네 차례야." 그 말을 듣고 제이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린이 검의 간격 한 걸음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도 이 정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제이는 잠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조심스레 말했다. "무, 무슨 얘기를?" 카셀은 어느 새 잠들어 있었다. 제이는 나직이 신음했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내일 밤을 걱정했다. 사위가 밝자마자 제이는 카셀을 깨웠다. 해는 뜨지 않았으나, 말이 충분히 달려줄 만 했다. "지금부터 서두르면 그들보다 먼저 골드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카셀은 반만 뜬 눈으로 적당히 세수하고 말에 올랐다. 해가 뜰 때까지 달런 거리도 상당했으나, 그 시간 동안 카셀은 반쯤은 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제이는 그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산도 벗어나고 험한 길도 벗어나 그들은 평야를 마음껏 달렸다. 말도 그 동안 힘을 비축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둘의 요구를 제대로 따라주었다. 중간에 커다란 강이 하나 흘러 길을 막을 때까지는 정말 당일 중으로 골드 게이트에 토착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유속이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넓이가 꽤 됐다. 못할 건 없지만, 말을 타고 헤엄쳐 건너는 진 위험했다. 들은 우선 강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아마, 이 강이 서족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는 그 몰비 강인 모양이다. 지도가 없어서 곤란하군. 건너야 하나? 아니면 그냥 따라가도 길이 나오나?" 제이는 아이린이 말했던 아란티아의 지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골드 게이트 바로 앞 부근까지 흐를 거야. 그리고 그 강은 레드에서 이어온 큰 길을 가로지르지 나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그 강을 건너는 하말 다리가 있다고 했어, 우선 강을 따라 가보는 게 좋겠어." 카셀이 제안했다. 한참 가다 보니 강 한 가운데서 배를 타고 그물을 던지는 어부가 있었다. 카셀이 그를 불렀다. “뭣 좀 여쭙겠습니다. 이 강을 따라가면 어디로 갑니까?" "골드 게이트로 갑니다." 어부도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 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까?" “가다 보면 나루터가 하나 나오는데, 거길 건너서 큰 길로 가는 게 좋을 게요. 강을 따라가면 중간에 큰 산이 하나 막고 있어서 돌아가는 데 하루는 걸릴 거요." "고맙습니다. " 카셀은 손을 크게 흔들었고, "그렇다는군. 가지." 과연 어부의 말대로 밀지 않은 곳에 나루터가 하나 있었다. 마침 쉬고 있는 사공이 둘을 보고,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하얀 수염을 기른 사공은 이 강에서 몇 십년은 일한 베테랑 같아 보였다. “지금 강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카셀이 물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말을 두 마리씩이나 옮기려면 큰 배가 있어야 하는데, 큰 배를 타려면 저기 동쪽 나루터로 가야 합니다." “한 마래씩이라면 그 배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사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가격을 두 배나 지불해아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돈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말 한 마리에 한 사람이면 은화 셋인데 두 번 왕복이니 은화 여섯을 내셔야 합니다." 금화 여섯이라도 상관 없었다. 카셀은 즉시 값을 치렀다. "내가 먼저 타고 가서 안전하면 신호하겠다." 제이가 말과 함께 배에 올랐다. 무거운 말이 나룻배에 오르자, 배가 크게 흔들렸다. 사공은 조심스레 노를 잡고 경고했다. "말이 날뛰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이거 생각보다 무겁군요. 말을 태워본 건 오랜만인지라." 제이는 말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얌전한 놈이니 괜잖소." 사공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물은 밝았으나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깊은 것인지 물이 생각보다 깨끗한 것인지는 구분되지 않았다. 강 건너편에 제이를 내려주고 사공은 안도했다. 말을 안전하게 이동시킬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제이는 주위를 잠시 살폈다. 눈에 보이는 위험 요소도 없었고, 검의 간격도 보이지 않았다. 제이는 강 건너의 카셀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공은 다시 되돌아가 카셀과 그의 말을 태웠다. 제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그가 안전하게 타고 오길 기다렸다. 배가 조금 크게 흔들거려 말이 당황한 듯 했지만 카셀이 바로 진정시켰다. 그리고 괜찮다는 뜻으로 다시 제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친구라.......“ 제이는 피식 웃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골드 게이트를 통과해 또 노숙을 하게 된다면, 어떤 얘기를 해야 할까?처음에는 괴로웠지만, 미숙하게나마 어떤 얘기든 한다면 카셀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얘기를 들어줄 것 같았다. 제이는 어느 새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검의 간격이 느껴진 건 카셀이 강을 반쯤 건너왔을 무렵이었다. 다섯 걸음! 제이는 즉시 주위를 살폈다. 검의 간격은 두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느 쪽 방향인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카셀, 배를 멈춰라!" 제이는 크게 소리 질렸다. 그 순간 괘 먼 거리에 있는 갈대 밭에서 한 명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른 족 갈대 밭에서도 한 명이 뛰쳐나왔다. ‘방심했다.' 너무 먼 거리라 검의 간격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 했다. 또 그들이 기척을 잘 숨기고 참을성 있게 기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 정도의 검술을 가지고 있으면 그 정도도 가능할 거라고 미리 알았어야 했다. 제이는 자신을 질책했다. "제이메르!" 카셀이 놀라 소리쳤다. 제이는 손을 들었다. “나는 괜찮다. 우선 거기에 있어." 둘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제이를 중심으로 좌우로 다섯 걸음 정도 되는 거리에서 멈춰 싫다. 우연인지 아닌지, 점의 간격 역시 다섯 걸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산쪽에서 여길 왔다면 분명 이 강을 건너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 반 시간만 늦었더라도 너희들이 지나간 다음에 기다리고 있을 뻔 했다." 슈벨이 검을 꺼내며 웃어 보였다. 빌리도 검을 꺼내며 말했다. “검을 버려라, 사냥꾼. 무의미한 싸움은 하고 싶지 않다." "무의미한 지 아닌지는 너희들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제이는 천천히 칼을 뽑으며 말했다. 제이메르의 선택 싸우기 전에 늘 그랬던 대로, 제이는 주위의 환경을 살폈다. 강가의 흙은 물에 젖어 질척거렸고, 사방에 솟은 갈대가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없는 장소였으나 제이는 이런 곳에서의 싸움에 익숙했다. 불리한 조건이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면 오히려 유리한 위치였다. 해서 슈벨과 빌 리가 좌우에서 조여 들어오는 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둘 모두의 검술을 어느 정도 분석하고 있었다. 빌리는 한 방 한 방이 강하지만 항상 정직한 대결만 해서인지 패턴이 단순했다. 그러나 그는 아마 자신의 단순한 패턴을 활용해서 머리 싸움을 즐기는 타입일 것이다. 그런 검사들에게는 정상에서 벗어난 공격이 필요했다. 슈벨은 아주 빠른 검술을 구사하지만, 이런 진흙 바닥에서는 위험하다고 할 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이 모든 분석은 고작해야 자갈밭에서 이루어진 짧은 싸움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 때의 싸움에서 보여준 그들의 실력이, 그게 다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점은 조금 걱정이었다. "칼을 버려라. 마지막 경고다." 빌리가 말했다. 제이는 그런 말싸움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일단 검을 들면 제이는 상대가 하는 말을 모두 흘려버렸다. 죽여야 할 상대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빌리도 마지막이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지켰다. 그는 눈짓으로 슈벨에게 신호하고 자세를 낮추었다. 제이는 둘의 위치는 보지도 않고 계속 검의 간격만 살졌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네 절음, 세 걸음, 두 걸음 반, 두 걸음....... 한 걸음 반! 그 순간 슈벨의 검이 날아왔다. 제이는 그 칼을 막아내고 동시에 빌리의 칼을 막아냈다. 순식간에 좌우로 날아오는 여섯 번의 공격을 막아낸 제이는 즉시 빌리 쪽으로 몸을 날려 검을 크게 휘둘렀다. 놀랍게도 빌리는 제이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막아냈다. 검의 간격을 볼 줄 아는 제이에게는 특별히 숨겨줬다가 최후의 순간에 써먹는 기술 같은 건 없었다. 언제나 그 때 그 때 보이는 그대로 검을 막고 간격을 살피다가, 틈이 생기면 거기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래서 제이의 검술에는 버릇이라는 게 없고, 상대가 분석할 만한 일정한 패턴이라는 것도 없었다. 상대가 느리게 움직이면 제이도 느리게 움직였고, 상대가 빠르게 움직이면 제이도 그 속도를 따라갔다. 그래서 그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란 건 완전히 틈을 봤다고 생각하는 순간 힘을 다해 내지르는 찌르기가 다였다. 그게 방금 막혔다. 걱정했던 대로 아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쉽게 두 걸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이는 뒤로 점프하여 둘의 공격 거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도 검의 간격은 여전히 한 걸음 반이었다. 제이는 물가에 한 쪽 발을 담근 채 둘의 위치를 눈으로 새겨두었다. 둘은 성급하지 않았다. 그도 칼을 고쳐 잡고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바닥에 발이 푹푹 빠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물론 상대도 바닥 같은 건 상관하지 않았다. 슈벨이 물을 걷어차며 달려왔다. 마치 물 위를 달려오는 것 같았다. 제이는 얼굴로 뛰기는 물방울을 팔꿈치로 막고 이어 슈벨의 검을 막았다. 둘의 몸이 물 위에서 춤을 추듯 한 바퀴 돌아 위치를 바꾸었다. 바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휘두르는 칼날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빌리는 둘의 움직임을 보다가 제이의 뒤쪽으로 검을 뻗었다. 제이는 고개를 숙여 피하고 빌리의 발을 걷어찼다. 그다지 세게 맞은 건 아니었으나, 의외의 공격에 놀란 빌리가 휘청하고 물러섰다. 그래도 칼을 찔러 넣을 결정적인 빈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또 슈벨이 금방 칼을 휘두르니, 빌리에게 결정타를 날릴 틈도 없었다. 둘의 지치지 않는 공격에 제이는 점점 숨이 가빠왔다. 한 명이라도 상대하기 힘든 적을 둘이나 마주 하고 있으니, 점점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사실 제이는 이 정도 수준의 검사를 단 한 명이라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자가 들이나 나타났으니, 익숙하지 않은 둘 대 하나의 싸움이 더욱 힘들었다. 제이는 강둑 위로 달려 올라갔다. 슈벨과 빌리도 곧장 따라왔다. 둘 모두 꽤 지쳤으나, 제이만큼은 아니었다. 빌리는 믿을 수 없다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군. 함부로 잡다가는 큰 일 나겠어." 말이야 저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 제이는 빌리 하나만 상대했더라도 이긴다고 장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비슷한 수준의 슈벨이 붙어 있으니 , 제이는 어떻게 싸워야 할 지 막막했다. "카셀!" 제이는 크게 소리쳐 불렀다. "괜찮나, 제이메르?" 카셀도 소리쳐 대꾸했다. "나는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군. 먼저 가라." 카셀은 잠시 제이메르 족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냥 포기하시지. 죽이지는 않을 데니까 어차피 못 도망간다." 슈벨이 카셀 쪽을 보며 말했다. 제이는 그가 잠깐 틈을 보인 사이 검의 간격을 갑자기 좁혀 들어갔다. 그러자 슈벨은 즉시 자세를 낮췄다. 빌리도 동시에 반응했다. 검의 간격을 볼 줄 아는 자들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함부로 감격을 좁혀 들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그 때 강에서 물소리가 크게 들렀다. 돌아보니 나룻배 위에 카셀과 말이 없었다. 카셀이 말에 탄 채로 배 위에서 뛰어내린 소리였다. 물 밖으로 목만 나온 말이 열심히 강 하류쪽으로 헤엄쳤고, 카셀도 목만 내밀고 말을 계속 독려했다. "저 자식, 또 도망가네!" 슈벨이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제이가 버티고 있어 쫓아가지 못했다. 셋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겁 먹은 사공이 얼른 배를 돌리기 위해 노를 젓는 소리, 말이 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 헤엄치는 소리, 물 밖으로 나가 다시 말을 달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검의 간격은 한 걸음 반과 한 걸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누가 그 간격에서 벗어나면 다른 한 명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사냥꾼 생활을 시작한 이후, 아이린을 제외하고 이렇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저 두 사람 중 한 명과 전력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싸움에 임하면 뒤를 걱정해 본 적이 없는 제이는 슬슬 뒤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싸우다 죽는 건 상관 없다는 게 그의 철학이었으나, 지금은 죽으면 카셀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 녀석이 말을 타 달리 면 이제 이 두 녀석은 쫓아갈 수 없다.' 머리는 그런 생각을 했으나, 마음은 그리 되지 못 했다. 그 때 그의 냉정한 마음을 흐트리기라도 하듯 카셀이 타고 있는 말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빌리나 슈벨도 이미 카셀을 포기한 얼굴이었는데, 도로 되돌아와 버리니 오히려 의아해했다. 제이가 뒤로 물러나며 검의 간격이 무너졌다. 그러나 빌리는 제이를 쫓지 않았다. 어차피 카셀과 제이는 빌리과 슈벨을 중심으로 갈라져 있어 같이 도망갈 수 없었다. "왜 돌아왔나?" 제이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가자." 카셀의 말에 그는 어이가 없었다. "뭔 소리야?" "네가 지면 나는 널 혼자 두고 가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먼저 가라고 했지, 언제 내가 진다고 했냐?" "그래, 이겨라....... 그리고 같이 가자." 제이는 그에게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다. "네가 있으면 마음 놓고 싸울 수가 없지 않나?" "그래도 친구를 뒤에 두고 갈 수는 없어." 그 말에 제이는 할 말이 없어졌다. 둘의 말을 듣던 빌리가 끼어들었다. "감성적인 판단을 자주 내러는 캡틴이군. 머리는 아니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마음이 그걸 따르지 못 하는 거다." 어딘지 자기에게 하는 말 같아 제이는 조금 뜨끔했다. 카셀은 멀찌감치 멈춰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타고 있으니 설사자신이 지더라도 혼자 도망칠 수 있는 충분한 거리였다. "감성적인 판단.......“ 제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짧은 순간 관찰한 카셀은 지나칠 정도로 상반된 두 가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빌리에게 잡혀 있을 때는 모든 것을 법정하게 바라보았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러다가 제이와 함께 밤을 보낼 때는 동생처럼 편하게 행동했다. 핏줄이라고는 없었고, 형제로 지낼 만한 인간 관계는 맺어본 적도 없었으나 아마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카셀은 지금 캡틴 울프로서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다. 친구로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이를 부하로 생각했다면, 레드 게이트에서 그랬듯 제이의 희생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이를 부하가 아닌 친구로 생각했다. 그게 빌리가 말하는 감성적인 판단이었다. "뭐, 마음은 편해졌군." 제이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칼을 들었다. 빌리도 그 사이 호흡을 조절하더니 말했다. "이제 도망치는 녀석 붙잡고 말고 할 핑계가 사라졌으니, 급히 싸울 필요도 없군. 슈벨, 이번에는 내게 맡겨주지 않겠나?" 슈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사냥감이긴 하지만....... 할 수 없지." 둘 대 하나라는 유리한 조건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을 보고 제이는 이게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슈벨에게서 진짜로 검의 간격이 사라졌다. 빌러에게만 세 걸음의 간격이 남아있었다. "둘이서 이기지 못한 나를 혼자서 해보겠다고?" 제이가 말했다. 빌리는 가지고 있던 찰을 집어넣고 다른 칼을 꺼냈다. 화려한 모양을 보니, 보검 같았다 "이제 이 칼도 실전에 제대로 써먹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빌리의 말에 그는 오히려 비웃었다. "보석이 박혀 있는 칼로?" 제이는 일부러 슈벨을 등 뒤에 두고 자세를 잡아 보았다. 슈벨은 몇 걸음 더 물러나더니 팔짱을 꼈다. 뒤를 노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싸움에는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를 쓰라는 말이 있지. 그런 뜻에서 말하자면, 이 칼이 내게는 더 익숙하다." 빌리는 칼을 몇 바퀴 부드럽게 손 위에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언제고 울프의 기사와 싸우게 될 것을 대비해서 항상 이 칼로 연습해 왔다. 지나치게 좋은 칼이라 내 실력을 오히려 떨어뜨릴 게 걱정될 정도더군. 그래서 아껴왔다. 익숙하면 어쩌고 해서 하는 말인데, 너는 그 칼을 얼마나 오래 썼지?" 제이는 날이 빠진 자신의 칼을 슬쩍 들어 보였다. "5개월." “그것 봐라. 너는 반년 밖에 안 쓴 무기가 너에게 맞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나는 적어도 이 칼을 2년은 사용했다." 빌리는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다. 검의 간격이 순식간에 한 걸음 반으로 줄었다. 제이는 순간 자신의 패배를 떠올렸다. 실력에서 밀린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 둘은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이 있었다. 8년 동안이나 강하다고 할만한 녀석들을 모조리 만나 모조리 쓰러뜨려왔다. 자고 일어나 한 명씩 죽이며 사냥을 한 적도 많았고, 피바람을 일으키며 무더기로 학살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이는 이 둘을 상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것은 목숨을 걸어본 실전 경험의 횟수였다. 제이는 지금까지 죽을 뻔한 일이 없었다. 어쩌면 이게 처음으로 목숨을 건 정식 대결이 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경지의 싸움은 해 본 적이 없던 제이는 순간 몸이 경직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변명할 거리를 만들 생각은 버려라, 사냥꾼. 이게 내 최선이다." 다음 순간, 검의 간격이 한 걸음으로 좁혀 들어왔다 제이는 지체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둘의 칼이 부딪쳤고, 둘 다 뒤로 물러났다. 간격의 변화도 없었고, 빌리의 처음 잡은 자세도 변화가 없었다. 제이는 견제하는 의미에서 슬쩍 칼을 찔렀으나, 빌리는 여전히 손목만 살짝 비틀어 막았다. 다음에는 칼을 좌우로 휘둘렀다. 빌리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다시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마지막 갈을 부딪힐 때의 소리가 좋지 않았다. 제이는 눈동자만 움직여 칼날을 살폈다. 중간쯤에 실금이 가 있었다. 낡은 칼이긴 해도 비싸게 주 산 칼이라 강도는 꽤 쓸 만했다. 그러나 빌리의 칼에 비할 바는 못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지금까지 둘의 강한 공격을 몇 번이나 받아내느라 이미 내구력의 한계에 도달했는지도 몰랐다. '짧게 끝내지 않으면 지겠군.' 제이는 순간적으로 이후의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 넣었다. 저 자세에서 나을 만한 모든 공격과 방어, 반격과 후퇴....... 검의 간격에서 보이는 여우 한 마리가 또 다른 여우를 사냥하기 위해 주위를 맴돌았다. 목을 공격한다. 막는다. 반격한다. 피한다. 그걸 예측하고 칼날을 돌린다. 그 순간 허리 쪽이 빌 것이다. 제이는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해 본 동작 그대로 달려들었다. 빌리는 제이가 예상했던 방향으로 칼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즉시 목으로 칼을 휘둘러 반격했다. 제이는 고개를 뒤로 젖혀 피했고, 그걸 예측한 빌리는 방향을 돌려 제이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계산대로였다. 제이는 그대로 가슴을 뒤틀어 빌리의 칼날을 피하고 허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빌리는 제이의 계산보다 더 빠르게 다른 쪽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제이는 순간적으로 다른 손으로 빌리의 손목을 잡았다. 둘은 서로를 붙잡은 채로 한 바퀴 돌았다. 고정된 자세로 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칼이 제압된 상황에서 빌리가 갑자기 칼을 놓더니 제이의 멱살을 잡은 채로 집어던져 버렸다. 느닷없이 몸이 들리니 제이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빌리는 바로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쓰러진 제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이는 앉은 자세로 칼을 내밀었다. 빌리는 칼을 두 손에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좌로 그었다. 요란한 금속성이 울리며 제이의 칼이 부러졌다.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휘두른 공격이었다. 부러진 칼날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빌리는 들어올린 칼을 그대로 내리 찔렀다. 그의 칼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이의 눈에서 검의 간격이 마침내 한 걸음 안으로 좁혀 드는 순간이었다. 칼끝은 정확히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 제이가 거의 무의식 중에 부러진 칼로 막았고, 칼날의 방향이 미묘하게 어긋났다. 칼은 제이의 심장이 아닌 어깨를 찌르고 들어갔다. 빌리는 순간적으로 놀라 칼을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제이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빌리의 칼날을 잡았다. 빌리가 칼에 힘을 주어 빼려는 순간 제이는 부러진 칼을 상대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터무니 없이 가까운 곳에서 던진 칼을 피하려고 빌리는 뒤로 약간 몸을 젖혔다. 제이는 어깨에 칼날을 박은 채로 몸을 밀어 올렸다. 칼끝이 뼈에 닿으며 기절할 것 같은 고통이 온 몸에 전해졌다. 그러나 제이는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 빌리의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잡았다. 둘의 몸이 거의 밀착한 상태에서 벌어진 짧은 상황이었다. 빌리는 제이의 어깨에 박힌 칼을 뽑았다. 잡고 있던 제이의 가죽 장갑이 매끈하게 잘려나갔다. 자유로워진 빌리의 칼은 제이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동시에 제이는 빌리가 차고 있는 칼을 뽑아 그대로 찔러 넣었다. 누구의 공격이 먼저 닿았는지는 그 둘도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나 빌리가 휘두른 공격은 제이의 뺨만 그었고, 제이가 찌른 칼은 빌리의 배를 뚫고 있었다. 빌리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제이는 칼을 뽑아 뒤로 물러섰다. "빌리!" 슈벨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빌리는 배를 움켜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고통을 표현하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제이는 취청거리며 일어나 피 묻은 칼을 들었다. 슈벨은 빌리의 상처에 손을 대고 제이를 노려보았다. “다음....... 덤빌 테냐?" 제이가 말했다. "아니. 가라" 슈벨이 보여주는 검의 간격은 두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제이는 그가 말하는 '가라'는 의미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휘적휘적 카셀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사냥꾼." 빌리가 말했다. 제이가 돌아보니 그는 고개만 조금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정식으로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나는 빌리 매트니다." 그의 얼굴은 벌써 핏기가 없어 하얗게 보였다. "제이메르다." 제이도 고통을 참고 짧게 말했다. “훌륭한 시합이었다, 제이메르. 그러나 우릴 벗어날 수는 없다. 포기해라." “나는 검을 들고 시합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리고 포기할 이유도 없어." 제이는 뒤로 물러났다. 슈벨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기억해라, 제이메르. 너는 나중에 내가 꺾어주겠다." "지금도 상관없어." 슈벨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빌리를 천천히 눕히고 출혈을 막는 데 최선을 다했다. 카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다." 제이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를 자신의 말을 찾다가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지금은 말을 몰 자신도 없었다. "뒤에 타야겠다. " "그래." 카셀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이는 별 생각 없이 다친 어깨를 들어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뜨겁게 달군 쇠를 갖다 댄 것처럼 아찔한 고통이 어깨를 찔렀다. 제이는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카셀의 뒤에 올라탔다. “조금만 참아. 골드 게이트는 얼마 남지 않았어." 카셀은 그를 격려하며 말을 몰았다. 그러나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말이 흔들릴 때마다 어깨의 고통이 그를 쿡쿡 찔렀다. 최근 몇 딘 사이 싸움을 끝낸 후 이렇게 피곤한 건 처음이었다. "잠깐 말을 세워야겠어." 카셀이 말했다. "계속 달려. 녀석들이 쫓아올 거다." 제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넓은 길의 지평선 끝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슈벨은 델리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을 거라던 빌리의 말이 신경 쓰였다. "그렇게까지 안전한 건 아니다." “그래도 네 상처를 봐줄 시간은 있을 거다." 카셀은 말을 세우고 내했다. 제이도 마지못해 따라 내렸다. 흐르는 피가 그의 어깨와 한쪽 가슴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맙소사" 카셀은 손수건을 꺼내 칼에 찔린 곳을 막았다. 제이는 그 손수건을 빼앗듯 들에 직접 지혈했다. “호들갑 떨지 마. 이런 걸로는 안 죽어."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뼈를 다치면 평생 고생해야 할 자리야. 마을 어른 중에 칼로 무릎을 베인 사람이 있는데, 환갑 넘기고도 절룩거리며 걷더라." "그걸 위로라고 하나?" 카셀은 웃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군. 네 칼이 부러지는 순간 난 네가 지는 줄 알았어," "사실 나도 죽었다고 생각했지." 카셀은 길 옆으로 흐르는 강으로 내려가더니 손수건을 적셔왔다. 제이는 그것을 받아 얼굴을 닦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는지, 손수건이 얼음처럼 차게 느껴졌다. 현실적인 감각은 고통을 더욱 몸 밖으로 이끌어냈다. 지금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 거울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이는 카셀이 내주는 물 주머니를 받아마시며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움이 끝난 후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건 줄은 미처 몰랐었다. "왜?" 카셀은 얼굴에 뭐가 묻었다고 생각했는지 뺨에 손을 대며 물었다. "혹시.......“ 제이는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닫았다. "아무 것도 아니다." "일부러 나 괴롭히려고 말하다가 마냐?" 카셀은 투덜대며 제이가 어깨에 대고 있는 손수건을 도로 빼앗았다. 지혈이 되도록 어깨를 손수건으로 묶으며 카셀은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절실하게 느껴지는군." "뭐가?" "내가 캡틴 감이 아니라는 거. 너처럼 대단한 검술을 가진 것도 아니고, 블랙처럼 많은 사람들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없고, 빌리처럼 과감하고 냉철한 판단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피 흘리는 친구를 위해 이렇게 피를 닦아주는 것밖에 못 하는 게 어떻게 캡틴이냐?" 제이는 괜히 카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졌다.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격려가 될만한 말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차갑게 카셀을 밀어내고 말했다. "가자." 제이가 먼저 말에 올라탔다. 카셀도 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앞에 타 말고삐를 잡았다. 카셀은 제이를 고려하여 그리 세게 말을 몰지 않았다. 그런데도 말이 흔들릴 때마다 제이는 머리가 어지럽고 상처가 아팠다. 그저 낙마하지 않을 정도로만 카셀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강 건너에 거대한 건축물이 하나 보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윤곽만 보더라도 그것은 성벽임에 틀림없었다. 말로 달리면 많이 걸려도 10분 정도면 족히 도착할 위치였다. 길의 왼쪽에 흐르는 거대한 몰비 강은 큰 길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마 다시 서쪽으로 꺾어 바다로 향할 것이다. 큰 길을 끊는 몰비 강에는 하얗게 빛을 내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나룻배를 타고 건너야 할 이 넓은 강에 놓인 다리는 다른 나라에서는 본 적 없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다리를 통과하면서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하늘로 높이 별은 무지개 같은 아치가 햇빛에 하얗게 반사되어 둘을 비추었다. ‘마스터가 보여주고 싶었던 아란티아의 멋진 풍경이란 건 자연 경관 만은 아닌가 보구나.' 마스터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제이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곧 카셀의 말이 멈췄다. 제이는 잠깐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왜 멈췄지?" 카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제이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때 앞을 보았다. 다리 건너편에 검은 기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그는 카셀과 제이를 발견하고, 조금 앞으로 나왔다. "후, 후퇴하자." 카셀이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동시에 블랙도 할버드를 들어올렸다. 제이는 즉시 카셀의 어깨를 잡았다 "안돼. 움직이지 마라." "왜?" "이 정도 거리라면 저 녀석, 할버드를 던져서라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거 막을 자신 없어." 제이는 전에 풀밭에서 빌리의 부하들을 사냥할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때 할버드를 막는 순간 전신의 뼈가 흐트러지는 것 같은 충격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물론 지금도 블랙은 그런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던졌다 튕겨내면 무기가 물에 빠질까 봐? 아니면 뭔가 기다리는 건가? 제이는 카셀의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내가 막고 있을 테니 넌 물러나라." "그럴 수는 없.......“ "이번에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제이는 카셀을 돌아보며 웃어보였다. 카셀은 제이가 뭇고 있다는 것에 잠깐 당황했다. "이건 친구로서의 부탁이다. 그리고 마스터 아이린에게 내 얘기 전해주고." 그런 말은 하친 싶지 않았다. 빌리와 싸울 때도 그 말은 참았는데, 결국 하고야 말았다. 어깨가 아팠다. 아마도 이 쪽 팔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발가락 하나만 다쳐도 컨디션이 무너지고 균형이 흐트러지는 게 검의 세계였다. 그런 상태로, 제 실력의 전부를 발휘해도 이길지 말지 모르는 적을 상대로 무사하길 바라는 건 사치였다. 카셀이 대 준 손수건에 피가 잔뜩 머금어 있었다. 친구의 배려.......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기로 참았다. ‘마스터도 생기고, 친구도 생겼는데 죽게 생겼구나.' 8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이 극적인 즉음을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느닷없이 사고로 죽거나, 원한을 품은 녀석이 독을 반 음식을 먹고 죽거나, 하여간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죽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라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뭔가를 이룬 채 죽는 건 나쁘지 않았다. "카셀." 아직도 돌아가길 머뭇거리는 카셀을 돌아보며 제이가 말했다. “만약 내가 울프의 기사였더라도, 나는 너를 캡틴으로 모셨을 거다." 카셀은 눈을 동그랗게 했다. 제이는 다친 어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마 하얀 늑대라는 친구들도 마찬가지 이유였을지 모르겠군. 기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나에게는 피를 흘리라고 명령하는 캡틴보다, 피를 닦아주는 캡틴이 더 좋을 거 같다." "제이, 지금 너 죽음을 각오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카셀은 버럭 소리쳤다. 이럴 때 나오는 그의 박력이 캡틴이 될만한 자질 중에 하나일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널 위해 죽냐? 그리 약해 보여, 내가?" 제이는 칼을 들어 카셀을 향해 뻗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은 자가 없다고 했나? 내가 그리 되어 주지. 그러니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접어라." 그 말 잘 하는 녀석도 이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제이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블랙이 갑옷을 철컹거리며 다가왔다. 뒤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음껏 움직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넓이의 다리였으나, 상대의 할버드 간격을 고려하면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제이는 싸우기 전의 버릇대로 주변 상황을 살피다가 관뒀다. 어차피 이 공간을 활용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죽음을 각오했는데도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승부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린이 두려운 나머지 승부를 피해버린 상대. 그토록 강한 빌리나 슈벨이 캡틴처럼 따르고 있는 자. 카셀이 말한 대로라면 죽음에서 일어난 악마와도 같은 기사....... 지금의 몸 상태가 어찌 되었건, 목숨을 내걸만한 존재가 아닌가? “빌리가 위급하군." 블랙이 말했다. 어떻게 그걸 아는지 모르지만, 단순한 짐작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는 진짜로 빌리를 걱정하는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 너머의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에게는 내게 익숙한 느낌이 묻어있다. 처음에 나와 접했던 달 밤 아래에서도 그랬고,풀밭에서 너를 봤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알겠군." 블랙의 목소리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제대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즉시 고개를 숙일 정도로,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너와 함께 있던 자가 누군가?“ 제이는 즉시 아이린을 떠올렸으나, 딴 말을 했다. "카셀 울프." 블랙은 반대편 다리 끝에서 여전히 가지 않고 기다리는 카셀을 바라보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가만히 있었다. "그 전에는?" "혼자." "거짓말이다. 사실을 말하라." "그래야 하냐?" 블랙은 할버드를 내밀었다. 그 끝이 제이의 코 앞에 다다랐다. 제이는 꿈적도 하지 않고 밸랙의 투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빌리에게서 빼앗은 검을 들어 보였다. "내게 적의를 보인자는 살려두지 않는다." "그럼 내 시체에 대고 물어라." 제이는 뱀이 나무를 타는 것처럼, 내밀고 있는 할버드의 옆을 파고들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칼날은 갑옷을 채 들지도 못 하고 빗겨나갔다. 아무리 힘이 모자랐다고 하나 이 정도로 허무하게 칼이 빗겨나갈 줄은 몰랐다, "아!" 막지 못한 게 아니라 막지 않은 것 같았다. 블랙은 할버드의 손잡이 부분을 휘둘러 제이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힘을 잃은 제이는 순간 무릎을 꿇었다. 죽을 힘을 다해 옆으로 구르지 않았다면 할버드의 칼날이 머래 위에 박혔을 것이다. 대신 그 묵직한 검은 쇳덩어리는 대리석처럼 하얀 바닥을 부쉈다. “함께 있었던 게 누구냐?" 블랙이 다시 물었다. 제이는 대답하지 않고 한 손으고만 들었던 칼을 두 손으로 잡았다.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한 번 이상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한 번으로 대체 어딜 치면 이길 수 있을까? 제이는 블랙의 목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죽지 않는 자라도 저길 쳐서 살아남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제이는 즉시 몸을 옆으로 했다. 블랙은 조금도 서두르지 많고 제이의 움직임을 쫓아갔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절대 흉내낼 수 없을 만한 속도와 타이밍으로 할버드를 휘둘렀다. 제이는 바닥에 거의 얼굴이 닿을 정도로 자세를 낮추었다. 머리 위로 섬뜩한 소리를 내는 바람이 스쳤다. 제이는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 블랙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목으로 칼을 절러 넣었다. 한순간 목표했던 자리에 있어야 할 블랙의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제이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시야가 흐려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블랙이 몸을 젖혀 공격을 피한 것임을 알고 즉시 칼날을 옆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그 칼날은 블랙의 손바닥에 잡혔다. 제대로 휘두른 게 아니라 전혀 힘을 싣지 못한 검은 블랙의 목 옆에서 멈췄다. 블랙은 할버드를 놔 버리고 그 손으로 제이의 멱살을 잡았다. 제이는 있는 험을 다해 저항하고 칼을 든 손을 흔들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구냐? 누가 너와 함께 있었는가?" 제이는 칼을 놓고 손바닥으로 그의 투구를 쳤다. 좌우로 칠 때마다 투구가 옆으로 삐걱거리며 흔들렸으나,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이는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그의 팔목을 움켜잡고 비틀었으나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쇳덩어리를 후려친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블랙은 잠시 제이의 모든 공격을 갑옷으로 받아내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답하라." "못한다." "대답하라." "네가 알 이름도 아니다." 블랙은 주먹으로 제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이 있었다. 제이는 그 한 방으로 늘어졌다. 블랙은 제이를 들어올렸다. "말하라! 누군가?" 코피가 주루룩 흘러 뚝뚝 떨어했다. 제이는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느낌으로만 손목이 있을 만한 부분을 잡고 있는 힘껏 비틀었다. 그러나 관절도 없는 블랙의 팔은 꺽이지도 않았다. 마치 거대한 쇳덩어리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곧 제이는 저항을 멈추었다.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사실 그가 놓아준다 해도 서 있을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때 블랙은 제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가 대답하지도 않은 이름을 말했다. "아이린.......“ 제이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아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힘없는 시선으로 다리 끝에 있는 카셀을 바라보기만 했다. 흐려진 시야 너머로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뭔가 소리 치고 있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블랙의 목소리만 꿈결처럼 들려왔다. 그렇게 큰 소리했지만, 역시 이런 몸으로는 무리였나 보다. '도망가라. 왜 거기에 있는 거냐?' 제이는 속으로 외쳤으나, 카셀은 여전히 그 곳에 못 박혀 있었다. "그녀인가? 넌 그녀와 함께 있었는가?" 제이는 겨우 입을 했다. "대체 넌 누구냐?" “모른다. 말하라. 그녀와 함께 있었는가? 그녀는 누구인가?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가?" 블랙의 목소리가 커졌다. "말하라, 제이메르!" 제이는 피식 웃었다. "내 이름도...... 아는가?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 이름은 모르는 놈이군 " 블랙은 제이를 집어 던졌다. 난간에 허리를 부딪쳐 제이는 비명을 질렀다. 분명 기절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얼굴을 바닥에 들이박고도 정신은 멀쩡했다. 끔찍한 고통은 맨 정신으로 감당해야 했다. 코에서 흐르는 검붉은 피가 하얀 돌 위에 떨어져 스며들었다. 블랙은 내려놓은 할버드를 들었다. 제이는 힘겹게 고개만 들고 블랙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사형 선고를 내린 후 길로틴을 들어올리는 것처럼 커다란 할버드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쩌면 제이에게만 그게 천천히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이 죽음...... 내가 너에게 내리는 게 아니라, 네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블랙이 말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으나, 제이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잘난 척 하지 마라, 블랙. 제대로 된 몸이었으면 지지 않았어." "그게 억울하다면 너도 죽음에서 되살아나거라." 제이는 마지막으로 카셀을 돌아보았다. 억울한 건 아니었다. 그에게 조금 미안할 뿐이었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두 사람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시야가 흐릿해서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리는 하나로 보였다. 그리고 카셀의 옆에 말을 타고 있는 이는 카셀보다 월등히 덩치가 큰 남자였다. 빌리가 쫓아온 건가? 슈벨이? 아니면 다른 누가?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바람이 새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할버드가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버드는 공중에 고정되어 있었다. 곧 소리만 있고 모습은 없는 뭔가에 밀려 블랙의 몸이 옆으로 꺾였다. 그리고 할버드를 쥐고 있는 록 어깨가 하얀 얼음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얼음은 점점 부풀어 올라 블랙의 상반신 오른쪽을 뒤덮었다. 골드 게이트 쪽이었다. 하얀 빛을 내는 물체가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로 다리 쪽으로 달려왔다. 은빛 털을 태양에 반사하는 그 동물은 늑대였다. 기절하기 직전인 제이의 머리로는 동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의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제대로 구별이 가지 않았다. 블랙은 얼어붙은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깨진 얼음이 제이의 머리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달려오는 늑대는 크게 울부짖었다. 이마 쪽에서 강한 빛이 쏟아졌다. 그러자 블랙의 무거운 몸이 뒤로 한 번 둥실 떠서 다리 난간에 부딪혔다. 돌더미가 떨어져도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난간이 부서했다. 그러나 블랙은 즉시 몸을 일으켜 달려오는 늑대를 향해 할버드를 휘둘렀다. 할버드가 휘두르는 간격 안에 있던 다리 난간과 기둥이 박살났다. 늑대는 블랙에게 뛰어드는 것처럼 높이 날았으나 목표는 제이였다. 그 거대한 늑대는 제이의 팔을 물고 뒤로 잡아 끌었다. 제이는 그 와중에 속으로 아프다고 욕을 내뱉고 있었다. "그 자를 내 말에 태우시오." 못 들어본 목소리였다. 늑대는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세게 제이의 팔을 물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 획 끌어올렸다. 그리고 거칠게 말 위에 올려놓더니 말했다. "카셀, 아까 말했던 대로 간다!" "알았어." 카셀은 충실히 대꾸했다. 제이를 태운 남자는 힘차게 소리를 지르더니 말을 달렸다. 그야말로 짐짝처럼 말에 실린 채 제이는 가늘게 눈을 대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를 데운 남자가 당연히 블랙을 피해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랙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이는 피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거리는 가까워졌고, 블랙은 할버드를 두 손에 쥐고 어깨 뒤로 끌어당겼다. 바위를 부수고 사람을 두 동강 내는 그 엄청난 힘을 실은 거대한 쇳덩어리가 제이를 데운 남자의 머리 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동시에 제이를 태운 남자도 똑 같이 크게 팔을 휘둘러 창을 뻗었다.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소리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이도 눈을 감아야 할 눈부신 푸른 빛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제이를 태운 남자는 할버드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뒤로 밀려나갔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만으로 제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그 남자가 뻗은 창과 부딪힌 블랙 역시도 뒤로 밀려났다는 것이었다. '누구지, 이 자는?' 고개를 돌려 보니 카셀과 은빛 털의 늑대가 그의 바로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골드 게이트가 있는 곳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갔다. 제이는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계속 고통을 인내하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게이트를 열어라!" 아까는 분명 하얀 벽돌로 보였던 성벽이 지금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이는 순간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녁 태양은 성벽의 반대편에 있으니 황혼을 반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성벽은 마치 금으로 만든 것처럼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루터아의 마스터 타냐의 요청에 의하여 게이트가 닫혔습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게이트의 성루에 있는 병사가 소리쳤다. "제가 마스터 타냐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가래가 낀 듯 거칠었으나, 그것은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제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 순간 늑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하얀 로브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가슴에 달고 있는 푸른 구슬의 목걸이를 보니 마법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계신 분들은?" “나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쉐이든이다. 환자가 있으니, 서둘러 문을 열어라." 제이를 말에 태운 남자가 말했다. 곧 그 병사는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안에서 갖겠다며 게이트를 열었다. 웅장하게 황금빛을 내는 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이의 머리 속에는 온갖 의문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물어보지 못 하고 제이는 정신을 잃었다. 6.쉐이든 비가 오는 날 "비가 많이 오네." 아즈윈이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카셀이 걱정되는군." 헛간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얻어 맞아 눅눅해진 옷을 벗어 던지며 게랄드가 말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블루 게이트를 떠나온 지 이틀 째 되는 저녁이었다. 비가 올지 모르니, 방을 먼저 구하러 가겠다고 카셀이 나간 직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기 시작한 비라 소나기인 줄 알았지만, 비는 멈추지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카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즈윈은 걱정이 되는지 계속 헛간 안을 서성대며 걸어 다녔다. 말도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나무로 덧댄 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구의 문도 바람이 불 때마다 경첩이 부서지지는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좀 앉아라." 쉐이든은 건초에 누워 말했다. 아즈윈은 툴툴대며 나무 상자를 끌어다 앉았다. "애가 나간 것도 아니고 알아서 처신하고 있겠지. 뭘 그리 걱정이냐?" 쉐이든이 탓하는 말을 했다. "걱정 되지 안 되냐? 아아, 이래서 내가 가려고 한 거였는데." 아즈윈은 아직도 불안한 듯 손바닥을 탁탁 부딪히며 말했다. 던멜은 말 없이 우유를 그릇에 데우고 있었고, 로일은 아즈윈처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우리가 더 걱정이다. 이 헛간, 떠내려 갈 것 같아." 게랄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누가 양동이로 물을 쏟아 붓는듯 잘 보이지 않았다. 용케 이 밝은 유리창이 버터고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진짜네." 게랄드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많이 와?" 쉐이든도 물었다. "신들께서 심심한 나머지 땅과 바다를 바꿀 생각이신가 보다." 게랄드는 창문을 톡 톡 두들기며 대꾸했다. "카셀은 뭐하고 있을 것 같아?" 앞날을 걱정하는 일 없는 로일도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아마 우리 재우려고 구한 방에서 혼자자고 있겠지. 카모르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원군을 데리고 급히 오던 상황도 아닌데, 굳이 이런 비 맞고 무리할 리 없지. 따지고 보면 캡틴은 우리보다 자기를 걱정해야 해. 내가 항상 주장하는 바지만! 그러니 다들 카셀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 걱정이나 하자. 하얀 늑대들, 빗물에 휩쓸려 전원 사망이라는 뉴스를 나디움에 알려주고 싶진 않거든." 게랄드가 역설했다. “그치만 우리 중에 수영 못 하는 건 게랄드 너 하나뿐이잖아. 전원 사망은 아닐걸?" 아즈원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네 녀석을 붙잡고 함께 가라앉아 주지!" 게랄드가 아즈윈의 옆에 밝아 목을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아즈윈은 끌려가는 데로 시큰둥하니 가만히 있었다. 던멜이 모두에게 데운 우유를 내주며 수화로 말했다. ‘한없이 올 비는 아니다. 밤중에는 그친다.' 아즈윈은 이왕 끌려간 김에 그대로 게랄드의 가슴에 기댄 채 우유를 받았다. 게랄드도 장난치는 게 재미 없었는지 아즈윈의 목을 놔주었다. 미끄러진 그녀의 머리는 그대로 그의 허벅지에 안착했다. 게랄드는 던멜의 우유를 받으며 말했다. “그치면 데리러 갈까?" "어디로 간 줄 알아서?" 로일이 우유를 후루룩 마시며 따지듯 말했다. "근처 마을에 있겠지." "날 밝은 다음에 가도 안 늦을 거야." "그런가?" 잠시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곤두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슬슬 졸음이 왔다. 아즈윈은 이미 게랄드의 다리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켜놓은 등불도 기름이 떨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잠이나 잘까?" 쉐이든이 아까 누웠던 건초에 도로 등을 기했다. 로일도 그 옆에 누웠고, 던멜은 상자에 않아 헛간 기둥에 등을 기했다. 다들 잠을 청할 편한 자세를 찾아갔지만, 게랄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난 언제나 이 녀석의 베게 대용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그는 아즈윈의 머리에 손을 대고 말했다. “그런 말 마라. 그 녀석이 그렇게 편하게 기대고 잠잘 만한 넓은 다리를 가진 게 너 밖에 더 있냐?" 쉐이든이 농담을 했고, 모두 웃었다. 게랄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쉐이든은 흐뭇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다가 곧 잠들었다. 느닷없이 모두의 잠을 깨운 건 게랄드였다. 가끔 이런 짓을 잘하는 게랄드라 누구도 경계하며 일어나지는 않았다. 울프 기사단 숙소에서 잠들어 있을 때도 칼을 옆에 두는 던멜만 게랄드의 목소리에 단검을 들었다. 등불이 꺼져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인지 비는 쳤으나, 아직 빗물이 천장에서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건 헛간의 정문 쪽이었다. 구름 낀 희미한 달빛에 비친 사람의 윤곽이 문 쪽에 서 있었다. 게랄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하얀 늑대들인가?"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인의 정체부터 밝히지 않는 걸 보니 정당한 사유로 우릴 만나려 하는 건 아닌 모양이군?" 게랄드가 비꼬는 소리를 했다. "듣던 대로군."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말하며 헛간 안으로 들어왔다. 적의를 가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쉐이든은 만일을 대비하여 옆에 세워놓은 창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헛간 기둥 마다 걸려 있는 등불에 불이 확 켜졌다. 단순히 심지에 불만 올라간 게 아니었다. 적어도 굵은 나무에 불을 붙여놓은 것처럼 불길이 커졌다. 헛간 안이 환해졌다. 처음에는 아니었겠지만, 이미 모두의 손에 무기가 들려 있었다. 헛간의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그 모습을 보더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무리 적의 위협이 없다고는 하나 너무 안일한 대처가 아닌가?" 그는 횃불 아래에서 가끔 푸른 빛깔을 보이기도 하는 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로브 자락 끝은 진흙으로 더러웠으나, 저녁에 내린 비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깔끔한 차림이었다. 들고 있는 지장이 끝은 기묘하게 구부러져 있었으며, 가슴에는 주먹만한 붉은 보석이 매달려 있었는데, 속에 뭐가 들었는지 각도에 따라 다른 빛으로 반짝였다. “마법사요?" 쉐이든이 물었다 "그렇다. 그 말을 하는 자네는 쉐이든 울프겠군." "나는 당신을 모르겠소만?" "루티아에서 온 마스터 데다인이다." "루티아?" 모두 그 말에 놀랐다. 하지만 게랄드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눈이었다. 쉐이든은 그가 사고 치기 전에 선수를 처서 예를 갖춰 말했다. “루티아의 마스터께서 한밤중에 이 곳에는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그레이 게이트로 갔더니 자네들이 금방 거치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근처를 찾아 다녔다. 내 마법을 총동원했음에도 자네들의 위치를 알기가 힘들더군."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소식을 아직 전하지 못 하긴 했지만, 나디움에서도 우리들이 곧 도착할 거라고 알고 있을 텐데요?" “그 정도로 시한이 급하다. 사실 이미 이틀이나 늦었다.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루티아로 가 주어야겠다. " "지금?" 쉐이든이 그 말을 하자마자, 게랄드가 내뱉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하얀 늑대들을 가라 마라 하는 거야? 마치 정해진 것처럼." "정해졌다. 마스터 퀘이언이 허락을 내렸으며, 아란티아의 왕실도 루티아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 게랄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눈가의 주름이 깊게 새겨지며 데다인은 잠시 게랄드와 쉐이든을 번갈아 보았다. 게랄드 옆에 아직 잠이 델 깬 아즈윈이 졸린 눈으로 똑 같은 포즈를 하고서 팔짱을 꼈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 줄 알면서도 쉐이든은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울프 기사단에 처음 들어봤을 당시부터 둘은 무척이나 독특한 성격이었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 독특한 성격은 자주 부딪쳤고, 재미있게도 둘은 서로를 닮아갔다. “마스터 데다인, 루티아에서는 울프 기사단의 계급 체계를 잘못 이해한 것 같군요. 울프 기사단은 분명 마스터 퀘이언과 왕실의 소속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 모든 권력은 여왕님 한 분께 집중되어 있지요. 즉, 하얀 늑대는 마스터 퀘이언과 새나디엘 여왕님 단 두 사람의 명령만 듣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 하얀 늑대는 단독행동을 할 수 있으며 그 때 그 단독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새나디엘 여왕 한 분만 가지고 계십니다." 쉐이든은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다 데다인은 여전히 그 체계를 이해하지 못 했다. “그러나 왕실과 마스터 퀘이언은 인정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권유지요. 마스터는 아마 '내 제자들을 데리고 가도 좋다.' 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건 같은 뜻이 아닌가?" 데다인도 화가 난 듯 인상을 구겼다. 착각인지 모르나 주위의 등불이 더욱 밝아진 것 같았고, 그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더욱 확대되어 보였다. "다릅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 여왕님께서 하얀 늑대들에게 루티아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왕실이 허락했다. " "아니, 왕실이 아니라, 여왕님 말입니다." 쉐이든은 차분하게, 그러나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섰다. 데다인은 지팡이를 고쳐 쥐고 고개를 저었다. "이전 하얀 늑대들에 비하면 정말 루티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젊은이들이군." "나이 좀 잡수신 분들은 항상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곤 하지만, 내 생각에 예전 하얀 늑대들이 우리보다 더 예의 바르고 착하고 그런 건 같지는 않더구만요." 아즈윈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고 노려보는 데다인 앞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하품을 길게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힘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데다인이 갑자기 굵은 어조로 말했다. 모두의 귀에 그 목소리는 두 갈래 세 갈래로 중첩되어 들렸다. 결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쉐이든은 분위기가 더 험악하게 변하기 전에 말을 빨리 했다.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할 건 없습니다, 마스터 데다인. 우리에게 정확한 상황 설명을 해준다면 아란티아와 루터아가 서로 가지고 있는 동맹을 존중하여 그 뜻을 따르도록 하지요. 단지 당신이 명령하듯 끌고 가려 했기에 모두들 반발하는 것입니다." 사실 게랄드나 아즈윈만 악의를 보인 건 아니었다. 로일이나 던멜도 여차하면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항상 감정을 확실하계 드러내는 아즈윈과 게랄드에 비하면, 차라리 무서운 건 그 두 사람 쪽이었다. 던멜은 어떻게 말릴 틀도 없이 눈 앞에 서 있는 자의 목을 딸 수 있었고, 로일은 한 번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마스터도 말리지 못할 녀석이었으니까. 이럴 때 쉐이든은 카셀이 있어줬으면 했다. 이 망나니들을 단번에 진정시킬 건 역시 캡틴뿐이었다. "상황 설명은 가면서 하겠다. 그러니 모두 나를 따라와라. 시간이 없다. 너희들을 찾은 이상 단 일 분도 소비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데다인도 그리 참을성이 많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성격이 괴팍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아니, 이런 상황에 처하면 다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이려나? “단 한 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까요?" 아즈윈이 또 끼어들어 말했다. 쉐이든은 눈이라도 가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루티아에 위험이 닥쳤다!" 데다인은 버럭 소리쳤고, 또 한 번 그의 목소리는 중첩되어 들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고개를 숙피고 경청하게 만들 힘이었으나, 하얀 늑대들에게는 화를 자극하는 소리로 밖에 안 들렸다. 데다인은 다시 보통의 언어로 말을 이었다. "이 정도로도 설명이 안되나? 우리 마법사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물러적인 힘, 그것도 아주 막강한 힘을 쓸 수 있는 기사가 몇 필요하다.“ 쉐이든은 서로 마찰을 일으켜 더 큰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마스터가 허락을 했다면 우리도 크게 반대랄 건 없을 거요. 당신이 말했던 대로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듣도록 합시다.“ 아즈윈이 팔을 활짝 펼쳤다. "잠깐! 그럼 나디움은 들리지도 못한다는 거야? 나, 여왕님 보고 싶은데?" 데다인은 고개를 저었다. "즉시 가야 한다." 아즈윈이 뭐라 더 한 마디 하려 했으나, 쉐이든이 손을 저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그만하자' 라고 말했다. 게랄드 역시 불만이 가득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을 생각하고 도끼를 내려놓았다. "좋아, 좋아 카셀만 돌아오면 바로 출발하자.“ 데다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카셀? 누구 다른 사람이 있나?“ "아, 아직 나디움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겠군. 울프 기사단에는 캡틴이 한 명 있다. 그가 아마 여섯 번째 하얀 늑대가 될지도 모르고, 까짓 안 되더라도 어쨌든 캡틴이다." 게랄드의 말에 데다인은 혼란을 일으켰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다 누군가, 그는?" "카모르트에서 데려온 녀석이지." “하얀 늑대들에 필적할 만큼 강한 자라서 캡틴 울프로 칭했나?" 게랄드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건 아니야. 딱히 내세울 건 없지만, 그렇다고 보통 녀석은 아니지. 어쨌든 그 녀석이 우리를 이끄는 리더다. 그 녀석만 오면 같이 가자고.” 데다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언제 오는가?” “글세, 내일 아침 정도?” “그럼 안 된다. 지금 가야 한다. 계속 말했지만, 이미 너무 지체되었다.” 게랄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 돼. 캡틴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가. 그것까지 양보할 수는 없다.” “육체적 강함이 없는 자는 루티아에 필요 없다. 그는 혼자 나디움으로 가라고 해라. 나머지는 나를 따라 이동한다. 어서!” “어이, 어이. 네가 캡틴을 버리라고 명령하는 거냐? 못 하겠다면 어쩔 거냐?” 게랄드가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쉐이든이 엄하게 꾸짖었다. “게랄드, 그만해 둬라.” 그러나 이미 데다인과 게랄드 사이에는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아즈윈도 얼결에 물러나 버렸다. "너는 지금 루티아의 마법사를 화나게 하고 있다." 데다인이 말했고, 게랄드가 즉시 받아 쳤다. “당신이 먼저 우릴 자극하고 있는 거잖아." "힘으로 데려가길 원하는가?“ "해보시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데다인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누가 미처 끼어들 들도 없이 게랄드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바닥의 건초가 헛간의 벽으로 날아갔고, 바닥의 고인 물웅덩이가 좌우로 튀어 올랐다. 게랄드는 벽에 부딪했고, 밝은 헛간 벽은 바깥으로 부서졌다. 게랄드는 그 부서진 돌 벽에 깔린 채 쓰러졌다. 데다인은 천천히 지팡이를 내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이미 아즈윈은 악 다문 이를 드러내며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던멜과 로일도 칼에 손을 얼었다. 로일이 끊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한 번 해보시오, 마스터 데다인, 그 지팡이를 휘두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갈 데니." 데다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조금은 흥분했군. 그러나 그만큼 우리 쪽도 절박하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러니 내......“ 그 순간 부서진 돌더미 속에서 뛰어오른 게랄드가 단 두 걸음으로 그 먼 거리를 뛰어와, 도끼를 데다인의 머리로 내리켰다. 데다인은 급히 지팡이를 들어 도끼를 막았다. 하얀 빛이 물 위에 일으킨 파문처럼 헛간을 가득 메우며 흩어졌다. 도끼는 지팡이 바로 앞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걸려 막혀 있었다. 그러나 사색이 된 데다인은 그 도끼를 아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는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게랄드는 그 물러난 거리만큼 다가가고 있었다. 결국 힘이 부족한 데다인의 팔이 조금씩 물러나면서 도끼 날도 점점 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그, 그만두라, 게랄드. 내가 마법을 쓰면 이 헛간 안에 있는 모두가 휘말리게 될 것이다." 데다인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티아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지, 마스터 데다인? 거기서는 마법사 한 명이 하얀 늑대 다섯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나? 그럼 대체 우리 도움을 뭐 하러 받으러 오셨나?“ 씨익 웃는 게랄드의 미소를 보고 데다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을 꾸욱 다물었다. 목걸이로 매달고 있는 붉은 보석이 급격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때 쉐이든의 창이 게랄드의 얼굴을 향했다. “그만하면 됐다, 게랄드. 내려놔라.” 게랄드는 잠시 데다인의 얼굴을 노려본 후 천천히 도끼를 뒤로 했다. 데다인도 물러나 지팡이를 거두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그의 얼굴은 아직 냉정을 회복하지 못 했다. 붉은 보석의 빛이 점점 옅어졌다. 나이로 미루어 아마 전투 경험도 많을 것이고, 분명 10 년 전의 전투에도 참가했을 테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공격을 당한 건 처음이었을 것이다. 쉐이든도 창을 내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과하겠소, 마스터 데다인. 그러나 당신의 방법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소.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가 절대 복종을 하는 사람은 새나디엘 여왕한분 뿐이오. 우리에게 루터아의 권위를 내세우려 하지 마시오." 데다인은 로브의 깃을 여미며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좋다. 나도 사과하지 하얀 늑대라는 배경을 10년 전의 것 그대로 라고 생각했군." 쉐이든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우선 이 친구들 네 명을 데리고 가시오. 루티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나, 당장 급한 일은 네 명으로도 충분히 어찌할 수 있을 것이오. 군대가 아니라 다섯 명을 원했다면 넷이나 다섯이나 비슷하지 않소? 그리고 난 남아 우리들의 캡틴을 기다렸다 함께 나디움으로 돌아가겠소. 그리고 만약 사람이 더 필요하다면 다시 나디움으로 와주시오. 당신들의 마법을 이용한다면 나디움과 루티아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닌 걸로 알고 있소. 어떻소? 이것보다 더 좋은 의견이 있다면 모르되, 절대 우리는 캡틴을 버릴 생각은 없소." 데다인은 하얀 늑대들 얼굴 하나하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쉐이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것 보시오. 천천히 얘기했으면 될 일 아니었소?" 입을 뻐끔거리는 아즈윈이 손을 들었다. 마치 선생님에게 간절히 질문을 요청하는 학생 같아 보였다. "왜?" "왜 내가 아니라 네가 기다리는 건데?" "누구든 상관없긴 하지만, 난 아직 카셀에게 해줄 얘기가 많아서. 나디움으로 가게 된다면 여러 가지 가르칠 것도 있고.......“ 쉐이든은 아직 카셀에게 천천히 해주려고 아껴둔 얘기들이 많았다. 그런 얘기를 하지 않고 나디움으로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캡틴을 기다린다면 자기가 되어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는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남겠어." 아즈윈이 고집을 피우자 게랄드가 저녁에 장난쳤던 것처럼 그녀 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야, 쉐이든, 신경 쓰지 마라. 내 눈에는 순진한 캡틴 꼬드겨서 단둘이 여행하다가 잡아먹을 속셈을 하고 있는 이 녀석의 머리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엄청 문란한 채 하지만 결국 욕구 불만에 차 있는......." 아즈윈이 복부를 팔꿈치로 후려치는 바람에 게랄드는 그대로 푹 고꾸라졌다. 데다인은 그런 모습을 보고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화가 풀렸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두 사람의 농담이니까 그보다 급하다면서 서두르십시오." 쉐이든이 말했다. "그러지." "어떻게 가실 겁니까? 큰 길을 따라 나디움을 통해서?" "하늘 산맥을 통과하면 루티아로 가는 길은 아주 쉽지. 그리고 내 마법이라면 너희들이 타고 있는 말도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아, 그게 바로 길을 통하지 않고 더 빨리 목적지까지 향하는 루티아의 마법이군요." 데다인은 피식 웃었다 "조금은 루티아에 대해서 알고 있군. 서두르도록 하지." 그리 내켜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네 사람은 쉐이든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말에 올랐다. 아즈윈은 끝까지 역할을 바꾸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이 무시무시한 마법사를 따라가기 보다 카셀과의 여행을 원하고 있었다. 로일 조차도 어제 가르치다 만 기술 하나를 마무리 지어 가르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다들 말을 타고 헛간을 나갔다. 어제는 마른 바닥이었던 곳이 이제는 늪지대처럼 물과 진흙이 질척했다. 말발굽 소리가 어둠 속에서 철벅거렸다. 던멜이 마지막으로 헛간을 나서기 직전 수화로 말했다. '우리가 돌아오기 전에 카셀을 정식 캡틴으로 만들어 놔라. 쉐이든도 수화로 대꾸했다 '내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리 될 것 같다.' 모두가 떠나고 쉐이든은 헛간에 홀로 남았다. 이제 등불은 보통의 밝기로 돌아가 있어 조금 어두웠다.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나도 카셀과의 즐거운 여행을 양보하고 싶지 않거든." 쉐이든은 혼자 중얼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곧 새벽이 가까워왔다. 날씨가 조금 추워져 쉐이든은 낮에 사둔 술을 데워 먹으며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루티아의 마법사는 벌써 왔다 갔나?" 특별히 위협을 가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도 아니었고, 달리 위험 신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쉐이든은 옆에 내려놓은 창을 치켜들었다. 비가 온 후의 싸늘한 공기가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추워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모닥불이 몇 번 흔들리다가 꺼져버렸다. 게랄드와 마스터 데다인의 싸움 통에 부서진 헛간의 벽을 통해 또 다른 마법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회색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 검은 장갑 주위로 연기처럼 검은 것이 흩날렸다. 지팡이나 목걸이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쉐이든은 그가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누구냐?" 쉐이든이 물었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로브 안에는 시커먼 어둠만이 있었다. 쉐이든은 즉시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를 떠올렸다. 그것과 너무도 유사한 모습이었다. 데다인이 친구들을 데리고 간 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나타난 마법사이기에 동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데다인은 비록 성질이 게랄드처럼 직설적이며 설득하는 방법이 과격하긴 했어도 나쁜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쉐이든도 최대한 그에게 예의를 갖춰주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자는 달랐다. 죽음의 냄새가 났다. "내가 좀 늦었군. 넌 하얀 늑대냐?" 마법사가 물었다 "그렇다." "그러냐?" 그 마법사는 느긋하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세워 좌에서 우로 스윽 그었다. 쉐이든은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마법사의 손짓이란,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이 가장 위험한 동작이라고 퀘이언이 가르쳐왔다. 쉐이든은 처음 잡은 창으로 이로피스 왕실의 기사를 꺾을 정도로, 상대방의 공격 범위와 강도를 보는 통찰력이 뛰어났다. 던멜이 온갖 해괴한 무기와 다양한 기술로 공격해 들어와도 처음 본 순간 모조리 막아친 사람은 쉐이든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법은 달랐다. 그것은 이미 일반 상식을 벗어난 개념이었기에 쉐이든은 그 공격 거리와 위력 같은 걸 계산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거의 운에 가깝다고 할 만 했다. 쉐이든은 창을 수직으로 세워 앞으로 내밀었고, 무언가 창을 강하게 후려쳤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그의 양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뭔지 모르지만, 아마도 창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의 몸을 두 동강 낼 공격이었던 것 같았다. 철창이 우우웅 하고 진동했다. 마법사는 오른쪽으로 그었던 손가락을 다시 좌로 되돌렸다. 쉐이든은 그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향만 보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머리 위로 칼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고 말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쉐이든은 앞으로 달려들어 창을 힘 있게 필러 넣었다. 그러자 한 순간 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냥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는 쉐이든의 눈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엄청난 속도로 이동한 것이었다. 그게 마법이었건 실제 이동 속도였건 쉐이든으로서는 상대하기 난감한 적수임에는 분명했다. 머리 속에서 그를 잡아낼 방법을 찾기 시작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만으로는 무리였다. 마법사는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떠서 미끄러지듯 헛간 안을 들어와 멈추었다. 그의 주위에 있던 건초와 나무 조각들이, 그가 일으킨 바람 탓에 한 쪽으로 휩쓸렸다. 그는 양손을 펼쳤다. 검은 장갑을 타고 흐르는 검은 연기가 형체를 만들기 시작하더니 양손에서 각각 한 마리의 박쥐가 날아올랐다.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매우 불규적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그 박쥐는 쉐이든의 얼굴로 날아왔다. 쉐이든은 어금니를 악 물고 창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창 날에 걸려 두 마리 박쥐가 공중에서 부서졌다. 돌에 부딪힌 것처럼 철창이 진동했다. 손바닥이 아파 쉐이든은 짧게 신음을 냈다. 마법사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하게 제작된 창인가 보군 부서지지 않다니.......“ 뒤쪽 헌간 구석에 묶여있는 쉐이든의 말은 겁에 질려 앞발을 세우고 몸부림 쳤다. 묶여 있어 달아나지도 못 하고 애처롭게 우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무엇보다 밤새 쭈그리고 않아 있었더니 무릎 관절이 아팠다. 마법사는 다시 팔을 좌우로 펼쳤다. 그의 몸 주위로 희뿌연 연기가 뭉쳤고, 그 안개 같은 물질은 곧 초승달 같은 모양을 만들어냈다. 어찌 보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반짝이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낫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면. 초승달은 쉐이든을 노리고 날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목표도 잡지 않고 아무렇게나 날아가 버렸다. 때를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때론 건초를 부수고 때론 헛간 기둥을 베어버리기도 하면서 날아다녔다. 정작 쉐이든은 교묘하다 싶을 정도로 피해가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죽을 지도.......‘ 쉐이든은 창을 쥐고 몸을 약간 뒤로 젖혔다. 이렇게 된 이상 피해 없이 이기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마법사도 쉐이든의 생각을 읽었는지 양손을 다시 모았다. 검은 박쥐가 한 마리, 그러고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일어났다. 마치 동네 주민들을 모아놓고 쇼를 하는 마술사가 모자에서 비둘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계속해서 박쥐가 만들어졌다. 찢어지는 듯한 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헛간을 날아다니는 그 초승달이 말을 동강낸 소리이리라. 쉐이든은 지체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네 마리의 박쥐가 상하좌우로 쉐이든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쉐이든은 그 박쥐의 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마법사가 가하는 첫번째 공격은 지금까지 쉐이든을 피해 다니며 그의 혼을 쏙 빼놓았던 그 초승달이었다. 쉐이든은 달려가는 탄력을 늦추지 않고 점프해, 공중에서 뒤로 돌았다. 처음에는 작았으나, 이제 초승달 모양을 한 마법의 칼날은 인간의 몸 정도는 지나가는 것만으로 동강낼 만큼 거대하게 변해 있었다. 소리 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으니, 초승달이 아니라 보름달로 보였다. 그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창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다. 마법의 칼날은 유리처럼 부서지며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쉐이든은 눈을 찔끔 감았다. 밤새 폭우로부터 모두를 지켜주었던 헛간의 창문이 모조리 바깥으로 터져나갔다. 부서진 마법의 칼날은 실제 금속이 부서진 것처럼 그 파편을 사방으로 날렸다. 그의 얼굴과 어깨에도 파편이 박혔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는 초승달의 칼날을 파괴한 즉시 몸을 돌려 약간 허공에 떠 있는 상태의 창을 되돌려 좌우로 휘둘렀다. 날아오는 검은 박쥐가 그의 바로 앞에서 부서했다. 그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두 걸음 전진했고, 다시 두 마리의 박쥐를 내리쳤다. 그 자리는 이미 쉐이든의 창이 상대에게 닿는 거리였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마법을 모조리 창으로 쳐낸 그의 접근에,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옆으로 움직였다. 마법사는 또 한 번 쉐이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쉐이든은 그 속도로 날아가면 어느 지점으로 갈 것인지 예측하고, 그 자리로 창을 힘껏 찔렀다 마지막 공격은 마법사가 피하는 것을 보고 나서 계산한 게 아니었다. 즉, 마법사가 피하려고 마음 먹은 순간 쉐이든은 이미 그가 피할 방향으로 창을 찔러 넣은 것이었다. 잠깐 사라진 마법사의 몸은 그리 벌지 않은 곳에서 쉐이든의 창에 꽂혀 있었다. 처음 마법사가 초승달 모양의 칼날을 만들면서 바닥에서 날아오른 건초 조각들이 이제야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쉐이든의 창은 마법사를 들고 헛간의 벽에 박혀 있었고, 마법사는 그 창에 뚫려 추욱 늘어져 있었다. 쉐이든의 입에서 붉은 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얼굴에 박힌 마법 칼날의 파편은 사라줬으나, 그 상처 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서 흐를 피가 그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루티아의 마스터라 해도 당해내지 못할 마법을 이런 식으로 제압할 줄은 몰랐군, 명성은 헛것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이 헛간을 날려버릴 걸 그랬지?" 늘어져 있던 마법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배를 뚫었다고는 하나 상대의 숨통까지 끊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멀쩡하게 목소리를 낸 것에 쉐이든은 깜짝 놀라 창을 뽑으려 했다. 벽에 박힌 곳에서는 빠졌다. 하지만 마법사의 몸에서는 빠져 나오지 않았다. "놀랐나? 안타깝게도 내 몸은 인간이 만든 무기로는 즉일 수 없다." 마법사는 쉐이든의 창을 움겨쥐었다. 쉐이든은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뽑으려 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마법의 효과 때문이 아니었다. 쉐이든은 이 한 번의 공격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부운 상태였다. 또 이 마법사는 육체적인 힘도 쉐이든 못지 않았다. 마법사는 한 손으로는 창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을 세워 쉐이든의 얼굴 왼쪽에 댔다. 그리고 처음 그랬듯,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었다. 쉐이든은 창을 놓아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을 베고 보이지 않는 칼날이 스쳐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얀 늑대란 녀석들은 하나 같이 건드리기 귀찮은 녀석들이야."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로브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가, 두 뼘 정도 길이의 지팡이를 들고 다시 나왔다. 매끈하고 무괴 없는 나무 막대 같았다. 하지만 쉐이든은 그가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었다 해도 그보다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맨손으로 하는 마법이 그 정도라면 도구를 사용한 그의 마법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쉐이든은 뒤로 물러났다. 마법사는 막대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저 몸이라도 푸는 듯한 포즈였다. 그러나 그 한 번에 뜨거운 바람이 헛간 전체를 뒤로 밀었고, 쉐이든의 몸도 뒤로 날아갔다. 그는 헛간의 뚫린 구멍으로 나가떨어졌다. 차가운 빗물 웅덩이에 떨어진 후 그는 옆으로 몇 바퀴 굴렀다. 온 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일어났으나, 손에 무기도 없이 절망적으로 헛간 안을 바라보아야 했다. 마법사는 공중에 떠서 천천히 헛간 밖으로 나왔다. 배에는 아직도 쉐이든의 창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창은 손에 닿지도 않고 도로 뽑혀 나왔다. 철창은 물웅덩이에 떨어져 가라앉았다. "루티아의 마법사는 어디로 갔나?" 마법사는 막대를 쉐이든에게 겨냥했다. 쉐이든은 창이 떨어진 곳과 막대의 끝을 번갈아 보고 어느 쪽이 더 빠를 지 계산하고 말했다.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겠지?" 지팡이 끝이 빛을 됐다. 쉐이든은 옆으로 피하려 했으나, 진흙에 빠진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그는 또 한 번 떠밀려 바닥에 등부터 떨어졌다. 뱃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밀고 올라왔다. 쉐이든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밑으로 떨구었다. 굵고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건드리고 입천장에서 미끄러지더니 밖으로 왈칵 쏟아졌다. 검붉은 피를 한 번 토하고 나니 더욱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코에서도 귀에서도 피가 나왔다. 눈도 잘 뜰 수 없었고, 시야가 흐려졌다. 손등으로 문지르니 눈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공중에 떠 있는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나 역시 네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지더라도......, 내 친구들이 대신 나의 분노를 씻어줄 것이다." "멍청한 녀석, 이것은 너보다 먼저 하얀 늑대의 이름을 가졌던 자들이 내게 저지른 죄에 대한 복수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늑대의 이름을 가진 기사들은 모두 너를 따라 같은 곳으로 갈 지어다." 쉐이든의 사지가 고정되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저항 없이 딸려 올라가 허공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으윽." 잡아당기는 힘은 무서울 정도로 강해졌고, 그는 이를 악 물었다. 입가에서는 피가 흐르고,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의 죽음은 안식으로 인도되지 못할 것이다, 하얀 늑대의 기사." 곧 어깨를 잡아당기는 고통이 목에도 전해졌다. 쉐이든은 컥 컥 소리만 낼 뿐, 이제 신음도 비명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의 의식이 점점 멀어져 갔다. 그 때 현악기의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리며 쉐이든의 몸이 진흙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허공에 떠 있는 마법사의 몸이 줄을 잡아당기다 놓친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죽지 않는 자들을 지배하는 군주여, 그대의 사악한 의지가 있는 곳에 루티아가 있을 것이다." 사방을 쩌렁찌렁 울리는 목소리에 바닥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가 거꾸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터져 올라갔다. 하얀 빛이 회색 로브의 마법사에게 쏟아졌고, 그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왔느냐? 그러나 루티아의 모든 마법사가 와도 나를 당하지는 못한다." 마법사는 막대를 휘둘렀고, 허공으로 솟은 빗물은 도로 흩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 빗물 속으로 쓰러져 있는 쉐이든을 향해 은빛 털의 늑대가 달려갔다. 늑대는 쉐이든의 목덜미를 물어 자신의 등 쪽으로 던져 올렸다. 쉐이든은 금은 물방울을 얻어맞으며 잠시 정신을 차렸다. “당신은.......” 쉐이든이 입을 열자, 늑대가 다급히 말했다. "꽉 잡으십시오." 쉐이든은 시키는 대로 했다. 늑대는 떨어지는 물 속을 뚫고, 달려나갔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늑대를 향해 막대를 겨냥했다. 그 순간 늑대가 달리는 바닥이 폭발해 올라왔다. 늑대는 옆으로 점프해서 그것을 피했다. 착지하는 자리가 또 한 번 터졌으나, 늑대는 즉시 그것을 예측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날려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던지는 마법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늑대는 그대로 한 시간은 달렸다. 몇 번 뒤를 돌아보며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쫓아오는 지 확인하기도 했다. 쫓아오는 기미가 없었는데도 늑대는 계속 달렸다. 반쯤은 정신을 잃은 채로 털을 움켜 쥐고 버티고 있던 쉐이든은 결국 심하게 흔들리는 늑대의 등에서 떨어졌다. 즉시 늑대는 몸을 세워 떨어진 쉐이든에게 다가왔다. 늑대는 입도 열지 않고 말했다. "하늘 산맥으로 피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쉐이든은 차가운 진흙 바닥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로 한 쪽 눈만 떠서 늑대를 올려다 보았다. "그, 그럴 수는....... 다, 당신은...... 누구요?" "저는 루티아의 마법사, 타냐입니다." 아침 햇살에 역광으로 비춰보이던 늑대의 실루엣이 점점 변하는 듯 하더니 곧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별을 구별하기 힘들던 굵은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하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안 좋은 징조가 보여 마스터 데다인을 따라 왔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어도 당신은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사과 드립니다." 쉐이든은 더 이상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 "캡틴을.......“ 그러나 그 말도 끝까지 하지도 못하고 그는 실신해 버렸다. 마스터 타냐 눈을 뜨니 모닥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쉐이든은 모포에 덮여 누워 있었다. 모닥불 위에 올라와 있는 냄비 안이 바글바글 끊으며 맛있는 냄새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안에 든 음식물이 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쉐이든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모포에서 약간 벗어나자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모포 안을 보니 발가벗겨져 있었다. 가슴과 옆구리, 어깨에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이마도 붕대가 감싸고 있었다. 이런 차림으로 음식 탈 것을 염려해서 일어나려 한 자신의 꼴이 우스워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가슴이 아팠다. “웃을 정도는 되는군요. 회복이 빠른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어둠 속에서 기절하기 직전에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닥불로 다가오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 빛의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데다인의 로브처럼 가끔 색갈이 바뀌어 보이는 것 같았다. 데다인의 것처럼 목걸이로 달기에는 부담스러운 크기의 푸른 구슬이 가슴 근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음에 안고 있는 장작을 옆에 쌓아두고 모닥불에 걸려 있는 냄비 안을 수저로 휘휘 저었다. "다 익은 것 같군요. 요리는 잘 못하지만 따뜻한 걸 드셔야 할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그녀는 모닥불 앞에 앉아 쉐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포를 몸에 두르고 힘겹게 앉았다. 머리가 띵하니 아프고 어지러웠다. "고맙습니다." 쉐이든은 그녀가 내 준 고깃국을 한 입 먹었다. 그러고는 무척 허기가 진 탓에 맛도 모르고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녀는 말없이 그릇을 받아 한 접시 더 내주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쉐이든은 다시 한 입 먹고 물었다. "기억하고 계신다면, 그 일은 오늘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자정이 조금 안 된 밤이고요." "오래 잠들어 있었군요." "당신은 지금 겉으로 보이는 부상보다 보이지 않는 부상이 더 심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일까지 잠들어 계실 줄 알았습니다." 쉐이든은 음식을 먹으며 새삼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거칠긴 했으나 목소리로 미루어 그리 나이가 많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얼굴은 그렇지 못 했다. 모닥불에 비쳐 잘 보이지 않는데도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미안할 정도로 추한 얼굴이었다. 한쪽 눈두덩이 밑으로 처져 있었고, 템에는 잔주름이 잔뜩 있었고, 입술에는 사마귀가 튀어나왔다. 긴 코는 한쪽으로 약간 비뚤어져 있고, 눈은 가늘었다. 그대로 늙으면 정말 애들 동화 속에 나오는 사악한 마녀처럼 될만한 외모였다. “타냐......, 라고 하설습니까?" "예. 당신은 쉐이든 울프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들 이름은 미리 외워두었지요. 그 중 창을 잘 쓰고 눈매가 매서운 곱슬머리의 남자 이름이 쉐이든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들은 것보다 머리카락이 짧군요." "카모르트에서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잘라버렸습니다." 그녀의 모든 외모 중 막 하나 다른 여자들보다 멋진 게 있다면 머리카락이었다. 독특하게도 검은 머리에 하얀 머리가 한 움큼씩 섞여 있었는데, 모닥불에 비쳐 찰랑거리는 그 머리카락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아까부터 왜 제 얼굴을 자세히 보시는 거죠?" 그녀는 악간 화가 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참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졌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제 추한 외모를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한 임시 방편이죠. 루티아 내에서는 큰 의미가 없지만, 가끔 아크랜드로 나오면 이 외모란 게 큰 걸림돌이 되니까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며 옆에 둔 철창을 들어 쉐이든에게 휙 던져주었다. 보통 남자도 힘 한 번 세게 주어야 들 수 있는 물건을 그녀는 젓가락 다루듯 했다. 아침에 자신을 업고 달린 건 늑대로 변한 힘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본래 힘인 모양이었다. "제가 다시 가서 주워왔습니다 무겁더군요." "고맙습니다." 쉐이든은 창끝을 바라보며, 아침에 있었던 싸움을 잠시 떠올렸다. 지금도 어둠 속에서 그 박쥐가 날아올 것 같은 생각에 몸이 떨렸다. “마스터 타냐." 쉐이든은 어둠 속을 주시하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그 자는 누구였습니까?" “그 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루티아의 마법사는 어쩌면......, 아니 오히려 아란티아의 여왕이나 당신의 마스터, 퀘이언이 더 잘 알 겁니다. 우리는 그 자를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또는 '죽지 않는 자들을 지배하는 군주'라고 부릅니다." 쉐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자라면 카모르트에서 죽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무척 놀랐다. "거기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쉐이든은 검은 사자 백작과 붉은 장미 백작의 내전이 있었던 지난 한 달 간의 이야기를 짧게 해주었다. 그리고 붉은 장미 백작을 검은 기사로 만들었던 그 기이한 마법의 근원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믿는 종교에 있었다는 부분을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역시 각 나라마다 퍼져 있는 그 종교의 실체가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군요. 최근 저도 그 정보를 조사하느라 1년 째 아크랜드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루터아의 그랜드 마스터조차 그 일을 조사하던 중 실종되셨습니다." 타냐는 그 생각에 우울해 하는 듯 했다. "어쨌든 당신을 공격했던 그 마법사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본인인지 아니면 그 자의 하수인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가 왜 아란티아에 나타났는지, 제 당신을 공격했는지도 모르겠군요." "저 이전의 하얀 늑대가 자기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복수라고 하더군요." “단순한 복수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자가 정말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면 몇 명 죽고 끝날 문제일 리가 없습니다." "확실히 엄청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저도 당신을 데리고 그 곳을 빠져나가는 것 이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루티아의 모든 마법사들 중에서도 그와 정면으로 마법을 겨를 수 있는 사람은 다섯 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 자의 본래 힘은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마법만이 아니라.......“ 타냐는 뒷말을 흐렸다. 쉐이든도 이런 깊은 밤에 들어둘 만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아, 그보다 이 창을 다시 가지러 가셨다면 혹시 거기에 다른 이가 없었습니까?" 쉐이든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타냐는 고개를 저었다. "오후에 도착했었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도 거기에 오래 머물만한 상황이 아니었지요. 그 자가 그 곳으로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르고, 또 당신을 여기에 눕혀두고 떠난 거라서.......“ 타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불빛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있는 마을이었다. 깊은 밤이라 불이 많이 켜 있지 않아 마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쉐이든은 왜 마을에서 묵지 않고 굳이 이런 벌판에 머물러 있는 건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기절하기 전에도 '캡틴'이라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오랫동안 캡틴의 자리가 정해지지 않는 바람에 루티아의 마법사도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는군요. 하긴 제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기절해버린 잘못도 있지요." 쉐이든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덮던 모포가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알몸을 보고 잠시 당황하던 타냐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옆에 개어놓은 그의 옷을 내밀었다. “당신이 입던 옷은 찢어지고 더러워져서 도저히 계속 입을 수 없어 하나 사 두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일어나 돌아다닐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왜 일어나시죠?" "캡틴을 혼자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캡틴은 아직 그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고, 우리가 왜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쉐이든은 옷을 입으며 설명했다. "아까 카모르트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언급한 그 사람을 말하는가 보군요. 카셀이라고 했던가요?" 그녀도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재를 끄덕였다. "그가 어디로 갔을 것 같습니까?" “아마 캡틴이라면 혼자서라도 나디움으로 갈 겁니다. 부서진 헛간을 계속 지키고 있는게 아니라면." 쉐이든은 옷을 모두 입고 창을 들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딥니까?" "하늘 산맥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저는 당신을 하늘 산맥으로 안내하여 나디움으로 직접 데려갈 생각이었습니다." 쉐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반 사람은 하늘 산맥으로 들어가지 못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신은 이미 일반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안내한다면 당신은 하늘 산맥의 힘에 지배당하지 않고 통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마스터 데다인이 친구들을 데려간 것도 그런 경로를 통해서겠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건 푸른 구슬도 흔들렸다. “어쨌든 저는 캡틴을 데리러 가야겠습니다. 제 임무는 캡틴을 지키는 것인데 이런 곳에서 머뭇거릴 수는 없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혼자 하겠습니다." 그녀는 검은 눈동자로 오랫동안 쉐이든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 나이가 차지 않아 10년 전 하얀 늑대들의 활약상을 얘기로만 들었습니다. 물혼 당신이 그 때 그 사람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 얘기에서 들었던 이미지와 대단히 유사하군요. 보통 사람들은 마법사를 보면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두려워 피하거나, 아니면 경외하며 의지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피하지도 않고 제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군요." "아니, 저도 마법사는 두려워합니만, 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 당신들의 힘을 항상 동경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제게 주어진 일을 스스로 하길 원합니다. 그게 답니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주름 진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으나, 굳어진 얼굴에 깃든 환한 표정은 보기 좋았다. “그게 하얀 늑대들의 자부심이라는 거군요. 좋습니다. 저도 급히 루티아로 돌아가야 하지만,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그녀는 목에 건 구슬을 들었다. "여기에 손을 대십시오. 제가 당신을 벗어나더라도 당신의 위치를 항상 알아낼 수 있습니다. 제가 늑대로 변하여 먼저 달려가 보겠습니다. 당신을 태우고 달릴 수도 있지만, 속도도 느리고 또 오래 달릴 수가 없으니까요." 쉐이든은 시키는 대로 구슬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저도 길을 따라 레드 게이트로 가겠습니다. 중간에 갈림길이 없으니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푸른빛이 어둠속에서 환하게 빛나며 쉐이든의 손을 감쌌다.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말했다. "캡틴의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제가 그 얼굴을 읽어내겠습니다." 쉐이든은 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인상을 썼다. "아주 강한 마음의 벽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저는 그 벽을 허물고 마음을 읽어낼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보여주셔야 합니다." 쉐이든도 인상을 썼다. "방법을 잘 모르겠군요."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과 있었던 일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리십시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하니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떠올라 버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정리된 단 한 장면은 아란티아의 보검을 들고 노르만트 왕성의 성문 앞에 우뚝 선 모습이었다. "그는 아란티아의 보검을 가지고 있군요." 푸른 구슬의 빛은 점점 희미해지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뜨고 쉐이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아무 사고가 없다면 하루 안에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한 가지 걱정 인 건.......“ 그녀는 턱에 손을 올리고 그걸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쉐이든이 침묵으로 그 뒷이야기를 강요하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길 오다가 좋지 않은 기운을 가진 존재를 만났습니다. 죽음 안에서 일어난 자, 죽은 자의 몸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자였습니다." "시체가 움직인다는 뜻입니까?" 쉐이든은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들을 떠올렸다. 노르만트 왕성의 성문 앞에서 부서진 갑옷이 도로 합쳐지며 일어나는 모습은 지금도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 광경이었다. "자연의 힘이 어긋나 있는 자리에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또는 잘못된 마법을 익힌 자가 간혹 죽은 자를 일어나게도 하죠. 루티아의 마스터 정도라면 그런 잘못된 존재는 어렵지 않게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는 제 힘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강한 의지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자도 그런 강한 의지를 가지진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자는 진짜로 살아있는 존재일 지도 모르겠군요." "가능합니다. 당신이 카모르트에서 봤듯, 스스로의 의지로 그런 모습을 가진 자와 타의로 그런 모습을 가진 자의 힘이 명백히 다릅니다." "붉은 장미 백작과 12 쏜즈.......“ 쉐이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발로 흙을 끼얹어 모닥불을 껐다. 그 중 불 붙은 장작 하나만 살려 치켜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불안해지는군요." "저도 말하고 되니 불안해지는군요." 타냐도 인정하며 마을 족으로 향하는 쉐이든의 및을 따라 걸었다. "어쩌면 그 자는 그 반대의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살아있는 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죽은 자의 모습을 갖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있는 모습을 갖는 거죠. 가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어떤 계기를 주었을 때 죽기 전에 가진 강력한 원한을 바탕으로 살아나는 겁니다. 그 때의 힘은 저 같은 마법사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정말 그가 그런 자라면, 그 자는 당신을 공격한 마법사보다 더 위험합니다." 쉐이든은 말없이 어둠 속을 걸었고, 타냐도 잠시 말을 멈췄다. 고인 빗물을 밟으며 내는 소리가 들벌레 우는 소리에 섞였다. 여름이라 밤에 우는 벌레와 개구리 소리는 더욱 요란했다. 하지만 타나의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내 깨닫지 못 하고 있었는데, 날벌레가 그렇게 많은데도 쉐이든은 피 한 번 빨리지 않았다. 타냐의 옆에 있어서 그런 거라면 이런 것도 마법일까? 바람이 불어 쉐이든이 들고 있는 횃불이 꺼져버렸다. 달이 비추고 있었으나, 길을 따라 걷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타냐는 구슬을 들어 거기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아까 쉐이든이 손을 대고 있을 때보다 훨씬 환하게 주위를 비추었다 푸른 조명 아래 걷는 밤길은 매우 신비롭게 느껴졌다. “마을로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 자는 당신을 찾기 위해 근처에 있는 모든 마을을 들쑤시고 다닐 거에요. 그래서 저도 다른 위험을 감수하고 당신을 이 곳에 눕혔습니다. 또 만악 그 자가 우릴 발견해 공격한다면 차라리 이런 벌판이 났습니다. 달아나는데 최선을 다한다면 저도 지지 않을 데니까요. 하지만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 공격당하면...... 그 자는 원한다면 마을 하나라도 날려버릴 겁니다." 그녀는 자꾸만 마을 족으로 가는 쉐이든을 말렸다. "말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지금 즉시 카셀을 찾으러 떠나십시오. 만약 그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그 위치를 저에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당신의 몸 상태를 너무 과신하는군요. 그 자의 마법에 당했다면 열흘은 안정을 취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하니 당신이 걷는 것 정도만 허락하는 겁니다." "제가 싸우는 것도 허락해야할 겁니다. 당신이 말한 몇 가지 위험 요소에 캡틴이 빠져 있다면, 저는 기꺼이 그 자와도 한 번 더 싸울 의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무기로는 무리입니다." 타냐의 얼굴에는 이 인간 아직 덜 혼났구나 하는 난처함이 드러나 있었다. 대충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한 쉐이든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얼굴로 앞만 보고 걸었다. 결국 그녀도 포기했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저는 당신의 캡틴을 찾으러 떠나겠습니다. 당신은 뒤따라 오세요. 차라리 제가 앞서서 해결해 버리는 게 당신의 고집을 꺾는 것 보다 쉽겠어요. 그 창을 이리 내밀어 보십시오." 그녀는 목에 건 구슬에 손을 했다가 했다 푸른 빛은 그녀의 손에도 옮겨졌다. 그녀는 모래알을 쥐듯 살짝 주먹을 쥐고 쉐이든이 내민 철창의 끝에 입으로 불었다. 파란 기운이 창끝을 따라 흘러가다가 안으로 스며들었다. "제 힘으로는 이 정도가 다입니다. 인간의 무기로는 그 자에게 작은 상처 하나 주지 못 합니다. 저는 거기에 생명의 힘을 약간 부여했습니다. 조금은 그와 맞설 수 있을 겁니다. 대신 단 한 번 뿐입니다." "그 정도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쉐이든은 크게 만족했다. 그녀도 그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그녀의 몸은 은빛 광채에 휩싸이더니 그 자리에는 인간의 여인이 아닌 늑대가 한 마리 서 있었다. "큰 길을 걷지 마십시오. 그는 항상 그 곳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란티아의 길을 잘 아는 당신이라면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이용해서도 충분히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큰 길을 따라 걷지 않으면 당신이 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소?" "벌써 잊으셨나요? 아까 이 구슬에 손을 했을 때 당신의 힘을 기억해 두었습니다. 일정 거리 안이라면 당신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몸 조심 하시길," "아, 한 가지 더 여쭤도 되겠소?" 늑대로 변한 그녀는 앞발을 떼었다가 멈췄다. "뭐죠?" "중요한 건 아닙니다. 왜 하필 늑대로 변하였습니까?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라도?" “그냥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늑대입니다. 울프 기사단과는 상관 없습니다." 늑대는 몸을 돌려 달리려다가 뒤를 한 번 힐끔 바라보았다. 늑대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울프 기사단도 좋아지게 될 것 같군요." 은빛 털의 늑대는 어둠 속으로 아주 빠르게 사라졌다. 쉐이든은 멍청히 그 뒤를 바라보다가 마을을 향해 어둠 속을 걸었다. "아, 돈이 없군." 옷이 바뀌는 바람에 돈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안타까워하며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랬더니 거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돈 주머니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마법사의 배려로군." 쉐이든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조곤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항했다. 쉐이든은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타냐의 말대로 레드 게이트로 가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비가 온 탓에 길이 엉망이라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한밤중에 마구에 들이닥쳐 산 말은 체력도 엉망이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아 금방 지쳤다. 다음날 점심 때 들른 마을에서 당장 말을 팔아버리고 다른 말을 구하려 했지만, 역시 그 마을에도 쓸만한 말이 없었다. "더 좋은 말은 없소?" "그런 말이라면 큰 도시를 가야지. 이 근처에서 내가 키우는 말보다 더 빠른 말은 없을 걸. 은화 하나 정도는 싸게 해줄 수 있으니, 그냥 사 가시는 게 어떻소?" 늙은 마구간지기는 뻐끔거리며 담배를 피웠다. 아란티아 사람들의 천성이 대부분 그렇듯 이 노인도 남의 속마음은 모르고 천하태평이었다. 결국 쉐이든은 그의 담배 파이프까지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말을 구입했다. 한 모금 태웠지만 별로 맛은 없었다. 아즈윈은 그런 것에 의지하는 녀석은 검사 자격도 없다고 항상 구박이지만 이 즐거움은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저녁때까지 말을 달려 도일들이라는 큰 마을을 접했다. 쉐이든은 그 곳에서 타고 온 말을 또 팔아버리고 제일 좋은 말을 구입했다. 덕분에 가지 있는 돈의 절반을 날렸지만, 단 몇 시간이라도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면 돈 같은 건 얼마를 쓰던 상관 없었다. 사실 하얀 늑대들은 물론이고 모든 울프 기사단은 봉급을 받지 않았다. 왕실의 거의 모든 시설물을 쓸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는 편의가 제공되지만 실질적인 계산을 소유하는 것은 금지 되어 있었다. 불만을 가진 기사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대부분 돈을 노리고 기사직을 수행하는 게 아닌 터라 큰 반발은 없었다. 대신 공적인 임무라면 울프의 기시들은 왕실의 국고에 가득 차있는 엄청난 재화를 끌어다 쓸 수 있었다. 특히 하얀 늑대들은 그 돈을 쓰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던멜이 자신의 무기를 따로 제작한다고 금화로 천 개 정도 가치를 가진 보석을 쓴 적이 있으나, 국고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가끔 아즈윈이 '공적인 임무를 위한 의상'이라고 자신이 좋아하는 옷과 몸을 치장하는 보석을 산 후 죄책감에 시달리긴 했으나, 아무도 거기에 신경 쓰지 많았다. 그 외에 국고에 손을 델 사람은 없었다. 쉐이든은 지금 그 돈을 빼 쓰고 싶었다. 또 각 게이트의 하이로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군대라도 내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서 인사를 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쉐이든은 무작정 말을 달리기만 했다. 타냐가 조언했던 대로 그는 마을에서 자지 않고 노숙을 했다. 하루 종일 말을 타 오며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흘렸으나, 모르고 있다가 저녁에 붕대를 갈면서야 알았다. 아직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이유 없이 코피가 쏟아지기도 했다. ‘카셀이 위험에 처해있다 한들, 이런 몸으론 도움이 될 것인가?' 아직 그가 어디 있는지도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쉐이든은 내일은 종 더 힘이 회복될 거라고 믿고 잠들었다. 다음날 조금 늦잠을 자는 바람에 쉐이든은 더욱 서둘러 말을 달렸다. 바닥의 물이 많이 말라 제법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쉐이든은 생각보다 길을 많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서두른다고 극적으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좀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진흙탕을 달리느라 말도 많이 지쳤다 내일이면 이 말도 바꿔줘야 할 것이다. 이제 레드 게이트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으니 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대신 타냐가 조금 걱정되었다. 하루 만에 온다더니 어떻게 된 걸까?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이런 일로 루터아의 마스터를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은 소식이 없는 게 점점 걱정되었다. 어쩌면 카셀보다 먼저 도착한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며 쉐이든은 레드 게이트로 향했다. 그러나 게이트는 닫혀 있었다. 그리고 게이트에 나 있는 창문 중 일부는 불에 시커멓게 타 있었고, 휘황찬란하게 날리고 있어야 할 깃발도 거의 걷혀 있었다. 대신 비상사태를 알리는 검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게이트의 앞에는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여행자들로 북적댔다. 쉐이든은 말을 세우고 그 사람들 틈을 지나쳐 정문 족으로 다가갔다. "난 우유를 맨데일로 배달하는 상인이오. 오늘 중으로 안 가면 못 팔아요. 나 맨날 보는 얼굴이면서 왜 통과를 안 시켜주는 거요? 지금까지 통행료 외상으로 낸 적도 없다고." 정문 제일 앞에 서있는 나이 많은 상인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사정을 말하며 제발 통과시켜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화를 내고, 어떤 이는 협박을 했다. 그리 급하지 않은 사람들은 진작 포기하고, 가까운 마을로 숙소를 마련하려고 갔지만, 나머지는 물러나지 않았다. "곧 해가 질 거고, 게이트 문은 공식적으로 닫히게 됩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현재 국가적인 비상사태니 양해를 바랍니다." 결국 기다리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 말을 듣고 돌아갔다. 그 후에 도 몇 명은 반 시간 동안이나 문을 열어달라고 싸웠으나, 경비병은 완강했다. 쉐이든은 그 마지막 사람까지 돌아간 후에야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병사도 여러 사람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몹시 지쳐 보였는데, 쉐이든이 다가오니 또 싸워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했듯이 지나갈 수 없소." "게이트의 수문장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쉐이든은 천천히 물었다. 병사는 무작정 열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 이 덩치 큰 남자를 보고 불안했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군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요?" “다른 사람들이 많아 특권을 보이고 싶지 않아 기다렸소. 하지만 사실 지금 대단히 급한 일로 골드 게이트 쪽으로 가던 중이었소. 나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쉐이든 울프요. 수문장을 나오라고 전해주시오." "아, 아, 저......,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병사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얼른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쉐이든이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습격?" "살아남은 자의 말에 의하면 약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사이였다고 합니다." 수문장은 죽었다고 했다. 대신 다른 나이 많은 병사가 이야기 해주었다. 쉐이든은 그들이 전하는 길지 않은 얘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검은 기사? 그러고 화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고 싶군. 언제 그 일이 일어난 거요?" "정오가 조금 안 되었을 즈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쉐이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기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가 봐야겠소. 여피에서 가장 빠른 말을 한 마리 빌려주시오." 그 말을 듣고 즉시 다른 병사가 말을 가지러 갔다. 레드 게이트는 울프 기사단에 도전하고자 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다른 게이트에 비해 쉐이든을 대하는 태도가 각별했다. 그들은 오늘 당장 게이트에서 벌어진 사건보다 쉐이든의 등장에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때 투구를 벗어 가슴에 얹어놓은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몸 여기 저기에 붕대를 대고 있었지만, 갑옷은 벗지 않은 상태였다. 쉐이든에게 지금까지의 얘기를 설명해주었던 병사가 얼른 그를 소개했다. "아, 마침 왔군요. 이번 사건에서 마지막까지 게이트에 남아있었던 병사입니다." 투구를 벗은 병사가 인사를 꾸벅 하고 말했다. "특별히 자세히 얘기할 건 없지만, 좀 이상한 일이 있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건 이번 사건과 별개의 일일지도 모릅니다만,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니겠지요." 쉐이든은 당장 나갈 준비를 할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시오." "게이트가 공격당한 후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저를 구해주었고, 저에게 기사님처럼 몇 가지를 물어봤지요. 그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은 게이트에 불을 낸 사람이 카셀이라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무척 중요시 하더군요." "카셀이라고?" 쉐이든은 주위에 있는 병사들이 깜꼭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군요." "카셀이 패 과들과 함께 이 게이트를 공적한 거요?" "정확히는 이 게이트를 지켜준 것입니다. 그 불길로 나머지가 모두 후퇴할 수 있었으니...... 그 카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나, 어했든 그 두 사람도 그 자의 행방을 궁금해 했습니다. 그리고 나디움에 위험이 닥칠지 모르니 두 사람 중 여자 쪽이 트라카스트 산을 통과해 먼저 가야겠다고 말했지요." "하늘 산맥으로?" "이상한 여자였어요. 누군지는 모르나, 남자 쪽이 마스터라고 불렀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제이였던 절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는 사람입니까?" 쉐이든은 금방 뛰쳐나갈 것처럼 서둘렀던 것도 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르는 이름이군. 하지만 그 여자라면 혹시......? 아니, 그럴 리가.......“ 병사는 잠시 쉐이든이 생각을 마치길 기다렸다가, 처음 하고자 하는 말을 마저 했다.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고, 마스터라는 여자는 남쪽으로, 제이라는 남자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골드 게이트에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만, 아마 우리 쪽 파발이 먼저 도착할 지도.......“ "모를 일이군." 농담처럼 말했으나, 쉐이든은 정말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혹시 게이트를 통과해 늑대가 지나가지 않았소? 겉으로 보기에 은빛 털을 가졌고, 크기는 내 러리 위로 올라올 정도로 큰데.......” 병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참 이상하군요. 그 두 사람도 늑대에 대해 물었는데, 당신도 묻고 있군요. 대체 그 늑대가 뭡니까? 그렇게 거대한 늑대는 태어나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 했습니다.“ 그는 혹시나 하고 다른 병사들을 돌아보았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쉐이든도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오, 됐소. 날 이제 가야겠소. 말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쉐이든은 게이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다른 병사에게 물었다. "현 레드 게이트의 경비 상황은?" "그 싸움으로 꽤 많은 피해가 있었으나, 우선 근처에서 받은 지원 병력으로 현상 유지는 하고 있습니다. 몇몇 파발이 골드 게이트 쪽으로 달려갔으며, 이틀 안에 이 쪽 소식이 전달될 겁니다." 쉐이든은 게이트에 나가자마자 즉시 말에 올랐다. 한 어린 병사가 그에게 작은 보자기를 하나 건넸다. "간단히 싼 도시락입니다. 저녁도 못 드신 것 같아서.......“ "고맙군." 쉐이든은 미소 지었고, 그 어린 병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쉐이든은 즉시 말을 달렸다. 밤이 깊었고, 길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쉐이든은 멈추지 않았다. 레드 게이트에서 골드 게이트로 가는 길은 거의 직선이었고, 길은 아주 잘 다듬어져 있었다. 말이 겁을 먹는 것이 문제였으나, 다행히 게이트의 병사들이 내 준 이 말은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쉽게 지치지도 않았고, 힘도 좋았다. 각 게이트마다 비상시에 쓸 파발로 쓰는 말을 보관하는데, 아마 이 말이 그 말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쉐이든을 도와주지 않았던 달도 그를 도와 환히 빛을 냈다. 쉐이든은 갑자기 말을 세웠다. 일렬로 늘어진 시커먼 물체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는 창을 세워 주위를 살팼다. 어둠 속은 조용했으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 시커먼 물체는 열 명의 병사와 열 마리의 말이었다. 말에서 내려 살펴보니 미라처럼 딱딱하게 바싹 말라 있었다. 아마 골드 게이트로 바로 몇 시간 전에 떠난 파발일 테지만, 죽은 지 천 년은 되어 보였다. 북서쪽 하늘에서 푸른 빛이 번쩍했다. 쉐이든은 즉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번개가 치기에는 하늘이 너무 밝았고 천둥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일은 결코 좋은 징조로 느껴지지 않았다. 쉐이든은 시체를 건너 다시 말을 달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또 한 번 발을 멈췄다. 이번에는 어떤 특별한 흔적을 발견한 것도 아니고 멈출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속도를 즐기느라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느라 제자리에서 몇 바퀴 걸어야 했다. 방금 어떤 한 지점을 지나치며 무언가 쉐이든을 건드렸다. 물리적인 자극이 아닌, 느낌이었다. 지금은 느낌이나 기분보다 객관적인 상황을 놓고 분석할 때지만,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뒤에 남겨둔 기분에 그는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것도 마법이라면, 당신이 내게 건 마법입니까, 마스터 타냐?" 쉐이든은 어둠 속의 한 부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만 한 번 깜빡였어도 놓쳤을 작은 불빛을 발견했다. 북쪽의 산등성이였다. 쉐이든은 즉시 말을 달렸다. 그 불빛은 두 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위치를 기억해 달리긴 했지만, 중간에 몇 번이고 방향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그 빛이 반짝인 산이라고 생각한 지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또 대낮이라도 뭔가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나무가 우거 져 있었다. 쉐이든은 밤이 가지고 있는 시간 중 절반을 그런 수색에 썼다. 보이지 않으니 순전히 감으로만 헤맨 끝에 작은 숨소리를 포착했다. 그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큼지막한 물체가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그것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은빛 털은 빛을 잃어 색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그가 지금까지 돌아오길 기다렸던 바로 그 늑대였다 "접니다, 마스터 타냐." 쉐이든이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늑대는 숨을 크게 내쉬며 계속 으르렁댔고,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다쳤군요. 상처를 봐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쉐이든의 팔뚝을 물었다.. 그러나 쉐이든은 밀려나지 않고 그 무게를 모두 받아냈다. 잠깐 동안 늑대는 그의 팔을 물고 매달려 있다가, 힘을 잃고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늑대의 목을 잡아 천천히 자리에 눕혀주었다. 목덜미를 잡은 손바닥에 뜨듯 미지근한 액체가 묻어 있었고 옆구리 쪽 가죽이 한 뼘 정도 찢어져 있었다. “......대체 부슨 일을 당한 겁니까?" 늑대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이다가 감쳤다. 그리고 늑대의 몸은 너무나도 작고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쉐이든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단 몇일 사이에 입장이 바뀌었군요." 쉐이든은 웃었다. "사실 밤 사이에 당신의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상처를 꿰맬 도구가 없어 출혈을 막을 수가 없더군요. 루티아의 행운이라고 밖에 할 수 없겠지만, 마침 급히 산길을 지나는 약초꾼을 만나 상처를 치료할 만한 도구를 얻었습니다. 물론 늑대를 안고 있는 저를 보고 그 약초꾼은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랐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포도 그 사람 겁니다. 음, 대가로 금화 하나를 주었으니 그 사람으로서도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녀는 모포 안을 들여다보고 힘없이 웃었다. "옷을 벗긴 것까지 입장을 바꾸어버렸군요." "죄송합니다. 그 때는 다급해서 그런 예의를 따질 시간이 없었습니다." "농담이에요. 어차피 누구 보여서 좋을 것도 없는 몸이니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누운 채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서쪽에 걸린 태양이 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렇게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서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도로 누워버렸다. 쉐이든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상처를 입고 억지로 일어난 것과는 좀 다를 겁니다. 무리해서 힘을 주면 꿰맨 부분이 터져 내장이 쏟아질 거요." 그녀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구겼다. 그러나 쉐이든은 굳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절반 정도는 진담입니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계십시오. 그리고 제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십시오." 그는 물주머니의 뚜껑을 열어 누워있는 그녀의 입에 물을 흘려 주었다 그녀는 몇 번 콜록거리면서 물을 조금씩 받아 마신 후 얘기했다. “당신을 두고 떠난 지 만 하루 만에 수상한 무리가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말했던 바로 그 검은 기사들의 무리였지요." “저게 그들이 레드 게이트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는 길입니다." 쉐이든이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곧 얘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만일을 염두에 두고 그들 주위에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무리에 캡틴 울프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지요." 쉐이든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잡혀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위험한 것 같지는 많았습니다. 당장 구하려 했으나, 그들과 같이 있는 검은 기사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자는 제가 다가가는 모든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또 아마 캡틴에게 했던 얘기까지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자세한 얘기는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물러났군요?" “예. 그러나 물러난 직후 저는 그들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회색 로브의 마법사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먼저 그 자를 발견한 건 분명 운이었습니다. 결국에는 그 운도 다해 이 꼴이 되었습니다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대며 고통스러워 했다. 어제 밤부터 다음날 아침, 그리고 저녁이 된 지금까지 그녀를 간호해 오던 그였다. 때문에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도우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옆에 차곡차곡 쌓아둔 옷가지의 제일 위에 올려져 있는 커다란 푸른 구슬을 다시 목에 걸었다. "저는 당신이 걱정되긴 했으나, 도저히 캡런 울프를 버려두고 올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 동안 그 곳에서 기다리며 그들이 이동하자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더군요. 혹시 오다가 그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아니, 저는 당신의 조언대로 큰 길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 자는 아마 당신이나 내가 그 쪽 길로 쫓아오길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레드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한 번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아마 그 얘기는 저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저는 계속 그들을 쫓다가 그만 회색 로브의 마법사에게 제 위치가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왔군요. 어제 오다가 미라가 된 레드 게이트의 병사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자의 짓입니다. 어쨌든 그 때는 제게 운이 따라주지 않은 셈이죠. 그가 먼저 공격을 했고, 저는 치명적인 상처를 얻었습니다. 부상당한 몸으로는 그를 쉽게 따돌리지도 못 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공격을 당했는데, 제대로 맞아버렸죠." "이게 그 상처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 상처를 입힌 후 그 자도 잠깐 방심했고, 저는 그 들을 타고 그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후 달아났습니다." 쉐이든은 하늘을 잠깐 밝혔던 푸른빛을 떠올렸다. "아마 그 역시 얼마간은 그 상처를 회복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산 속에 숨어 있었는데, 당신이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신호를 보냈는데, 솔직히 그 신호를 적이 먼저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당신이 그 신호를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다행히 두 가지 걱정은 실현되지 않았군요." 쉐이든은 그녀의 머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얼른 그 손을 뗐다. 아즈윈에게 하던 버릇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만져주는 것을 항상 좋아해서 할 일이 없을 때면 언제든 아무 다리에나 누웠고, 누구든 그녀가 누우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근 했다. 하긴 최근에는 아즈윈이 카셀을 그렇게 해주는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긴 했다. 타냐는 쉐이든의 손길에 잠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감히 루티아의 마스터를 쓰다듬는 아크랜드의 인간이 있을 리 없을 데니 놀랄 만도 했다. 쉐이든은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조금...... 다른 사람과의 접촉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보통 제 얼굴을 보면 다들 피하니까요. 당신은 역시나 다른 남자들과 다르군요." "제 주위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저는 남은 마법의 힘을 모두 끌어내 상처를 막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덕분에 잠깐 정신을 잃게 되었죠. 조금은 기억 납니다. 제가 당신의 팔을 물었죠? 그리고 또 당신은 저 때문에 캡틴을 구하는 데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죠. 사과 드리겠습니다. 두 가지 모두." "그건 사고였으니 누군가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상처 치료에만 전념을 다 하십시오. 당신이 스스로 지킬 힘만 회복하면 저는 다시 떠나야겠습니다." 타냐는 뭔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어버렸다. "내가 지금 떠나라고 해도 당신은 거절하겠지요? 그럼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요. 상처 치료에 전념을 다하겠습니다." 누운 채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쉐이든도 겨우 잠이 들었다. 그녀를 치료하면서 그는 단 한 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법사에게 당한 상처는 아직 도 나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아침이 밝으려면 한참 남은 새벽에 타냐는 쉐이든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벌써 잠에서 깨어 있었고, 근 시일 안에는 일어나지도 못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우뚝 서 있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을 입고 벌써 떠날 준비도 끝내두고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그렇게 됐군요." "무리하는 건 조금.......“ 그녀는 옷의 찢어진 옆구리 부분을 살짝 보여주었다. 꿰맨 부분이 조금 아물어 있었다. "그럴 수가! 혹시 내가 일주일 정도 잠들어 있던 겁니까?" "약이란 것이 사람의 자연적인 치유력을 돕는 물질이라면 마법사는 스스로 그런 힘을 더욱 발휘할 수 있지요. 혹시 여기서 마법에 관한 학문을 강의해야 하나요?" "조금 들어두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군요." 쉐이든은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벅꾸벅 졸다가 두 사람이 얘기하는 소리에 잠이 깬 말도 투레질을 했다. 그는 말 뒤에 실어놓은 가방에서 여름 배를 하나 꺼내 던져주었다. “조금 뭉개지긴 했지만, 먹을 만할 겁니다. 그 정도 상처가 아문 건 대단하지만 늑대로 변해 달리는 것까지는 무리일 데니 말 뒤에 타는 건 어떻습니까?" 쉐이든도 배를 한 입 베어물고 말했다. "거절은 않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직후 둘은 바로 말에 올라 달렸다. 어둠 속이었지만, 역시 이 말은 어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쉐이든은 이 녀석이 발을 헛디뎌 바닥을 구르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새벽이 되고 사위가 조금 밝아질 무렵 그들은 큰 길에 접어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쉐이든은 약간 달리는 속도를 줄여 물었다. "아프긴 하군요.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잠시 멈춰 주시겠어요?" 그녀는 말에서 내리더니 말 위에 있는 쉐이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까지 늦춰진 시간을 단축시켜 보죠. 제가 앞에 않아도 될까요?" 쉐이든은 그녀의 손을 잡아 앞에 태웠다. 그녀는 말의 머리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았다. “단신이 덩치가 크니 다행이군요. 이제부터 말을 빨리 달리게 하겠어요. 이 말은 당신만큼이나 용감하고, 또 달리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 있군요. 기본적으로 우리 둘을 데우고 달릴 기초 체력도 갖추고 있으니 피로만 없애주면 끝까지 달릴 수 있을 겁니다." 항상 마법사라고 의식한 채로 바라봐서인지 자신의 앞에 앉은 그녀의 몸이 이렇게 작다는 것에 쉐이든은 새삼 놀라고 있었다. 타냐가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캡틴에 대해 각별하니 저도 그를 구해주고 싶어지는군요. 갑시다." 쉐이든은 힘 있게 말을 출발시켰다 말은 바람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큰길을 따라 왼쪽으로 강이 하나 보였다. 쉐이든은 시간을 알아보려고 태양의 위치를 살핀 후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몰비 강입니다 여기서부터 골드 게이트까지는 두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두 시간이면 이 말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말의 머리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최근에 여길 지나간 자들의 힘이 느껴집니다." "그 검은 기사입니까?" "예. 레드 게이트 함락 소식이 골드 게이트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일입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그녀는 쉐이든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그녀의 가는 몸이 달리는 말의 뒤로 날아갔다. 이 속도로 달리는 말에서 뛰는 끔적한 묘기는 던멜도 다칠까 봐 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 새 늑대로 변해 말의 옆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 거대한 늑대를 보고도 말이 전혀 겁먹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빠르기만 한 단순한 녀석은 그 늑대를 또 다른 자기 동료쯤으로 봤는지 오히려 이겨 보려고 더 빨리 달리는 웃기는 경쟁까지 했다. 사실 처음 이 늑대를 봤을 때 자기도 그리 무섭다는 생각을 안 했으니, 어쩌면 본능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동물로서는 무서워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늑대는 쉐이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늑대로 변한 후 그녀의 목소리는 성별이 구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라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검은 기사든 그 마법사든 지금 당신의 힘으로 맞서는 건 무리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달리십시오." 늑대는 말보다 두 배는 더 빠를 속도로 앞서갔다. ‘가슴에 불을 당기는 말을 해놓고 싸우지 말라는 건 좀 억지군요. 마스터 타냐.' 쉐이든은 그녀의 등 뒤에 대고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카셀을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다. 다른 생각은 가급적 하지 않고 달리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몰비 강의 작은 나루터에 있는 두 남자를 발견한 순간 쉐이든은 말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두 남자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쓰러진 남자를 끌어 안고 상처를 손으로 막고 있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척 봐도 그것은 칼에 찔린 상처였다. 부상 당한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상 당한 남자를 치료하는 남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큰 길을 지나가는 쉐이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손을 흔들던 참이었다. 말을 세운 후, 그도 쉐이든을 알아보고 들었던 손을 접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도 없었고, 적의도 없었다. 오직 둘 사이에는 놀라움만 교차했다 "슈벨." "쉐이든." 둘은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잠시 멈춰 있었다. 쉐이든의 머리 속에 금방 대강의 상황이 그려졌다. 슈벨은 오히려 그보다 더 빨리 상황을 추측해냈는지 먼저 말을 했다. "캡틴을 구하러 왔나, 쉐이든?"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카셀을 데리고 있었던 게 너였나?" “그래, 나다. 어쩔래? 벌이라도 내릴 테냐? 좋지. 애초에 너를 비롯한 하얀 늑대들을 만나러 아란티아에 왔으니.......” 말은 그리 했으나, 슈벨은 안고 있는 남자의 배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쉐이든은 턱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친구냐?" "그렇다." "누구에게 당했나?" "사냥꾼." 쉐이든은 타냐를 치료하면서 썼던 토구와 약초를 같이 싸서 묶어둔 보자기를 슈벨에게 던져주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자." 슈벨은 그 보자기를 풀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냐? 난 지금 아란티아의 적이다." “스스로 울프의 자리를 포기하고 사라진 기사가 몇 년 사이에 적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지난 5년간의 일이다.” 슈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기억이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이군. 하긴 내 얼굴을 보고 기억을 못할 리가 없지." 쉐이든은 새삼 그의 얼굴을 들어지게 보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 두 번째 테스트에서 남아 있었다면 하안 늑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기사를 기억하는 거지, 네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 그 사이 독자적인 검술을 터득했나?" 쉐이든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뒤에서 슈벨이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블랙이 알라야의 다리에서 카셀을 기다리고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네 캡틴은 죽을 거다." 블랙? 쉐이든은 그 이름이 검은 기사를 칭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서둘러 다오. 이 후에는 얼마든지 쉬게 해줄 레니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내라."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녀석은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빠른 속도였음에도 그 속도를 상회하고 있었다. 쉐이든은 자세를 낮추고 가급적 재촉을 하지도 않았고, 조종을 하지도 않았다. 말은 이 넓고 죽 뻗은 큰 길을 달리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과연 레드 게이트에서는 이 말의 우수함을 알고 있을까? 만약 자기가 게이트의 병사라면, 하만 늑대가 아니라 여왕이 직접 온다고 해도 이 말은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골드 게이트가 보였다. 그리고 하얀 돌로 만들어져 아란티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라고 칭해지는 알라야의 다리도 보였다. 더 다가가니 검은 기사와 검은 기사와 싸우는 검사, 그리고 다리 입구에서 말을 탄 카셀도 발견했다. "카셀." 쉐이든이 소리쳤다. 카셀은 깜작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가끔 카셀은 쉐이든에게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어머니가 살아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었다. "쉐이든!" 쉐이든은 카셀의 옆에 말을 세웠다. "늦었다, 캡틴." “쉐이든! 어떻게 여길....... 그 보다, 아니, 저...... 제이메르를 구해야 해." 카셀은 한참 더듬거리다가 말했다. 제이메르란 검은 기사와 겨루고 있는 남자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지금 검은 기사에게 멱살을 잡혀 있었다. "기다려라." 쉐이든은 철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골드 게이트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서 늑대로 변한 타냐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할 것인지 짐작하고 쉐이든은 나직이 카셀에게 말했다. “내가 앞장서 달려가면 무슨 일이 생겨도 멈추지 말고 따라붙어라.” "알았어." 카셀은 즉시 대답했다. 그 순간 타냐의 마법이 검은 기사의 어깨위에서 폭발했다. 검은 기사의 어깨가 얼어붙었고, 타냐는 한 번 더 울부짖어 검은 기사의 얼굴에 대고 마법을 썼다. 검은 기사의 몸이 뒤로 한 번 둥실 떠서 다리 난간에 부딪혔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즉시 몸을 일으켜 타냐를 향해 할버드를 휘둘렀다. 할버트의 간격 안에 있던 다리 난간과 기둥이 박살났다. 늑대는 낮은 포즈로 달려가 쓰러진 제이의 어깨를 물어 쉐이든 쪽으로 끌고 왔다. "그 자를 내 말에 태우시오." 쉐이든이 말했다. 타냐는 제이메르의 팔을 물어 들어 올렸다. 쉐이든은 부상당한 남자를 상대로 할 짓은 아니지만 한 손으로 그를 잡아 말 앞에 실었다. 제이메르는 나직이 신음했다. "카셀, 아까 말했던 대로 간다!" "알았어." 카셀은 충실히 대꾸했다. 쉐이든은 검은 기사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갔다. 검은 기사는 할버드를 어깨 뒤쪽으로 치켜들었다. 이 단단한 알라야의 다리 난간을 부술 정도의 힘이라면 쉐이든도 정면으로 부딪힐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지금 이 한 번의 부딪힘으로 그의 힘을 몸으로 측정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쉐이든도 창을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상대가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창을 휘둘렀다. 두 자루 거대한 쇳덩어리가 부딪혔다. 푸른 빛이 부딪친 자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졌다. 단 한 번만 유효할 거라는 타냐의 마법이었다. 쉐이든도 뒤로 밀려났고, 검은 기사도 뒤로 밀려났다. 장갑을 끼지 않은 탓에 손바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르다.' 쉐이든은 검은 기사를 지나치며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카셀과 타냐도 검은 기사를 안전하게 지나쳐 따라오고 있었다. 카셀은 쉐이든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지어보였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고 멀어져 가는 다리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기사는 할버드를 치켜든 채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모르트에서 만난 검은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단 한번 무기를 대 보았을 뿐이지만, 쉐이든은 그 자의 강함을 온 몸으로 느꼈다. "게이트를 열어라!" 쉐이든은 골드 게이트의 정면에 서서 외쳤다. "루티아의 마스터 타냐의 요청에 의하여 게이트가 닫혔습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게이트의 성루에 있는 병사가 소리쳤다. "제가 마스터 타냐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늑대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타냐가 말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다친 몸으로 전속력으로 달렸고, 무리한 마법까지 썼으니 당연했다. “옆에 계신 분들은?" 게이트의 병사가 물었다 “나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쉐이든이다. 환자가 있으니, 서둘러 문을 열어라," 곧 성문이 열렸다. "1급 경계 상황이다. 모들 경비병들은 제자리로." "비번인 경비병들도 전원 연락해 복귀 명령을 내려라." 게이트 안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루티아 마법사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한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빠른 대처였다. 쉐이든은 부상 당한 제이메르를 들어다 안에 마련된 침대에 눕혔다. 뒤따라온 카셀은 무척 걱정스러운 듯 따라오고 있었다. 타냐도 문가에 서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길의 대상은 제이메르가 아니라 쉐이든이었다. "피가 나고 있습니다, 쉐이든." 놀란 건 카셀이었다. 쉐이든이 어깨의 상처에 손을 대 보니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왔다. "아까 창을 부딪히면서 또 상처가 터졌나 보군요." 쉐이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마법으로 당한 상처는 쉽게 낫지 않습니다. 제가 몇 번이나 경고하지 않았나요?" 곧 의사가 와 제이메르의 상처를 봐준 후 자신의 약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다른 모두를 돌아보며 손을 내저었다. "자, 이제 환자가 아닌 분은 잠시 나가 주....... 음?" 그는 잠시 카셀과 쉐이든, 타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어느 쪽이 환자인지 모르겠군요." "일단 급한 환자는 그 쪽이니 치료해 주시오. 그리고 좀 안정되면 다를 사람의 상처도 봐주시오. 깨끗한 헝겊이나 붕대 있소?" 쉐이든은 상처에 붕대만 감고 방을 나왔다. 밖은 소란스러웠으나, 이제야 조금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카셀은 잠시 쉐이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행이야. 정말 큰 사고가 난 줄 알았어." 카셀이 그를 힘있게 안았다 떨어지며 말했다. 그 한 번의 포옹만으로도 그동안 카셀의 걱정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다른 친구들은?" “사정이 생겨 하늘 산맥으로 갔다. 피차 해야 할 이야기가 많겠군." 그는 빙그레 웃으며 카셀의 어깨를 쳤다.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다. 다른 이야기보다 가장 우선해야 할 부분이라서." 그는 게이트의 망루에 올라갔다. 카셀과 타냐 모두 뒤를 따라왔다. 게이트의 제일 위에 올라오니 창을 들고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많았다. "레드 게이트보다 병사들 숫자는 많네." 카셀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레드까지는 출입이 자유롭지.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그렇지 않아." 쉐이든이 설명했다. “서쪽에서 내리 비치는 끓은 태양을 받으면 어면 원리에 의해서 인지 모르나, 동쪽에서 보면 벽이 황금빛으로 보이지. 마치 황금으로 만든 것처럼." 듣고 있던 타냐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골드 게이트의 축조는 이미 천 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루티아의 축복을 받은 돌이 쓰여졌죠. 그 축복은 하루 동안 받은 태양의 빛을 머금고 있다가 빛이 사라질 쯤 축복이 시작됩니다.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들이 동원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는지......, 당시 얼마나 정성스럽게 공을 들여 이 게이트를 지었는지 저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카셀이 조금 어색한 눈빛으로 타냐를 바라보자, 쉐이든은 얼른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 이 쪽은 루터아의 마스터 타냐, 그러고 이쪽은 캡틴 카셀 울프입니다." 카셀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카셀입니다." "반갑습니다. 쉐이든이 당신 걱정을 굉장히 많이 하더군요." "얼마 전 인질이 되어 있을 때 저에게 말을 걸었던 그 늑대였죠?“ "맞습니다." 카셀은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타냐를 꽤 무서워했고, 타냐는 그 반응을 당연하게 여겨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카셀이 타냐를 편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쉐이든으로서는 조금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게이트에서 제일 높은 망루에 서면, 몰비 강을 가로지르는 알라야의 다리가 한 눈에 보였다. 이제 검은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병사에게 아까 상황을 물어보니, 그 검은 기사는 일행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있다가 물러났다고 했다. "저 검은 기사는 누구지? 블랙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오랫동안 동행해 온 걸 보니 카모르트에서 우리가 봤던 그 검은 기사와는 다른가 보군." 쉐이든이 물었다. "분명히 달라. 모습은 저렇지만, 그는 진짜 기사야. 마치.......“ “마치?" "진짜 살아있는 익셀런 기사 같아." 쉐이든도 타냐도 그 과격한 발언에 그다지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쉐이든은 이미 창을 맞대는 순간 어느 정도 이상한 존재감을 감지했다. 마법사라면 그런 느낌에 더욱 민감할 것이다. "블랙은 계속 해서 골드 게이트에 가야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결국 왔지. 하지만 여길 와서 대체 뭘 한다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군." "골드 게이트에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걸까?" 쉐이든도 잠시 그 부분에 대한 지식을 떠올려 보다가 타냐에게 물었다. "혹 제가 모르는 역사적 의미나 마법적인 도구로서 이 곳 게이트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 자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그 목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의도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지금으로서는 골드 게이트의 경비를 강화하고 기다리는 방법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경비 태세가 아주 빠르더군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와보니 이미 경계는 강화되어 있었고, 저는 만일을 대비해 게이트 문을 닫아달라는 요청을 한 게 다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 곳 골드 게이트를 폐쇄하거나 경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릴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누가 이런 대규모 경비 체계를 명령했는지 모르겠군." 웨이든이 중얼거리듯 말했고, 거기에 대답이라도 하듯 뒤에서 대꾸했다. "아침에 제일 급한 파발로 연락을 받았네." 돌아보니 골드 게이트의 수문장 다네돌이 쉐이든을 보고 인사했다. 그는 과거 울프의 기사였으며, 마흔 살에 가까운 나이에도 젊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나이 들어 은퇴해서 다네돌만큼만 살면 성공이다.'라는 울프 기사들끼리의 농담이 있을 정도로 그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스터 아이린으로부터! 그 이름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쉐이든은 놀라 다시 확인했다 "아이린?" "그래, 아이린. 거짓말 같나?" "아니오. 그냥 좀 의외라서." 다네들은 편지를 하나 내밀며 말했다. "만약 하안 늑대들 중 한 명이나 제이메르라는 청년이 여기에 도착하면 꼭 전하라는 내용이었네. 제이메르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진짜로 나타나니 조금 의외였지.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이름이 또 하나 적혀 있었는데, '캡틴 울프'가 도착해도 이 편지를 전하라고 했네. 오히려 강조되어서 말일세. 하지만 울프의 기사에는 캡틴이 아직 없지 않나? 자네가 캡틴인 줄 아는 녀석들도 꽤 있지만.......“ "캡틴은 있습니다." 쉐이든은 그 편지를 받아다 카셀에게 내밀었다. 다네돌은 카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했다 카셀은 애써 그 시선을 피해 편지를 읽었다. "으음, 마스터 아이린이 오랜만에 아란티아로 돌아온 탓에 현지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알았군. 인제부터 캡틴이 생긴 건가?" "최근입니다. 그보다 그 분이 어떻게 캡틴을 알았는지 모르겠군요." 길지 않은 편지를 모두 읽은 카셀이 조금 긴장된 눈을 하고 말했다. "나디움에 내 소식이 알려친 것 같아." "뭐라는데?" “마스터 퀘이언이 캡틴 울프를 기다린다, 골드 게이트에 도착하면 지체하지 말친 왕실로 오라....... 캡틴 울프든, 하얀 늑대든, 제이메르든, 누구든 보는 즉시 바로. 그렇게 쓰여 있어." 카셀은 조금 겁 먹은 것 같았지만, 쉐이든은 대충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가 궁금한 건 마스터 아이린이 어덯게 이 일을 모두 알고 있느냐였다. 아마 그 해결의 열쇠는 제이메르라는 청년이 쥐고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 곳은 골드 게이트의 병사들에게 맡기 서둘러 나디움으로 떠나게." "그러지요." 쉐이든은 타냐와 카셀을 먼저 계단 아래로 내려보내고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다네돌." "걱정말게. 나는 9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익셀런 기사단 300기와 정면으로 맞섰던 바로 그 기사야. 골드 게이트에 위험이 닥칠 일 따위는 없다네. 이미 하이로드 비노클라스의 군대까지 이 쪽으로 향해오는 중인데, 전쟁이 있었을 당시 이후 최대의 병력이 모이는 셈이지. 난 좀 과격한 반응이 아닌가 싶은데.......“ 다네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나 쉐이든은 진지하게 말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그 때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질 지도 모릅니다." 농담을 잘 하지 않는 쉐이든의 성격을 아는 다네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밑에는 벌써 그들을 태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타냐는 옆에 쉐이든의 자리를 비워주며 먼저 앉아 있었고, 카셀은 안쪽 좌석에 앞아 있었다. 놀랍게도 카셀의 옆에는 방금 상처를 치료하고 나온 제이메르가 타고 있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쉐이든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여기에서 좀 더 휴식을 취하고 와도 될 거다." 쉐이든이 말했다. "아니, 같이 간다. 그 편지에 내 이름도 적혀 있었다면서?" 그가 말했다. 쉐이든은 감정 없이 웃으며 말했다. "이 마차에는 하나 같이 자신의 몸을 걱정하지 않는 인간들 뿐이군." 쉐이든은 타냐의 옆에 앉은 후 마차 문을 닫았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흔들리며 천천히 출발했다. 카셀이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화이트 게이트까지는 얼마나 걸려?" "하루." 쉐이든은 짧게 대꾸했다. 그리고 마차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했다. 지금까지 별정한 척 했지만, 말한 마디 더 꺼내기가 힘들 정도로 피곤했다. 그는 처음 술 마시고 뻗어버린 소년처럼 깊이 잠들었다. 7.빌리 캡틴 빌리 빌리는 정신을 잃은 채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몸부림쳤는지 기억하지 못 했다. 단지 온 몸이 불처럼 뜨거웠다가 이내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워졌다는 것 정도만 인식했다. 가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희뿌연 게 왔다 갔다 했다. "빌리, 정신이 드나? 내 얼굴 보여?" 그것은 슈벨의 목소리였다. 빌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끈적한 것이 눈 주위에 잔뜩 붙어 있는 것 같아 오래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지?" "골드 게이트에서 좀 떨어진 마을의 여관이야." "얼마나 떨어 졌는데......?" "걸어서 한 시간도 안 돼." 빌러는 그 와중에도 걱정이 되어 말했다. "안 돼. 골드 게이트의...... 벼, 병사들이...... 올 지도 모른다.“ 슈벨은 땀이 흐르는 그의 이마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다른 마을도 매 한 가지야. 그리고 널 데리고 움직이는 건 무리야." "그럼 날.......“ "버려라 어쩌라 하는 말 하지 마라. 이건 내 뜻이기도 하지만 블랙의 뜻이기도 하다." 슈벨은 수건을 적시고 옆에 있는 다른 남자에게 명령했다. "물 좀 갈아 와. 그리고 죽도 데워오고." 그 남자는 대야를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누구야?" "브리지나일. 우리 둘의 부하들 중 마지막 생존자다. 어제 레이너도 죽었다." "그...... 랬군." 입 안이 몹시 탔다. 슈벨이 물을 조금 먹여주었는데, 마시기가 힘들었다. 빌리는 갑자기 시간이 얼마나 흘렸는지 궁금했다. "내가...... 제이의 칼에 찔린 지...... 얼마나 됐지?“ "그 일을 당한 지 하루가 지난 저녁 때다. 시간은...... 여기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종을 쳐주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 여섯 시 정도 된 것 같아." "부상은......?" 빌리는 누워서는 배를 내려볼 힘도 없어 물었다 특별히 배가 아픈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린 치분이었다. 그래서 상처 자체는 별 거 아닐 거라는 기대도 했다. "미안해." 슈벨은 잠시 긴 침묵을 가진 후 말했다. "너에게 조잡한 위로 같은 건 어울리지 않을 테니, 솔직히 말할게. 급소는 피했다지만, 절망적이다. 의사가 그 사이 두 번 왔었는데, 내일을 넘기기 힘들 거라더군. 솔직히 그 빌어먹을 돌팔이 놈 중 첫번째는 아예 지금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더라. 그래서 내가 한대 먹여줬지." 빌리는 힘 없이 웃었다. "잘 했어." "일단은 마음 편히 백고 있어라. 아무리 의사들이 그런 말을 한들 난 네가 죽을 것 같지는 않아." "절망적이라고 말해 놓고선.......“ 슈벨도 칙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고통을 참기 힘들거든 말해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빌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되자 고통이 찾아오는 간격이 짧아졌다. 빌리는 몇 번이나 까무러칠 듯 비명을 질렀고, 그럴 때마다 슈벨은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중간에 몇 번 배의 상처에 약초를 대보기도 하고, 고통을 줄이는 약초를 달여 먹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던 그 약도 결국 마시지 못 하게 되자, 슈벨은 아무 것도 해주 못했다. 자정이 지난 한밤중에 잠깐 동안이나마 고통이 잦아들었다. 빌리는 또 슈벨의 도움을 받아 물을 받아 마시고 말했다. “보검은 꼭 다시 론타몬으로 가져다 줘." "알았어." 얼굴이 부어 오른 빌리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슈벨은 눈물을 보였다. "복수는 필요 없나?" "정당한 시합의 결과였다. 후회는...... 없어. 그보다 네가 걱정이다." "내가 왜?" “나 때문에...... 네가 여길 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잖아." "5년이나 기다렸는데, 잠깐 론타몬 좀 갔다 온다고 크게 늦어질 것도 없지. 그리고 여기 와서 실력 향상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어. 나중에 다시 오는게 낫겠어." "익셀런은 어떤가? 나보다 더 뛰어난 기사들이 있다. 원한다면 그 부분은......,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생각해 봐서." "블랙은 어디 있나? 그에게도 할 말이 있다." 빌리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그를 찾았다. 그러나 슈벨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잠들어 있을 때 잠깐 너의 안부를 물으러 왔었다. 심각하다고 했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가버리고는 돌아오지 않았어." 빌리는 그가 옆에 없는 게 조금 섭섭했으나,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지금 당장 옆에 슈벨이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슈벨이 말했다.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골드 게이트였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왜 여길 왔는지 모르겠다는 눈치더라. 뭐, 블랙이야 항상 그 표정이니 내가 눈치를 살펴봐야 소용없긴 하지. 그래도 여기만 오면 모든 게 명확해질 거라던 바람이 무너지고, 게다가 자신을 따르던 녀석 중 하나가 이렇게 누워버렸으니 우울해질 만도 하겠지." "그렇군." 빌리는 블랙에게 조금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미안한 사람은 슈벨이었다. 그는 잡고 있는 슈벨의 손을 놓지 않았다. "고맙다." "갑자기 뭐가?" "뭐든지." "그래, 그래. 죽기 전인데 뭔 말인들 못 하겠냐? 아무 말이나 해라. 다 들어줄게.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마라." 빌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배가 아파 길게 웃지도 못 했다. 그걸 신호로 또 고통이 엄습했다. 그 고통은 새벽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빌리는 아주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 본 것은 블랙이었다. 블랙은 어둠 속에서 빌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 되돌아온 거라고 생각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꿈인가?'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몽롱한 게 가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주위의 사물을 살폈다. 고통에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본 주위 사물이 이런 몽롱한 상태로 본다고 해서 명확해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어딘지 현실의 공간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슈벨이 침대 옆의 의자에 암은 채 꾸벅꾸벅 잠들어 있었다. 그것만큼은 다른 어떤 것보다 사실적이었다. '꿈이 아닌가?' 블랙은 빌리에게 죽음을 알리러 온 사신인지도 몰랐다. 그가 들고 있는 할버드도 사실은 사신이 들고 다니는 시간의 낫이라 해도 지금 빌리는 믿을 것이다. 그러나 블랙은 두려워하는 빌리의 어깨를 살짝 짚어 그를 진정시켰다. "걱정 마라.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블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고갯짓을 하더니 천천히 돌아서 방 입구로 돌아갔다. 빌리는 어딜 가느냐고, 할 애기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대신 몸이 움직여졌다.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빌리는 블랙의 뒤를 따라잡다. 그가 문을 열자, 빌리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문을 열면 나와야 할 어두운 복도와 나무로 만든 벽, 벽에 걸려 있어야 할 촛대나 여관방이면 항상 형식적으로 걸려 있곤 하는 그런 그림이 든 액자 같은 건 없었다. 넓은 초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초원 너머에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 하안 다리가 보이고, 다리 밑으로 깊고 푸른 강이 흐르고 있었다. 블랙은 천천히 그 다리 족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말에 올라타 있었는데, 그의 주위로 블랙과 똑같은 복장을 한 기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블랙과 달리 얼굴도 있었다. 빌 리가 론타몬에서 지겹도록 입고 다니던 바로 그 갑옷이었고, 주위의 모든 동료들이 입었던 갑옷이었던 터라 그에게는 아주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리 건너에는 거대한 게이트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블랙은 기사들의 선두에 서서 속도를 내어 다리를 건넌다. 그 많은 기사들이 지나가는데도 다리는 튼튼하게 잘 버텨주었다. 빌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탄 블랙을 쫓아가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다리를 건너는 기사들을 옆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강물 웨에 서 있거나, 공중에 떠 있어야 하는데도 그는 그것을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갈등하지도 않았다. 빌리는 오직 눈 앞에 펼쳐지는 이 믿지 못할 광경에 정신을 빼앗겼다. 블랙은 자신을 따라본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블랙이 낸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귀를 울리지도 않았고, 듣기만 해도 공포를 심어주는 이상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이 보여준 그 위압감과 굵은 어조는 변함이 없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아크랜드에서 가장 강하다는 이로피스의 왕실 기사단을 무너뜨렸다. 그 때 우린 너무도 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우리들의 진군이 멈출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아군조차 믿지 않았던 드래곤 사냥까지 해내고 이 자리에 섰다." 그의 고함에 맞추어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기운차게 함성을 내질렀다. 공기가 진동했다. 땅이 진동했다. 강물이 흔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천년 간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던 레드 게이트를 통과해 여기에 이르렀다. 골드 게이트 역시 우리의 힘 앞에 무너질 것이다. 아란티아의 마법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 인간의 힘으로는 우러를 막을 수 없다." 또 한 번 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줬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블랙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블랙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이름을, 슈벨은 조금이라도 짐작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카셀은 알았을지도 몰랐다. 빌리도 조금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머리 속에 염두에 두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빌리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게이트 쪽에서 그 함성에 맞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검은 갑옷의 기사들은 함성을 멈추고 게이트가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팔이 멈춘 후 게이트에서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마치 시민들 앞에 자기들의 개선을 자랑하는 것처럼 당당하고 여유 있게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이로드 탈룬드의 경비대를 이끌던 배롤 울프가 입었던 갑옷과 같은 것이었다. 빌리는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알고 숨이 막혔다. 처음 익셀런 기사단에 입단을 결심할 때부터 이 싸움을 몇 번이나 머리 속에 그려왔었다. 두 기사단은 상당히 오랫동안 서로를 주시하고 서 있었다.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 줄로 서있는 그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기사단보다 멋지게 보인다는 게 빌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두 기사단 중 어느 쪽도 상대의 모습에 겁을 먹지 않는 것 같았다. 함성도 신호도 없었다. 블랙은 천천히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쪽에서도 똑같이 한 명의 기사가 달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양쪽 기사단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빌리는 무의식 중에 그들을 따라갔다. 잘 훈련된 기사단의 말들은 그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도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빌리는 그 빠른 말을 어떻게 쫓아가고 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 했고, 이해할 필요도 느끼지 못 했다. 그저 눈앞의 모든 상황에 정신을 빼앗겨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제일 처음 출발한 양측의 첫 번계 기사들끼리 서로 무기를 부딪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뒤따라온 서로의 기사들이 서로를 향해 창과 도끼와 칼을 찔러 넣었다 마치 말과 말끼리 부딪히는 듯 과격한 돌격이었다. 바닥의 돌멩이들이 프라이팬의 콩처럼 튀었고, 돌풍이라도 부는 듯 먼지가 좌우로 퍼졌다. 이미 시간 개념조차 느끼지 못하는 빌리는 멍하니 서서 한없이 그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현기증마저 일었다. 이 정도 많은 숫자의 기사들이 부딪혔는데, 한 명 한 명의 싸움이 마치 혼자서 기사단을 대표하는 싸움인 양 수준이 높았다. 빌리는 오래 전부터 이 싸움에 끼어 있을 자신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고 어쩌면 그 싸움에 자기가 있었다면 뭔가 다른 결과가 있을지도 몰랐다고 호기롭게 말하던 시절도 있었다. 얼마나 치기 어린 상상이었던가? 얼마나 유치한 발상이었던가? 빌리는 창피함에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 전투를 그저 흘려 보내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다른 어떤 말들보다 힘 있게 두 마리 말이 필드 한 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미끄러져 달렸다. 말 위에 있던 두 사람의 창과 할버드가 어지럽게 부딪혔다. 제일 처음에 싸움을 시작했던 바로 그 두 기사였다. 그 중 하나는 블랙이었다. 그는 과연 슈벨과 빌리를 상대로 보여줬던 그 무지막지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은 상대편 하얀 갑옷의 기사에 의해 막히고 있었다. 점점 싸움의 양상은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기사는 잠시 자신의 싸움을 멈추고 이 두 기사의 싸움을 구경하기도 했다. 마침내 블랙이 결정적인 공격을 날려 하얀 갑옷의 기사가 든 창을 부러뜨렸다. 그 순간 하얀 갑옷의 기사는 허리에서 칼을 뽑아 잠깐 방심한 블랙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블랙은 휘청 하고 밀려났다가 말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얀 갑옷의 기사가 블랙을 찌른 칼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여왕을 위하여!" 그의 함성에 맞추어 모든 하얀 갑옷의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빌리."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빌리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뜨고 있던 눈은 뭐란 말인가? 잠깐씩 잠에서 깨어나면 보던 풍경이 그대로 천장 위에 펼쳐져 있었다. 슈벨은 긴장된 얼굴을 하고선, 차가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러나 빌리는 더 이상 그 수건의 감촉도 느낄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전신을 감싸 그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거칠게 호흡만 했다 "블랙이.......“ 갑자기 빌리는 나직이 신음하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 속이 하얘졌다. 반쯤 일어났던 몸은 옆으로 기울어져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빌리!" 슈벨이 놀라 그의 몸을 일으켰다. 그는 슈벨의 어깨를 붙잡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리가 후들거려 몸을 오래 지탱할 수 없었다. "가야 해." "무슨 소리야? 누워 있어." "가야 해, 블랙에게." "블랙은 왜? 어더 있는지도 몰라." "난 알아." 슈벨은 그가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부르고 있다. 가야 해." "누워 있어야해. 네 몸는......." 빌리는 제대로 힘도 틀어가지 않는 손으로 슈벨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발음도 안 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며! 그, 그러니...... 내 말대로 해줘." 슈벨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곧 그의 어깨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열자, 원래 나와야 할 것들이 보였다. 회백색의 벽과 나무 기둥,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는 밝은 액자. 빌리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휘청하고 쓰러졌다. 슈벨은 그를 부축하려고 애쓰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프겠지만, 이게 낫겠다." 놀라서 뛰쳐나온 브러지나일의 도움을 받아 슈벨은 빌리를 업었다. 그리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이슬이 내리고 있었고, 여명이 주위를 메우고 있었다. 순간 빌리는 그 여명 속에서 또 한 번 블랙을 보았다. 아까와 달리 고통도 느끼고 있었고, 슈벨의 목소리도 들렀다. 마치 빌리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들이 그 여명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블랙은 투구를 벗고 안개에 젖은 갈색 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빌리는 그가 블랙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알았다. 만약 블랙의 투구 안에 암흑 대신 얼굴이 있다면 분명 저런 얼굴일 거라고 믿어왔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검은 갑옷의 기사가 말했다. "캡틴, 더 이상 지원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전멸합니다. 본대와 같이 후퇴해야 합니다." 블랙은 동족 하늘을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후방을 지원해 아군 전체가 가넬로크로 달아나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 외에 다른 명령은 없었어." "우리 보고 죽으라는 명령 입니다."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눈물을 흘리며 블랙의 어깨를 잡았다. "캡틴, 왕실에서는 오직 당신의 패배만 알고 있습니다. 골드 게이트 전투 이후에 당신이 세운 엄청난 공을 인정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는 겁니까? 차라리 항복하십시오. 어떤 나라에서든 당신이 투항한다면 예우를 다하여 맞이할 것입니다. 캡틴......!" “나는 익셀런의 기사다." 블랙은 부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항복이 아니다." 블랙은 천천히 옆구리에 끼고 있는 투구를 했다. 그리고 벽에 세워진 할버드를 들었다. 울고 있는 기사는 다시 한 번 그를 설득하기위해 애썼다. "사실 어제 아란티아는 이번 네나드로스 평원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저에게 비공식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인 퀘이언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그가 뭐라던가?" "골드 게이트에서 부상 입은 채 싸운 그대를 이겨버리는 바람에 나의 명예도 실추되었다. 돌아와라. 그대가 죽을 곳은 거기가 아니다...... 캡틴, 나디움으로 가십시오. 당신을 인정해 주는 기사도는 론타몬이 아니라 아란티아에 있습니다." "내가 죽을 곳은 내가 선택하며 그 곳은 네나드로스 평원이 아니다. 나는 곧 나디움으로 갈 것이다. 거기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 이상 나는 죽지 않는다....... 이 말을 그대로 퀘이언에게 전하라." 그는 말에 올랐고, 뒤따라 다를 부하들도 말에 올랐다 오직 그의 말을 전해들은 부하만이 무릎 끓고 울고 있었다. 아까 꿈인지 현실인지 마법인지 모를 장소에서 보았던 그 웅장한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몇 명 보이지 않았고, 그들을 뒤따르는 병사들은 모두 다치고 지쳐 싸울 의욕도 없는 자들이었다. 델리 동쪽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행렬은 유령처럼 사라져버렸다. 빌리는 슈벨의 도움을 받아 수레에 앉았다. 브리지나일이 마차를 끌고 있으며, 슈벨은 그를 어깨에 기대어 두고 있었다. 슈벨이 조심스레 물었다. "골드 게이트로 가는 게 정말 맞아?" 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이 부르고 있다고?" 빌리는 슈벨이 의심하는 바를 이해하고 말했다. "그래, 지금 나는 죽기 직전에 헛것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이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아란티아에 온 것이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기사단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빌리는 천천히 고기를 수레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유령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벌이는 또 한 번의 전투가 아침 안개를 뚫고 투명하게 보였다. 검은 갑옷의 기사들은 더 이상 적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북쪽 언덕에서 새까맣게 내려오는 이로피스 병사들의 표적이 되었고, 서쪽에서 말을 타고 달러오는 가넬로크 기마병들의 먹이감이 되어 있었다. 싸우기 전부터, 다친 병사들은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갑옷의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싸움이다." 블랙이 소리쳤다. 부하들은 그의 말에 따라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희생이라 생각하지 마라. 우린 우리들만의 영광을 여기에 높이 세울 것이다. 죽기 위해 싸우지 말라. 우리는 이 곳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전투의 모들 것을 뒤집을 기적과도 같은 생존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빌리는 슈벨의 어깨를 꽉 쥐고 비를 악 물었다. 그리고 더욱 몸을 일으켜 세워라. 그리고 몇 명 되지도 않는 기사단의, 일어나지 않을 기적을 향한 마지막 행진을 바라보았다. 슈델은 빌리가 바라보는 방향을 같이 보고 있었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는 서쪽에 골드 게이트가 보였다. 빌리는 부하들 모두가 죽은 평원에 홀로 남은 블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투구는 부서졌고, 한쪽 눈은 눈물 대신 피를 흘렸다. 깨어진 갑옷 너머로 뜯겨져 나간 살점이 어깨에 붙어 너덜거리고 있었다. 등에는 화살이 두 대나 박혀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마치 산을 이루듯 이로피스와 가넬로코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나는 이 곳에서 죽지 않는다.' 블랙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빌직의 머리를 타고 전해지 있었다. '나는 나디움으로...... 아란티아의 여왕에게 돌아가야 한다. 다시 골드 게이트로 돌아간다면 결코 하얀 늑대들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따르던 기사들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온 내가, 이 곳에서 멈출 수는 없다.' 이미 생포하는 걸 포기한 양측 군대가 블랙 한 명을 겨냥하여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몇 대의 화살이 그를 노리고 있는지 셀 수 없었다. '아란티아의 여왕에게 돌아가야 한다.......‘ 수십 개의 화살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빌리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는 떨리는 입술로 슈벨에게 말했다. “멈춰라." 빌리는 슈벨의 품에서 벗어나 거의 굴러 떨어지듯 수레에서 내려왔다. 슈벨은 그를 막지 못하고 쫓아오기만 했다. 빌리는 휘청거리며 달렸다. 그 사이 몇 번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달렸다. 알라야의 다리가 정면에서 보이는 그 자리에 블랙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언제나처럼 할버드를 치켜들고 있었다. 빌리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의 앞에 털씩 무릎을 꿇었다. 슈벨도 뒤따라왔으나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접근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블랙은 천천히 빌리의 머리에 손을 댔다.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빌리." 빌리는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론타몬의 보검을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두 손으로 들어 블랙에게 바쳤다. "이 칼이 주인을 찾기 위해 저를 이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웰치. 익셀런의 캡틴이시여." 블랙은 천천히 그 보검을 받아 들었다. "왜 골드 게이트로 향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겐 해야 할일이 있었다. 그걸 지키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 사명감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여기뿐이었다." 빌리는 놀라지 않았으나, 슈벨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주저 앉아버렸다. 멀리 수레를 세워놓고 이 쪽으로 걸어오던 브리지나일은 아예 입을 따악 벌리고 굳어버렸다. 블랙의 주위에 괴물처럼 거대한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검은 기사들이 하나씩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수증기처럼 보이던 그들은 곧 형태를 갖추었고, 블랙의 뒤를 지키듯이 일렬로 늘어져서 싫다. 그 숫자는 적어도 백 기는 충분히 넘었다. "과거의 친구들이 다시 들어야 할 목표를 앞에 두고 나를 따라왔구나." 블랙은 뒤를 돌아보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저도 따르게 해주십시오, 캡틴 웰치." 빌리가 휘청거리며 일어나 말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따를 이유는 없다, 빌리." 블랙은 쇠로 된 오른손을 빌리의 머리에 올렸다. 그에게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며 빌리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빌리는 순간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했으나,곧 꼿꼿하게 일어났다. 배를 관통했던 상처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살아오며 지금처럼 정신이 맑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몸이 개운했다. 블랙은 론타몬의 보검을 도로 빌리에게 내주었다. "처음부터 이 보검의 주인은 너였다. 네가 가지고 있어라." "이 검은 오직 익셀런의 캡린 웰치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나의 이름은 웰치가 아니라, 블랙이다. 우리는 모두 이름을 잊어버린 망령들에 불과하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따르는 것이다. 그대가 캡틴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라." 빌리는 블랙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하고 뒤로 물러났다. 백여 마리 검은 말과 백여 명의 검은 기사들이 모두 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다른 한 명이 다가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만약 받아준다면.......” 슈벨이었다 그는 칼을 바닥에 꽂고 고개를 숙였다. “...... 너를 캡틴으로 모시고 싶다, 빌리." 빌리는 잠시 슈벨을 내려다보더니 눈을 차분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면서 말했다. "그럼 제가 앞에 서서 모두를 안내하는 인도자가 되겠습니다." 블랙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곧 아무런 신호도 하지 않았는데, 바닥에서 세 마리 검은 말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짜 말처럼 실체를 갖춘 후 우렁차게 울어 젖혔다. 블랙은 그 중 한 마리에 올라탔다. 그 말은 블랙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아란티아는 지금까지 있어본 적 없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슈벨과 빌리도 그가 내 준 말에 올랐다. 빌리는 보검을 허리에 꽂고, 제일 앞에 서서 골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아란티아가 건국될 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한 번도 적군에 의해 무너진 적이 없는 그 거대한 방어벽 주위로 천천히 안개가 걷혔다. 그리고 게이트를 향하는 이 이름 없는 기사단의 등 뒤로 동쪽의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덮어갔다. (7권으로 계속) 도 서 명 : 하얀늑대들7, 2.아란티아의 여왕 지 은 이 : 윤현승 출 판 사 : 파피루스 출판년도 : 2004년 5월 10일 <지은이 소개/윤현승> 대표작 : 다크문(1999), 헬파이어, 흑호 좋아하는 것들 : 커피, 와인, 삼겹살, 스노우캣, 아즈망가 대왕, 서태지, 노라 존스, 에이브릴 라빈, 최민식, 유시진, 피터 잭슨 <차례> 8.아이린 (1)하늘산맥 (2)괴물 9.카셀 (1)여왕의 도시 (2)늑대들의 만찬 10.빌리 (1)두 번째 골드 게이트 전투 (2)슈벨이 할 일 11.제이메르 (1)르고의 대장간 (2)두 번째 테스트의 의미 12.카셀 (1)칼이 부르는 소리 (2)화이트 게이트 전투 13.새나디엘 (1)퀘이언의 제자 (2)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3)루티아로 에필로그 / 빌리의 꿈 8.아이린 하늘산맥 아이린이 하늘산맥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러나 들어올 때마다 그 괴이함에 그녀는 긴장했다. 하늘을 완전히 가리는 우거진 나무는 가끔 바람도 불지 않는데 움직였고, 바위는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조금씩 바뀌는 지형에 눈을 빼앗기면 고정된 표지가 없는 숲 속에서 길을 잃게 되고, 나라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넓다는 이 산맥 안에서 영원히 헤매게 된다. 길을 잘 찾고 방향 감각이 좋은 사람일수록 혼란이 가중되는 곳이었다. 용기 있는 레인저들이 산맥에 도전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건 이미 얘깃거리도 못 되었다 이 곳은 오직 허락받은 자만이 지나갈 수 있는 신의 산이자, 허락 받지 못한 자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귀신의 산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하늘산맥을 출입할 수 있는 증표인 베나 에사르크라는 이름의 검이 있었다. 루티아의 마스터만 가질 수 있는 증표 중 하나이며, 하늘산맥의 여신 '나디우렌' 의 축복이기도 하고, 하늘산맥의 관리자이면서 드래곤들의 마스터인 '크나딕'이 내주는 출입증이라 할 수 있었다. 아란티아에는 베나 에사르크와 동격인 검이 두 자루가 더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대장장이 르고가 루티아와 가넬로크에서 보낸 두 선물을 합쳐 만든 아란티아의 보검이었고 다른 한 자루는 그녀의 친구이자 현 여왕 수호 기사인 퀘이언이 가지고 있었다. 아란티아의 보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실 아란티아를 상징하는 검은 여왕 수호 기사의 검이었다. 천 년이나 이어오는 두 검의 유래에 대해서 그녀가 아는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또 그녀가 줄여서 베나라고 부르는 이 점의 원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은퇴한 하얀 늑대들 중 최고의 실력자이면서 동시에 다른 셋의 선배 기사였다. 무엇보다 그는 아이린을 울프 기사단에 끌어들인 사람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그녀의 스승은 당시 여왕의 수호 기사인 마스터 그란돌이었으나, 마음속의 스승은 언제나 그였다. 십오 년 전, 그러니까 아이린이 막 스무 살 생일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론타몬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은퇴한 용병들이 모여 만든 용병 양성소 출신이었고, 그 곳을 운영하는 두 웅병을 부모로 두고 있었다. 물론 부모님은, 평범하게 결혼해서 애 낳고 살고 있는 세 여동생과 함께 지금도 잘 살고 있었다. 아이린은 다른 세 여동생에 비해 무서울 정도로 검에 재능이 있었다. 아니, 사실 누구나 그녀의 검을 접하면 공포에 질렸다. 부모님은 그녀에게 검을 주지 않기도 하고, 용병 양성소에 접근하지 못하게도 하며 그녀의 소질을 막아보려 했으나, 열여섯 즈음에는 이미 그녀와 정면으로 겨룰 만한 용병이 없었다. 그러자 부모님은 차라리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소중히 여기자는 뜻에서 적극적으로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구해다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맥을 총동원해 데려온 선생들 중 한 달을 버텨내는 이가 없었다. 아이린은 그 짧은 기간 동안 상대의 검술을 모조리 흡수 해버렸고, 유명 검술 학원 선생이나 전설적인 용병들은 더 있다가는 망신을 당할까봐 밤에 몰래 달아나버리기 일부였다. "이 곳에 소문난 용병이 스승을 찾고 있다고 알고 왔소." 스무 살 생일 바로 전날, 행색이 지저분한 남자가 그녀를 찾았다. 목소리는 젊었으나, 워낙 초라한 옷차림에 수염도 깎지 않아 나이가 굉장히 많아 보였다. 마침 훈련소에는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와 있었다. "난 이제 가르침을 받지 않아요. 그냥 이 곳에서 제가 스승이 되어 밥벌이를 하고 살기로 했거든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그녀는 이 작은 시골에서 어머니의 소원대로 평범하게 살다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여 여동생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오는 선생들마다 망신을 주는 것도 사춘기 때 장난으로나 할 짓 이었다. "아, '스승을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으러 온 거지, 가르치러 온 게 아니오. 소문이 자자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난 테스트를 하러 왔소." 말하는 투가 범상치 않아 그녀는 한 번 겨뤄보기로 하고 목검을 내밀었다. "신붓감 테스트를 하러 온 골 빈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라면, 검술 테스트겠죠? 받아요. 겨뤄보죠." 구경하러 몰려든 용병들이 큰 소리로 웃어했다. 그 지저분한 남자는 그게 자기를 비웃는 소리인 줄도 모르는지, 같이 웃으며 말했다. "굳이 목검을 쓰지 않아도 좋소만? 보아하니 꽤 좋은 칼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그걸 쓰시오." 그의 제안에 아이린은 인상을 구겼다. 용병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얼간이에 대한 응원으로 딘 하고 함성을 질렀다. "날 살인자로 만들려고 그래요?" "아니, 검을 들지도 않은 사람을 테스트 할 수는 없으니까." 그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고, 그녀는 사람과 겨룰 때는 결코 드는 일이 없는 검을 들었다. "그럼 가볍게 하죠." "아, 그것보다 먼저 겨루기 전에 통성명이라도 할 수 있겠소? 내 이름은.......” 그가 말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이름을 듣고 당신의 사정을 알아버리면 괜히 내 마음만 아파져요." “아이쿠, 마음씨가 곱기도 하셔라." 둘은 검을 뽑았고, 훈련소의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멀찌감치 떨어져 둘을 에워쌌다. 아이린이 첫 공격으로 가볍게 검을 내밀자, 그는 느닷없이 후려쳐 그녀의 검을 날려 버렸다. 날아간 검은 공교롭게도 구경하던 용병들 바로 옆에 새워놓은 술통에 거꾸로 박혀 손잡이를 허공에 부르르 떨었다. 깜짝 놀란 아이린의 목에는 어느새 그의 검이 들어와 있었다. 멀리서 굳이 망신당하러 온 얼간이를 구경하기 위해 느긋하게 앉아있던 용병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이름을 알고 싶어지지 않소?" 그는 검을 되돌려 뒤로 물러섰다다. "이게 테스트였다면 당신은 불합격이었소." “다시!" 아이린은 홧김에 그리 말했다가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용병 중 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아버지를 꺾은 이후로는 져 본 적 없어, 줬을 때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승부를 처음부터 하자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정중히 말했다 "미안해요. 시합의 결과였다면, 패배를 인정하겠어요. 하지만 이게 시합이 아니라 테스트였다면...... 다시 기회를 주세요." "그럽시다. " 그는 웃으며 그녀의 검을 주워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니 최선을 다하시오." 갑자기 그의 몸이 커 보였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아이린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그에게 말했다. "죽여도 좋나요?" '날 죽이면 합격이라고 말하고 죽어 드리지." 약이 오른 아이린은 몸의 힘을 마지막까지 끌어 모아 칼을 휘둘렀다. 두 자루 검이 닿는 순간 그녀의 검이 깨져버렸다. 그녀는 손바닥이 찢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반면 그는 손바닥을 입으로 훅 불기만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 자세는 가르칠 게 없군 그래. 누구에게 검을 배웠소?" "부모님께." 박살난 검을 내려다보며, 아이린은 말이 없었다. 그는 지저분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칼은 미안하게 됐군 " "칼은 상관없어요? 합격이에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칼이 내 쪽이 더 좋아 정당한 승부랄 수는 없고, 또 그 정도로 합격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숙하다고 해야겠군." 그는 칼을 도로 집어넣더니 허리띠를 풀어 잘을 칼집째 내주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소? 이 칼을 내게 도로 가져다주시오. 일년 후 아란티아의 나디움에서 그 칼을 얌전히 돌려준다면 합격이고, 실패하면 불합격이오." "내가 불합격하면 당신은 이 칼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 아닌가요?" "그 칼은 스스로 주인을 찾아가는 칼이니 내가 아닌 누군가의 손에 오래 있지 못할 거요. 그 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테스트니까, 당신이 설사 그걸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더라도 빼앗은 그 사람 역시 그 칼을 오래 가지고 있지 못할 거요. 결국 그 칼은 나에게 돌아올 거요." 일 년 후 나디움으로 그 칼을 가지고 갈 때까지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로핀 울프. 아란티아의 마스터 그란돌의 제자요." "제 이론은 아이 린이에요." “그 칼의 이름은 베나 에사르크요. 잘 보관하시오." 로핀이라는 남자는 웃으며 빈 손으로 그 곳을 떠났다. 그녀는 당장 여행 준비를 했다. 부모님은 무척 서운해 했으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덕에 그런 마음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생일날 아침, 그녀는 여행을 떠났다. 두어 달이면 도착할 줄 알았던 아란티아였으나, 떠돌아 다니는 즐거움에 이로피스에서는 반 년을, 카모르트에서는 석 달을 보냈다. 이렇게 즉거운 생활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 이십 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 사이 그녀는 로핀이라는 남자가 내준 칼의 가치를 알았다. 이로피스의 유명한 기사들은 경외를 표했고, 유명한 도적들은 그 칼을 보자마자 탐냈다. 이상한 마을의 이상한 괴물도 그 칼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고, 사악한 힘을 가진 마법사도 그녀의 검술과 베나의 힘을 꺾진 못했다. 이 귀한 칼을 서슴없이 내준 로핀이라는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날이 갈수록 커져, 그녀는 여행을 멈추고 아란티아로 향했다. “로핀 울프라는 남자를 만나려면 어떻게 가야 하죠?" 그녀는 화이트 게이트를 지나 나디움에 들어서서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첫 번째로 잡은 행인이 알고 있을 만큼 그의 이름은 유명했다. "여왕 폐하의 성 옆에 있는 작은 건물에 가서 물으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 거요." “고마워요. 그런데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이죠?" "울프 기사단의 하얀 늑대요." 그녀는 그게 뭔지 몰랐다. 그냥 괴상한 칭호라는 생각만 했다 하늘산맥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가끔 천둥이 쳤다가 눈이 내리고, 한 시간도 안 되어 눈이 비로 바뀌는 곳이니 안개 낀 정도야 이상할 게 없지만, 그녀는 당황했다. 칼이 출입을 허락한다 해도 길까지 안내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며 나디움으로 뻗는 길은 하나 밖에 알지 못하니,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어 아는 길을 벗어나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갈 길이 바쁘긴 해도 한 걸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를 들고 계속 나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이곳 날씨의 변덕스러움을 믿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렸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제이메르를 두고 온 게 걱정이었다. 젊은 혈기에 검은 기사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무리하게 캡틴 울프를 구하려다 다치지나 않았을까. 제자를 위험에 빠뜨린 캡틴 녀석이 얄미워졌다. 그리고 데리고 왔으면 이런 안개 속에서도 자신 있게 길을 안내해줬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그의 부재가 실감났다. '안고 있기도 좋았지...... 물론 제이는 하늘산맥의 출입을 허락 받은 이가 아니었으므로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사실 울프 기사단에는 캡틴이라는 존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로핀을 만나기 위해 처음 울프 기사단을 찾았을 당시에도 캡틴은 없었다. 여왕의 수호 기사인 그란돌은 울프들의 교육에 방관했고, 리더를 굳이 앞에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다들 그란돌을 마음속으로 따르니 캡틴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란돌은 마흔다섯으로 현역으로 뛰기는 무리인 나이였기에 슬슬 다음 수호 기사를 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첫 번째 수제자이자, 당시 울프 기사단의 한 명뿐인 하얀 늑대 로핀을 점 찍어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핀은 워낙 방랑벽이 심한데다가 스스로 마스터를 꺾기 전에는 마스터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터라 강제로라도 그를 캡틴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무리야." 아이린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스물 한 살인 아이린은 아직 하얀 늑대가 아니었다. “마스터 그란돌은 여왕의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분이다. 게다가 그 분의 검술은 인간의 영역에서 반 발자국 정도 벗어나 계시지. 아마 늙어서 지팡이만 짚어도 우리 정도는 이길 거다." 재능이 흘러넘치는 울프들도 마스터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로핀은 의견을 달리했다. “난 아직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마스터도 마찬가지고, 스승이 전력을 다해 제자를 죽일 리도 없고, 제자가 전력을 다해 스승을 죽일 수도 없지 않은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아이린은 평생 가도 로핀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어느 누구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이린의 예상은 얼마 안 가 깨졌다. 마스터 그란돌에 관해 로핀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실력 역시 엇비슷한 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메이루밀이었다. 농담을 좋아했고 무리를 잘 이끌 줄 아는 녀석이라, 오래 전부터 기사단 내에서 확고한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어느 날, 마스터 그란돌은 로핀과 아이린, 메이루밀을 불러 여왕 앞으로 데리고 가 소개했다 “로핀에 이어 이번에 하얀 늑대들로 임명할 인재들입니다, 폐하.” 놀란 건 아이린이었다. 그녀는 무례하게도 여왕 앞에서 소리쳤다. "저는 아직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커튼 너머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여왕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스승의 판단에 따르지 않을 거라면 어째서 스승 아래 있느냐?" 아이린은 찍소리도 못 하고 졸지에 하얀 늑대라는 부담스러운 직책을 맡게 되었다. 여왕은 셋과 인사를 나누더니 물었다. "내 예지와 통찰력이 마스터 그란돌을 따르지 못하는 게냐? 한 명이 더 왔어야 되지 않느냐?" 여왕의 말에 그란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울프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을 회복하기 전에 하얀 늑대의 이름을 안겨준다면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의 농담에 여왕은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기다리겠다. 허나 긴 시간이 걸리면 안 될 것이다. " 평소 자주 여왕과 만나오며,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로핀은 그 말에 뼈가 있다고 여겼다. "긴 시간이 걸리면 안 된다 라고 하심은 근 시일 안에 안 좋은 일이 터질 것을 예지하셨기 때문입니까? 혹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걱정거리라도?" "지금 울프의 기사가 몇 명이냐?" 여왕이 물었다. "서른 여덟입니다. " "더 늘게 될 것이다. " “그건 어떤 의미 입니까?" "아란티아는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나라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크랜드에 있는 모든 인재를 끌어들이지. 천 년 전 옐로우 게이트가 레드 게이트로 이름이 바뀌게 된 그 전쟁 이후, 울프의 기사가 스무 명이 넘은 적이 없다. 때론 수호 기사한 명만 내 옆에 있기도 했지. 그런데 지금의 숫자는 너무 많구나." "제가 무리하게 대륙 각지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인 탓입니까?" 로핀은 당황하며 물었다 "아란티아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네가 끌어들인다 한들, 그들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하dis 늑대가 세 명이나 되는 건 분명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여왕의 말에 아이린은 하얀 늑대라는 칭호를 받은 기쁨이나 부담감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아이린이 그 두려움의 실체를 알기까지는 3년의 세월의 필요했다. 그러나 로핀은 이미 그 말을 들은 직후 뭔가를 예감했는지, 두 사람의 하얀 늑대가 탄생한 바로 다음 날 벽에 걸어두었던 베나를 꺼내 들었다. "또 어딜 가려고?" 아이린이 물었다. 최근 로핀에게 검술을 지도 받는 즐거움에 사는 그녀였던 터라 그가 떠나는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길을 떠날 준비를 하는 로핀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일 년 안에 돌아오겠다. 실력 있는 녀석들이 찾아와 내 이름을 대거든, 네가 알아서 테스트 하여 울프의 기사들로 받아들여다오. 아, 그리고 폐하께서 말씀하신 또 한 명에 대해서인데, 네가 좀 맡아줘야겠다." "그 녀석이 누군데? 내가 보기에 현재 울프들 중에 루밀이나 너 정도의 실력자는 없어." "퀘이언이다." "그 녀석이?" 훈련을 하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녀석을 굳이 여왕 폐하가 언급한 거 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마스터께서 염두에 둔 기사는 분명 퀘이언이야. 네가 지벼봐 줘. 그러고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를 하얀 늑대로 만들어 놓아라." 납득할수 없었다. 그러나 오빠처럼 생각하고 따르는 로핀의 명령이니 시키는 대로 했다. 퀘이언은 루밀이나 로핀처럼 아이린보다 네댓 살이나 많았는데도, 수줍음이 많고 소심했다. 그에게 자신감을 부여하는 일은 검을 전혀 모르는 초보자에게 울프가 될 실력으로 키워놓는 것보다 어려워 보였다. 발전하는 것도 더했다. 서른여덟 명 중에서 굳이 순위를 꼽으라면 서른여덟 번째로 꼽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울프의 두가지 테스트에 통과한 건 기적과도 같았다. "넌 누가 울프로 뽑아줬냐?" 많은 이들이 로핀의 소개로 여길 왔으나, 퀘이언은 아니었다. 아이린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어쩌다 보니.......” 퀘이언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린은 더 묻기도 짜증나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냥 몸으로 움직이는 게 낫겠다. 로핀의 부탁도 부탁이지만 너처럼 행동하는 녀석은 내 성격에 가만 못 둔다. " 아이린은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그를 훈련시켰다. 어쩌면 지쳐서 그만두게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1년 동안 그를 실컷 괴롭힌 후에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의 자신감 부재는 실력 이전의 문제였다. 가끔 대결을 할 때 열에 한 번이긴 하지만 그녀의 빈틈을 제대로 치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럴 타이밍에 한 번 정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쳐도 되나?' 그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순식간에 오고 가는 공격과 방어 속에서 그런 망설임은 치명적이었다. 빈틈을 만들어서 그 부분을 치는 걸 즐기는 아이린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그를 훈련시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메이루밀에게 물었다. "이런 식 인데, 대체 어떻게 퀘이언을 하얀 늑대로 만들지?" 그는 난색을 표했다. "사실 나도 몇 번 가르쳐봤는데, 녀석의 소심증은고치기 힘들겠더라. 사람의 성격이란 게 그리 쉽게 바뀌냐? 그래도 울프의 기사잖냐? 어떻게든 잘 해봐." "그건 동료의 부탁을 외면하는 우회적 발언 같다?" 메이루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했든 최소한 녀석은 포기는 안 하잖아." "응? 포기?" 그의 말이 옳았다. 그리고 여왕이 어째서 퀘이언을 하얀 늑대로 지목했는지 알게 되었다. 퀘이언은 이미 아이린이나 메이루밀조차 소화시키지 못할 훈련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의 체력은 확실히 울프의 기사들 중 최고였다. 훈련 하는 양에 비하면 실력 발전은 굉장히 더딘 편이었다. 그리나 분명 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확실하게. 그러나 조금이라도 실력이 늘면 다른 사람과의 시합에 나서길 주저하지 않는 다른 울프들에 비해 그는 여전히 망설였다. 마치 뭔가가 그의 가슴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남들 다 자는 밤에 혼자 나와 웃옷을 벗고 땀을 흘리며 훈련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퀘이언." "아이린!" 퀘이언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전에는 그게 꼴불견이었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못 견디게 귀여워졌다. 밀도 깊은 밤이라는 시간도 크게 한몫하고 있었다. "이런 걸 말하긴 좀 갑작스럽긴 한데, 부디 거절하진 말아주라. 내 방으로 좀 와 줘." "왜?" "왜 부르는 건지 모르면 오지 마."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치게 복스러운 말이었으나, 당시에는 진지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접근이라고 생각한 말이었다. 서로의 끓어진 얼굴을 가리는 어둠도 큰 몫을 했다. “난 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이게 서로를 책임져야 할 관계로 발전하는 건 원하지 않아 우린 어차피 늑대들이니까." 퀘이언은 미소 지었고, 아이린도 겨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 날밤 둘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몇 명 정도였고, 그나마도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퀘이언도, 아이린도 후에 그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는 일 없이 그저 소중한 추억으로만 남겨두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노린 건 아니었다. 아이린은 순전히 자신의 호기심과 이겨내기 힘든 젊은 날의 열정으로 퀘이언을 안아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날을 기준으로 퀘이언에게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아이린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바라던 대로 그가 발전하였으나, 그렇다고 자기를 따라잡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로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메이루밀은 모두의 중심이 되어 갔고, 퀘이언은 마침내 하얀 늑대의 자리에 올라섰다. 아이린도 그란돌에게 가끔 지도를 받으며 나름대로 실력 발전을 이뤄가고 있었으나, 무언가 불만스러웠다. 그녀는 이 엘리트 집단 속에서도 확실하게 부각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도 아니었다. 로핀이 돌아오면 퀘이언은 우선 제쳐두고라도, 당장 3인자로 물러나게 되는 게 싫었다. 그러나 메이루밀은 단시간에 따라잡기에 너무 높은 벽이었다. 전쟁이 터졌다. 로핀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그가 보냈다는 검사들만 몇 명 찾아왔다. 최종적으로 울프는 오십여 병으로 늘어났다. 론타몬이 가넬로크를 무너뜨렸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을 무렵, 로핀은 돌아왔다. 지저분한 행색은 처음 아이린을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리고 한 팔이 없었다. 왜 외팔이가 되었는지 아무도 물을 수 없었다. 용기를 내어 아이린이 운을 띄워도 그는 웃기만 하고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마스터와 단 둘이서 얘기하는 것을 엿듣고 사건의 내막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 자가 그리 강하더냐?" "적어도 마스터와 비슷한 실력이었습니다. 제가 들은 소식에 따르면 현재 론타몬의 익셀런 기사단 중 한 명이라는데, 왜 그가 캡틴이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 "이름은?" "듣지 못했습니다. " “어떻게 살아남았느냐?" "저도 그 자의 팔을 베었습니다. " "대륙을 지배할 두 영웅이 서로 팔을 잃었구나." 로핀은 그란돌의 한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스터. 이미 저를 제외한 세 하얀 늑대들이 저를 능가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마스터는 로핀이 팔을 잃은 것에 대해 몹시 슬퍼했다. 그러나 그 슬픔을 오래 간직할 여유도 갖지 못했다. 론타몬은 가넬로크를 무너뜨렸던 그 엄청난 병력을 이끌고 아란티아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하늘산맥의 기후 변덕을 탓할 수는 없었지만 안개는 옅어지지 않고 되려 짙어졌다. 구름 한가운데로 들어간들 이보다 습기가 많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쯤 골드 게이트로 향하고 있을 검은 기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으나, 그녀는 마냥 기다려야 했다. 젊어 역경은 나이 들어 그 사람의 행동거지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한 나라의 위기를 젊어진 경험이 있는 그녀이기에 꾹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안개는 걷힌다. 움직이지 마라, 아이린.' 급한 마음에 무리해서 움직여 봐야 길을 잃을 위험만 커진다. 그녀는 망토를 몸에 감고 체온을 보존했다.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무에 머리를 기대었다. 론타몬의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울프의 기사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전쟁 경험이 없었고, 모두를 이끌 캡틴도 없었다. 또 젊은 데다가 각자의 실력에 자신감도 넘치는 탓에, 당장이라도 싸움터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왕실에도 비상이 걸렸다. 책상 머리에서 전략만 무수히 연구한 아란티아의 늙은 장군 세 명과 하얀 늑대들, 마스터 그란돌 그리고 여왕이 모여 마지막 작전을 모색했다. 각 게이트의 하이로드들이 제공할 병력과 왕실의 병력을 합쳐 총력전을 펼치자는 말이 오고 갔다. 여왕은 말이 없었다. 세 명의 늙은 장수들 중 울프의 기사 직에도 경험이 있는 이가 말했다 "각 게이트는 한 명이 열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성벽이 높고 두텁습니다. 게이트마다 걸어 잠그고 적의 습자를 줄여나가면, 지금 당장은 수적으로 열세라고는 하나 골드 게이트 앞에서는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 "어찌 생각하느냐?" 여왕이 네 명의 하얀 늑대들에게 물었다. 로핀은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백을 쓰러뜨리겠습니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천도 무너Em리죠. 그러나 만을 상대할 전략 전술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이린도 동의했다. "저 역시 전공은 일 대 일입니다. 백 단위가 넘어가는 싸움에 관해서는 무지합니다." 메이루밀이 바로 이어 말했다. "전 제너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 셋 모두 여왕의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무표정하게 다음 시선을 퀘이언에게 넘겼다. "묘안은 아닙니다만.......” 망설이던 퀘이언이 말했다. 모두의 눈빛이 그에게 꽂혔다. “말하라." "모든 게이트를 열어 통과시킨 후 그들을 골드 게이트 앞까지 들입니다. 거기서 싸우는 건 어떻습니까?" 늙은 장수가 소리 쳤다. "말도 안 되오." "하얀 늑대의 의견이다, 제너럴 존중하라 " 여왕은 근엄하게 꾸짖고 손을 내밀었다. "계속하라, 퀘이언," "예, 폐하. 제너럴의 작전은 어지간한 침략은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대는 론타몬입니다. 블루 게이트를 막으면 적군 천을 죽일 수 있겠죠. 그럼 그들은 그레이 게이트에 오천을 끌고 올 것이고, 그레이에서 오천이 당하면 레드에는 일만을 끌고 올것입니다. 그 때 당하는 피해 규모는 이 작은 나라가 감당해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퀘이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쓰이지도 많은 아란티아의 작전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그들에게 모든 게이트를 내주십시오. 그들은 저항 없는 아란티아를 손쉽게 잡아먹으며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골드 게이트에 도달할 병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란티아의 병력은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골드 게이트 앞에 모든 병력을 배치시킨 후 거기까지 도달한 군대를 무너뜨린 후 역습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 "적이 우리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신중하게 공격해 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소? 단 한 명의 손실이 없는 엄청난 병력이 골드 게이트에 집결할 가능성은? 너무 지나친 도박이오." 제너럴은 회의적으로 말했다 "그들이 이 대륙을 휩쓸어버린 기간을 생각해보십시오. 고작 일 년입니다. 그 사이 그들이 각 나라를 제대로 점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가넬로크였지, 아란티아가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이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론타몬의 모든 군대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항하면 바로 그 본대가 이쪽으로 창을 돌릴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오?" "전쟁이 벌어진 후에 계속 저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이가 있었습니다. " "누구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 다들 말을 잃었다. 오직 여왕만 희미하게 웃었다. "나 역시 게이트마다 막아서며 나의 아이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왜 모두들 울프 기사단의 존재를 모른단 말이냐? 이 땅을 지키기 위한 존재가 이 땅을 지킬 것이다. 마스터 그란돌, 아란티아의 보검을 가져오너라." 다들 놀랐다. 그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검은 날을 가진 칼날 이었다 퀘이언이 말한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가 울프 기사단에 선물한 금속과 가넬로크가 보내온 드래곤의 보석을 합쳐 르고가 벼린 검이다. 지금부터 이 칼을 아란티아의 보검이라 명하겠다. 그리고 이 나라를 지킬 검이니, 울프 기사단에 선물하겠노라. 회의를 끝내고 하얀 늑대들은 울프 기사단을 이끌 캡틴을 정하라. 그 기사가 이 칼의 주인이 될 것이다. 루티아와 드래곤과 나의 축복을 받은 이 칼의 의지가 선택한 진정한 영웅이 쥐었을 때, 이 검은 성스러운 빛을 발할 것이다. " 회의가 끝나고 더 자세한 작전 회의를 위해 모두 해산했다. 그러나 하얀 늑대들은 그 칼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문제로 밤새도록 고민했다. 캡틴을 정하는 데 있어서는 여왕도, 마스터도 개입하지 않았다. “난 모두의 선배 격인 로핀을 추천한다." 메이루밀이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로핀은 즉시 거절했다. “이미 모든 울프 기사단이 루밀을 캡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 비록 대부분의 울프들에게 있어 낳아준 부모 격이긴 해도 길러준 부모는 루밀이다. " “나도 동의한다. 루밀이 우리의 진정한 캡틴이다." 퀘이언이 거들었고, 메이루밀은 무척 난감해했다. 말 없는 아이린에게 로핀이 대답을 강요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이린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뭔가 좋은 대답이 나을 거라고 기대한 셋은 새벽의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아이린이 말했다. “로핀. 르고가 너의 칼을 만들었다. 마법의 힘을 담아 만든 검이라 했으니 베나 에사르크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베나는 나에게 줘. 그건 내 점이다." "음, 예전부터 너에게 주고 싶은 검이긴 하다만, 너의 검이라고 확신이 선 이유라도 있냐?" "내가 아란티아를 지키는 기사가 되고자 한다. 모든 싸움에 있어 내가 앞에 서겠다. 그리고 이 칼 역시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는 벽에 걸린 베나를 들어 아란티아의 보검 옆에 박았다. 그녀는 나직이 주문을 외웠고, 칼날에 박힌 고대의 문자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칼의 주인이었던 로핀이 누구보다 놀랐다. “난 몰랐다! 어떻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 "어느 날 이 칼이 내게 이 말을 가르치더군. 마치 꿈에서 암시를 내러는 것처럼. 그제야 나는 이 칼의 힘을 깨달았지." 로핀은 크게 기뻐하며 동의했다. "그럼 당연히 그 칼은 너의 것이다. 기꺼이 주도록 하지." "루밀. 르고는 너를 위한 무기도 만들었다. 한 자루 큰 칼과 한 자루 창. 둘 모두 어울릴 거라고 본다." "영광이군." 아이린의 말에 메이루밀은 작게 웃었다. 아란티아의 울프들은 모두 르고가 만들어준 개개인의 무기가 있다. 그러나 하얀 늑대들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한 자루 더 만들어지는데, 이제야 그 무기가 지급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왜 무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나, 둘은 자연스레 다음 차례인 퀘이언을 보았다. 아직 아무도 겁이 나서 손을 대지 못하는 보검을, 아이린은 서슴지 않고 덥석 집었다. "나는 아란티아의 보검 역시 스스로 주인을 선택할 줄 안다고 믿는다." 그녀는 퀘이언에게 검을 내주었다. 퀘이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말했다. "르고가 그러더군. 이상하게도 너를 위한 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다시 만들려고만 하면 날에 성스러움이 깃들여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부러진다고 그랬다. 마치 뭔가가 방해하는 것 같아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불안해했지. 그래서 나는 이 보검으로 그게 상서롭지 못한 일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시험하고자 한다. 퀘이언, 이 칼을 받아라. 네가 주인인지 아닌지는 칼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 "난 캡틴 감이 아니야.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아니, 어쩌면 네가 더 잘 알지 모르지." "난 내 판단은 신뢰하지 않는다. 너 역시 너의 판단을 신뢰 할 수 있어?" 퀘이언은 보검을 받지 않았다 "그럼 로핀에게 묻자." 로핀은 턱에 괴고 있는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아이린의 의견에 찬성한다. 적어도 난 우리 중 누가 캡틴을 맡아도 나름대로의 역할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비록 난 루밀을 추천했으나, 그렇다고 퀘이언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칼에게 선택을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르고가 칼을 만들지 못한 이유가 이미 퀘이언에게 주어질 무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아이린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로핀의 말에 퀘이언은 화를 냈다. "자신의 판단대로 해야 한다! 이런 무생물에 판단을 대넘기는 건 안 될 일이야." "정말 무생물일지 아닐지는 네가 소유해보면 알겠지." 아이린은 칼을 그의 얼굴 앞으로 더욱 가깝게 들이밀었다. 퀘이언은 결국 그 칼을 잡았으나, 자신을 캡틴으로 인정하지는 못했다. "그럼 적어도 시간을 줘." "억지로 맡기지는 않는다. 너의 판단이 무엇이든 우린 찬성하겠다. " 로핀이 결론을 내렸고, 마스터 그란돌도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 주었다. 울프 기사단에도 그 소문이 퍼졌으나, 크게 동요는 없었다. 모두가 반대할 줄 알았던 퀘이언은 그 잔잔한 반응에 되려 놀랐다. 한 때 울프들 중에서 가장 약한 축에 속했던 퀘이언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도 말보지 않았다. "너 자신을 믿어라." 아이린의 마지막 조언이었다. 론타몬이 쳐들어오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퀘이언은 익셀런의 기사단이 골드 게이트 앞에 도달할 때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 했다. 근처에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이린은 누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들 즉시 일어났다. 젖은 머리와 몸에 걸치고 있던 망토에서 물기가 후두둑 떨어쳤다. 다행히 안개가 걷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뿌연 시야 너머로 뭔가 커다란 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산맥에는 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하늘산맥이 아닌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해괴한 동물들은 가끔 묘한 눈동자로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홀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급적 나무 위는 보지 않고 걸어왔었다. 바다에서는 사이렌의 노래에 유혹 당해 암초에 뱃머리를 들이받는다면, 하늘산맥에서는 나무 위의 동물들이 길을 잃게 만들었다. 처음 하늘산맥을 찾은 것은 루터아의 그랜드 마스터가 초대해서였다. 그는 하늘산맥을 정원처럼 거니는 사람이었다. 그가 함께하면 이 곳은 그저 경치 좋은 숲이었다. 그러나 그가 옆에 없는 이 곳은 잘못하면 길을 잃어 영혼이 될 때까지 헤맬 괴물의 아가리 속이었다. 그 짧은 경험 중에 그녀는 위험한 동물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대체로 하늘산맥의 육식 동물은 인간이란 존재를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을 경계하는 편이지, 잡아먹으려 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또 인간보다 큰 동물은 대체로 순했다. 아이린은 점점 옅어지는 안개 너머로 접근하는 등물이 위험한 동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 하나를 부러뜨리고서 이 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대단히 수상했다. 녀석도 이 쪽을 경계했다. 그리고 부러뜨린 나무를 질질 끌어당기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안개가 옅어지며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린의 세 걸음 앞에 나타난 그 동물은 두 다리로 서 있었고, 털은 길고 코는 뭉툭했으며 귀가 뺨을 덮을 정도로 긴 원숭이 같이 생겼다. 그리고 녀석의 눈은 눈동자가 없이 피가 떨어질 것처럼 통제로 끓었다. 누군가 억지로 사악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저 눈을 만들지 않은 이상에야 신이 저런 눈을 창조하지는 많았으리라. 아이린은 본능적으로 그 괴물에게 위협을 느껴졌다. 괴물의 코에서 콧김이 푸욱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사람 두 명 분의 키만한 나무를 아이린에게 집어 던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날아오는 나무는 다행히 다른 나무에 걸려 도로 바닥에 떨어졌다.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아이린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린은 그 괴성에 귀가 아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들고 있는 칼을 무르지는 않았다. 그녀의 칼은 달려드는 괴물의 옆구리를 그었고, 괴물의 손들은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녀석은 방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다가 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칼을 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괴물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뭐였지?" 아이린은 다시 괴물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개는 걷혔고, 곧 태양도 보였다. 그녀는 칼을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손톱에 스친 어깨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괴물 밤이 왔다가 낮이 오고, 어느새 저택이 되었다. 배가 고프면 나무 열매를 따먹고, 목이 마르면 개울의 물을 마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렸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지 않았으나 잠을 잘 틈도 없이 계속 걸었다. 날이 어두워지며 다시 앞이 잘 보이지 않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 녀석일까?' 그녀는 다친 어깨를 감쌌다. 이상하게 약초가 먹히질 않고 상처가 곪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나 오래 달리지 않아도 금방 지쳤다. 주위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때론 술 취한 남자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무덤가에서나 들릴 법한 괴상한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점점 커진 기분 나쁜 소음은 사방에서 맴돌았다. "들어라, 하늘산맥의 괴물들아. 너희들의 정체가 무언지는 모르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아이린은 베나를 꺼내 바닥에 박고 고대어로 주문을 외웠다. 그 뜻을 아는 사람은 고대어를 전공한 루터아의 마법사 정도였고, 그녀 역시 고대어라고는 그 주문 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치 종교인이 아침저녁으로 반복하는 기도문처럼 그녀에게 그 주문은 익숙했다. 칼날에 새겨진 글자에서 붉은 빛이 새나와 어둠을 몰아내자,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까지 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 빛을 겁내고 있는 것이지, 아이린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린은 칼을 그대로 바닥에 꽂아둔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이미 장기전을 예감했다. 어둠을 자기들의 무기로 삼는 존재는 어둠이 끝나는 걸 두려워한다. 그들은 베나가 보여주는 마법의 빛과 아침의 햇살, 양쪽을 두고 고민하다가 새벽에 기습을 하던가, 그냥 후퇴할 것이다. 베나는 밤의 어둠을 이겨낼 줄 아는 칼이었다. 그녀의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스스로 빛을 거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들이 다가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이렇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언제나 그 날 밤이 기억났다. 그녀가 일생 동안 펼쳐온 수많은 시합과 대결 중에 가장 격렬했던 싸움이기에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가끔 머리 속에 떠오르곤 했다. 퀘이언의 말대로 론타몬의 주력이 겨우 블루 게이트 앞에 도달 했을 무렵, 선두에 선 익셀런 기사단은 이미 레드 게이트를 통과해 골드 게이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뭔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디움으로 나 있는 직선 도로 덕에 다른 마을은 거의 피해를 보지도 않았다. 큰 길 근처의 마을 사람들은 일부러 하늘산맥에 가까운 마을로 피했으나, 그것은 익셀런 기사단을 피해 달아난 게 아니라, 뒤따라 올 론타몬의 군대를 피한 것이었다. 퀘이언은 익셀런 기사단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전란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란티아의 백성들은 커다란 비극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울프 기사단을 독려했다. "내 팔을 벤 자가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르겠군." 로핀은 골드 게이트의 성벽 앞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익셀런 기사단이 노숙을 하고 있는 자리에 횃불이 희미하게 보였다. 옆에 있던 아이린이 눈을 밝히며 물었다. "누구야, 그게?" "이름은 나도 모른다 " 아이린은 그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가보자." "무슨 엉뚱한 소릴? 가만있어도 저 녀석들은 내일 여기로 올 텐데 뭐가 급해서 ........” "그래도 가보자." 그녀는 벌써 말을 끌어내고 있었다. 둘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성문을 빠져나가, 익셀런 기사단이 묵고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물론 그들이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적국의 기사 두 명을 환영해 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린은 당당했다. "나는 울프의 기사단이다. 그 쪽에서 제일 강한 녀석은 나와라."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창피한 도전장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진지했고, 상대 쪽 기사단에서도 그녀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나다." 한 명의 키 큰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덩치는 울프 기사단 누구와 겨뤄도 지지 않을 정도로 컸고, 갈색 머리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할 정도로 눈빛은 강렬했다. 아이린은 눈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억지로 눈을 치켜뜨며, 뒤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로핀에게 물었다. "저 녀석이야?" "아니 " 아이린은 상대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가 제일 강하냐? 이름이 뭐냐? 내 이름은 아이린 울프다." "나는 익셀런의 캡틴이며 이름은 웰치다." "아, 캡틴이시라? 내가 울프 기사단의 최강이니 내일 전투에 앞서 서로의 실력도 측정해 볼 겸 한 번 겨루자." 아이린은 상대방이 자신을 여자라고 무시하거나, 아니면 아예 대결을 거부하거나 혹은 포로로 잡아들이려 할 것을 기대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 공격해 온다면 싸우면서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웰치는 바로 수긍했다. "좋다. " 그는 기다리라고 하더니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왔다. 그 동안 다른 익셀런의 기사들은 아이린과 로핀을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로핀이 아이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잘못 건드린 것 같다. 저 녀석들, 진짜 기사다. 천방지축인 우리 기사단에 비할 바가 아니야." "이제 못 도망간다. " 아이린은 베나를 꺼내 앞으로 나섰고, 웰치도 묵직한 할버드를 들었다. 그 사이 익셀런의 기사 중 하나가 등불을 하나 들고 로핀 쪽으로 다가왔다. 로핀은 약간 경계했으나, 그 기사는 들고 있는 등 불만 건네주었다. "그 쪽이 잘 안 보여서 조명을 하나 둔 것뿐이다. 걱정 마라. 승패와 상관없이 돌려보내 주겠다. 지금까지 어떤 기사단도 이런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으니, 나도 거기에 걸 맞는 예우를 해주겠다." 웰치가 말했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서 웰치라는 남자의 실루엣에 압도되지 않으려고 그녀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나야 고맙지." 아이린은 이미 상대를 아란티아의 침략자가 아닌 대결을 위한 동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둘은 서로에게 시합 전 보여야 할 예도 갖추었다. 잠시 서로를 견제하던 둘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월치의 무거운 공격에 아이린의 몸이 통제로 들려 로핀의 옆까지 날아갔다. “와줄까?" 로핀이 말했다. "아니. 나 죽으면 대신 싸우지 말고 시체나 수습해서 돌아가 줘." 그녀는 패배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농담을 했다. 그녀의 공격에 이번에는 웰치가 휘청거렸다. 몇 번의 공격을 주고받은 후에는 그도 놀라는 눈치였다. "아란티아의 이런 기사가 있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참고 있었는가? 어째서 이전의 게이트에서는 막지 않았는가?" 어느 쪽도 상대에게 커다란 빈틈은 보이지 않아, 싸움이 길어졌다. 아이린은 이제껏 이렇게 흥분되는 싸움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로핀이나 루밀, 퀘이언과의 대결에서였겠으나, 그들과는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었다. 아이린은 머리 끝이 곤두서는 긴장감 속에서 베나가 이토록 자신의 뜻을 잘 따라 움직여 주는 것에 감사했다. 익셀런 측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고, 로핀도 잔뜩 긴장해있었다. 거의 한 시간이나 이어진 그 긴 싸움의 승부를 결정 지은 건 실력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고 집중력이었다. 이미 체력의 한계를 느낀 아이린의 걸음이 느려진 것을 보고 웰치는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체력은 떨어졌어도 마지막까지 이기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던 아이린은, 체력의 우위를 앞에서 어서 싸움을 끝내고 싶다는 웰치의 빈틈을 노리고 그의 옆구리를 베었다. 칼날이 스치는 순간 아이린은 즉시 돌아서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게 결정타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괜히 목을 찌르려고 달려들었다가는 역습을 당할 걱정에 신중히 몸을 사리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웰치는 일어나 잠깐 어둠 속에 서서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부상당한 그를 부축하려고 익셀런 측의 기사가 몇 명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린을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이게 아란티아의 기사냐?" 부상당했으나 부상당한 것 같지 않았고, 패배했으나 패배한 것 같지 않았다. 웰치는 강한 의지를 보이며 혼자 힘으로 일어났다. 허리를 따라 바지를 검게 적시는 피의 양을 보니 결코 가벼운 부상이 아닌데도 그는 비틀거리지 조차 않았다. 오히려 일어나 있기도 힘들어 로핀의 어깨에 손을 짚은 아이린이 패배한 쪽 같았다. "너의 이름을 기억하겠다, 아이린 울프. 언제고 다시 한 번 겨룰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난 후라도." "없을 것이다. 내일 너희들이 골드 게이트로 밀고 들어오면 우린 너희들을 전멸 시켜버릴 테니까. 기억해라. 아란티아의 마법에 너희들은 좌절할 것이다. 내가 그 첫번째다." 아이린은 호기롭게 소리치고 말에 올랐다. 로핀도 뒤를 따랐다. 혹시나 해서 돌아보았으나, 역시나 그들은 쫓아오지 않았다. "익셀런에는 저런 괴물만 있는 거냐? 저 자보다 더 강한 녀석이 정말 있는 거냐?" 아이린은 겨우 말고삐만 잡은 채로 말했다. "자신할 수 없군 솔직히 말하면 내가 두 팔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지금의 너는 이길 수 없 다. 그런데 방금 둘의 대결, 누가 이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해." 로핀은 어두운 표정의 아이린을 격려하며 말했다. "어찌 되었건 이긴 사람은 너다. 가슴을 펴도 좋아." "내가 놈들의 전의를 불태워 버린 건지도 모른다." "루밀이 들으면 크게 화낼 거야." 로핀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뒤는 퀘이언에게 맡겨라. 자신을 캡틴으로 인정한다면 상대측 캡틴은 녀석의 몫이 다. 그 녀석을 믿지 않나?" "믿지 않으면 어찌 캡틴으로 추천하겠어?" 아이린를 알라야의 다리를 지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긴 하루가 기다리고 있는 아주 긴 밤이었다. 괴물들의 공격은 새벽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아이린은 감고 있던 눈도 뜨지 않고 베나를 뒤로 휘둘렀고, 주저앉은 자세에서 일어나며 그대로 한 바퀴 몸을 돌려 칼날을 주위로 뿌렸다. 붉은 피가 그녀의 몸으로 튀었다. 붉은 빛이 어둠을 깨뜨렸다. 그 다음에야 그녀는 눈을 떴다. 주위에 괴물들의 시체 세 구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 중 일어나려고 하는 괴물의 목에 칼날을 박으며 그녀는 나무 뒤에 숨은 붉은 눈동자들을 주시했다. 흥분해서 내는 놈들의 숨소리가 더욱 커졌다. 동작을 크게 했더니 어깨가 더 아팠다. 밤 사이 상처가 도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때 베인 상처에 독이 감염되었거나. 그들은 방심할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새벽이 되자 또 한 번 공격해 왔는데, 기어이 아이린의 허벅지를 할퀴고 달아나버렸다. 한 녀석을 더 죽이긴 했지만 아직 많았다. 아니, 오히려 저녁 때보다 더 숫자가 늘어난 것 같았다. 한 시라도 빨리 나디움으로 가야 하는 그녀로서는 때 아닌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히 시간 잡아먹는 골치거리로 치부하기에는 괴물들의 힘이 너무 셌다. 한 마리 한 마리가 갑옷 입은 기사 하나를 잡아먹을 만했다. 동료들과의 연습 시합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패배를 해 본 적 없는 그녀였으나, 방심하면 이 괴물들의 배를 채우는 먹이가 될 지도 몰랐다. 아침이 되어 다시 걸으며 그녀는 괴물들의 목적이 식량확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나 에사르크라는 하늘산맥의 통행증을 가진 자를 공격하는 것부터 이상했다. 이 넓은 하늘산맥에, 널린 게 먹잇감이었다. 자기들을 벨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상대를 택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건 단순히 여행 도중 맹수를 만나는 사건과는 달랐다. 레드 게이트에 도달하기 전에 있었던 안 좋은 일들과 연관시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회색 로브의 마법사를 떠올렸고, 그 자의 끔찍한 마법을 떠올리니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괴물들은 여전히 따라왔다. 가끔 돌아보면 얼굴을 힐끔힐끔 보일 정도로 대담하게 접근해 왔고 심지어 바로 옆을 따라오기도 했다. 그녀가 칼을 들고 멈추면 그 녀석들도 멈췄고, 그녀가 걸으면 같은 속도로 따라왔다. 아이린은 점점 무서워졌다. 다친 어깨가 부어 올랐고, 허벅지 근육이 심하게 당겼다. 무엇보다 걱정인 건 녀석들이 이 부상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그녀가 지치길 기다렸다. 준비한 물을 마시긴 했으나, 뭔가 먹으려고 칼에서 손을 떼면 즉시 접근해 왔고, 다시 칼을 잡으면 얼른 달아났다. 숲 속에서 움직임에 익숙한 녀석들을 쫓아갈 수도 없었고, 길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의지에 반하여 그녀는 비틀거리게 되었다. 괴물들이 자기들끼리 뭐라고 속삭였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신경에 거슬려 악착같이 힘을 냈지만, 가끔 절룩거리거나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면 괴물들이 접근하는 거리가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지나치게 다가온 녀석의 목을 잘라버렸지만, 동료 하나 죽은 것 정도로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혼자 힘으로 도저히 당해내기 힘들만큼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괴물들은 신중했다. 완전히 포위당한 기분이었다. 조만간 길목을 막고 덮쳐올 녀석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암담했다. “차라리 제 정신일 때 싸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아이린은 검을 뽑아 들고 걸음을 멈추었다. 대충 감으로 세어보니 스무 마리 정도였다. 불리한 위치이긴 하나 베나의 힘을 최대한 끌어 모으면 못 싸울 것도 없었다. 그녀는 칼을 바닥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괴물들도 이 곳을 승부처로 봤는지 조용히 포위 간격을 좁혀 왔다. 그녀는 침착하게 주문을 끝마친 후 칼을 들었다. 괴물들이 달려들었다. 독을 품고 있는 손톱을 잊지 않고, 그녀는 한 마리 한 마리 신중하게 상대했다. 칼날이 괴물에 닿는 순간마다 붉은 빛이 터지며 괴물들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쓰러져 죽었다. 보통 칼로 상대했으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다섯 마리째를 처치한 후, 다리가 풀려 그녀는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또 한 번의 공격이 그녀의 등을 긁었다. 바로 몸을 돌려 녀석의 목을 찌르긴 했으나 이제 팔을 들어올리는 것에도 무리가 있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그녀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 벌떡 일어났다. 칼날이 울기 시작했다. 무언가와 반응하며 격렬하게 공기를 진동했다. 같은 힘을 가진 칼이 근처에 있다! 아이린은 직감하고 크게 소리쳤다. "여기다!" 그 소리를 들은 누군가의 발걸음이 빠르게 이 쪽을 향했다. 괴물들은 아이린을 포위한 채로 소리가 나는 족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몇 괴물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괴물들은 표적을 바꾸어 그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린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어 공격해 오는 괴물들을 견제하며 물러섰다. 그 때 아이린의 좌우에서 괴물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다친 팔로는 한 마리 이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때 그 두 마리를 향해 굵직한 창 두 자루가 동시에 날아와 박혔다. 아이린이 쓰러진 자리에 사방으로 네 명이 에워싸며 보호했다. 네 명 중 아는 얼굴은 없었으나, 뒤따라 피 묻은 칼을 쥐고 달려오는 남자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동시에 자신을 에워싼 네 명의 정체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괜찮은가?" 그는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 칼집에 꽃아 넣으며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쉽게 잡는 법이 없는 아이린이, 마음껏 의지할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동료뿐이었다. "퀘이언! 어떻게 여길 알고?" 아이린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물었다. "내 칼이 아침부터 울더군." 그는 아이린을 지키는 네 명에게 명령했다. "길을 벗어나지 말고, 그냥 쫓아 보내라." "예, 마스터." 즉시 대답하며 몰려든 괴물들을 단숨에 해치우는 그들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새로운 울프들이군.” "그렇지." 퀘이언은 바닥에 죽어 있는 괴물의 머리를 발로 툭 차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대체 이 괴물들은 뭐지? 아이나카스트 산에 열 번 넘게 올라와 봤지만, 이런 건 처음 본다." “나도 몰라. 그런데 여기가 벌써 아이나카스트였어?" "가까운 산이 아니었다면, 내가 djWL 폐하의 및 자리를 비우고 하늘산맥에 올라올 수 있었겠어? 뒷산이니까 가능했지. 어디에서오는 길이야?” "트라카스트 산. 레드 게이트 남쪽에 있는." “한 몇 년 너무 안 온다 싶었더니 요란하게 등장하는군." 퀘이언은 웃으며 잘 서지 못 하는 아이린을 부축했다. “모두 물러서라. 돌아간다. 프란츠, 브나타이돌. 둘은 경계하며 마지막을 지켜라." 아이린은 겨우 퀘이언에게 의지하며 걸었다. 시야를 가린 나무의 숫자가 줄면서 산 너머의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밀리 성의 뾰족한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이린은 아직 안도하지 않았다. 이 괴물들의 문제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레드 게이트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느냐였다. "하늘산맥에 저런 사악한 존재가 돌아다니고 있다니, 어쩌면 마스터 데다인이 저 문제로 하얀 늑대들을 부른 걸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넌 왜 여기로 왔어?" 퀘이언이 말했다. "아주 급한 일로." “무슨 일인데?" "레드 게이트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공격 당했다. 내 예감이 틀리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그 자가 죽음에서 부활한 존재 같아." "혹시.......” 퀘이언도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들었는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웰치다. 그가 나디움에 도착하면 무슨 불상사가 벌어질지 몰라. 막아야 해." 나디움의 성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나카스트 산은 화산도 아닌 주제에 뜨거운 지하수가 나오는 곳이 있었다. 성의 정원이 산과 맞붙은 탓에 성 내에도 온천이 하나 있었는데, 독이나 상처 치료에 아주 효과적이었다. 아이린은 오랜 피로와 걱정을 유황 냄새와 함께 날리며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풀을 밟고 다가오는 맨발 세 쌍에 그녀는 눈을 돌렸다.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김 때문에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시녀를 대동한 데다 아이린이 목욕하는 걸 알면서도 들어올 만한 여자라면 누구인지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덮고 있던 한 겹의 가벼운 옷을 벗으며 그 여자는 아이린의 맞은 편 물에 몸을 담그고 암아 눈을 감았다. 두 시녀 중 하나가 아이린의 옆으로 다가와 갈아입을 옷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인사한 후 물러났다.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아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몇 년 만에 같이 목욕하는 거죠?" 수면에 서려 있는 하얀 수증기에 서로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아이린은 여왕이 웃고 있음을 알았다. "5, 6년쯤 되나 보구나." "페하께 있어서 그건 긴 시간이 아니죠. 하지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래." "걱정할 만한 일이 벌어져 찾았습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오지 않을 셈이었느냐?" "아아, 정말 화가 나셨나 보네요." 여왕은 나직이 웃었다. "퀘이언이 보필은 잘 하고 있나요?" "역대 수호기사 중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제가 했다면 어땠을까요?" "네가 했다면 항상 둘이 놀아서 안 돼," 아이린은 수면을 찰싹거리며 격렬하게 웃다가 어깨가 아파 찔끔하고 팔을 움츠렸다. “다쳤구나." "하늘산맥에 이상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 마스터 데다인이 찾아와 루티아에 걱정거리가 있다고 하더구나. 자세한 얘기는 하길 꺼려했으나, 아마도 그 일과 상관있지 않나 싶다." "지금은 루터아가 처해 있는 위험보다 아란티아가 처한 위험이 더 중요합니다." "퀘이언에게 잠시 들었다. 지금 바로 골드 게이트에 병력을 증강 시킨다고 하더구나. 죽은 자가 살아나 이 곳으로 온다고?"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거의.......” 여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슬픈 어조로 물었다. “그 아이가 이제야 오는 게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누굴 말하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여왕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 후, 한숨을 길게 쉬었다. "너무 염려 말거라, 아이린.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골드 게이트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럼 골드 게이트의 병사들인 알아서 하겠지." "안일하시군요. 역시 그겁니까? 아란티아는 아란티아가 지킨다?" 여왕은 대답 대신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아이린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 저도 아란티아의 일부인 만큼, 제가 직접 이 곳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렴." 죽을 힘을 다해 달려왔으나, 여왕이 저렇게 마음 편히 있으니 오히려 허탈했다. "아이린," "예, 폐하." "나라고 걱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을 엿본 듯 그녀는 말했다. "울프 기사단의 숫자가 늘고 있다." "한· 명 더 늘 것입니다." “그리고 퀘이언이 말하길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온다고 하더구나." "저도 들었습니다. " "그럼 하얀 늑대가 다섯이고, 울프의 기사가 육십이 되며, 거기에 캡틴까지 생기는구나." "지난 전쟁 때보다 확실히 늘었군요." 여왕은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도 입을 다물었다. 새나디엘 여왕은 물을 좋아했다. 아이린이 농담 삼아 그녀를 물의 여신이라고 할 정도로 물에 담겨 있는 걸 좋아했고, 젖어있지 않을 경우에는 물을 쉼 없이 마셨다. 손가락이 쭈그러들 정도로 오랫동안 물에 있다가 아이린이 나올 때까지도 그녀는 온천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린은 그 동안 여행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주고 양해를 구해 먼저 자리를 떴다. 겉옷 하나만 어깨에 걸치고 나서니, 퀘이언이 온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벗은 다리를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아직 서른 살 안쪽이라고 해도 믿겠군." “오호, 욕구불만을 표출하지도 못할 만큼 늙은 건 아니었나 보네? 그 동안 여자 다리는 구경도 못 해봤냐?" 아이린은 긴 다리로 퀘이언의 배를 툭 차고, 유쾌하게 웃었다. "아, 시중 들어줄 아이 하나 불러줄까? 울프 기사단 숙소의 네 방은 다른 녀석이 차지하고 있는데, 다른 방이라도 원한다면.......” "별로 자고 싶진 않아. 얘기나 좀 하자." "근무 중이다." "같이 서지. 어차피 수호 기사의 자리는 너와 나 사이에 주어진 걸 내가 양보한 거잖아." "아니지. 네가 달아난 거지 수호기사가 되면 결혼을 할 수 없는데, 마침 넌 사랑을 찾게 되었으니까." "아, 그랬지." 아이린은 잊어버렸다는 듯 씁쓸히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빰에 붙은 젖은 머리를 떼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퀘이언이 말했다. "그는 찾았나?" "아니." "언제까지 찾으려고?" "찾을 때까지. 그 전에 돌아오란 말은 하지 마라." 할 얘기가 있다고 해 놓고 아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퀘이언은 허리에 차고 있는 '여왕의 수호자', 또는 '베나 실코’라는 이름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베나 에사르크와 함께 아란티아만큼이나 오래된 칼이고, 대대로 여왕의 수호기사에게 이어져 온 칼이었다. “만일 그 자가 정말 캡틴 웰치라고 확신한다면, 왜 그를 직접 저지하지 않았나?" 그녀의 말을 기다리다 못해 퀘이언이 먼저 물었다. "우선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떤 마법 관련 서적에 이런 말이 쓰여 있지. '되살아난 자는 죽지 않으며, 되살아난 자는 더 강하다.' 네가 여왕의 수호기사가 되었을 무렵, 나와 루밀, 로핀이 론타몬으로 가 싸웠던 마지막 전투가 어땠는지 안다면, 함부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와 겨를 마음은 안 들 거다. 물론 베나 에사르크까지 들고 달아날 만큼은 아니었지만." 변명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린이었으나, 퀘이언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한 가지 위험이 또 있었나 보군." "이 곳을 향하는 건 웰치 하나가 아니었다. 8년 전, 론타몬에서 우리는 그 괴물 놈과 마지막 싸움을 했다. 거의 승리했지. 그 때 녀석은 달아났고, 마스터 테일드가 그 자를 쫓아갔지. 그리고 둘 다 사라져 버렸어. 그런데 레드 게이트에 도달하기 전 어둠속에서 그 괴물 비슷한 녀석이 또 나타난 거다." 퀘이언은 검을 꽉 쥐고 허공을 응시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두가 론타몬의 사악한 마법사를 해치우러 떠났을 때 그는 홀로 이 곳에서 여왕을 지키며 또 다른 괴물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 얘기는 오직 아이린만 알고 있었다. "퀘이언, 하나 묻자. 현역 중에 베나를 물려받을 만한 녀석이 있나?” 퀘이언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있다." “그 녀석에게 이 칼을 내주고 싶다. 아직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만약 지금 이 곳을 향해 오는 검은 기사가 캡틴 웰치라면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 번 꺾었던 상대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너답지 않구나." “나도 많이 약해졌어.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퀘이언은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힘들 때 언제나 너에게 기대었다. 너도 힘들 때 나한데 기대라.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겠다. 하지만 약해졌다는 말은 해선 안 돼." 아이린은 퀘이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한데 이러겠냐마는 좀 약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는 안아도 주고 좀 그래라. 이 나이에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정말 가끔은 누구한데 미친 듯이 어리광 부리고도 싶더라.” 퀘이언은 한숨을 토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너야 이럴 수라도 있지, 나는 직책이 이렇다보니 그런 말도 함부로 못 한다. 빨리 한 녀석에게 물려주고 나도 2선으로 물러나고 싶어.” “그럴 만한 녀석은 있고?" '다섯 모두 재능은 있어." 둘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린은 퀘이언을 말없이 오랜 친구의 등을 도닥거렸다. "테일드가 보고 싶어." 아이린은 눈을 감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찾을 수 있을 거다." 퀘이언은 짧게 위로했다. 9.카셀 여왕의 도시 카셀은 잠이 오지 않아 베란다에 마련된 의자에 않아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꾸로 떨어지면 빠져서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할 것처럼, 검고 깊은 하늘에 촘촘히 떠 있는 별들이 아름다웠다. 내일 아침 나디움으로 들어가려면 오늘은 여기서 편히 쉬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라는 쉐이든의 충고대로 그들은 러니치라는 작지 않은 마을의 고급스러운 여관에서 쉬게 되었다. 여관 주인은 쉐이든의 얼굴만 보고도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2층의 제일 좋은 방 네 개를 내주었고, 음식도 그 동안 주린 배를 한꺼번에 채울 수 있을 만큼 식탁에 늘어놓았다. 쉐이든은 내내 마차에서 왔으면서도 피곤하다고 와인과 고기 몇 점만 집어먹고 침대에 누워버렸고, 타냐도 그리 많이 먹지는 않았다. 제이도 입맛이 없다고 술만 마시니, 그 많은 음식이 아까운 나머지 억지로 먹은 카셀만 소화가 안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베란다에 나와 보니 아래층에서 연주하는 누군가의 피리소리가 들렸다. 듣기 좋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 내리는 하늘이 구름을 불어오고, 바람을 부르는 구름은 산에 걸려 있어. 구름은 왜 하늘을 떠다니지? 산은 왜 하늘을 젊어지지? 누구나 묻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 따라 하기 좋은 반복되는 가락에 카셀은 저도 모르게 그 음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안 자고 있었나?" 하늘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감 없이 딱딱했다. 제이메르였다. 옆에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 보니 제이는 통나무를 겹쳐 만든 지붕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여전히 몸은 붕대투성이였다. 하지만 제이는 어깨의 상처나 블랙에게 얻어맞아 부을 상처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카셀은 그게 불만이었다. 다쳤으면 쉐이든처럼 잠이나 푹 자면서 회복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으련만 제이는 스스로를 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네가 영혼이 되어 하늘에서 계시를 내리는 줄 알았다. 왜 안 자고?" 카셀은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그의 옆으로 가서 않았다. “항상 밖에서 자니까 침대에서는 잠이 안 오나? 아니면 달이 밝은 날은 잠이 안 온다?" 깨끗한 잠옷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 몸에 치렁치렁하게 뭔가를 달고 다니던 지저분한 모습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오늘 만난 하얀 늑대라는 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쉐이든?" "겨뤄보지는 않았지만, 강하다는 걸 저렇게 온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처음 접했다. 마스터 아이린은 본 모습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기 때문에 그런 강함을 엿볼 수 있었던 건 한 번 뿐이었는데, 지금 자고 있는 저 덩치 큰 녀석은 자고 있어도 접근하기가 힘들 정도야." 카셀은 대답하기 애매하여, 그냥 침묵을 선택했다. 다행히 제이는 꼬치꼬치 캐묻거나 대화가 끊어지면 그걸 잇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대화의 시작을 양보했고, 끝맺음도 모호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을 꺼내기도 했다. "평화롭군." 대화의 어디가 분기점이었는지 찾기가 힘들어 그가 앞에 했던 말에 이어서 그런 말을 꺼낸 것인지, 아니면 새로 화제를 돌린 건지 모를 때도 많았다. "평화로워? 뭐가?" "파라다이스 같다는 나라, 모든 국민들이 즐거움을 노래하는 나라, 밥을 굶지 않는 나라. 별의별 말 다 들었는데, 여길 오기까지는 항상 초원만 달려와서 실감하지 못 했다. 아니, 실제로 골드 게이트에 도착하기 전에 지나친 몇몇 마을은 그리 잘 사는 건 아니었지. 워낙 쫓기고 쫓던 상황이라 그걸 음미할 기회도 없었고. 그런데 골드 게이트를 들어오니 그게 실감나는군. 아란티아는 평화로운 나라야." 피리 소리는 멎었으나, 아래층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기분 좋게 취한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친구의 저지를 받고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도 들렸다. 지붕 위는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노래가 이어졌다. 비 오는 하늘이 구름을 불어오지. 바람을 불러오는 구름은 산에 걸려 있어. 구름은 왜 비를 뿌리지? 산은 왜 하늘을 젊어지지? 내가 물어도 산은 대답하지 않아. 이어지는 피리 가락은 아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딘지 구슬프게 들렸다. 카셀은 피리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그래. 골드 게이트 바깥의 위험도 잊어버릴 것만 같은 평화야. 그래서 이 평화가 무너질 게 무서워.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천 년 동안이나 외부의 침략을 받아본 적이 없어. 그런데 이제 그 침략이 있게 될 거야." "없는 정신으로 돌아보긴 했지만, 골드 게이트는 검은 기사 하나 정도에 무너질 곳이 아니었다. 무너질 거라는 걸 왜 그리 확신해?" "그러니 내가 더 무섭다는 거야. 그런 곳을 무너뜨릴 힘이 그 곳을 넘어오면 대체 여기에 어떤 재앙이 떨어지겠냐?” 제이는 대화하는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걱정을 만들어서 하나? 전에도 잠시 말했지만,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그 위험에 대비해야지 한숨만 쉬면 어떻게 해?" 자신은 캡틴 감이 아니라는 말을 제이에게 터트리며 자신의 걱정거리를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 전에 카셀은 블랙에게 했던 맹세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하얀 늑대의 이빨을 갖게 될 것이다.' 블랙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아직도 카셀은 레드 게이트에서 그린우드의 배에 칼을 찔렀던 느낌이 손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복수를 위해 꿈의 한 귀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얼른 잊고 싶은데도 잘 잊혀지지가 않았다. 수없이 고민하고 고민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은 문제였다. 소설속의 주인공이 선언하는 대로 이끌어져 나오는 깔끔한 결론 같은 건 없었다. 카모르트에서 모두가 인정해주었어도 카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캡틴의 자격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었다. 블랙은 그의 면전에 대고 캡틴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마스터 퀘이언 역시 하이로드 탈룬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에게 캡틴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카모르트에서 만난 메이루밀은 그에게 보검의 선택을 받은 자이므로 안심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옥쇄를 가지고 있다고 그 사람이 왕이 아니며, 귀족의 망토를 걸쳤다 해서 거지가 귀족 행세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머리 속에는 이미 내일 있을 울프 기사단과의 대면을 몇 번이나 그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패배였다. 그들은 카셀을 캡틴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쉐이든의 압력이나 다른 누군가의 결정에 따라 마지못해 따랐다. 마음에서 졌으니, 내일 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는 이 말을 쉐이든에게 하지 못했다. 쉐이든은 걱정하지 말라고만 할 것이다. 그러니 이 걱정을 제이에게 말하지도 못했다. 제이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제이메르.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지? 쉐이든을 보고도 그 말을 다시 할 수 있나?" 카셀이 물었다. "있다." 제이의 눈에는 망설임도 없었고, 자기과시도 없었다. 그는 진짜로 그럴 수 있다고 순수하게 믿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감이었다. "나도 너처럼 검을 잘 쓰고 싶다." 카셀은 위로 받고 싶은 자신의 다른 약점을 모두 던지고 그 말만했다. 제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넌 정말 웃기는 녀석이다." 카셀은 당황했다. "부러운 걸 부러워하는 게 뭐가 어때서?" "아아, 이 말을 누가 했더라? 날 고용했던 어떤 재수 없는 귀족 녀석이 했던 말이었는데, 도저히 받아 칠 수가 없어서 가슴만 쳤던 기억이 나는군. 그 녀석은 이런 말을 했지. '사냥꾼이 평생 가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천 명도 안 되지만, 내 명령 한 마디면 만 명도 죽일 수 있다'고 했던가? 내가 보기에 너는 능히 그럴 수 있다. 난 한 명 한 명은 원하는 대로 죽일 수 있지만, 한꺼번에 수만 명을 죽일 수 있는 건 너 같은 녀석이야." 제이는 역시나 말이 길어지면, 앞에서 하고자 했던 말을 뒤에서 결론짓지 못 했다. 그는 내저었던 손을 접고 한숨을 쉬었다. "말하다 보니 어째 내가 널 욕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는 알았으니 됐어. 그리고 나중에 그 귀족이 그런 말을 하거든 이렇게 받아 줘. '어쨌든 난 내가 죽일 수 있는 한 명을 눈 앞의 귀족으로 할 수도 있다!'" 제이는 카셀의 조언에 놀란 눈을 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아마 속으로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발을 굴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위로는 없어도 돼, 제이메르. 하지만 아무 말이라도 들으니 기분은 나아지는군. 고마워. 내일도 뭐 어떻게든 될 거야." 다른 사람에게 더 없이 차갑고 무서운 사람이 자기 앞에서만큼은 절절 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이는 카셀을 위로하는 말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아 난감해했다. 천재적인 검술에 반해 말재주가 없는 건 다른 하얀 늑대들과 비슷하긴 했는데, 그들은 보통 이런 상황이면 웃음으로 얼버무리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해서 부드럽게 넘길 줄 알았다. 하지만 제이는 그런 걸 잘 수습할 줄 몰랐다. 미안한 말이었으나, 그 모습에서 카셀은 더 없는 위로를 받았다. "점은 사람을 죽일 뿐, 살리지 못합니다." 지붕 끝에 서서 옷을 펄럭이는 여자의 모습에 카셀은 통나무로 엮인 지붕 아래로 두 칸이나 미끄러질 만큼 놀랐다. 제이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2층 아래로 굴러 떨어져 노래 부르는 여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을 것이다. “마스터 타냐! 아니, 이 밤중에 왜 지붕에서?" 카셀이 가슴을 쓸어 내리며 물었다. 잠옷 같은 하얀 치마에, 하얀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섞인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서있는 모습이 더욱 신비로웠다. 가슴에 달린 둥글고 푸른 구슬은 달빛에 반사되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묘한 매력으로 비추었다. 신을 신지않은 그녀의 발은 분명 바닥에 닿아있었으나 지붕 위에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을 보니 조금 떠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제 방 위에서 두 분이 그러고 계시니 저도 잠을 이룰 수가 없군요. 그리고 그 대화 내용 역시 그냥 듣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 같아서요. 캡틴 울프, 옆으로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왜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통나무 지붕 위에 레이디를 안내하는 건 기사 된 도리가 아니군요. 내려갈까요?" "이 곳이 좋습니다. 전 밀폐된 장소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지 당신이 저를 두려워하기에 가도 되는지 여쭈었습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이 곳에서 얘기를 끝내도 좋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카셀은 뒤늦게나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인도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마녀에 관한 온갖 괴이한 얘기를 들어서 여자 마법사라면 바로 그 무서운 추억이 떠올라 그런 것뿐입니다. 결례를 범했군요." "제가 사악한 마녀처럼 생기 긴 했죠." 타냐는 카셀의 안내대로 옆에 앉으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아마 그런 대우를 많이 당했나 보다 생각했으나, 카셀은 자신의 처신 때문에 그녀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안타까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악하다는 건 분위기지, 외모가 아니죠. 당신의 어디에서도 그런 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악하는 의미를 아십니까?" "무슨 뜻으로 묻는지는 모르냐, 저는 그 사악함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신가요?" 타냐는 감정 없이 웃으며 말했다 "저에 대해 하실 말씀이라도? 검과 말에 대해 말씀하신 듯한데." "제이메르가 말한 그 귀족의 말대로 검은 한 명을 죽일 수 있지만, 말 한 마디는 천 명을 죽일 수 있지요. 당신의 능력이 검이 아니라 언어에 있고 그것으로 하얀 늑대들을 매혹시켰다면 굳이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감사하긴 합니다만, 말로 천 명을 죽이는 사람은 기사단의 캡틴이 아니라 정치가입니다. 그리고 전 정치가가 아닙니다. 위로를 해 주시니 고맙고 또 기쁘지만 당신도 제이메르만큼이나 저에 대해 모릅니다. " "그렇군요. 저는 기사 쉐이든과 며칠 동안 같이 지냈고 마법사가 아닌 사람을 처음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남자가 극찬하는 분이라 약간의 편견을 갖게 되었군요. 맞습니다. 저는 당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당신 역시 당신 자신에 대해 모르는군요. 캡틴의 자격을 말씀하셨습니까? 자기를 모르는 자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기사 쉐이든의 믿음을 단순히 자신감 상실로 깨지 마십시오." 제이가 눈을 부라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이! 난 마법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말은 짧게 끝내겠다. 말 참 어렵게 하려고 애쓰는데, 위로하는 척 하면서 카셀을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마라.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지금 넌 내 두 걸음 안에 놓여있어." "우습군요. 지금 루터아의 마법사를 협박하는 건가요?” "루티아가 어디 붙어있는지 난 모른다!" 제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타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셀은 앉은 채로 양족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만. 둘이 그런 사소한 자존심 싸움으로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내 고민 같은 건 잊어버렸으니 고맙소이다. 그러니 그만! 제이메르 앉아. 마스터 타냐도 앉으시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카셀을 사이에 두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카셀은 자기 처지를 한심스러워 하며 말했다. "이건 아주 괄목할 만한 상황이군. 하얀 늑대에 자신 있게 도전한다는 검사와 루터아의 마법사를 순전히 말 몇 마디로 앉혀버렸으니....... 나 자신에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군요. 안 그렇소, 마스터 타냐?" "저는 별로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 안 드는군요." “나도 재미없었다, 카셀." 제이도 타냐도 아직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카셀은 툴툴대며 중얼거렸다. "아, 그러십니까들?" 밑에서 울리는 피리 소리와 노래 소리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여자의 목소리는 더욱 맑게 울리는 것 같았고, 상대적으로 피리 소리는 더 작아줬다. 털 빛 하얀 늑대는 검은 구름을 몰고 오고, 검은 구름은 검은 땅 위에 일어나. 늑대는 어디에 있지? 털 빛 하얀 늑대는 어디 있지? 내가 물으면 대답해 줄 이가 여기 있을까? 카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래는 멈추었고, 피리 소리도 멈추었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가 박수가 들렸다. "이 노래의 끝이 원래 이런 거요?" 카셀이 물었으나, 타냐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노래입니다." 제이가 알 리 없었다. 카셀은 지붕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 가?" "저 노래 부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 제이와 타냐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카셀을 따라 지붕을 내려갔다. 노래를 듣던 마을 사람들은 밤이 늦어 다들 자리를 떠나고 여관 주인과 술 취한 남자 몇 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도 마침 일어서고 있었다. 카셀은 문을 열고 나와 좌우를 살펴보다, 마을을 벗어나는 길을 걷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발견했다. "방금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분 사람이 저 둘입니까?" 카셀이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피리는 여기 있는 내 동생이 불렀고, 노래는 저기 가는 저 여자가 부른 게 맞습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모르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오더니 한 곡만 부르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곡은 우리가 흔히 아는 곡이었는데, 가사는 달라 재미있어서, 부르고 싶을 때까지 부르게 해주었죠. 우리야 좋은 노래 들어서 좋았죠. 또 이상하게도 거절할래야 거절할 수가 없었죠." 여관 주인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남자도 키가 상당히 켰는데, 어둠 속을 걷는 여자는 그 남자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키가 켰고, 머리카락은 허리 밑으로 출렁일 정도로 길었다. 남자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여자는 상대적으로 허름한 바지와 셔츠만 입고 있었다. 바지춤에 한 손을 꽂고 걷는 모습이 밤중에 산책하는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서둘러 둘을 쫓아갔고, 제이도 뒤를 따라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냐는 1층까지만 따라오다가 돌아가버렸다. 왜 안 따라 오는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카셀은 앞서가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여쭐 게 있습니다." 긴 머리의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것 같은 긴 생머리에 파묻힌 얼굴에서, 코와 눈만 겨우 보였다. 키는 카셀보다 켰고, 제이보다는 작았다. 밝은 셔츠의 단추 틈으로 하얀 목선이 보이고 상체를 모두 가리지 못한 짧은 셔츠 아래로 가늘고 하얀 허리선이 드러났다. 긴 다리에 맞지 않는 짧은 바지 아래로 발목이 보였고, 맨발이었다. 옷이 없는 나머지 동생 옷을 훔쳐 입고 도망쳐 나온 가난한 여자처럼 보였는데, 도무지 허름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자기 몸매를 과시하기 위해 저런 옷차림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있는 손 중 오른손을 꺼내 한쪽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여관이나 근처 집에서 새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살필 수 없었으나, 웃는 표정이라고 카셀은 확신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날렵했으나, 카셀의 눈에는 그 모습이 굉장히 천천히 보였다. 로일이 이런 말을 했다. 단 한 차례의 공격만으로 서로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승부를 벌이기 직전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인다고. 쉐이든 역시 그런 위험한 순간이 아니더라도 집중력이 오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건 검의 고수가 아니라 일반 사람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며 첫사랑을 만날 때 갑자기 주위가 느려 보이는 건 그런 집중력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카셀도 아즈윈을 봤을 때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아즈윈은 그런 경험 따위 없다고 단언했지만! 지금 카셀은 로일이 말했던, 모든 것이 느려지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게 집중력이 올라가서인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 마법인지 분간하긴 힘들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으나, 그것조차 최면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손이 떨렸다. 호흡이 힘들었다. 마스터 타냐는 어째서 1층까지 따라 내려오다가 갑자기 되돌아가 버린 걸까? 그녀는 뭔가를 두려워했다. 따라올 생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그녀는 동행하던 것을 중간에 포기한 것이었다. 그녀의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카셀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위험한 것은 아니겠지. 위험하다면 타냐는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따라왔을 것이고, 만약 그녀 자신의 힘으로 역부족이었다면 자고있는 쉐이든이라도 깨워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물러서기만 했다. '대륙 어디에 나타나도 사람들이 벌벌 떨며 고개 숙일 루티아의 마법사가 두려워하는, 그러나 위험하지는 않은 존재.......’ 세상의 거의 모든 마법사는 루티아에서 마법을 배운다. 국적도, 나이도, 인종도 따지지 않고 루티아에서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마법을 부여한다. 루티아를 나오면 그제야 국적이 나뉘고 마법의 사용 목적이 나뉜다. 그리고 루티아는 그런 것에 개입하지 않는다. 어중간한 마법사가 사소한 일에 마법을 사용하는 정도는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루티아에서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수준이라 해도, 실제로는 카모르트의 국왕을 암살하려 했던 암살 집단 블랙 풋에서 최고 지위에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런 마법사들을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루티아의 마스터들은 어떤 레벨일지 카셀은 모른다. 카셀의 머리 속에서 이미 세상누구도 이기지 못할 존재로 고정되어 있는 하얀 늑대들조차 루티아의 마스터는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 루티아의 마스터 중 한 명이 두려워서 물러났다. 세상 누가 그럴 수 있는가? "노래의 뒤를 들으려고 따라온 거냐, 얘야?" 돌아서서 카셀을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었으나 깊이 있었고, 여자의 목소리였으나 중후하게 울렸다. 세상의 모든 고난을 겪은 나이 많은 여자가 힘을 주어 연설하는 목소리와 어린 여자가 첫사랑을 고백하는 수수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저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카셀은 열에 들뜬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하얀 손을 내밀었다. 얼굴로 다가오는 그 손길을 보고 카셀은 뱀의 눈을 본 개구리마냥 움직이지 못했다. "물러나라, 카셀." 제이는 언제 품에 끼고 있었는지 모를 단점을 꺼내 들며 카셀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섰다. 그녀는 손에서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멈춰있는 칼을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내민 손으로, 처음 했던 것처럼 긴 갈색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분 나쁜 여자다 누구냐? 정체를 먼저 밝혀라." 뒤에서 보고만 있었던 제이도 겁에 질려 있었다. 빌리와 슈벨을 상대할 때도 흔들림이 없었다. 만신창이 된 몸으로 블랙을 상대할 때조차도 냉정을 잃지 않았었다. 그런 제이가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것 같은 여자의 손짓 한 번에 모든 자제력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옆에 있는 키 큰 남자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제이는 단검의 끝을 그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었다. "제이메르.......” 카셀이 불렀으나, 제이는 듣지 못했다. 약간 서늘한 날씨였는데 식은땀이 방울 지어 제이의 뺨을 타고 흘렀다. 눈동자가 커지고 호흡이 멈춰있는 제이를 보고 카셀은 갑자기 무서워줬다. 그녀와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이는 카셀이 느끼지 못하는 뭔가를 느끼고 지독한 공포를 맛보고 있었다.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만 두거라." 그녀가 명령했다. 칼에 손을 대고 있던 남자는 도로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제이는 그제서야 몇 번 뒷걸음질치다가 주저앉아 버렸다. 토해내는 숨이 뜨거웠다. "카, 카셀. 도망쳐라." 제이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무표정하게 카셀과 제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망쳐도 쫓아오지는 않을 테지만,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본명은 카셀 노이이고, 아란티아의 여왕을 뵙기 위하여 나디움으로 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아는 예의를 다하겠습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그는 제이와 다른 의미로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카모르트의 국왕이 말씀하시길 제가 아는 그 분은 금발의 여인이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레이디께서.......” 키 큰 그녀는 고개를 약간 내밀어 카셀과 시선을 맞추었다. 때맞춰 구름을 벗어난 달빛에 처음 그녀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그녀는 이를 보이지 않는 미소를 보였다. "네가 보고 있는 이 머리카락의 색이 어찌 보이느냐?" 그녀의 머리카락은 달빛을 반사하여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황금처럼 빛을 냈다가 검어졌다가 다시 갈색이 되었다. 카셀은 그 빛에 눈을 빼앗겨 아무 말도 못 했다. "보이는 것에 눈을 빼앗기지 말거라." 그녀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카셀은 뒤를 따라갔다. 옆에 있던 칼을 찬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만은 계속 카셀을 따라오고 있었다. 눈빛은 온화했으나 잠깐 바라본 것만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강렬한 인상이었다. 그녀는 작은 연못가에 서 있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잔물결이 물가에 부딪치며, 마을에서 벗어난 사람 없는 들판에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카모르트의 국왕은 잘 있더냐?" "다시 뵙고 싶어 하십니다." "나도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많이 성장하였더냐?" “모르겠습니다. 예전의 그 분을 알지 못하니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닌 듯 합니다." "흩어져 있는 힘을 합치면 카모르트의 힘이 어느 정도가 될 것 같으냐?" "갑자기 물으시니 어찌 대답해야 할지?" "보지 않았나? 단 두 명의 귀족이 벌이는 전쟁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 두 힘이 합치면 어느 정도가 되겠더냐?" "저는 전쟁의 규모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보았다면 어느 누구도 카모르트를 업신여기지 못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불어와 허리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는 바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카셀을 향해 몸을 돌렸는데, 마치 바람이 보이는 것처럼 바람 줄기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며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환한 대낮이었어도 더 자세히 보지 못할 만큼 그녀의 얼굴이 확실히 드러났다. 카모르트에서 귀족의 자태를 풍기는 여자는 몇몇 보았다. 특히 끓은 장미 백작의 딸은 귀족적이라는 단어가 꼭 맞는 아름다운 외모와 그녀만의 자존심이 풍겼다. 그 외의 다른 귀족 여인은 결국 고급스러운 드레스만 빼고 보면 허영심만 가득 차 있는 여자들 투성이였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방금 밭일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할 차림새에, 그 흔한 장신구 하나 없었다. 오만함도 없었다. 오히려 눈앞의 카셀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사랑스러워 견별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눈만 가늘게 하고, 닫힌 입술이 보이는 웃음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무서웠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이 정도로 의식을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여기서 그녀가 연못으로 뛰어들어 죽으라고 한들 거부할 수 있을까? 제이는 만나는 순간 그 공포를 접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만남을 거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망갔어야 했다. 이 지독한 아름다움으로부터 벗어났어야 했다. 대체 뭐가 괜찮다고 만용을 부렸는가? 카셀은 후회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죽음에 이르기 전에 유언을 남기는 심정이었다는 편이 옳았다. "제가 울프라고 불릴 자격이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마음에 망설임이 있구나." 카셀은 어떻게 아느냐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녀가 자신의 이력을 모조리 읊고, 자신의 여린 마음과 추한 생각을 읽어낸다고 해도 그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누가 두려우냐?" "절 캡틴으로 바라지 않을 오십 여명의 울프들," "그 아이들이 너를 해하지는 않아," "그들이 저를 내치는 것이 저를 향해 칼을 뽑는 것보다 더 두렵습니다." 미소 이상의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술집에서 거하게 한 잔 마신 나무꾼의 호탕한 웃음소리 같았다. 그런 웃음소리까지 듣고 나니, 이제 얼굴로도 목소리로도 그녀의 나이를 측정할 수 없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울프 기사단의 캡틴을 만나러 온 내가 길을 잘 못 들었느냐? 내 앞에 이 작은 아이가 캡틴이 맞느냐? 아이린이 말한 대로야. 재미있군." 카셀은 그 뜻밖의 이름을 되뇌었다. “마스터 아이린이?" "그 애가 아니면 누가 말해줘서 내 여길 왔겠느냐?" 그녀는 손을 내밀어 카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잡지도 않았는데, 그녀에게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 늑대 다섯 명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네가 어찌 다른 울프 오십 명은 두려워하느냐? 아니, 틀렸다.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네 마음속의 망상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미 너는 너 자신을 캡틴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동시에 너를 캡틴으로 만든 하얀 늑대들의 결정을 믿고 있지만, 네 지식과 이성과 경험이 부정하고 있는 거란다." 그녀는 천천히 물러났다. 그녀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가와 있고 어느 순간 물러나 있었다. "걸을까?" 그녀는 연못 옆을 따라갔다. 카셀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검은 갑옷의 기사가 있습니다. 그는 저를 캡틴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골드 게이트를 무너뜨리려고 온 적입니다. 그러나 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뛰어나고 훌륭한 기사였습니다. 그런 자가 직접 저를 캡틴 감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 말에 저는 자신감을 상실했습니다." "너는 날지 못 하는 닭과 경쟁하는 독수리를 생각할 수 있느냐? 훌륭한 기사는 기사감도 못 되는 자에게 기사도를 논하지 않아, 위대한 캡틴은 캡틴이 아닌 자와 캡틴을 논하지 않는다. 캡틴이 아닌 자에게 어째서 굳이 캡틴이 아니라고 말해주겠느냐?" "그렇지만 그는.......” "내 말을 되새겨 보거라. 너는 너 스스로를 캡틴으로 인정하느냐?" 그녀의 말에는 질책의 뜻이 담겨 있었다. 사실 카셀은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내가 너를 부정한다면 어찌 하려고? 퀘이언이 너를 부정하면 어찌 하려느냐? 친구의 뜻은 부정하고 그들의 뜻을 따를 것이냐?"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카셀은 단호히 말했다. “그렇다면 도전해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하얀 늑대들을 네 편으로 만들었느냐? 실패할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느냐?" 그녀는 웃었다. 처음처럼 신비로운 미소도 아니었고, 처음처럼 아름답지도 않았고, 처음처럼 무섭지도 않았다. 하얀 늑대들이 보검을 들고 나타난 카셀에게 제안했던 것은 캡틴이었다.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기에 부담스럽고 무서웠으나,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멋진 일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 때처럼 임무를 제안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찌나 걱정하던 일을 현실화 시켜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슬픈 일이 아니었다. "예, 새나디엘 여왕 폐하." 카셀은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만난 관계가 되어선 안 된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켰다 "왜입니까?" "실수로 소설의 끝부분을 읽어버린 적이 있니? 아니면 한 번 봤던 연극을 다시 볼 때는? 나는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모르는 척 하려고 하지. 너와의 만남은 내가 미리 책장을 넘겨버린 뒤 페이지였다. 그러니 모른 척 해야 하지 않겠느냐?" 카셀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저 역시 저 자신을 몰아붙이기 위한 싸움을 하겠습니다. 저는 울프라는 성을 달지 않고 나디움으로 입성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를 모두가 캡틴이라고 인정하게 만들겠습니다." "그것 역시 뒤 페이지의 한부분일 테니, 어떤 방법인지 묻지 않는 게 좋겠군. 그러나 모두를 납득시키는 데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사실 왕실의 대신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캡틴을 반기지 않는다. 그 부분만큼은 어찌 처리할 지 묻고 싶구나." "그건 여왕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하아? 지금 내게 명령을 내리는 거냐?" "물론 이것은 부탁입니다. " 그녀는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어떤 도움이냐?" "제일 결정적일 때 저의 정당성을 입증시켜주는 말을 해주십시오.” "어떤 말이지?" "그건 직접 생각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게 숙제까지? 무례한 아이구나." 말은 그렇게 하나 그녀는 재미있어 했다. "귀찮아질 시간이 즐겁게 되겠군. 좋다. 그리 하자꾸나. 그런데 널 보니 꽤 오래 전에 울프의 기사들을 제치고 날 찾아온 청년의 얼굴이 떠오르는군. 날 만나기가 너무 어려워 차라리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더 쉽겠다는 말을 하기에, 그럼 어디 드래곤을 타고 여길 와보라고 제안을 했지. 그랬더니 만약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 친생배필을 당장 만나게 해달라고 내기를 하더군. 너처럼이나 굉장히 무례한 아이였지. 하지만 재미있어서 그 제안을 수락했더니 일 년쯤 후에 드래곤 한 마리가 내 정원에 내려않았지. 나도 드래곤을 보기는 참 오랜 만이라 즐거웠어. 가넬로크의 기사들을 지키는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지. 대신 그 드래곤은 자신의 친구가 보낸 거라며 편지를 내주더군. 짧은 편지였다." 카셀은 흥분하여 얼른 물었다 "뭐라 쓰여 있었습니까?" “나의 축복이 벌써 작용하여 천생배필을 가넬로크에서 만나버렸다더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많았는데 말이야. 넌 바로 그 아이와 닮았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쥐 잡으려고 곡괭이 들고 쫓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카셀은 뭐라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웃기만 했다. "혹시 그 남자의 이름이......?" "내게 이름은 말하지 않았으니 묻지 말아다오." 그녀는 등을 덮는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처음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제이와 그녀를 보호했던 중년의 남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자." 그 남자는 그녀의 명령에 고개만 끄덕인 후 그녀의 옆에 붙어 걷기 시작했다 돌아서기 직전에 카셀을 잠깐 보긴 했으나, 그 남자가 짓는 미소의 의미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카셀은 홀린 듯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제이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아아, 저, 저, 저 남자. 저 분과 얘기해 봤어?" "딱 두 마디 물어보더라." 제이는 몹시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검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아이린에게 검을 배운 적이 있는지?" "그래서?" "대답은 알잖아. 그런데 누구냐, 저 남자는?" 카셀은 인사 한 마디 못 하고 보내버린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러나 그녀가 말했듯이 이 만남은 비공식적이었다. 아마도 그 남자도 뒷날의 즐거움을 위해 인사를 미룬 것일지도 몰랐다. “난 모르겠지만, 그 뭐냐......? 네 그 '몇 걸음 싸움' 으로 잠깐 겨뤄보았겠지? 어떻든?" "몇 걸음 싸움?" 표현이 재미있어서 곱씹어보다가 제이는 설명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마스터 아이린은 검의 간격이 자유자재였다. 그 블랙이라는 자는 검의 간격이 없었다. 둘 모두 나를 뛰어 넘는 자들이었지. 그런데 저 자는....... 칼에 손을 올려놓자마자 검의 간격이 영이 되어버렸다." "영? 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제이는 화를 됐다. "칼을 뽑지도 않았는데, 난 절린 거나 다름 없었다는 뜻이다. 그자가 칼에 손을 올려놓는 순간 우리 둘 다 죽은 거였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젠장, 그런 거 묻지 말고 저 자가 누구인지나 말해," 보기 드물게 흥분하는 모습이 제이답지 않았으나, 더 인간적으로 보이긴 했다. 카셀은 여관 족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알려진 분이다. 그리고 아란티아 여왕의 수호기사지." "하! 소문으로는 들었지. 그럼 그가 마스터 퀘이언이라는 거였냐?" "이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기도 하고." 카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저런 사람과 명칭을 같이 한다는 부담이 또 머리 속에 떠올랐다. 제이는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싸우지도 많고 진 것 같아서 열 받는다고 털어놓으며 물었다. "그럼 그 여자는?" "날 캡틴으로 최종적으로 인정해주실 분." 제이는 얼른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근데 인정은 받았냐?" "아니. 오히려 부인했어." 제이는 위로하려는 말을 하려다 카셀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즐거워 보인다? 아까는 캡틴의 자격 어쩌고 하면서 굉장히 우울해 보였는데." "그래 보여?" 카셀은 웃었다. 여관에 도착하자 오지 않던 잠이 잘 왔고, 울프의 기사들을 만날 순간이 흥분되기까지 했다. "여왕께서 오셨었다고?" 마차를 타고 가며 쉐이든이 물었다. 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전날 늦게 잠을 이룬 셋보다 생생했다. “그 분이 나디움을 벗어나는 일이 다 있군 그것도 카셀 너를 보려고?" 그도 그 일은 무척 의외였나 보다. 카셀은 그가 당연히 여기며 어제 있었던 괴상한 일에 대한 설명을 해줄 줄 알았었다 카셀이 어젯밤의 일을 소상히 묘사했더니, 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그런 말씀을 잘 안 하시는 편인데 의외군." 쉐이든은 마부 쪽으로 나 있는 작은 족문을 열어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고, 마부는 딱딱하게 '곧' 이라고만 말했다. “어쨌든 일은 그리 되었고, 좀 부탁이 하나 있어. 다른 둘도. 특히 제이메르에게." 카셀이 말했다 "내가 뭘?" 제이는 잠을 저장하거나 미루는 방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똑같이 못 잔 카셀은 끝없이 하품을 했으나, 제이는 가끔 창문에 기대는 정도 외에는 졸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난 나디움에 들어가는 순간 캡틴 행세를 하지 않아," "거짓말을 하겠다는 거냐?"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거야. 이건 여왕계서 거신 내기야. 그들이 나를 캡틴으로 알아보느냐 아니냐.......” 쉐이든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내기다. 카모르트에서처럼 널 꾸밀 하등의 이유가 없어." "생각해 둔 바가 있어서 그래 쉐이든도 따라줘. 마스터 타냐도 그리 해주세요." 관심을 두지 않을 줄 알았던 그녀도 물어봤다. "그럴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골드 게이트 바깥에 있는 적은 염두에 두고 있나요?" "예. 오히려 그 상황이기에 이런 내기를 해야 했습니다. 지금 그일이 아란티아의 국가적인 위기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거나, 아니면 지금 이 자리의 네 명뿐이니까요. 울프의 기사들은 캡틴을 맞이하는 문제보다 그 위험에 맞서는 게 더 중요하니, 굳이 이 문제를 부각시켜 혼란을 가중 시킬 필요는 없을 겁니다." 쉐이든은 의자에 깊이 기대었다. "네가 뭔가를 계산했다면 따르겠다. 카모르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 "아, 혹시 울프 기사단의 명단 같은 거 있어?" "기사단 숙소에 가서 주지." 제이도 물었다. "내가 할 일이란 건?' "너도 가급적 너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게 좋겠어. 굳이 어찌 하란 건 아니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될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왜?" "나디움 내에서도 일부는 캡틴 울프에 대한 소식이 알려져 있을거야. 하지만 얼굴은 모르겠지. 그 와중에 외부인이 나타나면 뻔하잖아. 그런데 외부인이 두 명이면 약간은 선택의 여지가 넓어지지.” "필사적으로 정체를 숨기려 한다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군.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제이는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울프의 기사들과 겨루고 싶지 않나?" 카셀이 목소리를 약간 낮춰 말했다. 제이는 쉐이든을 슬쩍 노려보았고, 쉐이든도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겨루고 싶다!" "내 말대로 해.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럼 너는 원하는 만큼 울프의 기사들과 시합해 볼 수 있을 거다." 제이는 뺨을 긁적이며 강한 어조로 말하는 카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너 좀......뭔가 바뀐 거 같다." 쉐이든이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며 말했다. "저게 카셀의 진짜 모습이다. 네가 지금까지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모르겠군." 카셀이 난처해했고, 제이는 굳은 표정으로 쉐이든을 노려보았다. 그는 여러 차례 쉐이든에게 강한 경쟁의식을 표현하곤 했는데, 쉐이든은 그것을 받아주지 않았다. 제이도 많이 참고 있다는 게 명확히 보였다. 카셀은 그럴 때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특히나 이렇게 좁은 마차 안에서라면 과격한 두 사람의 성격을 고려하여, 카셀은 미리 언급해 둔바가 있었다. '제이메르, 난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원하지 않는다.' 제이는 진지하게 고민한 후 알았다고 대답했다. 어쩌면 제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대뜸 그는 '울프의 기사와 겨루는데 굳이 나디움까지 갈 필요는 없다. 여기에 울프의 기사 중 가장 강한 이가 있는데!' 라면서 좁은 마차 안에서 칼을 뽑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그 정도로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봐, 카셀." 쉐이든이 창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화이트 게이트다. " 카셀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마차는 언제부터인지 바닥이 하얀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곧게 별은 길 끝에 놓여있는 거대한 집들 때문에 처음에는 화이트 게이트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게이트와 달리 화이트 게이트는 시야를 가리고 길을 막는 거대한 성벽과 성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을 상징하는 거대한 두 개의 기둥이었고, 넓은 길 좌우에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었다. 카셀의 눈은 기둥을 따라 점점 위로 올라갔고, 다가갈수록 목이 뒤로 젖혀졌다. 게이트 앞을 막아야 할 커다란 문은 굳이 닫을 필요도 없다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이 게이트는 외침을 막는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군." 하얀 기둥의 끝에는 아래에서 잘 보이지 않는 창문 같은 것이 나 있었다. 속이 빈 구조물 같지는 않았으나, 기둥 아래의 어디에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없었다. 안이 비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해도 중간에 지쳐서 굴러 떨어질 만큼 높았다. "어째서 론타몬의 대군을 맞아 골드 게이트에 배수의 진을 쳤겠어?" 쉐이든이 설명해주었다. 화이트 게이트를 지키는 병사들과 마부가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눈 후 잠깐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카셀은 두 개의 하얀 기둥에 계속 시선을 남겨 두친 여왕의 도시 나디움으로 진입했다. "화이트 게이트에 대해서도...... 또 골드 게이트 전투가 어째서 화이트 게이트 앞이 아닌 그 곳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도, 내가 본 역사책에는 쓰여 있지 않았어." 카셀이 말했다. "네가 본 역사책의 저자 중에 아란티아 인이 없었겠지." 쉐이든이 아주 간단하게 카셀의 의문을 해결했다. 카셀은 나디움에 들어선 이후에도 화이트 게이트 쪽을 보다가, 더 오래 보지 못하는 점을 아쉬워하며 내민 머리를 집어넣었다. “나디움의 도서관에 가야겠어." “할 일이 많을 텐데?" "그러니까 더욱 책을 봐야지." "여왕의 성 아래에 천장이 둥근 건물이 도서관이야. 하루에 한 권씩 원하는 책만 읽어도 못 다 읽을 양이 꽃혀 있으니 네가 원하는 시간에 찾아가라." "벌써 행복해지는군." 카셀은 나디움의 정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큰 길을 따라 이루어진 건물은 모두 하얀 색이었다. 때가 타기도 하고, 좀 부서진 부분이 있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런 부분은 옛스러운 멋을 살려내는 몫을 해주었다. 블루 게이트에 이어 화이트 게이트까지 끈질기게 이어져 있는 외길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디움을 관통하는 중앙로로 이어져 있었다. 약간 오르막길로 이 길에서 벗어나 있는 집은 하얀 색으로 통일되지 않고 집 모양도 제각각이었으나, 나무로 만든 집은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늑대의 동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게 재미있었다. 동상 하나하나가 멈춰 서서 구경해도 될 만큼 멋했다. 쉐이든은 그런 동상 중에 몇 개는 아란티아가 만들어질 때부터 있어온 거라고 말해주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이 나디움이라는 도시가 하늘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과 아주 가깝다는 점이었다. 하늘산맥과 붙어있는 또 다른 나라인 가넬로크에서는 일부 약초꾼이나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학자들 외에는 하늘산맥에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디움은 한 시간만 공들여 걸으면 하늘산맥에 다다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마차는 하늘산맥의 산으로 더욱 가까이 접근해 가고 있었다. 마차가 멈춘 곳은 하늘산맥에 연결된 산과 나디움의 서쪽 끄트머리가 만나는 부분이었고, 바로 그곳에 여왕의 성이 있었다. 즉, 동쪽을 바라보는 성은 하늘산맥을 등지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아이나카스트 산이다. 루티아로 이어지는 입구라고도 하고, 하늘산맥의 신이 공식적으로 인간에게 출입을 허락한 문이라고도 하지, 고대어로 뭐라고 하긴 하는데, 대충 이 쪽 말로옮겨보면 ‘tm카이 게이트' 정도 되겠지." 쉐이든의 설명에 카셀은 뭔가를 깨닫고 놀라 물었다. "그럼 아란티아의 모든 게이트는 여기에서 출발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해도 될 거다. 다섯 개의 게이트를 지나 하늘산맥으로 들어가는 여섯 번계 게이트가 이 산이다....... 시인들이 가끔 그런 말을 하는데 실상이야 나도 모르지. 천 년 전 기록이 아직도 얌전히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고." 혹시나 알까 하고 기대했던 타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창 밖만 내다보았다. 외부에서 바라본 여왕의 성은 마치 화이트 게이트의 두 기둥을 뽑아다가 여기저기에 박아놓은 것 같은 높은 탑들이 뾰족뾰족하게 솟아 있는 곳이었다. 탑 하나하나가 굉장한 높이로 솟아 있어 언뜻 위압감을 줄만 한데도, 꼭대기에 눈이 쌓여 하얗게 보이는 아이나 카스트 산을 배경으로 서 있으니 되려 아담하게 보였다. 놀랍게도 그 뾰족한 기둥들은 뾰족한 돌산의 돌출 방향과 똑같이 뻗어 있어,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 조화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왕의 성은 산을 담아있었다. 그리고 성의 한족은 산에서 내려온 절벽과 붙어 있었고, 거기에서 흐르는 폭포수가 성의 정원에 떨어졌다. 정원에서 흐르는 물은 성 전체를 가로질러 나디움 외곽으로 흘러갔다. 아마도 서쪽 바다로 흐르는 몰비 강과 합류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이 성을 만든 사람의 생각을 엿본 기분이 들어, 알 수 없는 전율에 몸이 떨렸다. 운이 아니라 정말 그걸 염두에 두고 천 년 전에 이 건축물을 지었다면, 카셀은 여왕이 아니라 그 건축가를 향해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성의 모든 것이 산과 조화를 이루고, 그 웅장한 크기를 산의 웅장함에 묻혀 앞에 선 이방인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나라가 세 번씩 이름을 바꾸고 삼십 번씩 국경을 바꿔갈 때 아란티아는 누구의 침략도 받지 않고 이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감히 어느 나라의 왕이 이런 성에서 천년 동안 아란티아를 다스린 여왕을 끌어내릴 수 있겠는가? 아란티아를 점령했다하더라도 그들은 아란티아에 경배해야 할 것이다. 아란티아는 결코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 이 곳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갈 필요도 없고, 이 곳을 가지고 있음에 다른 곳은 필요가 없었다. 카셀은 그 천 년의 비밀을 한 번에 접한 충격에 잠깐 어지러웠다. 마차는 성문 바로 앞에서 잠시 멈췄다. 카셀은 입을 헤에 벌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부는 성문 앞을 지치는 네 명의 경비들에게 뭐라고 말한 후 말을 돌려 성 옆의 다른 건축물로 향했다. 성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제이가 물었다. 제이도 성의 아름다움에 반해 몇 번이고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던 차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울프 기사단의 숙소." 쉐이든이 짧게 말했다. 그가 숙소라고 낮춰 말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개별적인 건물로 보면 틀림없이 훌륭한 건물이긴 했으나, 그 나디움의 성 옆에 붙어 있으니 영락없이 나무에 매미한 마리 붙어있는 꼴이었다. 전혀 조화롭지 않았다. 본래 이름은 늑대들의 쉼터라고 정문 옆에 있는 대리석에 엉성하게 새겨져 있었다. 참으로 무난한 이름이었으나, 어했든 '숙소‘보다는 나았다. 그들은 이미 존재 자체로 신비하고 강한 기사단이었으니, 드래곤 기사단이나 이로피스의 왕실 기사단처럼 자기들이 소유하고 지키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붙여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만들어내는 것에 노력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쉼터니 숙소니 하는 건 울프 기사단에 어울리지 않았다. 갑자기 카셀은 이 모든 인연의 시작이 되어 주었던 패잔병들의 마을에 있던 패잔병들의 쉼터를 떠올렸다. 여기에서는 또 어떤 인연이 시작될까? 긴 머리의 레이디가 해주었던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불안함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말을 곱씹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오기가 생겼다. 정문에서 마차 앞에 뛰어든 남자 덕에 카셀의 생각이 끊겼다. 그는 바지만 입고 근육질의 각진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낸 명치 큰 남자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눈에는 웃음이 흘렀다 "여어!" 그는 마차 옆으로 달려들어 문을 왈칵 열었다. 공교롭게도 카셀이 있는 자리였다. 카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으나, 남자는 카셀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쉐이든 만을 보며 말했다. "아니, 제 너 하나냐? 나머지는?" 쉐이든은 그를 보고 호통쳤다. "레이디 앞에서 무슨 짓이냐? 당장 물러서라!” "아, 죄송했수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을 한 타냐를 보고 황급히 마차 문을 닫았고, 마차는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그 남자는 빙 돌아 쉐이든이 앉아있는 쪽 창문에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어 말했다. "하얀 늑대들이 돌아온다고 다들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 수련장으로 나와라." “다른 친구들은 없다." "에? 왜?" "피곤하니 파티나 그 간의 설명 같은 건 나중에!” "그렇지만 다들 기다린다." "그럼 내일까지 기다려." 쉐이든은 쏘아붙이듯 말했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차를 따라오길 포기했다. "누구야?" 카셀이 물었다. “브나타이돌 울프.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사교성도 좋은 녀석이지.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서 뭔가 축하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저 녀석을 거치게 돼. 아즈윈을 짝사랑하는데, 언제고 자기가 더 세지면 청혼을 받아달라고 했다가 다리뼈가 부러지도록 얻어맞고 다시는 그런 말을 안 하더라." 마차가 멈췄다. 건물 앞에서 그들은 마차 뒤에 실은 짐을 내렸다. 밀지 않은 곳에서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렀다. "우선 너와 제이메르는 여기에서 묵는 게 좋겠다. 아마 오늘 중으로 몇 가지 일정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없을 거다. 나는 바로 마스터에게 돌아왔다는 보고를 하러 가야겠다." 쉐이든이 말했다. “나도 같이 가야 하지 않을까?" "일단 어디에 계신지 알아봐야 하니 , 둘 다 방에 먼저 가 있는 게 좋을 거다. 구조는 간단하니, 직접 찾아가. 내 방이 2층 34호실이니, 둘이 35호실과 36호실을 써라." "무슨 여관 방 배정 받는 것 같군." "준비가 되면 사람을 보내겠다. 그 때까지 편히 쉬도록 해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주방장이 다 해주니 식당에 말하고." 쉐이든은 뭔가 더 말할 걸 찾다가 말했다. "나는 가급적 아무 말 안 할 데니, 다른 녀석들을 만나면 네가 알아서 처신해." "그렇게 할게." 카셀은 걱정스러워 하는 쉐이든에게 자신감을 보여주려 웃어보였다. 쉐이든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던 타냐가 말했다. "저도 왕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일고, 루티아와의 연락을 취해야죠. 그리고.......” 그녀는 카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하얀 늑대들의 소식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카셀은 고개를 약간 숙였고, 타냐도 목례하고 왕실 족으로 걸어갔다. 쉐이든은 카셀에게 수고하라는 말을한 후 돌아서려다, 제이메르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카셀을 지켜줬으니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겠지만, 가급적 울프들과의 충돌은 없었으면 좋겠군." "장담 못해." 제이는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고 말했다. 카셀이 얼른 가운데에 꼈다. "걱정 마. 그럴 일 없을 거야." 쉐이든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도 별로상관 없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길게 옆으로 늘어선 숙소를 따라 걸어갔다. 카셀은 제이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쉐이든이 네가 나쁜 녀석이라고 판단했으면 나를 너와 단 둘이 남겨 두지 않아. 믿으면서도 괜히 그런 말 하는 거야. 그러니 오해 없었으면 해. 그리고 내가 시합을 많이 하게 해준다고 했지, 싸움을 하게 한다고는 하지 않았어." "글쎄, 몸이 머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지 않아서." 하는 말마다 저음으로 딱딱하게 말하는 건 쉐이든과 비슷했다. 그러나 모든 면을 고려해서 신중히 말하고 신중히 행동하는 쉐이든에 비해 제이는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같이 있으면 조마조마했지만, 때를 그런 게 매력적으로 보이긴 했다 카셀은 웃으며 말했다. "불편한 몸이군." 다시 카셀과 제이는 단 둘이 되었다. 카셀은 심호흡을 하며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정문에 손을 했다. 세세한 면이긴 했지만, 문고리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늑대의 모양인 걸 보니 확실히 이 곳이 늑대들의 쉼터구나 하는 실감이 있었다. 둘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즉시 배롤, 브나타이돌에 이은 세 번째 울프의 기사를 만났다. 어린 여자 아이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카셀은 절대 울프의 기사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런 커다란 건물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울프 기사단에 나이 어린 기사가 있다고 메이루밀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함부로 꼬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카셀은 지금까지 그것을 반쯤은 '그만큼이나 나이 어린 애가 있다'는 정도의 예를 들은 것으로 치부했고, 반쯤 믿는 마음속에서도 그런 기사가 있다면 당연히 남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성장이 발라 어린 나이에도 카셀보다 더 큰 덩치일 거라고....... 그녀는 사실 키가 굉장히 큰 편이었다. 루밀이 말했던 부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녀는 열네 살일 텐데, 여자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또래에 비해 엄청난 키라고 봐도 좋았다. 걷어붙인 팔에 붙은 근육도 여느 남자 못지않았다. 하지만 허리는 굉장히 가늘었다.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다리도 가늘고 길다는 게 눈에 띄었고, 햇볕에 타서 약간 검은 얼굴과 그을린 목밀미도 긴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말라서 예쁘기보다 원래 또래가 가져야 할 체형을 좌우로 눌러 위아래로 늘려놓은 것 같은 이미지였다. 또 약간 젖은 갈색 머리가 길지 않은 탓에, 살짝 부푼 가슴을 고려하지 않으면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라는 오해를 받을 만한 외모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또 카셀은 고민하는 시선으로 서로를 꽤 오래 바라보았다. 얼른 인사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결국 제이가 먼저 말을 하게 내버려두게 되었다. "뭐냐, 넌?" 그녀는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큰 눈동자를 돌려 제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넌?" 목소리도 의외로 낮았고, 또 성숙하게 들려 사실은 어린 여자가 아니라 단지 울프 기사단에 있다는 몇몇 여기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린 쉐이든과 여왕 폐하의 초대를 받아 이 곳에 머물게 된 손님 이오. 레이디께서는 울프의 기사요?" 카셀이 인사했다. "레이디?" 그녀는 그 호칭을 굉장히 어색해했다. "레이디 같은 건 아니야. 하지만 울프의 기사는 맞다." "난 카셀이고, 이 족은 제이메르요." “난 실디레 울프. 쉐이든의 손님이라면 내가 안내하지. 그런데 쉐이든이 어디 있어? 왔어?" "오늘 온다는 소식은 못 들었소?" "듣고 머리 감다가 수련장 가는 길이야." 젖은 머리의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는 목검을 들어보였다. 왜 여태까지 보지 못했나 할 정도로 길었고, 끝이 뾰족해 나무라 해도 꽤 위험해 보였다. "쉐이든은 어디 있지? 가급적 지치지 않았을 때 내 훈련 상황을 점검하고 싶어." "훈련? 난 파티라고 들었는데?" "우린 훈련을 파티라고 부르기도 해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 없어. 모이면 우린 거의 검을 겨루니까. 쉐이든은 어디 있어?" “마스터 퀘이언을 찾으러 갔소." 카셀은 높낮이 없이 말하는 무뚝뚝한 면이 쉐이든을 참 짧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목검의 끝을 내러더니 약간 시선을 위로 치켜 뜨고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들의 캡틴 중 하나를 데려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아, 그건.......” 카셀이 대답하려는 순간 제이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쳤다. 카셀은 깜짝 놀랐으나 이미 그녀는 제이의 손을 막친 뒤로 두 걸음 정도 될 뒤였다. 착지한 자리에서 쭈그린 자세를 하고, 그녀는 목검을 거꾸로 쥔 채 제이를 노려보았다. 큰 눈이 가늘어지고, 무표정한 얼굴에 살기가 드니 무서웠다. "무슨 짓이야?" 아무리 키가 커도 어린 여자를 상대로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화가 난 카셀이 언성을 높였다. "널 공격하려 했다. 동시에 나까지 베려 했고." "뭐?" 제이는 카셀의 앞에 서더니 칼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칼은 빌리와의 싸움에서 빼앗은 것이고, 칼집은 예전에 부러진 칼에 맞춰져 있으니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덜렁거렀다. "뭘 할 셈이었냐, 꼬마?" "재미있네. 목검 빌려줄까?" 그녀는 눈꺼풀도 떨리지 않는 침착함을 보이며 물었다. "목숨을 걸지 않는 싸움은 안 한다 목점 같은 건 필요 없어." 제이는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아, 정말? 그런 말을 하는 상대가 울프의 기사란 건 알고 있어?" 말하는 양은 도발이었으나, 진심으로 궁금해 하며 그런 걸 묻는 것 같아 건방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에게는 시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른다. 내 영역 안에 들어오는 녀석의 소속이 어찌 되건." "제이메르! 손님으로서의 예를 지켜라." 카셀은 소리쳤다. 제이는 고개만 돌려 말했다. "너 지금 저 녀석에게 무시당한 건 알고 하는 소리냐?" “그것과 예는 별개의 문제다." 제이는 코로 숨을 내및으며 물러났고, 카셀은 사과했다 "무례를 범했소. 우린 단지 쉐이든의 옆방에 가는 중이었소. 안내해 주시겠소?" 그녀는 제이에게 계속 시선을 남겨두고, 휙 돌아섰다. “따라와....... 난 실디레 울프야." 그녀는 맨발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마차를 쫓아왔던 브나타이돌이라는 남자도 맨발이었다. 돌로 만든 바닥을 사뿐사뿐 걷는 그녀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카셀과 제이의 신발이 이 깨끗한 하얀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카셀은 실디레를 만나 놀라는 바람에 신발을 털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복도에는 역대 유명한 기사들로 보이는 초상화가 몇 개 걸려 있었다. 아주 오래된 그림 몇 개는 색이 조금 바래기도 했다. 천년 역사 동안 이 곳을 지켜왔던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절로 경외감이 들었다. 9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낯익은 얼굴의 그림도 있었다. "어제 봤던 사람이군." 제이가 말했다. 앞서가던 실디레가 계단 위쪽에서 멈췄다. “마스터를 어제 봤어?" "그럼 안 되나?" 제이는 싸움 거는 투로 말했다. 실디레는 더 묻지 않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카셀이 제이의 어깨를 어깨로 살짝 밀었다. "그만 해둬." "내가 뭘?" 제이는 모른척했다. 가끔 이런 모습을 보면 제이가 사람 죽이는 게 본업인 사냥꾼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사람의 목숨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사람 사귀는 법을 잘 모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하얀 늑대들도 사람 대하는 일을 해 줄 캡틴을 카셀에게 맡겼다. 가장 리더십이 강한 쉐이든 역시 사람을 너무 강경하게 대하는 바람에 마찰을 자주 일으키는 성격이었다. 2층 복도에는 하얀 늑대들의 정규 복장이라 할 수 있는 플레이트 메일이 동상처럼 서 있었다. 쇠로 만든 부분은 하얗고, 갑옷에 걸린 망토 역시 약간 때가 타긴 해도 하얀 게, 배롤이 입은 갑옷 그대로였다. 동경하다 못해 전설처럼 생각하는 기사단의 갑옷이 이런 곳에 장식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다니, 웃음이 나왔다. 실디레는 2층에 늘어선 방의 중간쯤에 멈춰 그 중 하나의 문을 열었다. "여기야. 필요한거 있어?" 무뚝뚝하긴 해도 챙길 것은 다 챙기는 그녀였다. "없소. 그보다 기사 실디레. 실례가 된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열네 살. 실례도 아닌 걸 무지 열심히 변명하면서 묻는 건 상관없지만, 그건 왜 물어?" "울프 기사단에 어리지만 천재가 있다 해서 여쭈었소." 카셀은 웃으면서 말했으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천재란 건 하얀 늑대들을 말하는 거야. 거기에 오르기 전까지 난 그냥 울프의 기사 중 하나지. 천재라고 부르지 마." 그녀는 가는 몸을 획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검을 쥐고 걷는 그녀는 역시나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무서운 걸." 그녀가 사라진 후 혀를 내두르며 카셀이 말했다. "뭐가?" "열네 살에 울프의 기사라고! 안 무섭냐?" "나도 저 정도는 했어." 제이는 단언했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너희 같은 놈들 옆에 있으면 정상인 내가 비정상으로 느껴지니 그런 얘기는 길게 하지 말아야겠다." 카셀이 먼저 방에 들어갔고, 제이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침대보를 덮은 싱글 침대 하나에 열 벌쯤 되는 옷을 넣을 수 있는 옷장과 위아래로 책 스무 권 꽂으면 다 찰 책장이 방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이건 검소한 방이라기보다 뭔가 모자란 방이었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에 쉐이든의 방에도 들어 가 보았다. 촛대가 놓인 작은 탁자가 카셀의 방보다 추가된 가구였고, 책장에 책이 꽉 들어차 있는 게 조금 달랐다. "거긴 쉐이든의 방이야."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마냥 놀라며 카셀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실디레는 쟁반에 물컵을 두 개 담아 서 있었다. "아, 미안하오." 그녀는 쟁반을 불쑥 내밀었다. “나셔. 아까 내 행동에 대한 사과야." "고......마워." 카셀은 망설이다 편하게 대하기로 하고, 컵을 받으며 웃어보였다. "카모르트에서 왔어?" 실디레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쉐이든이 카모르트에 다녀왔을 테니까. 이름도 그 쪽 이름이고.” "아, 그렇군." 카셀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녀는 가만히 카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찰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까우릴 시험해 본 건 역시 울프 기사단의 캡틴에 대한소문 때문이야?" 카셀이 물었다. "시험 당했다는 길 알아?" 실디레는 뭔가 긴장하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제이메르가 반응하는 걸 보고 알았지. 그 친구는 공격하려 들면, 어느 방향에서건 알아버리니까." 카셀은 물을 모두 마시고, 그녀의 쟁반을 통째로 받아 주었다. "그럼 그가 캡틴이군." 그녀는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왜 싫어?" "아니, 하얀 늑대들보다 강한 자라면 나도 이의는 없어." "아직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어. 곧 알게 되겠지만, 울프 기사단은 사실 캡틴을 맞이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거야. 그러니 그 쪽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카셀은 말을 돌리며 쟁반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실디레는 문가에 서서 말했다 "아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캡틴이야. 난 쉐이든이 캡틴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 자리에 서는 사람이 쉐이든에도 미치지 못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 각오했던 일이지만 막상 당사자에게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뜨끔했다. “......명령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그녀는 말을 잇고는 제이가 묵고 있는 방족을 힐끔 보았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건 그녀는 울프 기사단의 한 명으로 존재하고 있는 만큼 또래의 어린 여자들이 겪지 못할 많은 일을 겪고 여기에 올라서 있는 것이었다. 슈벨도 통과하지 못한 테스트를 통과했을 것이고, 책만 읽은 자기보다 인생 경험의 폭도 더 클지 몰랐다.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맞아. 중요한 건 울프의 기사들이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지 명령의 문제가 아닐 거다." 카셀은 동의했다. 그녀는 밝고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그를 주시했다. "카셀......이라고 했지? 제이메르라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당신은 누구?" "난 하얀 늑대들의 친구다." "검은 쓸 줄 알아?" "전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지?" "될 수 없나?" "그건 아니지만.......” 그녀는 뒷말을 얼버무리더니,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어버렸다. 무표정한 얼굴을 계속 보다 보니, 찡그린 얼굴이 오히려 귀여운 소녀였다. "난 가겠어." 그녀가 돌아서자, 카셀은 아쉬웠다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따지듯 묻는 말에 카셀은 말문이 막혔다 제이메르도 그렇고, 배롤도 그렇고, 이 소녀도 그렇고 어제서 검을 잘 쓰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얘기하는 걸 싫어하는 걸까, 그는 의문이었다. "아니야. 바쁜 데 괜히 붙잡았군." 그녀는 이상한 사람 보듯 하며 복도를 지나가버렸다. 카셀은 팔짱을 끼고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제이가 문을 열고 나와 있었다. "그 애가 보고 싶어한 건 너의 검술이었다. 맨손이긴 했지만, 그 애는 몇 번이고 너에게 살기를 보였다. 하지만 너는 반응하지 않았지.” 대충 그런 줄은 짐작하고 있어 놀라지 않았다. "널 캡틴으로 보고 있던 걸." "내 알 바 아니지. 사실 이 런 걸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나?" 카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쟁반의 물을 내주었다. "기사 실디레가 사과하는 뜻에서 내주는 물이다. 마셔라." 제이는 한번에 들이켰다 카셀은 쉐이든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 중 '아란티아, 여왕의 건국'이라고 쓰여 있는 책을 꺼내 침대에 엎어져 읽고 있었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사건의 연속을 나열해 놓은 게 지루함의 극치를 달렸다. 이제 막 서장을 읽고 늑대와 함께 이 땅을 발견한 여왕의 이야기가 시작되려 할 때 누군가 창문을 톡독 두들겼다. 2층인데 어떤 사람이 창문에 붙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카셀은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만 놀랐다. "카셀?" 당연히 카셀은 그를 몰랐으나, 그는 카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맞소만?" 창문을 열어주니, 그는 안으로 뛰어 들어와 한 바퀴 가볍게 굴러 발딱 일어났다. "반갑다. 내 이름은 에릴. 쉐이든이 이 방에 귀한손님이 있다고 데려오라더군. 또 한 명은?" "아, 옆 방에. 그런데 에릴...... 울프요?” 카셀은 확인차 물었다. "아, 이 숙소에 울프가 아닌 녀석이 창문 뛰어넘어 올 리가 없지 않아?" 그는 킥킥대며 조금 경박스럽게 웃었다. 생긴 것도 굉장히 어려 보였고, 몸도 가늘었다. 금발의 긴 머리가 어깨에 찰랑거렸고, 팔다리도 길었다. 코가 조금 비틀어졌고, 눈도 무척 작고 가늘었으며, 얼굴에 뭐가 많이 난 게 사춘기 소년 같았으나 굵은 목소리는 결코 어리지 않았다. "불러오리다. 그런데 어디로?" "별관으로. 마스터 사무실이자 숙소. 흠, 그런데 왜 불러오라는 지는 얘기 안 해주던데, 무슨 일로 온 거요? 그냥 손님에게 이 숙소를 내주지는 않는데? 아, 오해 마셔. 이 방에 묵는다고 시비 거는 거 아니니까." 그는 또 웃었다. 카셀은 어색하게 마주 웃어주고 옆방에 있는 제 이를 부르러 갔다. 제이는 땀을 흘러며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어깨 다쳤으면서 무슨 짓이야?" 카셀은 화를 내며 말했다. 제이는 다친 족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안 아파." "그러다 나이 들어 고생한다고 내가 그랬잖아." "노인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이 들어서까지 살아있을 직업도 아닌데, 그런 걸 뭣 하러 걱정해? 그리고 아까 그 꼬마 녀석 보고 나니 몸이 가만히 있지를 않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몸을 함부로 굴리는 건 막고 싶었다. "가자, 불러." "누가? 쉐이든?" “마스터 퀘이언." "아, 어제 그 사람.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내가 왜 그를 만나야 하지?" "괜히 빼지 마.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도 거의 모든 사람이 최고라고 칭한 분이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나나서...... 겨루고 싶긴 하지." "넌 자제하는 법을 좀 배워야겠다.” "그런 충고는 거절이다." “그러니까 그냥 따라와." 카셀은 다짜고짜 그를 끌고 나왔다. 복도 끝에서 기다리던 에릴이 손짓했다. "혹시 두 사람 다 검술 훈련에 관심이 있으면 수련장으로 가 보셔들. 거기에 지금 기사단 중 서른 명 정도가 모여 있소이다.......” 둘을 안내하며 그가 말했다. "됐소." "좋지." 카셀과 제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카셀이 먼저 말을 정리했다. "우선은 마스터 퀘이언을 뵙겠소. 나머지는 나중에.” "그러든가." 에릴은 웃으며 앞장섰다. 별관에는 경비를 서는 것으로 추측되는 또 다른 기사 두 명이 정문 앞에 않아서 체스를 두고 있었다. 둘다 덩치가 컸다.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워낙 심각하게 체스를 두느라 에릴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체스 둘 줄 아시오? 둘 줄 아는 녀석이 오십 명 중에 달랑 저 두 녀석뿐이라 항상 저러지. 저 시간에 검을 연마했으면 하얀 늑대가 되었을 텐데, 자기들은 검보다 체스가 더 재미있대.......” 에릴이 설명하며 별관 안쪽을 안내했다. 바닥은 부드럽게 짙은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에는, 마찬가지로 울프의 성이 붙은 기사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둘 줄 아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는데, 동네에서는 제일 잘 두었소." "그럼 나중에 저 두 사람에게 가 보시오. 대환영 일 거야." 복도는 길었고, 햇살이 따갑게 비추는 창문을 가로지른 끝에 거대한 도끼가 좌우로 걸려 있는 방문이 있었다. 에릴은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었고, 안에 대고 말했다. "카셀과 제이메르를 데려왔습니다, 마스터." "들어와라." 에릴은 문을 활짝 열어 제이와 카셀을 안으로 들였다. 커다란 테이블 앞에 어제 여왕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앉아있었다. 밤에 봤던 모습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으나, 햇빛에 반사된 짙은 갈색 머리와 둘을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은 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펜을 쥐고 있는 손이 바빴다. "가봐라, 에릴. 아, 그리고 모여 있는 울프들에게 괜한 훈련으로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전해라." 퀘이언이 말했다. 에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한다고 들을 녀석들이면 굳이 마스터의 전언이라고 하지도 않고 제가 부탁하고 말겠습니다." "조만간 실전이 있을지 모르니 몸을 아껴두라고 하면 몇 명이나 동요해서 갑옷 입으러 달려갈 것 같으냐?" 에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저라도 갑옷 입으러 달려가겠습니다만?" "그럼 안 되겠군.못 들은 걸로 해라. 그냥 몸 좀 사리고 있으라고 말하고, 왜냐고 묻거든 도망쳐 버려라." "그게 더 수상하게 보일 겁니다." "넌 항상 수상해 보이니까 괜찮아. 가 봐라." 에릴은 뒤통수를 극적이며 나갔다. 방 안에는 세 명만 남았다. "둘 모두 어제 잠깐 봤으니 인사는 생략하지. 쉐이든에게 짧게 설명을 들었다. 캡틴 카셀." 퀘이언은 펜핀을 잉크통에 꽂고 의자를 뒤로 빼 다리를 꼬았다. 그는 손으로 방 끝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카셀은 조심스럽게 끌어다가 그의 앞에 앉았고, 제이는 소리 내어 질질 끌고 와 털씩 주저 맞았다. 퀘이언은 그 모습을 보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몸이니, 캡틴이라는 호칭은 생략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셀은 최대한 겸손하게 보이길 바라며 말했다. "쉐이든이 그 얘기도 하더군. 나나 여왕이 아닌 울프들에게 직접 인정을 받고 싶다고?” "예. 특별히 마스터와 여왕 폐하를 거역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확실히 어제도 페하와 그런 비슷한 얘기를 나누었다고 들었다. 그럼 난 우선 그 문제에 대해선 빠지도록 하지." 퀘이언은 약간 고개를 숙여 카셀의 눈을 주시했다. 그는 대화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카셀과 대화할 때면 눈빛으로 먼저 제압하곤 했는데, 퀘이언의 눈은 아버지와 담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조언해두지. 울프들은 실력 없는 리더를 따르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언변 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퀘이언과의 대화는 아주 오래 전부터 머리 속에 구상해 둔 바가 있었다. 그가 호통치면, 그가 협박하면, 그가 거부하면, 그가 인정 해주면...... 그 많은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 모두 머리 담아두고 있었다. 에릴과 걸어오면서도 계속 그 가정에 대한 정리를 연습해 둔 터였다. 하얀 늑대들의 마스터, 아란티아 여왕의 수호 기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강이라고 주저 없이 추켜세우는 기사를 상대로 하는 대화와는 수준이 달랐다. 카셀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압니다.......” 그러나 카셀은 그 말 이후 준비된 말을 내뱉지 못 했다. “그럼 왜 배롤이 부상당했음에도 검 한번 휘두르지 않고 적의 인질이 되었나, 캡틴 울프?” 방에는 또 한 명이 있었다. 뒤통수에서 칼을 던져도 피할 만큼 감이 좋은 제이도 모를 정도로 그 한 명은 구석에 조용히 앉아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의자를 넘어뜨렸다. “마스터!” "안녕, 제이메르. 약속을 지켜주었구나. 사실 어제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마스터 퀘이언께서 이 가련한 몸이 부상당했다고 버려두시는 바람에 못 갔지.” 아이린이었다. 아즈윈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은퇴한 하얀 늑대들 중 최고의 기사. 그녀는 단정한 짧은 머리에 펄럭이는 헐렁한 바지와 단추 두 개를 풀어버린 헐렁한 셔츠만 하나 걸치고 있었다. “나디움에 계시다는 건 짐작했으나,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마스터." 제이는 쩔쩔매며 말했다. 아이린은 손짓하며 말했다. "의자 들고 와서 내 옆에 앉아. 나중에 실컷 그간의 일을 얘기하자. 지금은 캡틴에게 좀 따질 게 있어서." 제이는 시키는 대로 아이린의 옆에 않았고, 카셀은 넓은 방 한 가운데 죄인처럼 갇히게 되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자꾸 이 두 사람이, 대륙 전체를 뒤져도 비슷한 수준이 나오지 않을 엄청난 기사라는 생각에 온몸의 근육이 긴장되었다. "내가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했나?" 쏘아 붙이는 아이린의 목소리에 카셀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몰아붙이는 그녀의 말투가 마치 블랙을 닮은 것 같았다. “캡틴의 직위를 버려라, 카셀. 너는 자격이 없다!' 그 때의 그 아찔한 순간이 떠올라 카셀은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카셀은 아이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퀘이언을 향했다. 그도 아이린이 하는 양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아이린이라도 마스터 퀘이언 앞에 선 캡틴 울프의 대화에 무단으로 개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건 분명 약속된 행동이었다. "왜 대답을 못 하지, 캡틴?" 아이린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어찌 할 게냐, 카셀?” 레드 게이트 앞에서 캡틴의 직위를 시험하는 블랙의 목소리와 아이린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만약 아이린이 지금 하는 질문이 블랙과 같은 의도에 있다면, 절대 저자세를 보여선 안 된다. 카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마스터 아이린." "질문에 답부터 해라." 아이린은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 질문이 그 질문의 답입니다." "좋다. 뭐가 궁금한가?" "왜 직접 와서 저를 구하지 않으시고 제이메르를 보내셨습니까?" 아이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내가 너를 구해줘야 할 의무라도 있나? 건방지구나! 제이메르라도 보내준 걸 감사할 줄 모르다니,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제이메르도 그녀의 모습에 놀랐고, 카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이는 자신의 속마음을 잘 숨길 줄 모르니 그것은 적어도 제이에게 보여주던 그녀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일부러 화를 내고 있었다. 마스터가 직접 지시할 하얀 늑대의 마지막 테스트! 카셀은 직감했다. 잔뜩 긴장된 이 놈의 두 손을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쓰며 그는 부드럽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선택의 문제죠. 마스터 아이린께서 검은 기사의 정체를 알아보셨다면, 그런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는 아란티아에 직접적으로 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경우 저는 제쳐두고라도 저를 억류하고 있는 그 자에게 직접 오셨어야 하지 않았는지를 여쭙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자는 대단히 위험하고 강한 존재였으나, 두 사람의 힘이라면 가능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옆에 그 자의 동행이 없었다면 어쩌면 제이메르 혼자서 검은 기사를 이졌을 지도 모릅니다." 아이린은 팔짱을 끼고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게 어찌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검은 기사는 건드릴 수 없는 괴물을 곁에 두고 있는 자다. 검은 기사 하나만 있다면 나는 내 힘을 모두 걸고 그 자를 쓰러뜨렸겠지. 하지만 그를 받치고 있는 또 다른 존재는 나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그래서 제이메르에게 검은 기사와는 대적하지 말고 너를 구하라고만 지시했으며, 나는 미리 이 곳에 와서 거기에 대비하였다." "그 대비는 골드 게이트에서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이미 검은 기사와의 싸움을 하얀 늑대들과 함께 한 차례 겪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를 보는 순간 저는 공포에 질렸습니다.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마스터 아이린, 당신도 그 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습니까? 무서워서,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이로드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으며, 부상 당한 배롤의 목숨을 책임지기에 제 목숨은 너무도 가벼웠습니다. 그게 제 최선이었습니다." "검을 볼 줄 모르는 녀석이 부하에게 자기 짐을 던져버 리는 것이 잘 한 짓이며 최선을 다했다고 할 짓이냐?" "최선을 다했으며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됐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레드 게이트 병사들의 커다란 희생이 있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고, 그들은 사명감을 위해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 놈 봐라? 한 마디도 안 지네." 아이린의 눈썹이 껶였다. 카셀은 난처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열심히 대답하려 했을 뿐입니다." 퀘이언이 짧게 웃었다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렸다. 아이린도 큭큭 대고 소리내지 않으려 애쓰며 웃었다. "너 내 의도를 알고 문답을 하고 있구나. 그렇지?" "절 시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시험에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성격이야, 꽁 해서 혼내는 아빠 앞에 고개 숙인 꼬맹이 같은 놈들 보다야 훨핀 낫지. 제이메르, 저런 건 너도 보고 배워야 할 거다." "못 합니다." 제이는 단호했다. 듣고만 있던 퀘이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 이야기에는 내가 모르는 도입부가 있을 것 같군. 어떤가, 카셀?” "어디부터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자세한 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퀘이언은 창가의 해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에 울프 기사단 전원과 대신들을 소집하는 간단한 파티가 있다. 그 때까지 시간이 있다. 식사는 했나?" "아닙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끝날 얘기면 좋겠군. 따라와라.”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늑대들의 만찬 워낙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얘기를 많이 해 준 탓에 과거의 이야기는 많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식사를 하면서 퀘이인에게 빠진 부분 없이 모두 얘기할 수 있었다 식기가 부딪치고 와인 마시는 소리나 음식물을 씹는 소리, 음식을 나르는 시녀들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만 반복될 뿐, 넓은 식당에는 카셀의 낮은 목소리만 울렸다. 중간에 쉐이든과 타냐가 소리 없이 나타나 의자에 앉았다. 쉐이든이 퀘이언과 아이린에게 간단히 인사했고, 타냐는 거의 보일 듯 말 듯한 고갯짓만 보였다. 계속된 이야기는 꽤 많이 압축했음에도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중간에 제이메르의 활약이 상당히 부풀려줬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이린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 친구들이 없는 상태에서 제이메르는 마치 저와 피를 나눈 형제처럼 전력을 다해 절 보호해주었습니다." 아이린이 귀엽다는 듯 제이를 바라보았으나, 제이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빵만 뜯어먹고 있었다. 퀘이언은 심각히 얘기를 듣다가 와인 한 잔을 깨끗이 비우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 내 제자들을 꼬셨나 했더니 이야기로 유혹을 했군. 이제야 납득이 가. 매일 검만 다루는 녀석들이 갑자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넘어갈 법도 하지." "맞습니다. 옆에 두면 심심할 틈이 없죠." 쉐이든도 심각하게 그 말을 받으니, 그게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아이린이 숨죽여 웃지 않았다면 정말 농담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쉐이든도 곧 웃으며 말했다. "카셀의 말에 과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 축소되어 있군요." 제이메르도 동의했다. "카셀, 넌 블랙한데 쫄아서 아무 것도 못 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내가 멀리서 봤을 때 너는 오히려 포로 주제에 호통치는 입장이었다. 슈벨이란 자식과 그 누구냐....... 내가 배때기 부셔버린 놈도 꼼짝 못 했지." "그건 빌리야!"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어." 이 경우 카셀은 어떤 식으로 말해도 자신의 잘난 척이 되어버릴 테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퀘이언은 식기를 모두 물리라고 명령하고 말했다. "난 다시 폐하의 곁으로 가야 하니 나머지 문제는 아이린과 상의해라, 카셀. 그리고 쉐이든 너도. 마스터 타냐, 일이 이왕 이렇게 된거 갈 길이 바쁘지 않다면 조금만 여기 머물러 우릴 도와주시오." “마스터 퀘이언께서 직접 그런 부탁을 하신다면 전 거절할 수 없지요." 타냐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시기가 이러하니 당분간은 여유를 두고 너와 이야기하기 힘들겠구나, 카셀. 하지만 어제 폐하께 얘기한 바가 그러하고, 네 뜻도 그러하다면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예. 지금 급한 건 제가 아니라, 블랙입니다." 퀘이언의 말에 카셀이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다 그리고 너와 페하의 약속이 아마도 내가 내주는 테스트가 될 것이다." 퀘이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두고, 식당을 나서며 아이린의 어깨를 살짝 짚어 뭐라 속삭였다. 그 사이에 카셀은 낄 틈도 갖지 못 했고, 퀘이언은 사라졌다. 아이린은 다시 카셀을 바라보았다. "퀘이언이 말하길, 오늘 저녁에 울프 기사단 전체와 간단한 파티가 있댄다. 그 때의 행동 방침에 대해서는 따로 일러두지 않겠어. 알아서 해."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휘파람을 획 불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좀 움직여야지. 제이메르, 따라와라." 아이린은 '나중에 보자'는 말만 툭 던져 놓고, 제이를 끌고 식당을 나가버렸다. 카셀은 긴 이야기에 비해 폭풍과도 같이 정리되어 버린 마지막 몇 마디에 당황하여 손가락을 들었다. "방금 테스트라고 하지 않으셨어?" "신경 안 써도 돼." 쉐이든도 물로 입을 헹구며 말했다. “그런데 두 분 다 정작 말해야 할 건 말하지 않고 가셨군. 울프 기사단의 파티가 있기 전에 왕실 대신들과의 회의가 잠시 있다. 이미 그들은 네가 캡틴으로 임명된 걸 알고 있다." "너무 많이 그 문제를 알고 있군." 카셀은 식기를 나르는 시녀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아, 시녀들은 걱정하지 마라. 입이 무겁지 않는 아이들은 이 곳에 있지도 못 해." 쉐이든이 안심시키더니 노트를 끈 권 내주었다 손으로 직접 썼고, 그림도 곁들여 있었다. "이게 뭐야?" "아까 달라고 했지? 울프 기사단 전원의 검술 훈련 상황이다. 간단한 신상 명세도 곁들여 놓았으니 참고하라고 가져왔다." "고마워. 이런 게 필요했어. 아까도 세 명이나 만났는데, 벌써 이름이 헷갈리기 시작해. 아, 그 중에 실디레라는 기사가 좀 특이하던데, 아즈윈을 닮은 것 같아서.......” “여자애라서 닮은 것처럼 느껴지겠지. 얼마 전부터 생리를 시작해서 신경이 예민해졌어. 자기는 애 낳을 생각 없으니까 이런 거 없게 해달라는데, 그런 부탁을 받은 내 입장은 무척이나 난처하지. 이런 건 여자들끼리 알아서 해줘야하는데, 아즈윈 녀석이나 말라 녀석은 자기 일에만 신경 쓰느라 도통 귀찮아 해서.......” 쉐이든은 입맛을 다셨다. 카셀은 실디레와 말라라는 이름의 두 여기사에 관한 프로필을 찾았다. 출신지나 이름, 성격이나 행동 등에 대한 얘기는 간단히 적혀 있고 대체로 정술의 특징이나 훈련 내용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말라 울프라는 기사는 얼굴이 검어?" 카셀은 '흑인'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물었다. 말은 들어봤어도 피부가 검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네가 알까 모르겠지만, 아란티아는 서족 바다 건너의 땅과도 교역을 나눈다. 그 곳 사람들은 피부가 대체로 정거나 우리보다 피부색이 진하거나 그러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쉐이든의 표정을 보고 카셀은 새삼 세상이 넓다는 것을 느꼈다. “말라는항구에서 울프의 기사를 보고 테스트 없이 여기에 들어오게 된 케이스지. 처음 들어왔 때부터 실력이 엄청났으니 오히려 그 애는 발전이 더디다고 봐야 할 거다. 원래 좋아하는 일이 아크랜드 역사 공부라서 검술 발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너하고는 얘기가 잘 통할게다." "흐음." 카셀은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쉐이든이 얼마나 울프들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건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 안 되는 작업이었다. "쉐이든, 넌 정말 이 곳을 좋아하는구나." 카셀의 말에 쉐이든은 빙그레 웃었다. 이 곳에 와서 그의 미소를 더욱 많이 보게 된 것 같았다. 타냐는 여왕의 성에 대해서, 나디움에 대해서, 또 아란티아의 정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쉐이든에게 물어보았고. 쉐이든은 그 때마다 친절히 얘기해 주었다. 아는 범위 내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는 쉐이든의 모습은 마치 인자한 선생님 같았다. 카셀은 조용히 앉아 울프들의 이름을 외우며 그들의 검술 기록 등을 읽어 내려갔다. 마침 노트를 거의 다 읽을 무렵 시녀가 한 명 들어왔다. 이 곳 시녀들은 거의 비슷한 복장과 머러 스타일이었고, 다들 외모가 수려하여 카셀은 볼 때마다 눈을 빼앗꼈다. 잡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의 양은 보통이 아니고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쉐이든이 설명해 주었다. "아마 도서관에 있는 사람의 절반은 비번인 시녀들일 게다." 그 말만으로도 카셀은 집안 일 하는 시녀라는 이미지를 던져버리게 되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온 시녀는 쉐이든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회의가 있으시다고." "나만은 아니겠지?" "성함은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같이 있는 모두를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쉐이든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카셀. 마스터 타냐도 같이 가시지요. 아직 폐하를 뵙지 못했을 테니." 카셀은 책을 덮고 쉐이든의 뒤를 따랐다. "왕실의 대신들과는 무슨 얘기를 하게 되지?" 카셀이 물었다. "걱정할 건 없다. 카모르트에서 봤던 대신들처럼 국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아니야. 실무자들을 거의 대부분 여왕의 직접 명령이나 개인 판단으로 움직이지. 대신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조언자다. 하지만 알아둬. 아란티아의 장래에 대해 누구보다 걱정하는 사람이니, 너와는 약간의 마찰이 있을 거다." "그것도 은근히 무섭군." "여왕께 조언하는 사람이라는 건 꽤 권력이 있다는 뜻이지. 당연한 것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아, 그런데 루티아에서는 어떤 정치 체제를 갖습니까, 마스터 타냐? 전혀 외부로 알려진 바가 없어 궁금했어요." "루티아는 정치 집단이 아닙니다. 오직 스승과 제자만 있을 뿐이지요." 타냐는 짧게 대답했다. 더 이상 물을 수도 없는 대답이었다. "아...... 그렇군요." 여전히 카셀은 타냐가 편하지는 않았다. 회의실은 재미있게도 한쪽 벽이 트여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트인 벽에는 하얀 실크 커튼이 걸려 있었고, 희미하게 보이는 벽 너머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정원은 검은 바위가 둘러쳐진 바위산을 벽으로 삼고 있었다. 바깥에서 봤을 때 산과 성이 합쳐진 부분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그 자리인 모양이었다. 바위를 따라 흐르는 물이 작은 정원 안에 연못을 만들고 있었다. 도시락 하나 싸오면 하루 종일 편안히 누워있어도 될 만한 멋진 장소였다. 여왕이 앉아 있어야 할 왕좌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카셀과 타냐, 쉐이든이 안으로 들어오자, 트인 벽의 반대편에 모여 이야기 하고 있던 대신들이 모두 셋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려, 쉐이든 울프. 카모르트에서의 일은 잘 끝냈소?" 그 중 한 병이 말했다. "예. 전해드린 보고서를 읽어보셨다면 대략적인 이야기는 모두 아실 겁니다." "너무 짧지 않소?" "자세한 보고서는 나중에 드릴 것이며, 아마 카모르트 왕실에서도 직접 소식을 알려올 겁니다. 반나절 만에 그런 얘기를 모두 적어 제출하는 건 무리 아닙니까?" 쉐이든은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말했고, 대신들도 더 따지지 않았다. 그러고 이번에는 카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타냐는 그냥 뒤에 서서 듣기만 했고, 대신들도 타냐가 누구인지 아는지 따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그 보고서 내용대로라면 그 뒤에 있는 분이 이번에 하얀 늑대들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뽑힌 캡팆이라는 건데,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여쭙겠소.” 가장수염이 긴 대신이 말을 꺼냈다. 여왕이 출석하지도 않았는데,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회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분명 하얀 늑대들은 자기들의 캡틴을 정할 수 있고, 그것은 여왕 폐하의 승인만 필요할 뿐, 다른 어떤 외부 압력도 받지 않는다고 법리 해석을 할 수 있소. 내가 좀 찾아봤더니, 정말 울프 기사단의 캡틴에 관한 법률은 그게 다더군. 맞소?" “법률이 정한 바가 어찌 되었건, 우린 우리에게 정해진 방식대로 행동했으며 틀린 점은 없습니다." 쉐이든이 대답했다. “하지만 한도라는 게 있는 법이오. 지금까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은 언제나 울프 기사단 내의 인물로 뽑혔던 관례가 있소. 울프의 기사들은 애초에 왕실에서 임명을 내렸으며 폐하의 승인이 있었던 인물이기에 굳이 다른 절차가 필요 없었던 게요. 승인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하얀 늑대들의 권한 만으로 캡틴을 정할 수 있다라는 규clr에는 이런 내면이 있다고 해석하고 싶소만. 그럼 지금 타국에서 데려온 자를 즉각 캡틴으로 임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소?" 쉐이든은 인상을 구겼다. “늑대들에게는 늑대들의 규clr이 있으며, 왕실에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울프 기사단의 캡틴은 때로 왕실의 얼굴이며 폐하의 대리인이기도합니다. 어느 정도왕실에서 개입할 권리는 있소." 다른 대신이 거들어 말했고, 쉐이든은 그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굳이 선을 나누고 싶으시다면, 왕실에는 이 일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말 늑대들은 왕실의 의견에 발가락 하나 걸치지 않고 있으며, 오직 페하의 명령에만 움직입니다." “그걸 칼로 나누듯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않소, 쉐이든 울프?" 다시 제일 수염 긴 대신 나서서 천천히 말했다 그들은 화내지 않았다. 흥분하지도 많았다. 모든 일에 너무도 느긋했다. 생각해보면 이 일에 그들의 이익 관계가 끼어 있을 리가 없다. 왕실이 직접 운영하는 기사단이라면 누가 캡틴을 맡느냐에 따른 권력의 변화에 민감하겠지만 그린 것도 아니니 그들은 순전히 기존의 법률과 규칙에 관한 얘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감정 없이 논리를 방패 삼는 웅변가는 같은 논리가 아니면 설득이 되지 않았다. 반면 논리로만 상대하기 때문에 그들은 카셀이 캡틴 직위를 갖는 건 납득하지 않는 것이었다. "법적인 문제로만 얘기하자면, 저는 그 문제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만.......” 카셀이 낮은 어조로 말을 꺼냈다. 수염 긴 대신을 비롯한 모든 이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래도 저 자신을 직접 변호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발언권 요청을 해야 합니까?" "아니오. 말해 보시오." "우선 제 이름은 카셀이며, 카모르트에서 밀 농사를 짓는 에밀노이의 아들입니다.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같은 곳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즉, 어떤 핏줄의 이름으로도 아란티아의 귀한자리를 차지할 인물은 아닙니다." "울프 기사단은 출신을 묻지 않소." 카셀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머리 속에 떠올렸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꺼내놓았다. "출신을 묻지 않는다면 제가 카모르트의 출신인 건 문제가 되지않으며, 하얀 늑대들의 권한으로 캡틴을 정할 수 있다면 원래 울프 기사단이 아닌 사람이 선출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쉐이든의 주장이고, 틀린 점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신들께서는 지금까지 울프 기사단 내에서만 캡틴이 선출되었던 선례를 들어 저를 거부하려 하십니다. 맞습니까?" "아아, 카셀 노이. 사태를 너무 단순화 시키고 있소. 이건 좀 더 복잡한 문제요." “그럼 제가 캡틴이 된 계기는 더 복잡한 문제였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란티아처럼 정치가 잘 이어지는 나라에서, 캡틴 선출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왜 법전의 몇 줄만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전 그 법전을 읽지 않았고 아란티아의 법률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러나 하얀 늑대들과 함께 한 달간의 생활을 떠올려보면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얀 늑대들과 울프 기사단에게는 문장으로 적혀 있는 규clr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법률의 해석에 우선되어야 하는 존재, 그들이 울프 기사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캡틴이 되는 과정에서 규칙을 어긴 건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럼 하얀 늑대들과 견줄 만한 검술을 가지고 있소?" "없습니다." 카셀은 짧게 대답했다 “마치 검을 전혀 쓰지 못 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맞습니다. " "그런데도 캡틴의 자격이 있다고?” "대신께서는 제가 한 달 동안 고민했고, 아란티아에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또 한 번 고민했던 문제를 들추셨습니다. 자격이 있냐고 하셨습니까? 있습니다. 아란티아의 캡틴 울프는 스스로 캡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직위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를 캡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오만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소?" 대신의 말에 쉐이든이 울컥 하고 앞으로 나섰으나 카셀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만이라고 칭하신 그 권한은 오직 나를 캡틴이라고 인정해 주는 사람 앞에서만 존재하는 권한입니다. 당신들은 하얀 늑대를 향해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제가 가진 오만이고, 제가 가진 무기이며, 제가 가진 하얀 늑대의 이빨입니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커튼 쳐진 정원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듣기 좋은 음악처럼 방 안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우린 당신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아란티아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오. 울프의 기사도 아닌 자가 울프의 캡틴이 된다면 외부에 그 모습이 어떻게 알려지겠소?" 대신은 약간 저자세로 나왔고, 카셀도 그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아란티아의 기사들은 전설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아란티아 안에만 계셔서 외부에서 어떻게 이 곳을 바라보는지 모를 데지만 그건 저 하나로 인해 더럽혀질 정도로 가볍지 않습니다. 저 또한 그럴 일은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대신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따질 말이 없어 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옆에서 쉐이든이 노려보고 있는 것도 침묵에 큰 몫을 했다. "대신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대들이 해석한 법적의 해석에 대해 나는 찬성한다. 문장으로 쓰여지지 않는 관례라는 것도 때로는 소중하지."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속였고, 카셀은 무례하게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함께 피를 흘리지 못한 이들은 그 피의 무게를 논할 수 없다. 카셀은 하얀 늑대들에게 선택 받았으며, 선택 받은 경로에서 피를 흘리지 않은 자들은 그 선택에 개입해선 안 된다." 하얀 커튼 뒤에 하얀 실루엣이 있었다. 큰 키의 여인은 금발에 하얀 옷을 입은 요정과도 같은 모습으로 카셀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들은 그녀의 말에 따라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예, 폐하." "카셀은 스스로에 대한 변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따로 반박할 의견이 있느냐?" 수염 긴 대신이 모두를 대표해서 답했다.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중요한 직책에 저희들은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뜻은 잘 알겠다. 허나 마스터 퀘이언이 그대들을 납득시킬 방안을 생각해 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모두 물러가 오늘 저녁에 있을 늑대들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라." “예.” 대신들은 허리를 깊이 숙여 절하고 물러섰다. "카셀."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들어도 청아했다. 카셀은 심호흡을 할 여유도 갖지 못하고 대답했다. "예, 폐하." 가끔 자신의 별 거 아닌 목소리와 별 거 아닌 외모에 지나치게 구속 받을 때가 있는데, 그녀와 비교하니 마주 대꾸하는 게 무안할 정도였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얽매이는 자신을 질책하며 카셀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네가 말하던 도움을 내가 충분히 제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너는 너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킬 만큼 충분한 변론을 했다. 하지만 변론은 변론일 뿐, 진짜 너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해야겠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여왕의 모습조차 카셀은 마주 보기 힘들었다. 어제 그 모습을 어떻게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아마 달빛의 마력과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가려준 어둠에 안도했겠지. 