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조슈아 @프롤로그 and 제1화 흑의의 마법사@ 프롤로그 새벽의 여신이 별의 장막을 걷어 가는 시각, 풍요로운 대지에 이슬이 맺혀 초원 은 그 야말로 보석의 바다였다. 멀리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은빛의 아름다운 성 '게드마'(Kedemah)는 이 빛나는 초원 과 너무도 어울려 그야말로 신들의 궁전 같았다. "이제 곧 16세 인가?" 성을 마주보고 있는 서쪽의 언덕 위에서 마상(馬上)의 소년은 자조적인 음성으 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훌륭한 혈통임에 틀림없는 잡티하나 없이 새하얀 백마에 금실로 장식한 마구, 검붉은 승마용 바지에 목이 긴 갈색부츠를 신고, 손목부분이 풍성한 아름다운 레이스 가 달린 블라우스 안에 창을 든 여신이 새겨진 펜던트만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 금 발의 소년은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신분의 소년임에 틀림이 없다. 묻어날 듯 새하얀 피부는 새벽 햇살에 반짝이고, 마치 소녀 같은 갸름한 얼굴 선에 오뚝하면서도 섬세한 콧날이 귀족적이나 다소 연약해 보이는 인상에, 손목의 레 이스 바깥으로 마디가 가늘고 긴 손가락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고삐를 잡고 있었다. 이 소년이 소녀라 한다면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감정이 풍부한 짙 은 파란색의 눈동자는 강한 생명력과 기개로 반짝거리고 있어 그가 강인한 정신의 소 유자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가자! 아라우조!" 서서히 태양이 떠올라 언덕 아래 그림자를 늘어뜨리는 것을 보며 소년은 말머리 를 궁성으로 향했다. 1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것은 할 수 없습 니다." 소년은 분개하고 있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더욱더 짙어져 검푸른 빛이 되었다. "하루면 된다. 왕자야 단지 하루 뿐이야." 아카바의 국왕 바디메오는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이제 30대 후반이 되었을 뿐이었지만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이는 그의 얼굴 은 지난 세월 동안의 고통의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오빠, 오빠는 유일한 왕위 계승자야! 그 따위 저주로 죽어 버릴 꺼야? 돌아가 신 어머니께 죄송하지도 않아?" 오빠를 소녀로 바꾸어 놓은 듯 마치 쌍둥이 같은 에레나 공주는 보다 못해 끼어 들고 있었다. 이제 막 15세가 된 그녀는 미의 여신의 축복을 받은 듯 사랑스러움으로 빛나고 있다. 허리까지 오는 윤기 있는 긴 금발의 머리칼과 오빠와 똑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 진 그녀는 정감과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눈동자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소녀라는 것을 알려주는 애교 있는 귀여운 목소리 외에는 오빠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소녀는 사랑하는 오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기세였지만, 소년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했다. "네가 말한 데로다! 에레나 나는 그까짓 저주에 죽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친인 소피아 왕비가 그녀를 낳다 난산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언제나 어머니의 죽음과 오빠의 문제로 고통에 휩싸인 아버지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녀의 생일은 모친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고,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탓인 양 괴로워했다. 그런 그녀가 해맑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한 살 위의 오빠 죠슈에 왕자 덕분이 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오빠는 그녀가 고민에 휩싸일 틈도 주지 않고, 언제나 즐거운 놀이와 행복한 고민들로 그녀의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채워주었다. 그러나 철이 들 무렵 사랑하는 오빠에게 무언가 큰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고, 왕궁의 모든 신관들과 상급 마법사들 그리고 현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 수년을 연구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 해답이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오빠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소년은 유일한 해결책을 너무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고, 부왕과 공주 는 소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저는 아카바 왕국의 왕자로서 명예롭게 처신할 것입니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강요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버님." 그 말을 남기고 왕자는 횅하니 사라지고, 둘만 남겨진 부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간이 있잖아요. 아버님, 꼭 설득 할 수 있을 거예요." 에레나는 아버지를 위로하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오빠의 자존심에 너무 가혹한 방법일까? 아무리 하루 뿐이라 지만 여자가 되야 한다니'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띄며 고개를 떨구고 피곤한 듯 이마를 짚고 있는 부왕의 손을 잡아주었다. 2 왕자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저주를 받고 있었다. 그의 가혹한 운명의 시작은 17년 전 그가 아직 모친인 소피아 왕비의 뱃속에 있 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피아 왕비는 평민 출신으로 궁정 기사단의 입단 시험에서 16세의 소녀의 몸으 로 기라성 같은 기사들을 모두 물리치고 수석을 차지한 뛰어난 여검사였다. 기사장의 반대와 그 이하 귀족기사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왕국 기사단의 지위를 따내었고,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18세가 되던 해에는 기사단 중 상 위의 50인에게만 허용되는 아론(Aaron)의 칭호를 받는 대검호가 되어 왕실의 방패가 되었다. 당시 바디메오는 20세로 아직 황태자였으며, 부왕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어 나라는 어수선했다. 부왕이 병으로 쓰러져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세 차례에 걸친 영주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황태자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는 역대 왕위 계승자 중 가장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로서 왕조의 신물인 성검 말고스(Malchus)를 바론 대제 이후 4대만에 계승받은 검성(劍聖)의 칭호를 가지고 있 는 대검호였다. 바디메오는 수 차례의 내란동안 근위기사인 소피아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전란의 세월을 함께 하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져들었고, 그리하여 결혼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세르(Aser) 여신을 섬기는 아카바 왕국은 첩이나 후궁을 들일 수 없 으며, 오직 신성한 한 명의 왕비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평민출신인 소피아와의 결혼은 많은 장애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내 부왕과 대신관의 승인을 얻어낸 황태자는 성도 게드마의 아세르 신 전에서 온 백성들의 축복을 받으며 성혼했고, 이듬해 부왕이 붕어(崩御) 하자, 바디 메오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아카바 제 7대 국왕이 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소피아 왕 비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서 궁전은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온 나라가 축제로 떠들썩했던 대관식 후, 신관들은 축복청원의 제를 올리고, 온 백성들이 궁에서 나온 고기와 포도주로 한밤중까지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던 밤. 한 명의 마법사의 방문으로 왕자 죠슈에의 운명은 영원히 바뀌게 된다. 제 1 화 흑의의 마법사 ― 저주받은 밤의 이야기 멀리서 보아도 성이 축제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분위기였다. 흑마법사의 상징이랄 수 있는 머리까지 덮는 검은 수도복안에 마신을 상징하는 붉은 뿔의 염소가 새겨진 아머를 입고 있는 그는 배짱 좋게도 그런 불경한 복장으로 성밖 관도(官途)에 서서 게드마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가려졌지만 머리를 가린 수도복안에 주홍빛으로 빛나는 안광이 그가 상 당한 수련을 쌓은 마법사임을 알려주었다. "훗, 떠들썩하군!"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흑의(黑衣)의 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의 외로 대단히 부드러웠다. 그는 성벽을 훑어보며 조금은 감탄하고 있었다. 200여 년 동안 보수가 필요 없 었다는 전설의 성도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다. "교활한 신관들이 성 전체를 몇 겹의 마법 진으로 덮어놓았군! 자! 어디 있죠 ? 마석(魔石) 아스나여!" 성을 주시하며, 오른손 손바닥 위에 주홍색 마법 진을 만든 그는 그 위에 주문 을 읊었다. 그러나 마법 진은 곧 사라지고, 그는 짙은 괴소를 뿌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었다. "후후후, 성 전체의 벽돌 하나 하나에 모두 대마법 방어 주문을 새겨 놓았군요. 무식한 족속들...... 마족들이 100년을 찾아 헤매었어도 찾지 못한 것이 이해가 가는 군요. " 그는 얼마간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곧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이상 그런 것은 상관없죠. 후후, 귀중한 보 물은 언제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놓기 마련이니까요." 1 "크악!" 순식간에 7인의 기사가 녹아 내렸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다. '저...저자는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냐?'가 아니고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것은 상대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수도복의 마법사를 보며 검을 고쳐 쥐고 사나이는 얼어붙 은 듯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등이 벽에 닫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음을 안 그는 눈앞의 그 무엇 을 베는 것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카바의 영광스러운 신전 근위기사이다.' 절대적인 죽음이 눈앞에 다가옴을 직감적으로 느끼면서도 그는 공포로 인해 어 둠의 저편으로 넘어가려는 의식을 사명감으로 추수렷다. '이 일검(一劍)에 내 모든 것을 건다.' 파앗…….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기사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간격을 좁히며 마법사에게 돌진하였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머리끝에서부터 싸늘한 느낌을 받고 그는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이 서있음을 느꼈다. 언제 몸을 날렸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 몸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고, 악몽의 한 장면처럼 검은 수도 복의 마법사가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듯 천천히 지나쳐 가는 것을 보면서도 눈을 돌릴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어...어머니!' 의식이 멀어지며 대신전의 외전을 지키는 마지막 근위기사는 머리끝부터 서서히 녹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2 "폐하, 대신전에 침입자가 들었사옵니다." 전령은 창백한 얼굴로 거의 엎어지듯 달려와 국왕 앞에 부복하였다. 대관식의 무도회에서 왕비와 환담을 나누던 바디메오 국왕은 불쾌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잡았는가?" 젊은 국왕은 간 큰 도둑이 들어온 것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여, 굳 이 그런 정도의 일로 한창 즐거운 무도회에까지 급하게 달려와 사랑스러운 왕비 소피 아와의 정담을 방해하는데 짜증이 났다. 하지만 현명한 젊은 국왕은 망국의 근원은 작은 일에 소홀한데서 시작된다는 격 언을 언제나 신조처럼 여기는 사내였고, 신전의 일이라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침을 한번 삼키고는 전령이 악을 쓰듯이 국왕에게 차마 입밖에 내기 송구스럽다 는 듯한 목소리로 비보를 알렸다. "외..외신전의 근위조가 전멸입니다." 일순 기사장과 상급기사 등 후작 이상의 상급 귀족만이 모인 무도회장은 정적에 휩싸였고, 귀부인들이 경악해 헛 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이야기인가? 성문을 통하지 않고 신전에 그 정도 숫자의 적이 침입했다는 것인가? 상대는 몇인가?" 젊은 국왕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순식간에 질문을 던지고는 왕비를 걱정스 레 바라보았다. 왕비는 자신의 동료들의 죽음을 듣고 창백해진 얼굴로 은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괜찮소? 소피아?" 신하들 앞에서 호칭을 쓰지 않고 왕비의 이름 부른 실책을 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임신한 왕비의 몸이 걱정되는지 국왕은 왕비의 신색을 살피며 물었다. "걱정 마셔요. 폐하!" 그녀는 곧 정신을 추스르고 당황한 남편을 안심시켰다. 소피아 왕비는 전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침입자는 몇이죠?" "침입자는 단 한 명으로 마법사로 보인다고 하옵니다. 신전 근위조가 접근조차 해보지 못 하고 모두 당했사옵니다." 전령은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 민망한 목소리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다. 더 듣고 있을 필요 없다는 듯이 바디매오 왕은 몸을 돌려 급히 무도회장을 나서 려다 왕비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멈추어 섰다. "왕비는 남아 부인들이 동요하는 일이 없도록 안심시켜 주시오. 내전에 들기 전 에 신관들이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요. 어쩌면 벌써 저지했을 지도 모르지." 왕비의 성격에 임신한 몸으로 전투에 참가하려 할 것을 염려한 바디메오는 그녀 를 안심시키기 위해 믿음이 안가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기사들과 함께 급히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가고 나자 귀부인들의 걱정스러운 술렁거림으로 무도회장은 떠들 썩해졌고, 곧 그들은 왕비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왕비 소피아는 한동안 가볍게 아랫입 술을 깨물고 있다가 결연한 눈빛으로 몸을 돌렸다. "어딜 가시려고요. 왕비님!" 국왕의 이복동생인 오드니 대공의 젊은 아내 헤레나가 그녀를 막고 나섰다. 왕비보다 한 살이 많은 그녀는 왕비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였는데, 둘은 매우 친하여 한 자매 같았다. 그녀는 평민 출신으로 왕비 후보가 되어 중상을 받던 왕실 근위기사 시절의 소 피아에게 궁정 법도와 귀족으로서의 예의 범절을 가르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아 왕비가 가장 의지하는 정신적 지지자가된 현숙한 귀부인이었다. 왕비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헤레나로서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폐하가 목숨을 걸고 적과 맞서신다면 제가 해야할 일은 한 가지예요." 따라나서 저지하려던 헤레나 공작 부인은 왕비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멈추어 섰다. "저는 왕비이기 이전에 폐하의 기사입니다." 왕비는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고, 시녀들은 황급히 그녀를 따라 나섰다. 3 정체불명의 마법사는 대신전의 내전 입구에서 신관들과 대치 중이었다. 기사와 일반 병사들은 마법사의 주위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주위에 널려 있는 동료들의 녹다만 시체들을 바라보며 공포와 분노에 떨고 있을 수밖 에 없었다. 마법사는 마력으로 신전의 구조를 파악하려 했지만, 강력한 대마법진으로 보호 된 신전은 그 안을 마력으로 탐색할 수 없어 원하는 것을 찾아 더욱 더 신전의 깊은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투마법을 수행한 상위 신관 12인과 대치하면서도 그는 전혀 당황하지도 밀리 지도 않고 있었다. 12신관들과 흑색수도복의 인물 사이에는 묘한 공간의 일그러짐이 보여 그들이 엄청난 마력으로 서로를 밀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2인의 상위 신관들의 뒤에는 100년 전 대마법대전의 유일한 생존자로 180살의 대신관 르우엘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현존하는 최고령의 신관으로 아카바 뿐 아니라 온 팔메라 대륙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관이었다. 아세르 여신의 지상대리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그는 신탁 외에 국왕과 일부인사 들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아카바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그런 그가 지금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진땀을 흘리고 있다. 수 십여 년에 걸쳐 직접 키운 가장 뛰어난 12신관들이 단 한 명의 마법사에게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저자는 정체가 무엇인가?' 머리까지 덮은 검은 수도복으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그리 나이가 많지 않으리라는 것은 움직임과 풍기는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아카바 최고위의 신관12인의 공격마법을 저자 혼자 감당하고 있다. 거기에 더 해 서서히 결계를 침식해오고 있지 않은가?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마왕 마아가라 도 부활해 온 것인가?' 신관들 사이에 거의 신적인 존재인 노(老)신관은 100년만에 처음으로 등뒤로 한 기를 느끼고 있었다. "크악!!!!" 12신관 중 가장 말석인 다바네스가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 새하얀 백염을 물들 이며 침몰해 가자, 겨우 유지되던 힘의 균형은 순식간에 깨어졌다. "물러나라!" 대신관 르우엘은 소리치며 마력충돌로 일그러진 공간에 뛰어들며 제자들을 보호 했다. "크윽..." 100년만일 것이다.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온 것은. 대신관은 최대의 대마법 결계를 펼치면서 흑의 마법사의 사이(邪異)한 마력을 되받아 쳤지만 상대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너는 무엇 하는 자냐?" 쓰러진 제자들을 내전으로 옮기는 것을 곁눈질하며 대신관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호오! 당신은 좀 상대할만한 분 같군요. 신령력(神靈力)을 직접 행사하는 신관 은 이제 남아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말꼬리를 흐리며 처음으로 흑의의 마법사가 대꾸하였다. 그 목소리는 상황에 어 울리지 않게 매우 부드러워 긴장감이 떨어질 정도였다. "어줍잖은 정령소환이나 하급의 고대어 마법을 쓰는 자들만 상대하는 것은 이제 지겨워지던 차였죠." 그는 왼손을 들어 천천히 수도복에 가려진 얼굴을 드러냈다. '헉!' 대신관은 심장이 튀어나올 듯 충격을 받고 있었다. 붉다기 보단 검붉은 긴 머리칼을 단정하게 뒤로 묶어 넘긴 그는 바닥 없는 늪 같은 느낌을 주는 깊고 짙은 주황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20세나 되었을까? 섬세한 턱선에 조금 각이 졌으나 매우 높아 보이는 날카 로운 콧날, 빨간 눈썹은 짖고 긴데 눈꼬리에서 약간 쳐져 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 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용히 웃음 짖는 듯한 인상이 다분히 여성적인 인물이었다. '저...저 얼굴은 설마.....' 대신관은 오랜 세월을 잊으려 노력해도 영혼에 각인 되어 잊혀지지 않는 악마의 이름을 떠올렸다. "마아가!!!! 마아가인가?" 그가 어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겠는가? 100년 전 상위의 10인에게만 허용되는 브두엘(Bethuel)의 칭호를 받아 명실상부 한 왕국제일의 신관 중 일인이 되어 자제는 하고 있었으나, 불경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던 시절. 북쪽의 대국 시돈에서 마계의 문을 열고 마물들을 이용해 수백만의 시돈인을 학 살한 대마법사가 출현했었다. 그가 남하하면서 대륙은 혈풍에 잠기게 되고, 그는 곧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이에 열국의 국왕들이 팔메라 대륙역사상 처음으로 모두 모여 아카바에서의 사 흘간의 회담 끝에 온 대륙에서 최상위 신관들과 왕국 마법사, 기사들을 소집하여 연 합군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는 당연히 막 대신관이 된 루우엘도 끼어 있었는데 아카바에서는 10인의 신관과 아론의 이름을 갖는 상위기사만 40인, 그 외 왕실 근위기사단 200명을 보내고 있었다. 수적으로 많은 수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야 말로 왕국 최고의 전력이었다. 아무도 그들이 그 겁난을 막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합군은 아빌라국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가사라 협곡에서 그 소문의 마왕을 처 음 맞닥뜨렸다. 그가 바로 마아가였던 것이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의 인상은 한마디로 실망이었다. 겨우 저런 자 하나 때문에 이런 호들갑을 떨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멀리 보이는 그는 상체만을 가린 은색 아머를 입고 있었는데 선명한 핏빛 염소 의 문양이 인상적이었다. 그밖에는 붉은 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을 뿐 마법사로서 마법증폭을 위한 매개 도구인 마법지팡이나 그 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맨손이었다. 상상했던 대마왕의 이미지와는 격차가 너무 심해 어이없어 하는 수천의 연합군 을 그는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사단이 애초의 계획을 잊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둔덕을 올라가는 동안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듯 했는데, 적어도 루우엘의 눈에는 그것이 조소로 보였다. 기사들이 다가가자 가볍게 손을 드는가싶더니 둔덕 뒤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각 왕국의 내노라하는 기사들인 그들은 모두 엄청난 검술의 달인들이었다. 서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마물들은 서서히 마법사가 있는 둔덕 위로 밀려갔고 디베리아 왕국의 기사장 검성 라지의 검이 그의 몸에 닿을 무렵 비극이 일어났다. 한순간 낙뢰가 떨어 졌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강렬한 주홍색 빛이 그의 오 른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신관들과 마법사들은 본능적으로 결계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둔덕 위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마법사의 주위에서부터 모든 것이 순식간에 타서 없어 졌다. 아니 원래 주위에 아무 것도 없었던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순식간에 먼지로 화 해 날아가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수족들인 마물들까지 거리낌없이 날려 버리고 있었다. 화르륵...팟! 오른편의 마법사가 결계가 깨지자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타서 흩어지는 것 이 보였다. 루우엘은 태어나 처음으로 궁극의 공포를 맛보고 있었다. 대신관급의 '절대마법방어'를 펼치지 못하는 자는 채 10여 초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타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동료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동안 그는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신에게 기도 하며 목숨을 지탱하는 결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이 결계 밖은 지옥인 것이다.' 억겁의 세월이 지난 듯한 고통의 시간 후 열풍이 잠잠해지고, 깨끗하게 타버린 협곡에서는 연기조차 나고 있지 않았다. 절대적인 마왕의 힘을 보여준 마법사는 천천히 둔덕을 내려와 살아남은 자들에 게 시선도 한번 주지 않고 협곡을 따라 사라져 갔고, 그가 사라진 한참 후에야 몇몇 살아 남은 신관들과 마법사들이 신음을 내며 여기저기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흐으윽 ......" 브드엘의 칭호를 가진 80세의 대신관은 흐느끼고 있었다. 결계가 거두어지고 탈진하여 모래 바닥에 쓰러진 그는 수천의 기사들과 마물들 이 사라져 버린 둔덕을 바라보았다. 둔덕 위의 모래벌판은 지옥불이 휩쓸고 지나간 듯 마치 유리파편 같은 빛을 띄 며 녹아 붙어 있었다. 그는 정신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과도한 마력방출 후의 피로와 함께 불쾌감이 밀려와 내려다보니 바지가 젖어 있 었다. 어느 틈에 오줌을 지린 것이다. "당, 당신은... 100년 전에 아스나에 갇힌 것이 아니었던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공포와 수치의 기억을 더듬던 대신관은 심하게 떨 리는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순식간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적막에 사로 잡혀 대신관과 눈앞의 마 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마아가라는 이름의 공포는 가히 전설인 것이다. "후후.. 재미있군요." 마법사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높은 목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장내의 기 사들과 신관들에겐 그것은 전대의 대마왕의 괴소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제가 100살도 넘은 노인으로 보이십니까?"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대신관은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 확실히 얼굴은 같지만 그때의 그자 보다 더 젊다. 그 세월 동안 더 젊어 졌을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인가!" 마아가라는 이름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대신관은 곧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시 공포의 기운을 풍겼던 자신이 부끄러웠으나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 나이에 이 정도의 마력을 가진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다.' 흑의의 마법사는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제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저는 마석(魔石) 아스나를 찾으러 왔을 뿐 이에요." 대신관 이하 상위 신관 몇은 엄청난 충격에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고, 영문을 모르는 신관들과 기사들도 그 이름은 아는지 상황을 잊고 크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말도 안돼!" "무슨 소리야! 그것은 100년 전에 봉인되어 엥갈스 화산에 버려진 것이 아니었 던가?" "마왕을 봉인한 그 저주스러운 마석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설마 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성도에 가지고 왔을 리가..." 장내는 흑의 마법사의 한마디로 경악의 도가니가 되었다. '어찌 이자가 아스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가? 국왕페하 외에는 나와 12신 관밖에 아는 자가 없는 사실을...' 그때 마법사의 잔잔한 음성이 비웃음처럼 들려왔다. "훗, 솔직하신 분,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되겠군요." 자신이 너무 동요하여 상대에게 속을 읽혔다는데 치욕을 느낀 대신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때문에 신전에 무단 침입하여 수많은 인명을 해쳤단 말인가?" "방해가 돼서 말이죠." 확실한 증오를 부르는 속삭이는 듯한 어투로 흑의 마법사는 대답하였다. 장내의 인물들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신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 가? 저주받을 놈!" 대신관은 들어올린 팔이 은은히 저려오기 시작함을 느끼며 발작적으로 소리쳤 다. 그러나 마법사는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비웃는 듯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을 뿐이 었다. "아세르 여신이 자신의 신관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힘을 빌려줄지 기대 되는 데요." "크흑, 너를 용서 할 수 없다." 대신관은 '절대마법방어'를 펼친 상태에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살모나(Zalmonah)! 끝없이 어두운 자여! 피의 맹약을 지키라! 그대의 어두움에 영원히 가두어 지는 고통을..." 주문을 마치자 대신관의 발 밑에서부터 기이한 기류가 일어나더니 흑색 염료를 뿌린 듯 어두움이 깔렸는데, 그것은 아이 울음소리 같은 기이한 신음 소리를 내며 흑 의 마법사에게 뻗어갔다. "호오! 놀랍군요 ! '절대마법방어'를 펼친 와중에 그에 더해 소환마법이라...." 놀랍다기보다는 대견하다는 투의 탄성을 터트리며, 흑의 마법사는 곧 오른 손에 주홍색 마법진을 만들어 그 위에 가볍게 중얼거리듯 주문을 읊었다. "DURA!" 그러자 곧 급격히 뻗어 오던 어둠의 기류가 벽에 부딪힌 듯 그의 앞에서 흩어지 고 있었다. '뭐! 뭐냐?' 대신관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소환수 살모나의 힘은 형태가 없어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니 적어도 대신관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막아낼 수 없는 소환수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도 쉽게 저지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후후, 당신의 능력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장난은 그만 치도록 하죠. 더 놀 고싶지만 저는 너무 바빠서 말이죠."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마법사는 천천히 대신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자 살모나는 그에 비례해 더욱더 밀려나 결국 괴성을 지르며 소멸하고 말았다. "우욱!!" 소환수가 타의에 의해 불러들인 공간에서 강제 재소환되면 그 충격은 불러들인 자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대신관은 침음성을 삼키며 한 움큼의 핏덩이를 토해냈다. "자!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을 구해낼 방법을 생각해보세요." 결계의 지척까지 밀고 온 마법사는 속삭였다. "네놈이 '절대마법방어'를 어쩔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너는 아무 것 도 할 수 없이, 결국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신의 힘을 감당하는 게 고작이다. 네놈이 쓰 러질 때 기사들이 너를 처리할 것이다. " 대신관은 입가에 묻은 선혈을 소매로 닦으며 낭패한 기운이 역력한 목소리로 소 리쳤다. "후후, '절대마법방어'를 너무 과신하는군요. 그럼 이러면 어떨까요!" 마법사는 마법진을 거두고 합장을 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새벽의 어머니, 질서의 수호자 아세르여! 당신의 영광을 증거 하는 자에게 천 상의 방패를." '부오오'.... 마법사의 주위에 대신관과 같은 푸른빛의 결계가 생겨났다. "어엇! 저것은 '절대마법방어'가 아닌가?" "어떻게 저자가 '절대마법방어'를 펼칠 수 있는가?" 신관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대신관은 그야 말로 악몽을 꾸는 듯했다. 그의 머리는 하얗게 비어 아무런 생각 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파아악! '절대마법방어'의 결계끼리 충돌하자 파란 불꽃이 이는 듯 했다. 상황을 눈치챈 기사들은 재빨리 물러났지만 몇몇 마법지식이 없는 기사들은 어 물쩍거리다 충격파로 인해 눈, 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쓸어졌다. 곧이어 대신관의 결 계가 서서히 잠식되는가 싶더니 결계의 일부가 중화되어 벌어져 갔다. 그 조그만 틈으로 흑의 마법사의 손이 대신관의 머리를 잡아가는 것이 보였다. "우욱!" 마법사의 큰손은 대신관의 머리를 한 손으로 꽉 잡아 놓지 않았고, 대신관은 벗 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둥거렸으나 허사였다. "자! 이제 끝났죠?" 마치 게임에 이긴 아이 같은 말투로 마법사는 속삭였다. 갑자기 머리끝에서부터 싸늘한 기운이 퍼지며 대신관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마...마지막으로 묻겠다. 너는 누구냐!" 대신관은 죽음을 직감하고 오히려 침착해지고 있었다. "가시는 길에 선물로 이름은 알려 드리죠. 저는 레스타트라고 불리고 있죠." "네놈은 마아가와 어떤 관계이지?" "훗! 방심할 수 없는 분이군요, 거기까지입니다. 그럼 평안히 가세요." '슈우우'∼ "크아악∼" 대신관이 머리에서부터 녹아내려 가기 시작하며 살이 타는 냄새가 장내에 퍼져 나갔다. 학질에 걸린 듯 떨던 대신관의 몸이 깨끗이 녹아 내리자, 마법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몸을 돌려 내전으로 향하였다. 물론 막아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 "어떻게 되었나! 적은 어딘가!" 뒤늦게 왕실근위대를 이끌고 나타난 바디메오는 왕실의 상징인 창을 든 아세르 여신이 조각된 황금갑옷을 입고 있었다. 관절 부분을 세밀한 고리 장식으로 연결하고 어깨에서 연결되어 흘러내린 붉은 색 망토는 실제로 흰 망토 위에 축성 받은 처녀의 피로 '대마법주문'을 촘촘히 새겨 놓은 것으로 마법사의 공격마법에 더 없는 효과를 발휘하는 왕국의 보물이었다. 그리고 허리에 장식 없이 수수한, 은으로 만든 칼집에 꽂혀 있는 황금색의 검은 바로 전설의 성검 말고스였다. 급하게 뛰어 온 듯 국왕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폐하, 적...적은 내전으로 들어갔사옵니다." "무어라고!" 바디메오는 재빨리 장내를 둘러보고 곧 경악했다. 