카셀은 오만 가지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애썼다. "여전히 고민이 많구나, 카셀." "죄송합니다." "너와의 자세한 이야기는 만찬이 끝난 후로 하겠다. 울프들과의 즐거운 식사가 되길 바란다." 여왕은 물러났다. 옆에 따르고 있는 키 큰 사람의 그림자는 아마도 퀘이언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여왕의 옆에 있었다. 넓은 방 안에 세 명만 남았다. 쉐이든이 카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제 뵈었다면서 왜 그리 긴장하고 있나?" "백 번을 만나도 긴장하게 될 거야." "이해한다. 마스터께서도 그러시더군. 처음 수호 기사를 맡을 때나 지금이나 긴장하긴 매한가지라고. 그 긴장감을 즐기질 않으면 그 일을 오래 못 하지. 다른 하얀 늑대들도 마찬가지다. 아마 스스럼 없이 다가가는 이는 아즈윈 밖에 없을 거다. 그래서 다들 아즈윈이 다음 수호 기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모르지. 직접 지명하는 분은 폐하니까." 홀에는 생판 모르는 건장한 기사들이 잔뜩 있었다. 카셀은 일부러 다른 울프들과 대화를 나누는 쉐이든과 떨어져서 혼자 구석에서 있었다. 그리고 아까 노트로 외워둔 이름과 얼굴을 대치시켜 보고 있었다. 가끔 그들의 대화 중에 들리는 이름이 익숙하면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가 누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았다. 울프들은 대체로 카셀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했다. 대신들도 자기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고, 시녀들은 음식과 술을 나르며 모두와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대화만 들어보면 어느 족이 시녀고 어느 쪽이 대신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그들의 어조는 품격이 있었다. 어쨌든 이 홀에는 왕실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모이는 듯 했다. 카셀로서는 다행이었다. 문득 혼자 벽에 서 있는 실디레가 눈에 띄어 다가가 보았다. 다fms 사람들은 모두 술을 마시는데, 혼자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왜 다 같이 즐기지 않아?" 카셀은 친근감 있게 말을 붙였고, 그녀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아. 그럼 나도 그리 반갑지는 않겠군." "응. " 그녀는 너무 솔직했고, 카셀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냥 옆에 서서 와인을 홀짝거렸다. "저 기사의 이름은 리오나르드?" "어떻게 알았어?" "들리는 이름들을 좀 외워줬지. 저 사람은 말라지?" "맞아, " "피부가 검다고 해서 금방 알아봤지. 저기 저 사람은?" “사람은 시종이야." "아. " 그런 식으로 카셀은 꽤 많은 울프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디레는 별로 의심도 않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프란츠라는 기사가 상당한가 봐?" 카셀은 마침 자기 앞을 지나간 짙은 금발의 남자를 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는 과묵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들 그와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한다는 걸 분위기로 알았다. 그래 봤자, 모조리 검술에 관한 이야기라 카셀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아즈윈이 '파티장의 울프들은 재미없다'라고 한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맞아. 하얀 늑대가 된 마지막은 던멜인데, 사실은 다들 프란츠가 될 거라고 예상했지. 내 생각에도 충분히 하얀 늑대가 될 만한데 이상하게도 그 다섯 병은 여섯 번째를 뽑질 않아. 이번 다섯 명이 역사상 가장 많은 웃자라 자제하는 거라고들 하는데.......” 실디레는 조금 말하다가 카셀을 곁눈질했다. 시종이 내주는 커다란 치즈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던 카셀은 얼른 입을 토로 닫았다. 호기심 가득한 큰 눈으로 실디레가 물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같이 있던 제이메르라는 남자 말이야." "제이메르가 해?" "그가 정말 하얀 늑대들이 캡틴 감으로 데려온 남자라면 적어도 프란츠 이상일 거라고 생각해. 아니, 사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 말을 했어. 왜냐면 아이린이 직접 그를 소개했거든. 자기 제자라고. 그래서 당장 프란츠와 대결을 시키려고 했는데, 프란츠는 부상자이므로 시합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어. 그런데 제이메르라는 남자는 프란츠를 보고도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오히려 이런 부상 정도는 안고 싸워줄 수 있으니 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니까." 실디레는 잠시 말을 끊더니 주스로 입을 적셨다. 카셀은 그 사이 치즈 케이크를 조금 뜯어 먹었다. 다른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아, 중요한 얘기 중에는 어울리지 않는 케이크였다. "결국 시합이나 연습 같은 건 내일 하기로 했지만....... 정말 그가 캡틴 감이야? 실력은 둘째 치고 난 그런 성격 별로인데." "성격과 캡틴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카셀은 입가에 묻은 걸 닦으며 말했다. "난 중요하다고 생각해." 실디레는 억지를 쓰듯 말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중요할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캡틴이란 멤버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진짜 캡틴 감은 쉐이든이야. 몇 명은 아니라고 하지만, 쉐이든보다 멋진 남자는 없으니까." 사실 카셀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해서, 그것을 어린 소녀의 환상이라고 치부하지 못했다 분명 쉐이든은 멋진 기사였고, 캡틴의 역할을 맡아 할만한 남자였다. 그러나 쉐이든은 캡틴에서 벗어나 있을 때,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하얀 늑대들만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차라리 로일이 캡틴이 되고, 쉐이든이 옆에서 조언하고 아즈윈이나 게랄드가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게 더 원활하게 대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대신 그러면 또 로일의 파괴력이 죽어버린다. 그는 다른 사람 앞에 나서면 당장 소심해졌다. "이미 쉐이든은 멋진 캡틴의 역할을 해왔더군. 잠깐 너에 대해서 더 얘기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녀에 대해 글로 써놓은 것이었다. "나에 대해서? 정말? 언제? 뭐라고?” 실디레는 흥분하며 눈을 크게 떴다. "최근에." 쉐이든은 기본적으로 과묵한 편이었다. 글로만 남기고 본인들에게는 잘 얘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카셀은 괜히 말했나 싶어 얼버무리려다 실디레에 관한 부분을 떠올렸다. “눈 앞의 적에게 신경 쓰면 자꾸 허리가 빈다. 워낙 정면 공격이 강해서 굳이 옆을 막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그걸 아는 울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데, 프라이드가 강해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 너무 다그치면 오히려 반발을 일으키거나 스스로의 실력에 회의를 느낄지 몰라 조심스럽다.” 카셀은 말로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게 나을 거라 보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치즈 케이크가 든 접시를 옆에 내려놓았다. "자, 내 이마를 손으로 쳐 봐. 내가 막을 데니." 영문을 모르는 실디레는 주스 잔을 내려놓고 손을 날카롭게 세우고 뒤로 젖했다.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라 카셀은 얼른 덧붙였다. "좀 살살!" "알았어. 살살." 그래 놓고 그녀는 강하고 빠르게 카셀의 이마를 내리쳤다. 살살이라고 하면 대체 세게 치면 어느 정도냐고 비명을 지를 공격을, 카셀은 팔뚝으로 막아했다. 하지만 막은 쪽 팔뚝으로 이마를 내리찍는 바람에, 그는 순간 휘청했다 그러나 다른 쪽 손으로는 그녀의 옆구리를 잡았다. 그냥 툭 쳐보일 생각이었지만, 워낙 머리가 아파 그만 움켜잡아 버렸다. "무슨 것이야?" 그녀가 움찔하며 카셀을 밀쳤다. 하지만 카셀은, 막은 쪽 팔뚝이 아픈 건지 팔뚝으로 친 이마가 아픈 건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어 사과도 못 했다. “아니, 허리가 빈다고...... 쉐이든이 말한 걸...... 으으, 살살 치라니까." 카셀은 비틀거리며 벽에 손을 짚고 괴로워했다 실디레는 어이가 없어 카셀이 잡았던 허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게 다야?" 카셀은 고개를 끄덕였고, 실디레는 다른 말을 기대했는지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걸 고치면 많은 실력 발전을 거둘 거라고 말했어." “내내가 울프 기사단 중 제일 약해. 굳이 그런 걸 말해줄 필요없어." 그녀는 주스 잔을 들더니 확 돌아서 가버렸다. 카셀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특별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음에도 당사자에게는 그런 식으로 비칠 수 있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쉐이든이 조심한 모양이었다. "신중하지 못했나?" 조금 후회 되었으나, 아픈 머리 때문에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 봤다. 뭐 하는 짓이었냐?" 제이메르가 다가오며 물었다. 카셀은 이마에서 손을 떼고 헛기침을 했다. "들었어. 기사 프란츠와 한 판 벌이려고 했다며?” "아, 그거?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사방에서 한 판 벌이자고 난리다. 항상 같은 사람들과 대결을 하느라 새로운 인물을 꽤나 반기는 분위기더라." “친구들한테는 그게 정상이지 않겠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날 캡틴으로 아는 녀석들도 다 기억 못 하겠군," "왜, 캡틴다워서 좋구만," 조금은 부럽고 질투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버려야 마음이 편했다. "내일부터 열심히 뛰어. 너는 울프 기사단이 될 수 있을 거야.......” "별로 되고 싶은 생각 없어. 그냥 겨를 수 있는 녀석이 있으니 좋은 거다." 제이는 벽에 기대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울프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 같아? 저 기사들." “강하다. 아직 겨루지 않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볼 수 없었어." "내일 겨뤄봐라 그리고 내게 말해줘." 마침 두 명의 기사가 다가와 둘의 대화가 끊겼다. 애초에 둘은 캡틴이라는 부분은 암묵적으로 대화의 소재에서 제외하고 있어 누가 엿듣는다 해도 어느 쪽이 캡틴인지 모르게끔 조심하고 있었다. "어이, 제이메르. 얘기 들었다. 새로 온 캡틴이라며?" 옆에서 나팔을 부는 것처럼 살이 떨릴 만한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기사였다. 제이메르는 이제 그런 얘기 듣는 것도 지겹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했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퍼트려?" "아니었나? 상관없어. 마스터 아이린께서 직접 제자로 지목했을 정도라면 울프의 기사가 되는 건 문제도 아널 데지. 그것만으로 환영이다. 내 이름은 코엔이고, 이 족은 푸티에르." 푸티에르라는 남자는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살집이 조금 있고, 옆집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어울릴, 사람 좋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말해 줘봐야 이름 못 외워, 오늘 들은 이름만 스무 명이 넘는다.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은 줄 아나?" 제이는 귀찮아하며 손을 저었다. 대신 카셀이 말했다. "아까 숙소 앞에서 체스를 두시던 두 분이군요. 반갑습니다." "아, 그 쪽은?" 코엔이 물었다. "쉐이든의 친구이자, 제이메르의 친구이기도 한 카셀이라고 합니다." “오오, 새로 온 사람 중에 한 명이 캡틴이라 했으니 그 루티아의 못생긴 마법사가 캡틴이 아니라면, 여기 또 한 명의 후보로군." 코엔은 농담이라는 뜻으로 그 말을 하자마자 큰 소리로 웃었다. "사람의 외모로 그런 농담을 하는 건 옳지 않아요." 머리를 위로 올린 시녀 하나가 빈 쟁반을 배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코엔은 빙긋 웃으며 얼른 사과했다. "아, 미안. 혹시 와인은?" "전 치즈 케이크 담당이었고, 그나마 지금은 다 떨어졌어요. 와인은 탁자 위에 있으니 직접 따르세요." 시녀가 너무 당당히 말하니 울프의 성을 가진 코엔도 대적하지 못했다. "아, 그럼 난 와인이나 떠 가지러 가야겠군." 카셀은 그를 보내며 말했다. "나중에 체스나 같이 줬으면 합니다. 저도 꽤 좋아하는데, 최근 둘 기회가 없던 차였습니다." 마스터 퀘이언에게 안내해줬던 에릴이 말했던 대로, 코엔과 푸티에르는 굉장히 좋아하는 얼굴을 보였다 쉐이든의 일지에는 '체스 두는 시간만 줄이면 둘 다 대단한 인재' 라고 적혀 있을 정도니 오죽할까? "꼭 하지!" 푸티에르는 먹을 것을 앞에 둔 사자 같은 눈으로 검지손가락을 들어 카셀을 가리켰다. 카셀도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케이크는 맛이 있었나요?" 쟁반을 든 시녀가 물었다. 머리를 땋아 올린 얼굴선이 굉장히 가늘고 눈동자는 밝은 여자였다. 어렴풋이 밤에 본 여왕의 얼굴을 많이 발아 있어 목소리만 가늘지 않았다면, 심심한 여왕이 옷 갈아입고 놀러 나온 거라고 의심할 만도 했다. 그만큼 단아한 자세에 귀족파도 같은 중모였다. 쉐이든이 시녀는 단순한 왕실의 일꾼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아직 덜 먹었어요." 카셀은 아까 실디레에게 한 대 얻어 맞는 일을 자초하느라, 잠시 내려놓았던 접시를 도로 들었다. “오늘 먹은 음식 중에서 제일 맛있더군요. 벌써 두 조각 째에요. dkRK 점심을 많이 먹었는데도요. 요리사를 한 번 만나고 싶군요." 카셀은 극찬하며 증명이라도 하듯 한 입에 다 털어넣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제가 한 케이크인데, 기사들은 도무지 음식에 대하 맛을 평가하는 예를 보이질 않거든요." “당신이 한 음식이에요?" 카셀은 새삼스러워 하며 놀랐다.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빈 접시를 받아 쟁반에 올렸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울프들을 보신 소감이 어떠세요?" 그녀가 물었다. 시녀들은 대체로 키가 큰 편이었고, 이 여자는 그 큰 키의 평균보다 더 켰는데, 아까 퀘이언과 얘기한 식당에서 음식 시중을 하던 시녀 몇 명 중에 이런 키는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본 건 아닐 테니 다른 곳에서 봤나, 아니면 얘기가 다른 시녀들에게 샌 건가 고민해야 했다. “,제가 누구인지를 떠나 이런 엄청난 수준의 기사들과 함께 있으면 누구든 비슷한 마음일 겁니다. 무섭죠. 그러나 설레기도 하고요. 솔직히 좀 복잡한 심정이네요." 카셀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제이메르는 어때요?" 대뜸 물어보는 말에 제이는 적당히 대답할 말을 찾다 대꾸했다. “한 명 한 명이 몇 년이나 찾아 헤매도 찾지 못할 실력자들이라 마음에 든다. 찾아다니지 않아도 내가 쓰러뜨릴 괴물들이 잔뜩 있으니 좋지." 시녀는 빙긋 웃더니 아무도 모르게 옆에 서 있는 프란츠에게 말했다 “기사 프란츠는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프란츠는 왼손은 뒷짐에 올리고 오른손에는 붉은 와인을 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 제이는 알고 있었다는 듯 옆으로 물러섰으나, 카셀은 기척도 없이 옆에 다가온 그의 모습에 놀랐다. "어디서 많이 본 시녀인데 이름이 뭐지?" 프란츠는 키는 큰 편이 아니었으나. 몸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팔 다리가 길었다. 짚은 푸른 눈동자에 금발이 잘 어울리는 미남이었다. "난 프란츠를 알고 있는데, 프란츠는 날 못 알아보는 건가요? 실망이군요." "아아, 이백 명이나 되는 시녀들 이름을 어떻게 다 외우겠어? 미안하군." "난 오십 명 울프들 이름 다 외우는데요?" 프란츠는 당황해했고, 그 시녀는 깔깔대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 사이 카셀은 프란츠에 대한 신상명세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기본자세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 있게 내밀 공격이 없다. 패턴이 정해져 있어, 그것만 알면 막는 데 전혀 지장이 없어 자주 그 부분을 지적하는데도 고집스럽게 그 패턴을 이어나가고 있다. 아마 그 방범으로 하말 늑대 중 하나를 꺾을 때까지 계속 할 모양인데, 동정심으로 맞아줄 때까지는 아무도 맞지 않을 것이다. 그 패턴을 끊지 않는 이상 그는 하얀 늑대가 될 수 없다.' 당사자 앞에서 말해버리면 크게 상심할 만한 내용이기에 머리속으로만 떠올리고 입 밖에 내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쉐이든의 관점이었다. 아마도 프란츠가 원하는 패턴이란 알아도 막지 못하는 공격일 것이고, 이미 범상한 수준의 기사들에게는 알아도 박지 못하는 공격일 게 분명했다. 그게 프란츠의 프라이드일 것이다. “친구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줬는데, 모두 제이메르 자네와 나의 대결을 기대하고 있더군. 찾아 다녀도 쓰러뜨릴 괴물들이 잔뜩 있다라...... 그런 식으로 말을 해준다면 우리야 반갑지. 부상은 어떤가?” 프란츠는 친절히 배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의사의 실력이 좋은 건지, 약이 좋은 건지 벌써 낫는 것 같다. 뼈를 다친 건데 이렇게 발리 나을 수 있는 건가?" 제이가 다친 쪽 어계를 획획 돌려 보이며 말했다. “치명적민 상처도 이 곳에서는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게 되지요. 아마 그 상처라면 일주일 안에 완치 될거에요. 제가 약속드리죠." 시녀가 말하며 프란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카셀. 우리 한 번 내기해 볼까요? 전 프란츠의 눈 여겨 봤어요. 현재 울프 기사단 중 최고죠."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커서 주위에 있는 울프의 기사들이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웅성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홀 안에 있는 기사들이 조금씩 몰렸다. 거의 대부분은 제이메르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오는 것이었다. “프란츠 울프와 제이메르가 내일 대결을 펼친다는데, 어느 쪽에 걸겠어요? 저는 프란츠에게 걸겠어요. 실력과 경험 면에서 월등하다고 보고 있으니까." “프란츠의 실력을 모두 알고 있는 당신이 내기에 너무 유리하지 않나요?" 카셀은 아직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고 말했다. 프란츠에게 살짝 기대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귀여워보였다. 짝 올리는 말꼬리도 귀엽고, 살짝 오므린 옅은 분홍색의 입술도 촉촉해 보였다. 같이 있으면 절로 마음이 훈훈해지는 여자였다. "전 제이메르의 실력을 모르지만, 당신은 잘 알죠. 그러니 동등한 내기 조건 아닌가요?" 그녀가 말했다.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내기를 걸면 기분 나빠 할만 한데도 둘 다 재미있어할 뿐 아무 말 없는 게 신기했다. 아마 둘 모두 비슷한 마음에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것이라고 추측하며 카셀은 말했다. "좋아요. 대신 제이메르가 다른 울프 치사와 전력을 다해 한 번 싸우고, 프란츠 역시 다른 울프의 기사와 전력을 다해 싸워줘야 합니다. 물론 그 두 시합에 대한 승부는 아무래도 상관없죠. 한 명 한 명이 무지막지한 실력자인 울프 기사들 중 누구와 겨뤄 이기고 지다는 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으니, 우연이든 아니든 제이메르는 질 수 있죠. 그러나 만약 제이메르가 프란츠의 공격을 한 번 본 다음이라면 제이메르가 이길 겁니다. 그런 조건이 동반된다면 저는 제이메르에게 걸겠습니다." "너무 얕잡아 보는 거 아닌가요, 프란츠 울프를 경험도 실력도 다르다고 제가 그러지 않았나요?" "아니죠. 제이메르는 스스로 말하길, 자신은 상대에게 맞춰 싸운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주위에 강한 상대가 없어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의 잠재력은 뛰어납니다. 무엇보다 제이메르는 검술을 제대로 훈련 받은 적이 없어 나쁜 버릇도 없고, 공격 패턴도 정해진 게 없습니다. 만약 제이메르가 프란츠의 공격 패턴을 읽어낸다면, 프란츠가 자신의 최선을 다한 최고의 공격을 펼치는 순간 승부는 끝날 거에요." 이건 제이메르가 할 얘기가 없는 나머지 잡담처럼 말한 자신의 검술 이야기를 조금 정리해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제이메르는, 굳이 그런 얘기는 왜 하냐, 하는 눈으로 시큰둥하니 있었다. 그러나 프란츠의 표정은 험악하게 변했다. 그제야 깨달았으나, 만찬을 즐기느라 화기애애한 다른 울프의 기사들도 표정이 굳었다 음악은 없고 목소리만 있었던 홀 안에 순간적으로 침묵이 잦아들었다. 카셀은 당황했으나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고 시녀만 바라보았다. 시녀 역시 주위의 반응에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좋아요. 내기는 성립되었군요. 하지만 내기를 하려면 걸 게 필요한데, 뭘로 하시겠어요?" "전 가진 게 없는데요." "저도 가진 게 없으니,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기로 하죠." "그 것도 좋군요." "프란츠, 카셀에게 부탁할 재미있는 소원을 머리 속에 백 오십가지 정도 떠올려 놓고 있으니 절대 지면 안 돼요.” 시녀는 농담처럼 말했으나, 프란츠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 패턴 얘기는 들었는지 모르지만, 어디 한 번 해보시게. 원한다면 내가 무슨 공격으로 쓰러뜨릴 건지도 미리 말해주고 시합해 주지. 알고 막을 수 있는 공격으로 쓰러뜨릴 건지도 미리 말해주고 시합해 주지. 알고 막을 수 있는 공격이라면, 내가 특기도 아니었어.” 그의 으르렁거리는 목서리에 카셀은 잠시 물러났으나, 제이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안 말해줘도 돼." 모든 울프들의 험악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 카셀은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실디레도 그렇고, 자꾸 울푸들에게 반감만 사고 있으니, 이런 식으로 대처해도 되나 하는 생각에 불안하기만 했다. 2층 홀에서 아이린이 내려오며, 다행히 어두운 분위기가 가셨다. 다들 선배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지켜 그녀가 나타나 지나가면 우선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고, 아이린은 손을 들며 일일이 답례했다. 그리고 카셀의 옆에 서더니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시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폐하?” 어쨌든 놀란 건 카셀만이 아니니 뻔히 드러난 얼굴을 왜 못 알아 봤을까 자책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어제 같이 얼굴을 본 제이메르는 물론이고, 왕실과 접하고 산 지 몇 년이나 되는 울프들도 똑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얀 늑대들도 여왕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는 하나, 여기 자리하고 있는 울프들 마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분명 얼굴은 비슷했으나, 어제 봤던 그 신비로운 분위기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여동생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모르고 있었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분명 얼굴은 비슷했으나, 어제 봤던 그 신비로운 분위기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여동생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모를 만도 했지만. "폐, 폐하?" 아직도 친근하게 어깨에 손을 올러고 있는 시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프란츠가 고개를 숙였다. 시녀는 허전해진 손을 털며 말했다. "아이린, 넌 정말눈치 없는 애야. 가끔 이러고 나타나 허물없이 같이 지내는 게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몰라서 그랬니?" "저희 때는 아예 새로 들어온 기사인 양 행동하셨죠.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차라리 고양이로 변신해서 돌아다니시죠?" 아이린은 제이에게 들은 몇 가지 이미지와 꼭 맞는 여자였다. 그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상대방을 구박할 수 있는 여자였다. "루티아에 말해서 그런 마법을 내게 쓸 수 있는지 물어보도록 할게.” 시녀는 웃으며 위로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긴 금발 머리가 몇 시간 동안 정성껏 빗은 것처럼 허리까지 내려와 찰랑거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여왕인 걸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Ep고 동료인 것처럼 대했던 시녀들에게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늑대들을 위한 만찬을 시작하노라. 음식을 가져와라." 시녀들은 고개를 숙여 답하고 술만 있던 자리에 온갖 요리를 가져다 날랐다. 여왕은 우물쭈물하는 프란츠의 어깨에 손을 및고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즐거운 내기니, 너무 무리하거나 위험한 짓은 하지 말아다오. 솔직히 말해, 카셀이 내게 어떤 소원을 빌지도 궁금해." 그녀가 어깨를 살며시 두들기니, 프란츠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잊지 않고 말했다. "기사가 시합에 임하면 이미 내기나 명령은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저는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래야지, 프란츠." 여왕이 아이린을 옆에 끼고 계단을 오르니, 그제야 프란츠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제이메르와 눈을 한 번 마주쳐 웃어보였고, 카셀에게도 아까의 험악함을 버린 어투로 말했다. "재미있게 되었군. 내일이 기대되어 오늘 잠도 잘 못 이루겠어." 그는 돌아서서 동료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고, 그들도 웃으며 잔을 치켜들었다. 보기 좋아 보였다. 그러나 한 쪽 구석에서 주스를 마시는 실디레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거기에 합류하지도, 여길 보지 않았다. 카셀은 아직도 그녀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여왕은 높은 곳에 올라가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옆에 있던 아이린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주목. 먹을 건 먹고, 마실 건 마시면서 듣도록. 실은 우린 조만간 큰 적을 맞이하게 된다는 걸 알러주고 싶다. 난 기본적으로 골드 게이트의 막강한 방어선을 막고 있지만, 어쩌면 그게 뚫릴지 모를 그런 적이 골드 게이트 바깥쪽에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묻고자 한다. 너희들에게는 아직 캡틴이 없는 바.......” 말하는 도중에 몇몇 기사들의 시선이 제이를 향했다. “나는 너희들 모두가 의논하여 이 일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너희들의 선배가 겪었던 그 전투보다 더 대규모 전투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자기가 들은 말에 대해 옆 사람과 떠드는 취미가 없는 기사들이라 웅성거림은 없었다. 그러나 다들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 이 일에 울프 기사단이 직접 나실 필요가 있다. 너희들은 골드 게이트로 직접 가서 그들을 맞이하겠느냐, 아니면 여기에서 기다리겠느냐?” “가겠습니다.” 몇 명이 거의 통시에 말했고, 다들 그 말에 동의했다. 누구 하나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아이린은 사람들을 쭉 돌아보다가 물었다. “다수의 의견을 따를 필요는 없다. 반대하는 이는 손을 들고 그 이유를 말해보라.” 뒤에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쉐이든과 함께 서 있는 타냐였다. “말해봐요, 마스터 타냐. 루터아의 조언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일반적인 적이라면 골드 게이트 앞에서 맞는 게 옳습니다. 그래야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조만간 맞이할 적은 그렇지 않아요. 여러 분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나, 여러분들의 힘만으로 그 자와 맞서는건 무리라고 봅니다. 최대한 나디움의 성스러움과 하늘산맥의 축복에 가까운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적을 막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 명이 즉시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들은 어떤 적과도 싸울 수 있습니다. 마법적인 상대라면, 물론 루터아의 마법사들만큼은 아닐 데지만, 우리에게도 르고께서 만들어주신 무기가 있습니다." 몇몇이 과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는 눈을 감고 가슴에 달고 있는 구슬을 들었다. 푸른 빛이 홀 안을 가득 메웠고, 두어 명의 시녀가 짤막하게 비명을 내뱉었다. "누가 그 무기를 들어 보일 자신이 있습니까? 제가 단 한 번의 주문으로 그 무기를 이 자리에서 부수어 보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누가 소중한 자신의 무기를 내줄 수 있겠는가? 그 말에 겁을 내는 이는 없었으나, 아무도 무기를 들지는 않았다. 타냐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아직 마법을 모릅니다. 르고의 쇠를 다루는 기술은 이미 루티아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많은 중요한 물건들을 의뢰해왔죠. 그러나 여러분들의 무기는 마법사나 마법적인 어떤 존재를 상대하기 위한 최상의 무기가 못됩니다. 겪은 후에 그걸 깨닳으면 늦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실력에 믿음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번 싸움만큼은 나디움의 축복에 기대어야 합니다. 외부인이 개입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저는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적을 맞기를 주장합니다." "루티아의 마법사가 아란티아의 외부인이랄 수는 없지요. 충분히 수용할 만한 의견입니다. 다른 울프들은 달리 할 말이 있나?" 아이린이 묻자, 프란츠가 손을 들었다. "우선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야 거기에 대한 정확한 의논이 오고 갈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자다. 그 뒤에는 암흑의 존재가 있다." 처음으로 홀 안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렀다. 아이린은 이해한다며 손을 저었다. "안다 알아. 너희들이 그런 존재들과 얼마나 동떨어져서 이곳에 파묻혀 있었는지. 하지만 울프들은 원래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다. 앞으로도 익숙해져야 할 거야." “그렇다면 더더욱 나가서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적은 몇 명입니까? 그리고 골드 게이트 외부에 있다고 알고 있으면 굳이 기다려서 방어할 게 아니라 먼저 공격하는 린 어떻습니까? 만약 마법의 힘 때문에 우리가 막을 수 없다면, 우선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제가 패한다면 그 때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도 늦지 않습니다." 프란츠가 자신 있게 말하자, 이 죽음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기사들은 서로 자기가 나가겠다고 나섰다. “그 자는 죽여도 죽지 않으며, 여러분들처럼 죽음에서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카셀의 말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도미노처럼 가까운 족 울프들부터 천천히 집중하기 시작하며 마지막에는 홀 안에 있는 모두가 그의 말에 집중했다 "저는 그 자와 함께 있었으며, 제이메르가 이미 그를 맞아 싸운 적이 있습니다. 쉐이든도 한 번은 싸웠습니다. 둘 다 졌다고도 이겼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어쩌면 여기 있는 울프들 전원이 나간다면 그 자 하나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지금까지 본 어떤 기사단보다 막강하며, 어떤 기사단보다 용맹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기준이 인간일 때의 얘기입니다. 인간을 상대할 때 쓰는 용맹은 귀신에게 쓰지 못 합니다. 만약 그 자가 골드 게이트를 뚫지 못한다면 굳이 여러분들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골드 게이트를 뚫을 힘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가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임무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임무는 여왕 폐하와 이 나디움을 지키는 것입니다." 목소리는 작았으나, 마치 적을 앞에 둔 장수와도 같은 연설에 울프 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카셀은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명령조로 말해버린 것에 움찔 했다. 아이린은 상황이 재미있어 그냥 웅성거리게 내버려두다가 여왕이 옆에서 지적하자, 그제야 헛기침을 하고 발을 꺼냈다. "자, 조용. 급한 일이긴 하나 또한 중요한 일이니 결정은 내일 내리는 것으로 하겠다. 만찬을 계속 이어가며 의논하도록." 아이린은 결말을 지었다. 울프들은 대화를 나누다 가끔씩 시선을 카셀에게 주었다. 쉐이든이 다가와 카셀에게 말했다. “나쁘지 않은 연설이었다. 하지만 나도 그 자를 상대하기 위해 굳이 화이트 게이트 앞이어야 한다는 타냐의 의견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글쎄, 불길한 말을 해선 안 되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못할지도 몰라." "선택을 못 해?" 카셀은 그 불길함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고개만 저었다. "아니야, 아무 것도. 나중에 얘기할게." 쉐이든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이에게 손짓했다. "가볼 곳이 있다. 따라와라." "어딜?" 팔짱을 끼고 있던 제이가 물었다. "가보면 알아. 너도 좋아할 거다." 쉐이든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획 가버렸고, 이런 일에 겁이라고는 모르는 제이는 무작정 그의 뒤를 따라 나싫다. 그 사이 아이린이 카셀에게 다가와 등을 툭 쳤다. "나의 제이메르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 "좋은 곳으로 데려 간다던데요?" "좋은 곳? 음, 좋아. 나도 널 좋은 곳으로 데려갈 데니 따라와. 마스터 타냐도 따라오세요." 아이린은 홀을 빠져나가 둘을 어두운 복도로 인도했다. 아란티아의 궁전은 항상 동족으로 열려있는 형태였다. 복도도 그렇고, 창문도 그렇고 거의 모든 외부로 를린 구멍은 동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에서 비춰오는 달빛이 셋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가끔 시녀들이 지나가며 셋을 보고 인사했고. 세 사람도 마주 인사 했다. 참으로 재미있는 상하 관계였다. 절대 권력자인 여왕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위에 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왕 다음 가는 권력의 최상층인 왕실의 대신들도 이 곳에서는 시녀들을 보면 인사했고, 울프의 기사들은 대강 봐서 마음이 맞다 싶으면 아무나 친구 삼았다. 대륙 각지에서 모였다는데, 어쩜 이렇게 비슷한 성격의 기사들만 잘 갖다 맞췄는지 신기했다. "웰치 말이다." 아이린이 난데없이 그 이름을 꺼냈다. 아까는 내내 아꼈던 이름 이었다. "그 녀석이 다시 살아나 골드 게이트를 공격하는 이유에는 예전의 패배 설욕이라는 측면이 있지 않나? 잡혀 있었다면 조금 알 것 같아 묻는 거야." 항상 생각해오던 부분이라 카셀은 지체 없이 대꾸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기억하지 못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억한다던 복수의 측면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복수라는 단어가 맞지 않는다면 재대결이라 해도 좋죠. 어됐든 그는 마스터 퀘이언께 패배한 후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명성을 한꺼번에 잃은 인물이잖습니까? 마치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위해 명성을 쌓았다가 자신을 꺾은 사람에게 넘겨주는 그런 악역이었죠, 역사에서는." "흥미로운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있군. 무작정 퀘이언을 칭찬하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쉐이든에게 몇 가지 들은 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완벽한 기사도를 보인 익셀런을 이끈 인물이니까요." “맞아. 그런데 사실 그 웰치를 꺾은 사람이 나라면 어쩔래?" 카셀은 걸음을 멈췄다. "그런 얘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그럴 수밖에 우리끼리의 비밀이었으니. 퀘이언은 결코 그 싸움을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말하자면, 웰치는 나와의 싸움에서 부상당한 채로 퀘이언과 싸운 것이었다.” 달빛의 그림자에 가려진 아이린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보였다. 카셀은 커다란 충격에 눈을 감았다. “맙소사, 그럼 웰치는 전력을 다하지 못한 승부가 역사적인 승부였다고 평가를 받고 만 것이군요." “내가 당사자였다면 화병으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지. 무엇보다 그는 기사답게 장렬히 죽지도 못했어. 차라리 퀘이언에게 헤했던 그 자리에서 죽거나...... 오히려 내 손에 죽었다면 그의 최후는 만족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네나드로스 평원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지. 아란티아는 그 마지막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기둥에 기대어 선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당대의 영웅이 죽을 자리가 아니었다. 환희에 찬 가넬로크와 이로피스의 병사들은 그의 시체를 조각내었고,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것이지. 내가 죽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원한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지도 많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달빛에 반사되었다. “만약 다시 그가 여기 나타나 싸움을 요청한다면 받아주시쳤습니까?" 카셀이 물었다. 아이린은 얼른 눈물을 닦고 대답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러고 싶다 그러나 이미 이건 개인적으로 해결 할 일이 아니다. 너도 알겠지만." 카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셋이 도착한 곳은 아까 그 회의실이었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간 곳은 촛불만 몇 개 밝혀있어 어두웠다. 이 회의실은 북쪽 벽이 트여있어 서족에 있는 아이나카스트 산과 연결되어 있고, 그 열린 공간은 당연히 동쪽의 달빛을 받고 있었다. 바위 절벽에서 흐르는 작은 폭포가 만든 연못 옆에 퀘이언이 서 있었다. 퀘이언은 살짝 고개를 까닥여 보였고, 셋은 그 옆으로 다가갔다. 연못 안에서 찰람거리는 물길을 따라 뭔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카셀이 서 있는 물가 족으로 접근하더니 조용히 떠올랐다. 카셀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델했다. 그것은 물고기도 아니고 물귀신도 아니고 그냥 방금 수영을 마치고 올라온 여왕이었다. 발가벗은 몸에 젖은 금발 머리는 어깨와 가승을 가리고 있었다. 물론 카셀은 절대로 가승 아래로 눈길을 내릴 수 없었다. 퀘이언은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하얀 가운을 걸쳐 주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가운 뒤로 블어 넘겼다. 젖은 머리카락은 마치 살아있는 듯 그녀의 손길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얼굴과 긴 눈셉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했다. 그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배경으로 서 있느냐에 따라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가지는 여자였다. 여왕은 유혹하는 듯 가는 눈길로 카셀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너의 말을 잘 들었다. 특히 방금 있었던 만찬에서의 연설은 아주 잘 들었다 허나 유수와 같이 내미는 그 말을 책임질 자신은 있느냐?" 여기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가운 아래로 보이고 있을 하얀 다리에 신경을 쓸 것 같은 유혹을 버털 자신이 없어 얼른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책임질 수 있는 말이라면 일단 멋지게 하고 보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아직 틀린 발은 아닌 듯 합니다. 그렇게 공언하고 나면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어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축소시켜 말하면 결국 터 작은 결과에 만족해 버리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힘든 인생의 법칙을 따르는구나. 자신감의 또 다른 소치이기는 하나 언제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니 쉴 들이 없게 되지."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카셀이 남자로서의 욕망을 참는 모습마저 귀엽게 바라보며 여왕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장소를 택했나 보구나. 보다시피 나는 한 시라도 물에서 벗어나면 심한 갈증을 견디지 못하지. 백 년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요새는 많이 심해졌어. 이해해 주길 바란다. 아, 그리고 아까 몰래 접근한 것도 사과하지." “당치 않습니다. 폐하께서 특별히 아무 말씀을 안 하신 것이지, 저를 속인 건 아니잖습니까?" 카셀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카셀, 아이린, 그리고 타냐. 너희들은 외부에서 우리를 노리고 오는 위험한 적을 보고 왔을 것이다." “예.” 셋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 적은 한 편인 듯하나 사실은 다른 존재이며, 둘 다 나를 만나기 위해 오는 것이나 서로 다른 목적이 있다. 그중 한 목적을 너희에게 보일까 한다." 그녀는 뒤를 돌아서더니 어깨에 절친 옷을 내렸다. 하얀 어깨와 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가운을 보고 카셀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로지르는 심한 흉터를 발견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부드러운 등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 두 마디는 될법한 검은 상처가 어깨에서 허리까지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나를 한 번 죽였던 상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란티아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나를 죽였을 상처였지.” "같이 목욕을 한 적은 많지만 한 번도 등을 보인 적이 없으셔서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제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그건 대체 누구의 소행입니까?" 아이린은 마치 그 상처를 낸 자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하며 물었다 "그 때 그 아이의 이름이 웰치였지. 지금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나에게 오고 있다." 카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블랙의 검은 투구 안에 보이던 시커먼 심연이 다가오는 것 같아 현기증이 일었다. "웰치가? 폐하께서는 그 자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그 아이가 죽기 바로 전날이었지. 너는 알지 못하는 일이다." 아이린은 납득이 가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새나디엘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아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내게 오려는 지도 잊어버리고 막연히 나디움으로 향하고 있다면....... 그래서 스스로 악의 힘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단지 그의 이동만으로 나디움은 멸망할 것이다." 여왕은 천천히 옷을 올렸다. 그녀의 상처를 보고 나직이 신음하던 타냐가 말했다. "제 경우에는 웰치일 거라고 생각되는 그 기사와 동행하는 또 다른 존재와 접하여 큰 상처를 얻었습니다. 새나디엘 여왕께서 말씀하시는 악의 힘이란 바로 그 자가 아닙니까?" “바로 맞추었다. 따라오라." 느린 걸음으로 모두를 안내하며 그녀는 아이나카스트 산과 붙어있는 벽을 따라 걸었다. 그 끝에는 깊지 않지만 천장이 높고 입구가 넓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 동굴의 안쪽은 일부러 깎아내도 그보다 더 부드럽게 만들지 못할 정도로 반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바로 중심에는 네 마리의 늑대가 하늘을 향해 입을 모아 고개를 쳐들고 있는 석상이 있었다. "맙소사," 타냐가 그 석상 위에 놓인 구슬을 바라보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두 손으로 쥐면 딱 맞을, 그리 크지 않은 구슬 안은 수십 가지 색깔의 연기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이것은 드래곤의 오브다. 내가 처음 이 곳에 올 때부터 여기에 있었으며, 아란티아가 건국되어 지금까지 한 번도 자리를 옮긴 적이 없지." 여왕의 말에 타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말로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란티아에 드래곤의 영혼이 담긴 보석이 있다고.” "그래. 이것이 아란티아를 스스로 지키는 아란티아의 힘이란다.” 여왕은 어린아이처럼 해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예쁘지? 하루 종일 봐도 질러지 않는 아름다운 구슬이야.” "전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귀한 것이 이렇게 함부로 놓여 있어도 되는 됩니까? 이 고귀한 물건에 비하면 저 같은 인간은 그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데, 보여주셔도 될지.......” 심상치 않은 물건인 건 분명했으나 타냐의 그 말을 듣고서야 카셀은 그게 굉장한 물건이라고 짐작했다. 그제서야 보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하는 그였다. "너희들이기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카셀, 내가 왜 너에게까지 이것을 보이는지 알겠느냐?” 여왕은 다가와 카셀의 앞에 서서 얼굴을 살짝 쓰다듬고 이마에 키스 했다. 카셀은 몸이 굳어 꼼짝도 못 했다. "지금까지 이 오브의 실체를 바라본 이는 오직 울프 기사단의 캡틴과 나의 수호 기사들뿐이었단다. 커다란 위기 앞에 나타난 캡틴이라는 존재에게 나는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구나. 드래곤 오브의 수호를 부탁하겠다, 캡틴 울프.” 카셀은 심장이 조여 들고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서 그녀의 눈빛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끊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이린도 따라서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타냐는 오히려 겁을 내고 뒤로 물러섰다. "저의 마스터께서 대신해야 할 일을 제가 받을 자격은 없습니다, 새나디엘 여왕 폐하." 여왕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의 자유 의지다. 테일드의 제자, 타냐. 이건 루티아와의 약속과 맹세가 아니라, 너의 뜻이다. 나는 강요해서 내 말을 들을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오지 않는다." 타냐는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더한 강요는 없을 것입니다, 폐하." 그녀도 여왕 앞에 무릎 들었다. 여왕은 양손을 펼쳤다. "아란티아의 축복이 그대들과 함께할 것이다." 셋은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고, 카셀은 그만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막연히 될 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은 캡틴이라는 자리가 이토록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하고 싶었다. 이 순간 충성을 맹세할 어떤 가혹한 고문이 가해지더라도 카셀은 버틸 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왕은 오직 달빛을 반사하는 부드러운 미소만으로 그에게 캡틴의 자리를 내리고 있었다. 예정대로 카셀은 도서관에 있었다. 그런 자리에 오른 이상 뭔가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는 밤새 세 권의 책을 속독하고 그 중 한 권은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좀 더 객관적으로 쓰인 아란티아와 론타몬의 전쟁사였다. 타냐도 그를 따라와 옆 자리에서 책을 읽었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 아침이 될 때야 카셀은 피곤한 눈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뭐 좀 원하는 걸 읽었나요?" “당신과 같은 심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어요. 특별히 뭔가를 얻으려고 읽는 건 아니죠." 그녀는 평소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밤을 샌 도서관 사서는 아침에 출근한 다른 이와 교대를 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책을 안 읽은 탓에 활자를 눈에 넣는 것 자체가 즐겁군요." 그녀는 책장을 덮고 말을 이었다. "아침 드시지 않겠어요? 전 조금 배가 고픈데." "그러죠. 밤새 아무 것도 먹질 않아 머리가 어지럽군요." 여전히 대화 없이 둘은 도서관 내에 있는 작은 식당까지 직진했다. 음식은 방과 따뜻하게 데운 스튜가 다였다 타냐는 반쯤 먹다가 카셀에게 물었다. "제가 아직도 불편한가 보군요." 카셀은 수저를 내리고 고재를 저었다.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셀은 다른 사람과는 언제나 즐겁게 대화를 하지만, 저 하고는 의식적으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눈에 보여서요." 아니라고 부정하려다 카셀은 입을 다물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군요." 카셀은 나직이 신음하고 다시 스튜에 수저를 올렸다. 너무 익은 당근이 수지에 눌려 부서졌다. 한참 말이 없다가 카셀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까지 표정 변화를 보인 적이 없는 타냐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그걸 저한데 묻는 건가요?" “편견이라는 게 쉽게 무너지는 게 아니라서요. 마법사는 무서워요. 그런 의미에서 새나디엘 여왕님도 조금은 무섭죠. 타냐의 관점에서는 어떤가요? 폐하의 마법이란 것.” "그 분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아니, 적어도 우리와 같은 관점에서의 마법을 쓸 줄 아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루티아의 마스터 어느 누구도 새나디엘 여왕을 함부로 보는 이가 없죠. 아란티아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분이니 만큼........” 타냐는 말을 하다 중간에 끊고 빵을 입에 물었다. “...... 저도 뭐라 할 말은 없군요. 그 분 앞에서는 저조차 마법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저는 안심이 되는군요." 그는 지금까지 세 번 보았던 그녀를 한 번씩 떠올리며 계속 변하는 아름다움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어떤 것도 그녀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고,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모습이기도 했다. 천 년을 살아 온 여왕....... 그 시간 동안 그 분이 한 가지 모습으로 있어왔을 거라는 생각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동시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나디움의 늦은 아침에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몇 명과 나디움에 사는 백성 몇 명이 둘의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나팔 소리가 들리자마자 황급히 어딘가로 달려갔다. “비상 나팔일까요?” 타냐가 별 의미 없이 말했다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셀도 일어났다. 이미 두 사람의 머리 속에서는 같은 추측이 떠올랐다. 급한 마음에 카셀은 나이 많은 식당 요리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이건 알라야의 봉화가 올라갔을 때만 울리는 나팔 소리입니다. 거의 울리는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알라야의 봉화?” “내 생전에는 한 번 밖에 보지 못했던 봉화입니다.” 그는 아주 먼 곳을 가리켰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의 꼭대기에 커다란 불과 붉은 색의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혹시 그 한 번이라는 건 십여 년 전의 전쟁 때였습니까?” 카셀이 물었다. “그렇죠. 익셀런의 기사단이 골드 게이트를 공격했을 때의 바로 그 전투 때.......” 카셀과 타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성 쪽으로 달려갔다. 10.빌리 두 번째 골드 게이트 전투 전쟁에서 패했을 당시 론타몬의 왕실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외국의 군대가 자주 나타났고, 따로 집 가까운 곳에서 전쟁이 벌어 지기도 했다. 다행히 외진 곳이라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그 난리통에 빌리는 형제를 모두 잃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들리는 건 온통 익셀런 기사단을 욕하는 말 뿐이었다. '그들이 패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 '사실 익셀런은 훗날을 악속 받고 론타몬을 배신했다.' '캡틴 웰치는 지금 다른 나라의 다른 기사단으로 들어갔다.' 겁에 질린 백성들은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단지 무지한 백성들이 모르고 떠드는 소문이라기엔 그 파장이 켰다. 나중에는 왕실의 고위 관직자들까지 그런 소문에 한몫 했다. ‘아란티아 여왕의 저주가 론타몬을 덮칠 것이다.' 익셀런을 동경하여 기사 수업을 받던 어린 빌리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익셀런의 결백을 믿었다. 그리고 언제고 익셀런을 욕하는 그들에게 진짜 그들의 기사도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론타몬의 왕실은 모든 패전의 책임을 익셀런에게 떠넘겼으나, 결국 외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익셀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익셀런이 재건되었고, 빌리는 재건된 기사단에 즉시 발탁 되었다. "제일 열심이군. 넌 왜 이 기사단에 들어왔지?" 한 동료가 물었다. 빌리는 그런 질문이 있을 떼마다 자신 있게 말했다. "시간을 되돌려 골드 게이트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거 아주 흥미롭군." "그러고 내가 참가하면 그 전투의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왜냐면 적어도 다섯 명의 울프 기사를 내가 족칠 거니까." 젊은 날의 호기였다 반복되는 농담은 이제 삶의 목표가 되어있었다. 그의 강한 의지를 아는 많은 실력 있는 기사들이 그를 열심히 가르쳤고, 나날이 발전한 그는 곧 익셀런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을 갖게 되었다. "아란티아로 갈까 한다." 저녁 식사 시간에 모두가 모인 앞에서 느닷없이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아주 오랜 고민 끝에 힘겹게 꺼낸 결단이었다. 그가 보검을 가져간다고 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모두가 그를 신뢰했고, 잠깐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네가 돌아오면 너는 진짜 그 보검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왕실의 핏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시는 캡틴이 아니라 진짜 익셀런의 캡틴을 맞이하게 되겠지." 익셀런 기사들 대부분 그런 말로 그를 배웅했다. 그는 결국 속좁은 복수심 때문에 아란티아로 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란티아에 오기 전에도 아주 많은 여행을 했고, 자신을 성장시킬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을 완전히 바꿔버린 여행은 아란티아에서의 열흘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바로 그 골드 게이트 앞에 서게 되었다. 익셀런의 기사 델리 매트니는 눈을 감고 오래 전 이 곳에서 있었던 전투를 상상했다. 죽음의 강에 한쪽 발을 담근 채로 바라보았던 그 영상과 수 년 통안 자기 전에 그려보았던 상상의 접합점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 밀리는 눈을 했다. 알라아의 다리를 건넌 후 일렬로 늘어선 검은 기사의 무리 앞에 자신이 서 있었다. 이 꿈 같은 상황은 꿈이 아니었다. 잠깐이 될지 모르나, 그는 10년 전 영광을 이끌어낸 바로 그 익셀런 기사단의 캡틴이 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골드 게이트를 박살내는 거겠지?" 슈벨은 약간 흥분된 상태로 말했다. 골드 게이트에서도 이미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십 년 전 그 때의 전쟁을 겪어본 세대가 저 병사들 중에 있다면 아마 적잖이 놀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글쎄, 아무리 우리 쪽 병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골드 게이트 자체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블랙, 어떻게 하면 좋겠소?" 빌리는 침착하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 "골드 게이트의 패배를 잠깐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유령처럼 일어선 말 없는 검은 기사들 역시 겪어본 바 있는 이 상황에 조금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블랙은 언제나처럼 어떤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흥분해서 장난까지 걸었던 순간은 카셀이 옆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빌리는 조금 분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곱씹어볼 패배는 골드 게이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울프 기사단에 있다. 죽어야 할 존재들이 일어나 살아있는 자들을 죽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골드 게이트를 함락시킬 줄 알았던 빌리는 의외의 말에 다시 물었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네가 명령을 내려라. 캡틴은 내가 아니다.” 블랙은 그의 지위를 확인시켜 주었다. 빌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잠시 골드 게이트에 갔다 오겠소. 슈벨, 따라와라.” "선전 포고라도 하려고?" "비슷하지." 둘은 멀지 않은 골드 게이트 앞까지 달려갔다. 등쪽에서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받아 골드 게이트는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슈벨은 말을 달리며 말했다. "저녁에는 더 멋지지. 지금은 햇빛을 반사하고 있지만, 저녁에는 하루 동안 머금은 빛을 스스로 뿜어내거든." "장관이겠군. 하지만 여기에 저녁까지 머물 생각은 없어." “나도 이미 5년 전에 실컷 봤어." 둘은 골드 게이트 앞에서 말을 세웠다. 성문 위 망루에 창을 든 병사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이트의 성문지기는 나와라. 나는 빌리 매트니다." 곧 한 명이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골드의 성문지기 다네돌이다. 무슨 용건이기에 저리 험악한 기세로 서 있는가?" 슈벨이 그 이름을 듣고 빌리에게 귀엣말을 했다.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과거에 울프 기사단을 역임했고 지금도 현역에서 활동할 만큼 막강한 기사다." "골드 게이트를 지키고 있을 만한 인물이 별 거 아니라면 저렇게 잔뜩 웅크리고 있는 블랙의 기사들이 싱겁겠지." 빌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웃었다 "다네돌,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만약 들어준다면 그대의 용맹에 찬사를 바치겠다." "들어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제안할 의견이 뭐냐?" "성문을 열어라." "하아!" 다네돌은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자네들이 한 명씩 이름을 감추고 몰래 입장했다면 모른 체 넘어가줄 수 있다. 게이트 통과에 제한이 없는 게 게이트의 규칙이니까. 그러나 저렇게 많은 수를 한꺼번에 통과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이름이 있으나 나머지는 감추고자 하는 이름조차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당하게 우리를 밝히고 들어가고자 한다. 과거 울프의 기사였다면, 그대도 저 기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골드 게이트 전투에서 숨진 그 백 명의 익셀런 기사라도 되는가?" “바로 맞췄다. 다네돌 울프, 어서 성문을 열어라. 마지막 경고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다네돌이 얼마나 놀랐는지 볼 수 있었다. 또 함부로 그것을 거짓말 취급하지 않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이 사건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누군가라는 게 누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제 울프가 아니다. 그러나 성문지기의 임무는 통과시키지 말아야 할 자를 통과시키지 않는 것에 있다. 내가 보기에 그대들은 성문을 통과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다.” "그럼 강제로 열겠다." "저 기사들은 그 때도 이 곳을 통과하지 못했고, 내가 지키고 있는 한 지금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자신감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줄로 안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다는 걸 가르쳐 주겠다, 다네돌!” 빌리는 말을 되돌려 블랙이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그는 가볍게 숨을 몰아 내쉬고 배를 만지작거렸다. 약간 욱신거리는 느낌까지 완전히 사라져 이제 어딜 찔렸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블랙, 저 성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소?" "저 중에 울프의 기사가 있는가?" 근접한 곳이라면 어떤 목소리든 알아듣는 블랙이었다. 빌리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나도 동행해야겠군. 셋이면 된다. 성문이 열리거든 지체하지 말고 통과하라." "그리 하겠소." 블랙은 즉시 옆에 있는 세 명의 검은 기사와 함께 골드 게이트로 달려갔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블랙과 다른 세 명의 검은 기사를 태운 검은 말은 무시 무시한 도약력으로 몇 길 높이의 게이트 위로 뛰어올라갔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빌리는 이 사건에 관찰자로 남고 싶지 않았다. "슈벨, 성문이 열리면 모두에게 신호해서 달려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통과만 해." "뭘 하려고?" "이 말도 블랙과 같은 말이겠지?" "뭐, 뭐?" 슈벨은 당황했으나, 빌리는 힘차게 말을 몰아 달렸다. 몸의 컨디션이 너무 좋아 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햇빛을 반사하는 하얀 골드 게이트의 성벽을 향해 달려가는 말의 스피드가 너무 빨랐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속도도 줄이지 않고 벽에 들이받을 것처럼 말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뛰어라." 빌리는 어떻게 명령을 내려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세를 낮추고 작은 난간 정도의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 했던 것처럼 말을 믿고 발로 배를 조였다. 말은 그 명령을 알아듣고 뒷발로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순간적으로 내장이 바닥으로 쓸려 내려가는 싸한 기분에 빌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눈썹까지 휘날려 눈동자를 간질였다. 미처 밑을 내려다보지 못했으나,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하늘을 날고 있음을 알았다. 말은 아슬아슬하게 성벽 위에 도착할 만큼만 뛰어 떨어질 때의 충격은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이미 좌우로 나가떨어져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다들 신음하며 꿈틀대는 걸 보니 죽은 이는 없었다. 만약 블랙이 마음먹고 학살을 결심했다면 이 곳은 피로 난장판이 되어 있을 것이다. 빌리는 말고삐로 방향을 잡았고, 지체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안은 약간 어둡고 천장이 낮아 빌리는 고개를 잔뜩 숙였다 또 한 번 계단을 내려가자 게이트를 받아놓은 1층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 곳에서 수많은 법사들이 블랙을 포함한 기사 넷을 막기 위해 좌우로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블랙이 내민 할버드를 뚫지 못 하고 있었다. 점은 기사들은 창에 맞고 칼에 찔려도 막무가내로 문 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사람 키만한 칼날이 앞서 있는 검은 기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투구가 포재진 검은 기사가 말에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다네돌이었다 그는 그 무거운 칼을 한 손에 들고 호기롭게 소리쳤다 “만약 너희들이 죽어서 온 자라면,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죽여주겠다. 성문은 열 수 없다." 다른 족을 보고 있던 블랙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빌리는 잽 싸게 계단을 뛰어내려가 블랙 옆에 설다. "내가 하겠소." 빌리는 아예 말에서 뛰어내려 론타몬의 보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이 기사단의 캡틴이다. 은퇴한 울프의 칼을 받아보고 싶다." 다네돌은 빌리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다른 이들과 다르군," “나는 살아있다." 새벽에, 블랙의 손에서 몸으로 흘러 든 그 검은 기운을 생각하면 꼭 살아있다 자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죽어가던 몸이 이런 식으로 말짱해진다는 마법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몸도 다른 이들처럼 이미 죽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빌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대답에 자신이 없었다. "현 익셀런의 기사이기도 하지. 그러나 지금 나는 론타몬의 기사 자격으로 있지 않다." 부상당한 병사들이 신음하며 다른 병사들에게 부축을 받아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물러나지 않았다. 레드 게이트도 그렇고, 이 곳도 그렇고 게이트 병사들의 사명감은 일개 경비병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와라. " 다네돌은 머리 위로 거대한 칼을 한 번 휘두르더니 자세를 잡았다. 빌리도 심호흡 하고 말을 타느라 긴장된 몸의 근육을 살짝 풀어 주었다. 스스로가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이 높아졌다. 다네돌의 몸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눈에 새겨졌다. 그의 칼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빈들 투성이였으나, 애초에 그런 걸 노리고 들어갈 틀이 없을 만큼 강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빌리는 피하지 않았다. 아무리 저런 대검이라도 론타몬의 보검이 부러질리 없다는 자신감에서, 또 지금의 힘이라면 저런 무거운 칼도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서, 빌리는 칼을 힘껏 올려 쳤다. 두 자 루의 검이 부딪치는 순간, 빌리는 되려 대검을 밀어냈다. 다네돌은 휘청하고 물러섰고, 빌리의 반격을 막지 못해 가송을 베였다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다네돌은 힘겹게 모두 막았다. 거의 공격의 마무리를 향해 칼을 내미는 마지막 순간 이미 힘을 다 한 줄 알았던 다네돌의 대검이 빌리의 목을 스쳤다. 무리하게 결정타를 날 리려고 했다면, 목이 날아갈 뻔한 순간이었다. 밀린 것부터가 계산하고 한 짓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끌면 여기 있는 자들을 모두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말을 타고 있는 블랙이 뒤에서 말했다. 돌아보니 투구가 깨어진 검은 기사가 도로 일어나 있었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병사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물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마무리 하고 싶소." 빌리는 다시 검을 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느낌이 팔의 근육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다네돌도 큰 공격을 준비하며 힘을 비축하고 있는 게 보였다. 빌리는 다네돌을 향해 발려갔고, 다네돌도 정면에서 칼을 내리쳤다 빌리는 칼을 수평으로 그으며 돌진했다 순간적으로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져 보였다. 이미 빌리의 몸은 다네돌을 지나쳐 있었고, 거의 느낌도 나지 않는 검에서 한 방울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다네돌의 검은 힘 있게 바닥을 부쉈으나, 이미 그 자리에는 빌리가 없었다. 다네돌은 그 자리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 틈에 검은 기사 하나가 성문 족으로 달려가 말 채로 들이받았다. 성문이 크게 흔들렸다. 검은 기사는 창을 크게 휘둘러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을 쳐내고 세 사람이 동시에 들어야 들릴 만한 거대한 걸쇠를 창끝으로 밀어 올렸다. 게이트가 열렸다. 열린 성문 너머에 있는 백 여기의 기사들이 사전 악속대로 골드 게이트를 향해 달려왔다. 빌리가 손짓을 하자, 말은 다른 명령 없이도 그에게 다가왔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명령을 잘 알아듣는 말이었다. 빌리는 말고삐를 잡고 다네돌을 돌아보았다. 다네돌이 쓰러진 순간부터 경비병들은 싸울 의욕을 잃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투구가 깨어진 검은 기사가 도로 일어난 순간부터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편이 옳았다. "부상당한 사람을 옆으로 치워라. 곧 기사단이 이 곳을 지나갈 것이다." 그것은 명령이나 협박이 아니라, 배려였다.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열린 성문을 통과한 검은 기사들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게이트 전체를 뒤흔들며 모두의 앞을 지나갔다. 슈벨도 이미 검은 말을 조종하는 법을 익혔는지, 다른 기사들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고 빌리의 앞을 지나쳐갔다. "골드 게이트에 원한이 있는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공격하지 않았지? 왜 우리를 그냥 살려둔 것이냐?” 비록 싸움에서 패하긴 했으나, 다네돌은 조금도 비굴하다거나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아니 었다. 다른 방식으로 얻은 힘을 이용하여 그를 쓰러뜨린 것이 오히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골드 게이트의 통과뿐이었다." 빌리가 말했고, 뒤에서 블랙이 덧붙였다. "원한이 없지는 않지." 다네돌은 블랙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차마 꺼내길 두려워 그저 노려보고만 있었다. "열리지 않아야 할 게이트가 열린 것만으로 우리의 원한은 끝이다.” 블랙은 덧붙이고, 말을 돌려 다른 경은 기사와 함께 갔다. 빌리도 그 뒤를 따르려다 고개만 돌려 말했다. "서둘러 화이트 게이트에 우리가 온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가 말을 달려 빠져 나올 무렵, '알라야의 봉화를 올려라‘라는 다네돌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빌리는 한참 앞서있는 검은 기사의 무리를 따라잡았다. 슈벨이 할 일 직선으로 뻗은 길을 따른 금은 기사들의 진군은 말에서 내려 걷는 속도보다 빠른 정도에 불과했다. 살아있는 말과 같이 취급할 일은 아니지만, 말의 상대로 미루어 이대로 쉬지 않고 달려도 나디움까지 지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빌리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라고 명령을 내렸다. 블랙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골드 게이트로 온 건 당신의 과거를 수정하여 명예를 되찾는 일이 아니었나?" 슈벨이 블랙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는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버린 골드 게이트 전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나디움으로 가 여왕을 만나것. 골드 게이트에 대한 묵은 감정 같은 건 없다." 블랙은 아무렇지도 많게 말했다. 슈벨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적어도 이런 식의 결과는 아니었으리라 본다구. 마치 도망친 것처럼 보이지 않아?" 빌리가 대신 대답했다. "골드 게이트의 누구도 그렇게 보지 않았을 거다.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슈벨은 멀리 피어 오르고 있는 붉은 색깔의 연기를 가리켰다. 동쪽의 언덕에서서 피어 오른 연기에 이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서쪽에 있는 언덕에서도 불이 타올랐다. "저 봉화를 봐라. 아마 한 시간도 안 되어 우리가 골드 게이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나디움에 전해질 거다. 그럼 우리는 엄청난 군대를 만나게 될 거야. 적어도 울프 기사단 전체를 만나겠지.......” 빌리는 피식 웃었다. 슈벨은 아직 골드 게이트 안에서 벌어진 싸움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빌리는 질서 있게 늘어져서 따라오는 검은 기사들을 가리켰다. "네 눈에는 이 기사단이 단지 한 개의 기사단으로만 보이나? 내 눈에는 어떤 나라의 어떤 군대라토 박살낼 수 있는 마법으로 보인다. 하지만 블랙의 뜻에 따라죽은 자가 산자를 죽이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골드 게이트에서의 싸움을 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고 있다는 소식을 먼저 나디움으로 보내는 거지. 우릴 대비하라는 뜻으로." "왜 그래야 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블랙이 했다. "이 진군의 의미를 아는 자가 저 족에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슈벨도 마찬가지지만, 아직 빌리도 블랙이 왜 나디움으로 가는지, 왜 아란티아의 여왕을 만나려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진군하는 의미를 깨닫는 이가 저 쪽에 없다면 나디움이란 도시는 내일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빌리는 블랙이 자신을 지목하여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놀랐다. 짐작에 불과한 빌리의 생각을, 블랙은 정말로 가능하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이 이름 없는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론타몬의 대군조차 무너뜨리지 못했던 아란티아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나 빌리는 만약 정말로 이 기사단이 나디움으로 쳐들어가 10년 전에 하지 못했던 정복을 실현시킨다면 스스로 만족해 하거나 기뻐할 것인지 자문해 보았다. 닥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게이트를 통과하고 나서부터 이미 나디움 정복은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쉬운 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블랙 일행은 일부러 느린 이동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 간 몇 개의 마을을 지나쳤다. 한가롭게 놀던 마을 사람들이나, 쟁기질을 하는 농부들은 이 기괴한 행군을 바라보고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러나 검은 기사들은 살아있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배 안 고프냐?" 이미 점심 때가 지났다. 빌리를 간호하느라 밤을 새고 지금까지 내내 굶었으니 시장할 만도 했다. 그러나 빌리는 조금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던 터였다. "아, 그러고 보니 밥 먹을 때가 지났군." 그는 블랙에게 잠시 쉴 것을 요청했다. 블랙은 직접 명령을 내리라고 말했고, 빌리는 기사단에 멈추라고 명령을 내렸다. 검은 기사들은 정지했으나, 굳이 말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누구도 지치지 않았고, 말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사실 빌리도 마찬가지였다. 휴식이 필요한 사람은 슈벨 밖에 없었다. 그래도 빌리는 슈벨과 함께 마을로 가 먹을 것과 술을 샀다. “남은 음식과 돈은 거의 다 브리지나일을 줘버렸어. 이거만 사면 이제 돈도 안 남는군." 슈벨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음식값을 지불하며 말했다. 그는 빵을 하나 베어 물고 하나를 빌리에게 내주었다. 별로 배는 안 고팠지만, 끼니때가 되었다 싶어 빌리는 내준 것을 그냥 입에 물었다. 하지만 종이 씹는 맛만 나서 바로 뱉어버렸다. "무슨 맛이 이래?" "뭐가? 맛만 좋구만." 빌리는 다시 한 번 한 입 물어 억지로 삼켜보았지만 나무껍질을 한 시간쯤 씹다가 겨우 삼킨 것처럼 불쾌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너무오래 앓았나? 입맛이 전혀......." 빌리는 먹던 빵을 도로 내주고 대신 와인을 한 잔 마셨다. 아무향도 느껴지지 않고 맹물을 마시는 것 같았다 그나마도 한계까지 물을 들이킨 후에 억지로 한 모금 더 마시기라도 한 듯 목이 메였다. 불길한 생각이 퍼뜩 들었으나, 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와인 뚜껑만 닫아 도로 슈벨에게 넘겨주었다. “다 먹었어? 야, 너 거의 이틀은 굶었는데, 더 먹어야 하지 않아?" 슈벨이 조금 걱정하며 말했다. "이틀이나 굶어서 그런지 음식이 잘 안 넘어간다." 빌리는 진심으로 그런 것이길 바라며 말했다 슈벨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방을 먹다가 빌리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같이 멈췄다. "슈벨, 잠깐 여기서 나와 겨뤄보자." 슈벨은 입에 담은 빵을 우물거리며 황당해했다. "어이, 어이. 지금 그레이 타운에서 있었던 그 결투 약속을 지키겠다는 거냐?" “그런 거 아니야. 그냥한번...... 겨뤄보자.” “그러자. 그런데 너 블랙 덕에 상처가 낫긴 했지만, 몸도 제대로 안 풀했을 텐데, 할 수 있겠냐?" "아마 놀랄 거다." 슈벨은 웃으며 칼을 뽑았다. 빌리도 칼을 뽑아 가볍게 그의 칼을 쳤다. 둘은 몇 번 부드럽게 칼을 주고 받았고, 빌리는 슬쩍 슬쩍 공격을 피하다가 손을 들었다. "이제 됐어." 슈벨도 굳이 목검도 아닌 검으로 싸우는 게 내키지 않던 차라 즉시 공격을 멈추었다. "너 근데 좀 이상하다 뭐 안 좋은 거 있어?" "아니, 안 좋은 게 아니라...... 몸이 너무 좋다." "무슨 소리야?" “한 번 전력을 다해 쳐봐라. 내 몸을 쳐도 상관없지만, 네가 불안해 할 것 같으니까 그냥 내 검을 쳐봐라. 전력을 다해서!" 슈벨은 대체 무슨 꿍꿍인가 싶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그가 른타몬의 보검을 향해 힘 있게 칼을 휘두르는 순간 빌리의 몸이 사라지는 깃 같더니 어느 새 보검은 슈벨의 목을 향해 들어와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에 이어진 공격에 슈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쳤다. 빌리는 즉시 그의 목에서 칼을 떼고 물러났다. “대체...... 내 몸이 어떻게 된 거지?" 빌리는 칼을 떨어뜨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그건 슈벨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슈벨, 만약에......” 빌리는 다시 칼을 집어 칼집에 꽂으며 말했다. “만약에 내가 저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면 캡틴은 네가 맡아라." “무슨 헛소리야?" 슈벨이 버럭 소리 질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명령을 받아선 안 되지 않나?" 빌리는 그 말만 남기고 도로 검은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처진 빌리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이들의 이동은 저녁때까지 이어졌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 동안 아무도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고, 그들 역시 민간인을 해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울프의 기사단이 덮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긴 했다. 아무리 이 기사단이 막강해도, 상대는 오십으로 삼백의 익셀런을 무너뜨린 전설의 기사단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당시보다 더 강해줬을까? 아니면 더 약해졌을까? 그들은 붉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반나절 넘게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누가 보아도 유령의 기사들이라 할 만 했다. 거기에서 가장 버터기 힘들어하는 건 슈벨이었다. 그렇게 떠들길 좋아하는 그였건만, 그 역시 이 기사단에 끼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빌리." 슈벨이 먼 서족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러나?" "내가 먼저 나디움으로 가면 안 되겠나?" 슈벨은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는 처음 빌리를 떠날 때부터 울프의 기사들을 만나길 원했고, 그것을 위해 지난 몇 년을 훈련하고 방황했다. 그걸 알기에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슈벨은 다른 말을 했다. “이대로라면 필연적으로 전쟁이 벌어진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아직도 블랙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물며 저쪽에서 블랙의 의도를 아는 자가 있겠나? 나는 나디움이 무너지길 원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내가 먼저 도착하기 전에 무너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이해한다. 그럼 먼저 가서 어쩌려고?" "나는 블랙의 의도를 모르나, 적어도 이 일에 대한 힌트는 주어야지. 또 나 역시 울프의 기사들과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고." "혼자서?" "상관없어." "네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우린 나디움으로 진격할 거다." "그렇게 해." 슈벨은 밀리의 말 옆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겠군." 그가 말하자, 빌리는 악수하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아니야. 끝까지 네 옆을 지키며 이 기사단이 하는 일을 보고 싶었어. 하지만 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순간 내 욕심이 머리를 들더라고." 슈벨은 악수를 끝난 손을 되돌려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난 기사감이 아니야. 그러기에는 너무 이기적이지." 빌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먼저 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겠다, 슈벨." "이 속도로 느긋하게 가다 보면 밤중에 화이트에 게이트에 도착할 거다. 하지만 공격을 하려거든 아침으로 해라," "특별히 그래야 할 이유라도?" “그렇지 않아도 시커먼 갑옷의 기사들이 밤에 들이닥치면 그거 딱 악당 이미지잖아. 블랙이나 여기 기사들은 절대 그렇지 않는 자들이니까. 가장 성스러운 시간에 당당히 입성해라. 그게 좋아." “고마운 충고군." "간다." 슈벨은 주먹을 꽉 쥐어 보이고 말을 달려갔다. “집착인가? 여자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의지가 확고해서, 때론 본인을 일부러 격하시키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닌지.......” 빌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듣고 있던 블랙이 말했다. "슈벨에게는 슈벨이 할 일이 있는 거겠지." 블랙은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나?" “이제 막 지평선에 걸려 있소. 아직도 태양이 보이지 않으시오?" "태양을 볼 자격이 없는 거겠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블랙. 당신은 누구보다 찬란한 태양과 어울러는 기사입니다." 블랙은 웃었다. 어딘지 슬픔이 묻어있는 웃음이었다. "빌리, 너는 아직도 익셀런이 고귀한 기사도로 무장된기사단이라고 생각하느냐?" “겸손한 척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기사도를 마지막까지 지킬 기사단이 있다면 그것은 익셀런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빌리. 우리가 철저하게 기사도를 지킨가 애초에 기사도를 지킬 줄 모르는 문외한이기 때문에조심한 것 뿐이다. " 블랙은 뒤따르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고귀한 핏죽을 가진 계사들도 아니었고. 론타몬에 충성하는 애국자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학살한 살인자들일 뿐이다. 또 결코 피가 닿아서는 안 될 성스러운 아란티아에 피를 뿌린 사악한 군단의 돌격대일 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과 다른 익셀런의 기사들조차 모르는 당신들의 영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익셀런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모두 여기 있는 기사들을 동경하여 지금도 철저히 기사도를 지키는 훌륭한 기사들이 익셀런에 있습니다." "빌리, 너는 아직 10년 전을 모른다......” 블랙은 고개를 저었다. 길을 밟는 말발굽 소리가 조용히 저물어 가는 황혼을 향하고 있었다. 빌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블랙의 말이 맞다. 어쩌면 빌리는 과거의 익셀런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기사도가 어쩌도 해도 결국 익셀런의 기사들은 가넬로크의 수호 드래곤들을 살해했으며, 론타몬의 정복을 방해하는 수많은 기사들을 학살했다 그런 살인의 대가로, 안식의 땅을 찾지 못하고 지금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빌리는 할 말이 없었다. 태양이 서족 지평선에 겨우 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빌의는 눈 앞의 태양이 언제 사라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부디 지금 지는 해가 내일 아침에도 보이길...... 아니 적도 자신의 일이 끝날때까지 만이라도. 밤사이 슈벨은 돌아오지 않았다. 빌리는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않고 말 위에 있었다. 이미 그들은 화이트 게이트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다른 게이트의 문과는 달리, 기사들이 타고 있는 검은말의 앞발로 걷어차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문이었다. 그들은 게이트를 앞에 두고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빌리는 멀리 나디움을 살폈다.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비상시라 그런 것인지 집집마다 불이 밝혀져 있어 도시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이트 게이트의 좌우로 하늘 높이 솟은 탑의 꼭대기에 등대처럼 희미한 빛이 밝혀져 있었다. 슈벨의 말대로 지금 쳐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성스러운 도시를 더럽히는 악의 무리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빌리는 블랙에게, 진입을 한다면 내일 하자고 말했다. 어했든 블랙의 목표는 오직 아란티아의 여왕이었다. '그럼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어떤 결말이 있든 간에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바가 없었다. 별빛이 유난히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빌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후에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해답은 오직 시간만이 알고 있었다. 빌리는 손바닥을 칼로 스윽 그었다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피도 금방 멎었다. 사위가 밝아지고 있었다. 밤새 서쪽의 화이트 게이트를 향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뒤쪽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빌리는 뒤를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전군 앞으로." 빌리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름을 잃어버린 기사들의 군대가 화이트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11.제이메르 르고의 대장간 늑대들의 만찬이 아직 이어지고 있을 때 쉐이든이 데려간다던 좋은 곳이란 대장간이었다. 성에서 한참 내려와 나디움에서도 꽤 떨어진 먼 곳이었지만, 쉐이든은 멀리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밤길을 걸어갔다. 성에서 내려가는 계단 근처의 집에 사는 이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밤에도 불을 켜고 생활하고 있었다. "쉐이든 울프! 오늘 내 딸이 당신한테 청혼을 하기로 했소." 술 취한 남자가 자기 머리만한 맥주잔을 들고 2층 테라스에 몸을 반쯤 걸치고 소리쳤다. 쉐이든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들어 대꾸했다. “당신 딸이 몇 살인지 아는 이상 무척 수상한 청혼이군." "10년만 지나면 스무 살이야!" “그때쯤 이면 내 아들이 열 살이 될 테니, 내 아들과 결혼시키는게 좋겠군." 술 취한 남자는 또 당했다며 동료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웃어됐다. 제이는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하얀 늑대에게 대 놓고 저런 농담을 해대는 마을 사람들과 그의 관계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관계가 좋다 나쁘다를 평가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안 나쁘나, 저런 말?” "뭐가?" “고귀한 기사 아니셨나? 그런데 저런 식으로 사람들이 말하게 내버려두니, 조금.......” "울프의 기사는 출세의 장이 아니다. 수호 기사가 되지 않는 이상 나 역시 오 년이나 십 년 후에는 은퇴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저런 사람들과 똑같은 신세가 된다. 거드름 피우며 살 정도로 대단한 업이 못 돼, 울프의 기사는." 대장간의 퉁탕거리는 소러가 들려왔다. 밤에도 바쁘게 작업하는지 대장간의 도가니에서 새는 붉은 빛이 창문 밖으로 환하게 보였다. "르고, 안에 계시오?" 쉐이든이 열린 대장간 문을 노크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검댕을 묻히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소년이 달려 나왔다. “마스터께서는 작업 중이십니다. 지금 마무리 작업 중이니 조금 기다리십시오." “그럼 그 전에 이 친구에게 무기를 한 자루 주고 싶은데 가능한가?" 쉐이든이 제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새로운 울프의 기사신가요? 그럼 따로 주문을 하는 게?"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창고로 안내하겠습니다." 소년은 대장간 뒤쪽에 있는 별채로 둘을 안내했다. 제이는 쉐이든의 어깨 너머로 문 닫힌 작업실을 보았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쇳리가 끝없이 이어졌다가 잠깐 멈추길 반복하고 있었다. 소년은 창고라고 쓰인 문을 열쇠로 열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아래에는 바깥에서 보기와는 다른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하얀 늑대의 부탁이라면 언제든 이 창고를 공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무기를 꺼내 가셔도 좋습니다. " "고맙네. 하지만 한 자루면 되니, 걱정 말고." "걱정 안 해요." 소년은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물러갔다. "굳이 날 위해서 여길 데려왔나? 칼이라면 있어." 제이메르는 너무 종류가 많아 고르라고 해도 고르지 못할 무기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칼집도 안 맞는 걸 보니 다른 사람 칼인 듯한데, 네 몸에 맞지도 않는 칼로 싸움터에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한 첫 아닌가?" “난 아무 칼이나 잘 써." "우선 돌아나 봐라. 그 칼도 꽤 좋은 잘인 것 같으나, 여기에서 네 손에 착 붙는 칼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게 아니면, 그냥 그 칼을 쓰던가. 날 르고에게 가 있을 테니, 칼을 찾으면 돌아와라." 쉐이든은 짧게 설명하고 쇠 다듬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버렸다. 제이는 '르고가 누군데'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남은 창고에서 지루한 얼굴로 칼을 몇 개 뽑았다가 괜히 휘둘러 보고 도로 꽂아 넣었다. 워낙 많은 양이 진열되어 있어, 아무 칼이나 잔뜩 모아놓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칼이 다 똑같지.......” 그 말은 금방 잊어버렸다. 열 자루 정도의 칼을 꺼내 본 후, 제이가 칼을 관찰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이 중 아무거나 하나 뽑아도 일반 상점에서는 자기 집 대표 상품이라고 진열장에 전시만 해둘 물건에 버금갔다. 지금 제이가 차고 있는 것도 빌리가 익셀런의 기사로서 가지고 있을 칼일 텐데, 이 곳에는 그것을 능가하는 게 얼마든지 있었다. '잔인한 자식, 여기서 한 자루만 고르라고?' 창고 안의 있는 검들 중 그가 훑어본 건 절반도 안 되었다. 그 중 열 자루 정도는 제이의 마음에 꼭 들어 일단 옆에 꺼내두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신중하지 못한 선택을 한 것 같아 나머지 물건들은 좀 더 공을 들여 살펴보기로 했다.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것 같아도 그거 다 목록대로 정리해 놓은 거야. 흩트려 놓지마."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애가 노인네처럼 어깨에 겉옷을 걸치고 향기 진한 차를 마시며 문가에 서있었다 제이는 견습생인가 보다 싶어 무시하고 계속 칼을 찾았다. 그 소년은 제이가 꺼내놓은 칼을 대충 훑어보더니 픽 웃었다. "어쭈, 그래도 안목은 있나 보네. 제일 공들여 만든 것만 골라냈어." 제이는 꺼낸 검을 시험 삼아 휘두르던 손을 멈췄다. 소년을 다시보니 주름도 많고 목소리도 어린애 치고는 굉장히 걸걸했다. “당신이 르고라는 대장장이야?" "왜 이런 모습인지는 귀찮으니 대답하지 않도록 하지. 꽤 오랫동안 살폈나 보네." "오래 안 있었어." "창문을 봐라." 벌써 아침 해가 했는지 꽤 밝았다. 제이는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창고 안에 켜놓은 촛불 몇 개가 모두 달아 꺼지기 직전의 상태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 있었는데?" 제이는 이 사태를 설명이라도 해달라는 표정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르고는 제이가 꺼내놓은 칼 중 하나를 때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잠깐이지만 패 훌류함 솜씨였다. "아무리 찾아봐야 너에게 이거다 싶은 건 안 나을 거다. 가끔 졸면서 만든 게 있긴 한데, 대부분은 내가 정성을 들여 놓았으니 죽어라 살펴봐야 별 다른 건 없어. 내가 맞춰서 만든다면 모를까." 르고는 들고 있는 칼을 획 던져주었다. “맞춰서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지?" "네가 어떤 검술을 쓰는지, 어떤 자세로 검을 쓰는지에 맞추어 칼의 밸런스를 맞추고 길이를 맞추는 거야. 지금 만들고 있는 쉐이든의 창처럼." 칼에 신경 쓰느라 밤새도록 통탕거리던 소리가 언제 멎은 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카모르트에 간다고 했을 때 꽤 열심히 준비한 작업이 있었거든. 이번에는 다섯 명이나 되어서 조금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어. 게다가 하필이면 쉐이든 걸 마지막 작업으로 미뤄놓는 바람에......” "다섯 명? gis얀 늑대들을 말하는 거군." "지금 그 애들이 가지고 있는 칼은 모두 울프 기사단이었을 때 제작된 거야. 하얀 늑대라면 거기에 걸 맞는 무기가 필요한 거지. 또 그 사이 그 녀석들의 검술에도 변화가 생겼고, 내 생각에 앞으로의 적은 지금의 무기로는 어려울지 모르니." "무기란 게 적을 찌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나?" 르고는 모르는 소리 말라며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단순히 찌르고 베는 싸움이라면 하얀 늑대들만큼이나 무기 만드는 보람이 없을 정도로 아무 무기나 잘 쓰는 녀석들이 있을까? 찌르는 것만으로는 안 죽는 적들이 있는 법이지. 너는 그런 적을 상대해 본 적이 없을 테지?" 아이린과 밤에 싸웠던 회색의 마법사가 떠올랐다. 그 검은 박쥐를 막는 것만으로 칼이 부서졌던....... "있다." "허어, 그럼 알겠네? 그런 적을 상대로 무기란 게 얼마나 중요한건지." “그럼 지금 만들고 있다던 그 무기란 것들은 마스터 아이린의 칼에 맞먹는 마법의 무기란 건가?" 르고는 마시던 차가 목에 걸렸는지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는 입을 닦고 찻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베나 에사르핀에 맞먹는 검을 만드는 건 조금 무리지. 10년쯤 전에 한 번 만들어 보긴 했는데, 그 때는 워낙 재료가 좋아서 가능했던 거야. 또 사실 전투력으로 치면 베나 에사르크를 따를 만한 검은 여왕의 수호자라 불리는 '베나 실코’ 밖에 없지. 그 때 만든 검은 사실 전투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둔 거니까." "아란티아의 보검을 말하나 보군." “흠."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제이를 여기저기 뜯어보았다. "말하는 꼴을 보니,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네가 캡틴 울프는 아닌 모양이구먼?" "그런 셈이지." 제이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딱히 들킨다고 큰일 날 일도 아니고, 카셀도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한 자신이 완벽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골라내긴 했는데, 도저히 이 두 자루 중에서 한 자루를 선택하지는 못 하겠다. 그냥 두 개 다 줘." 제이는 칼 두 개를 양손에 들고 협박하듯 말했다. 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욕심도 많은 녀석! 천하의 르고가 만든 검을 들고서도 한 자루에 만족할 줄 모르다니." "줄 거야, 말 거야?" "가져라. 그런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검도 꽤 좋아 보이는군." "익셀런의 기사라는 녀석에게서 빼앗았다. " "그럼 세 자루나 쓸 거냐?" "사냥꾼에게 칼 세 자루는 기본.......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건 주인 돌려줘야지." 르고는 차를 마저 마시며 웃었다. "재미있는 녀석이구먼. 그렇게 해라." 제이는 만족하며 허리에 한 자루를 차고 유난히 긴 칼은 등에 짊어졌다. 묵직하게 몸을 잡아당기는 무게감이 좋았다. "아, 그리고 이 칼에 맞는 칼집도 좀 줘." 제이는 밀러의 검을 내밀었다. "내가 심부름꾼인 줄 아냐? 그런 건 내 제자에게 부탁해. 쉐이든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뒤뜰에 나가 봐. 난 일주일 째 밤샘 작업을 한데다가 오늘 밤에 작업해 놓은 쉐이든의 창에 대한 마무리 작업까지 해야 하니, 이제 좀 자야겠다." 르고는 창고 문을 잠그려고 제이를 쫓아내듯 밀어냈다. 제이는 아직도 나머지 검을 다 살펴보지 못한 게 아쉬워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부러지면 한 자루 더 사면 그만일 뿐인 게 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처럼 이걸 써먹고 싶어 흥분되긴 처음이었다. 그는 밤새 르고의 작업을 돕느라 녹초가 다 된 소년에게 칼집을 내놓으라고 반 협박해서 빌리의 칼 길이에 맞는 칼집까지 얻고서야 뒤뜰로 나갔다. 쉐이든이 커다란 창을 휘둘러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를 툭툭 치고 있었다. 계이도 등에서 칼을 꺼내 그 옆에 비어있는 커다란 나무둥치를 칼로 가볍게 쳤다. 굴이 검술 연습이라기보다 칼의 밸런스를 몸으로 익히기 위한 과정이었다. "칼은 마음에 드는 걸 골랐나?” 쉐이든른 제이를 기다리느라 이미 몸을 많이 움직였는지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르고라는 양반이 재촉해서." “재촉이라고 하기에는 창고에 있던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나?" 제이는 쉐이든의 창을 끝에서부터 반대편 끝까지 슬쩍 훑어보았다. “새 창은 아직 안 만들어졌나? 예전 것이군." “완성은 다 되었지만, 마법의 힘이 숙성되려면 적어도 하루가 필요하다는군.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에나 완성되려나 보더라." “하얀 늑대들은 다들 쓰는 무기가 다른 모양이지?” “대체로 아무 거나 잘 써. 취향 문제지. 하지만 그런 것도 목숨을 건 전투에 들어가면 꽤 중요하니까." 제이는 힘차게 검을 휘두르고 자세를 바꿔 몇 번 허공을 베었다. 바닥의 잔디가 칼이 일으키는 바람에 휩쓸려 올라갔다. 별로 만족스럽지 않아 그 동작을 다시 반복했다. 보고 있던 쉐이든이 물었다. "검을 배운 적이 없다고?" “없다. 왜? 내 검이 엉망으로 보이냐?” "울프 기사단에 들어와라." 제이는 손을 멈추었다. “그런 제안을 할 속셈으로 이 칼을 준 건 아닐 테고?" "별개다. 그 정도로 충실한 기본 힘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으면 꽤 훌륭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었다.” 제이는 울격 하며 칼을 들었다. "어이, 시비 거냐?" 쉐이든은 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제이는 얼른 싸울 거리를 늘리려고 한 걸음 뒤로 뛰었다. 그러나 싸우려고 일어날 게 아니었는지 쉐이든은 그냥 출구 쪽으로 걸어가기만 했다. 제이는 괜히 자기 꼴이 우스워지는 것 같아 칼을 집어넣었다. “어짼든 난 기사가 될 생각은 없다." "그거 아깝군 그대로 3년쯤 노력하면 하얀 늑대에 이를 수도 있을텐데." 그 말은 어떻게 들어도 '지금은 안된다'는 소리였다. 제이는 홧김에 넣었던 칼을 다시 뽑았다. 그 순간 쉐이든이 뒤를 획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검의 간격이 한 걸음으로 좁혀 들어왔다. 쉐이든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더라도 베지 못할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다른 울프들을 만났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제 제이는 아이린의 안내로 훈련장으로 갔었다. 지금까지도 울프들을 몇 떵 만나보긴 했지만, 그 곳에서 제이는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는 실력자들이 한곳에 모여 우글거리는 아주흥미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훈련장의 울타리 옆에서 아주 잠깐 본 시합이었음에도 제이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분명 다치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며 살살 하는 공격이었는데, 그런 공격이라도 제이는 힘겹게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건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린은 그들을 모아놓고 제이를 내세우며, 자신의 제자이니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과 한 번 겨루자고 했다. 그녀는 며칠 밖에 같이 지내지 많은 제자의 성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한 판 벌이고 싶어 온 몸의 근육이 들썩거릴 정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이름은 지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우린 일반 검사와는 겨루지 않습니다. 마스터 아이린의 명령이라면 가볍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잔뜩 흥분되어 있는 상태어서 그런 말을 듣고서 도저히 있을 수 없었다. 제이는 칼이 닿을 만한 사방 세 명 정도를 잡고 말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스터. 그냥 이대로 싸워도.” 제이는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검의 간격으로 두 걸음을 접근했다. 그 때 거의 동시에 좌우에 있던 세 명이 한 걸음의 간격으로 좁혀 들어왔다. 제이는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아찔해졌다. 한 명이라면 그나마 놀라면서도 그 한 걸음 간격에 대응할 수 있을 테지만, 세 명이 등시에, 그것도 정확히 같은 간격으로 다가오니 제이는 굉장히 당황했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 검도 꺼내지 않은 상태에서 제이 역시 세 명을 상대로 한 걸음 간격을 유지했고, 울프틀 역시 물러서지도 다가서지도 않았다. ‘그만 둬, 양 쪽 다! 혼난다?’ 아이린이 화내며 말렸다. 그 세 명은 뒤로 물러섰으나, 검의 간격으로는 한 걸음씩 신중하게 물러났다. 어느 새 손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더더욱 가슴 속의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명이 더 분위기가 험악하기 전에 나섰다. '이름은?' '프란츠.' '아, 좋아. 어때, 제이메르? 이 녀석이면 해볼 만하지' 나중에 얘기하길, 아이린은 제이의 실제 검술을 제대로 보고 싶다는 뜻에서 이런 시합을 주선한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보는 것보다 비슷한 실력의 있는 녀석과 겨루는 걸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게 더 좋다고 했다. '난 여기 있는 녀석이라면 아무라도 좋습니다.' 제이는 구석에서 이 쪽을 주시하는 실디레라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말했다. 하지만 프란츠는 제이를 가만히 보더니 바로 시합을 거절했다. '부상당했군. 몸 관리를 해줘야 하지 않나? 그런 몸을 한 자와는 시합할 수 없다.' 옷 안에 해놓은 붕대를 알아본 것이었다. '난 상관없어. 이 정도 부상은 안고 싸워주지. 내가 칼을 꺼내는게 싫다면 어서 목검을 가져와.' 제이는 이대로라면 시합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큰소리를 했다. 그러나 아이린이 뒤에서 어깨를 움켜쥐어 제이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프란츠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명을 하고 말았다. 시합은 나중으로 미뤄졌고, 제이는 옆에서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언제나 실전으로만 검을 익힌 제이였다. 그러나 그런 관전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울프들은 정말 대단한 기사들이었다. 제이는 다음 날 있을 그들과의 싸움에 대비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고, 다친 곳도 빨리 회복되도록 가급적 어깨를 쓰지 않고 있었다. 즉, 어제에 비해 제이의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그런데도 방금 쉐이든이 순간적으로 좀혀 든 검의 간격에는 반응을 할 수 없었다. “하얀 늑대를 향해 함부로 칼을 뽑지 마라. 아이린의 제자라면 앞으로도 우리와 접할 일이 많을 텐데, 모른 척 하고 넘어가 줄 만한 녀석들이 하얀 늑대 중에는 많지 않다." 그는 한 명씩 속으로 꼽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 그런 녀석 없다.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아." 쉐이든은 경고하며 내민 창을 되돌렸다.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쉐이든은 다시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내가 3년이라고 말한 건 너를 상당히 높이 평가해서 하는 말이었다. 아이린에게 잠시 너에 대한 얘기를 들은 바가 있는데, 아직 한 번도 누군가에게 배워본 적이 없다면서? 당연한 거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마스터 퀘이언에게 배울 때를 기준으로 검술의 실력에 많은 차이가 났다. 제이메르, 지금부터라도 충실히 배워라. 그리고 내가 말한 3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라." 누군가의 충고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말만 들으면 화가 났다. 그러나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쉐이든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여기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듣기만 해야 하는 자신의 무능력.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은 자가 되어주겠다고 카셀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1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제이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 이하다. 그래! 6개월이면 돼," "그럼 그러든가." 쉐이든은 싱겁게 대꾸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 때 길게 나팔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별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올랐으나, 쉐이든은 멈춰서 동쪽을 응시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알라야의 봉화.......” "그게 뭔데?" "너무 빠르군, 어떻게 벌써......?" 쉐이든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제이도 런른 뒤를 따라갔다. 나디움의 많은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하고 집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제이는 눈치로 봉화의 의미를 알았다. 두 번째 테스트의 의미 이미 훈련장에는 많은 울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상 대기명령이 떨어져 있어, 그들은 훈련은 커녕 언제나 하는 가벼운 시합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으나, 나디움의 백성들처럼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골드 게이트가 무너줬다는 소식이야. 자세한 소식은 파발이 도착하겠지만, 파발이 먼저 일지 공격이 먼저일지는 모르지." 이름을 외우지 못해 어제 봤다는 기억만 있는 울프 기사 하나가 제이에게 말했다. 제이는 입맛을 다셨다.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군." “으음? 무슨 기회?" 제이의 말에 그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시합 말이다. 오늘 적어도 여기 있는 녀석들 중 반 정도는 꺾어 볼 생각이었는데, 아깝게 되었지 않아?" 그가 웃음을 터트렸고, 근처에서 몸을 풀고 있는 얼굴 검은 여자가 말했다. "이거 흘려듣기에는 너무 강렬한 도전 아니야?" 제이는 좀 더 그들의 화를 돋울까 하다가 아까 쉐이든과 있었던 일을 떠올려 조금은 자제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까지 시합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주리라 믿으니 사과하진 않했다." “호오, 어제와 달리 조금은 겸손해졌는걸, 그럼 내가 나서지 않수가 없지," 그녀는 옆에 꽂혀 있는 긴 목검을 한 자루 그에게 내주었다. "훈련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긴 했지만, 규칙 좀 어기지, 뭐. 여기 있는 녀석들이 마스터에게 고자질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근처에 있는 다른 기사들은 마침 훈련도 못 하고 심심하던 차에 볼거리가 생겨 잘 됐다며 시선을 이 쪽으로 돌렸다. "내가 쓰는 목검이라 좀 긴데, 괜찮아? 내 이름은 말라다.” “난 무기 안 가려," 제이는 증명이라도 하듯 손바닥 위에서 자유롭게 검을 돌린 후 그녀의 앞에 섰다. 그녀는 가볍게 관절을 푼 후 말했다. "살살 하자고, 살살. 다치지 않게." "네가 조절하며서 싸울 만큼 약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하하, 그럼 내가 지는 걸로 하지." 말라는 크게 검을 휘둘렀고, 제이는 막은 후 뒤로 물러섰다. 공격을 단 한 번 봤음에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다는 게 보였다. 그녀는 굉장히 가벼운 몸놀림을 보이며 좌우로 잘도 뛰어다녔다. 확실히 조절하면서 싸운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는 그저 관찰만 하고 가급적 위험한 공격은 하질 않았다. 물론 전력을 다하지 않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말라를 따라잡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항복." 말라는 제이의 목검이 목으로 들어오자, 얼른 칼을 놓았다. 몇몇 울프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한 명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야아, 말라의 저 장난질을 이렇게 발리 따라잡은 사람은 로일 이후로 처음인걸." 말라는 떨어뜨린 목검을 주우며 혀를 내밀었다. "그 자식은 살살 하자는 합의 사항을 안 지키고 무식하게 내 정강이를 후려쳐서 그런 거 였어. 그 때 다리 부러진 게 보름이나 가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다들 그 때 일을 생각했는지 큭큭 대고 웃었다. 제이가 목검을 놓으려 하자, 다른 울프가 나섰다. "이런 정도로 간단히 하는 시합이라면 나도 하지. 내 이름은.......” "아, 이름은 말하지 마라. 말라라는 이름 하나 외우기도 힘들다." 통성명을 거부했으나, 그 울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좋아 내가 네 이름을 외우고 있는 게 중요하겠지." "그건 무슨 의미냐?" "알면서 뭘 그래? 우리가 네 이름을 외우는 건 의무 사항이 될 예정 아니던가?" "너희들 생각이겠지." 제이의 말에 그는 웃으며, 길지 않은 목검을 내밀었다. 제이는 그것을 툭 치고 다시 한 번 아까와 같은 시합을 했다. 이번에도 제이는 손쉽게 상대방을 제압했다. “다음은 내가 할까?" 또 다른 울프가 나서려고 할 때, 언제부터인가 무리에 끼어 있던 프란츠가 손을 들었다. "내가 하지." 원래 오늘 아침에 있어야 할 본래 시합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우우 하는 함성을 질렀다. 프란츠는 목점을 쥐더니 말라에게 손짓했다. "네가 나와서 내 검을 받아다오." "어? 제이메르와 하는 게 아니라, 나와 하는 거야?" 프란츠는 목점을 들고 서 있는 제이를 슬쩍 노려보더니 말했다. "어제 만찬에서 주고받은 말을 기억한다면 내가 뭘하려는 지 알거다." 순간적으로 제이는 어제 무슨 말을 주고받았었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칼을 찾아다닌 즐거움이 전날 있었던 기억의 거의 전부였다. 마침 반대편 울타리에 카셀이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프란츠와 말라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었다. 제이가 그 쪽으로 다가가니, 카셀이 졸린 눈을 하고 물었다. "비상 대기라서 훈련은 금지한다 했는데도, 어제 약속한 시합을 할 셈이야?" "내가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프란츠라는 놈이 먼저 제안한 거야. 그나저나.......” 제이는 작은 목소리로 귀에 대고 물었다. "저 녀석이 어제 나한데 뭐라고 했었냐?" “재가 그랬잖아. 프란츠가 한 번 전력을 다해 싸워보고, 그 모습을 네가 본 후라면 네가 이길 거라고. 그랬더니 프란츠는 알고서도 막지 못할 공격이라며 화를 냈었지." "아아, 이제야 기억나는군." 프란츠와 말라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둘은 적당히 칼을 대는 듯 하다가 갑자기 전력을 다해 부딪치기 시작했다. 프란츠 쪽이 먼저 강하게 나오자, 하는 수 없이 말라도 전력을 다하는 형상이었다. 과연 울프들의 실력은 모두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더니, 어느 쪽도 쉽게 밀리지 않았다. 여차하면 말라가 이길 수 있는 순간도 있었으나, 프란츠는 그런 위기를 절묘한 동작으로 받아냈다. 프란츠는 잠깐 뒤로 물러선 상태에서 카셀과 제이메르 쪽을 짧게 한 번 봤다. 그러더니 자세를 낮춰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순간 검 끝이 사라졌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있었고, 말라는 비명을 지르며 검을 놓쳤다. 제대로 노리고 쳤으면, 목검 정도는 부러뜨릴 만한 공격이었다. 말라는 손을 쥐고 고개를 숙여 욕을 내뱉었다. "이 자식, 적당히 하자는 시합에서 그런 공격을 하기가 어디 있어?" "난 적당히 하자는 말 안 했다 그리고 이 정도는 보여줘야 어제했던 말을 제대로 지키는 거라서 미안하게 됐군." 그는 말라가 아닌 제이를 보며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했던 대로 그 공격으로 결정타를 날리겠다?" "손님 접대지." 제이는 앞으로 나서더니 말라가 내 준 긴 검을 갑자기 휘둘렀다 그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비겁한 짓이었으나, 제이는 이 녀석들 앞에서 철저히 악당 역할을 해도 좋았다. 하지만 프란츠는 아주 쉽게 그 공격을 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 제이메르. 너 뭐하다온 녀석이냐?" 묻기는 했으나, 답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것처럼 프란츠가 내지르는 검은 묵직했다. 울프의 기사들이 얼마나 봐주면서 싸웠는지 실감했다. 제이는 프란츠가 칼을 내밀고 도는 방향대로 움직이며 말했다. "사냥꾼이다." “나도 사냥꾼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늑대의 이빨을 얻었다. 그 이빨을 너에게 보여주지 못 하는 게 아쉽다. 보이면 이런 목검이라도 죽어!" 둘의 싸움은 극도로 빨라졌다. 언제나 상대에 맞춘 움직임을 따라가던 제이였으나, 그런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 녀석은 정말 빠르고 강했다. 검의 간격은 얼마든지 보였으나 그걸 바라보고 활용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프란츠는 예고했던 대로 밑에서 올라와 허리를 노리는 공격을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이건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막지 말자.'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그는 방어를 포기 하고 검을 내질러 상대의 가슴을 찔렀다. 거의 동시에 둘의 공격이 들어갔고, 제이는 한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프란츠도 그 자리에 온전히 서 있지 못 했다. 울프들이 두 사람에게 우루루 달려들었다. 제이는 잠깐 동안 정신을 잃은 탓에 주위에 몰려든 울프들을 보고 조금 놀란 나머지 손을 내저었다. “난 괜찮으니 저리 비켜." 제이는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이내 이것이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라 시합에 불과했음을 알고 겨우 진정했다. 프란츠도 가슴을 짚고 일어나 있었다. "비상시다. 서로 몸을 아껴야 하는 처지니 여기서 접지." 프란츠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실전으로 실력을 쌓아온 제이는, 목숨을 걸지 않은 시합 따위는 모두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얼마나 유치하고 위험한지 방금 한 번의 시합으로 깨달았다 이런 자들과 매일 시합을 한다면 목숨이 삼백 개 정도 있어야 겨우 일년을 버틸 수 있을테니까. "아니, 내가 졌다. 네가 다음 공격을 예고하지 않았다면 반격은 못 했을 거야." 제이는 처음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발언을 내뱉고야 말았다. 이내 후회했으나, 프란츠는 그와 악수하며 유쾌하게 말했다. "이 곳에서 승패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고받는다. 그래서 승리라는 것도 별 의미 없어. 뭐, 사실 한 번 본 것만으로 막을 수 있을 만한 공격도 아니었다. 네가 잘 한 거야." 프란츠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울타리에 팔꿈치를 걸치고 구경하는 카셀을 흘끗 돌아보았다. "저 친구 말에 발끈한 것도 없지 않아 있고. 대체 누구야? 어제 말할 때마다 괜한 성질이 나게 만드는 게 처음에는 무척 기분 나쁜녀석이라고 느꼈다 " "처음에는 그랬다? 그럼 지금은?" 두 사람이 멀쩡히히 얘기 잘 하니 부축했던 울프들은 모두 물러났다. 말라가 수고했다며 어깨를 특 했고, 그는 그녀의 목검을 돌려주었다. "지금은 별로 감정 없어. 덕분에 재미있는 시합도 했고...... 어제 사실 저 녀석이 불을 붙이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잡어. 오랜만에 설렘을 맛보았으니 되려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겠지." 그러고 보니 카셀은 프란츠를 처음 봤을 텐데도 그의 성격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뭔가 속임수라도 있을 것 같았다. 가끔은 캡틴 같은 얼굴을 하다가, 가끔은 어수룩한 모습을 하다가, 남의 모습을 흉내 내기도 했다가, 엄청난 거짓말을 태연히 하기도 하고, 느닷없이 진설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니, 사실 제이도 그의 진짜 모습이 어떤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오래 옆에 두고 싶은 녀석임에는 분명했다. "듣자니 실디레에게 뭔가 가르쳤다고 하더군." 프란츠가 말했다. "실디레? 그 건방진 꼬마 녀석 말이야?" "꼬마라 해도 명색이 울프다. 누구도 그 애에게 지지 않지만, 누구도 그 애와 싸울 때 방심하지 못해. 나나 쉐이든을 꽤 따르기도하고 나에게 좀 배우기도 하는데, 아무도 그 애를 길들이거나 기본부터 가르치진 못해. 그런데 어제 나한데 내게 그런 말을 하며 카셀이 굉장히 못된 녀석이라고 말하더라. 웃긴 건, 정작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나쁜 버릇이 없어졌다는 거야. 너와의 대결로 들떠 있느라 잠을 못 자고 있는 나를 찾아오더니 한 번 자세를 봐달라고 하는데....... 고질적인 버릇 하나가 갑자기 없어졌더군," 프란츠는 카셀을 훔쳐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밤새도록 땀에 젖을 정도로 열심히 훈련한 실디레 본인의 노력덕이긴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하게 만든 동기가 뭐지? 무슨 마법이라도 했나? 나나 쉐이든이 알면서도 지적하지 못한 것을 하룻밤 사이에?” 프란츠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역시나 남의 입에서 듣는 카셀은 불가사의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제이가 보기에 카셀은 여전히 검을 취두를 줄 모르는 불쌍할 정도로 착한 청년에 불과했다. 비상 대기라고는 했지만, 따로 내려진 명령은 없었다. 정오가 지나 따분하게 있던 기사들은 점심을 먹으러 갔고, 제이도 그들에게 섞여 밥을 먹은 후 다시 훈련장에 나왔다. 그 사이 카셀은 두 명이나 친구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제이는 전력을 다해 그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었다. 코엔과 푸티에르, 체스를 검술보다 좋아하는 기사들. 아니나 다를까, 그 세 사람은 열심히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 재미없는 말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제이가 마침내 지루해서 고개를 돌릴 무렵, 카셀이 비명을 지르며 머 리를 움켜잡앗다. “이거, 노린 겁니까? 함정이라고 피했던 게 함정이라니!" 코엔은 팔짱을 끼고 낄낄대고 웃었다. "이건 내가 퓨티에르에게 자주 써먹는 전법이지. 네 수 앞밖에 못 보는 사람의 실력으로는 무리지." 푸티에르가 눈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질렀다. "전적은 내가 더 높아. 어쩌다 통하는 작전으로 까불지 마. 솔직히 운이 좋아서지. 카셀이 거기에서 나이트를 움직이지 않았으면, 그 작전은 말짱 도루묵 아니었냐?" “나이트를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한 거야. 정확히 다섯 수 앞을 내다본 거지." 코엔은 실실 웃으며 손가락을 펴보였다. 카셀은 패배한 체스판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푸티에르 말이 맞네요. 이건 코엔이 다섯 수 앞을 내다본 게 아니라 제 실수였어요. 나이트를 움직이는 게 아니었어요." 푸티에르가 과장된 웃음으로 코엔을 놀렸다. "거, 봐. 네 잡기술은 언제나 이런 식이지." "뭐가 어째, 자식아!" 아마 어느 나라의 어느 기사단에 들어가도 최고의 기사라는 지위에서 거들먹거릴 기사 두 사람이 배 나온 동네 아저씨들 마냥 체스 두다가 홧김에 멱살다짐을 하는 모습은 제이가 보기에도 희극적인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제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의식한 후에야 싸움을 멈췄다. 카셀이 웃으며 체스 말을 치웠다 "어서 와, 제이메르. 칼은 좋은 걸로 골랐어?" "어떻게 알았냐?" "너 없을 때 르고라는 사람이 왔다갔어. 그 사람 생각보다 어려보이던걸. 아, 코엔, 푸티에르. 식사하고 오세요. 나중에 또 한판 더두죠." 두 사람은 좋다고 말한 후에도, 여전히 티격태격하며 식당 쪽으로 갔다. 제이는 코엔이 앉아있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카셀이 말했다. “르고라는 사람도 예전에 울프의 기사였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스터 퀘이언의 마스터의 마스터 였다나? 굉장한 사람이지?" "그럼 대체 몇 살이라는 거야?" 제이는 그 작은 키와 어려 보이는 얼굴에 엄청난 나이를 매치시켜 보니 , 되려 기분이 나빠졌다. "백 살은 안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런 모습이야?" "저주를 받았대나? 하늘산맥의 마녀와의 대격돌이라고 말해주더군 실상은 모르지. 자세한 건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더라." "그 사람이 무슨 얘기하려고 여길 왔어?" 카셀은 체스 판을 마저 치우다가 물었다. "너도 체스 둘 줄 알아?" "그런 거 배우고 싶은 생각 절대 없어." 혹시라도 배우라고 권할 게 무서워 강하게 거부했다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카셀은 조금 아쉬워하는 말투로 투덜대며 말했다. "그냥 창고에 처박아둔 칼만 주기에는 뭔가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서 잠도 잘 못 이루고 와 본거래. 그래서 내가 프란츠와의 대결에서 무승부라고 했더니, 좀 후회하는 말로 이렇게 말했지. '그냥 만들어서 줄 걸 그랬군.' 그래서 내가 울프의 기사들은 다 만들어서 주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 패배였어. 무승부가 아니다." "무승부야! 누구도 네가 졌다고 생각 안 해. 그리고 얘기 하는데 껴들지 마." "그, 그러지."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역설하는 카셀의 눈빛에 잠깐이나마 제압당했다. 역시 카셀은 이야기꾼의 소질이 있었다. 얘기 할 때의 모습은 정말 창을 든 쉐이든 만큼이나 막강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울프의 기사들은 무기를 직접 만들어 주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만든 무기가 제대로 된 녀석들에게 쓰일 때는, 자신이 직접 칼을 들고 휘두르는 것보다 더 즐겁다고 말하더군. 그럼 울프의 무기는 모두 공짜냐고 물었지. '공짜다.' 그럼 돈은 어디서 나느냐? 재료비는? 생활비는? ‘모두왕실에서 대준다. 그러니 제이메르라는 친구가 왕실 소속이 된다면 멋진 무기를 하나 제대로 만들어 주겠다. ' 뭐, 그런 식의 대화였지." 카셀은 르고의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아주 빠르게 그 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제이가 물었다. “나도 무기에는 돈을 잘 아끼지 않는 편이라 칼은 비싼 걸 사는편이지. 그래서 유명한 대장장이들을 제법 많이 아는데, 르고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명성이 없는 것에 비해 그가 만든 칼은 대단히 훌륭해. 그건 어떻게 된 거냐?" "아, 그건 르고에게 물을 것도 없이 친구들한테 들어서 알아. 르고는 만든 무기를 외부에 팔지 않는대. 왕실에서 직접 지원을 받으니 굳이 돈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울프의 기사들을 능가하는 검사는 없다고 생각하니 굳이 좋은 검사에게 좋은 무기를 줘야겠다는 사명감을 외부로 발산할 필요도 없다는 거지. 넌 울프들이 아닌 르고에게 먼저 인정을 받은 거야. 과거의 마스터니 영광으로 생각해도 될 거야."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뭔가 불만이었다. "왜 그런 얘기를 너한테 해준 거야? 나는 대뜸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네가 캐물었냐?" "아니, 그냥 말해줬어. 특별히 물어보진 않았는데?" 이것도 능력이라면 사실 제이는 바꾸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스스럼없이 카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카셀은 언제나 그 말을 진심으로 들었다 진심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줄수 있다는 것도 제이가 생각하기에는 훌륭한 능력이었다. 열심히 듣고 있는데도 상대방이 '얘기 재미 없지? 미안해 '하며 대화를 중단할 때는 난감했다. 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셀은 정말로 한 판 더 둘 참인지 흑과 백의 체스 말들을 도로 배열해 놓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판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할수 있는 건 이런 거 밖에 없어. 너 지금 알게 모르게 다른 울프들에게 캡틴으로 보여지고 있는 거 알아? 넌 아마 이 상태로 울프의 두 번째 테스트에도 통과하게 될 거야. 캡틴의 자격으로 전혀 손색이 없지. 그럼 그것으로 핀거야. 네 성격을 아니까 하는 말인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네가 캡틴의 자리를 거부하더라도 내가 캡틴이란 말은 하지마." 가급적 유쾌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옅게 묻어있는 슬픔은 감추지 못했다. 제이는 그를 위로해 줄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괜히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려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테스트란 건 뭐지? 아이린도 그 비슷한 말을 했었다." 카셀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 두 번째 테스트야. 넌 아마 통과할 거고, 울프 기사단의 테스트가 원래 그렇듯, 통과한 후에 그게 어떤 테스트인지 깨닫게 될 거야." "그럼 혹시 아이린이 말한 세 번째 테스트가 뭔지 아나?" "글쎄, 그건 모르겠다. 마스터 퀘이언의 세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면 하얀 늑대가 되는 거라고 보는데, 으음, 아이린의 세 번째 테스트란 건 뭘까? 나도 궁금한 걸. 두 사람은 같은 과정을 통해 하얀 늑대들이 되었지만, 은퇴한 후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어. 그래 서 아마 그 테스트의 의미는 전혀 다를 거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아도 네가 그 테스트를 통과할 자격이 된다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늑대의 테스트란 원래 그런 거야." "네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제이는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카셀은 무릎에 올려놓았던 책을 읽기 시작했고, 기분 좋게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머리 위에 쏟아지는 뜨겁지 않은 햇살이 몸을 적당하게 데워주었다. 잠들기 직전 제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제 내 약점은 어떻게 알았지? 다들 나와 시합을 할 때면 언제나 내 허리쪽을 보고 있어. 그리고 내가 공격할 때 거 길 공격해. 그걸 의식하고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넌 어제 만찬에서 한 번에 그걸 지적했어. 너 혹시 대단한 검술의 고수 아냐?" 거 기에 대답하는 카셀의 목소리도 들었지만,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아 그대로 잠든 척 했다. "아, 그건 쉐이든이 가르쳐 준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멍청한 놈, 모처럼 널 강하게 봐주는 녀석이 생겼는데, 그런 걸 굳이 말해줄 필요가 없잖나? "쉐이든이? 아, 그랬지."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 말해줬을 거야." “프란츠가 갑자기 실력이 좋아졌다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말했어. 그렇지만.......” "굳이 그런 걸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내게 감사할 필요도 없어, 네가 강한 건 너의 노력이지, 다른 사람 덕이 아니야." "그, 그렇지만.......” 그 가는 목소리를 내는 녀석은 분명 실디레일 것이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낼 것 같지 않던 그 애가 우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제이는 더욱 눈을 뜰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사실 반쯤은 잠에 빠져든 상태라 정신도 몽롱했다. 왜 훌쩍이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울프 기사단 중에서 제일 약해. 모두에게 거치적거리고 있어. 난 그냥 뽑힌 거야. 여왕 폐하께서 날 직접 지목해서 여기 오게 된 것이고, 2년 전에야 겨우 울프의 기사가 된 거야. 두 번째 테스트에서 남은 것도 사실 쉐이든의 도움이 없었다면 실패했을 거야. 운이 좋은 거야. 난 울프 기사단의 자격이 없어 난.......” 그 애는 울었고, 카셀은 아무 말도 없었다. 여자와 아이의 눈들은 제이에게 너무 강한 무기였다. 제이는 잠들어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번 눈물은 여자인데다 어린 아이이기까지 하니 모른 척 하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그랬구나. 실디레, 난 이제까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널 보고서야 알았어. 울프 기사단이 이렇게 강한 이유는 너에게 있던 거야. 대륙 어디에 가서도 최강이라는 이름을 들을 만한 네가, 아마도 그 나이에 그런 검술을 쓰면 괴물이라는 소러를 들으며 파묻혀 버리거나 되려 견제 당해 망가질 그런 재능을 가진 네가, 이 곳에서는 절대 특별해 보이지 않는 거다." 제이는 의식적으로 잠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마도 별로 소용도 없을 거라 생각하는, 카셀의 위로하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쉐이든의 일지에 이런 말이 써 있더군. 울프 기사단이 동시에 실력이 급상승한 계기가 너에게 있다고. 이토록 엄청난 재능을 가진 네가 어리다는 핑계를 대지 많고 죽을 힘을 다해 훈련을 하는데, 너보다 앞서 있는 다른 울프들이 어떻게 훈련을 게을리 하고 어떻게 방심할 수 있겠어? 전쟁이 없는 아란티아에 전쟁과도 같은 긴장감을 안겨준 건 너야. 그래도 모르겠니? 네가 울프 기사단 전원의 실력을 밀어 올리고 있는 거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훌쩍이기만 하던 실디레의 울음이 커졌다. 무의식 중에 실눈을 떠보니 실디레는 정말 어린애처럼 카셀에게 안겨 있었다. '자자! 얼른 자버리자.' 제이는 주문이라도 외우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로 눈을 감자, 거의 의식이 끊어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그건 참으로 다행이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잠깐 졸긴 했지만 그 사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해가 거의 졌고, 대기 상태라는 제한으로 훈련을 못 하던 울프들이 다시 목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옆 자리에서 푸티에르와 심각한 얼굴로 체스를 두고 있는 카셀이 있었고, 코엔은 옆에서 잡담으로 푸티에르를 훼방 놓고 있었다. 세 명의 기사들을 추위에 세워놓고 그들에게 뭔가를 얘기한 후 동시에 그 세 명의 검을 받아내는 훈련을 하는 실디fp도 멀지 많은 곳에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훈련이었다. 제이는 기지개를 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잠자리에 허리가 아팠다. "잘 잤나, 게으른 친구?" 말라 다음에 겨뤘던 기사가 허리를 툭 치며 말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갑자기 이름을 물으니 그 기사는 조금 황당한 표정이었다. “자이논이다. 이제 와서 건 왜 묻나?" “이제부터 조금씩 이름을 외워 나가야지, 오십 명이나 외우는 머리로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름을 외운다니 생각나서 묻는 건데, 카셀이라는 저 친구 어떻게 우리 이름을 다 알고 있는 지나? 아무도 저 녀석에게 자기 이름을 소개한 적이 없는데. 게다가 느닷없이 말라랑 바다 건너 섬의 역사를 묻질 않나, 나한테는 키우고 있는 동물이 뭐가고. 도대체 내 취미를 어떻게 알고 저러는 거지?” 제이는 뻐근한 어깨를 두들기며 중얼거렸다. "카셀 녀석, 유치한 편 끌어들이기를 하다니.......” 작은 목소리라 자이논은 알아듣지 못 했다. "뭐라고?" "카셀이라면 아마 너희들 검술 버릇까지 꿰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걸 걸 물었다고 네가 기분 나쁘기라도 했나?” "아니,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 나야 환영이지. 동물을 키워본 사람만 알겠지만, 그거 혼자보다는 여럿이 하는 게 좋거든. 정보 교환도 되고. 아아, 고향에서는 악어도 키워봤는데, 이 무식한 울프 놈들은 파충류만 보면 기겁을 한다니까.......” 제이는 입을 따악 벌렸다. "피가 차가운 동물은 질색이야. 그런 것도 내 버릴 거다." 동강낸다는 말에 자이논은 눈을 크게 떴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안 키워! 이런 젠장, 하늘산맥의 신기한 동 물들을 접하고 있는 이런 곳에서 고작 내가 염소나 키우고 있어야 하다니!" 자이논은 투덜거리며 허리에 손을 뻗었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녀석들 투성이였다. "그런데 다시 훈련을 시작해도 된다고 했냐?” 제이가 물었다. "우리끼리 정한 거다. 중요한 싸움이 곧 있을 거라는데, 그런 거라면 몸을 아끼기보다 오히려 진장된 근육을 풀어주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수를 세어보니 마흔 명은 되었다. "쉐이든은?" "듣기로 마법에 당한 상처가 잘 낫지 않아 요양 중이라더군. 만약 싸움이 있다면 쉐이든은 끼지 많을 거다." "그렇군, 그럼 나도 몸 좀 풀어볼 수 있을까?" 자이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흥미로운 눈빛으로 제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수상하여 제이는 자기 얼굴에 손을 했다. "뭘 봐?" "아니다. 내가 상대해 줄 데니 따라와라." 이틀 밖에 생활하지 않았으나, 이런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낮잠 자다 일어나 잡담하던 녀석을 붙잡고 시합을 해도 그 녀석은 강한 녀석이다. 몇 번 겨뤄보는 것만으로도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줄 정도의 실력자들이며, 지적당해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레벨이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이 괴상한 공간이 점점 마음에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이논에 이어 세 명 정도와 순서를 바꾸며 겨루기를 하며 지쳤을 무렵, 다른 기사가 다가왔다. 다른 이에 비해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 기사의 손에 목검이 들려있는 것을 보고, 제이는 손을 저었다. "더 겨루고 싶지 많아. 지쳤어." 전 같으면 지쳐서 기절해도 좋으니 싸우고 싶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참았다. 무엇보다 큰 적이 다가온다는 말을 듣고 나서 몸을 함부로 굴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제이의 마음속에 일어나기 시작한 큰 변화였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여 몸을 아끼고 있었다. "아, 나도 쉬려고 온 거다. 다른 젊은 녀석들에 비해 체력이 안 따라줘서." 그 기사도 손을 저으며 제이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좀.......” "늙어 보인다고? 그럴 수밖에. 난 십 년 전 전쟁때도 울프의 기사였으니까. 조만간 은퇴해야겠지." "흐음. 이름이 뭐야?" "이제부터 이름을 외워두기로 했나, 제이메르? 난 알렉스다.......” "알렉스...... 흐음. 외우기 쉬운 이름이군.....” 둘은 다리를 펴고 별 대화 없이 앉아 있었다. 제이는 문득 항상 보이던 카셀이 보이지 않아 고개를 분주하게 움직여가며 그를 찾았다. "누굴 찾는지는 알겠다. 그 녀석은 누구냐?” 갑자기 알렉스가 물었다. "내가 설명할 때 그 자리에 없었나? 내 친구고, 쉐이든의 친구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알렉스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물주머니를 제이에게 내주었다. 알렉스는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사람 특유의 지혜로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이가 물을 다 마시길 기다려 말을 이었다. "진짜 정체 말이다."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카셀의 정체를 숨겨주려고 노력할 생각도 없지만, 약속도 있고 하니 굳이 말해줄 생각도 없었다. "친구야! 그 이상은 별로 말할 게 없다."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뭘 생각하고 있는지, 웃었다. “그래, 아무렴 상관없겠지. 그보다 하루 종일 널 지켜보다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다." "하루 종일?" "말라와 싸우는 것도, 자이논과 싸우는 것도, 에릴, 코엔. 다 봤지. 특히 프란츠와의 대결은 인상 깊었어." "흐음, 그래서?" "아까 파발이 왔는데, 우리들의 적이 누구인지 파악되었다. 그래서 지금 다들 가벼운 긴장 상태로 적과 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패 많이들 안 보이지?갑옷을 입으러 간 거다. 그 동안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고서는 거의 입을 일이 없어서 먼지만 잔뜩 쌓여있을 테니 미리 입어서 길을 들이려는 친구들이 많을 거야 사실 나도 그렇고 하고 싶다. 오늘 아침에 골드를 통과했다면,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에 나디움에 쳐들어 올 것이다." "그 적이란 건 누구지?" 제이는 그 적이란 당연히 블랙과 슈벨, 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확실히 해두려고 물은 것이었지만, 알렉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약 백여 기 정도 되는 검은 기사의 무리다." "백여 기?" 제이는 깜짝 놀랐다. 알렉스는 계속 말했다. "해서 지금 아니면 나중에 말해줄 기회도 없을 것 같아 미리 말하는 거다. 말해줄 의무도 없고, 권리도 없긴 하지만 말이다. 넌 이미 울프 기사단의 두 번째 테스트에 통과했다." 제이는 당장 그 백여 기나 검은 기사들의 정체가 수상했지만, 데테트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빼앗겼다. "잠깐, 잠깐! 좀 이상하군." 제이는 이마를 짚으며 깊이 생각한 후 말을 이었다. "테스트에 통과하면 뭐가 테스트였는지 저절로 알게 될 거라더니 난 전혀 모르겠는데?" 알렉스는 재미있어 하며 말했다. "내가 테스트를 통과했을 당시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군. 맞아. 저절로 알게 되지만, 첫 번째 테스트처럼 강렬하게 그게 테스트였다는 걸 알게 되지도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좀 눈치 빠른 녀석들은 퀘이언이 두 번째 테스트가 끝났다는 선언을 하는 순간 뭔지 알게 되지만, 대부분은 그 다음날에야 알게 돼.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내 경우에는 아이린이 테스트 합격을 통보해 왔지. 하지만 뭔지 통 알수가 없었어. 내가? 내가 울프 기사단이 되었다고? 그럴 리가! 이런 생각들도 뜬 눈으로 밤을 보냈었다." "나도 마스터 아이린에게 테스트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건 좀...... 이상하군 가능하다면, 설명해주지 않겠나?" "해주지 않아도 내일쯤이면 알아 십 년이나 이 곳에서 생활하면 사나흘이면 누가 합격할 건지 눈에 보이지. 하지만 넌 이들 만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알렉스는 거기에서 말을 끊으려다 그냥 말했다. "하지만 시간도 없고 하니 설명해주지. 이 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게 바로 두 번째 테스트다. 이틀뿐이지만 생활하면서 뭘 느꼈지? 여기 살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았나? 더 많은 사람과 시합하고 싶고, 더 많은 친구들과 겨루고 싶다는 생각하지 않았나?" "그게 뭐가 테스트라는 거야?" 제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게 테스트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알렉스는 친절하게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말했다. "자, 첫 번째 테스트는 기본 실력을 보는 거다. 적어도 두 번째 테스트에 임할 정도의 수준이 되느냐를 보는 거지. 그리고 두 번째 테스트는 앞으로의 혹독한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느냐를 보는 거다. 즉 여기 있는 울프 기사들을 보고 부담을 느끼거나 배우고 싶다는 의지가 꺾이는 녀석들은 알아서 여길 달아난다. 그게 두 번째 테tm트다. 예를 들어보지. 내 경우에는 아이린이었다. 그리고 5년 전, 테스트에서는 로일이라는 친구가 두 번째 테스트의 핵심이었지." 로일의 이름은 카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얀 늑대들 중에서 도 일 대 일에 가장 능하다는 기사. "대부분 그를 보고 스스로 재능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돼. 실디레라는 아이를 봤지? 그 애는 정말 천재다. 그러나 로일 만큼은 아니라고 본다. 과연 열네 살인 그 애가 스무 살이 된다 해도, 내가 처음 봤을 때의 로일 정도의 실력을 가질까? 회의적이야. 다들 그런 로일을 보고 경악했고, 많이들 포기했지. 그러나 그를 보고도 포기하지 않게 되면 울프의 기사가 될 자격을 갖추게 되는 거야. 발전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알렉스는 열심히 설명했지만, 확 와 닿는 설명은 아니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군." 납득하지 못하는 제이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정상이야 그래서 내가합격이라고 말하는 게 좀 이르다고 한 거야. 너에게 있어 두 번째 테스트를 계속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였어. 다들 그렇게 생각해.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외부에서 온 녀석 중에 이 정도로 싸울 수 있는 녀석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알렉스는 그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러에서 비상을 알리는 붉은 깃발을 든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많은 울프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쪽을 보았다. 알렉스는 그 쪽 방향을 보면서도, 하려던 말을 계속 했다. "그래서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제이메르. 넌 우리들의 캡틴이 아니야." 제이도 깃발을 든 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캡틴이라고 말한 적 없어."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캡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하지만 오늘 너와의 시합을 겪으며, 또 너의 실력에 감탄하며, 동시에 캡틴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다."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알렉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네가 이대로 훈련을 쌓으면 훌륭한 울프의 기사가 되는 건 물론이고 조만간 하얀 늑대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게 될 거라고 본다. 아니, 진짜 하얀 늑대가 될 지도 모르지. 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순간 넌 캡틴 감이 아니야. 왜냐하면 그런 걸로 캡틴이 뽑힐 거였으면 이미 우리는 캡틴 감을 다섯 명이나 가지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굳이 외부에서 캡틴이 왔을 리가 없잖나?" 제이는 그 추리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어설픈 거짓말이 모조리 들통났다는 건 알아차렸다. "머리 좋군. 그래서 어쩌라고?" "뭐, 특별히 너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널 좋은 동료로 생각하고 있어. 단지 네가 캡틴이 아니라면 그 다른 한 명인, 음…….” 그는 말을 꺼내길 주저했다. 그 사이 끓은 깃발을 틀고 있는 기사가 훈련장에 도달했다.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기사는 화이트 울프를 지키는 경비병이었다. 듣자니 나디움의 경비병들은 레드 게이트의 경비병들처럼 울프 기사단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기사들 중에서 선별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경비병이 큰 소리로 말했다. "차칭해서 이번에 나디움을 쳐들어올 기사단의 대변인이라는 자가 나타났다. 막무가내로 여기까지 온다기에...... 그, 그냥 데려와 버렸어." 경비병은 조금 겁에 질런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니 경비병의 뒤에서 말을 탄 기수 하나가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자이논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아, 잘 했어. 그런데 웃기네, 쳐들어올 거라는 녀석들의 대변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반가운 얼굴 아닌가?" 경비병은 조금 변명하듯 대꾸했다. "나도 그래서 그냥 데려와 버린 거야.” 제이도 그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알렉스도 제이에게 하려던 말도 잊어버리고 놀란 목소리를 냈다. "저 친구, 슈벨 아냐?" 슈벨은 말에서 훌적 뛰어내려 훈련장으로 걸어왔다. 그가 몰고 온 검은 털의 말은 고삐를 잡아당기지도 않았는데, 슈벨이 앞서가는 길을 조용히 쫓아왔다. 울프들은 오랜 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워하는 얼굴이었으나, 그 검은 말이 내는 수상한 분위기에 대놓고 인사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슈벨 역시 다른 울프들은 제대로 보지 않고 제이에게 다가갔다. "잘도 이런 곳에서 유유자적하고 있군, 제이메르.” 제이도 그의 접근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찌른 그 녀석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고 왔나?” 머리라도 들이 받을 듯 서로 가까워줬으나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슈벨이 말했다. "내가 전에 말했지. 네 놈은 내가 죽일 거라고.” "언제? 기억도 안 나." 슈벨은 한 걸음 물러나며, 주위에 몰려 있는 울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잘 지냈나? 오랜 만인데, 인사는 안 해 줄 건가?”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할 때, 프란츠가 나섰다. "네가 가지고 온 소식이 하도 충격적이라 인사할 처지가 못 되는군. 하지만 우선은 환영한다. 모두를 대표해서." "네가 대표야? 하긴 그 때 날 그 정도로 몰아붙일 정도였으면 하얀 늑대는 못 하더라도 울프 기사단 대표 정도는 되어야지." "말에 가시가 돋쳤군." 프란츠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우선 네가 개인적인 신분으로 여길 온 것 같지 않으니 묻겠는데, 왜 여길 쳐들어오겠다는 거지? 지금 여길 향하고 있는 검은 기사들과 너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건지도 말해주면 고맙겠군." "공식적으로는 여길 향하는 기사단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이긴 하지만, 실은 개인적인 신분으로 온 거다. 조만간 나디움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군대가 올 거다. 그 때 그들이 원하는 조건은 단 하나다. 아란티아의 여왕을 내보내라. 그 외에 다른 조건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디움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그 말을 하면서도 그게 얼마나 모순된 말인지는 알 거다. 아란티아의 여왕은 단순히 이 나라가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폐하께서 계시기에 이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거부하겠다." "그런 대답이 있을 줄 알았다. 협상의 여지도 없겠지? 그럼 나 역시 그 이상 해줄 말은 없다." “한 때 울프 기사단에 임했던 너다. 그럼 내 대답을 알면서도 굳이 그 말을 하려고, 여길 찾은 건 아니겠지. 여길 온 건 두 번째 이유 때문인가? 말해봐라, 슈벨 레프만." 슈벨은 웃었다. "그렇게 청산유수로 말해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그는 천천히 검을 꺼냈다. 다들 시합 중이라 목검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태에서 도발을 일으키는 건 슈벨에게 위험한 짓이었다. "난 두 번째 테스트의 합격을 스스로 던져버렸다. 아마 프란츠 너라면 알겠지. 때로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때로 그런 나를 몰아세우기도 하면서 여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확신이 없었지......... 그걸 확인하려 한다." 슈벨의 칼 끝이 모두의 얼굴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누구든 좋다. 덤벼라. 울프 기사단 테스트의 불합격자가 합격자를 상대로 정식으로 시합을 요청한다." 다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울프 기사단 중 제일 병치 큰 기사인 브나타이돌이 앞으로 나섰다. "슈벨, 네가 적으로 온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 하지만 원하는 게 정식 시합이라면 피할 것도 없지. 내가 상대해주했다." "아, 브나타이돌. 그 사이 꽤 덩치가 커졌군. 아직도 성장기냐?" "성장한 건 키와 몸무게만은 아니지. 기다려라. 내 무기를 가지고 돌아오마." “얼마든지.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너희들이 서로의 사정을 봐주고 급소를 피해가며 치는 바보 같은 시합이 아니다. 목숨을 걸어라. 그렇지 못할 놈은 내 앞에 나설 자격도 없다. 다른 녀석들도 가서 무기를 가·지고 와라. 브나타이돌이 죽으면 그 다음 녀석을 바로 상대해주겠다." 슈벨은 검을 들고 큰 소러로 외쳤다. 그러자 자이논이 외쳤다. "무리한 짓 마라. 그런 식으로 계속 싸울 셈이냐? 여기 있는 마흔 명이랑 전부? 웃기지 마라. 하얀 늑대들도 다섯 이상은 버티지 못한다." “알아. 그럼 만약 내가 살아남으면 하얀 늑대를 능가하는 검술을 얻었다는 거겠지." 슈벨은 비아냥대며 말했다. "두 번째 테스트도 통과하지 못한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라도 있을 것 같으냐?” “바로 그거다. 언제나 발 괴롭혀 왔지! 그 빌어먹을 놈의 테스트. 나는 통과한 거야. 그러니 그 따위 거지같은 테스트에 얽매이고 살 바에야 여기서 죽는 게 나아." 제이의 옆에 있던 알렉스가 갑자기 소리질렀다. “슈벨, 이 멍청한 녀석 !난 널 그리리 보지 않았다. 날 지금까지 수 없이 많은 울프의 기사들을 접했고, 너는 보자마자 테스트에 합격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엉뚱한 이유로 그만 두었지!" “그 이유란 걸 이 자리에서 말하면 너부터 베어버리겠다, 알렉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그 말을 하는 슈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 없다. 여길 나가는 바로 전날 난 널 오랫동안 설득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난 네가 여기서 그만 둔다 하더라도 언제고 돌아와 다시 테스트를 요청할 거라고 믿었다. 그 정도 그릇은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칼을 접어라. 넌 아직도 5년 전의 밝은 눈을 가겼다. 그런 눈으로 악당인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알렉스의 말에 슈벨은 잠깐 눈만 깜박이며 서 있었다. 마흔 명의 기사들 들에서 슈벨은 긴 침묵을 깨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동안 스스로 최강의 기사라는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나? 까불지 마라. 너희들도 결국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썩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해. 조만간 너희들은 너희보다 강한 힘을 접하게 되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들의 힘이란 게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얼마나 안이한 사고방식이 낳은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여자처럼 매력적인 긴 눈썹 안의 푸른 눈동자가 모두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알렉스는 마지막까지 설득해 보려고 손을 내밀었으나, 슈벨이 내민 칼 앞에 물러서야 했다 "테스트? 좋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너희들을 테스트 해 주겠다. 나디움이 멸망한 다음에도 그 잘난 테스트란 걸 나한데 할 수 있나 보자!"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은 더 이상 옛 친구에 대한 반가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이, 슈벨. 울프의 기사들을 상대하기 전에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서 제이가 나싫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르고의 검을 뽑았다. "너와의 승부도 중요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울프의 기사다." 슈벨이 말했다. "정식은 아니지만 나도 방금 두 번째 테스트에 통과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간접적이긴 하지만, 아마 여기 있는 누구도 그 말에 거부할 사람은 없을 거다. 겨우 이틀뿐이긴 하지만, 나도 여기 방식을 좀 알게 되어서 하는 말인데, 이 친구들이 그냥 인정해버리면 마스터 퀘이언이고 여왕이고 왕실의 대신들이고 별로 상관없이 인정되는 것 같던데....... 결국 마찬가지 아냐? 나 역시 네 앞에 울프의 기사로서 설 수 있다." 제이는 버릇처럼 긴 말을 내뱉은 다음에 자기 말이 앞뒤가 맞는지 곰곰이 씹어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가 상대해도 되지. 마침 내게는 가지러 갔다 올 필요 없이 점도 있겠다, 너와 겨룰 명분도 있겠다, 울프의 기사라는 조건도 되겠다....... 부족할 게 없지? 안 그래?" 슈벨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 없군. 그래. 첫 번째 희생자는 너로 하겠다." 제이는 다친 쪽 어깨를 획획 돌려 보았다. 아직도 약간 고통이 남아있었으나, 움직임에 무리는 없었다. 두 사람이 싸울 준비를 갖추는 동안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뒤로 물러났다. 다들 슈벨의 발이 얼마나 빠른지 알고 있기에 활동 반경을 넓혀주는 것이었다. 제이는 가벼운 흥분 상태로 검을 치켜들었다. 이 곳 기사들을 상대로 시험해본 여러 가지 기술들과 새로 얻은 검을 어서 써보고 싶었었다. 이런 조건에서 한 번은 고전했던 적을 상대로 싸운다는 건 굉장한 설레는 일이었다. "제이메르, 넌 슈벨과 싸울 조건이 안 된다. 물러나라." 아무도 말리지 않는 싸움의 중앙에 칼 한 자루 들지 않고 한 명이 서서히 걸어 들어왔다. 시합이라는 명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슈벨은 명백히 침략자였다. 그런 적을 상대로 무방비 상태로 설 수 있는 멍청한 것을 할 울프의 기사는 없었다. 다들 갑자기 난입한 그 사람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됐다. 카셀이었다. "슈벨, 당신도 싸울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검은 접었으나, 구겨진 인상에는 살기가 가득한 슈벨이었다. 제이가 보기에 그는 이미 카셀을 검의 간격 한 걸음 안에 두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뛰어가면 막기도 힘든 거리였다. 그러나 카셀은 슈벨이 자기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는지 제이 족으로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사방에 싸울 상대로 가득하다. 너만 빼면! 네가 속임수는 이제 신물이 난다. 물러서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 슈벨은 소리질렀다. "슈벨, 네가 여기에서 설사 두어 명을 벤다 해도 네가 가지고 있는 의문은 해결되지 않아." "뭐라고?" "배롤과 싸워봤다면 알지 않아? 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알 수 있다. 네가 잠깐 안본 이들 남짓한 시간 동안에 무지막지한 힘을 얻지 않은 이상에야 한 명이라도 제대로 쓰러뜨릴 수 있겠나? 아니, 난 검술은 모른다. 네가 어쩌면 여기 있는 기사들보다 강할지 모른다. 그래도 두 명? 세 명? 그 이상을 꺾을 수 있나? 그 다음은 어쩔래? 그 정도로 과거에 같이 테스트에 임했던 동료들을 꺾으면, 네 지난 5년간을 보상 받으며 기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검도 모르는 놈에게 그 따위 설교는 듣고 싶지 않아!" 슈벨은 당장 검을 휘두를 듯 소리 질렸다. 그러나 카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제이처럼 검의 간격을 볼 줄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살기를 감지할 줄 아는 울프의 기사들이 긴장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제이는 카셀이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대가 아니었다면 당장 뛰쳐나갔을 것이다. 방금 슈벨은 카셀에게 거의 반걸음 가까이 접근했었다. 그런데도 베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각오하고 들어온 자리에서 무방비인 카셀을 헤치는 못할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카셀은 슈벨의 기사로서의 각오를 더럽히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슈벨의 분노가 더욱 커졌다. "설교는 내가 하지 않는다." 카셀은 주위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울프의 기사들을 돌아보더니 한 명을 가리켰다. "실디레, 지금 칼을 들고 없지? 가지고 나와라." 놀란 건 실디레 한 명만이 아니었다. 슈벨도 어처구니 없어하며 말했다. "뭐 하자는 거야?" 실디레는 시키는 대로 나와 카셀의 옆에 섰다. 카셀은 실디레의 어깨를 잡았다. "잘 봐라, 슈벨 레프만. 여기 두 번째 테스트를 통과하여 울프의 성을 가진 기사가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 배롤이 미처 가르쳐주지 못한 두 번째 테스트의 의미를 가르쳐 줄 것이다. 설교라고 했나? 그런 것도 좋지. 대신 울프의 성을 갖지 못한 슈벨 레프만에게 설교 해 줄 사람은 울프의 성을 가진 실디레다." "어린애와 싸우라는 거냐? 그것도 여자 아이를?" 슈벨은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카셀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자' 때문 아니었나? 네가 여자를 함부로 볼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슈벨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고, 울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셀은 손을 활짝 펼쳐 기사들 모두를 가리켰다. "내가 아직도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 그럼 여기 있는 울프의 기사들을 봐라. 여자인 데다 열네 살밖에 안 되는 실디레가, 울프 기사단에 도전하러 왔다는 간 큰 녀석을 상대한다고 해도 아무도 동요하지 않아!" 슈벨은 그제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제이도 흘러가는 상황이 하도 재미있어 잠시 멍청히 있었고, 울프들도 카셀과 슈벨의 말싸움에 신경 쓰느라 정작 자기들이 어떤 반응을 남들에게 보이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제이 역시 실디레를 지목한 것은 의외였으나, 실디레와 슈벨의 싸움을 두고 어느 한족의 우위를 점치지 않았었다. "방심하지 마라, 슈벨. 넌 이 '기사'의 검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말이다, 슈벨. 넌 나와 며칠을 같이 보내 놓고도 내 성격을 아직 모르겠나? 질 것 같은 싸움이었으면, 얘처럼 장래에 멋진 레이디가 될 소녀를 거친 싸움터에 내보낼 것 같아?" 카셀은 씨익 웃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 저럴 때 웃는 카셀의 미소는 정말 사악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제이는 끼어들지 않았다. 카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실디레를 슈벨 앞에 내버려 둔 채 물러났다. "어이, 그 말 진심이야? 너도 알겠지만, 슈벨 저 녀석 강하다." 제이가 말했고, 프란츠가 거들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실디레를 내보낸 건지는 모르지만 난 반대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서 개입하지 못 했지만, 대체 네가 무슨 권리로 실디레를 내보낸 거냐?" 카셀은 굳은 표정으로 검을 꺼내 서로를 겨냥하는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검술을 못 한다고 하니, 싸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자기에게 부탁하라고 했소." 그건 아마도 자고 있는 동안 주고받은 이야기인가 보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프란츠는 놀랐다. "네가 검을 못 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실디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저 애가?" 슈벨과 실디레의 검이 부딪혔다. 또래에 비해서는 비교할 사람 없이 큰 키지만, 다른 기사들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하는 실디레였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검은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아주 길었다. "실디레가 그 상대라면 별로 창피할 것도 없는 일 아니오?" 카셀이 되려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실디레는 말을 함부로 하는 아이가 아니다. 나나 쉐이든 정도하고만....... 젠장." 제이가 보기에도 프란츠는 패나 복잡한 심경인 것 같았다. 카셀은 턱을 금적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란츠는 팔짱을 끼고 카셀을 힐끗 곁눈질로만 바라보았다. 카셀은 조용한 시선으로 슈벨과 실디레의 격돌을 바라보았다. 제이도 목숨을 건 시합에 신경을 집중했다. 평지에서 움직이는 슈벨의 움직임은 정말 빨랐다. 지금까지는 자갈밭이나 진흙 밭에서 싸했으므로 그의 진짜 스피드를 보지 못했기에, 아마 제이가 직접 싸웠다면 지금의 이 움직임에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실디레는 굉장히 침착하게 그 속도를 잘 따라 잡았다. 때문에 되려 당황하는 사람은 슈벨이었다. "게다가 슈벨도 네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고, 사람을 한 사람 지목해서 앞에 내세우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더군. 둘 사이에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아무래도 나 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일을 넌 말하지 않은 것 같다. " 프란츠가 말했다. “그게 나에 관한 일이라면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이 시합에 집중하고 싶군.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만에 하나 실디레가 패해서 다치거나 죽으면 난 날 용서하지 못할 거다." 카셀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슈벨의 검이 실디레의 허벅지를 베었다. 침착한 척 팔짱을 끼고 있던 카셀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실디레는 당황하지 않고 물러나 잠깐 상처에 손을 했다. 손바닥에 선홍색 피가 묻어 나왔으나, 그녀는 칼을 다시 잡고 싸움을 이어나 갔다. “그럼 왜 실디레를 내보냈나? 만약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었다면 나를 내보내거나, 제이메르였어도 좋았지, 굳이 왜?"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결국은 갈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괴로워하는 카셀을 보고 프란츠가 말했다. "쉐이든이 적은 일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실디레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어떤 상대를 만나도 전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처음만나 처음 가진 시합에서는 오십 명 중에서 열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실디레를 이기지 못 했어. 하얀 늑대들 다 섯 명을 제외하면 첫 상대하는 실디레를 이긴 울프는 다섯 명뿐이란 계산이지." 카셀은 정말로 만의 하나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제이는 이미 검의 간격을 보며 이 승부의 끝을 볼 수 있었다. 카셀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즉, 처음 접하는 상대와의 싸움에서 승률은 실디레가 제일 높아. 너희들은 실디레와 몇 번 싸워 본 후, 경험이 부족한 저 아이의 약점을 공격해서 이기는 거지. 하지만 슈벨은 실디레의 약점을 모른다." 프란츠의 눈동자가 커졌다. 카셀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난 하얀 늑대를 제외하고 슈벨이 가장 싸우기 껄끄러운 상대를 내세운 거야." 계속 간격을 좁혀가던 실디레는 마지막 한 걸음으로 슈벨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 슈벨은 그 순간 빠르게 칼을 내질렸으나, 실디레의 목덜미를 살짝 비껴갔다. 그리고 뒤이어 실디레의 검이 슈벨의 옆구리에서 어깨까지 한 번에 긁고 올라갔다. 슈벨의 몸이 뒤로 한 번 들렸다가 울프의 기사들이 있는 곳까지 나가 떨어줬다. 실디레도 마지막 순간에 슈벨이 내민 칼에 균형을 잃었는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카셀은 화살처럼 튕겨나가며 넘어진 실디레를 향해 달려갔다. "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지?" 프란츠의 눈은 재미있을 만큼 크게 떠져 있었다. "제 입으로 말했잖아. 쉐이든의 일지를 봤다고." 제이가 당연하다는 듯 설명해주었다. "그런 건 본다고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프란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이는 콧김을 푹 내뱉으며 쓰러진 슈벨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직 의식이 살아있었다. 희미하게 뜬 눈으로 주위의 울프들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열네 살짜리 꼬마 애에게 지다니! 후후, 그래, 내가 재능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군. 두 번제 테스트를 통과 못하는 게 당연하지."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제이는 그만 한심하여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멍청한 녀석, 바로 그 점 때문에 네가 두 번째 테스트에 떨어진 거다. 이 둔한 나도 카셀이 왜 실디레를 내세웠는지 알겠다.” 제이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켰다. 옆에서 브나타이돌이 부축을 도왔다. 슈벨은 고통에 신음하느라 부축을 거절하지도 못 했다. 제이가 말했다. "평소에 스스로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믿는 녀석들만 잔뜩 모인 곳에서 자신이 최고가 되지 못한다는 것에 소외를 받는 녀석을 떨구는 게 두 번째 테스트다. 나도 이제야 좀 알겠군. 그리고 남는 녀석들만이 자기 재능을 뛰어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제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셀은 품에서 붕대를 꺼내 싸움 중간에 다친 실디레의 다리를 감싸주고 있었다. 실디레는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다리를 맡겨두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갑게 둘을 대하던 아이였다. "너도 남았다면....... 네 재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올라갈 생각을 했다면, 여기 있는 다른 녀석들과.......” 제이는 뭔가 멋지게 설명하려다 실패한 후 고개를 저었다. "에이, 이런 건 잘 못 하겠다. 그만 하자." 슈벨은 걸음을 멈추었다. 푹 숙인 그의 얼굴 밑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지금.... 넌 내게...... 내 지난 5년간이 쓸모 없다고 말하는 거냐? 내........ 내 선택이 틀렸다고?" 제이는 우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브나타이돌이 말을 해주었다. "그래, 잘못 선택한 거다. 그것 때문에 그 동안 네가 괴로웠다면 그냥 인정해 버려라. 하지만 네 지난 5년이 쓸모없지는 않을 거다. 넌 우리가 갖지 못한 경험을 가졌을 것이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시작해라. 넌 훌륭한 울프의 기사가 될 것이다." 자기가 하지 못한 말을 서슴지 않고 줄줄 읊은 브나타이돌이 존경스러워 제이는 잠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슈벨은 그만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다리에 힘을 잃은 그를 더 이상 부축할 수 없어 그냥 놓아주었다. 출혈이 많아 위험한 데도 그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제이메르." 마침내 눈물을 훔치며 슈벨이 말했다. "뭐냐?" "카셀에게 전해줄 말이 있다.” "말해." "블랙은 지금 과거의 골드 게이트 앞에서 죽었던 익셀런 기사단을 부활시켰다. 지금 달려오는 검은 기사단의 정체는 바로 익셀런이다.” 브나타이돌은 입을 딱 벌렸다. "괜한 허풍을 떠는 게 아니다. 죽음에서 일어난 그들의 힘은 정말로 막강하다. 울프 기사단으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블랙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진군하는 의미를 깨닫는 이가 저 쪽에 없다면 나디움이란 도시는 내일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나도, 빌리도 그 의미를 모른다. 바로 옆에 있는 우리조차 모르는 그 의미를 이 곳에서 아는 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딱 한 사람, 그 의미를 안다면 그건 카셀이라고 생각했다.” 슈벨이 강조해주지 않아도, 그 블랙이 말했다면 그건 허풍이 아닐 것이다. 제이는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그래, 전해주겠다. 너는 상처나 치료해라.” 슈벨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너무 피를 많이 흘린 상태에서 말이 많았다. 브나티이돌은 잠깐 가슴을 짚어보너디 말했다. “걱정 마, 기절한 것뿐이야. 여왕의 힘을 보살피는 곳에서 이런 상처로는 죽지 않아.” “걱정 안 해.” 제이는 어깨를 돌려보고는 말했다. 이제 어깨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칼이 부르는 소리 "적이 ...... 캡틴 웰치라고?" 누구도 그 말을 믿지 못 했다. 놀라야 할 부분에서 놀라지 않는 이 무덤덤한 울프의 기사들도 동요했다. 제이가 슈벨의 말을 지나치게 가감 없이 말해버린 탓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고 알아야 한다면 지금 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카셀은 실디레의 다리에 붕대를 묶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벨이 말한 건 거짓이 아닙니다. 어제 마스터 아이린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일 이 곳을 공격해올 죽음에서 되살아난 자란, 한 때 웰치의 이름을 가졌던 자입니다." "그럼 어제 왜 구체적으로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 이것저것 그녀의 고향에 대해 얘기하며 지금은 많이 친해진 말라가 물었다. “마스터 아이린도, 저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때만 해도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 자는 골드 게이트를 무너뜨릴 만한 병력을 가지고 있지 많았었기에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카셀의 설명에 말라는 씁씁히 말했다. “그리고 지금 오고 있는 군대는 과거 우리 선배들이 쓰러 뜨렸던 익셀런 기사단이고?" "물론 그 힘은 십 년 전 골드 게이트를 공격했던 기사단에 비할바가 아닐 겁니다." 카셀이 덧붙였다. "우리도 그 때보다는 숫자가 늘었다." 십 년 전에도 울프의 기사였던 알렉스가 말했다. "또 그 때보다 지금 울프의 기사들 레벨이 결코 떨어지지 않아." "실력이야 어찌 되었건 그들은 불사의 험을 가졌습니다. 저는 이미 죽음에서 그들이 살아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습니다. 아마 카모르트에서 본 그 괴물들과는 다르겠지만, 같은 힘을 쓸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프란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거 이상하군. 어제부터 계속 걸렸는데, 어째서 넌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어제 여왕 폐하도 따로 만났다고 들었다. 제이메르가 아닌 너를! 새로 온 둘 중 한 사람이 울프의 캡틴이 된다고 우리들은 어제부터 계속 들떠 있었다. 허나 검도 쓰지 못하는 자가 캡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상황이 자꾸 너를 캡틴으로 몰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카셀과 잠깐 눈이 마주친 제이는 그냥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카셀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런 식으로 캡틴임이 밝혀진다면 여태껏 조심해오며 서서히 그들을 설득한다는 계산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얼버무리고 싶지는 많지만, 그 문제는 당장 오늘 밤에라도 쳐들어올지 모를 검은 기사들을 물리치고 난 다음에 의논하고 싶습니다." "얼버무리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말해라. 그게 그리 어렵나?" 프란츠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그의 얼굴에 대고 내가 캡틴이니 내 말을 들어라 라고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럴때가 아니었다. "그만해 둬, 프란츠. 카셀의 말이 맞아.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잖아. 놈들이 여왕 폐하를 노린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 맞아 싸울 준비를 하는 게 순서야. 애초에 우리에게는 캡틴이 없었어. 그러니 이번 싸움에도 캡틴이 꼭 필요한 건 아니야. 카셀을 몰아세워 내쫓겠다는 거야, 아니면 억지로 캡틴을 시키겠다는 거야? 입장을 분명히 해." 실디레가 굉장히 과격하게 일어나 프란츠의 가슴을 검지로 찌르며 말했다. 그것은 생각지도 않은 도움이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준 건 이런 식으로 보답을 받을 목적이 있었거나 아니면 한 사람씩 자기편으로 만들겠다는 얄팍한 수단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돕고 싶었고, 그냥 조언을 들어주고 싶었다. 울프 기사단의 자격이 없다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캡틴의 자격이 없다며 자책하는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여 도움을 준 것뿐이었다. "아,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울 건 없고....... 저, 그냥 내가 아는 정보를 주고 싶은 게 다야.” 카셀은 실디레를 진정시켰다. 실디레는 화난 얼굴로 계속 프란츠를 쏘아보며 물러섰다. 프란츠는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런 런 쉐이든의 노트에도 쓰여 있지도 않았고 두 사람을 오래두고 관찰하지도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실디레는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쉐이든과 프란츠를 잘 따랐다 프란츠도 아마 그녀를 여동생이나 조카처럼 친하게 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그런 아이가 어제 느닷없이 나타난 녀석 편을 들며 자기에게 삿대질을 하는 것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왠지 방금 받은 도움이 화살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을 것 같아 카셀은 불안했다. "자, 프란츠. 그러고 모두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누구냐가 아니오. 그러니 내 말을 들어주시오. 여러분들은 오늘 밤부터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에 대비해주시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아침 해가 밝기 전에는 공격해오rl 않을 것이니, 기습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될 것이오. 싸움은 내일, 아마도 아침에 있을 거요.” 푸티에르가 손을 들고 말했다. “모르나 본데, 화이트 게이트는 방어를 할만한 공간이 없다. 그러니 밤에 허들어온다면 완전히 무방비가 될 도시를 왜 그들이 아침까지 기다려 공격하겠나? 내가 적군이라면 당연히 밤을 노려! 체스로 치면 알아도 막지 못할 여섯 수 앞의 공격이지.” 그 의 말에 카셀과 코엔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심각한 와중에 왜 모두 사람이 웃는지 나머지는 얼떨떨해 했다. 카셀은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지 않도록 즉시 말을 꺼냈다. "죽음에서 돌아왔다고는 하나, 그들은 익셀런의 기사도를 가진 자요. 적어도 내가본 블랙, 그러니까 웰치는 그랬소. 민간인을 공격하려고 밤에 오지는 않을 거요.” “그럴 듯 하군. 좀 불안하긴 하지만." 푸티에르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들이 왜 이 곳을 오느냐 하는 거요. 나는 그가 골드 게이트에서의 패배를 만회하려고 되살아났다고 생각했소. 그러나 파발에 따르면 골드 게이트는 몇 명의 부상자가 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소. 그렇다면 블랙의 진짜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거요. 슈벨이 말해주긴 했지만, 나 역시 그들의 진군이 갖는 의미를 모르겠소." 처음, 방에 있던 카셀을 퀘이언의 사무실로 안내해주었던 에릴이 물었다. "그럼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언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자격은 없습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견을 길게 나누는 모습에서 카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타냐가 다가와 있었다. "여러분들의 판단에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도 제 조언이 여러분들에게 닿길 바라십니다." 아침에 도서관에서 헤어진 이후 내내 보이지 않았는데, 잠도 한숨 안 봤는지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셀도 두 시간 정도 잠깐 졸았던 젓 빼고는 잠을 안 자고 있어 조금 피로했다 타냐는 목에 건 구슬을 들고 말했다. "지금 이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건 검은 기사들의 무리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왜 이 곳을 향해 오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요? 저 역시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좋은 목적으로 오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검은 기사의 무리에 섞여 다가오는 건 죽지 않는 자들을 지배하는 군주! 그 불사의 기사단은 바로 그 자를 이 곳으로 안내하고 있는 역할을 하는 꼭두각시일지도 모릅니다." 구슬이 파랗게 빛을 냈다. 구슬 안에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블랙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며칠 전 그녀가 보았던 모습을 형상화 시킨 영상인 듯 했다. “마스터 퀘이언과 아이린의 전언입니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조건으로 접근하는 무리는 화이트 게이트를 통과시키지 마라. 이는 나의 조언이기도 합니다." 그 단순한 명제에 프란츠는 손을 털고 일어나 말했다. "깊이 생각할 건 없었군. 카셀, 하나만 묻지. 카모르트에서 그 죽지 않는 놈들을 어떻게 죽였었지?" “그들을 살려낸 자를 죽였소." 그들은 그것을 해압으로 보았다. 하나 둘씩 갑옷을 입으러 간다, 무기를 가지러 간다 하며 흩어졌다. 더러는 간단한 전투 포메이션을 연습하기 위해 어둑어둑해진 훈련장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 들은 여태까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왔던 것처럼, 지금도 스스로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셀의 주위에 남아있는 사람은 제이메르와 타냐, 실디레 뿐이었다. “나도 갑옷을 가지러 가야겠어. 아, 그리고 아까는 고마웠어." 실디레가 말했다. "아니야. 내가 고마웠어." 실디레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자기가 웃었다는 것에 어색해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타냐가 말했다. "귀여운 아이군요." 제이가 말했다. “휘두르는 검을 보면 절대 그 말 안 나올 걸." 카셀은 두 사람의 의견 모두에 동의했다. 벌써 다섯 잔 째 차를 마시며, 카셀은 책장을 넘쳤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마당에 도서관에는 카셀 밖에 없었다. 사서도 없어 문이 닫혀 있는 것을, 그나마 쉐이든의 권한으로 열쇠를 얻어올 수 있었다. 쉐이든은 이 와중에 책을 보러 온 카셀이 이상한 거라고 구박이었다. 그는 여전히 부상 치료에 전념했는데,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마치 커다란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것 같았다 카셀을 도시관에 버려두고 돌아서는 그의 등에 얹혀진 짐이 굉장히 무거워 보였다. "어디 가, 쉐이든?" “르고에게. 곧 내 창이 완성될 거다. 그 옆에 있고 싶다. 그런데 왜?" 할 말이 있는 걸 눈치챈 쉐이든이 물었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게 네 눈에는 보이나? 다들 내가 이러고 있으니까 한가해 보인다고 하던데.” "내 눈에는 네가 부상을 치료한다거나 쉬는 걸로 보이는 게 아니라, 되려 자신을 뭐랄까, 몰아세우는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 보여." 쉐이든은 빙그레 웃었다. "다섯 명이 나눠 가졌던 책임을 혼자 감당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군. 전에는 내가 아니더라도 네 명이 또 있었으니까 괜찮다는 생각을 했거든. 아마 나머지 녀석들도 그런 생각으로 서로에게 책임감을 떠넘기고 살았었나 보다." 카셀은 웃으며 닿지도 않는 쉐이든을 끌어당겨 어깨동무를 했다. 이건 아즈윈이 자주 하던 짓이었다. "너만 그렇게 생각해, 쉐이든. 서로를 의지한 게 아니라 너에게 의지한 거야. 로일도, 아즈윈도, 게랄드도, 던멜도! 네가 하얀 늑대들의 큰 형님이니까. 하지만 이제 캡틴은 나야. 그런 책임감의 일부는 내게 나누어줘도 좋아." 카셀은 그를 놓아주었고, 쉐이든은 가슴을 주먹으로 탁 쳤다. "알아. 그러니까 내가 다른 일을 모두 너에게 떠넘기고 다음에 있을 전투에만 온 정신을 쏟을 수 있는 거잖아. 명령을 기다리고 있했다, 캡틴." 쉐이든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팔자 좋게 잠을 자고 있을 수는 없없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지 못 했다. 그러나 어제 도서관에서 책을 훑어볼 때도 그랬고 슈벨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랬고 해답은 책 속에 있을 것 같았다. 소문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에 충실한 사료들이, 죽음에서 살아난 익셀런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려고 다시 차를 한 잔 가지려고 일어설때,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옆에 도착했다.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타냐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이제 많이 익숙해져 미묘한 변화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배려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깨닫지 못한 순간에도 그녀의 배려가 계속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지금의 차 한 잔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타냐는 그의 앞에 않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게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책 속에 모든 진리가 있는 건 아니다........ 마스터께서 하신 말씀이시죠." "책은 과거의 죽은 기록이다. 그러니 열심히 읽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시죠." "미묘하게 앞뒤가 어긋난 말이군요." "제 아버지는 존재 자체로 미묘하게 어긋난 분이에요." "가끔 카셀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요." "그렇지 만도 않아요. 아버지의 책에 대한 명언 하나 더 들어래요?" "해보세요." "밀 판 돈으로 책 사면 뒈진다." "아, 그거 정말........ 생활이 묻어 나오는 명언이군요.” "안 지키면 실현되는 예언이기도 하죠." 카셀은 차를 한 모금 한 후, 옆에 쌓아둔 책 중 하나를 꺼내 책갈피를 꽂아두었던 곳을 펼쳐 보여주었다. "이건 정말 재미있는 기록 중 하나인데요, 혹시 익셀런의 기사들 대부분이 죄인들 이었다는 거 아세요?" "글쎄요, 전 아크랜드 역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터라......." “관심이 있었어도 잘 몰랐을 겁니다. 저도 방금 안 거에요.” 그는 다른 책에서 찾은 부분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또 이런 기록도 있죠. 익셀런은 오직 실력 위주로만 기사들을 뽑은 탓에, 순수하게 귀족으로만 구성된 황실 기사단에 비해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 못 했다...... 실력 위주로만 뽑아 최고로 대우를 받고 사는 울프의 기사들과 대조되죠.” "계급 주위 사회에서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되네요. 아란티아가 이상한 거죠." "맞아요." 카셀은 웃으며 두 책의 펼쳐진 부분을 각각 짚었다. "실력 위주로만 뽑았다, 그 중 죄인도 있다, 이 두 부분을 합치면 익셀런 기사단의 구성은 대충 짐작이 가요. 갑자기 일으킨 전쟁에 써먹기 위해 급조된 익셀런 기사단의 실체는 사실 버려도 상관없는 인물들로만 구성된 소모품이었던 겁니다." "그럴 리가? 잘은 모르지만, 그 정도로 기사도에 충실한 기사단도 없다 하던데요?" "맞아요." 카셀은 차를 마시며 근방을 서성거리며 말을 이었다. 졸린 탓에 이런 식으로 가끔 환기를 시켜주지 않으면 머리 회전이 잘 되지 않았다. "워낙 커다란 집단이었고, 제가 카모르트에서 안면이 있는 팔콘이라는 사람도 범죄자 출신이었던 것 같지는 않았으니, 익셀런의 전부가 여기에서 말하는 그런 부류는 아닐 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제가 알던 지식을 모두 합치면, 어떻게 봐도 그들은 소모품으로 분류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막강한 카리스마의 캡틴을 중심으로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을 무너뜨려 버리고, 패배를 모르는 군단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입니다." 카셀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긴장감을 이어갔다. "게다가 그들의 본래 목적은 드래곤 사냥! 인간이 드래곤을 사냥한다? 그런 목적만 봐도 충분히 ‘너희들은 드래곤과 함께 죽어라!' 라는 기사단 창립 의도가 보이지 않으세요? 그런데 이 엄청난 기사단은 진짜로 그 목적을 이행해 버립니다." 카셀은 잠시 머리 속의 이론들을 정리하다가 아까 찾던 책의 다른 부분을 뒤적거렸다. "자, 보세요. 사실 지금부터 정말중요한 건 이 부분입니다. 거지에서 멈췄어야 하는 론타몬의 군대가 갑자기 아란티아로 군대를 돌립니다. 왜일까요?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에도 적히지 않는 어떤 일이 그 사이 벌어졌을 겁니다. 어쨌든 그걸 계기로 론타몬은 아란티아를 쳐들어왔고, 십여 년 전, 정확히 9년 전 골드 게이트 전투를 펼쳤던 겁니다. 그런데........ 이거 한 줄뿐인데다가, 서술자 본인까지 소문이므로 명확하지 않더라고 주장하는 부분이라, 저도 뭐라 말하긴 애매한데 말입니다.......” 카셀은 그 부분을 보여주었고, 타냐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건 마지막 골드 게이트 전투에 참여했던 익셀런의 기사들이 모조리 범죄자 출신이었다면 가능할 일이군요." "그겁니다. 익셀런 기사단은 일종의 용병이었어요. 그들의 계약은 원래 가넬로크 드래곤 기사단까지였습니다. 드래곤 사냥을 따로 훈련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계약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장되었습니다. 여기 써 있는 이 문장대로라면, '화이트 게이트까지 익셀런 기사단이 진출한다면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과거의 죄목으로 구속되지 않는다는 보상을 받게 된다. '는 거였습니다." 타냐는 버릇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빌리의 모습과 블랙의 모습이 흐릿하게 목걸이를 통해 나타났다. “당신이 말한 대로라면 이건 굉장한 우연의 일치군요. 그 빌리라는 익셀런 기사는 범죄자들을 끌고 다니다가 하이로드를 습격하여 당신을 잡은 거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함께 나디움으로 향해왔었죠" “맞아요. 원래 다른 두목을 섬기고 있던 범죄자들이 우연히도 그레이 게이트에서 빌리를 만났죠. 그들은 빌리와 함께라면 뭔가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과거를 지우고 행복하게 살 희망에 계속 화이트 게이트 쪽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희망은 제이메르라는 사냥꾼, 단 한 사람에게 무너져 버렸지만 말이죠." "결국 빌리는 과거에 캡틴 웰치가 하려고 했던 일을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었던 거군요." "범죄자로 구성된 익셀런을 수치로 아는 론타몬에서 이런 비화를 알려주었을 리 없을 데니 빌리 본인은 알지 못 했을 것이고, 당시 블랙은 과거의 기억을 잊고 있었으니 결국 서로 모를 수밖에요. 두 사건은 완전히 우연입니다. " “그러나 기억을 잃은 블랙에게는 충분히 영향을 줄만한 모습이 있겠네요." 타냐의 말에 카셀은 뭔가 머리 속을 후려치는 충격이 있었다. 지금까지 블랙의 행동들, 골드 게이트로만 도달 하겠다는 의지가 어느 사이에 바뀌어 화이트 게이트로 향하는 심경의 변화, 원래는 없었을 부하들....... 현계의 익셀런 기사인 빌리와 울프의 기사가 되었을지 모를 슈벨! 이게 우연의 일치라고? "블랙은 기억을 되찾았을 겁니다. 그러고 과거의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았을 것이고, 과거의 부하들을 이끌고 있는 거겠죠. 맙소사 그럼 그가 할 일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타냐도 이미 몇 가지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그걸 깨달았는지 놀라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카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 였다. “그들은 9년 전에 받았던 명령을 다시 시행하고 있는 거였군요. 이게 블랙이 말하던 진군의 의미였어요." 흥분하는 카셀과는 달리 타냐는 침착했다. 그녀는 구슬로 보이던 영상을 지운 후 말했다. "그러나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들이 과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덜 위험한 건 아니지 않나요? 그들의 안식을 위해 화이트 게이트를 오픈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죠." 카셀은 조금 친정시키기 위해 자리에 않았다. 펼쳐놓았던 책들과 함께 머리 속도 정리했다. 타냐는 카셀이 보여주었던 책에 도로 책갈피를 꽂고, 정리를 도왔다. "이런 식으로 찾아낸 몇 가지 자료 말고도 다른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지금 기사들끼리 하는 말도 일리가 있죠. 그저 단순히 과거에 패배했던 울프 기사단이 골드 게이트에 없으니 굳이 싸우지 않고 통과만 한 것이고 화이트 게이트로 와서 보복하겠다는 것. 과거의 실패를 수정하기 위한 의지로 살아났다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또 제가 말했던 대로 그들이 단순히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보내는 꼭두각시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어쨌든 블랙이 이 사건의 중심이라면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해요. 혹시나 했지만 여왕 폐하는 아무 말씀 없으시고, 마스터 퀘이언이나 마스터 아이린은 이미 해줄 얘기 다 해줬다고 발뼘이시죠. 왜인지 본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지 않아요. 결국 제가 뒤적일 건 이런 역사책뿐이죠." 타냐는 감정 섞이지 않는 미소로 응하며 카셀이 뽑아놓은 책을 한 권 들었다. "그럼 저도 돕죠."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제도.......” "전 마법사니까 괜찮아요." 별로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카셀은 그녀가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기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 다가 물었다. “예" 타냐가 되물었다 "뭐가요?" "아니, 방금 뭐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무슨 말이요?" "뭐라고 안 했어요?" "전혀 " 두 사람 다 서로를 멍청히 바라볼 때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좀 더 또렷했다. "코뮤......, 이....., 가브......, 무.......” 카셀은 도서관 사서가 있다면 당장 퇴실 시킬 만큼 시끄럽게 의자를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셀은 다시 한 번 들리는 그 소리를 그대로 입으로 흉내 내어 말했다. "코뮤 루부......, 입트, 가브 트 무.......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 이게 무슨 뜻이죠?" 타냐가 놀란 눈을 했다. "고대어에요. 마법의 언어이기도 하죠. 당신이 어떻게 그걸?" "어서요. 해석할 수 있나요?" "저도 고대어에 능하지는 아요. 하지만 그 말은 간단하니 어느정도 뜻은 알 것 같군요. '이리 와라, 그리고...... 나를 찾으라.' 누가 그런 말을 당신에게 하고 있는 거죠?" 카셀은 이 비슷한 언어를 한 달 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이 목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선명했다. "아란티아의 보검입니다. 칼이 날 부르고 있어요." "이 밤중에 어딜 간다는 거에요?" 카셀은 당장 마굿간으로 달려가 말을 한 마리 끌어냈다. 타냐가 말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보검이 저를 주인으로 선택한 이상, 나는 칼의 목소리에 따라야 해요." "우스운 관계군요. 그 칼의 명령을 듣는다면 당신이 그 칼의 주인이 아니라 칼이 당신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닌가요?" “그래도 상관 없어요. 그리고 이 일의 중심이 블랙이라면 이 일의 해결책은 보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론타몬의 영웅에서 패배자로 만들어 버린 당사자이기도 하니, 이번 싸움의 중심에도 아란티아의 보검이 서야 합니다." 타냐는 말리는 걸 포기하더니 말했다. “막지 못할 바에야, 제가 따라가는 게 낫겠습니다. 적어도 경호원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녀의 몸이 천천히 뒤로 젖혀지는 것 같더니 다음순간 어둠속에서 환하게 빛을 하는 은빛 털의 늑대로 변했다 그녀는 계속 말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전투는 내일 아침에 벌어질 것입니다. 그 때까지 어디 있는지도 되를 보검을 찾아 말을 타고 가는 건 무리입니다. 그러니 나를 타고 가요. 그게 빠를 겁니다." "그 그렇지만.......” "안장이 없어도 생각보다 편할 테니 그런 걱정은 말아요." "아,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신 등 위에 올라탈 수는 없습니다. " 타냐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카셀. 어떻게 그렇게 약하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남을 배려할 수가 있는 거죠? 어제와 오늘만 해도 그렇죠. 저 정도로 엄청난 실력의 기사들 틈에 끼이면 어지간한 정신력을 가진 기사들조차 버티지 못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울프의 두 번째 테스트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당히 그 속에 끼어 되려 어린 기사를 배려하고 돌봐주려 하더군요. 날 배려해서 내 위에 타지 않는다? 역시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녀는 끝에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타긴 타겠습니다만, 역시나 죄송스럽기 그지없군요. 처음부터 늑대라고 생각하면 모르겠지만, 이미 당신의 모습을 봐버린 상태니.......” 카셀은 쑥스러워 하며 늑대의 등에 올라갔다. 왠지 둥실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자라는 게 신경 쓰인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바로 맞췄어요." "차라리 당신이 무서워하는 마녀라고 생각하는 게 어때요? 외모도 그럴 듯 하니." “하하, 외모란 건 원래 익숙해지기 마련이죠. 오히려 외모에 연연해하는 건 당신 같은데요, 마스터 타냐." 타냐는 멈칫했다. 늑대의 뒤통수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마 방금 한 말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어느 방향인지 일러주세요." 늑대는 천천히 달리며 말했다 "예. 우선 골드 게이트 쪽으로 가야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두 시간." 그리고 다음 순간 카셀은 주위의 환경을 돌아볼 여유도 갖지 못했다. 뜨기 힘든 눈을 겨우 떠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물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잘리는 늑대 위는 빨랐다. 카셀은 그녀의 은빛 털을 꽉 쥐고 떨어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화이트 게이트 전투 골드 게이트를 꽤 남겨두고 타냐는 속도를 줄이더니 곧 멈췄다. 눈만 질끈 감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카셀은 조심스레 옆으로 내렸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타냐는 늑대에서 인간으로 변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 카셀은 주저앉은 채로 그녀가 바라보는 쪽에서 다가오는 횃불의 무리를 발견했다. 선두에 있던 기사가 말을 타고 접근했다.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고, 횃불을 등지고 있어 얼굴도 갑옷 모양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하이로드의 행군을 막는가?" 타냐는 목걸이의 빛을 밝게 하여 역광으로 들어오는 기사의 얼굴을 보이게 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경계하며 창을 들었다. 그는 배롤이었다. 갑옷을 입고 있어 부상이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지금 말을 타고 달려올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루티아의 마법사 타냐입니다. 여기 캡틴 울프가 그대들을 맞으러 왔습니다." "캡틴이?" 배롤은 마법사에 대한 예의도 잊고 당장 말에서 뛰어내려 카셀에게 달려왔다. 카셀은 손만 들어 인사했다. "사정이 좀 있어 일어나 반기지 못해 죄송합니다, 배롤." "아니, 그 무슨 소릴?" 배롤은 카셀의 손을 잡아 부축해주며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당신은 떠났다고 해서 늦게나마 서둘렀소. 몸은 괜찮으시오? 슈벨은? 그 검은 기사는?" “많은 것을 얘기할 시간은 없습니다. 전 보검이 부르는 소리에 달려왔습니다." 배롤은 칼이 부른다는 비현실적인 말에 조금도 이상하다는 말도 않고, 당장 허리에 꽂아둔 보검을 칼집 째로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 동안 이 칼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부담되었는지 모른다오. 어서 원 주인이 가져가 주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카셀은 그 칼을 받아 조심스럽게 허리에 차며 물었다. "그런데 탈룬드께서는?" “마차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오. 골드 게이트가 검은 기사들의 무리에 의해 강제로 열렸다는 소리를 듣고 당장 가야 한다며 이렇게 서두르고 있는 거요. 나는 그 분이 골드 게이트의 보호 아래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막무가내로.......” 카셀은 그가 어떻게 고집을 부렸는지 눈에 선했다. "그 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나디움은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짐작하고 있었소." "예, 그러니 하이로드를 모시고 다시 골드 게이트로 돌아가십시오.” "명령을 어기라고?" "제가 어기라고 명령을 내리겠다면, 당신은 어느 쪽 명령을 들을 겁니까?" 배롤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셀은 타냐를 타고 오며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자기 앞에서 눈물을 보인 실디레의 모습이 단순히 어린애이기에 나을 수 있는 어리광이었나? 경험이 부족한 기사이기에? 그런 식으로 치면 모든 울프의 기사들이 인간관계에 관해서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봐야 했다. 슈벨의 비꼬던 그 말 그대로, 그들은 몇 년 동안이나 이 곳에서 틀어박힌 채 세상을 돌아보지 않았던 우물 안 개구리들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실력이 너무 높아 서로에게 미를 수밖에 없었으며 은 연중에 바랐지만 표면상으로는 거부했던 그것이, 가장 솔직하고 어린 실디레의 눈물에서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명령을 내려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기분 좋게 복종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그러나 서로 검술을 경쟁하던 울프들끼리는 그럴 수 없었다. 언젠가 따라잡을 목표로 설정해놓은 하얀 늑대들도 그 자리는 무리였다. 퀘이언이 캡틴이 된 건 검술의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카셀의 단호한 명령에 잠깐 놀랐던 배롤의 표정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원한다면........” 실디레의 복종은 우연히 만들어낼 결과였다. 그러나 배롤은 의도해서 만들어낸 복종이었다. "뭐, 나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지. 책임은 져 줄 데니까. 그렇지, 캡틴?" 배롤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물를이지, 배롤." 둘은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배롤은 즉시 몸을 돌려 말에 올랐다. "전군 방향을 돌려 골드 게이트로 향한다. 소러는 네지 마라. 랄룬드께서 주무신다." 병사들은 곧 뒤로 돌았고, 마차를 모는 말머리도 뒤로 돌아갔다. 카셀은 말없이 그를 보내려다 문득 간략한 울프들의 신상 명세가 떠올랐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카셀은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어 그냥 말해 버렸다. "배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이 있나?" 배롤은 말도 세우지 않고 돌아보았다. 잠시 그는 카셀의 엉뚱한 말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줬다. "있다면 굳이 울프의 기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마스터 르고도 은퇴해서 대장장이를 하기 전에는 여왕의 수호 기사였다. 울프에서 은퇴한 후 따로 배워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배롤은 알아서 행렬의 뒤를 쫓으려는 영리한 말을 제어하며 그 자리에서 몇 바퀴 맴돌았다. 그의 표정에는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의문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곧 미소로 대신했다. “울프의 기사가 그런 일을 해도 되나?" “과일 장사하는 울프도 있다던데, 반드시 골드 게이트의 다네돌처럼 나이 들어서도 막중한 임무를 맡을 필요는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르고가 과거의 수호 기사였다는 건 금시초문인걸." "아아, 비밀이었나? 나한데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해서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비밀이었으면 그냥 입 다물어 줘. 나중에 따로 르고에게 물어보지. 내가 직접!" 배롤은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행렬을 바라갔다. 밀어져 가는 횃불을 바라보는 카셀의 측은한 시선에 타냐가 물었다. "왜 그런 슬픈 표정을 것고 있죠, 카셀?" "그냥요. 저는 아마 캡틴이 되지 못할 겁니다." "음, 또 그 말이냐 라고 하기에는 지금까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죠? 자신감을 얻은 게 아니었나요?" “아니오. 캡틴이 되기에는 이미 울프의 기사들을 너무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 같아요. 한 명 한 명에게 애착이 가고, 모두와 친해지고 싶어졌어요. 당신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울프 기사단을 동경했습니다. 기사를 꿈꾸는 다른 수많은 소년들처럼....... 캡틴이 되어 저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떨어지는 사지로 내몰 자신이 없어요." 카셀은 보검을 살짝 뽑아보고 잠시 검은 칼날을 쓰다듬었다. 한 달 전 카모르트의 수도 노르만트로 들어가며 의지를 다잡기 위해 칼날을 꼭 쥐어 피를 냈던 기억이 났다. 그 때의 처절함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것이 타냐 앞에서 눈물이 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나디움에 있고 싶어요. 청소부가 되어서라도, 모두의 심부름꾼이 되어서라도, 요리사가 되어서라도! 제가 좋아하는 그들의 옆에 있고 싶어요. 캡틴의 모습이 아니라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제가 아란티아를 여행하며 얻은 결론입니다." 카셀은 힘 있게 보검을 꽃아 넣었다. "갑시다, 타냐. 조금 있으면 날이 밝아을 겁니다." 타냐는 천천히 늑대로 변해 카셀이 타기 쉽도록 자세를 낮추었다. 다시 늑대는 서쪽을 향해 달렸다. 타냐의 말대로 되살아난 익셀런 기사단의 진군이 갖는 의미를 안다고 그들의 진군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은 누군가가 알아주길 원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일에 대해 모두와 상의하면 해결책이 나와 줄 거라 믿었고 거기에 아란티아의 보검이 있다면 어떤 돌파구가 마련될 거라고 카셀은 생각했다. 그러나 카셀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한 가지 있었다. 검은 기사의 무리가 화이트 게이트로 돌격해 가는 시간이 너무 일렀다. 이제 겨우 해가 동쪽에 머리를 들이밀었건만, 기사들은 벌써 화이트 게이트가 멀리 내다보이는 평원에서 배열을 정돈하고 있었다. 뒤에서 보아도 그들의 군대는 웅장했다. "우리가 늦었나요?" 늑대의 모습을 한 타냐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대열의 꽁무니를 바라보던 카셀은 이를 악 물었다. 비를 맞고 비틀거리며 도착했던 무너져 좌절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따라 잡아요!” 카셀이 소리쳤다. “예?” “어떻게든 우리가 먼저 화이트 게이트에 도착해야 합니다.” “위험해요. 그리고 이미 울프 기사단도 공격 준비가 완료되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저 안에 뛰어들면.......” 타냐는 안타깝게 말하며 화이트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게이트의 좌우 기둥을 상징하는 탑의 꼭대기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성스러운 빛을 향해 어느 군대가 사기를 잃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죽음에서 살아난 기사단은 빛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알아요, 알지만.......” 카셀은 함부로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직도 블랙이 말한 진군의 의미는 명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두 기사단이 부딪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으며, 블랙 역시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막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 검은 기사의 무리가 아니라 울프 기사단을 먼저 박아야 합니다. 타냐, 어했든 우리는 화이트 게이트에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 "좋아요. 그럼 이미 돌아서 가기에는 무리입니다. 돌파하겠어요." 카셀은 자세를 한껏 낮추고 털을 한 움큼 꽉 쥐었다. 타냐는 크게 한 번 도약했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주위의 사물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리는데도 그 검은 기사들은 쉽게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들의 말 역시 보통 속도가 아니었다. 거의 뒷부분을 따라 잡았을무렵, 갑자기 제일 뒤에 쳐져 있던 검은 기사가 뒤를 획 돌아보았다. 그는 등에 매고 있던 창을 들어 늑대를 향해 찔렀다. 타냐는 왼쪽으로 점프해서 창을 피했다. 순간적으로 허공에 떠 오른 늑대는 저공으로 비행하는 새처럼 낮게 옆으로 날아갔다. 착지하는 순간, 다른 기사가 칼을 취둘렀다. 카셀의 머리 위로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타냐는 점점 속도를 올려 검은 기사들의 말을 하나씩 따라잡았다. “타냐, 선두의 말 쪽에 붙어요." 타냐는 대답하지 않고 약간 몸을 틀어 방향을 고쳤다. 선두에는 빌리와 블랙이 있었다. 빌리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블랙은 거대한 할버드를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기사들은 모르나 타냐 역시 블랙의 공격은 피할 자신이 없었는지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카셀은 그 상태에서 크게 소리쳤다. "블랙, 아직 나와의 내기는 잊지 않았겠지? 기다리고 있겠다." 카셀이 다시 타냐의 몸에 찰싹 붙자, 타냐는 속도를 올려 화이트 게이트로 돌진했다. 카셀은 그 사이 계속 머리 속에 이 질주의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역시 결론은 같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화이트 게이트를 가로막는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려, 예상대로 하얀 갑옷을 입은 울프 기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란츠가 선두에 있었고, 그 옆에 갑옷도 뭣도 걸치지 않은 제이메르도 눈에 띄었다. “멈추시오." 카셀은 황급히 늑대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비록 타냐가 도달하기 전에 속도를 줄이긴 했지만, 그 엄청난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서 두 바퀴가 뒹굴었다. 떨어지며 입술을 깨물었는지 피가 났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말했다. "저들을 공격하면 안 됩니다." 프란츠가 소리 질렀다. “어딜 갔다 왔는지 모르지만, 그럼 저들의 침략을 넋 놓고 보고 있으란 말인가? 감히 여왕을 내놓으라고 하는 저 군대를?"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이 화이트 게이트를 통과하고자 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나디움의 공격이 아니라, 나디움의 도착에 그 목적이 있는 겁니다." 기사들은 그게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슈벨의 말대로라면 그 진군의 의미를 모른다면 나디움이 파괴될 거라고 말했다. 네 말대로 화이트 게이트의 도착만으로 의미가 있다면, 왜 그런 말을 했겠나?" "나디움의 파괴는 곧 울프 기사단의 파괴를 뜻한다!" 카셀은 강한 어조로 말하며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성스러운 군대가 사라진 이후의 상태를 뜻해. 말라 울프, 모르겠나? 저 검은 기사의 군대 뒤에는 다른 울프들이 사라지면, 나디움은 그 힘에 완전히 노출되는 거야. 에릴 울프, 창을 내려라. 우린 싸울 필요가 없다. 울프 기사단이 막아야 할 적은 저 검은 기사단이 아니다. 알렉스, 당신도 모르시겠소? 푸티에르, 몇 수 앞만 내다보아라. 체스처럼 생각해. 이건 체크 메이트를 위해 적이 던져주는 미끼다. 대륙 전체에서 가장 막강한 두 기사단이 서로 부딪혀 서로 전멸하길 원하는 거다. 웰치는 그걸 원하지 않아서 슈벨을 보낸 거다.” 카셀은 악착 같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열의 뒤에 있던 실디레가 조금 앞으로 나왔다. "카셀, 거기에서 나와. 화이트 게이트에서 가까운 곳에서 싸울수록 위험해.” 울프 기사들의 말이 점점 흥분했고, 앞발로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하얀 기둥을 중심으로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검은 기사들의 무리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1분도 안 되어 여기에 들이닥칠 것이다. "비켜라, 카셀. 너는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권리가 없다.쳐들어 오는 적과 싸우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설사 우리가 정말 전멸 당한다 하더라도.” 프란츠가 말했다. 카셀은 이를 악물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라면 카셀의 말을 듣겠지만 제이 한 명 명령을 들어준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셀은 다시 타냐의 등에 올라탔다. “내가 저 진군을 막겠다. 그럼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네가 무슨 수로?” 카셀은 아란티아의 보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그러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냥 보고 있어라, 프란츠 울프!” 그 칼을 보고 모두 입을 따악 벌렸다. 프란츠는 할 말을 잃어버렸고, 그의 옆에 있던 알렉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터 묻고 싶었다. 대체 넌 누구냐?” 그것은 울프 기사단 모두의 질문이기도 했다. 하얀 늑대 위에 앉은 카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 따가운 시선 앞에서 퀘이언은 어떤 멋진 연설로 모두를 감동시켰을까? 카셀은 알지 못 했다. 퀘이언 만큼 제대로 지위를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남들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마음가짐으로 블랙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살아 돌아온다면.......” 카셀은 팔이 떨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당신들이 캡틴이라 불러야 할 사람입니다.” 카셀이 신호했고, 타냐는 다시 검은 기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잠깐이었으나, 화이트 게이트 앞에 서 있던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당신 말대로 발리긴 하지만, 저 기사단을 어떻게 막을 생각입니까?" 타냐가 달리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안함이 묻어 있었다. "여기에서 멈추세요." 카셀은 숨을 몰아쉬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마법으로 사물을 환하게 비출 수 있죠? 당신의 구슬도 그렇게 했고, 늑대의 털도 그렇게 할 수 있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칼에 그 마법을 부여해 주세요." "칼을 빛나게 하라고요? 그런 걸로 저들을 멈춰 세울 수는 없......” “그냥 그렇게 해주십시오! 이 칼은 영웅이 쥐었을 때 빛을 낸다고 했습니다. 블랙이 웰치로서의 기억을 되찾았다면 그 빛을 보고 멈추지 않을 리 없어요. 시간 없으니 어서요!" "좋아요. 여기까지 와서 당신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군요." 타냐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은빛 털이 아침 햇살을 이겨낼 정도로 환해줬고 심지어 카셀의 몸에서도 옅게 빛이 나왔다. 그러나 정작 칼에서는 빛이 나오지 않았다. “타냐?" 이제 검은 기사들은, 카셀의 앞에 멈추고 싶어도 멈추기 힘든 거리까지 근접해 있었다. "타냐!" 카셀은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타냐는 눈을 질끈 감고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악 다문 늑대의 이빨에서 끓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칼은 마법이 통하지 않아요. 아아, 내가 바보였어요. 이 칼의 금속은 현자라 불리는 루티아의 마법사가 아란티아에 선물로 준 것 어떤 마법사의 힘으로 이 칼을 부술 수 없으며, 어떤 마법도 이 칼 앞에서는 소용없어요. 제 힘으로는 이 칼에 빛을 부여할 수는 없어요." 늑대의 몸에서 빛이 사라졌고, 카셀의 몸에서도 빛이 사라졌다. 보검의 검은 날은 아침 햇살조차 반사하지 않고 투박한 맨몸을 드러내 보이기만 했다. 카셀은 늑대 위에서 내렸다. “타냐, 도망치세요. 그리고 울프 기사단에 총 공격을 명령하세요." "카셀!" 카셀은 타냐를 돌아보며 힘없이 웃었다. “제가 실패했어요. 지금까지 도와줘서 고마워요." 카셀은 타냐를 내버려두고,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땅이 진동하며 카셀의 몸을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목청껏 소리질렀다. "블랙! 약속대로 내가 왔다. 멈춰라." 이미 멈출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공포로 발이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못 했고, 이미 달아날 시기도 늦었다. 그러나 카셀은 눈을 감지 않았다. 만약 검은 기사의 칼이 그의 목을 친다면 이대로 그 마지막 순간을 바라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믿었던 보검은 그를 버렸다. 그러나 카셀은 블랙의 기사도를 믿었다. 누군가 카셀의 어깨를 가만히 쥐었다. 그 순간 보검의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아무 소리도 없이, 아무 계기도 없이, 어찌 생각하면 너무나도 느닷없이 그렇게 빛이 터져 나왔다. 카셀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가 아닌 민간의 모습을 한 타냐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빛이 터져 나온 순간과 거의 동시에 검은 기사들의 무리가 카셀을 지나쳤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진동과 바람이 카셀을 뒤흔들었다. 먼지 속에 갇혀 카셀은 잠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모래가 코로 들어가 기침이 나왔고, 눈을 몇 번 깜빡였어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동은 더 이상 없었다. 카셀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검은 기사들은 카셀을 지나친 곳에서 스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백여 기가 넘는 검은 기사들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타냐.......” 카셀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을 데리고 달아나려다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그냥 서 있어 버렸어요.” "그냥 두고 가라고 했잖아요." 보검은 아직도 빛을 잃지 않고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뿌연 먼지도 그 빛을 가리지 못 했다. "제가 정말 당신을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보검의 빛을 받아 웃는 타냐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카셀은 그만 그녀를 껴안아버 리고 싶었다. "고마워요, 타냐 마지막 순간에 마법이 먹혀 들어갔나 보군요." "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 "말했잖아요. 전 당신을 데리고 달아나려다 타이밍을 놓쳤다고요. 보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 카셀은 벌린 입으로 먼지가 들어가는 지도 모르고, 칼을 내려다보았다. 칼날을 감싸고 있던 빛은 천천히 사그라졌다. 카셀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보검에 고맙다는 말을 했다. 검은 기사 중 하나가 말을 타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또 하나 익숙한 얼굴의 남자도 옆에 있었다. "빌리, 살아있었군. 당신이 정지 명령을 내렸소?" 카셀이 말했다. 빌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네가 앞에 있어 우선 피하긴 했지만, 멈춘 것은 각자의 의지였다. 또 그 빛 때문이기도 하고." 카셀은 블랙 족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타냐 쪽인지 카셀 인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블랙은 말했다. "그 늑대로군. 다시 만나면 베어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 정도도 각오하지 않고 당신들 앞을 막아선 건 아니었다." 타냐는 차갑게 말했다. 카셀은 고개를 까닥하며 말했다. "멈춰줘서 고맙소, 블랙." "오해하지 마라. 널 베고 지나갈 수도 있었고, 밟고 지나갈 수도 있었고, 무시하고 돌진할 수도 있었다." 블랙은 카셀의 보검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칼이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너 같은 녀석이 들고서도 그런 빛이 나는 검인가? 아란티아의 보검은 그런 값싼 물건이 아닌 줄로 안다. 어떤 속임수를 했는지 물으려고 멈줬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니 비꼬는 것도 비꼬는 걸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블랙은 또 카셀을 상대로 절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그런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쨋든 당신들을 멈춰 세웠으니, 이 칼의 임무는 끝이오." 카셀은 얼른 칼을 넣어버리고 말했다. "이제 서로 약속을 지켜야 할 때요. 블랙." 카셀은 당당해지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빌리는 아직 그 약속이 무엇인지 기억을 못 하고 있었으나, 블랙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쉽게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향 감각을 제대로 잡지 못 하는 그가 놀랍게도 서쪽을 정확히 찾아내어 그 쪽을 바라보았다. 화이트 게이트가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바라보는 곳을 본 카셀은 숨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화이트 게이트 빛을 따라 나디움을 감싸는 높지 않은 성벽 위에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었지만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고, 블랙은 카셀보다 훨씬 먼저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퀘이언, 그리고 아이린........” 블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흔들린 공기를 가라앉히고, 떠돌아다니는 모래 먼지를 잠재웠다. "그래, 네가 한 약속대로다. 나는 화이트 게이트 앞까지 도달했고, 너는 하얀 늑대 중 가장 강한 이를 내 앞에 데려다 놓는다고 했지, 그럼 그 날 나를 쓰러뜨렸던 아이린이나, 퀘이언을 데려올 수밖에 없겠지. 데려와라. 내가 쓰러진다면 이대로 물러나주겠다. 대신 내가 쓰러뜨린다면 너 역시 약속대로 죽어라, 캡틴 울프." "악속은 지킨다. " 카셀은 고개를 굳게 끄덕이며 블랙을 지나쳐 검은 기사들의 무리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검은 기사들이 말머리를 돌려 옆으로 비켰다. 타냐가 그 뒤를 따랐다. 카셀은 무리를 모두 통과했다가 뒤를 획 돌아보았다. “그러나 블랙, 나는 하얀 늑대 중 가장 강한 사람을 당신에게 내준다고 했지, 아이린을 내세운다고는 하지 않았다." 블랙이 천천히 말을 몰아 다가왔다. "아이린보다 더 강한 자가 있느냐? 불가능할 것이다 그 때 봤던 아이린만큼 강한 이는 내가 돌아다녀본 세상 천지에 없었다. 퀘이언도 아니었고, 메이루밀도 아니었고, 로핀도 아니었다. 하이로드를 지켰던 배롤도 아니었고, 너를 지키기 위해 달려왔던 제이메르도 아니었고, 다리 위에서 겨루었던 쉐이든도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해졌다고 할 만한 인물이 따로 있는가? 얕은 속임수는 용서치 않는다, 카셀." "속임수는 없다. " 화이트 게이트 록에서 말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카셀은 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 하고 말했다. "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내 목숨을 내기로 걸고 싸울 하얀 늑대는 내가 선택한다." 등 뒤에 말이 도착했고, 거기에는 정말 의외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아아, 열심히 말싸움 하는데 끼고 싶지 않은데다가 여기까지 온 건 울프 기사단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내 자유니 오해는 마라. 개인 자격으로 왔다, 슈벨이 그렇게 했듯이." 제이메르였다.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한 자루 뽑았다. 그리고 빌리를 향해 획 던져주었다. "살아있었냐?" 빌리는 다시 찾은 자신의 검을 받아 들고 픽 웃어 보였다. "그래, 널 죽이기 위해 다시 한 번 생명을 받아들였다." "그럼 말에서 내려와. 그런 말 타고 싸우는 건 반칙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너도?" “그야 물론이지." 블랙도 카셀도 타냐도 다른 모든 검은 기사들도 끼어들 틈도 없이 둘은 느닷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결이었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공방전이었다. 둘 다 무슨 마음을 먹고 그 동안 얼마나 엄청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탐색전도 없었고 서로 무기를 몇 번 주고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13.새나디엘 퀘이언의 제자 아이린은 하늘산맥에서 만났던 그 괴물의 시체를 살펴보고 있었다. 몇몇 학자나 의사들을 불러다가 부검도 해보고, 자문도 구해보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란티아에서 가장 저명하다는 나이많은 학자도 밤새 책을 들추더니, 고개를 저어버렸다. “하늘산맥에 사는 생물 중에 우리가 모르는 생물이 한둘이 아니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생물은 인간과 접해본 적이 없는 신종인 것 같습니다. 루티아의 도서관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진 자료 중에 이 비슷한 생물도 없지요." 아이린도 지친 나머지 의자에 털씩 주저앉아 벽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그런데 전 이 녀석들, 하늘산맥 깊숙한 곳에서가 아니라 꽤 가까운 곳에서 만났었다고요. 이런 포악한 성질의 동물이라면 그간 산골 마을을 습격했어도 골백번은 습격했겠다! 안 그래요?" "일리 있죠. 실제로 하늘산맥 근처에 서식하는 동물들은 종종 산 아래로 내려와 가축을 잡아가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종류 중에는 큰 맹수가 없어요." "알아요. 하늘산맥에는 사람을 공격할 만한 대형 육식 동물은 없죠. 오히려 지상에 사는 호랑이가 하늘산맥의 맹수보다 강할 거에요. 알아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 아닙니까?" 아이린은 투덜대며 말했고, 학자는 고개만 저었다. 손을 씻고 나와보니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 한 시녀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들고 종종 걸음으로 달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이린. 식사는 하셨나요?" "아니, 고마워 " 그녀는 샌드위치를 받아 들자마자 한 입 덥석 물었다 "예. 그런데 마스터 퀘이언께서 찾으십니다. " "새벽부터 이 친구가 웬일로?" "웬일이긴요. 어제 있었던 비상이 오늘 터졌으니까 그렇죠." 아이린은 좀 멍한 시선으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그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냐?" "이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세요? 지금 무서워 죽겠는데. 하여튼 마스터 퀘이언께 가보세요. 지금 게이트 쪽으로 가고 계실 거에요. 위험하지는 않겠죠?" "그 표정을 지을 정도만큼은 위험할거다." 아이린은 손사래를 치며 성을 나섰다. '게이트로 갔다고? 녀석, 폐하의 경호는 어쩌고?' 위험한 일이 벌어진 것 치고는 나디움의 분위기가 상당히 차분했지만, 정작 퀘이언은 뭐가 다급해서 나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아이린은 걸음을 빨리 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나디움은 평지보다 높은 곳에 있어 화이트 게이트 너머의 평야가 모두 내다보였다. 과연 검은 기사의 무리가 일렬로 배치되어 말머리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맘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쳐들어올 수 있는 거리였다. 성에서 나디움을 관통하는 긴 계단 아래에 퀘이언이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린은 얼른 달려가 그를 따라잡았다 “나, 찾았어?" "아, 밤새 연구는 어떻게 되었나?" "결과 없음." 곧 격렬하게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린은 먹던 샌드위치를 던져버렸다. "역시 쳐들어왔군. 현재 대처는?" "울프 기사단 전군 배치 상태." "누가 지휘해? 쉐이든? 너?" "프란츠." "아, 그저께 내가 제이메르와 한판 붙이려고 했던 친구." "듣자니 무승부였다더군." "제이메르가? 의외네 " "이길 거라 생각하고 싸움 붙인 거 아니었나?" “당장 이길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한 열 번쯤 지고 나면 뭔가 깨달음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지. 발전과 가르침은 그 다음이다. 녀석은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냥꾼 출신이니, 지는 걸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퀘이언은 화이트 게이트가 아니라 게이트의 옆에 늘어져 나디움을 감싸는 성벽의 갤러리로 올라갔다. 앞 족 평야가 한 눈에 보였다. 거의 도착할 무렵, 검은 기사들이 전력을 향해 달려왔다. “벌써 시작한 거야?" 아이린은 칼은 제대로 차고 있는지 허리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뒤늦게 잠옷 비슷하게 입고 나다니고 있는 자기 옷차림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진정해라. 울프 기사단이 무너지면 우리 둘이 나선다고 달라지지 않아." "뭐가 그렇게 침착하냐, 너나 여기 시녀들은?" "여기 안 살아 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퀘이언은 여전히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바라보았다. 검은 기사들은 살아있는 말로는 낼 수 없는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기세만으로 화이트 게이트 같은 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것 같았고 그 기세만으로 이미 9년 전 전투를 이끌었던 익셀런 기사단보다 월등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막을 수 있나? 그 정도는 훈련시켰겠지?" 아이린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적어도 우리 때와 실력 차는 없다. 그 정도는 훈련 되어 있어. 하지만.......” 퀘이언은 픽 웃었다. 아이린은 그의 여유가 불만이었다. "뭐가 우스워?" 퀘이언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떨리는 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 "네가 날 겁쟁이라고 했지? 지금도 이렇다.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군. 너희들이 론타몬으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는 마법사를 죽이러 떠났을 때, 난 마스터의 뒤를 이어 여왕을 지키고 있었지. 그 때 여왕을 암살하려고 나타난 어쌔신이 있었다는 거 알지?" "알지.” "혼자 남은 내가 얼마나 겁에 질렀었는지 너나 다른 친구들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폐하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때도 난 여전히 겁쟁이야. 말없이 이런 여유나 부리고 있어줘야 저 녀석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거 아니겠냐." 퀘이언은 울프 기사단의 제일 선두에 서 있는 프란츠에게 손을 들어 주었. 프란츠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저 하늘산맥의 축복이 저 아이들을 지켜주길 빌 수밖에." 퀘이언은 빙그레 웃으며 주먹 쥔 손을 허리 아래로 떨구었다. 그때 검은 기사들 틈바구니를 들고 달려오는 하얀 빛이 보였다. 마법과도 같은 섬광이 가로질러 곧장 울프 기사단 앞으로 달려왔다. 은빛 늑대을 변한 타냐와 그 위에 타고 있는 카셀이었다. "저 녀석은 어elf 갔다 온 거야?" 아이린의 질문에 퀘이언도 대답하지 못했다. 카셀은 화이트 게이트까지 단숨에 달려와 도착했다. 그리고 프란츠를 비롯한 울프 기사단에게 뭐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검은 기사들은 돌진해오고 있는데, 와 아군을 막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뭐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런 대화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이린은 당장 뛰어내려가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오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카셀은 늑대에 타더니 도로 검은 기사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퀘이언도 아이린도 발을 잊었다. 늑대와 카셀은 게이트 앞 이백 미터쯤 앞에서 서더니 칼을 치켜들었다.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보검 아니냐?" "내가 보기에도 그런 거 같군. 저걸로 뭘 하려고?" "저 멍청한 녀석이 보검에 엄청난 힘이라도 있다고 생각하고 저런 짓을 하는 거 아닐까?" "내가 보기에 카셀은 그 정도로 멍청하거나 무모한 녀석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군." 아이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녀석 어쩌면 옛날 얘기에 집착하는 건가? 네가 보검의 빛으로 익셀런 기사단을 물리쳤다고 하니까 그런 기적을 바라고? 그 빛의 기적이란 게 '울프 기사단이 적과 싸우며 흘린 피' 라는 걸 모르고 저런 짓을 하는 건가?" "그럴 지도." 계속 보고 있기 힘든 순간이었다. 검은 기사들은 카셀을 향해 멈추지 않고 돌진했고, 카셀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악 물었다. 그 순간 화이트 게이트에 있는 사람들까지 눈을 가려야 할 만큼 강한 빛이 폭발했다. 아이린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한쪽으로 젖혔다. 순간 카셀의 무모한 행동이 만들어낸 기적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 기사들이 멈췄다. 아이린은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다 퀘이언을 돌아보았다. 퀘이언도 황당한지 현 상황에 여왕의 수호 기사가 절대 짓지 말아야 할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왜 멈쳤지?" 아이린은 자기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퀘이언도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문득 게이트 앞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막 달려 나가려던 그들도 멈춰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잠깐이지만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그 중 하나가 갑자기 검은 기사들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저거 네 제자 아니던가?" "제이메르?" 아이린은 난간 쪽에 붙어 그가 제이인 것을 확인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런 제기랄, 다들 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거지?" "너무 머리 쓰지마." 계단을 타고 맨발로 걸어 올라오는 새나디엘 여왕이 말했다. 그녀는 긴 갈색 머리를 하고 허름한 옷에 윗 단추가 한 개 떨어져 가슴 윤곽이 반쯤 내비치는 밝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이린은 또 한 번 놀랐다. "그, 그걸 옷이라고 이, 입고 계십니까, 폐하?" "왜? 나 이러고 잘 다녀." 되려 자랑스럽게 말하는 여왕의 천진난만한 눈빛을 보고 아이린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잘 키워놓은 딸이 노출 심한 옷을 입고 바깥을 싸돌아다닐 때 아버지의 심정이 이런 걸지도 몰랐다. 멍청하게 욕정만 많은 사내놈들에게 백 년에 한 번 모여주고 평생 노예 생활이나 하라고 시켜도 들을 만한 몸매를 저런 식으로 내놓고 다니는 것도 불만이었고, 꾸미는 대로 옷맵시가 나는 외모와 몸매를 함부로 여기는 것도 괴로웠다. 새나디엘은 아이린 옆 난간에 팔꿈치를 기댄 후, 가는 턱에 손을 올리며 상체를 내밀어 달려가는 제이메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 다 지나치게 갇힌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군. 너희들이 십 년전, 팔팔하던 머리로 돌아가면 지금 상황이 충분히 이해될 거야.” "왜요?" 아이린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않니? 자신을 무너뜨린 패배가 울프 기사단이라고는 하냐. 웰치의 머리 속에 가장 강하게 각인되어 있을 사물은 아란티아의 보검과 바로 아이린 너 아니겠니? 내 생각에는 네가 저 앞에 나가 있었어도 검은 기사들은 멈췄을 것 같군. 너 대신 카셀이 보검으로 한 거지.” 아이린은 가늘게 신음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보검이 저렇게 아무 때나, 아무 사람 손에서나 빛을 내는 물건이었습니까?" 아이린의 불만 섞인 말에 갑자기 새나디엘이 말투가 변했다. “함부로 그런 말을 하지 말 거라, 아리린! 저 칼은 베나 에사르크와 동급의 물건이다. 누가 네 칼에 그런 욕을 하면 너라면 어떻게 하겠는냐? 보검은 스스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주인의 의지를 합쳐서.” 아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리고 카셀 역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에 저 기사단을 멈춘 것 같다." 새나디엘은 가는 손가락을 하나씩 필치며 양팔을 펼쳤다 손가락이 모두 쳘쳐진 후, 말을 타고서도 한참을 달려야 할 거리에 있는 카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 나는 하얀 늑대 중 가장 강한 사람을 너에게 내준다고 했지, 아이린을 내세운다고는 하지 않았다." 다음에 들린 블랙의 목소리에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블랙은 아이린을 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떤 내기를 한 것인지 모르나, 블랙은 아이린을 원하고 있었다. "가끔 폐하께서 마법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카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퀘이언이 신기해하며 말했다. "이런 것도 마법이냐? 나는 나디움 근처에 있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들리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것뿐이야." 옷차림에 따라 새나디엘 여왕은 말투나 행동이 달라지곤 했다. 지금은 선머습처럼 말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천 년 넘게 살아오며 그녀 안에 수많은 다를 인격이 자라온 것인지도 몰랐다. “그걸 보통 사람은 마법이라고 부릅니다만....... 아닙니다. 상관없지요." 퀘이언은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아이린은 두 사람의 대화보다 제이메르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제이는 느닷없이 빌리라는 자에게 싸움을 걸었다. 아이린은 조마조마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애를 어디에서 발견했다고 했지?" 퀘이언이 물었다. "우연이다. " "몇 년 동안이나 찾아 헤맨 제자라기에 고르고 고른 최고인 줄 알았더니, 우연?" “오늘 벌어질 이 일을 예감하고 다가오는 어느 날, 내 앞에 불쑥 나타났어. 나름대로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우연! 그 이상은 아니야.” 여왕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 색깔로만 구별할 수 있는 먼 거리에 있는 제이를 마치 코앞에 두고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말했다. "우연히 너와 제이메르가 만났고, 우연히 제이메르와 빌리라는 기사가 만났고, 우연히 빌리는 죽었다 살아난 웰치를 만난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단다, 아이린. 로핀이 그 때 너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년 나에게 오지 않았을까? 아니, 그 전에 너의 부모님이 서로 만나지 않아 네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미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게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그건 우연이라고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거지.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우리들은 그저 과거를 평가할 수 있을 뿐이야.” 검이 부딪치고 서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아이린은 가슴이 저렸다. "빌리라는 기사....... 굉장히 빠르군." 퀘이언도 눈이 상당히 좋은지 그 먼 거리의 싸움을 모두 보고 있었다. 아이린도 제대로 볼수는 없었지만, 빌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할 수는 있었다. "인간이 아닌 자의 힘이 들어 있군. 거부할 수 있는 힘일 테지만, 스스로 그걸 알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있어.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몰아세우는 걸까? 이 싸움이 끝나거든, 물어봐야겠구나." 새나디엘이 말하자, 아이린이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제이메르가 질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퀘이언이 대신 대답했다. "제대로 힘을 발휘하면 울프의 기사 중 누구도 당하지 못할 거다. 저건 인간의 힘이 아니야." 아이린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쪽 의미라면 제이메르도 인간이랄 수는 없지." 두 사람이 서로 칼을 내민 첫수는 다섯 번이 채 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의 공격은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제이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제이는 한 손에 내민 칼로 막음과 동시에 몸을 한 쪽으로 비틀었다. 르고가 정성을 들여 만든 칼이라고 했는데도 그 찌르는 힘이 엄청나 칼날이 부서졌다. 그러나 무기까지 파괴한 빌리의 칼은 약간 속도가 느려졌고, 제이의 가슴을 찌르지 못하고 스치기만 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제이의 다른 쪽 손은 등에 있는 칼을 뽑아 빌리의 가슴을 찔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연히 만나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별 거 아닌 놈이었다면 진작에 버렸다. 맞아, 폐하의 말씀대로 이건 우연이 아니야. 확률의 문제였지. 저 녀석은 나라는 인간에게 선택 받기 위해 지금까지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나 역시 저 녀석을 선택하기 위해 그 동안의 후보들을 모조리 떨쳐낸 거야. 나는 결국 선택했고, 저 녀석은 내 제자야. 내 제자가 저런 싸움에 질 리가 없지." 퀘이언이 빌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친구는 아직 살아있지?" 빌리는 가슴에 칼을 박은 채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제이는 찔렀던 손을 내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야....... 사, 살아 있냐?" "심장은 비껴갔다." 델리는 자기 힘으로 칼을 뽑아냈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가슴에 칼을 박은 채로 '심장이 비껴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뽑은 칼을 바닥에 휙 집어 던지며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같은 방식으로 졌군. 분명 내가 더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너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벽이 하나 있나 보군." 빌리는 쓸쓸히 말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봐, 카셀. 태양이 떠 있나?" 카셀은 동족 위로 한 템 정도 솟아있는 태양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보는 바대로다.” "떠 있냐고 물었다." 그는 한 번 더 대답을 강요했다 "떠 있다. " "그렇군." 빌리는 고개를 떨구었다가 피도 나지 않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이의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론타몬의 보검을 카셀에게 내밀었다. "슈벨은 아직 살아있다고 했지?" 카셀은 그 칼로 뭘 하라는 건지 몰라 받지 않았다. “전해다오. 전해주기만 하면 무슨 뜻인지 알 거다."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보니 이 기사단의 캡틴은 너다. 캡틴이 함부로 보검을 남에게....... 적에게 맡기는 게 아니다. 전할 말이 있다면 전해주겠다." "그렇군." 빌리는 다시 보검을 도로 꽂고, 제이메르에게 돌려받은 그 칼을 다시 주었다. “론타몬의 보검을 다시 론타몬으로 보내달라는 말만 전해 줘." “좋다 하지만 나 역 시 이 칼을 안전하게 받을 처지는 아니다. " 카셀은 블랙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빌리의 칼과 아란티아의 보검 두 자루 모두 제이에게 내주었다. “빌리의 말을 전해줘. 그리고 돌아가." "어딜 돌아가라는 거야?" “네 싸움은 끝났다, 제이메르. 여기서부터는 내 싸움이야." 블랙은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섰다. 카셀은 고개만 치켜들고 블랙을 노려보았다. 맹수 앞에 빈손으로 서 있는 어린 아이도 이보다는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카셀은 물러남이 없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무모함이 날까, 제이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가야 하나?" 아이린이 베나에 손을 올려놓은 채 물었다. 사실 앞뒤 재지 않고 당장 나서고도 싶었다. 이런 자제심도 나이가 든 증거라면 증거였는데, 또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간다고 이길 자신 있나?" 퀘이언이 웃으며 물었다. "뭐, 9년 전에 비하면 많이 둔해지긴 했지. 그렇다고 한 번 이겼던 상대에게 질 것 같지는 않아 나이를 헛먹은 것도 아니고." "문제는 죽음에서 되살아난 웰치가 어느 정도나 더 강해졌느냐에 달려 있겠지." "어쭈, 넌 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네?" 퀘이언은 잠시 대답을 미뤘다 "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말해두지." "뭔 소리야?" "은퇴했으면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역할도 해줘야 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에게는 몰려오는 적을 물리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잖아." 그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새나디엘은 어린애처럼 난간에 턱을 괴고, 긴 다리를 접어 무릎을 꿇은 채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셀이 막아서는 저 지점이 무너지면 그대로 나디움이 멸망할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그녀는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화이트 게이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메르가 돌아오고 있었고, 반대로 게이트를 빠져나가 검은 기사를 향해 달려가는 기사도 있었다. 제이메르와 그 기사는 서로 지나치며 눈빛을 주고받았으나,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새나디엘을 통해 전달되는 카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블랙, 약속대로 당신이 이긴다면 나는 말없이 이 곳에서 당신의 칼에 죽겠다. 그러나 패배한다면 당신 역시 스스로 죽음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은 죽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새나디엘 여왕을 만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역시 패배한 자가 할 말은 아니겠지." 점점 그 목소리는 웰치의 목소리와 닮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첩되어 여러 갈래로 들려서 명확하지 않았지만, 9년 전 그 목소리를 떠올릴 만큼은 되었다. "그럼 내가 이겼을 경우, 내가 원하는 조건은 들어주는 건가?” 블랙이 말했다. "그게 뭔지는 알고 있다. 아마도 네 부하들 모두를 화이트 게이트에 당도하게 하는 거겠지." "알고 있었군." 카셀이 말했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여기 와서 확신한 것이다. 당신이 말한 이 기사단의 진군의 의미. 그것은 십 년 전 수행하지 못 했던 이 기사단의 명령을 다시 한 번 시행하는 것이다. 아마도 익셀런의 역할은 화이트 게이트 앞까지 본대를 이끄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것으로 익셀런의 기사가 되었던 죄인들의 형량이 없어지는 거겠지. 그렇지 않나?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 블랙은 웃었다. "골드 게이트 앞에서 내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난 알았다 화이트 게이트 앞을 가로막게 될 최후의 적은 울프 기사단이 아니라 바로 너라는 걸." 블랙은 할버드를 치켜들고 화이트 게이트에서 카셀 쪽으로 향하는 기사를 응시했다. 카셀도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다. 약속대로, 네 앞에 하얀 늑대들 중 가장 강한 기사를 네보내겠다, 쉐이든 울프." 쉐이든은 천천히 말을 세웠다. 말은 레드 게이트에서 빌려서 카셀을 구할 때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주었던 파발마였다. "늦었다. 카셀, 르고가 만들어줘야 할 창이 오늘 아침에야 완성되어서." 쉐이든은 조용히 창을 세웠고, 블책도 천지를 들어올리는 것 마냥 무거운 할버드를 들어올렸다. "네가 내 상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쓸만한 인물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이냐? 원한다면 기다려 줄 수 있다. 아이린을 내보내라. 퀘이언도 좋다." 블랙은 말 고삐도 잡지 않고 두 손으로 할버드를 들어올렸다. 쉐이든도 다리로만 말을 컨트롤하며 창을 두 손에 들었다. "캡틴 웰치. 하나 묻지." "말해라." "내가 무섭나?" "뭐라고?" 블랙의 투구가 살짝 흔들렸다. "무섭냐고 했다. 어째서 과거의 인물을 찾나? 한 번 겨뤄봤던 자와 겨루고 싶어진 거냐? 카셀이 나를 내세운 건 간단하다 하얀 늑대들은 전원이 동일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다섯 명 중 제비뽑기를 해서 아무나 나왔어도 결과는 같아." 쉐이든의 말에 블랙은 말이 없었다. 쉐이든이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다시 말해두지. 내가 하안 늑대 중 최강이다." 쉐이든의 창이 섬광처럼 뻗어나갔고, 블랙은 할버드로 막아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뒤로 취청하고 밀러났다. 말이 알아서 물러서주지 않았다며 뒤이은 공격에 승부가 끝날 편한 순간이었다. 그가 내민 창과 할버드가 부딪친 자리에서 반짝이는 빛의 가루가 희미하게 흘러내렸다. "이렇게까지 멋지게 마련된 시합장에서 네가 방심하는 엉뚱한 일이 벌어질까봐 말해두는데, 이 창, 조금 특별한 창이다 너라도 찌르면 회복되지 않을 거다." 쉐이든은 다시 한 번 창을 들어 휘둘렀고, 블랙도 지지 않고 받아 했다. 들고 이동하기도 힘들만한 두 자루 무기가 허공에서 맞물려 움직이지 않았다. 쉐이든은 전력을 다해 밀어냈으나 그 와중에 블랙은 웃음을 터트렸다. "카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 싶군. 마지막 싸움으로 손색이 없는 정말 멋진 상대를 데리고 와줬어, 좋다, 쉐이든 전력을 다해 받아봐라." 블랙은 할버드를 허공에서 크게 한 바퀴 돌려 쉐이든의 양 어깨를 거의 시간차 없이 공격해 들어왔고, 쉐이든은 가까스로 막았다. 철창의 떨림이 온 몸의 뼈를 흔들어 놓는 것 같았다. “그래, 이런 적을 원했다. 아무래도 내 친구들 하고는 한계 상황까지 끌어내지 싸우지 못하거든." 쉐이든도 힘을 아끼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야, 퀘이건, 이럴 때 이런 거 묻긴 뭐 한데.......”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어, 물어." 퀘이언은 싸움에 한눈을 파느라 건성으로 대꾸했다. 새나디엘도 아이린의 질문에, 호기심 많은 소녀 같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제일 늦었다고 했지? 다른 친구들은 모두 제자를 만들었다고." "그랬지." 새나디엘이 물었다. "무슨 제자?" "5년 전 헤어지기 전에 서로 간단한 내기를 했습니다. 서로 최고의 제자를 만들어 오자. 제일 강하고 멋진 녀석을 키우는 녀석이 이기는 거다....... 장난처럼 한 내기였지만, 이제 장난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 아이린이 설명하자, 새나디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이린이 마지막으로 데려온 게 제이메르라는 애구나." "그렇지요. 방금 퀘이언에게 나머지 친구들의 제자들은 어디 있는지 물은 겁니다." “나도 궁금한 걸. 퀘이언의 제자는 누구지? 하얀 늑대들 다섯 명인가?" 퀘이언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섯 명 중 한 명만 제 제자입니다." 새나디엘이 기억을 곱씹으며 물었다. "제일 먼저 네가 밑에 둔 건 던멜이었지. 당시의 본명이 아마 테마르였고?” "맞습니다. 어쌔신 마스터라 불리는 남자, 칼스텐의 제자였습니다. 둘이 힘을 합쳐 폐하를 공격하는 걸 저 혼자 겨우 막아냈지요. 칼스텐은 죽으면서 테마르를 제게 맡겼고, 지금도 테마르는 칼스텐을 마음 속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요. 던멜은 제 제자가 아닙니다." 퀘이언은 여왕의 도움이 없더라도 여기까지 들려올 첫소리를 일으키는 두 사람의 싸움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일으키는 모래 먼지가 마치 황금 가루처럼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기억나나, 아이린? 로린은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울프들을 모으러 다녔고, 그 중 하나는 너무 어려서 아직 데려오지 못 했다고 했던 거. 로핀은 그 애를 계속 키우고 싶다면서 가끔씩 가넬로크로 여행을 가곤 했지. 사실 우리의 내기가 시작된 것도 그 녀석이 하도 자기 제자 자랑을 해대서 그런 거였잖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로핀의 팔불출 같은 자랑 덕에 간접적으로 우리 두 사람의 미움을 받았던 그 제자라는 녀석은 로핀이 사라진 후, 그러니까 5년 전 울프의 테스트 때 여길 왔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두 번째 테스트가 끝날 무렵에야 나는 그 애가 로핀의 제자라는 걸 알았지. 그 놀라운 센스와 가끔씩 로핀이 가르친 흔적을 보이는 검술....... 한 가지 단점이라면, 한 팔이 없는 녀석에게 배운 탓인지 한쪽 손에 모든 공격 형태가 몰려 있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다른 한 손이 균형을 자주 흐트러뜨리더군. 그래서 난 그 애의 버릇을 없애주려고 다른 쪽손에 방패를 들게 했는데, 이제 그 애는 방패를 마치 칼처럼 쓸 줄 알게 되었지. 그 애의 이름이 아즈윈이다. 로핀의 제자이며, 너를 가장 존경하는 하얀 늑대." 아이린은 블루 게이트에서 받은 편지가 바로 떠올라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웰치와 웨이든 두 사람의 목숨뿐 아니라, 나디움의 운명, 어쩌면 여왕의 운명까지 결정짓는 전투 중에 웃음을 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새나디엘이 웃어버렸다. "아즈윈은 너도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을 거다. 둘이 서로 비슷해, 아마 너에게는 10년 전으로 되돌리는 거울 앞에 선 기분일 것이고 아즈윈에게는 10년 뒤를 넘어다 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 줄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니 오히려 만나고 싶어지지 않는군요. 아, 그럼 루밀의 제자도 하얀 늑대들 중에 있는 거야?" "그래, 그 애는 케스트가 필요 없었어. 어느 날 갑자기 루밀의 편지를 가지고 나타났지. 사실 루밀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건 전혀 없었군. 동시에 나에게도 가르침은 받지 않았어. 녀석은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천재다 필요한 건 그 애에게 어울리는 실전과도 같은 시합과 동료뿐이었지. 그래서인지 자기를 처음으로 쓰러뜨린 루밀을 스승으로 생각하더군." "로일 울프라는 친구군. 울프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런 로일을 처음부터 지치지도 않고 몰아붙인 게 게랄드라는 용병이었지. 그 애는 스승이 없다. 전쟁터에서 태어나 피로 자신을 다스렸, 모든 것을 실전으로 익혔지, 그래서 거친 버릇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버릇들을 하나씩 고쳐주다니 보니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어져 버렸어. 가르치는 보람이 없달까? 로일이나 게랄드나.......” 아이린은 울프들 사이에 퍼진 두 사람의 소문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쉐이든은 여전히 블랙을 맞아 힘겹게 싸움을 이어갔다. 그러나 결코 블랙이 유리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퀘이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싸움의 흐름을 눈으로 쫓아갔다. 얘기하는 중에도 절대 시선을 떼지 않았었다. "그래. 내가 너희들과의 내기에 내세울 진짜 제자는 저 애 하나뿐이다. 내가 직접 가르쳤기에. 나와 같은 검술을 쓰고, 같은 창술을 쓴다. 어쩌다가 불러서 가벼운 대련이라도 하면 거울을 보고 싸우는 것 같지. 쉐이든 울프. 내가 너희들 앞에 내세울 내 제자다." 아이린은 여왕의 옆에서 여왕을 흉내 낸 포즈로 싸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말 위에서 싸우는 게 아주 능숙하군. 웰치는 말을 잘 다루는 게 아니야. 말이 스스로 잘 움직이는 거지. 하지만 쉐이든은 발을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모는 법을 아주 잘 아는 것 같군.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길지 자신 못 하겠는걸." "카셀 저 애는 정말 정확하게 쉐이든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섯 명의 하얀 늑대들과 우리 둘까지 몰아넣은 일곱 명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 웰치와 싸우라고 했어도 카셀은 쉐이든을 선택했을 거다. 아까 쉐이든이 스스로를 하얀 늑대들 중 최강이라고 했지?그 말이 맞다. 말 위에서의 싸움은 쉐이든을 당할 자가 없어." 퀘이언은 조용히 이 싸움의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아까 나에게 웰치를 이길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 이 싸움의 결과가 그 대답을 대신할 것이다." 그것은 블랙이 싸움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노렸던 공격임에 분명했다. 블랙은 성벽도 뛰어오를 만큼 엄청난 다리 힘을 가진 말이 못 이겨 휘청거릴 정도로 힘을 주어, 할버드를 끌어당겨 위에서 내리 꽂았다. 물론 그 전부터 그는 계속 그것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쉐이든의 공격에 휘말려 좀처럼 기회를 만들지 못 했었다. 그러나 승부를 서두르는 쉐이든의 큰 공격이 흐트러져 말에서 약간 휘청거리는 순간 마지막에 쓰려 했던 그 공격을 시도했다. 아무리 르고가 만든 창이라 해도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면 부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쉐이든은 막지 않았다. 그 불안한 자세에서 그는 창을 블랙의 투구 쪽으로 찔러 넣었고, 할버드는 쉐이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말의 엉덩이에 내리 꽂혔다. 말이 심하게 요통 치며 쉐이든은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투구의 한 쪽을 얻어맞은 블랙도 뒤로 밀려나 말에서 떨어졌다. 쉐이든은 즉시 일어나 창을 들었고, 블랙도 말에서 떨어진 타격은 없었는지 비틀거리지 않고 일어났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싸움의 공백이 있었다.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쉐이든의 창이 웰치를 배를 뚫고 있었다. 그 순간의 쉐이든은, 누구도 보지 못 했다. 블랙은 잠깐 자세를 정렬하기 위해 할버드를 치켜들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빌리도 서로 말에서 떨어졌으니 싸움이 길어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셀은 어째서 저런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 했다. 웰치가 방심하고 있을 때, 아니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때, 아니 쉐이든이 만들어 낸 그 방심 상태에 모두가 빠져있을 때, 쉐이든만이 움직여 창을 찌른 것이었다. 블랙은 배를 들린 채로 뒤늦게 할버드를 휘둘렀다. 그러나 쉐이든은 맨손으로 할버드의 자루를 잡아채고 찌르고 있던 창을 뽑아 그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섬광 같은 하얀 빛이 터졌다. 검은 갑옷으로 둘러싸인 철갑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쉐이든의 옆구리를 겨냥했던 할버드도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블랙은 일어나지 못 했다. 어깨가 떨어진 부분에서는 피 대신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지막 공격....... 알고 있었나?" 블랙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쉐이든은 마지막 공격을 피하면서 상처 난 어깨를 움켜쥐었다. "알고 있었다. 그 기술로 이로피스의 왕실 기사단 캡틴을 죽였었지. 친구들을 상대로 내 살기를 드러내며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싸운다면 적어도 당신 정도 되는 적이기를 바랐지. 그럼 당연하지 않은가? 상상 속에서 나는 언제나 그 기술을 받아 치는 연습만 해왔다." 쉐이든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쓰러져서 몸부림치는 말 곁으로 다가갔다. 말은 고통스러워 했고, 쉐이든은 말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잘 싸워 주었다." 날아오는 창을 피하지 못한 건 쉐이든이 방심해서라 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는 전력을 다한 싸움을 끝냈고, 집중력이 흐트러질 만도 했다. 그 순간에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창을 피하는 건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에서도 무리였다. 쉐이든의 옆구리를 들은 창은 배로 빠져 나와 바닥에 박혔다. 그는 그대로 굳어 몸을 늘어뜨렸다. 마지막 힘을 다하여 뜨거운 피가 묻어있는 창 자루를 움켜잡았으나, 이미 그것을 뽑아낼 힘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손에 힘을 잃고, 늘어뜨렸다. 그는 오직 카셀의 비명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검은 기사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도 리더의 패배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창이 날아온 방향은 하늘이었다. 회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허공에 떠 있었다. "수고했다, 웰치. 여기까지 잘 와주었다." 카셀을 기다리는 바로 그 헛간에서 쉐이든을 공격했던 사악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잃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카셀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쉐이든의 앞에 섰다. 쉐이든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었으나, 숨을 쉬지 않았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창이 꿰뚫은 배에 손을 댔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손을 가만히 치켜들자, 검은 기사 한 명이 쥐고 있는 창이 허공으로 딸려 올라갔다. 자신의 무기를 빼앗긴 검은 기사는 도로 그 창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이미 한참 위에 떠 있는 회색 로브의 마법사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 자는 그 창을 쉐이든에게 던졌을 때처럼 손도 대지 않고 창 끝을 카셀 쪽으로 날렸다. 카셀은 쉐이든을 끌어안고 눈만 꾸욱 감았다. 카셀의 등까지 도달한 창은 보이지 않는 힘에 멈추더니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카셀의 등 족에 타냐가 섰다. "사악한 힘이 골드 게이트를 통과하다니.......” "이 친구들과 함께 묻어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땅이 울렸다. 돌아보니 화이트 게이트 쪽에서 울프 기사단 전체가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제일 선두에는 프란츠와 제이메르가 있었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귀를 괴롭게 하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면 화이트 게이트를 무너뜨리는 건 역시 어렵지 않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우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밤이 온 것처럼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검은 기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말 위에서 몸부림쳤다. 이내 그들의 괴로운 목소리는 꿈에서라도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바로 그 목소리로 변했다.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들. 카셀은 파르라니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열두 명밖에 되지 않는 그 검은 기사들이 노르만트를 무너뜨린 그 악몽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왔다. 이번에는 그 검은 기사들이 백 기가 넘었다. "이런 걸 노리고 캡틴 웰치를 부활시켰는가?" 타냐가 푸른 빛을 뿜는 구슬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아니, 화이트 게이트까지 무너뜨려 줄 것은 바라며 부활시켰다. 하지만 완성하지 못했지. 그러나 캡틴 웰치. 내가 있는 한 그대의 몸은 불사다. 다시 일어나라. 그리고 저 건방진 늑대들을 모조리 너희들과 같은 처지로 만들어라." "그리 두지 않는다. " 타냐의 구슬에서 푸른빛이 뻗어나갔다. 그러나 회색 로브의 마법사의 곁에도 가지 못하고 좌우로 부서져버렸다 그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 때 당한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데지 네 힘으로는 무리다, 루티아의 마법사." 시커먼 연기가 블랙을 감쌌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팔이 도로 올라와 붙었고, 쓰러졌던 그의 몸이 강제로 일으켰졌다. 검은 기사들은 말고삐를 당겨 달려오는 울프 기사단을 향해 돌진했다. 백여 마리의 말이 일으키는 흙먼지 속에서 블랙은 다시 할버드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카셀은 절망적으로 두 방향에서 벌어지는 이 사태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막으려 했던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채 육체만 회복된 블랙은 타냐에게 할버드를 겨냥하고 있었다. 피하면 그 뒤에 있는 카셀과 쉐이든을 향할 테니 물러서지도 못하고 그녀는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밤새 카셀을 업은 채 달리고, 방금 회색 로브의 마법사를 상대하느라 마법을 쏟아낸 상태에서 블랙의 할버드를 막을 힘은 없을 것이다. 그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블랙을 뒤에서 칼로 찔렀다. 아란티아의 보검과는 전혀 다른 빛을 내는 그 칼은 톤타몬의 보검이었다. 빌리는 웰치를 찌르고 등을 붙들었다. "블랙, 캡틴의 명령이다. 멈춰라. 이런 싸움을 위해서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블랙은 순간 멈칫했다. 론타몬의 보검이 내는 옅은 빛이 블랙의 몸을 감쌌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구나."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 때 빌리의 몸 안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마법사의 손길로 빨려 들어갔다. 빌리는 짤막하게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휘청거렸다. 아까 찔렸다가 바로 회복되어 버린 가슴에서 검붉은 피가 벌컥 새나왔다. 그리고 배 쪽의 옷도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틀 전에 찔렸던 상처였다. 제이에게 찔린 두 곳이 지금 와서야 치명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빌리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법사는 또 한 번 손을 까닥였다. 이번에는 블랙의 배에 박힌 칼이 도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 블랙이 그 칼을 손으로 움켜쥐어 빠지지 못 하게 했다. "그만 두라, 내가 살아난 것이 내 의지라면 죽는 것도 내 의지다. 나의 부하들 역시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났으니, 스스로의 의지로 죽게 내버려 두라." 블랙의 힘겨운 목소리가 투구 속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이미 늦었다." 후드 안에 얼굴을 감춘 마법사는 다른 쪽 손을 치켜들었다. 블랙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래도 배를 찌르고 있는 칼에서 손을 대지 않았다. "죽게...... 내버려두라.......” "일어나라, 웰치. 그대가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 나를 위해서 그리 해주어야겠다." "내,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은 너를 위한 게 아니다. 이대로 너의 인형이 될 바에야....... 내가 할 일을 포기하고 죽는 게 낫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여왕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가라. 일어나 대륙을 벌벌 떨게 했던 그 무기로 여왕을 다시 한 번 베어라." 카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마법사는 분명 '다시 한 번' 이라고 말했다. 카셀은 타냐를 돌아보았다. 타냐는 자신의 모든 마법의 힘을 쉐이든에게 쏟아 웃고 있던 중이었지만, 그 말에 놀라 카셀과 눈을 마주쳤다. 여왕의 등에 난 그 상처가 두 사람의 머리 속에 그려줬다. '블랙은....... 여왕을 만나 뭘 하려 했던 거지? 처음부터 여왕을 죽이려고 이 긴 여정을 이끌어 왔단 말이야?' 카셀은 믿을 수 없었다. 믿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 질렀다. "닥쳐라! 캡틴 웰치의 기사도를 그런 식으로 비하시키지 마라. 그의 숭고한 의지를 너의 의지로 깔아뭉개지 마라." 마법사는 가볍게 한 손을 들었다. 그의 손 주위로 검은 박쥐 네 마리가 파닥거리고 날아다닌다. "자기 손으로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이가 입으로 나불대는 협박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네 마리의 박쥐가 한꺼번에 카셀을 향해 날아왔다. 방향도 속도도 제 각각인 그 박쥐를 카셀의 힘으로 막는 건 무리였다. 타냐는 쉐이든의 등에 손을 댄 채로, 구슬을 들어 푸른빛을 뽑아냈다. 네 마리의 박쥐는 급류를 이겨내는 물기 처 럼 푸른빛의 영역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 때 블랙이 집어 던진 할버드가 방심하고 있던 회색 로브의 마법사에게 날아가 가슴에 꽃혔다. 마법사는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둔탁하게 떨어졌다. 박쥐도 힘을 잃고 사라져버렸다. 양쪽에 힘을 내고 있던 타냐는 저항하는 힘이 사라지자, 비명을 내지르며 무릎을 끓어버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쉐이든의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댄 후부터 상처에서 피가 나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의 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 아이의 내기가 나의 죽음에 안식을 가져다주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블랙은 삐걱거리는 몸을 겨우 버티며 ‘함부로 말하지 마라' 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카셀은 혹시나 하는 기적을 기대하며 울프기사단과 검은 기사들의 싸움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싸움은, 마법사가 쓰러졌음에도 계속 되고 있었다. 결국 그 마법사는 죽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아 했다. "날 일으켜줘요." 타냐가 말했다. 카셀은 얼른 그녀를 부축했고, 그녀는 카셀에 치대어 계속 쉐이든의 몸에 힘을 넣고 있었다. "쉐이든은......?" "지금 창을 때거나 쉽게 건드릴 수 없어요. 출혈이 심해질 거에요. 여긴 나디움의 축복이 있는 곳 쉽게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런 부상이라면 오래 가지 못 해요. 저도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그리고 그 자도.......” 타냐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쓰러졌던 마법사는 할버드를 가슴에 박은 상태로 일어났다. 그는 한 손으로 그 묵직한 할버드를 떼어내더니, 맨 손으로 웰치의 무기를 박살내 버렸다. 조각 난 검은 금속은 바닥에 떨어져 재가 되어 부서졌다. "죽음을 원한다면 원대로 해주겠다. 그러나 너는 죽음에서 조차 안식을 구하지 못 하리라." 마법사의 손길을 따라가는 검은 연기가 바닥에 강물 풀어놓은 검은 잉크처럼 블랙을 향해 흘러갔다 블랙은 피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서서 카셀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려는 말이 머리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미안하군.' "웰치!" 카셀은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웰치를 덮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를 및은 하얀 빛이 그 검은 그림자를 한꺼번에 드러내어 버렸다. 마법사는 놀라 손을 접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오는 이는 새나디엘 여왕이었다. 그녀는 처음 마을에서 카셀과 만났을 때처럼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나, 바람도 없이 휘날리는 금발만은 달랐다 그녀는 바로 뒤에 퀘이언과 아이린을 대동하고 웰치와 회색 로브의 마법사 사이에 섰다. "여왕이시여.......” 블랙은 신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은 블랙을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주더니, 바로 회색 로브의 마법사를 향해 호통쳤다. 영웅의 죽음을 더럽히지 말라,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회색 로브로 얼굴을 가린 마법사의 어깨가 흔들렸다. 두 기사단의 격렬한 전투속에서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던 그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차라리 그것은 환희에 가까웠다. "어리석구나. 정말로 어리석도다, 새나디엘. 나는 지금 널 죽이기 위해 화이트 게이트를 무너뜨리려고 이토록 노력하고 있는데 너는 스스로 게이트의 보호에서 벗어나 내 앞에 나타났구나." 마법사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한손에서 검은 박쥐들이 퍼덕거리며 하늘로 날았고 그 슷자는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고 다른 한손에서는 싯누런 빛을 내는 초승달 모양을 한 빛의 뭉치가 만들어 졌다. "나는 모든 죽지 않는 자들을 지배하는 군주이며, 아란티아의 새로운 왕이 되어 하늘산맥을 지배할 예언자다 오랫동안 이루지 못한 꿈을 여기에서 이토록 쉽게 이를 줄은 몰랐노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내가 천 년을 살아온 인간들의 여왕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찬사와 축복은 오직 이 말뿐이구나." 수십 마리의 박쥐가 새나디엘을 향해 날아갔고, 뒤이어 한 손에 들고 있던 초승달의 모양을 한 빛의 뭉치가 날아갔다. 타냐는 비명을 지르며 마법의 구슬을 치켜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퀘이언, 아이린. 명령 한다." 새나디엘은 바지춤에 손을 찌른 채로 딱딱한 자세를 하고 그 어둠의 마법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검지를 내밀어 명령을 내렸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죽여 버려라." 순간 뒤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퀘이언이 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카셀은 칼날을 휘두른 곳의 뒷배경이 일그러져 보인 것에 놀랐다. 날아오는 박쥐 중에 절반이 그 한 번의 휘두름에 사라져버렸고, 뒤이어 날아오는 박쥐들 역시 그의 빠르지 않은 칼 놀림에 모조리 두 동강 났다. 초승달 모양의 칼날은 퀘이언의 정면이 아니라 뒤로 날아가 굥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여왕의 뒤를 노렸다. 그러나 그 칼날은 아이린이 쳐내 두 동강 났다. "베나 에사르크....... 베나 실크....... 상대가 그 두 자루 검이라면 나 역시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군." 그는 말하며 크게 두 손을 치켜들었다. 검은 구슬이 머리 위에서 만들어줬다. "내가 막는다, 아이린, 공격을 맡아라." 퀘이언이 칼날에 손바닥을 대고 자세를 낮게 잡았고, 아이린은 베나를 바닥에 꽂고 눈을 감았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만든 검은 구슬은 주위의 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 마법의 대결 앞에 카셀은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타냐 역시 자신의 마법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이 대결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퀘이언 그대는 이 마법을 막지 못할 것이며, 아이린 그대는 나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 두 자루 무기를 내려놓는다면 내 쪽에서 협상의 카드를 제시할 만한 뭔가를 내놓지." 퀘이언은 차갑게 대꾸했다. “한 번 하얀 늑대에게 물린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여유도 있나?" "설마 내가 두 번이나 물릴까!" 마법사는 바로 머리 위의 검은 구슬을 내던졌다. 퀘이언은 그 거대한 검은 구슬을 피하지 않고 칼을 내리쳤다. 엄청난 바람과 굉음이 울리며 카셀은 그만 뒤로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타냐도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둘 다 끝까지 싸움터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검은 구슬은 파괴되었고, 그 안에 퀘이언과 여왕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 칼을 박고 있던 아이린이 벌떡 일어났다. 칼날에 새겨진 문자에서 끓은 광채가 새나오고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도망치지 못한다, 이놈!"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 마법이 깨어진 반동으로 비틀거리는 마법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순간 마법사의 몸이 옆으로 사라지듯 움직였으나, 베나 에사르크는 그 움직임을 그대로 추적했다. 그녀의 칼이 스치고 난 후 마법사의 한 쪽 팔이 떨어져 나가 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속이 빈 헝겊 조각에 불과했다. "두 번이나 그 칼에 당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빈 소매는 검은 불길에 타서 사라져 버렸다. 아이린은 다시 자세를 낮추었으나, 두 번째 공격은 가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뭐가 즐거운 지 계속 킥킥대고 웃었다. "기억해 둬라, 아란티아의 여왕. 천년 전, 드래곤의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지켜줬던 옐로우 게이트가 십여 년 전 전투에서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졌다. 그리고 론타몬의 대군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 골드 게이트가 어제는 사람 하나 죽지 않고 무너졌다. 그대의 성스러움이 약해진 것이다. 이제 일 년 안에 화이트 게이트가 무너질 것이다. 간단한 계산이지. 그 때가 되면, 너의 목숨은 물론 이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내 앞에 무릎 끓을 것이다. " “나는 모든 살아있는 자들을 다스리는 이의 대리인이며, 하늘산맥의 축복으로 보호를 받는 여왕이다 너의 사악한 어둠은 드래곤 오브의 빛을 뚫지 못하며, 너의 사악한 죽음은 나디움의 성스러운 생명을 방해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영원이란 없다." "그건 네가 이어가고 있는 그 끈질긴 도전에 대해서겠지."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점점 밀어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그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군은 전투를 멈춰라!" 평원 전체를 울릴 만한 커다란 목소리를 쩌렁쩌렁 퍼트리며 소리친 사람은 블랙이었다. 검은 기사들은 그의 명령을 듣고 즉시 뒤로 물러났다. 울프의 기사들도 전투를 멈추었다. 바닥에 부서진 검은 기사들의 파편들이 스스로 합쳐져 일어나고 있었다. 울프의 기사들은 지금까지 끝없이 살아나는 그런 적들과 지금까지 싸우느라 모두 지쳐 있었다. 새나디엘은 짧게 숨을 내쉬며 블랙을 돌아보았다 블랙은 힘겹게 배에 박혀 있는 론타몬의 보검을 뽑아내더니, 비틀거리며 여왕에게 다가왔다. 쉐이든에게 베였다가 마법사에 의해 도로 붙었던 그 팔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는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는 힘겹게 다른 한 팔을 바닥에 펄어 또 일어났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 그는 새나디엘 앞에 서게 되었다. 그녀의 옆에는 퀘이언이 있었으나, 그는 블랙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웰치. 약속을 지켜주었구나." 새나디엘은 빙그레 웃으며 한 손을 내밀어 블랙의 투구를 어루만졌다. 그녀가 웰치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웰치가 살아있는 존재로 숨을 쉬던 마지막 날, 네나드로스 평원에서였다. 그녀는 수호기사 그란돌을 데리고 웰치를 만나러 직접 그 곳에 갔다. 아란티아는 전쟁의 가장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그 전투에 참가하길 거부한 상태였기에 그 근처에는 울프의 기사단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가 여기에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뭔가에 이끌려 걸어 나온 익셀런의 캡틴 웰치는 그녀를 보고 얼어붙었다. 그는 도저히 눈앞의 일을 믿을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란돌을 델리 두고 혼자서 웰치의 앞에 섰다. 대는 것만으로 부러뜨릴 그녀의 가는 목을 보고도 웰치는 전의를 불태울 수가 없었다.0 “당신이 진짜...... 아란티아의 여왕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웰치는 그 미소에 되려 겁을 냈다. 아마도 그가 아란티아 땅을 밟은 이후 유일하게 겁을 낸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일 것이다. "내일 전투에서 항복하거라."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잠시 주춤했던 웰치의 마음에 불꽃이 일었다. "헛소리!" “헛소리가 아니다. 너는 내일 전투에서 필연적으로 패배할 것이고, 그 네가 죽으면 이 전쟁은 사실상 종료될 것이다. 론타몬의 대군은 나름대로 노력을 하겠지만, 의미 없겠지. 나는 그대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포기 하거라." "나는 적군의 왕이 하는 권유를 듣지 않소. 아니, 오히려 웰치는 할버드를 치켜들며 눈을 부릅떴다. “지금 당신을 죽이면 이 전쟁은 커다란 반전을 맞이하게 될 거요." “들어라, 아이야. 이 전쟁은 론타몬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사악한 존재가 인간을 이용하여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대가 그 앞에 서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나를 유혹하여도 소용없소!" "유혹이 아니다. 그대 스스로 판단하여라." 그녀는 천천히 웰치에게 다가갔다. 무기를 들었건만 그는 그녀에게 대항하지 못 했고, 다리가 굳어 달아나지도 못했다. “나는 그대에게 항복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깨닫길 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큰 키의 웰치에서 손을 올려 뺨에 가만히 손을 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눈셉 뒤에 가려진 반짝이는 눈동자를 다시 바라볼 용기가 나지 많아 웰치도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무,물러나시오! 난...... 론타몬의 기사며,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론타몬의 황제뿐이오." "불쌍한 아이. 다른 이가 아니라 로핀이 너를 발견했더라면 너는 내 옆에서 그 힘을 썼을 텐데 어찌 하여...... 아니, 아니다. 이것도 네가 가진 운명이고, 너의 사명감이라면 나는 거기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 그대의 판단에 최선을 다하라."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서 다시 그란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웰치는 떨리는 손으로 할버드를 들었다. “당신을 벤다면....... 당신을 벤다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소. 론타몬이......” "그만 하렴. 이제 와서 네가 승리하여도 화이트 게이트로 함께 들어와 보상을 받아야 할 동료들이 없지 않느냐?" 웰치는 떨리는 입술을 떼지 못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꽉 쥐고 있는 할버드의 날이 공포와 슬픔으로 크게 흔들렸다. 새나디엘은 측은한 눈길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순수하게 빛나는 그 눈빛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 순간 웰치는 할버드를 내리쳤다. 내리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았다. 할버드의 날은 그녀의 등을 내리쳤고, 끓은 피가 풀밭에 후두둑 떨어졌다. 등을 가로지르는 상처 너머로 부서진 척추 뼈가 보였다. 그녀도 인간이었다. 베면 피를 흘리고, 피를 흘리면 죽는 그런 인간 이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보았던 피였다. 어둠 속이라 피처럼 느껴지지 도 않는 검은 액체에 불과했다. 적에게 죽음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뒤집어쓰길 주저하지 않았던 그런 피였다. 그러나 웰치는 그 피를 보는 순간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또 한 번 할버드를 들어 그녀 의 머리를 향해 떨어뜨렸다. 그 순간 칼이 하나 날아와 그의 어깨에 박혔다. 웰치의 육중한 몸이 뒤로 나가 떨어졌다. 웰치는 괴로운 신음을 내며 일어섰다가 다시 털씩 주저 아 버렸다. 칼을 던진 그란돌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분노한 그란돌이 다시 일어나 웰치 쪽으로 한 걸은 내디뎠으나, 그녀는 작은 손을 내밀어 그를 막았다. "됐다, 그란돌, 돌아가자. 나는 괜찮다." "폐하. 이런 상처를.......” "아란티아 안이라면 나는 죽지 않는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 가냘프기 그지없는 소리에 웰치는 어깨에 박힌 칼의 고통도 잊을 만큼 마음 한 쪽이 아팠다. "일어설 수가 없구나. 도와다오."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란돌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안았다. 어둠 속에서 검게 빛나는 피가 그녀의 굽은 등을 따라 물처럼 흘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은 웰치를 향해 말했다. “웰치. 너는 무장하지 많은 여자의 등 뒤를 베었다. 기사로서 이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내일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나디움으로 돌아와 내 앞에 무릎 끓고 이 일을 사죄하라. 허나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는 위대한 영웅의 슬픈 운명을 노래하겠다." 그녀가 사라지는 동안 웰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리고 9년이 지나 웰치는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여왕 앞에 다시 섰다. 새나디엘은 네나드로스 평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투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란티아의 여왕이시여." 블랙은 차가운 금속 팔로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온 저를 용납하신다면, 부디 그 때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새나디엘은 가는 손을 그의 투구 위에 올려놓았다. "용서 하노라." 가만히 한 번 새나디엘을 올려다본 블랙은 곧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머리에서 투구가 떨어져 나가고, 갑옷에서 팔이 떨어져 나갔다. 흔들리는 갑옷도 빈 속을 드러내며 옆으로 굴렀고, 다리도 하나씩 분해되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여왕은 낮은 어조로 울프의 기사들 앞에 서 있는 검은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화이트 게이트를 열어라. 그리고 과거의 전사들을 나디움으로 초대하노라. 그대들의 임무는 여기에서 끝이 나며, 안식이 그대들을 맞이할 것이다." 검은 기사들은 그 말에 모두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웰치가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갑옷 채로 무너지더니, 재가 되어 사라줬다. 화이트 게이트 앞의 너른 평야에는 이제 검은 기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루티아로 새나디엘 여왕은 쉐이든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창 끝을 가볍게 잡아 뽑았다. 뽑은 자리에서는 피가 조금 흘렀으나, 당연히 있어야 할 엄청난 출혈은 없었다. 창에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던 쉐이든의 몸이 깃털처럼 부드럽게 바닥에 떨어졌다. "어서 나디움으로 데려가거라." 가까이 있던 타냐가 그 커다란 덩치를 안아 올려 달렸다. 싸움을 끝낸 울프 기사단 중 열 명 정도가 이 쪽으로 달려오다가 타냐를 도와 쉐이든을 옮겼다. 프란츠가 바로 옆까지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다시 갈색 머리카락이 된 새나디엘을 보고, 프란츠는 약간 머웃거리다가 말했다. 아마 파티장에서 시녀인 척 하고 행동했던 그녀를 보지 않았더라면 프란츠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괜찮다. " 그녀가 대답했고, 퀘이언이 물었다. "피해는?" "부상자는 좀 있지만.......” 프란츠는 살짝 웃어 보였다. "다행이구나. 잘 했다." 퀘이언에게 그 말 한 마디 듣기 위해 싸웠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프란츠는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바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따라가려다 카셀에게 한 손을 들었다. "여어." 카셀도 무표정하게 한 손을 들어 그 말을 좇았다. "여어." "다 들었다. 약속 하나로 정말 무모한 짓을 하더군." "들었어?" 프 란츠가 새나디엘을 바라보니, 퀘이언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 친구들에게도 들리게 하셨습니까?" "너희들에게만 들리게 하는 게 더 힘들어. 다들 가까이 있었으니까. " 프란츠는 빙그레 웃어 보인 후 말했다. "그러니 우리도 약속을 지켜야지." “무슨약속?" 카셀은 정말 잊어버려 물었다 "살아 돌아오면 캡틴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그건 약속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고였지만.......” 프란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쨌든 울프 기사단에 온 걸 환영한다, 캡틴 카셀." 그토록 바라던 호칭이었으나, 카셀은 전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쓰러져 있는 빌리 쪽을 가리키며 쉐이든과 같이 치료해 달라고 부탁만 했다. 델리의 상처는 너무 치명적이라 그냥 데려가지 못 하고 프란츠는 그 자리에서 응급조치를 한 후 수레가 올 때까지 기다려 거기에 태워 데려갔다. "자,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 우리도 가자꾸나." 새나디엘이 음직이자, 그제야 퀘이언과 아이린, 카셀도 그 곳을 떠났다. 카셀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아이린." "예, 폐하." "왜 베지 못 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책임은 네가 질 줄로 안다." "예." 아이린이 슬픈 목소리로 대꾸하자, 새나디엘은 장난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이린도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둘은 서로에게 기대어 나디움까지 느긋한 산책을 이어갔다. 화이트 게이트 앞에 거의 도달했을 무립, 퀘이언이 새나디엘에게 말했다. "페하, 손님이 왔군요." "응?" 그녀는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도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마스터 데다인. 하늘산맥으로 데려간 내 늑대들을 돌려주러 돌아왔나?" 루티아의 마법사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후 말했다. "하늘산맥을 내려오다가 이 곳에 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서둘렀는데, 다행히 무사하시군요." "수호 기사가 두 명이나 있는데,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정도라면 세상이 멸망할 일 밖에 없지. 그래, 용건은?" "긴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데다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카셀은 그가 친구들을 모두 데려간 바로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안 좋은 예감에 얼른 물었다. "혹시 하얀 늑대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데다인은 잠시 카셀이 누구인지 살졌다. 카셀은 다급히 말했다. "저는 캡틴 울프입니다. 제 친구들의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아, 자네가......?" 그는 조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셀의 다리부터 머리까지 훑어본 후 말했다. "이런 말 하긴 뭣 하지만 로일이라는 기사가 말한 것과는 다르군." "로일이?" "여기 오기 직전 그가 이런 말을 했네. 캡틴이라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긴 얘기는 우선 생략하고 여왕에게 짧게 보고했다. "루티아가 함락되었습니다, 폐하. 그리고 하얀 늑대들 중 두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회의실에는 새나디엘과 퀘이언, 아이린, 카셀, 대신들 열두 명과 울프 기사단의 대표로 다섯 명이 참가하고 있었다. 제이메르는 자격이 없어 함께 있지 못하고, 타냐도 쉐이든의 병실에 있느라 자리에 없었다. 심각하게 데다인의 얘기를 듣던 여왕이 말했다. “그러니까 루티아에 괴물이 쳐들어왔고 그 괴물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 와서 나의 하얀 늑대들을 데리고 갔는데 그 네 명마저 위험에 빠졌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런 식인가, 마스터 데다인?" 여왕은 조금 화난 목소리였다. 그녀에게 있어 하얀 늑대란 먼 흡날 수호 기사가 될 후보임과 동시에 자식과도 같은 아이들인데, 그들을 데려다가 위험에 빠뜨렸으니 그녀의 분노는 당연했다. 데다인은 쩔쩔매며 말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두 사람이 실종된 건 사고였습니다. 아즈윈과 게랄드가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늘산맥은 아무리 루티아의 마법사라 하더라도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는 곳입니다. 하물며 마법도 쓰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갑자기 제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근처를 수색했지만, 찾지 못 했지요." 아이린이 추가 설명했다. "하늘산맥으로 들어가면 어떤 마법의 힘으로도 잃어버린 사람은 찾지 못합니다 만약 정말 사고로 그들을 잃어버렸다면, 데다인도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카셀은 놀라 말을 잇지 못 했고, 새나디엘은 가만히 눈을 감고 뭔가 생각에 빠졌다. "결국 또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가, 마스터 데다인?" 그는 새나디엘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단어를 택하느라 애쓰며 말했다. "현재 루티아는 괴물들에게 점령당해 있습니다. 그나마 많은 사제들과 마스터들이 로일과 던멜 두 사람의 보호 아래 겨우 살아남아 있지요. 우리는 울프 기사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깨달았으며,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려고 다시 여기 오게 되었습니다." 새나디엘은 차갑게 눈을 내리깔고 대꾸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의 병력은 내주기 힘들다. 아이린이 있어줘서 다행이었지, 하얀 늑대들도 없이 오늘 같은 일을 또 당하면 난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적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 대체 누굴 더 데려가겠다는 건가? 아이린? 부상당한 쉐이든? 그럴 수는 없지." “그, 그러나......, 새나디엘 여왕이시여, 우리의 동맹 관계는 이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데다인은 당황했다. "나도 이런 식으로 동맹을 깰 생각은 없다. 우선 말해보라. 그대가 원하는 병력이란 건 무엇인가?" “사실 저도 어느 정도의 병력이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로일에게 물었더니 , 그는 데려오지 않은 한 명, 즉 쉐이든과 자기들을 지휘할 캡틴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데다인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카셀을 돌아보았다. 카셀도 그 표정의 의미를 아는 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새나디엘은 기분좋게 웃었다. "로일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울프 기사단 절반은 죽었을, 아니 이 도시의 절반이 부서져야 해결되었을 일을 피해자 한 명 없이 해결했으니...... 심지어 적군조차 한 명 죽지 않지 않았느냐?" "폐, 폐하.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체스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카셀. 너는 나이트를 움직여 나이트를 막았고, 비습을 대동한 퀸을 끌어들여 적의 퀸을 막았다. 새나디엘이라는 움직이지 않아야 할 말까지 움직여 놓고, 어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새나디엘은 손을 내밀어 명령했다. "좋다, 마스터 데다인. 로일이 말한 대로의 병력을 주겠다. 그러나 현재 쉐이든은 부상 중이라 움직일 수 없으니, 쉐이든 대신.......” 그녀는 자리에 있는 울프의 기사들을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음, 내가 정할 일이 아니군. 캡틴 울프, 그대가 루티아로 데리고 갈 한 명을 선택하라." 카셀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폐하, 그리고 마스터 데다인. 전 솔직히 로일이 무슨 생각으로 절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곳이 전투가 한창이라면 제가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가지 않는 게 올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위험에 빠졌다는데 여기 남아 기다리는 게 괴로우니, 그 제안을 받아들여 가겠습니다." "네 욕심이라는 거구나." "예, 폐하." "명목이란 건 그런 식으로 바꿔도 상관없지." "고맙습니다. 그러니 쉐이든이 가지고 있을만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저와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동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 명령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폐하가 아닌 다른 분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울프의 기사가 아닌 자구나." 새나디엘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캡틴 울프의 뜻이 이러하구나. 아이린, 어찌 하겠느냐?" “짐은 모두 챙겼나?" 아이린이 얼린 문을 노크하며 물었다. 제이메르는 열심히 가방 안에 물건을 부셔 넣고 어깨에 했다. "괜찮겠나? 굳이 네가 싫다면 가지 않아도 좋아. 아직 네가 한 번도 제대로 된 긍정의 뜻을 나타내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마스터. 하늘산맥이라면 언제고 가 보고 싶었던 거니,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제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이린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녀석, 말을 하지 그랬니?" 아이린은 그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오래 걸릴 일이 아니라면 꼭 돌아와라.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많아.” 제이도 그녀의 허리를 꽉 붙들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래야지, 암. 꼭 살아서 돌아와라. 그것이 내가 내 주는 세 번째 테스트다." 둘은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아이나카스트 산의 입구로 갔다. 아이린은 지팡이를 쥐고 발리 가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데다인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이미 너무 지체되었다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마법사 치고는 성격이 굉장히 급한 양반이었다. "아까 내가 보낸 그림 보셨나요? 어때요?" “아, 그 괴물 그림 말이오? 맞소. 그 괴물들이 우리를 공격해 왔소. 그린데 어떻게 그런 그림을 얻으셨소?" “직접 그렸죠. 루티아 뿐 아니라 하늘산맥 각지에 펼쳐진 괴물인듯 해요. 트라카스트 산에서 이 쪽으로 오던 중에 나를 공격해 왔지요. 만약 이런 게 정말하늘산맥 여기저기에 돌아다니고 있고, 심지어 루티아까지 공격했다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닐 겁니다." 아이린은 작게 속삭이며 말했다. “만약 내 제자가 그 괴물들에게 당한다면 서둘러 연락을 보내주세요. 내가 직접 가서 박살을 내버릴 테니." "든든한 말씀이구려." 데다인은 헛기침을 하며 대꾸했다. 그의 뒤에는 타냐가 기다리고 있었고, 제이메르는 벌써 출발 준비를 끝냈다. 카셀은 마중 나온 울프 기사 몇 명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프란츠는 그의 손이 부서질 정도로 세게 악수를 했고, 푸티에르는 나중에 체스 한 판을 기약했으며, 말라는 가다가 심심하면 읽으라며 자기 나라의 역사책을 한 권 선물해 주었다. 실디레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머금고 카셀을 껴안았다. 그 후 카셀은 새나디엘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쉐이든을 못 만나고 가는 게 정말 아쉽습니다. 부디 제 인사를 대신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다. 몸조심 하거라. 전에도 말했듯이 너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과 하얀 늑대들, 네 본연의 능력이 모두 합쳐지면 너는 루티아에서도 오늘 같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카셀이 돌아서려 하자, 새나디엘이 다시 한 번 그를 불러 세웠다. "아, 그리고 카셀, 내기 말인데........" "프란츠와 제이메르의 대결 말입니까?" "듣자니 무승부라는데, 무승부라서 내기는 없던 걸로 하기에는 재미없지 않나? 그러니 둘 모두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건 어떻겠니? 말해보렴.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리고 내 소원 또한 들어다오." 내내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지며 카셀은 작게 웃었다. “그럼 전 예전에 폐하께 소원을 빌었던 사람과 같은 소원을 빌겠습니다. 제가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너무 쉬운 소원이잖니? 만나게 해달라고? 그럼 난 이렇게 말해 주겠다. 넌 이미 그 사람과 만난 적이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게 될 거야." 근처에 인연이 있다고 할 만한 여자가 한 명뿐이라, 카셀은 저도 모르게 실디레를 보게 되었다 실디레는 여왕의 말을 듣지 못 하고 그냥 손만 흔들고 있었다. 카셀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웃었다. "폐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네가 사람'의 소원을 택한다면, 나 역시 그 때 그에게 했던 부탁을 하고 싶구나." 카셀은 순간 몸이 굳었다. “드, 드래곤을...... 말입니까?" "잘 다녀 오거라." 협상을 용납하지 않고 새나디엘은 카셀을 떠밀듯이 보내버렸다. 카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앞서 숨 속으로 들어간 데다인의 뒤를 따랐다. 그의 옆에 제이가 섰다. "걱정 되냐?" 그가 물었다. 카셀은 이 진정되지 않는 가슴이 정말 걱정이 되어서 쿵쾅거리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니. 기뻐." “이 자식, 아까는 죽을상을 하더니....... 뭐가 기뻐?” “아버지는 하늘산맥에 와본 적이 없다고 했거든. 왠지 내가 이긴 것 같아서.......” 카셀은 웃었고, 제이는 그가 페 웃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늘산맥의 두터운 숲이 만들어내는 어둠이 점점 짙어졌다. 에필로그 빌리의 꿈 빌리는 눈을 뜨고 커튼이 쳐 있는 환한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이게 죽은 후의 세계인지 아니면 살아남아 보는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고민했다. 아니면 죽기 직전에 보는 환상이거나. 이게 현실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어딘가를 꼬집어보는 바보 같은 짓을 하기전에 다행히 슈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깨어났네. 내일쯤에나 일어날 거라고 의사가 그러던데." 슈벨은 빌리의 몸이 살짝 뛰어오를 정도로 몸을 날려 침대 옆에 털씩 주저않았다. "여긴...... 어디지?" "나디움의 어느 병원이다. 아무래도 적군의 캡틴이다 보니 왕실로는 들일 수 없다더군. 그래도 꽤 시설 좋은 병원이니 기분 나빠하지는 말아." 빌리는 슈벨의 도움을 받아 벽에 등을 대고 자리에 앉았다. 가슴과 배에 붕대가 대어져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지?" 빌리가 물었다. “마법이라고 밖에....... 여기 올 때만 해도 죽을 상처였는데, 뭔가 이상한 조치를 하는 것 같더니 살아남았다고 내게 통고해 주더군. 나도 사실 여기 와서 많이 다쳤는데, 벌써 이렇게 걸어 다니잖아." 슈벨은 대답하며 빌리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살아난 게 다행이야. 여왕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부상이니 깨어나거든 고맙다는 인사나 한 마디 하라고 의사가 그러더라." 빌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옆에 새워놓은 론타몬의 보검을 돌아보았다. "블랙, 아니, 웰치는?” 어렴풋이 기억은 났다. 그러나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죽었어." 슈벨은 슬픈 미소를 보였다. "그래. 웰치로서는 잘 된 걸지도.......” 빌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은 어뻘 수가 없었다. 겨우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어, 빌리는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멀리 탑처럼 우뚝 솟은 화이트 게이트와 그 앞의 별은 평원이 보였다. 그 날의 전투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몸은 괜찮나?" 가벼운 차림의 키 큰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빌리는 잠시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 쉐이든...... 이라고 했지? 하얀 늑대." "맞다." "너도 꽤 심한 부상을 당한 걸로 아는데 멀쩡해 보이는군." "너보다야 덜 치명적이었다." 그는 셔츠를 들어 배를 돌돌 감싸고 있는 붕대를 보였다. 배 쪽에 댄 약초로 붕대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쉐이든은 고갯짓으로 따라오라고 하며 계단을 올라갔고, 딱히 방향을 잡고 산책을 하던 게 아니었던 터라 빌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잘 말해 놨으니 편히 쉬다가 떠나라, 빌리. 원한다면 한달이든 일 년이든. 그 몸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몇 달 필요하겠지만, 너 편할대로 해. 누구도 쫓아내지 않을 거다." 쉐이든이 말했다. "카셀은?" 빌리는 갑자기 궁금해져 물었다. "루티아로 떠났다.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인사도 않고 루티아쪽에 일이 있다며 가버렸지." 쉐이든은 화를 내며 중얼거렸다. 빌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쪽에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하늘산맥의 도시를 너희들은 옆 나라 방문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계단의 끝에는 여왕의 성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빌리는 창피한 것도 모르고 멍한 얼굴로 성을 올려다보았다. 쉐이든은 아무 말 없이 계단 끝의 난간에 손을 짚고 기다렸다. 빌리는 그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말로 표현하는 것부터가 죄악인 것 같아 그저 쉐이든의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만 회복된다면 나는 떠나겠다." 빌리가 말했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이 곳은 나의 땅이 아니다. 나는 론타몬으로 가야 해. 어쨌든 나는 익셀런의 기사니까." "말리진 않겠다. 그런데 슈벨도 데리고 갈 건가?" 쉐이든이 손가락으로 성 옆에 있는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곳은 울프 기사단의 숙소인 건 알았다. 요새 슈벨이 새벽같이 일어나 갔다 오는 장소임에 틀림 없었다. "그건 슈벨이 결정해야지. 녀석은 아닌 척 하려고 여길 증오하는 것처럼 말해왔지만, 사실은 여길 돌아오고 싶었을 거다. 강요하지는 않아." 빌리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슈벨이라면, 아마 그는 날 따라올 거다. 무엇보다 녀석은 내게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쉐이든은 고개를 갸웃했다. "슈벨 녀석과 같은 말을 하는군." "녀석이?" "자기가 빌리 너라면 아마 따라오라고 했을 지라더군. 여길 정말 좋아하지만, 자기가 갈 곳은 론타몬이라고 했다." "그랬나?" 빌리는 흐뭇하게 미초 지으며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서 여왕의 성을 바라보았다. 찬 바람이 들자, 상처가 쑥쑥 아렸다. “난 가보겠다." 빌리는 계단 쪽을 향하다가 갑자기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정말 솔직하게 말해다오." “난 거짓말이나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는다. 물어봐라." “캡틴 웰치는, 하얀 늑대로서의 네가 보기에 어떤 사람이었지?" 쉐이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솔직하게 말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군. 그는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본 중 최고의 적수였다. 그 외에는 별로 할 말도 없어." 쉐이든은 천천히 울프 기사단의 숙소로 걸어갔다. 빌리는 쉐이든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대답을 원했다." 여름인데도 이 높이에서 부는 저녁 바람은 꽤 찼다. 빌리는 병원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 그는 또 한 번 죽음에 시달리며 환각을 보았을 때처럼 웰치의 모습을 보았다. 네나드로스 평원 전투를 앞두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처럼 서글프거나 절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부하가 그에게 눈물로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 번 보았던 과거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은 웰치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왜 그 때는 그게 슬픈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저토록 당당하게 웃는 그 얼굴을 왜 죽음을 각오한 기사의 절망적인 미소라고 생각한 걸까? ‘캡틴, 왕실에서는 오직 당신의 패배만 알고 있습니다. 골드 게이트 전투 후에 당신이 세운 엄청난 공을 인정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는 겁니까? 차라리 항복하십시오. 어떤 나라에서든 당신이 투항한다면 예우를 다하여 맞이할 것입니다. 캡틴.......’ '나는 익셀런의 기사다. 그러고 내가 할 일은 항복이 아니다.' 블랙은 천천히 옆구리에 끼고 있는 투구를 했다. 그리고 벽에 세워진 할버드를 들었다 전장으로 떠나는 그를 붙잡는 부하의 목소리는 애절했다. 그러나 웰치는 모든 것을 거절했다. '내가 죽을 곳은 내가 선택하며 그 곳은 네나드로스 평원이 아니다. 나는 곧 나디움으로 갈 것이다. 거기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 이상 나는 죽지 않는다........’ 그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일까? 빌리는 아직도 그것이 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슈벨이 알까? 아니다. 그는 블랙의 최후를 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 깨어나거든, 쉐이든에게 묻자. 쉐이든이 모르거든, 아란티아의 여왕께 여쭙도록 하자. 그러나 잠에서 깬 후에도 빌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네나드로스 평원의 마지막 전투에서 웰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키며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나는 이 곳에서 죽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나디움으로...... 아란티아의 여왕에게 돌아가야 한다. 다시 골드 게이트로 돌아간다면 결코 하얀 늑대들에게 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따르던 기사들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온 내가, 이 곳에서 멈출 수는 없다.' 자고 있는 빌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다. '아란티아의 여왕에게 돌아가 이 모든 일에 사죄 드려야 한다. 나의 동료들의 죄를 씻기 위한 이기적인 마음으로 흘리게 했던 인간의 피에 대해 사죄 드려야 한다. 성스러운 수호자였던 드래곤들을 살해했던 일에 대해 사죄 드려야 한다. 전쟁으로 흘리는 피가 닿지 말아야 할 이 땅에 저지른 죄와 그 분께 저지른 잘못에 사죄 드려야 한다.' 오직 적군에게서만 그 기사도와 용맹을 인정받은 익셀런의 캡틴인 웰치의 마지막 목소리가, 아란티아에서 먼저 죽은 동료들에게 나직이 울려 퍼졌다. '여왕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2부 아란티아의 여왕' 편 끝 '3부 하늘산맥에서 온 마법사' 로 계속 도서명 : 하얀 늑대들8 지은이 : 윤현승 펴낸이 : 신현호 출판사 :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 2004년 8월 25일 <지은이소개/윤현승> 1978년생인 윤현승의 대표작으로는 다크문 (1999), 헬파이어, 흑호가 있다. 싫어하는 것들은 소주, 여름, 더위, 장마, 영화 보는 도중에 결말 얘기하는 사람, 책 읽고 있는데 결말 얘기하는 사람, 웃긴 얘기 했는데 비웃는 사람이다. <차례> 프롤로그 - 사라진 카셀 1. 던멜 (1) 블랙풋의 템플 / 29 (2) 하늘 산맥의 밤 / 57 (3) 루티아 / 67 (4) 마법사들의 회의 / 97 (5) 자경단 / 113 (6) 모즈들의 공격 / 133 (7) 카구아 / 165 (8) 라르비튼의 다리 위에서 / 201 (9) 루티아노의 결정 / 217 (10) 넌서치 Nonesuch / 229 (11) 플로라 / 259 (12) 아란티아에서 온 원군 / 273 (13) 화이트비 Whitebee / 289 (14) 루티아의 마지막 밤 / 305 (15) 배신자 / 325 (16) 케인스윅의 전투 / 341 프롤로그 사라진 카셀 “어린 시절부터 이 곳은 영원히 전설 속에 있을 것이고 나 같은 평범한 농부는 절대 밟지 못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좀 정신없는 와중에 와버리긴 했지만, 이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군요." 아이나카스트 산을 통해 하늘 산맥에 처음 발을 디딘지 거의 한 시간 만에 카셀이 입을 열었다. 카셀처럼 감정 풍부한 녀석이 말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라는 게 뭔지 쉽게 와 닿지 않았으나, 제이도 그 말에는 공감했다. 그런 말을 했음에도 카셀은 앞으로 일어날 일보다 뒤에 남겨둔 일이 더 걱정인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 제이와 눈이 마주쳤고, 그럴 때마다 제이는 저도 모르게 같이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 제이는 또 제일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타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정말 표정이 없는 여자였다. 예전부터 그는 마법사라면 딱 질색이었다. 아이린과 함께 그 회색 로브의 마법사를 상대로 한밤중에 결투를 벌인 후에는 더더욱 싫어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눈을 마주치게 되는 것도 질색이었다. 제이는 노골적으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할 말이 있으면 그렇게 눈치만 보지 마시고 그냥 하십시오." 타냐는 눈치가 빠를 여자였다. “할 말 없어. 눈치 보는 거 아니다." 제이는 앞만 보며 그녀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제이메르?" “묻지 마." 제이는 즉시 거절했으나, 타냐는 개의치 않았다. “카셀과 제이메르, 두 사람은 완전히 성격이 다르고 하는 행동도 말도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겁니까? 둘이 만난지 일주일도 안 된 거 아니었습니까?" “시비냐, 그거?"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제이는 걸음을 멈추었고, 타냐도 덩달아 섰다. 거의 부딪칠 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도 타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실제 거리는 한 걸음, 검의 거리로는 여섯 걸음. 제이에게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제이는 마법사를 상대로 한 간격 재기는 신뢰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아님에도 간격을 재는 게 무의미한 자들도 있었다. 마스터 퀘이언, 쉐이든 울프, 블랙, 그러고 아이린....... 가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인정하치 싫은 패배감이 불복 치밀었다. 카셀이 루티아에 같이 갈 사람으로 자신을 지목해 줘서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론 그곳에 남아 아이린에게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섭섭하기도 했다. 그 반대 상황이었어도 섭섭하긴 매 한가지였을 테지만....... ‘잠깐, 내가 왜 카셀과 같이 가게 된 것을 기뻐한 거지?' 타냐가 궁금해 한 부분이 이거였나 싶어 그는 그녀를 코앞에 두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마스터 데다인께서 꽤 앞서 계십니다. 뒤따르시지요." 타냐가 말했다. 제이는 잠깐 동안 그녀의 길을 막고 서 있는 걸 까먹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그러다가 또 되돌아서 타냐에게 말했다. “카셀은 좋은 친구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어." “그렇습니까?" 타냐는 높낮이 없는 말투로 대꾸하며 눈짓으로 빨리 일행을 따라가기나 하라고 말했다. 제이는 투덜대며 다시 걸었다. 그러나 데다인이 보이지 않아 잠시 어리둥절했다. “직진하십시오." 그가 머뭇거리자 타냐가 뒤에서 말해주었다. “나도 알아." “모를 겁니다. 아무리 당신이 뛰어난 레인저라 해도 하늘 산맥의 숲에서는 본래 가지고 있는 방향 감각이 통하지 않지요. 오직 나디우렌의 증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마법사만이 하늘 산맥에서 길을 잃지 않습니다."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그는 도대체가 방향을 알 수 없는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당황하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앞서 있는 데다인을 보고 있지 않으면 자꾸 딴 길로 샜다. “제이메르는 발자국만으로 저를 쫓아왔을 정도로 뛰어난 레인저에요. 그런 친구가 여기선 길치나 다름없다는 건가요?" 카셀은 제이가 민망해할 칭찬을 하며 물었다. 타냐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누구든 그렇습니다." “재미있군요. 달리 주의해야 할 다른 사항은 없나요?" 카셀이 물었고, 데다인이 대신 대꾸했다. “없다. 그냥 내 뒤만 따라오면 돼. 다른 하얀 늑대 두 사람도 내 뒤만 얌전히 따라왔으면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는 데다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카셀을 무시하고 있었고, 말끝마다 상대를 깔보는 어조를 깔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마법사였다. 멍청한 건지 대범한 건지, 카셀은 그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느긋하게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루티아의 일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괴물이 공적해 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요." 데다인은 뒤는 돌아보지 않고 짧게 설명했다. “루티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에게 함락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요새가 무너졌고, 다운서치가 놈들의 손에 들어갔지. 그 싸움에서 하얀 늑대 둘은 크게 도움이 되었으나, 괴물들의 숫자가 워낙 많은 터라 둘 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같은 수준의 기사 스무 명 정도는 기대했으나, 새나디엘 여왕은 응하지 않더군." 데다인은 더 이상의 질문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말끝을 끊었다. 제이는 울프 기사단도 마음에 들어가던 참이었다. 데다인은 지금 그가 좋아하게 된 두 가지를 모두 무시하고 있었다. 화가 부글부글 끓는 제이를 보고, 카셀은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제이는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참았다. 한 시간쯤 비가 오다가 갑자기 밤이 되었다. 데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여기에서 밤을 샌다고 말했다. 제이는 평상시 하던 대로 땔감을 준비하거나 먹을 것을 장만하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데다인이 즉시 저지했다. “길을 벗어나지 마라. 이 곳에서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즉시 길을 잃게 된다." 제이는 당장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레인저인지 한 차례 떠들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즈윈과 게랄드가 길을 잃었다고 했는데, 어떤 경로로 그런 사고가 발생했는지 듣고 싶군요." 카셀이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으며 물었다. 데다인은 차갑게 말했다. “그건 루티아에 도착하면 차츰 설명해 주지. 아니면 미리 가 있는 하얀 늑대들에게 묻던가. 지금은 안전하게, 그리고 가급적 빨리 루티아에 도착하는 것만 신경 쓰도록 해라. 도착하자마자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일찍 자두고." 카셀이 더 할 말도 없게 쏘아붙이고 돌아서는 그를, 타냐가 불러 세웠다. “마스터 데다인." “왜 그러나?" “지금 당신은 당신에게 묻는 사람이 누구인지 좀 더 생각해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는 루티아를 구하러 가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입니다." “공손하라는 뜻인가, 마스터 타냐?" “적어도 마스터 퀘이언께 대하는 정도는 돼야 하겠죠." 데다인은 다시 카셀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쉬고 돌아섰다. “노력하지." 그는 밝게 빛을 내는 지팡이를 앞에 세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 사람은 달빛도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혔다가 이내 타냐가 목에 걸고 있는 구슬의 푸른빛으로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원래 여유 있고 남을 배려하는 마법사였습니다. 또 누구보다 루티아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저건 지금 처한 위험에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지, 카셀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이해하세요." 타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원군을 기대하고 왔는데 고작 두 사람, 그것도 한 명은 칼도 잘 못 쓰는 아직 어린 녀석이니 마음에 안 들겠죠." 카셀은 아까 살짝 내린 비로 젖은 머리를 털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조금 적정입니다. 로일이 무슨 근거로 저를 지목해서 부른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요." 타냐도 자리에 앉았고, 제이도 몇 넌 동안이나 쌓였는지 푹신하기까지 한 낙엽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스터 타냐, 하늘 산맥에 대해서 얘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카셀은 마른 빵을 뜯어 둘에게 나눠주며 물었다. “어떤 얘기 말이죠?" 타냐는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되물었다. “여러 가지....... 신화나 전설 같은 거요. 우리에게는 어린애들을 위한 동화 밖에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모험가가 하늘 산맥을 올랐다가 길을 잃었는데, 거대한 괴물 새를 발견하여 그 새를 타고 돌아 왔다더라, 하는 정도? 또 유명한 사냥꾼이 기이한 동물을 잡으려고 하늘 산맥에 들어갔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베갯머리에서 애들 겁줄만한 얘기도 있고....... 정확히 말해 하늘 산맥은 어떤 곳입니까?" “하늘 산맥은 드래곤들의 성지입니다." 타냐는 간단히 설명했다. “들어본 것도 같군요. 가넬로크의 드래곤 기사단과 함께 하는 네 마리 드래곤이 하늘 산맥에서 왔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실제 역사가 너무 오래된 나머지 전설처럼 흐려진 부분이죠. 드래곤들이 이 곳을 지배하고, 엘프들은 그 지배 안에서 삽니다. 요정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쪽은 다른 한 록을 경멸하고 다른 한 쪽은 한 쪽을 증오 한다더군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엘프 얘기도 조금 들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부족을 구성하고 삽니까?" “부족이라기보다 나라죠. 하늘 산맥의 크기를 작게 보지 마십시오. 이 안에 몇 개의 엘프 국가가 있는지, 하늘 산맥의 남쪽 끝이 어디 인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요." “엘프들을 본 적이 있나요?" “루티아를 찾은 엘프라면 본 적이 있습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오고 가는 간단한 교역이랄까요? 얘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죠. 그들은 고대어를 쓰고, 저는 그다지 그 언어에 능통하지 않아서." 제이는 한참 그 얘기를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현실적으로 말하니 좀 재미없군. 옆집에 누가 살고 키우는 개가 점박이라는 둥......,그런 얘기 같잖아. 내가 이야기꾼들한테 들은 얘기는 그런 게 아니었어." 카셀은 웃음을 터트렸고, 타냐는 딱딱하게 물었다. “그럼 제이메르가 들은 얘기란 어떤 거죠?" 제이는 얘기를 시키면 언제나 당황했다. “그냥, 엘프가 인간 세계로 내려와 인간과 사랑에 빠졌고 애를 낳았는데, 날개가 달려서 하늘로 날아갔다는...... 음, 여기까지만 하고 포기하겠어." 제이는 빵만 씹었다. “그런 얘기라면 저도 대륙에서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쪽이 더 현실성이 없는 것 같군요." 타냐의 건조한 어조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도 제이에게는 시비를 거는 걸로 들렸다. 카셀이 중간에 없었다면 아마 오래 전에 타냐와 목숨을 걸고 한 판 벌려 자신의 간격 재기가 마법사와 싸울 때 얼마나 소용이 있는지 시험해 보다가 일찌감치 목숨 하나 버렸을 것 같았다. 전 같으면 그런 일에 목숨을 아까워할 제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디움에서 무지막지한 녀석들을 잔뜩 만난 후, 때로 나중을 위해 목숨을 아껴둬야 할 상대도 있다는 걸 배웠다. 제이는 그냥 참기로 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스스로도 놀랐다. “당신은 루티아의 마스터인데도 루티아에 머물지 않고 대륙을 떠돌아다녔다고 들은 것 같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카셀이 물었고, 타냐는 길게 생각했다. 이린 이야기까지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 마스터를 찾아 다녔습니다." “타냐의 마스터?"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입니다. 열두 살 때 그를 만났고, 그는 저를 루티아로 데려가 마법사로 키웠죠. 그게 십 삼사 년쯤 전 일입니다. 어렸을 때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그리고 그는 10여 년 전, 아란티아에 위기가 닥쳐올 거라며 저와 헤어져 전쟁에 개입했죠. 아실 겁니다. 그리고 론타몬이 항복을 선언하며 물러갔을 당시의 하얀 늑대들과 함께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해치우러 가야 한다며 떠났죠. 그 일은 아마 8년쯤 전 일일 겁니다. 그 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카셀은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타냐는 좀 더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라졌습니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그 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하얀 늑대들 중 하나인 메이루밀이라는 분에게 들었습니다. 사실 이 일은 저나 루티아에게 만이 아니라, 울프 기사단의 캡틴인 당신에게도 중요한 얘기가 될 것 같군요. 마스터 퀘이언께서도 이 일을 얘기해 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게죠. 그러니 이 일은 좀 더 공을 들여 천천히 애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카셀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제이는 문뜩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십 몇 년 전 일이 어렸을 때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면 지금이 몇 살이란 소리야?" “스물여섯입니다만?” 타냐가 차갑게 쏘아보자, 카셀이 대신 질책했다. “그런 질문은 그리 예의 바르지 못해, 제이메르.” “아, 그런가? 난 한 마흔 살쯤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궁금했지." “제이메르, 너 진짜!" “뭐가?" 그때 타냐가 갑자기 가슴에 걸린 구슬을 치켜들었다. 제이는 순간적으로 자기가 마법으로 공격당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말실수를 저지른 건가 싶어 등골이 오싹했으나, 이내 뒤에서 들리는 묘한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셀은 두 사람이 주시하는 뒤쪽을 목을 길게 빼어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제이와 타냐는 동시에 카셀에게 대꾸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움직이지 말아요!" 카셀은 엄마한데 난데없이 한 소리 들은 어린 소년의 눈을 하고서 얼어붙었다. 제이는 칼을 꺼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내밀었다. 처음에 그 소리는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으나, 점점 한족 방향에서 모여들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규칙적으로 가까워지는 진동과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 거기에 큰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건 엄청나게 커다란 동물의 발소리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동물은 없어." 제이의 말에 타냐가 대꾸했다. “코끼리보다 더 클 것 같군요." “코끼리가 뭐냐?" “아크랜드에 살지 않는 동물입니다. 예를 잘못 들었군요, 제가." 곧 동물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는 멈추었고, 낙엽을 밟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제이와 타나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둘 다 싸움이 벌어질 경우 카셀을 바로 뒤에 두고 싶지 않았다. “공격이 온다면 제가 방어를 맡겠습니다. 당신이 공격을 맡아주십시오."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자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직감했는지, 타나가 말했다. “상대가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건가?" “추측이 아닙니다. 마법사입니다. 그것도 막강한." 타냐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스터 데다인께서 하필 자리를 비울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말투에는 근심이 가득했음에도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다. 타냐의 푸른 불빛 안으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마법사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말없이 두 사람을 주시하는 것 같더니 로브 안에 숨긴 지팡이를 내밀었다. “저 자식, ‘그 자식' 아니야?" 제이가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지팡이 끝이 하얗게 타들어가더니 타냐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지팡이의 방향이 시간차 없이 제이메르를 향했다. ‘검의 간격'을 재는 것으로 모든 공격과 방어를 하는 제이였기에 간격을 보여주지 않는 마법의 공격을 막는 건 생소했다. 하지만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 정도는 보였다. 제이는 지팡이와 자신의 심장 사이에 있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칼을 내질렸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뭔가가 칼끝에 닿아 폭발했다. 벽에 세게 부딪친 것처럼 뼈가 흔들리는 충격이 있었다. 제이는 뒤로 밀려났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마법사는 그 공격으로 제이까지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지 한 걸음 내디뎠다가, 아직 제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멈췄다. 제이는 입맛을 다시며 칼을 슬쩍 살폈다. “네 마법이 ‘그 자식' 보다 더 약하거나 아니면 칼이 좋거나 그런 모양이군. 어쨌든 칼이 부러질 일은 없겠구만." 제이는 칼을 손바닥 위에서 한 번 돌린 다음 자세를 잡았다. “이제 마법사랑 싸우는 방법을 조금 알 것 같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다른 마법을 쓰는 잡니다. 힘은 막강할지 모르나, 생명과 시간을 빼앗는 그 끔찍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그리고 저 자는 실수했습니다. 자기 마법이 나와 같은 종류라는 걸 드러냈거든요." 타냐가 뒤에서 다시 걸어오며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에 묻은 나ant잎과 흙을 털었다. “괜찮나?" 제이는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조금 위험했습니다만, 두 번 당할 장도는 아닙니다. 물론 저 혼자 당해낼 마법사도 아닌 것 같군요." “네가 또 내동댕이쳐지지만 않으면 내가 죽이겠다.” 제이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양팔을 벌리더니 뭔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이는 상대에게 그럴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아 당장 뛰어나갈 준비를 했다. 그 순간 그 마법사의 뒤편에서 거대한 머 리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시커먼 얼굴 좌우에 박힌 사람 머리만한 붉은 눈동자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지금까지 맹수를 보고 두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는 제이조차 단번에 다리가 굳었다. 냉정을 잃은 적 없는 타냐도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물러서요!" 타냐가 소리 쳤다. 허연 이빨이 이중으로 겹쳐진 입에서 뜨거운 것이 밀려나왔다. 처음에는 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푸른 구슬의 빛을 가리는 어둠의 덩어리였다. 제이는 왼쪽으로 몸을 날렸고 괴물의 입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기운은 제이를 지나쳐 뒤에서 터졌다. 터진 자리를 중심으로 주위의 나무들이 뿌리 채 뒤로 밀려났고, 제이도 허공으로 나가떨어졌다. 푸른빛은 사라졌다. 제이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처박혀 바닥을 뒹굴었다. 날카로운 잔 나뭇가지가 그의 얼굴을 베고 지나갔고, 뜨거운 바람과 차가운 흙이 그의 등을 덮었다. 제이는 숨도 쉬지 못하고 엎어져 있었다. 한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게 아니었다.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제이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큰 소리를 들었고, 그 다음부터는 귀가 멍해져 일시적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제이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집중시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망치로 온 몸을 구석구석 두들겨 패놓은 것 마냥 뻐근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선 숨을 쉬는 것이 급했다. 그 다음에는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였고, 마지막으로 팔을 움직였다. 팔을 움직여 아직 칼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제이는 칼을 지팡이 삼아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엎어져 있었지?' 마법사의 빛이 아니면 코앞도 보이지 않던 아까와는 달러 주위의 사물을 인식할 만한 조명이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희미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먼지 사이로 달과 별이 보였다. 왜 갑자기 저런 게 보이는 걸까 하는 멍청한 질문이 불쑥 떠올랐다. 주위의 나무가 모조리 넘어져, 아까까지 하늘을 가리던 지붕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폭발의 중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카셀!" 제이는 크게 소리쳤다. 목이 아팠다. 망토가 가리지 못한 얼굴과 피부가 화끈거렸다. 눈이 따끔거리고 관절 마디 하나하나가 삐걱거렸다. “카셀, 어디 있냐?"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카셀이 대답을 했더라도 아직 귀가 멍해 들을 수 없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서인지 바로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도 뒤늦게 감지하고 칼을 내밀었다. 데다인이었다. “뭐였나?" 그는 제이의 칼이 아니라 나무가 쓰러진 광경을 보고 놀라 물었다. 제이는 칼을 접었다. “어둠 속이라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엄청나게 큰 놈이었다. 그놈이 입에서 내뱉는 어떤 거 한방으로 이 꼴이 되어버렸어." 데다인은 바닥에 가라앉은 풀숲을 손바닥으로 더듬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째서 이 곳에......? 아니, 아니다. 서둘러라. 이 곳에 오래 있다가 또 그 괴물에게 사로잡힐지 모른다." “이봐, 카셀과 여자 마법사도 같이 데려가야지." “네가 무사한 걸 보니 타냐도 안전할 것이다. 그녀는 드래곤을 만났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니까." “카셀은?" “전투가 있었겠지? 카셀이 있던 자리가 어디였나?" 제이는 대충 짐작으로 가리킨 자리를 보고 뻗었던 손가락을 접었다. 폭발이 일어난 중심이었다. 그 괴물이 노리던 건 어쩌면 타냐와 제이가 아니라 카셀이었는지도 몰랐다. 이런 폭발의 중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체 어떤 종류의 기적이 필요할까? 제이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난 먼젓번 두 명의 하얀 늑대가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단순히 길을 잃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실종 원인을 다시 찾아봐야겠군. 루티아를 위협하는 적 중에 내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뜻이니까.......” 데다인은 벌써 길을 한참이나 걸어간 뒤라 뒷말은 제이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어이, 이봐. 카셀을 찾아야지!" 제이가 소리했다. “그의 살 조각이라도 찾으라는 건가?" 데다인이 대답했다. 제이는 화가 울컥 솟았으나, 데다인은 곧 손을 흔들어 사과했다. “미안하군. 일이 이렇게 된 것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렇다. 좋다. 너는 나무가 무너진 곳을 중심으로 수색해라. 나는 이 근처 숲을 더 살펴보겠다. 하지만 그 괴물이 아직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도록." “그 괴물이 대체 원데?" “나도 잘 모른다. 하늘 산맥에는 루티아의 학자들도 모르는 생물이 많아." 데다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고, 제이도 고개만 끄덕였다. 데다인의 말이 옳았다. 반 시각을 돌아다녔지만, 카셀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흔적은 조금도 찾아내지 못 했다. 사실 제이는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남쪽인지 조차 구별하지 못 하고 있었다. 카셀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데다인이 다시 어둠 속에서 돌아왔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도 찾아다니느라 고생했는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 내 말을 조금 믿어주겠나? 이곳에서 카셀은 찾을 수는 없다. 일반인이 길을 벗어나면 어지간한 수색으로는 찾아내지 못 해. 나를 믿어라. 타냐도 어딘가에서 부상당해 있다면 찾아야 하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괴물이 우리를 공격했다면, 두 번째 공격이 없다고 장담 못 한다. 지금은 루티아로 돌아가야 한다. 날 믿어라." 제이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이메르가 그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1. 던멜 (1) 블랙풋의 템플 ‘루티아에 온지 며칠 째더라......?' 던멜은 끔찍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 루티아에 도착한 후의 하루하루를 따져보았다. 어떤 순간에 무슨 조치를 취했다면 이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답을 알아내봤자 후회밖에 남지 않을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가급적 흥분된 시선을 떼고 냉정한 자세로 돌아가기 위한, 던멜의 우회로였다. 모즈라고 불리는 이 괴물들은 사로잡은 인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에는 '플로라'가 묶여있었다. 괴물들의 발길질 한 번이면 그녀는 묶인 통나무를 등에 짊어진 채로 바닥에 얼굴을 부딪칠 것이다. 또는 배에 칼을 대고 있는 괴물들의 손놀림 한 번이면 다른 인질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생명은 끝이었다. 옆에 있는 로일은 허리에 찬 칼을 힘주어 쥐고 있었다. 루티아의 마스터 중 하나인 루더 역시 분노로 쥐고 있는 지팡이가 떨리고 있었다. 괴물들을 상대로 협상은 없었다. 이 비극을 막을 방법도 없었다. 사실 루티아에 온 순간부터 비극은 준비되었다. 던멜은 플로라가 저기에 매달려 있게 된 것이 전부 자기 탓인 것만 같아, 여길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 아란티아로 가던 하얀 늑대들이 루티아로 왔던가? 던멜은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폭우가 쏟아졌던 그날, 마스터 데다인을 만나 모두가 하늘 산맥으로 떠나던 열이틀 전을 기억했다. ‘아니, 시작은 카모르트였다.' 카모르트에서 벌어진 사건과 루티아에서 벌어진 사건 사이에 미묘하게 맞물려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검은 기사. 카모르트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이 단편적으로 머리 속에 그려졌고, 결국 던멜은 기억의 시작을 덴모주에서, 죽어 있던 여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되살아나는 광경을 본 그 순간으로 되돌렸다. 그 일이 있기 약 한달 전. 카모르트의 덴모주. 아직 공사가 완성되지 않은 탓에 그 강한 진동을 이겨내지 못 하고 덴모주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던멜은 지하 동굴을 빠져 나와 성이 무너지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 장미 백작의 모든 재력의 상징이 스스로의 의지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떤 사악한 마법의 힘에 의해서 모인 것인지 모를 성 위의 검은 구름이 완전히 걷혔다. 긴 시간이 흐른 후 무너진 붉은 장미 백작의 성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그 폐허 안으로 들어가지 못 했다. 던멜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게 두려웠으나, 레앙으로 떠난 로일의 부탁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다시 지하실로 들어갔다. 지하실의 일부도 크게 무너져 있었다. 얼마안가 나머지 성한 부분도 무너질 것이었다. 지하실 안의 중독자들 중 많은 이들이 돌에 깔려 죽어 있었다. 나머지도 도망칠 엄두를 못 내고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을 구해주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성이 또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순수하게 약해진 지반 탓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던멜은 횃불을 하나 들고 보이지 않는 암흑의 힘으로 자신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그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붉은 장미 백작은 부서진 재단 옆에 숨을 거두고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그의 딸인 라틸다 쟌스테인이 쓰러져 있었다. 던멜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눈보다 더 의지하는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었던 그녀의 몸에서 생명의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긴 호흡을 내뱉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마주했다. 던멜은 놀라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선으로, 그리고 그녀는 긴 잠에서 깨어난 멍한 눈으로. “제가...... 살아났나요?" 그녀가 물었다. 던멜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녀는 죽은 아버지의 등을 아주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뾰족한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렇게 애원했건만, 아버지는 언제나 제 멋대로 군요." 그녀는 돌로 자신의 이마를 찍었다.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한 번 더 이마를 찍었다. 던멜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는 피가 흐르는 얼굴을 들어 물었다. 던멜은 그녀의 손을 놔주고 단검으로 바닥에 글씨를 됐다. “말을 못하는 분이군요." 라틸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남긴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 로일의 친구. “그가 당신을 이 곳에 남겨두었군요." 던멜은 희미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다시 바닥에 짧은 단어를 이어갔다. - 죽지 마시오. “당신은......, 하얀 늑대군요? 파티장에서 본 기억이 나요." 던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글씨를 남겼다. - 로일을 데려오겠소. “이제 와 제가 어떻게 그를 만날 면목이 있겠어요?" 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던멜은 그녀를 안아 올려 지하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온 후 채 몇 분 되지 않아 지하실은 완전히 내려앉았다. 그는 라틸다를 돌 위에 내려놓고 다시 바닥에 글을 썼다. - 로일을 데려오겠소. 기다리시오. 라틸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로일을 데려을 떼까지 이 여자가 살아있어 줄지 던멜은 자신할 수 없었다. 그 후 던멜은 덴모주의 외곽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으나 누군가 쫓아오는 기미는 없었다. 로일이 부탁한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두고 나오긴 했으나, 이대로 덴모주를 떠나도 될지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가봐야 할 곳이 많았다. 카셀이 에노아 후작의 원군을 부르러 간 암브루, 로일이 있는 레앙, 그리고 공격당하고 있을지 모를 노르만트. 그러나 그는 셋 중 어디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끼고 있는 반지를 들었다. 블랙풋에 있던 시절부터 그를 따랐던 헤더가 노르만트에서 헤어질 때 줬던 선물이었다. ‘이 반지를 드리겠습니다. 만약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실 생각이 든다면, 반지가 그 길을 인도할 겁니다.' 그는 반지의 보석 부분을 돌 위에 내리쳤다. 보석은 유리처럼 조각조각 깨졌다. 구슬만한 크기의 투명한 빛의 뭉치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러고 꽤 빠른 속력으로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말 위에 올라 빛을 쫓아갔다. 빛은 평야를 가로질러 북쪽을 향해 날아갔고, 가끔은 빨리, 가끔은 천천히 던멜을 유도했다. 빛이 강을 가로지르자 던멜은 물에 뛰어들었고, 산을 넘자 말을 버리고 맨 몸으로 절벽을 올랐다. 하지만 험한 바위산을 따르는 오랜 추격에 지친 나머지 던멜은 끝내 빛을 놓치고 말았다. 분명 바위 위 쪽으로 올라갔던 빛이 잠깐 시야를 벗어난 사이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는 반시간 정도 근방을 찾다가 포기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북쪽으로만 향했으니, 계속 방향을 유지하면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던멜은 잠시 나무 밑에서 쉬다가 카모르트의 지도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문득 그는 산의 구조와 지도상의 위치를 대조해보고 블랙풋의 템플이 바로 이 산임을 알았다. ‘빛을 놓친 게 아니라, 빛이 스스로 사라진 거구나.' 그 증거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주었다. “누구도 함부로 발을 대지 않는 곳에 한가하게 앉아 빵 쳐 먹고 있는 놈도 다 있군. 정체를 밝혀라." 한 무리의 복면을 쓴 괴한들이 그의 주위를 순식간에 에워쌌다. 근 십 년, 정확히는 8년 하고도 몇 개월 동안이나 떠나있었으니, 남아있는 블랙풋의 암살자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던멜은 그들의 접근을 진작부터 알고 있어 처음부터 두 손을 들고 비무장임을 보여주고, 허공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저 자식 뭐 하는 거야?"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물었다. “글씨를 쓰고 있군. 자기는 말을 할 줄 모른대." 첫 번째 남자가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다. 죽여!" 그들은 저항의 뜻을 버린 사람을 상대하는 데도 가차 없었다. 던멜은 즉시 자세를 낮추더니 바닥에 쌓인 나뭇잎을 흩뿌리며 옆으로 사라졌다. 뒤늦게 그들은 화살을 쏘고 단검을 던졌으나, 빈자리에만 박했다. 암살자들은 모두 던멜의 위치를 놓쳤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첫 번째 남자의 목에 단검이 들어와 있었다. 암살자들은 화살을 그쪽으로 돌렸으나 쏘지는 못 했다. 던멜은 들고 있는 단검으로 다시 한 번 허공에 글씨를 썼다. - 헤더 암살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 친구 벨 테면 베 봐. 그럼 우리가 널 죽일 것이다." 던멜이 다시 설득하려 할 때 바위 위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또 다른 암살자가 툭 떨어졌다. 상당히 높은 곳이었는데도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너희들이 위협하는 그 분의 위치를 모르니 지금의 행동은 용서하겠다. 하지만 지금 즉시 무기를 내려놔라." 헤더였다. 그녀는 오래 전, 던멜의 이름이 테마르였을 당시 제자임과 동시에 단 한 명 정을 주던 연약한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암살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테마르." 목을 겨냥하고 있는 암살자를 놔주고 던멜은 수화로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 사정을 설명하고 싶다.' “괜찮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마스터 제라르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더의 극진한 행동에 다른 암살자들은 의아해했다. 블랙풋의 템플은 원래 론타몬의 거대한 돌산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있는 곳은, 템플이라기보다 급히 만든 도적들 소굴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렸다. 안은 제법 예전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꾸며놓았으나, 너무 어두웠다. ‘좋은 곳은 아니죠? 실망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헤더는 걸어가면서도 익숙하게 한 손으로 수화를 했다. 한 손으로 하는 던멜식 수화는 하얀 늑대들 중에서도 쉐이든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 년 간 만나지 않았던 그녀가 할 수 있다는 건 그 동안에도 꾸준히 연습을 해왔다는 뜻이었다. 노르만트에서 왕을 납치하려다 던멜이 테마르라는 걸 아는 순간 그녀는 즉시 임무 수행을 포기했었다. 그 때 그녀는 그가 테마르로서 블랙풋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했었다. 한 손으로 하는 수화를 보니, 그게 진심이었다는 게 와 닿았다. 던멜은 완전히 돌아온 게 아니라, 잠깐 들른 거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완전히 돌아오신 게 아니죠?' 마치 던멜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헤더가 먼저 그 부분을 건드렸다. ‘미안하다. 난 이미 암살자가 아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테마르. 우리는 이제 이 정도로 작은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의 명성을 되찾으려면 어쌔신 마스터 칼스텐의 공백을 채워야 하지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당신뿐입니다.' ‘마스터 제라르는?' ‘그 분은 늙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계자를 두지 않습니다. 조직 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상위 멤버들이 모두 제라르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에 겨우 불만을 억제하고 있을 뿐, 솔직히 언제 반란이 터질지 불안합니다. 그나마 그 상위 멤버들은 모두 당신의 친구에게 노르만트에서 죽었죠.' ‘그 점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제라르는 나도, 칼스텐도 모두 존경하는 과거의 영웅이시다. 그를 나쁘게 평가하지 마라.' ‘칼스텐이 죽은 후 그 역시 변했습니다. 약해지셨지요.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돌아와 주실 수 없습니까? 간청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져야 할 동굴은 점점 커졌고, 오히려 밝아졌다. 동굴의 가장 안 쪽은 뚫린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바깥과 다를 바 없이 밝았고, 벽에는 돌을 깎아서 또는 나무를 덧대어서 만든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을 따라오는 암살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블랙풋의 암살자는 모두 모여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두 사람 주위를 에워쌌다. 던멜은 그들이 풍기는 살기에 질식될 것 같았다. 그건 헤더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녀도 당황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길목을 아주 덩치 큰 남자가 가로 막았다. “물러나라, 드캔. 무슨 짓이냐?" 헤더는 강압적인 어조로 그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드캔이라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가 과거 블랙풋을 배반하고 어쌔신 마스터 칼스텐을 죽인 테마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사실입니까?" “테마르라는 건 맞다. 그러나 그 따위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당신의 말을 신뢰할 사람은 이제 이 자리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심지어 이번 임무에서 저 남자를 보는 순간 암살자로서 지켜야 할 룰을 어겼다고 하더군요." “누가 그러더냐? 발락? 메첼? 그 둘이 임무에 대한 말을 했을 리는 없겠지. 그건 모두 너희들이 상상한 게 아인가? 테마르는 마스터 칼스텐의 직속 후계자다. 너희들은 마땅히 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이냐, 드캔?" 헤더는 으르렁거리며 그를 위협했다. 머리 둘은 더 큰 드캔이지만 눈빛에 압도되어 마치 헤더가 칼을 휘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던멜은 그런 행동만 보고도 그 자의 실력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헤더나 헤더가 이끌었던 정예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자를 대표로 내세웠다면,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블랙풋의 힘이 이토록 약했던가?' 던멜은 되레 서글퍼졌다. 잔뜩 긴장해 있던 드캔은 곧 그 자리에 있는 암살자들이 모두 자기를 호응해주고 있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나를 당신과 동일한 서열에 올려주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당신의 독단에 대한 제동을 걸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하오. 내가 아직 부탁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을 때 여기 테마르라는 과거의 영웅도 템플에서 내보냈으면 하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모르나, 이 자는 죽일 수밖에 없소." 헤더가 한 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 던멜이 그녀의 어깨를 짚고 수화로 뭔가 말했다. 헤더는 피식 웃으며 그 말을 그대로 전했다. “테마르께서 말씀하신다." 던멜은 헤더가 말하는 동안 조용히 드캔을 노려보았다. 마치 헤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던멜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보였다. “원한다면 나 헤더가 빠질 테니 너희 모두 테마르를 공격하라. 거기에서 살아남는 자는 모조리 내 서열 위에 올려주겠다." 드캔을 비롯한 암살자들은 터무니없는 위협에 이를 드러내며 분노를 표했다. 그러나 진짜로 그 말을 실현할 정도로 무모한 이는 없었다. 그때 동굴 여기저기에 타고 있던 횃불이 사람의 키 높이로 화라락 타올랐다. 흥분해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마법사 메첼이 조용히 뒤에서 걸어왔다. “블랙풋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누누이 주장해 왔지만, 난 무시했었지. 하지만 설마 이런 반란 비슷한 짓을 할 줄은 몰랐는 걸?" 코홀룬에서 던멜에게 한 팔을 잃은 후 기력을 잃은 그녀였으나, 지난 국왕 납치 임무 실패 후에는 오히려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여기 있는 남자는 내 마법 장벽을 뚫고 내 팔을 자른 실력자다. 그런데 여기 한 팔 밖에 남지 않은 나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자가 있던가? 드캔, 그럴 수 있나? 아니면 내 서열을 원하나?" 드캔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메첼에게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마법사님께 말한 게 아니었소. 난 그저 헤더에게.......” “헤더는 나를 이끄는 리더다. 헤더에게 하는 말은 곧 내게 하는 말이지. 그렇지 않나?" 그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그 끝을 따라 마법의 불길이 그려졌다. 놀란 암살자들이 일제히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자, 테마르. 마스터 제라르께서 기다리시오. 들어갑시다." 메첼이 안내했고, 드캔은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헤더는 드캔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속으로 메첼이 우릴 구해줬다고 생각하겠지? 메첼이 살려준 건 네 목숨이다, 드캔. 테마르가 진짜 검을 휘둘렀다면 오늘 부로 블랙풋이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던멜이 지나갈 때 드캔은 똑바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마스터 제라르가 기거하는 곳은 사방이 납작한 돌로 막힌 넓은 석실이었다. 직사각형의 긴 쪽 끝에 호랑이의 가죽으로 몸을 둘러싼 늙은 남자가 있었다. 던멜은 그를 보고 인사하려다 멈추었다. 길고 생기 없는 긴 수염에, 얼굴 가득한 주름은 그 노인을 살아있는 송장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더 이상 던멜이 알던 제라르가 아니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십니다," 헤더는 설명하고, 제라르에게 말했다. “마스터 제라르, 테마르께서 오셨습니다." 제라르는 손을 내밀었다. 던멜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오, 나의 어린 친구가 돌아왔느냐?" 던멜은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헤더를 바라보았다. “수화로 말씀하십시오.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간의 의사 소통에는 한 명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헤더는 기꺼이 중간 다리 역할을 맡았다. ‘제라르, 많이 늙으셨습니다.' “9년 전이었나, 8년 전이었나? 칼스텐을 따라 아란티아로 떠났을 때가 스무 살이었지.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 ‘햇수를 세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보다 헤더가 많이 성장했군요.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라고 놀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던멜의 수화를 전달해 주면서도 헤더는 얼굴이 붉어졌다. 제라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아이야. 지금까지 자네를 기다리며 자네를 위해 블랙풋을 지켜왔네. 자, 이제 그 뜻을 따라 돌아오지 않겠나? 자세한 이야기는 모두 헤더에게 들었네. 어떤 경로를 통해 아란티아의 여왕을 암살하려 했던 자네가 울프의 기사가 되었는지는 묻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는 돌아와야 해.” ‘저는 이제 블랙풋의 암살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일은 아직 아란티아에 남아있습니다.’ “허면 왜 돌아왔나, 테마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직 당신만 알고 있는 해답입니다.’ “묻게." ‘우리가 처음 카모르트에 왔을 때 우릴 공격한 것도 블랙풋이었고, 코홀룬에 있을 때도, 노르만트에 있을 때도 우릴 공격한 건 블랙풋이었습니다. 우리가 카모르트의 국왕을 도우려는 걸 막기 위해 누군가 블랙풋을 이용했겠지요. 그게 누구입니까? 누가 하얀 늑대들을 암살하라고 사주하였습니까?' 수화를 해석해주던 헤더도, 뒤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던 메첼도 그 질문을 듣고 놀랐다. 그들은 의뢰인을 발설할 수 없었다. 던멜은 그걸 알면서도 묻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 제라르는 오히려 웃으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자네는 하얀 늑대들을 ‘우리'라고 표현하는군. 더 이상 블랙풋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강조하는 겐가? 좋은 질문이야. 언제고 누군가는 그런 질문을 하러 올 거라고 생각했네. 물론 테마르 자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일세." 제라르는 거친 기침을 토해낸 후 말했다. “우선 한 가지 정확히 해둘 게 있네. 그 의뢰인은 하얀 늑대들을 죽이라고 한 게 아닐세. 아란티아에서 오는 원군 전체를 암살할 것을 의뢰했네. 꽤 커다란 보수였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지. 만약 처음부터 칼스텐 조차 건드리지 못한 하얀 늑대인 줄 알았다면 의뢰를 맡지 않았을 거야." ‘그 의뢰인이 누굽니까, 마스터 제라르?' “성급히 굴지 말게. 내가 그 의뢰인을 말해줄 수 없다는 건 잘 알지 않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없네. 의뢰인을 보호하는 건 암살자의 자존심이고, 블랙풋의 존망이 걸려 있지. 자네는......, 여왕을 죽이라면서 칼스텐을 아란티아로 이끈 그 ‘의뢰인’이 누구인지 공개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야." ‘저는 때가 되면 그 의뢰인을 밝힐 것입니다. 제 판단대로 합니다. 당신의 판단을 말씀하십시오.' “너무 화내지 말게. 그 분노가 눈도 보이지 않는 내게 느껴질 정도군. 의뢰인을 발설하는 큰일을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니겠나? 그 조건을 들어주게. 그럼 나는 블랙풋의 존재 자체가 흔들릴 만한 큰 죄를 짓도록 하겠네." ‘뭡니까?' 제라르는 던멜이 아닌 그 너머 등 뒤에 대고 다른 이를 불렀다. “발락 이제 나와도 좋다." 발락은 던멜도 모를 정도로 완전히 기척을 숨기고 그림자 안에 숨어 있었다. 한 팔에는 크로우를 차고, 다른 쪽 손에는 단검을 쥐고 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약간 말라 있었다. 그는 카모르트 국왕을 납치하려는 임무 중에 던멜을 만나 노르만트에서 패한 적이 있었다. “검을 드시오, 테마르. 아마 그 때와는 조금 다를 거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헤더가 놀라며 제라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을 꾸미신 겁니까?" “발락은 국왕 납치 임무에서 실패한 후 나를 찾아와 내게 숨겨진 블랙풋의 암살 기술을 모조리 가르쳐달라고 했다. 하지만 후계자도 아닌 녀석에게 비기를 가르쳐 줄 수는 없었지." 발락은 던멜의 앞으로 다가갔고, 제라르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뼈만 남은 제라르의 손이었지만, 발락을 말리러 가는 헤더의 손목을 잡아 저지시키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발락이 그러더군. 그럼 누가 후계자가 될 수 있냐고? 나는 칼스텐이나 테마르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지.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나, 그 까다로운 칼스텐이 바보처럼 흐뭇해하며 인정한 어린 천재에 대한 기억이 내겐 너무 강렬했거든. 그러자 발락은 내게 부탁했지. 만약 테마르가 돌아왔을 때 그를 죽이면 그때 자기에게 블랙풋의 모든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냐고. 그래, 맞아. 나는 약속을 했다. 그러니 테마르에게 내 뜻을 전해라. 만약 발락을 꺾으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주겠노라고." 전할 것도 없이 던멜은 이미 제라르의 모든 말을 입술 모양으로 보고 있었다. 던멜은 발락과 제라르, 그리고 헤더를 번갈아 보더니 헤더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헤더는 던멜의 수화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테마르가 뭐라 하느냐?" 제라르가 재촉했다. “하겠다고 하십니다." “잘 됐군. 자, 헤더. 내게 이 싸움의 중요한 부분을 설명해 다오." “처음에는 화가 났으나, 이제 당신에게 따로 원망은 없소. 나는 그저 칼스텐의 뒤를 따르고 싶었을 뿐입니다. 막강한 선배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진심으로 상대해 주시오." 발락은 크로우를 거꾸로 세우고 바닥에 한 손을 짚었다. 마치 전력 질주를 하기 직전의 자세 같았다. 던멜은 헤더에게 수화로 물었다. ‘이 아이의 훈련 경력은 어찌 되느냐?' “열여섯 살 때부터 오 년간." 수화를 알아들은 발락이 직접 대답해, 던멜은 무척 놀랐다. “당신의 수화는 헤더에게 조금 배웠소. 규칙만 알면 그리 어렵지도 않더군." 발락은 웃어 보였고, 헤더가 추가로 설명했다. “그는 오 년 동안의 훈련으로 저를 뛰어넘은 자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던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단검을 거꾸로 쥐었다. 발락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입 모양을 보여줄 필요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닥만 보고 있다가 던멜을 향해 튕겨 나갔다. 거의 얼굴이 땅에 닿을 듯이 낮은 자세에서 도약하는 그의 속도는 다섯 걸음 떨어진 거리가 의미 없을 정도로 빨랐다. 크로우의 긴 칼날이 던멜의 얼굴을 그었다. ‘빠르구나.' 던멜은 뺨을 베인 부분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발락은 그를 치고 지나간 후 뒤를 허용한 채 우뚝 서 있었다. 던멜이 다시 자세를 잡자 이번에도 자세를 바닥에 붙일 정토로 낮게 달려가더니 오른쪽으로 휘어져 들어왔다. 극단적으로 방향을 바꾸며 그는 벽을 발로 차고 던멜에게 뛰어들었다. 던멜은 즉시 크로우를 막았지만, 걷어차는 발길질을 피하지는 못 했다. “헤더, 설명해줘야지." 제라르가 말했다. 헤더는 싸움에 정신이 팔려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겨우 말했다. “테마르가 밀리고 있습니다. 약간이긴 하지만 크로우에 베이기까지 했습니다." “칼날에 독약을 발랐다면 그 한 번만으로 발락이 이겼겠군. 그런데 테마르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방어에 급급하십니다." “그래?" 제라르는 무슨 의미에서인지 빙그레 웃었다. “저게 하얀 늑대들을 통해 배운 바보 같은 짓이 아니길 바라야겠군." 발락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짧고 간결하고 급소만 이어 치는 공격은, 보기에 숨이 막힐 정도로 빨랐다. “무슨 뜻입니까?" 늙고 병든 제라르였으나, 빈 말 하는 법이 없기에 헤더는 얼른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테마르는 멍청하게 막다가 싸우는 녀석이 아니다. 언제나 한 번의 공격으로 적의 숨통을 끊는 게지. 테마르, 내가 왜 너와 발락과 싸우게 했는지 알겠느냐? 그걸 깨닫지 못하고 발락의 숨통만 끊거나, 당한다면 우리 블랙풋은 오늘 부로 문을 닫는 게 나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제라르는 슬픈 표정이었다. 던멜은 이미 봐준다 어쩐다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밀렸고, 발락이 오히려 물러나 주었다. “이게 당신의 최선이 아닌 줄 알고 있소. 내가 각오한 것 이상의 실력을 내주지 않으면 나도 곤란하오." 발락은 차갑게 말했다. 던멜은 뭔가 생각하다가 단검을 거꾸로 쥐고 간단히 수화를 했다. ‘배운 게 오 년이라 했는데, 그럼 직접적으로 칼스텐의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는 뜻이구나. 그린데 왜 스스로 칼스텐의 제자인 것처럼 행동하느냐?' “그는 내게 세상을 보여주었소. 단지 부자 상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죽이려 들었던 다른 조직의 암살자들로부터 구해주었고, 복수를 하고 싶다면 블랙풋으로 오라고 했소. 그리고 몇 번이긴 하지만 기술도 가르쳐 줬고.......” 던멜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옅은 금발을 쓸어 넘겼다. 이미 땀에 젖은 발락과 달리 그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물기 하나 없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던멜은 다시 수화로 말했다. ‘그럼 넌 아직 칼스텐의 제자가 아니구나.' 발락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술의 상당 부분은 이미 보았고, 따로 헤더와 함께 연구하여 알고 있소. 마스터 제라르께서 아직 블랙풋의 최고 암살 기술을 전수해주지 않았으나.......” ‘블랙풋의 암살 기술이라 했느냐? 그래, 제라르가 왜 내게 너와 대결하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그 이후는 수화로 말하지 않았다. 눈빛이 뭔가를 시작하려 한다고 대신 말했다. 헤더가 열심히 던멜의 수화를 전달했고, 둘의 대화를 모두 들은 제라르가 약간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발락, 잘 보거라. 네가 신처럼 떠받들었던 마스터 칼스텐의 모든 기술을 열여덟 살 때 모조리 익혀버린 천재의 모습을." 던멜은 잠깐 숨을 들이 마시더니 갑자기 뒤 쪽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천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햇빛 때문에 석실은 조금도 어둡지 않았으나, 그 밝은 빛 덕분에 벽 쪽은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던멜은 그 그림자 안에서 사라졌다. 발락은 당황하여 즉시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피한 자리에 던멜이 있었다. 던멜은 칼등으로 그의 목덜미를 툭 쳤다. 발락은 몸을 회전하며 크로우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 던멜은 그의 등 뒤에 있었고, 이번에는 옆구리를 단검으로 툭 쳤다. 그 이후 완전히 벌거벗은 아이의 몸을 쓰다듬듯 단검이 그의 다리, 가슴, 배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옷만 베어져 있었다. “봐주는 게요7" 발락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제라르가 대신 말을 받았다. “흥분하지 마라, 발락. 네가 생각하는 칼스텐의 모습과 지금 테마르의 모습을 비교하거라. 