여기저기 형체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녹아버린 시체들과 신음하는 병사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전으로 향하는 유일한 입구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도하는 자의 문'이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은 두께가 어른의 팔 길이 정도로, 저 멀리 헤브론 지방에서만 생산되는 '타이론' 석의 거대한 원석을 그대로 깎아 만들어 단단한 것은 물론이고, 용광로를 만드는데 많이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녹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마법사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아있는 열기만으로 아직까지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예상보다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폐하 이래서는 적을 쫓을 수가 없습니다." 접근하려던 몇몇의 병사들이 열기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는 것을 보며, 기사장 파올 로가 말했다. 바디메오는 아직 녹아 내리고 있는 입구로 뛰어드는 것이 무모한 일이라 판단하 고 결국 어느 정도 화기가 식기를 기다리기며 상황을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대신관님은 어디 계신가? 설마 부상을 당하셨는가?" 그제야 대신관이 보이지 않음을 기억하고 바디메오는 물었다. "크흑...대신관님은 그 놈을 상대하시다가.... 사체도 남기시지 못하고....." 대신관의 수제자인 아우다가 오열을 터트리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 기 시작했다. "서.... 설마 당하셨단 말인가!!!!" 바디메오는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대신관이 누구인가 ? 전 아카바뿐 아니라 팔메라대륙을 통틀어 최고 배분의 신 관중 한 명인 것이다. 그런 그가 단 한 명의 마법사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바디메오는 엄청난 힘의 마법사에 대한 경이로움보다는 할아버지같이 모셨던 대신관을 죽음으로 이끈 자에 대한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래 상대의 신원과 목적은 파악했는가?" 바디메오는 분노로 인해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침착해 지는 것이 이 젊은 국왕의 장점이라면 장점인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레스타트라고 밝혔사온데, 외람되오나 성전에 침투한 목적이 마 석 '아스나'를 가져가기 위해서라고 했사옵니다." '뭐! 뭐라고!' 바디메오는 너무도 당황하여 상황도 잊은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기사장 을 포함해 대신들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거리거나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설마 그 100년 전 마아가의 마력을 봉인해 화산에 던져 넣었다는 그 마석을 이야기하시는 거요?" 기사장 파올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하얀 눈썹을 찡그리며 신관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대신들과는 달리 바디메오는 대신관으로부터 들 었던 옛 이야기를 상기하고 있었다. "왕자님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저희 왕국에는 100년 전 마법대전에 현자 '스코 올'이 마왕 '마아가'를 봉인했던 3개의 돌, 영혼을 봉인하는 '라아마', 마력을 봉인하 는 '아스나', 육체를 봉인하는 '바우아' 중 마력을 봉인한 아스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돌은 전해진 데로 엥갈스 화산에 버려졌지만 저희는 아스나에 봉인된 이 계의 마력을 이용할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몰래 가짜와 바꿔치기로 했었죠. 아! 물론 현자와 백성들을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슬픈 일이지만 이용할 수 있는 방법만 찾 아낸다면 그 힘은 그야말로 대륙의 보물이 되어줄 겁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 명심하셔 야 할 일은 이일은 상급 신관들과 왕위 계승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 그 누구도 알 게 되어서는 안 되는 왕국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명심해 주십시오!" '이일이 세어 나가면 아카바 왕국은 온 대륙의 비난을 받게 된다. 다시는 그 명 예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마른침을 삼키며 바디메오는 무의식적으로 성검 말고스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곧 자신을 조심스레 쳐다보며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대신들의 시선을 의 식하자, 바디메오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상황은 여러분이 들으신 바와 같소. 이것은 이미 전쟁상황이요. 상대가 단 일 인의 마법사 라지만 그러하기에 더욱더 곤란한 싸움인 것입니다." 한마디를 쉬고 대신들을 한번 둘러본 후, 바디메오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이 침입한 곳은 대신전의 내전, 많은 병사가 들어가 봐야 용병의 묘를 살릴 수 없고, 놈은 최상급의 마법사... 어쩌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몰살당할 수도 있 소. 그러므로 놈은 나 혼자 상대하겠소." "마...말도 안되옵니다. 폐하!" "거두어 주십시오." "기사단을 믿지 못하시옵니까? 폐하!" 왼손을 들어 불같은 기사들의 항의를 저지한 바디메오는 엄숙한 어조로 선언하 듯 말하였다. "귀관들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오. 다만 쓸데없는 희생을 막자는 것이고 나에겐 방법이 있소. 나는 검성 바디메오요! 나 이외에 그런 자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상황을 봐서 알 수 있을 것이오! 이것은 칙명으로 들으시오. 이 시간 이후 짐의 허락 없이 그 누구도 내전에 들 수 없소. 불응하는 자는 내 맹세하거니와 반역자라 불 리게 될 것이오." 5 입구와 미로 같은 여러 통로들과는 달리 내전 안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양 축을 수십 계의 돌기둥들이 지탱하고 있었는데, 거대한 기둥 하나 하나에 모두 대마법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훗! 정말 할 일 없는 신관들이군요. 이런 꼼꼼한 수작업은 정말 처음인데요." 자신을 레스타트라 밝힌 이 엄청난 힘의 마법사는 말과는 달리 약간은 곤혹스러 운 표정이었다. 꼭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같은 어투는 그의 버릇인 것 같았다. 그는 내전의 안쪽을 훑어보고 조금은 감탄하는 것 같았다. 대리석 제단을 중심으로 황금으로 깍은 아세르 여신상의 부조가 아름답게 빛나 고 있는 내전의 안쪽 벽에는 아세르 여신의 종속 신들의 모습과 신화들을 조각한 구조 물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모든 각각의 조각들의 경계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주먹만 한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분명히 이들 중 하나인데, 이래서는 아무리 나라도 찾는데 애를 먹겠군요."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는지 레스타트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 리고는 갑자기 왼쪽 검지를 깨물더니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대리석 바닥에 마법진 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번거로운 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죠." 마법진을 다 그리고 조금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가볍게 손가락을 빨다가 뒤로 물러선 그는 주문을 외웠다. "자! '다리아' 시간의 정령이여! 피의 계약을 이행하세요! 시간의 결계를 열고 나에게 100년 그 이전의 시간을 엿보게 해주세요." 마법진의 위에 일어난 붉은 색 기류 안에서 초록색의 아름다운 긴 머리칼에 하 얀 피부, 뾰족한 귀를 가진 나체의 소녀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동자가 없어 조금은 섬뜩한 이미지였으나 환하게 웃는 얼굴로 레스타 트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이고는 온몸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스타트의 눈앞에 뿌연 잔영이 생겨나고 그것은 조금씩 넓어져 양팔을 벌린 정도의 넓이에서 멈추었다. 레스타트는 미소 짓는 얼굴로 그 안을 바라보았다. 그 안의 풍경은 지금의 벽면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듯 했는데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보다 미세하나마 벽면의 조각들이 좀더 깨끗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는 왼쪽부터 차례로 보석들을 바라보다 일곱 번째의 석상에서 멈추었다. "훗, 여기 있었군요. 아스나여!" 그가 멈추어선 벽면에는 엷은 아미 색을 띄는 주먹만한 호박이 박혀 있었는데, 그의 눈앞의 정령의 영상에는 초록색의 사파이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백년동안 단 한 개의 보석만이 바뀌어 있다는 것은 이것이 아스나라는 이 야기겠죠." 그가 가볍게 손을 휘저어 영상을 흩어내자 정령은 모습을 되찾고 레스타트의 볼 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는 마법진 속으로 사라져갔다. 씁쓸한 미소를 띄던 레스타트가 손을 들어 보석을 잡으려 할 때 별안간 뒤에서 파공음이 들려왔다. 쉬이익……. 자신에게 무엇인가 불가사이한 속도로 쏘아져 오는 것을 느낀 레스타트는 몸을 돌리지 못하고 재빨리 결계를 쳤다. 파악……. 그러나 등뒤에서 쏘아져 오던 물체는 그대로 결계를 찢고, 등에 박혀 레스타트 의 가슴까지 꿰뚫어 나오고 있었다. "크윽....." 절대 들을 수 없을 것 같던 레스타트의 침음성이 악물은 입에서 새어나왔다. 곧 검이 서서히 뽑혀나갔다. 상체에 걸친 아머에 검이 긁히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내었다. 등과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천천히 돌아서는 레스타트의 시선에는 차가운 눈빛 의 바디메오가 성검 말고스를 들고 서있었다. 말고스는 전설의 성검답게 피 한 방울 묻지 않고 파리한 빛을 띄며 레스타트를 향해 있었다. "후후... 상상도 못했군요. 정말로 있었군요. 그런 물건이...." 가슴을 꿰뚫리고도 레스타트는 웃고 있었다. "말고스입니까? 좋군요. 소문으론 들었었지만 설마 검 따위가 제 결계를 뚫을 수 있으리라고는.....그런가요? 당신이 검성 바디메오로군요. 저의 속셈에 당신을 넣 지 않은 것이 실수였군요." 평소 같으면 벌써 치유마법으로 상처가 아물었겠지만, 성검에 입은 상처인지라 치유마법이 듣지 않아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입가의 피를 소매로 닦으며 바디메오를 응시하였다. "그러나 첫 검에 확실히 심장을 찌르셨더라면 아무리 저라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텐데 아쉽군요." 바디메오는 흠칫 놀라며 그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검은 확실히 마법사의 왼쪽가슴을 꿰뚫었고, 심장은 이미 산산이 부서졌을 터였다. "후후...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저의 몸은 좀 구조가 다르거든요." 별안간 레스타트가 오른 손을 발작적으로 뻗으며 주문을 외쳤다.. "RHEGIUN(파괴)" 폭갈과 함께 새파란 폭염이 머리통만한 공이 되어 바디메오에게 쏘아져 갔다. '카강!' 뒤로 잽싸게 물러서며 검으로 불의 공을 퉁겨낸 바디메오는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열 걸음을 밀려갔다. 간격이 확보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레스타트 의 공격이 이어졌다. 파팍- -슈우..우욱- 연속해서 날아오는 불의 공을 피하기 위해 몸을 날린 바디메오는 간격을 좁힐 기회를 찾지 못해 내전을 받치는 기둥들을 이용해 간발의 차로 피해내는 것이 고작이 었다. 화르륵.....- 새파란 불의 공을 맞는 곳마다 머리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녹은 구멍이 생겨났다. 온 벽과 기둥들에 대마법주문이 새겨져 있어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피할 수는 없다.' 기둥에 등을 대고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바디메오는 무언가 결심하는 듯했다. "후후, 나오시죠. 일국의 왕이라는 분이 훌륭한 신전을 너무 망가트리시는군요." 망가트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잊은 것일까? 그는 바디메오를 도발하고 있었다. "이야앗!" 바디메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기둥을 발판으로 레스타트에게 검신 합일이 되어 쏘아져 갔다. 레스타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특유의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RHEGIUN" 파란 불꽃이 날아와 바디메오에게 연속적으로 쏘아져 갔다. 일순 공중에서 뜬 상태로 몸을 회전시킨 바디메오는 성검을 던지고, 자신은 불의 공들을 피해 레스타트 의 등뒤로 날아가 제단에 부딪혔다. 퍼억- "으윽...." 단단한 대리석 제단에 심하게 부딪힌 바디메오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나뒹굴었 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바디메오는 그대 로 주저앉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심하게 꺽여 있었고, 왼쪽 어깨는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나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노.....놈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가까스로 상체를 세운 바디메오는 마법사를 바라보았 다. 등을 보이며 서있는 그는 목의 한가운데 성검을 박은 채 조용히 서있었다. '이겼는가?' 긴장감이 풀린 바디메오는 왼쪽 어깨를 눌러 지혈하며,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피가 바닥에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레스타트가 천천히 검을 뽑고 있 었다. '이...이럴 수가?' 쨍강.... 검을 뽑아 멀리 던져버린 그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 쓰러진 바디메오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위험했습니다.....설마....그런...식으...공격..해올 줄은....상 상....도....못했군요..." 꿰뚫린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며 성대를 다쳤는지 괴이한 목소리로 레스타트가 말했다. "크윽.... 너는 불사신인가?" 상체를 지탱할 힘조차 빠져나간 바디메오는 바닥에 몸을 눕히며 떨리는 목소리 로 말하였다. "아직은 아닙니다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쓰러진 바디메오에게 다가오며 레스타트는 오른손을 들어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럼 이제 끝내도록 하지요. 위대한 기사님." 조롱하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레스타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오고 있었고 바디 메오는 두 눈을 감고 사랑하는 아내 소피아를 떠올리고 있었다. '용서하시오. 소피아 나의 힘없음을....' 푸욱-. 검이 살을 꿰뚫는 파육음에 바디메오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눈앞의 마법사의 오른 쪽 가슴에 성검 말고스가 비죽 나와 있는 것이 보이며, 등뒤로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의 심장은 왼쪽에 없다면 오른쪽에 있는 것이겠지?" "크악!" 처음으로 마법사는 고통에 찬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삐죽 나온 검의 끝에 피가 끓어 거품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찌른 것이리라. 엄청난 양의 피를 흘 리던 그는 이윽고 침몰해갔다. "소피아" 바디메오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상대를 쓰러뜨려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아내 를 다시 보게 된 기쁨인 것이다. "폐하!" 검을 뽑은 소피아 왕비는 남편에게 달려와 상처를 바라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폐하 괜찮으세요?"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은 그녀는 바디메오의 눈에는 마치 여신 같았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저를 반역자로 처벌하세요." 아름다운 왕비는 눈물을 훔치며, 장난끼어린 눈동자로 바디메오를 바라보며 남 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곧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껴안고 입을 맞 추고 있었다. "후훗... 왕비이셨던가요?" '헉'. 재빨리 떨어져 나간 소피아가 검을 들고 뒤로 돌아 서는 순간 마법사의 긴 손가 락이 왕비의 두 손을 잡아채는 것이 보였다. 두 눈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얼굴엔 핏기가 없어 시체처럼 파리한 빛을 띄고 있 었다. "대단한 여기사를 두셨군요. 아무리 성검 말고스라 해도 저의 심장에 검을 박을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두 손을 잡힌 소피아는 손을 빼려 했지만, 레스타트의 긴 손가락은 마치 족쇄처 럼 그녀의 양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왕비를 놓아라 이 괴물 같은 놈아! 크윽..." 바디메오가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다가 고통에 신음을 내며 쓰러지자 레스타트는 왕비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왕 앞에 집어던졌다. 