어느 쪽이 우위더냐?" 던멜은 무표정하게 헤더 쪽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헤더는 끼고 있는 크로우를 달라는 뜻임을 알아채고 얼른 빼서 내주었다. 던멜은 크로우를 끼고 헤더에게 뭔가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제라르와 테마르가 발락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전율에 몸을 떨었다. “발락, 테마르는 이제부터 크로우를 사용하실 겁니다." 이미 잔뜩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발락은 그녀의 말을 새겨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발락은 이제 던멜의 등 뒤를 공격했다. 그러나 던멜은 보지도 않고 그의 공격을 피한 후 크로우로 그의 등과 목을 툭 툭 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발락이 지금까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각도와 속도였다. 빠르지도 않았으나, 크로우가 가질 수 있는 공격 방향을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발락이 지금까지 크로우라는 무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칼스텐이 그 무기를 주로 썼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발락은 칼스텐의 크로우가 무적이었던 이유는 어떤 특별한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던멜이 보이는 크로우의 동선이나 힘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예측하지 못한 각도에서 예측하지 못한 속도로 칼날이 들어올 따름이었다. 위라고 생각하면 아래였고, 빠르다고 생각하고 막는 쪽에 힘을 주면 터무니없이 느렸다. “발락이 알까요? 방금 테마르는 다섯 가지 공격을 동시에 썼습니다." 헤더는 제라르에게 말했다. “그 정도도 모를 둔한 애는 아니지 그리고 이제 그 애도 괜한 자존심을 버릴 때가 왔단다. 여기에서 자존심을 세워 악착 같이 이기려 든다면 블랙풋을 이끌어갈 마스터의 자격이 없지." 제라르는 힘없이 말했다. “처음부터 발락을 후계자로 키울 생각이셨군요. 제라르.” “그래. 하지만 나는 이미 늙었고, 블랙풋의 암살 기술은 내 몸으로 보여주지도 못해. 가르치지 않은 게 아니라, 가르치지 못한 거란다. 칼스텐이 죽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아란티아에 죽으러 간 거였으니까. 하지만 딱 한 사람 그의 기술을 전부 알고 있는 이가 있었다. 테마르......, 맞아. 난 테마르가 돌아오길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야. 블랙풋의 마스터가 될 발락의 스승이 되어주길 바라서지." 발락은 양쪽에서 조여 오는 듯한 칼날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 하고 결국 넘어졌다. 던멜은 발락의 오른손을 밟아 크로우의 칼날을 모조리 부러뜨려 버렸다. 던멜은 잠깐 동안 발락의 목에 크로우를 들이대고 있다가 곧 뒤로 물러섰다. 던멜은 자신의 크로우도 벗어 헤더에게 던져주더니 다시 발락에게 손짓했다. 수화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의사 전달은 되었다. ‘일어나라.' 발락은 부러진 크로우를 벗어버리고 맨손으로 던멜 앞에 섰다. 둘은 무기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다가 동시에 자세를 잡았다. 발락은 몹시 망설이다가 나직이 말했다. “맨손 격투는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뒷말은 흐렸으나,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던멜은 몇 번 공격을 받아주다가 반격으로 그를 쓰러뜨렸고, 발락은 그 때마다 즉시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제라르도, 헤더도, 메첼도 누구 하나 둘의 진지한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는 주먹과 발이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뼈끼리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만이 석실을 채웠다. 헤더는 제라르의 손을 꽉 쥐고 그 모든 광경을 눈으로 새겨두었다. 발락이 마침내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지치고 다쳤을 때에야 싸움은 끝났다. 물론 발락은 일어나 더 싸우고 싶어 했다. 메첼이 달려가 막았다. “그만 해라. 죽을 지도 몰라." 결국 발락은 숨을 몰아쉬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다. 던멜도 지친 숨을 몰아쉬고 제라르 앞에 섰다. 제라르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고, 던멜은 그의 손을 잡았다. “테마르, 칼스텐은 후회 없는 싸움 끝에 죽었느냐?" 던멜은 대꾸 없이 그의 손등을 가볍게 툭툭 쳤다. 제라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군. 나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네. 나는 발락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고,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었어." 헤더가 조용히 말했다. “발락도 만족할 겁니다." “나의 뜻을 이해해 주어서 고맙다." 제라르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헤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테마르, 이제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로군. 블랙풋에 하얀 늑대들을 암살하라고 의뢰한 자에 대해 물었지? 자네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던멜은 그의 손등에 '검은 사자' 라고 썼다. “그럼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자가 맞네." 제라르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한 달 전에 카모르트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 동굴을 나설 때, 당차게 자신을 테마르의 딸이라고 칭하며 이별했던 헤더의 얼굴이 떠올랐다. 헤더와의 이별은 그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아란티아의 여왕을 암살하는 임무를 위해 어쌔신 마스터 칼스텐과 블랙풋을 떠나던 자리였다. 아직도 그를 배웅하는 어린 소녀의 눈물이 어른거렸다. ‘다시 돌아올 생각은 버려라, 테마르. 우리의 상대는 아란티아 여왕의 수호기사인 마스터 퀘이언이다. 그를 꺾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어째서 그 자의 의뢰를 받아들이셨습니까?' “넌 우리에게 의뢰를 한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그가 우리에게 암살을 의뢰한 순간, 나는 론타몬의 정복 전쟁이 멍청한 국왕의 영토 욕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론타몬의 패배로 끝났다고 믿은 그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는 그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 걸 막고 싶은 거다.'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품고 계신다면 어째서 그 자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대체 그 의뢰인이 누구입니까?' ‘네 스스로 알아낼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모르는 편이 낫다.' 그것은 약 8년 전의 일이었다. 이제 던멜은 열하루 전 아즈윈과 게랄드를 잃어버린 하늘 산맥의 밤을 기억에서 더듬어갔다. (2) 하늘 산맥의 밤 그 일이 있기 11일 전. ‘잊지 마라, 테마르. 너는 내가 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천재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누구도 너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던멜은 굵은 나뭇가지에 서서 멍청히 숲의 먼 곳을 바라보다가 문득 죽기 전 유언처럼 남긴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이 기억나는 건지 모르지만 그는 얼른 털어냈다. 스승의 생각만하면 가슴이 아파왔다. 꽤 오랫동안 숲을 바라보았으나, 망망대해처럼 나무로 덮인 산만 보일 뿐 달리 표적으로 삼을 만한 사물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나무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이유 없이 가지를 움직이거나 바위라고 생각했던 물체가 슬금슬금 움직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저 하늘 산맥에 살고 있는 이름을 달지 못한 수 만 종의 무해한 생물 중 하나라고 데다인이 설명했었다. 던멜은 하품을 길게 한 후 밑을 내려다보았다. 잘 보이지 않는 회색 어둠 속에서 로일이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로일의 수화는 다른 하얀 늑대들에 비해 굉장히 느렸지만, 그래도 정확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뭐 보이는 게 있어?' ‘없다.' ‘보이는 게 있으면 알려줘.' ‘너도 들리는 게 있으면 알려줘.' 던멜도 수화로 대꾸해 주고 나뭇가지에 기대어 앉았다. 나무 아래는 너무 어두웠다. 시각에만 의지해 움직이는 던멜에게 어두운 곳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이라도 별빛과 달빛이 살아있는 나무 위가 더 편했다. 어제 새벽 그들은 비가 오는 날 밤 작은 헛간에서 루티아의 마법사라고 소개한 마스터 데다인을 만났다. 따로 떨어진 카셀을 어떻게 데려올 것인가에 대한 작은 마찰이 있었으나, 결국 쉐이든이 남기로 하고 나머지는 데다인을 따라 나섰다. 오는 동안 아즈윈은 내내 자신이 남았어야 했다고 불평했고, 나머지도 데다인을 따라 하늘 산맥으로 향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던멜은 명령이라면 따라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친구들을 설득하지는 않았다. 그 일은 점점 어두워지는 저녁이 될 무렵 일어났다. 데다인은 보통 하늘 산맥을 걸어서 여행하면 거의 절반은 안개나 빗속을 이동하게 되지만 운이 좋아 지금까지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금방 루티아에 도착할 수 있겠다고 안도하고 있었다. “운이 좋긴 뭐가 좋냐? 난 카셀이 걱정되어 죽겠고만.” 그것이 아즈윈의 마지막 말이었다. 로일이 그대로 전해준 그녀의 말을 듣고 던멜이 실실대고 웃은 지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아즈윈이 사라졌다. 그때까지는 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게랄드도 같이 없어졌다. 그제야 던멜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데다인은 로일과 던멜에게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한 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한 시간쯤 지난 후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 말했다. ‘두 사람이 사라졌다.' 하늘 산맥의 숨은 아크랜드의 숲과 달랐다. 그는 두 사람의 힘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곳의 숲은 던멜에게서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은 모두 빼앗아버렸다. 그는 두 사람의 기척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데다인은 아영하기 쉬운 곳으로 이동한 후 다시 둘을 찾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던멜과 로일은 두 시간 가량이나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일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사라진 사람이 둘 중 하나라면 모르지만, 둘이 같이 사라졌으니 아마 같이 어딘가로 비밀 얘기 하러 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에 불과할 거라고 추측했다. 던멜도 제발 로일의 추측이 맞기를 바랐다. 어둠이 내려앉으며, 던멜은 붉은 장미 백작의 지하에서 보았던 어둠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카셀을 제외한 모두가 카모르트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잊어가고 있지만, 던멜은 그 사건이 대륙에 일어나고 있는 안 좋은 일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루밀은 그들에게 이 일을 여왕께 알리고 대책을 세우라고 말한 후, 자기도 나름대로 이 사건이 독립된 사건인지 아니면 큰 사건의 일부분인지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던멜은 자신의 과거를 통해서도 이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털어놓지 못 해 괴로웠다. 그리고 말해봤자, 뭐가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마스터 칼스텐은 때가 되면 이 일을 공개하라고 했지만, 그 때라는 게 언제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돌아가면, 던멜은 여왕과 이 일을 상의하고 싶었다. 던멜이 나무에서 내려와 보니, 로일은 가슴에 걸로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던멜은 그게 뭔지 물었다. “라틸다가 준 거야. 이 목걸이에 얽힌 사건이 아직 끝난 것 같지 않다고 그녀는 말했지. 그리고 자기가 아버지처럼 변해버리면 다시 돌아와 죽여 달라고 부탁했어.” 로일은 슬픈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여왕 폐하께서 내게 내리신 숙제를 떠올렸지.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워본 적 있냐고. 수호 기사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얘기하자고 그러셨다.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 하지만 두 사람이나 지키지 못한 후에야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셨는지, 조금 알게 되었지. 그리고 난 그 숙제를 끝낸 것도 아니야. 그래서 사실 난 그녀의 옆에 남고 싶었다." ‘좋아하게 되었나, 그녀를?' 던멜이 물었다. “그렇게 보여?" ‘나야 모르지.' 던멜은 웃어 보였다. “난 아즈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로일이 스스로를 한심스럽게 여기며 말했다. ‘우리 같은 처지에 사랑을 논하는 건 사치다. 그런 감정을 갖지 말라는 건 불가능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갈 수 없다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좋지.' “무슨 뜻이야, 그건?" ‘라틸다를 좋아하게 된 것 같나? 그럼 이 일이 끝난 후 다시 그녀에게 갔다 와라. 그게 진실한 감정이 된 거라면 거기 머물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누가 너에게 의무를 강요하겠나? 억지로 울프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오히려 지금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거다.’ 로일은 웃었다. “내가 워낙 감정에 무딘 녀석이긴 해도, 아직 라틸다에 대해 그 정도로 적극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 건 아니야." 던멜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세한 땅의 진동이 느껴졌다. 로일도 감각이 뛰어난 편이지만, 던멜 만큼은 아니었던 터라 아직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던멜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멀리 또 하나의 숲의 물결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 산맥의 숲이 가끔 스스로 움직이긴 하지만 저건 그것과 다른 움직임이었다. 뭔가 커다란 것이 나무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낮이었다면 숲을 뒤흔드는 저 거대한 물체가 뭔지 희미하게나마 보여줄 테지만, 던멜의 눈에는 나무의 움직임만 겨우 보였다. ‘뭐지?’ 흔들리는 나무의 숲 위쪽으로 깃발이 펄럭이는 듯한 뭔가가 위로 올라왔다. 바람에 펄럭이는 검은 깃발 같은 것이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멀어서 세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을 타고 망토를 휘날리는 기사 같았다. ‘나무 위를 말이?' 그것은 이내 숲 안으로 도로 들어가 버렸다. 자세히 관찰할 여유도 없이 눈에 맺혔다가 바로 사라져 버려 던멜은 그게 자신의 착각인지, 유령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 했다. 밑에서 로일이 나무를 흔들어 신호하고 있었다. 던멜은 다시 떨어지는 속도로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뭔가 우릴 포위했다." 로일은 짧게 말했다. 던멜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숲의 마력에 감각은 잃었으나, 워낙 가까워 포위한 녀석들의 수치 정도는 금방 알아냈다. 던멜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 “다섯 명?" 던멜은 로일의 말을 수정해주었다. '다섯 마리.' 괴물들은 예고도 없이 달려 나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괴물의 모습은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털 긴 원숭이 같기도 했고, 저주를 받아 등이 굽은 인간의 보습 같기도 했다. 뭉툭한 코와 늘어진 귀를 가진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 혐오감이 일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눈동자가 사방에서 덮쳐왔다. 끝에 돌을 묶은 몽둥이로 내리친 자리가 움푹 파였다. 힘만으로 치면 어지간히 단련된 남자 이상이었다. 하지만 기습에 대비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하얀 늑대 두 명을 상대로 그런 공격은 큰 위험이 되지 않았다. 로일은 단 칼에 두 마리를 베어버렸고, 던멜도 두 마리의 목에 칼을 꽂았다. 마지막 한 마리는 머뭇거리다가 달아났으나, 달아난 방향에서 하얀 빛이 번쩍하더니 나무에 등을 부딪혀 기절했다. 데다인이 와 있었다. 마법사의 지팡이가 내는 밝은 빛이 주위를 밝히자 던멜은 비로소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데다인은 쓰러진 괴물을 살피며 말했다. “이제 이런 곳까지 괴물이 퍼져 있었군." 던멜은 이 괴물보다 방금 전에 먼 곳 숲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어떤 존재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데다인이 먼저 로일에게 말했다. 그의 말은 굉장히 빠르고 던멜을 배려하는 대화를 하지 않아 입 모양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로일은 그의 말에 강하게 반발했고, 데다인은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하는 건가?' 던멜은 참을성 있게 두 사람의 논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두 사람을 포기하고 돌아간다는군.” 로일이 말했고, 데다인이 즉시 수정했다. “아니,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잠시 찾는 걸 보류한다는 뜻이다.” 비로소 데다인은 던멜을 배려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며 대화를 했다. 그는 마흔 살 정도 되는 얼굴에 강한 의지가 번뜩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얼굴로 나이를 측정하기 힘들다지만, 그는 아마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거라고 던멜은 짐작했다. “그게 그거 아니오?" 로일이 다시 화를 내며 말했다. “말했듯이 이 숲에서 사람을 잃어버리면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손도 댈 수 없다. 지금까지 이 근처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더군. 그리고 난 사실 숲의 수색에는 전문가가 아니다.” “수색하는 건 던멜이 꽤 하는데, 같이 찾아보는 게 어떻소?” “하늘 산맥을 돌아다닐 수 있는 증표가 없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레인저라도 길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하늘 산맥은 그런 곳이지. 그러니 지금은 루티아로 돌아가 다른 마법사의 도움을 얻는 게 좋겠군. 지금 그대들이 쓰러뜨린 이 괴물들이 바로 루티아를 공격한 그 괴물들이다." “루티아라면 그런 마법사가 있소?" 로일은 벌써 눈앞에 쓰러뜨린 처음 보는 생명체에 대해 관심을 끊어버리고 따져 물었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오직 친구들뿐이었다. “적어도 그랜드 마스터께서는 할 수 있지." 마스터 데다인은 좀 더 이 괴물에 대해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던멜은 수화로 로일에게 말했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라면 론타몬 정복 전쟁에서 아란티아를 도운 후 실종되었다고 들었다.' 고일은 그런 얘기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건성으로 데다인에게 물었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는 실종되지 않았소?" “오래 전 일이지. 그 자리를 계속 공석으로 둘 수는 없지 않나? 이전 그랜드 마스터께서 다시 그 자리에 계시지. 자, 잃어버린 두 사람도 걱정이지만 나는 루티아도 걱정이다. 서두르자." 로일은 등뼈가 박살 난 괴물 두 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이런 괴물들이라면 당신들의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소?" 데다인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좀 우습군. 사실 이 괴물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장정 두셋은 잡고 늘어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센데, 아예 별 거 아닌 놈들로 취급하다니....... 어쨌든 마법과 괴물들에 관해서는 문제가 좀 있네." 로일은 팔짱을 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던멜은 벗어놓은 배낭을 짊어지며 로일을 설득했다. ‘일단 그의 말대로 하자. 루티아에 사람을 찾는데 능한 마법사가 있다면 차라리 서둘러 루티아로 가는 게 두 사람을 위해 좋을 것이다.' 로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벌써 카셀과 쉐이든을 뒤에 두고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즈윈과 게랄드 마저 버리고 가는군. 것도 이 따위 만들어지다 만 괴물 같은 놈들 때문에 말이야." 로일도 별 수 없이 배낭을 짊어지고 앞서서 기다리고 있는 데다인을 따라갔다. 데다인은 품에서 나뭇잎으로 싼 주먹만한 꾸러미를 꺼내어 둘에게 내주었다. “뭐요, 이게?" “계속 모즈들을 무시하는 말투를 하니, 미리 경고하는 의미로 주는 약초다. 모즈의 손톱에 긁히거나 이빨에 물리면 이틀도 못 가 죽게 돼. 마법의 보호가 없다면." “안 긁히면 되지." 로일이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두 개의 약초 봉지 중 하나를 던멜에게 주었다. “그러길 바라지." 데다인은 말하며 앞장섰다. 던멜도 로일도 그의 말투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약초를 쓸 일이 조만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품속에 깊이 간직했다. 사실 둘 다 티내지는 않았지만, 다섯 마리 괴물들이 보여준 강한 힘에 놀라 있었다. (3) 루티아 그 일이 있기 10일 전. 두터운 숲의 그림자가 어깨를 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은 새벽이 되자 점차 가벼워지더니 이내 평지에 있을 때처럼 감각이 살아났다. 데다인이 알려주기 전부터 던멜은 루티아가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루티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란티아의 왕실 내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새나디엘 여왕과 마스터 퀘이언, 그리그 여왕을 보필하는 일부 시녀나 경호를 맡은 네댓 명의 울프 기사들이 다였다. 말수 적은 여왕의 시녀들조차도 하늘 산맥에 다녀온 후 그렇게 무서운 곳은 치음이라 호들갑을 떨었고, 루티아에 대해서는 그렇게 멋진 곳은 처음이라고 또 한 번 수다를 떨 정도였다. 다른 울프들은 그런 것에 무관심 했지만, 던멜은 루티아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다. 좋지 않은 문제를 떠안고 향하는 루티아긴 하지만, 숲 너머로 하늘을 찌르는 하얀 탑이 보이니 설레임을 쉽게 억누를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 루티아다. 아직 하늘 산맥에서 이어지는 숲이 계속되고 있지만, 벌써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 거다. 우린 이 곳을 '아웃서치'라고도 부르고 아웃서치 숲이라고도 부르지. 그러나 이제 여기는 더 이상 루티아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모즈들의 땅이 되었지." 데다인은 이제 던멜과 같이 있는 사람으로서의 예를 다 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얘길 할 때마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던멜의 얼굴을 보고 말하고 있었다. 말은 거칠고, 행동도 성격도 급하지만,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싫어하지만 던멜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데다인이 저렇게 행동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데다인은 탑 쪽을 향하는 걸음을 늦추더니 귀를 기울였다. 로일도 걸음을 멈추고 던멜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앞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뭔가 있는 것 같아.' 던멜이 물었다. ‘얼마나?' ‘아주 많이.' 데다인은 작은 목소리로 로일에게 말했다. “하필 놈들이 공격하는 시점에 돌아와 버렸군." “뚫고 갈 거요?" 로일도 적들의 위치를 대충 짐작한 모양이었다. 던멜도 되돌아온 감각으로 괴물들의 위치와 숫자를 추측했다. “굳이 지금부터 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다. 게다가 여기서부터는 그 괴물들에게 내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데다인이 씁쓸히 말했다. 던멜은 의아해하며 수화로 물었고, 로일이 해석해주었다. “던멜이 말하길, 루티아 안에서라면 마법사들의 힘이 더 강해지지 않냐고 묻는군." “잘 아는군." 데다인은 나뭇가지 사이로 부분 부분 보이는 하얀 탑을 가리켰다. “저기가 루티아의 탑이고 탑 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보석이 마법의 힘을 집중해서 루티아를 보호해 주고 있었지. 때문에 일반 짐승들은 아웃서치 안으로는 접근조차 하지 못 했다." “지금은 아니오?" “아니니까 괴물들이 설치고 다니지." 뭔가가 폭발했다.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만 공기의 진동만으로 꽤 큰 규모의 폭발이라고 던멜은 짐작했다. 데다인도 깜짝 놀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중 한 명이 싸우고 있나 보군." “바, 방금 그건 뭐였소?" 로일은 얼얼한 귀를 후비며 물었다. “마법이지, 뭐긴?" 데다인은 걸음을 빨리 했다. 로일은 어깨를 으쓱하며 던멜을 바라보았다. 던멜도 로일과 같은 생각이었다. 저런 커다란 소리를 낼 정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들이 대체 왜 따로 기사들을 필요로 하는가? 데다인은 지팡이나 커다란 보석 달린 목걸이 대신 칼을 들었다. “나도 검에 문외한은 아니나, 저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에게 쓸 정도는 아니지. 우리 쪽 경비 중에도 꽤 검술에 뛰어난 젊은이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숫자가 많이 부족하다 보니.......” 데다인은 생각도 하기 싫은 듯 말을 끊고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아웃서치를 돌아 북쪽의 리버 포레스트를 통과해 다운서치로 갈 거다. 모즈들은 항상 서쪽의 게이트만 공격하니 우리는 북쪽의 망루를 이용할 수 있겠지." 그는 누구에게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듯 말끝을 흐렸다. “괴물들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가까이 갈수록 규모가 짐작이 안 갈 정도로 탑의 끝은 높았다. 어떻게 저런 높은 탑을,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어냈는지 궁금했다. 데다인은 칼끝으로 탑 꼭대기에 하얗게 햇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보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탑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루티아는 루티아가 아닌게 된다. 우리의 싸움은 결국 저 탑의 수호야." 숲의 마력에서 벗어난 것인지, 숲의 마력을 루티아의 힘이 상쇄시켜 주는 것인지 모르나, 감각이 예민하게 돌아왔다. 이제 어느 방향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괴물들이 게이트를 공격하고 있는지도 계산할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던멜은 알았다. 괴물들의 숫자는 오십 정도고, 거기에 맞서는 사람의 숫자가 오십 정도 되었다. 그러나 셋이 피해간 쪽 방향에는 괴물들이 훨씬 많았다. 던멜은 눈을 감고 그 숫자를 세어보더니 데다인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러나?" 던멜은 로일에게 말했다. ‘이 쪽 숲에서도 괴물들이 있다. 백 마리 정도.’ 로일이 그 말을 전해주자, 데다인은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모즈들은 한 번도 리버 포레스트를 따라 내려온 적이 없어." 로일이 대신 변명했다. “던멜도 나도 여기가 처음이니 그런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오. 하지만 던멜이 있다고 그러면 대체로 있는 거라고 믿어도 좋소.” “소리도 못 듣는다고 하지 않았나?" “소리가 안 들리는 우리보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 더 잘 안다면, 그 느낌은 믿어볼만 하잖소?” 던멜 조차 자신이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건지 설명할 자신이 없건만, 로일은 무척 단순하게 설명했다. 로일은 데다인보다 앞서 걸으며 숲의 경계에 섰다. 탑은 아직 멀리 보였으나, 마을을 둘러싼 요새는 숲을 벗어나는 자리에서 백 걸음 안 쪽에 있었다. 굵은 통나무가 울타리처럼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고,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창이 울타리 바깥쪽으로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기형적으로 팔이 긴 괴물들은 그 통나무에 매달려 벽을 넘으려고 바둥거리고 있었고, 병사들은 창으로 올라오는 괴물들을 찌르고 있었다. 양쪽 다 효과적인 공격을 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어를 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양쪽 다 필사적이었다. 망루에 있는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요새 입구 쪽으로 몰려오는 괴물들에게 불덩어리를 날렸다. 공기가 흔들리며 던멜은 잠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멀리 떨어진 곳이었건만, 바로 코앞까지 열기가 도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불길에 휘감겨 나가떨어진 괴물들은 긴 털이 조금 그을린 것 외에는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길에 날려간 괴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발목을 접 지른 게 불에 덴 것보다 더 큰 부상인 듯 보였다. “저 괴물들이 불에 안 타는 거요, 마법이 약한 거요?” 로일이 손가락으로 그걸 가리키며 물었다. “루티아의 마스터에게 마법이 약하다는 말을 하나? 모즈들에게 마법이 안 통하는 걸세. 어쨌든 숫자가 너무 많으니, 공격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들어가는 수밖에 없군. 두어 시간 안에 끝날 거다.” 말은 느긋하게 했지만, 데다인은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로일은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긁적이다가 말했다. “동료들을 돕지 않을 생각인 거요, 아니면 저 치열한 전투 광경이 보기보다 위험하지 않은 거요? 내가 보기에는 꽤.......” “몇 달 되지도 않는 전투 중에 죽은 마법사의 숫자가 삼십이고, 그보다 열 배 이상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치열하지 않다니?” 데다인이 흥분하여 말했다. “그럼 지금은 왜 참는 거요?"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을 건가? 저 괴물들은.......” “창이 통하는 걸 보니, 칼도 통할 것 같소만?" 로일은 칼을 뽑아 들었다. 누구나 그랬지만, 말을 할 때의 로일은 항상 무시당한다. 아즈윈이 언제나 마스터 퀘이언에게 주장하듯, 로일이 배워야 할 건 검술이 아니라 연설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로일이 검을 들면 어떤 웅변가도 침묵을 지킨다. 그건 루티아의 마스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저 칼 앞에서 할 말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던멜은 로일의 검과 카셀의 입이 겨루면 누가 이길까 궁금해지곤 했다. 그러나 호기심일 뿐, 사실 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카셀이 로일을 짓누르려 하지도 않고, 로일은 카셀이 말할 때 항상 얌전히 듣기만 하니까.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로일, 네가 후방에 서라. 내가 앞장서겠다.' 던멜이 지시를 내렸다. 로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데다인에게 설명했다. “던멜이 앞서 갈 거요. 등 뒤에 바짝 붙어 가시오. 그리고 내가 당신의 뒤를 지킬 거요. 하지만 마스터 데다인도 자기 몸은 알아서 지키도록 하시오." “잠깐, 잠깐! 자네들 지금...... 저 난장판을 맨몸으로 뚫고 가자는 건가?" “칼이 있으니 맨몸은 아니오." 로일은 고갯짓으로 요새 쪽이 아닌 숲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숲에 숨어 있는 괴물들 백여 마리보다 다른 쪽에 정신 팔린 오십 마리에 뛰어드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소?" 데다인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무 기둥에 몸을 숨기고 바깥으로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가 숨겼다 하는 괴물들의 모습은 희극적인 데가 있었다. 그러나 녀석들이 손에 뭉툭한 무기를 하나씩 치켜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니 던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로일의 무신경함이 도움이 되었다. “갈 거요, 안 거요?" “가지!" 로일이 신호했고, 던멜이 요새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데다인은 나이 든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왔다. 숲 속을 거닐 때도 로브로 가려진 다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의 걸음은 빨랐다. 마법사에게 익숙한 길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평지에서도 던멜의 걸음에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요새를 공격하던 괴물들 중 일부가 던멜 일행을 발견하고 몸을 돌렸다. 던멜은 단검 한 자루 만으로 몰려드는 괴물들을 뚫고 들어갔다. 그 돌격은 곁에서 보기에는 마치 거대한 통나무로 바위를 뚫는 것처럼 보였다. 던멜이 후려친 두 마리 괴물이 좌우로 튕겨나가며 다를 괴물들까지 와르르 넘어뜨렸고, 뒤따르는 로일이 놀란 괴물들 얼굴에 칼을 그으니 대여섯 마리가 동시에 쓰러졌다. 던멜은 멈추지 않고 괴물들을 찌르고 베었다. 뛰는 속도에서 걷는 속도로 느려졌고, 로일과의 간격이 좁아졌다. 하지만 다행히 괴물들은 아무런 작전 없이 달려들기만 했다. 심지어 포위를 하려고 모여든다는 게, 오히려 동료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꼴이 되니 상대하기는 편했다. 데다인이 걱정이었으나, 그는 의외로 대처가 빨랐다. 로일과 던멜이 쓰러뜨리는 괴물 숫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그 틈바구니에서 휘두르는 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포위망은 뚫렸고, 셋은 요새의 앞에 도달했다. 데다인이 재빨리 던멜보다 앞서 나가 요새의 입구 앞에 섰다. 그리고 던멜과 로일은 데다인의 등을 지켰다. 던멜은 어깨가 뜨거워 손을 대보니 금속 조각이 하나 박혀 있었다. 직접적으로 찔린 게 아니라, 부러진 무기 파편 하나가 박힌 것이었다. 로일도 목에 할퀸 상처가 있어 거기에서 흐르는 피가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약초는 언제까지 써야 하는 거야?" 로일은 상처에 손을 대 피의 양을 재보더니 물었다. 괴물들은 선뜻 나서지 못 하고 두 사람 앞에서 으르렁댔다. 꽤 많이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지간한 부상을 입은 녀석들이 도로 일어나 있었다. 밤에는 몰랐지만 낮에 보니 그것들의 눈동자는 피처럼 붉었다. 그런 게 수십 개나 노려보니 솔직히 좀 무서웠다. 그러나 이 무신경하다가 못해 무서워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로일은,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 칼은 늘어뜨리며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지금 다 해치울까?" ‘아니.' 칼을 들고 있어서 긴 수화는 하지 못 하고 던멜은 그냥 칼끝으로 그들이 왔던 숲 쪽을 가리켰다. 아까 그들을 향해 조여 왔던 백여 마리의 괴물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문을 열게, 마스터 루더!" 먼저 요새의 문 앞으로 달려가 있는 데다인이 망루를 향해 소리쳤다. “마스터 데다인, 왜 이리 늦었나?" 아까 불덩어리를 날렸던 마법사가 반갑게 소리치며, 밑의 병사에게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최대한 빨리 온 거네." 데다인은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요새를 막고 있는 통나무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데다인은 먼저 들어가며 두 사람을 불렀다. 로일은 괴물들 쪽을 힐끗 보더니 입맛을 다시며 던멜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힌 후 세 사람은 바로 망루 쪽으로 올라갔다. 루더라는 마법사는 짧은 흰 머리카락에 뺨과 턱 모두를 뒤덮는 길지 않은 흰 수염을 한 노인이었다. 그는 데다인을 보자 양팔을 활짝 펼쳐 그를 안았다. “내가 얼마나 자네를 기다렸는지 모를 걸세." 데다인은 포옹을 짧게 끝낸 후 그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 중 우릴 돕기 위해 와 준 두 사람일세. 이쪽이 로일 울프, 이 쪽은 던멜 울프." “반갑소." 그는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긴 했으나 약간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방금 보여준 그 엄청난 검술을 보고 바로 짐작했소. 그건 역시나 마스터 퀘이언의 가르침이 있는 울프 기사단의 검술이오?" 로일은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대꾸했다. “아니, 이건 그냥 마구잡이로 휘두른 거요." 루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다인을 힐끗 보았다. 데다인은 망루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려 몰려 있는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모즈들이 저 정도 숫자로 공격해 오는 건 일반적인 게 되었군.” “그러게 말일세. 하지만 오늘은 더 올 것 같지 않군. 저 두 사람에게 당한 모즈들의 숫자를 보고 놀란 건 우리보다 저 놈들일 테니까." “리버 포레스트에서도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가?" “이틀 전부터. 처음에는 멍청하게 문에 머리를 들이받던 녀석들이 이제는 벽을 타넘기 시작했고, 끝없이 아웃서치 쪽에서 게이트 쪽으로만 공격해 오던 녀석들이 최근에는 다운 포레스트와 리버 포레스트를 관통해오고 있다네. 다운서치도 이제 안전하지 못 해." 루더가 설명하는 동안 괴물들은 요새의 입구 근처에서 서성댔다. 그리고 자기 동료들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려보더니 왔던 길로 되돌아 가버렸다. 두 마법사와 경비들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선 난 두 사람을 타워로 데려갈 걸세. 오늘 안에 루티아노가 개최될 테니 서둘러 정비를 마치고 오게. 케인스윅의 선생들을 몇 불러오지." “알았네. 아, 그리고......, 이틀 전에 콜리튼 선생이 죽었네." “저런....... 안 됐군." 망루를 내려올 때 두 하얀 늑대들을 바라보는 경비들의 시선에는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확실히 던멜도 괴물들을 베는 순간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르고가 벼린 칼로도 그들의 피부는 잘 베어지지 않을 만큼 질겼고, 마구잡이로 달려들긴 했지만 칼에 베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후속 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 또한 대단했다.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한 병사들에게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런데 그런 괴물들 수십과 싸웠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 약은 어찌 먹는 거요?" 로일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걷는 데다인에게 물었다. 데다인은 로일의 얼굴을 힘없이 바라보았다가 놀랐다. 아까 다친 목의 상처는 쉽게 지혈되지 않아 목의 반쪽이 검붉게 젖어 있었다. 로일은 나뭇잎에 싸인 축축한 약초 뭉치를 들고 다시 물었다. “그냥 먹으면 되는 거요?" “아니, 바르는 걸세. 이러 줘보게." 데다인은 직접 손으로 약을 떠 그의 목에 문질러 주었다. “붕대는 감지 말게. 보기 흉해도 그냥 두는 게 효과가 더 좋아. 상처는 부위보다 더 넓게 바르는 게 좋고, 물론 다치자마자 바르는 게 가장 좋다." 데다인은 약만 발라주고 뭔가 더 말하려는지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로일이 뒷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몸을 휙 돌려 탑 쪽으로 걸어갔다. 괴물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는지 십 수 명의 투구를 쓴 청년들이 무기를 들고 뛰어가다가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었다. 요새의 게이트에서부터 따라오던 병사들이 그들에게 속닥이며 뭔가 열심히 설명했고,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마을이 있군." 로일이 놀랍다는 뜻으로 말하니, 되려 데다인은 의아해했다. “마을이 있는 게 이상한가?" “루티아에는 온통 마법사들 투성이라 이런 통나무나 짚으로 만든 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소." “외부에서 알려진 루티아란 건 다른 나라에 알려진 아란티아와 비슷하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 잊고 자기들만의 이미지를 만들지." 데다인은 세 사람 쪽을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루티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지. 숲과 마을, 그리고 탑. 아까 말했던 게이트의 동쪽 숲을 아웃서치, 요새의 북쪽에 강을 따라 나 있는 숲은 리버 포레스트이고 아직 보지 못한 남쪽의 숲은 다운 포레스트일세. 북쪽에서 내려온 강은 루티아를 가로질러 다운 포레스트로 이어져 있지." 데다인은 멀리 보이는 강을 손으로 가리키며 손가락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그어 보였다. “저 강이 마을을 두 곳으로 나눈다네. 강을 기준으로 동쪽이 즉, 이 곳이 다운서치. 강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탑 근처의 마을이 ‘넌서치'. 넌서치는 비교적 안전하니 그 쪽으로 이주를 권장하지만, 모든 밭이 다운서치에 있어 농사짓는 양반들은 우리의 권고를 무시하고 여기에 머물러 있지. 사실 우리의 식생활이 모두 거기에 달려 있으니 우리도 마냥 피하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저 다운서치와 아웃서치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을 수밖에. 아직 괴물들이 그 경계를 뚫고 들어온 적은 없어서, 아직까지는.......” 데다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하던 설명을 끊었다. 던멜은 데다인의 말이 모두 끝난 후 마을 사람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먼 곳에서 세 사람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 멀어서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하는 말들이겠지만, 입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던멜에게는 가까이에 있나 멀리 있나 차이가 없었다. “괴물들 수십 마리를 몇 분도 안 되어 해치웠대." “아란티아에서 온 원군이란 게 저 사람들인 모양이야," “저 두 사람이 다야? 우릴 지켜줄 엄청난 원군이 온다면서?" 던델은 씁쓸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통나무를 세로로 쌓아 만든 요새는 이중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지지대가 받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불을 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관리가 되고 있을까? 사다리를 타고 넘는 것에 대해서는? 괴물들이 활을 쓸 줄 안다면 저 요새가 과연 반나절이라도 버틸 수 있는 방패가 되어줄 것인가? 던멜은 가슴이 조여들 정도로 불안해졌다. 곧 그 문제점은 저녁에 있을 마법사들의 회의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지만, 지금은 그저 막연한 불안감에 침이 마르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너무 빈약하다는 정도만 로일을 통해 데다인에게 전했다. “나도 그런 건 아까부터 느낀 바가 있긴 한데, 마스터 데다인, 내 친구가 말하길 다운서치를 지키는 저 나무 요새는 그다지 안전해보이지 않는다고 하오." “원래 없던 걸 루티아의 마을 경비대 아이들이 급조해 놓은 거다. 우리에게는 저런 게 필요 없었어." 데다인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늘 산맥에는 짐승 같은 게 없소? 숲 속에 있는 도시라면 그런걸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요새가 필요하지 싶소만." 로일이 물었다. “없긴? 사람을 공격할 만큼 큰 맹수는 없지만, 닭이나 염소 같은 가축 하나 물고 달아날 육식 동물은 아주 많지.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 화이트비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지간한 야생 동물은 발을 들여놓지 조차 못하네." 원래대로라면 그런 안전한 마을 안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넘쳐야 했다. 화이트 게이트의 보호 아래 사는 나디움 사람들처럼. 그러나 이 곳 주민들의 얼굴에는 함락 직전의 성에 사는 사람들 같은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루티아의 마법사들이 지켜주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괴물들의 침략은 요새의 입구에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마을에는 불타거나 부서진 흔적이 남아있는 집도 많았다. 다리를 한 쪽 잃거나 머리에 붕대를 동여매고, 마을을 가로 질러가는 던멜 일행을 힘없이 바라보는 늙은 남자도 있었다. 요새가 뚫린 적도 몇 번 있었던 게 분명했다. 딴 곳을 바라보느라 데다인과 로일의 대화에 신경을 못 쓰던 던멜에게 로일이 지금까지의 말을 설명해주었다. ‘방금 데다인은 마법사들의 보호를 받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보호를 받는 형편이 우습다고 말했어.’ ‘지금까지의 피해 상황을 한 번 물어봐.' 로일은 데다인과 긴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설명했다. ‘탑 가까운 쪽에 붙어서 지붕에 넝쿨을 잔뜩 기르고 있는 하얀 건물 보이지? 저게 마법 학교 케인스윅이라는군. 저기에서 마법을 배운 사람들이 아크랜드에서 마법사 소리를 듣는 거래. 아까 말했던 죽은 사람 서른 명이란 저 곳 소속인가 봐. 또 괴물의 독에 중독 된 나머지 입원해 있는 사람도 지금 스무 명이고. 다행히 지금은 해독제가 만들어져 있어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 모양이야. 하지만 마법사들의 피해보다 일반 마을 사람들 피해가 더 심각하다더군.' 긴 이야기를 해놓고선 정작 던멜에게 하는 로일의 설명은 짧았다. 던멜이 물었다. ‘지금 우리는 탑으로 가는 건가?' ‘어. 탑에는 루티아의 마스터들이 있고, 그 마스터들이 하는 회의에 참가하려나 봐.' ‘여기 어딘지 모르게 카모르트와...... 비슷해.' ‘어떤 점이?' ‘위기감......, 위험.' ‘그렇긴 했지만, 거긴 우리가 잘 해냈잖아.' 던멜은 희미하게 웃으며 수화를 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그 사건을 해결해낸 친구들은 지금 이 자리에 없잖아. 나는 뒤에서 주시하기만 했고, 너는 그 자리에 아예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우리에겐 지금...... 캡틴이 없다.' 로일은 부정하지 않았다. 던멜이 보기에 그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카셀과 가장 짧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는 묘하게 카셀을 잘 따랐다. 왜일까? 누구도 따르려 하지 않고, 누구와도 억지로 친구를 사귀려 들지 않는 그가 어째서 카셀과는 그렇게 잘 지내는 걸까? 던멜도 사람 사귐에 능한 카셀의 매력에 반해있긴 하지만, 그런 게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닐 것이다. 카셀 자신이 고백했듯, 그는 어렸을 떼부터 친구가거의 없었다. 그리고 겨우 만든 친구란 건 하얀 늑대들과 카모르트의 왕, 과거에는 도적 두목이었지만 지금은 왕실 기사단의 캡틴인 팔콘, 왕실 수호 가문의 고디머 백작과 에노아 후작이었다. 내내 친구가 없다가 느닷없이 그런 친구를 만든 카셀이 이상한건지, 카셀 같은 가진 것 없는 녀석과 친구가 된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건지 던멜은 구별을 할 수 없었다. 다운서치를 지나 루티아를 남북으로 가르는 강이 나왔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알았지만, 그 강의 이름은 크보츠였고, 고대어로 ‘가로지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숲을 통과하는 강 치고는 수심이 깊고 강폭도 넓었다. 강을 건너는 하얀 석조 다리는 골드 게이트 앞에 있는 알라야의 다리를 연상시켰다. 다리에서 탑까지는 금방이었다. “이 다리의 이름은 라르비튼이라고 하고, 처음 루티아를 건설할 당시의 석공 이름을 달았다 탑도 같은 사람이 지었지." 던멜은 다리 중앙에 서서, 만들어졌던 당시의 웅장함을 느껴보았다. 좌우를 튼튼하게 묶은 아치 형 구조물 위쪽이 부서져 있었고, 두꺼운 바닥재도 금이 가고 부서져 있었다. 역사에 기록하기도 힘든 오랜 시간 동안 이 다리를 둘러싼 많은 일화들이 있을 것 같았다. 좌우 기둥 위쪽에는 지금 남아있는 것보다 더 높은 구조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부서졌어도 다리 자체에는 큰 영향은 미치지 않을 정도로 바닥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소중한 걸 부쉈을 만한 전투가 있었던 걸까? 모든 이들이 평화 외에 아무 것도 없을 거라던 아란티아에는 아란티아 만의 전쟁과 역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루티아에도 루티아 만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 역사 안에서 이 다리는 항상 중심 소재로 자리 잡고 있겠지.' 다리 건너에서 로일이 손짓하고 있었다. 던멜은 그런 상상을 즐기며 가급적 천천히 다리를 이동했다. 루티아의 탑은 대칭을 이루지 않는 네 개의 첨탑 중심에 몇 층인지 세기 힘든 높이로 솟아있고, 드문드문 창문이 나 있었다. 깨끗하다고 볼 순 없지만, 녹색의 나무들을 배경에 두고 푸른 하늘을 찌르고 있는 하얀 탑은 그 탑의 기능이야 어찌 되었든, 눈을 시원하게 할 만큼 멋졌다. 나디움의 성이 하늘 산맥의 웅장함에 녹아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루티아의 탑은 하늘 산맥의 웅장함과 어깨를 겨루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다. 취향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던멜은 양쪽 다 좋아 보였다. “자네들이 해줘야 할 일이 많네. 하지만 그 전에 짐부터 풀 방으로 안내하지." 셋은 높은 탑의 균형을 잡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둘러싼 건물에 들어갔다. 지붕 위에서 흘러내린 넝쿨이 늘어진 입구에는 하얀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데다인." “베드포드 선생, 이 쪽은 아란티아에서 온 두 명의 기사들이오." “아, 울프 기사단의 그.......” 베드포드가 인사도 나누기 전에 데다인은 말을 끊었다. “난 루티아노를 소집하기 위해 바로 가봐야겠소. 두 사람을 적당한 숙소로 안내해주시오." 데다인은 던멜과 로일에게 간단히 목례만 하고 복도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발을 빨리 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몸은 미끄러지는 듯 항상 빨랐다. “성격이 급한 분이시긴 하지만 오늘은 각별하군요." 베드포드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저는 케인스윅의 선생 중 하나인 베드포드라고 합니다." “로일 울프요. 이 친구는 던멜 울프." 로일이 소개하며 악수했고, 던멜도 뒤따라 악수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좋은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베드포드는 삼십 대 초반에 깔끔하게 다듬은 금발을 찰랑거리는 미남이었고, 눈매가 너무 선해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나 있을지 걱정되는 마법사였다. “마법사요? 여기에서 그런 거창한 호칭을 달 수 있는 사람은 아홉 명뿐입니다. 여덟 분의 마스터와 한 분의 그랜드 마스터죠." 로일이 그를 마법사라고 칭하자, 그는 겸손하게 낮추어 말했다. “마법사라는 개념이 여기에서는 다르게 쓰이나 봅니다?" “그렇다기 보다 잘 쓰지 않는 거라고 해야죠. 여러분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위대한 기사'라고 하시나요? 저희들은 마법사라는 개념을 그런 식으로 두고 있습니다." “흥미롭군요." “이 곳에는 현재 여섯 분의 마스터가 계십니다. 에틀리, 저스틴, 루더, 필립, 골베인, 그리고 여러분을 이곳까지 안내하신 데다인입니다." “마스터는 여덟이라고 하지 않았소?" “두 분은 이 곳에 없습니다. 한 분은 타냐라는 이름의 마법사로, 마스터 중에 유일하게 여성이십니다. 케인스윅에는 절반 넘는 여성분들이 선생님으로 활동하지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여자는 역사적으로 봐도 드물죠. 어쨌든 그 분은 아크랜드의 케인스윅 지부들을 관리하는 일을 자진해시 맡아 루티아에 오지 않은지 좀 되었답니다. 실종된 과거의 그랜드 마스터를 찾으러 다닌다는 소문도 있죠." 또 그 마법사 얘기였다. 루티아의 이전 그랜드 마스터. 다른 친구들은 관심이 없어 모르지만, 던멜은 그가 바로 아란티아 보검에 쓰인 마법의 금속을 가져다 준 현자이자, 전쟁 때 아란티아를 지켜준 마법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실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고, 퀘이언도 자세한 언급은 피했다. 그는 언제나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퀘이언은 자신의 스승이면서, 전 여왕 수호기사인 그란돌에 대한 이야기도 피했다. 들은 이야기라면, 딱 하나. ‘그 분은 여왕 페하가 당한 어떤 큰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내게 수호 기사 자리를 물려주었다.' “아직 언급하지 않은 마지막 한 명이 마스터 타냐가 찾으러 나선 그 실종된 마법사입니다. 그 분의 성함은 테일드. 바깥에서는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분 하나의 힘만으로도 론타몬의 군대는 아란티아에 접근하지 못했을 겁니다." 외부에서는 그냥 ‘루티아가 도왔다.' 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도움은 굉장히 컸다. 삼천 명이 넘는 군대가 전투에 끼지도 못하고, 아란티아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사기와 군량을 모두 잃고 되돌아간 일도 있었고, 멀쩡한 땅이 늪으로 변한 나머지 진군을 못한 군대가 여럿이었다. 사람들은 그게 단순히 론타몬 군대의 아둔함이라고 비웃었으나 세 개의 나라를 무너뜨린 경험을 가진 군대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이유가 없었다. 불길로 사람을 태우는 것만이 마법은 아니었다. 던멜은 그게 바로 진정한 마법이라 생각했다. “들은 바가 없어서 난 잘 모르겠소." 로일은 고개만 까닥이며 말했다. “의외군요. 전 울프 기사단이라면 전쟁에 대해 잘 아실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난 전쟁이 있었을 때 도망자 처지여서.......” 로일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을 말했고, 베드포드는 입맛만 다셨다. 그는 두 사람이 묵을 방문을 열어주었다. “학생을 위해 준비해두는 방들 중 제일 큰 방입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제게 말씀하세요. 전 항상 같은 자리에 있겠습니다." “회의가 있다 들었소만?" “아무리 마스터 데다인께서 서두르신다 해도 루티아노가 개최되려면 반나절은 걸립니다. 제 생각에는 저녁때나 될 텐데, 그 사이 점심이라도 드시겠습니까?" “그래 주면 고맙겠소." “기다리세요. 곧 올리죠." 베드포드는 빙그레 웃어 보인 후 방문을 닫고 나갔다. 로일은 괜히 방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던멜은 고개를 갸웃했다. ‘뭘?' “적군이 여길 쳐들어온다, 그 적군이란 오늘 새벽 우릴 공격한 그 불 뻘건 괴물이다, 숫자는 여기 병사들보다 많다, 마법은 안 통한다......, 또 뭐 있지?" ‘독.' “그래,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이 곳의 위험성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던멜은 희미하게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로일도 맞은편 침대에 앉았다. “왜 웃어?" ‘너, 변했다.' “뭐가?" ‘그런 거 별로 관심 안 두잖아.' “내가 그랬나?"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일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멀뚱히 던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상해 보여?" ‘아니, 책임감을 갖게 된 것 같아 좋아 보인다.' 로일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라틸다의 목걸이를 쥐고 말했다. “여왕 폐하의 숙제에 대해 어제 내가 했던 말 기억나? 그 숙제에 대한 해답은 카셀이 가르쳐주었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우릴 지키기 위해, 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 애는 홀로 싸웠지. 그건 책임감이야. 혼자서 싸움에 나서는 건 조금도 두렵지 않아.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뭔가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어깨에 걸린 무게가 달라." 던멜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거 알아, 로일? 카셀이 우리의 캡틴이 된 후 모두의 말재간이 아주 좋아졌다는 거.' 로일은 웃음을 터트렸다. 던멜은 길게 한숨을 쉬며 로일의 질문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이 마을의 위험성? 자세한 앞뒤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속단할 수 없지만, 만약 내가 저 괴물들의 지휘관이라면 루티아는 하루 안에 함락시킬 수 있다.' 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당연히 베드포드라고 생각하고 로일은 웃옷을 아직 입지 않은 것도 상관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음식이 잔뜩 담긴 쟁반을 부들부들 떨며 들고 있는 여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로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쟁반을 들어주려고 하자, 그녀는 얼른 거부했다. “제가 할게요." 그녀는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와 방 중앙에 있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사람이 웃옷을 입어주길 기다렸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베드포드가 들어올 줄 알고 웃옷을 벗고 있었던 로일과 던멜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로일의 호의를 거절하느라 급히 들어온 탓에 나가지도 못 하고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식탁 위에 가지고 온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둘은 옷을 입었다.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았다. “괜찮습니다. 못 보일 꼴을 보인 건 우리 쪽이죠." “아니에요. 전 근육질 남자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두 분 다 근육이 좋아 저한테는.......” 그녀는 애써 어색함을 이기려고 말하려다 그만 또 입을 다물었다. 금방 울 것 같은 그녀의 난처함에 둘은 더욱 곤란해졌다. 던멜이 손짓을 하니, 로일이 던멜 대신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말을 꺼냈다. “복장을 보니, 시녀는 아니신 것 같고 마법사십니까?" “이 탑에 거주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은 마법을 쓸 줄 알지만, 마법사라고 하진 않아요. 저는 그냥 케인스윅의 선생이에요."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촛불 위에 양손을 살짝 올렸다가 뗐다. 촛불이 저절로 타올랐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저, 시녀도 아니신데 왜 굳이 식사를 여기까지? 제 말은......, 그냥 부르면 우리가 식당까지 갔을 겁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한참 속으로 말을 정리했다. “특별한 식당에 안내하지는 못할망정, 케인스윅의 학생 식당에 두 분을 안내할 수는 없죠. 그리고 실은 두 분을 미리 뵙고 싶어서 베드포드 선생님 대신 자청해서 왔습니다. 제 이름은 플로라에요." “우릴 보고 싶어서라고요?" 눈치 없이 로일이 묻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사과하고 나가려했다. 던멜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눈짓으로 의자를 권했다. “아, 전.......”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속에서 그냥 나가야 한다는 예절 문제와 두 사람이랑 대화하고 싶다는 욕구가 격렬히 충동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던멜은 수화로 로일에게 말했다. “던멜이 말하길....... 아, 우선 제 이름은 로일입니다. 던멜이 말하길, 같이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물론 저도 그러길 원하고요. 사과 드려야겠군요. 진작 권해야 했는데.” “아니, 천만에요. 기사 분들께 방해나 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녀는 앉은 자리가 불편한지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로일은 수화로 던멜에게 말했다. ‘아즈윈이나 말라 같은 여자들 보다가 이런 여자 보니까 오히려 신선하지 않아? 실디레가 이런 성격이면 정말 재미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로일의 농담을 무시하고 던멜은 수화를 했다. ‘케인스윅이란 곳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봐 줘. 내가 생각하는 마법사의 체계와 다른 것 같군. 이 곳의 구조를 알아야 여기 일에 잘 대응할 거다. 그러고 숙녀 분이 당황하지 않게 대화를 잘 이끌어 가봐라.' ‘내가 뭔 수로?' ‘알아서 해. 그리고 우리 둘이 하는 수화가 길수록 불안해할 테니 가급적 둘이서 얘기하고.' 마지막으로 던멜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키니, 그녀는 둘이서 무슨 얘기 하나 싶어 불안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눈이 굉장히 컸고, 눈썹이 좌우로 처진 모양새가 뭘 하든 난처한 일을 억지로 하는 것 같았다. “아, 던멜이 케인스윅에 대해 물었어요. 어떤 곳이죠, 구체적으로?" 로일은 그녀가 또 한 번 사과하기 전에 얼른 물었다. “아, 케인스윅은 마법사 양성 학교에요. 사실 대륙에도 마법사 학교 비슷한 곳이 설치되어 있지만, 그 중 대부분은 가짜랍니다. 진짜라 해도 거기에서 마법을 가르치진 않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가려, 그 중 뽑힌 사람을 여기로 데려오는 거죠. 가르치는 건 그 다음입니다. 사실 가르친다 어쩐다 하는 것도 맞는 표현은 아니에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능력을 끌어낸다는 게 맞을 거예요. 그래서 그 잠재력을 깨닫는 어떤 계기만 있으면 어제 나무 끝에 겨우 불을 붙일 줄 아는 사람이 다음 날 산을 불태우는 힘을 얻기도 한답니다. 검술과는 조금 다르죠." “어찌 보면...... 울프 기사단도 비슷합니다. 우리도 가르치거나 배운다기보다 자신의 재능을 끌어내는 훈련을 하는데 열중하거든요." “아, 얘기 들었어요.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은 그 검술이 어찌나 대단한지 마치 마법을 보는 것과 같다고. 저는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얘기는 들었어요. 오늘 다운서치 바깥 요새에서 들어오면서 모즈들 수십 마리를 단숨에 해치웠다면서요?" “제가 열 마리 정도 죽이긴 했지만, 수십 마리라는 건 부풀려진 소문 같군요. 그런데 모즈라는 건 그 긴 팔을 한 원숭이 같은 못생긴 괴물들을 뜻하는 단어입니까?" 플로라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제야 긴장이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예, 고대어로 흉악한 괴물을 뜻하는 단어죠. 아직 마을 사람들은 그 위기감을 잘 느끼지 못 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걱정이 크답니다. 저녁에 있을 루티아노에서 여러분들은 그 위기감이 어떤 건지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설명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일이군요." “루티아노라는 건 마법사들 모임?" “마스터들만 모이는 회의입니다. 가장 중요한 안건을 처리할 때 소집하죠. 여러분들께 원군을 요청하기로 한 것도 열흘쯤 전 루티아노에서 내린 결정이에요." 로일은 빵에 버터를 바르다 말고 던멜의 질문을 대신해주었다. 로일이 버터 바른 빵은 던멜이 먹었다. “그 모즈들은 어째서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까?" 질문하면서 로일은 던멜을 쏘아봤고, 던멜은 모른척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요. 마법만 통한다면 저 정도 숫자의 짐승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조만간 그렇지도 않게 되겠죠." 플로라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괴물들의 숫자는 나날이 늘고 있어요. 겉으로 드러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이....... 마을 사람들이나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언급은 자제하지만, 늘어나는 수치를 생각하면 절망적일 정도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그녀는 느닷없이 눈물을 보였다가 황급히 소매로 훔치며 일어났다. “제, 제가 말이 너무 많아 두 분의 식사를 방해한 것 같군요. 일어날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는 로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가버렸다. “우리가 무슨 압력이라도 가했나? 나 저 선생님 이름도 기억 못했는데, 가버리네." ‘플로라야. 성격이 그런 거라면 우리가 일부러 맞춰줘도 저렇게 행동할 거야. 그보다 루티아노에서 있을 회의 내용이 대충 그려지는군.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게 원군이라면 하얀 늑대들 전원이 모두 와도 별 소용이 없을지도 몰라.' “아까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지휘관도 없고, 요새도 타 넘을 줄 모르는 괴물들이랑 상대하는 게 뭐가 걱정이냐? 요새의 벽을 이중으로 세워서 높이를 더 높이면, 게이트만 틀어막고 있어도 막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다. 왜 난 이렇게 불안할까?' 던멜은 우유를 한 잔 따랐다. 그것은 로일이 마셔버렸다. (4) 마법사들의 회의 던멜은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소개된 여섯 명의 루티아 마스터들 이름을 머리 속에 정리했다. 로일은 그들의 이름을 소개 받은 후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잊어버렸고, 그 이후로도 그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 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던멜이라도 외워둬야 했다. 에틀리. 그는 마스터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금발에 잘 생긴 외모는 젊었을 때 플로라처럼 순진한 여자 마법사들 여럿을 가슴 조이게 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 잔잔하면서 강한 얼굴선은 확실히 젊은 현자라는 이미지에 걸맞았다. 말도 또박또박 조리 있게 잘 했다. 필립은 에틀리보다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그 푸른 눈동자가 워낙 맑아 무척 젊어 보였다. 무엇보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찰랑이는 금랄 머리는 뒤에서 보면 여자라는 오해를 살 정도로 결이 좋았다. 요새의 망루에서 만난 루더라는 마법사는 전투 후 옷을 가지런히 하고 있으니 비로소 루티아의 현자다웠다. 그리고 짧은 흰 수염과 머리카락은 왠지 옷으로 감춰진 그의 몸이 근육으로 다져져 있을 거라는 인상을 주었고, 실제로 그의 마른 몸은 단단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필립은 얼굴에 굉장히 주름이 많았지만 그게 나이 때문에 저절로 만들어진 인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중에 그의 나이가 쉰둘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한 것도 그 주름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이라고 항상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스틴도 기르면 필립 같은 멋진 금발이 될 것 같지만, 그의 머리는 젊은 병사처럼 짧았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머리까지 짧으니 젊다 못해 어려 보였다. 나이는 필립보다 두어 살 더 많았다.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던멜은 외모로 마법사들의 나이를 측정하는 바보같은 짓을 그만 두었다. 골베인은 흑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이런 피부색에 놀라는 건 익숙하니 굳이 그렇지 않은 척 하지 말라고 웃어 보였다. 말라와 몇 년 지내온 두 사람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는 예절 바른 기사라 칭찬했다. 그들 틈에 끼어있는 데다인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벽을 뚫어버릴 눈매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터들 사이에 있어도 확연히 드러날 만큼 그의 시선은 매서웠다. 알게 모르게 던멜도 마법사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해아 했다. 그들은 같은 마법사지만, 모두 개성이 달랐고, 말투가 달랐고, 생김새가 달랐다. 그러나 좌우에 빈 좌석을 둔 탓에 원탁임에도 상석에 앉아있는 것 같은 러스킨이라는 노인은, 던멜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마법사의 고정관념과 정확히 일치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에 하얀 로브와 긴 눈썹, 긴 수염에 선한 눈매를 가진 얼굴, 끝에 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검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느긋하게 앉아있는 자세....... 설명해주지 않아도 던멜은 그가 루티아의 모든 마법사들을 지배하는 그랜드 마스터라는 것을 짐작했다. “간단한 소개가 끝났으니 이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의의 진행은 흑인인 골베인이 했다. 차분하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아무리 흥분된 주제를 가지고 회의를 하더라도 사람들을 진정시켜줄 것 같았다. 골베인은 로일과 던멜을 위해 시간을 들여 각 마스터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지만, 던멜은 이름만 기억하기도 바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렸다. 대충 에틀리가 마을을 관리하고, 루더는 마을 경비, 골베인이 케인스윅의 교장을 맡고 있다는 정도만 기억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일은 쉐이든이 잘 했고, 카셀이 오게 된 이후 쉐이든도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울프 기사단 중에 그런 일 잘하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던 터라, 이로피스에서 기사단의 사무를 보던 쉐이든이 반 강제로 떠맡은 일이기도 했다. 그 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가장 좋아한 사람도 어쩌면 쉐이든일 지도 몰랐다. “아란티아의 여왕께서는 건강하신가?"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이 묻는 바람에 던멜은 뭔가 떠오르려던 생각이 끊겼다. “잘 계십니다. 좀 오래 떨어져 있긴 했지만 잘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로일이 대답했다. 러스킨은 먼 곳에 시집보낸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 같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이로 따져 보면 당연히 그 반대일 테지만, 외모 때문에 그런 식의 상상 밖에 되지 않았다. “아란티아의 여왕께서 하얀 늑대들을 직접 보내오신 것에 대해서는 크게 기뻐할 일이긴 합니다만, 겨우 두 명이란 건 곤란합니다.” 에틀리가 갑자기 본론을 꺼냈다. 소리를 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한다고 소개된 던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마치 공격하듯 로일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 잘못이 아니오.” 로일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데다인이 대신 설명했다. “작은 사고가 있었네. 원래 네 사람이 왔어야 했지만, 두 사람이 하늘 산맥을 오던 도중 실종되었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약해지긴 했지만 화이트비의 힘을 이용하면 두 사람 정도는 하늘 산맥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에틀리는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입니다. 마스터 데다인. 화이트비의 힘이 가장 강할 때도 하늘 산맥에서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았었죠. 마스터 러스킨께서 전력을 다하신다면 모르나, 지금은 또 그럴 때가 아니잖습니까?” 러스킨은 에틀리의 지적에 허허하고 웃었다. “그건 나를 탓하는 말로 들리는군, 에틀리. 저 두 사람은 동료까지 잃어버린 상태로 우릴 돕기 위해 여기에 와 준 손님들이자, 원군들이야. 회의 시작하자마자 몰아세우는 건 좋아 보이지 않는군.” “그런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마스터 러스킨, 루티아는 아란티아의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맹국입니다. 그들이 위험에 처할 때 우리가 도왔고, 이제 우리가 위험에 처했으니 돕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 명이라니요? 예, 중간에 사고가 있었던 점은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두 다 왔어도 네 명이었습니다. 네 명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러스킨은 입맛을 다셨다. 가만히 있던 루더도 말했다. “언제나 현명한 판단으로 우리 현자들을 이끌어 주셨던 아란티아의 여왕께서 이번만큼은 루티아의 위기에 대해 잘못 이해하신 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확실한 원군이 필요했었습니다. 분명 제 눈앞에서 활약을 보인 두 사람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유능한 검사 두 사람이 군대를 막기는.......” 로일은 속에서 끓는 분노를 조용히 인내하고 있었다. 던멜도 그들의 말에 반발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타이밍을 놓쳐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태는 밖에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마스터 에틀리는 의자에 파묻혀 회의를 주시하기만 하는 로일과 던멜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원탁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사실 이 영상은 열 명 이상의 울프 기사들을 위해 준비된 것인데, 단 두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스터 에틀리!" 러스킨이 엄히 말했다. 에틀리는 고개를 가로 저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의 손이 빛을 내더니 원탁 위에 희미한 평면의 지도가 떠올랐다. 그것은 손으로 그린 지도 같았지만, 지도 아래로 바닥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신기해하는 로일과 던멜은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도의 중앙에는 마을과 탑이 그려진 루티아의 모습이 있었고 서쪽에는 바위산이, 그 외의 세 방향은 숲이,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숲, 즉 아웃서치에는 붉은 점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붉은 점들은 모즈들을 표시한 겁니다." 에틀리가 설명하려 할 때 아무 말 하지 않고 있기가 민망했던 로일이 한 마디 했다.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 것 같소만?" “한 점당 열 마리씩을 표시한 거요." 에틀리는 잘라 말했다. 로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보다시피 한 달 전에 비하면 다섯 배나 그 숫자가 늘었습니다. 처음 모즈들이 아웃서치를 공칙하던 일 년 전과는 비교할 수치가 아니지요. 이제는 한 달 전과 다르고, 또 일주일 전과 다릅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나면 저는 모즈들의 수치를 이 지도 상에 표기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 던멜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을의 풍경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고, 거기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부상당한 노인이 그려졌다. “그에 비해 루티아를 지키는 병사들은 한정되어 있고, 모즈들과의 전투로 나날이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도 위로 보이는 각 마을의 배치와 요새의 위치가 던멜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리고 라르비튼의 다리를 둘러싼 루티아의 역사와 그에 따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마법사와 마법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던 불안감이 가슴을 흔들고 있었다. 던멜은 지금까지 막연했던 불안감의 정체를 알았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더 이상 괴물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절망적 입니다." 플로라도 같은 말을 했다. 절망....... 아니, 마스터 에틀리는 진짜로 그 절망감이 무엇인지 경힘해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던멜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전투의 경험도 없는 마법사였다. 괴물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루티아는 그 괴물들을 막아낼 힘이 없다. 그 간단한 명제에서 나오는 결론은 너무 당연했다. ‘루티아가 멸망한다.' 던멜은 이 현실적이지 못한 상황에 잠시 정신이 얼떨떨해 했다. 그리고 루티아에 들어오면서 봐왔던 풍경과 지금 떠오른 생각들이 합쳐졌다. 이곳은 외적의 침입에 대해 어떤 방비도 되어있지 않은 곳이었다. 요새? 그것은 쏟아지는 물을 막는 거적에 불과했다. 경비병들? 그들은 전투를 경험해 본적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는 농사꾼들에 불과했다. 루티아는 카모르트가 아란티아에 요청했던 것과 달리, 군대가 모자라서 원군을 요청한 게 아니었다. 마치 다 끊어진 밧줄에 의지해 천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남자가 자기 밧줄이 얼마나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도와달라고 부탁해온 기분이었다. 론타몬의 정복 전쟁을 경험해봤을 마스터들조차 전쟁이 뭔지 모르고 있다. 던멜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당혹스러움을 티 내지 않으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괴물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 했소?" 러스킨이 모두에게 물었다. “모릅니다. 왜 그들이 우리의 마법에 통하지 않는지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에틀리가 대답했고, 데다인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 마법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론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지만, 사실 화이트비의 보호를 뚫고 그런 마법을 쓸 만한 마법사가 대륙 어디에 있겠소?" 골데인이 힘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크랜드에는 없을지 몰라도 하늘 산맥에는 있을 지도 모르네, 마스터 골베인." 데다인이 딱딱하게 말했다. “아니, 오히려 케인스윅 선생들이 하는 말이 더 일리가 있겠군. 우리 중 한 사람이 배신자라는 거 말일세." 사람 좋은 검은 얼굴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회의가 잠시 멈춰버렸다. 그 사이 던멜은 혼자서 이 일에 대한 결론을 생각해 보았다. 사태는 간단했다. 괴물이 쳐들어오고 있고, 그 괴물들만 해결하면 루티아의 문제는 끝이다. 여기에는 속마음을 숨기고 접근하는 검은 사자 백작 같은 귀족도 없고, 정치적으로 얽힌 이해관계도 없으므로, 이 일에 대한 여파가 국가간 전쟁으로 발전될 일도 없었다. 오직 공격해오는 모즈들을 해치우는 것, 그게 다였다. 그러나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자칫 잊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 하나 있었다. 루티아가 멸망한 후의 여파는 반드시 아란티아까지 피해를 줄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피해가....... 그 피해의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루티아가 멸망하는 일이 단순히 괴물들의 공격에 의해서라면 이 괴물들의 공격은 단순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루티아를 노리고 있구나.' 던멜은 조심스럽게 혼자 결론을 내려보았다. 한참 후, 골베인은 스스로 만든 침묵을 수습했다. “배신자니 어쩌니 하는 얘기는 우선 접어둡시다.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음모 따위는 믿고 싶지 않소. 모즈들에게 어째서 마법이 통하지 않는지는 나와 케인스윅 선생들이 어떻게든 밝혀내도록 하겠소. 또 이 괴물들이 어디에서 나타나 왜 하필 루티아를 공격하는 지에 대해서도....... 아, 마스터 러스킨께서 하실 말씀은?" 러스킨이 손을 드니 골베인이 발언권을 주었다. “루티아노에서 벌써 같은 말이 여러 차례 나온 걸로 아네, 누군가 루티아를 노리고 그 모즈들을 보내고 있다는 말 말일세." 마침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던멜은 조금 놀랐다. 러스킨은 던멜을 보고 희미하게 웃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마스터 골베인, 이에 대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 했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늘 산맥의 엘프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에야 아크랜드의 어떤 나라가 우리를 공격해 이익을 얻겠습니까?" “아직 엘프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가?" “가능한 연락은 모두 취해보고 있습니다만, 회신은 없습니다." 모르는 이야기 투성이라 로일은 벌써 지루해하고 있었고, 던멜은 대화의 몇 가지 부분은 소화시키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사람들 역시 그 괴물들의 정확한 정체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 그럼 그간 수없이 얘기해봤어도 결론이 나지 않았던 문제는 접어두고, 아란티아에서 온 원군들을 위한 회의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터 에틀리, 계속 해주게나." 골베인은 다시 회의를 진행시켰다. “모즈들은 이제 사다리를 이용해 요새를 넘어오는 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짐승들은 경험을 통해 하나씩 전투 방법을 익혀가고 있습니다. 이제 문만 걸어 잠그고 막을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을 경비대는 오히려 역 공격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아직 모즈들의 수치를 알지 못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고 우신은 방어에 최선을 다해야 하늘 시점 입니다." 마을 경비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니 그 일을 맡고 있던 루더가 처음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방어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언제까지 무작정 방어에만 집중한단 말입니까?" “요새를 좀 더 강화하는 건 어떤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 되네. 본격적으로 모즈들이 쳐들어올 경우, 요새 강화가 하루나 이들 정도 더 시간을 벌 수 있는 요인은 되겠지. 물론 난 그 하루를 위해서라도 요새 강화에 힘을 쓰겠네. 그러나 그 벌 수 있는 시간으로 뭘 더 할 수 있을지, 그걸 생각하는 게 이번 루티아노의 목적이 아닌가?" 회의는 길어졌고,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그들은 가끔 로일과 던멜을 쳐다보며 회의에 참여해주길 바랐지만 둘 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로일은 자기가 자신 없는 일에 애써서 끼려 들지 않았고, 던멜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루티아노에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회의는 밤까지 진행되었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던멜은 몇 가지 의견을 떠올렸으나, 표현하지는 않았다. 말을 못한다는 문제도 있고, 성격도 그랬고, 던멜은 앞에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로일은 회의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가 적극적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이 지루한 회의석상에서 열변을 토하는 수준은 못 되었다. 둘 다 그런 사람이었고, 그걸 바꿀 생각은 없었다. 회의는 끝이 났다. 러스킨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무 오래 화이트비를 비워놓았군. 마스터 루더, 두 사람을 마을 경비대에 소개시켜 주고 앞으로의 방어 전선을 어떻게 짤 것인지 정해주시오. 할 수 있는 모든 협력을 두 사람에게 제공했으면 하오.” “물론입니다." 러스킨이 일어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하고 나머지도 헤어졌다. 다들 로일과 던멜에게 루티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으나, 데다인 만은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날 따라오시게, 울프의 기사들." 루더가 웃으며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밖은 벌써 저녁이었다. 던멜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무거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에 마음이 안정되질 않았다. 너무 중요하지만 그런 만큼 단순한 나머지 잊기 쉬운 것. 이를테면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무기도 없이 뛰쳐나왔다거나, 와인을 마시려는데 잔이 없다거나, 수프를 먹으려는 스푼이 없다거나....... 로일에게 그 잊어버린 게 뭔지 물어보려 하니, 그는 벌써 루더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회의가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던 모양일세?” “그렇소. 애초에 용어부터 익숙치가 않아서.......” 로일은 루더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꾸했다. “게다가 회의실의 분위기가 꼭 잘못도 없는데 혼나는 기분이었소.” “나 역시 에틀리의 말을 부드럽게 바꾼다는 게 그만 그쪽 분위기로 흘러버렸었지. 사과하겠네. 맞아, 자네들 잘못이 아니야. 우리들 잘못이지. 너무 기대가 컸던 탓도 있고. 사실 아무리 훌륭한 기사라도 결국 병사 중 하나인데 말이야, 안 그런가?" “같은 말은 한 달 전에도 수없이 들었소. 어쨌든 난 싸우는 일에는 자신 있소. 하지만 저런 이론 쪽에는 완전히 무관심 하오." “기분이 나빴나 보군?" “기분이 나빴냐고 했소? 우리 캡틴이 같이 봤다면 당신들에게 한바탕 쏟아 부어줬을 거요." 루더가 껄껄대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 캡틴과 같이 오지 그랬나?" 던멜은 놀라며 자리에서 멈췄다. 앞서가던 두 사람도 멈췄다.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회의의 내용이 오래 전 머리 속에 그려봤던 상황과 거의 일치차고 있었다. 던멜은 카모르트에서 돌아오는 날 친구들에게, ‘카셀이 없었다면 카모르트의 일이 어떻게 끝이 났을까?'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논한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다들, 대신들과 귀족들이 낀 회의석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있다가 그냥 아란티아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방금 그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검은 사자 백작처럼 울프에게 적대적인 귀족이 아니라, 울프 기사단에게 호의 적인 마법사들을 상대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 것이었다. “왜 그래?" 로일이 묻자, 던멜은 짧게 수화를 했다. ‘둘이 이야기 하자.' 로일은 루더에게 양해를 구하고 던멜 앞으로 다가가 수화로 물었다. ‘잘못된 게 있어?' ‘있다. 회의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리 속에 떠돌았었다. 그게 뭔지 이제야 알겠어. 멍청하게도.' ‘그게 뭐지?' ‘우리에게는 지금 입이 없다.' ‘내가 네 수화를 못 알아보는 건가? 입?' ‘생각해 봐라. 우리가 다섯 명이었을 때 대외적으로 활동하면 누가 주로 말을 했지? 아즈윈이었다. 그 애는 언제나 제일 앞에 서서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독설을 쏟아냈지. 그래서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런 방식이 하이로드들에게는 잘 먹혔어. 귀여워했다고 봐야지. 게랄드도 유머는 엉망이지만, 이야기하는 건 항상 즐겨해. 그리고 그런 둘을 제어하면서 대외적으로 사실상 캡틴의 역할을 했던 건 쉐이든이었다.’ ‘그랬지 ' 로일도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던멜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았다. ‘우린 카셀을 캡틴으로 만들었고, 녀석은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기대 이상이었지 그때 제일 기뻐했던 게 누구였을 것 같나? 쉐이든? 우릴 제어할 필요가 없게 된 이후 짐을 벗었다는 기분은 들었겠지. 아즈윈은 자기가 지나치게 흥분하면 옆에서 말려줄 캡틴이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고, 게랄드도 기분 좋게 복종할 사람이 위에 있다는 걸 환영했다. 하지만 생각해 봐. 정말 카셀이 있어 좋았던 사람이 누군지 말이다.' 로일은 멀뚱히 생각하다가 숨을 들이켰다. “그건 나야."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다. 카셀이 생긴 후 우리는 우리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 그러니까 앞에 나서서 공식적으로 말해야 하는 임무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린 그런 캡틴을 놓고 와버렸다. 그것도 쉐이든과 함께.' “거기다가 아즈윈과 게랄드까지 잃어버렸지. 맙소사, 우리에게는 지금 '입'이 없군." 로일은 소리 내어 말했다. ‘네가 없을 때 카셀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얀 늑대들은 그 이름 자체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그린데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는 그 이름을 무기로 만들 수 없는 거다.' “좀......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던멜은 미소 지었다. ‘할 수 있어?' 로일은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못해." ‘사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그 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자기들의 위기 앞에서는 평소 가지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잃어버렸겠지.' “그럼...... 어쩌지?" ‘우선은 이들의 의견을 따라가자. 나 역시 문제점만 알고 있을 따름이지, 해결 방법은 모르겠다. 어쩌면 마법사들도 해결책을 모르기 때문에 이 사태의 핵심을 외면하는 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다시 루더의 뒤를 따랐다. 루더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궁금해 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5) 자경단 자경단의 캡틴은 코렛이었고, 짧은 붉은 머리에 키가 로일보다 한 뼘 정도나 더 큰 남자였다. 가장 근육질인 남자를 대장으로 뽑은 건가 싶을 만큼 덩치도 좋았다. 그는 로일 앞에 뻣뻣이 서서 말했다. “바, 반갑습니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많습니다." 로일은 그의 굳은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옆에 있는 다른 이들도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두 분께서 우릴 지휘해 주신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까 낮의 전투도 잘 봤습니다." 그런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로일은 되려 민망해했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두 사람이 같이 있었으니 위험한 싸움은 아니었소." 로일은 가급적 겸손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들의 기대에 불을 붙인 셈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 내뱉은 말에 그들의 실망은 더욱 컸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을 지휘할 수 없소." 막 한 사람씩 소개하려던 찰나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루더는 자경단을 대표하는 스무 명을 앞에 두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로일은 목소리도 낮추지 않고 말했다. “지휘는 못 하오. 나는 주로 명령을 듣고 움직이는 쪽이었고, 던멜은 어느 정도 작전에 능하지만 마찬가지로 지휘를 맡을 수는 없는 처지요. 우리는 지취관이 아니오." 로일은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렇지만, 기사라면 최소한 우리들보다야 이쪽 방면에 능숙할 거 아닌가?" “아는 것과 지휘를 직접 맡는 것은 다르지 않소?" 코렛은 뒤에 있는 병사들의 눈치를 보았고, 병사들도 뭐라 할 말이 없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 보였다. 싸우기도 전에 사기를 깎아먹은 꼴이었다. “아......, 그, 그럼 우선 요새의 구조라도 구경하시겠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코렛이 앞장서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두 사람이 그 집을 나오자마자 안에서 요란하게 떠들었고, 그 소리를 들은 로일이 던멜에게 수화로 말했다. ‘안에서 우리더러 기사 맞냐고 떠드는데?' ‘내가 보기에도 충분히 그런 오해를 살만한 소지가 있었다.' 코렛은, 요새의 망루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 손짓을 해주었다. “모즈들은 주로 밤이나 새벽쯤에 공격해 오지요.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시간에 상관없이 공격해오니 저렇게 하루 종일 경계를 설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코렛은 열심히 마을 경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던멜은 어둠 속에서 부정확한 입 모양을 보이며 말하는 그의 설명을 모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리키는 요새의 각 부분과 거기 에서 창을 들고 서 있는 병사들의 위치만으로 상황을 모두 판단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되어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적들이 작전이라고는 모르는 짐승들이라는 점이 다행스럽긴 하나, 병사들 역시 전투에 무지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은 막연히 위험에 처해있다고 여길 뿐, 던멜이 생각하는 만큼의 위기감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 괴물들이 사다리로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통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고, 대규모 공격을 막을 화살 부대를 더 구성하고 있습니다. 망루마다 돌과 긴 창을 두고, 기습 공격에 대비했지요." 코렛의 설명은 그런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여전히 그들은 끊어지기 직전의 밧줄에 의지한 채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밧줄이 얼마나 약한지 모르고 있었다. 던멜은 요새의 경계를 이루는 통나무를 두들겨 보고 물었다. ‘불에 대한 대비는?' 로일이 통역해주자, 코렛은 어깨를 으쓱했다. “건조한 시기에는 물을 뿌려주고 있지요. 그리고 이 곳은 비가 많은 곳이라 걱정할 것 없습니다." 루더는 코렛에게 몇몇 약해 보이는 쪽 경계에는 통나무를 이중으로 세우라고 명령을 내렸고, 불평 한 마디 없이 그들의 작업은 당장 밤부터 시작되었다. 그 힘이 미약할 따름이지,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의욕은 대단했다. ‘우린 이 요새 가까운 곳에 머물러야겠다.' 던멜이 수화로 말했다.' ‘왜?' ‘괴물들이 진짜로 쳐들어오면 병사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여태까지 막아왔는데, 굳이 우리가?' ‘뭔가 이상해. 막아? 아니, 내가 보기에는 괴물들 쪽이 일부러 공격을 서서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괴물들을 누군가 지휘하고 있다면, 이 정도 요새라면 언제든 부술 수 있다.' ‘정말 누군가 지휘한다고 생각해?' ‘모르지.' 로일은 더 따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자경단 청년들의 숙소에서 묵겠다는 말을 듣고 루더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 한들, 귀한 손님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실 수는 없네. 탑에서 머물고 비상시에만 자경단에 합류해 주시게." “여기 온 이상 당신들의 명령을 들어야겠지만, 그냥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소." 로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루더는 더 설득하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소식을 들은 코렛은 루더보다 더 놀랐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는 개인 방조차 없습니다." “저기 침대가 몇 개 남는데 안 되오?" “그건 자경단의 병사들이 교대 시간마다 번갈아 가며 쓰는 침대입니다." “그거면 됐소. 교대할 병사가 잘 시간이 되면 비워드리겠소. 나나 던멜은 그리 잠이 많은 편이 아니니." “아니 , 그런 뜻이 아니라.......” 우기는 것에 관해서는 로일도 아즈윈 못지않았다. 결국 코렛과 로일은 그나마 제일 깨끗한 침대보가 있는 창가 쪽 침대 두 개를 개인 숙소로 정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시키는 대로 하긴 했다만, 이런다고 달라지진 않는다.' 아란티아의 기사가 같은 방에서 묵는다는 사실에 잠을 못 이루는 병사들이 뒤척이는 와중에, 로일이 수화로 말했다. 던멜도 동의했다. ‘그래도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일단 자고 내일 생각을 정리해보자.' 로일은 침대에 누우려다 마지막으로 수화로 말했다. ‘아즈윈과 게랄드, 무사할까? 두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서도.......’ 던멜은 뭐라 말할까 하다가 그냥 수화를 접었다. ‘그것도 내일 생각하자.' “그래." 둘은 동시에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던멜은 등불이 희미하게 밝혀져 있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새벽녘에야 잠들었다. “저 아이가 우리 측 암살자 세 명을 죽인 꼬마라고?" 쇠사슬에 묶인 소년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이 조용히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딴에는 안 들리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아이는 이미 입모양으로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예. 유랑극단에 있던 귀머거리인데, 말도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몇 살이야?" “말을 못하니 물어봐도 대답을 해야 말이지요. 열두 살 정도 되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런데도 우리 쪽 요원을 세 명이나 죽였습니다. 그것도 부러진 칼로.......” “유랑 극단에서 뭐하던 놈이었지?" “전들 알겠습니까? 여하튼 의뢰하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유랑극단인 척 하고 가는 마을마다 불 질러서 돈이 될 만한 건 다 빼돌리는 놈들이었잖나. 그리고 그 유랑극단 주인 놈은 현상수배도 되어 있었어. 현상금이 금화 백은 되던걸. 그 현상 수배에서 벗어나려고 포장하고 있던 게 그 극단이지. 인형 놀이로 애들 홀려서 납치까지 하는 놈들 좀 죽이는 게 어때서? 자네도 반대는 안 했잖나." “그 놈이 훔친 거 챙겨보려고 찬성하긴 했지만, 세 명이 죽었다니까요, 마스터 칼스텐." “꼬마 애 하나 못 죽이고 죽은 놈들이 잘못이지." “예?" 칼스텐이라 불리는 남자는 다가와 그의 얼굴에 입을 가까이 들이댔다. “내 말 알아듣나?" “제가 못 알아듣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아니 잘 봐. 우리 말하는 걸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잖아. 알아듣는 거야. 그렇지?" 칼스텐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칼스텐이 물었다. 아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칼스텐은 아이의 손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위험합니다!" 뒤에서 그의 부하가 놀라 소리쳤다. “호오, 이 꼬마가 나를 위협할 정도의 고수인가?" 칼스텐은 픽 웃었다. 그의 부하는 소리 지른 게 무안했는지 뒤통수만 긁적였다. “글씨를 쓸 줄 안다면 이름을 바닥에 남겨보아라." “그깟 애가 무슨 글을 쓸 줄 알겠습니까?" “자네는 닥치던가, 나가던가 해주겠나? 시끄럽군." 그의 부하는 닥치는 쪽을 택했다. “자, 이름을 내게 가르쳐다오." 테마르는 천천히 손가락을 내밀어 글씨를 썼다. 그것이 칼스텐과 테마르의 첫 번째 대화였다. - 테마르 “흐음, 좋은 이름이군. 나이는?" - 열두 살 “극단에서는 뭘 했지?" - 칼춤 “그래서 칼을 쓸 줄 아는군. 누가 칼을 가르쳐주었지?" - 아버지 “아버지는?" 테마르는 대답을 멈추었다. 칼스텐은 느긋하게 한 번 더 물었다. “아버지는? 혹시 우리 요원이 죽인 극단 사람들 중 하나가 네 아버지였나?" 테마르는 고개를 젓고, 다시 바닥에 글씨를 썼다. - 단장이 죽였다 “저런, 그럼 넌 아버지의 원수 밑에서 일하고 있던 셈인가?" - 복수를 위해서 “이런, 이런. 그럼 네가 준비한 복수를 우리 쪽 요원이 대신 해버렸구나. 그래서 화가 난 거였나? 그래서 요원들을 죽였나?" - 그건 그냥 살기 위해 칼스텐은 한참이나 테마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스터, 곧 중요 의뢰인이 찾아올 시간입니다. 그만 가셔야겠어요." 뒤에서 그의 부하가 초조하게 말했으나,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테마르에게만 집중했다. “글씨를 쓰는 것 말고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 수화 “그걸 내게 가르쳐다오." 테마르는 큰 눈을 깜박였다. 그의 부하도 놀란 눈을 했다. “이 애는 지금부터 내가 관리하겠다. 그러니 먼저 이 녀석과 대화할 방법을 익혀야지." “저, 이런 말 하면 마스터께서 제 몸의 급소란 급소에는 다 칼침을 박아놓으시겠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수가 없군요. 제정신이십니까?" “제 정신이다. 생각해 봐. 내가 열두 살 때는 겨우 어른 하나를 목검으로 이길까 말까 했었지. 그런데 이 녀석은 이 어린 나이에 벌써 이 정도 실력이야. 누군들 가르치고 싶지 않겠나?" “마스터께 배우고 싶어 하는 재능 있는 녀석들이야 줄을 세우면 론타몬을 횡단시킬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가 가르치고 싶은 녀석과 내게 배우고 싶은 녀석은 엄연히 다르지. 가르치다가 안 되면 마는 거고, 이 녀석이 지금 싫다고 하면 마는 거고. 자, 내 말을 모두 알아들었느냐, 테마르?" 테마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제자가 되겠느냐?" 역시 그 질문에도 테마르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좋다. 넌 지금부터 블랙풋의 어쌔신 마스터인 칼스텐의 정식 제자다." 그는 테마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어린 소년의 결정이었으니 사실상 그것은 테마르 본인의 결정이 아니라 칼스텐의 의지였다. 그러나 만약 지금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 해도 고민없이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테마르에서 던멜로 이름이 바뀐 지금도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울프 기사단이고, 퀘이언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여전히 그의 스승은 칼스텐이었다. 그 일이 있기 9일전.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망루 밑에 선 던멜은 바다처럼 넓게 퍼진 아웃서치의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바람도 없이 나무가 흔들렸지만, 그것은 하늘 산맥만의 괴이한 움직임이 아닌 괴물들의 움직임이었다. 어제 루티아노의 회의 석상에 나타난 지도와 그 투명한 지도 위에 움직이던 붉은 점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던멜이 느끼기에도 괴물들의 숫자는 많았다. 인기척이 있어 뒤를 돌아보니 어제 방에서 만난 케인스윅의 여선생, 플로라가 있었다. 그녀는 망루 계단에 올라 다소곳이 서서 말했다. 가정교사에게 잘 교육 받고 평생 저택에서 보호 받으며 살아온 작은 숙녀 같은 가지런한 자세였다. “방에 안 계셔서 깜짝 놀랐어요. 숙소를 자경단 건물로 옮기셨다고요?”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몹시 아쉬워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표현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은 후, 잠시 멈춰 있었다. 던멜이 한참동안 가만히 있자,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이번에는 작별 인사를 하고 계단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던멜이 손짓해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왜......?" 그녀는 당황했다. 던멜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고, 그녀는 자기 걸음 수를 체크해가는 듯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섰다. 던멜은 망루의 난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 할 말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녀는 두 손을 크게 저었다. “아니, 없어요. 그냥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제가 기사님의 수화를 알아보지 못 하니.......” 던멜은 다시 난간에 글씨를 썼다. 문득 이렇게 글씨를 쓰고 있자니, 처음 칼스텐을 만나 했던 대화가 기억났다. 그 후로 이렇게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대화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 느리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도 제 뜻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플로라께서 더 말씀을 많이 하시면 됩니다. 플로라는 웃음을 터트렸다가 얼른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하지만 앞에 서니 너무 긴장이 되어서요." 그녀는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 하다가 결국 숲 쪽을 바라보았다. 갈색에 어깨까지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숨을 골랐다. 투명한 보석이 달린 화려하지 않은 귀걸이가 그녀의 수수함을 돋보이게 했다. “실은 제게 남동생이 있어요. 지금은 떨어져서 살지만 기사 지망생이죠. 재능은 있어요. 마을에서 아무도 못 당해내죠. 성격도 거칠어서 싸움터에 어울릴 만한 아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싸움의 재능은 고작해야 동네 술꾼들 제압하는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그 애는 항상 울프 기사단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답니다. 저는 그 애의 그 꿈을 소중히 해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노력을 했지만, 그 애는 제가 마법사라는 것부터 싫어해요. 집에서 얌전히 설거지나 하라고 혼나기도 했죠."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니에요. 노력도 많이 해요. 하지만 이로피스 왕실 기사단 시험에 세 번 정도 떨어지고 나서부터 의욕을 잃고 지금은 결혼해서 가업을 이어받아 빵을 굽죠. 그래서인지 저는 항상 왕실의 기사들을 존경해 왔어요. 제 동생처럼 칼 잘 쓰는 사람도 붙지 못하는 시험에 합격한 기사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그런데 그 중 최고가 울프 기사단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당신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꼭 한 번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아, 얘기 재미없나요?" 그녀는 흐뭇하게 웃으며 얘기하다가 이내 혼자만의 자책으로 또 당황했다. 자기 얘기가 재미없으면 듣는 사람 잘못이라고 성질부리는 아즈윈 같은 여자나 두 마디 이상의 대화를 하는 법이 없는 왕실의 시녀들만 보다가 이런 여자들을 보니, 로일의 말대로 신선했다. - 계속 하십시오. 제게 있어 재미없는 이야기란 없습니다. 던멜은 다시 글씨를 써서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래도 이런 사소한 얘기를 듣는 것에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그녀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또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던멜도 계속 숲을 바라보고 있기가 지루하던 차에 나타난 대화상대가 도망칠까 봐 얼른 손가락을 놀렸다. - 사소한 얘기를 하는 게 걱정이라면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한참 던멜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당신은 친절한 사람이군요. 제가 생각하던 울프의 기사와 이미지가 달라요....... 아,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제가 알고 있는 얘기는 모두 해드릴게요." - 하늘 산맥의 엘프들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어려운 이야기군요. 저도 두 번 정도 밖에 본 적이 없어요. 우린 가끔 식량이나 마법 물약 같은 것과 그들의 옷감, 가축 같은 걸 교환해요. 베돈 같은 하늘 산맥의 숲에 사는 가축도 받았는데, 길들이지 못해서 교역에서 손해 보기도 하죠." 그녀는 그때 일이 생각나는지 웃다가 말을 이었다. “새처럼 깃털 달린 하얀 날개가 등에 있고, 뾰족한 귀가 굉장히 커요. 제 손바닥만큼. 어떤 엘프들은 그게 늘어져 있기도 하죠. 어릴 때는 날기도 한다는데 다 큰 엘프들은 날지 못 해요. 그들은 자기들을 ‘레미프’ 또는 ‘레미 쿠아프’라고 지칭하죠. 고대어로 인간이란 뜻이죠. 그리고 그들은 인간을 ‘우그’라고 불러요. 그건 고대어로 엘프라는 뜻이고요." 던멜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웃었다. “그들에게 있어 아크랜드는, 인간에게 있어 하늘산맥과 같아요. 우리가 요정이고 자기들이 인간인 거죠.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지금도 옵니까?' “만나고 싶으신가요? 안타깝지만 그건 어려워요.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전혀 찾아오지 않았어요. 꼭 정기적으로 오는 건 아니지만 이맘때면 오는데, 소식이 없네요. 아마 모즈들 때문일 거예요. 이렇게 공격당하고 있는 마을을 보면 올 생각이 싹 가시지 않겠어요?” 기척이 있어 던멜은 숲쪽으로 즉시 시선을 돌렸다. 요새의 다른 쪽 망루에서도 병사들이 숲을 주시하며 창을 준비하고 있었다. 괴물들 몇 마리가 숲 언저리에서 서성대며 요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즈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게 뜻이 있는 언어인지 그냥 괴성인지 듣지 못하는 던멜은 알 수 없었다. 모즈들을 만난지 겨우 하루 밖에 안 되었지만, 던멜은 즉시 녀석들의 행동 패턴을 파악했다. 이건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을 긴장시키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모즈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겁을 집어먹고 일일이 반응해 주는 이 경험 없는 병사들을 상대로 그 작전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병사들만 그러는 건 아니었다. 옆을 보니 난간을 꽉 쥐고 있는 플로라의 손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괴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엘프들의 얘기를 하며 겨우 서로 간에 가지고 있던 거리감을 없애가던 그녀는 공포에 떨었다. 던멜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플로라는 화들짝 놀라며 던멜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난간에 글씨를 했다. - 괜찮습니까? 괴물들은 그 후 반 시간 가량이나 의미 없이 소리만 지르고는 다시 숲으로 사라졌다. 플로라는 던멜의 옆에 서서 공포를 인내하고 있었다.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더니 겨우 말문을 열었다. “사실 여기는 가까이 오고 싶지 않았어요. 괴물들이 처음 아웃서치를 공격해올 때 저는 학생들과 밖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어요. 좀 폭발이 있는 훈련이라서 밖에서 할 수 밖에 없었죠. 그 때 괴물들이 공격했고, 저는 필사적으로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소용없었어요. 예, 아시다시피 괴물들은 제 마법은 물론이고 마스터들의 마법에도 죽지 않거든요.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다섯 명이나 물렸고, 그 중 둘은 죽었어요. 그러고 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저를 구하려다가 희생당했죠. 모즈들만 보면 그 때 생각이.......” 그녀는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고 던멜의 손에서 벗어났다. “추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녀는 도망치듯 망루에서 빠져 나가버렸다. 던멜은 그녀의 손을 잡아준 게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게 된 것 같아 씁쓸했다. 로일은 자경단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간단한 검술 훈련을 시켜주고 있었다. 애초에 기본이란 걸 배워본 적이 없는 로일이 가르쳐 봐야 여기 오기 전에 카셀에게 가르쳤던 내려치는 연습을 반복시켜주는 게 다였다. 그러나 사실 그 정도도 그 젊은 친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만큼 제대로 검술을 아는 이가 없었다. 던멜은 로일을 불러냈다. “왜?" ‘검술보다 창을 가르쳐라.' “난 창술 몰라." ‘찌르고 휘두르는 정도만. 짧은 시간 안에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게 좋겠다.' “그도 그렇군. 그럼 내일부터는 창으로 바꾸도록 하지." 로일은 돌아가려다 다시 던멜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듣는 사람을 의식하고 수화로 바꾸었다. ‘창만으로 막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는 거 알지?' ‘벽을 넘어오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겠지. 나머지는 우리끼리 하자. 게이트 쪽은 네가 맡아라. 제일 허술해 보이는 북쪽은 내가 맡겠다.' ‘남쪽은?' ‘그중 제일 검술이 뛰어난 사람들을 네가 선별해서 배치해라.’ “알았어. 그런데 넌 어디 가려고?" ‘탑으로. 두 사람을 찾았는지 알고 싶다.' “그럼 내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괜찮아.' 던멜은 로일을 버려두고 루티아 중앙의 탑으로 갔다. 가는 동안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차 있었다. 이 곳이 마법 도시 루티아임을 보여주는 상징은 하늘을 찌르는 탑과 햇빛에 반사되어 낮에도 빛을 내는 꼭대기의 커다란 보석뿐이었다. 데다인은 사무실에서 문서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던멜이 왔다는 소식을 그의 비서쯤 되는 남자가 전해줬는데도 그는 던멜을 맞이하지 못했다. 거의 저녁 무렵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둘은 겨우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차라도?" 던멜은 고개를 저은 후 의사소통을 위해 미리 적어놓은 쪽지를 내밀었다. - 아즈윈과 게랄드는? 데다인은 그걸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두 사람의 행방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네. 아무리 마스터 러스킨께서 최선을 다한다 해도 하늘 산맥의 숲은 아주 넓어. 시간이 걸리지. 더구나 화이트비의 힘을 그 쪽으로 모두 쏟아내면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루티아의 성스러운 힘이 무너질 게 두렵네." 데다인은 말을 한 후 이마를 짚었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료를 적정하는 마음도 크겠지만, 여기 일도 크다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처리해야 할 일도 쌓였고." 그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나머지 할 말을 접었다. "두 사람 찾는 일은 최선을 다한다고만 말해두겠네. 이 이상 어떤 약속은 무리야." 던멜도 그를 이해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점점 커지는 불안 속에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두 사람에 대한 안전이 염려되니, 마냥 마음 놓고 있기가 힘들었다. 벌써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숙소에서 로일은 낮에 훈련을 같이 했던 자경단 청년들과 가볍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도 같은 걱정을 털어놓았다. "나도 좀 이상해. 절벽에서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두 사람을 왜 걱정해야 하는 거지?" ‘단순한 사고였다면 난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길을 잃고 있고 헤매고 있는 사람이 나라면, 난 너희들이 날 걱정하고 있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 나 역시 두 사람의 실종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불안해진다.' 로일은 마시던 잔을 한 번에 털어 넣고,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갔다. 둘은 다시 수화로 대화를 나누었다. '안 좋은 예감이라도?' 로일이 물었다. '두 녀석이 사라진 게 단순한 사고였을까?' '사고가 아니면7' '나도 모른다. 그리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고 싶지도 않고.' '괴물들에 대해서는? 계속 여기 사람들의 결정에 따를 건가?' '생각 중이다.' '나도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겠지만.......‘ 로일의 약한 표정을 보고, 던멜은 오히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디 재 보자. 우리만으로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둘은 피곤한 하루를 끝내고 비어있는 침대를 찾아 늦은 잠에 들었다.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다음날 새벽 바로 알게 되었다. (6) 모즈들의 공격 "제라르, 보이십니까? 제 수제자입니다. 몇 살인지 제가 말씀 드렸나요? 열여덟입니다. 열여덟. 믿어지세요?" 길지 않은 턱수염을 만지작대며 칼스텐은 흐뭇하게 말했다. "아비는 자식 자랑할 때 팔푼이가 된다더니 네가 꼭 그 꼴이구나." 늙은 제라르는 희미한 시야 너머에 있는 테마르를 보며 가래 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소리 듣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은 기분이군요. 하지만 이 녀석, 겨우 열여덟에 제가 가진 모든 기술을 익혀버렸습니다. 제가 그동안 이 기술들을 익혀오느라 고생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질투까지 나는군요." "블랙풋에 또 한 명의 어쌔신 마스터를 길러놓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럼 저 터무니없는 녀석을 어떻게 써먹을 생각이냐?" "글쎄요. 자잘한 암살 임무에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전에서 통하지 않을 기술들을 익힌 것도 아니고, 굳이 연습으로 사람 죽일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저도 고민입니다. 저런 천재를 제게 맡긴 하늘에 대고 묻고 싶은 심정이지요. 그냥 본인한데 물어볼까요?" 칼스텐은 손짓하여 테마르를 가까이 불렀다. "넌 앞으로 무얼 하고 싶으냐?" 칼스텐이 물었다. 테마르는 오래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벌써 제자를 두려고?" '재능도 있고, 특이하게 저를 잘 따릅니다.' 칼스텐은 테마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같은 암살자들조차 너를 무서워하지. 그런데도 너를 잘 따른다면 확실히 가르쳐보고 싶긴 하겠구나. 이름이 뭐냐?" '헤더. 열 살쯤 되는 아이 입니다.' "원하는 대로 해라." 테마르가 헤더를 처음 만난 건 암살자들이 임무를 마친 후 데리고 온 포로들 틈에서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어떤 부자가 정의감에 불타 큰 돈을 투자해, 어린 아이들을 키워 노예로 팔아먹는 상인을 죽여 달라는 의뢰였다. 하지만 정작 잡혀 있는 어린 아이들을 처분할 길이 없던 마음 약한 어쌔신이 그 아이들을 데리고 와 버린 것이었다. 그 어쌔신은 크게 혼났으나, 칼스텐은 별 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이라며 아이들을 다시 자기들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헤더는 처음 볼 떼부터 테마르를 따랐다. 다리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소녀를, 테마르는 생각 없이 데리고 다녔다. 아이는 글자를 쓸 줄 몰랐고, 수화도 모르니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냥 옆에 두기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소녀는 테마르의 수화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크게 놀랐다. 재능이 있건 없건 그는 헤더를 다를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딸이나 다름없었다. 암살자들 틈에서 정이란 걸 경험하지 못한 그에게 또한 유일하게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해준 아이이기도 했다. - 저도 당신이 무술을 배우고 싶어요. 수화를 모두 배워서 굳이 글을 배울 필요가 없었건만, 헤더는 언제 배웠는지 쪽지에 글씨를 씨서 자신의 뜻을 보였다. 그 순간 테마르는 그녀를 가르쳐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술들을 가르쳐보기도 전에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칼스텐에게 직접 암살을 의뢰하러 온 '그 남자'를 본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테마르는 알지 못 했다. 그러나 그 얼굴은 결코 잊지 않았다. '테마르, 꼭 돌아와야 해요. 기다리고 있을 게요.' 누구도 마중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 블랙풋의 템플 앞까지 나온 헤더는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 작은 아이를 떼어 놓고 가는 테마르는 딸을 강제로 빼앗긴 심정이었다.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테마르. 너의 첫 번째 임무이자 가장 성스러운 임무이기도 하다. 눈물로 그 가치를 떨어뜨리지 마라." 언제나 칼스텐의 말에는 복종했으나, 그 말에는 반발심이 일어나는 테마르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명령을 지켜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눈물을 참지 못할 테니까. '다시 돌아올 생각은 버려라, 테마르. 우리의 상대는 아란티아 여왕의 수호기사인 마스터 퀘이언이다. 그를 꺾는 건 불가능하다.' 그 일이 있기 8일 전 던멜은 반사적으로 눈을 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방 안은 어두웠고, 바깥도 아직 이른 새벽빛만 옅게 떠돌고 있었다. 던멜은 급히 로일을 깨웠다. '왔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로일은 금방 사태를 짐작했다. "모두 일어나!" 로일은 소리치면서 옷을 입었다. 다들 영문을 몰라 졸린 눈을 뜰 무렵, 요새 쪽에서도 비상을 알리는 종이 시끄럽게 울렸다. 로일과 던멜이 요새의 게이트 쪽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는 이미 괴물들의 공격이 시작된 후였다. 로일과 던멜은 즉시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조심해라." 로일이 칼을 내밀었고, 던멜은 자신의 길지 않은 칼을 거기에 부딪혔다. 미리 얘기를 해두었던 대로 로일은 게이트 쪽에, 던멜은 북쪽의 망루 쪽으로 달려갔다. 아직 이 곳에는 괴물들이 없었다. 녀석들은 모조리 게이트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게이트 쪽을 지원하러 갑시다!" 북쪽 망루를 지키던 병사들이 나가려 하자 던멜이 만류했다. 그리고 칼끝으로 간단히 '여기' 라고 나무에 새겼다. “예? 하지만.......” 망루에 있던 세 명의 병사들은 게이트 쪽과 던멜 쪽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새벽 공기 너머로 요새의 입구로만 몰려가는 괴물들의 무리가 보였다. 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이번 공격 숫자가 평상시보다 많다는 건 당황하고 있는 병사들의 눈빛으로 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굳이 던멜이 설명해 줄 필요 없이 괴물들은 북쪽 망루 쪽으로도 몰려왔다. 그 숫자는 입구로 몰려간 숫자만큼 많았다. "이런 맙소사!" 고작 세 명의 병사들은 이미 괴물들의 달려오는 기세에 기가 질려 뒷걸음질쳤다. 던멜은 투척용으로 뾰족하게 깎은 나무 창을 하나 들어 선두의 괴물을 향해 집어 던졌다. 한 마리가 가슴에 창이 박혀 픽 고꾸라졌다. 던멜은 활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나무 창 하나를 쥐고 한 번 더 집어 던졌다. 또 한 마리가 쓰러졌으나 그것들의 돌진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뒤를 쳐다보니 처음에는 얼어있던 병사들이 창을 쥐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던멜은 따로 격려의 말을 할 수 없어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주었다. 병사들도 겨우 용기를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들은 예전에도 그랬을 게 분명한 무식한 방법으로 요새의 통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위에서 창을 내리 찔러 그들을 떨쳐 냈다. 괴물들 중 몇 마리가 벽에 사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처음 사다리를 타는 것 같은 어색한 발걸음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던멜은 요새를 병사들에게 맡기고 좁은 나무 벽 위를 달려가 사다리를 걷어찼다. 사다리가 심하게 흔들리며 매달려 있던 괴물들이 떨어졌다. 하지만 금방 그 다음 괴물들이 사다리를 올라탔다. 발 하나 걸칠 공간도 없는 나무 기둥 끝에 선 던멜이 백 마리 넘게 몰려오는 괴물들에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는 사다리 끝에 서서 올라오는 괴물들을 하나씩 베어 떨어뜨렸다. 그러나 다른 쪽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오는 괴물들은 완전히 무방비로 요새 안 쪽으로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원하러 뒤늦게 달려온 자경단의 병사들이 안쪽으로 침투한 괴물들을 막았다. 망루 위에서 창을 휘둘러 괴물들을 공격하는 병사들도 필사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통하는 듯 했으나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사다리를 몇 개 부숴서 그나마 요새를 넘는 녀석들의 숫자는 줄었다. 던멜은 다시 요새 안 쪽으로 내려가 병사들을 공격하는 괴물들의 뒷덜미를 두 자루 짧은 칼로 그었다. 순식간에 네 마리 괴물들이 피를 터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우선 던멜은 속으로 한 가지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녀석들의 급소도 인간의 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극히 단순한 동작으로 한 번 찔러 하나씩 쓰러뜨렸다. 어느새 그의 옆에 늘어진 모즈들의 숫자는 열 마리가 넘었다. 던멜은 다시 벽을 타고 올라가 요새에 걸린 사다리를 활로 베어버렸다. 싸움은 그런 식으로 반복되었다. 던멜이 기억하기로 기둥에 오르고 사다리를 걷어찬 횟수만도 열두 번이 넘었다. 요새 안 쪽에 있는 모즈들의 시체는 서른이고, 그것들 거의 대부분은 던멜이 죽인 것이었다. 괴물들의 공격이 주춤해졌다. 게이트 쪽을 확인해보니 거기도 숫자가 많이 줄어 있었다. 로일이 잘 맡아주는 모양이었다. ‘남쪽은?' 던멜은 보이지 않는 남쪽 망루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여길 비울 수도 없었다. 괴물의 살점 붙은 팔을 털어내고 던멜은 다시 요새의 망루로 뛰어올랐다. 모즈들은 끈덕지게 포기하지 않고 벽을 오르고 있었다. 아래쪽에 남아있는 숫자는 적어도 삼사십은 되어 보였다. "거의 다 막았습니다." 자경단의 병사가 힘들어하며 말했다. 이미 망루에서도 두 마리가 되는 모즈의 시체가 있었고, 병사도 한 명 쓰러져 숨을 안 쉬고 있었다. 이마가 깨져 안이 보였다. 밑에 있던 괴물들 중 몇 마리가 동시에 망루로 몸을 날렸다. 밑에서 서로를 집어 던진 건지 과격하게 떨어진 충격 때문에 괴물들은 자기 몸을 일으키지도 못 했다. 그래도 그 중 일부는 즉시 정신을 차리고 당황한 나머지 창을 떨어뜨린 병사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 놈은 던멜의 검에 목이 베어 쓰러졌다. 뒤를 공격하던 놈은 발뒤꿈치로 걷어찼고, 다른 녀석은 목을 잡아 망루의 천장에 집어 던졌다. 걷어찬 녀석은 요새 바깥쪽으로 한참이나 날아가 무리 사이로 나가떨어졌고, 천장에 머리를 부딪친 녀석은 다시 머리부터 떨어져 목이 꺾였다. 그 동작 사이에 휘두른 칼에 망루에 매달려 달려들던 세 마리는 도로 밑으로 떨어졌다. 방금 던멜이 몇 가지 동작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으면 그 사람은 골드 게이트의 경비병을 할 자격은 충분했다. 그 정도가 안 되는 병사들의 눈에는 그저 공포 섞인 놀라움만 가득했다. 던멜은 여길 계속 지키라는 뜻으로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병사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힘 있게 대답했다. 몰려오는 괴물들의 숫자는 부쩍 줄었으나, 반대로 부상당한 병사들도 몇 있었다. 정신없이 싸우는 통에 다친 곳이 없나 던멜도 몸 여기저기를 짚어보았다. 그러나 처음 루티아를 찾은 날 다친 곳 빼고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몸에 뚝뚝 흐를 정도로 범벅인 피는 모두 괴물의 것이었다. 그는 남쪽 망루 쪽으로 달려갔다. 테마르는 울프의 기사 두 명을 상대로 결국 다리를 크게 부상당해 쓰러졌다. 동시에 그 기사들도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무릎을 꿇었다. 기사 한 명이 말했다. "어려 보이는데, 실력이 대단하군." 칼스텐은 두 사람 앞에 서서 말했다. "이 아이의 칼에는 독은 바르지 않았다. 응급조치를 하면 살 수 있을 게다. 그러니 물러나라. 내가 원하는 건 너희들의 여왕뿐이다." "그런 말을 하면 더 물러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피를 뚝뚝 흘리며 그 울프의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칼스텐은 이미 그가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출혈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멀지 않은 기둥 뒤에서 겁먹은 시녀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겁은 먹었으되 달아나지 않는 여자들의 모습이 칼스텐에게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공격하지 않을 테니 이 두 사람을 치료해 주어라." 그는 시녀들에게 손짓했다. 즉시 시녀 네 명이 치마를 붙들고 달려와 기사 둘을 보호했다. 시녀 하나가 악을 쓰듯 말했다. "어째서 여왕 폐하를 해하려는 겁니까?" 칼스텐은 피식 웃었다.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가는 것뿐이다.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여왕의 수호 기사를 믿어라." 칼스텐은 다른 울프 기사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여왕의 방을 향했다. 테마르는 비틀거리면서도 그의 걸음에 뒤쳐지지 않게 발을 재게 놀렸다.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할 정도로 깨끗한 복도 끝에, 하늘로 머리를 치켜세운 늑대의 문장이 양각으로 새겨진 나무문이 있었다. "테마르." 칼스텐은 방문 앞에 서서 테마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너의 눈에 블랙풋의 마법을 결어두지 않았다. 그러니 언제고 때가 된다면 그 의뢰인을 밝혀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하가라.” 테마르는 의아해하며 손을 저었다. '템플을 떠날 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마스터께서 의뢰를 받는 것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칼스텐도 수화로 말을 했다. '안에서 나의 이야기를 엿들으면, 여왕의 수호 기사는 전력을 다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자는 내가 암살자라고만 알아둬야 해. 그러니 지금부터 수화로 말하겠다. 내 뜻을 곡해하지 말고 잘새겨두거라, 테마르.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마스터 칼스텐! 당신은 세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어쌔신의 마스터 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너의 수화를 멈추어라. 그리고 내가 하는 수화만 잘 보거라. 스승의 유언마저 방해할 셈이냐?' 테마르는 당황하며 손을 밑으로 내렸다. '네가 보지 않았더냐? 우리가 단순히 경비병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했던 울프 기사단 두 명이 블랙풋에서 나 말고는 건드리지 조차 못할 너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곳에는 그런 녀석들이 쉰 명 가까이 있다고 들었다. 이 방에는 그런 기사들 중 가장 강한 기사가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퀘이언. 나는 알고 있다. 조만간 그의 이름은 칼을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이 될 것이다.' '질 걸 알면서 싸우려 하십니까?' '의뢰인의 요구는 아란티아 여왕의 암살이었다. 난 그 의뢰를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의뢰를 거절했을 경우 그는 단숨에 우리 블랙풋을 없애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데 왜 굳이 타인의 손을 빌리려 했을까? 어쨌든 나는 그 의뢰를 듣는 순간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를 죽이던가, 아니면 블랙풋이 멸망하던가.' 테마르는 방 안에 있는 두 명의 기척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강한 기운이고, 또 하나는 있는 듯 없는 듯 투명하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나는 세 번째 방법을 생각해냈다. 내가 죽는 것이다. 아란티아의 여왕을 암살하려 든다면, 분명 그녀의 수호기사가 나를 막을 것이다. 그 수호기사란 분명 익셀런의 캡틴 웰치를 쓰러뜨린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겠지.' 칼스텐은 잠시 수화를 멈추고 눈을 감았다. '이런 기분을 알 수 있겠느냐? 나는 언제나 가장 강한 힘을 추구해왔다. 그 정점에 있는 자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모든 이들과 싸워 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지.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강한 자와 싸워서 살아남았다 할 수 있겠느냐고.' 칼스텐은 천천히 여왕의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그 정점에 있는 자가 바로 이 방문 너머에 있다. 이 싸움에서 나는 죽을 것이다. 만약 이긴다 하더라도 아란티아 여왕을 수호하는 기사를 살해한 대가로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 그러니 내 유언을 따라다오.' 테마르는 대답하지 못 했다. 투명한 커튼이 쳐 있는 침대 옆은 작은 호수가 펼쳐져 있는 산의 중앙이었다. 여왕은 호수의 앞에 서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아직 뽑지 않은 칼에 손을 얹은 남자가 서 있었다. "대답은?" 칼스텐은 테마르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테마르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스승은 말없이 퀘이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란티아의 예법대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후 손에 낀 크로우를 들었다. 퀘이언도 고개를 까닥여 인사한 후 검은 칼날의 칼을 뽑았다. 두 사람 사이에 길지 않은 침묵이 있었다. 이미 남쪽 경계를 넘어온 괴물들이 다운서치 안까지 도달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혼란이 다운서치를 휩쓸고 있었다. 괴물 한 마리가 넘어뜨린 노인의 등에 칼을 내리치고 있었다. 이미 죽어있는데도 뭉툭한 칼의 움직임은 그치지 않았다. 던멜은 달려가 괴물의 목에 단검을 꽂아, 그 상태로 들어올렸다. 괴물은 던멜의 팔목 위에서 짧게 발버둥치며, 손톱으로 팔을 긁었다. 그는 몰려오는 무리를 향해 녀석을 집어 던졌다. 칼날이 빠져나온 목에서 터져 나온 핏줄기가 괴물이 나가떨어지는 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렸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던멜은 달려오느라 지친 폐를 달래기 위해 짧고 강하게 호흡을 내뱉었다. 지붕 위에서 한 마리가 던멜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는 보지도 않고 그 쪽으로 몸을 돌려 발로 머리를 내리꽂았다. 깨진 머리뼈에서 질척한 액체가 터져 바닥에 퍼졌다. 괴물들은 때론 두 다리로, 때론 네 다리로 빠르게 달려와 한꺼번에 던멜을 엎쳤다. 그러나 그의 짧은 검 두 자루 앞에 그들의 움직임은 그리 빠른 건 못 되었다. 다운서치 한 가운데 모즈의 시체 스무 구가 쌓일 무렵에야, 던멜을 도우려고 온 병사들이 나타났다. 던멜은 그 중앙에 주저앉아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모두들 혼자서 이 많은 괴물들을 해치운 던멜을 보고 기가 찬 모양인지 저들끼리 뭐라 말을 주고받았다. 던멜은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이트에서도 기사 로일께서 괴물들을 모두 막았습니다." 한 명이 말했다. 멀리서 부상자를 실어 나르는 들것이 바쁘게 오고 갔다. 그 중 하나에는 자경단의 캡틴인 코렛도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로일은 던멜보다 더 치열하게 싸운 흔적을 요새의 동쪽 입구 근처에 남겨놓았다. 괴물들의 시체 틈에 끼인 자경단의 병사들 시체가 그 치열함을 간접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물러갔지만, 일시적인 후퇴 같아 보인다." 로일이 말했다. '다친 곳은?' 던멜이 물었다. "칼에 베인 곳이 두어 군데 있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목은 어때?’ "목?" 로일은 처음 다쳤던 상처를 만져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렇지도 않군, 이제. 마법사의 약이라 그런지 금방 낫네.” '아군 피해는?' "잘 모르겠어. 정신없이 싸우느라. 하지만 아까 들어보니 대여섯 명은 죽은 것 같더라." 로일의 말에는 후회가 가득했다. "처음부터 나 혼자 싸웠어야 했는데.......“ '자신하지 마라. 폼은 엉망이지만 녀석들의 힘, 방심해서 한 대라도 맞으면 그걸로 끝이야.' 로일은 게이트 쪽을 바라보았다. "잠깐 물러난 거야. 다음에는 더 크게 올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렇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크게 오면 우리 힘만으로는 막기 어렵겠더라.' 탑 쪽에서 루티아에서는 보기 드문, 말을 타고 마법사들이 달려왔다. 네 명의 마스터들이었다. 던멜은 차례로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에틀리, 저스틴, 루더, 필립. 회의석상에서 두 사람을 심하게 몰아세웠던 에틀리가 가장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으시오? 우리가 조금 늦었소." “마법사들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소만?" 별 뜻 없이 말한 거겠지만 로일의 말은 마법사들에게 반발을 살만 했다. 그러나 긴 금발의 마법사, 필립은 부드럽게 넘겼다. "마법 자체는 통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도 쓸만한 기술이 좀 있네." 에틀리가 필립의 말을 받았다. "녀석들에게는 마법의 불꽃도, 마법의 냉기도 통하지 않지만, 물리적으로 패대기치면 칼로 치는 것만큼의 효과는 있소. 그보다 방금 내 지도로 알아본 결과 숲 쪽에 모즈들이 삼백에서 사백 정도 집결해 있었소. 바로 쳐들어올 것 같아 우리도 합류한 거요." 던멜은 로일에게 뜻을 전달했다. "던멜이 말하길, 남쪽 경계가 허술하니 그 쪽을 맡아 달라 하오. 요새의 입구는 내가, 던멜은 북쪽을 맡겠소." 루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그런 식으로 방어를 펼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병력이 없었었지. 하긴 이 정도로 쳐들어온 적도 없었지만. 필립, 에틀리. 두 사람이 남쪽 경계를 맡아주게. 나는 기사 로일과 함께 요새 입구를, 저스틴은 기사 던멜과 북쪽 망루를 맡는 걸로 하지." 말을 타고 달리는 저스틴과 거의 동시에 던멜도 북쪽 방주에 도달했다. 남쪽과 북쪽 거리를 왕복해서 달리고 나니 던멜도 꽤 지쳤다. 저스틴이 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얀 빛이 어깨를 타고 전신을 한 번 감았다가 사라졌다. 손가락 끝이나 팔꿈치 같은 곳에는 빛이 가루처럼 떨어졌다.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걸세." 금발의 마법사는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말 위에서 굽혔던 몸을 다시 위로 올렸다. 그의 손에는 하얀 나무와 붉은 나무가 꼬아 올라간 모양을 한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두 줄기 나무를 타고 빛의 가루가 반짝이며 흘렀다. 고삐를 쥐고 등을 편 자세로 앉아있는 마법사는 말만 수년을 타 온 기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폼이 좋았다. "지금 케인스윅의 선생들도 전투 준비를 해서 이 쪽으로 오는 길이오. 그들까지 가세하면 삼백 정도 되는 모즈들은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을 거요." 그가 격려하는 뜻에서 말했다. 던멜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멀리서 땅을 밟는 진동이 희미하게 던멜의 발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저스틴은 지팡이를 들고 망루의 병사들에게 뭐라고 소리쳤다. 병사들은 '예, 마스터' 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말에 타서 지팡이를 휘두르니 노장의 기세가 엿보였다. 곧 요새의 벽 너머로 괴물들이 들이닥쳤다. 벽에 걸치는 사다리의 숫자가 아까보다 세 배는 더 많았다. 던멜이 앞으로 나가려 하자, 저스틴이 지팡이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처음은 내가 하겠소." 저스틴은 지팡이를 들어올려 눈을 감친 뭔가 중얼거렸다. 그 사이 괴물들이 벌레처럼 벽을 넘어 달려오고 있었다. 망루의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올라오는 괴물들을 밑으로 찌르다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 망루에서 후퇴했다. 저스틴의 지팡이가 형체를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환하게 빛을 냈다. 요새 가까이에 있던 열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후퇴해 저스틴이 타고 있는 말 뒤로 피했다. 저스틴은 괴물들이 열 걸음 앞으로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타고 있는 말이 뒤로 밀려났고, 동시에 서른 마리 가까이 되는 모즈들이 한꺼번에 요새의 벽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튼튼한 통나무 벽이 크게 진동했고, 뒤통수를 들이받은 괴물들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몇몇 놈들의 머리가 깨져 벽은 피로 물들었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쓰러진 괴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던멜이 놀란 눈을 하고 저스틴을 올려다보았다. 말도 놀랐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식으로 밖에 괴물들을 막을 수 없었소. 이 뒤는 부탁드리겠소. 같은 마법을 또 쓰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해서." 저스틴은 던멜에게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벌써 식은땀이 두어 방울 흐르고 있었다. 이런 게 마법이 안 통하는 괴물들에게 억지로 짜 맞춰서 쓴 마법이라면, 대체 제대로 쓰는 마법이란 건 어떤 수준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벽에 걸렸던 사다리는 아까의 반동으로 다 쓰러졌고, 벽에 뒤통수나 등을 들이받은 괴물들 중 절반은 이미 뼈가 부서져 죽거나 움직이지 못했다. 몇몇 움직일 수 있는 모즈를은 그나마 정신을 차리지 못 해, 자경단 청년들이 찌르는 뻔한 공격을 막지 못했다. 던멜이 나설 것도 없이 일차 공격은 쉽게 마무리 되었다. 뒤이어 십 수개의 사다리가 다시 요새의 벽에 걸렀다. 던멜은 사다리가 결린 쪽 벽으로 뱀처럼 미끄러지듯 타올라갔다. 벽을 사이에 두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괴물과 던멜의 얼굴이 딱 마주쳤다. 던멜이 먼저 괴물의 코를 이마로 들이받았다. 녀석이 사다리 밑으로 떨어지니 뒤에 타고 올라오던 괴물들이 진로를 방해 받아 멈칫했다. 던멜은 힘주어 한 손으로 괴물 다섯 마리의 무게가 걸려있는 사다리를 밀었다. 그것들은 사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벌레처럼 바둥대다가 맨바닥에 등부터 떨어졌다. 던멜은 벽 위에 올라서서 괴물들을 내려다보았다. 털색이 다 달라 규칙적이라는 느낌은 없지만, 벽을 타려고 발버둥치는 게 개미가 커다란 사냥감을 노리는 모습과 닮아있었다. '잠을 잘 못 참나? 피곤하네.' 몰리는 괴물들의 숫자는 여기에도 많았지만, 동쪽 입구 쪽은 더 많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로일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뒤에서 날 보고 뭐라고 할까?' 던멜은 요새의 안쪽,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쪽이 아니라 괴물들이 몰려 있는 벽 너머로 뛰어내렸다. 내려가는 순간, 걷어찬 던멜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모즈들의 몸뚱이가 동료들까지 같이 무너뜨렸다. 나머지는 즉시 그에게 달려들어 둔탁한 무기를 휘둘렀다. 녀석들은 다운서치에서와 똑같이 서로를 찌르거나 베는 것에 개의치 않고 던멜을 공격했다. 규칙도 작전도 없었다. 던멜은 완전히 자신의 감각을 믿고 반사적으로 그들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아침 해가 뜬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라 아직 공기는 달궈지지 않았다. 더운 피가 던멜의 얼굴로 위로 튀어도 그는 그게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불쾌한 액체가 몸에 닿았다는 느낌 이상은 없었다. 던멜을 중심으로 피와 땀, 그리고 무리가 움직이며 흔들어댄 공기가 점점 달궈졌다. '움직임을 가볍게 하자. 녀석들은 불규칙한 움직임을 가진 돌덩어리다.' 절벽에 매달려 떨어지는 돌을 피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는 훈련에서 그는 목숨을 스승에게 내맡기는 것을 수도 없이 해 왔다. 그때 살아남았던 게 그 후 살아남은 수많은 싸움보다 더 치열했었다. 괴물들의 머리를 손으로 짚어 그 다음 머리로 이동하면서는, 흐르는 냇물에 둥둥 떠 있는 속 빈 호박을 밟고 뛰는 훈련을 생각했다. 내려오며 모즈의 머리통 하나 박살내는 것은 바위를 뒤꿈치로 부수는 것에 비하면 그리 힘든 건 아니었다. 하나씩 줄어드는 괴물들의 숫자를 보며 던멜은 오히려 집중력을 잃지 말자고 스스로 다잡아야 했다. 녀석들은 한 마리가 남아도 달려들고 있었다. 마지막 다섯 마리는 던멜이 손도 대지 많았는데, 투명한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바닥에 납작 엎어졌다. 바둥거리는 녀석들의 몸뚱이 위로 열개가 넘는 나무창이 박혔다. 망루에 병사들과 마법사 저스틴이 서 있었다. 그가 놀라 소리 질렀다. "이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소?" 던멜은 괜찮다고 손을 들었다. "화라도 내고 싶지만. 그 무모한 짓이 당신한테는 무모한 짓이 아니었나 보군." 사실 무모한 짓이었다. 던멜은 그 무모한 짓의 이유를 손가락을 펼쳐 가르쳐주었다. 괴물들이 요새의 동쪽 입구에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북쪽의 숲을 가리켰다. 또 스무 마리 정도가 던멜 쪽으로 왔다. 던멜은 자신을 가리킨 후 멀리 떨어진 요새의 입구를 가리켰고, 다시 저스틴을 가리킨 후 숲에서 몰려오는 스무 마리를 가리켰다. 저스틴은 즉시 그 뜻을 이해했다. "좋소. 여긴 우리가 맡겠소." 던멜은 간단한 수신호로 활과 화살 통 두 개를 받았다. 던멜은 백여 마리가 새까맣게 붙어있는 동쪽 입구를 향해 달려가며, 화살 통 하나는 등에, 다른 하나는 허리에 맸다. 동쪽 입구 벽에는 사다리가 열 개 넘게 걸려 있었다. 그는 달려가면서 화살을 하나 쏘아 사다리를 막 넘는 한 마리를 맞췄다. 그는 시간차를 두지 않고 그 옆의 사다리, 그 다음에는 지상의 모즈들을 공격했다. 일정 거리에 이른 후,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쉬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화살 하나에 모즈 하나씩, 그 숫자가 스물이 넘어간 후 허리에 맨 화살 통이 비었다. 동료 스무 마리가 죽는 동안 모즈들은 어디에서 가한 공격에 자기들이 죽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던멜이 등에 있는 화살 통으로 손을 옮길 때야 녀석들은 던멜의 위치를 알았다. 그리고 요새를 타넘기 위해 사다리 밑에 대기하고 있던 모즈들이 우루루 던멜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 화살을 쏘았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공격에 모즈들은 무수히 넘어졌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던멜 역시 뒷걸음질치지도, 활을 멈추지도 않았다. 넘어지면 그 위를 밟고 다음 놈이 달려들었고, 그 위에 넘어지면 또 다른 놈들이 달려들었다. 눈, 목, 가슴, 얼굴....... 던멜이 노리는 대로 한 마리씩 넘어졌고, 그 다음 목표에게 시위를 놓는 순간 이미 다음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던멜에게 달려오는 선상으로 모즈들의 시체가 일렬로 늘어졌다. 갑자기 아웃서치 숲 쪽에서 끝이 뭉툭한 나무 기둥을 어깨에 짊어진 스무 마리의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화살이 떨어진데다가 더 이상 몰려오는 괴물들의 숫자도 감당하지 못 하게 되자, 던멜은 요새의 벽을 타 넘어 올라갔다. 망루에 있던 병사가 던멜을 향해 뭐라고 소리 질렀으나, 투구에 입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병사는 던멜에게 화살 통을 하나 던져주었다. 그걸 던져준다는 말이었던 듯 했다. 던멜은 거기에 담긴 화살 통을 등에 있는 통에 털어 담았다. 던멜은 벽 위에서 기우뚱한 자세로 서서 기어 올라오는 모즈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이비 벽을 타넘고 건너간 괴물들이 요새 안쪽에서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안에 끼어 있는 로일이 수없이 베어 넘겼지만, 넓게 퍼져 오는 공격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방어라인까지 통과한 괴물들은 막는 이 하나 없는 마을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공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던멜은 다시 벽을 기어오르는 괴물 두 마리를 활로 떨어뜨리고 숲에서 나무 기둥을 메고 달려오는 괴물들을 살폈다. 이제 겨우 벽을 타넘기 위해 넝쿨로 엮은 사다리를 쓰는 짐승들이 그 물건의 용도를 알고 있다는 게 기이했다. 괴물들은 나무 기둥을 요새의 입구에 들이박았다. 요새 위쪽 망루는 이미 괴물들에게 점령당해 있어 기둥을 들이받는 공격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망루와 문을 막아야 할 병사들은 요새를 타 넘은 모즈들과 싸우는 것만으로 벅찼다. 던멜은 화살로 입구를 공격하는 괴물들을 착실하게 하나씩 쓰러뜨렸다. 하지만 하나가 비면 다른 녀석이 그 자리를 메워, 입구를 부수는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그 때 던멜은 숲 쪽에서 뭔가 다른 존재를 느꼈다. '뭐지?' 모즈는 아니었다. 그런데 모즈들 사이에 있었다. 던멜은 잠깐 한 눈을 팔았고 그 순간 벽을 타 오른 괴물 한 마리가 몸을 날려 도끼를 휘둘렀다. 던멜은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균형을 잃고 요새 안 쪽으로 떨어줬다.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그는 몸을 굴렸으나, 다시 서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공격해온 녀석도 바닥에 고양이처럼 착지하더니 네 다리로 뛰어 던멜 쪽으로 몸을 날렸다. 던멜은 내리꽂는 녀석의 도끼를 피하고 활처럼 휜 몸을 튕겨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즈는 도끼를 집어 던졌다. 그것은 날도 갈지 않고 그저 뭉툭한 쇳덩어리를 나무 끝에 묶어놓은 것 밖에 안 되었지만, 워낙 던지는 힘이 좋아 몸의 어딜 맞아도 온몸의 뼈가 부서질 만 했다. 던멜은 고개를 젖혀 피하자마자, 화살로 모즈의 목을 맞췄다.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간 화살이 목을 뚫고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벽이 흔들렸다. 던멜은 등에 맨 화살 통에 손을 가져갔다. 몸을 굴리는 사이에 몇 개 안 남은 화살이 모두 쏟아져버렸다. 그는 포기하고 요새 안쪽에서 벽을 넘어오는 모즈들을 막고 있는 아군 쪽에 붙었다. 온몸에 검붉은 피를 묻힌 로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벤 숫자만도 오십인데, 이제부터 올 놈들은 삼백은 더 될 것 같다." 던멜은 활을 어깨에 메고 수화로 말했다. 손가락에 끈적하게 붙은 피가 수화를 할 때 팔뚝을 타고 흘렸다. 정신없이 화살을 쏘는 동안은 몰랐지만, 손에 묻은 피가 활시위에서 튕길 때마다 피가 튀어 얼굴도 엉망이었다. ‘문이 부서질 거다. 마법사들에게 말해라. 문이 부서진 후 들어오는 첫 번째 괴물들을 막아달라고.' 로일은 지팡이와 칼을 같이 들고 있는 마스터 루더를 힐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마법사는 벌써 그런 마법을 세 번이나 썼다. 그 때마다 열 마리씩 놈들의 머리통을 부수어버렸지만, 이제 그런 엄청난 힘을 더 쓸 수는.......” 로일의 말을 가로막으며 루더가 말했다. “할 수 있네." 그의 지팡이가 하얗게 빛을 냈다. 마을 경비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마법사가 그런 일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가 걱정하는 건 자기 몸이 아니라 요새였다. “그런데 그 다음은 무은 작전을 쓸 텐가? 이제 병사들도 한계네." 병사들의 절반은 죽거나 다쳤고, 나머지도 지쳐서 칼을 지팡이 삼을 지경이었다. 입구 앞에서 기다리던 모즈들의 숫자는 이백 마리는 족히 되었었다. 그러나 던멜은 굳이 수치를 표현하지 않고 로일에게 지금부터 할 일을 말했다. 로일도 그 말에 동의했다. "던멜이 말하는 작전대로 하겠소. 처음 기세만 꺾어주시오. 나머지는 우리 둘이 알아서 하겠소." 루더는 즉시 알았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방금 둘이서 한다고 말했나?" "시간 없소, 마스터 루더." "작전이란 건 그게 다인가? 차라리 뒤에서 오고 있을 케인스윅 선생들과 힘을 합쳐 공격하는 게 나을 거야. 그들도 괴물 한두 마리 정도는 해치울 마법을 가지고 있으니.......“ 그는 말을 하다 말았다. 선생들이 온다고 한 시간은 이미 지났다. 그들은 아마 방어선을 통과해, 마을을 유린하는 모즈들과 조우했을 게 분명했다. "이보시오, 마스터 루더. 나는 말을 잘 하지 못 하니 이럴 때 어떻게 말해야 당신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우릴 부른 게 이걸 위해서가 아니었소?" "솔직히 나는 그 원군이라는 게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을 기대한거였네." “그럼 우리 둘이 그 기대한 몫을 하겠소." 요새의 문이 안쪽으로 꺾어졌다. 성질 급한 괴물들은 또 사다리를 걸고 다른 쪽 벽으로 넘어왔다. 두어 번 더 부딪힌 후 괴물들이 통과할 만한 구멍이 생겼다. 나무에서 애벌레가 기어 나오는 것처럼 모즈들이 그 구멍을 통해서 꾸물꾸물 기어왔다. 던멜은 궁수를 맡은 다른 병사들의 화살을 넘겨받아 다시 두 통을 채워 넣었다. 로일은 짧게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카셀이 있었다면 루더에게 좀 더 멋지게 말할 수 있었을 거야. 아즈윈이 있다면 우리 둘이 어떤 포메이션으로 싸워야 할 지 가르쳐줬을 것이고, 게랄드와 쉐이든은 우리 둘보다 이런 싸움에 더 능숙하지. 올 사람이 바뀌었어야 했어." 로일은 마치 격려라도 해달라는 듯 말했다. 싸움의 절반을 활로 이어온 던멜도 이 정도로 지쳤는데, 로일이 지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던멜은 머뭇거리던 수화를 펼쳤다. ‘덥다. 그렇지?' "맞아. 이 갑옷은 도대체 통풍이라는 걸 모르는군." 로일은 검을 들었고, 던멜은 시위에 화살을 올려놓았다. 문을 통과하고 벽을 넘은 모즈들이 우루루 쏟아져왔다. 피 상대방의 심장을 뚫고 단검을 바라보던 테마르는 속으로 그 검붉은 빛을 보고 속으로 말했다. '더럽다.......‘ 죽은 이의 눈동자에는 고통과 공포, 또는 분노로 인해 핏대가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죽은 이가 죽인 이에게 되돌려주는 마지막 공격인 양 그 눈동자는 테마르를 괴롭혔다. “그 자는 이 지역에서 가장 흉악하면서, 가장 강한 자다." 칼스텐은 그의 옆에 서서 말했다. 테마르는 아무 의사표현도 하지 않고, 그의 입 모양만 바라보았다. "이 녀석에게 죽은 죄 없는 피해자만 쉰다섯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미래의 위대한 기사가 이 자의 비겁한 기습에 열 명 가까이 죽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테마르는 한참 후에 대꾸했다. '그렇게 강한 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니야. 이런 녀석이라고 해도 우리가 죽일 권리가 있느냐를 물은 거야." '아무도 그런 걸 묻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정당한 일도 아니었고,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전 이 자를 죽이면서 제 기술이 정확한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게 가장 잔인한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이쿠, 우문현답이구나. 난 이 녀석이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 의뢰도 받지 않고 죽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야. 살인은 살인이지. 그러나, 보아라. 피를 두려워하지 않고 검에 재능을 둔 녀석을 내버려두면 보통 이런 식으로 된다. 피를 즐기게 되는 거지."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끌어주신 점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건 네 재능이야. 천성이 그렇지. 하지만 난 천성이 피를 좋아하는 쪽이었다. 괜히 암살자 노릇을 하고 있겠느냐?" '저도 그렇게 되길 원하십니까?' "피를 좋아하지 마라. 그런 건 너와 어울리지 않아." 칼스텐은 테마르가 죽인 살인마의 앞에 다가서더니 그 시체의 머리를 걷어찼다. 단순히 분노로 찬 게 아니었던 터라 목뼈가 부러지며 머리통은 거리를 잴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날아갔다. "이 개자식이 겁탈한 여자는 죽인 사람의 세 배 이상이다. 그리고 그 여자들은 어딘가에서 평생 그 고통을 인내하며 살고 있겠지. 그 여자 중 한 명이 자살한 걸 본 후 네 첫 번째 실전 상대를 이 녀석으로 정했다. 유치해 보일진 모르지만, 난 그 피를 좋아하는 천성을 이런 식으로 돌렸다." 칼스텐은 숨을 짧게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강한 녀석들을 찾아다니게 됐단다. 그 중에는 죄가 없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내 이름을 밝히고 목숨을 건 싸움을 해도 좋은지 물었지. 진짜 강한 녀석들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나는 항상 그 목숨만을 앗아갔다. 그래, 난 아직 나와 필적할 만한 강자를 만나본 게 아니었어." 테마르는 그때 나눈 대화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난 후 나이가 들면서 그는 스승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란티아의 여왕을 암살하라는 의뢰인과의 대화를 통해 스승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알았다. "의뢰비가 얼마든 그 의뢰는 받을 수 없소. 내가 뭐 하러 모든 살아있는 인간들의 여신과도 같은 분을 죽이겠소?" 던멜이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끔찍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의뢰인을 앞에 두고도, 칼스텐은 당당했다. 그 남자는 쇠가 짖어지는 것 같은 듣기 싫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례비는 그대가 평생을 걸쳐 원하던 것이다." "하, 나한데 그런 것도 있었나? 그게 뭐요?" "아크랜드에서 가장 강한 자." 일언지하에 의뢰를 거절하려 했던 칼스텐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고민했다. 테마르는 어째서 그 따위 어처구니없는 의뢰를 받고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그 의뢰를 수락했다. 테마르는 스승이 보인 심경의 변화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란티아 여왕의 수호기사와 싸우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손에 피를 묻힌 채 살인마를 죽였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 때 했던 대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제야 감춰져 있던 망각으로부터 씻겨져 드러났다. 스승의 진의를 깨닫는 순간, 퀘이언의 검이 칼스텐의 가슴을 베고 뒤이어 배를 찔렀다. 찔린 후에도 칼스텐은 움직일 수 있었으나 저항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봐 온 중 가장 적절하게 들어간 어쌔신 마스터의 기술이 퀘이언의 검 앞에 막히는 순간, 테마르도 스승의 패배를 알았다. 테마르는 머리 속이 하얗게 타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하얀 바닥 위에 흐르는 붉은 피의 기억만은 선명했다. 서로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 던멜과 로일을 감싸고 있는 것은 모즈들의 몸 안에서 방금 전까지 뜨겁게 흐르고 있던 검붉은 피였다. "안 덥냐?" 로일이 던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말했다. 던멜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 하는 두 사람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사람은 데다인이었다. “공포를 모르는 괴물들이 스스로 물러났군." 그는 질척한 피와 살점이 묻어있는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얀 빛이 어깨를 따라 몸 전체로 흘렀다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숨을 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마을은7" 로일이 물었다. “뒤따라 케인스윅의 선생들과 학생들이 마을 안으로 진입한 괴물들은 헤치웠지만, 마을 사람들 몇 명이 희생당했네, 미리 대피를 시키지 못한 우리 책임이지." “지금이라도 다운서치의 주민들을 모두 넌서치로 대피시켜야겠네." 루더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도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괴물들은 아직 많고, 요새는 부서졌어. 지금 바로 수리 하고 있지만, 오늘처럼 들이닥친다면 이건 아무 의미가 없네." “최후의 경우, 크보츠 강을 넘어간 후 다리를 무너뜨려야겠지." "라르비튼의 다리를?" 루더는 루티아의 탑을 무너뜨리겠다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놀랐다. 로일은 사무적으로 물었다. "그게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소?" “크보츠 강을 통과하는 다리는 하나뿐이다. 강폭이 넓어 헤엄을 못 치는 모즈들은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 하지만 루티아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를 내 손으로 부수고 싶지는 않아. 우선 이 경계는 최후까지 지켜야지. 그보다 루더, 상처는 괜찮나?" "무기에 스친 거야. 독은 퍼지지 않아." “그래도 모르니 치료를 하게나. 그리고 마스터 에틀리가 죽었네." 데다인은 짧게 말했고, 루더는 놀란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마지막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다가 그만 칼에 찔려 죽은 모양이야." "확인했나?" "시체는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걸세." 데다인은 다시 로일과 던멜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한 번 더 기분 좋게 해주는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두 사람은 선천적으로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군.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상처가 아물었을 만큼 내 힘을 다 불어넣었는데도 겨우 출혈을 막는 정도니.......” 데다인이 말했다. “몇 군데 괴물에게 할퀸 부위가 있소. 치료를 따로 받아야겠소." 로일이 말했다. "들것을 부르지." “걸을 만큼은 되니 그냥 그 약초나 주시오. 그리고 숲 너머의 모즈들은 아마.......” “알고 있네. 짧은 후퇴지. 우리가 쉴 틈을 주지 않고 녀석들은 더 많은 숫자로 공격해 올 게야." 별거 아닌 듯 말하는 데다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애써 눈물을 감추는 루더와 아예 눈물조차 보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냉정함을 보이는 데다인 증 어느 쪽이 더 에틀리의 즉음에 슬퍼하는 건지 던멜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죽음은 앞으로 더 많이 있을 것이다. "덥군." 로일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해가 머리끝에 걸려 있었다. (7) 카구아 그 일이 있기 7일 전. "칼이 스물여섯 자루, 부러진 걸 빼고 나면 스물둘, 창은 있는 것 없는 것 다 모아봐야 마흔네 자루. 그 중 모즈들의 살갗을 뚫을 만큼 되는 것만 추리면 서른다섯 자루가 고작입니다. 나머지는 그냥 나무 끝에 쇠붙이 단 것에 불과합니다. 전투도끼가 네 자루 있지만, 한 자루는 날이 상해서 못 쓰고 장작 패는 도끼까지 합치면 열다섯 자루입니다." 자경단의 캡틴 코렛은 머리에 붕대를 동여매고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날 전투에서 전투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돌도끼를 얻어맞고 기절했는데, 그 때 싸우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창을 배운 사람들에겐 창을 쥐어주고, 도끼질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도끼를 쥐어주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머지에게는 칼을 주고 밖으로 집합시키도록 하시오." 피곤한 얼굴의 로일은 코렛에게 간단히 지시했고, 코렛은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을 모았다. 병사들이라 봐야 이제 자경단의 청년들은 반도 남지 않았고 나머지는 자원해서 온 마을의 중년들이나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소년들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보호자에게 맡겨 전투의 가장 후방에 두고 싶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리를 해서 병사들을 모아봐야 백 명이 겨우 될 정도였으니,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거기에 지팡이 대신 칼을 꿰찬 케인스윅의 선생들과 학생들이 또 백 명 정도 되었다 앞으로 대륙으로 나가면 사람들 앞에서 존경을 받으며 마법사라고 얼굴 세우고 다닐 사람들이 고작 병사들에 섞인 샌님들 꼴을 하고 있으니 던멜은 보기 안타까웠다. 마법사는 신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법사다....... 모즈들이 이 곳을 침략해 첫 번째로 부순 건 요새의 벽이 아니라, 바로 그 신비함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한 마리를 해치우기 위해 마법을 모조리 쏟아 붓고 지쳐서 쓰러지는 것보다 저게 낫죠."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활을 다듬는 던멜의 옆에 플로라가 앉았다. 그녀도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간밤에 다시 한 번 괴물이 쳐들어올 거라고 해서 저는 무서워서 잠도 못 잤어요. 아참, 옆에 앉아도 되나요?" 그녀는 뒤늦게 묻고 안 된다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진짜로 걱정하는 거라면 참으로 피곤한 성격인 것이고, 억지로 그러는 거라면 이것만큼 자신의 귀여운 매력을 풍기는 방법도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의 축 처진 눈과 그런 성격은 아주 잘 어울렸다. 간밤에 똑같은 근심으로 밤을 샌 던멜은 그녀의 자잘한 행동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딱히 할 이야기는 없었던지 그녀는 막상 앉아놓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던멜도 묵묵히 활시위 조율을 마쳤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다가 말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항상 옆에 오면 혼자 떠들다가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달아나버리는 그녀답지 않아 던멜은 의아해했다.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또 있다가 없어지니 허전했다. 어제 쓰고 피만 닦아둔 단검을 다시 꺼내 날을 다듬었다. 르고가 만든 검은 어지간해서는 상하는 법이 없었다. 지금도 긴장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시간 보내기에 불과했다. 언제 괴물들이 또 대규모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전날의 피로를 남겨두지 않기 위한 휴식이기도 했다. 갈증이 나 자리에서 일어날 때 플로라가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주전자와 물컵이 들려 있었다. "드시겠어요?" 그는 미소 지으며 컵을 받았다. 둘은 다시 벽에 기대어 앉았다. 던멜은 천천히 물을 삼키며 요새의 문을 고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웃통을 벗고 작업하는 젊은이들을 사이에서 긴 금발의 마법사, 필립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왠지 밤에도 저 금발은 빛을 낼 것 같았다. '미스터 필립은 마스터 애틀리와 친분이 두터운 분이셨어요. 마스터 애틀리의 장례식조차 치를 시간이 없다는 것에 누구보다 안타까운 분도 저 분이겠죠. 그러니 이 일에도 가장 앞장서고 싶으실 거예요." 던멜은 나뭇가지를 하나 들어 바닥에 글씨를 썼다. - 마스터들의 마법, - 괴물들 죽였소. "예, 그렇죠. 우리들도 한두 마리 정도는.......“ - 모즈, - 마법, 안 통한다고 들었소. "아, 조금 복잡한 설명이 되겠군요." 플로라는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 허공에서 터트렸다. 작은 폭발이었지만, 던멜은 반사적으로 뒤로 고개를 젖혔다. "아, 죄송해요. 너무 셌군요." 플로라는 버릇처럼 사과를 한 후 말을 이었다. "이게 마법의 불꽃이에요. 이 불꽃은 자연의 불꽃과 거의 같은 힘이에요. 자연의 힘을 극단적으로 높이거나 내리는 게 마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적어도 루티아는 이런 방식의 마법을 써요. 불, 얼음....... 작은 물건이라면 저도 이런 식으로 이동할 수 있어요.” 플로라는 다섯 걸음쯤 떨어져 있는 주먹만한 돌을 손도 대지 않고 휙 집어 던졌다. 공교롭게도 지나가는 병사의 어깨에 맞았다. "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정말요?" 그녀는 맞은 이가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 후에야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항상 전 사친뭉치군요. 어쨌든 마스터들은 이런 마법에 굉장히 능숙하죠. 저도 집중하면 화살도 쓸 수 있어요. 싸움이 벌어지면 제가 맡은 일도 사실 그런 마법이에요. 제가 칼을 들고 서 있어봐야 방해만 될 테고, 그렇다고 케인스윅의 선생 정도 되는 이가 구경만 할 수 없으니까요." 던멜은 다시 글씨를 썼다. - 어제 저스틴, - 모즈들 열 마리, 던졌소. "가능해요, 마스터들이라면. 사람 한 명 무게라면 저도 공중에 들었다 놓을 수 있어요. 하지만 기사님께서 가지는 의문 그대로 괴물들은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 당연히 집어 던질 수도 없죠. 그건 간접적인 거예요. 공기를 움직이는 거죠. 또 바위 같은 사물들을 움직여 공격해요. 저처럼 화살을 쓰거나." 플로라는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화살도, 바위도, 다른 집어 던져 무기가 될 만한 물건도 부족하다는 거죠. 그러니 마법사들까지 칼을 쓸 수밖에 없어요." 요새 안쪽에서 활을 맞은 괴물들의 몸에서 화살을 도로 빼서 모으는 담당이 따로 있을 정도로 화살 부족은 심각했다. 플로라는 그게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도 모르고, 줄줄 말하고 있었다. 로일에게 검술을 배우던 마법사 중 익숙한 얼굴 하나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 탑 안을 안내해주었던 베드포드였다. "두 사람 얘기를 듣자니, 저도 끼고 싶어지는군요. 물 좀 주시겠습니까, 기사 던멜?" 던멜이 내주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베드포드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마법사들을 위한 마법사들의 도시에서 정작 전투가 벌어지니 가장 쓸모없는 게 마법사가 되어버리는군요." "저도 동감이에요, 베드포드. 이 곳에 위험이 닥친다면, 언제나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베드포드는 빙그레 웃으며 던멜에게 말했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두 하얀 늑대들의 활약에 모든 병사들이 깊게 감명을 받았어요. 두 사람이 해치운 모즈들의 숫자가 자경단 청년들이 죽인 숫자의 합보다 더 많다더군요. 게다가 요새의 문이 부서진 후의 두 사람은 정말 놀라웠다고 들었어요." 던멜은 고개만 끄덕였다. 뭔가 호응을 기대했던 베드포드는 그냥 웃으며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던멜은 전투가 터지면 그런 개인의 수치 싸움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 도시가 얼마나 오래 모즈들의 공격에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베드포드의 솔직한 질문에 던멜은 망설이다가 플로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저도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게요." 결국 던멜은 두 사람의 바람대로 나뭇가지로 글씨를 썼다. ‘한 번.' 둘은 침묵했다. 두 사람 다 그 질문을 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던멜 역시 솔직한 대답을 한 것을 후회했다. 베드포드는 루티아에 대해, 마을 인구가 이천 명 가까이 되지만 거의 노인들이 대부분이며, 그 중 진짜 마법사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고작해야 백여 명에 불과 한다는 등의 이야기만 혼자 늘어놓다가 다시 검을 배우기 위해 돌아가 버렸다. 던멜은 마법 수련생들과 마을 사람들의 관계가 하숙생과 하숙집의 관계라는 것에는 흥미가 당겼으나 위기를 앞두고 그런 유쾌한 얘기에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 플로라는 딱히 할 이야기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계속 던멜의 옆에 있었다. 던멜도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 있는 것을 창피해했지만, 왜 옆에 있고 싶어하는지 설명하는 걸 더 창피해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바람에 어색함이 배가되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다른 한쪽을 귀찮아하거나 같이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니, 계속 옆에 있어주던 플로라가 말도 않고 사라졌다. 던멜은 식사를 따로 하려나 보다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낮에 잠깐 존 것을 빼면 어제 전투 이후 한잠도 자지 않은 탓에 무척 피곤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 하나 내지 않고 둘은 구운 빵에 염소젖과 치즈를 먹었다. 뜨거운 닭고기 수프는 지친 몸을 달래주었다. 마을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찬 부녀자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일만큼은 꼭 돕겠다는 뜻으로 식사 준비에 열성이었다. 경계 근무 교대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합류하며 임시로 차려진 천막 아래 식당이 북적댔다. 횃불을 밝히고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막사에 벌레가 우글거렸다. 모깃불을 지피던 청년 하나가 화이트비에 벌레 퇴치 기능은 없냐고 케인스윅의 선생한데 따지고 있었다. "둘 중 한 명씩은 자도록 하자. 둘 다 깨어있는 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해." 음식 먹는 동안 내내 말이 없던 로일이 입을 열었다. '네가 먼저 자라. 새벽에 깨운다.' "밤에는 내가 더 유리하지 않아?" '내가 더 유리해. 안 보이니 더 예리해지지.’ 던멜은 농담처럼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로일은 픽 웃었다. "다들 아즈윈이나 게랄드가 낙천적이라고 하지만 그건 그냥 걔네들 성격이고, 진짜 낙천적인 사람은 너지. 배우고 싶은 점이야.” ‘그건 네가 만든 게랄드식 농담이냐?' "진심이야. 들리지도 말하지도 않는 그런 약점에 대해 넌 아무 콤플렉스도 없잖아. 그건 굉장히 낙천적인 거라고 봐야 하지 않아?" 던멜은 빵을 마저 입에 몰아넣었다. 로일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내가 먼저 잘 테니 새벽에 깨워."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일을 보낸 후 던멜은 망루에 섰다. 자정이 넘도록 숲에서 크게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모즈들은 가끔 숲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도로 사라지기도 하고, 요새의 앞까지 장난치듯 다가왔다가 이쪽에서 공격하려 들면 도망쳤다. 병사들은 그럴 때마다 한층 긴장했지만, 이내 사라지면 맥이 탁 풀리곤 했다. 반복되는 괴물들의 행동이 꺼림칙했다. 던멜 혼자만 그런 느낌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점점 똑똑해진다는 생각이 드는군." 마스터 루더는 생각만큼 요새 방어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는 괴물들의 공격이 있을 때나 자신의 경계 근무 시간에만 열심이었고, 그 외의 다른 시간에는 탑으로 돌아갔다. 어떤 중요한 임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요새의 방어가 그의 본래 임무라면 거기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 아닌가하고 던멜은 생각했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생활에 대해 그는 가급적 개입하지도, 추측만으로 단정을 내리지도 않았다. "이제 저 녀석들, 우릴 놀릴 줄도 알아. 이대로 숲에서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체력을 빼앗아 갈 걸세." 모두들 어제 그 엄청난 공세가 있은 후, 당일 밤에 다시 한 번 공격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경비를 섰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또 낮에 괴물들이 나타났지만, 잔뜩 긴장만 시키더니 가버렸다. 지금도 놈들은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럴 때 울프 기사단이 있다면 어떤 작전을 짜겠나?" 던멜은 난간에다 손가락으로 짧게 뜻을 남겼다. - 작전, 없소. - 오면, 싸운다. 그 뿐. “흐음. 자네 같은 기사들이 오십이면 것도 이상할 게 없군. 마법이 통한다면 우리도 그런 말을 자신 있게 할 텐데.......” 자기들만의 무기를 잃어버린 마법사들은 자신감도 잃어버렸다. 플로라도 그렇고, 베드포드도 그렇고, 모두들 그랬다. 그런 마법사들에게 던멜은 아무런 위로도 할 수 없었다. 루더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인사를 하더니 그냥 가버렸다. 다른 병사들도 던멜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는 점 때문에 함부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때 마침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든 다섯 명쯤 되는 무리가 망루 밑으로 다가왔다. 그 중 하나는 플로라였다. 그녀가 내려와 보라고 손짓했다. 그러고 보니 루티아에 와서 던멜에게 가장 많은 말을 한 사람은 플로라였다. 그녀는 자기 행등을 수줍어할 뿐, 정작 던멜의 언어 문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에요. 던멜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어요." 모두 한 명씩 인사를 했다. 열일곱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에서부터 서른 살이 넘는 남자도 있었다. 학교라고 해도 특별히 나이 제한을 두고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니 이런 연령 구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 그리고 우리 다섯 명이 모즈들과 대항하기 위한 마법을 연구했어요. 특히나 우리들은 전투라고는 전혀 모르는 약골들이라서 전부터 검술을 익히기보다 이런 쪽을 생각해 왔거든요." 플로라가 설명했고 멧이라는 청년이 나서서 네모난 나무통을 끼었다. 위쪽에 홈이 파여 있고, 안에는 화살이 들어있었다. "볼품은 없어도 꽤 효율적이에요." 그는 활을 쏘는 연습을 하는 과녁을 앞에 두고 말했다. 가까운 쪽 망루에 있던 병사들이나, 밤에 요새 복구 작업을 하던 자경단 청년들이 다가와 구경했다. 그가 뭔가 주문을 외우자, 팔뚝에 낀 통에서 화살 네 개가 팔뚝 주위로 떠올랐다. 땀을 흘리며 마지막 주문을 끝내자 화살 네 개가 정확히 과녁 한 가운데 후두둑 박혔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이런 식으로 홈을 따라 화살을 끌어내면, 여러 대를 한꺼번에 쓸 수 있죠. 마법으로 활을 쓰면 효율성에서 많이 떨어지지만, 이런 식이면 어떨까 싶어요.” 던멜은 진지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따라오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다들 영문을 모르고 망루에 올랐다. 던멜은 숲을 한 번 가리킨 후 쏴보라고 했다. 멧은 시키는 대로 팔을 뻗었다. 던멜을 그의 팔의 각도를 조금 더 위로 하게 한 후 손가락을 펼쳤다. “화살을 흩어지게 쏘라는 뜻인가요?" 던멜과의 대화에 익숙해진 플로라가 대신 그 수신호를 해석했다.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멧은 시키는 대로 화살을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화살 네 대가 숲 가까운 쪽에 박혔다. 던멜은 엄지손가락을 펴 보인 후 난간에 글씨를 썼다. - 화살이 박힌 위치, 방금 쏘았던 팔의 각도, 강도를 기억하시오. 던멜이 뭘 원하는지 금방 알아챈 멧은 기뻐했다. 플로라도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여러분들도 몇 번 연습을 해봅시다. 그리고 코렛에게 가서 이 공격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세요. 전투시 각자의 위치를 지정해 줄 거예요." 화살을 아끼기 위해 연습을 길게 하진 않았으나, 그건 활을 쏘는 연습과는 달리 거리 잡아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던멜은 적어도 이 마법으로 공격해오는 모즈들 오십은 잡을 수 있겠다고 계산했다. "모두에게 용기를 주셨어요." 플로라는 학생들을 보내고 던멜 옆에 서서 말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던멜은 난간에 글씨를 썼다. - 도움, 될 거요.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어서 생각해 본 건데, 다행이네요. 물체를 움직이는 마법은 아주 힘들어요. 시위를 떠나는 화살만큼의 위력을 내는 학생은 그러 많지 않죠. 저 통은 좀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어요." - 플로라는 어느 정도? 그녀는 수줍게 바닥의 화살을 하나 쥐어 허공에 날려 보냈다. 어둠 속에서 망루 위를 한 바퀴 회전한 화살은 도로 그녀의 손에 얌전히 올라갔다.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블랙풋의 마법사 메첼이 여러 개의 단검으로 보여줬던 무서운 기술쯤은 손쉽게 해낼 것이다.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그녀 역시 암살자 수준의 마법사를 제자로 둘 수 있는 케인스윅의 선생님이었다. 환하게 웃던 플로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까 저녁에 베드포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사실 우리 중에 있을지 모르는 배신자의 문제에요." 처음 루티아노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 뒤로 계속 머리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였다. "처음 그런 의심을 하게 된 건 누군가 하늘 산맥의 숲에서 모즈들을 공격하면서 제기되었어요. 거기에서는 모즈들이 마법의 불길에 새까맣게 타서 죽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웃서처 안으로 들어오면 그제서야 마법이 안 통하는 거예요." 플로라는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갈지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만 통한다면 우리 힘만으로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마스터들이 나설 필요조차 없었을 테죠. 아크랜드의 난다 긴다 하는 마법사들도 사실 우리들의 제자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이 괴물들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아요. 아니, 사실 마법이 통하는 짐승이라면 화이트비의 신성한 힘의 영역 안에 발을 들이 지 못한답니다." 플로라는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는 탑 위의 보석을 가리켰다. "일정 라인 안에 들어올 때만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누군가 그 괴물들을 보호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게다가 저 엄청난 숫자의 모즈들을 보호할 정도의 마법은 우리 같은 케인스윅의 선생은 할 수 없어요. 적어도 루티아의 마스터는 되어야죠." 플로라의 마지막 말에 던멜은 고개를 갸웃했다. 플로라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제가 표현을 잘못 했군요. 제 말은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란 마스터들 정도 수준의 마법사다, 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루티아의 마스터들이 무슨 이유로 루티아를 공격해오는 괴물들을 보호하겠어요?" 루티아에 배신자가 있어 괴물들을 보호한다? 그건 울프 기사단 중 하나가 배신해, 나디움을 공격하려 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던멜은 그런 장면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 보호 마법이 괴물들에게 걸려 있다면, 그 보호 마법을 없앨 수도 있지 않소? 던멜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글씨를 써서 물었다. "역 마법을 쓰려면 어떤 마법이 모즈들에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정작 그걸 알아내지 못하고 있어요. 마스터 골베인과 그 밑의 많은 케인스윅 선생들이 전력을 다해 연구하고 있지만 회의적이죠. 모든 마스터들이 그 문제에 몰두하고 있어요. 사실 마스터 러스킨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마법을 어떻게 처리하겠어요?” 그랜드 마스터조차 어쩌지 못하는 마법이라니, 당장 던멜의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건 덴모주의 지하실이었다. 어둠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무형의 공격에 던멜은 처음 마법이란 것에 공포를 느꼈었다. “그리고 만약 모즈들을 돕고 있는 마법사가 정말로 루티아의 마스터라 해도 저는 믿고 싶지 않아요. 그 분들은 저에게 있어 또 다른 부모님이자, 선생님이에요. 어떤 이유에서 그 분들이 절 죽여야 한다 말해도 저는 거기에 따를 거예요.” 플로라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가 가진 루티아의 애정은 아란티아에 대한 던멜의 애정보다 더욱 진했다. 갑자기 플로라가 던멜의 어깨를 꽈악 붙들었다. 던멜은 공포에 찬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시선을 숲으로 돌렸다. 다른 쪽 망루에서도 몇 명이 동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던멜은 분명 모즈들의 의미 없는 도발이 시작된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즈들의 움직임은 없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는 묘한 움직임이 시커먼 어둠 속에서 힐끗 보였다. 요새에 켜진 횃불과 화이트비가 밝히는 조명만으로는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던멜은 그 기묘한 느낌을 좇아 승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광경을 어디선가 한 번 봤다는 기분이 들었다. 곧 그 이상한 그림자는 나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말처럼 생겼지만, 갈기가 위에 타고 있는 기수의 가슴을 가릴 정도로 무성하고 눈은 툭 튀어나온 큰 동물이었다. 송곳니가 입 밖으로 나와 있어 그게 말처럼 초식 동물인지, 아니면 육식 동물인데 억지로 길들여서 타고 다니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이상한 동물이었다. 그 짐승 위에 타고 있는 자는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 검은 로브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안 보였다. 우선 로브 바깥으로 드러난 팔과 다리는 모두 검은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어둠 속을 달리는 그 기묘한 복장의 기사는 빨리 달리는데도 느리게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기사는 숲 밖으로 나와 다시 한 번 요새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갔다. 망루에 있는 병사들은 그 기사의 모습을 관찰하면서도 공격하거나 비상을 내지 않았다. 본 적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카구아예요." 플로라는 팔뚝을 잡은 손에 힘을 빼지 않고 말했다. "정체가 뭔지는 가장 나이 많은 마법사들도 몰라요. 단지 부를 명칭이 없어 루티아의 전설 속에 나오는 유령의 이름을 붙였지요. 정확히 기억은 못 하겠지만, 아마 5, 6년 전부터 나타났던 것 같아요. 그냥 조용히 나타나 루티아의 마을 주변을 뛰어다닌 후,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갑자기 사라져버려요. 최근에는 나타나는 횟수가 더욱 잦아졌어요." '유령? 전설?' 던멜이 물었다. 갑자기 처음 하늘 산맥에 들어왔을 때 숲을 흔드는 거대한 물체 위로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던 깃발 같은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때 본 그 물체가 이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저 자는 나무 위도 뛰어오를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노르만트의 성벽을 타 넘었던 '열두 검은 기사들'이 떠올랐다. "카구아에 대한 전설은 많아요. 사악한 드래곤의 피가 엘프의 몸에 닿아 변한 존재라는데, 형체도 모양도 없지만 달빛을 받으면 모습이 나타나고, 하늘 산맥에서 정해진 길을 벗어난 인간과 하늘 산맥의 엘프들을 잡아먹는대요. 그게 루티아의 전설이죠. 그리고 엘프가 가진 전설 중에는,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게 있어요. 인간의 사냥꾼 중 가장 뛰어난 실력자가 하늘 산맥에서 길을 잃고 죽어가며 자신을 여기에 가둔 하늘 산맥의 신과 엘프들을 저주했대요.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게 저런 모습이고, 엘프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네요. 어느 쪽도 믿을 근거는 없지만, 둘 다 무시할 수 없는 전설이에요." 로브를 펄럭이는 검은 기사는 세 번이나 요새 주위를 맴돌다가 플로라가 말한 대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겨우 긴장이 풀린 플로라는 얼른 던멜의 팔에서 손을 뗐다. "죄송해요. 또 이러는군요. 제 버릇이 이래요. 겁을 먹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붙들어버리거든요. 전에는 그랜드 마스터를 껴안는 바람에 마스터들에게 혼나기도 했어요." 플로라는 심하게 자신을 자책했다. - 신경 쓰지 마시오. - 그보다, 카구아에 대해서 더 "아, 죄송해요. 그게 다에요, 제가 아는 건." - 타고 있는 동물은? "잠깐 말씀드린 적 있죠? 저게 베논이에요. 전에는 루티아에도 몇 마리 있었지만, 모두 풀어줘 버렸죠. 엘프들의 가축이라 인간이 길들이기에는 조금 행동이 과격해서요. 기운 좋은 녀석은 사람을 태우고 나무 위로 뛰어오를 수도 있으니 더더욱 우리 같은 인간이 타기 힘든 거겠죠. 아,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베논은 검은 털이 없어요. 흰털이나 회색 털은 있지만요. 하지만 저 카구아들은 검은 털의 베논을 타고 다녀요. 있을 수 없는 동물을 타고 다니니까, 저주 받은 사냥꾼의 유령이라는 전설이 꽤 신빙성을 얻지요." 던멜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물었다. - 5, 6년 전에 나타났다? "예." - 모즈들이 나타난 시점은? "1년쯤 전이죠. 아, 혹시 카구아들이 괴물들을 조종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추측 플로라는 카구아들이 사라진 어둠의 숲을 주시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무엇보다 최근에는 카구아들이 나타난 다음 날에는 반드시 모즈들이 요새를 공격해 왔거든요." - 내일도? "어쩌면요."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두 사람을 감쌌다. 던멜은 카구아라 일컫는 검은 기사들의 모습을 반추해보았다. 곧 플로라는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망루를 내려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수줍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답례 인사를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달아나듯 사라졌다. 던멜은 숲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숲의 어딘가에서 베논이라는 동물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는 유령 기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내 생각이 지나친 건가?' 던멜은 아무리 따로 생각을 하려 해 봐도, 그 놈들은 붉은 장미 백작의 열두 기사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때의 그 끔찍한 느낌도 없었고, 하고 다니는 꼴도 달랐고, 타고 다니는 동물도 달랐지만, 그런 건 별개의 문제였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그 망령은 아직 카모르트에서 해결된 게 아닐 지도 몰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던멜은 갑자기 새나디엘 여왕이 걱정되었다. 그 일이 있기 6일 전. 새벽에 로일을 깨우면서 밤새 아무 일도 없었냐는 말에 던멜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로일은 자고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법의 보호라....... 누군가 성을 공격하는 적에게 보이지 않는 방패를 씌워주었다고 가정하면 이해하기 편하려나? 그런데 그런 게 가능해?" ‘마법사들이 우리의 검술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지. 마찬가지다. 우리의 상식으로 그들을 잴 수는 없다.' "붉은 장미 백작이 생각나는군. 보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자라면 보이지 않는 방패도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자경단 청년들이 침대를 정돈하고 건물 안을 청소하느라 먼지가 날렸다. 바쁜 아침의 일상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던멜은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두 사람을 안았다. "카모르트의 사건과 이게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로일이 물었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백작은 덴모주의 군주라기보다 그 지역의 종교 지도자였다. 또 메이루밀이 이런 말도 해주었지. 카모르트와 같은 사건이 이로피스에서도 있었다고. 그 사건은 왕실 기사단이 해결했다고는 하나, 아마 그 기사단도 피해가 심각했을 거다. 잘 생각해 봐. 여러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붉은 장미 백작은 그 본체가 아니야. 그 검은 기사들의 대장은 분명 네가 보검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였다. 하지만 붉은 장미 백작은 덴모주의 지하실에서 딸을 살리며 죽었다. 그 둘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야.' 로일은 라틸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또 우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던멜은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즉, 그 백작에게 힘을 주었을 다른 존재는 아직 우리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난 그 동굴의 지하실에서 백작이 아닌 또 다른 어둠의 힘을 목격했다. 만약 그런 힘이 실제로 카모르트와 이로피스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늘 산맥이라고 예외로 둘 수는 없지 않겠나?' 로일은 복잡하게 굴러가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한 모금 했다. "근데 카구아라는 건 뭐야? 그게 여길 공격하는 건가? 모즈들이랑 같은 편인가?" 던멜은 로일의 추리에 고개를 저었다. ‘모즈와 함께 라고 할 만한 근거는 아직 없어. 대략 5년 전부터 출몰했다는데 이제야 공격하는 것도 우습고.' 로일은 물을 한 컵 다 마신 후 말했다. "던멜, 너 여기 온 후 마음속에 있는 말을 많이 꺼내는구나." '수다 떠는 사람들이 없으니 나라도 해야지.' 로일이 큰 소리로 웃어버리는 바람에 전날 밤 새고 이제야 겨우 잠을 청하는 자경단 청년들 몇 명이 깨버렸다. 로일이 나간 후 던멜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였더니 누군가 또 잠을 깨웠다. 로일이었다. '갑자기 왜?' 던멜은 눈을 겨우 떠서 물었다. "갑자기?" 그 말에 로일은 오히려 의아해하더니 말했다. "뭐, 어쨌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와 봐." 나와 보니 저녁이었다. 던멜은 잠깐 놀라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잔거지?' "새벽에 잠들었고, 지금은 해가 지기 직전이지. 그래서 '갑자기'라고 물어본 거냐?" 겨우 이들 밤을 샌 것뿐인데, 그렇게까지 피곤했나 싶었다. 던멜은 아직도 온전히 차리지 못한 정신으로 로일을 따라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건 기억에도 없을 정도로 과거의 일이었다. 로일이 안내한 곳은 요새의 망루가 아니라, 병사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막사 쪽이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낙들의 손이 바빴다. 둘은 막사 옆의 크지 않은 집으로 들어갔다. 자고 났더니 그 집은 마스터들의 회의실이 되어 있었다. 안에는 루더와 데다인, 필립, 그리고 그랜드마스터 러스킨이 있었다. 그 긴 수염의 늙은 마법사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를 압도하고 동시에 펀하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 있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눈빛으로 환영했다. 던멜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인사했다. 골베인과 저스틴은 자리에 없었다. "나와 루더가 연구해서 에틀리의 마법 문서를 마무리 지었소. 요새 경비와 이 일 모두에 힘을 다해주신 마스터 루더에게 감사드리겠소." 다른 마스터들도 루더에게 수했다는 말을 건넸다. 데다인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서론은 생략하고, 모두 탁자 앞의 지도를 잘 보시오." 데다인은 탁자 위를 완전히 가리는 양피지를 펼쳤다. 여섯 조각이나 이어 붙인 커다란 지도였다. 그의 목에 걸린 보석이 빛을 내더니 그 빛이 지도에 옮겨졌다. 지도에 그려진 탑과 집의 일부가 투명하게 위로 떠올랐다. 넌서치를 가리키는 부분에서 뿌연 빛을 내는 점들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다운서치에도 같은 점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회색 점은 루티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화이트비의 힘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면 점 하나하나가 세부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실시간으로 말입니다." 이런 마법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턱이 없는 던멜은 그저 지도에 보이는 점이 움직이는 영상만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스킨이나 다른 마스터들은 심히 놀라는 눈치였다. 그건 로일의 단순한 검의 자세를 보고 일반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감탄을 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방금 기사 로일 앞에서 잠깐 시험을 해봤는데, 이런 모습이 나타났소. 실패한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를 불러 검토해 봤으나 이상은 없었습니다. 즉, 이게 진실입니다." 데다인은 다운서치를 감싸는 요새 밖을 가리켰다. 숲의 나무를 표현하는 녹색의 물결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 외에는 달리 특별한 건 없었다. "괴물들은 붉은 빛이 아니던가?" 필립이 물었다. “마스터 에틀리가 했던 대로 모즈즐 붉은 점으로 표시하려 했네. 그런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지. 몇 번을 검토해봤네. 심지어 기사 로일이 직접 요새 밖으로 나가보기까지 했고." "모즈들이 사라졌다는 뜻인가?" 러스킨이 물었다. "맞습니다, 마스터. 모즈들은 아웃서치의 숲에 단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마스터들은 놀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던멜도 심각하게 지도를 바라보기만 했다. 러스킨이 말했다. “모즈들이 아웃서치를 비운 적이 있다 해도 이 지도가 없을 무렵에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을 테지." 루더가 말했다. “특별한 일인지 아닌지 모르나, 대규모 공격이 있은 후의 일이니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경비를 더 강화해야겠습니다." “그럼 나도 오늘 밤에는 화이트비의 빛을 더욱 강하게 뿌려야겠군.” 러스킨은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일이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마스터 러스킨, 제 친구들을 찾는 일은 어찌 되었나 궁금하오만?" 러스킨은 서글서글한 눈매로 로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왕 폐하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로일이니 러스킨의 눈빛에도 지지 않고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거지, 던멜은 그 선한 눈매에 그만 밀려날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해야겠군, 로일 울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의 하늘 산맥을 모조리 뒤져보았네. 그 정도로 찾았다면, 억지로 내 마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특별한 영역 안에 숨어있지 않는 이상 발견되었어야 하지. 아니면...... 안됐지만 그 두 사람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못 찾았다면 찾을 때까지 찾아봐야 할 것 아니오?" 로일이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데다인이 로일의 앞을 막았다. "무례하다, 로일 울프!" 러스킨은 오히려 데다인을 말렸다. "아니, 내가 사과해야지. 자네 말이 맞네. 좀 더 찾는 범위를 넓혀보도록 하겠네." 러스킨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데다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구보다 루티아를 사랑하기에 누구보다 근심이 크신 분이다. 그런데도 일부러 시간과 공을 들여 그대들의 친구를 찾는 중이다.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게 무슨 짓인가?" "나 역시 루티아와 아란티아의 동맹 관계보다 내 친구의 행방이 더 소중하오. 여기 오면 친구들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온 거 아니오?" "자네가 생각하는 국가간 동맹이란 게 그렇게 가벼운 거란 말인가?" "동맹이 가벼운 게 아니라, 내 우정이 무거운 거요." 로일은 지지 않고 으르렁댔다. 데다인도 그를 쏘아보았다. 마스터들과 던멜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한바탕 싸움이라도 했을 분위기였다. ‘그만해라, 로일. 이럴 때가 아니잖나?' 던멜도 그를 달래려 애썼다. "넌 두 사람 걱정도 안 돼?" ‘걱정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흥분하면 안돼. 지금은 외부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로일은 마지막까지 데다인을 노려보다가 방을 나섰다. 던멜은 이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로일을 본 적이 없었다. 루티아에는 점점 어둠이 드리워졌고, 사라진 친구들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이제는 아란티아까지 걱정 되었다. 다시 피로가 몰려왔다.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심한 전투가 있었으나 이 정도로 피로를 남길 정도는 아니었다. '왜이러지?' 던멜은 머리를 짚었다. 퀘이언의 칼에 찔린 후, 칼스텐은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나의 제자를 맡기고 싶다, 마스터 퀘이언." "무슨...... 뜻인가?" 퀘이언은 테마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를 암살자의 제자로 두고 싶지 않았다. 받아다오.” 퀘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해라. 이 건 누구의 의뢰였나?" "내게는 그걸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그러나 테마르는 알고 있다. 그 애가 스스로 선택한 시기에 의뢰인이 누구인지 밝히게 될 것이다." 칼스텐의 배에서 쏟아지는 피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나디움안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이미 말을 하는 게 불가능한 부상이었다. 칼스텐은 비틀거리며 퀘이언을 지나쳐 아란티아의 여왕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뭔가 말했다. 등을 보이고 있어 테마르는 스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뜻은 잘 알겠다." 새나디엘 여왕은 칼스텐의 머리에 손을 얹은 후 말을 이었다. “마음에 원하는 것을 품고 있구나. 말하라." 칼스텐은 또 뭔가 말했다. 테마르는 여전히 칼스텐의 입을 볼 수가 없었다. 새나디엘은 테마르를 자세히 뜯어본 후 말했다. "네 제자는 스스로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다." 칼스텐은 마지막으로 테마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마르는 이미 그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만 벌리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잊지 마라, 테마르. 너는 내가 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천재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누구도 너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칼스텐이 던멜에게 남기는 유언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 남자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테마르를 부탁한다, 마스터 퀘이언.’ 그리고 칼스텐은 숨을 거두었다. 테마르는 울지 않았다. 스승의 죽음 앞에서 의연한 자세로 버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고,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바른 시선으로 새나디엘 여왕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디우렌의 힘이 그대의 영혼을 인도할 것이다, 마스터 칼스텐." 그녀는 테마르에게 손을 내밀어 엄히 말했다. "자, 아이야. 네 스승의 시신을 네 손으로 수습하거라. 나디움의 첫 번째 산에서,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장례를 치뤄라. 그리고 다시 돌아와 스승의 유언대로 할지, 아니면 이대로 떠날지 선택하라. 어느 쪽을 택하든, 이 일에 대한 문책은 따르게 될 것이다." 테마르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칼스텐의 시체를 들고 여왕의 방을 나왔다. 그의 좌우로 여왕의 시녀들이 따랐다. 뒤따라 올라온 울프의 기사들이 칼을 들고 테마르를 막았다. "페하의 허락이 계셨습니다." 시녀들이 말했고, 기사들은 말없이 물러났다. 테마르는 여왕이 말하는 장소에서 스승의 시신을 화장했다. 시녀들은 테마르를 돕지 않았으나, 끝까지 그의 옆에 있었다. 그 불꽃을 바라보며 그는 칼스텐이 옆에 있었던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칼스텐이 없는 자신의 인생을 내다보았다. 마스터는 나를 이 곳에 버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인가? 마지막 순간 그의 머리에 남는 의문은 그것 한 가지였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테마르는 동쪽으로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반사하여 뿌옇게 보이는 나디움의 성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 일어나 시녀들에게 글씨를 써서 뜻을 전했다. '여왕께 돌아가고 싶소.' 그 일이 있기 5일 전 해가 떴다. 던멜은 피곤한 눈으로 난간에 기대어 숲을 바라보았다. 이게 의도된 거라면, 적절한 작전이었다. 조만간 공적해 올 거라고 예상한 병사들은 이틀 동안 완전히 기진해 있었다. 만약 공격이 있다면 오늘 밤이 될 것이다. '놈들에게 지휘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던멜은 이틀 전 전투에서, 수풀 속에 몸을 가린 '모즈가 아닌 어떤 존재'를 떠올렸다. 그 때의 모습, 그 때의 느낌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희미했다. 밑에서 플로라가 그를 불렀다. “마스터 루더께서 급히 찾으세요. 기사 로일도 함께 마스터들의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멍한 정신이 수습이 되지 않던 차라 던멜은 플로라와 함께 회의실로 쓰는 작은 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몇 번이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 들어가기 전에는 아예, 세수하려고 준비해둔 물통의 물을 머리에 들이부었다. 벽에 손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으니, 플로라가 그의 목 위로 수건을 올려주었다. "제가 한 번 밖에 안 쓴 거예요, 그거라도.......” 수줍게 말하는 그녀에게 던멜은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이미 다른 이들은 모두 탁자 앞에 모여 어제 보았던 그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다인과 루더가 탁자 앞에 서서 로일에게 뭔가 말했다. 지도 위에는 루티아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떠올라 있었다. 얼결에 들어와 버린 플로라는 사과하고 돌아가려 했다. "아, 플로라 선생. 그냥 같이 있게. 이 일은 케인스윅 선생들도 같이 알아야 할 일이니까." 루더가 손짓하니, 플로라는 던멜의 옆에 섰다. 데다인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밤새 힘을 때 확대해서 아웃서치 바깥 구역까지 모즈들을 찾아보았네. 그랬더니 방금 이런 결과가 떠오르더군." 데다인의 보석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도 위에 펼쳐진 붉은 점들의 움직임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던멜도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었다. 제일 늦게 방으로 들어온 필립은 지도를 보자마자 설명도 듣지 않고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탄성을 내질렀다. "맙소사." 아웃서치 숲 너머 동쪽에 모즈들을 표시하는 붉은 점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녀석들은 사라진 게 아니 라 여기에 집결하고 있었던 모양일세." 데다인이 말했다. "저게 저 녀석들의 일방적인 패턴인가? 꼭 작전회의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루더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녀석들의 저런 움직임은 에틀리가 이 지도를 연구할 당시부터 보인 적이 없네." 필립이 딱 잘라 말했다. 로일이 개입했다. "아웃서치 바깥쪽이라면 마법이 통하는 구역 아니오?" 던멜의 세계에서는 좌중의 침묵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던멜은 방 전체에 그런 침묵이 깔렸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좀, 과격한 발상이긴 하지만.......” 루더가 조심스럽게 말했고, 필립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쁘지 않네. 어떤가?" "지금까지 우리 쪽이 먼저 공격한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데, 어쩌면.......” 여전히 루더는 조심스러웠다. 카리스마로 뭉쳐 있을 것 같은 짧은 흰 머리의 노인이었지만, 막상 결단을 내려야할 때는 과감하지 못 했다. "되레 역습을 당한다는 건 생각 안 해봤나?" 데다인은 찬물을 끼얹으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이 모인 자리는 아웃서치에서 한 걸음 바깥쪽에 불과하네. 놈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마법으로 당하는 순간 전력을 다해 아웃서치의 숲으로 달려들겠지. 그럼 우리는 도로 놈들에게 당하는 꼴이 되지." "그래도 완전히 시도 못할 건 아니지. 이건 기회야. 물론 신중해야겠지만." 필립과 데다인이 말다툼했고, 루더는 곰곰이 작전을 머리 속에 굴려보고 있었다. 이 지도를 처음 본 게 아니었는지 플로라도 금방 사태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우, 움직이고 있는데요." 붉은 점들은 도로 아웃서치로 들어오고 있었다. 필립은 안타깝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역습의 기회가 있었다 해도 우리가 늦은 모양.......” 그는 말을 멈췄다. 다시 한 번 정적이 찾아 들었다. 붉은 점들이 그리는 이동 경로는 거의 직선이었고, 그 끝은 다운서치 요새의 정문 쪽이었다. 처음에는 일렬이었으나, 그것들이 이동하며 넓게 펼쳐지니 점은 지도 안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 점이 지도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하듯 반사된 빛이 모두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지도의 축척을 생각하면 이건 전력을 다해 뛰어오는 속력이군. 데다인, 자네 생각에는 몇 마리 정도나 될 것 같나?" 루더가 물었다. "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수치는 아니지만.......” 모두 아무 말 않고 데다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길게 느껴지는 몇 초 안 되는 시간이 흐르고 그가 말했다. "천오백." 루더는 바로 방을 나갔다. 로일은 루더가 전투 준비라고 소리치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고, 수화로 말했다. '이번 건, 전과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될 거야.' '데다인에게 최악의 사태에 대해 설명해라.' '최악?' '그가 말했잖은가? 다리를 부숴야 할지도 모른다고.' 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던멜은 플로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가시오.' 던멜은 그녀에게 탑 쪽을 가리켰다. 간단한 뜻이라 금방 통했으나, 그녀는 거부했다. "저에게도 이제 맡은 구역이 있어요. 마법사들은 지금까지 마을의 젊은 병사들에게 이 싸움을 모두 내맡겼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싸울 거예요." 던멜은 그녀와 그녀의 학생들에게 전투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을 후회했다. 충분한 화살이 있다면 마법으로 화살을 날리는 것도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화살의 숫자를 모두 합쳐도, 지금 몰려오는 괴물들의 숫자에 미치지 못한다. 던멜은 그녀의 고집을 막지 못했다. 대신 그는 벽에 글을 썼다. - 요새의 문이 부서지면, - 지체 말고 넌서치로 가시오. "알았어요. 던멜도 조심하세요." 플로라는 떨리는 입술로 인사하고 뒤를 돌았다. 던멜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세우고, 간단한 수화로 말했다. "그건 무슨 뜻이죠?" 놀란 얼굴로 그녀가 물었다. - 괜찮다 - 는 뜻. 겨우 그녀는 얼굴을 폈다. 그리고 같은 모양의 수화로 던멜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플로라는 자신이 맡은 구역으로 달려갔다. 문을 나선 로일이 옆에 섰다. "우려하던 일이 터지면 데다인이 다리를 무너뜨릴 거다. 가자." 던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망루 쪽에 섰다. 병사들도 괴물들이 대규모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긴장하고 서 있었다. 몇몇 마법사들이 궁수들 옆에서 화살을 준비하며 요새의 벽 뒤편에 섰다. 던멜도 활을 준비해 두었다. 눈앞이 잠시 흐릿하게 보였다가 도로 회복되었다.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던멜은 팔뚝에 가려운 상처를 긁적였다가 모즈의 발톱이 긁고 지나간 자리를 발견했다. '놈들을 지휘하는 놈이 있다.' 던멜이 수화로 말했다. 며칠 전 망루에 서서 밤이 내린 숲을 바라보며 플로라와 이야기했던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숲의 유령. 사냥꾼의 저주. 그들이 나타난 후에는 반드시 모즈들이 쳐들어 왔다....... '처음에는 모즈들이 전투를 경험하며 스스로 배워간다고 생각했다. 연장을 쓸 줄 아니, 그런 간단한 사고를 할지도 모른다고. 이건 이곳 마법사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당연히 나도 그러려니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아니야. 간단한 원리다. 놈들에게는 지휘관이 있고, 그 지휘관이 괴물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다. 전투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무기를 쓰는 건 녀석들 스스로 익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배워가고 있는 거라고 봐야지.' 로일도 멀지 않은 곳에 병사들이 몰려 있어, 수화로 말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것도 괴물들을 이용해서?' '그건 나도 모른다. 들었던 대로 루티아의 배신자일지도 모르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외부의 공격 인지도.......’ 던멜은 거기까지 수화를 하던 손을 멈췄다. 그건 로일이 어떤 소리를 듣고 던멜의 수화를 보는 걸 멈췄기 때문이었다. 이내 던멜도 로일이 시선 방향에 있는 존재를 발견했다. 숲은 흔들리고 있었다. 모즈들이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그 두꺼운 숲이 진동했고, 나무들이 들썩였다. 그리고 숲을 벗어난 요새의 정면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검은 털의 베논을 타고 있는 기사가 서 있었다. '카구아,' 어둠 속에서 봐서 검게 보인 게 아니었다. 검은 로브 겉으로 보이는 갑옷도 검은 색이었고, 로브 안쪽에도 햇빛에 가끔씩 번쩍이는 금속이 보였다. 그것도 검은 색이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자가 검은 로브를 쓰고 있으니 당연히 어둠 속에서 보면 유령 같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들썩였다. 밤의 유령이 낮에 나타났으니 당연히 놀랄만했다. 하물며 플로라는 얼마나 겁에 질렸을지 걱정 되었다. 검은 기사는 허리의 칼을 뽑았다. 던멜이 떠올렸던 그 추리가 지금 이 광경을 보는 모든 병사들의 머리 속에 일제히 떠올랐음이 분명했다. 그것은 충격과도 같았고, 뒤에서 천 마리 넘는 괴물들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는 공포를 더해주었다. 카구아라 불리는 검은 기사는 뽑은 칼을 밑으로 내렸다. 그것을 신호로 숲에서 모즈들이 달려 내려왔다. 녀석들이 얼마나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는지, 공기의 진동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8) 라르비튼의 다리 위에서 뒤늦게 내린 명령에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날린 화살이 허공을 날았다. 몰려오는 괴물들의 파도에 화살이 빨려 들어갔고, 달려오던 모즈들이 바닥을 구르면서 먼지가 뽀얗게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정도 공격으로는 돌격을 막을 수 없었다. 십수 개의 사다리가 동시에 요새의 벽에 걸렸다. 거기에 모즈 한 마리라도 올라타면 사람의 힘으로는 그 사다리를 도로 밀어낼 수 없었다. 새까맣게 몰려드는 모즈들의 무게만으로도 요새의 벽이 무너질 것처럼 뒤로 크게 흔들렸다. 병사들은 벽을 올라오는 괴물들을 창으로 찔렀고, 벽을 넘어온 모즈들은 병사들과 한데 엉켜 혼전을 이루었다. 마법사들과 마법학교 수련생들은 마법으로 화살을 날렸다. 많은 괴물들이 화살에 죽었다. 그러나 더 많은 숫자가 그 사이 요새를 넘었다. 던멜은 화살을 쉬지 않고 쏘았으나, 마찬가지로 망루를 사수하기에는 모자랐다. 로일은 게이트 쪽을 맡으러 갔으나, 이제 혼전에 섞여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던멜의 옆에서 계속 망루 아래로 창을 찌르던 병사 증 하나가 모즈에게 목덜미를 물렸다. 던멜은 그 놈의 얼굴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크게 부상당한 병사는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어버렸다. 잠깐 동안 던멜의 공격이 뜸해진 틈을 타서 모즈 두 마리가 망루를 올라왔다. 던멜은 단숨에 단검을 휘둘러 둘의 얼굴을 베었다. 뒤이어 세 마리가 올라왔고, 세 마리를 쓰러뜨리면 네 마리가 올라왔다. 좁은 장소에서 모즈들의 시체가 쌓였고, 쌓인 만큼 모즈들이 뒤따라 올라왔으나 던멜은 망루를 내주지 않았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창으로 등을 찔렀다. 던멜은 보지도 않고 창을 피해 공격한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이제 망루의 뒤쪽도 모즈들에게 빼앗겨, 계단에서도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망루에만 신경 쓰던 증에 던멜과 같이 있던 병사들은 모두 죽고, 요새의 벽 상당 부분은 파괴되어 있었다. 아직 요새의 입구는 버터고 있었으나, 다른 부분에서 올라온 모즈들이 일제히 그 쪽으로 몰려가니 5분을 버터지 못할 것 같았다. 던멜은 모즈 한 마리의 배에 검을 찌른 채로 들어올려 계단에 올라오는 녀석들을 항해 패대기쳤다. 계단을 타고 있던 모즈들이 뒤로 우루루 떨어졌다. 던멜은 계단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넘어진 모즈들의 등을 밟고 뛰었다. 돌아서며 그는 착지하기도 전에 활을 들어 두 마리를 쏘아 맞췄다. 후퇴 시기가 너무 늦었다. 요새는 단 한 번의 돌격도 막아내지 못 했다. 애초에 요새는 이 정도 공격을 고려하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계속 증축할 수도 있었으나, 마법사들은 괴물들이 어째서 마법에 통하지 않는지, 어떤 사악한 존재가 루티아를 노리고 이런 짓을 했는지, 또는 누가 내부의 배신자가 있는지를 알아내느라 바빠 더 큰 공격에 대한 방어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지친 병사들은 괴물들을 맞아 전력을 다해 싸우지도 못 했다. 경험 적은 루티아의 청년들은, 체력을 보존해가며 밤을 새는 법도 알지 못했다. 언제 후퇴해야 할지도 몰랐다. 정확한 타이밍에 그런 명령을 내려줄 지휘관도 아군 쪽에 없었다. 간단한 작전이었다. 적들은 일부러 허술한 공격을 계속 해서 위기감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그리고 숫자가 확실히 늘어난 시점에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루티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케인스윅의 선생 중 한 명이 화살로 모즈들 다섯 마리를 한꺼번에 쓰러뜨렸다. 마법으로 움직이는 칼이 저 혼자 춤을 추며 모즈들을 헤집어놓기도 했다. 마스터 루더가 아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스무 마리나 되는 모즈들을 공중으로 집어 던지기도 했다. 괴물들만 전략과 전투에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마법사들도 그리 되고 있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을 상대로 한다 해도 곧 마법사들은 방법을 찾아내었고, 앞으로 더 좋은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조금만 더 경험을 쌓으면, 그리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즈들의 지휘관은 마법사들이 어떤 잠재력을 발휘하여 이 위기를 극복할 여유는 주지 않았다. 그것이 지난 수개월 동안 결정적인 공격 없이 산발적으로만 공격해온 이유였다. 던멜은 두 개 남은 화살 중 하나를 쏘아 모즈 한 마리의 목에 박아 넣고, 몸을 돌렸다. 요새의 벽 위에 검은 털의 짐승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베논의 등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검은 기사가 타고 있었다. '카구아!' 모즈들의 시체를 밟고 서 있는 던멜과 눈이 마주 친 카구아는 단숨에 베논을 채찍질 하여 달려왔다. 던멜은 시위에 마지막 화살을 먹여 쏘았다. 멀지 않은 거리를 향해 화살 한 자루가 정확히 카구아의 머리 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카구아는 고개만 슬쩍 꺾었고, 화살은 빗나갔다. '피해?' 분명 맞으리라 생각한 나머지, 카구아가 휘두른 커다란 칼에 반응이 늦었다. 게다가 그 공격은 아주 빨라 던멜은 어렵사리 피하며 바닥을 굴렀다. 말과 달리 베논은 육식 동물처럼 방향 전환이 아주 빨랐다. 그놈이 미끄러지는 자리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카구아는 다시 던멜에게 칼을 휘둘렀고, 던멜은 뒤로 몸을 날려 그의 사정거리 밖으로 피했다. 그러자 그 검은 기사는 옆에 끼고 있던 창을 던멜에게 던졌다. 직선으로 뻗어 날아온 창이 던멜의 옆구리를 찢으며 스쳐가 돌벽에 박했다. 큰 부상도 아니었는데, 던멜은 옆구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던멜은 자기 몸에 일어난 심상치 않은 변화에 당황했다. 그는 벽에 박힌 창을 뽑아 같이 죽는다는 각오로 달려오는 검은 기사를 향해 뻗었다. 순간 베논과 함께 카구아의 몸이 달려오던 방향의 왼쪽으로 강하게 밀려났다. 허공에 떠오른 베논은 날렵하게 몸을 비틀더니 바닥에 네 다리를 착지했다. 베논의 등에 붙어있던 검은 로브의 기사도 마치 그 짐승과 한 몸인 것처럼 몸을 같이 틀어 착지를 도왔다. 다시 고개를 든 카구아의 손에는 창이 또 한 자루 쥐어져 있었다. 다운서치의 골목을 걸어 나와 마스터 루더가 지팡이를 세웠다. "어디 너도 마법이 통하지 않는가 보자." 루더의 지팡이에서 뻗어나간 세 가닥 불줄기가 카구아의 상반신을 불태웠다. 그것은 일순 그의 몸을 덮고 있던 검은 로브를 태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구아는 불길 속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마법사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는 불이 옮겨 붙은 창을 집어던졌다. 서른 걸음 넘는 거리를 단숨에 날아간 참이 루더의 어깨를 뚫고 그를 벽에 꽃아 버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던멜도 어쩌지 못 했다. 마법의 불길에 휩싸인 카구아는 베논을 몰아 천천히 루더에게 다가가 창을 다시 뽑았다. 던멜은 뒤늦게나마 창을 던졌고, 거의 동시에 카구아도 루더의 피가 묻은 창을 던졌다. 두 자루 창이 공중에서 서로 비껴나가며, 뻗어나갔다. 던멜은 몸을 틀어 창을 피했고, 카구아도 아까 화살을 피할 때처럼 고개만 꺾어 피했다. 몸에 타오르는 불길은 천천히 꺼졌고, 카구아의 검은 로브는 실오라기 하나 타지 않고 바람에 흩날렸다. 던멜은 두 자루 칼을 뽑아 양손에 들었다. 루더는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지팡이를 들었다. 카구아는 양쪽을 번갈아 보고는, 이내 마을의 골목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던멜은 급히 루더에게 달려갔다. 루더는 어깨를 막고 있었으나 흐르는 피는 감당하지 못 했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일어났다. 던멜은 그가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을 회복할 동안 모즈로부터 지켜주었다. "설마 카구아가 모즈들을 지휘하는 장수일 줄이야.......” 던멜은 탑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루더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후퇴하지 못한 병사들이 많네. 내 명령이 너무 늦었어. 그러니 내가 책임져야지." 그건 딱히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더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다. 던멜은 그의 옆에 서서 마법을 쓴 후 생기는 공백을 지켜주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내 쪽으로 집결하라. 내 쪽으로 오지 못한 자들은 라르비튼의 다리 쪽으로 후퇴하라." 루더는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다운서치의 골목을 통과해 달려왔다. 병사들은 후퇴하면서도 활을 쐈지만 맞지 않고, 쫓아오는 모즈에게 어설피 칼을 휘두르는 병사는 오히려 당했다. 루더는 후퇴하는 병사들이 자신의 뒤쪽으로 피한 것을 확인한 후 지팡이와 양손을 번쩍 들었다. 땅이 크게 울리며 다운서치의 집 대여섯 채가 단박에 박살이 났다. 그리고 부서진 돌무더기가 수십 마리 모즈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가세.” 루더는 던멜의 어깨에 의지해 비틀거리며 탑 쪽으로 달려갔다. 이미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과 다리 건너에서 모즈들을 견제하는 공격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쪽의 다운서치 마을 쪽에서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리로 달려왔다.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로일이었다. ‘다리에서 보자.' 로일이 멀리서 수화를 보냈다. 필립과 데다인이 지키는 북쪽에서 후퇴하는 병사들이 다리를 건넜다. 데다인은 루더와 던멜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리를 건너갔다. 그는 다리를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던멜은 다친 루더도 데다인과 보내고 로일을 기다렸다. 모즈들은 끝없이 몰려왔다. 이미 데다인이 말한 이천이라는 수치를 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는 병사들까지 보낸 후 로일과 던멜이 다리 앞을 막았다. 로일은 짧게 숨을 몰아쉰 후 모즈들을 노려보았다. “데다인이 뒤에서 다리를 부순다는군. 후퇴하자." 로일이 말했다. '잠깐.' 던멜은 잠시 그를 세웠다. 모즈들은 무작정 다리를 공격해오지 않고 멈춰 있었다. 미친 듯이 날뛰면서 돌격해 올 줄 알았던 짐승들이 다리를 에워싼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적응하기 힘든 사실이었으나, 그들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구아가 모즈들의 앞에 섰다.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 같은 죽음을 풍기는 기운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녀석은 아주 강했다. 로일이 소리쳤다. "넌 누구냐?" 대꾸를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닌 터라 로일은 말을 하자마자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로일은 멈칫했다. 그는 멀뚱히 카구아 쪽을 바라보았다가 던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자식 방금 말했다!" '뭐라고?' "우리 더러, 너희들이야 말로 누구냐, 라고 말했다. 저거, 인간이었어?" 검은 로브 때문에 얼굴도 보이지 않은 그 기사는 한참 대답을 기다렸다. '말해라, 로일.’ 던멜이 신호했다. "뭐라고 말해?" '우리의 정체를 물어봤잖은가? 대답해줘라.' 로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소리쳤다. "우리는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이다." '여왕께 돌아가고 싶소.' 테마르가 바닥에 쓴 글씨를 보고 두 시녀들은 그를 왕실로 안내했다. 궁궐의 여기저기에 울프 기사단의 갑옷을 입은 자들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아란티아의 여왕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여왕의 옆에는 스승을 죽인 남자가 서 있었다. 지금 당장 그와 싸우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칼스텐이 못한다고 처음부터 포기해버렸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란티아의 여왕이 이 인간 세상에 어떤 존재든, 그 일을 의뢰한 남자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시켰던 그는 관심 없었다. 스승을 잃은 슬픔과 앞으로의 일에 대한 막막함만 지울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블랙풋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었다. 밤새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를 바라보며 그는 그런 생각만 했다. 칼스텐이 아는 기술은 모두 그가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사라진다면 블랙풋의 미래는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정을 주었던 헤더도 보고 싶었다. 그게 옳은 길인지 아닌지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칼스텐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이대로 죽을 거라면 왜 이 곳에 왔는가? 테마르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여왕 앞에 무릎 꿇고 힘없이 하얀 돌바닥 위에 글씨를 썼다. - 스승의 유언에 따르겠소. 새나디엘은 테마르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망설임이 있구나. 그런 아이는 받고 싶지 않다." - 상관없지 않소. 테마르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가는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느렸지만, 이상하게도 피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 테마르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힘도 주지 않은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테마르는 한 뼘도 벗어나지 못 했다. 테마르는 겁에 질려 반사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는 칼에 손을 가져갔다. 여왕의 뒤에 서 있는 수호 기사도 거의 동시에 허리의 칼을 쥐었다. 그러나 새나디엘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는 개의치 않는 차가운 눈으로 테마르를 쏘아보았다. "네 스승의 목소리를 들어라!"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커다란 소러가 머리를 흔들었다. 언제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그였다. 순간적으로 들린 여왕의 목소리에 그는 온 몸에 바늘이 꽂힌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것이 마스터 칼스텐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라는 진동이 머리 속을 울린다는 것은 그에게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 아란티아의 여왕 페하께 인사드립니다. 저에게 기회가 닿지 않아 울프 기사단의 자리에 오르지 못 했으나, 이런 식으로나마 폐하를 뵙고 싶었습니다.] 뒤이어 새나디엘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것은 어제 칼스텐이 죽기 전에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대화였다. [...... 뜻은 잘 알겠다. 마음에 원하는 것을 품고 있구나. 말하라.] 다시 칼스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 테마르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도록 해주십시오.] 이미 그 말을 듣는 순간 테마르는 스승이 죽던 순간에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쏟아졌다. [...... 선택의 없었던 저 아이의 인생에 첫 번째 기회를 부여해 주십시오.] 테마르는 머리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무슨 뜻입니까, 마스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당신이 제 선택이었습니다. 당신이 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선택이 없었다고 말을 하십니까?' 지금까지 스승이 그에게 했던 말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내 제자가 되겠느냐?'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그 말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있을 곳을 잃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머물던 유랑 극단이 블랙풋의 손에 사라지는 순간, 그는 머물 곳을 새로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고민도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한 개밖에 없는 선택지에서의 선택이었다. ‘넌 앞으로 무얼 하고 싶으냐?’ 던멜은 가르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게 헤더였다. 벌써 제자를 키우려고? 그건 핑계였다. 제자를 키우고, 블랙풋의 스승이라는 자리에 올라 머물고 싶었다. '나의 제자를 맡기고 싶다, 마스터 퀘이언.' 그는 정말 자기 제자를 명성만 알고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에게 맡기고 싶었던 건가? 아니다. 칼스텐은 처음부터 테마르가 원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피를 좋아하지 마라. 그런 건 너와 어울리지 않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검술의 천재가 암살자들 틈에서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풋이 아니면 안주할 만한 장소를 찾지도 못하는 그를, 함부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칼스텐은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고 자칫 악한 힘에 이용당할지 모를 그의 재능을 보호하고 싶었다. 칼스텐은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후 던멜로 이름을 바꾸고 수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은 사실을, 그의 스승은 이미 알고 있었다. 테마르는 안주하고 싶었다. 여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 제자는 스스로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다.] 그의 귀는 다시 원래 그랬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테마르는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여왕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그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렸다. "자, 이제 다시 말해보아라, 아이야." 얼음처럼 차가웠던 여왕의 얼굴은 이제 세상없이 아를다워 보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테마르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글을 했다. - 이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여왕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게 주어진 권한으로 지금부터 그대를 울프 기사단으로 임명하겠다." 로일의 목소리에 검은 기사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칼을 들었다. 모즈들이 일제히 이를 드러내며 손에 칼을 들었다. "오호라." 로일은 갑자기 뭐가 즐거운지 던멜의 어깨를 툭 쳤다. "미안하다, 던멜. 잊어버릴 뻔 했네. 맞아. 우린 아란티아의 늑대들이야." 피 묻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천진한 미소는 마치 새나디엘 여왕과 같았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느낌. 던멜도 미소 지으며 칼을 내밀며 속으로 말했다. '맞다, 로일. 하얀 늑대가 등을 보이면 안 되지." 로일은 거기에 칼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여왕 폐하를 위하여!" 두 사람의 신호에 맞추기라도 하듯 모즈들은 일제히 라르비튼의 다리로 달려왔다. 던멜과로일은 그 엄청난 숫자를 보고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 때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기운이 등을 덮쳤다. 다리가 크게 흔들리고 몸이 떠오를 것 같은 세찬 바람이 밑에서 위로 올라갔다. 둘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다리 밑에서 잔잔히 흐르던 강물이 다리를 중심으로 좌우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얀 거품을 담은 강물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몸을 일으켜 모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기겁을 하고 후퇴하려 했으나, 강이 만들어낸 파도를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었다. 마치 물로 만들어 진 거대한 손바닥이 내리치듯 모즈들은 물살에 휩쓸려 뒤로 나가 떨어졌고, 카구아도 하얀 거품 속으로 사라졌다. 머리 위로 올라가 있던 물이 던멜과 로일 쪽으로도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모즈들을 공격한 것 같은 강한 힘이 없었다. 그저 세차게 소나기를 한 번 맞은 정도였다. 던멜은 물길에 휩쓸린 모즈들의 무리 속에서 몸을 털며 일어나는 베논을 발견했다. 그 뒤로 카구아도 검은 로브를 털며 베논과 함께 다운서치로 멀어졌다. "뭔 난리야, 이건?" 로일이 중얼거렸다. 둘은 다리를 건너 마스터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나무 지팡이를 쥔 러스킨이 서 있었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루티아노를 개최하도록 하세. 아무래도 우리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아." 그는 비틀거리며 탑으로 돌아갔다. "다리는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군." 피를 흘리는 어깨에 손을 짚은 채 루더가 말했다. 데다인은 다리를 부수려던 마법을 접었다. 로일이 물었다. "모즈들이 완전히 후퇴한 건 아니잖소? 다리는 부수는 게.......” 루더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공격해 올 때 잡힌 친구들이 많아. 모즈들은 움직일 힘을 잃은 몇몇 병사들은 산 채로 잡았네. 또 다운서치의 집에 숨은 병사들도 일부 있고....... 그들에게 건너올 마지막 길을 우리 힘으로 차단하고 싶지 않네. 다리를 부수는 건 최후의 방법이야." 던멜은 그의 말을 보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 코렛이 다가와 루더에게 뭔가를 말했다. 루더는 크게 놀라며 진짜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던멜은 그 입 보양을 보고 전에 같이 북쪽 망루를 지키며 싸웠던 마스터 저스틴이 모즈들에게 잡혔다는 걸 알았다. 죽음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피를 흘리며 동료의 부축을 받아 걸어가는 병사들이나 들것에 실려 가는 마법사들, 상처의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치료 받는 이들이 주위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명이 울면서 팔 하나가 떨어진 병사를 업고 달려갔다. 시체를 부여잡고 우는 병사도 있었고, 강 건너를 바라보며 절망하는 마법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바쁜 움직임에 그들의 슬픔은 묻혀버렸다. 다리에서 멀지 않은 넌서치는 금방 야전 병원이 되었다. 던멜은 계속 누군가를 찾아 눈을 바삐 움직이다가 눈에 익은 한명을 찾았다. 서로 찾고 있었는지 그 역시 던멜을 보자 달려왔다. "플로라가......." 그는 플로라의 제자였다. 얼굴에 괴물의 발톱 자국이 있었고, 흐르는 피가 턱에서 굳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플로라가 괴물들에게 잡혔어요. 우리를 마지막까지 다리 쪽으로 보내다가 자기는 쫓아오지 못 하고.......” 던멜은 그 뒷말을 모두 보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나중에야 알았다. 던멜과 로일이 지키는 게이트가 뚫리던 순간에도 플로라가 지키던 북쪽 망루는 뚫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9) 루티아노의 결정 괴물들의 공격이 있은 날,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사들이 동원되어 다리를 중심으로 다시 방어 전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벨 수 있는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베어다가 벽을 올렸고, 혹시라도 강을 건너오는 모즈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강을 따라 목책을 쌓았다. 다리는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도록 항시 마스터 중 한 명이 지키기로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생존자는 그 다리를 통과해 넌서치로 돌아오지 않았다. 던멜은 목책 건설 작업을 도우며 루티아의 뒷산을 돌아보았다. 강을 배경으로 루티아의 북서쪽은 깎아지를 듯한 바위산으로 막혀 있었다. 그가 다리를 지키고 있던 루더에게 모즈들이 저 산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내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생각을 고쳤다. "돌아들어오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바위산을 타고 오는 건 녀석들에게도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닐 걸세. 소규모로 밖에 올 수 없어. 하지만 우선 경비를 서게 해 둬야겠군. 놈들이 강을 건너는 걸 택할지, 뒷산을 넘어오는 걸 택할지, 둘 다 택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던멜은 작업을 하면서도 계속 다리 너머를 지켜보았다. 모즈들의 움직임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플로라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음에도 자꾸 미련을 두고 바라보게 되었다. 가끔은 눈을 감고 그녀의 느낌을 다운서치 쪽에서 찾아보려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모즈들의 무리 속에서 그 힘을 찾기는 어려웠다. 던멜은 탑을 올라가 데다인의 방을 찾았다. 그와 케인스윅의 교장인 골베인이 같이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던멜은 그에게 플로라의 일에 대해 물었다. "이미 그 일에 대해 연구해봤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데다인은 '에틀리의 지도'라고 명명된 양피지를 펼쳤다. "지도의 힘을 이용하면 인간과 모즈를 구별해서 볼 수 있으니까 만약 포로들이 잡혀 있다면 지도에도 나타날 거라 생각했지. 그리고 기회를 잡아 구하러 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지도를 가장 마법의 힘이 강한 이 탑 아래로 옮겨왔네. 저스틴도 잡혀있을지 모르니까.......” 저스틴이 창에 찔려 죽었다는 걸 목격한 사람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데다인은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보게." 그는 말을 이으며 지도의 한쪽에 반짝이는 점들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구역은 넌서치의 야전 병원 쪽이었다. 지금 적어도 백 수십 명의 마을 주민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곳이었지만, 떠돌아다니는 점은 채 오십이 되지 않았다. “화이트비의 보호 아래 있으면 이 지도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표시할 만큼 아주 강력하게 작동하게 되어 있지. 그런데도 생명의 힘이 미약한 부상자들은 제대로 표시하지 못 한다네. 만약 괴물들에게 사로잡힌 우리 측 마법사들이나 병사들이 살아있다 해도 부상당해 있다면 이 지도로는 알 수 없네." 데다인은 끝까지 죽었을 거라는 가정은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작은 배려에 던멜은 고마웠다. 그러나 지도를 접기 전에 던멜은 아주 희미한 흰 점을 다운서치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이내 그 점은 꺼져버렸다. 던멜은 들었던 손가락을 접었다. "왜 그러나?" 던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잠시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가서 쉬게.” 던멜은 처음 베드포드가 안내해주었던 방을 찾아가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 그는 데다인이 주었던 약초를 팔뚝에 스친 부분을 발랐다. 독한 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꿈에 어린 시절의 헤더를 만났다. 헤더는 딸 같은 존재였다. 딸이 아빠와 결혼한다고 애교를 부리듯 헤더도 던멜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었다. 다시 만났을 때도 그런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애쓰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에게는 네가 안주할 곳이, 나에게는 내가 안주할 곳이 있어야한다.' 던멜은 헤더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그 일이 있기 4일 전.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렸다. 점심 무렵에, 루티아노가 다시 열렸다. 라르비튼의 다리를 지키고 있는 필립과 죽은 에틀리를 제외한 나머지 마스터들과 로일, 던멜이 루티아노에 참가했다. "더 미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원군이 필요합니다." 루더가 러스킨에게 말했다. 늙은 마스터도 처음의 생기를 잃은 피곤한 얼굴이었다. 데다인이 말했다. "진작 그러려고 했지만, 누가 자리를 뜬단 말민가? 에틀리에 이어 저스틴까지 잃으면서 그 공백이 커졌거늘." '그렇기에 더욱 원군을 부르는 걸 서둘러야 하지 않나?" 필립이 끼어들었다. 데다인도 답답한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사실 최근 울프의 기사 두 명이 활약해 주는 것을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사과해야 할 정도로 훌륭했소." 데다인은 따로 고개를 돌려 진심으로 사과했다. 로일은 사과를 받지도 않고 그냥 무뚝뚝하게 앉아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사실 마스터 퀘이언이 하는 말이 이러했소. 루티아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모르나, 하얀 늑대들 다섯 명이 가서 해결 못할 일이라면 울프 기사단이 모두 가도 해결 못할 일일 것이다....... 난 그 말을 의심했으나, 이제 조금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소. 만약 내가 오는 길에 두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이번 참사가 달라졌을 것이오." 데다인은 자연스럽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넘겼다. 던멜과 로일의 옆에서 두 사람이 해치운 모즈들의 수치를 아는 마스터들은 그 말에 동의했다. 데다인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마스터 러스킨께서 힘을 다하였음에도, 그 두 사람을 찾지 못 했소. 이 일을 어찌 해결해야 할 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소." 가만히 있던 러스킨이 말했다. 그는 워낙 기척 없이 말을 해서 던멜은 그의 입을 보는 타이밍을 약간 놓쳤다. “......는 잘못이 없네. 누구의 책임도 아니니, 앞으로 자신의 책임 운운하는 말은 하지 말게들. 그보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란티아의 여왕에게 이 일을 고하고 원군을 요청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7" 던멜은 감기에 걸린 듯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사람들의 말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그 분을 다시 뵐 면목이 없습니다." 데다인이 자신감 없이 말했다. “외교는 모두 데다인에게 맡긴 바, 우리에게 필요한 전력을 다시 아란티아에 부탁했으면 하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두 기사 분은?” 루더가 말하며 로일과 던멜을 바라보았다. 던멜도 저런 엄청난 군대를 앞에 두고 하얀 늑대들만 모두 왔으면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란티아에 원군을 요청하는 점에서는 찬성입니다. 그 원군은.......” 그러나 로일은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아직 오지 않은 하얀 늑대 한 명과 우리들의 캡틴 한 명이면 됩니다." 다들 놀랐다. 던멜이 조심스레 수화로 물었다. '카셀과 쉐이든만?' 로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던멜에게만 해야 할 말을 모두에게 했다. "캡틴 울프는 하얀 늑대들 다섯 명이 모두 힘을 합쳐도 하지 못할 기적과도 같은 일을 카모르트에서 해냈고, 쉐이든 울프는 모두가 의지하는 울프 기사단의 형과도 같은 존재요. 그 두 사람만 온다면 이 일도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을 거요." "그건......, 두 사람만 더 오면 저 엄청난 모즈들의 무리를 격퇴할 수 있다는 뜻인가?" "아마도." "어떻게?" "그걸 알면 내가 했을 거요. 모르니까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을 부른다는 거고." 로일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러스킨이 중재했다. “그럼 데다인은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아란티아의 여왕에게 원군을 부탁해 보시오." 최소한의 원군이 그들 두 사람이고, 그보다 더 많이 불러달라는 뜻을 우회한 말이었다. 데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루더는 던멜이 말한 후방 산에 대한 수비와 앞으로의 경계에 대한 말을 주고받았다. 골베인은 케인스윅 학생들의 보호와 선생들의 죽음에 대한 문제로 길게 얘기했으나 딱히 결론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골베인은 마법으로 괴물들을 퇴치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 중 두어 가지는 실제로 전투에도 써먹을 만 했기에 루더는 귀담아 들었다. 던멜은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플로라의 문제와 로일이 말했던 아란티아의 원군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상대는 정치적으로 통할만한 존재가 아니다. 카셀이 온다고 일이 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아. 차라리 가급적 많은 울프의 기사들이 오는 편이 더 좋다.' 회의실 밖을 나서며 던멜이 수화로 말했다. “나도 왜 갑자기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카셀이 온다면 뭔가 바뀔 거라고 생각해." 로일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카셀이 검은 기사들의 군주를 앞에 두고, 내게 아란티아의 보검을 내줬을 때의 기분은 설명해줘도 모를 거다. 내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얻었다는 느낌....... 날 그때만큼 충실했던 적이 없었어. 그건 내게 있어 기적이다. 난 그 기적을 믿는다." 던멜은 로일이 가장 먼저 카셀 앞에 무릎 끓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짧은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누구보다 서로 마음이 돈독했던 카셀과 로일이었다. '그래, 이해한다.' "나머지는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거다. 만약 그 분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필요 없다고 말했어도 울프 기사단 전체를 내주시겠지.” '간혹 불같은 성격을 내보이시는 그분 성격이라면, 오히려 하얀 늑대 두 사람을 잃어버린 일을 추궁하지 않을까?” 로일은 힘없이 웃었다. "어제부터 계속 아파 보인다, 던멜. 독에 감염된 거 아니야?” '약은 발랐다.' "그럼, 걱정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 거야.” '그럴지도.' 로일과 헤어진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는 게 정신을 차려보니 케인스윅으로 와 있었다. "아, 기사 던멜." 복도에서 몇 명을 마주치다가 그 중 하나가 아는 척을 했다. 베드포드였다.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왜 여기 왔을까? 던멜은 멍청히 서 있다가 플로라가 생각나서 왔다고 그가 내민 펜으로 종이에 적었다. 베드포드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를 플로라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플로라가 케인스윅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는, 이 와중에서도 그녀의 방을 청소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베드포드가 나타나니 그들은 인사하고 물러났다. “전 가보겠습니다.” 베드포드는 던멜을 혼자 내버려두고 방을 나왔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한 방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었다. 몇 번이나 읽은 건지 벽에 꽂힌 엄청난 양의 낡은 책에는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 있었다. 학생들이 치워 비교적 정돈이 잘 되어 있는 상태라는 점을 고려하면, 평소에는 얼마나 지저분하게 하고 살았을지 상상이 갖다. 책장에 꽂지 못한 책들이 넘쳐났고, 옷걸이에 걸린 옷은 여러 겹이 겹쳐 있었다. 그 중 한 벌은 처음 만나 식사를 가져올 때 입었던 옷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정신까지 몽롱한 데도 그녀에 대한 기억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한 어린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고, 입에서는 더운 김이 샜다. 급히 달려온 모양새였다. "당신이군요. 듣지는 못 해도 알아듣는다고 했어요, 맞죠?"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똑바로 잘 들어요. 선생님은 당신 때문에 죽었어요." 소년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악을 썼다. "선생님은 모즈를 누구보다 무서워했어요. 그래서 모즈들이 쳐들어온다는 신호만 나면 이 방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왠지 알아요? 처음 모즈들이 아웃서치를 공격해 올 때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이 바로 선생님의 남자 친구였어요. 그는 선생님을 구하려다 그 분의 눈앞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어요." 소년은 눈물을 쏟아냈다. "그래서 모즈들이 나타날 때마다 피했어요. 당신이 나타나자 외부에서 온 사람도 루티아를 위해 이렇게 애쓰는데 자기만 숨어있을 수 없다며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싸움터에 나선 거예요. 덕분에 그 전투에서 희생된 거라구요." 소년은 달려들어 던멜의 옷을 움켜쥐었다. "그거 알아요? 난 차라리 선생님이 죽어있길 바래요. 잡혀 있는 게 아니라, 고통 없이 죽었기를 바래요. 만약 살아있다면 그 괴물들 틈에 잡혀있을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그분의 공포를 알기나 해요? 모즈들이 나타날 때마다 아기처럼 흐느끼던 모습을 본 적 있어요?"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에 다른 학생들이 나타나 그를 뜯어말리려 애썼다. 그러나 던멜은 움직이지 못했다. “당장 가서 구해와. 구할 수 없으면 멀리서 활로 쏴서 그 분을 죽여 드리란 말이야. 활 잘 쓴다며? 뭐가 아란티아의 원군이야? 당장 네 나라로 돌아가!" 베드포드까지 나타나 그를 던멜에게 떼어냈다. 소년은 몸부림치면서 끝까지 던멜에게 입을 보여주려고 했다. 던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있었어도 괴물들에게 점령당했을 거라면 차라리 오지 말 것을......, 그랬다면 선생님은.......” 소년은 학생들의 만류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울었고, 던멜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케인스윅의 선생들까지 찾아와 소년을 달래 데려갔고, 곧 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베드포드만 남아 던멜을 위로했다. "시저라는 아이입니다. 마법사였던 두 부모님을 잃고 플로라를 엄마처럼 여기던 아이였죠. 충격이 클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당신이 없었다면 라르비튼의 다리마저 수호하지 못 했을 거라는 걸 다들 알고 있습니다." 베드포드가 떠난 후 던멜은 분노와 죄책감으로 몸을 떨었다. 벽에는 플로라가 마지막까지 연구하던 ‘마법을 이용한 활'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몇 차례 실험했는지 화살이 벽에 몇 대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뽑아 다른 쪽 벽에 집어 던졌다. 벽에 화살촉이 박혀 끝을 희미하게 떨었다. 호흡이 거칠게 토해져 나왔다. 던멜은 벽에 손을 짚고 문 밖에 서 있다가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은 전혀 없었다. 그저 앞이 조금 희뿌옇게 보이기만 했다. 황급히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그리고 의식이 끊어졌다. (10) 넌서치 다시 눈을 했을 때는 하얀 벽이 있는 침대 위였다. "깨어났네요? 이제 혈색이 좀 도는군요. 절 알아보시겠어요?" 그녀는 케인스윅의 여선생으로 플로라와도 절친한 친구인 하이디였다. 그녀는 넌서치의 야전 병원에서 모두를 지휘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궁금하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자면, 당신은 어제 오후에 기절했고, 만 하루 동안 잠들었어요. 지금은 그 다음 날 아침이죠. 새벽에 마스터 데다인께서는 루티아노의 결정에 따라 아란티아로 떠났고요." 그녀는 펜과 종이를 던멜의 무릎 위에 놔주고, 그와 가까이 앉았다. "묻고 싶은 게 계신 얼굴이군요." 던멜은 흔들리는 손으로 펜을 놀렸다. - 내가 왜? "당신은 괴물의 독에 중독 돼 있었어요. 약하게 긁히는 바람에 신경 쓰지 못했나 보더군요. 하지만 독에 대해서는 좀더 강한 주의가 필요했어요. 오히려 약하게 중독 되는 바람에 몸속에 깊숙이 침투해서 천천히 당신의 체력을 깎아먹었던 거예요. 그럼 아무리 당신처럼 건강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잃게 되죠. 해독제를 바르는 것도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나뭇잎으로 싼 하얀 가루약 세 개를 주었다. “조치는 다 했지만, 치료는 계속돼야 해요. 이걸 하루에 하나씩 드세요. 원래대로라면 일주일은 쉬어야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힘들겠죠. 그래도 기본 체력이 강한 분이니 보통 사람들보다 금방 회복할 거예요." - 고맙소. 하이디는 던멜의 손을 한 번 잡았다가 놔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하이디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플로라가 당신에 대한 말을 많이 했어요. 그 애는 항상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어서 말했죠. 그래서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어요. 당신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하지만 너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건 죄악이니 그저 바라보는 걸로 만족한다고요. 자신이 보통 아크랜드의 사람들에게는 손도 닿지 못할 높은 신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아이죠. 아니, 어쩌면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예전의 남자 친구를 생각하느라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을 글썽였다. "플로라를 잃은 슬픔을 건드린 것은 죄송하지만, 꼭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던멜은 잉크가 말라 잘 나오지 않는 펜으로 종이 위에 짧게 썼다. - 미안하오. 하이디는 왜 그가 사과를 한 건지 알지 못했다. 강의 방어선을 중심으로 2교대로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서 있는 자리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패배감이 쌓여있었다. 생각이 깊고 신중한 루티아의 마스터들은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 했다. 던멜이 라르비튼의 다리 옆으로 나타나자, 마스터 루더가 무척 걱정했다는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그러나 던멜은 대꾸 없이 마법사를 지나쳤다. 아직 회복되지 않아 흔들리는 걸음으로 던멜은 라르비튼의 다리를 건너 기 시작했다. 루더나 병사들은 그를 보고 경악하고 있겠지만, 던멜은 상관하지 않았다. 다리 끝까지 건너간 그는 가상으로 그린 머리 속의 지도에 모즈들의 기운을 표시해 나가기 시작했다 모즈들이 없는 공백으로 그는 달려갔다. 그리고 괴물들의 눈에 띄기 전에 한 걸음에 지붕 위로 뛰어올라갔다. 잠깐 동안 소리를 내지 않고 그는 그대로 지붕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를 발견한 모즈는 없었다. 던멜은 지붕에서 머리만 내밀어 모즈들의 하고 있는 형태를 살폈다. 녀석들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딱히 꼬집어 말할 단어를 고르자면 녀석들은 노닥거리고 있었다. 넌서치 쪽에서 마법사들이 역습을 해올 것에 대비하지도 않았고, 강을 건너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던멜은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불이 끓었다. 에틀리의 지도에 따르면, 괴물들의 숫자가 다시 이천을 채웠고 더 늘어나고 있다는데, 던멜은 이대로 지붕 아래로 뛰어 내려가 녀석들을 하나씩 죽여, 이천이라는 숫자를 채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녀석들이 공격해오지 않는 덕에 자경단의 부상자들이 회복할 시간 여유를 얻은 지금, 그들을 자극할 수는 없었다. 던멜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소리 없이 뛰어 점점 다운서치의 동쪽 끝으로 이동했다. 모즈들의 대다수는 다운서치의 외곽 요새 쪽에 모여 있었다. 하는 짓은 넌서치 마을 쪽과 다를 바 없었다. 자경단의 청년들이 수개월 동안 힘겹게 세운 요새는 이제 형체만 남아있었다. 마침 가지를 쳐낸 커다란 나무를 들쳐 메고 모즈들 몇 마리가 마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근처 공터에는 아웃서치에서 잘라온 게 분명한 큰 나무들이 많았다. 몇몇 모즈들이 도끼로 남은 가지들을 하나씩 쳐내 있었다. '뭘 하는 거지?' 던멜은 잠시 그들의 작업 광경을 바라보다가 포로들이 어디 있나 살폈다. 모즈들 틈에 섞여 있을 거 라 기대한 인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죽여 어딘가로 치워버린 것인지, 아니면 따로 다른 곳에 가둬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던멜은 자신이 어느 쪽을 바라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을 가리며 검은 것이 불쑥 지붕 위로 올라왔다. 베논이었다. 던멜은 즉시 뒤로 네댓 걸음 물러나 칼을 뽑았다. 베논의 위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카구아가 타고 있었고, 그 자의 손에는 철로 만든 창이 쥐어져 있었다. 끝에 달린 날은 길이가 두 뼘이라, 베는 것도 가능한 창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틀리의 지도에는 이 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즈들과 같은 붉은 점이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색깔이라 못 보고 지나쳤을까? 지도를 체크할 때마다 우연히 범위 바깥으로 피해있었던 건가? 던멜은 자세를 낮추었다. 그때 또 다른 기척이 옆집의 지붕 위에 있었다.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무기를 들고 똑같은 모양의 베논을 탄 카구아였다. 그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둘은 처음 이곳을 공격해 올 때 모즈들을 지휘했던 그 자도 아니었다. '그럼 셋?' 던멜은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신호를 보냈다. 로브 안에 가려진 입으로 말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다른 쪽 지붕 위에 있던 녀석이 가볍게 몸을 날려 던멜이 있는 집 위로 올라왔다. 던멜은 지체 하지 않고 몸을 돌려 탑 쪽으로 향하는 지붕 위로 뛰었고, 카구아들은 즉시 따라왔다. 빗물이 약간 고인 지붕 위에서 미끄러지며 던멜은 검을 휘둘렸다. 뒤에서 찌르는 창과 그의 검이 부딪치며 던멜은 뒤로 밀려났다. 9층 높이에서 떨어졌으나, 그는 다리부터 부드럽게 착지했다. 근처에 있던 모즈들이 깜짝 놀라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던멜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리 쪽으로 달렸다. 카구아가 쫓아와 다시 등을 창으로 찔렀다. 던멜은 옆으로 굴러 피했고, 뒤이어 오른쪽에서 덤벼든 카구아의 창을 연속으로 피했다. 그는 몸을 날려 베논의 갈기를 쥐고 옆구리에 매달렸다. 베논은 던멜을 떨쳐내려고 벽에 타고 달리더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던멜은 털을 움켜쥐고 버틴 후, 베논 위의 카구아에게 칼을 휘둘렀다. 카구아는 팔을 내밀어 단검을 막았다. 찌릿한 통증이 던멜의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허공에 떠 있는 베논이 바닥에 착지하기 전에 던멜은 카구아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다시 지붕 위로 착지했다. 어느 새 다른 카구아가 옆으로 접근해 창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단검을 휘둘러 그의 얼굴 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피했다. 양쪽 모두의 공격이 실패한 후 서로 지나쳐 지붕에서 떨어졌다. 던멜은 착지하자마자, 벽에 등을 붙여 상대가 어느 쪽에 있는지, 기척을 느껴보았다. 그들은 던멜이 어디 있는지 확신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데도 두 방향에서 조여 들어오고 있었다. 손바닥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힘으로 갑옷을 뚫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싸우는 동안 칼날도 많이 상해 있었다. 던멜이 벽에 달라붙듯 매달려 다시 지붕 위로 올라오니 베논 두 마리는 귀신같이 던멜의 위치를 알아내고 같이 지붕 위로 따라 올라왔다. 양쪽 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도 없었다. 단지 뜨거운 태양만이 지붕 위를 달구었다. 땀이 눈썹에 매달려 흔들렸다. 던멜은 한쪽 손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자세를 낮추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동시에 카구아를 태운 두 마리 베논도 던멜에게 달려왔다. 두 검은 기사의 창이 교차하며 던멜을 찔렀다. 던멜은 바닥을 구르며, 두 개의 점을 좌우로 휘둘렀다. 두 자루 창 중 하나가 던멜의 목덜미를 긁은 후 지붕에 박혔고, 던멜이 휘두른 두 자루 검 중 한 자루에서만 베는 느낌이 있었다. 목표한 대로 제대로 맞았다면 베논의 다리에 맞았을 것이다. 던멜은 처음부터 카구아 둘을 상대하는 걸 포기하고 그들을 태운 놈의 다리만 노렸었다. 라르비튼의 다리까지 뛰다 뒤를 돌아보니 그 작전은 성공했다. 공격이 통한 건 한 마리뿐이지만, 어느 쪽도 돌아보지 않았다. 던멜은 피가 흐르는 목덜미에 손을 짚고 다리로 돌아갔다. 루더가 달려와 붕대로 피를 막아주었다. 곧 하이디가 와서 약물치료까지 도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하루 동안은 쉬라고 제가 그러지 않았나요?" 둘은 던멜을 혼내다가 이내 질문을 바꾸었다. "포로들은 있던가?" 던멜은 고개를 저었다. 던멜이 다리를 건너는 순간부터 뭔가를 기대하고 서 있던 많은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실망한 듯 돌아갔다. 루더도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돌아서려다 몸에 붙은 털을 하나 떼었다. "이건...... 무슨 털인가?" 던멜은 아까 베논의 갈기를 붙들었을 매 손에 붙은 털을 떼어 보았다. "이게 그 검은 털의 베논 것이라고?" 둘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베논은 흰털과 회색 털만 존재한다고 했다. 그래서 카구아가 타고 있는 검은 털의 베논은 존재 자체로 이상한 짐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확인해보니 그것은 진짜 검은 털이 아니었다. 털의 뿌리 록 한 마디 정도는 하얀 색이었다. "자네도 봤지? 내 마법 불꽃에 휩싸여도 끄덕 않던 녀석들을!” 루더는 던멜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손과 몸에 붙은 털을 신중히 떼어서 탑 쪽으로 달려갔다. 그 일이 있기 이틀 전. "루더가 예상했던 대로일세." 골베인이 하얀 종이 위에 깔아놓은 베논의 털 빛 가닥에 집중한 채로 설명했다. "마법을 보호할 수 있는 물질이 코팅되어 있네. 나도 이런 물질을 조금 가지고 있지만, 베논 한 마리를 통째로 염색시킬 분량은 없어. 무엇보다 이런 건 우리 마법사들에게는 그리 좋은 게 아니니까, 외부 유출은 철저히 막고 있네. 이 염료에 대해 아는 사람은 루티아 전체를 꼽아 봐도 열다섯 명 이 채 안 되네."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다리 건너에서 모즈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고, 목책을 쌓는 작업도 계속 되었다. 이런 게 얼마나 실용성이 있을지 던멜도 모를 노릇이었다. 말 없는 로일은 더더욱 말을 잃어갔다.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며칠 동안 교대 근무하며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간혹 창에 기대어 졸기도 했다. 적은 이곳 병사들이 정규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강물을 뒤집어엎거나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마법사들이 버티고 있다. 섣불리 공격하면 공격하는 쪽도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내버려둬도 무너질 곳이라 여기고, 굳이 공격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게 사실이고 지금 병력을 아끼는 작전을 쓰고 있다면, 목표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이란 말인가? 그럴 리는 없다. 녀석들은 분명 루티아의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해 올 것이다. 문제는 그게 언제냐는 거다. 얼마나 기다리게 만들 셈인가, 일주일? 한달?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공격은 마법사들이 전투 방법에 익숙해지기 전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병사들이 지칠 시기를 기다려야겠지. 그런 것을 고려하자면, 사흘 안이다. 그때까지 아란티아에서 적절한 원군이 와준다면 모르겠지만, 그때 오는 공격은 알아도 막지 못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던멜은 전날 싸웠던 카구아에 대한 이야기를 루더와 필립, 골베인이 모인 자리에서 했다. 루더는 다리를 지키는 차례가 되어 앞부분만 듣고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골베인은 필립에게 힘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하나 실수했네. 이 털에 대한 연구를 할 때 시간이 없어 다른 케인스윅 선생들의 도움을 받았거든. 이 털을 염색시킬 정도로 마법 물질에 대해 정통한 자가 저 쪽 편에 있다는 건, 루티아 내의 누군가가 배신자로 있다는 의심을 더욱 증폭시킬 거야." 필립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의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도 오랫동안 감지 못했는지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카구아가 쓰고 있는 검은 로브도 같은 종류일 거라 생각하네. 모즈들은 루티아 경계 안쪽에서만 마법이 통하지 않지만, 녀석들은 어디에서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지. 마스터 러스킨께는 말씀드렸나?" "저녁때부터 화이트비 옆에 계신다고 하셨네. 방해 드리고 싶지 않아서 아직 말씀 못 드렸네. 방에 들어가시기 전에 내게 엘프들의 마법사와 연결해 보겠다고도 하셨네. 그 분에게도 그 분의 방법이 있을 거라 믿어. 그 분께서 이대로 루티아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으실 걸세." 골베인이 말을 마친 후, 마법의 빛이 아닌 촛불로만 밝혀진 방안이 더욱 어두워진 기분이 들었다. “마법이 안 통하는 괴물 이천에, 마찬가지로 마법이 통하지 않는 카구아가 셋이라면 난감하군. 게다가 그 자들의 힘도 보통이 아니던데." 필립이 한숨쉬며 말했다. "병사들의 사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네. 카구아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게 나타나면 모두들 겁에 질렸지.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모즈들의 지휘관이라고 알려졌으니.......” 골베인이 말하다가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는 로일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보시게, 로일 울프. 일 대 일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나?" "내가 일 대 일로 못 이길 상대는 내 스승과 내 친구들뿐이오." 로일은 언제나처럼 단언했다. 던멜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직 서로 전력으로 부딪친 게 아니지만, 베논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 녀석들의 힘은 결코 쉽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놈들은 어떤 식으로든 강을 건너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거요. 그때는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이 했던 공격도 먹히지 않을지도 모르오.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그러니 방어가 아닌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요.' 던멜이 로일의 입을 빌려 말했으나, 모두 난색을 표했다. “역습을 하자고? 불가능하네." '방법이 역습에만 있는 건 아닐 거요.' 곧 두 마법사는 기가 질려 말을 잃었다. 필립이 말했다. "혹...... 루티아를 버리자는 건가?"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어!" 필립은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회의가 시작되면 항상 펼쳐놓는 탁자 위의 지도에 손을 댔다. 하얗게 빛나는 넌서치의 빛을 짚으며 그는 소리쳤다. "보이나? 이 빛이 존재하는 건 루티아가 있기 때문일세. 이 점 하나하나가 루티아에 꿈을 실었고, 그 꿈이 루티아를 만들어가고 있네. 그런데 어떻게 루티아를 버린다는 말을 쉽게 하는가? 라르비튼의 다리를 부수는 것조차 망설이는 우리에게 할 소린가?" 골베인이 그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달랬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검은 얼굴의 마법사에게 화를 냈다. 던멜도 너무 경솔하게 말을 꺼냈나 싶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다 문득 지도의 넌서치 부분에 빛나는 하얀 점을 발견했다. 그 빛은 넌서치의 다른 점에 비해 유난히 밝았다. 던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과 동일한 크기의 빛을 가진 또 하나의 빛을 넌서치에서도 발견했다. 라르비튼의 다리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는 그 빛이 넌서치에 있는 하얀 빛과 같은 크기였다. 던멜은 서둘러 로일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보시오, 두 분 다 진정하고. 던멜이 하나 묻는군. 베논을 염색한 그 물질, 그걸 뒤집어쓰면 에틀리의 지도에도 표기가 안 되는 거요?"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마법의 영향을 받는 거니까, 아마 지도상에는 카구아가 나타나지 않을 걸세." 골베인은 겨우 필립을 진정시켜 앉힌 후 말했다. 로일은 다운서치의 하얀 점을 가리켰다. "그럼 저건 뭐요?" 두 사람은 그 하얀 빛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우리 쪽 마법사임에 틀림없다!" 필립이 말했다. “부상자는 빛이 거의 안 보인다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이건 꽤 큰데?" 로일의 말에 필립도 동의했다. “여기 다리 쪽에 있는 큰 점을 보게. 이건 루더야. 이건 생명의 힘을 감지하는 지도지만, 마법이 강한 자라면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더 강한 빛을 띠게 되지. 미안하지만 자네들도 일반인과 같은 밝기의 점으로 밖에 표기 되지 않아." "그럼 지금 다운서치에 있는 저 점은.......” "저스틴이야. 살아있었어." 로일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필립은 골베인의 얼굴을 보며 환호에 가깝게 말했다. "구하러 가는 거요?" 로일이 물었다. “좀 더 생각해 볼 일일세. 지금까지 힘을 숨겨오다가 갑자기 이렇게 드러낸 건 어쩌면.......” 빛은 금방 다시 사라져버렸다. 네 사람은 멀뚱히 시로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다시 그 빛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반시간을 기다려도 빛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골베인은 무척 난감해했다. 결국 그들은 결론을 내지 못 했다. 저스틴이 살아있다면 오히려 이 쪽에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저쪽에 숨어있거나 잡힌 척 한 걸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말을 하면서, 회의가 끝이 났다. 그 빛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이틀 후였다. 그때까지는 그게 진짜로 희망의 빛인지, 아니면 절망을 예고하는 경고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던멜, 잠깐 와보시겠소?" 베드포드가 어둠 속에서 다가와 손짓했다. 해독 치료를 받은 후 근육이 물러진 기분이 들어, 목책 건설 작업을 도우며 일부러 몸을 풀던 중이었다. 던멜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따라갔다. 넌서치의 작은 집에 베드포드를 비롯한 케인스윅의 선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제법 나이가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촛불만 밝혀놓고 말하는 것을 보니 역적모의라도 하나보다 생각했는데, 말하는 투를 보니 그 추측을 진지하게 고려해도 될 것 같았다. 베드포드는 던멜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펜과 종이를 준비해 두고 말을 꺼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소개는 간단히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쪽은 아란티아에서 오신 던멜 울프.” 베드포드는 빠르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모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뭔지 모를 비장감마저 서려 있었다. "우리들은 루티아의 탑이나 케인스윅과는 별개의 조직입니다. 아시겠지만, 모즈들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지요. 그래서 왜 그런지에 대한 조사를 이어가던 중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이런 모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베드포드는 촛불을 가까이 하고 말했다. “당신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을 받을 지도 모르니, 요점만 말씀드리죠. 모즈들에게 누군가 보호 마법을 쓰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익히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종류의 마법으로....... 그리고 그것은 화이트비의 힘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외부의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그건 순진한 발상입니다. 그 정도의 마법사가 루티아가 아닌 다른 곳의 마법사라는 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모즈들은 루티아에 가까이 접근할 때만 마법이 통하지 않아요. 그건 내부 소행자라는 뜻입니다." 베드포드는 조심스레 던멜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써주길 바라며 그가 쥐고 있는 펜 끝을 살피는 시선도 많았다. 그러나 던멜은 가만히 있었다. “이건 위험한 발언이며, 우리 손으로 해결하기에 너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불러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던멜에게 말했다. 던멜은 펜에 잉크를 묻혀 짧게 종이 위에 썼다. - 누가 의심스럽소? 베드포드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펴고 말했다. “우선 우리는 가장 마법이 뛰어난 그랜드 마스터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직접 관리하는 화이트비만 깨버리면 간단히 루티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분께서 뭐 하러 굳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겠습니까. 오히려 그 분은 최근, 화이트비를 보호하는 방에 오래 머물러 계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혹시 있을지 모를 내부의 배신자로부터 루티아의 상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라고 하시지만, 그 분도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여기신다는 간접적인 증거죠." 말이 너무 느린 데드포드 대신 다른 이가 성질 급하게 나서서 추리를 이었다. '마스터 에틀리도 의심 가는 첫 번째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언제나 모두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하고 별로 인기가 없는 마법사이기에 억측을 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을 의심한 우리를 용서하소서....... 이 분은 모두의 선생님이라 할 만한 분이시지만, 그래도 마스터 러스킨 다음으로 모든 마법에 능통한 점을 들어 우리는 마스터 골베인을 의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 분 옆에 우리가 붙어 그 분의 연구를 도우니, 사실 괴물들을 돕고 싶어도 그럴 시간을 가질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아닙니다. 마스터 루더? 모즈들이 쳐들어올 때 제일 앞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분이?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린 행동을 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위험하죠. 실제로 이번 전투에서 그는 어깨를 크게 다쳤으니까요." 던멜은 마스터들 중 남은 인물들을 체크해보면 그들이 누굴 의심하는지 금방 짐작해냈다. "마스터 필립은 사실 의심하기 조차 힘든 선한분입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나름대로 그 분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딱히 그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도 힘들지만, 그가 괴물들을 돕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이디 선생님과 연인 관계죠. 결혼까지 준비하시는 분이 그런 끔찍한 일을 꾸밀 수는 없을 겁니다. 마스터 저스틴도 마찬가지로 의심이 가지 않은 분이긴 했지만 돌아가셨지요. 전투가 일어나면 항상 제일 앞에 서시던 분이었건만.......” 그가 어물거리며 결론을 내리지 못 하자, 베드포드가 말을 끊었다. “우린 현재 공석으로 계신 한 분까지 의심해 보았습니다. 마스터 타냐. 그러나 외부에서 이런 일을 하기에는 당연히 무리지요.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이 일은 내부에서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으로 가능성을 좁혔습니다." “마스터 데다인." 그들끼리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후 말하는 것일 텐데도, 존경하고 받들어야 할 마스터를 배신자로 지목한다는 사실에 그들은 긴장했다. 베드포드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는 전투가 일어나면 항상 늦게 나타나거나 후방에서만 싸웁니다. 그가 원군을 데리러 간 사이에는 모즈들이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또 다시 자리를 비우자, 모즈들이 잠잠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가 하얀 늑대 네 명 중 두 명을 잃어버리고 두 명만 여기 데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확신했습니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의 실종도 데다인이 저지른 일일지 모릅니다." 괜히 따라왔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데다인은 성격이 급하고 과격하고 말을 함부로 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조직을 배신하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추리에는 결정적인 부분이 비어있었다. 카구아....... 배신자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카구아와 연계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추리하기 이전에 던멜은,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시기에 서로를 의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들은 후 자신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동조를 해야 하나? 오히려 혼내야 하나? 반발심을 살 텐데....... 쉐이든, 너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즈윈이나 게랄드라면 이런 심각한 고민 따위 하지 않겠지. 왜 이들은 로일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 이런 복잡한 추리를 들려주는가? 던멜은 솔직히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들어버렸고, 또 못들은 걸로 하기에는 너무 사태가 커져 있었다. 마스터들이 걱정하는 내부 혼란의 중심이 바로 이 자들이었다. - 나도 따로 생각해 보겠소. - 이 일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합시다. 던멜은 고민 끝에 펜으로 적어 모두에게 보인 후 자리에서 나왔다. 뭔가를 기대하는 멤버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마시자, 갑자기 카셀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 일이 일어나기 하루 전. 교대하기 위해 새벽에 로일을 깨울 때 갑작스럽게 루티아노를 소집한다는 소식이 전해했다. 다리를 지키는 마스터 필립을 제외하니 이제 루티아노라고 해 봐야 골베인, 루더, 러스킨 세 사람뿐이었다. “어제 및었던 말 중에 루티아를 버리자는 의견이 나온 걸로 아네. 이 점에 대해 논하고 싶어 내가 급히 루터아노를 열었네." 러스킨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케인스윅의 학생들 사이에서 루티아 내 배신자 문제로 말썽이 있다더군." 그의 눈과 던멜의 눈이 마주했다. 그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도 된 것처럼 던멜은 가슴 한 쪽이 뜨끔했다. “예. 아무래도 괴물들을 감싸고 있는 보호 마법을 쓰려면, 루티아의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비밀리에 소문이 퍼지는 걸 모아봤더니 놀랍게도 데다인이 의심 받고 있더군요." 루더는 혀를 차며 말했다. “공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리게 하고, 판단력을 흩트려 놓지. 누구보다 루티아를 사랑하는 사람이 루티아의 배신자로 지목 받다니....... 슬픈 일이로군." 러스킨은 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마법 보호 말인데, 카구아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나?" 골베인이 대답했다. “카구아로부터는 어떤 마법의 힘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제 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마법으로부터 보호 받는 로브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러스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루티아 내부의 배신자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자중하라고 일러두게. 설사 우리의 적이 내부에 있다 하더라도 그런 소문이 퍼지면 공격도 당하기 전에 우리 안에서 무너지게 될 게야. 자, 마스터 루더. 루티아를 버리고 달아나는 문제에 대해 설명해주겠나?" 러스킨은 '버린다.' 라는 단어를 각별히 강조했다. "우선 동쪽 바위산을 타고 가는 문제를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오백이 넘는 노인과 여자들, 그리고 사백 명에 가까운 부상자들을 데리고 그런 험한 길을 통과해 달아나는 건 무리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건, 강을 따라 병사들을 총 동원해 퇴로를 확보하고, 리버 포레스트만 통과하면 그 후는 마법이 통하니까 모즈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루더는 지도를 짚어가며 공을 들여 설명했다. "그러나 역시 적들이 이 이동을 모르게 하는 게 가장 좋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해서 신경을 돌려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지나치게 위험하구려. 그렇지 않아도 모자란 병력을 분산시키자고?" 골베인이 걱정스레 말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걸세. 하지만 지금은 할지, 안 할지부터 결정해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스터 러스킨?" "그들이 노리는 게 루티아라는 이 땅인지, 아니면 루티아에 사는 주민인지 알 수 없군. 차라리 저쪽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존재면 좋으련만.......” “협상을 할 생각이 있다면 이런 무자비한 공격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지. 힘들겠지만, 우선 확실한 희로를 확보하는 데 신경써주게. 그 다음 일은 아란티아에서 원군이 온 다음에 논해 보세나. 그 원군으로 루티아를 지킬 수 있을지, 아니면 퇴로를 보호할 수 있을지 먼저 알아야지." 러스킨과 다시 눈이 마주친 던멜은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던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버린 것처럼 빙그레 웃었다. "루티아노를 마치겠네." 러스킨이 방을 떠난 후, 루더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중얼거렸다. “우리의 운명은 데다인이 누굴 데려올 지에 따라 달려있군." 던멜이 회의 내내 생각한 게 그것이었다. 기적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마스터 퀘이언의 말이 옳았다. 하얀 늑대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울프 기사단 전부가 움직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던멜은 탑을 나와 나디움이 있을 만한 북쪽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새벽의 빛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라르비튼의 다리 너머로 쫓 온 이후, 처음으로 모즈가 가까운 장소까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병사들은 잔뜩 움츠려 들었다. 일부는 성급하게 활시위를 당겼고, 비상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그 동안 모두가 얼마나 긴장해 있었는지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 알 수 있었다. 다운서치 방향에서 다리 쪽으로 접근하는 것은 단 한 마리였다. 녀석은 다리에서 한참 떨어진 방향에서 하얀 천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다리를 지키는 필립은 어처구니가 없어 좌우에 서 있는 던멜과 로일을 번갈아 보았다. "저게 뭐 하자는 짓 같나?" 로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 보이지 않소?" 로일답지 않은 적절한 인용이었다. 러스킨은 당연히 화이트비를 지키는 방에 있을 것이고, 골베인은 베논의 염색에 쓰인 마법 약품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연구실에 박혀 있을 것이고, 루더는 앞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 병사들과 리버 포레스트를 점점하고 있을 것이다. 필립은 이 황당한 광경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처리해야 했다.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뭉툭한 코를 벌름거리며, 그 모즈는 이 쪽의 답변을 기다렸다. 필립은 밑의 병사를 시켜 아무 깃발이나 흔들어 보이라고 했다. 곧 모즈는 밀 포대를 질질 끌며 다리 쪽으로 다가왔다. 끌리는 모양새가 안에 패 무거운 물건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뭐 같아 보이나?" 불길한 느낌을 갖는 건 비단 세 사람만은 아니었다. 던멜은 이미 모즈가 끌고 오는 보자기 안에 뭐가 있을 지 짐작하고 이를 부르르 떨었다. 모즈는 다리에 세워놓은 목책을 피해 지그재그로 걸어오더니 다리 중간쯤에서 포대를 놔두고 어슬렁어슬렁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돌아가는 모즈와 필립을 번갈아 보며 명령을 기다렸다. 필립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리 중간으로 걸어갔고, 던멜이 뒤를 따랐다. 모즈가 두고 간 포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필립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포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필립은 포대를 잡고 안을 보더니 뒤로 확 물러났다 그것은 발가벗겨진 인간의 시체였다. 온몸이 칼로 난도질 되어 있었고, 끈적한 피가 차 있는 포대 안은 악취가 심했다. 피가 완전히 굳지 않은 걸 보니 죽은 지 오래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두 눈이 파여 있었으나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마스터 저스틴이었다. "이 놈!" 분노한 필립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고 모즈에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주위 공기를 달구는 보이지 않는 열기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뻗어가 모즈에게 닿았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모즈의 몸이 사람 키만큼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화르륵 불에 타올랐다. 고통스러운 몸부림 끝에 녀석의 몸은 시커먼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동강 났다. 분노를 참지 못 하고 마법을 쓴 필립은 물론이고, 대체 가져온 포대 안에 뭐가 들었기에 필립이 분노하는지 모르던 병사들도, 잡혀 있는 다를 사람들도 같은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치를 떨던 던멜도,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마법이 통했다! "캡틴 코렛." 필립이 다리를 되돌아가며 소리쳤다. 코렛이 황급히 달려와 필립의 명령을 받았다. “마스터 루더를 찾아와라." 모즈들에게 마법이 통하는 순간 병사들 사이에서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당장 마법사들 전부 이끌고 역습에 나서야 한다는 둥, 다리 밖으로 모두를 끌어내기 위한 작전이라는 둥, 마스터 필립이 그때 쓴 마법만 통하는 거라는 등, 화이트비의 힘이 회복되었다는 둥 온갖 의견들이 목책 주위를 떠돌았다. '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이제 루티아의 모든 것에 책임을 떠안고 있는 필립과 루더는 신중했다. 그래서인지 그 문제로 논하는 루더의 표정은 괴로워 보였다. "겨우 모즈 한 마리가 불에 탄 걸 가지고 공격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기횔세. 어떤 이유에서인지 보호 마법이 사라졌어. 이걸 이용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따로 있겠나? 아니, 우선 다운서치 한 가운데에 마법을 한 번 씨보면?" “인질이 있을지 모르네.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잖은가?" "아, 그렇군. 내가 너무 흥분했어." "또 카구아가 아직 다운서치를 지배하고 있네. 그건 어쩔 텐가? 모즈들의 숫자를 고려해보면 마법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해도 어설프게 그들을 자극할 수는 없어." “어느 쪽이건......, 아무튼 이건 기회야. 마스터 러스킨은 뭐라 하시던가?"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네. 화이트를 보게. 빛이 더 강해져 있어. 보고를 받지는 않으셨어도 이 일을 잘 알고 계신 모양이야." "골베인은?" “사태에 변화가 생기면 알려달라고 하고 지금 방에 있어. 우리 두 사람이 외곽 경비로 빠지는 바람에 탑의 업무를 모두 혼자 맡느라 지쳐있어. 그런데도 불평 한 마디 없군." 던멜은 잠시 돌아보겠다고 하고 자리를 떴다. 화이트비의 하얀 빛이 넌서치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다운서치까지 밝히지는 못했다. '가볼까?' 덴모주의 지하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서부터 던멜은 어두 속의 전투에 자신을 잃었다. 몸이 안 좋았다는 점을 고려하고라도, 낮에도 카구아 둘과 싸우면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었다. 셋이 나타난다면? 냉정을 되찾으려 할수록 죄책감과 분노가 고개를 들었다. "데다인이오." 목책에 몸을 기대어 서 있는 던멜에게 다가와 베드포드가 말했다. 그는 손톱을 물어뜯다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데다인이 없을 때 괴물들은 쳐들어오지 않았고, 데다인이 없을 때 모즈에게 마법이 통했소. 다음 그랜드 마스터로 지목 받는 그의 힘과 지식이라면, 화이트비에 맞서는 강력한 보호 마법을 알아냈을지도 모르오. 그가 언제 돌아온다고 했소?" 던멜은 모른다고 했다. "기대하지 마시오. 어쩌면 그 자는 당신의 동료를 데리러 가서 또 한 번 그 동료를 버리고 빈손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어서 이 사실을 그랜드 마스터께 고하고 우리끼리 이 위기를 극복해 내야 하오. 부탁하겠소." 그는 던멜에게 떠넘기듯 말하고 가버렸다. 처음의 여유 넘치는 마법사의 이미지는 완전히 잃어버린 그였다. 모두들 그랬다. 루티아는 이제 성스러운 마법의 도시가 아니었다. 함락 직전의 절망적인 성이었다. 병사들은 패닉에 빠졌고, 마법사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 했다. 던멜도, 로일도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던멜은 이 순간 다른 누구보다 카셀이 있기를 바랐다. 지금 루티아에 필요한 건 모즈들과 싸울 만한 병력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힘을 규합시킬 캡틴임을, 로일은 본능적으로 짐작하고 카셀이 와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었다. 결국 그대로 의견만 난무한 채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고 하루가 지났다. 데다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시간상 나흘 거리였으니, 빨라야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나 올 테지만, 던멜은 아침부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원군도 원군이지만 와서 배신자가 아님을 그가 스스로 입증하길 기대하는 건지도 몰랐다. 피곤하지 않도록 가끔 자두었으나, 깊은 잠은 들 수 없었다. 새벽에 가벼운 식사를 한 후 던멜은 다리 건너를 바라보았다. 논의 끝에 선제공격을 한 번 해보기로 결정을 내린 듯 마스터들과 일부 마법사들의 회의가 바쁘게 진행되었다. 로일도 거기에 끼어 있었으나, 던멜은 합류하지 않았다. 그저 로일에게 결과만 알려할라고 하고 그는 강을 따라 걸었다. ‘카구아들을 계략에 능한 장수라고 가정해 보자.' 마스터 저스틴의 시체를 던져 병사들의 사기를 깎으려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킨 게 의도한 것이었든, 갑작스러운 사고였든, 그들은 충분히 그 일에 대해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성급하게 밤에 마법으로 공격을 가했다면, 치명적인 역습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모즈들이 마법이 통하는 아웃서치 외곽 숲에 물러났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만약 이 쪽에서 먼저 시간을 제 때 맞춰 나섰다면, 역습 자체는 성공했더라도 결과적으로 피해는 마법사 쪽이 더 컸을 것이다.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다가 역습을 하지 않자, 그냥 그 숫자로 밀어붙인 게 라르비튼 다리를 건넌 그 전투일까? 그럼 그 다음 전투는? 역습을 노린 역습인가? 던멜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단순한 명제를 풀지 못해 같은 추리만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왜 공격해 오지 않는가? 저 숫자와 병력을 가지고 어째서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는가? 전략은 던멜 분야가 아니었다. 또 모두들 전락은 많이들 생각하지만, 자신이 없어 실행에 옮기 지 못했다. 결국 역습을 시작하는 작전 시각은 해가 가장 높은 정오 때로 하기로 했다. 마스터 루더를 중심으로 한 마법사 스무 명과 병사들 서른 명이 다리 끝에 서서 공격 준비를 마쳤다. 로일이 선두에 나서기로 하고 던멜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필립과 함께 라르비튼의 다리를 지키기로 했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던멜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다리를 건너가 보았다. 아직 괴물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느낌만은 분주했다. 지금 이 작전을 알고 있던 모르고 있던 적어도 기습이라는 이름은 달 수 없게 되었다. 녀석들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거라고 던멜은 확신했다. "무슨 일이야?" 로일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던멜은 잠시 그 느낌을 정리해보았다. '놈들이 움직이고 있다.’ "설마...... 마법이 다시 안 통하게 된 거야?" '모르지.' 둘은 다시 다리를 건너 괴물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분주한 움직임은 반시간 가량이나 계속 되었다. 루더는 초조하게 그 음직임을 주시했다. 어느 새 정오가 지났으나,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던멜은 지금 들리는 소리에 대해 로일에게 물었다. "모즈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가까워. 루더는 놈들의 최후 공격이 지금 시작되는 걸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군." 모즈들 몇 마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좌우로 따라붙은 녀석들이, 처음 나타난 녀석들 옆에 붙어 횡렬로 섰다. 늘어선 숫자는 대략 서른 마리 정도 되었다. 발을 맞추는 것 같지는 않지만, 줄은 잘 맞추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루더가 안타깝게 내뱉었다. "늦었다. 어젯밤에 쳤어야 했어. 이제 다시 마법이 안통하게 된 걸세." 필립은 앞니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지팡이가 여러 가지 색깔로 빛을 내더니 어제 모즈를 불태웠을 때처럼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갈랐다. 선두에서 걸어오던 모즈 네댓 마리가 동시에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다. 모즈들은 순간 움츠렸다. "어?" 본인이 해놓고도 당황한 나머지 필립은 마법사답지 않은 외마디를 질렀다. 녀석들은 또 마법 공격이 있을까 걱정되는지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다시 줄을 맞추어 다가왔다. 마법에 당할 줄 알면서 오니 루더는 되려 난감해했다. 그저 '경계하라'고 외치는 게 고작이었다. 모즈들은 강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처음 일렬로 내려오는 행렬의 좌우에 다른 녀석들이 계속 붙으면서 최종적으로 멈춘 자리에는 이백여 마리 정도 되었다. 무기를 가지고 있으나, 결정적인 싸움을 대비한 어떤 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 자식들, 뭔 꿍꿍이일 것 같냐?" 로일이 던멜의 어깨를 두들겨 물었다. '모르겠다. 저게 다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겠는데.......’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적들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녀석들은 필립이 시험 삼아 쓴 마법에도 불구하고 달아나지 않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온다면 차라리 이 악 물고 싸우려 들겠지만, 이건 그도 저도 아니니 병사들은 웅성대기만 했다. 마법이 통하니 당장 가서 불로 태우고, 태운 재는 얼려버리자고 역설했던 마법사들도 막상 그 기회가 오니 그러지 못 했다. 뒤이어 다운서치에서 모즈들 제2진이 강 쪽으로 1진과 똑같이 횡렬로 밀고 내려왔다. 2진은 1진의 반 정도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나무 기둥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모두 열두 개였다. 처음에는 나무 기둥이 다리를 건너는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 부실했다. 저 나무로 배를 만들어 노를 저어 오는 게 낫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이내 그게 어설프게나마 십자가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던멜은 호흡을 멈추었다. 그 십자가에는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제1진으로 대기하고 있던 괴물들은 제9진이 가져온 십자가를 세우는 데 합류했다. 누워있던 나무가 똑바로 서자, 나무에 묶여있던 사람들이 고통에 비명을 토해줬다 헝클어진 머리에, 찢어진 옷에, 피 묻은 얼굴은 그동안 그들이 얼마나 고통 받으며 잡혀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중 일부는 거의 실신해 있었고, 일부는 깨어 있었으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멍청히 다리 건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중 하나에 플로라가 묶여 있었다. 그 일이 시작되었다. (11) 플로라 루티아에 온 열 하루 전부터 이 순간까지 더듬어본 던멜은 한참이나 모즈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루더와 필립이 다급히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목책 뒤에서 수십 명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던멜은 가만히 서있었다. 상대방이 뒤통수에 대고 말한다 해도 느낌으로 아는 그였지만 드물게 이번에는 로일이 등을 두 번이나 칠 때까지 대꾸를 못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이성이 남아있을 때 네가 명령을 내려다오." 로일의 눈에는 분노 외에는 남아있는 게 없었다. 모즈들은 지난 싸움에서 빼앗은 루티아 병사들의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칼끝은 묶여있는 포로들의 배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공격해오면 그대로 찔러버리겠다는, 무언의 위협이었다. 그 때문에 가장 급한 건 로일을 말리는 일이었다. 내버려두면 모즈들 한가운데에서 그 흥분이 폭발할 것이, 결과는 인질과 괴물 양쪽 모두의 전멸일 것이다. 물론 그 경우 로일의 생명도 위험했다. '참아라. 내가 컨트롤 하겠다.' 던멜은 일부러 냉정한 척 수화로 말했다. 로일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냉정을 잃은 건 던멜도 마찬가지였다. 던멜은 마지막 이성의 끄트머리를 잡고 자신에게 말했다. 천천히 생각하자.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저 인질들은 진작 죽었을 거다. 아직 시간은 있다. 어쩔 수 없이 던멜의 시선은 열두 개의 십자가 중 플로라 쪽에 꽂혔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늘어져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녀의 상태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이미 숨을 거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기운은 미약했다. '루티아에 온지 며칠 째더라.......’ 던멜은 문득 그런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루티아에 왔을 때의 일부터 지금까지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시작은 카모르트였다. 카셀을 만나고 붉은 장미 백작을 만나고 블랙풋을 만났다. 검은 사자 백작의 야망은 엉뚱하게도 패잔병에 불과했던 카셀에게 무너졌고, 어둠 속에서 힘을 키우고 있던 암흑의 마법은 로일의 검에 깨졌다. 돌아오던 길에 루티아를 도우러 나디움을 향하던 발길을 하늘 산맥으로 돌렸다. 아즈윈과 게랄드가 실종되었고, 로일과 던멜은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괴물들과 싸우게 되었다. 이 모든 사건은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중심에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검은 기사였다. 카모르트의 열두 기사와는 다르지만, 루티아에도 검은 기사가 있었다. 이 곳에서 그 자는 카구아라 불리고 있었다. '대체 왜 나는 그 두 가지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모즈들은 자리를 피해주었고, 뒤에서 그 틈으로 검은 털의 베논을 탄 카구아가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카구아는 다리 쪽으로 꽤 가까이 접근한 후 기다렸다. 인질 중 키가 큰 남자는 그래도 바닥에 발이 닿아 십자가에 매달린 몸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 하는 키 작은 여자들은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워 실신하거나 비명을 질렀다. 던멜은 그 비명을 마음속으로 듣고 있었다. '난 차라리 선생님이 죽어있길 바래요!' 시저의 바람은 어긋났다. 플로라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강 건너를 주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손아귀에 있던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내려다보니 쥐고 있던 목책의 한 부분을 부숴버린 걸 알았다. 다리를 건넌 자리에 로일과 던멜, 그리고 마스터 루더가 섰다. 그들과 카구아는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로브 안쪽에 반짝이는 금속의 모양을 보고, 던멜은 그가 투구를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안 쪽에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와 같은 모양의 갑옷이 있다 해도 던멜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모양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투구 때문에 입 모양을 볼 수 없어 로일에게 물었다. '지금 저 자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있는가?' "아무 말도 안 한다 계속 보고만 있는걸." "내가 말해 보했네." 루더는 두 사람 앞에 나섰다. 로일이 던멜에게 입만 움직여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가르쳐주었다. "원하는 게 뭔가, 카구아?" 루더의 질문에 카구아가 대답했다. 로일은 그 목소리가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카구아가 아니다." "하긴 그 이름은 우리가 붙인 거지. 그럼 이제 스스로 그 정체를 밝혀보지 않을 텐가?" "루티아의 멸망을 바라는 자다." 로일은 덧붙여 설명했다. "저 자식, 우릴 비웃고 있어." 루더가 다시 물었다 "루티아의 아이들을 저렇게 묶어놓은 건 무슨 연유에서인가? 협상을 원하나?" "협상?" 고개를 젖히는 로브의 움직임에 설명이 없어도 던멜은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낮에 보았어도 그자의 모습은 유령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차라리 냉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던멜은 대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시야가 넓어졌다. 모즈들은 단순히 위협용으로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녀석들은 혹시라도 이 쪽에서 공격을 가해올 것을 고려해 인질 가까이 붙어 있었다. 화살을 쏠 수도, 마법을 쓸 수도 없었다. “그 쪽에는 제대로 된 계략가도, 장수도 없는가? 우리가 협상의 카드를 제시할 필요도 없이 여길 박살낼 수 있다는 것 정도를 알만한 인재가 그 쪽에는 아무도 없나?" "그럼 인질을 왜?" "인질? 이게 어디 인질로 보이나? 나는 네가 루티아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이 녀석들을.......” 로일은 그 말을 완전히 전달하지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던멜은 그 뒷말이 뭔지 몰라 로일의 입과 카구아 ? 스스로 밝힌 게 맞다면 이제 카구아라고 부를 수 없겠지만 ? 를 번갈아 보았다. 로일은 분노로 떠는 입술로 겨우 카구아의 말을 옮겼다. "...처형하려고 데리고 온 거다." 그 후 로일은 루더와 검은 기사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전달하지 못 했다. 그러나 상황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루더는, 인질들을 해치면 이 쪽에서도 공격하겠다고 말했을 것이고, 검은 기사는 해볼 테면 해보라고 했을 것이다. 공격해봤자, 인질들은 구할 수 없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오는 순간, 다운서치에서 대기하고 있는 괴물들이 몰려올 것이다. 마법이 통한다 하더라도 이래서는 싸울 수가 없었다. 이성을 잃고 다리를 건너오는 건 저 쪽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처형은 왼쪽 첫 번째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 인질의 배에 칼을 대고 있던 모즈는 갑자기 그 칼을 떼더니 세워놓은 십자가를 앞으로 밀었다. 양팔을 십자가 좌우에 묶인 남자는 그대로 밀려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루더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던멜은 그 후에 모즈가 통나무를 밟고서 확인 차 죽은 남자의 등에 칼을 찔러 넣는 것까지 보았다. "이걸 원한 거였나?" 로일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던멜도 냉정함을 잃어 그게 루더의 말을 전달한 건지, 자기가 직접 말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 그는 플로라가 왼쪽으로부터 여섯 번째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모즈들은 통나무를 고정시켜 세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실수로 넘어져 인질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힌다 해도 별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검은 기사의 말대로 이것은 처형이었다. 그리고 도발이었다. 이 쪽에서 구하러 가든 말든 인질은 모두 죽는다. 그런 상황을 연출하여 이쪽 사기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려는 속셈이었다. 이번에는 또 왼쪽에서 두 번째 통나무를 밀었다. 루더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넘어지는 통나무가 공중에서 멈칫하며 천천히 밑으로 떨어줬다. 루더는 필사적으로 나무가 넘어지는 방향을 뒤틀었다. "멈춰라!" 루더가 소리쳤다. 보고만 있기가 힘들었다. 인질을 잃더라도 나가싸워, 최소한 후회 없이 플로라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모즈들 틈에서 원래 없어야 할 것을 발견한 순간, 던멜은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로일에게 수화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로일이 먼저 말했다. "저 자식, 방금 저대로 인질들 죽는 걸 지켜보라고 말했다. 마법도 통하니 어디 한 번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있는 모즈들을 다 마법으로 불태운다 해도 뒤에는 그 열 배의 병력이 있댄다. 그리고 저녁에 모즈들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는 시점이 찾아오면 그때 다시 공격해 온다고 말하고 있다. 던멜, 날 잡지 마라. 저 자식 먼저 죽여 버리겠다. 어차피 인질들이 다 죽을 거라면, 이대로 멍청히 보진 있지 않는다!" '로일, 침착해라.' "뭘 침착해!" 그 순간 왼쪽에서 세 번째 통나무 하나가 쓰러졌다. 힘을 회복하지 못한 루더는 그것을 막지 못 했다. 거기에 매달린 사람은 자경단의 청년이었다. 나이는 스물세 살이고, 열일곱 살의 빨간 머리 여동생이 있으며 부보님과 함께 아웃서치에서 밭을 갈던 평범한 농부의 자식이었다. 던멜은 수화로 말했다. '침착해라, 던멜.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면 내 수화를 봐!' 로일은 멈칫했다. 다시 왼쪽에서 네 번째 나무가 넘어지니 루더는 다시 지팡이를 내밀어 통나무를 막았다. 그 지팡이 끝에 검은 기사가 서자, 보이지 않는 실에 걸린 듯 허공에 머물렀던 통나무는 도로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기사의 창끝이 루더를 향했다. 정확히는 루더의 어깨였다. 루더는 거의 본능적으로 얼마 전에 찔린 부분을 감싸 쥐었다. 부러진 통나무에 올라탄 모즈가 칼을 내리찍었다. 거기에 매달려 있던 여자는 케인스윅의 선생이었고, 올해 서른에 남편이 재작년에 병으로 죽은 후 혼자서 꿋꿋하게 살림을 이끌어 오던 존경 받는 마법사였다. 그러나 모즈의 칼날 아래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던멜은 수화를 빨리 했다. ‘모즈들을 누군가 공격할 것이다. 그때 너는 검은 기사를 공격해라. 나는 사람들을 구하겠다. 루더에게 이 말을 전해라. 무조건 사람들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로일은 즉시 루더의 귀에 대고 그 말을 전했다. 카구아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울부짖듯 소리치던 루더가 동그란 눈이 되었다.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 때 플로라의 오른쪽 십자가를 지키던 모즈들 머리 네 개가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한 자루 창이 날아와 베논의 엉덩이에 박혔다. 베논이 크게 몸을 일으켰고, 검은 기사는 그 위에서 떨어졌다. 그것이 모두에게 신호가 되어주었다. 로일과 던멜이 동시에 검은 기사를 향해 달려 나갔다. 분명히 쓰러졌다고 생각한 검은 기사는 쓰러진 베논 옆에서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벌떡 일어났다. 처음부터 그 자 외에는 시야에도 없었던 로일이 달려가 칼을 내리쳤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충격이 옆을 지나쳐서 달려가는 던멜의 피부에까지 느껴졌다. 모즈들 틈에 모즈가 아닌 자가 끼어 있었다. 어찌나 기가 막히게 기척을 숨기고 있었던지 던멜 조차 그걸 알아채는 데 시간이 걸렸을 정도였다. 그 남자는 놀라 달려드는 좌우 모즈들의 공격을 단번에 제압하고, 통나무를 밀려고 하는 모즈의 팔을 잘라냈다. 그러나 그 끈질긴 모즈 놈은 뒤로 넘어지면서 기어이 발로 통나무를 걷어찼다. 그것은 플로라의 것이었다. 플로라의 얼굴이 바닥을 향한 채 십자가가 밑으로 뚝 떨어졌다. 던멜은 달려가 떨어지는 통나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허공을 가르며 한 자루 창이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막았으나, 그의 몸이 뒤로 밀려났고 플로라의 십자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창을 던진 건 다운서치에서 다가온 또 다른 검은 기사 중 하나였다. 던멜은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이 계기를 마련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은 검은 기사가 집어던진 창을 피하더니 겁도 없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던멜은 그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호기심도 없이 바닥에 떨어진 십자가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한자 정도 높이에 떠 있었다. 던멜은 다가가 나무를 잡았다. 플로라를 묶은 밧줄은 스스로 풀어졌고, 그녀는 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루더가?' 다른 모즈들도 동시에 십자가를 걷어찼다. 인질들은 지금까지 처형된 사람들처럼 밑으로 떨어졌다. 필립과 루더가 필사적으로 넘어지는 십자가를 마법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서인지 불안정하게 고정되었다. 로일은 검은 기사와 싸우고 있었고, 던멜이 달려들 찬스를 만들어준 그 청년은 검은 기사 쪽으로 걸어가며 그 사이에 있는 모즈들을 무수히 찌르고 베었다. 다운서치의 모즈들이 그 청년을 목표로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던멜의 감각 안에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그려졌다. 그러나 던멜은 그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눈앞의 플로라에게서 보고 있었다. 갑자기 지도 안에 보였던 다운서치의 가장 밝았던 점을 떠올렸다. 모즈들은 십자가를 넘어뜨려 처형하는 걸 포기하고, 칼로 찌르려 했다. 플로라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던멜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옅게 번졌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가만히 손짓을 했다. 오른쪽 라인에 있는 모즈들의 무기가 모조리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왼손을 들었다. 왼쪽 라인에 있는 모즈들의 무기가 혼자서 날아가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졌다. 그녀는 던멜이 내민 손에 의지해 일어나더니 양손을 뿌렸다. 십자가에 묶여있던 인질들의 밧줄이 모조리 끊어졌다. 당황한 모즈들이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해 허둥댔다. 그 때 두 검은 로브 입은 기사와 다운서치에서 몰려오는 모즈들의 무리 앞에 두 길 높이의 불길이 치솟았다. 남쪽에서 시작된 불의 벽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북쪽으로 질주했다. 성급하게 불로 뛰어든 모즈들이 그 자리에서 증발되어버렸다. 동시에 많은 것이 일어났다 검은 기사 둘을 상대로 하려고 다가갔던 그 남자는 마치 싸움에 방해라도 받은 것처럼 멈춰서 불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던멜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 화풀이라도 하듯 모즈들을 공격해 밧줄에서 풀린 인질들을 구했다. 놀랍게도 로일은 아직도 검은 기사와 싸우고 있었다. 아니, 언뜻 보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밀리고 있었다. 필립과 루더가 병사들을 이끌고 다리를 넘어오고 있었다. 모즈들은 맨손으로라도 밧줄에 풀려 나온 인질들을 죽이려 했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칼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저 혼자 움직여 모즈를 베었다. 처음에는 느렸지만 점점 가속이 붙어 나중에는 허리 위에 있는 사물을 모조리 베고 지나갔다. 다섯 자루, 열 자루, 스무 자루...... 점점 날아다니는 칼의 수가 늘었다. 던멜 조차 밑으로 몸을 숙여야 했다. 그것은 칼의 폭풍이었다. 공중에서 소용돌이치는 칼날의 소용돌이가 아직 세워져 있는 십자가를 베다 못해 부숴버렸다. 회전하는 칼들의 공격 범위가 점점 늘어나자, 격렬히 싸우던 로일과 검은 기사도 뒤로 물러났다. 검은 기사는 날아오는 칼을 몇 개 쳐서 부러뜨렸지만, 수십 개가 넘는 칼날을 버터지 못 하고 창에 맞아 뒤뚱거리는 베논을 몰아 물러났다. 로일도 다리 쪽으로 후퇴했다. 달려오던 루더와 필립, 그리고 자경단의 병사들은 움직이지 못 했다. 칼날에 묻은 모즈의 핏방울들이 서로 부딪혀 깨졌다. 이제 허공에는 피 섞은 폭풍이 만들어낸 붉은 안개가 드리워졌다. 그 안에서 홀로 몸을 세우고 서 있는 건 플로라 한 명 뿐이었다. 그녀의 몸 주위로 흐르는 뜨거운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힘을 잃은 칼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모즈들은 물론이고 인질들조차 바닥에 엎드린 채 꼼작도 못하고 있었다. 던멜도 폭풍이 끝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플로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던멜에게 배운 수화로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던멜의 품에 그대로 쓰러졌다. 근처에서 엎드려 몸을 사린 모즈 한 마리가 발톱을 세우고 느닷없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던멜이 베기 전에 또 다른 칼이 모즈의 목을 날려버렸다. 싸움의 발단을 제공한 남자였다. "내가 만나는 여자 마법사들만 이런 거야, 아니면 여자 마법사란 건 다 이런 거야?" 그 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불의 벽은 아직도 살아서 모즈들의 진로를 막고 있었고, 필립과 루더가 이끄는 병사들은 칼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은 모즈들을 공격해 인질들을 구해냈다. 그 남자도 그 싸움에 합류해 혼자서 모즈 수십을 베었다. 불의 벽이 꺼졌다. 그 뒤에 있던 모즈들과 검은 기사들은 이미 후퇴하고 없었다. 라르비튼의 다리를 넘어오니 마스터 데다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몹시 지친 얼굴로 말했다. "늦었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세 명이나 죽을 이유가 없었는데.......” 그는 던멜이 안아들고 있는 플로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손수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그는 말을 이었다. "수고했다, 플로라," 불의 벽은 데다인이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어조를 통해, 혹시나 했던 칼날의 춤이 누구의 힘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나 도착할 줄 알았네. 다행이야." 루더는 지친 얼굴로 그를 살짝 포옹했다. "그리고 그 위치에서의 기습이 제일 유효적절했네. 그걸 빨리 알아챈 던멜도 그렇고....... 운이 좋았어." 그 역시 따뜻한 눈길로 기절한 플로라를 내려다보았다. 잡혀있던 사람들은 급히 하이디를 중심으로 한 마법사들이 막사로 옮겨가 치료했다. 모두의 얼굴에 의욕이 넘쳤다. 검은 기사가 이번 처형으로 뭘 노렸는지 자세히 모르나, 이런 결과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잘 맞아 들어갔던 검은 기사의 치밀한 예측은 플로라라는 요소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 로일도 돌아오고, 필립도 돌아와 데다인과 포옹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사나운 눈매를 하고 지저분한 옷차림에 헐거운 배낭을 멨으며, 몇 년 동안이나 썼는지 알 수 없는 낡은 망토를 입고 있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약간 붉은 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에는 모즈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데다인이 그를 소개했다. "아란티아에서 데려온 원군일세. 처음에 그가 제대로 기습을 시작해주지 않았다면, 싸움이 시작되기도 힘들었지. 싸움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인질들 전부를 잃었을 테니까. 나는 처음부터 그에게 카구아를 공격해달라고 요구했거든." '그렇군. 이름을 듣고 싶네, 기사 울프?" 필립이 악수를 청하며 묻자, 그 청년은 손만 탁 쳐주며 시큰둥한 눈으로 말했다. "아란티아에서 온 원군은 맞지만, 울프는 아니다." 필립이 로일의 눈치를 살피니 로일도 동의했다. "저 자의 말대로 울프의 기사는 아니오. 넌 누구냐?" 그는 삐딱하니 허리에 손을 얹고 대꾸했다. "제이메르다." (12) 아란티아에서 온 원군 플로라는 잠들었고, 시저는 던멜에게 사과했으며, 루더는 이후의 작전에 골머리를 앓았다. 병사들은 처음 있은 전투에서의 승리로 약간 들떠 있었으나, 앞으로가 문제였다. 시저와 함께 플로라를 간호하다가 라르비튼의 다리로 다가온 던멜을 보고 루더가 손짓해 불렀다. "데다인이 데려온 그 제이메르라는 청년에 대해서 모른다던데, 정말인가?" 그가 갑자기 물었다. 밤이었지만, 탑 위에서 떨어지는 화이트비의 빛으로 주위는 이른 새벽만큼 밝았다. 그러고 보니 계속 플로라에게 신경 쓰느라 반나절이 지나도록, 그 남자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제이메르. 원래 왔어야 할 쉐이든 대신 온 아란티아의 원군. “캡틴 울프가 직접 그를 데려오겠다고 지목 했다지 뭔가? 아란티아의 여왕은 그 이상의 지원군을 거부했다지." 또 한 차례 사고가 있었다. 이 곳을 향하던 카셀은, 때마침 아란티아에 있었던 마스터 타냐와 함께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은 후 사라졌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데다인은 말했지만, 아무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캡틴 울프의 실종 사고 말일세. 처음 하얀 늑대들을 데려올 때도 그렇고 아무래도 데다인의 움직임이 적에게 노출되어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루더는 신음했다. 던멜은 순간적으로 그 적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데다인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나 본인이 가장 의심 받을 위치에 있는 자가 굳이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겨우 플로라에 대한 걱정을 접었건만, 이제 거기에 카셀에 대한 문제가 끼어 들어왔다. 더구나 카셀은 아즈윈과 게랄드가 실종된 것과는 달리, 잃어버리면 걱정이 되는 친구였다. - 로일은? "아까 캡틴 울프의 실종 문제로 데다인에게 따지러 갔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제일 곤욕스러워 하고 있을 텐데....... 어?" 루더는 놀라며 손가락으로 다리 건너를 가리켰다. 제이메르가 다운서치 쪽에서 뭔가를 질질 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저스틴을 푸대에 담아서 걸어오는 모즈와 같은 폼이라, 던멜은 괜히 소름이 끼쳤다. 경계 서던 병사들도 놀라 목책 가까이 붙었다. 그가 잡아온 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즈였다. 목덜미의 털만 붙잡고 오는 꼴이 방금 먹이감을 구해온 사냥꾼 같아 보였다. "원래는 쉐이든 울프라는 기사가 왔어야 했다지?" - 그렇소. "자네가 없을 때 우리에게 설명하길, 원래 왔어야 할 쉐이든 울프는 10년 전투에 죽은 캡틴 웰치와 싸우다 부상당했다고 하더군. 어제 새벽에 벌어진 화이트 게이트 전투에서 그 싸움이 있었는데, 글쎄 그 울프 기사단의 상대가 또 죽음에서 살아난 익셀런 기사단이라더군. 데다인도 그 싸움의 일부를 목격했다니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다리를 건너올 쯤에 제이메르가 끌고 온 모즈가 깨어나 저항했다. 그러자 제이메르는 모즈의 머리를 걷어차고 주먹으로 한 대 후려쳐 기절시키더니 다시 끌고 왔다. 루더는 그 황당한 광경을 보면서 덧붙여 말했다. "또 데다인이 말하길, 하늘 산맥에서 저렇게 빨리 걷는 사람은 처음이라더군. 캡틴 울프를 잃어버린 후 급한 마음에 전력을 다해 걸었는데, 하늘 산맥의 마력에 영향을 받는 일반인 주제에 자기와 동일한 속도로 걸었다더군, 대체 정체가 뭔가? 정작 본인은 그것에 대해 말도 잘 안 해서, 원." 제이메르는 허리에 긴 칼을 한 자루, 등에도 한 자루, 또 단검까지 한 자루 차고 있었다. 이런 차림으로 모즈들과의 싸움에서 그런 격렬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녀석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제이메르는 다리를 다 건너와 루더와 던멜 앞에 모즈를 던져놓았다. "이 괴물 녀석들 낮에 보니까 서로 의사소통도 잘 했다. 물어봐. 여길 어떻게 할 건지, 그 검은 망토 뒤집어 쓴 기사 놈들이 누군지." 루더는 손을 내저었다. "우리가 이들의 언어를 어찌 아는가?" "그렇지만 이 자식들, 서로 대화를 나눴다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짐승들끼리의 대화를.......” "짐승들끼리의 대화가 아니라 그 검은 망토 뒤집어 쓴 녀석들 말이다!" 제이메르는 단호히 말했다. 루더는 얼떨떨해했다. "잠깐 모즈들과 카구아가?" "어느 쪽이 모즈고, 어느 쪽이 카구아야?" 제이메르는 꿈틀대는 모즈의 옆구리를 한 번 더 걷어찼다. 모즈는 몸을 움찔하더니 저항을 멈췄다. 녀석은 기절한 게 아니라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다. 루더는 할 말을 잃어버려 대답도 못 했다. 제이메르는 문득 던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네가 또 한 명의 하얀 늑대? 카셀에게 약간 들었다. 던멜이지? 듣지도 말하지도 못 하는?" 던멜은 바닥에 글씨를 써서 보여주었다. - 카셀은? "잃어버렸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군. 하지만 우릴 공격한 게 보통 괴물이 아니라서." - 괴물? "아, 이 괴물 말고." 제이메르는 모즈를 발로 톡톡 차보이더니 말했다. 엉뚱하게도 잡힌 모즈가 불쌍해 보였다. "엄청 커다란 놈이었다. 게다가 웬 마법사가 공격해 오기까지 했어. 솔직히 말해 나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카셀이 너희들을 굉장히 보고 싶어 했는데.......” 그도 씁쓸해하며 말했다. "뭐, 죽진 않았겠지. 아, 그리고 이건 르고가 전해달라는 선물이다. 아냐? 그 애늙은이 대장장이. 루티아에 너네 둘만 남았다고 하길래 다른 두 사람 것은 안 가져왔어. 도끼랑 방패라서....... 네 것도 활이 하나 더 있던데 번거로워서 내버려뒀다. 로일 것은 벌써 줬고." 그는 메고 있는 한 뼘 반 길이의 단검을 벨트 째 풀어 건네주었다. 뽑아보니 화이트비가 내는 마법의 빛을 반사하는 신비한 날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낼 것 같았고, 날과 칼등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웠다. 이건 굳이 누구 솜씨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 쉐이든이 캡틴 웰치와 싸웠다고? 던멜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다시 물었다. 제이메르는 던멜이 쓴 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명해야 해? 좋아. 짧고 간결하게 하자 검은 기사 놈이 카셀을 잡았다. 나는 마스터 아이린과 같이 있었는데, 아, 아이린 알지? 너네 선배. 그녀와 같이 가다가 카셀이 엉뚱한 놈에게 잡혀 있어서 내가 구해냈다. 그런데 그 놈은 사실 알고 보니 죽음에서 되살아난 캡틴 웰치였던 거다. 그 녀석은 자기 부하들까지 살려내서 화이트 게이트를 공격해 왔고, 쉐이든이 일 대 일로 싸워서 쓰러뜨렸다. 그리다가 어떤 빌어먹을 마법사가 공격했고, 여왕이 나타나니까 달아나버렸다. 그 사이 쉐이든이 다쳤고, 나는 그 녀석 대신 온 거다. 이제 알아듣겠지?" ......못 알아들었다. 던멜은 어떤 부분을 어떻게 물어봐야 저 혼자 말하다가 혀 꼬이는 이 친구를 진정시켜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을지 난감했다. "그보다, 기사 제이메르. 모즈들이 카구아와 대화를 나눴다는 게 사실인가?" 루더는 기다리다 못해 끼어들었다. "난 기사 아니야." "아무렴 어떤가? 사실인가?" "거짓말을 왜 해, 내가? 난 모르는 언어긴 했지만, 그건 분명 서로 알아듣는 언어였어." "그럴 리가 없네. 카구아는 유령이나 다름없는 별개의 존재고, 모즈는.......” 루더가 혼란스러워 하자, 던멜이 글씨를 썼다. - 카구아는 인간이오. 루더의 눈동자가 커졌다. 던멜은 가급적 짧은 문장으로 설명했다. - 비슷한 모습이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난 적이 있소. - 그래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소. - 이들은 인간이오. "느낌만으로 그런 걸 알 수는 없는 법일세. 에틀리의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존재들.......” 던멜은 탑의 9층 쪽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그 느낌을 새겨오느라 헷갈린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 필립 그 다음에는 탑의 17층을 가리켰다. - 데다인 그 다음에는 탑의 5층을 가리켰다. - 골베인 "골베인은 지금 연구실에 있을 데니 19층에 있네. 거기가 아니야." 던멜은 고개를 저었다. - 5층 "아, 오늘 케인스윅 선생들을 불러 회의를 한다고.......” 루더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러스킨의 위치는 항상 애매했다. 놀랍게도 그는 던멜의 감각으로도 찾기 힘들 만큼 자신을 숨기는 게 능했다. 심지어 같은 회의실안에 있어도 그의 느낌은 희미할 때가 많았다. 그런 그가 화이트비가 빛을 내는 탑의 꼭대기로 들어가면 느낌이 완전히 증발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새나디엘 여왕 외에 본 적이 없었다. 던멜은 설명을 마쳤다. - 카구아도 처음에는 애매했지만, 오늘 낮에 보고 확신했소. - 그들은 괴물도, 유령도, 우리가 모르는 하늘 산맥의 엘프도 아닌, - 인간이오. 루더는 신음하다가 손짓했다. "괴물들이 어떤 언어를 쓰는지는 모르나, 인간과 의사소통을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겠지. 한 번 조사해보도록 하겠네." 병사들은 기절해 있는 모즈를 몇 겹이나 되는 밧줄로 묶어 끌고 갔다.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있을 루티아노에서 얘기하세. 아마 루티아에서의 퇴각 문제를 매듭지을 것 같네. 그때 그 문제까지 상의하도록 하지." 루더는 머리를 짚고 다시 다리 앞으로 갔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고, 명확한 건 하나도 없었다. 상황은 점점 복잡해졌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야, 던멜." 제이메르가 그의 앞에 섰다. "여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설명을 들었어도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 확실히 해두자 넌 카셀 친구냐?" 던멜은 주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일 빨리 끝내고 카셀 찾으러 가자." 던멜은 그의 말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제이메르는 그의 반응을 보고 의아해했다. “로일도 그러던데, 왜 이 말 하면 니들 똑 같은 얼굴을 하고 그러냐?" 너무 복잡한 상황에 빠져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계속 루티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모즈들의 정체, 루티아의 배신자,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와 루티아의 검은 기사 간의 관계, 아즈윈과 게랄드의 실종.......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 시달리며 가장 명백히 머리 속에 새기고 있어야 할 문제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오히려 아직 이 곳의 위기를 실감하지 못 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가 가장 간단하게 문제를 풀어내기도 했다. 빨리 끝내고, 카셀 찾으러 가자.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던멜은 손을 내밀었다. 제이메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보다가 곧 악수를 나누었다. "근데 카셀 찾으러 가자는 게 이상한 말이냐? 로일 그 녀석은 이말 듣자마자 자러 가버리데?" 제이메르는 여전히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틀 후 해가 뜨는 것을 기점으로 하겠습니다." 제이메르의 등장은 다른 마스터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다리를 지키고 있는 중인 데다인을 제외한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루더는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모든 병력을 강 쪽에 집결시킨 후 공격을 시작....... 만약 그 시점부터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해도 기습을 한다면 어느 정도 영향은 줄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강을 건너 후퇴한 후 강물을 이용한 공격도 가할 수 있으니, 적어도 마을 사람들의 대규모 이동은 가능할 겁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일부분을 번갈아 가며 이동시키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신경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쓸 수도 없고 하니, 결국 한꺼번에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동 방향은?" 러스킨이 물었다. 그는 나날이 할쑥해져 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화이트비를 정상적으로 가동시키는 것만으로도 보통 마법사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힘이 소모된다. 최근에는 그 빛을 더욱 강화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케인스윅의 몇몇 학생들은 최근 괴물들에게 마법이 통하는 이유가, 마침내 러스킨의 힘이 모즈들에게 덮여있는 보호 마법을 벗겨냈기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강을 따라 리버 포레스트로. 일단 길은 확보해 두었습니다. 걸음이 느린 사람을 고려한다고는 하지만 3일간은 강행군을 해야 합니다. 목표는 아란티아의 나디움. 원군을 루티아로 보내는 건 힘들 테지만, 일단 우리가 그 쪽으로 향하면 새나디엘 여왕을 우릴 보호해 줄 것입니다." 골베인이 설명했다. "결국 루티아가 멸망하는군." 러스킨은 무덤덤한 척 말했다. 골베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잠시 비워두는 거라고 해두십시오. 괴물들이 이 곳을 지배해봤자, 루티아는 마법사들의 도시입니다. 조만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렴 그렇지. 우선 사람들의 생명이 우선일 데니." 말은 그렇게 했어도 러스킨의 얼굴에 새겨진 서글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참, 그리고 제이메르의 제안에 따라 모즈를 심문해 봤습니다. 아크랜드 고유어는 물론이고 각 나라 고유의 언어와 사투리까지 포함하여 열두 개의 언어로 말을 걸어봤습니다만,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엘프들이 쓰는 고대어로 말을 걸었더니......, 몇 마디 했습니다." 골베인이 말했다. "고대어?" 루더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물었다. "녀석은 제가 묻는 몇 가지 질문에 단편적인 대답을 하다가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회피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목적으로 루티아를 공격하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더군요. 녀석은, '여길 먼저'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여길 먼저 치고, 그 다음에는 다른 곳을 치겠다는 뜻인가 봅니다." "이 근처의 도시라면, 엘프들의 도시 두 군데와 아란티아의 나디움이겠군." "확실히 이 병력이라면 엘프들의 도시도 부술 수 있겠군. 최근 엘프들과 연락이 잘 안 되는 이유도 모즈들에게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도 되겠어." 마스터들끼리의 대화에 던멜이 끼어들었다. 로일이 그의 뜻을 대신 전달했다. “엘프들과 연관 되어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는 건?" 골베인은 허허 웃었다. '엘프들은 절대 외부의 일에 개입하지 않네. 특히 인간과는 말이야." '엘프고 뭐고....... 공격이 이틀 뒤라고?" 이런 자리가 불편하다며 끼지 않으려다 억지로 참가한 제이메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뭐가 잘못 되었나?" 골베인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내일 해!"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가? 거의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동일세." "내일도 늦어. 카셀은 언제 찾으러 가라고?" 제이메르의 입장에서는 그런 안건을 내놓는 게 당연했지만, 마법사들에게는 조금 엉뚱한 의견이었다. "자네는 국가간 동맹에 의해 여기 있는 걸세. 캡틴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동맹의 의지를 이런 식으로 더럽히지 말게." 루더가 엄히 말했다. "웃기지 마! 카셀이 부탁해서 와준 거지, 동맹이 뭔지 알게 뭐야?" 제이메르는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다들 황당한 얼굴이었다. 로일이 입을 열었다. 수습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저 녀석은 울프 기사단도 뭣도 아니니 나도 할 말은 없지만, 틀린 건 아니오. 작전 시기까지는 돕겠소. 루티아를 벗어나면 당신들의 마법도 통할 데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마법이 안 통하는 카구아 셋은 나와 던멜이 알아서 처리하리다. 그 후에는 친구들을 찾으러 떠나겠소." "천 명을 버리고 한 명을 구하러 가겠다고?" 필립이 화를 냈다. "천 명은 당신들의 책임이오. 그리고 한 명은 우리들의 책임이오. 아, 셋이구나." 로일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란티아의 대표자가 이런 식으로 우렬 농락하려는 건가?" 필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던멜이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던멜은 일부러 천천히 종이 위에 자신의 뜻을 적으면서 두 사람이 열을 식히길 기다렸다. - 캡틴를 보호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고, 동맹을 소중히 하는 것도 우리 임무요. 로일은 그 두 가지 모두 소중히 하겠는 뜻이었소. 우린 작전 시까지 최대한 협조하겠소. 당신들 마법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카구아도 어떻게든 해보겠소. 루티아 주민들이 안전을 확보했다고 판단되면 우린 카셀을 찾으러 가겠소. 던멜의 글을 보며, 마스터들도 더 할 말은 없었다. 러스킨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되면 하늘 산맥의 통행증이 필요하겠지. 숲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나디우렌의 증표일세. 나중에 받으러 오게." 던델은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스터들도 이 일로 더 이상 따지지 말게. 아란티아의 여왕이 원군으로 울프 기사단이 아니라 하얀 늑대들만 보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따지는 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지킨 후에 해야 할 일이다." 마법사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예, 마스터." "몸은 괜찮아?" 늦은 아침을 같이 먹으며 로일이 물었다. '모즈의 독에 관해 묻는 거라면 너무 늦었어.' "미안해." 로일은 웃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군." '뭐가?' "폐하 말이야. 정말 루티아의 이런 위기를 모르시는 걸까? 정말 우리들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우리만 보내신 걸까?" '그 분의 뜻을 미리 예측하지 마라.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만 해결하면 돼.' "해결이 안 되니까 하는 말이지." 두 사람의 탁자 옆에 제이메르가 신경질적으로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앉아서 먹었다. 빵을 뜯어먹으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니들의 이빨이란 게 뭐냐?" 로일은 빵을 먹던 입을 약간 벌려 앞니를 건드렸다. "이거?" "아니! 이 자식, 놀리냐?" "뭔 이빨? 자세히 설명 안 하면 모르지." 로일은 딱딱하게 말했다. "하얀 늑대의 이빨 말이다. 그거 보고 산 사람 없다며?" 그 말 듣고 실실 웃는 로일의 모습에 제이메르는 벌컥 화를 냈다. "뭐가 우스워?" "네 무기는 뭐냐?" 로일은 반문했다. “칼이다 " “내 이빨도 칼이다. 그게 다다." “그게 뭔 소리야?" 로일은 빵을 우물거리며 가느다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쉐이든을 대신해서 왔나? 카셀이 지목했다면 어느 정도 실력은 갖추고 있겠지. 그럼 실력을 보이는 건 입이 아니라, 칼로 해라." “......해 보자는 거냐?" 제이메르는 정말 살기를 보였다. 로일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기 싸움이 한심스러워 던멜이 포크를 탁자 위에 내리찍었다. 그 소리가 컸는지 옆에서 식기 나르던 아주머니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다시 먹는 데 집중하다가 제이메르가 먼저 말했다. “너도 한 걸음 안쪽짜리였냐?" “건 또 뭔 소리야?" “너도 설명 안 했으니, 나도 안 해!" 제이메르는 빵을 입에 우겨 넣더니 일어나 가버렸다. 로일은 불만스럽게 던멜에게 말했다. “카셀이 저 녀석을 지목해서 데려와? 저 녀석이 카셀을 협박해서 그리 된 게 아닐까?" ‘카셀을 몰라서 하는 소리냐? 그 반대겠지.' 로일은 포크를 입에 물고 픽 웃었다. (13) 화이트비(Whitebee) 그날 밤은 데다인이 다리를 지켰다. 모즈들의 움직임은 분주했다. 그가 오후에 보여준 에틀리의 지도에 따르면, 모즈들은 다운서치 뿐 아니 라 아웃서치까지 넓게 퍼져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데다인도 이틀 후 아침이면 너무 늦는 게 아닌지 걱정했다. 제이메르가 볼쑥 찾아와 두 사람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다리 건너를 쳐다보았다. 데다인이 말했다. "듣자니 루티아노에서 혼자 쳐들어갈 것처럼 소란을 피웠다더니 안 쳐들어갔나?" 제이메르는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혼자서는 무리였어." 그게 당연하다는 걸 따로 알려줬어야 했나? 던멜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재미있어 했다. 그러다 다짜고짜 제이메르는 데다인을 향해 말했다. "당신, 배신자냐?" 던멜은 이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곤욕스러웠다. 하지만 항상 굳은 얼굴을 한 데다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는 건 유쾌했다. "배신자? 누가? 내가?" "몇몇 사람들이 그러더라. 당신을 배신자라고 지목한 모임도 있던데?" 베드포드는 어느 새 제이메르까지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데다인은 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루티아의 마스터 중에 배신자가 하나 있다고 하던데, 그게 나였나? 내가 저 이천 마리 넘는 괴물들을 보호하는 마법을 썼다고?" 데다인은 목책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이보게, 던멜 울프. 자네도 그런 소리 들었나? 내가 배신자리고?" 던멜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메르, 가서 그 모임에 대해 이런 말을 해주게. 그 정도 마법을 쓰려면, 적어도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 정도는 되어야 하니 차라리 배신자를 그로 지목하라고." "회의실에 앉아있던 그 하얀 수염의 늙은이 말이냐? 하지만 카셀이 실종될 당시에도, 또 먼젓번 하얀 늑대들 두 명 잃어버릴 때도 당신은 현장에 있었잖아. 그 검은 로브 입은 마법사가 사실은 당신 아니야? 타냐도 그 점은 녀석이 자기와 같은 종류의 마법을 썼다고 말했다. 그럼 당연히 루티아의 마법사잖아. 게다가 그 싸움이 있었을 때, 당신은 자리에도 없었어!" "추리가 미숙하군, 제이메르. 만약 내가 배신자라면 그런 문제는 내게 말해선 안 돼. 자네는 추리의 시작부터 실수했다. 자, 나를 배신자로 지목한 모임과 자네를 위해 내가 차근차근 짚어주겠네. 우선 내가 루티아를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을 암살하고 그가 지키는 화이트비를 부셔버렸을 걸세. 뭣 하러 힘들게 모즈들을 지휘하고 마법으로 그 놈들을 보호하고, 배신자가 아닌 척 아란티아로 원군을 구하러 떠나고 또 하얀 늑대들을 하늘 산맥에 실종시키겠나?" 데다인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루티아의 마스터가 루티아를 배신할 이유는 없다. 던멜, 하얀 늑대들 중에 아란티아를 배신할 사람이 있나? 그리고 만약에 정말 만약에 자네가 아란티아를 배신하고 아란티아를 멸망시키려면 어떻게 하겠나? 괴물들을 외부에서 끌어들여 각 게이트를 차례로 부수면서 공격해오겠나? 아니지! 자네 같은 지위를 가진 자라면 몰래 여왕에게 접근해서 목에 단검 하나 꽂으면 끝이야. 아란티아는 여왕 새나디엘의 나라이고, 그녀가 없으면 그건 더 이상 아란티아가 아니야. 마찬가지다. 화이트비가 없으면 그건 루티아가 아니다. 모즈들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멍청한 짓은 안 해. 알아들었나?" "못 알아들었다! 그럼 뭐야? 누가 저 괴물들을 데리고 오는 건데?" “그런 귀찮은 짓을 하면서까지 루티아를 공격하는 자? 당연히 외부의 적이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제이메르가 묻자, 과격한 반응을 보인 건 던멜이었다. 그는 다급히 바닥에 글씨를 써서 물었다. 하지만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아 목책 위에 단검으로 다시 새겼다. - 어떻게 그를 아는가? "말했잖아.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여왕을 공격했다고." 던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모르트에서 벌어진 일이 이어지고 있는 건 루티아가 아니라 아란티아였다. 던멜의 표정을 보고 제이메르는 손을 저었다. "걱정 마라. 그 일은 카셀이 알아서 해결했다. 사실 카셀이 왔으면 그 일을 모두 명확하게 설명해줬을 텐데, 난 사건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정확히 몰라 설명 못해. 울프 기사단에 섞여 칼 휘두른 게 다라.......” 제이메르는 잠시 자기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까먹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배신자는 없다는 건가?" "누가 그런 말을 퍼트리고 다니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다시 그를 만나거든 내 말을 그대로 전해라. 그런 말을 퍼트리는 자가 오히려 루티아가 가진 내부의 적이라고!" 데다인의 머리카락은 바람도 없는데 좌우로 흔들렸다. 깜짝 놀란 제이메르가 뒤로 물러날 정도로 마법사의 살기는 강했다. 데다인은 다시 다리 건너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는 던멜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게 입 모양 만으로 말하고 있었다. '너희들의 캡틴이 여길 오면......, 그 어려 보이는 청년이 여길 왔다면 정말 로일이 말한 대로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새나디엘 여왕마저 그 비슷한 말을 했다.' 던멜은 두 번 생각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다인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루티아의 배신자는 정말 나인지도 모르겠군. 이 곳에 데려오면 큰 힘이 될 사람을 벌써 네 사람 째 잃어버린 셈이 되니.......’ '넷?' 던멜은 손가락을 넷 펼쳤다. '아즈윈, 게랄드, 캡틴 울프, 그리고 마스터 타냐. 그녀는 내가 살아온 세월의 반밖에 살지 않은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숨기고 있는 힘을 끄집어내면 나보다 두 배는 더 강한 마법사다. 또 마스터 데일프의 수제자이기도 하지. 이 네 사람이 왔다면 루터아를 지켰을지도 몰라.' 던멜을 아무 위로도 하지 않았다 이 사태의 가장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제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그였다. 그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적은 내부에 있다고 던멜은 확신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고, 던멜이 있는 곳은 탑의 바깥쪽 벽이었다. 케인스윅의 첨탑이 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15층 높이까지 올라오자, 바람이 굉장히 셌다. 그곳은 마스터 루더의 방 밖이었다. 그는 자고 있었다. 던멜은 창문에 붙어 그의 방 안을 살폈다. 루티아의 지도와 하늘 산맥의 지도가 벽에 붙어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약병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침실에 둘 정도의 약품이라면 그다지 위험한 종류는 아닌 것 같았다. 병에 붙은 라벨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온갖 종류의 역사서와 함께 책장한 족 끝에는 낡은 칼이 두어 자루 꽂혀 있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는 다시 탑을 올라 이번에는 골베인의 방 창문에 기대었다. 피부 검은 늙은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문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케인스윅의 여선생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차를 한 잔 앞에 두고 차분히 대화를 나누었다. 입 모양을 보니 고대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부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모즈의 언어를 분석하는 건가?' 던멜은 더 위로 올라가 데다인의 방에 도달했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안에 들어가 보았다. 에틀리의 이름이 달린 온갖 물건들이 너른 탁자 위에 잔뜩 펼쳐져 있었다. 찢어진 지도가 방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오래 청소를 안 했는지 구석진 곳에는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던멜은 찢어진 지도 몇 장을 들어보았다. 루티아의 집 한 채까지 자세히 묘사된 지도였다. 아마 실시간으로 모즈들의 움직임을 감지해내는 에틀리의 지도를 만들다 실패한 작품들인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실패했다면 지도를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을 들였는지 짐작이 갔다. 만약 베드포드가 말했던 대로 그가 배신자라면, 그는 루티아를 멸망시키기 전에 먼저 과로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도 역시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책장 한 쪽 구석에는 대여섯 개의 수정 구슬이 있었다. 오래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고 그나마 하나는 금이 가 있었다. 괜히 건드려 들어왔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내버려두었다. 필립의 방도 바닥을 밟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우선 아무도 없어 안으로 들어와서 살폈다. 그도 수정 구슬은 두 개 가지고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박자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그걸 어떤 용도로 쓰는지 알 수 없었고, 특히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점쟁이들이 점 볼 때 수정 구슬을 쓴다는 말은 들었지만, 루티아의 마스터가 마녀처럼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수정 구슬을 만지고 있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밖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던멜은 소리 없이 창문 밖으로 빠져 나가 벽에 붙었다. 두 사람의 기척이 방으로 들어왔다. 던멜은 그 방의 다른 쪽에 나 있는 더 작은 창문으로 눈을 들이댔다. 필립과 케인스윅의 여선생이었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던멜을 치료한, 야전 병원의 의사 하이디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던멜은 다친 팔을 괜히 휘둘러보고 관자놀이도 살짝 눌러보았다. 나은 줄도 모르게 그의 몸은 회복되어 있었다. “제안하오, 하이디. 지금쯤이면 모두에게 약혼을 발표하고 결혼식을 준비할 시기 인데." 필립이 말했다. 하이디는 던멜 쪽에서 등을 돌리고 있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맙소. 이 일이 끝난 후라도 우리는 늦는 게 아닐 거요." 필립은 미소 지으며 하이디를 껴안았다. 던멜은 조심스럽게 창가에서 떨어져 탑을 올라왔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오니 다운서치는 물론이고 아웃서치의 외곽 숲도 보였다. 모즈들이 켜 둔 횃불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화이트비의 조명과 그들이 스스로 켜 둔 조명이 있었음에도 그들이 뭘 하는 건지 알아보기에는 너무 멀었다. 던멜은 마지막으로 가장 꼭대기에 있는 화이트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정상에 등대처럼 빛을 내는 보석은 언뜻 탑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투명한 유리로 보호되어 있었다. 던멜은 살짝 유리를 두들겨보았다. 보통 유리와는 느낌이 달랐다. 아마 던멜이 전력을 다해 내리치더라도 부서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보호 장비 일 것이다. 보석은 사람 키만 한 크기였고 크게 보면 길죽한 팔면체의 형태였으나, 세부적으로 보면 다양한 각도로 깎여 있었다. 사람 한 명 겨우 서 있을 수 있는 좁은 복도가 화이트비즐 에워싸고 있었고, 그 복도의 중앙에 밑으로 연결된 나무 계단이 있었다. 하지만 러스킨은 보이지 않았다. 던멜은 한 층 더 아래 있는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러스킨의 기척은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방이라고 해도 다른 마스터들의 방과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안 좋은 기름을 등불로 쓰고 있는지 약간 매캐한 냄새가 남고, 거기에 고급스러운 향료 냄새, 마법사들의 방에서 나는 공통된 책 곰팡내가 섞여있었다. 벽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지팡이와 여러 가지 색깔의 로브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거의 대부분 하얀 색이었지만 게 중에는 하늘 빛깔이나 숲의 빛깔도 있었고, 검은 색 로브도 있었고, 회색 로브도 있었다. 아란티아의 여왕을 공격한 건 회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라고 했고, 카셀을 공격한 건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라고 했다. 그 두 마법사가 같은 인물인가? 잠시 제처 놓았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만약 배신자가 있다면 가장 마법이 뛰어난 러스킨이라고 말한 데다인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아란티아의 회색 마법사, 하늘 산맥 숲의 검은 마법사, 그러고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 마법사들에게 있어 로브의 색은 자신을 위장하는 보호색과도 같았다. 던멜의 경우에는 숲을 달리는 데다인의 로브 색이 나무라고 착각하기도 했으니, 제이메르 역시 밤에 공격한 마법사의 로브가 검은 색이라고 알아본 걸지도 몰랐다. 마법사에게 있어 로브의 색은 개인을 알아보는 특징이라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방 벽에는 루티아의 지도와 아란티아, 아크랜드 진체 지도가 걸려 있었다. 그가 다른 곳에서 봤던 아크랜드 지도에 비해 꽤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던멜은 잠시 지도를 살피다가 뒤에서 접근하는 인기척에 즉시 단검을 빼며 몸을 돌렸다. “그 행동은 침입자를 맞은 내 쪽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러스킨이었다. 그는 손에 든 차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온다면 미리 말하지 그랬나? 차를 한 잔만 준비했군." 이렇게 가까이 접근했는데도 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에 놀랐다.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새나디엘 여왕도 투명한 기척을 가졌지만, 이렇게 던멜을 놀라게 한 적은 없었다. "자네가 있는 것에 내가 놀라야 하는데, 어째서 내가 있는 것에 자네가 놀라는가?" 러스킨은 관절을 걱정하는 노인네처럼 천천히 다리를 굽혀 의자에 앉았다. 눈에는 잠이 한 가득 담겨 있었다. "우선 앉게. 자네와 대화를 나누려면 쓸 종이가 있어야 하니, 서로 앉는 게 편하겠군." 던멜은 저항할 수 없는 제안에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내민 깃털펜에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휘갈겼다. - 사과드리겠소. "이해하네. 루티아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문을 스스로 조사해 보고 싶었겠지? 다른 마스터들을 살피면서 상층까지 온 건가?" 괜한 추측으로 묻는 게 아닌, 확신이 담겨 있었다. 던멜은 이 통찰력 깊은 현자를 상대로 일찌감치 기 싸움하길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러스킨은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잠시 던멜을 바라보았다. "루티아의 역사에 대해 아나?" - 모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초대한 사람을 불러다 앉혀놓고 얘기하는 사람처럼 동요하는 빛 하나 없이 말을 꺼냈다. "루티아는 아란티아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네. 아크랜드의 역사로 치면 꽤 옛날이라 모르는 사람도 많은 그런 진설과도 같은 이야기네. 그 전설은 천년 전에 아크랜드에 있었던 커다란 전쟁에서 시작되지. 아란티아라는 나라가 처음 생긴 직후 터진 전쟁이라고 봐도 좋고, 그 전쟁 이후에 가넬로크라는 나라가 생겼다고 봐도 좋아. 어느 쪽으로 따져도 일반인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일 뿐이겠지만." 러스킨은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했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어둠의 힘이 아란티아를 공격했네. 그 어둠의 힘이 어떤 존재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네. 론타몬의 정복 전쟁을 역사상 가장 커다란 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의 전쟁이었겠지. 인간의 모든 마법사가 그 싸움에 동원되었고, 심지어 하늘 산맥의 드래곤까지 개입되었지. 10년 전 전쟁에서 네 마리의 드래곤이 죽었다고 온 대륙 사람들이 슬퍼했다지? 하지만 천년 전 전쟁에서 죽은 드래곤들의 수치를 입에 올린다면 누구든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할 걸세. 당시 가장 커다란 건축물 중 하나였던 옐로우 게이트가 드래곤의 피로 물들어 레드 게이트라고 이름이 바뀌었을 정도니까. 아, 내가 듣기로 그 때 가장 커다란 활약을 펼친 것도 울프 기사단이 아니었나 싶네." - 천년 전부터 울프 기사단이? "루티아의 마법사와 울프 기사단이 왜 동급의 개념인지 좀 이해가 되나?"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 워낙 외부에 부풀려져 있으니,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조직을 작게 생각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그런 곳의 가장 높은 직책 중 하나에 있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어깨를 눌렀다. 러스킨은 그런 고민을 이해하는 듯 웃어 보였다. "그 전투에서 승리한 마법사들에게 하늘 산맥의 지배자께서 이 땅을 내리고, 이 방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내렸지. 그게 바로 화이트비라는 보석일세. 라르비튼이 자신의 손자까지 대를 이어 완성한 이 탑의 꼭대기에 올려 건 루티아의 상징이지." -데다인에게 들었소. 화이트비가 없으면 그건 루티아가 아니라고. "정확하네. 루티아 안에 화이트비가 보관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이 곳에 화이트비가 있기 때문에 이 땅이 루티아가 된 거야. 뭐, 첫번째 그랜드 마스터의 이름이 루티아라서 도시의 이름이 그리 된 건 좀 별개의 문제지만." 러스킨은 흐뭇하게 웃었다. "아, 이 방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역대 그랜드 마스터들의 초상화를 모두 볼 수 있네. 마스터 루티아의 그림이라도 한 번 보겠나?" 던멜은 거절했다.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던멜은 이 방을 서둘러 나가고 싶었다. 그랜드 마스터의 배려가 오히려 던멜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어쩌면 이런 긴 이야기가 러스킨이 침입자에게 내리는 벌인지도 몰랐다. 러스킨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방도 사실은 마스터 테일드의 것이네. 나는 그의 자리를 임시로 맡고 있는 거야. 따라오겠나?" 둘은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계단이 아까 봤던 화이트비가 보관된 탑 꼭대기와 연결된 계단이었다. 던멜은 좁은 복도에 서서 손을 대면 만질 수도 있는 거리에 화이트비를 두고 섰다. 루티아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을 정도로 밝았으나 가까이 오자 눈부실 정도는 아니었다. 따뜻한 빛에 감싸인 러스킨은 이십 년은 젊어 보였다. "나는 루티아의 43대 그랜드마스터네. 그리고 테일드는 44대 그랜드마스터. 그리고 아직 45대는 뽑힌 게 아닐세. 나는 그의 빈 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것뿐이야. 데다인이나 골베인이 다음 그랜드마스터로 거론되고 있지만, 두 사람을 포함한 우리 모두 테일드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지." 러스킨은 화이트비에 손을 댔다. 보석의 표면에서 불꽃처럼 일어난 빛의 안개가 천천히, 그리고 희미하게 노인의 몸을 감쌌다가 도로 화이트비로 되돌아갔다. "그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해치우러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들과 론타몬으로 떠난 게 대략 8년 전이었지. 나는 그가 적어도 40년은 루티아를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었건만, 그는 그 싸움에서 사라져버린 게야." 그 이야기를 하는 러스킨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기분 탓인지 화이트비의 빛도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나와 테일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기보다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였다네. 그 이중적인 관계를 자네는 알고 있는가? 마침내 가르침을 끝내고 제자에게 물려줬던 자리에 도로 않게 되는 그 허탈한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칼스텐과 테마르의 관계가 떠올랐다. 던멜은 칼스텐의 심정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러스킨의 서글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형체 없는 고통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작전 시작은 이틀 후라고 했나? 그때가 되어도 나는 이 곳을 지키겠네. 이 곳을 버리고 떠날 때 탑 꼭대기를 봐주게나. 빛이 사라지면 내가 죽은 것이고, 아직 남아있다면 살아있는 걸로 알아주게." 러스킨은 미소 지었다. "아니, 아닐세. 늙어 느는 건 잔소리 아니면 헛소리뿐이군. 마지막 말은 그냥 못들은 걸로 해주게." 나갈 때는 결국 앞문으로 나오게 되었다. 던멜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루티아의 마스터가 루티아를 배반하는 건 하얀 늑대들이 아란티아를 배신하는 것과 같다. 마스터들이 스스로 말했듯, 그들이 루티아를 배신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여길 지켜야할 명분이 있고, 또 루티아를 멸망시키고자 한다면 굳이 모즈들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던멜은 내부의 배신자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있다면 오히려 케인스윅의 선생들 쪽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었다. '하얀 늑대가 새나디엘 폐하를 암살해?' 던멜은 마스터 칼스텐을 그리며, 진지하게 고려해보았다. '만약 정말 그러고자 한다면......, 그건 정말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니, 던멜은 강을 일으켜 모즈들을 내리쳤던 러스킨의 마법과 대지에 거대한 불의 벽을 일으켜 세웠던 데다인의 마법이 떠올랐다. 그리고 멀쩡한 허공에 피의 안개를 일으켰던 플로라의 모습도 아른거렸다. 정말 던멜이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루티아의 마스터가 루티아를 배신한다면, 그건 단순히 루티아의 재앙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설사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 재앙은 반드시 아크랜드로 연계될 것이다. (14) 루티아의 마지막 밤 플로라는 다친 몸으로 탑의 물건들을 수레로 옮기는 일을 돕고 있었다. 던멜이 다가가자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다쳤으니 쉬라는 말을 하려고 그러죠?"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활발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특별히 크게 부상을 당한 건 아니었어요.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거였는데, 그런 건 침대에 누워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죠." 억지로 힘내려고 애쓰는 게 아니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옷도 밝은 색으로 입어 외향적인 모습부터 바꾼 그녀는 전과는 전혀 다른 적극성을 띠었다. "그보다 던멜은 간밤에 좀 주무셨나요? 오늘 저녁에는 또 밤을 새셔야 할 텐데요." 서너 시간 밖에 자지 않았지만, 이런 비상시에 그 정도면 사치였다. "시저가 이상한 말을 했다지요? 제가 크게 혼냈어요. 하지만 나름대로 절 생각하고 한 말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리고......” 그녀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그러나 당당한 미소로 말했다. "고마워요. 힘들었던 순간 의지하려는 저를 언제나 잡아주셔서 감사했어요." - 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모든 것은 플로라 자신의 힘 플로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괴물들 사이에 잡혀 있을 때 저는 차라리 죽자 생각했어요. 혀를 깨물든, 마지막 남은 마법으로 내 몸에 불을 지르든, 그 때의 공포를 잊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저지르려고 했죠. 그 때 뭔가가 끓어올랐어요. 마음속에 있는 저를 억제하는 뭔가가.......” 설명을 멈춘 후 그녀는 한참이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그 손을 던멜에게 내밀었다. "잠재력이 끌려 나오는 계기란 언제나 엉뚱한 법이지만 저에게는 당신의 수화였어요. 괜찮다...... 는 그 말. 그길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던멜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때 베드포드가 다급히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기사 로일은? 마스터 데다인은?" 던멜은 다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는 교대한 골베인이 있었다. 그 옆에는 로일도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베드포드?" 플로라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가장 꼭대기 층으로 가보십시오, 던멜. 플로라도 가주시면 좋겠어요." “그랜드 마스터의 방에요?" '마스터 필립이.......” 주위에 듣는 귀가 많아 베드포드는 뒷말을 잇지 못 했다. 던멜과 플로라는 굳이 그의 말을 확인하지 않고 같이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아직 완전히 몸을 회복한 게 아닌 플로라는 10층까지 오르자 힘들어했다. 던멜은 그녀를 업었고, 그녀는 사양하지 않았다. 꼭대기 방 앞에는 러스킨, 데다인, 루더, 제이메르가 있었다. 그들이 빙 둘러 서 있는 가운데에는 필립의 시체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 하이디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울부짖었고, 플로라가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플로라가 겨우 달래 그녀를 시체로부터 떼어내자, 제일 먼저 제이메르가 살폈다. 등에는 갈이 꽂혀 있었고, 핏자국은 계단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내가 아침에 방준을 열자 필립이 여기에 쓰러져 있었네. 죽은 지 꽤 오래 된 상태였지." 러스킨은 무거운 호흡을 내쉬며 말했다. "여섯 시간 정도. 그러니까 새벽 무렵에 죽은 것 같다." 제이메르가 시체에 손을 한 번 대보고 그 손을 천천히 핏자국으로 옮겨갔다. “단검에 찔린 채로 계단 중간에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거야." "핏자국은 계단 끄트머리에서 시작되었지 않나?" 데다인이 물었다. "이 정도출혈이 거기에서 시작되었고, 걷는 속도로 계단을 이동했다면 찔린 자리는 계단 중간이 되는 거다." 제이메르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방문 앞까지 왔다가 숨을 거둔 거고....... 팔이 미처 방까지 닿지 못 했군." 필립이 뻗은 손은 방문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데다인이 정리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필립을 뒤에서 찔렀고 그는 필사적으로 러스킨의 방을 향해 기어 왔다가 결국 마스터께 알리지 못 하고......, 죽은 거군." 모두 분노보다 황망함이 앞서 말들이 없었다. 데다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던멜을 올려다보았다. 제이메르가 끼어들어 말했다. "이건 이 마법사를 아는 사람이 저지른 거야. 나랑 같은 생각 하지 않나, 던멜?" 정확히 그랬다. "이 마법사도 루티아의 마스터지? 그런 직급에 있는 마법사가 어느 정도인지는 당신네들이 보여줘서 잘 알아. 느닷없는 기습에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적이었다면 적어도 이 근처를 박살낼 규모의 싸움을 했지 않았을까?" "화이트비를 지키려고 마법을 쓰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손가락 끝을 깨물던 루더가 말했다. 제이메르는 손사래를 쳤다. "하아, 그렇다고 반항도 안 하고 죽어?" "그럼 대체 누가......?" 데다인은 그렇게 말했다가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는 모두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머리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침내 러스킨이 입을 열었다. "우선 데다인은 밤새 다리를 지키느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겠지. 자정 넘어 살해당한 거라면 데다인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니 데다인, 자네가 이 일을 조사해 주게. 어쩌면 필립을 살해한 자가 바로 소문속의 그 배신자일지도 모르겠군." "예, 마스터." 데다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모두의 틈으로 하이디가 뛰어들었다. “마스터 루더, 당신은 어제 어디 계셨죠? 어제 자정에 뭘 하고 있었어요?" 눈물이 글썽이는 그녀는 루더의 옷자락을 세게 잡고 있었다. 루더는 당황하여 그녀의 손을 떼어내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이디, 이러면 안 돼요. 모두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데, 이러는 건 옳지 않아요." 플로라가 그녀를 말렸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아니, 난 알아야겠어. 맞아. 필립은 쉽게 이런 일로 당할 분이 아니야. 날아오는 화살도 피할 수 있는 분이 뒤에서 찌르는 적의 단검을 못 피할 리 없어. 아는 사람이고 필립만큼 강한 사람이라면 루티아의 마스터 외에 또 누가 있어? 예? 마스터 루더, 어제 자정 넘은 시간에 뭐 했어요? 당신이 필립을 죽인 게 아니라면, 제발 말해줘요." 루더가 난처한 얼굴로 데다인을 바라보았다. 데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조사해야 할 일이네. 그냥 이 자리에서 말해주게. 사실은 시간도 많지 않아." "자고 있었네....... 자고 있었소, 하이디. 그러나 내가 그 시간에 방에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은 없소. 미안하오." 그가 자고 있을 때는 아직 필립이 살아있던 시점이었다. 던멜이 어제 몰래 봤던 광경들은 큰 증거가 되지 못하기에 그는 아직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골베인은?" 데다인이 묻자, 플로라가 대신 대답했다. "아마 어제 쥴리 선생님과 같이 계셨을 거예요.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어제 새벽까지 모즈가 했던 말들을 분석했다고 들었어요." 골베인은 동의했다. 모즈들에게 죽은 것도 모자라 이제 탑 안에서 동료가 죽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의 검은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 역시 어제 혼자 있어서 따로 증명할 길이 없군." 러스킨은 스스로 고백했다. 던멜도 그렇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보였다. 제이메르는 고개를 저었다. "난 어제 자경단 병사들이 잔뜩 모여 있는 숙소에서 잤어." 데다인은 틱을 쓰다듬다가 발했다. "하이디, 우선 자리를 피해주시오. 필립은 곧 수습해서 내려 보내도록 하겠소. 플로라, 그녀와 같이 가주었으면 하오."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하게 저항하는 하이디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던 데다인이 벽을 세게 후려쳤다. "이해할 수가 없군. 만약 우리 중 하나가 배신자이고 필립의 살인범이라면, 왜 굳이 마스터 러스킨의 방 앞에서......? 그것도 작전을 하루 앞두고.......” 러스킨이 말했다. "필립이 뭔가를 알아낸 건지도 모르지. 그걸 내게 말하러 왔다가 적에게 들킨 거고." "필립의 방을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러스킨이 자리를 뜨려는 데다인의 어깨를 잡았다. "던멜도 같이 데려가게. 그가 할말이 있을 거야." 러스킨의 말대로 두 사람은 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던멜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자기 방을 뒤졌다는 말에도 데다인은 화 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필립은 하이디와 같이 자정쯤까지 같이 있었다고?"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정확히 언제까지 같이 있었는지 알아봐야겠군. 그리고 자네가 러스킨과 얘기하고 다시 탑을 내려온 시점을 생각하면....... 재밌군. 결국 자네도 범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야." 던멜은 손에 쥔 펜으로 뭔가를 쓰려다 포기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제이메르도 마찬가지야. 자경단 청년들과 같이 잤다고는 하나, 모즈들 틈에서도 기척을 죽이고 숨어있을 만한 검의 고수가 자고 있는 사람들 옆에서 잠깐 사라지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로일도 마찬가지인데다 자네들 셋이면 필립을 암살할 만한 실력은 충분하지. 안 그런가?" 던멜은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안하군. 생각에 제한을 두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떠들어봤네. 난 좀 조사해 봐야겠으니 돌아가 보게." 데다인은 던멜이 탁자에 내려놓은 펜을 쥐고 종이 위에 뭔가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던멜은 그가 뭘 하는지 잠깐 지켜보다가 방을 나갔다. 모즈들의 바쁜 움직임은 멎었다. 루티아는 다음 날 아침에 있을 운명의 순간을 맞이해 바쁘게 움직였다. 이 양 집단을 사이에 두고 던멜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물건만 챙기라고 경고했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수레에 한가득 짐을 채워 넣기 바빴다. 캡틴 코렛은 절룩거리는 발로 뛰어다니며 제발 일 인당 한 보따리 이상 등에 지지 말라고 애원하고 다녔다. 로일은 그들의 일을 도왔고, 틈틈이 병사들의 검술 훈련을 챙겼다. 던멜은 어떤 방식으로 선공을 할지에 대해 루더와 지도를 앞에 두고 상의했다. 데다인은 그 일이 있은 후 보이지 않았다. 골베인도 고대어에 대한 분석을 마친다며 나타나지 않았다. 제이메르는 다리를 건넜다가 되돌아왔다가 던멜의 작전 상황을 훔쳐봤다가 강가를 어슬렁대며 나름대로 바빴다. 그리고 갑자기 로일에게 다가가더니 뭐라고 말했다. 잠시 루더에게 지도를 맡기고 그들에게 가보니 로일이 한심스럽다는 듯 던멜에게 말했다. "이 녀석, 방금 나한데 뭐라는 줄 아냐? 결투 신청했다." 제이메르는 화를 냈다. "내가 언제? 네가 그렇게 잘 싸우는 놈이냐, 내가 전력을 다해도 안 죽고 막을 만한 놈이냐고 물었지." "그게 그거 아니야?" "울프 기사단 애들한테 다 들었다. 네가 하얀 늑대들 중에서 일대 일에 제일 능하다며? 한 번 겨뤄보자." 애들? 울프들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만한 사람은 아즈윈과 게랄드 밖에 없었다. 첫 번째 테스트만 통과한다면 두 번째는 무난하게 통과할 성격임에 분명했다. "그러니까 결투 신청 맞네." "결투는 아니다. 울프 애들이랑 싸워보고 알았다. 그 녀석들한테 어설프게 싸움 걸었다는 며칠 못 가겠더라. 그러니까 이건 결투가 아니라, 시합 신청이다." "난 시합이라도 그냥 하는 법을 모른다. 큰 전투를 앞두고 서로 몸 사리는 게 어때?" 시합을 거절하는 로일이라....... 던멜은 로일이 어딘가 성장했다는 기분이 들어 흐뭇했다. 하지만 제이메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너 정도 되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봐, 솔직히 네가 나보다 더 강할 거야. 네가 쉐이든 녀석과 맞먹는 실력자라면 분명 그럴 거라 본다. 많이는 아닐 것이고, 조금 더 세겠지. 아주 조금 그러니까.......” 녀석은 검사로서의 자존심과 로일을 설득하기 위한 단어 선택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가 진다고는 말 못 하지만, 한 번......, 거리나 재보자.” "거리?" 로일은 해석이라도 부탁하듯, 던멜을 힐끔 봤다. 던멜은 어깨를 으쓱했다. "음, 너네 식대로 말해보면.......” 제이메르는 갑자기 칼을 뽑았다. 그 순간 로일의 몸이 뒤로 젖혀졌고, 동시에 손잡이 위에 그의 오론손이 올라갔다. 험한 도발을 했는지 제이메르는 알고 있을까? “그래, 그거. 이 '거리' 밖에서만 싸우자 이거다. 가능하지 않냐?" 제이메르의 말에 로일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네가 말한 거리냐?" "더 안으로 들어가면 네 목숨 책임질 자신 없어서.” "뭘 책임져?" 사실 이 정도로 로일을 도발시키며 싸움을 거는 녀석은 아즈윈 말고 처음이었다. 하지만 로일의 힘을 한 번 당해보고도 계속 저런 식의 도발을 이어갈 지는 의운이었다. 던멜은 갑자기 두 사람의 결투에 흥미가 생겼다. 로일은 던멜의 허락을 구했다. ‘그 녀석이 말한 간격만 유지하며 싸워 봐라. 재미있을 것 같다. 아님 내가 할까?' '아니, 내가 한다.' 로일은 칼을 뽑아 제이메르가 든 칼을 툭 쳤다. "네가 말하는 간격을 한 번 보여라. 내가 맞춰보지." "네 녀석이 어설프게 간격 맞추면 실수로라도 너 죽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 간격이 어느 정도냐고?" "우선 이게 두 걸음이다." 제이메르와 로일은 순식간에 칼을 세 번 교차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냥 두 번 부딪힌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실제로 제이메르는 그 세 번 사이에 속임수를 한 번 끼워 넣었다. 로일은 흥미로운 듯 왼쪽으로 몸을 틀며 가볍게 뛰었다. 제이메르도 그의 속도에 맞췄고, 둘은 원을 그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좋아, 이게 두 걸음? 그 다음은?" 로일이 물었다. “한 걸음 반." 제이메르는 다시 칼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칼이 다시 교차했다. 주위에서 검술 연습을 하거나, 물건을 나르거나 목책을 세우던 병사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지도 위에 열심히 펜을 놀리던 루더도 고개를 길게 빼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럼 이게 한 걸음이겠군?" 로일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칼을 찔러 넣었다. 제이메르는 자칫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공격을 막고 바로 반격했으며, 로일은 또 막으면서 찔렀다. 이건 어떻게 봐도 서로 목숨을 노리는 격렬한 싸움이었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가 두 사람의 시야를 서로 가렸고, 그 틈으로 칼이 여러 차례 부딪혔다. "너도...... 보이냐?" 먼지 틈으로 겨우 보이는 제이메르의 입술에 즐거운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뭐가?" "간격이." "네가 간격을 보여줬으니 대충 이 정도 될 거라고 봤지. 이게 ‘한 걸음' 이란 거냐?" "정확해. 그럼 계속 해보자." "규칙은 한 걸음 바깥쪽에서?” "어, 힘들면 가끔 두 걸음 밖으로 도망쳐도 된다." "물론 네가 도망치면 굳이 쫒아가진 않으마." 그 상태로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칼을 부딪쳤다. 그렇게 격렬히 싸우는데도 서로 다치지 않으니 신기할 정도였다. 던멜은 그 싸움의 경과가 무척 흥미로웠다. 서로 다치지 않게, 그러나 서로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싸운다? 이건 울프들에게도 써먹으면 괜찮을 훈련법이군. 더구나 로일처럼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 녀석을 저런 식으로 억제시키며 싸우게 만드는 건 보통 수단이 아니었다. 카셀이 쉐이든 대신 저 녀석을 데려왔다면 그럴 만한 다른 이유가 있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순수하게 실력으로만 가려 뽑아 데려온 거라고 해도 믿을 만 했다. "반걸음!" 반 시각 가까이 지난 순간 로일이 갑자기 소리치며 칼을 찔렀다. 제이메르는 그 엄청난 속도의 칼끝을 맞춰 칼날이 비켜나가게 했다. 동시에 제이메르는 로일의 멱살을 잡았고, 로일은 또 그 손을 잡았다. 둘은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노려보았다가 동시에 놔주었다. "재밌었다." 로일은 제이메르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고 뒤로 물러섰고, 제이메르도 지쳤는지 말은 못하고 고개만 까닥여 대꾸했다. 주위에서 놀란 눈을 한 병사들이 힘없이 박수를 쳐 보냈다. 제이메르는 물을 마시러 가버렸다. '어떤가?' 던멜이 물었다. "너도 봤지 않아?" '옆에서 보기에는 훌륭하지. 마주 보기에는 어떤가 해서.' '나도, 저 녀석도 마지막 순간에는 점점 간격이 좁아졌다. 그 한걸음이란 게 폭이 꽤.......” '의식하지 못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알고 있었군. 간격을 좁혀온 건 저 녀석 쪽이지?' '한 걸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녀석이 그걸 의식 못 했지. 그래서 막판에 내가 반걸음이라고 소리치면서 시합을 끊은 거야. 그대로 가다가는 서로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 맞아. 저 자식 겨우 이 짧은 시합을 하면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조금만 가르쳐주면 정식으로 싸워도 어지간해서는 안 지겠어." '가르칠 건가?' "당장 도움이 된다면 가르쳐야지. 하지만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 싸움은 내일 아침이야." '오늘 저녁이 될 지도 모른다.' 한참 기분 좋게 땀을 닦으며 말하던 로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수화로 말했다. '녀석들이 올 것 같은가? 루더에게 말하지 그래?' '목표가 생겨 의욕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을 막고 싶지 않아. 밤에 놈들이 쳐들어온다면 그걸 알든 모르든 중요한 게 아니지, 병사들은 오늘 밤부터 경계하고 있을 테니. 아마 루더도 짐작하고 있을 거다. 우리가 움직이는 게 먼저일지, 녀석들이 공격해 오는 게 먼저일지....... 작전 시작은 처음부터 우리가 정한 게 아니라 모즈들이 정하는 거였어.' 던멜은 수화로 말하면서도 그 말이 틀리길 빌었다. 그러나 가넬로크의 유명한 철학자의 말에 따르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일은 대체로 일어난다. 경험상 이 말은 맞았다. 뒤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은 플로라였다. 그녀는 치마를 부여잡고 강가에 앉아있는 던멜의 옆에 앉더니 자신의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는 무료함을 달래기라도 하듯 옆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강물 위로 던졌다. 많은 부분이 변했지만 자기 편할 때 찾아와 말없이 옆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가오는 타이밍은 항상 던멜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였다. "하이디는 필립의 옆에 있겠대요. 모즈들이 쳐들어오든 말든 상관없다면서." 플로라가 말했다 "저 역시 그런 하이디를 여기에 두고 떠나지 않을 거예요. 싸우겠어요." 던멜이 안 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플로라의 손이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방금 집어 던진 및 개의 돌멩이가 도로 강물 위로 떠오르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화살처럼 날아가 반대편 강둑에 깊이 박혔다. 플로라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떤 계기로 이런 힘을 얻게 되었는지 고민했지만 사실 그런 건 의미가 없지 않겠어요?" 그녀가 손을 내민 방향으로 강물이 얼어붙었다가, 금방 지진으로 갈라지듯 부서졌다. "싸울 겁니다. 지금까지 싸우지 않고 방 안에 숨어있었던 죄 값을 치룰 거예요. 그래야 하겠죠? 그게 제가 이 힘을 얻은 대가겠죠, 마스터 데다인?" 그녀의 시선은 던멜의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함부로 결정할 일이 아니네." 뒤에서 다가오는 데다인이 말했다. 그는 던멜 옆의 질척거리는 진흙을 맨 땅처럼 밟으며 서 있었다. "왜죠?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할 때잖아요." 플로라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네가 케인스윅의 선생에 불과하다면 앞에 나서서 싸우든 남아서 하이디를 보호하든 내가 상관 하겠나? 내겐 지금 그렇게 마음 써줄 여유가 없네. 정식으로 루티아노를 거쳐야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권한만으로 플로라, 너에게 마스터의 칭호를 내리겠다. 이제 네 힘은 너 혼자 만의 것이 아니다." 플로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싫습니다."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 퇴로의 가장 선두에 서서 리버 포레스트를 안내할 마법사가 없다. 필립이 맡기로 한 그 자리에 네가 서주었으면 한다. 마스터 플로라." "싫습니다. 저는 던멜의 옆에서.......” "그를 좋아하나?" 플로라는 던멜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루티아의 마스터가 아니라 케인스윅의 선생으로서 전투의 가장 앞에 서길 원하는 거예요." 던멜이 두 사람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진정시켰다. "좋아. 다급한 순간일수록 긴 대화를 해야 하는 법이지." 데다인은 로브가 더럽혀지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진흙 땅 옆에 앉았다. 해는 진작 졌지만 화이트비의 조명 아래 셋은 서로의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마스터 플로라, 이제 그대도 이 일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할 위치에 있으니 말하겠다. 루티아 내부의 배신자에 대해서." 플로라는 데다인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필립이 죽은 후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인물을 의심해 보았다. 루더, 러스킨, 골베인, 어느 정도 마법의 힘을 완성한 케인스윅의 선생들, 학생들....... 그래, 하얀 늑대 두 명과 제이메르, 심지어 내가 누군가에게 정신을 조종당해 그런 짓을 한다는 가정까지 해보았네. 또 루티아의 배신자와 필립을 살해한 자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가정도 해보았고,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마법사임을 감추고 탑을 드나드는 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네. 그리고 난 거기에서 해답을 얻었네." "배신자가 있나요?" 플로라가 물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루티아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게 아니라, 외부의 적에 의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데다인은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지 않네. 내일 새벽 나는 그 배신자 문제를 해결하려 하네. 만약 내가 실패하거든....... 던멜, 자네가 내 뒤를 이어주게. 내 방에 잠입할 수 있다고 했지? 책장 속 수정 구슬 안에 내가 생각한 배신자의 이름을 써두겠네. 그러나 그건 최후의 수단일 경우니 미리 보지 말아주게. 나는 그 배신자를 내 힘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어. 내 심정을 이해해주겠나?"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다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슬피 보였다. 하얀 늑대들 중 하나가 아란티아를 배신했다, 그 범인을 자신이 알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던멜은 데다인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내가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해도 내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추측은 접게나. 지금 내가 한 말도 나를 숨기려는 거짓말일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줘야 마지막 순간 자네에게 일이 떨어졌을 때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걸세." 데다인은 곧 플로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 마스터 플로라의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지. 내가 배신자건, 내가 찾아낸 다른 배신자를 내가 처리하건, 우리는 루티아를 보호해줄 거라고 믿는 커다란 힘 하나를 잃게 되는 걸세. 내일 새벽에 작전대로 우리가 움직이게 될지, 아니면 괴물들이 먼저 공격을 하게 되어 강제로 이동을 하게 될지 모를 일이야. 그러나 그 때는 적어도 한 명, 최악의 경우 두 명이나 되는 루티아의 마스터를 잃게 되는 거다. 그때는 누가 마을 주민들을 숲으로 이끌겠나? 하얀 늑대들조차 술에서는 마스터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데.......” 플로라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플로라, 너의 힘이 급성장 한 걸 보게 되었네. 가장 힘이 필요한 시기에, 외부에서 힘을 끌어들이려고만 생각하던 내 눈에, 루티아 내에서 스스로 성장한 마법사가 나타난 걸세. 어쩌면 배신자 문제를 제하고라도 이 싸움에서 모든 루티아의 마스터가 죽을 지도 모르지. 마스터 테일드는 이미 오래 전 사라져 생사를 모르고, 같이 왔어야 할 마스터 타냐 역시 하늘 산맥에서 사라졌네. 자, 누가 루티아를 재건해야겠나? 케인스윅에서 루티아의 역사를 강의하는 선생이자, 마스터의 힘까지 얻은 마법사라면 딱 맞을 일이지." 흐느끼던 플로라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기까지 바라보시고 제게 일을 맡기는 거라면 더욱 싫습니다. 이제야 겨우 마법에 눈을 뜬 제가 그런 막중한 책임을 어찌......?"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다시 탑으로 가보아야 한다." 데다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던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플로라를 부탁드리겠소, 던멜 울프. 아란티아의 기사여. 루티아의 마지막 임무를 그대에게 맡기겠소." 그는 죽으러 떠나는 사람처럼 탑으로 사라졌다. 던멜은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을 잊지 못했다. 다시 그를 보게 됀 새벽이 되치 전에, 모즈들이 쳐들어왔다. (15) 배신자 아직 해가 뜨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 싸늘한 새벽이었다. 은은한 빛을 내던 화이트비가 갑자기 대낮처럼 빛을 뿜으니 다들 놀라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밤이 끝나길 기다리며 플로라와 같이 서 있던 던멜도 뒤를 돌아보았다. 집중해도 찾기 힘든 기척이긴 하지만, 빛이 터지는 순간 러스킨의 느낌은 탑 안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골베인의 기척은 탑의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루더는 다리 앞에 서서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던멜은 감각을 최대한 동원하여 이번에는 데다인을 찾았다. 그 역시 러스킨처럼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방도 아니었고, 케인스윅도 아니었고, 넌서치도 아니었다. 그는 화이트비가 있는 방에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긴 하나, 데다인은 마스터 중 누구도 아닌 자와 그 방에 같이 있었다. 감각을 최대한 동원했으나, 지금 데다인과 같은 방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러스킨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플로라, 난 잠시 던멜은 데다인과의 약속을 어기고 미리 탑 쪽으로 가볼 요량으로 그녀에게 글씨를 썼다. 그러나 플로라는 글씨를 끝까지 보지 않고 강 건너를 가리켰다. 다운서치에서 모즈들이 횡렬로 서서 천천히 강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창과 도끼로 무장하고 심지어 몇 마리는 투구까지 쓰고 있었다. 그들은 군대처럼 다리까지 맞춰가며 넌서치로 다가왔다. 그건 어떻게 봐도 훈련을 끝낸 정규 보병들의 모습이었다. 플로라와 던멜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할 일이 있었다. 플로라는 머뭇거리다가 던멜을 꽉 한 번 끌어안고 넌서치로 달려갔다. 그녀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후퇴 준비는 이미 전날 끝냈던 터라 리버 포레스트를 향한 사람들의 이동은 바로 시작되었다. 던멜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라르비튼의 다리로 갔다. 해가 뜨자마자 공격을 하려 했던 자경단의 병사들은 이미 방어 태세로 들어가 있었다. 먼저 공격하느냐 방어부터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괴물들의 시선을 최대한 라르비튼의 다리 쪽에 집중시켜 마을 사람들의 이동을 보호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한 작전 지시는 전날 모두 끝났으므로,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강의 라인을 따라 배치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준비했다. 그러나 아직 시위를 당기지 않았다. 훈련을 받은 건 괴물들만이 아니었다. 이 쪽도 짧게나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다. 모즈들은 화살이 날아가면 겨우 닿을 만한 위치까지 다가오더니 멈췄다. 다리에는 루더만 있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다가 던멜에게 물었다. "기사 로일은 어디에 있나?" 던멜은 북쪽을 가리켰다. "제이메르는?" 남쪽. "골베인과 데다인이 늦는군. 그런데 왜 갑자기 화이트비가 저렇게 밝아졌지? 저런 적이 없었는데."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탑의 꼭대기를 보았다가 다시 강에 집결된 모즈들을 훑어보았다. 화이트비가 만들어낸 환한 빛 때문에 모즈들의 얼굴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빛. 그것은 신호였다. 어떤 의미의 신호일까? 좋은 쪽일까, 나쁜 쪽일까? 적을 향한 신호일까, 아군을 향한 신호일까? 알 수 없었다. 화이트비 안에 데다인과 같이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러스킨인가? 러스킨이 아닌 다를 자라면 어떻게 저 높은 탑 꼭대기에 아무도 모르게 오를 수 있는가? 아니, 모든 신경이 강 너머에 있었으니 사실 탑에 몰래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것 역시 알 수 없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다운서치 쪽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일렬로 늘어져 서 있는 모즈들 뒤로 뭔가가 땅을 진동하며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바퀴가 달린 물체였고, 그런 게 스무 개가 넘었다. 통나무의 양끝은 수레가 받치고 있고, 그 수레에는 톱니바퀴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교한 기계 장치가 되어있었다. 무슨 용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성벽을 오르는 기중기인가 싶지만, 여기에는 성벽이 없었다. 다리에 세운 목책을 부수면서 달려올 물건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든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마스터가 있다. 적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돌격용 통나무라면 수레 앞에 있는 기계 장치가 의미가 없었다. 저걸 강에 띄워 타고? 비효율적이었다. 바퀴를 만드는 시간 동안 배를 만드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다리를 달고 움직이는 길다란 통나무 수레는 곧장 강 쪽으로 달려왔다. 다리 쪽이 아니었다. 루더는 지팡이를 펼쳤다. 강에서 떨어진 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그들의 길목을 차단했다. 그러나 모즈들은 아랑곳 않고 돌파했다.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루더는 이미 그런 건 예상하고 있었고, 즉시 작전을 바꾸어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라인 공격!" 준비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허공으로 날렸다. 그들이 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모즈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통나무를 밀고 달려오던 녀석들이 우루루 넘어졌다. 밤사이 식은 차가운 바닥의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수레를 밀고 오는 모즈들이 강 가까이 붙자, 루더는 주저하지 않고 라르비튼의 다리를 무너뜨렸다. 그 다리를 무너뜨리는 걸 누구보다 반대해 오던 마법사였다. 하얀 돌 더미가 강물로 떨어지며 물방울이 튀었다. 돌가루가 짙은 안개처럼 시야를 가로막았다. 모즈들이 몰고 온 수레는 강 바로 앞에서 멈췄다. 통나무는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게 중에는 통나무 두 개를 이어 붙인 것도 있었다. 그 길이를 보니 이 넓은 강폭을 넘을 것 같았다. 가까이 붙으니 그제야 던멜은 그게 어떤 종류의 물건인지 알았다. 그것은 투석기와 같은 원리로 물체를 튕겨 오르게 하는 기계 장치였다. 그들은 반 일주일도 안 되어 그런 복잡한 기계를 스무 대나 만들어낸 것이다. 던멜은 즉시 활을 들어 수레에 붙은 모즈들을 정확히 쓰러뜨렸다. 그것은 그다지 정밀한 기계는 못되었다. 그 스무 개 중에서 제대로 작동한 것은 열 개도 채 안 되고 나머지는 불발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열 개는 정확히 끌고 온 기나긴 통나무를 허공으로 튕겨 올렸다. 한 쪽은 그대로 수레에 결려 있고, 다른 한 쪽은 허공을 날아 곡선을 그으며 강 건너까지 떨어졌다. 길이가 부족한 통나무는 반대편에 닿지 못하고 물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단 몇 초 만에 나무다리 열 개가 만들어졌다. 모즈들이 그 다리를 타고 밀고 왔다. 던멜은 화살이 떨어진 활을 버리고 칼을 들고 다리 한 쪽에 붙어 건너오는 모즈들을 쓰러뜨렸다.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모즈들이 모조리 강 아래로 떨어졌다. 헤엄은 못 치는지 떨어지는 모즈들은 떨어지는 족족 허우적대며 하류로 하염없이 흘러내려갔다. 통나무에 불을 붙이려는 마법사들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나무에도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루더는 지팡이 끝을 들어올리며 팔도 쳐들었다. 강물이 끓어오르는 듯 하더니 불기둥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 힘은 미약하여 통나무 하나도 밀어내지 못 했다. 그 다리를 건너던 모즈들을 휩쓸어간 게 전부였다. 루더는 숨을 물아 내쉬며 뒤로 비틀거렸다. "우리의 마법이 억제 당하고 있다. 지금 화이트비의 힘이 짓누르는 건 모즈 쪽이 아니라 우리다!" 던멜이 막고 있는 통나무 외에는 모든 길이 뚫렸다. 뒤쪽에서 또 수레를 앞에 단 통나무 열 개가 북쪽과 남쪽 강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루더까지 활을 들고 창을 든 병사들에 합류해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며칠 동안 열심히 세워둔 목책도 그다지 소용없었다. 나무다리를 건너려고 시도하는 모즈들의 3분의 1은 강에 빠져 죽었고, 건너오면 그 즉시 활이나 창에 맞아 또 3분의 1이 죽었지만 그 나머지만으로도 병사들 전체를 위협할 만한 인원은 되었다. 강가는 완전히 모즈들이 차지했다. 이제 던멜은 앞이 아닌 뒤에서 덤비는 적까지 막아야 했다. 그는 몸을 돌리며 접근하는 모즈들 다섯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둘은 목을, 둘은 가슴을 하나는 손목을 베었고, 그 틈바구니로 끼어드는 키 작은 모즈는 발로 걷어차 강물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사이 던멜은 음직일 틈도 없이 몰려든 모즈들의 중앙에 포위되었다. 셀 수도 없는 창과 도끼와 칼이 던멜에게 날아들었다. 던멜은 몸을 돌리며 그 모든 공격을 흘려냈다. 실타래처럼 엉킨 칼날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검은 기사에게 쓰기 위해 아껴뒀던 르고의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둘레를 싸고 있는 무기들을 쳐낼 요량으로 한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무기들은 단검에 튕겨나가는 게 아니라 모조리 잘려나갔다. 부서진 파편들이 몸에 부딪혀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휘두른 던멜이 더 놀랬다. '르고, 당신 뭔 물건을 만든 거야?' 그는 순간적인 틈을 파고들어 포위망 사이를 빠져나갔다. 녀석들이 표적을 잃고 몸을 돌리는 순간 무리의 오른쪽으로 돌아 자신을 포위했던 모즈들 전체를 자신의 걸음 안에 가두어 베었다. 모즈들은 포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던멜에게 오히려 자기들 스무 마리가 포위당해 있다는 계산은 하지 못 하고 던멜의 등만 쫓아 도끼를 내려치고 창을 찔렀다. 그러나 던멜이 자신의 손가락 위에서 놀던 단검을 거꾸로 쥐고 걸음을 멈추었을 때, 스무 마리의 모즈들이 한 자리에 와르르 넘어졌다. 그 안에 살아남은 건 한 마리도 없었다. 다리를 건너온 모즈들이 또 몰려오고 있었다. 던멜은 숨 한 번 몰아쉬고 다시 단검을 내밀었다. 뒤에서 익숙한 존재가 다가와 던멜의 오른쪽에 섰다. 둘은 말뚝을 받은 듯 그 자리에 같이 서서 몰려오는 모즈들을 내리쳤다. 곧이어 다른 한 명이 던멜의 왼쪽에 서서 도왔다. 모즈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강의 다른 쪽에서 건너온 모즈들은 넌서치로 밀고 내려가며 공격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부서진 라르비튼의 다리 근처의 통나무에서 몰려온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세 사람이 만들어놓은 두터운 댐 앞에 희생된 자기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입에서 터지는 하얀 김과 거품 섞인 침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위협만 있었다. 그들은 세 사람을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다. "아즈윈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의 오른쪽에 선 로일이 말했다. 던멜은 왼쪽에 선 제이메르를 살핀 후 수화를 보냈다. '제이메르를 게랄드 자리에 넣고 9번 포메이션은?' "저 녀석이 게랄드만큼의 돌파력을 가지는 건 힘들다." 제이메르가 고개를 획 돌려 따졌다. "뭘 가지고 둘이 쑥떡대냐?" "지금 하얀 늑대들끼리의 전투 포메이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중이다. 네가 게랄드라는 친구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해야 하는 거라면 한다!" 제이메르는 딱 잘라 말했다. 던멜도 시간이 없어 로일을 설득했다. '제이메르를 앞에 세워라, 그리고 네가 지시해. 나머지는 저 친구가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줘야지.' "제이메르, 우리 두 사람 앞에 서라. 그리고 돌격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몰려오는 놈들을 좌우로 처내라. 돌격이라고는 해도 앞으로 움직이면 안 돼. 네 목표는 적을 베어 죽이는 게 아니라 적을 분산시키는 거다." "뭔 소리냐, 그게?" "나랑 던멜, 두 사람이 검의 양쪽에 있는 날이다. 그리고 네가 칼끝이다." 모즈들도 자기들끼리의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다. 제이메르의 말대로였다. 녀석들은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난 후 놈들은 동시에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로일은 소리쳤다. "온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생각해라." "젠장." 제이메르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두 사람 앞에 서서 모즈들을 한꺼번에 맞았다. 처음에는 급류처럼 몰려오는 숫자를 견디지 못해 세 걸음이나 밀려났고, 로일과 던멜도 하는 수 없이 같은 걸음을 물러나야했다. 모즈들은 우선 눈에 들어오는 제이메르를 공격했으나, 뒤에서 로일과 던멜이 견제하며 제이메르를 보조했다. 제이메르는 다시 두 걸음을 물러섰고, 로일과 던멜도 두 걸음을 물러섰다. 제이메르는 어깨를 살짝 스치는 부상을 입었고, 그걸 보호하려고 로일도 부서진 검의 파편을 옆구리에 맞아가며 무리해서 앞으로 나가싸웠다. 던멜은 포메이션을 약간 더 벌려 모즈들이 자기 쪽으로 더 오게 유인했다. 제이메르는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즈 다섯 마리를 떨어뜨리기 위해 스스로 물러난 것이었다. 그는 그 이후 물러나지 않았다. 모즈들은 제이메르가 거칠게 휘두르는 검을 피해 좌우로 흩어졌고, 흩어진 녀석들은 로일의 검에 목이 날아갔고, 던멜의 검에 고꾸라졌다. 주위에 쌓이는 모즈들의 시체 때문에 음직일 수 없게 되자, 제이메르는 뭐라고 소리 지르며 좌로 이동했다. 던멜은 못 알아들었으나, 그의 움직임만 보고 똑같이 따라갔다. 두려움을 모르는 모즈들도 따라와 창을 찔렀다. 로일이 창과 모즈의 팔을 동시에 날려버린 후 제이메르의 어깨를 쳤다. "왼쪽으로 돌아서 싸운다. 이번에는 내가 칼끝이다..” 로일은 자연스럽게 자기 쪽으로 몰려온 적들을 힘으로 밀어붙였다. 제이메르와 던멜이 급히 뒤따라가 로일이 놓친 녀석들을 베었다. 로일은 두 사람이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믿고 거의 앞에 있는 놈만 베며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다시 넓은 곳에 이르자, 모즈들이 세 사람을 에워쌌다. 이제 녀석들은 포위하며 싸우는 법도 알고 있었다. 누가 이런 훈련을 시켰는지는 뻔했다. 다시 제이메르가 앞에 섰다. 제이메르는 금방 그 형태에서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이해했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싸우던 던멜은 문득 그의 움직임이 보이는 특정한 패턴을 찾아냈다. 그는 보지 않아도 어느 쪽에서 누가 어떤 속도로 자신을 벨지 알았고, 그걸 정확하게 계산했다. 느낌으로 적의 힘을 측정하여 대응한다는 점에서 울프 기사단의 첫 번째 테스트와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막연한 느낌을 정확한 수치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 복잡한 계산을 단 시간에 끝내어, 들어오는 모든 모즈들의 공격을 옆으로 흘려내고 있었다. 일단 쓰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기술이 있을 수 있느냐에 대해 하얀 늑대들끼리 의논한 적이 있었다. 밤새도록 얘기했으면서도 막상 아즈윈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궁극적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 기술도 있겠지. 그런 건 모순이야.’ 그러나 쉐이든의 의견을 달랐다. '궁극적으로 상대를 쓰러뜨릴 기술을 가진 자가 궁극적인 방어 기술까지 가지고 있게 된다. 그런 건 모순이 아니야.' ‘그럼 어떤 방식으로 싸우면 그런 게 가능한가?' 던멜이 물었다. 가장 경험 많은 게랄드의 의견이 모두를 납득시켰다. '상대의 공격을 미리 읽으면 되지. 1초, 아니, 그 반의 반의 반이라는 찰나만이라도 상대의 공격을 미리 읽으면 뭔들 못해?' 제이메르는 그걸 하고 있었다. 던멜은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묻고 있었다. 그런 게 가능한가? 가능하든 않든 눈앞에 그걸 실현시키는 자가 있었다. 로일은 그런 검술의 이론을 설명할 줄 몰랐지만, 언제나 상대의 공격을 미리 읽는 듯 방어하고 공격할 줄 알았다. 게랄드가 말한 궁극적인 공격에 가장 근접해 있는 건 로일이었다.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지 않으면 시합에서 로일을 이길 수 없었다. 어쨌든 로일은 그런 걸 계산해서 싸우는 게 아니었다. 거의 본능적이었다. 제이메르는 계산해서 싸우고 있었으나, 워낙 계산이 빠르니 본능적인 반응이라 할 만 했다. 둘은 싸우는 방식이 비슷했으나, 자신 만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제이메르는 분명 아직 미숙했다. 로일도 가끔 자신을 억누르는 듯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둘 모두 보이는 것 이상의 잠재력이 아직도 잠자고 있었다. 로일이 억제하고 있는 힘을 펼칠 때 마스터 퀘이언인들 그를 이길 수 있겠는가? 누가 어느 쪽에서 공격해 올 줄 아는, 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검의 간격을 잴 줄 아는 녀석이 그 간격을 자유자재로 이용하게 될 줄 안다면 전력을 다하는 로일이라 한들 제이메르를 이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즈들의 공격은 점점 뜸해지더니 결국 멈추었다. 넌서치 한가운데에서 뿌려진 모즈들의 시체는 셀 수가 없었다. 넘치는 시체를 보고 아군도, 적군도 질려 호흡을 멈추었다. 라르비튼의 다리를 중심으로 또 한 번 소용돌이 쳤던 검의 폭풍이 잠시 멎었다. 마을 안에는 세 명이 만들어낸 적막이 내려앉았다. "끝이냐, 자식들아? 난 아직 힘 남아돈다." 팔 근육이 후들거리는 주제에 제이메르는 넌서치 입구에 몰려있는 모즈들을 향해 기세 좋게 소리쳤다. 로일도 제이메르 옆에 서더니 어깨를 툭 쳤다. "잘하더군." "아직 밀었어." 제이메르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던멜은 나란히 서서 서로를 격려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칼스텐의 유언이 되었던 말이 떠올랐다. '잊지 마라, 테마르. 너는 내가 본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천재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느 누구도 너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던멜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마스터. 여기 저를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자가 두 사람이나 더 있습니다.' 갑자기 던멜은 등 뒤쪽에서 희미하게나마 데다인을 감지했다. 그의 기척은 탑 위에서 아래로 급격하게 이동했다. 아무도 알지 못한 걸 보니 소리가 난 건 아니었다. 던멜은 모즈들이 아직 많았음에도 더 이상 이 곳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여길 부탁한다.' 던멜은 로일에게 수화로 말하고 탑으로 달려갔다. 기척이 그 정도 속도로 탑 위에서 아래로 향했다면 그것은 추락밖에 없었다. 던멜은 더 이상 느껴지지도 않는 데다인의 기척을 찾아 케인스윅의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천장이 뚫린 복도 한 가운데 마스터 데다인이 쓰러져 있었다. 떨어지는 순간 어떤 조치를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았는지 그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부서진 나무 파편이 폐를 찌르고 복부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머리 주위로 끓은 피가 넓게 퍼지고 있었다. 데다인은 멍한 시선으로 뚫린 천장 위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던멜은 다가가 조심스레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어째서입니까?" 눈물은 그의 눈동자 위에서 흐르지 못 하고 고였다. 그는 이미 앞을 보지 못 하고 있었다.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묻고 있었다. "루티아가 당신을 용서하길.......”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몸에서 완전히 힘이 사라졌다 던멜은 감지 못한 그의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던멜은 고개를 들어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화이트비가 있는 방에 두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 하나는 러스킨이었고, 하나는 아까부터 데다인과 같이 있었던 존재였다. 던멜은 뚫린 천장으로 뛰어올라갔다. 새벽의 찬 바람이 그를 감쌌다. 화이트비의 하얀 빛은 다시 옅어졌으나 대신 동쪽의 햇빛이 더욱 강해져 사위는 밝았다. 던멜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탑으로 달려가 단숨에 한 층을 뛰어올라갔다. 그는 거의 받침대에 발가락 하나만 걸쳐 한 층을 뛰어오른 후, 몸을 한 바퀴 돌려 거꾸로 선 자세로 한 층을 더 올라갔다. 그 때부터는 튀어나온 벽돌들이 많아 그는 거미처럼 붙어 탑을 올라갔다. 데다인의 방 창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간 후 그는 책장에 꽂힌 수정 구슬을 끄집어냈다.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을 보기 전에 이미 그는 누가 루티아를 배신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죽는 순간에도 데다인이 그랬듯이 던멜도 누구인지 보다 '왜'가 더 궁금했다. 아마 데다인의 추리가 늦은 것도 그 부분 때문일 것이다. 던멜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모즈들을 수없이 베었음에도 전혀 날이 상하지 않은 르고의 단검을 거꾸로 쥐었다. 그는 러스킨의 방문 앞에 잠깐 멈춰 섰다. 뒤에서 단검에 찔린 채 숨진 필립의 시체가 놓였던 자리였다. 많은 양의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이 계단을 올라와 방문을 두들기기 위해 팔을 내밀고 죽어있었던 마법사의 시체가 지금도 보이는 듯 했다. 여전히 러스킨의 방에는 두 사람의 기척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층 더 위쪽이었다. 화이트비가 있는 곳. 던멜은 방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던멜은 나무 계단 위로 올라가, 바로 한 바퀴 구르며 자세를 잡았다. 어떤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유리벽이 둥글게 깨어져, 그 곳을 통과한 찬 바람이 좁은 방 안을 세차게 파고 들어왔다. 점점 희미해지는 빛의 보석에 손을 대고 있는 노인의 몸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꺼졌다 켜지길 반복했다. 빛의 알갱이를 가득 품은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그의 팔을 따라 뱀처럼 꿈틀거린 후, 도로 화이트비로 돌아갔다. 이틀 전에 봤던 그 때 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사람임에도 두 가지 기척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자네도 같은 것을 물을 텐가? 누구인지는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을 걸세. 어째서...... 겠지. 안 그런가, 던멜 울프?" 노인은 원래 입던 하얀 로브 대신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어째서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기척이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 질문에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데다인에게도 대답할 수 없었네. 미안하다고 밖에." 데다인이 아란티아로 이동하는 전 과정을 꿰뚫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3천으로 늘어난 모즈들 전체를 보호 마법 아래 둘 수 있는 사람도 사실 그 사람 하나였다. 뜻밖에 모즈들에게 마법이 통하던 나흘 전, 데다인처럼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파악이 안 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방에서 나던 매캐한 냄새가 좋지 않은 기름 냄새라고 치부해버렸던 건 던멜의 안일함이었다. 그것은 베논의 털에서 나던 냄새였다. 다들 어째서 필립이 내밀고 있는 팔을 '방문을 두들기기 위해 내민 손'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째서 아무도 그가 마지막 순간에 기력을 파내서 범인을 가리킨 채 죽은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모두들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데다인도, 던멜도, 루더도, 골베인도, 플로라도......, 지나친 믿음이 모두의 판단력을 흐려놓았다. "데다인은 누구보다 루티아를 사랑했고, 누구보다 나를 믿었지. 그 믿음이 그의 명석함을 방해했을 걸세. 아니, 알았더라도 믿기 싫었던 걸지도 모르지. 차라리 어제 새벽 필립처럼 화이트비를 부셔버리자는 의견이나 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필립을?' 던멜은 버릇처럼 수화로 말했다가 손을 접었다. 이제 이 사람과 어떤 대화를 하길 기대할 수는 없었다. 데다인에게도 그랬겠지만, 그가 굳이 던멜에게 루티아를 배신한 이유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들킨 지금,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는 명백했다. 아크랜드와 하늘 산맥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던멜은 몸이 조각나는 한이 있어도, 그의 목을 벨 각오로 칼끝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목표는 루티아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이자, 루티아의 배신자....... 러스킨. (16) 케인스윅의 전투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도 러스킨은 전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몰래 침입한 던멜을 보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던 그때 그 미소와 같았다. “기억나나, 던멜 울프? 내가 못 들은 걸고 해달라고 했던 말." 그는 화이트비를 에워싸는 둥근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던멜은 그의 입 모양만 볼 수 있는 각도를 유지하며 그가 다가오는 만큼 옆으로 물러섰다. 사람 키만 한 보석을 사이에 둔 좁은 방에서 보이지 않는 긴장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화이트비가 깨지면, 내가 죽은 걸로 알라고......, 했었지." 러스킨은 눈동자만 약간 돌려 던멜의 등 뒤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던멜의 칼끝에 눈빛을 고정시켰다. 던멜은 그가 시선을 바깥쪽에 둔 순간, 뭔가 커다란 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은 점점 강해졌고, 이제 유리벽이 흔들리고 탑이 흔들렸다. 하지만 러스킨의 지팡이를 앞에 두고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죽었네. 만약...... 이 방에서 살아남는다면 모두에게 알려주게. 또 만약 모즈들로부터 살아남는다면, 새나디엘 여왕에게도 전해주게.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은 루티아와 함께 죽었다고." 러스킨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 불꽃처럼 꿈틀대는 붉은 기운이 휘두른 곡선에 있는 것을 모조리 깨뜨렸다. 사방을 가리던 유리벽이 산산조각 났고, 동시에 화이트비도 몇 조각으로 부서졌다. 던멜은 완전히 바닥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던멜의 등과 머리를 가린 팔뚝에 박혔다. 동시에 뭔가가 바깥쪽에서 유리벽의 남은 부분을 후려쳤고, 천장의 두꺼운 유리가 내려앉았다. 던멜은 옆으로 한 바퀴 구르며 아래층과 통하는 출입구로 몸을 떨어뜨렸다. 떨어지기 직전 그가 본 것은 마치 백배는 확대 시켜 놓은 것 같은 거대한 독수리의 발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가 아니었다. 던멜은 거의 굴러 떨어지다시피 계단을 내려왔다. 동시에 그의 뒤를 추적하며 붉은 불꽃이 위층에서 밑으로 꿈틀대며 날아들었다. 방 중앙에서 불줄기의 끝이 수십 갈래로 찢어졌다. 던멜은 입구로 달려갈 여유도 갖지 못 하고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방 안에 넓게 퍼진 불줄기가 던멜의 등을 떠밀며 탑 바깥으로 붉은 혀를 불쑥 내밀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 까마득히 높은 허공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던멜은 팔을 뻗어 창문 난간을 붙잡아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안에서 빠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손등을 달구고 있었다. 던멜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날개가 깨진 화이트비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새의 깃털을 가진 날개가 아니라 박쥐같은 피막으로 된 날개였다. 그 생물체는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하늘로 떠올랐다. 바람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던멜을 크게 흔들었다. 던멜은 밑에서 녀석을 올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가넬로크에서 딱 한 번 본 적 있는 그 동물은, 검은 빛깔을 지닌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러스킨이 타고 있었다. 던멜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고 있었다. 특히 나가는 출구 쪽은 불길이 너무 셌다. 그리고 그 불길은 외부의 계단까지 태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던멜은 문득 아래층에 역대 그랜드마스터의 초상화가 걸린 방이 있다는 러스킨의 말을 기억해내, 밑으로 가는 사다리를 찾았다. 아랫방은 아직 화재의 영향이 없었다. 둥근 방 사방 벽에 마법사들의 초상화가 잔뜩 걸려 있었다. 그는 급히 문 밖으로 뛰어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당연히 몰라야 할 초상화들 중 아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데다인을 탑에서 떨어뜨린 존재가 누군지 알았던 순간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그 초상화를 떼어 가지고 내려가다 불의 영향이 미치지 않을 만 한 방에 던져놓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세기도 힘들 엄청난 숫자의 모즈들이 케인스윅의 정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후방으로 들어가자.' 던멜은 케인스윅이 있는 쪽의 반대편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3층 높이에서 떨어졌으나, 그는 바닥에서 두 바퀴 굴러 가볍게 일어났다. 하필 착지한 그의 앞에는 검은 털의 베논을 타고 있는 검은 로브의 기사가 버터고 있었다. 창끝에 묻은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던멜은 계단을 뛰어내려오느라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지도 못 하고 싸울 자세를 잡았다. 검은 기사의 창이 던멜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피한 후 바로 반격하려다,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걸 알아챈 검은 기사는 기다려주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베논의 등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은 상태로 검은 기사가 휘두르는 창끝을 막아내던 던멜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묵직한 창끝이 던멜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몸을 틀었고, 창은 가슴을 스쳐 바닥에 박혔다. 그가 마지막 힘을 다해 단검을 집어 던지려는 순간, 그가 목표로 잡았던 검은 기사의 얼굴에 화살 한 자루가 날아와 박했다. 검은 기사의 몸이 뒤로 흐느적거리며 물러났다. 뒤이어 그 자의 어깨, 목, 가슴에 화살이 퍽퍽 박히더니 마지막에는 베논의 이마 중앙을 화살로 꿰뚫었다. 어찌나 뚫는 힘이 강한지 화살 하나가 박힐 때마다 검은 기사와 베논의 몸이 뒤로 들썩거리며 물러나가다 마지막에는 벽에 부딪혔다. 던멜은 들었던 단검을 접고 검은 기사의 죽음을 확인했다. 로브를 적신 피가 바닥까지 흘렀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 서 있는 사람은, 북쪽 숲으로 주민들을 이동시키느라 이 자리에 없어야 할 플로라였다. 그녀도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찢어진 옷 틈으로 허벅지가 한 뼘이나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도 흉터가 진하게 남을 긴 상처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상처를 손바닥으로 지혈하며 말했다. 손바닥에 가려진 왼쪽 눈을 대신한 오른쪽 눈동자가 깜박였다. “.우리의 작전은 완전히 노출되었어요." 배신자가 누구인지 안다면, 그건 당연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와 모두를 탑 안으로 대피시켰어요. 이제 탑을 지키며 싸우는 수밖에 없어요. 남은 병력은 모두 케인스윅 앞으로 집결하고 있어요. 그 곳에서 우리의 마지막 전투가 있을 거예요." 던멜은 죽은 기사를 내려다보다가 검은색 로브를 휙 걷어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그는 로브 안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뒤통수를 뚫은 화살촉을 따라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투구를 굳이 벗겨볼 필요도 없이 그는 인간이었고, 그가 쓴 투구는 던멜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분위기도 기척도 전혀 다른 이들을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와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익셀런의 기사였다. 제이메르는 쉐이든이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죽음에서 살아난 익셀런의 캡틴 웰치와 싸웠다고 말했었다.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그는 '죽음에서 되살아났다.' 라는 표현을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죽어 있는 녀석은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진짜 인간이었고, 이건 분명 익셀런 기사단의 갑옷이었다. 로일이 다가왔다. 그는 어깨 오른쪽 끝에서 가슴의 왼쪽 끝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를 안고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플로라가 놀라 달려가 그의 상처에 손을 대어 마법으로 약간 지혈을 시켰다. "내가 하나 죽였다....... 이제 하나 남았군." 로일이 말했다. '익셀런이다. 확인했나?' 던멜의 수화에 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또 하나의 심은 기사가 베논을 타고 세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던멜과 로일은 동시에 칼을 들고 섰다. 플로라도 손을 치켜들었다. 벽에 박힌 화살 하나가 그녀의 손길을 따라 떠올랐다. 검은 기사가 뭔가 말했다. “당신에게 누구냐고 묻는군요. 제가 대신 대답하겠어요." 플로라는 부상당한 로일을 지키며, 던멜의 옆에 서서 소리쳤다. “이 분들은 아란티아에서 울프 기사단이다!" 그가 또 말했다. “자기 부하 두 사람을 죽여서 놀랍다고 하는군요." 그 때 검은 기사의 왼쪽에서 제이메르가 걸어 나왔다. 젖은 소매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모즈들의 피로만 물들었다면, 피가 계속 흐를 수는 없었다. 그 역시 큰 부상을 옷 속에 감추고 있었다. “저 친구들이 하나씩 죽인 것 같으니 넌 내가 맡으면 되겠군. 그 못생긴 말에서 내려라, 치사하니까." 플로라는 제이메르에게 말하는 검은 기사의 말을 옮겨주었다. “저 기사, 제이메르의 말에 웃는군요. 아, 정말 내리네? 자기 이름이 네이슨이래요. 익셀런의...... 제1기사단이래요. 그런 게 있어요? 지금 론타몬의 익셀런은 그다지 힘이 없다고 들었는데 왜 하늘 산맥에 저런 모습으로.......” 플로라가 묻고 있었지만, 사실 그건 던멜이 묻고 싶었다. 제1기사단이 뭔지, 왜 그들이 여기에 있는지....... 그러나 분명한 건, 이 네이슨이라는 자가,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들처럼 갑오스이 모양만 비슷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익셀런의 기사라는 점이었다. 네이슨이라는 익셀런 기사가 뭐라고 말했고, 제이메르가 거기에 맞받아쳤다. "하아! 한 번도 져 본적이 없어? 그럼 지금 한 번 져보겠군. 그리고 그거 아냐? 네 놈들이 신처럼 떠받는 캡틴 웰치란 녀석도, 지금 저기 서 있는 하얀 늑대들 중 하나한테 졌다. 그러니 너도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뭐라고 맞받아치는 네이슨의 대답에, 제이메르의 인상이 구겨졌다. 플로라는 잠시 두 사람의 대화에 한눈을 팔다가 약간 늦게 던멜에게 설명했다. "웰치는 그냥 범죄자들을 이끄는 리더에 불과했을 뿐, 진파 캡틴은 자기가 모시고 있다는데요?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저는 잘.......” 던멜은 단편적으로 들은 그의 이야기만으로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사실을 깨달았다. 러스킨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이 점은 기사가 원래 익셀런이든 아니든, 그가 모시고 있다는 캡틴이 웰치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째서 익셀런 기사단이 루티아를 공격하고 있는지 였다. 뭐라 말릴 겨를도 없이 제이메르가 네이슨을 공격했다. 네이슨은 긴 창으로 제이메르의 기습을 막아 옆으로 흘리더니 창 손잡이로 제이메르의 몸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제이메르의 몸은 차 올린 낙엽처럼 공중에서 잠깐 멈췄다. 그 다음 네이슨의 창 끝은 정확히 그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갔다. 던멜이 조금만 늦게 단검을 던졌다면 제이메르는 꼬챙이처럼 창에 꿰일 뻔 했다. 다행히 제이메르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걸로 끝났다. 네이슨은 고개를 살짝 틀어 던멜 쪽을 바라보았다. 뒤에 있던 로일이 나서니, 던멜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내가 한다.' 수화로 하지 않아도 로일은 알아들었다. 던멜은 플로라가 죽인 기사가 떨어뜨린 창을 주워 들고, 네이슨 앞에 섰다. 던멜은 쓰러진 제이메르를 위해, 방향을 고쳐 그의 앞에 섰다. 다섯 걸음 앞에 서 있는 그 자는 묵묵히 창끝을 던멜에게 향했다. 검은 로브 안에 모든 것을 감추고 있었으나, 던멜은 그 자가 모즈들을 이끌고 건너와 처음 맞아 싸운 검은 기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바로 루더의 어깨를 찌른 자였고, 모즈들을 지휘해 인질들을 묶은 십자가를 쓰러뜨렸고, 죽은 두 검은 기사의 리더였다. 그리고 그는 강했다. '여기서 죽는다.' 이런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같이 죽는 것 정도겠지만, 그것도 운이 좋아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때 던멜의 오른쪽에 로일이 섰다. 이미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출혈을 했으면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었다. 기절한 줄 알았던 제이메르도 다시 일어나 양손에 각각 한 자루씩의 칼을 들었다.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던멜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부상당하긴 했으나 하얀 늑대라고 알려진 기사 두 명과 쉐이든 대신 임무를 맡고 온 검사 세 명이 조여 들고 있는데도 전혀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네이슨이 천천히 창을 들었다. 그 때 루티아의 서쪽을 감싸는 바위산 쪽에서 진동이 있었다. 그 바위를 타고 뭔가 빠른 물체가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물 정도 되더니 바위 틈새에서 기어 나온 숫자가 점점 더해져 넌서치 동쪽 끝에 이르는 순간에는 백이 넘었다. 그것들은 곧장 탑 쪽으로 달려왔다. 검은 색이 아닌 회색을 띤 털 빛깔을 가진 베논의 무리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자루 양끝에 날이 달린 창을 든, 인간이 아닌 자들이 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손에는 무기도 들려 있었다. 네이슨을 앞에 둔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지금 탑을 향해 돌격해오는 존재가 만약 적이라면, 지금까지의 노력에 상관없이 루티아는 끝장일 것이다. 아니, 화이트비가 깨지는 순간 루티아는 더 이상 루티아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은 이 곳에 있는 모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울 따름이었다. 던멜은 창을 머리 위에서 한 바퀴 휘두른 후 네이슨을 향해 찔러 넣었다. 동시에 네이슨도 던멜을 향해 창을 찔렸다. 두 자루의 창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9권으로 계속) <작가의 말> 트로이, 슈렉2, 스파이더맨2, 화씨9/11 올 여름 날 설레게 한 영화 네 편. 그러나 무엇보다 날 들뜨게 한 건 내 다음 책을 기다려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 그대들을 울프 기사단으로 임명하노라! 2004. 8. 13 8권 집필을 끝낸 열대야 속에서. 도 서 명 : 하얀늑대들9 지 은 이 : 윤현승 펴 낸 이 : 김대식 출 판 사 : 디앤씨미디어 출판년도 : 2004년 9월 30일 <지은이 소개/ 윤현승> 대표작: 다크문(1999). 좋아하는 것들: 반지의 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 스티븐 킹, J.R.R 마틴, 에미넴, 브래드 피트, 디아블로, 사일런트힐, 소울칼리버, 터미네이터2, 파이트 클럽, 슈렉.......홈페이지: http://hadeshome.com 이메일: greathades@hotmail.com <차례> 2. 타냐 (1) 카셀이 남긴 흔적 / 9 (2) 즈비 레미프 / 35 (3) 오파이 / 63 (4) 늑대와 마법사 / 35 (5) 가장 빨리 나는 자 / 105 (6) 논틸의 영역 / 129 (7) 프보에 레미프 / 173 (8) 타냐의 선택 / 201 (9) 하푸 / 217 (10) 어둠 속의 두 사람 / 241 (11)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 / 275 <소개글, 서평> 드래곤을 부르기 위해서는 다섯 명의 전사가 필요하다. 잠을 깨우는 무녀, 가장 빨리 나는 자, 가장 빨리 걷는 자, 털빛 하얀 늑대, 그리고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감각을 빼앗을 하늘 산맥의 숲에서 벌어지는 하얀 늑대들의 외로운 전투! 전설 속에 감춰져야 할 고대의 적들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카셀이야!' (1) 카셀이 남긴 흔적 열두 살의 타냐는 먼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가끔 아빠, 엄마, 네 살 위인 언니, 두 살 아래인 남동생과 이 곳에 소풍 나오면 그녀는 절벽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빠의 경고도 잊고 여기에 서서 치마를 펄럭이며 홀로 춤을 추곤 했다. 언니는 미친 짓이라고 만류했다. 동생은 하고 싶지만 자기는 가벼워서 바람에 날려 절벽에 떨어질 거라고 말했다. 이 곳에 오면 타냐는 자유였다. 동생 말대로 때론 정말 바람에 날려 몸이 뜨기도 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강풍에 등을 떠밀려 하늘을 나는 경험을 했던 그녀는 언제고 또 한 번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잽싸게 팔을 날개처럼 펄럭여 절벽 아래로 활공해 보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다짐은 실천되지 못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동생과 언니는 저택에 갇힌 해 불에 타 죽었다. 그녀는 긴 시간 동안 불 탄 저택에 엎드려 울었고, 이제 자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리에 와 있었다. 그녀는 절벽의 맨 끝으로 갔다. 아빠가 가지 말라고 했던 영역을 수 차례 넘어왔지만, 정말로 이 바람 센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선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발가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은 파도가 검은 바위를 두들기며 하얀 포말이 일어났다. 까마득한 거리였지만, 수면에서 튄 물방울이 얼굴에 닿는 것 같았다. 죽어야지 타냐는 속으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죽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이 일어나는 계치가 될지도 몰랐다. 눈을 감고 뛰어내리면 까만 바닷물에 얼굴을 들이박는 게 아니라, 파란 하늘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팔을 펄럭이는 건 잊지 말아야지. 새처럼, 바람만 잘 타면 날 수 있을 거야. 다들 나보고 무겁다고 했지만, 난 뜰 수 있어....... 타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무서웠다. 찬바람이 송곳처럼 몸을 찌르며, 얼굴이 절벽 아래로 향했다. 그녀는 눈을 떴다. 이 기적을 눈으로 감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발바닥이 바닥에서 떨어지고 몸이 허공으로 던져지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면 안 돼. 힘이 떨어져. 팔을 휘둘러. 침착하게....... 새처럼 우아하게. 난 가벼워.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생각했던 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녀는 팔을 허우적거렸고 그녀의 몸은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녀는 팔을 활짝 편 채로 가만히 있었다. 몸은 떨어지지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검은 파도가 암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곳은 아직도 한참 아래였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유지한다고 나는 것에 도움을 주는게 아니라는 것쯤은 어리지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보기만 하면 눈물이 나을 것 같아 절대보지 않았던 파란 하늘이 그녀의 눈동자를 적셨다. 그녀는 울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울었다. 언니는 남동생보다 많이 우는 울보라고 놀렸다. 이번에야말로 울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새침한 언니의 놀리는 목소리가 귀에 어른거리자 또 눈물이 나왔다. 처음 가진 조랑말이 뱀에 물려 죽었을 때보다 서럽게 울었다. "날고 싶었니?" 그녀의 몸은 천천히 떠올라 다시 벼랑 안 쪽으로 떨어졌다. 뒤에서 다가온 푸른 로브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타냐는 눈물을 잽싸게 훔치고 그를 확 쏘아보았다. "뭐예요, 당신은?" "나는 것을 도와준 건데 방해했나?" 그는 무섭지도 않은지 다리를 천길 낭떠러지에 내려놓고 앉았다. "나는 것에도 규칙이 있단다. 훈련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지. 무턱대고 바람에 몸을 맡기면 인간의 규칙 안에서 보통은 죽지" 그가 정말 나는 법을 가르치고자 그런 말을 늘어놓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타냐도 알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니? 과거는 사람을 키우는 거름이다. 그래서 힘든 일을 이겨낸 사람일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지. 그리고 넌 죽음을 앞에 두고도 너의 의지를 떠올릴 만큼 정신력이 대단한 아이다. 거기에 과거를 이겨낼 힘을 갖추면 너의 정신 상태는 완결무결해지지.” “어린 꼬마라서 어려운 말만 쓰면 넘어갈 줄 알아요? 잘난 척 말아요. 당신이 날 구해줬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난 정말 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면......,올라가면......,” 타냐는 다시 흐느꼈다. “너마저 죽으면 네 부모님과 네 형제들이 살아있었다는 증거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지.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을 발견하고 너를 찾아왔단다. 크림로스 백작은 정말 훌륭한 귀족이었는데.......” “날 괴롭히지 말아요. 못 날아도 좋으니, 여기서 떨어지게 해줘요.” “내게 네가 죽었어야 할 5년을 다오. 너에게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지지 않을 힘을 나누어주마.” “당신은 마법사인가요? 그럼 그냥 내 과거를 지워줘요. 그 다음에 5년을 갖든 마음대로 해요. 이틀이나 엄마의 시체 옆에서 잠들었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 했어요. 엄마는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언니도 동생도 그렇게 해줘야 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시신이 불에 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기억은 잊어버리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그 잔인한 과거도 너의 일부란다. 그 네 사람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그 기억을 잊어버리면, 누가 그들을 기억해 주겠니?” 타냐는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루티아의 마스터 테일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얘기해주겠니?” 마스터 타냐는 바닥에 손을 짚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푸른 안개가 뿜어져 나가 땅에 흡수되고, 땅에서 출렁대던 푸른 힘은 나무를 타고 밤하늘로 뻗어갔다. 숲의 바람과 나무의 향기가 전해주는 작은 속삭임이 그녀의 코와 귀에서 맴돌았다. 다시 뜬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푸른빛을 발하며, 어둠을 뚫고 원래 있어야 할 것과 원래 있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낙엽이 깔린 진흙 속에 새겨진 뚜렷한 발자국을 발견했다. 서둘러 달려간 흔적이었고, 신발의 모양과 크기로 미루어 완전히 일치하는 또 다를 존재가 하늘 산맥에 있지 않는 한 그것은 카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희미한 또 다른 한 사람 분의 발자국이 존재했다. 지금 카셀은 혼자가 아니었다. '누구지?' 타냐는 카셀의 흔적을 쫓아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같이 있지만 흔적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이 동행 때문에 타냐는 추적하는 내내 혼란에 빠져 있었다. 카셀 혼자만의 흔적을 따라 숲을 달리면서 혹시 숲의 마력에 자신의 감각을 빼앗긴 나머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고민해야 했다. 한 시간 전, 타냐와 카셀, 제이메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리고 그 마법사의 등 뒤에서 나타난 거대한 괴물체에게 두 번째 공격을 당했다. 제이메르는 다급한 나머지 몸을 날려 피했다. 타냐도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다 뒤에 있을 카셀을 떠올리고 두 다리를 고정시켰다. 괴물이 입에서 뿜어낸 어둠의 입김은 구슬의 푸른빛을 산사태만큼이나 빠르게 먹어 들어갔다. 그녀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를 공격하기 위해 모아놓은 힘으로 그 어둠을 밀어됐다. 그러나 겨우 방향만 슬쩍 꺾어가게 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을 지나쳐간 어둠이 카셀을 피해가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 카셀을 낚아채어 숲 쪽으로 피하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폭발이 일어났고, 타냐는 그 검은 불길에 휘말려 수풀 속에 떨어졌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목에 건 구슬을 들어올렸다. 빛을 머금은 구슬이 부풀어 올랐다. '봉인을 깨야 하나?' 그녀는 한 순간 망설였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절대 망설일 일이 없을 거라고 오랫동안 믿어왔었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 급작스러워 마음은 자제력을 잃고 머리는 판단력을 잃었다. 그녀는 부풀어 오른 구슬을 머리 위로 들고 주변을 살폈다. 위대한 지혜를 가진 학자는 몇 번 주고받는 대화만으로 상대의 지혜를 측정할 수 있으며, 위대한 기사는 길을 잡는 자세만 보아도 상대의 실력을 알 수 있듯, 위대한 마법사도 위대한 마법사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타냐는 상대가 자기와 같거나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마법사라는 걸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생명체 역시 단순히 병치만 큰 괴물이 아니라 힘을 측정하기 힘든 마법적인 존재였다. 어떻게 보아도 그 둘은 서로를 돕고 있었다. 상상만으로 위협적인 연합이었다. 그러니 그걸 눈앞에서 봐버린 타냐도 자제력을 잃고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구슬의 빛 안에는 괴물도, 마법사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다.' 한 번 깨뜨린 마법의 봉인은 두 번 되돌리지 못한다. 테일드는 스무 살만 넘기면 언제든 그 봉인을 깨뜨려도 좋다고 말했으나,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타냐는 그냥 유지하고 있었다. '타냐, 아무래도 내가 널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 같구나.' 아직 테일드가 타냐의 몸에 봉인을 걸기 전, 타냐의 마법 수업이 끝났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그가 말했다. 타냐는 그 이유를 몰라 물었다. '뭐가 괴물이라는 거죠?' 타냐가 물었다. '넌 네 숨겨진 힘까지 끌어내어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보통 그 정도 경지에 오르려면 나이가 마흔 살은 넘어야 하지. 그런데 넌 열여덟도 안 된, 너무 어린 나이에 그런 힘을 얻었다. 그래, 넌 아픈 과거를 네 의지로 이겨냈고, 그걸 마법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니 더욱 위험하지 그 힘을 한계까지 끌어다 쓰면 네 안의 우물이 말라버려 다시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며, 심할 경우‥‥‥ 죽는단다. ' 테일드는 걱정하며 그녀의 몸에 봉인을 걸기로 결정했다. 타냐 스스로 마법을 억제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도록. 그러나 그는 봉인을 걸기를 마지막까지 주저했고, 한 후에도 후회했다. 그러나 타냐는 봉인의 후유증 따위는 신경도 안썼다. 테일드가 실종된 후 타냐는 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봉인을 풀지 않기로 결심했다. 패를 봉인이 있는 편이 편했다. 아직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으나, 카셀이 걱정되어 불편한 몸으로 일어났다. 폭발한 자리에는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많았다. 그녀는 아까 잠깐 봤던 기억과 직감으로 카셀이 갔을 방향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제이메르가 카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선 급한 건 카셀이었다. 뛰어가며 그녀는 그들을 공격해온 괴물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정도 크기와 그 정도 마법, 생각나는 건 드래곤 뿐이었다. 그 외의 어떤 동물이 그 두 가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타냐는 드래곤이 하늘산맥을 기어 다니며 하늘 산맥의 다른 생물을 공격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드래곤은 엘프들에게는 신이었고, 인간들에게는 성스러운 수호자였다. 데일드와 함께 가넬펄크에서 만나본 드래곤은 인간으로 치면 루티아의 현자였다. 하지만 오늘 밤 그들을 공격해 온 드래곤은 사악한 힘으로 둘러싸인 '괴물' 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인간도 국경 하나 건너면 성격이 달라지고, 바다를 건너면 피부색이 달라지며, 산을 넘으면 쓰는 언어가 달라지는데, 드래곤이라고 모두 현자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애초에 인간은 드래곤이라는 종족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드래곤들이 천 년 동안 살아 온 가넬로크에서도, 그곳 대학이나 도서관의 드래곤 전문가들도, 드래곤에 대한 정보는 극히 일부만 알고 있었다. 드래곤은 알에서 태어난다고 했지만, 알을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정말 알을 낳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데일드는 드래곤에 대해 잘난 척 하고 떠드는 학자에게 알 껍질도 본 적 없는 놈이 드래곤이 난생인지 태생인지 어떻게 아냐고 따졌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타냐역시도 지금 나타난 그 괴물에 대해 드래곤이냐 아니냐를 가려낼 지식도 없었을 뿐더러, 더욱이 드래곤이라면 그게 왜 공격을 해왔는지를 추측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냐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건 괴물 족이 아니라, 그 괴물 이전에 공격해온 검은 로브의 마법사 족이었다. 그 자의 마법은 자신의 것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거울을 보고 마법을 쓴다면 그런 느낌이 날 것이다. '루티아의 마스터다. ' 당장 떠올릴 수 있는 마법사는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 데다인, 루더, 저스헌 그리고 그녀의 스승 테일드 정도였다. 골베인이나 필립, 에틀리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타냐만큼 강한 힘을 쓰지는 못했다. 그들이 마스터일 수 있는 이유는 힘이 아닌 다른 족이었으므로, 타냐는 자연스럽게 나머지 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식으로 저도 모르게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보여주지 않은 얼굴을 가상으로 그려보다가 그만 두었다. 그녀는 식구처럼 편하게 지낸 루티아의 마스터 중 하나가 자기를 공격해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카셀을 찾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카셀의 흔적이 나타났다. 타냐는 당황했다. 흔적이 하나뿐이었다. 하늘산맥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카셀이 괴물을 보고 정신이 나간 나머지, 혼자서 산 속을 전력질주해서 달리고 있다? 아란터아에서 본 그는 가끔 무모함을 발취하긴 하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런 엉뚱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카셀을 구해준 걸 봤던게 착각이라 해도, 그런 정황을 생각해 볼 때 카셀의 옆에는 그를 끌고 가는 제 3의 인물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자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거기에 또 기대하지 않은 흔적이 겹쳐 있었다. 아까 그 괴물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발자국이었다. 손으로 길이를 패보니, 이 정도 크기라면 10년 전 죽은 가넬로크의 드래곤보다 더 크다는 계산이었다. '그 놈이 카셀을 따라가고 있어?' 카셀은 달아나고 있고, 드래곤으로 추측되는 괴물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데, 카셀을 데리고 있을 것 같은 동행인의 흔적은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흔적을 따라가는 추적은 무척 피곤했다. 겨우 제 3자의 흔적을 발견한 후에야 타냐는 안도했다. 발자국의 기로 미루어 카셀보다 키가 큰 자였고, 몸무게도 조금 더 나갔다. 그러나 진흙 바닥을 벗어나는 순간 그의 발자국은 또 사라졌다. 이 발자국을 용케 찾아낸 자신이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만약 이자가 카셀과 함께가 아니라 혼자 달아나고 있다면 절대 추적할 수없을 것이다. 진흙 바닥 위에는 역시 깊숙하게 괴물의 발자국이 패여 있었다. 한 뼘이 조금 안 되는 발가락 부분이었고, 패인 뒤로 진흙이 잔뜩 밀러나 있었다. 보폭도 아까보다 두 배나 늘어나 있는 걸로 미루어 놈은 달러고 있었다. 아마 이 정도 보폭을 만드는 속력이라면, 그 다른 한 사람은 몰라도 카셀의 걸음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괴물체가 달려 내려가며 나무를 모조리 밀어 넘어뜨리거나 어깨로 부셔버려 자신의 병치만한 길을 내준 덕에 따라가기는 쉬웠으나, 불안감은 더 커줬다. 카셀의 흔적은 산을 내려가는 방향으로 나 있었다. 숲의 경사가 급해질수록 카셀의 발자국은 더욱 또렷해졌고, 괴물의 발자국도 그 뒤를 따라갔다. 간혹 그가 미끄러지면서 수십 년 동안 쌓인 낙엽을 엉덩이로 파낸 흔적도 있었다. 넘어지면서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닥치는 대로 그 위에 손바닥 자국을 내놓기도 했다. 경사를 내려가고 있다는 정황에서 타냐는 두 가지 가정을 세웠다. 앞다리에 비해 뒷다리가 월등히 큰 드래곤에게 불리한 도주로를 택했거나, 원래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이거나....... 둘 다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지만, 산을 내려가면 뭐가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타냐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땅에서 거인의 손가락처럼 튀어나온 나무뿌리 위로 뛰어올라갔다. 디디고 선 뿌리의 크기만도 두 아름은 족히 되는 이 나무는, 펼치고 서 있는 가지가 보이는 시야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대들보 같았다. 이 나무 밑에서 손톱만한 소인 족이 살고 있다면 모험심 많은 여행자가 종족 내부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나무가 하늘이라고 과학자들이 규정을 내릴 만했다. 그 나무를 자기 집으로 삼고 있는 귀가 머리보다 더 큰 다람쥐가 경계심 많은 까만 눈동자를 한 쪽만 구멍 바깥으로 내밀고 힐끔힐끔 타냐를 쳐다보았다. 타냐는 뿌리와 뿌리 사이를 소리 없이 건너 뛰어 그 나무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거대한 나무 밑으로 갔다. 거기에는 괴물이 발톱으로 할퀴고 지나간 흡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무 위에는 풀을 뜯어먹고 사는 초식 구렁이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하늘 산맥에는 사람을 잡아먹을 만한 육식 동물조차 없었다. 그런 곳에 이런 집채만 한 괴물은 있을 리가 없었다. 타냐는 스쳐 달려가는 것만으로 온갖 귀하고 웅장한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는 이 괴물의 정체가 드래곤이라고 확신했다. 이 괴물을 멍청한 괴물이 아닌, 지능이 있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이 추격전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놈은 카셀을 추적하고 있었고, 처음 세 사람을 공격해온 마법사와 드래곤의 공격 목표도 카셀이었다. 결국 루티아를 도우러 가는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 캡틴을 공격했다는 건데, 고작 한 달 전에 캡틴이 된 카셀의 정체를 아는 자가 하늘 산맥에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데다인조차 하얀 늑대들에게 캡틴이 없다고 알고 있었고, 심지어 마스터 퀘이언도 타냐보다 카셀의 얼굴을 늦게 봤다. 타냐는 혼란에 빠겼다. 그리고 이 흔적의 끝에 카셀의 시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실 스물여섯이라 봐야 마법사의 세계에서는 소녀를 갓 벗어난 어린 나이에 속했다. 루티아에서는 스물다섯이 넘어야 겨우 케인스윅 선생 자리를 내주고, 거기에서 10년 정도 배움을 쌓으면 ‘마법사’라는 칭호로 불릴 자격이 생기며 거기에서 루티아노의 동의를 얻으면 비로소 마스터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대륙 전체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그 자리에, 타냐는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올랐다. 테일드의 수제자라는 것과 별도로, 루티아노는 전원 일치로 그녀를 인정했다. 그녀는 마스터의 칭호가 생기자마자, 아크랜드 각 나라에 퍼져있는 루티아의 지부를 관장한다는 핑계로 실종된 스승을 찾는 여행을 떠났다. 마스터들도 그녀의 여행을 인정해주었다. 은퇴 할 나이가 지난 러스킨이 다시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를 앉는 것은 본인부터 싫어했다. 다음 마스터로 지목되는 데다인과 골베인은 적어도 이십년 안에 그 자리를 맡는 건 거절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결국 다른 그랜드 마스터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보다 원래 그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을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루티아노는 결정했다. 그러니 그녀의 여행은 모두 환영했다. 마스터 테일드를 찾아 헤매는 동안 타냐는 수없이 많은 모험을 겪었다. 때로 자신이 마법사라고 착각하는 사기꾼에게 진짜 마법사의 공포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찾아가 복수를 했으며, 아직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해 노예로 살아가는 소년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소작농들의 정당한 권리도 채워주지 않는 지방 영주들을 수없이 보았고, 타냐에게 잘 보여 루티아로 입성하고자 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그 전혀 다른 두 가지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배려하지 않는 욕심. 남을 챙겨주는 학자를 찾는 일은 영주의 백성들에게 곡간의 곡식을 퍼주는 귀족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들은 언제나 입을 앞세웠고, 욕심을 앞세웠지만 실천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타냐는 행동하지 않는 웅변가를 혐오했고, 배려하지 않는 귀족을 증오했다. 그러다가 타냐는 루티아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행지로 당연한 듯 아란터아를 택했고, 카셀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놀랍게도 행동하는 웅변가였다. 그에게는 공명심이 없었다. 욕심은 있었지만 이기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희생할 줄 아는 용기를 가졌다. 그건 한 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말한다. 옷 입고 걸어 다녀야 할 길에 옷을 벗고 다니면 미친 짓이라 말하고, 남들이 바로 걸을 때 혼자 뒤로 걸으면 그것 또한 미친 것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말하며, 이기적으로 욕심을 내세워야 할 일에 희생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말한다. 도덕적 이상은 모두 미친 짓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기가 하지 않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미친 거다. 카셀은 그런 것들에 덧붙여, 외부인들에게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 받는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부하들을 리드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팀의 명예'를 소중히 한 나머지 자기 목숨을 내던졌고, 부하를 리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먼저 나섰다. 재미있는 건 그가 울프 기사단에 걸 맞는 실력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 역시 미친 짓이었다. 화이트 게이트 앞으로 돌진해 오는 검은 갑옷의 기사단을 보고 나디움의 모든 기사들은 그들과 맞아 싸워야 했다. 그러나 카셀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웰치는 스스로 멈줬다고 말하나, 그것이 순수하게 자기 의지였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타냐는 쉐이든 울프를 만나는 순간 처음으로 남자라는 존재를 멋있다라고 생각했다. 사실 루터아의 마스터들이란 대체로 노인들이고, 상대적으로 젊은 데일드의 경우는 남자로 여기지 않았다. 또 늙긴 했으나, 그런 대단한 남자들 들에 있다 보니 자연히 평범한 남자들에는 전혀 눈이 가지 않게 되었다.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 그녀는 혼자 멋진 남자란 어떤 걸까 괜한 공상에 빠지곤 했었다. 그런데 쉐이든은 그런 공상에서 나온 거의 모든 요건을 갖춘 남자였다. 카셀? 그는 그 모든 요건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돌격해오는 익셀런 기사단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던 그를 보고 멋지다고 생각을 해버린 나머지 그 미친 짓에 합류해버렸다. 그리고 점점 카셀이라는 남자에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만나는 인간마다분석을 해대는 안 좋은 버릇이 발동되면서 배려할 줄 아는 귀족, 행동하는 웅변가라는 현실적으로 절대 나타나기 힘든 인간 유형이 나타나는가를 지켜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한참 경사를 내려가다가 길을 멈췄다. 계속 전진만 하던 드래곤의 발자국이 처음으로 머뭇거린 이상한 흔적이었다. 드래곤은 한 자리에서 맴돌았으며 심지어 뒷걸음질치기도 했다. 제이메르가 레인저라고 했던가? 그를 같이 데려왔어야 했군, 하지만 그라고 본 적 없는 드래곤의 흔적을 분석할 수 있었을까? 타냐는 혼자서 그 흔적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렀다. 그녀는 괴물의 발자국 너머에서 또 다른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것은 카셀과 함께 있어야 했지만 여태까지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진흙땅이 아닌 곳에서 나타나는 그자의 두 번째 흔적이었다. 카셀의 발자국은 다른 곳까지 이어져 커다란 나무 뒤에서 멈췄다. 타냐는 현재까지의 상황과 흔적, 그리고 지금 이 흔적을 정리해보았다. 누군가 드래곤과 마법사의 공격 속에서 카셀을 구해됐다. 그리고 그 자는 카셀을 하늘 산맥의 남쪽, 산을 내려가는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고, 드래곤은 그 두 사람을 쫓고 있다. 그러고 타냐가 그 뒤를 따라가는 형상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드래곤은 멈췄다. 왜? 놈이 카셀의 흔적을 놓친 나머지 맴돌았거나, 어떤 다른 이유에서 혼자 멈춘 거라면 뒷걸음질치는 발자국과 발뒤꿈치 부분이 깊게 파인 흔적은 나을 수 없었다. 카셀은 나무 뒤에 숨었는데, 카셀의 동행인은 내내 보이지 않던 흔적을 보이며 정면으로 나타났다. 두 흔적이 만나는 곳에서 타냐는 이해할 수 없는 추리를 해냈다. 그 둘은 여기에서 싸웠다. 아니 좀 더 세밀한 분석을 하자면, 드래곤의 전진을 막아냈다. 멈추고 뒷걸음질치기는 했으나, 드래곤은 달아나지 않았다. 이것을 전투의 흔적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여기에서 잠시 머물렀던 그들은 다시 처음 시작된 추격전을 시작했다. 갑자기 타냐는 자기들을 공격해온 루티아의 마법사가 누군지 보다, 카셀을 데리고 달아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가 더 궁금해졌다. 아니, 그보다 이 자가 카셀을 구해준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무의 숫자가 줄고 사위가 점점 밝아지며 흔적은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그 쪽에 신경을 덜 쓸 수 있게 된 타냐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빨라지고 빨라져서 더 이상 두 다리가 그녀의 의지를 감당하지 못 하게 되면서 두 손이 바닥에 닿고 두 다리는 뒤로 뻗어 옷 대신 하얀 털이 그녀의 몸을 뒤덮었다. 그녀는 늑대가 되어 달렸다. 주위의 나무들이 옆으로 흘러갔고, 멍청한 하늘 산맥의 노루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그녀의 옆을 비슷한 속도로 따라왔다. 그러나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자, 결국 뒤쳐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했다. 뭔가 앞에 있었다. 그녀는 즉시 걸음을 세웠다. 그녀를 뒤따라오던 바람이 스쳐가며 털을 흐트러뜨렸다. 그녀의 앞에는 검은 로브를 입고 검은 털의 베논을 타고 있는 기사가 길을 박고 있었다. 유령처럼 음산한 기운이 그 자의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카구아?' 그녀가 아직 아크랜드를 배회하기 전, 루티아에서는 한 가지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소문의 정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정은 털의 베논을 탄 유령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카구아라고 불렀다. 타냐는 먼발치에서 사라져가는 그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봐야겠다며 쫓아가 봤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상한 일이 많이?벌어지는 하늘 산맥이라 하더라도 모든 일은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믿는 그녀도, 카구아가 정말유령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꽤 오래 전이라 잊고 있었던 그것이 아무런 개연성 없이 나타나니 타냐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우선 기다리기로 했다. 카구아의 정체가 뭔지는 오래 전부터 풀고 싶었던 수수께끼였으나, 지금은 그걸 풀 떼가 아니었다. 카구아는 언제나 나타나자마자 모습만 슬쩍 보여주고 사라지니 또 그래 주길 기대하며, 그녀는 기다렸다. 만에 하나 그것이 공격해 오는 것에 대비해 자세도 낮췄다. 입에서 새나오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어딘지 겁에 질린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 같았다. 카구아는 한참이나 타냐를 보아보더니 느긋하게 베논의 입에 건 고배를 잡아당겨 물러나기 시작했다. 타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 검은 기사가 사라진 방향에서 창 한 자루가 날아와 타냐의 발 바로 앞에 박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빼지 많았다면 앞발이 창에 동강날 뻔했다. 그녀는 젖힌 몸을 옆으로 뺐다. 늑대의 이마 앞에서 빛을 발한 마법의 기운이 나무 사이로 흘러가 보이지도 않는 표적에게 정확히 박했다. 새벽이 가까워겼으나 아직은 어두운 술 한쪽이 번쩍였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기사의 모습이 빛에 반사되어 분명히 보였다. 생각보다 휠씬 먼 거리였다. 저기에서 여기까지 이 정도 속도로 이 정도로 정확하게 창을 던졌다는 게 믿어지지 많았다. 게다가 그 자는 타냐의 마법을 정면으로 맞았으나, 전혀 피해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대로 상반신이 얼어붙어 즉사할 수도 있는 마법이었는데도! 그 자는 베논을 몰아 타냐에게 정면으로 달려왔다. 전력 질주하는 자신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타냐는 시간을 벌기 위해 바닥에 박힌 창을 물어 옆으로 내던져버리고 숲 속으로 달려갔다. 달아나는 와중에도 그녀는 추적해 왔던 방향을 잡았다. 뒤에서 그녀를 쫓는 베논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무래도 숲 속에서 달리는 거라면 베논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자는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곧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더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심하지 않고 계속 달리다가 곧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추위를 기울이며 베논의 기척이 가까이 있나 살폈다. 다행히 그 자를 접하는 순간 가겼던 끔적한 기운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카셀의 흔적은 금방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흔적은 없어졌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점점 초조해 지는 마음에 세세한 관찰 따위는 생략한 채 카셀의 흔적을 쫓아 달렸다. 이제 숲에 나무도 비교적 드물어 덩치 큰 추격자에게 유리하고, 평지라 드래곤의 신체 구조에 불리한 경사로를 따라 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드래곤의 흔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추격을 멈춘 것이었다. 타냐는 문득 드래곤이 추격을 멈춘 자리가 카구아가 나타난 자리와 일치하지 않았나 의심해 보았다. 카구아가 그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의외로 나타난 존재라 추리에 끼워 넣으니 단서가 늘었다기보다 혼란만 가중시켰다. 카구아로부터 벗어난 자리에서 얼마 달리지 않고 그녀는 멈췄다. 괴물의 흔적이 사라진 대신 다른 흔적들이 늘어났다. 숫자는 열 이상, 최근 난 흔적이었으며 그 흔적의 주인공들은 근처에 있었다. 늑대로 변하면서 급격히 밝아진 청각으로 그들의 위치까지 파악이 되었다. 그러나 상대도 청각과 시각이 꽤 좋았던지 타냐의 접근을 알아채고 즉시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몰려왔다. 타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구슬을 손에 쥐었다. 푸른빛이 옅게 그녀의 몸 주의를 에워쌌다. 어지간한 마법이라면 튕겨내 버릴 것이고, 어지간한 칼이나 화살이라면 이 푸른 안개에 닿는 순간 부러질 것이다. 곧 타냐의 주위로 다가온 존재가,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귀 쪽으로 길게 찢어진 눈매에 담긴 인형처럼 동그란 눈동자 수십 개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늘어진 긴 귀에 하얀 피부, 녹색과 푸른색을 섞어놓은 듯한 짙은 색의 머리카락이 나무 사이에 줄을 이었다. 등 뒤에 달린 하얀 깃털의 날개는 호흡과 같은 패턴으로 들썩였다. 하늘 산맥의 엘프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아그 요에 모루 요에브 모에들 우 바 요에, 우그 와자이브트.] 남의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종족이라고는 해도, 입을 열면 노래를 하듯 부드럽게 말을 하는 건네는 게 그들이었다. 그런걸 고려하자면 이건 굳이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경고나 위협을 가한다는 말투라는 걸 알았다. 열개가 넘는 창과 활을 주위에 두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으니 그녀는 손을 들어보였다. 그들은 그런 작은 움직임에도 창을 움찔거리며 공격할 태세였다. 기습이나 포위 공격도 가능했던 상황에서 굳이 위협의 말을 전달했다는 건 당장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순한 엘프들의 천성을 믿고, 손을 든 채로 이들이 했던 말을 조용히 곱씹어보았다. 엘프들의 쓰는 고대어는 골베인에게 기본만 배워 듣기는 어느 정도 능했으나, 말하기는 미숙했다. 그나마 지금은 두 가지 모두 오래 사용하지 않아 자신 없었다. 우선 마지막에 했던 두 단어만은 확실하게 들렸다. '우코는 '엘프'라는 뜻으로 하늘 산맥의 엘프들이 '인간'을 칭하는 단어였고, '와자이브르는 '마법사'였다. 그들은 타냐가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타냐가 일부러 못들은 척 하고 자신의 귀를 가리키자, 처음에 협박을 가했던 엘프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타냐는 그들이 했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말을 하면 죽이겠다, 인간 마법사.'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려고 열었던 입을 도로 닫았다 [고호우 무.]1 그것은 아는 말이었다. '따라와라.' 말을 하면 죽이겠다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극도로 행동에 유의하며, 그녀는 뒤를 따라갔다. 엘프를 따라 걷는 그녀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공격해 왔고,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생명체가 뒤따라왔으며 사라진 카셀의 흔적을 따라갔더니 루티아에 나타나는 유령이 공격해왔다. 그리고 그 공격에서 벗어났더니 엘프들이 나왔다? 나무 사이로 뜨는 해를 바라보며 그녀는 적어도 한 가지 의문은 풀어냈다. 드래곤이 추격을 멈춘 건 이 곳이 엘프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쫓아오던 카구아가 멈춘 것도 같은 맥락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수많은 의문 중 가장 핵심은 되려 엘프들의 출현 때문에 얽혔다. 엘프들은 신발을 신지 않지만, 진흙에 찍힌 발자국은 분명 카셀 것보다 조금 더 큰 신발이었다. 신발을 신은 엘프가 아닌 이상에야 카셀을 구해준 건 인간이었고, 그 인간은 카셀을 엘프들의 방으로 안내했다. 대체 누가? (2) 즈비 레미프 엘프들은 인간을 엘프라는 뜻의 우그라고 불렀고, 자기들을 인간이라는 뜻의 레미프 또는 레미 쿠아프라고 칭했다. 하늘 산맥에 사는 레미프에 대한 이야기는 스승에게 많이 들었지만 만날 일이 없을 거라며 기억해두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래도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을 조합해보면, 이들은 하늘 산맥의 레미프들 중에서도 '즈비' 족이었다. 하얀 얼굴에 인간보다 긴 얼굴, 긴 다리에 긴 팔, 큰 키를 가진 호리호리한 체형이고, 하얀 깃털을 가진 날개는 즈비 족의 가장 대표적인 외향적 묘사였다. 그리고 그런 특징들은 타냐를 포위하여 데려가는 그들과 일치했다. 반면 프보에 레미프들은 검은 얼굴에 전통적으로 머리를 길게 길렀다. 그러나 프보에 레미프들을 본 인간은 극히 드물어 아직 그들의 외모를 확실하게 묘사한 문서나 증언은 없었다. 이 즈비 레미프들은 타냐의 주위를 포위한 채 걸었다. 묶지는 않았으되, 그녀의 입만 노려보며 하품이라도 하려 들면 당장 찌를 준비를 했다. 그들의 선한 눈에 보이는 살기 비슷한 감정에 타나는 당혹스러웠다. 테일드의 설명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몇 레미프들은 언제나 조용했으며, 폭력을 싫어해 이런 식으로 군대처럼 몰려다니지도 않았다. 그들은 갑옷을 입거나 날카로운 무기를 쓰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들은 말로 전쟁이 벌어져도 날이 없는 둔탁한 무기를 써서 뼈를 부러뜨리는 게 그들이 아는 가장 잔인한 싸움이었다. 이렇게 창을 들이댈 정도로 과격한 종족이 아니었다. '좋지 않은 일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루티아가 더욱 걱정이 되었다. 마을에 접어들며, 레미프들이 주로 쓰는 양식의 집이 보였다. 인간들이 쓰는 건축 자재처럼 편평하게 다듬지 않아 울퉁불퉁한 나무판자나, 곁가지만 쳐낸 굵은 나뭇가지 등을 밧줄로 엮은 움막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 중 상당수는 나무 위에 지어져 있었다. 산맥 깊숙한 숲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곳을 덮고 있는 나무들도 워낙 커서 집을 얼릴 만큼 충분히 굵은 나뭇가지들도 많았다. 나무 위의 집을 올려다보니,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있는 것 같지만 성의 첨탑을 그리는 구조와 비슷했다. 제일 높은 나무의 제일 높은 집은 밑에서 거의 보이지 않은 탓에 그걸 보려면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야 했다. 시선을 위로하면 절로 숲에 가린 하늘을 만나게 되고, 나뭇잎사이로 내리쬐는 빛의 줄기를 얼굴로 맞이하면 절로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곳은 숲 전체가 레미프의 집을 기둥 삼은 웅장한 성채였다. 감정을 느끼는 방식은 서로 다를 게 당연하겠지만,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식으로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극한 우연으로 저런 배치를 가진다는 건 더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나무 위의 집에는 날개를 파닥이며 매달려 있는 꼬마 레미프들도 있었다. 아직 어릴 때는 날개를 써서 날수 있지만, 쉰 살이 넘어 성인이 되면 점점 늘어나는 몸무게를 날개의 힘이 이기지 못 해 날지 못한다고 했다. 쉰 살이 겨우 성인의 문턱이라면, 레미프들의 수명은 어찌 되는지 궁금해졌다. 드래곤만큼 오래 산다는 소문도 있고, 인간보다 조금 더 오래 살 뿐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실제로 어찌 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굳이 알아볼 욕심도 없었다. 나무와 집으로 만들어진 성채를 감싸는 외곽에는 뽀족하게 깎은 목제 창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한 반투명한 그물들이 목제 창이 없는 부분에 걸려 있었다. 작은 새들이 몇 마리 그물에 걸려 힘없이 날갯짓을 하곤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그 그물에 걸린 새나 동물을 떼고 있는 레미프들도 있었다. 그렇게 잡은 새를 놔주는 걸 보니 동물을 잡기 위한 그물은 아닌 것 같고, 뭔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어책으로 보였다. 조화로운 마을 입구의 외관을 해치는 것으로 미루어 최근 만들어진 함정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레미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타냐지만, 이 살벌한 분위기는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녀 주위로 몰려드는 병사들이 많아졌다. 귀여운 작은 꼬마 레미프들이 허공에 떠서 다가오니 어른들이 강압적으로 그들을 막았다. 바람 한 번 불면 눈알이 톡 빠져 나올 것 같은 크고 호기심 가득한 눈에 눈물이 한 모금 정도 맺혔다. 얼결에 심하게 혼낸 병사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레미프들은 그녀를 마을 중앙의 동그란 움막으로 안내했다. 움막 앞의 나무문은 두 개의 친 기둥에 경첩을 걸고 매달려 있었고, 나무 기둥에는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드래곤이 역동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 입을 벌린 게 은근히 협박을 가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그 기둥은 깎아서 마법 지팡이로 써도 될 만큼 스스로 마법의 기운을 뿌렸다. 무게로 따져보면 거의 금과 같은 값을 치를 만한 나무가 여기에서는 기둥으로 볼 수 있을 만큼 흔한 건지, 아니면 정말 문을 통과하는 사람의 기를 죽이는 도구인지 타냐는 궁금했다. 너무 많은 레미프 덕에 카셀의 흔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예민한 육감은 카셀이 여기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움막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넓고 시원했다. 둥그런 방에 나이 든 레미프들이 짚으로 만든 방석에 앉아있었고, 창을 든 경비들이 그녀의 등 뒤에 싫다. 가장 중앙에 있는 등이 굽고 날개는 거의 보이지 않게 쪼그라든 늙은 레미프가 말했다. 타냐는 조금씩 고대어에 익숙해지며 그들의 말을 듬성듬성 알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부분에서는 단어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후아루 룹 앙트 요에 주드 요에드. (이 룹은 내버려두고 너희들은 구드 오에드 하라.)] [재드, 아에 홉‥‥‥‥ (하지만 홉트시여‥‥‥‥)1 [투 포드 워비. 우그 와자아브트 시포드 우럽 도에클 무. (걱정 마라. 우그의 와자이브트는 날 건드리지 조차 못하니까)] 대강 거기까지 알아들은 타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만의 거친 음성이 조용한 움막 안을 울렸다. “루티아의 마법사를 상대로 함부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레미프들의 홉트시여.” 말을 하면 찌르겠다고 경했던 경비가 창을 치켜세웠다. 동시에 타냐는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경비들을 획 노려보았다. 그 순간 창 네 자루가 두 동강 나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앉아있는 늙은 레미프들이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고, 창이 깨진 경비들은 당장 바깥의 동료들을 불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커다란 목소리로 레미프들의 왕이 소리쳤다. [자흣쿠! (조용히 해라)] 움막 안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병사들도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다. [자이 지아트 퍼드 오에드 옥 루부! (내가 오에드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당황한 경비들은 늙은 레미프를 향해 쓸데없는 저항을 하다가 결국 물러났다. 왕은 키도 작고 주름 때문에 얼굴 형체를 알아블 수 없을 정도로 늙었지만, 그 기세는 젊은 왕과 다를 바 없었다. "고대어를 할 줄 아나 보군, 루터아의 마법사?" 갑자기 그 쪽에서 아크랜드의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순간 놀랐으나, 그녀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녀의 얼굴은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어 표정을 숨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목소리까지 느긋한 척 하려니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아듣는 것만 어느 정도. 대화는 미숙합니다. " "그럼 내가 인간의 말을 하는 게 낫겠군." 그는 어느 지방 사투리를 쓴다는 것 정도의 묘한 억양만 있을 뿐, 거의 완벽한 아크랜드 공용어를 구사했다. 타냐는 잠시 공백을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우선 경비들을 놀라게 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경비들에게 잡혀서 온 게 아니라, 스스로 이 자리에 섰음을 간접적으로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 "이런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보여주려 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야, 우그 와자이브트." 별로 힘들지 않을 거라 봅니다. 타냐의 말에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앞에서 그런 발을 할 수 있는 우그는 아란티아의 홉트나,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정도지.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타냐 " "내 이름은 후딘틴, 라든의 홉트다. " 라든은 레미프들의 나라들 중 루티아와 가장 가까워 교류가 가장 활발한 나라였다. 홉트는 그들 말로 '왕' 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인간들이 쓰는 왕이라는 단어와 미묘하게 다르다. 오히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쪽에 더 가까운 의미였다. 그는 레미프들을 대표할 뿐, 지배하지는 않는다. 또 마을의 중대 사안을 결정하나, 권력을 갖지는 않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런 걸로는 영광이라 하지 않지. 그럼 어째서 내 아이들에게 잡혀왔는가?" "아시지 않습니까?" "짧게 해도 될 대화를 굳이 늘리고 싶은 게냐? 네가 먼저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느냐?" 예상대로 그는 ‘나의 영역’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영역'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침범한 게 아니라, 유도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호위하고 있는 중요한 사람.......아니, 우그 한 명이 이 쪽으로 잡혀 왔습니다. 잡혀온 것인지 구출된 것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그의 흔적이 여길 향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를 다시 데려가야겠습니다.” “성급한 건 거의 모든 우그들의 특징이지, 타냐. 그러나 서둘지 말게. 운명이 그를 이 곳으로 인도했다면, 그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있어서지, 강제로 끌려온 게 아니야.” “그와 저는 이 곳에서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루티아에 커다란 위험이 닥쳤고, 거기에는 그의 힘이 필요합니다. 늦으면.......” [차훗쿠, 타냐.] 후딘틴은 부드럽게 말을 이으며, 늙고 힘없는 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그대의 힘이 설사 내 우위에 선다 하더라도 이 방 안은 나의 영역이고, 그대가 아무리 급하다 해도 여기에 있는 이상 나의 시단 안에서 움직여 줘야지. 루티아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했나? 그것은 그 쪽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게야. 왜냐면 루티아는 루티아 자신의 힘에 의해 멸망할 처지에 놓여 있으니까.” 그가 내민 손은 타냐에게서 열 걸음은 더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그 자의 손이 직접 몸을 훑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손이 타냐의 머리를 인형처럼 쥐고, 다리를 쓰다듬어 모았고, 그녀의 가냘픈 두 팔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침착해라, 타냐.' 그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속으로 소리쳤다. 기본적으로 레미프들은 인간보다 육체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 강했다. 루티아를 제외하면, 아크랜드의 어떤 나라도 제대로 된 마법사를 열 이상 데리고 있지 않다. 그러나 레미프들은 셋 중 하나가 마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마법과 인간이 생각하는 마법은 체계가 다르니,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완전한 우위에 서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레미프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법사가 왕, 즉 홉트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힘을 그가 보일 수 있는 건 당연했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루티아 내부의 힘?” 그녀는 후딘틴이 단어의 착오를 일으켜 잘못 말한 것이길 바라며 물었다. “그렇다. 그리고 그 엄청난 힘은 우리까지 누르려 하고 있지. 솔직히 말해 나마저도 그 힘을 겨우 버틸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 네 말대로야. 루티아의 마스터를 상대로라면 방심할 수는 없지. 바로 그 힘이 모즈들과 함께 우리들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타냐는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후딘틴의 보이지 않는 힘은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주는 것 같았지만, 지금 손가락 하나라도 까닥이면 후딘틴은 그녀의 목을 간단히 부러뜨려버릴 것 같았다. 여기에서는 어설픈 저항을 하기보다 그에게 복종하는 족이 나았다. “모즈? 지금 루터아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레미프들도 공격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데다인은 모즈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그냥 괴물이라고 칭했었다. “그렇다네, 그리고 그들을 루티아로 끌어들이는 건 루터아의 마법사야." “말도 안 됩니다!” 타냐는 저도 모르게 힘을 쓰려다, 냉정하게 공중에 떠오르는 구슬을 도로 가슴 쪽으로 되돌렸다. 후딘틴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그의 미소 속에 담겨 있는 의심을 읽어냈다. 레프들은 눈이 커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레미프들이 쓰는 고대어에는 거짓말 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마스터 골베인이 그녀에게 고대어를 가르칠 때 제일 먼저 알려준 상식 중 하나였다. “혹시 그 마법사가 저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타냐가 물었다. “우리들이 처한 위험을 생각하자면, 경비들이 자네를 살려서 데리고 온 것도 살생을 싫어하는 우리 천성 덕분이지.” 타냐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여러 늙은 레미프들을 훑어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오해를 어떻게 하면 풀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처지를 이해해주고, 지금 자신이 놓인 상황을 이해한다면, 얘기는 쉽게 진행시킬 수 있지. 우선 그 구슬을 내려놓게.” 그것은 타냐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맡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생명의 한쪽은 후딘틴이 쥐고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타냐는 목걸이를 풀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걸이에 걸린 구슬을 쥐어 후딘틴 앞으로 가져갔다. 그는 구슬을 자신의 발 앞에 놓인 하얀 쿠션위에 내려놓더니, 말했다. “뒤를 보게." 어깨너비가 타냐보다 두 배는 족히 될 레미프가 서 있었다. 날개는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칼로 찔러도 안 들어갈 것 같은 탄탄한 근육은 인간과 비교할 게 못 되었다. 그 자는 반만 뜬 눈으로 타냐를 보더니, 후딘틴에게 고대어로 뭐라고 말했다. 후딘틴은 곧 타냐에게 말했다. “그는 이 곳 라든의 군대를 지휘하는 판커틴이다. 따라가라. 다시 오면 이 구슬을 돌려주겠다.” 판커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타냐를 안내했다. 그녀는 판커틴의 넓은 등만 보며 따라가다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숲 거의 전체가 이 나라, 즉 라든의 영역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이 곳은 그 중에서도 중심가임에 분명했다. 지나가는 레미프들도 많고, 집도 다른 곳에 비해 밀집해 있었다. 나무가 없는 법은 곳에서 많은 레미프들이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활 쏘는 연습을 하거나 전투 훈련을 받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여자나 꼬마들이 타냐에게 몰래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또 그런 레미프들 대부분은 판커틴이 무서워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 했다. 판커턴이 안내한 곳은 마을 내에서 유일하게 돌로 지어진 집이었다. 그는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시나비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판커린은 문을 열어주었다. 무섭게 쏘아보는 시선은 무언의 경고였다. 안은 기름 등불이 두 개만 켜 있고 창문은 없어 무척 어두웠다. 벽에는 장식물이나 가구 하나 없이 깨끗했고, 바닥에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나무의 형태로 보이게 그림이 수놓아진 양탄자가 늘어져 있었다. 그 끝에 레미프가 한 명 앉아있었다. 판커틴은 타냐를 안으로 들여보낸 후 나가버렸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쉬기 힘든 위압감의 레미프였다. 그녀는 시선을 양탄자 끝으로 돌렸다. 한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옅은 색 머리카락은 즈비 족으로서는 드물게도 작게 솟은 가슴과 배를 덮을 정토로 길었고, 등불 아래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 윤곽은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그 여자 레미프는 손을 내밀어 타냐에게 말했다. [즈딥트 드루부, 타냐] 그리고 즉시 약간 어색한, 그러나 완벽한 아크랜드의 언어로 이어 말했다. “거기 앞에 서세요, 타냐. 제 이름은 시나비아에요.” 듣는 사람이 남자라면 그 목소리만으로 유혹 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신의 거친 목소리에 비교하고 싶지 않았으나, 쉽게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옷을 벗어요." 타냐는 이 레미프가 제대로 된 단어를 선택해서 말한 건가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옷을?” 시나비아는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허락을 받지 않는 실례를 범했군요. 예, 당신들 우그들도 우리와 거의 신체 조건이 같고, 수치심도 같지요. 하지만 염려 마세요. 이 방은 제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들어오지 못 합니다. 그리고 전 앞을 보지 못해요.” 시나비아는 눈을 감고 있었고, 대신 한쪽 귀를 타냐 쪽으로 살짝 대고 있었다. 대고 있었다. “세상을 보는 눈을 얻은 대신 앞을 보는 능력을 잃었지요. 저는 당신을 보려는 게 아니라 당신의 과거를 보려 해요. 그래서 당신이 우리에게 위협을 가할 존재인지 아닌지 알아볼 거예요." “그래서 당신들의 홉트가 저를 이 곳에 보됐군요." “그럴 수밖에요. 지금 제 힘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건 루티아의 힘이 저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낸 순간 루티아와의 교역을 끊고 누가 배신자이며,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그래서 루터아의 마법사인 당신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밖에 없답니다 " 타냐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아무리 냉정하고 대담한 타냐라도 남 앞에서 옷을 벗는 건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려 마세요. 당신이 찾으려고 온 그 사람도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과거를 가진 우그더군요." "카셀이 여기에 있습니까?" 타냐는 마지막 옷을 밑으로 흘리고 물었다. “그래요. 이 방을 무사히 나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타냐는 그녀가 '무사히' 라고 말한 부분이 신경 쓰여 물었다 “만약 제가 루티아의 배신자라면 어쩔 생각입니까?" “죽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외모에 어울리지 많게 그녀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가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살짝 밀고 눈을 떴다. 그 순간 타냐는 뭔가 강한 빛을 본 것처럼 눈이 부셨다. 타냐는 휘청하고 뒤로 물러섰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시나비아는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슬픈 과거가 있군요." “사정상 당신의 뜻에는 따랐으나, 그런 건 굳이 말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맞아요. 그런 먼 과거는 이 일과 상관없겠죠. 제가 보고자 한 건 최근의 과거였습니다. 하지만 장신의 잠재의식이 워낙 먼 과거의 일에 집중되어 있어 저절로 보인 것입니다. 사과드리지요. 그리고 그 기억은 제 안에서 타 없어졌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눈을 감은 채 미소 짓는 시나비아의 얼굴을 보니 화가 났다가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레미프의 앞에 카셀도 발가벗은 채 서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근에 가까이 하기 조차 싫은 암흑의 마법사를 둘이나 만났군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하나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그리고 또 하나는 루티아의 마법사군요.” “그가 루티아의 마법사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릅니다. 둘은 둘이 아니라,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로브의 색깔이 다르다고, 속까지 다른 마법사랄 수는 없지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하나는 당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하나는 당신과 같은 종류의 마법사죠. 당신 스스로 그 추리를 엮어 나가면 누구인지 정확하게 지목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해답을 제가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그래요. 그러니 알게 된다면 제일 먼저 저에게 알려주시길. 그리고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하늘 산맥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자가 화이트 게이트를 들어오지 못 했듯.” “자세히 알고 싶군요." “저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지식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저보다 당신이 더욱 많이 알겠죠. 그 이상은 모릅니다 해답을 찾으세요. 당신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아, 그리고!"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들며 말을 이었다. “아란티아의 홉트는 대단한 분이시군요. 기억 속에서 보이는 그분의 힘은 저 같은 작은 존재의 힘과는 비교할 수가 없네요. 과연 북쪽의 가장 위대한 우그라는 말이 틀린 게 아닌가 보네요." “그분은 제 상식으로도 알 수 없는 분입니다. 당신이 그 분을 제 기억에서 보셨다면 이미 많이 어긋나 있을 테죠." “그런 말씀 하나하나에도 그 분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이 깊이 느껴지는군요. 자, 이제 됐어요. 끝났습니다. 당신은 루티아의 배신자가 아니며, 이 마을에 해를 끼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이 방을 나가셔도 좋아요." 타냐는 옷을 다시 입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는 하나 시나비아의 머리 움직임은 앞을 모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가 궁금했다. 그녀는 과거를 끌어내어 보듯, 현재도 다른 어떤 힘을 이용하여 볼 수 있는 걸까? “아, 타냐. 저 역시 그 두 암흑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오늘 새벽 당신이 만난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있습니다." 타냐는 문을 나서려다 멈칫 했다. “그건‥‥‥ 드래곤입니까?" “맞습니다. 그 분은.......” 타냐는 그녀가 드래곤에게 존칭하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프보에 족의 수호 드래곤 중 한 분인 '구아닐' 입니다. 우리와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프보에 족이지만 지금까지 서로 수호드래곤을 끌어내어 싸움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런 룰이 깨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오파이’ 가 대신 설명해 줄 거예요." “오파이가 누구입니까?" “본래 이름은 오푸 아이븜. 우리 말로 ‘한 팔’ 이라는 뜻이지요.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오파이라고 애칭으로 불리다가 그게 이름처럼 굳어졌습니다. 구아닐의 문제로 이 마을에 머물고 있는 우그이며, 그가 바로 당신이 찾는 첫 번째 의문의 해답입니다. " 타냐는 수수께끼가 늘어나는 걸 원치 않았다. “카셀은 어디 있습니까?" “이 집을 나서면 당신은 바로 그를 찾을 수 있어요." 타냐는 살짝 고개만 까닥여 인사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자기 무거운 것을 벗은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후딘턴에 이어 저런 엄청난 위압감을 가진 이를 한 번 더 만난 것이 하늘 산맥을 밤새도록 달러온 것보다 더 피곤했다. 카셀도 이 둘을 만났다면, 혹시 어딘가에 기절해 있지나 않을까? 마법사도 버티기 힘든 그런 힘을 보통 사람이 받았다면 적어도 반나절은 제 정신으로 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타냐는 어디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했으나 시나비아의 말대로 그는 찾을 수 있었다. 카셀은 두 집 건너 오른쪽에 있는 길가에서 레미프 꼬마들과 공깃돌 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셀은 어찌나 놀이에 집중을 하고 있는지 타냐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도 모르고 있었다. 돌을 던졌다 받는 그의 손동작을 유심히 바라보는 꼬마 레미프들의 시선은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시범이 끝나자 꼬마들은 레미프의 언어로 요란하게 떠들면서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 당신을 구하러 왔더니 여기에서 애들과 놀고 있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저는 그 자리에서 그냥 루티아로 돌아가 버릴걸 그랬습니다. " 타냐가 차갑게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타냐!" 카셀은 일어나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밤사이 몇 번 뒹군 흔적이 남아 지저분한 얼굴에 턱수염이 듬성듬성 균형 있게 자라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썹 위를 덮고 있었다. 적을 향하면 험악하게 굳어지는 선 굵은 얼굴이 아이처럼 활짝 펼쳐졌다. “아아, 당신이 와줄 거라고 믿있어요.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아요." 타냐는, 돌멩이를 이용해 손 놀이를 하는 건지, 던져 올린 돌멩이를 구경하는 건지 모를 꼬마들을 힐끗 보았다. “돌을 쥔 아이들한데 포위당했으니 무서워할 법도 하군요." 카셀은 허허 웃었다. “아, 너무 핀잔하지 말아요. 사실 밤새 위험한 일을 겪고 나니 지금의 휴식도 휴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그 쫓아오던 드래곤도 무서웠지만, 시나비아라는 레미프 여자도 무서웠어요, 아름다움에는 항상 독이 있는 거죠. 새나디엘 폐하나, 아즈윈이나, 타냐처럼요.” “그 목록 안에 억지로 저를 끼워 넣지 않아도 됩니다.” “억지로 아닌데요?" “카셀은 지나치게 주위의 모든 것을 배려하려고 노력하는군요. 아란티아에서의 일들을 보고 알았어요. 그런 식으로 매사에 나서려고 들면 제 명에 죽지 못할 겁니다 "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아름답다는 묘사 한 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은 아니죠.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 여자에 관해서는 확실히 배운 바가 있거든요. 여자가 정말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은 그 분위기에 매혹 당했을 때지, 외모라는 건 눈에서 사라지면 없어지는 일회성에 불과하다고 하셨는데 대체로 맞아요. 남자가 여자에게 취하는 건 자신을 매혹시킨 분위기가 여운으로 남았을 때입니다. 아아, 하지만 제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서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카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 제 분위기가 매력 적이다?" 타냐는 펄금 어이가 없어 물었다. “아차, 제가 유혹하는 것처럼 말씀 드렸나요?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카셀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두죠. 우리에게는 그런 농담을 할 시간이 없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시했어요? 레미프 마을 안의 인간이란 게 얼마나 이질적인지, 저는 감당이 안 됩니다. " 카셀은 즉시 이야기하려다, 레미프 꼬마 둘이서 공깃돌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고 중재해주었다. 하지만 흥분한 꼬마들은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바닥에서 뜨기까지 했다. 하지만 카셀은 말 한 마디로 둘을 진정시켰다. “자드!" 씩씩거리면서도 결국 꼬마들은 다시 앉았고, 공깃들 놀이를 시작했다. 타냐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고대어도 할 줄 아십니까?" “여기 와서 몇 마디 배웠습니다. 아까 이 아이들은 저에게 계속 ‘자드’라고 해서 대충 앉으라는 뜻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지요." “그러고 보니 아란티아에서도 저에게 고대어 몇 마디를 물어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칼이 말을 했다면서.......” “아! 레미프들이 하는 언어가 그래서 좀 귀에 익숙했군요." 카셀은 크게 납득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고, 타냐도 그가 내준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이 길에 있는 것을 신기해하는 레미프들이 조금 있었지만, 큰 반향은 없었다. 어째서일까? 레미프들와 해마다 교류를 하는 루티아에서도 한 번 그들이 나타나면 다들 놀라며 구경하러 오곤 했다. 하지만 이곳 레미프들의 시선은, 그저 고립된 마을에 외부인이 들어온 정도에 불과했다. '오파이.' 아마 이 마을에는 오파이라는 인간이 오랫동안 살았고,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큰 신비감이 갖지 않게 된 것이리라 그녀는 짐작했다. 그리고 카셀이 시작한 이야기의 주인공도 오파이였다. “그 때 저는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둠 속이긴 했지만 그 괴물의 입이 저를 향하는 순간 무서워서 피하지도 못 했거든요. 그 때 숲에서 누군가 저를 낚아채서 그 어둠의 불길로부터 구해주었습니다. 그는 저를 풀숲에 던져두고 드래곤과 마법사가 사라지길 기다렸습니다. " “카셀은 그게 드래곤이라는 걸 바로 알았나요?” “나중에 알았습니다. 프보에 종족의 수호드래곤 중의 한 마리라고, 저를 구해주신 분은 저를 끌고 즉시 남쪽으로 달렸습니다.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무조건 따라 뛰었죠.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당신과 제이메르가 걱정이 된다고 말했죠. 그러자 그 사람은, 둘 다 불길을 피했으니 염려 말라고 했죠. 특히 당신은 그 불길을 옆으로 비껴내기까지 했다고 하더군요.” 타냐는 내심 놀랐다. 카셀을 구하는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상황까지 볼 사람이 누군지 더욱 궁금해졌다. 그러나 카셀은 객관적인 상황만 전달하면 그만인 이야기를 얄밉게도 기승전결까지 구성해서 말하고 있었다. "저는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무작정 쫓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제이메르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하지만 그 사람이 말하길, 저 목소리를 들은 건 적도 마찬가지라니 쫓아가지 말라더군요. 저는 폭발 때문에 귀도 멍하고, 정신도 없어서 거의 반시간동안이나 그를 따라가가다가, 쉬자고 제안했죠. 그랬더니 구아닐이 쫓아온다면서 멈출 수 없다고 하더군요.“ 카셀은 가끔 얘기를 하다 보면 이성을 잃고 전력을 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당시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 목소리까지 흉내 내고 있다는 것도 의식을 못 했다. 대신, 듣는 사람은 그의 목소리에 빨려 들어가 금방 얘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줄거리만 얘기해 주면 그만이지 싶던 타냐도 어느 새 그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제가 물었죠. 구아닐이 뭐죠? 그가 말하길, 프보에 족의 수호드래곤이다. 프보에는 뭔데요? 질문은 나중에 하지 않겠나? 그 놈이 내 열 걸음을 따라 잡는 데는 두 걸음이면 충분하단 말이다 더구나 너라는 혹까지 달고 달아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야......! 저는 어디를 가든 혹 취급이죠.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지더군요. 프보에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왜 만난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드래곤이 저를 쫓아오는 겁니까? 그는 오히려 당연하지 않냐는 듯 말하더군요. 네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니까!" 타냐가 쫓아오는 내내 가졌던 의문 중 하나였다 마법사도, 드래곤도 카셀을 공격했다. 그리고 카셀을 구한 자 역시 카셀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카셀이 울프 기사단의 캡델으로 인정받은 건 날짜로 치면 이틀도 되지 많았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저는 놀라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 물었죠. 그런데 그가 말하길, 그걸 몰라서 묻나? 이러지 않겠습니까? 그 때는 그게 무슨 뜻인가 싶었죠. 하지만 그의 그런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고, 점점 그에게 믿음이 갔죠." “당신이 캡틴이라는 건 마스터 데다인도 믿지 않았던 사실인데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이 알 수가 있죠?" 타냐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역시 그 의문을 해결하고 싶어 먼저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오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걸으면서 자신이 레미프 족과 같이 생활한 게 3, 4년은 되고, 그들이 자기에게 오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요. 그게 무슨 뜻인 줄 아시나요?" “오푸 아이봄. 한 팔이라는 뜻이죠." “오푸 아이봄 위바오브. 아아, 저는 레미프 언어의 '부' 발음이 정말 마음에 들더군요. 어쨌든 그건 ‘한 팔 전사’의 약자래요. 그러나 그는 한 팔이 없는데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행동해온 덕에, 나중에서야 놀랐지 뭡니까? 그 다음에 인간 이름은 뭐냐고 물었더니 쉽게 대답해주지 않더군요. 오히려, 캡틴 울프라면 나 정도는 금방 알아야 하지 않아? 하고 웃으면서 말하더라고요. 안 본 사람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 순간 구아닐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왔어요." 카셀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때 저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지요. 우리 둘은 나무 뒤에 숨었죠. 저는 그 괴물이 본체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그 거대한 괴물이 드래곤이라니! 가넬로크의 드래곤 기사단은 저 엄청난 크기의 생명체와 어떻게 같이 생활할 수가 있었을까, 익셀런 기사단은 어떻게 저 괴물을 죽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오파이는 갑자기 칼을 뽑더니 구아닐 앞에 서더군요. 뭔가 레미프의 언어로 말하니 그의 칼이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죠. 마치 마스터 아이린의 검처럼요 ” “마스터 아이 린의 검?" “베나 에사르크. 여왕 수호 기사만 가질 수 있는 베나 실크와 동급의 검이죠. 그런데 오파이가 가진 검이 베나와 같은 빛을 내면서 구아닐의 앞을 가로막았어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저는 그 와중에도 그만 그 장면을 한 편의 멋진 벽화로 남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붉은 빛 앞에서 구아닐은 암흑의 불길을 토해내지도, 거대한 발로 그를 짓밟지도 못 했어요. 그냥 주위를 맴돌다가 뒤로 물러났죠." 그제야 타냐는 카셀의 동행이 남긴 발자국과 드래곤이 남긴 발자국이 겹치는 부분의 의미를 깨달았다. “베나 에사르크가 드래곤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검이었군요." “같은 칼인지는 아직 몰랐었죠, 저도. 마침 궁금해서 이렇게 물었죠. 그건 드래곤의 전진을 막는 마법 점입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참 멍청한 질문이었군요. 그는, 베나 에사르크와 비슷한 검이지,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거 참 위험한 검이군요, 했더니, 이게 위험해? 그럼 네가 가진 검은 위험하다는 생각하지 않나? 베나보다 더강한 검이 세상에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자네가 가진 즈토크 워그가 아닌가?" “즈토크 워그?" 카셀은 뽑지 않은 아란터아의 보검을 들었다. “‘늑대의 검’이라는 뜻이랍니다. 베나 실크보다 더한 검이라니, 위험하긴 한가 보네요." 웃면서 말하려고 애쓰지만, 부담감이 표정 곳곳에 묻어있는 카셀이었다. 그는 보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많았다. “그 암흑의 마법사도, 오파이도 그 칼을 보고 당신이 캡틴 울프라는 걸 알아냈군요." 간단한 추리였으나 함께 하고 있는 장본인들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상대측에서 그것도 어둠 속에서 알아챘다. 그건 적어도 우연히 마주쳤다가 카셀의 보검을 알아보고 공격을 가한 게 아니라, 데다인이 데리고 온 일행 중 캡틴 울프가 있다고 확신했다는 뜻이었다. 즉, 데다인의 행보를 알고 있는 누군가의 준비된 기습이었다. “검은 드래곤은 계속 추적해왔고, 그 공격을 피해 우리들은 계속 산을 내려왔죠. 갑자기 그가 걷는 속도를 줄이더니, 하늘 산맥을 다 내려왔으니 안전하다고 그러더군요. 여기서부터는 논틸의 영역이니 구아닐도 오지 못할 거라고." 타냐는 손을 내밀었다. “잠깐만요. '논틸' 이라는 건 이 곳 레미프들이 모시는 수호 드래곤의 이름이겠죠?" “아, 금방 짐작하시는군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도 몇 번이나 물어보고서야 알았는데." “그럼 '하늘 산맥을 다 내려왔다' 라는 건 무슨 뜻이죠? 지금 여기는 하늘 산맥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저도 조금 황당해서 물었어요. 당연히 여길 하늘 산맥의 안쪽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마치 열심히 숲을 걷고 있고 주위에는 나무가 여전히 울창한데 옆에 가던 친구가 숲을 다 빠져나왔다고 말하는 것 같죠. ‘이봐, 그럼 여긴 술이 아니라 어디라는 거야?’ 뭐, 이런 느낌이랄까요?" 카셀이 웃으며 말했으나, 타냐가 전혀 호응하지 않자 얼른 하던 말을 이었다. “레미프들이 생각하는 하늘 산맥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늘 산맥은 사실 비슷한 개념이더군요. 오파이가 설명하길, 우리도 하늘 산맥을 남쪽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라고 생각하고, 레미프들도 하늘 산맥을 북쪽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라고 여긴다......는 거죠. 즉, 여긴 아크랜드 남족의 또 다른 대륙인 겁니다." 굳이 길게 설명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그는 길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었다. 어쨌든 루티아의 사람들이 레미프들과 수없이 교류를 나눠오면서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긴 했다. “확실히 레미프들은 인간들처럼 이 숲에서 특별히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니 금지의 영역이랄 것도 없고, 반대로 레미프들은 숲이 없는 아크랜드에서 방향 감각을 잃는다고 했으니...... 타냐는 입술을 만지작거러며 중얼거렸다. 카셀은 그녀가 이야기를 곱씹을 시간을 주었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꼭 알아야 할 건 두 가지로 좁힐 수 있군요. 어째서 프보에 종족의 수호 드래곤이 인간을 공격한 것이고, 그 오파이란 사람은 누군데, 레미프들과 같이 살고 있죠?" 갑자기 두 사람의 뒤에 기척 없이 나타난 남자가 말했다. “프보에의 여러 종족 중 자기들 수호 드래곤을 이끌고 뭔가 안좋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레미프들이 있다. 물론 그 드래곤이란 구아닐을 말하는 것이고, 그 목표는 즈비 종족 뿐 아니라 인간 종족까지 포함되어 있지 첫 번째 타깃은 '루티아'와 이 곳 즈비 레미프족의 나라 '라든'이다. 그리고 나는 그 문제를 돕기 위해 여기에 머물고 있다. 자, 다른 질문 있나?" 한 팔은 소매가 헐렁거리고 있었고, 다른 쪽 손으로는 느긋하게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길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남자였다. 메마른 얼굴에 행색이 초라한데다가 눈까지 졸린 듯 반를 감고 있으니 드래곤과 맞섰다는 이미지와는 조금도 맞지 않았다. 한 팔로는 면도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자기 얼굴이 수염과 아주 잘 어을리는 외모라는 걸 인식하고 기르는 중인 건지, 뺨을 따라 자란 털은 수염과 코밑에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얘기하던 게 있어서 그녀의 시선은 저절로 그가 차고 있는 '베나 에사르크, 베나 실크와 맞먹는다는 검'으로 갔다 칼집에는 읽을 수 없는, 아니 일주일쯤 연구하면 해석을 할 가능성이 있는 고대어들이 잔뜩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우리가 모르는 아주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 같군요." 타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눈높이를 같이 한 후 말을 이었다. “루티아를 공격하는 게 누구라고요? 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라고 들었는데요?" “아, 모즈들. 그게 루티아를 공격하고 있겠지. 맞아. 그걸 이끄는게 누구냐고? 글세, 나는 그게 루티아의 마법사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후딘틴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루티아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입니까?” “뭐, 그 쪽도 대충 그렇다고 짐작하고 있으면서 뭤하러 귀찮게 확인하나?" 얼굴 생긴 것도 느긋한 사람이 말하는 것도 느긋하니, 다급한 마음을 가지 타냐는 그의 모든 것이 불쾌했다. “당신은 대체 누군데 이런 걸 모두 알고 있는 거죠?” 타냐는 일부러 강한 어조로 물었다. 가래가 낀 듯 탁한 목소리와 마법사라는 직위와 쏘아붙이는 박력에 밀리는 일반 사람들은 보통 타냐 앞에서 눈을 깔았지만, 그는 담배 연기만 뱉었다. “나는 오파이다. 본명은 로핀. 한 때 울프의 이름을 가졌었지.” 카셀이 코를 긁적이며 추가했다. “은퇴한 네 명의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이래요. 퀘이언, 메이루밀, 아이린, 그리고 여기 계신 로핀이죠. 다들 어디 갔는지 도무지 연릭이 안 되는 한 사람이 있다더니 하늘 산맥 안쪽에 있지 뭡니까?” 속없는 카셀은 웃기만 했고, 로핀은 지저분한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누군지는 설명했고......, 또 다른 질문 있나, 마스터 타냐?” (3) 오파이 타냐도 테일드 덕에 아란티아의 기사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 만나지는 못했으나,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오는 편지에 그는 긴 사연을 적어오곤 했었다. 아이린과의 사이가 깊었음에도 실제로 테일드가 편지에서 많이 이야기한 기사는 로핀이었다. 그는 당시 을프 기사단 전체에서 맏형 격이고, 퀘이언이 캡틴을 맡기 전까지 실질적인 캡틴 자리에 있었었다. 어떤 대결에서 한 팔을 잃지 않았다면 그가 당연히 캡틴이 되었을 것이고, 마스터 그란돌에 이은 수호 기사 자리도 그에게 넘어갔을 거라는 게 테일드의 의견이었다. 아란티아 위기를 구해낸 제 1의 공로자였으며, 루티아에서 조차 인정하는 최고의 기사였다. 테일드의 실종에 가장 많은 해답을 가지친 있는 사람이라 전부터 죽 만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방랑벽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될 만큼 아크랜드에서 그의 존재는 완전히 증발한 것처럼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찾아다닌 게 억울할 만큼 엉뚱하게도 그는 하늘 산맥 너머에 와 있었다. 그것도 제이메르 같은 레인저보다 더 지저분한 차림에 수염도 안 깎은 얼굴로...... “아직도 당신의 행동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군요." 상황이 이러하니 타냐는 그의 정체를 듣고 숨도 못 쉴 정도로 놀랐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온갖 의문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워버릴 것 같아서 급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질문을 했다. “만약 카셀을 구할 정도로 우리들 가까이에 있었다면 어패서 우리에게 먼저 경고해서 그들과 같이 싸우지 않았죠?" “아, 그 놈의 자식들이 니들을 기습하리라는 걸 내가 알고 있었듯, 그 족에서도 내 움직임을 알고 있었거든. 적어도 내가 먼저 접촉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지들 쪽을 기습하려 했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게 잔뜩 대비하고 있는 놈들을 상대로 먼저 움직이면 위험하지." 말 한 마디에 담배 한 모금을 내뱉는 그는 말도 거칠었고, 어조의 높낮이도 자기 멋대로였다. 가델로크 족의 리듬 있는 억양으로 말했다가 이로피스 식으로 딱딱하게 끝맺음 했다. 그 지방 사투리를 섞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거기에서 카셀을 데리고 숨어 있었어야지 않습니까? 왜 굳이 레미프들의 영 역까지 데리고 왔지요?" “흐음, 이 마법사 양반이 화가 나셨나? 어이, 타냐." 로핀은 파이프를 문 채로 입 주위로만 하얀 연기를 푸욱 내뿜더니 한 손으로 타냐의 어깨에 손을 터억 하니 올려놓았다. 타냐는 그를 노려보았고 카셀은 난처한 얼굴로 '저, 로핀, 그건......이라며 중얼거렸지만, 로핀은 둘 다 개의치 않고 할 말만 했다. “대체 넌 나와 카셀을 어떻게 쫓아왔나? 카셀의 흔적을 보고 왔겠지. 그 족에도 너와 동일한 힘을 가진 마법사가 있었다. 그 흔적을 찾는 건 문제도 아니었겠지. 더구나 드래곤까지 같이 있다?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뭐였을 거 같냐? 암흑의 불길을 막아낸 후 부상당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마법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나를 도와 구아닐과 싸우자고 설득하는 것보다 그냥 하늘 산맥을 벗어나는 쪽이 낫지, 암." 그는 올려놓았을 때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어깨를 치워주었다. 그리고 또 그 느긋하고 기분 나쁜 눈으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마치 ‘다른 질문 있나?’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마법사를 상대로 할 말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는 건 둘째치고, 테일드의 제자가 된 이후로 한 번도 당한 적 없는 어린애 취급에 타냐는 화가 난다기보다 황당했다. “자, 로핀. 루티아의 마스터께 예를 다하셔야 합니다. 그건 상식이에요. 타냐도 화 푸세요. 로핀은 진짜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겁니다. 어찌 보면 혹이 되어버린 제 잘못이죠." 카셀이 중재에 나섰다. 로핀이 담배로 마른 혀를 적시며, 침을 탁 뱉었다. “하긴 캡틴 울프가 되려 내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한 건 놀랄만한 일이지." 참았던 화가 울컥 터졌다. 전에 카셀을 무시하는 말을 했을 때 제이메르가 화를 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 그 심정이 이해가갔다. 하지만 카셀이 타냐의 옆에 서서, 자기는 괜찮으니 참으라고 말했다. 아예 그런 쪽으로는 내성이 생긴 모양이었다. 괜히 전에 그에게 했던 말에 죄책감이 생겨,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자, 로핀. 저는 당신에게 어떻게 해서 제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되었는지 간단하게나마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당신이 어떻게 레미프들의 마을에 살게 되었는지 긴 이야기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 로핀은 아직도 공깃돌 놀이하느라 바쁜 레미프 꼬마들을 앞에 두고 바닥에 앉았다. 꼬마들의 숫자가 어느 새 여섯 명으로 늘어 있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요란해지자, 로핀이 작게 말하라고 명령했고, 아이들은 순종했다. “앉아봐. 진작 이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지만 캡틴 울프가 동행이 더 올 거라며 기다리라고 해서 아직 아껴둔 이야기다." 로핀은 그녀에게 통나무 의자를 다시 권했다. “제가 올 걸 알고 있었습니까, 카셀?" “제이메르야 숲에서 길을 못 찾을 데니, 당신이 절 찾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동료가 도우러 올 거라고 생각한 것이 당연한 건가? 타냐에게 그것은 꽤 길게 생각해봐야 할 인간 분석에 관련된 문제였다. “아,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잘 지내던가?" 로핀이 물었다. “제가 보기에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십니다 메이루밀께서는 카모르트의 싸움에서 저희들을 도와주셨죠. 아이린과 퀘이언께서도 아란티아의 화이트 게이트 전투에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물리치셨습니다." “그 염병할 자식과의 싸움이 끈덕지게 우리를 따라다니는군. 그래, 얘기는 그 놈에 대한 걸로 시작해야겠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타냐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이야기는 짧게나마 메이루밀에게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얘기의 막바지에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트려버렸던 이야기 였기에 타냐는 다시 한 번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주었다. 얘기하는 내내 인식하지 못했으나, 사실 로핀은 이미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가 가지고 있는 마력을 한 가지 없애버렀다. 그 존재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루티아의 마스터들을 겁주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함부로 그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으며, 아예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알게 모르게 공포감을 주었다. 그러니 직접 만나거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 어둠의 제왕을 이놈이니 저놈이니 불러, 존재가 갖는 격을 떨어뜨려 버렸다. 로핀에 대한 첫인상이 워낙 좋지 않아, 그가 그런 식으로 카셀과 타냐가 성급하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없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론타몬 전쟁의 목적이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나?" 로핀이 말했다. “영토 확장 전쟁이 아니라 뭔가 음모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카셀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역사 공부에 안일한 건 아니었군, 후배. 전쟁은 론타몬 국왕을 옆에서 보좌하는 정체 불명의 마법사이자, 종교 지도자에 의해 시작되었지. 죽은 후의 불멸을 기도하거나 절대자에 대한 찬양을 하거나, 자신의 내적 발전을 기르는 게 주된 목적인 기존의 종교와 달리, 생전에 불멸의 힘을 얻는 게 목적인 뭣 같은 교리가 그 놈이 내세운 종교의 핵심이지 " “예, 카모르트의 덴모주를 비롯해 많은 지역에서 아직도 산재해 있는 종교죠. 그러고 덴모주처럼 직접적으로 그 힘을 얻은 곳도 있습니다." “아마 가넬로크나 이로피스에도 그 힘을 직접적으로 얻은 군주가 있을 걸." “가넬로크는 아직 소식 없습니다. 메이루밀이 알아본다고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이로피스에는 그 존재가 나타나 왕실 기사단이 처리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 “카모르트에서 검은 기사를 만나봤다고 했지?" “예" “그리고 그 검은 기사의 갑옷은 익셀런 기사단의 것과 같겠지?" 로핀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웃는 얼굴로 물었다. “정확합니다." “그야 그럴 수밖에......그 놈의 자식이 직접 론타몬의 국왕을 뒤에서 조종해 만든 기사단이 익셀런이니까. 그 기사들은 모두 거꾸로 된 십자가가 구슬을 박고 있는 모양의 상징물을 가지고 다닌다는 게 그 증거지. 실제로는 칼이 심장을 박고 있는 모양을 상징한 것이고." 로핀은 바닥에 그 그림을 그려 보였다. 타냐도 그 문장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으나, 별로 관심이 없어 기억은 희미했다. “전쟁은 모두 그 자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먹는 것 외에는 별로 취미도 없는 론타몬의 뚱땡이 왕 작품이 아니지." “뚜, 뚱땡이?" 어린애들이나 불릴한 별명에 말까지 더듬으며 카셀이 물었다. 로핀은 강의하는 교수 풍으로 말을 이어갔다. “얼굴 둘레가 여자 허리만 하고, 허벅지 둘레가 내 허리만 한 자였지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도움을 얻어야하므로 시녀는 팔씨름으로 뽑는다나? 남자를 뽑으라 조언해 봤자 그런 놈들은 꼭 수발 들어주는 종은 여자여야 한다고 고집이지. 허리 아래 존재하는 신체기관은 배 두께 때문에 보지도 못할 놈이......” 카셀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렀다가 타냐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사실 타냐도 웃을 떤 했다. 로핀은 여전히 두 사람의 반응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뚱땡이 왕! 대략 십 년 전에 한 번 만나봤지. 전쟁을 준비 하길래, 하지 말라고 다그치면서‥‥‥ 그했더니 싫다면서 밥이나 먹고 가라고 한 10인분쯤 되는 음식을 내주더라. 음식 맛은 기가막히긴 했지만, 그 넉넉한 배를 보면 식욕이 날 수가 없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익셀런 기사단에서 제일 센 놈 나오라면서 한바탕 붙고 나왔다 그 때 이 팔을 잃었지." 로핀은 자신의 헐렁거리는 소매를 특 치며 말했다 카셀이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저,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은퇴하신 하얀 늑대들은 지금의 하얀 늑대들에 비해 조금도 기량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팔을 벨 정도의 실력자가 당시의 익셀런 기사단에 있었습니까? 혹시 그게‥‥‥ 캡틴 웰치?" “이거 민망하구만. 그 얘기는 좀 접어두지. 역사 이야기하는데 내가 패배한 얘기는 끼우고 싶지 않아. 아, 수정한다. 무승부다! 왜냐면 나도 그 녀석 팔을 베어버렸거든! 익셀런 기사단의 캡틴이 그 녀석에서 웰치로 바뀐 순간이었지. 그 뭐냐,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 그 놈도 기사도는 있는 녀석이었다. 피를 너무 흘려 실신하기 직전에 나를 치료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줬지, 아마? 난 물론 거절하고 걸어 나왔지. 아아, 죽을 뻔했었어......” 로핀은 뭐가 재미있는지 콕콕거리고 웃었다. “자,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자. 다들 지겹게 들어 알고 있지? 그러니까 마지막 네나드로스 평원 전투에서 캡틴 웰치가 죽은 후 론타몬은 아란티아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사실상 전쟁은 거기에서 마무리 되었다...... 얘기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지. 그 모든 일의 최고 공로자는 울프 기사단이 아닌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였다. 그건 잘 아나?" “예, 어느 정도는 압니다. " 카셀이 대답했다. 그는 실종된 타냐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에 조심스러워 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로핀의 눈만 바라보며 뒷얘기를 기다렸다. “그래, 그는 아란티아에 쳐들어온 거의 모든 군대를 싸움도 못하게 해버했지. 그걸 아란티아 여왕의 저주니, 론타몬 군대의 우둔함이니 하고 명청한 사람들이 평가하지만, 그건 사실 모조리 테일드의 마법이었어. 그 친구에게 당한 군대는 아마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을 거야. 칼이라도 뽑고 피라도 흘렸으면 차라리 전쟁의 희생자 명단에라도 올랐을 것을, 걷다가 전투를 마감해버렸으니 오죽했겠나? 그걸 표현하자니 '저주' 라는 단어밖에 없었겠지." “마스터의 마법은......." 타냐가 조용히 말했다. “그 분의 마법은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개인의 힘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마법사는 루티아에서도 둘 이상 존재하기 힘들죠." “그래 성격은 소심해서 아이린이랑 키스도 벌벌 떨며 하는 녀석이, 지팡이만 들었다 하면 천지를 뒤집을 만한 힘을 내곤 했으니, 안하무인이었던 우리 울프 기사단에게는 좋은 선생이 되어주었지. 아, 물를 아이린 짝사랑 하던 많은 사내 녀석들에게 그 정도 여자를 쟁취하려면 그 정도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교훈도 됐지. 아이린은 여전히 씩씩하게 섹시한가?" 워낙 느닷없는 타이밍에서 나온 질문이라 카셀은 한참 후에 대답했다. “뭐, 강인한......여성상이시죠." “잘도 얼버무리네, 자식. 어쨌든 싸움은 끝나고 테일드는 혼자서 론타몬을 찾아가 전쟁의 원인이 된 그 마법사를 찾았지." 그게 테일드의 마지막 편지였다. 조만간 돌아갈 테니 같이 만나 마실 와인을 준비하라고까지 했었다. 타냐는 정성껏 준비한 와인을 따지 못했다. “론타몬도 귀를 막고 있지는 않았을 터! 몇 만 명이나 되는 론타몬 군대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논 마법사를 상대로 협상 같은 건 못하지. 뚱땡이 왕이 테일드 말 한마디에 설설 기었을 걸 상상하면 자다가도 웃을 만하지. 테일드는 이 전쟁을 일으킨 주범인 마법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론타몬 왕실은 자기들의 마법사를 수배했어. 하지만 그 놈은 전쟁에서 패배하자마자 북쪽 얼음 땅에 마련한 성으로 숨어버렸지. 테일드는 그 놈이 거길 근거지로 삼아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고 준비중이라는 걸 알아됐지." “그래서 하얀 늑대들과 마스터 테일드께서?" “그 때 멤버가 나, 루밀, 아이린, 그러고 테일드. 얼음 성에서의 전투는......그런 끔찍한 전투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하여간 지루할 정도로 길고 힘든 싸움이 이어졌고, 우리는 결국 그 녀석이 숨어있는 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지. 거기에서 최후의 싸움이 있었다.” 어느 순간 로핀은 담배를 꺼버렸고, 졸런 눈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오랜 옛날의 전투를 회상하는 영웅의 눈동자는 푸른 잎사귀에 가린 태양을 담았다. “뭐, 그 때까지 제일 앞에 서서 제일 열심히, 걸어 다니는 시체들과 얼음 괴물들을 부숴버런 건 아이린이었고, 제일 힘을 써야 할 순간에 제일 지쳐버린 것도 아이린이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그녀를 대신하여 힘을 써야 할 나머지 세 사람이 실수한 거라 봐야 할거야. 또 그 땐 내가 한 팔로 쓰는 검술에 미숙하기도 했고......” 로핀은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어느 순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어조에는 슬픔이 깃들였다. 간간이 농담이 섞여도 그 슬픔을 줄이지는 못했다. “테일드는 녀석의 움직임을 잡았고, 나와 루밀이 녀석의 마법을 막아내고 나니 결국 최후의 일격은 안타깝게도 지쳐서 칼 쥘 힘도 없는 아이린에게 주어져버린 거야. 그 지친 몸으로 그 애는 그 영혼 마저 시커먼 자식한데 베나를 휘둘렀지만, 실패하고 말았지. 오히려 아이린은 놈에게 큰 부상을 당했고......말이 부상이지 난 그 애가 죽은 줄 알았어. 오죽하면 옷이 다 찢어져서 이쁘게 솟은 그 애 가슴을 보고도 내가 전혀 흥분도 못했겠냐? 당황한 테일드의 집중력이 느슨해진 들을 타서 그 놈은 결계에서 벗어나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테일드는 그 놈을 쫒아갔지." 로핀은 두 손을 들었다. “그게 끝이야." 카셀이 추가 설명이라도 바라듯 타냐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일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죠." “죽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나도, 아이린도 테일드를 찾아 몇년을 돌아다녔더니 어던가에 항상 테일드의 흔적이 남아있었거든. 그리고 동시에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남긴 흔적도 나타나고 있지. 내 생각에는 테일드가 아직도 그 놈을 추적하고 있는 것 같아."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죠? 루티아로 돌아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해치울 방안을 마련해야 옳지 않습니까?" 타냐가 따지듯 물었다. “이봐, 타냐. 내가 말을 함부로 해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정말 별 거 아닌 놈이라고 생각하나? 그 자와의 싸움이 그저 통상적인 칼이 오고 가는 싸움이었을까? 아란티아 여왕 앞에서 있었던 전투를 같이 봤다면서, 카셀과? 말해두지만, 아이린의 전성기는 그 얼음성의 전투에서였어." 타냐는 할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때 아이린이 다친 후 테일드가 혼자서 그 악마 녀석을 쫒아가 싸웠다! 인간 중 가장 위대한 마법사와 인간 모두를 멸망시킬 수 있는 암흑의 마법사 두 사람이 만들어낸 최후의 전투가 어떤 결말로 나타났는지 우리 상식으로 그러긴 좀 힘들지 그 후 8년이 지난 지금 상황만 놓고 보자면, 그 둘이 모두 살아 남아있지 하지만 한 쪽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데일드는 아직까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 관계를 알 수 없어. 그가 직접 우리 앞에 나타나 설명을 해주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타냐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로핀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한 가지 테일드의 제자에게만 특별히 내 생각을 말해주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가진 마법의 실체는 대체로 저주다. 어쩌면 테일드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저주'를 받았고, 그 저주를 풀지 못해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아직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고개를 돌리지는 못 했으나, 타나는 당장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싸움이 끝난 후 둘 다 나타나지 않았다. 만약 테일드가 죽고 그 놈 혼자 살아남았다면 진작 나타나 하던 일을 꾸몄어야지. 왜냐고? 자기 힘에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가 죽었는데 뭘 망설여? 다른 그랜드 마스터가 생기기 전에 전쟁을 다시 일으키는 게 낫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건 그 놈 역시 테일드에게 '어떤 공격'을 받고 그걸 회복하는 데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는 거야. 역으로 말해 데일드 역시 나타나지 못하는 건 그 놈에게 어떤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 공격이란, 내 생각에 저주라는 거지" 다른 건 대강대강 말했으면서, 테일드에 대해서는 차분히 말하는 로핀이 은근히 고마웠다. 별지 않은 곳에서 시나비아의 방까지 안내해준 덩치 큰 레미프인 판커틴이 세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타냐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해서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와 제 마스터의 실종이 어떤 관계가 있죠?" “이봐 타냐, 아직 어려서 마법사로서의 통할력이 부족한 건가, 아니면 그런 통찰력을 발취하기 위한 지식이 부족한 건가?" 너무 얘기에 집중하느라고 그가 다음 얘기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이런 걸 지적해 무안 주는 그의 악랄함에 타냐는 잠깐이나마 가쳤던 고마움을 당장에 잊어버렀다. 로핀은 불 꺼진 파이프를 도로 물고 시선을 카셀에게 돌렸다. “자네는 알겠나?" “글쎄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저도 잘......” 카셀은 답지 않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로핀은 껄껄대고 웃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편견을 없애주지. 아란티아의 보검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 중에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과 우연한 인간관계는 없다. 즉,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한 가지 줄기로 엮어 있다고만 생각하면 핵심은 아주 간단하게 나오지." “그래도 잘 모르겠습니다 " “이런 씹어 먹을! 생각도 안 하고 대답하지 마라." 로핀은 버럭 소리 질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카셀은 입 모양을 타냐에게 보이며 물었다. ‘씹어......먹어?' 타냐는 로핀이 쓰는 어취따윈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로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론타몬의 왕을 움직여 대륙 전쟁을 일으킬 당시 그가 맡은 역할이 무언가? 계략을 세우는 장수? 전투의 앞에서는 기사? 왕의 보좌관? 아니, 그저 종교의 지도자였어. 카셀 자네가 겪은 카모르트의 사건에서 붉은 장미 백작의 역할은 뭐였지?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아란티아 내 사건의 핵심에는 누가 있나? 그 사건들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가정을 두면......자, 세 사건의 공통적인 요소가 뭔가?" 카셀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검은 기사!" “다른 말로 바꾸면 익셀런 기사단이 되겠지." 로핀은 만족스레 웃었다. “캡린 웰치가 다시 살아나 골드 게이트를 무너뜨렸다? 그를 누가 살했지? 복잡하게 얽힌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것도 못 돼. 그리고 거기에서 해답을 얻으면 루티아를 공격하고 있는게 누군지도 알아낼 수 있다. " 타냐는 힘을 주어 발했다. “저는 그런 말장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루티아를 누가 공격하고 있습니까?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쉽게 말해준다고 해결책이 뚝 떨어질 것 같은가? 그렇다면 나는 진작 일을 해결해주었을 거야. 해결책은 내가 아니라, 루티아의 마스터 본인이 풀어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도달한 결론을 다른 경로를 통한 사고 과정을 통해 스스로 알아내야지, 그럼 내가 알아내지 못한 해결책을 찾아낼 게 아니냐?" 로핀은 뒤쪽으로 다가온 판커틴에게 고대어로 뭐라고 말했다. 준비되었다, 잠깐만 기다려라 하는 일상적인 대화였다. 로핀은 다시 불만 가득한 타냐에게 말했다. “내가 아직도 선문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마스터 타냐?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아주 바쁜 일이 있음에도 아란티아 보검이 하늘 산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나의 검이 알려줘서 일부러 움직인 거라고. 레미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명[기더]대로지. 여기까지 데려왔으면, 내가 뭔가를 가르쳐 줄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내게 더 많은 정보를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로핀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타냐는 벽을 상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답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성 있게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고 싶어도 시간이 없습니다. 카셀을 찾아오느라 지나치게 시간을 낭비했으니, 서둘러 그를 데리고 이 곳을 떠나야 합니다. 당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고 거기에 대해 돕고 싶으나, 일일이 그런 것에 추리를 강요한다면, 저 역시 당신이 아직 모르지만 알아야 할 사실을 알려드릴 수가 없지요." "카셀을 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긴 이 족도 마찬가지야. 계획을 벌써 하루나 늦췄다. 서둘러 회의를 시작해야 해." 로핀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판커틴을 가리켰다. 그 큰 키로 아침 햇살을 가로막고 있으니 현기증이 났다. 밤에 드래곤과 마법사를 향해 힘을 소모한 후 전력을 다해 카셀을 쫓아 뛰었고 그 다음에는 두 명의 레미프 마법사들과 괜한 신경전으로 정신력을 많이 맞아먹었다. 그런데 이 로편이라는 기사는 지금 그녀에게 머리를 쓰라고 명령하고 있으니, 화가 났다. “따지고 보면 당신은 과거 아란티아의 기사며, 아직 루티아와 동맹을 유지해야 할 임무에 음여 있습니다. 카셀은 물론이고 당신조차 루티아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런 임무도 잊고 참가해야 할 정도로 그 레미프의 회의가 중요한 것입니까?" 로핀은 콧잔등을 긁적이다가 흥분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프보에 족의 수호 드래곤인 구아닐이 깨어나 라든과 루티아를 공격하려 한다 모즈?그게 뭔지는 아직 잘 몰라. 하지만 그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게 루티아 족 배신자라는 건 분명하지 우리들만의 힘으로 그 연합을 꺾을 수 없다. 그래서 라든의 수호 드래곤인 논틸을 깨워 그 힘을 막으려 한다. 구아닐이라는 한 축을 꺾어버리면 그 연합 세력 자체가 기둥을 잃어버린다. 루티아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나? 지금 나보다 루티아를 구하는데 바쁜 사람이 있나?" 퀘이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책임감 있는 기사였다. 수호 기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얻었는지,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에 수호 기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고스란히 마법사로 바꾸어놓아도 본받을 만한 표본이었다. 마스터의 연인인 아이린 역시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마스터가 편지로 그녀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어딘지 스승의 일부를 빼앗겼다는 기분도 들긴 했지만,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임에는 분명했다. 워낙 극찬이 심해 절반 이상은 과장이라고 믿어왔으나, 그녀의 넘치는 행동력과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강한 프라이드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메이루밀은 유쾌한 음유시인 같았다. 그는 모든 일에 즐거워했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사람을 좋아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한 번 만나 이야기할 때도, 그는 타냐를 마치 오래 전 헤어줬다가 다시 만난 여동생처럼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로핀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테일드가 했던 말이었다. 뭘 할 지 알 수 없어서 재미있다고 했지만, 타냐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관계만큼 불안한 것도 없었다. 그에 대해서 말하는 누구도 그를 한 마디로 정의 내리지 못했다. 또 누구도 그를 함부로 여기지 못했다. “로핀이 적이 아니라, 내 밑에 있게 된 건 정말 다행이야. 하긴 그게 아란티아의 축복이라는 거겠지” 새나디엘 여왕조차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은 농담 삼아 그를 이런 식으로 평가했다. “만약 루티아와 아란티아가 전쟁을 벌인다면 나는 제일 먼저 로핀 울프를 암살하겠다. ” 새삼 그가 달려오는 드래곤을 멈춰 세운 사람이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가 한 말에 타냐는 할 말을 잃었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로 내 이야기가 재미없었다면 나도 들으라 마라 하지는 않겠다, 타냐. 카셀을 구해준 건 딱히 내가 이 곳에서 하고 있는 일에 개입시키려고 했던 게 아니라 네가 말한 대로 아란티아에 대한 내 애국심 때문이니 굳이 있으라고도 말 안해. 그러니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라. 서로에게 시간 낭비는 하룻밤으로 충분하다.” 판커틴과 로편은 같이 타냐가 처음 들어갔던 움막, 즉 홉트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길어갔다. 그렇게 커다란 덩치와 같이 걷는데도 로핀은 전혀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다. 헐렁거리는 소매도 그를 초라하게 만들지 못했다. 카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너무 얘기에 빠져 있어서 당신이 옆에 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카셀이 옆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던 쪽은 타냐였다. 그녀는 미안해하는 카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레미프 꼬마들은 공깃돌 놀이를 하며 또 티적태격 싸우고 있었고, 빨래를 마치고 온 여인들이 두 사람을 보고 수근거리고 있었다. 젖은 머리에 밝은 피부를 한 레미프 여자들은 타냐가 보기에도 무척 예뻐보였다. 오래 전 바꿔 진짜 얼굴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으니 외모에 관해서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의식하지 않았고, 또 그런 말을 대놓고 할 만한 용기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미인들을 보면 가끔 어린 아이 겁주려는 동화 속에나 나을 만한 자신의 마녀 같은 얼굴을 절로 상기시키게 되었다. 그런 걸 의식하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고 시선을 맞히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카셀 같은 사람을 대하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장신은 언제나 자기가 처한 큰 위험보다 남이 처한 사소한 일에 더 신경을 쓰는군요. 사과는 제가 해야겠습니다. 루티아의 위험에 평상시의 마음을 잃을 건 데다인뿐만이 아니었나 보군요." "그렇지 않아요. 타냐의 반응은 당연했습니다 사실 저도 제이메르를 두고 온 것도, 루티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 좋은 일도 너무 걱정되어 위가 시릴 지경이었어요. 그러다 사실 여길 오게 된 것이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차면서, 루티아를 돕는 방법은 ......뭐랄까, 바꿔보고 싶어졌죠." 그의 말에 타냐는 고개를 갸웃했다 놀랍게도 통제를 벗어난 이런 상황에서 그는 타냐보다 앞서서 생각을 했고 타냐보다 더 침착했다. 보통 하늘 산맥, 그것도 레미프의 마을 한 가운데라면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는커녕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야 옳았다. 검은 기사들이 쳐들어오고 있는 와중에 도서관에서 책을 찾을 수 있던 여유가 우연이 아니라면, 대체 이 대범함은 어디에서 왔는가? 밀 판 돈으로 책사면 뒈진다고 말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카셀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머리 속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일은 루티아의 원군으로 저를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격전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까 저를 심문하는 레미프들의 왕과 과거를 들여다보는 레미프 여자를 보고, 이런 막강한 힘이라면 루티아를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라든은 원래 루티아와 교류를 하고 있는 나라지 않습니까? 공동의 적이라면 서로 연합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가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될 루티아에 있기보다 이들을 원군으로 만드는 게 제가 할 일일 겁니다. " 레미프에 대한 상식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절대 외부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교류라는 것도 그것이 자기들의 필요로 그나마 이어나가는 것이지, 협력관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타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 였다. 갑자기 그에게 무척 미안해줬다. 이런 와중에 원군을 요청하겠다는 발상을 한 건 둘째치고, 어쨌든 그는 없는 용기와 힘을 끌어 모아 루티아를 도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무작정 루티아로 그를 끌고 가려고만 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좋습니다 우선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원군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 그녀는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라며 말했고, 카셀은 보일 듯 말듯 미소 지었다. 문득 로핀과 카셀이 대화하는 중에 잊고 있었던 일, 발자국을 따라 산을 내려오던 중 만난 그 점은 로브의 기사, 카구아가 다시 기억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카구아와 익셀린 기사단? 들 다 어떤 의미에서 '검은 기사‘ 였다. 타냐는 로편이 뭘 말하고 싶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4) 늑대와 마법사 레미프들의 회의는 굉장히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찌나 요란한지,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도 알아보는 이가 별로 없었다. 병사들 몇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악간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 하지만 로핀이 두 사람 옆에 서주며 병사들에게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바로 경계를 풀어버렸다. 로펀은 이 곳에서 상당한 신뢰를 얻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이 바뀌었나?" 주위가 소란스러워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와중인데도 로편의 목소리는 아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높낮이였다. “레미프의 회의라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냥 종 있어보고 싶었습니다.” 카셀이 넉살 좋게 대답했고, 로핀은 웃었다. 레미프 노인들이 움막의 안쪽 절반 정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젊은이들이 자리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움막에서 긴쪽 끝에는 라든의 홉트인 후던틴이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반대쪽 끝에는 로핀을 비롯한 두 사람이 서게 되었다. 로핀이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이런 위치 덕에 후딘틴은 카셀과 타냐를 자주 쳐다보게 되었다. 타냐는 그럴 때마다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 곤욕스러웠다. 후딘틴은 타냐를 발견하고, 살짝 손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구슬이 허공을 천천히 날아와 얼굴 앞에서 멈췄다. 문자그대로 손 하나 대지 않고 돌려준 셈이었다.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목에 걸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삿대질까지 해대며 격렬히 뭔가를 토론하고 있었다. 음악과도 같은 멋진 목소리였음에도 이 정도로 서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으니 길거리 시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고대어를 전혀 모르는 카셀이 물었다. "회의 시작하기 전에 목이라도 풀려고 열심히 자기 가문에 대한 얘기를 떠들어대는 거야. 레미프들은 들으면서 말하는 게 가능하니까, 별로 시끄러울 것도 없지. 형식적인 거야. 원래대로라면 이런게 반나절은 계속 진행되지만, 오늘은 급하니까 반시간 정도면 끝나겠지." 이런 절 반시간? 수다 떠는 것에는 취미 없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다시 로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새벅에 당신과 카셀의 흔적을 쫓아오다가 이상한 적을 만났습니다.“ "이상한 적?" "검은 로브를 입고 검은 베논을 타고 있더군요. 그게 아까 하던 얘기와 연관성이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즌재입니까?" 로펀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나는 몇 년 간 테일드를 찾아 헤매다가 그가 어디로 갔는지 또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어디로 갔는지를 추적하기보다, 어떻게 론타몬이 그 놈 손에 놀아나게 되었는지를 역 추적해 보았다. " 엉뚱한 걸 말하면서 교묘하게 핵심만 피해가다가 상대가 짜증이 치밀 무렵, 아무 것도 아닌 양 결론을 툭 던져 말하는 게 로핀이 가지는 대화의 법칙이었다. 타냐는 이제 그런 부분을 따라잡았고 먼저 말했다. "그 중심에는 익셀런이 있었고요?" "이로피스 황실 기사단, 카모르트 국군, 드래큰 기사단. 모조리 그 힘 앞에 무너졌지. 그 다음이 아란티아. 그런데 웃기는 건 론타몬의 대륙 정복 계획서에 아란터아라는 이름이 없었다는 거야. 고려조차 안 했어. 당시 전쟁에 관여했던 대신들을 몇 명 만나 얘기해봤더니, 작전 회의 때 아란티아라는 이름은 거론 된 적도 없다더군 하나 있다면, 대륙을 론타몬이 지배한 후 아란티아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회의 정도랄까?" "아란티아 침공은 느닷없이 결정되었다?" "그렇지." 타냐는 그 말을 듣자, 테일드가 루티아노에서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론타몬의 군대가 경로를 아란티아로 수정했소. 있어서는 안될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루티아가 개입해야 하겠습니다. ' 로편이 가지는 대화의 법칙은 따라갈 수 있었으나, 배경 지식이 없으면 그 속내를 파고들기 어려웠다. 타냐가 다시 답답해할 찰라, 카셀이 핵심을 알아했다. 그는 덕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멈췄다. 그 손가락 끝이 파르라니 떨리고 있었다. "카모르트에 있을 때 전직 익셀런 기사였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익셀런 기사단의 존재 목적은 드래곤 사냥이었고, 가넬로크가 최종 목표라고 하기에는 당시 전쟁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랐다고 했지요." 그 말에 타냐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익셀런은 그 이후를 대비했고, 그 이후란 것에 아란티아는 없었다?" 로핀은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에는 만족스러워 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제야 기억나는군요. 캡틴 웰치가 화이트 게이트로 진군해 오는 의미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했던 얘기들 그때도 가델로크 정복과 아란티아 침공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했지요?" 타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맞아요, 그겁니다. 어떤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지면 보통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작은사건은 잊혀지기 마련이죠. 책을 읽을 때나, 노래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죠. 문장을 읽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작가가 정말 말하고 싶어하는 행간은 놓치게 되고, 리듬과 가락에 취해버리면 정작 가사를 신경 쓰지 못하는 것처럼요. 가넬로크가 무너지고, 아란티아의 그 극적인 사건 사이에 있어서 주목받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카셀은 자기가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당시 익셀런 기사단 중 일부가 하늘 산맥으로 들어갔다가 실종되었습니다. 들어가는 이라면 누구든 잡아먹는다는 하늘 산맥의 악명을 높여주는 데에만 일조하고 잊혀져 버렸죠." 이제 로핀은 두 사람이 말하는 데 끼어 들지조차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지어낸 얘기라고 알고 있는데요?" “동화처럼 펴진 얘기라 안 믿는 사람도 많긴 하지만, 지금까지 정황을 따져보면 오히려 그게 사실이라는 게 더 사실적이에요." 카셀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레미프들의 토의는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한 바탕 싸울 태세였다. 그렇게 흘려듣자, 외국어인 레미프들의 언어가 귀에 더 잘 들어왔다. 이제 몇몇 어려운 단어들을 빼고는 거의 모든 말이 이해되었다. [엘레부나르 가문의 아름으로 말하건대, 그 때 있었던 도난 사건은 결코 할아버지와 관계없는 일이오.] [가문의 아름은 진실을 선고할 가치가 없다.] [알긴 하나? 그 폭력 사건에 대한 대가로 내 딸이 스스로 팔을 부러뜨렸어 그렇다고 그 애가 그 멍청한 신랑이랑 화해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이혼을 하겠다는 건가? 내 삼백 년을 살아왔지만, 그런 프보에 놈들이나 하는 멍청한 관습을 따르려고 하는 레미프들은 라든 땅에 있어본 적도 없었어.] [요새 젊은 것들은 도대체가 글러 먹었어. 옛날은 하늘 산맥이 공기도 더 좋았지.] [잠깐, 이건 아까 그 도난 사건이랑 아무 관계도 없는 얘기지 않소?] [왜 딴소리야? 공기가 더 좋았다니까!] 이런 얘기들이 오고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호흡도 되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반나절 동안 할 수 있는 레미프들의 인내력에 치를 떠는 타냐였다. 그녀는 레미프들의 말을 귀에서 흘려버러고 카셀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까지 정황을 종합해보면 론타몬 정복 전쟁의 최종 목표는 가넬로크도, 아란터아도 아닌 하늘 산맥이었군요.” “정확히 말하면 드래곤 사냥이었고.” 로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왜? 드래곤 기사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드래곤 사냥을 훈련 받은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 산맥에 있는 드래곤을 왜 공격하려 했던 거죠?" 타냐가 물었다. "나도 그걸 알고 싶어서 하늘 산맥에 오른 거야. 이 모든 일을 꾸민 게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면 이 일을 해결해야 할 사람은 울프의 기사가 아니라 루티아의 마스터다. 테일드가 있는 곳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녀석이 와야 할 곳에 먼저 가 있는 것! 그게 내가 얻은 해답이었다." 로핀의 말에 타냐는 나직이 신음했다. “아까 모든 사건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요? 그럼 10년 전 벌어했던 일의 여파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겁니까? 모즈들의 공격 , 구아닐...... 이런 것들이? 전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만." "여파? 여파라...... 응? 여파라니?" 로핀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익셀런 기사단의 일부가 드래곤 사냥을 위해 하늘 산맥에 오른 그 사건의......” "일부?" 로핀은 레미프들의 회의에는 아랑곳 않고 큰 소리로 웃었다. “오십 명 밖에 안 되는 울프 기사단에도 굳이 정예라고 할 만한 하얀 늑대들이 있는데, 그 몇 백 명 규모의 익셀런에는 정예가 없었겠나? 그 때 하늘 산맥에서 사라진 건 그냥 대강 추린 녀석들이 아니었어. 드래곤 사냥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기사들, 즉 가장 실력이 좋은 기사들로만 만들어낸 익셀런 내의 또 다른 기사단, 그게 제 1기사단이다. 새벽에 검은 베논을 타고 있는 기사들을 보았나? 그게 바로 그 놈들이다 여기서는 승의 유령이라는 뜻으로 카구아라고 부르고 있지. 루티아에서는 어떻게 부르고 있나?" 레미프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로핀은 요란했을 때나 조용해진 지금이나 상관 않는 목소리로 할 말을 끝냈다. "난 10년 전에 실패로 끝난 사건의 여파를 확인하기 위해 여기 머물고 있는 게 아니야. 실패? 내가할 일은 실패라고 알려져 있는 일을 정말로 실패로 만드는 거다. 이런 씹어 먹을!누가 실패래? 녀석들의 드래곤 사냥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제 움막 안은 거것말처럼 조용해졌다. 로핀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검은 수염이 덮인 빰을 긁적였다. "휘유~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려나 보군," 회의 진행 방식은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내림차순으로 의견을 말하고 제일 마지막에 그 의견이 맞는지에 대한 점을 치면서 결과가 나타난다고 로핀이 설명해주었다. 앞에서 떠들어댄 것이 긴 것에 비하면 그런 결정은 순식간에 난다는 말도 곁들였다. 타냐는 아침에 만난 카구아의 검은 로브 안에 익셀런의 갑옷을 그릴 수가 없었다. 다시 거기에 대해 물어보려 할 즈음, 회의가 끝나버렸다. "아, 결과가 나왔군. 안타깝게도 레미프들은 자네들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로핀이 말했다. 타냐는 전혀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말도 안 돼요." "응? 안돼? 뭐가 안 돼?" 로핀도, 카셀도 타냐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볼품없이 크기만 한 코를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10년 전 현역인 기사라면 지금쯤 꽤 나이가.......” 타냐는 거기까지 말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10년 전 현역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고, 현역에서 물러나 늙었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일반인은‥‥‥ 하늘 산맥에서 그렇게 오래 견디지 못 해요." "맞는 말이야. 나도 여기 살면서 점점 머리가 둔해지거든. 어떻게 된 건지는 그 자식들한데 직접 물어봐." 로핀은 툭 내뱉었고, 타냐가 뭘 더 물어볼 지 기대하는 눈으로 기다렸다. 카구아가 익셀런 기사단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따져봐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그걸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 여기에서 그걸 발이 안 된다고 따져봐야 괜한 억지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회의죠?" 타냐는 다른 걸 물었다. “드래큰을 깨우는 의식이야. 라든의 지배자, 논틸은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어서 깨우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지. 인간으로 치면 신을 깨우는 종교 의식이니 , 그 의식에 참여할 이를 경건한 진행 과정을 거쳐 뽑는 거야."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치고는 꽤 빨리 결정이 났군요." “사실 이 의식에 대한 준비는 반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어. 매번 같은 결과를 줬으니 굳이 또 긴 회의를 할 필요가 없는 거지. 한달 전에 이 비슷한 멤버로 가긴 했는데, 실패했었다. " “실패? 드래곤이 일어나지 않은 건가요?" 카셀이 얼른 물었다. 그는 벌써 드래곤을 볼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자기를 공격해온 구아닐은 드래를 취급도 안하는 것 같았다. “아니, 논틸의 영역에 다가가지 조차 못 했어. 중간에 프보에 종족들이 기습을 하는 통에 큰 싸움이 벌어졌고 양쪽 다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한 거지." 포보에는 땅을 뜻하고, 즈비는 하늘을 뜻하는 단어였다. 단어가 주는 의미 그대로, 그 둘은 앙숙 관계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건 아마도 최근에 벌어지기 시작한 일일 거라고 타냐는 짐작했다.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수 정예로만 가기로 한 거야. 멤버는 지난번과 동일하되, 같이 가는 병사들은 최소한으로. 그게 회의 내용이었다.” 타냐는 흡트가 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물었다. “저건 뭘 하는 거죠?” 늙은 홉트는 붉게 타는 숯이 가득 차 있는 검은 항아리를 앞에 두고 그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강력하게 집중된 마법의 힘이 홉트의 손 위에서 아른아른 보였다. 마법사의 눈에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자기들이 한 회의 내용이 맞는지에 대해 점을 치는 거야. 드래곤께서 신탁을 내린다. 라고 하지만, 형식적인 거야. 원래 회의라는 것이 점괘에 들어맞는 결과를 내는 게 목적이니까. 비웃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시험답안지를 검토하는 것에 불과한 거야. 회의에서 결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다섯 명이 지목될 거다.” 로핀은 후딘틴의 손놀림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었다. 주름 진 손에 쥔 하얀 가루가 숯이 든 항아리 위에 떨어지자 깜짝 놀랄 만한 큰 소리가 나며 하얀 연기가 위로 피어 올랐다. 카셀이 어깨를 움츠렸고, 타냐는 고개를 뒤로 약간 젖혔다. 그 정도로 집중된 힘이 항아리 안에서만 맴돌 수 있도록 조절하는 후딘틴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피어 오른 연기는 뭉게뭉게 하나의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카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핀, 저는 여기 레미프들이 루티아에 원군으로 가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까 소수 인원만 드래곤을 부르러 간다고 했지요? 그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릴 거 아닙니까? 저는 아침에 우릴 맞이하러 나온 레미프들의 군대를 보고 대단히 막강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병력의 일부만이라도 루티아로 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핀은 카셀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 달 전에 프보에 족이 공격해 왔다고 했지? 그 일 때문에 여기 레미프들은 보통 조심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 후딘틴은 루티아의 힘에 자신의 힘이 억제 당한다고 생각하지. 그런 그가 루티아를 도우러 가려 하겠나? 더구나 외부 일에는 신경도 안 쓰는 이 종족이? 불가능해." "말이라도 꺼내보세요." "어이쿠, 캡틴께서 명령이신가? 거절하겠다. 이들은 자기들의 점괘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고 점괘에 없는 명령에는 절대 따르지 않아 봐라. 지금 내리고 있는 점괘에도 결국드래곤을 깨우라고 결론이 나오고 있다. 레미프들에게 점괘는 곧 기더다. 운명이라고 해석해야 하지만, 그 단어로는 부족하지. 굉장히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단어라서 심지어 충동적으로 도둑질을 해도 기더가 정해진 대로 따랐다고 밀지. 어쨌든 프보에 족이건 즈비 족이건, 레미프들이 기더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없어." 항아리 위에 만들어진 연기가 첫 번째로 그린 형상은 기도하고 있는 레미피의 형상이었다 정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사람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려내는 모양이 정교했다. 후딘틴이 가래가 낀 듯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위버브.] 로핀이 설명했다. "잠을 깨우는 자. 즉, 드래곤을 깨울 수 있는 무녀를 뜻하지. 회의에서 거론된 인물은, 두 사람 다 만나본 시나비아라는 레미프다" 농도 짙은 연기가 꿈틀대며 다시 만들어낸 그림은 레미프들이 가지고 있는 날개의 형상이었다. [드루 기즈더즈 가이우브.] "가장 빨리 나는 자 레미프의 세계에서는 가장 빨리 난다는 건 곧 가장 강한 전사를 뜻하는 거야. 회의에서 거론 된 인물은 당연히 이 곳의 캡틴인 판커틴이지." 계속 로핀의 옆에 있던 덩치가 산만한 레미프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손을 들어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한 번 향했다가 다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프의 세계에서 두 번 째로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 무녀가 움직이는 데 가장 강한 호위 무사가 파라가는 건 당연한 거야" 로핀의 말에 카셀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말하려던 그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타냐가 그에게 생각하고 있는 걸 말해보라고 하기 전에 연기가 다음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번 연기는 벗은 발이 앞뒤로 걷고 있는 움직이는 형상을 표현해냈다. 이런 종류의 마법은 타냐가 알고 있는 마법의 이른으로는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후딘틴이 소리쳤다. [드루 기즈더즈 베푸브.] "가장 빨리 걷는 자." 로핀은 그 말을 해석해 준 후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이 일에 나 역시 깊이 관련되어 있어서인지 회의에서도 빠지지 않더라고. 가장 빨리 걷는 자는 바로 나, 오파이다. " 로핀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살짝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연기가 만들어내는 모양을 바라보며 로핀은 어깨를 으쓱했다. "더 볼 것도 없어. 나머지 둘은, 무녀와 함께 일행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사인 '가장 높이 서는 자'와 드래곤의 동굴에서 길을 안내할 '어둠을 읽는 눈'이겠지. 이미 그 인물도 내정되어 있어." 그러나 그 연기는 로핀이 예상하지 못한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다음을 호명하던 후던틴의 거침없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결여되었다. 당황한 레미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만들어낸 것은 커다란 나무의 형상이었다. [와자이브트......, 그봄 즈비 모에프디압.] 계속 해석해주던 로핀도 조금 얼떨떨한지 눈만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타냐도 후딘틴의 발음을 놓했으나, 대충 '마법사'에 대한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짐작해 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연기가 만들어낸 형상에 레미프들은 기겁을 했다. [라두 워그.......] 연기가 마지막에 만들어낸 모양은 늑대였다. 그리고 연기가 사라지며, 점괘도 끝났다. 레미프들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처음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소란스러웠던 것만큼이나 떠들어됐다. "다들 왜 저러죠?" 카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점괘에서 지목한 인물이 회의 내용과 둘이나 달라졌다. 하나는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 또 하나는 '털 빛 하얀 늑대‘라고.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후딘틴은 신탁에 다른 힘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얘기하는 중이다 " 로핀은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갑자기 타냐를 획 쳐다보았다. 타냐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보며 불편한 기미를 감추지 못했다. "뭡니까?" “타냐 네가‥‥‥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이긴 하지?” "전 루티아에서 온 마법사입니다. " “아니, 엄밀히 말하면 어제 우리 셋은 모두 하늘 산맥에서 내려왔잖아. 자의적인 게 아니 긴 해도.” “하지만 레미프들의 점괘에 인간이 나올 이유가 없잖습니까?” “나는 그럼 인간이 아니던가?” “아.” “그리고 털 빛 하얀 늑대란 건 어쩌면 울프 기사단의 캡틴을 말하는 걸지도.......” 카셀은 심각하게 그 점괘에 대한 내용을 생각해 보더니 물었다. "다들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 거죠?" "서로 자기가 그 점괘의 주인공이라고 떠드는 거야 자기 이름에 늑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전사나, 자기 고향이 하늘 산맥에 있는 마을이라는 등, 11대 째 조상이 늑대였다는 둥, 별로 신빙성들은 없군. 소란을 진정시키지 않는 걸 보니, 홉트도 당황하긴 한 모양이야.“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되었던 회의는 뜻하지 않게 길어지기 시작했다. 로핀은 그 회의에 끼지 많았고, 카셀은 가끔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며 회의가 끝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지루하게 하품을 하는 로핀에게, 갑자기 카셀이 물었다. "로핀. '내가 하얀 늑대다. ' 라는 말을 레미프어로 뭐라고 하죠?" "뭔 헛소리야?" 그러면서도 로핀은 이미 카셀의 의도를 짐작했는지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어서요. 이 점괘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좋아. 하지만 그런 단순한 단어 조합을 네 발음으로 말한다고 해서 이 요란한 회의를 진정시킬 수나 있을지 모르겠구나." 로핀은 무시하고 있었고, 카셀은 그 무시를 무시하고 있었다. 순간 타냐는 카셀의 눈동자에서 블랙이 이끄는 익셀런 기사단을 맨몸으로 막아내던 그 때의 눈빛을 발견했다. 지금 그는 단순히 이 난장판인 회의석상에 뛰어들어 뜬금없이 자기가 하얀 늑대라고 밝히는 것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적어도 타냐가 아는 카셀은 그런 단순한 계산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카셀, 뭘 생각하는 겁니까?' 짧은 시간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타냐가 알아낸 기사 울프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기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늑대의 이빨'이라는 무기 또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검술은 전혀 모르지만 카셀 역시 울프였다. 지금 카셀 울프가 대의 이빨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로핀이 말했다. "자이 임 드루 라두 워그......따라 할 수 있겠나?" 그러자 발음에 대한 걱정이 아닌 다른 부분에 대해 카셀이 물었다. “'자이' 가 나라는 뜻이죠?" "맞아." "가장 빨리 나는 자는 '드루 기즈더즈 가이우브' ?" 로핀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장난처럼 가르치던 고대어 발음을 접고 물었다. “기억력 하나는 좋군 그런데 뭘 하려는 거냐, 카셀?" 카셀은 대답하지 않고 획 돌아서서, 목청 좋은 레미프들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드루 기즈더즈 가이우브 아즈 라이! (가장 빨리 나는 자는 '라이'다.)" 그 난장판이던 회의가 기적처럼 조용해졌다. 아주 짧은 순간 찾아온 그 정적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타냐였다. 타냐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들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제게 작전이 있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둘이서만 루티아로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홉트의 눈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실패하면 우리 둘을 내보내줄 것 같지도 않군요. 지금 당신에게 다들 미쳤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 "상관 없어요. 로핀, 통역해 주십시오. 내가 알기로 가장 빨리 나는 자는 라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로핀마저도 곱지 않은 눈길로 카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네 놈이 무슨 것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길 바란다. " 로핀이 그 말을 통역하자마자 다른 어떤 레미프들보다 먼저 판커틴이 앞에 나섰다. 손가학으로만 카셀의 머리를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덩치가 소리쳤다. 로핀이 그 말을 다시 통역해주었다. "판커틴이 말하길, 자기가 가장 빨리 나는 자라고하고 있다. 넌 지금 아란티아로 따지면, 퀘이언의 분노를 사고 있는 거야." "하지만 퀘이언은 아니죠. 다시 통역하십시오, 로핀. 판커틴이 아니라 후던틴에게 말입니다." 카셀은 눈에 핏대가 선 판커틴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후딘틴이 말했고, 로핀이 작은 목소리로 통역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당신들의 회의가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빨리 나는 자는 라이입니다. 그리고 털 빛 하얀 늑대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인 저를 말하는 것이고,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는 여기 있는 마스터 타냐입니다. " [너 정도 약한 우그가 함부로 늑대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고, 우그의 와자이브트가 감히 레미프들의 와자이브트와 겨루고 있는 것도 우습다.] "우그의 와자이브트가 아니라 루티아의 마법사요!" 루핀은 그 말을 후딘틴에게 통역해주며 키득대고 웃었다. "어이, 카셀. 지금 후딘틴의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가? 조심하는게 좋아. 그가 손가락만 까막하면 네 머리는 하늘 산맥 안에서 찾지 못할 거다. " "제 두려움은 저의 죽음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 산맥에서 제 친구가 두 명이나 실종 당했고, 또 다른 두 명은 루티아에서 위험을 맞이했으며 다른 한 명은 그런 루티아를 구하기 위해 홀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 여기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통역하십시오, 로핀! 네가 모두를 이끌고 드래곤을 깨우겠다. 그러니 그대들은 원군을 모아 루티아를 구하라. 그대들이 루티아를 구하면 루티아의 마법사들이 다시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 로핀은 악을 쓰는 듯한 카셀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더니 '에라, 모르겠다 ' 하는 표정으로 후딘틴에게 그 말을 통역해주었다. 늙은 홉트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소리쳤다. [에피컨딕후.(받아들일 수 없다!)] 통역도 해주지 않았는데, 카셀은 그 말을 말아듣고 소리쳤다. "그럼 여기에 앉아 누가 늑대고 누가 마법사인지 구아닐이 쳐들어올 때까지 회의나 하고 계시오!" 카셀은 획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방 안에는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로핀은 그 말을 통역해주지도 않았는데, 자세히 보닌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웃느라바빴다. 레미프들은 '이상한 우그‘ 또는 '정신 나간 우그’ 라고 떠들었다. 홉트는 화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판커틴은 타냐가 카셀이라도 된 것처럼 노려보았다. 오래 있을 만한 자리도 못 되었고, 굳이 있을 만한 자리도 아니었다. 타냐도 바로 카셀을 뒤따라 방을 나갔다. (5) 가장 빨리 나는 자 카셀은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이 길고 꼬러가 몸길이보다 더 긴 이상한 새들이 무리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타냐는 카셀의 뒤에 서서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가 먼저 뒤를 돌아 말했다. "제 맘대로 되지는 않는군요." 타냐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레미프에게 원군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정말 그 나이 많은 레미프들이 외지인의 말을 들어줄 줄 아셨습니까?" "적어도 협상의 여지는 보일 줄 알았죠." "레미프들은 협상이란 걸 모릅니다 교류에 있어서도 자기들이 제시한 물건값을 쳐주지 않으면 그냥 가버리죠. 손해를 보든 이익을 보든 언제나 가격이니 물물교환 품목을 자기들이 결정합니다. 그런 것조차 운명대로 따른다...... 가 저들의 생활 습성이거든요. 성공 여부는 접어두더라도,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아까 보여줬던 박력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카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후회했다. "여기 레미프들 하는 짓이 어딘지 인간들의 모습과 비슷해서요. 자제력을 잃고 울컥해버렸습니다. " "비슷한 게 화날 만한 일이었습니까?" "괜한 억지죠. 하늘 산맥의 엘프들이란 항상 고귀하고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믿어왔거든요. 하지만 자기들의 이익만 따지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지독히 인간과 비슷해 보이더라고요." "당신은 레미프들의 마을에 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빠른 판단 아닌가요?" "직감이죠. 홉트는 빼더라도, 주위에 있는 다른 레미프들은 적어도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어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레미프들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했으니 비슷한 게 당연할 겁니다. 그리고 '라이'라는 건 어디서들은 이름입니까? 저에겐 조금 갑작스럽군요." "아까 그 꼬마 애들에게 들었습니다. " 타냐는 그 이름이 나온 경위에 대해 뭔가 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었다. "공깃돌 놀이하던 그 꼬마 애들?" "예 ." “그 애들한데 들은 이야기를 저런 신성한 회의실에서 말씀 하셨습니까?” "저게 굉장히 중요하고 신성한 회의라고 가정해 봤습니다. 제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을 경우 피들은 그냥 무시했을 거고 망신만 당했겠죠. 하지만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협상이란 것에 대해 모르는 레미프들이라도 관심을 보였을 소재 아니었습니까? 그 증거로 판커틴이 화를 냈고......“ "혹시 실패했을 경우 망신을 당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안 하셨습니까?" "안 했어요. 또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타냐나 로핀이 구해했겠죠." 믿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린 생각으로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니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지는 건 타냐였다. "좋습니다. 지나간 일은 넘어갑시다. 꼬마 애들이 얘기해됐다는 라이라는 건 누굽니까?" "꼬마들이 제가 누구냐고 묻더군요. 저는 어딘지 그 녀석들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기도 했고, 피곤한 나머지 복잡하게 따지기도 싫고 해서, '나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단의 캡틴이다. ' 라고 말해줬죠." "그런 긴 말도 '앉아'를 배운 것과 같은 방식으로?" "손짓 발짓 눈짓이죠, 뭐. 제가 기사단 캡틴이라는 걸 설명하는데 아마 10분쯤 결렸을 겁니다. 다행히 그 꼬마들은 제가 말을 못한다는 걸 전혀 답답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런 걸 설명하는 걸 즐겼죠. 외국어 배우는 데는 윽박지르는 선생들보다 같이 떠들어주는 꼬마 애들이 더 좋더군요." 마스터 골베인은 윽박지르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이런 논리로 따지면 좋은 고대어 선생은 못되었다. 타냐는 지루한 고대어 수업이 갑자기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여하튼 그 애들은 자기들에게도 가장 강력한 전사가 있다는 말을 해주었고, 그 이름이 라이라는 것도 그 때 알았죠. 내가 만나보고 싶다고 했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만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 이상은 말이 딸려서 알아내지도 못 했고요. 아아, 이제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상황은 끝났습니다. 작전대로라면, 문을 나설 때 레미프 중 누구 하나는 절 잡았어야 했는데, 안 잡더군요." "레미프가 아니었다면 통했을 작전이었습니까?" "협상이라는 단어를 아는 존재라면 통했을 법했죠. 그렇지 않아요?" 정말 그랬을까? 타냐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어찌실 겁니까?" "저는 힘이 되지 않더라도 타냐는 루터아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말이라도 구해봅시다. " "여긴 말이 없습니다. 베논이라는 가축만 있지요. 숲에서는 말보다 빠른 대신, 민간이 타기에는 까다롭죠." 검은 털의 베논은 뒤에 기사를 한 명 태우고도 엄청난 속도였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카셀과 타냐가 베논을 구해서 루티아로 돌아가는 문제를 상의할 때, 움막의 문이 다시 열렸다. 로핀은 문에 기대어 손짓했다. "어이 카셀, 점괘를 논하는 자리에서 나가는 것은 레미프들의 세계에서 굉장히 무례한 짓이다. 어서 돌아와 사과해라." 카셀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귀족들의 식사시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만큼 무례한 것입니까?" 로핀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번 캡린은 말싸움 잘 하는 친구로 뽑았나? 어쨌든 네 억지가 조금 통하긴 했다. 사실 그 정도로 과격하게 몰아붙이는 녀석은 레미프 세계에서 드무니까 신기해서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어한다는 편이 옳겠지만......” 타냐와 카셀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셀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통했네요?' 로핀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후딘틴이 네 제안이 적법한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증명해 보라 하는군. 네 말대로 점괘를 해석해도 되는지 자기도 모르겠다면서 ." 타냐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레미프의 홉트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굉장히 솔직하네요." “솔직한 만큼 잔인하다. 이 점괘가 틀리면 카셀, 넌 죽을 지도 몰라. 그건 나도 막지 못한다. " "처형 같은 겁니까?" 카셀은 약간 놀란 듯, 그러나 특유의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기회를 잡은 건 네 혀다. 그러니 너를 죽이는 것도 네 혀다. 후딘틴이 제시한 조건은 간단하다. 라이를 동행 시켜도 되는지 네가 증명해 봐라." 카셀이 별 거 아닌 듯 말했던 라이에 대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가장 빨리 나는 자라고 할 수 있지만, 만날 수 없는 레미프? 판커틴이 그 정도로 흥분한 걸 보면, 분명 라이라는 자는 평범한 레미프가 아닌 것 같았다. 움막 안에서 후딘틴을 비롯한 몇몇 늙은 레미프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카셀과 로핀이 옆으로 물러났다. 늙은 홉트가 말했고, 로핀이 해석해주었다. [네 말대로다, 우그. 가장 빨리 나는 자는 라이다. 하지만 데려갈 수 없는 자이기도 하지. 네가 데려가봐라. 만약 그렇다면 너를 점괘에 나온 털 빛 하얀 늑대로 인정하겠다. 그러나 네가 라이네게 죽는다면, 넌 점괘에 나온 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로핀이 통역을 끝낸 후에는, 이미 후딘틴은 한참이나 걸어가 있었다. 뒤따르는 판커틴의 눈매에 카셀은 뒤로 시선을 피하기까지했다. "안 좋은 기분이 드는군요 " 타냐가 말하자, 카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타냐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로편은 후배에 대한 걱정은 없고, 잔인한 호기심만 가득했다. "나도 라이에 대해서는 애기만 듣고 본 적은 없어. 네 덕에 한 번 만나게 되었구나." "라이가 대체 누구죠?" 타냐가 물었다 "글쎄, 나도 소문만 들어서....... 저 판커틴, 사실 이 마을 진짜 캡틴이 아니다. 윈래 캡틴이 있있다지. 판커틴은 솔직히 말해 내가 전력을 다하면 그다지 어렵지 많은 상대지만, 원래 캡틴인 타놀스라는 자는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졌다고 하더구나 " “겨뤄보지도 않은 검사와 실력을 비교하는 게 가능합니까?” 타냐는 카셀이 너무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아 괜히 얘기를 돌려보았다. "시나비아가 해준 얘기니까 거의 맞을 거야. 물론 진짜로 싸우면 내가 이기지만 객관적인 전력은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바로 그런 타놀스를 라이가 죽인 거야. 기습도 아니고 정식 대결에서! 판커틴이 괜히 화냈겠니? 카셀이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힌 셈이잖여.“ 로핀은 일부러 카셀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카셀의 팔을 이끌었다. “걱정 마 너의 기더가 여기에서 멈추라고 명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여자랑 자 본적은 있냐? 오우, 그럼 지금 죽으면 좀 억울하겠군.” 뒤에서 보기에 카셀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거기서 제일 악독한 건 로핀이었다.타냐가 추측하기에, 숲과 산이 너무도 잘 어우러져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 마을에 절대 없을 것 같은 게 세 가지 있었다. 그것은 술이나 여자를 파는 뒷골목, 망치에 부서진 돌무더기가 가득 쌓여있는 채석장, 그리고 축축한 지하에 쇠창살로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그런데 절대로 없을 것 같은 세 가지 중 하나가 이곳에 존재했다. 마을의 외곽 족에는 어설프게 계단이 만들어진 토굴이 하나 있었고, 그 끝에는 지하 감옥이 있었다. 쇠창살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 이중 감옥 안에 또 하나의 창살로 둘러싸인 방이 다섯 개 있었다. 나머지 넷은 비어있고, 판커틴은 끝 방으로 셋을 안내했다. 창살이 막혀 있는 큰 창문 너머에서 후딘틴을 비롯한 몇몇 늙은 레미프들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형수가 맹수에 잡아먹히기를 기다리는 지루하게 기다리는 관람객 같았다. 어찌면 후딘틴은 카셀의 말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신성한 회의를 더럽힌 대가로 처벌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거것말을 할 를 모르는 족속들이 그런 고단수 속임수를 썼을 리 만무했지만, 창살 안에 갇혀있는 존재를 보니 그런 생각이 안들 수가 없었다. 굵은 철창 안에 있는 레미프는 팔다리는 물론이고 온 몸이 치렁치렁한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축 늘어진 얼굴에, 탈색된 잿빛 머리카락만 겨우 보여 시체 같았다. 하지만 남을 괴롭힌다는 개념도 갖지 않는 레미프들이 괜히 저런 과잉 대처를 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쇠사슬을 저 정도로 굵게 묶어 놓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판커틴은 로핀에게 뭐라고 짧게 말했고, 로핀이 전달했다.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는군.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하고는 무조건 싸우려 드는 저 망나니를 어디 한 번 성스러운 드래곤 깨우기 의식에 데려가 보라는군." "그렇게 길게 말 안 한 것 같은데요? 통역 제대로 한 거 맞습니까?" 카셀이 불안한 듯 묻자, 로핀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 긴장 풀라는 뜻으로 됫말은 내가 덧붙였어." 로핀은 이 끔찍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카셀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극히 짧은 순간 지었다가 이내 지웠다. "통역이 필요해요." "밖에서 도와주지." 로핀이 말했고, 판커틴이 덧붙여 말했다. “호오, 판커틴이 그러는데, 라이도 인간의 말을 조금 할 줄 안다고 그러네? 잘 됐다. " 철창문이 열렸다. 별로 열린 적이 없어 경첩이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카셀이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갈 때 타냐도 그 뒤를 따랐다. 로핀이 물었다.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 "카셀의 판단을 믿습니다. 제가 그 점괘 속의 존재라면 저 역시 살아남겠죠. '기더' 대로라면." 로핀이 창 밖의 홉트를 돌아보았다. 다른 레미프들도 타냐의 동행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철문은 다시 eke혔다. "고맙습니다, 타냐." 카셀이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당신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뜻이 아니니, 고마워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여차하면 저 레미프를 태워버릴 겁니다. " "제 판단을 믿는다면서요? 예, 예. 같이 태우지만 말아주십시오" "로핀 말투를 짧아가는군요?" "정말요? 오, 맙소사. 로핀을 수호기사로 뽑지 않은 새나디엘 폐하께 축복 있으라." "이놈들, 다 들린다!" 로핀이 소리쳤다. 뭐라고들 다 열심히 떠들었으나, 긴장을 푸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 저렇게 묶어놓으면 대체 먹는 건 어떻게 해결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카셀이 한 걸음 다가가자 끌고 다니기도 힘들만한 무게의 쇠사슬을 몸에 건 채로 라이라는 레미프가 몸을 일으켰다. 몸에 걸려 있는 쇠사슬 몇 가닥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쇳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그리고 카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카셀은 완전히 겁에 질려 얼어붙은 건지, 타냐도 뒤로 물러났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셀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일이 닥치기 전에는 긴장으로 옴짝달싹 못하거나, 겁에 질려 떨다가도 막상 일이 벌어지면 정반대로 위험 속으로 돌격했다. 너무 무서워 겁을 잃어버리는 건지도 몰랐다. "약해보이는군 예전에는 빨리 나는 자였다고 해도 지금은 무리겠는데? 안 그렇습니까 타냐?" 타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다 카셀의 의도를 짐작하고 입을 다물었다. 놀랍게도 카셀은 이 와중에 상대를 도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칼......달라." 이어지지 않는 투박한 인간의 언어로 그 지저분한 레미프가 말했다. "그 다음, 이대로, 그 다음, 널 죽인다. " 제대로 된 언어도 아니었는데도 그의 위협에는 엄청난 살기가 묻어 있었다. 타냐는 숨이 막혀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카셀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누구든 위험을 앞에 두고 자기 앞에 선 건 처음이었다. 의지하는 걸로 보이는 게 싫어, 타냐는 카셀의 오른쪽에 섰다. 그제야 카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완전히 겁에 질린 나머지 눈동자 하나 깜짝이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표정하게 '노려본다. ' 로 인식하겠지만, 타냐는 알았다. 그는 그런 공포를 안고 레미프와 대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남자, 대체.......‘ 이상하게도 카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뜻인가?" [유즈.(그렇다)] "나는 인간들 중 최강의 기사들을 이끄는 캡틴이다. 너는 너의 한쪽 팔을 쇠사슬로 묶은 채로 그런 기사를 이길 자신이 있는가?" [유즈.1 "밖에 레미프들 중 가장 빨리 나는 레미프, 판커틴이 있다. 회복되지도 않은 그 몸으로 그와 싸워 이길 순 있는가?" [유즈.1 두 사람의 대화에는 공백이 전혀 없었다. 카셀은 터무니없는 조건을 줄줄 읊었고, 라이는 무조건 그렇다고 대담했다. "무슨 죄로 여기에 갇혔는가?" 카셀은 괜히 허리를 구부렸다가 곧게 폈다. "레미프,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나, 싸우고 싶다. 그래서, 강한 레미프, 찾았다. 친천히, 하나씩, 그리고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 어둠속에서 라이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카셀도 타냐도 피하지 않았다. 습한 어둠 속에 묻혔던 푸른 눈동자가 햇빛에 옅게 반짝였다. "인간들은 그것을 결투라고 부르지. 그 결투는 정당했나?" "나, 선언했다. 나와 싸우자......고. 날 피하는 자, 싸우지 않는다. 나와 싸우는 자, 싸운다. 그리고 이겼다. 그리고 죽였다. 그게 내 죄다. " 카셀은 숨을 안 쉬고 있었는지 겨우 숨을 토했다. 타냐는 그를 격려하는 뜻에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카셀은 돌아보며 힘없이 미소지었다. 아무리 검술에 대해 무지한 카셀이라도 라이가 풍기는 이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멀쩡할 리는 없었다. 그의 이마에는 말로만 듣던 식은땀이 주루룩 흐르고 있었다. '진짜 무서워하고 있구나.' 생각 같아서는 다 포기하고 그냥 이 방을 나가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충분히 할 만큼 했습니다. 보세요. 판커틴도, 후던틴도 놀라고 있습니다. 이걸로 멈춰도 당신을 욕하지 못합니다. 돌아갑시다. 루티아로.' 그러나 그는 다시 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의 세계에서는 서로가 인정하면 설사 상대를 죽이더라도 그건 살인이 아니다. 그러나 레미프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기사들 간의 불문율이 없는가?" "없다. " “몇 명이나 죽였는가?" "오십 . " “그들은 모두 너와의 결투를 인정했는가?" "했다. " 카셀은 뭔가 결심이라도 하듯 타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깨에 올라가 있는 타냐의 손을 꽉 쥐었다. 타냐는 그의 손길이 의미하는 바를 몰라 당황했다. 이내 카셀은 라이 쪽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어이, 카셀." 뒤에서 로핀마저 소리했다. 타냐는 잡았던 손을 놔주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라이는......살인자가 아니라 전사입니다. " "이런 짧은 대화로 그런 걸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 “레미프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고 했죠? 그렇다면 이 자는 싸우려 하지 않는 자는 죽이려 들지 않을 겁니다. " "그렇다고 다가갈 필요는 없습니다. " “거리를 두고 창살 밖에서 고기를 던져줘서는 사자와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 "그렇지만 우린 이미.......“ 창살 안이라고 말해 봤자 이미 카셀은 마음을 먹은 후였다. 타나는 그의 어깨를 놔줬다. 카셀은 라이와 한 걸음 간격을 두고 정면에 섰다. 그리고 느닷없이 칼을 뽑아 바닥에 힘껏 내리 꽂았다. 칼날의 강도가 워낙 좋아 돌로 만들어진 바닥의 금을 내며 칼이 박혔다. 검은 칼날이 희미한 쇳소리를 내며 파르라니 떨렸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검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칼의 주인이다. 싸우고 싶나?" "싸움이, 내 기더다." 라이는 카셀을 노려보머 말했다. 카셀이 실수로라도 싸우자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머리를 들이받아서라도 죽일 것 같았다. 아니, 그 보다 카셀이 지금 제대로 서 있을 수나 있을 지 걱정이었다. “기더를 내게 맡겨라. 그 기더대로 따르게 해주겠다. " 카셀이 말했다. "네가?" 라이가 의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아니. 나는 싸울 줄 모른다. 그러나 이 칼의 주인으로서 나는 너와 겨를 만한 수많은 전사들을 알고 있다. 또한 이 칼과 함께 하면 피하고 싶어도 싸워야 할 적이 끌려온다. 내겐 그 싸움을 대신할 전사가 필요하다. 네가 내 옆에 서라." 라이는 잠시 듣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 거짓말한다. " "못 믿나?" 카셀은 라이를 상대로 등을 획 돌렸다. 라이는 오히려 자기를 상대로 등을 보인 것에 당황했다. “루핀, 이 자를 묶은 쇠사슬의 열쇠를 주시오." 카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로핀도 당황했다. "제 징신이냐?" "당신이 날 여기에 처넣었잖소? 내 밤대로 하라는 뜻 아니었소?" 처음으로 로핀의 느긋한 얼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거 후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력이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로핀은 판커틴에게 말해 진짜로 그 열쇠를 꺼내 창살 안으로 던지려다, 다시 접었다. 그리고 창살 문을 열고 들어와 직접 카셀의 손에 열쇠를 쥐어주었다. "네가 죽으면 나도 그 운명에 동참해주지." 카셀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같이 죽겠다는 겁니까?" "너 죽으면 저 녀석도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야." "아하! 최고의 마법사와 최고의 기사를 호위로 됐군요, 저는." 카셀은 열쇠를 쥐고 웃으며 돌아섰다. 검은 칼날이 코앞에 고정 되어 있었다. 라이는 바닥에 꽂혀있던 아란티아의 보검을 들고 있었다. 카셀과 타냐, 로핀은 모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어설프게 위협할 상대가 아니었다. 로핀도 괜한 자극을 주지 많기 위해 검을 꺼내지 않았고, 타냐도 함부로 마법을 쓰지 못했다. 양손과 팔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으나, 왠지 라이의 검보다 더 빠르게 마법을 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카셀이 로핀과 타냐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로핀과 타냐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눈으로만 결론을 내렸다. 카셀의 목숨은 카셀 본인만이 보호할 수 있다. 나서지 마라....... 라이는 검은 칼날을 유심히 살피기만 했다. 하지만 언제라도 충동적으로 칼을 휘두르면 그걸로 카셀의 목숨은 끝이었다. 라이는 몇 년 만에 만난 연인을 대하는 손길로 칼날을 차분히 보듬어주면서 말했다. "인간, 거것말 한다. " "인간에게...... 속은 적이라도 있나?" 아무 말도 못할 줄 알았던 카셀이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라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카셀이 먼저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자신의 공포가 드러나기 전에 떠들어서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너에게 상대의 실력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있다면 지금 내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도 보이겠지? 그러나 내 뒤에 있는 두 사람은 나와 다르다. 싸우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 자와 싸워야, 네가 여기에 갇히는 바람에 따르지 못했던 네 기더를 다시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를 죽인다면 너는 또 다시 이 곳에 갇히게 된다. 나를 죽여 다시 여기에 갇히는 것을 택하겠는가, 나를 따라 싸우는 것을 택하겠는가?" 라이의 침묵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무섭나?" 라이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카셀은 웃었다 로핀의 눈썹이 꺾였다. '저 자식, 미쳤나?' 그의 눈이 그렇게 말했고, 타냐도 당혹스러웠다. "너 , 날 겁준 거 였냐? 못된 녀석 맞다, 무서웠다. " "그런 네가, 날, 기더로, 인도?" 익숙하지 않은 인간의 언어로 말해 어눌해 보이는 것뿐, 라이는 굉장히 영리한 자였다. 타냐는 카셀을 구할 기회만 노렸지만, 라이는 눈빛으로 그녀는 물론이고 로핀까지 묶어두고 있었다. “딱하기도 하지 " 카셀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자기에게 걸 맞는 상대가 없었나? 내가 널 무서워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는 않은 줄로 안다. 그럼 넌 내 능력에 대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가?" "능력?" "내 왼쪽의 로핀을 지금 베어보라." 농담만 일삼는 로핀의 눈빛이 일순 살기를 띠었다. "나, 필요 없는 살생, 하지 않는다. " 라이는 거절했다. 그러자 카셀은 버럭 호통쳤다. “닥쳐라, 라이, 지금 이 감옥 안에서 살생 따윈 벌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라이가 쥔 보검이 로핀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뽑은 로편의 칼이 보검과 부딪혔고, 거의 동시에 타냐의 마법이 라이의 얼굴을 향했다. 라이는 고개를 젖혀 피했으나, 움직임에 제한을 받아 어깨와 쇠사슬 한 쪽이 얼어붙었다. 두 자루 칼이 카셀의 얼굴 앞에서 고정되어 있었다. 라이와 로핀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날 겁줄 수 없는 자는 내 옆에 서지 못한다, 라이. 마지막으로 묻는다. 싸우고 싶나?" 카셀은 뒤이은 마법을 준비하는 타냐를 저지하고 말했다. 라이는 조금씩 힘을 빼 로핀의 칼에서 보검을 뗐다. "싸우고 싶다. " 라이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보이던 살기와는 다른 성격의 의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싸우게 해주겠다. 그러나 그건 내 통제 안에서다. 네가 약속을 지키면 나도 약속을 지킨다. 적어도 너에게는 자유가 주어진다. 속이기 쉬운 위치에 있는 건 너야." 라이는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아란티아의 보검을 도로 내주었다. 카셀은 칼을 잡아 칼집에 넣었다. 그러고 라이의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손목과 발목, 그리고 몸을 걸고 있는 자물쇠가 모두 열리고, 그의 몸에서 묵직한 쇠사슬이 모두 흘러내렸다. 벌거벗은 그의 몸은 오래 갇혀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건장한 육체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라이는 두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자신의 몸을 뜯어보았다. 카셀은 그가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로핀에게 물었다. "로핀, 이제 후딘틴에게 어떤 증거를 보여야 합니까?" 로핀은 대답은 않고 카셀을 무섭게 패려보았다. "너 이 자식, 내 칼로 즈토크 워그를 막게 했냐?" "두 명검의 상봉이라고 해둡시다. " "흥" 로핀은 코웃음을 치며, 후딘틴이 있는 창살문을 덕으로 가리켰다. "천 년 동안 살아오며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한 척 했던 저 노인이 지금 놀라고 있는 모습을 봐라. 너는 이미 어떤 레미프도 감히 앞에 서지 못한 살인마의 칼날 앞에서 살아남았다. 그게 이 점괘에 대한 너의 해석이 옳다는 증거지." 카셀은 라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 자는 살인마가 아닙니다. 결투의 개념 없는 레미프들보다 제가 그걸 먼저 알아낸 것뿐이죠." 인간의 말 뿐 아니라 인간의 예법에 대해서도 아는 건지, 라이는 카셀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카셀이 말했다. "팀에 합류한 걸 축하한다, 라이." 타냐는 악수를 하고 돌아선 카셀을 부축했다. 뒤늦게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그가 더없이 가없었다. 라이가 밖으로 나오자, 겁에 질렀으면서도 구경하러 나온 레미프들이 사방에 잔뜩 있었다. 그를 임시 거처에 넣어두고 옷을 내주고 오랫동안 묵은 떼를 싰는 동안 카셀은 집 앞에서 계속 기다렸다. 그를 풀어준 게 마음에 걸리는 지 판커틴도 카셀의 옆에서 칼을 차고 서 있었으며, 만약을 대비한 병사들도 집 주위에 여럿 배치되어 있었다. "그 자를 그 정도 쇠사슬에 묶어둘 정도였다면 이제 와서 저런 경비 세우는 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타냐는 팔장을 끼고 서서 로핀에게 물었다. "내가 아나? 지들이 그러고 싶다는데." 로핀은 불도 안 붙은 담배 파이프를 물었다. "아까.......“ 타냐는 라이의 앞에 선 카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당신도 카셀의 힘에 잠깐 동안 눌려 있었습니다. " "맞다. 젠장! 변명의 여지도 없어." "뭐, 결국 라이를 제압한 건 당신 힘이었죠. 그보다 정말 라이가 카셀을 따를 거라고 짐작 했었습니까?" "저게 따르는 거냐?" "적어도 굴복시킨 건 아니 었습니다 " "것도 그러네. 따를 거라고 생각했냐고? 만나본 적이 없는 레미프를 어찌 알겠냐? 그저 협상이 실패로 끝나면 카셀을 끌고 나오려고 했었지." 집 앞에서 서성대던 카셀이 반가운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봤다. "이제 제가 말한 대로 됐으니 라든 족에서 루티아로 원군을 보내 줄 차례겠지요?" "선배 부려먹고 생글생글 잘도 웃네. 난 모른다! 결정은 홉트가 내리는 거야." "레미프들은 약속을 지킬 겁니다. " "정확히 해, 카셀. 레미프들은 원군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러나 카셀은 처음 듣는 것처럼 팔짝 뛰었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 뒤늦게 깨달은 그의 표정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타냐도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역시 레미프들은 자기들이 손해 보는 거래는 처음부터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어쩌죠?" "일단 결정을 기다려보지,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감옥 안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카셀을 대하는 로핀의 태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것에 뿌듯해 해야 할 카셀은 마냥 이 손해 보는 거래에 대한 해결책을 풀어내기 위해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카셀, 라이를 풀어줄 때 당신은 '어떤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까?" 타냐가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대체 뭘 믿고 덤벼든 거냐고 물은 겁니다. 로핀을 공격해 보라질 않나, 너무 위험한 설득이었어요.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 "확신은 없었어요." 이런 점이 카셀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이었다. 한껏 믿음을 줘놓고 돌아서면 그 믿음을 배반하지만 그 모습이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화도 못 내게 하는 저 미소. 어떤 면에서는 짜증나는 성격이었지만, 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다 보면 화낼 타이밍도 놓쳐버리게 되었다. "목숨 내놓고 함부로 그런 것을 하는 건 여전하군요." "검술에 절대적인 실력을 가진 자들은 대체로 아무나 베지는 않습니다. 로핀이 없었으면, 라이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을 거예요. 뭐, 덕분에 결과는 더 좋았습니다 " 카셀이 웃어 보이자, 로핀은 콧방귀를 뀌었다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제가 여태까지 살아남은 그 행운 중 하나는 제가 만난 기사들은 하나 같이 굉장한 실력자들이었다는 거죠. 만난 게 전부 다 어설픈 녀석들이었으면 장난으로 내민 칼에 맞아 진작 죽었을 테죠." 로핀이 파이프를 손가락에 끼고 하품을 하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요는, 라이를 처음부터 인정하고 들어갔다?" "예 그리고 로핀 당신이 하도 뒤에서 밀어대니 나서지 않을 수도 없었고요. 만약 거기에서 물러났으면 당신은 저를 캡틴 울프로 인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요?" "내가 테스트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나?" “마스터 퀘이언께서도 그러셨고, 아이린도 그러셨습니다. 메이루밀도 마찬가지셨죠. 당신이라고 다를 거 있겠습니까?" "이런 씹어먹을, 맛있는 걸 그 놈들이 다 처먹어버려서 네 놈이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나?" "예?" "아니야. 됐어, 됐어. 테스트고 지랄이고 너 상대하느라 괜히 나만 피곤하다. " 로핀은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두 사람이 스쳐가듯 주고받은 말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스케일이 큰 대화였다.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다면, 타냐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두 사람은 울프 기사단끼리만 아는 어떤 테스트를 주고받았다. 카셀은 그 테스트에 통과했고, 로핀은 그제야 카셀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로핀의 행동 변화에는 그런 보이지 않는 심리가 개입되어 있었으며 둘 다 그걸 알고 행동했다니, 타냐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들 다 너무 절 몰아붙이지는 마세요. 제가 그 와중에 라이에게 당했더라도 로핀과 타냐는 안전했을 겁니다. 책임은 저 하나만 지는 셈이 되니 차라리 과감하게 몸을 날린 거죠. 다행히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 카셀은 기분 좋게 웃었다. 타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핀이 옳았다. 이 남자 상대하는 거, 정말 피곤하다. “걱정한 제가 바보 같군요." “하지만, 타냐. 만약 제 제안이 성공한다면, 그리고 이 일이 끝난다면 그는 저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서로 간의 약속만 제대로 지켜진다면 거것말을 하지 않는 레미프의 특성상 그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 아니겠습니까? 그럼 레미프들 중 가장 강한.......” 뒤에서 나는 커다란 소리에 카셀은 말을 끊고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 쪽을 향했다. 문을 열고 나온 라이가 바깥에서 자길 구경하러 나온 레미프들을 쭈욱 흝어보았다. 그러나 별 관심을 가지지는 않고, 대신 나무에 가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른 레미프들과 같은 깔끔한 옷을 입고, 잿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그는 새하얀 날개를 활짝 펼쳐 날갯짓했다. 레미프들이 놀라 웅성거렸고, 아이들은 환호하며 같이 날개를 펼쳤다. 발이 떠오른 그의 몸은 빠르게 하늘로 솟아올라갔다. 나무를 뚫고 올라간 그는 큰 원을 그리며 비행하더니 다시 지붕위로 내려않았다. 그가 떨어뜨린 몇 개의 깃털이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카셀은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했던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일 강한 데다 하늘까지 나는 레미프 전사가 울프 기사단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로핀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가장 빨러 나는 자‥‥‥‥ 점괘는 레미프들의 언어에 지독히도 충실했군." 판커틴은 지붕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치고 있었고, 라이는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못들은 척했다. 어른이 된 후에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레미프라는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타냐였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 자가 울프 기사단이 되기 전에, 당신이 죽지 않길 빌어야겠군요. 바람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누군가의 손에 통제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 "그건 '라이의 기더'에 빌어주십시오. 그의 운명에 배신이 없기를.......“ (6) 논틸의 영역 한달 전부터 준비한 의식이라더니 과연 결과가 나본 후에 떠날 채비를 갖추는 것도 빨랐다. 마을 전체에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카셀은 출발 직전까지 후딘틴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점괘에 나온 인들이 라이가 맞다면 제가 간다는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이 의식이 꼭 성공하도록 노력할 겁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루티아와 연합해 주십시오.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당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그 미지의 적에 의해 루티아가 무너지면, 당연히 그 적은 당신들을 노리게 될 것입니다." 대강대강 통역해주었던 로핀도 적극적으로 카셀의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후딘틴을 비롯한 늙은 레미그들은 나이만큼이나 완고했다. [그 말도 옳다. 그러나 우리가 데리고 있는 전사의 숫자는 고작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길 비우라고 명령할 텐가, 늑대여?] 후딘틴은 이제 카셀을 고대어로 늑대, '워그'라는 호칭을 썼다. 카셀을 실망했으나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그럼 당신들의 현명함에 루티아의 운명을 걸겠습니다. 다시 회의를 열고. 다시 점을 치십시오. 당신들의 신께서 당신들을 지키고자 한다면, 루티아를 도우라는 점괘가 나올 겁니다." 타냐도 실망이 컸으나, 이제 되돌릴 수 없었다. 카셀은 출발 준비가 끝나는 저벽 무렵까지 라이가 지붕 위에 퍼져 있는 집 앞에 앉아 고민에 빠졋다. 타냐도 그 옆에 앉았다. "타냐, 아까는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타냐는 감사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그렇게 여러 번 챙기지 않아도 됩니다 " 말하고 나니 너무 냉정하게 들려, 타냐는 조금 후회했다. 그녀는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말이 거칠었군요." “타냐는.......” 카셀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않아 벽에 등을 기대었다. 한참이나 말을 끊고 눈까지 감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험한 세상을 살아 오셨군요." "말에 가시가 있군요?" 분석되지 않는 유형의 인간으로 분류 시켜놓은 이 남자의 엉뚱한 발언에 일일이 신경 쓰는 건 피곤한 작업이었다. 이럴 때는 그냥 차갑게 대하는 게 나았다. "왜 저를 그렇게 경계하시죠?"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사실 경계한 적은 없으니 대답에는 솔직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무슨 말만하면 쏘잖아요." "그렇게 들리는 점은 제 성격입니다. 사과는 하겠습니다만, 그 점에 관해서는 카셀이 익숙해지는 편이 낫습니다. " "아, 그 말 참...... 오랜만에 듣는군요." "오랜만에?" 혼자 그 일을 상상하며 얼굴을 붉히는 카셀의 얼굴은 귀여웠다. 뭔 일을 해도 수줍어하고 겁이 많았던 남동생이 떠올랐다. 물론 진짜 동생이었다면 쥐어박아서라도 아까 같은 무모한 짓은 절대 안 시켰겠지만. “고향에 쟈넷이라고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있었죠. 그 애는 항상 저한데 차가웠어요. 나름대로는 참 노력 많이 했지만, 항상 톡톡 쏘며 절 거들떠 봐주지도 않았죠. 그래서 한 번은 좀 남자로 봐달라고 그랬더니 걔가 이러더라고요. '이게 내 성격이야 네가 익숙해져!'" 카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익숙해지라는 말은 저에게 있어 접근 금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타냐는 카셀이 뭔가 단단히 오해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쟈넷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굳이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으나 그 여자가 했던 뜻으로 한 말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나 이제 와서 그런 변명을 하는 것도 우스웠고, 카셀은 그런 변명을 들어줄 시간을 주지도 않았다. 그는 바지춤에 두 손을 찔러놓고 벽에 기대어 졸았다. 어제부터 잠을 자지 못했던 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타냐도 벽에 머리를 기대고 보니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사실 남자란 건 접근 금지 시켜도 돼. 안 그래?‘ 타냐는 잠들기 전 제 혼자 묻고 저 혼자 대답했다. ‘자기한테 대답 강요하지마, 멍청한 여자 같으니.’ 한 시간쯤 후 눈을 떠 보니 코앞에 석양을 가리는 덩치 큰 레미프가 서있었다. 판커틴인 줄 알았지만, 라이였다. 타냐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의 구슬을 쥐었다. "출발이다. " 그가 어눌한 어조로 말하고 마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주위에는 여전히 별 의미 없는 경비병이 두어 명 따라다니고 있었다. 타냐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카셀을 깨웠다. "얼마나 잤죠?" 카셀은 일어나자마자 물었다. “해가 안 진 걸 보니 많이 잔 건 아닙니다.” “밤새 뛰었더니 온 몸이 뻐근하군요. 타냐는 괜찮아요?” 카셀은 부시시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폈다. "저는 익숙합니다.“ 카셀은 몸 이곳저곳을 주물럭대더니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라이가 간 방향으로 걸어갔다. "카셀 ." 타냐는 잠시 그를 불러 세웠다 "예?" "아까 했던 말이요. 저도 당신을 대하는 데에 있어 노력할 데니 제 성격에 익숙해지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아, 그거요. 제 말뜻을 곡해했군요. 아아, 아니면 제가 말을 하다 말았거나. 걱정 마세요. 당신이라면 익숙해지려고 노력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접근할 기회를 주신다면 말이지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말해봐야 별로 설득력도 없지만, 변명 같은 자기 말을 부드럽게 받아준 것에는 고마웠다. 하지만 바람기도 없는 주제에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는 대체로 여자 때문에 고생하는 법이니, 그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마을 입구에는 점괘에서 지적된 세 사람, 시나비아, 로핀, 라이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고, 그 주위로 창과 칼로 무장한 레미프 스물 다섯,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캡틴 판커틴이 준비했다. 어둠 속에서 몰랐으나, 시나비아는 푸른 하늘과 같은 머러색이었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우고, 그녀는 발소리만 들고 두 사람에게 인사해 보였다. "논틸의 영역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다. 그래서 판커틴도 경비병 자적으로 따라오는 거지." 로핀이 설명해주었다. 판커틴은 그 매서운 눈매로 자주 라이와 카셀을 노려봤으나, 쟃빛 머리의 라이는 무관심했고, 카셀은 모른척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보니 머리 짧은 즈비 족 남자 사이에서 라이는 유난히 머리가 길었다. 게다가 머리를 묶어 단정한 여자처럼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으니, 꼴이 우스웠다. "판커틴은 저에게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요." "드래곤을 깨우는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게 카셀, 네 탓인데 오죽 불만이 많겠나?" 로핀은 즐겁게 웃었다. 많은 레미프들이 배웅하는 와중에 서른 명 정도 되는 레미프와 인간이 숲을 향했다. 앞에 서는 사람은 '가장 빨리 걷는 자'라고 지목된 로핀이었다. 그 뒤를 '털빛 하얀 늑대'인 카셀이, 그의 옆에는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인 타냐가 따랐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시나비아는 '드래곤의 잠을 깨울 무녀'로서 판커틴의 호위를 받으며 걸었다. 판커틴이 길에 있는 많은 장애물을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도저히 약점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걸음걸이는 자연스러웠다. '가장 빨리 나는 자, 라이는 느리게 걸었다가 빠르게 걸었다가 멋대로였다. 그러나 많은 레미프들이 우려하는 무리에서의 이탈은 아직 벌이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어보였다. 흉악범이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기준의 흉악범은 아니니 괜찮다고 카셀은 불안해하는 타냐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리 효과는 없었다. "루티아가 걱정되시죠?" 카셀이 물었다. "이 일이 루티아에 도움은 되겠죠. 동의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루티아 안에서 발 벗고 뛰는 것만큼 피부에 와 닿지 많으니까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죠." “그래요. 그 점괘에 대해 일일이 제가 반응해서 타냐를 끌어들일 것까지는 없었.......” “그건 카셀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지 많았다면 아무리 부탁했어도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 “이제 루티아의 일은 먼저 가 있는 친구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거기 가봐야 제가 할 일이 없다면 할 일이 있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야지요." 화이트 게이트의 전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타냐는 루티아에 정말 필요한 건 자기가 아니라 카셀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힘을 더 보태 해결될 위기라면 처음부터 그런 위기는 벌어질 이유도 없었다. 루티아에는 같은 힘을 가진 마스터가 여섯 명이나 더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카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자신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면서 거기 가지 못한 판단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다른 두 사람은 하늘 산맥 어딘가에서 실종되었다고 했습니다. 루티아 족에서 두 사람을 찾지 못하다면, 레미프들이 찾아줄지도 몰라요." “숲은 그들의 영역이죠. 일이 좋게 끝난다면 홉트도 적극적으로 찾을 겁니다 " 문제는 시간이었다. 루티아의 일도, 실종된 두 하얀 늑대들의 일도. 그러나 타냐도 그 시간의 문제가 얼마나 체적으로 그들을 괴롭히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밤이 되어 그들의 이동은 점점 느려졌다. 카셀도, 타냐도 피곤한 눈으로 로핀이 들고 있는 작은 등불에 의지해서 걸었다. 적에게 들킬 염려가 큰 마법 조명은 시나비아도 타냐도 사용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카셀의 보검에 박힌 보석만 희미하게 빛을 냈다. 시나비아가 힘들어하자 판커틴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판커틴의 덩치가 워낙 커서 타냐와 비교해도 작은 체구인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보였다. 그녀는 타냐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입장은 서로 다르군요. 저는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당신은 누군가를 보호하고. 저도 당신처럼 건강한 육체를 갖고 싶었지만, 신은 제게 가저야 할 것 이상의 능력을 부여해주시질 않으셨죠.“ 그녀는 마치 딸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듯 판커틴의 가슴의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버렸다. 저 정도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부러웠다. 가끔 연약한 몸을 남자에게 의지하는 여자들을 볼 때면 그녀는 테일드를 절로 떠올렸다. 인생을 살아오며 스승을 제외하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남자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로핀은 어떻게 길을 그리 잘 찾죠?" 카셀이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여행을 많이 하다 보면 길 찾는 기술이 느는 건 당연하다. " “친구 중에 한 명도 레인저 출신이지만 하늘 산백에서는 길을 못 찾거든요. 특별한 도구가 있습니까?" 로핀은 허리에 찬 검을 툭 했다. “아크랜드에 사는 인간이 이런 음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길을 찾으려면 두 가지 중 하나가 필요하지. 마법, 아니면 나디우렌의 증표. 내 검이 그 증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아크랜드에서 갈고 닦은 감각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숲에서 길 찾는 건 매한가지야," “아 그래서 방향도 못 잡는 이런 밤중에 서슴없이 내달릴 수 있나 보군요?" 로핀은 싱겁게 웃었다. “이봐, 나디우렌의 증포가 여기 이 칼 한 자루뿐인 줄 아냐?" 로핀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누가 또 있어요?" 카셀은 타냐나 판커틴을 보았다가 뒤이어 자신의 보검을 내려다보았다. "이 칼이요?" “만들기야 르고가 만들었지만, 보검을 만들 수 있는 금속은 테일드가 직접 가져왔고, 손잡이에 박힌 보석은 가델로크에서 가져왔지. 인간을 대표하는 세 힘이 합쳐져서 나타난 검이라면 하늘 산맥의 여왕이라 할지라도 통행을 허락 해줘야지."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겁의 보석이 호흡하는 타이밍으로 빛을 냈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경건한 눈빛으로 그 검을 대하는 로핀은 잠시 걸음까지 멈추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 검은 단순한 증표 이싱의 힘을 가지고 있지. 기억해라. 그 검의 태생은 하늘 산맥이고, 그 검의 진짜 용도는 하늘 산맥에 있다. " 긴장한 카셀은 숨까지 멈추고 물었다. "그 진짜 용도가......뭡니까?" "몰라," 로핀은 획 돌아서 가버렸다. 괜히 같이 긴장해서 듣던 타냐도 인상을 구겼다. 카셀은 로핀의 어깨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런 것까지 추리하라고 그러실 겁니까? 이건 가르쳐줘도 되잖아요." "모른다니 까 그러네 ." "용도가 있다면서요?" "그래, 있어."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그러니까 모른다니까." "용도가 있긴 있는데, 뭔지는 모른다는 겁니까?" "아! 그런 셈이군." "아! 그러시군요, 선배님. 하늘 산맥에서 들고 다니면 조명 효과가 더 우수하다는 성능을 말씀해주시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 카셀은 투덜거렸고, 로핀은 죽는다고 웃어댔다. 타냐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희극적으로 넘어가는 것 같아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 드래곤을 깨우러 간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어둠 속에서 들리는 규clr적인 야간 조류의 노랫소리가 듣기 좋았다. 바람에 묻은 습기 많은 나무 냄새는 보통 아크랜드에 있는 숲에서는 맛보기 힘든 향기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저 깊은 어둠 어딘가에 있을 적을 상상하니, 낭만에 젖을 들은 없었다. “드래곤은 수천 년을 살지만, 실제로 활동하는 시간은 몇 백 년되지 않는다더군, 대부분의 시간은 잠으로 보내. 자기들을 모시고 있는 레미프의 부름을 받으면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가사 상태라고 보는 편이 낫지. 하지만 아무 레미프나 부른다고 일어나면 그게 제대로 된 잡이라고 할 수 있겠나? 하루에 아홉 시간만 자는 인간이란 존재도 자다 두들겨 깨우면 기분 더러워지기 마련인데, 수십, 수백 년씩 자는 드래곤이 뜬금없는 레미프가 부르는 소리에 매번 일어날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각 나라, 각 부족을 지배하는 드래곤이 한 마리씩 있으면 그 드래곤을 깨울 수 있는 레미프도 한 명뿐인 거야." "그게 시나비아군요." "시나비아는 그런 무녀들 중에서도 굉장한 계급의 존재야 만나봤으면 알겠지만, 어지간한 루티아 마법사는 그녀 앞에서 숨도 못쉴 걸." 타냐는 그 말에 동의했다. 로핀은 계속 말했다. "또 라든은 레미프들의 나라 중에서도 꽤 큰 나라고, 그들이 모시는 드래곤도 드래곤 세계에서 높은 계급의 존재지. 로드 Lord의 이름과 비슷한 급이라 할 수 있는 ‘레'의 칭호를 가지고 있고, 이름은 논틸, 그를 보시고 있는 나라의 이름이 그의 성이야. 붙여서 부르면 레-논틸-라든, 그게 라든을 지키는 수호 드래곤이다." "로드의 계급이 있다면 다른 계급도 있겠군요?" 이런 얘기를 좋아하는 카셀이, 타냐가 궁금해하는 다른 것보다 앞서 물었다. "아란티아의 계급 체계는 사실 드래곤들의 계급 체계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로드 Lord 의 계급은 'Re'라고 부르는 반면, 기사Knight의 계급은 ‘ka'라고 부르고, 하이로드Highlord의 계급은 'Sa'라고 부른다. 나도 드래곤들의 이름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쉽게 예를 들자면, 드래곤들의 마스터인 크나elf은 '사-크나딜'이 되는 거지. 좀 알겠나? 물를 '사'의 칭호를 가진 드래곤은 중립을 지키므로, 따로 관할 구역을 갖지 않아서 이름은 짧아. 그리고 오해 할까봐 미리 말해두지만 계급만 그렇다는 거지, 어줍지 않게 계급으로 드래곤들의 힘을 판단하는 우는 범하지 말 것." "와아, 인간들의 하이로드도 대단했는데, 드래곤들의 하이로드라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안 잡히는군요. 우리가 만난 그 검은 드래곤은 어떤 존재인가요?" 로핀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마치 '이 말을 해, 말어.' 하는 표정이었다. "구아닐. 그 자는 '카'의 계급을 가지고 있고,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사악한 존재다. 그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드래곤이다." 길게 뜸들였던 것에 비하면 짧은 설명이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게 타냐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숨긴 것을 덮어버리기 위해 그는 다른 설명을 바로 이어갔다. "즈비 족이 프보에 족과의 오랜 갈등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프보에 족은 '카'의 드래곤을 모시고 있어서, '레'의 드래곤을 모시고 있는 즈비 족이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갖고 있거든. 그런 문제로 몇 백 년이나 갈등을 빚어왔고, 최근 구아닐의 출현과 거의 동시에 서로 창을 들이대기에 이르렀지." 로핀은 머리 속으로 이야기를 가다듬다가 말을 멈췄다. 그대로 그들은 아주 오fot동안 걸었다. 뒤따라오는 레미프들은 말을 하기는커녕 입을 열지조차 않았다. 타냐는 로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런 침묵의 무게를 이길 수가 없어 묻지 못했다. 그러나 카셀은 닥치는 대로 물었다. “혹시 그 계기가 10년 전, 사건이 아닙니까?" 항상 묻는 말에 거침없었던 로편이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카셀도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노리고 물은 게 아니었음을 증거라도 하듯, 대답을 따로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당신은 익셀런이 하늘 산맥을 오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여기에 올랐다고 했지만, 혹시 진짜 여기 머무는 목적은 그 검은 드래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 아닙니까?" “한 가지만 부탁함세, 후배 논틸을 깨우는 작업이 끝나면 내가 아는 모든 얘기를 해주지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지금 우리가 논틸의 영역을 향해가는 것은 종교 의식 중 하나다. 난 레미프들과 오래 살아서인지 이런 종교 의식에 부정 타는 걸 좋아하지 많게 되었거든? 구아닐의 이름은 레미프들에게 있어 악마의 이름과도 같다. 그러니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카셀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기다릴게요." 로핀은 씨익 웃었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즉시 손에 든 등불을 카셀에게 넘겨주고, 뒤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병사들이 창을 들어 사방을 경계했고, 시나비아를 안고 있는 판커틴이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오파이?] 이제 타냐는 고대어 발음에 많이 익숙해져 있어, 들리는 것만이라면 큰불편이 없었다. 하지만 로핀은 굉장히 능숙하게 그 말을 받았다. 대체 로핀은 어떻게 마스터 골베인처럼 수십 년 동안이나 언어를 연구한 사람보다 더 능숙하게 고대어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앞에 모즈들의 시체다 있다.] [시체? 그럼 다른 적은?] [내 느낌에는 없지만, 혹시 모르지. 내가 살펴보고 오겠다.] [사나비아는 어쩌고?] 로핀이 묻자, 판커틴은 안고 있는 시나비아를 깨웠다. 그녀는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한 걸음걸이로 판커틴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는 무릎을 끓고 시나비아에게 고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내 걱정 말아요. 루티아의 마법사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저를 지켜줄 겁니다. 그리고 판커틴께서 걱정하는 라이는 절대 여자를 해치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판커틴이 가장 걱정하는 건 라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라이는 여전히 만사에 무관심해 보였다. 나무 위를 두리번거리는 라이를 돌아보고 카셀이 말했다. "자유를 만끽하고 있군요, 라이는," "저게 자유를 만끽하는 걸로 보이나요?" "안 그래 보여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표정이 전혀 없어 그게 즐거워하는 건지 잠 깨려고 고개를 흔들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갔다. [경계를 확실히 해둬라.] 판커틴은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카셀에게 등불을 넘겨받은 로핀과 함께 어둠 속으로 나갔다. 로핀의 등불이 사라지자, 타냐 주위에는 빛이 모두 사라졌다. 타냐는 어둠 속에서, 저녁 무렵 카셀이 했던 말을 머리 속에서 다시 굴려보았다. '경계한다. '맞는 말이었다. 타냐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가정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티아의 마스터들을 빼고 나면 사실 마법사들 중에서도 친한 사람은 없었다. 마스터 테일드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을 접했다. 그 중 열에 아홉은 그녀 앞에 똑바로 서지 못 했고, 나머지의 열의 아흡은 그녀에게 존경이나 두려움 두 가지 감정만 보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적이었다. 예를 들어 쉐이든은 존경 쪽이고, 제이메르는 두려움 쪽이고 블랙은 적이었다. 새나디엘 여왕처럼 예외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 예외였다. 긴 여행 중에 그녀는 어떤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의 임무였고, 스승의 행방이었다. '정말 그 얼굴을 버려도 상관 없느냐?' 데일드는 그녀의 몸에 봉인을 걸 때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미련은 없습니다. 전 차라리 이 봉인을 축복이라 여기겠습니다. ' 봉인이 끝난 후 그녀는 이미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자들은 그녀를 보면 외면하려고 애썼고, 여자들은 무서워서 피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녀의 머리 속에서 그 말은 주문처럼 반복되었고, 이제 그 주문도 필요가 없었다. 긴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적들 앞에서도 그녀는 망설임이 없었다. 생명을 빼앗는 마법을 인정하지 않던 스승의 좌우명을 따르고 싶어서 반드시 죽여야 될 상대를 만나면 차라리 늑대로 변하여 물어서 죽였다. 죽음으로도 죄를 씻지 못할 악한 이들은 평생 살아있는 걸 원망하며 죽음을 기다려야 할 저주와도 같은 마법을 걸었다. 일반인들 앞에서 그녀의 마법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신의 낫과도 같았다. 그 와중에 그녀는 남들을 배려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한 그녀의 집념은 다른 쪽에 쓰일 집중력까지 끌어 모았다. 덕분에 사사로운 잠정도 잊었다. 그 후 카셀을 만났다. 도서관에서 이야기했던 그는 오랫동안 하나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집념 어린 모습과 닮아있었다. 약하기 때문에 빈 곳을 채우려는 의지는 더욱 빛이 났다. 그리고 그는 '친구' 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말했다, 친구와 만나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고, 친구를 구한 이야기를 했고, 친구들이 자기를 구해준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을 더 사귀고 싶 다는 것도 그의 넓은 목표 중 하나였다. 그의 돌발적이고 무모한 행동에서 단 하나 일관된 건 '친구' 였다. 그는 싸우고 있었다. 루티아가 아니라 루티아에 있는 친구를 위해. 하늘 산맥의 운명이 아니라, 하늘 산맥에서 실종된 친구를 위해. 사적인 감정? 아니었다. 그는 그 친구를 구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잘 알고 있었다. 카셀은 로핀과 판커틴이 떠난 어둠 속에서도 조용히, 실종된 두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카모르트에서 두 사람을 비롯한 하얀 늑대들과의 모험, 전혀 성격이 다를 첫 같은 아즈읜과 게랄드시만 사실은 제일 좋아하는 사이인 것 같다는 장난 섞인 추측을 비롯해, 아즈윈을 아주 좋아하지만 절대 연애 감정을 갖지 않으려 한다는 수줍은 고백. 그의 이야기는 항상 재미있었다. 말을 잘 하는 것을 떠나, 그는 상대방을 재미있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친구들에 대한 얘기에는 눈을 빛내는 열정에 타올랐다. 그런 카셀의 이야기 속에, 아무도 없는 황야를 걷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어딜 가도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 주위에 있어도, 그녀는 혼자였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외로웠다. 너무 외로워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거짓말을 해댔다. 이제 그 거짓말이 자신의 진심이 되었다고 또 한 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황야에서 비 피할 곳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울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때처럼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하고 울었다. 카셀이 친구들 이야기를 하번 귀를 막아버리고 싫었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잊어버려야 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니까. 그러나 들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황야에서 외쳤던 말들이 떠올랐다. 무릎을 끌어안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견뎠던 추위와 쌓인 눈을 밟아 남긴 자기만의 발자국이 떠올랐다. '아무렇지도 않아 ' 지금은 그 빗나간 거짓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진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더라면.......‘ 눈동자에 차는 눈물에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가 방울 지어 떨어진 후 도로 눈앞이 맑아졌다. ‘......그랬다면 당신은 나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 해줄까?’ “......그래서 결국 아즈윈은 게랄드를 좋아하지 않는 척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인정하는 꼴이 되니 싫다 이거죠. 게랄드는 다른 쪽에는 무모할 정도로 적극적인데, 아즈윈에 관련된 일에는 오히려 아닌 척 하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둘은 막 대하는 것처점 보이고.......타냐?" 타냐의 목걸이가 그녀의 감정에 반응하여 희미하게 빛을 냈다. 어둠이 가려주던 그녀의 눈물이 그 빛에 반짝였고, 카셀은 이야기를 멈췄다. 타냐는 황급히 고개를 들리고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 들은 아직도 밋밋한 관계인가요?" 타나는 얘기 잘 들고 있었다고 보여주려고 물었다. 하지만 카셀은 넘어가 주지 않았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타냐는 고개를 돌린 채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잠시 가만 두라고 소리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해서 또 다시 카셀에게 냉정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타냐는 내밀었던 손을 접었다. “잠깐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그럴 때면 정할 이유 없이 눈물이 나죠 " 타냐는 먼저 구슬의 빛을 수습해 꺼뜨리고, 호흡을 정리했다. 카셀이 말했다. “제 얘기의 어떤 부분이 그런 기억을 들췄나 보군요.”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고맙게도 그는 더 따지고 들지 않았다. 괜한 위로를 해서 그녀를 민망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았다. '이런 건 위험하다.' 타냐는 마음을 다잡았다. 십 년 넘게 머리 속에 쌓아둔 벽을 이렇게 쉽게 허물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과거의 상처가 얕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모든 것이 같다. 자살하려 했던 그 때를 떠올려. 내 목숨은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미 죽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야. 잊어버리자.’ 일주일도 안 되어 그 벽을 허물고 있는 카셀은 위험한 존재였다.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 타냐는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우리말을 조금은 알아듣는 것 같은데, 우리 쪽 언어로 말해도 괜찮은 가요?] 시나비아가 말했다. 타냐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자기가 뭘 잘못한 걸까 열심히 고민하며 로핀이 사라진 방향만 바라보는 카셀에게 눈을 떼지 못 했다. 시나비아가 말했다. [지금 그를 놓치면 그는 돌아오지 않아요.] 타냐는 그녀를 세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어색한 고대어로 말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나와 카셀은! 남의 과거를 보더니, 이제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려는 겁니까?] 어둠 속에서도 눈을 감고 말하는 시나비아의 아름다움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두운 골방 안보다 숲에서 더욱 맑게 울렸다. [저는 우그 사이의 감정을 알지 못 함니다. 로핀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그대로 무녀가 되어 사랑도 없이 수백년을 살아갈 자신이 있냐고? 그는 레미프들이 갖는 감정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죠. 저에게 있어 당연한 게 그에게는 당연한 게 아닌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었죠. 아란티아의 홉트, 새다니엘도 천 년 동안 혼자였으나 그녀는 한 번도 외로워하지 않았으며 혼자임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여왕에게는 울프 기사단이 자식과도 같았고,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와 비슷한 주기로 바꿔는 수호 기사를 연인처럼 여겼다. 그녀가 외로워 할 이유는 없었다. 시나비아는 감은 눈으로도 정확히 카셀이 있는 곳을 지적했다. [그를 보세요. 저는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숨소리에 깊은 고뇌가 묻어있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누가 잘못했나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어요.] 타냐는 그녀에게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 다시 눈물이 나을 것 같았다. 터진 눈물샘이 이상하게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사가 되기 전, 자신이 얼마나 울보였는지 떠올랐다. 카셀과 시나비아는 오랫동안 감추어온 기억들을 너무 많이 들춰내고 있었다. [지금 그는 의지 할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본 그는, 의지할 상대를 만나야 진정으로 강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지붕입니다. 주위에 받쳐주는 기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넓게 펴질 수 있는 지붕입니다. 반대로 받쳐주지 않으면 홀로 서지도 못하지요. 농사를 지을 때는 농사꾼이었고, 패색이 짙은 군대에서는 패잔병이 되었으며, 의적들 사이에 있을 때는 의적이 되었으며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냐 늑대가 받쳐주자, 그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이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가 왔군요.] [나는 누군가를 도와줄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제가 아까 말했죠? 남자에게 보호받는 저와 남자를 보호하는 당신....... 당신이 부러웠습니다.] 그녀는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펼쳤다. 하얀 빛의 가루가 늑대의 형상과 나무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나무는 마법사를 뜻합니다.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와 하얀 늑대. 저는 점괘가 나오기 전부터 당신들 두 사람이 우리의 기더에 개입했다는 것과 당신들 두 사람이 그 기더 전체를 좌지우지하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시나비아는 다시 손을 접었다. 그녀가 만든 빛의 가루가 하늘을 떠돌아 타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카셀을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먼저 마음은 열면, 카셀은 반드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겁니다.] 타냐는 눈을 감고 빛의 가루가 사라지는 마법을 맞아들였다. [시나비아, 당신은 아란티아 여왕이 제게 해 준 예언도 읽었습니까?] [예, 당신의 ‘연인’에 대한 짓궂은 예언이더군요.] [지금까지의 조언은 모두 그걸 염두에 두고서?] 시나비아는 정확히 타냐가 신경 쓰고 있는 게 어떤 부분인지 이해하고서 미소지었다. [새나디엘 홉트의 예언에, 제 과거를 읽는 능력을 감히 대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저는 약속 드렸던 대로 당신의 과거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요. 오직 카셀의 과거와 당신의 현재를 재 본 것에 불과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카셀이 지금 필요한 건 친구죠.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레미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금은 믿어지지 않는군요.] 시나비아는 빙그레 웃었고, 타냐도 따라 미소지었다. 이린 식으로 미소지은 적이 드물어 어색했다. [고맙습니다. 사나비아.] 타냐는 카셀에게 돌아섰다. 그는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먼저 뭔가 할 말을 하려다 타냐가 말을 하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타냐도 거의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는 바람에 마찬가지로 말을 멈췄다. 서로 배려하느라 서로 입을 떼기 힘들어, 오히려 어색한 시간만 흘렸다. 타냐는 결심하고 말을 꺼냈다. "카셀.......“ 그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등불이 다가왔다. 로핀과 판커틴이 돌아왔다. "구아닐이 근처에 있다. " 로핀이 말했다. "여긴 논틸의 영역이라면서요?" 타냐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하던 카셀은 당장 벌떡 일어나 물었다. 어색한 참에 로핀이 나타나 준 걸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방금 얘기하려던 순간을 괴로워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니, 타냐는 로핀의 출현이 안타까웠다. "어어. 우린 이미 논틸의 영역에 들어와 있지. 그런데도 구아닐이 돌아다닌다는 건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거야. 서둘러야겠어.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지.“ 그들은 원래 가려던 길보다 약간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걷는 속도는 아까보다 더 빨라졌다. 열심히 그 걸음을 쫓아오던 시니비아는 곧 판커틴을 불러 다시 들어달라고 요구했다. 판커틴은 기꺼이 그녀를 안아 올려 타냐의 뒤에서 걸었다. 라이는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따라오고, 빨리왔다. 레미프들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도 숲으로 나온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 자리에는 모즈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로핀이 말했다. 마스터 아이린이 괴물의 시체를 끌고 와 연구 하는 걸 옆에서 봤는데, 타냐도 본 적이 없는 짐승이었다. 다리는 짧고 팔은 길었으며, 온몸을 덮은 털은 지저분했고, 뭉특한 코는 얼굴을 가렸다. 붉은 눈은 그 괴물을 사악하게 보이는 데 한 몫 했다. 모즈는 아이린 마저 상처 입혀,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을 정도로 막강했다. “누가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살펴보니 어떤 군대와 맞붙어 싸운 격렬한 전투 흔적이 있었고, 그 근처에는 구아닐의 발자국도 있었다. 어두워 확신하긴 힘들지만, 모즈 쪽이 기습당한 것으로 보이더군. 맨발 흔적과 날개 깃털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게, 십중팔구 레미프들의 군대가 왔다 갔다는 뜻인데.......” 로핀은 말끝을 흐렸다가 대뜸 물었다. "너 지금 딴 생각 하냐?" "예?" 뒤에서 보기에 로핀의 말에 경청하는 것으로 보이던 카셀이 화들짝 놀라머 대꾸했다. 눈치 빠른 로핀은 타냐의 얼굴을 살폈다. "둘이 싸웠냐?" "모즈들이 왜 이 곳에 있는 거죠?" 카셀과의 문제는 두 사람이 풀어야 했다. 여기에 로핀이 끼어 드는 건 원치 않았다. 그래서 타냐는 일부러 굳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나 로핀은 그런 표정만으로 이미 몇 걸음 앞을 내다보고 늙은이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라든에, 프보에 레미프들 뿐 아니라 모즈들도 위협이 되고 있지. 근 한 달 안에만 벌써 두 번이나 전투가 있었거든 그 때마다 많은 수의 모즈들을 즉이긴 했지만, 이 쪽 피해도 심각했어." 로핀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등불을 높이 세웠다. "후딘틴이 루티아에 원군을 내주지 않는 이유 중 두 번째다. 모즈들이 루티아를 공격한다면 라든도 안전하지 않다는 거 아니냐? 물론...... 우리도 안전한 건 아니 었구만." 로핀은 천천히 등불을 내려놓고, 판커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시나비아를 내려놓았고, 병사들은 전투를 준비했다. "타냐, 이제 빛을 숨기지 않아도 좋다." 타냐는 구슬을 들었고, 그 푸른빛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타냐의 마법 빛을 반사한 붉은 눈동자가 정면에 둥둥 떠다녔다. "백 마리 정도 되는군 " 로핀은 대강 숫자를 헤아리고, 모두에게 고대어로 명령을 내렸다. [사나비아 주위로 집결하라.] 판커틴이 그 명령을 받아 전달했고, 병사들은 민첩하게 시나비아를 보호했다. 타냐도 카셀도그녀 옆에 섰다. 카셀은 타냐와 얼굴이 마주쳤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와중에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건 조금 많이 엉뚱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색함은 짙어질 것이다. 결국 타냐는 달리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아무 말이나했다. "제 옆에 잘 붙어 계십시오." 타냐는 주문을 외우며 정면에 있는 모즈들에게 푸른빛을 쏘았다. 부채꼴로 펼쳐져 있던 모즈들의 포위방 한 쪽이 와르르 뒤로 무너지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핀은 한 손으로만 부드럽게 검을 뽑아 어둠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칼이 모즈들에게 박힐 때마다 붉은 빛이 어둠을 깨뜨렸다. 판커틴은 시나비아의 옆에서 그녀만 지키고 었었으나, 모즈들은 그 거대한 장정에게는 덤비지 않고 다른 병사들만 공격했다. 그가 모즈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면, 다른 쪽이 공격당했고, 공격당하는 쪽으로 다시 돌아가면 또 다른 반향이 공격당했다. 모즈들은 둥그렇게 시나비아를 보호하는 원을 따라 움직여 판커틴이 없는 부분을 공격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원 밖으로 달려나가 모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로핀의 옆에서 통나무라도 부술 만한 엄청난 칼 놀림으로 모즈들을 베 나갔다. 하지만 일반 레미프들은 힘에 겨워했다. 로핀과 판커틴이 있는 쪽은 전혀 문제가 없었으나,그 외의 방행은 금방 시나비아를 보호하는 경계가 깨졌다. 모즈의 뭉툭한 몽둥이 하나가 시나비아 쪽으로 날아왔다. 그것은 큼직한 레미프의 팔뚝에 막혀 부러졌다. 라이였다. 그는 병사들 안쪽까지 들어온 모즈를 허공에다 내던졌다. 나뭇가지 너머로 사라진 모즈는 어디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도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는 맨 손으로 붉은 눈의 짐승들을 내리치고 목을 꺾어 놓았다. 덩치는 켰지만 모즈들의 칼과 발톱을 피하는 건 아주 민첩해 어떤 몸놀림으로 그런 공격들 하나하나를 피하는 지도 구별이 안 갔다. 그 때 시나비아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타냐도 라이를 도와 모즈들을 처리하고 있느라 뒤는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모즈가, 몸통으로만 기어와 그녀의 발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다급한 카셀이 들고 있던 보검으로 모즈를 찔렀다. 그래도 모즈는 발목을 놔주지 않았다. 마법의 모든 방향이 바깥쪽을 향하고 있어 그 방향을 짧은 시간에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슬을 놓고, 맨손으로 시나비아의 발목을 물고 있는 모즈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그녀의 손등에서 하얀 털이 빠져 나오면서 늑대의 발로 변했다. 늑대의 이빨을 가친 그녀는 모즈의 목을 물어 뼈를 부러뜨렸다. 목이 떨어져 나가며, 모즈의 몸통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카셀의 손과 타냐의 머리와 시나비아의 발목을 적셨다. 타냐는 빠르게 시나비아 근처로 달려드는 모즈들을 공격했다. 이 거대한 늑대와 하늘까지 날아을라 공격해오는 라이를 본 모즈들은 허둥대다가 그만 서로 몸뚱이를 부딪치며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입에 문 모즈를 던져버리고 더리운 피를 뱉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어도 그 피 맛이 남아있어 또 침을 뱉었다. [워그.(늑대)] 레미프 중 하나가 경이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워그.] [워그.] 카셀이 울프 기사단이라는 걸 알 리 없는 그들의 당연한 오해였다. 로핀이 맞아 싸우던 모즈들도 모두 후퇴했다. 그는 피 묻은 칼을 털어내며 돌아와 라이의 앞에 섰다. 라이는 아직도 한 손에 인형처럼 너덜거리는 모즈의 시체를 쥐고 있었다. 로핀이 물었다. [싸워주기로 결심했나?] [이런 건 싸움이 아니다.] 라이는 그 시체를 획 던졌다. 나무에 머리를 들이박은 모즈의 몸이 늘어졌다. 그는 허리를 속여 로핀의 얼굴 정면을 주시했다. [너 정도면 괜찮다. 감옥 안에서 물러난 것도 묶이지 않고 싸우고 싶어서였다.] [그런 건 캇[f에게 부탁해 봐. 걔가 허락하면 나도 안 피해. 그걸 조건으로 풀려난 거 아니었어?] 로핀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렇다고 라이가 진짜 카셀에게 부탁하지는 않았다. 짧은 싸움이었으나, 피해는 켰다. 병사들이 열 명 가까이 죽거나 움직일 수 없는 큰 부상을 입었고,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걷기에 힘든 부상을 얻은 건 다섯이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가장 큰 피해는 시나비아의 부상이었다. 타냐는 마법으로 상처를 지혈했으나, 걷는 건 불가능했다. 뼈가 으스러졌으니, 어쩌면 평생 걷지 못할지도 몰랐다. 타냐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지키지 못했다며 사과했으나, 판커틴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레미프들의 성녀를 부상 입힌 건 모즈가 아니라, 공명심에 잠시 눈이 멀어 옆을 떠난 자신이나 다름없다고 그는 말했다. 고통과 출혈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나비아는 자기 앞에 무릎 끓은 판커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늘어진 하얀 날개가 고통을 참느라 파들파들 떨렸다. 예의 상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는 이 종족은 몸조차 거것말을 할 줄 몰랐다. [판커틴, 나의 전사여. 내가 발을 잃었으니, 당신이 나의 발이 되어주세요. 아직 내 기더는 여기에서 멈추라고 정해지지 않았어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시나비아. 이제 절대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레미프들의 상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이런식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시나비아의 모습에서 라냐는 진짜 용서를 보았다. 판커틴은 울면서 그녀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고, 시나비아는 힘겨운 미소로 고통을 참았다. 그 광경을 보는 타냐에게 카셀이 손수건을 내주었다. “닦아요, 피가 많이 묻었네요." 얼굴을 닦아내고 보니 정말 피가 많이 묻어 나왔다. 타냐는 그 손수건을 다시 내주려다가 그의 얼굴에 튄 몇 방울의 피를 손수 닦아주었다. 피. 아란티아 여왕이 직접 말해준 예언은 피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 '암흑을 상징하는 더러운 피를 뒤집어쓴 자.......스스로 나의 모습을 보여줄 자.' 타냐는 곧 그런 기억을 털어 버렸다. 시나비아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근처에는 아직도 모즈들이 많았다. 좋지 않은 기운이 사방에 넘쳐났다.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타냐는 손수건을 내주며 힘없이 웃었다. 카셀도 손수건을 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친 데 없나?" 또 로편이 끼어 들었다. "아, 전혀 " 예절 바른 카셀은 충실히 선배에게 대꾸했다. “조심해. 레미프들은 면역이 되지만, 인간은 모즈의 손톱에 긁히기라도 하면 독에 감염돼. 조금이라도 다치면 즉시 약을 발라줘라. " 다시 이등이 시작되었다. 타나 한숨을 푹 내쉬고 일행을 뒤따랐다. 논틸의 영역에 도착한 후 모두의 경계는 더욱 강해졌다. 한 달전 사건을 염두에 두는지 길 찾기에 관여하지 않던 시나비아도 로편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로편은 자신이 찾아낸 길이 아닌 다를 길을 통하느라 그만 방향을 잃고 말았다. 결국 로편이 비밀 입구를 찾아낸 건, 예정에서 두어 시간 더 걸린 아침이 되어서였다. 그나마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인도라, 길은 매우 험했다. 그래도 추가 공격 없이 도착한 것만으로 다들 안도했다. "우리가 적들을 피해간 건지, 적들이 우릴 피해간 건지 모를 일이군." 로핀은 공격당하지 않는 결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다. 논틸의 동굴 입구에는 나뭇가지와 넝쿨로 가려진 괴이한 모양의 석상이 왕을 모시는 신하처럼 좌우로 배치되어 있었다. 로핀은 그 넝쿨 중 몇 개를 잘랐다. 자신의 일부를 잘린 넝쿨의 나머지는 혼자 힘으로 스르르 물러났다. 카셀이 깜짝 놀랐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여기에서는 식물 같은 동물이 있고, 동물 같은 식물도 많아. 움직이는 식물이라 봐야 곤충을 잡아먹는 정도니 염려마라." “식물이 곤충을 잡아먹어요?" 카셀이 극도의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햇빛을 받지 못해서 곤충 따위를 잡아먹어 영양을 보충한다더라.“ 판커틴이 다가와 시나비아를 내러놓았고, 시나비아는 석상 앞에 무릎 끓고 뭐라고 기도를 했다. 다른 레미프들도 따라서 무릎을 끓고 고개를 숙였다. 카셀이 그 풍속을 존중한 나머지 무릎을 꿇으려하자, 로핀이 저지했다. "석상 앞에 무릎 끓을 수 있는 건 라든의 레미프들로 한정되어있다. " 로핀은 석상 밑에 Tm인 글을 읽었다. "레-논틸-라든. 운명 [기더]을 따르는 자의 출입을 허락하노라. 선택 [클로아쿠]받지 못한 자의 출입을 금하노라 여기 내 호흡이 닿는 곳에 내 힘이 함께 하며, 여기 내 지혜가 닿는 곳의 존재는 나를 경배하라.......자, 논틸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저주한다. " "운명이라는 단어와 선택이라는 단어가 중복되어 있군요." 카셀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몇 차례 설명했지만, 레미프들을 이해하려면 기더를 이해해야한다. 레미프들은 기더를 따르며, 기더는 신이 직접 클로아쿠한다. " "알 듯 말 듯 하군요." "내가 어제서 라이를 조심하라고 했는지 알아? 레미프들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기더에 따른다고 생각하면 서슴지 않고 아군을 배신할 수 있다. 웃기는 건 당한 쪽에서도 그게 기더라고 인정하면 배신자를 욕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배신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거의 쓰이질 않아. 나쁜 쪽으로 기더를 따른다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지." 기도는 끝났으나, 시나비아는 석상 앞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레미프들도 똑같이 따라했다. 로핀은 목소리를 더욱 작게 했다. "대신 상대를 죽이는 건 오래 전 내려온 신탁에 따라 기더로 인정하지 않지. 프보에 족을 죽일 수 있는 건 그들을 레미프로 인정하지 않아서야. 자, 카셀. 너는 기더로 보호 받는 레미프도 아니고, 라이는 그런 기더를 거스를 정도로 자신의 전투 의지를 소중히 여긴다. 이래도 자신 있게 저 녀석을 컨트롤 해서 네 부하로 만들겠다고 자신할 수 있겠냐?" 또 한 번 자신감을 상실할 줄 알았던 카셀은 어깨만 으쓱했다. "부하로 만드는 건 어려워도 친구가 되는 건 노력해 봐야죠." "하! 넌 퀘이언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줄줄 읊어댔냐?" “마스터 아이린 앞에서였습니다. " "그럼 더 이상하군. 걔는 말 많은 남자는 질색했는데?" “그런 건 넘어가죠. 마스터 아이린을 대했던 그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흘러요. 의식에 필요한 시간은요?" 기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나비아가 대답했다. "하루나 이틀. 하지만 논틸께서 스스로 깨어날 준비를 하고 계셨다면, 오늘 중으로 깨어나실 지도 모르죠. 하지만 뵙기 전에는 알지 못해요." 판커틴은 절룩거리는 시나비아를 부축해 석상 옆에 앉힌 후 병사들에게 경계 근무 사항을 지시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언제부터 언제까지 누가 보초를 서고 휴식을 취하는 순서를 파는 것까지 세세하게 지시한 후 시나비아에게 말했다. [여기까지가 제 의무입니다. 이제부터는 로핀이 대신 당신을 인도 할 것입니다.] [그래요.] 판커틴은 무표정한 라이를 불렀다. [네가 내 대신이 되었으니 반드시 이 분을 지켜라.] 라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판커틴은 그에게 대답을 강요하기라도 하고 싶었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싸움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카셀이 끼어들었다. 그는 자기 눈앞에서 동료끼리 싸우는 걸 못봐주었다. "잠깐만요. 혹시 판커틴은 여기까지만 가는 겁니까?" 두 레미프 사이에 끼어 어린 아이 같아 보이는 카셀이 물었다. 로핀이 카셀의 말을 전달해 주자, 판커틴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 동굴에 들어갈 수 있는 기더가,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점괘에 나타난 사람이 걷지 못합니다. 그 점괘가 제대로 된 것이 맞다면 무녀를 지키는 전사가 또 필요한 젓 아닙니까? 기더? 제가 점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시나비아께 여쭙겠습니다. 판커틴은 스스로의 불찰로 '잠을 깨우는 무녀'를 부상 입혔습니다. 그럼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무녀의 기더를 보호해야 하지 않나요?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건 오히려 기더에서 도망치는 거 아닙니까?" 언뜻 판커틴을 책망하는 말이었으나, 뒤집어 생각하면 판커틴을 배려하는 말이었다 점괘메 대한 해석에, 레미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카셀이 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시나비아와 같이 가고 싶어하는 욕심을 자극하니 판커틴은 망설였다. 그의 작은 신음을 듣고 타냐는 감탄했다. 이게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카셀의 작전이라면 실패해도 성공인 치밀한 계산일 것이다. 판커틴은 당연히 점괘에 개입한 카셀을 많이 윈망했을 것이고, 라든의 도움을 받아 루티아를 구하고 싶은 카셀이 그 원망을 받아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카셀은 그 원망을 망설임으로 바꿔버렸고, 망설임을 배려로 여기게 만들고 었었다. 이것까지 계산하지는 못했겠지만, 판커틴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나비아까지 카셀의 작전에 끌려왔다. [점괘대로라면 나머지 네 사람에게는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머지 넷 중 누구라도 저를 보호하느라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점괘는 어긋나게 되는 거겠죠. 판커틴, 당신에게 절 부상 입힌 책임이 있다면 그 책임은 임무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점괘가 저런 식으로 유동적으로 적용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시나비아의 억지는 현재 일행에게 있어 점괘를 우선했다. 판커틴은 힘들게 결정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그 후 따로 카셀을 보고 살짝 고개만 끄떡여 보였다. 판커틴을 보고 웃어주는 카셀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고, 타냐는 다시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런 걸 계산했나?' 아니, 그런 걸 계산할 수 있다면, 카셀은 그저 뒤에서 숨어서 머리 쓰는 책략가라야 옳았다. 적어도 카셀의 성격이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앞에서 행동하는 자였다. 그러니 치밀한 계산을 한 것처럼 보이는 배려가 어쩌면 카셀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당연해?' 밤에 시나비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패잔병들 틈에서는 패잔병이 되었고,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정치가가 되었고, 하얀 늑대들 들에서는 하얀 늑대가 되었다. 퀘이언과 아이린에 이어 로핀에게 또 한 번 인정 받더니, 라이를 상대로 친구가 되어보겠다는 말을 쉽게 내뱉고, 판커틴의 원망을 빗겨갔다. 카셀은 지금 각 레미프와 인간의 대표적인 존재들 틈에서 약자로 숨어버리는 게 아니라, 리더가 되어가고 있었다. 리더의 관점에서 보면, 판커틴을 '돌봐준다'는 생각이 당연했던 것이다. '저 덩치를......보살펴? 너무 앞서 나가고 있나?' 타냐는 혼자서 구시렁댔다. 이런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판커틴은 다시 한 번 병사들에게 경계 사항을 지시한 후 시나비아를 품에 안아 들었다. 로핀이 앞에 섰고, 그들은 동굴 입구로 뒤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타냐는 동굴이라는 표현을 신전이라고 바꿨다. 동굴의 첫머리서부터 타냐는 돌 벽에 만든 정교한 부조를 볼 수 있었다. 부조를 구성하고 있는 바위는 검은 금속과도 같아 등불을 들이대면 하얗게 반사를 일으켰다. 그래서 로핀이 든 등불의 일렁임은 거대하게 새겨진 드래곤 밑에 무릎 끓고 있는 레미프들의 날개가 펄럭 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세 마리 드래곤이 태양을 보호하고 있는 조각과 또 다른 세 마리 드래곤이 달을 보호하는 그림이 위 아래로 접쳐져 있었다. 타냐의 마법 불빛에 반응하여 외곽선이 보이는 벽화도 있었다. 잘못 그린 거라고 밖에 생각이 안 되는 괴이한 생명체와 드래곤이 싸우는 모습이라던가, 날개가 없는 우그와 날개 달린 레미프들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도 무척 신기했다. "우리의 셈으로는 셀 수 없는 긴 시간 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을 보살피는 레미프들의 역사라 할 수 있죠. 드래곤은 신과 우리를 이어주는 천사임과 동시에 신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죠." 벽화를 대하는 시나비아는 동굴 앞의 석상에 대한 경건함과 다름없었다. 그녀를 안은 판커틴은 벽화를 지나쳐 로핀이 멈춰 있는 동굴의 끝에 이르렀다. 단단해 보이는 검은 돌을 어떻게 깎았는지 모르나, 거대한 돌문이 너른 동굴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나비아는 판커틴의 품에서 내려와 한 발로만 서서 돌문에 손을 댔다. 그녀의 손바닥 끝에서 나온 하얀 빛이 돌문에 새겨진 가는 홈을 따라 물처럼 흘렸다. 홈이 그리는 건 문 전체를 수놓은 한 그루 나무 그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 미묘하게 흔들렸다.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바깥과 전혀 다른 공기가 흘러나와 일행을 감쌌다. 오래 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고, 불길한 습기가 얼굴을 덮었다. 안은 빛이 전혀 없어 로편의 등불 하나로는 무리였다. 판커틴은 준비한 횃불을 하나 켜 카셀과 라이에게 하나씩 내주었다. 돌문의 뒤에는 나선형 계단이 연결되어 가파른 경사로 지하를 향하고 있었다. 겨우 두 사람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의 나선형 계단 왼쪽은 벽이었고, 오른쪽은 낭떠러지였다. 시커먼 우물 같은 아래쪽에서 더운 바람이 솔솔 올라왔다. "차라리 어두운 게 다행이군요. 얼마나 내려가야 하죠?" 카셀이 물었다. "반나절은 걸리 지 않을 거예요." 시나비아가 발했다. "음, 뛰어내려도 금방 바닥에 닿을 거리는 아니군요." 키셀은 벽 쪽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걸 겁 많다고 탓할 일은 못 되었다. 계단 자체는 튼튼하지만, 반나절 동안 걸어 내려가야 할 까마득한 절벽을 밑에 두고 걷는 건 유쾌한 일이 못되었다. 타냐는 일부러 횃불 세 개 이상의 빛은 밝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계단의 나선 구조를 어지럽게 돌았으나, 한 시간쯤 내려가자 거의 직선을 걷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회전 반경이 넓어겼다. 점프해서도 건널만했던 절벽 너머의 반대쪽 계단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동굴 아래는 원뿔 모양의 공동이 있었고, 이 계단은 벽을 따라 건설되었나 보군요." 카셀이 말했다. “그렇다기 보다, 원래 이런 공간에 드래곤이 살게 되었고, 고대의 레미프들이 자기들의 신을 방문하기 위해 계단을 만들었겠지." 로핀이 말했다. "하지만 신전답지 않게 불길한 기운이 가득 차 있군요." 타나의 말에 시나비아가 말했다. "이 곳은 성스러운 힘이 지배하는 곳이에요. 불길한 기운이라니 말도 안 돼요." “당신의 예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저 역시 마법사입니다. '레'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드래곤의 서식처가 이런 공기를 기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봅니다만?" “......그러나 레미프도, 우그도, 어떤 힘도 드래곤의 기더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안에 서게 되었다면, 우리는 가기에 순응해야 합니다. " 타냐가 보기에 누구보다 불안해하는 사람은 시나비아였다. 그녀가 과거를 보는 능력으로 미래를 보는 능력을 얻었다면, 이 좋지 않은 예감을 모를 리가 없었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달래는 말로 타냐를 달래는 것이었다. “당신의 심정은 잘 알지만.......” 타냐의 말은 로핀이 끊었다. "드래곤을 제압할 힘은 존재한다. " 판커틴의 품에서 얼굴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시나비아가 말했다. "판커틴이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할 겁니다, 오파이. 레미프들에게 드래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신과 같은 존재예요. 함부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앞서가던 로핀은 허리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붉은 빛이 적을 대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빛 줄기 하나가 칼날처럼 살갗을 베는 느낌이었다. "이 칼이 바로 드래곤을 죽일 목적으로 만들어진 드래곤 슬레이어다. 드래곤을 죽이는 무기도 존재하며, 그걸 다를 인간도 존재한다. " [베나 에실커?] 언제나 고요하게 말하는 시나비아의 목소리가 극도로 커졌다. 그건 단순히 귀청을 때리는 고음이 아니라, 정신까지 흔드는 마법이었다. 놀란 카셀이 주저앉으며 횃불을 놓쳤다. 계단을 굴러간 기름 헝겊 묻힌 나무가 불똥을 바닥에 남기며 계단 오른쪽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타냐는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고, 판커틴도 한족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젖혔다. 횃불을 떨구지는 않았으나, 라이도 어깨를 움츠렸다. [칼을 내려 놔라, 오파이!] 시나비아의 눈꺼풀이 치켜 올라갔고, 그 안에 숨겨진 회색 눈동자가 로핀을 쏘아보았다. [당신은 지금 논틸의 영역을 더럽히는 무기를 들고있다. 이럴수가! 그 칼을 들고 라든을 몇 년 동안 활보했으며, 그 칼을 들고 홉트 앞에 서 왔단 말인가? 아아. 통찰력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무녀여. 베나 에실커를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했다니.......] 으르렁거리는 시나비아 앞에서 로핀은 두려움 하나 없이 말했다. [자책하지 마라, 사나비아. 이 칼을 만든 것도 드래곤이고, 이 칼을 내게 준 존재도 드래곤이다. 레-가넬-란도르. 그 분이 이 칼을 만든 목적은 단 하나뿐이다. 드래곤들을 죽이는 드래곤이자, 카-구아닐을 죽이는 것. 논탈의 영역을 더럽혀? 그분은 이 칼 앞에 경배해야 할 것이다.] 로핀은 칼을 부드럽게 돌려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횃불을 하나 잃어버린 탓에 더욱 어두워진 어둠 속에서 그는 조용히 덧붙였다. [저주 받은 이름을 이 곳에서 언급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한다. 그러나 이 칼 역시 레미프들의 기더 안에서 움직인다. 내가 걱정하는 건 논틸의 기더다. 타냐의 말이 맞아. 여기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불길한 기운이 가득하다.] 로핀은 잠깐 내려놓은 등불을 다시 들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고대어로 오고 간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카셀은 패 두 사람이 저렇게 험악하게 싸웠는지 몰라 얼떨떨해 하고 있었다. 타냐는 카셀을 끌고 로편을 따라갔고, 나머지도 계속 걸음을 유지했다. "왜들 그러는 겁니까?" “카셀, 당신에게는 마법적인 감각이 없어 불안감도 없는 겁니다. 차라리 나을 지도 모르지요. 지금 이 동굴 안에 뭔지 모를 끔적한 기운이 잠자고 있어요. 로핀이 가장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한 겁니다" "안 좋은 일이라도.......“ 타냐는 대답하지 못 했다. 카셀이 떨어프린 횃불은 아직도 바닥에서 조용히 타고 있었다. 횃불이 밝힌 광장의 중앙을 가로질러 로핀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원뿔 모양을 한 지하 공동의 가장 밑바닥은 대리석처럼 반듯하게 깎은 석판이 체스 판처럼 짜여 넓게 퍼져 있었다. 레미프들의 역사와 드래곤을 찬양하는 시가 고대어로 판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석판들 모두에 경배하며 의식을 치르며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무녀가 드래곤의 잠을 깨울 힘을 축척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게 석판의 용도였고, 석판이 없는 곳에 세워진 조각상들이 할 역할이었다. 그러나 로핀은 무시하고 석판을 밟고 달렸다. 시나비아는 그걸 저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판커틴을 재촉해 석판 위를 가로질러 광장의 반대쪽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결코 레미프들의 출입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닌 거대한 문이 있었다. 타냐는 구슬을 들어 주위를 밝혔다. 문에는 처음 동굴을 들어올 때처럼 기묘한 모양의 그림이 홈을 따라 그려져 있었다. 바닥의 석판을 따라 이동한 무녀가 이 곳에 오면 처음 동굴을 들어 올 때와 같은 마법으로 문을 얼어야 했다. 그러나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돌문의 한쪽은 크게 부서져 있었다. 피 냄새가 났다. 로핀이 제일 먼저 문의 부서진 것을 향해 뛰어 들어 갔다. 시나비아와 판커틴, 타냐와 카셀, 그리고 라이가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또 하나의 천장 높은 방이었다. 어떤 구조와 어떤 원리를 이용한 방법인지 모르나, 이렇게 깊은 곳까지 외부의 햇빛이 천장의 작은 구멍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닥을 모두 보석으로 덮은 것 같은 에메랄드 빛 타일이 햇빛을 반사해 방안을 오묘한 초록색으로 밝히고 있었다. 그 타일들의 중앙에 인간이 이 땅 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생명체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두손으로 긴 머리를 받친 자세는 방금 잠에 빠진 듯 편안해 보였다. 이 푸른 드래곤은 초록빛에 녹아들어 방과 하나 되어 있었다. "또 한 번 내가 늦었다." 로핀은 드래곤의 머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망연자실한 시나비아가 판커틴의 품에서 빠져 나와 드래곤을 향해 절룩거리며 걸어가다가 그만 쓰러졌다. 그녀는 울면서 계속 기어가 드래곤 앞에 엎드려 절규했다. [드라즈......아즈 포드......드베우, 포드 드베우......] 감은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이 반짝이는 타일에 거짓말처럼 큰 방울을 이루어 뚝뚝 떨어졌다. 타냐도 이토록 아름다운 푸른 드래곤에게 저질러진 비극에 을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방 안을 채워야 할 드래곤의 호흡도 없었고, 모두의 심장을 공명시켜야 할 드래곤의 박동소리도 없었다, 머리 위에 검은 창이 박혀 턱 밑으로 빠져 나와 있었고, 날개는 날 수 없도록 못질이 되어 있었다. 흘린 피가 검게 굳어 바닥을 덮고 있었다. 레-논틸-라든은 그의 성지에서 죽어 있었다. (7)프보에 레미프 로핀은 베나 에실크를 내려놓고, 죽은 논틸을 추모하는 짧은 시를 읊었다. 시나비아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고, 판커틴은 그녀의 옆에 다가와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나 본인도 슬픔을 수습하지 못 했다. 이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라이 하나였다. "가넬로크의 네 드래곤이 죽은 후 세상의 모든 음유 시인들이 그 비극을 노래하는 시를 수없이 써 내렸습니다. 그들은 드래곤의 복수를 대신하기 위해, 기사도로 완벽히 무장한 익셀런을 사악한 악마로 묘사해 사람들에게 전파시켰죠.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 해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 카셀은 논틸 앞에 무릎 끓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걱정하며 서둘렀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미프들의 절차를 무시할 수도 없었지. 이 곳의 정확한 위치도 몰랐고." 로핀은 다시 일어나 칼을 집어넣었다. "내가 아는 것만 따져도, 이번이 다섯 번째다. 아마 더 있겠지. 그러나 '레' 의 칭호를 가진 드래곤까지 당하다니 ! 구아닐과 모즈들이 함부로 그의 영역에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군." 시나비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판커틴의 부축도 거부하고 절룩거리는 다리로 그녀는 타냐의 앞에 다가왔다. 그녀는 회색 눈동자가 타냐를 바라보았다. 흐르는 눈물은 아직도 주체 되지 않았다. [타냐.......아란티아의 홉트가 천 년 동안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제가 말씀 드렸나요? 타냐, 지금 제가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사라졌어요.] 그녀는 타냐의 팔에 매달려 무너졌다. 그녀를 부축하는 타냐는 위로할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타냐도 덩달아 눈물이 나왔다. 가녀린 레미프 여인을 꽉 끌어안고서 타냐는 로핀에게 말했다. "점괘가 어긋났습니다. 처음부터 다시......논틸의 죽음을 라든에 알리고 처음부터 다시 회의를 시작해야지요." "신탁을 내려줘야 할 신이 죽었다. 회의가 무슨 의미가 있나?" "논틸의 힘을 잃었으나, 레미프들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막강합니다. " "그런 뜻이 아니야. 논틸이 죽었다는 건 라든이 죽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루티아로 치면, 화이트비가 없어진 거지." 로핀이 말했다. 타냐는 루티아의 이름을 듣자 오히려 냉정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서둘러야 합니다. 죽은 신을 추모하는 드래곤을 죽인 자를 처벌한 후라도 늦지 많습니다." 카셀도 드래곤 앞에서 일어나 말했다. “타냐 말이 맞습니다. 우선 라든으로 돌아가지요." 자기 몸도 못 추스를 것 같던 판커틴이 다가와 시나비아를 다시 안아 들었다. 시나비아는 흐느끼며 그의 굵은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 때 갑자기 문 앞에 서서 흥미 없는 얼굴로 논틸의 머리만 주시하던 라이가, 천장 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싸움이 일어났다.] "어디에?" 놀랍게도 카셀이 알아듣고 물었다. "입구." 라이는 인간의 언어로 대답했다. "무슨 싸움?" "모른다, 그것까지는." 로핀이 퍼뜩 깨달으며 말했다. “논릴의 힘이 사라졌다면, 동굴 앞에 있는 경비들은 적의 힘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거다. 이제 와서 계단을 올라가 봐야 늦어." 로핀은 황급히 부서진 돌문을 통해 달려나가려다, 멈춰 라이에게 말했다. “너, 날 수 있지 않나? 계단을 통하지 않고 직선으로 올라가면 금방이야." “거절한다. 이 싸움, 내 기더, 아니다. " 로핀은 그의 대답에 황당해했고, 카셀이 그의 굵은 팔뚝을 붙들고 말했다. "지금 이런 일이 기더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라이?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네가 해야 할 일이다. " "명령은......,너와 나의 약속이 아니다. " "약속?" 카셀은 잡았던 팔을 세게 놓으며 손가락으로 라이의 가슴을 찔렀다.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며 오직 네 욕심만 생각하느라, 네가 진짜 가져야 할 기더는 잊어버렸나? 이건 명령도 아니고, 내가 너에게 해주었던 약속도 아니다. 네가 해야 할 일임에도 잊고 있어서 가르쳐주는 거다. 고마워해라, 라이. 그러니 지금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라." "가르침도 필요 없다 " 라이의 눈에는 우그와 지혜를 겨루지 않겠다는 레미프 특유의 오만함이 있었다. "젠장, 넓게 해석하면 너와 내가한 약속은 내 명령을 네가 듣는 것도 포함돼!" "포함 안 된다. " “그럼 여기에서 혼자 논틸의 시신을 바라보며 네가 전사이기 이전에 누구였는지나 생각하고 있어! 타냐, 도와주세요. 전처럼요.” 타냐는 즉시 늑대로 변해 카셀을 등에 태웠다. 등에 탄 카셀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두 번이나 무리한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 당신을 태우는 건 즐겁습니다. 이 말을 해줄까? 타냐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달렸다. 어둠 속에서 한족 면이 절벽이나 다름없는 나선형 계단을 고속으로 달리는 건 타냐도 조금 겁나는 일이었다. 그 때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가 밑에서 올라왔다. 타냐는 이마 앞에 빛의 구슬을 만들었다. 라이는 펄럭이던 날개를 활짝 펴 활공하며 달리는 타냐의 옆으로 붙었다. "전사이기 이전의 나, 누구인가?" "혼자 생각하는 게 싫어 손쉬운 대답을 원해서 따라왔나?" 카셀은 넓은 지하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좋아, 대답해주지 넌 레미프다. " 카셀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이었다. “드래곤을 신으로 모시며, 드래곤을 부모로 생각하는 레미프다. 누가 이 땅에 널 내려 보줬는가? 네 부모의 원수 앞에서도 넌 나와의 약속 따윌 생각하고 있을 건가? 그건 내 약속이 아니더라도 네가 스스로 만들어야 할 목적이 아니던가7" 마지막 순간 카셀은 거의 울먹임에 가깝게 호통쳤다. "이런 제기랄, 내가 헛소리 늘어놓게 만들지 마라. 넌 저걸 보고 화도 안 나냐?" 라이는 말없이 활공하다가 날개를 퍼덕여 방향을 바꾸었다. 곧 계단을 따라 이동하는 타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력으로 상층을 향해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타냐는 다시 인간으로 변했고, 카셀은 등에서 내렸다. 타냐는 동굴의 입구를 향해 즉시 달리려다가 멈췄다. 카셀이 따라오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입을 가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를 한 주먹 정도 토해냈다. "어디 다친 데라도?" 타냐가 놀라 물었다. "흔들리는 몸 위에서 라이한데 얘기하느라 혀를 심하게 깨물었어요. 당신 등에다 피를 뱉을 수도 없으니 그냥 참다가.......“ 그는 다시 침 섞인 피를 뱉었다. "어서 봐요." 그녀는 카셀의 입을 벌여 혀를 찧은 부분을 발견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이밀어 상처를 건드렸다. 파란빛이 반짝이며 그 부분이 지혈되었으나, 순간적인 고통에 카셀은 어깨를 움찔했다. "이제 됐습니다. " "고마워요." 발음도 안 되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타냐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의 유일한 무기가 손상을 입었군요." 카셀도 웃었으나, 고통이 심해 소리를 내지는 못 했다. 둘은 입구의 문을 빠져나가 처음 석상이 좌우로 늘어선 곳으로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라이는 팔장을 낀 채로 입구에 벌어진 또 다른 비극을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했던 말, 혼자,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직, 모르겠다. " 라이가 말했다. “지금은 몰라도 된다, 라이." 카셀은 한숨을 내쉬며 레미프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라이가 공격당했다고 말을 꺼낸 지 꽤 시간이 흐른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이 정도 인원이 전멸을 당할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었다. 자세한 건 로핀이 와줘야 알겠지만, 타냐가 보기에도 이건 기습이었다. "하지만......, 물어봐라, 라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라 너의 지혜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지." 라이는 카셀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죽은 레미프들 쪽으로 돌아보았다. "지금은, 한 가지만, 묻는다. " "그래 ." "화가 나지 않느냐, 물었다, 네가, 내게." "그했지." "났다 하지만, 몰랐다. 그것이, 분노...... 몰랐다 " 라이는 시체들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으로 말 걸어준 자, 칼 빌려준 자, 내 옆에 있어준 자. 잊었던 감정,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죽었다. 이들을 죽인 자, 죽이고 싶다. 네가 말한 결투...... 가 아니다. 그냥 죽이고, 싶다. 이것이 분노인가?" 카셀은 입에 고인 피를 삼키고 말했다. "분노를 모르고 살아왔다면, 이 순간을 깊이 새겨둬라, 라이. 터트릴 상대는 반드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래....... 그게 내 기더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감정의 교차가 일어났는지 타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종족이 서로 다른 두 남자는 눈앞의 참상을 바라보며 같은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다. “프보에 족의 소행은 아니군." 한참 후에 계단을 올라온 로핀이 시체들의 상처와 근처의 흔적을 살피며 물었다. 그가 오기 전 혼자 조사해본 타냐도 동의하며 말했다. "베논의 발자국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프보에 족은 즈비 족과 달리, 베논을 타는 용도로 쓰지 않죠." “요새 들어서 갑자기 다른 방식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프보에 족 소행이 아니라고 본 건 전투 방식 때문이다. " 그는 발자국이 찍혀 있는 방향을 짚어가며 설명했다. "공격의 시작은 오른쪽이었다. 한 번에 두 명이나 베었고, 놀란 라든의 레미프들이 방어했겠지. 하지만 2차 기습이 왼쪽에서 이루어졌고, 혼란의 틈을 타 순식간에 승부를 결정 지어버린 거다 " "둘입니까?" "베논의 발자국은 둘 뿐이다. 그러고 이건 훈련받은 기사들의 소행이야." "카구아?" 그 이름에 시나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 자인가요, 논틸을 살해한 게?" "그걸 위해 대륙에서 올라온 자들이다. 논틸이 죽은 건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것 같더군. 그리고 죽인 기사의 이름은 '네이슨'이다. " 타냐가 물었다. "어떻게 이름까지?" "여기 올라오기 전에 논틸을 찌른 창을 살졌지. 지금까지 그런식으로 드래곤을 살해한 개자식들의 이름을 몇 알아줬다. 레드워드, 네이슨, 홀튼....... 혹시나 아는 이름이 있을까 해서 조사해 본 거야." 로핀은 뒷말을 흐리며 죽은 레미프들이 벗어놓은 배낭을 정리했다. 이제 각자의 짐은 각자가 들어야 했다. 타냐도 당장 먹을 음식과 물이 들어있는 짐을 하나 받았다. 날개 때문에 등에 뭔가를 걸치지 못하는 레미프들의 특성상 배낭은 주로 허리에 매어 허벅지 쪽으로 늘어뜨리는 구조였다. 타냐는 그냥 한쪽 어깨에 배낭을 걸쳤다. 카셀은 붕대와 약이 들어있는 가방을 받았고, 로핀의 도움을 받아 허리에 배낭을 고정시켰다. “한 달 전 시도한 의식이 프보에 족에 의해 차단 당했다. 여기에 모즈들은 카구아의 지휘를 받고, 카구아 놈들은 논틸을 포함한 드래곤들을 살해하고 다니고 있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으나, 놈들은 구아닐의 지휘를 받는다. 그리고 구아닐은 프보에 족의 수호 드래곤이지." 로핀도 험한 길을 이동할 때 쓸만한 도구를 잔뜩 담은 배낭을 허리에 맨 후, 허리에 찬 칼은 등에 바꿔 맸다. "카구아, 구아닐, 프보에, 모즈. 모두가 연합이라 단정하긴 힘들지만, 엮여 있는 건 분명하다. 거기에 루티아의 배신자가 섞여 있지. 지금 하늘 산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중에 독립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어." "카구아가 아직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우리도 표적에 있다는 뜻 아닙니까?" 카셀이 물었다. “당연하지. 하지만 놈들이 익셀런의 기사고, 10년 동안이나 하늘 산맥에서 생존해 있을 만한 대가리는 있다. 그럼 레미프 인간 양쪽에서 대표할 만한 마법사 둘이나 있는 이 일행을 건드리지는 못 할거야" 로핀의 말에 타냐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자는 마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하나를 두려워해서 공격하지 않는 거라면, 그건 제가 아니라 오히려 로핀 쪽일 겁니다. " "상관없어, 그딴 건. 서두르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라든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해가 떨어지면요?" 카셀이 로핀의 뒤를 따르며 괜한 걸 물었다. "어제 새벽 구아닐이 우릴 쫓다가 멈춘 게 무슨 이유에서라고 생각하나? 그냥 해가 떠서야. 놈이 얼마나 밤을 좋아하는지 알겠지?" 그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가면서도 처음 가는 길처럼 신중히 걸었다. 로핀은 함정이 있을 지도 모르니 각자 주의하길 바란다고 말했고, 타냐도 주위에 있는 모든 소리와 사물에 신경을 썼다. "카구아가 익셀린 제 1 기사단이고, 들이 드래곤을 사냥하고 있다면 대체 어떻게 구아닐과 한 편이 된 거죠7" 카셀은 손바닥 한 마디 길이는 되는 송곳니가 나 있는 다람쥐를 보고 기겁을 하더니, 그 마음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빠르게 물었다. "녀석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겠지. 난 오히려 루티아의 마법사가 루티아를 배신하고 그 놈들과 손을 잡은 이유가 더 궁금하다. 답답하지. 이 정도로 각지에서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나면 속을 시원하게 할 만한 결정적인 단서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걸 아직도 모르겠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결론부터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 모르는 해답을 너희들이 갖고 있을 잠재력을 지우고 싶지 않았어. 이제 너희들은 성급한 추리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지. 그러니 나머지 해답도 그런 식으로 얻어내 줬으면 좋겠다." 주위가 탁 트여 잘 보이는 곳은 들키기도 쉬운 곳이었다. 그래서 걷기 쉬운 넓은 길이 오히려 불안한 타냐는 주위를 살피는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카구아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를 이제야 알겠군요. 인간의 사냥꾼이 하늘 산맥에서 죽으며 저주를 건 레미프 사냥꾼도 아니고, 하늘 산맥의 유령도 아니었군요. 너무 단순해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카구아란 사실 그 카-구아닐이 창조해낸 '어떤 존재' 가 아니었습니까?" "맞아. 카구아는 구아닐의 부하들을 일컫는 단어였어. 레미그들의 역사에서도 희미해진 그 존재와 비슷한 유령이 나타나자, 레미프들은 전설을 끌어다가 그들을 카구아라고 칭하게 된 거지." "구아닐은 하늘 산맥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사악한 드래곤이고 카구아는 그 드래곤의 부하라면......모즈는?" "파괴 밖에 모르는 드래곤 놈이 어떻게 창조의 힘을 얻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느닷없이 나타났으니 구아닐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출신은 다르나, 그런 이유에서 결국 모즈도 카구아와 비슷한 개념이겠지 " 한참 가다가 로핀은 다시 정지 신호를 내렸다. 이번에는 아무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앞으로 나셨다. 다시 돌아온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쪽 길은 차단되었다. 모즈들이 지나간 흔적이 많아. 허술하게 그 흔적을 감추려고 한 자국도 조금 보이고." "모즈들이 포위를?" 타냐가 물었다. "그게 이상하냐?" 로핀은 다른 길을 찾는지 시선을 먼 곳에 두고 말했다. 시나비아는 이제야 겨우 울음을 멈추고, 카셀과 뭔가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모즈들이 미리 앞질러 가서 함정을 판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죠.“ "모즈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어? 뭐, 적어도 놈들을 지휘하는 건 인간의 기사다. 신전에서 여기까지는 외길이야. 고차원적인 작전이랄 것도 없지." 로핀은 방향을 바꾸어 북쪽이 아닌 동쪽의 새 길을 택했다. "돌아가는 시간이 길어지면 곤란합니다. "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싸움을 뚫고 가는 것보다 빙 돌아가는게 되려 시간 절약에는 도움이 되잖냐! 솔직히 말해 난 구아닐과 싸우면 싸웠지, 카구아와는 싸우고 싶지 않아.” 타냐는 그의 칼을 흘끗 봤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으니 자신 있다?" “구아널은 이 검을 두려워하고 나도 구아닐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린 서로 공격을 할 수가 없지 내가 칼을 쓰면 둘 중 하나가 죽거나, 둘 다 죽어 " "싸움에서 둘 중 하나가 죽는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타냐가 말했다. “오냐, 오냐. 당연한 말 덧붙여주마. 나는 내가 사는 쪽을 택할거다. 구아닐도 자기가 사는 길을 택하기 위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카구아나 모즈를 이용하는 거겠고, 나는 그 새끼가 원하는 대로 안 당하려고 싸움을 피하는 거야." 로핀이 택한 방향에는 길은 없고, 허리 위까지 올라가는 풀밭이 나왔다. 로핀은 발 밑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며 걸었다. 말이나 하지 많았으면 걱정은 안 하련만 보이지도 않고 뭔지도 모르는 위험을 어떻게 조심하라는 건지....... 타냐는 함정이나 뱀이라도 있나 부지런히 살폈다. 뒤에서 수풀을 헤치며 카셀이 따라왔다. “방금 시나비아에게도 물었지만......, 라든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식으로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까?" "예를 들면?" 로편은 발 밑을 살피느라 건성으로 대꾸했다. “다를 드래곤을 불러 도움을 구하는 건 어떻습니까?" "다른 부족의 무녀를 찾아야지. 시나비아가 다른 부족의 드래곤도 깨울 수 있다고 그러든?" "아니오. 하지만 로핀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쭈었습니다. " "나를 높이 평가해주는 건 좋지만, 레미프의 무녀도 못하는 일을 인간인 내가 어찌 하나? 게다가 이 곳은 논틸의 영역이라서 다른 드래곤은 살지도 않아. 그린 방법을 쓰고 싶다 해도 우선 라든으로가는 게 더 낫다. 정확히 어떤 드래곤의 도움을 받을 것인지, 어떻게 그 족 부족의 협조를 얻어낼 것인지, 홉트에게 물어봐야지." "레-가넬‥‥‥ 란도르는요?" "그 이름은 고대어로 언급했구만, 알아들었냐?" "이름만요." “그 분에 대해서는 긴 얘기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지. 내가 그 분을 찾은 게 아니라, 그 분이 나를 찾았다. 그리고 란도르는 여기에서 일주일은 족히 가야 나오는 땅이야 " "그렇군요." 그다지 수긍하는 빛은 아니지만, 카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멈춰라." 로핀은 카셀을 저지하며 갑자기 수풀 밑으로 몸을 바짝 낮추었다. 숨었다기보다 밑에서 상황을 살피는 자세였다. 그러고 다시 일어나더니 깜짝 놀랄 만한 속도로 달려갔다. "왜 그러는 거죠?" 타냐도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의아해했다. 갑자기 칼을 부딪치는 금속성이 들렸다. 타냐와 카셀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서 로핀의 뒤를 따라갔다. 카셀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라이, 시나비아 옆에 있어줘." 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펀은 갈대밭을 벗어난 자리에 칼을 들고 혼자 있었다.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뭐가 있었습니까?' 타냐가 물었다. “프보에 레미프들이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달아나 버렸어. 사로잡아야됐다는 생각에 죽이지도 못했군." "몇이나?" "셋 정도. 아마 정찰하는 녀석들일 거다 " "이 쪽 길도 감시당하고 있었던 겁니까?" “우리 길을 역추적해서 따라왔나 보다. 서둘러야겠어." 수풀을 헤치고 라이와 판커틴이 시나비아를 데리고 따라왔다. 라이는 충실히 그들 옆에 있어주였다. 단순히 귀찮아서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고 타나는 생각했지만, 카셀은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라이는 고개를 까닥였다. '왜?' 라이는 정말 카셀의 명령 또는 부탁을 들어준 건가? 저 정도로 따르기 시작하면 오히려 위험한 건 카셀 쪽이었다. 약속을 못 들어 줬을 때는 어찌 되는가? 아무리 큰 그릇이라도 담을 수 없는 존재가 있는 법이었다. 타냐는 더욱 라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제대로 된 길로 가는 게 아니라 걷는 속도는 더욱 더뎌줬고, 밤이 되었는데도 라든에 도착하지 못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냐는 말에 로편은 미덥지 못하게 '그럴 지도.' 라고 대답했다. "나디우렌의 증표를 가지고 있다면서 길을 잃은 겁니까?" 카셀이 화를 냈다. "증표고 지랄이고 이 정도 두터운 숲에서 길 찾는 게 쉬운 줄아?" 로핀도 덩달아 화를 냈다. 대강 타냐는 로핀의 의도를 짐작했다. 그는 쉬운 길을 놔두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었다. 프보에, 모즈, 카구아, 어떤 적에 의해서든 라든으로 가는 어지간한 길은 모두 차단되었다고 가정하고 전혀 다른 길을 찾아가다 보니, 로핀도 조금씩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디우렌의 증표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제 그녀도 방향을 잡기 어려웠고, 시나비아나 판커틴도 여기는 모르는 곳이라고 말했다. 저녁이 되면서 숲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프보에 족의 시체를 발견했다. 피부가 검어 옷이 아니라면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프보에 족 레미프들의 시체가 열 구 넘게 길을 막고 있었다. 최근 죽은 흔적인 걸 미루어 보아, 원래대로라면 로핀 일행은 이들에게 기습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프보에 레미프들이 되려 기습을 당한 모양이었다. 인간들도 피부색은 지역마다 달랐다. 그러니 레미프들도 다를 수 있겠지만, 즈비 족 레미프들의 피부색이 워낙 매끄럽고 하얀 터라 프보에들의 검은 피부는 각별해 보였다. 어깨까지 늘어뜨릴 만한 긴 곱슬머리가 지저분하게 흙에 범벅되어 있었고, 그 중 몇은 아예 머러로 얼굴을 가렸다. 키는 인간 정도였고, 손톱은 길었으며, 귀는 위로 솟지 않고 아래로 늘어졌다. 고통스럽게 치켜 뜬 하말 눈자위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내는 것 같았다. 타냐는 구슬의 빛을 줄였다. 잠시 근처를 수색한 로핀이 돌아왔다. "이건 레미프들 것인데?" 아무래도 로편도 타냐처럼 카구아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의외의 존재에 대해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분이라도 일어난 건가? 베논의 발자국이 보이는 걸 보아 익셀런 놈들도 있었나 본데, 특별히 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뭐가 뭔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강행한다. 이제부터 라든까지는 일직선 길이다. 적을 만날 걸 각오하고 직진하는 게 나아." 그 때 카셀이 손을 들었다. "왜?" "그보다 우린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 "아. " 로핀은 뒤늦게 시나비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판커틴의 품에서 물만 조금 마신 게 다였다. 아무리 발을 안 쓴다지만 이 정도로 오래 매달려서 이동을 하면 지치기 마련이 었다. 로핀도 타냐도 지나치게 적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타냐도 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그럼...... 조금만 더 가서 뭘 먹도록 하지." 프보에들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 반 시각을 더 이동한 후에 일행은 멈춰서 배낭에 넣어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않아서 다리를 쉬니, 다들 뒤늦은 피로가 찾아와 아무 말을 못했다. 카셀이 겨우 말을 꺼냈다. "타냐. 마스터 데다인이 새나디엘 폐하께 원군을 요청할 때 어째서 저와 제이메르 두 사람만 보내신 걸까요?"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짐작되는 바는 많았으나, 카셀이 궁금해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 싶어서 되물었다. "페하께서는 아란티아에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늘 산맥의 심각성도 어느 정도 짐작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째서 루티아의 그 큰 위기에 대해......아란티아가 위험할 때 기꺼이 도움을 줬던 루티아에 겨우 저라는 작은 존재를 보내는 걸로 동맹의 의무를 다하려 하셨던 걸까, 그게 궁금합니다." "폐하께서는 카셀을 결코 작은 존재로 보지 않으셨을 겁니다 " 타냐는 카셀을 위로하려 했으나, 그는 손을 저었다. "아니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저는 하늘 산맥의 모든 위기를 루티아의 위기와 항상 연관지어 생각했습니다. 어찌면 이 모든 위험이 루티아를 향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요. 로핀은 항상 루티아와 라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말씀 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글쎄요,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보세요. 모즈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또 카구아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둘은 프보에와 같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데 프보에는 동쪽에서 왔어요. 그럼 모즈들도 동쪽에서 왔다고 가정해도 될까요? 그럼 모르들은 해 동족에 더 가까운 라든은 내버려두고, 루티아를 먼저 공격하고 있는 지죠?" “라든도 지금 위협받고 있잖습니까?" “루티아는 아예 요새가 무너졌다고 했어요. 서로 경계하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로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입술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그래, 내가 원하는 네 식대로의 사고 과정이 그런 거였다. 맞아, 모즈들!" 그는 지쳐 늘어진 채로 숨을 고르고 있는 시나비아에게 말했다. “모즈들은 비금까지 라든 자체를 공격한 적이 없어. 항상 우연히 만난 우연한 전투를 치렀지. 기억 나나, 시나비아? 당신의 힘으로 모두의 과거를 들여다보시오. 모즈들이 싸움을 일으켰던 전투 전부를!” “정상적인 의식도 없이 과거를 훔쳐볼 능력은 못됩니다. 하지만 판커틴의 기억에서.......” 시나비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전투....... 전투의 위치. 아....... 모즈들은 항상 우리들과 이동 중에 만났습니다. 심지어 워낙 대규모 이동을 하고 있어서 판커틴이 기습을 준비했다가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동중인 모즈들은 라든을 공격하지 않았죠. 우리는 우리들 신경 쓰느라 그 이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그저 라든이 무사한 것에 안도하기만 했죠.” [제일 최근 모즈들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시기가 언제인가?] 로핀이 판커틴에게 물었다. [열흘쯤 전] [숫자는?] [약 천에서 천오백 사이.] [방향은?] [서쪽] 로핀은 타냐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든에서 서쪽 방향에 있는 건 루티아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모즈들과의 전투는 우리와 관련이 없는 일이었어. 놈들의 목표는 루티아다. " 로핀은 왜 이제야 그걸 알았지? 라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카셀의 말이 맞아. 처음부터 하늘 산맥 전체를 노리고 하는 공격이자면 즈비 레미프들의 가장 커다란 나라 중 하나인 라든을 먼저 친 후에 루티아를 공격했어야 했어. 그런데 라든은 내버려두고 손실이 없는 병력을 최대한 루티아에 집중시키고 있는 거다. " 타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레미프들을 돕는 길이 루티아를 돕는 길이라고 여기고 여태까지 시나비아를 보조했다. 그런데, 로펀과 카셀은 지금 그게 아니라고 발하고 있었다. 제이메르가 루티아로 떠난 지 이틀 째. 루티아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 엄청난 숫자의 모즈들, 그것도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대군을 막아낼 것인가? 로핀은 잠시 머리 속으로 다른 부분을 정리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아 새나디엘. 페하의 통찰력에 고개를 숙이나이다. " 로핀은 남이 걱정하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페하께서 루티아를 돕는 원군을 보내시지 않은, 그것에 모든 해답이 있었다. " 타나가 말했다. “잠깐만요. 많은 부분이 달라겼지만, 대전제는 변하지 많았습니다. 모즈들의 목적이 루티아 하나라면, 그 다음 타깃은 당연히 아란티아입니다. 그럼 페하께서는 루티아를 돕는게 오히려 아란티아를 보호하는 길이 아닙니까?" “어제야 마법사의 통찰력을 발휘하는군. 하지만 모자라." 로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있는 어떤 마법사도 아란티아의 여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살아있는 어떤 군대도 울프 기사단을 꺾을 수는 없다. 적어도 아란티아 내에서는 여왕의 힘 앞에 맞설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울프 기사단이 루티아로 원군을 떠난다면, 적은 루티아를 공격하던 병력을 고스란히 아란티아로 되돌리면 그만이다. " 로핀은 숨 죽여 말을 이었다. “머리 많이 안 굴려도 알 수 있는 거지만, 잘난 척 시작한 김에 설명해주지. 적은 루티아를 함락시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는데도 함락시키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모즈들을 이끄는 장수라면 루티아를 위험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는 해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않아. 루티아가 아란티아에 원군을 요청하여, 울프 기사단을 끌어낼 때까지!" 타냐는 여왕이 그런 것까지 내다보고 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럼 마스터 데다인이 원군을 데리러 아란티아로 외교를 나서는 것조차 적의 작전이라는 말입니까?" "데다인 본인이던가, 아니면 데다인을 아란티아로 보낸 자던가......,그게 루티아의 배신자다. 그 자가 루티아를 볼모로 잡고 아란티아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구아닐의 연합 세력이다." 타냐는 그랜드 마스터 리스킨을 떠올랐다가 황급히 지웠다. 루티아와 목숨을 함께 하실 분이 그런 것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 왜 저를......,루티아의 원군으로 보내신 걸까요?" 카셀은 나직이 신음하며 말했다. 아란티아를 보호하기 위해 울프 기사단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카셀은 내보냈다. 타냐는 그가 왜 실망하는 빛을 보이는 지 금방 점작했다. 로편도 대답에 신중을 기했다. “그건......, 적을 혼동시킬 작전이었거나, 뭐, 다른 깊은 뜻이 계셨겠지 " 카셀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니 저도, 제이메르도 원래 울프 기사단이 아닌 외부인이었군요." "그런지 않아요, 카셀!" 타냐는 로핀을 쏘아봐주고 말했다. “함부로 새다니엘 여왕 폐하의 뜻을 흐리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분명 카셀 당신을 움직여 더 큰 뭔가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화이트 게이트의 기적을 우연이라고 치부한다면 그걸 높이 평가한 모든 사람을 무시하는 게 됩니다. 저까지도요. 그러니 함부로 자신을 낮추지 마십시오.” 카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청하게 고개만 끄떡였고, 로핀은 웃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이거 나를 호통치는 소리로 들리는군.” “당신은 항상 눈치가 빨라서 곤란했지만, 이럴 EO는 편리해서 좋군요. 돌려 말해도 알아서 해석해 주시니!” 타냐의 강한 어조에 로핀은 두 손으로 기도를 하듯 맞잡고 사과했다. “말이 헛 나온 거라고 생각해주시게, 마스터 타냐.” 카셀도 겨우 표정을 풀고 말했다. “괜찮아요. 이런 것에는 많이 익숙해졌다지만, 또 막상 여왕 폐하께서 그랬을 지도 ...... 하니 조금 우울해졌던 겁니다. 항상 눌리는 게 생활이라, 여차하면 저도 모르게 비관적으로 머리를 굴리게 되네요. 이제 됐어요. 그보다 루티아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의논해보죠. 라든에 직접적인 위험이 없다고는 말 못 하고, 저는 아직도 레미프들을 도와야 루티아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정이다 어쩐다 하지만, 결국 루티아는 레미프에게도, 인간에게도 중요한 마법의 도시입니다.” 뒤에서 시나비아가 힘없이 말을 꺼냈다. "원군 문제라면 제가 홉트께 강하게 제안하겠습니다. 당신들은 우리 일에 전력을 다해 도우셨어요. 그러니 원군이라면 우리도 당연히 .......“ 타냐는 희망을 품고 그녀의 됫말을 기다렸으나, 카셀이 저지했다. "아니, 약속은 아직 지키지 못했습니다. 모즈들의 위협을 제하고라도 구아닐과 카구아가 남아있습니다. 라든을 지키려면 드래곤의 힘이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점괘에 나타난 누구도 아직 이탈되지 않았습니다 " 카셀은 모두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어느 새 모두가 넓게 원을 만들었고, 그 중앙에 카셀이 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고, 그 일은 드래곤을 깨우는 일입니다. 그 일이 끝나 라든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당신들은 루티아를 도울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나라를 버리고 루티아를 도울 생각이십니까, 시나비아? 아란티아의 홉트께서 하지 않았던 실수를 당신이 저 질러선 안 됩니다. " 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나비아가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나 드래곤을 깨우기 위한 의식을 다시 시작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을 잃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드래곤을 깨우려면 그 나라의 무녀를 만나야 하고, 정치적인 교류가 오고 가야하죠. 의식을 길게 끌길 좋아하는 레미프들의 천성을 모두 무시하고 가장 필요한 절차만 밟아 즉각 드래곤을 깨운다 해도, 5일에서 7일 정도 걸린답니다. 타냐의 도시가 그 때까지 버텨줄까요?" 타나는 눈을 감았다 화이트비가 밝게 빛나는 탑이 눈에 아른거렸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로핀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분명 ‘레'나 ’카‘의 칭호를 가진 드래곤과 칭호가 없는 드래곤은 각 나라와 부족에 연관되어 있지. 그러나 ’카‘ 와 ’레'를 모두 관리하는 중립인, ‘사’ 의 칭호를 가진 드래곤은 소속이 없지 않나? 드래곤들의 하이로드 말이야.” "일리 있군요." 시나비아도 그 말에 깊이 고민했다.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 카셀과 타냐는 희망을 품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분들은 레미프들의 세계에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불립니다. 자기 의지로만 움직이며, 자기 의지로 기더를 조종하십니다. 하늘 산맥 전체에 세 분 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어디 있는지 아는 이들은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 묻지 않습니다.” "후딘턴은?" 시나비아는 또 고개를 저었고, 로핀은 서성대다가 자리에 앉았다. 헐렁거리는 다른 록 팔이 늘어진 게 유난히 기운 없어 보이게 했다. "확실히 아무도 모르면 안전하긴 하겠군.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아직 늦은 게 아니야. 정말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거든. 하지만 지금은 끝장났다는 기분은 아니야.“ “다른 종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절차 없이 바로 찾아가 보면 어떨까요?” 카셀이 물었다. “내가 안다.” 라이가 괜히 끼어 들어 말했으나, 아무도 듣지 못했고, 시나비아가 카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무리입니다. 드래곤들은 자기를 모시는 무녀의 말이 아니면 듣지 못 해요.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사의 칭호를 가진 분들만 모든 무녀들의 말에 응하십니다. " 그녀는 함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로핀이 가서 살펴보니 다친 다리에서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거 위험하군. 서둘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면 곤란하겠어 ." 타냐가 다가가 다시 한 번 지혈을 해주었으나, 그 이상의 치료는 무리었다. 카셀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라이를 보았다. "그런데 라이 너,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안다‥‥‥ 고 했다 " "뭐를?" "사의 칭호를 가진 드래곤." 모두의 머리를 후려치는 침묵이 잦아들었다. 새로 붕대를 가느라 고통을 참는 시나비아가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아나요?] [봤다.] [봤다더라도 겉모습만으로 ‘사’의 칭호를 가진 분이라는 걸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기더는 싸움에 있다고 알려주신 분이 그 분이다. 내가 처음에 인사를 하자, 이름이 뭐냐고 물었고 그도 자신의 이름을 밝혔었다. 그 때 그 이름은 분명 ‘사’ 로 시작했다. 나머지 이름은 잊었다.] 타냐는 알아들은 말을 모두 카셀에게 해주었고, 그는 뒤늦게 놀라며 물었다. “그 분은 어디 계시냐?” “자세한, 모른다, 그러나, 멀지 않다.” “여기는 논틸의 영역입니다. 하이로드께서 여기 계실 이유가 없어요.” 시나비아가 강력히 주장했다. "모른다. 하지만, 있다. " 당연하겠지만, 라이의 표정에는 거것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았다. 로핀도 입을 굳게 다물며 생각에 잠졌다가 모두의 대화를 중지시켰다. "아아, 이런!" 그는 칼을 뽑았고, 시나비아의 발목에 붕대를 감은 판커틴도 당장 칼을 들고 섰다. 타냐는 구슬의 불을 밝혔다. 포위 당해 있었다. 바닥에 쌓인 나뭇잎 밟는 발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타냐, 가능하다면 늑대로 변해서 싸워라. 나무가 너무 많아 마법을 쓰면 우리 쪽도 위험하다.” 타냐는 지체 없이 늑대로 변해 카셀의 옆에 붙었다. 카셀도 칼을 뽑았다. 어둠 속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라두 워그? (하얀 늑대)] [라두 워그] 그건 분명 레미프의 언어였다. 타냐는 프보에의 목소리도 즈비족과 전혀 다를 바 없구나, 하고 생각하며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뭔가 눈치 로핀이 타냐를 말렸다. 그 때 판커틴이 칼을 내리고 소리쳤다. [워 아이부 레미프 오그 라든. (우리는 라든의 레미프다.)] 그러자 반대쪽에서도 대답이 돌아왔다. [워 아이부 레미프 오그 만디르.(우리는 만디르의 레미프다.)] 판커틴이 물었다. [혹시 퍼거스나이?] [판커틴!] 어둠 속에서 잘 빠진 마른 체형에 짧은 금발 레미프 남자가 걸어 나왔다. 판커틴은 그를 보고 힘껏 끌어안았다. 시나비아도 겨우 안도하며 모두에게 설명했다. (8) 타냐의 선택 이대로 싸웠다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엄청난 숫자의 레미프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일부는 베논을 타고 있있고, 창과 활, 칼로 완벽하게 무장한 폼이 인간의 기사단 못지 많았다. 숫자는 많았으나, 잘 통제되어 조용했다. 가끔 베논이 고개를 털며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다였다. 피거스나이는 다른 레미프들과는 달리 웅얼거리는 발음에 혀를 떼는 것도 부정확해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겨우 고대어에 익숙해 겼으나, 결국 로핀의 통역이 필요했다. [기더가 이끄는 대로 왔더니 자네를 만나게 되었군. 소리도 없이 몰래몰래 오길래, 우리는 프보에 놈들인 줄 알았다.] [아까 발견한 시체는 자네들이 한 짓이었군.] 판커틴이 말했다. [어제 아침부터 약 다섯 군데에 매복 부대를 쓸어버렸다. 카구아가 이끄는 모즈 놈들이 조금 막강했지만, 그 놈이라고 별 수 있는 건 아니었지.] [정말 많이 몰려왔군.] [위험했었다. 어둠 속이었던 데다가 너희들 쪽에 우그가 같이 있어서 무조건 공격하려고 했거든. 하지만 늑댁 있어서 놀라 멈췄다. 우리의 점괘에서는 기더가 이끄는 곳의 끝에 하얀 늑대가 있다고 나왔지. 우리는 그게 상징적인 의미인 줄 알았거든.] 퍼거스나이는 인간으로 돌아가 있는 타냐를 턱으로 가리켰다. [우리는 두 달쯤 전 카구아의 공격을 받았다. 놈들은 프보에 족과 연합을 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서쪽으로 사라져버렸지. 우리는 이 일에 관련해서 짧은 회의를 거친 후 '퀴니'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로핀은 통역 후 퀴니란, 레-퀴니-만디르를 뜻한다고 가르쳐주었다. [퀴니는 아직 힘을 화복하지 못 해 카-구아닐과 싸울 수는 없으나 적어도 마을을 지켜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서쪽의 나라를 도우라는 신탁을 내려 지금 이 쪽을 향했다. 퀴니의 말씀은 틀림없었어. 여기에는 모즈를 이끄는 카구아도 있었고, 프보에 족들도 너희들을 노리고 있더군. 심지어 우리는 구아닐과도 조우했다.] [어찌 되었나?] [우리가 먼저 민첩하게 대응했지. 구아닐도 그다지 우리와 싸우고 싶지 않았는지 물러났다. 그런데 프보에 족이 왜 논틸의 영역에 이리 깊숙이 침투해 있는 건가?] [......논틸께서 살해 당하셨다.] 퍼거스나이는 유감의 뜻도 표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쨌든 신탁의 끝에는 하얀 늑대가 있을 거시니 그 뜻을 따르라고 하셨다. 휴우, 늑대라니,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군.] 퍼거스나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판커틴은 웃지 않고 타냐와 카셀을 돌아보았다. [퀴니의 신탁대로라면 어쩌면 너희들이 도와야 할 건 라든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뜻인가? 우리보다 서쪽에 있는 나라는 라든 뿐이다.] [하얀 늑대의 뜻을 따르라고 했던가? 너희들은 잘못 알고 있다. 하얀 늑대는 저 여자 우그가 아니라 남자 우그다.] 판커틴은 카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퀴니의 신탁에 나오는 서쪽의 나라는 라든이 아니라 루티아다.] 퍼거스나이는 무슨 헛소리냐고 물었고, 시나비아가 말했다. [자세한 사항은 라든에 돌아가서 우리의 점괘에 맡기시지요. 그러나 아마 후딘틴의 점괘에서도 똑같은 뜻이 나올 겁니다.] 시나비아는 감은 눈으로 로핀, 카셀, 타냐를 향해 한 사람씩 정감 어린 미소를 보였다. "긴 시간 갇혀 지낸 저에게 여러분의 모험 이야기는 선물과도 같았습니다. 계속 그 모험의 일부가 되고 싶지만 저에게는 저의 할 일이 있겠죠. 그 전에 마지막으로 세 분이 카-구아닐의 흔적을 쫓는 데, 한 가지 잊고 있는 요소를 더해드리고 싶습니다. 루티아와 아란티아가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는 큰 적은 카- 구아닐이 아닙니다.“ 로핀은 그 말을 듣는 즉시 시나비아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고 무릎을 쳤다. 시나비아가 계속 말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오파이의 기억 속에서 그 자는 론타몬의 홉트를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고, 가델로크까지 정벌한 후 카구아들을 보내어 드래곤을 살해하고 있습니다. 카셀의 기억 속에서 그 자는 아직도 종교를 이용해 대륙에 사악한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타냐의 기억 속에서 그 자는 아란티아의 골드 게이트를 넘었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 산맥으로 들어오는 정상적인 입구는 대륙 전체에서 한군데 밖에 없습니다. 아란터아. 그 곳은 여신 나디우렌께서 허락하신 하늘 산맥의 유일한 입구입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노리는 곳은 그 입구입니다. " 천 년 전 전쟁에서 무너뜨리지 못한 레드 게이트는 익셀런 기사단이 무너뜨렸고, 골드 게이트는 부활한 웰치가 무너뜨렀고, 이제 화이트 게이트 차례라고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말했다. 그러고 나디움은 '스카이 게이트‘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하나로 좁혀졌군. 하늘 산맥에 있는 적도 아크랜드에 있는 적도, 목표는 나디움이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그걸 위해 카-구아닐과 연합한 거였군." 로핀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퍼거스나이와 함께 라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란티아라는 방패가 무너지면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사악한 힘에 노출되어 결국 우리도 멸망한다는 뜻을 후딘틴에게 보이겠어요. 그는 절대 제 의견을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카셀, 당신은 스스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당신이 해줄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라이와 함께 드래곤들의 하이로드께 이 사실을 알려주세요. 우리의 힘으로 루티아를 구한다 해도, 퀴니의 힘만으로는 구아닐을 막지 못할 겁니다. 우리의 연합만으로는 프보에와 카구아의 연합을 막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 시나비아가 말했고, 로편이 즉시 손을 올렸다. “물론 나도 같이 가겠다. 논틸이 살해된 이상 나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시나비아는 감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타냐에게 얼굴을 돌렸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와 함께 라든으로 돌아가 연합을 구축하여 루티아로 떠나는 원군에 합류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레미프들의 연합군 선두에 서주면 후딘틴을 설득하기가 더 쉬울 겁니다. 아니면 카셀과 로편을 도와 드래곤을 찾는 일에 합류하실 건가요? 찾을 수 있을 지 없을 지 모를 일이긴 하지만, 이 일 역시 당신의 힘이 필요할 거예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지도상에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작은 나라, 타냐는 그곳 백작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면서 불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했고, 나라는 크게 흔들려 왕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돕던 하인들도 월급을 주지 못해 내보내고 나니, 작은 저택에 남은 건 아버지 크림로스 백작과 병든 어머니, 네 살 위인 언니, 남동생, 그리고 타냐 뿐이었다. 그래도 타냐는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래서 잘난 아버지 노릇이라도 해보겠다?" 어느날, 집무실을 찾아온 험상궂게 생긴 귀족의 고함에 타냐는 문 옆에 숨어 어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결국은 갖지 못할 돈이라면 이 땅이라도 내주겠소. 그러니 그딴 시답지 않는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이 땅의 가치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군, 크림로스 백작. 누가 당신 딸을 잡아먹는다고 했나? 여기보다 좋은 곳에서 살게 해준다고 했지." 아직 열두 살인 타냐였지만, 단 몇 마디 대화만으로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했다. 타냐는 몰래 문틈으로 아버지를 협박하는 남자의 얼굴을 봐두었다. 그의 이름은 대니 얼 아치볼드였고, 론타몬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엄청난 부자였다. “당장 나가! 죽여 버리기 전에." 아버지는 칼을 뽑았다. 아치볼드는 두 손을 내밀고 물러났다. "최종 채무 기한이 지나 오늘은 손수 내가 나타났소. 그리고 난 인자하게도 아주 작은 조건만 내주었지. 이 저택, 그리고 두 딸 중 한 명. 그게 다요. 자, 내일 아침까지 선택할 시간을 주겠소, 백작." 그는 문을 나서며 타냐와 눈이 마주했다.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며 그가 말했다. “몸을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아이야. 내일 네 언니와 함께 데리러 오마." 타냐는 너무 무서워 주저앉고 말았다. 아버지가 뒤따라 나오며 그녀를 진정시켜 주었다. “걱정마라, 타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나 아치볼드가 말한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급한 채무를 위해 아치볼드의 돈을 끌어다 썼고, 그 돈은 지난 오십 년 동안 쌓인 빚보다 더 커다란 액수로 불어났다. 크림로스 가문의 인덕과 어떻게든 갚으려는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믿어준 다른 빚쟁이들파 달리 아치볼드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영지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 난 타냐의 언니를 노리고 있었다. 다음날 칼을 든 깡패들이 저택을 쳐들어왔다. 경비는커녕 하인도 없는 집안을 누비며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부셨다. 아버지는 저항하다가 죽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호하다가 또한 같이 칼에 찔렸다. 남동생은 누나를 지키기 위래 작은 손에 쥐기도 힘든 칼을 들고 저항하다가 붙잡혀 벽에 묶였다. 타냐를 벽장 뒤 비밀 공간에 숨겨둔 언니는 홀로 그 깡패들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팔을 묶이고, 모드가 보는 앞에서 아치볼드에게 겁탈 당했다. 언제나 언니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어 거울을 보던 타냐였다. 그러나 지금 언니는 남자의 한 순간 미친 발정에 눌려,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수수하게 차려 입고 마을에라도 나가면 마을 총각들은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몇 날 몇 일 동안 밤새워 쓴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들에게 차례대로 몸을 빼앗기고 있었다. 없는 돈에 마련한 드레스를 입고 어떤 파티장에든 나서면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는 그녀가 지금은 밧줄에 팔을 묶이고, 입가에는 피를 흘리며 침대에 매달려 있었다. 타냐는 그 모든 광경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팔뚝을 깨물었다. 갑자기 언니의 고통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몸 속을 헤집는 뜨거운 느낌에 그녀는 배를 움켜쥐고 고꾸라졌다. ‘타냐, 거기 있지 마. 봐선 안돼 ' 그 와중에도 동생을 걱정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읽곤 했다. 놀랄 테니,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자고 약속했다. 접시를 깨뜨려 언니가 손가락에 피를 흘릴 때, 타냐는 똑같이 피를 흘렸다. 누구 하나가 감기에 걸리면 둘 다 침대에 누웠다. 이제 두 자매는 생전 처음 겪는 고통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언니, 이렇게 아픈 거야? 이렇게 괴로운 거야? 안돼. 이러지마. 언니를 괴롭히지 마.' 그들은 타냐를 찾기 위해 저택을 샅샅이 뒤졌다. 언니는 동생을 어제 미리 탈출 시켰다고 거짓말했다. 아치볼드는 발로 배를 걷어차며 동생이 있는 곳을 말하라고 강요했고, 그녀는 다시 한 번 같은 거짓말을 했다. 이미 견딜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노출된 그녀는 아치볼드의 이어지는 발길질에 숨을 거두었다. 아치볼드는 욕하며 그녀의 방에 기름을 끼얹고 그 위에 등불을 던졌다. 불은 순식간에 침대를 태우고 커튼을 집어삼켰다. 타냐는 연기에 눈을 감고 비상 통로를 기어가 지하실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택은 불에 탔고, 아치볼드가 부하들을 데리고 저택 밖에 세워둔 말에 오르고 있었다. "저 저택을 쓰실 거 아니었습니까?" "더 큰 걸 짓는다. 멍청한 크럼로스 백작은 이 땅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 줄 몰랐겠지만, 여실 론타몬 황제께 바치면 사실 이 나라 전체가 론타몬의 영역이 된다. 저택 한 채 정도는 하사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거지." “그래서 일을 서두르셨군요." "알아서 물러 나주길 바랐다가 늦으면 안 되지." "뭐, 우리야 덕분에.......“ 뜨거운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어리지만 총명한 소녀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4년 전, 지금의 타냐와 같은 나이인 언니가 그랬을 때, 몸에 벌어진 작은 기적을 축하하며 엄마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언니의 고통만이 그녀의 몸이 느끼는 전부였다. 그러고 그 피는 고통의 대가였다. ‘엄마.......’ 모두가 돌아가고 타냐는 홀로 불타고 남은 저택에 들어갔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를 곁에 두고 그녀는 잠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눈을 뜨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가족들과 항상 같이 놀았던 절벽이 가까운, 그 초원으로 갔다.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가 그녀를 감쌌다. '죽어야지.' 타냐는 결심하고 절벽 가까운 곳에 섰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마스터 테일드를 만났다. 그는 그녀의 고통을 치유해주지 않았다. 그저 몇 달 동안 대륵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여행만 했다. 그녀가 과거의 고통을 애써 잊을 만할 무렵, 한 번도 말하지 않던 그 이야기를 했다. "과거는 잊지 말거라. 그러나 과거에 얽매어 미래를 밟지 못하는 건 한 번 살다 죽을 인생이 너무 아깝지 많니? 부모님의 죽음을 잊지 마라. 언니의 고통을 잊지 마라. 남동생의 희생을 잊지 마라. 살아가기 위한 욕심을 채운다면 이기적이어도 좋다. 그 이기적인 욕심이 정당해지길 원하느냐? 그럼 너는 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 테일드의 눈은 정확했다. 그녀는 5년 동안의 수업만으로 루티아의 마스터와 맞먹는 힘을 얻었다. 그가 기뻐해 준다면 그녀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루티아에서의 호칭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테일드가 실종된 후 그녀는 그를 찾아 론타몬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의 흔적은 없었다. 가족의 죽음만큼이나 테일드의 실종은 그녀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우연인지 아니면 무의식이 그녀를 이끌었는지, 그녀는 어느 순간 아치볼드 백작의 저택 앞에 서 있었다. 타냐는 설마 싶어 그곳을 방문했다. "루티아의 마스터께서 나를 찾아오시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려." 나이 든 아치블드는 얼굴의 주름이 조금 는 것 외에는 거의 변한게 없었다. 타냐보다 더 어린 아내는 목과 팔뚝에 난 멍 자국을 가리는 긴 옷을 입고 나와 내키지 않는 인사를 했고, 형식적으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타냐는 아치볼드의 아내에게 물었다. "레이디 아치볼드. 말해둘 게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집을 나가 당신이 스스로 살 길을 찾으십시오. 친정으로 돌아가든가, 혼자 돈을 벌든가.“ “우리 집은 오래 전에 내 남편이 없애버렸어요." “그럼 당신도 절벽에서 누군가 만나길 기대해야지. 그러니 나가시오. 당장!" 아치볼드는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의 아내는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조심스레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허허, 두 여자 사이에 남자가 알아선 안 되는 뭔가가 있소?" 아치볼드가 괜스레 말을 꺼냈다. 타냐는 여자가 나가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 집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은 여전히 남의 땅을 가로채서 채우나?" 아치볼드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집사에게 신호했고, 금방 경비들 스무 명이 식당 주위를 둘러쌌다. 그는 여유 있게 접시 위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설며 말했다. “루티아에서 무슨 일로 마법사가 찾아왔나 했더니, 왕실이 고용한 첩자였나? 아니면, 어디 보자, 내 사업에 관심이 있어서 오셨나? 이 못생긴 마녀 같으니라고." "못생긴 마녀라....... 대니얼 아치볼드.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있으니 못 알아보겠나?" 아치볼드의 손에 있던 포크가 허공에 떠서 그의 이마를 겨냥했다. 아치볼드는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경비들이 당장 창을 치켜들자, 타냐는 크게 소리했다. 순간 식당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유리창문이 모조리 바깥쪽으로 깨졌다. "지금 이 자에게 내리는 처별에는 내 이름을 걸겠다! 원한다면 루티아와 론타몬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 그러니 그 전쟁을 시작할 용기 있는 병사들은 언제든 나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 살아있는 채로 그대들 안에 있는 심장을 구경 시켜 주지." "되지도 않는 협박 따위 지껄이지 마라." 겁먹었으면서도 아치볼드는 기세 좋게 소리질렀다. "나는 론타몬의 백작이자, 론타몬 왕실을 후원하는 권력자다. 나를 건드리고 무사할 성 싶으냐?" "내가 울었던 것만큼도 울지 못할 거라면 입 닥쳐라, 아치볼드. 나는 루티아의 마스터 타냐다. 그 이름의 무게를 이겨낼 자신이 있다면 어떤 말이든 지껄여라. 나를 설득해 위험을 모면해보던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타냐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에게 그랬듯, 너에게도 '내일 아침'까지 선택할 시간을 주겠다, 백작." 타냐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이는 병사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 그리고 몇 명 낯익은 얼굴들이 있군 고귀한 장미를 꺾느라 즐거웠던 그 더러운 얼굴은 한 명도 잊지 않았다." 병사들 중 일부가 들고 있는 창이 거꾸로 그들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가 ‘어' 하는 짧은 외마디를 내지르는 순간, 창은 입을 뚫고 뒤통수로 빠져 나와 벽에 박혔다. 다섯 구의 시체가 고급스러운 수채와 옆에 장식처럼 걸렸다. "미친 욕정을 불태웠던 대가치고 너무 심하다 생각하나들?" 아치볼드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다. 타냐는 양손을 모두 펼쳤다. 아직 살아있는 병사들의 손에 있는 창이 모조리 떠올라 아치볼드의 주위를 감쌌다. 뽀족한 금속의 끝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가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비명을 질렸다. 스무 자루 창이 아치볼드의 몸에서 손가락 한 마디만 남긴 곳에서 멈췄다. 그는 묶이지도 않았는데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리 소리질러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병사들은 달아났다. 타냐는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아 그가 스스로 창에 머리를 들이받는 이튿날 아침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이군요, 마스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 타냐는 일어나 그 방을 나갔고, 그녀가 나간 후 시작된 불길은 순식간에 저택 전체를 감쌌다. '복수가 아니라, 루티아의 마스터가 내리는 처형에 불과했네요. 이것이 마스터께서 말씀하신 이기적 욕심이 정당성을 갖는 방법이었습니까?‘ "저는 루터아의 마스터 입니다. " 타냐는 말했다. "마스터는 루티아에 대한 판단에서 항상 독립적이었죠. 루티아를 구할 임무는 저에게 있어 첫번째입니다. 그러니 그 곳을 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겠습니다." 테일드의 편지 말미에 타냐의 감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만약 나에게 루티아와 아이린, 둘 중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아이린을 선택할 거야.' 타냐는, 이런 닭살 돋는 말을 잘도 문장으로 펼쳐놨군요, 라며 답장을 썼었다. "저는 카셀과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이 위기는 루티아 뿐 아니라 아란티아, 크게 봐서 대륙 전체의 위기와 연관되어 있으니 그 힘을 이겨내려면 당연히 드래곤을 부르는 게 우선이겠죠."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시나비아는 마치 그 판단의 근거를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기더가 우리를 이끈다면, 레미프들이 갈 곳은 루티아가 될 겁니다. " 시나비아는 판커틴과 함께 퍼거스나이의 군대를 앞세워 라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이는 인간 셋과 레미프 하나였다. "자, 그럼......네가 안다는 그 드래곤은 어디 있지, 라이?" 카셀이 물었다. "동쪽." 라이가 대답했다. "거 찾아가기 쉬운 방향 지시구만 " 로핀이 앞장섰다. 라이가 뒤를 따랐고, 타냐와 카셀이 나란히 따라갔다. 카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타냐." 카셀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기적 선택이었다. 타냐는 아직 카셀과의 모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루티아를 구할 수 있는 더 큰길이라는 것은 변명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마스터, 이건 당신이 가르쳐준 방식이에요. 괜찮죠?' 안 괜찮다고 그가 대답해도 상관없었다. 이건 그녀의 선택이있다. (9) 하 푸 중간에 두 시간 정도 교대로 잠 잔 것 빼고는, 일행은 거의 쉬지도 많았다. 카셀은 거의 죽은 듯 잠들었다가, 다시 이동을 시작할 때는 불평 하나 없이 달렸다. 걱정된 타냐가 물었다. "괜찮아요? 화이트 게이트에서 전투가 있을 때부터 한 번도 제대로 못 쉬었잖아요." "아, 어쩐지 피곤하더라...... 괜찮아요. 농번기 떼 아버지께 끌려 다닌 것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에요. 그리고 타냐도 거의 저와 같이 움직였잖아요." 타냐가 걱정하는 건 몸의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였다. 보통 사람이 평생 걸려도 한 번 겪을까말까한 일을 요 며칠 사이에 얼마나 많이 당했는가? 그러나 일일이 그런 걸 챙겨가며 쉴 여유는 없었다. 로편도 걸음을 늦추지 많았고, 타냐도 더 말하지 않았다. 거의 새벽이 다가올 무렵, 라이는 길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야, 임마, 너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건 아냐, 어? 알고 하는 소리냐?" 로핀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땅으로 가는 길, 모른다. 그 때, 하늘에서, 봤다.“ 라이는 손가락으로 나무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에서, 찾는다. " "탁 트인 하늘은 위험...... 하지만.......“ 라이는 로핀의 판단을 기다렸다. 카셀은 피곤한 눈으로 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네요.“ 로핀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웃으며 카셀의 머리를 흐트렸다. “뭐, 쉴 시간을 갖는 셈 치지.” "곧, 돌아온다. " 라이는 로핀이 아닌 카셀에게 말하고 나무 위로 뛰어올라갔다. 거의 보이지 않게 될 만큼 높이 올라간 후에야 날개를 펼치더니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녀석, 슬슬 카셀을 따르는 거 같군.“ “그렇군요." 맞장구 쳐주길 바라며 말했던 로핀이 무안할 정도로 싱겁게 대꾸한 카셀은 나무에 등을 기대앉았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 조금 눈 좀 붙여도 될까요?“ "붙여버려. 나도 좀 쉬어야겠다.“ 로핀도 나무 뿌리 위에 앉아 가죽 주머니의 물을 들이켰다. 카셀은 금방 잠들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며칠째 밤을 새다시피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이제 한계에 부딪쳤을 겁니다. " "숲에서 내 걸음을 따라오는 것만도 용하지. 타냐는 힘들지 않냐?" “마법사니까요." "테일드는 굉장히 허약했어. 가끔 아이린이 업어주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 로핀은 그 때 일을 회상하다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럴 만도 하죠." 타냐도 웃어보려고 했으나 굳은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내지 못했다. 근육이 미소를 의식하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까지 냉정하게 변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그했다. 카셀도 그녀의 의도한 냉정함에 주의를 기울였으나, 로편은 전혀 개의치 많고 말을 이어갔다. 그는 언제나 주위 상황보다 자기감정에 솔직했다. "둘이 굉장히 잘 어울렀어. 뭘 하든 서로 의논하는 모습은 어쩔 땐 짜증날 정도였지. 어린 것이 나보다 먼저 애인 만든 것도 열 받았는데...... 허허허." “마스터께서도 아이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워낙 편지에 그 내용을 자세히 묘사해 놔서 처음 아이린을 뵈었을 때도 별로 남 같지가 않았지요." 