팍―. 검은 바디메오의 발치에 꽂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왕비님! 당신 덕분에 저는 십 수년을 마법의 잠 속에서 보내야 하는 큰 상처를 입었답니다. 대가를 치러주셔야 겠죠 ?" 별안간 그의 주황색 안광에 가위눌린 듯 꼼짝하지 못하는 왕비의 눈을 바라보던 레스타트는 얼굴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태아라.... 당신의 자궁에는 지금 태아가 있군요!" 그 말에 흠칫 놀라 정신을 차린 소피아 왕비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레스타트는 벽에 박혀 초록색의 빛을 발하는 마석 아 스나를 일별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후훗. 방법을 바꾸도록 하죠. 제가 당신에 의해 마법의 잠을 자게 되었으니 당 신도 그 세월 동안 살아서 고통을 당하도록 해야지 공평하게 되겠죠. "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네 놈은..." 과다한 출혈로 꺼져 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바디메오가 소리 치는 가운데 레스 타트가 오른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왕비의 머리 위에 뻗어 갔다. 마법에 걸렸는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왕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저 악 몽처럼 눈앞의 마법사가 하는 양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REHENE REHENA UBANOBA........" 주문을 외우는 동안 점점 레스타트의 몸에 피거품이 일며 녹아 갔고, 주문을 마 친 그의 몸은 마침내 피곤죽이 되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운명의....결계.....를....열고.....왕비....의 운....명....을 ...바꾸...었 죠....후후....당신....이.....낳...는..왕위계승...자..가..될..아들은....16세.. 의...탄생일에..살아서...온몸이...천천히...녹아..내리는..고통을...맛보게..될겁니다. 후후...제가...마법의..잠에..들기..전에...드리는..선물.마음에..드셨기를..그 럼..16년..동안...고통 속에...괴로워해..보시지요..후후후 " 이윽고 온몸이 녹아 내린 레스타트는 저주를 남기고 증발하듯 아무런 자취도 남 기지 않고 사라져갔고, 장내에는 과도한 출혈로 기절한 `바디메오`와 주저앉아 멍하니 마법사가 사리진 허공을 바라보는 왕비만이 남아 있었다. 아카바력 340년 에브라임 원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프린세스 조슈아 @제 2 화 새로운 운명의 시작@ 제 2 화 새로운 운명의 시작 저녁 노을이 성벽에 검붉은 그림자를 그리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수많은 음유시인들과 여행자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게드마 성의 낙조는 언제나 소년의 영혼을 따뜻이 감싸안아 정화시켜 주는 듯했다. 서쪽 성벽 위에서 보는 낙조와 멀리 보이는 에그론 산맥의 웅장한 모습을 본다 면 누구든지 이 아름다운 왕국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리라. "헤에....여기 있었네.... 죠슈에...." 등뒤에서 장난스러운 말투의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불경스럽게 왕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데도, 죠슈에 왕자는 목소리의 주인공 을 잘 알고 있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러움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너 또 저녁 기도에서 빠져 나왔구나? 샤레셀(Sharezer)....." "헤헤...." 고대어로 `왕을 수호하는 자`라는 뜻의 거창한 이름을 가진 이 소녀는 새하얀 공단으로 만든 가운에 은실로 짠 성포를 쓰고 있었는데, 상급 신녀임을 나타내는 금으 로 조각한 아세르 여신의 부조가 장식된 펜던트를 목에 걸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15 ∼ 16세나 될법한 자그마한 소녀는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은 빛의 성포를 벗고, 감아 올려 금빛의 망사로 고정시킨 머리칼을 글쩍이며 살그머니 소 년의 옆에 앉고 있었다. 밖으로 빠져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단단히 고정시킨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 은 만약 풀어해 친다면 한 바구니는 될 듯 그 풍성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아래 머리를 말아 올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는 새하얀 백옥을 깍아 놓은 듯 하여, 그녀가 햇빛을 별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소녀는 새하얀 피부 외에는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두 눈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언뜻 장난기로 똘똘 뭉친 듯한 소녀의 갈색 눈동자는 정감과 풍부한 감성, 이지 로 빛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깊이가 있어, 감히 쉽게 근접할 수 없는 고귀한 영혼을 가지고 있음이 엿보였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으니 좀 비켜주었으면 좋겠다. 샤레셀." 왕자는 용기 좋게도 까마득히 높은 성벽의 끄트머리에 따라 앉아 자신을 바라보 며 눈을 빛내는 소녀가 부담스러운지 퉁명스러운 말을 던지고 있었다. "하나도 멋없다. 뭐! 고뇌에 잠겨 낙조나 바라보고 있는 비운의 왕자 같은 건...." 뒤통수를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은 곧 어쩔 수 없다 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방해하러 온 거냐?"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을 손으로 넘기며 왕자는 소녀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 였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음.... 있잖아. 죠슈에! 옛날에 시돈 왕국의 에므르 왕비는 어금니에 충치가 생겼는데, 남편한테 이 빠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아파도 꾹꾹 참다가 결국 충치가 퍼 져서 이를 다 빼야 했데. 글쎄!.... 그리고 마스바의 트라멜론 왕은 변비가 심했는데, 의관에게 거기를 보이기 싫어서 참다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지..하고 꾹 참다가 결국 내장이 터져서 죽었고, 음... 또 맞아! 우리 엄마는 아빠가 구혼하실 때 신분은 높지 만 무뚝뚝하고 재미없으셔서.. 전혀, 청혼을 받아들일 맘이 없으셨는데, 확실하게 거 절 않고 무시하고 놔두었다가 어느 사이에 외할아버지 마음을 휘어잡아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까지 가셨데 .... 에 또..." "그...그만 됐어! 샤레셀!" 언젠가 만담으로 유명한 왕궁의 어릿광대가 샤레셀과의 길고 긴 회담(?) 이후, 어릿광대 옷을 벗어 던지고 떠나더니 왕궁 뿐 아니라, 온 아카바에서 영원히 그 그림 자조차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문은 왕궁에서는 거의 전설이었다. 그대로 놔두면 다음날 아침까지 떠들어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왕자였 다. 무엇보다 소녀가 자신을 깊이 걱정하여 마음을 돌리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왕 자는 소녀를 무정하게 밀어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죠슈에의 표정을 살피던 샤레셀은 왕자의 표정이 누그러지자 조심스럽게 마음속 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음... 있잖아! 죠슈에!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설령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추 억하게 되더라도...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 를 하고 싶었어." "..........." "나도 어릴 때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여신님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소녀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를 번지며, 방금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더 이상 느 껴지지 않았다. '샤레셀...' 죠슈에는 소녀의 아픔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열흘을 일찍 태어나 언제나 누나 노릇을 하려해서 어린 시절 제멋 대 로인 죠슈에가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이 소녀는 부왕의 이복동생인 오드니 대공의 딸이 었다. 첩이나 후궁이 인정되지 되지 않는 아카바에서 오드니 대공은 에브라임의 성을 물려받지 못하고 평민의 신분으로 자라 기사로 시작해 수많은 전공으로 대공의 지위 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헤레나 대공부인은 왕국 내무대신이었던 부친을 가진 명 문의 무남 독녀로 세상을 떠난 모친 소피아 왕녀와는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 그런 둘의 사이에서 태어난 샤레셀은 부모는 물론이고, 국왕 바디메오와 왕비인 소피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왕자와는 마치 친남매처럼 자라났다. 아무도 그녀의 황금빛 인생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신녀로서의 각성을 한 것이 10살 때였고, 그후 관례대로 그녀는 신 전에 바쳐져 신녀가 되었었다. 그날 이후 죠슈에의 눈에서 사라져 5년 후에야 상급 신녀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 소녀는 더 이상 어린 시절 기억 속의 꿈 많은 귀족 소녀가 아니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소년은 다시 삐죽 웃는 소녀를 보며, 정신을 차렸다. 소녀는 언제 가라앉아 있었냐는 듯이 엉덩이를 탁탁 털며 일어나더니 허리를 곧 게 펴고, 오른팔을 쭉 뻗어 검지 손가락으로 에그론 산맥에 살짝 걸쳐진 태양을 가리 켰다. "그래서 결심했지, 쓸만한 왕자를 한 명 키워 나대신 세계를 여행하게 하는 거 다! 그래서 돌아 올 때에는 열두 대의 마차에 선물을 가득 싣고, 그보다 더 많은 얘깃 거리를 가지고 돌아와 12일 밤낮을 떠드는 거지!" 그녀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왕자를 바로 보며, 싱긋 웃더니 성 포를 대충 눌러쓰고는 두 손을 뒤로 깍지 끼며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러니 너는 그때까지 내 허락 없이 죽거나 할 수 없어, 알았지?" 까르르 웃으며 샤레셀은 재빨리 망루로 사라져 갔다. 남겨진 죠슈에 왕자는 한동안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다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의 이야기 데로다. 나는 작은 굴욕을 참지 못해 너무도 소중한 것들 을 내팽개치려 하고 있었어...' 왕자는 달빛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멀리 성밖 마을들의 자그마한 불빛들을 정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결심한 듯 고개를 한번 끄떡이고는 성벽의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5 왕자 죠슈에는 17년 전 신전에 침입했던 한 마법사에 의해 태어나기도 전에 저 주를 받고 있었다. 새하얀 천사 같은 왕자가 태어났을 때 왕과 왕비를 비롯해 온 아카바는 모두 미 래의 왕위 계승자의 탄생에 기쁨으로 밤을 지새웠었다. 그러나 왕실에는 남모를 고통이 뒤따랐으니, 왕자가 16세가 되는 생일에 처참하 게 녹아내려 죽게 되리란 저주 때문이었다. 왕비 소피아는 시름에 잠겨 고민하다 몸을 버려 결국 이듬해 왕자를 쏙 빼 닮은 누이 에레나를 낳다 숨을 거두고, 국왕은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슬픔과 왕자의 저 주에 대한 고민으로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왕자의 저주를 풀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각국의 대마법사와 신관들, 나 중에는 심지어 엘프족의 마법사들까지 끌어 들였지만 어떤 종류의 저주인지 조차 알 아 낼 수 없었다. 왕은 서서히 지쳐가고, 왕자는 아름답고 명석하게 자라나 어느덧 15세의 훤출한 미소년이 되어있던 지난 해, 아무 기대를 하지 않고, 북쪽의 먼 왕국인 시돈에서 초 청해온 현자 기르가스가 너무도 간단히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왕자님에게 걸린 저주의 종류를 알아 내지 못하는 한, 어떤 마법으로도 왕자님 의 저주를 풀 수는 없습니다." ".........." "다만...왕자님께 저주를 건 마법사는 왕자님이 16세가 되는 생일에 저주의 시 효를 맞추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루만 피할 수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말이요?" "16세의 생일이 지나게되는 다음날의 자정까지만 왕자님이 여성의 몸이 되어 있 으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그런 것이 가능하오?" "성변이(性變異)의 마법은 웬만한 상급 마법사들에게는 일반적인 변용 마법중 하나일 뿐입니다. 다만...." "다만?" "예, 그러나 왕자님의 경우는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운명을 피해가 려는 것이지요.. 해서 그저 변용이 아닌 그 속성까지 완전히 변이 시켜야만 할 것입니 다. 그저 보통의 변이 마법사가 베푸는 것으로는 어느 정도는 가능하나 완전한 변이 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찌..." "마력의 증폭이지요!" "마력의 증폭....?" "전설의 마법사 타이가의 지팡이 '우노'나, 저 아빌라의 전설의 무당 '제논의 마법구술' 등을 매개로 전이의 마법을 증폭해 왕자에게 베푸는 것이지요." "꼭 그것들이어야 하는가?" "으음.... 그런 종류의 마법도구들은 대마법사나 신관과의 계약으로 이계신(異界神)이 그 힘을 빌려주는 매개이거나, 아니면 그 힘을 가두어 놓은 물건들이지요. 폐 하의 성검 말고스에 깃들어 있는 힘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하면 성검을 이용해서..." "아닙니다. 폐하의 검에 서린 힘은 아세르 여신이 성전의 수호자를 위해 베푼 성스러운 힘.. 질서의 여신의 힘이 비자연적인 일에 힘을 빌려 줄리 없지요. 오히려 이 런 일에는 조금은 사이한 물건을 쓰는 것이 적당하옵니다." 국왕은 물론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것으로 인해 왕비를 잃고, 왕자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던가? "고맙네... 정말로 고맙네... 원하는 것이 없는가? 내 무엇이든지 힘닿는 데로 들어주겠네.." "저는 지혜로 인간의 고통을 덜어줄 소명을 받은 자..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 다. 개념치 마십시오." 16년을 괴롭히던 국왕의 고통을 말끔이 씻어 주며 현인 기르가스는 고향 '시 돈'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왕자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왕자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여자의 몸이 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버틴 것 이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실강이로 시간이 지나는 가운데 이제 16세의 생일까지는 겨우 하루를 남기고 있었다. 6 "정....정말이냐? 왕자야?" 국왕은 너무도 기뻐 당장이라도 천장을 뚫고 날아갈 기세였다. 조슈에는 고개를 끄떡이며 부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간 고집을 부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옹졸했습니다. 용서하세요." 국왕은 체통도 잊고 연신 고개를 끄떡이며, 왕자의 손을 잡고 흔들어 데었다. "으핫핫.. 하하... 그래 네가 마음을 돌렸다니, 이 아비는 더 바랄게 없다! 으하 핫.. 가만... 그래... 에레나..에레나...는 어디있느냐 에레나에게 알려야지.. 하하하" 국왕 바디메오는 왕비와의 결혼이후 근 17년만에 처음으로 마음놓고 웃고 있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고 있는 부왕을 바라보며 소년은 지긋이 아랫입술을 깨물 고 있었다. '자! 죠슈에. 단 하루다... 하루만 여자의 몸으로 버티는 거다.' 7 국왕 바디메오와 에레나 공주가 멀찍이 떨어져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대신전의 내전에는 11인의 상급신관들과 7인의 상급 여신관들이 제의를 입고, 제단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대신관 아우다가 마석 아스나를 뽑아서 마치 쉽게 깨어지는 물건이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쳐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17년 전 대신관의 죽음이후 수제자로 대신관으로서는 매우 젊은 나이에 그 의 자리를 이어받아 올해로 60세를 맞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온몸에 하얀 천을 감은 죠슈에 왕자가 누워있었는데, 그 오른 편에 는 집광 거울의 받침대에 주먹만한 물체를 끼울 수 있게 되어있는 장치가 놓여 있었 다. 죠슈에 왕자는 매우 불쾌한 얼굴이었는데 그 이유는 몸을 감싸고 있는 하얀 천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나체인데다,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 중에는 여신관이 일곱 명이나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녀들의 가장 오른 편에 '샤레셀'이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다. '제길 왜 저 녀석까지....' 왕자가 조용히 이를 가는 동안 대신관은 아스나를 집광 거울의 중앙에 끼우고, 물러나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 여러분... 