로핀은 타냐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어둠을 이겨내려고 눈에 힘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보다니요?' "아니, 잠깐 있어 봐." 로핀은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가, 혼자 납득하며 말했다. "이제야 생각나는군. 테일드가 이런 말을 했었지. 자기에게 끝내주게 예쁜 제자가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타냐라고. 그 말에 나도 끝내주게 건방지고 귀여운 제자 하나 있다고 맞장구 쳤고.“ 타냐는 자기도 모르게 카셀을 봤다. 다행히 그는 자고 있었다. "난데없이 그런 말은 왜 하는 겁니까?“ 타냐는 일부러 험한 눈으로 했다. 그러나 역시나 로핀에게는 그런 게 의미 없었다. "아니, 그 녀석이 못난 솜씨로 그림까지 그려 보여줬으니 하는 말이야." 로핀은 남의 사생활로 수다 떠는 아줌마 같은 어조로 말했다. "아아, 그러니까 그 얼굴이 사실은 진짜가 아니다? 만났을 때부터 부조화가 느껴지는 얼굴이라서 수상쩍게 여겼는데 말이야.“ "여자 얼굴로 그 따위 말을 지껄이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로편." "홍, 그럼 얼굴을 숨긴 채로 남을 대하는 건 예의인가, 타냐? 비록 한족 팔은 없지만 눈썰미는 정확하다. 그러고 마법에 대한, 아주 사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로핀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자세에서 허리에 한 칼에 손을 가져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는 한 활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네 얼굴을 변하게 하고 있는 건 네가 늑대로 변하는 마법과 다르다. 그건 일종의 봉인이지, 그 봉인을 깼을 경우 얼마나 엄청난 마법을 쓸 수 있을지 상상하기 무서울 정도로. 난 루티아의 배신자, 그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드래곤에 맞먹는 마법을 쓰는 것을 보았다. 테일드와 같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마법이었지. 세상에 그런 마법사가 테일드 말고 또 있을 수 있다면, 그건 그 수제자가 아닌가? 말해봐라, 마스터 타냐. 왜 얼굴을 가리지?" 여전히 농담하는 말투였으나, 눈은 진지했다. "제 마법의 진짜 힘은 당신이 말했던 대로 마스터 테일드에 맞먹습니다......아마도요. 그러나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습니다. 그 힘은 제 생병을 갉아먹는 양날의 검이기 때문에, 제가 스스로 마법을 컨트롤 하기 전까지 쓰지 못하도록 마스터께서 봉인을 거셨습니다. 이 얼굴은 그 봉인의 대가이자, 증거죠." "하지만 이제 마법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제 진짜 얼굴을 보는 남자에게 커다란 '재앙‘ 이 있을 거라고 아란티아 여왕께서 예언하셨습니다. " 로핀은 다시 풀린 눈으로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폐하는 재앙을 예견하지 않아." "그 예언은 제게 있어 비슷합니다. 그러고 이 봉인은 마스터를 다시 뵐 때까지 풀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 "뭐, 그런 거라면 그런 거지." 타냐는 괜한 말을 지껄이게 된 것 같아 화가 끓었다. "그리고 저만 그 정도 힘을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마스터 테일드와 같은 힘을 쓸 수 있는 건 그 수제자뿐 아니라 그 스승도 계시니까요." "스승? 러스킨 그 노인을 말하나?" "그 분은 연세가 백 세 가까이 되셨지만, 지금도 현역에서 활동을 하는 어떤 마법사보다.......“ 타냐는 말을 멈추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그 정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세 사람 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루티아의 배신자라.......” 로핀이 말했다. “...... 함부로 추측하지 마십시오. 그랜드 마스터께서 루티아를 배신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유를 찾기에는 조금 늦었지. ‘왜’를 찾는 건 ‘누구’를 찾은 후에 할 일이다.“ 로핀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을 끝내고 무사히 루티아로 돌아가거든 러스킨을 족쳐봐. 그리고 앞뒤 가리지 말고 대뜸 '왜'를 물어라. 의외로 쉽게 핵심을 찌를 수 있을 거다. " 타냐는 여전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혹시나 싶었다. "아아, 제자 얘기하다 보니 내 제자 녀석이 보고 싶어지는군. 잘 있으려나?" "따로 키워들 제자가 있습니까?" "아, 있지. 내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하얀 늑대가 되어 있어야 했고, 내 계획은 언제나 내가 생각해도 얄미울 정도로 잘 들어맞지.“ 그는 새삼스레 자고 있는 카셀을 보았다. 타냐는 카셀이 말한 하얀 늑대의 기사들 중의 한 이름을 떠올렸다. "아즈윈?" 그는 흐뭇해하며 말했다. "내가 하도 아즈윈 자랑을 해대니까 다른 녀석들도 제자를 키워 보겠다고 나서더군. 그래서 내가 내기를 걸었지. 누가 더 멋진 제자를 키우는지에 대해서. 물론 해보나마나 한 내기지. 내가 무조건 이겨. 난 왜 이길 게 뻔한 내기 따위를 사랑하는 친구들과 해버린 걸까? 재수없게시리, 나 같은 놈을 내가 만나면 남은 한 팔도 베어버릴 거야.“ "자신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쉐이든 울프라는 기사와 며칠을 같이 보내봤습니다만, 당신이라도 그와 싸워 이긴다고 자신 못할 겁니다. 어느 모로 보나요." "호오, 그래? 그건 누구 제자지?" "뭐, 마스터 퀘이언의 제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 "퀘이언은 제자를 잘 키우는 스타일이 아니야.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나 정도는 아니지. 아이린? 하하, 독불장군이 무슨 제자를 키운다고! 루밀 녀석도 거기서 거기고. 다들 자기 능력을 키우는 것은 잘 할지 모르지만, 사람 만드는 건 날 못 따라가. 다시 말하지만 무조건 내가 이겨. 아즈윈은 최고야. 물론 그대로 잘 성장하기만 했다면, 외모로도 따라올 수 없을 걸. 잘 키워서 내 애인 삼겠다는 계획도 전체 계획의 1퍼센트 정도 있었지만, 내가 워낙 연상 체질이라서 !" 그가 큰 소리로 웃어버리는 바람에 카셀이 화들짝 놀라 깼다. 타냐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그를 안심시켰고, 그는 다시 잠들었다. "듣자니 아즈윈이라는 기사는 게랄드와 함께 하늘 산맥에서 실종되있다고 하더군요." "게랄드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즈윈이라면 괜찮다. 그 애는 어떤 위기에서도 헤쳐 나갈능력이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정도 훈련은 시켜놨어." "그 말은 카셀에게 해주십시오. 걱정이 지나쳐 아마 지금 자면서도 두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 "어, 알아 카모르트에서 있었던 일을 들을 때 짐작했다.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 했지만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해서 아즈윈을 꼬셨는지 알겠더라." 타냐도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알 것 같습니다. " 날이 점점 밝아졌고, 멀러서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다가왔다. "알아두시게, 마스터 타냐. 정말 멋진 남자는 자기가 멋지다는걸 모른다. 그걸 인정해주는 여자를 만났을 매 그 멋진 남자가 넘어가는 거야." 로핀이 말했다. 호응해주고 싶지 않은 수다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이 라이가 나무에서 내려와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찾았다. 동남쪽, 빠른 걸음으로 반나절." "그래 ?" 대답해 놓고서 로편은 일어나지 않았고, 타냐도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안 가나?" "아니, 잠깐. 너도 좀 쉬어라 날개 안아프니? 죽어라고 날라갔다 온 것 같고만 " 로편은 손을 저으며 물었다. 라이는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늘어뜨렸다. 인간으로 치자면 어깨를 으쓱한 것으로 보였다. "자, 그럼 우리 다 같이 캡틴께서 휴식을 마친 후에 움직이도록 하자." 결국 라이도 볼록 튀어나온 나무뿌리 위에 앉았고, 후에 있을 격전을 대비한 휴식을 취했다. 로핀의 판단은 옳았다. 쉴 시간은 그때 한 번 뿐이었다.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라이가 제일 앞에 섰다. 다들 당연한 듯 행동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레미프들이 너무 무서운 나머지 감옥에 가둬놓고도 쇠사슬을 칭칭 감아둔 흥악범이 일행에 합류한 것도 모자라, 이제 그가 스스로 앞에 나서서 모두를 안내하다니! 피곤한 카셀도 의식하지 못 했고, 주위를 살피는 로핀도 의식하지 못 했다. 아마 라이 본인도 자기가 앞에 나서고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 지 못할 것이다. "여 긴 하푸군." 로핀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나무하나를 짚었다. "하푸?" 카셀이 물었다. "경계선이라는 의미지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산을 가르는 넓은 계곡이 하나 나온다. 계곡? 한 1년 전에 본 기억으로는 계곡이라기보다 땅사이를 가로지르는 틈이었지 바닥이 깊은 틈새....... 그걸 이르는 말이 하푸인데, 대충 여기서부터 동쪽이 프보에 족 영역이고, 서쪽은 즈비 족, 그리고 북쪽은 하늘 산맥이다. 과연 중립을 지키는 하이로드가 사는 곳으로 적당한 장소긴 하군 라이, 얼마나 남았나?" 로핀이 물었다. "더." 라이는 구체적인 거리를 말하지 않았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긴 길을 밟는 발소리만 정적 속에 이어졌다. 로핀은 항상 그렇듯 거의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라이, 하나 묻자. 일단 네 말 듣고 오긴 쳤지만, ‘사’의 칭호를 가진 드래곤은 다른 드래곤처럼 함부로 입구를 공개하지 않는다. 넌 어떻게 알아냈나?" "내가 아니다. 드래곤, 그가, 날 찾았다. " 그는 같은 말 또 하게 하지 말라고 고대어로 중얼거렀다. "어떻게?" "날고, 있었다. 그러니까.......“ [불편하면 고대어로 말하라. 카셀에게는 내가 전달해 주겠다.] 로핀이 말했다. [내가 날고 있을 때 드래곤이 내 앞에 나타나 말했다. 어떻게 날 수 있느냐고? 모른다고 했더니,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 근처에 산다고 했다.] [그럼 정확한 입구는 모르나?] [산 꼭대기에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위치는 모른다.] [아, 아, 아! 그러니까 우리는 산을 찾은 다음 그 산 꼭대기에 올라 어디에 있는 지 모를 입구만 찾으면 된다는 건가? 간단한 일이군.] 로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너 어떻게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지?] [우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와 몇 년 동안 같이 다녔다.] [하늘 산맥을?] [아니. 아크랜드를 다녀왔다. 그는 나오 헤어진 후 돌아온다고 약속을 했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고통 속에서 방향도 잡을 수 없는 아크랜드를 떠돌아다니다가 겨우 하늘 산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좋은 우그였으나, 우그는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우그를 믿지 않는다.] 카셀은 고대어 사이에서 자기의 이름이 나오자. 통역해 달라는 뜻으로 타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타냐도 해석하지 않았다. 앞서 가는 로핀은 뒤돌아보며 괜히 웃어보였다. [그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그 우그와 닮았다.] [너희들이 보기에 우그는 다 똑같아 보이지 않나?] [그렇긴 하군.] [그런데 그게 몇 년 전이었나?] [오십년쯤 전.] [넌 몇 살이냐?] [일흔 다섯.] [유후, 이거 노인 공경을 해야겠군.] 로핀은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다가 주먹을 쥐며 멈췄다. [어쨌든 네 말이 맞긴 맞나 보다. 아까부터 프보에 족의 숨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군.] 로핀은 즉시 레미프의 언어에서 인간의 언어로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게 누구신가? 카구아께서 납시셨군." 어둠 속에서 마치 동상처럼 웅크러고 있는 검은 털의 베논이 머리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검은 로브의 기사도 고개를 들었다. 그 기사는 뒤에 숨기고 있던 창을 앞으로 세웠다. 어찌나 완벽하게 자기 몸을 위장하고 있었는지, 카셀은 물론이고 타냐도 뒤늦게 눈치 채고 놀랐다. "또 한 번 인간과 레미프가 동행하는 이상한 무리군. 이 곳에 볼일이라도 있는가?" 투구 안에서 울리는 굵직한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이럴 때야말로 로핀의 느긋한 성격은 꽤 믿음직스러웠다. "내가 할 질문을 먼저 해버리네, 저 개놈의 자식. 먼저 대답 안하냐?" 카셀은 타냐 옆에 꼭 붙어서 중얼거렸다. "아즈윈의 성격이 어디에서 나왔나 했더니 저 사람 때문이었군요" 타냐는 이 와중에도 피식 웃게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로핀의 제자가 아즈윈이라는 거 들었습니까?" "잠결에 들었어요." "그 전의 말도?" "들어선 안 될 말이었나요?" 타냐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오. 나중에 얘기하죠." 로핀은 한 팔을 흐느적거리며 카구아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논틸이 죽었더군. 네 짓이냐?" “다른 쪽 팀이 한 일이군. 내 임무는 그보다 더 크다. " "뭐냐, 그건?" “위치를 보고 말하라. 너희들은 포위당했다. 내가 질문한다. 네가 대답하라. 살려줄 수도 있다. " “어어, 그러세요? 그런다고 내가 더 불리해 보이십니까, 이 시껌둥이 새끼야? 내가 언제고 드래곤 사냥하는 놈들 중 하나만 잡히면 조져 놓으려고 했는데 참 잘 걸렸다. 억울하면 이름이라도 불러봐라. 네 패거리들 하나씩 죽이면서 목록 작성해 보게!" 그 검은 기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 이름은 레드워드다 그리고 우리는 아홉이다. 어디 명단 작성해 봐라." “내 이름은 로핀이다. 그리고 우리는 넷이다. 하지만 넌 명단 작성 할 꿈도 꾸지 마라, 카구아!" 로핀이 칼을 뽑았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 레드워드는 들고 있는 창으로 목덜미를 토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왜 우릴 카구아라고 부르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하지만 카구아는 따로 있어. 우린 그냥 익셀런 기사단이야," “......그러냐? 그럼 나도 그냥 하얀 늑대다 " "하안 늑대?" 서로 주고받은 말에 놀랐으나, 그 이상 따지고 들지 않았다. 로핀이 먼저 레드워드를 향해 달려나갔고, 레드워드도 베논을 몰아 로핀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두 자루 무기가 부딪쳤고, 붉은 빛이 뻗어나갔다. 놀란 베논이 앞발을 들면서, 위에 탄 레드워드는 몸의 균형을 잡느라 애를 썼다. 두 사람이 맞붙는 걸 신호로 사방에서 함성인 들렸다. 어둠 속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검은 얼굴이 숲을 가득 메워 달려들었다. 타나는 구슬을 들었다. 푸른 기운이 나무 사이를 수증기처럼 침투하며 어두운 숲을 채웠다. 놀란 프보에 족의 전사들이 우물쭈물 할 때 타냐는 한 쪽 손을 펼쳤다. 나무 몇 그루가 통째로 부러지며 손이 가리키는 방향에 있던 레미프들이 모조리 나가떨어졌다. 흙더미가 퍼 올라가며 근처에 있던 레미프들도 거기에 깔렸다. 그녀는 손바닥의 방향을 처음에는 북쪽, 그 다음에는 서쪽, 그 다음에는 남쪽을 가리키며 격전을 벌리고 있는 두 기사들을 제외한 전 방향에 힘을 쏟아냈다. 그 때 남쪽에 뿌린 마법이 튕겨서 되돌아왔다. 바닥에 쌓인 두툼한 낙엽의 층이 벗겨지며 날아온 그 힘을, 타냐는 한 손으로 막아냈다. 어깨 관절이 어긋나는 충격에 이를 악 물고, 그녀는 바로 다른 마법을 손앞에 만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르게 더 강한 힘이 그녀의 몸을 감샀다. 타냐는 마법 시전을 포기하고, 그 힘으로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허공으로 튕겨 올라가 열 걸음이나 멀리 떨어져 나갔다. 레미프들에게도 당연히 마법사가 있었다. 전투에 나설 수 있을 만한 레미프 마법사라면, 루티아 마스터와 같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타냐라는 장벽이 사라지니, 그 다음 마법은 당연히 카셀과 라이로 향했다. 그러나 라이는 들고 있는 칼을 던졌고,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레미프 마법사는 어깨에 칼이 박혀 쓰러졌다. 타냐의 마법에 머뭇거렸던 레미프들은 그녀가 넘어진 틈을 타 달려왔다. 라이가 맨손으로 싸우려 할 때 카셀이 칼을 뽑아 라이에게 던겼다. "이걸로 싸워." 카셀의 손에서는 큰 칼이던 보검이 그의 손에서는 작은칼로 보였다. 그렇다고 그 위력이 반감되는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타냐의 옆으로 날개를 펼치고 미끄러져 간 라이는 타냐에게 집중적으로 달려드는 레미프들을 막아냈다. 카셀도 달려와 넘어진 타냐를 부축했다. “일어 설 수 있겠어요?" "문제 없습니다. " 타냐는 다시 일어나 라이의 등 쪽에 섰다. "라이, 그 쪽을 맡아요." 타냐는 메고 있던 배낭을 던져버리고, 구슬을 두 손에 쥐었다. 그 빛의 힘이 점점 강력해졌고, 어쩐 일인지 레미프들은 그 빛의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 했다. 특별히 접근을 못하게 막는 마법은 아니었다. 타냐는 잠깐 공격이 뜸한 틈을 타 마법으로 얻어맞은 가슴과 배를 쓰다듬었다. 당장 보이는 외상은 없었으나, 후유증은 나중에 찾아 올 것이다. 지금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 때 연속적으로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카셀은 놀란 눈으로 입을 떼지 못 하고 있었고, 타냐도 비슷한 얼굴로 놀랐다. 짧은 시간이었건만, 라이의 앞에 죽어 넘어간 레미프들은 '쌓여있다'고 할 정도로 많았다. 적들은 어느 정도는 죽을 각오를 하고 밀고 내려온 형상이었다. 급경사를 이용해 숫자로 밀어붙이면 제일 앞서 있는 몇 명이 죽더라도, 뒤따라오는 엄청난 인원을 막을 만한 병력은 없다고, 그들은 가정했을 것이다. 틀리지 않다. 이 쪽은 세명이 고작이었고, 그 중 한 명은 병력이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꺼번에 적을 밀어낼 수 있는 타냐의 마법만 경계하던 프보에들이었고, 타냐가 마법을 못 쓰는 틈을 타 밀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는 라이가 있었다. 라이는 이 숫자의 파도를 칼질 몇 번으로 막아냈고, 카셀에게 한다는 소리가, "이 잘 지나치게 좋다. 싫다. " 였다. 그러고 그 칼을 카셀에게 도로 내주더니, 바닥에 떨어진 프보에들의 칼 두 자루를 양손에 들었다. 타냐는, 아직도 이 자를 울프 기사단에 넣을 생각이 드느냐고, 카셀에게 묻고 싶었다. 로핀 역시 싸움이 길어졌다. 레드워드는 결국 힘이 달려 뒤로 물러났고 로핀은 베논을 타고 있는 상대를 구태여 쫓지 않았다. "이거 신기한 일이군. 얼마 전에도 나와 겨뤄 밀리지 않는 인간 놈이 나타나더니......, 하얀 늑대란 게 뭐냐?" “네놈이 그 이름을 어찌 아느냐?" “그 년도 자기가 하얀 늑대라고 했으니까," "년?“ 로핀이 외마디처럼 내뱉었다. 그러나 레드워드는 괜한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뿔 나팔을 길게 불었다. “혹시나 해서 데려왔더니, 쓸모가 있군." 뿔 나팔 소리에 반응한 뭔가가 바닥을 쿵 울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제 나무를 흔들고 땅을 흔들었다. 구아닐이 걸을 때와 비슷한 소리였다. "제기랄, ‘진짜 카구아' 냐?" 레드워드는 여유 있게 투구까지 벗었다. 이마를 가린 체인 메일 밑으로 붉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거 캡틴한데 나중에 사과해야겠군 '외팔의 로핀‘을 카구아가 죽이게 내버려두었으니.” 로핀은 칼등으로 머리를 톡톡 치며 됫걸음질 쳤다. “그럼 그렇지. 네 놈들 새끼 캡틴이라면 당연히 '그 놈' 일 줄 알았어!" “카구아로부터 살아남는다면 부디 다시 캡틴 빅터보다 나를 상대하는 게 너로서는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높지 않나?” “확률 같은 소리한다. 빅터한데 전해라. 남은 한 팔로 오줌이라도 누고 싶으면 날 안 만나게 도길 빌라고.” 로핀은 카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후퇴한다! 라이, 길을 뚫어라.” 레드워드는 쫓아오지 않았고, 프보에들도 굳이 그들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거대한 발소리는 급격히 빨라졌고, 땅이 울리는 정도도 커졌다. "뭡니까?" "카구아다. " "카구아는 저 레드워드라는 기사? "나도 속았다. " 로펀은 뛰면서 간단히 설명했다. "저 놈이 말하지 않았나? 카구아란 건 원래 카-구아닐의 부하였다. 당연히 드래곤이지." 뒤에서 따라오는 거대한 발소리를 돌아볼 자신이 없는 카셀은 앞만 보고 뛰었으나, 타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돌아보았다. 구아닐 만큼 거대한 검은 머리가 한껏 낮은 자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은 상체를 세우고 튼튼한 뒷다리로만 서서 달려오는 날개 없는 드래곤이 었다. '진짜‘ 카구아는 나무에 부딪히면 나무를 꺾어버리고 바위에 발이 걸리면 바위를 걷어차며 달려왔다. 로핀은 나무가 우거진 방향으로 달리려는 라이에게 방향을 지시했다. "왼쪽으로 길을 꺾어. 녀석이 내리막길을 달리게 해야 해.“ 카셀이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타냐는 카셀보다 걸음을 늦추어 뒤에 대고 불덩어리를 날렸다. 사람 머리만한 거대한 불덩어리였으나, 카구아의 얼굴에 맞고 터지는 모양새는 고작 해야 새총에 맞은 정도로 보였다. 타냐는 계속 달리며 다시 카구아의 무릎 쪽을 겨냥했다. 그들이 달리며 일으키는 먼지를 들고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힘이 카구아의 무릎을 두들겼으나 통나무만큼이나 굵은 다리를 크게 흔들지 못 했다. 마지막으로 타냐는 달리고 있는 바닥에 대고 마법을 썼다. 바닥이 패였고, 카구아는 거기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일어나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카셀은 고통스럽게 숨을 토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로핀도 그걸 아는지 혼자만 앞서가지 못 하고 안타깝게 말했다. "차라리 구아닐 녀석이 나타났다면 칼을 쓸 수나 있으련만," 구아닐을 멈춰 세운 로핀도, 레미프의 군대를 막은 라이도, 저 날개 없는 드래곤 앞에서는 어찌지 못했다. 더 강한 마법이 필요했다. 레미프의 마법사도 제압하지 못할 마법으로 저 거대한 괴물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봉인을 풀어 두었어야 했을까?' 타냐는 모험을 걸기로 하고, 달리면서 늑대로 변했다. 변하는 순간 속도가 처졌고, 카구아의 거대한 입이 늑대의 머리를 물려고 달려들었다. 타냐는 바닥에 몸이 닿을 정도로 납작하게 기듯이 입을 피했다. 머리 위에서 딱 하고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일단 늑대로 변한 후에는 쫓아오는 카구아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녀는 몸을 날려 나무를 밟고 카셀의 옆에 바로 붙었다. "제가 신호하면 점프 하세요." 타냐는 미리 일러두고 카셀의 바로 등 뒤로 붙었다. 카셀이 달리는 속도에 맞추다 보니 다시 카구아의 입이 다가왔다. 카구아가 어깨로 부러뜨린 나무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고, 불처럼 뜨거운 호흡이 등에 닿았다. "지금!" 달리면서 점프하기 카셀의 체력으로 무리였다. 카셀은 겨우 발이 뗄 정도만 몸을 띄웠다. 그러나 체중을 위로 향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카셀의 다리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강제로 그를 들어올렸다. 카셀은 몸이 뒤로 밀려나며 타냐의 귀와 털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손아귀 힘이 모자라 그의 몸은 등에서 미끄러져, 곧장 카구아 쪽으로 떨어졌다. 타냐는 앞발에 힘을 주며 몸을 세웠고, 뒷발이 주루룩 뒤로 밀려나 먼지를 일으켰다. 카구아가 엎어진 카셀을 향해 입을 벌렸고, 타냐는 그 입을 향해 뛰어들었다. 넘어진 카셀의 배낭을 물고 몸을 날렸으나, 약간 늦어 카구아의 이빨이 등을 스쳤다. 눈이 찔끔할 만한 통증에 타냐는 배낭을 문 이발에 힘을 주었다. 돌아볼 시간은 없었으나, 계속 카셀을 물고 달릴 수도 없어 그를 내려놓았다. "다시 타요." 카셀은 비틀거렸다가 타냐의 목덜미의 털을 쥐고 올라탔다. 그의 몸이 등의 상처에 닿자, 몹시 아팠다. 로핀이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카구아는 로핀 쪽이 아니라 타냐 쪽으로 달려왔다. 땅이 울리며 카구아가 부러뜨리는 나무끼리 서로 가지를 비비는 소리가 가까워쳤다. 타냐는 다시 발렸으나 아까처럼 빠르지 않았다. 입에서 피 맛이 느껴줬다. ‘카셀을 물어버린 건가? 아닐 거야. 내가 흐르는 피이길.' 힘들었다. 카셀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눈이 잘 안 떠졌고, 등이 축축해졌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목의 하얀 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거 많이 다친건가?' 카구아는 더욱 가까워졌다. 갑자기 멀지 않은 것에서 로핀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귀 옆에서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쪽으로 가지 마!" 그러나 바로 뒤에 카구아가 따라 붙어 있으니 멈출 수도 없었다. 순간 그녀의 몸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거리감을 잡지 못한 타냐는 뒤에서 카구아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밑으로 쑤욱 꺼지자 바로 뒤에서 또 한 번 이빨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떨어진 몸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몸이 제어되지도 않았다. 시야에 보이는 풍경 안에 나무도 없었다. 스무 걸음쯤 되는 공간은 허공이었고, 그 너머에서 비로소 숲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타냐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그 곳은 시커멓게 물들어도 보이지 않았다. 절벽이었다. 세 영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인 하푸란 바로 이 곳이었다. 타냐와 카셀은 거리를 잴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늑대의 털이 위로 흩날렸고, 카셀의 몸도 등에서 떨어져 위로 올라갔다. 모든 젓이 정지된 것처럼 천천히 떠올랐다. 무섭게 스쳐 가는 바람 소리가 귀를 울렸다. 타냐의 몸은 늑대에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며 카셀의 손을 붙잡았다. 떨어지는 현기증으로 기절한 카셀의 손에서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타냐의 머리 위쪽으로 올라간 구슬의 푸른빛이 절벽의 가장자리를 비췄다. 그녀는 절벽에서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치지 않기를 바라며 카셀을 끌어당겼다. '늦은 진 아닐까?' 타냐는 정신을 집중했다. '아니,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점은 아직 늦은 게 아니라고 했던가?' 구슬의 빛이 밝아지며 두 사람의 몸이 점점 느려졌다. 그러나 속도는 완전히 늦춰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다하여도 두 사람이나 되는 무게를 버틸 정도는 못되었다. '봉인 같은 거 풀어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정신의 힘은 떨어지는 무게를 줄이는 데에, 육체의 힘은 카셀을 끌어당기는 것에 집중했다. 점점 다가온 카셀을 향해 그녀는 두 손을 내밀어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속도를 늦추는 게 너무 늦었다면, 부디 내 몸이 먼저 떨어지길 .' 그녀는 카셀을 안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대로 그녀의 등이 먼저 떨어졌다. 구슬의 불빛은 사라졌고, 암흑이 이어졌다. 떨어지는 순간 몸이 박살나지 많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추락하는 힘을 줄이는 것에 어지간히 성공하긴 했나 보다. 그러나 타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죽음이 시작된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한 침묵이 찾아왔다. 타냐는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어 가슴에 안고 있는 카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카셀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타냐?" 그가 말했다. '살아 있구나. 다행이다. ' 그 말을 들으며 타냐는 기절했다. (10) 어둠속의 두 사람 "그게 네가 선택한 외모더냐?" 테일드와 함께 처음 뵙는 아란티아의 여왕이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미소로 물었다. 성숙하지만, 그 미소의 한편에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묻어있었다. "꼭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리 되었습니다. " “안타깝구나. 나는 어여쁜 소녀 보기를 즐겨 하는데, 그걸 보지 못 하다니."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새나디엘에게 타냐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 시녀들을 보렴. 얼마나 예쁘냐, 다들? 가끔 외모로 시녀를 뽑는다고 농담을 하는데 그건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야." 테일드가 킥킥대고 웃는 걸로 봐서는 분명 농담이긴 한데, 어느 타이ald에 웃어야 할 지를몰라 그냥 어색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녀들은 울프 기사단 시험만큼이나 엄하고 어려운 데스트에 통과한 여자들만 뽑힌다고 했다. 그리고 이 성에 생활하며 성스러운 분위기를 몸에 담은 여자들은 절로 아름다움이라는 찬사가 따라붙은 것뿐이었다. "외모에 관해서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농담을 싫어합니다. " 불쾌해진 타냐가 말했다. 그러나 여왕은 의도했던 대로 불쾌하게 만들었다며 싱글벙글하는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그럼 그 봉인으로 만들어진 외모에 대한 예언을 내리노라. 너는 너의 연인이 될 사람에게 너의 진짜모습을 스스로 보이게 될 것이다" "예?" 타냐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여왕의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중첩되어 들리는 착각이 일어나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주위에 서 있는 시녀들과의 공간은 늘어나고 타냐와 새나디엘 사이의 공간은 줄어들었다. 놀라 물러나는 타냐를 눈빛으로 붙들어 놓고 새나디엘은 말했다. “또한 암흑을 상징하는 더러운 피를 뒤집어 쓴 채로, 무엇이라도 죽이는 마법을 손에 들고 너를 바라보노라. 네가 그 남자의 뜨거운 육체를 스스로 품에 끌어들이면, 너는 결코 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리라."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새나디엘은 음흉하다 못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얼떨떨해 하는 타냐 대신 테일드가 말했다. "우와, 그런 구체적 인 예언을 하시다니, 드물기도 하셔라 " 새나디엘의 고른 눈빛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네 이놈, 테일드. 내가 일부러 타냐를 위한 말을 위해 네 시간을 차단했거늘, 너는 고새를 못 참고 끼어드는 게냐? 쯧쯧,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라는 녀석이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아니, 그럼 사랑하는 내 제자의 연인을 예언한다는 데 가만히 있습니까? 예언을 하질 마시던가." "하하, 정말 좋아하는 여자한데는 한 마디도 못 하면서 나한테는 대꾸도 잘 해." 새나디엘은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타냐는 두 사람의 유쾌한 대화에 도저히 합류하지 못 하고 소리 질렀다. “만약 그 따위 끔찍한 남자가 앞에 나타난다면 제가 먼저 불에 태워 버릴 겁니다. " “그럴 수 있을까?" "있습니다 " "어디 해보렴.“ 가늘게 뜬 새나디엘의 눈을 보고 있자니, 이건 예언이 아니라 저주 같았다. 타냐는 눈을 뜨자마자 우선 구슬이 불빛을 내려 했다. 그리나 구슬은 그녀의 가슴에 없었고,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보니 옷도 벗겨져 있었다 어설프게 감긴 붕대가 몸 대신 가슴을 감고 있었다. 붕대를 따라 등을 만졌다가 타냐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어둠 속에서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그녀는 고통을 삼켰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 물에서 손을 씻는 찰방찰방 하는 소리도 났지만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불빛조차 없었다. "카셀?" 타냐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렸다. "거기 계세요. 제가 가죠." 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다시 찰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어이쿠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풍덩 하는 물소리가 났다. 곧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그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타냐, 소리 좀 내주시겠어요?" 부르르 몸을 떠는 카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요." 타냐가 말했다. 카셀은 그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방금.......“ "아, 개울가에서 손수건을 빨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졌어요. 도통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아서......“ "내 구슬은 어디 있죠?" "거기 누워있던 곳 근처를 더듬어 보세요. 옷과 함께 잘 뒀어요." 손을 뻗어보니 익숙한 감촉이 닿았다. 그녀는 손을 대어 빛을 냈다. 머리까지 흠뻑 젖은 카셀의 얼굴이 보였다. "아, 빛은 내지 말아요. 근처에 카구아가 있어요." 카셀이 얼른 말했다. 타냐는 불빛을 꺼뜨리고 속삭였다. "그게 따라왔습니까?" "예 ." 옷이나 머리의 물을 짜내는지, 바닥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떨어지는 순간은 기억하지만, 그 다음에는 저도 그만 기절해 버렸어요.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도로 깨어나보니 타냐 위에 제가 엎어져 있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위쪽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더군요. 지진이 일어난 듯한....... 급한 김에 타냐를 들어서 이동을 했는데, 타냐의 등이 피로 범벅이었어요. 우선 아무 곳으로나 달려가다가 벽을 만났고, 계속 벽을 짚으며 걸어가니 돌아들어가는 길이 나왔어요. 거기가 여깁니다. 우리가 떨어진 자리로 카구아가 내려온 소리를 듣고, 저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숨어 있었죠. 두개의 횃불을 쌍으로 켜놓은 것 같은 녀석의 눈동자가 여기저기 살피다가 반대쪽으로 이동하더군요. 아직도 근처를 배회하고 있어요. “녀석은 앞이 보이는 걸까요?" "진짜 드래곤에게 이런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날개도 없는 괴물을 드래곤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타냐는 구슬에 댔던 자신의 눈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기운이 눈동자를 감쌌고, 주위 사물이 파랗 보였다. 드래곤의 마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타냐도 그 정도는 가능했다. 감각으로만 더듬거리며 자신의 옷을 쥐어짜는 카셀의 모습이 보였다. 젖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뻗어있는 꼴이 우스웠다. 물론 그녀의 꼴도 만만치 않았다. 제대로 매듭도 갖추지 못한 붕대는 타냐가 몸을 움직이자, 풀어져서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붕대는 어디에서 났어요?" 타냐는 다시 붕대를 되감으며 물었다. "어제 죽은 레미프들의 배낭을 서로 나눠 담을 때 붕대와 약이든 가방이 저한데 왔어요. 기억나요? 운이 좋은 거지만, 레미프 식으로 말하면 '기더가 이끌었다. '고 해야겠죠." 카셀은 웃다가 헛기침을 했다. "붕대를 감을 때도 어차피 보이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안 건드리기 위해 애를 썼으니, 의심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런 것 같군요. 안 건드리려고 애쓰다가 매듭도 제대로 못 묶은 걸 보니. 이럴 때는 주물럭거리는 한이 있어도 제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 타냐는 붕대를 다시 감고 옷을 입으려다 포기했다. 카셀의 말마따나 피로 범벅이 된 옷을, 다시 몸에 걸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절벽 아래는 꽤 따뜻했다. 굳이 옷을 입지 않아도 버틸 만했다. 오히려 조금 더운 족에 가까웠다. "카구아가 근처에 있다니 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움직이죠." "움직일 수 있겠어요?"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타냐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손을 주세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타냐는 카셀이 더듬더듬 내민 손을 꽉 잡 걸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타냐는 한 걸음 디딜 매마다 등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 끌어 모은 마법의 거의 전부를 등에 집중시켰지만, 그런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결국 타냐는 십 분도 걷지 못하고 멈췄다. 카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안되겠어요. 조금 더 쉬었다 가죠."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로핀이 구하러 올 겁니다. " 라이의 날개라면 로핀을 껴안고서 여길 내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식으로 여길 내려오면 먼저 내려온 카구아와 길이 겹친다. 아마 다른 방법을 찾겠지. 그러나 포기하지는 많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기다리는 계 더 현명한 처사였다. 하지만 마법사의 본능이 계속 걸음을 이끌었다. "그 카구아에게 지혜라는 것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같은 자리에만 있는 건 좋지 않아요. 그리고.......“ 타냐는 확인이라도 하듯 주먹을 쥐었다 졌다. "제 힘만 회복한다면, 카구아를 꺾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 "드, 드래곤을요?" "카구아는 드래곤이 아닙니다. 날개도 없었고, 크기도 구아닐보다 작았죠. 놈은 드래곤을 닮은 괴물입니다. 드래곤과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로핀도 싸우고자 마음먹었다면 녀석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그는 후퇴했잖아요." "그 칼을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검에 대해서 아는 지식은 부족하지만, 그 칼은 한 번 쓰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사라지는 마법의 검. 구아닐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칼을 빠른 괴물에게 써버릴 수는 없었겠죠." "그렇군요. 그럼 어쩌죠?" "업어주십시오." 타냐는 고통을 인내하느라 입에 고인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는 마법 회복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로핀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겠지만, 지금은 우리 둘만으로 싸워야 합니다. “ "정말 카구아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제 몸에 걸려 있는 봉인을 풀 겁니다. 당신에게는 피해가 없을 거예요." "피해라니요?" 예언을 확대 해석할 필요도 없고, 예언에 신경을 쓸 때도 아니었다. 그러나 괜히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어 카셀에게 그런 예언의 짐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그냥 절 도와주세요.......“ "예 ." 타냐는 카셀이 내민 등에 올라탔다. 상처가 벌어져 뼈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통증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됐나요?" "제가 말하는 쪽으로 가십시오." 타냐는 카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방향을 지시했고, 카셀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시간이 흐르며 카셀도 점점 힘들어했다. 타냐는 그에게 조금 쉬어갈 것을 제안하려 했으나,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저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계속 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 "너무 피로를 남기면 그 다음 이동이 오히려 힘듭니다. 어느 정도 힘들어지면 즉시 말씀 하십시오." 카셀은 그녀를 고쳐 업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항상 당신에게 업혀 다니다가 처음으로 당신을 업어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생각 하시나요?" "왜요?" “당신은 이상한 남자에요." "그런 말 많이 들었죠. 특히 여자들한테." "제가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닐 테지만,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들었는지 궁금하군요." "화창해서 뛰쳐나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날씨에 나무 그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거나, 검술 훈련에는 제일 열심인 주제에 제일 못 싸운다거나, 또래에게는 찍 소리도 못 하면서 어른들하고는 잘 싸운다거나....... 아아, 쟈넷이 또 뭐라고 그랬더라?" "쟈넷이라는 여자를 좋아했나 보군요." “예. 무척 예뻐서 마을 총각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어지간히 거기에 휩쓸린 게 아닌가도 싶군요. 남자란 게 그렇죠, 뭐." 타냐는 픽 웃었다. "아닌 줄 알았더니 어떤 의미에서는 제가 생각한 이상한 남자와 같은 뜻으로 그 쟈넷이라는 여자가 당신을 놀렸군요." "아하, 타냐도 저를 별 거 아닌 남자로 보십니까?" "흐음, 실망인가요?" "뭐 별로요. 하도 많이 그런 말을 듣다 보니 이제 진심이 담겨있지 않는 놀림도 구별해 낼 줄 알게 되었지요. 역으로 생각하면 타냐는 저를 별 거 있는 남자로 보고 있다는 뜻이죠.“ "자신감 넘치는군요." "이런 자신감도 없으면 내다 팔아도 안 사가요. 음, 원래는 없던 자신감이기도 했으니까 그 사이 많은 정신적 성속을 이뤘다고 나중에 아버지한데 개겨도 되긴 하겠군요.“ "카셀이 말하는 아버지 얘긴 참 재미있습니다.“ "뭐, 자식새끼 한 개 낳아 왔더니 할 줄 아는 건 이기지도 못할 말싸움으로 시비 거는 것뿐이니, 어머니 봐서 버리지는 못 하겠고 나중에 촌장이나 해먹으라고 하시던 분이긴 하죠. 저를 전쟁터로 몰아낸 장본인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이상한 말만 안 했어도 저는 전쟁터로 안 나갔고, 지금쯤.......“ "지금쯤?" “......농사짓고 있겠죠. 의도하지 않은 출세니 아버지께 굳이 감사 안 해도 되겠죠?"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별로 기억에 없습니다. 제 가장 첫 번째 기억이 어머니이긴 하지만, 그게 도무지 생각이 안 나요. 훗날 제가 첫눈에 반하는 상대를 만나면 그게 아마 어머니를 닮았을 거라고 아버지께서 그러셨죠. 근데 따지고 보니 그런 식으로 여자를 만나면 결국에는 엄마에게 과잉보호 당해 엄마랑 똑같은 여자 찾아다니는 어리광쟁이랑 다를 바가 없잖겠습니까?" "짧은 경험으로나마 대륙을 돌아다니며 봤던 대부분의 남자들은 항상 여자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더군요. 엄마 또는 하녀." "우와, 과격하네요?" "엄마처럼 해줄 거 다 해주고, 하녀처럼 순종적인 여자. 이해는 하지만 당한 일이 있다 보니, 그런 남자들의 욕구를 볼 때마다 남자에 대한 혐오감이 올라오곤 하죠." 카셀의 등에 업혀서까지 언니의 과거가 떠올랐다. "저는 그 쪽에 해당되는 남자입니까?" "적어도 당신은 자신이 할 일을 자신이 하며, 여자를 음흉한 눈빛으로 보지 않는 부류니까요." "속단하지 마세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 등에 닿는 당신 가슴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서 힘든 것도 모르겠습니다." 타냐는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가려면, 여기에서 조금 쉬어야겠습니다. 왼쪽으로 가세요. 너무 틀었어요. 예, 이대로....... 여기서 멈춰요." 카셀은 타냐가 아픈지 않도록 살살 내려놓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업은 채로 말하는 건 관둬야겠는데요?" 카셀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네요." 고통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카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배에 힘을 꽉 주고 소리내지 않았다. ‘효율성 문제다. 내가 소리 내면 카셀이 걱정할 것이고, 앞으로 업고 걸을 때 더 조심하게 되지. 그럼 카셀은 더 힘이 들 것이고, 속도는 더 느려질 것이며, 카구아로부터 피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래, 효율성 문제야. 아무 소리 내지 마, 타냐.’ 그러나 악 다문 입에서 가는 신음이 새 나오고 말았다. 눈물이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봤지만, 목 깊은 곳에서 나는 소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아파.......‘ 카셀이 타냐가 있는 방향으로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가 그냥 접었다. 그는 타냐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 역시 타냐가 어떤 생각으로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 위로해봐야 서로 가슴만 아프니 그는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그 침묵이 무엇보다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시간이 흐른 후 고통은 겨우 잠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배가 안 고프니 겨우 정오쯤 되지 않을까.......싶지만, 오래 지절해 있어서 저녁일지도 모르겠군요.“ "시간이 너무 지날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제 됐어요. 갑시다.“ "괜찮겠어요?" "예. 손을 내밀어요." 카셀은 시키는 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타냐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등에 두 손을 댔다. '이럴 때 남자의 등이 넓어 보이는 거구나.'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지만, 갑자기 그런 걸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등의 통증에서 신경을 돌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았다. "어디로 갈 지는 정하고 움직이는 거죠?" 카셀은 흔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그녀를 업고 물었다. "예. 점점 오르막이에요. 힘들겠지만, 우리는 이 길로 가야 됩니다. " "위로?" "절벽을 타 넘고 오를 수는 없으니 이 길이 위로 향하는 길이길 바래야죠. 아니라면 적어도 카구아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쪽이던가." 카셀은 묵묵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등에 밴 축축한 땀이 가슴과 맞닿은 붕대를 적셨다. 이동하며 타냐는 바닥에 난 발자국을 발견했다. 아무리 어둠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얻었더라도, 환한 태양 아래 흔적을 찾는 것만큼 정확한 정보를 얻는 건 무리였다. '카구아의 발자국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발자국은 두 종류였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역시 드래곤 크기를 한 거대한 짐승의 발자국은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카구아가 두 마리?' 타냐는 계속 신경 쓰지 못했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완만한 오르막길의 머리 위로 천장이 존재했다. 타냐는 머리 속으로 하푸의 밑바닥을 그려보았다. 카셀은 키구아를 피해 절벽의 어딘가 나 있는 틈새로 숨었다. 그 틈새를 통해 계속 걸어가다 나옴 지리는 위로 향한 동굴이었다. 그것도 좌우와 상하 구별을 하기 힘들 정도로 넓은 지리. 푸르게만 보이는 시야 안에서 색깔을 구별할 수는 없었으나, 바닥은 단단하게 굳은 모래가 바위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박힌 수많은 발자국 중에 일부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벽에는 뭔가에 긁힌 자국이 깊이 나 있었다. ‘혹시 라이가 말했던 드래곤의 신전이 여긴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역시 하늘 산맥의 하이로드가 이런 곳에 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라이는 분명 드래곤이 산 위쪽에 있다고 말했었지, 하푸의 아래쪽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 타냐는 드래곤도 아닌데 이 정도 발자국을 내는 또 다른 생명체를 만나는 건 걱정 되었다. 위로 올라가는 경사가 더 급해졌다. 카셀은 타냐를 고쳐 업느라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더 자세히 보니 발자국은 세 종류였다. 타냐는 시야를 이 이상으로 밝히지 못하는게 안타까웠다. 결론은 내자면, 하나는 두 사람을 쫓는 카구아, 또 하나는 카구아는 아니지만 최근 발자국을 낸 또 다른 드래곤, 마지막 하나는 드래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에 발자국을 낸 더 커다란 어떤 생명체. ‘세 번째 발자국은 무시하더라도, 두 번째 발자국은 뭐지? 구아닐? 우리가 모르는 다른 드래곤? 대체 이 깊은 땅 속에 뭐가 사는 거야?’ 등의 상처보다 마음의 불안감이 더욱 그녀를 어지럽혔다. 절벽 위에서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로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니, 이럴 때 로핀이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라이도 뛰어난 전사지만, 드래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마법사뿐이었다. 그것도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와 필적하는 힘을 가진 마법사! “카셀” 타냐는 망설임을 끝냈다. “예” 힘들어 대답도 겨우 하는 카셀이었다. “업혀 가는 거, 미안해하지 않을게요.” “예” “그러니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도 미안해하지 말아요.” 약간시간이 걸렸으나 카셀은 대답했다. “예” “또 내 목소리가 변하더라도 개의치 마세요. 모든 마법의 힘을 상처 치료에 동원하면 목소리도 외모도 조금씩 변할 수 있으니까, 혹시 봐오던 게 아닌 다른 얼굴을 보더라도 그게 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카셀은 충실히 대답했다. “예” "카셀, 이제 잠깐 동안 전 정신을 잃을 지도 몰라요. 그래도 계속 직진 하세요. 그리고 길이 막히거든 거기에 잠깐 동안 서 있도록 하세요.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힘들더라도 그냥 업고 계세요.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 "돌아보지 않을 게요." 타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에 쥔 구슬에 강한 힘을 주었다. '돌아보지 마세요, 카셀. 새나디엘 여왕의 예언을 믿는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 있어 그 예언은 재앙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부디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구슬이 깨지면서 섬광처럼 짧게 빛을 냈다. 그녀는 그 빛을 수습하여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희미한 빛의 뭉치가 그녀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머리 속이 깨지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윽" 타냐는 등의 고통도 잊고 크게 호흡을 들이키며 허리를 젖혔다. 업고 있던 카셀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균형을 잡고,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 타냐도 겨우 균형을 잡고 카셀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녀의 몸 전체에서 희미한 빛이 맴돌았다. 타냐는 또 몸이 튀어나갈까 봐 카셀의 목을 꽉 끌어안고,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둠을 들고 타냐의 몸에서 빠져 나온 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팔 다리를 묶은 줄을 끊어버린 것처럼 시원하게 뭔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등의 고통과 몸 안에서 폭발하는 고통이 합쳐지며 타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에 흐느꼈다. "으으......으윽.“ 입에서 피가 왈칵 쏠아져 카셀의 뒤통수를 적셨다. 카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려 했나 약속대로 돌리려던 머리를 멈췄다. "타냐‥‥‥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겁에 질린 카셀이 물었다. 타냐는 대답하지 못 했다. 업히지 않고 봉인을 깨뜨린다면 더 쉬됐을 지도 몰랏다. 그리나 타냐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빛으로 인해 카셀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거, 걸어요, 카셀. 계, 계속.......“ 타냐는 마지막으로 쥐어짜내며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낮은 비명을 터트렸다. “으윽” 타냐의 손톱이, 쥐고 있는 카셀의 어깨를 찌르며 피를 냈다. 다리의 근육은 팽팽하게 당겨졌고, 전신의 관절이 비틀렸다. 등에서 아물어가던 상처가 터져 허리를 타고, 다리를 타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타냐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 봉인의 힘은 너의 육체를 강제로 묶을 것이다. 그 육체의 힘을 되살리고 싶거든, 다를 형태로 변해야 한다. 늑대가 좋겠구나. 봉인이 있는 한, 네 마법의 힘은 한계까지 뿜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네 마법의 근원은 생명이다. 충분히 채워져 있으나 다시 채워지지 않는 우물이다. 그 물을 관리할 도르래를 얻기 전까지 이 힘은 네 안에 숨겨두어라. 네 스스로 그 봉인을 푸는 날, 루티아는 또 한 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얻게 되리라. 눈 앞이 하얘줬다. 손가락을 묶은 보이지 않는 실이 끊어졌다. 그러나 아까처럼 후련한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이 뽑혀져 나가는 것 같았다. 눈동자를 가리는 보이지 않는 장막이 바깥쪽으로 깨졌다. 오직 타냐에게만 들리는 굉음이 울렸다. 머리 속에 항상 떠 있던 뭔가가 사라졌다. 갑자기 텅 빈 것처럼 머러가 멍해졌다. 누군가 손을 집어넣어 뇌를 직접 비틀어 파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르지 못한 숨을 토했고, 그 때마다 입에서 침 섞인 피가 카셀의 등 위에 떨어졌다. 그녀는 자기가 토해낸 그 피에 또 얼굴을 부딪쳤다. 다리를 따라 흐르는 피는 처음 월경을 가겼던 그 때의 공포를 떠올렸다. 언니의 고통을 공유했던 열두살의 그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아파...... 하지 마.' 저항하는 언니의 몸을 덮친 남자들의 손이 몸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살갗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괴로웠었어? 아니야. 난 언니의 고통을 공유한 게 아니었어, 그랬다고 상상한 거다.‘ 절벽 위에 홀로 서서 파도치는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타냐는 견elf 수 없는 외로움에 양팔을 펼쳤다. '날 수 있어.' 아니, 그녀는 날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죽는 게 두려워 상상으로 공포를 뭉개고 싶었을 뿐이었다. '죽는 게 아니야. 그냥 나는 거야.' 그리고 타냐는 절벽을 뛰어내렸다. 테일드는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녀의 몸을 낭떠러지 아래로 한없이 떨어져 검은 대리석 같은 바닷물에 부딪쳤다. 하얀 포말 안에서 죽어가는 가족들의 불투명한 눈동자가 하나하나 보였다. 타냐의 입에서 거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실 같은 공포가 머리 속에 남아있는 벽을 무너뜨렸다. '모두 복수했다. 이건 내가 혼자 만든 공포다. 견뎌라.' 오래된 기억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견뎌, 타냐.' 목구멍에서 역류하던 피가 입에 고였다. 숨도 못 쉬고 기침으로 피를 토했다. 몸 안에 고인 피가 코로 주루룩 샜다. 스무 살이 되면 봉인을 풀라고 했는데, 너무 오래 방치한 건가?' 뭔가 잘못 되었다. 테일드는 봉인이 풀릴 때에 대해 이런 고통을 얘기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심한 고통이라면 미리 경고를 했을 거다! 뭔가 잘못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보든 과정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육체를 다시 한번 흝었다. "아악." 타냐는 비명을 지른 후 힘이 빠져 몸을 늘어뜨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 정신을 잃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절 알았다. 그러나 의식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까 카구아의 발에 밟혔다면 이런 기분으로 죽었겠구나 싶을 정도로 묵직한 힘이 녀의 온몸을 짓눌렀다. "타냐,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니 돌아보지 않겠습니다 " 카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던, 당신 스스로 잘 해내리라 믿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의 무거운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경사를 올라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으니 죄책감도 갖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당신에게 부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 옆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타냐, 지금 뭘 하고 있든...... 지지 마십시오!" 갑자기 머리 속이 맑아졌다. 그제야 카셀이 꼭 쥐고 있는 다리의 감각이 돌아왔다. 그의 따뜻한 손이 다시금 사람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었다. 타냐는 늘어진 몸을 천천히 일으켜 다시 카셀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제 그것은 고통에 겨운 떨리는 손길이 아니라,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자신이 토해놓은 피가 흐르는 카셀의 등에 얼굴을 대고 타냐는 고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습에 닿은 그의 등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끝났습니다, 카셀." 카셀이 놀라 말했다. "괜찮으세요?" "아직은 아니에요. 앞으로 조금만 더 가세요. 거기 다리를 피고 앉을 만한 곳이 있습니다. 잠시만 쉬도록 해요." 타냐는 이제 시커먼 동굴 안을 낮과 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했다. ‘만약 찾아내면 제일 먼저 얼굴을 후려쳐 줄 거에요, 마스터.' 갑자기 찾아온 고통은 갑자기 물러났다. 한순간 그녀를 덮쳤던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당연한 얘기였으나, 카셀은 아직 타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동굴에는 카구아가 두 마리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둘 중 하나는 만날 것이고, 그것들과 상대하려면 지금 힘으로는 부리입니다. 그래서 제 몸에 걸린 봉인을 풀었습니다. " 타냐는 자세한 부분은 생략하고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한 거라면 하시 마시지 그랬어요? 타냐는 굳이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히 막강한 마법사 아닙니까?"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만, 드래곤은 그 정도로 함부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카셀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타냐가 토해낸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타냐는 민망한 나머지 입과 얼굴에 묻은 피를 닦다가, 카셀이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타냐는 아픈 척 기침을 하며 말했다. "저, 그 피를 토한 건...... 어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사과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것도 사과하지 않기로 하죠." "이런 건 미안해해도 되는데.......“ 카셀이 투덜대며 말했고, 타냐는 웃음을 터트렸다. 카셀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목소리가 바뀐다더니, 좋은 쪽으로 바뀌는 거였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말투야 그대로지만, 왠지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군요." "그건 다시 말해 전의 목소리에 불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네요?" “그럴 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깜짝 깜짝 놀랄 때도 많았죠." 카셀은 손수건으로 목 뒤를 닦으며 허허 웃었다. 그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마치 보이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타냐에게 말했다. "이겨 냈군요." "그래요." "하지만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말했듯이 카구아가 두 마리이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옆에 당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죠. 혼자 이겨내는 건 옆에 아무도 없을 때로 하세요. 손 좀 내 놔 봐요." 타냐는 얼결에 손을 내주었고, 카셀은 씨익 웃었다. "보세요. 이젠 제가 손 내밀랜다고 내밀었죠? 당신이 저를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옆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믿어주어도 되지 않나요?"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런 힘을 얻은 결까? 카모르트에서? 아란티아에서? 타냐는 봉인을 풀 때와는 전혀 다른 고통이 가슴 한 쪽을 찔렀다. 이제 등의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또 눈물이 나려 했다. ‘당신의 그 미소와 자신감에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을 따르는 걸 겁니다. 나는 당신의 모험에 함께 하고 싶었지만, 이제야 그럴 수 없음을 알게 되었군요.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이 모험을 끝으로 당신을 떠나야겠습니다. 분명 당신이 다칠 매마다, 또 그 미소가 어긋날 때마다 괴로워 견딜 수 없을 테니까.' 타냐는 절망 속에 루티아를 떠올렸다. 로핀의 추측대로, 러스킨이 배신자라면 그녀는 루티아에서 그 싸움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고 카셀은 다시 아란티아로 돌아가 현재 처한 위험을 알리고 위기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걸로 됐다. 이 동굴 속에서의 힘든 여정이 끝을 맺으면 타냐는 이 추억을 반추하며 루티아 마스터로서의 인생을 이어가겠지. "자, 다시 이동합시다. 아직 두어 시간은 더 업고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너무 쉬면 늘어집니다. " 카셀은 벌떡 일어나며 아직도 잡고 있는 라냐의 손을 끌어당겼다. 타냐는 이제 업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려 했으나, 쉽게 말을 떼지 못 했다. 그런 침묵에서 카셀은 항상 먼저 입을 여는 걸 택했다. "얼굴이 안 보이는 어둠을 틈 타 이런 말 하는 건 좀 한심하지만, 이 순간이 아니면 또 말도 못할 데니.......“ 카셀은 뭔가 준비해뒀던 말에서 어긋났다고 생각했는지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 타냐는 그가 말 하는 동안 가슴이 꽉 막힌 첫 같아 입을 열지 못 했다. "아, 시작이 들렸군요. 꽤 길게 준비한 서두를 망쳐버렸네요 그냥...... 언제나 제 자신을 비하하며 어떤 여자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당신에게 만큼은 반드시 하고 싶어요. 좋아합니다. 타냐. 당신이 루티아의 마스터든, 대륙을 지배하는 마법사든. 이 말 했다고 절 불에 태워 죽일 분은 아닐 테니까. 그렇죠?" 카셀은 어색하게 웃었고, 타냐는 그러질 못 했다. 가늘게 팔이 떨렸다. 그녀는 순간 카셀을 배려한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그린데 그게 아니었다. 카셀의 솔직한 마음을 들고 나서야 자신이 솔직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사실은 떠나고 싫은 게 아니 없다. ‘카셀, 저도 당신을.......’ 타냐는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입에서 맴도는 말은 엉뚱하게 샜다. "미안해요, 카셀." 카셀은 예상했던 담이 나왔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등을 댔다. "자, 계속 가요. 아직은 당신을 업고 싶으니까, 몸이 다 나았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타냐는 그가 내미는 등에 손을 및었다. 자신의 피가 아직도 흥건하게 묻어 있는 이 등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타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기척도 없이 접근한 거대한 카구아가 그녀의 얼굴 높이로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피해요!" 타냐는 아직도 상황을 알지 못하는 카셀의 덜미를 붙잡아 뒤로 집어 던졌다. 카구아가 내리친 앞발이 빈 바닥을 깨뜨렸다. 그러나 피하는 것까지 예측이라도 한 듯 카구아는 입에 모아놓은 검은 불길을 뿜어냈다. 이미 카셀을 뒤로 던져놓은 타냐는 피할 수도 없었다. 처음 하늘 산맥에서 구아닐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카구아의 불길은 구아닐과 거의 강약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원하는 방향대로 비껴낼 수 있을 거라 믿고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하안 빛이 손바닥 앞에 펼쳐졌다. 어둠의 힘을 담은 불길이 거기에 충돌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카셀이 있는 곳으로 밀려나지는 않았으나, 그 힘이 예상 이상으로 강하여 타냐의 몸이 뒤로 미끄러졌다. 타냐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봉인에서 풀려난 마법은 충분히 끌어 모으지 않았는데도, 카구아의 불길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러나 키셀에게 업혀 다니는 게 고작이었던 체력으로는 이 힘을 온전히 받아내기가 힘들었다. 불길이 멈추었고, 타냐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타 들어간 손바닥은 만지지도 못하게 아팠다. 그 순간 카구아는 바닥의 바위를 손에 들어 던졌다. 그녀는 빤히 보이는 그 바위를 피하지 못 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마법의 창이 바위를 깨뜨렸다.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타냐는 주저앉은 채로 양팔을 펼쳐 카셀 쪽으로 날아가는 파편을 모조리 쳐줬다. 나머지 크고 작은 날카로운 돌멩이들이 타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얼굴의 살갗이 찢어지고 어깨에 돌들이 박혔다. 그 사이 힘을 회복한 카구아는 다시 한 번 불을 뿜어냈다. 타냐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내밀었다. 빛과 어둠이 법은 동굴 안에서 두 번째 충돌을 일으켰다. 진동하는 공기가 근처의 바위벽을 뒤흔들었다. 천장에 금이 가 흙이 쏟아졌고, 가라앉은 공기가 소용돌이치며 수백 년 동안 고이 가라앉아있던 먼지가 들썩였다. 두 가지 공격 중 어느 족도 상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카구아도 더 이상 불길을 쓰지 못 했고, 타냐도 더 이상 마법을 쓰지 못 했다. 그러나 카구아는 두 다리를 내딛으며 타냐에게 다가올 수 있었고 타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는 다가오는 괴물의 커다란 이빨만 바라보았다. 이제 팔도 마비되어 안 올라갔다. ‘더 일찍 봉인을 풀었어야 했는데, 엉터리 예언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하고 죽게 되었구나, 카셀은 달아났을까?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이 미안하다였군.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지 않았나?' 타냐는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 때 더듬거리며 다가와, 타냐의 어깨를 짚은 카셀이 말했다. "정면입니까?" 타냐는 놀라며 비명에 가깝게 말했다. “무슨 짓을......! 달아나요." 그 때 카셀이 보검을 뽑았고, 타냐의 정면 쪽으로 내밀었다. "아직 나의 생명에 당신의 기더를 의지할 가치가 있다면, 한 번 더 기적을 베풀어 주소서, 즈토크 워그. 아란티아의 보검이시여!" 카셀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검에서 하얀 빛이 쏟아줬다. 측정하기도 힘든 드넓은 지하 동굴 전체를 밝히는 빛에, 카구아는 눈이 부셨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주춤했다. 어둠을 낮처럼 보는 타냐도 똑같이 눈이 부셔 얼굴을 돌렸다. "카구아, 구아닐의 추종자이며,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하늘 산맥의 괴물이여. 워그의 목소리를 들으라." 카셀은 및을 뿜는 보검을 앞으로 세우고 타냐의 앞에 설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검은 철로 비늘을 깎아 만든 석상 같은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보검의 빛인지, 카셀의 목소리인지 모를 그 기세에 밀려 카구아는 뒤로 물러났다. "날개 없는 괴물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하늘 산맥의 여신, 나디우렌의 지배 아래 무릎을 꿇으라. 구아닐의 배신에서 귀를 떼지 못하면, 네 영혼에 암흑만 남으리라." 칼을 한 번 휘두르자, 카구아는 채찍에 맞기라도 한 듯 뒷걸음질치며 신경질 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빨과 앞발을 들이대기도 했으나, 보검이 빛을 뿜어내는 영역 안에는 손을 들이지 못했다. "하늘 산맥 아래 생명의 지배자이신 아란티아 여왕 앞에 네 죄를 고하라. 나디우렌의 대리자께서 네 이름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그 분을 대신하는 즈토크 워그 앞에 그대의 머리를 내려놓으라!" 아까 바위가 폭발하며 상처를 입은 건 타냐 만이 아니었다. 카셀도 이마가 짖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타냐가 토한 피로 굳어가는 어깻죽지가 다시 피로 물들었다. 칼을 들지 않은 왼손은 허리 뛰로 숨기고 파르라니 떨고 있었다. 떨어지는 바위 파편을 피하지 못한 건지, 주먹이 깨져 제대로 쥐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카셀의 목소리는 넓은 동굴 안에서 웅장하게 울렸다. "물러나라. 아란터아의 힘 앞에서 네 사악한 의지를 버려라. 캡틴 울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카구아!" 카셀의 보검은 점점 빛을 잃었다. 빛을 뚫지 못했던 카구아는 이제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되돌렸다. 타냐도 힘이 회복되긴 했으나, 아직 쓸 수 있는 정도는 안 되었다. "카셀......, 달아나요. 그 놈은...... 말을 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짐승에 불과해요." 타냐는 이를 악 물고 무릎에 손을 점고 말했다. 카셀은 갈을 완전히 바닥으로 늘어뜨리고 말했다. "언제고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말을 아예 모르는 짐승한테 죽을 줄은 몰랐군요." 카셀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당신이 달아날 시간은 벌었길 바랍니다. 일부러 말을 길게 늘이긴 했지만, 이제 더 할 발도 없군요." 마치 지금까지 물러난 치욕을 장기라도 하겠다는 듯 카구아는 발톱을 세운 앞발을 치켜세웠다. 보검의 빛 안에 드러나 타냐의 모습을 보고 카셀은 말했다. "아름답군요, 타냐. 아버지 말이 옳았어요." 카구아의 앞발이 카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여왕이시여, 어째서 그런 예언을 하셨습니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선택은 제가 하는 것이고, 예언에 나타난 존재를 찾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저는 카셀을 선택합니다. 그가 저를 거절하는 한이 있어도 그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한심한 건 저였습니다. 당신에게 고통을 줄 게 두려워 도망치려 했습니다. 이렇게 늦게 깨달은 저를 용서하세요, 카셀.‘ 타냐는 카구아의 불길을 막느라 마비되었던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가진 생명의 힘이 그 오른손 위에 집중되어갔다. 단검 길이만 했던 그 빛은 순식간에 사람보다 더 긴 창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늦었다. 타냐의 깨달음도 늦었고, 다시 마법을 쓸 만큼 회복할 시간도 부족했고, 카구아를 공격하기에도 늦었다. 타냐는 이미 카셀의 머리가 부서진 후에 카구아를 공격하게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러나 카구아의 앞발은 카셀의 머리에서 1 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멈춰 있었다. 타냐도 놀란 나머지 어깨 뒤로 당졌던 그 마법의 창을 던지지 못했다. 카구아의 팔은 강제로 막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의 창이 내는 빛에 번들거리는 검은 비늘 위로 스스로 빛을 내는 붉은 비늘이 덮고 있었다. 카구아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곳에 또 다른 드래곤의 머리가 있었다. 샛노란 눈동자가 내려다보는 것은 겁에 질려 자기를 올려다보는 카구아 쪽이 아니라, 카구아 아래에 힘없이 고개를 숙인 카셀 쪽이었다. [멍청한 우그가 말도 안 통하는 짐승에게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움을 느끼게 할 목소리로 그 붉은 드래곤은 말했다. [하지만 할을 알아듣는 쪽에서 듣기에는 꽤 재미있는 연설이긴 하구나.] 카구아는 몸을 뒤로 틀어 붉은 드래곤의 목을 덥석 물고 악어처럼 머리를 뒤흔들없다. 그러나 고정된 붉은 목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더러운 구아닐 놈의 부하가 내 동굴을 나다닌 죄에 대해, ‘사-크나딜'의 이름으로 처형하겠다. 변론을 하겠나?] 그 드래곤은 카셀의 머리 위에서 멈춘 카구아의 팔목에서 손을 eP더니 그걸로 놈의 배를 찔렀다. 카구아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붉은 드래곤은 그 비명을 한참 듣더니 말했다. [못 알아듣는 변론은 기각하노라.] 그는 배를 손으로 찌른 채 카구아의 거대한 몸뚱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카구아의 등뼈를 입으로 물었다. 뼈가 부러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카구아의 몸이 기형적으로 꺾어졌다. 드래곤은 그것에도 성이 안 찼는지 꺾은 카구아의 질긴 몸을 찢어 두 동강을 내버렸다. 검붉은 내장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고, 피가 파도처럼 바닥에 흘러 넘쳤다. 카셀은 그걸 채 피하지도 못 하고 소나기처럼 얻어맞았다. 카셀은 휘청거리며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크, 크나딜....... 드래곤들의 하이로드...... 십니까?" 드래곤은 두 동강 난 카구아의 몸뚱이를 좌우로 내던졌다. 질척한 피와 살점이 벽에 튀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이다, 어린 우그." 인간의 언어로 말해도 그의 목소리는 웅장했다. "감사합니다." 카셀은 겨우 고개를 숙여 말했고, 드래곤은 고개만 살짝 까닥여주더니 타냐에게 말했다. "거기 있는 우그는 나라도 죽일 만한 마법은 거두고 와서 이 친구를 돌보는 게 어떠냐?" 타냐는 그제야 손에 만들어놓은 마법의 창을 거두었다. 그녀는 드래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카셀을 향해 뛰어갔다. "괜찮으시.......“ 타냐는 말을 맺지 못 했다. 카구아의 피에 흠뻑 젖은 카셀이 반만 뜬 눈을 하고서 타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타냐...... 우린 살았어요." 타냐는 아란티아의 보검을 든 그의 모습을 보고 입을 가렸다. ‘여왕이시여.......’ 너는 너의 진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며, 그는 암흑을 상징하는 더러운 피를 뒤집어 쓴 채 무엇이라도 죽이는 마법을 손에 들고, 너를 바라보노라. 네가 그 남자의 뜨거운 육체를 스스로 품에 끌어들이면, 너는 결코 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리라. 타냐는 카셀에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는 정신을 버터지 못하고 타냐의 품에 쓰러졌다. 그녀는 카구아의 뜨거운 피에 흠뻑 젖은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하십니다, 폐하. 어찌 이 순수함을 유혹이라 하십니까? 어찌 하여 저에게 이길 수 없는 유혹을 예언하시며 거절해야 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까?' 타냐는 눈들을 흘리며 몸 안 길이 숨겨놓았던 힘을 해방시켰다. 하얀 빛이 타냐와 카셀을 감쌌고, 그 성스러운 회복의 힘이 동굴을 환하게 밝혔다. (11)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 크나딜은 길게 하품을 하다가 그 자리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스스로 빛을 내는 붉은 비늘이 타냐가 발하는 치유의 빛에 반사되어 거대한 루비처럼 보였다. 점잖은 눈매는 지그시 타냐와 카셀을 주시했고, 코에서 내는 호흡은 따뜻했다. 내내 타냐의 시야 안에서 윤곽으로만 존재하던 것들이 빛을 흡수하여 자세히 보였다. 드래곤의 뒤쪽 벽에는 가루처럼 반짝이는 하얀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너무 거대하여 도저히 전체 모습을 한 눈에 넣기 어려웠다. 크나딜의 등 뒤쪽 벽에는 발이 그러져 있었고, 까마득히 높은 벽에는 머리가 있었고, 깊숙한 어둠한쪽에는 날개 끝이 있었다. 그것은 크나딜과는 전혀 다른 드래곤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 곳은 논틸의 동굴과 달리 위가 둥글고 바닥은 편평한 터널이었다. 이 곳은 크나딜의 거처가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통로였다. 통로는 위를 향했고, 가파른 경사는 나선으로 꺾이고 있었다. 라이의 말대로 산꼭대기가 이 곳으로 들어오는 입구였다면, 아마 이 나선형 길은 산 하나에 통제로 숨겨져 있는 미로일 깃이다. 그 통로 끝에서 이쪽으로 접근하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두 개의 그림자 중 하나는 날개를 펼치고 공중에 뜬 채로, 다른 하나는 그 날개 달린 존재만큼이나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걸어오는 이가 뭐라고 소리 지르며 칼을 뽑았다. 칼날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타냐의 하얀 빛을 뚫었다. 크나딜은 재미있다는 듯 그 붉은 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오, 근 오백 년 동안의 방문객보다 일주일 간의 방문객이 더 많군. 게다가 그 중 셋은 나를 죽일 만한 무기를 들고서 말이야." 로핀이었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왔다가 느긋하게 엎드려 있는 드래곤을 보고 멈췄다. 라이도 날개를 펼치고 돌격했다가 방향을 꺾더니 먼지를 일으키며 착지했다. 라이는 드래곤을 향해 다가가 무릎을 꿇고 인사 했다. 앞에 놓은 카구아의 시체를 본 로펀은 즉시 사태를 이해했다. “드래곤이시여, 하찮은 인간이 인사드리나이다. 존함을 말씀해주시 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란티아에서 온 로펀입니다. " "사-크나딜 이다 " "카구아로부터 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무례를 무릎 쓰고 당신의 영역에 침범한 죄,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 그런 예절이 오고 갈 시점은 이미 지났다. " 크나딜은 흐ANT한 시선으로 카셀과 타냐를 바라보았다. "이미 나는 너희들이 올 것을 예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레미프들에게 신탁을 내린 건 나였지. 논틸이 죽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힘이 미약하여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걱정이었으나, 다행이야." "논틸의 죽음을 아십니까?" “안타까운 일이야. 그 일로 온 게 아닌가? 오푸 아이븜 위바오브." “맞습니다, 마스터 크나딜. 그 일을 상의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 레미프들, 그리고 드래곤들에게도 커다란 위험이 찾아왔습니다. 그 일은.......” “아, 이야기라면 저 마법사가 깨어난 다음에 하기로 하지.” 기절한 카셀을 안고 있던 타냐가 말했다. “저는 듣고 있사옵니다, 마스터 크나ELF. 시간이 없는 건 모두에게 마찬가지, 말씀 하십시오." 크나딜은 웃었다. “나는 이 곳까지 마법사를 인도한 빠른 발과 빠른 날개에게 말한 것도 아니고, 마법사를 보호하는 늑대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 점괘가 중간에 어긋난 건가, 아니면 레미프들의 해석이 어긋난 건가? 내가 뜻하는 이는 하늘 산맥에서 내려온 마법사다. 방금 카구아를 물리치고 기절한 저 청년 말이다. " 타냐는 아직 뭐가 뭔지 몰라 크나딜이 지목한 카셀만 끌어안고 있었고, 로핀은 할 말을 찾느라 고생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항상 속편히 쳐다보고 있는 이는 라이였다. 로편은 한 손으로 부드럽게 칼을 돌리며 칼집으로 집어넣었다. “마스터 크나딜, 카셀은...... 마법사가 아닙니다." 크나딜은 고개를 갸웃했다. 드래곤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으나, 아무리 봐도 커다란 입가가 이루는 곡선은 미소로 보였다. 그것도 만사를 흥미롭게 여기는 유쾌한 호기심을 담은 미소. "인간의 기준을 모르겠군. 즈토크 워그의 빛으로 나를 인도하여 나의 힘을 이용해 카구아를 죽인 인간이 마법사가 아니라면 너희들은 대체 누구를 마법사라 부르느냐?" 감히 드래곤들의 하이로드를 상대로 마법을 논할 수는 없으니, 타냐는 대꾸하지 못했다. 로편은 겨우 납득하며 말을 이었다. 누구를 상대하든 변함없는 로핀도 경직된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곳으로 길을 인도한 건 모두 카셀이었군요. 이곳으로 오는 길을 아는 라이를 끌어들인 것도, 중간에 다른 드래곤을 찾아가자고 한 것도.......모두 카셀이었습니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라든에서 다른 드래곤을 찾아보자는 회의를 하고 있거나 루티아를 구하러 가는 원군에 합류했을 겁니다. " 크나ELF은 먼 곳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잠깐 눈을 감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잠든 게 아닌가, 로핀이 슬쩍 물었다. "저....... 마스터 크나딜?" "조용. " 크나딜은 손을 내밀었다. 로핀은 어깨를 으쓱하며 타냐에게 다가갔다. "카셀은 어떤가?" "그 동안 누적된 피로가 그를 누르고 있습니다. 쉽게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용케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그 정도 미모를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진작 알고 있었고, 붕대만 감은 몸으로 카셀을 껴안고 있을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어? 잘 좀 묶어라. 다 보이겠다. " 로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너희들이 절벽으로 떨어진 후 나는 카구아를 저지하려고 결국 칼을 뽑았지. 녀석도 이 칼의 힘을 아는지 섣불리 공격해오지 않더군. 그때 레드워드란 놈이 또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나와의 정면 대결을 택하지 않고 프보에 레미프들을 끌고 왔더군." "여기에만 힘든 싸움이 있었던 게 아니었군요." “너희들 정도로 힘든 건 아니었을 데지만, 워낙 숫자가 많아 죽을 뻔했지. 드래곤을 살해하는 놈들과 한 편이 될 정도로 정신 나간 놈들이 아닐 텐데, 어째서......? 아, 지금은 복잡한 논쟁은 하지 말자." 로편은 라이를 가리켰다. “라이가 힘을 많이 써줬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 오지도 못하고 죽었을 거다. 르고가 녀석에게 맞는 갈을 주었더라면 어떤 힘을 발휘할 지 궁금해지더군. 내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아마 이긴다는 말은 못할 거다 " "대단한 평가군요." “재미있게도 녀석은 카셀을 구하기 위해 나를 들고 절벽으로 활공해 보겠다고 제안했을 정도야 카셀이 자신의 기더를 약속했으니 , 거기에 따라야 한다면서." "결국 빠른 길을 찾았습니까?" “카구아가 먼저 절벽을 내려갔거든. 괜히 날아가다 녀석의 불덩어리에 직격 당할 수는 없었지. 시간은 없고.......그 때 녀석은 자기가 전에 찾았던 그 구멍이 기억났다며 나를 들고 하늘을 날아서 그 구멍으로 들어갔다. 라이는 본능적으로 그 구멍이 하푸와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았던 거야." 로핀은 입맛을 다시며 눈을 크게 몇 번 깜빡였다. “그래...... 여길 오기 위해 꼭 필요한 ‘빠른 날개'는 라이였다. '빠른 걸음'이 일행의 앞에 서고, '흰 털의 늑대'는 ‘하늘산맥에서 온 마법사'를 보호했어야 했지." “그렇군요." 타냐는 다시 카셀을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 얼굴로 돌아오니 이제야 표정을 읽을 수 있겠군. 언제부터 그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 “도서관에서 책 찾을 때......였나7" 타냐는 빙그레 웃었고, 로핀은 인상을 구겼다. “마스터 타냐, 미리 한 가지만 경고하지 그런 미소는 무기를 뽑는 것만큼 아껴라, 크나딜의 관점으로 얘기하자면, 그런 것도 마법이야. 남자에게는 쥐약이지. 어설피 그런 마법 난발하면 카셀 아닌 다른 남자들도 너한테 목숨을 바치겠다고 설친다?" 타냐는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경험상 그래. 여하튼 조심해. 그러고.......” 로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타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해 주었다. " "감사합니다. " 타냐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 모든 신탁이 크나딜에 의한 거였다면, ‘잠을 깨우는 무녀'는 무슨 일을 하는 거였지? 여기서 시나비아의 역할이라는 게, 으음, 봐봐. 크나딜께서는 벌써 기상 중이시지 않나?"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 때 크나딜이 눈을 떴다. 카셀을 감싸던 회복의 빛은 꺼져갔다. 드래곤의 붉은 빛을 조명 삼을 수는 없으니, 타냐는 손을 들어 빛의 구슬을 몇 게 허공에 띄웠다. 이런 걸 아무렇게나 해내는 걸 보고 로핀이 짧게 감탄사를 냇다. 하지만 크나딜은 오히려 그런 게 너무 눈이 부신지 자기 힘으로 하나를 꺼버렸다. “타냐라고 했느냐? 서쪽에 있는 루티아의 마법사지?" 크나딜이 물었다. “예." “지금 루티아가, 모즈들과 어둠을 추종하는 기사들에게 공격 당하고 있다. " 타냐는 잊었던 걱정거리를 떠올렸다. “내일 아침 해가 eM면 전투가 있을 것이고, 그 전투에서 루티아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로핀이 나직이 신음했다. "레미프들이 원군을 보내지 않았나 보군." 크나딜이 그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말했다. “라든과 만디르의 레미프들은 적절한 시간에 도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대로 두면 루티아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는 그 커다란 얼굴을 타냐의 앞으로 가까이 가져왔다. 입김이 화덕의 불길을 가까이 하는 듯 뜨거웠다. "가서 그들을 도와라, 라두 워그." “그러나.......” "네가 여기에서 할 일은 끝났다. 그러나 루티아에서는 너의 힘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마법사는 네가 안전하게 보호하겠다. " 카셀의 몸은 회복 중이었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나 그걸 걱정한 건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자기 마음을 깨달았는데, 여기에서 헤어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가더라도 작별 민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마스터 크나딜." 그녀는 카셀의 머리를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크나딜의 말이 맞았다. 이 곳에서 그녀가 할 일은 끝났다. 그런데도 다시 깨어난 그의 얼굴을 본다면 루티아로 떠나지 못하고 망설일 게 분명했다. 차라리 그가 잠들어 있을 때 떠나는 게 좋았다. ‘돌아오면, 처음부터 시작해도 좋다.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 타냐는 로핀에게 또 한 번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몸을 획 돌렸다. "나가는 길은 아나?" 로핀이 물었다. "지금은 다 보입니다." 타냐는 로핀이 왔던 쪽으로 달려갖고, 빠르게 하얀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로핀이 왔던 방향은 산꼭대기로 향하는 커다란 터널이 아니었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의 발로는 내려올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비틀어진 길이었다. 돌을 먹는 지렁이가 파놓은 첫 같은 구부러진 길로 타냐는 내달렸다. 험한 오르막은 바닥과 천장을 번갈아 밟아가며 이동했고, 바닥이 끊어져 까마득한 낭떠러지인 곳은 벽을 타고 달렸다. 마지막 오르막을 빠져나가자, 맑은 하늘의 달이 보였다. 싱싱한 풀 냄새가 코를 간질였고, 기분 좋은 야간 조류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산맥을 멸망시키려 하는 존재가 여길 걸어 다니고 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타냐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점점 속도를 늘려가며 숲을 들고 달리는 그녀의 주위에 있는 나무가 뒤로 일그러지며 물러낫다. 바람이 그녀를 따라잡지 못해, 얼굴을 때리는 공기가 아팠다. 전에는 그녀와 속도를 경쟁하며 뛰었던 하늘 산맥의 노루는 이제 그녀가 지나간 줄도 몰랐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위가 밝아지는 동쪽은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했다. 익숙한 지형이 나타나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웃서치였다. 사방에 기분 나쁜 존재들이 즐비했다. 타냐는 눈을 감고 루티아 전체의 기운을 느낌으로 훑어보았다. 루티아는 공격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숫자의 모즈들에게. 그 느낌 너머로 레미프들이 루티아 서쪽 바위산에 배치되어 있었다. 다행히 원군은 도착해 있었다. 여러 가지 회의를 거쳤을 걸 생각하면, 정말 빨리 온 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지?' 크나딜도 이 일에 대해 언급했었다. 타냐는 아웃서치를 돌아 다운 포레스트로 뛰어갔다. 굉장한 숫자의 모즈들이 그 곳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타냐의 접근을 보고 놀라 무기를 들었지만, 타냐는 무시하고 그 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녀는 녀석들이 도끼를 휘두르는 것보다 더 빠르게 파고 들어가 그들을 들이받았다. 긴 팔에 털이 무성한 짐승들이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지나간 자리에는 늑대의 발에 밟힌 모즈가 줄을 이었다. 곧 다운포레스트를 관통하는 크보츠 강이 나타났다. 그녀는 속도를 오히려 더 높여 도약해 단숨에 강을 뛰어넘었다. 숲이 끝나고 높은 바위산이 나왔다. 그녀는 달려오던 속력으로 붙잡을 곳 하나 없는 바위산을 불쑥 올라갔다. 그녀는 근처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잡아 루티아를 내려다보았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나, 모즈들은 거대한 통나무를 크보츠 강에 걸어놓고 그걸 다리 삼아 넌서치로 넘어오고 있었다. 라르비튼의 다리는 부서져 있었고, 마을은 불 타고 있었다. 모즈들은 이미 넌서치는 물론이고 케인스윅까지 포위하고 있었다. 그 때 먼 하늘에서 검은 드래곤 한 마리가 날아와 화이트비가 있는 탑의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카-구아닐." 루티아의 탑 꼭대기에 있던 화이트비가 깨졌다. 멀어서 작게 보였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그 강한 힘이 사라지는 상실감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그녀의 피부를 자극했다. 타냐는 잠깐 시간적인 혼동을 일으켰나 싶었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구아닐이 화이트비를 깨뜨린 게 아니라, 화이트비가 깨진 후 구아닐이 탑에 착지했다. 보호 유리는 발톱에 깨졌으나, 화이트비는 내부에서 다른 이에 의해 깨졌다. 구아닐의 등 위에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 한 명이 올라탔으나,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마법사가 하늘 산맥에 들어올 때 공격해온 마법사였다는 것 정도만 겨우 알 수 있었다. '루터아의 배신자 ' 타냐는 당장 그 뒤를 따라가려다 생각을 고쳤다. 지금은 모즈들에게 공격당하는 루티아 쪽이 먼저였다. 그게 누구든, 배신자를 처단하는 건 나중 일이었다. 타냐는 레미프들이 있는 동쪽 바위산의 가장 높은 곳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 베논을 타고 있는 레미프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었다. 거대한 늑대를 보고 놀란 레미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들러나거나 창을 들이댔다. 타냐는 즉시 인간으로 변해 고대어로 소리쳤다. [나는 루터아의 마법사이며, 라든의 무녀 시나비아의 친구다. 여기 판커틴은 없는가?] 그녀는 자신의 발음이 정확하길 바랐다. 다행히 알아듣는 이가 있었다. [판카틴은 락든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 오지 않았다. 내가 이 군대의 지휘관이다. ] [이름은?] [피거스나이. 그 때 봤던 라두 워그로군.] (피피스나아. 그 때 참던 라투 워고로금.) [원군으로 왔는가?] [라든의 홉트 후딘틴께서 루티아를 도우라고 점괘 없이 명령을 내리셨다.] ‘고마워요, 시나비아.’ 타냐는 속으로 말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멈춰 있는가?] [우리는 새벽부터 루티아의 군대에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질 못 했다. 내려가려고 하면 어느 순간 우린 올라가고 있다.] [마법인가?] [우리 측 와자이브트는 여기 오자마자 살해당했다. 상대편에 엄청난 와자이브트가 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내가 지휘하겠다. 따라와라.] 타냐는 바위산을 뛰어 내려갔다. 그 순간 눈앞이 어두워질 정도로 강력한 힘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소리쳤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늑대의 몸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가볍게 바위 위로 뛰어오르며 그 자리에 있는 보이지 않는존재에게 팔을 휘둘렀다. 바위가 깨지며 뭔가 옆으로 피했다. 타냐는 그것을 따라갔다. 달아나는 줄 알았으나, 그 자는 멈춰서서 타냐에게 푸른 섬광을 쏘았다. 타냐는 맨 손으로 그것을 잡아 부러뜨리며 바위 위에 섰다. 푸른빛의 칼날이 그녀의 몸 주위에 가루처럼 떨어졌다. 그 자는 프보에 족의 여자 레미프였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카구아 같은 매끈한 검은 피부에, 단정하게 등 뒤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녀의 손 위에서 맴돌며 타냐를 겨냥하고 있는 빛의 구슬은 그녀의 눈동자를 더욱 신비롭게 했다. 그녀의 어깨에는 긴 나뭇잎으로 묶은 깊은 상처가 있었다. [뛰어오는 것만으로 내 결계를 깼구나. 루티아의 마스터냐?] [아마 나와 안면이 잇을 것이다.] [어제 새벽 내 마법을 맞은 건 그 얼굴이 아니었는데? 아니, 느낌은 같구나. 하지만 카구아에게 죽지 않았나? 놀랍군.] [난 네가 여기 있는 게 더 놀랍군. 레드워라는 기사의 명령이었나?]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미프가 우그의 명령을 듣다니, 너희들의 기더는 우그에게 지배당하는 쪽으로 가고 있나?] 레미프의 검은 머리가 펄럭이고, 허공에 떠 있는 마법의 빛은 더욱 커졌다. [건방진 우그 년. 한 번의 패배에서 목숨을 건졌자면, 그냥 물러났어야 했다. 어차피 날 죽일 수 있는 우그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뿐이야. 그리고 그는 우리의 동맹이다!] [그렇다면.......] 의외로 타냐는 놀라지 않고 대꾸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그랜드 마스터이다.] 레미프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푸른 빛의 구슬이 타냐의 얼굴 앞까지 날아왔다. 그러나 타냐는 그걸 슬쩍 피했다. 처음부터 그것은 속임수였다. 진짜 마법사라면 눈에 보이는 공격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게 명확하게 보였다. 타냐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바닥에서 그녀를 감싸며 찌르고 들어오는 여덟 자루의 하얀 창이 표적을 잃고 서로 부딪쳐 깨졌다. 타냐는 놀란 눈으로 뒷걸음질치는 레미프의 목 쪽으로 손을 휘둘렀다. 구슬도 없이 만들어낸 타냐의 열기가 공간을 베는 칼로 변해 상대를 치고 지나갔다. 레미프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보호하는 장막을 쳤으나, 양 팔과 목이 떨어져 나간 후였다. 붉은 피가 튀어 보이지 않는 장막의 윤곽을 그렸다. 타냐는 멀찌감치 서서 루터아를 내려다보았다.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그 사이 바위산을 타고 내려간 레미프들이 모즈들의 군대를 향해 휩쓸고 들어갔다. 처음에는 맞서 싸우는 듯하던 모즈들은 그 힘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케인스윅 안쪽에 숨어있었던 루터아의 군대가 빠져나와 거기에 합류했다. 깨진 화이트비의 잔해를 비추는 아침 햇살이 타냐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테일드가 항상 주장해왔듯, 루티아 안에 화이트비가 있는 게 아니라 화이트비가 있는 곳에 루터아가 있었다. 이것은 루터아의 최후인지도 몰랐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모험도 루티아에서 끝나지 않는다.' 타냐의 몸은 다시 늑대로 변했다. 그녀는 바위를 쓰다듬는 높새바람처럼 산을 타고 내려갔다. 루터아의 탑이 가까워했다. 도서명 : 하얀늑대들10(3부 : 하늘 산맥의 마법사) 지은이 : 윤현승 출판사 : 파피루스 출판년도 : 2004년 11월 7일 <지은이 소개/윤현승> 1978년생. 대표작 : 다크문(1999), 헬파이어, 흑호. 싫어하는 것들 : 소주, 여름, 더위, 장마, 영화 보는 도중에 결말 얘기하는 사람, 책 읽고 있는데 결말 얘기하는 사람, 웃긴 얘기 했는데 비웃는 사람 홈페이지 : http://hadeshome.com 이메일 : greathades@hotmail.com <차례> 3. 아즈윈 (1) 길을 잃다 (2) 함정 (3) 세르메이의 부탁 (4) 금지된 구역 (5) 두 남자를 기다리며 (6) 횃불 두 개의 시간 동안 (7) 기억나지 않는 일 4. 사-나딜 (1) 하늘 산맥의 연합 (2) 잠을 깨우는 무녀 (3) 사-나딜의 기억 (4) 타치셀 (5) 카-드로크의 악령 (6) 그녀의 싸움 (7) 마법사와 기사와 드래곤 에필로그 아즈윈의 기억 3. 아즈윈 (1) 길을 잃다 그러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할 것! 머릿속에 박혀 있는 첫 번째 좌우명. 모든 원칙에 앞서는 행동 수칙. 아, 그런데....... 누가 이 말을 해줬더라? 이제 비를 피하는 것도 지겨워 좌악좌악 쏟아지는 물줄기를 얻어맞으며, 아즈윈은 그 넓디넓은 푸른 하늘 중에 하필 머리 위만 시커멓게 자리 잡고 있는 구름을 원망했다. 아니, 상대를 잘못 잡았다. 원망할 건 이 숲이다. 이 산이다. 없다가 나타나는 건 구름 잘못이 아니라, 만드는 이 산 잘못이다. 그렇다고 해두자. 멍청히 비를 맞으니 마냥 자신이 멍청해지는 것 같아, 그녀는 웃옷을 벗었다. ‘이왕 비 맞을 거 샤워나 하자.’ 옷을 벗으니 비가 그쳤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침묵으로 삿대질했다. 그리고 그녀는 젖은 옷에서 빗물을 짜내고 짧게 묶은 머리를 풀어 흔들었다. 얼마 전가지만 해도 한 갈래로 땋았다가 두 갈래로 땋았다가 말 꼬랑지처럼 늘어뜨리기도 하면서 가지고 놀던 머리였지만, 지금은 목 뒤만 간질였다. ‘거울이라도 보면 꼴이 가관이겠군.’ 눈 코 입만 겨우 구별하는 빗물 고인 웅덩이로 익숙하지 않은 짧은 머리를 다듬는 건 힘들었다. 제대로 된 빗도 없었다. 며칠 전 그 재수 없던 밤에 태워먹고 볼품없이 잘라낸 머리가 영 어색했다. 그녀는 젖은 옷을 어깨에 걸치고 반나절 동안 헤매다 찾아낸 고목 아래의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속 편하게 낙엽을 쌓아놓고 그 위에 누워 자고 있는 게랄드가 있었다. 아즈윈은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몸을 닦았지만, 수건도 이미 젖은 거라 개운치가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고 웃옷을 벗은 채로 게랄드 옆에 누웠다. “아직 비 오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게랄드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왔다, 안 왔다 그래.” “일상적인 하늘 산맥의 아침이군.” “뜨거운 차와 함께 아침식사라도 대령하라는 투로 말하네. 우리 헤맨 지 거의 일주일째인 건 아는 거냐?” “예~, 압니다. 식량이 거의 떨어졌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아침 식사 얘기는 안 했잖아.” 게랄드는 몸을 뒤척이며 옆으로 누웠다. 아즈윈은 그의 어깨를 꼬집었다. “윽, 왜 꼬집어?” 부릅뜬 게랄드의 눈을 팔짱 끼고 노려보는 아즈윈의 드러난 가슴에서 멈췄다. 당당하게 드러낸 쪽을 창피하게 만드는 노골적 당당함이 그의 눈동자에서 반짝였다. “그대의 죄를 용서하노라.” 게랄드가 말했다. “죄? 용서? 못 배운 놈에게 일일이 가르치기도 피곤하다, 자식아. 벗고 있는 여자는 체온으로 덥혀주는 거야.” “난 지금 체온이 딱인데.” “그럼 지금부터 더워지던가!” 아즈윈은 게랄드의 한 팔을 빼앗아, 그 팔을 베고 누웠다. 머리카락 닿는 기분이 좋았던지 게랄드도 아즈윈을 끌어안았다. 게랄드가 장난으로 하는 거부는 대체로 흔쾌한 승낙이었다. 이렇게 장난을 치다가도 넓은 가슴에,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심심할 틈 없는 굴곡진 근육을 보면 가끔 선을 넘고 싶은 유혹을 참기가 어려웠다. 자잘하게 상처 많은 얼굴과 남자가 긴 머리 하는 건 질색이라며 항상 짧게 깎고 다니는 머리카락은 각 진 얼굴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졌다. “게리야, 하나만 물어보자.” 그녀는 급소를 피하지 않는 정공법으로 들이댔다. “넌 왜 내가 유혹하면 안 넘어 오냐?” “음, 철학적인 질문이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철학?” “아니야, 됐어. 오랜만에 껴안는 아즈윈이니 이대로 기분 좋은 채로 있으련다.” “그건 나도 동의한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지?” “대답이라. 어디 보자.......” 게랄드는 한참 뜸들이며 기대하게 했다가 말했다. “에이, 말 안 해줘.” “아잉, 해줘.” 어느 쪽이 방패고 어느 쪽이 칼인지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변화무쌍한 공격과 방어는 하얀 늑대들조차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로 공격당한 게랄드는 괴로워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좋아. 말해주지. 유혹에 넘어간 적 있어. 누누이 말하지만 언제나 네가 기억을 못하는 거지.” “이건 또 뭔 소리야!” 아즈윈은 기억 속에서 첫사랑과 첫경험의 남자까지 거슬러 올라가, 머릿속에 있는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떠올려 보면서 버럭 소리 질렀다. 그가 킥킥대고 웃어버리니, 그게 농담인지 진담잊ㄴ지 구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과 자기 사이에 그런 걸 기억하고 못하고는 중요한게 아니라고 여기고, 바로 털어버렸다. 둘은 잠시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편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아즈윈이 먼저 깼다. “먼저 간 친구들은 어찌 되었을까?” “로일과 던멜이라면 해결하고도 남았겠지. 카셀 옆에는 쉐이든이 있을 테고. 세 사람이 실종되고 우리 두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고무적이지 않아?” “그것도 그렇지만, 두 사람 빠진 공백이 그리 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수다쟁이 덩치와 남자에 굶주린 고양이 둘이 빠졌다고 큰일이야 있겠어?” “오호~, 그래. 네가 내 참을성의 끈을 끊었겠다?” 아즈윈은 게랄드의 팔을 젖히고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손가락으로 게랄드의 코를 쿡 찔렀다. “굶주린 고양이? 맞아, 굶주렸다. 야옹! 그럼 잡아먹을까?” 그녀의 가늘게 뜬 눈을 보고 게랄드는 피식 웃었다. “관둬.” 벌써 게랄드의 입술 쪽으로 자기 입술을 가져가던 아즈윈은 고래를 갸웃하고 멈췄다. 그가 방금 지어 보인 미소는 완벽한 거부였다. “정말.......싫어?” “뭐랄까....... 아니, 됐어. 여기서 더 입을 열면 내가 바보 같아져.” “원래 바보면서 뭘 그러냐?” 아즈윈이 은근히 떠보자, 갑자기 게랄드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녀를 쓰러뜨렸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그가 올라타 있었다. 아즈윈은 순간 자기 말실수로 그가 상처라도 받았나 싶었다. 그러나 역시 게랄드는 농담 섞인 어조로 웃어 보였다. “지금도 충분히 널 좋아하고 있어. 너무 좋아지면 곤란해. 그러니까 넘어가자.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게랄드는 그녀의 손을 놔주고 일어났다. “우후, 선을 그어버리는 거냐? 까다로운 녀석.” 아즈윈이 쏘아붙이자, 게랄드는 콧김을 푸욱 내뱉더니 딴소리를 했다. “비 그쳤다. 이동하자.” 게랄드는 옷을 입고 배낭을 메더니 헝겊으로 날을 보호한 도끼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갔다. 혼자 구덩이 속에 남은 아즈윈은 몸에 묻은 낙엽을 털고 엉킨 머리를 긁적였다. “복잡한 놈.” 일주일 전, 폭우가 쏟아진 밤이 지나고 두 사람은 로일, 던멜과 함께 루티아의 마스터 데다인을 따라 하늘 산맥을 오르고 있었다. 아즈윈은 쉐이든이 아니라 자기가 카셀을 호위했어야 했다고 계속 투덜댔고, 데다인은 짜증을 냈다. 아즈윈은 일주일 전을 거의 기억 하지 못했다. 그 일이 일어난 게 하늘 산맥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 이튿날 밤이었다는 것도 게랄드가 말해줘서 알았다. 당시에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마법사 데다인이 기가 팍 죽을 만한 욕을 생각하느라 이것저것 머릿속에 담아둘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마법 도시를 향한다는 설렘도 없이 꿍해 있는 동안 일이 벌어졌다. 그게 그냥 평지였다면, 애초에 던멜의 예리한 감각을 통과하여 기습을 한다는 건 파리가 방금 만들어진 촘촘한 거미줄을 지나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아즈윈 역시 컨디션 좋은 날이면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는 활을 감지하고 피할 자신도 있었지만, 그 숲에서는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결국 두 겹의 거미줄을 통과한 공격이 아즈윈의 발목을 걸었을 때 일이 시작되었다. 뭔가에 걸려 바닥에 엎어진 그녀는 ‘윽’ 하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입에서 새나간 소리는 그녀의 귀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발목에 걸린 밧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있었고, 저항할 여유도 없이 그녀의 몸은 공중으로 휙 떠올랐다. 아즈윈은 바닥의 잡초를 움켜쥐고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밧줄에 이끌려 자기 몸이 날아가고 있다는 상황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에 더 당황했다. 한 발이 고정돼 거꾸로 매달려 위아래가 뒤바뀐 데다가, 몸은 심하게 흔들렸으며, 갑작스레 피가 머리로 쏠리니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침착하게 할 일을 정리했다. 우선 그녀는 짧은 순간에 일이 벌어지느라 절로 멈춰버린 호흡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리고 배에 힘을 모아, 단번에 허리를 구부려 발에 묶인 밧줄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허리에 찬 칼을 빼어 발 아래 밧줄을 단숨에 잘라냈다. 낙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못하고 그녀는 공중에서 몸을 틀었다. 시야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부터 떨어진 건 기적이었고, 균형을 잃은 것을 이용해 몸을 옆으로 굴린 건 천만다행이었다. 뒤로 몸을 피한 후에야 겨우 시야가 회복되었고, 그녀가 착지한 자리에는 창이 세 자루 박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괴한 몇 명이 박힌 창을 뽑아 들었다. 괴한들은 터무니없이 민첩한 그녀의 움직임에 놀라 멈칫했다. 나뭇잎에 가려 달빛이 채 바닥까지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들의 얼굴색을 알 도리는 없었다. 피부가 검다는 건 싸움이 끝난 후에야 안 사실이었다. ‘아이고, 복근이야.’ 아까 밧줄을 자르기 위해 전력을 다해 상체를 구부린 후유증이 뒤늦게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괴한들은 창을 쓰는 게 미숙했다. 창이라면 쉐이든을 상대로 원 없이 두들겨 맞아본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는, 방패를 들 필요도 없는 상대였다.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두 자루 창을 흘려버리고, 세 번째 창을 끝을 부러뜨렸다. 하지만 당연히 들려야 할 부러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흘린 창은 쳐내고 부러진 창은 손으로 잡아 그 끝에 있는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시야는 회복되었어도 적이 완벽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창끝에 있는 상대를 잡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익숙한 감촉과 함께 피가 좌우로 튀었다. 다시 그녀를 향해 창이 날아들었다. 아즈윈은 보지도 않고 창을 피했다. ‘더 있군’ 아즈윈은 적이 모두 몇 명인지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적은 아즈윈이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찌르고 들어오는 창들을 피하고, 쳐내며, 그녀는 같은 방법으로 한 놈을 더 해치웠다. 여전히 모든 전추는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적들은 더 이상 접근해 오지 못했다. 아즈윈도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그들의 등에 날개가 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데다가 소리까지 안 나니 답답히 미칠 지경이었다. ‘던멜은 이런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거구나. 이제 놀리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새삼스러운 다짐을 하며 아즈윈은 배낭과 같이,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끌어내렸다. 무겁지 않은 짐이긴 했지만, 거꾸로 매달릴 때부터 덜컥거리며 신경 거슬리게 했던 물건을 내려놓으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 어둠 속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소리로 적을 포착하는 것에 익숙한 그녀는 약간 반응이 늦어 그것을 방채로 완전히 막지 못했다. 불꽃이 터졌고, 그녀는 창을 든 무리 쪽으로 무방비로 나가떨어졌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머리 한쪽이 불탔으나, 그걸 신경 쓸 틈도 없이 그녀는 날아드는 창을 막아야 했다. 여러 자루의 창이 어깨를 스치고 허벅지를 스치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겨내고 포위망을 빠져나오니 또 불덩어리가 날아왔다. 아즈윈은 방패를 휘둘러 불덩어리를 쳐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그 폭발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뒤로 밀려났다. 남든 적들은 절묘하게 그 순간을 노리고 창을 찔렀다. ‘우와, 이거 죽겠네.’ 아즈윈은 어둠을 배경으로 감춰진 창을 모두 막을 자신이 없었다. 어디에서 불덩어리가 날아오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순간 귀를 막았다가 갑자기 열어놓은 것처럼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그와 동시에 어둠 한쪽 끝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불덩어리가 날아오던 쪽이었다. 그 방향에서 도끼 한 자루가 횡으로 회전하며 날아와 아즈윈에게만 신경 쓰던 적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들이 놀란 틈을 이용해 아즈윈은 나머지 적을 둘 해치웠고, 달아나는 녀석을 향해 창을 던져 등을 맞췄다. 남은 녀석들은 더 공격도 못하고 모두 달아나버렸다. 어둠 속에서 게랄드가 나타나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주워들었다. 그는 피 묻은 날을 다끙며 말했다. “너도 걸려들었냐?” “내가 먼저 걸려든 거야.” 아즈윈은 배낭과 방패를 다시 짊어졌다. 뒤로 땋은 머리는, 털면 재가 되어 떨어질 만큼 타버렸다. 그녀는 우울하게 말했다. “갑자기 누가 내 발목을 잡아채더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들리지도 않았나 봐.” “나도 똑같았다. 우연히 한 놈을 죽였더니 갑자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군. 마법사였나 보더라.” “소리를 차단해? 정말이지 마법사란 족속들은....... 우리 이런 놈들이 우글거리는 루티아로 가는 거냐? 근대 예네들은 뭐야? 얼굴도 검고, 날개도 달렸고....... 귀는 늘어졌네. 이거 혹시 하늘 산맥의 엘프들 아니야?”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냐? 관두고, 빨리 일행이나 찾아 쫓아가자. 이런 숲에서는 던멜도 우리 기척을 못 찾을 거야. 설마 없어진 것도 모르려나?” “일단 여기서 벗어나기나 하자. 그 놈들 또 몰려올 지도 몰라.” 두 사람은 서둘러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며 달렸다. 그러나 일행이 걸었던 길은 나오지 않았다. “이 쪽이야.” “아니, 저 쪽이야.” 게랄드가 한쪽을 가리켰지만, 아즈윈은 그 반대편이라고 확신했다. 마치 일행이 앞에 보일 정도로 강한 직감! “이 쪽 아냐?” “저 쪽이라니까.” 그때 게랄드의 말을 들었으면 어쩌면 일행을 따라갔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그 후 게랄드가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아즈윈은 무척이나 감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그때 한 말에 크게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사실 그 뒤로도 아즈윈은 몇 번이나 ‘이 방향이 맞다, 내 머리카락을 건다.’ 라고 말하고 앞서 걸었을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뒤로 땋은 머리를 잘라버렸다. 물론 내기에서 패배했다는 뜻에서 장렬한 화형식까지 치러주었다. 그렇게 헤맨 시간이 대충 닷새 째 되던 날, 마침내 게랄드가 말했다. “저......., 우리 길 잃은 거 아닐까?” 하얀 늑대가 된 이후, 아즈윈은 처음으로 게랄드를 볼 낯이 없어졌다. “코무 두.......” 원래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시간관념이 희박해지긴 하지만, 이제 일행과 헤어진 게 며칠 전인지도 계산이 안 됐다. 그 와중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룬....... 무.” 그녀가 흐릿한 눈으로 같은 말을 두 번쯤 반복하자, 자다 일어난 눈을 깜빡거리던 게랄드가 심각하게 물었다. “혹시 하늘 산맥의 영향으로 언어를 잃어버린 거냐?” “닥쳐봐.” 아즈윈은 다시 그 말을 반목하고서 물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 거 같냐?” “애초에 그 이상한 말은 어디서 들은 거냐?” “꿈에서.” “그딴 개꿈, 잊어버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는 열 개 국어도 들어봤다.” “그게 아니야. 요새 잘 때마다 이 소리가 들린단 말이야.” 게랄드는 흠칫 놀랐다. “유령?” “으이그.” 둘은 다시 짐을 메고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방향도 못 잡고 있으니 이동이라 봐야, 무작정 걷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혹시 말이다, 우리 그 싸움이 끝난 다음에 그냥 그 자리에 있었으면 데다인이 구하러 오지 않았을까?” 아즈윈은 여전히 자기가 이 일을 저지를 거라 자책하며 울었다. 게랄드가 앞서가며 픽 웃었다. “원래 길치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자는 주장은 강한 법이지.” 아즈윈은 아무 말도 못했다. 게랄드는 미안한지 덧붙였다. “이제 그런 말 하지 마. 어차피 하늘 산맥에서는 누구나 길을 잃는다잖아. 내가 말한 방향으로 갔어도 옳은 방향은 아니었을 거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2차 공격을 받았을 거고. 아무렴 며칠이고 헤매겠냐? 뭐가 나와도 나오겠.......”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게랄드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눈 앞의 이상한 흔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 봐. 나왔지?” 굉장히 거대한 발자국이었다. 게랄드가 바닥에 푹 파인 부분에 손을 대보니 두 뼘은 족히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 게랄드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아즈윈은 발자국의 형태를 유심히 살피고 답했다. “집채만 한 네 발 달린 도마뱀? 아니, 발톱이 찍힌 걸 보면 새 족에 가깝군. 이런 나무 우거진 곳에 이런 몸집으로 살고 있는 놈 일리 없으니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란 뜻이고, 옆에 다른 놈이 따라가고 있군.” 게랄드는 아즈윈이 발견한 작은 발자국에도 손바닥을 대보았다. “이 큰 놈에 비교하면, 이 쪽은 작은 동물이군. 호랑이 같은 건가?” “귀동냥으로 들은 거긴 하지만, 하늘 산맥에는 육식 동물이 없다고 했어. 하지만 모르지. 이 대륙만큼 넓은 숲에 대해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알겠냐?” “어느 쪽이건 이상한 동행이군. 드래곤이라도 되나, 이 큰 놈은?” “드래곤이라.......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쩔래?” 아즈윈이 먼저 물었다. “딱히 방향을 잡고 걷던 것도 아니었잖아. 하늘 산맥에 사는 동물이라면 적어도 우리처럼 같은 자리 맴도는 짓은 안 하겠지. 따라가 보자.” “하지만 이런 놈들이 무더기로 사는 둥지에 도착하면?” “이렇게 큰 놈이 무리 지어 산다고 생각해?” “보통 대형 육식 동물은 혼자 생활하지.” “육식 동물이라고 확정?” “아아, 재미있겠군.” 둘은 웃음을 터트렸다가, 동시에 우울해져 입을 닫았다. “일행을 놓쳤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말해도 돼, 게리?” 아즈윈이 말했다. “하지마!” 게랄드는 듣기를 거부했다. “우리 어쩌면 하늘 산맥에서 평생 살아야 될 지도 몰라.” “하지말래도 할거면 왜 물었어? .......근데 어째서?” “하늘 산맥의 동물을 사냥하러 간 최고의 사냥꾼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던가, 자기의 길 찾기 능력을 시험하던 레인저가 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왔다던가 하는 얘기. 그 레인저가 노인이 되어 돌아온 후 이렇게 말했대. ‘내가 30년 동안 돌아다니며 하늘 산맥의 지도를 그렸더니 사실은 그게 산 두 개를 번갈아 돌아다니며 그린거였다. 어쩐지 산들의 패턴이 두 가지뿐이더라니.......’ 그 두 가지 얘기에 근거하면 우리는 평생 여기에서 살 수도 있어.” 아즈윈의 이야기에 게랄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태초에 두 신이 계셨도다. 한 신은 여자를 창조하였고, 또 한 신은 남자를 창조하여 이 땅 위에 내려 보내 자손을 낳아 퍼트렸나니, 그 둘의 이름을 아즈윈과 게랄드라 하였노라. 그럼 좀 편해지겠어? 루티아의 일은 로일과 던멜에게 맡기고, 아란티아의 일은 쉐이든과 카셀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곳에서 모험이나 즐기자. 혹시 알아? 삼십 년 후에 아란티아 돌아가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 ‘내가 하늘 산맥을 삼십 년이나 헤맸지만, 아즈윈의 육체를 탐험하는 것만큼 즐겁지는 않더라!’ 가자. 하얀 늑대 두 마리의 마지막 모험지가 하늘 산맥이란 건 차라리 극적이지.” “좋지! 그 첫 단추로 집채만 한 육식동물이란 건 더욱 극적이지.” 둘은 열심히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게랄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었다. 아즈윈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이걸 모험이라 여기니 부담이 줄긴 했지만, 웃을 건 또 뭐냐?” “그 두 사람은 훗날 그 발자국을 쫓아가게 된 걸 크게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여기에 붙여주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또 안 웃긴 얘기하고 혼자 웃는다.” 하지만 아즈윈은 웃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 고민할 시간 동안 움직이자. 그러니 지금은 발자국을 따라가자. 아즈윈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게랄드를 따라 걸었다. (2) 함정 발자국은 계속 일렬로 이어지고 이었고, 저녁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해가 지는 방향을 발견한 후에야 둘은 지금까지 걸어온 방향이 서쪽이었음을 깨달았다. 아즈윈은 깊이 신음했다. “아무래도 몹시 수상해진다?” “뭐가?” 게랄드는 느긋하니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이 발자국, 우연한 발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거든.” 게랄드도 진지하게 고민해보다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우연이다만?” “일단 그 발자국을 발견하기까지 길 안내한 건 나 아니였냐?” “그렇지. 계속 네가 우겼지.” “우긴 건 아니야. 너도 동의했잖아.” “네가 하도 자신 있게 주장해서 따른 거잖아. 나모 모르긴 마찬가지였고.” “그래, 가끔 같은 길을 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식으로 안내한 게 이상하게도 서쪽이 아니었다 해서.” 게랄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태양을 보고도 남쪽을 못 찾는 바보가 되어있긴 했지만, 한참 가도 보면 적어도 석양을 정면에서 보긴 했지. 오오, 잠깐 있어 보자, 진짜 그렇구나. 그리고 이 발자국을 발견했다?” “맞아.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거지.” “뭐, 수상한 걸로 치자면 처음 우릴 공격한 그 놈들부터지.” “죽인 놈들을 더 살펴봐뒀어야 했나? 아니면 쫓아가던가.” “그럴 정신이 없었었잖아.” 둘은 얘기를 하면서도 걷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단 그 관경이 진실인지 확인해 볼 양으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하늘 산맥의 마력이 신기루를 만들어 낸 게 아님을 확신한 후에야 돌은 더 접근한 후 몸을 바닥에 밀착시켰다. 흔적의 끝에는 마을이 있었다. “오호라, 하늘 산맥 한 가운데에 마을이라!”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게랄드가 말했다. 언뜻 보면 통나무를 꼬마들 장난 쳐놓은 것처럼 쌓아놓은 구조였는데, 자세히 보면 나름대로 규칙을 가지고 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집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통나무 틈이 꽤 넓어 통풍에도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집들이 가운데 과장을 포위한 듯 둥글게 펼쳐져 있었다. 그 한 가운데 통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박혀 있었다. 계속 머리위에 나무를 두고 이동해 오던 두 사람은 오랜 만에 탁 트인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고 있을 만한 상황은 못 되었다. 그 나무에는 여자 하나가 밧줄에 묶여 있었다. “우리의 행동 방침을 정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새로운 모험이라 생각하며 거대한 짐승의 발자국을 쫓아오던 우리가 ‘만약 하늘 산맥에 있다면 그건 신들의 정착지일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마을을 발견했고, 느닷없이 그 마을 중앙에 온 몸으로 ‘구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여자를 봐버렸다. 어째야 하냐?” 게랄드는 당황한 나머지 횡설수설했다. 먼저 횡설수설할 기회를 빼앗긴 아즈윈은 대신 진지해지기로 했다. “구해줄 만한 상황을 아닌 것 같지 않냐?” “구해줄 만한 상환인 것 같지 않냐?” 게랄드가 난처한 얼굴로 되물었다. 둘은 다시 묶여 있는 여자를 살폈다. 얼마나 오래 묶여 있었는지, 머리는 물론이고 두 다리도 기운 없이 축 늘어져 매달려 있었고, 멀리서 보기에도 몹시 힘들어 보였다. 얼굴은 두 사람들 공격해온 그 검은 피부의 엘프들과 같은 색이었다. 묶여있는 기둥에 눌려있긴 해도 짙은 갈색의 날개도 있었다. 뒤로는 허리까지, 앞으로는 배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가 탐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런 얼굴에, 여자에, 묶여있는 모습을 보니 말라 생각나서 구해주고 싶은걸.” 게랄드의 말에 아즈윈은 신중히 대꾸했다. “말라라면 저런 애처로운 포즈로 묶여있지도 않았겠지. 보고 있자니 가슴 아프긴 하지만, 우린 저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쟤네들은 우리와 풍습도, 언어도, 종족도 다른 애들이야. 저 여자가 마을 죄인이면?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거룩한 행사라면? 시집 간 처녀 첫날밤 티르는 방식이면 어떻게 하냐?” “하긴....... 말라가 그러는데, 물 건너 몇 달 배로 가면 신혼 첫날밤 신랑 발바당을 몽둥이로 후려치는 이상한 나라도 있다더라.” “모험을 찾아 발자국 추적해온 건 사실이지만. 아무렇게나 끼어드는 건 민폐지.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날 어두워지면 내가 한 번 접근해 볼게.” “접근한 다음에?” “물어보지, 뭐. 풀어드릴까요, 아님 그냥 갈까요?” “그 말 못 알아듣는 쪽에 내 도끼 건다.” 둘은 우선 밤이 되길 기다렸다. 거의 바닥 난 마른 식량을 긁어모아 마지막 식사를 끝마친 후, 받아둔 빗물을 마셨다. 가끔 얼굴색 비슷한 엘프들이 집 밖으로 나와 서성대긴 했지만, 광장에 묶인 여자에게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지나치게 조용하고 인적도 드물었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아즈윈은 실제로 저것이 이 쪽 종족들의 풍습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들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지만, 분위기는 결코 유쾌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둘은 나무 아래에 있어 살짝 젖는 것에 불과했지만, 광장에 묶인 여자는 굵은 빗줄기를 계속 맞아야 했다. 처음에는 꿈틀대며 빗물을 조금이나마 털어내던 그녀는 곧 그것도 멈췄다. 저대로 죽는 건 아닐까 아즈윈은 조마조마했다. 횃불이 모두 꺼지고, 광장은 완전한 어둠에 싸였다. 비가 그치면 또 횃불을 켤지 모르니 차라리 지금이 낫겠다 싶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배낭에서 긴 천을 꺼내 두 겹으로 접었다. 옷을 벗고 천으로 가슴을 조인 후 게랄드 쪽으로 등을 내밀었다. 게랄드는 뒷 매듭을 묶어주면서도 물었다. “왜?” “항상 묶어줬으면서 왜 물어? 출렁임 방지다.” “전투가 아니면, 굳이 안 하잖아.” “해야 할 것 같아. 예감이 안 좋아.” “그 예감으로 여기까지 끌어온 게 누구시더라?” 아즈윈은 고정된 부분을 몇 번 움직여 편하게 한 후 심호흡을 길에 했다. “어쩔 때는 가슴이 너무 불편해.” “하긴. 칼 쓰는 여자 치고는 좀 크지. 용병 시절 봤던 여자들은, 내가 싸움을 위해 일부러 줄였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작았는데....... 하지만 너도 평균으로 치면 좀 작은 편 아니냐?” “내비둬~. 난 대신 모양이 예쁘잖아. 간다, 뒤를 지켜줘.”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바로 후퇴해라.” 게랄드도 도끼날에 싼 헝겊을 풀어두었다. 아즈윈은 젖은 흙바닥을 미끄러져 내려가 마을 변두리에 도달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이 숲은 감각에 의존해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곳이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모두 체크해 보고 아전하다고 생각되자, 그녀는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낮은 자세로 칼을 찬 허리에 손을 대고 뛰었다. 고인 빗물을 밟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묶인 엘프 여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 “어이. 아직 살아 있냐?” 아즈윈이 물었다. 그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달빛 하나 없어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대충 눈빛이 맑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음, 아직 살아 있군. 혹시 우리 말 알아? 알아들어?” 아즈윈의 말에 그 엘프는 몹시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계속 고래를 갸웃거리다가 작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빈! 드라즈 아즈 아이 드빈.] “못 알아듣는 쪽이냐? 목소리는 죽여주게 좋긴 하지만, 뭔 말인지 알아야지. 우리 쪽 말 전혀 몰라?” 아즈윈은 답답해하며 중얼거렸다. [드빈! 드빈!] “드빈? 그게 무슨 뜻이냐? 네 이름이냐?” [베프! 드라즈 아즈 아이 드빈.] “너무 흥분하지 말고, 통성명부터 하자. 내 이름은 아즈윈이다. 아!즈!윈! 넌 이름이 뭐냐?”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일부러 천천히 말을 했으나, 그 엘프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젖은 머리의 빗물이 튀었다. 약해지던 빗줄기는 금방 사라졌고, 구름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약간의 별빛과 달빛이 주위를 밝히는 순간, 갑자기 주위에 다른 불빛이 생겼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켜지는 횃불이었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그 마을 주민들이 언제 모였는지 광장을 호위하고 있었다. “아! 너네 언어 하나 배웠다. 드빈, 그거 함정이란 뜻이지?” 아즈윈은 허탈하게 웃었다. 칼을 들긴 했지만 주위에 워낙 숫자가 많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여기서 잡혀주면 말도 안 통하는 이 이방인을 살려둘 것 같지 않았다. “너 구해주는 건 실패한 것 같다, 미안.” 아즈윈은 그녀를 돌아보며 미소 지어 주었다. 횃불에 젖은 머리 반사되면서 보이는 엘프 여자의 연약함에, 등을 돌리는 게 꼭 죄 짓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시간 되면 다시 시도해 보겠다. 그때 왜 묶여있었는지 이유나 듣자.” 아즈윈은 왔던 방향으로 뛰었다. 이미 그녀의 앞에는 검은 얼굴의 엘프들이 창을 들고 잔뜩 있었고, 다른 곳을 포위하고 있던 엘프들도 그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믿는다, 게랄드!” 아즈윈은 소리 지르며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향해 무수한 창이 내리 꽂혔고, 그녀는 몸을 회전시키며 날아오는 창을 모조리 막았다. 부러진 창날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고, 놀란 엘프들은 뒤로 물러났다. 그너라 게 중 한 명은 물러나지 않았고, 놀랍게도 아즈윈의 칼을 막기까지 했다. ‘윽!’ 계속 밀어붙이려던 계획이 어긋났다. 그때 거의 동시에 아즈윈의 전진 방향에 있던 엘프들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들을 베고 뒤에서 나타난 건 게랄드였다. 그는 상대의 창을 빼앗아 대여섯 명이나 되는 엘프들을 뚫고 아즈윈 쪽으로 달려왔다. 아즈윈의 칼을 막았던 엘프가 깜짝 놀라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고, 빈틈을 발견한 아즈윈은 그의 목을 베어 쓰러뜨렸다. 놀랍게도 그 순간 다른 엘프들은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갑자기 공격할 의지를 잃은 그들은 방금 죽은 엘프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응? 어째서?’ 얼결에 머뭇거리던 아즈윈의 손목을 잡고, 게랄드는 뻥 뚫힌 길을 내달렸다. 당황한 엘프들이 뒤늦게 두 사람의 뒤를 쫒아왔다. 한 시간 넘게 주의를 헤매며, 달리고, 쫓아오는 엘프들과 싸우느라 둘은 땀에 흠뻑 젖었다. 아즈윈은 나무에 올라가 근방을 돌아보고는 겨우 안도했다. “따돌렸나 보다.” 그녀는 나무에 기대며 털썩 주저앉았다. 게랄드도 지쳤는지 나무에 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징한 놈들. 묶어놓은 여자한테 말 한 마디 걸었다고 그렇게 살벌하게 쫓아 오냐.” “엄청 중요한 여자였나 보지. 아니면 우리가 달아나면서 본의 아니게 죽인 동료들 복수를 위해서 쫓아온 건지도 모르고.” 아즈윈은 ‘본의 아니게’ 라는 말을 강조했다. “어쩔 거냐? 또 구하러 가?” “고민 좀 해보자. 나도 모르게 또 구하러 가겠다고 말해버렸거든.” “어차피 못 알아들었을 것 아니야?” “것도 그러네. 하지만 기사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왜 약속은 하고 그래?” 게랄드도 아즈윈의 옆에 앉아 두 다리를 폈다. “여하튼 뭘 하더라도 좀 쉬었다가 하자.” “그러자.” 아즈윈은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두 사람의 무릎을 덮었다. 피곤해 잠깐 잠들었다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둥그렇게 두 사람을 향하고 있는 창만 열두 자루를 넘었고, 뒤에서 경비처럼 서 있는 검은 피부의 엘프들은 대략 스무 명 가까이 되었다. 나무 뒤 안 보이는 쪽에도 더 있는 듯했다. “번갈아 가며 잤었어야지.” 게랄드가 눈만 깜빡이며 말했다. 아즈윈은 다리를 덮은 모포 안쪽에 버릇처럼 쥐고 있는 칼을 확인했다. 게랄드도 나무에 기대어 놓은 도끼 쪽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으나 약간 몸을 뒤척이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둘은 꼼짝 않고 있었다. “왼쪽 셋은 내가 벤다.” 아즈윈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을 이었다. “오른쪽 둘과 나무 뒤의 하나는 네가 맡다.” “그 다음 포메이션은?” “없어도 돼. 하지만 저 녀석들이 먼저 움직일 때까지 움직이지 마. 포위만 한 걸 보니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아즈윈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마을에서 공격해온 엘프들과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다른 녀석들인가?’ 어둠 속에서 본 거라 옷 모양 같은 건 충분히 헷갈릴 수 있었으나, 창의 모양은 명백히 달랐다. 자루에 붉은 실을 달아놓은 것이나, 폭이 넓은 날을 쓰는 거나, 길이도 훨씬 길었다. 그 무리들 사이로 척 봐도 이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엘프 남자와 전날 밤 마을 중앙에 묶여있던 여자가 다가왔다. 무리의 리더는 피부는 검지만 짧게 자란 수염과 짧은 머리카락이 모두 하얘, 머리까지 검은 다른 녀석들과 눈에 띄게 달랐다. 그 남자는 다른 엘프들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두 사람을 겨냥하고 있던 창이 물러났다. 옆의 엘프 여자가 아즈윈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수 웃었다. “풀려났군.” 아즈윈도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 덕분에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흰 수염의 엘프가, 알아듣기 곤란한 높낮이이긴 하나,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아즈윈은 그 말투를 알아듣고 놀라 대꾸했다. “그거 가넬로크 남쪽 지방 사투리네? 아, 사람 말 할 줄 아는 걸 더 놀래야 하나?” 깊은 주름을 만들어내며 그는 노인다운 품위 있는 웃음소리를 냈다. “당신들 쪽에도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도 있습니다. 저는 가넬로크 남쪽 지방 마을에 사는 노인에게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렇군. 대충 짐작이 가. 어렸을 때 바보 같은 하늘 산맥 전설은 다 그런 동네 할아버지들이 해주곤 했지.” “제 이름은 론틀로스, 라루튼의 군대를 이끄는......., ‘푸푸바이’입니다. 당신들이 시선을 끌어주어서 우리의 ‘바푸쿠즈’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푸쿠즈의 기더가 두 우그를 이끌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지만, 설마 그대로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가넬로크 사투리 억양에도 적응하기 바쁘던 게랄드는 한꺼번에 쏟아지는 새로운 단어에 인상까지 찌푸렸다. “이봐, 당신 이름이 론틀로스고 당신이 라루튼이라는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가진 엘프라는 건 알겠지만, 나머지는 뭔 소리야?” “으음, 사과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안 쓴 지 거의 십 년 가까이 되다 보니 말을 하기가 쉽지 않군요.” 론틀로스는 말을 더욱 천천히 했다. “저는 라루튼의 군대를 모두 총괄하는 지휘관이며, 라루튼의 홉트를 보좌하는 신하입니다. 홉트는 여러분들의 언어로 왕이라 할 수 있겠군요.” “당신 직책이 푸푸바이라 했으니, 장군쯤 되나?” 아즈윈이 유추해 물었다. “아, 매우 유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되겠군요.” “그럼 바푸쿠즈는 뭐야?” 아즈윈은, 조금 피곤한 듯, 그러나 억지로나마 미소 짓고 있는 엘프 여자를 바라모여 물었다. “바푸쿠즈란 홉트의 따님을 칭하는 단어입니다.” 게랄드도 마침내 이해하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우리가 라루튼이라는 나라의 공주님을 구하려다 함정에 빠졌는데, 그 틈에 원래 그 함정에 빠졌어야 했던 라루튼의 장군께서 구해버리셨구만?”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때?” “기더......., 운명대로 바푸쿠즈께서 우그, 즉 여러분들 인간과 엮이게 되어 있다면, 저는 당신들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결국 제 예측대로 여러분들께서 나타나 주셨습니다.” 아즈윈은 이제 모포를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포 안에 감추고 있던 칼을 보자, 병사들이 경계하는 빛을 보였다. 적의를 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칼을 넣었다. “뭐, 감사하다는 인사를 억지로 하러 올 것까지야 없었지만, 창을 들이대면서 인사를 하는 건 좀 그렇군.” “죄송합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처음 보면 오해를 하고 공격해 올까봐 그런 극단적인 조치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게 더 위험한데.” 게랄드가 말했다. 론틀로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엘프 나라의 바푸쿠즈는 아즈윈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손등을 이마에 살짝 댔다. [자이 드리프 요에, 우그 위바오브] 론틀로스가 그 말을 번역해주었다. “인간의 전사께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인사는 그 정도로 됐고, 상황이 어찌 되었다 들어볼 수 있을까?” 론틀로스가 그 질문에 대꾸하기 전에 엘프의 공주가 말했다. [아즈윈.] 아즈윈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흠칫 놀랐다. 그녀는 아직 이들에게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곧 어젯밤 이 엘프 여자가 ‘함정’이라는 말을 외쳐댈 때 바보 같이 자기를 소개했던 순간을 기억했다. 엘프 여자는 손가락으로 아즈윈을 가리키며 한 번 더 이름을 부르더니, 이번에는 자기를 가리켰다. [세르메이] “세르메이? 흐음, 좋은 이름이네.” 아즈윈은 어깨를 으쓱했다. (3) 세르메이의 부탁 많은 이야기를 통해 아즈윈은 엘프를 레미프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고, 인간을 우그라고 부른다는 것과 그 두 개의 언어가 사실은 견해의 차이로 서로 바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배웠다. 아즈윈은 이 곳의 언어에 맞게 레미프과 우그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자신이 인감임을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워하는 게랄드는 조금 불만이었으나, 대세에 따랐다. “흐음, 그럼 너희들은 드래곤을 신으로 모시는 거냐?” 한창 시장하던 터라 아즈윈은 그들이 내주는 음식을 기꺼이 받아먹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무형의 신을 믿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현실 안에서 존재하는 분을 믿고 있지요. 실제로 그 분들께서는 우리에게 예언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 예언에 따르면 너희들이 우리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는 거지?” “아,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까다롭군요. 제가 인간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또 우리에게 당연할 걸 설명한다는 게........ 좀더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는 신탁을 받지만 그게 정확히 우리가 모시는 수호 드래곤의 신탁이라고는 말을 못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의 기더가, 아니 운명이 당신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당신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도 기더의 한 종류죠. 언제나 반대 현상은 벌어지는 접이니까.” “운이 좋은 거였네, 뭘.” 아즈윈이 결론을 내리자, 론틀로스는 껄껄대고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요.” “어쨌든 너희 바푸쿠즈는......., 어째서 묶여 있었던 거지?” “이것도 이야기 하자면 깁니다.” “우리 시간 많아.” “우리는 없습니다.” “그럼 줄여서 이야기 해.” 론틀로스는 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은 언제나 매사를 밝게 보시는군요.” 게랄드가 크게 웃었다. “만난 지 반나절 밖에 안됐으면서도 아즈윈 성격의 절반을 알아 보는군” 론클로스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레미프들 중에서도 프보에 족입니다. 프보에는 크게 세 개의 나라가 존재하는데, 북쪽의 푸트나이, 동쪽의 타치셀, 서쪽의 라루튼으로 부르지요. 협력하는 사이였느나, 이제 좋지 않은 일로 창을 들이대는 처지가 되었지요.” “인간들 세상에서도 그런 일은 흔히 벌어지지.” “레미프들 세계에서는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아니, 레미프들만의 세계였다면 이런 일은 영원히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의 운명 안에서는요. 우리들이 가진 정보에 따르면 푸트나이의 홉트가 우그와 연합을 맺었습니다.” “우그와 레미프가 연합을?” 아즈윈은 크게 놀랐다. “우리도 어찌 된 일인지....... 몇 해 전이었을까? 푸트나이의 홉트는 자기들의 신인 ‘카-푸타이’를 살해한 ‘이구셀런’이라는, 검은 갑옷과 검은 옷으로 무장한 인간들을 받아들이는 우를 범했습니다. 신을 살해할 정도로 막강한 그들의 힘에 타치셀도 항복하고, 타치셀의 레미프들은....... 아아, 끔찍하게도 자기들 손으로 직접 자기들의 수호 드래곤인 ‘카-드로크’를 살해하였습니다.” “신을 죽였다? 인간으로 치면 매우 철학적인 이야기지만, 레미프들에게는 그게 현실이라 참혹하군. 푸트나이의 그 홉트라는 잦자는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자기들의 드래곤을 살해한 외부의 힘과 손을 잡은 것도 그렇고, 그 협박에 눌려....... 잠깐, 이구셀런? 발음 정확히 한 거냐?” 아즈윈이 물었다.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잘못되었습니까?” 게랄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론틀로스에게 말했다. “혹시 그거 ‘익! 셀런’, 또는 ‘이그! 셀런’ 이라고 발음해야 하는거 아닌가?” “그럴까요? 혹시 아는 우그들입니까?” 론틀로스는 정확한 이름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아즈윈은 침을 삼켰다. “직접 마주쳤다고는 말 못하지만,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기사단이긴 하지.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그 녀석들이 맞는다면 이건 보통일이 아니야.” 신을 둘이나 잃은 레미프들에게는 이미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라루튼의 그래곤은?” 가끔씩만 예리한 게랄드가 툭 내뱉었다. 아즈윈이 뭔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익셀런 녀석들이 드래곤을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거기에 무조건 복종하는 건 우습군. 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정도라면 그 따위 인간 정도는 밟아주면 그만이지.” “현명하신 분이군요. 맞습니다. 깨어있는 드래곤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우그, 레미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드래곤과 싸울 수 있는 건 오직 드래곤뿐입니다. 그러나 푸트나이의 홉트와 연합한 이구셀런은 아니, ‘익! 셀런’ 은 또 다른 힘과 연합하고 있습니다.” 아즈윈은 그가 할 다음 말을 예측했다. “드래곤과 싸울 수 있는 건 드래곤뿐이다....... 라고 했으니, 그럼 놈들이 연합했다는 건 또 다른 드래곤이겠군.” “전설 속에서,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알려진 사악한 검은 드래곤, ‘카-구아닐’입니다.” 인간의 언어로만 대화하는 중에도 그 이름이 언급되자, 주위의 레미프들이 웅성거렸다. 말없이 듣기만 하는 세르메이도 어깨를 움츠렸다. “즈비 레미프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그 이름만으로 공포의 대상입니다. 어떤 드래곤도 대적할 수 없으며, 어떤 무기에도 죽지 않는 파괴의 신이죠. 그는 레미프들에게 산 재물을 요구하고, 다른 드래곤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즈윈은 익셀런이 어떻게 그런 존재와 힘을 합쳤다는 건지 궁급했으나, 론틀로스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바람에 당장 묻지 못했다. “타치셀의 레미프들이 스스로 수호 드래곤을 죽였을 정도로 구아닐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력은 대단합니다. 또 구아닐을 즈비 레미프들의 세계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음, 즈비 레미프라는 건 다른 종족?” “그다지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레미프들이지요. 아마 우그들에게 알려진 대부분의 레미프는 그 쪽일 겁니다. 사실 프보에 족이든 즈비 족이든, 레미프들은 우그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든’ 같은 나라는 ‘우그의 도시’ 와 일 년에 두어 번 교류를 갖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너히는 푸트나이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인가?” “말씀 드렸다시피.......” 론틀로스는 침울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프보에들 중에서도 특히나 외부ㅘ의 교류를 꺼리는 나라입니다. 우그는 물론이고 레미프들과도 거의 관계를 갖지 않지요. 그런 중에 푸트나이의 왕은 그런 사악한 드래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신을 죽이라니요?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회의를 열었고, 모든 라루튼의 레미프들을 불러 공개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더는 싸움에 있다는 결정을 내리고, 수호 드래곤을 깨워 푸트나이와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최후의 한 명까지.” 어색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의 말에 잔뜩 집중하던 게랄드는 이제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고, 아즈윈 역시 타는 목만 축이고 있었다. “우리는 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신탁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우리는 수호 드래곤, ‘카-탄톨’을 직접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거의 언제나 잠을 자고 있는 드래곤을 깨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하신 분은 각 나라에 한 분 뿐인 무녀가 필요하고, 그 분이 바로 여기 계신 바푸쿠즈십니다.” “그래서 그 드래곤은 뭐라고 대답했지?” 아즈윈이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이틀에 걸친 의식을 끝낸 후 탄톨을 깨우고 우리는 지금가지의 일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러나 함께 싸워달라는 요청을 탄톨께선 거절하셨습니다.” “그럴 수가! 어떻게 자기를 모시는 백성들을 버릴 수가 있는 거지?” “탄톨께서 말씀하시길, 자신의 기더 속에 ‘죽음’이 끼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이 일에 개입을 하게 되면 ‘카-구아닐의 힘을 가진 우그’ 에게 살해당할 거라며 우리를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이대루 우리 힘만으로 싸워 봐야 푸트나이의 대군도, 카-구아닐도, 이구셀런의 힘도 꺾지 못할 텐데 무의미한 저항이 될 게 뻔하지요.” “그런데 지금 말하는 일들은 언제 일어났던 거지?” 갑자기 아즈윈이 물었다. “탄톨을 깨우는 작업은 반 년 정도 전에.......” “아니, 그 구아닐과 익셀런의 연합 세력, 푸트나이와 타치셀의 배신.” “햇수를 세는 건 거의 잊었습니다. 5년? 아니, 7, 8년 정도 전인 것 같군요.” 아즈윈이 생각에 잠겼고, 게랄드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계산하는 거냐?” “아무 것도 아니야. 익셀런이 개입 되었다 하기에, 십 년 전 전쟁이랑 끼워 맞추기 한 번 해보려고....... 아,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론틀로스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세르메이께서 마지막 신탁을 제안하셨습니다. 카-탄톨이 아닌 더 크신 분께. 그러자 놀랍게도 기대하지 않았던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어떤 신탁이었지?” “긴 내용이 섞여 있지만 간략히 하자면, ‘다섯 명의 선택된 존재에게 알리나니, 와서 깨우라. 잠을 깨우는 무녀, 가장 빨리 나는 자, 가장 빨리 걷는 자,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 털빛 하얀 늑재. 거기에 두명의 우그가 너희들의 기더에 합류하리라.’ 신탁 치고는 몹시 구체적이었지요. 우리는 우선 이 신탁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홉트도, 가장 나이 많은 와자이브트도,. 이런 목소리의 신탁을 내리는 분이 누군지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반대로 생각하여, 우리가 접하지 않은 드래곤이시자, 드래곤들의 래플홉트신 ‘사-크나딜’ 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중간에 못 알아듣는 단어가 있었으나, 아즈윈은 그걸 물어 이야기의 맥을 끊지 않았다. “어디 계신지는 모릅니다. 누구도 모르지요. 그러나 기더가 우리를 이끈다면 반드시 그 분께 도달하리라 믿었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타치셀에 들렀습니다. 그나마 우리와 가장 친밀하게 교류를 맺었으니까, 다시 한 번 생각을 고쳐먹으라고, 또 카-탄톨께 용서를 구하라고 제안해보았습니다. 성공한다면 우리는 드래곤만큼 큰 원군을 얻게 된다고 믿었으나, 지나치게 순진했던 게지요. 타치셀의 홉트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나마 풀어줄 때 떠나라는 경고까지 덧붙였지요.” “그래도 꽤 인간적인 처사....... 아니, 레미프적인 처사였군.”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돌변했고, 우리는 타치셀의 부속 도시인 브레스톤의 레미프들에게 공격당했습니다.” “그 와중에 세르메이가 잡혔군.”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밤에 바푸쿠즈를 만나 뵌 그 곳이 브레스톤입니다. 그들은 드물게도 전문적인 군대를 가진 마을이지요. 브레스톤 레미프들과의 싸움에서, 신탁에 조건에 맞춰 데려온 네 명의 전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가장 빨리 나는 자에 해당하는, 우리 세계에서 가장 강한 레미프가 활에 맞아 죽었으며, 가장 빨리 걷는 자....... 우리 중에 하늘 산맥의 길을 가장 잘 찾는 레미프도 죽었습니다. 독특하게 머리카락이 하얗고 ‘늑대’ 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소년은 공주를 구하는 싸움에서 희생당했으며, 하늘 산맥 꼭대기에 은거하시는 나이 많은 마법사는 싸움의 초기에 저 쪽 마법사에게 힘을 빼앗겨 숨을 거두셨지요.” 아즈윈은 이미 신탁 받들기는 글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은 말 안 해줘도 대충 알겠군. 세르메이 공주는 아까 그 마을에 잡혀 있었고, 그걸 미끼로 너희 모드를 사로잡을 함정을 판 거였는데, 우리가 ‘우연히’ 끼게 되었군. 그치?” 아즈윈의 말에 론틀로스는 허허 웃었다. “아니, 우연이 아닙니다. 그건 운명 ‘기더’입니다.” “그렇다고 치지.” 아즈윈이 대꾸했다. 그때 내내 귀만 기울이던 세르메이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론틀로스에게 뭐라고 말했다. “세르메이께서 그러신니다만......., 당신은 이 쪽으로 유도된 거라고 하시는군요.” 아즈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개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네 목소리였던 거야. 맞지? 그......., 모두 무, 룬 무. 했던 거.”] “발음은 몹시 부정확하지만, 그건 대충......., 와서 도와달라는 뜻인 듯합니다.” 론틀로스의 설명에 아즈윈은 세르메이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 멍청한 공주 같으니. 그런 건 인간 말로 하란 말이야. 몇 일 거리나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목소리를 날릴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라면 의사소통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공주에게 멍청하다고 했으니, 론틀로스는 화들짝 놀랐으나 세르메이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웃기만 했다. “간다.” “뭘?” 아즈윈이 물었다. “여기까지 얘기 했으면 결론 뻔 한 거 아냐? 괜히 우리 붙잡고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리가 없잖아. 도와달라는 거지?” 론틀로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카-구아닐은 우리의 전설 속에서 하늘을 물들이는 검은 악마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라루튼으로 끝나는 일이 아닌 게지요. 레미프들이 무너지면, 아크랜드의 우그들도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될 겁니다. 라루튼의 푸푸바이, 아니 장군으로서 정중히 요청합니다. 우리들을 도와주십시오.” 게랄드가 결론부터 말해버렸으니, 놀랄 것도 없었고 따지고 들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즈윈은 따졌다. “우리는 루티아로 돌아가야 해. 기다리는 친구들도 있고.” 론틀로스는 아까 아즈윈이 말했던 걸 기준으로 방향과 거리를 계산했다. “루티아라면 라든의 서쪽에 있는 우그들이 도시를 말하는 거겠죠? 반대로 오셨습니다.” “그건 쟤 때문이잖아!” 아즈윈은 세르메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글쎄요.......” “기더니 운명이니 하지 마. 하나 묻자. 왜 하필 나였나? 끝을 잴 수도 없다는 이 넓은 하늘 산맥에서 고작 부를 사람이 나 뿐이었나?” 론틀로스가 그대로 그녀의 말을 전달했고, 세르메이는 즉각 대답했다. “역시 기더라고 하십니다.” “좀 더 그럴 듯한 설명을 해보라고 그래.” “그리고 그렇게 먼 거리를 통과해서 뜻히 전달되었을 정도로 당신과 마음이 잘 맞았다고 하십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난 인간이고 그 쪽은 레미프인데, 맞긴 뭐가 맞아? 그 정도 거리를 반경으로 삼는 원 안의 레미프들 중에 마음이 맞는 레미프가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아즈윈이 무섭게 쏘아붙였고, 론틀로스는 또 바쁘게 뜻을 전달했고, 세르메이는 그때마다 지체 없이 대답했다. “바로 그 점이 기더라고 합니다. 잡히기 전부터, 도움을 준다는 신탁 속의 두 우그를 찾아 무녀의 힘을 썼고 그 와중에 당신이 느껴졌다 하시는군요. 잡힌 후에는 더욱 필사적으로 당신을 끌어당겼고, 바람대로 당신이 왔습니다.” 아즈윈은 세르메이가, 다가온 자신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즉시 ‘함정’ 이라고 말해줬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이미 아즈윈이 와 줄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세르메이의 마법에 걸려든 거로군.” 아즈윈은 불만족스러운 대답에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보자. 그런데 하나만 더 묻자. 우리가 사실 일주일 전인가? 그때 니들과 똑같이 생긴 레미프들한테 기습을 당했거든. 덕분에 일행을 놓쳐 길을 잃었다. 우리는 이 곳에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어. 지금도 머릿속에서 뭔가 하나다 떨어져 나간 것처럼 멍해.” 론틀로스는 긴 시간 동안 세르메이와 그 문제로 상의했다. 그 사이 아즈윈은 던멜식 수화로 게랄드에게 말했다. ‘정말 도와줄 거냐, 얘네들?’ 게랄드도 수화로 말을 받았다. ‘안 그러면?’ ‘나도 딱히 거부감이 일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한 말이 사실이 아니면 어쩌려고? 이를 테면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엄청 고난도의 함정이라든가, 실컷 도와주고 보니 우리 적이었다든가.’ ‘거짓말로 꾸며대기에는 너무 거창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하기에도 조금 꺼림칙해서.......’ 두 사람의 수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레미프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아즈윈은 손놀림을 멈췄다. 그녀는 헛기침을 한 후 론틀로스에게 말했다. “아,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드리기는 어렵군요. 그럼에도 추측하자면, 그들은 브레스톤의 레미프들이고, 그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당신들을 공격했을 거라는 정도입니다.” “브레스톤의 레미프들이라.......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그 쪽 애들이란 걸 알지?” “당신들은 브레스톤에서 가장 빠른 날개, 우리들은 가장 힘이 세고 검을 잘 쓰는 레미프를 ‘빠른 날개’ 라고 표현합니다만, 그 가장 빠른 날개인 카린델프를 죽였습니다. 그때 브레스톤의 레미프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즈비 족의 땅에서 우리들의 기습을 이겨내고 와자이브트를 둘이나 살해한 우그들이다!’ 정황을 종합해보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죠. 사실 우리가 다짜고짜 두 분께 도움을 요청한 것을 당신들이 우리의 기더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있지만, 두 분이 무척 강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유능한 전사들을 잃었고,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거기에 대한 어떤 요구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이래봬도 우린 돌아가면 꽤 고우 관직자야. 별로 바라는 거 없어. 그보다 그 카린델프란 레미프를 우리가 언제 죽였지?” “브레스톤에서 있었던 두 분의 싸움을 지켜보았는데, 당신은 곧장 카린델프 쪽으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때 그 쪽, 게랄드라고 하셨지요? 게랄드께서 후방을 공격했고, 아즈윈 당신은 카린델프를 베었습니다. 카린델프는 뒤에서 공격해 오는 도끼에 놀라 잠깐 방심을 했던 게지요.” 아즈윈은 실소를 터트렸다. 어찌 생각하면 카린델프는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레미프들 중에서 최고라고 자랑할 만한 실력자였을지는 모르나, 하얀 늑대 둘을 앞뒤에서 동시에 상대했으니 살아남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타치셀의 레미프들은 우리가 바푸쿠즈를 구출했다는 것보다 카린델프가 죽었다는 것에 더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카-드로크의 저주’ 라고.......” “잠깐, 잠깐. 이제 됐어. 더 이상 레미프들의 풍습과 언어에 대해서는 강의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세르메이가......., ‘어떤 드래곤’을 찾아가는 걸 도와달라는 거지?” “맞습니다.” “잘 됐네, 길을 잃어 갈 데도 없고, 언제 한 번 드래곤을 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가는 걸로 하지. 일 끝나고 하늘 산맥 빠져 나가는거나 도와줘.”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당신을 항상 한 가지만 빼고 말씀하시는구만.” “허허, 죄송합니다. 우리들 언어는 중요한 걸 뒤에 붙이는 버릇이 있어서, 우그의 언어로 바꾸면 이런 식으로 말을 하게 되는군요.” “ 그 한 가지는 뭐야?”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의 적은 이구셀런과 타치셀 레미프들의 연합이며, 거기에 카구아라는 괴물까지 끼어 있습니다.” “또 새로운 단어 들어버렸다. 카구아? 그런 건 나중에 말하자. 먹을 만큼 먹었고, 쉴 마큼 쉬었으니 출발하는 게 어때?” “당신의 성격은 마치 바푸쿠즈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군요.” 론틀로스는 아버지가 말괄량이 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말했다. 그는 아즈윈이 따질 기회도 주지 않고 돌아서서 레미프들에게 명령했다. 군대는 바로 이동을 준비했다. 게랄드와 아즈윈도 짐을 챙겼다. 아즈윈은 찝찝해 했지만, 게랄드는 벌써 임무를 하나 받은 용병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리 좋으신가?” 아즈윈이 괜히 심술 맞게 물었다. “넌 안 좋아? 옛날에 마스터께서 가르쳐주신 걸 떠올려 봐. 언제고 인간이 아닌 것들과 싸우게 될 지도 모르며 그걸 대비하라고 하셨지? 그거 하나 들어맞았다. 여왕님께서는 ‘하얀 늑대들이 다섯명이나 되었노라, 이제 아란티아 밖에서 싸울 일을 대비하라’ 라고 하셨다. 그것도 맞았잖아. 이제 우리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임무를 갖게 되는 거야.” “말음 멋지군. 그런게 그 멋진 임무가 아무도 안 알아줄 이런 외진 곳에서의 싸움이야? 별로 폼은 안 난다.” “하필 도움을 요청한 게 길 잃은 하얀 늑대 두 마리다. 우리가 운이 좋은 건지, 저 녀석들이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아가 말한 대로 기더란 것 때문인지,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어때? 이래도 신난다고 말 못해?” 아즈윈은 게랄드의 배를 손등으로 툭 치며 웃었다. 일행이 출발했다. 둘은 무리의 중앙에 위치해 걸었다. 게랄드가 물었다. “그런데 대체 그 익셀런 기사단은 어찌 된 거야?” 레미프들의 다른 사정을 제쳐 두더라도, 그것만큼은 그녀의 왕성한 호기심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만난다잖아. 그때 물어보지, 뭐.” “이 친구들은 안 만나길 바라는걸?” “그럼 그때 자기들이 만난 동행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지, 뭐.” (4) 금지된 구역 처음에는 친절하게 챙겨주던 론틀로스도 이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 돌아가 바쁘게 이것저것 하느라 둘을 소홀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 통한다 해도 세르메이는 너무말이 없었고, 다른 레미프들은 두 사람을 약간 적대시했다. 덕분에 둘은 심심해졌다. “하루 온종일 돌아다니는 꼬라지를 보니까 길을 모르고 이동하는 것 같지 않냐?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그러네.” 아즈윈이 말했다. “우리 방향 감각으로 그걸 따질 처지는 못 되지. 어쩌면 직진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구불구불 가는 걸로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라.” 게랄드가 대꾸했다. “환장하겠군. 우리로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거지만, 왜 나는 계속 동쪽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을 보면 대충 동쪽과 서쪽을 구분할 수 있는데도 방향을 못 잡겠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익셀런 기사들이 정말로 이런 델 돌아다니고 있는 거라면, 그 녀석들은 대체 어떻게 방향을 잡고 있는 거지?” 게랄드가 드물게도 생산성 있는 의문을 제기했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마법 도구 같은 게 있음 될까? 데다인이 자기 뒤만 잘 따라오면 문제없다고 한 걸 보면, 마법 같은 게 필요할 거야. 어쨌든 여기는 마법의 숲이니까.” “마법이라는 단어만 붙이면 다 해결이군.” 둘은 똑같이 키득대고 웃었다. 두 사람 옆에 언제 붙어있었는지 모르지만, 세르메이도 따라 웃었다. 둘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즈윈이 게랄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알아듣고 웃은 걸까?” “우리 꼴이 웃겨서 웃은 거야.” “웃겼니?” “다른 사람 보기에는 우린 언제 봐도 웃길걸?” 신기하게도 세르메이는 아즈윈 옆에 붙어있는 걸 좋아했다. 남자가 따라다니는 것은 싫증이 날 정도로 많이 겪었으나, 여자가 따르는 것은 어색한 아즈윈이었다. 그 붙임성 좋은 울프 기사단의 말라도 별로 친하지 않았고, 머릿속에 얼음덩어리 박고 사는 실디레는 그녀에게 말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꼬마 천재는 그녀를 적대시하는 편이었다. ‘당신의 가치관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끔 내뱉는 말에도 가시가 송송 박혀 있었다. 열네 살짜리를 상대로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고 묻는 건 자존심이 상하니, 아즈윈은 그 말을 두고두고 고민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항상 여자에게 인기가 없었다. 동네에서 그녀를 무서워하는 남자들만큼이나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았지만, 여자들은 열에 아홉은 그녀를 싫어했고 나머지 한 명은 증오했다. 기사단에서 생활하며 성격을 유들유들하게 많이 고쳤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런 건 변하지 않았다. ‘개인의 의견에 가슴앓이 하는 건 오히려 너답지 않구나. 시녀들 중에는 너의 가치관과 행동을 존경하는 아이도 많단다.’ 여왕에게 상담해 봤으나, 그런 대답 밖에 듣지 못했다. 쉐이든은 ‘모르겠다.’ 로 일관했고, 로일이나 던멜은 회피했다. 그나마 진지하게 상담을 받아준 건 게랄드 뿐이었다. ‘네가 남자하고만 노니까 그렇지. 언제 한 번 실디레랑 놀아주기라고 해봤어?’ 가만히 있어도 따르는 남자와 노력을 들여야 친해질 수 있는 여자는 사귀는 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거의 한 달이나 지난 후에야 게랄드가 재미있는 소식을 안겨주었다. ‘전에 실디레가 너한테 할 말 있지? 그거 네가 쉐이든 꼬시는 거보고 열 받아서 한 소리였단다.’ 아즈윈은 그 뒤로 다시는 쉐이든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쉐이든은 그 말을 듣고 옆방에 있던 브나타이돌이 자다 놀라서 달려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런 이유에서 레미프의 바푸쿠즈가 따르는 것은, 그녀에게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아즈윈은 걸으며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갑자기 론틀로스가 그녀에게 ‘바푸쿠즈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 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얌전한 여자애가 자기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하니 닭살이 돋았다. 정오가 되자 그들은 점심 겸 휴식을 가졌다. 게랄드와 아즈윈이 자리에 앉자, 세르메이도 옆에 따라 앉았다. 레미프 병사가 그녀에게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내주었다. 몇몇 병사들은 후방으로 정찰을 떠났고, 다른 병사들은 앉아서 쉬었다. “훈련이 잘 돼 있군.” 아즈윈은 딱히 누군가를 지정하지 않고 말했다. 세르메이의 안부를 묻기 위해 돌아온 론틀로스가 그 말에 대꾸했다. “얼마 전에 겨우 시켰습니다. 레미프에게는 원래 군대라는 개념도 희박합니다.” “평화를 좋아해서?” “무기라는 건 우리의 믿은 안에서 허락되지 않은 물건입니다. 즈비 족과 충돌이 있을 때조차 사망자는 거의 나지 않죠. 그런 전투를 많이 치른 타치셀 정도만, 군대라는 개념에 익숙할 겁니다.” ‘그래서 푸트나이라는 북쪽 나라가 타치셀을 먼저 점령했겠군.’ 아즈윈은 복잡한 문제는 제쳐두고, 론틀로스에게 물었다. “우리야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지만 어디로 가는 지나 알고 가자. 그래곤이 사는 곳?” “예. 말씀 드렸듯이, 모든 드래곤들의 마스터이자 래플홉트이신 ‘사-크나딜’ 의 영역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 레미프는 물론이고 다른 드래곤들조차 그 땅을 밟아선 안 됩니다. 불경스러운 즈비 레미프들에게는 그런 성스러운 땅을 보호한다는 의식도 없으나, 우리는 그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탁을 따르는 것이므로 예외적으로 규칙을 어기고있는 것이지요.” “금지된 장소인데가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드래곤을 찾아 헤매는 거다 이거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조심스러웠으나, 론틀로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드래곤을 찾으면 그가 불길을 뿜어내서 모든 일을 해결해주는 거야?” 론틀로스는 아즈윈의 과격한 농담에 망설이며 대답했다. “적당한......., 단어를 못 찾겠습니다만, 그렇지는 않다고 해두겠습니다. 왜냐면....... 적은 드래곤을 죽이는 드래곤인 카-구아닐이며, 사-크나딜은 엄밀히 말해 전투를 하는 드래곤이 아니니....... 아, 역시 어렵군요.” 론틀로스는 이마를 감사 쥐며 말을 이었다. “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즈윈, 당신 말이 옳습니다. 저는 크나딜께서 이 모든 일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기적은 기적만의 힘이......., 뭐랄까, 독립적일 때, 그 힘이 적절합니다. 그러나 기적의 반대되는 힘이 존재한다면 기적은 기적으로 통하지 않는 법이지요.”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즈윈은 손을 저었다. “ 저도 이 이상은 어떻게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내가 말해보지. 원군을 부르러 가는데, 그 원군이 정말로 힘이 될지 의심스럽다, 이거 아니냐?” “그렇게 설명해 버리신다면....... 저도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론틀로스는 나직이 신음했다. 아즈윈이 더 안 물어볼 테니 볼 일 보라고 할 때까지 고민하다가, 식사를 하러 돌아갔다. 게랄드는 팔짱을 끼고 고개 숙여 졸고 있었다. 아즈윈은 그의 옆에 앉아 같이 눈을 감았다가 잠이 오지 않아 도로 눈을 떴다. 그녀는 찬찬히 게랄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반 장난으로 게랄드의 가슴 위에 올라타며 키스하려 했던 일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전부터 재미 삼아 비슷한 시도는 많이 했지만 이번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건 아니었다. 그래서 께끗하게 거절당한게 조금 무안해졌다. ‘너무 좋아지면 곤란하다? 무슨 특별한 의미로 한 말이면 어쩌지?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 ‘게랄드가 다른 남자들처럼 쉽게 마음을 드러내는 녀석이었으면 금방 끈적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 거다.’ 라는 괜한 상상으로 혼자 안타까웠다/ 항상 티격태격하면서도 그런 일로 서로 상처 입지 않으니, 너무 막 대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어른스럽지 못하긴 했지.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대해주면 좀 좋아지려나?’ 그런 건 또 자기답지 못했다. 그럼 나다운 건 뭐냐? 자기가 한 질문에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거 진짜로 내가 게랄드를 좋아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성욕만 가지고 있는 건가? 후자면......., 어이쿠,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어 실디레한테 그런 말 들어도 싸지.’ 자고 있던 게랄드가 눈을 끄게 떴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아즈윈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자는 사람 얼굴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게랄드의 얼굴에 너무 접근해 있었다. 아즈윈은 뭐라 변명할까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물리며 말했다. “게리 얼굴 감상 중/” 게랄드는 픽 웃으며 다시 뒤통수에 손을 받치고 나무에 기댔다. “딴 남자 없으니 아쉬운 대로 하나 남은 거라도?” “아, 그런 건가?” 아즈윈은 뺨에 손을 얹고 허탈하게 말했다 “아니야, 아닌 것 같아. 여러 명 놔둬도 너를 선택할 것 같은 터무니없는 예감이 든다....... 아아, 이런 건 좋지 않아. 내가 널 정말 좋아하는 거면, 그동안의 시간이 아까워져서 곤란해.” 게랄드는 아즈윈의 혼잣말에 웃기만 했다. 후방으로 정찰을 나갔던 레미프들이 급히 되돌아와 론트로스에게 보고했다. 어조도 다급했고, 그 말을 하는 병사들의 얼굴에도 위기감이 서려 있었다. 론틀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리 모두에게 이동 명령을 내렸다. “무슨 일이야, 장군?” 턱에 올린 손을 떼며 아즈윈이 물었다. “뒤에서 우릴 추적해 오는 레미프 군대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선두에는 이구셀런, 아니 익셀런이 둘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레드워드’ 라는 자인데, 익셀런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당할 수 없어요.” 론틀로스는 세르메이에게 뭐라 말한 후 제일 앞으로 달려갔다. 아즈윈은, 팔짱 끼고 누워있는 게랄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런 말 들으면 우리끼리 해버리고 싶지 않아?” “못 당한다잖아.” 게랄드는 부스럭대며 일어나 배낭을 멨다. 세르메이는 발을 굴리며 아즈윈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즈윈은 한숨을 내쉬며 그 손길에 이끌려 걸음을 빨리 했다. “오냐. 간다, 가.” 그녀를 안심시키려 일부러 느긋한 말투를 해도, 세르메이는 참새 날개처럼 짙은 갈색의 날개를 떨며 두려워했다. 아즈윈은 뒤에오는 게랄드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가 아는 익셀런이 정말 이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였냐?” 게랄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나서 물어보자며?” 아즈윈은 그들을 만난 후 정말 물어볼 시간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또 한 차례 비가 쏟아졌다. 비에 젖는 걸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나, 반시간 넘게 그치질 않자 비로소 비 피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론틀로스는 이 비가 흔적을 지워줄 거라고 좋아했지만, 동시에 비 때문에 길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을 염려했다. 게랄드가 하얀 늑대로서 배운 모든 기술을 다 발휘해 도끼로 쳐 넘기는데 한 달 정도 걸릴 만큼 거대한 나무 아래에 커다란 굴이 하나 있었다. 큼직한 나무뿌리가 서로 엉켜 자연적인 지붕을 만들어 놓고 아래에는 푹신한 낙엽이 깔려 있어 일행이 젖은 몸을 말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서른 명의 일행은 낙엽을 쌓아 잠자리를 마련하거나, 동굴 안의 젖지 않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모닥불을 피우거나 하며 밤을 보낼 준비를 갖추었다. 게랄드는 론틀로스의 옆에서 몇 가지를 묻고 답했다. 둘은 꽤 친해졌는데 대화 중에 허물없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빗소리와 함께 어렴풋이 들리는 두 남자의 목소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즈윈의 마음을 흐뭇하게했다. 할 일은 없고 날은 어두워졌으니, 아즈윈은 무릎에 모포를 덮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때 비슷한 모포를 어깨에 걸친 세르메이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눈으로 옆에 앉기를 청했다. “네가 접근하는 건 좋다. 하지만 대체 너는 뭘 믿고 우리 둘을 그렇게 따르냐? 내가 적의 스파이면 어쩌지? 응?” 아즈윈이 자리를 약간 비켜주며 말했다. 알아들을 리 없는 세르메이는 그저 웃으며 아즈윈의 왼쪽에 앉았다. 아즈윈보다 키가 작은 세르메이는 고개를 약간 쳐들었다. “익셀런은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같은 우그인데다 처음 보는 우리를 그렇게 믿어주는 건지 모를 일이군. 론틀로스에게 물어볼까. 아니면 네가 우리말을 배울 때까지 기다려볼까?” 아즈윈은 검은 눈썹 아래 갇힌 푸른 논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귀찮으니 관두자. 잘 자라.” 그녀는 거의 무시한다는 투로 모포를 두르고 휙 돌아 잠들었다. 잠결에 누군가 어깨를 쓰다듬은 기분이 들었다. 게랄드일까 싶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밤중에도 계속 어딘가 다른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따뜻한 손길이 마음에 들어 가만히 있었더니 이번에는 등을 꼬옥 껴안는 기분이 들었다. 푹신한 가슴의 느낌은 여자였고, 이 일행 중에 여자를 다져보면 이건 역시 세르메이였다. 내칠까 하다가 그냥 두었더니 아침가지 그대로였다. 아즈윈은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자기 옆에 누워있는 세르메이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자고 있으면서도 세르메이는 아즈윈의 허리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또래지만 아마도 훨씬 나이가 많은 이 fp미프 공주님이 꼭 여동생 같아 보였다. 그녀는 세르메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세르메이가 눈을 뜨자,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더 자요, 착한 공주님.” 세르메이는 그녀의 허리를 놓고 혼자 돌아누웠다. 아즈윈은 기지개를 펴며 굴을 나왔다. 여기저기에 모포를 둘러쓴 레미프들이 여럿 있었고, 입구에는 게랄드가 앚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에 연기 마시기야?” 아즈윈이 말했다. “좋은 아침.” 게랄드가 연기를 내뿜고 인사했다. “좀 잤냐?” “아까 두어 시간 새우잠 잤지. 오늘은 내가 레미프들과 조를 짜서 불침번 섰으니 내일은 네가 내 자리에 들어가라.” “그러마. 밤사이 아무 일도 없었어?” “있었어. 달이 안 보여서 시간은 모르지만. 느낌상 자정 정도에 저 쪽 숲에서 커다란 괴물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라. 불침번 서는 레미프들이 모두 겁에 질린 걸 보고 물었더니 카구아라는 괴물이라더군.” “그 이름을 론틀로스가 언급했던가? 그게 뭐냐?” “카-구아닐의 무하라더라. 드래곤이랑 거의 비슷한 생김새에 크기도 비슷하지만 날개가 없어 바닥을 기어 다니는 괴물....... 이라고 설명해주더군. 아마 우리가 발견했던 그 발자국의 주인공이겠지.” “그런 괴물도 저 쪽에 합류되어 있는 거야? 왜 이렇게 우리가 붙은 쪽은 항상 그런 적들만 만나는 거냐? 카모르프에서도 안 죽는 놈들이랑 싸워 겨우 살아남았더니.......” “그거야 우리가 이 쪽에 붙어버렸으니까, 전투의 신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저 쪽에 괴물을 안겨주신 게지. 우리가 저 쪽 편이 되었다면, 론틀로스가 카구아를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전투의 신? 그거 용병들이 만들어낸 신이지? 들어본 적 있다.” 아즈윈은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내린 아침 이슬을 손으로 털고 앉았다. 게랄드는 담배를 끄며 말했다. “한때 내가 그 신으로 불리던 몸이었지.” “불의 용벼이라는 건 언제부터 생긴 별명이야? 어렸을 때부터?” “작은 용병 부대의 대장으로 있다가 어떤 일.......” 갑자기 게랄드는 ‘어떤 일’ 이라는 것에 쓸쓸한 눈빛으로 아즈윈의 얼굴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을 계기로 큰 곳으로 가서 큰 전쟁을 치렀지. 그때부터 울프 기사단을 목표로 훈련을 쌓다 보니 좀 과격한 공을 세웠고, 적들에게 내 모습이 무섭게 비춰진 거지. 대충 그게 6년쯤 전이었나 보다.” “6년쯤 전이라....... 내가 용병을 시작했을 무렵에 너는 그 정도 용맹을 떨친 셈이구나.” “아니, 네가 용병을 시작할 당시에는 불의 용병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잘 기억 못하는 시점을.” “하긴 넌 기억력이 부실하지. 만난 사람도 못 알아보는 편이고.” 아즈윈은 게랄드의 의미심장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넓고도 좁은 용병 세계에서 특출 난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았던 건 이상하지. 어디에서 용병 생활 해봤어? 응? 과거 한번 대보자. 이런 얘기 우리 서로 잘 안 했었잖아. 좋은 계기가.” “됐어. 부질없어. 그리고 그런 건 서로 묻지 않기ㅗ 했잖아. 던멜도 자세히 말한 적 없고. 그냥 ‘마스터 퀘이언이라는 사람을 꺾으려 울프 기사단에 도전했다.’ 라고 해 둬. 넌 따로 스승이 있다고 했던가?” “어. 이름은 아직도 모르지만. 그 분은 그냥 자기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어. 하지만 나에게 울프 기사단을 추천할 걸 보니 전직 울프 아니었나 싶어.” “알고 보니 하얀 늑대들이라던가?” “굳이 캐고 싶지는 않아. 앗, 너 교묘하게 내 질문을 피했다?” 게랄드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여왕님께서 항상 주장하셨든, 우리가 울프 기사단이 된 건 아란티아가 스스로를 키기 위한 축복에 의해 글려온 거야. 다른 이유가 있어도 그런 건 사소한 거야.” “대수롭지 않은 이유라도 그런 식으로 숨기면 궁금해지지. 그럼 나중에. 아주 나중에 얘기해줘.” 아즈윈은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런데 밤새 보초 설 동안 이 곳을 적들에게 안 들켰다고?” “안 들켰어. 지금까지는.” 게랄드는 멍하니 뒤에 시선을 둔 아즈윈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뒤에 있나?” “한명” “아군 아니야?” “내가 알기로 일행 중에 저런 놈은 없었어. 뭣보다 저 녀석이 지금 활을 들고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화살을 올려놓고 있거든.” “막을 수 있겠어?” “나무 위에 서 있을 정도로 훈련 잘 된 놈이면 여기서 던진 내 칼 피하려나?” “나더러 죽으라는 거냐?” “둘에 피해라. 하나, 둘!” 게랄드는 옆으로 몸을 구부렸고, 아즈윈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뽑아 던졌다. 그 두 사람의 행동은 상대가 시위를 놓는 것보다 빨랐다. 아즈윈이 던진 칼과 상대가 날린 화살은 허공에서 교차했다. 아즈윈은 몸을 틀었다. 화살촉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던진 칼은 활을 쏜 레미프의 가슴에 박혔다. 레미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멀리서 보초를 서던 병사가 달려왔다. “적이다!” 게랄드가 소리쳤다. 자고 있던 레미프들이 밖으로 나왔고, 밤새 불침번을 서고 이제야 겨우 한숨 자려던 론틀로스도 허둥지둥 달려왔다. “들킨 건가, 게랄드?” 게랄드가 대답했다. “저거 우리 편 아니지?” “정확이 어느 쪽 레미프인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적어도 우리 일행은 아니다. 잠깐 확인해 보지.” 그는 크게 부하들을 향해 뭐라고 말했다. 아마도 인원을 체크하는 것인지 그의 말을 들은 레미프들은 소란스럽게 동료들을 찾았다. 그 사이 게랄드가 말을 이었다. “이 곳을 발견한 후 저 혼자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화살을 쏜 건 아닐 거야. 아군이 근처에 있으니, 자기가 당하더라고 그거 믿고 시도한 거겠지. 아마 나머지 놈들은 벌써 여길 찾았다고 보고하러 떠났을 거다.” 부하들의 말을 전해들은 론틀로스가 말했다. “이탈자는 없군. 둘 다 서둘러주게. 어떤 군대가 우릴 찾아냈든, 병력상 전투를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거다.” 론틀로스는 병사들을 수습해 바로 이동을 준비했다. 아즈윈은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보고 물었다. “밤새 무슨 좋은 얘기라도 했어?” “남자 둘이 모여 밤에 하는 얘기라면 뻔하잖아. 그런 얘기하면 원래 남자들은 금방 친해져. 술이 빠져서 좀 아쉽더군. 여자들은 뭘로 친해지나? 너도 밤새 세르메이 공주와 같이 있었지?” “잤다.” 아즈윈은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으나, 게랄드는 어처구니 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조금 짐작은 했지만, 네가 여자까지 손을 댈 줄은.......” “너 일부러 그런 오해하며 상상하는 거지? 몇 분전에 죽을 뻔한 상황에 그런 건 좀 너무하지 않아? 아무리 야한 걸 좋아하기로서니.......” 아즈윈이 야단치듯 말했다. 게랄드는 오히려 반발했다. “그렇지만 세르메이와 너, 그림 되잖아. 어느 남자 놈한테든 물어봐 봐라. 그런 상상 안 할 것 같아?” 게랄드는 레미프 병사가 내주는 배낭을 어깨에 멨다. 밤사이 친해진 사람은 론틀로스 하나가 아닌 듯했다. 용병 생활을 하며 남자처럼 지낸 적도 많았지만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남자와의 벽이 느껴졌다. 특별히 우정을 쌓을 시간도 없는 사내들끼리도 이상하게 술 한잔이면 이튿날 친구가 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걸 또 가볍다 말하기도 힘든 게, 그 짦은 순간 맺은 우정으로 서로 목숨을 내주기도했다. ‘그럼여자의 우정이란 건 뭐지?’ 애초에 정상적인 여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본 적 없는 그녀였다. 적어도 이동 명령에 황급히 달려와 손을 잡는 세르메이에게 그 해답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오해 받을 만한 상황을 제공하는군.” 아즈윈은 그녀의 손을 잡고 끌려가다시피 다시 걸었다. 게랄드는 여전히 즐거워하며 둘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첫 번째 기습은 이동한지 한 시간도 안 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일렬로 이동하는 일행의 앞을 지키는 론틀로스 쪽도 아니었고, 후방에 서있는 게랄드 쪽도 아니었다. 매복하고 있던 적은 그 중간에서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들은 일행의 앞과 뒤를 끊더니, 둘로 갈라져 전방과 후방을 공격해 왔다. 적들은 어떤 인간의 군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몇 명이냐?” 게랄드가 도끼를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우리 쪽으로 열다섯 이상. 전방으로 스물.” 아즈윈이 나무 사이의 레미프들 숫자를 파악해 외치며, 칼과 방패를 들었다. “세르메이를 지켜라. 내가 앞을 맡는다. 게랄드는 지휘관을 잃은 나머지 당황한 레미프들에게 손짓하며 달려오는 적들을 맞았다. 아즈윈은 옆에 매달려 눈을 동그랗게 뜬 세르메이를 진정시켜 주었다. “걱정 마라. 이럴 때 저 녀석이 앞에 선다는 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구경시켜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즈윈은 정말로 칼 한 번 쓰지 않고 싸움이 끝나는 걸 지켜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게랄드는 이런 우거진 나무사이에서도 자유자재로 도끼를 휘둘러 적들을 유린했다. 심지어 아군조차 놀라서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도끼질 안에 들어온 적은 살벌하게 나가덜어졌다. 잘려나간 팔과 다리와 목이 나무 사이로 튀고 피가 바닥과 나뭇가지를 물들였다. 활을 든 레미프 조차 시위 한번 당겨보지 못했다. 그나마 아군 쪽 레미프들의 견제로 그 궁사마저 달아나지 못했다. 아즈윈은 괜히 세르메이의 눈을 가려줬다. 기습을 당했으되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얼굴과 팔과 도끼에 피를 잔뜩 묻히고 돌아온 게랄드는 들뜨지도 긴장하지도 않고 말했다. “론틀로스 쪽으로 군대가 더 많이 몰렸다. 공주가 그 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보다.” “쫓아가자.” 이번에는 아즈윈이 세르메이의 손을 잡아주고 앞서가는 병사들을 좇아갔다. 중간 중간에 적들의 시체 몇 구와 아군의 시체 몇 구가 길을 안내하는 표지처럼 늘어져 있었다. 다행히 그 시체 중에 론틀로스가 섞여있지는 않았다. 게랄드는 점점 걸음을 빨리 했고, 길을 안내하는 레미프들을 독려했다. 세르메이가 힘들어 뒤쳐지지 시작할 무렵, 게랄드는 걸음을 멈췄다. “흔적이 끊겼어.” 게랄드는 손짓으로 론틀로스가 어디고 간 것 같느냐고 병사들에게 물었다. 뜻은 금방 알아들었으나 게랄드가 못 찾는 걸 그들이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미프 중 하나가 게랄드에게 뭐라고 자기네 언어로 설명했다. 게랄드는 그의 손짓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흩어져서 찾아? 안돼. 적들이 근방에 잔뜩 깔려 있다. 우리까지 흩어지면 안 된다.” 게랄드가 레미프들과 다음 가야 할 곳을 상의하는 동안, 아즈윈은 세르메이를 보살폈다. 그녀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론틀로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아즈윈은 세르메이를 토닥거려 주었다. 남은 병사들의 숫자는 여섯이었다. 게랄드 덕에 후방 병사들은 무사했으나, 기습당하는 순간 세 명이 죽었고, 론틀로스의 흔적을 쫒아오며 죽은 병사들의 숫자는 대강 여섯 명 정도였다. 그럼 론틀로스는 적어도 열 명의 병사들과 함께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게랄드가 길을 정할 수도 없었고, 항상 명령을 듣기만 하는 병사들이 앞으로의 계획을 정할 수오 없었다. 아즈윈은 지휘관은 잃은 병사들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용병 생활을 하며 수없이 겪어본 바 있었다. “세르메이.” 아즈윈은 공주의 양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안내해라.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지?” 세르메이는 그 파란 눈으로 아즈윈을 바라보기만 할 뿐 뭐라 말하지 못했다. 아즈윈은 그녀가 말은 못 알아듣더라도, 뜻은 알아들을 거라 믿으며 천천히 말했다. “안내해라, 드래곤에게!” 세르메이는 아즈윈의 눈을 보며 말했다. [사-크나딜] “그래, 크나딜. 그 드래곤에게 가자.” 세르메이는 곧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아즈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자, 방향이 정해졌다, 게리!” “잠깐.” 게랄드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세르메이가 가리킨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모두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레미프들이 속삭이는 소리였고, 조심스레 낙엽을 밟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론틀로스?” 아즈윈은 작은 목소리로 세르메이에게 물었다. 세르메이는 들려오는 소리에 한참 귀를 기울이더니 놀라며 말했다. [브레스톤.] 아즈윈은 게랄드에게 그 말을 전했다. “적이다.” “싸울까?” “숫자를 모른다. 피하자.” 그녀는 세르메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앞에 서겠다. 뒤를 지켜줘.” 게랄드는 고갯짓으로 대꾸하고, 레미프들에게 손짓으로 설명했다. 병사들은 게랄드의 수신호에 익숙해져 있어 대강 세르메이를 따라가야 한다는 걸 알아들었다. 아즈윈이 세르메이와 함께 소리없이 달리자, 병사들은 자세를 낮추고 따라왔다. 게랄드는 제일 뒤에서 따라왔다. 두 번째 기습은 아즈윈을 향해 시작되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적 병사들은 아즈윈과 세르메이가 지나가는 자리에 밧줄을 걸어놓았고, 둘은 거기에 걸려 넘어졌다. 아즈윈은 넘어지는 순간 세르메이의 손을 놓고 바닥을 한 바퀴 굴러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어있던 병사들이 튀어나와 엎어진 세르메이를 향해 창을 치켜들었다. 아즈윈은 거의 방향도 보지 않고 칼을 횡으로 그었다. 두 명의 레미프가 목의 핏줄이 끊어져 쓰러졌다. 그 사이 그녀의 앞에 덩치가 아주 큰 레미프가 하나 섰다. 검은 피부에 울퉁불퉁한 가슴이 근육을 드러낸 레미츠는 회색 깃털이 반쯤 섞인 검을 날개를 좌우로 크게 펼치고 칼을 치켜들었다. 아즈윈은 그가 휘두르는 묵직한 공격을 받고 옆으로 다섯 걸음 정도 나가 떨어졌다. 다른 아군 병사들은 이미 다른 곳에 숨어 있었던 적들을 맞아 싸우느라 아즈윈을 도울 틈이 없었고, 게랄드는 선두가 지체하는 바람에 뒤에서 따라붙은 추적자들을 혼자 상대하는 꼴이 되었다. 아즈윈은 발딱 일어나 방패를 든 손으로 목을 주물렀다. 그녀를 날려버린 덩치 큰 레미프는 호흡을 고르며 칼을 얼굴 앞에 세웠다. 아즈윈은 그의 자세를 보며 옆으로 침을 탁 뱉고 몸을 잔뜩 낮췄다. 그녀는 바당의 낙엽을 발로 터트리며 달려 나가 상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 레미프는 감탄할 만한 타이밍으로 그녀의 목을 노리고 칼을 찔렀다. 그녀는 그 칼을 방패로 막는 척하며 흘렸다. 칼날이 방패의 곡선을 타고 듣기 싫은 금속성을 울렸다. 그녀는 거의 주저앉듯 낮은 자세에서 그의 다리를 칼로 쳤다. 비명을 지르며 그가 뒤로 무너지는 순간 그녀는 칼을 쳐올렸다. 뼈가 깨지며 그의 목이 떨어졌다. “이동!” 아즈윈은 크게 소리치며, 세르메이의 손을 잡았다. 다른 레미프들은 아직 적과 싸우느라, 그녀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즈윈이 말한 상대는 게랄드였고, 게랄드는 후방의 적을 내버려두고 방향을 돌려 아군 병사들이 싸우는 적을 베어 넘겼다. 게랄드가 그들을 상대하는 동안 아군 병사들은 겨우 아즈윈을 쫒아올 수 있었다. 세 번째 기습은 세르메이가 앞에 나타난 시냇물을 돌아가야 한다고 방향을 지시했을 때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 앞질러 왔는지 모르다, 활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정면을 막고 있었다. 아즈윈은 세르메이를 껴안고 나무 뒤로 몸을 피했다. 아즈윈에 이어 적의 궁수를 발견한 아군 병사가 레미프 언어로 경고해 모두 나무뒤로 피했으나 한 명을 듣지 못해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적 궁수들은 즉시 화살을 재 장전했다. 아즈윈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가 바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녀가 숨어있는 나무 뒤로 화살이 후두둑 박혔다. 그녀는 세르메이를 안은 채로 소리쳤다. “게리, 질러가서 뒤를 공격해라. 내가 시선을 끌어보겠다.” “조심해.” 보이지 않는 나무 뒤에서 게랄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즈윈은 바닥에 떨어진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어 그 끝을 뽀족하게 깎았다. “여기 가만히 있어.” 그녀는 세르메이에게 일러두고, 방패만 나무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즉시 망패에 화살이 쏟아졌다. 날아온 열 개 중 여석 개가 방패에 부딪칠 정도로 적중률이 대단했다. 아즈윈은 네 개가 빗나간 것까지 센 후, 나무 밖으로 몸을 내밀어 깎은 나무를 집어 던졌다. 제대로 공을 들여 다듬은 것은 아니었으나, 나무 자체의 질이 좋아 무게감은 충실했다. 급조한 나무창을 직선으로 날아가 레미프 한 명의 배에 박혔다. 놀란 적 궁수들이 다시 화살을 쏘았다. 아즈윈은 옆이 다른 나무로 달려가 몸으 날렸다. 화살이 그녀의 등 뒤로 휙휙 지나갔다. 아군 병사들도 적의 시선이 아즈윈에게 쏠린 틈을 타 창을 집어 던졌다. 창을 피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궁수들의 화살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 사이 뒤로 돌아간 게랄드가 소리 없이 제일 왼쪽 레미프를 베었다 두명을 베었을 때쯤에야 다른 레미프들이 알아챘고, 세 명을 벨 때 활의 방향이 게랄드 쪽으로 향했고, 네 명을 벨 때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게랄드는 네 명을 베는 순간 몸을 날려 나무 뒤로 몸을 숨겼고, 화살은 또 나무에만 박혔다. 그 틈에 아즈윈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적의 오른쪽을 공격했고, 게랄드는 나머지 레미프를 맡았다. 마지막 궁수가 당황해서 쏜 화살은 게랄드의 도끼날에 맞아 부러졌으며, 아즈윈은 녀석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 칼날이 빠져나오며 피가 푸욱 터져 나왔다. 아즈윈은 소리쳤다. “세르메이.” 나무 뒤에서 그녀의 얼굴이 살짝 떠올랐다. 아즈윈은 그녀에게 손짓했다. “가자.” 세르메이는 긴장된 웃음을 지으며, 레미프의 언어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후드 에즈 포우.] 병사들도 나무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안전을 확인한 후에 세르메이 쪽으로 나왔다. 세르메이는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아즈윈에게 다가왔다. [요에 아이부 조우 즈드봅트, 아즈윈.] 아즈윈의 손을 잡는, 검고 여린 손은 무척이나 떨렸다. 아즈윈은 픽 웃었다. “그거 나 칭찬하는 말이지?” 그녀는 세르메이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기습은 없었다. 쫓아오는 발검음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곧 밤이 되었다. (5)두 남자를 기다리며 무슨 거대한 짐승이 파놓은 것 같은 구덩이를 그 날의 숙소로 정하는 걸 보고, 아즈윈이 말했다. “입구에 낙엽만 잘 깔아놓으면 아군이건 적군이건 못 찾을 최고의 은신 장소이긴 하지만, 저거 왠지 초대형 지렁이가 뚫어놓은 거 같지 않아? 자고 일어나니 지렁이 뱃속이고 싶지는 않은데.” 게랄드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다 같이 한 몸 되는 거지.” 따로 시키지 않아도 병사들은 바닥에 떨어진 재료만으로 구멍에 맞는 커다란 뚜껑을 만들었다. 시험 삼아 올려놔 보니, 낙엽이 쌓인 흔적까지 절묘하게 주위와 조화를 이루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마음에 들지 않은지 몇 번의 수정 과정을 거친 후에야 겨우 만족했다. 저녁부터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구멍 안이라 불을 지필수가 없었다. 레미프들은 어둠 속에서 모포에 의지해 싸늘한 기온을 견뎠다. 아즈윈과 게랄드도 나란히 앉아 체온을 보존했다. 누군가 둘 사이로 더듬더듬 다가왔다. “세르메이?” [아즈윈.] 세르메이가 말하며 아즈윈의 어깨를 더듬었다. “이리와. 두 명의 기사가 공주 하나 지키는 거야 어렵지 않지. 여기 게랄드랑 내 사이에 앉아. 따뜻할 거야.” 아즈윈은 마치 연인을 대하듯 그녀의 허리를 잡아 옆에 붙여주고 다리를 덮은 모포를 같이 썼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어째서 해준 것도 없는 나를 이렇게 따르는 걸까?” “뭔가 서로 잘 맞는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며칠 거리에 있는 상대를 끌어들일 정도라면 그럴 만도 하지.” 게랄드가 해석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팔을 길게 뻗어 아즈윈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고, 아즈윈은 세르메이의 허리를 안았다. 비 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닥을 때리는 굵은 물줄기에 흙벽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모두 곯아떨어졌는지 숨소리가 컸다. 피곤한 하루였다. 세르메이도 아즈윈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어 뒤척임 한 번 없이 잘 잤다. “자?” 아즈윈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 “자면서 어떻게 대답하니?” “이건 잠꼬대야.” “내일부터는 어쩌지?” “뭘?” “말도 안 통하는 우리가 이 친구들을 이끌 수도 없고, 어디로 가는지 방향도 못 잡겠고....... 나 가넬로크 지방 사투리랑 이로피스 북부 언어는 좀 할 줄 알지만, 레미프 어는 통 모르겠다.” “론틀로스가 이 쪽 말을 할 줄 알았던 것부터가 이상했던 거야.” 아즈윈도 피곤한 목소리로 낮의 일을 상기시키며 말했다. “낮의 적들, 대단했지? 그 포위 공격, 우리 진로를 예상한 듯한 함정, 기습하는 타이밍. 사실 많이 위험했어.” “적에게도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 있다는 뜻이지.” “우리도 지휘관이 필요해.” “내일 내가 론틀로스를 찾으러 가볼게.” “길도 못 찾으면서?” “한 명 데려가지.” “사방에 적들이 깔렸어. 위험해.” “숫자가 적으면 오히려 안 들킬 거다.” “그때까지 나머지는 여기에서 대기?” “달리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대로 하고.” “난 없어. 좋아. 자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 잘 자.” “난 이미 자는 중이야.” “내내 말해놓구선.” “잠꼬대라니까 그러네.” 이런 모습과 낮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을 일치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아침이 되어 게랄드는 한 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손짓발짓 대화가 안 통하니 태양 아래에서 대화하자는 듯이었다. 그는 거의 반시간 동안이나 밖에서 그와 얘기하다가 다시 뚜껑을 열고 내려왔다. “길을 잘 찾는 한 명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 여기서 기다려.” “신기하다, 너? 어떻게 단어 하나 모르면서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지?” 아즈윈이 물었다. “너도 세르메이와 급한 김에 몇 마디 하지 않았었어?” “그 차원을 넘었다고 보네, 친구. 대단하긴 하다. 어쨌든 빨리 와. 못 찾겠으면.......” ‘그냥 와라.’ 라는 말은, 세르메이를 옆에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 “몸조심해.” “남겨놓은 너희가 더 걱정이다, 난.” 게랄드는 레미프 한 명과 같이 밖으로 나가, 뚜껑을 닫았다. 다시 침묵 속에서 긴 시간이 흘렀다. 레미프들은 간간히 걱정스러운 어조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결코 세르메이에게 뭔가를 얘기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높은 지위에 대한 예절인 모양이었다. 세르메이도 그걸 의식해서인지 말을 아꼈다. [아즈윈.] 세르메이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보이지도 않는 방향에서 세르메이가 슬쩍 손을 댔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아즈윈의 얼굴을 더듬었고, 곧 이마에 뭔가가 닿았다. 그녀의 코앞으로 세르메이의 콧김이 느껴졌다. 이마를 대고 있는 세르메이의 행동에 아즈윈은 당황했다. 괜히 게랄드가 했던 말도 생각났으나 이게 레미프 나름대로의 어떤 풍습일지도 몰라 무작정 내치기도 뭐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며 머리가 쾅 울렸다. 이상하게도 어둠 속에서 세르메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것도 발가벗은....... 아즈윈은 뒤늦게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눈앞이 하얗게 보이는 이 환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몸이 살짝 떠오른 것 같은 몽롱한 상태에서 세르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아즈윈은 놀랐다. “어? 어떻게 우리말을 할 줄 알게 되었지?” [그게 아니야. 난 여전히 레미프의 언어를 쓰고 있어. 지금 내겐 너의 말이 나의 언어로 들리고 내 말은 너에게 너희들의 언어로 들릴 거야. 엄밀히 말해 지금 우리는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서로 전달하는 거야.] “얼떨떨하군.” [좀 머리가 멍하지 않아? 아마 이 상태에서 벗어나면 너는 나와의 대화에서 정확히 어떤 얘기를 했는지 기억 못할 거야. 그냥 전체적인 대화의 맥만 기억하는 거지. 마치 어린 시절 어느 날 아침 밥상에서 했던 일상적인 대화처럼. 그러니 집중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깨어나는 순간 이 대화를 모두 잊어버릴 수도 있어. 막연하게나마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알려면, 어린 시절의 특별한 기억이 되는 것처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해야 해.] “무슨 얘기인지 대충 알겠다. 그래서 여태껏 이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은 거야?” [그런 이유도 있지만, 이 대화법은 시간이 아주 길게 걸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지만 보통 대화하는 속도로 인지하게 돼. 상대적으로 바깥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언제 추적자가 올지 모르는 급박한 순간에 쓸만한 방법은 못돼.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아직 너를 믿지 않았었어.]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더니 믿지 않은 거였어?” 조금 충격이었다. [사과할게. 네 옆에 붙어 있었던 건 네 과거를 읽기 위해서였어. 그래서 네가 우리에게 위험한 존재인지 도움을 줄 존재인지 판단을 하고 싶었어.] “서로 마음이 맞으니까 이끌렸다는 말과는 영 다르네.” [서로 마음이 맞는다 해도 적이 되는 경우는 있지.] “복잡한 의미에서 옳은 말이긴 하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진짜 같은 편으로 받아들였나?” [화가 많이 났니? 하지만 너도 나를 믿지 않을 수 있었어. 우리가 사실은 너를 나쁜 일에 이용하려고 한다면 어땠겠어? 그런 의심은 하지 않았니? 우리가 지금 깨우러 가는 게 ‘사-크나딜’ 이 아니라 ‘카-구아닐’ 이었다면? 마지막 순간에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지. 그러니 의심해야 옳아. 이해해. 그러니 너도 이해해 줬으면 해.] 세르메이의 목소리에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즈윈은 즉시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예절은 목소리에 실리지 못했다. 둘 사이에는 오직 직접적인 의사소통만 있을 뿐, 어떤 형식도 끼지 못했다. 아즈윈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런 의심은 했었다. 하지만 네가 날 따라다니니 어느 순간 믿어버렸지. 그런데 사실 그게 너의 의심이었다니 조금 화나네.” [이제 의심은 풀어도 좋아.] “좋아. 난 어차피 네가 꽤 좋아졌다. 그 말마저 거짓말이라면 난 내 운명을 슬퍼하련다.” [고마워, 그래서 말할게. 너를, 힘도 없는 내가 억지로 이끈 건 또 한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야. 나는 과거를 보는 눈을 가졌어. 네가 내 앞에 옷을 벗고, 네 마음의 문을 열면 나는 네 과거를 모두 읽을 수 있어. 물론 그 과거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아. 내 맹세지. 레미프들은 절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어. 나도 우그의 언어는 조금 배웠는데, 우리는 기더라는 단어 외에는 배신이가 거짓말, 속인다는 말은 하지 않아. 그런 단어의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레미프들이 있을 정도야.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말을 믿어도 좋아.] “어려운 얘기는 접자. 그래서 내 과거를 보니 어땠어?” [긴 시간 동안 관찰했어. 너는 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너의 힘을 길렀지. 내게는 그런 게 좋게 보이진 않아. 그러나 우그의 세상과 우리와는 다르니까 뭐라 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너의 살생을 저지르는 행위에는 한 가지 귀중한 가치관이 개입되어 있더군. 너 스스로 그걸 옳은 일이라고 믿으면 망설이지 않는다는 거야.]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아.” [바로 그런 점이 널 믿게 된 계기야. 너와 나를 연결지은 기더에 이상이 없다고 확신했어. 너는 약한 자를 무시하지 않고, 강한 자를 경계하지.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바를 따르고, 우그들의 보편적 도덕관념에서 대체로 옳은 일들이야.] “그거 칭찬이라고 보면 되는 거야?” [넌 정말 좋은 여자야. 내가 우그로 태어났다면 나는 꼭 너처럼 되려고 노력했겠지. 나는 처음 볼 때부터 널 좋아하게 될 걸 알고 있었어.] “에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니 좀 우습다.” [맞아. 과거를 보는 눈이 단련되면 미래를 조금 훔쳐보기도 해. 신탁처럼 정확하지도 않으니, 그걸 예언이라 할 수도 없지. 그러나 희미하게 보이는 그 미래의 일부분은 때로 잘 들어맞아. 나는 너의 무서운 미래를 봐버렸어. 그래서 적들이 추격해 올 때마다 나는 너를 잡아끌었어.] 아즈윈은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미래?” [나는 너희가 익셀런이라고 부르고, 우리가 이구셀런이라고 부르는 그 검은 망토의 기사에게 죽을 거야.] 아즈윈은 말을 멈췄다. 생각의 일부가 끊겼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세르메이가 경고했던 대로 이 모든 이야기가 어린 시절 했던 일상적인 대화처럼 희미해진다 해도 이 말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웃기지 마. 나를 이길 수 있는 건 나와 같은 하얀 늑대들뿐이야.” [그래서 무서운 거야. 나는 너의 힘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 라루튼의 어떤 레미프도 너나 네 남자 친구를 이기지 못할 거야. 내가 아는 어떤 전사도! 그런데 그런 너를 죽이는 기사라면 대체 얼마나 강할지 정말 두려워.] “부정확하다고 네 입으로 말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나 네 미래를 예측하는 힘이 정확한지 묻자. 나를 죽이는 익셀런이 정확히 누구냐? 언제 죽는다는 거냐?” 아즈윈의 몰아붙이는 말에 세르메이는 몹시 당황했다. 소리 내러 입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떨거나 말을 더듬었을 것이다. [너무해, 아즈윈.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더군다나 마음을 서로 열고 있는 이런 대화에서 나는 진실 밖에 말하지 못해. 그런 무서운 말을 시켜선 안돼.] “말해! 나는 두렵지 않아. 난 언제 죽는 거지?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에게!” [아즈윈. 어두운 미래를 말하는 일은 강요해선 안돼. 예언을 말하는 자가 그 예언을 당사자에게 말하면 그 미래는 결정되어 버려. 그러면 원래 흘러가야 할 기더가 역행하고.......] “내 운명이 더 강한 자에게 죽는 거라면 나는 스스로 더욱 단련하지 않은 것을 자책하며 죽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건 역행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결국 세르메이는 포기했다. [그래. 어쩌면 나도 네가 그런 말을 해주길 바랐었나 봐. 네가 그 무서운 미래를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말을 꺼낸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내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후회 안 해. 널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 안심해.” [그 일은 가까운 시일 안에 벌어질 거야.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어. 그 자의 이름은.......] “이름은?” 세르메이는 마지막가지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이슨.] 모르는 이름이었다. ‘넌 먼 훗날 살해될 것이고 그 사람은 바로 마스터 퀘이언이다!’ 라는 정도를 기대했던 그녀로서는 네이슨이라는 이름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특별히 아는 바라도? 뭐, 어디어디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든지, 나와의 관계라든지.” [거의 몰라. 그가 우그들의 세상에서 어떤 존재였으며, 익셀런들 사이에서 어떤 존재인지. 다만.......] “다만?” [그는 하늘 산맥에 와서 가장 많은 드래곤을 죽인 자야. 레드워드와 함께 우리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자라고 할만 하지.] “고마워, 세르메이. 안타깝게도 네 예언은 어긋날 거다.”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잔뜩 긴장했던 마음은 차라리 후련해졌다. “그럼 이걸 계기로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도록 하지. 어차피 게랄드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론틀로스를 걱정하는 거지?” [나는 그를 사랑해. 우리는 오래 전부터 서로 사랑해 왔어. 그러니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솔직한 대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군. 그런 중요한 말을 하는 것에 있어 이리도 긴장감이 없을 수가 있나?” [맞아.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건 처음인데도, 나 역시 전혀 떨리지 않는군.] “나이 차가 너무 나는 거 아니야?” 아즈윈이 놀리듯 말했다. [우그들은 삶이 짧아서 사랑을 따질 때 나이를 염두에 두지만 우리는 우그들에 비해 꽤 오래 살아서 나이는 별로 상관없어.] “그렇지만도 않아. 나도 내 나이 두 배쯤 되는 남자들 좋아한 적 있었어.” [우린 남자 보는 취향도 비슷한가 보지?] “론틀로스가 너와 내가 성격이 비슷했다고 한 말이 이해가 되는군. 너도 어지간히 말괄량이였었지?” [어렸을 때 얘기지. 내가 스무 살 때.] “지금은 몇 살이야?” [마흔 아홉. 프보에 레미프들은 즈비 레미프들보다 수명이 짧지만, 보통 우그들에 비하면 두 배 정도 오래 사니까 우린 서로 나이가 비슷한 셈이야.] “론틀로스는?” [지금 아흔 살 정도 돼.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를 좋아했고, 지금도 그 감정은 변하지 않았어. 그가 항상 옆에 있어줘서 행복해. 그 역시 나를 좋아해서 지금가지 결혼을 하지 않았지.] “네가 크길 기다렸나? 그럼 이제 결혼하면 되겠네?” [좋아한다는 걸 말하지도 않았어. 어떻게 결혼을 해?] “그럼 더 이상하네. 서로 알면서 말하지도 않았다? 우그들 중에도 간혹 그런 답답한 연애를 하는 녀석들이 꽤 있긴 하다만........” [그것과는 달라. 나는 영원히 결혼할 수 없어.] “그 쪽 나라 공주는 그래야 하나?” [아니, 내가 드래곤을 깨우는 무녀이기 때문이야. 즈비 레미프들은 결혼을 하고도 마법의 힘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보에 레미프들은 관계를 맺으면 마법의 힘을 완전히 잃어버려. 특히 나 같은 여자는 성스러운 존재로 인식되니 단순히 마법의 힘을 잃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굉장히 불공평하군.” [나에게만 한정된 불공평이야. 견뎌야지. 아버님도 내가 무녀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많이 슬퍼하셨대.] “편법이긴 한데, 그럼 결혼은 하되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될까?” [나도 그 생각을 해봤어. 론틀로스도 아마 아이를 갖지도, 잠자리를 갖지도 않는 결혼을 부탁하면 들어줄 지도 몰라. 그러나 말했듯이 나는 성스러운 존재로 남아야 해. 힘의 유무와 상관없이 내가 결혼을 하면, 나를 성녀라 여기는 평민들의 믿음을 잃게 되지. 무녀로서의 힘을 잃는 건 매한가지야.] “그 무녀란 일을 다른 여자에게 넘겨버리면 안되나?” [내가 죽기 전까지 새로운 무녀는 태어나지 않아. 언제나 그 나라에 드래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여자는 한 명뿐이야.] “복잡한 문제구나.” [내가 보기에는 너놔 네 친구가 더 복잡한 것 같아.] “게리 말하는 거야? 그 애는.......” 아즈윈은 게랄드에 대한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뭔가 꽉 막혀 목구멍 밖으로 목소리가 새나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거봐. 말할 수 없지? 이 대화법에서 넌 거짓말을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네 잠재의식의 솔직함과 겉으로 내보이는 가식이 충돌을 일으켜 말을 하지 못하는 거야.] “이건 뭔가 속임수 같아! 내가 말을 하는 건데, 왜 말을 못하는 거냐? 내 이름은 세르메이다! 이것 봐. 거짓말 할 수 있잖아. 그런데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세르메이는 웃었다. [우린 벌써 긴 시간을 소비했어. 돌아가야 해.] “내 질문은 아직 안 끝났어.”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야.] 아즈윈은 눈을 떴다. 세르메이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되돌리고 있었다. 변함없이 이 곳은 땅굴 안이었고, 레미프 병사들은 옅을 불빛이라도 내기 위해 나무를 태우고 있었다. “치사한 녀석.” 아즈윈이 말했다. [요에 아이부 하이두.] 세르메이는 그들의 언어로 대꾸했다. 그녀와 말이 안 통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오히려 어색해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더 없이 친근했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레미프 병사들은 창을 들어 경계했고, 아즈윈도 칼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론틀로스였다. 세르메이는 바푸쿠즈의 체면도 잊고, 천장 낮은 땅굴 안을 황급히 기어갔다. 뒤이어 게랄드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즈윈, 나 왔다.” 뚜껑이 열렸으나 햇빛은 스며들지 않았다. 벌서 밤이었다. 아즈윈은 대체 둘이서 얼마나 오랫동안 얘기한 건지 놀라 세르메이와 대고 있었던 이마를 문질렀다. “오래 기다렸지?” 다른 사람과의 재회를 제쳐두고, 게랄드가 돌아오자 아즈윈은 덥석 그를 끌어안았다. “어이쿠, 그렇게 기뻐?” “아니, 뭔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해버렸어.” “하늘 산맥에 들어와서부터, 너무 그러는 거 아냐?” 게랄드는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허기지군.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넌 잘 챙겨 먹었냐?” “아니. 같이 먹자.” 아즈윈은 세르메이와 대화를 끝낸 후의 얼떨떨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배도 안 고픈데 게랄드와 식사를 했다. “어떻게 찾아냈어?” 아즈윈은 돌아온 론틀로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세르메이를 보며 물었다. “론틀로스는 그 기습조의 공격으로 우리와 떨어진 후 우리만큼이나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나 봐. 그들을 모두 해치우고 되돌아오려 했지만, 멀리서 카구아....... 전에 잠깐 말한 적 있는 그 거대한 괴물이 쫓아오는 바람에 그 괴물을 달고 세르메이에게 돌아올 수가 없어 다름 길로 빠졌다는 거야.” “론틀로스다운 선택이군.” “카구아를 따돌린 후, 론틀로스도 세르메이를 찾아 헤매고 다녔데. 그 와중에 또 전투가 한 번 있어서......., 보다시피 살아남은 병사는 네 명 뿐이고, 론틀로스도 배를 베이는 부상을 입어 상태가 좋지 않아.” “그래도 우리는 일단 지휘관을 돌려받았네.” “다행이지. 난 우선 좀 자둘게. 론틀로스는 아마 내일 아침 일찍부터 떠나자고 성화일 거다.” 게랄드는 모포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바로 잠들었다. 추워 보여, 아즈윈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경고했던 대로 세르메이와 대화했던 몇 가지 부분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선명했다. 특히 마지막 세르메이의 사랑 이야기와 게랄드에 대한 말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네이슨’ 아즈윈은 괜스레 그 이름을 입에 올려보았다.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 예언이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꺾을 수 있는 건 하얀 늑대뿐이야.’ 그녀는 주문처럼 그 말을 반복하며 잠들었다. (6) 횃불 두 개의 시간 동안 지휘관이 돌아온 레미프들은 다시 활발하게 움직였다. 아침이 되자마자 식사를 준비했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이동을 시작했다. 이제 레미프 병사들도 우호적으로 아즈윈을 대해주었다. 가장 위급한 순간, 출신도 모르는 두 명의 우그가 가장 선두에 서서 가장 중요한 두 레미프를 지켜주었으니, 신뢰를 얻은 건 당연했다. “우린 이 곳을 ‘하푸’ 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반나절만 가면 끝을 잴 수 없는 깊은 계곡이 낭고, 북쪽으로 가면 하늘 산맥과 연결되는 큰 산이 나온다. 대수롭지 않은 산이지만, 우린 그 곳을 ‘엡-누브마두트 산’ 이라고 부르고 있다.” 론틀로스는 아직 보이지 않는 계곡과 산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게랄드에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는 거지?” “엡-누브마두트란 ‘허락되지 않는 곳’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또 즈비 레미프들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지 우린 모른다. 하지만 그 곳이 사-크나딜의 성지이기에 적절한 이름 같지 않은가?” “찾는 걸 기더에 맡긴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이동하는 줄 알았더니, 결국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군.” 정말로 운에 맡겨 돌아다니는 줄 알았던 게랄드가 안도하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야 기더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다.” 론틀로스는 게랄드의 이깨를 툭툭 쳤다. 세르메이는 여전히 아즈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이제 아즈윈도 그런 식으로 걷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도 있을 기습에 대비해 가끔 쉴 때면 병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철저하게 경계를 섰다. 게랄드도 거기에 끼어 그들과 대화하기도 했고, 말을 배우기도 했다. 칼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철저하게 소질 없는 게랄드가 정말로 언어를 배우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그 몇 개 알아낸 단어로 농담까지 시도했다. “대단한 녀석.” 더 웃긴 건 그 농담을 듣고 웃는 레미프 병사들이었다. 그냥 웃어주는 건지, 아니면 정말 웃긴 건지, 게랄드의 재미없는 농담이 사실은 레미프들에게 통하기 위해 준비된 것인지 모르지만, 즐거워 보이긴 했다. 아즈윈이 느끼기에도 같은 장소를 여러 번 맴돈다고 느낄 무렵, 저녁이 되었고 론틀로스는 정지 명령을 내렸다. “아까부터 뭘 찾는 거야?” 아즈윈이 물었다. “성지의 입구입니다. 이 산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기더가 입구를 허락하지 않는군요.” 아즈윈을 대하는 론틀로스는 게랄드와 달리 정중했다. 편하게 대하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들은 점심 무렵 미리 발견해둔 동굴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나무뿌리 사이에 끼었다던가, 거대 지렁이가 파놓은 것 같은 작은 구덩이가 아니라, 본격적인 석회암 동굴이었다. “용케 이런 곳을 찾았군.” 아즈윈이 말했다. “하늘 산맥에는 이런 동굴이 많고 이런 걸 길을 찾는 표지로 쓰는 경우가 많으니 버릇처럼 머리에 기억을 해둡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동굴 깊은 곳에서 바람이 흘러나와 좀 추운 편이었으나, 지내기는 나쁘지 않았다. 론틀로스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레미프들과 다음 작전을 짜고 있었다. 간혹 개별적으로 흩어져서 찾는 건 어떠냐, 여기가 아닌 하푸를 찾아보는 건 어떠냐 하는 게랄드의 목소리도 들렸다. 세르메이는 아즈윈의 옆에서 피곤한 눈으로 회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도 간혹 몇 마디 론틀로스에게 던지곤 했다. 아즈윈은 오랜 기억처럼 남은 그녀와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게리, 회의 내용에 중요한 게 없으면 이리로 좀 와 봐.” 게랄드는 허리를 두들기며 다가왔다. “나날이 나의 존재 가치가 커지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좀 도와줘.” “뭘?” “한 번 겨루자. 목숨 반 개 정도 걸고.” 게랄드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넘기기에는 아즈윈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 보였다. “뭔 일 있었어? “내가 죽는대.” “누구한테?” “세르메이가 그러더라. 내가 익셀런의 네이슨이란 놈에게 죽는다고.” 그녀가 든 칼을 보더니 게랄드는 말없이 자기 자리로 가 도끼를 가져왔다. “걱정되어서 확인해 보는 건 좋다만,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세. 지금가지 목숨 걸고 서로 싸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하지만, 대결 중에 칼 맞아 죽지는 않을 걸.” “그럼 기습으로 당한다는 거야? 더 기분 나빠.”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연습 상대라면 해주마.” 게랄드가 자세를 잡길 기다려 아즈윈은 방패 없이 싸웠다. 두 사람의 격력한 연습 시합에 레미프들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아, 연습이야, 연습.” 게랄드가 론틀로스에게 말해주고 다시 아즈윈을 공격했다. 누가 봐도 둘 중 하나 죽이려고 달려드는 꼴이니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며 아즈윈도, 게랄드도 서로 위협을 느꼈고, 둘은 동시에 물러났다. “이것 봐. 이런 널 대체 누가 죽인다는 거냐?” 게랄드는 어깨에 도끼를 걸쳤다. 아즈윈은 무심히 칼끝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한 건 사실이야. 세르메이가 옳았어. 듣지 말 걸 그랬어.” 게랄드는 길게 한숨쉬며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하얀 늑대들은 혼자 죽지 않는다.” “위안, 전혀 안돼.” 아즈윈은 허탈하게 웃었다. 근처에 드래곤의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면, 굳이 일행 전부가 이동하며 찾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세르메이와 일부 병사들은 여기 남고 나머지만 여길 떠나 그 곳을 찾기로 했다. 세르메이의 경호를 위해 아즈윈이 남고, 게랄드는 론틀로스와 함께 떠났다. 그것이 어제 했던 회의의 결과였다. “또 둘이 남아 남자들을 기다리는구나. 이건 나랑 별로 안 맞는 포지션인데 말이야.” 아즈윈은 혼자 팔 굽혀 펴기를 하고 땀을 흘리며 일어나 말했다. 세르메이는 유심히 그녀가 하는 운동을 보다가 자기도 따라 했으나 한 개도 못했다. “아까 저 쪽에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 좀 씻고 올게. 비 맞은 거 외에는 며칠 째 못 씼었어.” 아즈윈은 대강 말해두고 횃불 하나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공간은 넓어졌고, 말이 싸놓은 뭣처럼 지저분하게 꼬인 바위기둥이 여럿 보였다. 이런 동굴을 처음 보는 아즈윈은 신기해하며 반질반질한 벽을 만져보았다. 촉촉하게 젖은 이끼를 손가락으로 찔러보기도 하고, 하얗게 펴 있는 돌 꽃을 건드리기도 하면서 그녀는 물소리를 따라갔다. 벽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바닥에 한 번 고였다가 시내를 이뤄 시커먼 어둠 속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은 차갑고 깨끗했다. 그녀는 바위 사이에 횃불을 껴두고 옷을 벗었다. 몸을 씻고 짧은 머리를 감고 나니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세르메이였다. 그녀도 옷을 벗고 다가와 몸을 씻었다. 긴 머리를 풀어 조심스레 감는 모습은 남자처럼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터는 자신과는 달리 우아했다. 아즈윈은 가져온 수건으로 몸을 닦고 다가가 세르메이가 머리 감는 걸 도와주었다. “역시 공주라서 그런지 머리 결 좋네.” 아즈윈은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이것 좀 봐. 며칠 관리 안 했다고 이런 식으로 뻗쳐버린 거. 용병이라고 남자처럼 취급 받는 건 질색이었지만, 이 꼴로는 그런 말 들어도 별 수 없겠는걸. 어? 너, 몸은 마른 주제에 가슴은 왜 그렇게 크냐? 그거 너네 종족 특징이야? 비교 되니까 옷 입어버려야겠다.” 둘은 머리도 말릴 겸 횃불 아래 나란히 앉아 음악처럼 흐르는 물소리를 감상했다. 생각이란 항상 정확한 개연성을 가지며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물소리는 그녀의 이상한 기억을 들추었고, 뜬금없이 목욕하는 새나디엘 여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왕의 빛나는 눈동자와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스터 퀘이언이 처음 아란티아의 보검을 내주며 했던 말도 연결 고리 없이 떠올랐다. ‘이 검으로 내리는 명령은 곧 여왕을 대신하는 명령이다. 아즈윈을 캡틴으로 임명하며, 카모르트로 가서 그 나라 국왕에게 도움이 되고 오너라.’ 약간은 장난기가 섞인, 그러나 너무나도 가혹한 결정. 그런데 마스터는 왜 나를 캡틴으로 지목하신 거지? 익셀런, 검은 기사, 카모르트의 붉은 장미 백작....... ‘뭐가 연결고리고, 뭐가 핵심이지?’ 하늘 산맥, 드래곤, 레미프, 그리고 또 역시나 익셀런 기사단. 마스터는 인간이 아닌 존재와 싸우게 될 거라고 했다. 울프 기사단은 기본적으로 개인 훈련 외의 단체 훈련은 거의 받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공들여 받는 단체 훈련 중에는 수상한 항복이 들어 있었다.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울프의 기사들은 그런 훈련을 왜 받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즈윈, 하얀 늑대들을 위한 21번 포메이션을 만들어라.’ 마스터의 또 다른 명령이었다. 포메이션을 번호를 굳이 거기까지 매길 필요도 없기에 아즈윈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퀘이언이 가르쳐준 그 자세와 방법을 배운 후 아즈윈은 너무 놀라 물었다. ‘이건 적을 누구라고 상정하고 싸우는 방식입니까?’ ‘오래 전 나를 뺀 다른 하얀 늑대들이 북쪽 얼음성에서 싸우던 적을 상대로 급조한 포메이션이다. 이 싸움의 중심에 아이린이 있었지. 이제 그 자리에 네가 서 줘야겠다. 너는 아마 아이린보다 더 훌륭히 해낼 거다.’ 아즈윈은 아직도 그 얼음 성이란 곳이 어디인지, 이전 하얀 늑대들이 대체 누굴 상대로 싸웠다는 건지 듣지 못했다. 언제고 알게 될 테지만 부디 모르고 끝나게 되길 바란다면서 퀘이언은 가르침을 끝냈다. 스물한 번째 포메이션....... 그것은 하얀 늑대들 다섯 명 전부가 단 한 명의 적과 싸우기 위한 전투 방법이었다. “세르메이, 우리 얘기 조금만 하자.” 아즈윈은 자기 이마를 가리킨 후 세르메이의 이마를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아즈윈의 얼굴 가까이로 머리를 댔다. [이 곳은 전과 같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야.] 세르메이의 목소리가 몇 겹으로 중첩되어 들리는가 싶더니, 곧 또렷해졌다. [게다가 옷도 반쯤 벗고 있으니, 긴 시간 동안 얘기할 만한 상황도 아니고. 이러다가 병사들이 날 부르러 오면 곤란해.] “짧게 얘기하지. 걱정되는 게 하나 있어서 그래.” [예언이라면 이제 더 얘기 안 할래.] “그런 쪽은 아니야. 너는 내 과거를 읽었다고 했지?” [모두 보지는 못했어.] “지금 일어나는 일과 내가 과거에 만난 괴물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지?” 세르메이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몰라서 대답을 못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했으면서도 그녀는 대답을 길게 끌었다. [네가 생각하는 게 옳아. 네가 걱정하는 게 옳아. 그 이상은 나도 모르겠어.] “카-구아닐이라는 건 어떤 존재지? 지금가지 말해준 것 말고 우그들의 세계와 연관지어서.” [그건 너무 과거의 일이야. 나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카-구아닐은 인간의 세계를 공격한 적이 있어.] “그래서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네가 모르기 때문에 나도 알지 못해. 아크랜드의 역사는 오직 너와 게랄드의 기억을 바탕으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어서.] “그렇군. 그럼 익셀런은? 익셀런과 내가 카모르트에서 만난 검은 기사와는 어떤 관계지?” [네가 카모르트에서 만난 존재들은 죽은 자들이고, 이 자들은 산 자야. 같지 않아.] “정확한 건 아무 것도 없군.” [도움이 못되었구나. 미안해.] “아니, 괜찮아.” [아, 지금 누군가 우릴 부르고 있어. 오면 큰일이야.] 세르메이의 이마가 머리를 떠나자,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얇게 입은 옷에 몸도 완전히 말리지 않고 오랫동안 있었던 탓에 몹시 추웠다. 위에서 횃불을 하나 든 게랄드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르메이는 황급히 옷을 마저 입었다. 그래도 세르메이는 여기까지 온 게 게랄드라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네가 떠난 지 얼마나 된 거지?” 아즈윈이 물었다. “시간관념이 잘 안 잡힌다고 했지, 그 대화법은?” 게랄드는 금방 알아채고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저녁이다. 그리고 적들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아직 이 동굴을 들키지는 않았지만, 시간문제야. 동굴 찾는 것에 재능이 있는 건 이 쪽 레미프들만이 아니니까. 서둘러 떠나야 돼. 하지만 동굴 근처를 놈들이 수색하고 있는 것 같아 들어왔던 입구로 떠나기는 애매하지.” “그래서 어쩔 거야?” 아즈윈은 벗어놓은 나머지 옷을 입었다. “이 동굴에 뒤로 빠져나가는 길이 있나 살펴보려고. 같이 가자. 여긴 론틀로스에게 맡기고.” “우리 둘이서? 길 잃으면 어쩌려고?” “동굴의 후방이 있는가만 살피는 거야. 동굴 안이니 길을 잃지는 않겠지.” “동굴 안이라서 길을 잃은 위험이 더 큰 거 아닐까?” 론틀로스가 다가와 세르메이에게 뭐라 말했다. 세르메이는 아즈윈에게 인사하고 동굴 입구 쪽으로 되돌아갔다. 론틀로스는 게랄드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충고했다. “동굴이 너무 깊거나 갈래길이 나오면, 그냥 되돌아 오는게 좋다.” “알았다.” “아, 그리고 혹시 중간에 좋지 않은 길이 나오면 이 밧줄을 쓰도록 해라.” 론틀로스는 하얀 끈과 검은 끈이 서로 꼬아져 있는 손가락 두께도 안 되는 가는 밧줄을 내주었다. 게랄드는 그 밧줄 뭉치를 받아 잡아당겨 보았다. 신기하게도 밧줄은 잡아당긴 만큼 길게 늘어났다가, 놓으니 탄력 있게 줄어들었다. “오오, 이거 신기하네. 마법으로 만든 건가?” 게랄드가 재미있어서 몇 번이나 튕기길 반복하다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 손등을 얻어맞고 떨어뜨렸다. 론틀로스는 허허 웃었다. “우그들은 우리가 감탄할 정도로 좋은 칼과 창을 만들지만, 레미프들에게는 다른 면에서 대단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이 밧줄도 그중 하나고, 이걸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레미프 세계에서도 매우 드물지. ‘나이즈닥’ 이라고 부르는 이 밧줄은 사람 한 명 정도의 몸무게라면 단숨에 나무 위로 올려줄 수 있을 정도지.” 게랄드는 또 몇 번 잡아당기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이런 걸 쓸 자신이 없군. 아즈윈, 네가 써라.” 아즈윈도 신기해하며, 기꺼이 넘겨받았다. 론틀로스는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빠져나가는 또 다른 입구를 발견하거든 괜히 나가서 돌아다니지 말고 즉시 돌아와.” “그러지.” 게랄드는 대답하고 먼저 걸었다. 아즈윈은 세르메이와 대화 하느라 거의 꺼져버린 횃불 대신 론틀로스가 내주는 새 횃불을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두 개의 횃불이 밝히고 있었으나, 동굴 안이 깊은 어둠을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즈윈은 묵직한 침묵 속에서 나이즈닥을 몇 번 튕기며 소리 내다가, 하는 짓이 공허하여 줄을 어깨에 걸쳤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떠들어서 불안감을 없애주는 게랄드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즈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드래곤 성지는 아직 못 찾았냐?” “곧 찾게 될 거다.” 아즈윈은 그의 옆에 붙어 서서 물었다. “너 요새 은근히 차가워진 거 알아?” “착각이겠지. 내가 언제 차가워진 적 있어? 겨울에 얼음 넣은 맥주 마시다가 차가워진 적은 있지.” “아니야, 차가워졌어. 차가워진 거 맞아.” 아즈윈은 괜히 소리질러보았다. 동굴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동굴이 더 깊어지자, 이제 아까 같은 어둠만 있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횃불에 동굴 여기저기에 박힌 보석 같은 돌멩이가 반짝였다. 어디에나 흐르는 물소리가 여러 갈래로 중첩되어 하모니를 이루었고, 어둠은 어둠으로 남지 않고 빛을 품은 검은 보자기 같았다. 작은 빛 알갱이가 두 사람이 다가오면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듯 하나씩 붉은 빛을 반짝였다. 가끔 전신이 희뿌연 색깔의 커다란 곤충이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달아났다. 고여 있는 물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는 발소리를 듣고 물가에서 멀어졌다. 아직 한 번도 인간과 레미프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동굴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아직도 두렵나?” 한참 말없이 걷다가 게랄드가 물었다. “뭐가?” “죽는다며?” “누구 씨가 지켜준다고 했으니 안심하고 있소만!” “내가 냉정하게 보이는 건 네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뜻이야.” 가끔씩만 날카로웠던 게랄드가 요새 들어 자주 날카로웠다. “어라, 누구 멋대로 내 머릿속을 분석하려 들어?” “그렇지 않으면 정말 뭔가 원하는 거냐?” “전부터 난 네 몸만을 원했다니까 그러네.” 앞만 보며 걷던 게랄드는 잠시 멈춰 서서, 재미있다는 듯 아즈윈을 돌아보았다. “너의 자유분방은 도를 넘지 않아 보기에 나쁘지 않지만, 가끔은 그런 말도 진지하게 해보시지 그래?” “진지하게 해 봤자, 넘어갈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실까?” 아즈윈은 게랄드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앞서 걸었다. 게랄드는 도끼를 목 뒤에 놓고 두 손을 거기에 걸친 채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진지하게 말해본 적도 없지 않나?” “애매한 소리 한다. 진지하다 어쩐다 하는 얘긴 재미없어.” “내가 네 그런 장난에 휩쓸리지 않는 건 우정이 깨질 것을 염려한 내 배려야.” “어째서 그런 걸로 우정이 깨지지?” “글쎄.” 게랄드는 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아즈윈이 멈춰 서서 길목을 막았다. “아, 아, 아. 이것 봐라? 너 지금 속으로 망설이는 거지? 눈앞의 이 매력덩어리 여자를 안아, 말아? 맞지?” “혼자 들뜨고 있네.” “오우, 혼자가 아니라고 보네, 게랄드 울프! 타오르는 횃불 아래서 붉은 불빛을 내는 젖은 머리의 여자가 보내는 유혹을 맨 정신으로 버티는 남자란 존재할 수 없네. 그렇지 않은가?” 아즈윈이 굵은 목소리를 내며 게랄드를 위협하자, 그는 그녀의 젖은 머리를 사정없이 헝클며 지나쳤다. “세상 모든 남자들을 네 관점으로 보는 건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 안 해? “어떤 여자들에게 배알도 없냐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지.” “그런 걸 무시하는 것도 네 매력이다. 하지만 그런 매력을 발산한다고 해서 내가 널 안거나 네가 날 안아도 된다는 건 아니야.” “하늘 산맥의 하늘 아래에서 제일 비싼 남자로군. 관두자, 관둬.” “뭐, 이렇게 토닥거리는 것도 재미있지 않아? 다 왔다.” 게랄드는 멀리 보이는 하얀 빛을 가리켰다. 걸어가니 천장쯤에, 사람 하나 빠져나가기에 충분한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조금 높았지만, 두 사람이 기어오르기에는 충분했다. “나이즈닥을 써야 할 높이는 아니군.” 아즈윈은 레미프의 밧줄을 한 번 써보고 싶었으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 어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게랄드는 울퉁불퉁한 벽을 타고 올라가 조심스레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어 위험 여부를 확인했다. “여긴 어디쯤이야?” 아즈윈이 물었다. “몰라. 하지만 나가는 출구만 알면 방향을 잡는 건 론틀로스가 알아서 할 거야. 돌아가자. 출구가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돌아가기로 했으니. 그리고 난 예전부터 널 좋아했어. 어쨌든 입구 쪽은 타치셀의 레미프들이 버티고 있고, 그 레미프들의 선두에 있는 건 익셀런 기사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아마 익셀런일 거다. 그들 중 하나에게 죽는다고 예언 되었다면, 모든 싸움은 나에게 맡겨라. 그게 방금 내가 헛소리처럼 섞어서 내뱉은 고백에 대한 책임이다. 얘기 끝!” 게랄드는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다시 횃불을 들고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아즈윈은 얼어붙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달려가 그의 등에 업혔다. “게리!” 게랄드는 순간 비틀거렸다가, 그녀를 매단 채로 걸어갔다. “너, 방금 고백한 거지? 맞지? 이거 프러포즈야? 엉?” “앞서나가지 좀 마라. 그거랑은 달라. 나는 네 사생활에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고, 널 책임질 생각도 없고, 네가 나만 바라보길 바라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내 생각이 그러니 함부로 우정 깨는 소리하지 말라는 거다.” “이건 대사건이야. 언제나 웃기는 소리만 하는 게리가 진지하게 말을 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야지.” 아즈윈은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속삭이듯 말을 이어갔다. “예전부터라면 왜 말을 하지 않았지? 아니, 프러포즈까지는 아니었어도 나는 항상 널 유혹했는데, 왜 넘어오질 않았지?” “뭐, 진지해져 보는 건 어떠냐고 말하긴 했지만, 진짜로 진지한 건 싫거든. 못 믿겠지만, 나는 한 여자한테 빠지면 거기에 미쳐 앞뒤를 못 가려. 널 좋아하지만 나 자신을 잃고 싶지는 않아. 무엇보다 우리는 하얀 늑대들이다. 여왕 폐하의 수호 기사 후보야. 서로에게 빠지면 나중이 힘들어진다.” 그건 그렇지. 너도 나도 이 직책을 너무 좋아하니까. 그래도 말은 해줄 수 있었잖아. 일은 일이고, 사랑은 사랑이야.“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어려운 얘길세.” 아즈윈은 배시시 웃으며 얘기하다가 곧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알았어. 철없는 짓은 그만하기로 마음먹은 참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제 아무 남자한테나 접근하지도 않을 것이고 너만 좋아할 테니 그 프러포즈는 받아들여도 되려나?” 그녀의 말에 게랄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프러포즈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네가 참 잘도 그러겠다. 그러고 싶을 때만 그렇게 해! 내가 전에도 그 말 했었잖아.” “으응? 그 말을....... 네가 했었어?” 게랄드는 잠깐 멈칫했다. “관둬. 없던 걸로 하자. 우리가 예전같이 남매처럼, 친구처럼, 하나의 팀으로 지내려면 지금 이 상태가 딱 좋아.” 아즈윈은 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걸 원하면 또 그런 식으로 행동해 보도록 노력하지. 하지만 이런 것도 기분 나쁘지 않군. 그럼 어쩐다? 좋아는 하지만, 건들 순 없는 건가? 와아, 너무하잖아. 이봐, 게리. 지금까지 그런 말을 숨겨온 것도 너답지 않고, 굳이 내가 좋다고 하는데 까다롭게 기준을 세우는 것도 너답지 않아. 그건 오히려 너와 내 관계를 너무 얕게 본 결과야. 이런 걸로 흔들리지 않아, 우리 둘은.” 그 말을 마무리 지으며 진지한 얼굴을 지어보려 했던 그녀는 또 실실 웃고 말았다. 게랄드도 결국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즈윈, 넌 아마 기억 못할 테지만, 네가 날 좋다고 말한 가장 처음 순간에 나는 이미 많이 넘어갔었다. 그걸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여기서 선을 넘어버리면, 난 정말 못 버틸 거야.” “내가 좋다고 말한 처음 순간이 언제지?” “그걸 계산하는 게 바로 바보 같다는 거야.” “하지만 내가 인정하건대, 넌 버틸 수 있어.” 아즈윈은 나중에 다시 켤 것을 염두에 두고 횃불을 발로 조심스럽게 밟아 껐다. “그리고 그런 걸 이 자리에서 재보기에는 횃불이 너무 아깝지. 우리는 돌아갈 길도 아직 남아있어.” 게랄드는 자기가 든 횃불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횃불 하나 탈 시간이라 봐야 오래 가지도 않아.” “난 자신 있어” “아....... 그러셔?” 게랄드가 아즈윈과 함께 횃불 하나를 들고 돌아오는 모습을 론틀로스가 제일 먼저 발견했다. “늦었군. 이 동굴이 생각보다 길었나?” 론틀로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게랄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별로. 중간에 일이 좀 있어서.” “횃불이 용케 살아 있군. 지금쯤 불이 꺼졌을 거라 보고 구하러 갈 참이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하나는 중간에 꺼두었었지.” “음, 잘했다.” “그보다 타치셀의 레미프들이 근처까지 도착했나?” “멀리서 움직임이 있긴 하다. 밤은 일단 여기에서 보내고, 날이 밝기 전에 떠야겠어.” 둘은 바깥의 일과 동굴을 빠져나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즈윈은 세르메이 옆에 앉아 길게 몸을 폈다. 세르메이는 동글동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게랄드?] “어?” [게랄드, 아즈윈.] 세르메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더니 빙그레 웃었다. 아즈윈은 그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후후, 고맙다는 말 하나는 배워둘 걸 그랬나?” 그녀는 뒤통수를 손으로 받치고 드러누웠다. 졸렸다. 세르메이와의 대화는 상항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여러모로 피곤한 날이긴 했다. (7) 기억나지 않는 일 대체로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을 때는 떠오르지 않던 기억들은, 기대하지 않던 순간에 갑자기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잠들기 전, 아즈윈은 게랄드가 했던 말들을 잠깐 떠올려 보았다, 게랄드는 예전부터 자기를 좋아했었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나 혼자만의 감정 아니었어?’ 그녀가 처음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는 이미 많이 넘어갔었다고 했다, ‘그건 또 언제야?’ 피곤한데도 잠을 이루지 못했던 아즈윈은 이튿날 아침 서둘러 깨우는 게랄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기억들에 와르르 얻어맞았다. 다섯 명의 하얀 늑대들이 처음 공식적으로 여왕 폐하를 만나는 날, 게랄드는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린 남녀 간의 관계를 뛰어넘어야 하얀 늑대들이 되고 수호 기사가 되는 겁니까? 마스터께는 직접 여쭙지 못했으나, 폐하 앞에서 여쭙습니다. 마스터 퀘이언께서는 영원히 혼자가 되시는 겁니까?’ 몹시도 무례한 그 질문에 퀘이언은 당황했고, 새다니얼은 재미있어 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대답을 퀘이언에게 미뤘다. ‘네가 말해보거라, 퀘이언. 너는 지금 그 직책을 후회하느냐?’ 한 번도 그 자신 만의 페이스를 무너뜨리는 걸 본 적이 없는 그가 이번만큼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그가 답을 준비하는 동안 새다니엘이 말했다. ‘나는 그 질문을 한다면 아즈윈이 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게랄드라니 정말 의외구나.’ 게랄드는 어깨만 으쓱했다. 퀘이언이 말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제 과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폐하, 제자들에게 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런 약한 모습을 본다고 이 애들이 너에 대한 존경심을 버릴 리는 없다. 그리고 나 역시 너에 대한 과거를 알고 싶구나.’ 퀘이언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마스터의 위엄을 유지하며 게랄드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게랄드, 그래, 이 정도 얘기는 해도 좋겠구나. 나 역시 사랑하던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하던 사람이 아직도 날 사랑하지는 않으며, 나 역시 그 감정을 길게 가지지는 않았다. 그 잠깐 동안의 감정은 아직도 내 가슴에 불타고 있으나, 그걸 겉으로 드러낼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나는 여왕 폐하를 사랑한다. 그 분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아즈윈이 환호하며 말했다. ‘마스터와 폐하라면 어울립니다.’ 새다니엘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게도 그것은 기분 좋은 고백이구나.’ ‘허나 폐하는 아란티어를 사랑하시며 제 지금 사랑은 결국 짧은 시간 동안 잊혀질 짝사랑에 불과합니다. 은퇴하는 순간이 되면 저는 그 사랑을 잊을 것이고, 이 임무를 다섯 중 한 명에게 물려주며 제 운명이 결정지어줄 또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되겠지요.’ ‘대답이 되었느냐, 게랄드?’ 새다니엘은 웃으며 물었다. ‘어렵군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전 수호 기사의 자격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호 기사에 관한한 나도 누가 될지 예측하긴 어렵지. 그러니 그 문제는 나 역시 모르겠구나.’ 새다니엘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여왕 알현이 끝난 후 아즈윈은 당장 게랄드를 붙잡고 ‘네가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냐? 시녀 중에 있어? 나는 항상 무시하더니 결국 딴 여자가 있었구나.’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게랄드는 얼굴에 대고 ‘수다쟁이’ 라고 말해주고 그녀의 말은 일체 무시했다. 그때부터였나? 아직 던멜이 하얀 늑대가 되지 않았던 그 때, 그러니까 처음 하얀 늑대라는 직위를 가지게 된 그 날이었다. 울프 기사단 내에서 하얀 늑대가 된다는 건 사실 큰 의미를 가지는 건 아니라서, 간단히 술만 마시는 축하 파티가 다였다. 베란다에 혼자 있는 게랄드를 찾아간 아즈윈은 술에 취해 말했다. ‘잘 됐다. 우리는 바라는 바까지 올라왔어. 로일이 가지고 있던 경지에도 비슷하게나마 이루었고.’ 그때 게랄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에서 새나오는 어두침침한 촛불과 바깥에서 내리쬐는 달빛을 동시에 받은 게랄드의 얼굴은 무척이나 신비로워 보였다. 술에 취했으면서도 이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는 건 어쩐지 미화되었거나 잘못된 기억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아즈윈은 게랄드가 슬픈 어조였다는 것은 확실하게 기억했다. ‘기쁘냐? 나는 별로다.’ ‘다른 울프들한테는 좋다고 그랬잖아.’ ‘좋았다는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좋은 것만은 아니군.’ ‘무슨 문제 있어?’ ‘여자 문제다.’ ‘오호라, 상담이구나. 다 해결해주지. 말해봐.’ ‘싫다. 이런 건 혼자 담고 삭이는 게 남자다.’ 아즈윈은 웃으며 난간에 기대어 있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심각한 건 안 어울려. 항상 그랬듯, 내게 재미있는 농담을 해줘야지. 저 늑대 놈들 또 검술 얘기로 빠졌다구. 지겨워라.’ ‘우스운 얘기? 나랑 결혼할래, 이런 거? 매일 아침 내게 빵을 구워줘. 저녁에 잠들기 전에 네 얼굴을 봤으면 해.’ 아즈윈은 뒤집어지게 웃으며, 게랄드의 뺨에 키스했다. “귀여운 것. 그래, 그래. 빵 굽는 건 무리니까 매일 밤 내 방에 와서 얼굴 보고 잠들어라. 너를 위해서 방문을 항상 열어두마.” 아즈윈은 그 말을 하고 난간에 엎어져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누구에게 옮겨졌는지 그녀는 침대에 올라가 있었다.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때 그거 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냐?” 아즈윈을 깨우자마자, 손에 도끼를 들고 입구로 달려가려던 게랄드가 멈춰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농담이고 뭐가 진심이야? 이 위급한 상황에 선문답 하자는 거냐?” 아즈윈은 그제야 기억이 아닌 현실로 돌아왔고, 얼른 잠에서 깨는 척 하며 물었다. “아, 미안. 꿈이랑 혼동했다. 무슨 일이야?” “적이다. 동굴 앞을 포위당했다.” “뭐? 새벽에 이동한다고 했잖아.” “이동하려고 모두들 깨우기 직전에 당한 일이다. 서둘러.” 아즈윈은 얼른 칼과 방패를 챙겼다. 그러고 보니 울프 기사단의 첫 번째 테스트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쉐이든이었으나, 합격한 후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은 게랄드였다. 그리고 두 번째 테스트 내내 옆에 붙어있던 사람도 게랄드였다. ‘그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내가 그때 저 녀석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가? 아니야. 기억 못할 정도로 아무 남자한테나 그런 말 낭비하고 다니지는 않았어!’ 아즈윈은 방패로 자기 머리를 한 대 쳤다. ‘에라, 이 녀석, 그런 걸로 뿌듯해 할 때가 아니지. 만약 단순히 기억 못하는 거라면, 저 녀석이 내 유혹에 안 넘어간 게 아니라 내가 눈치 못 챈 게 되네.’ 주위의 다급한 공기와 상관없이 아즈윈은 당혹스러웠다. 세르메이를 제외한 모든 레미프들은 무기를 쥐고 동굴 입구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론틀로스는 밖을 내다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바깥쪽에서도 레미프들의 언어로 대답이 돌아왔다. 게랄드는 동굴 입구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엎드린 채로 물었다. “타치셀 쪽 레미프인가?” “그렇다. 그리고 나와 대화하는 건 그들을 이끄는 이구셀런인 레드워드다.” “전에 기습을 했던 지휘관도 저 놈이겠지? 이제 동굴까지 차단했군. 쉽게 대하지 마라, 론틀로스. 저 놈은 이런 국지전에 대단히 능한 놈일 거다.” “바푸쿠즈를 내놓으면 나머지는 풀어주겠다는군.” “그 말 자체가 함정이다. 놈들이 원하는 건 세르메이 하나다. 넘기면 우리의 생사여탈권은 완전히 넘어가는 거야.” “함정이든 아니든 따를 수 없는 요구다.” “그것까지 알고 저러는 거야.” 론틀로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신음했다. “어제 찾아둔 입구로 피하자.” 게랄드가 제안했다. “아니, 안 된다.” 론틀로소는 게랄드의 팔을 붙들었다. “적어도 나는 안돼.” 그는 게랄드의 팔을 붙잡은 상태로 밖에 대고 뭐라고 소리쳤다. “방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해뒀다. 나와 부하들이 여기에서 시간을 끌겠다. 너와 아즈윈이 바푸쿠즈를 모시고 어제 찾은 그 길로 가라. 그 다음은 기더에 맡기고 드래곤의 성지를.......” 아즈윈이 화를 내며 그의 말을 끊었다 . “기더 따위는 입에 올리지 마라.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작전을 말하는 거야?” “시간이 없소. 아즈윈. 익셀런, 특히 저 레드워드라는 자는 우리 레미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투에 관한 지식을 꿰고 있소.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대로 입구를 비우고 반대쪽 출구로 달아나면 어찌 되겠소? 당연히 그들도 따라올 것이고, 우리의 기동력으로는 저들을 따돌릴 수 없소. 나무로 가득 찬 숲에서도 우리의 퇴로를 예측하고 병력을 숨겨놓았던 자요.” 게랄드도 론틀로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 반대로 하자. 우리가 여길 맡겠다. 네가 공주를 모셔라.” 론틀로스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밖을 내다보지 마라, 게랄드! 너희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우그의 전사여.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저 자도 바푸쿠즈가 여기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나는 최대한 여기에서 시간을 끌겠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겠다. 이것은 나의 기더다.” “너희들이 기더는 목숨을 함부로 하는 건가?” 게랄드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커다란 것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 우리들이 최고로 여기는 기더다 만약 여기에서 내 목숨을 희생하여 우리의 의지를 지킬 수 있다면 나는 진실로 행복할 것이다.” 듣다 못한 아즈윈이 론틀로스의 멱살을 잡았다. “시끄러워!” 깜짝 놀란 레미프 병사들이 얼결에 창을 들이댔다. 론틀로스가 바로 손을 내밀어 부하들을 만류했다. 아즈윈이 말했다. “이기적이다, 론틀로스. 희생으로 세르메이를 살렸다고 그걸 영광이라고 생각하려는 거냐?그럼 세르메이의 마음은? 저 애는 어쩔거냐? 네가 희생해서 죽은 다음에 남아있을 저 애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만 마음이 편해지면 다야? 닥치고 세르메이와 같이 여길 떠나라. 나와 게랄드가 여길 지키겠다. 아니, 너희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저 익셀런이라는 존재를 이 자리에서 죽여주지.” 론틀로스는 겁에 질린 눈으로 두 사람을 말리려고 다가오는 세르메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놓아 주게, 아즈윈.” 론틀로스는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부드러운 명령을 내렸다. 그는 힘이 빠진 아즈윈의 두 손을 잡아 밑으로 내린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와 바푸쿠즈와의 관계는 레미프 세계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하 관계다. 알 수 있겠는가? 바푸쿠......, 아니 세르메이는 나의 군주시며, 나의 딸이며, 나의 연인이다. 너희 우그들이 이 관계를 이해하며, 거기에 대해 조언할 수 있겠나? 네가 분노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라.” 그는 아즈윈의 손을 놓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너희들의 자신감도 알고 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라.” 론틀로스는 두려움에 젖은 세르메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세르메이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어떤 말도 오고 가지 않았으나. 세르메이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세르메이가 태어나는 순간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바쳐왔다. 이 아이는 나의 전부였다. 그런 아이를 너희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라. 아즈윈, 게랄드.” 아즈윈은 납득할 수 없었다. 계속 따지고 싶었고, 론틀로스를 세르메이와 같이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게랄드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아즈윈.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론틀로스.” “그게 내가 여기 있는 이유다. 그러니 바푸쿠즈를 부탁한다.” 게랄드는 횃불을 들고 앞서 걸었고, 아즈윈도 배낭을 짊어지고 게랄드를 따르다가 론틀로스를 돌아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만나도’ 지금처럼 편하게 대해줘, 론틀로스.” 론틀로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세르메이는 마지막까지 론틀로스 옆을 떠날 줄 몰랐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론틀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론틀로스는 그 손을 꽉 쥐며 말했다. [트포드 크바이, 마이 히티. 트포드.] 론틀로스는 그 손을 놓아주며 동굴 밖의 익셀런을 향해 소리쳤다. [엡 누브마두트, 이구셀런.] 세르메이는 천천히 뒷걸음치다가 아즈윈을 향해 달려왔다. 아즈윈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달렸다. 마지막 순간 동굴 안쪽으로 화살이 날아 들어왔고, 론틀로스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고부 라루튼!] 병사들도 따라서 외쳤다. [라루튼!] [라루튼!] 처음에는 흐느끼며 달렸던 세르메이는 어느 새 눈물을 그쳤다. 곧 세르메이는 뺨에 묻은 눈물을 닦고 그녀를 고려해 천천히 걸어가려는 게랄드를 재촉했다. 아즈윈은 갑작스러운 세르메이의 심경변화에 내심 놀랐다 그녀를 위해, 그녀가 이뤄내야 할 사명을 위해 모두가 희생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녀 혼자 울면서 걸음을 지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었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적지에 남기고 온 지금 그녀의 행동은 보통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즈윈은 처음으로 연약한 바푸쿠즈가 아닌, 세르메이의 진짜 내면을 볼 수 있었다. 횃불이 절반쯤 탔을 무렵, 전에 찾아뒀던 출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즈윈은 배낭에서 레미프의 밧줄 나이즈닥을 꺼내 게랄드에게 내줬고, 그는 먼저 올라가 밧줄을 내려주었다. 아즈윈은 안전한지 시험 삼아 나이즈닥을 세게 잡아 당겼다. 길게 늘어났지만 어느 정도에서 멈췄다. 아즈윈은 세르메이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잡은 나이즈닥을 최대한 잡아당긴 후, 단숨에 벽을 타고 뛰어올라갔다. 튕기는 힘이 예상보다 커서 입구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둘의 몸은 지상에서 몇 걸음이나 떠올랐다. 세르메이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즈윈은 바닥에 착지한 후 몸을 한 바퀴 굴리며 세르메이를 보호했다. 줄의 반대쪽 끝을 잡고 버티고 있던 게랄드는 아즈윈이 놓친 줄이 얼굴을 채찍처럼 후려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피했다. 햇빛에 눈이 부셔 둘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아즈윈은 언제 또 쓰게 될지 모를 밧줄을 허리에 친친 감았다. 세르메이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았는지 눈 주위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 내가 적이라면 론틀로스 같은 거물은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는 걸택할 거다.” 게랄드가 횃불을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그 말, 세르메이에게 해 줘.” 아즈윈이 말했다. “세르메이는 혼자 견뎌낼 거야. 론틀로스는 세르메이가 아주 강한 여전사라고 했다. 너처럼. 그러니 혼자 이겨내도록 내버려 둬.” “너무 잔인해” 아즈윈은 세르메이의 손을 잡아주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세르메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몹시 당황하며 뭐라고 아즈윈에게 말했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레미프들과 며칠 지낸 게랄드도 단어 몇 개 아는 정도니 그 말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로아쿠 오그 라플홉트! 사-크나딜.] “크나딜? 그 드래곤 말하는 거야?”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던 세르메이는 답답한지 손가락으로 자기 귀를 가리켰다. “귀 아파?” 게랄드가 물었다. 아즈윈은 그의 어깨를 쳤다. “장난 하냐? 이건 뭔가 들린다는 뜻 같아. 이럴 때 이마 맞대는 대화를 할 수도 없고, 답답하군.” 세르메이도 답답해하다가,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주 못 그렸지만, 아즈윈은 그게 뭔지 대강 알아들었다. “아, 기억난다. 리플흡트 크나딜! 그리고 귀를 가리킨다는건.......” 아즈윈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도려나? 그래서 그게 어디야?” 세르메이는 해가 떠오르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가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 검은 로브를 둘러쓴 기사가 있었다. 세르메이는 떨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접었다. 게랄드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도끼를 천천히 끌어내려 옆에 들었고, 아즈윈도 세르메이를 지키며 섰다. “자, 저 녀석이 여기 입구에 버티고 있다. 이 드넓은 숲에서 마주칠 수 있는 엄청난 우연이 아니라면 저게 의도된 거고 저 뒤에는 우리의 들통 난 작전을 박살낼 병력이 준비되어 있겠지? 그 레드워드라는 놈, 대단한 놈일세. 이런 것까지 계산하고 포위했던 거야?” 아즈윈이 중얼거리며 칼을 고쳐 쥐었다. “둘이서 먼저 가라. 내가 해치운다.” 게랄드가 말했고, 아즈윈은 거절했다. “아니, 내가 한다. 세르메이를 데리고 가라.” “아, 그냥 같이 해버리자. 지금 시합하는 것도 아니고.......” 검은 기사는 이를 드러낸 검은 털의 짐승 위에서 내려와 머리를 가리고 있던 후두를 걷어냈다. 검은 금속이 반짝이는 투구가 드러났다. “카린델프를 죽인 우그가 있다고 하더니, 그게 너희 둘인가?” 그가 입을 열었다. 게랄드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저 놈, 말할 줄 알잖아?” 검은 기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크랜드에서 오지 않았나? 그럼 내 갑옷을 보고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자기네 기사단 유명하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놈이냐?” 아즈윈이 쏘아붙였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면서 한 무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레미프들이었다. “둘이 같이 덤벼도 상관없다. 그 정도는 해주지.” 익셀런의 기사는 칼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칼끝이 그리는 곡선만 봐도 예사 놈은 아니라고 짐작하고, 아즈윈이 신호를 보냈다. 이미 레미프들은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기회는 한 번밖에 없었다. 두 하얀 늑대는 동시에 달려들어 칼과 도끼를 휘둘렀다. 정확히 목과 가슴을 노린 그 공격을 보고 익셀런의 기사는 피하지 않고 달려들어 아즈윈의 칼을 쳐냈다. 그리고 가슴을 노리는 도끼를 피하더니, 어깨로 아즈윈을 들이받았다. 나무에 부딪힌 아즈윈의 목으로 검은 기사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 나무에 칼날이 박혔다. 아즈윈이 옆으로 몸을 굴리며 휘두른 칼을 그는 철갑으로 보호된 손등으로 쳐내더니 가볍게 나무에 박힌 칼을 뽑았다. 다시 그 칼은 아즈윈을 겨냥했다. 뒤에서 게랄드가 달려들려는 순간 아즈윈이 소리쳤다. “먼저 가라, 게리.” “같이 해.” “세르메이를 지켜. 드래곤 사는 곳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억지로 찢어질 필요 없......!” 그 순간 게릴드에게 푸른빛을 띤 투명한 칼날이 쏟아졌다. 게랄드는 황급히 도끼를 휘저어 그걸 쳐냈다. 부서진 투명한 칼날이 밑으로 후두둑 떨어지더니 파란 불꽃을 내며 타올랐다. 아즈윈은 나무 너머를 바라보았다. 레미프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는 마법사였다. 아즈윈은 다급히 말했다. “게리, 부탁이다. 세르메이를 지켜라. 뒤따라가겠다.” 게랄드는 세르메이를 손으로 잡아끌어 자기 등 뒤로 보내고 다시 말했다. “그러지 마라, 아즈윈. 너까지 희생하려고?” “희생? 미쳤냐? 뒤따라간다고 말했다. 이 녀석에게 내 ‘기더’를 시험해보겠다. 너는 전진해라. 전진 방향에도 적이 있을지 모른다. 조심하고.” 게랄드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마지막으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믿어라.” “오냐. 기다리다 안 오면 그냥 가겠다.” “기다려! 안 갈 리가 있겠냐?” 아즈윈은 게랄드를 보내는 길지 않은 대화를 하면서도 눈앞에 놓여있는 칼에 계속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기사는 뒤에서 몰려온 병사들을 이끈 여자 레미프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을 아즈윈에게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마법사라고 아즈윈은 짐작했다. 그의 명령에 그 여자 레미프는 병사들을 이끌고 게랄드를 쫓아갔다. 결국 작은 동굴의 출구 앞에는 아즈윈과 익셀런의 기사만 남게 되었다. “다 보내다니, 정식 시합이라도 하자는 거냐?” “나쁘지 않은 실력이더군. 괜히 너 하나 잡자고 병력을 여기에 묶어놓을 필요는 없지.” “후회한다, 너?” “나는 익셀런 제1기사단의 홀튼이다. 눈앞의 대결 상대를 두고 후회하는 짓은 안 한다.” “나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아즈윈이다. 대결 상대를 후회하게 만드는 짓을 주로 하지.” 홀튼은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혹시나 했더니 어설픈 기사단 출신이 아니었군.” “너도 네이슨이 아니군.” “......그의 이름은 어떻게 알지?” “레미프들에게 들었다. 그는 어디 있나?” 아즈윈은 메고 있던 배낭을 옆으로 던져버리고 방패와 칼만 들었다. “말해줘야 할 의무라도 있나?” “의무는 아니지.” 레미프들의 발소리도 완전히 멀어졌다. 항상 들려 와 이제 소음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숲의 소리만 정적처럼 둘을 감쌌다. “그런데 레미프들, 너네 말 잘 듣더라. 어떻게 그리 훈련시켰어?” “10년 동안 유령처럼 행동하면 못할 일도 아니지.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고 있다. 칼을 들어라, 기사 아즈윈.” 아즈윈은 칼의 옆면으로 이마를 두들겼다. “아차 깜빡 했다. 너 죽인 다음에, 게랄드를 어떻게 쫓아가야 하나?” “괜한 걱정을 하는군.” “너희들은 어떻게 하늘 산맥의 길을 찾지?” “그런 힘을 얻었다, 우리는.” “친절하지 못한 놈이네.” 공격의 시작은 아즈윈 이었으나, 그녀의 공격을 막은 홀튼의 반격에 밀리는 건 되려 아즈윈 쪽이었다. 갑옷을 입고서도 저 정도 속도라면, 벗은 후 공격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빨랐다. 그의 공격은 멈추는가 싶으면 이어졌고, 전력을 다해 휘두를 줄 알고 잔뜩 힘을 주어 방패를 들이대면 공격을 멈춰버렸다. 왼손잡이와 싸워본 적은 많았으나, 이 자는 거의 양손잡이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하던 거기에 맞추지 않고 자기 식대로 밀어 붙이는 아즈윈이 자기 공격을 한 번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못 따라가겠다, 빌어먹을.’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 칼을 찔러봤자, 검은 로브 안에 감춰진 갑옷을 뚫을 정도는 못되었다. 홀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지, 자잘한 공격에는 현혹되지 않고 큰 공격만 대비했다. 어설프게 갑옷을 뚫을 공격을 시도하다가는 역습 당하기 꼭 알맞았다. 아즈윈은 몇 걸음이나 일부러 밀려나다가 나무를 밟고 뛰어올라 투구 쪽을 칼로 찔렀다. 그러나 홀튼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공격을 막고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고 투구로 머리를 들이받았다. “윽.” 눈앞이 하얘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홀튼의 공격을 오른손에 든 칼로 막았으나, 홀튼의 투구는 다시 한번 아즈윈의 머리를 들이박았다. 강한 충격에 그녀의 머리가 뒤로 튕겨나갔다가 되돌아왔다. 고통은 둘째 치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즈윈은 피가 흘러나오는 이를 악물고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또 한 번 날아오는 칼을 막더니, 그녀는 방패를 상대의 투구 앞에 대 그 자의 시야를 가렸다. 그래도 그는 놓지 않았다. “떨어져, 자식아!” 아즈윈은 소리 지르며 방패로 그의 투구를 밀었고, 이어 허공에 뜬 발로 홀튼의 가슴을 걷어찼다. 아마 충격은 없었을 테지만 느닷없는 공격에 놀라 홀튼은 멱살을 잡은 손을 놓쳤다. 바닥에 착지한 후 그녀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홀튼의 공격이 또 한 번 머리 위를 스치고지나갔다. 아즈윈은 방패로 머리를 가렸다. 하얗게 반짝이는 눈앞이 조금씩 보이나 싶었으나, 눈에 피가 들어가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 훨씬 대담하게 접근하는 상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홀튼은 아즈윈의 시야를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미 아즈윈은 그 다음 벌어질 공격의 계획과 방향을 모두 읽어냈다. 아즈윈은 방패를 들이밀고 그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홀튼은 방패 째로 날려버릴 양으로 두 손으로 칼을 쥐고 휘둘렀다. 깨지는 듯한 큰 소리와 함께 방패는 멀찌감치 날아갔다. 그러나 방패 뒤에 있어야 할 아즈윈은 없었다. “!” 아즈윈은 홀튼의 표정에서 그의 생각을 읽었다. 홀튼은 그녀가 사라졌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곳은 방패였고, 그의 시야 안에서 아즈윈은 분명 방패 뒤에 있어야 했다. 그러니 방패를 머리 위로 세우고 바닥을 기다시피 달려오는 아즈윈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밑에서 쳐올리는 그녀의 칼이 투구를 뚫었고, 홀튼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넘어졌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휘두른 팔을 되돌렸으나, 이미 칼은 목표를 잃었다. 쓰러진 홀튼의 시체 위에서 아즈윈은 피 묻은 칼을 들고, 게랄드와 세르메이가 달아났다고 추측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앞이 흐릿했다. 그녀는 피가 들어간 눈을 비비고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저 방향이 맞을까?’ 몇 번 홀튼과 부딪치면서 그녀는 안 그래도 없던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래서 차라리 눈을 감았다. ‘세르메이, 또 한 번 나를 불러라. 기더에 나를 맡기고 너를 찾아가겠다.’ 그녀는 도로 눈을 뜨고 달렸다. 세르메이와 엮여 있다면 아무렇게나 달려도 결국 그녀에게 도달하리라 믿었다. 그때 뒤쪽에서 음산한 기운이 불쑥 등줄기를 타고 쫓아왔다. 아즈윈은 바닥에 엎드렸다. 커다란 불기둥 하나가 훑고 지나갔다. 돌아보니 머리를 뒤로 묶은 검은 피부의 여자 레미프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까 홀튼과 이야기 하고 레미프들을 이끌었던 그 여자였다. 그녀가 뭐라고 소리 지르자, 숨어 있던 레미프들이 몰려왔다. “기사도를 바라는 건 홀튼까지겠지.” 아즈윈은 싸우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고함 소리가 뒤쫓았다. 도주로의 끝에는 바닥이 갈라진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었다. 바닥은 깊이를 잴 수 없는 시커먼 어둠만 가득했다. 계곡의 건너편까지는 나이즈닥 열 가닥을 합쳐도 닿지 않을 정도로 멀었다. ‘여기가 하푸구나.’ 그 절벽의 틈은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 좁아지는 한 부분에 흔들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즈윈은 그 쪽으로 달려갔다. 흔들 다리에 가까워질수록 절벽 양쪽을 울리는 금속성과 비명 소리가 커졌다. 뒤에서는 여전히 레미프들과 마법사가 쫓아왔고, 흔들 다리를 향하는 길목에도 같은 놈들이 몰려 있었다. 그 곳에 게랄드가 서서 흔들 다리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아즈윈은 그 레미프 무리의 한 가운데로 달려들었다. 게랄드의 도끼에만 신경 쓰고 있던 레미프들이 거의 동시에 무릎이 꺾여 쓰러졌다. 아즈윈이 달리는 방향에 있던 레미프들은 차례로 뒤로 넘어졌고, 아킬레스건과 무릎을 베인 레미프들은 다친 부분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러댔다. 아즈윈이 게랄드에게 도달하기 위해 뚫은 길목의 레미프들이 무너지면서, 무리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아즈윈은 피 떨어지는 칼을 들고 주위를 살폈다. 홀튼과 싸우고 여기까지 달려온 자기보다 게랄드가 더 지쳐 있었다. 세르메이는 이미 흔들 다리를 건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랄드는 세르메이를 지키면서 동시에 여기 올 때까지 버티느라 체력소모가 심한 싸움을 이어갔음에 분명했다. 아즈윈은 빠르게 상황을 분석하고 게랄드에게 명령했다. “먼저 건너!” 언제나 그랬듯 전투시의 명령권은 아즈윈에게 있었다. “바로 따라와라.” 게랄드는 흔들리는 다리 위를 평지에서 달리듯 빠르게 건넜다. 아즈윈은 방패로 몰려드는 창을 모구 막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위협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몰려 있는 레미프들이 아니라, 한참 떨어져 있는 여자 마법사 쪽이었다 아즈윈은 칼을 크게 휘두러 그들을 잠깐 물리치더니, 칼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레미프의 창을 집어, 멀리서 뭔가를 준비하는 여자 마법사를 향해 던졌다. 레미프들의 사이사이을 뚫고 날아간 창이 그 마법사의 옆을 휙 지나갔다. 깜짝 놀란 그 마법사는 준비하던 걸 멈추고, 몸을 숨겼다 “어딜 감히!” 잠깐 칼을 놓았음에도 감히 그녀에게 함부로 달려드는 병사는 없었다. 그녀는 다른 레미프들을 향해 바닥에 꽂힌 칼을 뽑아 휘둘러 보이고, 뒷걸음질 쳤다. 돌아보니 게랄드가 다리의 거의 끝에 도달해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다리의 오른쪽으로부터 시커먼 뭔가가 접근하는 걸 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거대한 새의 발톱이었다. 아니, 도마뱀인가? 여하간 낱개 하나하나다 애기 손바닥만한 검은 비늘로 둘러싸인 거대한 발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즈윈은 뒤로 점프했고, 그 발톱은 흔들 다리의 줄을 잡아 뜯었다. 거의 다 건너고 있던 게랄드는 다리가 휘청 하면서 균형을 잃었다. 다리가 끊어졌고, 게랄드는 먼저 건너가서 기다리고 있던 세르메이 쪽으로 몸을 날렸다. 끊어진 다리는 아직 고정되어 있는 양쪽 끝을 기준으로 두 조각 났다. 아즈윈은 바닥에 발을 대고 게랄드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는 세르메이의 도움을 받아 절벽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대신 계곡을 건너는 길은 사라졌다. 다리가 끊긴 절벽 너머에서 시커먼 새의 다리가 올라와, 바닥에 발톱을 꽂아 고정시켰다. 곧 다른 쪽 발도 따라오더니 이내 날개 없는 검은 드래곤이 아즈윈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분명히 같은 편일 레미프들조차 겁에 질려 한참 뒤로 물러났다. 아즈윈도 일단 칼과 방패를 내밀고는 있었으나, 그 크기에 기가 죽어 입을 따악 벌렸다. “이게 카구아구나.......” 아즈윈은 론틀로스가 말해준 그 이름을 용케 떠올렸다. 그리고 그 거대한 드래곤은 아즈윈 앞에서 앞발을 치켜세우고 튼튼한 두 다리를 바닥에 지탱하더니 몸을 길게 일으켰다. 2,3층짜리 건물이 앞을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어, 잠깐. 이거랑 싸워야 되는 거냐, 내가?” 아즈윈은 무섭다기보다 뭔가 억울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카구아는 아즈윈이 생각할 기회도 주지 않고 앞발을 내리쳤다. 바닥이 부서지며, 깨진 흙더미가 그 검은 발에 딸려 올라가 허공에서 흩날렸다. 피하긴 했지만 워낙 바닥을 깨뜨리는 힘이 강해 그녀는 뒤로 밀려나 나무에 등을 부딪쳤다. “반칙이다, 이거. 반칙이야! 내게 타고 싸울 전투마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아즈윈은 나무에 기댄 채로 카구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사정 봐줄 이유가 없는 카구아의 공격이 이어졌고, 아즈윈이 피한 대신 나무가 박살났다. 끈적한 나무 진액이 튀고, 그 파편이 방향을 가리지 않고 흩어졌다. 아즈윈을 쫓느라 몇 그루의 나무를 부숴버린 카구아는 이제 그녀가 숨은바위를 통째로 들어 절벽 쪽으로 내던져버렸다. 직접적인 공격을 하나도 당하지 않았건만, 온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아즈윈은 단 시간에 지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또 나무에 등을 기대게 되었다. 노려보는 카구아의 샛노란 눈빛이, 나무 뒤에서 마찬가지로 쏘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즈윈은 카구아가 으르렁대는 것에 맞추어 으르렁대며 말했다. “저 자식 움직임을 잡을 울프 두 명을 배치시켜 줘. 내게 저 놈 목을 벨만한 르고의 무기를 새로 만들어줘. 싸움은 그 다음에 하는 거야. 그래야 공평하지.” 카구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주위의 공기가 모조리 카구아의 입 쪽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즈윈은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야, 야. 그거 말로만 듣던 ‘그거’냐? 하지 마, 그런 거. 나한테 그걸 막을 방패를 줘야지.” 힘을 끌어 모은 카구아는 아즈윈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쏟아지는 검은 불길이 아즈윈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를 비롯한 근처 나무 몇 그루를 뒤로 밀어 쓰러뜨렸다. 그 힘의 여파는 단순히 나무 몇 그루에 한정되지 않았다. 재수 없게 그 쪽으로 몸을 피하고 있던 레미프 병사들 수십이 검은 불길에 휩쓸려 사라졌다. 카구아의 숨결이 닿은 부분은 바닥마저 검게 타서, 하늘 산맥에서 보기 드물게 큰 길이 생겼다. 녀석은 앞발을 들고 뒷발로만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아즈윈은 카구아의 숨소리가 들릴 만한 가까운 곳, 나무 뒤편에 서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묶어두었던 나이즈닥을 풀어 매듭을 만들었다. “사냥 수칙 3번, 세상 어떤 맹수도 눈을 보호하는 힘은 없다.” 아즈윈은 그 말을 되뇌며 픽 웃었다. “그 말을 암기하라고 하셨을 때는 어떤 맹수도 내 칼에 당할 수 없다고 반항했었네요. 뭐, 어린애한테 저런 괴물도 있다는 걸 설명할 자신은 없으셨나 보죠, 선생님?” 그녀는 카구아가 뒤통수를 보이는 순간, 매듭을 만든 나이즈닥을 카구아의 머리를 향해 휙 집어 던졌다. 정확히 목에 걸린 밧줄을 잡아당기는 순간, 놀란 카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밧줄을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겼다. '세르메이를 달고도 그 정도 뛰었으니, 내 몸 하나는 저 녀석 머리 위로 날 수 있겠지.‘ 아즈윈은 끝까지 버티다가 화가 난 카구아가 밧줄을 잡아당기는 순간 바닥에서 발을 떼며 몸을 날렸다. 온 몸이 카구아의 몸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가속 상황에서 그녀는 나무를 발로 걷어차며 방향을 바꾸었다. 그 다음 도달한 나무를 도약 지점으로 삼아 아즈윈은 카구아보다 놓은 위치에 떠올라 있었다. 갑작스레 위로 솟구쳐 오른 아즈윈을 찾지 못한 카구아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카구아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칼을 내리 찍었다. 칼날은 버터를 찌르는 것보다는 질긴 느낌으로 카구아의 눈동자에 푹 박혔다. 카구아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로 팔을 휘둘렀다. 아즈윈은 그 팔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허공에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칼날이 뽑혀 나오며 피가 아닌 뿌연 액체가 허공으로 딸려 나왔다. 아즈윈은 굵은 나뭇가지에 등을 부딪치고, 나무에 가슴을 부딪친 후 바닥에 허리부터 떨어졌다. 한 순간 숨도 못 쉴 정도로 괴로웠으나, 쉴 틈이 없었다. 눈을 잃은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카구아는 앞발을 바닥에 짚고 아즈윈을 향해 달려왔다. 아즈윈은 처음에는 기다가 일어서서 절벽을 향해 달렸다. 절벽 끝에 도달하는 순간 그녀는 게랄드가 아직도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도끼를 들어 보였고, 아즈윈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둘 사이에는 그것 외에 어떤 신호도 없었다. 그녀는 뒤로 돌아서서 오히려 덤벼드는 카구아 쪽으로 달려갔다. 카구아는 바닥을 긁듯이 앞발을 휘둘렀고, 아즈윈은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이미 그것까지 예측한 카구아는 다른 쪽 팔을 휘둘러 아즈윈을 후려쳤다. 그녀의 몸은 어린아이가 내던진 인형처럼 힘없이 날아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카구아의 목에 걸려 있는 나이즈닥을 잡았다. 길이가 다 되는 순간 밧줄은 길게 늘어나며 가늘어졌다가 멈췄다. 아즈윈은 약간 뒤로 몸을 젖힌 자세로 멈춰 있었다.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방패가 아닌 밧줄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밧줄을 손으로 한 바퀴 꼬아 고정시켰다. ‘끊어지지 마라. 적어도 한 번만 더 버텨라.......’ 카구아가 팔로 후려치는 순간 방패로 막았음에도 온 몸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가 도로 붙은 것 마냥 얼얼했다. 홀튼에게 얻어맞은 상처에서 겨우 멎었던 피가 또 흘렀다.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턱에서 방울 지어 떨어졌다. “사냥수칙 9번, 사냥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8번이었던가?” 한 쪽 눈을 잃은 카구아는 절벽을 등지고 서서 몸을 길게 세웠다. 카구아는 목에 걸린 줄을 손으로 가져갔다. 아즈윈은 자기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줄 거라면, 지금이다, 게랄드.” 카구아는 순간 밧줄의 끝을 잡고 아즈윈을 세게 잡아당겼다. 아즈윈은 오직 녀석이 잡아당기는 타이밍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놈이 끝을 당기는 순간 아즈윈도 있는 힘을 다해 밧줄을 당겼다. 나이즈닥은 거의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가 가벼운 쪽을 끌어당기며 강하게 수축했다. 아즈윈의 발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카구아를 향해 무섭게 빨려 들어갔다. 카구아도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앞발을 들었다. 그러나 치켜든 앞발은 아즈윈에게 휘두르지 못했다. 카구아는 컥 하는 비명과 함께 등을 움츠렸다. 절벽 건너편에서 집어 던진 게랄드의 도끼가 카구아의 뒷덜미에 박혀 있었다. 거기에 신경 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아즈윈의 몸은 카구아에게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칼은 이미 카구아의 목에 박혀 있었다. 고통 속에서 카구아는 앞발을 허우적거리며 아즈윈을 공격하려 했다. “당신이 만든 검이라면 드래곤도 죽일 수 있다고 했지, 르고?” 카구아는 마지막까지 팔을 허우적거리며 천천히 뒤로 넘어졌다. 쿵 하고 육중한 체중이 바닥을 울렸다. 아즈윈은 피곤한 눈으로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 주위의 레미프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는 관심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손에는 카구아의 목을 묶은 밧줄이 쥐어져 있었다. 아즈윈은 아직도 살아남아 입에서 피를 벌컥벌컥 뿜어내는 카구아의 목에서 칼을 뽑아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쥐고 심장에 그 칼을 다시 한 번 박았다. 크게 경련을 일으킨 카구아는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아즈윈은 다시 칼을 뽑았다. 심장에서 터진 피가 발목 아래를 적셨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녀석의 가슴에서 내려와 목과 등 사이에 박힌 도끼를 뽑았다. 너무 세게 박혀 한 손으로는 안 빠지니, 그녀는 발로 카구아이 뒤통수를 밀어 그걸 뽑아냈다. 도끼를 절벽 건너편에 있는 게랄드를 향해 집어 던지는 것까지 하고 나자 그녀는 이제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며 레미프들이 다가왔다. 하지만 아즈윈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아즈윈, 건너올 방법을 생각해보겠다. 기다려라.” 게랄드가 소리쳤다. “아니, 그냥 가라. 나는 여기까지다.” “내가 간다고 했잖아.” “아니야.” 아즈윈은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말을 이었다. “가라. 이 녀석들도 여길 건너지 못할 것이고, 너도 여길 건너지 못할 거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나마 시간을 벌었을 때 일을 끝내라. 세르메이를 세르메이가 가야 할 곳으로 데려다 줘.” 아즈윈은 우두커니 서 있는 세르메이와 게랄드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멀어서 복잡한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수없이 보아 그의 모든 표정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몹시 궁금한 아즈윈이었다. “가라. 내 걱정은 마라.” 게랄드는 망설였다. 흐려진 시야 안에서 게랄드이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가 아는 다른 사람........ ‘죽을 때가 됐나? 왜 저 녀석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머릿속에 게랄드가 했던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러고 싶으면 그냥 그러고 싶다고 말해.’ 평생의 좌우명. 후회하는 일 없게, 모든 일을 즐기자! 그녀는 즐거운 일이 아니면 손대지 않았고, 일단 손 댄 일은 죽을힘을 다해 해냈다. 그게 포기하여 다른 즐거운 일을 찾는 것보다 즐거웠기에 인내는 그다지 쓰지 않았고 성공은 짜릿하게 달았다. 그런데 그 말을 누가 해줬더라? 선생님이었나? 게랄드였나? 이 말은 용병 생활할 때부터 달고 다니던 좌우명이었으니, 게랄드는 아니지. 그런데 왜 녀석을 그때 동굴 안에서 그 비슷한 말을 한 걸까? 아니, 그런 멍청한 말 누가 해준 거명 어때? 지금은 게랄드만 생각하자. 게랄드는 하푸의 깊은 계곡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그럼 기다려라. 세르메이를 데려다 놓고 반드시 구하러 가겠다.” “그래. 위대한 기사의 키스로 눈 뜰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마.” 이제 주먹을 쥘 힘도 없는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무섭게 잠이 쏟아져 깨어있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게랄드의 농담 같은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그건 결혼하자는 뜻이냐? 그런 얘기 마지막은 항상 그거야.” 아즈윈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게랄드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게리. 살아있으면......., 그러자.” 아즈윈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이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검은 기사 하나가 몇 명의 레미프들을 대동하고 서 있었다. 그녀는 순간 아까 죽은 홀튼이 되살아난 건가 착각했다. 그 자의 옆에는 내내 마법으로 괴롭히던 그 여자 레미프도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홀튼을 정면대결로 쓰러뜨렸다는 말을 듣고 거짓인가 했는데, 이제 카구아의 시체까지 보게 되다니. 하늘 산맥에 오래 있었더니 드디어 내 머리가 엉뚱한 착각을 보여주고 있는 건가, 아니면 눈앞의 이 여자가 잘못된 건가? 넌 누구냐?” “아란티아의 하얀 늑대다. 10년 전 너네 기사단을 박살낸 그 기사단의 후배지.” 아즈윈은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힘 있고 위엄 있게 말하고도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없었다. “내가 싸움터에 있는 동안에 익셀런은 패배한 적이 없다. 론타몬은 가넬로크의 다음 경로로 아란티아를 택했었나 보군. 멍청한 왕 같으니라고. 그렇게 무리한 작전을 썼으니 보나마나 패배지.” 아즈윈은 그가 한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대륙 정복 전쟁의 익셀런이 아니었나? 그럼 캡틴 웰치가 이끌었던 그 익셀런은 뭐야?” “그는 한 팔을 잃은 나의 캡틴을 대신한 두 번째였다. 아마 너희가 아는 익셀런 기사단이란, 그냥 죄를 면제 받고 싶어 하던 죄인들이었겠지.” “두 번째? 죄인?” 아즈윈은 이건 또 무슨 소리가 싶었으나, 그는 시원스럽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별로 상관도 없었다. 이제 일어날 힘은 되었고, 그거면 싸우기에도 충분했다. 그는 아즈윈이 일어나는 꼴을 보더니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로브의 후드를 벗어 투구를 드러냈다. “싸우자는 거냐?” “뭐, 여기서 잡혀준다고 살려둘 것 같지는 않으니 얌전히 잡히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넌 이름이 뭐냐?” “레드워드다.” 네이슨이 아니군. 아즈윈은 어느 새 네이슨이 아닌 다른 자에게는 공포조차 느끼지 않았다. 레드워드는 금방 칼을 뽑아 아즈윈의 얼굴 앞까지 뻗었다. “홀튼을 쓰러뜨렸다는 건 인정하나, 그 정도 상처로 뭘 해보.......” 아즈윈은 눈앞의 칼을 옆으로 쳐내고 상대의 춤 안으로 어깨를 부딪쳤다. 레드워드는 그 무게를 이겨내고 그녀를 밀치고 칼을 휘둘렀다. 아즈윈은 넘어질 듯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칼을 크게 휘둘렀다. 레드워드는 무의식적으로 휘두르는 그녀의 칼을 모두 막았다. 그게 한계였다. 그녀는 공격 때문이 아니라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주저앉았다. 레드워드도 굳이 반격을 하지 않고 그녀가 제풀에 쓰러지길 기다렸다. 레드워드는 주저앉은 아즈윈의 배를 걷어차고 등 뒤를 세게 밟았다. 아즈윈은 흙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겪어본 적 없는 굴욕감이 일었으나, 갑옷 입은 남자의 몸무게를 이겨내고 일어날 만한 힘은 이미 없었다. “이런 것도 대결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적어도지지 않았다고 인정해주지. 하지만 역시나 무리 아니었나?” 그가 말했다. “사과라도 할까?” 아즈윈은 차가운 바닥에 뺨을 붙인 채로 말했다. “아니, 널 데려가야겠다.” “어디로?” “캡틴께.” 그는 그녀의 등에서 발을 떼고, 레미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조심스레 다가와 그녀를 포박했다. 그들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그녀는 말했다. “네 ‘첫 번째 캡틴’ 에게 말이냐? 데려가서 어쩌려고?” “너의 처분을 묻겠다. 네 죄는 단지 죽음으로 갚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뭔 상관이냐? 내 할 일은 여기서 끝났다. 그리고 너희 할 일도 나 잡는 걸로 끝났다. 그러니.......” .......상관없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이제 피곤함이 도를 지나쳐 말도 끝맺고 싶지 않았다. “희망을 품고 있군. 한 가지 말해두지만, 네가 죽인 카구아는 우리가 가진 카구아 중 제일 어린놈이었다. 지금 하푸 너머로 도망친 그 두 녀석에게는 우리가 가진 카구아 중 가장 강한 녀석이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저 계곡을 건너지 못할 거라 보는가? 길은 얼마든지 있다.” 아즈윈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반응을 보일 힘도 없다는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녀는 다른 레미프들의 손에 끌려갔다. 그 상태로 몇 시간을 걸으며, 아즈윈은 세르메이의 예언이 분명 틀릴 거라고 확신했다. ‘네이슨이라는 기사에게 죽기 전에 이렇게 끌려가다가 탈진해서 죽을 거야.......’ 예상대로 그녀는 밤을 넘기지 못하고 기절했다. 그리고 다시 밧줄에 묶인 채 눈을 떴을 때 그 곳은 또 다른 레미프들의 마을이었다. 그녀는 이 곳이 어디인지 금방 추측해낼 수 있었다. 타치셀이었다. 4. 사-나딜 (1) 하늘 산맥의 연합 루티아의 전투를 결정짓는 마지막은 케인스윅 앞에서 벌어졌고, 그 전투의 마지막은 던멜과 카구아라고 부르는 검은 기사 네이슨과의 싸움이었다. 부상당한 로일도 던멜도 아직 싸울 힘을 남겨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플로라는 가급적 기회가 되면 자기 힘으로 마법을 써서 던멜을 돕고 싶었다. 언제나 도움을 받기만 했다. 그러니 지금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두 기사의 싸움이 시작되자, 마치 준비된 일 대 일의 결투처럼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다. 플로라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엄청난 격돌이었다. 옆에서 제이메르도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창은 쉐이든이라는 녀석이 최고라고 하지 않았던가?” 플로라는 긴장한 나머지 기회를 접해도 마법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땅이 울렸다. 서쪽의 바위 산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플로라는 그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레미프!” 그들은 베논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넌서치로 달려와 케인스윅으로 달려오는 모즈들에게 들이닥쳤다. 모즈들은 베논을 향해 창을 들이댔으나, 나무도 올라갈 수 있는 베논은 그 창 정도의 높이는 가볍게 뛰어넘어 모즈들의 행렬을 헤집어놓았다. 레미프들은 강하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창 놀림으로 모즈들을 베었다. 그래도 모즈들은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녀석들은 창을 내던지고 몸을 날려 베논 위에 올라탄 레미프들을 물어뜯었다. 싸움이 격렬해지는 순간 어디선가 함성 소리가 들렸다. 케인스윅의 정문 쪽이었다. 누가 그런 마법을 “썼는지 굳이 알아 볼 것 없이 거대한 불길이 치솟으며, 그 힘에 딸려 올라간 모즈들 수십 마리가 까맣게 타서 운석처럼 강물에 처박혔다. 아마 그 마법을 쓴 당사자조차 지금의 플로라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마법이 통해?” 플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탑 위를 바라보았다. ‘화이트비가 깨졌다.......’ 지금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불길한 추리가 하나로 모아지던 중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이제 마법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모즈들을 보호하고 있었던 그 힘을 화이트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 루티아를 배신하고 모즈들과 카구아를 끌어들인 장본인이 그랜드마스터 러스킨이라는 뜻이었다. 플로라는 자기가 한 생각이 오히려 무서워 어깨를 떨었다. 그때 던멜의 마지막 공격이 네이슨의 어깨에 맞아 갑옷을 부쉈고, 던멜은 네이슨의 창에 가슴부터 배까지 베여 쓰러졌다. 네이슨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던멜을 향해 창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플로라는 마법의 힘으로, 뒤에서 버티고 있었던 로일과 제이메르는 칼로 던멜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빠르게 하얀 빛이 네이슨과 던멜 사이를 가로질러갔다. 네이슨은 창을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세 명도 하려던 공격을 멈췄다. 거기에는 사람보다 더 큰 은빛 털의 늑대가 있었다. 늑대는 몸을 돌려 네이슨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네이슨은 떨어뜨린 창 대신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레미프들도 모자라 이제 늑대까지 루티아를 돕는 건가? 내가 없는 곳에서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군.” 그가 말했다. “그걸 안다면 물러나라, 익셀런의 기사.” 늑대가 입도 열지 않고 말했다. 플로라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늑대의 목소리와 목소리에 실린 마법의 힘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스터의 힘을 얻은 지금에 와서는 다른 마법사의 힘을 느끼는 것에도 더 민감해져 있었다. 이건 보통 마법사가 가질 수 없는 위엄이었다. 루티아 내에서도 오직 마스터들만이 가질 수 있는 힘! ‘누구지?’ 웅장하게 중첩된 늑대의 목소리는 여자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원래 마법사의 음성이란 항상 바뀌기 마련이었다. 플로라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네이슨과 맞서는 늑대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이 힘을 찾았으니, 나도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겠군.” 네이슨은 천천히 베논 위에 올라탔다. 늑대가 그가 피할 길을 열어주자, 제이메르가 대신 그 길을 막아섰다. “이제 와 보내줄 것 같으냐?” “운 좋게 살아난 공짜 생명이라고 함부로 여기지 마라.” 네이슨은 비꼬듯 말했다. 제이메르는 이에 질새라 소리쳤다. “내 싸움은 안 끝났어!” 플로라는 네이슨이 물러난 틈을 타 던멜을 보살폈다. 내장이 다친 건 아니지만, 가슴뼈 위를 지나는 근육을 모두 다쳐 출혈이 심했다. “이해 못하는가, 꼬마? 내 쪽이 물러나 주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저 늑대가 날 그냥 보내줄 리가 없지.” 네이슨이 말했다. 제이메르는 황당한 눈으로 늑대를 노려보았다. “넌 뭔데 나서는....... 어, 너?” 제이메르는 늑대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고집스러운 그 눈이 묘하게 뒤틀리며 그는 네이슨을 더 붙잡지 않았다. 늑대는 침착하게 말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제이메르. 서로가 타협의 여지가 있을때 저자가 물러나 줘야 합니다. 루티아를 장악하고 있는 모즈들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습니다. 늑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얀 빛에 휩싸이며 털은 없어지고 머리카락은 몇 움큼의 하얀 부분을 남기고 검게 변했으며, 두 다리와 두 팔은 길어졌다. 늑대의 얼굴이 인간의 모습을 하는 순간, 플로라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 늑대는 루티아의 마법사 중에서는 본 적이 없는 여자 마법사였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나, 저 자가 이 엄청난 숫자의 모즈들을 이끄는 리더라면 여기서 죽이는 게 좋소.” 로일이 말했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네이슨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 자가 가지고 있는 칼을 쓰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네 사람이 살아남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자존심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말을 꺼냈던 로일은 눈빛을 달리하고 네이슨이 뽑은, 별 특이할 것 없는 칼을 바라보았다. 네이슨은 오히려 놀라며 말했다. “내 칼까지 알아보는가?” “드래곤은 죽이는 칼이라면 벌써 두 자루나 보았다. 그건 카-구아닐의 검인가? 누굴 타깃으로 하려고?” 실제로 주위의 기온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차가운 어조에도 네이슨은 흔들리지 않았다. “구아닐께서 내게 드래곤을 죽이는 힘을 주셨다면, 그 목표가 누구겠는가? 이 정도까지 알고 있는 자라면 내 목표가 누구인지 역시 내 입으로 말할 필요가 없겠지.” “구아닐에게 전하라. 그의 사악한 힘이 있는 곳에 루티아의 힘이 있을 것이라고.” “루티아의 가장 위대한 힘이라면 이미 우리와 함께 있다.” “너희와 함께 하는 순간 그 힘은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 “네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마법사인가?” “때가 되면 증명해 보이도록 하지.” 네이슨은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다가 베논을 몰아 논서치를 빠져나갔다. 그가 크보츠 강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자, 모즈들은 밀려온 파도처럼 금방 빠져나갔다. 여기저기에서 승리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봐, 너 누구냐?” 플로라나 로일에 앞서 제이메르가 먼저, 네이슨을 풀어준 것에 대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제 늑대의 모습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닐 텐에 못 알아보십니까, 제이메르?” “으음, 진짜, 너냐?” “얼굴이 바뀌었으니 이해는 하지만, 당신 같은 감각 예리한 검사가 굳이 따져 물을 줄은 몰랐군요.” 플로라는 어째서 제이메르가 그 말에 상처 입고 입을 떼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시하고 플로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 분의 부상은 어떻습니까?” “출혈이 심합니다. 이 이상 흘리면 위험해집니다.” “지혈에 도움이 되는 마법은 알고 있죠? 제가 돕겠습니다, 플로라.” 그녀는 던멜의 가슴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마스터의 힘을 얻은 플로라라고 해도 감히 비교하기 힘든 강력한 치유의 힘이 던멜의 상처를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쉽게 나을 상처가 아니군요. 괜찮으십니까, 기사 울프?” 그녀는 로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로일이오. 던멜을 구해주셔서 고맙소. 당신도 루티아의 마법사요?” “잠시 부재중이었는데, 늦었습니다. 로일, 당신에 대해서는 카셀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그도 당신과 던멜 울프를 많이 걱정했습니다.” “캡틴을 아오?” “캡틴 카셀은 당신들을 돕기 위해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많은 힘을 썼습니다.” 그녀의 말에 로일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알고 있었소.” 뒤에서 마스터 루더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 곳은 괜찮은가? 제이메르, 살아있었군. 아까 모즈들에게 둘러싸인 모습까지만 봐서 죽었다고 생각했지.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루더는 플로라의 옆에 서 있는 여자 마법사를 보고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늦었습니다, 마스터 루더.” “.......타냐, 돌아왔군.” 플로라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아는 타냐는 이런 얼굴도, 이런 목소리도 아니었다. “마침내....... 봉인을 풀었군.” “예,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루더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가장 필요할 때에 와주었어.” “아닙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타냐는 정말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변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세. 레미프들을 데리고 왔다면 사정이 있었겠지. 우리에게도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네. 무엇보다 러스킨이 루티아를 배신하고, 마스터 데다인을 살해했지.” 플로라는 그의 죽음을 루더에게 듣는 순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 그런데 레미프들을 어떻게 데려올 수 있었는가? 솔직히 지금, 마법사들이나 루티아 주민들이 레미프들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있어서 어떤 설명이 있어야겠네.” “정확히 말하자면 캡틴 울프가 레미프들과의 협상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제이메르와 중간에 헤어졌다던 그....... 음, 아란티아의 원군과 레미프의 원군이 같이 온 셈이군. 그래, 캡틴 울프는 지금 어디 계신가? 만나 뵈어야겠네.” “그는 아직 하늘 산맥 동쪽에 있습니다.” “아직? 혼자?” “설명 드리기....... 무척 곤란하군요.” 타냐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볼품없는 긴 코에 주름진 얼굴이었을 때조차 그 은빛 머리 섞인 검은 머리카락만큼은 아름다웠었는데, 매끄러운 얼굴선을 가진 지금은 너무도 근사해 보였다. 더구나 늑대에서 인간으로 변하면서 몸을 감싸던 빛의 가루가 살갗에 남아 반짝이니, 여자인 그녀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지금 드래곤들의 마스터 ‘사-크나딜’ 과 함께 있습니다. 지금 루티아노 개최를 제안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스터 루더는 경악에 가까운 얼굴을 했다. 플로라도 조금 얼떨떨했고, 로일도 심각한 얼굴로 타냐를 주시했다. 제이메르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드래곤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스터 드래곤? 도대체......., 하늘 산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겐가? “지금부터 그 얘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투가 끝난 직후 가장 급한 일만 처리한다는 것이, 그나마도 많이 더뎌져 루티아노가 시작된 시각은 밤이 되어서였다. 던멜의 부상을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마법의 힘을 동원한다고 해도 결국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의료 기술이었으나, 그 의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턱없이 부족했다. 제이메르는 붕대 몇 번 두르고 치료 끝이라며 무리하게 루티아노에 참가하려다 복도에서 기절했다. 결국 얌전히 해주는 치료를 끝내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있는 로일만 루티아노에 있을 수 있었다. “이전에도 북적거린다고 느낀 건 아니었지만, 빈 자리 하나하나가 너무 크군요.” 타냐는 러스킨이 앉은 자리, 데다인, 에틀리, 저스틴, 필립이 앉은 자리를 하나씩 바라보았다. 모즈에게 발톱에 긁힌 자국이 머리끝에서 턱까지 이어져 있는 골베인이 고래를 끄덕이며 힘없이 말했다. “이 빈 자리들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향후 몇 년을 고통 속에 보내야할지 모르오. 플로라가 이 자리에 올라와 있지만 또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지.” “인원에 대한 이야기는 희생당한 분들의 추모식을 가진 후에 해도 늦지 않소. 그리고 지금은 추모식조차 연기해야 할 정도로 해야 할 일이 많소. 회복한 아웃서치의 경계를 강화해야 하며, 다시 경비를 추가해야 하오.” 루더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 마스터 타냐도 돌아왔으니, 하얀 늑대들의 힘의 힘까지 더해 루티아 경비에 힘을 기울이면.......” “갑작스레 돌아온 제가 상황을 주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저에게 발언권을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타냐가 루더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루더는 약간 어색하게 그러라고 대꾸했다. 그녀가 의심할 여지없는 타냐 라고는 알고 있느나, 그녀의 외모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아 보였다. “우선 적이 루티아를 공격한 목적은 루티아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었죠. 큰 피해를 감수하고 모즈들을 총동원했다면 승리했을 상황에서, 그 익셀런의 기사가 미련 없이 떠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레미프들이 원군으로 왔기 때문이 아닌가? 루더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레미프들이 루티아를 도우러 온 것은, 그자에게 있어 원군과는 다른 의미였을 겁니다.” 회의실의 한족에는 레미프들이 나라, 만디르의 캡틴 퍼거스나이가 말없이 앉아있었다. 레미프가 인간의 회의석상에 앉아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피부가 검은 골베인을 노려보는 일이 많았으나, 레미프의 문화나 사정에 밝은 케인스윅의 교장은 충분히 그 시선을 이해해주었다. 타냐는 그런 퍼거스나이를 염두에 두고 말을 이었다. “하늘 산맥의 세력끼리 하나의 적을 상대로 연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따로 부술 수 있었던 상대가 서로 힘을 합쳐버렸으니, 그들로서는 공격 목표를 달리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루티아가 처음부터 공격 목표가 아니었다면, 왜?” 루더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골베인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말했다. “제이메르가 잡아온 그 모즈에 대해서 기억나시오?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알아낸 사실이라 미처 알릴 여유가 없었소. 모즈는 레미프들의 언어를 썼으며, 나는 그 언어를 해독해 계속 말을 걸어보았소. 그랬더니 그것은 이런 말을 했소. ‘루티아 다음은 북쪽 인간들의 나라.’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했지만, 결국 모즈들의 다음 목표는 아란티아가 아니었나 싶었소. 마스터 타냐의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군.” 로일은 물을 계속 조금씩 마시다가 말했다. 피를 많이 흘려 갈증이 심한 모양이었다. “던멜과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었소. 적들은 이상하게 전력을 다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전투 중에는 여러분들께 말하지 않았으나, 사실 내가 지휘관이라면 진즉에 이 루티아를 함락시켰을 거요. 그럼 그 이유가 아란티아 침공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씀이시오?” 타냐는 빠르게 대꾸했다. “제가 레미프들 사이에서 겪고 배운 몇 가지를 종합해보면, 모즈들이 루티아를 공격하면서도 함락시키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을 루티아로 끌어내려는 거죠. 그러나 새나디엘 여왕께서는 하얀 늑대들 다섯 이상을 이 곳에 주지 않았고, 두 번째 원군도 기사단이 아닌 제이메르와 캡틴, 이렇게 두명으로 한정 지었습니다. 적들은 그 두 번째 원군이나마 무너뜨리려 했고, 우리는 결국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는 제이메르에게 들은 바 있네. 몹시 횡설수설해서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루더의 말에 골베인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 뒤로 캡틴 울프와 저는 한 가지 기적을 접했습니다. 레미프들은 그 기적을 ‘기더’ 라 고 표현하더군요. 그 ‘기더’ 덕에 전 하얀 늑대의 맴버 중 하나인 로핀이라는 기사를 만나 그와 함게 라든의 수호 드래곤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로핀?” 로일이 놀라며 물었다. “아는 분입니까?” 타냐가 되물었다. “아니, 모르오.” 로일은 굳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타냐도 길어질 것 같은 말은 접고 이야기를 계속 했다. “우리가 카구아라고 부르는 자들은 실제로 익셀런 기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라든의 드래곤 논틸은 살해당해 있었지요. 우린 대신 더 크신 드래곤을 찾아 하늘 산맥의 동쪽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캡틴 울프는 레미프들과 협상했고, 그 결과로 만디르의 병사들이 여기 있게 됐습니다.” 모두들 새삼스레 퍼거스나이를 보게 되었다. 퍼거스나이는 지루한 표정을 감추고 날개를 한 번 들썩였다. “결국 우리는 드래곤들의 하이로드 ‘사-크나딜’을 만나게 되어 그 분께 도움을 청한 후 저는 루티아의 마지막 전추를 위해 귀환했습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 이상의 얘기는 불필요할 듯해서 생략합니다.” “드래곤들의 마스터, 크나딜까지 개입하실 일이라면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문제가 하늘 산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거군.” 루더가 턱을 긁적였다. “엄밀히 말하면 대륙 전체의 일입니다. 제가 하늘 산맥에 오기 전 아란티아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에게 공격 받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익셀런 기사단까지 부활해서 화이트 게이트로 돌격해 왔지요.” 루더는 나직이 신음하며 자기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골베인을 돌아보았다. “제이메르에게 듣긴 했으나,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 이야기로군. 그가 단순히 횡설수설한 건 아니었던 게야.” “긴 이야기는 회의가 끝난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어째서 그랜드 마스터께서 루티아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루더도, 골베인도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던멜이 알고 있을 걸세. 그러나 그 이유를 정확히 듣는다 해도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를 태우고 날아간 검은 드래곤은.......” “그것이 바로 카-구아닐이라는 드래곤이며, 이 모든 원흉의 처음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럼 그것에 관해서는 던멜께서 깨어나는 대로 알아볼 일이군요. 혹시 로일께서는 이 일에 대해 아시는 바가.......” 타냐가 혹시나 했으나, 로일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럼 아까에 이어, 루티아의 재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재건은 루티아 방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란티아의 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한, 적들은 하늘 산맥을 통과해 나디움을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고로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어떤 적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막아낼 힘을 새로이 키우는 것입니다.” “글쎄, 쉽게 말할 일인가, 이게?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도 아니고. 화이트비가 깨어진 순간 루티아는 본래 루티아가 가질 힘을 잃었네. 이제 우리는 하늘 산맥의 사소한 짐승들까지 막아야 하는 처지야. 아웃서치를 넘어가면 길도 못 찾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된 거지.” 루더가 침울하게 말했으나, 타냐의 어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플로라가 말해주더군요. 적들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제 그들은 쉽게 루티아를 공격하지 못할 겁니다. 당연하지요. 화이트비가 없어도 이 곳은 모든 마법사들의 힘이 집중되어 있는 곳입니다. 어째서 화이트비가 깨지고 러스킨이 물러나는 그 시점에서 카-구아닐이 나서서 루티아를 불태우지 못하겠습니까? 그 자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 중에 자기를 죽일 존재가 있다면 그건 마법사 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러스킨을 자기편으로 만든 것도 그 증거입니다.” 골베인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 채고 먼저 말했다. “마스터 타냐의 말이 옳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존재요. 사실 모즈들에게 공격당하는 동안 우리가 자신감을 많이 잃었던 사실이오. 그러나 마법만 통한다면 정말 드래곤이 쳐들어와도 막을 수 있는 게 루티아 아니겠소?” 잠시 얼떨떨해 있던 루더도 힘없이 웃었다. “내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 있었군. 재건에 대해서는 내게 맡겨 두시오. 탑과 케인스윅의 일은 마스터 골베인께서, 마을 일은 플로라가 맡으면 되겠군. 경비는.......” 루더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저었다. “친구들의 죽음과 러스킨의 일로 나의 통찰력이 이토록 무뎌져 있었다니! 미안하네, 마스터 타냐.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자네는 루티아에 남아있지 않을 생각이군.” “예. 루티아의 일은 세 분께 맡기겠습니다.” 타냐의 말에, 계속 듣고만 있던 플로라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저에게 맡겨진 임무가 너무 과중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시점에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타냐? 또 떠나시다니요?” “퍼거스나이에게 이 곳의 경비를 위해 좀 더 힘을 빌려달라고 부탁 드려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하얀 늑대 중 한 명, 지금 봐서는 부상이 덜한 로일께서 저와 함께 사-크나딜께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드래곤을 만나야 하는 이유라도 있소?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나, 내가 보기에도 다른 곳의 일보다 루티아의 일이 더 급한 것 같소. 아니, 적어도 여기가 아니라면 나는 아란티아로 돌아가는 게 옳지 않소? 적들의 눈이 전부 아란티아를 향하고 있다면.” 로일은 마지막 말에 힘을 더욱 주었다. 아란티아에 위험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그의 눈은 타오르는 듯했다. 충성심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자유분방한 울프의 기사들은 묘할 정도로 아란티아의 안전에 민감했다. 이기적이고 자기 발전 외에는 관심이 없을 것 같던 기사들이 화이트 게이트를 향해 돌진해 오는 익셀런의 기사들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달려 나갔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회의를 심드렁하니 듣고 있던 로일도 역시 울프라는 성을 가질 만한 기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저와 동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데려가고자 하는 곳은 마스터 크나딜 앞이 아니라, 캡틴 카셀의 앞입니다.” 타냐는 차근차근 설명했고, 로일은 즉시 납득했다. “캡틴의 옆을 비울 수는 없지....... 그럼 카셀은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거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크나딜을 뵙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했으나, 실제로 우리는 크나딜의 부름에 이끌린 것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그 분께서 카셀에게 뭔가 시킬 일이 있거나, 카셀을 통해 자기 의지를 나타내고자 한 거라 추측해 보았습니다. 그 일을 하는데 있어 거기에 마법사 한 명과 캡틴을 지킬 기사 한 명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타냐의 말에 로일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루더는 그 말에 오히려 어처구니없어 했다. “카셀이란 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여러 차례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아무리 아란티아의 캡틴이라지만,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라 자처할 마법사가 스스로 그 밑에 들어가 고작 ‘동행’ 이라는 이름을 얻고자 하는가?” 타냐는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그녀의 침묵은 절로 회의실 전체의 침묵을 이끌어냈다. “저도 이상하군요.” 타냐는 눈을 감고 잠시 카셀을 떠올려 생각했다. 쉐이든도 그랬고 방금 로일도 그랬고, 이 까다롭고 고집 센 하얀 늑대들에게 카셀의 이름은 그들은 움직이는 열쇠였다. 전에는 이해를 못했으나, 그를 겪어보고 나서야 타냐는 이해했다. 이제 그녀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이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나 ‘카셀이 부른다!’ 라고 말한다면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피식 웃음이 샜다. 하지만 막상 루더가 묻자 그녀는 새삼 의아해졌다. 어째서 그를 따르려 하는가? 아니, 그 건에 어째서 그는 자신을 그토록 믿어줬는가? 왜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했는가?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그의 고백은 느닷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에게는 오히려 내 감정이 충동적이라고 보일지 모르겠군.’ 타냐는 그의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말했다. “우리 쪽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가 아란티아라면, 그 열쇠를 움직일 인물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고 크나딜께서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거기에 루티아가 함께 하는 건 당연하니 굳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다행히 루더는 맘대로 떠는 타냐의 말에 수긍했다. 타냐는 속으로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는 루티아를 이용해 아란티아의 군대를 이끌어내는 것에 실패한 적들이 다음 목표로 잡는 곳이 어디냐는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크나딜께서 그걸 아시겠지요.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저절로 떠오를 겁니다.” “고려해 둔 곳이 있소?” 골베인이 물었다.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퍼거스나이에게 레미프 언어로 물었다. [프보에, 레미프들의 나라 중 가장 큰 나라가 어디입니까?] 퍼거스나이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프트나이, 타치셀, 라루튼. 세 나라가 비슷하며, 그 중 타치셀이 군사적으로 가장 강하고, 나라의 크기는 푸트나이가 가장 크다. 푸트나이는 사실 하늘 산맥 남쪽 레미프들 나라 중 가장 크지.] 타냐는 그 말을 모두에게 전달한 후 말했다. “그럼 푸트나이와 타치셀 두 곳 중 하나가 적들의 본거지일 겁니다. 구아닐과 함께 한 러스킨이 어디로 갔는지도 예측해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의 다음 목표에 대해서도.” “그것 역시 아란티아 침공와 연관 되어 있는 건가?” “전략상 깊이 따져볼 필요도 없습니다. 설사 루티아 함락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즉시 아란티아를 침공하지 않았을 겁니다. 론타몬 정복 전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론타몬에게 최종 항복을 받아낸 건 아란티아가 아니었습니다.” 타냐가 벽에 붙은 대륙 지도를 바라보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째서 굳이 프보에 레미프들의 나라가 어디냐고 물었는지 알았다. 그녀는 적의 군대가 집결해 하늘 산맥을 넘기에 어디가 가장 좋은 장소인지 물은 것이었다. “가넬로크. 구아닐은 분명 하늘 산맥의 군대를 거기로 끌고 갈 겁니다.”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나, 조금 설명을 추가해줬으면 하오만?” 골베인이 말했다.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닷새쯤 전에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아란티아를 직접 공격 했었습니다.......” 타냐는 말했다가 잠깐 멈칫했다. 그 사이 벌어졌던 많은 사건 덕에 그 일이 닷새가 아니라 다섯 달 쯤 전에 일어난 것 같았다. “로핀께서 알려주신 바에 따르면, 10년 전 익셀런 기사단을 주축으로 시작한 대륙 정벌의 배후 세력으로도 그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마스터 테일드의 실종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에 저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자가 하늘 산맥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관계하고 있다는 건가?” 루더가 물었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구아닐과 익셀런 기사 간의 연결 고리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모즈 역시 누가 만들어 냈겠습니까? 그 이상한 세력의 중심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입니다.” “근거는 있소, 마스터 타냐?” 골베인이 물었다. “지금은 그걸 밝혀내려고 노력할 시점이 아닙니다. 허나.......” 타냐는 로핀에게 들었던 말을 인용하며 말을 이었다. “현재 하늘 산맥을 둘러썬 공간에, 절대 힘을 합칠 수 없는 세력들끼리 연합을 했습니다. 카-구아닐, 프보에 레미프, 익셀런 기사단, 모즈, 그리고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이들 모두를 자기 아래 둘만한 존재는 하나뿐이라는 것, 그게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플로라는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라, 조심스레 끼어들어 물었다. “그럼 그것은 드래곤을 지배하는 악마인가요?” 타냐는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것보다 정확히 표현할 자신이 없어 그냥 그렇다고 말했다. 플로라는 이해한 바를 풀어 말했다. “그러니까 그 악마라 구아닐에게 명령을 내리고, 구아닐은 레미프와 익셀런에게, 그리고 익셀런은 모즈들을 조종하고 있는 거군요.” “거기에 카구아라는 괴물까지.......” 타냐가 덧붙였다. “잠깐, 카구아와 익셀런은 같은 존재가 아니오?” 단어에 혼돈을 일으킨 로일이 물었다. “우리가 전설에서 끌어다 익셀런에게 이름 붙인 그 존재는 실재하고 있었습니다. 구아닐의 부하 같은 괴물인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설명하지요.” 타냐는 그 괴물을 상대했던 순간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카구아와 프보에 족 병사들이 하푸 근처를 지키고 있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 일행을 잡으려고 기다리던 게 아니라 ‘다른 일행’을 잡으려다가 거기에서 마주치게 된 것으로 보였었다.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레드워드라는 익셀런의 기사는 로핀이 자기를 ‘하얀 늑대’ 라고 소개하자 놀랐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 기억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간단히 종합해 보자면 이러합니다. 하늘 산맥의 사악한 연합 세력이 무너뜨리려는 최종 목표가 아란티아이며 그런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란티아의 새나디엘 여왕 폐하 앞에서 분명 이런 말을 했으며, 분명 자기가 한 말 그대로를 실천하려 들 겁니다.” 순간적으로 타냐의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죽음의 공포가 느껴질 만큼 음산하게 변했다. “천년 전, 드래곤의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지켜냈던 옐로우 게이트가 십여 년 전 전투에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졌다. 그리고 론타몬의 대군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 골드 게이트가 어제는 사람 하나 죽지 않고 무너졌다.......” 타냐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대로 듣기 좋게 변했다. “화이트 게이트는 울프 기사단과 카셀이 지켜냈습니다. 그러니 그 자는 반드시 화이트 게이트를 무너뜨리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루티아와 가넬로크를 무너뜨리는 것, 그게 그자의 목접입니다.” 사실 거기까지는 어느 정도 타냐의 추측이었다. ‘살아있는 어떤 존재도 울프 기사단을 꺾을 수 없고, 살아있는 어떤 마법사도 아란티아의 여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나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살아있는 마법사라 할 수 없다. 그 싸움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뚫리지 않는 방패와 그 방패 너머의 존래를 찌르려는 창의 대결과도 같았다. 방패가 아닌 등을 공격하려 해도, 그 등에는 루티아가 버티고 있었다. 방패를 피해 찌르려 해도 울프 기사단의 힘이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그 자는 천 년 동안이나 방패를 두들겼고, 마침내 그 방패에 금이 갔다! 방패를 깨뜨리기 위한 마지막 준비가 이 며칠 사이에 막바지에 치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크나딜께서 캡틴 울프를 부른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나 싶은 겁니다.” 루더가 팔짱을 끼고 타냐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루티아의 마법사와 하얀 늑대 한 명이 필요한 거군. 확실히 가넬로크를 공격함에 총력을 기울이면 루티아를 공격할 여유는 없겠어. 이미 우리는 아란티아를 도우러 가기 힘들 정보로 큰 피해를 입었느니 굳이 견제할 필요도 없을거고.......” 루더의 말에 골베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 슬퍼할 만한 일은 아니오, 마스터 루더. 적어도 루티아는 아직 가장 취약한 부분을 지키는 성벽이 되어주고 있지 않소? 수리가 할 일은....... 무너지지 않는 것! 그거 하냐요. 그것만으로 적에게 다섯 게이트를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겨주게 되는 거지요.” 골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펼쳤다. “루티아는 더 이상 그랜트 마스터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습니다. 빈 자리가 많은 루티아노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마흔 다섯 번째 그랜드 마스터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루더는 동의하며 타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골베인은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마스터 루더. 그 자리에 있어줄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루더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자리에 마흔네 번째 그랜드 마스터의 수제자가 있거늘, 아니 설사 타냐가 아직 어려 그 일을 맡기 어렵다 치더라도 케인스윅의 교장이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일은 루티아의 역사 중에서 무려 열다섯 번이나 있어왔던 일이오. 내가 맡을 일은 아니지 않소?” 골베인은 빙그레 웃었다. “본인의 의사에 충실히 따르고 싶지만, 이미 결정된 듯하오.” 타냐도, 플로라도 이미 거수로 찬성하고 있었다. 그래도 루더는 그런 귀중한 자리에 자기 같은 사람이 앉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적어도 생각할 시간은 주시오.” 루더는 결국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하이디의 부축을 받은 던멜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일이 일어나 물었다. “벌써 걸어도 되는 건가?” 하이디가 대산 대답했다. “루티아노에 꼭 할 말이 계시다 하기에 억지로 모셨습니다.” 던멜은 한 손으로만 하는 수화로 로일에게 뜻을 전달했다. 로일은 고개를 갸웃하며 타냐에게 말했다. “당신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소.” 타냐도 던멜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으나, 그는 그런 종류의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고 여쭤봐 주시겠습니까? 타냐의 부탁에 로일이 말했다. “알아듣는 건 입 모양으로 할 수 있소.” 타냐는 같은 말을 던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던멜은 수화로 말했고, 로일이 전달했다. “당신이 봐야 할 그림이 있다고 하오.” “그림?” 던멜은 잠깐 수화를 하던 손을 멈추고, 다친 가슴에 살짝 손을 댔다. 상처가 벌어졌는지 붕대 위로 피가 번졌다. 그러나 그는 곧 고통을 인내하고 다시 수화를 이어갔다. ‘초상화가 하나 있소. 하이디가 그러는데, 그 초상화의 주인이 당신의 스승이라 하더군요.’ “마스터 테일드의 초상화?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타냐는 사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던멜은 짧은 수화만 남겼다. ‘따라오시오. 직접 보여주겠소.’ (2) 잠을 깨우는 무녀 눈을 뜨자 주위가 붉은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장가처럼 들리는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카셀을 멍한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근육과 뼈가 온통 뻐근했고, 끈적한 것이 몸에 잔뜩 묻어 있어 몹시 불쾌했다. 그러나 불쾌한 기분만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뜻한 기운이 가슴 한쪽에 맺쳐 있어 몸의 피가 한 바퀴 돌 때마다 그 따뜻한 것이 따라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피!’ 카셀은 딱딱하게 굳어 털 때마다 그 가루가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앞을 보니 시커멓고 거대한 것이 누워있었다. 크게 치켜 뜬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다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억을 가리고 있는 뿌연 막이 서서히 걷히며 과거의 일이 역순으로 머릿속을 스쳐갔다. 카구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소리치던 일과 타냐를 업고 동굴을 걷던 일,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에도 자신을 안고 있던 타냐의 손길, 레미프들, 드래곤을 깨우기 위한 다섯....... “아!” 카셀은 아까부터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드래곤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채운 붉은 빛은 두 동강 난 카구아보다 훨씬 커다란 드래곤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셀은 황급히 고래를 숙여 절했다. “예를 다하지 못함을 사과드립니다. 마스터 드래곤. 아니, 마스터 크나딜.” 옆으로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쉬고 있던 드래곤은 너그러운 시선을 카셀에게 향했다. “아니, 모두에게 잠시 쉬는 시간이 필요했고, 네가 그것을 제공했다.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준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네가 일찍 일어났어도 우리는 기다려야 했으니, 서두를 것도 없지.” 나름대로 소리를 낮췄음에도 크나딜의 목소리는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목소리에 적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뒤를 돌아보니 팔짱을 끼고 있는 로핀과 날개가 접히는 것에 상관없이 바위에 등을 기댄 라이가 앉아있었다. “로핀, 와주셨군요.” “감사 인사 받기는 조금 늦었다. 네가 죽어버렸더라면 나는 이 칼을 쓰지 않은 걸 죽을 때까지 후회했을 거다. 감사는 라이에게 하려무나.” 로핀은 부드럽게 말했다. ‘죽었으면 시체 처리하느라 고생했을 거야.’ 라는 과격한 언사가 아니라는 점이 로핀답지 않아 어색했다. 라이는 붉은 빛 속에서 더욱 딱딱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렸다. 네가, 깨길.”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군. 그리고.......” 카셀은 주위를 다시 돌아보다가 물었다. “저....... 타냐는요?” “너 지키느라 죽었다고 장난치려 했는데 봐줬다. 그 애는 루티아로 떠났다. 떠난 지 꽤 됐어. 바깥의 시간으로 치자면 현재는 밤이고, 지금쯤 그 애는 루티아에서 편히 자고 있지 않을까?” 로핀의 말에 카셀은 당황했다. “제가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습니까?” “그나마 타냐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것이고 일어나더라도 이렇게 생생하게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넌 그 애 한테,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감사의 말 중 10퍼센트 정도는 써버려도 돼.” 카셀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크나딜을 바라보았다. 크나딜은 자기를 올려다봐야 할 셋을 배려해, 잠을 자는 것처럼 턱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여기 오기가지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모두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며......., 성급히 부탁드립니다.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크나딜은 나직이 웃었다. “우그들의 성격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나, 하나 같이 들 내게 그런 말부터 불쑥불쑥 내뱉는구나.” 로핀이 뒤에서 거들었다. “그만큼 우리의 일이 급한 거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해해줄 만하다. 내가 너희들이 겪은 일을 전부 알 수는 없으나 단편적으로 보이는 너희들의 과거와 로핀이 해 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래, 네가 너의 일을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어떤 이유로 도움을 청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자 한다.” 카셀은 환하게 얼굴을 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일을 설명하고 또 설득하기 위해 어떤 지혜를 자내야 되는지 몹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드래곤들의 하이로드를 상대로 그런 어리석은 지례를 내세울 것에 얼마나 민망했던지.......” 카셀은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크나딜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 가지 너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 수 없구나. 우그들의 일을 돕고자 하는 드래곤은 내가 아니다.” “예?” 로핀과 카셀이 동시에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이런 귀중한 일에 공들여 시간을 들일 수 없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겠느냐마는, 그 못된 구아닐 녀석의 성급함에 나 역시 따라가지 않을 수 없구나. 자, 우그들과 레미프들의 싸움에 내가 끼어야 한다면 그건 너희들의 힘만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큰일이며 그건 바로 드래곤의 잘못이겠지. 맞다, 카셀. 너는 나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 드래곤들의 죄로 인하여 태어난 구아닐이 우그들과 레미프들을 해치려 든다면, 당연히 내가 나서야 함이 옳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나서기 어려움이 있다.” 카셀은 가슴이라도 두들기는 심정으로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마스터 크나딜께서는 하찮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실 것이며, 저 같은 하찮은 존재를 시험하여 설득의 당위성을 생각하게 하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러면 왜입니까?” “두 가지 이유를 내가 말한 연후에 그런 절실함을 웅변해도 늦지 않다, 마스터 카셀.” “아, 저....... 죄송합니다.” 카셀은 입을 다물었다. 크나딜은 크게 몸을 일으킨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하고, 어디까지 드래곤의 성스러움으로 남아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러나 이 부분만은 진심으로 말해야 너희들도 나의 사정을 이해하고, 이 지하의 일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구아닐을 이길 수 없다.” 로핀은 당장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우그들만이 할 수 있는 거짓말이라는 특권을 행사하시는 겁니까? 저에게 이 칼을 내 주신 ‘레-가넬-란도르’ 께서도 구아닐은 꺾을 수 있다 하셨습니다.” “한 걸음 앞밖에 내다보지 못하는 가넬. 여신께서는 그에게 힘을 주었으나 지혜마저 선물하지는 않으셨구나. 구아닐은 혼자가 아니다. 이 하늘 산맥 남쪽에서만 해도 그에게는 강력한 원군이 있다.” “검은 기사....... 말씀이십니까? 그들이 여러 드래곤들을 살해하긴 했습니다만, 그건 잠들어 있는 분의 머리에 창을 꽂는 비겁한 암살이었습니다.” “옳다! 기사들은 잠들어 있는 드래곤을 죽일 수 있으나, 깨어있는 드래곤을 어쩌지는 못하지. 그러나 깨어있는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마법사, 그것도 우그들의 마법사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그 쪽이다.” “그건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겠지요?” “세상에는 하나에 하나를 더했을 때 둘 이상이 나오는 존재들이 있다. 그게 바로 사악한 마법사와 사악한 드래곤이다. 구아닐을 꺾는 건 어렵지 않지만, 구아닐과 힘을 합한 존재까지 막기는 어렵구나.” 카셀이 로핀을 돌아보자, 로핀은 그가 뭘 궁금해 하는지 알아채고 간략히 설명했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라면 드래곤도 죽일 마법을 가지고 있다. 네가 기절하고 타냐가 너를 지킬 때, 그러니까 저 카구아를 죽인 건 크나딜이셨으나, 타냐 역시 카구아를 죽일 수 있었다. 크나딜께서, ‘자신을 죽일 만한 마법사’ 라고 표현하셨다.” 크나딜이 로핀의 말을 받았다. “그 아이의 힘이 다시 나와 합쳐진다면, 그래, 구아닐과 루티아의 연합을 막아볼 만도 하군.” “그럼 왜......., 말을 끊은 점, 용서 바랍니다. 그럼 왜 타냐를 보내셨습니까?” 카셀은 크나딜을 탓하듯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루티아는 아직 존재해야 한다. 너희들도 너희만의 사고로 이 일이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카셀이 대답했다. “아란티아입니다.” “루티아는 하늘 산맥으로부터 아란티아를 지키는 마법의 방패다. 그리고 타냐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아마 돌아올 테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자, 첫 번째 이유는 말했다. 두 번째 내가 너희를 돕지 못하는 이유는 조만간 해결할 수 있다. 나는 당분간 이 곳을 떠날 수 없다. 그것은 드래곤을 살해하러 다니는 기사들 때문이지. 이 장소 역시 그 자들에게 들통 났으니 더더욱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로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킨다는 말은....... 무엇을 지킨다는 말입니까? 이 자리가 크나딜께서 거주하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까?” “너희들에게 그 개념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아란티아에서 왔으니 설명하긴 편하구나. 나는 로핀 네가 아란티아에서 원래 가져야 할 그 지위에 있는 자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란티아 내에서 하이로드도 아니고, 귀족 집안 자식도 아닙니다.” 로핀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그런데도 하이로드와 같은 직위를 가지고 있지 않더냐?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군. 하이로드와 같은 직위를 가질 ‘뻔’ 했다고 말해야겠구나.” “여왕....... 수호 기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확실히 제가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으나, 저보다 그 일에 더 충실한 친구가 있어 양보했지요. 그럼 크나딜께서는....... 오, 이런 제기랄!” 로핀은 크게 소리 질렀다가 얼른 입술을 탁탁 쳤다. “아, 용서 하십시오. 이 놈의 입이란 건 때로 인간의 의지에서 벗어나 떠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짧은 어휘력으로는 그 말밖에 안 나오는군요.” 카셀은 크나딜의 말에서 힌트를 얻지 못했으나, 로핀의 반응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았다. “어린애 같은 발상의 적용이긴 합니다만, 마스터 크나딜께서는 그럼......., ‘여왕 수호 기사’ 이십니까?” “내가 어찌 깨우지도 않았는데 깨어 있겠느냐? 드래곤의 섭리를 잘 모르는 우그라 할지라도, 이 곳을 스스로의 지혜로 찾은 너희라면 그 이상한 점을 깨닫지 않았겠느냐?” 로핀은 잠깐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그럼 크나딜 정도 되는 분께서 다른 누군가를 지킨다면, 제가 아는 어설픈 하늘 산맥의 지식으로는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건.......” 로핀은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운지 입술을 핥았다. “그건?” 카셀도 작은 목소리로 로핀의 말을 따라했다. “말해보라.” 아까부터 인간과 흡사한 감정을 보이는 크나딜은 지금도, 로핀의 사고 과정에 흥미로워 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하늘 산맥의 여신 나디우렌.......” 로핀은 침을 삼키고 말을 끝냈다. “.......이 아니십니까?” 크나딜은 대꾸했다. “맞다.” 솔직히 카셀에게는 ‘여신’이라는 단어가 피부에 와 닿을 만한 게 못되었다. 들은 바는 있으나 꽤나 비현실적인 단어였던 터라 그저 눈만 몇 번 깜빡이며, 여신이라면 어느 정도의 존재인가 따져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로핀은, 어머니의 원수라고 믿었던 마녀에게 ‘사실은 내가 네 에미다!’ 라는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패닉에 빠졌다. “저는 여신이라는 분이 상징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절대자로 믿는 그런 분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이 동굴 안에 계시다는 뜻입니까?” 로핀이 더듬더듬 물었다. “신이라는 개념이 우그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겠지. 여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레미프들을 통해 전달되었으나 당연한 일일 게다. 하지만 나디우렌의 이름으로 전달된 검이 두 자루나 아란티아에 있을 텐데?” “베나 에사르크와 베나 실크. 예, 맞습니다. 아, 이 얘기를 미리 언질해주셨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이대로 그 분을 만나 뵈러 가야 하는 겁니까? 호흡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성급하게 굴었던 우그가 할 말은 못되는군.” 크나딜의 콧김에 바닥의 먼지가 푹 푹 올라갔다. “그래도 따라오라. 얘기는 가면서 하는 게 좋겠다. 카구아의 지체가 썩기 시작하는 공간에서 그 분의 이름을 여러 차례 거론하고 싶지 않아. 자, 나도 이 말을 해야 하는 게 즐겁구나. 큼, 큼. 서두르자. 이제는 카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깨워서라도 데려가야 할 시간이야.” 크나딜은 몸을 일으켜 동굴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카셀이 타냐를 업고 죽을 둥 살 둥 하며 걸었던 그 길이었다. 이곳에서 타냐는 피를 토하며 몸부림쳤었다. 그 후 그녀의 외모가 바뀌고, 목소리가 달라졌다. 하지만 카셀은 그녀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절하기 직전 바보 같은 말만 지껄였다는 창피함만 떠올랐다. “으.......” 말로만 듣고, 그렇게나 만나고 싶었던 드래곤을 눈앞에 두었으며, 이제 여신을 뵈러 간다고 하는데도 카셀은 타냐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뭐라고 했는지 몇 번이나 검토해 봤지만,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하기에 창피한 말뿐이었다. 속도 모르는 라이가 뒤에서 물었다. “여신을.......뵙는 것이........ 괴로운가? 아니면, 다른 이유?” 카셀은 어색하게 웃었다. “염려해 주는 건 고맙지만, 너라도 그 이유는 절대 말해줄 수 없어.” 로핀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너는 지금이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인지 알고 엉뚱하게 여자 생각하는 거냐?” 창피하기도 하거니와, 그녀를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화도 나서 카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자 생각이 아니라, 타냐 생각입니다.” “어이쿠, 그러신가?” 로핀은 카셀의 위압적인 말투에 놀라는 척만 했다. “좋아, 네 젊음을 고려하여 이해해주지 카셀. 그 나이면 그런 문제가 세상의 멸망보다 중요하기도 하지. 난 너무 어렸을 때 그런 순수함을 잃어버린 탓에 너 같은 애를 보면 괜히 놀려주고 싶어서. 그보다 언제부터 타냐를 좋아하게 된 거냐?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었다만....... 막상 너도, 타냐도 그런 말을 해대니 나는 조금 갑작스럽지 않을 수 없거든?” 크나딜의 발소리는 덩치에 비해서 굉장히 조용했다. 카셀은 드래곤이라면 의례 동굴을 쩌렁쩌렁 울리는 발소리를 낼 거라고 생각해 왔었다. 실제로 많은 드래곤을 노래하는 시도 그 웅장한 발소리를 강조했었다. 하지만 크나딜은 조용했다. 마치 누군가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발걸음 같았다. “도서관에서 저와 함께 책을 찾아주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지만 보이는 외모만큼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지요.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두려움이 가시고 나면 친근감이 드는........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만, 크고 나서 남자로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면 어머니보다 더 친해지는....... 적절한 비유가 아니었나요?” “난 아버지랑 만날 때마다 대판 싸워서, 별로 납득이 안 가는걸?” “어쨌든 같이 밤새 도서관의 책들을 뒤적이며 눈을 마주하니, 그 두려움이 호감으로 변했습니다. 늑대가 되어 저를 업고 달리는 순간 정말 좋은 친구가 되겠구나 했지만, 여전히 접근하기가 어려운 여자였던 터라.......” 카셀은 말해놓고 무안한 나머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로핀은 입김을 세게 내뱉었다. “똑~같은 것들끼리 만났군. 둘 다 도서관이었냐? 도서관에서 밤새면서 인연을 만드는 건 매년 졸업 시험 준비하다가 눈 맞아서 시험 날려먹는 왕립 학원 학생들 몫 아니냐?” “꼭 지목하라면 거기라는 거죠. 어떻게 감정의 분기점을 한 장소, 한 시간으로 지정할 수 있겠습니까?” 카셀은 퉁명스럽게 말했다가 걸음을 멈추고 놀라 손을 떨었다. “잠깐만요, 로핀. 타냐는 제게....... ‘미안하다.’ 고 말했습니다. 둘 다 도서관이라는 건, 무슨 소립니까?” 로핀도 걸음을 멈추고 입맛을 다셨다. “이런, 이런, 이런. 아껴두면 두 녀석 안절부절 못하는 꼴 보며 즐길 수 있는 절묘한 상황을 내가 까발려버렸군 난 타냐가 하도 다정하게 널 끌어안고 있어서 당연히 뭔가 벌어진 후라고 생각했건만, 것도 아니었잖아? 역시 순수한 척하는 년놈들의 진도 맞추기는 재수 없어.” “로핀, 말씀해 주십시오. 타냐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카셀은 자기가 안달할수록 로핀이 좋아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매달렸고, 예상대로 로핀은 그 뒤를 얘기하지 않았다. “쉿, 여신의 성전이다. 자중할지어다.” 로핀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고 걸음만 빨리 했다. 카셀은 라이가 자기 명령에 절대복종 한다면 로핀의 목에다 칼을 들이대라는 명령마저 내리고 싶었다. 로핀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너야 상관없지만 이 모든 걸 말해버리는 건 타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여자의 마음을 소중히 해줘야지. 난 이런 일에 옆 사람 끼는 건 딱 질색인 사람이야. 그럼에도 충고를 한 가지 해주지. 네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결론을 내려라. 그리고 그 결론에 배반하지 마라.” 미워할 근거를 잔뜩 던져놓고 그는 꼭 마지막에 그럴 듯한 말을 끼워 넣곤 했다. 그것도 항상 절묘하게. 그러니 더욱 얄미워지는 카셀이었다. 천장이 조금 낮아지고 동굴의 폭도 조금 좁아지며 크나딜은 자세를 낮추었다. 따라 걷는 셋도 괜스레 고개를 움츠리게 되었다. “음, 제가 망령된 추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신 나디우렌은 드래곤이십니까?” 카셀이 물었고, 대답하려는 로핀에 앞서 크나딜이 말했다. “지금까지 한 얘기를 뭘로 들었느냐? 하늘 산맥의 여신이라면 당연히 드래곤이지.” “그, 그럼 그 분은 지금....... 주무시는 게 아닙니까?” “그러하다.” “그럼 마스터 크나딜께서 깨우십니까?” “나는 전지전능이 아니다. 레미프와 드래곤 사이에 맺어진 룰은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깰 수 없다. 그건 룰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기 때문에 룰로 세워졌으므로 그러하다.” 카셀은 그가 뭘 어떻게 말했는지 따져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결국 나디우렌을 깨우기 위해서는 레미프의 무녀가 필요하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점괘를 또 언급하게 만들려느냐? 내, 드래곤을 깨우기 위한 다섯 전사의 첫 번째를 ‘잠을 깨우는 무녀’라 지목하지 않았더냐?” “시나비아! 우리는 시나비아를 두고 왔어요.” 카셀은 로핀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로핀도 타냐와 똑같이 가졌던 그 의문을 이제야 물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크나딜께서는 벌써 기상해 계신데, 대체 누구를 깨우기 위한 무녀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 의문은 이제 풀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가 그 분을 깨우는 겁니까?” “내가 부르면 스스로 일어나시는 걸 바랄 수도 있지.” 카셀은 겨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럼 다행이군요.”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 “그게 며칠이나 걸립니까?” “너희들이 말하는 며칠이라는 단위로는 잴 수 없다. 그래서 잠을 깨우는 무녀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 오랜만에 입을 열어 대화하는 즐거움에 내가 너무 너희들을 괴롭히고 말았구나.” 하늘 위가 하푸라고 불리는 계곡인 거친 바닥을 지나 또 다른 크지 않은 굴을 통과해 들어갔고, 또 거기에서 몇 번 꺾었다.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하여 카셀은 도저히 그 길을 다 외울 수가 없었다. “나디우렌께서는 벌써 깨어나 계시다. 아직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잠을 깨우는 무녀는 이미 도달해 있지.” 로핀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밝아지는 길의 끝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근 오백 넌 동안보다 최근 일주일 간의 방문이 더 많다고 하셨지요? 그럼 우리 외에 또 다른 방문자가 있었다는 뜻입니까?” “그래. 예상치 못한 동행을 이끌고 잠을 깨우는 무녀가 이 곳을 찾았다. 내가 이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아이 스스로의 강한 의지가 절대 찾아낼 수 없는 이 곳을 찾아냈지. 그 아이는 우그인 너희보다도 다급하게 나를 재촉하여 여신을 깨웠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려온 동행은 정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할 만큼 급히 떠나버렸지. 이러니 내 우그들의 성급함을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크나딜은 붉은 빛이 틈에서 새는 거대한 돌문에 살짝 손을 댔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돌끼리 스치는 약간의 소리만으로 문이 열렸다. 문이 반만 열렸음에도 안에서 보이는 그 강렬한 붉은 빛에 로핀과 카셀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곳에 여신이 있었다. 나디우렌. 하늘 산맥의 여신은 크나딜과 거의 비슷한 크기를 한 진홍색 비늘을 갑옷처럼 온몸에 두른 드래곤이었다. 세 줄기로 뻗어나간 은빛의 뿔이 왕관 대신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한 쌍의 다른 뿔은 머리카락처럼 얼굴 옆을 가로질러 뺨을 가리고 있었다. 등에 접혀있는 날개는 레미프들처럼, 호흡하는 것과 같은 규칙으로 천천히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처럼 주위를 채운 하얗고 투명한 돌들이 드래곤 둘의 붉은 빛을 흡수하여 눈을 어지럽게 할 만큼 반짝이고 있었다. 천장에는 석회암 동굴에서나 볼 수 있는 돌고드름이 보일 듯 말 듯 투명하게 매달려 있었다. 여신은 아직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신 앞에 검은 피부의 프보에 레미프가 쓰러져 있었다. 라이가 반사적으로 경계했다. “대단한 레미프다. 나디우렌의 긴 수면을 깨우는 데는 보통 드래곤을 깨우는 것과는 다른 많은 힘이 소진되며 그 시간 역시 길어야 하지. 하지만 저 아이는 단 하루 만에 해야 할 일을 해내고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크나딜은 그 레미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나디우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두 마리 드래곤이 나란히 있는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프보에 레미프가 즈비 레미프와 적대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은 드래곤을 죽이는 일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무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로핀이 물었다. “여신께서 어찌 하늘 산맥의 종족을 차별하시겠느냐? 그리고 프보에 족들에게도 분열은 있었고, 나는 아직 우리를 따르는 쪽의 무녀를 부른 것이었다. 이 아이는 아마 라루튼이라는 나라의 무녀, 또는 공주일 것이고 이름은 세르메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 애를 데려온 전사 역시 우그였다.” 카셀은 그동안 있어온 일의 연관성 때문에 벌써부터 가슴을 두근거리며 물었다. “그 전사의 이름은 무었입니까?” “글세, 너무 급한 나머지 자기가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 중 하나라고만 밝혔다. 후훗, 대담하게도 자기가 구아닐을 죽이겠으니 그에 걸맞은 무기나 하나 달라고 요구하더군. 구아닐의 죽음이 그 아이의 기더에 있는지 시험도 해볼 겸 베나라고 이름 붙일 것은 못되나, 드래곤을 죽일 만한 검을 한 자루 내줬지.” 카셀은 침을 삼키고 물었다. “남자였습니까?” “남자였다.” 그럼 누구인지는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랄드....... 그가 언제 떠났습니까?” “이틀 전 밤이다.” 카셀은 아직 그가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했으나, 이내 혼자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즈윈은 어째서 오지 않은 걸까요? 그리고 왜 또 여기서 기다리지 않고 떠난 거죠?” “아무래도 저 프보에 족의 무녀가 깨어나면 물어봐야 할 일이겠군.” 로핀도 아즈윈의 일이라니 카셀과 같은 걱정을 했다. 크나딜은 두 사람이 몇 마디 얘기를 하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자, 카셀, 로핀, 라이. 하늘 산맥의 여신 앞에 예를 취하라. 이제부터 나는 그 분께 이 몸을 빌려드려. 그 분의 목소리를 내겠노라.” 크나딜은 천천히 몸을 세우고, 목을 천장 쪽으로 길게 뺐다. 셋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크나딜의 입에서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굵고 강인하지만 여성의 목소리라고 인식할 만한 목소리가 인간의 언어와 고대어로 동시에 흘러 나왔다. [루이브 드루 워브츠 압 드라즈 느하이커, 마이 클라트버트.] “이 공간 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라, 나의 아이들아.” 고대어가 계속 섞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내 인간의 언어로 변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라이에게는 레미프의 언어로 들렸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하늘 산맥을 지배하는 나디우렌이며, 모든 드래곤들의 하이로드인 사-나딜이다.” 목소리가 닿는 공간 안의 모든 것이 드래곤 앞에 경배해야 할 것 같은 웅장하고 차분한 리듬이, 흔들리지 않는 동굴 안의 공기를 타고 흘렀다. 카셀은 꽉 짓눌려 질식할 것 같은 무거움을 이겨내고 겨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카셀은, 로핀이 대신 말을 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그는 위엄에 눌려 고개를 들기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카셀이 말을 계속 해야 했다. “아니면 저희가 먼저 저희가 겪은 일에 대해 말씀을 올려야 하나이까?” “크나딜의 기억 안에서 너희가 가져온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나를 깨운 아이가 해주었다. 너희가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말 중간 중간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종종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것은 레미프들의 언어도 아니었고, 아크랜드에 존재하는 언어도 아니었다고, 로핀이 나중에 설명해주었다. 그 메아리 같은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로 듣고 있음에도 아닌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하늘 산맥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은 그러지 못했다. 결국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나와 크나딜은 방관할 수밖에 없었지.” “볼 수 없게 됨이 지금 일어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카-구아닐. 그가 하늘 산맥 밖에서 나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하늘 산맥의 장막이 약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힘이 강해진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구아닐은 현재 하늘 산맥 안에 있습니다.” “너희들의 기억 안에서 혼동되는 몇 가지 이름이 있었음을 안다.” 크나딜의 얼굴을 한 사-나딜의 머리가 천천히 밑으로 내려와 카셀과 시선을 맞추었다. 어딘지 모르게 눈동자를 가리고 있는 긴 눈썹은 카셀이 알고 있는 ‘어떤 여자’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당장 그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모든 분위기가 한 번은 겪은 바 있는 듯 했다. “카구아, 그것은 카-구아닐이 자신의 피를 응축시켜 만들어낸 생명체들이지. 드래곤이라 부를 수도 없고, 하늘 산맥의 자식들이라 부를 수도 없는 괴물들. 그러나 너희들은 우그의 드래곤 사냥꾼들을 카구아라고 불렀었지.” “예. 카구아라는 존재를 직접 볼 때까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프보에의 종족들은 익셀런이라는 사냥꾼들을 이구셀런이라고 불렀다. 고작 10년이라는 찰나에 일어난 망각이었고, 검은 망토 하나를 꿰뚫어 보지 못해 일어난 착각이었겠지. 하물며 천 년의 시간 동안 레미프들 조차 어찌 불러야 할지 잊은 이름이거늘, 어찌 천 년이라는 시간을 기억이 아닌 역사라 부르는 우그들이 그 이름을 알 수 있겠느냐? 애초에 기억조차 없었으니 이는 착각이 아니라, 무지라 불러야겠구나.” 카셀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며, 대꾸했다. “심지어 저희들은 천 년을 역사라 하지 않고 전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도 드래곤들께서 역사라 부르는 일을 우리는 신화라 불러야 할 겁니다.” “무지를 죄라 하지는 않았으나, 너는 변명을 위해 말을 앞세우는구나. 살아있는 생명이 내 앞에서 입을 여는 것이 쉽지는 않을 진데, 어찌 지금 그렇게 입을 쉽게 열 수 있느냐?” 속삭이는 듯 말을 하는 여신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여전히 위압감 가득하고, 굵고 강한 어조였지만, 카셀은 그녀가 미소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신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는 크나딜은 조금도 얼굴 표정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말이 많다고 탓하는 줄 알았으나, 그녀의 웃음기를 알아채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여신 앞에서 말을 쉽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카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옆을 보니 로핀은 고개를 들기도 힘들어하고 있었고, 라이는 아까 무릎을 꿇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카셀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 즈토크 워그. 베나를 상쇄할 또 다른 힘이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드래곤의 힘을 창조해낸 그 칼뿐이겠지. 그 칼을 만든 장인의 이름을 듣고 싶구나.” “르고라 합니다.” “그에게 나의 찬사를 들려주어라.” “마스터 르고에게 최고의 칭찬이 될 것입니다.” “네가 그 칼을 가지게 된 것이 그 칼의 기더인지, 너의 기더인지 따져볼 일이구나. 훗날 하늘 산맥을 통과하게 된다면, 그 칼이 너에게 기적을 베풀 것이다. 그것이 그 칼이 너에게 간 이유이리라.” “어떤......기적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기적이란 예상치 못한 일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기적이라 부르지 않겠느냐? 그런 일을 하는 우그를, 너희들은 마법사라 부르지. 그러니 내게 물을 일이 아니라 네가 답할 일이다.”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카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설명은 옆에 있는 너의 동료가 대신 해 줄 일이다. 내가 여기에 설명할 일은 오직 하나, 카-구아닐의 존재다.” “여신께서는 구아닐이 하늘 산맥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다 하셨습니다. 그럼 얼마 전 검은 옷의 마법사와 함께 저를 공격한 그 드래곤의 이름 역시 무지에 따른 저의 착각입니까?” “미묘한 착가이라 할 수 있지. 여기 있는 검은 드래곤은 카-구아닐의 후손이며, 후손이므로 같은 이름을 쓴다. 틀리지 않으나 정확하다고 볼 수 없는 호칭이다.” “같은 이름?” 카셀은 로핀을 슬쩍 돌아보았다. 로핀은 이제야 겨우 여신의 목소리에 적응하고 카셀을 돌아볼 여유까지 생겼다. 이제 보니 로핀이 차고 있는 베나 에실크는 격력하게 번쩍이며 여신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었고, 아란티아의 보검 역시 심장 박동처럼 빛을 냈다 거뒀다 하고 있었다. 칼집에서 꺼내놓으면 드래곤들의 붉은 빛을 이겨낼 만했다. 로핀은 숨을 몰아쉬며 겨우 궁금한 걸 묻고자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약간 먼저 말한 나디우렌의 말에 로핀은 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쉽게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나도 호칭에 관한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구나. 너희들은, 내가 ‘카-구아닐’이라고 부른 자를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 너희 셋 중 둘에게는 그 쪽이 익숙한 이름이겠지?” 두 사람이 말을 못하는 것에 상관없이, 여신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이제 와서 늘어 놔도 인간들에게는 지루한 역사이며, 나에게는 괴로운 기억을 더듬는 것에 불과하지. 그러나 앞으로 있을 일을 논하기 위해 이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신화라고 언급한 부분까지 이 자리에서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은 아마 천년 전 인간들의 세계에서 있었던 드래곤들의 전투겠지. 하지만 그 이야기 역시 내가 어찌 설명해야 하겠느냐......?” 여신에게도 천 년은 긴 시간이었다. 그녀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좋을지 모를 엉킨 실타래의 한쪽을 머릿속에서 찾아내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나 막상 꺼낸 말은 크나딜의 기억에 의지한 카셀의 정체였다. “그렇구나. 네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면 오히려 나로서는 편하지. 이것은 울프 기사단의 역사이기도 하니 이건 네가 계승해야 할 이야기다. 캡틴 울프.” “울프 기사단의 역사가 곧 천 년의 아란티아 역사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나 역시 천 년 만에 만난 캡틴 울프라는 존재에 무척 설레는구나.” 카셀은 이 웅장한 공간 안에서 또 다른 전설을, 여신의 입으로 듣는다는 것에 가슴이 터질 듯 복받쳐 올랐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지 모르나, 천 년 전 캡틴 울프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나딜은 잔뜩 주먹을 쥐고 자기 말을 기다리는 카셀을 보더니 말했다. “이상한 말을 하는 구나, 너는. 네가 캡틴이라면 이미 아란티아의 첫 번째 캡틴은 만났어야 하지 않은가?” 카셀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리 여신이라 해도 드래곤의 시간관념을 인간에게 맞추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나딜이시여. 저는 한낱 우그에 불과하며 이제 겨우 스무 살 조금 넘은 청년에 불과합니다. 어찌 그 먼 시간 전에 존재했던 분을 알겠습니까?” “아란티아와 영원히 함께 할 축복을 내려준 그 아이가 어찌 너를 만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예?” 카셀은 당황해 로핀을 쳐다보았고, 로핀은 더욱 당황해 카셀을 바라보았다. 카셀은 이후로 다시는 로핀이 저렇게 놀라는 모습을 보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보아라, 이것이 내가 너희들에게 해주고 싶어 부른 이야기다.” 사-나딜의 모습이 일순 사라졌다. 카셀은 갑자기 밝아진 하늘을 보고 눈이 부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가 보는 것은 동굴이 아닌 밖이었다. 거기에 긴 갈색 머리의 소녀가 붉은 빛깔의 거대한 드래곤을 마주 하고 있었다. “네가 나를 닮은 이름을 가지고 나의 영혼을 닮아 태어난 아이구나.” 드래곤이 말했다. “예, 제 이름은 ......입니다. 저 역시 당신의 꿈을 꾸고 여기에 나와 보았습니다.” 소녀는 말했다. “무엇이 우리 둘을 이 곳으로 이끌었는지 궁금하다. 내 예지는 하늘 산맥 안에서 한정되어 있지 않으나, 어찌 하여 너는 나의 예지 안에 들어있지 않느냐” 스스로 말해보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없습니다. 다만 태어나 자란 아름다운 곳을 그대로 아름다움으로 이어가고 싶나이다.” “이루거라.” “당신의 이름을 따 여기에 도시를 세우겠나이다.” “허락한다.” “그 힘으로 제 꿈에 나타난 검은 존재와 싸우겠나이다.” “검은 존재가 누구더냐?” “저는 보았습니다. 하늘 산맥에서 당신과 닮았으나 당신과 완전히 다르고, 당신의 힘을 가졌으나 사악함이 깃들어 도저히 꿈의 결말을 볼 수 없는 자를 만났나이다.” “내게 너의 꿈을 보여라.” 검은 구름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산맥의 붉은 바위에 앞발을 걸치고 대륙을 노려보는 시선이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검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점령하며 날아가는 길목 아래의 세상은 모든 것이 까맣게 타 들어갔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한 마디 없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회색로브의 마법사였다. 그 마법사가 내민 손에 검은 드래곤은 내려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로브 안에는 썩은 해골이 있었다. 해골이 입을 열어 꿈을 꾸는 자를 향해 축축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길이 열릴 지어다. 네 영혼을 내 식탁 위의 마지막 향연으로 즐기리라.] 그러나 꿈을 꾸는 자는 당당히 소리 질렀다. “나의 이름은...... 이다. 너의 이름을 밝혀라. 언제든 만난다면 결코 네 이름이 내 앞에 서지 못하리라.” [지금까지 나는 죽음이라 불렸으나,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를 카-구아닐이라 부르라. 그러니 그때까지 이 드래곤이 나를 대신하리라. 그러나 네가 나를 만나면 하늘 산맥 남북의 모든 존재는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리라.] 꿈은 사라지고, 드래곤은 소녀에게 칼을 내주고 있었다. ‘“이 칼을 베나 실크라 부르라. 이것을 너의 힘으로 삼거라. 카-구아닐은 하늘 산맥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힘이니 인간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힘을 내가 허락하겠다.” 소녀는 대답했다. “이 칼이 있는 곳에 나딜의 힘이 있게 하겠나이다.” 그리고 드래곤은 손가락을 내밀어 소녀의 가슴에 대는가 싶더니 그 안으로 불쑥 집어넣어다. 소녀는 움찔하며 놀랐으나, 고통 없이 가슴에서 빠져 나온 드래곤의 손가락 안에 오며한 빛을 띤 구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받으라. 그리고 네가 세운 나라에 이 구슬이 있게 하라. 언제고 다시 만난다면 그 오브가 너와 나의 접합 점이 될 것이다.” 카셀이 보는 소녀의 모습은 흐릿해졌고, 그녀의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이 먼저였으며, 뭐가 나중인지도 구별하지 못했다. 카셀은 그저 나딜이 보여주는 환각 속에 있을 뿐이었다. 어떤 나라를 상징하는지 모르는 깃발이 불타고 있었다. 그 밑으로 날아가는 열 마리가 넘는 검은 드래곤의 날개가 있었다. 인간은 그 힘 앞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곳만은 저항하고 있었다. 거대한 성벽 뒤에 선 병사들이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날린 화살에 검은 드래곤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황금빛 드래곤과 붉은 드래곤, 푸른 드래곤과 은빛 드래곤이 버티고 서서 불을 뿜었다. 검은 드래곤들과 찬란한 빛깔의 드래곤들이 성벽 위에서 맞붙어 싸웠다. 그 검은 드래곤들은 한 마리만 제외하고, 날개가 없었다. 드래곤이 흘린 피로 성벽은 붉게 물들었고, 추수를 앞두고 있었던 금빛 밀밭이 단숨에 불타거나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썼다. 죽음에서 일어난 병사들이 성벽을 타넘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 성 아래로 내려가 싸우던 황금빛의 드래곤은 오히려 그들이 던지는 수십 개의 로프에 걸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성벽 뒤에서 몰려온 기사단이 그 병사들을 물리쳐 드래곤을 구했다. 다시 일어난 황금빛의 드래곤은 감히 어떤 드래곤도 따르지 못할 힘으로 검은 군대를 몰아냈다. 마법사들은 검은 드래곤들이 뿜는 어둠의 공격을 막아냈고, 아래와 위에서 싸우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지원했다. 검은 드래곤들은 이 작은 인간들의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군대의 가장 선두에는 하얀 갑옷을 입고 붉은 빛의 칼날을 휘두르는 그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소녀를 따르는 쉰 명의 기사들 역시 그녀를 따라 성장해 있었다. 성벽 아래에서건 위에서건, 설사 드래곤과 비교한다 하더라도 이 기사들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열 마리가 넘는 검은 드래곤과 수만 명이 넘는 죽음의 병력은 결국 이 드래곤들의 피로 물든 게이트를 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사들의 리더라 할 만한 여자가,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카-구아닐을 노려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반동만으로 그녀가 짚고 서 있는 성벽이 내려앉을 정도로 강한 진동이 구아닐을 향해 흘러갔다. 검은 드래곤은 저항도 못하고 목이 날아가 죽었다. 그 검은 드래곤 위에 서 있는 회색의 마법사는 붉은 칼의 소녀에게 패해 증발했다. 소녀는 칼을 높이 들었다. “승리했노라!” 병사들은 환호했고, 기사들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마리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 역시 소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성벽 아래에서 죽음에서 되살아난 군대와 싸워준 기사들의 캡틴이 다가와 자신의 칼을 소녀에게 바쳤다. “멸망한 아로크의 기사들을 끌어 모아, 아란티아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소녀는 칼을 받았고, 그 캡틴은 무릎을 꿇어 맹세했다. “이후 아로크는 영원히 아란티아를 지키는 기사의 나라가 되겠습니다.” “아로크의 축복이 이다면, 아란티아 역시 영원할 거라 믿습니다.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시는 드래곤이 계십니다. 그 분을 만나십시오.” 두 명의 캡틴 앞에 선 황금빛의 드래곤이 엄숙히 선언했다. “나의 명예를 지켜준 이 용맹한 기사단의 나라에게 나의 자식 넷을 수호자로 내리겠노라. 그래고 내 힘이 함께 한다는 뜻에서 그 나라에 나 레-가넬-란도르의 이름을 부여한다.” “그럼 이제부터 아로크를 가넬로크라 부르고, 이 기사단을 드래곤 기사단이라 명하겠나이다.” 기사단의 캡틴을 눈물을 흘려 감사의 뜻을 전했다. 소녀는 자기 옆에 선 여자 마법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드래곤들에게 말했다. “여기 카-구아닐을 쓰러뜨린 수줍은 처녀가 있습니다. 그녀에게 선물을 내려주옵소서.” 갑옷 입은 당당한 소녀와 달리 그 마법사 처녀는 몹시 창피해하며 소녀의 등 뒤에 숨었다. 그러자 푸른빛의 드래곤이 나와 말했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대신하여 나 레-논틸-라든이 선물을 내리노라. 너와 너의 마법사들이 살 수 있는 땅을 하늘 산맥의 나의 영토 안에 내리니, 그 땅의 이름을 너의 이름과 같이 하라.” 그 드래곤의 말에 마법사는 붉게 물든 뺨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논틸이시여. 저의 이름은 루티아이며, 제 이름 아래 사는 마법사는 평생 하늘 산맥의 주민으로 살 것을 맹세합니다.” “그 땅 안의 존재에 대한 내 허락의 뜻으로 그 땅 안에 내 힘을 내리도록 하지.” 붉은 빛의 드래곤이 나서서 손가락으로 남서쪽을 가리켰다. “사-크나딜의 힘이 루티아, 너의 도시 안에 호흡하리라. 나디움의 남쪽을 따라 논틸의 서쪽 땅에 도달하면 그 곳에 커다란 보석이 있을 것이다. 나의 힘을 계승하는 마법사에 의해 그 빛을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래곤들 중 가장 높은 드래곤이 나섰다. “아란티아의 첫 번째 국왕이자, 울프 기사단의 첫 번째 캡틴인 너에게는 내가 직접 선물을 내리겠다.” “말씀 하십시오, 사-나딜이시여.” 소녀는 칼을 넣고 무릎을 꿇었다. “나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뜻으로 내준 그 오브에 나의 축복을 담겠노라. 그 축복이 함게 하는 한, 너는 아란티아의 첫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이 될 것이며, 아란티아는 하늘 산맥과 아크랜드를 통하는 관문으로 ‘스스로 지키는 나라’ 가 될지어다. 또한 그대의 용맹과 힘에 대한 모든 드래곤들의 존경의 표시로 드래곤들의 하이로드, 그 직책을 내리겠다. 이는 우리 드래곤들이 결코 인간세계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거이니라.” “사-나딜이시여, 이 과분한 선물을 어찌하여 제가 모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축복을 저 ‘나디엘’ ,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자 아란티아의 여왕 혼자가 받는 것이 아닌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내리는 축복으로 여기겠나이다.......” 드래곤들은 모두 날개를 펼쳐 하나씩 날아올라 하늘 산맥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사-나딜만 남아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달아올라 환호하며 드래곤을 배웅하는 와중에 오직 소녀만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 드래곤이 말했다. “나디엘, 너는 이미 나의 딸과 같다. 딸의 눈물은 보고 싶지 않구나.” “울지 않습니다. 언제나 웃음으로 이 땅을 지키겠습니다, 어머니.” 나딜은 다시 날개를 펼쳤고, 크게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 올랐다. 소녀의 손길은 점점 드래곤의 시선에서 멀어져갔다. 보이는 모든 것이 끝났고, 카셀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감동하고 싶지 않은 신파에 눈물을 흘려 창피하기라도 한 듯 카셀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로핀은 주저앉아 나딜이 보인 모든 것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가? 이미 폐하께서는 모든 것을 보여주셨거늘, 대체 나는 어디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그토록 대륙을 헤매었다지?” 로핀은 오히려 웃어버렸다. 카셀은 가만히 내려다보는 여신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것은 외형상 사-크나딜의 모습이었으나, 카셀은 거기에서 사-나딜의 인자함을 발견했다.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그 위엄 있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여왕 폐하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하이로드라는 직책이 드래곤들에게서 배운 거라 했지만, 직접 내려주신 직책이란 건 짐작도 못했습니다.” 카셀이 말했다. 각 게이트의 하이로드들 역시 모르고 있음에 분명했다. 아란티아의 역사는 그 이름 안에 다 있었다. 아란티아 안에 진짜 하이로드가 한 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미 여왕의 이름 안에 진실이 있었다. 드래곤들에게 있어 기사의 직책인 카(ka), 귀족의 직책인 레(Re), 그리고 하이로드의 직책인(Sa). 천년 전 나디엘은 바로 그 ‘사’의 직책을 여신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았고, 그녀의 이름은 사-나디엘(Sa-Nadiel) 이 되었다. “하긴 아크랜드 공용어가 아닌, 아란티아 고유 발음으로 치면 새나디엘(Sanadiel) 보다는 사나디엘이라고 발음하는 편이 정확하긴 하지.” 로핀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카셀이 알 수 없는 쓸쓸한 미소하 떠올랐다. 한 때 울프의 이름을 가진 사람 중 최고라 여기던 그가 스스로 캡틴 자리를 후배에게 내주고 떠나, 이 자리에서 그 캡틴의 유래를 알게 된 심정이 어떠할까? 카셀은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디움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밤, 여왕이 어째서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을 안고 자신을 미리 보러 마을을 직접 찾아왔는지, 어째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토록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카셀은, 레드 게이트가 되어 있는 천 년 전의 옐로우 게이트 앞에서 연호되었을 그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외쳐보았다. ‘캡틴 나디엘.’ (3) 사-나딜의 기억 검은 피부의 레미프 여자가 작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모두 꿈에서 깨어나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아직 머뭇거릴 때, 라이가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더니 말했다. “그냥, 악몽, 꾼다.” 로핀은 긴장으로 쉬지 못했던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쉰 후에야 두 사람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여신에게 아뢰었다. “제가 품고 있는 의문에 대한 거의 모든 해답을 방금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가장 중요한 의문은 피해가신 듯합니다. 제가, 보여주신 기억을 잘못 안 것입니까?” 나딜은 고개를 약간 꺾어 들고 대꾸했다. “옳다.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에 가감을 하지 말고 곡해를 하지 말지어다.” “에.” 두 사람은 대꾸를 하면서도, 뭔가 불안했다. 여신은 조금도 극적이지 않고, 조금도 이야기에 다른 정황을 섞지 않았다. 새나디엘 여왕에 대해 자신의 기억을 보여줄 때는 즐거워했던 여신의 마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내리 깔린 목소리는 다시 두 사람을 누르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천 년 전 구아닐에게 힘을 빌려준 ‘죽음’ 에 대해서 잠시 보았다. ‘그것’ 은, 크나딜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아크랜드와 하늘 산맥이 아직 구별되지 않았으며 레미프와 인간이 아직 형체를 구별하지 않았을 때부터 나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생명을 원했고, 그는 죽음을 가망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죽이고 자기조차 죽고 싶어 하는 존재였다. 카셀, 내가 역사라 부르는 일을 너희들은 신화라 부른다고 했느냐? 이 일은 나 역시 기억으로도 역사로도 신화로도 망각해버린 그 이전이 일이었다. 그때는 나도 드래곤이 아니었으니.......” 나딜의 머리 뒤로 암흑이 짙게 깔렸고,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마법의 언어가 되어 당시의 저주를 동굴 안에 뿌리고 있었다. 로핀은 당황하여 칼을 뽑으려 했으나, 칼은 뽑히지 않았다. 카셀의 칼은 스스로 뽑혀 나왔으나,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도로 꽃혀버렸다. 카셀은 그 괴이한 일에 놀라 심장이 멈춰버리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카셀은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얼어붙었다. 아니, 실제로 드래곤의 열기로 따뜻한 동굴 안이 차갑게 얼어붙어, 나딜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붉은 비늘에서 스스로 나오는 빛에 반사된 그림자가 이상한 형상을 가지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딜은 그런 일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 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싸워야 했으며, 그 싸움은 이 땅에 있어야 할 많은 것을 지우고 없었던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패한 그것은 형체마저 잃은 채 대륙에 저주라는 명목으로 떠돌아다니는 유령이 되고 말았지. 그리고 내가 드래곤의 몸으로 사-나딜이 되었을 때, 그것 역시 드래곤의 몸을 빌려 카-구아닐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늘 산맥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등 뒤를 덮치는 듯한 섬뜩한 기운에 카셀은 뒤를 돌아보았다. 동굴 어딘가에서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성스러운 여신의 땅에 침입한 적은 동굴을 울리며 여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여신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째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조차 잊어버린 사악한 드래곤과의 싸움은, 그제야 비로소 내가 역사라 부르고 너희가 신화라 부를 만한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자를 죽여 마법의 힘이 아직 약한 대륙으로 내쫓고, 그 사이에 산맥을 일으켜 녀석을 막기 위한 방패를 세웠다. 그것이 하늘 산맥이고, 그 자는 지금도 파괴하는 욕구만 살아남아 그 방패를 넘으려 하고 있지.......” “사....... 나딜, 그의 힘이 이 동굴 안에 있나이까?” 카셀이 물었다. “염려 마라. 그때 남은 그 자의 숨결은 아직도 하늘 산맥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나의 땅에서 그 힘은 살아있는 자를 해치지 못하노라.” 나딜이 부드럽게 팔을 휘젓자, 두 사람을 괴롭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카셀이 신경 쓰지 못했던 라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비라도 맞은 듯 땀을 흘리던 라이는 이마에 손을 짚고 머리를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여신이시여. 제가 할 일은 바로 그 자가 방패를 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카셀이 물었고, 나딜은 대답했다. “그러하다. 그것이 네가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자는 죽음을 지배하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의 힘이 나를 죽일 수 없듯, 이제 나의 힘으로도 그 자를 죽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힘을 이용했군요? 익셀런! 10년 전 이 땅을 침범한 인간의 기사다 드래곤을 죽이고 다녔는데, 그 마지막 타깃은 바로 여기 계신 여신이 아닙니까?” “시행착오에 이은 학습이라 할 만하지. 그것이 천 번째 준비였고, 하늘 산맥에 다시 태어난 카-구아닐이 두 번째 준비였고, 레미프들을 본 따 만든 괴물들이 세 번째 준비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그 자가 마련한 커다란 인간 세상의 두 힘은, 아크랜드와 하늘 산맥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을 이 자리로 부른 나의 목적이다.” 익셀런, 구아닐, 모즈....... 다시 말해 드래곤을 죽이는 힘과 여신을 위협하는 힘과 인간의 군대를 무너뜨리는 대군이다. 카셀은 이미 어느 나라도 막아내지 못할 그 엄청난 연합을 부수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그 커다란 인간 세상의 두 힘’ 이란 게 뭘지 상상할 수 없었다. “아!” 로핀이 뭔가 깨달은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신 두 힘 중 하나는 루티아가 아닙니까? 루티아에 배신자가 있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십중팔구 그 배신자를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하다. 구아닐을 죽였던 그 루티아의 후계자가 이제 나를 향해 마법의 힘을 돌렸다. 그 거대한 위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겠느냐?” 크나딜도 구아닐과 마법사가 같이 있다면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카셀은 새삼 그랜드 마스터의 배신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 깨달았다. 그건 단순히 루티아의 멸망으로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타냐.’ 잊으려 해도 카셀은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로핀은 계속 이어 말했다. “그리고 혹시 또 하나의 힘이란 울프 기사단이 아닙니까?” “그것 역시 옳다.” 카셀은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여신에 대한 예의도 잊고 버럭 소리 질렀다. “무슨 엉뚱한 말씀을 하세요?” 나딜이 아무 말 않자, 로핀은 직접 설명해 주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세 번이나 동일한 인간의 연합에 막혔다. 천 년 전에 나디엘이라는 울프의 기사와 루티아라는 마법사에 의해 저지당했고, 십 년 전 역시 퀘이언이 이끄는 울프 기사단과 테일드라는 힘에 의해, 그리고 얼마 전에는 바로 너희 둘, 카셀과 타냐라는 힘에 막혔지. 나딜께서는 이를 두고 시행 착오라 하셨다. 내가 만약....... 내가 만약 천 년 전부터 아란티아를 공격하려다 막힌 장본인이라면 나를 가로막은 바로 그 힘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겠다. 그래서 그 둘이라 짐작해 보았다.” 나딜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나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가 그 자에게 힘을 빌려주게 되는 순간만을 내다볼 수 있었으므로, 그 이후 있었던 울프 기사단의 배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 자는 그 두 힘으로 카-구아닐을 부활시켰으며 자기에게 힘을 빌려주는 또 다른 루티아의 배신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안으로는 레미프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창을 들이대게 했으며, 밖으로는 이제 레-가넬-란도르가 이름을 내린 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카셀의 기억에서 읽은바 그대로 그 힘은 이미 골드 게이트까지 무너뜨렸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셀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막막했다. 그 큰 힘에 맞서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지, 이 커다란 흐름에 이 작은 인간의 힘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무서웠다. 카셀은 눈을 감고 나딜의 말을 곱씹어 보다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저....... ” 카셀이 말해보려 하는 순간 로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딜이시여, 지, 지금 무언가 혼동을 일으키신 듯합니다.!” “무슨 혼동이냐?” “천 년이라는 기억을 거슬러 생각하실 정도라면 오히려 최근의 자잘한 사건들은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인간에게 몇 년이라는 단기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부분에서 큰 실수를 범하신 듯합니다.” 여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인간과 드래곤의 시간을 비교하자면, 나에게 몇 년은 너희들에게는 몇 시간이나 며칠이라 할 만하다. 하면 너희들은 몇일 전의 일보다 몇 년 전의 일을 더 정확히 기억하는가? 내가 말한 부분에 시간상 틀린 부분은 없다.” 로핀은 단정을 내리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지 않고, 감히 따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셀이 생각한 그 묘한 이질감과 함께, 그가 따지고 있는 시간상의 이유를 합치니 카셀은 로핀이 무엇을 두고 무례를 범하는지 깨달았다. 지금 나디우렌은 끔찍한 진실을 말했었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이 힘을 빼앗은 후, 루티아에 또 다른 배신자를 만들었다!’ 혼동을 일으켰던 쪽은 여신이 아니라, 로핀과 카셀이었다. 던멜은 로일의 어깨에 의지해 계단을 올랐다. 그는 중간 중간 손을 내저었고, 그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손놀림 하나 만으로 모든 의사를 저달해 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수화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으나,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 암울하여 곧 그런 건 잊어버렸다. 그는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의 배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루티아를 배신했다는 것을 가장 빨리 알아낸 데다인의 고뇌가 던멜의 수화에 묻어나고 있었다. ‘데다인, 당신이야말로 진실로 루티아를 지키는 분이셨습니다.’ 로일은 던멜의 수화를 전달하며 가끔 타냐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관심 없는 척 들었고, 로일 역시 대화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력을 잃고 나중에는 대충대충 전달했다. 하지만 타냐는 루티아로 돌아오기 전에 충분히 로핀과 이야기하며 예측했던 내용이라 자세히 들을 필요도 없었다. 던멜이 멈춘 곳은 꼭대기에서 몇 층 내려온 방이었다. 타냐는 아직 올라가야 하는 줄 알고, 계단에 발을 하나 걸친 채 물었다. “역대 그랜드 마스터들의 초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초상화가 있는 방은 가장 꼭대기의 방, 아래층입니다만.” 던멜이 수화로 말했고, 로일이 다시 전달했다. ‘그 방은 러스킨의 마법으로 불탔었소. 그 그림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여기로 옮겨왔소.’ 로일이 전해준 이야기에는 러스킨과 던멜의 마지막 대결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었다. 던멜은 자신의 활약이 어떠했는지 묘사하지 않았으나, 러스킨의 마법을 피해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타냐는 던멜의 힘에 놀랐었다. “불에 탔다면......., 잠깐 제가 거기 둔 물건이 무사한지 보고 오겠습니다.” 타냐는 남은 게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불 타버린 러스킨의 방에는 깨진 유리와 빈 약병들만 조금 놓여 있었다. 책은 표지가 탔지만 아직 안의 내용이 남아있는 게 더러 있었다. 학생들이 맘먹고 복원한다면 소실된 책의 거의 대부분은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제일 중요한 물건들만 넣어두는 벽장을 열었다. 원래 많은 물건을 쌓아두는창고가 아닌 터라, 그녀는 쉽게 찾고 있던 것을 찾았다. 벽장 안은 안전했다. 몇 대 째 전에 그랜드 마스터를 지낸 마법사의 지창이라던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마법의 보석, 드래곤의 뿔 같은 귀한 물건들은 옆으로 치워두고, 그녀는 얌전히 누워있는 와인 병을 침전물이 섞이지 않게 조심스레 들었다. 그것은 오래 전 가넬로크의 집정관이 루티아에 선물한 귀한 와인이었고, 몇몇 소심한 마법사들이 차마 먹지 못하고 삼십 여년을 내려오다가 골베인에게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대륙 전쟁으로 루티아를 떠나 있는 테일드가 마지막 편지에 금방 돌아올 테니 같이 마실 와인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타냐는 골베인에게 부탁했고, 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골베인은 그 와인의 가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선뜻 내주었다. 그녀는 바로 그 와인을 이곳에 보관했다. 그녀는 와인 병을 조심스레 들고 다시 던멜과 로일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던멜은 화재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해둔 초상화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손으로 수화를 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을 아시오?’ 하필 그 와인을 손에 든 시점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니 또 다시 그리움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딱딱하게 굳어 슬프거나 기쁠 때 절로 자세하게 되는, 봉인 풀기 전 얼굴이 이럴 때는 훨씬 편했다. 그녀는 침착한 척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압니다.” ‘당신이 이 사람의 수제자라던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10년 전 대륙 정복 전쟁에서 아란티아를 도와준 바로 그 마법사고?’ 타냐는 일부러 목소리에 날카로움을 묻혀 따졌다. “그의 이름은 테일드이며, 마흔네 번째 그랜드 마스터를 지냈고, 8년 전 당시의 하얀 늑대들과 함께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의 전투에서 실종되신 분입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걸 묻는 겁니까?” 괜히 수화를 전달하는 로일 쪽이 놀랐다. 그러나 던멜은 초상화를 내려놓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수화를 이어나갔다. ‘바로 그 8년 전에 겪은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했소. 사과하고.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 의문을 풀지 못해 굳이 다른 마스터에게 말하지 않고, 하이디의 도움을 받아 이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의 수제자가 당신이라는 걸 알아내어 직접 전달하는 거요.’ “8년 전?” 그 사건이 있던 시점에서부터 일어난 모든 론타몬의 사건을 조사하고 다녔던 일들이 주마들처럼 지나갔다. 얼마나 그의 자취를 찾아 헤맸던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했던가? 타냐의 그리움과 상관없이 던멜의 수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비록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이었지만, 나 이전의 하얀 늑대들이 마스터 테일드와 함께 싸웠다는 그 8년 전의 전투를 알지 못하오. 실제로 나는 바로 그 시기를 이용해 여왕을 죽이여 했던 암살자였기에.......’ 그 차분한 던멜도 그 부분을 얘기하기는 꺼려했고, 수화를 전달하는 로일도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나 이전의 하얀 늑대들이 가진 전투와 내가 벌인 일이 몇 가지 일치하고 있음을 알아냈소.’ “뭔가 당신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대해 듣고 싶긴 하나, 그게 나의 마스터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겁니까?” 타냐는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져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일을 햇수로 꼽아본 적이 없어, 시간상으로 내 계산이 정확한지 아직도 확신할 수 없소. 그러나 여왕을 죽이라고 나의 스승에게 암살을 사주한 그 남자의 얼굴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소. 스승께서는 퀘이언의 칼에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으로 그 얼굴을 기억해두어 언제고 밝히라 하셨었소. 아무래도 그 언제라는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하오.’ 타냐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이미 속으로 던멜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러스킨의 불길에 휩싸여 쫓겨 내려가는 그 순간에 그 얼굴을 보게 됐소. 여왕을 암살하라고 의뢰한 남자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중 하나였소. 바로.......’ 그 다음 던멜이 하는 말에, 타냐는 들고 있던 와인 병을 떨어뜨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깨진 조각은 붉은 액체와 함께 주위로 흩어졌다. “익셀런이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하늘 산맥을 오른 것은 10년 전 가넬로크가 정복당한 후였습니다.” 로핀은 나딜에게 도전이라도 하듯 말을 길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드래곤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략 7년 또는 8년 전이었죠. 그 당시 그랜드 마스터는 테일드였고, 그는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루티아의 배신자는....... 그게 정말 러스킨이라면, 그는 고작해야 2년이나 1년쯤 전에야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되었습니다. 테일드가 돌아오기까지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라든에 있으면 그 정도 소식은 듣게 되니, 시간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와 또 다른 루티아의 배신자라는 말이 저로서는.......” 로핀은 말을 하면서도 이미 자기 주장 안에 나디우렌의 말을 증명하는 단서가 들어가 버린 것에 좌절하며 입을 다물었다. 로핀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8년전 테일드는 실종되었습니다. 살아있다고 믿기 위해 별 시답잖은 흔적을 다 들이대며 그는 단순히 실종되었다고 지금까지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죽었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에게 힘을 빌려주느니, 이용당하느니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로핀, 인간의 아이야. 그게 그토록 괴로운 일이었다면, 좀 더 시간을 두어 말해줄 것을 그랬구나. 가혹한 현실이긴 하나 나는 이 자리에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입장이니 이해해 다오.” 새나디엘 여왕을 닮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흐느끼는 로핀을 감쌌다. 카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 년 전 전추에서 카-구아닐은 죽었다. 그러나 그 자가 스스로에게 건 축복과도 같은 저주에 의해 어떤 살아있는 존재에 의해서도 죽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죽어있는 존재는 그의 세계에 속해있지. 죽었다고 했느냐? 그는 죽을 수 없는 존재다.” 카셀은 말하지 못하는 로핀 대신 겨우 자신의 뜻을 말했다. “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럼 테일드가 루티아를 배신하고,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돕고 있다는 뜻입니까?” “처음 내가 카-구아닐이라는 호칭에 대해 했던 설명을 기억하느냐?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안에서 구아닐이라는 존재를, 너희들은 분리하여 생각하지 못했지. 지금 너희들은 나를 무어라 부르냐? 나는 크나딜의 육체를 빌린 나딜인가, 나딜의 영혼을 담은 크나딜인가? 마찬가지이다. 달리 생각하지 못함이 당연하다. 타냐는 멍청히 바닥을 흐르는 붉은 와인만 바라보고 있었고, 로일은 타냐를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던멜의 재촉을 받아 전달을 끝맺었다. “던멜이 말하긴, 8년 전 그날, 아란티아의 여왕을 암살하라고 사주한 사람이 바로 추상화의 이 사람이라 하오.” 로일은 충실히 말을 전달한 수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던멜, 너는 왜 느닷없이 이 사람을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라고 말하는 거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실이라도 있나?” 타냐는 떨리는 시선으로 던멜을 바라보았다. 던멜은 그녀의 눈을 보며 굳이 로일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타냐 역시 던멜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물을 생각이 없었다. 또 그녀는 이 순간, 로핀이 말해준 중요한 단서들이나 자신이 직접 찾아냈던 많은 단서들을 잊어버리고, 단 한 가지 광경만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카셀이 익셀런의 기사단을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멈춰 세우고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아란티아의 여왕 앞에 섰을 때......., 아이린은 그를 베지 못했다. 누가 봐도 벨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칼을 접었다. ‘아이린, 그 회색 망토 안에서 당신은 누구의 얼굴을 본 겁니까?’ 빌리라는 기사에게 사로잡혀 있는 카셀을 구하기 위해 아란티아의 광야를 헤매던 그때, 자신을 공격했던 그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누구였던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공격하거나 지나간 장소에는 항상 테일드의 흔적도 같이 있었다. 로핀도 그것을 보았고, 자신도 그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그것을 ‘테일드가 그 흔적을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안일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해답은 던멜이 가장 빨리 내렸다. 그리고 타냐도 그 결론에 동의해야 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바로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였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디우렌은 그 정적을 바라지 않았는지, 스스로 입을 열어 정적을 깨뜨렸다. “아직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으나, 이 이상 말하는 것도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그대가 할 일이 있다, 카셀 울프. 나디엘과 즈토크 워그의 계승자여.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자기가 모은 두 가지 힘과 하늘 산맥에서 카-구아닐이 모은 힘을 합하여 하늘 산맥 북쪽으 l나라를 다시 공격하고자 한다. 막아라. 아란티아의 서쪽의 나라가 무너지면 이제 나의 축복은 더 이상 그들을 막지 못할 것이다.” 카셀은 솔직히 말했다. “구체적으로 제가 무슨 일을 해야합니까? 너무 큰일이라 저는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인간들의 힘을 규합하라. 천 년 전 그랬듯, 다시 그 힘을 하나로 모으라. 그러나 과연 그 힘으로 카-구아닐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지.......” 그때 프보에 레미프의 여자가 일어났다. 아니, 아까부터 일어나 눈을 뜨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겁먹은 시선을 계속 카셀과 로핀, 특히 라이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들의 언어로 크나딜의 얼굴을 한 나딜에게 말했다. 그러자 나딜은 대답했다. “그대와 동일한 이유로 온 자들이다. 염려 말라.” 역시나 그녀는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으나, 레미프에게는 레미프의 언어로 들렸다. 그 말을 알아들은 그 레미프 여자는 다시 말했다. 나딜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가 턱을 천장으로 향했다. “이제 나의 시간을 끝내노라. 뒤는 크나딜에게 맡기겠다. 염려마라, 아이들아. 말하지 못하나 모두 듣고 있으니, 크나딜이 나를 대신하게 하리라.” 크나딜의 몸에 거할 때는 커다란 소리가 났으나, 빠져나갈 때는 조용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서 있는 붉은 드래곤은 크나딜이었다. 그는 여신의 목소리와 비슷한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큰 소리가 부담스러웠으나, 여신과 대화를 마친 터라 상대적으로 듣기 편해졌다. “뒤는 내게 맡기셨으니, 이제 깨어나실 때까지 내가 모든 일을 주관하겠다. 하늘 산맥 북쪽의 일도 중요하나, 울프 기사단의 큰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의 이야기 역시 중요하다. 라루튼의 공주 세르메이여, 말하라. 이 공간 안에서 언어의 장벽은 없어질 지어다.” 세르메이는 잠시 뭔가 일어나는 변화를 느껴보다가 카셀에게 말했다. 카셀은 그녀가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동시에 카셀이 하는 말 역시 그녀에게 레미프의 말로 전달되고 있었다. 오히려 양쪽 말을 모두 할 수 있는 로핀은 헷갈려 했다. “게랄드와 아즈윈을 아시나요?” “압니다!” 카셀은 물어본 세르메이가 놀랄 정도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는 라루튼의 공주 세르메이입니다. 드래곤들의 하이로드를 깨우러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고, 그러던 중 인간들의 나라 아란티아에서 울프의 기사라 하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저를 도와 이 근방까지 왔으나, 아즈윈이 타치셀의 레미프들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게랄드는 저를 이 곳까지 데려와 주었으나, 사-크나딜을 뵙자마자 아즈윈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크나딜이시여, 그가 언제 떠났습니까? 저는 얼마나 여기에 기절해 있었던 겁니까?” “이틀 전이다. 너는 만 하루 동안 여신을 깨우는 의식을 치렀고, 또 하루 동안 잠들어 있었다.” 일어날 힘도 없어 주저앉은 채로 말하는 그녀는 처음에는 흐느끼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 울음이 너무 서글퍼, 영문을 모르는 카셀은 그녀를 달랠 엄두도 못 냈다. 그녀는 울면서 말을 했다. “그럼 이미 늦었습니다. 아, 나의 기더가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으니, 내가 한 예언 역시 그 사악한 기더의 한 축이 되어버렸나이다. 여신이시여, 크나딜이시여, 저의 죄를 용서치 마옵소서. 제가 그 둘을 죽였나이다. 제가 하늘 산맥을 구하러 온 두 영웅을 죽였나이다.” 그녀의 흐느낌에 크나딜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죄라면 내게 죄 사함을 빌지 말거라, 세르메이. 나 역시 너를 인도한 그 자의 미래에서 죽음을 보았다. 나는 그 뜻을 내비쳤으나, 그 유쾌한 인간의 전사는 내 예언조차 무색하게 할 강한 의지를 지니고 말했다. 목숨을 내놓는 그 정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좋아할 자격조차 없는 여자를 구하러 가아겠으니, 자기 길을 막지 말고 구아닐을 죽일 무기라도 빌려 달라 말했다. 내 어찌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어찌 그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그래, 나는 그에게 나의 힘을 담음 검을 주었고, 그 검은 하늘 산맥 안에서 나디우렌의 증표가 되어 길을 잃지 않게 하겠지. 죽음이 그의 운명을 이끌었다면 그는 지금 레미프들의 나라 타치셀에 갔을 것이다.” 크나딜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적은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그 위대한 전사에 대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카셀이 소리질렀다. “무슨 뜻입니까? 마치 게랄드나 아즈윈의 죽음이 결정된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 분 다? 로핀!” 카셀이 부르기도 전에, 로핀은 벌써 떠날 채비를 끝내고 있었다. “내가 떠나겠다. 너는 여기 남아 마스터 크나딜을 보좌하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직 여신께서 깨어나지 않으셨다! 너는 그 분께서 더 하실 말씀을 기다려라.” “하지만, 로핀, 혼자서요?” “라이와 같이 가겠다. 어제도 나를 들고 날 수 있었으니 적어도 조금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 “그래도 혼자 힘으로는 무리입니다!” 로핀은 픽 웃었다. “그럼 네가 돕기라도 하게? 걱정 마라. 이번에는 에실크의 힘을 쓰길 주저하지 않겠다.” 크나딜이 끼어들어 말했다. “에실크의 힘이라면 카-구아닐도 꺾을 수 있겠지. 그러나 타치셀에는 이미 너 혼자 감당하기에는 큰 힘이 모두 모여 있을 것이다.” “모두....... 라고 하셨습니까?” “구아닐의 장막에 가로막혀 나도 타치셀의 일을 내다보기 힘들구나. 그러니 기다려라. 여신께서 곧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실 시간이다. 그때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 드래곤을 배신한 프보에 레미프들에게 내가 직접 드래곤의 분노를 내리리라.” 트나딜은 크게 소리 내었다. 천 년 동안 멈춰 있던 크나딜의 목소리가 하푸를 따라 하늘 산맥으로 울려퍼졌다. (4) 타치셀 마치 사라진 고대 인간의 도시를 다시 발견하기라도 한 듯 아즈윈은 레미프들의 거대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도시 여기저기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내린 듯 거대한 나무가 주위를 가로막고 있었으나, 다른 숲에 비하면 나무가 거의 없어 어색하게도 뻥 뚫린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튼튼한 나무들 틈으로 레미프들의 서조 건물이 보였다. 나무를 좋아하니 나무로만 집을 짓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 놈들에게 잡혀왔으면, 아마 여기가 타치셀이란 곳이겠군.’ 워날 머리가 멍해서 뭐가 뭔지 아직 잘 파악이 안 되었다. 기절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고 싶었다. 아즈윈은 마을 광장 한 가운데에 팔을 뒤로 묶여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가 다리를 잡는 묵직한 느낌에 돌아보니 한쪽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그 끝이 바닥에 깊이 박힌 통나무에 걸려 있었다. 조금 손을 움직여 보았지만, 팔의 감각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깨어났나, 아즈윈?” 아즈윈은 뒤에서 들리는 어색한 높낮이를 가진 인간의 언어를 듣고 돌아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아즈윈과 같은 꼴로 론틀로스가 묶여 있었다. “살아있었군. 세르메이가 들으면 좋아하겠어.” “그런가? 바푸쿠즈께서는, 성공하셨나?” “게랄드가 데려갔으니 분명히 성공했겠지.” “레드워드도 돌아오지 않고 거기에 합류했던 군대도 돌아오지 않으니 여기에서 병사들이 하는 이야기만으로는 그런 걸 알 수가 없어 궁금했었다....... 아, 이구셀런 중 하나를 죽였다던데 사실인가?” “홀튼이라는 이름이었지, 아마. 어, 죽였어. 레드워드는......., 내가 힘이 부족해 졌다고 변명해 볼 수 있겠지만, 레드워드 역시 제 컨디션을 가지고도 상대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확실히 너희들이 무서워할 만한 실력자더군.” 몹시 목이 탔다. 바닥에 물이 고여 있다면 그거라도 핥아먹고 싶었다. “그리고 카구아 중 한 마리까지 죽였다 들었다.” “그럼 내가 카구아를 죽인지 며칠이나 지난 거야?” “이틀쯤 되지 않았나 싶군. 당신은 어제 이 기둥에 묶였고, ‘레미프들은 전날 악몽과도 같은 일이 있었다.’ 라고 떠벌려 댔지. 그러니 이틀이 맞다. 하지만 나도 중간에 몇 번이나 잠들기도 하고 정신을 잃기도 했으니, 시간을 계산하지 못하겠군.” 론틀로스의 목소리에는 힘도 없었고,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즈윈도 멍청히 앞만 바랃보다가 엉덩이를 끌어 쇠사슬이 묶인 통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몸의 어떤 부분은 굳어서 느낌도 남아있지 않았고, 어떤 부분은 깨질 듯 아팠다. “그래도 우린 해낸 거야. 게랄드는 세르메이를 안전하게 데려갔을 것이고, 세르메이는 드래곤을 부르겠지. 우리는 비록 이 곳에서 처형당하겠지만, 그 애가 부른 드래곤이 모든 것을 극적으로 해결 해 줄 거야. 그렇지 않아?” 아즈윈은 위로라도 받고 시은 마음에 말했다. 론틀로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즈윈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 기절했나 보다 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곧 론틀로스는 암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적으로 모든 게 늦었다.” “늦다니?” “우린 최선을 다했다. 그 점에서 틀리지 않지. 그러나 지금까지 엿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우리 라루튼은 푸트나이의 군대에 의해 벌써 멸망한 모양이다.” 아즈윈은 깜짝 놀라 물었다. “멸망하다니? 푸트나이가 라루튼을?” 잠깐 생소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레미프들의 나라들이 다시 기억 속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푸트나이와 타치셀의 연합에 합류하지 않기 위해 라루튼이 홀로 저항하고 있다는 말. “카-탄톨께서 힘을 주지 않으셨고, 사-크나딜께서 응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우리의 저항을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랬군.” “두 나라를 합친 레미프들의 군대와 구아닐, 거기다 카구아까지....... 그 힘을 어찌 막을 수 있겠나? 어젯밤 나는 또 한 마리의 카구아를 보았다. 타치셀의 저 건물, 신전 뒤로 걷는 그 검은 괴물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희망마저 잃어버렸지.” 아즈윈은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상투적인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미 자기부터 희망을 잃었으니 남들에게 도움이 될까? 게랄드가 모든 걸 해줄 거라 바랄 수도 없었다. 그를 믿고 있으나, 부담되는 기대를 하는 것도 몹쓸 직이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글쎄, 이런 걸 알아둘 필요가 있을지 싶지마는....... 신전 너머, 카구아와 함께 타치셀의 북쪽에 멈춰 있는 또 다른 군대가 있다. 원래 숫자의 10분의 1정도만 여기 머무르는 모양이고, 나머지는 푸트나이에 있다던가? 바로 그 괴물들의 무리가 우그들의 세계를 침략할 거라더군.” “할 예정? 이미 끝냈다거나 하고 있는 중이 아니고?” 아즈윈은 루티아를 염두에 두고 물었다. “그거야 나도 모른다. 내가 들은 건 푸트나이와 타치셀의 연합군이 서쪽을 공격하여 즈비 레미프들을 지배할 것이고, 저 괴물들의 군대는 우그의 나라를 지배할 것....... 이라는 정도다.” 이제 론틀로스의 말에는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가 여기 잡혀 있다는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심술 맞은 하늘 산맥의 절대자가 아즈윈을 가지고 놀기 위해 만든 머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 쪽 방향에서 쳐들어가는 아크랜드 대륙이면, 가넬로크인가? 하늘 산맥 쪽에는 군사 배치도 안 해놨을 텐데, 한 방만 치면 와르르 무너지겠구만. 드래곤 기사단이 조금 버텨주려나? 엄마 아빠더러 아란티아에 살라고 편지는 보냈으니, 두 분이 저 군대에 휩쓸려 돌아가시더라도 내 잘못은 아닌 거겠지? 빌어먹을, 언제 울고 안 울어봤더라? 진짜 지금이 딱 울고 싶어지는 순간이니까 울어도 되려나? 천하의 하얀 늑대가 우른 꼴 보이면 짜증나니까 그냥 울지 말아야겠다.” 아즈윈은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다가,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경비병들의 시선이 수상하여 론틀로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릴 가두지 않고 바깥에 묶어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거냐? 세르메이가 잡혀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고하러 오는 누군가의 미끼냐?” “그렇지 않겠나?” “이상한 놈들일세. 이제와 드래곤에게 가있을 세르메이를 잡아서 뭣하게? 라루튼도 이미 공격했다고 했지? 굳이 그 대를 잡아도 필요가 없잖아.” “죽이지 못하는 거다. 일어나자마자 내가 물었지 않았나? 카구아를 죽였느냐고. 이들은 너에 대해 뭔가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 그건 단순히 카구아를 죽였다, 또는 익셀런 중 하나를 죽였나는, 너의 강함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여기 레미프들은 ‘카-드로크의 악령’ 이라고 수군대고 있다.” “그건 또 뭐야?” “전에 잠깐 이야기했지. 카-드로크. 원래 타치셀의 수호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타치셀의 레미프들은 익셀런과 카-구아닐의 협박에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들의 신을 죽였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뭐, 덕분에 안 죽었으니 내가 이익 본거네. 그거면 됐어. 그보다 곤란하게 됐네. 나 이러고 있으면 내 서방님이 나 구한답시고, 뛰어들 텐데.......” “서방? 그건 남편, 또는 배우자를 뜻하는 단어가 아닌지? 게랄드를 지칭하나 본데, 언제 부부의 연을 맺은 건가?” 아즈윈은 낄낄대고 웃었다. “부부의 연이라....... 맺은 건 맺은 건데, 그걸 그런 식으로 설명하니 되게 웃기는군. 그냥 농담이었어.” “게랄드도 나와 같이 있을 때 네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나도 세르메이와 네 이야기 많이 했어.” 세르메이는 너무나도 순수하게 론틀로스를 좋아했고, 그 감정을 입에 담는 수줍음이 귀여웠다. 언어가 통하든 말든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옥의 한쪽에 내놓아도 별로 걱정 안 될 게랄드보다 오히려 세르메이가 더 걱정되는 아즈윈이었다. “아, 그리고 보니 남자들만 여자 얘기로 시시덕대는 게 아니었구나? 여자들도 남자 얘기로 우정을 돈독히 하는 거였네. 으음, 진작 알았으면 울프 처녀들하고도 남자 얘기로 친해졌을 텐데, 아깝다.” 아즈윈은 새로운 깨달음에 즐거워하며 론틀로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또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어이, 론틀리. 듣고 있냐?” “론틀리? 그건 날 지칭하는 건가?” “맘에 들어? 넘어가자. 나보다 몇 십 살이나 많은 할아범 상대로 장난치는 게 조금 미안하긴 하네. 그래도 네가 날 게랄드처럼 편히 상대해주니 나로서는 편하다. 전에 헤어지면서 한 약속은 안 잊어먹었네. 아, 그보다 넌 이번 일을 모두 무사히 끝나면 어찌할 거냐? 세르메이와 ‘부부의 연’을 맺을 생각은 없냐?” 아즈윈은 농담조로 그 말을 강조했으나, 론틀로스는 심각하게 대답했다. “알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때론 그게 더 큰 행복이 될 수 있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그저 동료 같았던 게랄드와 그 짧은 시간에 어떤 감정의 교류를 가졌기에 자신 있게 연인처럼 말하는 것인가?” “와우! 그렇게 물으니까 자신 있게 대답 못하겠는걸. 그냥....... 그래, 레미프가 나 같은 변덕쟁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무리일지도. 너희들은 수십 년 동안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조용히 감정을 고이 간직하지만, 나 같은 녀석은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꺼져버려.” 게랄드는 꽤 전부터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그는 이런 아즈윈이 성격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옆에 둘 수 있는 친구를 택한 것이리라. 아즈윈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지금 감정도 한순간 불타는 변덕일 거야. 그런데도 나는 게랄드의 마음을 알아버렸어. 그걸 모른 척 넘어가기에 난 참을성이 많지 않아. 모른 척 넘어가기엔......., 나도 게랄드를 좋아했어. 맞아, 좋아했었어. 나도 오래 전부터 좋아했었어. 빌어먹을, 나도 처음부터 좋아했었어.” 아즈윈은 고개를 축 숙였다. “에휴, 꼴불견이다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고 잘 생긴 깃 한 새끼 달려와 자기 안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길 기다리는 내숭덩이들 묘사해놓은 동화책만 보면 열 받아서 발기발기 찢어버린 내가 이제 그 꼴 되어버렸네. 그런데 그게, 우리 여자란 동물의 불상한 습성이냐? 기다리고 있으니까 기분은 삼삼하구만.” 아즈윈은 웃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게랄드한테 무지 미안해지네. 그녀석이 나 좋아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딴 남자랑 놀고 있었던 게 되잖아. 살아 돌아가면 잘 해줘야지. 여왕님께서 허락해주시면, 결혼도 해버려야지. 열애라면 두발 벗고 끼어드시는 분께서 그걸 모른 척하시지는 않겠지. 수호기사만 안 하면 울프 자리 서른쯤에 넘겨버리고 결혼하는 거다. 내 프러포즈 거절하면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여주겠어! 대신 거절 안 하면....... 어이, 론틀리. 듣고 있냐?” 론틀로스는 또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몇 번 다리 묶은 쇠사슬을 찰랑대며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기절했나? 혼자 떠들고 있었네. 하긴, 뭔 상관이냐? 그래. 거절만 안 하면, 잘해줘야지. 정말 잘해줘야지. 그동안 미안한 거 보답이라도 하게 잘 해줘야지. 그러니 구하러 와라, 게리. 여기 너의 레이디께서 구출을 기다리신다.” 아즈윈은 힘없이 늘어져 빈 땅만 바라보았다. 중간에 레미프 병사가 물을 가져다주면 몇 모금 받아 마시고, 빵을 내주면 몇 입 베어 먹기도 하면서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바닥이 어둑어둑해질 때 검을 철갑의 발이 아즈윈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검은 로브가 가리고 있는 투구 너머의 강한 시선이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었군, 하얀 늑대.” 피곤함이 묻어있는 그의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레드워드였다. 레드워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칼을 들어 내리그었다. 아즈윈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젖혔다. 상의가 잘려나가 가슴이 드러났다. 불쾌함에 소리라도 지르려던 아즈윈의 턱으로 칼날이 들어왔다. “이렇게 보면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여자인데, 대체 그때는 무슨 저주가 있었던 건지.......” “그럼 한 번 풀어줘 봐. 예뻐해 줄 테니까.” “난 원래 톡톡 쏘는 여자를 좋아하지. 레미프들이 상납하는 얌전한 레미프들 상대로 즐기는 것도 지겨워졌는데, 너 하나 여기서 눕혀 재미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호오, 나도 너처럼 말 함부로 하는 녀석 되게 좋아하는데! 이거 뜻밖의 장소에서 취향 비슷한 사람끼리 만났네 그려?” 아즈윈은 비아냥거리며 말했고, 레드워드는 크게 웃었다. “까불지 마라, 꼬마야.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멍청한 레미프 놈들이 너를 카-드로크의 악령이라고 부르지만 않는다면 진작 본보기로 발가벗겨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오줌을 지리며 꿈틀대는 꼴이 볼만 했겠지.” 레드워드는 투구를 벗고 아즈윈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아, 글쎄. 이 밧줄만 잠깐 벗겨보라니까. 원하면 옷도 벗어줄게, 좋지? 여자가 이런 말 하는 거 쉽지 않거든. 그만큼 너한테 죽도록 반한 거야. 그러니까 풀어봐. 갑자기 풀어주면 팔도 잘 안 움직여. 위험하지도 않아. 그리고 네 칼 잠깐만 빌려줘, 응? 착하지? 그 다음에는 내가 오줌을 지리건, 뭘 지리건 상관없잖아, 위대하신 기사님.” 아즈윈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레드워드는 턱에 들이댄 검을 옆으로 스윽 그었다. 칼날이 턱을 벴다. 그 다음 휘두른 검은 정확히 뺨을 베어내는 방향이었다. 아즈윈은 최대한 머리를 뒤로 젖쳤다. 칼끝이 베고 지나간 자리가 불에 덴 듯 화끈했다. 그 다음에 내지르는 칼날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했다. 어깨, 목덜미, 이마, 다리, 팔! 급소도 아니고, 위험한 부위도 아닌 곳만 골라 칼집을 내는 레드워드의 표정을 전혀 변하지 낳았다. 아즈윈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인내하며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레드워드는 천천히 몸을 수그려 무릎으로,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다리를 깔아뭉갰다. 딱딱한 금속이 뼈를 으스러뜨리는 것 같았다. 레드워드는 왼손으로 아즈윈의 드러난 젖가슴을 움켜쥐더니 칼날을 들이앴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그는 말했다. “여자가 남자들 세계에 검이나 활로 어설프게 끼고 싶어 가슴을 자르기도 한다지. 너도 그리 해야 하지 않은가?” 칼날이 젖가슴 위를 이미 파고 들어가 있었다.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지 않으니, 오히려 고통을 더 심해졌다. “이거 왜 이러시나? 이렇게 예쁜 가슴을 자르려고? 게다가 난 그 정도로 정신력 강한 여전사가 못 된다고.” 레드워드의 칼에 힘이 들어갔다. 배어 나온 피가 가슴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그녀의 주위에 몇몇 레미프들이 겁에 질린 눈을 하고서 모여들어 있었다. 레드워드는 그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픽 콧김을 내뱉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의 처형을 캡틴께서 오신 후에 하겠다. 그리고 네 저주가 사라지는 순간, 너는 지금 내뱉은 모든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여자로서 최악의 죽음이 될지, 인간으로서 최악의 죽음이 될지는 그때 가서 내 선택을 따르라.” 아즈윈은 고통에 숨을 몰아 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련하시겠어.......” 겨우 고통을 가셨지만 몇 군데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붉은 핏자국 난 가슴을 내려다보니 서러운 한숨이 절로 새나왔다. “어째 화도 안 나냐? 음, 카-드로크가 어떤 드래곤이고 뭘 했길래 악령이란 소리를 듣게 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 녀석 덕에 목숨 여러 번 건졌으니 고마워해야겠군.” 묶여 있는 것도 꽤나 중노동이었다. 거기다 피까지 흘리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즈윈은 머리를 통나무에 기댄 채 잠시 잠들었다. 꿈 속에서인지 아니면 피로에 지쳐 반 무의식 속에서인지,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두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냥 여기서 죽고 끝낼까?’ [아즈윈, 지금 일어나야 해. 네 죽음이 너의 앞에 다다랐어. 일어나, 아즈윈. 일어나! 여신께서 깨어나셨어. 나의 목소리를 들어.] ‘세르메이?’ [너의 기더를 받아들여선 안돼.] 아즈윈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몸이 절로 떨렸다. 이제 어개나 묶인 팔분 아니라, 온 몸이 자기 몸이 아닌 듯 굳어 있었다. 영원히 불구로 살라고 신의 손을 가진 의사가 판정을 내려도 고스란히 다라야 할 판이었다. 가급적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음에도 쇠사슬 묶인 발목을 피멍이 들었고, 레드워드에게 베인 부분은 진물만 나고 상처에 딱지가 내려앉지 않았다. 가슴 베인 자리는 상처가 더 벌어진 것 같았다. 익셀런들이 타고 다니는 검은 털의 이상한 짐승이, 론틀로스가 신전이라고 지칭한 하얀 석조 건물로 걸어가고 이었다. 레드워드가 직접 나와 그 익셀런의 기사를 맞았다. 멀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뭔가 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론틀리, 일어나 있나?” 부르긴 했으나 기대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말 하지 말아다오.” 아즈윈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숲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우연에 가깝긴 했지만, 아즈윈은 그 익숙한 느낌이라면 더 복잡한 숲에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랄드였다! ‘정말 온 거야? 그러니, 게리?’ 북쪽을 지키는 레미프는 네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자고 있던 사이 교대 근무 때문에 빠져나간 건가? 하지만 지금은 경비를 빼낼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경비를 강화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직 녀석들은 눈치를 못 챘나 보군. 하지만 게리, 뭘 하려는 거야? 차라리 밤에 오지 그랬어?’ 아니, 밤이라면 오히려 위험했다. 아즈윈은 세르메이를 구하려 했던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고 게랄드가 밤의 시간을 택하지 않은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그렇다고 아침이 더 안전한 건 아니잖아.’ 아즈윈은 그가 뭘 어떻게 해서 자기를 구할 시도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레드워드와 한참 이야기하던 그 또 다른 익셀런은 아즈윈을 힐끗 쳐다보았다. 길지 않은 시선이었음에도 묘한 살기가 전해져왔다. 그는 곧 레드워드를 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저 녀석, 뭐냐? 혹시 들었어?” “레미프들은 귀가 밝지만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던지 별로 주위를 기울이지 않더군. 그래서 방금 대화를 다 들을 수 있었다. 그 자는 방금 루티아라는 도시를 공격하고 돌아온 네이슨이라는 자다.” “네이슨?” 세르메이가 예언했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수년 전에 나눈 대화처럼 희미해져 버린 세르메이와의 대화였으나, 그 이름만큼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포기하려 했던 마음을 다잡고 뒤돌아 물었다. “또 둘이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은 거지?” “레드워드가......., 캡틴이 오고 있다 말했다. 오늘 중으로. 그리고 근처에 여신께서 계시고, 그 여신을 찾는 또 다른 무리가 세르메이가 사라졌던 그 지역을 헤매고 있다더군. 결국 놓쳤으나 대강 위치를 아니, 그 곳을 한 번 들이닥쳐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네이슨이라는 자는 자기들끼리 결정할 일이 아니니 기다려보자고 했고, 레드워드는 여신을 살해하면 그걸로 이 싸움은 끝인데 뭐가 고심할 거리냐고 조금 다퉜다. 그리고 레드워드는 왜 혼자냐고 물었고, 네이슨은 두 사람, 베이트, 에드몬드가 희생되었다면서 긴 얘기는 피곤하니 나중에 하자고 미뤘다. 곧 둘은 또 카-드로크의 악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역시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안 잡히는군.” “저 자가 그렇게 강한 자인가? 세르메이 말이, 드래곤을 가장 많이 죽인 기사라던데.......” 아즈윈은 일부러 예언 이야기는 빼고 물었다. “레미프가 어찌 저들의 강함을 측정할 수 있겠나?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구아닐만큼 두려운 이름이 이구셀런이고, 그 이름을 가진 우그 중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네이슨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혹시, 나를 죽인다는 말을 하던가?” “아니, 처형은 캡틴이 올 때로 연기하자고 하는군. 몇 마디 놓치는 바람에 자세한 내막을 모르지만, 러스킨이라는 마법사가 카-구아닐과 함께 푸트나이에서 출발했고, 저녁쯤에 여기 당도한다고 말했다.” 러스킨.......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루티아에서 왔다고 했지, 저 네이슨이? 그럼 루티아는 무사한가?” 그동안 잠깐 잊고 있었으나, 아즈윈은 루티아의 원군으로 하늘 산맥에 올랐었다. 그러다 사고를 당했고, 엉뚱한 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나이 전혀 연관성 없는 일만 하고 있던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루티아의 무사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루티아에는 로일과 던멜이 있는데, 네이슨을 살아서 돌아왔다. 그 두 사람과 네이슨이 서로 만났을까? 그런데도 네이슨 쪽이 살아남은 거라면? 아즈윈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신전 앞에서 터졌다. 거기에 게랄드가 서 있었다. 풀 때가 잔뜩 묻은 지저분한 옷차림에 언제나처럼 빗지도 않은 짧은 갈색 머리에, 온 몸에 상처투성이인 주제에, 포즈는 당당했다. 손에는 르고가 만들기 제일 귀찮아하던 그 도끼가 아직도 튼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고, 등에는 전에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칼이 한 자루 메어져 있었다. 아즈윈보다 시력도 청각도 좋은 레미프들이, 뻔히 나타나있는 게랄드의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당장 창과 방패와 칼을 들고 게랄드를 감쌌다. 그러나 공격하지 못했다. 게랄드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프보에 족의 늙은 레미프를 앞에 끌어안고 목에 도끼를 들이대고 이었다. “어이, 론틀로스! 듣고 있나? 이 녀석들에게 내 말을 전달하라. 내가 너희들의 왕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섬기는 여왕을 얌전히 풀어달라.” 아즈윈은 이 와중에도 농담 비슷한 소리를 해대는 그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론틀로스 대신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게리?” “그게 말이다. 어젯밤부터 내내 머리를 굴려봤는데, 이 방법 밖에 없더라고. 봐라. 아무도 나 공격 못하잖아.”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론틀로스도 동의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우리에게 있어 홉트란, 고작 우그 인질 ‘ 따위’ 와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분이니까.” “허어, 무시하면서 안심시키는 건 또 재밌네.” 아즈윈은 웃었다. 론틀로스는 곧 게랄드이 말을 그대로 레미프 언어로 옮겼다. 레미프들은 당장 크게 술렁였고, 몇몇 경비병들은 허둥지둥 달려와 아즈윈을 풀어주려 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네이슨과 레드워드가 신전에서 나오기 전까지 게랄드의 단순한 작전은 들어맞는 듯했다. [트포드 루이브 드루 워브츠 오그 우처마이!] 레드워드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수많은 레미프들은 그 자리에서 경직되었다. “뭐라는 거야, 저 자식?” 아즈윈이 물었다. “적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군.” 레드워드의 이어지는 말에 론틀로스는 당황했다. 레미프 병사들도 당황했고, 특히 게랄드가 잡고 있는 늙은 레미프는 몸을 크게 흔들며 소리 질렀다. “지금 게랄드가 잡고 있는 홉트는 자기들은 현혹시키는 사악한 마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오, 맙소사. 홉트가 직접 자기가 홉트라 말하고 있건만.......” 론틀로스가 당장 레드워드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레드워드는 옆에 서 있는 경비병의 창을 빼앗아 게랄드에게 던졌다. 어찌나 그 힘이 세고 속도가 빨랐던지 게랄드도 겨우 몸을 빼내어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타치셀 왕의 배를 뚫은 창은 벽에 꽂혀, 늙은 레미프를 매달아버렸다. 몇몇 레미프들은 비명을 질렀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아낙들은 기절해버렸다. 그러나 레드워드는 레미프의 언어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당황하지 말라. 나는 저 자의 마법을 제거했을 뿐이다.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그리 될지 모를 미래를 잠시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너희들의 왕은 신전 안에 안전히 계시다. 저자를 죽여라. 카-드로크의 악령을 두려워하지 말라!] 머뭇거리던 레미프들은 곧 레드워드의 말을 믿고, 창을 들고 게랄드에게 달려들었다. 게랄드는 얼른 계단 높은 곳으로 달려 올라가 도끼를 크게 휘둘러 접근을 못하게 만들더니 아즈윈에게 소리쳤다. “야, 시간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기다려.” (5) 카-드로크의 악령 게랄드는 높이 치켜든 도끼를 휘두르며 계단위로 뒷걸음질 쳤다. 계단을 가득 채운 레미프 병사들은 눈에 증오를 담고 창을 지르며 다가왓다. 게랄드는 그들이 창을 찌르는 타이밍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도끼를 휘둘렀다. 끝이 잘린 창 자루가 계단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니들 왕은 내가 안 죽였어! 그래도 날 죽이려 들면 나도 안 참아!” 게랄드는 계단의 제일 끄트머리까지 올라가더니 크게 소리쳤다. 알아들을 리 없는 레미프들은 창이 멀쩡한 병사들을 앞세워 다시 공격하려 했다. 게랄드는 도끼를 치켜세우고 계단 아래로 거의 점프하듯 뛰어 내려갔다. 고슴도치가 가시 세운 것처럼 내민 창 자루가 부러졌고, 그가 지나간 자리의 레미프들이 뒤로 넘어졌다. 레미프들 한 가운데로 떨어진 게랄드는 도끼 몇 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 포위망을 뚫었다. 다친 병사들은 여럿이었으나, 죽은 이는 없었다. “아, 이것 참, 얼마 전에 친하게 지낸 놈들이랑 얼굴이 비슷하니 죽이지도 못하겠군. 론틀로스, 이 녀석들에게 물러나라고 할 수는 없나?” 게랄드가 외쳤다. “아까부터 그러고 있다. 하지만 도무지 듣질 않는군.” 론틀로스는 안타깝게 대꾸했다. “멍청한 놈들.” 게랄드는 신전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두 익셀런의 기사를 도끼로 가리켰다. “어이, 너희 두 녀석! 기사라면 위에서 명령만 내리지 말고 직접 내려와서 싸워.” 그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게랄드는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광장의 한쪽으로 수십 명의 레미프들이 에워싸기 시작했고, 더만ㄴㅎ은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게랄드는 입맛을 다셨다. “이런 건 기사가 할 짓은 아니지 않나? 하늘 산맥에 와서 용병짓 하게 생겼네.” 그는 곧 레미프들 틈으로 아즈윈을 바라보았다. 그는 힘없이 웃어 보이며 도끼를 치켜세웠다. “진짜 겨우 도착하나 했는데, 너한테 가는 길은 왜 이렇게 먼 거냐? 돌아가기도 귀찮으니, 이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 내내 피하고 막기만 했던 게랄드의 도끼가 레미프들의 살을 가르고 뼈를 부수었다. 레미프들이 마침내 잡았다 싶을 때 횡으로 한바퀴 돌아간 첫 번째! 도끼질이었다. 원을 이루고 있던 레미프들의 포위망이, 중앙에서 마법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깨졌다. 몇 명이 죽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게랄드를 포위하려고 창을 들이댔던 병사들 모두가 레미프의 피를 뒤집어썼다. 목이 잘려나간 레미프의 시체가 네 걸음이나 바닥을 걸어 동료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터져 나온 피가 광장을 적셨고, 다른 쪽에서 흐르는 피가 그 피에 합류하여 개울을 만들었다. 첫 번째 도끼질에 이은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언제 어느 방향으로 가해졌는지 레미프들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시선이 가려 있었고, 겨우 찾았다 싶으면 그 자리에는 돌료의 시체가 만들어낸 핏줄기가 얼굴에 뿌려졌다. 포위 같은 건 물론이고 제대로 된 공격도 없었다. 타치셀에서도 그나마 용맹하다고 알려진 레미프 하나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뛰어올라 활공을 하듯 게랄드의 머리 위로 창을 찔러 넣었다. 게랄드는 몸을 비틀어 창을 피하고 상대의 가슴부터 배까지 한 번에 그었다. 핏덩어리인지 내장인지, 검은 것이 왈칵 바닥에 떨어졌다. 혈관에 흘러야 할 뜨거운 액체가 내는 증기는 게랄드가 뒤집어 쓴 피의 색깔을 띠었다. 이제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포위하고 있는지 분간되지 않았다. 이런 싸움을 경험해보지 못한 어린 병사들은 무서워 달아났고, 게랄드는 달아나지 않고 저항하는 레미프들의 무리를 부셨다. 더 이상 타치셀의 레미프들은 게랄드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레미프들의 시체 위에서 게랄드는 붉게 물든 도끼를 어깨에 짊어졌다. 짧게 숨을 몰아 쉰 그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는 더 이상 레미프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아즈윈도 보지 않는 그 너머였다. “오냐, 오냐. 아까 마을 뒤쪽에 잔뜩 뭐가 있더라니.......설마 하니 그 생긴 모습이 애완용이 아닌 줄 알았지.” 몰아쉬는 짐승의 호흡이 주위에 가득했다. 아즈윈은 게랄드의 주위로 몰려드는 그 이상함 짐승들을 보고 론틀로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론틀로스도 겁에 질린 나머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마 이 짐승을 많이 접해봤을 타치셀의 레미프들조차 이 짐승들이 광장으로 모여든 후 모두 물러났다. “모즈들.” 론틀로스는 뭉툭하게 튀어나온 코와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를 한 털복숭이를 지칭하며 말했다. “푸트나이에서 이런 짐승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녀석들이야말로 하늘 산맥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들이다.” 아즈윈은 게랄드에게 자기 구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물러나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포위당해 있었다. 그리고 이 모즈란 놈들은 레미프들과 달리 결코 게랄드의 도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동료의 등을 떠밀어 게랄드에게 붙여놓고, 그걸 방패삼아 달려들기까지 했다. 게랄드는 그것까지 눈치 채고 두 마리를 동시에 베었으나, 다른 놈이 뒤에서 발톱으로 게랄드의 등을 긁었다. 게랄드는 포위당하지 않도록 옆으로 달렸으나 이 넓은 광장에서 그것도 무리였다. 결국 발목을 잡힌 게랄드는 열 마리 넘는 모즈들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한 마리는 게랄드의 어깨를 물어뜯었고, 한 마리는 다리를 할퀴었고, 한 마리는 머리에 매달렸고, 한 마리를 게랄드의 도끼를 붙들었다. 게랄드는 고함을 지르며 머리에 붙은 모즈의 얼굴을 움켜잡아 내던졌다. 허벅지를 물은 모즈를 걷어차고 등에 매달려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으로 목을 찌르려 드는 모즈를, 도끼를 잡고 늘어져 있는 모즈와 함께 날려버렸다. 그러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어느 틈에 빈자리로 파고든 모즈는 금방 게랄드에게 매달려 공격했다. 그러나 게랄드는 결코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한 마리씩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즈들을 베어나갔고, 힘으로 덤비는 짐승들을 힘으로 제압했다. 모즈들의 시체가 레미프들의 시체보다 많아졌음에도 서 있는 모즈들의 숫자는 주는 것 같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모두 레미프들의 것이었으나, 그 다음에는 모즈들의 것이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것이 되었다. 게랄드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모즈를 이마로 들이 받아 떨구고 도끼로 목을 따버린 후에는 이마에서 피를 흘렸다. 어느 순간부터 게랄드는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게랄드가 지금 움직이는 게 알고 움직이는 건지, 자나 깨나 훈련으로 다져진 반사 신경으로 움직이는 건지, 아즈윈은 알지 못했다. 아마 게랄드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반짝이던 게랄드의 눈빛에 생기가 머물러 있지 않았고,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입가에 고통을 인내하는 끈기만 남아있었다. 아즈윈은 게랄드와 같은 고통 속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게랄드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옆에 있는 동료 기사의 상태를 알았고, 실력을 알았다. 그걸 즉각 눈치 채고 전추 포메이션을 짤 줄 아는 그녀는 제일 처음 퀘이언에게 울프 기사단의 캡틴 직을 제안 받았다. ‘네가 울프들 중 가장 보는 눈이 정확하다. 내가 아는 한, 이전 울프 기사들은 물론이고 이전 하얀 늑대들까지 포함하여 너의 지휘 능력은 최고다. 이런 말을 한다고해서 네가 자만심에 빠져 훈련을 게을리 할 놈이 아니니 하는 칭찬이다.’ 퀘이언의 말을 듣고 아즈윈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었다. ‘에, 전......., 놈이 아니라 년인데요.’ ‘음,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알고서 벌써 회피 작전을 쓰는 게냐? 역시 너는 전투를 보는안목이 높아. 필드에서 그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어찌 될지 가슴이 설레기까지 하는구나.’ 퀘이언은 빙그레 웃으며 아즈윈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했다. ‘너는 확실한 캡틴 감이다.’ ‘거부권은 있습니까?’ ‘싫으냐?’ ‘전 싸가지가 없어서 안대요. 쉐이든을 꼬셔보시죠?’ ‘아아, 그 녀석은 나를 닮아서 너보다 더 고집을 부려 안 하려들거다.’ ‘저도 그럴 거라 예상하셨죠?’ ‘그래, 그럼 너의 안목으로 괜히 하나 묻자. 하얀 늑대들 중 누가 제일 강하냐?’ 아즈윈은 그 난데없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비교하라 하시니 오히려 마스터답지 않으십니다.’ ‘난 그냥 나의 관점이 아닌, 다른 이의 관점을 듣고 싶어서 그런다.’ 아즈윈은 꼿꼿하게 퀘이언의 책상 앞에 서 있다가, 그의 사무용기 몇 개를 옆으로 밀고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퀘이언은 그녀의 무례를 방관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말했다. ‘던멜입니다. 그 녀석이 활을 들고 원거리 사격 태세로 들어가면 누가 당하겠습니까? 화살 다 쏘고 나서도 그 녀석이 단검 하나 쥐고 있으면 완전히 무밥이 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죠.’ ‘던멜한테 그런 말 들려주면 되려 실망할 만한 답변이구나.’ ‘그럼 들려주지 마시죠. 그리고 일 대 일 싸움이라면 로일이 되겠죠. 아직까지 저도 열 번 싸우면 서너 번 정도밖에 못 이기니까. 하지만 전시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말을 타고 기사 복장으로 몸을 무겁게 한 상태에서라면 마스터께서도 쉐이든을 이긴다고 말씀 못하실 겁니가, 그쵸?’ ‘너 지금 마스터의 책상에 엉덩이 깔고 앉아있는 것도 모자라, 제자에게 진다고 말하는 무례를 범하느냐?’ ‘그럼 마스터 무릎에 앉을까요?’ ‘무릎 꿇고 저 쪽 구석에 앉아있는 것도 좋겠군. 하던 말이나 마저 하려무나.’ ‘예, 예. 어쨌든 전쟁터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일 대 일이고 기사간의 승부고 간에 규칙 없이 미친 듯이 싸운다......., 라고 가정하면 게랄드를 누가 당하겠습니까? 저는 이 비교에 굳이 끼우지 않겠습니다. 자, 대답은 종료되었나이다. 뭘 바라십니까, 마스터?’ 아즈윈은 장난스럽게 따졌다. ‘골고루 점수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구나. 짓궂은 질문은 여기에서 접도록 하지. 그런데 넌 대체 누굴 제일 좋아하는 거냐? 우리도 너희들만한 때에 매력적인 여기사가 하나 있어 그런 감정들은 서로 숨기거나 어렵게 꺼내어 젊은 시절의 추억을 만들긴 했지만, 네가 끼어있는 너희들의 관계는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저는 제일 강한 애가 좋습니다.’ ‘허허, 그래? 그럼 난 누군지 알 거 같다.’ ‘오우, 마스터는 아니에요!’ ‘알았다, 이 녀석아.’ 퀘이언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때 마스터는 정말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가? 사실 그때 그녀는 이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저에게 게랄드를 붙여주십이오. 그럼 하얀 늑대들 나머지 셋을 이겨 보이겠습니다!’ 아즈윈은 쇠사슬에 묶인 자리가 마비되어 발목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몸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멀리서 모즈들에게 물리고 발톱에 찔리면서 한 마리 한 마리 베어나가는 게랄드를 보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날 풀어줘!” 갈증으로 타 들어가는 목은 이제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자기 안에서 소리 질렀다. “날 풀어줘! 두 마리 하얀 늑대들의 이빨을 너희들에게 보여주겠다. 암컷이 이끄는 늑대 무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겠다. 날 풀어줘, 이 개자식들아! 게랄드와 내가 힘을 합하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겠다.” 아즈윈이 그 말을 하고 싶은 상대는 레드워드였다. 그러나 그에게 이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그때 레드우드는 뿔 나팔을 꺼내 불고 있었다. 싸움에 정신이 팔린 게랄드는 이미 그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뿔 나팔에 이끌려 나온 그 검은 비는ㄹ을 갑옷처럼 덮은 거대한 괴물의 모습도 발견하지 못했다. 카구아였다. 카구아는 신전의 천장 한쪽을 손으로 짚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벌렸다.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이중으로 이빨이 자라 있는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드래곤 닮은 그 괴물의 입 앞에서 뭉쳐졌다. 솟구치는 검은 불길이 향하는 방향은 게랄드 쪽이었다. “게리, 피해!” 아즈윈은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게랄드는 그 검은 불길에 휩쓸렸다. 이제 거의 죽고 마지막까지 게랄드를 물고 늘어졌던 모즈들이 불길에 딸려 마을 경계까지 날려갔다. 타버린 모즈들의 시체는 바닥에 떨어지자, 까맣게 재처럼 부서졌다. 그 불길이 지나쳐간 자리에 온 몸에 검은 수증기를 쓸어안은 게랄드가 멀쩡히 서 있었다. 그는 도끼 대신 등에 메고 있었던 커다란 칼을 쥐고 있었다. 칼날의 붉은 빛이 그 남은 수증기마저 옆으로 밀어내버렸다. “아, 날개가 없는 걸 보니 넌 구아닐이 아닌가?”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웃어보였다. 그는 커다란 칼을 뒤로 젖혀들었다. “에이, 뒷일은 나중에 생각해야겠다. 그리고 넌......., 거 뭐냐? 이럴 때 해야 되는 말! 그래, 그거.” 그는 크게 소리 지르며 끌어당긴 칼을 집어 던졌다. “크나딜의 이름으로 처단하노라!” 그 굵직한 칼날이 공중에서 몇 바퀴 회전하며 카구아 쪽이 아닌 약간 벗어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끈에 이끌린 듯 그 칼은 칼이 그리는 궤적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던 카구아의 얼굴을 향해 뚝 떨어졌다. 칼날은 정확히 카구아의 얼굴에 박혔고, 붉은 빛이 눈부시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카구아의 머리가 바닥으로 뚝 떨어지며 신전을 부쉈고, 그 돌무더기가 레드워드와 네이슨을 덮쳤다.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피했고, 레드워드는 광장 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잠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죽은 카구아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이거 아주 곤란하게 됐군. 고작 사흘 사이에 내 밑으로 관리하고 있던 세 마리 카구아를 잃어버렸으니 이제 캡틴 볼 낯도 없게 됐어.” 그는 으르렁거리며 허리에서 칼을 뽑아 게랄드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시끄러! 구아닐도 아닌 괴물한테 저 칼 쓴 나는 뭐 안 아까운 줄 아냐?” 게랄드도 내려놓았던 도끼를 다시 들더니 레드워드를 향해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까불지 마라. 걸을 힘도 없으면서 용케 여기까지 왔구나.” 레드워드는 주저 없이 칼을 내리쳤다. 그의 힘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비록 아즈윈이 홀튼을 꺾긴 했으나, 그때 만난 게 레드워드였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자신 없었다. 힘겹게나마 게랄드는 그이 검을 막았으나, 결국 물러났다. 물러나고 물러나서 더 이상 뒤로 처질 힘도 없게 되니, 게랄드는 휘청하고 무릎이 꺾였다. 레드워드는 그걸 놓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힘이 없어 다리를 휘청거린 사람이 보일 수 없는 움직임으로 게랄드는 몸을 틀었다. 칼날은 게랄드의 왼쪽 어깨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다. 대신 게랄드는 오른손에 든 도끼를 쳐올렸다. 두 자루 무기에서 흘러나간 피가 모즈의 피로 질척해진 바닥으오 튀었다. 게랄드는 그 흙바닥에 도끼를 휘두른 손을 짚었다가 미끄러져 얼굴을 처박았다. 힘이 모자랐는지, 넘어진 후의 게랄드는 어린아이가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몇 번 꿈틀대면서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까지도 레드워드는 휘두른 칼을 쥐고 서 있었다. 두 조각 난 턱에서 물처럼 피가 주루룩 흘렀다. 천천히 게랄드를 향한 시선을 고정하던 레드워드는 다시 힘을 주어 칼을 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게랄드를 향한 앞이 아니라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눈만 깜빡이고 숨도 잘 못 쉬던 게랄드는 주섬주섬 어깨의 상처를 지혈하다가, 다시 도끼를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자신의 피와 남의 피로 엉망이 된 게랄드의 모습을 보던 레미프들 중 한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아드로.......] [비아드로 오그 카-드로크.] [카-드로크!] 레미프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빠졌다. 비명을 지르거나, 달아나는 레미프들이 있는가하면 게랄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오들오들 떠는 레미프도 있었다. 차마 세기도 무서운 숫자의 모즈들을 피로써 광장에 뿌려놓은 게랄드에게 이미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도, 이제 창을 던져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게랄드만 그런 현상에 무관심할 따름이었다. 아즈윈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대체 왜들 저러는 거지?” “게랄드를 보고 카-드로크의 악령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떤 이는 드로크가 살아났다고 까지....... 나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군.” 론틀로스도 혼란스러워했다. 그 해답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이제 게랄드를 앞에 두고 있는 익셀런의 기사, 네이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네이슨을 칼을 뽑았다. 게랄드는 지팡이 대신 짚고 있는 도끼를 들어올리지도 못하고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크나딜의 검을 쓸 상대를 잘못 택한 거 같네.......” 레드워드와 싸울 때부터 아즈윈은 게랄드와 같은 시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게랄드의 눈으로 게랄드의 힘으로 게랄드의 무기를 들었다는 가정으로, 그녀는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니 네이슨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 역시 게랄드와 같은 두려움을 가졌다. 그리고 그가 어떤 공격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바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거의 도끼를 들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 그걸 안다 해도 대처하기는 힘들었다. 네이슨은 뽑아 든 칼을 게랄드의 얼굴 앞에 세웠다. 아즈윈과 게랄드는 똑같이 어깨를 움츠렸다. 사실 계산했던 것보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당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해 하는 게랄드에게 그는 정말 의외의 말을 했다. “깊이 사과한다, 위대한 기사여.” 게랄드야 아마 놀랄 기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즈윈은 정말 놀랐다. 만약 앞서 싸운 레드워드만큼만 칼을 휘두를 자신이 있다면, 그야말로 칼만 내밀면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 그 자는 뜬금없는 사과를 하고 있었다. “어......., 어. 난 이런 고단수 속임수에 약한데?” 게랄드는 모즈들의 발톱에 긁혀 살갗이 찢어진 목덜미를 긁적였다. 네이슨은 피식 웃었다. 게랄드와 거의 비슷한 색깔의 머리에 깎지 않아 턱과 뺨을 고르게 덮은 수염과 푸른 눈동자는 사실 조금 연약해 보였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았다. 아즈윈은 조금 당황했다. ‘저 녀석들이 하늘 산맥에서 굴러먹은 게 몇 년 쯤 되는 거지? 그럼 저 녀석은 몇 살 때부터 익셀런 제1기사단에 있었다는 거야?’ 게랄드 조차 자기가 벤 수많은 시체에 둘러싸인 것에 질려 있건만, 네이슨은 거의 그런 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지 게랄드가 던진 붉은 빛 내는 칼에 이마를 얻어맞고 죽은 카구아와 압도적으로 내리치다가 마지막 순간에 당한 레드워드의 시체만 눈으로 훑는 정도였다. 그것도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은 아니었다. “나는 익셀런 제1기사단의 네이슨이다.” 게랄드는 아즈윈 쪽을 보고 ‘방금 이 말 들었냐.’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게랄드다. 초면이긴 하지만, 사실 난 너 무지 만나고 싶었다.” “날 아나?” “어떤 레미프의 예언 속에 나오더군. 네가 나한테 죽는다....... 라고.” 네이슨은 무덤덤한 얼굴에 자잘한 주름을 만드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느긋한 푸른 눈동자는 게랄드의 팔과 다리, 그리고 도끼에 담긴 모든 힘과 살기를 계산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그 눈빛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로일.’ 로일의 멍청해 보이는 그 편안한 눈동자는 앞에 선 적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단 시간에 읽어냈다. 로일은 그걸 설명하지 못했으나, 그는 그 정보를 토대로 적의 약점을 찾아내 찌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는 상대의 다음 동작을 예측해 공격할 줄도, 방어할 줄도 알았다. 아즈윈은 네이슨이라는 자가 모든 면에서 로일과 닮았다는 걸 직감했다. “배워둘 만한 정신세계다. 정말 많은 기사들을 만나왔고, 정말 많은 실력자들과 싸웠지만 너 같은 이는 처음이야. 울프 기사단이라면 나 역시 못 들어본 이름이 아니다. 내가 모시는 분의 팔을 벤 자가 소속되어 있던 곳이니까.” “아, 네가 모시는 자의 이름은 뭐고, 그 자를 벤 울프 기사는 또 누구냐?” “둘 다 여기에서 언급할 만한.......” 순간적으로 게랄드의 도끼가 네이슨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옆에 선 어느 누구도 그 갑작스런 도끼질을 감지하지 못했고, 구경하던 레미프들은 게랄드가 도끼를 휘두르고 숨을 두 번쯤 내쉰 후에야 놀랐다. 아즈윈도 거의 반동 없이 휘두른 게랄드의 공격에 마치 자기 바로 옆으로 도끼가 지나간 듯한 날카로움을 맛보았다. 대결을 피하는 법이 없는 로일이 처음으로 대결을 거부한 상대가 게랄드였다. 아즈윈이 처음 로일을 꺾은 후, 비슷한 시기에 모두 같은 경지에 올랐다. 각기 그 방법은 달랐으나, 서로들 그 방법에 기겁했다. 그때 게랄드가 쓴 방법은 가장 마스터 퀘이언에 가까웠다. 그는 반동 없이 도끼를 휘두를 줄 알게 되었다. 그 묵직한 공격이 기척 없이 날아오면 두 번 중 한 번 정도는 칼을 내밀어 막을 수는 있지만, 막아도 게랄드의 힘을 견디는 건 쉽지 않았다. 때로 게랄드는 목검으로도 로일을 대결장 밖으로 밀어내버리기도 했다. 로일은 그렇게 나가떨어진 후 한 달 동안 그 공격을 막을 연구를 한 뒤에야 게랄드 앞에 섰다. 그런 게랄드의 공격이었다. 체력이 한계까지 떨어진 그로서는 그걸 마지막 일격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즈윈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목으로 날아가던 도끼는, 네이슨의 손에 자루를 잡혀 멈췄고, 네이슨이 오른손에 든 칼은 게랄드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게랄드도 맨손으로 그 칼날을 잡았다. 도끼와 칼이 서로의 목을 노리고 고정되어 있었다. 네이슨은 하던 말을 마쳤다. “.......이름은 아니니 접고 싶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싸움이다. 너의 소속이니, 나의 소속이니 하는 건 이 자리에서 빼도록 하지.” 게랄드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가 네이슨의 칼날을 타고 흘렀다. 네이슨이 먼저 도끼 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이해한다, 훌륭한 기습이었다. 그러나 내 반격도 만만치 않았지? 그런데 너 역시 막았다.” 게랄드도 잡고 있던 칼을 놓았다. 둘의 무기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들어갔다. 네이슨은 설명조로 말했다. “비록 넌 부상이 심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집중력을 높이는 타입이지. 그리고 나 역시 네 싸움을 보며 머릿속으로 그 도끼를 모두 막고 있었다. 서로 예리하게 단련된 상태에서 이런 힘도 안 들어간 기습으로 결판내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얌전히 목검 들고 세 판 중 두 판 먼저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하자고?” 네이슨은 숨죽여 웃었다. 그 와중에도 아즈윈은 그의 공격 반경을 계산해보고 있었다. 묶인 손을 저도 모르게 꿈틀대고 움직이며, 어느 방향이 비어 있는지, 어느 방향을 더 좋아하는지.......,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으로 날릴 만한 기술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아니면 자잘한 공격을 넣으며 상대와 머리싸움 하길 좋아하는 녀석인지!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알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었다. 그는 빈틈이 없었다. “레드워드는 성급한 녀석이긴 해도 쉽게 당할 녀석도 아니었고, 어설프게 방심을 하는 녀석도 아니었다. 즉, 그런 몸을 했어도 네가 더 강했던 거다. 바로 그 점을 사과하고 싶다. 위대한 기사를 상대로 하찮은 싸움을 이어가게 한 점을 반성한다.” “좀 엉뚱하긴 해도 기사도를 따른다니 할 말이 없군. 그런데 위대한 기사는 나보고 하는 말이냐?” 게랄드도 피곤한 얼굴로 다시 도끼를 바닥에 기대고 비스듬히 섰다. 칼을 내밀면 닿을 위치에 저런 자세로 있는 것부터가 아즈윈은 불안했다. 하지만 네이슨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어쩌면 먼 거리에서 아즈윈이 보지 못하는 둘 사이의 묘한 대립 관계가 둘을 가로 막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솔직히 조금 아깝군. 시기와 장소가 제대로 제공된다면, 우리의 싸움은 아마 떠들기 좋아하는 유랑시인들에게 멋진 소개가 될 법하지 않은가? 아깝군.” “아까워?” “너는 그런 생각 안 드나? 나는 캡틴에게 검을 배워 이 자리에 선 후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으며, 구아닐에게 이 검을 하사 받은 후 드래곤조차 내 범위 안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카구아를 죽인, 아란티아의 기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나는 밤새도록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제대로 된 컨디션은 못되고, 그 아란티아의 기사란 자는 기대지 않으면 서있지도 못할 몸이라니......., 아깝지 않으나?” “이왕 말 질질 늘이며 사과할 거면 나한테 하루 정도 쉴 시간 같은 거 주면 안 되려나?” “그럴 수는 없다.” “네 동료가 죽어서?” “기사가 전투 중에 죽고 사는 것이 죄가 되고 상이 될 수는 없지.” “그럼 레미프들을 너무 죽였나? 아님 이 괴물딱지들?” 네이슨은 근처에 모여 있는 레미프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네가 죽인 이 짐승들은 푸트나이 쪽에 아주 많다. 오늘 네가 죽인 건 수치상으로 그다지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네가 카-드로크의 악령이라고 알려지는 건 곤란하지. 타치셀 뿐 아니라 푸트나이의 레미프들에게 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으니.” “몇 번 듣긴 했다만 그게 무슨 악령이냐?” “타치셀의 수호 드래곤이다. 그는 자기를 모시는 레미프들에게 목숨을 소진하는 그 순간 끔찍한 저주의 단어를 섞어 말했다. 자신이 우그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타치셀의 왕을 죽이고, 자기를 죽음으로 몬 ‘드래곤의 모습을 한 괴물’ 을 죽일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타치셀을 멸망케 하리라....... 그 저주는 이 곳 레미프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안겨주었고, 너는 기가 막히게 그 저주의 언어에 걸맞은 모습으로 여기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래 봐야 여기 왕 죽인 건 내가 아니잖아.” “레미프들에게는 그리 보인다. 그리 보이게 레드워드가 말했지만, 너는 레드워드를 죽였지. 레미프들은 알아서들 그 저주에 맞춰 너라는 존재를 해석할 테지. 가장 안 좋은 쪽으로! 그러니 너를 보내줄 수는 없다. 너를 여기서 죽여 카-드로크의 악령이 저 여자라고 믿게 하는 편이 우리 쪽에서는 편하다.” 네이슨은 천천히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처형자의 목을 치는 칼처럼 그 칼은 정해진 궤도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게랄드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하, 드로크라는 드래곤이 암컷이었나 보군?” “무엇보다 저 여자는 지금 묶여있지. 적당한 의식을 통해 처형하면 그걸로 악령이 가지는 공포 요소는 완전히 지울 수 있다.” “그게 세르메이의 예언이었나? 생각보다 재미없는 결론이네.” 네이슨의 검이 게랄드의 머리를 내리쳤다. 게랄드는 도끼에 기대어 있던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고 기댄 도끼를 하단으로 휘둘렀다. 빠르지 않지만 정확하게 곡선을 그리는 도끼의 궤도에서 네이슨은 벌써 두 걸음 정도 물러나 있었다. 게랄드는 한 걸음 다가갔다가 휘청하더니 도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역시 오른쪽 다리 쪽에 문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옷 아래 상처를 숨기고, 모즈와 레미프들의 피로 자기의 피를 감추고 있지만, 물어뜯긴 상처가 얌전할 리 없었다. 어쩌면 그가 일어서서 네이슨과 떠들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지도 몰랐다. “여봐, 네이슨. 어지간하면 그냥 풀어줘. 날 봐라. 피투성이에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또 아즈윈을 봐라. 이틀이나 묶여 있어서 팔은 마비되어 있을 것이고 다리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거다. 달아난다 한들 어디까지 가겠냐? 그냥 풀어줬다가 잡는 게 네 쪽에서는 더 이익이야. 뭣보다 나는 하얀 늑대다. 아무리 다쳤어도 이 이름이 가지는 힘 앞에 익셀런은 별 거 아니야. 경고 겸 부탁이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는 건 하얀 늑대뿐이다.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그냥 풀어줘.” 게랄드는 고통을 인내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아즈윈이 보기에도 찡그림을 감추려는 억지웃음이었다. “익셀런의 이름을 평가할 근거가 네게 있는가? 그럼 나 역시 네 경고에 경고한다. 나는 익셀런 중 가장 위에 있다.” 그의 칼이 또 한 번 게랄드의 머리를 향했다. 게랄드는 그 검을 막았으나, 도끼에 튕겨 나온 네이슨의 칼은 허공에서 바로 옆으로 휘어졌다.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허리로 들어오는 그 칼을 내버려두고 게랄드는 바로 반격했다. 그 반격은 허리를 베고 돌아온 네이슨의 칼날에 막혔고, 또 두 차례 칼이 게랄드의 몸을 그었다. 게랄드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네이슨은 천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게랄드는 계속 자신의 몸을 찌르는 네이슨의 검을 무시하다시피 흘리며 반격하고 있었다. 성급하게 결정을 지으려 들었더라면, 게랄드의 도끼는 진작 네이슨의 뼈를 부쉈을 것이다. 그러나 게랄드의 목숨을 내 건 최선의 공격 하나하나가 모두 막히고, 그 반격에 이은 반격으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전투를 겪어냈는가? 얼마나 검에 단련된 사람인가? 네이슨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철저하게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게랄드는 토하는 피를 코와 입에서 쏟아내면서도 거리를 떨어뜨려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의지를 뛰어넘어 이미 다친 쪽 다리는 말을 듣지 않는지 그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다른 한 다리로 버텨가며 그는 싸우고 있었다. 네이슨은 게랄드가 보이는 가짜 허점으로도 함부로 뛰어들지 않았다.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았다. 게랄드와 호흡을 같이 하며 머릿속으로나마 네이슨을 공격하던 아즈윈은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 점차 희망을 잃고 있었다. 마스터 퀘이언 인들 이런 벽을 가지고 있을까? 스승이라는 존경심을 지우고 나면, 퀘이언이 저 자리에 서서 게랄드의 무수한 공격들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쉽게 찔러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저 많은 유혹을 버텨낼 수 있을까? 신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는 마스터 퀘이언의 공격인들 지금의 게랄드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그러나 네이슨은 게랄드를 무너뜨리려 애쓰지 않고 스스로 무너지기를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게랄드는 도끼를 더 휘두르지 못했고 한쪽 다리가 마비된 것을 대신해 몸을 지탱해주던 다른 쪽 다리도 마비되었다. 이제 바로 두 걸음 떨어져 있는 네이슨이 목을 길게 빼고 있어도 도끼를 내리칠 수 없게 되었다. 게랄드는 이제 도끼가 아닌 배를 움켜쥐고 상대를 조용히 응시했다. 아까 베인 자리로 심각할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이슨도 잠깐 그 모습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존경할 만한 기사다, 너는.” “어? 뭐가?” 게랄드는 피가 들어갔는지, 아니면 단지 잘 안 보여서 그런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지금 네 행동을 목숨을 내 건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네이슨은 칼날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아즈윈 쪽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동료에게 뒤를 맡기는 거냐?” “뭘 맡겨?” 아즈윈은 아직 두 남자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여자도 같은 하얀 늑대라고 했지? 홀튼을 죽이고, 카구아를 죽인....... 저 여자에게 희망을 걸고 내 기술을 모두 보여주려는 건가?” 아즈윈은 눈을 크게 떴다. 게랄드는 동작을 크게 하여 무리하게 네이슨을 몰아붙였다. 수많은 변칙적인 기술에 대응하는 네이슨의 그 움직임을, 아즈윈은 모두 눈으로 쫓고 있었다. 결국 그 날렵한 움직임에 큰 벽을 느껴버렸지만....... 게랄드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 할 말을 찾다가 그냥 포기하더니 그는 또 어렵사리 무기를 들었다. 지금이라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레미프들의 가벼운 무기로 바꿔 들었으면 하고 아즈윈은 바랐으나, 그 무게를 버틸 힘도 없을 듯한 게랄드는 고집스럽게 도끼를 썼다. 그러나 아직 휘두르지는 못했다. 그는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네이슨도 거기에 대비했다. 이제와 엄청난 공격을 한다고 말려들 정도로 네이슨은 어설픈 실력자가 아니었다. 아즈윈에게 당장 제대로 된 몸과 칼이 주어진다 해도, 루티아에서 여기까지 밤새 이동해 오느라 피곤하다는 그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네이슨이 피곤하다고 말한 것은 변명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흐트러지는 발목의 균형만 보더라도 확실히 그는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 정도 움직임이었다. ‘마스터, 세상에는 저런 괴물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가르치신 검술의 한계로 저런 자를 이길 수 있습니까? 하얀 늑대들의 이빨이 꺾이지 않는 건 아란티아 안에서 한정된 것이었습니까?’ 아즈윈은 마지막으로 치달아가는 전투를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게랄드의 힘이 다한 만큼 절망도 깊어졌다. 자신의 검술보다 남의 검술을 더욱 정확하게 볼 줄 아는 그녀의 시선은 이미 게랄드의 마지막 공격과 네이슨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까지 비춰졌다. “잘 보고 있어, 아즈윈.” 게랄드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도끼를 내리쳤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약했다. ‘보고 있다, 게리. 날 대신해 희생한다는 말을 하지 마라. 지지 마라. 여기 널 좋아하는 여자가 너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여기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 지지 마라. 상대가 누구든 지지 마라.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이고도 지는 건 용납 못한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네이슨의 검은 게랄드의 배를 뚫었다. 모두 아즈윈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저 한 가지, 게랄드가 칼에 찔리는 와중에도 도끼를 상대의 머리위로 내리쳤다는 정도만 예상을 벗어난 공격이었다. “훌륭했다. 늑대여.” 목숨을 내주고 시도한 최후의 일격조차 네이슨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네이슨은 이미 힘을 잃은 게랄드의 도끼날을 장갑을 낀 손으로 잡고 있었다. 게랄드는 떨리는 손으로 배를 찌르고 있는 네이슨의 칼을 움켜쥐었다. “너는 내가 가진 모든 기술을 다 쓰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너는 내가 만난 최고의 기사였다. 나머지는 네 동료에게 맡겨라. 이 다음싸움은 결코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후회가 남지 않는 결투가 되게 하겠다.” “겨, 결투는......, ......이다.” 게랄드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배의 근육을 잃어버린 그가 그 정도의 목소리를 내는데 얼마나 큰 고통이 따를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게랄드는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끝.......” “뭐라고?” 네이슨은 그가 제대로 말하길 기다려주었다. “결투는......여기서 ......끝이다.” “미련을 남기려는 거냐? 어리석은 녀석!” 네이슨은 게랄드의 배에서 칼을 뽑으려 했다. 그 순간 게랄드의 손이 네이슨의 손목을 잡았다. “카-드로크의 악령 같은 게 있다면, 내가 되어주지!” 게랄드는 지금까지 억지로 말한 게 모두 속임수였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네이슨의 손에 붙잡혀있는 도끼를 갑자기 뒤로 잡아 당겼다. 순간 네이슨은 도끼날을 놓쳤다. 네이슨의 반사 신경이 얼마나 빨랐는지 따져보면, 그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게랄드에게 손목에 잡힌 그 순간, 바로 게랄드가 무슨 공격을 할 것인지 눈치 챈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붙잡고 있던 도끼날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자, 미련 없이 게랄드의 배에 꽂힌 칼 손잡이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그 극한 순간의 판단으로 그것만큼 정확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네이슨의 칼날이 배의 근육을 찢으며 빠져나갔다면, 게랄드는 아무리 영혼의 힘까지 끌어 썼다 해도 도끼를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이슨은 게랄드가 마지막까지 숨겼던 속임수 한 번에 배에서 칼을 뽑아내지 못했다. 게랄드는 다쳐 마비된 줄 알았던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네이슨의 균형을 뒤로 무너뜨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랄드는 도끼를 휘두르는 손이 아니라, 네이슨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움직임을 차단했다. 호흡으로 치면 반의 반 호흡 동안 일어났던, 눈에 비치는 모습으로 치자면 도끼가 머리 위로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걸음으로 치자면 게랄드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두 기사가 그런 계산을 모두 했던 것일까? 아즈윈을 알지 못했다. 그저 게랄드의 도끼가 네이슨이 목을 치고 지나간 것만 망막 속에 깊이 새겨졌다. 네이슨의 목에서 터진 피가 게랄드의 얼굴과 몸을 적셨다. 게랄드는 도끼를 떨어뜨리고 뒤로 물러나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 한 번을 위해 남겨둔 힘을 써버린 후 그는 주저앉은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앞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았다. “여기.......”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것도 잊고 소리치려다, 아즈윈은 기침을 심하게 터뜨렸다. 목에서 피가 터졌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메마른 목에 따뜻한 것이 적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게랄드고 자기 몸에 흐르는 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부러진 갈비뼈도, 한 꺼풀 벗겨나가 어깨 옆에 매달린 살점도, 배를 깊게 뚫고 있는 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즈윈 역시 주위에서 웅성대는 레미프들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마지막 남은 집중력을 서로에게 보냈다. 게랄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봤냐?” 아즈윈은 울지 않기 위해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봤다.” 입술을 타고 피가 흘렀으나 그녀는 의식하지 못했다. 오직 게랄드의 몸에 흐르는 피만 눈에 들어왔다. “머......., 멋있었다, 게리. 그러니......., 와라.” 아즈윈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한 번 흘리고 나니 시원한 게 목소리가 더 잘 나왔다. 그녀는 꽉 막힌 목소리로나마 말했다. “와서 안아다오. 네, 네 입술에......., 키, 키스하게 해줘. 와....... 천천히라도 좋으니 내게 와라.” 게랄드는 피 묻은 이를 내보이며 빙그레 웃더니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그러나 후들거리는 다리는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당신의 치유력이 여기까지 닿는다면 지금 저 피를 멈추어 주소서.’ 아즈윈은, 목소리가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그녀에게,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기도를 했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식 중 한 명이 여기 죽어가고 있나이다. 나의 더러운 생명이, 아직 나룰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지금 저 녀석이 여기까지 걸어오는데 그 생명 모두를 바치겠습니다. 여왕이시여!’ “게리를 도와줘요, 새나디엘!” 아즈윈은 굳게 다문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저렇게 자신을 위해 걸어오는 남자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기둥 뒤에 묶인 쇠사슬이 긁혀 발목의 껍질이 벗겨져 흐른 피로 정강이 아래가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끌어당겼다. 게랄드는 그녀의 말대로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걸어와 그녀와 다섯 걸음을 남겨두고 있었다. 더 이상 게랄드는 말을 하지 못했다. 수화를 위한 손짓도 못했다. 그는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납처럼 무거운 고개를 들어 뭔가 말했다. 아즈윈은 그의 입 모양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그의 입술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우......., 울지.......” 게랄드는 힘겹게 할 말을 했다. 그러나 아즈윈은 그의 떨리는 입 모양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결국 아즈윈을 네 걸음 남겨놓고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작은 미동에 희망을 걸 시간도 주지 않고, 게랄드의 움직임은 멈췄다. 아즈윈은 멍청히 게랄드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길지 않은 머리카락 속에도 모즈에게 당한 상처가 많은 탓에, 그가 대고 있는 땅은 금방 피가 고였다. 갑자기 얼굴을 들며 놀랐지 라고 말할 것 같은 그의 어린애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게리.......” 아즈윈은 천천히 나무 기둥에 기대었다.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니? 그래......., 울지 않으마.” 아즈윈은 어금니를 꽉 물고 눈을 감았다. “네가 죽은 이 땅 위에서 내가 흘릴 눈물을 없다. 기다려라, 그 눈물을 네 앞에서 흘려주겠다.” 그럼에도 눈동자가 뜨거워졌다. 뺨과 턱이 파르라니 떨렸다. 그녀는 오기로 눈물을 참았다. 맞물린 이가 부서질 만큼 턱에 힘을 주고 그녀는 눈물을 내지 않았다. “미안하다, 게리.” 아즈윈은 정확히 무엇에 대한 사과였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미안해.......” (6) 그녀의 싸움 “눈을 떠라, 아즈윈.” 대놓고 얼굴에 찬물을 쏟아 부운 후 그가 말했다. 아즈윈은 몸을 발딱 일으키며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짓이야!” “선생한테 또 말대꾸한다, 이 녀석. 얼마나 얻어맞아야 저 말버릇은 고쳐질는지.” “선생님이야말로 말버릇 좀 고치시기 그러십죠?” “뭔 십죠, 자식아? 물 한 바가지 더 얻어맞고 시작할까?” 아즈윈은 허둥지둥 달아나 나무 뒤에 숨었다. “한 겨울에 다 큰 처녀한테 왜 물을 쏟아 붓고 지랄이십니까, 엄청 잘난 선생님?” “니 옷 달라붙게 해서 가슴 구경 할라고 그런다. 당장 이리 나오지 못해!” 아즈윈은 투덜대면서도 또 그의 앞에 섰다. 그는 준비한 수건을 내주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도 얼굴을 닦고 그의 옆에 앉아 그가 마시는 술을 한 모금 빼앗아 먹었다. “네가 벌써 술 마실 나이가 됐던가?” “언제까지 애로 보셨어요? 열아홉 살이면 모르는 거 없어요.” “마을 오기 전에 들었다. 생명의 신비를 탐구해보겠다고 남자애 쓰러뜨려놓고 옷 벗기다가 마을 어르신한테 들켜서 발칵 뒤집어놨더구나. 시대가 이러니 살아남지, 백 년 전 같았으면 넌 마녀로 찍혀 화형을 당해도 열 번은 당했을 거다. 뭐, 지금도 어느 지방 가면 그런 짓 많이들 한다만.......” “상관없어요. 날 마녀로 찍은 놈부터 죽일 거니까.” “또 죽인단 말 함부로 하는구나.” 선생님은 하나뿐인 손으로 아즈윈의 수건을 받아 그녀의 머리를 털어주었다. 아즈윈은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있다.” “그래도 좋으니 나랑 안할래요?” “이제 선생까지 꼬시려고? 싫다.” “나 정도면 예쁘지 않아요? 엄마가 순결을 소중히 여기라고 머릿속에 주입시켜 놔서 적어도 첫경험은 멋진 남자랑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마을 여자애들은 내가 남자 같아서 그런 얘기는 해주질 않으니 그런 게 무슨 느낌인지 알게 뭐람?” “그래서 알고 싶으냐?” “예.” “그럼 내가 너의 첫 번째를 빼앗긴 저주의 남자가 되기 전에 한가지 충고 하나 하자.” “하세요.” 아즈윈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닥치고 하던 일이나 해!” 장난으로 당기는 것 이상으로 세게 당기니 아즈윈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에 질질 끌려 당겼다. 그래도 그는 놓지를 않고 말했다. “순결이 뭐가 어째? 이런 발칙한 녀석을 봤나? 네가 멋진 남자란 걸 만나보기나 해봤어? 그때 후회하기 전에 네 몸 하나는 소중히 해둬. 네가 그나마 여자애였으니 이상한 놈이구나 하고 넘어가는 거지. 남자 애가 성별 바꿔 그런 말 했으면 거기를 잘라버렸을 일이다!” 아즈윈은 울먹이며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배 치우고 앉아있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째서 내 주위의 남자들은 다 이 모양이야?” “네 주위 남자들이 널 보고 그 말 하겠구나.” “선생님.” “말해.” “정말 날 좋아할 만한 남자애가 있어요?” “심각하게 묻는 거냐?” “매우 몹시 엄청나게 심각합니다. 내가 접근하면 남자들은 다 도망가니까......., 솔직히 자신 없어요. 내가 남자처럼 행동해서 그런가요? 차라리 여자를 좋아해버릴까요?” 선생님은, 처음에는 황당한 눈길로, 그러나 이내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한겨울에 강에서 퍼온 물을 퍼부은 것에 잔뜩 화가 났으나, 이제라도 따뜻하게 안아주니 금방 화가 풀려버렸다. “아즈윈, 사랑하는 제자야. 너는 정말 멋진 여자란다. 너무 멋진 나머지 널 진심으로 좋아할 정도로 솔직한 남자가 없는 거야. 그러니 오히려 그 일을 축복해라. 그럼에도 너를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다면, 그 남자는 정말 너를 좋아하는 거야. 그런 일로 다급해하면 안돼. 알았지?” 아즈윈은 그의 말에 너무 행복해져 그만 눈물이 조금 나왔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그의 선생님이었고, 훈련할 때는 또 매몰찼다. “뭐, 그건 그렇고, 바위 위에서 균형 잡고 칼을 쓰기가 그리 힘들어? 왜 뒤로 넘어져서 기절하고 그러냐? 어찌나 기운차게 넘어지는지 나는 네 뒤통수가 깨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머리는 왜 그렇게 길어?” 아즈윈은 어깨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새로 묶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자애 같은데, 머리라도 안 기르면 곤란해요.” “그럼 뒤로 땋아버려.” 그가 그때 해준 충고는 검술을 가르쳐준 것만큼이나 유용했다. 검술을 깊게 배울수록 선생님의 힘을 알게 되었고, 그럴수록 다른 남자들은 시시하게 보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선생님의 충고대로 용병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때 만난 남자들 모두 별 거 아니었다. 용병들의 더러운 생활상과 비겁한 습성을 보니, 오히려 남자에 대한 혐오감만 더해졌다. 애초에 처음 들어간 용병 부대가 그런 곳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멋진 남자를 발견했다. 이름은 덱밀이었고, 그녀보다 한살이 어렸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녀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며 싫어했다. 귀여운 맛에 톡톡 건드린 애정 표현이었으나, 그게 남자의 긍지를 건드린 게 되어버렸다. 그는 용병답지 않게 실력이 부족하여 얼마 후 죽었다. 그 후 그녀의 용병대는 적이 고용한 다른 용병대를 맞아 싸워 전멸하고 아즈윈만 포로로 잡혔다. 그때 살아남는 조건은 ‘하룻밤’ 이었고, 그녀는 거기에 응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만난 덕에 얼굴도 기억 못하는 그 용병 대장은 꽤나 멋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녀의 처음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으나, 그건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몰랐다. 그 후 그녀는 한동안 그 용병 대장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그를 잊어버리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남자를 찾았다. 그 다음으로는 돈 많고 성격 차분하고 얼굴 반반한 나이클슨 이라는 이름의 백작을 만나기도 하고, 몸매 죽이는 화가를 만나기도 했으나 그 자의 방랑벽 때문에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런 생활을 2년 동안 하다 그녀는 소식을 접하고 아란티아로 향했다. 선생님의 말이 옳았다. 그 곳에는 그녀가 몇 년 동안 찾아 헤맨 것보다 많은 멋진 남자들이 가득했다. 그 중 최고가 게랄드였고, 그 중 제일 까다로운 녀석도 게랄드였다. 겨우 고비를 넘어왔다 싶었는데, 그는 죽었다. 바보 같은 녀석. 아즈윈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다시 타치셀이었다. 오후의 잔인한 햇살이 그녀의 얼굴로 내리꽂혔다. 그녀는 아직도 묶여 있었다. 게랄드와 네이슨의 시체는 레미프들이 조심스럽게 들고 가 신전 앞에 눕혔다. 그들은 진정으로 게랄드를 카-드로크의 악령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구하려 했던 아즈윈이나 론틀로스 역시 건드리지 못했다. 또 왕도 죽고 명령을 내릴 만한 익셀런까지 모두 죽어버린 게 큰 이유라고 론틀로스는 설명했다.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녀져 버렸으니 처형을 할 만한 상황도 못 된다는 것이었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이유는 상관없어.” 그녀는 기둥에 기대어 밧줄에 묶인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회복되긴 커녕 이제 숨을 들이마시기만 해도 폐가 따끔거렸다. 그래도 그녀는 쇠사슬을 끌고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조금씩 구부렸다 펴길 반복했고, 등을 곧게 세웠다. “뭐 하는 건가?” 이제 다리를 펴고 앉은 자세로 스트레칭까지 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론틀로스가 물었다. 아즈윈은 힘들게 목소리를 냈다. “저들에게 물과 먹을 것을 달라고 해.” “안 줄 거다, 아마. 시체를 치우는 모습이 안보이나? 그럴 정신이 못될 거다.” “카-드로크의 악령께서 달란다고 말해.” “그런 말은.......” “시도나 해봐. 드로크라는 드래곤은 암컷이었다며? 그걸 강조하고.” 론틀로스는 경비병을 불러 뭐라고 말을 했다. 경비병은 화를 내듯 말했고, 론틀로스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다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게랄드와의 기억이 차례대로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몸을 움직여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마지막에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알고 싶었으나, 마음의 다른 한쪽에서는 거부했다. 어떤 말을 했더라도 그녀는 울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울고 싶지 않았다. 더 쉬어버리면, 몸을 아예 못쓰게 된다. 그것만 생각했다. 몸의 긴장을 풀 수만 있다면 당장의 생명력과 체력을 맞바꾸어도 좋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게랄드는 농담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용병 생활을 하며 삭막한 환경을 이겨내려고 억지로라도 유쾌해지려고 노력했다는 증거가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도 가끔 그는 자기가 본격적으로 웃긴 얘기에 신경 쓰게 된 건 아즈윈 덕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무슨 큰 대 죄악을 저질렀다고 그런 망발이냐? 넌 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한 농담 했었잖아. 불의 용병이니 어쩌니....... 기억 안나?’ 아즈윈이 구박하던 게랄드는 대체로 져주었다. 또 아무리 놀려도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가끔 날리는 역습에 당하고 나면 아즈윈은 화가 나면서도 속이 시원해졌다. 그녀는 하얀 늑대들의 남자들 넷을 모두 좋아했지만, 게랄드가 제일 좋았다. 그게 아즈윈의 어린아이 같은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게랄드에게 만큼은 어른으로서 갖은 심각한 사랑 같은 얘기는 던져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서로 상처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친구라는 관계가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일찍 좋아한다고 말해둘 걸....... 후회가 쌓였고, 마음이 아팠다. ‘언제가 제일 괴로웠어요?’ 선생님이 검을 가르치고 떠났다가 매년 그러했듯 다음 해에 다시 돌아왔을 때였다. 아즈윈은 팔 없는 소매를 가만히 쥐어보며 물었다. ‘팔을 잃었을 때요?’ ‘내가 원하는 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된 고통은 팔을 잘릴 때의 고통 같은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고통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지.’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어린 아즈윈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야 그녀는 진심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레미프 여인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무릎 옆에 작은 물그릇 하나와 식은 고기 수프가 담긴그릇을 내려놓았다. 레미프 여인의 떨리는 손을 보던 아즈윈은 론틀로스에게 말했다. “밧줄을 풀어주던가, 먹여주던가 하라고 해라.” 론틀로스가 그 말을 전달했으나, 병사는 일손이 부족하다며 레미프 여인을 보내버렸다. 아즈윈의 앞에는 바닥에 놓은 물그릇과 멀건 수프 그릇 하나만 놓여 있었다. 아즈윈은 잠시 그걸 바라보다가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혀를 물에 댔다. 마른 혀의 감각이 희미하게 깨어났다. 그녀는 같은 자세로 수프를 핥고 다시 물을 마셨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즈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음식이 목을 넘어가자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주문이라도 외듯 뱃속에 들어간 것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중얼거렸다. ‘그냥 삼켜라.’ 아즈윈은 거의 반사적으로, 십 년 가까이 된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산 속에 처박아 놓고 고생 시킨 후, 마른 음식을 내던져 주고 한 말이었다. ‘그냥 씹어서 넘겨. 너무 힘들어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일수록 전력을 다해 씹어. 먹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입을 움직인다고 생각해라.’ 그녀는 기침을 토했고, 수프 그릇이 엎어졌다. 론틀로스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아즈윈은 무시했다. ‘마음이 비굴해지지 않으면 미래를 위한 어떤 행동도 비굴하지 않다. 살아남고자 마음먹었으면, 그 외에 다른 잡다한 건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주문처럼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무시해라. 살아남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무시해라.’ 그런 말을 선생님이 했던가? 마스터 퀘이언이 했던가? 용병 생활을 했을 때 날 귀여워해 줬던 대장이 그랬던가?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하나로 종합해 나가고 있었다. ‘조만간 싸우게 되리라.’ 칼 한 번 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목매달려 처형된다면, 그녀는 적어도 그런 생각을 품을 채로 죽을 작정이었다. ‘힘들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쳐들기 마련이다. 그게 인간이다. 그러니 그런 걸로 괜히 자기 의지가 약하다며 비관하지 마라. 그럴 때는 그냥 하던 걸 계속 해나가면 된다.’ 그것은 분명 선생님의 말이었다. 퀘이언은 그런 가르침을 내리지 않았다. 마스터는 최악의 상황에서 나오는 행동은 모두 잠재의식이 결정 내리는 것이니 다 커버린 상태에서 가르쳐 봐야 의미 없다고 말했다. ‘즉, 모두의 가장 내면의 스승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다. 부모님이나, 어릴 적 스승이겠지.’ 하던 걸 한다....... 아즈윈은 오직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에 정신을 집중 했다. 싸울 수 있느냐, 지금 하는 행동이 의미가 있느냐, 그런 걸로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목을 움직이고, 무릎을 움직였다. 마지막 순간 단 한 번 칼을 쥘 기회가 있다면 그녀는 적어도 그걸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이 든 론틀로스는 묶여있는 자세의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또 기절해 있었다. 아니, 자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겨우 몸을 풀기를 끝내고 통나무에 기대어 있으니, 눈앞에 검은 갑옷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순간 그녀는 네이슨이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다. 아니면 새벽에 일어났던 일의 반복인가?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달랐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게 미숙한 그녀였으나, 그래도 그건 분명 다른 이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옆에 있는 병사와 레미프의 언어로 뭔가 긴 대화를 나누고 가버렸다. 아즈윈은 잘못 봤나 싶었으나, 그는 한 팔이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 그녀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지금은 의식을 잃으면 안돼!’ 그녀는 다시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자가 바로 네이슨과 레드워드가 말했던 익셀런의 진짜 캡틴이었다. 한 팔 뿐이라 혹시나 했으나, 다행히 어릴 적 검을 가르쳐준 그녀의 선생이 알고 보니 익셀런의 캡틴이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검은 머리색도, 짙은 눈썹도, 가는 눈동자도 선생님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즈윈, 아즈윈! 깨어 있나?” 론틀로스가 다급히 불렀다. “깨어 있다. 왜 그래?” “방금 기적이 일어났다. 라루튼이 살아남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초록 이파리들과 약간 어두컴컴해진 하늘이 보였다. 그녀는 솔직한 심정으로 ‘그게 어쨌는데?’ 라고 되묻고 싶었다. “다행이군. 저 자가 그런 말을 했나?” “그렇다. 아무래도 저 자가 익셀런의 대장인 빅터란 우그 같군. 방금 그는 당신과 게랄드가 익셀런을 셋이나 죽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특히 네이슨이 죽은 것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몇 번이나 병사에게 따지더군.” 네이슨은 그럴 만한 기사였다. 특히 그를 오래 옆에 두고 부하로 써먹었다면,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 것이다. “그래서 라루튼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겨보지....... 시간이 없다, 멍청한 타노르스가 자만심에 내가 지시한 작전과 병력을 어기고 고작 부대 하나로 라루튼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다.......” “타노르스?” “푸트나이의 왕이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군.” 아즈윈은 이제 그들의 나라 이름을 정리해 보는 것도 귀찮아 말했다. “그래서 캡틴 빅터란 자가 나에 대해서는 뭐라 안하던가?” “옆에 있는 병사가 레미프들 중 절반은 당신을 카-드로크의 악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처형해봐야 소용없다, 그리 말하더군. 그러자 빅터는 카-구아닐과 러스킨이 곧 올 테니 그때 처형하면 드로크의 악령 같은 건 사라지게 되리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처형이 시작될 것 같다.” 아즈윈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론틀로스는 걱정스럽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라루튼이 안전한 건 다행이나, 우리의 죽음은 예정대로 흐러가게 되었군.” “내가 죽을 운명은.......” 아즈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게랄드가 대신 가져갔다. 그러니 난 죽지 않아.” 아직도 그녀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칼을 잡을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를, 아니 타치셀의 하늘을 덮는 검은 그림자가 광장을 뒤덮었다. 펄럭이는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켰고, 광장에 그 거대한 몸집이 내려앉는 순간 먼지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 그 모습을 보고 광장의 시체를 치우던 레미프들은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엎드려 절을 했다. 게랄드의 칼에 죽어 쓰러진 신전 앞의 카구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머리끝에서 등을 따라 꼬리까지 이어진 뿔들이 그 위압감을 달리 했다. 활짝 펼친 날개만으로 이미 카구와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게 카-구아닐이구나.’ 그 드래곤의 어깨 위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한 명 타고 있었다. 그렇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어깨의 관절에 다리를 대고, 뱀처럼 꿈틀대는 드래곤의 목에 가볍게 손을 짚은 자세였지만, 별로 흔들리지도 않았다. 구아닐이 신전 앞에 착지한 후, 그 마법사는 줄이라도 묶고 내려오는 듯 부드럽게 구아닐의 어깨를 타고 미끄러져 빅터의 옆에 섰다. 검은 후드를 벗자,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역시 아즈윈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빅터와 마법사 노인은 조심스레 말을 나누었다. 여전히 그들은 여기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아는 레미프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즈윈은 그들의 대화를 모두 론틀로스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마스터 러스킨.” “구아닐께서 굳이 이 곳까지 와야 할 정도로 뭔가 일이 어긋났소, 캡틴 빅터?” “라루튼의 레미프 하나가 사-크나딜을 깨운 듯하오. 즈비 레미프들 쪽도 예상치 못한 자들이 끼어들었소. 논틸을 미리 해치우지 못했다면 큰일이 벌어졌을 것이오.” “예상치 못한 자?” 노인이 물었다. “울프 기사단! 그 일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줬어야 하지 않소?” “우리 예정대로라면 그랬어야 했지. 하지만 아란티아 여왕의 통찰력을 루티아의 힘으로는 뚫지 못한 듯하오. 어쩌면 우리의 다음 일정까지 그 힘에 막힐 지도 모르겠소.” “그녀가 가진 힘을 아란티아에 한정되어 있소. 가넬로크까지 손대지는 못하지! 하지만 사-크나딜이 깨어났다면 얘기가 달라지오. 아무리 구아닐이시라도.......” 검은 드래곤의 거대한 눈동자는 내내 아즈윈 쪽을 향하고 있다가 빅터의 말을 듣더니 하얀 이빨이 들어찬 입을 열었다. “크나딜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크나딜 위에 있는 존재는 아직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한다.” “어찌해야 하오, 구아닐?” 러스킨이 물었다. “예정을 약간 앞당겨 가넬로크를 친다. 하늘 산맥의 일정이 아크랜드의 일정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지.” 드래곤의 목소리는 모두 저런 걸까? 목소리만으로 그녀는 살갗에 소름이 끼쳤다. “그 전에 한 가지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구아닐. 저기 묶여 있는 여자가 카구아를 죽였고, 나의 부하를 죽였습니다. 이 일이 단순한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카-드로크의 악령이 저지른 짓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일정에 지장을 줄 일이니 부디.......” 빅터의 말을 전달하는 론틀로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드로크 같은 녀석의 악령이 공포를 안겨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군. 지금 처리하노라. 좋지 않은 기운이 서쪽에서 밀려오고 있다.” 구아닐은 눈을 잠시 감았다. “묘한 일이군. 대체 무엇이 나의 시선을 가리고 있는가? 뭔가 나의 머리에 장막을 드리웠다. 러스킨, 이 힘을 감지해보라.” 러스킨은 바로 지팡이를 들더니 빅터에게 물었다. “네이슨의 검은 회수했소?” 빅터는 대답 대신 허리의 검을 두들겼다. “무슨 문제라도?” “드래곤의 힘을 가진 검이 여기 또 있소.” 그러더니 러스킨은 레미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죽은 카구아의 시체를 살피라. 그가 무엇으로 죽었는가?] 레미프들은 신전 옆에 쓰러진 카구아의 머리에 박힌 칼을 가리켰다. 게랄드가 집어 던진 그 칼은 박힌 부분이 머리뼈라 레미프들의 힘으로는 뽑지 못했다. 구아닐은 그 칼의 주인을 금방 알아보았다. “크나딜! 이 마을에 힘을 빌려준 건 드로크의 악령이 아니라 크나딜의 힘이었군. 더 지체할 수 없다. 크나딜의 불길함이 내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 구아닐은 몸을 일으켜 아즈윈에게 다가왔다. 론틀로스는 그 발걸음만 듣고도 겁에 질려 신음했다. 레미프들에게 드래곤이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아즈윈은 충분히 실감했다. 드래곤에 대해 알지 못하고, 드래곤 사냥을 훈련 받은 그녀조차 지금은 오금이 떨렸다. 일어서 있다면 주저앉아버렸을 정도로. 구아닐은 마을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레미프 언어로 소리쳤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레미프들은 그 말을 듣고 환호했다. 론틀로스는 그 말을 전달해주지 못했다. 중간에 카-드로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걸 보니 아마 그 악령의 힘을 제거한다고 말한 게 아닌가하고 아즈윈은 혼자 추측했다. 구아닐은 입을 크게 벌리고 아즈윈에게 다가왔다. 그녀에게는 잡아먹히는 것이지만, 레미프들에게는 이게 신성한 의식이다 보니 구아닐은 그 모든 것을 천천히 진행 시켰다. 결국 그녀는 하얀 이빨이 보이고, 그 너머로 검붉고 축축한 혀의 움직임과 자신이 곧 통과하게 될 깊은 식도의 시작 부분까지 모두 느릿느릿 바라보아야 했다. ‘그래, 세르메이의 예언은 게랄드가 박살냈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다.’ 아즈윈은 구아닐의 입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뭐든 좋으니 어서 이 운명을 걷어차 버릴 기적 하나 일어나서 내게 칼을 쥐어줘!’ 구아닐의 뜨거운 호흡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는 마치 구아닐에게 호통 치듯 소리쳤다. “어서!” 그 말을 신호로 숲에서 직선으로 뻗어 나온 검은 바람이 구아닐의 옆구리를 감쌌다. 그 커다란 몸집이 허공에 떠오르며, 쇠사슬을 묶은 통나무도 뽑혀 나갔다. 그녀는 세찬 공기의 흐름에 딸려 올라갔다가 통나무와 함께 광장 중앙에 떨어졌고, 구아닐은 그 큰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레미프들이 지어놓은 집까지 나가떨어졌다. 구아닐의 몸을 태우는 검은 불길은 순식간에 숲으로 옮겨졌고, 마른 나무로 만들어진 집은 증발하듯이 불타버렸다. 불길이 날아온 쪽에는 구아닐을 닮은 또 다른 검은 드래곤이 있었다. 코에는 두툼한 뿔이 길게 달려 있고, 머리 좌우로는 가늘고 긴 뿔이 머리카락처럼 목덜미까지 감싸고 있는 괴이한 드래곤이었다. 그것은 날개를 펼치고 큰 보폭으로 광장 안쪽으로 들어와 포효했다. [카-탄톨!] 론틀로스는 라루튼의 수호 드래곤을 부르짖었다. 카-탄톨은 론틀로스를 알아보고 레미프 언어로 말했다. 말을 끝낸 후 드래곤이 다시 큰 소리로 포효하자, 그가 나온 남쪽 숲에서 엄청난 숫자의 레미프들이 달려왔다. 론틀로스는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곧 구아닐과 함께 “쓸려나간 아즈윈이 걱정되어 광장 안쪽을 바라보았다. 타는 불길 속에서 쓰러져 있던 아즈윈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통나무에 묶여 있던 쇠사슬은, 통나무가 뽑혀 나가는 순간 빠져 나와 그녀의 발목에만 매달려 있었다. 밧줄이 그녀의 옷과 함께 타들어갔고, 그녀의 옷과 머리카락의 일부도 아직 불길이 남아있었다. 아즈윈은 먼지를 털 듯 불을 털어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그녀는 구속하고 있는 건 그녀의 발목에 걸린 석자 길이의 쇠사들 정도였다. 구아닐이 넘어지며 무너뜨린 석조 건물에서 피어오른 먼지가 아즈윈의 뒤쪽으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녀는 타버린 소매 자락을 찢어버리고, 헐렁거리는 바지의 옷감도 찢어 피가 나는 어깨와 손목에 묶었다. 주위의 소동에 전혀 개의치 않고 모든 일을 끝마친 그녀는 딴 세상 얘기를 묻듯 물었다. “무슨 일이야?” 론틀로스는 잠깐 그녀의 모습에 홀려 바라보던 시선을 접고 대꾸했다. “카-탄톨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 때나마 우리를 버렸음에 후회한다 말씀 하셨다.” “저게 카-탄톨이군. 조금만 빗나갔으면 내가 불 탈 뻔 했어. 사실 좀 탔지만.” 그녀는 화상을 입은 어깨와 가슴에 슬쩍 손을 댔다. “보이나, 아즈윈? 저것이 라루튼의 군대다. 탄톨께서 드로크의 영광에 동참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는 크게 흥분하며 말했다. 아즈윈은 천천히 걸어가 론틀로스의 밧줄을 풀어주며 남쪽 숲에서 몰려오는 레미프들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은 달려오며 대열을 정비하여 창과 칼을 들었다. 캡틴 빅터를 구아닐이 쓰러진 것에 개의치 않고 타치셀의 레미프들에게 크게 명령을 내렸다. 다급하나마 타치셀 측의 레미프들도 대오를 짰다. 그러나 카-탄톨이 버티고 있는 이 쪽 영역을 보고, 타치셀의 레미프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 신전 쪽에서 하늘을 쪼개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건 인간의 목소리였으나, 도저히 인간의 목소리랄 수 없었다. 레미프들은 귀를 막았고, 귀를 막지 못하는 론틀로스도 고통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조아프 드루 기더 오그 드로크 , 카-탄톨! (원한다면, 카-드로크의 운명에 합류하라, 카-탄톨!)] 러스킨이었다. 그의 하얀 수염이 펄럭이며 빛에 휩싸인 지팡이에 주위의 바람이 빨려 들어갔다. 카-탄톨은 인간의 마법사를 보고 잠시 당황한 듯했다. 마치 죽음을 예견한 듯, 체념하는 빛이 언뜻 지나갔다. 론틀로스가, 피하라고 소리 질렀으나 탄톨은 피하지 않고 외쳤다. [가플드 요에브 기더! (너희들의 운명과 싸워라!)] 러스킨의 지팡이가 빛을 발했다. 타치셀에 있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그 빛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한줄기 빛이 지나간 자리의 중앙에 있던 검은 드래곤의 몸은 하얗게 타 들어가며 뒤로 넘어갔다. 라루튼의 레미프들은 비명을 질렀다. 만약 마지막 순간 탄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싸우기도 전에 싸움을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피하지 않았다. 론틀로스는 묶인 채로 명령을 내렸다. [가플드! 가플드! 고브 탄톨.] 레미프들은 일제히 소리지르며 타치셀의 군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고브 탄톨.] 캡틴 빅터도 ‘가플드’ 라는 같은 명령을 내렸다. 두 레미프들이 광장의 한 가운데로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타치셀의 병사들이 먼저 아즈윈과 론틀로스에게 도달하고 있었다. 론틀로스의 쇠사슬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가라, 아즈윈. 먼저 자리를.......” “닥치고 보고 있어.” 아즈윈은 손목을 주물럭거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게랄드가 해낸 걸 내가 못할 것 같은가, 론틀리?” 아즈윈은 양 무릎을 굽힌 말을 탄 자세로 기다리다가 제일 선두로 달려오는 타치셀의 병사를 발로 걷어찼다. 발목에 딸려오는 쇠사슬에 다른 병사들까지 얻어맞아 쓰러졌다. 그가 바닥에 떨어뜨린 창을 집어 그녀는 몇 번 크게 회전시켰다. “창은 오랜만이군.” 그녀는 중얼거리더니 무수히 몰려오는 병사들을 향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창을 몇 번 찔렀다. 선두의 병사들이 몇 명 쓰러지며, 돌격하는 힘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때 뒤에서 라루튼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광장 안은 두 군대가 합쳐져 혼전을 이루었다. 그 사이 병사들은 도끼로 쇠사슬을 끊어 론틀로스를 구했다. 론틀로스는 잠시 전투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즈윈에게 말했다. “후퇴해야겠다. 아무리 이런 와중이었어도 타치셀의 군대는, 훨씬 전투의 경험이 많았고 또 숫자도 더 많다. 더구나.......” 그는 거짓말처럼 허무하게 죽어버린 카-탄톨의 시체를 보았다. 탄톨은 자기가 우그의 힘에 죽을 거라고 예언했고, 그 예언대로 죽을 걸 알면서도 이 곳으로 왔다. 그럼에도 후퇴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에 론틀로스는 고심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잠시 싸움을 지켜보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칼 두 자루와 방패 하나를 주웠다. 그녀는 칼을 몇 번 휘둘러보다가 하나는 던져버리고 방패도 다른 걸로 바꿍T다. 이런 격력한 전투 중에도 그녀는 마치 쓰레기라도 줍는 듯 느긋했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칼과 방패를 골랐는지 그녀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 커다란 소리가 광장의 대 혼란을 관통하며 신전을 향했다. “카-드로크!” 아즈윈의 근처에 있던 타치셀 병사들이 깜짝 놀라 몰러나는 것을 기준으로,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레미프들들 뒤로 밀어냈다. 적들이 갑자기 전의를 잃으니, 공격을 하던 라루튼의 병사들도 뒤로 물러났다. “카-드로크!” 아즈윈은 또 한 번 소리쳤다. 광장을 울리는 긴 메아리에 양측의 레미프 병사들이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전투는 그녀의 고함소리 두 번으로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칼끝으로 신전에 서 있는 러스킨과 빅터를 가리켰다. “이 자리에서 내가 드래곤의 악령이 되어주겠다. 그대로 팔짱 끼고 서서 명령을 내려 악령을 죽일 수 없다면 직접 나서라, 캡틴 빅터! 하얀 늑대의 기사가 익셀런의 기사에게 정식으로 도전한다!” 아즈윈은 싸늘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마법사가 지팡이 끝을 아즈윈에게 향했다. “너에게 싸울 기회를 줄 이유는 없다.” 지팡이 끝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하자, 아즈윈은 큰 목소리로 비웃었다. “내가 상대하려는 자는 비열한 마법사가 아니라, 익셀런의 기사다. 혹시 하늘 산맥에 너무 오래 있어 기사도를 잊었는가, 빅터?” “마법사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 아란티아의 기사여.” 마법사의 지팡이가 카-탄톨을 죽일 때와 같은 빛을 뿜었다. 아즈윈은 방패를 내밀어 빛의 한쪽을 막고 칼을 이용해 및을 반사시켰다. 공기가 진동하며 방패가 깨지고, 칼날을 부서졌다. 아즈윈은 뒤로 다섯 걸음이나 나가떨어졌으나 한 바퀴 구르더니 즉시 일어났다. 그녀는 팔목을 주물럭거리며 러스킨을 향해 소리쳤다. “왜, 드래곤 한 마리 죽이더니 힘을 모두 소비해 버리셨나? 아니면 울프의 기사가 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도 모를 거라 보셨나?” 아즈윈은 론틀로스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다른 칼과 방패를 부하에게서 넘겨받아 건넸다. 그녀는 탄톨을 죽인 그 빛을 막아냈다. 그게 레미프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론틀로스의 설명 없이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화가 난 러스킨을 속으로 막으며, 빅터가 말했다. “아무래도 드로크의 망령 같은 건 이 자리에서 없애두는 게 편하겠군.” 빅터는 성큼성큼 아즈윈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이동하려는 방향에 서 있던 타치셀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아즈윈은 빅터가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발목을 주무르고 자리에서 탁 탁 뛰어 몸을 풀었다. “무기는 그걸로 됐나?” 빅터는 앞에 서서긴 얘기도 없이 물었다. “이것저것 네 쪽이 사정 봐준 것도 많은데, 무기까지 바라지는 않아.” 아즈윈은 픽 웃었다. “그럼 다행이군.” 빅터는 잠깐 멈칫하고 서는 듯하더니 칼을 휘둘렀다. 한 팔이 없는 균형 감각으로 이 정도 빠르게 칼을 낼 수 있다는 것에 아즈윈은 잠시 놀랐다. 가슴에 붙이고 있었던 방패가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옆구리를 베이자,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건 진짜다. 마법을 막는 것처럼 우연이나 정신력 싸움이 아니야.’ 그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아즈윈은 칼과 방패를 모두 합쳐 박고 또 막았다. 보통 대여섯 번 정도 막히면 당황하는 건 공격하는 쪽이었으나, 빅터는 정해진 길을 묵묵히 가는 듯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다리가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에 신경 써. 팔이 움직인다. 방패가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지지 않아. 마법 막는 팔이 마비되고 있군....... 부러진 건 아니겠지? 어쨌든 나쁘지 않아. 이 정도 부상을 안고 게랄드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어.’ 빅터가 슬쩍 보여주는 그 벽의 높이가 네이슨과 다르지 않다는 건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는 왼손잡이인데다가 한 손으로만 쓰는 공격이었으나 당연히 이 경험해보지 못한 공격에 눈을 빼앗겨 진작 승부가 결정 났어야 옳았다. 반나절 동안 힘을 회복하는 데 신경을 썼지만 쉽게 회복될 만한 피로가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는 전력을 다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손과 발이 모두 상대의 공격을 따라가고 있었다. ‘움직인다. 따라갈 수 있어!’ 뜻밖에도 몸이 가벼웠다. 오히려 컨디션이 좋을 때보다 몸이 더 부드럽게 움직여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건 익셀런 제 1 기사단의 캡틴 빅터가 아니라 선생님이었다. 그도 한 팔이었고, 빅터는 선생님과 거의 비슷한 실력자였다. 그녀는 하얀 늑대가 되었어도 항상 가장 강한 사람을 상정하고 연습을 하기 시작하면, 한 팔로 어린 제자를 가지고 놀았던 선생님을 떠올렸다. 이런 싸움의 진행 과정을 자다 일어나도 머릿속에서 끄집어낼 만큼 연습해 보았다. 새로운 게 아니었다. ‘선생님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었어요. 이겨도 되겠죠?’ 아즈윈은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만약 지금 힘이 모자라 실패하더라도, 게랄드와 같은 결론을 낼만한 공격 방법이 머릿속에 완벽히 그려졌다. 빅터도 그걸 눈치 챘는지 몸의 균형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는 멈추지 않는 공격 자세를 고쳐, 순간적으로 방어로 자세를 돌렸다. 아즈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방패를 약간 뒤로 젖히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때 그녀의 눈앞으로 하얀 섬광이 보였다. 모든 신경을 상대의 가슴과 칼에 신경 쓰고 있던 차라 그 빛이 아까부터 자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피하지 못했다. 어렵사리 방패를 들어 막았으나, 그 공격은 방패로 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섬광은 방패를 깨뜨리고 그녀의 팔목을 부러뜨렸다. 아즈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가 돌바닥에 어깨를 부딪쳤다. 떨어진 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빅터 쪽으로 굴러갔다. 그녀는 너무 아파 신음만 낼 수 있었다. “이건 기사들 간의 대결이라고 내가 경고하지 않았소?” 빅터가 뒤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아즈윈에게 마법을 쓴 러스킨은 침착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 마법을 두 번이나 막았소. 하얀 늑대란 존재를 얕보지 마시게. 당신과 동일한 실력을 가진 네이슨 조차 하얀 늑대에게 죽었다 하지 않았소?” “그렇다고 나까지 죽으리라 염려해 준 거요?” 빅터는 크게 화를 냈고, 러스킨은 지팡이를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캡틴 빅터. 이건 당신을 위한 싸움이 아니오. 자, 비켜주시겠소? 당신이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이도록 하지.” 빅터는 나직이 으르렁대다가 몸을 휙 돌려 아즈윈에게 다가왔다. “내가 하지.” 빅터는 다가와 칼을 들었다. “내 의사는 아니었다.” “그리 보이는군.” 아즈윈은 힘없이 대꾸했다. ‘게랄드 만도 못하게 됐군. 싱거워라. 기적이 일어나 칼을 들어 본 게 어디냐?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 내 잘못이지.’ 그녀는 이미 자기에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은 모두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특별히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끝내버리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래도 아무 것도 못 이룬 인생은 아니었다. 이런 바보 같은 계집 녀석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인연은 모두 만나뒀으니....... 멋진 스승, 멋진 친구, 멋진 주군. 아, 게랄드한테는 여전히 미안하게 됐군. 마스터 뵐 낯도 없고.’ 그녀는 위안하고 위안하다 억울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빅터를 노려보았다. “아니, 난 진 게 아니야! 다시 싸우면지지 않아. 나는 하얀 늑대니까!” 빅터는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그녀는 빅터의 시선이 아즈윈이 아닌, 아즈윈의 뒤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뭘 보고 놀란걸까? 죽은 탄톨이 살아나기라도 했나? 론틀로스가 활 시위를 당겨 그를 협박하고 있는 걸까? 아즈윈은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아즈윈의 말을 받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녀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 같았다. “하얀 늑대를 꺾을 수 있는 건 하얀 늑대뿐이야. 그렇지, 아즈윈?” 신전 쪽의 러스킨이 지팡이를 들어 아즈윈의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마법을 쓰려 했다. 그 순간 빅터와 러스킨 사이로, 하늘에서 새처럼 활공하며 날아온 레미프가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착지했다. 다른 레미프들과 달리 얼굴은 하얗고, 날개도 눈처럼 희었다. 잿빛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치켜 뜬 눈으로 그 레미프는 검은 날의 칼을 러스킨에게 들이댔다. 러스킨은 광채가 일만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으나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러스킨도 그 검은 날의 칼이 뭔지 안다면 마법을 아끼는 게 당연했다. 그것은 아란티아의 보검이었다. 아즈윈의 뒤에 있던 남자는 천천히 다가와, 주저앉아 있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빅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고, 아즈윈도 떨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빅터를 주시하던 그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한 팔 없는 그 남자는 미소 지으며 아즈윈에게 말했다. “늦었구나.” 아즈윈은 그가 댄 손바닥에 머리카락을 슬쩍 비비고 짜증내는 투로 말했다. “엄청 늦었어요, 선생님.” 그것은 그녀가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7) 마법사와 기사와 드래곤 로핀이 라이의 등을 타고 하늘을 날아 타치셀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제일 먼저 빅터를 발견했다. 그 익셀런의 검은 갑옷과 한쪽뿐인 팔을 보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라이을 향해 마법사를 막으라고 소리 치고는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 짧은 순간 빅터가 칼로 내리치려는 여자가 아즈윈인지 확인 하지도 못했다. 어쨌든 로핀은 착지한 후 즉시 칼에 손을 얹고 집어 던질 준비를 했다. 다행히 빅터는 아즈윈을 공격하지 않고, 멈췄다. 어지간히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라이는 카셀이 빌려준 칼을 들고, 무모하게도 러스킨의 정면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가 마법사를 상대로도 싸워봤을까 걱정 되었으나, 러스킨은 함부로 라이를 공격하지 못했다. 빅터가 공격하려는 여자는 아즈윈이었다. 하늘 산맥에서 제자 녀석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여기서 빅터와 겨루고 있으니, 그는 반갑다기보다 자신에게 맞춰져 있는 기더의 톱니바퀴에 기가 찼다. “엄청 늦었어요, 선생님.” 그가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는 투덜대며 말했다. “고생 많았다." 엉망인 그녀의 얼굴을 보니 우선 안쓰러웠고, 살아있는 얼굴을 보게 되어 안도했다. 그리고 그녀를 이 꼴로 만든 녀석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늘 산맥에서 보기에는 그리 반가운 얼굴이 못 되는군, 빅터.” 먼지를 뒤집어써 검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어 보이는 로핀의 몰골을 보고, 빅터는 콧살을 찌푸렸다. “즈비 레미프들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 우그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했는데, 그게 너였냐?” 패어있는 뺨으로 보이는 미소는 빅터를 더욱 잔인하게 보였다. 젊었을 때에 비해 더욱 날렵해진 것 같아 로핀은 괜스레 그의 몸을 살피게 되었다. 그러나 갑옷과 옷 안에 감춰진 근육이 어느 정도일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빅터도 로핀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무리 아닌가, 로핀? 고작 날아다닐 줄 아는 레미프 한 마리를 데려와서 뭘 하려고?” “글세, 구원군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나? 봐라. 효과 좋네, 뭘.” 로핀은 베나 에실크를 들어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치셀의 레미프들은 하얀 날개의 라이를 보고 적잖이 동요하고 있었다. 빅터는 한심하다는 듯 말햇다. “네가 상대해야 할 적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해졌나? 아니면 너무 다급히 뛰어오느라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잊었나?” 빅터의 뒤 쪽에서 부서진 석조 건물의 잔해를 무너뜨리며 검은 드래곤 한 마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온 몸에 꺼져가는 검은 불꽃을 품고 있는 그 드래곤은 분명 카-구아닐이었다. 구아닐은 눈동자만 밑으로 하고 로핀을 노려보았다. 카셀을 구하기 위해 맞섰던 며칠 전보다 더 커진 기분이 들었다. 그게 착각이 아니라면, 구아닐은 현재 ‘성장’ 하고 있는 중임에 분명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빅터의 뒤에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도 있었다. 라이가 견제하고 있으나 러스킨은 별로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그는 라이와 로핀을 둘 다 날려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는 건 빅터에게 이 싸움의 지휘권을 맡긴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너에게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 10년 전 싸움을 다시 해볼 텐가?” 빅터가 칼을 내밀며 말했다. 로핀은 베나 에실크를 그와 똑같은 자세로 내밀었다. “꼴을 보니 빅터 널 여기서 죽여두면 앞으로의 싸움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는 건 분명하겠구나.” “어리석은....... 나는 너의 과거에 존경을 표하며, 항복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때라면 모르나, 지금의 네 실력으로는 무리다.” “아, 누가 내가 한다고 그랬나?” 로핀은 갑자기 옆에 쓰러져 있는 아즈윈에게 칼을 내주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둔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입으로 묶여 있는 가는 줄을 풀었다. 안에 들어있는 회색 가루를 확인하더니 그는 아즈윈의 머리 위에 쏟아 부었다. 반짝이는 가루가 그녀의 머리에서 물처럼 흘러내리더니,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쓸어 내렸다. 아즈윈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방패를 드는 쪽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손도 안 짚고 벌떡 일어났다. “움직일만 하냐?” 로핀이 물었다. “루밀이 주신 것보다 훨씬 낫군요.” 아즈윈은 기세좋게 대꾸했다. 빅터에게 러스킨이 말했다. “테일드가 만든 치유의 가루군. 오직 네 개만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하긴, 그 중 하나를 전 하얀 늑대가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할 건 없겠지.” “싸움은 내 제자가 한다!” 로핀은 아즈윈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빅터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10년 전 나보다 더 강한 하얀 늑대가 여기 있다. 어때? 자신 있나, 빅터?” 빅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러스킨이 버럭 소리 질렀다. “뭘 하는가, 캡틴 빅터? 당장 둘을 모두 쓰러뜨려라. 드래곤과 마법사가 네 뒤에 있다!” 빅터는 갑자기 싸울 의지를 버리고 칼을 늘어뜨렸다. 러스킨은 눈을 크게 떴다. “피하는 건가?” “아니오, 러스킨. 잠시 오만 속에 착각했었소. 당신 역시 로핀이라는 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않소?” “그래서 지금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는 우리 셋 중 하나가 희생해서라도 죽여야 하는 자다.” 로핀은 킥킥대고 웃었다. “루티아를 배신한 마법사가 마법사랄 수 있나?” 러스킨의 눈썹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 “한 때나마 당신을 존경했던 게 창피하오, 러스킨. 이제 주위도 돌아볼 줄 모르는가?” 구아닐이 당장 경계하며 머리를 뒤로 물렸다. 타치셀의 레미프들과 라루튼의 레미프들은 로핀이 나타난 숲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붉은 빛을 발견하고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엎드렸다. 심지어 빅터의 수발을 들기 위해 굽실거리던 레미프 조차 그 붉은 빛을 바라보는 순간, 빅터를 무시하고 무릎을 꿇었다. 숲의 나무 위로 곧게 솟은 드래곤의 머리가 숲에서 벗어나 곧 전신을 타치셀 안으로 드러내보였다. 드래곤의 붉은 빛이 석양의 붉은 빛과 동화되어 타치셀의 광장을 채웠다. 사-크나딜, 드래곤들의 하이로드이자 마스터인 그의 포효가 산을 울리고 숲을 울리고 하늘을 울렸다. 크나딜의 어깨 위에는 그의 뿔을 잡고 카셀이 서 있었다.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느라 정신이 없는 그 와중에도 눈은 구아닐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없는 분노가 가득 차 이었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는 쓸만한 녀석이라니까. 본인은 의식하고나 있을지 모르겠군. 자신이 크나딜의 어깨 위에 서있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 크나딜의 말대로, 드래곤을 부리는 자가 마법사가 아니라면 누가 또 마법사라 할 수 있겠는가?’ 로핀은 흐뭇하게 웃으며, 아즈윈의 어깨를 살짝 쥔 채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자, 그럼 빅터, 러스킨, 구아닐! 이 쪽에도 드래곤과 마법사와 기사가 있다. 해볼 테냐?” 갑자기 구아닐이 크게 포효했다. 크나딜의 포효에 듣는 이가 스스로 무릎을 꿇게 만드는 웅장함이 있다면, 구아닐의 포효에는 듣는 이가 귀를 틀어막고 엎드리게 할 공포가 깃들여 있었다. 나무가 뿌리채 흔들렸고, 약간 금이 간 신전이 뒤흔들려 기둥이 하나 무너지고 천장의 일부가 내려앉았다. 두 거대한 드래곤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크나딜, 이제 와 땅 속에서 기어 나온다고 내 힘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구아닐의 날개가 서서히 펼쳐졌다. [침묵하라, 구아닐. 그리고 함부로 날개를 펼치지 말라. 그 따위 허풍을 들으려고 여신의 옆을 비운 게 아니다.] 크나딜이 말했다. [어리석은 녀석. 여신의 힘에 의지해 살만 찌우던 네가 전투라고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구아닐은 크나딜의 어깨에 서서 뿔을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카셀을 보고 비웃었다. [아니면 그 하찮은 인간에게 어깨를 내주고 마법사라는 이름을 붙여 힘을 빌릴 정도로 여신의 힘은 허약해졌는가? 우습구나.] 크나딜은 대꾸하지 않았다. 구아닐은 쩌렁쩌렁 울리는 쇳소리를 담은 목소리로 비웃었다. [마스터의 이름을 버려라, 크나딜. 누구의 권력으로 감히 너를 드래곤들의 마스터라 칭할 수 있는가? 하이로드의 권좌에서 물러나라, 크나딜.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 적어도 혼자서 나의 힘을 막을 정도가 못된다면, 그리하라. 여기 나를 받드는 두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너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데려온 저 허약한 인간들은 감히 그럴 수 있는가? 선택을 잘못했다. 아니, 선택이 늦었다 나와 내가 모시는 분인 이미 네가 가졌어야 할 힘을 모두 가져왔다. 너는 남은 찌꺼기를 긁어모은 것에 불과하다. 내 앞에서 벌벌 떨며 달아나던 꼬마를 어깨에 태우고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내 앞에 무릎 꿇어라. 내가 하늘 산맥의 지배자가 되거든, 하찮은 마스터의 이름이나마 유지하도록 선처하겠노라.] 크나딜은 가늘게 뜬 눈으로 구아닐을 바라본 뿐, 분노도 공포도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크나딜의 분노는 그의 어깨에 탄 카셀이 대신했다. “닥쳐라! 카-구아닐. 하늘 산맥의 래플홉트이신 크나딜께서 한낱 범죄자에 불과한 자를 상대로 흥분하시기에는 그대의 존재가 너무나 하찮구나.” 구아닐은 잠시 그 인간이 자기의 고대어를 알아들었다는 것에 당황했다가, 곧 언어에 저주를 담아 퍼부었다. [네 이 놈, 감히 우그 주제에 어딜 함부로 나서느냐? 신들끼리의 싸움이다. 피조물이 나설 자리가 못되노라.] 구아닐의 몸에서 피어 오른 검은 기운이 크나딜 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검은 기운이 형체를 만들어 유령처럼 타치셀 안을 떠돌아 주위를 어둠으로 물들였다. 검은 날개가 만드는 어둠에 형체를 만들어 떠도는 그림자가 타치셀의 낮을 낮이 아닌 시간으로 바꿔놓았다. 그러나 카셀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소리쳤다. 아니, 그의 시선은 오히려 신전 쪽에 눕혀 있는 두 인간 중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분노는 모두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카셀을 올려다보고 있던 로핀은 그 시선을 좇아 누군지 모르는 신전 앞의 시체를 살폈다. 타치셀에 몰려 있는 모든 레미프들이 구아닐의 공포와 크나딜의 위엄에 짓눌려 벌벌 떨고 있는 와중에 아즈윈 조차 신전 쪽으로 슬픈 시선들 보내고 있었다. ‘누구지? 카셀, 누가 죽었기에 구아닐의 공포도 알아보지 못하고 소리칠 정도로 화가 난 거냐?’ 카셀의 목소리는 크나딜의 힘을 받아 드래곤만큼 넓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죽음을 감지한 숲의 새들이 하늘을 날았고, 땅의 짐승들은 산불을 피해 달리듯 달아났다. “그대는 나를 하늘 산맥에서 죽이지 못했고, 그대의 부하 역시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의 죽음은 그대의 기더에 있지 않다. 그대가 가진 파괴의 힘은 늑대들의 캡틴 앞에서 날개를 펴지 못하리라. 크나딜의 힘 앞에 항복하라, 구아닐!” 구아닐의 저주는 이제 크나딜이 아닌 카셀을 직접 향했다. [닥쳐라, 우그! 네 입을 찢어 네 어미의 무덤 속에 처박아 썩히리라. 네 심장을 불태워 네 아비의 산 심장에 뿌리리라. 죽을 때까지 살아남아 움직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숨 쉬지도 못하는 고통에 빠져, r 자손까지 평생 그 고통을 같이할 저주를 너에게 내리노라.] “하늘 산맥 안에서 네 힘이 깃들 수 있을 거라 보는가? 네가 떠받드는 주군의 힘으로도 아란티아의 여왕이 내리는 축복을 꺾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너 따위의 저주로 캡틴 울프의 이름 앞에 맞서려 하느냐? 크나딜께서 내게 부여하신 발언권으로 대신 경고하나니, 항복하라.” [네 놈이 가진 힘을 보여라. 얘기는 그 다음으로 하라. 네가 떠드는 허풍을 내 발아래 짓밟아 크나딜의 머리 위로 떨궈주겠다. 크나딜, 너의 선택이 얼마나 엉성했는지 지금 가르쳐 주겠다. 러스킨, 빅터. 너희들의 힘을 아둔한 드래곤 놈에게 보여라.] 러스킨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지팡이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지팡이는 카-탄톨을 죽인 하얀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빅터가 늘어뜨리고 있는 검에는 구아닐이 펼쳐놓은 그림자와 같은 짙은 어둠이, 연기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타치셀에 생명의 힘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구아닐이 보이는 그 살의는 당장 살아있는 생물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뿔을 쥐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 한 로핀은 자기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핀조차 살갗이 떨리는 공포를 맛보고, 아즈윈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엇다. “그럼 어디 너를죽일 나이 힘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 아무 말도 못할 줄 알았던 카셀은 큰 소리로 아래를 향해 외쳤다. “아즈윈, 네가 가진 검의 힘을 보여라. 라이, 아란티아의 힘이 나를 대신하여 너에게 깃들 것이다. 너희들의 캡틴이 명령한다!” 어둠의 기운 속에서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 서 있던 아즈윈과 라이가 동시에 칼을 치켜들었다. 아란티아의 보검이 구아닐의 어둠을 밀어내며 빛을 뿜었고, 베나 에실크의 붉은 빛이 빅터의 검이 내는 어둠을 깨뜨렸다. 구아닐과 크나딜이 서로를 견제했고, 라이는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을, 아즈윈은 빅터를 겨냥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는 카셀은 마지막 한 마디를 아껴두고 있었다. 그 선택은 여기 오기 전부터 로핀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로핀은 숨 죽여 웃다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어쩔래, 빅터?” 빅터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자신의 검을 집어넣어버렸다. 힘과 힘이 견제하고 있는 균형이 갑자기 무너져버렸다. 러스킨과 구아닐이 놀란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항상 너는 내가 준비를 완벽히 마쳤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나타나는구나.” 로핀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싫으면 그 따위 막돼먹은 준비는 아예 하질 말던가.”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또 서로의 한 팔을 뺏는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다. 물러나지.” 아즈윈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협상하지 말아요.” 붉은 빛을 담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제자의 얼굴에서 그는 10년 전 베나 에사르크를 불려주었던 아이린의 눈빛을 보았다. 그러나 로핀은 부드럽게 그녀를 설득했다. “아즈윈, 너의 캡틴까지 나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러니 너도 내게 상황을 맡겨라.” 아즈윈은 카셀을 들먹이자 입을 닫았다. 그 큰 분노도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아즈윈이 카셀을 믿고 있다는 것에, 로핀은 적지 않은 질투심을 느꼈다. “보내주지. 대신 타치셀을 넘겨라, 빅터. 어차피 여기 레미프들은 너희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 산맥에서 물러가라. 이미 준비해뒀다고 했지? 그럼 이건 인간들의 싸움으로 넘겨. 레미프들의 전투는 레미프들이 끝내게 둬.” “푸트나이까지 비우라는 거냐?” “타치셀을 넘기면 당연히 그리 되니까 타치셀만 언급한 거였다. 당연히 푸트나이도 줘야지. 거기에서 또 이 짓 한 번 더 하자는 건 물론 아니다.” “좋다. 거래는 그 정도로 끝내지. 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같아.” “결과는 내가 결정짓는다. 허풍 떠는 건 네 특기가 아니야.” 둘은 그다지 살기도 띠지 않은 조용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빅터가 먼저 등을 돌렸다. 그는 로핀으 향하고 있는 러스킨의 지팡이 끝을 손바닥으로 밀고 말했다. “거두시오, 러스킨. 사-크나딜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막강한 존재니까.” 말은 그렇게 했으나, 노려보는 쪽은 크나딜이 아니라 말없이 아란티아의 보검을 쥐고 있는 라이 쪽이었다. 빅터는 검은 털의 베논에 올라타며 아직도 분노의 눈빛으로 크나딜과 카셀을 주시하는 구아닐에게 레미프의 언어로 말했다. [이 곳에서의 지휘권은 내게 있소. 따라주셨으면 하오.] 구아닐은 나무를 태울만한 뜨거운 콧김을 푸욱 내뿜더니 방향을 돌려 숲으로 사라졌다. 두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드래곤이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고 갑자기 떠나버렸으니 타치셀의 레미프들은 몹시 당황했다. 라루튼의 레미프들은 아직도 창을 세우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고, 익셀런을 물리친 인간들이 버티고 있으며, 무엇보다 붉은 드래곤이 이 곳에 재앙처럼 나타나 있었다. 타치셀의 병사들에게는 오직 절망만 남았다. [그 쪽에 지휘관이 있소?] 로핀이 라루튼의 레미프들에게 말했다. 한 명이 절룩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제가 지휘관인 론틀로스입니다.] [타치셀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키시오. 보아하니 자극하지만 않으면, 마찰은 없을 거요. 아, 그리고, 론틀로스라면......., 세르메이를 알겠군. [그녀를 아십니까?] [누가 여기에 크나딜을 모셔왔을 거라 생각했소? 잠을 깨우는 무녀지.] 로핀은 웃으며 말했다. 론틀로스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납득하여 크나딜의 어깨에 서 있는 카셀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 란 게 우그일 줄은 몰랐군요.] [호오, 레미프 치고는 눈치가 빠른 양반이시구려. 뭐, 어쨌든 세르메이는 여신의 신전에 무사히 잘 있소. 조만간 데려올 수 있도록 조치하겠소.] [고맙습니다.] 안도하는 그는 감사 인사를 하고, 병사들에게 로핀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미 전의를 잃은 타치셀의 병사들은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시키는 대로 따랐다. “왜 그냥 보내주셨죠?” 아즈윈은 로핀의 칼을 돌려주며 조금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카셀도 보내주길 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짠 작전이었어.” 굴러 떨어질까봐 크나딜의 몸에서 힘겹게 내려오는 카셀을 기다리는 동안, 로핀은 칼을 집어넣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이, 너도 와서 쉬어라. 여기까지 크나딜과 같은 속력으로 날아오느라 피곤하지 않나?”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난 역시 이 칼이 싫다.” 그는 제법 익숙해진 억양으로 대구하며 아즈윈의 옆에 섰다 라이가 강제로 돌려주는 보검은 아즈윈이 대신 받았다. 이 보검이 가지는 압박은 강한 검사일수록 확실히 느끼는 법이었다. 아즈윈은 그를 휙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누구죠?” “카셀이 아군으로 끌어들인 친구지.” 아즈윈은 라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물었다. “.......빅터는 선생님의 팔을 벤 자죠?” “그래.” “그리고 그 자의 팔도 선생님이 베었고요?” “그랬지.” “그 자는 카셀이 말하는 동안에도 구아닐이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 이 레미프만을 경계했어요. 러스킨은 크나딜을 향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노인이 마법을 썼더라면 라이에게 죽었을 겁니다.” “그 다음에는 아마 타치셀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크나딜도, 구아닐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위험했겠지. 라이가 싸움판 전체를 막고 있었던 셈이었어.” 로핀의 말에 이어 카셀이 다가와 말했다. “그리고 타치셀 북쪽에 엄청난 숫자의 모즈들이 대기하고 있었어. 싸움이 벌어졌다면 전멸하는 건 우리 쪽이었을 거야.” “모즈.......?” 아즈윈은 게랄드에게 무자비하게 달려들었던 그 괴물들을 떠올리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로핀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타치셀의 병사들을 수습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말했다. “아마 루티아를 공격하던 그 병력이 되돌아온 거겠지. 하늘 산맥 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빠른 이동 속도야. 아마 그 울창한 나무 사이를 쉬지 않고 달려왔을 거다. 그런 괴물들이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이 여길 들이닥친다고 생각해 봐라. 크나딜께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 오히려 빅터가 우리를 봐준 거였지.” “봐주다니요? 작전대로긴 하지만 하도 로핀이 당당하게 여길 내놓으라고 요구하길래, 보는 저는 조금 불안했습니다.” 자기가 말하는 걸 옆에서 보는 사람의 심정은 모르고, 카셀이 물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구아닐이나 러스킨 둘 중 하나라도 희생당하는 걸 원치 않은 거다. 그건 아마 대륙에서의 더 큰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고.” 로핀은 입맛을 다시며 크나딜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드래곤은 말없이 구아닐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늦었어, 카셀. 게랄드가 죽었다.” 아즈윈은 차분한 눈으로 카셀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니?”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카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의 칭호를 가진 드래곤과 그랜드 마스터의 칭호를 가진 마법사를 막아낼 때의 모습은 한순간 잃어버리고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흔들리는 어깨를 보던 아즈윈은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아즈윈, 미안....... 게, 게랄드가.......” “아니, 미안. 괜한 말을 했구나. 네가 늦은 게 아니지. 맞아, 그냥 투정 한 번 부리고 싶었어. 잘 와주었어, 카셀. 나의 캡틴.” 게랄드의 장례는 몇몇 레미프들과 론틀로스가 준비해주었다. 론틀로스는 타치셀을 정비하는 바쁜 와중에도 장례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높이 쌓은 나무 위에 게랄드의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올리면서, 카셀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아즈윈은 그의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울던 카셀은 겨우 울음을 멈췄다. “미안해. 네가 더 슬플 텐데, 이런 모습을 보였군.” 불길이 거세져, 둘은 조금 물러나 나란히 앉았다. “괜찮아. 적어도 녀석의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은 있어야지. 그리고 그게 캡틴이면 녀석도 불만은 없을 거야. 나도 울고 싶지만, 울지 않기로 했어. 게랄드가 죽기 전에 그 말을 했으니, 내가 안 울어도 그녀석이 할 말은 없어.” 아즈윈이 말했다. 한참 지난 후에 카셀이 입을 열었다. “좋아했었지?” “.......응. 그걸 최근에야 알았어. 하지만 게랄드는 예전부터 좋아했었나 봐. 그게 싫어.” 아즈윈은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게랄드를 삼킨 불길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밝아졌다. “왜 더 일찍 몰랐을까? 아니, 차라리 왜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 카셀은 위로하려고 그녀의 어깨로 손을 내밀었다가 도로 접었다. 이미 그녀의 앞에서 울어버린 그는 위로할 자신을 잃었다. 아즈윈에게 있어 그것은 차라리 카셀다운 배려였다. 아즈윈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카셀.” “응?” “넌 절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면 마음에만 담아두지 마라.” 카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그가 드러낸 자잘한 감정의 변화를, 아즈윈은 금방 눈치 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구나.” “응.” “다행이다.” 그 말을 해놓고서 아즈윈은 또 한숨을 쉬었다. “남이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건 금방 알아채면서 정작 왜 나는 그러지 못한 걸까?” 아즈윈은 구부렸던 다리를 길게 펴며 물었다. “이제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가넬로크!” 로핀이 뒤에서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큼지막한 고깃덩어리를 가져와 한 조각씩 나눠주었다. “여신께서 말씀하신 대로다. 우리의 예상대로이기도 하고, 빅터도 드러내놓고 목표를 보이기도 했지. 푸트나이에 모즈들을 집결시키고 인간의 세계를 공격하려면 당연한 거지.” “그럼 언제 가넬로크로 떠납니까? 내일?” 카셀이 내키지 않는 듯 고기를 한 입 베어 물며 물었다. “그래야지. 하지만 좀 곤란하군.” “뭐가요?” “우선 가넬로크에는 네가 가야겠다. 그 쪽에 이 위기를 알리고 전쟁 준비를 하려면 캡틴 울프라는 직함이 필요하지. 근데 네가 혼자 갈 수 있냐? 익숙해지긴 했겠지만, 여긴 아직 하늘 산맥이다.” “그건, 그렇죠.” 카셀이 자신감 없게 말했다. “그런 문제도 문제지만, 캡틴이라는 사람이 수하 기사 하나도 두지 않고 움직이는 건 보기에 좋지 않아. 서른 살도 안 된 어린 청년이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고 밝히면 보통을 쫓아내는 쪽이지. 게다가 외부에는 퀘이언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줄 알거든.” “내가 가죠? 뭐가 걱정이에요?” 아즈윈이 예전처럼 쾌활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는 게 사실 제일 좋지.” “그 옷차림으로는 무리일 지도.......” “네 녀석 옷차림이라면 더더욱!” 로핀은 강조한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타치셀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푸트나이의 레미프들 처리하는 것까지 크나딜께서 직접 나서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유능하긴 하나 적대 관계인 라루튼의 대장이 움직이는 것도 곤란하지. 나는 얼마간 여기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명 정도는 내 일을 도와줘야 하니, 아즈윈도 남아있었으면 한다.” “제가요?” “푸트나이가 저항할 경우 앞에 서서 싸울 사람도 필요하거니와, 여러 가지로혼자서 못할 일이 많아.” “그럼 카셀더러 저 레미프랑 단둘이 가란 말이에요?” 아즈윈은 부서진 신전 지붕에 고양이가 달 쳐다보는 것처럼 멍청히 앉아있는 라이를 가리켜 말했다. “글쎄다....... 뭐, 나 혼자 일을 하고 아즈윈이 따라가는 게 안될 일은 아니지.” 아즈윈은 오랜 만에 만난 로핀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고, 카셀을 도와 가넬로크로 가고도 싶었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로핀이 전 하얀 늑대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로핀이 거기에 대해 묻자 그녀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때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레미프들은 ‘거대한 늑대가 나타났다.’ 고 호들갑이었고, 일부는 무기까지 챙겨 들고 있었다. 로핀과 카셀은 같은 생각을 하고서 일어나 그 쪽으로 달려갔다. 거기에 머리가 가슴까지 올라오는 거대한 은빛 털의 늑대가 숲 속에서 나와 광장으로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밤인데도 희미하게 반사되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빛바랜 망토를 둘러쓴 남자가 따라붙어 있었다. 횃불에 반사되어 갈색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에, 레미프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눈초리를 한 그 청년은 아즈윈이 처음 보는 이였다. 그러나 늑대가 위에 태우고 있는 건 분명 세르메이였다. [세르메이!] 아즈윈보다 먼저 알아보고 론틀로스가 달려갔다. 늑대의 등에서 내린 그녀는 론틀로스에게 달려가 세게 포옹했다. 둘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 바빴다. 그때 늑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황빛 횃불을 푸르게 반사하는 로브를 입은 여자로 변했다. 두 가지 색깔을 한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렸고, 곡선을 이루고 있는 얼굴의 모든 선은 아즈윈이 보기에도 굉장한 미녀였다. 그녀는 검의 고수나 보일만한 조용한 발걸음으로 로핀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이야기는 여신, 사-나딜께 모두 들었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로핀은 고래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정말 딱 맞는 시간에 도착해 줬구나, 타냐. 아니,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인 건가?” 로핀의 옆에 있던 카셀은 머뭇머뭇하다가 아즈윈을 보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 다가가 그녀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걱정했어요, 타냐.” 타냐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저도 걱정했습니다.” 카셀은 그녀의 냉랭한 반응에 주춤하더니, 형식적으로 물었다. “루티아는요?” “무사합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나,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겠지요.” 타냐는 부드럽게 그의 손을 놓고 로핀에게 말했다. 로핀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정확한 표현이군. 그보다 같이 온 저 친구는? 또 다른 하얀 늑대인가?” 뒤에 있던 청년은 고개를 살짝 꺾은 채로 로핀을 바라보다가 카셀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카셀은 다가가 그의 손을 소리 나게 부딪쳤다. “왔구나, 제이메르!” 카셀이 인사하는 동안 타냐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사실은 로일이나 던멜 울프 두 사람 중 한 명을 데려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던멜은 크게 부상 중이었고, 던멜이 의사소통을 하려면 로일이 필요했으므로 우선 두 사람은 루티아에 두고, 대신 제이메르를 데려왔습니다.” “대신이라는 말은 너무 하지 않나?” 제이메르가 툭 내뱉었다. “그렇습니까?” 타냐는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중간에 낀 카셀은 난처한 미소로 말했다. “여전하군, 두 사람은.” 로핀은 아즈윈의 옆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심호흡을 했다. “아즈윈, 내일부터 내 일을 도와라. 아쉬울 테지만, 카셀은 저 둘에게 맡기는 게 좋겠군.” “예, 생각해 보니 저도 잠깐 동안은 여기 남아있는 게 좋겠습니다.” 아즈윈은 괜스레 불타는 장작을 돌아보았다. 아침이 되자 카셀, 타냐, 제이메르, 라이 넷을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일행이 정해졌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다며, 로핀은 하늘 산맥을 넘어가는데 필요한 물건을 모두 챙겨주었다. “그래도 이 중 셋은 하늘 산맥의 마력에 당하지 않으니 그나마 이동이 늦지는 않을 거다.” 아크랜드 안에서라면 누구 못지않은 길 안내자인 제이메르는, 졸지에 길치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제이메르는 아크랜드로 돌아간다는 말에 들떠 있어 그다지 화도 안냈다. 일행을 기다리게 두고 로핀은 카셀만 따로 불러다 말했다. “잊지 마라. 가넬로크에서 만나게 될 가장 큰 적은 빅터나 구아닐이 아닐 것이다.” “압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 그랬지.” “전....... 아직도 게랄드가 죽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를 화장시킬 때 울었지만 어딘지 그게 거짓된 울음이라는 생각마저 들어 마음이 아픕니다.” “그건 슬퍼할 시간을 따로 주겠다는 게랄드라는 친구의 배려일거다. 그런 친구가 가장 못된 친구지. 먼 훗날 이 때의 일을 추억처럼 회상할 무렵, 그 친구는 불쑥 네 기억 속에 나타나 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게랄드의 추억으로 울 수 있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 나도 그런 친구가 있었고, 그 눈물을 전혀 아깝지 않더라.” 로핀은 카셀의 어깨를 툭 치며 얘기를 마무리 지으려다 덧붙였다. “아, 그리고 저 제이메르라는 친구 말인데, 대체 누구냐?” “무슨 뜻인가요? 같이 만나 겪은 얘기라면 간략하게나마 해드린 걸로 압니다만.......” 로핀은 그새 또 타냐와 뭔가로 말다툼을 하는 제이메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적절하게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란티아에서 겪은 너의 모험 중에 타냐가 나타난 시점이란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이메르는 대체 왜 가장 적절한 시점에 나타난 거냐?” 카셀은 레드 게이트를 통과해 빌리의 포로로 끌려가던 순간, 나타나준 제이메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지 않느냐? 나타났다면 당연히 울프의 기사 중 한명이 타냐를 따라왔어야지. 그렇지 않아? 그래서 난 사실 밤새 거기에 대해 조금 생각해 봤다.” “제이메르는 그냥 절....... 위기에서 구해준 멋진 친구입니다.” “그리고 아이린의 제자라며? 그게 단순한 우연이라고? 내내 제자 찾기에 실패한 녀석이 이런 중대한 시기에 가넬로크에서 느닷없이 아란티아로 건너온 청년을 만나 제자로 삼아?” “그 얘기도 해드리긴 했습니다만, 별로 중요도를 담아서 하지는 않았지요. 그게 그렇게도 이상한 일인가요?” “음.......” 로핀은 나직이 신음하다가 말했다. “천 년의 역사 동안 하얀 늑대라는 존재가 다섯 명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울프 기사단의 숫자도 가장 많지. 아마 퀘이언은 이 넘쳐나는 인재들을 보고 뭔가 커다란 위험이 다가온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하얀 늑대들 다섯 명을 뽑는 걸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섯 명이 카모르트라는 외국에서 캡틴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 캡틴이 위험에 빠진 걸, 하얀 늑대가 아닌 제이메르라는 청년이 구해준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카셀은 당황하며 대꾸했다. “카셀, 이 말을 명심해라. 나디우렌께서 하신 말씀을 되새겨라. 아란티아는 스스로를 지키는 나라다.” “그런.......! 제이메르가 나타나서, 게랄드가 죽었다는 겁니까?” 카셀이 놀라 소리 질렀다가, 뒷부분에서 목소리를 죽였다. 다행히 제이메르는 타냐와 티격태격 하느라 여기 소리를 못 듣고 있었다. “아니, 그 반대다. 하얀 늑대가 한 명이 줄어들 것을 감지하고 그 자질을 가진 자를, 아란티아는 불러들인 거다.” 카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로핀은 픽 웃으며 카셀의 어깨를 탁탁쳤다. “이렇게 말한다고 우리 같은 인간이 바꾸고 어쩌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결국은 최선을 다하라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로핀.” 카셀은 웃으며 대답하고, 물었다. “저, 아즈윈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데요.” “아까 세르메이가 위로해 준다고 방에 들어갔는데, 둘 다 나오지 않는구나. 뭐, 조만간 만날 수 있을 테니. 인사는 내가 대신 전해주마. 서둘러라.” “예, 그럼 로핀,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탁드린 것 있죠?” “사-나딜께 하는 부탁 말이냐? 이미 어제 크나딜께 전달해 드렸다. 그러니 이미 아셨을 거다. 걱정 말거라.” 로핀은 담배 파이프를 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카셀은 돌아와 타냐의 옆에 섰다. 타냐는 로핀이 전해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빨리 걸으면 일주일 정도로 가넬로크 국경에 도착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디우렌의 증표가 있으니 그보다는 빨리 갈 수 있겠죠. 출발할까요?” 타냐는 제일 앞서 걸었고, 카셀은 얼른 옆으로 따라붙었다. 제이메르와 라이도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타냐.......” “말씀하십시오, 카셀.” 그러나 카셀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타냐는 머뭇거리는 그를 대신해 말했다.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어떤 위로의 말을 해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하지만.......” 타냐도 결국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카셀은 조용히 타냐의 손을 잡았고, 타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뭘 둘이 심각하게 얘기하나 싶던 제이메르는 뒤에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 저런 면이 있었나, 저 두 녀석? 둘 사이에 무슨 일이있.......” 자기도 모르게 옆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렸던 제이는 머리 하나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라이의 얼굴을 보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어제부터 물으려다 말았는데....... 너 누구야? 너도 엘프냐?” 제이가 물었다. 라이는 제이를, 눈동자만 돌려 내려다보더니 레미프의 언어로 중얼거렸다. [내 기더에 낄 수 없는 녀석이 끼어 있군.] 제이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욕한 거냐?” 대답해줄 리 없는 라이였다. 제이는 투덜대다가 곧 혼자 여행하던 몇 달 전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떠난 지 두 달 만에 돌아가게 되는 고국이었다. 제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더욱 입을 굳게 다물었다. 카셀 역시 말이 없었다. 가넬로크....... 그 곳은 아버지의 마지막 여행지기도 했다. 에필로그 아즈윈은 레미프들이 내준 거친 감촉의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기로 한 타치셀의 여자 레미프가 조심스레 음식을 놓고 나갔지만 그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내일 카셀이 일찍 떠날 테니 어서 자고 일어나 그를 배웅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자려 했지만, 잠들지 못했다. 로핀이 뿌려준 마법의 가루로 몸의 고통은 거의 남지 않았다. 카모르트에서 메이루밀을 만나 그 가루로 치료 받았을 때는 몸이 날듯이 개운했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게랄드를 화장시키며 날려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즈윈은 그게 누구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 레미프는 다가와 아즈윈의 침애 옆에 앉았다. 돌아보니 세르메이였다. [아즈윈.] “세르메이. 아아, 몸은 괜찮아? 고생 많았지? 여기 앉아.” 세르메이는 아무 말 않고 그녀가 내준 자리에 앉았다. 얼굴에는 근심이 많아 보였다. 아즈윈은 손을 내밀었다. “어이, 너 설마 위로하러 온 거냐? 됐어. 나는 그런 걸로 울지 않아. 이런 걸로 울어버리면 날 위해 죽은 그 녀석의 명예가 뭐가 되냐? 씩씩하게 살아줘야.......” 세르메이는 아즈윈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더니 그 손으로 이마를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자기의 이마를 가리켰다. 아즈윈은 은근히 고집 있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수긍했다. 세르메이는 다가와 아즈윈의 이마에 머리를 댔다. 그리고 다시 그녀와의 의사소통이 시작되었다. [아즈윈, 넌 지금 너무도 괴로워하고 있어.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이런 것도 괴로워하는 걸로 보이니, 레미프들 눈엔? 녀석은 나한테 울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조금 참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렇다고 죽을 만큼 괴로운 것도 아니야. 세르메이, 이 대화법으로 그런 얘기 해봤자 난 집중하지도 못할 테니 깨어나면 잊어버릴 거라고. 위로할 거면 됐어.” [아즈윈, 넌 뭔가 잘못 알고 있어. 나는 게랄드의 기억과 너의 기억이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계속 끌려 다니며 말을 하지 못했어. 우리는 서로 얘기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으니까. 그래서 고민했어. 너는 지금도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으니, 이걸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러기에 꼭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대체 그게 뭔데? 바깥의 시간은 많이 흐르고 있어. 자두지 않으면 내 캡틴이 떠나는 것도 못보고 보내게 될 거야. 어서 말해줘.” [말이 아니야. 나는 너의 기억을 ‘보여주고’ 싶어.] “내 기억을 왜 굳이 너를 통해 봐야 하지?” [봐야 해!] 아즈윈은 그녀의 귀여운 고집에 웃었다. “그래 봤자 게랄드의 추억이겠지. 좋아. 그녀석의 추억 하나쯤 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 세르메이는 성급하게도 아즈윈의 의식을 밖으로 밀어내버렸다. 그녀의 기억은 단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보이는 모든 게 빨랐다. 게랄드는 피를 흘리며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뭔가 말하며 죽었다. 그러나 그가 뭘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네이슨과 싸웠다. 그 전투는 휙 스쳐가는 지금 봐도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또 한 번 새겼다. ‘기다려라, 반드시 구하러 가겠다.’ 하푸에서 그가 외쳤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기억 속을 맴돌았다. 동굴 안에서 가졌던 그와의 시간은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런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없다면......., 적어도 좀 더 일찍 가졌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즈윈, 넌 아마 기억 못할 테지만, 네가 날 좋다고 말한 가장 처음 순간에 나는 이미 많이 넘어갔었다. 그걸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여기서 선을 넘어버리면, 난 정말 못 버틸 거야.’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이런 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렇지, 게리? ‘내가 좋다고 말한 처음 순간이 언제지?’ 아니, 적어도 후회가 덜 했을까? 아니면 고통이 깊었을까? ‘하긴 넌 기억력이 부실하지. 만난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편이고.’ 하늘 산맥을 헤매던 당시에 했던 그의 말이 갑자기 흘러가는 기억의 표면 위로 불쑥 떠올랐다. 둘은 이제 카모르트에서 카셀을 만나고 있었다. 카셀 앞에서 했던 기사의 맹세는 아직도 유효했다. 그는 모두의 캡틴이었다. 또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아란티아였다. 둘은 모두 하얀 늑대가 되어 같이 실전처럼 연습을 했고, 그는 농담처럼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널 좋아하고 있었던 건 내가 먼저였어.’ 아즈윈은 그 말에 항상 저항했다. ‘내가 먼저였어!’ ‘어라? 기억하나?’ ‘응? 뭘?’ 항상 둘 사이의 대화는 농담처럼 지나갔으니 이런 자잘한 것들까지 기억할 수는 없었다. 아즈윈은 세르메이가 이런 걸 보여주려고 그랬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천 번째 울프 기사단의 테스트를 동과했을 때 만났던 이는 게랄드였다. ‘이름이 뭐야? 난 아즈윈이다.’ ‘난 게랄드다. 다들 날 불의 용병 게랄드라고 부르지.’ 그녀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용병 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잊으려고 노력했던 편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렇게 하는 게 편했다. ‘무기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이름 불려 나온 녀석들은 얌전히 돌아가 자기 하던 일이나 마저 해. 그렇지 않으면 내 불도끼 맛을 보게 될 테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우스워?’ 게랄드가 따지듯 물었다. ‘그럼 넌 불도끼라는 말이 안 우스워? 그거 웃으라고 한 말 아니었어? 불도끼가 뭐냐, 불도끼가?’ 게랄드도 웃었다. ‘맞아. 웃으라고 한 말이었어. 그런데 왜 아무도 안 웃는지 난 항상 그게 궁금해.’ 그게 처음 만난 게랄드였고, 아즈윈은 그때부터 그가 마음에 들어 훈련장에서도 항상 그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곤 했었다. 무의식적으로 살펴보는 그 공간 안에 항상 게랄드가 있었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언제나 자기 쪽에서 먼저 손을 들어주었다.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 사랑이라는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망가뜨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친구. 그래서 게랄드고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던 것이고, 아즈윈도 그를 애써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게 해답이었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세르메이, 이걸 보여주고 싶었구나. 그래. 어쩌면 나도 이런 걸....... 의식을 전달하는 세르메이의 의사소통은 너무도 과격하여 아즈윈의 언어조차 차단되었다. 세르메이는 거의 강제로 아즈윈의 의식을, 회상하는 기억 밖으로 밀어냈다. 그녀의 기억은 그 첫 번째 테스트를 넘어 용병 생활까지 거슬러가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만났던 남자들, 마음에 들던 안 들던 일단 좋아하는 척 해서 마음을 떠보았던 남자들, 때론 많이 좋아했고, 때론 덜 좋아했던 남자들이 모조리 기억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게랄드를 추억하는 와중에 보이는 그런 기억들은 그녀에게 괴로움만 주었다. 그만둬, 세르메이! 이제 충분해. 위로하는 것도 필요 없고, 괴롭히는 건 더더욱 필요 없어. 무슨 짓이야? 그러나 세르메이가 보여주는 기억들의 모습은 점점 느려졌다. 그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알아들을 정도로 그것들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무거운 추억의 실체를 두고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그녀는 초원 위에 피 묻은 칼을 들고, 투구를 쓴 채 홀로 서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로핀의 가르침을 끝내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처음 들어갔던 용병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용병대에서 그녀는 첫사랑이라고 할 만한 덱밀을 만났었고, 덱밀은 죽었다. 그러나 기억은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 세르메이가 보여주려는 기억의 종착점은 바로 이 곳이었다. .......세르메이, 뭘 보여주려는 거야? 이제 그만 둬. 보고 싶지 않아. 아즈윈이 속한 용병대는 적이 고용한 또 다른 용병대를 만나 패배했다. 아즈윈은 제일 앞에 나서서 싸워 엄청난 적을 해치웠으나 종국에 가서는 적에게 포위당했다. 그때 적의 캡틴으로 보이는 검은 투구를 쓴 남자가 모두의 앞에 나서서 말했다. “잘 싸우긴 하지만, 포기 하시지?” 그녀는 지치지 않는 젊음과 만용을 무리고, 칼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포기하면 살려줄 거냐?” 여태 동그란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던 그녀가 말하자, 적 용병들은 그 목소리에 전부 놀랐다. 모두 그 놀라운 검술을 보고 호리호리한 체형일 뿐인 ‘남자’ 라고 생각했었고, 사실 그 세계에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기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주제에 그 남자는 명령을 내렸다. “투구 벗어봐.” “싫어!” “어차피 졌잖아.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주지.” 아즈윈은 약간 고민했다가 투구를 벗었다. 그녀의 외모를 보고 많은 용병들이 군침을 흘렸다. 남자를 좋아하긴 해도 저런 시선은 정말 소름이 끼쳤다. 용병들의 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좋다. 나와 오늘 하룻밤만 자면 살려서 보내주지.” 아즈윈은 여기서 목숨 걸고 싸운다는 말을 할 정도로 실력에 자신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을 피해 나중을 택해 싸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게 실패한다 해도, 목숨의 대가가 하룻밤 잠자리라면, 그게 첫 번째 경험이 될지언정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하룻밤이면 되냐?” 그렇게 생각해 버리자. “된다.” 다른 용병들이 치사하다며 우우 하고 소리 질렀으나, 대장은 닥치라고 한 소리 했다. “그럼 좋다.” 아즈윈은 말했다. 그들은 가가와 아즈윈의 팔을 묶어 그들이 막사를 친 곳까지 반나절이나 끌고 갔다. 그들은 그녀는 막사에 묶어놓고, 밤이 될 때까지 버려두었다. 촛불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밧줄을 풀려고 안간힘을 써보았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익숙한 용병들이 묶어놓은 밧줄이, 끙끙댄다고 풀릴 리 없었다. “됐다, 됐어. 안 그래도 돼.” 막사의 출렁이는 커튼을 젖히고, 용병 대장이 들어왔다. 그는 작은 촛불만 하나 켜더니 아즈윈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웠다. 아즈윈은 오히려 당황하며 물었다. “이봐, 안....... 건드리냐?” “나랑 하룻밤만 자면 된다고 했잖아. 거기서 자. 내일 보내주지.” 아즈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잔다는 게 그 의미였냐?” “그럼 넌 뭘 바랬냐? 치사하게 다 잡은 포로 가지고 노는 건 질색이다. 내 친구들도 알아. 우린 너네 용병대처럼 이상한 족속들 아니다.” 자기가 속한 곳의 악명이 높았으니 그녀는 변명도 못했다. 그냥 그녀는 다른 용병들도 다 그런 줄 알았으니 이 남자의 행동이 의외였을 뿐이었다. “오해했다. 미안하군.” 아즈윈이 사과하자, 그는 부스럭대며 일어났다. “닥쳐! 네가 죽인 동료들이 얼마나 많은 줄은 알고 하는 소리냐? 생각 같아선 그대로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 네 몸뚱이 한 번 파는 걸로 그 피를 씻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잘난 척하지마.” 아즈윈은 그 말에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어둠 속이라 분노하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촛불의 밝기로는 붉어진 얼굴이 드러나지 않기에, 또한 다행스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원한다면 죽여라.” 아즈윈은 평소 하던 대로 괜히 성질을 부렸다. “맞아. 사과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널 죽인다고 될 일도 아니지.” 그는 다가와 아즈윈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촛불에 잠깐 비친 그의 얼굴은 의외로 젊었다. 그는 다시 돌아가 침대에 앉았다. “거기 옆에 물 받아놓은 바가지 있으니 그걸로 좀 씻고, 내 옆에 와서 자라.” 아즈윈은 묶였던 부분을 주물럭거리며 물었다.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 안하나?” “네 실력이 좋긴 하지만, 맨 손으로 날 죽일 정도는 못되지.” “자신 있나 보군.” “시끄러워.” 그는 침대에 누워 진짜로 잠들어버렸다. 그녀는 받아놓은 물로 소리 나지 않게 씻고 옆에 걸어놓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댔다. “뭐냐?” 졸린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건....... 그러니까 목숨 살려준 보답이 될 수 없을까?” 바깥에 피워둔 모닥불의 붉은 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있다가 그녀의 손을 세게 움켜잡았다. “그러고 싶으면, 그냥 그러고 싶다고 말해!” 아즈윈은 뒤로 움찔 하며 물러났으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강하게 압박하는 그의 목소리는 선생님을 제외하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를 겁주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필요 없다. 난 날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억지로 봉사 받을 정도로 굶주리지 않았어.” “그게 잘 모르겠지만, 널 좋아하는 것 같다!” 아즈윈은 마침내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 것에 속으로 환호했다. ‘얏호!’ 그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지만, 일단 그녀는 끌어안은 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밤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날이 밝기 전에 떠라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즈윈을 조용히 뒤에서 끌어안으며, 그가 말했다. “어......., 왜?” 아즈윈은 당황하며 물었다. “그냥 떠나라. 난 나만의 목표가 있다. 그걸 이루기 전까지......., 그러기 전까지 누군가에게 빠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오늘 하룻밤만으로도 나는 너에게 빠질 것 같다. 그러니 떠나라.” 아즈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그러지. 나도, 나만의 목표가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나 역시 사랑 같은 거에 빠질 생각은 없어.” “무슨 목표냐?” “울프 기사단!” “네 실력으로 그런 게 가능할까?” “원래 말투가 그런 식이야? 이럴 때는 농담으로라도 가볍게 넘기는 거다! 됐어. 이제 나도 너에 대한 흥미가 없어졌으니, 너도 관심 꺼. 오늘밤도 한 번 즐긴 거뿐이야. 앞으로 겪을 수많은 유흥의 첫 번째였을 뿐이야. 그게 다다. 그리고 시작치고는 각별히 형편없었어.” 그는 아즈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미안하게 됐군. 혹시라도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때는 잘해주도록 하지.” 모른 척하는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허풍을 알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주는 선생님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약속대로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옷을 입고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녀는 새벽의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하다가 용병들의 막사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누군가 서 있었다. 윤곽만 보이는 그 모습을, 그녀는 금방 알아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손을 모으고 큰 소리로 외쳤다. “평생 후회할 거다, 이 멍청한 자식아!” 그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그는 멍청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다시금 크게 다가왔다. 그때 그 남자는 온 몸에 피를 흘리며, 아즈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촛불에 비춘 그 그림자와 묘하게 일치하고 있는 모습에 아즈윈은 목이 메었다. ‘안돼, 세르메이. 보여주지 마.’ 그녀는 무서워졌다. ‘보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으면 그냥 그렇게 하라고 말하던 그 젊은 용병의 얼굴은 이제 나이가 들어 수염이 났고, 그때보다 훨씬 유쾌하게 목소리가 바뀌었으며, 그때보터 훨씬 잘 웃을 수 있는 남자기 되어 있었다. 그 용병들의 대장은 침대 위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해준 따뜻한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힘겹게 열린 입 모양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했던 그 입 모양을 지금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울지 마라, 아즈윈.’ 아즈윈은 눈물을 터트렸다. 게랄드가 죽었던 바로 그 순간에도 울지 않았던 그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것이 게랄드가 아즈윈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해주고 싶은 게 정말 많았는데......., 미안하다.’ “아아!” 아즈윈은 소리를 지르며 세르메이를 끌어안았다. 기억은 끊겼으나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세르메이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즈윈은 흐느끼며 말했다. “그 녀석, 알고 있었어. 몇 년이나 숨기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 내가 기억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그렇게 알아주지 않았는데도 기다리고 있었어. 비겁한 놈! 못된 자식.” 아즈윈은 소리 내어 울었다. 이미 아침은 지났고,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아즈윈은 그 서러운 빛에 참았던 것이 쏟아져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밖에서 그녀를 위로하려고 들어가려던 로핀은 조용히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흐느기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어, 게리.......” 도서명 : 하얀 늑대들 11권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지은이 : 윤현승 출판사 : 파피루스 출판년도 : 2004년 12월 31일 <지은이소개/윤현승> 윤현승 1978년생. 대표작 <다크문> <헬파이어> <흑호> 홈페이지 : http://hadeshome.com 이메일 : greathades@hanmail.net 차례 부록-등장인물 소개 및 용어정리/6 -2부 날짜별 상황정리/11 프롤로그/15 1. 레오피오의 행정관/ 25 2. 한밤의 사냥꾼들/ 43 3. 원로의원 롬노르/ 69 4. 로크의 의회/ 95 5. 나르베니/ 131 6. 아버지의 과거/ 161 7. 데라둘을 돕는 자/ 197 8. 아로크의 탑/ 235 9. 붉은 장미의 여백작/ 271 10. 두 남자의 약속/ 295 11. 리마 성/ 319 <소개 글, 서평> 카모르트, 처음 카셀이 하얀 늑대들과 즈토크 워그를 만났다. 아란티아, 제이메르와 타냐가 카셀과 합류했다. 하늘산맥, 감춰져 있어야 할 고대의 적이 일어났다. 가넬로크, 이제 이 모든 것의 마지막 충돌이 있을 것이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위협하는 공포 앞에 선 인간들의 마지막 저항. 등장인물 소개 및 용어 정리 **아크랜드-인간이 사는 땅, 론타몬, 아란티아, 이로피스, 가넬로크, 카모르트와 기타 작으 나라들로 이루어짐. **아란티아-다섯 개의 게이트와 그 게이트를 지키는 다섯 명의 하이로드가 지배하는 나라. **아란티아의 5개 게이트 화이트 게이트-새나디엘 골드 게이트-비노클라스 레드 게이트-아라딜 그레이 게이트-큐디노르 블루 게이트-탈룬드 **울프 기사단 캡틴 울프-카셀 노이. 카모르트 루우룬 마을 출신. 농부 에밀의 아들. 하얀 늑대들-쉐이든, 로일, 던멜, 아즈윈, 게랄드 이전 하얀 늑대들 -퀘이언 : 현 여왕 수호 기사. 베나 실크의 계승자 -로핀 : 배나 에실크의 주인 -아이린 : 베나 에사르크의 계승자 -메이루밀 그란돌-이전 여왕 수호 기사 르고-아란티아 울프 기사단 전속 대장장이 현 울프 기사단-프란츠, 배롤, 자이논, 에릴, 브나타이돌, 알렉스, 실디레, 말라 등등 슈벨-울프 기사단의 2차 테스트에서 불합격, 이후 돌아옴. **론타몬-10년전 전쟁을 일으킴.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지만 대부분 불모지. **웰치-과거 익셀런 기사단의 캡틴 **빌리-현 익셀런의 기사 **익셀런 제 1기사단 -캡틴 빅터, 네이슨, 홀튼, 포웰, 스탠리, 레드워드, 베이트, 에드몬드, 버크만 **카모르트 국왕-샤를 3세 누벨 덴 뤼미에르 백작-검은 사자 백작, 레앙의 영주 바딩-라이온 기사단의 캡틴 바르다 위그 쟌스테인 백작-붉은 장미 백작, 덴모주의 영주 라틸다 쟌스테인-붉은 장미 백작의 딸 12쏜즈-붉은 장미 백작의 기사단, 캡틴 링케, 네프, 크라브지크드뤼포, 알랭, 데미로프, 타르콘트 등 잔 말로 에노아 후작-암브루의 영주 휴스펠 데이릭-팔콘이라는 별명의 의적. 현 왕실 기사단 캡틴 **블랙풋-어쌔신 길드 제라르-블랙풋의 길드 마스터 칼스텐-어쌔신 마스터 그 외-헤더, 발락, 리켄, 옌스, 메첼 **가넬로크 집정관-루에머스, 나르베니, 논돌린 롬노르-과거 집정관. 현 원로 의회 의원 달리아-롬노르의 딸 데라둘 마치-드래곤 기사단 캡틴 드래곤 기사단-브란더, 루시우스, 텐드로스, 그라쿠스 느하로우-로크 경비대 캡틴 리펜다스-그랜드 로크 의장 세레스머스-레오피오의 행정관 타르케르-앤발디의 행정관 **하늘 산맥-레미프들이 사는 딸. 라든, 만디르, 란도르, 타치셀, 라루튼, 푸트나이 등의 나라로 이루어짐 **루티아-화이트비가 지켜주는 마법사들의 도시. 루티아노-루티아의 마법사 회의 러스킨-43대 루티아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44대 루티아 그랜드 마스터 루티아의 마스터-에틀리, 저스틴, 루더, 필립, 골베인, 데다인, 타냐 케인스윅-루티아의 마법사 학교. 케인스윅 선생-플로라. 하이디, 베르포드 **레미프-하늘 산맥에 사는 종족. 하얀 피부의 즈비 족과 검은 피부의 푸보에 족으로 나뉨. 즈비 레미프:라든, 란도르, 만디르 후딘틴-라든의 홉트 시나비아-라든의 무녀 판커틴-라든의 캡틴 퍼거스나이-만디르의 캡틴 라이-라든의 범죄자. 가장 빠른 날개로 지목됨. 프보에 레미프 : 푸트나이, 타치셀, 라루튼 세르메이-라루튼의 공주 론틀로스-라루튼의 장군 **하푸 : 즈비 족과 프보에 족을 경계 짓는 깊은 계곡 **드래곤-하늘 산맥의 지배자이자, 레미프들의 신 사-나딜 -여신 나디우렌. 하늘 산맥의 주인 사-크나딜 -드랜곤들의 마스터. 레-논틸-라든 -논틴의 군주 레-가넬-란도르 -란도르의 군주 카-푸타이 -푸트나이의 군주 마-드로크 -타치셀의 군주 카-구아닐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따르는 검은 드래곤 2부에서의 날짜정리 1일 마스터 데다인-나디움에 루타아 원군 요청. 퀘이언, 하얀 늑대들에 한정하여 원군 수락. 2일 카셀-하야 늑대들 다섯명과 함께 블루게이트 통과. 3일 - 4일 카셀-네나드로스 평원 도착. 빌리-그레이 타운에서 지옥검과 슈벨을 만남. 제이메르-블루 타운에서 아이린 만남. 5일 카셀-그레이 게이트 통과, 하이로드 탈룬드 만남. 제이메르-아이린과 함께 블루 게이트 통과. 6일 빌리-이름을 모르는 검은 기사와 조우. 지옥검 죽음. 7일 폭우가 쏟아짐 카셀-동행을 잃어버림. 빌리-블랙, 회색 로브의 마법사와 만남. 제이메르-아이린과 네나드로스 평원에 도착. 쉐이든-네 명의 하얀 늑대들은 마스터 데다인과 하늘 산맥으로 떠남. 그후 혼자 남아 카셀을 기다리다가 마법사에게 공격당함. 8일 카셀-하이로드 탈룬드와 동행. 제이메르-그레이 게이트 통과. 쉐이든-은빛 털의 늑대에게 구조 됨. 카셀을 구하기 위해 출발. 아즈윈, 게랄드-하늘 산맥에서 실종. 9일 카셀-빌리와 만남. 울프의 기사 배롤 과 블랙 싸움. 카셀은 인질이 됨. 제이베르-지옥검의 시체 발견. 쉐이든-카셀 추적 중. 던멜-로일과 함께 루티아 도착. 루티아노 개최. 아즈윈-기습당한 수 게랄드와 함께 헤매는 중. 10일 카셀. 빌리-은빛 털의 늑대를 만남. 제이메르-아이린과 함께 하이로드 탈룬드를 만남. 쉐이든-카셀의 흔적 추적 중. 던멜-루티아 수비 중. 11일 카셀. 빌리-레드 게이트에서 전투. 제이메르-레드 게이트 통과, 아이린과 헤어짐. 카셀 찾아 단독 행동. 쉐이든-저녁에 레드 게이트 통과. 던멜-새벽에 루티아로 모즈들 습격해옴. 마스터 에틀리 죽음. 12일 제이메르-빌리의 마차를 공격. 블랙과 첫 번째 대결후 후퇴. 쉐이든-회색 로브의 마법사와의 싸움으로 부상당한 타냐를 찾아냄. 던멜-모즈들의 총공격 대비 중. 밤에 카구아가 나타남. 13일 카셀-빌리에게서 탈출. 제이메르와 만남. 쉐이든-타냐를 치료함. 던멜-숲에 괴물들 모습이 사라짐. 14일 카셀, 제이메르-산맥의 경계를 따라 골드 게이트를 향해 이동. 쉐이든-타냐와 함께 골드 게이트로 향함. 던멜-모즈들 총공격으로, 루티아의 다운서치를 점령당함. 15일 쉐이든-블랙의 흔적을 발견. 수벨과 만남. 제이메르-빌리, 슈벨과 만나 전투. 블랙과 다리 위에서 대결. 쉐이든과 타냐, 카셀과 합류. 카셀-저녁에 새나디엘 여왕과 퀘이언을 만남. 던멜-루티아노에서 데다인을 아란티아로 보내기로 결정. 아즈윈-드래곤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추적함. 브레스톤에서 묶여 있는 세르메이를 구출하려다 공격당함. 16일 빌리-부상으로 의식을 잃음. 카셀-울프 기사단과 만남. 저녁에 기사들 파티. 여왕과 대면함. 제이메르-르고로부터 칼 얻음. 데다인-새벽에 아란티아로 출발. 아즈윈-세르메이, 론틀로스와 만나 그들의 일을 도와주기로 결정. 17일 빌리-되살아난 익셀런의 기사들과 함께 골드 게이트 공격. 카셀-타냐와 도서과에서 익셀런의 비밀을 알아냄. 밤에 칼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감. 제이메르-빌리에 앞서 찾아온 슈벨과 대결. 던멜-데다인을 의심하는 케인스윅의 학생들을 만남. 아즈윈-프보에 피미프들의 공격으로 론틀로스 실종. 18일 새벽에 화이트 게이트 전투! 카셀-데다인, 타냐, 제이메르와 함께 루티아로 떠남. 밤에 카-구아닐의 공격으로 일행과 헤어짐. 던멜-모즈들에게 마법이 통함. 아즈윈-세이메이로부터 죽음을 예지받음. 실종된 론틀로스가 돌아옴. 19일 던멜-플로라가 마법으로 모즈들을 공격함. 제이메르, 데다인 같이 합류. 타냐-카셀의 흔적을 처적하여 레미프의 나라 라든에 이름. 로핀 만남. 카셀-레미프들의 회의 끝에 논틸을 찾으러 가기로 결정. 시나비아, 판커니, 라이가 팀에 합류. 아즈윈-드래곤의 성지를 찾는 중, 게랄드와 햇불 두 개의 시간 동안 같이 보냄. 20일 던멜-마지막 루티아노에서 루티아를 버리기로 합의. 러스킨과 화이트비 옆에서 대화. 타냐-새벽 논틸의 던전에 도착했으나 드래곤은 살해당해 있음. 다시 라든으로 돌아가다가 밤에 퍼거스나이와 만남. 일행은 시나비아, 판거틴과 헤어져 하푸로 출발. 아즈윈-게랄드, 세르메이와 헤어진 후 레드윈드에게 사로잡힘. 21일 던멜-루타아의 마지막 전투. 네이슨과 대결. 타냐-익셀런 제1기사단 레드워드와 전투. 카구아의 공격을 피하다가 카셀과 함께 하푸 밑으로 떨어짐. 봉인을 품. 크나딜 출현. 타냐는 다시 루티아로 떠남. 게랄드-세르메이와 함께 크나딜의 동굴에 도착. 아즈윈-잡혀서 끌려가는 중. 22일 던멜-마스터 데다인 죽음. 익셀런의 네이슨과 대결. 타냐-루티아로 도착하여 퍼거스나이의 레미프 군대에 합류. 루티아에서 모즈들과 전투. 카셀-여신 나디우렌과 만남. 세르메이로부터 게랄드와 아즈윈의 위기를 들음. 아즈윈-타치셀에 잡혀 있음. 23일 아즈윈-게랄드와 네이슨 죽음. 아즈윈은 빅터와 대결. 카셀-타치셀에 합류하여 아즈윈과 재회. 빅터, 구아닐과 러스킨을 데리고 후퇴함. 타냐와 제이메르 합류. 24일 카셀, 타냐, 제이메르, 라이-가넬로크로 떠남. 프롤로그 눈 섞인 바람이, 깨진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곳은 바닥도, 벽도, 천장도 모두 얼음인 얼음성의 맨 꼭대기 방이었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얼음 조각들이 문자 그대로 살갗을 찢었다. 거기에 뺨을 메여 흐르는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으나, 검을 쥐고 선 한 팔의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옆에서 창을 든 또 다른 기사의 어깨에서 흐르는 피는 바닥에 떨어져 얼음을 녹였다가 금새 얼음과 함께 얼어붙었다. 두 기사의 앞에 선 마법사의 지팡이가 달빛마저 차단하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법사는 방 안에 그려진 푸른 원의 중앙에 서 있었다. 그 원의 끄트머리에, 늙은 남자가 미라처럼 말라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인간이라 보기 힘든 이 위대한 힘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헛수고다.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나를 죽일 수는 없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 입은 열리지 않았으나 늙은 남자의 사악한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와 두 기사의 뒤에는 칼날을 바닥에 꽂은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부상을 입었는지 앉아있던 자리가 흘러내린 피로 얼어붙어 있었다. “베나 에사르크가 그 어둠의 저주를 깨뜨려줄 것이다.” 그녀는 세 남자를 지나쳐 달려가 늙은 마법사를 베었다. 동시에 늙은 마법사도 숨겨놓은 마지막 암흑의 힘으로 손을 휘둘렀다. 하나의 붉은 섬광이 늙은 마법사의 몸을 베었으나, 그녀 역시 비명을 지르며 칼을 놓쳤다. 무겁게 버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얼음 바닥에 떨어졌다. 뒤에서 그녀의 마지막 공격을 엄호해주었던 두 기사가 달려가 그녀를 보호했다. “루밀, 내 등을 견제해라!” 로핀이 창을 든 메이루밀에게 소리치며 쓰러진 그녀의 부상 정도를 살폈다. 그녀의 핏기없이 하얀 목에서 이어진 상처는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배까지 가르고 있었다. 하얗에 보이던 내장이 금방 붉게 물들었고, 곧 흘러나오는 피가 그녀의 배와 바닥을 적셨다. “아이린.......” 성 전체에 봉인을 걸어두어 늙은 마법사를 묶어두었던 테일드가 놀란 눈으로 아이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핀은 베나의 검에 두 동강 난 얼음 성의 군주를 가리켰다. “테일드! 녀석이 달아난다.” 죽은 줄 알았던 얼음 성 군주의 몸에서 피어 오른 검은 연기가 뱀처럼 꿈틀대며 성의 깨진 창문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테일드는 로핀의 다급함은 아랑곳 않고 아이린 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아이린의 창백한 얼굴에 손을 대더니 말했다. “내가 준 치유의 가루, 아직 안 썼지? 그걸 뿌려.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다.” 로핀은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입으로 끈을 풀어 가루를 뿌렸다. 그 때 테일드는 검은 연기가 빠져나간 창문 쪽으로 뛰어올라갔다. 창가에 매달려 테일드는 로핀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린을 돌아보았다. 치유의 가루의 힘에 가까스로 눈을 뜬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가,가지 마.” “마무리를 지어야지, 금방 돌아올게.” 테일드는 깨진 창문을 뚫고 눈보라 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이린은 땀에 절은 이마에 손을 얹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꿈을 정리해보던 그녀는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린애도 아니고 진짜 몇 번이나 이런 꿈을.......” 그녀는 창문에 걸린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평화로운 나디움의 아침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며칠 전, 화이트 게이트 앞에 죽음에서 되살아난 익셀런의 군대가 몰려왔었다는 걸 생각하니 이 평화로움이 곧 있을 위험을 가리기 위한 속임수 같았다. 그녀는 자고 일어나 엉망인 머리를 긁적이다가 뒤늦게 방 안에 들어와 있는 웨이언을 발견했다. “깜짝이야!” 아이린은 놀라긴 했으나, 재미있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 방에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있던가?” “흐음, 안했었나? 요새는 기억력이 엉망이라.” 퀘이언은 그녀가 있는 창가에서 한 칸 떨어진 창문을 열었다. 밖에서 부는 새벽바람이 커튼을 뒤로 밀었다. 분홍색 물결 속에 잠깐 사라려 보였던 퀘이언은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그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겠더군.” 아이린은 벌써부터 퀘이언이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네가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베지 못한 이유 말이다.” 둘은 서로를 보지 않고 나디움의 바깥 정경만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말하고 싶지 않아.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폐하께서 네가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다.” 퀘이언이 뜸을 들이며 말하지 않자, 아이린이 재촉했다. “메시지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는 항상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지금 못하고 있잖아?” 아이린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여름의 막바지를 준비하는 나디움 사람들과 정원에서 왕실의 아침을 시작하는 시녀들을 내려다보던 퀘이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나라. 울프 기사단까지도 준비하고 있는데,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말이 안 되지. 폐하께서는 직접 명령을 내리기 전에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나디움은 안전하지 않아. 또 혼자 지키려고?” 아이린이 창가에서 내려와 퀘이언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니면 폐하 옆에 있으니 미래가 보이기라도 하던가?” “예언은 무슨....... 이건 전략적인 문제다. 글쎄, 앞으로 나디움에 일어날 위험은 너희들이 얼음 성으로 떠났던 8년 전에 비할 바가 아니지. 그건 예언이라고 할 만하군. 그래도 나디움은 나 혼자 지켜야 해. 그게 내가 할 일이고. 너는 너의 할 일을 해야지.” 아이린은 천천히 한 손을 내밀어 퀘이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퀘이언, 나는 네게 지은 죄가 너무 크다. 원래 로핀이 맡았어야 할 그 자리에 억지로 끌어올린 것도 나고, 이 커다란 짐을 네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도 나다. 그런 너를 두고 여길 떠날 수는 없어.” 퀘이언도 아이린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천하의 모두가 우러르는 나다. 게다가 이런 취급 받기에는 솔직히 내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아이린은 포옹을 풀고 피식 웃었다. “좋아요, 좋아. 마스터 퀘이언께서 명령하시니 시킨 대로 해야지요.” 아이리은 다시 창가에 두 손을 짚었다. “아, 그리고.......” “말해.” “마스터 그란돌은 어째서 너에게 수호 기사 자리를 갑자기 물려 주셨지? 전쟁이 끝났다는 계기는 분명 있었지만, 좀 서둘렀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분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죄책감?” “너도 얼마 전에 알았을 거다. 폐하의 등, 그리고 화이트 게이트를 찾은 웰치....... 마스터 그란돌께서는 캡틴 웰치가 내리친 그 공격을 막지 못했지.” “아, 그거! 하지만 그건 마스터의 책임이 아니었잖아?” “수호 기사란 건 그런 자리야. 폐하께서도 그걸 알기에 굳이 잡지 않으셨고....... ‘내가 아란티아 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단 하나 있다면 그건 나를 지키는 수호 기사의 운명이다.’ 폐하께서 그 분을 놓아주며 하신 말씀은 그게 다였다.” 아이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하얀 늑대들이 너에 대한 환상을 어느 정도 품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란돌게 품은 환상에 비할 바는 못 될 거다.” “내가 품은 환상을 그대로 전수할 필요는 없지. 가르치는 방식에서 이미 나는 우리들의 마스터와 다르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그란돌께서 가르친 하얀 늑대들보다 내가 가르친 하얀 늑대들이 훨씬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거든.” 아이린은 큰 소리로 웃었다. “어제 그 애들 무기 만들어진 거 가지러 갔더니, 마스터 르고께서 그러시더군. 지금의 하얀 늑대들이 자기가 아는 한 역대 최강이라고. 그럼 우리는 뭐가 되는 거지?” “두 번짼가 보지.” 퀘이언은 창가에서 내려와 말했다. “그 애들 무기까지 챙겼다면 이제 더 할 말은 없군. 난 폐하께 돌아가겠다. 굳이 작별인사 하러 오지는 마라. 오늘은 나도 좀 바쁠테니. 그리고 이거.” 웨이언은 아이린이 익숙히 아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하나 내주었다. “테일드의 회복 가루네?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쓸 일이 없었어.” “그럼 나만 썼나 보군. 로핀이 나를 위해 써버렸고, 나는 로핀에 내 몫을 줬으니.......” 아이린은 벌써 문 쪽으로 걸어가 버리는 퀘이언을 불러 세웠다. “헤이, 친구. 금방 돌아올 여행에 굳이 작별인사는 필요 없지만 적어도 충고나 격려 한 마디 정도는 있어야지?” “다치지 마라, 아이린.” “오냐.” “그리고 테일드가 무사하다면....... 안부나 전해다오.” 아이린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하지 못했고, 퀘이언은 대꾸를 기다리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잔인하기도 해라. 어리광부리지 말라 이거야? 하지만 네가 아니면 난 이 세상 누구한테 어리광을 부리며 휴식을 취한단 말이냐?” 아이린은 옷을 챙겨 입고 베나 에사르크까지 허리에 찼다. 그리고 방패와 칼, 도끼가 든 큼직한 배낭까지 매고 그녀는 등을 곧게 세웠다. “자, 서른다섯이나 먹어서 스물다섯 먹은 현역들 틈에 끼어 마지막 전투를 할 준비는 됐나?” 아이린은 즐겁게 혼자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마스터 아이린.” 1. 레오피오의 행정관 가넬로크의 레오피오라는 마을은 남쪽을 지키는 요새라고 하기에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마을이었다. 성벽은 맨손으로 타넘을 만큼 낮았고, 발로 걷어차면 벽돌이 삐져나올 정도로 부실했다. 일부는 무너진 채로 몇 달이나 방치될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만한 일도 드물었다. 1년쯤 전 도적 떼 잡는 일로 마을 경비병들이 총동원된 일 빼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나마 남쪽은 하늘 산맥과 접해있어 가끔 일어나는 그런 일조차 없었다. 그래서 아무 할 일 없이 그곳을 지켜야 하는 남쪽 성문의 경비병은, 동료들 사이에서 지루함이라는 가장 큰 적과 싸우는 최전방의 전사라고 불렸다. 그러나 남쪽 성문의 경비병은 그 날, 놀랄 만한 광경을 보았다. 한 명이라면 여행자나 할 일 없는 나무꾼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테지만,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일행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놀란 경비병은 허둥지둥 망루에 서서 형식적으로 격식을 갖추어 물었다. “어디서 오는 여행객이오?” 일행 중 제일 앞에 있는 남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금발에 평범한 얼굴이었으나, 목소리는 굵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했다. “하늘 산맥에서 왔소. 이 마을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 마을을 관리하는 영주는 누구요?” 경비병은 얼굴에서 황당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 마을은 ‘레오피오’고, 영주가 아니라 ‘로크 의회’에서 파견된 행정관이 직접 관리하고 있소.” “그럼 잘 됐군. 나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며 레오피오의 행정관과 직접 해야 할 이야기가 있소. 성문을 여시오.” 평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던 말 한 마리가 레오피오로 들어오는 북쪽 성문 앞에서 멈췄다. 뒤따라오던 흙먼지가 그를 덮었다. 망루 위에 있던 병사들이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캡틴 렌겔이 돌아오셨다.” 경첩 하나로 유지되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 철제문이 열리고 기수 한 명이 전력을 다해 마을을 가로질러 1층짜리 석조 건물 앞에서 멈췄다. 그는 거의 넘어질 듯 말에서 내려와 안으로 들어갔다. “세레스머스 행정관, 급한 보고가 있습니다.” 레오피오의 경비대장인 렌겔이 세차게 문을 열고 달려 들어왔다. 마침 식사를 하려고 빵에다 칼집을 내던 세레스머스 행정관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이거 재밌군. 렌겔 같은 무뚝뚝한 남자가 이 정도로 놀랄 만한 일이 이 마을에 일어날 수가 있나?” 렌겔은 농담도 받지 않고, 누런 양피지 한 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양피지에 잔뜩 묻은 먼지가 피어오르자, 세레스머스는 재빨리 빵을 옆으로 치웠다. 거기에는 때로 얼룩져 잘 보이지도 않는 남자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현상 수배범이 이 마을에 숨기라도 했나?” 세레스머스가 물었다. “최근 마을에 일어난 이상한 일을 알아보러 옆 마을을 찾아갔더니 그 쪽 경비대가 이런 걸 주더군요.”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렌겔의 얼굴에는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세레스머스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내가 행정관으로 파견된 지 3년 동안 절도 사건조차 채 열두 건이 일어나지 않은 이 작은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건가? 내가 알아듣도록 설명해주게.” 렌겔은 땀을 닦으며 의자를 끌어다 탁자 앞에 앉았다. “행정관께서는 ‘로크’에서 오셨으니 당연히 이 마을이 작게 느껴지시겠지만, 사실 레오피오는 근처의 모든 경비를 담당하는 규모가 큰 마을입니다.” “그래, 그래. 경비병도 무려 서른 명이나 있지. 진작 그 경비병을 스무 명으로 감축하고 싶었지만, 당장 실직자 열 명을 만들까봐 참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마을이지.”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행정관.” “미안하이. 말하게.” “얼마 전부터 이 마을을 찾는 여행객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건아십니까? 귀찮음으로 똘똘 뭉친 마을 사람들이야 관심도 없을 것이고 손님 늘어 좋아하는 건 이 마을에 하나 밖에 없는 여관의 주인장뿐이니 당연히 행정관께 그 소식이 전달이 안 되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경비병들 사이에서는 벌써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손님이 들다니? 뭐, 하늘 산맥 구경간다는 멍청한 여행자들이야 원래 있지 않았나?” “가끔이었죠. 한 달에 열 명 오면 그 뚱뚱한 여관 주인이 만세 부를 만큼만 오죠. 하지만 지난 일주일 간 서른 명이나 왔습니다.” 세레스머스는 멀뚱이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예,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들이란 게 뭔가 이상하단 말입니다. 간혹 칼이나 창을 들고 오는 남자들도 있고, 이상한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놈도 있고....... 어떤 놈은 얼굴에 흉터투성이인 게, 단순히 젊은 혈기로 그러고 다니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거죠.” “으음.” 세레스머스도 입 안이 껄끄러워지는 것 같아 먹으려던 빵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길을 가다 모르는 남자와 부딪쳐 사과했는데, 그 자의 소매 속에서 단검 한 자루가 툭 떨어졌었다. 그는 칼을 다시 숨기더니 휙 째려보고 여관으로 사라져버렸었다. “그래서 저는 예감이 안 좋아 한 달에 한 번 이 마을을 찾는 상인에게 외부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요.” “의회에서 보내오는 소식에는 특별한 게 없었네.” “그 상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중앙에서 직접 내려올만한 소식은 못 되죠. 대신 저는 상인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이걸 그 지역 경비대에게서 가져온 겁니다. 이건 공개적으로 현상금을 건 수배지입니다.” “범죄자인가?” “아니오. 누가 뿌렸는지도 모릅니다. 단지 여기 그려진 이 남자의 시체를 가져오면 현상금으로 금화 천을 내겠다니 황당하지 않습니까?” “시체를?” 세레스머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범죄자의 경우에도 극형에 처할 살인마가 아닌 이상에야 살아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 마련이다. 그런데 범죄자도 아닌 자를 시체로 만들어 가져오면 돈을 주겠다니....... 누군가의 몹쓸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시체를 어디로 가져가면 돈을 준다던가?” “여기 그런 것까지 쓰여 있습니다. ‘이 자를 죽여 어느 마을이든 그 마을의 중앙에 던져 좋으라. 내가 직접 찾아가 금화를 주겠다. 내가 돈을 내겠다는 증거는 앤발디에서 보이겠다.’ 그런데 앤발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앤발디 마을 근처에 있는 광장에서 서른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시체로 발견되었답니다. 그리고 웃긴 건 그 장정들이 꽤 잘나가는 현상금 사냥꾼들이었다고 합니다. 그게 대략 일주일 전이었다는 게 그 상인의 말이었죠.” “섬뜩한 얘기긴 하지만, 그게 레오피오랑 무슨 상관인가?” 렌겔은 계속 묻기만 하는 세레스머스에게 화를 냈다. “좀 들으십시오! 수배지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이 자는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이름을 사칭할 것이며, 조만간 하늘 산맥 부근 마을에 나타날 것이다.’ 레오피오는 가넬로크의 남쪽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럼 마을에 모인 손님들이 이 전단에 그려진 남자를 잡으려는 암살자들이라는 거야?” “또는 사냥꾼들이거나.” “맙소사! 농사만 짓는 말을에 이게 웬 피 바람 불 소리야? 이 양피지는 또 어디서 나돌던 거고?” “옆 마을에서 두 남자가 다퉜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다른 남자는 도망쳐버렸답니다. 그 죽은 남자의 시체를 처리하다 보니 품에서 이게 나왔다는군요. 아마 레오피오로 오던 사냥꾼 두 명이 술 취해 싸우다 그런 것 같습니다.” “허어, 그런......일이.......” 마흔 살이 넘을 때까지 큰 사건사고 하나 없이 넘겨오며 행정관 생활을 해온 그였다. 10년 전 전쟁 때도 지방 행정관으로 있던 차라 전쟁의 여파에서 피해갈 수 있었고, 지금은 그 때보다 더 지방인 마을에 파견되었다. 둘은 서로 얼굴만 보며 말을 못하고 있던 차에, 경비병 하나가 문을 두들기며 밖에서 불렀다. “행정관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세레스머스 대신 렌겔이 문을 열며 물었다. 경비병은 몹시 난처한 얼굴이었다. “저, 그냥 무시하려고 해도 뭔가 꺼림칙해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웬 미친놈인가 싶어서 그냥 성문만 통과시켜서 끝내려고 했지만, 그 자가 자기를 무시하면 이 마을 사람들은 다 죽을 거라며 반 협박을 해대는 통에.......” “뜸 들이지 말고 말하게.” 그 동안 렌겔과 주고받은 얘기가 있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세레스머스가 화를 내며 말했다. “에, 그게...... 일행이 네 명인데 모두 로브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ㅇ낳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게도 그 네 명이 남쪽 성문으로 와서.......” 렌겔이 답답해하며 말을 귾었다. “남쪽에 있는 거라 봐야 인간관계 다 끊고 은거하는 사람들의 통나무 집 밖에 없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그게...... 저......, 하늘 산맥에서 왔다고 합니다.” “하늘 산맥?” “그러니까 그게, 하늘 산맥에서 왔고, 이 마을이 위기에 처했는데.......” 렌겔이 세레스머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경비병 인원을 감축시킨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행정관. 이 친구가 앞으로 ‘그게’라는 말을 한 마디만 더 하면 우선 한 명은 이 자리에서 줄이는 걸로 하지요.” “좋군.” 경비병은 화들짝 놀라며 머리 속으로 황급히 말을 수정하다가 말했다. “그 자가 말하길, 자기가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고 합니다.” 렌겔은 눈을 동그랗게 떳고 세레스머스는 침착 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 자가 그 전설의 소드 마스터 퀘이언이라던가?” “아,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물어봤더니, 그 자는 웃기만 했습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행정관님. 제발 절 자르지 마십시오. 그들은 나타날 때부터 뭔가 너무 이상했습니다. 한 명은 너무 키가 커서 성문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고, 한 명은 여자인데 후드를 벗자 제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예뻤습니다. 한 명은 갈색 머리에......, 아, 붉은 머리던가? 하여간 그 남자는 제가 성문을 안 열어주고 이런저런 걸 묻자, 절 죽일 듯이 노려보며 칼에다 손을 올려놨습니다. 그냥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전 얼어붙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냥 성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경비병은 그 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무서웠는지 침을 꿀꺽 삼킨 후 계속 말했다. “어쨌든 그 울프 기사단 캡틴이라는 자는 자기가 이 마을 여관에 가 있을 테니 이 마을 행정관을 자기에게 모셔오라고 말했습니다. 전하지 않으면 이 마을 사람들은 다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 저 그게 아니라......, 절 자르지 마십시오. 어머니께서는 편찮으시고 여동생은 아직 어려서 제가 벌지 않으면.......” 렌겔은 이 불쌍한 경비병을 너무 괴롭힌 건가 싶어 얼른 그의 말을 막았다. “알았네, 알았어. 가보게. 인원 감축은 없던 걸로 하겠네.” 경비병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렌겔은 탁자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도닥거리며 말했다. “저 친구가 아무리 설명을 잘 했어도 결국은 우리가 가서 해결을 봐야 할 일이지 싶습니다, 행정관.” “우리가 가도 해결을 못할 일이 아닐까 걱정이군.” 세레스머스는 양피지를 품에 넣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세레스머스는 온갖 망상을 머리 속에 담고 마을을 가로질러 ‘마을에 손님 는 걸 혼자 좋아하는 주인장의 여관’ 으로 향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렌겔은 경비병 다섯 명을 불러 동행했고, 자신도 옷 속에 사슬 갑옷을 겹쳐 입어 두었다. 남쪽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한 일행이었다. 거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양피지가 도착했고, 동시에 자기가 캡틴 울프라고 밝힌 사람이 나타났다. 이건 수상함을 넘어 위험한 일이라고 세레스머스는 판단했다. 확실히 여관 안은 비정상적으로 손님이 많았다. 렌겔의 말을 듣고 나서 그런지 인상 더러운 이상한 놈들도 많았다. 그래도 캡틴 울프라고 자기를 밝힌 자의 일행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1층 바의 안쪽 구석자리에 촛불을 켜고 앉아있는 네 명이 맥주잔을 훌쩍이고 있었다. 보고 한 대로, 로브를 벗지 않은 한 명은 키가 굉장히 컸고, 로브를 벗고 스테이크를 찍어 먹고 있는 남자는 눈매가 매서웠고, 나머지 한 명은 그 둘에 비하면 굉장히 평범했다. 세레스머스의 시선을 빼앗은 건 그 평범한 남자의 옆에 앉아있는 여자였다. 마을 경비병들의 등장은 어두침침한 가게 안에 긴장감을 가져왔다. 일부 손님들은 조심스레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이 구석자리의 수상한 일행들도 경비병들과 세레스머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직 이 여자만 주위의 상황에 개의치 않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무관심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잃어버렸던 젊음의 혈기가 되돌아온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옆에서 렌겔이 어깨를 치지 않았다면 한도 없이 그 얼굴을 바라봤을 정도로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촛불을 반사하며 검은 파도 위에서 하얀 포말이 이는 듯 출렁이는 머리카락은, 대화가 끝날 때까지 세레스머스의 집중력을 흩트려놓았다. “나는 이 마을의 행정관 세레스머스요. 남쪽 성문 경비병의 말을 전해 듣고 찾아왔소.” 넷 중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이렇게 빨리 와주실 줄은 몰랐소.” 금발에 수염을 약간 기른 얼굴은 스물다섯 정도 되어 보였지만 촛불의 조명으로 실제 나이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스물다섯은 넘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이렇게 젊은 남자가 울프 기사단의 캡틴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특히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이 데라둘의 나이가 오십이 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 세레스머스의 시선은 점점 그 미녀에게서, 그 남자 쪽으로 옮겨 갔다.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 농담을 하는 분은 아닌 듯 하오. 앉아도 되겠소?” 렌겔은 의자를 하나 가져와 탁자 한 쪽에 내려놓았고, 세레스머스는 소리 나게 그 자리에 앉았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이라 했소?” “그렇고.” “그럼 당신이 퀘이언이오?” 그의 앞에 앉은 눈매 매서운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질문을 하네.” 캡틴 울프라 밝힌 남자는 웃으며 설명했다. “외부에는 그리 알려져 있소만, 마스터 퀘이언께서는 여왕 폐하의 경호만 맡고 계실 뿐, 캡틴의 지위는 별도로 내게 내려져 있소.” 그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하늘 산맥에서 오셨다고?” “그렇소.” “거기에서 십 년쯤 헤매다가 엘프라도 데리고 왔소?” “대충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왔으니 무례라 여기진 않으리다. 그리고 난 더 황당한 얘기를 해야 하니 판단은 알아서 하시오.” “해보시오.” “조만간 하늘 산맥으로부터 가넬로크를 침공할 군대가 내려올 것이오. 그 숫자는 가넬로크 군대 전체를 이끌고 와도 막지 못하니, 레오피오의 주민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시오. 또 근처 경비대를 모두 한 곳에 모아 주민들의 보호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시오. 이번 적은 십 년 전과 달리 기사도를 기대할 수 없소.”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세레스머스였지만 이어지는 말에 점점 황당해졌다. “내가 지금 당신 말을 계속 들어야 하오?” 세레스머스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난 상관없소. 당신이 상관있지.” 그는 여유 있게 맥주를 한 모금 했고, 세레스머스는 그 여유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만 상관있다?” “방금 내가 제안한 일을 하려면 당신은 근처 마을의 행정관이나 영주들을 설득해야 하고, 내가 여기 왔다는 사실을 로크의 외회에 알려야 하지 않소? 그런데 당신부터 납득하지 못하면 곤란한 건 그 쪽 아니오?” 세레스머스는 자기도 이 자에게 여유를 조금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편한 의자에서 무리하게 허리를 기대어 손목을 까닥거리며 물었다. “그럼 먼제 내가 납득할 만한 증거라도 대보시오.” “내가 당신에게 증거를 댈 이유는 없소. 당신이 우선 할 일은 한 가지요. 파발을 띄워 의회에 알리시오.” 이런 일을 고스라히 의회에 알렸을 때 자기 철밥통이 온전치 못 할 거라고 세레스머스는 생각했다. 망신을 당하는 걸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겠구나 하는 그런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는지 그 남자는 강압적으로 말했다. “뭣 하러 여기 온 거요? 내가 캡틴 울프라니 거짓인지 아니지 확인하려고? 그래서 거짓말이면 사기죄 하나 붙여 잡아가려고 병사들을 데려왔소? 그럼 내가 캡틴 울프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보시오. 나는 당신을 배려하고 이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서 괜한 참견을 하는 것뿐이오. 그런데 당신은 입 몇 번 열고, 펜 놀림 볓 번이면 막을 수 있는 재앙을 방치하려 하는군. 가시오!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요.” 그 남자는 자뭇 실망했다는 얼굴로 맥주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세레스머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는 망신당할 바에야 기꺼이 재앙을 방치하는 쪽을 택했을 거요. 하지만 내가 들은 바가 있어 그러지 못하겠군.” 세레스머스는 품에 있는 양피지를 꺼내 그에게 보였다. 놀라길 바랐으나, 그 남자는 쓰윽 훑어보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만 하군.” “할 말은 그게 다요, 캡틴 울프?” 세레스머스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캡틴이라는 호칭을 달았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다요. 현상금 천이라....... 너무 높으면 현실감이 없어 사냥꾼들을 못 모을 거라 생각했나?” 그는 세레스머스가 이해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세레스머스는 고민했다. 이 자리에서 떠나 이 자를 내버려둔다? 어느 쪽이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끝내게 되는 것만 같았다. 이미 이야기하는 중에 이 남자가 쳐놓은 그물에 한 다리가 걸려있어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저 자가 정말 캡틴 울프고 지금까지 한 말이 진짜라면 세레스머스는 심각한 직무유기를 범하게 된다. 반대로 아니라 해도, 세레스머스는 방금 들은 이야기로 한 달 동안은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양피지에 대한 반응이 저러니, 불안감은 더했다. “뭐, 이 일은 당신 영역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용건은 끝났소. 라이, 이제 로브를 벗어도 되다. 그리고 행정관, 그나마 와주셔서 감사드리겠소. 솔직히 ㅁ라해 날 무시하고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당신을 설득하지 못한 건 내 책임이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소. 내 경고는 끝났소.” 그 남자는 마치 세레스머스의 마음을 읽은 듯이 말하고 있어싸. 그리고 그가 말하는 중에 계속 로브를 쓰고 있던 덩치 큰 남자가 후드를 벗는 순간 세레스머스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촛불 위로 하얗게 보이는 머리카락 틈으로 긴 귀가 드러났다. 매끄러운 얼굴과 반쯤 감았음에도 큰 눈동자가 세레스머스를 향했고, 세레스머스는 도움이라도 청하듯 렌겔을 돌아보았다. 렌겔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바보 같은 말을 했다. “그 귀 진짜요?” 매서운 눈매를 하고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그 귀가 진짜라느 ㄴ것까지 증명하려고 움직이면 정말 웃길걸.” 그 덩치 큰 남자가 정말로 귀를 앞뒤로 쫑긋하고 움직였으나, 예상과 달리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말을 한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고, 그 찌푸린 얼굴을 보고 금발의 청년은 작은 소리로 웃었다. 렌겔은 당황했고, 세레스머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도 아시 캡틴 울프를 사칭한 남자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세레스머스요. 당신은 누구요?” “캡틴 울프. 이 자리에서 그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오. 흠, 이제 내 말을 믿기로 했소? 내가 토해낸 열변보다 라이의 쫑긋거리는 귀가 더 설득력이 있다면 앞으로 어떤 행동 노선을 취할지 고민해 볼 일이군. 세레스머스 행정관, 다시 말씀드리겠소. 의회에 알리시오. 아란티아의 캡틴 울프가 가넬로크와 정식으로 연합을 맺기 위해 지금 찾아가고 있다고. 아, 그리고 말이 있다면 네 마리만 부탁드려도 되겠소?” 세레스머스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다. 황급히 여관을 나와 병사들과 사무실로 돌아온 세레스머스는 당장 파발꾼을 불렀다. “며, 몇 가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렌겔이 조심스레 물었다. “뭘 더 확인해? 저 자가 캡틴 울프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바 아닐세. 하지만 그 덩치 큰 남자는 분명 하늘 산맥에서 온 엘프고, 지금 누군가 캡틴 울프를 사칭하는 자를 죽이면 이 마을을 통째로 살만한 현상금을 걸었으며, 그걸 믿고 이 마을에 정말로 사냥꾼들이 우글대고 있네. 현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모조리 내 능력 밖이야. 자네는 어서 부하들을 시켜 근처 마을 경비대에게 알리게. 사흘 안으로 주민들을 대피시킬 준비를 갖추라고. 말도 네 마리 준비해.” “으음, 말 준비하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쪽 경비대 측에서 하늘 산맥에서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믿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변명거리는 뭐든 만들어! 책임은 내가 지겠네. 만약 이 일이 어떤 귀 큰 남자를 데리고 다니는 서커스 단장의 속임수에 불과한 해프닝으로 끝난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해프닝을 즐겨주겠네.” 그제야 렌겔은 귀찮은 일이라면 딱 질색인 이 행정관이 나중에 정말 귀찮아질 일을 피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 한밤의 사냥꾼들 세레스머스 행정관이 요란하게 떠난 후에도 넷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카셀은 미지근한 맥주잔에 입술을 댄 채 허공을 응시했다. 미세하게 떠다니는 먼지를 쫓아 고개를 돌리다가 타냐에게 시선이 갔다. 그녀도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타치셀에서 만나 하늘 산맥을 가로지르는 일주일 간 타냐는 말이 없었다. 가끔 카셀이 내미는 손을 잡았으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놔버리기 일쑤였고, 타냐 쪽에서 먼저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일이 많았다. 노숙하는 하늘 산맥의 밤중에 잠깐 일어나면, 혼자 깨어 모닥불을 응시하는 타냐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뭐하냐고 물으면 그냥 보초를 서고 있다고만 대꾸했다. 제이메르나 라이는 우너래 말이 없었다. 둘은 간혹 별거 아닌 일로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제이는 몇 마디 말 이상 꺼내면 했던 말을 주워 삼키다가 말 하는 걸 포기해 버리기 일쑤였고, 라이는 아직 인간 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두 사람에게 있어 말싸움이란 건 성립되지 않았다. 결국 둘 다 참아버리면 싸움은 정말 싱겁게 끝났다. 그래도 저러다 서로 칼을 들면 무슨 싸움이 벌어질지 카셀은 항상 조마조마했다. 한얀 늑대들 다섯 명과 동행하는 것보다 이 셋을 이끄는 게 더 힘든 일이었다. 카셀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이야?” 제이가 물었다. “아니, 갑자기 내가 무척 어리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말을 하며 타냐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또 딴 세상에 있는 듯 혼자 뭔가에 골몰해 있었다. 일주일 동안 맞대고 있었던 얼굴이지만, 그녀의 미모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카셀은 여자에 대해서는 미숙했다. 아즈윈도 한 달이나 같이 부대끼고 살았었지만, 아즈윈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면 항상 깜짝깜짝 놀랐었다. “너 술도 마실 줄 알았냐?” 라이가 입술만 축이던 맥주잔을 갑자기 한 번에 들이켜자, 제이가 물었다. 라이는 거품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고 말했다. “오래 전, 인간 세상, 있었다. 그때, 마셨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맛은 없다.” “와본 적 있다고? 사람이 하늘 산맥에 들어간 꼴이었을 텐데, 괜찮았나? 날아다니니까 상관없나?” “방향, 못 잡는다. 안내해 준 우그, 있었다” “그 인간이란 건 누구냐?” 제이가 드물게도 흥미를 보였으나, 라이는 한 마디만 하고 침묵해 버렸다. “우그.” 자기가 물어봐 놓고선 제이 역시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다. 괜히 옆에서 그걸 묻고 싶었떤 카셀의 궁금증만 커졌다. 라이는 인간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했다. 그런 단어가 없는 레미프가 일부러 그 단어를 써가며 말했다는 건 정말 인간 세상에서 큰일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그 일은 무슨 일일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일이 자꾸 연관성이 있을 것 같아 라이가 인간 세상에서 겪은 일과 맞춰보고 싶었지만, 라이는 그 일을 말해주지 않았다. 하늘 산맥에 도전한 인간이 많았듯, 아크랜드에 도전한 레미프도 많았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의 엘프가 라이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이야기 속의 엘프는 배신당하지 않았다. 라이는 바의 다른 곳에서 자기를 힐끔거리고 쳐다보는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카셀에게 물었다. “나, 레미프인 것, 보여도 되는가?” “된다.” 카셀은 단호했다. “왜?” 제이도 물었다. “됩니다.” 이번에는 타냐가 대답했다. 제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대놓고 그 행정관한테 네가 캡틴인 거 밝힌 것과 같은 거냐?”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우리에 대해서 의회에서 떨들어주는게 좋거든.” 카셀은 두 달 절 일은 떠올리며 말했다. “카모르트에서 겼은 적이 있지. 왕이 공식적으로 초청한 원군을 상대했을 때조차 대신들과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느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어. 우리는 시간도 없는데다가 불청객이며, 아주 안 좋은 소식을 전하러 가는 거지. 의회 쪽에서 먼저 흥분해 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 제이는 아직 이해가 안 되었지만,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둘이 알아서 해라.” 제이는 잔 바닥에 남은 맥주를 비우고, 다시 한 잔을 시켰다. 타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더 마실 겁니까? 전 먼저 가서 쉬고 싶습니다만.” 카셀은 조금 당황하는 듯 했으나 이내 웃으며 말했다. “내일 정오에 떠나니 그 때까지만 일어나세요, 타냐.” “일어나지 않으면 깨워주십시오.” 타냐는 보일 듯 말 듯 목례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카셀은 그녀의 뒷모습을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메르는 카셀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우리 급한 거 아니었나? 그래서 하늘 산맥에서 내려와서도 쉬지도않고 달려왔잖아?” “아, 그러고 보니 좀 피곤하군. 타냐도 피곤할 만해. 하늘 산맥에서 거의 혼자서 경계를 섰어.” 제이가 새로 나온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아까 그 행정관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또 급히 떠나야 했을 거야.” 카셀은 피로가 잔뜩 뭉친 목덜미를 주무르며 말했다. “이제는 급하지 않고?” “그 행정관이 앞 뒤 꽉 막힌 사람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든가, 아니면다른 행정관을 설득하러 이 마을을 바로 떠났겠지. 하지만 이제 됐어, 저 행정관이 보낸 파발이 로크에 도착할 여유도 줘야지.” “그래서 내일 정오? 오랜만에 맥주 마실 시간은 가져도 되겠군. 그보다 카셀, 저 마법사 여자랑은 뭔가 잘 안 되는 거냐? 둘이 손 잡길래 그런가 보다 했지만, 찬 바람 부는 게 아란티아에서보다 오히려 더 하다?” “우물 앞에서 빨래하는 동네 아낙 같은 소리 마라, 제이메르. 나도 맥주 더 마셔야겠다. 라이도?” 라이는 대답 대신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카셀은 손짓해서 주인을 불렀다. “여기 맥주 두 잔 더. 그리고 안주로 먹을 만한 것도 한 접시 부탁하겠소.” 타냐는 녹슨 경첩 소리 나는 나무문을 닫고 잠깐 동안 거기에 등을 기댔다. 주저앉으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무거운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지팡이를 벽에 기대언호고 거울 달린 화장대 앞에 털썩 앉았다. “뭐하는 거냐, 타냐?” 타냐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어째서 카셀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야? 마스터께 일어난 일이 카셀 탓도 아닌데.” 타냐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해서 그런 거다. 너무 급격히 올라간 마법적 힘을 정신적인 힘이 받쳐주지 못하는 거야. 초조해하지 말자.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려야 해.’ 타냐는 루티아를 떠나기 전 잠깐 만났던 로일을 떠올렸다. 로일은 던멜을 두고 떠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던멜이 긴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체력을 회복하려면 일주일은 필요했다. ‘제이메르라는 친구는 분명 울프 기사단에 필적할 만한 실력자요. 하지만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낳소. 그러니 진자 카셀의 보호자로 내세울 만하지는 않지요. 그러니 당분간 당신이 직접 카셀을 지켜주셔야 하오.’ ‘걱정 마십시오. 그의 옆을 절대 떠나지 않ㅇ르 테니.’ ‘부탁하겠고. 조만간 뒤따라가겠소.’ 그러나 하늘 산맥을 지나 가넬로크로 오는 내내 타냐는 카셀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머리 속에는 오직 스승님에 대한 의문만 가득했다. ‘어떻게, 왜 그가...... 그런 일에!’ 밤에도 스승님과 겪은 많은 일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카셀은 더 이상 타냐의 손을 잡지 않고 있었다. 타냐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내민 카셀의 손길을 무의식적으로 뿌리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을 계속 거절다했으니 더 이상 카셀이 손을 내밀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하아, 안고 싶은 건 내 쪽이었는데....... 슬픈 건 나만이 아니야. 카셀은 바로 얼마 전에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누구보다 위로 받고 싶을텐데, 내가 위로 받길 바라다니! 몹쓸 짓이다. 그만 둬.’ 타냐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기 얼굴인데도 적응이 안 되었다. 카셀은 이 얼굴을 좋아해줄까? 전보다 똑바로 바라보는 횟수는 줄었다. “엉뚱한 고민으로 새지 마. 이제 혼자 강한 척 하지 않아도 의지할 사람이 생겼어. 그러니 그냥 의지하자.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렇지 않아?”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거울 오른 쪽에서 검은 것이 불쑥 솟아 올라왔다. 방구석의 모서리 자리였다. 타냐는 즉시 고개를 돌렸으나, 그 검은 형상은 없었다. 오직 거울 안에만 있었다. “놀라지 마라, 타냐. 난 너다.” 타냐는 눈을 크게 뜨고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 안으로 벽에 세워뒀던 지팡이가 빨려 들어왔다. “허튼 소리. 누구냐, 넌?”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네 안의 내가 그 해답을 주지.” 그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타냐는 구별할 수 없었다. 자시의 목소리인 것도 같았다. 그녀는 머리는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돌려 주위를 살폈다. 거울 속의 검은 존재는 점점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네가 거부하는 예언을 받아들여라. 넌 이미 하늘 산맥에서 모든 것을 내다볼 수 있었다. 그렇지? 그랜드 마스터 러스킨이 왜 배신을 했냐고? 모든 것을 보았으니까. 인간이 이 싸움에서 패배할 것을 알았으니까! 루티아의 화이트비를 이용하면 그 정도로 거대한 운명의 물결을 읽지 않을 수가 없지. 러스킨처럼 예지력이 강한 마법사일수록 그 미래가 안겨다 주는 고통은 크지. 버틸 수 없었을 거야. 그래서 차라리 그 고통을 안겨주는 쪽이 되기로 한 거야. 넌 알고 있었어. 아니, ‘우리’는 알고 있었어.” 거울 속에서 나온 검은 기운은 점점 타냐 자신의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봉인을 풀기 전 그 추한 마녀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제 러스킨과 동일한 힘을 얻은 지금 우리도 그 미래를 읽은 거야. 두렵지? 괜찮아. 그러니 운명을 받아들여. 이 정도로 추악한 미래를 보게 되면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스승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타냐의 팔이 거울 속에서 빠져 나와 그녀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나 거울의 영상이었고, 실제로는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등을 감싸고, 가위에 눌린 듯 무거운 것이 온 몸을 짓눌렀다. “넌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네가 스승이라 불렀던 자에게 겁탈 당하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달려들고 말 거야. 그 전에 목숨을 끊어버리는 건 어때? 그러기 싫다면 러스킨과 같은 선택을 하는 것도 좋지. 그럼 적어도 네가 배신당하는 쪽은 아닐 테니.” 타냐는 고개를 한쪽으로 틀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해오면 뭔가 신비로울 줄 알았나?” 타냐는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등을 감쌌던 어둠의 기운은 마치 불꽃놀이처럼 다양한 색깔을 보이며 터졌다. 타냐는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타다 남은 검은 기운이 마루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추종하는 마귀냐?” “아니, 난 네 안의 악마다!” 그것은 쇠끼리 비비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타냐는 꿈틀거리는 어둠의 덩어리를 발로 밟아 뭉갰다. “내 안에 너 같은 건 없어.” 타냐는 호흡을 멈추고, 창문 너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밤의 어둠을 뚫고 마을을 벗어나 성문 밖에 이르렀다. 그곳에 여관 쪽을 바라보는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그 기사는 타냐와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말을 몰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구아닐과 같은 시선....... 누구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창가의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타냐는 지팡이를 들어 그 기척이 완전히 접근하기 전에 날려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 수상한 인기척에 좋지 않은 기운은 없었다. ‘내버려둬 볼까?’ 과연 몰래 접근한 자는 창문을 두들기며 신호를 보내왔다. “정체를 밝혀라.” 타냐가 물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위험을 경고하러 왔습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타냐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창문은 저절로 열렸다. 복면까지 쓴 괴한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방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더니 말했다. “캡틴 울프의 일행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저는 블랙풋이라는 조직의 길드 마스터 헤더라고 합니다.” 그 여자는 복면을 벗었다. 길드 마스터라고 하기에는 꽤 어린 스무 살 정도의 소녀였다. 하지만 눈매는 날카로워 어리다고 얕잡아 볼 정도는 아니었다. “블랙풋?” “예.” 타냐는 던멜이 과거 몸담고 있던 암살 조직의 이름이 블랙풋임을 기억했다. 그리고 8년 전 그 조직의 어쌔신 마스터, 칼스턴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내린 의뢰로 새나디엘 여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까지 차례로 떠올랐다. “날 죽이러 온 건 아닌 것 같군요. 하지만 등 뒤에 감춘 무기는 함부로 휘두르지 마십시오. 죽습니다.” 타냐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헤더는 뭔가 반짝이는 게 보여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어깨를 움찔했다. 머리 뒤로 반투명한 칼날 두 개가 떠 있었다. 헤더는 당혹스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칼을 쥐는 건 제 버릇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헤더는 조심스레 칼을 허리춤에 넣고, 빈 두 손을 보였다. 타냐도 그 마법의 칼날을 지웠다. “저는 캡틴 울프의 일행에게 경고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카셀에게 위험이?” “그 분께도 이 일을 알리러 우리 쪽 조직원이 한 명 가있습니다. 현재 이 여관 내 손님 거의 전부가 여러분을 노리는 암살자들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일단 빠져나가시지요.” “여관 주인은 관련 없습니까?” “조사해본 결과, 주인과 주인 아들은 이 마을 토박이로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럼 아까 먹은 음식이 위험하지는 않았을 테고....... 경고하러 간 당신 조직원은 어느 정도 실력자입니까?” “조직 내 최고 실력자로, 당신이 알만한 이름으로는 던멜이라는 분의 제자입니다.” 헤더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럼 무사하겠군.” “무슨 말씀이신지?” 헤더는 이 마법사가 어느 쪽을 두고 무사하다고 말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게랄드라는 녀석이 죽었다며?” 갑자기 제이가 말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카셀이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촛불에 어른거리는 제이를 노려보는 카셀의 눈빛은 강렬했다. 제이는 안주로 나온 소시지를 씹으며 말했다. “라이가. 너와 로핀이라는 남자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더군.” 카셀은 원망하는 눈길로 라이를 노려보았고, 라이는 오히려 왜 그렇게 노려보느냐는 듯 무표정을 유지했다. “완전히 관계없는 건 아니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라이가 제대로 설명 못했을 거다.” “그 관게란 건 대충 안다. 라이는 정확히 뜻을 전달했어. 결국 내가 게랄드라는 녀석을 대신해야 한다는 거 아닌가? 그 녀석은 내가 꺾지 못한 네이슨이라는 기사를 죽였다고 했다. 솔직히 하나 말해두지. 그 네이슨, 네가 최고라고 여기는 하얀 늑대들보다 강한 놈이었다.” “뭐?” 카셀이 눈을 부릅떴다. “네가 하늘처럼 떠받드는 하얀 늑대라는 존재보다 더 강한 놈도 있었다는 거다. 글쎄, 로일이나 던멜이 제대로 된 몸 상태였다고 해도 네이슨을 이겼을까? 아닐걸. 그런데 게랄드가 놈을 죽였다. 그럼 또 게랄드가 최고인가 하면 그건....... 아니,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라.” 제이는 맥주를 들이켠 후 잔을 세게 내리쳤다. “카셀, 친구가 죽는 슬픔이 뭔지 나는 모른다. 뭐, 알고 싶지도 않아. 난 우울한 건 질색이야. 그러니 널 위로도 안 할 거다. 하지만 언제까지 꿍해 있을 거야? 게랄드라는 녀석이 너와 얼마나 친한 놈인지 모르니 그런 것까지 대신할 수는 없지만......, 전투에 관해서는 내가 대신해주지.” 카셀은 멍청히 제이의 웅변을 듣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뭐가 우스워?” “제이메르,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자기소개도 못하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꽤 말 잘 하네.” 제이는 소시지 씹는 입만 움직였다. 카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가 그대로 손을 이마에 짚은 채 탁자에 기대었다. “알아. 나도 평소 같지는 않았어.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너무 많은 와중에...... 게랄드가 죽다니, 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이야기 한 적 있던가? 전에 카모르트에서는 하루가 늦어 친구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이번에는 반나절이 늦어 한 명이 죽었어.” “그네 네 잘못이었나?” 제이는 맥주로 입을 헹구듯 씹은 소시지를 넘겼다.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온통 내 생각에 취해 너나 라이, 타냐를 돌봐주지 못했어. 누구보다 타냐를....... 기억 나? 아란티아의 화이트 게이트에 나타났던 그 회색 로브의 마법사.......” “그 음침한 놈?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아.” “그게 타냐의 스승이야.” 제이의 눈썹이 한쪽으로 꺾였다. “저 여자의 스승이면 무지막지한 마법사겠군. 하지만...... 으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자세히 설명할 자신이 없어. 그게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테일드이자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이고, 앞으로 우리가 상대하게 될 큰 적이야. 그래서 지금 가장 괴로운 사람은 타냐야. 얼마나 힘들겠어?”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섬세한 여자 같진 않더군. 외모가 바뀌었어도 성격은 얼음덩어리 그대로야. 정말 나랑 안 맞는 여자다.” 제이는 여관의 정문을 열고 들어오는 검음 옷의 남자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 검은 옷의 남자도 곧장 제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이는 탁자 밑으로 내려놓은 손으로 칼 손잡이를 잡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 녀석도!” 제이는 묵묵히 자기와 같은 속도로 맥주를 들이뭇는 라이를 힐끔 노려보았다. “라이는 아크랜드가 처음이 아니라고 했지?” 카셀이 물었다. “짧은, 모험이 있었다.” 라이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무슨 모험이었어?” “우그....... 이름은, 잊었다. 우그, 나, 친구였다. 나는 하늘 산맥을, 그는 이 곳을 안내....... 그리고 그는, 나를 이런 술집에 두고...... 사라졌다.” “사라져?” 카셀이 놀라 물었다. “사라졌다.” “왜...... 떠났는데?” “모른다. 그냥, 기다리라, 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라이가 쥐고 있는 나무 맥주잔이 파삭 깨졌다. 맥주 거품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 기더, 아니었다. 배신이다. 우그, 거짓말, 했다.” 카셀은 뜻밖에 그가 보인 분노의 감정에 놀랐으나, 제이는 덤덤했다. “왜 배신했는지 아나?” “안다. 그가 간 후, 이상한 놈들...... 나타났다.” “이상한 놈들?” “서커스단.......” 카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고, 제이도 인상을 구겼다. “그 다음 이야기는 안 해도 알겠다.” 제이는 아마 모를 것이다. 레미프가 대륙에서 혼자 힘으로 하늘 산맥으로 돌아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카셀은 어색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물었다. “그게 언제 적 일이었어?” “50년 정도, 점.” “라이, 혹시 그 사람 이름 알아?” “모른다. 그냥, 우그, 라고 불렀다. 그는 나, 레미, 라고 불렀다.” 카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저, 라이, 어쩌면 그 남자...... 배신이 아니었을 지도 몰라.” 카셀이 말했다. 라이는 끓는 분노의 시선을 카셀에게 돌렸다. “왜?” 카셀은 정확하지도 못한 기억을 라이에게 설명해줘도 될지 망설였다. 그 때 누군가 카셀의 옆에 앉았다. 제이는 이미 그 괴한이 옆에 앉기 전부다 경계하고 있었다. “캡틴 울프?” 그가 낮은 어저로 말했다. “그렇소만?” “날 모르시겠소?” 카셀은 그 남자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블랙풋? 이름이.......” “발락. 테마르, 아니 던멜의 제자요.” 카모르트의 국왕을 납치하는 와중에 던멜과 정면으로 맞섰던 그 암살자가 똑똑히 기억났다. 카셀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날 노리는 사냥꾼이 있을 거라고 행정관이 말해주긴 했지만 설마 그게 당신......?” “일주일 전, 앤발디라는 도시 외곽에서 꽤 유능하다고 하는 사냥꾼들이 일제히 모였소. 전단의 내용대로요. 그 곳에 카모르트에 나타난 그 검은 기사들과 똑같이 생긴 녀석들이 나타났소.” 카셀은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거나 발락이라는 남자가 잘못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거 혹시 익셀런의 기사 아니었소? 그러니까 갑옷만 같은.......” “카모프트의 그 사건은 블랙풋도 깊이 관여했던 바, 두 기사의 차이를 내가 모를 리 있겠소? 그들은 분명 카모르트의 그 유령 기사였소. 그 기사 중에서 하나가 듣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소. 여기에서 살아남는 자에게 당장 착수금으로만 금화 백을 내줄 것이며, 그것이 전단이 진짜라는 증거라고. 그 기사는 그 자리에서 모인 현상금 사냥꾼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렸소. 나도 방심했으면 죽을 뻔 했을 만큼 그 기사의 힘은 막강했소. 그 자는 너무나도 침착하게 살아남은 스무 명의 숫자를 세더니, 금화 이천을 그 자리에서 던져줬소.” 발락이 그런 얘기를 하는 중, 제이와 라이의 시선이 카셀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술집 안에 있던 몇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카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뒤에서 보기에 느긋하게 보이려고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 스무 명이 지금 이 여관 1층에 모두 모여 있소.” 발락이 말하며 계속 숨기고 있던 오른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칼날이 손톱처럼 달린 크로우가 손목에 달려 있었다. “내가 길을 뚫을 테니 달아나시오. 앞의 두 사람도 어지간히 검의 달인으로 보이니, 캡틴을 호위하고.......” “아니, 됐소.” 카셀은 발락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억지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하니 하얀 늑대들의 호위를 받는 캡틴 울프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자가 상금을 걸었을 것 같소? 그 자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서 차라리 어처구니가 없군.” 카셀은 천천히 허리를 돌리더니 느긋하게 의자에 손을 걸었다. 뒤에는 이미 벽처럼 덩치 큰 괴한들이 길목을 막고 서 있었다. “의도?” 제이가 물었다. 카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 건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자네 사냥꾼들. 특별히 죄가 없는 걸 내 아는 고로 한 가지만 말해두지.” 카셀은 의자가 아닌 탁자 위에 앉아, 한 쪽 발목을 다른 쪽 허벅지 위에 터억 하니 올려놓았다. “혹시 자네들이 본 전단대로 내가 ‘캡틴 울프를 사칭하는 자’가 아니라 ‘진짜 캡틴 울프’라면 어쩔텐가?” “글쎄올시다.” 제일 앞에 선 한 명이 나서서 비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울프 기사단의 캡틴은 마스터 퀘이언이라는 건 검을 배우는 생초보도 아는 사실인데, 그걸 굳이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소?” 발락이 귀엣말로 카셀에게 경고했다. “저 녀석들, 옆 마을에서 서로 사냥감 잡겠다고 싸우다 한 놈이 죽은 사건 때문에, 아예 이 마을에서는 힘을 합치기로 했소. 작전도 짰을 거요.” 카셀은 그 경고를 듣는 둥 마는 둥 뺨에 얹은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 까닥이며 말했다. “무지도 죄가 된다던가 만다던가?” 제이가 그 말을 받았다. “죄다. 사냥꾼이 분수를 모르고 자기보다 더 큰 사냥감을 노리면 보통 그 사냥감에게 잡혀 먹히지.” 카셀은 바로 이어 말했다. “그리고 사냥꾼 목숨 긴경 쓴답시고 사냥꾼에게 도망 다니는 캡틴 울프란 있을 수 없지. 제이메르, 라이, 가서 캡틴 울프의 호위를 누가 맡고 있는지 가르쳐 줘라.” 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문을 지키던 궁수가 화살을 날렸다. 아마도 활 실력 하나로 사냥꾼 세계에서 최고라고 이름이 알려졌을 그 궁수의 화살은 제이메를의 칼에 두 동강 났다. 아무도 그 칼을 뽑는 걸 보지 못했다. 사냥꾼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셔따. “네 놈들 중에 활 쓰는 놈은 하나뿐이냐? ‘매발톱’에 비하면 반걸음이나 부족해.” 제이는 허리에 찬 다른 칼까지 뽑더니 라이에게 물었다. “하나 빌려줄까?” 라이가 대꾸했다. “칼은, 저기 많다.” 로브에 가린 등에서 뭔가 불쑥 올라갔다가 가라앉았다. 그제서야 사냥꾼들은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타냐가 1층 계단에 내려갔을 때는 이미 싸움이 끝나가고 있었다. 라이는 달아나는 한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계단 쪽으로 집어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방금 내려오는 타냐의 정면으로 날아들어다. 타냐는 지팡이를 휙 휘둘러 그 남자가 날아가는 방향을 창문 쪽으로 틀었다. 유리창을 박살내며 나가떨어진 남자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댔다. 대여섯 남은 사냥꾼들은 더 싸울 의지를 잃고 달아나버렸다. “내버려둬. 이 사실을 소문 내줄 녀석이 한둘쯤 있는 것도 좋으니까.” 카셀은 쫓아가려는 제이를 말리고, 계단 쪽에 서 있는 타냐에게 말했다. “시끄러워서 깨셨습니까?” “아니오. 하지만 자기 전에 볼만한 광경은 아니군요.” 1층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아직 살아남은 사냥꾼들은 신음하며 기어서라도 여관 밖으로 달아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타냐의 뒤에 있던 헤더가 계단을 내려와 카셀 옆에 섰다. 그때까지도 카셀은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오. 이름이...... 헤더였던가?” “무사하셨군요, 캡틴 울프.” “다행히도 그렇소. 그보다 이 사냥꾼들을 누가 고용했는지 알고 있소?” “현재 조사 중입니다.” “조사가 끝나면 알려주시오. 우리는 내일 아침 로크로 떠날 테니 뒤늦게라도 알게 되면 우릴 찾아오시오.” “그렇게 하지요.” “주인장.” 카셀이 부르자, 바의 뒤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던 주인이 얼굴만 내밀어 대꾸했다. “예, 예?” “이 곳 수리비는 내가 내야 하오?” “아닙니다요. 괜찮습니다.” “그럼 난 가서 쉬겠소. 아침에 해가 밝거든 마을 행정관에게 가서 방금 본 걸 그대로 알리시오.” 카셀은 탁자에서 내려와 계단을 올라갔다. 남은 제이와 라이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으나, 술맛이 떨어졌는지 또 마시지는 않았다. 헤더는 그 두 사람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발락은 손목에 차고 있던 크로우르 풀어버리고 말했다. “비상시를 대비해 조직원을 스무 명이나 데려왔는데, 두 명이 해결해버렸군. 난 나설 틈도 없었따.” “차라리 잘 됐습니다. 캡틴 울프의 경호가 저 정도라면, 우리는 정보 수집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군요.” “참, 테마르의 소식은 안 물어보나?” “경황이 없어 제일 중요한 걸 여쭙지 못했군요. 나중에 묻도록 하죠. 앞으로 저 분과는 많이 마주쳐야 할 테니까.” 둘은 조용히 술집을 빠져나갔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조직원들이 그 두 사람을 따라 마을 밖으로 사라졌다. 카셀은 복도 창 끝에 서서 술집 앞에 있던 블랙풋의 조직원들이 마을을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뜻밖의 지원 세력을 얻었군요.” 뒤에서 타냐가 다가와 창가에 기댄 카셀 옆에 서서 같이 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뜻밖이긴 하네요.”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타냐가 물었다. 그 빛나는 눈동자의 아름다운 얼굴은 오래 바라보기 힘들었다. 카셀은 괜스레 눈을 밖으로 돌렸다. “속이 좀....... 피를 보고 아무렇지 않는 척 하는 게 아직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 감각이 무뎌지지 않은 걸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어렵네요. 하지만, 글쎄요. 지금 저 밑에 시체가 열 구 넘게 있는데, 저는 지금이라도 침대에 누우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정도면 충분히 무뎌진 걸지도.......” “그런 고민을 멈추지 마십시오. 그런 쪽에 감각이 무뎌져 있는 건 저나 제이메르 정도면 족합니다. 당신까지 냉정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가장 냉정해져야 하는 위치가 아닌가요?” 타냐는 천천히 창가에서 멀어졌다. 카셀은 타냐가 또 그냥 가버리나 보다 하고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타냐의 팔이 목을 감싸왔다. 카셀은 그녀의 따뜻한 가슴이 등을 덮어오자, 너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카셀의 뺨에 댔다. “앞으로 얼마나 큰 희생이 있을지, 얼마나 큰 죽음이 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지지 말아야 해요. 죽음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순간, 우리는 적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죄책감을 가지세요. 죽음을 두려워하십시오. 당신은 그 짐을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항상 제가 함께 할 겁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타냐의 목소리에 카셀은 마음이 들떴다. 그저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대꾸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미안해요, 타냐. 그 동안 제 생각만 하느라 타냐를 위로할 여유를 갖지 못했어요.” “제가 할 말입니다. 아직 우리는 충분히 긴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좀 냉정하게 보였더라도 그건 제 진심이 아니라.......” 그녀는 뭔가 말을 이어가려다 포기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그냥 있어요” 카셀도 그저 그녀와 닿은 부드러운 감촉을 소중히 여기며 움직이지 않았다. “타냐.” 카셀은 목을 감싼 타냐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네, 카셀.” “상대가 누구든지지 마십시오.” 타냐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말은 크나딜의 동굴에서도 했잖아요.” 타냐는 카셀에게 키스하고, 말을 이었다. “지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카셀도 의외로 자기가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며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꽤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창가에 서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 이상 아무 대화도 이어나가지 못했다. 3. 원로의원 롬노르 “주인님!” 잠시 책상에 앉아 있던 롬노르는 다급한 집사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이제 일흔이 다 되어가는 그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깜빡 잠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새삼 늙었다는 걸 실감했다. 자신만은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의 패기와 건강을 잃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던 시절이 그리웠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집사는 급한 보고는 뒤로 미루고, 먼저 롬노르의 안색을 살폈다. “아닐세. 어제 잠을 못 이뤄서. 이 늙은이가 새벽잠 없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그보다 무슨 일이지?” “루에머스 집정관께서 친히 저택에 오셨습니다.” 롬노르는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사소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일은 잦았으나, 그런 중요한 약속을 잊는 일은 드물었다. “내가 집정관과 사전 약속을 했던가?” 이렇게 기억력이 희미해질수록 반대로 과거의 기억은 선명해졌다. 처음 의원 자리를 얻었을 때나, 집정관이 되고, 결혼하고 딸을 낳고, 아내를 잃었던 순간들은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개척하며 살고 늙은이는 과거를 되새기며 산다더니, 지금이 꼭 그 꼴이었다. 같이 늙은 친구들은 젊은 시절을 미화시켜 그런 거라고 핀잔이었다.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오셨습니다.” “허허, 루에머스가 글러 때가 다 있군. 응접실에?” “예, 차를 내올 필요도 없이 서둘러 롬노르 위원님을 모셔오라고 다그치셨습니다.” “곧 가보겠네.” 롬노르는 겉오산 하나 걸치고 지팡이를 챙겨 응접실로 갔다. 문을 열고 절룩거리며 다가가니 루에머스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했다. “롬노르 위원,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하도 원로 의회에 출석을 하지 않으시니 얼굴마저 잊어먹겠습니다.” 루에머스는 단정히 정리한 금발에 쉰 살이 다 되었어도 젊은이처럼 혈기왕성한 남자였다. 깊게 패인 주름살은 나이보다 더한 연륜을 보여주었고, 옷 너머로 각이 잡히는 근육은 아직도 몸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목덜미와 얼굴에는 십 년 전 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많았다. 루에머스가 집정관을 맡은 5년 동안 전쟁의 여파로 흔들리는 가넬로크가 많이 살아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롬노르는 어딘지 그가 맘에 들지 않았다. 오래 전 지나치게 야망에 가득 찼던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원로 의회란 게 예전처럼 힘이 강한 것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늙은이들이 자기 안 죽었다는 걸 알리려고 발악하는 곳에 끼어있기라도 해야 하는 거요?” “하하, 물론 아닙니다. 의원께서는 언제나 말씀이 직설적이시군요.” 론모르는 의자에 손을 짚고 허리를 구부려 느릿느릿 자리에 앉았다. 겨우 지팡이에 손을 올려놓은 후 그는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으로, 집정관께서 직접 오셨소?” “좀 중대한 사안이 터져서 도움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요새 시국도 어지럽고 안 좋은 일이 계속 겹치다 보니 솔직히 제 주위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말입니다.” “나라고 믿을 만하오? 아니, 믿을 만하더라도 내가 감히 집정관의 힘이 되어줄 수 있던가?” “가넬로크가 건드릴 수 없는 대국이라 불리던 시절의 집정관이셨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도 노후가 걱정입니다.” “늙어 권력이 무슨 소용 있소? 나야 탐욕이 도를 넘어 이 나이 되어서도 2층짜리 호화 저택 짓고 사는 게지. 정치가가 말년에 권력을 가질 필요가 무어 있겠소?” “2층을 강조하시는 건 의회 의원 오십 명 전원을 욕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더불어 집정관 세 명을 포함해서지. 루에머스 집정관도 그렇고, 논돌린, 나르베니 집정관도 그런 호화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건 로크 시민들에게 그리 좋게 보이지 않을 거요.” “새겨듣겠습니다.” 루에머스는 속에 딴 마음을 감추고, 부드러운 미소만 드러냈다. 롬노르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소? 이제 사람을 앞에 두고 오래 앉아있는 것도 금방 피로해지는구려. 그리고 방금 읽던 책도 그냥 접어 두고 와서, 그 뒤가 궁금해서 못 참겠군.” “곧 이 쪽 일이 더 궁금해질 겁니다. 어제 저녁 늦게 파발이 하나, 의회로 직접 들어왔습니다. 최근 급한 파발이 몇 건 들어오긴 했지만, 수백 년 동안 묻힌 매뉴얼에 따라 시행된 파발은 또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수백 년? 그런 게 다 있소?” “가넬로크 남쪽 마을 레오피오에서 온 겁니다. 혹시 레오피오가 하늘 산맥으로부터 있을지 모를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진 건 아십니까?” “들은 것도 같구려.” “저도 기록된 게 있나 한참 찾았습니다. 침략이 있을 경우 레오피오의 파발은 노란 깃발을 달로 입성해야 하고, 노란 봉투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그게 날아왔습니다.” “농담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편지의 내용이 조금 재미있었습니다. 아란티아의 울프 기사단 캡틴이 직접 하늘 산맥으로부터 가넬로크를 위협할 군대가 내려올 것이며, 조만간 로크로 직접 가겠다, 라고 말했답니다.” 롬노르는 지팡이 끝에 달린 구슬을 만지작 거렸다. “그것 참.......” 겨우 말을 꺼낸 롬노르는 뒷말을 쉬이 잇지 못했다. 다시 루에머스가 말했다. “퀘이언 간트라는 기사를 만난 게 5년 전이었지요?” 전쟁 후의 논의를 위해 각 나라의 지도자가 모두 모인 자리였다. 그토록 쟁쟁한 인물들이 모였건만 그 중에서도 퀘이언과 새나디엘 여왕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나는 캡틴 데라둘만한 남자가 세상에 둘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캡틴 퀘이언 만큼은 견줄 만 했었소. 아니, 당시 서른 살 겨우 넘은 나이를 생각하자면 그 이상이었지.” “동감입니다. 하지만 퀘이언은 당시 자신은 더 이상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수호 기사라고 했지요.” “허어, 그랬소? 기억이 잘 안 나는군.” “만나는 사람마다 나서서 설명하는 게 귀찮아서 그냥 캡틴이라는 호칭을 달았었다고 사석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즉, 당시 울프 기사단에는 캡틴이 없었던 겁니다. 만약 이 파발이 사실이라면 이 캡틴이라는 자는 둘 중 하나겠지요. 캡틴 울프를 사칭하는 자거나, 아니면 새로 발탁된 캡틴이거나. 하지만 근 1년 전까지의 정보를 보자면, 울프 기사단의 캡틴은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워낙 내부의 일을 외부로 내놓지 않는 나라인 터라 그 정보도 부정확하긴 합니다만.” “그럼 캡틴 문제는 그렇다 치고, 그 하늘 산맥에서 내려오는 적이란 건 뭐요?” 그걸 논의하고자 오늘 아침 바로 비상 국정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의원들의 의견이 제각각이라 도저히 정돈을 못하겠더군요. 아시잖습니까? 의원들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 드래곤께서 오셔도, 그것만은 못 막으실 겁니다. 그래서 다른 두 집정관과 상의한 후 원로 의회의 의장 격인 롬노르 의원을 자리에 모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의회에 원로 의원이 개입하지 않기로 한 법률은 어찌 되는 거요?” “개입은 아니지요. 의회의 의견에 조언을 주는 본래 임무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또랑또랑한 어조로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는 루에머스 집정관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 이제 뒤가 궁금하시다던 그 책은 조금 잊혀지셨습니까?” 롬노르는 그만 허허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언제쯤 가야겠소?” “이틀 후 아침에 시작할까 합니다. 내일 있을 의회에서 제가 롬노르 의원을 자리에 모신다고 알리겠습니다.” “내가 미리 예고까지 한 후 나타나야 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군.” “로크의 의원들은 우리 세 집정관들보다 당신의 말을 더 잘 들을 겁니다.” ‘그래서 자네는 나를 조종하려 드는 거겠지.’ 롬노르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루에머스는 자기 볼일이 끝나자 미련 없이 저택을 떠났다. 뒤늦게 집사가 내온 차를 혼자 마시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집사, 내일 의회에 다녀와야겠다.” “의원복을 다려놓을까요?” “늙으면 겉으로 보여줄 건 옷밖에 없지. 신경 써주게.” “예, 주인님.” 찻잔의 차는 식었고, 식은 차는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하늘 산맥의 적? 거짓 보고라는 죄명으로 레오피오의 행정관을 파면시키는 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틀 후, 롬노르가 참석한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의원들은 격렬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거짓 보고에 일일이 반응하면 의회의 위신이 어떻게 되는가, 만약 정말이면 큰일이지 않은가의 토론부터 시작해서, 당장 군대를 움직여야 한다, 드래곤 기사단을 부르자 같은 성급한 의견도 있었다. 보고를 올린 행정관을 직접 불러 심문하자는 등의 의견은 차라리 바보 같은 말이었다. 저녁 무렵 ‘앤발디’에서도 급한 파발이 날아왔다. 그 파발꾼이 들고 온 편지 역시 노란 봉투였고, 어찌나 휘갈려 썼는지 서기가 그 내용을 해독하려고 식은땀을 뻘뻘 흘릴 지경이었다. “아란티아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앤발디의 행정관서를 찾아와 군대를 집결시켜 남쪽 방어벽에 배치시키라고 강요했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병사들은 괴상한 요술로 벽에 못 박혔고, 저는 하얀 날개가 달린 괴한에게 멱살을 잡혀 벽에 반시간이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 협박에 이기지 못해 이 파발을 날리며, 캡틴 울프는 자기가 ‘협박했다.’ 라는 말을 편지에 남기라도 또한 명령했습니다. 캡틴 울프의 또 다른 경호원이 현재 제 옆에 서서 편지 내용을 감시하고 있으며, 그의 눈동장에서는 불이 타오르는 듯 했습니다. 앤발디의 행정관, 타르게르.” 그 내용을 들은 루에머스 집정관은 어이없어 하며 말했따. “앤발디 같은 중요한 군사적 거점을 맡는 행정관이 보고 형식도 맞출 줄 모르는가?” 루에머스의 옆에 있는 젊은 집정관 논돌린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다음부터 행정관을 뽑을 때에는 시문학 과목을 추가해야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의원들의 실소가 터졌다. 가넬로크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집정관인 나르베니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캡틴 울프란 자는 자기가 로크로 오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그 자가 캡틴을 사칭하는 자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은근히 진짜 같지만, 그게 또 의심쩍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뒷자리에 앉은 연공서열 높은 의원 하나가 소리쳐 말했따. “내버려둬도 여기로 온다면 그 자가 온 후 회의를 하는 건 어떻소?” “그리하면 늦소.” 루에머스가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 자를 대할 때 어떤 방식으로 대할지 의회 내에서 결론을 지어야 하오. 만약 사칭한 자라면 처벌을 내리면 그만이지만, 진짜일 경우 그 자 아에서 가넬로크 의회의 난잡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겠소?” 루에머스의 일장 연설이 있은 후 점심시간을 알리는 나발이 울렸다. 전쟁이 터져도 점심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의원들이 자리를 떴다. 세 집정관은 롬노르와 함께 나무 아래 정원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있어 좋을 것도 없는데, 왜 불렀는지 모르겠소.” “아닙니다. 의원님께서 계셔주셔서 한층 정리된 느낌입니다.” 항상 웃기만 하지 도대체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는 논돌린이 말했다. 옆에서 우아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써는 나르베니가 말했다. “내일쯤이면 몇 가지 의견 정도는 수렴할 만하겠죠.”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롬노르는 그 미소를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그녀는 남자를 대함에 애교가 넘쳤고, 또한 남자에게 싫은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벌써 몇 명의 의원들이 그녀의 침실에 한 번 들어간 후 정책을 바꿨다고도 했다. 능력 있는 그녀를 모함하기 위한 거짓일지도 모르지만, 롬노르는 그런 소문을 쉽게 흘려버릴 수도 없었다. 사실 그녀는 권력욕만큼이나 허영도 대단했다. 어찌나 피부에 들이는 공이 대단한지 그녀는 마흔 살 가까운 나이임에도 주름이 거의 없었고, 헐렁한 의원복 위로 풍만하게 솟은 가슴은 지금도 젊은 여자처럼 보기 좋은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허리도 가늘었고, 살짝 드러낸 다리는 유리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5년 전 각 나라의 대표가 모인 자리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냈었다. 집에 있는 보석이란 보석은 다 달고 나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가넬로크 여왕처럼 행세했다. 조촐한 회식 자리는 당장 화려한 파티장이 되어버렸고, 그 자리의 남자들은 모조리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는, 자신의 로크의 의원이 아니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가장 멋진 남자를 꼬드겨 그의 아내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롬노르는 그게 단순히 농담으로 끝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는 나르베니가 퀘이언을 유혹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 퀘이언은 어떤 남자도 뿌리칠 수 없는 그녀의 손길에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나는 향기롭다고 독사의 독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오.’ 있을 수 없는 일을 당한 얼굴로 멍하니 서있는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퀘이언은 그 자리를 떠났다. 또한 남자를 유혹하는 나르베니의 화려함은 새나디엘 여왕이 풍기는 온화한 아름다움에 그만 빛을 잃어버렸다. 여왕은 작은 왕관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았으나 항상 빛이 나는 듯 했다. 왜 보석을 하지 않느냐, 만약 아란티아에 금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가넬로크가 기꺼이 국고를 털어 선물하겠다는 루에머스 집정관의 짓궂은 농담에도 ‘무거워서 걸치기 귀찮은 금은 관두고 당신 나라에서 제일 맛 좋은 와인이나 선물하라. 그걸로 당신 농담의 가치를 평가하겠다.’ 라는 대답으로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루에머스가 다음날 당장 보물처럼 간직하던 자신의 와인을 선물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나르베니가 아란티아에 강한 적의를 품고 있는 건 분명했다. 집정관이 된 후 성장한 듯도 하지만, 롬노르는 인간이란 건 세월이 흘러도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르베니는 대화 내내 그런 적의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에 롬노르는 오히려 불안했다. 나르베니는 지금도 음식을 사이에 두고 롬노르에게 소녀처럼 청순한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 어떤 눈길을 주어야 넘어오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단정하게 한쪽으로 빗어 내린 긴 금발 머리는 햇빛에 반사되는 것만 같았다. 어린 아이의 피를 마셔서 피부 노화를 막는다는 소문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캡틴 데라둘은 이 일에 대해 뭐라 그러오?” 롬노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데라둘은 그 자를 직접 만난 후에 얘기하겠다며 그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있소.” 논돌린이 대꾸했다. 루에머스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더니 약간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요새 캡틴 데라둘의 행보가 수상합니다.” “여자라도 생긴 것 같나요?” 나르베니가 웃으며 물었으나, 루에머스는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이겠지....... 아닙니다. 좀 더 지켜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롬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끝냈다. 힘든 고민을 이어가며 먹은 탓에 소화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회의는 다음날에도 같은 양상을 띠었고, 그 다음날에는 비교적 조용히 얘기가 진행되어 캡틴 울프라고 밝힌 남자에 대해 의회가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인지 신속히 논의되었다. 그 과정에서 롬노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루에머스는 롬노르 덕에 일이 빨리 끝났다고 추겨세워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원로 의회의 의원들을 만나 옛날 얘기를 하며 차 한 잔 하다가 그는 홀로 집으로 향했다. 가끔은 혼자 산책하고 싶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드래곤 기사단의 건물 옆에 와 있었다. “으음, 내가 왜......?”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드래곤 기사단의 뒤뜰에 있는 정원은 의회의 정원만큼이나 잘 꾸며져 있는 대신 사람 북적대는 의회 정원과 달리 인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예전부터 업무에 지쳐 혼자 있고 싶으면 가끔 이곳을 찾았다. 그는 풀 향기를 마시며 그 때를 향수하며 걸었다. 그가 집정관을 맡았던 그 시절에는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활발한 기사단의 고함 소리도 들리곤 했다. 지금도 기사들의 목소리는 가끔 들렸으나 그 때 같은 활기는 없었다. 당연히 드래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기사들이 정중히 인사하며 그를 지나쳐갔다. 갑자기 루에머스의 말이 떠올랐다. ‘캡틴 데라둘이 수상해? 가넬로크를 지키기 위해 공을 들인 걸 생각하면, 그를 수상히 여기는 자네가 수상한 게지.’ 그는 잠시 쉬어갈 겸 의자에 앉았다. 이제 시기가 지나 꽃잎이 날리는 정원 중앙에서 그는 오랜 기억을 들추었다. 저 꽃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소녀가 있었다. 이 정원 중앙의 꽃밭은 바로 그가 스무 살이 된 딸을 위해 지은 곳이었다. 당시 그녀를 위해 기꺼이 수호 기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남자들이 드래곤 기사단 내에서도 많았던 터라, 이런 좋은 자리를 제공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선물을 준 아버지를 위해 꽃밭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또한 딸이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꽃잎이 휘날리는 바람 속에서 춤을 끝내고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맞잡고 미소 짓는 성숙한 딸의 모습은 아버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보아라, 내 딸이다. 하늘이 가넬로크에 내린 선물은 드래곤만이 아닐 것이다.’ 호기롭게 외치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일찍 피어버린 꽃은 너무나도 쉽게 저물었다. 이 정원만 오면 딸을 떠올리는 기쁨과 잃은 슬픔이 교차했다. 롬노르는 다시 일어나 정원을 가로질렀다. 혹시나 해서 캡틴 데라둘을 찾았으나, 그는 자리에 없었다. “손님과 같이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간다던가?” “모르겠습니다.” “그 손님이란 건 누군가?” “그것도 잘.......” 드래곤 기사단의 일이라면 감기 걸린 사람 한 명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사무관이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것에 롬노르는 호통을 쳤다. 그러나 돌아서고 나서 후회했다. ‘이제 내가 무슨 권리로 젊은이들을 야단친단 말인가?’ 그는 쓸쓸히 드래곤들이 과거 둥지를 틀었던 넓은 공터로 갔다. 철조망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 썼던 과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캡틴 데라둘의 철저한 관리로 부서진 곳은 없었으나, 역시 드래곤이 있어야 할 곳에 드래곤이 없다는 건 서글픈 일이었다. 이 곳에서 이간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던 드래곤이 딸의 운명을 말할 때 롬노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 내가 일부러 이런 곳을 찾아 고통을 끄집어내는 거냐? 돌아가자. 캡틴 울프가 오든, 아란티아의 여왕이 오든 이제 와서 내가 할 일이란 게 뭐가 있겠는가? 쉬자. 쉬자꾸나.“ 롬노르는 걸음을 돌리려다 문득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단정하지 못한 금발에 오랜 여행으로 찌든 망토를 두른 모습을 보고 기억의 한 부분이 불쑥 머리를 쳐들었다. 그 곳에 서 있는 그 청년의 모습은 이십여년 전에 보았던 청년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누구지?’ 이십여 년 전, 집정관을 지내며 일주일에 한번씩 드래곤 뷰하롤을 만나 이야기하길 좋아했던 롬노르는 바로 이 자리에서 노숙자 같은 꼴을 한 금발의 청년을 발견했었다. 당장 성스러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호통치려다, 공터에서 기지개를 펴는 드래곤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길이 하도 초롱초롱하고 맑아 함부로 내쫓기가 애매했다. 호기심도 들고 해서 롬노르는 그에게 접근해 물었다. “넌 어느 집안 아이인데 허락도 없이 여길 들어와 드래곤을 관찰하느냐?” 그 당돌한 청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넬로크의 수호 드래곤을 소유하신 분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그 분께 허락을 받고 오겠습니다.” ......드래곤은 가넬로크의 소유물이 아니다....... 의회 의원들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금기를 호기롭게 떠드는 청년의 말투가 마음에 들어 롬노르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땅은 드래곤 기사단의 땅이지. 그 땅의 주인에게는 허락을 받았느냐?” “밟고 지나가는 땅의 모든 주인에게 허락을 받는 게 순서라면, 우선 그 주인을 만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무관도 만나지 못하게 하면서, 대체 드래곤 기사단의 누구를 만나 허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롬노르는 속으로 ‘요 녀석 보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계속 물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너는 드래곤을 왜 보느냐? 단순히 신기한 동물이나 보려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늘어놓으며 불법을 불법이 아닌 것처럼 말장난으로 속여 보려 하는 거냐?” “본 적 없는 신기한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 드래곤께 볼 일이 있긴 있습니다.” “뭐냐?” “위에 태워 달랠 겁니다.” 그는 그만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딸아이에게 안겨진 비극에 일상의 하루하루가 괴로워, 웃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그였다. 바로 그 허무맹랑한 청년은 보름 후에 으리으리한 롬노르의 저택을 찾아왔다. 그리고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요구를 들이댔다. “롬노르 집정관의 따님이신 달리아와 결혼하려고 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는 달리아에게 청혼하려는 쟁쟁한 가문의 청년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당시 워낙 청혼자가 많았던 터라 귀찮아진 롬노르는 그들을 한 날, 한 자리에 불렀던 것이다. 그 출신도 알 수 없는 청년은 그들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롬노르만 노려보며 말하고 있었다. 다들 비웃으며 아예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롬노르는 두통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대꾸했다. “요청치고는 조금 과격하군. 내가 그걸 허락해야 하나?” “허락?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집정관님. 무슨 허락입니까? 저는 그냥 선언을 하러 온 겁니다.” 청년은 자기 가슴을 쾅 쾅 두드렸다. 보다 못한 청혼자들 중 하나가 나섰다. “꼬마야, 넌 누군데 감히 집정관께 그런 말을 올리느냐? 네가 이런 자리에 설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하고 왔냐?” 그의 말에 청혼자들은 껄껄대고 웃었다. 그러나 청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느냐?” “나는 십 년이나 집정관을 보내시고 현재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에넬로르의 외동아들이자, 현재 드래곤 기사단에서 2년 째 기사 수업을 받고 있는 에넬사르다. 이 내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면 누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가? 어디 아까부터 시끄럽게 나불대는 그 입으로 말해 보라!” 당당히 말하는 에넬사르의 말에, 금발의 청년은 어처구니없어하며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롬노르 집정관님. 이런 녀석을 청혼자랍시고 들였습니까?” 피곤한 눈으로 롬노르는 물었다. “무슨 뜻인가?” “내세울 거라고는 자기 아버지 이름 밖에 없는 녀석이 달리아의 남편감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에넬사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당장 칼을 뽑았다. “네 이 놈, 네 기름칠한 혓바닥을 이 자리에서 베어내리겠다.” “어디 해봐! 내 동강 난 혓바닥이 집정관 저택 거실바닥에 피 튀기면서 팔닥거리면 네 아버지 에넬로르께서 뭐라 말씀하실지 궁금하구나.” 에넬사르는 도움이라도 청하듯 롬노르의 눈치를 살폈다. 롬노르는 누구의 편도 될 생각은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의 저택에서 누구든 칼을 휘두르게 허락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에넬사르는 꺼낸 칼을 쓰지도 못하고 집어넣지도 못한 채 그저 쩔쩔매기만 했다. 한참 그 모습을 보던 그 청년은 기어이 한 마디 더 했다. “넌 칼 휘두르는 것도 남 허락 받고 휘두르냐?” “이 자식!” 롬노르는 내버려두면 기어이 피를 보겠구나 싶어, 손을 내어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제일 뒤에 조용히 서 있던 키 크고 어깨 딱 벌어진 청년이 손을 내저으며 에넬샤르를 말렸다. “함부로 칼을 꺼낼 자리가 아니지 않나, 에넬사르? 집어넣어라.” 에넬사르는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칼을 넣었다. 롬노르는 그가 나서준 걸 감사해하며 말했다. “이 곳에서 제 정신으로 서 있는 건 자네뿐이군, 데라둘 마치. 정리 좀 해주게.” 그 때 그 금발의 청년은 인상은 구기며 말했다. “데, 데라둘, 너도 달리아에게 청혼을 하려고?” 데라둘은 큭큭 대고 웃었다. “왜 안 되나?” 청년의 인상이 구겨지는 걸 감상하다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다. 집정관께서 부탁하셔서 경호 겸 왔다. 이런 일이 있을 것 같더라고.” 롬노르가 둘 사이의 대화를 듣다가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일주일 전에 기사단에 찾아와서 드래곤 위에 태워달라고 난장판을 부리는 녀석이 있었지요.” 롬노르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청혼자들의 표정이 일제이 일그러졌다. 데라둘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 여기 모이신 분들은 적어도 이 자리에 난입한 친구가 어째서 자기가 레이디 달리아께 청혼할 자격이 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습니까, 롬노르 집정관님?” 롬노르도 사실 이 청년의 만용이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궁금하긴 했다. “말해보게.” “그야.......” 뜻밖에도 수줍어하며 그가 대답했다. “달리아가 날 좋아한다고 했으니까요.” 한 명이 침을 튀기며 웃음을 터트렸고, 다른 이들도 웃었다. 한 명은 귀족의 품위도 잊고 벽을 치며 과격하게 웃기도 했다. 청년은 얼굴을 붉히면서 끝까지 롬노르에게 말했다. 그는 말하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달리아는 절 좋아한다고 말했고, 저도 달리아가 좋습니다. 우린 긴 시간 동안 얘기했습니다. 저는 여기 온 지 보름 밖에 안 됐지만, 여기 저보다 달리아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한 사람 있습니까? 달리아가 토끼를 키우고 싶어한다는 거 아는 사람 있습니까?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뭔지 알아요? 즐겨 부르는 노래와 시를 압니까? 저는 압니다. 달리아는 요리를 못해요. 하지만 저는 잘 하죠. 제가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달리아는 말을 잘 탑니다. 저는 못 타죠. 달리아가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저는 달리아를 좋아합니다. 달리아도 저를 좋아합니다. 그게 답니다.” 롬노르는 그 말을 하는 청년이 조금씩 다가오는 착각이 들어 고개를 약간 뒤로 물렸다. 그는 대꾸할 자신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 우리 둘 사이에 롬노르 의원께서 개입하실 자신이 있습니까?” 듣다 못한 한 명이 버럭 소리 질렀다. “당장 나가라. 결혼이 애들 소꿉놀이인 줄 아느냐?” 다른 이들도 욕을 내뱉었다. 말하는 게 너무 과격하여 데라둘도 그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 청년과 룸노르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롬노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째 달리아가 만들어 본 적도 없는 쿠키 만들겠다고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더라니.......” 그는 아직도 자기를 강한 시선으로 쏘아보는 이 청년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농부입니다.” 욕을 하던 청년들은 이제 아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디에서 왔느냐?” “카모르트, 루우룬이란 마을에서 왔습니다.” 그 청년은 모든 질문에 주저함 없이 대꾸했다. 롬노르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름은 무엇이냐?” “에밀 노이입니다.” 그 곳에 에밀이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될 정도로 닮은 청년이 공허한 시선으로 철조망 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롬노르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다가가 그 일을 물어보려다,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헛기침을 크게 했다. 그 청년은 약간 놀란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룸노르를 발견하고 살짝 미소 지었다. “누군데 허락도 받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느냐?” 젊은 시절 모두를 호통하던 그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은 정중히 고개 숙여 말했다. “한 때 드래곤의 둥지였던 이 성스러운 자리를 견학해보고자 온 여행자입니다. 특별히 저지하는 사람이 없어 허락을 받아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이 땅은 드래곤 기사단이 소유하고 있지. 그럼 그 곳의 허락은 받았는가?”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 곳을 과거 자신들의 영광을 지켰던 성지로 여기지 않아 제가 여기 있는 것조차 관계치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쪽은 드래곤 기사단이 아니라, 이 곳에서 죽어간 드래곤들의 영혼이겠지요.” 이십여 년 자기를 향해 소리치던 그 젊은이의 날카로움은 없었으나, 대화하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지 않았다. 롬노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자네......, 카모르트에서 왔나?” 그 청년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란티아에서 왔습니다.” “아, 그래?” 롬노르는 실망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안도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어떤 사실에 대한....... “하지만 고향은 카모르트지요.” 그 젊은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롬노르는 놀라 얼른 물었다. “혹시 루우룬 마을?” 그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그걸 아십니까?” 롬노르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청년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괘, 괜찮네. 조, 조금 확인해 볼 일이 있어서....... 나, 난 가봐야 겠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아닐세. 가보겠네.” 롬노르는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허둥지둥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그 청년이 자기를 걱정한 나머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자네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되겠나?” “카셀입니다.” 룸노르는 황급히 돌아서서 걸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어먹기만 하는 나이였다. 하지만 어째서 과거 가슴 아픈 일들은 하나도 잊혀지지 않고, 건드리기만 하면 또렷이 기억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롬노르는 보석함을 열어 떨리는 손으로 몇십번이나 읽고 또읽은 딸아이의 편지를 꺼냈다. ‘믿지 못하시겠지만, 아빠. 제가 아이를 낳았어요. 그 이름은 에밀이 가장 좋아하는 위대한 모험가의 이름을 따서 카셀이라고 지었어요. 남편과 꼭 닮은 귀여운 아이랍니다.......’ 4. 로크의 의회 로크에 도착하는 날 이른 아침, 카셀은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바위에 고인 물로 세수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 물을 적시고 고개를 드니 헤더가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카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캡틴 카셀.” “좋은 아침이오......, 헤더.” “좀 더 주위를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로크로 갈수록 당시늘 노리고 있는 적은 많습니다.” “충고 고맙소.” 카셀은 세수를 마저 했다. 헤더는 그가 세수하는 걸 계속 내려다 보며 말했다. “로크의 몇몇 암살집단이 당신을 잡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 중 몇은 벌써 우리 조직이 부쉈습니다. 하지만 그 중 제일 큰 조직은 저희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조직 보스가 있는 곳이 워낙 경비가 철저해서 발락도 쉽게 침투하지 못 하겠다더군요.” “그 조직이 그렇게 막강한가?” 카셀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블랙풋이 아직 어쌔신 길드였다면, 어지간히 충돌을 일으켰을 정도로요. 그 조직 보스는 아직 젊지만 한 때 현상금이 금화 오백으로 치솟았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였다더군요. 지금은 중견 조직을 거느리는 암흑의 보스가 된 거죠.” “이름은?” “본명은 모르지만, ‘붉은 손’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나이트 핸드’니 ‘해골롤러’ 같은 조직도 아직 저희가 처리를 못했습니다. 그런 녀석들이 설치는 바람에 개별 사냥꾼들은 애초에 손을 떼버려서 손쓰기 편한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주의하십시오.” “고맙소. 그런데 그런 놈들에게 현상금을 제공한 장본인데 대해서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 그보다 로크 자체가 최근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로크 시민들은 그걸 모르죠.” “어떤 일이오?” “최근 몇 년 사이 실종 사건이 여러 건 있었습니다. 대부분 성 밖에 사는 가난한 농부나 집 없이 떠돌아 다니는 노숙자, 멀리서 온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라서 크게 다뤄지지 않을 뿐, 알아낸 것만 스무 건이 넘습니다.” “더 있다는 거군. 그게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나? 이를 테면 거꾸로 된 십자가를 내세우는 종교라든가.......” 카셀이 날카롭게 물었다. “저도 그것과 연관이 있을까 알아보고 있지만, 단언하지는 못하겠군요.” “고맙소.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으면 바로 또 알려주시오. 또 다른 건?” “지금은 이게 답니다. 그런데...... 혹시 테마르의 소식은 아십니까?” “테마르? 아, 던멜.” 헤더는 고개를 천천히 한 번만 끄덕였다. “던멜은 루티아에 있소.” “루, 루티아요?” 헤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셀은 다른 일행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갖출 때까지 루티아에서 벌어진 일과 던멜의 일을 가냑히 설명해주었다. 어차피 카셀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테마르께서는 역시 그런 일에도 중요한 분이시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카셀은 부드럽게 말했다. “조만간 찾아올 테니 직접 말하시오. 아, 던멜과는 말은 하는 게 아니지, 참.” 헤더는 빙그레 웃으면서 인사하고 바위 뒤로 물러갔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때도 갑작스러웠다. 떠날 채비를 끝낸 타냐가 자신이 탈 말과 카셀이 탈 말을 모두 끌고 오며 물었다.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까?” “뭐, 뻔한 내용이었습니다. 로크에 많은 위험이 있다는 것 정도?” “......뻔한 내용이 아니었으면 했는데요.” “그러게요.” “서두르죠. 전날 나타난 적의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타냐는 무게가 안 느껴질 만큼 가볍게 말에 올라탔다. 반면 카셀은 이틀 재 계속 되는 노숙으로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힘겹게 말에 올라탔다. 이제 로크까지는 반나절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아로크였던 역사까지 합치면 천년이나 되는 나디움보다 오래된 고대의 도시에 발을 디디다는 것에, 카셀은 작은 설레임을 느꼈다. 먼저 여관을 잡아놓느라 일행과 잠시 헤어졌었던 제이메르가 카셀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가니, 카셀이 웬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금방 카셀에게서 도망치듯 가버렸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제이가 다가가며 물었다. 카셀은 비틀거리며 멀어져 가는 노인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카셀은 어깨만 으쓱했다. “저 노인은 내가 어디 출신인지 알아봤어.” “그거 위험한 거 아냐? 내가 추적해볼까?” “으음, 아니야. 의회 쪽 사람 같은데, 조만간 또 만나겠지. 아, 그런데 라이는?” “그 큰 덩치 데리고 다니기도 애매해서 그냥 여과에 두고 왔다.” “제이메르, 라이에게 조금만 더 잘 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왜?” 카셀은 제이의 어깨를 톡 톡 쳤다. “너랑 비슷해. 둘 다 사람을 믿지 않고, 둘 다 위험하고, 둘 다 예의 바르지 못하거든. 하지만 둘 다 심성은 착하니까.” “검술로 치면 너는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이다. 앞으로 할 말을 예측할 수가 없어. 누가 착하다고?” “너도 가넬로크 출신이라고 했지? 다시 돌아왔는데, 가볼 곳 없어?” “이 자식, 딴 소리 하네.” 제이는 철저망 너머에서 다가오는 타냐를 발견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없어. 있을 곳이 없으니까 사냥꾼이 되어 떠돌아다니 ㄴ거야.” 그 말을 하면서도 제이는 고향에 있는 에위니가 생각났다. 아직 잘 살고 있을까? 카셀과 타냐는 서로 대하는 게 한결 부드러워졌다. 제이가 사이에 끼어 있는 게 거북할 정도로 들러붙어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늘 산맥에 있을 때보다 서로를 보고 웃는 일이 많았다. 인간관계란 것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해 본 적이 없는 제이도, 이 괴상한 커플에 대해서는 흥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루티아의 마스터와 울프 기사단의 캡틴. 외부에서 비추면 귀족끼리 가문 맞춰 중매라도 놔준 후 만난 관계 같았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냥, 자기만큼 사람 대할 줄 모르는 여자와 의외로 여자에 대해 미숙한 남자의 별 거 아닌 연애였다. 타냐가 사람 키 둘만한 높이의 철장을 훌쩍 뛰어넘어 두 사람 옆에 착지했다. 얼굴이 변한 후 무슨 엄청난 힘을 얻었는지, 그녀는 평상시에도 늑대로 변한 것 같은 몸놀림을 보였다. 제이는 이런 여자가 마법이 아닌 검을 익혔으면, 대체 무슨 검술이 나올까 궁금해졌다. “특별히 이상한 조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검은 기사의 흕거이 여기까지 이어졌다가 사라진 건 분명합니다.” 타냐가 말했다. 어젯밤 제이는 어둠 속에서 유령 같은 검은 기사를 발견했다. 밤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 멀리서 제이를 노려보는 기사가 있었다. 제이는 그게 검은 갑옷이라고 일행에거 설명했으나, 그게 정말 검은 갑옷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엇다. ‘누구냐?’ 제이는 위협적으로 물었다. 그 검은 갑옷의 기사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었다. 그 투구 안에서 제이는 아버지 티온의 얼굴을 보았다. 제이는 기겁을 하며 칼을 뽑아 뒷걸음질치다가 넘어졌다.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널 잊을 것 같았니?’ ‘닥쳐라!’ 제이는 소리 지르며 칼을 집어 던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볍게 그 칼을 쳐냈다. ‘기억해라. 넌 아직도 날 벗어나지 못했어.’ 아버지는 다시 말에 올라 달려갔다. 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타냐가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식은땀 흘리는 제이는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다음날 타냐는 그 검은 기사의 흕거을 찾아 로크로 들어왔다. 발자국은 없었으나, 타냐는 그 흔적을 계속 추적할 수 잇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드래곤 기사단의 건물이었다. 제이는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했으나, 카셀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어제 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아. 왜 자꾸 물어?” 제이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 검은 기사가 블랙풋의 길드 마스터가 말했던 대로 카모르트의 검은 기사와 같은 녀석들이라면, 그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어. 그 녀석들은 아란티아에서 본 캡틴 웰치와도 다르고, 네가 루티아에서 만난 익셀런 기사들과도 달라. 그들은 죽은 자이면서 죽지 않는 자야. 녀석들의 무기는 검도, 마법도 아니야. 공포지.” “그런 놈들 하나도 무섭지 않다.” 제이가 힘을 주어 말하자, 타냐가 끼어들어 말했다. “무섭지 않은 것 치고는 어제 그 비명에 꽤 공포가.......” “비명? 난 그냥 소리 지른 거다. 경고였다. 이 녀석들이.......” 제이는 억지로 화난 얼굴을 지어 보였다가 돌아섰다.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맞서봐야 이길 녀석들도 아니니 그냥 생각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카셀과 타냐는, 가는 제이를 붙잡지도 않았다. 제이는 여관으로 돌아가 이른 술을 한 잔 했다. 위층에 혼자 쓸쓸히 있을 라이를 불러 같이 한 잔 할까도 했지만, 지금은 혼자가 나았다. 사실 라이는 괜찮은 녀석이었다. 과묵했기에 제이가 대하기에도 편했다. 술을 좋아했고, 제이가 연습 상대해 달라는 걸 거절하지도 않았다. 검을 한 번 받으면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검의 간격으로 치면 거인의 한 걸음이었다. 보여도 막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방어를 하지 않고 흘리면 좋을까? 어디에 맞추면 한 방 날려줄 수 있을까?’ 제이는 온통 그런 생각만으로 밤늦을 때까지 한 잔 술로 버텼다. 아까부터 손님이 많은 데도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계곡 같은 그릇만 닦고 있던 바텐더가 조심스레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저, 손님. 위층 방 예약하신 분이죠?” “어, 왜?” “손님을 노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제이는 새로 시킨 술을 입술에만 적셨다. “아는 녀석들인가?” “예, 저...... 뒷문이 열려 있으니 그 쪽으로 달아나시지 않겠습니까? 워낙 포악한 자라서 경비대도 함부로 못 건드는 자입니다.” “흐음.......” 제이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술잔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저, 손님?” 바텐더가 제이를 부르다가 입을 딱 다물었다. 벌써 제이의 주위로 볓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제이는 바에서 홀의 탁자로 자리를 옮겼을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술을 반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니, 곧 한 녀석이 앞자리 의자에 거칠게 앉았다. “오랜만이군, 제이메르. 벌이 좋나?” 뺨 좌우에 흉터가 깊이 나있고, 한쪾 눈은 검은 안대를 끼고 있으며 지저분한 검은 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는 녀석이었다. 제이는 좌우를 에워싼 녀석들을 먼저 살폈다. ‘세 걸음, 세 걸음, 셀 걸음, 세 걸음 반, 네 걸음, 네 걸음.’ 앞에 앉은 녀석도 네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다. 전 같으면 거리가 멀어도 이 정도 숫자에 주의했을 제이였으나, 두 걸음짜리 모즈들을 사방에 수십 마리 두고 싸워본 터라 이 정도는 위험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검은 안대를 긴 남자가 담배 파이프를 물었고, 옆에 있는 녀석이 촛불을 대주었다. 그 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를 맡으니 제이도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언제 피우고 안 피웠더라?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더군. 이번 사건으로 누굴 죽이게 되는건가 해서 나와 봤더니, 그게 옛 친구라니! 아, 이런 게 운명이란 거겠지? 으음, 그런데 너는 내가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보겠나?” 알아보고 못 알아보고 할 것도 없이, 모르는 녀석이엇다. 노려보는 꼬락서니를 보니 별 볼일 없는 녀석임에는 분명했다. “하긴 우리 둘 다 어렸으니까. 난 그 때 네 검을 유일하게 막아낸 사냥꾼 중 하나였지. 우리 둘 다 스물두 살이었던가? 네가 가장 고전을 했던 상대를 떠올리면 기억날 거다. 이 뺨에 상처를 낸 것도 너지.” 여전히 기억은 안 났다. ‘어디 보자......, 스물둘?“ 당시 제이는 좀 더 강한 사냥감을 찾아 돌아다니던 시절이라, 네 걸음 안쪽에 없던 녀석은 그냥 놔주곤 했었다. 2년 동안 얼굴에 상처 낸녀석들까지 일일이 머리 속에 담고 다닐 여유도 없었다. “나, 너 몰라.” 기억력 없다는 소리 듣기도 싫으니, 제이는 그냥 모르는 걸로 했다. “모른 척 하고 싶은 거겠지. 자, 이제 상황은 역전됐군. 네가 사냥꾼 중 최고라고 이름 날리면서 펑펑 노는 동안 나는 이 정도의 명성과 실력과 조직을 얻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 정보원 중 하나가 널 발견했다더군.” 자기소개를 안 해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녀석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휙 던져 주었다. “너와 동행인 녀석들을 죽여주면 금화로 천을 주겠다던 의뢰인이 있다. 반 주지. 죽여와라.” 제이는 눈만 몇 번 깜빡였다. 그 남자는 깍지 낀 손을 탁자에 대고 물었다. “이 자가 레오피오라는 마을에서 몇 놈 죽였다고 그러더군. 그래봤자 로크의 내 부하들 싹 끌어들이면 어렵지 않지만, 난 별로 내 부하들을 희생 시키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너 하나 죽일 수하들은 데리고 있지.” 주위를 둘러싼 녀석들은 위협이라도 할 양으로 칼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제이의 간격 안에서 그들 중 세 걸음 안에 들어오는 놈은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금화 오백이고, 덤으로 네 목숨까지 살려준다. 괜찮은 거래 아닌가? 옛 우정을 생각해서 하는 제안이다.” 카셀은 로크에 들어와서도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녀석들이 끊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타냐는 어떤 암살자든 제일 처음 접근하는 놈들을 근처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불기둥을 세워 태워버리겠다는 살벌한 말을 했다. 놀랍게도 카셀은 찬성했다. 처음부터 이 쪽에서 강하게 나오지 않으면 미련을 가진 사냥꾼들을 끝없이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 만나는 가장 첫 번째 놈들을 가급적 인상적으로 해치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제이도 나중에 생각해보니 피해를 줄이기에는 그게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싸울 적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아는 자들이니까......, 하지만 암살자 놈들이 자기에게,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할 줄은 몰랐다. “불기둥만큼 화려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제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손을 내밀어 그가 물고 있는 담배 파이프를 빼앗았다. 주위 녀석들이 당장 칼을 뽑을 듯 위협적으로 쇳소리를 냈다. 그 남자는 자기 부하들에게 손을 내밀어 저지하고 웃어 보였다. “거대 성립인가?” 제이는 빼앗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이름이 뭐냐?” “이름도 기억 못하나? 다들 날 ‘붉은 손’이라고 부르지. 왜 그렇게 불리냐 하면.......” “붉은 손, 벌이가 별로 안 좋나? 이런 형편없는 담배를 피우면서 두목 행세를 하고 다니게?” “까다롭군. 로크에서 제일 좋은 물건이야.” 제이는 입맛만 버린 파이프를 탁자에 내려두고 말했다. “네가 로크에서 제일 큰 범죄 조직이냐?” “그런 건 왜 묻나?” “널 죽여 버리면 카셀이 앞으로 얼마나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을까 해서.” “어디 죽여보시지, 날 죽이면 감히 건드리겠다는 놈 없을 거다.” “정말?” “시험해 보고 싶으면 어디 해봐.” “그러지 뭐.” 제이의 칼날이 지나가는 동안, 그걸 의식한 사람은 술집 안에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이 이름 모르는 사냥꾼, 붉은 손의 손목이 탁자 위로 날아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의자를 넘어뜨리고는 뒤로 쓰러졌다. 놀란 부하들이 휘두른 검에 베인 탁자는 천천히 두 조각으로 쓰러졌다. 제이는 두 자루 검을 내밀었다가 그 중 한 자루는 집어넣었다. 만일을 대비해 꺼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붉은 손의 부하들은 놀란 눈으로 뒷걸음질 쳤다. 검의 영역에서 이미 열 걸음 밖으로 달아나 있었으니, 진짜로 달아나는 건 시간상 후에 나타날 현상일 뿐이었다. “불기둥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는군.” 제이는 고민하다가 벌컥 벌컥 피가 흘러나오는 잘린 손목을 쥐고 쓰러진 붉은 손의 멱살을 잡았다. “아까 부하들 더 있다고 했지, 너?” 그는 겁에 질려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이대로 보내줄 테니, 다 데려와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 니들 겁 줘서 다시는 못 오게 하려면 이 정도는 모자랄 것 같다.” 제이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스무 명 정도 해치워 술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으면, 불기둥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덤빌 엄두는 못 낼 것 같았다. “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 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제이는 뒤를 힐끔 노려보았다. 단검을 던지려다가 방금 벌어진 느닷없는 상황에 얼어붙어버린 남자가 제이와 눈이 마주쳤다. “야, 던질 거면 던지고, 그렇지 않음 가.” 그는 얼결에 단검을 보이고도 자기 목숨을 부지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달아났다. 그리고 술집 안의 수상한 녀석들 몇 명이 또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들 역시 뭔가에 안도하고 있었다. 제이는 다시 붉은 손에게 말했다. “아니, 오지 말라는 게 아니라 다시 오라고. 못 알아들었어? 조직원 많다며? 그러니까......, 이 술집 손님 많을 때 와서 다시 날 공격해. 그게 좋겠다. 구경꾼이 더 많아야 해. 약속 정할까?” “제, 제발. 또 이런 일 없게 할테니.......” 제이는 그의 뺨을 때리고, 잘린 팔을 움켜잡았다. 절단면에서 피가 주루룩 흘러나와 제이의 손을 붉게 적셨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달아나지도 못하던 바텐더가 결국 그 광격을 보고 바닥에 토해버렸다. “마지막으로 한 버 더 ?한다. 다시 와라! 가급적 많이 데.......” 제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붉은 손은 정신을 잃었다. 그의 멱살을 놔주고 제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 덤빌 놈?’ 하고 물어 보려고 했지만, 벌써 정신 멀쩡한 놈들은 다 달아나고 없었다. 술 한 잔 더 하고 싶었지만, 바텐더가 저 지경이라 주문을 할 수가 없었다. 위층에 올라가 보니 라이는 바닥까지 날개를 늘어뜨리고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밖을 바라보는 시선이 병석에 누워 밖을 바라보는 허약한 소년 같았다. “뭐 하냐?” 제이가 물었다. “구경.” “너로서는 오랜 만에 보는 풍경이겠군.” 제이는 피 묻은 손을 씻었다. 대야의 맑은 물이 금방 불투명하게 변했다. “울프 기사단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새삼 실감나는군. 이런 곳에 있으니 꼭 내가 최고의 칼잡이라도 된 것 같아. 거기에서는 그냥 오십 명 중 한 명이었는데.......” 제이는 고개만 돌려 라이에게 말했다. “라이, 이 일이 끝나면 울프 기사단에 한 번 가봐라. 결투를 우너한다고 했지? 거기에서는 원 없이 해볼 수 있을 거다.” “기더가......, 나를 이끌었다.” 제이가 못 알아들을 단어로, 라이는 말을 이었다. “내 기더, 싸움에, 있다면, 나 있을 곳, 카셀 옆.......” 제이는 한참 그 말을 해석하다가 동의했다. “그렇겠군.” 제이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카셀의 옆이 전장이지.” 카셀은 거의 새벽에 돌아와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또 아침에 일어났다. 로크의 의회에서 직접 사신이 찾아 와 의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이 있어 그는 바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제이는 전날 자기 전에 한 말이 마음에 들어 그 말을 카셀에게 했다. “내 옆에 전장이다?” 면도칼을 들고 거울 앞에 선 카셀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라이가 한 말이다.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네 옆에서 큰 사움이 몇 번이나 일어나 ㄴ거냐? 그러니 제일 격렬한 전장은 네 옆이지.” “엄밀히 말해 그건 내 전장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사람들의 전장이지. 야아, 어찌 생각하면 최악이네. 하지만 오늘은 내 전투가 되겠군.” 카셀은 면도칼을 따뜻한 물에 담그며 말했다. 거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수염 깎냐?” 제이가 물었다. “이제 억지로 기를 필요는 없어서. 하늘 산맥에서는 깎을 시간이 없었기도 하고.” 제이도 자신이 까칠한 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혹시 타냐가 싫어해서?” 카셀은 놀란 눈으로 말했다. “너 이제 ‘타냐’ 라고 부르네?” 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뭐?” “맨날 ‘마법사 여자’ 라고 불렀었잖아.” “글세, 이런 말 너한테 하면 기분 많이 나쁠 테지만, 마법사라고 부른 것에는 어느 정도 내 두려움이 담긴 호칭이었다. 하지만 이제 타냐가 마법을 써도 어느 정도 막겠더군. 그러니까 안 무서워져서.......” 카셀은 면도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두들기더니 갑자기 물었다. “아이린의 테스트에 대해서 전에 한 번 말한 적있지? 제이메르, 이제 너 아이린의 세 번째 테스트를 통과할 자신이 있냐?” 카셀은 그 세 번째 테스트가 하얀 늑대가 되는 퀘이언의 세 번째 테스트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살아 돌아가는 게 세 번째 테스트다. 그런 건 자신이 있고 없고...... 가 아니지 않냐?” 카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제이메르 넌 성장했어.” “무슨 말이야?” “그런데 너 언제까지 남 면도하는 거 구경할 거냐?” 카셀은 문을 닫았다. ‘성장?’ 제이는 카셀이 하는 말을 되새겨보았다. 확실히 카셀이 변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처음 만날 때보다 더 어름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비해 오히려 자신은 더욱 어린애가 되었다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의회의 앞에 도달하자, 경비병들은 즉시 일행을 포위했다. 특히 로브로 등과 머리를 가린 라이를 경계했다. 카셀은 라이에게 얼굴만 보여주라고 했고, 라이는 주저 없이 후두를 뒤로 넘겼다. 병사들은 기겁을 했다. 제이는 의회 안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는 말에 화를 냈으나, 카셀이 아란티아의 보검까지 맡겨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제이가 카셀의 말을 듣는 것에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카셀이 아무 말도 안 할 때는 대체로 아무렇게나 해도 됐다. 하지마 그가 뭔가를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따르는 게 나았다. 카셀은 귀찮은 일을 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었다. 이 멍청한 병사들은 라이는 애초에 무기가 없어 경계하지 않았고, 타냐의 지팡이는 무기로 생각하지 않았다. 몇 명만 겨우 죽일 수 있는 자기 칼은 두려워하면서, 의회 의원들을 통째로 얼려버릴 수 있는 지팡이는 내버려두는 게 제이는 우스웠다. 또 이 병사들은 타냐의 얼굴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늑대로 변한 모습을 한 번 보여주면 라이의 날개 보여주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는 농담을 해보려다가 포기했다. 제이는 자기가 농담을 하면 대체로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의회 정문을 통과해 의회 본 건물까지 오는 길목에는 정신 산란할 정도로 멋진 정원이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카셀은 꽃을 처음 본 어린 애처럼 좋아하며, 거기에 대한 자기 지식을 한없이 늘어놓았다. 타냐는 다 아는 얘기였고, 제이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라이가 거기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라이가 이간의 음식에 흥미를 보이는 건 어색할 게 없지만, 이런 꽃밭을 좋아하니 제이는 좀......, 웃겼다. “환영하오, 캡틴 울프” 루에머스라고 자기 이름을 밝힌 집정관과 향수 냄새 짙은 나르베니,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웃는 얼굴 외에는 거의 자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논돌린이 일행을 맞이했다. 정원에서의 밝은 표정을 던져버리고, 카셀은 집정관 세 명을 만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오, 루에머스 집정관. 대놓고 캡틴 울프를 사칭한 자라고 욕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가려고 했소.” “그렇게 생각했다면 굳이 당신을 찾아내려고 마을 술집 마다 호위 병사들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어제는 당신 부하가 벌써 한 바탕 소동을 벌여놨더군.” “책임을 묻는 거야?” “전혀! 레오피오 행정관 세레스머스로부터 관련 정보는 많이 들었소. 오히려 그런 녀석들이 설치게 둔 것에 사과하오. 현재 우리 쪽 경비병들이 그런 자들을 색출해내고 있소. “회의가 준비되어 있다면 바로 시작하고 싶소. 할 얘기가 많소.” “들어오시오. 우린 긴 얘기에 익숙하오.” 의회 건물 안은 오십 명의 의원들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동글게 펼쳐져 있는 너른 회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부채꼴로 펼쳐진 의자는 집정관 세 명이 앉는 가운데 자리를 공격하듯 에워쌌으며, 천장은 엎어놓은 계란처럼 회장을 덮고 있었다. 회장 안 어디에서 말을 하던 목소리가 반사를 하게 되어 있어, 목청 좋은 사람이 소리라도 지르면 메아리가 한동안 안 멈췄다. 카셀은 집정관 세 명의 옆에 앉자마자 그런 메아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확실히 의회 경비병들은 현명했다. 자신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면, ‘시끄러!’ 라면서 칼을 뽑았을 만한 상황이 적어도 다섯 번은 나왔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치사한 카셀은 그들의 우회한 비아냥을 알아듣지 못한 척 여러 차례 되묻거나 뻔뻔스럽게 딴 짓을 하기도 했다. “울프 기사단의 규모는 어떻고? 드래곤 기사단과 비견할 만 하오?” “캡틴 울프의 승계 식은 어떤 식으로 치러지는 거요?” “당신의 보검이 아란티아 보검이라는 증거는 없지 않소?” “앤발디의 행정관이 보내온 서한에 의하면 당신이 그를 협박했다고 했소.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한 거요?” 제이가 듣기에도 노골적으로 카셀의 정체를 의심하는 질문들이었다. 그런 게 반시간이나 이어졌으니 제이는 짜증이 극도로 치밀어 올랐다. 카셀의 대답도 짜증났다. “비견할 만 하오.” “승계 식은 없었소.” “증거 없소.” “협박이랄 것도 없었소.” 카셀의 성의 없는 대답에 화가 치민 의원 하나가 아예적의를 담아 말했다. “그럼 아란티아 여왕의 침실은 어떤 식으로 꾸며져 있소? 하늘 산맥 요정들처럼 나뭇잎을 타고 주무시나?” 화가 난 건 되려 타냐였다.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그 의원을 노려보았다. 로크로 오는 길목에 마을이 항상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는 도중 노숙을 몇 차례했는데, 제이는 모닥불 옆에서 카셀의 손을 잡고 있는 타냐를 보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잡고 있어도 부족하냐?’ 그 냉기 담은 눈빛을 당해본 제이는, 놀라 심장을 움켜쥐고 의자 뒤로 굴러 떨어진 그 의원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했다. “다른 질문 없소?” 카셀은 굳이 대답할 필요성 없는 그런 질문에는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게 고작이었다. “카셀이 왜 저러는 거야?” 보다 못한 제이가 속삭여 타냐에게 물었다. “카셀은 지금 의원들에게 간접적으로 분노를 표하고 있습니다. 다들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화내고 있는 거라고?” “당신도 모르겠습니까?” “......모른다고 그러면?” 타냐는 집정관 중 하나르 턱으로 가리켰다. “적어도 한 명은 짐작한 것 같군요.” 여성 집정관 나르베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의원 여러분, 이제 그만 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캡틴 울프께서 상당히 화가 나신 것 같군요. 대체 그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가 언제 터트리려고 아무 말씀 안 하시는거죠, 캡틴울프?” 카셀은 그 색기 넘치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이 상황에서 화가 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레이디 나르베니?” “그냥 집정관이라고 해주세요, 캡틴.” “그러지요, 집정관. 저는 그리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짐나 의원 여러분들은 여전히 저에게 할 말이 많은 듯 하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나르베니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제이가 보기에도 나르베니는 카셀을 도와주려고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카셀은 그 도움을 거절하고 잇었다. 그 때 의회 문이 조용히 열리며 짧고 하얀 수염을 짧게 기른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하얀 옷을 치렁치렁하게 여러겹 입는 의원들의 복잡한 복식과 달리 그 남자는 가볍고 하얀 갑옷에 붉은 단을 허리 쪽에 맨 단순한 차림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회장 중간쯤에 위치한 자리에 앉았다. 모두의 시선을 끌어면서도 별 상관 않고, 그는 계속 하라는 뜻으로 손짓을 보냈다. 생김새도 다르고 나이도 훨씬 많았지만, 제이는 이 남자의 분위기가 어쩐지 마스터 퀘이언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퀘이언처럼 거리재기 애매한 힘이 먼 거리에서도 전해져 왔다. “누구야?” 제이가 속삭여 타냐에게 물었따.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 데라둘 마치입니다. 의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의회에 참가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로 의회는 의원들을 뽑고, 의원들은 집정관을 뽑고, 집정관은 원로 의원들을 사퇴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무 물리고 물리는 권력 견제 덕인지 가넬로크는 아란티아 다음으로 정칙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지요. 하지만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은 그런 권력 견제 시스템에 포함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드래곤만 기사단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거죠.” “가넬로크 드래곤은 다 죽었잖아” “예, 그래서 실상 캡틴 데라둘은 현재 집정관과 거의 같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위험한 인물이죠. 카셀과 제가 어제 늦게까지 조사한 사람이 바람 캡틴 데라둘입니다.” “의회와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이란 건, 아란티아 여왕과 카셀의 관계랑은 다른 건가?” “전혀 다릅니다. 카셀은 완전히 새나디엘 폐하께 소속되어 있으며 그 명령을 받들지만, 데라둘은 의회의 제안을 받을 뿐 독자적으로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관습적으로 의회의 명령을 따르지만, 지금은 어떨지 모르죠.” 카셀은 데라둘을 보고 살짝 목례했고, 데라둘도 그 인사를 받았다. “우리들은 당신이 정말 캡틴 울프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소. 그 증거가 없다면 우린 무엇으로 믿어야 하오? 거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 할 거요? 고작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려고 의회에 참석한 거요?” 루에머스 집정관이 강압적인 어조로 물었다. 카셀은 아침에 수염을 깎아버린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로크의 의회는 물어보기만 하려고 날 불렀소?” “방금 나르베니 집정관께서 직접 발언권을 드렸잖소. 그래도 말을 하지 앟은 건 당신이오.” “싹을 틔울 준비가 되지 않은 메마른 땅에 씨를 뿌려 무엇 하오?” 루에머스 집정관은 무섭게 눈을 치켜떴다. “그래서 땅을 적실 비라도 기다리고 있다는 거요?” “아니, 로크의 의회는 태양이 너무 강하다는 거요.” 카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의원들을 한 명씩 차근차근 돌아보았다. 언제 입을 열거냐고 성질 급한 의원 한 명이 손가락질을 할 무렵에야 카셀은 말했다. “나라는 존재를 여러분들에게 납득시킬 철학적 논증은 펼쳐야 하는 거요? 로크의 의회도 다른 왕실과 다를 바 없이 별로 재미는 없군요.” 누군가 장난으로 나선 거냐고 말했으나, 대부분은 카셀이 다음 할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셀이 말을 끝내면 즉시 퍼부어 줄 준비를 하고, 날을 세웠다. 제이는 그 날카로운 눈빛이 뒤통수를 쿡 쿡 찌르는 것 같았다. 오십 개의 칼은 막아도 오십 명의 눈동자는 무서운 제이였다. 하지만 제이가 보기에 카셀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무서운 놈.’ 카셀은 느긋하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가넬로크에 닥쳐오는 적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소. 그 적은 하늘 산맥의 사악한 드래곤에게 복종하는 검은 기사와 지금까지 이 땅에 있어 본 적 없는 수천 마리의 괴물이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건 이 딸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 사악한 마법사요.” 한 쪽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고, 곧 이어 사방에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한 명이 떠나갈 듯 웃으며 말했다. “5년 전에 가넬로크에 여왕을 모시고 왔던 마스터 퀘이언은 적어도 그런 허풍과 거짓말을 하지 않았소. 당신은 퀘이언을 한 번이라도 봤나 모르겠군.” “당신은 드래곤을 한 번이라도 봤소?” 카셀은 멀뚱히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무, 무슨 그런 엉뚱한 소릴?” “로크에 살지 않았소? 말해보시오. 십 년 전 드래곤들을 한 번이라도 봤소?” “이제 위대한 드래곤의 영혼을 더럽히는 소리를 지껄일 셈인가? 아무렴 로크의 의원이 드래곤도 한 번 뵙지 못했을까? 정말 웃기는 질문이 아닐 수 없군.” “방금 내 질문이 웃기면, 당신 질문은 뭐요?” 그 옆에 있는 의원이 벌떡 일어나 말문이 막힌 도요를 도와 말했다. “터무니없는 궤변을 늘어놓아 우릴 혼란시킬 셈이오? 당신은 벌써 절차를 무시하고 있소. 우선 당신을 충분히 증명한 연후에 그런 논의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오. 그런데 다짜고짜 전투에 대한 회의부터 하자고? 아니, 이건 정말이지 절차 이전의 문제요. 하늘 산맥에서 ‘사악한 드래곤’이 쳐들어오다니! 이것보다 희극적인 말이 어디 있소? 하늘 산맥에서 왔다 했소? 거기에는 하늘 산맥의 엘프라도 살던가?” “그럼 아크랜드에는 사람이 살고 있소?” “어째서 대답이 또 그런 식이오?” “질문이 그런 식이잖소. 솔직히 나는 여기 의원들이 드래곤을 보고 자란 로크 사람들인지가 의심스럽소. 드래곤을 비현실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아닐텐데, 어째서 하늘 산맥에서 뭐가 내려온다니 다들 그걸 거짓말로 만들려고 발악을 하는 게요?” “당신이 먼저 당신을 증명하면 되는 문제요. 캡틴 울프도 아닌 자를 회의석상에 앉혀놓고 국가적인 문제를 상의하란 거요?” “그래서 나 역시 답답해하는 거요. 당신들은 내가 캡틴이란 걸 믿지 않고 있소. 그럼 내가 캡틴인지 아닌지 알아볼 준비는 그 쪽이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니오? 아란티아의 국보라 할 수 있는 보검을 밖의 경비병들이 뺏어가게 내버려두는 걸 보니 거기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바깥 정원에는 지금 하늘 산맥에서 온 엘프가 유유히 산책을 하고 있건만 그 곳은 보지 않고 나에게 하늘 산맥에 엘프들은 살고 있느냐는 질문을 해대며, 루티아의 마스터가 바로 저 자리에 앉아있거늘 확인해볼 생각도 않고 있는 사람들이, 나보고 먼저 나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거요? 자, 그럼 내가 나 자신을 증명할 방법은 별로 남지도 않았군. 마스터 타냐, 당신의 힘을 보여 이 회장전체를 얼려버리시오. 제이메르, 의회를 지키는 경비병들을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여 버려라.” 카셀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의원들을 차분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당신들은 아직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소.” 진짜로 카셀의 말을 듣고 일어나려 했던 제이의 어깨를 타냐가 지그시 눌렀다. 제이도 진짜 그래야 하는 건가 해서 내심 염려하던 차였다. ‘놀래라.......’ 자기가 이렇게 놀랐으니, 다른 의원들은 어땠을까 알만했다. 어색하게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카셀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에게 말했다. “드래곤 기사단은 의회와 독립되어 있다는데 맞습니까?” “맞다.” 캡틴 데라둘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제가 아니라 마스터 퀘이언을 기대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저는 정식으로 기사단끼리의 대화를 요청합니다.” “그러지.” 데라둘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있던 의원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캡틴 데라둘에게 말을 해대는 바람에, 회장은 다시 소란에 빠졌다. 루에머스 집정관이 상황을 정리하며 웃었다. “캡틴 데라둘, 방금 뭐라 하셨소?” “내게 대화를 요청한 젊은 캡틴의 요청을 수락했소. 집정관, 뭐가 잘못 되었소?” 논돌린 집정관도 당황해 하며 나섰다. “곤란하오, 캡틴. 이 자는 아직 의회의.......” “아란티아의 기사가 가넬로크 의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소? 하던 말을 마저 하시게, 캡틴 울프. 나 역시 의회와 별도로 듣고 답하지.” 카셀 역시 막힘없이 말했다. “루에머스 집정관, 로크의 방위군과 의회의 경비대, 그리고 가넬로크의 국군이 총집결 하는데 며칠이 소요되오?” “당신이 뭔가 열심히 말했으나, 의회는 아직 당신의 입장을 받아 들인 건 아니오.” 루에머스 역시 망설임은 없었다. 카셀은 아까 다른 의원들이 욕을 해대고 시비를 걸면 시큰둥하게 받아들였으나, 루에머스 만큼은 진지하게 상대하고 있어싸. ‘아.’ 제이는 그제야 카셀의 관점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아침에 말했던 대로, 카셀은 지금 전투를 하고 있었다. 다른 의원들은 별로 위협이 안 된다고 카셀은 판단했기에 대충 상대했다. 그러나 루에머스는 그 위협이 될 거라 보고 신경을 모두 그에게 집중한 것이었다. 즉, 카셀이 ‘간격’을 보는 건 루에머스 하나였다. ‘재밌군.’ 루에머스가 거부한 대답은 데라둘이 대신 해버렸다. “사흘. 의회의 승인이 떨어지는데 반나절, 로크의 수도 방위군과 의회의 경비대가 집결하는데, 또 반나절, 그 사이 근처 도시에 명령이 하달되고 다시 반나절 후에 집결, 그리고 반나절 후에 로크로 향하면, 그 정도....... 가장 빨랐을 경우에 그러하지.” “캐,캡틴 데라둘!” 타국의 기사단 캡틴에게 그런 것까지 상세히 일러주는 데라둘의 모습을 보고 논돌린이 황급히 나서 말렸다. 다른 의원들도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카셀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레오피오에서 여기까지 적군이 전력질주한다 해도 나흘 안에 오기는 힘들 것이고, 그 쪽에서 파발이 노는 데 하루, 거기에 더하기 사흘....... 앤발디의 행정관이 내 말대로만 하고 있다면 의외로 사흘은 짧지 않은 시간이군요.” 카셀은 집정관 세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여전히 제이가 보기에, ‘간격’은 루에머스 하나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레오피오가 함락되었다는파발이 오고 난 다음에 내가 필요하거든 불러주시오.” 카셀은 느린 걸음으로 회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분노, 당혹, 두려움, 비웃음, 그런 다양한 시선이 꽂혔으나, 카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눈 돌아가게 아름다운 정원의 한 가운데에 라이가 있었다. 웬일인지 라이는 로브를 벗고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한참이나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시녀들이나 귀족 여인들은 천사라도 본 것 마냥 황홀한 얼굴로 구경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외모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제이인 터라 별로 신경쓰지 못했으나,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라이는 대단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토굴에서 방금 기어 나온 병자 같은 핏기 없는 얼굴에 색깔 부족한 머리카락은 그 쪽 취향의 여자들에게 다양한 환상을 제공할 만도 했다. 제이의 눈에도 꽃을 주위에 두고 날개 펼친 라이의 모습은 멋졌다. 정확히 전투에 필요한 만큼만 단단하게 뭉치 어때의 근육과 딱 벌어진 가슴은 부럽기까지 했다. “이 정원이 마음에 드나, 라이?” 카셀이 탐스러운 하얀 날개의 끝을 손가락으로 붙잡고 장난스럽게 흔들며 물었다. [인간이 여기는 아름다움이란, 숲이 스스로 만들어낸 조화를 더 좋아하는 레미프의 취향에서 벗어나 있다.] 라이는 눈까지 감고 호흡하며 레미프의 언어로 말했다. 그 말은 타냐가 해석해 주었다. [그러나 그런 부조화를 억지로 조화로 이끌어낸 아름다움이 마음에 든다.] 마침 의회를 나선 의원 몇 명이 라이의 모습을 보고 기절할 듯 놀라, 체면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캡틴 데라둘도 따라 나왔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카셀과 라이에게 동시에 말했다. “날개 멋지군. 하늘 산맥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믿겠어.” 라이는 데라둘과 하늘을 번갈아 보았다. 데라둘은 주름 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숙소는 어디에 잡고 있나?” “그냥 평범한 여관입니다. 캡틴 데라둘.” “퀘이언이 자네 같은 어린 청년을 후계자로 지목할 줄은 몰랐군. 한 동안 캡틴은 없을 거라더니 거짓말이었나?” 데라둘은 회장에서 보인 딱딱함은 벗어버리고 오랜 만에 만난 삼촌처럼 웃었다. 제이는 지나치게 친근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수상쩍었으나, 카셀 역시 친근함을 보였다. “절 캡틴으로 지목한 건 마스터의 수제자들, 그러니까 하얀 늑대들이었습니다. 마스터께서는 그냥 거기에 대해 허락만 내리신 거죠.” “자세히 들어둘 만한 얘기군. 어쨌뜬 숙소는 우리 쪽에서 내주겠네. 방은 많으니까. 그 쪽 레이디는 루티아의 마법사?” “타냐입니다.” 타냐는 직접 자기소개를 했다. “루티아에서 온 손님을 받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환영하오, 마스터 타냐. 이 도시에도 ‘그랜드 로크’ 라고 마법사 연합이 있는데, 그들이 무척 만나고 싶어 할거요. 그리고 이 쪽은?” “라이. 하늘 산맥의 레미프입니다.” 카셀이 소개해주었다. 라이는 데라둘의 인사를 받지 않았으나 데라둘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메르. 저를 지키러 따라와 준 제 친구입니다.” “반갑네.” 데라둘이 손을 내밀었다. 제이는 별 생각없이 청하는 악수를 받으려다 불쑥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 티온과 어머니를 모시러 왔던 드래곤의 기사 카르. 카르는 밭일로 엉망이 된 어머니 앞에서 울었다. 그리고 제이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가 전쟁 통에 죽었다. 그 때 카르가 티온에게 언급한 이름이 있었다. ‘데라둘 마치. 아버지를 다시 전쟁터로 부른 자.’ 그러나 티온은 그 호출을 거절했엇따. 제이는 까닭 모를 살기를 내보였다. ‘그 때 카르가 아니라, 당신이 직접 와서 티온을 데려갔더라면......, 내가 내 손으로 티온을 죽일 필요도 없었고, 어머니도 죽을 필요 없었어!’ 얼마 전 봤던 그 검은 기사의 얼굴 속에 드러난 아버지의 얼구이 또 한 번 기억 속에서 튀어나와 말했다. ‘기억해라. 넌 아직도 날 벗어나지 못했어.’ “제이메르.” 카셀이 어깨를 툭 쳤다. “억지로 인사할 건 없네.” 데라둘은 픽 웃으며 악수하려고 내민 손을 접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기사단 사무실에서 하도록 하세. 에스코트할 기사를 몇 부를까?” “장소는 압니다. 짐도 챙겨야 하니 저희들끼리 나중에 가겠습니다.” “그러게.” 데라둘은 정원을 가로질러 멀리 사라졌다. “제이메르, 왜 그래?” 카셀이 질책하듯 물었다. “아니야. 그냥 싫은 기억이 나서.” 제이는 건성으로 대구했다. “어? 만난 적 있어, 캡틴 데라둘을?” “아니.” 제이는 딱 잘라 말했고, 카셀도 더 묻지 않았다. 넷은 다시 정원을 빠져 나와 정문을 나섰다. 제이는 계속 데라둘에 대한 정확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머리를 굴려보다가 물었다. “카셀, 데라둘이라는 노인네, 너무 친절하지 않아? 어찌 보면 넌 의원들에게 사기꾼으로 오해 받는 게 정상잉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너를 잘 안다는 듯 말하느 거지? 이상하지 않나?” 뜻밖에도 타냐가 동의했다. “저도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글쎄, 그냥 마스터 퀘이언처럼 어려우면서도 편한 느낌이라, 난 나쁘지 않았는데.......” 그 때 허름한 차림의 한 남자가 카셀 앞으로 다가왔다. 검의 간격을 전혀 보이지 앟는 남자였으나, 제이는 일단 경계했다. “저......, 어, 어떤 분께서 이걸 전해달라고....... 아무 것도 묻지 마십시오. 전 모릅니다. 그렇게 전하라고만 했습죠. 그럼 전.......” 그 노숙자 같은 남자는 카셀에게 작은 쪽지만 한 장 전해주고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손에 든 금화가 진짜인지 확인해 보는 모습이 어떤 경로로 쪽지를 전달하게 되었는지 알만 했다. “뭐라고 쓰여 있어?” 제이가 어깨 너머로 보려 하니 카셀은 그냥 쪽지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데라둘을 조심할 것.’ 이라고 쓰여 있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우리한테 사냥꾼을 보낸 것도.......” “더 크게 떨들지?” 카세이 화내며 제이의 입을 틀어막았따. “애초에 우리가 믿을 건 우리 네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어. 새삼스럽지 않아. 그리고 난 이 쪽지가 더 수상한걸.” 말은 그렇게 해도, 카셀은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캡틴 데라둘이 러스킨 같은 배신자라면 우리는 퀘이언을 적으로 두고 있는 것과 같아.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야. 아니길 바라야지. 일단 블랙풋의 정보를 기다려보자. 사냥꾼들을 끌어 모은 자와 그 검은 기사들의 주인은 같은 존재일 거야. 그걸 알아내면 이 따위 쪽지는 별로 문제될 개 없어.” 카셀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제이는 카셀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으나 당장 자기 문제부터 복잡하여 그럴 여유를 갖지 못했다. ‘젠장, 그러고 보니 티온이 드래곤 기사단 출신이었잖아, 그것도 추방당한.......’ 제이는 몇 번이고 아버지의 망령 같은 건 없다고 되뇌었다. 5. 나르베니 기사단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근 한 달 내에 먹은 음식 중 가장 근사했다. 과묵함이 도를 지나쳐 항상 본의 아니게 카셀에게 상처 주는 타냐도 오랜만에 좋은 음식 먹는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타냐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는데도 카셀은 기쁘지 않았다. “어제의 조치가 조금 안 좋았나요?” 카셀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드레싱 올리지 않은 샐러드만 입에 댔다. 살짝 반숙한 달걀 요리를 수저로 뜨던 타냐가 솔직하게 말했다. “좀 과격했지요.” “의원들을 화나게 하는 게 목적이긴 했지만, 잘못된 방향이었던 것 같아요. 권위 의식을 가진 자에게 권위 없는 논리로 공격하는 건 반감만 사는 게 당연한데....... 이 반감이 의회의 힘을 집중시키는 것에 쓰이지 않고 제게 반발하는 것에만 쓰이면 실패입니다.” “확실히 이 시점에서는 실패입니다. 카셀의 계산대로라면 오늘 아침에 벌써 의원들이 몇 명 사과하러 찾아왔어야 하지만, 아무도 안 오는군요.” 타냐의 말에 카셀은 머리를 긁었다. 그녀는 웃으며 카셀의 앞에 놓은 물 잔에 손가락을 얹었다. 물 표면에서 물방울 하나가 떠올라 카셀의 얼굴 앞에서 탁 터졌다. “당신이 그런 모습을 제 앞에서만 보이는 건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이군요. 제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예? 제가 그랬나요?” “당신이 결과도 나오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전전긍긍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죠. 지금 실컷 괴로워하고 다시 의원들 앞에서는 어제처럼 당당히 나설 테죠.” “어제 제가 당당해 보이던가요?” “사기꾼이라도 이 정도라면 루티아 대변인 시켜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긴 했죠. 제가 카셀의 위치에 있었다면 의원들을 마법으로 겁 줘서 복종 시켰을 겁니다.” “공포로 이끌어낸 복종은 더 큰 공포에 무너집니다. 제가 아무리 겁을 준다 해도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보이는 공포를 이길 수는 없어요. 역시 어제는 실패였어요. 좀 더 진심을 내비쳤어야 했습니다.” “타인의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치가가 될 수 없다! 제 마스터가 하신 말씀이죠. 결과적으로 지금 후회하고 있으나, 카셀이 모두에게 솔직히 말하는 저자세를 보였다면 이보다 더 안 좋은 결과가 나타났을지도 모릅니다. 어제의 일을 후회하지는 말아요.” “정치에 십 년 이상 몸담은 인간은 모조리 사막으로 쫓아버리는 게 좋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죠.” “풋!” 타냐는 먹던 달걀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걸 겨우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건 은퇴시키는 것 이상이네요?” “은퇴시켜봐야 귀족들은 왕실에 영향을 끝없이 미치고, 의원들은 원로원에서 계속 힘을 발휘하죠. 아버지는 원로원이란 곳을 각별히 싫어하셨어요. 술만 입에 들어가면 늙은이가 어쩌고저쩌고....... 사실 아버지는 할아버지도 무척 싫어하셨다더군요.” “카셀의 가족 이야기는 항상 듣기 좋군요. 카셀 아버지도 한 번 뵙고 싶어요.” “타냐의 이야기는 언제 들려주실 건가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카셀에게는 언제고 꼭 들려드리겠습니다.” 타냐는 굳은 얼굴로 말했고, 카셀도 고개만 끄덕였다. “제이메르와 라이는 식사 안 하나요?” 카셀이 창 밖을 보다가 물었다. “벌써 먹었을 겁니다. 둘 모두 대륙의 3대 기사단 중 하나에 들어왔는데, 굳이 사람 기다리며 노닥거릴 필요 있겠냐며 의기투합해서 나가더군요.” “의기투합? 그 둘에게 별로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군요.” “여전히 계기만 하나 던져주면 서로 찌를 듯이 노려보긴 하더군요. 제이메르가 아직 라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다음부터 시비 거는 일은 줄었지만, 아마 목숨 걸고 싸우면 라이도 꽤 긴장해야 할 겁니다. 제이메르는 ‘그럼 검사’ 니까요.”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군요.” “카셀도 은연중에 알지 않았나요? 사실......, 저 둘은 고삐도 뚫지 않은 야생 황소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감방 안에서 쇠사슬을 친친 감은 라이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런 자가 아직까지 사고하나 없이 우리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군요. 저 없는 사이에 뭔가 특별한 조치라도 취하셨나요?” “조치 없어요. 관리도 안 했고. 타냐 말대로지요. 야생 황소를 길들여 외양간에 넣으면 그건 이미 야생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배는 부르지 않았지만 카셀도 식사를 끝냈다. 그는 접시를 치우라고 시녀들에게 부탁하고 과일만 하나 입에 물었다. “자유분방하긴 해도 울프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은, 기사단이라는 조직 안에 있어봤던 존재입니다. 그들을 저렇게나 통제한 퀘이언은 정말 대단해요. 하지만 제가 그 분의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요. 제이도, 라이도 그냥 둘 겁니다. 그냥...... 사고 없이 절 따라와 주길 바라는 거죠.” “꼭 불량 학생을 다루는 선생님 같군요.” “적어도 저는 책임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두 학생이 말썽을 부리면 전 죽으니까요.” 카셀은 허허 웃었다. 타냐는 한숨을 쉬었다.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 카셀이에요.” “저도 말하고 보니 좀 무섭네요. 제발 저 둘이 친하게 지내야 할텐데.......” 카셀은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에 회색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카셀이 놀라 눈을 잠깐 깜빡이는 사이 그는 빠르게 걸어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봤어요, 지금?” “뭘요?” 타냐는 뒤늦게 창문 밖을 보며 물었다. 카셀은 본 걸 말해주었다. 그러나 타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제 착각일까요?” “글쎄요. 회색이 아닌 다른 색깔의 로브였던 것도 같고....... 일단 마법의 흔적은 없으니 모르지만, 그래도 주의를 기울여야겠군요.” 타냐는 불안해하며 말했다. 제이는 풀만 내주는 아침 식사 식단이 마음에 안 들어 고기 끼운 빵을 먹으며 바위 위에 앉아있었따. 그리고 라이는 로브를 벗고 하얀 날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제 날개가 들어가는 옷을 하나 즉석으로 만들었는데, 간단한 검은 천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라이와 잘 어울렸다. 라이의 모습을 발견한 드래곤의 기사들이 멀리서 일부러 이 쪽으로 다가왔다. “여긴 기사단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신성한 훈련 장소다. 누구냐?” 그 기사가 물었다. “신성한 훈련 장소라면서 왜 훈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제이는 빵을 가득 물어 볼록 튀어나온 뺨을 우물거리며 되물었다. “드래곤 기사단의 훈련과 수업은 모두 정확한 일정에 맞춰져 있다.” “그럼 그 일정이 아니면 훈련도 안하고 결투도 안 하나?” “결투?” 그 키 크고 목에 금목걸이를 두른 갈색 머리의 기사는 크게 웃었다. 스무 살 넘은 지 한참 넘은 얼굴이었으나, 얼굴에 여드름도 많았고 기름기도 번들거렸다. 타냐나 라이처럼 물방울 튈 것처럼 깨끗한 피부만 보다가 갑자기 현실적인 피부를 보니 제이는 저도 모르게 자기 얼굴과 이마를 만져보게 되었다. 거친 환경에서 노숙을 일상적으로 하니 이미 제이의 피부는 회복이 안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자기 얼굴도 이 녀석처럼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줄까 생각하니 조금은 우울해졌다. “뭘 그렇게 노려보는 거냐, 이놈?” 그는 제이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어보다가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근처 기사들이 다가왔다. 하늘 산맥의 요정이 숙소에 묵는다는 소식을 들은 기사들은 라이를 실제로 보자, 다들 신기해했다. 단숨에 구경거리가 되었으나, 라이답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기사들이 훈련을 안 한다는 말에 조금 실망해서. 나는 여기 오면 울프 기사단처럼 마음껏 대결을 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대결? 워낙 우리 기사단의 명성이 높으니 그런 허무맹랑한 도전자들이 더러 있지. 자네도 그런 부류인가?” 그나마 나이 많고 차분한 기사가 물었다. “아마 나도 그런 부류......일거다.” “캡틴 울프를 호위하다니, 울프 기사단인가?” 제이는 몇 가지 따져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걸.” 이 애매모호한 대답에 근처에 모여든 기사들 몇 명이 실소를 터트렸다. 제이는 딱딱한 빵을 먹느라 목이 탄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 없으니 그냥 가야겠군. 라이, 가자. 우리가 얻을 건 이런 기사단에는 없다.” 한 명이 제이의 어깨를 잡았다. “흘려들을 수 없군. 그건 무슨 의미인가?” “의미 따지지 마라. 겨룰 거냐?” “검이라면 있다.” “나도 있다.” 제이는 슬쩍 몸을 돌렸다. 다른 기사들이 나서서 두 사람을 말렸다. “왜 그러나? 참게.” “이 곳은 천박한 결투를 위한 자리가 아니야.” 제이는 허리에 찬 칼에 손을 대고 아까부터 준비한 말을 꺼냈다. “어떤 자리에서건 그 싸움은...... 서로 최선을 다하는 만큼 신성하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서로 최선을 다한다면 그 싸움은 어떤 자리에서건 신성하다.’ 였다. 제대로 의미 전달도 하지 못했지만 말한 당사자가 하도 당당하니, 그 말을 이해 못한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해 봐야 했다. 그 때 싸움이 일어나려는 것을 말리려고 멀리서 달려온 기사 한 명이 제이를 알아보았다. “자네 혹시 제이메르가 아닌가?” 사람 기억하는 것에 자신 없는 제이는 이건 또 누군가 싶어 건성으로 물었다. “누구?” “브란더! 지옥 도끼라는 별명의 살인마를 죽여 현상금을 받을 때 내가 내주지 않았나? 여보게들, 내가 말한 그 사냥꾼이 바로 이 친구야.” 그가 껄걸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제이는 겨우 기억을 해냈다. “아, 맞다. 기억나는군.” 울프 기사단에 가서 그 곳이 소문보다 형편없는 곳이라면 돌아와서 드래곤 기사단의 문을 두들기겠다고 말했었다. “그래, 어떻든가, 울프 기사단은?” 브란더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문보다 좋은 곳이었다. 오히려 네가 자신 있게 추천한 이 곳에서 나는 실망하는군.” “어째서?” “훈련도 안 하는 기사단을 기사단이라 할 수 있나?” “아, 그런 거라면....... 이보게들, 잠깐 뒤로 물러나주겠나?” 브란더의 말에 모두이상할 정도로 충실히 복종하고 있었다. 먼저 칼을 뽑은 건 브란더였다. 제이는 느닷없는 브란더의 접근에 놀랐다. “어떤가? 아직도실망스러운가? 아, 그 때 나에게 두 걸음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었지? 지금은 어떻지?” “한 걸음.” 제이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브란더는 다시 칼을 넣었다. “울프 기사단으로 가서 한 달 후에 캡틴 울프를 동행하여 이 곳으로 나타나다니....... 자네는 분명 이 곳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야.” 제이는 다시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인연이 없지는 않지.“’ 브란더는 말을 이었다. “자, 우리에게도 규칙은 있고, 드래곤 기사단은 자네 같은 유능한 인재와 껄끄러운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예정에 없긴 하지만, 캡틴께 제안해 간단한 시합을 주선해 보지. 그 쪽의 엘프 친구도 인간과 겨루고 싶어 하나? 그 첫 상대가 드래곤 기사단이라면 우리도 영광이겠어.” 계속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어조에 제이는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뭐, 그러지.” 브란더는 화가 나 있는 다른 기사들을 적당히 수습해 돌아갔다. 잠깐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의미에서 대단한 녀석이군.” 한 마디도 안하고 열심히 관찰에만 전념하던 라이가 말했다. “재미있다.” “누가? 내가?” “우그들.” 제이는 팔짱을 끼었다. “도대체 우그가 뭐냐?” 라이는 앞만 바라보며 제이의 질문을 묵살했다. 어제 일에 대해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의회도, 원로 의회도 아닌 마법사 모임인 ‘그랜드 로크’ 였다. 가넬로크 내에서는 아마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인 자리겠지만, 타냐가 보기에 마법사라고 이름을 붙일 만한 이는 백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상하 구별이 되는 마법사들 사회에서 루티아의 마스터인 타냐의 출현은, 의회에 나타난 카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타냐가 당장 명령한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자세로 굽실거리며 인사했다. 오히려 타냐는 그들이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줘야 했다. “어제 있었던 의회의 서기관이 전달해준 내용을 검토했습니다. 저희들이 우려한 바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마법사이자 그랜드 로크의 의장인 리펜다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노인은 타냐가 권한 편한 의자에 앉아서도 몇 번이나 들썩였다. “최근 일어난 몇 가지 이상 조짐을 저희 그랜드 로크는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가넬로크 이곳저곳에 출몰하는 검은 기사의 모습이나, 유령들, 그리고 곳곳에 일어나는 이단 종파와 사악한 마법의 흔적....... 마스터 타냐께서 하늘 산맥에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들은 우려한 일이 표명으로 드러나는구나 싶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리펜다스 의장.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가넬로크를 노리고 있습니다.” 타냐는 돌려 말하지 않았고, 나이 많은 마법사들은 나직이 신음했다. “사실이었군요. 그 거대한 힘에 우리 마법사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루티아의 원군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루티아도 꽤 큰 피해를 입어 회복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현재로서는 여기 계신 분들의 힘만으로 적을 막아내야 합니다. 가넬로크의 마법사들을 모두 모으면 어느 정도 전력이 됩니까?” 타냐는 그런 문제들을 묻고, 앞으로 어떻게 힘을 모아야 할지 연구해 본 후 마법사들을 보냈다. 카셀은 받아 적은 쪽지를 타냐에게 전하며 말했다. “적어도 우리 편이 아예 없지는 않았군요. 든든한 걸요.” 카셀이 애써 희망적으로 말했다. 의회에서 연락이 없다는 것에 자신이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타냐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큰 힘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돕겠다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평가해선 안 되지만, 그들 전부의 힘을 합쳐도 루티아의 마스터 한 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루티아는 그런 마스터 여덟 명을 두고도 무너졌지요.” “그 때는 마법이 안 통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그런 게 아니니........”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상대로 한 인간의 마법은, 마법이 안 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카셀은 그 회색의 마법사를 새나디엘 여왕 앞에서만 만나봤으니 모를 겁니다. 그 분 앞에서조차 그 정도 힘이라면 거기에서 벗어났을 때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카-구아닐조차 부하로 쓰고 있어요. 솔직히 제가 모든 마법을 끌어낸다 해도 그 구아닐 하나 막기 벅찬데 말이에요.” 타냐는 거기에 또 하나의 큰 적, 러스킨에 대해서는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카셀은 알았다. 서로 알지만 말할 수 없었다. “걱정 말아요. 그래도 늦은 건 아니에요.” 타냐가 위로하려 했으나, 카셀이 먼저 위로해버렸다. 타냐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산책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정원은 밤이 더 멋지다더군요.” “마침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카셀은 타냐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의회의 있는 ‘천상의 정원’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멋진 정원을 거닐며, 카셀은 이 정원을 만든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냐는 카셀의 목소리를 음악처럼 흘려들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것만으로 타냐는 충분히 즐거웠다. 정원의 중앙에는 넓은 꽃밭이 두 사람을 환영했다. 낮에 보면 색의 향연으로, 밤에 보면 흑백의 풍성함으로, 들어온 이들의 마음을 흔드는 멋진 장소였다. 하지만 카셀은 그 아르다움에 괜스레 우울해졌다. “왜 그래요?” 타냐가 물었다. “뭔가 슬픈 기억이 떠오를 것 같은 장소네요. 오래 있고 싶지 않은데도 떠나기 싫은.......” 카셀은 한참이나 그곳에 서 있었다. 밤의 정원에 있을 리 없는 불빛이 있어 가보니, 거기에 엉뚱하게도 제이메르가 있었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분수대 앞에서 먼 산 바라모듯 멍청히 있었다. “뭐 하냐?” 제이가 물었다. “너야말로 뭐 하냐?” 카셀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는 등불을 분수대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분수, 재밌다. 가만 놔뒀다가 시간 되면 저절로 물이 튀어나와. 이거 봐” 마침 분수에서 몇 줄기의 물이 힘차게 위로 솟았다. 달빛과 등불의 작은 빛을 반사하며 허공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물방울이 뿌옇게 흩어졌다. 분수대를 장식하는 드래곤의 조각상은 짙은 안개 속에서 바라보는 미지의 동물 같았다.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은제이가 일부러 기다려 구경할 만도 했다. 카셀은 제이를 옆으로 끌고 가 뭐라고 속삭였다. 타냐는 두 사람 만의 대화를 하도록 내버려두고 뒷짐을 진 채 분수를 구경했다. 그 때 마법사의 감각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희미한 살기가 등 위에서 접근해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존재감은 있었다. 타냐는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쩌지?’ 타냐는 제이가 칼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말했다. “카셀, 제이메르. 두 사람 잠시 여기 계시겠어요? 곧 돌아오겠습니다.” “아, 그, 그러세요.” 카셀은 어째서인지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타냐는 돌아서서 정원을 가로질러 기사단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꽃나무와 향나무로 꾸인 짧은 미로를 빠져나가니, 잔디밭 한가운데에 그 불안감의 정체가 서있었다. 진한 암흑의 힘에 눌려 옆에 있는 몇 송이의 꽃이 자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손이 살짝 닿는 것만으로 꽃송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잔디밭 위에는 검은 갑옷의 기사가 검은 말을 타고 있었다. 루티아의 마법사들이 카구아라 믿고, 레미프들은 드래곤 슬레이어라 믿고 있었던 익셀런 제 1 기사단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자는 그야말로 생명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유령 그 자체였다. 생명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악령의 힘이나, 시체에서 살아난 괴물은 대륙을 여행하며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검은 기사는 그런 것과도 달랐다. 카모르트에서 하얀 늑대들 다섯 명이 있었는데도 쉽게 막지 못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타냐.......” 순간 그 기사가 듣기 싫은 쇳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레오피오의 여관에서 그녀를 덮쳤던 그 목소리와 같았다. “또 나타났는가?” 타냐는 힘을 실어 한 걸은 내디뎠다.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타냐와 검은 기사의 사이에 있는 풀이 모조리 얼어붙어 하얀 외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검은 기사가 타고 있는 붉은 눈을 번쩍이는 말의 앞발을 얼렸다. 발굽을 타고 오른 하얀 냉기가 말의 목을 타고 머리를 얼리고 이내 검은 기사의 발과 허리, 그리고 가슴을 얼렸고 마지막으로 투구 끄트머리까지 얼렸다. 그렇게 그 말과 검은 기사의 몸뚱이는 수십 년 동안 얼음 속에 처박았다가 방금 꺼낸 것처럼 하얗게 변색되었다. 그럼에도 검은 기사의 투구 안에서 입김이 뜨겁게 뿜어져 나왔다. 기사는 굵은 목소리의 고대어로 말했다. [너의 마법은 나의 주인이 내리신 힘 앞에 무력하다.] 그 기사는 얼어붙은 팔을 강제로 움직여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 보였다. 쇠 장갑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금이 가며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그는 그 손으로 허리에 찬 검을 움켜잡았다. 갑옷을 깨뜨릴 정도의 냉기 속에서도 칼날은 고스란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칼을 뽑으면서 팔뚝 일부가 부서져 떨어졌으나, 쥐고 있는 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따. [진짜 마법사의 힘이란 게 이 정도는 아닐 것이고, 이 이상은 뭐가 있지?] 타냐는 손가락을 하나 들며 고대어로 대꾸했다. [그런 질문을 할 여유가 있다는 건 이래도 안 죽는다는 뜻이지?] 예고도 없이 뻗어나간 투명한 칼날이 걸은 말을 탄 검은 기사를 내리쳤다. 얼어붙은 육중한 갑옷이 깨져나가고 말은 수십 조작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타냐는 잠시 기다렸다. 얼어서 부서졌던 갑옷 조각들 주위로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더니, 하나씩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조각은 미세한 것들 하나까지 빠른 속도로 짜 맞춰졌다. 검은 기사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고 일어난 순간 검은 말 역시 다시 합쳐진 몸으로 길게 울었다. 초식동물이 아닌 맹수의 포효 같았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께서 보내신 사자가 죽을 거라 생각했나?] 그는 비웃고 있었다. 타냐는 손을 치켜들고, 더 강한 마법을 준비했다. 검은 기사는 듣기 싫은 저음으로 말했다. [두고 온 사람이 걱정되지 않은가?] 타냐는 순간 카셀을 떠올렸다. 짤게 보인 동요를 보인 검은 기사는 놓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시간 끌기라면 어쩔 텐가, 마스터 타냐?] [너 정도로 시간을 끌지는 않는다.] 검은 기사는 바닥에서 산산조각 난 칼의 손잡이를 집었다. 그 칼도 검은 기운을 접착제 삼아 도로 붙어버렸다. 투구를 까닥이며 기사가 말했다. [나의 주인께서 널 죽이지는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한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뺏어두면 좋겠다고 하셨지.] 검은 기사는 마치 강물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소년처럼 제자리에서 가볍게 몇 번 뛰었다. 갑옷의 무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타냐는 손을 뻗어 모든 것을 얼리는 마법을 실었다. 검은 기사는 그 마법을 정면으로 맞서고도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제이가 미리 낌새를 눈치 채고 언질을 줬음에도 카셀은 분수대 옆으로 찾아온 여자의 출현에 무척 놀랐다. 일부러 나타난 게 뻔한데도 마치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그녀는 놀라는 척 했다. “나르베니 집정관! 이 곳이 의회의 정원이라면 모르되, 장소가 이러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군요.” “아, 그런가요? 저 역시 만나면 기사단 내 건물에서 만날 줄 알았지, 정원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요. 캡틴을 뵈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산책 겸 나왔는데 이거 큰일이네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거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피어 오른 미소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녀는 분수대 옆에 자신이 들고 온 등불을 내려놓았다. 제이가 가져온 것과 합쳐 빛이 두 개가 되니 분수대 근처는 꽤 밝아졌다. 그 빛의 도움으로 또렷이 보이는 그녀의 얼굴 윤곽은 분명 진한 화장 탓일 것이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피부는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어둠 탓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스듬히 한 쪽 어깨에 걸쳐 풍만한 가슴과 한쪽 허리만 감춘 상의 너머로 보이는 가는 몸매나 옆이 트인 치마가 흔들릴 때마다 시선을 빼앗는 하얀 다리에 카셀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볼 일 있소, 집정관 양반?” 그런 것에 완전히 초연한 제이가 툭 내뱉었다. “당신의 캡틴과 대화 중이니, 잠시 빠져주시겠어요?” 나르베니의 붉은 입술이 그리는 미소는 어지간한 남자는 대번에 홀릴 만도 했다. “난 카셀 경호원이오.” 제이가 말했으나, 여전히 나르베니의 시선은 카셀만 향하고 있었다. “울프 기사단의 캡틴 정도 되시는 분도 경호원을 필요로 하십니까?” 근본적인 질문에 제이는 말문이 막혔다. 카셀은 제이를 부드럽게 옆으로 밀고 말했다. “볼 일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십시오. 여기 있는 제이메르는 경호 이상의 일을 맡고 있지요. 그게 무엇인지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제가 아는 모든 일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가요?” 나르베니는 새삼스럽게 제이를 찬찬히 뜯어보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제이는 그 미소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만 구겼다. “갑자기 나타나 귀중한 시간을 빼앗아 버린 것 같군요. 하지만 하루 종일 기다려 일부러 이 시간에 나타난 것이니 양해하시길.” “의회의 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오.” “캡틴 울프, 의회에서 다시 한 번 회의를 가지고 당신에 대한 평가를 달리 했답니다. 원래 이런 일에 강력하게 저항하기 마련이 원로회의 측에서 의외로 당신에 대한 지지를 표하고 나섰지요. 혹시 롬노르 의원을 뵈신 적이 있나요?” “모릅니다만?” “흐음, 그 분은 다시 한 번 캡틴께서 의회에 출석하시길 원하세요. 거기에 자신도 출석하여 정식으로 지지를 표명하실 듯하네요. 여전히 많은 의원들은 당신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을 테지만, 상당한 효과는 있을 거예요. 그 말을 전해드리러 왔어요.” “아, 그런 일에 일부러 집정관께서 오실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나르베니는 고개를 저었다.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꽃 냄새가 주위를 향기롭게 물들였다. “전에 이 곳을 찾은 마스터 퀘이언께 제가 무례를 저지른 탓에, 이번 캡틴 울프께는 좋은 인상을 남겨볼까 하고요.” “마스터께요?”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때는 아직 철이 없어 퀘이언을 뵙는 순간 못된 생각이 들어 그만 고백을 해버렸지요. 보기 좋게 거절당했지만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아, 못할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할 용기를 잃어버렸군요. 어쨌든 조심하세요, 캡틴 울프. 로크에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가짜 아란티아의 캡틴이 캡틴을 사칭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고, 더 심하게는 아라티아가 가넬로크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실제로 검은 기사는 제가 머무는 저택 근처까지 찾아왔었어요.” 카셀은 눈을 크게 떴다. “검은 기사가?” “모를 일이지요. 마치 익셀런의 기사단 같은 갑옷을 하고 있어서, 몹시 당황했습니다.” 나르베니는 마치 눈 앞에 검은 기사가 있다는 듯 겁먹은 얼굴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자를 만나고도 무사하셨습니까?” 카셀이 물었다. “캡틴께 경호 기사가 있다면 저도 있지요.” 그 때 제이는 검에 칼을 올려놓고 있었다. 카셀은 제이가 과잉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르베니의 뒤에서 나타난 두 명의 남자가 무서운 눈을 하고서 카셀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장에 가까운 각진 옷에 어깨는 실크로 만든 휘장을 두른 독특한 기사 복식을 갖춘 키 큰 기사들이었따. 나르베니는 당장 그들을 호통했다. “그 못된 기세를 거두어라!” 나르베니는 한숨을 쉬며 카셀에게 사과했다. “최강이라고 칭송 받는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나타났다 하니 어제부터 흥분해서 이렇답니다. 혹시라도 기회가 되시면 이 어설픈 자신감을 꺾어주시지요.” “시기가 이러하니 그런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요. 그리고 저는 절 지키는 이 친구보다 터무니없이 약합니다. 만약 시합을 하게 된다면 제이메르가 나서도록 주선하지요. 괜찮나, 제이메르?” 카셀의 말에 제이는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도 돼.” 카셀은 그를 달래듯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지금은 서로 힘을 겨룰 때가 아니라 큰 적을 상대로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특히 집정관 세 분과는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저도 그러길 바라요. 그 첫 단추가 제가 되고 싶군요.” 나르베니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카셀도 손을 내밀었다가 갑작스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내민 손을 멈췄다. “집정관! 누구 허락을 받고 이 정원에 발을 들인 거요?” 캡틴 데라둘이었다. 나르베니는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문관에게는 허락을 받았습니다만, 캡틴 데라둘?” “사무관이?” 당장 내일 사무관이 무슨 처벌을 당할지 상상하기 싫은 표정으로 데라둘은 중얼거렸다. 그 무서운 시선은 다시 나르베니를 겨냥했다. “여기서 나가시오. 그리고 캡틴 울프와 할 말이 있다면 정식으로 나를 거치던가, 아니면 의회의 대변인을 통하시오. 사적인 대화를 의회 정치에 이용해 먹으려 드는 건 지긋지긋하군.” 카셀은 데라둘의 말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그는 너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바르베니도 마침내 화를 감추지 않았다. “의원들과의 친근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지나치시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캡틴 울프마저 당신 침대로 끌어들일 생각인가?” 나르베니는 얼굴이 붉어져 입술을 가늘게 떨었다. “무례하시군요, 캡틴 데라둘. 그런 헛소문을 당신 같은 분까지 입에 올리시다니!” “헛소문?” “그래요. 능력 있는 여자가 집정관 자리까지 오르는 게 못마땅한 멍청한 남자들이 지어낸 헛소문! 당신은 그런 편견이 없을 줄 알았지만, 실망이군요.” “나는 아주 많은 여성 정치가들을 존경하지만, 당신은 그 축에 감히 끼지 못하오.” 두 남녀가 서로 쏘아보는 눈길은 타는 듯 뜨거웠따. 보는 카셀이 뜨끔뜨끔 할 정도였다. “그 무례함을 보상 받을 날이 있을 겁니다, 데라둘 마치!” 그녀는 경호 기사 둘을 대동하고 카셀을 지나치며 말했다. “데라둘을 조심하세요. 예전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지금은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을 맡을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런 데라둘에게도 들으라고 한 말임에 분명했다. 데라둘도 거기에 맞서든 말했다. “지난 집정관 선거에 대한 의혹은 아직 풀리지 않았소! 언동을 조심하시오.” 정원 너머로 사라지는 나르베니는 그 말에 멈칫했으나, 그대로 걸어갔다. 데라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카셀에게 말했다. “한 가지만 말해두지. 로크의 의회는 예전 같지 않아. 의원들이고 집정관들이고 모조리 자네를 이용해 먹으려고 안달이 나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네.” 카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거기에 캡틴 데라둘까지 의심해야 하겠군요.” “그 정도 상황 해석은 필요한 시점이군.” 그는 카셀이 자기까지 의심하고 있다는 걸 오히려 바람직하게 여겼다. 이런 자신감을 가진 기사에게 맞서려면 카셀은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회의에 참가할 텐가?” “예.” “제발 의원들이 내가 우려하는 바를 조금이라도.......” 데라둘은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커다란 소리에 말을 멈췄다. “기사단 사무실 쪽이다.” 제이가 말했고, 카셀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갔다. “타냐!” 타냐의 마법으로 팔이 떨어져나간 채로 검은 기사는 검을 휘둘렀다. 타냐는 공중으로 몸을 날려 칼을 피하고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러나 검은 기사는 멈추지 않고 타냐가 착지한 자리까지 따라와 칼을 들었다. 너무 빨라 타냐가 다른 마법을 준비할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맨손으로 검은 기사의 칼날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과 칼 사이에서 하얀 빛이 폭발했다. 칼날은 막았으나, 칼날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은 막을 수 없었다. 검은 연기가 뱀처럼 그녀의 팔목을 타고 몸으로 흘러 들어왔다. “윽!” 그 검은 연기는 타냐의 살갗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피해봤자 소용없으니 타냐는 아예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뱀의 형상을 한 검은 연기가 흐트러지고 칼날은 또 한 번 유리처럼 깨졌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검은 기사는 칼을 놔버리고, 그 손으로 타냐의 얼굴을 후려쳤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타냐는 뒤로 머리를 부딪혔다. 즉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검은 기사는 어느 새 타냐의 몸 위에 올라타 누르고 있었다. 갑옷만의 무게라고 생각하기에는 짓누르는 힘이 너무 셌다. 검은 기사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타냐의 얼굴은 움켜쥐었다. 그 다음 공격이 어찌 되었든 타냐는 피해 없이 이 녀석을 해치울 수는 없겠다고 판단하고, 침착하게 검은 기사의 배 쪽으로 힘을 모았다. 그 순간 기사의 누르는 힘이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기사가 잡고 있는 손이 타냐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마법을 멈추었다. 갑옷을 입은 검은 기사보다 더 커다란 덩치가 뒤에서 기사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올리고 있었다. 활짝 펼친 날개가 뒤이어 보였다. 어지간히 단련된 남자보다 힘이 센 타냐가 감당 못했던 무게였음에도 그는 한 손으로 검은 갑옷을 들어올렸고, 다른 한손은 타냐의 얼굴을 쥐었던 팔을 잡아챘다.. 라이였다. 라이는 들어올린 검은 기사를 내던졌다. 무거운 쇳덩이가 정원의 경계를 짓는 벽돌 벽을 무너뜨렸다. 주인을 지키기라도 하듯 붉은 눈을 뿜어내는 검은 말이 달려들었으나, 라이는 노려보는 것만으로 말을 세워버렸다. 말은 앞발을 세우며 몇 번 위협했으나, 라이가 꼼짝도 않자 고개를 숙이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괜찮은가?” 라이가 물었다. 타냐는 옷을 털면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검은 기사는 금방 일어났고, 깨진 칼과 부서진 팔은 또 원래대로 돌아갔다. 죽은 자에게 사악한 기운이 있다고 해도 이러 ㄴ빠른 회복은 있을 수 없었다. 근처에 이 자의 주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늘 산맥에서 온 놈이구나.] 검은 기사가 말했다. [넌 구아닐의 부하이가? 같은 냄새가 난다.] 라이가 물었다. [의미 없는 문답이다.] 검은 기사는 말에 올라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엄청난 도약력으로 담장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라이가 따라가려 하자, 타냐가 저지했다. “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멀리서 그 맹수 같은 말이 우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라이는 폈던 날개를 다시 접고 레미프의 언어로 물었다. [저 녀석이 우리가 싸워야 할 존재인가 보군. 혹시 우리보다 먼저 여기 와 있는 건가?] 카셀이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오고 있었다. 타냐는 아까 얻어맞아,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손을 대고 말했다. [아니, 저들은 하늘 산맥에서 온 게 아닙니다.] 카셀의 뒤에는 제이와 캡틴 데라둘이 따라오고 있었다. 타냐는 데라둘의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로크의 누군가가 우리가 오기 전부터 준비해 뒀던, 그런 존재입니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시체에서 떨어지는 피가 어깨에 묻었따. 검은 기사는 조용히 주인의 말을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은 이미 천장에서 떨어지는 진득한 피로 얼룩져 있었다. 탁자 앞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여자는 몽롱한 정신을 차리자마자 엄습해 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제,제발.......” 그녀는 피 섞인 침을 뚝 뚝 떨어뜨리며 눈앞에 악마의 형상을 하고 서 있는 검은 존재에게 애원했다. “주, 죽여주세요. 제발.” 사흘 전만 해도 그녀는 로크로 소금을 팔러 온 평범한 어부의 평범한 아내였다.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후 남편은 마누라를 찾아 사흘 내내 로크 온 시내를 헤집고 다녔다. 당연히 그의 아내의 행방을 찾지 못했고, 사람들은 다른 남자를 다라 도망간 거니 더 찾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녀는 이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온 몸에 입고, 이상한 연기에 중독 되어 하루의 절반은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리고 매일 밤 이 이상하게 생긴 괴물 앞에 서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 어둠 속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낸 그 악마가 말했다. “넌 이미 죽어 있어. 저 탁자 위에서 꿈틀대는 심장이 네 거야. 다른 ‘것들’은 금방 그걸 눈치 채던데, 이번 건 좀 느리군.” 어부의 아내는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몽롱한 시선에 들어오는 방 안의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였다. 검은 기사는 주인으 명령을 들고 칼날을 심장에 박았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걸쭉한 피가 되어 입 밖으로 왈칵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몸은 천천히 쇠사슬에 이끌려 천장에 매달렸다. 그녀는 이미 죽어있었지만, 여전히 숨을 쉬고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몇 년 째 그 곳에 매달린 수많은 시체들 역시 마찬가지로 들릴 듯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괴로움을 토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오래 전 지쳐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고 있었고, 누군가는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나 그들은 이미 죽을 수조차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검은 깃털 달린 커다란 날개가 활짝 펼쳐져 하늘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았다. 검은 깃털들은 어미 새의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머리를 한껏 세운 새끼 새처럼, 서로 피를 받으려는 듯 경쟁적으로 꿈틀댔다. 거기에서 흡수된 피는 반투명한 피부 안쪽으로 보이는 굵은 핏줄을 타고 흘렀다. “캡틴 카셀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구나.” 저음의 웃음이, 또 다른 희생자의 비명조차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 지하실을 울렸다. “그대는 이미 늦었다. 이미 나는 모든 것을 대비하고 있다.” 6. 아버지의 과거 나르베니의 말대로였다. 의회 의원들의 반응은 이틀 전과는 급격히 달라져 회의 진행에 몹시 적극적이었다. 적이 온다면 그 적에 대한 대비가 먼저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갔다. 고작 원로 의회에서 네댓 명이 참석하는 것만으로 이런 변화가 있을 리는 없었다. 아직도 반발이 있는 의원과 그렇지 않은 의원들 사이의 열띤 토론은 있었지만, 진행에 자극을 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카셀은 원로 의회의 의원 세 명을 주시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안면이 있었다. 드래곤 기사단을 근처에서 구경할 때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출신 지역을 알아본 노인이었다. 그가 원로의원이었다는 사실은 의외였으나, 여전히 어떻게 자신의 출신지를 알아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롬노르였다. “혹시?” 그러나 그 출신이라는 것이 갑자기 무기가 되어 겨냥할 줄은 몰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낸 바가 있소, 캡틴 울프.” 회의는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이제 캡틴 울프를 중심으로 하늘 산맥에서 오는 적이 누구인지, 왜 가넬로크를 노리는지, 그들과 어떤 식으로 싸우게 되는지에 대해 논의할 단계까지 와 있었다. 찬물을 끼얹듯 집정관 루에머스는 말을 이었다. “캡틴의 본명이 카셀이며, 아란티아 출신이 아닌 카모르트 출신이고, 또한 성이 ‘노이’라는데, 사실이오?”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우호적으로 나섰던 의원들이 웅성거렸다. 원로의원 롬노르도 무척 당황했다. 카셀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일이오?” 카셀이 대꾸했다. “중요하오.” 루에머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귀 뒤를 긁적였다. 뒤에서 보고 있던 나르베니가 루에머스에게 손짓했다. “ ‘그것’을 언급하기에는 그리 좋은 시기와 장소가 아닙니다. 루에머스 집정관.” “지금 이 자리보다 더 적합한 곳이 어디에 있다는 거요?” 나르베니도, 논돌린도 대꾸하지 못했다. 걱정스러워 하며 두 사람은 카셀 쪽을 힐끔 봤다. 루에머스는 점점 톤을 높여가며 의원들에게 말했다. “이 곳에 있는 의원들 중 상당수는 이십 년 전 일에 대해 잘 모를 거요. 나도 그 때는 고작 말단 의원에 불과했으며 과날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때 가넬로크에는 아주 굴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소. 캡틴 데라둘, 당신은 그 자리에 있던 핵심 중 한 명이었으니 잘 알 거요.” 회의 내내 팔짱을 끼고 방관하고 있던 데라둘도 나르베니처럼 우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이 지금회의와 무슨 상관이오?” “크게 상관있소. 가넬로크의 의회는 어디보다 공평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므로,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명확하게 규명해왔소. 그러니 이 일 역시 얼버무려서는 아니 되오.” “그만 두시오, 집정관.” 데라둘이 말했으나, 루에머스는 듣지 않았다. “역사가들마다 과거를 평가함은 다르겠으나, 나는 그 일을 드래곤 기사단의 수치이자, 우리 의회의 굴욕이라 말하고 싶소. 그 일은 안타깝게도 모든 나라에 전해져, 이제 어중이떠중이 음유시인들까지 하찮게 입에 올리고 있소. 나는 그 일을 바로 이 자리에서 해결하고 우리 의회 정치가 더욱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오.” 아무 말 않던 원로의원 롬노르도 손을 들었다. “집정관, 캡틴 데라둘의 말이 옳소. 그 일을 거론할 자리가 아니오.” 카셀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루에머스는 결국 롬노르의 말까지 무시하며, 똑바로 카셀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십여 년 전 가넬로크 의외와 원로 의회는 단 한명의 청년 때문에 엉망으로 흔들렸으며 드래곤 기사단은 그 청년을 캡틴으로까지 맞이하려 하였소. 귀족의 핏줄만을 기사로 받아들이는 드래곤의 명성을 더럽혔으며, 당시 집정관의 딸마저 그 자에게 납치 당하다시피 이 나라를 떠났소. 그 일로 인해 당시 집정관은 사퇴했으며, 그 일로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 엔손드가 또한 사퇴했고, 한동안 가넬로크의 정치는 밑바닥부터 흔들렸소.” 그의 열성적인 어조에 몇몇 나이 많은 의원들은 벌써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사건인 터라 대다수 의원들도 그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하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직 롬노르와 데라둘만 당황하고 있었다. 나르베니는 이마를 짚고 루에머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의 만행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심지어 나는 그 자리에 있었소. 기억나십니까, 원로의원들? 그리고 이 자리의 많은 선배 위원들. 우리는 결국 두 명으로 이루어진 집정관 체제가 허술하다는 걸 깨닫고 세 명으로 늘리는 법안까지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렇고, 집정관. 나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소. 젊은 위원들을 위해 짧게 설명해 드리리다. 당시 집정관이셨던 롬노르 의원의 따님 달리아는 그 때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는 남자에게 유혹당해 반강제적으로 결혼했으며, 드래곤 기사단은 그 자가 내세운 터무니없는 내기에 휘말려 캡틴 자리를 그 자에게 내줄 뻔했었소. 또한 그 남자는 원로의원들 앞에서 자신이 레이디 달리아와 결혼할 자격이 있음을 일장 연설로 공격해 원로 의회의 권위를 더럽혔소. 맞소. 그런 가넬로크의 근 역사 중 가장 수치스러운 일 중 하나요. 나 역시 다른 로크의 시민들과 함께 슬퍼했었소. 그러나 왜 그 일을 하필 지금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 명이 이의를 제기하며 길게 말해싿. “옳소. 지금은 캡틴 울프를 모시고, 전쟁을 준비하는 자리가 아니었소?” 다른 의원도 말했다. 루에머스는 차라리 그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 때 우리 정치의 초석을 흔들고 로크에서 가장 아름다고 고귀한 여인을 데리고 달아나버린 그 남자의 이름은 ‘에밀 노이’요. 그는 카모르트에서 흘러 들어온 하찮은 농부의 자식이었으며, 지위는 물론 재산도, 핏줄도, 검술도, 아무 것도 없이 오직 거짓말로 무장한 사기꾼에 불과한 남자였소.” 의자를 쥐고 있는 카셀의 팔이 채찍에 맞은 듯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미 카셀은 달리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부터 주체할 수 없이 동요하고 있었다. “어이, 카셀. 괜찮나?” 옆에서 재미없는 옛날 얘기 듣듯 지루해하던 제이가 물었다. 타냐도 가켓의 손목을 잡았다. “카셀?” 카셀은 제이의 목소리도, 타냐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루에머스는 손가락으로 카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바로 이 자리에 앉은 캡틴 울프라는 남자의 본명은 카셀 노이이며, 그 때 가넬로크를 공격한 그 사기꾼의 자식이오. 우리는 지금 또 한 번 사기꾼의 자식에게 농락을 당하러 이 자리에 나온 거요.” 루에머스는 그 뒷말을 더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미 의회는 그것만으로 발칵 뒤집어졌다. 차가운 얼굴 뒤에 승리의 미소를 감추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나르베니 집정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웃음을 잃는 일이 없는 논돌린 집정관도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셀은 굳게 다문 입술로 롬노르 원로의원을 바라보았고, 롬노르도 어찌할 줄 모르는 눈으로 카셀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나가라!” 그 때의 수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의원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카셀에게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우리에게 사기꾼의 자식 따위는 필요없다.”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질렀고, 욕을 섞은 말로 협박했다. “나가!” “경비병, 이 자를 내쫓아라.” 가넬로크의 정치 세계에서는, 회장에서 쫓겨나는 것만큼 굴욕적인 일은 없었다. 실제로 과거 의원 중 여기서 끌려 나간 굴욕감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의자를 세게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잃고, 카셀은 잘에서 일어났다. “제 외할아버지셨군요.” 카셀은 롬노르에게 말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욕하던 아버지조차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쁜 말을 하지 않았는데.......” 카셀은 힘없이 회장을 걸어 나갔다. 잉크병이나 종이 뭉치 같은 쓰레기가 날아왔다. 누군가는 진심으로 먹으려고 들고 온 토마토를 집어 던졌다. 우연인지 실력인지 그 토마토는 카셀의 머리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카셀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허공에 뜬 토마토는 천장 쪽으로 날아가더니 불꽃과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타버린 토마토 조각이 여기저기로 떨어졌다. 아수라장이었던 회장이 일순 침묵에 빠졌다. 카셀의 뒤에 있던 타냐의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펄럭였다. 그녀는 토마토를 던진 의원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 의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만해요, 타냐.” 카셀은 그녀의 어깨를 쥐고 미소 지었다. 그는 조용히 회장을 나섰고, 타냐는 마지막으로 의원들 모두를 노려보며 나갔다. 찬 냉기가 겨울날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한바탕 주위를 흔들었다. 토마토가 깨진 후 타냐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침묵은 계속 되었다. “훌륭하오, 루에머스 지벙관. 이 와중에 아란티아를 적으로 삼아 어쩔 셈인지 묻고 싶군.” 데라둘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십 년 전 정쟁에서도 혼자 도도한 척 꼼짝 않고 있던 아란티아요. 이제와서 자기들 ㅉ고에서 전쟁을 주도하겠답시고, 사람 한 명 보내왔다고 우리가 거기에 순순히 따라야 하오?” 루에머스는 의자의 앉은 채 깍지를 끼고 반문했다. “당신 눈에는 나이 어린 청년일지 모르나, 내 눈에는 아란티아의 대표이며 가넬로크에 위기를 알리러 온 구원자로 보이는군.” “아란티아가 나중에 극적으로 나타나 구원자 행세를 하는 건 여전하군. 론타몬의 대륙 전쟁을 끝장낸 건 가넬로크였소. 내가 이끄는 군대였고, 당신의 드래곤 기사단이었소. 울프 기사단이 아니었단 말이오. 언제까지 거기에 휘말려 우리가 아란티아의 속국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는 거요?” 루에머스는 주저하지 않는 자신감으로 위원들에게 말했다. “기억하시오, 모두! 가넬로크는 대륙 최강의 군대를 가졌소. 하늘 산맥에서 괴물이 쳐들어오다고? 좋소. 그 일을 미리 우리에게 알려준 캡틴 울프에게 축복을! 그럼 그의 역할은 거기에서 끝이오. 이제 그 적을 우리가 막으면 될 일이오.” 루에머스가 길지 않은 연설을 마치고, 몇몇 의원들은 박수를 쳤고, 몇몇 의원들은 깊이 공감했다. 여전히 불만을 품은 이도 있었으나 드러내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논돌린 집정관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 시간 가량 휴회하겠소. 서기관, 로크 수비군과 각 지역 행정관들에게 보낼 서한들을 준비하게.” 저녁 무렵 마법사 모임 그랜드 로크에서 타냐를 초청했다. 의회의원들에 비하면 마법사들의 조치는 매우 빨랐다. 그들은 곧 가넬로크에 들이닥칠 적이 누군지 아는 만큼 두려워했고, 두려워하는 만큼 그 대비에 적극적이었다. 하루 종일 말이 없는 카셀의 옆에 있어주던 타냐도 하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제 걱정은 마세요. 대충 짐작한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놀랐을 따름이에요.” 카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으나 얼굴 표정은 그러지 못했다. 타냐 역시 그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지금은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제이메르, 카셀을 부탁합니다.” 타냐는 방을 나서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이에게 말했다. “걱정 마라.” 제이의 검술이 어제 그 검은 기사에게도 통할지 모를 일이었으나, 지금은 그에게 의지해야 했다.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그냥 카셀의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당신은 도움이 될 겁니다.” 타냐는 그 말만 남기고 그랜드 로크의 안내자를 따라 기사단 건물을 나갔다. “정신적 문제? 내가 그게 뭔지 어떻게 알아?” 제이는 두 손을 털며 중얼거렸따. 그는 이부러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 혼자 소파에 앉은 카셀 앞에 앉았다. “네 정신적 문제가 뭐냐?” “뭐?” “내가 도움이 될만한 걸 말하라는 거다.” “그냥 거기 앉아서.......” “앉아서?” “나랑 똑같이 인상 쓰고 있어.” 카셀이 대답했고, 제이는 카셀의 요구와는 다른 의미에서 인상을 구겼다. 제이는 응접실 탁자에 놓인 마른 비스킷을 씹으며 시간을 보냈다. 카셀은 문득 한 자리가 비어있는 것에 물었다. “라이는?” “그 녀석 갑자기 없어지는 게 하루 이틀이냐? 또 어디 노은 곳에 낮아서 깃털 손질이나 하고 있겠지.” “라이와 사이는 어떠냐?” “별로. 또 물어 보냐, 그걸?” “안 싸우면 됐어. 별로 할 말이 없어서 말한 것 뿐이야. 신경 쓰지마.” “네 어머니가 여기 집정관 달이었나?” 카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는 말실수했나 보다 생각했다.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말을 꺼낸다는 것이 그만 자신의 어머니를 언급해버리고 말았따. “내 어머니도 여기 의원 딸이었.......” 놀란 카셀의 눈을 보고서야 제이는 말을 멈췄따. “네 어머니가?” 제이는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이다.” “내가 여자였다면 아마 너한테 빠져버렸을 거다. 어떻게 그렇게 거짓말 하는 게 미숙할 수가 있냐?” “시끄러.” 카셀은 허탈하게 웃었따.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걸 빠뜨렸군.” “중요한 게 뭐냐?” “뭐, 자잘한 얘기들. 가족 얘기, 앞으로 뭐 하며 살 건지, 고민거리는 뭔지....... 우린 항상 너무 굵직굵직한 얘기만 해왔어.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야.” “넌 네 아버지 얘기 자주 했잖아.” “그럴까? 아버지 얘기라...... 그게 정말 아버지 얘기였나?” “이 녀석, 또 이상한 길로 빠지려고 하네.” “어렸을 때부터 많이 느꼈지만, 난 아버지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몰라. 그저 과거에 여기저기 여행하다가 이상한 짓 많이 하고 다녔다고는 생각했지. 하지만 어머니께서.......” 카셀은 고통스럽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도 오늘 알았어. 정말이야. 아니, 사실은 루에머스 집정관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도 잘 기억이 안 나. 일찍 어머니를 여읜 많은 자식들이 대게 그렇듯, 그저 아름다운 분이셨다고 회상하는 정도지.” 머리를 누르는 카셀의 손이 얼굴 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카셀은 그대로 그 손으로 눈 주위를 누르고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절대 어머니 얘기를 하지 않으셨어. 누구 앞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자랑으로 여기신 분이니, 분명히 눈물을 보일 얘기는 하고 싶지 않으셨던 거야.” “언제냐?” 제이가 나직이 물었다. “응?” “언제 돌아가셨느냐고, 네 어머니가?” “두 살 때, 병으로. 잘 기억이 안 나. 하지만 아버지께서 내가 아란티아로 떠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었어. ‘나는 아내를 얻었고, 아내는 자유를 얻었다.......’ 어머니는 절대 루에머스 집정관의 말대로 치욕적인 어떤 일을 다한 게 아니었을 거라고 믿어.” “널 보면 알 수 있다.” 제이가 말했다. “뭘?”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널 보면 알 수 있다고. 난 그게 부러워.” “꼭 그렇지 만도 않아. 아버지는.......” “난 내 아버지를 내 손으로 죽였다.” 카셀은 애써 슬픔을 참고, 웃음으로 이어가려던 말을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를? 그러니까 어떤 상징적인......?” “돌려 말한 거 아니다. 내 손으로, 내 칼로, 내 힘으로 죽였다.” 제이는 자신의 손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따. “카셀. 너는 그런 멋진 아버지를 두었고, 멋진 친구들을 만났고, 이제 멋진 연인까지 생겼다. 우는 소리는 멈춰라.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블랙을 세우던 그 기세는 어디로 간 거냐? 네가 네 아버지의 결백을 믿는다면, 낮의 그 개자식들이 하는 말은 잊어버려.” 제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떠는 주먹 뒤로 크게 뜬 눈은 카셀이 아닌 먼 과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집어 던져 마룻바닥에 패대기쳤어. 나는 아직도 높은 곳이 무섭다. 널 구하려고 뛰어든 아란티아의 그 절벽에서 내가 얼마나 오금이 저렸는지 말하면 웃을 거냐? 타는 불을 볼 때마다 내 손으로 화장시켰던 어머니를 떠올리면 어리애라고 놀릴건가?”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느끼고 욕을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네가 얘기하자는 게 이런 거였나? 그래. 나의 아버지는 드래곤 기사단이었다. 여긴 내가 저주하는 곳이었어. 이제야 기억나다니. 너나 나나 거지같은 곳이었다, 여긴.” “미안하다, 제이메르.” “관둬. 사내새끼 두 놈이 우는 꼴도 우습다.” 카셀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고, 제이도 창 밖만 바라보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서로를 위로하지 않았고, 둘 다 서로를 자극하지 않았다. 제이는 창 밖으로 뭔가 희뿌연 것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길게 뺐다. 카셀은 제이의 행동을 보고 똑같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기에 로브를 입은 괴한이 똑바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이는 눈짓으로만 카셀에서 신호했다. 카셀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나가면 안돼.’ 제이는 충분히 카셀의 뜻에 공감했다. 만약 저 로브를 입은 자가 ‘그 자’라면 제이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타냐도 없는 곳에서 마법사를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공격해온다면 어떻게든 버텨보겠지만, 이 쪽에서 먼저 자극하는 건 극히 위험했다. 그 자는 잠깐 동안 두 사람을 노려보는 듯 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뭐, 뭐였지?” 카셀이 물었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카셀은 깜짝 놀라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제이도 조금은 놀랐다. “누구요?” 카셀이 물었다. “손님이 왔습니다, 캡틴 울프.” 기사단의 사무관 목소리였다. 카셀은 얼른 제이에게 얼굴을 보이며 물었따. “티......나?” 제이가 대꾸했다. “나.” 카셀은 크게 소리쳐 말했다. “잠시 기다리라 이르시오.” 카셀은 세수를 하고 사무관을 따라 건물 앞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맞았다. 그는 깔끔한 정장에 고급스러운 마차까지 앞에 대령하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롬노르 의원을 모시는 집사입니다. 주인님께서 울프 기사단의 캡틴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같이 가십시오.” “롬노르 의원?” “예. 거절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 분인데 말입니다.” 나이 지긋한 집사의 눈에는 젊은 카셀을 무시하는 빛이 가득했다. “그럼 내 친구를 같이 데려가겠소.” “가급적 혼자 와 달라 하셨습니다만?” “나 혼자 가버리면 친구가 심심해 할 테니, 같이 데려가겠소. 또한 나는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위치니 그 쪽이 이해해 주시오.” 집사는 결국 납득하고, 카셀은 제이를 불렀다. “혼자 오라는 건 둘째 치고 낌새가 좋지 않다, 카셀. 아까 그 자도 그렇고.......” 제이가 경고했다. “나도 그래. 뭔가 불길한 밤이군. 준비해라.” 카셀의 말에 제이는 허리에 찬 칼 두 자루를 툭 두들겼다. “준비야 항상 되어있지.” 라이는 지붕 위에서 마차에 타는 카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셀.......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이름을 반복해 불러보았다. 왜일까? 카셀은 익숙했다. 라이는 하늘 산맥에서 내려온 후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왜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라이는 자신이 그저 우그라고 불렀던 그 남자를 잠시 떠올렸다. 그 남자는 인간의 나이로 치면 마흔 살에 가까웠고, 항상 웃었다. 그는 자주 자기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자랑했다. 농사처럼 결과물 얻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 대신 장사처럼 빨리 돈을 회수할 수 있는 일을 좋아했고, 성실하게 버는 돈보다 도박으로 돈 버는 걸 더 좋아했다. 이로피스라는 나라에서 정치도 해봤고, 론타몬에서 기사 수행원을 해보기도 했고, 여자도 스무 명은 만났다가 헤어졌고 사람도 죽여 봤고, 죽을 뻔하기도 했고, 이제 하늘 산맥의 레미프까지 만났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럼 이제, 죽을 건가, 우그?’ 그 우그는 정말 말이 많았다. 라이가 우그의 말을 더듬거리며 할 수 있는 것도 그의 덕이었다. 그는 라이가 알아듣지 못해도 입을 멈추지 않았따. 하지만 지금의 카셀과는 달리 그는 말만 꺼내면 문제를 일으켰다. ‘아니, 안 죽어, 안 죽어. 왜 죽어? 그보다 맥주 더 마실래? 이 집 맥주는 카모르트 최고야.’ ‘더 마신다.’ ‘어이, 주인장. 여기 맥주 한 통 더 가져다주시오. 내 친구 주량 채우려면 이 집 술 다 비워야 될 거야.’ 우그는 깔깔대고 웃으며 주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가?’ 라이가 물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술값은? 많이, 나온다.’ ‘오오, 레미, 드디어 네가 인간의 금전 관계를 파악하기 시작했구나. 좋아, 좋아. 가르친 보람이 있어. 하지만 걱정 마. 널 술 사주는 정도로 돈이 떨어지지는 않아. 뭐, 사실 돈 없다고 술 못 먹거나 굶는 일도 없어. 나 알잖아. 큰 돈 만지는 방법에는 도가 텄어!’ 그는 귀밑까지 찢어지는 미소를 보이며 라이의 어깨를 툭 툭 쳤다. ‘금방 올게. 여기에 꼭 붙어있어.’ 그렇게 떠난 우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남자가 들어와 라이의 앞에 앉았다. ‘너구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뚱뚱한 남자였다. 라이는 상대를 내리깔고 보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 냐?’ ‘질문은 단장께서만 하신다. 넌 닥치고 질문에 대답이나 해.’ 라이와 맞먹을 정도로 근육을 키운 남자 두 명이 각각 한쪽 어깨를 세게 움켜잡았다. 술집에 있는 다른 우그들은 슬금슬금 탁자에다 술값을 지불하고 달아나 버렸다. 술집 주인도 그 술값을 받을 생각도 않고 뒷문으로 몰래 나갔따. 딱 한 명만 그 술집에 남아 라이와 그 남자들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얼굴로, 평범하게 겁먹은 그 남자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네 주인이 널 내게 넘겼다. 너 사느라고 돈 좀 썼으니, 그리 알고.’ ‘돈?’ ‘그래, 돈. 네가 그 돈 값을 해줘야지.’ 라이는 머리 속이 엉망이 되는 것 같았다. 돈. 물건을 판다, 물건을 산다. 돈으로 물건을 산다, 돈으로 사람을 산다. 돈 때문에 사랑을 버린다, 돈 때문에 우정을 깬다. 돈 때문에 나라를 판다....... 우그가 라이에게 돈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주기 위해 해준 많은 동화와 설화가 머리 속을 스쳐갔다. ‘얌전히 날 따라와라. 사람 말도 할 줄 안다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품을 점검하는 장사꾼의 차가운 손길로 로브에 가린 라이의 날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흐음, 진짜네. 이거 정말 돈 되겠어.’ 돈. 배신. 우그. ......금방 올게, 여기에 꼭 붙어있어. 거짓말? 그게 거짓말? ......걱정 마, 레미. 난 너한테 절대 거짓말하지 않아. ‘자, 착하지? 이름이 레미라고 했던가?’ 배신! 거짓말! 라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남자가 억지로 누르려 했으나, 라이의 힘을 이길 수 는 없었다. ‘우그, 어디, 있나?’ ‘우그? 아, 그 녀석. 그야 내가 준 돈 받고 벌써 마을을 벗어나 있겠지. 덩치 좀 크다고 까불지 말고 앉아라. 사자도 조련하는 내가 너 따위 무서울까?’ 단장은 허리에 매고 있던 채찍을 들었다. ‘우그, 어디 있나!’ 라이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지!’ 단장은 채찍을 세게 휘둘렀다. 라이는 그 뒤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태어나 그렇게 화가 난 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레미프가 아닌 인간을 죽이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건 그 일이 끝난 후에도 멍청히 술집 한 쪽에 앉아있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괘, 괜찮으시오? 맙소사, 당신 진짜 하늘 산맥에서 온 엘프였군.’ 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저 우그가 마지막으로 시켜 놓은 맥주만 밤새 마시며 혹시나 하고 그를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너구나.”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 자는 라이의 등 뒤에서 유령처럼 나타나, 유령처럼 바람에 로브를 펄럭였다. 심상치 않은 존재였다. 라이는 하늘 산맥에서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캡틴 울프와 함께 하는 레미프지?” 그 자는 ‘엘프’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정확히 ‘레미프’라는 단어를 썼다. 경험상 그것은 보통 인간이 모르는 단어였다. 더구나 로브를 입고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카셀에게 들은 바가 있던 터라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 냐?” 그는 로브 안에 감추고 있던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카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롬노르 의원의 집은 비교적 검소했다. 경비라 봐야 무장도 허술한 병사 세 명이 고작이었다. 제이는 그 세 사람은 경계할 것도 못 된다고 언질 했다. 그래도 둘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서 오시오, 캡틴 울프.” 놀랍게도 그 자리에는 롬노르 의원만이 아니라, 다른 의원들 특히 논돌린 집정관이 참석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인물들이 모이는데 경비가 없다는 게 오히려 수상했다. 곧 카셀은 사태를 이해했다. 이 모임은 괜히 밖에 사람을 세어 눈길을 끌지 않으려는 비밀 모임이었던 것이다. “낮의 일에 대해서는 몹시 유감으로 여기고 있소.” 논돌린이 주도하여 얘기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카셀은 계속 롬노르에게 신경 썼다. 또한 롬노르 역시 카셀만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캡틴께서 퇴장하신 후 의회는 전쟁준비에 대한 논의를 마쳤소. 세부 사항은 앞으로 몇 가지 거쳐야 하지만, 군대는 이미 이쪽으로 이동 중이오. 당신을 인정하는 부류와 인정하지 않는 부류로 나눠져 있으나, 당신에 의해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거요.” 카셀은 말을 아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은 카셀이 가장 바라던 일이었다. 카셀은 사태를 주도하기 위해 의회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냥 이 경고를 사실로 받아들여 그들 스스로 전쟁을 준비하면 그걸로 카셀이 할 일은 끝이었다. “루에머스 의원이 당신의 출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이오. 그러나 그도 요즘 들어 일어나는 좋지 못한 징조에 대해 민감해 있던 차였소. 사람들의 실종 사건이나, 쥐가 갉아먹다 버려진 것 같은 시체가 하수도에서 발견되었다든가, 유령이 성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던가 하는.......” 그 말을 하는 논돌린은 혐오감에 몸서리를 쳤다. 다른 의원들도 그 일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논돌린은 모두의 의견을 정리해 다시 말을 이었다. “캡틴 울프. 루에머스는 기본적으로 가넬로크를 걱정하는 사람이오. 그런 일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 아란티아가 끼는 걸 두려워한다는 거요. 의회의 힘이 약해지는 걸....... 이 자리를 빌려 말하지만, 루에머스는 누구보다 당신이 캡틴 울프라는 걸 믿는 사람이었소. 나조차 미심쩍어 하던 차에도 루에머스는 당신이 퀘이언의 후계자임에 분명하다고 단언했소. 그래서 더욱 당신을 경계했던 거요.” “나를?” “루에머스는 인재를 등용하고 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에 타고난 사람이오. 첫날 당신이 하는 행동만 보고, 그가 나를 불러 뭐라고 한 줄 아시오? 지금 저 청년이 만약 사기꾼에 불과하다면 당장 감옥에 처넣어 1년을 썩힌 후, 내 후계자로 키우겠다! 그는 그런 사람이오.” 의외였다. 논돌린의 미소 뒤에 무언가 속임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카셀은 믿고 싶었다. “오늘 일에 너무 노여워 마시오. 우리는 아란티아를 적으로 삼고 싶지 않소.” “아란티아는 외부에 적을 두지 않습니다. 제 사적인 문제죠. 그 점은 염려 않으셔도 됩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한 의원은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었다. 논돌린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리다가, 시선을 롬노르에게 돌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태에 대해 롬노르 위원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이렇게 자리를 준비했소. 오늘 회의에서 많은 의원들을 설득하셨으며, 캡틴께서 퇴장한 후 흥분한 루에머스 대신 의회를 진정시키기도 하셨소. 모두 당신을 위해 한 일이니, 롬노르 의원에 대해 혹시라도 갖게 될 오해를 풀었으면 하오.” “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다면 롬노르 의원 한 분이시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할아버님?” 카셀은 눈꼬리를 가늘게 하고 롬노르를 바라보았다. 롬노르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부정할 수 없구나. 그래, 내가 루에머스에게 말했다. 얘야.” 롬노르는 애써 웃으려 했으나 노려보는 카셀의 눈빛에 도로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야. 나는 널 돕고 싶었다.” “의도된 바가 아니었다니 저도 거기에 대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카셀은 당장 아버지의 일을 묻고 싶었다. 대체 이 곳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사기 행각이 무엇이었는지, 왜 의회가 저토록 흥분하는지, 어머니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얘기는 무엇인지! ‘정말 당신이 어머니의 아버지라면 어째서 의회의 분노를 방치하신 겁니까?’ 카셀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일을 다그칠 수도 없었다. 이 곳에서 카셀은 에밀 노이의 아들이 아니라,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엇따. 카셀은 참았다. “두 분의 재회를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선 각 지방 전투 준비 상황과 함께 아으로 로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상의해야 하고, 하늘 산맥에서 오는 적들의 병력도....... 해주셔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논돌린은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카셀은 집사가 내 준 차를 마시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죽지 앟는 자들의 군주와 십 년 전 전쟁, 익셀런의 제 1 기사단, 드래곤, 레미프, 모즈들, 그들은 다른 비현실적인 이야기보다 오히려 익셀런 기사단에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론타몬이 또 전쟁을 시작하려 한다는 거요?” 한 명이 물었다. “아니, 이것은 론타몬과 별개로 일어나는 사건이오. 그들은 하늘 산맥에서 드래곤 사냥꾼이었고, 이번에 내려오는 군대를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고 있소. 실제로 루티아는 이들이 이끄는 모즈라는 괴물 군단에 무너졌소.” 카셀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들은 루티아의 마법사들이 원군으로 와줄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보였다. 카셀의 설명이 끝난 후 논돌린은 괜스레 주위를 경계하다가 말했다. “실은 캡틴을 이곳으로 부른 것에는 다른 이유가 또 하나 있어서 그렇소.” “말씀하시오.” “캡틴 데라둘을 조심하시오.” 카셀은 마시던 찻잔에서 입술을 뗐다. “얼마 전 우리에게 경고하는 쪽지를 주신 게 혹시?” “맞소. 나였소. 나는 당신이 드래곤 기사단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소. 차라리 우리 집정관들 중 한 명에게 몸을 의탁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소. 하지만 당신이 캡틴 데라둘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얘기를 걸어버리는 바람에 조금 늦었소. 그래서 쪽지라도 보낸 거요.” 여전히 데라둘이 수상하다는 그 말은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논돌린 쪽을 의심해 보았다. 그러나 그를 의심하면 그와 힘을 함께 하고 있는 롬노르까지 의심하는 게 된다. 카셀은 외할아버지를 의심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타국의 기사가 함부로 한 기사단의 캡틴을 평가하는 짓을 할 수는 없소. 하지만 듣기로 데라둘은 누구보다 가넬로크를 지키려 한 사람인데, 어째서 조심해야 한다는 거요?” 누구보다 루티아를 지키고자 했던 러스킨이 루티아를 배신했다. 데라둘도 과거의 명성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애국심을 누가 따를 수 있었겠소? 허나 지금은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오. 그는 최근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을 집 안에 들이고, 그 자와 함께 의회 의원들의 뒷조사를 하고 있소. 나 역시 나흘 쯤 전 로브를 입은 괴한이 저택 근처를 어슬렁대는 걸 발견하고 경비병을 시켜 쫓아가게 했으나, 그 자는 귀신처럼 사라졌다고 하더군. 하지만 드래곤 기사단 근처에서 그를 봤다는 소문은 무수히 많소.” 카셀은 아까 창문 너머로 봤던 그 자를 떠올렸다. “그 괴한이 캡틴 데라둘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소?” “있소.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기사들이 꽤 있소. 일부 사무관들의 증언도 확보해뒀소. 그 자는 얼굴을 보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는다고 하오. 수상하기 이를 데 없지 않소? 더구나 최근 로크뿐 아니라 근처 도시에까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출몰한다고 하오. 너무 앞서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만, 그 시가들이란 게 실은 드래곤 기사단의 누군가가 갑옷을 검게 칠해 입고 다니는 건지 누가 알겠소?” “그건 아니오.” 카셀이 말했다. 논돌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찌 그리 단언할 수 있소?” “갑옷 색깔만으로는 그 유령 같은 자들을 흉내 낼 수 없소. 그보다 누군가 그 자들을 조종하고 있을텐데, 혹시 사명을 여럿 거느린 의원이 있소?” 카셀은 붉은 장미 백작의 사례를 떠올리며 물었다. “거의 모든 의원들이 사병을 데리고 있소. 나 역시 서른 명 정도.......” 괜한 추궁을 받은 것에 불쾌해하는 얼굴로 논돌린이 말했다. “아니, 그런 병사들 말고, 정예라고 할 만한 기사들을 데리고 있는 의원말이오.” 롬노르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나르베니 집정관과 루에머스 집정관. 두 사람 보두 특별히 키운 열 명의 기사들이 있다. 실력은 드래곤 기사단에 들어가도 좋으나, 귀족이 아니라 사병으로 받아들인 케이스지.” 카셀은 머리 속에 그 둘도 의심해볼 만한 명단에 올렸다. 그리고 차츰 그 추리 망을 좁혀 내일 중으로 검은 기사들을 거느린 이가 누군지 알아내볼 작정이었다. 카셀은 누구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카모르트에서의 경허대로라면, 가넬로크의 배신자는 최근 갑자기 강한 권력을 얻은 사람 중에 있을 것이다. 적은 약한 권력자를 굳이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권력이 약한 이를 끌어들였다면 그 자를 강한 권력의 한 축으로 만들어 놓았을 게 분명했다. 그럼 결국 의심할 사람은 세 명의 집정관과 캡틴 데라둘이다. 카셀은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추측일뿐더러, 미리 말해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카셀은 현재 로크에 유행하는 사이비 종교가 있는지, 갑자기 힘이 강해진 귀족이나 의원, 또는 영주가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거론되는 이름 하나하나를 머리 속에 기억해 두고, 현재 로크에 오는 병력에 관한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뜨거운 차가 차게 식었따. 집사가 와서 새로 차를 따라 주었다. 롬노르는 회의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카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셀은 그 눈빛에 화가 울컥 솟았다. 그는 루에머스 집정관이 아버지의 헌담을 할 때도 저런 눈빛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카셀은 결국 숨겨둔 말을 토해냈다. “그렇게 바라만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십시오, 롬노르 의원. 그렇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불만스러운 겁니까? 그래서 제 존재 자체가 달갑지 않으신 겁니까? 제가 당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들추는 거울이 되는 겁니까? 말씀 하십시오. 아버지께 죄가 있다면 제가 책임져 드리겠습니다.” 대화의 말미에는 목소리 톤이 한껏 올라갔다. 다른 의원들도 갑작스러운 카셀의 분노에 당황했다. 그러나 의외로 롬노르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네 아버지와 같구나.” 그 말에 카셀은 일부러 건방지게 보이려고 까닥이던 손가락을 꾸욱 쥐었다.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라는 직책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 너는 무일푼에 직책 없는 이로 나타났어도 같은 말을 했을 게야. 집정관들도 두려워하는 나 롬노르에게 말이야. 그렇지 않니?” 롬노르는 겨우 편한 얼굴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그래, 수치스러웠지. 내 부덕함에, 집정관이라는 직책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는 아둔함이 수치스러웠다. 그래서 진실은 그냥 묻혀 두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하지만 이제 말을 해야 할 때가 온 듯 하구나. 카셀, 내 딸 달리아의 아들아. 내가 진실을 말하도록 잠시만 시간을 내다오.” 롬노르는 주름 진 손을 내밀어 카셀의 손을 잡았다. 카셀은 그 떨리는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알려진 얘기와 실제 이야기는 다르단다. 네 아버지 에밀이 갑자기 나타나 달리아를 반강제로 데려갔다고 사람들은 떠들고 있지만, 달리아는 스스로 에밀을 택했단다. 내가 반대하고, 주위의 모두가 반대했음에도 그리 했지. 가넬로크 최고 권력자의 딸이 출신도 알 수 없는 남자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말을 머리 굳은 사람들이 믿겠느냐? 바로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 믿지 못했는데 말이다. 에밀은 달리아의 청혼자 스무 명이 모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내게 요구했다. 아니 협박이었지.” 롬노르는 그 때 일을 상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귀족과 의원들의 자식들이, 가진 것도 없는 놈이 무슨 자격으로 나서느냐고 윽박지를 때,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 말고 너희들이 가진 게 뭐냐고 따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군. 그 자리에 데라둘이 없었고,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 목이 날아갈 판이었지. 그런데도 에밀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어머니를 만나신 거죠?”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카셀이었으니, 어머니와 관계된 이야기가 나오자 참지 못하고 뒤를 재촉했다. 이제 롬노르의 손을 잡고 있는 건 카셀 쪽이었다. “달리아는......, 불치의 병을 안고 있었단다.” “불치의 병이라니요? 허약하신 분이라는 말씀은 들었으나.......” “몸이 허약한 것도 사실이었단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급격히 악화되었지. 나는 집정관이라는 권한을 이용해 인간에 대한 지식에 통달한 당시의 드래곤 베하롤에게 딸아이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단다. 심각한 규칙 위반이었지. 드래곤은 나 같은 하찮은 인간의 부탁을 일일이 들어 주셔서는 안 되는 게야. 그랬다가는 난리가 나지 않겠느냐? 서로들 치료해달라고 난리겠지. 그러나 그 친절한 분께서는 그런 걸 알고도 친히 달리아를 진찰해 주셨단다. 하지만 그 분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달리아의 몸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어머니는 절 낳지 못할 정도로 허약했다고 했어요. 절 받아준 산파는 아이와 산모 둘 중 하나는 분명 죽을 거라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대요. 그 때 정신이 없던 아버지는 산파에게, 자기가 죽을 테니 둘 다 살려내라고 협박했다더군요.” 카셀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으나, 아무도 웃지 않앗다. 아니, 웃지 못했다. “네가 존재하는 자체가 내겐 기적이다. 드래곤은 달리아가 2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어. 드래곤의 입에서 나오는 진찰이다 보니 그건 차라리 저주나 예언같았지. 비밀로 했으나, 어떤 경로로 빠져나갔는지 그 사실은 로크의 어지간한 귀족들은 모두 알게 되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할 수 있겠니? 수많은 고위 관직자와 귀족들이 달리아에게 청혼을 해왔다.” 논돌린마저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잔인하군요.” “집정관의 외동딸. 그것도 얼마 후에 죽을 로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 2년 후에 죽을 달리아의 슬픔을 알아주지 않은 건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지. 나마저도 달리아가 어떤 남자의 품에서 죽어야 행복할까 하는 비겁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못된 아버지였어, 나는.” 롬노르는 카셀의 손등을 두들겼다. “그 때 나타난 게 에밀이었어. 나는 그 사형 선고를 받아들인 후 달리아가 처음으로 웃는 걸 보았지. 생을 포기한 아이가 웃는다는 게 어떤 기적인지 알겠느냐? 두 사람의 사랑을 나는 일찌감치 받아 들였지. 하지만 내 지위가 지위다 보니 그것은 내가 받아들인다고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랑이었단다. 에밀은 직접 의회에 참가해서 의원들을 설득하려 했고, 원로 의회에서는 아예 의원 한 명이 고혈압으로 실려 나갈 정도로 격렬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단다.” 논돌린과 다른 의원들은 그 말에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으쓱하거나 허허 웃고 말았따. 그러나 평소의 아버지라면 별로 놀랄 것도 없는 일이라, 카셀은 별 동요없이 뒷얘기를 기다렸다. “그 때 마지막 제안이 이랬었지. 사실상 강제로 포기시키려고 의회 의원들과 당시 달리아의 청혼자들이 생각해낸 억지였다. 집정관의 외동딸을 지키려면 그 정도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하고, 달리아처럼 특별히 드래곤께서 운명을 점지해준 여자라면 적어도 드래곤을 쓰러뜨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세상 어떤 기사가 드래곤을 이길 수 있겠는가? 에밀이 사기 친 게 아니라, 의회 쪽에서 사기 치려 했던 거야. 나는 그 일을 저지시키려 했지. 그런데 엉뚱하게도 에밀은 그 내기를 승낙했고......, 해버렸단다.” “자, 잠깐만요, 롬노르 의원. 그, 드래곤을 꺾었다는 게 정말이었습니까?” 논돌린이 소문으로만 들은 진상에 대해 놀라 물었다. “논돌린 의원은 그 자리에 없었으니 모르겠구려. 하지마 꽤 많은 이들이 그 광경을 보고 충격을 먹었을 거요. 그 작은 젊은이가 녹색의 드래곤 뷰하롤을 맨 주먹으로 후려쳐서 쓰러뜨린 건 그야말로 장관이었지.” “어떤 인간이 맨주먹으로 드래곤을 쓰러뜨린다는 게요? 그건 사기가 아니었소?” 드래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는 게 분명한 한 의원이 말했다. “사기가 아니든, 드래곤께서 정식으로 대결 신청을 받고 스스로의 입으로 패했다고 인정하셨는데 어떤 논란이 있을 수 있었겠소?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오. 기사단의 규정상 드래곤이 인정을 한 기사는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거였소.” “그런 규정이 있소?” 한 의원의 질문에 대해서는 논돌린이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대답하는 논돌린도 그 얘기에 놀라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일 년 가량 기사 수업을 받아 알고 있소. 그건 드래곤 기사단의 첫 번째 규정이기도 합니다. 가넬로크를 지키는 드래곤이 인정하는 자는 기사단의 캡틴이 된다....... 간단하지만, 매우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소. 또한 이는, ‘기사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3대째 핏줄부터 귀족이어야 한다.’는 규정까지 초월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거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들었소. 맞습니까, 롬노르 의원?” “맞소. 당시 캡틴이었던 엔손드는 드래곤의 말을 철저히 따르고 규정을 숭배하던 전형적인 드래곤의 기사였던 데다가, 마침 은퇴하려던 참이어서 ‘캡틴 에밀’이 탄생할 뻔 했던 거지.” “의회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군요.” 카셀이 말했다. “오늘 봤지 않은가? 발칵 뒤집혔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게다가 그런 일을 벌인 드래곤 뷰하롤이 갑자기 아란티아로 가야 한다며 떠나버려서 진상을 규명하지도 못하게 되었던 거지.” “아란티아에?” 카셀은 갑자기 떠오르는 이야기에 크게 놀라 말했다. “그 일에 대해 아는 바라도?” “아, 아닙니다. 그냥 좀....... 계속 얘기하십시오.” 롬노르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찬반양론이 벌어지고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어떤 비리가 개입되었는지, 의회는 어떻게 반응할 것이며, 한 명의 남자에게 난장판이 되어버린 원로원은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그런 문제들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던 어는 비 오늘 날 밤에 에밀과 달리아는 사라져 버렸다네. 둘이 동시에! 한참 그 청년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해뒀던 의회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지. 결국 당사자가 없는 와중에 별의별 추측이 나돌았단다. 당연히 에밀이란 남자에 대한 소문은 극을 달렸지.” “아버지가 지금 계신 곳이 카모르트의 루우룬이라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카셀이 물었다. 이미 롬노르에 대한 카셀의 분노는 증발하고 없었다. “에밀이 그곳 출신이라고 말한 적도 있고, 달리아가 내게 가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니까. 그 곳 생활이 편하다는 말이나, 시아버지, 그러니까 네 친할아버지가 죽었다는 편지, 가뭄이 들어 농사가 어렵다는 얘기도 있었고, 아이를 가졌으니 잘 낳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편지도 있었단다.” 롬노르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응접실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작은 보석함 같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안에서, 얼마나 자주 읽었는지 손때가 잔뜩 묻은 편지를 꺼냈다. “네 어머니의 편지다. 나보다 네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카셀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달리아의 유품이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만, 역시 이게 좋을 거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소용 없지. 이 편지를 보거라. 너를 낳은 기쁘이 넘치는 이 문장들을 보거라. 알 수 있겠니? 살아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아 생을 포기한 아이가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너까지 낳았을 때의 그 기쁨을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강제로 안겨주는 그 편지함을 받아 들고 카셀은 목이 메었다. “어머니는 제가 두 살 때 돌아가셨어요.” “너를 낳은 기쁨이, 달리아의 수명을 연장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구나.” 롬노르는 카셀을 만난 후 처음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 나를 이해해다오. 달리아의 아들인 너를 본 내 심정이 얼마나 기쁨으로 가득 찼는지 알아다오.” 롬노르는 흐르는 눈물을 굳이 닦지 않았다. 카셀은 그의 늙은 손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할어버지.......” 7. 데라둘을 돕는 자 마법사 회의인 그랜드 로크는 로크의 시내 가장 남쪽, 성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루티아의 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곳의 탑도 마법사들의 권위를 내세울만하나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천 년이 넘는 아로크의 역사를 고려하면, 루티아가 오히려 이 건물을 모방해 건축되었을지도 몰랐다. 백여 명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그 세 배가 넘는 숫자의 마법사 지망생들이 루티아에서 직접 찾아왔다는 마스터를 보고 싶어 줄 지어 서있었다. 타냐는 그들의 반응에 차갑게 대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그런 걸 좋아했다. “로크를 지킬 여러 가지 방안을 연구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드래곤의 힘을 막을 수 있는 힘에 대해서 나름대로 결론이 나왔지요.” 그랜드 로크의 의장 리펜다스는 열심히 흑판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회의장은 조금 큰 강의실을 연상케 하는 평범한 방이었다. 모인 마법사들은 강의 듣는 학생들처럼 얌전하게 앉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격렬하게 전투하듯 수업을 치르는 케인스윅에 익숙한 타냐에게는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다. “우리끼리의 힘으로 실험해보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으나,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적어도 로크 하나 정도는 완벽하게 보호하는 힘입니다.” 타냐는 그가 그리는 그림의 위치를 보고 흥미로워하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아까와 달리 의욕을 보이는 그녀의 반응에 신이 난 리펜다스는 더욱 설명에 열을 올렸다. “현재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이 탑의 이름이 ‘아로크의 탑’입니다. 아로크의 탑을 역삼각형의 아래 꼭지점에 해당하는 장소로 치면 여기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오른쪽 꼭지점에 해당하는 탑은 ‘분노의 탑’이고, 같은 거리의 왼쪽 꼭지점에 해당하는 탑은 ‘축복의 탑’입니다. 이 두 개의 탑은 아로크의 탑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아로크의 탑에서 모인 힘은 로크를 보호하는 성스러운 방어벽을 칠 수 있지요. 실제로 천 년 전 기록에는 드래곤 십여 마리르 이 마법으로 막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타냐는 그들이 제시한 이 이론이 꽤 쓸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각한 오류가 하나 있었다. 타냐는 백 명의 마법사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단데 올라가 리펜다스가 그린 탑의 위치를 짚으며 물었다. 케인스윅의 수업 중에 선생님의 분필을 빼앗아 질문하던 버릇 그대로였다. “아로크의 탑은 아까 보니 방어적인 구조로 설계된 듯 합니다. 살펴봐야 알겠으나, 북쪽 두 개의 탑에서 내는 마법을 정확히 받아 들일 수 있겠군요. 그런데 작동은 누가 시키죠?” 희망적으로 말했던 리펜다스는 순간 당황했다. “그거야 마스터 타냐께서.......” 타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탑의 가동원리를 설명한 책을 가져다주십시오. 천 년 전에 작동을 했다면 아직 쓸 수 있는지 여부도 확인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 이런 종류의 탑을 가동시키려면 꽤 커다란 힘이 필요합니다.” 라펜다스가 또 같은 대답을 하려 하자, 타냐는 손가락을 세 개 세웠다. “세 개의 탑을 작동시킬 세 명의 마법사 말입니다.” 타냐는 아로크이 탑을 짚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탑은 아무래도 중심이 될 테니 제가 맡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두 개의 탑은 누가 작동시키죠?” 백 명이나 모였음에도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타냐는 일단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리펜다스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실험을 해봐야겠습니다만, 글쎄요.......” 리펜다스는 수십 장이나 되는 양피지로 쓰인 고문서를 열심히 뒤적이다가 말했다. “아, 여기 기록이 있습니다. 천 년 전에도 탑을 가동할 인원이 없어 각각 백 명의 마법사가 서로 힘을 합쳤군요. 그런 식이라면 저희도 가능할 겁니다.” “실험해 보도록 하지요.” 타냐도 곧 수긍했다. 리펜다스는 겨우 안도하며 손수건을 집어 넣었다. “아,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의회에서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다른 의원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우리 의견에 호응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신 그 분을 모시고 좀 더 심도 깊은 작전 내용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가 소개하자, 문을 열고 여전히 요염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여성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목에는 디자인이 간단하면서도 큼직한 보석 목걸이가 빛을 발했다. 나르베니 집정관이었다. 그녀는 뒤에 세 명의 수하 기사를 데리고 느린 걸음걸이로 타냐의 옆으로 다가왔다. 본적도 없는 그 세 명 중 하나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그 남자도 싸늘한 미소로 타냐를 마주보고 있었다. ‘누구더라?’ 리펜다스가 웃으며 나르베니에게 말했다. “집정관께서 직접 마법사 회의에 참석해 주시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겁니다.” 나르베니도 빙그레 웃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이 나라를 지키는 데 저라는 작은 힘이 도움이 될 수 있길 빕니다.” 마법사들이 박수를 쳤다. 그 때 한 쪽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두지 않겠다, 나르베니!” 캡틴 데라둘이었다. 그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당장 칼부터 꺼냈다. 나르베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했다. “이런 곳에 당신이 어째서? 그보다 그건 무슨 무례죠, 캡틴 데라둘? 이곳은 마법사들의 신성한 의식의 공간인 아로크의 탑입니다. 그런 무장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무서워 너는 뒤에 그런 수호 기사를 데리고 왔나?” 나르베니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데라둘의 뒤로 조용히 따라 나선 갈색로브를 입은 남자를 가리켰다. 마법사들도 데라둘이 대동한 남자를 보고 놀라 웅성거렸다. “전부터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금했었지요. 기어이 오늘 나타나셨군요. 어디 그 가면 속의 얼굴을 드러내줘야겠네요.” 그 괴한은 순순히 얼굴을 보여주며 말했다. “얘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데라둘? 우선 저 여자를 죽이고 얘기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르베니는 그 남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예요, 당신?” 나르베니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타냐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데라둘 편에 서있었던 겁니까?” 오랜만에 만난 얼굴이었으나 그는 그다지 늙지도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드래곤 기사단을 숙소로 삼은 첫날 아침, 카셀은 로브를 입은 괴한을 보았다고 했다. 타냐는 그게 혹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이며 이미 드래곤 기사단을 자기 손 안에 둔 게 아닐까 불안해했었다. 그 추측은 다행히 틀렸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불안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카셀은 여신 사-나딜이 해준 경고를 타냐에게도 말해주었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인간의 두 가지 커다란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그 중 하나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였고, 다른 하나는 울프 기사단 중 하나라고 했다. 카셀은 여신이 틀렸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였었다. 타냐는 그 말이 생각나 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생명의 힘이 응축된 마법의 칼이 길게 자라났다. 드래곤을 죽일 정도의 힘이었으나, 지금 데라둘 뒤에 나타난 남자를 상대하자면 그 정도로도 충분할지 자신이 없었다. “오랜 만이다, 타냐. 하지만 얼굴이 달라졌군. 데라둘에게서 미리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못 알아볼 뻔 했어. 그는 항상 그렇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타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설명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메이루밀.” 시간이 늦어 우선 다른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카셀과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어지는 마지막까지 롬노르와 카셀은 서로 손을 놓기를 아쉬워했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듣고 싶은 이야기도 너무 많구나.” “예, 저도요. 아버지는 그런 얘기를 절대 해주지 않았지요.” “허허, 에밀에게 약점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는 게 할애비가 손자에게 주는 선물이 될 수 있으려나?” 카셀은 유쾌하게 웃었다. “꼭! 해주시죠.” 손을 흔들며 다시 마차에 오른 카셀은 몇 번이나 달리는 마차의 뒤를 돌아보았다. 제이는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좌석 중 카셀의 정면에 앉아 아쉬워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등 뒤에는 조용히 콧노랠르 부르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왜, 좀 더 얘기하지 않고?” 제이가 말했다. “아니야. 아쉽더라도 오늘은 여기에서 헤어져야지. 시간은 아직 많아 . 그리고 우리에게 당장 중요한 건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적이잖아. 아버지 얘기가 아니지.” “내가 보기에는 그리 미룰 일도 아닌 것 같더만.......” “그런가?” 카셀은 어머니의 편지가 든 보석함을 꼭 끌어안고 웃었다. 제이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말했다. “하지만 표정 좋아진 건 다행이다.” “그래 보여?” “어어. 아, 그리고 아까 그 드래곤 얘기 있잖냐. 네 아버지가 어떻게 드래곤을 이긴 거냐? 엄청난 장사냐?” “그럴 리가 있겠어?” “아버지의 무용담 같은 건 들었을 거 아니야?” “못 들었어. 아버지는 ‘여행 했다.’ 이상의 얘기는 하신 적 없어. 하지만 원로원이란 존재는 무지 싫어하셨는데, 그 이유는 대충 알겠군.” “되게 궁금하네. 힘도 없는 사람이 드래곤을 이기는 방법이라.......” 카셀은 턱에 손을 얹고, 마차 옆을 지나쳐가는 밤의 도시를 구경했다. “나라면.......” “너라면?” “나라면 아마 드래곤과 거래했을 거야.” “어떻게?” “내가 만나본 드래곤이라 봐야 날 죽이려 드는 구아닐과 마스터 크나딜, 여신 나디우렌 정도지만, 적어도 그들 모두 인간과 대화가 통하는 존재야. 신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란 거지. 그러니 나라면 뷰하롤에게 뭔가를 제시하고, 내 주먹 한 방에 쓰러져달라고 부탁하지 않을까 싶은걸.” “내가 드래곤이라면 그런 조건 제시하는 녀석은 발로 밟아버릴거다.”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어쩌겠어?” 카셀은 과장되게 눈웃음 지었다. “이를 테면 웬 거지가 너한테 다가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 대 칠 테니 맞고 깆거하는 척 해달라고 해도 들어줄 만한 부탁 말이야.” “그런 게 있을 리가 없.......”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제이의 머리 속에는 병석에 누워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죽기 전 흉하게 늙어버린 모습이든 젊은 시절 아름다운 모습이든, 단 몇 분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한 번이 아니라 서른 번도 맞아 줄 수 있었다. “있다.” 제이는 대답을 수정했다. “그렇지? 나라면 드래곤에게 그런 조건을 제시할 거야. 그리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뷰하롤의 얼굴을 때리는 거지. 그럼 드래곤은 그럴싸하게 넘어지고, 나는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이 되는 거야!” 카셀은 크게 웃었다.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사기잖아.” “너라면 못할 거 같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과 네기 진심으로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을 얻는 것.” “타냐 얘기냐? 아니, 아니. 그 여자라면 그런 절망에 빠질만한 상황에 빠질 리가 없지.” 제이는 한 손을 주머니에 빼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더니 도로 집어넣었다. 천천히 달리긴 했으나, 마차는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답게, 마차옆을 지나치는 건물들은 하나하나 고풍스럽고 멋졌다. 옛스러운 건물 하나하나가 멋졌다. 그러나 제이는 그런 것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제이에게는 나디움이 훨씬 멋진 도시였다. “그래서 드래곤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 뭐야? 넌 뭘 제안할거냐?” “얘기해 봐야지. 원하는 걸 묻고, 그걸 줄 테니 쓰러져달라고.” “드래곤 정도 되면 자기가 원하는 걸 모두 가질 텐데 뭐가 부족해서 인간에게 부탁해? 또 네 아버지 가난했다며?” “지금도 결코 부자는 못되시지. 그러니 대화해 본다는 거야. 아버지라면, 글쎄, 술을 한 통 짊어지고 가서 드래곤에게 권했을까? 감이 안 오긴 하네. 아, 하나 있다!” “뭔데?” “새나디엘 폐하!” “여왕이 왜? 조건 들어주면 여왕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네 아버지 권력이 엄청나냐?” 카셀은 깔깔대고 웃었다. “이런 못된 사람 같으니! 아버지, 정말 치사하세요.” 제이는 혼자서 웃는 카셀의 정강이를 툭 찼다. “혼자 웃지 말고 가르쳐 줘” “폐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 너 있는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날 닮은 여행자가 폐하를 한 번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 차라리 드래곤 타고 날아다니는 게 더 쉽다고 말했더니, 폐하께서 이제 날 만났으니 어디 한 번 드래곤 타고 날아보라고 했었다고. 그러니 그 여행자는 천생의 배필을 만나게 해달라고 조건을 달았고.......” “그래서?” “아직 모르겠어? 드래곤에게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한 번만 져 달라. 그러면 당신에게 새나디엘 여왕을 만나게 해주겠다!’ ” “그게 뭐? 드래곤 정도 되면 혼자 날아가서 한 번 만나면 되지.” “너는 아마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거야. 새나디엘 여왕 폐하는 드래곤들 세계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하이로드’셔. 반면 가넬로크에서는 위대한 드래곤이라 존경받는 뷰하롤도 드래곤들의 세계에서 고작 평민에 부과하지.” “평민에 불과하다는 건 어떻게 알아?” “사, 레, 카 중 어느 호칭도 달지 않았으니까.” “난 아직도 모르겠다.” “몰라도 돼. 그냥 이것만 이해해 봐. 뷰하롤은 꿈에 그리던, 천 년 전 인간의 영웅이자 여신 사-나딜에게 인정 받은 새나디엘이라는 분을 만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소개받은 거야. 뷰하롤은 다른 세 마리 드래곤이 잠을 잘 때도 인간들과 교류하고 집정관의 딸을 치료하고자 했을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과 정이 많은 드래곤이었어. 아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여하간 그래. 뷰하롤이 뛸 듯이, 아니 날 듯이 기뻐하고 있는 게 내 눈에는 보이는군.” “그런데 네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 여왕을 소개해주고 말고 하는 거야?” “약속했잖아. 드래곤을 데려오겠다고. 미리 언질을 줬으니 아란티아에서도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의 모습을 봐도 놀라는 게 덜하겠지. 아니, 오히려 놀라는 건 아버지에 대해서일 거야. 누구도 드래곤을 데려올 거라고 믿지 않았을 테니까.”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어쨌든 사기구나?” “그래, 그래. 사기야. 드래곤과 가넬로크 의회와 새나디엘 여왕 폐하를 상대로 한 사기였지. 그것도 단 한 여자를 얻기 위한 사기. 바로 내 어머니, 달리아.......” 카셀은 웃으면서도 눈자위에 눈물이 그득했다. 그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다시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어머니 보고 싶냐?” 제이가 물었다. “응, 항상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보고 싶은 건 처음이야. 어머니는 내 이름을 위대한 모험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대. 아버지가 그 모험가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서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니까 당연한 거라나? 권력 다 팽개치고 아버지를 택한 어머니나 그런 어머리를 기어이 납치해 달아나는 아버지나......, 정말 똑같은 분들끼리 만났어. 하하.......” “그렇구나.......” 카셀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제이도 어머니가 간절히 보고 싶었다. 처음 보는 거지에게 죽도록 얻어맞아도 좋을 정도로. “!” 제이는 사방에서 조여 드는 검의 간격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제이는 어디에서 칼이 날아오는 지, 그 방향과 속도까지 거의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바지춤에 찔러 넣고 있는 손을 빼낼 시간적 여유도 없이, 발을 힘껏 뻗어 카셀의 가슴을 걷어찼다. “윽!” 카셀이 뒤로 밀려나 마차 의자에 부딪히는 순간 천장에서 창 한 자루가 뚫고, 방금 카셀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지나갔다. 제이는 바지에서 손을 빼고 칼을 뽑았따. 뚫고 들어오 창은 도로 빨려 올라가더니 이번에는 제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이는 몸을 비틀어 피하고 창을 잡았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제이는 당황한 카셀에게 소리쳤다. “마차 문 열고 내려! 뛰어내릴 때 머리를 감싸고 무조건 굴러라. 구르는 것만 생각하고 속도를 멈출 생각은 하지 마.” 카셀은 무작정 시키는 대로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마차는 다행히 빠르지 않았다. 제이는 창을 놔주지 않고 칼을 머리 위로 휘둘렀다. 마차 천장이 깨져나갔다.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심하게 요동치는 마차 옆으로 마부의 머리가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제이는 창을 놓고, 카셀이 열어 놓은 문으로 뛰어내리려다 멈췄다. 카셀이 있떤 자리에 편지가 든 보석함이 놓여 있었다. ‘멍청이, 이 소중한 걸.......’ 제이는 몸을 돌려 그 보석함을 챙기고 나서야 문으로 뛰어내렸다. 바로 머리 위로 창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제이는 두 바퀴를 바닥에서 구른 후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 칼을 들었다. 검은 철갑옷을 입은 기사가 마차 위에서 뛰어내렸다. 돌 바닥에 금이 갈 정도로 묵직하게 떨어졌으나, 그는 휘정거리지도 않았다. 투구 안에서 하얀 입김이 화악 쏟아져 나왔다. 아무도 태우지 않은 마차는 겁먹은 말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기묘한 동물의 비명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제이는, 먼저 마차에서 굴러 떨어진 카셀을 돌아보았다. 오십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카셀이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제이는 보석함을 내려놓고, 접근하는 검은 기사에게 칼을 치켜들었다. “누가 보낸 거냐, 넌?” 뒤에서 카셀이 소리쳤다. “그 녀석, 말이 안 통한다. 죽지도 않아.” 제이의 눈썹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검은 기사는 머리 위로 치켜 올린 창을 묵직하게 휘둘렀다. 제이는 옆으로 한 번 피하고 뒤로 물러났다. 내리친 돌바닥이 깨졌다. 밤길을 지나가던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한 걸음. 간격을 재고, 제이는 주저 없이 상대의 빈틈을 파고 들어갔다. 옆구리로 정교하게 파고 들어오는 창을 흘려내고, 좌우로 균형을 흩트린 후 제이는 검은 기사의 투구에 칼을 내리쳤다. 르고의 검임에도 불구하고 투구를 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금이 간 투구에서 검은 연기가 피식피식 샜다. 제이는 뒤로 물러섰다. ‘좀 어렵겠군.’ 제이는 허리에 차고 있는 다른 한 자루의 검까지 빼 들었다. 자세를 낮춘 제이의 모습을 보고 검은 기사는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아니, 제이의 눈에는 그것은 기분 나쁜 탐색처럼 보였다. 그 수상한 투구 속의 보이지 않는 시선 덕에 제이도 접근하지 못했다. 검은 기사는 갑자기 깨진 투구를 벗기 시작했다. 제이는 그 느린 철갑 손가락의 움직임에 기겁했다. 벗은 투구 앞에 또 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그만 해둬, 이 망할 자식아!” 제이는 버럭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반응한 건 투구를 벗은 기사가 아니었다. 요란한 맹수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사라진 방향에서 검은 말을 탄 검은 기사 두 명이 제이 쪽으로 달려왔다. 마치 안개를 이끌고 온 것처럼 주위가 희뿌옇게 보였고, 두 기사의 도끼가 제이에게 동시에 날아왔다. 제이는 그 두 자루 도끼를 두 자루 칼로 막았다. 그러나 말을 타고 휘두르는 엄청난 힘에 제이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제이가 다시 일어나을 대 투구를 벗은 검은 기사는 그저 목이 없는 기사였다. 눈을 깜빡이며 다시 봐도 아버지의 얼굴은 없었다. 아니, 사실 그게 당연했으나, 그는 혼라스러웠다. “아!” 잠시 잊어버린 것에 놀라며 제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쳐간 검은 기사 둘은 멈추지 않고 카셀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피해라, 타셀.” 제이가 소리쳤다. 카셀은 벌써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빠르게 쫓아가는 말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그 때 건물 위에서 날아온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두 명의 검은 기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검은 기사들은 도끼로 내리칠 표적을 카셀에게서 그들로 바꿨다. 요란한 쇳소리가 카셀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두 손으로 가린 그의 머리 위로 깨진 금속 파편이 몇 개 떨어졌다. 위에서 떨어진 검은 복면을 쓴 두 사람이 바닥을 몇 바퀴 굴러 일어났다. 카셀은 지나친 검은 기사 둘도 멀찌감치 이동한 후 말머리를 돌렸다. 카셀은 움츠린 고개를 펴고 자신을 구해준 그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몸의 근육을 모두 드러내는 검은 옷을 입었는데, 겁으로 보이는 몸매로 미루어 한 명은 여자였고, 한 명은 남자였다. 둘은 쓰고 있는 복면을 벗어 카셀 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헤더와 발락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캡틴 울프?” 헤더는 이마를 가리는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말했다. 로크에 들어오기 전에 짧게나마 만났음에도 그 동안 일이 너무 많아 블랙풋을 아예 잊고 있었다. “......고맙소.” “저들을 해치운 후에 얘기를 계속 해야겠습니다.” 검은 기사 둘은 벌써 도기 끝을 발락과 헤더에게 향했다. 발락이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냈다. 순간 건물과 건물 사이, 또는 근처 집의 지붕 위에 있더 복면 쓴 블랙풋의 요원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 몇 명이 단숨에 쇠사슬을 던져 기사 둘을 잡아 묶었다. 카셀이 얼른 경고했다. “아, 저들은.......” “죽지 않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그러나 상대가 하얀 늑대들 둘이라 하더라도 당신 하나 피할 시간은 벌 수 있소. 저 녀석들이 그들보다 강하오?” 발락이 자신있게 손목에 낀 크로우를 치켜들었다. 헤더도 자세를 낮추고 적을 응시했다. 제이의 앞에서 스스로 투구를 벗은 기사도 도로 머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어째서인지 목 위에 투구를 올려놓은 모습은 인간의 목 잘린 시체를 보는 것보다 끔찍했다. 제이는 긴장된 손으로 칼을 다시 쥐었다. 사슬에 묶인 검은 기사 둘은 서로를 잠깐 바라보며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의사소통을 나누더니 동시에 도끼를 치켜세웠다. 사슬의 끝을 잡고 있던 이들이 끌려가거나 사슬을 놓쳐버렸다. 헤더는 지붕 위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궁수들에게 신호했다. 화살 몇 개가 검은 기사들과 검은 말을 맞췄다. 그러나 고통도 느끼지 않는지 그들은 화살을 맞아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도끼날의 방향을 카셀에게 맞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듣기 싫은 괴성이 길게 터져 나왔다. 카셀이나 일부 블랙풋 요원들이 깜짝 놀라 귀를 막을 정도의 끔찍한 소리였다. 검은 기사 셋은 갑자기 싸울 자세를 버리고 서로에게 그들만 통하는 의사소통을 나누었다. 제이의 앞에 있던 검은 기사가 나팔 같은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한 마리 말이 달려와 그 기사를 태우더니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두 명의 다른 기사들도 말머리를 돌려 그 뒤를 좇아 달려갔다. 제이는 귀신에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고객을 세게 저었다. 그는 다시 카셀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험악한 녀석들이 잔뜩 카셀의 옆을 에워싸고 있었다. 제이는 신경실적으로 그들을 밀치고 카셀의 옆에 섰다. “저 검은 가사들....... 어찌 된 일인지 조사는 끝났소?” 카셀이 물었다. “조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붉은 장미 백작과 검은 사자 백작의 사례를 생각하며 저희들은 신중하게 누가 캡틴께 암살자를 보냈으며, 누가 또 이런 힘을 얻어 검은 기사를 보내고 있는지 여러 가지 방향으로 접근해 보았지요. 한 시간에 후에 겨우 알았습니다. 헤더가 신중히 대꾸했다. “캡틴 데라둘?” 카셀은 급한 마음에 넘겨짚어 물었다. “저희들도 그를 제일 먼저 주시했습니다. 무엇보다 최근 그의 행동이 수상했습니다. 몰래 의원들을 조사하기도 하고, 기사단 사무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을 들이고 그와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처음에 저희들은 그 자가 마법사라고 생각했으나, 저희 쪽 마법사 메첼이 아니라고 했지요. 마법사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럼 집정관 중 한 사람?” “정확합니다. 저희들은 그 자가 바로 오늘밤 이 도시를 장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죄송스럽게도 명령을 받기 전에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저택은 비어있었고, 그 집정관의 지하에는 끔찍한 현장이 방치되어 있더군요. 거기에는 사람을 재물로 바친 흔적과 최근 로크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시체 수십 구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마법인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지하실을 조사한지 몇 분만에 집이 갑자기 불에 타며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일로 우리 쪽의 유능한 요원 몇 명이 희생당했지요.”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카셀은 이미 누군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혼자 답답해진 제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저 검은 기사들 부리는 놈과 카셀에게 암살자 보낸 놈, 가넬로크 배신자라는 게 다 일치한다는 거 아니야? 그게 누구라는 거냐?” “검은 기사를 보고 익셀런 갑옷을 입은 자라고 정확히 묘사한 사람.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게 익셀런의 갑옷으로 보이지 않아.” 카셀이 대답했다. “아!” 제이는 그제야 알았다. “뭘 그렇게 경계해, 타냐? 나다. 못 알아보겠나? 메이루밀이다.” 로브를 벗은 메이루밀의 웃는 모습을 보고도 타냐는 주위를 늦추지 않았다. 메이루밀, 그가 전 하얀 늑대들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런 거리 안에 두기 위험한 적이었다. “압니다. 그래서 더욱 경계를 풀 수 없습니다. 저는 가장 믿었던 두 사람이 벌써 적의 편에 붙은 걸 보았습니다. 당신이라고 예외로 둘 수는 없지요.” 메이루밀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테일드의 실종 사건을 얘기하던, 따뜻한 차가 놓인 탁자 앞이었다. 그 때의 조용한 분위기, 서글서글한 눈매와 사람 좋은 웃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그 때보다 묶은 머리가 더 길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타냐, 예뻐져서 기쁘지만 그렇게 칼날 세운 것 같은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루밀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하자, 타냐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제 마법이 당신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캡틴 데라둘, 당신도. 그리고 나르베니 집정관, 당신도! 지금 이 회장에 있는 누구든 움직이면 나는 제일 먼서 그 사람을 죽일 겁니다.”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리펜다스 의장이 제일 겁을 먹고 얼어붙었다. 나르베니는 한심스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마스터 타냐. 루티아의 마법사라면 그 정도 오만은 기본인가 보지요?” 데라둘은 꺼난 칼을 치우지는 않았으나, 타냐의 경고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저 칼을 가볍게 바닥에 늘어뜨리기만 하고 말했다. “마스터 타냐, 당신이라면 저 여자의 사악한 기운을 느낄 수 있지 않나? 어제도 저 여자는 카셀이 혼자 있을 때 죽이려고 접근했었다. 만약 제이메르라는 청년이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면 카셀은 죽었겠지.” “당신이 카셀을 친근하게 대한 건 루밀 때문인가 보군요.” 타냐가 말했다. “메이루밀이 해주는 카셀의 이야기는 아주 감명 깊게 들었다. 동시에 카모르트에서 일어난 그 믿지 못할 일이 여기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데라둘은 나르베니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메이루밀은 처음부터 로크 의회 의원들 중 배신자가 있을 거라 말했지. 난 믿고 싶지 않았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명을 조사했고 결국 루에머스가 로크의 배신자겠거니 심증을 굳혀갔지. 그가 여러 가지로 의심받을 만한 행동도 많이 했고......, 그 자가 역으로 나를 조사하는 일도 더러 있었거든. 하지만 그는 그저 전형적인 보소주의 의원에다 과격한 애국자에 불과했어. 저 여자의 정체를 꿰뚫어본 건 메이루밀이었지.” 나르베니의 유리 같이 매끄러운 피부에 신경질적인 주름이 잡혔다. “증거라도있나요?” “네 저택 지하에 있는 끔찍한 광경을 본 것으로 충분하다.. 그 때 화가 복받쳐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이 차라리 후회스럽구나, 나르메니.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르베니는 장난스럽게 머릴를 긁적였다. 타냐는 그녀늬 멋진 금발을 타고 뱀 같은 거이 꿈틀대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그 굵은 실오라기 같은 것은 형체를 가지 물체가 아니라, 젖은 나무를 때울 때나 날법할 검은 연기였다. “그냥 그 때 죽이러 나서시지 그랬어요, 데라둘? 그럼 귀찮게 여기에서 맞닥뜨리는 게 아닐, 실종자 처리로 끝낼 수 있었는데....... 다 늙어서 잘난 척하긴! 당신의 힘으로는 날 어쩌지 못해요. 또 한 번 침대에 쓰러 뜨려드릴까? 아니, 이제 나 정도 여자는 안지 못할 정도로 늙어버렸겠죠? 그럼 필요 없어요.” 그녀는 심히 아깝다는 듯 말했다. “네 힘의 근원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이 마녀. 어디 진짜로 칼을 맞고도 죽이 않나 보자.” 데라둘은 타냐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늘어뜨리고 있던 칼을 던졌다. 물론 타냐는 처음부터 좌우에 서 있는 세 명을 모두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데라둘의 그 칼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버려두었다. 칼은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르베니의 얼굴로 회전하며 날아갔다. 그러나 나르베니의 뒤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서 그 검을 가슴으로 받았다. 심장에 박힌 칼을 움켜쥐고 그 기사는 무릎을 꿇었다. 나르베니는 마차 바퀴에 깔려 죽은 생쥐를 발견한 어린 소녀처럼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가 이내 깔깔대고 웃었다. “어머나 이런, 내 수호 기사 한 명 죽어버렸네. 괜찮아요, 데라둘. 원래 죽어있던 애니까. 당신이 기사단에 받아주지 않아 타락하던 애를 데려다 재물로 바쳤더니 이렇게 멋지게 자라주었지요. 앤디, 일어나 널 쫓아낸 저 늙은이를 죽여 버리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 앤디는 가슴에 박힌 칼을 뽑아 옆으로 휙 던지더니 자기 칼을 뽑았다. 심장에 박혔음에도 생채기가 난 정도 밖에 피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피는 흐르지 않고 끊적했다. “데라둘.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나 죽일 날을 항상 꿈꾸고 있었지요.” 데라둘은 나직이 신음하며 말했다. “네가 나르베니의 밑으로 들어간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 ‘그런 쪽’이었나?” “예, 그런 쪽입니다. 이제 내가 당신보다 강하니, 지금이라도 드래곤 기사단으로 받아주시겠습니까?” 타냐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기사단 정원에서, 얼어붙어 박살이 나면서도 끝까지 달려들어 타냐를 찌르려 했던 그 자. 그가 후려쳤던 뺨이 도로 욱신거리는 듯 했다. “물론 이제 필요 없소, 데라둘.” 앤디라는 이 흐리멍덩한 눈을 가진 붉은 머리 청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 맨 십자가 비슷한 모양의 목걸이를 쥐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르베니의 뒤에 있는 다른 두 명의 기사도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나르베니는 황홀한 듯 자기 몸을 양팔로 감싸며 부들부들 떨었다. “자, 데라둘. 봐요. 항상 가넬로크에서 최고라고 떠벌리던 당신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기사를 제가 데리고 있어요. 제가 당신을 깔아뭉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당신을 두 조각내어 불 속에 집어넣고 타는 냄새를 즐길 겁니다. 이제 와서 내가 로크의 배신자라는 걸 알아서 뭘 하게요? 늦지 않아 다행이다? 늦었어요. 오늘 그랜드 로크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죽일 겁니다. 거기 있는 루티아의 마법사도.” 나르베니는 부드럽게 양팔을 펼쳤다. 그녀의 팔을 중심으로 검은 불길이 치솟아 올라갔다. 둥근 회의장을 크게 한 바퀴 휘감으며 불길은 단숨에 마법사들을 포위했다. 놀란 마법사들이 그 마법을 꺼보려고 아는 마법을 모두 시도했으나, 소용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는 종류의 마법이 아니었기에 끌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쓰는 마법을 흡수해 검은 불길이 더 크게 솟아오르니, 불타는 기름에 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의장 안은 이미 지옥의 도입부처럼 어둠이 내려앉고, 마법사들의 비명과 혼란이 가득 찼다. 검을 잃은 데라둘도, 아직 검을 들지 않은 메이루밀도 이 상황을 어찌 할 수가 없었는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오직 나르베니 만이 이 끔찍한 공간 안에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조절하고 있었다. “데라둘! 자, 어디 저항해 보세요. 무릎 꿇고 제 발등을 핥으면 당신 목숨 하나는 살려 드리죠. 당신이라면 저의 군주께 데려가도 받아줄 거예요. 당신에게 젊음을 안겨드리죠. 그리하면 우리는 ‘또 하나의 커다란 힘’을 얻게 되는 거겠죠.” 나르베니의 몸이 변하고 있었다 등에서 그림자처럼 뻗어 나온 검은 연기를 형체를 갖추어 나르베니를 감쌌다. 그것은 깃털 하나 하나가 살아서 흔들리는 검은 날개였다. 그녀의 손톱이 길게 늘어났고, 금발의 머리카락은 검게 변하여 뱀처럼 어깨 위로 꿈틀거렸고, 보랏빛으로 변한 얼굴에서는 광채가 흘렀다. 그녀의 피부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나체로 선 그녀의 몸을 옷처럼 감쌌다. “어쩌시겠어요? 제가 손가락만 까딱하면 이 곳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죄 없는 마법사 몇 명을 살려드리도록 하죠.” 나르베니의 옆에 선 수호 기사들은, 드래곤 기사단의 정원에서 타냐를 공격했던 그 검은 기사로 변해 있었다. 어느 새 갑옷으로 몸을 감싼 그들은 우뚝 서서 데라둘과 메이루밀, 타냐를 내려다보았다. 석상이나 다를 바 없이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명령 한 마디만 떨어지면 당장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 것임을 셋 다 알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나르베니는 대답을 강요했다. “드래곤의 기사가 군주로 모실 분은 오직 ‘가넬’께서 직접 내리신 드래곤 뿐이다.” “하지만 드래곤은 다 죽었잖아요.” “드래곤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내 뒤를 이를 캡틴을 지목하실 것이다.” “교섭 결렬! 재미없네요. 당신을 데리고 갔으면 정말 재미있었을텐데.” 나르베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아쉬워요.” 살아 꿈틀대는 검은 불길이 솟아올라 회장에 있는 마법사와 타냐와 메이루밀, 그리고 데라둘을 덮쳤다. 거의 동시에 타냐가 오른 발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걸음을 중심으로 하얀 냉기가,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주위로 뻗어나가더니 거짓말처럼 검은 불길이 사라져 버렸다. 나르베니와 검은 기사 셋은 움찔 하며 뒤로 물러났고, 수십 명의 마법사들도 화들짝 놀라 주저앉았다. 루밀은 어깨를 털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추워라.” 타냐는 루밀을 돌아보며 한 번 웃어주고, 나르베니에게 말했다. “평범한 인간이 사악한 주술로 마법을 얻었다고 루티아의 마스터를 꺾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당신 정도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마법사는 루티아에 서른 명도 넘게 있습니다. 밤의 여왕이나 된 듯이 잘난척할 정도는 아니니 좀 더 겸손해져야겠습니다, 나르베니.” 나르베니의 얼굴에 튀어나온 굵은 핏줄에 흐르는 피가 크게 박동했다. 어린아이처럼 탄력 있는 보라빛 뺨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화를 풀고 말했따. “확실히 루티아의 마스터를 너무 얕잡아보긴 했군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연인은 어디다 두고 오셨나요? 내 다른 부하들이 캡틴 울프가 있는 곳에 모였는데, 그건 어쩌려고?” 타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런 말을 해서 날 흔들리게 하려는 보니, 확실히 당신이 흔들리긴 하나 보군요.” “흐음....... 예상치 못한 전력을 상대로 싸우고 싶진 않군요. 오늘은 물러나도록 하죠. 어차피 로크의 주요 인사는 모조리 오늘 밤 안으로 죽을 테니, 당신들 세 사람쯤 살아남는 건 그 분이 용서해주시겠죠.” 나르베니는 그 말만 마치고 몸을 휙 돌려 문을 나갔다. 그 길목은 검은 기사로 변한 앤디가 막았다. “메이루밀, 저 세 명을 맡아주십시오.” 타냐는 검은 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검은 기사들은 지체 없이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타냐는 허공으로 뛰어올라 검은 기사 셋의 뒤에 착지했다. 그리고 나르베니를 쫓아갔다. 금방 뒤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났으나, 루밀이 맡아 주리라 믿었다. 나르베니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검은 불길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은 닿는 곳마다 생기를 빼앗아, 운 나쁘게 그 복도에 서 있던 죄 없는 마법사들 몇 명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타냐는 전력을 다해 달리며 양팔을 펼쳤다. 타오르는 불길은 갑자기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꺼졌다. 나르베니는 얼마 가지 않은 곳에서 날개를 접고 어둠 속에서 타냐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냐는 호흡을 정리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얌전히 탑 안에 있었으면 목숨은 건졌을 꺼야. 왜 따라왔지?” 나르베니가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너 하나 해치우는 일에 내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줄로 안다.” “하나?” 나르베니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심히 거슬렸다. “아까 말했잖니? 예상치 못한 전력을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다고. 내가 왜 깨끗이 너랑 싸우는 걸 포기한 줄 아니? 그런 너 정도 되는 마법사가 얼마나 막강한지 알기 때문이야. 그래, 너랑 같은 힘을 가진 마법사라면, 널 상대할 만 하지.” 나르베니는 긴 손톱 달린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발소리가 나기 전에 이미 타냐는 접근해오는 익숙한 마법의 기운을 느꼈다. 타냐는 나르베니가 아닌 그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하얗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멈추세요. 더 다가오면 공격하겠습니다.” 타냐는 그 이름을 다시 언급하는 것에 심한 수치심마저 느꼈다. “......마스터 리스킨.”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였던 리스킨이 지팡이를 한 손에 쥐고 그 자리에 멈췄다. 여전히 가슴 아래까지 기르고 있는 그 하얀 수염은 멋졌고, 그의 미소는 인자한 친할아버지 마냥 보기 좋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인적 없는 로크 외곽의 풀밭을 흔들었다. “타냐, 이제 본래의 힘을 찾았구나. 테일드가 농담처럼 이런 말을 했지. 타냐가 봉인을 푸는 날, 우리 두 사람은 그랜드 마스터라는 자격을 던져야 할거라고. 틀리지 않았어.” 러스킨이 말했다. “언제고 만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만나면 살려두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군요.” 타냐는 손에 마법을 끌어 모아 빛의 창을 만들었다. 그러나 러스킨은 고개를 저었다. “네 마법은 다시 샘솟지 않는 우물을 퍼다 쓰는 것과 같다....... 테일드가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 강력한 마법을 쓰게 되면, 혹 나를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도 죽게 된단다. 그걸 모르느냐?” “듣기 싫군요, 러스킨.” 타냐가 말했다. 나르베니의 손에도 천천히 검은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러스킨도 지팡이를 들었다. 타냐는 이 둘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러스킨 하나만으로 벅차다. 아니, 솔직히 러스키 한 명이 쓰는 마법을 막는 것에 전력을 다해도 오래 갈 수 없었다. 러스킨은 전쟁을 몇 번이나 치른 베테랑이며, 당연히 이른 국지전에 능했다. 그 때 하늘에서 깃발이 강한 바람에 펄럭이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얀 날개를 접으며 과격하게 바닥에 착지한 건 라이였다. 그는 어디에서 주워왔을지 모를 거대한 낫을 쥐고 있었다. 일반 농부라면 당연히 낫의 끝을 허리에 고정시켜야만 쓸 수 있는 그런 크기의 농기구였으나, 라이의 손에서는 그저 약간 큰 정도의 낫이었다. 어둠 속에서 날개를 펼친 그가 하필 그런 도구를 들고 있으니, 애들 겁주는 동화 속에서 나올 만한 죽음의 신 같은 꼴이엇다. “또 저 녀석인가?” 러스킨은 황당해하며 말했다. 타냐도 조금 당황했다. 드래곤 기사단 사무실에 있을, 또는 카셀의 옆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어떻게 여길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루밀......이라는 사람, 부탁했다.” 라이가 말했다. “메이루밀?” 러스킨이 어이없어 말하자, 나르베니가 대꾸했다. “아로크의 탑에서 절 방해했지요. 데라둘과 함께.” “로핀에 이어 또 성가신 자가 나타났군.” 러스킨은 혀를 찼다 그 사이 라이는 타냐를 돌아보며 레미프의 언어로 물었다. [타냐, 죽여도 되는가, 이 남자?] 타냐는 망설였다. 여기에서 라이와 힘을 합쳐 러스킨과 싸울 수 있을까? 그러나 타냐보다 나르베니가 먼저 반응했다. “하늘 산맥에서 날아온 엘프라면 거기 처박혀 있지왜 나타났나?” 나르베니는 손에 모은 검은 기운을 라이에게 쏟아 부었다. 타냐도, 러스킨도 반응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이는 순간 손에 쥔 낫을 나르베니에게 내던졌다. 검은 기운을 두 조각 내며 낫은 크게 회전하며 나르베니의 허리를 치고 지나갔다. 비록 낫이 뚫고 지나갔다고 하나 무형의 기운을 아무 마법적 힘도 없는 철제 농기구로 막을 수는 없었다. 라이는 검은 기운에 휘말려 수십 걸음 떨어진 풀숲까지 나가떨어졌다. 그 운동 신경 좋은 라이가 날개 한 번 퍼덕이지 않고 둔탁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나르베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어둠 속에서 검게 보이는 피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 쥐려 했으나, 허리를 기준으로 상반신이 천천히 위에서 미끄러져 밑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러스킨과 타냐는 서로를 겨냥했다. 그러나 둘 다 공격하지는 않았다. “자, 타야.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우리 두 사람도 방금 저 둘처럼 서로를 죽이며 끝낼 수 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네가 그리 한다면 나도 피하지 않겠다. 어차피 앞으로 벌어질 전투는 결국 널 죽이느냐, 죽이지 못하느냐의 싸움이니 나야 손해 볼 것은 없지.” 타냐는 혼란스러웠다. 뭐가 옳은 선택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러스킨이 싸움을 피해준다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는 게 타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타냐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고, 러스킨도 타냐를 향한 지팡이를 그 손에 맞춰 천천히 내렸다. 타냐는 라이에게, 러스킨은 나르베니에게 갔다. 라이는 기절한 게 아니었다.그는 거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며 보십시오.” 타냐는 조금 과격하게 라이의 등을 잡고 허리를 세웠다. 라이는 타냐에게 기대러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수, 숨을 쉬기가 힘들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타냐는 라이의 가슴에 손을 대고 회복의 마법을 부여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음에 이를 마법을 정면으로 맞고도 쉽게 회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호흡을 돕는 것만으로도 라이는 신음을 멈추었다. [떨어지면서 어깨가 빠졌나 보군요. 잠깐 이 쪽으로 몸을 돌려보십시오.] 타냐는 라이의 팔을 잡고 살짝 어깨를 틀었다. 꽤 아팠을 테니만, 라이는 비명 한 마디 내지 않고 물었다. [적은?] 타냐는 뒤를 돌아보았다. 러스킨은 물론이고 나르베니도 보이지 않았다.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아마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위험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겠죠. 고맙습니다. 라이. 당신 덕에 두 번이나 목숨을 건졌어요.” 라이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둘은 다시 아로크의 탑으로 돌아갔다. 앤디를 비롯한 검은 기사들도 달아나고 없었다. 데라둘도 없었고, 메이루밀만 남아 다른 마법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캡틴 데라둘은 어디 가셨습니까?” 타냐가 물었다. “그 마녀의 말 대로라면 이미 많은 의회 의원들이 공격당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기사단을 출동시키려고 갔다. 하지만 틀림 없이 늦었겠지.” “정말 놀랐습니다. 루밀.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에.......” “카셀이 말해주지 않던가? 나는 검은 기사들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모르트 다음에 갈 곳은 당연히 가넬로크였어. 뭐, 비밀리에 움직이느라 내가 정체를 드러낼 수 없어서 오래를 부른 건 미안하게 됐다. 카셀은? 기사단에?” “글쎄요. 걱정되는군요.” 카셀은 다시 롬노르의 저택에 있었다. 검은 기사에게 공격당하고 나니, 갑자기 할아버지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어 돌아온 것이었다. 그 걱정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저택의 정문은 부서졌고, 집은 불타고 있었다. 카셀은 불타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아버지!” 카셀은 크게 외치며 돌아다녔다. 제이도 카셀의 뒤를 따라왔고, 다른 블랙풋의 요원들도 흩어져서 생존자를 찾았다. 카셀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복도를 달려 아까 얘기를 나눴던 응접실에 도착했다. 롬노르는 카셀과 얘기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이 뚫고 지나간 흉한 상처가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마치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머한 시건을 앞에 두고. “할어버지.” 카셀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잡았다. “오오, 카셀이 왔구나.” “저, 절 잡읏요. 제가.......” “아니, 됐다, 얘야. 내 상태는 내가 잘 알아.” 롬노르는 천천히 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상처를 입고도 살아남아 너를 볼 수 있는 건 아마도 드래곤의 축복이겠지. 카셀....... 이건 내 죄의 대가란다. 달리아와 에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한 죄. 그러니 괜찮다. 나는 살만큼 살았고, 너도 봤으니 만족한다. 그저.......” 롬노르는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카셀, 에밀을 다시 만나거든 미안하다고 전해다오.” “예, 할아버지.” 카셀은 울음을 꾹 참고 그의 손을 쥐었다. 이미 제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는지 그는, 카셀이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부탁까지 남겼다. “그리고...... 달리아에게도...... 미안하다고......, 저, 전해다오. 이 애비가....... 잘못했다고. 사랑한다고.......” 롬노르는 더 이상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렸다. 카셀은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불길은 응접실까지 침범해 순식간에 커튼과 바닥의 양탄자를 잡아먹었다. 제이가 카셀을 끌었다. “카셀, 여기서 어서 나가야 해.” 카셀은 약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제이의 손길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근처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놀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소란스러운 통에 불을 끄려고 물통을 나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카셀은 불타 무너지는 저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이는 카셀을 위로하지 못하고 그저 어깨만 살짝 잡아주었다. 카셀은 눈물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이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사람들이 많아져 다른 요원들은 해산시키고 혼자 남아있는 헤더가 카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어머니의 편지가 들어있는 바로 그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아, 잊고 있었네.” 제이가 그걸 보고 말했다. “아까 그 검은 기사들과 싸웠던 그 자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 같아 보여서.......” “고맙소, 헤더.”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캡틴 카셀.” “집정관 루에머스가 안전한 지 확인해 주시오. 그리고 아직 살아있다면 내일 즉시 의회를 개최하라고 전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헤더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났다. 카셀도 불구경하는 인파를 해치고 어둠 속을 걸었다. 8. 아로크의 탑 루에머스가 살아남은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전날 밤 그의 집에도 검은 기사들이 둘이나 들이닥쳤다. 그들을 막기 위해 저택의 사병들이 총동원되었고, 그 과정에서 루에버스가 대단히 아끼는 기사가 여섯이나 죽었다. 그 후 검은 기사들은 뭔가에 불려간 듯 스스로 돌아간 것뿐, 그나마 그들의 희생으로 물리친 것도 아니었다. 루에머스의 얼굴에는 깊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집정관 중 한 명은 롬노르의 저택에서 죽었고, 한 명은 배신자로 사라졌다. 또 의원들의 절반 정도가 어제 벌어진 무차별적인 테러로 죽어, 의회에 빈 자리가 많았다. 화재가 번지거나 괜히 휘말려든 시민들의 피해도 극심했다. 공포가 순식간에 로크에 퍼졌다. 메이루밀은 의회 앞으로 나와 그 동안 있었던 일, 즉 가넬로크를 무너뜨리려는 내부의 적을 조사했던 과정, 이로피스에서 일어난 비슷한 일과 카모르트의 붉은 장미 백작의 일들을 설명했다. 가넬로크의 의회처럼 정보 수집에 빠른 이들이 그런 일을 모를 리는 없었으나, 그런 황당한 일이 진짜로 일어났을 거라고 믿은 의원은 드물었다. 이제야 그게 사실이었고, 어제 그런 일이 자기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에 의원들의 충격은 컸다. 의원들은 심각히 루밀의 말을 새겨들었고, 어제 늦게나마 전쟁 준비에 대한 회의를 일단락 지은 것에 안도했다. 카셀은 자기가 말하는 것보다 설득력이 있을 거라며, 그 일을 루밀에게 맡겼다. 카셀은 방관자로 타냐오 함께 의석 한쪽에 앉아 회의를 지켜보기만 했다. 가넬로크의 침략이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으며, 그 침략의 주체가 10년 전 론타몬을 뒤에서 조종한 존재인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는 사실은, 의원들에게 있어 나르베니가 악마의 힘을 빌려 배신을 했다는 것보다 더 충격이었다. 루밀은 그렇게 자신이 했던 조사 내용을 간략히 사무적으로 전달했다. 루밀은 발표 중간에 루에머스를 여러 차례 돌아보았다. 과거 울프 기사단 소속이기도 하고 데라둘과 친분이 있긴 하나, 엄밀히 말해 메이루밀은 의회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집정관이 언제 개입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루에머스는 루밀이 아닌 카셀만 노려보고 있었다. 카셀도 피하지 않는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눈빛이 전투 준비를 마친 기사들 같군.’ 현역이었을 시절 루밀도 나서기 싫어하는 다른 울프들을 대신해서 자주 이런 자리에 서봐서 저런 눈빛을 잘 알았다. 루밀은 로핀이 아직 양팔을 모두 가지고 있을 당시부터 자주 울프 기사단에 대변인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었다. ‘그게 왜 필요해?’ 아이린은 항상 말 많은 남자는 딱 질색이니 그런 놈 울프 기사단에 껴 놓을 생각 말라고 핀잔이었고, ‘너 있잖아.’ 로핀은 그런 일에 관심 없었고, ‘난 불편한 거 잘 모르겠는데?’ 퀘이언은 대변인으로 루밀 이상이 있을 리 없다고 못 박았고, ‘알아서 하렴.’ 마스터 그란돌은 언제나처럼 방관했고, ‘필요하다면 어디선가 굴러 들어오겠지’ 여왕은 더 심각하게 방관했다. 울프 기사단은 어느 곳에서나 전설처럼 여겨지지만, 어느 곳에서도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조용한 파티장에서 칼을 꺼내 실력을 보일 수도 없으니, 아란티아 안에서도 울프 기사단이 얕잡아 보이는 경우는 허다했다. ‘역시 필요해.’ 루밀은 자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은퇴한 후에, 그것도 아란티아가 아닌 카모르트에서 루밀은 그런 녀석을 발견했다. 루밀은 속으로 후배들에게 ‘니들은 축복 받은 게야.’ 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녀석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루밀이 로크에서 데라둘과 조사하는 동안, 뜻밖에도 카셀이 하늘 산맥에서 나타났다. 누군가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이제 롴의 의회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감정 대립으로 이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루밀은 걱정이었으나, 내버려두기로 했다. ‘알아서 될 일은 알아서 되게 내버려둬라.’ 마스터 그란돌은 언제나 네 명의 하얀 늑대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내렸었다. 루밀은 이제 아예 머리 속에 그런 걸 담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의 묘한 시선 교환을 발견했으면서도 자기 할 이야기만 하고 얘기를 끝냈다. 점심도 가질 겸 휴회에 들어갔다. 모두 빠져나간 와중에 루에머스 집정관만 자리를 지켰다. 그는 깊은 상념에 젖어 턱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떠보니 앞에 카셀이 있었다. 카셀은 조용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졌다고 말하라는 건가, 캡틴 울프?” 그의 눈동자는 불타올랐다. 마치 어제 자신의 동료들을 죽이고, 소중한 기사들을 죽인 사람이 카셀이기라도 한 듯. “봐라, 내 말을 안 들어서 동료 집정관이 하나 죽었고, 다른 하나는 의회를 배신했다, 내가 이겼다....... 그런 말을 하고 싶어서 왔나?” 아무도 없는 회장에 으르렁거리는 루에머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셀은 고개를 저으며 의자를 끌어다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서너걸을 앞에 두고 두 남자는 동시에 팔짱을 꼈다. “우리 둘 다 졌소.” 카셀이 말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건가?” “내가 늦었고, 당신은 대처하지 못했소. 나는 당신이 배신자일지도 모른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캡틴 데라둘도 그런 의심 때문에 대응이 늦었소. 모두가 졌소.” “아주 잘나셨군, 그래. 그래서 내가 그 말에 동의하길 원하나? 가넬로크는 곧 무너질 거라고? 솔직히 말해보시게, 캡틴. 가넬로크가 이후 벌어질 전투로 살아남을 것 같은가?”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의중을 반쯤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사소한 분위기 싸움이나 속마음을 떠보려는 설전도 건너뛰고 서로를 직접 공격하고 있었다. 이건 마치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기세 싸움을 벌이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둘 다 상대가 먼저 베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하늘 산맥에서 적이 온다는 말을 믿었었소?” 카셀이 물었다. “믿으나 안 믿으나 결과는 같지.” “그럼 가넬로크으 패배를 인정한 건 당신이군.” “천 년 전 아로크가 가넬로크로 바뀔 때 가넬로크는 드래곤의 힘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드래곤을 잃어버린 우리가 다시 그런 거대한 적을 맞아 싸워, 이긴다는 희망을 가지라고? 멍청한 소리. 차라리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믿는 편이 훨씬 편하지.” “아직 적의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시오? 가넬로크는 십 년 전 전쟁에서도 대처만 빨랐다면, 론타몬을 막을 수 있었소.” “울프 기사단이 그런 론타몬을 막았다는 걸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싶은 건가? 그 때 너는 몇 살이었나? 열 살? 열다섯? 그 때 나는 그 전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캡틴 웰치의 힘을 눈앞에서 보았고, 그가 이끄는 익셀런의 군대가 드래곤을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뷰하롤, 셀팬텀, 데널 마이오니, 아샤크....... 우린 그 드래곤 네 마리를 잃고, 드래곤 기사단의 절반 이상을 잃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희생을 바탕으로 결국 론타몬 병력의 절반을 꺽어버렸다. 그 절반 남은 군대의 절반만 아란티아로 간 거다. 아란티아는 전설의 기사단처럼 일어나 그 사소한 군대를 무너뜨린 것뿐이지. 틀렸나?” 루에머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적에게 겂을 주어 쫓아내려는 맹수의 포효도 없었고, 사냥감을 노리는 굶주림이나 잔인함도 없었다. 그의 눈빛과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주인의 의지가 있었다. “자, 십 년 전에는 몇 번의 칼질만으로 가넬로크가 가져야 할 명예를 약탈하더니,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캡틴 한 명 보내어 의회를 조종하려 하는가?” ‘이 사람을 이겨선 안 된다.......’ 카셀은 처음부터 그런 가정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이 남자는 이제 마지막 남은 가넬로크 의회의 힘이었다. 자존심이었다. 그를 꺾으면 의회도 꺾인다. 또 카셀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는 이 강인한 의회의 전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카셀은 누군가를 짓누르는 거짓말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배운 바 있었다. 카모르트에서 도적이나 강도들을 상대할 때 했던 거짓말이나, 로즈 기사단을 상대로 했던 거짓말들은 단 몇 시간을 가지 못했다. 의적 팔콘은 카셀의 거짓말을 짐작하면서도 속았다. 그는 어쩌면 카셀의 거짓말을 본 게 아니라, 카셀 자체를 본 것일지도 몰랐다. 검은 사자 백작은 하얀 늑대들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카셀의 말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영악했다. 결국 카셀은 그 거짓말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겉만 번지르르한 거짓말로는 검은 사자 백작을 이길 수 없었다. 마지막에 그를 꺾은 건 캡틴 울프라는 직책이 아니었다. 루에머스. 의회 정치에서 수많은 경쟁자들 앞에서 당당히 집정관의 자리에 올라 다른 두 집정관마저 밑에 두고 있는 정치의 가장 상단에 있는 남자. 카셀이 로크에 들어와 몇 가지 정보를 수집하면서 제일 걱정하면서도 가장 대비하지 않은 인물이 루에머스였다. 그는 아란티아의 여왕 새나디엘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넬로크의 최고 권력자였다. ‘누구도 아란티아 땅에서 새나디엘 폐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니 누구도 카셀로크 땅에서 루에버스를 이길 수는 없다.’ 카셀은 위축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늘 산맥의 여신까지 만난 자신이 인간을 상대로 아직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카셀은 입을 열었다. “캡틴 웰치라면 나도 만났었소.” “루우룬이라는 시골 마을에 잠시 들르기라도 했던가?” “한 달 전에, 아란티아 땅에서.” “말도 안되는 소리!” “그는 죽음에서 부활했고, 다시 골드 게이트를 뚫고 화이트 게이트로 진격했소. 그리고 마지막까지 기사도를 지키며 이제야 겨우 편안한 죽음의 길도 들어섰소. 십 년 전 전투에는 없었소. 대신 나는 그 자리에 있었소.” 나르베니가 이끄는 검은 기사를 직접 본 후가 믿지 못할 말도 아니었다. 루에머스는 잠자코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새나디엘 여왕 폐하 앞에 선 것도 보았소. 그 엄청난 힘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를 공포에 질리게 할 만했었소. 나는 하늘 산맥에서 그 힘의 일부가 루티아를 무너뜨리고, 레미프들을 죽이고, 드래곤들을 죽이는 걸 보았소. 그러나 그들은 아란티아를 공격할 수 없소. 왠지 아시오? 가넬로크가 있기 때문이오.” “가넬로크를 언급해서 분위기라도 부드럽게 만들어 볼 생각인가? 유치하군.” “유치하다면 적에게 유치하다고 말하시오. 죽지 않는 잘들의 군주는 론타몬을 이용하여 이미 실험을 마친 바 있소. 아란티아를 공격하던 그 막강한 군대는 오히려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던 가넬로크에게 역습을 당해 패했지. 당신이 옳소. 네나드로스 평원 전투를 기억하시오? 천년 전 옐로우 게이트 전투에서도 적은 진즉에 끝장냈다고 생각했던 아로크의 기사단에게 뒤통수를 맞은 바 있소.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분명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소.” 천년 전 전쟁에 대해 루애머스가 정확한 정황을 알 리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아로크라는 국명이 왜 가넬로크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었다. “이제 그 자는 실수하지 않을 거요. 확실하게 가넬로크를 무너뜨리고, 이 땅을 완전히 죽음의 땅으로 만든 후에야 군대를 아란티아로 돌릴 것이오. 루티아라는 동맹마저 흔들리게 된 아란티아는 가넬로크 없이 결코 혼자 힘으로 그 대군을 막지 못할 거요. 아란티아가 뚫리면 한ㄹ 산맥이 무너지고, 하늘 산맥에서 고대에 잃어버린 힘을 회복하면 죽지 않는 잘들의 군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소. 루에머스 집정관, 가넬로크가 무너지면 대륙 전체가 무너집니다.” 루에머스는 작은 신음 하나 없이 카셀은 노려보았다. 그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카셀의 말을 일축할 정도로 그릇이 작은 남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쉽게 넘어가 주지도 않았다. “왜, 그런 식으로 설득하여, 전직 울프 기사단인 메이루밀의 말에 겁먹은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의원들처럼 날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 “당신이 내 편일 필요가 있소?” 카셀은 피식 웃었다. 카셀의 어떤 웅변에도 흔들리지 않던 루에머스의 얼굴 표정이 그 작은 웃음에 흔들렸다. 카셀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카모르트에서도, 아란티아에서도 내 편이 된 사람은 내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나의 편이 된 거요. 나는 나를 적대하는 사람까지 내 편으로 만드는 능력은 없소.” “카모르트에서 캡틴이 된 활약상을 이 자리에서 떠벌리고 싶은건가?” 뒤에 이을 말을 모조리 토해낼 준비를 하고 있던 카셀은 순간 당황했다. “내가 카모르트에서 캡틴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소?” 루에머스는 여전히 냉정했다. 흔들렸다고 생각한 건 실수였다. “추리하기 어려울 것도 없이. 아까 회의 시작 전에 메이루밀이 한 달 전 카모르트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라며 인사하는 것도 봤고, 얼마 전까지 루우룬 마을의 농부 출신이던 자가 갑자기 한 달 전 아란티아에서 죽은 캡틴 웰치가 부활했다는 말을 했다면 캡틴으로 임명받은 건 근 한 달사이라는 거겠지. 우리 의회 정보에서도 아란티아에 캡틴 울프가 있다는 말은 최근 없었고! 결국 당신은 카모르트에서 ‘우연히’ 캡틴이 되었다는 소리겠지. 여왕께서 아란티아의 인사 정치가 가넬로크에 비하면 상당히 파격적이라고 농담 하시더니, 농담은 아니었군.” 카셀은 오랜만에 맛보는 긴장감에 입 안이 바싹 타 들어갔다. 심장은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으나, 한동안 잃어버린 감각 중 하나가 되돌아왔다는 신선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새나디엘 폐하와 여신 나디우렌 앞에서도 이러지는 않았구나.’ 카셀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실제로 검을 들고 전투를 치른 적도 없지만, 손바닥은 자잘한 상처로 엉망이었다. 그 상처들 틈으로 캡틴을 맹세하며 보검으로 낸 긴 자상이 의미하게 보였다. ‘패잔병들의 마을에서 시작해, 카모르트, 아란티아, 라든, 타치셀, 그리고 가넬로크....... 난 성장한 걸까, 머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퇴보한 걸까?’ 카셀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을 기다리는 루에머스를 다시 바라 모았다. 이미 그의 눈빛은 ‘한 달 만에 캡틴이 된 자가 어디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여느냐’ 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셀은 그만 웃어버렸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었다. “그런 것까지 예측하실 정도라면 말하기 쉽겠소, 루에머스 집정관. 내가 하고자 하는 말도 변하지 않소. 나는 당신을 내 편으로 만들 수도 없고, 만들 생각도 없소. 실제로 내가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이가 정말 나의 편이 된 적은 없었던 것 같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전심전력으로 다 헤나갈 때 나의 편이 생겼었소.” 쉐이든, 던멜, 아즈윈, 게랄드, 로일, 제이메르, 타냐, 라이.......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반대급부로 나의 적이 생겼소.” 붉은 장미의 쟌스테인 백작, 검은 사자의 뤼미에르 백작, 캡틴 웰치, 카-구아닐, 그리고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편에 선 자와 함께 나의 적에 선 자와 싸우는 것 뿐이었소.” 루에머스는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 카셀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옷이 창문에 비쳐 반사되면서, 라이의 하얀 날개처럼 그를 더욱 강하고 커 보이게 했다. “끈질기게 날 설득하려 드는군. 그만 두어라. 가넬로크의 의회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하지 않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은 없소.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시오. 나는 나의 일을 하겠소.” “너의 일? 너의 일이 가넬로크에 해를 끼칠 거라고는 생각 못하나? 아란티아의 캡틴이 의회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순간 무너지게 될 의회의 권위는 어찌 되는가? 네 아비 되는 자가 원로원을 무너뜨렸던 그 때처럼 되는 거겠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일을 하라고 했지, 협조해 달라 하지 않았소. 가넬로크의 집정관을 믿소. 가넬로크를 지키시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서기관이 황급히 집정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루에머스는 목소리를 낮춰 카셀에게 얼굴을 앞당겨 말했다. “그럼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아란티아의 캡틴 울프를 의회에서 끌어내는 거다.” 카셀 역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공식적으로 나의 출입을 막으시오. 그리하면 나는 따르겠소. 그게 가넬로크와 로크의 의회를 지키기 위한 당신의 판단이라면! 그럼 내가 할 일은 여기에서 끝이오.” 둘은 마지막까지 서로를 노려보다가 서기관이 다가오자, 물러서따. “무슨 일인가?” 루에머스가 물었다. “큰일났습니다, 집정관. 레오피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흔들리는 서기관의 말에도 루에머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나’ 때문에 조금 늦어버렸군. 또 할 말 있는가?” 카셀은 가볍게 대꾸했다. “아니, 이미 집정관 당신 머리에 전투를 치러야 할 마음가짐이 완성되어 있지 않소? 그걸로 됐소. 아까 이기고 지고를 따졌는데, 여기에 관한 한 내가 이겼소. 당신은 이미 전투 준비를 하고 있고 그건 내가 바라던 바니까.” 루에머스는 메마른 코웃음을 쳤다. “의회에서 쫓겨나는 쪽이 할 말은 아니군.” 카셀은 뒷말은 못들은 척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걸어갔다. “카셀!” 루에머스는 ‘캡틴’이 아닌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루에머스는 짧은 순간 망설인 후 말했다. “롬노르 의원은 내가 가장 존경하던 분이셨다. 네가 할아버지를 잃었다면, 나는 아버지를 잃은 거다.” 카셀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언제고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루에머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카셀은 회장을 나섰다. 문을 닫은 후, 서기관에게 명령하는 루에머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을 끝낸다! 다시 의원들을 집합 시켜라.” 카셀은 루에머스를 혼자 만난다고 아직 회장에서 나오지 않았고, 타냐는 메이루밀과 재미없는 대화만 주고받기에, 그냥 나와버렸다. 언뜻 듣기로 두 사람은 과거의 이야기나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테일드,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제이는 혼자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 서서, 나뭇잎이 풍성하게 자란 나무를 감상하는 라이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중이었다. 여전히 먼 발치에서 라이를 수줍은 눈으로 구경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아침에 의회로 출발하기 전, 카셀은 타냐와 제이, 라이를 모아놓고 의회 정치와 권력의 특성, 거기에 따른 자신의 위치, 앞으로 모두가 할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냐는 로크와 근처 평원에 놓인 마법의 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제이는 그런 어려운 것들을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울프 기사단이 그리워졌다. 그 곳에서는 이렇게 멍ㅊ어히 있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또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 울프의 기사들이 있었다. 제이에게는 그런 게 딱 맞았따. “자네 어머님 성함이 혹시 레이디 아나샤가 아니신가?” 반면 가넬로크에서는 계속 기분 나쁜 일만 벌어지고 있었다. 겨우 어제 검은 기사의 머리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얼굴을 잊을 만하니, 이제 엉뚱한 녀석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제이는 내키지 낳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떻게 알았지?” 드래곤의 기사 브란더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 같은, 가슴에 붉은 드래곤의 문장이 새겨진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의를 드러내는 제이의 눈을 보고 이렇게까지 반응 없는 이도 드물었다. “이걸 우연이라고 하면 우습지만....... 그 일이 있었던 게 한 달 쯤 전이었지? 자네가 트레고라는 현상범을 잡아 나랑 만난 게.” 제이는 지옥도끼라는 별명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 이 곳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마침 캡틴 데라둘께서 다음 캡틴으로 임명할 만한 인재가 누가 있나 살펴보라고 하셨거든. 그 자격 요건이 매우 까다로워 이십 년 기록부터 훑어봐야 했지. 근런데 말이다, 제이메르. 그 명단에 자네 이름이 있더라고.” “잘못 본거다.” 제이가 말했다. “제대로 봤어.” “난 로크에 발을 디딘 게, 몇 년 전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냥감 쫓아 슬쩍 지나가 본 게 다였다. 기사단과는 인연이 없어. 잘못 본 거야.” 제이는 한 번 더 강조했다. “난 이래봬도 기억력은 꽤 좋은 편이야, 친구. 그 때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드래곤 기사단에 대해 꽤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내가 그랬다고?” 제이는 자기도 기억 못하는 일을 기억하는 브란더와 이야기하는 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카르라는 드래곤의 기사를 아는가?” 제이는 브란더가 머리를 직접 후려치기라도 한 듯 잠깐 휘청거렸다. 옆에 난간을 잡지 않았다면 창피하게도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거나 넘어졌을 지도 몰랐다. 브란더는 제이의 너무나도 솔직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했다. “그가 왜?” 브란더는 윽박지르는 제이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무슨 과정으로, 어떤 절차를 거쳐서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네. 어쨌든 기사 카르는 자네를 견습 기사단의 목록에 정식으로 올려놓았더군. 그러다 전쟁이 터졌고, 견습기사들이 모조리 죽는 바람에 자네는 그 기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훈련병으로 남게 되었지.” 돌아오지 않는 카르를 기다리던 그 눈 오는 겨울 밤, 제이는 처음 검의 간격을 보았고 어머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얻었다. 어머니는 카르가 자리를 잊어버렸다며 울었고, 훗날 카르와 그녀의 아버지 우페르의 죽음을 알리는 통보에 또 한 번 울었다. 동시에 그는 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카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이는 아직도 그 때의 의문을 풀지 못했었다. ‘왜 오지 않았지? 왜 나와 어머니를 데려가지 않았나? 그랬더라면 뭔가 달라졌을 거야. 왜? 카르, 이 나쁜 자식! 그래 놓고 혼자 죽어?’ 아직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혼자 외로움에 떨며 사냥꾼 생활을 하던 밤이면, 제이는 보이지 않는 카르이 망령에게 소리 지르곤 했다. 그러나 그 있을 리 없는 망령은 결코 제이에게 대꾸해주지 않았다. “카르가.......” 제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카르가?” “카르가......, 그 때 왜 날 데려가지 않았지? 견습기사 명단에 올려놨다면, 어째서?” “그야 나도 모르지. 그런 걸 묻는 걸 보니 아마 당시 자네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나 보군. 그럼 이해할 만하다. 말했잖나? 견습기사들까지 차출당해 모조리 죽어버릴 전쟁터에 자네를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거야.” 제이는 입을 다물고 난간을 세게 붙잡았다. 브란더는 침묵으로 그를 위로했다. “카르는 어떤 기사였지? 겨우 제이가 입을 열어 물었다. “우리들 세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기사 중 하나였다. 그는 누구보다 강했고, 누구보다 전투에서 용맹했다. 빈말로 하는 게 아니야. 그가 죽었을 때 캡틴 데라둘께서는 자신의 후계자를 잃었다고 슬퍼했을 정도였다.” “죽은 자는 언제나 그렇게 위대해지는 법이지. 더 말해봐. 그가 혼자서 몇 백 명을 죽였고, 몇 십 명을 구했는지 그 무용담을!” 제이는 정원으로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제이메르, 이건 우리들의 수치이기 때문에 말하지 못했으나, 오해는 풀고 싶다. 카르는 진정으로 위대한 기사였어. 그는 스무 명의 드래곤 기사들을 이끌고 원로 의회의 의원들을 로크의 남쪽으로 후퇴시키는 임무를 수행했지. 그 때 그 작전을 알아챈 익셀런의 일부가 그 길을 막았다. 고작 다섯 명 정도였지. 그 다섯 명에게 드래곤 기사 스무 명 전부가 살해당했다.” 제이는 아란티아에서 봤던 익셀런의 기사 빌리를 떠올렸다. 빌 리가 그 정도로 강했던가? 스무 명을 다섯으로 꺽을 정도로?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로크의 기사들도 분명 보통 수준은 아니었다. 브란더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희생을 발판으로 모든 의원들을 대피시키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카르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한 이와 싸우겠다며 짐을 든 거다. 그 위대한 용기를 무의미한 싸움이라 말하고 싶은가? 아니야. 로크의 기사들은 모두 알고 있네. 익셀런 기사들 중 최강은 캡틴 웰치가 아니었어. 그 자의 이름은 네이슨일세.” 제이의 눈썹이 살짝 꺾였다. “누구라고? 다시 말해봐.” “네이슨. 그 당시에도 꽤 어린 기사였다던데, 혹시 자네가 아는 자인가?” 제이가 말이 없자, 브란더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자 한 명에게 목숨을 잃은 드래곤 기사가 서른 명이 넘고, 죽은 로크의 경비병은 셀 수가 없지. 드래곤 뷰하롤의 목에 거대한 철창을 박아 넣은 것도 그 자다. 캡틴 웰치의 명성에 가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공개하지 않은 탓도 있다. 적 기사의 이름을 굳이 드높여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그 자는.......” “네이슨 애기는 그만해도 돼. 그래서 그 다음은?” “뭐......, 결국 그 작전도 실패했네. 카르가 피신 시켰다고 생각한 의원들은 모조리 매복해 있던 다른 익셀런 기사들에게 죽었다. 그 때 아나샤의 아버지이지, 전 집정관인 우페르 의원도 죽었지.” 알수 없는 분노와 후회가 온 몸을 사로잡았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럼 루티아에서 내가 싸운 그 녀석이......, 카르를 죽인 자였다고?” 제이는 갑자기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브란더는 무슨 말인가 싶어 물어보려다 말았다. 제이는 약간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너무 깊숙이 개입한 거라면.......” “할 얘기만 해.” “알겠네. 자네 어머니는 원로의원 우페르의 딸이었다. 그 우페르도 그 전대 의원의 아들이었고. 자네는 몇 대 위를 거슬러 올라가도 흠잡을 수 없는 귀족 가문이라는 거지. 3대 전부터 귀족의 혈통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에도 충족되며, 이미 견습 기사의 명단에 오른 채로 8년이 지났으니, 이대로 기사에 올라도 문제될 건 없네. 실력도 검증되었으니, 아주 간단한 서류상의 절차만 남은 거지. 어떤가, 제이메르? 벌써 울프의 기사가 된 게 아니라면, 이번만큼은 내 제안을 무시하지 말게.” “더 조사해봐. 아마 난 자격이 안 될 거다.” 제이는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복도를 걸었다. 브란더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 아버지가 어머니를 겁탈한 일 말인가?” 제이는 살기를 품고 칼을 뽑았다. 그러나 브란더는 칼을 뽑지 않았다. 전에 드래곤 기사단의 정원에서 보여준 그 놀라운 반사 신경을 생각해보면, 일부러 대응하지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만약 브란더가 칼을 뽑았다면, 제이는 뒤는 생각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나에 대해 조사한 거냐!” “그게 다다. 딱 그 한 줄만 있었다.” 브란더는 오히려 제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가 어설프게 기사단의 직위 하나 제안하는 걸로 보이나? 네 아버지의 죄는 지난 의회에서 이미 지워졌다. 캡틴 데라둘 역시 그 일을 잊고, 그를 복직시키려 하셨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아직까지 네가 지금의 너로 있는 것이지, 너는 이미 드래곤의 기사다. 사실 넌 직작 ‘내가 있을 자리’에 있어야 했던 녀석이야.” 브란더는 제이가 내민 칼끝까지 다가갔다. 제이는 하마터면 뒤로 물러날 뻔 했다. “혹시 거기에 얽매여 있는 건 너 자신이 아닌가? 그 시간 동안 아직고 그 일을 잊조 못했다면, 너는 과거를 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드래곤 기사단에 들어와야 해.” “그래, 얽매여있다. 잊은 줄 알았지만......, 아니더군.” 제이는 칼을 접고 물러났다. 브란더는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네가 아버지 죄를 대신 갚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제이는 잠깐 멈칫했다가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메이루밀은 초록빛이 파도처럼 흔들리는 풀밭에 앉아 구운 소시지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데라둘은 그가 권하는 소시지를 거절하고 담배만 물고 있었다. 드래곤의 휴식터였고, 인간과 드래곤의 교류장이었던 이 곳은 이제 쓸쓸한 바람만 불고 있었다. 데라둘이 타고 온 말과 기사단에서 키우는 몇 마리 사냥개들이 같이 뛰어다니며 빈 자리를 채울 따름이었다. “결국 드래곤 기사단을 움직이기로 했습니까?” 루밀이 물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은 없어.” 데라둘은 깨물고 있는 파이프의 위치를 옮기며 대꾸했다. 저녁 노을조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카셀은 메이루밀에게 더 이상 의회 출입은 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루밀도 영문은 알 수 없었으나, 그대로 따랐다. 나중에서야 회의 결과를 데라둘에게 전해 듣게 되었다. 루에머스를 중심으로 한 의회는 레오피오 함락에 대한 논의를 빠르게 진행시켰다. 소식을 전해온 기수의 말에 따르면 레오피오에서의 전투는 없었따고 봐도 좋았다. 레오피오의 행정관 세레스머스는 진작부터 마을을 비울 준비를 해두었던 터라, 적이 지평선에 보이자마자 주민들을 모조리 대피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공격이 시작되자, 경비병들조차 빠져나갔으니 인명 피해도 거의 없었다. 처음에 의원들은 그런 행정관의 대처에 크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곧 그 불만도 사라졌다. 기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괴상하게 생긴 괴물들이 시야에 보이는 평원 전부를 까맣게 물들였다.’ 라고 당시 본 광경을 설명했다. 그 근처 마을의 군대를 모조리 모아 성벽을 방어했다 하더라도 아마 몇 분 버티는 게 고작이었을 테니, 세레스머스는 퇴각 명력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기수는 적의 정확한 숫자는 헤아리지 못하고, 1, 2만은 족히 넘지만 그 것보다는 많을 거라는 애매한 수치만 전달해주었다. 2만....... 의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십 년 전 로크의 방위군을 무너뜨린 론타몬의 병력이 2만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인간도 아니었다. 루에머스 집정관은 즉시 로크 방위군을 맡을 만한 장군들을 호출하고, 가장 기동력이 좋은 기마대를 구성하여 앤발디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 때 데라둘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기병대가 아닌, 드래곤 기사단을 직접 출동시키겠다고 말했다. 루에머스는 딱 잘라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메이루밀도 거기까지 전해 듣다가 데라둘의 말을 끊었따. “확실히 앤발디를 잃는 건 타격이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래곤 기사단이 움직이는 건 시기상 좋지 않습니다. 루에머스 집정관 말이 옳아요. 드래곤 기사단은 마지막까지 아껴야 하는 병력입니다.” 루밀이 말했다. 데라둘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말했다. “로크의 수비대에서 기마대를 구성한다? 아무리 초법적 조치를 취한다 하더라고 내일 아침에야 준비되지. 그리고 그들의 실력으로 아무리 말을 독려한다 해도 앤발디까지 사흘 이상은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틀이면 족해.” “몇 명이나 끌고 갈 겁니까?” “백. 나머지 백 오십은 로크에 남겨둬야지.” “레오피오를 지난 적도 사나흘이면 앤발디에 들이닥칠 겁니다. 그 숫자로 뭘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오십여 명에 불과한 울프 기사단 출신이 숫자를 논하나?” 데라둘은 허허 웃었다. “적어도 우리는 몇 천 명에게 덤비는 짓은 하지 않았죠.” “그럼 우리가 해버려서 자네 기사단의 명성을 꺾어볼까?” “진담 같아서 원....... 받아치기도 힘들군요.” 데라둘은 루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 말게. 그거 약간 적들의 이동 속도를 늦추는 이상은 하지 않을 걸세. 앤발디는 로크만큼이나 큰 도시야. 사람들이 피할 시간적 여유를 준다는 것에 드래곤 기사단이 쓰인다면 충분하지.” “데라둘, 꼭 그런 슬픈 눈으로 하실 얘기가 아닌 듯 합니다만?” “날 보게, 루밀. 잘 봐. 얼마나 늙어버렸나? 자네보다 어린 퀘이언이 모든 검사들 앞에서 마스터라는 칭호를 써도 될 정도로 성장해 있네. 본인은 싫어한다지만. 그런데 나는 그런 퀘이언의 스승과 같은 연배임에도, 아직도 기사단의 캡틴으로 남아있어. 권력에 단맛을 들여 아직도 그 후계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지.” “누가 그 따위 말을 합니까? 데라둘께서 안 계셨다면 드래곤 기사단은 뿌리부터 흔들렸을 겁니다.” “아니야. 캡틴 웰치에게 패했을 때 난 물러났어야 했어.” “모든 기사들이 당신을 존경하고 뒤를 따르려 합니다. 약해지지 마십시오.” “난 약해 질 자유도 없다는 건가?” 데라둘은 담배 연기를 흘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억울하면 어서 후계자를 두십시오. 인재가 그리 없는 것도 아니던데요.” “몇 명 봐두고 있네. 루시우스, 브란더, 텐드로스, 그라쿠스 같은 녀석들이 쓸만하지. 하지만 이 기사단의 캡틴은 언제나 드래곤께서 임명해왔어. 지금은 드래곤께서 계시지 않지 않은가? 이 규칙들을 어떻게 우회해야 할까? 한 명 찍어놓은 녀석이 있긴 하지만, 그 놈의 규칙이란게....... 아아, 나는 때로 그란돌 녀석이 진심으로 부러워.” 루밀은 픽 내뱉었다. “세상을 등지고 외롭게 사시는 분이 뭐가 부럽습니까? 차라리 아직도 현역에서 뛰는 데라둘이 훨씬 멋지십니다.” “그런 게 부럽다는 거야. 못된 친구 같으니라고. 은퇴해서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어디서 어떻게 산다 하는 편지 한 통 없다니까.” “두 분이 젊은 시절 막역한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좋은 경쟁자였지. 들어두면 재미있을 얘기지만, 그건 우리 두 노인네들의 추억으로 남겨둘 걸세.” “기회가 있길 빕니다.” “카셀 말이네.” 데라둘은 갑자기 그 이름을 언급했다. “예?” “자네가 말한 만큼의 박력이 있다거나 리더십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군. 아직 많이 겪어보지 않은 탓이긴 하지만.” 루밀은 빙그레 웃었다. “아란티아의 보검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저는 그 친구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데라둘께서도 ‘그 때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울프의 캡틴의 울프들이 스스로 결정한다지? 자네가 결정했다면 그리 되는 거겠지. 그래, 그런 게 부러워. 하지만 나는 이런 규칙 속의 드래곤 기사단이 체질에 맞는 것 같네. 그래서 그란돌이 아란티아 행을 택했을 때 나는 가넬로크에 남은 거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드래곤이 없어진 지금, 캡틴 데라둘은 드래곤 기사단 그 자체이십니다.” “말만으로도 고마우이.” 데라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 중 하나가 데라둘의 옆에 다가와 투구를 벗고 인사했다. “캡틴, 앤발디로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얘기해야 할 친구가 있다더니, 그건 마무리 지었나, 브란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했습니다.” “지휘는 누가 맡기로 했는가?” “선발대는 텐드로스, 후발대는 제가 그리고 루시우스가 로크에 남아 후방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텐드로스가 또 동전 던지기에서 이겼나?” 데라둘의 말에 브란더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루시우스는 아직도 사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별로 상관없을 겁니다.” 데라둘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루시우스는 언제 그 동전의 앞 뒷면이 같은 모양이라는 걸 알아챌는지.” 루밀도 같이 웃었다. 데라둘은 나이 오십이 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말 위에 올라타 고삐를 움켜쥐었다. “가세. 그 ‘괴상하게 생긴 괴물들’ 이란 게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러.” 그는 기운차게 말을 몰아 달려갔다. 루밀은 두 마리 말이 풀밭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며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데라둘,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은 최고의 기사입니다.” 막 해가 머리를 서쪽 지평선에 담는 저녁이었다. 카셀은 멀지 않은 로크의 남쪽 성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한 무리의 기사단을 보았다. 백여 마리 정도 되는 말이 일으키는 먼지가 뿌옇게 성문을 덮었다. “드래곤 기사단이 출정하는군요.” 카셀은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타냐는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채 다섯 걸음이 되지 않고 점프하지 않아도 길게 팔을 뻗으면 천장에 손이 닿는 좁고 둥근 방 중앙에 눈을 감고 정좌를 하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눈썹과 뺨을 덮은 긴 머리카락이 어울리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를 포옹할 수 있었던 건 분명 그 순간이 어두웠기 때문에 가능한 만용이었다고 카셀은 생각했다. 타냐는 눈을 뜨고 카셀의 시선을 받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카셀도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루에머스 집정관이 생각 이상으로 행동을 빨리 하는군요. 기대했던 대로인가요?” 타냐가 물었다. “그 이상입니다. 아마 캡틴데라둘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을 테죠. 제가 없었더라고 그 두 사람은 레오피오 침공에 이런 빠른 대응을 했을 겁니다. 어제의 재앙도 사실상 데라둘과 타냐가 막았고, 제 힘으로 의원들을 구한 것도 아니었으니.......” 카셀은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겹쳐 타냐에게 산파조로 말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타냐.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미안해할 피요는 없습니다, 카셀. 하지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카셀은 항상 자기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을 하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 카셀이 없었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카셀은 그런 존재에요. 그러니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오.” “그럴까요? 그건 아직도 끝내지 못한 제 숙제예요. 캡틴의 조건은 무엇일까......? 마스터 퀘이언은 모두를 단숨에 제압하는 카리스마라고 하셨고, 루밀은 어떤 상황에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과감한 결단력이라고 주장하셨으며, 하이로드 탈룬드께서는 모두를 감동시키는 인간성이라고 했거든요. 저는 아직도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어요” “좋습니다. 제가 해답을 드리죠.” “타냐가요?” 갑작스러운 말에 카셀은 놀랐다. “최고의 캡틴이란, 유능한 부하를 뒀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 그래요?” “반대로 최악의 리더는 유능한 부하를 놀리고 자기가 일을 하는 자이지요.” “저, 좀 이상한걸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최악이라고요?” “되새겨보세요. 제 마스터께서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이전 하얀 늑대들을 길러내신 마스터 그란돌이 바로 최고의 리더라면서요.” “그란돌이란 분에 대해서는 수없이 이야기 들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 은퇴한 울프 기사단은 워낙 조용히 살아서 모른다고 하지 않나요?” “언제고 기회가 되면 뵙고 싶어요.” 드래곤 기사단은 순식간에 남쪽으로 향하는 큰 길에 올라 시야에서 먼지만 남겨두었다. 카셀과 타냐는 아로크의 탑 꼭대기에 있었다. 루티아의 탑을 본 적이 없는 카셀로서는 나디움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높은 건물에 오른 적이 없었다. 아니, 실제로 나디움에서도 건물을 샅샅이 돌아다닌 게 아니라, 이 정도 높이는 처음인 셈이었다. 처음 올랐을 때 다리가 후들거려 서있기도 힘들어 타냐의 부축을 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밑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는 것에 쾌감마저 느꼈다. 타냐는 드래곤의 어깨 위에 올라가 날기까지 한 사람이 할 말은 못 된다고 지적했다. 카셀은 사-크나딜의 어깨에 올라탔을 때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확히 이 탑은 어떻게 이용하는 거죠?” 카셀이 물었다. 설명은 들었으나,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 년 전 가넬로크가 아직 그 국명을 드래곤에게 하사 받기 전 아로크라는 곳은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을 길러내는 마법 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지금의 루티아 같은 곳이랄까?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곳 아로크의 탑, 북동쪽에 있는 분노의 탑, 북소쪽에 있는 축복의 탑....... 이 세 곳에 마법의 힘을 부여하면 그 삼각형 안에 있는 공간을 완전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이 곳 마법사들은 그 영역을 로크 존(Roc Zone) 이라고 부르고 있더군요. 아, 물론 마법적인 사악한 존재에 한정되지요.” “모즈도?” “성공한다면, 예. 모즈들 역시 인간도 짐승도 아닌 존재이므로, 이 영역 안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루티아의 화이트비라는 보석이 그런 역할을 했었지만, 오히려 이용 당해버린 탓에 루티아는 무너졌습니다. 하지마 이곳은 이용하지 못합니다.” “드래곤도 막을 수 있을 정도인가요?” “가능합니다. 세 개의 탑이 힘을 합치면, 그 마법의 힘은 화이트 게이트의 성스러운 힘에 필적하죠.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조차 존(Zone)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굉장하군요. 그럼 천 년 전에는 왜 이 엄청난 힘을 쓰지 않았죠? 그 때 아로크는 드래곤들의 공격으로 무너졌다고 했는데, 이걸 썼다면.......” “썼습니다. 하지만 그 때 축복의 탑이 무너졌죠.” “탑은 존 안에 포함이 안 되는 건가 보군요.” “이 절대 마법의 약점이죠. 아로크의 탑은 존 안에 포함되어 안전하지만, 축복의 탑과 분노의 탑은 그대로 노출됩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당시의 카-구아닐’은 제일 먼저 축복의 탑을 무너뜨렸죠.” “당연히 지금의 카-구아닐도 그걸 알고 있겠군요.” “예. 그렇겠죠. 그리고 분노의 탑을 지키는 마법사들은 로크 존의 한쪽이 무너지는 순간 적의 힘에 노출되어 적이 되어버렸죠.” “아군이 적이 되었다? 그건 어째서죠?” “그건 분노의 탑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카셀은 그 특성이 뭐냐고 물어보려다, 멀리서 날아오르는 하얀 날개를 발견했다. 라이였다. 준비가 끝나면 축복의 탑 쪽에서 날아서 이 쪽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여전히 방향 감각을 잘 못 잡아서 인지 똑바로 날지 못하고 몇 번이나 중간에 위치를 수정하고 있었다. “라이가 날았어요.” 타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앉은 채로 두 손을 바닥에 가만히 댔다. 갑자기 탑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셀이 놀라 창틀을 잡았다. “걱정 말아요, 카셀. 처음 시작할 때만 이러는 거니까.” 탑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힘이 하늘로 올라갔다. 아주 옅은 푸른색을 띠고 있는 빛이 아로크의 탑을 감싸더니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가로질러 라이가 날아오는 방향 쪽으로 무지개처럼 늘어졌다. 카셀은 그게 어떤 현상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그 빛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있었다. 그 현상은 뭐가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끝났다. “성공이군요. 적어도 이 탑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냐는 뒷말을 흐렸다. “역시 두 개의 탑을 지키는 문제가?” 카셀이 물었다. “아니, 그 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탑은 세 개예요. 아로크의 탑은 제가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축복의 탑은 그랜드 로크의 마법사들 전원이 힘을 합치면, 방금 실험했던 대로 작동시킬 수 있지요. 하지만 분노의 탑을 작동시킬 수가 없군요.” “마법사가 모자라서?” “아니, 분노의 탑은 저도 작동시킬 수 없습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옷을 입는 것에도 유행이 있듯 검술의 세계에서도 유행이란 것이 있고, 마찬가지로 마법의 세계에서도 유행이란 것이 있습니다. 루티아가 세워지면서 암흑 마법으로 분류된 많은 마법들이 사악하게 취급되어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명맥만 이어오고 있습니다.” “암흑 마법이라면, 어떤 종류죠?” “쉽게 말해 카셀이 아란티아에서 본 블랙이나 검은 기사들은 그 암흑 마법의 결정체입니다. 즉, 분노의 탑 안에 그런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가 백 명 정도 있어야 한다는 거죠. 아니면 저와 동일한 힘을 쓸 수 있을 만한 암흑 마법사가 필요한데......, 루티아 내에서도 마스터 골베인과 마스터 데다인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데다인께서는 돌아 가셨고요.” “그럼 어쩌죠?” “일단 제가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카셀은 그녀가 억지로 안심시키려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로크의 탑에서 파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사이 타냐는 몇 번이나 늑대로 변하여, 걸어서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에 덜어진 축복의 탑과 분노의 탑을 뛰어다녔다. 그녀는 마법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며, 탑을 작동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그 와중에 라이도 수없이 로크의 밤하늘을 날아다니느라, 로크 시민들의 좋은 볼거리가 되어주었다. ‘ 하늘 산맥의 엘프가 우리들을 위해 싸워준다.’ 가 아니라, ‘천사가 우리 편이 되었다.’ 라고 왜곡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로크 시민들의 공포를 덜어주었다. 카셀은 가끔 땀에 절어 돌아오는 타냐를 조용히 맞이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타냐는 그걸로 족하다고 했으나, 카셀은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제이메르는 무슨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도 타냐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랜드 로크 측에서도 암흑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범죄자들까지 총동원한다 해도 쓸만한 이는 열 명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겨우 아침 식사를 시작할 무렵, 각 지역에서 속속 군대가 도착하거나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로크의 성문은 강화되거나 보수되었고, 병사들의 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러나 카셀은 그 군대의 숫자를 모두 합한다 하더라도 남쪽에서 올라오는 모즈 군대의 반도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구아닐과 카구아들이 있었고, 러스킨이 있었고, 익셀런 기사단이 있었고, 무엇보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있었다. 군대가 모일수록 희망보다 젊아감이 깊어지는 카셀이었다. 그런 중에 전혀 뜻밖의 군대가 북쪽에서 나타났다. 채 백여 명이 되지 않는 작은 군대였으나, 민감해져 있는 로크의 군대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기병대는 비상사태를 알리고 성문은 굳게 닫혔다. 놀라 말을 타고 달려온 루에머스는 카셀을 보고 인사도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지?” “나도 모르오.” 둘은 서로 양보하지 않고 북쪽 성문의 망루에 올랐다. 북쪽에서 내려온 군대는 로크의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서 멈췄고, 그 쪽에서 보낸 듯한 사신 하나가 커다란 깃발 하나르 들고 성문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카셀은 나직이 탄성을 질렀다. 그 깃발에는 붉은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9. 붉은 장미의 여 백작 하얀 담배 연기가 좁은 밀실 안에서 실처럼 가늘게 올라가 천장에 부딪쳐 흩어졌다. 루에머스는 가만히 그 연기 줄기를 추적하다가 금빛으로 만들어진 길고 가는 파이프를 바라보았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붉은 입술이 또 한 번 나르베니를 떠올리게 하며 매혹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르베니는 데라둘이 지적한 대로 실제로 많은 의회 의원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집정관이 된 것을 조사해보니 그런 내막이 있었으나, 결정적 증거가 없어 공개하지 못했었다. 라틸다 쟌스테인, 카모르트에서 온 이 여 백작은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드레스를 입고 도도한 걸음걸이로 주위 남자들의 시선을 모조리 빼앗고 있으나, 결코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차가운 아름다움은 나르베니와 전혀 다른 느낌이라, 여자를 싫어하는 루에머스의 관심을 끌었다. 물론 남자로서의 흥미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흥미였다. 루에머스는 이미 오래 전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고,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하다가 놓쳐버린 경험이 있었다. 아니, 말했다 하더라도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이 주위의 다른 남자들과 다를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말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해버렸고, 로크를 떠났다. 그 후 그는 평범한 귀족답게 가문을 따져 결혼을 했으나 거기에 사랑은 없었다. “캡틴 울프는 아직 인가요?” 라틸다가 물었다. 루에머스는 자신의 생각과 일치되는 타이밍으로 그녀가 말을 거내자 픽 웃었다. “곧 올 거요.” “제가 우스운 말이라도?” “아니오. 예전에 겪은 한심한 일이 생각나서. 여 백작과 관계없는 일이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오.” 그러면서 루에머스는 또 웃었다. 라틸다는 이상하다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넬로크의 의회 정치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공개된 장소에서 논의했고, 이런 밀실 회담 같은 것은 지양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찾아온 붉은 장미의 여 백작은 사람 바글거리는 곳에서 대화하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 대표 한 사람하고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일로 바쁜 의원들을 모두 모아 의회를 소집하기 여의치 않으니, 다른 의원들도 찬성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아란티아의 요청 때문이니 아란티아의 중요 인사가 없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겠다.’ 결국 루에머스는 그 조건까지 수락했다. 루에머스가 두 번째로 웃은 건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겨우 잊어버릴 긴 세월이 지난 후 갑자기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며 나타난 아란티아의 캡틴의 어머니가 바로 자신이 사랑하던 그 여인이었다. 루에머스는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젊은 시절의 첫사랑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으나, 대신 그 때 에밀이라는 남자에게 하지 못했던 복수를 그 아들에게나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아, 늦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카셀이 웃으며 인사했다. 루에머스는 땀 흘리며 다가오는 그 금발의 청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내가 원로의원이 되면 그 소름 끼치게 아름답게 생긴 마법사와 결혼해 생긴 자식을 내가 있는 원로 의회에 보낼 건가? 그것도 이 싸움에서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늦었소.” 루에머스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지만, 화 난 목소리로 말했다. 라틸다를 관찰하며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한 반시간은 즐거웠으나, 마치 억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듯 그는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있으니, 공기가 좋지 않소. 정원으로 가는 게 어떻소?” 루에머스의 제안에 두 사람은 순순히 따랐다. 둘은 작은 목소리로 오랜만이라는 둥, 그 사이 많이 성숙해졌다는 둥, 스스럼없이 인사말을 나누고 있었다. “로일은요?” “아직 루티아에 있습니다. 곧 올 거예요.” “무사한가요?” “그럼요.” 둘은 정원에 이를 때까지 루에머스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뭔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루에머스의 옆에는 엉뚱하게도 카셀의 경호원 노릇을 하는 제이메르라는 청년이 따라붙어 있었다. 또 그는 괜히 라틸다의 경호 기사로 보이는 청년과 눈싸움을 나누고 있었다. 루에머스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나오자고 했나?’ 루에머스는 일단 간단한 질문을 하고 라틸다는 길지 않게 답변했다. 대충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으나, 내막을 듣고 루에머스는 내심 놀랐다. “국경 밖에 세워둔 이천의 군대는 어찌된 일이오? 가넬로크가 어수선한 시기를 틈 타 쳐들어오는 거라면 이미 늦었습니다만?” “집정관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카모르트 왕실의 결정에 따른 정신 원군입니다. 알고 여쭤보시는 거겠죠?” “알고 여쭈었소.” 이런 농담을 하면 어지간한 배짱 가진 의원도 쉽게 루에머스 앞에서 웃지 못했다. 그러나 카셀과 라틸다는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루에머스는 다섯 살 때 병으로 죽은 자기 아들을 보는 것 같아 경계했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 꽤 어리군. 말하는 걸로만 보면 서른은 넘는 기분이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카셀은 외국인이며, 정을 줘서는 안 될 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루에머스는 카셀을 차갑게 대했다. “한 달 전 아란티아 여왕으로부터 직접 친서가 왔습니다. 아란티아가 카모르트를 도왔으니, 카모르트는 가넬로크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카모르트가 십 년 전 전쟁에서도 직간접적으로 가넬로크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갚을 때도 됐죠.” 라틸다가 말했다. “환영이오. 그러나 그 군대를 로크에 들일 수는 없소.” “예?” 검게 눈썹을 세운 라틸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카셀도 놀랐다가 이내 뭔가 이해하는 듯싶었다. 카셀은 뭐든 빨리 이해했고, 눈치가 빨랐다. 기분 나쁠 정도로. 그러면 또 한 번 25년 전이 떠올랐고, 복잡한 감정에 냉정한 마음이 흔들렸다. “이 정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소.” “아니, 아니에요. 좋은 걸요.” “카모르트 왕실에도 여기에 필적하는 천상의 정원이 있다고 들었소. 굳이 칭찬할 필요는 없소. 그리고 당신이 직접 우리의 전투 준비 상황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요.” “제가 봐야 뭘 아나요?” 라틸다는 겸손하게 말했다. 마차를 타고 셋은 로크의 남쪽으로 달렸다. 그 사이 둘은 또 루에머스를 배제하고 열심히 자기들끼리의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건 꽤 들어둘 만한, 카모르트의 최신 정계정보였다. “원래 제가 아닌, 왕실 기사단이 직접 올 예정이었으나, 아시다시피 현재 캡틴 데이릭은 왕실 복구에 전력을 다하느라 움직일 여유가 없었죠. 코홀룬의 고디머 백작도 수호 가문으로서 복구에 관련된 재정적 후원을 대느나 정신이 없고요.” “캡틴 데이릭, 고디머 백작....... 벌써 그리워할 정도로 긴 시간이 흘러버린 것 같군요. 그런데 덴모주 쪽도 그리 여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의 아버지가 왕실에 진 빚을 갚아야죠. 전투가 끝난 후, 남은 군대를 모아보니 그 정도는 되더군요. 덴모주의 자잘한 경비를 레앙의 군대가 보조해주기로 했고요.” “검은 사자 백작?” “그의 첫째 아들은 살아남아 있으니까요. 아버지와 달리 심약하기 그지없지만, 적어도 죄책감이 뭔지는 아는....... 아, 저런 재미없는 이야기였죠, 집정관?” 루에머스는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대충 뤼미에르 백작이 무슨 일을 했고, 한 달 전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었소.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되니 재미없지는 않소.” 카셀은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눈매로 라틸다에게 말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많은 일이 있었군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로크의 탑이었다. 카셀은 열심히 라틸다에게 아로크의 탑이 두 개의 탑을 어떤 식으로 작동시키는지, 어떻게 로크를 수비할 것인지 설명하느라 바빴다. 루에머스는 그저 로크 시민들 세금만 뜯어먹고 사는 아로크의 마법사 늙은이들을 마침내 써먹을 수 있게 된 것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내가 덧 불일 말은 하나요. 카모르트의 군대는 그 두 개의 탑을 지키는 싸움을 해주시오. 로크에 들어오는 일없이. 당연히 모든 원조는 철저히 해드리겠소.” 루에머스가 말했다. “흐음, 외국의 군대를 자국의 성 안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이거죠?” “그렇소. 역사적으로 ‘그런 일’은 수없이 일어나지 않았소?” “원군이 적군이 되는 일? 많죠. 카모르트에서는 귀족들끼리도 그런 치졸한 작전을 써먹으려고 했었으니까. 이해해요.” 라틸다는 주저 없이 말했다. 루에머스는 속으로 대단한 여자구나, 싶었지만 역시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이해해주니 고맙소. 이걸로 동맹은 성립된 거요?” “그렇네요.”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전투 준비는 한창이었다. 평소 가벼운 운동도 하지 않던 마법사들과 마법사 학생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중 여자이자, 루티아의 마스터인 타냐가 손수 남자도 들기 어려운 나무와 돌을 지고 옮기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손을 놓고 구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법사라고 으스대던 약골들이 타냐 덕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곧 그랜드 로크의 의장과 타냐가 이 쪽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천 년 전 전쟁에서도 이 탑이 쓰였다고 했다. 그 때는 어째서인지 패배했지만, 지금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십 년 전 전쟁과는 다른 기분 좋은 흐름이 느껴졌다. 세 나라가 연합했고, 마법의 힘이 로크를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카셀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뭐가 불안한 것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달리아. 당신의 아들이 이제 로크를 지키러 왔군. 내가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여기서 말해버리면, 난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 되는 거겠지?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난 언제나 진심은 말하지 못하는군.’ 곧 리펜다스 의장도 와서 인사하고 타냐도 짧은 목례로 루에머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녀는 라틸다에게 만큼은 직접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루티아의 마법사신가요?” 라틸다가 손을 잡으며 물었다. 두 미녀가 마주 서있는 광경은 어딘지 모르게 가슴을 푸근하게 했다. “그렇습니다.” 타냐는 대답하더니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옆에 붙어 서있는 카셀을 뒤로 밀었다. 갑자기 타냐의 주위로 하얀 냉기가 피어올랐다. 라틸다는 깜짝 놀라며 타냐의 손을 놓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슨 짓이오?” 루에머스도 놀라 다가가다가 그만 손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에 물러서버렸다. 타냐는 루에머스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고, 라틸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카모르트의 소중한 원군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라틸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여름에 라틸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나오고 있었다. “좋은 의도로 찾은 자리에서 왜 이렇게 악의에 찬 공격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물어보지죠.” “최근 죽은 적이 있었습니까?” 루에머스는 이건 무슨 멍청한 질문이냐는 듯 카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카셀은 그걸 농담으로 여기지 않았다. 타냐의 긴 머리카락이 펄럭였고, 발 쥐위로 고드름 같은 긴 얼음송곳이 라틸다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라틸다가 소리???다. “캡틴 울프!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카셀도 놀라 말했다. “타냐!” “물러나십시오, 카셀. 다시 묻습니다. 누차 경고하건대, 대답하지 않으면 또 한 번 죽을 겁니다. 죽은 적이 있습니까?” 라틸다의 붉은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생기 넘치는 붉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당신 질문에 이미 대답이 있군요. 그래요. 죽은 적이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난 후 다시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지요.” “그 후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게 누군지 모릅니다.” 타냐는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계속 노려보았다. 라틸다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죽여 볼 생각인가요?” 라틸다가 말했다. 타냐는 그 손을 놓아주고, 얼음송곳도 없앴다. 라틸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법은 사라졌으나 타냐의 시선은 아직도 차가웠다. “당신의 몸에 암흑의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그 힘을 꺼내 보이는 것만으로 주위에 있는 생명체는 모두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 방법을 몰라서 아직 쓰지 못하는 거겠지만.” 카셀은 옷을 벗어 라틸다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라틸다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내가 그 정도로 위험한 존재인지는 몰랐군요. 그럼 그냥 그대로 얼려버리지 그러셨어요?” “그러고도 싶군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단지 신호를 보내는 것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괴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카셀, 이 분을 돌려보내십시오. 이 도시에 둬서는 안 되는 여자입니다.” 카셀보다 루에머스가 먼저 말했다. “여 백작이 나르베니처럼 된다는 뜻인가?” 타냐는 고개를 저었다. “다릅니다. 나르베니는 이미 죽은 채로 움직이고 있고, 완벽하게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에게 조종당하고 있죠. 그러나 이 분은 자기가 몸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즉, 살아있습니다.” 라틸다는 이제야 겨우 일어나 말했다. “그거 아주 고마운 분석이군요. 마스터 타냐. 그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라면 적으로부터도 나를 보호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은 세 나라의 연합을 방해할 권리가 없어요!” “그럼 전투 후에 당신을 탑 안에 가두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한 나라의 여 백작을 그런 식으로 대접할 바에야 돌려보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타냐도지지 않고 말했다. “좋아요. 탑에 들어가 있죠. 내 군대의 운영권은 루에머스 집정관에게 맡기죠. 하지만 저는 여길 떠나지 않습니다.” “탑에 뒀다가 당신이 괴물로 변하는 순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저 하나뿐입니다. 예, 탑에 있는 동안은 안전하겠죠. 하지만 풀리는 순간, 우리는 내부에 나르베니 같은 적을 다시 한 번 두게 되는 겁니다.” 타냐는 카셀과 루에머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천 년 전 전쟁에서 축복의 탑이 구아닐에게 무너지면서, 로크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 당시 분노의 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가 언급하길 피했죠? 그 때 분노의 탑 안에 있던 마법사들은 모조리 악의 편으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는 그 정도로 강력한 암흑 마법의 결정체를 탑 안에 방치해 둘 수는 없.......” 타냐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카셀도 타냐와 한바탕 싸우셔고 나서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 이상한 침묵에 리펜다스와 루에머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타냐는 다시 한 번 라틸다의 손을 잡았다. 라틸다는 아까 같은 공포의 순간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 얼른 뒤로 물러섰다. “무, 무슨 짓을 또 하려고요?” 타냐는 쉽게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겨우 그녀를 잡아끌었다. “잠깐 가볼 데가 있습니다.” 건장한 기사도 집어 던지는 타냐의 힘에 나약한 라틸다가 저항할 수는 없었다. 라틸다는 마치 구해달라는 듯 카셀을 불렀다. 그러나 카셀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라틸다를 인심시키는 말만 했다. “괜찮아요. 그냥 따라가셔도.” 루에머스는 황당한 나머지 뒤에서 소리쳤다. “어딜 데려가는 거요, 마스터 타냐?” “분노의 탑!” 카셀이 대신 대답하고, 네 사람이 타고 온 마차에 라틸다를 강제로 태웠다. 마차가 로크의 북쪽으로 달려간 후, 엉뚱하게 여기 남게 된 루에머스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리펜다스 의장에서 물었다. “왜 저러는 거요?” 리펜다스 의장도 뒤늦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아마 저 여 백작을 다른 곳에 쓸 모양입니다.” 분노의 탑은 피라미드처럼 아래가 넓고,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를 가진 탑이었다. 탑의 중간 부분이 한 번 뒤틀려 있어 옆에서 보기에도 불안한 이 건물이 천 년이나 무너지지 않았다는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타냐와 라틸다, 카셀은 탑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라틸다는 아직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고 타냐가 시키는 대로 방 중앙에 앉았다. 단지 앉아있는 걸로 충분했다. 타냐는 그녀의 힘을 끌어낸다는 몇 마디 말을 하고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어제 아로크의 탑이 흔들리는 것처럼 탑이 몇 번 흔들렸다. 불안하게 천장에서 돌먼지가 떨어졌다. “쟌스테인 여 백작, 당신의 군대를 여기에 주둔 시키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이 방에서 나오지만 않으면 됩니다.” 타냐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라틸다는 기분 나빠했다. “이제는 아예 명령조군요. 루티아의 마법사는 다들 그런 가요?” “그리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어제부터 계속 여기에 대해 연구하다가 갑자기 답이 나와 버리는 바람에 제가 좀 ㅎ으분했군요.” “뭣보다 아직 제 군대는 국경 밖에 있어요.” “그럼 어서 들이시죠. 루에머스 집정관과는 얘기가 아직 안 끝난 거였습니까?” 타냐는 카셀에게 물었다. “끝나가려는 중에 타냐가 끼어들었죠. 뭐, 사실상 합의는 봤지만.......” “아, 그래요? 그럼 두 분이 다녀오시면 되겠군요. 다시 모셔다 드리죠. 아니, 저는 아직 이 탑에 있어야겠습니다. 카셀은 그랜드 로크로 가서 이 탑을 작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고 알려주세요. 아마 리펜다스 의장이 직접 오거나 다른 마법사들이 올 겁니다.” 결국 카셀은 괜히 따라왔다가 쫓겨나듯 라틸다와 마차에 탔다. 조용히 이동하는 마차 아네서 라티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히 무서운 여자를 옆에 두시고 있군요, 캡틴 울프. 당신 공행은 항상 그런 건가요, 제가 옆에서 볼 때만 그런 건가요?” 카셀은 어색하게 웃다가 괜히 말을 돌렸다. “샤를 국왕 폐하는 괜찮으신지요.” “적극적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계시지요. 심지어 이번 원정에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바람에 대신들이 말리느라 고생했다는 후문도 있었어요.” “그럴 분이 아니신데 놀랍군요.” “당신의 존재가 카모르트에서 얼마나 크신지 알시겠어요?” “농부의 아들일 뿐인데요, 카모르트에서는.” “그런걸 중요시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요.” 카셀은 다시 로크의 북쪽 성문을 통과해 시내로 들어서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타냐가 갑자기 공격한 건 대신 사과 드릴게요.” “좀 무섭긴 했어요.” “신경이 날카로워요. 그녀가 싸워야 하는 상대가 워낙 커다란 존재라서요.” “제 아버지 같은 자인가요?”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셀은 숨기지 않았다.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렇군요.” 라틸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아는 하얀 늑대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군요.” “사정상 제가 먼저 오게 되었습니다. 곧 올 거라 생각됩니다. 로일도 그 때 함께.” 너무 늦지 않길 바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하늘 산맥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었다. 라틸다는 씁쓸한 미소로 고개만 끄덕였다. 카셀은 곧 그녀와 로일이 꽤 오래 함께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로일은 카모르트에서의 일이 끝나자마자 라틸다를 찾아 덴모주까지 일행을 끌고 가기까지 했었다. 로일에 대해서는 자신도 자세히 모르니, 괜히 그 얘기를 꺼내 위로하기도 애매했다. “참, 그 탑에 대해 설명하자면.......” 카셀은 어색한 치묵이 싫어 말을 꺼냈다. 그러나 라틸다는 손을 저었다.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제가 가진 힘이 필요한 거죠?”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려 했던 카셀이 무안할 정도로 간단하고 명료한 설명이었다. 카셀은 고개만 끄덕였다. “예.” “그럼 그걸로 됐어요. 아버지의 힘으로 대신 살아있는 목숨입니다. 이 목숨이 아버지의 죄를 갚는데 쓰인다면, 저로서는 환영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마법사 분을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타냐가 직접 사과할 거예요.” 카셀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정확한 날짜는 계산할 수 없지만, 새나디엘은 카셀이 하늘 산맥으로 떠나는 순간 카모르트에 원군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 것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라틸다의 상태까지 알고 그런 요청을 한 걸까? 가넬로크의 탑은? 나딜의 일과 하늘 산맥의 일은 어느 정도 전략상 예측이 가능하다 해도 이런 것까지 예상한 건 아닐 것이다. 카셀이 무서워하는 건 새나디엘 여왕의 이런 예지가 아니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였다. 이 곳은 아란티아가 아니므로, 새나디엘의 축복도 닿지 않는다. 즉, 새나디엘이 이런 걸 모두 알 수 있다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도 안다는 뜻이었다. 상대는 드래곤을 죽이는 드래곤과 생명을 농락하는 악마였다. 거기에 싸움 밖에 모르는 포악한 괴물들이고 전투에 도가 튼 기사들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난 뭘 할 수 있지?’ 라틸다를 의회에 데리러 왔더니, 이번에는 제이가 엉뚱한 소식을 알려줬다. “라이가 로크 경비대에 잡혀 감옥에 갇혀 있댄다.” “그건 무슨......?”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다. 로크 감옥 간수쯤 되는 녀석이 달려와서 말해주고 갔다.” 카셀은 감옥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워낙 경황이 없어 카셀은 철창 안에 갇힌 라이를 보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멍청히 서 있었다. 간수장은 라이가 때려눕힌 남자가 워낙 돈도 많고 의원들과 친분이 있는 상인이라 라이가 누군지 알면서도 형식상 잡아둘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카셀도 충분히 이해하므로 간수장에게는 별말하지 않았다. “뭐, 나도 그 사람이 뻑 하면 찾아와서 돈으로 사람 빼내가 버리는 것에 못마땅하던 차니, 이번에는 내 권한으로 빼내드리겠습니다. 애초에 규칙상 이 감옥은 ‘사람’을 가두는 곳이지, 엘프를 가두는 곳은 아니니까.” 간수장이 말했다. 라이는 카셀이 찾아왔다는 걸 봤으면서도 고개를 이 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카셀은 라이 대신 간수장에게 물어야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이 엘프를.......” “레미프요. 이름은 라이고.” 갑자기 엘프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카셀은 즉각 수정해주었다. “어, 그러니까 이 레미프를 고소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하려는데 느닷없이 주먹을 날렸다.’ 고 하더군요. 당장 사형이라도 시켜야 한다고 난자안을 피우는 걸 겨우 설득시켜 돌려보냈습니다. 뭐, 이 레미프가 로크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캡틴 울프의 경호를 맡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걸 보니, 어지간히 화가 나긴 한 모양입니다만.......” 간수장은 감방 문을 열쇠로 열어주며 덧붙였다. “실은 우리가 잡은 게 아니라, 이 레미프가 잡혀준 거였습니다. 밧줄도 안 묶고 데려왔지요.” 카셀과 제이는 철문 안으로 들어가 라이의 옆에 섰다. 카셀은 라이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네. 그렇지?” 라셀의 말에 라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났다. “미안하다.” 놀랍게도 라이는 사과부터 했다. 카셀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아니, 괜찮아.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뭘. 그보다 왜 그랬어? 스카우트란 건 또 무슨 소리야?” “돈, 준다고 했다. 구경거리, 되라고 했다. 그래서 때렸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간수들이 말리는 소리와 누군가 악을 쓰는 소리도 났다. 카셀은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그 때와 ‘같은 일’을 겪은 거구나.” “그렇다.” “잘 했어, 그럼. 내 이름을 빌려주지. 그런 놈 또 나타나면 이빨을 다 박살내버려.” 제이가 웃으며 말했다. “카셀, 네 입에서 그런 말도 나오나?” “친구의 명성이 더럽혀지는 것보다 내 입이 더러워지는 게 낫지.” 간수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온 중년의 남자는 척봐도 이번 사건의 피해자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퉁퉁 부어 오른 눈과 찢어진 눈썹에, 화가 잔뜩 난 작은 눈으로 그는 소리쳤다. “캡틴 울프의 경호원이 이런 폭행 사건을 치르고도 그 명성이 무사할 줄 아시오? 단단히 책임을 지셔야 할 거요.” 제이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느 듯 카셀을 보았고, 라이는 말이 없었다. 카셀이 말했다. “라이를 데려다가 뭘 하려고 했소?” “출세시켜 주겠다고 했소! 그게 잘못인가? 하늘 산맥의 엘프가 가지는 아름다운 자태를 로크의 시민들에게 자랑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소. 거기에 대한 대가가 이거란 말이오?” 그는 자신의 부은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경호원을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했다?” 카셀의 말에 그 남자는 움찔했다. 하지만 지지 않고 말했다.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시오! 나는 그런 뜻으로 제안을 한 게 아니었소. 무엇보다 그만큼의 보수는 내겠다고 했소.” “보수? 가만있어보자, 그러니까 돈으로 내 경호원을 빼가려 했다는 거요?” “캡틴 울프. 나는 이 곳 의회와 밀접한 친분을 가지고 있소. 이런 식으로 대해서는 곤란한 일을 당할 거요.” “그럼 어디 그 의원들 이름 모두 말해보시오. 그 명단 들고 나는 루에머스 집정관과 직접 상의해봐야겠소. 그렇지 않아도 많은 의원들이 죽어 신경 날카로운 그 분이 무슨 조치를 취할 지 궁금하군.” 카셀은 몇 마디 더 퍼부어주려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제이메르, 네 맘대로 해버려.” 제이는 팔짱을 풀며 물엇다. “저런 돈 많은 놈 건드리면, 가넬로크 의회랑 또 한 바탕 할 텐데 괜찮나?” “그럼 역사에 기록이 남겠지. 가넬로크의 돈 많은 상인 한 명이 가넬로크와 아란티아의 전쟁을 발발시켰다고.” 간수장과 간수들은 나서지도 못하고, 제이는 그 상인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상인은 처음에는 협박하다가 그 다음에는 사과하다가 나중에는 애원했다. 그 후 특별히 비명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카셀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라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가자, 라이.” 저녁 시간. 오랜만에 카셀, 라이, 제이메르, 타냐 네 사람이 모두 같은 식탁에 앉았다. 딱히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타냐가 그 시간에 맞춰 돌아왔고 또 지붕 위에 올라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던 라이도 돌아왔다. 제이도 우연찮게 식사시간이 되자 돌아왔다. 혼자서 식사를 하게 될 줄 알았던 카셀은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음식이 모두 준비되자, 카셀은 포크를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셋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맞춰져 있었다. 그는 할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었고, 셋은 계속 기다려주었다. 카셀은 이 정도까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고 있는 그들이 고마웟다. “앞으로 이런 소중한 자리를 얼마나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카셀은 와인 잔을 들었다. “......맛있게 먹자.” 제이도 잔을 들었다. “그래, 맛있게.” 타냐도 잔을 들었고, 한참 와인에 맛을 들이는 라이도 어색하게 인간의 문화를 따라 잔을 들었다. 와인을 마신 후의 식사는 즐거웠다. 잠깐 동안 넷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 비극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카셀은 아버지와 농사를 하며 겪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 냉정한 타냐가 몇 번이나 웃음을 터트렸고, 남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라이는 두 번이나 거기에 대해 질문을 했다. 제이는 현상범을 따라가다 겪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보려다 결국 어디 어디를 베어 죽였다 라는 걸로 얘기를 끝내는 사람에 타냐에게 핀잔을 들었다. 타냐도 혼자 대륙을 여행하다가 겪은 자잘한 얘기를 해주었다. 라이도 어린 시절 짝사랑했던 레미프에 대해 얘기했다. 한참 듣다 보니 그 짝사랑 상대가 ‘레미프 소녀’가 아닌, ‘레미프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고 카셀과 제이는 경악을 했다. 흥미롭게 얘기의 뒤를 재촉한 건 타냐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만의 즐거운 시간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것은 네 사람이 모두 함께 즐긴 마지막 저녁 식사가 되었다. 10. 두 남자의 약속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만나는 걸로 하자. 그 전까지 연락도 하지 마!” 레다둘이 화라도 내듯 말했다. “연애하다가 질린 여자 차는 방법이랑 같은 식이군. 내가 그리 싫었나?” 그란돌도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너랑 헤어지니 속이 다 시원하다. 절대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마라. 다시 만나기 싫으니까.” “아, 그럼 나 혼자 오를 테니, 넌 자식아, 그냥 그 쪽 기사단 설거지 담당이나 해라.” 두 사람이 말하는 건 옆에서 보면 싸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둘은 항상 그렇게 얘기했다. 데라둘은 속으로 헤어짐이 너무 아쉬워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란돌도 다르지 않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그래서 둘은 차라리 싸웠다. 그래야 이별의 아픔을 더는 것 같았다. “조만간이다.” 그란돌이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 조만간.” 둘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삼십 년이 흘렀다. 데라둘은 살짝 머리를 내밀어 앤발디의 성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특별한 신호는 없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오늘 따라 달과 별이 무지 밝았다. 데라둘은 한참 어둠을 응시하다가 다시 몸을 낮추고 망루에서 내려왔다. 밑에서 브란더가 대기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캡틴. 텐드로스가 북쪽 성벽에 대기 중입니다. 이 쪽에서 신호만 보내면 언제든.......” 브란더는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둣 뒷말은 내지 않았다. 데라둘은 믿음직스러운 그의 등을 툭 쳤다. “이제 자네 할 일만 끝내면 되겠군. 서두르게.” 브란더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캡틴께서 가시면 안 됩니까?” “지금 내 명령을 거부하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조만간 불바다가 될 이 곳에 캡틴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오백 명이나 되는 주민들을 지켜야 하는 일이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거냐? 브란더, 그런 건 가장 젊은 자네가 해야 할 일이야.” “검술은 제가 텐드로스보다 뛰어납니다.” “고집 부리지 말게. 내 ‘인사 배치’에 불만이 있으면 정식으로 절차를 거쳐.” “예. 사흘쯤 걸리겠군요.” 브란더의 말에 데라둘은 숨 죽여 웃었다. “가보게.” “조심하십시오, 캡틴.” “자네야 말로.” 갑옷도 입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은 브란더는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브란더가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 일이 정말 위험하다면, 더더욱 자네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지.” 데라둘은 길게 한숨을 쉬다가 의자에 앉았다.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차를 권했다. “고맙네.” 그는 향 좋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중요한 작전을 앞두면 항상 옛 생각이 났다. 이런 게 또한 늙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우울해졌고, 우울해지면 그는 언제나 그랬듯 웃음으로 때웠다. “캡틴, 남쪽에서 적의 움직임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명이 다가와 보고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안 주는군.” 데라둘은 미련 없이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모즈들의 모습은 이미 확인한 바 있었다. 오늘 새벽 기습적으로 앤발디를 공격해오는 괴물들 백여 마리가 있었다. 고작 그 정도 숫자에도 앤발디의 병사들은 쩔쩔 매며 당해내질 못했다. 때마침 도착한 드래곤 기사단은 달려가 그들을 전멸 시켰다. 그 와중에 두 명이 죽고 여섯 명이 다쳤다. 큰 피해는 아니었으나, 다친 기사 중 둘이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나머지 넷도 힘이 없어 보였다. 로크의 그 끔찍한 학살이 있기 전 캡틴 카셀은 미리 데라둘에게 모즈들의 몇 가지 특징을 말해주었다. 카셀은 그 괴물들을 모즈라고 지칭했다. 그는 모즈들이 공포를 모르는 무자비한 괴물이지만, 지휘관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했다. 손톱과 이빨에 독이 있으며, 낮보다 밤에 더 활발히 움직이니 밤을 조심하라고 했다. 검은 드래곤이 나타나면 절대 싸우지 말라고, 마법사가 나타나도 달아나라고 전했다.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며, 또한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자정을 넘은 지금 다가오는 괴물들 중에 다행히 드래곤은 섞여 있지 않았다. 마법사가 섞여 있을지 모르나, 그것까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지휘관이라.......”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은 새벽에 봤던 괴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적어도 반년 이상 잘 훈련시킨 병사들 같았다. “제법이군. 저런 괴물들을 훈련시킨 자가 누군지 한 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야. 숫자는 ㅇ느 정도 되는가?” 데라둘은 눈이 침침하여 어둠 속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따. 그런 걸 보좌해주기 위해 옆에 있는 부관은, 곧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했다. “오백 마리 정도 됩니다. 그리고 뒤쪽에 그것과 비슷한 숫자가 대기하고 있는데,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럼 후방에 적어도 천은 있다고 봐야겠군. 이 오백이 우리 움직임을 기다리는 미끼일지도 모른다. 신호가 있을 때까지 절대 작전을 시작하지 마라.” “예.” 그 기사는 나직이 대답하고 옆에 있는 기사에게 신호했다. 앤발디의 너른 마을 지붕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기사들이 그 기사의 수신호에 응답해왔다. 불빛 하나 없이 전달되는 이 수신호는 금방 북쪽의 성벽까지 이르렀다. “우리도 움직이지.” 데라둘은 천천히 성벽에서 내려와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앤발디의 마을 중앙에는 광장이 있었고, 거기에는 데라둘이 타고 갈 말이 대기하고 이써야 했다. 하지만 말은 없었다. “누구 없나?” 데라둘은 목소리를 약간 높여 말했다. 마을 중앙에는 물이 고인 분수대가 있었다. 거기에 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기사가 앉아있었다.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짚어보니 간신히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래 전에 죽었는지 피는 나지 않았다. 데라둘과 그의 부관은 바로 칼을 뽑았다. “마을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켜 놓고 뭘 하고 계시나요, 캡틴?” 성당 벽에 그려진 것 같은 타락한 천사의 검은 그리자가 광장을 덮었다. 데라둘이 말했다. “나르베니! 네가 여기에?” “모즈들을 지휘하는 사소한 일이 떨어져서 왔더니, 의외로 큰 걸 건지게 되었군요.” “닥쳐라. 궁수, 저 까마귀를 떨어뜨려라.” 데라둘은 아무도 없는 지붕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응?” 나르베니는 어둠 속을 돌아보았다. 지붕 위 굴뚝 옆에 본래 하얀 갑옷을 검게 색칠한 드래곤의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칼이 아닌 활을 들어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보통 화살보다 두 뼘이나 더 긴 화살이 나르베니의 가슴에 박혔다. 나르베니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분수대 한 가운데 떨어졌다. 작은 물기둥이 올랐다가 사방으로 퍼졌다. 데라둘은 긴장을 풀지 않고, 분수대에 다가갔다. 물 속에서 유령처럼 긴 머리를 늘어뜨린 나르베니가 천천히 일어났다. “어머나, 젖어버렸네. 이걸 어쩌나?” 그녀는 물이 주루룩 흐르는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달빛 아래에서 묘한 빛을 발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푼 가슴에 박힌 화살을 천천히 뽑더니 손가락에 끼고 까닥거렸다. 화살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이런 걸로는 날 죽일 수 없어요, 데라둘.” “그럼 이 드래곤의 성검이라면 어떨까?” “아, 캡틴에게만 전해진다는 그거? 해보시죠?” 나르베니가 한 손을 드었다. 갑자기 나르베니의 모습이 사라질 정도로 분수대 주변의 어둠이 짙어졌다. 그 어둠은 주변을 빠르게 잠식하다가 데라둘과 그의 부관을 덮쳤다. 부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몇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졌다. 붉은 피가 광장 여기저기로 퍼졌다. 그러나 데라둘은 무사했다. 나르베니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말했다. “그거 진짜 성검이었어요? 놀랐네. 난 그냥 장식품인 줄 알았더니.” 데라둘은 열심히 자신을 따라다니며 보필해준 어린 기사의 시체를 보고 버럭 소리 질렀다. “네 이년!” 데라둘은 달려가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나르베니는 금방 날아올라 피했다. 그리고 화살을 옆으로 던졌다. 처음에는 느리고 날아가던 화살은 갑자기 빨라져, 굴뚝 옆의 궁수를 맞췄다. “으아악!” 그 궁수는 비명을 지르다가 지붕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르베니는 지붕 높이에 뜬 채로 주위를 살핀 후 허리에 손을 얹었다. “또 숨은 녀석이 있나 보고....... 어디 보자, 이 앤발디에서 모즈의 군대를 맞아 무슨 작전을 쓰려는 건가요? 여기 저기 숨어있는 애들 많네. 가만 두면 안 되겠군요.” 그녀는 양팔을 펼쳐 뭐라고 소리쳤다. 어디에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길게 퍼졌다. 어둠을 배경으로 몇 마리의 말이 성벽을 뒤어 넘어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그 검은 말은 심연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마을 한 가운데로 달려왔다. 그들의 목표는 당연히 데라둘이었다. “자리를 지켜라. 모습을 드러내지 마라!” 데라둘은 크게 소리질렀다. 캡틴의 위기를 알고 달려오려던 부하 기사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멈췄다. 기사들은 그 명령을 다린 기사들에게 수신호로 전달했고, 검은 기사들의 침입을 보고 자리를 이동하려 했던 기사들도 멈췄다. 혼자 선 데라둘의 주위로 나르베니의 부하 기사 다섯이 에워쌌다. 데라둘은 편안히 숨을 내쉬다가 칼을 얼구 앞에 세웠다. 나르베니는 분수대 중앙에 서 있는 여인의 조각상 어깨에 사뿐히 앉았다. 물 항아리를 짊어진 조각상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말했다. “안타깝네요. 가넬로크의 영웅이 죽는 자리에 부하들 하나 없다니. 내가 이 죽음을 보고 나중에 슬픈 노래를 만들어 드리죠.” “타락한 집정관의 노래를 부르는 건 어떤가?” 나르베니는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죽여라.” 다섯 명의 검은 기사는 말에서 내려 데라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데라둘은 그 포위를 칼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빠져 나오더니 기사 하나의 등에 칼을 꽂았다. 발로 등을 걷어차며 뽑아낸 칼로 두 기사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검은 기사의 공격은 강하면서도 아주 빨랐다. 데라둘은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계속 허용하면 체력만 깎아먹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는 무리해서라도 두 기사의 사이를 파고들어 크게 칼을 휘둘렀다. 검은 기사의 투구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머리 없는 기사가 휘청대며 허공에서 칼질을 하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팔을 잃은 검은 기사와 다른 두 기사가 달려드는 걸 무시하고, 아까 등에 칼을 꽂아 약간 움직임이 더딘 녀석을 발로 걷어차며 다시 한 번 목에 칼을 꽂았다. 검은 연기가 주위로 폭발하듯 새나왔다. “물러나라!” 갑자기 나르베니가 소리쳤다. 검은 기사 셋은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나르베니는 한참이나 쓰러진 검은 기사 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경악했다. “믿을 수가 없어. 죽지 않는 기사들인데, 어째서?” 데라둘은 드래곤의 성검으로 나르베니를 가리켜 말했다. “내려와 내 검을 받아라, 나르베니. 니가 저지른 죄악을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이 심판하리라.” “어디 그 잘난 검을 내 몸에도 대 보시죠.” 흥분한 나르베니는 조각상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발이 닿는 순간 주위의 물이 사방으로 흘러 넘쳐 분수대를 비워버렸다. 데라둘은 얼굴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서도 칼을 쥔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나르베니는 여신의 석상에 손을 댔다. 석상은 단숨에 산산조각이 났고, 부서진 석상의 조각들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긴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에 맞춰 뾰족한 돌 조각 하나가 데라둘에게 날아갔다. 데라둘은 가볍게 칼을 휘둘러 날아오는 파편을 깨뜨렸다. 그 다음 돌 조각도, 그 다음 돌 조각도 피하지 않고 부셔버리더니 그는 말했다. “그런다고 이 칼이 약해지지는 않는다. 어디 밤새도록 그 짓을 해볼 텐가?” 나르베니는 으르렁거리며 뾰족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녀는 양팔을 휘저었다. 무수히 많이 떠 있는 돌무더기가 한꺼번에 데라둘을 덮쳤다. 데라둘은 도저히 받아 칠 수 없는 그 숫자를 보고 칼을 늘어뜨렸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성장한다는 게 가능한 걸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 마흔이면 배움을 멈추고, 은퇴를 준비하고, 가르치는 즐거움에 빠져 단련을 게을리 하는 게 고작이었다. 데라둘도 그랬다. 그래서 웰치라는 젊은 영웅에서 패했다. 십 년 간 수없이 자신을 채찍질한 지금에야 데라둘은 대답할 수 있었다. ‘가능하다.’ 데라둘은 몸을 슬쩍 몇 번 돌리는 것만으로 그걸 다 피할 수 있었다. 조금 어렵겠다 싶었지만, 다시 해보라고 해도 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데라둘은 칼을 내밀었다. “지난 십 년간이 헛된 건 아니었군.” 그의 너무나도 여유 있는 모습에 나르베니는 그만 두려움을 느꼈다. “공격 하라.” 그녀는 급히 명령을 내렸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은 기사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데라둘은 세 자루 검을 모조리 피하고 밑에서 위로 칼을 올려쳤다. 기사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그는 휘두른 칼을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목을 내리쳤고, 다급히 물러서는 기사를 쫓아가 아직 몸에 남아있는 회전력을 살려 또 한 번 칼을 휘둘렀다. 검은 기사는 칼을 내밀어 막았으나, 그 칼까지 부러뜨리며 데라둘의 검은 투구를 깨뜨렸다. 데라둘은 젊은 시절부터 끈질긴 승부욕이 무기였던 기사였다. 상대가 잠깐 상처를 입어 물러나는 것에 멈추지 않는 게 버릇처럼 단련되어 있었다. 그건 지금처럼 나이 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데라둘은 부서진 투구를 붙잡고 물러나던 기사를 두 걸음 더 쫓아가 머리 위를 내리쳤다. 어깻죽지까지 잘려나간 검은 기사는 몇 번이나 발버둥치다가 움직이지 못했다. 데라둘은 눈을 돌려 나르베니를 노려보았다. 나르베니의 젖은 날개에 달린 검은 깃털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그녀는 당황하여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데라둘은 놓치지 않고 칼을 집어 던졌다. 그의 칼은 허공을 가로질러 막 떠오른 그녀의 어깻죽지를 맞췄다. 나르베니는 아까 화살에 맞아 떨어질 때와 달리 이번에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돌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졌다. 그녀는 꿈틀대며 바닥을 기었다. 데라둘은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등을 밟았다. “죽은 후에라도 그런 게 가능하다면, 네가 지은 죄에 대해 빌어라, 나르베니!” 데라둘은 어깨에 박힌 칼을 뽑아 높이 치켜들었다. 나르베니는 머리만 돌려 그 칼끝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그 순간 데라둘은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려, 분수에서 넘친 물로 가득한 광장으로 미끄러졌다. 데라둘은 아찔한 머리를 쥐고 일어났다. 나르베니는 날개를 접어 몸을 가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방금 공격은 그녀의 짓이 아니었다. 나르베니의 등 뒤로 회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 남자는 마치 연인이라도 되는 듯 나르베니의 어깨를 살짝 두 손으로 쥐었다. “놀라운 일이군. 공포의 전도사가 되어야 할 나의 아이가 오히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다니.......” 보이지 않는 로브 안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는 몇 백 살은 먹은 노인처럼 거칠었다. “아아, 용서하세요. 나의 주인이시여, 제가 패했습니다.” 나르베니느 흐느끼며 말했다. “아니, 아니, 괜찮아. 탓하는 게 아니야. 애초에 이 남자는 네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암, 넌 잘못이 없다. 나는 아란티아에서 보았지. 천 년 전에도 보았고, 십 년 전에도 보았지. 울프의 기사, 하얀 늑대들, 나마저도 물러나게 할 힘을 가진 인간의 기사들. 지금 저 남자는 아란티아의 축복에 초대받지 못했을 뿐, 그것들과 같은 힘을 가졌다. 내가 늦어 널 잃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르베니는 그의 어깨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라둘은 그 남자가 하는 말만 듣고도 그 정체를 짐작했다. “너로구나,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는 게.”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로브 안에 감춰진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 그리하면 너를 죽음 후에 있을 고통에서 구제하노라. 나를 믿고, 내가 죽음에서 무한히 자유로움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 역시 같은 자유를 얻으리라.” “내게 있어 자유는 이미 오래 전에 내 안에서 완성되었다.” “생과 사의 수레바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비꼬는 말도 아니었는데 , 데라둘은 마치 욕을 한 바탕 얻어들은 것처럼 불쾌해졌다. “내 검이 대답하리라.” “그럼 그 대답에 ‘나의 검’이 응하리라.” 데라둘은 그가 말한 검이 문자적 의미의 검이 아님은 바로 알았다. 그건 아마 마법적인 공격을 암시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데라둘은 자세를 낮추었다. ‘죽일 수 있을까?’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데라둘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자신의 지난 십 년을 믿었다. 자신의 성검을 믿었다. 그 검은 처음 네 마리 드래곤을 가넬로크에 내린 드래곤이 직접 하사하신 검이었다. 그 후 기사단의 캡틴에게로 대대로 내려온 검이자, 드래곤 기사단의 상징이었다. 즈토크 가넬!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데라둘을 향하고 있던 손을 돌려 어두운 골목을 가리켰다. 한 남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데라둘은 그 차분한 걸음걸이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그 희미한 윤곽을 보고, 굳게 칼을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네가 보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믿어라, 데라둘. 네가 보는 그대로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웃음을 잔뜩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데라둘은 도저히 눈앞의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 때문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안개 같은 뿌연 어둠을 해치고 걸어 나온 그 남자는 데라둘이 익히 알고 있는, 또한 너무나도 그리운 얼굴이었다. “악마여, 내 눈을 현혹하지 말라.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믿을 바에야 내 한 쪽 눈을 내놓겠다. 지금 이 일을 납득할 바에야 내 목숨 전부를 내 놓고 네 목숨의 반쪽을 빼앗겠다. 저 가짜를 내 앞에서 치워라.” 데라둘은 목이 메는 슬픔을 견디려 애쓰며 말했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남자와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내 목숨의 반쪽을 내놓고 증거 하노니, 네가 거짓이라 믿는 이것은 사실이다. 혹시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않아 잊어버렸는가? 그래, 원래대로라면 너와 함께 만나, 함께 은퇴하여 어느 곳에서 쓸쓸히 낚시질이나 하며 과거나 회상하며 살아야겠지. 나를 만나기 전에 그런 말을 하더군.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낚시하며 십 몇 년 살기에 딱 좋은 곳을 찾았다고. 그 대 나는 내 정체를 말했지.” 그 마법사는 기어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그리 똑 같은 반응을 보일 수가 있지? 그러니까 친구라는 거겠지. 보아라, 데라둘. 새끼 드래곤의 몸종이여. 여기 있는 건 네가 그토록 만나길 바라는 바로 그 친구다. 반갑지 않은가? 응?” “아니야.” 데라둘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주름진 그의 눈가를 따라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그 남자는 데라둘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늙어 있었다. 데라둘처럼 흰 머리가 조금 섞인 짧은 갈색 머리에 보기 좋게 기른 턱수염은 데라둘이 항상 그리워했던 친구의 얼굴 그대로였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팔뚝의 근육은 젊은이들처럼 탄탄했다. 대신 푸른 눈동자는 말라버린 듯 생기가 없었고,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야.......” 오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데라둘은 몇 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만나자는 게 아니었잖나, 그란돌?” 울프 기사단의 캡틴이 되었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 데라둘은 자기가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이 되었을 때보다 더 기뻤다. 자신의 친구가 자기보다 한 발 먼저 정상에 올랐다며 어린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드래곤의 기사단처럼 절차와 형식을 중시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금방 캡틴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은근히 친구가 앞질러 갔다는 것에 가벼운 질투심도 일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다시 아란티아에서 날아온 편지에는 그가 여왕의 수호 기사가 되었고, 자기 뒤를 이를 캡틴을 찾고 있다는 사연이 쓰여 있었다. 데라둘은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 평생 독신으로 살 자신이 있느냐고 우스개 섞인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 망나니 같은 녀석이 마음을 잡고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것에 흐뭇하기도 했다. 하얀 늑대들 네 명을 뽑았다는 편지를 받은 후, 데라둘은 자기도 경쟁적으로 제자를 키우려고 노렸했다. 새로운 캡틴, 퀘이언이 아란티아를 지켜냈다는 것에 자신의 제자가 그런 일을 한 것처럼 뿌듯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어느 날, 마지막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자만심이 도를 지나쳐, 새나디엘 폐하께서 크게 다치셨다. 자리에서 물러날 시기가 왔다. 조만간 찾아가겠다.’ 지독히 바쁜 엄무에 치여, 데라둘은 그 편지에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전후 처리와 무너진 가넬로크를 되살리기 위한 많은 일들을 추진하느라 잠깐 펜을 들 여유도 없었다. 그 오랜 친구는 결국 데라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5년 전, 여왕과 함께 가넬로크를 방문한 퀘이언 역시 데라둘의 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단지 여왕이 다쳤다는 일이 무엇인지 들은 게 전부였다. ‘마스터는 캡틴 웰치의 공격으로 폐하께서 부상당하신 걸 자책했습니다. 그 전부터 은퇴를 생각하고 계셨으니, 아마 그게 계기가 된 듯 합니다.’ 퀘이언은 데라둘이 어딘가 혼자서 유유자적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 생각해 버리는 게 편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길 원한 게 아니었다. 대륙 모든 검사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퀘이언의 스승이자, 메이루밀이 주저 없이 하늘 아래 최고라고 치켜세운 기사며, 전 아란티아 여왕의 수호기사였던 그란돌이었다. 그런 그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함께 나타나 자기에게 칼을 겨누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데라둘은 검을 든 친구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전의를 상실한 듯 멍청히 있었다. “자네도 꽤 늙었군. 나만 늙은 게 아닐까 걱정 많이 했는데.” 그란돌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데라둘은 정확히 그 공격을 막고, 반격으로 목을 공격하려고 손목의 균형을 바꿨다. 그러나 데라둘은 하려던 공격을 멈추고 도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란돌도 옆구리를 내리친 공격에서 뭔가를 기다리다가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앞으로 있을 두 가지 공격과 방어를 예측했고, 우선 물러나기로 선택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하긴, 우리 두 사람의 시작이 서로 죽이려고 싸웠던 것부터였지? 젊은 혈기에 지쳐서 기절할 때까지 싸웠으니, 이제 그 승부를 낼 때도 된 거라 이거군.” 데라둘은 큰 소리로 웃으며,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바라보았다. 멀리 성문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공격을 앞두고 자제력을 잃은 보즈들이 성벽을 타넘으려고 발악하는 소리였다. 일부는 나무 성문을 두들겼고, 그 소리가 이 곳의 공기까지 쿵쿵 울렸다. 데라둘은 그 긴박한 와중에도 전혀 다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그란돌의 공격을 기다렸다. 그란돌도 굳이 데라둘의 검이 펼치는 영역 안에 들어서지 않았다. 보고 있는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오히려 답답해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 끌어 위험하지 않겠나, 데라둘?” “급한 건 내 쪽이 아닐 것이다.” 데라둘은 눈을 감았다. 모즈들이 성문을 둟고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데라둘은 기다렸다. 그 순간 그란돌의 공격이 데라둘의 얼굴을 내리쳤다. 데라둘은 그 검을 막고 몸을 한 바퀴 돌려 반격했다. 몇 번이나 서로의 검을 쳐내며 접전이 벌어지는 동안, 데라둘은 메이루밀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 멍한 눈동자를 하고도, 그란돌은 자신의 검술을 정확히 펼치고 있었다. 그 엄청난 공격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단 한 번도 자넬 이겨보지 못하는군.’ 데라둘은 그란돌의 검을 세게 쳐서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물론 그 정도로 그란돌을 찌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몸을 돌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에게 달려가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느닷없이 공격 목표를 자기로 잡고 달려오는 데라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검은 불길이 타오르더니 스스로 날개를 갖고 데라둘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데라둘은 순식간에 칼을 휘둘러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날아오는 검은 박쥐 같은 것들을 쳐냈다. 마법사는 뒤로 한 걸음 길게 뛰었으니, 데라둘은 그 움직임마저 따라잡았다. 달아나는 상대를 따라잡는 건, 상대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만 내 명령을 따라다오. 늙어버린 몸이여. 조만간 쉴 시간을 주겠다.’ 데라둘은 로브를 펄럭이며 물러선 마법사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길게 손을 뻗었다. 그의 검은 정확히 마법사의 가슴을 꿰뜷었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서 따라온 그란돌의 검이 데라둘의 등을 뚫고 배를 빠져 나왔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찌르고 있었다. 데라둘은 멍한 표정의 그란돌을 돌아보았다. “죽은 후에 기회가 되면, 꼭 이 일을 사과하게....... 친구.” 그 때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데라둘의 검을 움켜쥐었다. “네 어리석음이 내린 해답이 고작 이런 거냐? 감히 가넬의 검 따위로 나를 저지하려 들다니!” 데라둘의 검이 쩌억 금 가더니 가슴에 박힌 채로 재가 되어 타버렸다. 지지대를 잃은 데라둘은 천천히 허물어졌다. 마법사는 쓰러지는 데라둘의 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배에서 빠져 나온 칼날을 타고 붉은 피가 밑으로 주루룩 흘렀다. “나, 나는 실패했드나...... 가, 가넬로크는 패하지...... 않으리라.” “로크에 남겨놓고 온 멍청한 애송이들이 날 막을 수 있으리라 보는가?” 마법사는 로브를 벗었다. 그 순간 데라둘은 눈 앞의 광경을 죽기 전에 보는 환상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자신의 목을 움켜지고 있는 이 괴물 같은 마법사는 다름 아닌, 아란티아를 구한 루티아의 영웅, 테일드였다. 테일드는 십여 년 전 잠깐 봤던 그 모습 그대로 허약한 듯, 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사악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그 때와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잘 가게, 캡틴 데라둘.” 테일드의 손 안에서 데라둘의 목뼈가 부러졌다. 데라둘은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면서 밤하늘을 올라가는 효시의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앤발디의 여기저기에 놓아둔 짚더미에 불을 붙이거나, 기름 뿌린 지붕에 횃불을 집어 던졌다. 커다란 마을은 단숨에 불길에 휩싸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모즈들의 찢어지는 괴성이 이어졌다. 데라둘은 희미해져 가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환청처럼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미안하네, 친구.’ 데라둘은 그 목소리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했다. 불 타오르는 앤발디를 바라보는 그란돌의 멍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테일드의 얼굴을 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그 모습을 보고 싱겁게 웃었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정도로 이성이 남아있는가?” 그란돌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르베니가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이 자를 완전히 수중에 넣지 않으셨습니까? 저라면 그냥.......” “함부로 나서지 마라, 나르베니. 이 자의 검술까지 내가 조종할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이 정도가 가장 좋다.” 그의 뒤로 익셀런 제 1 기사단의 캡틴 빅터가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내려와 보고했다. “오백 마리 정도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작전 좋군.” “제가 우려했던 대로입니다. 왜 앤발디를 굳이 공격하라고 명하셨습니까? 여길 손에 넣지 않아도 로크를 치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빅터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데라둘 하나 죽이는데, 모즈 오백이면 굉장히 싼 거지. 하얀 늑대 한 마리 없애는데, 네이슨을 잃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런 실수는 또 없을 겁니다. 이제 로크로 진격하겠습니다.” “좋다. 나르베니는 앤발디에서 도망친 녀석들을 쓸어버려라.” 그는 다시 회색 로브를 뒤집어 썼다. 동쪽에서 천천히 뜨고 있는 태양은 북쪽 땅까지 밝히고 있었다. “나딜, 내가 인간 세상에서 가장 큰 두 가지 힘을 가졌을 때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이제 인간이 볼 수 있는 아침의 태양이 얼마 남지 않았도다.” 11. 리마 성 로크의 방비에 관련된 작업은 더욱 빨라졌다. 몇 년 전에 큰 전쟁을 치러보기도 했고, 얼마 전에 큰 사건도 있었으니 카셀은 다가오는 전쟁에 시민들의 공포가 클 거라고 보았다. 그러나 의원들은 그들을 구슬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들었다. 의회 안에서만 입을 놀릴 줄 아는 인간들이라고 욕하던 타냐도 그들의 행동력을 칭찬했다. 로크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의회 의원의 과반수 찬성으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로크 경비대의 캡틴 느하로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붉은 장미 백작의 군대를 직접 찾아가 그 쪽 지휘관과 의견을 교환했다. 서로 다른 나라의 지휘관 두 사람이 쉽게 의견을 조율하기는 어려웠으나, 그래도 짧은 시간만 지낸 걸 감안하면 많은 발전을 이룬거라고 카셀은 생각했다. 타냐는 바빠서 그 때 같이 한 저녁 식사 이후 한 번도 드래곤 기사단 건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밤을 새서 그랜드 로크의 마법사들을 가르치거나, 모즈들의 독에 대비한 해독제 개발을 도왔고, 리펜다스 의장을 비롯한 이부 직책 높은 마법사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 짧은 시간 안에 커다란 전쟁을 준비하는 만큼 그 중심에 있는 타냐가 바쁜 건 당연했다. “당연할 걸 알면서도 보고 싶은 건 아직 내가 철이 덜 든 걸까?” 남쪽 성 망루에 서서 하소연하는 카셀의 말을 듣고 제이가 대꾸했다. “보고싶으면 보러 가면 되지.” 문제는 카셀도 바쁘다는 것이었다. 사실 타냐 다음으로 바쁜 사람도 카셀이었다. 이렇게 겨우 시간을 내어 제이와 만나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경비 상황을 보는 일을 겸한다는 핑계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라이는 항상 옆에 끼고 다니고 있었으나, 별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카셀은 타냐에 대한 언급을 더 하지 않았다. 제이의 말이 정답이었다. 보러 가고 싶으면 보러 가면 그만이었다. 바쁘다는 건 언제나 인간관게에 있어 피하기 가장 좋은 핑계거리였다. “너, 타냐랑 같이 있는 거 부담스럽지?” 난간에 양팔을 늘어뜨려 걸치고 있는 제이는 눈만 돌려 카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카셀은 제이를 흉내 낸 포즈로 팔을 늘어뜨리고 투덜거렸다. “제이메르한테 분석 당하다니.......” “장난하지 말고 말해 봐!” 카셀은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맞아.” “어째서? 타냐가 보는 것 이상으로 널 좋아하고 있는 건 옆에 있는 내가 봐도 티 나더라. 그 여자가 그 정도 티 내는 거면 확실한 거 아니냐? 대체 뭐가 부담스러워?” “사태를 단순화시키지 좀 마. 그런 건 솔직히 좀...... 아아, 타냐와 얼굴을 맞대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던 크나딜의 동굴 안이 내게는 가장 편했던 것 같아.” “너무 예뻐져서 오히려 싫어졌나?” “싫어진 건 아니야.” “카셀, 내 주제에 인간관계에 관해 충고하는 건 말이 안 되지만...... 너, 타냐랑 한 번 자버려.” 카셀은 어처구니가 없어 벌린 입을 다물었다 열었따를 반복하다가 제이의 어깨를 한 대 쳤다. “그런 것도 충고냐?” “뭐, 내 경우에는 정을 쌓는 것보다 그게 더 빨랐으니까 하는 말이다. 너처럼 여자를 너무 소중히 여기는 나머지 쩔쩔매는 녀석은 차라리 그런 일을 겪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다.” 카셀은 몇 마디 퍼부어 주려다가 또 입을 다무었다.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맞는 것도 같았다. “아, 빌어먹을 남자의 본성이라니. 너 때문에 타냐 얼굴 더 못 보게 생겼다. 볼 때마다 네 충고가 생각날 것 같아.” “그런 건 원래 한 번 저지르고 나면 더 생각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제이를, 카셀은 장난이 아닌 진짜로 한 대 치고 싶었다. “요는, 우리들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다.” 제이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너도 그런 생각 해?” “루티아에서 모즈들과 싸워봐서 알아. 그런 놈들이 몇 백이 아닌 몇 천이 몰려온다면, 여기 군대로는 못 막아.” 카셀은 놀라 주위에 다른 사람들 없나 살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그 괴물 한 마리가 훈련된 병사 셋은 잡겠더라. 로일, 던멜은 네가 누누이 최고라 말했지? 나와 그렇게 셋이 힘을 합쳤어도 우리는 백 마리 조금 넘게 잡는 게 고작이었어. 그것도 꽤 위험했지. 그런 놈들이 1만? 2만? 포기해라, 카셀. 로크는 무너진다.” “시끄러워. 그렇게 무서우면 너부터 도망쳐라?” 제이는 드물게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셀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버릴까?” 카셀은 그의 농담이 오히려 불안했다. “너, 무슨 일 있었어? 요새 가끔 이상한 말 하더라?” “난 원래 이상하게 말했어.” 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늘어뜨린 양 팔을 난간 밑으로 대롱대롱 흔들거리고 있으니, 의욕 없어 괜히 한 번 자살 생각해보는 사춘기 소년 같았다. “그런데 드래곤 기사단이 떠나고 사흘 정도 지나지 않았나? 왜 소식이 없지?” 카셀도 그 부분이 궁금했다. 앤발디가 무사하다면 무사하다는 소식이, 함락되었다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올 때가 되었다. 그건 의회에서도 걱정하는 일이었다. “드래곤 기사단을 걱정해주네. 웬일로?” “거기에 어떤 녀석을 달거든. 그 놈한테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두 사람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한참이나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카셀이 이 짧은 휴식을 끝내고 일어서려 할 때 내내 뒤에 없는 것처럼 서 있던 라이가 말했다. “사람들이 공격당하고 있다.” “어디서?” 카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라이는 여태껏 카셀이 바라보고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저 곳.” “어떤 사람들?” 카셀과 제이는 고개를 길게 빼고 라이가 가리킨 방향에 뭐가 보이는지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인간의 시력으로 레미프의 시력이 닿는 곳을 내다보는 건 무리였다. “검은 기사들이 셋. 공격하는 쪽, 백 스물. 일반인과 기사, 섞였다. 기사는 열 명 정도.” “일반인?” 카셀은 뭔가 생각나는 바가 있어 황급히 말했다. “라이, 지금 저들을 구해줄 수 있겠어?” “있다.” “그럼 뭘 기다려?” 라이는 날개를 펼쳤다. 그 때 제이가 라이의 앞에 섰다. “나도 데리고 가라. 나 하나 정도는 들고 날 수 있지?” 라이는 제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고, 그저 보고만 있다가 대답했다. “좋다.” 라이는 제이를 뒤에서 끌어안더니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조금 무거웠는지 바닥까지 거의 떨어지는 듯 하더니 곧 위로 활공해 올라갔다. 카셀은 말없이 둘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제이메르 이 녀석, 높은 곳은 싫어한다더니 왜......?” 제이는 높은 곳은 질색이었다. 지붕에 앉아 있는 건 은근히 짜릿해서 좋지만, 절벽 위나 탑처럼 아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높은 지대는 싫었다. 그러니 디딜 곳 없이 매달려 하늘을 나는 건 고통 그 자체였다. 라이는 그런 제이를 고려하지 않고 몇 번이나 격렬한 날개 짓으로 그저 눈 앞만 집중했다. 과연 라이의 말대로 검은 기사들 셋이 로크 쪽으로 달리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고 있었다. 그들 중간에 끼어 있는 기사들 몇 명이 그걸 저지하고자 했으나, 황소처럼 앞에 있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들이받으며, 달리는 말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라이는 최대한 바닥에 닿을 듯 낮게 날았다. 제이는 발이 닿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라이가 나는 속도에 맞춰 바닥을 달리다가 라이가 두 팔을 놓자, 제이는 바닥을 심하게 굴렀다. 하지만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으로 단련된 그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약간 긁힌 것 빼고는 별로 다치지도 않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의 옆으로 피로에 찌들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사람들이 스쳐갔다. 그 행렬의 가장 끝에서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제이는 그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나와 하늘 산맥의 엘프가 맡겠다. 계속 달려라.” “죽지 않는 자들이오. 우리는 스무 명이나 희생하는 와중에도 저들을 필사적으로 공격했느나, 몇 번을 찔러도 죽질 않았소.” 기사 중 하나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제이와 라이가 나타나 준 것을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 검은 기사 하나가 제이에게 달려왔다. 제이는 두 자루 칼 중 한 자루만 뽑아 두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기사를 밀치며 앞에 섰다. “카셀이 말해준 것에 따르면.......” 검은 기사가 몰고 달려오는 말은 엄청나게 빨랐다. 제이는 그 위에서 휘두르는 창을 피해 고개를 숙이더니 바닥을 쓸 듯이 달리는 말의 앞다리를 하나 베어버렸다. 달리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넘어지는 것도 요란했다. 말 위에 타고 있던 검은 기사는 먼지를 일으키며 열 걸음 넘게 바닥을 미끄러졌다. 제이는 느긋하게 다가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검은 기사의 머리를 칼로 날려버렸다. “......죽여도 바로 부활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 그 사이 하늘에서 활공해서 내려간 라이가 검은 기사 하나를 낚아채 하늘로 올라갔다. 검은 기사는 그 묵직한 쇠주먹으로 라이의 가슴과 배를 치며 저항했으나, 오히려 라이의 무릎에 얻어맞았다. 라이는 그 높이에서 검은 기사를 떨어뜨렸고, 바닥에 추락한 검은 기사는 산산이 조각났다. 남은 검은 기사 하나는 동료 둘의 죽음에도 별 동요를 보이지 않고 칼을 내밀었다. 앞발로 바닥을 긁는 말이 강한 투지를 보이며, 제이를 노려보았다. 검은 기사를 향해 날아가는 라이를 보고, 제이는 손을 내밀었다. “내가 상대한다. 저 놈이랑 해결할 일이 좀 있어서.” 라이는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오던 속도를 늦추더니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제이의 부탁대로 더 접근해오지 않았다. 제이는 칼끝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방금 죽은 두 놈 중에 날 겁주던 그 놈이 있냐, 아니면 네가 그 놈이냐, 아니면 너네들 모두 그런 이상한 짓들을 할 수 있는 거냐? 어느 쪽이든, 어디 네 투구 안의 얼굴을 보여 봐라. 이제 더 이상 그런 걸로 날 어쩌지 못하니까.” “그런다고 너의 공포를 없앨 수 있을 것 같은가?” 갑자기 듣기 싫은 괴물의 목소리도 아니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도 아닌 또렷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 투구 안에서 나왔다. 그 목소리는 아버지 티온의 목소리였다. 검은 기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제이의 주위를 어둡게 물들였다. 그러나 제이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없어진다고 말 안 해. 그 때도, 지금도......” 그는 무서웠다. 어린 시절 두려움의 전부였던 사람을 컸다고 두렵지 않다 라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었다. 제이는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달려갔다. 검은 말은 앞발을 치켜 세우며 단숨에 제이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기사의 창이 제이의 목을 겨냥하고 날아왔다. ‘한 걸은 반!’ 창날이 제이의 어깨를 스치며 바닥에 내리 꽂혔다. 그리고 제이의 칼은 말의 목을 베고 그 위에 타고 있는 검은 기사의 옆구리까지 벴다. 머리가 날아간 말이 바닥을 구르고 그 위에 있던 검은 기사도 말과 함께 몇 바퀴를 굴렀다. 검은 기사의 다리 한 쪽과 팔 하나가 덜어져 나갔고, 마지막으로 투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안에는 자신의 칼에 죽은, 8년 전의 아버지가 있었따. “또 한 번 나를 죽일 셈이냐, 아들아? 넌 평생 나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한다. 평생, 죽는 그 순간까지.” “안 그럴 거다!” 제이의 칼이 그의 목을 베었다. 검은 연기가 폭발하며 옆으로 흘러나갔다. 제이는 빠르게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돌아서따. 머리 없는 말과 머리 없는 기사가 서로 뒤엉켜 꿈틀대다가 죽어가는 모습은 그리 오래 볼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이는 어딘지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아버지는 죽어가면서 그런 구차한 말은 안 했다.” 갑자기 브란더의 말이 떠오르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네 말이 맞아, 브란더. 내가 아버지의 죄를 갚을 필요는 없지.“ 걸어가는 제이 옆으로 라이가 다가왔다. “검은 기사, 너, 둘이서, 무슨 말, 했나?” “집안 문제다. 관심 갖지 마라.” “뭐?” 라이가 손을 내밀었다. “날아가자. 멀다.” “싫다.” “그럼 나 혼자 간다.” “혼자 가라.” 그러자 라이는 혼자 날아서 갔다. “진짜 혼자 가네.” 제이는 투덜대며 앞서가고 있는 드래곤 기사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피곤하지만 안도하는 눈빛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정말 고맙소.” “꼼짝 없이 전멸 당하는 줄 알았소.” “말 위에 탄 기사를 그런 식으로 공격하는 건 처음 봤소. 나중에 좀 가르쳐 주시오.” 그 중 하나는 전에 제이와 시비가 붙었던 바로 그 기사였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손만 슬쩍 들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제이도 손을 들어주고,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다가 말했다. “브란더는?” “아, 저 그 문제는.......” 한 명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는 빠져 나오지 못했소.” 상황은 간단했다. 앤발디에서 빠져 나온 시민들의 절반 저오는 무사히 근처 다른 도시로 피했으나, 나머지 절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제이와 라이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드래곤의 기사 그라쿠스의 말에 따르면, 검은 날개를 펼치고 있는 악마가 동료들을 모두 태워 죽였고,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검은 안개에 휩싸여 미라처럼 말라죽었다고 했다. 결국 브란더라는 기사는 앤발디의 북쪽에 있는 ‘리마 성’으로 약 오백여 명의 사람들을 피신 시켰다. 동료인 텐드로스는 퇴로가 없는 리마 성에 모두 갇혀 있다간 학살당할 거라고 보고, 일부 시민들 빼내어 로크 쪽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적에게 그 경로를 추적 당했다. 이 과정에서 텐드로스와 기사 스무 명이 죽고, 시민들 백여 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건 제이와 라이가 구출한 사람들이 다였다. “리마 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의 병력은?” 루에머스 집정관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저희들이 빠져 나오던 당시에는 괴물들만 약 오백여 마리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괴물보다 죽여도 죽지 않는 검은 기사들과 하늘에서 저주를 쏟아 붓는 그 악마입니다. 텐드로스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리마 성을 계속 지킬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아시다시피 군량도, 마실 물도, 무시도 없지요. 애초에 방어를 위해 지어진 곳이 아닙니다.” 그 기사의 말에 옆에 앉은 카셀이 물었따. “리마 성이 어떤 곳이죠?” “봉화대를 지키기 위한 작은 성채입니다. 지하가 넓어 당장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르나 퇴로가 없어서.......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로크 수비대의 캡틴 느하로우와 일부 의원들, 참모들이 당장 웅성대며 그곳의 시민들을 구하러 가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살아남았음을 오히려 죄책감으로 여기는 그라쿠스는 그들을 구하러 가는 어떤 작전이든 자기가 가장 앞에 서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리마 성까지 말을 타고 전력 질주해도 반나절 거리였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시기에 가장 귀중한 전력이 되어줄 기마병을 많이 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보병들을 이끌고 가면 그 다음날 도착할 텐데 그때까지 리마 성이 버틸 수는 없었다. 아니, 이미 함락했을 지도 몰랐다. 열성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그라쿠스의 밀대로 드래곤 기사단 스무 명과 로크 수비대의 기마병 백여 명이 지원을 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순간이었다. 카셀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루에머스도 입을 열지 못했다. 또 느하로우를 보좌하는 나이 많은 참모관도 안전부절 못했다. 루에머스가 펜을 들어 뭔가를 써서 카넬에게 밀었다. 루에머스는 짧은 문장 안에 자기 의견을 모두 담았따. ‘당신이 말하시오. 나와 참모는 말할 수 없다.’ 카셀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루에머스가 옳았다. 집정관은 절대 말할 수 없는 문제였다. “원군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원로 의회의 대표로 나선 의원이 턱수염까지 바르라니 떨며 말했다. “지금 캡틴께선 이백 넘는 사람들의 생명을......, 포기하자는 말씀이시오?” “닥치시오. 의회에 출입할 권리조차 없는 사람이 그런 명령을 내릴 자격은 있소?” 원로의원의 말에 원탁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혼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라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포함입니까, 의원?” 붉은 입술에서 새나오는 하얀 담배 연기가 회의실 천장을 뿌옇게 흐렸다. 그녀가 내미는 담배 파이프 아래로, 옆에 있는 경호 기사가 은잔을 내밀어 재를 받았다.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자리에 앉혀놓고 하는 군사작전 이라는 체제라 해도, 타국에서 와서 발음조차 여러분들 귀에 이상하기 짝이 없는 제가 나설 수는 없죠. 하지만 캡틴 울프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걸 여러분들 모두 알고 계시지 않나요? 아니면 제가 너무 전략전술에 대해 모르는 건가요? 루에머스 집정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금도 강압적이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에 원로의원은 기가 죽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가지는 힘을 아주 잘 알았고,, 그걸 가장 적절하게 이용하는 법도 알았다. 카셀은 입이 아닌 행동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녀의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경계했다. 타냐가 누누이 경고했듯, 그녀는 적이 될 수도 있는 여자였다. 루에버스 집정관은 나직이 말했다. “적군의 위치가 어디인가가 중요하겠군. 현재 예상 위치는 어디요?” 늙은 참모가 조심스레 말했다. “레오피오에서 앤발디에 다다른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경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속도로 앤발디를 떠났다면, 오늘 밤......, 아니 최악의 경우 이미 도착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원군 포기에 대한 캡틴 울프의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참모는 잛게 답했다. “동의합니다.” “나도 동의하오.” 루에머스는 조용히 모두를 응시했다. 드래곤의 기사가 당력히 반발했다. “지, 지금 드래곤 기사들을 포기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리마 성에는 일반 백성만 있는 게 아닙니다. 드래곤 기사들도 사십여 명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시겠습니까?” 말하는 상대는 루에머스였으나, 증오의 대상은 카셀이었다. 카셀은 처음 입을 열 때부터 그 증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셀은 천천히 말했다. “리마 성의 그 검은 악마라면 나르베니일 것이고, 나르베니가 있다면 마법사 없이 그 곳을 단 한 순간도 지킬 수 없습니다. 기마병을 백이 아닌 이백을 데려가도 나르베니를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카모르트에서 몇 백 명의 병사들이 검은 기사 열두 명을 막지 못해 단숨에 무너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마법사를 데려가면 되지 않소?” “나르베니를 막을 마법살르? 마스터 타냐더러 로크를 비우란 거요?” “어, 어쨌든 우리 드래곤 기사단은 이틀 째 그들을 막고 있습니다!” “적이 일부너 내버려 두고 있는 겁니다.” 적의 작전은 지나치게 단순하여 카셀에게는 그 자체가 함정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것은 루티아의 반복이었다. “적은 이 쪽에서 원군을 그곳으로 보내길 원합니다. 고통스럽게 쫓기는 당신들을 로크까지 보내주면서요. 더 심하게 말하자면, 당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라는 것. 그래서 원군을 보내라는 것, 그게 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 충격이 큰 그라쿠스는 침울해진 얼굴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러나 리마 성은.......” 경비대의 느하로우는 뭔가 강하게 이의를 표하러 했다. 카셀이 말을 기다려주니, 되려 말을 잊지 못했다. 카셀이 말했다. “여러분. 적은 가넬로크를 무너뜨리는 걸 시작으로 대륙 전체를 무너뜨릴 준비를 마치고 하늘 산맥을 내여왔습니다. 그런 고대의 적이 고작 리마 성 하나에 애를 먹을 이유는 없습니다. 리마 성 자체가 함정입니다.” “캡틴 울프의 의견에 동의하겠소.” 루에머스는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게 아닐, 카셀의 의견에 동의한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 잔인한 결정을, 집정관으로서 힘겹게 내린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카셀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노려보는 의원들과 기사를 뒤로 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바깥의 찬 공기를 맡자, 갑자기 속에서 뭔가 울컥 솟아올랐다. 카셀은 입을 막고 벽에 손을 짚었다. 힘을 잃은 팔뚝이 격렬히 떨렸다. ‘왜 이러지?’ 리마 성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아니, 실제로 그 끔찍하고 선명한 영상이 방금 전 겪은 기억처럼 머리 속을 들었다가 놓았다. 리마 성은 불타고 있었다. 그 불길 속에 사람들이 까맣게 타거나, 진흙 속에 파묻혔다. 그 시체 위에 검은 날개를 한 여자가 카셀을 보더니 깔깔대고 웃었다. 죽은 사람 모두의 얼굴이 다 아는 사람같았다. 그들이 죽을 때 겪은 고통이 모두 전해지는 것 같았다. 보검 손잡이에 박힌 보석이 빛을 내고 있었다. 카셀은 보검을 꽉 잡았다. ‘당신이 보여주는 모습입니까, 즈토크 워그? 바꿀 수 없는 미래라면 보여주지 마십시오.’ 화강암을 말끔하게 깎아 만든 하얀 바닥에 카셀의 눈물이 떨어졌다. 그 눈물 자국 옆으로 커다란 늑대의 발이 다가왔다. 카셀은 얼굴을 들어 무릎 꿇은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느개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내, 내가 왜 이러는 거죠? 거기서 곧 죽을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보이고 있어요. 내가 내린 결정으로 죽고 있다고요. 내가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전쟁터의 사람들이 체스 판의 말이 아닌데, 내가 그럴 권리가 있습니까?” 카셀은 늑대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은빛 털이 카셀을 포근하게 감쌌다. “무서워요, 타야. 이보다 더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 같아 무서워요.” 늑대가 앞발을 들어 카셀의 등을 감쌌다. 그 몸은 천천히 인간의 몸으로 바뀌었다. 타냐는 자신에게 힘없이 매달린 카셀을 두 손으로 안으며 말했다. “그 결정 옆에는 반드시 제가 있겠습니다, 카셀. 그 죄를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타냐는 적의 선두 부대가 이미 남쪽 평원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늑대로 변하여 전력을 다해 달려왔던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카셀을 안아주었다. 지금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타냐도 무서웠다. 그녀의 눈에는 불타는 리마 성이 아닌, 불타는 로크가 보이고 있었다. 무너진 세 개의 탑이 보였다. 이미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내민 손길이 두 사람을 지배해가고 있었다. “지지 마십시오, 카셀. 지지 말아요.” 타냐는 크나딜의 동굴에서 카셀이 자기에게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살아있으면 계속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일로 더 성장할 수 있어. 나는 적의 캡틴에게 패했고, 많은 유능한 기사를 잃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 일을 수치로 여기지 마라. 다시 일어설 수 없다면, 그게 수치다. 드래곤이 없어도 우리는 드래곤 기사단이다. 드래곤께서는 돌아오신다. 그 때 우리가 엉망으로 무너진 기사단을 보여드려야 하겠는가?’ 데라둘은 패퇴하고 쓰러진 기사들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는 앤발디에서 죽었다. 브란더는 부모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만큼이나 통곡했다. 리마 성에는 이제 먹을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게 언제인지 브란더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밤은 길었고, 지쳐 잠든 사람들은 마른기침을 하며 뒤척였다. 어둠 속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브란더, 자네 차례야. 한숨 자라.” 동료가 다가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브란더는 메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여 대답했다. “됐어. 어차피 잠도 안 와.” “어제도 못 잤잖아.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 “괜찮대두.” 그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계단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원군이 올 것 같나?” 그의 질문에 브란더는 대답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이 많았다. 잠들지 못하는 늙은이나, 힘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아낙들, 부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앤발디의 병사들....... 브란더는 그들을 보다가 대꾸했다. “반드시 올 거야. 하루만 더 버티면 살아남을 수 있어. 설마 하니 드래곤 기사들이 마흔 명이나 생존해 있는 이 곳을 버리겠어?” “그런가?” “산책이나 하지.” 브란더는 절룩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올라갔다. 하늘에는 약간 구름이 있었으나, 맑아서 별도 달도 잘 보였다. 최근에는 날씨가 줄곧 괜찮았다. “내가 로크 쪽 사령관이라면, 원군 같은 건 보내지 않는다.” 브란더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뭐? 아, 아까는.......” “듣는 귀가 많아서 거짓말 했어.” 브란더는 차갑게 말했다. 전투를 위해 설계된 건 아니라 해도, 리마 성의 성벽은 쉽게 오를 만큼 낮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은 이 높은 성벽도 한 번에 뛰어 넘어와 기사들을 몇 명이나 베고 되돌아갔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무너져갔다. 살아남은 마흔 명 중에 몸이 성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브란더도 검은 기사 둘을 상대하다가 허벅지를 창에 찔렸다. 걸을 때마다 비명을 지를 만큼 아팠지만, 어차피 약고 없고 쉴 시간도 없으니 아픈 척 안 하는 게 나았다. 불로 지져 소독한 자리는 가끔씩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저길 봐라. 저 많은 괴물들이 그저 포위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 도망을 못 가게 하는 거다. 죽이지도 않는다. 천천히 괴롭힐 뿐. 로크에서 원군이 오길 기다리는 거다. 우린 미끼야. 이런 미끼에 빠지는 놈이 로크에 없길 바라야지.”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냐, 너는?” “캡틴 데라둘께서 작전 중에 돌아가셨다. 그 시체를 버리고 온 우리들이 무슨 자격으로 살아 있으려 하느냐? 다만 내 책임으로 데려온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만 있는 거지.” 브란더는 성벽 위 좁은 난간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잠이 없는 괴물들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을 어슬렁거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들은 무기 없이도 드래곤 기사들과 상대할 만큼 막강했다. 갑옷을 뚫을 수는 없어도 그 발톱과 이빨에 스친 기사들은 모조리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독 때문이라는 걸 알아도 약이 없으니 무의미했다. 브란더는 갑자기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내가 있었어야 했다. 그 때 캡틴 데라둘을 강제로 밀어내서라도 그 작전을 내가 맡았어야 했다. 나느 그만 명령이라는 변명 때문에 그 분을 가장 위험한 곳에 팽개치고 도망친 거야.” 브란더는 분을 삭이지 못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다른 기사들도 놀라 돌아보았다. “캡틴의 고집을 알면서 그러나? 자네가 그런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캡틴 자리를 받아 들였으면 그만이었다.” “브, 브란더 네가?” “캡틴께서는 계속 내게 그 자리를 맡으라 하셨다. 하지만 드래곤 기사단의 캡틴은 오직 드래곤만 지명할 수 있다. 내가 그 정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규칙을 깨는 첫 번째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듣고 있던 동료가 브란더의 어깨를 짚었다. “브란더, 정말 캡틴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지금이라도 네가 캡틴을 맡아라. 비상시다. 규칙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걸 어겨서라도 지휘 체계를 확실히 해야 하지 않은가?” “내 말을 듣지 않았나? 나는 캡틴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럴 자격이 있다 하더라도 캡틴을 앤발디에 버리고 온 순간 사라졌다.” 밤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어두웠다. 적들은 예고 없이 공격해 왔다. 이제 또 검은 기사들이 이 성벽을 넘어오면 또다시 몇 명이나 죽을 것이다. 그런 고통스러운 고문이 몇 번이나 계속 되어야 끝을 낼 것인가? “나를 저주한다. 데라둘을 죽인 게 나라면 대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 죄를 씻을 수 있단 말인가?” 브란더는 갑옷을 모조리 벗어 던졌다. 안에 겹쳐 있는 사슬 갑옷까지 벗어 성벽 밑으로 던져 버리더니 칼 한 자루만 들고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착지하는 순간, 아물어 가는 허벅지의 상처가 또 한 번 터졌다. 경계를 서고 있는 동료들이 소리 쳤다. “브란더, 무슨 짓이냐? 올라와라.” 마침내 성벽을 내려온 먹이 감을 발견한 괴물들이 냄새를 맡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검은 기사들도 브란더를 첫 번째 타깃으로 잡았다. 브란더는 목청껏 소리쳤다. “나르베니, 들어라! 드래곤 기사단의 브란더가 말한다.” 검은 기사들이 다가오다가 말을 세웠고, 괴물들도 누군가의 명령으로 멈췄다. 검은 기사 중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다가 곧 인간의 언어로 바꾸었다. “어제 나를 벴던 그 녀석이군. 무슨 미련이 남았나? 협상은 없다.” 브란더는 그가 자신의 허벅지를 벤 기사임을 알았다. 드물게도 그 검은 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앤디’라고 밝힌 후에 공격했다. 그의 실력은 대단했지만, 브란더의 실력을 따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앤디는 목이 떨어지고도 브란더의 허벅지에 부상을 입히고 쓰러졌다. 물론 앤디는 지금 멀쩡한 몸으로 브란더 앞에 당당히 말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너에게 할 말이 아니다. 너의 군주를 데려와라.” “너 따위 앞에 나설 분이 아니다.” 브란더는 잠시 앤디를 바라보다가 허공에 대고 소리 질렀다. “나르베니, 가넬로크에 대한 그대의 맹세는 어디 갔는가? 그대의 흉측한 형상에도 귀가 있다면 그대가 값어치 없이 맹새한 충성심에 배신당해 죽어간 사람들의 원성을 들으라.” “원성? 난 안 들리는데?”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동쪽에서 다가와 브란더 앞에 섰다. 밤의 여왕이 남자를 유혹하려고 몸맬르 한껏 드러낸 것 같은 모양새로 나르베니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서 몇 명의 동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던가. 브란더는 그녀의 미소가 증오스러웠다. 나르베니는 장난스럽게 귀에 손을 댔다. “나보다 귀 좋은가 봐. 그런 것도 들리게.” 브란더는 이가 갈리는 분노를 참고 말했다. “한 때 여성 집정관으로서 당신의 열정을 존경한 나를 증오하노라. 데라둘의 분노를 이어 받아 나의 통찰력 없는 영혼을 이 자리에서 불 태워 그 불길로 너를 베겠다. 내가 하지 못하면 나의 동료들이 할 것이다. 나의 동료들이 못한다 하더라도 천 년을 이어온 드래곤 기사단의 누군가가 언제고 너를 처단하리라.” “천 년이면 오래도 했지, 뭘. 끊길 때도 되지 않았어? 아직은 날 존경해도 좋아. 드래곤 기사단을 박살낸 가넬로크의 집정관으로서!” 브란더는 성벽에 대고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기사들은 칼을 들어라. 우리가 로크의 미끼가 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모두 죽으라. 죽음으로 우리의 마지막 용기를 적에게 보여주리라.” 나르베니는 깔깔대고 웃었다. “멍청한 기사 놈들의 답답한 기사도의 결론이 그러야? 자살? 까불지 마라, 브란더. 아무도 네 명력에는 따르지 않아. 넌 캡틴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렇게 죽고 싶으면.......” 브란더가 잠깐 성벽 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에 나르베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등 뒤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냥 내가 죽여줄까?” 브란더는 칼을 등 뒤로 휘둘렀다. 그러나 허공만 그었고, 나르베니는 또 아까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기 뺨을 두들기며 말했다. “로크에 짐이 되지 않게 하겠다고? 좋은 생각이야. 그래, 죽으렴. 그 후에 난 저 성 안에 어린 아이들을 창대에 꽂아서 로크에 데리고 갈 거야. 여자들은 벗겨서 거꾸로 매달아 까마귀 먹이가 되게 할 거야. 나머지는 사지를 따로 떼어서 로크의 성벽 너머로 선물로 줘야지. 그래도 너희들의 영혼이 깨끗하다고? 직무유기에요, 드래곤의 기사님. 지켜야할 어린 양들을 끝까지 지켜야지요.” 나르베니는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다시 요점 정리해서 말해줄게. 그런 건 개죽음이야.” “생명의 가치를 논하지 말라.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 나는 드래곤의 기사다. 나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드래곤과 드래곤을 따르는 기사들뿐이다!” 성문이 열렸다. 기사들이 열린 문으로 천천히 걸어와 하나둘씩 브란더의 등 뒤에 섰다. 부상당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기사들은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누구 하나 몸 성한 이가 없었으나,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브란더는 뒤에 누가 있는지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자기 혼자서라도 나르베니와 싸우기 위해 남은 힘을 모두 그러모아 소리쳤다. “캡틴 데라둘을 위해!” 다른 기사들이 일제히 그의 말을 따라 외쳤다. “캡틴 데라둘!” 그제서야 브란더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 말없이 칼을 뽑아 들고, 굳은 각오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브란더도 그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 “지금 생각난 건데, 난 이런 모습을 하기 전에도 너희들의 그런 잘난 척은 꼴사나웠었어.” 나르베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죽여 버려라.” 멀리 대기하고 있던 모즈들이 일제히 리마 성을 향해 파도처럼 밀고 왔다. 오백여 마리가 일으키는 먼지와 진동이 리마 성을 흔들었다. 브란더는 절룩거리며 앞으로 몇 걸은 내디뎠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형제들. 가자.” 브란더의 말에 모두 앞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그 순간 브란더의 옆으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형제애는 나중에들 찾아요, 드래곤의 기사들.” 애교가 깃들였으나, 그녀의 묵직한 명령조의 말투에 달려 나가려는 스무 명이 멈칫했다. 목 뒤만 살짝 덮은 길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에 짙은 눈썹을 한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뽑아 들었다. “비, 비키시오.” 몰려오는 괴물들을 보고 다급해진 브란더가 서둘러 말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출현으로 죽음을 각오한 그들의 의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저 마물의 말이 맞아요.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야.” “뭐요?” 브란더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화내지 말아요. 이왕 멋있게 죽으려면 이런 곳이 아니라, 더 멋진 장소여야지. 이런 곳에서 죽어버리면 데라둘 그 고지식한 양반은 오히려 화낼 걸.” 짙은 눈썹 밑의 또렷한 눈동자는, 눈가의 주름을 오히려 매력적인 미소로 부각시켜 주었다. “다, 당신으 누구요?” 브란더가 물었다. “아이린. 자세한 자기 소개는 나중에! 아란티아에서 가넬로크를 돕기 위해 왔으니, 지금은 나와 내 후배들에게 맡겨요.” 그녀의 옆에는 어느 새 세 명의 남녀가 서있었다. 방패와 길지 않은 칼을 두 손에 든 단발의 젊은 여성과 길고 가는 칼을 든 갈색머리의 남자, 활을 손에 쥔 옅은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셋 다 아이린이라고 밝힌 여자보다 키가 컸으나 브란더의 눈에는 그녀가 넷 중 가장 커보였다. 아이린은 뽑은 칼을 바닥에 내리 꽂더니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입에서 알아들을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드루 즈나바드 오그 베나, 입쥬브 마이 치하프. 즈루오 요에브 나위브 두 마이 우푸마이.] 붉은 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기 시작하더니 점점 부풀어 올라, 처음에는 아이린과 그녀 주위 세 명을, 그 다음에는 드래곤의 기사들을 모두 감쌌다. 당황한 기사들이 그 빛이 두려워 물러나자 브란더가 손짓으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 빛은 추운 겨울날 쬐는 모닥불처럼 따뜻했다. 브란더의 손짓을 보고 멈춘 기사들도 곧 그 붉은 빛이 해롭지 않은 걸 직감했다. 결국 거대한 빛의 뭉치는 리마 성 전체를 감쌌다. 괴물들은 달려오다가, 그 빛을 보고 멈췄다. 그들은 빛이 닿는 부분에서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괴성을 지르고 무기도 집어 던졌으나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저건 뭐야?” 나르베니가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때 해가 떠오르려면 한 참 시간이 남은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르베니는 놀라 등뒤를 돌아보았다. 황금빛을 띤 거대한 물체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 황금빛 날개의 주인은 리마 성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그것은 온 몸의 비늘에서 눈부신 빛을 뿜어 내는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아이린을 비롯한 네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특히 나르베니는 날개를 퍼덕이는 걸 깜빡해 밑으로 잠깐 처질 정도였따. 드래곤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르베니 쪽을 바라보더니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맙소사, 이럴 수는 없어!” 드래곤의 입에서 폭발하는 불길의 포효가 나르베니의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바닥을 일렁이는 불줄기는 댐에서 터진 물길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모즈들은 불길에 휘감기자마자 형제를 잃고 증발했다. 브란더를 비롯한 드래곤의 기사들은 자기들에게 몰려오는 그 불길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불은 아이린이 만들어낸 붉은 장막에 막혀 옆이나 위로 흘러갔다. 후끈한 열기가 모두의 얼굴에 잠깐 스치고 갔으나,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한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삽시간에 스쳐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즈들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시체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불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살아남은 극소수의 모즈들도 정신이 나간 듯 도망아가지도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건 검은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는 나르베니 뿐이었다. 나르베니만 힘겹게 날개를 펼치고, 자신의 손과 날개를 살폈다. “하늘 산맥에서 내려온 거라면 드래곤을 같은 편으로 둘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보아라. 드래곤의 불길 속에서도 안전한 나를! 이는 내가 모시는 주인께서 드래곤보다 더 위에 존재하심을 증명하고 있다.” 나르베니는 깔깔대고 웃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흘러나온 검은 기운은, 드래곤의 불길에 휩쓸려 부서진 검은 기사들을 도로 일으켜 세웠다. 검은 말은 유령처럼 투명한 모습을 갖추고 기사들을 태웠다. “자, 이제 론타몬의 기사들이 십 년 전에 했던 일을 다시 하겠노라. 이름도 없는 드래곤이여, 탁한 금빛으로 자신을 치장한 가련한 짐승이여, 차라리 하늘 산맥에서 얌전히 눈이나 뜨지 말 것을 그랬구나, 이 자리에서 너를 죽여, 추락한 나의 신용을 회복하겠다.” “추락한 너의 명예를 내가 아예 지워주겠다.” 바닥에 꽂힌 칼을 뽑아 들며 아이린이 외쳤다. 앤발디를 감싼 붉은 빛이 그녀의 칼날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르베니는 어이가 없어 손가락을 내밀었다. “성스러운 신들의 전투에 하찮은 인간이 끼지 말라.” 그녀의 손가락에서 뻗어나간 사람 몸만 한 검은 구슬이 날아왔다. 브란더는 그 구슬이 터지는 순간, 맞은 당사자는 물론이고 터진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한꺼번에 대여섯 명씩 미라처럼 말라 죽은 걸 기억하고 소리쳤다. “피하시오.” 그러나 아이린은 뽑은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 검은 구슬을 없애버렸다. 보는 기사들이 허탈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즈윈, 길을 뚫어라. 로일, 던멜. 날 보호하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죽여도 죽지 않는 검은 기사들은 지체 없이 말머리를 돌려 세 명에게 달려들었다. 브란더는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방패를 든 여자를 검은 기사들이 내리치는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며 길을 뚫었고, 그 뒤를 따르는 남자 둘은 검은 기사들을 말과 함께 베어버렸다. 그 세 사람이 뚫은 길로 제일 뒤에서 아이린이 달려갔다. 그 가벼운 몸놀림은 앞의 세 사람은 바라 따라 잡아 나르베니에게까지 이르렀다. 당황한 나르베니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커먼 암흑이 바닥까지 집어삼키며 아이린을 향해 뻗어갔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날리며, 칼을 횡으로 그었다. 붉은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암흑을 두 조각 내버렸다. 나르베니는 날개를 펼쳐 뒤로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그녀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나르베니는 쓰러지면서도 날개를 퍼덕거렸다. 아이린은 단숨에 그 날개 두 조각을 베어버리고 칼날을 그녀의 목에 댔다. 나르베니는 비명도 못 지르고 굳어버렸다. “너, 넌 누구냐? 그 칼은.......” “베나 에사르크. 네가 모시는 그 주인보다 더 높은 존재의 검이며, 나는 네가 모시는 그 주인을 죽이러 온 죽음의 신이다.” “웃기지 마라. 나의 주인은 모든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시다! 죽음 따위는.......” “어디 죽나 안 죽나, 네가 먼저 죽어봐!” 아이린은 칼을 크게 휘둘렀다. 떨어져 나간 나르베니의 머리는 바닥을 몇 번 구르다가 머리카락부터 시작해 까맣게 타 들어갔다. 아이린이 밟고 있는 목 없는 몸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타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나르베니의 비명 소리가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메아리 쳤다. 어둠과 붉은 빛과 황금빛이 서로의 영역을 어지럽히는 중심에, 아이린과 그녀를 지키는 세 기사가 브란더의 눈에 수백 년 만에 드러난 벽화처럼 아름답게 떠올랐다. 그리고 곧 브란더의 앞으로 황금빛 드래곤이 바닥을 울리며 다가와 고개를 천천히 낮추어 시선을 맞췄다. 드래곤의 가는 시선이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나의 아이들이구나.” 드래곤이 말했다. 어떤 기사는 할 말을 잃어 벌린 입술을 닫을 줄 몰랐고, 어떤 기사는 환희로 몸을 떨고 있었다. 오래 전 드래곤을 잃어버리기 전에 자신들이 신처럼, 스승처럼, 어머니처럼 모시고 있던 드래곤이 다시 돌아오길 얼마나 바랐던가? 로크의 기사가 아니고서는 그 간절함을 알 수 없었다. “드래곤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여쭙나이다. 그 고귀하신 존함을 저희에게 알려주십시오.” 브란더가 떨리는 목소리를 수습하여 물었다. 드래곤은 천천히 말했다. “처음 너희들에게 이름을 내려줬던 드래곤이다. 나의 이름은 레-가넬-란도르. 나를 가넬이라 부르라, 아로크의 기사들이여. 너희의 캡틴은 어디 있느냐?” 브란더는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데라둘, 우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분께서 오셔서 당신을 찾습니다.” 브란더는 두 걸음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캡틴께서는 이틀 전의 전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그 분을 대신하여, 드래곤 기사단의 주인께, 당신의 하인이자 당신의 이름을 따르는 기사로서 인사드립니다. 가넬, 아침의 태양이시여, 아로크의 수호자시여!” 브란더의 뒤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리마 성 앞의 너른 평원은 천 년 만에 돌아온 가넬의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마지막 권, 12권으로 계속) 도 서 명 : 하얀 늑대들 12 -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지 은 이 : 윤현승 펴 낸 이 : 신현호 출 판 사 : 파피루스 출판년도 : 2005년 1월 20일 <지은이 소개/윤현승> 작가 윤현승 씨는 1978년생으로, 현재까지 완결시킨 소설로는 다크문, 헬파이어, 흑호가 있으며 곧 완결시킬 소설은 하얀 늑대들, 책으로 안 나온 소설로는 Deep Forest가 있다. <차례> 11. 하늘 산맥에서 온 원군 12. 즈토크 워그 13. 로크 존 14. 라이의 날개 15. 하얀 늑대 대 하얀 늑대 16. 느-라이프덤 17. 제이메르의 이름으로 18. 타냐의 저항 19. 워그의 영혼 20. 무너진 방벽 21. 늑대들을 위한 노래 22. 테일드의 저주 23. 그리고 카셀은 없었다 에필로그-기다리는 아버지 작가의 말 <소개 글, 서평> 가진 것이라고는 언변밖에 없는 카셀. 우연히 아란티아의 보검을 손에 쥔 카셀의 운명은? 카셀의 언변은 과연 그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일에 싸인 어둠의 기사단, 그들의 정체는...? 한 나라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카셀. 그는 결국 영웅이 될 것인가! 수준급 말발의 사기꾼 기사가 펼치는 예측불허 모험담! 11. 하늘 산맥에서 온 원군 제이는 많은 기사들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설렁한 기사단 사무실 내에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끝난 후라 식당이나 주방에도 사람이 몇 명 없었다. 견습 요리사가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제이를 발견하고 누구냐고 물었다. “감자 하나만.” 대답대신 제이가 말했다. “예? 가, 감자요?” 제이는 삶은 감자를 하나 들고 밖을 거닐다가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발견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라이의 그림자였다. 뻔히 보이는 목표물을 놓치고 터무니없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라이는 집에 처박혀 있거나 혼자 창가나 지붕 위에서 도시를 관찰하는 게 일과였다. “라이냐?” 제이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지붕 위의 레미프를 불렀다. “나다.” 라이가 대답했다. “뭐하냐?” “구경.” 놀라운 관계 발전이었다. 녀석은 제이의 질문에 대답을, 그것도 두 번 연속으로 했다. 친하게 지냈으면 한다는 카셀의 말이 떠올라 제이가 말했다. “얘기 좀 하자.” “올라와라.” 제이는 감자를 입에 물고, 기둥을 딛고 뛰어올라 지붕의 끝을 잡았다. 팔 힘만으로 몸을 끌어올려 매달아 올라가니 라이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제이는 거절하지 않고 손을 잡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제이는 라이가 앉아있는 자리 옆에 섰다. 무섭지 않은 적당한 높이에 전망도 좋았다. “카셀이 걱정한다.” 감자를 먹으며 제이가 말했다. “무슨 걱정?” “너 외롭지 않을까 하고. 카셀도 바쁘고, 타냐도 바쁘고, 시간 좀 남는 나는...... 뭐, 하여간 그렇다. 혼자서 심심하지 않나?” “사람 구경, 재밌다.” 라이는 손가락으로 제이가 절대 볼 수 없는 먼 곳을 가리켰다. “그러냐?” 제이는 시큰둥하니 말하고 칼을 뽑았다. 그리고 라이에게 내밀었다. “뭔가?” 라이가 물었다. “가져.” “왜?” “너, 칼 없잖아.” “그래서, 네 칼을?” “이 칼 좋아.” “무슨, 뜻인가?” “그러니까...... 너 정도 실력자가 아무 칼이나 갖는 것도 우습고....... 에잇, 그냥 주면 좀 그냥 가져라.” 라이는 한참이나 제이의 손을 바라보다가 칼을 잡았다. 제이는 벨트를 풀어 칼집도 내주었다. 받아도 그런 걸 묶을 줄 모르니, 하는 수 없이 라이의 허리에 직접 달아주었다. 어깨는 넓고 허리는 가는 녀석이니, 칼을 찬 벨트가 꽤 어울렸다. “하나 묻자.” 제이가 말했다. “물어라.” “어떻게 카셀한테 합류한 거냐?” “......기억 안 난다.” “기억도 안 나는 지금은 왜?” “왜, 그걸, 묻는가?” “이상하니까. 내가 보기에 너라는 녀석이...... 카셀의 말을 듣고, 카셀의 말에 따르는 것이 오히려 위화감이 들 정도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제이는 머리를 긁적였다가 괜히 침을 뱉었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카셀 옆에 있는 녀석은 다 이상한 녀석이군.” “너, 이상하다.” 라이가 말하자, 제이는 조금 어처구니없어 하며 말했다. “그래, 나도 포함해서 이상하지.” “아니, 이상하다.” 라이는 제이가 직접 채워준 칼을 뽑아 제이에게 내리쳤다. 제이는 검의 간격을 좁히지 않고 내리치는 검을 부담 없이 막았다. 하지만 역시 그의 엄청난 힘은 살짝 휘둘러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뭐냐, 갑자기?” “이상하다....... 너의 검, 너의 기술, 처음 본다.” “굳이 칼 휘두르면서 말해야 하는 거냐, 이건?” “처음 본다. 너처럼, 센 녀석.......” 칼 줬다고 그 대가로 칭찬하는 건 아님이 분명했다. 라이는 한 번 더 반복해 말했다. “처음 본다.” 라이가 보이는 검의 간격이 빠르게 좁혀 들어왔다. 두 걸음. 한 걸음 반. “카셀, 내게 말했다.” 한 걸음. 제이는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다. 정해진 듯 라이의 검이 자신의 목을 치는 광경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옆에 있으면, 강한 녀석, 얼마든지 만난다....... 그렇게 말했다. 싸움......, 나의 기더다.” 반 걸음. 이 순간 검을 내밀면 반걸음조차 사라진다. 그러면 누가 먼저 공격하든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였다. 그 반걸음 안으로 들어와 죽이지 않고 제이를 건드린 사람은 마스터 퀘이언과 아이린 뿐이었다. 라이도 그 둘과 같았다. 머리 속에 그려진 푸른 초원 위의 토끼는 라이라는 호랑이에게 벌써 물려 죽어 있었다. 제이는 진짜로 호랑이에게 목을 물린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라이는 그 상태를 계속 이어가며 말했다. “제이메르, 너, 나의 기더에, 있지 않다. 싸우지 않는다. 그러나 너, 강하다.” “요점만 말해!” 제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목이 잘려나간 상태로 말을 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혼자, 답 찾아라. 그러면, 넌...... 나, 도, 이길 수 있다.” 검의 간격이 사라졌다. 제이는 목을 쓰다듬으며 물러났다. 방금 먹은 감자가 갑자기 체한 것 같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라이는 동쪽이 아닌 남쪽을 가리켰다. “남쪽 성문, 누가, 온다, 거기, 카셀, 있다.” 제이는 라이와 좀 더 그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담스러웠다. 지금은 자리를 뜨고 싶었다. “가봐야겠다.” “내가 데려다 줄 수도 있.......” “싫어.” 제이는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이 닿지 않는 높이는 견딜 수 없지만, 이 정도 높이라면 즐거운 쾌감이었다. 라이는 도로 앉아, 성문으로 들어오는 이 백 여명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우그.......’ 하늘 산맥이 아닌 곳에서 만난 첫 번째 우그의 이름은 처음 인간의 언어를 접하는 라이가 발음하기에는 너무 까다로운 이름이었다. 그래서 라이는 그냥 그를 우그라고 불렀다. 그 남자 역시 라이를 레미프라고 부르지 않고 레미라고 불렀다. ‘어쨌든 날 믿어. 이거 하나만 기억해! 네가 날 버리지 않으면 나도 널 절대 버리지 않아. 알았지, 레미?’ 라이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의 얼굴에 대고 오십 년이나 반복해온 질문을 또 하고 있었다. ‘왜 돌아오지 않아? 난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 아이를 가졌다면 그 아이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나? 내게 보내라. 이번에는 내가 하늘 산맥을 여행시켜 주겠다. 기다리고 있다. 여기 레미가 널 기다리고 있다.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대답해라.’ 라이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고개를 따라 날개도 축 늘어졌다. “아즈윈! 던멜! 로일!” 카셀이 달려가 아즈윈과 던멜, 로일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기뻐했다. 제이가 남쪽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카셀이 먼저 와서 하늘산맥에서 온 하얀 늑대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이 드래곤 기사단을 구출했다는 소문은 금방 로크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졌다. 먼저 도착해 가족들의 생사를 걱정하던 앤발디의 주민들은, 그들이 근처 마을로 안전하게 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하고 있었다. 제이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서, 열심히 세 사람에게 떠드는 카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세 사람과 함께 온 사람 중에는 아이린도 있었다. 제이는 팔짱을 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마스터 아이린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셀은 그녀를 세 사람 이상으로 반겼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얘네들 무기 전달해주러 온 거다. 캡틴, 내가 할 일은 이제 90퍼센트 정도 끝났어. 나머지는 너희들이 해야지.” 카셀이 그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드래곤 기사단이 성문을 통과해 제이의 옆으로 지나갔다. 제이는 그들 틈에서 브란더를 발견했다. “여어, 살아있었군.” 제이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갯짓만 해서 인사했다. 브란더도 제이를 발견하더니 한 손을 들었다. 제이는 그의 지친 표정을 보고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군.” “개선하고 돌아온 건 아니잖나?” “들었다. 캡틴 데라둘이.......” 제이는 위로하려다 말았다. “어쨌든 잘 살아 돌아왔다.” 브란더는 고맙다고 말하고 다른 동료들을 따라갔다. 제이는 브란더의 등을 시선으로 좇다가 다시 카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벌써 아이린이 앞에 와 있었다. “이 녀석, 내가 왔는데 여기서 모른 척 딴 데 보고 있어? 예의가 안 되어 있다.” “아...... 저, 오셨습니까?” 제이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니, 아니잖아, 제이메르. 나와의 인사는 이걸로 정하지 않았어?” 아이린은 제이를 강제로 세게 끌어안았다. 제이는 당황하면서도 그 포옹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아, 역시 젊은 남자의 가슴이 좋구나. 좋아, 좋아. 잘 지냈어, 내 제자?” “예, 마스터.” 아이린은 제이를 놔주었으나, 그래도 허리는 한 손으로 안고 있었다. “어이, 카셀. 가넬로크 의회 의원들은 어디 있나? 할 말 잔뜩 있어.” “아, 지금 오고 계실 겁니다.” 카셀이 다가와 말했다. 카셀의 옆으로 아즈윈과 로일, 던멜이 따라왔다. 제이가 살짝 손을 들어 인사했다. 로일과 던멜도 같이 손을 들었다. 로일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으나, 던멜은 조금 초췌해 보였다. 루티아에서 죽다 살아났는데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했다. “그럼 이 성 수비대장도 당장 불러. 적이 남쪽을 완전히 장악했다. 우리도 오다가 들켜서 위험할 뻔 했어. 지금 당장 방어 준비를 하라고 전해. 오늘 밤에라도 쳐들어올 것 같다.” “그거라면 타냐에게 먼저 말해야 할 겁니다.” “마스터 타냐?” “예, 아로크의 탑을 작동시킬 겁니다.” “아로크의 탑? 흥미로운 얘기를 하는군. 자세히 설명해봐.” “축복의 탑에는 그랜드 로크의 마법사 백 명이, 분노의 탑에는 카모르트에서 온 쟌스테인 여백작이, 그리고 이 곳 아로크의 탑은 제가 작동시켜 로크에 방벽을 칠겁니다.” 타냐는 카모르트의 세 탑을 설명한 후 마무리했다. “문제는 두 개의 탑을 어떻게 지키느냐 입니다. 아로크의 탑은 로크 존(Roc Zone) 내에 있으므로 안전합니다만, 나머지 둘은 자체 병력으로 지켜야 합니다.” “로크 존의 힘은 어느 정도지요, 마스터 타냐?” 아이린은 아로크의 탑을 올려보다며 말했다. “구아닐은 막을 수 있습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아마도....... 하지만 그 자의 힘은 마법과는 별개의 문제라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분노의 탑과 축복의 탑, 양쪽을 보호하지 않으면 싸움이 안 된다?” “예, 천 년 전 아로크가 멸망한 것도 축복의 탑이 무너진 직후였습니다. 구아닐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테죠.” 듣고만 있던 카셀이 입을 열었다. “아이린, 우리는 아직도 적 병력의 규모를 알지 못합니다. 정찰병을 보내도 숨어있는 모즈들까지 셀 수는 없어서요. 어느 정도입니까?” “오만.” 주저 없는 아이린의 대답에 카셀은 눈을 감아버렸다. 아이린은 바지춤에 손을 찔러 넣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열심히 하늘 산맥을 가로질러 저 셋을 데려오긴 했지만.......” 아이린은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일, 던멜, 아즈윈을 돌아보았다. 제이메르도 거기에 같이 섞여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망적이다. 그나마 로크의 성벽을 지키는 게 아니라, 탑 두 개를 지킨다니 큰 짐을 덜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는 같아. 현 병력은 어찌 되지?” “로크의 수비대가 이천, 각 지방에서 호출해서 올라온 군대가 오천, 기타 기병대가 천, 거기에 드래곤 기사단 백오십 정도입니다. 지금 귀환한 기사들을 합치면 이백쯤 되겠군요. 거기에 카모르트의 군대가 이천오백 정도입니다.” “5대1이네. 그 ‘5’라는 적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수치는 아닌데 말이야.” 아이린은 농담처럼 말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현재 탑 근처에 목책과 벽을 서둘러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별 의미는 없을 겁니다.” 카셀이 말했다. 아이린은 그의 표정을 읽고 고개를 저었다. “캡틴이 자꾸 그런 얼굴 하면 안 되지. 좀 더 기운차게 말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으니까 힘내자. 그런 걸 입버릇처럼 말해도 모자라.” “압니다, 아이린. 하지만 전...... 모르겠어요. 우선 캡틴 느하로우나, 루에머스 집정관 앞에서는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힘이 나질 않는군요.” “그럼 단 걸 좀 먹어라. 그리고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어.” 아이린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두 개의 날개가 남쪽에서부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 커다란 날갯짓 소리가 로크 시민들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두 마리 드래곤은 곧장 아로크의 탑 쪽으로 날아와 그 빈 공간에 착지했다. 마법사들은 기겁을 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카셀을 비롯한 나머지는 덩치 큰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먼지가 일어나는 바람을 잠시 고개 돌려 피하기만 했다. 한 쪽은 황금빛 드래곤이었고, 다른 한 쪽은 붉은빛 드래곤이었다. “마스터 크나딜,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셀과 타냐는 붉은 드래곤 앞에 무릎을 꿇어 인사를 했다. 그의 모습은 동굴에서 볼 때보다 햇빛 아래에서 더 아름다웠다. 크나딜은 날개를 접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잠깐 우울해졌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캡틴 울프. 아직은 무너질 때가 아니지. 그건 내가 죽을 때 해도 늦지 않다.” 카셀은 놀라 물었다. “크나딜께서 직접 이 전투에 나설 예정이십니까?” 대답은 크나딜의 어깨에 타고 있었던 로핀이 했다. 로핀은 펄럭이는 한 손을 늘어뜨리고, 단숨에 드래곤의 어깨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물론이다. 이건 이미 인간들만의 전쟁이 아니다. 드래곤들도 함께 하리라고 여신께서 미리 언급하시지 않았더냐? 가넬, 로크의 사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군.” 황금빛 드래곤은 크게 포효하며 하늘을 날아올랐다. 로크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얼마나 환호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드래곤이 돌아왔다! 그들에게 있어 그보다 더 사기를 끌어올릴 소식이 또 있을까? 구름 뒤에서 나타난 또 한 마리 드래곤이 하늘을 나는 가넬의 옆에 따라붙어 맴돌았다. 크나딜이 손가락으로 그 드래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는 아직 ‘레’의 칭호를 얻지는 못했으나, 전투에 관한 한 가넬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드래곤이다. 이름은 셀바이크, 가넬과 함께 구아닐을 막아줄 것이다.” 아이린과 로핀도 희망찬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평소의 그라면 단지 드래곤을 보는 것만으로 환호하고, 설렌 마음을 감추지 못해 발이라도 굴렀을 것이다. 그러나 카셀은 놀라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왜 이러지?’ 두 마리 드래곤이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아름다운 새처럼 춤을 추고 포효하는 모습에 벅차올라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감정이 증발해 버린 듯 카셀은 절망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메이루밀은 각지에서 모인 군대가 어떤 체계로 움직이면 좋을지에 대해 캡틴 느하로우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느하로우는 언뜻 보기에 허약하고 자신감 없는 남자였으나, 지식으로 치면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따로 루밀이 조언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는 거의 모든 군사 배치를 해나갔다. 전투와 전략에 조예가 깊은 의원들도 꽤 도움이 되었다. 서로 충돌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는 게 의회란 곳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는 정말 강한 게 또 의회였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시간 좀 내지? 바빠도 시간 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외팔의 남자를 보고 메이루밀은 거의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로핀!” “어, 내 이름 로핀이야. 그렇게 크게 상기 안 시켜줘도 돼.” “하하. 이 친구야, 여전하구만.” 루밀은 로핀을 세게 껴안고 몇 번 흔들었다. “잘 있었니? 아이쿠, 얼마나 고생을 안 했으면 얼굴빛이 탱글탱글하군.” 로핀은 루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배 안 나오려고 발악하는 정도는 움직여주고 있지.” 둘은 크게 웃었다. 루밀은 잠시 회의에서 빠져 로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날 며칠을 해도 모자랄 개인적 이야기는 잠시 접고, 로핀은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서로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대적하기 위해, 전혀 다른 장소에서 진행시켰던 일의 접합 점을 얘기하다 보니, 공통된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카셀.......” “어, 카셀.” 로핀이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하늘 산맥에서 하는 꼴을 봤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역시 우연은 아닌 것 같군. 녀석이 아란티아에 끌려온 거야.” “나도 카모르트에서 직감했다. 커다란 일이 있으면 아란티아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름들을 끌어들인다고 했지. 그럼 하얀 늑대들 다섯 명으로도 모자랐던 걸까?” “오죽 모자랐으면 우리까지 끌고 왔겠어?” 로핀은 허허 웃었다. “.......큰 싸움이 있을 거야.” 루밀이 말했다. “알아.” 로핀도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그거 들었나, 카셀에게?” “뭘?” “루티아의 커다란 힘과 아란티아의 커다란 힘이 죽지 않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루티아의 큰 힘은........” “테일드지? 들었다. 그리고 아란티아의 큰 힘은.......” 로핀은 말하기를 주저했다. “마스터 그란돌.” 루밀은 잠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있다가 물었다. “상징적인 의미인가?” “아니, 직접적인 의미야. 나도 믿고 싶지는 않아. 앤발디에서 살아남은 기사가 그런 말을 해줬다. 자기들의 캡틴을 죽인 건 회색 로브의 마법사지만, 싸움을 한 건 그란돌이라는 사람이었다고.” “말도 안돼.......” “조만간 우리 앞에 나타날 거다 그때 진실의 여부를 알 수 있겠지. 왜 아란티아가 우리까지 끌고 왔냐고? 그 분 때문이 아닐까?” 루밀은 대답하지 못했다. 로핀도 지금만큼은 농담으로 넘기지 않았다. 그란돌이 어떤 인물인지, 누구보다 로핀이 잘 알고 있었다. 굽 높은 구두로 뛰어오던 라틸다는 그만 휘청거렸다. 놀란 로일이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려 하니 그녀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이런 일로 부축 받으면 더 꼴사나워져요.” 라틸다는 로일 앞에서 옷을 여미고 싱긋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로일.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예, 라틸다. 여전히 붉은 옷이 아름다우시군요.” “그래요? 일부러 맞춰 입은 보람이 있군요.” “저를 위해서요?” “그럼요. 이 곳에 온 것도, 어쩌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어요. 너무 속 보였나요?” “아니, 변함없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로일은 양팔을 활짝 펼쳤다. 라틸다는 놀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그 품에 안겼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없이 안고 있다가 말했다. “이렇게 나오실 줄은 몰랐는걸요?” “너무 오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요.” “로일답지 않은 걸요.” “싫으면 놓아도 됩니다.” 그러나 라틸다는 놓지 않았다. “작전 사항이 나왔습니다.” 로일이 말했다. 둘은 약간 떨어졌으나, 손은 놓지 않았다. 라틸다가 물었다. “저도 포함이겠죠?” 로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의 탑을 지키시게 됩니다. 그리고 카모르트의 병력은 전원 축복의 탑으로 가게 될 겁니다.” “제....... 병사들까지요?” “이미 그 병사들의 운영권을 카셀에게 넘겼다고 하셨죠?” 그렇게 하더라도 그 병사들이 자기들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라틸다였기에 조금 놀랐다. “혹시 캡틴 울프가 직접 그리 하라고 지시한 건가요?” “지시 자체는 다른 쪽에서 내렸지만, 카셀도 동의했습니다. 카모르트 병력뿐 아니라 로크 수비대, 기병대, 가넬로크 군 병력 전부가 축복의 탑을 지킬 겁니다. 심지어 드래곤 가넬과 셀바이크까지도요.” “자세히 들은 바는 없지만, 탑 두 개 모두 지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제가 있는 곳은...... 어찌 되는 건가요?” “걱정 마십시오. 이 곳을 지키는 것은 사-크나딜, 드래곤들의 마스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카셀의 지시만 하나 덧붙여졌죠. 제가 라틸다의 옆을 지킬 겁니다.” 라틸다는 허탈하게 웃었다. “축복의 탑은 일 만의 군대가 지키고, 분노의 탑은 셋만 지키게 되는 거군요.” “그래도 적은 어느 쪽을 공격해야 할지 쉽게 선택하지 못할 겁니다. 몇 만의 대군이라도 해도 말입니다. 기억 하십니까? 당신과의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맙소사, 그럼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사와 가장 강한 드래곤을 경호로 두게 되는군요.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두려워요.” “적어도 저에게는 있지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단순히 행진을 뜻하는 나팔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죠?” “가넬로크의 나팔 체계는 제가 알지 못하지만, 느낌상 경계경보쯤 되는 것 같군요.” “적이 쳐들어오는 건가요?” 로일은 대답 없이 라틸다의 손만 꽉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며, 크나딜이 분노의 탑 옆에 착지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본 드래곤, 그것도 엄청나게 거대한 붉은 드래곤이 다가오니 라틸다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놀라지 말고 보세요, 라틸다. 마스터 크나딜입니다. 인사 하세요.” 라틸다는 생전 처음 인사를 하는 것처럼 서투르게 치마를 잡고 살짝 무릎을 구부렸다. 그러나 크나딜은 그녀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땅을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탑에 오르라, 인간의 여인이여. 로크의 방벽을 세울 때가 왔다.” 아로크의 탑 꼭대기에서 솟아오른 푸른빛이 로크의 하늘을 천천히 물들여갔다. 투명한 푸른빛은 곧 어두워져 가는 저녁 공기 속에 산란 되어 보이지 않았다. 타냐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다시 눈을 떴다. 아이린이었다, “아까는 많이 변해 놀랐어요, 마스터 타냐. 얼굴이 그렇게 바뀌어버리다니.” 아이린은 뒷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털며 말했다. “마스터라는 빼셔도 됩니다. 미스터 아이린. 당신이란 분은 저에게 있어 조금 특별한 분이니 좀 더 어린 아이 취급하셔도 됩니다. 아니, 그래 주는 게 제게는 편하겠군요.” 타냐는 경계하는 빛을 지우며 말했다. “그럼 그러지. 타냐도 그럼 나를 마스터라고 높이지 않아도 돼요. 나 역시 타냐가 조금 특별한 존재거든” “그렇게 하죠.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한 남자에게 빠졌던 여자들이군요.” 아이린은 팔짱을 끼며 좁은 창틀에 앉았다. 수십 길 높이의 탑꼭대기에서 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테일드를 좋아 했었어?” “사춘기를 같이 보낸 스승님이 그런 멋진 분이라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긴, 나랑 같이 있을때조차 네 얘기를 더 많이 했을 정도였어. 질투날 정도로 하지만 너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버렸고, 나는 여전히 그 녀석을 사랑하고 있지. 그 차이야. 그러니까 내가 이겼어. 그렇지?: 아이린의 말에 타냐는 픽 웃었다. “뭘 놓고 이겼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승님은 당신을 만난 후 항상 행복해 하셨어요. 저는 진심으로 그 행복이 오래 가길 빌었습니다.” “미안하군. 그 기도를 들어주지 못해서”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아이린의 미소 뒤에는 눈물을 참는 슬픈 눈망울이 감춰져 있었다. 타냐는 무슨 말을 해도 그 상처를 후벼파게 될 것 같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린이 그 말을 먼저 해버렸다. “내가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베야 했을까?” “......후회하십니까?” “후회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이린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 미안. 정신 집중해야 할 순간에 방해가 되었군. 병력 배치 만 알려주고 난 간다.” “대충 압니다. 모든 병력을 축북의 성에, 사-크나딜만 분노의 탑이죠? 적절하군요.” “던멜은 아직 부상중이라 로크 성문을 지키고, 메이루밀이 로크내 약 오백 정도 되는 병력을 지휘하고 있다. 축복의 탑에는 병력이 워낙 많아서 로핀이 지휘를 도우러 갔고.” “제이메르도 거기 있겠군요.” “로핀이 필요하다며, 아즈윈과 함께 데려갔어.” “카셀은요?” “아직 의회에. 굳이 전장에 나설 필요가 없는 사람까지 전장에 나갈 필요는 없지.” “카셀은 아마 그 사실을 괴로워할 겁니다.” “왜?” “카셀이 설사 당신 정도 되는 실력자라 해도, 그의 직급을 생각하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죠. 그는 아란티아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모든 위대한 장수가 최전방에서 싸운 건 아니지. 하지만 카셀의 심정은 알 것 같아.” “아이린은 어디를 지킬 겁니까?” “난 여기 있을 거야.” “듬직하군요.” “카셀도 여기로 보내줄까? 적의 규모를 보니, 어차피 방벽이 무너지면 앞뒤 잴 것도 없을 것 같은 병력이던걸.” 아이린은 창문 너머로 평원을 뒤덮고 다가오는 모즈들의 이동을 보며 말했다. 카-구아닐은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있다 해도 저 숫자에 밀려 드래곤의 위압감은 나타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 이쪽에 드래곤이 셋이나 있어도 적을 압도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카셀이 옆에 있다면 저에게도 많은 위안이 되겠죠. 그러나 그 말은 절대 하지 않아요. 카셀은 이미 해야 할 일을 다 해주었습니다. 이제 그가 맡긴 일을 제가 해야지요.” “넌 정말 강한 아이야.” 아이린은 웃으며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타냐는 다시 눈을 감고 말했다. “아이린.” “응?” “아까 물었지요? 베었어야 했냐고.......” “응.” “베었어야 했습니다.” “그게 누군지 알았더라도?” “예.”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니야.” “어렵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타냐는 눈을 뜨지 않고 말을 이었다. “테일드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쫓아가던 그 순간, 적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고 했죠?” “맞아.” “반면 테일드는 부상이 없었고요.” “맞아.” “아무리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라 해도 베나 에사르크에 베인 상태에서 완전한 힘을 가진 테일드를 꺾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테일드가 강제로 몸을 빼앗겼다고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테일드가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인지 잘 압니다. 지금 남아있는 모든 루티아의 마스터가 힘을 합한다 해도 그 분 한명의 힘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너 설마 테일드가.......?” 아이린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영겁의 세월을 버텨온 악마의 영혼이라 해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마법사의 몸을 강제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적의 군대를 이끄는 익셀런 제1기사단을 보십시오. 나르베니 같은 평범한 여자도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고, 병약한 카모르트의 백작을 한 나라를 위협하는 악마로 만들 수 있음에도 정작 더 강한 자들은 왜 그보다 더 강하게 만들지 않고 그냥 수족으로만 부리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냐 역시 이런 설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린 외에는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테일드는 스스로 몸을 내준 겁니다.” "멍청한 소리! 테일드가 왜?“ 아이린은 창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테일드가 인간을 배신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수십 년을 루티아에 충성한 러스킨도 배신했습니다. 테일드라고 그러지 못할까요?” “너.......” 타냐는 한 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의문을 모조리 쏟아냈다. “당신의 스승인 그란돌까지 저쪽에 붙었다고 했습니다.” “조종당하는 거다, 당연히!” “아란티아에서 부활한 캡틴 웰치를 잊으셨습니까? 웰치는 그 자의 힘으로 살아났음에도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란돌은 그러지 못하는군요.” “넌 지금 나의 스승과 너의 스승을 동시에 모욕하고 있다.” “상관없습니다. 아이린, 다시 한 번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부디 저의 스승님을......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의 손으로 죽여주십시오.” 타냐는 목이 메어 끝까지 말하지도 못했다. 아이린은 화가 났으나, 타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대꾸하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타냐는 입술만 굳게 다물었다. 타냐는 잠시 일어나 아이린이 앉아있었던 창틀에 손을 짚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로크의 탑에서 내다보이는 넓은 평원은 온통 모즈들로 뒤덮혀 있었다. 모즈들은 일정 거리에서 멈춘 채 시위라도 하듯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그러나 방벽 너머를 공격해 오지는 못했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의 목소리가 천천히 로크를 공포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12. 즈토크 워그 의회의 의원들은 의외로 침착했다. 적을 맞이한다는 것만으로 패닉을 일으켰던 처음을 생각하면 지금의 대응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의원들에게만 한정된 모습이 아니었다. 축복의 탑이나 로크의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 역시 큰 두려움 없이 적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드래곤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이 정도까지 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소.” 한참 그런 얘기를 하던 루에머스가 말했다. 일부 의원들도 이제 로크는 살았다고 벌써 전투에 승리한 것처럼 들떠 말했다. 적이 도달하기 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의원들의 망중한이었다. 루에머스의 초대로 거기에 앉아 멍청히 이야기를 듣던 카셀은 툭 내뱉듯 말했다. 병사들이 아무리 의욕적이어도 검은 드래곤 한 마리의 힘이면 탑하나 지키는 것도 어렵습.......“ 희망 섞어 이야기하던 의원들 모두 말을 멈추고, 카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카셀은 바로 말실수를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그런 관점에서 전투를 바라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소. 나 먼저 일어나겠소.” 루에머스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소? 얼굴이 말이 아니군.” “피곤해서 그럽니다.” “그럼 좀 쉬도록 하시오.” 카셀은 회의실에서 나와 늦은 밤의 정원을 거닐었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정원이었으나, 이제 그 아름다움에 순수하게 감동하지 못했다. 반가움을 나눌 겨를도 없이 아즈윈과 로핀은 제이메르까지 데리고 축복의 탑으로 갔다. 던멜과 메이루밀도 지휘를 돕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일도 라틸다가 있는 분노의 탑으로 떠났다. 타냐는 이제 아로크의 탑을 비울 수 없었다. 가고 싶었지만, 그녀를 방해할 수도 없었다. 지독한 외로움이 가슴을 짓이겨다. 전투를 앞두고 모두 떠나버린 정원의 고요함이 그 외로움을 더욱 크게 했다. 항상 하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라이를 보면 마음이 진정되곤 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힘들어, 보인다. 자라.” 라이도 카셀을 보자마자, 그런 말을 했다. 모두들 그런 말을 했다. 쉬어라. 피해라. 가장 안전한 곳으로. “라이, 너까지 그런 말을 해서는 안돼.” 카셀은 차가운 석재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울프기사단으로서 전장에 나서지 않는 늑대가 있을 수는 없다. 이런 게아니야. 내가 동경하던 기사는 이런 게 아니었어. 라이, 너는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르는 거지? 네가 나를 벨 수 있는 그 순간에 나를 베지 못한 건 로핀과 타냐가 막고 있어서였지 나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두려워한 건 내가 아니라 로핀이었어. 그렇지? 그런데 왜 너는 나를 따라온 거야?” 라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말이 어눌해서 그렇지, 듣는 것 만이라면 어지간히 전문 용어가 비어가 섞이지 않는 이상 모두 알아듣는 라이가 못 알아들어서 그런 제스처를 취한 건 아니었다. 라이가 말했다. “그런 말, 카셀, 답지 않다.” “너도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나는 타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버렸다. 그 순간 타냐가 어떤 행동을 취한 줄 알아? 내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던져버리고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아차렸어.” 카셀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타냐에게 보인 약한 모습을 라이에게까지 보일 수는 없었다. 카셀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잊어버려라, 라이. 방금 내가 한 말은 모조리 잊어버려. 없었던 말이야.” 카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약속, 때문이었다.” 라이가 말했다. “무슨 약속?” 카셀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어 라이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생각났다. 내가 카셀 따른 이유. 약속했다. 내가 약속 지키면....... 카셀도 약속, 지킨다고.” 그것은 라이가 아란티아의 보검을 쥐고 카셀에게 들이민 상태에서 정신없이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카셀은 똑똑히 그 순간을 기억했다. 카셀은 약속했다. 라이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카셀도 배신하지 않는다고. “오십 년 전, 함께 여행한, 우그. 그도 같은 약속, 했다. 나를....... 버리지 않는다, 말했다. 카셀, 너 그 우그 닮지 않았다. 그러나, 너, 보면 그 우그 생각난다. 그래서, 따랐다. 다시 한 번, 그때의 믿음, 그때의 환희,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따랐다. 친구다. 배신, 하지 마라. 나도, 배신하지, 않는다.” 라이의 말에 카셀은 뭉클한 감동마저 느꼈다. 라이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쉬운 단어를 택하여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역시 카셀의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카셀은 라이의 굵은 팔뚝을 잡고 말했다. “그래, 라이. 너는 내 부하가 아니라 친구야. 모두가 나를 좋아한 나머지, 모두가 나를 친구로 인정한 나머지, 나를 지키려 하고 있어. 나는 그런 보호를 받는 허약한 캡틴이야. 라이, 나를 지켜라. 언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르는 이 힘없는 캡틴을 지켜다오. 젠장, 난 항상 이런 말밖에 못하는구나.” 카셀은 한없이 자신을 내차며 정원을 걸었다. 라이는 카셀의 옆을 따라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자니....... ” 제이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팔짱을 끼고 괴물들이 있을 방향을 응시하던 이즈원은 한참이나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말이 없자 자기한테 한 말이 아닌가 보다 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잠깐 타치셀에서 보았으나, 이것저것 잡담을 나눌 정도로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이 쪽에서 워낙 무뚝뚝하게 있으니 말을 걸기도 곤란했다. 게다가 아즈윈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로핀의 말대로라면 게리의 죽음에 제이메르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직접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분노의 표적이 될 이유도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즈윈은 녀석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네가...... 그.......” 그 말을 하고 제이는 또 입을 다물었다. 아즈윈은 이 자식이 지금 누구 놀리나 하고 노려보았다. “할 말 있나? 듣자니 내가 뭐?” 제이는 아즈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했다. “하얀 늑대들의 전투 포메이션을 지시한다며?” “그래.” “그럼 나도 그거 몇 개 가르쳐줘.” 아즈윈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나 없는 사이에 울프 기사단으로 임명되었나?” “그런 건 아니다.” 제이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아즈윈도 그 시선을 쫓았다. 로핀은 모닥불 앞에서 몇 명의 지휘관들과 드래곤 기사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터지는 걸 보아 진지한 얘기를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전투 전에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로핀의 배려였다. “나 때문에 게랄드가 죽었다면서?” 본인이 그런 말을 하자, 아즈윈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움찔했다. “카셀이 그러디?” “로핀이라는 사람이 말한 걸 다른 녀석이 듣고, 그걸 내가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 있겠다.” 아즈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이를 노려보았다. 제이는 그 시선을 굉장히 불편해하며 말을 이었다. “루티아에서 던멜, 로일과 함께 포메이션을 하나 배운 바 있다. 게랄드라는 녀석이 서있어야 하는 자리에.......” “함부로 ‘녀석’이라고 부르지마!” “.......어쨌든 그 자리에 내가 한 번 서보았다. 꽤 힘들더군. 게랄드가 얼마나 대단한 검사였는지는 만나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더라. 네이슨이라는 놈을 죽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랠 일이었지. 그래서 그 자리에 내가.......” 아즈윈은 갑자기 옆에 세워놓은 도끼를 제이에게 내밀었다. “들어.” “뭘?” “이 도끼.” “왜?” “이건 게랄드의 무기다. 르고가 게리의 힘과 게리의 기술에 맞춰 만든 최고의 무기다. 이걸 네가 소화할 수 있다면 , 그때 그 자리에 넣어주지.” “.......이건 너희 늑대 이름 단 녀석들이 하나같이 좋아하는 테스트라는 거냐?” “까불지 마. 네 스스로 내뱉은 말에 책임지라는 거다.” 제이는 군말 없이 도끼를 받아 들었다. “무겁군.” “따라와.” 아즈윈은 제이를 약간 널찍한 자리로 끌고 갔다. “막아 봐.” 아즈윈은 칼을 앞으로 내밀고 방패는 허리 뒤로 숨겼다. “좋다. 공격해 봐.” 제이가 말했다. 그 말을 끝내자마자 아즈윈은 달려가 칼을 휘둘렀다. 도끼를 들어 막은 제이는 뒤로 휘청하고 물러났고, 아즈윈은 물러난 제이의 가슴에 칼을 들이댔다. 제이는 놀라 움직임을 멈췄고, 아즈윈은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제이는 뒤로 한 바퀴 굴렀다. “한 번.” 아즈윈이 말했다. 제이는 인상을 구기며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제이는 두 손으로 잡은 도끼를 세게 휘둘러보고 고개를 까닥이더니 말했다. “다시 해봐.” 그 말이 끝나자마자 들어간 아즈윈의 공격에 제이는 또 비틀거렸고, 두 번째 세 번째의 공격은 막지 못했다. 목 바로 아래까지 들어와 있는 칼에 제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즈윈이 말했다. “두 번.” “다시!” 제이는 소리치며 도끼를 휘둘렀다. 아즈윈은 여전히 방패를 든 왼손은 뒷짐 진 채 칼만으로 제이의 도끼를 몇 번 받아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왼손에 든 방패로 제이의 머리를 쳤다. 제이는 몇 번 머리를 잡고 휘청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고 섰다. “세 번.” 아즈윈의 말에 제이는 부정했다. “방금 건 아니었다.” “진짜 쳤으면 두개골 깨졌어. 세 번이야.” 제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포기?” “아니.” 제이는 갑자기 달려와 도끼를 횡으로 세게 그었다. 아즈윈은 여유 있게 피하고 또 이녀석의 어딜 쳐줄까 하다가 움찔 하며 물러났다. 제이는 휘두른 도끼의 회전을 살려 어느 새 아즈윈의 머리로 내리치고 있었다. 피할 타이밍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아즈윈은 방패를 내밀어 도끼를 막으며 옆으로 살짝 흘렸다. 이빨 시린 금속성이 울리며 도끼는 바닥에 내리 꽂혔다. 아즈윈은 칼을 든 손의 팔꿈치로 제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제이는 도끼를 놓치고 바닥을 굴렀다. 아즈윈은 소름 돋아있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뭐야, 이 녀석? 그렇게 세게 휘두른 다음에 바로 다음 목표점을 잡아?” 그런 건 게랄드도 못했다. 아니, 누구도 못했다. 게랄드가 이 무거운 무기를 들고 던멜처럼 빠른 녀석과 싸울 수 있는 건 누구보다 압도적인 힘과 저돌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이는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정확성은 게랄드 이상이었다. “네 번.......안 하냐?” 제이가 물었다. “아니, 이번 건 아니야.” 아즈윈은 짧게 숨을 내쉬며 경직된 근육을 풀었다. 제이도 그 사이 뒤로 물러나 도끼를 한 손으로 휘둘러보고 있었다. 아즈윈은 잠시 허리에 손을 얹고 녀석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로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티아에서 제이메르라는 녀석이 아란티아 원군이랍시고 왔다. 나보다 말 못하는 녀석은 처음 봤지만.......검술하나는 끝내주더라. 누구에게 배웠는지 몰라도 체계가 완전히 달라. 잘만 가르치면 여섯 번째 하얀 늑대를 만들 수도 있겠어.’ ‘그럼 프란츠가 억울해할걸.’ 아즈윈은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았다. 로핀 역시 이런말을 했다. “빅터가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 아느냐, 아즈윈? 그런 자의 오른팔을 죽였다. 게랄드는. 절대 헛된 죽음이 아니야.” ‘그런 것도 위로입니까, 로핀?’ 진짜로 살기를 담아 말하는 아즈윈을 보고 로핀은 오히려 화를 버럭 냈다. ‘그래서 언제까지 게랄드의 죽음에 슬퍼하며 혼자 앓을 거냐? 그 녀석은 너에게 복수할 상대조차 남겨놓지 않고 죽었다. 그런데 대체 너는 누구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어서 혼자 분노를 키우는 거냐?’ 로핀의 말이 옳았다. 아즈윈은 쏟아낼 곳 없는 분노를 아무에게나 발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제이의 책임은 없었다. 그냥 아즈윈의 혼자 생각이었다. “야, 아즈윈” 제이가 도끼질을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아즈윈이다!” 그녀는 즉각 수정했다. “아, 뭐든....... 그보다 이 도끼를 쓰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러면 뭘 어쩌게?” 제이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전에 시험했는데, 난 두 자루를 쓰는 게 더 유리한 것 같더라고.” “어설프게 자기 기술 바꾸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냥 받아봐. 그리고 이번에는 방패 써라. 아군 죽이고 싶지 않아. 한걸음 안으로 들어가면 나도 조절 못해.” “한 걸음?” 제이는 달려가 칼을 휘둘렀다. 도끼질과는 달리 칼놀림은 제법이었다. “응?” 제이는 뭔가를 재고 있었다. 아즈윈은 즉시 방패를 앞으로 내세웠다. 그의 보이지 않는 어깨 뒤쪽에서 도끼가 휘어져왔고, 그걸 막자 팔뚝이 짜릿하게 울렸다. 칼은 칼끼리 부딪치고 도끼는 방패와 맞물려 삐걱거렸다. 아즈윈은 순간 몸을 뒤로 빼며 제이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바로 칼을 올려 쳤다. 예상대로 제이는 그것을 막았고, 동시에 도끼날은 그녀의 뺨만 살짝 스쳤다. 제이는 더 공격하려다 무릎이 풀썩 꺾여 균형을 잃었다. 그는 당황하며 자기 무릎을 움켜쥐었다. “왜......?” “네 움직임을 이용해서 균형을 무너뜨렸다. 이런 싸움은 해본 적 없지? 다리 내놔봐.” 아즈윈은 칼을 집어넣더니 다가와 제이의 가슴을 뒤로 밀었다. 제이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즈윈은 그의 다리를 끌어 당겨 무릎과 종아리를 주물러 주었다. “서너 개의 포메이션만 가르쳐주겠다. 하지만 별로 소용없을 거야 .” 아즈윈이 말했다. “내 실력이 부족한가?” 제이가 물었다. “아니, 너는 게리가 아니야. 게리의 무자비한 돌격을 네가 굳이 흉내 낼 필요는 없어.” 아즈윈은 쭈그리고 앉아 제이의 불만 가득한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너, 상대의 공격 타이밍을 다 잴 줄 아는 거지?” “대충 그렇다.” “그럼 넌 돌격할 필요 없어. 적을 사방에 두고 싸워라. 그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시큰둥하게 말하고 있으나 만약 지금 제이가 아즈윈이 생각하는대로 움직이는 녀석이라면, 이건 정말 로일과 맞먹는 천재임에 분명했다. 로일은 일 대 일에 있어서는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이는 일 대 다수에 있어서 게랄드 이상일지도 몰랐다. 아즈윈은 제이의 다리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손잡이지? 그래도 도끼는 왼손에 들어라.” “그러지....... 음, 그럼 이 도끼 나 쓰라는 거냐?” “게리를 대신하라는 뜻은 아니다. 넌 너야. 너를 위한 포메이션은 따로 만들어두지.” “알았다.” 의미하는 바를 알고 대답하는 게 아님이 분명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로핀의 옆으로 다가왔다. 로핀은 누운 건지 앉은 건지 모를 느긋한 자세로, 다가오는 아즈윈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만하냐?” 아즈윈은 로핀을 노려보다가 그의 배 위에 털썩 앉아버렸다. 로핀은 비명을 지르며 물 밖 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크게 한 번 튀어 올랐다. 하지만 아즈윈은 허벅지 사이로 로핀의 배를 감싸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짓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 이 녀석이, 이제 스승에 대한 예절은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았냐?” “됐어요. 선생님이 가르쳐준 건 검이었지. 예절 아니었어. 그보다 저 녀석, 여길 보낸 거 누구예요? 이 배치, 의도한 거죠?” “의도? 배치?” “이 곳이 가장 격전지가 될 거라는 건 알아요.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한 거였고, 로핀 역시 이런 자리를 피할 사람이 아니죠. 알아. 로일을 분노의 탑으로 보내버린 건 카셀이었을 거고, 던멜이 이 곳에서 빠진 건 당연했죠. 하지만 저 녀석은 왜 나랑 묶은 거죠? 가르치라고? 로핀이죠?” “아니, 내가 아니야.” “그럼 누구예요?” “그럼 누구예요?” 로핀은 옆구리를 감싸고 있는 아즈윈의 다리를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아이린.” “마스터 아이린이?” “특별히 그걸 의도한 건 아닐걸? 네가 아이린을 좋아하고, 아이린은 제이메르를 매우 아끼지. 나라도 둘이 묶어놓고 싶겠다.” “고작 그런 이유?” “흐음, 가르쳐보고 싶어졌나, 저 넌 아직 제자를 두기에는 어려.” “꼭 가르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였달까? 잠깐 칼을 대는 순간, 내 기술을 다 빼앗아가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어.” “걱정 마라, 아즈윈.” 로핀은 아즈윈의 다리에 올려놓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넌 내가 키운 최고의 제자다. 아무리 저 녀석이 네 기술 다 빼앗아가도 너의 진짜는 빼앗기지 않아. 아이린이 내기를 위해 제법 괜찮은 녀석을 데려온 모양인데, 어림없지.” “내기?” “모른 척해둬 .”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즈윈과 로핀은 얼른 일어나 남쪽 로크의 상공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을 내는 로크의 방어막 주위로 검은 박쥐같은 것이 날개를 퍼덕이고 날고 있었다. “저게 뭐죠?” “믿을 수 없지만, 생긴 모양으로 추측해보자면....... 모즈다.” “모즈가 날개가 있었어요?” “없지. 하지만 모즈를 만들었던 녀석이 거기에 날개 하나 못 달까?” 그 박쥐같은 괴물은 몇 번 크게 펄럭이더니 푸른 빛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즈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 로크 존인지 뭔지 하는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 로핀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러스킨. “ “그 사람이 왜요?” “익셀런 제1기사단 녀석들이 하늘 산맥에서 타고 다녔던 검은 털의 베논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 물질로 몸을 보호했다고 했다. 녀석들이 입고 있는 망토도 같은 거고.” “맙소사, 그럼 로크 존이 소용없다는 뜻인가요?” “아니, 아니지. 러스킨이 무슨 연금술사도 아니고 그런 귀한 물질을 대량으로 만들 수는 없을 거야. 고작 베논 한두 마리, 모즈 두어 마리 염색하는 정도겠지. 크기를 보니 날개를 비정상적으로 키우느라 실제 몸체는 아주 작은 것 같군. 저런 녀석 한 마리 로크 존으로 들어간다고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위험하지 않다면 저런 걸 왜 굳이 로크 안으로 들여보낸 거죠? 드래곤의 출현으로 사기 충전된 로크 사람들을 겁이라도 주려고?” "글쎄, 하늘을 나는 모즈라면 크기야 어찌 되었건, ‘한 명’ 정도는 죽일 수 있으려나? 병사들 몇 백 명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라면 루에머스 집정관이라든가.......“ “카셀 옆에는 누가 남아있죠?” 아즈윈이 급히 물었다. 몸은 벌써 로크 쪽으로 향해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네가 옆에 있는 것만큼은 믿을 만한 녀석이 남아있다. 저런 거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가 앞으로의 전투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아즈윈은 인상을 찌푸렸다. “답지 않게 진지해지지 말아요.” “그래야 할 때는 해야지.” 로핀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아즈윈의 이마를 쿡 찔렀다. “이번 전투가 끝날 떄까지 항상 상기해 둬라. 적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다. 어떤 이상한 일이 벌어져도 마음 흔들리지 말 것.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나도 달아나지 말 것.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나도 눈물을 보이지 말 것.” 아즈윈은 로핀의 손을 탁 쳐냈다. “적어도 마지막 말은 지키겠군요. 제가 흘릴 눈물은 벌써 다 흘려버렸으니까요.” 자정이 넘었어도 적은 공격해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카셀은 침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딱딱하고 차가운 돌바닥에서 쉬거나 아예 비상경계 태세로 쉬지도 못할 텐데, 자기는 졸음을 못 이겨 잘 준비를 하고 있다니........ ‘캡틴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카셀은 고개를 저었다. ‘변명이야, 이런 거. 캡틴이라면 최전방에서 싸워야지. 최전방에서 물러나 구경하고 있는 캡틴 따위, 어떤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아. 악당으로나 나오려나?’ 그렇다고 억지로 말에 올라 칼을 들어봐야 친구들에게 거치적거릴 따름이었다. 노르만트의 왕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검은 기사들 앞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카셀은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그는 입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정말?” 창문 너머에 희뿌옇게 보이는 얼굴을 보고 카셀은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약한 마음이 그런 추악한 형상을 비추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어?” 그러나 창문을 깨뜨리며 카셀을 덮친 그 검은 형상은 모즈였다. 깃털이 아닌 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는 창문 전체를 덮을 정도로 컸으나, 얼굴은 손바닥보다 작았고, 몸 전체의 크기도 조금 큰 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카셀은 그 작은 무게를 못 이겨 뒤로 넘어졌다. ‘어떻게?’ 구아닐도 들어오지 못하는 로크 존 안으로 어떻게 이런 괴물들이 들어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전에 카셀은 뒤통수를 바닥에 부딪쳤다. 모즈의 작은 두 팔은 가까스로 제압했으나, 입에서 나오는 터무니없이 긴 혀가 카셀의 목을 감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보였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려 카셀은 뭘 봤는지 인식을 하지 못했다. 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즈의 혀가 잘려 나가며 뜨거운 피가 얼굴을 덮었고, 모즈의 묵직한 몸이 뒤로 빠져나갔다. 목에 감긴 축축한 혓바닥을 떼어내는 카셀의 손길이 무거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날개 달린 모즈는 불길한 성당의 석상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 라이가 던진 칼날이 가슴에 박힌 괴물은 몸부림쳤으나, 벗어나지 못했다. 라이는 다가가 모즈의 목을 움켜잡았다. 모즈는 라이의 팔목을 잡고 저항했으나 라이는 그대로 모즈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한 방에 모즈의 목이 기형적으로 꺾여 앞으로 축 늘어졌다. 그걸로 이미 숨이 끊어졌으나, 라이는 한 번 더 쳤다. “괜찮나?” 라이가 카셀을 부축하며 물었다. 카셀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즈가 혀를 감는 순간 보았던 뭔가가 뒤늦게 천천히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모두 보는 순간 카셀은 기절했다. 자신을 부르는 라이의 목소리도 희미해졌다. “카셀?” 그곳은 눈에 익은 장소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울퉁불퉁한 굴곡들 위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증기 뒤로 보이는 그곳은 무너진 축복의 탑이었고, 그 위로 검은 드래곤이 포효하고 있었다. 그 옆에 황금빛 드래곤이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사방에 걸린 울퉁불퉁한 바위 같은 것들은 모두 사람의 시체였다. ‘보아라.’ 무너진 축복의 탑 옆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있었다. 그 마법사가 손가락으로 분노의 탑을 가리키며 한 번 더 말했다. ‘보아라.’ 그 곳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탑 옆에 붉은 빛의 드래곤이 쓰러져 있었다. 입에서 흘리는 붉은 피가 개울을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 그 머리 위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머리를 치렁치렁 흘러내리고 서 있었다. 그녀의 피 묻은 손에 크나딜의 얼굴에서 파낸 드래곤의 눈동자가 들려 있었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이번에 아로크의 탑을 가리켰다. ‘보아라.’ 아로크의 탑 꼭대기에는 카셀이 지금 이 순간 너무도 보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몸은 두 동강이 나있었다. 회색의 마법사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머리를 잡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자의 웃음소리가 귀청을 찢어놓는 것 같았다. 잘려나간 타냐의 몸 아래로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뭔가가 바닥으로 철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카셀은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로크가 보였다. 로크의 성문은 아예 장작개비처럼 박살이 나 있었다. 그 안으로 모즈들이 밀고 들어왔다. 로크의 시민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야!” 카셀은 소리를 질렀다.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다시 축복의 탑이 보였다. 아즈윈과 로핀이 보였다. 둘은 뭔가 이야기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도끼를 들고 있는 제이메르가 다가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탑 옆에 우뚝 서 있는 황금빛 드래곤은 분명 살아있는 가넬이었다. 시체가 아니었다. 탑도 무너지지 않았다. 분노의 탑 옆에 서 있는 붉은 드래곤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죽지 않았다. 탑 꼭대기의 라틸다와 로일이 사-크나딜에게 뭔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로크의 탑에는 타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로크는 지금 이 순간 창 밖을 쳐다보면 나타날 그런 평원한 모습이었다. 메이루밀과 던멜도 보였다. 간간히 알아볼 수 있는 던멜의 수화가 잠시 이어졌다. 그의 옆에 있는 메이루밀은 그 수화를 알아듣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아까 본 것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이었고, 나중에 본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보아라.’ 보이는 모든 곳에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는 또 한 번 손가락을 들어 밤하늘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카셀은 의식적으로 그 방향이 서쪽이라고 생각했다. 그 곳은 하늘 산맥이었다. 레미프들의 얼굴이 잠깐 보이는 것도 같았고, 검은 드래곤의 얼굴도 잠시 보이는 듯 했다. 눈 덮인 산에 하얀 얼음 조각이 서 있다가 갑자기 긴 머리를 카셀에게 들이밀었다. 카셀은 실제로 그것이 얼굴에 닿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뒤로 물러났다.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만들며 이동하는 그 이상한 유령같은 괴물을 뒤로 한 채 카셀의 시선은 어느새 평원을 지나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성곽에 이르렀다. 그것은 블루 게이트였다. 거기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한 명 한 명 그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워둔, 아무리 급하게 외웠어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아란티아의 영웅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목소리마저 들렸다. “늦지 않을까?” 아직은 어린 목소리, 그러나 어른들 틈에 끼어서도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는 당찬 소녀. 못 보던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 한 쪽에 흉터가 생긴 그 아이는 실디레였다. 그리고 실디레 옆에 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납자는 쉐이든이었다. “늦는 건 늦는 거고, 우리 가는 건 가는 거다. 걱정해도 우선 자둬라. 우리가 갈 길은 멀다.” 그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또렷했다. “로크까지 며칠이나 걸리지?” 실디레가 물었다. “닷새.” “너무 길어!” “마지막 순간 말이 지치면 안 되니까 휴식을 취하며 가야지.” “그렇지만, 쉐이든.......” 실디레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카셀의 시아는 뒤로 물러나 다시 하는 산맥을 향했다. 그 나무 가득한 숲이 반드시 하늘산맥이랄 수는 없으나, 카셀은 확신했다. 그 숲 너머로 모즈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평원을 덮은 그 숫자를 보고 카셀은 또 한 번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모즈들이 도달한 곳은 며칠 전 함락된 레오피오였다. 평원 반대편 지평선까지 메워 걸어오는 모즈들은 적어도 오만 마리 이상이었다. 그런 광경의 한 쪽에서도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있었다. 그는 어디에나 존재했고, 모든 것을 카셀과 함께 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모즈들을 가리켰다. “보아라.” 고대어인지, 인간의 언어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내가 이겼다. 천 년이나 준비된 마지막 전투다. 새나디엘의 대처는 이미 늦었다. 너의 부하들 없이 네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느냐, 새나디엘의 후계자? 내가 준비한 이 힘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 로크가 무너지는 순간, 내 위대한 계획이 시작되노라. 넌 막을 수 있겠느냐? 로크가 무너지는 순간, 내 위대한 계획이 시작되노라. 넌 막을 수 없다. 넌 막을 수.......” 카셀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침대 옆에는 라이가 앉아 있었고, 벽에는 여전히 칼에 박힌 모즈가 걸려 있었다. 깨진 창문에서 찬 바람이 불어왔고, 밖은 여명이 깃들기 시작했다. “벌써 아침이야?” 마셀이 놀라 물었다. “새벽, 이다. 걱정, 했다. 너, 오래, 의식, 없었다.” 라이가 대답했다. 카셀은 침대에서 거의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탁자에 놓인 지도를 꺼냈다. 라이가 호기심에 다가왔다. 카셀은 너무 급히 깃털 펜에 잉크를 찍다가 그만 잉크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잉크는 금방 바닥의 양탄자를 적셨지만 카셀은 그걸 다시 주울 생각도 않고 지도 위에 선을 길게 그렸다. “뭘, 하는가?” 라이는 카셀이 상처 입은 데도 없이 기절한 것부터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제는 일어나자마자 지도에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는 숭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으나, 카셀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레오피오에서 모즈들이 오는데 약 사흘, 블루 게이트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게 닷새.......” “누가. 오는가?” 라이가 물었다 . “울프 기사단!” “여기로?” “그래. 하지만 폐하께서 너무 늦게 보내셨어. 이틀이나 늦어.” 카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손을 늘어뜨렸다. “아니, 아니야. 가넬로크는 사실 사흘도 버티지 못해. 알 것 같아. 오늘 가넬로크의 병사들은 한잠도 자지 못했어. 봐. 괴물들이 저렇게 몰려와 있는데 누가 잘 수 있겠어? 내일이야. 아니, 하루 더 우리가 지치길 기다려 모레 공격할 수도 있어. 그때 그걸 막는 건 불가능해.” 카셀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손에 쥔 깃털 펜이 부러졌다. “울프 기사단이 와도, 그때는 이미 늦어. 제일 무서운 건 원지 알아? 그걸 알고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야.” “있다.” 라이가 말했다. “뭐가?” “나는 모른다. 있다. 있을, 것이다.” “너에게 위로를 부탁한 적 없어!” 마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라이에게 퍼부으려 했다가 멈췄다. “미안해, 라이.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어.” 라이는 화가 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넌 계속......, 네 친구, 게랄드, 죽음을, 네 탓, 으로 돌렸다.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라이의 길지 않은 잿빛 머리카락이 새벽바람에 흔들렸고, 옅은 햇빛을 등지고 말하는 그의 하얀 날개는 천사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레미프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나,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 레미프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특히 다른 레미프들에 비해 두 배나 더 큰 날개를 가진 라이는 더욱 아름다웠다. “넌, 아즈윈, 살렸다. 늦은 게, 아니라....... 빨랐다.” “아즈윈을 구한 건 내가 아니라, 로핀이야. 라이, 너야. 타치셀을 당긴 건, 너다. 카셀이다.” 카셀은 한참이나 라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한 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카셀은 결국 한 가지만 떠올랐다. 크나딜의 동굴에서, 라든에서, 아란티아에서 언제나 머리 속에 담고 있었던 한 가지, 그것은 시간이었다. 카셀은 침대 옆에 풀어놓은 아란티아의 보검을 들고 라이에게 말했다. “제이메르 들고 난 적 있지? 나 들면 어디까지 날 수 있어?” 라이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말했다. “어디든.” “아로크의 탑으로 가자.” 카셀은 옷 하나 걸치고 어제 먹다 남은 빵을 입에 물었다. 희미한 방벽에 싸여 있는 로크의 상공을 날아가는 건 아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카셀은 머릿속에 그려놓은 지도와 앞으로의 시간을 계산하느라 그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이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보여준 끔찍한 광경이 정확히 언제의 모습인지 카셀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단지 불타는 리마 성처럼 카셀의 공포가 만들어낸 가짜였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믿어 버리고 끝나면 좋겠다고 카셀은 간절히 빌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카셀은 날아가는 순간에도 계속 망설였다. 마지막까지 라이에게 방향을 돌려 다시 드래곤 기사단의 자기 침실로 데려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잠이나 자자. 잠이 모자라니까 멍청한 생각이나 하는 거지. 쓸데없이 무거운 이런 옷을 벗어버리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뜨거운 물에 얼굴을 씻고 그냥 침대에 누워. 그리고 자. 자고 일어나서 침실에 더럽게 걸려 있는 모즈의 시체를 치우자. 그리고 각 군대를 돌아다니며 캡틴 울프의 권위를 보여주며 모두를 격려해주면, 다들 좋아하겠지.’ 카셀은 정말로 눈앞에 그들이 있는 것처럼 주먹을 꽉 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인간들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소리 지르는 거야. 자 싸우세요. 나는 혼자 후방에서 당신들 죽는 거 얌전히 구경하고 있을 테니, 목숨 바쳐 싸우세요. 나와 로크의 의원들만 살아남아 있고, 탑만 건재하면 인간들은 살아남는 겁니다. 그러니 사망자 명단에도 올리기 힘든 너희들은 다 죽어도 괜찮아요. 얼마나 좋습니까? 당신들의 위대한 희생 앞에 당신들의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살 겁니다!’ 카셀은 어금니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푸른 방벽 너머로 모즈의 군대가 보였다. 그들도 횃불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위치를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모즈들에게 필요한 불이 아니라, 모즈들을 지휘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불이리라. “라이, 구아닐이 어디 있는지 보여?” 카셀이 말했다. “봉지지 않는다.” “익셀런의 기사들이나 카구아는?” “밤은, 보기 힘들다.” 카셀은 희미하게 스치는 찬 밤공기를 맡으며 머리 속을 비웠다.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하고도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라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 “모른다. 그냥...... 난, 너 뭘 하든, 따른다.” 카셀은 그런 라이에게 이 말 밖에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고마워.” 탑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카셀을 보고 타냐는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인사도 못했다. “타냐, 나 갈 곳이 있어요.” 카셀은 창턱에 겨우 매달려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날개를 펄럭이던 라이가 한 발만 창턱에 걸치고 기다렸다. 타냐는 그 들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라이와 함께요? 어딜?” “데려올 친구들이 있어요. 지금 아란티아에서.......” 방안에는 타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린이 작은 탁자에 앉아 카셀을 보고 말했다. “울프 기사단이 오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 캡틴?” 카셀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알게 되었어요.” “그런 큰 일을 ‘그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마스터 아이린께서는 어떻게 아셨나요?” “내가 하늘 산맥으로 떠날 때 이미 울프 기사단은 출정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충 시간을 거슬러 생각해보면, 지금쯤...... 그레이 게이트에 있지 않을까?” “블루 게이트에 있습니다.” “적이 너에게 그걸 보여주었구나.” “......예.” “적의 환각에 눈을 빼앗겨 캡틴이 함부로 자리를 비우려고?” 아이린은 질책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킨다고 달라집니까?” 카셀은 오히려 강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에게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보인다. 로크의 시민들은 이미 캡틴 울프라는 존재를 따르고 있다. 네가 지킨다고 달라지냐고? 달리지지. 전쟁에서 사기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않지? 아란티아가 그 엄청난 론타몬의 군대를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절대지지 않는 믿음이었다. 그게 새나디엘 폐하께서 울프들에게 주신 마법이었어.” “마법이요? 그래요. 사람들은 제가 바로 그런 마법을 발휘해주길 바라는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 그런 힘은 없어요.” “네가 아무 힘도 없다면 대체 하얀 늑대들이 왜 너를 따르겠어? 흐음, 우습군. 퀘이언과 나를 앞에 두고 큰 소리 칠 때 이미 그런 문제는 해결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고민하는 거였어? 생각 이상으로 소심한 녀석이네.” 아이린은 차분한 말로 화를 내고 있었다. 타냐는 손을 내밀어 아이린을 말리고 대신 말했다. “카셀, 어딜 간다는 건지는 묻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이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제가 카셀에게 의지하고 있어요. 그것만으로 힘이 되어줄 수는 없나요? 조만간 아이린은 과거의 연인과, 저는 과거의 스승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자리를 비우겠다니요?” “타냐....... 그리고 아이린, 저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요, 적이 저의 자신감을 무너뜨리기 위해 보여준 미래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아이린. 로크의 군대로 저 엄청난 군대를 맞아 싸울 수 있습니까? 기적을 일으켜 사흘을 지킨다고 해도, 그 뒤에 지금 몰려온 것보다 더 많은 숫자가 이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까지 보았습니다. 적은 보여준 것 이상의 모즈를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군대 이상?” 아이린도 동요했다. 타냐도 놀랐다. 성 밖에 버티고 있는 괴물들의 숫자는 이미 기적을 필요로 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 이상이라는 건 생각도 못해본 숫자였다. 카셀은 뽑지 않은 아란티아의 보검을 칼집 째로 들었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제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이틀이 늦습니다. 저는 시간을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리를 단축시킬 수는 있습니다.” 아이린은 이미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았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멍청한 녀석! 마법사조차 한 번에 열 명 이상을 이끌고 가다가는 하늘 산맥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나는 베나 에사르크의 힘을 빌려도 절대 다른 사람을 하늘산맥으로 끌어들이지 않아.” “하지만 땅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하늘 산맥을 경유하는 게 더 빠르잖습니까? 즈토크 워그는 하늘 산맥에서 가장 강력한 인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나딜께서 즈토크 워그와 기적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기적이 지금 필요할 때에요.” “아직도 모르겠니? 네가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울프 기사단을 끌고 오는데 극적으로 시간이 단축되지는 않아!” 카셀은 힘없이 들고 있던 보검을 늘어뜨렸다. “그럼 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늦게 움직이셨습니까?” 아이린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적이 가넬로크를 치려고 군대를 준비한 건 아셨지만, 미리 아란티아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 네가 말했지? 지금 엄청난 군대가 레오피오로 내려왔다고. 계산해 보거라. 만약 울프 기사단이 먼저 로크에 와 있었다면 그 군대는 지금쯤 레외오가 아니라 블루 게이트로 내려가고 있을 거야. 나도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 적과 새나디엘 폐하는 서로 시간 싸움을 하고 있었어.” 아이린은 신경질적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부터 울프 기사단은 아란티아를 빠져나가서는 안 되는 병력이다. 알잖아? 울프들은 새나디엘 폐하의 힘 안에서 완전한 존재야. 블루 게이트를 벗어나는 순간 울프들은 더 이상 울프가 아니야. 쉐이든이 화이트 게이트 앞이 아니라 이 곳에서 캡틴 웰치와 싸웠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있습니다!” 카셀은 지체 없이 말했다. 다시 그의 눈에 빛에 반짝였다. “타냐, 제가 얘기했던 거 기억나요? 전 카모르트에서도 노르만트로 원군을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 역시 하루가 늦었지요. 타치셀에서도 하루가 늦어 게랄드가 죽었습니다.” 타냐는 강하게 부정했다. “누구도 그걸 카셀의 탓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제가 그걸 제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카셀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타냐는 카셀의 눈에서, 입으로 말하지 못하는 작별 인사를 보았다. “......그때 늦은 이틀의 시간을 끌어오겠습니다.” “카셀!” 타냐는 손을 내밀었다. 카셀은 고개를 저으며 창턱에서 기다리는 라이에게 다가갔다. “기다려요, 타냐. 반드시 돌아올게요.” 라이는 카셀을 뒤에서 끌어안고 탑 아래로 떨어졌다. 타냐가 달려가 창가로 가보니 카셀은 이미 하늘을 날아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카셀, 어째서 아직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왜 항상 자기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겁니까? 내가 이렇게 필요로 하고 있는데, 왜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겁니까?” 타냐는 카셀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원망했다. 아이린은 타냐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녀석은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마법을 시도해볼 생각인 것 같구나. 그리고 여기에 와서는 안 될 원군을 데려온다는 소리겠지.”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곳에는 더 많은 원군보다 카셀 한 명이 더 필요합니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원군 따위 아무래도 좋아요. 전 무서워요. 카셀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나도 알아. 그래서 말린 거야.” 카셀의 모습은 얼음 성의 창문에서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테일드의 모습과 같아 보였다. “카셀이 없어졌다는 걸 어떻게 다른 친구들에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군. 겁먹어서 혼자 안전한 곳에 숨어있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아이린은 눈물 맺힌 타냐의 눈을 보며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만약 타냐가 마음의 의지를 잃어 마법의 싸움에서 패한다면, 카셀, 이건 무조건 네 책임이다!” 13. 로크 존 아이린은 카셀이 새벽에 떠났다는 소식을 가급적 조용히 전달했다. 병사들은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았다. 루에머스도 아이린의 말에 한참이나 신음하더니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아란티아의 캡틴이 자기들 군대의 사기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적어도 그걸로 사기가 떨어지는 일은 피하고 싶어 했다. 로핀은 의외로 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울프기사단 오면 꽤 도움될 걸?” 하고 말했다. 아즈윈은 콧살을 찌푸리며 아이린과 똑같은 생각으로 말했다. “괜찮은 남자란 것들은 항상 자기가 괜찮다는 걸 몰라서 그걸 증명한답시고 여자 곁을 떠나버리죠.” “아, 맞아. 그래서 괜찮은 여자 옆에는 시원찮은 남자만 남게 되지.” 아이린의 말에 로핀의 한쪽 눈썹이 꺾여 올라갔다. “이것들이, 그게 나 같은 멋진 남자 앞에서 할 소리냐?” 제이는 카셀이 가버렸다는 것에 황당해했다. 그러나 곧 수긍했다. “그 녀석이 그리 한다니 그리 할 겁니다.” “카셀이 너한테 그 정도로 믿음을 줬더냐?” 아이린은 제이 같은 괴팍한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물었다. 제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솔직히 말했다. “믿음을 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믿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말해놓고 앞뒤가 맞는 말인가 점검해보는 건 여전했다. 아이린은 빙그레 웃으며 제자의 성장에 즐거워했다. “제이메르, 난 마스터 크나딜께도 이 사실을 알리러 가야겠다. 아, 그리고...... 합격해라, 세 번째 테스트.” 기억력이 좋지 않은 제이도 그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반드시 그럴 겁니다.” “좋아.” 아이린은 분노의 탑을 지키는 크나딜에게 갔다. 크나딜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셀의 선택에는 나조차 개입할 수 없다. 이미 그의 기더가 내 통제를 벗어났다. 적의 힘이 너무 커졌다. 그러니 카셀이 뭘 하든, 그건 그의 선택에 맡기노라.” “라틸다라는 여자는 어떤가요? 타냐가 걱정하더군요. 그녀는 언제라도 저쪽의 힘으로 물들어버릴 수 있다고.” “내가 ‘살아있는 순간까지’는 괜찮다.” 이중적인 의미였다. 불안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 애초에 크나딜께서 안 계시면 이런 방식의 전투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아이린은 마지막으로 남쪽 성문으로 갔다. 메이루밀과 던멜은 마침 간단한 시합을 하고 있었다. 일반 사람이 보기에도 가볍게 몸푸는 수준에 불과한 몸놀림이었다. “전투 전이라 몸 사리나, 루밀?” 아이린이 안부 인사 대신 물었다. “던멜이 좀 봐달라고 해서. 한 바퀴 돌고 오는 모양인데, 어떤가? 다들 괜찮아?” “적군과 아군의 병력 차를 모르는 병사들의 한가로운 하루였지. 모르는 게 낫지만.” 아이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밀은 웃으면서도 유쾌하지 못한 농담이라고 핀잔했다. 아이린은 곧 카셀의 문제를 말했고, 루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위치를 아는 녀석이 그럴 리가?” “위치 같은 거 몰라, 그 녀석. 자기가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녀석이 뭔가 이상한 말을 했는데, 카모르트에서 벌어졌다는 일 좀 자세히 얘기해줘 봐. 이틀의 시간이라는 게 뭐야?” 루밀은 암브루의 에노아 후작 저택에서 그를 만난 얘기과 노르만트에서 본 것을 상세히 일러주었다. 마지막에 루밀은 입맛을 다시며 검은 사자 백작 앞에서 소리치는 카셀에 대해 말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라......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카셀이 검은 기사들의 군주앞에서 한 건, 로일에게 ‘저 녀석을 메라’ 하고 검을 던져준 것 하나밖에 없어.” “듣자니 타치셀에서도 아즈윈과 라이라는 레미프에게 검을 들라고 명령을 내린 거 하나밖에 없다더군. 레미프들이 루티아를 도운걸 아무 것도 안 한 거라고 생각해 버린 건가? 답답한 녀석. 새벽에 떠날 때 한 대 쳐서라도 말려줄 걸 잘못했어.” “칼을 휘두르는 낭만적인 기사들의 서사시를 즐기던 어린 아이인 게지. 머릿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과 현재 자기 모습에 대한 괴리감이랄까” “흥, 세상 누가 이상을 현실에 접목하고 살까?” “됐어. 크나딜조차 이미 이 상황이 통제를 벗어나 있다고 말씀하셨다며? 카셀을 도로 데려올 수 없다면 이제 믿고 기다려야지. 확실히 울프 기사단이 여기 오면 도움은 될 거야.” “정말 도움만 될까?” 아이린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루밀도 흐뭇하게 웃었다 “퀘이언은 늑대들을 잘 키워놨나?” “하나씩 일일이 살펴볼 시간적 여유는 없었지만, 적어도 울프 기사단이 여기 오면 우리 두 사람 오십 명이 온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거다.” “그거 멋진 말이군.” “우리가 늙은 걸지도. 그보다 루밀, 네가 키운 제자는 로일인가?” “특별히 키운 건 아니다. 우리 네 사람의 내기에 그 녀석을 내세우긴 껄끄럽군. 퀘이언에게 소개만 시킨 정도지. 너는?” “나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고 있어.” 갑자기 바닥이 크게 울렸다. 성벽도 약간 흔들리며 먼지와 돌가루가 뿌옇게 일어났다. 해가 지는 시각이기도 하거니와, 막 저녁 식사를 하려고 병사들끼리 교대하던 순간이라, 병사들의 동요가 더욱 컸다 망루 위에 선 던멜이 두 사람에게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루밀과 아이린은 급히 사다리를 올라가 성 밖을 내려다보았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로크 존의 경계에 서 있었다.그가 그 경계에 서 있는 것만으로 로크의 지각 전체가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 자의 힘이 이 정도라는 건 예상했기에 아이린은 오히려 그걸 버텨낸 로크 존의 위력에 더 감탄했다. 그리고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그녀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마법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왔냐? 이 테일드 몸 빌려 장난치는 녀석아!” 아이린은 베나 에사르크를 뽑았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손을 휘휘 저었다. “새나디엘의 힘도 없는 곳에서 나와 일 대 일로 싸우자는 건 아닌 줄로 안다.” 그 사악한 목소리 어디에서도 테일드의 느낌은 없었다. 아이린은 열 걸음 정도의 안전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주의했다. “폐하의 힘이 없어도 베나의 힘은 살아있어.” “어이, 어이. 넌 날 벨 수 도 없잖아. 설마 하니 과거에 사랑하던 사람을 죽이려고?” 마법사는 천천히 로브를 위로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진짜 테일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십 년 전 처음 만나 바로 사랑에 빠졌던 그 얼굴 그대로 그는 아이린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린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으나,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죽일 걷다. 사악한 일에 이용당할 바에야 죽어도 좋다고 테일드는 생각할 것이다.” “오해하지 마라, 아이린. 나는 단순히 테일드의 몸을 빌리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테일드다.” 이제 목소리마저 진짜 테일드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아이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런 강력한 마법의 보호막으로 둘러쳐진 몸에 내가 강제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가 스스로 나를 받아들였다. 나와 함께 세상을 양분하자는 약속을 따르고 있는 중이다.” 타냐의 말이 옳았다. “입 좀 닥치시지!” 아이린이 한 걸음 다가가자, 테일드의 얼굴을 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검지를 세워 흔들었다. “조심해, 아이린.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오면 난 널 두 동강 내 버릴 수도 있어.” “해 봐!” 