왕자저하의 16번째 탄생일까지 이제 1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기 회는 단 한번,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내가 일러준 주문을 외우고 그 힘을 아스나에 집중하면, 증폭된 힘을 내가 왕자님에게 이끌도록 하겠다. 명심해야만 할 것은 왕자 님께 변이의 주술을 베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아스나로 증폭하여 그 힘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력의 집중이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 명 심하라."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될 만큼 엄숙한 목소리로 긴 설명을 끝낸 대신관은 양손에 신력(神力)을 모으기 시작하며 소리쳤다. "TEREDO TEREONA" 부오오...... 대신관의 양손에서 하얀 광채의 빛이 세어 나오더니 곧 왕자의 몸과 아스나 사 이에 원형의 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빛에 싸인 죠슈에는 눈이 부셔 바깥의 상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 마법 회랑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도 1시간 남짓이다. 그 안에 모든 것 을 끝마쳐야만 한다. 자! 시작하라! " 18인의 최상위 신관들이 일제히 전이의 주문을 외우자 곧 따스한 분홍빛의 기류 가 나타나 아스나로 흘러갔다. 그러자 아미 색의 조금은 탁한 빛을 띄던 아스나가 조금씩 분홍빛을 띄더니 곧 이어 훨씬 짙어져 거의 빨간색을 띄는 기류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 기류는 대신관이 만들어 놓은 마법 회랑을 따라 하얀 빛 무리에 싸여 있는 죠슈에에게 흘러갔다. '어엇.. 이게 뭐야?' 눈앞의 빛무리에 눈이 부시던 죠슈에는 온몸을 덮는 짙은 분홍색 기류에 기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별안간 온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아악!" 처음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피부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 오더니, 곧 이어 근육과 몸 속 심지어 머릿속까지 고통은 스며들어 왔다. "정상적이 고통입니다. 왕자님.... 왕자님의 몸이 마법에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 다. 조금만 참으싶시오!" '으윽... 그런 말을 해봐야...' 왕자의 신음이 계속되는 동안 부왕과 공주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서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고통 속에 마침내 조슈에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8 "왕자야!" "오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몇몇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조수에는 천천히 깨어났다. 힘겹게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웃고 있는 에레나가 보 였고, 그 왼편에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확실히 깨어나지 못해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지만, 곧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결과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었죠? 어....?" 죠슈에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전혀 낯선 높은 소프라노의 고음으로 변해있었다. '되었구나! 여자가...' "으흠.... 왕자님 지금은 자정이 막 지나 새벽이옵니다." 무슨 말인가, 두 눈을 깜박이던 죠슈에는 곧 상황을 깨닫고 부왕을 바라보았다. 부왕은 역시 눈물을 머금으며 연신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고, 에레나는 얼굴을 가리고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조금은 피곤한 얼굴의 샤례셀이 얼굴을 들이밀며 미소 지었다. "왕자님은 이제 오래오래 사실거예요. 약속 잊으면 안 되요!" 대신관 앞이라 어울리지 않게 존칭을 쓰는 그녀였지만, 두 눈은 기쁨으로 반짝 이고 있었다. "그런데... 신관님들께서 민망해 하시니 가슴정도는 가리는 것이 어때요?" 그제야 죠슈에는 신관들이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마치 파수꾼들인 양 여기저 기 엉뚱한 곳에 시선을 두고있음을 발견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맞아...나는 ...' 죠슈에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먼저 다리를 감싸고있는 하얀 시트가 보였고, 그 위로 갑자기 하얀 물체가 시선 을 막아 당연히 보여야 할 아랫배가 보이지 않았다. '아....아악' 잽싸게 천으로 상체를 가린 왕자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느낌이었다. '가..가슴이다.' 코밑까지 시트를 끌어올린 왕자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 왕자는 지금 여자인 것이다. "내일 자정이 지나면 왕자님께 걸려 있던 저주는 풀리게 됩니다. 그후에 왕자님 의 몸에 재변이를 행하면 되지요." 백발의 노신관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주위의 전환을 모색했지만, 역시 이런 일에 약한 신관들은 여전히 시선을 돌리고 있어, 왕자는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 옆에 샤레셀의 얼굴은 두 볼이 한주먹은 나와있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 고있는 것이 분명함을 알 수 있었다. 9 조슈에는 겨우 자신의 방에서 혼자가 되자 한숨을 내쉬며 거대한 벽걸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리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럴 것이 누이 에레나가 좀더 성숙한 모습이랄까? 거울 속의 소녀의 모습은 조 슈에의 본모습과 비교하자면 좀더 키가 작아지고, 어깨를 지나 허리까지 늘어트린 금발의 머리칼과 파란 가운 위에 뽕끗 솟은 모양 좋은 가슴 정도 였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가운의 돌출부를 응시하던 조슈에는 아까의 영 상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몸을 보고싶은 충동에 사로 잡혀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자 불에 댄 듯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침대로 뛰어들어 비 단 베개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하루다.... 단지 하루야...죠슈에"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NEXT 제3화 사라진 마석 아스나 프린세스 조슈아 @제3화 사라진 마석 아스나@ 제 3 화 사라진 마석(魔石) 아스나 새벽닭이 울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신전중앙의 크리스탈 여신상에 반사된 달빛이 외신전의 내부를 밝게 비추고 있 다. 오직 왕족과 상급이상의 신관들만이 들 수 있는 내신전의 입구에는 17년 전 내 신전에 침투했다가 바디메오 국왕에 의해 격퇴되었다고 전해지는 마법사 레스타트가 녹여 없앤 거대한 돌의 문 대신, 강철을 녹여 화려한 조각들로 장식된 강철 문이 막고 있었다. 거대한 강철 문에는 문을 열기 위한 손잡이나 열쇠구멍 조차 없으며, 문의 중앙 의 이음세에 마법진이 세겨져 있어, 문을 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주문을 외워야했 다. 외신전의 새벽 기도 시간까지 이제 3시간 남짓 남은 시간, 내신전 입구의 기둥 뒤에서 섬세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연신 좌우를 살피던 인영이 철문 앞에 서서 가볍게 중얼 거리자 소리 없이 강철 문이 열리며 내신전의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한번 좌우를 살핀 인영은 황급히 안으로 사라지고, 강철 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서서히 닫혀 갔다. 내신전의 벽면에 새겨진 조각상들의 양옆에는 모두 제각기 다른 종류의 보석들 이 박혀 있었는데 인영은 망설이지 않고, 왼편에서 일곱 번째 보석을 향하고 있었다. "자! 서둘러야지..." 몹시 불안한 듯 떨리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의외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 다. 모자가 달린 회색가운을 입은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아미 색의 호박을 빼어내고 소매 춤에 넣었다. "그분이 기뻐하시겠지?" 기대감으로 떨리는 것일까?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며 황급히 내신전을 빠져 나 왔다. 1 성동 쪽의 늪지대를 지나 마을의 공소에는 저녁때면 언제나 가족의 평안과 나라 의 번영을 비는 시민들로 붐볐다. 전국각지에 마을마다 공소가 있는데 그 안에는 아세르 여신상이 모셔져있고, 일 주일에 한번 마을의 신관이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가진 자가 여신상을 딱기 위해 들 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도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심스레 공소의 문을 열고 나오는 회색 인영이 있었다. "아직 안 오셨을까?"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목소리는 예의 내신전에 중년여성의 목소리였다. "여기요! 세레나!" 기도소의 마당에 심어진 아름드리 나무의 뒤편에서 달빛을 등지고선 훤출한 키 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아아! 기르가스님" 떨리는 목소리로 여인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 안기고 있었다.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훤출한 키에 허리까지 오는 긴 암갈색 머리칼을 묶어 넘긴 27∼8세 남짓 되어 보이는 차가운 인상의 미 청년이었다. 여인을 바라보는 짙은 초록색의 눈동자는 일말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개의치 않고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 의해 회색의 가운이 벗기어졌다. 이제 30세쯤 되어 보이는 여인은 놀랍게도 상위 신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그 얼굴은 왕자 조슈에의 변이의식에 참여했던 여신관들 중 하나의 얼굴이다. 그녀는 신녀의 신분이 무색하도록 사내의 품에 안겨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그래서... 가져왔소?" 무심한 표정으로 키스를 받던 사내는 여인을 턱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며 차갑게 말하였다. 아쉬운 듯 투정 섞인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달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설마! 신전 내에 침입자가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 겠죠. 호호호" 창피하지도 않은 걸까? 그녀는 자신의 배신에 대해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 는 듯 연신 교소를 흘리고 있었다. 사내의 초록색 눈동자에 언뜻 경멸의 빛이 비치는 듯 하더니 곧 사그러지고, 그 는 손을 내밀었다. 신녀는 곧 왼쪽 소매에서 마석을 꺼내어 사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미 색의 마석 아스나는 백여 년만에 처음으로 달빛을 받자 괴기스러운 주황색 빛의 광채를 뿜어냈다. 득의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던 사내는 아스나를 품속에 갈무리하고, 여신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사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왼쪽 입꼬리가 살짤 올라가는 듯 싶더니 사내는 여인의 허리를 두 팔로 감고 입 을 맞추었고, 여신관은 달뜬 신음성을 내며 사내의 목을 껴안았다. 그러나 별안간 여신관의 두 눈이 치켜 떠지더니 그녀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사내의 품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러나 사내는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을 놓지 않고, 이윽고 여인은 경련을 멈추 더니 머리끝부터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서서히 녹아 내리고 있었다. "후후... 잘 가시오. 매력적인 여신관... 매혹의 주문에 그리 쉽게 빠져든 것도 당신의 운명이겠지..." 심하게 녹아 피곤죽이 된 여신관의 사체를 차갑게 일별하고 사내는 이제 막 떠 오른 새벽햇살을 받으며 사라져 갔다. 2 왕자의 저주를 풀었다는 기쁨에 밤잠을 설치던 바디메오 국왕은 아침 일찍이 일 어나 대신관과 환담을 나누던 중, 넘어질 듯 달려온 신관의 청천병력 같은 보고를 받 게되었다. "무....무어라고? 아스나가 사라져?"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옥좌에 주저앉은 국왕은 대신관에게 고개를 돌렸 다. 국왕에 지지 않을 정도로 창백해진 안색의 대신관은 벼락같이 소리를 질러 데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냐! 입구를 부수고 들어가는데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그것이 침입자는 여신관 세레나인 듯 합니다. 새벽에 사라져 지금까지 발 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대신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세레나`라면 가능하다. 그녀는 내신전에 들 수도 있고, 마을의 공소로 이어지는 신전의 비밀 통로를 알고있는 몇 안 되는 여신관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왜?' "기사단을 호출하라! 짐이 직접 나서겠다." 바디메오는 충혈된 눈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3 조슈에가 누이 에레나에게서 아스나의 분실 소식을 들은 것은 해가 중천에 뜬 후였다. 밤새도록 싱숭생숭한 마음에 잠 못 이루다가 새벽녘에야 잠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왕과 기사단은 대신관이 일러준 비밀 통로의 근처에서 여신관 세레나의 것으 로 추정되는 회색 가운과 심하게 녹아 내린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누군가에게 아스나 를 전해주고 제거 당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조슈에는 충격과 여인의 몸이 되어버린 부끄러움으로 자신의 방에서 두문분출 했고, 부왕은 성도의 모든 가도에 검문을 세우고, 온 아카바의 영주 들과 기사단에 주먹만한 회색의 호박을 가진 자를 잡아 들여 성도로 압송하라는 공문 을 내렸다. 그리하여 왕궁은 상급신관들이 아스나를 가려내는 동안 근 한달을 엉뚱하게 잡혀온 보석의 주인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고, 한 달이 지난 후에는 그나마도 압송되는 용의자도 더 이상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잡혀온 보석상들과 주인들은 곧 적당한 보상을 받고 돌려보내졌 고, 그 이후로는 아스나를 찾기 위한 뾰족한 대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절망 속에 또 한 달이 흐르고 있었다. NEXT 제4화 동궁의 미소녀 프린세스 조슈아 제 4 화 동궁의 미소녀 part 1 제 4 화 동궁의 미소녀 왕실 내궁의 서쪽에는 아치형의 지붕에 전체 외벽을 백석으로 깎고, 네 개의 거 대한 기둥을 은으로 입혀 그야말로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궁전이 있다. 그리고 이 미궁은 우아한 모습과 너무도 어울리게 '백합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궁전의 주인은 올해로 16세가 되는 아카바 왕국의 유일한 왕위계승 자로, 그 아름다움과 뛰어난 검술로 이름 높은 조슈에 왕자였다. 그러나 최근 성도에서는 왕자가 심한 병에 걸려 근 두 달 동안 '백합의 정원'에 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 백성들의 근심을 사고 있었고, 이에 온 나 라의 신전과 공소는 왕자의 쾌유를 비는 백성들로 연일 들끓었다. "오빠! 언제까지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거야! 그러다 정말 없던 병도 생기겠 어!" 에레나 공주는 진심으로 오빠의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난 두 달간 조슈에 왕자는 단 한번도 방을 나서지 않았고, 음식도 꼭 누이가 가져오지 않으면,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너라면 이런 처지에 한 발짝이라도 방문을 나설 수 있겠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왕자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 내며 그 높은 고음의 미성으로 소리치며 일어나 앉고 있었다. 그러자 부스스한 머리에 창백한 피부이지만,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금발의 미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봐! 이걸 보라고, 하루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까지 생각 했었는데 벌써 두 달째야." 앙칼진 소녀의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대는 오빠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레나 공주 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두 달을 보아왔지만, 그녀의 오빠는 언제 봐도 너무나 아름다운 소녀의 모 습이었다. 가뜩이나 새하얀 피부는 두 달간이나 햇빛을 쐬지 않아, 이제는 거의 실핏줄이 들여다보일 듯 새하얗고, 조금은 소녀답지 않게 발달해있는 양어깨는 섬세한 목선과 의외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준다. 