걸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루밀이 소리쳤다. “아이린, 돌아와라.” 그녀는 멈칫했다. 테일드는 거보라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손가락으로 비누방울을 터트리듯 방벽을 톡 건드렸다. 물결 같은 파문이 손가락 주위로 퍼져 나갔다. “내 제자가 제법 힘 좀 썼군. 얼마나 버티나 볼까?” 테일드는 반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아까보다 더 심한 진동이 로크 전체를 때렸다. 성벽의 높은 쪽에 서있는 병사들은 휘청하며 주저앉았다. 보이지 않는 막이 흔들리는 무거운 진동이 로크의 공기를 울렸다. 몸으로만 느낄 수 있는 저음은 로크 사람들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드레곤이 오고, 각지의 군대가 몰려오고, 카모르트에서 원군이 오며 충천했던 사기가 그 반걸음에 흔들렸다. “저런, 타냐. 그렇게 전력을 다해 막지 않아도 된다. 그런 식으로 애를 쓰면 네가 하루라도 버틸 수 있겠니? 이틀까지는 무리겠구나.” 테일드는 타냐가 앞에 있기라도 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막고 있어도 소용없으니 얌전히 마법을 거두어라. 원래 네 스승이었던 나니, 지금도 군말 없이 나를 따르면 그만이야. 러스킨처럼.” 듣다 못한 아이린이 버럭 소리쳤다. “타냐가 너의 마법 앞에 무릎 끓을 리 없으니 헛된 설득은 접어라. 타냐가 마법으로 막고, 내가 검으로 막겠다. 어느 쪽이 먼저 지칠 지는 해보면 아는 일이야.” “아주 강한 정신력이야. 내가 바로 그 강인함에 반했었지.” “테일드인 척 말하지 마!” “그럼 어쩌라고? 내가 테일드인 걸.” 테일드는 또 크게 웃었다. “자자, 너희들이 그 정도로 강하게 저항하면 나도 곤란하지. 아, 그럼 이 사실을 알려주면 되겠군.” 마치 어린애에게 말하듯 손뼉을 짝 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순간에도 조금씩 몸을 앞으로 기울이던 그는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까부터 울리는 저음의 진동이 계속 이어졌다. “너희들이 그토록 의지하고 있던 캡틴이 죽었다. 카셀이라던가? 맞지?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아무 것도 못한 채 어물거리며 말만 늘어놓던 녀석.” “기어이 되지도 않는 거짓말까지 늘어놓는 걸 보니, 너도 궁지에 몰렸나 보지?” 아이린이 지지 않고 말했다. “아주 강한 레미프가 지키고 있더군. 뭐, 내가 데리고 있는 늙은이 한 명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아로크의 탑 쪽을 바라보았다. ‘듣지 마라, 타냐. 다 거짓말이다. 들어선 안돼.’ 테일드는 어설픈 마술사가 커다란 모자 안을 휘적거리다가 크기에 맞지 않는 커다란 토끼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소매에서 하얀 깃털이 달린 뭔가를 끄집어냈다. ‘보지 마라, 타냐. 너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어기는 보지마.’ 아이린은 타냐가 자기의 속마음을 읽어주길 바라며 외쳤다. 테일드가 소매에서 꺼낸 건 하얀 날개였다. 날개의 아랫부분은 아직 고 살점이 붙어 끈적한 피를 흘리고 있어싸. 테일드는 그 날개 한쪽을 로크 존 안쪽, 아이린의 발 아래로 던졌다. 아이린은 발 앞에 떨어진 날개를 보고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 레미프나 죽여서 날개 한 쩍 뜯어오면 겁이가도 먹을 줄 아는가?” 아이린의 말에 테일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이린, 예전 같지 않게 말을 하는군. 그런 모습이었나? 변했군. 더 멍청하게! 나는 세월이 조금 흐르긴 했지만 그깟 거짓말 몇마디 하려고 이정도로 큰 날개를 가진 즈비 레미프를 또 찾는 바보짓은 하지 않아. 아차차, 그러고 보니 나는 하늘 산맥에 들어가지도 못하지? 그럼 아크랜드 어딘가에 떠돌아다니는 길 잃은 레미프를 한 마리 찾아 왔어야 했나? 더 무서울 것 같아서 날개를 가져왔는데, 실패했나 보군. 그냥 캡틴 울프, 그 녀석의 머리통을 가져왔어야 했어. 실패야, 실패.” 그는 장난처럼 웃었다. 아이린은 타냐에게 했던 경고를 차라리 자기가 들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 그 날개와 더불어 흐리멍덩한 눈을 한 남자가 테일드의 등 뒤로 나타났다. 테일드의 웃음소리는 마법의 방벽에 파문을 일으키며 계속 땅을 진동시켰다. “마법의 힘은 타냐에게 맡긴다 치고.......자, 아이린. 내 사랑. 그럼 검의 힘은 어찌할 거지? 여기 절대 이기지 못한다고 너희들 스스로 떠벌리고 아녔던 바로 그 기사가 있다.” 아이린은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공포와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도저히 맨 정신으로 서있을 수가 없었다. 성벽 위에 있던 메이루밀도, 이미 들었으면서도 막상 그 모습을 보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스터 그란돌. 전 여왕 수호 기사이자 루밀, 아이린, 로핀, 퀘이언의 스승인 그가...... 루티아의 전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의 뒤에 서 있었다. 해가 떨어지자, 어둠은 천둥이 내리쳐 하늘을 울리는 것만큼이나 빨리 찾아 들었다. 하늘 어디에선가 날개를 펄럭이는 검은 드레곤이 로크의 상공을 배회하다가 북서쪽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모즈들의 군대가 이동했다. 일으키는 먼지의 방향은 검은 드래곤이 이동한 방향과 같았다. 축복의 탑 쪽이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 추가되었군.” 빅터는 말 위에 올라 희미한 빛에 휘감겨 있는 로크를 바라보았다. 밤의 별빛 아래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십 년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극도의 가지 혐오감과 우월감. 그 우월감에 젖어 산 긴 세월을 앗아간 적이 로크의 어딘가에 있었다. 빅터는 깊은 호흡을 반복하며 화를 삭이다가 말했다. “버크만, 정해진 자리로 가라. 포웰, 스탠리, 너희들은 나와 같이 축복의 탑으로 간다. 작전을 시작하겠다.” “예, 캡틴.” 세 사람이 떠난 자리에 러스킨만 남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로브에 가려 발이 보이지 않으니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가지 묻고 싶소. 마스터 러스킨.” “마스터의 칭호는 진작 버렸으니,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시게. 캡틴 빅터.” “뭐, 그럼 러스킨. 왜 루티아를 버렸소?” “우리가 서로의 개인적인 부분을 알아야 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호기심을 강제로 접을 이유 역시 없소. 당신이 대답 안 하면 그만이오.” 러스킨은 호탕하게 웃었다. 한참 앞서 있는 선두의 모즈들을 따라 모즈들의 마지막 병력도 이동을 시작했다. 빅터도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고, 러스킨도 거기에 맞춰 걸었다. “긴장하고 있군, 빅터.” “작은 싸움은 아니잖소.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구아닐에게도.” “긴장은 패배를 염두에 두었을 때 하는 거지. 적이 우리에게 품고 있는 공포심을 이끌어 함성 한 번만 지르면 끝날 전쟁이 아닌가?” 빅터는 콧김을 푹 냈다. “당신은 로핀이라는 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적어도 제일 먼저 죽었어야 하는 자라는 건 알지.” “십 년 전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소? 그는 항상 내 앞길을 막았소. 그가 내 팔을 빼앗지 않았다면, 론타몬 대륙 전쟁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거요. 제1기사단의 캡틴은 웰치나 네이슨이 되었을 것이고, 나는 후방에서 가장 강력한 론타몬의 실권을 쥐고 있었겠지. 그럼 난 아란티아 진군을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오.” “웰치 역시 아란티아 진군은 찬성하지 않았어.” “하지만 따랐지. 그게 나와 그 녀석의 차이요.” “나도 잘 모르지만, 캡틴 웰치는 왕실에서 내려온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네. 그런 조건이었을걸.” “그래 봤자 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우려는 왕실의 치사한 협박이었겠지. 웰치는 그 협박을 무시하지 못하는 소심쟁이고.” “소심? 기사도겠지. 죄인으로 치자면 네이슨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 아이는 내가 본 중 최고였소. 한 팔을 잃기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소. 그런 아이를 죄인들 틈에 끼워둘 수는 없지 않겠소? 그래서 1기사단에 넣었고,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지. 여전히 나는 그 아이만큼 막강한 기사는 없다고 여기고 있소. 이제 나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빅터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바로 그 아이를 죽인 게 하얀 늑대란 놈이었소. 만약 네이슨이 전투 중에 죽는다면 틀림없이 드래곤이나 마법사에게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녀석은 일 대 일 승부에서 죽었단 말이오. 실력에서 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러나 죽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지. 이런데 내가 긴장하지 않게 생겼소?” “여유를 가지게. 자네는 누구도 하지 못한 대륙 정복의 선두에 서게 되는 거네.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아니, 나는 인간이 어차피 멸망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이기는 쪽에 서고 싶었을 뿐이오. 거창한 이유는 없었소.” 빅터는 말을 도 빨리 몰아 러스킨을 지나쳐 가버렸다. 러스킨은 허허 웃었다. “아직도 그런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가? 차라리 부럽군. 나 같은 늙은이는 이미 돌처럼 굳어버렸건만.......” 그는 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는 드래곤의 푸른빛과 붉은 빛, 황금 빛 모두가 보이고 있었다. “나의 죽음이 드래곤에게 달려 있고, 드래곤들의 죽음이 나에게 달려 있다....... 내가 지금 제대고 하고 있는 거냐, 테일드?” 모즈들은 매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저 속도로 로크의 성을 우회하여 축복의 탑으로 향한다면 내일 새벽이 되어서야 도착할 것 같았다. 결국 오늘 밤에도 공격은 없을 듯했다. ‘뭔가를 ...... 기다리는 건가?’ 던멜은 한숨을 쉬며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저녁에 섰던 그 자리에서 예닐곱 걸음 정도 다가선 자리에 있었다. 성문 앞까지는 아직도 멀었지만, 그 자는 아주 천천히 규칙적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망루에 있는 병사들을 쳐다보기도 하고, 던멜과 루밀을 쳐다보기도 했다.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로트 존은 먼 하늘에서 천둥이 친 것 마냥 묵직하게 진동했다. 그 정도 흔들림으로서는 성벽은 물론이고 작은 집도 무너뜨릴 수 없지만, 사람들의 용기는 무너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성문 쪽으로 나와 있었다. 병사들은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어르기도 하고, 위험 지역에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저녁에 하늘을 날아간 그 검은 드래곤은 뭐냐, 적은 언제 공격해 오느냐 묻기 바빴다. “난리도 아니군.” 옆에 있는 루밀이 말했다. 던멜은 그 말을 알아보지 못해 뭐라고 말했는지 다시 물었다. “아, 미안. 아무 말도 아니었다.” 루밀은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좀 쉬지 그러나? 아직 부상도 회복 안 되었고.......” -괜찮습니다. 그냥 루밀께서 쉬십시오. 내일 아침에 제가 쉬겠습니다. 던멜은 난간에 글씨를 써서 말했다. “그럴까? 그러나 저러나 로크 군대의 군기도 꽤 대단하군. 이렇게 겁을 잔뜩 먹었는데도 자리를 이탈하는 병사도 없고, 경비 체계가 흔들리지 않고 있어.” 루밀은 길게 하품을 했다. “그럼 내일 교대하기로 하고, 난 한숨 자러 가지.”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밀이 가고, 던멜은 혼자 몸을 가볍게 풀었다. 루티아 마법사들의 치료로 한결 나아졌으나, 여전히 몸을 크게 움직이면 상처가 아팠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모즈들이 일으키는 먼지 냄새가 났다.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있었고, 병사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던멜이 돌아보니 헤더와 발락이 망루에 와 있었다. 던멜은 경계하는 병사들에게 괜찮다고 사인을 보냈다. 병사들은 창을 접긴 했으나, 의심쩍어 자리를 뜨진 않았다. ‘찾아뵙는 게 늦었습니다, 테마르.’ 헤더는 수화로 인사했고, 발락은 멋쩍게 고개만 까닥 숙여 인사했다. ‘카셀을 도왔다는 말은 들었다. 고맙구나.’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다가 조직원 모두가 로크에 갇혀버린 꼴이 되었구나. 전투가 시작되면 너희들도 어쩔 수 없이 싸움에 휘말리게 될 거다.’ ‘마스터 제라르께서 돌아가신 후, 조직원들은 더 열심히 전투 기술을 연마했습니다. 전투가 있으면 오히려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너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구나.’ 발락이 그 수화에 끼어들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돕고자 하는 건 로크가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마스터 테마르.’ ‘난 마스터가 아니다, 발락.’ ‘저에게 있어서는 마스터십니다.’ 던멜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한 사람이가도 더 필요한 시점이지. 적이 안으로 침투했을 경우에 도움을 청하겠다. 하지만.......’ 그런 최악의 경우가 온다면 블랙풋의 유능한 조직원은 모조리 죽을 거다, 라는 것까지 수화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던멜은 손을 접었다. 헤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항상 조직원 중 한 명은 옆에 있을 겁니다.’ ‘알았다.’ ‘그리고 테마르.’ 헤더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블랙풋은 아직도 당신을 기다기고 있습니다.’ 던멜은 그 이상 수화를 하지도, 보지도 않았다. 헤더는 계속 기다리다가 발락의 권유에 못 이겨 그곳을 떠났다. 카셀이 이 곳을 떠났을 때 던멜은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이 아닌, 몸의 느낌으로 던멜은 알 수 있었다. 사실 루티아에서 모즈라는 괴물들과 정면으로 싸워본 던멜과 로일만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같은 말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로크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도 아란티아는 남아있다. 카셀이 그곳으로 몸을 피한 후, 그 곳에서 다시 울프 기사단을 이끌고 싸워주는 게 나았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살아 있어라, 카셀.’ 14. 라이의 날개 카셀은 라이의 등에 업혀 있었다. 라이의 큰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몸이 출렁거렸고, 높은 곳에서 부는 바름은 여름인데도 차가웠다. 드래곤을 타 본 적도 있고, 아로크의 탑도 올라가 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높은 곳은 무서웠다. 타냐와 아로크의 탑에서 작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앤발디를 지나쳐간 둘은, 저녁 무렵엔 벌써 레오피오를 가까이 두고 있었다. 카셀은 날아간다는 게 얼마나 빠른 건지 새삼 놀라고 있었다. 문제는 라이가 자꾸 다른 방향으로 샌다는 것이었다. “왜 자꾸 동쪽으로 가려고 하는 거야? 남쪽이야.” 카셀은 라이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때마다 라이는 과격하게 방향을 고쳤고, 카셀은 얼른 목에 팔을 걸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카셀, 겁 많다. 다른 우그, 즐거워했다.” 라이의 말에 카셀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높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던멜 밖에 없을 거야. 그 우그는 아마.......” 카셀은 말을 멈췄다. “말하라.” “뭘?” “방금, 하려던 말.” “아무 것도 아니야. 그보다 라이, 네가 하늘 산맥을 관통해 날아가는 데 어느 정도나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대략 레오피오 남쪽산에서 하푸까지.” “하루.” “중간에 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쉬지 않아도 된다.” “밤새 날 거야?” “난다.” “......왜 업혀 있은 내가 더 지치는 거지?” 레오피오를 끼고 남쪽으로 향하는 중에 뒤에서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카셀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가끔 라이가 지나가는 새를 따라잡는 일은 있었다. 놀란 기러기 무리를 흩트려놓기도 하고, 호기심 많은 독수리가 먹이 감인가 하고 따라붙었다가 덩치에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니 뒤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라이를 추월해 가는 일도 있을 법 했다. 그러나 그 날갯짓은 새의 날갯짓과 달랐다. 소리도 아주 컸고, 크기도 아주 컸다. 무엇보다 새의 날개가 아니었다. 카셀이 놀라 뭐라 말하려 할 때 라이는 벌써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카셀은 미처 뭐가 쫓아오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라이의 등에 바짝 엎드렸다. “세게, 잡아라.” 라이가 말했다. 카셀은 라이의 목을 감고 있는 자신의 왼팔을 오른손으로 꽉 쥐었다. 뚝 떨어지는 느낌에 카셀은 눈을 꽉 감았다. 앞 머리카락이 이마를 세게 쳤고, 얼굴 근육이 심하게 당겼다. 내장이 한꺼번에 밑으로 사라지는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라이는 지금까지 카셀이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속력으로 활강했으나, 퍼덕이는 묵직한 소리는 더 가까워졌다. 라이는 뒤를 돌아보며 쫓아오는 적과의 뒤를 보고 싶었으나 너무 속도가 빨라 뒤를 보기는커녕 눈도 뜨기 어려웠다. ‘라이, 뭐야? 뭐가 쫓아오는 거야?’ 카셀은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입도 열 수 없었다. 라이는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다. 나무와 풀이 얼굴 바로 옆을 스쳐갔고, 약간 길게 자란 풀잎이 라이의 날갯짓에 찢어져 바람에 날려갔다. 뒤에서 나무가 부러지거나 땅이 파이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라이의 몸은 크게 요동치며 다시 위로 올라갔다. 공기의 진동이 뒤를 쫓아왔다. 카셀은 이빨이 부서지도록 깨물고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만 했다. 그 위험한 순가니 되어서야 카셀은 눈을 뜨고 바로 밑에서 쫓아오는 거대한 동물을 발견했다. 집채만 한 몸매에 그보다 훨씬 넓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는 그것은 검은 드래곤, 카-구아닐이었다. 라이는 계속 날개를 퍼덕여 위로 위로 올라갔고, 구아닐도 계속 그 뒤를 따라왔다. 구아닐의 입이 활짝 열렸다. “라이, 피해!” 카셀이 소리쳤다. 라이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찌나 방향 전환이 심했는지 카셀은 그만 팔을 놓치고 말았다. 구아닐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검은 불길이 하늘로 수직으로 뻗어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라이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고, 카셀은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잡고 매달릴 것 하나 없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단순히 추락의 공포가 아니었다. 바람에 스쳐 피부가 찢겨나가는 고통과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오는 송곳 같은 공기가 숨을 못 쉬게 만들었다. 이런 높은 속에서 떨어지는 충격으로 죽는 게 아니라, 그전에 심장마비로 죽는 걸지도 몰랐다. 카셀의 앞으로 라이가 날아왔다. 수백 마리 벌들이 웅웅대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살갗을 사정없이 때렸다. 라이는 카셀의 등 뒤를 잡았다. 하지만 라이는 굳이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 떨어지는 속도를 살려 더 빠르게 떨어졌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로 입을 활짝 벌린 드래곤이 지나갔다. 거대한 검은 날개가 일으킨 바람에 라이가 잠깐 휘청거렸다. 그러나 금방 균형을 잡고 라이는 아까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속도는 떨어지는 속도에 비하면 빠르다고 할 수 없으나, 현기증이 일어나 카셀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뒤에서 잡아주고 있는 것에 의존하니, 잡을 것 없기는 떨어지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높이를 잴 수 없는 상공에 던져져 있는 공포....... 카셀은 숨을 쉬기가 더욱 괴로워졌다. “천천히...... 숨을 내쉬어라. 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어라.” 라이가 부들부들 떠는 카셀을 진정시켜주며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이제 바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끔 펄럭이는 라이의 날개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눈, 떠라.” 카셀은 라이의 말대로 눈을 떴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카셀은 저도 모르게 외마디를 냈다. “아!” 푸른 초원이 펼쳐진 자리에 하늘 산맥의 웅장한 꼭대기가 보였다. 카셀의 시선과 동일한 선상에 눈 덮인 산 정상이 있었다. 바닥이 편평하고 윗부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른 구름이 카셀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레오피오의 마을은 장난감 마을처럼 작게 보였고, 걸어서 두 시간을 걸어가야 할 옆 마을이 한 시야 안에 보였다. 초원의 지평선과 산맥의 지평선이 서로 겹쳐 있었다. 밑에서 볼 때 알 수 없었던 하늘 산맥과 아크랜드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나뉘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대륙의 성곽이었다. “어, 얼마나 위로 올라온 거야?” 카셀이 물었다. “재 본 적, 없다. 하지만 우리 위, 아직, 구름 있고, 우리 아래, 또, 구름 있다.” 카셀은 천천히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지평선이......약간 굽어있어.” “더 높이, 올라가면, 둥글게......보인다.” “둥글게?” 카셀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공, 처럼.” 카셀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기하네.” “우그도, 레미프도, 보지 못한 광경, 이다. 어린 레미프들, 여기까지 못 오른다. 어른 레미프, 날지 못한다. 그래서 나, 밖에 못 봤다. 딱 한 우그만 빼고.” “네가 말한 ‘그 사람’도, 이걸 봤어?” 라이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라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렇기에 얼마나 그 배신감이 컸는지....... 칼이 목에 들어온 순간에 떠든 말이긴 했으나, 카셀은 라이에게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었다. 칼 앞에서 입을 연 자신과 그 약속을 믿은 라이 중 어느 쪽이 더 용기를 냈을까? ‘아들아, 앉아라. 오늘은 네 할아버지가 겪은 신기한 이야기를 해주겠다.’ 라이가 정말 그 사람을 소중히 생각했다면, 오히려 ‘이 얘기’를 숨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순간이기에 더욱 말해야 했다. “라이, 이건 할아버지께서 겪은 일을 아버지께서 해주신 이야기인데.......” 카셀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구아닐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높이 올라왔건만, 이 넓은 시야 안 어디에도 없었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께서 말을 팔러 큰 도시를 갔는데...... 난 그 얘길 듣고 믿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그 술집에서 하늘 산맥의 엘프를 봤대. 서커스 단장이 그 엘프를 잡아가려고 했는데, 서커스단장은 ‘너의 주인이 너를 팔았다, 그러니 이제 내밑에서 일하라.’고 말했어. 그 엘프는 서커스 단장과 그 부하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죽였지. 무서워 꼼짝 못하고 있던 할아버지는 그 엘프가 슬픈 얼굴을 하고서 누군가를 다음날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대. 그리고 그 엘프는 결국 하늘로 날아갔다고 했지. 할아버지는 밀을 파는 것도 잊고 그 엘프가 사라지는 모습을 구경했다고...... 했어. 난 그 얘길 믿지 않았었지.” 카셀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싶었고, 지평선이 공처럼 둥글게 보인다는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고도 싶었다. 차분히 기다리는 라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카셀은 말을 계속했다. “라이, 거기에는 뒷얘기가 있어. 그 엘프가 다음날까지 돌아오길 기다렸던 그 사람...... 사실은 그 술집 바로 뒤 하수도에 버려져 있었어. 배에는 칼에 꽃혀 있었대.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던 거야.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그를 발견해 의사를 불러 치료했지만 이미 너무 피를 많이 흘려 손 댈 수 없었지. 그 남자는 의식을 차리자마자 할아버지에게 하늘 산맥의 엘프가 어디 갔냐고 물었지. 할아버지는 사실대로 얘기해줬어.” 카셀은 라이가 숨도 안 쉬고 듣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 동안 몇 번이고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먼 대륙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던 카셀이었다.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랬었고, 카셀도 그랬다. “그 남자는 울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해줬어. 그 서커스 단장....... ‘할아버지가 봤던 그 레미프’가 죽인 서커스 단장은 거짓말을 한 거야. 그 단장은 엘프를 팔라고, 정 말 한평생 살 수 있을 만 한 돈을 내주겠다며 팔라고 그 남자에게 제안했었어. 라이, 넌 돈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니? 그건 정말 커다란 유혹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는 거절했어. 그 서커스 단장은 쉽게 그런 일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겠지. 팔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그는 거절했다가 그만 칼에 맞았어. 칼에 찔린 채로 술집으로 기어가며 엘프에게 달아나라고 소리 지르는 걸 막으려고 그들은 그를 하수도에 처박았지.” 말을 계속하는 카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미 추운 걸 넘어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으나, 카셀은 계속 말했다. “라이, 넌 그 여행자의 이름을 기억 못하겠니? ‘그 우그’는 마지막까지 술집에 놔두고 온 엘프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기회가 되면 꼭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할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죽었대. 할아버지는 밀을 판 돈으로 그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고 바로 여행을 떠났어. 그리고 수많은 모험을 하고 돌아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지. 그 자식의 이름이 에밀이고, 에밀이란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모험을 하고 싶어 또 여행을 떠났어. 그 여행에서 에밀, 나의 아버지는 달리아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이 나야. 아버지는 내 이름을 가장 좋아하는 모험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어.” 카셀도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라이....... 할아버지가 만난 그 사람의 이름이 ‘카셀’이야.” 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셀은 아이의 지금 얼굴을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의 처음에 네가 있었어. 할아버지가 모험을 떠나게 하고, 아버지도 모험을 떠나게 했어. 알겠니, 라이? 네가 나를 여기 있게 한 거야.” 카셀은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라이는 웃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라이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고맙다, 카셀.” 카셀은 라이가 지금 그 말을 어느 쪽 카셀에게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라이의 등 뒤, 그러니까 더 높은 하늘 쪽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구아닐은 라이의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위에 있었다. “위!” 카셀이 놀라 외쳤다. 라이는 즉시 날개를 접고 머리를 앞으로 떨어뜨리며 빠르게 활강했다. 구아닐의 앞발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라이는 카셀을 껴안은 채로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늘 산맥 쪽으로 날아갔다. “카셀, 방향 감각, 믿지 말고, 네 감각, 믿어라. 숲은 가지 말고, 바위 산, 찾아라. 눈길 걸어, 산 세 개 건너면, 하푸다. 눈 산의 느-라이프덤, 하늘 산맥의 유령, 조심하라.” 라이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카셀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라이는 하늘 산맥의 경계를 지나쳐 바위산의 뾰족하게 튀어 오른 둔덕에 카셀을 내려주었다. “가라.” 라이는 다시 날개를 펴 날아오르려 했다. “아니야. 같이 가야 해.” 카셀은 라이의 날개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는 카셀의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내 기더, 여기까지다. 카셀, 너 네 기더, 따라라.” “라이, 명령이다. 돌아와!” 라이는 하얀 날개를 펼치고 어린 아이처럼 맑은 미소를 짓더니, 어색하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불복하겠다, 카셀. 나의 캡틴이시여!” 카셀이 다른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라이는 몸을 돌려 이 쪽으로 날아오는 드래곤에게 돌진했다. 카셀은 구아닐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바위산 뒤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죽지 마. 라이. 죽지 마!” 마지막으로 돌아본 라이는 구아닐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라이는 바닥에 추락하기 직전 날개를 펼치며 다리부터 내려앉았다. 찢어진 어깨에서 흐르는 검붉은 피가 옆구리까지 적셨다. 숨을 가쁘게 몰아 내쉬는 라이는 천천히 칼을 들었다. 제이메르가 빌려준 그 칼날에는 붉은 피가 살짝 묻어 있었다. 카-구아닐은 라이의 뒤로 날아와 공중에 뜬 채로 말했다. [혼자서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떨어져 나왔느냐? 널 무시하고 가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게 하는구나, 건방진 레미프 녀석.] 비늘이 몇 개 뜯어진 구아닐의 뺨에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라이가 말했다. [내 기더의 마지막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나쁘지 않지.] [날개 좀 퍼덕일 줄 안다고 드래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고 보느냐?] [무기가 문제였지. 여태까지 드래곤을 피한 적은 없다.] 구아닐은 덩치에 걸맞지 않은 경박스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이런 작은 상처로 나를 죽이려면 일백 번은 베어야 할 것이다.] [백 번만 베면 되나?] 라이는 날개를 펼치고 뒤로 날아올랐다. 구아닐은 눈을 부릅뜨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뿜어낸 검은 불길은 눈에 들어오는 평지는 모조리 불태웠다. 라이가 피해 날아가는 방향으로 쫓아가는 불길을 잠깐 동안이나마 푸른 하늘을 검게 물들였다. 라이는 높이 올라가더니 구아닐을 향해 날아갔다. 목을 치고 지나가며 뺨에 난 것보다 훨씬 긴 상처가 났고, 다시 뱡향을 돌린 라이는 구아닐의 날개를 내리쳤다. 날개의 막이 찢어졌다. 구아닐이 날개로 일으킨 바람에 라이는 잠깐 뒤로 밀려 나는 듯 했으나 곧 눈길 위의 썰매를 타듯 미끄러져 그 바람을 탔다. 좌우로 넓게 펼친 날개는 구아닐이 일으킨 뜨거운 공기 안으로 파고 들어갔고, 라이는 구아닐의 다른 쪽 뺨까지 베었다. 하늘로 높이 날아간 라이는 말을 고쳐 쥐고, 아래쪽에 있는 구아닐을 가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구아닐은 자기가 밑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치욕스러워 했다. 칼이 베고 지나간 자리에서 흐르는 피가 비늘을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 “오냐, 내 진짜 힘을 이 자리에서 보여주겠다.” 구아닐의 몸 전체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라이의 오른쪽 어깨 쪽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멈춰라, 구아닐. 내가 내린 그 힘은 오직 드래곤을 죽일 때에만 허락한다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흥분한 구아닐이었으나, 그 목소리를 듣고 목을 움츠렸다. 구아닐은 천천히 날개를 접어 바닥에 착지했고, 보이려 했던 그 힘은 도로 감춰버렸다. “레미프, 너의 힘은 잘 알았다. 너의 기더가 싸움에 있다? 그럼 그 기더에 충실히 응해주지.” 라이의 앞에 유령처럼 회색 로브를 펄럭이며 떠 있는 남자는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라이는 칼을 집어 던졌다. 몸의 반동도, 예비 동작도 없이 던진 칼은 그 자의 로브에 박혔다. 그의 몸이 뒤로 약간 밀려났으나, 그 외의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자기를 맞춘 것을 감탄하고 있었다. “훌륭해. 싸움이란 건 상대적인 거지. 정말 구아닐을 죽였을 지도 모르겠어.” 그는 배에 박힌 칼을 뽑아 바닥으로 던졌다. “꽤 좋은 칼이군. 내 몸에 박히고도 멀쩡하다니.” 구아닐 옆으로 떨어진 칼을 가리키며, 그는 라이에게 말했다. “줍지 않을 텐가?” 라이는 무표정하게 마법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내려가 칼을 집었다. 그 사이 구아닐은 증오의 눈길로 그를 계속 노려보았으나, 공격하지는 않았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도 그 옆에 소리 없이 차지했다. “캡틴 울프가 뭣 하러 하늘 산맥으로 간 거지? 내가 보여준 미래에 대처하는 거라면 동쪽으로 갔어야지.” [카셀은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다. 하늘 산맥으로 가는 게 당연해서 하늘 산맥으로 간 거다. 그리고 그곳은 너 같은 사악한 존재는 가지 못하는 곳이지.] 라이는 고대어로 대꾸했고, 그 마법사도 고대어로 말을 받았다. [사악하다는 기준은 나디우렌이 선이라는 전제 조건 때문이지. 그리고 그쪽 길로 가면 오히려 안 좋을 텐데? 하늘 산맥이라고 선한 존재만 있는 것도 아니지. 그곳엔 나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나만큼이나 ‘워그를 증오하는 존재’가 있지 않나?] 마법사는 한쪽 팔을 펼쳤다. 헐렁한 로브의 소매 뒤로 그 자리에 없었던 인간이 나타났다. 라이는 눈에 착각이라도 일으킨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사의 옆에는 칼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라이는 본능적으로 그 남자의 힘을 경계했다. “내가 보기에 저 녀석이 레미프들 중 가장 강한 녀석 같다. 싸움을 싫어하는 녀석이 스스로 자기의 기더를 싸움이라고 떠벌릴 정도라면 그럴 만하지? 그란돌, 인간 중 가장 강한 네가, 레미프 중 가장 강한 저 녀석을 죽여라. 꽤 상징적인 의미가 되어줄 것이다.” 구아닐은 숨 죽여 웃었고, 회색 로브의 마법사도 어깨만 들썩이며 웃었다. 그란돌은 라이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라이는 그 초점 없는 눈을 한 검사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갑자기 목을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라이는 그 공격을 바깥으로 밀어내지 못했다. 구아닐을 벨 때도 한 손으로 싸웠던 라이였으나, 그 공격을 쳐내기 위해서는 두 손을 모두 써야 했다. 그란돌은 튕겨 나온 칼을 라이의 옆구리로 돌렸고, 가까스로 그걸 막고 물러나면 바로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라이의 눈에는 그란돌의 손이 여덟 개쯤 되어 보였다. 그는 치명적인 공격 사이사이에 보일 듯 말 듯한 속임수를 무수히 섞고 있었다. 계속 그런 것에 신경 쓰며 막으니 금방 집중력을 잃어갔고, 그란돌은 그 틈을 노려 속임수처럼 보인 몇 개의 공격을 진짜로 찔러 넣었다. ‘이게 진짜 우그의 검사.......’ 사실 라이는 기분이 좋았다. 라든에서 카셀을 처음 만난 순간과 그 이전의 카셀을 만난 순간이 겹쳐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라이를 보고 놀랐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했으나 가까이 하려고 했다. 크나딜이 직접 기더에 싸움만 있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로 살벌한 자신의 삶에 끼어 온 우그들이었다. ‘넌 하늘 산맥에서 온 엘프냐?’ 라이는 고개를 들어 그 괴상한 생명체를 주시했다. ‘내 이름은 카셀이다. 네 이름은 뭐지?’ 그가 물었다. 라이는 그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레미프.] ‘네 이름이 레미프야?’ 라이는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그.] ‘뭐, 우그? 내 이름은 카셀이야.’ [우그.] ‘카셀이라니까!’ [우그.] ‘그래, 젠장. 우그라고 불러라. 나도 네 이름, 맘대로 불러버리겠다. 레미....... 좋아. 지금부터 널 레미라고 부르도록 하지. 근데 그 날개 진짜냐? 날 수 있어?’ 그는 신가한 듯 라이의 날개를 붙잡으며 말했다. ‘태워줄래? 그럼 내가 아크랜드를 여행시켜 주지. 어이,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인간의 언어는 못 알아듣나?’ 카셀은 팔짱을 끼고 빙그레 웃었다. ‘좋아, 이거 하나만 기억해! 네가 날 버리지 않으면 나도 널 절대 버리지 않아. 알았지, 레미? 따라와. 아크랜드를 여행시켜주지.’ 그란돌과 라이의 검이 교차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라이는 상대의 검이 자신의 배를 뚫는 순간 힘을 잃었다. 그러나 그란돌은 배를 뚫렸음에도 라이를 찌른 칼을 옆으로 그어버렸다. 검붉은 피가 쏟아졌고, 라이는 무릎을 꿇었다. 라이의 뒤로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다가왔다. 그는 라이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렸다. [녀석이 왜 하늘 산맥으로 갔나? 왜 가까운 길을 버리고 먼 길로 돌아갔나?] 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라이의 한쪽 날개를 잡아 뜯어냈다. 마치 폭발이라도 일어나듯 깃털이 터지며 라이의 날개가 뽑혀져 나왔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이 날개는 아마도 네 친구들을 겁주기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나의 날개에.......] 라이는 고통에 몸을 떨었으나 결코 괴로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칼이 꽂힌 그란돌의 배를 바라보며, 그저 만족스러워 할 따름이었다. [나의 날개에, 겁을 먹을 정도로 우그는 약하지 않다.] [그럼 죽어라. 네 싸움뿐인 기더에 평안을 주겠노라.] 그 말을 하며 마법사는 다른 한 쪽의 날개도 뽑아냈다. 날개 끄트머리에 살점까지 뜯어져 나왔다. 라이는 비명은 지르지 않고 그저 반사적으로 고개만 뒤로 젖힐 뿐이었다. 검붉은 피가 마법사의 회색 로브를 적셨으나, 로브는 그 피를 말끔하게 흡수했다. 라이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의 죽음은...... 너의 기더에 있지 않다. 이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싸움뿐인 인생에 우정을 수놓아 준 것은 첫 번째 카셀이었고, 싸움뿐인 기더를 그 자체로 받아들여 준 것은 두 번째 카셀이었다. 다른 우그지만, 라이에겐 같은 존재였다. [나의 기더는 그들에게 속해 있다.] 라이의 머리가 천천히 밑으로 수그려졌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마법사는 날개 잃은 레미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가라, 카셀. 내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붉은 피를 머금은 하얀 깃털이 메마른 바닥을 몇 바퀴 굴러갔다. [제가 쫓아갈 수 있습니다.] 구아닐이 말했다. 마법사는 하늘 산맥 쪽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내버려둬라. 하늘 산맥의 유령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저런 하찮은 녀석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는 순간 이미 새나디엘은 내게 패했다.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는, 그 아둔함의 결과를 보아야 알 수 있을 테지.] 마법사는 몸을 돌려 북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희뿌옇게 사라졌다가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고, 또 한 걸음 내디디면 더 먼 곳에서 나타났다. 구아닐까지 날아간 그 자리에는 라이의 시체만 있었고, 그의 피 묻은 날개 역시 한쪽만 남아있었다. “이 칼과 함께 피하고 싶어도 싸워야 할 적이 끌려온다. 내겐 그 싸움을 대신할 전사가 필요하다. 네가 내 옆에 서라.” 홀로 떠돌아다니던 아크랜드에서도, 돌아온 하늘 산맥에서도 라이는 카셀을 기다렸다. 계속 강한 레미프를 찾아다니며 라든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라이는 기다렸다. 아크랜드에서 겪은 외로움과 똑같은 외로움을 곱씹으며 어두운 철창에 갇혀 있을 때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금발의 작은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카셀이라고 밝혔고, 울프의 캡틴이라 말했다. 그러나 라이는 그 이름도 직위도 개의치 않았다. 그 역시 같이 가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네가 약속을 지키면 나도 약속을 지킨다.” 그리고 같은 약속을 했다. 라이는 알 수 없는 고독에 가슴이 찌릿했다. 그는 라이의 쇠사슬을 풀어주며 말했다. “팀에 합류한 걸 축하한다, 라이.”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켜주었다. 그때로 다시 되돌아간다면, 라이는 오십 년 동안이나 준비해두었던 말을 해주고 싶었다. “돌아와 주었구나, 카셀.” 15. 하얀 늑대 대 하얀 늑대 저녁부터 이동해온 모즈들이 마지막으로 집결한 장소는 축복의 탑 북쪽이었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마법사가 알려온 바에 따르면 2만 마리 정도의 모즈들이 탑을 부채꼴 모양으로 포위하고 있었고, 또 다른 2만 마리 정도의 모즈는 그보다 더 북쪽에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뒤쪽 만 마리의 모즈들 군대 중앙에 검은 드레곤이 있었다. “한 마리? 확실해? 더 없어?” 그 말을 전하러 온 어린 마법사는 로핀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했다. “멀긴 하지만, 큰 게 더 있다면 눈에 안 들어올 리가 없죠.” ‘카구아는 왜 없는 거지?’ 로핀이 의아해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빅터 이 자식,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군대 한 가운데에 카구아 두어 마리만 던져놔도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을 텐데....... 더 좋은 작전이라도 있다는 건가, 아니면 좀 더 지켜보겠다는 건가?’ 로핀은 입맛을 다셨다. 아즈윈은 모즈들을 응시하다가 생각에 빠진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안 나가 볼 거예요?” 적진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기사 세 명이 말을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즈들 군대와 로크 군대의 중간쯤에 멈춰서서 기다렸다. 로핀은 말에 오르며 말했다. “아즈윈, 가자. 캡틴 느하로우. 따라오시오.” 로크의 경비 대장으로 여러 가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어제 적군의 대규모 이동 모습을 보고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로핀이 같이 가자는 말을 하자,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로핀은 안되겠다 싶어 말했다. “아, 캡틴은 여기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게 좋겠소. 아무래도 우린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 같으니.” “아, 나도 그게 좋겠소.” 느하로우가 얼른 말했다. 로핀은 그 옆에 있는 제이메르에게 손짓했다. “같이 가자.” “나보고 가서 뭐 하라는 거요?” 제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는 어제부터 새벽까지 도끼질을 하느라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졸린 눈이나마 치켜뜨니 예전에 사냥꾼 생활을 했던 가락이 나왔다. 로핀은 그의 얼굴에서 진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게 필요했다. “숫자 맞춰야지.” 제이는 콧김을 푹 내쉬고 말에 올랐다. 로핀, 아즈윈, 제이는 말을 타고 달려가 적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검은 기사 중 하나가 로브를 벗었다. 예상대로 빅터였다. “네가 있을 것 같았다. 로핀.” “아아, 아직 안 죽었었나?” “내가 죽어야 했나?” “아니, 꼭 그렇다기 보다 뭐, 여기 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뒤통수 깨져 뒈져버렸으면 네놈새끼 낯바닥은 안 봐도 되잖냐?” “봐버렸으니 안타깝겠군. 그런 걸로 죽기에는 준비된 무대가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재수없다, 너. 이런 징글징글한 놈들을 5만 마리나 데려왔으면서, 그게 다 널 위한 거다?” “어차피 인간은 멸망한다. 그 순간까지 그걸 즐기는 게 낫지. 이런 걸 보고 즐거워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빅터는 싸늘한 미소로 대꾸했고, 로핀은 코웃음 쳤다. “내가 진짜 니가 말한 대로 이런 큰 무대만 아니었으면, 뭐 처먹으라는 욕까지 쏟아 부어주고 싶지만, 내 순진한 제자 녀석이 옆에 있어서 참는다.” 아즈윈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그 말에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제이도 황당해했다. 로핀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그 둘은 뭣 하러 데려왔냐, 빅터? 혼자 나오면 무서워서?” “내 제자들이자, 내 부하들이다. 포웰, 그리고 스탠리.” 포웰과 스탠리는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검은 로브 속의 그 시선은 기분 나쁠 정도로 살벌했다. 그 시선은 모조리 아즈윈을 향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하늘 산맥에서 싸운 홀튼과 레드워드, 네이슨을 기억했다. 아마 이 둘도 그 셋과 거의 비슷한 실력자일 것이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데리고 나와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앞으로도 우리는 싸울 일이 많아. 이로피스도 가야하고, 론타몬도 깨야 하고....... 아아, 그 전에 아란티아를 쳐야 하는구나. 듣자니 여왕이 그렇게 예쁘다며?” “푸하, 너도 드디어 나한테 물들었구나. 유치한 싸움 해보자 이거냐? 이왕이면 엄마 욕도 해보지 그래?” “여왕의 외모는 네 입으로 말했다. 그걸 내가 또 언급한 게 그리 불만인가?” “기억 안 나.” 로핀은 한참 뒤에 몰려 있는 모즈들 쪽을 길게 목을 빼서 바라봤다. “근데 구아닐은 왜 뒤에 숨어 계시나? 응? 앞으로 좀 나와서 가넬과 얘기 좀 해보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빅터는 다시 로브를 머리에 썼다. “구아닐이 직접 나서서 가넬과 싸울 기회나 있을지 모르겠군. 로핀, 버틸때까지 버텨봐라. 이 싸움의 결과가 네 눈에도 보이겠지?” 빅터는 웃으며 말 머리를 돌렸다. 로핀이 말했다.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아, 참. 그건 아니고....... 싸움이 싱거워질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탑 두개 안부수고도 로크 안으로 들어갈 지도 모른다. 여기에만 병력 집중 시키고 후회할 거다.” “상관 마, 자식아.” 로핀은 툭 내뱉었다. 로핀과 아즈윈도 말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제이는 가만히 말을 세워두고 말했다. “로핀. 당신, 저 빅터란 작자랑 싸워 봤소?” “뭐가 궁금해서 그런 걸 묻나?” 제이는 빅터의 뒷모습에 계속 시선을 박은 채 말머리를 돌렸다. “저 자는 우리 중 누구도 이길 수 없소. 당신도, 퀘이언도......” “그런 게 보이나?” 로핀은 여유 있는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보인다. 전혀 다른 차원의 간격이! 뭔가.......” “아즈윈, 네가 말해봐라. 너도 빅터의 힘이 보여?” 아즈윈은 천천히 말을 몰며 말했다. “방금 저 셋과 우리 셋이 싸웠다면 우리가 이긴다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네요.” “그렇군. 우리 셋 다 그렇게 느꼈다면, 저 녀석들도 알았을 테지.” 로핀은 주머니에서 꺼낸 육포를 씹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일은 빅터를 꺾는 일이 아니다. 저 녀석이 머리 속에 짜고 있는 건방진 시나리오를 무너뜨리는 거지. 그 어긋난 시나리오가 승리를 가져올지, 더 큰 패배를 가져올지 그건 모르지만,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저 세 놈을 죽여야만 싸움에서 승리하는 건 아니야.” “캡틴, 방금 왜 칼으르 뽑지 않으셨습니까?” 포웰은 뒤를 돌아보며, 빅터에게 물었다. 멀리 로핀, 제이메르, 아즈윈이 말을 타고 돌아가는 게 보였다. 스탠리도 불만스레 말했다. “캡틴께서는 가넬로크 측에 크나딜이 있는 것보다 로핀이 있는 게 더 위험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없애는 게 낫지 않았습니까?” “로핀은 항상 그렇게 보인다. 항상 약해 보이고 항상 가벼워 보이지. 그래서 항상 모르겠어. 내가 무서운 게 뭔지 아냐?” 빅터가 물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대꾸했다. “모르겠습니다.” “녀석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거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게 뭐가 무섭다는 겁니까?” “더 배워라. 검의 실력으로는 이미 너희 두 사람 다 나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날 만족시킬 수 없지.” “가르쳐주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있는 병력이 저들에게 주고 있을 공포를 생각해 보거라. 아무리 간이 커도, 그런 걸 맨 정신으로 감당할 수는 없다. 심지어 드래곤들의 마스터인 크나딜도 이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로핀 저녀석은 나랑 똑같이 즐거워하고 있어.” 빅터는 나직이 웃었다. “로핀이 낙마해서 죽어버린다면 우린 정말 승리를 공짜로 얻을 수 있을 텐데......, 뭐, 그건 재미가 없겠지. 버크만에게 연락해라. 공격을 시작한다.” 모즈들의 대규모 군대가 밤사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남쪽 성문의 병사들은 조금 걱정을 덜었다. 그들은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울리는 그 진동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공포를 맛보고 있었다. 거기다 시야를 가득 채운 괴물들까지 바라봐야 하는 건 지나친 고문이었다. 그러나 적들은 남쪽의 병사들을 쉬게 놔두지 않았다. 성벽에서 경계를 서던 던멜이 제일 먼저 평원 끝에서 다가오는 커다란 기구를 발견했다. 망루의 병사들도 금방 그것을 발견하고 다른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투석기다!”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수백 마리의 모즈들이 집채만 한 투석기를 열 대 이상 밀고와 성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 세워 두었다. “우리 쪽 투석기는 전부 북쪽으로 옮겨놨는데, 곤란하게 됐군.” 아침에 교대해 달라던 메이루밀은 벌써 와 있었다. 그는 밑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에게 소리쳤다. “장군, 병사들을 성벽 멀리 배치시키시오.” “알았소. 하지만 여길 대체 왜 공격하는 거요? 탑 두 개를 먼저 부숴야 여길 공격해 올 거라 하지 않았소?” “적은 그리 생각하지 않나 보오.” 모즈들이 투석기를 준비하는 시간은 병사들이 피하는 시간보다 더 빨랐다. 열 개의 투석기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대로 작동되어 돌무더기가 푸른 하늘 위로 가로질렀다. 망루의 병사들이 일제히 성벽 뒤에 대고 외쳤다 “피해라.” 사람만한 크기의 바위 덩어리들이 성벽 위를 지나쳐 모여 있는 병사들을 덮쳤다. 한꺼번에 십 수 명의 병사들이 거기에 깔려 죽었고, 성벽 가까이에 위치한 집은 지붕이 박살났다. 기둥이 부실한 집은 아예 무너져버리기도 했다. 단 한 차례 공격만으로 피해는 막심했다. 하지만 대처할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병력이 북쪽으로 가 있는 상태여서, 비록 모즈들이 천마리도 안 된다고는 해도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성문 앞에는 로크 존을 천천히 두들기는 회색로브의 마법사가 버티고 서 있었다. 루밀도, 던멜도 모즈들의 투석기보다 그가 성문앞에 서서 매 시간 마다 한두 걸음씩 다가오는 게 부담스러웠다. “제기랄.” 루밀이 기어이 욕을 내뱉으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 병사들을 수습해 물러나시오. 적은 투석기 외에는 공격하지 못하오.” “마법의 장벽이 있다면서 어떻게 돌이 공격해 올 수 있는 거요?” 바로 옆에 몰려 있던 병사들이 돌에 깔려 으깨진 모습을 보고 극도의 혼란에 빠진 지휘관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오직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에게 영향을 받은 사악한 존재만이 여길 통과하지 못하는 거라고 미리 설명을 해놨지만, 그걸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충격으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은 그냥 물러나시오. 가급적 멀리. 적은 돌만 날릴 뿐, 성문으로 직접 돌격해오지는 못하오.” 루밀은 다시 성벽 바깥쪽으로 몸을 돌렸다. 투석기의 방향을 보던 루밀이 던멜에게 물었다. “방향을 조절하고 있군. 어느 쪽 같은가?” 던멜은 돌이 날아간 위치를 보다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루밀은 망루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밑으로 내려가라! 다음 공격은 성벽이다.” 지휘관보다는 이해가 빠른 병사들이 급히 망루를 내려갔다. 두 번째 공격은 던멜의 예상대로 성벽을 두들겼다.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고, 망루가 부서졌다. 약간 날아오는 거리가 모자란 바위가 성문 앞에 흉물스런 조각상처럼 처박혔고, 성벽 너머까지 날아간 바위는 먼저 와서 박혀있는 돌과 부딪쳐 깨지기도 했다. 루밀과 던멜은 성벽 아래로 내려가 벽에 등을 기대고 공격이 멈추길 기다렸다. 세 번째 공격은 성벽 너머 가장 먼 거리를 겨냥했다. 날아간 바위가 대여섯 채의 집을 깨부수면서 공격이 그쳤다. 둘은 바위에 긁혀 나가 위태롭게 반만 남은 망루에 올라 밖을 내다보았다. 투석기 옆의 모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는 어딘가로 급히 이동했고, 나머지는 그대로 투석기 옆에 남았다. 그 남은 병력 중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도 있었다. “저 녀석이 로핀이 말해준 익셀런 제1기사단인가 보군. 역시나 모즈들이 지휘하는 거겠지?” 루밀이 말했다. 던멜은 모즈들의 움직임을 가리킨 후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제2차 투석 준비 중. “멀쩡히 눈 뜨고 남쪽 성벽 다 박살나는 걸 봐야겠군.” -가야 합니다. 루밀이 어딜 가느냐고 눈으로 묻자, 던멜은 다시 손을 들어 투석기 쪽을 가리켰다. “우리 둘 만으로는 무리지.” 루밀은 피해있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부터 저 투석기를 박살내러 간다. 지원자는 나서고, 나머지는 더 멀리 피하라. 다음 목표는 이 성벽이 될 것이다.” 병사들은 웅성거리며 일부는 나서고, 일부는 눈치만 봤다. 지휘관도 루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동의하지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때 어디에선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루밀의 앞에 나타났다. “뭐냐, 넌?” 루밀이 놀라 물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이런 일에는 반드시 나서라는 길드 마스터의 명이 있었습니다.” 루밀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던멜을 돌아보았다. 던멜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짧게 휘파람을 불자, 어느새 비슷한 복장을 한 녀석들이 여기저기에서 몰려왔다. “흐음, 던멜 자네 과거가 몹시 궁금해지는 순간이구만.” 루밀이 말했다. “불안......하세요?” 라틸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담뱃대를 쥐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가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없어졌다. 로일은 창가에 손을 짚고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검은 물결처럼 보이는 모즈들의 무리가 손가락만한 크기로 보이는 분노의 탑 주위에 포진되어 있었다. “여기로는 어떤 적도 오지 않는군요. 예상했던 바지만.” 로일이 말했다. 라틸다도 로일의 옆으로 가서는 그가 보는 곳을 보았다. 하지만 눈이 좋지 않아 그런 먼 곳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로일은, 우리 쪽에 큰 전력인데 제가 여기 묶어둔 꼴이 되었군요.” 우울하게 말하는 라틸다의 모습을 보니 거짓말이라도 해서 위로하고 싶었지만,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카셀이 라틸다를 지키라고 보낸 것에 기뻤고 지금도 여기 있고 싶었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벗어나는 늑대는 있을 수 없었다. “너는 이 곳에 있어야 한다, 로일 울프.” 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분노의 탑 아래 엎드려 있는 사-크나딜이었다. 그는 가끔씩 필요한 때만 말했는데, 거기에 굳이 귀 기울이거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긴 계단을 내려갈 필요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적은 너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제가 말입니까? 전 그다지......” “원래 그 자리에는 퀘이언이 있어야 한다. 새나디엘은 다음 여왕 수호 기사를 누구로 지목했느냐? 나라면 너를 정하겠구나.” “크나딜께서는 저의 검술조차 보신 적이 없습니다. 어찌 아십니까?” “그걸 내가 설명해야 하느냐? 듣기만 하거라. 이것은 너희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잔인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라틸다 쟌스테인, 너도 알겠지만 너의 몸 안에는 네 아비의 힘이 흐르고 있다. 그 힘이 적에게 노출되는 순간 너는 우리의 또 다른 큰 적이 될 수 있다. 그 때 로일, 너는 라틸다를 죽어야 한다.” 라틸다는 흠칫 놀랐고, 로일은 버럭 소리 질렀다. “저는 라틸다를 지킬 목적으로 여기 왔습니다!” 크나딜은 로일의 분노에 일일이 대꾸해주지 않았다. 겁에 질린 라틸다가 물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요, 마스터 드래곤. 제가 어떻게 적이 되는 건가요? 타냐도 그런 말을 했지만, 전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요.” “로크의 모든 것이 이미 그의 힘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보호가 사라지는 순간 너는 그 힘에 노출되어 너의 자아를 잃을 것이다.” “그건 크나딜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로일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 원래 현재 여왕 수호 기사인 퀘이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 탑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도가 되려면 현재로서는 너밖에 없지 않겠느냐?” 아즈윈은 혼자 싸우는 것보다 대규모 전투에서 지휘하는 것에 어울린다. 던멜은 부상당했다. 게랄드는 죽었고, 쉐이든은 이 곳에 없다....... 이 배치의 의미는 라틸다를 지키는 것보다 탑 자체를 지키는 것에 있었다. 카셀은 이걸 알고 보낸 걸까? “그러나 당신이 죽고 만약 라틸다마저 죽는다면, 대체 저 혼자 이 탑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해도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이 세 개의 탑을 움직이는 마법사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자라는 것만은 알고 있어라. 모든 이가 죽어도 이 탑은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크나딜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로일 울프 왜 여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뭔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느냐?” 로일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 “피가 끓어올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크나딜이시여,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를 억누르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크나딜은 손을 높이 내밀었다. 탑 꼭대기에서 그 손까지는 꽤 멀었으나, 크나딜은 허락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일은 몸을 돌려 라틸다를 한 번 끌어안았다. “잠깐 다녀올게요.” “로일,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라틸다가 당황해 하며 물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갑니다. 적은 이 곳으로 오지 않을 테지만,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는 돌아 올게요.” 로일은 크나딜의 손바닥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팔목의 붉은 비늘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어깻죽지에서 드래곤의 등에 손을 짚어 척추 방향으로 몸을 돌린 후, 그대로 꼬리 끝까지 한 번에 미끄러져 바닥에 다다랐다. 로일은 뒤를 돌아 크나딜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 일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니 네가 선택하고, 네가 책임지거라.” 로일은 그의 말에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크나딜은 손가락으로 남쪽을 가리켰다. “로크의 남쪽 성문이다.” 로일은 짧게 목례하고 세워놓은 말을 타고 달렸다. 크나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틸다는 창가에 손을 기대고 말이 일으키는 먼지바람을 바라보았다. “결국 저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군요. 이 탑에 있는 것만으로 로크 존을 유지시킨다고는 하지만 저는 그런걸 못 느끼겠고....... 마스터 크나딜, 제가 무얼 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큰 전투에서는, 큰 존재든 작은 존재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지. 너도 나도 그 순간을 위해 이런 곳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크나딜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저 아이를 막았어야 했을까? 모르겠구나. 하늘 산맥에서 벗어났다고 나의 마음이 이토록 연약해진 것은 결국 나 역시 여신의 힘 안에서 안주한 탓이겠지.” 로일은 로크의 시내를 가로지르는 길이 아닌, 성곽을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모즈들은 남쪽에만 있지 않았다. 녀석들은 백여 마리씩 무리 지어 성에서 떨어진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함락 되기 전의 루티아를 보는 것 같았다. 녀석들은 로크의 방벽이 사라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크나딜께서 말씀하신 건 우리 모두의 운명이 마스터 타냐 한 명에게 달려있다는 뜻이구나.” 성 안에 우뚝 솟은 아로크의 납이 가까워지자 로일은 말을 더욱 재촉했다. 거기에는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은 모즈들이 있었다. 그리고 열 대 가량의 투석기가 준비되어 있었고, 몇 개는 로일이 도달할 무렵 작동되었다. 거대한 바위가 돌로 만든 로크의 성벽을 직접 강타했다. 그가 오기 전부터 공격을 당했는지, 성벽의 손상 정도가 심각했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어쌔신들이 성벽을 타고 밖으로 나와 모즈들을 공격했다. 투석기 근처에 몰려있던 모즈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향해 몰려갔다. 그 와중에 투석기 하나가 갑자기 불에 타올랐다. 뒤이어 또 다른 투석기가 불에 타오르자, 모즈들은 당황해서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물도 없고, 있다 해도 기름에 타는 불을 쉽게 끌 수도 없었다. 인간 흉내를 내느라 누더기를 옷처럼 걸친 모즈가 옷을 벗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그 모즈는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아 뒤로 쓰러졌다. 뒤이어 수십 개의 화살들이 돌을 나르던 모즈들에게, 또 투석기 옆을 지키고 있던 모즈들에게 떨어졌다. 어쌔신들이 공격하는 반대편에서도 로크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그것은 로크의 병사들과 모즈의 군대가 맞붙는 사실상 첫 번째 전투였다. 로일은 전투가 벌어지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로일을 발견한 모즈들은 날이 나간 도끼와 녹슨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로일은 오히려 속도를 높여 그 모즈들을 말로 깔아뭉개며 칼을 휘둘렀다. 모즈들의 잘린 머리가 동시에 몇 개가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로일은 모즈들의 무리를 뚫고 가던 칼을 멈췄다. 그의 앞을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기사가 막고 있었다. “네가 불을 질렀나?” 그 기사가 물었다. “내 친구일 거다. 그가 몰래 움직이고자 마음먹으면 너는 막지 못한다.” 로일이 대답했다. “캡틴께서는 로크에도 괜찮은 실력자들이 있다고 조심하라 하셨지. 이름을 말하라. 나는 익셀런 제1기사단의 버크만이다.” 그 기사는 칼을 뽑아 길게 뻗었다. “나는 울프 기사단의 로일이다.” 둘은 지체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버크만은 두 손 모두 고삐에서 놓고 칼을 휘둘렀다. 로일도 그 힘에 밀리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칼을 쥐고 휘둘렀다. 두 자루 칼과 두 마리 말이 한바탕 부딪치고 지나갔으나, 어느 쪽도 상대를 상처 입히지 못했다. 둘은 서로에게 놀라며 급히 견제 자세를 취했다. “제법이군.” 버크만은 다시 말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로일은 칼을 막는 데에만 급급해 말을 제대로 몰지도 못했다. 반면 버크만은 말을 자우자재로 움직여 농락하다시피 로일을 공격했다. 팔 근육이 짜릿하게 경련이 올 정도로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이런 엄청난 녀석이 있으니, 크나딜이 가서 도우라고 한 모양이구나.’ 로일은 말을 몰아 달아났다. 버크만은 고함을 지르며 따라왔다. “도망칠 실력도 아니면서 어딜 가는가?” 말 위에서의 전투라면 로일은 항상 졌다. 쉐이든에게 열 번 싸우면 열 번 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울프의 기사들에게도 번번이 패배했다. 그래서 로일은 차라리 말에서 내려 말 위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법을 더욱 연마했었다. 로일은 고삐를 놓고 뒤로 점프했다. 말을 계속 앞으로 달려갔고, 로일은 바닥에 착지했다. 버크만은 그 모습을 보고 칼에서 창으로 무기를 바꾸었다. 로일은 그가 다가오길 기다려 칼날을 앞으로 내밀었다. 버크만은 달려오는 속도를 늦추어 창을 내리쳤다. 창날이 로일의 가슴을 스치며 바닥에 꽂혔다. 옷이 찢겨져 나갔으나, 상처는 없었다. 로일은 그 창을 움켜잡았다. 버크만은 힘 있게 창을 되돌렸고, 로일은 그 힘을 이용해 같은 타이밍으로 뛰어올랐다. 길게 뻗은 칼은 곧장 버크만의 투구를 내리쳤다. 바닥에 발을 대지도 않은 자세에서 내리친 칼로 투구를 부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투구 안으로 전달하는 충격은 충분했다. 버크만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가, 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갑옷을 입은 채 떨어진 충격이 보통이 아닐 텐데도, 버크만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다음은 이미 로일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버크만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했으나. 로일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로일의 검이 목을 치고 지나갔고, 목에서 역류하는 피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색깔을 구별할 수 없었다. 그는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며 목을 짚었다. 투구 안에서 피가 벌컥벌컥 새나왔다. 쓰러진 그의 몸 주위로 흐르는 검붉은 피가 메마른 땅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넓게 퍼졌다. 로일은 옷이 찢긴 가슴을 문지르다가 돌아섰다. 불타지 않은 투석기는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모즈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으나, 흥분한 녀석들은 적이 뭘 노리고 공격해왔는 지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로크의 병사들은 후퇴했고, 모즈들은 그 후퇴를 뒤쫓다가 보이지 않는 마법 방벽에 부딪쳐 튕겨 나왔다. 로일은 마지막 불타지 않은 투석기에 도달했다. 거기에 메이루밀이 있었다. 그는 로일을 발견하고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않나?” “그거 부서지면 바로 돌아가야죠.” “이 녀석들을 지휘하는 익셀런의 기사가 왜 나타나지 않는 지는 네가 알겠구나.” 루밀이 웃으며 말했다. 로일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 투석기, 다른 가넬로크의 도시에서 훔쳐온 걸 거다. 구조는 내가 잘 알지.” 루밀은 투석기의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장착되어 있는 돌이 튕겨 올라가는 게 아니라, 그걸 고정하고 있는 쇠사슬이 끊어졌고, 안에 있는 뭔가가 묵직하게 부러지며 투석기 전체가 요란하게 울렸다. “자, 이제 후퇴한다. 굳이 계속 싸울 필요는 없어!” 루밀을 옆에 내려놓았던 창을 어깨에 걸치며 몸을 돌렸다. 로일도 그를 따라 성으로 돌아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루밀의 앞에 검은 연기가 바닥에서 피어오르며 사람 크기만큼 커지더니 그 안에서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나왔다. 루밀은 놀라며 남쪽 성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아직도 있었다. 같은 형체가 다른 장소에 둘이나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루밀은 망설임 없이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창은 끝에 걸리는 것 없이 지나쳐 나왔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양팔을 펼쳤다. 로브의 안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마법사를 삼키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끄집어냈다. 그 남자는 연기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루밀을 향해 칼을 올려 쳤다. 루밀은 창으로 막았으나, 창은 잘려나갔다. 로일이 끼어들 틈도 없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스터 그란돌.......” 루밀이 외마디처럼 외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란돌은 다시 한 번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루밀은 급히 물러나면서고 부러진 창을 휘둘러 칼날의 방향을 바꿔 급소를 맞지 않았으나, 칼날이 가슴을 스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루밀은 결국 균형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란돌은 쓰러진 루밀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귀를 찢는 금속성이 울렸다. 로일과 그란돌의 검이 루밀 앞에 맞물려 있었다. 로일은 눈앞의 건장한 남자를 보고 루밀에게 물었다 “방금 이자를 누구라고 부르신 겁니까?” 결과적으로 로일은, 루밀을 내리치는 그란돌의 공경을 막은 게 되었으나, 사실 로일은 막기 위해 뛰어든 게 아니라 공격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보통 눈앞에 무방비로 쓰러진 상대를 노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방심하기 마련이었고, 로일은 그 부분을 노렸었다. 하지만 그란돌은 루밀을 내리치려던 공격 방향을 돌려 로일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루밀은 뒤늦게 가슴에서 터지는 피를 움켜잡고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그는 고통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스터 그란돌이다. 적의 부하가 되어버린, 나의 스승이시다.” ‘그란돌?’ 그가 나타나는 순간,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희열....... 로일은 그런 복잡한 감정들로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랬군.” 로일은 중얼거리며 상대의 공격을 힘으로 밀어냈다. 그란돌은 그리 세게 저항하지도 않고 쉽게 물러나 주었다. 그리고 자세를 다시 잡았다. “로, 로일.......” “예, 루밀.” “퀘이언을...... 기억하라. 녀석의 공격은...... 모, 모조리 그란돌을 카피했다.” 로일은 짧게 숨을 쉬었다. “그럼 한 번에 승부를 내겠군요.” 로일은 한 손에 쥔 칼을 뒤로 빼고 자세를 낮추었다. “바라던 바입니다.” 마스터 퀘이어 간트. 전 하얀 늑대들이자, 울프 기사단의 캡틴. 그리고 현 여왕 수호 기사. 퀘이언은 하얀 늑대 다섯 명을 모두 불러놓고 그 앞에 목검을 들었다. 그리고 딱 한 번 공격할 테니 막으라 말했다. 그 단 한 번의 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아즈윈은 방패 채로 나가떨어졌고, 그 무지막지한 게랄드도 가슴에 목검을 맞고 기절했다. 쉐이든은 가까스로 창으로 막았으나, 그 창은 주우러 가기 귀찮을 만큼 멀리 날아갔다. 던멜은 아예 포기했다. 로일은 퀘이언의 검을 방어하는 건 포기했다. 그리고 그 검을 향해 달려가는 걸 택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검의 곡선이 그 정도로 멋질 수 있다는 것에 로일은 가슴 짜릿한 감동을 느꼈다. 오랫동안 찾아다닌 해답이었다. 평생 배우고 싶었던 단 한 편의 명화를 찾아낸 화가처럼, 자신이 꼭 연주하고 싶은 악보를 본 피아니스트처럼, 자기가 너무나도 쓰고 싶었던 글을 읽은 작가처럼 로일은 깊이 감동했다. 로일은 그 공격을 받아내고 손목을 다쳤다. 하지만 그걸 패배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신 부상이 나을 동안 수십, 수백 번 머리 속에 그 일격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칼을 들어 휘둘렀을 때 몇 번 만에 그걸 흉내 낼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알아도 막지 못하는 공격이었다. 마침내 로일은 마스터가 절대적인 자신감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할 수 있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하얀 늑대 뿐이다.” 로일은 그 말을 중얼거리며 칼을 두 손에 쥐었다.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돌격하는 자세를 취한 로일은 그란돌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묘하게 범위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도망친 건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 그 범위 안으로 들어와 로일을 공격할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대대로 하얀 늑대라는 존재가 한두 명 밖에 없었는지 아느냐?” 퀘이언이 로일을 따로 불러 물었다. 로일은 솔직히 모른다고 말했다. ‘그 시대에 가장 취어난 검사가 둘 이상 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그런 거다. 그리고 아란티아의 축복은 언제나 그런 사람을 나디움으로 끌어들여왔다. 너는 메이루밀이 보내왔지 루밀은 의식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 역시 축복의 한 종류다.’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십니까? 어제는 아즈윈을 불러 하얀 늑대들 중 누가 제일 세냐고 물었다면서요?’ ‘허, 그 입 싼 녀석. 뭐라 하더냐?’ ‘자세히 묻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번에는 하얀 늑대들이 다섯 명이다. 그건 앞으로 큰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거지. 나는 처음부터 네 명을 하얀 늑대들로 뽑길 주저하지 않았다. 너희 넷이 던멜을 추가로 하얀 늑대로 만든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 내가 숫자를 늘리지 않으려 해도 결국 너희들은 그런 존재가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한 명‘은 필요하다.’ ‘여왕 수호 기사가 될 한 명이란 거겠죠?’ ‘폐하께서 내주신 숙제를 풀었느냐?’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걸 해결할 때 너는 그 한 명에 가장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친구들을 제친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퀘이언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너다운 대답이다. 하지만 로일, 한 가지만 가르쳐주겠다. 원래 그 말이 아니었단다.’ ‘뭐가 원래라는 겁니까?’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하얀 늑대 뿐이다....... 그 말을 우리 때 우리가 수정한 말이었어. 나의 마스터 그란돌께서 우리에게 전한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다섯 중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왜 자기에게만 하는 건지 로일은 알지 못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 퀘이언은 그 말을 해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의 스승께서 홀로 하얀 늑대의 자리에 있었을 때 그 분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여왕 수호 기사가 된 후에야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너는 그럴 수 있겠느냐?’ 로일은 그때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얀 늑대의 으로 네가 낮추지 마라. 녀석들은 네가 아무리 강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다.’ 혼자 앞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카모르트에서 아란티아의 보검을 휘두른 후 로일은 자신을 묶고 있던 서슬이 끊어졌다는 걸 알았다. “마스터 그란돌. 당신이 과거의 누구였든, 지금 누구에게 힘을 빌려줬든......, 지금의 ‘하얀 늑대’는 접니다.” 로일이 말했다. 그란돌은 그 말을 알아듣고, 시험이라도 하겠다는 듯 로일이 펼친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로일은 퀘이언에게 배우고 홀로 꾸준히 익혀왔던 단 한 번의 검을 내질렀다. 아직 미숙할 때는 친구들에게도 몇 번 막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익숙해진 후에 누구도 그걸 막지 못했다. 로일은 무서워졌다. 퀘이언도 그 검은 막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울프 기사단에도 내가 있을 자리가 없어지면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로일의 검은 불어오는 바람에 일어난 먼지를 가르고, 공기를 가르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정적을 갈랐다. 직선으로 뻗어나간 로일의 검은 그란돌의 검을 스치고 갔다.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무시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갔고, 속도도, 힘도 거의 같았다. 퀘이언은 그 공격을 그란돌을 보고 배웠고, 로일은 또한 퀘이언을 그대로 흉내냈다. 같은 오른손잡이였으니, 거울에 반사된 영상이 다시 한 번 거울에 부딪혀 거꾸로 된 이미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같았다. 그러나 그란돌은 마지막 순간에 그 칼을 휘두르지 않고 그대로 로일을 지나쳐갔다. 사람들이 신의 한 수라고 극찬한 퀘이언의 그 기술을 단순히 로일의 검을 피하는 데 써버렸으니, 로일은 그 피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알고 있었다.’ 그란돌은 로일이 자세를 잡는 그 순간부터, 이걸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깨끗하게 피해버릴 수는 없었다. 로일의 검이 그란돌의 어깨 바로 옆을 스치며 올라갔다. 로일은 허무하게 올라간 자신의 검 끝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란돌은 무방비로 드러난 로일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화살 하나가 날아와 그란돌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란돌은 로일을 찌른 칼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또 다른 화살이 그란돌의 얼굴로 날아들었고, 시간차 없이 또 한 자루의 화살이 그의 가슴을 노렸다. 그란돌은 얼굴을 젖혀 피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가슴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았다. 그는 부러진 화살을 옆으로 던졌다. 그의 스무 걸음 앞에, 던멜이 활시위에 화살을 얹어 놓고 있었다. 그란돌과 던멜 사이에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쓰러진 로일 옆으로 발락이 달려가 그를 들쳐 메고 즉시 후퇴했다. 루밀은 다른 블랙풋 요원들의 부축을 받아 물러났다. 그란돌은 오직 던멜의 활만 응시했다. ‘테마르, 피하세요. 모즈들이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멀리서 헤더가 수신호를 보냈다. 던멜은 겨냥한 활을 물리지 않은 자세로 뒤로 물러났다. 그란돌은 쫓아오지 않았다. 16. 느-라이프덤 “죽지 마, 라이.......” 마지막으로 돌아본 라이는 검은 드래곤과 정면으로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카셀은 숲 속으로 달렸다. 이제 더 이상 드래곤의 포효는 들리지 않았다. 라이는 싸우고 있었다.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어떤 인간도 건드리지 못하는 드래곤을, 모든 레미프들이 신으로 여기는 드래곤을, 고작 칼 한 자루 들고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것이 지는 싸움이란 걸 알면서도 라이는 싸우고 있었다. “싸워라, 라이. 나 역시 싸우겠다.” 카셀은 달렸다. 겨우 눈물을 참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까지 충분히 많은 눈물을 보여 왔다. 그러니 마지막 눈물은 승리의 환희로 흘리고 싶었다. 누군가 부르고 있었다. 카셀은 하늘 산맥의 바위 위에 내려앉자마자 그 부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부름은 꽤 긴 시간 동안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코무 두 무.......] 구체적인 장소는 모르고, 방향만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나디우렌의 증표가 있어 방향이라도 잡히니 다행이었다. 즈토크 워그. 루티아의 현자가 가져온 금속과 가넬로크에서 선물한 드래곤의 보석을 합하여 대장장이 르고가 만든 아란티아의 보검. 그 이름을 그대로 인간의 언어로 바꾸면 ‘늑대의 검’ 이었고, 오직 위대한 영웅이 쥐었을 때만 빛을 내는 검이자, 모든 죽어있는 자를 벨 수 있는 검이었다. 그러나 지금 카셀은, 이 칼을 하늘 산맥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길잡이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기적은 필요치 않았다. ‘기적은 아란티아의 원군이 일으켜줄 거야. 내가 할 일은 그들을 가넬로크로 데려가는 것이다.’ 카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처음 태양을 기준으로 달렸던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라이가 빤히 보이는 아로크의 탑으로 똑바로 날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인간이 하늘 산맥의 숲에서 헤매는 건 당연했다. 그걸 막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또 하나, 하늘 산맥은 거리를 단축시켰다. 거리상으로 대륙에서 사나흘씩 가야 하는 거리를 하룻밤 사이에 올 수도 있었다. 아크랜드의 공간과 시간 개념은 하늘 산맥에서 완전히 다르게 적용되는 것 같았다. 그게 이번에도 적용된다면 어쩌면 이틀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위험한 도박일까?’ 카셀은 잠깐 걱정을 접고 달렸다. 그저 한 가지만 머리 속에 깊이 새겼다. 지금은 이 두 다리가 유일한 무기다! 밀집된 나무가 점점 더 많아졌다. 카셀은 계속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향해 가다가 멈췄다. 그 소리가 함정이지는 않을까?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분명 하늘 산맥의 벽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수많은 모즈들이 아크랜드로 내려왔으나, 모두 하늘산맥을 비운 건 아닐 것이다. 프보에 레미프들끼리의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구아닐의 부하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 ‘라이가 있었더라면.......’ 라이가 계속 카셀을 안고 날고 있다면, 하늘 산맥을 더 빨리 가로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적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어쩌면 적은 카셀을 죽이러 온 게 아니라 라이를 막으로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라이는 나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적의 의도대로.......’ 카셀은 다시 발을 놀렷다. 잠깐이라도 걸음을 늦추면 딴 생각이 낫다. 폐가 찢어지도록 달려야 비로소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카셀은 마냥 달렸다. ‘늦어.’ 카셀은 거치적거리는 나무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경사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뒹굴거나, 두텁게 쌓인 낙엽에 파묻히기도 했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렸지만 제 자리에서 얼마 벗어나지 못한 듯 했다. ‘뛰는 건 자신 있었는데. 마을에서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사람은 없었어. 약골이긴 해도, 검은 쓸 줄 몰라도, 아무도 날 따라오지는 못했어.’ 하지만 느렸다. 이런 험한 지형이라면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른 제이메르의 다리를 바란 건 아니었다. 쫓아가는 게 숨이 막힐 정도로 쭉쭉 앞서 나가는 로핀의 다리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늑대로 변할 수 있냐는 타냐의 마법을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지금보다는 더 빠르게, 지금보다는 더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카셀은 간절히 바랐다. ‘매년 죽을 고생을 해 봤자, 폭풍 한 방이면 한 해 농사 망치는 거야.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하늘이 비를 안 뿌려주면 인간의 힘으로 뭘 더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농사를 관둬야 하나? 아니지. 그럴 때면 그냥 하늘에 대고 이렇게 말해주면 돼.’ 아버지는 말했다. 그래서 카셀은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가르쳐 준 그 마법의 주문을 하늘에 대고 외쳤다. “그런다고 질 줄 알아!” 카셀은 다시 달렸다. 방향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해도 거리감까지 잡을 수는 없었다. 그건 하늘 산맥의 마법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카셀은 숲에서 달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 지금까지 얼마나 달려왔는지 계산해가며 속도를 늦출 여유도 없었다. 한 시간쯤 달리고 나니 이미 다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마음은 아직도 전력질주하고 있지만, 이제 걷는 것 이상으로 달리기는 힘들었다. 카셀은 잠시 나무에 기대어 서서 호흡을 정리했다. ‘뛰지 못하면 우선 걷자. 멈추는 것만은 해선 안돼.’ 카셀은 걸었다. 멈추면 나쁜 생각이 들었다. 로크의 사정과 앞으로 벌어진 전쟁, 적의 규모, 라이, 타냐, 제이메르, 로일, 아즈윈, 던멜, 아이린, 메이루밀, 로핀......, 그리고 게랄드. 일부러 카셀의 길목을 막으려고 의도한 게 아니고서는, 이렇게까지 빽빽할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나무가 많이 자라 있었다. 라이는 산길을 따라 달리라고 했으나, 이미 산으로 가는 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위도 많이 어두워졌다. ‘배 고파......, 목 말라.’ 뭔가 먹을 걸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셀은 횃불 몇 개가 근처에 있는 걸 발견했다. 꽤 많은 숫자였다. ‘프보에 레미프?’ 카셀은 뒷걸음질치다가 달렸다. 횃불도 카셀을 쫓아왔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달렸으나, 숲 속에서 레미프들의 걸음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카셀 주위로 좁혀와 모습을 드러냈다. 카셀은 칼을 찬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물러서라는 레미프어가 뭐였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우호적인 레미프들에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물러나줄 리는 없었다. 칼로 위협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카셀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멈춰 섰다. ‘그냥 적이 아니길 빌자.’ 얼굴 검은 레미프들은 창과 활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그 무기를 카셀에게 들이대지 않았다. 그저 카셀과 거리가 떨어진 자리에서 멈춰 있다가 한명이 고개를 숙였고, 나머지도 같이 그런 인사를 했다. 특별히 아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적대관계에 있는 푸트 나이의 레미프들이라면 이런 행동을 할 리 없었다. 조금은 안심하고 그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마침내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세르메이?” 건장한 장정들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그 레미프 여인은 카셀을 보고 살짝 눈웃음 지었다. 라루튼의 공주로, 그녀는 게랄드, 아즈윈과 함께 고생하며 크나딜의 동굴에 카셀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바 있었다. 그녀를 보자, 반가움에 앞서 타치셀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피트 두 머드 두 요에 아이피아프.]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했고, 카셀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녀의 옆에 있는 프보에 레미프 장수가 말했다. “파푸쿠즈 세르메이께서 다시 만나 반갑다고 인사하십니다. 저의 이름은 론틀로스이고, 우리는 어제 당신이 이 곳을 지날 거라는 계시를 받고 길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시?” “계시라기보다 느낌이었다고 하시는군요. 우리는 아침 일찍 푸트나이를 떠나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직 근처에 푸트나이 레미프들의 잔당이 지키고 있어서 위험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을 만났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거기다 근처에 카구아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카구아가? 그것들은 지금 아크랜드를 공격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생각해보니 모즈의 군대를 틈에서 특별히 카구아를 본 건 아니었다. 그냥 모즈들이 총공격했고, 카-구아닐까지 가넬로크에 있으니 당연히 그의 부하인 카구아들도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우리는 푸트나이의 저항 세력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다가 카구아 네 마리의 흔적이 나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북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말을 듣고 보니 또 확신할 수 없군요.” 카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카구아들도 적의 가장 큰 전력 중 하나였다. 그들 한 마리 한 마리가 가넬로크의 수호 드래곤과 맞먹는 괴물들이고 그게 아군에 큰 위협이 되는 건 자명했다. 하지만 왜 서쪽이지? 이제는 그것들이 어디로 가고 있든, 그 움직임 자체가 속임수인 것만 같았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저도 지금 서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원군을 데리러?” 론틀로스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사실 우리도 당신들을 도우러 가고 싶었으나.......” “압니다. 당신들은 숲이 아닌 평지에서 힘을 쓸 수 없지요.” “우그들은 우리를 도왔는데, 우리가 도울 수 없다니! 안타까워하던 차에 도울 수 있는 길이 생겨 다행입니다.” 그는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얀 털의 동물을 끌고 왔다. 색은 달랐지만 그건 익셀런의 기사들이 털을 검게 물들여 타고 다니던 그놈이었다. “이 녀석은 아무나 자기 등에 태우는 걸 좋아하는 베논입니다. 또 ‘높은 산’ 출신이라 추위에도 아주 강한 놈이지요.” 론틀로스는 재갈을 물린 베논을 카셀 앞에 내주었다. 말보다는 늑대에 가깝게 생긴 베논은 카셀을 보자마자 혀로 얼굴을 마구 핥았다. 카셀은 고삐를 잡아 겨우 진정시키며 물었다. “이 동물은 인간, 아니 우그를 싫어한다고 들었는데요?” “보통은 싫어하지요. 즈비 레미프들과 달리 우리는 굳이 이런 녀석들을 길들이지 않습니다. 이 녀석이 좀 특별한 놈이지요. 당신을 위해 안장도 달아봤더니, 처음에는 싫어하다가 금방 익숙해 하더군요.” 카셀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올라났다. 놀랍게도 그 베논은 약간 자세를 낮춰 카셀이 타기 쉽게 배려까지 했다. 그리고 헐떡이기 바빴던 그 입을 꽉 다물고 언제라도 달릴 준비를 했다. “너무 의외라 뭐라 말해야 할지....... 감사합니다.” 카셀이 말했다. 론틀로스는 씁쓸히 웃었다. “그 정도 밖에 돕지 못하는 게 아쉽더군요. 우리 중에도 베논을 탈 줄 아는 기수가 몇 명 있어, 그 중 두 명이 당신을 서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까지 안내할 겁니다. 처음에는 그들을 따라가십시오. 그 후에는 혼자 갈 수 있을 겁니다. 나머지는 그 베논에게 맡기십시오. 길을 아는 녀석입니다.” 세르메이가 베논의 옆으로 다가와 카셀에게 뭔가를 내주었다. 나뭇잎에 싸인 그것은 하얀 떡 비슷하게 생긴 음식과 가죽으로 만든 물 주머니였다. 그리고 그녀는 론틀로스에게 넘겨받은 두툼한 옷을 한 벌 내주었다. [추워질 겁니다.] 순간 카셀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한 선물이 아닙니다. 아즈윈과 게랄드에 대한 제 사과입니다. 아즈윈을 만나면 반드시 건강한 모습으로 라루틑을 찾아달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카셀은 론틀로스가 그 말을 통역해주기 전에 대답했다. [예.] 론틀로스는 놀랐으나, 세르메이는 웃어 보이기만 했다. 이런 많은 선물들보다 그녀의 미소가 지금 이 순간 더 힘이 되는 카셀이었다. 베논은 헐떡대며 어서 달리자고 재촉했다. 카셀은 이 성급한 짐승의 고삐를 늦추어 주었다. 베논은 마치 ‘진짜 달려도 돼?’라는 듯 시험 삼아 몇 걸음 걸었다. 론틀로스의 뒤에서 베논을 타고 대기하고 있던 두 레미프들도 카셀의 뒤를 따랐다. 카셀은 세르메이와 론틀로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카셀이 떠나고 세르메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가요, 하늘 산맥에서 온 마법사.......] 베논은 정말 빨랐다. 안장에 앉아 허리를 세우고서는 도저히 질주하는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어, 카셀은 납작 엎드려야 했다. 단순히 속도를 비교하자면, 늑대로 변한 타냐가 더 빨랐을지 모르나, 좁은 나무 틈을 역동적으로 흐르는 베논 위가 체감속도는 훨씬 빨랐다. 게다가 밤의 숲을 달리니 눈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카셀은 오히려 고삐를 잡아당겨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베논은 불만스러운 듯 코를 킁킁거리며 속도를 줄였다가 약간이라도 고삐를 늦추면 또 엄청나게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는 다를 레미프들도 어지간히 지친 것처럼 보였다. ‘이 속도라면 충분해.’ 베논 위에 올라가 있는 게 익숙해졌을 무렵, 숲을 거의 빠져 나왔다. 밖은 아침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라이가 말했던 바로 그 바위산이 나왔다. ‘네 감각을 믿어라. 숲은 가지 말고, 바위산을 찾아라. 눈길을 걸어, 산 세 개를 건너면 하푸다. 눈 산의 느-라이프덤, 하늘 산맥의 유령이다. 조심하라.’ 카셀은 라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느-라이프덤? 그게 뭐지? 아까 생각났다면 세르메이에게 물었을 테지만, 이미 늦었다. 뒤쫓아 오는 레미프들이 안다 해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소용없었다. ‘늦지 않을 지도......’ 하지만 기사단이 타고 있는 보통 말이 베논처럼 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 문제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카셀을 급히 고삐를 당겨 베논을 멈춰 세웠다. 베논의 뭉툭한 발톱이 바위 바닥 위로 미끄러지다가 고정되었다. 그 순간 그 베논이 달려갔을 방향으로 거대한 괴물의 입이 수풀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계속 달렸다면 틀림없이 그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타이밍이었다. 날개 없는 검은 드래곤, 카구아였다. 이미 두 마리 카구아가 각 한 명의 레미프와 베논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레미프와 베논의 비명 소리는 그쳤다. 그저 뼈가 부서지는 소리만 카구아의 입에 서 새나왔다. 또 다를 카구아가 한참 앞쪽 길목에서 튀어나와 섰다. 흥분한 베논이 몸을 들썩이며 뒷걸음질쳤다. 앞에 두 마리, 뒤에 두 마리. 크나딜이라 한들 네 마리 카구아를 물리칠 수 있을까? 카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하게 고삐를 당겼다가 곧 힘을 뺐다. ‘나보다 네가 더 무섭겠구나.’ 카셀은 천천히 베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삐가 아니라 녀석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몸을 조여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베논의 등에 밀착시켰다. ‘어차피 내 목숨은 너한테 달렸다. 네 마음껏 달려라.’ 이 성급한 베논은 벌써 카구아를 두려워하는 것에 질려 이제 반항하더니 앞의 두 마리에게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베논은 점점 보폭을 넓게 뛰더니 마지막 순간 높이 뛰어올랐다. 카구아들은 입을 바닥에 닿을 듯 낮추고 다가오다가, 베논이 뛰어오르자 얼굴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베논의 날렵한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베논은 카구아의 머리를 밟고 이어 등을 밟더니, 그다음 카구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계속 속력을 유지해 뒷다리로만 선 카구아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카셀의 머리 위로 카구아의 꼬리가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네 마리 카구아가 베논을 쫓아왔으나, 하늘 산맥에서 가장 빠른 이 동물을 날지도 못하는 드래곤이 따라올 수는 없었다. 겨우 몸을 세우고 돌아보니 이미 카구아들은 한참 뒤쳐져 잘 보이지도 않았다. 베논은 약간 속도를 늦춰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는 다른 레미프들도 어지간히 지친 것처럼 보였다. ‘이 속도라면 충분해.’ 베논 위에 올라가 있는 게 익숙해졌을 무렵, 숲을 거의 빠져 나왔다. 밖은 아침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라이가 말했던 바로 그 바위산이 나왔다. ‘네 감각을 믿어라. 숲은 가지 말고, 바위산을 찾아라. 눈길을 걸어, 산 세 개를 건너면 하푸다. 눈 산의 느-라이프덤, 하늘 산맥의 유령이다. 조심하라.’ 카셀은 라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느-라이프덤? 그게 뭐지? 아까 생각났다면 세르메이에게 물었을 테지만, 이미 늦었다. 뒤쫓아 오는 레미프들이 안다 히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소용없었다. ‘늦지 않을 지도.......’ 하지만 기사단이 타고 있는 보통 말이 베논처럼 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 문제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카셀은 급히 고삐를 당겨 베논을 멈춰 세웠다. 베논의 뭉툭한 발톱이 바위 바닥 위로 미끄러지다가 고정되었다. 그 순간 그 베논이 달려갔을 방향으로 거대한 괴물의 입이 수풀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계속 달렸다면 틀림없이 그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타이밍이었다. 날개 없는 검은 드래곤, 카우아였다. 이미 두 마리 카구아가 각 한명의 레미프와 베논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레미프와 베논의 비명 소리는 그쳤다. 그저 뼈가 부서지는 소리만 카구아의 입에서 새나왔다. 또 다를 카구아가 한참 앞쪽 길목에서 튀어나와 섰다. 흥분한 베논이 몸을 들썩이며 뒷걸음질쳤다. 앞에 두 마리, 뒤에 두 마리, 크나딜이라 한들 네 마리 카구아를 물리칠 수 있을까? 카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하게 고삐를 당겼다가 곧 힘을 뺐다. ‘나보다 네가 더 무섭겠구나.’ 카셀을 천천히 베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고삐가 아니라 녀석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목을 조여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베논의 등에 밀착시켰다. ‘어차피 내 목숨은 너한테 달렸다. 네 마음껏 달려라.’ 이 성급한 베논은 벌써 카구아를 두려워하는 것에 질려 이제 반항하더니 앞의 두 마리에게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베논은 점점 보폭을 넓게 뛰더니 마지막 순간 높이 뛰어올랐다. 카구아들을 입을 바닥에 닿을 듯 낮추고 다가오다가, 베논이 뛰어오르자 얼굴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베논의 날렵한 움직임을 따라 잡지 못했다. 베논은 카구아의 머리를 밟고 이어 등을 밟더니, 그다음 카구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계속 속력을 유지해 뒷다리로만 선 카구아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카셀의 머리 위로 카구아의 꼬리가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네 마리 카구아가 베논을 좇아왔으나, 하늘 산맥에서 가장 빠른 이 동물을 날지도 못하는 드래곤이 따라올 수는 없었다. 겨우 몸을 세우고 돌아보니 이미 카구아들은 한참 뒤쳐져 잘 보이지도 않았다. 베논은 약간 속도를 늦춰 달렸다. ‘왜 카구아가 여기 있지?’ 카셀은 겨우 목숨을 부지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저 네 마리 카구아를 하늘 산맥에 남겨둠으로써 적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로핀은 알까? 카셀은 다시 고삐를 잡은 후에도 계속 그 생각만 했다. 추워졌다. 하늘도 점점 어둑어둑해지더니, 이제 태양도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세르메이가 마련해준 옷을 입었어도 추위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중에는 입김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얼마만큼 온 거지?’ 베논이 잘 달려주긴 했지만, 바위산의 오르막을 오르면서 속도가 많이 줄었다. 굉장히 많이 달려온 것도 같지만 하늘 산맥의 넓이를 생각하면 그다지 많이 온 것도 아닐 것이다. ‘절반이나마 온 거라면 좋겠다. 라이가 날아가면 하루거리라고 했던가? 내일 저녁에는 아란티아에 도착할 수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로핀은 시간에 쫓겨 급하게 움직였어도 언제나 이동한 거리를 확실히 알았다. 타냐도 로핀 정도는 아니었어도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에 있는지 정도는 별 고민 없이 알았다. 제이메르는 처음 와봤다는 아란티아를, 마치 가지 고향 마을처럼 헤집고 다녔다. 카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였다. 대체 뭘 믿고 혼자 하늘 산맥에 오른 걸까? 그냥 로크에 머물러 있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부터 적의 작전이었을까? 내가 포크에서 할 중요한 일을 내다보고 나를 이런 곳으로 몰아내려고 왜곡된 미래를 보여준 걸지도 몰라. 그럼 난 완전히 적의 함정에 빠진 거야.’ 카셀은 베논이 걸어 올라가는 척박한 바위산을 대다보았다.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굵은 번지 같은 것이 눈앞으로 날아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이 오고 있었다. “여긴 계절이 통하지 않는 곳이구나.” 카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보기에 눈 덮인 높은 산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에 올라 이런 작은 눈송이를 보니 걱정이 더 앞섰다. 아마 더 높이 올라가면 눈이 많이 쌓여 있을 것이고, 바람은 더욱 세질 것이다. “알고 가는 거니? 이게 가장 짧은 경로야?” 베논은 네 다리만 재게 놀렸다. 가끔 내려가기도 했으나. 금방 올라가는 방향으로 향했다. 여전히 가볍게 달리고 있었으나, 처음처럼 주위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리지는 못했다. “힘든 건 알지만, 조금 더 힘을 재다오. 어쩌면 지금 너의 발에 수만 명의 운명이 달려있을 지도 몰라.” 어쩌면 인간들 전체일지도 모르지....... 그건 카셀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격려이기도 하고, 위로이기도 하고, 또한 의문이기도 했다. 정말 이게 로크의 전쟁에 큰 도움이 되는 길일까? 어둠이 그의 자신감을 갉아먹었고, 추위가 그를 위축시켰다. 세르메이가 내준 옷을 입고 장갑을 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제 눈발이 제법 거칠었고, 베논은 눈 쌓인 바닥을 걷고 있었다. 아마 적은 오늘밤쯤 로크의 탑을 공격할 것이다. 적도 아군도 그걸 알고 있었다. 카셀이 알고 있는 건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전투에 유능한 적장은 분명 그 이상을 노릴 것이다. 카셀은 부디 로핀이 적장 비터보다 더 앞을 내다보고 있길 바랄 따름이었다. ‘아니, 앞을 바라본다 한들 전력 차가 그렇게 심한데 뭘 할 수 있지?’ 카셀은 또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있자. 더 추워지기 전에 빵을 먹어두자. 허기지면 더 비관적인 생각만 할 거야.’ 카셀은 빵과 물을 먹고 베논에게도 먹였다. 베논은 여전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빛이 완전히 사라져 카셀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바로 코앞도 보이지 않았다. 밤에도 빛을 내는 보검 손잡이에 달린 보석도 이런 눈보라 속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흔들리는 베논의 등도 손으로 느끼고 위치를 아는 것이지,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번 떨어지면 베논의 등에 오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고삐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 그의 앞길을 방해라도 하듯 눈발이 더욱 세졌다. 지나치게 바람이 세서 베논은 앞으로 전진을 못하고 뒷걸음질쳤다. 카셀은 힘겹게 베논의 등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걸었다. 몇 걸음 따라오던 베논은 갑자기 앞으로 가길 거부했다. 바람이 심하긴 해도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 못 걸을 정도는 아니라, 고삐를 더 세게 당겼다. “가야 해. 이련 곳에서 멈추면 더 위험해.” 카셀은 목청을 더 높였다. 그러나 베논은 움직이지 않았다. 카셀은 희미한 빛을 내는 보검을 베논의 얼굴 옆으로 가져갔다. 녀석은 보검이나 카셀을 보는 게 아니라, 그의 등 뒤를 노려보고 있었다. 베논의 긴 호흡이 이어졌다. 카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발이 얼굴을 덮는 어둠을 주시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베논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뭔가가 보일 리가 없었다. “거기 누구 있소?” 한참 대답을 기다리다가 카셀은 다시 베논을 끌어당겼다. “여긴 아무 것도 없어! 움직여야 해.” 그러나 베논은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이 옳았다. 뭔가가 있었다. [드루 리아이...... 아즈 즈레드.] 바닥을 울리는 굵은 목소리가 구름보다 높은 산의 바람을 뚫고 카셀에게 도달했다. 그는 놀라 베논의 옆으로 물러났다. 세르메이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눈보라에 섞인 그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카셀을 그게 어떤 의미의 말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존재에게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카셀은 마냥 기다렸고, 베논 역시 물러나지도 전진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주위에서만 눈보라가 더 세지는 기분이었다. 옷 틈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지독히 찼다. 어둠의 존재는 다시 한 번 카셀에게 말했다. [드루 리아이 아즈 즈레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얼굴을 딱딱하게 얼리는 눈이 얼굴에 두껍게 달라붙었다. 머리카락을 덮은 눈 더미가 카셀의 어깨로 떨어졌다가 어깨 위에서 뭉쳐 또 바닥으로 떨어졌다. 베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삐를 쥐고 있는 손은 장갑을 꼈음에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을 때리는 눈송이가 아팠으나, 이제 그것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졸렸다. “느-라이프덤.......” 카셀은 잘 열리지도 않는 입으로 말했다. “물러나라.” 이제 손바닥에 달라붙어 버린 듯 떨어지지 않는 보검을 앞으로 들었다. “나는 이 산을 지나갈 권리를 위임 받았으며, 하이로드 새나디엘의 후계자이며, 즈토크 워그의 계승자다.” 카셀의 팔은 길지 않은 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부르르 떨렸다. 칼끝은 잉크에 닿은 깃털이 검은 잉크를 흡수하듯 어둠에 먹혔다. 카셀은 반쯤 감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무섭다기 보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더듬거렸다. “기, 길을 열어라. 네가......, 이 산의 주인이라 해도 나디우렌의 이름 아래 있다면 너는 내 아래 있는 자다. 이 산을 더럽힐 생각은 없다. 그, 그러니 길을...... 여, 열어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춥다.’ 그 외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눈발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카셀은 천천히 칼을 허리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떨리는 손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몇 번이나 실패한 후에야 겨우 칼집의 입구를 찾아 넣을 수 있었다. 눈보라는 거의 멈췄고, 하늘의 구름도 걷혀갔다. 희미한 달빛에 주위가 약간 밝혀졌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눈을 밟은 흔적도 없었다. ‘뭐였을까?’ 카셀은 겹겹이 쌓이는 의문을 저만치 미뤄두고, 그저 수고했다는 뜻으로 베논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계속 가다오. 달을 보니 밤은 이제 시작된 것 같구나. 재촉하지는 않을게. 네가 갈 수 있는 만큼 갔음에도 우리가 늦는 거라면 그건 너와 기더가 그러한 것이겠지. 하지만 다음 산을 갔을 때도 비슷한 존재가 가로막으면 나는 그때 또 방금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카셀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천천히 걸었다. 이런 눈 속에서는 베논을 타고 갈 수도 없어 고삐만 잡고 전진해갔다. 그 순간 바닥의 눈이 푸욱 가라앉으며 베논과 카셀은 동시에 밑으로 떨어졌다. 베논은 필사적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눈 위를 밟고 올라가려고 발악했으나, 내려가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카셀도 깜짝 놀라 고삐를 놓고 두 손으로 아무거나 붙잡았다. 주위에 가득하던 눈밭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손에 잡힌 날카로운 바위를 움켜쥐고 카셀은 겨우 떨어지지 않고 버텼다. 내려다보니 거의 절벽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파른 경사가 한없이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틈으로 베논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기어오르려 했으나, 결국 무너지는 다른 눈 더미와 함께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카셀은 세 걸음 정도 너비로 벌어진 얼음의 틈새 끝에 매달려 있었다. 쌓인 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자연적인 함정이었다. 카셀은 필사적으로 위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얼어붙은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루 종일 격렬하게 움직이는 베논의 등 위에 올라가 있느라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직으로 깎인 낭떠러지는 아니었으나, 바닥까지 빛이 닿지 않아 얼마나 밑으로 미끄러져야 바닥에 닿을지 가늠하기 조차 힘들었다. 설사 바닥이 가까워 다치지 않고 떨어진다 해도......, 그래서 살아남는다 해도 카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카셀은 죽을 힘을 다해 벽을 밟고 손을 위로 뻗었다. 하지만 발을 디딜 만한 부분이 없어 계속 미끄러졌다. 잡히는 건 가루처럼 자잘하게 부서지는 눈밖에 없었다. 카셀은 허리의 보검을 뽑아 거꾸로 쥐고 벽에 내리쳤다. 몸은 점점 밑으로 쳐졌다. 더 버틸 힘이 없었다. 카셀은 마지막 힘이라고 생각하고 칼을 벽에 내리찍었다. 보검이 운 좋게 얼음 틈새에 박혀 고정되었다. 카셀을 겨우 한시름 놓았다 생각하며 거기에 의지해 기어오르려 했다. 그때 반투명한 나뭇가지 같은 것이 얼음에 박힌 칼날을 잡았다. 카셀을 눈을 크게 뜨고 외마디를 내질렀다. “어?” 얼음에 박힌 칼이 도로 뽑혀져 나왔다. 저절로 빠진 게 아니었다! 보검이 손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그는 밑으로 미끄러져 얼음 벽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절벽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그러나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떨어지는 순간까지 의식을 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닥이 얼굴에 닿자 곧 따뜻한 방안에서 이불을 덮고 있는 것만큼이나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그걸 편히 쉬는 거라고 생각했다. 17 .제이메르의 이름으로 타냐는 눈을 뜨고 문 밖에선 사람에게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녀는 문이 아직 닫혀 있었는데도 밖에 누가 있는지 보였다. 그랜드 로크의 의장 리펜다스였다. “마스터 타냐, 어제부터 식사를 하지 못하셨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는 문만 살짝 열고 밖에서 말했다. 어린애 한 다스쯤 옆에서 북치고 놀아도 별로 상관없었으나, 그랜드 로크의 마법사들은 타냐의 집중력에 혹시라도 해를 끼칠까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간단히 먹을 거라도 있습니까? 물이나 차게 식힌 차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별로 배는 고프지 않고, 갈증만 심했다. 한 순간 지독히 잠이 쏟아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괜찮았다. 언제까지라도 깨어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준비해 드리죠.” 리펜다스는 타냐를 도울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얼른 계단 아래에 대고 식사를 올리라고 외쳤다. 타냐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팔과 다리를 풀었다. “좀 걸어야겠어요. 화장실도 가야겠고, 얼굴로 좀 씻고 싶군요.” 타냐가 휘청휘청 걸어가자, 리펜다스는 깜짝 놀랐다. “아, 그럼 의장께서 대신 서계시겠어요?” 타냐는 힘없이 웃었다. “농담이에요. 제 힘이 잠깐 끊긴다고 방벽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염려 놓으세요.” 타냐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힘들어.’ 밑에서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온 시녀가 올라오다가 타냐를 보고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음식은 그냥 방에 놔두세요. 나중에 먹겠습니다.” 타냐는 벽에 손을 대고 일어나, 계단에 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석양이 보였다. 적은 밤에 움직일 것이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방벽을 공격하기 시작한 지 하루가 지났고, 카셀이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그 자의 모습은 이미 타냐의 머리 속에 들어 앉아있었다. 아마 타냐의 모습도 그 자에게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 피 묻은 날개는 분명 라이의 것이었다. 라이는 죽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라이가 희생한 겁니까? 아니면 당신도 라이와 함께 죽은 건가요? 지금 어디 있나요, 카셀?’ 마법의 힘이 극대화된 지금도 타냐는 카셀의 흔적을 읽어낼 수 없었다. 어디에 있든, 그저 무사하길 바랄 따름이었다. “해가 지고 있군.” 로핀은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느하로우가 바쁘게 움직이며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몸을 풀고 있었다. 로핀이 말했다. “벌써 몸을 풀 필요 없어.” “곧 시작될 거 아니에요?” “너는 드래곤 기사단 쪽으로 가거라.” “드래곤 기사단은...... 움직이지 않는 병력으로 아껴둔 거잖아요.” 적은 모즈들을 삼중으로 배치했다. 이만이 조금 넘는 병력은 앞에 진을 치고 있고, 그 뒤에 또 비슷한 병력이 있었다. 세 번째 병력은 가장 뒤에 있었고, 빅터와 구아닐은 거기에 있었다. 아직 확인할 수는 없으나, 러스킨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로핀은 마지막 주둔 병력이 탑을 무너뜨리려고 대기한 정예 부대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기병대 백과 드래곤 기사단 백 오십, 중무장한 창병들 삼백을 가장 후방에 배치했다. 바로 그 정예 부대와 싸우기 위한 이 쪽의 정예 부대였고, 로핀은 당연히 그 중심에 드래곤 기사단을 뒀다. 캡틴을 잃긴 했으나, 그들은 울프 기사단에 맞먹는 대단한 기사들이었다. “그래. 바로 그 병력을 네가 지휘해야 하는 거다.” “거기에는 다른 녀석들이 있어요. 제가 거기 간다고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어요.” “가넬과 셀바이크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드래곤 기사단은 캡틴이 없어도 잘 움직인다 해도, 다른 기병들이나 드래곤까지 움직이려면 지휘관은 있어줘야지. 네가 해라.” “싫어요.” 로핀은 논쟁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전방만을ㄹ 바라보았다. 적진영이 움직였다. “날 믿고 따라라, 아즈윈. 그리고 우선은.......” 로핀은 허리에 찬 검을 내려다보았다. 가넬이 카-구아닐을 해치울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만들어준 검이, 가넬의 숨소리와 같은 규칙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우선은 오늘 밤을 넘기는 것만 생각하자.” 솔직히 로핀은 자신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언제나 그랬듯 여유 있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부디 제자가 이 속마음을 읽지 못하길 바라며....... 제이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다른 드래곤 기사들과 같이 앉아있는 브란더에게 다가가 물었다. 몇 명은 그가 도와준 일 덕에 아는 척이나마 했으나, 대부분 기사들은 무관심했다. “여어, 제이메르. 어서 와라. 여기 앉아. 그런데 우릴 구해주신 아이린이라는 분이 네 스승이라며? 죄송하다고 전해다오. 그 이후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바쁜 건 나도 그 분도 알아. 신경 쓰지 마라. 나도 그냥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인사라도 해두려고.” “작별 인사 같다. 꼭?” 제이는 모즈들의 진영에 듬성듬성 켜 놓은 횃불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아군 진영에서도 횃불을 하나 둘씩 밝히고 있었다. 로크의 방벽이 희미한 빛을 내고, 달도 밝았으나 역시 횃불은 필요했다. “저 녀석들 보면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하지.” “싸워본 적 있나?” “있다. 루티아에서.” “루티아?” 브란더는 무척 놀랐다. 일반인들에게 루티아는 아직 배일에 감춰진 신비의 도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이역시 그랬다. “거기에서 이, 삼천 마리의 괴물들이 몰려왔을 때 루티아의 마법사들은 아무 것도 못했어. 이번에는 몇 만 마리다. 위험한 숫자긴 하지.” “해봐야 아는 거지.” “식상한 말이군.” “전투가 벌어지면 그런 단순한 말이 모두를 이끄는 거야.” 브란더는 기세 좋게 웃다가 말했다. “어때? 생각은 정리되었나?” “뭐가?” “네 배치가 어디든, 여기 남아. 그리고 드래곤 기사단이 되어라.” “너 의외로 질기구나?” “그런 걸로 이 자리에 있게 되었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던 기사 하나가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브란더, 네가 벌써 캡틴이 된 것처럼 말하지 마라. 우리들의 캡틴은 오직 드래곤만이 결정해 주신다.” “그럼 저기 가넬이 계시는군. 어때, 루시우스? 여쭤볼까??” 브란더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루시우스는 양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말했다. “네가 하도 설쳐 대서 나도 네가 조사한 자료를 봤다. 제이메르, 이 녀석의 아버지는.......” “닥쳐라! 그건 제이메르의 과거가 아니라, 그 사람 개인의 과거다. 제이메르는 정확히 아나샤의 아들이며, 아나샤는 집정관 우페르의 외동딸이었다.” “그 외동딸을 더럽힌 죄를 뒤집어쓴 자의 아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는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네 말 역시 의미 없다. 캡틴께서는 이미 기사 티온의 죄를 용서하셨다. 네가 왈가왈부 나설 문제가 아냐.” 제이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둘 다 입 닫어.” 그는 두 사람을 비롯해 다른 드래곤 기사들을 모두 돌아보았다. 몇 명은 브란더에게 동조하고 있었고, 몇 명은 루시우스에게 동조하고 있었고, 일부는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몰랐으며, 일부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브란더, 나를 이 정도로 높이 평가해준 건 고맙다.” 제이는 사실 갠 얘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리하지 않은 말을 이런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건 자신 없었고, 경험상 그런 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하아, 카셀이라면 시원하게 너희들을 혼내줬을 텐데.......” 제이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브란더, 그리고 너! 둘 모두에게 더 좋은 이야기를 해주지. 티온은, 그래. 너희가 자료상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그 남자는 내가 죽였다. 레이디 아나샤의 이름 아래 일 대 일 대결로 그를 꺾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너희들이 내 과거를 가지고 얘기하고 있나?” 그냥 웃어버리고 돌아서서 잊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평생 따라다닐 문제일 것이고, 여기에서 하는 어떤 말도 그런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제이는 알았다. 한동안 카셀을 만나 즐거웠다. 울프 기사단도 즐거웠다. 그러나 역시 제이는 혼자 싸우는 사냥꾼이었다. “브란더, 나는 기사가 아니라 그냥 살인자일 뿐이야. 그게 다다.” 제이는 주위에 몰려있는 드래곤의 기사들을 밀치며 어둠 속을 걸어갔다. 누구도 그를 붙들지 않았다. 그저 브란더는 탑 옆에 서있는 거대한 황금빛 드래곤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우리의 주인께서 돌아오셨음에도 우리는 아직 아무 말씀도 듣지 못했군. 이제 드래곤 기사단은 대체 무얼 해야 하는가?” 카모르트에서 온 붉은 장미의 군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틀째 쉬지 못한 병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고, 조금은 느슨하게 쥐고 있던 창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제이는 그런 병사들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말을 타고 병사들을 독려하던 지휘관이 그를 발견했다. 지휘관은 즉시 제이의 길을 막고 대열을 벗어난 병사가 누군지 확인했다. “소속이 어딘가?” 제이는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소속? 내 소속이 어디지? “내 이름은 제이메르요.” “제이메르? 아.” 지휘관은 말투를 고쳤다.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나에 대한 지시가 있었소?” “마스터 로핀께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예. 당신의 이름으로.” “나에 대해서 뭐라고?” 지휘관은 자기가 말하기도 이상하긴 했는지, 약간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제이는 계속 걸었다. 로크의 수비대가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자 바닥에서 마른 먼지가 일어났다. 사방에서 고함치는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곳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다른 곳에서 잇따라 그걸 복창했다. 제이는 그들의 이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 곳으로 계속 걸어갔다. 아군 진영의 제일 앞은 로크 수비대가 맡고 있었다. 제이는 작전 내용을 들었으나, 잊어버렸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투가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앞으로 갔다. 로핀이 내세운 대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제이메르, 선택지를 주겠다. 첫째, 제일 앞에서 제일 위험한 자리에 서서 싸워라. 격전지에서 아군이 위험한 곳을 발견하면 거기에 뛰어들어라. 그래, 아즈윈. 나도 알아. 그 자리에 선 이상 반드시 죽을 거다. 솔직히 너 정도 되는 녀석을 그런 곳에 던져놓고 싶지 않아. 그래서 두 번째 선택을 주겠다. 이게 싫다면 세 번째 선택지도 있다. 전투에서 빠져라. 하지만 넌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 잊어버려라.’ ‘그래서 그 두 번째가 뭐요?’ ‘드래곤 기사단의 브란더라는 친구가 와서 부탁하더군. 자네를 드래곤 기사단의 전투 배치에 넣어달라고.’ 브란더는 그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는 거지? 그건 알지 못했다. 로핀도 그런 질문을 했더니, 브란더는 ‘그냥’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냥, 조만간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를 캡틴 자리가 부담스러워 다른 쓸만한 인재를 찾다 보니 자꾸 제이메르라는 인물이 눈에 밟힌다...... 그런 답변만 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더 하고 싶어서 방금 브란더를 찾은 것이지만, 제이는 유치하게도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들추고 도망쳐 나와 버렸다. ‘나에 대해 뭘 아는가, 브란더? 내 과거를 알고도 나를 드래곤 기사단에 넣어줄 텐가? 나는 사냥꾼이다. 난 비위에 거슬리면 아군의 등도 찌를 수 있는 그런 놈이다. 그런 걸 동료로 두고 싶다고?’ 드래곤 기사단을 중심으로 구성한 정예 부대는 드래곤 가넬, 드래곤 셀바이크와 함께 축복의 탑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대략 삼천으로 구성된 후방 전투 부대가 있었고, 그 앞은 이천 명의 로크 수비대가 맡고 있었다. 모즈들과 가장 심한 격전을 벌이게 될 천명의 중무장 보병은, 제일 선두에서 적의 돌격을 막을 방패 병들 바로 뒤에 있었다. 제이가 속해 있는 건 바로 그 중무장 보병 부대였다. 제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병들의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뭐라고 하는 건지 들리지 않았다. 자기에 대해 하는 말 같았는데,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상관없었다. 적의 군대는 해가 진 직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가 브란더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나온 순간부터 탑 쪽으로 전진해왔다. 이만 마리가 동시에 일으키는 불규칙적인 발소리가 울렸다. 멀리서 기병대의 말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도 거기에 섞였다. 누군지 모르는 병사가 길게 소리 내어 노래했다. 가넬로크의 세 개 탑을 흔들며 하늘 산맥에서 불어오는 남풍이여. 천년 동안 기다려 한 번 노래하는 로크의 새 천년 동안 기다릴 드래곤의 소식을 전해다오. 붉은 피는 우리의 의지, 푸른 하늘은 우리의 마음. 하늘 산맥에서 불어오는 남풍이여, 대륙에서 불어오는 북풍이여. 궁수 부대의 후방에 있던 캡틴 느하로우는, 누군가 부르는 그 노래가 끝나자마자 소리쳤다. “가넬로크의 전사들이여!” 그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의 함성이 터져 올랐다. 보병 부대의 북쪽에 위치한 카모르트의 지휘관도,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목청 좋게 외쳤다. “카모르트의 전사들이여.” 파도를 타고 이동하듯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러댔다. 몇 천명이 동시에 터트리는 소리는 시큰둥하니 서있는 제이마저 흥분 시켰다. 두 나라의 군대가 동시에 울리는 북소리도 요란했다. 제이는 등에 맨 도끼를 들었다. 희미하게 반사되는 도끼날은, 바라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벨 듯 예리했다. 제이는 손등으로 도끼날을 쓰다듬었다. ‘게랄드의 도끼...... 내가 그를 대신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전방에서 모즈들의 함성이 터졌다. 천천히 걸어오던 모즈들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거리를 얼마 남겨두지 않는 순간 뛰어오기 시작했다. 함성과 발소리가 어우러져 한 순간 주위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허공을 울리는 진동에 귀청이 멍멍해졌다. 바닥의 돌이 튀어 올랐다. 모즈의 군대와 인간의 군대 사이에서 흐르던 공기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제이는 뒤로 몸을 약간 늦추었다. 왼손에 든 도끼는 늘어뜨리고, 오른손에는 르고에게 얻은 칼을 들었다. “아이린,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스승이시여. 당신이 내 준 테스트를 지키러 갑니다.” 별 밝은 하늘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올라간 효시 한 방을 기점으로, 로크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올렸다. 밤공기를 가르며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올라가 모즈들에게 떨어졌다. 선두를 약간 벗어난 지점에서 뛰어오던 모즈들의 돌격 라인이 무너졌고, 뒤따라 달려오던 모즈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대혼란이 빚어졌다. 그렇다고 달려오는 속도가 늦춰지는 건 아니었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제이는 발걸음을 뗐다. 병사들을 제치고, 다음 활 공격을 바쁘게 준비하는 궁수들 몇 명을 제치며 제이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 옆을 지나가는 제이를 발견한 느하로우가 놀라 말했다. “당신의 대열로 돌아가시오, 제이메르. 이제 곧.......” “내 맘이다.” 제이가 말했고, 느하로우는 그를 막지 못했다. 오늘 아침 남쪽 성에서 큰 싸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 제이는 아이린이 걱정되어 아로크의 탑을 찾아갔다. 다행히 그녀는 탑으로 올라가는 1층 계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과일을 깎아먹고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어, 나는 괜찮아. 싸우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로일이 다쳤더군. 꽤 심각하게.’ ‘로일이? 어떻게.......’ 로일은 감히 제이가 어찌해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사였다. 그런 그가 당했다는 건 어떤 사고가 났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 제이는 누가 그랬냐고 물은 게 아니라, 어떻게 당한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예상 밖의 대답을 해주었다. ‘일 대 일 싸움에서 당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좀 심각해. 아마 이번 전투에서는 더 이상 싸우지 못할 거야.’ 갑자기 하고 싶었던 질문을 꺼내기 싫어졌다. ‘마스터, 제가 왜 당신의 제자입니까?’ 하지만 제이는 물었다. ‘왜 그런 걸 묻지? 싫어?’ ‘아닙니다, 단지...... 퀘이언의 제자는 모두 엄청납니다. 듣자니 아즈윈이라는 여자도 로핀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제가 당신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아이린은 크게 웃었고, 제이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는 진지합니다. ‘미안해. 넌 그런 자기비하 같은 건 안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거든’ ‘전 당신이 기대했던 것만큼 강한 건 아닌가 봅니다. 어제도 아즈윈에게 몇 대나 얻어맞았습니다.’ ‘확실히 아즈윈은 굉장한 아이야. 로핀이 자신 있게 내기에서 이긴다고 말할 만도 해.’ ‘내기?’ ‘아, 그냥 우리끼리 얘기야. 잊어버려. 어쨌든 나는 네가 하얀 늑대들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제이는 결국 얼마 전 라이에게 검을 준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 친구는 제가 아주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라이는 로일 만큼 강한 레미프였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인정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전 지금 실력으로 그를 이길 수 없어요.’ ‘카셀과 함께 간 그 레미프...... 죽었다.’ 아이린고의 말에 제이는 깜짝 놀랐다. ‘카셀과 라이가?’ ‘카셀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 레미프가 죽은 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로일과 라이, 둘 다 동일한 사람에게 당한 것 같아.’ 아이린은 긴 얘기를 해 주지 않았고, 제이도 깊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래. 네 고민이 어떤 건지 이제야 감이 잡히는구나. 나도, 퀘이언도, 그런 고민 많이 했었어. 여전히 해답을 내지 못한 고민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라이라는 레미프가 네게 한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너, 울프 기사단 애들과의 대결에서 어느 정도지?’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정도?’ ‘그런 대답을 하는 시점에서 너는 라이의 말에 대한 해답을 얻을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야.’ 아이린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이메르, 네가 내 제자냐고? 물론이야. 너는 내 제자다. 왜 그걸 물었을까? 그건 아마 내가 널 가르친 바가 적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난 여전히 너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줄 생각 없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완성되어 있거든.’ ‘다시 말해 이게 제 한계라는 뜻입니까?’ ‘다시 말해 너는 벌써 나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거야. 라이라는 녀석이 어느 정도 실력자든 너는 그 레미프를 죽일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 라이가 너보고 강하다고 말한 거겠지.’ 제이의 걷는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화살의 공격을 뚫고 도달한 모즈들이 방패를 세우고 있는 로크의 수비대를 향해 몸으로 부딪쳤다. 방패 뒤에 세우고 있는 창에 찔리든 말든 뒤에서 밀어붙였다. 그 밀려오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방패병들은 뒤로 물러났다. 몇몇 모즈들이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뛰어올라 방패 병들을 덮쳤다. 화살이 또 한 차례 쏟아져 뒤따라오는 모즈들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몰려오는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제이는 그 난장판 속을 달려가며 오른손에 든 칼은 치켜세웠다. ‘라이와 아이린이 번갈아 가며 수수께끼를 낸 게 아니었다.’ 둘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이 혼자서 그걸 깨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제이는 아이린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이긴다’고 말하지 않았다. ‘죽인다’고 말했다. 머리 속으로 엄청난 간격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즈들이 보여주는 그 간격들을 모두 계산하며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제이는 그 싸움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계속 막막해 했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절대 이기지 못할 싸움에 달려드는 것 같았다. 자기 역시 이 전투에서 싸우다 죽어갈 한 명의 병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괴로웠다. ‘죽은 녀석은 필요 없어!’ 헤어질 때 했던 에위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도 죽은 다음에는 너 필요 없어.’ 제이는 말했다. ‘살아남아라, 제이메르.’ 아이린이 말했었다. ‘혼자 답 찾아라. 그러면 너, 나도 이길 수 있다.’ 라이가 말했다. 마침내 제이는 앞을 가로막는 방패 병들까지 지나 벽을 이루고 돌격해오는 모즈들을 향해 왼손에 들고 있는 도끼를 휘둘렀다. 한꺼번에 대여섯 마리의 모즈들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제이는 지체하지 않고 오른손의 칼을 들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과 도끼를 막았다. 그리고 몸을 몇 바퀴 회전하며 칼과 도끼를 번갈아 가며 휘두르고 막았다. 그가 전진하는 방향으로 뜨거운 공기가 피를 머금고 주위로 터져나갔다. 거센 회오리가 몰아치고 지나간 것처럼 모즈들의 동강난 시체가 바닥에 줄을 지었고, 그 옆으로 팔을 잃거나 상처 입은 녀석들이 넘어지며 한 차례 긴 길을 만들어냈다. 주위를 에워싼 수십 마리 모즈들의 간격이 머리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간격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가장 가까운 녀석부터 베어버리고, 그 다음 간격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그 녀석을 베면 그만이었다. 이건 전투가 아니었다. 이건 일 대 일 싸움도 아니었다. ‘나는 기사가 아니야. 사냥꾼이지.’ 라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모즈들 역시 전투를 위한 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 녀석들은 전쟁터의 적이 아니라, 그냥 사냥감인 거지.” 제이는 의식하지 못한 미소를 보이며 도끼를 크게 휘둘러 근처에 있던 모즈들의 머리를 한꺼번에 베었다. 키가 작아 목이 아니 머리를 얻어맞은 녀석은 두개골이 깨져 날아가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어깨가 잘려나가기도 했다. 제이는 사방으로 퍼지는 피를 피해 몸을 낮췄다. 그리고 한 마리의 다리를 베고 일어나 다른 녀석의 턱을 올려 쳤다. 괴물들은 제이의 모습을 발견하지 조차 못했다. 제이의 간격 안에서 녀석들은 모두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어디에서 칼이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죽어 넘어갔다. 제이는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차분히 죽여 나갔다. 단지 숫자가 많을 뿐, 예전에 하던 짓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사이, 제이의 주변에는 모즈들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로 로크의 수비대에서 투석기로 발사한 불덩어리가 모즈들의 진영으로 떨어졌다.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모르트의 군대가 붉은 장미 깃발을 앞세우고 돌격해왔다. 하지만 제이는 상관 하지 않았다. 아군의 전략도, 적군의 전략도 의미가 없었다. 지금 제이의 머릿속에는 사냥감과 사냥감 아닌 것의 구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이, 게랄드.” 제이는 모즈의 피로 얼룩이 져 있는 도끼 안에, 본 적도 없는 그가 있기라도 한 듯 말했다. “네 실력은 모르지만.......” 다시 모즈들이 제이를 호위 공격해왔다. “네가 몇 마리를 죽일 수 있든, 내가 더 많이 죽여주지.” “아이린, 제이메르가 싸우고 있습니다.” 타냐가 말했다. 아이린은 한쪽 다리만 구부려 가슴으로 끌어안고, 구부린 무릎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그런 게 보여?” “또렷하게.”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보입니다. 그 자 역시 저를 보고 있습니다.” 타냐는 거기까지 말하고 눈을 떴다. “로크 존 안으로 상당히 접근했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파고들면 저로서도 막을 수가 없군요.” “완전히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 로핀이 이끄는 저 전투에 상관없이 이 전쟁은 끝입니다.” 두 개의 탑을 지키는 건 로크 존을 유지하기 위해서고, 로크 존은 결국 그 자를 막기 위해 쳐놓은 방벽이었다. 타냐는 그런 작은 것들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린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타냐가 막아줄 수밖에 없다는 거구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우린 막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가요? 아이린은 언젠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싸워본 적이 있지요?” “있지.” “그때도 이런 암울한 전투였습니까?” “이런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지만, 비슷했어. 테일드, 메이루밀, 로핀, 그리고 나, 모두 그 자를 죽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어.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그를 죽일 수 없고, 모든 죽어있는 존재는 그의 명령을 듣지. 녀석이 스스로에게 축복처럼 걸고 있는 저주야. 따지고 보면 우리는 녀석의 파괴행위를 후세로 떠넘기려고 이 짓을 하는 거야.” “베나 에사르크의 힘으로도?” 타냐가 물었다. 아이린은 허리에 찬 검을 손으로 툭 쳤다. “녀석의 힘을 한 순간 없애버릴 수는 있을 거야. 그럼 나 늙어 죽을 때까지는 다시 녀석을 안 봐도 된달까?” “괜히 여쭤봤군요.” “10년 전의 테일드도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단언했어. 새나디엘 폐하도 그 방법을 알고 계시다면 진작 너나 내게 말씀해주셨겠지. 여신을 만나 뵈었다며? 그분은 알고 계시든?” 타냐는 고개를 저었고, 아이린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지. 아, 그보다 제이메르는 잘 싸우고 있어?”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어요.” 타냐는 아이린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의 제자에 대해 제가 왈가왈부하는 건 옳지않으나.......” “말해. 나도 녀석에 대해 자세히 몰라.” “생각해봤는데, 제이메르는 우리보다 적의 편에 섰을 인물이었습니다. 이건 운이나 아란티아의 축복, 그런 걸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의 운명에도 걸려 있지 않은 존재였어요. 라이가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기더에 존재할 수 없다고, 저 역시 그를 대하며 묘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다른 곳에 속해 있어야 할 존재가 강제로 끌려온 거죠. 적에게 가 있었거나, 아니면 다른 곳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거나.” “뭘...... 말하는지 알겠구나. 그래.” 아이린은 제자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 씁쓸히 말했다. “이 전투가 승리로 끝난다 해도 제이메르는 당신을 떠날 거예요.” “상관없어.” 아이린은 그녀답게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였다. “그런 일이 벌어져도 제이메르는 내 제자야. 그리고 지금은 그 아이의 현재 모습을 지켜봐 주는 것에 충실해야지.” “두렵습니까? 제자가 너무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 “로핀도 그걸 잘 알더군. 어쩌면 우리의 목숨은 제이메르가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무섭다고. 맞아. 무서워. 제이메르까지 우리 편에 떨어졌는데도 우리가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인간은 살아남을 기회조차 잃는 거야.”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 순간 주위에서 검의 간격이 멀어졌다. 옅게 느껴지는 검의 간격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꽤 많은 병사들이 자신의 주위에 서서 싸우고 있었다. ‘어쩐지 싸우기가 편하더라니 모즈들은 여전히 격렬하게 인간의 군대를 몰아치고 있었다. 북쪽 지역에서는 카모르트의 군대가 모즈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횃불의 이동이 격렬하게 앞과 뒤로 이동하길 반복했다. 남쪽에서는 로크의 군대가 싸우고 있었고, 오히려 모즈들을 압도했다. 정체 모를 괴물들을 맞아 싸우는 것 치고는 대단한 선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혼잡한 전투 중에 제이의 주변에는 잠시 공백이 생겼다. 제이는 짧은 휴식을 취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에 물이 흐르듯 별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잠깐 동안 차가운 공기가 머리 위로 스쳐갔다. “이봐, 이름이 뭔가?” 수염이 뺨과 귀밑을 덮고 있는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제이메르.” “ 난 바르탄 지방에서 온 하닐로스다. 나도 그 곳에서는 꽤 하는 편인데 자네는 못 당하겠군.” 옆에서 다른 기사가 투구를 벗으며 그 말을 받았다. 긴 곱슬머리가 땀 때문에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뒷모습이 의지가 되더군. 앞에서 싸워주니 편하기도 했고...... 내 이름은 욤이다. 카모르트 군대인데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이 쪽에 합류하게 되었군.” 꽤 직책이 높은 모양인지 그를 따라온 그의 부하들도 여럿 되었다. “난 코펜, 용병이지만, 얼마 전부터 로크 기병대의 정규군으로 일하고 있지. 말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바닥에서 싸우다가 여기에 끼게 되었군.” “갤린노르. 남쪽에서 왔다. 뭐, 드래곤 기사단에 들고 싶어서 노력했지만, 아버지가 귀족이 아닌 약초꾼이라.” 그 나이 많은 남자는 허허 웃었다. “전 코넬리우스라고 합니다. 실전 검술에 대해서는 자부하고 있지만, 이런 곳에서 그런 걸 논할 처지가 못 되는군요.” 나이 어린 남자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쥐고 있는 칼에 묻은 피나 얼굴에 입은 상처를 보니 적지 않은 모즈들을 해치운 실력자임에 분명했다. 모즈 한 마리가 병사 대여섯을 저승길로 동행할 만큼 무지막지한 놈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이 옆에 살아남아 있는 남자들은 모두 상당한 칼잡이들인 셈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여자였다. 투구를 쓰고 있었으나, 제이는 알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제이의 시선을 보고 투구를 벗었다. 짧다 못해 거의 대머리에 가까운 머리인 그녀가 말했다. “나, 난...... 지방 용병대에서 정규군으로 편입된 메이트니다.” 다른 병사들도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하날로스가 물었다. “제이메르, 자네는 어디에서 왔나? 이름을 보니 카넬로크 출신 같은데.......” “사냥꾼이다. 고향 같은 건 없다. 상관있나?” 제이는 차가운 눈동자로 되물었다. “물론 없지. 뭐. 이런 자리에서 이름인들 필요한가?” 그들은 허허 웃으며 동의했다. 메이트니라는 여자가 자기 소개할 때 모두가 보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나이도, 지역도, 성별도 개의치 않는, 오직 검술 하나로 살아온 검사들이었고 이 전투에서 서로에게 이끌려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저 누군가는 여기서 싸운 우리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거지.” 하날로스의 말에 다들 쓸쓸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이는 비웃었다. “누가 이런 곳에서 들은 이름을 기억하나?” 제이는 다시 하늘을 보았고, 조금도 숫자가 줄지 않은 모즈들을 보았고, 그 너머에서 겨우 윤곽만 보이는 검은 드래곤을 보았다. 지쳤으나 머리 속은 밤하늘처럼 맑았다. “너희들끼리나 그 좋은 기억력으로 열심히 옆 사람 얼굴과 이름이나 외워둬. 난 벌써 잊어버렸으니까.” 흩어진 모즈들의 군대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효율적이지 못한 돌진으로 인해 많은 모즈들이 별 이득 없이 죽었다. 심지어 피를 보고 자제력을 잃어 자기들끼리 물어뜯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 그들을 다시 지휘해 격전지로 내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전열을 갖춘 모즈들의 군대가 첫 번째로 노리는 곳은 전장의 빈자리였고, 그곳은 제이가 있는 곳이었다. 제이는 다가오는 모즈들의 무리만 바라보며, 뒤에 서있는 이들이 듣든지 말든지 말했다. “이름이 필요한 건 살아남았을 경우다. 죽은 놈 이름 따위는 필요 없어.” 몰려오는 모즈들의 간격이 다시 열 걸음 안으로 좁혀왔다. 그때 물러나버린 줄 알았던 하날로스가 제이의 바로 뒤에 서서 말했다. “앞장서라, 대장. 뒤를 따르겠다.” “대장?” 제이는 어색한 호칭에 돌아보았다. “내 쪽 지휘관은 벌써 죽어버렸거든.” 하날로스는 허허 웃었다. “뒤를 따르겠다.” 다른 병사도 말했다. “나도 뒤를 따르겠다. 제이메르.” 같은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나왔다. 제이메르는 거기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근사하게 말할 자신도 없었고, 뒤에서 그들이 따라오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이의 뒤에 있는 누구도 몰려오는 모즈들의 군대를 보고 물러나지 않았다. “가넬이시여.” 브란더는 누구도 말을 걸지 못했던 드래곤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가넬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브란더의 얼굴 바로 앞으로 머리를 가져갔다. “말하라, 아이야.”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오직 당신이 내린 규칙으로 살아왔으며, 드래곤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며 지켰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방식에 의문이었습니다.” 브란더의 목소리에 다른 드래곤 기사들이 놀라 다가왔다. 원래 기사단에는 네 마리 드래곤들이 기사단 영토 안에 있을 때조차 드래곤에게 말을 걸지 않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러니 그 가장 큰 존재인 가넬에게 말을 거는 건 큰 죄악처럼 비춰졌다. “어째서 우리 기사단은 능력에 앞서 핏줄을 가려 기사들을 뽑아야 하는 것이며, 사람 그 자체보다 그의 과거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진정 가넬께서 바라신 당신 자식들의 모습입니까?” “무례하다, 브란더!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망발이냐?” 루시우스가 달려와 가넬 앞에서 무릎 꿇어 인사한 후, 브란더를 잡아끌었다. “놓아라. 나는 아직 가넬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네가 지금 누굴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지 안다. 그러나 기기가 그렇지 못하며, 절차 역시 이러해선 안된다.” “놓아라, 루시우스.” “자중하라!” “나는 지금 의회에 청원하는 것이 아니며, 공식적인 기사단의 의견을 여쭙는 것도 아니다. 내 사적인 의문이다.” 브란더는 갑옷의 가슴 부위에 그려진 드래곤의 마크를 주먹으로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마크를 따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 기억해봐라. 그것이 무엇을 위해서였나? 로크를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입에 발린 소리로 떠들었던 드래곤의 명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가족, 나의 사랑, 나의 친구들을 위해서다.” 브란더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가넬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 우리 기사단의 규칙으로 쫓아내버린 한 남자가 싸우고 있습니다. 로크에 아무 것도 지킬 게 없는 그가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어째서 그가 당신의 기사가 될 자격이 없단 말입니까?” 가넬은 지그시 뜬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브란더와 시선을 맞추었다. 브란더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대답해 주십시오. 가넬!” “네가 원하는 대답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기사 브란더.” 가넬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가, 도리어 브란더에 대해 물었다. “내가 먼저 묻겠다. 너는 어떻게 드래곤의 기사가 되었느냐?” “아버지 쪽은 집안 대대로 행정관을 지내셨고, 어머니 역시 귀족이셨습니다.” “네 아버지의 아버지 역시 귀족이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그 위는 어떠했느냐? 누군가는 귀족이 아니었지. 그때 그 사람이 귀족이 아니었다면, 너는 이 자리에 있겠느냐? 아니, 그 전에 네 어머니와 네 아버지가 만나지 않았다면 네가 태어날 수 있었겠느냐? 네가 여기 있는 건 누구의 의지냐? 네 아버지냐, 네 아버지의 아버지냐, 아니면 처음 귀족이 된 네 선조냐?” 브란더는 가넬이 뭘 의도하고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파악하지 못해 대답을 못했다. “저기 싸우는 저 아이는 어째서 저기 있느냐? 어째서...... 너의 옆에 있지 못하고 저기에 있느냐? 나는 너에게 레미프들이 알고 있는 [기더]를 설명할 수 없다. 처음, 아주 작은 것이 바뀌었다면 저 아이는 저기에 있지 않았을 너......, 그러나 처음 아무리 큰 일이 벌어졌다 해도 저 아이는 저기에 있을 것이다.” 가넬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원래의 높은 위치로 되돌리며 말을 끝맺었다. “네 질문의 해답은 저 아이가 직접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저 아이의 이름을 내게 말하라, 브란더.” 브란더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이메르, 아나샤와 티온의 아들 제이메르입니다.” “여보, 제이메르 결혼식에 초대할 마을 사람 명단이 이게 뭐예요?” 아나샤는 설거지 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물었다. 제이는 칼을 손질하며 어머니의 눈치를 보다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티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티온은 못들은 척하며 물었다. “뭐가?” “마을 사람들 전부 다잖아요! 우리 형편에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티온은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제이메르가 번 돈도 있고.......” “어이쿠, 자랑스러우셔라. 그래서 아들의 신혼살림 차릴 집 장만 비용을 털어 결혼식하고 며느리랑 같이 옆에 끼고 사시게? 대단한 부정이시구랴.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잖아.” 티온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헛기침을 하며 제이에게 말했다. “아들아, 혹시 방금 뜬금없이 급한 볼일이 생기지 않았느냐?” “급한 일 없는데요.” 제이가 대답했다. “그럼 에위니나 보러 갔다 오려무나.” “한 시간 전에 집까지 데려다 주고 왔는데 또 무슨.......” “그냥 가!” 제이는 하는 수 없이 손질하던 칼을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두 사람의 전투 가까운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다. 제이는 터덜터덜 걸어 또 에위니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그는 에위니를 가는 길목에서 만났다. “아, 집에서 고기 좀 갖다 드리라기에....... 너는?” 그녀가 물었다. “아버지 명령으로 너 보러 간다.” “명령?” 둘은 나란히 다리 난간에 기대고 서서 흐르는 개울을 내려다보았다. “너랑 결혼이라니, 진짜 실감 안 난다. 이제 너랑 같이 자고 같이 먹고 아기도 낳고 그러는 거야?” “싫음 마라.” “......분위기라고는 없는 자식.” 물소리는 맑았고, 어디선가 식사를 준비하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에위니는 눈을 깜빡이며 먼 곳에 시선을 두는 제이에게 물었다. “제이, 너 정말 이 생활 만족해?” “왜 갑자기 물어?” “드래곤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며? 거기에 들어가면......편할 거 아니야?” “어머니께서 아버지더러 도로 거기 들어가라고 성화이시긴 하지. 기사단 그만둬버리는 바람에 살림이 빠듯해졌으니까.” “어머니 집 부자 아니야?” “자존심마 살아서 외할아버지 신세는 절대 안 지시겠대.” “그러니까 너라도 벌어야지.” “너 지금 기사 남편 얻으려는 거냐?” “나쁘지 않지만, 후후후, 네가 드래곤의 기사가 되면 나 같은 년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나?” 제이는 개울물에 침을 탁 뱉었다. “같아.” “뭐가?” “난 항상 같은 걸 택했을 거다. 너를 택했을 것이고, 같은 생활을 택했을 것이고.......” 에위니는 웃으며 제이의 팔을 붙들었다. “제이가 그런 말을 하다니, 놀랍기도 해라. 그럼 내가 혼자 되게 두지마.” “그래.” “절대로” “알았어.” “그리고 죽지도 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죽지 마, 제이.” 에위니는 울고 있었다. “죽으면 안돼.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잊으면 안돼. 죽지 마. 제이메르. 꼭 살아서 돌아와.” 멀리 시선을 둔 밤하늘의 별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느껴졌다. 제이는 언제인지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삶을 원했다. 미치도록 외로운 사냥꾼 생활의 어느 순간, 멍청하게도 자신의 과거를 수정해서 만들어본 삶은 그런 식이었다. 평범하고, 바보 같고, 유치한 생활의 반복....... ‘이런 게 아니었어.’ 제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해치운 모즈가 바닥에서 꿈틀댔다. 제이는 도끼로 놈의 척추를 내리찍었다. 그는 허벅지와 배에 난 출혈 심한 상처를 손으로 짚었다. 손으로 틀어막아 멈출 상처가 아니었다. ‘모즈 독이 퍼지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거더라? 오늘 밤안으로 영향을 주는 건 아니겠지.’ 아까 같이 싸우던 녀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 몇 명이 제이의 옆에 남아있긴 했지만, 모두 모르는 얼굴이었다. 제이는 모즈들의 시체 옆에 파묻힌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하날로스.’ 머리카락 없는 여검사 메이트니는 제이의 허벅지를 물어뜯는 모즈를 죽이고 자신은 창에 찔려 죽었다. 욘은 제이의 바로 옆에서 철퇴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었다. 제이의 어깨를 적신 피는 모즈의 피가 아니라, 그의 피였다. ‘이름, 다 생각나잖아.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제이는 힘없이 웃었다. 죽은 하날로스의 어깨를 두들기고 제이는 다시 일어났다. 모즈들의 첫 번째 대군의 힘은 거의 대부분 꺾였다. 기적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 해치울 수 없을 거라 믿었던 그 군대가 물러났다. 제이의 근처에 와있는 캡틴 느하로우가 뒤늦게 승리의 함성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반쯤 올린 팔을 내렸다. 모즈들의 두 번째 이만 군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참아라, 아즈윈.” 아즈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로핀은 대꾸하는 말투로 말했다. 뒤에 있는 기병대의 리더도 초조한 얼굴로 아즈윈과 로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군대와 모즈의 군대는 아직도 뒤엉켜 기나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자정을 넘어 새벽을 향해가는 어둠 속에서, 불붙은 돌무더기가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불화살이 인간의 진영에서 모즈의 진영으로 날아갔다. 모즈들은 활을 쓰지 못했으나, 워낙 숫자가 많아 그런 원거리 공격이 별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밤을 버티는 전투는 절망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로크의 군대는 버텨냈다. 그들은 작은 환호를 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 자잘한 기쁨의 환호마저 못다 지르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첫 번째 군대와 비슷한 규모의 군대가 이동해왔다. 그제야 병사들은 자기들이 상대하고 있는 적군의 규모를 실감했다. 저 또 다른 군대를 막아내면 그 다음은 또 무엇이 있을까? 싸울 의욕이 꺾이고,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사기 하나 떨어뜨리려고 이만의 대군을 버릴 정도로 너희들의 군대가 많은 거냐? 처음부터 사만으로 몰아쳐 왔으면, 그래도 버티는 싸움을 해가 뜰 때까지 이어갈 수 있었는데.......’ 로핀은 알면서도 거기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망설임은 아즈윈을 동요시켰다. “왜요? 왜 참아야 해요?” “아직 우리가 움직일 수는 없다. 지금 드래곤 기사단을 움직여선 안돼.” “저 군대가 몰려오면 끝나는 건 우리예요.” “아즈윈, 아직 모르겠니? 왜 저 엄청난 대군이 단지 크나딜 하나가 지키고 있는 분노의 탑으로 왔겠니? 저들이......, 아니 빅터가 염두에 두는 건 인간의 군대가 아니라, 가넬과 셀바이크, 이 두 마리 드래곤이다.” 로핀은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아즈윈도 그 시선을 쫓았다. “빅터의 목소리를 들어봐라. 들리지 않느냐? 이만 마리의 모즈를 던져 줄 테니, 두 마리의 드래곤을 다오....... 그게 녀석의 시나리오다. 내가 거기에 응할 수는 없지.” “참을성의 싸움이라는 건가요? 하지만, 로핀. 제이메르를 봐요. 내가 한 수 가르치겠답시고 도끼 하나 던져준 저 녀석이 대열의 제일 앞에서 혼자 싸우고 있어요. 저 녀석이 선 자리에 모즈들의 시체가 가장 많고, 저 녀석이 지키는 후방의 군대가 제일 많이 살아남았어요.” “나도 의외긴 하구나.” 르고가 만든 무기는 항상 어둠 속에서 특이한 빛을 냈다. 그래서 로핀과 아즈윈은 엉망으로 뒤엉킨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 빛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 녀석, 지금 팔도 안 올라갈 거예요. 게리의 도끼는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라구요.” “그건 저 녀석이 더 잘 알 거다. 잘 제어하겠지.” “제가 저 녀석 자리로 가겠어요!” “아즈윈, 몇 번 말해야 듣겠니? 네 자리는 여기다. 움직이지 마라.” “어떻게 저걸 보고 참을 수가 있어요? 로핀, 이제 늙어버린 거예요?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을 못 느끼고 있어요?” 아즈윈은 주위 시선은 아랑곳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핀은 그런 아즈윈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당겼다. “내가 왜 퀘이언에게 캡틴 자리를 양보한 줄 아나? 난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 따위는 질색이거든. 만약...... 만약 데라둘만 살아있다면, 침착한 척 서 있어야 하는 자리 따위 그 늙은이에게 던져주고, 난 지금 제이메르가 서 있는 저 자리에 서있었을 것이다.” 로핀은 아즈윈의 멱살을 놔주었다. 그녀는 목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대로면 저 녀석.......” “말하지 마라. 아무 거도~! 그냥 버텨라. 이건 참을성의 싸움이다.” 캡틴 느하로우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나마 버릇처럼 몸에 밴 군기가 아니었다면, 등을 보이고 달아났을 정도로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느하로우도 마침내 말머리를 돌렸으나, 한 명이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이메르였다. “후퇴하시오.” “난 됐어.” “돼, 됐다니?” 제이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게만 보이는 선을 칼로 그리며, 그는 말했다. “이 선을 넘으면......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 같다.” “뭘 회복하지 못한다는 거요?” “이건 경계다. 한 번 여길 내주면, 다시는 여길 밟지 못해. 하지만 내가 여기 서 있으면, 군대가 다 이동해도 이 자리는 아직 우리의 경계가 되는 거니까 다시 밟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선은...... 군대의 간격이다.” “당신 혼자 거길 지키겠다는 거요?” “더 말 시키지 마. 집중력 떨어진다.” 느하로우는 할 말이 없어 그대로 말고삐를 잡은 채 멈췄다. 적의 군대가 개미떼처럼 몰려오는데도 꼼짝 않고 있는 그의 모습은 미쳤다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느하로우는 도저히 그를 버려두고 말머리를 돌릴 수 없었다. 그도 칼을 뽑고 제이의 옆에 섰다. 제이는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가 말했다. “같이 싸울 거면, 말에서 내려라. 모즈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표적이 된다.” 느하로우는 시키는 대로 말에서 내리고 말은 아군 쪽으로 보냈다. 모즈들의 군대 선두는 이제 오십 걸음도 남지 않았다. 느하로우는 마른 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내가 미쳤지. 이제야 경비대 캡틴 맡아서 안정적인 직장 얻었다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당신 같은 사람한테 이끌려 미친 짓을 하게 되다니....... 당신 옆에 선다고 사는 것도 아닌데!” “싫으면 가.” “아니, 나는 겁쟁이긴 해도 바보는 아니오. 당신이 그은 그 선, 거길 모즈들이 넘어오면 우린 지는 거요. 맞소. 나도 여기서 등을 돌리면 우리가 패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명령을 내렸소. 그러니 책임을 져야지. 우리 두 사람이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느하로우 옆에는 다른 병사들도 몇 명 서 있었다. 그의 뒤로 다른 병사들도 있었다. 모두 온 건 아니었으나, 너무나도 많은 병사들이 목숨 내놓겠다고 제이 옆에 있는 걸 택했다. “어이, 다들 들어라. 너희들은 무덤을 스스로 찾아왔다. 난 그딴 거 책임 안 져.” 모즈을의 군대는 이제 스무 걸음 앞이었다. 그들의 호흡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제이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주위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대신 난 그 무덤 옆에서 절대 후퇴하지 않겠다. 내 이름을 기억해라. 난 제이메르다.” 폭풍우 속의 성난 파도처럼 모즈들은 열 걸음을 앞두고, 갑자기 달려들었다. 제이메르는 혼자서 그 모즈들의 중심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느하로우와 병사들이 따랐다. 그리고 어느새 더 많은 병사들이 그 뒤를 따라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싸우기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가넬로크의 이름 대신 외치고 있었다. “제이메르!” “왜 뚫리지 않는가, 빅터?” 어둠을 응시하는 노란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검은 드래곤의 비늘이 달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빅터는 구아닐의 시선을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구아닐은 엄청나게 성장해 있었다. 단순히 덩치만 커진 게 아니었다. 빅터는 솔직히 녀석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옆에서 지팡이를 바닥에 짚은 러스킨도 구아닐의 분노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참으시오, 구아닐. 우리가 나설 자리가 아니오.” 빅터가 말했다. “너의 작전 구사 능력에 실망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군대를 가지고서 이렇게 쩔쩔매는가?” “모즈들 따위 다 버려도 좋소. 이 쪽에 당신이 살아남고, 저 탑이 무너지면 우리가 이기는 거요.” “그걸로 이 밤을 모두 보내려고?” “당신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건 그만큼 행동도 자제하라는 뜻으로 아셔야 할 거요. 가넬 하나라면 모르되, 둘이나 당신 혼자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하시오?” “셀바이크? 저 꼬마 드래곤 한 마리 추가되었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를 가장 앞에 세워라. 지금이라도 내가 움직이면.......” “내가 말하는 둘이란 가넬과 셀바이크가 아니라, 가넬과 로핀이오! 로핀이 가지고 있는 검을 잊었소?” “칼 따위 지금의 내 몸에는 통하지 않.......” 구아닐은 말을 멈추고 뺨에 손을 댔다. 목덜미와 뺨에 난 비늘 벗겨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러스킨도 마법검에 당한 상처라며 회복시키지 못했다. 구아닐은 자기를 공격했던 레미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가넬은 오직 당신 하나를 죽이기 위해 그 칼을 만들었고, 그 칼의 주인으로 로핀을 택했소. 내 생각에 그 선택 하나만 봐도 가넬은 당신을 견제하는 드래곤으로 충분하오.” “그만하라, 빅터! 너의 오만이 이미 도를 넘었다.” “인정하오. 그러나 당신 역시 참아야 하오. 정 내 명령에 따르기 싫다면, 잠깐 로크 남쪽 성문에나 다녀오시지 않겠소? 거기 계신 분께 여쭤보면 될 거요.” 구아닐은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빅터에게 그 분노를 터트리지는 않았다. 빅터도 그가 화를 가라앉히기를 기다려 말했다. “가넬을 죽일 분은 당신뿐이오. 로핀도 그걸 알기 때문에 아군이 저렇게 불리한데도 나타나지 않는 거요. 시간은 우리 편이니, 기다리시오. 녀석이 먼저 움직일 거요.” 빅터도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뭔가 계획에서 틀어졌다. 완전히 무너져 회복하지 못할 타격을 입거나, 마법사들 전원이 전멸했어야하는 루티아가 살아남은 것부터 불안했다.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힘이 하나 버티고 있었다. 네이슨은 원래 드래곤 사냥을 위해 키우누 기사가 아니라, 이 전투에서 써먹으려고 아끼고 아껴둔 보석이었다. 그 보석을 잃은 것에, 또한 예상치 못한 존재가 있었다. ‘하얀 늑대들!’ 자신의 팔을 벤 것도 같은 존재였다. 빅터는 전장의 한 부분을 주시했다. 아까부터 미묘하게 전투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장소였다. ‘이번에도 하얀 늑대냐? 누가 저 경계를 지키고 있는 거냐?’ “대답하노라, 브란더.” 가넬이 멀리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브란더나 다른 기사들도 또 다시 시작된 인간과 모즈들의 전투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차였다. 브란더는 무슨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잠깐 얼떨떨했으나, 듣고 나니 금방 이해되었다. “핏줄과 가문, 실력과 인성, 순결과 정직. 이 모든 것은 너희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이다. 나로 인함이 아니다.” 모즈의 피도, 인간의 피도 흑백으로 보이는 어둠 속에서 유달리 빛을 내는 금속 한 조각에 가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쓰러진 나를 향해 달려드는, 죽음에서 되살아난 군대에게 두려움 없이 달려온 기사들. 나디엘의 울프들도, 크나딜의 드래곤들도 두려워하는 카-구아닐의 수하들을 향해 망설임 없는 진군을 했던 아로크의 기사들. 그게 내가 본 드래곤의 기사들이었다. 드래곤 기사단이 되는 조건은 단 하나, 그것은 용기다.” 브란더는 굳게 다문 입술을 열어 동료들에게 외쳤다. “로크의 기사들이 싸울 차례다, 형제들!” 그 말은 루시우스가 받았다. “전투를 준비한다.” 제이메르는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신의 호흡과 모즈들의 호흡도 점차 희미하게 들리다가 마침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검의 간격만큼은 싸움이 진행될수록 또렷하게 보였다. 이제 한 걸음도 반걸음도 아닌, 반의 반걸음 이하까지 세밀하게 보였다. 놀랍게도 그 반의 반걸음의 간격을 가지고 사방에서 공격하는 모즈들의 공격에, 제이는 일일이 반응할 수가 있었다. 도끼는 동일한 간격으로 들어오는 모즈들을 한꺼번에 쳐내는데 쓰였고, 가급적 아꼈다. 팔이 잘 안 움직였다. 모즈들의 피가 먹은 소매가 점차 무거워졌고, 오른쪽 다리가 무거웠다. 비 온 다음날 진흙 묻은 장화를 신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내려다 볼 시간이 없어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다리가 마비되고 있다는 건 한참이나 지난 후에 깨달았다. 쉴 틈이 없었다. 불을 갖다 댄 것 마냥 왼쪽 어깨가 화끈거렸다. 다가오는 검의 간격을 완전히 막지 못해 들어온 공격에 맞은 모양이었다. 많지는 않았으나, 살점이 깨끗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그나마 어깨 전체가 잘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팔만 움직일 수 있으면 고통은 별 상관없었다. 아까부터 별로 아프지도 않았으니까. 처음 간격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 그걸 적용시킬 때의 기쁨. 처음 죽인 사람.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사냥. 죽음. 사냥. 죽음. 사냥. 죽음....... 반복된 일상과 반복된 싸움.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런 질문으로 우울해지려는 자신을 되새기려고 일어나보면 어느 새 또 누군가를 죽이고 피 묻은 칼을 닦고 있었다. 이제 피 묻은 칼을 닦을 시간도 주지 않고 모즈들은 계속 돌려들었다. 제이는 아까보다 많이 밀려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경계를 내주면 안 된다 하는 생각에 제이는 다시 억지로 모즈들을 밀어 붙였다. 수많은 모즈들의 시체와 인간들의 시체가 발에 밟혔다. 으깨진 내장을 밟아 미끄러져 얼굴에 피 섞인 흙을 묻히고 일어나보면 모즈들의 간격은 급격히 가까워져 있었다. 몇 번인가 그런 간격들을 놓치는 바람에 입은 상처의 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치명상을 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잘한 공격을 허용하기도 했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칼날을 타고 흐르는 모즈의 피와 합쳐졌다. 하지만 제이는 언제 다쳤고 언제 적의 피를 뒤집어 썼는지도 잘 기억 못했다. 동료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느하로우도 이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싸우다 돌아보면 아까 싸우던 병사는 어디 가고, 다른 병사가 모즈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내내 화살을 쏘아 견제해주던 후방의 지원도 사라져 있었다. 제이가 경계라고 생각해둔 라인을 넘어간 모즈들은, 후방 로크 부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제이는 여전히 로크 측 군대의 가장 앞에 서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게 모즈 군대의 가장 선두는 아니었다. 갑자기 모즈가 보여주는 검의 간격이 빠르게 물러났다. 침침한 시선을 끌어올려 보니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 있었다. ‘아, 또 그 어둠의 기사인지 뭔지 하는 놈인가?’ 아니었다. 그 자는 자기 칼에 죽은 로크의 병사 하나를 옆으로 밀어두고, 제이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구나.” 그가 말했다. “뭐가?” 제이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난 스탠리다.” “아, 익셀런이군.” “네 이름은?” “제이메르.” “좋은 이름이군.” 스탠리는 잠깐 고개를 까닥해 보이더니, 터벅터벅 다가와 칼을 휘둘렀다. 제이는 그걸 막는 순간 아찔했다. 반걸음 안쪽이었다. 밤새 모즈를 베느라 지친 팔다리가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듯 바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의 빠른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스탠리라는 기사 역시 그걸 잘 알고 있는지, 제이가 움직임을 크게 해서 막을 수 밖에 없는 공격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제이의 얼굴로 칼을 찔렀다. 제이는 얼굴을 틀어 피했으나, 귀를 베었다. “아직 힘이 남았나?” 뺨을 타고 흐르는 피가 턱에서 방울 지어 떨어졌다. 제이는 어깨만 살짝 들어올려 턱의 피를 문질러 닦았다. ‘어?’ 피를 닦고 나니 갑자기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급히 눈을 깜박이며 물러나고 나니 겨우 시력이 회복되었다. 또 한 번 스탠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제이는 같이 공격으로 맞섰다. 그러나 스탠리는 그것까지 읽고서 제이의 공격을 여유 있게 피하더니 발로 제이를 걷어찼다. 제이는 피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 모즈들의 시체더미 옆으로 넘어졌다. 스탠리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제이의 가슴에 칼날을 내리 찍었다. 제이는 도끼로 막고 옆으로 구르며 스탠리의 발목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도 피했다. “잽싼 녀석이군.” 제이가 하고 싶은 말을 스탠리가 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깐 멈췄다. 머리 속으로 어떤 싸움의 패턴이 이어지든 둘은 순식간에 그걸 건너뛰고 바로 마지막 공격을 휘둘렀다. 스탠리의 검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와 제이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제이가 내민 칼에 막혀 방향만 살짝 꺾여 제이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어깨를 뚫고 나간 칼날이 제이의 등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제이의 도끼는 스탠리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겨우 도끼의 무게로만 내리친 공격이라 그리 큰 힘은 실리지 못했다. 그러나 스탠리의 투구를 깨뜨리고 그 안을 칠 정도는 충분했다. 스탠리는 뒤로 비틀거리며 투구에 박힌 도끼를 빼내려다가 뒤로 넘어졌다. 몇 번 꿈틀대긴 했으나, 이미 그는 죽었다. 제이는 그런 시체를 수없이 보아왔다. 아마 몇 분 동안 계속 경련을 계속한 다음에야 그 움직임이 멈출 것이다. 그러나 제이는 확인이라도 하듯 그 시체의 가슴 위에 칼을 찔러 넣었다. 칼이 박힌 어깨보다 귀를 베인 자리에서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었다. 만져보니 귀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이제 일어설 힘도 없었다. 모즈들이 다가오면 꼼짝없이 목을 내줘야 할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제이는 아직 서있을 수 있었다. 스탠리의 가슴을 찔렀던 칼도 어느 샌가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투구에 박아 넣었던 도끼를 빼낸 건 아예 기억에 조차 없었다. 다행히 모즈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제이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전투를 시작할 때 느하로우와 이야기하며 바닥에 그어놓았던 선이 발 아래 밟혀 있었다. 동쪽에서 해가 뜨려는 듯 여명이 밝아왔다. ‘겨우 버티긴 했군. 하지만.......’ 팔이 올라가지도 않고,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느낌에는 넘어질 힘이 없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멀리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는 모즈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 모즈들 틈으로 또 한 명의 익셀런 기사가 있었다. 그가 칼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있는 모즈들이 일제히 활을 치켜들었다. ‘저 괴물들에게 활을 가르쳤나? 후방에서 난리 났겠군.’ 제이는 멍청히 모즈들이 화살을 쏘아 올리는 방향만 쳐다보았다. 화살을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렸다. 무수히 쏟아지는 화살을 바라보며, 제이는 픽 웃었다. ‘멍청한 놈들, 피하지도 못할 사람한테 뭘 저리 많이 쏘나......?’ 제이는 여름철 땀을 식힐 소나기라도 받아들이듯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죄송합니다, 아이린.’ 아즈윈은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로크의 군대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모즈들의 군대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로핀은 모즈들이 활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빅터가 숨긴 정예부대 중 하나는 모즈의 궁수 부대였다. 이제 그들을 앞세워 똑같이 활을 날리며 전진해올 모즈들의 군대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런 로핀도 날아오른 화살이 떨어진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로핀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드래곤 기사단이 말을 몰고 달려 나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아니,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명령을 내리려 했다.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드래곤 기사단이 나설 시간이었다. 아즈윈에게 참으라고 그토록 강조한 로핀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명이 모즈들의 군대를 흩트려 놓고 있었다. 그가 계속 일정한 자리에 버티고 있으니, 축복의 탑으로 접근하는 모즈들의 군대는 항상 지휘 체계를 잃었다. 로핀은 베나 에실크를 쥐고 있었다. ‘그래. 캡틴 데라둘만 살아있었다면 내가 저 자리에 있었을 거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해내지는 못했을 거다.’ 제이는 눈을 떴다. 주위가 눈부시게 밝았다. 쏟아지는 화살에 얻어맞아 죽었어야 할 순간이었으니, 이것은 영혼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 후에 보게 될 빛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헛것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살아있나?’ 아프지 않았지만 여전히 잘린 귀에서 피가 쉬지 않고 흘렀고, 어깨를 뚫은 칼을 타고도 피는 흘렀다. 제이는 이런 식으로 피를 흘리다 죽는 사냥감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러니 자신도 조만간 그런 사냥감들처럼 죽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이상했다. 너무 편안했다. 그리고 아직 아침 해가 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밝았다. 제이의 머리 위에 드래곤의 머리가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는 드래곤의 날개가 방패처럼 펼쳐져 있었다. 모즈들이 쏘아올린 수십 개의 화살이 그 날개에 튕겨나가 주위에 떨어져 있었다. 가넬이었다. 천천히 지평선에 떠오르는 태양을 머금은 날개가 내는 황금빛이, 밑에 선 제이메르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뒤쪽에서부터 수백 마리 모즈들을 휩쓸면서 달려온 드래곤 기사단 이백여 기가 멈춰 섰다. 제이메르를 중심으로 모인 이 방어선을 상대로 모즈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포웰을 불러들여라. 군대를 후퇴시킨다.] 빅터는 가넬뿐 아니라 드래곤 기사단까지 움직인 것을 보고 고대어로 모즈 한 마리에게 명령했다. 러스킨이 짧게 말했다. “이제 자네 뜻대로 됐군.” “아침이 되어서야 그리 된 건 예상 밖이었소. 하지만 이제 저들의 전력은 모두 드러났소. 그걸로 됐소.”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가넬을 노려보는 구아닐에게 빅터가 말했다. “잘 참아주셨소. 당신은 저들에게는 하루의 유예만 준거요.” 모즈들의 본진 쪽에서 길게 나팔이 울렸다. 모즈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자리에는 가넬과 제이메르, 그리고 드래곤 기사단만이 있었다. 제일 선두에 서서 말을 달리던 브란더가 말에서 내려 잠시 가넬 앞에 섰다. 제이메르는 지친 얼굴로 브란더를 돌아보았다.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제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희미한 미소만 겨우 보여줄 뿐이었다. 브란더는 그를 부축해 주려고 다가가다가 그만 멈칫했다. 제이는 브란더를 기다리지 못하고 천천히 옆으로 무너졌다. 지나친 출혈과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는 제이의 몸이 가넬의 손위로 떨어졌다. 가넬은 제이의 몸을 품고 치유의 빛으로 그를 감쌌다. “제이메르, 아나샤의 아들이자, 진정 용맹한 로크의 기사여!” 가넬의 그 말에는 흐뭇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브란더는 저도 모르게 신음에 가까운 숨을 내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 그 뒤에서 멍청히 그 말을 듣고 있던 루시우스와 부딪쳤다. 그러나 루시우스는 그것도 인지하고 못하고 있다가 그 동그란 눈을 돌려 브란더와 마주쳤다. “가넬로크의 주인께서 직접, 우리의 캡틴이 서야 할 자리를 대신한 기사를 보호하고 계시다. 데라둘께서 이 광경을 보았어야 했는데.......” 루시우스는 끝까지 말을 잊지 못했다. 브란더 역시 아쉬움과 환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말했다. “아니, 기뻐하실 것이다. 그 분이 십 년이나 기다린 기사가 마침내 나타났다. 제이메르, 드래곤께서 인정한 우리의 캡틴이여!” 브란더는 한쪽 무릎을 꿇고 제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루시우스도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캡틴 제이메르!” 이백여 명의 기사들 모두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외쳤다. “캡틴 제이메르!” “캡틴 제이메르!!” 18. 타냐의 저항 아란티아. 화이트 게이트의 중앙 망루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아침 바람에 그녀의 긴 갈색 머리가 흩날렸다. 간혹 햇빛이 반사되면 머리카락은 금빛으로 변하거나 붉은 빛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것은 드래곤의 빛깔이었다. 그녀는 허리가 드러나는 짧은 셔츠와 허벅지가 찢어져 있는 너덜너덜한 바지를 입었지만, 남루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그런 옷차림으로 화이트 게이트를 방문했을 때조차 경비병들을 그녀의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눌려 내쫓지 못했다. 이제 그녀가 그러고 있으면, 어느 순간엔가 마스터 퀘이언이 옆에 서니 경비병들도 이제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그것은 화이트 게이트 경비병 열 명만 아는, 즐거운 비밀이었다. “아이린이 보면 또 기겁을 할 복장을 하고 계시는 군요. 폐하.” 퀘이언이 다가서며 말했다. “숲과 나무가 나의 향수고, 바람이 나의 옷이야. 옷 입는 즐거움은 젊은 애들이나 가지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나 보는 게 민망해할까봐 걸치는 게 옷이야.” “그 부분이 아이린이 괴로워하는 부분입니다. 동쪽에서 온 소식이 있습니까?” “이제 너도 느낄 수 있지 않니, 퀘이언?” “피 냄새가 납니다.” “너무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구나. 하지만 저 희생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우리는 악몽과도 같은 무의미한 학살을 보게 되겠지. 그리고......, 어쩌면 나디움마저도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야.” 퀘이언은 슬픈 눈으로 말하는 여왕을 지켜보기만 했다. “나디움이 살아남길 빌어야겠구나.” “모든 이가 여왕께 빌건만 폐하께서는 누구에게 비십니까?” “나야 나의 수호 기사에게 기대어야겠지.” 그녀는 뒤에 선 퀘이언의 가슴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더 큰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슬픔 모두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메이루밀은 로일이 누운 침대 옆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아이린은 메이루밀 옆에 서있었다. 몹시 피곤해 보였다. 가슴에 입은 상처를 감싸는 붕대가 루밀의 등 뒤를 사선으로 가로질렀다. ‘언제나 말없이 제일 앞장서서 화살 받이가 되어주는 친구.’ 아이린은 루밀만 보면 미안함이 앞섰다. 로핀은 자기가 화를 불러 자기가 수습하곤 했지만, 루밀은 언제나 아이린이 부른 화를 대신 수습하곤 했다. 울프 기사단에 있을 때도, 지금도. 아이린은 이번에 다쳐야 하는 것도 자신이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밀은 자기가 부상 입은 건 말도 않고, 아이린에게 사건 경과만 일러 주었다. ‘마스터 그란돌. 세상 어느 것도 두려울 게 없는 두 기사를 저 꼴로 만들어 놓으셨군요.’ 루밀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아이린은 품에 있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부스럭하는 소리에 루밀이 졸린 눈으로 그녀를 돌아 보았다. “언제 와 있었어?” “꽤 오래 전부터.” 루밀은 눈을 감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모즈들의 소리는 안 들리는군. 축복의 탑은 무사한 모양이지?” “기적적으로 모즈들이 먼저 후퇴했더군.” 아이린은 말하며, 침대에 누운 로일의 얼굴에 가죽 주머니를 댔다. 루밀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뭐 하려고?”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뭐긴? 죽어가는 하얀 늑대를 살리려고.” “그란돌이 와계시다. ‘하얀 늑대’라는 호칭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라.” “알고 한 소리다. 대대로 한 명뿐인 하얀 늑대. ‘지금의 하얀 늑대’도 마찬가지고.” “퀘이언한테 들은 말이야?” “애매한 언질은 있었지. 하지만 하늘 산맥에서 내려오면서 세 녀석을 비교하고 내린 결론이야. 아즈윈은 로핀이 자신있게 자랑할 만한 애고, 던멜은 퀘이언이 여왕폐하를 암살할 만한 실력이라고 무서워할 만했어. 하지만 로일은 그 이상이야. 정말 대단해. 이 정도로 강한 녀석은 처음 봤어. 내기에서 이기고 싶어? 그럼 내 손을 놔라. 이 녀석이 그 한 명이다.” “아니, 틀렸어.” 루밀의 진지한 말에 아이린도 잠시 가죽 주머니를 되돌렸다. 루밀은 가늘게 신음하는 로일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지혈되지 않은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고, 배를 묶은 붕대는 그 피로 축축했다. “로일은 그란돌에게 패했다. 이 아이는 네가 생각하는 하얀 늑대가 되지 못해.” “그러니까 다시 회복시켜서 싸우게 해야지. 지금 우리 중에 그란돌을 이길 사람은 없어!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아이린은 말을 하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말은 기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고, 평생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의식적인 말이었다. “맞다, 아이린.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그의 육체를 빼앗은 영향인지 그 분의 움직임은 전성기 때 그대로다. 로일이 다시 회복된다 해도 그런 분을 이길 수는 없어.” 루밀은 자기 가슴에 난 상처를 만졌다. 고통이 그의 얼굴을 슬쩍치고 지나갔다. 루밀은 잠시 숨을 고루 내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란돌을 반드시 꺾을 필요는 없다. 목표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다. 그리고 그 자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베나에사르크를 가지고 있는 너다. 그러니 지금의 하얀 늑대는 너야, 아이린. 네가 모든걸 끝내야 한다. 8년 전과 같아. 그래서 퀘이언이 마지막 남은 회복의 가루를 너에게 준 거다.” 아이린은 눈을 꽉 감았다.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다가 그녀는 결국 가죽 주머니를 품에 도로 넣었다. “어째서 여왕 수호 기사들이 그 일을 영광스러워 하면서도 서둘러 후계자 만들어놓고 은퇴하고 싶어 하는지 알겠다. 뭔가 커다란 운명을 짊어지는 부담감은 우리처럼 칼만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맡을 게 못돼.” 루밀은 힘없이 웃었다. “타냐는?” “아직 괜찮아. 하루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 “하루라.......캡틴 울프가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은 되려나?” “녀석이 뭔가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다면,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에는 돌아올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무리야. 하지만 그때쯤이면 상황은 끝나겠지. 로크는 오늘밤이 고비야.” “녀석이 살아있을 것 같나?” “네 마음이 느끼는 바를 믿어라.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정말 우리를 겁주고자 했다면 성문 앞에서 카셀의 머리를 들이밀었지, 라이의 날개를 내밀지 않았어.” “그렇군.” “가볼게. 타냐가 힘들어 하니, 나라도 옆에 있어줘야지. 타냐가 방벽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싸움에서 필요한 건 역시나 울프기사단 오십 명이 아니라 카셀 한 명이야.” “녀석의 선택이 잘못된 거라고 말하는 거야?” 아이린은 짧게 미소 지은 후 방을 나섰다. “나중에 보자.” 루밀은 아이린을 보내고 로일의 땀에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일, 너도 회복에만 신경쓰거라.” 루밀도 가슴의 상처에 손을 얹은 채 힘겹게 침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직 의식을 차리지도 못한 로일에게 말했다. “그리고 돌아와라.” 루밀은 아이린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본심을, 제자로 생각해본 적 없는 제자에게 말했다. “네가 패하면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로일 혼자 남은 방 안은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 후 그를 치료하는 의사와 간호사가 왔다 갔고, 던멜이 잠시 문병을 왔다. 로일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거친 호흡을 토하며 눈을 떴다. 눈썹에 맺힌 땀방울이 시야를 뿌옇게 흐리고 있었다. 로일은 마치 루밀이 방금 전에 말하고 나간 것처럼 대꾸했다. “예, 마스터.” 시간은 정오를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저녁처럼 어둑어둑했다. 로핀은 불안한 하늘의 징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 녀석들.” 로핀은 당장 캡틴 느하로우를 부르고, 말을 타고 군대의 제일 앞으로 달려갔다. 어제에 비하면 전력이 확연히 준 게 눈에 띄었다. 어제는 버틸만한 수치였다면, 오늘은 절망적인 수치였다. 아직 축복의 탑 옆에 드래곤 가넬과 셀바이크가 버티고 있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공격해올 것 같소.” 로핀은 느하로우가 오자마자 그 말부터 했다. 느하로우도 전날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 말만 겨우 타는 정도였다. 고작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만으로 어제 입은 상처가 벌어져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로핀은 그를 부른 것이 미안해졌다. “어쩌실 겁니까, 로핀? 적도 피해를 많이 입었으나, 우리만큼은 아니에요. 한 번만 더 어제처럼 돌격해오면 이제 막지 못합니다.” “아군 피해는 어느 정도요?” “오천....... 그 중 카모르트의 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적의 피해는?” “일만.” 부족한 전력으로 두 배의 피해를 입힌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적은 20퍼센트의 전력만 줄었고, 아군은 50퍼센트가 줄어버린 셈이었다. 숫자 싸움에서 상대가 안 되었다. “전열을 가다듬어야겠소. 카모르트 지휘관들은?” “확인해보니 거의 모두 전사했소.” “그럼 전방에 로크 군대와 카모르트 군대를 합쳐 집결시키시오. 어제보다 더 긴 배열로, 무리해서라도 궁수 부대를 더 늘리고, 기병대는 모두 후방으로 보내시오. 가장 젊은 지휘관을 선두에 보내고, 당신은 궁수 부대만 지휘하시오.” “후방 부대는......?” “내가 직접 맡겠소.” “어떤 작전입니까?” “적들도 궁수 부대가 있으니 우리 쪽에서 돌격할 생각은 말고, 천천히 후퇴하는 싸움을 하시오. 반시간에 열 걸음씩 물러난다는 계산으로. 그 다음은 내게 맡기시오.” 두 사람이 작전에 대한 간략한 얘기를 주고받을 때 뒤에서 아즈윈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로핀은 마지막 지시를 내린 후 말머리를 돌렸다. “아즈윈, 따라와라.” 로핀은 아즈윈을 데리고, 축복의 탑으로 말을 몰았다. 드래곤 기사단이 말을 정비하고 갑옷을 입고 있었다. 어제 새벽 짧은 진군만으로 적에게 준 피해만 봐도, 확실히 드래곤 기사단은 아군의 최대전력이었다. “브란더, 루시우스. 있는가?” 루시우스가 마침 갑옷을 입다가 다가왔다. “브란더는 제이메르와 함께 지금 막사에서 쉬고 있습니다.” “제이메르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상이 심합니다.” 오늘 전투에서까지 그가 활약해주길 바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잘 해주었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적이 쳐들어 올 것이다. 그 전까지 드래곤 기사단을 준비하라. 제2진으로 준비한다.” “적의 정예가 움직일 때까지 우리도 참아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번에는 적의 정예도 초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아마 목표는 아군 궁수 부대. 그 전에 드래곤 기사단이 먼저 그들을 제압해야 한다. 지휘는 직접 할텐가?” 로핀의 말에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여기 아즈윈이 기병대를 지휘할 것이다. 중간에 서로 연락하거나 신호를 주고받기 힘들 것이다. 가급적 기병대의 움직임에 맞춰 전투를 이어나가되, 위급할 시에는 독단으로 행동해도 좋다.” “예, 마스터 로핀.” 로핀은 다시 아즈윈을 데리고 축복의 탑으로 달려갔다. 가넬과 셀바이크가 로핀을 맞이했다. “적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일 거라 보는가?” “예, 레-가넬. 태양은 이제 우리를 지키는 방패가 되지 못하는군요.” 로핀은 짙은 구름에 가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말했다. “이제 구아닐도 움직일 겁니다. 그 전투에 관한 한 모두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단지.......” 가넬과 셀바이크는 로핀이 망설이는 뒷말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법사를 조심하십시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는 드래곤을 죽이는 마법을 알고 있습니다.” “주의하도록 하지. 허나 궁금한 게 있군. 어째서 크나딜께서 말씀하신 카구아들은 보이지 않는가?”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큰 전력이 되어줄 수 있는 카구아를 적이 그냥 하늘 산맥에 버려두고 왔을 리도 없는데, 어디에도 녀석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넬은 나직이 숨을 들이쉬다가 말했다. “아마도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에 가장 위험한 곳을 노려 카구아들이 공격해 올 것 같군. 크나딜께 카구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오너라, 셀바이크.” 셀바이크는 대답 없이 바로 날개를 펼쳐 분노의 탑 쪽으로 날아갔다. 뿌연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로핀이 말했다. “가넬, 솔직히 저는 두렵습니다. 이제 에실크 만으로는 죽일 수 없을 정도로 구아닐의 힘이 성장했습니다. 녀석을 죽이지 못하면 설사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나 역시 두렵다, 로핀. 녀석의 성장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야. 더구나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루티아의 마법사를 등에 업고 싸우니 그 힘을 측정할 수조차 없구나.” “어찌 해야 합니까?” “너는 인간들의 전투에 최선을 다하라. 나와 셀바이크는 녀석과의 싸움에 최선을 다하겠다. 셀바이크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아이다.” 로핀은 미소 지었다. “기대하지요, 가넬.” 로핀은 말을 돌려 기병대 쪽으로 향했다. 뒤따르는 아즈윈이 물었다. “힘이 없어 보여요, 로핀.” “잘 봤다.” “질 것 같아요?” “몰라.” “에이, 항상 저한테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보통 진짜로 늦은 건 아니다, 라고 가르쳐 놓고선.......” “맞아. 그런데 난 지금 끝장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로핀의 그 말은 그 어떤 절망적인 말보다 더 절망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로핀은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희망적인 메시지만 잔뜩 전달하고 격려하기 바빴다. “아즈윈, 네가 기병대를 지휘해라. 나도 거기에 섞여 같이 싸우겠다.” 아즈윈은 로핀의 비어 있는 한 팔을 보며 말했다. “지휘하신다면서요?” “하나 맡기도 바쁜 녀석이 있다.” “빅터...... 말씀이시군요.” “이길 길 없는 전투임에도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기회가 있다. 난 거기에 걸어볼 생각이다.” “빅터와 관련 있나요?” “저 몇 만이나 되는 모즈들과 구아닐을 한꺼번에 지휘하는 미친 자식 죽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체되겠지. 그 사이 다른 나라가 연합하여 싸워주길 바라는 수밖에.” 아이린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로핀, 그럼 당신이 빅터에게 패하면 우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아즈윈은 남쪽의 로크를 돌아보았다. 로일과 던멜은 잘 해나가고 있을까? 카셀은 지금 어디까지 가 있을까? “게리.......” 아즈윈은 슬픈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노의 탑에 갔던 셀바이크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로핀은 드래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아즈윈. 내가 여기 저기 말하고 다닌 작전 다 들었지? 혹 내가 죽거든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기마.” 아즈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로핀도 알아들었냐고 다그치지 않았다. ‘손가락이 안 움직여.’ 타냐는 눈썹끼리 달라붙은 것 같은 끈적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물을 대여섯 컵이나 들이켰는데도 하루 종일 안 마시고 땡볕을 걸어 다닌 것 마냥 갈증이 났다. 타냐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탁자 쪽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물병도, 물잔도 모두 비어 있었다. ‘목말라. 누가 물 좀 가져다 줘.’ 타는 목이 아파 말이 안 나왔다. 타냐는 힘겹게 몸을 틀어 다시 기어서 방문 쪽으로 향했다. 내딛는 손이 바늘방석을 짚는 기분이었다. 타냐는 결국 그 자리에 엎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하루? 이틀? 북쪽 전투는 어찌 되었지? 아까 결과를 말해줬었나? 기억이 안 나.......’ 타냐의 머리 속에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들어앉아 그녀를 끝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가끔은 웃기도 하고, 가끔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 작은 반응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으나, 지금은 더없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것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었다. 집요하게 한 자리에 떨어지며 구멍을 내는 빗물이었다. 터무니없이 두꺼워 건드릴 수 없어 보이는 자리를 두들겨 결국은 금을 냈으며, 종국에 가서는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 금 간 자리를 벌려 놓았다. 그때마다 타냐는 물을 한 컵씩 마셨으나, 메마른 솜에 한 방울 떨어진 물처럼 흔적없이 증발해버리곤 했다. ‘내가 물을 많이 달라고 했잖아! 내 옆에서 시중을 들어준다던 그 시녀는 어디로 간 거야? 그랜드 로크 의장은 어디 있지? 물이나 가져와.’ 신경이 날카로워진 타냐는 한 번 길게 심호흡을 한 후에야, 물을 날라준 시녀가 이미 반시간 전에 다녀갔다는 걸 깨달았다. 한 시간에 한 번씩 하루 종일 마실 물을 갖다 나르는 시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타냐는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가, 방 안이 갑자기 어두워진 걸 발견했다. ‘눈이 침침해졌나? 아니면 누가 창문을 닫았나?’ 돌아보니 창틀에 이상하게 생긴 동물이 날개를 활짝 펴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그 허상 같은 괴물은 모즈의 축소판 같은 모습이었고, 날개는 박쥐처럼 피막으로 덮혀 있었다. 짧은 순간 타냐와 날개 달린 모즈는 서로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즈가 먼저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고, 타냐는 한 손을 내밀었다. 모즈는 창틀에서 뛰어드는 자세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깨진 살 조각이 타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 뒤로 또 한 마리의 모즈가 날아들었다. 타냐는 그걸 미처 발견하지 못해 마법을 쓰지 못했다. 겨우 한 팔로 얼굴을 막았으나, 모즈는 그녀의 팔뚝에 매달려 발톱으로 상처를 냈다. 그녀는 팔을 세게 휘둘렀다. 불꽃이 모즈의 몸뚱이를 태웠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모즈가 나방처럼 날아다니며 벽과 천장에 부딪쳤다. 창문으로 다른 모즈 두 마리가 또 날아들어 쓰러진 타냐의 위로 올라탔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물병을 든 시녀가 들어왔다. “마스터 타냐, 물 가져왔....... 꺄아아아악!” 시녀는 놀라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두 마리 모즈가 타냐의 몸 위에 있는 걸 보고, 급한 김에 물병을 휘둘렀다. 사기로 만든 물병이 깨졌고, 얻어맞은 모즈 한 마리가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곧바로 일어나 이번에는 시녀에게 달려들었다. 기운을 잃은 타냐의 목덜미를 모즈의 혀가 감쌌다. 타냐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때 계단에서 뛰어올라온 아이린이 시녀에게 달려드는 모즈를 칼로 베었다. 타냐의 목을 감쌌던 모즈는 얼른 혀를 입속으로 되돌리고 달아나려 했으나, 아이린은 놓치지 않고 녀석의 목을 날려버렸다. 탄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은 모즈의 피로 엉망이 되었다. 아이린은 겁에 질려 주저앉은 시녀를 일으켜 세워 명령했다. “가서 리펜다스 의장을, 아니 마법사 아무나 불러라.” 아이린은 시녀를 보내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날아다니는 모즈는 더 없었다. 그녀는 돌아와 쓰러진 타냐의 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타냐, 괜찮나? 타냐!” 상처 하나없는 데도 타냐는 큰 부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 아즈윈은 장갑을 끼고 칼날을 점검하고 방패를 털고 투구를 썼다. 머리에 꼭 맞는 투구를 찾느라 꽤나 시간을 들였음에도, 디자인이 맘에 안 들어 몇 번이나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뭘 써도 별로 안 어울리니 대충 해둬라.” 감히 하얀 늑대를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로크의 군대 전체를 뒤져도 몇 명 없었다. 아즈윈은 픽 웃으며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제는 수고 많았다.” 제이메르는 벌써 전투를 준비한 복장이었다. 전날 엉망으로 찢어진 옷 대신 입은 드래곤 기사단의 복장이 영 어색했다. 그래도 몸 상태가 엉망이라는 걸 감출 정도로 깔끔하긴 했다. “그 복장은 이제 드래곤 기사단으로 움직일 거라는 뜻이냐?” “그냥 입을 게 없어서.” 제이는 시큰둥하니 대꾸했다. “안 입었어도 됐어. 네 역할은 끝났다.” “어제도 내 맘대로 했으니 오늘도 내 맘대로 한다.” 아즈윈은 슬쩍 손가락을 내밀어 옆구리릍 툭 찔렀다. 제이는 황급히 옆구리를 가리며 비켜섰다. 아즈윈은 찌른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어깨를 한 번 찔러줄까? 좋게 말할 때 물러나.” 제이는 허리에 찬 도끼를 성한 쪽 팔로 들어 내밀었다. “알고 있다. 사냥꾼으로서의 내 생명은 끝났다. 이 팔로 예전 같은 실력을 낼 수는 없겠다. 그러니 우선 이 도끼는 돌려주지. 잘 썼다.” 아즈윈은 도끼를 받아 등 뒤에 매달았다. “그럼 어깨뼈가 부서지고도 성하기를 바랐어? 목숨 건진 걸 다행으로 여겨.” “그래서 더 물러나기 싫다. 죽으면 그만이고, 살면...... 다행이겠지. 어차피 여기 무너지면 인간은 멸망하는 거 아닌가?” 아즈윈은 킥킥대고 웃으며 제이의 성한 쪽 어깨를 두들겼다. “대단한 녀석! 어제 널 함부로 여긴 거 사과하지. 사과의 의미로 한 팔로 싸워도 되는 거 하나 가르쳐주마. 이건...... 번호 붙이기 애매하니까, 그냥 ‘J 포메이션’라고 하자. 어제 너 싸우는 거 보고 만들어뒀다.” 제이는 말했다. “고맙다.” “아니, 내가 고맙다. 널 보고 있자니, 그 동안 침울하게 있었던 게 바보 같아졌어.” 포메이션에 대해서는 전날 얘기해 준 게 있어 가르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몸을 움직이며 제이에게 움직이는 방향과 칼을 휘두를 방향을 지정해주었다. 그녀는 제이의 어깨 부상까지 고려해서 공격 방향을 수정했고, 그는 그 가르침을 금방 흡수했다. 갑자기 주위가 술렁댔고, 쉬고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무기를 들고 이동했다. 제이는 잠깐 칼을 내리고 병사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나 아즈윈은 그의 칼을 툭 치며 말했다. “한 눈 팔지 마. 시간 없어.” 군대가 재정비되고,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순간에도 둘은 계속 호흡을 맞추며 연습을 반복했다. 그리고 제이가 아즈윈의 말 한 마디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게 될 무렵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즈윈은 살짝 땀에 젖은 아미를 손등으로 훔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사들의 함성과 모즈들의 함성이 들렸다. 제이는 그녀가 왜 여유 있게 이러고 있는지 몰라 물었다. “안 가냐?” “기다려. 너도 여기 잠깐 앉아.” 제이는 시키는 대로 앉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호흡을 정돈하는 시간을 가졌다. “포메이션은 다 외웠지?” 그녀가 물었다. “외웠다.” “기병대의 제일 뒤에 따라붙어서 처음에는 싸우지 마. 그 어깨로 오래 싸울 수는 없어. 그러니 체력보존하고 있어. 중간에 내가 신호를 보낼 거야. 그럼 내 옆으로 와라. 그리고 이 포메이션으로 싸우면 돼. 알았지?” “알았다.” 아즈윈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제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가자, 제이메르. 이제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마.” “그건 아마 하얀 늑대의 이빨이라는 거겠지?” 아즈윈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그때 구름으로 가린 어두운 동쪽 하늘에서 검은 드래곤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축복의 탑에 대기하고 있던 가넬과 셀바이크가 날아올랐다. 피부를 가볍게 흔들 정도로 강하게 공기가 떨렸다. 동시에 아즈윈은 아랫배가 시큰거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로크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타냐?’ 타냐의 머리 속에 항상 떠 있던 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였다. 그 자는 끔찍한 공포를 보여주지도 않고, 협박을 하지도 않고, 강하게 압력을 가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커먼 어둠과 죽음을 암시하는 단어만 내뱉었다. 하지만 창문에서 날아든 날개 달린 모즈가 공격한 후에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아닌 테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벼랑으로 떨어지는 타냐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살아 있으라고 말하던 그 모습 그대로, 아란티아를 구하고 돌아오겠다며 마지막으로 안아주던 그 다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쓰러진 타냐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선 안 된단다. 그건 운명에 거스르는 짓이야.’ ‘테일드의 모습으로 나를 농락하지 마라. 암흑의 군주, 그런다고 넘어가지 않아.’ 타냐는 말했다. 어둠 속을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메아리 쳐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이제 너의 스승조차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겉모습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 건 테일드다. 하지만 넌 테일드가 아니야.’ ‘불쌍하게도....... 지친 나머지 사고가 꽉 막혀버렸구나. 좋다. 난 단지 지금의 네 잘못을 가르쳐주려고 왔다. ‘인간을 지키고자 한 힘이 잘못되었다고?’ ‘패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니?’ ‘그렇지 않아.’ ‘아니, 알고 있을 게다, 타냐. 이 전투는 진다. 조만간 축복의 탑이 무너질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은 미래를 내다보고 있어. 러스킨은 패배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적의 편에 붙었고, 기사 빅터는 이기는 편에 붙고 싶어서 인간에게 칼날을 들이댔지. 그걸 현명한 행동이라고 추켜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너는 그들보다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지 않았나?’ 타냐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셀, 제이메르, 라이와 같이 로크에 발을 디뎠던 순간부터 그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무너진 탑과 몰려오는 모즈들, 가넬을 짓밟은 구아닐의 포효. ‘아니면 카셀을 기다리는 거냐? 그가 네가 본 미래를 바꿔주길 바라는 거냐? 그래. 그래서 떠나는 걸 강하게 잡지 못했던 거겠지.’ 테일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안에서 카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베논에 타고 있었다. 어디서 베논을 얻은 걸까? 하지만 그는 눈보라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강해지는 눈 속에 파묻히던 그는 베논 위에서 내려 고삐를 잡아당겨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그의 앞에 희뿌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대한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카셀은 어둠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카셀, 다가가지 말아요.’ 타냐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소리치고 있었다. 카셀은 보검을 뽑아 자기를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잠깐 날씨가 맑아지자 카셀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무방비 상태로 걸어갔다. 그리고 카셀은 눈 쌓인 얼음 틈바구니로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버텼으나, 그 유령 같은 괴물은 카셀을 얼음 틈새로 던져버렸다. ‘안돼!’ 타냐는 외쳤다. 테일드는 어느 새 등 뒤로 다가와 그녀의 가는 어깨를 따뜻하게 감쌌다. ‘염려 마라. 그리 위험한 절벽은 아닌 것 같구나. 살아있을 거야. 하지만 얼음 틈새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타냐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테일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에게 우선이 되는 게 무엇이냐, 타냐? 이기지 못할 전투냐, 아니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냐? 아직 늦지 않았다. 어서 가거라. 가서 카셀을 구해라.’ ‘카, 카셀은...... 카셀은 혼자 이겨낼 수 있어요.’ ‘그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면서 그러는 구나. 너의 보호가 필요해. 네가 먼저 약속하지 않았니? 저 애를 지킨다고.’ ‘아니야!’ 타냐는 거칠게 테일드의 손길을 뿌리쳤다. ‘카셀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저기에 간 거야. 그런데 내가 여길 버릴 수는 없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 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속일 생각하지 마. 저건 어제 있었던 일이야. 어제 축복의 탑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그 순간에 벌어진 일야. 그러니까, 지금 카셀은.......’ 테일드는 긴 한숨을 쉬었다. ‘벌써 내 말을 잊었니? 너는 이미 한 번 목숨을 버렸던 아이다. 네가 살고자 한다면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좋다고 말했지 않니? 로크가 무너진다 한들, 그 순간이 인간의 멸망이겠니? 네가 카셀과 사랑을 나누고 오랫동안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은 이어질 테지. 아니면 하늘 산맥에 같이 숨어살아도 좋겠구나.’ 테일드는 서글픈 눈으로 타냐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타냐는 그 손은 뿌리치지 못하고 울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해도 네가 카셀을 잃어버린다면, 뭐가 남겠니? 평생 그걸 가슴의 상처로 안고 살 바에야 다른 인간들의 운명을 무시하거라.’ ‘마스터.......’ 타냐는 울면서 눈앞의 테일드의 얼굴에 힘없이 손을 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사 지금 제 눈앞의 당신이 진짜 제 마스터라 해도, 그런 말을 해선 안돼요.’ 타냐의 손에서 하얀 빛이 났고, 테일드의 몸은 바닥에 세게 떨어뜨린 도자기처럼 조각났다. 그녀는 주저앉아 울었다. ‘카셀, 돌아와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돌아와 옆에 있어줘요.’ 아이린은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떠는 타냐를 끌어안고 있었다. 타냐는 나직이 신음하며 카셀과 테일드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이린은 타냐의 이마를 찬 수건으로 식히기도 하고, 부르르 떠는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한없이 어리고 작기만 한 이 소녀가, 혼자서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못하는 게 증오스러웠다. 아이린은 주머니 속의 회복 가루를 꺼내 타냐의 몸에 뿌렸다. 지금 타냐가 무너지면 수천 명이 죽어가며 지켜낸 어젯밤이 무의미해진다. ‘너에게라면 마지막 회복 가루를 쓰기에 아깝지 않을 거야.’ 그러나 치유의 가루는 설탕 가루처럼 타냐의 얼굴과 옷에서 흘러내리기만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어가는 목숨을 일으키는 마법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타냐 정도 힘을 가진 마법사에게는 통하지 않는 거였나?’ 아이린은 의식을 잃은 타냐를 끌어안았다. “안돼. 힘을 내, 타냐. 제발 일어나!” 타냐를 격려하던 아이린의 목소리는 이내 자신에게 향했다. ‘난 어쩌면 좋지? 퀘이언, 이럴 때 너라면 어쩌겠니? 새나디엘, 도와줘요. 이 어린 소녀를 지켜주세요.’ 19. 워그의 영혼 축복의 탑은 모두 무너져 있었고, 카-구아닐은 레-가넬을 짓밟고 있었다. 구아닐의 거대한 포호는 로크의 병사들을 불태웠다. 누구도 구아닐의 힘을 막지 못했다. 타냐는 아로크의 탑 꼭대기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어요, 카셀.’ 로크의 성벽 역시 무너져 있었다. 그 앞에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얼굴을 가린 후두를 머리 뒤로 넘겼다. 너무도 평온해 보이는 그 얼굴에서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이겼다. 새다니엘의 후계자. 농부의 아들이, 검술도 마법도 모르는 하찮은 인간이 고작 인간의 대장장이가 차가운 불길에서 망치 두들겨 만든 칼 한 자루 들었다고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디 와봐라. 아란티아에서 백명도 안 되는 기사들을 데려온다 한들 이 무너져가는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고 보는가? 그곳에서 얼어 죽어라. 그곳에서 하늘 산맥의 유령에게 먹혀라. 차라리 워그를 증오하는 그 유령에게 먹히는 게 네겐 안식이 되리라.” 카셀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니, 말을 했으나 하는 말마다 얼음이 되어 바닷가에 던져졌다. 카셀은 목을 잡고 피를 토했다. 마법사는 웃었다. “네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어둠이 손을 내밀었다. 카셀은 천천히 그 차가운 어둠에 사로잡혔다. 그때 어둠 앞에서 또 다른 어둠이 카셀을 보호했다. 차가운 철갑으로 감싼 커다란 손이 그 어둠을 쫓으며 말했다. “네 두려움을 아직도 꺾지 못했는가?” 검은 갑옷의 그 기사는 웰치였다. “두려워 말라. 네가 진짜 하찮은 인간이라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너에게 공포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 카셀은 피 묻은 손으로 웰치의 손을 잡았다. 이제 웰치는 더 이상 검은 갑옷의 기사가 아닌 살아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보였다. “제게 정말 캡틴의 자격이 있습니까?” 새다니엘 앞에서 무릎 꿇었던 그 위대한 기사는 주름 진 눈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너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 나는 캡틴이 아닌 자와 캡틴의 자격을 논하지 않는다.” “웰치.......” 카셀은 그 말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옆구리를 감싸는 따뜻한 것이 있어 카셀은 그것을 꽉 끌어안았다. 사방이 지독히 추웠기에 그 털북숭이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것이 카셀의 얼굴을 핥았다. “너구나. 다행이다. 살아있었네.” 카셀은 얼어붙은 입술을 떼며 물었다. 베논이 킁킁대며 카셀에게 코를 가까이 가져왔다. 뜨거운 콧김이 얼어붙은 얼굴에 닿았다. 공기가 찼으나, 바람이 불지 않으니 바깥보다는 나았다. “잠깐만 이대로 있자.” 의지는 몸을 일으켰으나 육체는 의지를 끌어당겨 눕혔다. 그는 한참 동안 베논을 끌어안고 온기가 회복되길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굴러 떨어진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동물 울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바깥은 계속 눈보라가 치는 모양이었다. “난 다쳐도 상관없으니, 너라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다쳤는지 아닌지도 잘 안 느껴지지만.” 만져보니 다리는 아직 있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것이 남의 다리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카셀은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계속 주물럭거렸다. 팔이 뻐근해질 정도로 다리를 주무르고 나서야 감각이 돌아왔다. 카셀은 장갑을 벗고 손을 베논의 배 밑으로 넣었다. 녀석은 추위에 익숙한 듯, 카셀의 차가운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너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겠니? 여긴 또 어디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으니 너라고 방향을 잡고 있겠냐마는, 그래도 나보다는 잘 알 거 아니냐? 하아, 너와 대화가 통하면 물어보고 싶은게 한둘이 아니구나.” 카셀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지금은 그냥 좀 더 자고 싶었다. 카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바닥을 더듬었다.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보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바닥의 어떤 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바닥이 얼음인지 바위인지 흙인지도 느껴지지 않는 얼어붙은 손가락의 감각으로 카셀은 정신없이 주변을 더듬었다. ‘침착하자. 손잡이에는 빛을 발하는 보석이 달려 있어. 이런 어둠 속에서는 더 잘 보여야 해.’ 카셀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가며 아주 작은 빛이라도 보이나 하고 집중했다. 하지만 빛은 없었다. 눈에 파묻혔나 싶었으나, 이곳은 바깥처럼 눈이 쌓인 곳도 아니었다. 카셀은 다시 바닥을 기어 베논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베논이 주저앉은 배 밑으로 손을 넣었다. 바닥을 더듬느라 언 손에 다시 따뜻한 피가 돌았다. 그 밑에 딱딱한 게 잡혔다. 보검이었다. 보검의 손잡이에 박힌 희미한 빛을 바라보니 카셀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 똑똑한 녀석은 이 칼이 카셀에게 소중한 거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딴에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기도 카셀과 붙어있는 게 따뜻하니 옆에 누워있었고, 그 장소가 하필 칼이 떨어진 장소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든 칼이 돌아왔다. 카셀은 몇 년 만에 다시 뽑는 것처럼 조심스레 칼을 뽑아보았다. “당신이 없다면, 나 역시 없는 거겠죠?” 칼을 찾은 안도감에 다시 졸음이 왔다. 카셀은 주저 없이 그 칼날을 손에 쥐고 칼을 잡아당겼다. 척추가 펴질 만큼 짜릿한 고통이 전해졌다.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 카셀은 눈을 감고, 손바닥에서 넘쳐 팔뚝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피를 느꼈다. 카모르트에서 처음 하얀 늑대들을 만나 노르만트에 입성할 때도 그랬고, 하늘 산맥의 눈 덮인 산에 갇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캡틴 울프다.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 나는 그렇게 되어가는 중이다.” 카셀은 힘들게 다리를 옮겨, 베논의 등에 올라탔다. 베논은 카셀이 안장에 올라타 목덜미를 끌어 앉자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카셀은 거의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손잡이에 박힌 작은 불빛으로는 천장이 어디 있는지도 알기 어려웠으니, 떨어진 자리가 어떤 구조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푸처럼 계곡이 이어져 있는 걸까? 그냥 동굴일까?’ 그저 머리가 부딪치니 않도록 최대한 낮추고 있을 밖에 도리가 없었다. 베논은 카셀이 떨어지지 않는지 확인해 보는 듯 앞뒤로 움직여 보더니 천천히 걸었다. 카셀은 녀석이 아까 떨어졌던 얼음 틈새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고 좀 더 목덜미를 세게 잡았다. 떨어졌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꽤 가팔랐었으니, 자신을 태우고 베논이 올라가긴 힘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베논은 직진을 하고 있었다. 약간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했으나, 급격한 경사를 오르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걸 보니 굉장히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러니 많이 굴러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영리한 베논이 그를 찬 바람이 통하지 않는 따뜻한 곳으로 끌고 갔다고 해도 이 정도로 멀리 떨어진 자리까지 끌고 갔을 리는 없었다. 보검이 떨어진 위치만 해도 그랬다. 즉, 베논은 그대로 지하를 통해 걷고 있는 것이었다. 카셀은 조심스럽게 손을 위로 뻗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손을 계속 스치고 가다가 벽에 닿았다. 그는 움찔하며 손을 움츠렸다. 바위가 닿았다. 혹시나 하고 다시 손을 뻗어보니 또 바위가 닿았다. 얼음이 아니었다. ‘산 속의 어딘가로 가고 있구나. 혹시 이 길도 알고 가는 걸까, 아니면 그냥 구멍이 뚫려 있으니 가는 걸까?’ 어차피 앞도 안 보이고, 다리도 안 움직이니 베논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산에 익숙한 녀석이 본능적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알고 있을 거라고 믿고 기다려야 했다. 카셀은 천천히 흔들리는 베논의 등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들어버렸다. 그 사이 보검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흔들림에 다시 깨어났을 때 카셀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였다. 굵지만 잘 들리지 않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리니 사방에서 카셀을 둘러싸고 회의라도 하는 듯 했다. 카셀은 호흡을 멈추고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희미한 보석의 빛으로는 겨우 팔이 닿는 거리만 보였다. 베논은 움직이지 않았다. 카셀은 조심스레 베논의 등에 손을 댔다. 그 추위 속에서도 끄덕 않던 녀석이 희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고, 불안하게 발을 내디뎠다가 물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카셀은 크게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곳에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구나.’ 카셀은 칼을 꺼내려고 조심스럽게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뭔가 딱딱한 것이 그의 팔뚝에 슬쩍 손을 댔다. 닿은 부분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팔을 치웠다. 그 순간 보석의 빛에 살짝 비친 누군가의 팔이 보였다. 손가락은 나뭇가지처럼 길었고, 팔뚝은 사람 손보다 더 가늘었다. 얼음으로 만든 것 같은 하얀 비늘이 팔뚝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비늘 사이를 비집고 가시가 튀어나와 있었다. 카셀이 잠깐 멈칫한 사이 그 손이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을 슬그머니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가 놀라 다시 보검을 잡았으나, 뭔가에 떠밀렸다. 그는 베논의 등에서 굴러 떨어졌고, 공포를 견디지 못한 베논이 말처럼 울었다. 베논이 바닥을 뛰는 것과 별개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뭐지?’ 살아있는 존재인지, 죽어있는 존재인지, 하나인지 둘이지 여럿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카셀은 엉덩이를 끌어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벽이 등에 닿았다. 벽은 얼음이 아닌 바위벽이었다. 카셀은 허리를 더듬어 칼을 찾았다. 그러나 칼은 없었다. 그리고 보검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카셀은 더욱 크고, 더욱 위협적으로 들리도록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목청에서 새는 소리는 작고 겁먹은 소리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딱딱하고 거대한 손이 카셀의 목을 잡았다. 저항했으나 카셀은 무기력하게 벽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그리고 벽에 걸려 위로 올라갔다. 그는 두 손으로 목을 잡은 얼음 덩어리를 움켜잡았다. [드루 리아이 아즈 드레드.] 느낌상 그런 건지 실제로 그런 건지 카셀은 아주 높은 곳까지 끌려 올라가 멈췄다. 추위와 공포로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부딪쳤다. [그뷔수....... 쿠 그뷔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귀로 흘러 들어왔다. 자장가처럼 카셀을 잠으로 이끄는 목소리에 이어 시끄럽게 카셀의 잠을 방해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일어나라, 새나디엘의 후계자! 그리고 내게 와라.’ 카셀은 명령하는 그 목소리를 비웃어 주고 싶었다. 이렇게 잡혀 있는 중에 대체 뭘 어쩌라는 건가하고. ‘영혼마저 얼어버린 하찮은 짐승에게 사로잡혀 걸음을 멈추지 마라. 네가 만들어낸 공포로 너를 붙잡지 마라. 처음 내게 왔듯이 그렇게 내게 오라.’ 카셀은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뭔가가 자신의 목을 잡고 있지도 않았다. 환각이었다. 어둠 속에서 베논의 겁에 질린 발소리가 좁은 동굴 안을 울리고 있었다. 희미한 보검의 빛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카셀은 형체만 보이는 그 괴이한 존재를 바라보며 천천히 시선을 위로 했다. 이번에는 환각도, 착각도 아니었다. 뱀처럼 긴 목과 말처럼 긴 머리를 가진 하얀 얼음 조각상이 카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긴머리가 천천히 카셀을 향해 내려왔다. 카셀은 그 다가오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카이크. (물러서라.)] 카셀은 어느 순간 인간의 언어가 아닌 고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카셀의 목소리인 동시에 즈토크 워그의 목소리였다. [내게 패해 이 곳으로 쫓겨났다면 미련을 두지 말고, 계속 이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으라. 나는 드래곤들의 하이로드와 같은 존재이며, 인간들의 여왕을 섬기는 자다.] 그 투명한 머리가 카셀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작게 열린 입에서 하얀 냉기가 밑으로 쏟아졌다. 얼음 조각에 닿은 카셀의 손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손목을 열리고, 팔뚝을 얼리고, 어깨를 얼리더니 카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입김까지 얼어붙고 있었다. 머리 위를 덮는 냉기는 머리카락을 딱딱하게 얼리고 얼굴을 얼리고 눈까지 마비시켰다. 그 순간 희뿌연 존재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것은 하늘 산맥의 눈 덮인 산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펼친 한 마리 거대한 새였다. 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울음소리에 근처 모든 산이 지진을 일으켰고, 눈사태가 일어나 숲을 삼켰다. 마치 자신이 이 산맥의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새의 발톱 아래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레미프들의 시체가 찍혀 있었다. 부리에는 레미프의 살 조각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었다. 부리에는 레미프의 살 조각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때 눈 위를 달리는 하얀 동물이 거대한 새의 목덜미를 물었다. 새는 저항했고, 그 하얀 짐승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결국 목이 부러져 새는 죽었다. 하늘 산맥의 하늘을 지배하는 괴물을 물어 죽인 하얀 짐승은, 피투성이가 되어 산 아래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그 새의 동료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불쌍한 털 짐승을 공격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하늘 밖으로 달아난 그 짐승은 결국 산 아래초원에서 기절해 쓰러졌다. 하늘 산맥의 새들은 하늘 산맥 아래까지 쫓아 내려와 죽어가는 짐승 주위로 몰려들었다. 날개를 퍼덕이며 몰려든 모습은 마치 시체 옆에 모여든 까마귀 같았다. 갑자기 한 마리 새의 부리가 잘려나갔다. 뒤로 땋은 갈색 머리를 펄럭이는 인간 여자가 그 새들 틈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새들은 부리와 발톱을 휘두르며 저항했으나, 동료가 둘이나 죽자 겁을 먹고 달아났다. 그 인간의 여자는 심한 상처를 입고 하얀 짐승 옆에 쓰러졌다. 그 짐승은 자신을 구해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그녀의 상처를 핥았다. ‘내가 이 곳을 지킬테니, 너는 하늘 산맥을 지키거라. 너의 이름으로 나의 기사단을 만들겠다. 여신께서 내려주신 이 도시의 모든 것을 너를 위해 만들 것이며, 언제나 너를 기다릴 거야.’ 그녀는 그 짐승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의 모습을 따서 내 기사단의 가장 위대한 기사를 하얀 늑대라고 부를게. 그 첫 번째가 나다.’ 수십 년이 흐르고, 그 하얀 털의 짐승은 하늘 산맥의 깊은 산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육체는 바위와 하나가 되었고, 수백 년이 지나며 작고 검은 바위로 변했다. 그 바위 앞에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나타났다. ‘이런 곳에 계셨군요. 새나디엘의 하얀 늑대, 하늘 산맥의 또 다른 지배자여. 저는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네일드입니다.’ 그의 웃는 모습은 어린 아이처럼 밝았다. “같이 가시지요. 조만간 당신의 힘이 필요한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보인 것은 아란티아의 대장장이 르고였다. 그는 새나디엘 여왕과 마스터 테일드에게 동시에 소리 쳤다. ‘이걸로 나보고 뭘 만들라고?’ 테일드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말했다. ‘칼.’ ‘못해!’ ‘여기 가넬로크에서 가져온 드래곤의 보석도 있어요. 인간이 잡아도 워그의 영혼을 견뎌낼 수 있도록 손잡이를 보호할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수호 기사까지 해 보신 분이 왜 이러십니까? 아란티아 왕실에 ’베나 실크‘와 맞먹는 보검이 존재해야 한다고 누누이 주장하셨으면서.......’ 테일드에 이어 여왕이 결정을 내렸다. ‘르고, 그냥 만들어.’ 르고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다음 순간 젊은 시절의 퀘이언이 보검을 들고 크게 최치고 있었다. ‘아란티아의 여왕을 위하여.’ 그리고 카셀 자신이 보였다. 허름한 유랑 시인의 복장을 하고 패잔병들의 마을 어느 으슥한 골목에서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즈토크 워그는 운 좋게 술집에서 자신을 주운 부랑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늑대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던 그 목소리를 지금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와이부 엔, 입트 주우 무.(일어나라, 그리고 나를 보라.)] 다음 순간 카셀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에게 지배당해 검은 악마가 되어버린 검은 사자 백작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나는 농부의 자식이 아니다. 나는 하얀 늑대들의 캡틴, 카셀 울프다!’ 캡틴 웰치가 화이트 게이트로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는 타냐가 있고 그 위로는 카구아가 내려다보며 포효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음처럼 투명한 영혼으로 카셀을 노려보는 하늘 산맥의 그 거대한 새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워그’의 영혼은 그 무든 순간에 있었고, 카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우 무.(나를 보라.)] 워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패잔병들의 마을에서는 대답하지 못했던 그 말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었다. “보입니다. 아란티아의 보검, 아니 워그의 영혼이시여.” 카셀은 천 년 전 워그에게 죽었던 하늘 산맥의 악마를 똑바로 주시했다. 더 이상 그것은 얼음 덩어리로 보이는 것도, 반투명한 유령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푸른 창공 위에서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육식 새의 모습이었다. “네가 아무리 고대의 악령이며, 이 곳을 지배하는 주인이라 할 지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카셀은 거대한 존재의 머리에 대고 있는 얼어붙은 손을 꽉 쥐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오직 하얀 늑대 뿐이다.” 카셀의 손 안에서 크리스탈 같은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깨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얼음 조각들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카셀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떨어지는 보검을 쥐었다. 손잡이의 보석은 여전히 옅은 빛만 내고 있었고, 칼날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나디우렌의 증표라서가 아니라, 이곳이 그냥 당신의 영역이었군요.” 카셀은 칼을 집어넣고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베논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힘 있게 고삐를 잡아 베논의 머리를 돌렸다. “가자. 이제 길은 내가 안내하마.” 베논은 무너지기 시작하는 동굴 안을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카셀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보였다. 베논은 눈으로 막혀 있는 동굴 입구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수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바닥에 착지하자 또 눈 쌓인 산자락이 나왔다. 눈은 아직 내리고 있었으나, 심하지 않았다. 구름이 너무 짙게 깔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분간이 안 갔다. 하늘 산맥에 들어온 후 시간 개념은 완전히 잊어버린 카셀이었다. “이 쪽으로 오세요.” 차갑게 언 마음을 녹이는 듯한 따뜻한 여자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카셀은 원래 가려던 방향에서 약간 돌려 그쪽을 향했다. 베논은 바닥이 파이는 눈 바닥을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 산을 내려갔다. 구름이 걷혀갔다. 눈 쌓인 바닥이 끝나고 다시 풀이 나왔고, 곧 나무가 나왔다. 베논이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카셀은 가장 빨라지는 순간에 고삐를 잡아 세웠다. 숲이 시작되는 곳에 즈비 족의 레미프 두 명이 환한 달빛 아래 서 있었다. 한 명은 덩치 큰 남자 레미프였고, 한 명은 그의 어깨에 의지해 겨우 서 있는 가냘픈 여자 레미프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음에도 카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부름에 이끌려 왔습니다, 시나비아.” 시나비아의 옆에는 라든의 캡틴인 판커틴도 있었다. 판커틴이 먼저 인사했고 뒤이어 시나비아가 말했다. “하늘 산맥의 길이 보이시는군요.” “보입니다.” “오래 전 잃어버린 영혼이 기억을 되찾았네요. 그가 당신을 인도할 것이고, 당신은 그를 인도해야 할 겁니다.” “제가 얼마나 온 거죠?” 시나비아는 북쪽을 가리켰다. “저 쪽은 인간들의 나라, 아란티아와 카넬로크의 국경입니다. 남쪽에는 하푸가 있죠.” 시나비아는 북쪽을 가리켰다. “저 쪽은 인간들의 나라, 아란티아와 가넬로크의 국경입니다. 남쪽에는 하푸가 있죠.” 카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절반 밖에 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밤을 지나 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시나비아, 로크는 지금 무사합니까?” 카셀은 성급히 물었다. 시나비아는 감은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전투의 모든 부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내 시야가 넓지 않아요. 미안해요, 카셀. 하지만 당신의 친구 한 명의 모습은 보이는군요. 제이메르....... 지금 그의 앞에 수많은 기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군요. 지금 그를 레-가넬-란도르께서 직접 지키고 계시는군요. 새벽 빛이 그 둘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보이지 않네요. 그리고 당신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제가 뚫고 볼 수 없는 영역 안에 숨어 있어서 보이지 않아요.” 카셀로서는 그 정도만 알아도 다행이었다. 문제는 여전히 시간이었다. 만약 지금 가넬로크가 무사하다 해도 다시 한번 밤이 오면 또 한 번의 격전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으니 시나비아는 그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 듯 말했다. “저는 당신을 약간이나마 돕기 위해, 당신이 만나야 할 우그들을 이 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을 이쪽으로?” “다행히 제가 부르는 소리를 경계하면서도 받아들이는 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있더군요. 쉐이든, 아는 분이지요?” “그가 와 있나요?” 시나비아는 다시 북쪽을 가리켰다.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세요. 그 끝에 당신이 찾는 우그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보검이 빛을 발했다. 카셀은 보이지 않는 끈에 이끌린 듯 손을 뻗어 칼을 뽑았다. 그리고 시나비아가 가리킨 곳과 같은 방향으로 칼을 뻗었다. “늦지 마세요, 카셀. 당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요.” 시나비아는 빙그레 웃으며 손에 쥔 노란 가루를 뿌렸다. 카셀은 그 가루가 만들어내 희미한 길을 따라 베논을 인도했다. 돌아보니 시나비아와 판커틴이 조용히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었다. 카셀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카셀이 다시 고삐를 쥐자, 베논은 속도를 올렸다. 보검의 빛이 점점 강해졌다. 여러 차례 칼이 빛을 낸 적이 있었으나 지금처럼 강한 빛을 보인 적은 없었다. 카셀은 보검을 두고 했던 나딜의 말이 떠올렸다. ‘훗날 하늘 산맥을 통과하게 된다면 그 칼이 너에게 기적을 베풀 것이다. 그것이 그 칼이 너에게 간 이유이리라.’ 베논은 자기 스스로도 놀라 머뭇거릴 만한 속도로 하늘 산맥의 숲과 산을 뛰었다. 그리고 숲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카셀은 그 끝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쉬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브나타이돌은 어렸을 때부터 유령이라면 질색이었다. 어머니는 덩치만 크고 겁 많은 아들의 담력을 키우겠답시고 밤중에 공동묘지에 들어가 할아버지 묘에 꽂힌 꽃을 가져오게 했다. 물론 못하면 아홉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 싼 얘기를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해 버리겠다고 협박하면서! 열두 살의 브나타이돌은 울면서 공동묘지에 갔다. 그는 귀를 막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 마침내 꽃을 집었다. 그 순간 기다리고 있었던 듯 공동묘지 뒤에서 시커먼 물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오줌까지 지리며 그는 엉엉 울었다. 무덤 뒤에서 튀어나온 건 최근 근처를 돌아다니며 어린 아이만 잡아먹는 늙은 이리였다. 브나타이돌은 숨을 헐떡이며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그 이리를 향해 외쳤다. “유령도 아니면서 놀라게 하고 지랄이냐, 이 옘병할 자식아!” 그는 맨손으로 이리를 두들겨 팼고, 발로 걷어차 목뼈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그는 엉망으로 짓이겨진 꽃 대신 이리 시체를 증거로 들고 갔다. 어머니는 그걸 보고 기절했다. 어른이 된 후로도 브나타이돌은 유령를 끔찍이 싫어했다. 울프기사단에 들어온 후로도 그는 어둠 속에서 이유 없이 바스락거리면 기겁을 하고 달아나곤 했다. 쉐이든은 그런 그를 두고, ‘일출부터 일몰까지만 무적인 녀석’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본인조차. 블루 게이트를 통과해 아란티아와 가넬로크의 국경 지대까지 이동해온 울프 기사단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지붕 없는 곳에서 하룻밤을 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심장 떨렸던 브나타이돌은 해도 뜨기 전에 출발준비를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더구나 쉐이든은 이상한 이유로 기사단을 하늘 산맥에 가까이 붙여 이동 시켰다. 그게 더 시간을 지체 시킨다는 걸 알면서도. ‘하이로드 탈룬드께서 꿈에 엘프를 만났고, 동시에 나에게도 말을 걸었다. 수상하지만, 못 따를 말은 아니었다.’ 엘프가 아니라 유령이 아니었을까? 그말을 듣고 진지하게 물어본 브나타이돌의 말은 모두들 무시했다. 그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산 쪽으로 다가가 소변을 보았다. 밤에 혼자 볼 일을 보러 오지 못해 참았더니 소변 줄기가 길게도 이어졌다. 앞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숨을 멈췄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멈췄는데도 낙엽 밟는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하고 숲의 어둠 속을 지켜보았더니, 뭔가가 진짜로 걸어오고 있었다. “으악!” 그는 바지 단추 잠그는 것도 잊고 달려왔다. “유령이다! 하늘 산맥에서 유령이 내려오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의 말을 제일 먼저 들은 건, 브나타이돌의 짐을 챙겨주던 실디레였다. 실디레는 그의 바지 틈으로 나온 걸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몇 명의 울프들 중 말라가 그 꼴을 보고 소리 질렀다. “야! 우리 중에 유일하게 순수함을 간직한 아이한테 왜 제일 못볼 꼴을 보이는 거야?” 브나타이돌은 뒤늦게 단추르르 채우면서도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하늘 산맥에서 유령이 나타났다니까! 이번에는 진짜야.” “아, 글쎄 진짜 유령이 나타나면 네 칼로 베어버리라니까. 르고가 만든 칼은 그런 일도 할 수 있다잖아. 제기랄, 화이트 게이트 앞에서 싸운 익셀런 기사들이 유령이었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같냐?” 둘이 티격태격하도록 내버려두고 쉐이든이 다가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브나타이돌이 걸어온 곳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나 겁을 먹어 헛소리한 게 아니었다. “진짜다.” 브나타이돌은 자기 말은 안 믿어주면서, 쉐이든 말은 믿어주는 동료들이 얄미웠다. 아직 잠이 덜 깬 프란츠가 반만 뜬 눈으로 물었다. “저거 늑대 아니야?” “아니야. 달라. 그리고 그 위에 누가 타고 있군.” “엘프인가?” 프란츠는 마치 엘프를 옆동네 사는 사람 이름이라도 되듯 쉽게 말했다. 브나타이돌은 점점 가슴을 졸였다. “그럴 지도. 가보자.” 쉐이든이 걸어가자 제일 먼저 브나타이돌이 말했다. “난 절대 안 가.” 어째서인지 실디레가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실디레는 아즈윈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를 주먹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여자였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정체 모를 동물 위에 타고 있는 청년을 보고 쉐이든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카셀?” 카셀이 타고 있는 동물은 쉐이든도, 프란츠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납게 생겼지만, 혀를 헐떡이는 게 붙임성 좋은 개나 늑대를 닮았다. 카셀은 흔들흔들 하는 목을 겨우 고정시키고 쉐이든과 프란츠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 말했다. “아, 쉐이든이구나. 프란츠도 있군. 다들 있어?” 쉐이든은 그의 괴상한 행동에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프란츠는 벌써 잠이 확 달아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다 있다. 가넬로크도 가는 길이었다.” “정말로 시나비아가 도왔구나.” 카셀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의 옅은 미소에 프란츠는 괜히 겁이 났다. “출발 준비는 되었어?” 카셀이 물었다. “지금 막 떠날 참이었다.” 쉐이든이 대답했다. “그럼 따라와. 지름길이 있어.” “지름길?” 카셀을 벌써 하늘 산맥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프란츠가 놀라 말했다. “하늘 산맥으로 가자는 거야? 미쳤어?” 카셀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혹시 아 아직 너희들 캡틴이야?” “그, 그야 그렇지만.” “그럼 따라와.” 쉐이든도 망설였다. “로크로 가는 짧은 길은 동쪽이다. 남쪽이 아니야.” “쉐이든, 날 믿어.” 카셀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쉐이든은 머뭇거리다가 뒤에 대고 소리쳤다. “친구들, 캡틴이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쉐이든과 프란츠가 누굴 만나 긴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 하던 기사들이 반가워 다가왔다. 그러나 쉐이든은 그들을 막고 명령했다. “말에 올라라. 지금 출발하겠다.” “인사할 시간은 줘야지.” 실디레가 말했다. 그녀는 지나 한 달 동안 지나치게 훈련에 열중한 나머지 그만 얼굴에 크게 상처를 입고 말았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일 텐데도 개의치 않았다. 본의 아니게 훈련 중 상처를 낸 프란츠가 더 괴로워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느냐고 쉐이든이 물었다. 카셀이 돌아오면 제대로 된 울프의 기사로 보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카셀이 돌아온 것을 가장 반가워할 사람도 이 사춘기의 소녀였다. “인사는 가면서 하자. 우리는 지금부터 하늘 산맥으로 가야 한다.” 쉐이든의 말에 제일 크게 놀란 사람은 현역 울프 기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알렉스였다. “다시 말해주겠나? 하늘 산맥?” “캡틴의 명령이다.” “명령이라고 죽으로 간다는 거야?” “카셀은 죽으로 가는 길에 부하들을 던져 넣고 뒤에서 구경하는 녀석이 아니야.” 쉐이든은 말에 올랐고, 다들 미심쩍어 하면서도 뒤를 따랐다. 카셀은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숲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그 뒤를 따르지 못했다. 쉐이든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머뭇거렸다. “내가 앞장서도 돼?” 실디레가 말하더니, 쉐이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숲안으로 불쑥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게도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실디레의 모습은 사라졌다. 쉐이든도 가볍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고작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건만, 괴물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다른 울프들도 하나씩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까지 들어가지 못한 이는 브나타이돌이었다. 그가 모는 말은 계속 숲 앞에서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다들 어째서 저렇게 겁이 없는 거지? 저게 카셀이 아니고 하늘 산맥에서 내려오는 유령이 카셀로 변한 거면 어쩌려고? 왜 아무도 의심을 안 하지? 이거 안 따라가면, 규칙 위반으로 기사단에게 제명당하나? 그럼 엄마가 화낼까?” 브나타이돌은 거기까지 말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있어 보자, 우리 기사단에 규칙이란 게 있던가?” 그는 괜히 그걸로 길게 생각을 끌다가 말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 찼다. “에라, 모르겠다!” 결국 브나타이돌도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울프 기사단은 아크랜드에서 사라졌다. 20. 무너진 방벽 탑의 동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즈들 전부와 마지막 남은 로크의 군대 전부가 격돌하는 것보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세 마리 드래곤들의 전투가 더 웅장하다고 아즈윈은 생각하고 있었다. 뒤늦게 기병대에 합류한 아즈윈은 무수히 많은 모즈들을 베었으나, 평원에 깔린 모즈들의 엄청난 숫자를 보면 자신의 칼질이 무의미한 것 같았다. 주위가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졌다. 하늘을 보니 로크 주위로 검은 구름이 몰리고 있었다. 로핀이 말한 대로였다. 태양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되지 못했다. 아즈윈은 기병대의 전투보다 하늘의 전투에 더 신경쓰고 있었다. 셀바이크의 움직임은 구아닐이나 가넬을 압도하고 있었다. 너무 커서 공중에서 방향 전환에 시간이 걸리는 구아닐과 가넬에 비해, 셀바이크는 물 속의 물고기처럼 자유자재였다. 그 커다란 구아닐이 셀바이크를 따라잡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리고 구아닐은 셀바이크의 움직임에 신경 쓰다가 가넬의 꼬리에 얻어맞아 까마득한 상공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구아닐은 수십 마리의 모즈들을 깔아뭉개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정작 구아닐은 충격을 거의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구아닐은 모즈들을 짓밟으며 도움닫기를 하더니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검은 불길을 뿜어냈다. 로크의 방패병들이 그 불길에 휩쓸렸다. 이번에는 가넬이 불을 뿜어 모즈들 수백 마리를 한 번에 태워버렸다. 구아닐이 가넬의 가슴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두 마리 드래곤은 날개를 불규칙적으로 퍼덕이며 허공에서 뒤엉켰다. 거기에 셀바이크까지 거세해 발톱으로 구아닐을 할퀴었다. 한 덩어리로 엉킨 드래곤이 모즈들 한 가운데로 떨어졌다. 꼬리에 채이고 발에 밟히는 모즈들이 엄청났다. 하지만 구아닐도, 가넬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일부 모즈들이 창을 던져 가넬과 셀바이크를 공격하려 했으나, 그런 쇠붙이로는 드래곤의 비늘조차 뚫지 못했다. “한 눈 팔지 마라, 아즈윈.” 로핀이 말을 달려와 소리쳤다. “드래곤 기사단과 합류한다. 적의 정예가 도착했군.” 로핀의 말에 아즈윈은 몰려오는 모즈들을 보았다. 척 보기에도 그들은 다른 모즈들보다 월등히 컸다. 게다가 인간에게 빼앗은 철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즈윈은 로핀에게 알았다고 대꾸하고 기병대를 향해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드래곤 기사단도 달리는 로크 기병대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 선두에는 루시우스와 브란더가 있었다. “드래곤 기사단은 측면 공격!” 아즈윈은 말발굽 소리에 이기려고 악을 썼고, 브란더도 즉시 대답했다. “알았다.” 루시우스를 선두로 한 드래곤 기사단이 다시 분리되어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모즈들의 정예부대도 달려오는 기병대 쪽으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왔다. 곧 두 종족의 부대가 부딪쳤다. 처음 말과 부딪친 모즈들은 튕겨나가거나 말에 밟혔으나 곧 말의 속도가 늦춰지자 지체없이 모즈들은 말 위에 올라타 기병들을 공격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모즈들이 죽어나갔고, 동시에 많은 기병들도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아즈윈도 떨어졌다. 아즈윈은 처음부터 모즈들의 선두에 있는 검은 갑옷의 기사를 노렸다. 그가 이 정예 부대의 지휘관이라면 녀석만 없애면 싸움은 훨씬 수월해질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즈윈의 검을 쉽게 방어하고 창을 휘둘러 그녀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뒤이은 모즈 두 마리의 공격에 아즈윈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그녀는 모즈들 주위에 포위되고 말았다. 아즈윈은 등에 맨 방패를 끼고 모즈들의 공격을 막으며 포위를 헤쳐 나오려고 애썼다. 하지만 갑옷 입은 모즈들을 상대하는 건 갑옷입은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누군가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고 들어오더니, 말에서 뛰어내려 아즈윈의 옆에 섰다. 제이메르였다. “안 부르길래 그냥 왔다.” 아즈윈은 대답대신 칼을 내밀었다. 제이는 그녀의 칼을 가볍게 소리 나게 치고 그녀의 등에 붙었다. 그녀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 “로메이션, 기억하지?” 모즈들은 아즈윈과 제이가 모즈들에게 파묻히는 걸 발견하고 둘을 구하려고 말머리를 돌렸다. 때마침 브란더가 이끄는 기사들이 후방을 공격하여 모즈들의 정예군대도 대열이 깨졌다. 로핀은 그 틈을 노려 말을 몰았다. 루시우스를 비롯한 세 명의 드래곤 기사들이 옆에 붙어 그를 도왔다. 셋에게 모즈들을 맡기고 고삐 쥔 손으로 말을 모는 것에만 집중하던 중 누군가 로핀의 뒤통수 쪽을 공격했다. 로핀은 급히 고개를 숙여 피했다. 뒤이는 공격에 루시우스가 얻어맞아 머리부터 굴러 떨어졌다. 검은 갑옷의 기사였다. 그 기사는 로핀을 다시 한 번 공격하더니, 반격해오는 드래곤 기사 둘을 동시에 말에서 떨어뜨려버렸다. 로핀도 하는 수 없이 고삐에서 손을 놓고 칼로 그 자의 공격을 막았으나, 한 번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균형을 잃었다. 로핀은 차라리 말에서 떨어지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로핀은 바닥에 닿는 순간 몸을 돌려 다리부터 착지했다. 그 익셀런 기사는 창을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돌리더니 말을 돌렸다. 로핀은 떨어진 세 명의 드래곤 기사들을 확인했다. 루시우스도, 다른 두 명도 모두 죽었다. “아직도 저런 녀석이 남아 있었나?” 그가 로핀을 향해 달려오려는 순간, 다른 기사가 다가와 그를 저지했다. “멈춰라, 포웰. 내가 맡을 녀석이다. 넌 가서......, 드래곤 기사들을 지휘하는 저 놈을 베고 와라” 빅터였다. 포웰은 빅터가 가리킨 기사 브란더에게 달려갔다. 빅터는 로핀 쪽으로 말을 몰고 오도니 가볍게 말에서 내렸다 그의 손짓 하나에 로핀을 공격하려고 다가오던 모즈들이 주위로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로핀은 아즈윈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길게 뺐다.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빅터를 노려봤다. “저 녀석의 이름은 포웰이다. 기마 전투로만 보자면, 적어도 이필드 내에서는 위에 설 실력자가 없다. 봐라. 대룩 최고라고 할 만한 드래곤 기사단도 저 녀석 하나를 못 막고 있지 않나?” 빅터는 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부하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였는데, 왜 죽은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러야 더 센놈을 만나서 그런 거지. 너 보기보다 멍청하구나?” 로핀이 대꾸했다. 빅터는 큰 소리로 웃으며 칼을 꺼냈다. “어쨌든 수고했다. 작전대로라면 오늘 아침에 전투가 끝났을 텐데, 무려 반나절이나 늦췄구나. 훌륭해. 하루가 더뎌지는 바람에 내가 구아닐과 러스킨에게 얼마나 미안했었는지 아나?” “여유 넘치는 척, 꼴값하고 있네. 빅터, 그냥 쉽게 말해. 나 때문에 미치겠지?” “그래. 미치겠다. 진작 알고 있었지만, 항상 후회한다. 다들 탑을 무너뜨리는 싸움이니, 인간과 모즈의 전투니, 드래곤 구아닐과 드래곤 가넬의 싸움이니, 어쩌니 저쩌니 떠드는데 다 틀렸어. 이건 너를 죽이는 싸움이었다. 널 죽여야 전투가 쉬워지는 게 아니라, 널 죽이는 것 자체가 전투에 이기는 거였어.” “그러니까 내가 너더러 멍청하다고 했잖아. 새삼 깨닫지 좀 마. 아, 빅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나냐? 첫경험인들 그렇게 짜릿했을까? 킁, 그때 네 팔 베는 느낌이란 정말이지.......” “하아, 그랬나? 첫경험이 그리 좋았다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보통은 실패하지.” “아, 난 천부적이었거든. 검술도, 그쪽도.” “천부적인 검술이 아직 녹슬지 않았기를 빌지.” “어느 쪽도 아직 녹슬지 않았어.” 로핀은 빙긋 웃더니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빅터도 피하지 않고 받아쳤다. 둘에게는 둘만의 공간이 펼쳐졌고, 둘은 두 사람 외에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공간이 차단된 듯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인정한다, 로핀. 역시 녹슬지 않았어.” 빅터가 말했으나, 로핀은 말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군. 넌 단지 녹슬지 않은 게 고작이다.” 벌써 지친 로핀과 달리 빅터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로핀이 겨우 물러나며 억지로 말했다. “허어 암, 그 나이에도 발전할 수 있긴 있구나.” 빅터는 약간 간격을 벌리더니 한 팔을 크게 펼쳤다. “하나 궁금하게 있다, 로핀.” “뭐냐?” “대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왜 하는 거지? 네가 날 이길 수 없다는 것도, 드래곤들이 힘을 합쳐도 구아닐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었잫아.” 그 순간 어둑어둑한 하늘 전체를 덮는 하얀 섬광이 수만 마리의 모즈와 수천 명의 인간들로 뒤덮인 평원 전체를 가로질러 퍼졌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드래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마리 드래곤이 허공에서 떨어져 바닥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목의 절반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나간 흔적은 카치셀에서 카-탄톨이 죽은 것과 같은 흔적이었다. 셀바이크였다. 그 하얀 빛은 구아닐의 등에 타고 있는 늙은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러스킨.......” 로핀은 으르령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한다. 넌 알고 있었어. 그런데 대체 왜 계속 저항하는 거지?” 이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셀바이크의 몸 위로 모즈들이 개미처럼 올라타 도끼와 칼을 내리찍었다. 셀바이크는 길게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그 위로 구아닐이 내려와 울부짖었다. 그의 몸에서 암흑의 연기가 피어올라 휘감겼다. 눈의 착각인지 모르나, 구아닐의 몸이 부풀어 이제 가넬보다 더 커 보였다. 셀바이크에게 찢긴 상처가 모조리 회복되었고, 발톱과 이빨은 더 길어졌다. “어떤 드래곤도 이제 구아닐을 죽이지 못한다.” 빅터가 말했다. 인간들의 영역에 착지한 가넬도 포효했다. 하지만 구아닐 앞에 가넬의 목소리는 힘에 부쳤다. 두 마리 드래곤은 또다시 서로에게 날아가 지상 바로 위에서 맞잡았다. 두 마리 드래곤은 또다시 서로에게 날아가 지상 바로 위에서 맞잡았다. 두 마리 드래곤이 휘젓는 꼬리가 일으킨 흙먼지가 주변을 뒤덮었다. “나도 하나 묻자, 빅터.” “마지막 질문이 되겠군.” 빅터는 다시 칼을 쳐들었다. “십 년 전에 말이야, 네가 론타몬의 군대를 이끌고 왔어도 아란티아를 꺾을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런 걸 왜 이제 와서 묻지?” 로핀도 칼을 들며 말했다. “왜 이기지도 못할 편에 붙어서 싸우냐는, 네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남쪽 성문에서 다섯 걸음도 채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느낌뿐일지 몰라도 그는 지금까지 한 시간에 한 걸음씩 다가오던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방벽이 흔들리는 것 같소, 메이루밀.” 망루에 선 집정관 루에머스가 말했다. “마스터 탸냐의 힘이 다한 거요.” 루밀이 말했다. “캡틴 울프는 오지 않는 거요?” “살아있다면, 내일...... 어쩌면 모레.” “내 처지에 늦는다고 탓할 수조차 없군.” 루에머스는 긴 숨을 내쉬었다. 다가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한 병사 하나가 회색 로브의 마법사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고스란히 화살을 쏜 병사에게 되돌아가 이마에 박혔다. 마법사는 고개를 들어 루밀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친구를 마나는 것처럼 반가운 얼굴로 테일드가 웃고 있었다. 루밀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아로크의 탑을 돌아보았다. 테일드도 루밀처럼 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그만 쉬거라, 타냐.” 로크의 군대는 이미 밀릴 때까지 밀려나 있었다. 많은 지휘관들이 모즈들이 쏜 화살에 쓰러진 후, 지휘 체계도 무너졌다. 그나마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 것도 로크 병사들의, 목숨으로 지키겠다는 의지 덕이었다. 모즈와 인간이 뒤섞인 틈바구니에서 아즈윈과 제이메르가 겨우 포위망에서 빠져 나왔다. 한 손으로만 칼을 휘두르던 제이는 설 기운도 없이 지쳐 아즈윈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두 사람 앞에 힘겹게 빅터를 맞아 싸우고 있는 로핀이 있었다. 아즈윈이 보기에 로핀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를 구하려고 달려가는 아즈윈의 앞으로 검은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와 막았다. “찾고 있었다, 하얀 늑대.” 아즈윈은 제이를 옆으로 밀어놓고 말했다. “찾고 있었다, 하얀 늑대.” 아즈윈은 제이를 옆으로 밀어놓고 말했다. “뒤에 있어, 제이메르. 이 녀석은 내가 맡는다.” 제이는 대답할 힘도 없이 숨만 헐떡였다. 아즈윈은 칼과 방패를 들었다. “이 전장에서 네가, 살아남은 마지막 내 상대다. 드래곤 기사단의 두 지휘관도 내 손에 죽었고, 어제 스탠리까지 죽이며 활약했던 저 자는 싸울 형편도 못되는군.” 포웰이 말했다. 제이가 버럭 소리 쳤다. “브란더를 네가 죽였다고?” “이름까지 알지는 못한다.” 아즈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이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하늘에서 쿵 하고 심장까지 울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맞붙어 있던 두 마리 드래곤 중 가넬이 아즈윈 쪽으로 튕겨 나왔다. 아즈윈과 제이는 급히 뒤로 물러났고, 포웰도 말머리를 돌렸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체가 바닥을 스치며 아즈윈과 포웰의 사이로 지나갔다. 안개 같은 먼지가 피어올라 아즈윈의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구아닐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즈윈은 자신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커진 드래곤의 검은 다리와 꼬리가 바로 얼굴 옆을 지나가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구아닐은 쓰러진 가넬의 목을 잡아 다시 한 번 집어 던졌다. 가넬은 로크의 병사들을 무너뜨리며 무기력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아즈윈이 그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먼지 틈으로 창이 날아왔다. 아즈윈은 방패로 창를 막고 뒤로 물러났다. 포웰이 모는 말의 앞발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옆으로 피하며 저항했으나, 포웰은 쉽게 막았다. 제이가 도와주려고 다가왔으나, 그녀는 소리쳤다. “피해. 이 녀석, 처음부터 널 죽이려고 날 몰아붙이는 거야.” 제이는 얼결에 그 말을 듣고 뒤로 물러났다. 포웰은 잠시 공격을 늦추고, 한참 뒤로 물러난 제이를 노려보았다. “흥, 스탠리의 복수를 하려면 너부터 죽여야겠군.” “레드워드와 홀튼의 복수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날 죽여야 할거다.” “아, 그 둘을 죽인 게 너였니?” 포웰은 다시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전력으로 방어에 집주하는 아즈윈의 방패를 쉽게 뚫지는 못했다. 물론 아즈윈도 말 위에서 강하고도 빠르게 창을 뿌리는 포웰을 쉽게 공격할 수 가 없었다. 가넬이 또 한 번 나가떨어졌다. 아즈윈과 포웰의 싸움에서 물러나 있던 제이는 이제 두 마리 드래곤의 싸움을 보았다. 가넬은 힘겹게 일어나려 했으나, 결국 구아닐의 발아래 짓밟혔다. 가넬이 토하는 피가 두 드래곤의 싸움에 희생된 병사들 시체 위를 뒤덮었다. 구아닐은 가넬을 밟은 채로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는 축복의 탑을 노려보았다. 탑 안에 있는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탑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구아닐은 꼬리를 휘둘러 축복의 탑을 후려쳤다. 탑은 크게 흔들렸고, 구아닐은 꼬리를 반대로 휘둘러 탑의 반대 부분을 후려쳤다. 세 번째 내리치는 꼬리에 얻어맞은 축복의 탑은 버티지 못했다. 구아닐은 인간이 들어본 적 없는 사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너져라. 천 년 전 무너졌던 아로크의 방벽처럼 또 한 번 부서져라.” 탑은 무너졌고, 로크 전체를 뒤덮은 푸른 마법 장벽이 파문을 일으켰다. 타냐는 숨을 가늘게 쉬고 있었다. 가끔씩 어깨를 파르라니 떨기도 하고, 가끔씩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내주는 물컵에 입술을 댈 정도의 의식은 찾았으나,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마시고 기침을 토했다. 그녀에게 뿌려진 치유의 가루는 바닥에 떨어진 채 그대로였다. 아이린은 자기 무릎에 뉘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타냐가 새삼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린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쥐고 있다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수고 했다, 탸냐. 이제 쉬렴.” 아이린은 그녀를 그 자리에 눕혔다. 타냐는 떨리는 눈으로 아이린에게 물었다. “카, 카셀은요......?” 아이린은 거짓말도 할 수 없는 지금 상황이 너무도 슬펐다. “잊어버리렴.” 그때 북쪽에서 시작된 파문이 아로크의 탑까지 이어졌다. 그녀가 펼친 방벽의 한쪽이 무너지는 순간, 타냐도 길게 숨을 토하며 추욱 늘어졌다. 그 순간 로크의 방벽이 사라졌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는 자신을 가로막는 마법이 사라지는 순간 마지막 남은 다섯 걸음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성문에 손을 들이댔다. 투석기를 수십 번 얻어맞아도 무너지지 않았던 성문이 장작개비처럼 박살났다. 테일드는 로크의 안으로 발을 디디며 말했다. “이틀 걸렸군.” 그의 앞에는 메이루밀과 던멜이 버티고 서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피해 있으리라는 집정관 루에머스도 거기 섞여 있었다. 테일드는 그 병사들 쪽으로 팔을 휘둘렀다. 수십명의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봐, 루밀. 지금 나를 상대로는 자네도 저 병사들과 다를 바 없어. 뭘 하겠다고 막아선 건가?” 루밀은 넘어진 병사들 틈에서 루에머스가 무사함을 확인하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할 수야 없지.” “아무 것도 안 하는 거나 같아.” 테일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때 말 한 마리가 달려와 메이루밀의 뒤에서 멈췄다. 말에서 뛰어내린 아이린은 루밀의 옆에 섰다. “타냐는?” 루밀이 물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몫이야.” 아이린은 대답하며 칼을 꺼냈다. 테일드는 턱으르 쓰다듬으며 말했다. “베나 에사르크를 쓰면 조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너도 이 칼은 무섭지 않나?” “그걸 네가 쓸 수 있을 때나 무서운 거지.” “타냐와 약속했다. 망설이지 않겠다고.” “이제 벨 수 있다고 경고하는 거야?” 테일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그 팔을 활짝 펼쳤다. 펄럭이는 로브 자락 뒤로 루밀과 아이린의 스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린은 나직이 말했다. “루밀, 던멜. 그란돌을 부탁한다.” 루밀이 말했다. “테일드의 마법을 너 혼자 막을 수는 없다.” “서로 불가능한 걸 해야 할 시점이야.” 루밀은 대답하고 던멜에게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그란돌을 맡아라.’ 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즈 군대의 기세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으나, 모두의 칼이 밑으로 쳐졌다. 탑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싸움에서 그들은 패배했다. 포웰과 싸우는 아즈윈도, 빅터와 싸우던 로핀도, 무너지는 탑을 보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아닐은 쓰러진 가넬의 목을 움켜잡아 들어올렀다. 그리고 르크의 병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을 지켜 준다던 이 드래곤의 무력함을 보라. 이것이 너희 인간들의 마지막을 알리는 재물이 될 것이다.” 구아닐의 등에 타고 있던 러스킨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지팡이 끝에서 시작된 하얀 빛이 넓게 퍼져 가넬의 몸 전체를 감쌌다. 분산된 빛은 점점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그 점이 향하는 방향은 가넬의 목이었다. 그 순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날아든 칼 한 자루가 러스킨의 지팡이를 맞췄다. 지팡이에서 뻗어나간 하얀 빛이 가넬의 목을 지나쳐 아무도 없는 평원을 뚫었다. 빛이 닿은 부분에 있는 바위가 깨지고 바닥이 갈라졌으나, 가넬은 무사했다. 구아닐의 뒤에는 드래곤의 기사 브란더가 있었다. 칼을 던진 게 그의 마지막 힘이었던 모양인지 그는 말위에서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고, 갑옷은 깨져 어깨에만 걸쳐져 있었다. “탑이 무너졌다고......, 로, 로크의 긍지가 무너진 건 아니다!” 아즈윈의 앞에 있던 포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녀석 분명 말에서 떨어뜨렸는데.......” 분노한 구아닐의 입에서 검은 불길이 브란더를 향했다. 그러나 가넬의 입에서 뿜어져 나간 불길이 그보다 더 빨랐다. 구아닐과 러스킨은 불길에 휘감겨 한참이나 날아가 평원에 처박혔다. 가넬은 온 몸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말했다. “가넬로크의 병사들이여, 아로크의 기사들이여. 내가 죽더라도 포기하지 말라. 죽어서라도 나는 너희들의 수호신이 되리라. 싸우라. 내가 같이 싸워주겠다! 죽으라. 내가 같이 죽어주겠다!” 가넬의 힘겨운 말에 로크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즈들을 향해 칼을 들었다. 불길에 휩싸였던 구아닐은 금방 다시 일어났다. 등에 타고 있던 러스킨조차 큰 피해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검은 비늘을 휘감은 검은 연기가, 레미프가 입힌 상처를 제외한 모든 부상을 회복시켰다. 구아닐은 서쪽을가리키며 고대어로 말했다. [어리석은 가넬, 아침의 드래곤이라 잘난 척해봐야 이제 끝이다. 보라. 태양이 지고 있다. 너와 나를 따르는 우그들의 마지막 방패까지 서쪽에 잠겼다. 인간은 이 밤을 결코 넘기지 못하리라.] 가넬은 떨리는 시선으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점까지 서쪽 언덕으로 사라지는 순간 드래곤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벗겨진 비늘은 전처럼 신비로운 황금빛을 뿜지도 못했다. 이제 더는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구아닐과 싸울 마지막 힘을 끌어 모으려 다시 눈을 떴을 때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넬은 죽을 때가 되어 헛것을 보는구나 싶어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입에 고인 피가 여기저기로 흩뿌려졌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서쪽에서 가라앉았던 태양이 하얀 빛을 품고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구아닐도 멀뚱히 눈을 껌뻑였다. 그것은 태양이 아니었다. 환하게 빛을 내는 한 자루 칼이었다. 그 보검을 쥐고 있는 남자를 제일 먼저 알아본 건 아즈윈이었다. “카셀!” 로핀도, 빅터도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상 절대 올 수 없는 아란티아의 원군이 도달해 있었다. 그것은 울프 기사단이었다. 21. 늑대들을 위한 노래 하늘 산맥의 숲은 지독히 어두웠다. 게다가 말이 지나가기에는 나무가 너무 우거졌다. 새벽에 카셀을 따라 하늘 산맥에 진입한 지 반시간도 안되어 쉐이든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카셀이 뭔가 잘못 생각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짧은 지름길이 있어도 말이 달리지도 못하는 길이면 의미가 없었다. 다른 울프들도 그걸 알지만 섣불리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화이트 게이트를 비우고 가넬로크로 떠나라고 여왕이 명령했을 때부터 쉐이든은 불안했다. ‘아, 참 그렇구나. 네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지. 그럼 넌 빠져라. 어디 알렉스가 지휘하는 게 낫겠니? 프란츠도 요새 동료들의 믿음을 얻고 있지?’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울프 기사단이 화이트 게이트를 떠나는 문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폐하.’ ‘로크가 무너지면 화이트 게이트도 의미가 없지. 떠나거라, 쉐이든. 내가 할 말은 그게 다다.’ 그 말을 하는 새나디엘의 얼굴에는 비장미마저 느껴졌다. 그녀 역시 목숨을 걸고 있었다. 마치 최전방에 나선 기사단의 리더 같은....... “캡틴이 이상해.” 실디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녀가 가장 솔직했다. 길이 이상하다, 하늘 산맥에 처음 들어와 무섭다, 이런 게 지름길일 리 없다....... 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셀이 이상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 그랬다. 실디레는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던 카셀을 두고도 인사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카셀...... 아닌 것 같아.” 무서운 나머지 뒤에 처지고 싶지 않아 엉겁결에 제일 앞으로 나와 버린 브나타이돌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렇지? 유령이 흉내 낸 거야.” “그만 좀 해.” 실디레가 작게 소리쳤다. 길은 험해지고, 나무는 많아지고, 말은 뛰기는커녕 걷지 조아 못했다. 쉐이든은 참다 못 해 카셀에게 다가갔다. “카셀,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카셀은 보검을 뽑았다. 보검은 뽑는 순간부터 강렬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쉐이든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울프들은 화이트 게이트에서 본 그 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에 놀랐다. 말들도 흥분하여 앞다리를 치켜들거나 뒷걸음질치기도 했다. 카셀은 말없이 자신이 타고 있는 그 이름 모를 짐승을 몰았다. 보검의 빛은 사방으로 퍼지지 않고 카셀의 전진방향으로 길게 뻗었다. 쉐이든은 또 한 번 말을 잃고 카셀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다들 가늘게 실눈을 하고 그 빛을 쫓아갔다. “나, 나무가......휘어있어.” 말라의 작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녀의 검은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수군대는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리듯 메아리 쳤다. “우리 단체로 꿈꾸는 거야?” “하늘 산맥의 나무는 원래 이런 식으로 자라는 건가 보지.” 바닥이 좌우로 약간씩 밀려나 있었고, 기사단의 앞을 가로 막고 있던 나무는 허리를 옆으로 구부리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부분이 좌우로 밀려나 있으니, 전진방향에는 가로 막는 게 없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숲을 관통하는 터널이었다. 숨이 가빠왔다. 바로 옆에 있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친구들의 얼굴도 희미하게 보였다. 기사단이 지나가고 난 자리의 나무는 구부렸던 허리를 도로 폈다. 그리고 다시는 통과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서로 엉켜 길을 막았다. 그러나 앞에 있는 나무는 꿈틀대며 물러나, 카셀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쉐, 쉐이든. 나 무서워.” 실디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쉐이든은 실디레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무섭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실디레를 그렇게 아끼는 프란츠조차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다들 두려워하지 마.” 카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나디엘 폐하와 별개로 존재했던 아란티아의 주인께서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너희들의 캡틴을 믿어.” 카셀은 뒤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찌 보면 만사를 체념한 사람의 미소 같았고, 어찌 보면 모두를 안심시키는 인자한 웃음 같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하고는 베논의 옆구리를 찼다. “자, 가자. 친구들!” 베논은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쉐이든도 말을 세게 몰았다. 울프들 모두 경쟁적으로 말을 달렸다. 베논의 걸음은 육상의 어떤 동물도 따라가지 못하는 엄청난 속력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이 그 걸음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울프 기사단을 위해 길을 내준 나무와 바위가 회색빛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닥에 닿지도 않고 달리는 듯 말발굽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뭔가에 흘린 듯 정신없이 달렸다. 여러 개의 산을 지나고,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를 수없이 관통했다. 중간에 보이는 엄청난 넓이의 계곡은 다 한 번에 뛰어 허공을 날 듯 지나갔다. 얼마나 달린 건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어디가지 와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울프들 모두 달리는 그 자체에 취해 지금 뭣 때문에 카셀을 따라 달리는 건지도 잊어버렸다. 마침내 카셀은 크게 방향을 꺾었다. 달린 지 몇 시간 만에 처음 방향을 꺾는 것이었다. 아니, 달린 지 하루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어저면 이틀, 어쩌면 한 달. 쉐이든은 방금 일 년 동안 달렸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숲이 사라졌다. 그들은 어느 새 평지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방향 감각을 잡을 수가 없었다. 카셀이 들고 있는 보검은 계속 빛을 내고 있었고, 그 빛 때문에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쉐이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별도 달도 태양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 닿을 듯 가까운 하늘에서 시커먼 구름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쉐이든은 옆에 있는 프란츠에게 소리쳤다. “지금이 아침이가, 밤이가?” 프란츠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시간이 얼마나 흘러버린 거지? 우리가 늦은 건가? 제때 도착한 건가?” 쉐이든은 아무런 지시 없이도 혼자 달리는 말을 내려다보았다. “말이 전혀 지치지 않았어.” “우리도 지치지 않았지.” 처음에 겁에 잔뜩 질려 있던 브나타이돌도 편안한 표정이었다. “지금처럼 기분 좋아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아.” 쉐이든은 웃어 보이며 말했다. “카셀에게 울프 기사단의 깃발을 전해주고 와라. 도착한 것 같다.” 카셀은 베논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고, 곧 보검도 집어넣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기사들은 자기들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은 로크의 북쪽 축복의 탑 앞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군. 포웰, 가서 먼 길 온 여행자들이 얼마나 헛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가르쳐주고 와라.” 울프 기사단의 출현에 가장 놀란건 빅터였으나, 가장 먼저 그 마법 같은 보검의 빛을 비웃은 것도 빅터였다. 포웰은 아즈윈과 승부를 내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모즈들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로핀도 아즈윈에게 말했다. “너도 가라, 아즈윈.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야.” “하지만 로핀.......” “어서!” 아즈윈은 빅터와 로핀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포웰과 같은 방향으로 뛰어갔다. 작별 인사하듯 돌아보는 아즈윈에게 로핀은 칼을 흔들어 보였다. “저 아이와 힘을 합쳐야 겨우 날 상대했을 텐데, 멋 부리려고 너무 무모한 짓을 했군.” 빅터가 말했다. 로핀은 남아있는 제이에게 말했다. “제이메르. 네 다친 쪽 팔, 앞으로 못 움직일 테니 잘 봐둬라. 아이린 대신 좀 가르쳐주마. 한 팔로 싸우는 게 어떤 식인지.” 제이는 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로핀은 빅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후배들 왔으니, 진짜로 한 번 해볼까?” “여지껏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했지. 하지만 이제 뒤를 염려할 필요가 없어 졌잖아.” “멍청한 놈. 고작 오십 명의 기사들이 왔다고 전투에 영향를 주지는 않아.” 언덕 위에서 평원을 뒤덮은 모즈들을 바라보던 카셀은 쉐이든에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맡길게.” 쉐이든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가자.” 제일 뒤에 버티고 있던 체스 좋아하는 기사, 푸티에르가 말했다. “여왕 폐하를 위하여.” 곧 쉰다섯 명의 기사들이 언덕 밑으로 말을 몰았다. 멀리서 보기에 그 진군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언덕 아래에 있던 포웰은 모즈 궁수 부대를 이끌고 와 대기했다. 포웰 역시 그들 하나하나를 칼로 쳐 쓰러뜨리지 못하고, 화살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 아까웠다. 그러나 굳이 상대해줄 필요가 없기도 했다. 포웰은 모즈들에게 레미프어로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라인, 발사 준비.] 분노의 탑에 있는 크나딜이 탑을 짚은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라틸다도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크나딜의 도움으로 어제부터 있었던 전투를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의 죽음 하나하나에 가슴 아파 울던 그녀였으나, 지금은 그때의 그 모든 순간보다 더 안타까웠다. 적의 지휘관은 모즈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쏘아 올린 수백 개의 화살이 하늘을 덮고 울프 기사단을 덮쳤다. 라틸다는 허무하게 죽어갈 기사들의 마지막을 볼 수가 없었다. 눈을 뜨니 크나딜의 마법이 사라지고 그녀는 이제 적을 보지 못했다. 크나딜은 말없이 무너진 탑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셀바이크가 죽을 때도, 가넬이 구아닐에게 짓밟힐 때도 반응이 없던 크나딜의 어깨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라틸다는 두 손을 하늘에 내밀어 노래했다. “하늘이 경배하고 땅이 지켜주는 아란티아여. 기사들이 찬양하며 전설이 이름 밝혀주는 울프들이여. 이제 그 전설이 우릴 지키러 이 땅에 왔네요. 이제 그 이름이 이 땅을 밝히러 우리에게 왔네요. 아란티아여, 울프여, 싸우소서. 싸우소서. 싸우소서.” 라틸다는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여왕이시여, 당신의 아이들을 지키소서!” 구아닐은 웃음을 떠뜨렸다. 그것은 경박스러운 도박꾼이 판돈을 쓸어 담으며 환호하는 소리와 같았다. “아둔하구나, 아둔하도다. 새나디엘이여. 아란티아의 축복에서 벗어난 기사들이 대체 다른 나라에서 무슨 힘을 발휘한다고 이곳으로 보낸 거냐? 실수했다, 새나디엘. 너의 성급함이 인간을 멸망으로 인도했구나.” 구아닐은 모즈의 궁수 부대 쪽으로 돌진하는, 울프 기사단에게 외쳤다. “보아라, 이것은 아란티아를 벗어난 늑대 새끼들의 최후가 될 것이다.” 하늘로 솟구친 화살은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러 울프 기사단에게 송곳처럼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카셀은 지그시 눈을 감고, 브나타이돌이 전해준 깃발을 높이 들었다. 늑대의 그림이 그려진 아란티아의 상징이 바람에 강하게 펄럭였다. 카셀은 말했다. “보아라, 이것은 아란티아를 벗어난 울프 기사단의 첫 번째 승리가 될 것이다.” 날아오는 화살의 폭풍 속에서 동시에 울프들의 칼과 창과 방패가 소용돌이쳤다. 쉐이든의 창에, 머리 위로 날아오는 아홉 개의 화살이 튕겨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에릴은 달리는 말 위에서 보이는 화살 전부를 보고 피했고, 배롤은 허리 뒤에 차고 있는 커다란 타워실드로 화살 전부를 막아 말까지 보호했다. 실디레는 말 위에 엎드려 화살을 흘려보내고 말 머리 쪽으로 날아든 화살만 두 자루 칼로 쳐냈다. 누군가는 머리만 살짝 꺾어 화살을 피하고 약하게 날아오는 건 투구 두꺼운 부분을 들이대 튕겨냈다. 그렇게 한 순간 우수수 내리꽂힌 화살은 모조리 울프들이 휘두른 무기에 맞고 부러지거나, 빗겨져나갔다. 아무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쏟아진 소나기에 아무도 젖지 않는 모습을 보고 포웰은 조금 얼떨떨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포웰은 서둘러 명령했다. [두 번째 라인 장전하라. 두 번째 라인!] 그러나 두 번째를 준비하지 않고 있던 모즈들의 대응보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울프 기사단이 더 빨랐다. 자이논이 말 옆에 매고 있던 투척용 창을 한 자루 들어 집어 던졌다. 직선으로 날아온 창이 모즈들 세 마리를 꿰고 지나갔다. 에릴이 쏘아올린 화살이 모즈들 사이로 한 발에 한 마리씩 박혔다. 두 번째 라인과 첫 번째 라인이 교체하는 혼잡한 상황에, 갑작스러운 공격이 더해져 모즈 궁수부대는 큰 혼란에 빠졌다. 덕분에 뒤에서 버티고 있던 창을 든 모즈들이 앞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아무리 훈련시켰다 해도 이런 위급상황까지 대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포웰은 포기하고 자기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창을 들었다. 언덕 아래로 질주한 울프 기사단이 활을 든 모즈들을, 둑에서 넘친 홍수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급하게 창을 들이댄 모즈들도 그 홍수에 파묻혀 나가떨어졌다. 포웰은 제일 선두에 달려오고 있는 울프를 향해 창을 강하게 휘둘렀다. 쉐이든은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검은 기사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두 기사의 창이 서로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그러나 포웰의 창은 허공만 찌르고, 쉐이든의 창은 포웰의 얼굴을 뚫었다. 말에서 떨어진 포웰의 몸은 뒤따르는 울프 기사단 틈으로 빨려들어 갔다. 모즈들은 기병대의 공격에 익숙했다. 드래곤 기사들도 상대했고, 로크 기병대도 같은 식으로 싸웠었다. 그러나 삼각형을 그리며 몰려오는 울프들의 돌격에 모즈들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못했다. 울프들은 모즈들의 저항은 거의 무시하다시피 받아 넘기고,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모즈들이 셋이나 꿰인 창을 버리고, 자이논은 다른 창을 두 손에 들어 던졌다. 그리고 르고가 만들어준 자신의 철창으로는 좌우로 동시에 휘둘러 가까이에 있는 모즈들을 차례차례 쳐냈다. 유령 빼고는 무서울 게 없는 브나타이돌은 큰 칼로 모즈들 머리를 한꺼번에 몇 개씩 베고 지나갔다. 창에 꿰이는 걸 각오하고 머리 위로 덮치는 모즈들 조차 브나타이돌의 펼친 검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쉐이든의 창도, 배롤의 칼도, 모즈들은 뚫지 못했다. 코엔이 집어 던진 쇠사슬에 목이 걸린 모즈가 허공으로 딸려 올라갔다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말라는 말 뒤에 타고 올라오려는 모즈를 주먹으로 내리 찍어 떨어뜨렸다. “어딜, 자식이!” 쉰다섯 명의 울프들 중, 민첩하기로는 던멜보다 한 수 위인 에릴만 말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바람에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바닥을 구르는 탄력을 멈추지 않고, 단검 두 자루를 뽑았다. 그리고 그대로 모즈들의 발목을 후두두두둑 끊어놓았다. 그렇게 울프 기사단의 돌격 사이에 끼인 모즈들은 그 숫자가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모조리 쓸려나갔다. “내가 울프의 한 명이었으면서도 그걸 몰랐다니......” 로핀은 후배들의 돌격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울프 기사단이 아란티아의 축복에 보호 받는 게 아니라, 울프 기사단 그 자체가 아란티아의 축복인 거야.” 빅터도 그 광경을 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모즈들을 직접 지휘해야겠군.” “어딜 가려고? 넌 나랑 마무리 지어야지.” “널 죽이고 간단 소리야, 물론.” “못 간다, 빅터.” 지금까지와 달리 로핀이 먼저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빅터는 움찔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로핀의 공격권 안에 들어와 있어 피할 수가 없었다. “십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넌 항상 나보다 강했다. 그래, 차기 여왕 수호 기사로 지목 받은 하얀 늑대보다 강했다 그거다. 그런데 왜 네가 지는지 알아? 난 항상 마지막 기술은 안보여 줬거든.” 십 년 전 그때는 그란돌을 흉내낸 기술로 그의 팔을 베었다. 그리고 지금은 로핀이 홀로 십 년 동안 연습한 기술을 썼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기술이었다. 빅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 품 안으로 뛰어드는 로핀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로핀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상대에게 찔리는 걸 전제로 한 기술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로핀의 칼은 밑에서 솟구쳐 빅터의 턱을 뚫고 머리 속 뼈를 깨드리며 뒤통수에서 빠져 나왔다. 빅터의 눈이 크게 커졌다. 보이지도 않는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 검은 빅터의 눈에 보이지 조차 않았다. “숨기고 있을 만한 기술이지, 자식아?” 빅터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옆으로 허물어졌다. 로핀은 비틀거리다가 꼿꼿이 섰다. 그리고 옆에서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제이메르에게 말했다. “가만있지 말고 와서 좀 도와다오.” 제이는 허둥지둥 달려가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도움을 거부하고 자기 배에 박힌 칼을 잡으며 말했다. “뽑아.” “안됩니다. 출혈이 너무 심해져요.” “뽑으라면 뽑아. 그리고 빅터 턱에 박힌 것도 뽑아와라.” 제이는 도저히 로핀의 배에 박힌 칼을 뽑지 못하고, 우선 빅터에게 박힌 칼을 뽑아 로핀의 손에 쥐어주었다. 로핀은 제이의 손을 잡아 자기 배 쪽으로 가져갔다. 피는 아직 많이 나오지 않았다. “뽑아.” 제이는 거부할 수 없었다. 천천히 뽑으면 더 고통스러운 걸 알기에 제이는 한 번에 깨끗하게 뽑아냈다. 로핀은 가늘게 떨며 제이의 팔에 기대었다. “제이메르....... 구아닐이......, 어디 있나?” 그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북쪽, 그러니까 저 쪽에 있습니다.” 제이가 그의 손을 잡아 방향을 가리켜준 후에야 그는 구아닐을 보았다. “뭘 하고 있나?” “날개를 펼치고 모즈들의 진영으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동쪽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착지해 울프 기사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아닐의 포효가 들려왔다. “울프들은?” “이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우리 앞을 지나쳐 구아닐 쪽으로 갈 것 같습니다.” “아즈윈은? 보이나?” 제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쪽에서 몰려오는 울프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울프 기사단의 돌격에 정신이 팔려 뒤에서 다가오는 아즈윈을 발견하지 못하는 모즈들 수십 마리가 그녀의 칼에 잘려나갔다. 아즈윈은 처음에는 자세를 낮춰 달리다가 이내 몸을 곧게 펴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방향으로 뛰었다. 달려오는 첫 번째 말에는 쉐이든이 타고 있었다. 그는 아즈윈을 발견하고 속도를 늦추려 했다. 하지만 아즈윈은 소리쳤다. “멈추지 마. 내가 지휘할 테니 계속 달려가.” 쉐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의 속도를 올렸다. 아즈윈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뒤에서 달려오는 실디레에게 외쳤다. “실디레, 같이 탄다! 물러나.” 실디레는 즉시 고삐를 놓고 안장 뒤쪽으로 몸을 밀었다. 그리고 아즈윈은 달려오는 말의 목을 잡고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아 안장에 올라탔다. 그녀는 고삐를 쥐고 제일 먼저 뒤따르고 있는 울프들을 살폈다. 실디레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들었다. “너 뺨 왜 그래?” 아즈윈이 물었다. “다쳤어.” “남자가 싫어한다, 그런 거?” “상관없어.” 아즈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술 가르쳐 줄 테니까 나중에 같이 마시자.” “술?” 실디레는 이 와중에 그녀가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아즈윈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 소리 쳤다. “내가 지휘한다. 포메이션 3번!” 울프들이 줄을 지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 순간 모즈들의 부대 사이를 뚫으며 울프들의 검과 창이 또 한 바탕 폭풍처럼 치고 지나갔다. 아즈윈은 얼굴에 튄 피를 닦을 여유도 없이 외쳤다. “알렉스, 옹고르, 말라, 콜디. 포메이션 7번으로. 좌측으로 들어가 모즈들을 공격하라. 알렉스가 지휘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네 기의 기사가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쉐이든, 닐테, 파렐. 7번 우측 포메이션. 쉐이든이 지휘한다. 스나다스, 배롤. 후방으로 빠져 쉐이든 조를 보호하라.” 그녀의 명령을 들은 기사들이 빠져나가면 바로 다른 기사들이 달려왔고, 그들 역시 아즈윈의 명령을 듣고 긴 대열에서 빠졌다. 그렇게 그녀의 옆에는 실디레, 푸티에르, 코엔, 자이논 밖에 남지 않았다. 실디레가 외쳤다. “우린?” “나머지는 드래곤 사냥하러 간다.” 아즈윈이 외쳤다. 멀지 않은 전방에 로핀이 보였다. 그는 아무 부상 없이 당당히 서서 자신의 칼, 베나 에실크를 들고 있엇다. 그의 뒤로 제이메르가 있었고, 쓰러진 빅터도 있었다. ‘이길 줄 알았어요.’ 아즈윈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칼을 수직으로 던졌다. 기다리고 있던 로핀도 베나를 수직으로 던졌다. 두 자루 검이 허공에서 교차하며 베나는 아즈윈의 손으로, 아즈윈의 검은 로핀의 손으로 들어갔다. 울프 기사단이 지나가자마자 로핀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이가 같이 주저않아 그의 부상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로핀은 이미 부상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는 아즈윈의 칼을 제자의 손이라고 생각하는 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이메르, 싸우는 장면을 계속 설명해다오. 앞이 잘 안 보이는구나.” 자신의 말솜씨 없음이 이렇게 증오스러울 때가 없었다. 제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즈윈이 구아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에 세 명이 따라가고 있군요.” “울프들의 대열이 어떻지?”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아닐을 중심으로 한 진영을...... 맙소사. 천 마리 정도 되는 모즈들과 또 구아닐이 울프들 오십 명에게 포위당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동시에 포위망 안으로 뛰어드는군요. 모즈들이 당황해서 흩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떨어진 상태에서 저렇게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모즈들은 그냥 평원에서 허둥되는 맹수들일 뿐이야. 더 이상 군대가 아니지. 내가 말했잖아. 빅터 하나면 죽이면 이 전쟁 끝이라고.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빅터가 없으면......, 구아닐도 무용지물이야. 그, 그런데 카, 카셀은 어디 있나?” 제이는 언덕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울프의 상징을 휘날리고 있던 카셀은 거기 없었다. “안보입니다.” “가야 할 곳으로 간 거겠지. 내 몸을 좀 더 잘 세워라. 시야가 조금 회복되는 것 같다. 내가 직접 보고 싶어. 역시 내가 맷집 하나는 끝내주지.” 제이는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배를 뚫은 상처에서는 피가 벌컥벌컥 터져 나오고 있었다. 꽂힌 칼을 뽑지만 않았어도 어느 정도 버텼을 텐데, 그는 제자가 자기 때문에 말을 멈추지 않게 하려고 걸 뽑아버린 것이었다. 몸이 점점 차가워졌음에도 로핀은 눈을 떼지 않았다. “아즈윈, 네가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일 차례다.” 22. 테일드의 저주 “라틸다, 너에게도 선택권을 주겠다.” 크나딜이 쥐고 있는 분노의 탑 한 부분이 부서졌다. 탑을 올려다 보는 붉은 드래곤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크나딜.” 라틸다는 얼른 대답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 생명의 절반을 태워버려도 좋겠느냐?” “그걸로 이 전투의 아주 하찮은 부분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태워버리십시오. 절반이 아니라 그 이상을 태워도 좋습니다. 마지막 순간 로일의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는 수명만 남겨주셔도 좋습니다. 아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으니, 부디 이 전투에 제 힘을 보태세요.” “너는 가장 중요한 방패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네가 기둥이 되어줘야겠다.” 크나딜의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분노의 탑을 휘감았다. “라틸다, 창가에서 떨어져 앉아라. 지금부터 너에게 산고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자리에 앉자마자, 라틸다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녀의 몸은 허공에 떠올랐고, 입으로는 검은 기운을 토해냈다. 그녀는 호흡을 컥컥 내뱉었다. 코와 눈과 입에서 흐른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갔으나, 그녀는 그걸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분노의 탑이 통째로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산산이 조각나 무너져 버렸다. 크나딜은 탑이 있는 자리에 자신이 섰다. 그리고 허공에 뜬 라틸다의 몸을 두 손으로 감쌌다. 라틸다는 기절하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그녀의 몸 주위에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이제는 크나딜의 몸 주위로 맴돌았다. “인내하라. 이제 나에게도 너의 아픔이 전해지리라.” 크나딜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드래곤의 몸에서 붉은 빛의 기둥이 하늘로 뿜어져 올라갔다. 드래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하늘을 울리고 공기를 울렸다. 빛의 기둥은 하늘에서 꺾여 축복의 탑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구아닐의 꼬리에 무너지고 남은 자리에 내리 꽂혔다. 인간과 모즈들의 격전이 벌어지고 탑 주위에 붉은 빛이 폭발했다. 크나딜의 목소리가 탑 옆에 쓰러진 가넬에게만 들렸다. [일어나라, 레-가넬. 영겁을 이어나갈 너의 생명 절반을 태워 해야 할 일이 있다.] 가넬은 대답 없이 기어가 무너진 탑의 자리에 섰다. 붉은 빛에 가넬의 황금빛이 섞여 또 하나 빛의 기둥을 만들었다.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간 빛은 로크 상공을 가로질러 아로크의 탑으로 떨어졌다. 빛을 잃은 아로크의 탑에 쳐다보기 힘든 강한 빛이 감돌았다. 쓰러진 타냐 옆으로 익숙한 손길이 다가와 어깨를 두들겼다. 타냐는 힘겹게 뜬 눈으로 돌려다보았다. 테일드였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어나야지, 공주님.” 타냐는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물러나라....... 자랑이라도 하러 왔는가? 좋다, 네가 이겼다. 그러니 아로크의 탑으로 가라. 거기에서 내, 마, 마지막 힘을 너에게.......” 타냐는 그 뒷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테일드는 혀를 차며 말했다. “헛것만 가르쳤구나, 내가.” 그는 타냐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누누이 말했잖니? 선택은 네 맘이고, 그게 이기적이라면 그냥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 밥맛이지만 너처럼 착한 아이는 그렇게 하는 게 나아. 지금도 그래. 넌 대체 누굴 걱정한 나머지 몸을 사리고 있는 게냐?” 멍한 의식으로는 도저히 이 다정한 말이 악인지 선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타냐는 당신의 진짜 정체가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테일드는 이미 그 질문까지 알고 있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두들겼다. “내가 지금 세상을 구할 조언을 하든, 세상을 파멸시킬 유혹을 하든 결정은 네가 내리는 거야. 우물을 퍼낼 때가 왔다. 일어나라, 타냐.” 타냐는 갑자기 주위를 감싸는 붉은 빛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렵게 몸을 일으켜 정좌를 했다. 그녀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눈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테일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아, 참 그리고! 카셀이 돌아왔다.” 테일드의 환영이 사라졌다. “마스터.......” 타냐는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아로크의 탑을 감싸는 황금빛과 붉은빛이 또 한 번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 로크의 남쪽 성문 밖으로 뻗어 날아갔다. 그리고 정확히 회색 로브의 마법사 얼굴을 때렸다. 테일드의 몸이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줄에 얽힌 듯 사지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강하게 저항하자, 공기가 진동하며 주변에 있는 성벽이 깨져 나갔다. 또 바닥이 울리며 투석기 공격으로 흔들흔들하던 집이 무너져 내렸다. 당황한 그는 또 한번 몸을 폈다. 천둥이 내리치는 굉음과 뜨거운 열기가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 빛의 그물을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아이린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방 알았다. 8년 전 얼음성에서 테일드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묶었던 바로 그 마법이었다. 물론 그때보다 훨씬 커다란 빛이었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베나 에사르크를 바닥에 꽂았다. 그녀가 마법의 주문을 외우는 순간, 테일드의 얼굴을 한 마법사가 명령했다. “그란돌, 저 년을 베어버려라.” 그란돌은 즉시 아이린에게 다가갔다. 루밀이 달려 나갔고, 동시에 던멜이 단검을 집어 던지며 그란돌의 선제공격을 막았다. 던멜은 루밀보다 뒤늦게 달려갔음에도 더 빨리 그란돌과 맞붙었다. 세 명의 하얀 늑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칼을 부딪쳐ㅆ다. 금속끼리 맞물리는 불꽃이 번쩍였고, 세 사람의 발에 채인 자잘한 자갈 파편들이 튀어나갔다. 아이린을 죽이려는 자와 아이린을 보호하려는 자의 싸움은, 북쪽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모즈들의 마지막 전투만큼이나 처절하게 이어졌다. “포기해라, 아이린. 그 칼로 나를 벤다 해도 일시적이다.” 차라리 비열한 얼굴로 말했으면 비웃어주면 그만이었으나, 테일드는 마지막까지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상관없어. 이번에는 벨 거다.” 아이린의 주문으로 베나 에사르크의 붉은 빛이 점점 커졌다. 테일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북쪽에서 싸우는 로핀과 여기 있는 너, 두 사람의 지혜를 합쳤다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알지 못하니? 왜 이 전장에 카구아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아, 넌 카구아가 뭔지 모르지?” 테일드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 거친 웃음소리에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성벽의 남은 기둥이 무너졌고, 동시에 망루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늘의 구름마저 거품처럼 들끓었다. “이번 전쟁은 루티아의 공격을 그대로 복사한 전투였다. 난 여기에서 모즈들 5만을 모두 잃어버려도 상관없었다. 지금 남쪽에서 또다른 5만의 모즈들이 올라오고 있다. 내일 아침쯤 도착할 거다. 아니, 그 녀석들까지 전멸 당해도 좋아. 상관없다. 심지에 네가 베나로 나를 베어도 상관없다. 잠깐 시간이 지체될 뿐이야. 내 영혼이 거할 또 다른 육신만 찾으면 그만이지. 그 모든 걸 희생시켜서 뭘 얻으려 했냐고? 당연하잖아, 아이린. 저 멍청한 캡틴 울프 녀석이 여길 구하겠답시고 쓸데없이 데려온 울프 기사단이 비워놓은 곳으로 가는 거지.” 테일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그가 보여주는 현재의 모습이 아이린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곳은 화이트 게이트였다. 새나디엘 여왕은 화이트 게이트의 망루 위에 있었고, 퀘이언은 그녀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는 날개 없는 네 마리 검은 드래곤이 있었다. 아이린은 비명을 질렀다. “안돼!” “내가 이겼다, 아이린. 로크는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내가 노리는 건 한 나라도 아니었고, 드래곤도 아니었어. 새나디엘 한 명이었다. 카셀도 내가 이용했다. 나는 녀석이 울프 기사단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길 빌었어. 캡틴 카셀! 인간을 멸망으로 이끈 위대한 영웅이여!” 베나를 쥔 아이린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붉은 빛은 테일드를 벨 정도로 강하게 뭉쳤건만, 정작 그녀는 그걸 뽑아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다. 루밀이 그란돌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어제 다친 상처까지 터지며 그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던멜도 자신의 검을 모두 잃었다. 맨손으로도 싸울 수 있는 그였으나, 그란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직도 루티아에서 입은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그의 힘으로는,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무리를 한 것이었다. 던멜은 그란돌의 마지막 공격을 막았으나 그만 무릎을 꿇었다. 잘려나간 손가락에서, 찢어진 뺨에서, 부러진 어금니에서 흐르는 피가 금방 바닥을 적셨다. 그란돌은 두 사람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조차 않고 등을 돌려 아이린에게 걸어갔다. 그란돌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베나를 뽑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한 눈으로는 그란돌을, 한 눈으로는 퀘이언을 보고 있었다. “미안해, 퀘이언.” 베나 실크, 여왕 수호 기사의 검이 이렇게 커다란 적을 맞이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퀘이언이라 한들 드래곤 네 마리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퀘이언은 지금껏 아이린조차 보지 못한 엄청난 힘으로 드래곤의 꼬리를 베고, 날개를 베고, 뛰어올라 이빨을 깨뜨렸다. 그럼 힘조차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불길에 휩싸인 그의 몸은 성문에 부딪쳐 무너진 돌 더미에 깔렸다. 그리고 네 마리 카구아는 망루 위에 홀로 선 작은 여인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새나디엘.” 아이린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고개를 드시오.” 그녀와 그란돌 사이에 막아선 사람은 놀랍게도 집정관 루에머스였다. “당신이 마지막 인간의 힘이라면, 희망이라면, 마법이라면....... 마지막까지 당당하시오. 마지막까지 저항하시오.” 아이린의 눈이 크게 커졌다. 루에머스는 아이린도 아니고, 자기 앞에 선 그란돌도 아닌, 쳐다보지 못할 공포의 군주를 바라보며 외치고 있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도 로크의 정신마저 앗아갈 수는 없소. 천 년 전에 무너졌어도 다시 일어난 것이 아로크였고, 십 년 전에 무너졌어도 다시 일어난 것이 가넬로크였고. 이 곳은 아크랜드의 희망이 마지막까지 살아 있어야할 땅이오. 고개를 드시오. 고개를 들고 마지막까지 싸......!” 그란돌의 검이 그의 팔을 베었다. 밑으로 떨어진 팔을 내려다보며 루에머스는 비틀거리며 물러났으나 쓰러지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로 고통을 인내하다가 말했다. “싸, 싸우시오, 아이린!” 마치 의도라도 하듯 그란돌의 검은 아까 한 번 베었던 팔의 나머지 부분을 베었다. 루에머스는 결국 비명을 질렀고, 그란돌의 검은 또 달린 부분의 어깨 죽지를 내리쳤다. 루에머스의 피가 아이린의 얼굴로 터졌다. 아이린은 눈도 감지 않고 그 피를 얼굴로 받아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란돌, 또 한 번 하얀 늑대와 하얀 늑대의 싸움을 해보자 그겁니까?” 쓰러진 루에머스를 넘어 다가온 그란돌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베나를 지금 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모아온 단 한번의 칼질은 그란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제발, 메이루밀, 던멜. 아무나 일어나 그란돌을 조금만 막아다오.’ “제가 하겠습니다, 마스터 아이린.” 그녀의 속마음에 대한 대답인지, 아까 그란돌에게 했던 말을 받아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뒤에 선 로일이 대답했다. “하얀 늑대와 하얀 늑대의 싸움은 아직 저에게 달려 있습니다.” 구아닐의 검은 불길이 울프들을 향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애꿎은 모즈들만 그 불길에 휩싸였을 뿐, 울프들은 미리 방향을 알고 피해 있었다. 그들이 헤집고 다니는 자리마다 모즈들의 시체가 줄을 이었고, 지휘관을 잃은 모즈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저 괴성만 지르다 달려오는 말 위로 도끼나 칼만 집어 던졌다. 그러나 그걸 맞아줄 울프들은 아니었다. 그때 전장의 한쪽에서 모즈들의 정예를 부수고 드래곤 기사들이 돌아왔다. 그들 중 하나가 아즈윈의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울프 기사단이 와주었군. 우리는 뭘 하면 되지?” 아즈윈은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말했다. “구아닐의 시선을 괴롭혀라. 내가 녀석을 잡겠다.” 그 기사는 동료들에게 칼로 신호를 보내고 아즈윈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구아닐은 계속 불을 뿜으며 모즈와 울프들을 동시에 공격했다. 구아닐의 어깨에 타고 있는 러스킨이 쓰는 불꽃 마법에 벌써 일곱 명 째 울프가 나가떨어졌다. 드래곤 기사단도 그의 마법에 제대로 말을 달리지 못했다. 아즈윈은 구아닐의 바로 옆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코엔, 녀석의 움직임을 잡아라.” 기다렸다는 듯 코엔은 쇠사슬을 집어 던져 구아닐의 목을 휘감았다. 구아닐은 그 가는 쇠사슬이 목을 감자 그걸 잡아챘다. 코엔은 물론이고 코엔을 태우는 말까지 들썩하고 움직였다. 아즈윈의 신호에 맞춰 푸티에르도 쇠사슬을 던져 날개를 묶었다.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무게는 별 거 아니더라도 위로 날아오르려는 탄력을 받지 못하니 구아닐은 균형을 잃었다. 거기다 자이논이 던진 창이 벌써 세 개째 날개 끝에 박혀 있어, 날갯짓에도 방해를 받았다. “실디레, 올라가.” 아즈윈이 외쳤다. “뭘 하면 돼?” “저 드래곤 위에 있는 마법사를 떨어뜨려라.” 실디레는 달리는 말에서 뛰어올라, 코엔과 구아닐의 목 사이에 걸린 쇠사슬을 붙잡았다. 그녀는 쇠사슬에 매달린 채로 한 바퀴 돌더니, 그 탄력을 그대로 이어가 쇠사슬 위를 밟고 달려 올라갔다. 중간에 구아닐이 크게 뛰어오르는 바람에 코엔과 푸티에르의 말이 들썩였으나 쇠사슬이 끊어지지도 않았고, 쇠사슬을 놓치지도 않았다. 날지 못하는 구아닐은 달리기 시작했다. 두 울프들도 악착같이 말을 달려 쫓아갔다. 그 사이 실디레는 드래곤의 등 위로 타고 올라갔다. 위에 있는 마법사 러스킨은 그렇게 흔들리고 있는 데도, 차분하게 자세를 잡고 수염만 휘날리고 있었다. “의미 없는 짓이다, 어린 울프의 기사여.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 한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죽이지는 못한다.” 실디레는 검은 비늘에 손을 짚어 균형을 잡으며, 소리쳤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뭐야? 안 들어 놔서 몰라. 그리고 그런 거 일일이 계산하면서 싸우나?” 실디레는 흔들리는 드래곤의 등 위를 달려가 칼을 휘둘렀다. 러스킨은 울프의 기사가 휘두르는 빠른 검을 지팡이로 쉽게 막으며 불꽃의 마법을 뿌렸다. 구아닐의 등 위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어리석은! 검으로 마법을 이길 셈이냐?” 그 불길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러스킨은 순간 목덜미의 서늘한 감각에 손을 짚었다. 실디레는 이미 러스킨의 목을 치고 지나간 후였다. 러스킨은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내 죽음이 이런 식이었다니. 이거면 되는 거냐, 테일드......?” 늙은 마법사는 구아닐의 등에서 떨어져 달리는 발아래 짓밟혔다. 실디레는 구아닐의 어깨를 짚고 칼을 거꾸로 쥐었다. 하지만 갑옷처럼 튼튼하게 싸여있는 드래곤의 비늘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뚫을 자신이 없었다. 그때 그녀는 드래곤의 뺨에 길게 나 있는 검상을 발견했다. 드래곤끼리의 전투로 긁혀진 다른 상처는 벌써 아물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몇 군데 벗겨진 비늘은 아물지 않고 있었다. 누가, 어떻게, 무슨 힘으로 저런 무지막지한 상처를 만들어냈는지 모르지만, 저곳은 충분했다. 구아닐은 목을 묶은 쇠사슬에 신경 쓰느라 실디레는 신경 쓰지 못했다. 그는 달리는 속도를 더 높이더니 결국 코엔과 푸티에르의 쇠사슬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날개를 강하게 퍼덕이며 공중으로 치고 올라갔다. 실디레는 그 뺨에 칼을 힘껏 처박았다. 날려고 몸을 띄운 상태에서 얼굴에 칼을 찔린 구아닐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실디레는 크게 요동치는 구아닐의 몸에서 튕겨나가 허공을 날았다. 실디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그때 한 마리 말이 지나가며 정확히 그녀의 몸을 받아냈다. 프란츠였다. “괜찮나?” 실디레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타이밍 죽이네.” “이 정도면 얼굴에 상처 낸 빚은 없던 걸로 하지?” “그거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어?” 실디레는 오히려 황당해하며, 프란츠의 몸에 매달려 말 뒤로 옮겨갓다. “구아닐 쪽으로! 아즈윈을 보호해야 해.” “알았다.” 구아닐은 처박힌 몸을 털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붉은 빛을 뿜는 검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구아닐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그 빛은 베나 에실크의 칼날이었다. “선생님께서 하실 일을 대신하러 왔다!” 아즈윈은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그대로 구아닐의 이마에 베나 에실크를 처박았다. 구아닐은 몸부림치며 튕겨 올랐으나, 아즈윈은 떨어지지 않았다. “크아아악~!” 구아닐은 자신의 이마에 붙은 아즈윈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아즈윈은 끝까지 버티더니 오히려 주먹으로 구아닐의 눈동자를 후려쳤다. 구아닐은 머리에 아즈윈을 단 채로 크게 몸부림치다가 도로 바닥에 턱을 부딪쳤다. 베나 에실크에서 시작된 붉은 빛이 구아닐의 머리를 감싸더니 금방 몸 전체를 휘감았다. 구아닐은 꿈틀댔으나, 짓누르는 아즈윈과 에실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날개만 퍼덕였다. 아즈윈은 베나 에실크를 잡고 있던 손을 떼더니 등 뒤에 차고 있는 게랄드의 도끼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건 게리 몫이다.” 그녀는 꿈틀대는 구아닐의 긴 목을 도끼로 내리쳤다. 구아닐의 마지막 단말마가 전장을 크게 뒤흔들었다. 먼 곳에서 제이의 몸에 등을 기대고 앉은 로핀은 드래곤의 비명만 듣고도, 일어난 모든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어떠냐, 친구들? 대륙 최강의 기사들만 모인 저 모든 울프들을 지휘하는 리더십과 드래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필드를 가득 채우는 저 뜨거운 가슴과 지치지 않는 강인함. 거기에 끝내주는 외모까지. 후후후, 봐라. 누가 나보다 더 멋진 제자를 키웠느냐?” 로핀은 흐뭇하게 웃으며 천천히 팔을 늘어뜨렸다. “내기는......, 내가 이겼다.” 제이메르는 차가워진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친구분들께 전하겠습니다, 마스터 로핀. 당신의 승리입니다. 이 전투 전부가 당신의 승리입니다.” 로일과 그란돌은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며 물러서지 않았다. 다급해진 테일드가 소리쳤다. “뭘 하는 거냐, 그란돌? 한 번 베었던 녀석을 상대로 뭘 망설이나?” 아이린이 대답 없는 그란돌 대신 대꾸했다. “네 썩은 영혼으로는 보이지 않겠지? 조종당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란돌의 영혼은 맑고 깨끗하다. 그러니 보이는 거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하얀 늑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이는 거다.” 정작 로일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 아이린의 뒤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그란돌의 호흡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란돌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날 이길 수 있겠나?’ “이제 당신에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 그란돌.” 로일은 입을 열어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습니다.” 그 순간 그란돌은 살짝 미소 지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에게 조종당하고 있던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고 있었다. 아이린도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완전히 사로잡히신 게 아니었나?’ 그 순간 지붕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건 테일드 하나 뿐이었다. “로일, 칼을 받아라!” 베논을 타고 수많은 로크 건물들의 지붕 위를 질주해온 카셀이었다. 그는 즈토크 워그를 로일에게 던졌다. 그러나 로일은 그쪽을 보지도 않았고, 그란돌 역시 신경쓰지 않았다. 먼 거리를 나는 칼은 카셀이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즈토크 워그는 스스로 빛을 내더니 방향을 돌려 로일 쪽으로 날아갓다. 로일은 들고 있던 칼을 놔버리고 날아오는 보검을 잡아챘다. 눈부신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걸 기점으로 로일과 그란돌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린의 동체 시력으로도 보지 못할 정도의 빠른 공격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터졌다. 언제나 아란티아에 한 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하얀 늑대의 검술은 상대를 단 일격으로 죽이는 궁극의 기술이었다. 그란돌을 보고 아이린이 배웠고, 아이린은 퀘이언을 가르쳤고, 퀘이언은 금방 아이린을 능가했다. 그러나 로일과 그란돌은 퀘이언보다 강하고 빨랐다. 너무나도 똑같은 기술에 둘 다 튕겨나갔고, 아이린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돈 두 사람의 기술이 또 한 번 그녀의 앞에서 부딪쳤다. 그러나 아이린은 오직 눈앞에 묶여있는 테일드 한 명만 노려보았다. 메이루밀은 고개만 들어 아이린 옆에서 싸우는 로일을 보고 있었다. 아이린과 눈이 마주친 루밀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녀석의 검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아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나 에사르크의 붉은 빛이 칼날에 응축되어 불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로일의 검은 그란돌의 배에 꽂혀 있었다. 그란돌의 칼은 부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일격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는 기술에 두 번째는 있을 수 없었다. 하물며 세 번이나 써야 하는 검술에서 그란돌의 다리는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로일은 그 세 번째 검을 휘둘렀다. 이가 부서지도록 깨물고, 근육이 찢어져도 멈추지 않았고, 뼈가 부러져도 팔을 움직였다. 완전히 똑같은 기술끼리의 격돌에서 승부를 낸 건 그 차이였다. 다가오는 아이린을 보고 테일드는 소리 질렀다. “그란돌, 나를 보호하라. 너는 죽지 않는 나의 인형이다. 그 따위 짐승의 칼에 굴하지 말고 일어나 나를 보호하라.” 그란돌은 로일의 검에서 빠져 나오려 했으나, 로일은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보검 역시 그란돌을 놔주지 않았다. “구아닐, 돌아와라. 돌아와서 나를 보호하라!” 그러나 그 순간 구아닐은 실디레에게 목덜미를 맞아 바닥에 추락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테일드의 앞에 서서 베나 에사르크를 얼굴 앞에 세웠다. 테일드는 눈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 질렀다. “소용없는 짓이다.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나를 죽일 수 없으며.......” “모든 죽어있는 존재가 어쩌고저쩌고는 그만 닥치고, 이제 그만 내 남자에게서 떨어져!” 아이린의 검이 테일드의 배에 꽂혔다. 붉은 섬광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뚫고 무너진 성문을 지나 로크의 남쪽 평원까지 관통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비명이 아이린은 물론이고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과 로크 사람들의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거의 동시에 아즈윈의 도끼에 구아닐의 목이 떨어져나갔다. 축복의 탑을 받치고 있던 가넬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고, 분노의 탑을 지키던 크나딜도 힘을 잃고 쓰러졌다. 라틸다의 몸도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테일드의 손이 천천히 치켜 올라갔다. 한 순간 자기를 묶은 봉인이 풀리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가는 손가락 사이에 검은 힘이 응축되었다. “아직 운은 내 편이군.” 테일드는 왼손으로 아이린의 목을 움켜쥐고 검은 발톱으로 만들어진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8년 전에도 이런 식이었지, 아마?” 찌르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힘을 써버린 아이린은 그 손을 보고도 피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상황은 8년 전과 거의 같았다. 그때도 베나를 찔러 넣었음에도 저 마지막 공격을 막지 못해 얼음 성의 군주를 놓친바 있었다. 그때와 다른 건, 지금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조차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암살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던멜의 검이 테일드의 오른손을 베고 지나갔다. 베어나간 팔뚝이 바닥에 떨어지며, 동시에 던멜도 바닥을 굴렀다. 그 베나의 붉은 빛이 완전히 테일드의 몸을 감쌌다. 몸부림치는 회색 로브의 마법사에게서 검은 연기가 빠져 나왔다. 검은 연기는 형체를 추기 시작하며 테일드의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꿈틀대는 검은 연기는 곧 저주 섞인 말을 토해냈다. “짧은 평화를 이어 가거라. 이미 화이트 게이트는 무너졌다. 너희들의 싸움은 이제야 시작되었노라. 흐흐흐, 그 동안 수고 많았다. 테일드,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여. 이제 늙어빠진 이 몸을 내주마.” 테일드의 몸은 천천히 수그러져 아이린의 품에 안겼다. 아이린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테일드를 끌어안았다. 테일드의 맑은 눈동자가 아이린을 향했다. 그리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해줬어, 아이린....... 늦어서 미안해.” 아이린은 빙그레 웃으며 8년 만에 돌아온 연인을 꽉 끌어안았다. “잘 왔어, 테일드. 뭘 하다 이제 왔어?” 테일드는 빙그레 웃었다. “스승님을 적의 편에 던져주었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구아닐을 자유롭게 풀어주도록. 그리고 아란티아의 가장 커다란 힘이 구아닐을 죽일 수 있도록 유도했어.” 테일드는 천천히 말했다.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 새 몇 개월 전 러스킨에게 하는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루티아를 배신하셔야 합니다, 마스터. 공포를 받아들이세요. 로크의 축복의 탑이 무너질 겁니다. 그러니 사악한 편으로 완전히 돌아서십시오. 당신이 저들 편에 서서 전력을 다해 싸워주면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자기 옆에 있어야 할 암흑의 힘을 놓쳐버릴 겁니다.’ 그보다 더 과거의 시간에 테일드는 또한, 옛 친구를 찾아 가넬로크로 향하는 은퇴한 수호 기사 그란돌에게 이야기 했다. ‘그란돌, 내일 저의 육체를 빌린 마법사가 당신의 육체를 빼앗을 겁니다. 빼앗도록 두십시오. 그럼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친구를 죽이게 되겠지만, 대신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러스킨과 그란돌의 배신은 테일드의 육체를 가진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한 말이 아니었다. ‘진짜 테일드’가 한 일이었다. 회색 로브의 마법사가 말한 그대로, 그는 테일드인 동시에 죽지않는 자들의 군주였다. 아이린은 뭐가 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테일드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내버려두었다. 심지어 어쌔신 마스터 칼스텐에게 아란티아의 여왕을 암살하라고 할 때도 그는 침묵했다. “테일드, 뭘 한 거야? 대체 8년 동안 저 괴물의 영혼 속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8년 전, 아이린의 베나 에사르크에 맞아 달아나던 얼음 성의 군주는 얼마 가지 못하고 눈 내리는 평원에서 테일드에게 잡혔다. 검은 형체만 남은 암흑의 군주는 지팡이를 들이대는 테일드를 향해 말했다. “나를 죽여 봐야 소용없다. 아니, 네가 살아있는 존재인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다. 십 년이건 백 년이건 지난 후에 나는 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때 너 같은 위대한 마법사가 있을까? 천 년 전에는 운좋게도 나디엘이 있었고, 지금은 운 좋게도 네가 있지만, 또 다른 백 년 후에는 어떨까?” 암흑의 군주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테일드는 지팡이를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 나를 받아들여라. 내 힘을 네 육체 안에 가두어 너와 함께 증발시켜라. 그럴 자신이 없나? 네가 아니면 어떤 마법사도 하지 못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그냥 나를 죽이라. 네 연인도 함께 죽을 것이다.” “무슨 소리냐?” “묵은 육체를 버릴 때마다 쓰는 마지막 방법이었지. 내 저주에 얽혀 내가 죽는 순간 나와 접촉한 모든 인간들이 나와 함께 죽으리라. 론타몬의 익셀런 기사들, 나를 신으로 믿고 따르는 멍청한 교인들, 내 명령에 따랐던 론타몬의 왕실, 가넬로크의 의회, 너의 연인, 너의 두 친구. 모두 나와 함께 죽으리라.” 테일드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당장 내가 네 깨끗한 영혼에 들어가면,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므로 사라진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은 네 마법의 눈이 더 잘 알 것이다. 해볼 만하지 않은가?” 테일드는 천천히 자신이 빠져 나온 얼음 성을 바라보다가 긴 생각에 빠졌다. 로브가 눈에 덮이고, 조각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을 쯤에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의 기운은 모든 마법 장벽을 벗어버린 테일드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곧 테일드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암흑의 군주가 표면으로 올라왔다.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테일드의 입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그게 가능하리라 보았는가? 정말로 내 힘을 고작 인간에 불과한 네 힘으로 증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이제 끝이다. 이번 세대에서 나를 막을 유일한 인간의 힘이 사라졌다. 이제 새나디엘 하나만 제거하면 끝이다. 아크랜드와 하늘 산맥에 마지막 죽음의 힘이 깃들 것이다.” 그의 웃음소리가 평원을 가로질렀다. 아이린의 질문에 테일드는 빙그레 웃으며 힘없이 대꾸했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내가 알고 있고, 내가 하는 일은 모두 그가 알고 있었다. 단 한가지만 숨겨뒀지. 그것은,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그를 죽일 수 없고, 모든 죽어있는 존재는 그의 조종을 받는다는, 자기 몸에 건 축복과도 같은 저주를 뒤바꾸는 일이었어. 그 일에 8년이나 걸렸고, 그 일에 너무나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이제 됐다, 아이린. 이제 됐어.......”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그란돌의 배를 찌르고 있는 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죽어있는 존재 중 가장 위대한 인간의 전사를...... “이제 놓거라, 로일 울프.” 그란돌은 천천히 로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일은 부상을 참고 칼을 찌르고 있느라 이제 모든 힘을 다 소진했다. 그란돌은 한번 더 말했다. “퀘이언이 아주 잘 가르쳐뒀구나. 이제 내가 맡겨라.” 그란돌은 자신의 배를 찌르고 있는 칼에서 로일의 손을 떼고 직접 배에서 칼을 뽑았다. 그의 손 안에서 즈토크 워그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테일드의 머리 위에서 형체를 갖추며 천천히 물러나는 그 검은 형상을 향해 달려갔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는 달려오는 그란돌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멈춰라, 너는 나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명령은 보검의 빛을 뚫지 못했다. 아이린의 품에 안겨 있는 테일드는 힘없이 말했다. “단 하나 ‘죽어있는 존재’가 그대를 죽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네 영혼에 갇힌 채로 뒤바꾼 너의 저주다. 아니, 나의 저주다. 루티아의 그랜드 마스터 테일드가 목숨을 바꿔 완성한 저주다. 아아, 들어봐 아이린. 이 말은 8년이나 참았다가 하는 거야.” 테일드는 심지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죽어라,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 그란돌의 손 안에서 빛을 발하는 아란티아의 보검은 형체 없는 검은 연기를 뚫었다. 칼날은 연기 안에서 부서졌고, 동시에 하얀 빛이 주위로 터져 나왔다. 그 안에 빛의 형상을 갖춘 늑대 한 마리가 달아나는 연기를 물어뜯었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내는 비명이 로크의 하늘을 덮었다. 북쪽 축복의 탑을 뒤덮은 모즈들이 그 비명 소리에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비명은 가넬로크의 하늘을 덮었다. 로크로 진군해 오는 또다른 5만의 모즈들이 쓰러졌다. 그의 비명은 대륙을 훑으며 이 전투 후에 벌어져야 할 모든 저주를 뜯어냈다. 카모르트에도, 이로피스에도, 론타몬에도....... 그러나 테일드조차 그 마지막 비명에 마지막 마법이 섞여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네 마리 카구아는, 새나디엘을 죽일 때까지 나의 죽음 후에도 죽지 않으리라!’ 그의 저주는 아란티아의 블루 게이트를 지나, 그레이 게이트, 레드 게이트, 골드 게이트를 지나 화이트 게이트에 이르렀다. 새나디엘은 머나먼 동쪽에서 들려오는, 영원히 죽지 않을 존재가 죽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힘겹게 일어나는 퀘이언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다가오는 네 마리 카구아를 올려다보았다. “폐, 폐하. 피하십시오.” “아니, 퀘이언. 나 하나만 죽으면 이 전투는 끝이다. 녀석이 유치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마지막 순간 대륙 하나를 불태울 저주 대신 날 죽이는 마법을 택했구나. 다행이야.” 새나디엘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힘을 잃은 퀘이언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 주었다. “고마워, 퀘이언. 지금까지의 모든 수호 기사 중 네가 최고였단다.” 카구아의 검은 발톱은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새나디엘을 향해 뚝 떨어졌다. 퀘이언은 그 처참한 순간을 눈앞에 두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구아의 발톱은 새나디엘의 머리에서 몇 미터나 떨어진 허공을 긋기만 했다. 헛친 게 아니라 팔이 뒤로 끌려간 거였다. 아니, 팔이 끌려간 게 아니라 몸이 통째로 끌려간 것이었다. 아니...... 카구아 한 마리가 아니라 네 마리 모두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 중 두 마리는 공중에 딸려 올라가 두 동강이 나 갈기갈기 찢어졌다. 날개를 펼친 붉은 드래곤이 화이트 게이트 앞에 내려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몸체에 비하면 카구아 네 마리는 어른 앞에 선 어린아이였다. 붉은 드래곤은 꼬리를 휘둘러 이빨을 들이밀고 달려드는 카구아의 목을 후리쳐 부러뜨렸고, 마지막 한 마리는 불을 뿜어 태워버렸다. 베나 실크를 떨어뜨리며, 퀘이언이 물었다. “여왕이시여, 이건 또 어떤 종류의 기적입니까?” “모든 걸 아란티아의 축복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새나디엘은 소녀처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인사하거라, 퀘이언. 모든 드래곤의 지배자이자, 하늘 산맥의 여신인 나디우렌, 사-나딜이시다.” 퀘이언은 떨리는 다리로 무릎 꿇어 인사했고, 새나디엘도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붉은 드래곤은 카구아의 시체를 뒤로 하고 화이트 게이트 앞으로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나딜. 나의 어머니!” “내 딸, 나디엘. 하늘 산맥에도 많은 일이 있어 늦었구나.” “당신께서 나타나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너의 후게자가 나타나 나에게 부탁했노라. 모든 전투가 가넬로크에서 벌어지면 아란티아가 비게 되니 나더러 가달라고.” “감히 여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다니, 무례하기는 제 아버지와 꼭 같네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드래곤을 보고 싶다는 제 소원에 당신을 데려오다니...... 뭐라 할 말이 없군요.” “나 역시 너를 보고 싶었던 참이니, 그걸 무례한 요구라 할 수 는 없었지.” 두 종족의 여성은 서로를 바라보며 천 년 전 처음 만난 그날처럼 미소 지었다. 네 마리 카구아의 시체가 불타올랐다. 나딜이 말했다. “녀석이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마법조차, 카셀이 내가 한 작은 부탁을 이기지 못했구나.” 늑대의 형상을 한 빛 덩어리는 달아나려는 검은 연기의 마지막 한 점까지 먹어 치우고 자신도 사라졌다. 이제 할 일을 모두 끝낸 보검은 바닥에 떨어지더니, 산산이 부서져 빛을 잃었다. 그란돌은 느린 걸음으로 테일드에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까닥하고 인사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테일드.” 테일드 역시 아이린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그란돌.” “그럼 내 오랜 친구에게 사과하러 가야겠군.”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란돌은 거짓말처럼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오래 전 숨이 끊긴 것처럼....... 그러나 편안한 표정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이제 나도 때가 다 되었다, 아이린.” 테일드는 아이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잘린 팔에서 흐르는 피가 아이린의 두 다리를 적셨다. 그녀는 웃으려고 애썼지만,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나 빨리?” 그는 팔을 올려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해.” “돌아오겠다던 약속은 지켰네, 뭘.” 테일드의 얼굴은 천천히 늙어가기 시작했다. 청년의 얼굴에서 장년의 얼굴로, 중년에서 노인의 얼굴로 바뀌었다. 얼굴의 주름이 늘어나고 머리도 하얗게 탈색되었다. “한 번만 더 안아줘, 아이린. 너무 오랫동안......, 너무 추운 곳에 있었어.” 힘없이 말하는 그의 몸을 아이린은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타냐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줘.” “알았어.” “행복하게 살아.” “그럴게.” “사랑해, 아이린. 그거 하나로...... 저 암흑 속에서 버텼어.” 테일드는 그 말을 끝으로 소리 없이 숨을 멈추었다. 아이린은 흐느끼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던멜의 부축을 받아 로일 옆에 앉은 루밀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모든 것이 테일드의 머리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구나. 그 녀석은 8년 전, 이미 이 전쟁을 계산하고 있었어. 그 계산 안에서 모든 드래곤과 인간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조차 움직인 거야.”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여 부상자를 구하러 달려왔다. 많은 병사들이 기절한 루에머스에게 매달려 응급처치를 했고, 루밀과 로일에게도 몇 명이 달려왔다. 겨우 주저앉아 있는 로일은 북쪽에서 날아오는 붉은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크나딜이었다. 그의 두 손에는 쓰러진 라틸다가 쥐어져 있었다. “루밀, 지금 오는 라틸다가 죽었든 살았든 그녀의 옆에 있게 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로일은 기절했다. “그래.” 루밀은 로일을 편히 눕혔다. 자신을 치료하려는 의사까지 로일에게 붙이고, 그는 던멜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카셀은 어디 갔지?” 23. 그리고 카셀은 없었다. 카셀은 아로크의 탑 꼭대기에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베논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의 옆에 앉아있었다. 타냐는 꼭대기 방 한 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 “타냐, 일어나요. 제가 돌아왔어요.” 그녀는 온 몸의 피부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타냐, 일어나요. 제가 돌아왔어요.” 그녀는 온 몸의 피부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너무 상처가 많아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카셀은 그냥 그녀를 끌어안기만 했다. “타냐......, 일어나요.” 타냐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정말 왔네요, 카셀. 마스터께서 당신이 왔다고 했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온다고 했잖아요.” 타냐를 보면 어떤 상황이든 울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마음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타냐는 오히려 우는 카셀을 달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나마 당신을 보게 되어 다행이에요. 마음속으로 빌었어요. 제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긁어 쓸 테니, 부디 마지막 한 번이라도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빌었어요.” “잘못 빌었어요. 마지막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어야죠. 우리 두 사람의 아이에게 읽어줄 동화의 마지막 한 줄처럼, 그런 기도를 해야죠.” “저는 그렇게 큰 욕심은 없어요. 카셀, 그래요. 살아만 있다면 당신과 계속 함께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타냐의 손은 점점 차가워지고, 숨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이어지는 목소리 역시 가까이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카셀은 그런 그녀를 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늘 산맥의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란티아의 축복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가 마지막으로 가져가는 생명은 모든 전투를 끝내버린 울프 기사단도 아니었고, 울프 기사단으로 데려온 카셀도 아니었고,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아이린도 아니었고, 카구아 네 마리로 죽이려 했던 새나디엘도 아니었다. 타냐였다. 로크의 방벽을 세워 5만마리 모즈를 막고,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막고, 마지막 순간 두 마리 드래곤이 생명의 반을 태워 보낸 거대한 마법을 자신의 생명 전부를 태워 받아낸 그녀였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테일드라고 이름 짓겠지요. 딸을 낳으면 나디엘이라고 지었을 거예요. 둘 다 있어도 좋겠지요. 마법 같은 건 쓰지 못해도 좋으니 당신과 한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었어요. 그래요.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줄 마지막 동화 한 줄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렇게....... 사랑해요, 카셀.” 타냐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카셀 안에서 힘을 잃어갔다. 카셀은 크나딜의 동굴 안에서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카셀도 눈을 감았다. ‘여왕이시여, 여신이시여. 나의 생명을 가져가셔도 좋으니, 부디 타냐를 살려주십시오. 아버지가 어머니와 저를 살렸던 그때의 기도처럼, 타냐를 살려주세요.’ 카셀은 반응하지 않는 타냐의 움직임에 절망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타냐!!” 아즈윈은 로핀의 시체 앞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로핀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은 제이메르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말하지 않았다. 울프 기사단이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모두 말에서 내려 그 앞에 섰다. 쉐이든과 프란츠가 울프 기사들 중 서른 명이나 다쳐서 실려갔다는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쩌면 죽은 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면서, 특히 네 사람은 부상이 심하다고 걱정했다. 드래곤 기사단의 브란더가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로핀 앞에 섰다. 검게 눌어붙은 핏자국이 얼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고, 겨우 출혈만 막고 있는 붕대가 갑옷 대신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일어나 자신의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드래곤 가넬도 로핀의 시체 앞으로 와 네 다리를 바닥에 붙인 채 침묵했다. “쉐이든.” 아즈윈이 말했다. “왜?” “여왕 수호 기사 자리는 내가 맡겠다.” “애초에 너라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거다.” “고마워.”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로일은...... 아마 울프 기사단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던멜도 당분간은 자리를 비우겠지. 녀석은 아직 정리해야 할 과거가 많이 남아있어. 너는......, 너는 수호기사의 자리에 있기에는 밖으로 돌아다니며 할 일이 많아. 반면 난 그 외에는 어디에도 필요 없다.” “여왕 수호 기사 자리를 할 일 없는 녀석이 맡는 자리로 추락시키지 마라.” 쉐이든의 말에 아즈윈은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 떠날 채비를 갖춰라. 부상당한 녀석들은 그냥 나중에 따라 오라고 버려두고 와.” “그 말 하면 다 죽을 힘을 다해 따라올 걸. 우리야 여왕 폐하 옆에 있는 게 속 편하니까.” 브나타이돌이 농담처럼 말했다. “맞아. 우리 있을 곳은 폐하 옆이다.” 울프의 기사들은 모두 칼을 뽑아 한데 모았다. “여왕 폐하를 위해!” 모두 말을 타고 떠날 준비를 갖출 때, 아즈윈은 아직도 앉아있는 제이메르 옆으로 다가왔다. “넌? 같이 안 갈래?” “아, 너 대신 이분 시신을 수습해두마.” “로핀은 자기가 죽거든 항상 동물의 밥이 되게 내버려 두라고 말했었어.” “내 맘이야.” “또 그런다. 그럼 맘대로 해. 그래서 그 다음은?” “더 생각해 보고.” 아즈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울프 기사단에 너의 자리 하나 정도는 비워두도록 하지. 그럴 생각 없어도 한 번 정도는 놀러 오고.” 아즈윈은 실디레가 데려온 말에 타며 덧붙여 말했다. “마스터 아이린과 메이루밀께서는......, 부상 치료 끝내고 오는 다른 울프들과 합류해서 오시라고 전해줘. 우리는 먼저 가서 환영 이사를 준비해 둔다고.” “급하게도 가는구나. 아, 근데 카셀은?” 아즈윈은 아련한 시선으로 로크쪽을 바라보았다가 말했다. “카셀은 이미 우리들의 기더를 떠났어.”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아즈윈은 말을 몰아 멀어져 갔다. 경미한 부상으로 누워있던 몇몇 울프들이 황급히 일어나 같이 가자며 말에 올랐다. 제이는 다친 어깨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떠나?” 제이는 로핀의 시신을 화장하고, 다른 드래곤 기사단의 기사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밤이 되어서야 로크로 돌아왔다. 로크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루에머스는 생사를 헤매는 위험 속에서 겨우 고비를 넘겨 이제 잠들었다고 했고, 루밀과 로일도 잠들어 있었다. 던멜은 두 사람의 침대 앞에 힘겨운 자세로 앉아있었다. 또 그 옆에는 붉은 장미의 여 백작이 앉아있었다. 던멜과 어떻게 대화를 나눠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제이는 안도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로일은 괜찮소?” 라틸다는 졸린 눈으로 대꾸했다. “예, 괜찮아요. 아까 일어나 제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더니 도로 잠들어버렸어요.” 제이가 보기에 사실 라틸다가 더 환자 같았다. 그는 로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중에 묻기로 했다. “마스터 아이린은?” “남쪽 성문에 계세요?” “무사하셨군.” 제이는 혹시나 했던 마음을 놓으며, 침실을 나서려다 뒤를 돌아 보았다. 라틸다는 정성스러운 손길로 로일 얼굴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던멜의 옆에 블랙풋의 헤더가 나타났다. 두사람이 하는 수화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제이는 절룩거리며 성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린은 위험하게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금이 간 망루에 서있었다. “마스터, 왜 그런 곳에 계십니까?” 아이린은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야아, 제이메르! 내 자랑스러운 제자. 듣자니 대단한 활약을 했다더구나. 올라와라. 네 얘기나 듣자꾸나.” “별로 할 얘기는 없습니다.” “캡틴으로 인정받은 얘기도 안해줄 거야?” “캡틴은 브란더 같은 녀석이 맡는 겁니다. 전 아니에요.” 제이는 계단을 올라가 그녀의 옆에 섰다. 벌판에 생명이 빠져나가 쓰러져 있는 모즈들의 시체가 줄을 이어 쌓여 있었다. 저거 치우는데도 몇 주일은 걸리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제이는 궁금한 것만 물었다. 로핀이 죽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을 테니 굳이 말해서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다. “카셀은 어디 있습니까?” “사라졌다.” “사라지다니요? 제가 이런 전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지만, 적어도 캡틴 울프가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후 처리라던가.......” “우리 제이메르, 이제 그런 것도 알아?” 아이린은 놀리듯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옳은 말이야. 루에머스가 의식을 차리고 제일 먼저 찾은 사람도 카셀이었어. 크나딜도 라틸다를 들고 날아와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카셀이었지. 하지만 정작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없더군.” “그야 타냐 옆으로 갔겠죠.” “타냐는 죽었다.” 제이메르는 카셀이 없어졌다는 것보다 더 크게 놀랐다. 그 무지막지한 마법사 여자가 죽는 일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럼 카셀은 타냐 시체 옆에 있습니까?” “아니, 타냐도 없어졌어.” “......무슨 소리에요?” “난 타냐의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마지막 순간 드래곤 두 마리가 뿜어내는 봉인의 힘을, 탑이 아닌 자기 몸으로 받아내서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를 묶은 거야. 타냐는 마지막 생명의 힘을 모조리 쏟아 부었겠지. 그 정도 마법은 테일드도 할 수 없어. 그걸 해낸 타냐가 살아남을 수는 없는 거야.” “그렇군요.” 제이는 씁쓸히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아이린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카셀, 그 힘도 없는 녀석이 혼자 힘으로 타냐 시체를 업고 대체 어디로 갈 수 있느냐는 거야? 너도 올라가 봤지, 그 아로크의 탑? 엄청 높거든. 혼자서도 헐떡대며 오르내릴 계단을 사람 하나를 들쳐 메고 이동해? 게다가 아로크의 탑에 있던 사람들은, 케셀이 올라가는 건 봤어도 내려오는 건 못 봤다고 했거든.” “그 녀석 베논인가 하는 그 하얀 털 짐승을 타고 왔던데요. 거기에 태워서.......” 아이린은 대답대신 자기 옆에서 고른 숨을 쉬며 자고 있는 베논을 보여주었다. 아까부터 있었지만, 워낙 조용해서 모르고 있었다. “방안에는 이 녀석 하나만 있었어.” “그럼 뭐예요? 카셀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다는 겁니까?” “마법?” 아이린은 피식 웃으며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하얀 가루를 집었다. 가죽 주머니에 약간 남아있는 치유의 가루였다. 그녀는 제이의 다친 어깨에 그 약간의 가루를 문질러 주었다. 갑자기 어깨가 낫는 건 아니었지만, 잠깐이나마 아픔이 사라졌다. “마법일지도 모르지. 맞아.” 아이린은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다. “나는 분명 이 치유의 가루를 타냐에게 뿌렸어. 하지만 타냐처럼 강한 마법사에게는 통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냥 옷과 바닥에만 묻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깝게 버리게 된 거지. 그런데 아까 베논 이 녀석만 남아있는 탑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이 치유의 가루가 흔적도 없더라 이거야.” “누가 쓸었어요?” “아니, 아니! 타냐의 힘이 다해 생명이 꺼지는 순간, 그 애 몸에 걸려 있는 마법 장벽도 사라진 걸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래서 그 치유의 가루가....... 나도 자세히는 몰라. 난 분명히 타냐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냐의 시체를 부여잡고 울고 있는 카셀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맙소사! 녀석이 없어진 거야. 그래서 이런 저런 추리를 하다 보니 이런 결론에 이르렀지. 그럴듯해?” “어느 쪽이든 카셀은 떠난 거군요.” “그렇지.” “할 말이 있었는데.......” “나도 두 녀석 모두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안타깝군. 하지만, 넌 녀석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고 있지 않니? 찾아가면 되지.” “아, 그렇군요.: 제이는 난간에 손을 짚고 말을 이었다. “예, 일단 고향에 사는 ‘누구 한 명’ 잘 있나 보고, 그리고 한 번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러렴.” 아이린은 제이의 등을 세게 한 번 쳐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 테스트 합격을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카셀은 멀리 떨어진 북쪽의 평원에서 말을 타고 로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밤이지만, 아직도 로크 시내는 횃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전투는 끝났으나, 로크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죽은 병사들과 그 유족들, 부서진 성벽과 지진과도 같은 충격으로 위험해진 몇몇 중요 건축물들의 보수, 카모르트 원군 파병에 대한 처리, 이 일에 대한 각국 대표화의 협의는 물론이고 아직 로크에 머물고 있는 드래곤들에 대한 문제까지. 의원들도 많이 죽었으니, 로크의 의회는 또 많은 의원들을 선별해야 할 것이고 그 중에 두 명의 집정관을 뽑아야 한다. 루에머스가 집정관 생활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예전 같은 활발한 활동은 무리였다. 로크에는 이 많은 일들을 주도하며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중 가장 적절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카셀은 잘 알았다. 카셀은 씁쓸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많은 문제들을 던져버리고 도망쳐 나온 캡틴 울프를 사람들은 욕하겠죠?” 카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 뒤에 타고 있는 타냐가 말했다. “아니, 홀연히 나타나 도시를 구하고 또 다시 홀연히 사라진 영웅이라고 기억할 겁니다.” 타냐가 죽어가던 그 순간, 탑 꼭대기의 방은 그녀가 내쉬는 마지막 호흡에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바닥에 깔려 있는 가루들이 부서지며 타냐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고, 옷과 얼굴에 떨어진 가루들 역시 자잘하게 폭발했다. 카셀은 놀라 그녀를 안은 채 멍청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내뱉은 마지막 호흡은 다시 그녀의 코와 입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것은 그녀의 스승이 제자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타냐는 이제 더 이상 마법사가 아니었고, 카셀은 이제 더 이상 캡틴이 아니었다. 그러나 둘은 더 바랄 게 없었다. 아란티아의 축복은 이 모든 것을 위해 두 사람을 불렀고, 그것이 끝난 지금 다시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다른 많은 울프들과 하얀 늑대들도 그렇게 흩어지리라는 걸, 카셀은 잘 알았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지.’ 타냐가 물었다. “고향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죠?”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제 거리를 끌어당기는 기적 같은건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여행이 길어도 상관없어요.” 카셀은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렸다.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에필로그 - 기다리는 아버지 루우룬 마을의 역사상 최대 위기설에 봉착한 에밀은 한 시간 전부터, 그 문제로 눈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늙은이를 어떻게 쫓아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전날 책 읽다가 늦게 자서 졸려 죽겠는데, 루우룬 마을 촌장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에밀,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세상이 망할 징조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밭 전체에 키우고 있는 감자를 남김없이 뽑아갈 수 있단 말인가? 옆집도 그런 일을 당한 것에 놀라서 어떤 망나니가 그런 짓을 했나 싶어. 밤을 새워서라도 잡으려고 지키고 있었더니 글쎄......,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달아나지 뭔가? 분명 옆마을 그 놈들인 게야. 거 왜 있지? 요새 건들거리고 다니는 그 젊은 놈들.” “그러니까 촌장, 나더러 옆 마을 촌장을 찾아가 그 망나니들을 잡아서 대령하라 그런 말씀이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에밀의 말에 늙은 촌장은 허허 웃었다. “아, 뭐 꼭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래 주면 좋겠다는 거지.” “그게 그 녀석들 소행이 아니면요? 안 그래도 옆 마을 촌장에게 꼬투리 잡혀 계시면서 얼마나 더 망신당하려고요?” “하지만 그 감자는 말이야!” “예, 예. 올 봄부터 죽을힘을 다해 키워놓은 감자죠. 게다가 하룻밤 사이에 뽑아간 건 전문가들 소행이죠. 그 애송이들이 할만한 짓이 아니에요.” 에밀은 피곤한 나머지 손사래를 쳤다. 당장 떠오르는 범인 몇 놈이 있었으나,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반강제로 촌장을 쫓아냈다. “제가 좀 더 생각해보고 처리하겠습니다. 가서 쉬세요. 저도 좀 쉬어야겠습니다.” “아, 알겠네. 그만 좀 밀어. 아, 그리고 카셀 말일세.” 에밀은 촌장을 거의 문밖으로 밀어낸 후 문고리를 잡고 물었다. “예, 카셀이 왜요?” “안 오나?” “제가 압니까?” “아니, 어제도 오늘 돌아오는 데 내기 했다며? 자네 그런 식으로 술값 날린 게 얼마야?” “그냥 재미로 하는 겁니다. 다른 도박으로는 날 이겨먹지 못할 ㅌ니 그런 내기라도 해서 술 한 잔 얻어먹으려고 하는 거죠. 카셀은 당분간 안 올 겁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그 녀석 인잰데. 내 눈은 틀림없어. 뭐, 큰 자리 해먹을 만한 인물은 못되겠지만, 적어도 마을 하나 다스리는 촌장은 그럭저럭 해줄 게야. 물론 자네가 촌장을 맡아준다면 더 좋겠지만, 그러질 않으니 카셀에게라도.......” “그것도 카셀이 온 다음에 얘기합시다.” 에밀은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하지만 촌장은 계속 ‘아까워, 아까워’ 하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에밀은 문에 등을 대고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 방 안이 휑하니 비어 보였다. 새삼 자기가 3년이나 떠나있을 때의 아버님이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짐작이 갓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방 청소를 한 후에야 창문을 열고 파이프 담배를 물었다. 그렇게 무료한 일상의 오후가 지나갔다. 못 잔 잠이 쏟아졌고, 오랜 만에 과거의 기분 좋은 일들이 뒤죽박죽이나마 꿈속에 떠올랐다. 에밀은 꿈속에서도 이 꿈이 깨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꿈속인데도 차가움이 느껴졌다. 이십여 년 전 그 날이었다. 로크의 비는 카모르트의 비보다 따뜻했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에밀은 그 비를 맞고 부들부들 떨었다. 에밀은 빗속에서 창문에 대고 소리 질렀다. “달리야, 난 네가 좋아. 이대로 널 두고 가고 싶지 않아.” 달리아도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난 죽어, 에밀. 이제 살날이 일 년도 남지도 않은 여잘 진짜로 좋아하는 게 어딨어? 사실대로 말해줄까? 죽기 전에 얼굴 탱탱한 남자 녀석 하나 가지고 놀아 본거야. 그러니 돌아가. 가서 너의 행복을 찾아. 넌 어떤 여자라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냥 날 던져 버려. 나도 널 던져버릴 거야!” “그래, 달리아. 나는 어떤 여자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 나는 정말 대단한 남자니까. 하지만 딴 여자는 싫어. 에이, 진짜! 대륙 전체를 뒤지고 다니면서 겨우 찾아낸 여자가 뭐 그 따위로 소극적이야?” “뭐, 그 따위?” “내가 이대로 놓칠 것 같아? 일 년? 그래, 일 년 동안 꼭 붙어 살자. 일 년 동안 남들이 평생 맞대고 있는 것보다 더 맞대고 살자.” “시끄러, 나쁜 자식. 이제야 겨우 삶을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야. 네 덕에 죽기 전의 달콤함을 맛보고 행복하게 죽을 자신이 생겼단 말이야. 그런데 왜 자꾸 미련을 만드는 거야?” 달리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에밀은 눈물 섞인 빗물을 맞으며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못 견딜 것 같으면...... 그냥 미련 가져. 괴롭게 살아. 한 시간, 한 시간이 아까워 미칠 정도로 괴롭게 사는 거야.” “나쁜 자식!” 달리아는 울면서 2층 창문에서 뛰어 내렸다. 에밀은 떨어지는 그녀를 안고 진흙으로 엉망인 바닥을 뒹굴었다. 눈을 꼭 감고 에밀을 안고 있던 달리아가 처음 입을 열었다. “우와, 일 년 후가 아니라, 지금 죽을 뻔했다.” 하지만 에밀은 환호를 지르며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거봐, 내가 이겼지? 아무리 괴롭혀도 내가 이긴다고 했지?” 임신한 달리아는 산통이 진행되는 순간 에밀의 손을 꽉 잡았다. “에밀, 만약......,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아기를 구해야 해? 알았지? 난 이미 드래곤이 말씀해주신 기한보다 더 오래 살고 있어. 그러니 언제 죽을지 몰라. 꼭! 알았지? 우리 아기 죽이면 안 돼!” “그런 말 하지 마. 둘 다 무사할 거야.” 그러나 달리아는 본능적으로 그 위험을 알고 있었다. 산파는 반나절이나 아기를 받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밖으로 나와 말했다. “산모와 아기 둘 다 위험할 수 있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에밀은 다 늙은 노파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뭐라고, 이 돌팔이 늙은이가!” 놀란 촌장과 마을 청년들이 그를 뜯어말렸다. “이거 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웃기지 마. 좋아. 내가 죽지. 그러니 둘 다 살려내!” 당황한 노파는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또 반나절이 지나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에밀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갔다. 하얗게 얼굴이 질린 달리아가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노파도 기진맥진해 말했다. “허약해 보이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나 원, 남편이나 마누라나 똑~같은 것들끼리 만나서 사는구먼.” 달리아는 웃는 얼굴로 에밀에게 말했다. “네가 한 말을 기억해냈어. 미련을 가지라고 했지? 그래, 미련을 가졌어.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썼어. 봐, 내 아기야. 그리고 네 아기야. 우리 아기야. 나 해냈어. 이것 봐, 우리 아기야. 다리도 둘이고, 팔도 둘이고, 눈도 둘이야. 이거 봐 벌써 내 손가락을 쥐고 있어. 이것 봐, 벌써 젖을 찾고 있어. 날 알아보는 것 같아. 어쩌면 좋지?” 달리아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서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밀은 아기와 아내 모두를 껴안고 울었다. “잘 했어, 달리아. 이 못된 아들놈아. 너도 잘 했다. 둘 다 정말 수고했어.” 달리아도 울고, 에밀도 울고, 아기도 울고 셋 모두 울었다. “아이 이름 뭐라고 지을 거야?” 달리아가 물었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하늘 산맥의 엘프에 얽힌 일을 겪으신 적이 있어.” “아, 그 얘기 나도 들었어.” “나는 항상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결국 그런 모험을 하고 싶어서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너를 만났지. 그러니 그때 그 엘프와 친구였던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카셀이라고 짓고 싶어.” “그럼 우리 아들은 하늘 산맥의 여행자가 되겠네?” “아,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녀석이 나 같은 짓을 하게 두고 싶지 않아. 그건 사실 미친 짓이거든.” “그 미친 짓에 반한 날 두고 할 소리야?” 달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카셀이 겨우 걸음마를 뗄 무렵, 달리아는 침대에서 누워 마지막을 기다렸다. 에밀은 아이를 내려놓고, 달리아 옆에 앉았다. “보거라, 카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네 엄마란다.” 달리아는 힘없이 웃으며 카셀의 손을 잡았다. “건강해야 해, 카셀. 엄마는 너무 힘들어 먼저 쉴게.” 카셀은 아빠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 침대 옆에 서서 엄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아는 죽었다. 작은 그 방에서 아무도 울지 않았다. 달리아의 표정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오랜 만에 생생하게 꾸는 과거의 가장 행복한 꿈을 방해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밀은 인상을 구겼다. 무시하려 했으나 노크가 계속 이어졌다. 에밀은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누구든 반가운 얼굴이 아니면 한 대 쳐줘야지. 드래곤마저 날려 버렸던 이 주먹으로.” 에밀은 문을 열었다. 에밀은 밖에 서 있는 청년을 바라보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눈앞에 드래곤만큼 거대한 괴물이 입을 쩌억 벌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널 잡아먹겠다, 하는 말을 해도, 일단 들어와서 차나 한 잔 하고 날 굳이 잡아먹어야 하는 이유를 최소한 한 가지 정도는 들어봅시다, 라고 대답할 에밀이었으나, 지금은 아무 말도 못했다. 어쨌든 드래곤마저 날려버린 그 주먹은 쓰지 못하고 뺨만 긁적이다가, 마지막에는 웃어 보였다. “어서 오너라, 아들아.” 에밀과 달리아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말했다.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하얀 늑대들을 마치며 하얀 늑대들을 써 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은 메일은 아마도 ‘다음 권 언제 나와요?’ 라는 독촉과 ‘작가님 미워요!’ 라는 협박과(10권 이후), ‘카셀은 언제 강해져요?’ 라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자, 앞의 두 가지는 그렇다고 치고, 카셀은 언제 강해져요,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답변 보내기 애매했다. 그거 참,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하얀 늑대들의 작가로서 남기는 마지막 글이니 결국 카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1권 첫 줄을 쓸 때부터 카셀의 운명은 정해 놓고 있었다. 중간에, 개인적으로 아는 친구들에게 주인공 죽이네 살리네 농담도 많이 했지만, 결국 내 하고 싶은 대로 주인공의 운명을 처리했다. 1부를 시작할 때 내 머리 속에는 온통 4권 하이라이트만 차 있었고, 2부 시작할 때는 7권 에필로그만 생각했고, 3부 쓸 때는 독자들에게 ‘미워요 편지’ 백만 통(거짓말!) 받게 만든 ‘그 장면’ 만 거듭 그렸다. 중간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변경되기도 하고, 어떤 인물은 더 중요해지고 어떤 인물은 더 희미해지고 했지만 그래도 ‘카셀은 끝에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이렇게 될 거야.’ 라는 줄기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카셀을 따라댕기는 하얀 늑대들과 제이메르, 타냐, 라이 같은 두 번째 주인공들이 까다로워서, 카셀 자체를 쓰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인터넷 연재 사이트 드림워커에서 집필 당시, 내가 대놓고 ‘앞으로도 카셀, 칼 못 써요!’ 라고 써놨더니 독자들끼리의 리플이 아주 볼만했다. ‘그럼 마법을 배우나요?’ ‘마법 두루마리 하나 주우려나?’ ‘제 생각에는 아마 마법도 못 배울 거예요’ ‘그럼 권법이라도 배우겠죠.’ 독자들은 카셀이 저런 식으로 강해지길 원했다. 후후훗, 재밌지 않은가? 자, 이제 12권까지 읽은 여러 독자분들. 머리 속에 카셀을 그리라. 그리고 그가 최종보스인 죽지 않는 자들의 군주와 일 대 일 대결에서 마침내 승리한다! 으음. 뭐 누군가는 저런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카셀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 고집을 끝까지 용납해준 파피루스 사장님께 감사드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는 관심으로 집필에 많은 도움을 주신 편집자 성영주 씨께 감사드리고, 이런 약해빠진 주인공을 사랑해준 독자들에게 또 감사드리며, 이 주인공 언제 세지는지 끝까지 보다가 지친 독자들에게는 뭐 조금 미안하고, 더불어 ‘혀 안 돌아가는 게 날 보는 것 같아!’ 라는 이상한 이유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버린 제이메르(......)에게 이상하게도 고맙고, 또한 ‘늑댄지 뭔지 아직도 쓰고 있냐? 길기도 하다.’ 라며 스토리가 늘어지지 않게 항상 자극을 주시는 그 분께 사죄드리며, (아들래미, 아직도 가난합니다요, 어머니!) 홈페이지 찾아와서 부족한 작품 무지 부풀려서 감동해주시는 손님 분들께 민망해하며, 이 책 사서 보는 분들께는 축복 있으라! 하얀 늑대들 집필 과정에서 있었던 몇 가지 재미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훗날 개인 홈페이지에서 공개하기로 하고, 작가의 말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지 않고 여기서 끝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셀 언제 강해져요?’ 라고 물었던 분들께 뒤늦게나마 답변을 드린다. “어때? 카셀, 강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