소년다운 치기와 강인함이 어우러진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는 너무도 정감 흐르 는 소녀다운 얼굴에 언발렌스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것 또한 묘한 매력을 느끼 게 하 는 요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용의 가운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 완벽한 몸매는 16세 소 녀의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훌륭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에레나는 언뜻 부럽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본래 아름다운 왕자이기도 했지만, 이것은 확실히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드는 에 레나였다. "오빠! 정말 예쁘다!" 소녀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상심한 오빠를 확실히 나락으로 떨어뜨릴 결정적 인 한마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악!" 왕자는 다시 침대 위에 엎어져 베개로 귀를 막았다. 소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왕국 전체에 기사단을 풀어 뒤지고 있으니까! 꼭 찾아 낼 수 있을 거야! 오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소녀였다. "에레나! 여자의 몸은 왜이리 불편한 거냐? 조금만 움직여도 이 쓸데없이 큰 가 슴은 흔들려 신경 쓰이고, 피부는 쉽게 멍들고, 그 한 달에 한번 끔찍한 복통에.... 화장실에 가면... 그....그...으흑....." 또다시 오빠를 위로하려다가 도리어 이불을 뒤집어쓰게 만들고야만 에레나는 한 숨을 내쉬며 조용히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어쨌든 더 이상 방에만 박혀 있어서는 정말 몸을 버리게 될 거야. 어떻게든 오 빠를 눈에 띄지 않게 출입할 수 있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해!' 1 마석 아스나의 분실 후 2개월 남짓, 더 이상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된 국왕 바디메오는 대신관 이하 12인의 상급신관들과 왕궁마법 사인 그레텔을 불러들였다. 분실물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모든 동맹국들의 힘을 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마석 아스나를 폐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카바는 어쩌면 영원히 회복이 불가능한 정도의 외교적 손실을 입게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였다. 그리하여 국왕은 진퇴양난의 기로에 처해 있었다. "아아!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고르고 골라 바로 의식이 행해지는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바디메오는 이마를 짚은 손가락을 떨며, 탄식하였다. 국왕의 표정을 살피던 대신관 아우다는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폐하! 신의 소견이옵니다만, 도적은 상급여신관 세레나를 매혹의 주문이나 그 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꾀어낸 듯하옵니다." 바디메오는 이마를 짚던 손을 떼어 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소!" 마른침을 한번 삼킨 대신관은 말을 이어 갔다. "상급 여신관쯤 되는 자가 그리 간단히 매혹의 주문에 걸려들었을 리 없지요, 아마 상대는 상당한 마법사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세레나는 지난 수개월간 궁 밖으로 나간 적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그자는 궁 안에서 세레나를 유혹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사옵니다." "누가 그런...." "그래서 지난 수개월간 궁을 출입한 상위마법사들중 하나가 아닐지 ...." 국왕은 몸을 일으켜 대신관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런 정도의 마법사가 성에 든 적이 있소?" "새벽마다 여신님의 축성을 받는 의식을 받으면서도 풀리지 않은 주문이옵니다. 그런 정도의 강력한 주문을 가진 마법사는 지난 몇 년간 성에 든 적이 없사옵니 다." 국왕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아니오?" "그 능력으로 볼 때 그 정도의 마법을 숨기고 있었을 수도 있고, 또 신관들과 접촉한 적도 있는 인물이라면 있사옵니다." "누...누구요? 그자가!" 갑자기 왕궁 마법사로 지난 100년간 왕국의 길흉을 점쳐온 160세의 노파 그레텔 이 그 까마귀도 몸서리 칠 기분 나쁜 걸쭉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현자 기르가스이옵니다. 폐하!" "기르가스가? 그는 왕자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준 왕국의 은인이 아니오?" "저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정황으로 보아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자가 없사 옵니다." 잠시 국왕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설마.... 아니야... 왜 그자가? 어떻게 아스나의... 음 그것도 세레나 여신관 에게서? 그렇다 해도 이유 없이 여신관에게 매료의 주문을? 앞뒤가 맞지 않는군.... 그렇다면 설마 그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국왕 바디메오는 등뒤로 식은땀이 흐름을 느꼈다. "외무대신을 부르시오! 시돈 왕국에 기르가스의 초청을 요청하겠소!" 국왕은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원무궁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복안이 있으시옵니까?" "그자가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다고 법 치국가인 아카바 왕국이, 일국의 대현자로 이름 높은 자를 납치할 수도 없는 일, 시돈 왕국에 거절할 수 없는 요구를 할 참이오!" 적의 윤곽이 잡혀가자 바디메오의 전사로서의 기질이 불을 뿜고 있었다. 대신관은 침음성을 삼키며 국왕의 살기 띤 눈동자를 주시하였다. '이일이 전쟁의 씨앗이 되지 않기를 여신께 비는 수밖에...' 2 "그래서 시돈에 사신을 보내기로 하신 겁니까? 아버님?" 조수에 왕자는 전보다 더욱 약해져 수척해진 얼굴로 침대에서 상체만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국왕과 공주는 조수에 왕자의 파리한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교환하고 있었다. "왕자야! 시돈에서 답이 오는 데만 최소한 석 달은 걸릴 거란다. 그때까지 이방 에만 틀어 박혀있을 순 없지 않느냐? " 국왕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저도 남장이라도 해서 나가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남자로는 보이지 않 더군요. 그러니 뾰족한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님..." 이미 시도를 해보았던지, 왕자는 아름다운 자태에 어울리지 않는 툴툴거리는 어조로 힘없이 대답하며,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긴 금발의 머리칼이 귀찮은 듯 뒤로 쓸어 넘겨 끈으로 묶고 있었다. "상급신관들과 궁전 마법사 외에는 너의 정체를 아는 이가 없으니, 일단 답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신분을 속이고...." "대신들이나 궁녀들이 저를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저와 에레나가 닳았다는 걸 모두 의심스러워 할겁니다. 아버님!" 그러자 이미 생각해 놓았다는 듯 에레나가 대답하였다. "왕실의 먼 친척 벌되는 동맹국의 손님 정도로 소문내면, 오빠가 나와 닮은 것 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 안 할거야! 응....그리고 당분간은 동궁에서 지내는 게....." "내가 왜 너의 처소에서 지내야 되는데?" "답답하네 오빠! 이 '백합의 정원'은 오빠의 전용 궁전이잖아! 그런데 거기에 여자가 드나든다고 소문이라도 나봐! 당연히 그 여자는 온 게드마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말 꺼야! 그러면 어떻게 그 모습으로 나다닐 수 있겠어!" "..........." "그리고 오빠는 지금 공식적으로 중병에 걸려있는 환자라구!" "그도 그러네..." 조슈아 왕자는 누이의 제안에 혹한 듯 매우 관심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은 그도 매우 답답한 것이 사실이어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나다닐 수만 있다 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국왕이 왕자를 재촉했다. "자! 결심이 섰으면 나가도록 하자! 이 가운을 걸치고 일단 에레나의 동궁에서 제대로 된 옷을 입거라! 도대체 그 옷은 어울리지가 않는구나!" 마치 여신 같이 균형 잡힌 풍만한 몸매에 남성용의 비단 잠옷을 입어, 민망할 정도로 몸매가 드러나 보이는 조슈에의 차림새를 못마땅하듯 쳐다보며, 국왕은 미리 준비해온 듯 모자가 달리고 바닥까지 쓸릴 듯이 긴 여성용의 붉은 가운을 넘겨주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왕자는 한숨을 내쉬며, 가운을 받아 입었고, 공주는 부왕 과 안도의 빛이 역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 날밤 에레나 공주의 궁전인 '새벽의 장미'에서는 왕가의 먼 친척이 방문해서 당분간 머문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고, 궁의 귀빈실이 말끔히 치워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3 "싫....싫어! 어째서 이런 옷을 입으라는 거냐! 에레나!" 커다란 원형의 탁자와 침대 위에 마치 전시하듯 벌려져 있는 드레스들과 속옷가 지들을 보며 왕자는 마치 경련을 일으킬 듯 했다. 그 앞에서 자뭇 심각하게 조슈에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고르던 에레나는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오빠는 동쪽 궁전의 손님이야! 그런데 남장이라도 할 줄 알았어? 오빠도 시도 해 봐서 알겠지만 어딜 어떻게 꾸며도 오빠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아! 기왕 꾸밀 거면 이뿐 게 좋잖아! 아! 이게 좋겠다." "..........." 누이가 고른 분홍색에 긴 레이스로 장식된 비단 드레스를 보며 왕자는 그대로 굳어버린 듯 했다. "오빠! 그 가운 안에 아직도 남자용의 속옷을 입고 있겠지? 제발 좀 벗어 던지 고 몸에 맞는 속옷 좀 입도록 해봐! 그런 거만 계속 입고 있으면, 몸도 불편하고 그 좋은 몸매를 버리게 된다고..." ".........." "왜 그래 오빠?" 오빠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에레나는 오빠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 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조슈에가 입을 연 것은 거의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래....! 속옷이 몸에 맞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이렇게 몸이 불편했던 것이 군!" 왕자는 엄청난 발견이라도 한 듯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옷을 고르는 왕자를 뒤로하고, 에레나는 방을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문을 닫고 나와 문에 등을 기대고 선 그녀의 등뒤에서 왕자의 중얼거리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이건 정말 몸에 딱 붙는군! 이렇게 느낌이 좋을 수가! 괜히 쓸데없이 고 생하고 있었잖아! 에레나도 참! 이런걸 이제 가져오다니!" 마치 16세 소녀처럼 수다를 떨어 데는 조슈에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주는 사랑 하는 오빠가 더 망가지기 전에 빨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빌고있었다. NEXT 제4화 동궁의 미소녀 PART 2 프린세스 조슈아 @제4화 동궁의 미소녀 part 2@ 4 "이봐 보았나? 그 아가씨?"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더군!" "나도 공주님과 정원을 산책하시는걸 보았는데 꼭 공주님의 언니 같더구만!" "허! 내가 보기엔 돌아가신 왕비님을 더 닮은 것 같던데?" "그렇다면 왕비님의 친척이시겠구먼?" 왕실 근위대의 연무관(演武館)에서는 궁정기사단들이 몇 일 전에 입궁한 왕실의 먼 친척이라는 것만이 알려졌을 뿐, 그 정체가 신비에 싸여있는 금발미녀의 이야기 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녀였지만, 이미 그 뛰어난 미모로 궁전의 기사들과 대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훈련 후 구석에서 땀을 닦던 왕실 근위대장 조르쥬도 그녀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지, 눈치 체지 않게 한창 이야기 중인 기사들 쪽으로 가까이 접근해 앉고 있었 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사들의 이야기는 더한층 무르익고 있었다. "그래도 말이야, 아무리 왕비님 쪽의 친척이라도 그 집안은 평민출신이지 않은 가! 그런데 한번 찾아오지도 않은 집안의 손님을 '새벽의 장미' 궁전에서 머물게 하는 것은 정말 이상치 않나?" "나도 그것이 이상하더군! 그리고 '에레나' 공주님께서 매우 어려워하시는 것 같았는데 말이지!" "아무튼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지!" "아! 그것은 정말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네, 내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이었어." 기사들은 연분홍 빛 환상에 빠져들고 있는 동안 조르쥬는 입가에 미소를 띄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연무관에 들어서는 섬세한 인영을 보고 일순 굳어지고 있었다. 소문의 주인공인 절세의 미소녀가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어엇..." 상체를 드러내고 땀을 닦던 병사가 얼른 옷을 챙겨 입으며 짧은 경악성을 질렀 고, 이어서 여기저기서 장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는 마치 대단히 익숙한 곳에 들어온 양,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연습용 검 들이 걸려있는 벽면으로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저...정말 죽여주는 구나!' 순간 아무리 마음속에서라고 해도 경박한 생각을 했다는 자괴감에 조르쥬는 주 먹으로 뒤통수를 때리고있었다. 기사들을 일별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연습장이기라고 하듯 유유히 검을 고르 고 있는 소녀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빨강 색의 바지차림의 그녀는 길고 가는 다리에 어울리는 무릎까지 오는 갈색 가죽 장화를 신고있었고, 그 위에 분홍색 비단 블라우스는 많은 레이스로 장식되어있 었으나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가리기에는 역부족인 듯 완연한 굴곡을 보여주고 있었 다. 화장기가 없는 새하얀 얼굴은 섬세한 목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조금은 날 카로운 콧날은 도도한 기운을 풍기며 타고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허리아래에서 출렁이는 윤기 흐르는 금발의 머리칼은 아쉽게도 은색의 끈에 하 나로 묶여 있었고, 마치 오랜 세월 검술을 단련한 기사 같은 절도 있는 걸음 거리와 몸가짐은 그녀의 미모와 대치되어 더욱더 야릇한 매력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르쥬를 감탄시키는 것은, 길고 짖은 속눈썹 안에 빛나는 두 눈동자였다. 그것은 마치 음유시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파아란 유리바다를 연상시키는 깊이 있고 짙은 파랑색 눈동자로 생명력과 강인함으로 빛나고 있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보석 같았다. 그러나 순간 조르쥬는 저 눈빛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한참 검을 고르고있던 소녀가 실전용의 양날검을 꺼내어 휘둘러보는 것을 보며 근위대장은 일순 식은땀이 흘렀다. 왕실의 손님이 근위대의 연무장에서 상처라도 입으면 그야말로 큰일인 것이다. 그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그것은 양날검입니다. 초심자에겐 매우 위험하지요! 검을 배우시고 싶 으시면, 제가 연습용으로 하나 골라드리겠습니다." 검을 보던 파랑색 눈동자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무슨 바보 같 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어서 조르쥬는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검으로 눈을 돌리며 소녀는 차갑게 대꾸하였다. "나는 초심자가 아닙니다. 다만 검의 무게가 익숙하지 않아 제어 보고있는 거죠." 그리고는 양날검을 잡고 연무대로 올라가 자세를 취하였다. '제법 자세는 잡혔군!' 조르쥬의 눈에 이체가 흐르는 가운데 소녀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루기 힘든 양날검을 자유자제 로 휘두르던 소녀는 일순 바닥을 박차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10보 앞의 찌르기 연습용의 판자를 검으로 꿰뚫고 있었다. '세...세상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난 듯 둘러서 구경하던 기사들은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완벽한 *아돌 (검으로 빠르게 전진하여 찌르는 공격) 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조르쥬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기술만으로도 왕실 기사단 전체에서도 그녀의 상대가 될만한 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어쩌면 나조차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일지 모른 다.' 그러나 기사단들의 경악에 찬 시선을 받으면서도 기실 그녀는 불만에 가득차 있었다. '다르다! 이 느낌이 아니야! 이것은 나의 검술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다른 것일까? 여자의 몸이라는 것은?' 왕자는 자신의 몸을 시험해 보기 위해 연무장을 찾아 왔던 것이다. 어느 정도 달라졌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훨씬 참담했다. '이 정도의 아돌에 발목이 저항감을 느끼고 있다. 정상적인 공격을 한다면 3∼4번을 넘기지 못하고 발목을 다치고 말 거다! 그리고 베는 동작에 꼴사납게 자세가 흐 트러지고 있다. 비교적 가벼운 남방풍의 양날검인데도 불구하고 몸이 그 무게를 완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 왕자는 한숨을 쉬며 경악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을 둘 러보았다. 그러나 곧 그 시선이 근위대장 조르쥬에게 멎으며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순간 조르쥬는 정신이 아찔해옴을 느꼈다. "저와 연습 시합을 해주시겠습니까? 기사님!" "에...예?" "저의 연습상대가 되어 주시겠냐고 했습니다!" "그...그런..." 동료들의 수근거림을 들으며 조르쥬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방금 그녀의 실력을 본 동료들은 그가 거절한다면 자신이 없어서 일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도전을 받아 준다해도, 만약 그녀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 겠는가? 이래저래 손해보는 것은 그인 것이다. 그의 생각을 눈치채었는지 왕자는 가볍게 실소하며 제안을 하였다. "기사님과의 연습 대결이니 위험할지도 모르겠군요. 연습용목검에 보호구를 착 용하도록 하죠! 괜찮으시겠어요?"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게 되었는지, 젊은 근위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떡였고, 둘 은 곧 신축성이 좋은 해마의 가죽을 몇 겹으로 덧 데어 만든 보호구에 목 검을 들고 연무대에 올랐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궁전 기사단 대부분이 몰려와 창밖까지 가득 채우고있었다. '제길... 다른 기사단 놈들까지 죄다 왔군! 한가한 놈들...' 상황이 결코 좋지 않음을 느낀 조르쥬는 이를 갈고있었다.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과는 달리 이제는 근위대의 명예가 달린 일전이 되 어버린 것이다. "자! 시작하죠!" 조슈에는 목검을 들고 예를 표했고 조르쥬도 여전히 이를 갈며 예를 표했다. 적막에 휩싸인 연무장은 바늘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듯 조용해져 있었다. "하앗!" 별안간 그 적막을 깬 것은 조슈에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며 일직선으로 목을 찔러가고 있었다. '우웃!' 속으로 경악성을 터트리며 조루쥬는 온힘을 다해 물러나며 소녀의 목검을 쳐 올 리고 있었다. 따악 ―. 시원한 격타음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찔러오던 조슈에의 목검이 쳐 올려 졌다. 조슈에는 손아귀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검을 놓칠 뻔하였지만, 가까스로 물러 나 다시 검을 쥔 손바닥을 죄고있었다. '이 정도의 반동에 손바닥뿐 아니라 어깨까지 저려오고 있다. 신중하게 공격하 지 않으면 이 몸이 먼저 망가진다. 이따위 보호구로는 근위대장의 검에서 이 가녀린 몸을 보호하지 못해...' 그녀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자신의 몸이 더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실망 하고 있었다. 그 사이 불의의 일격을 받은 조르쥬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조르쥬는 등 뒤로 한기를 느끼고있는 중이었다. '엄청나게 빠르군! 저 소녀가 타격순간에 손아귀에 제대로 힘을 가했다면 나는 지금쯤 기절해 있거나 다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실수였을까? 검을 쥐는 폼이나 아돌 의 보법으로 봐서는 좀더 실력이 있는 듯 한데 어째서.....' 순간 그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조르쥬는 목검을 왼쪽 어깨에서부터 비스듬히 들며,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를 취하며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파워전이다! 그녀는 기술을 받쳐줄 힘이 없는 것이다! 특기인 속도를 사용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어쩌면 쉽게 끝날 지도 모른다.' 근위대장의 자세를 보며 조슈에는 일순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눈치챘다! 과연 아론의 칭호를 가진 검호이군! 파워전으로 가져가면 막아 낼 수 없다!' 수비를 굳히고 서서히 간격을 좁혀오는 근위대장은 마치 탐색하듯 반보씩 전진 해올 뿐이어서, 무리하게 공격하지 하지 않고, 탄탄한 수비를 바탕으로 서로 연속 받 아치기의 파워전으로 끌고 가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전 중이라면 모를까? 기다리는 상대를 속도전으로 쓰러뜨리는 것은 매우 힘든 것이다. 그것도 저 정도의 검호 임에야... '제길... 이 싸움 지는 수도 있겠군!' 여전히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재주 좋게도 안 보이는 곳에만 식은땀을 흘리며 조슈에는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어머! 아가씨! 여기 계셨네요!" 그때 별안간 뾰족한 교성이 들려와 긴장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다. 모두 놀라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기사들로 꽉 찬 연무장의 입구에서 건장 한 사 내들을 비집으며 겨우 상체를 들이밀고 들어오는 상급 여신관의 복장을 한 작은 소녀가 보였다. '샤레셀!' 하얀 가운에 멀리에 은빛 성포를 쓴 암갈색의 눈동자의 소녀는 조슈에의 어릴 적 친구 샤레셀이었다. 그녀는 그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굴리며,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듯 짤랑짤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가씨! 대신관님께서 찾으시는데 뭐하세요? 다리 아프게.... 한참 찾았잖아 요!" 신녀 답지 않은 귀여운 말투에 기사들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가운데, 조슈에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 익숙지도 않은 몸을 가지고 처음부터 아론 급의 기사를 상대하려 한 것 은 나의 자만이었다. 얼마나 더 이 가녀린 육체를 가지고 지내야 할지 모르니 함부로 써서는 안되겠지... 서서히 단련해 나가는 것이 좋겠군. 그런데 문제는 이 자리를 어 떻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슈에는 아직까지 자세를 풀지 않고 서있는 근위대장 을 바라보았다. '뭐... 어쩔 수 없군!' 조슈에는 이를 악물며, 태어나 한 번도 지어 본적이 없을 정도의 환한 미소를 조르쥬에게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자, 허리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잠시 다리가 휘청하는 조르쥬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려 호흡을 가다듬으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고지식한 녀석이네 이만큼 신호를 보내는 데도!' 속으로 이를 갈며 조슈에는 목검을 내려놓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훌륭한 기사님을 만나 좋은 수업을 받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런데 어쩌 죠? 대신관님 께서 급히 찮으신다니! 다음 기회에 개인적으로 수업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개인적으로'라는 말의 위력이었을까? 그는 황급히 자세를 풀며 벌개진 얼굴로 목례를 하며 황송하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별.....별 말씀 다하십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아가씨 같은 미...(아 차!) 뛰어난 검술을 가지신 분과 대련 할 수 있어서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불쌍하게도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있어 조슈에는 '너무 심했나?'라는 생 각도 들었으나 참을 수 없는 장난끼가 발동하고 있었다. 목검과 보호구를 소년 견습 기사에게 넘기며, 그녀는 짧게 조르쥬에게 목례하고 돌아서 연무대를 내려가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돌아서서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있는 젊을 근위대장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 기사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다음에 개인적인 시간을 마련 할 수 있 으면 좋겠군요! 조용한 곳에서 말씀을 좀 나누고 싶군요!" 기사들의 노골적인 질투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조르쥬는 천국에 오른 듯한 멍한 얼굴로 잠시 굳어있더니 황급히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가볍게 예를 표하며 여전히 몽 롱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왕실 근위대장 조르쥬라고 합니다. 올해로 22세이며 고향은 메디나! 다섯 남매 중 막내이며, 아버님은 메디나의 영주이시고, 어머니는..." 조슈에가 근위대장인 조르쥬를 모를 리가 없다. 그는 견습 기사이던 시절부터 조슈에 왕자의 검 상대로 부왕에게서 배운 왕실의 비전 검술인 샤레타의 희생자였다. 언제나 왕자의 연습대가 되어 연못에 쳐박히거나 기절해 실려오기 일수였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왕실 근위대의 대장이 되고,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인데다가 인망도 있어 언젠가는 기사장의 지위에까지 오를 것이라 예견되는 촉망받는 기사인 것이다. "아! 근위대장 조르쥬님이셨군요. 그 용명은 익히 들어 알고있었어요. 직접 만 나 뵈니 명성보다 훨씬 미남이시네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요. 만나서 반가 웠어요! 다음에 다시 뵙게 되기를 기대 하겠어요. 그럼...." 조슈에가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나오자, 몰려들어 구경하던 기사들이 입구까지 길을 내주기 위해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구에서 볼이 터질 듯한 얼굴로 웃음을 참고있는 샤레셀을 잡아 끌며 연무장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달뜬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이거원 정신 사납구먼!" "대단한 여장부이신데?" "도대체 여자의 몸으로 그런 검술을 어떻게 익힌 거야?" 그때 외궁의 노(老)기사가 가볍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의아해진 기사들이 노 기사에게 다가갔다. "아니? 왜 그러세요? 선배님!" 백발의 노 기사는 눈물을 훔치며 대답하였다. "예전의 소피아 왕비님이 생각나서 그런 다네! 그분이 처음 근위대의 시험을 보 러 찾아 오셨을 때 딱 저 정도 나이이셨지.. 젊은 기사들이 젊은 혈기에 참 많이도 귀 찮게 굴었었는데 언제나 웃음으로 넘기 섰었지.. 저 아가씨는 왕비님의 혈족임에 틀림 이 없으시구먼... 그때의 왕비님과 외모뿐 아니라 검술 실력까지 너무 닮으셨어..." 노 기사는 이제 목놓아 울고있었고, 처치 곤란인 듯 젊은 기사들은 어깨를 으쓱 하며, 여전히 연무대 위에서 굳어있는 불쌍한 조르쥬를 바라보았다. 사상 최연소의 근위대장은 기사들과 부하들의 이제는 살기 마저 느껴지는 질투 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분홍빛 환상의 늪에 머리까지 푹 잠겨, 그녀가 서있었던 자리 를 바라보며 언제까지나 멍하니 서 있었다. 5 "킥킥킥......!" '새벽의 장미'의 궁전으로 통하는 정원로에서 샤레셀은 내내 배를 잡고 웃고있 었고, 그 옆에는 조슈에가 툴툴거리며 걷고 있었다. "히힉...킥... 도대체 뭐한 거야! 조슈에! 근위대장님을 상사병으로 죽일 생각 이었어? 불쌍해서 못 봐주겠더라!" "조르쥬가 하도 진지하게 덤벼와서 어쩔 수 없었어! 뭐, 장난도 쳐보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런데 이 몸이 그래도 꽤 예쁘장하긴 한가 보지? 그 고지식한 녀석이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헤매는 건 처음 봤어!" "아무튼 그 사람 이제 당분간은 네 생각만 하며 살 꺼야! 조심하라고...." 너무 웃어 눈물이 흘렀는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샤레셀은 조심스레 조슈 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볍게 땀을 흘린 그녀의 피부는 약한 홍조를 띄며 태양을 받아 싱그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샤레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원래의 몸으로 돌아 와야지! 저 미모 때문에 성에서 조슈에의 존재가 너 무 부각 되고있어, 앞으로가 걱정이네.' 그때 자신의 모습이 샤레셀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이지 안는 듯, 조슈에는 땀이 말라붙어 가려운지, 블라우스 속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사이를 가 볍게 긁고 있었다. "이 쓸 때 없이 튀어나온 가슴 때문에 움직이는 데 불편해 죽겠어! 에레나가 준 속옷을 입고서 그래도 좀 나아지긴 했는데, 조금만 격하게 움직이면 흔들려서 아프 고, 또 가슴 사이에 자주 땀이 베어 기분만 나빠져... 여자들은 용케도 이런 걸 달고 다 닌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샤레셀을 돌아보며, 조슈에는 불만이 가득한 얼 굴로 말을 이어갔다. "예전엔 무도회에서 귀족 부인들과 딸들이 가슴이 푹 파인 드레스를 입고 와서 는 춤추는 것이 보기에 짜증이 났었는데 요즘엔 이해가 가!" "저 조슈에?" "응? 왜?" 샤레셀은 마른침을 삼켰다. "너....어! 사람들 앞에서 블라우스나 드레스 속에 손을 넣거나 하지는 않았겠 지?" ".........?" "설마?" "음... 글쎄 한, 두 번 쯤은 그러지 않았을까?" 샤레셀은 머릿속에 괴종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도대체, 에레나는 뭐하는 거야? 이런 녀석을 혼자 돌아다니게 하다니!' 다행히도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샤레셀은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6 태양이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불쌍한 근위대장 조르쥬는 서 쪽 성벽의 망루에 올라 저물어 가는 저 빨간 태양이, 양 볼에 가벼운 홍조를 띄고 가 볍게 숨을 헐떡이며 검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과 조금은 닮았다 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아아!' 그는 마음속으로 장탄식을 터트리며, 왼쪽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를 해보지만 허사다. 도저히 마음에 안정되지가 않는 것이다. 그때 망루의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에 조르쥬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인물은 빨강머리에 조금은 치기 어린 얼굴을 멋진 구랫나루로 가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신전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그는 조르쥬를 발견하고는 씩 웃으며 다가왔다. "천하의 조르쥬가 여자 한 명 때문에 청승을 떠는 걸 보게 되는 군!" "무슨 말인가?" 조르쥬는 불쾌한 듯한 어조였지만, 가볍게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어..어라! 자네 정말이었군? 근위대 녀석들이 쑥떡 거리 길래 설마 했는데..." "하아∼" 젊은 근위대장은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없는지 낙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 다. 빨간 머리의 청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신전기사단의 상징이랄 수 있는 금실로 장식된 파란색의 망토를 풀어 아무렇게나 걸고는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아가씨가 그렇게 아름다운가? 나는 보지 못했지만.... 하하! 하지만 자네는 지나 치게 금욕적이라 평생 독신으로 살 줄 알았는데, 자네의 심장을 한방에 맞춘 아 가씨라니 한 번 이 두 눈으로 보고 싶구만." "............" 조르쥬가 계속 말이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멋쩍은 듯 뒤통수를 쓰다듬던 그는 정색을 하며 본론을 꺼내었다. "자네가 그 아가씨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내가 알아낸 정보를 하나 알려 주 러 온 거네 만...." 순간 몽롱하던 시선에 초점이 잡히며 조르쥬가 빨강머리 청년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에 대해 뭔가 좀 알고있나, 키로스?" 키로스라 불린 신전기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소문이네만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라면 뭐든 해보게!" 조르쥬는 관심 어린 눈빛으로, 몸을 끌어 당겨 앉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왕실의 먼 친척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지만, 다들 돌아가신 소 피아 왕비 님의 혈족이라 예상하고있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거네!" 조르쥬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아론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여기사 이셨다는 왕비님과 같이 뛰어난 검 술을 가지고 있지..." 다시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조르쥬의 두 눈은 먼 시선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네!" ".........?"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에레나 공주님의 '새벽의 장미'에 머물게된 손님으로 들 알고있는데, 몇몇 궁녀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렇지가 않다 네!" "무슨 이야기인가?" "내가 알고 지내는 서쪽 궁의 궁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 미녀가 '새벽의 장 미'에 입궁하기 이전에, 이미 지금 병중이신 조슈에 왕자님의 '백합의 정원'에서 얼마간 지내는 것을 보았다는 거야!" "뭐...뭐라구?" 조르쥬는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더 들어보게! 그래서 더 자세히 물었더니 그녀가 실토하더군, 자네가 마음에 두고있는 그 아가씨는 조슈에 왕자님의 방에서 지내는 것 같더라는 군, 그것도 거의 단 둘이서!" 다리에 힘이 빠져나간 듯 조르쥬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있었다. "꽤 오래 단둘이 지낸 것 같다던데, 그녀가 단지 병간호만을 위해 그렇게 오래 왕자 와 단둘이 지내지는 않았으리라고 보는데.... 그래서 내 나름 데로 생각을 정리 해 보았네 만, 내 생각으로는 그 아가씨가 아마도 장래 황태자비로 내정 된 것이 아닌 가 생각되네." 조르쥬는 아무 말 없이 두 무릎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나만 알고있는 것도 아니니 곧 퍼져 나갈 것이네, 다른 놈들에게 듣게 되기 전에 내가 알려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네!" 그 후 꽤 시간이 경과된 후에도 마치 석상이 된 듯 조르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키로스는 씁쓸한 표정이 되어,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망루를 내려갔다. 혼자 남은 근위대장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고 있다. 태양은 완전히 사라지고 외로운 달빛이 그의 머리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NEXT 제5화 디베리아에서 온 남자 제 5 화 디베리아에서 온 남자 아카바의 사신단이 성도 게드마를 떠난 지 어언 석 달께에 접어들고 있었다. 늦은 봄 여인의 몸이 되어 이제 16세의 첫 여름을 맞는 조슈에 왕자는 초조히 사신단의 귀환을 기다리고있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삼고있던 아카바의 북쪽 끝 곡창지대인 '마리'와 디베리아의 남쪽 끝인 '카사'에 홍수가 일어나 강줄기가 크게 북쪽으로 올라가 버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강을 경계로 국경을 정한 터라, 아카바는 비옥하기 이를 데 없는 곡창지대인 '마 리'에 더해서 디베리아의 영토인 '카사'의 거의 3할에 이르는 농토를 날로 삼키게 되었고, 그 반대로 디베리아는 그 만큼의 농토를 잃게 된 것이다. 이에 디베리아왕국은 협상을 위해 외무 대신이 직접 이끄는 사신단을 파견하였고, 지금 그들은 막 아카바의 성도 게드마에 들어서고 있었다. 1 멀리 하푼강으로부터 연결되는 수로를 따라, 각국의 수많은 상선들이 팔메라 대륙 남반구 최고의 중계무역 도시인 성도 게드마에 들어서고 있었다. 200여 년의 역사 끝에 완공되었다는 이 길고 긴 수로는 대형 범선 3척이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는 넓이로, 게드마의 무역중계항에서 시작해서 북쪽의 하푼강으로 이어지며, 실핏줄처럼 퍼진 강들과 연결되고, 서쪽의 디르사강을 따라 가면 바다로 이어져 멀리 북구의 시돈에서 남쪽의 세바까지 대륙 전체를 연결하는 아카바왕국의 대동맥이었다. 대륙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게드마의 중계무역항은 지난 200여 년간 아카바 왕국의 부의 상징이었다. "이런 왕국을 다스릴 수 있다면 좋겠군!" 디베리아 왕국의 상징인 적색의 용이 그려진 돛을 달고,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중형의 고급 순양선에서 사나이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한발은 선수 발판에 한발은 뱃머리의 선 수상에 얹어 놓고도, 흔들리는 배 위에 서 전혀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 상당한 수련을 쌓은 무골인 듯했다. 이제 20세쯤 돼 보이는 그는 훤출한 키에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였으나, 상당히 섬세한 얼굴 선을 가지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직모의 갈색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리면서도 거의 흐트러짐이 없고, 보기 좋게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약간은 거만한 듯 하지만 표정이 풍부한 얼굴과 검은 눈동자는 그가 풍기는 기운과 달리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선실의 문이 열리며 바람이 부담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린 반백의 노대신이 나오고 있었다. 디베리아 왕국의 외무대신인 그는 근 4년여만의 뱃 여행이 몸에 부친 지, 계속 구토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왕자님!" 반백의 외무대신은 뱃머리에 서있는 젊은 왕자의 모습에 못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내려오시죠. 그러시다 떨어지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제 심장이 다 나빠지겠습니다." 그러자 왕자의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죽으면 형님들도 기뻐할 겁니다." "레도 왕자님...." "후후... 그건 그렇고 아버님을 졸라서 사신단에 끼어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카바는 정말 아름답군요. 단지 강 하나를 경계로 하고 있을 뿐인데 기후도 사람도 이렇게 다르다니!" 말꼬리를 바꾸는 왕자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노 대신은 노안에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왕자의 시선을 따라 수로 변으로 보이는 넓은 가도 위에 간편한 복장의 사람들, 우거진 숲과 깨끗한 대리석 건물들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마을들을 바라보았다. "아카바는 원래 남방의 레스돌 섬 출신의 이민족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섬이 화산 폭발로 가라앉아 오랜 세월 떠돌다가 이곳에 정착했죠. 그래서 이제 357년의 역사를 가지고있을 뿐입니다. 전투민족인 그들은 이 일대를 1000년 이전부터 다스려오던 페드라를 서방으로 밀어내 소국으로 만들어 버리고, 지금의 번영을 갈취한 겁니다." 왕자는 가볍게 이채를 띄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저 소국 페드라가 예전에는 번성한 국가였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원래 하푼 강 이남 '마리'의 넓은 농토의 절반은 우리 디베리아의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 10년 전쟁에서 페드라와 함께 밀려나 지금은 하푼 강이 국경이 되어 버린 겁니다. " "........." "아시겠지만 아카바는 대륙남부의 중심부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인데다,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강줄기가 영토와 연결되어있죠. 그래서 일찍부터 중계무역이 발달했고, 비옥한 토지에 기후도 좋아서 매년 반복되는 풍작으로 국가의 제정이 탄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푼 강의 수상로를 확보하지 못했었다면, 지금과 같은 번영을 영위하지는 못했겠죠." 레도 왕자는 몸을 돌려 팔짱을 끼며, 대신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아무리 강줄기가 변했다해도, 전쟁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하푼 강 이남의 땅을 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아닙니까? 강을 잃게 되면 이 수로가 소용이 없어질텐데, 그런 것을 용납할 리가 없을 텐데요!"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디베리아로서도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영토를 잃을 순 없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원래가 강을 경계로 삼은 것이 아니라, 국경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뿐이니 만큼, 엄밀히 따지면 넘어간 농토와 강은 우리 것이 되지요." 대신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하였다. "재미있는 협상이 되겠군요."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며, 레도 왕자는 이제 막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게드마 항을 바라보았다. 2 "시돈에 전쟁이 일어 났더란 말인가?" 근 3개월 여 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신이 가져온 소식은 왕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옥좌 아래에서는 임무를 완수 못한 외무대신 이하 수행원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국왕 바디메오의 분노를 그대로 받고있었다. 국왕의 오른 편에 앉아 있던 대신관 아우다도 낭패한 표정으로 왕의 안색을 살피고있다. "그...그래서 시돈의 국왕은 만나보지도 못했단 말이요?" "시돈의 성도 알본은 이미 완전히 파괴되어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국왕은 남부로 피신중인지라 도저히...." "크윽...." 바디메오는 불게 물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침음성을 내고 있었고, 왕이 잠잠해 지자 외무대신은 조심스럽게 듣고 온 바를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폐하 저희들이 알본의 피난민들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알본을 비롯해서 시돈 왕국의 북동부 전역을 공격하고 있는 무리들은 마물들인 듯 하옵니다." 순간 바디메오와 대신관은 자리에서 튀어나올 듯 몸을 일으키며 경악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마물들? 누가 마물들을 그리 대량으로 소환하였단 말인가?" 국왕에 앞서 대신관 아우다가 소리쳤다. "그것이.... 저희들이 해로를 따라 성도 알본에 도착하기 보름쯤 전에 북쪽의 산악 지대에서부터 마물들이 출몰하더니 곧 그 수가 수만에 이르러 북쪽의 마을들부터 차례로 공격해 왔다고 하옵니다." "군사대국인 시돈이 그것들을 막아 내지 못했더란 말이요?" 바디메오가 침중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로 어렵지 않게 북쪽의 산악지대로 쫓아낼 수 있었다 하옵니다. 그러나 마물들의 수가 전혀 줄지 않아 조금씩 밀리다보니 어느덧 그 지경에 이르렀다고..." "으음...." 바디메오는 속이 타는지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는 대신관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찌 생각하시오! 대신관!"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대신관은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저희가 우려하던 일이 발생한 듯 하옵니다만..." "역시 그자가?" "그런 듯 하옵니다." 영문을 모르는 외무대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국왕은 손짓으로 그들을 물러나게 했고, 집무실에는 국왕과 대신관만이 남게 되었다. "신전에서 100여 년을 연구했어도 아스나의 힘을 사용할 방법을 완전히 터득하지 못했었는데, 그 자가 그리 쉽게 그 방법을 알아냈다는 말이오?" "저의 소견입니다만, 그자는 왕국의 비밀인 아스나의 존재를 이미 예전부터 알고, 치밀한 계획 하에 왕궁에 들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쩌면 마왕 마아가나 17년 전 신전을 침입했던 마법사 레스타트와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레스타트의 이름이 거론되자 국왕의 두 눈에 불꽃이 튀는 듯 하였다. 그 마법사 때문에 바디메오는 사랑하는 왕비를 잃고 오랜 고통의 세월을 감내해야 하지 않았던가? 국왕의 분노에 가득찬 얼굴을 바라보며 대신관은 말을 이어 갔다. "마물들은 소환 마법으로는 그리 찍어내듯 한꺼번에 불러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한나라를 상대로 마법사가 마물들만을 소환하여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더욱더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지요." ".........." "전대의 마왕 마아가는 차원의 결계를 열고 마물들을 불러내어 수족처럼 이용하였습니다만, 아직까지도 그 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시 차원의 결계를 열고 소환을 행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그는 아예 차원의 결계를 열어 놓고 수개월을 이동하고 있었죠." "그러나, 결국 현자 스코올에 의해 3개의 마석에 봉인되지 않았소? 게다가 육체와 영혼을 봉인한 마석들은 의식을 치르고 파괴했었다고 하던데……." "현자 스코올이 마아가를 봉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온 팔메라의 연합군들이 마물들을 상대하는 동안 홀로 남은 그를 수백명의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수백 겹의 결계로 덮어 씌어 겨우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병법만 제대로 알고있었다면, 결코 잡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군." 대신관은 상기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요! 그래서 모든 나라들의 신관들과 마법사들은 그런 자가 다시 나타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집무실의 넓은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왕궁의 인공 호수를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제는 왕자의 몸에 베풀어진, '성 변이의 마법'을 푸는 것이 더욱 어려워 지고있는 것이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도대체 왕자에게 무어라 말해야 좋단 말인가!' NEXT 제5화 디베리아에서 온 남자part 2 수로에서 외궁으로 연결되는 항만에 입항 신고를 하고, 외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디베리아의 사신단은 푸대접을 받고있었다. 오랜 세월 교역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상처는 두 나라가 동맹국이 되는 것만큼은 막고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국경문제가 불거진 시점에서야 아카바로서는 그들을 달가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디베리아의 사신 자격으로 국왕의 알현을 신청하였지만 국왕은 나타나지 않고, 오랜 외유로 자리를 비웠다가 막 돌아 왔다는 외무대신이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로 협상을 위해 접견실에 나타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아카바는 절대로 마리 지방의 하푼 강 남부 땅을 넘겨주는 일은 없을 거요!" 아카바의 외무대신 렌돌프는 강경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하며 몸을 의자에 깊숙이 박고, 모양도 좋은 긴 콧수염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고 있었다. 이는 대화의 차단과 협상의 결렬을 의미하는 몸동작으로,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매우 모욕적으로 보이는 가식적인 제스츄어였다. 부글부글 끓는 심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테이블의 밑에서 피가 날듯이 양 주먹을 꽉 쥔 디베리아의 외무대신 하멜은 침착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정론을 내뱉었다. "이것은 내놓고 안 내놓고의 문제가 아니오! 도대체 강줄기가 변한 것과 국경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이것은 단지 아카바가 디베리아의 영토를 점거하고있는 상황일 뿐이오! 우리의 입장은 귀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있는 카사의 농지를 돌려 달라는 것이오!" 쾅- 그러자 렌돌프 외무대신은 상체를 일으키코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비동맹국인 디베리아에 전진 기지를 내주란 말이오? 나를 뭘로 보는 거요! 곡창지대인 마리의 물줄기를 내주고 나면, 농토의 물길을 귀국에게 맡기고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소?" "........."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국이 하푼 강을 넘어와 성이라도 쌓는 날에는 우리는 두 눈을 멀쩡히 뜨고 교두부를 내주는 것이 아니오!" 디베리아의 외무대신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 조용히 의견을 토로했다. "우리가 농토 이외에 어떤 군사적 목적에도 이용하지 않는다고 보장한다면 어떻겠소!" 그러자 렌돌프는 코방귀를 끼며 말을 받았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소? 그곳이 디베리아의 영토인 이상 아카바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이,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게 될 것이오. 그 신경전이 계속 되면 문제는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다분히 위협적인 발언을 내뱉으면서, 렌돌프는 너무 성급히 지나치게 위험한 영역까지 건드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외무대신 하멜은 결국 참지 못하고, 역시 테이블을 내려치며 고함을 쳤다. "그럼 카사의 영주와 백성들의 피와 땀이 밴 농지를 전쟁도 해보지 않고, 갈취할 생각이었소?" 그날 오후 늦게 시작된 회담은 결국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하고, 1차 협상은 결렬되었다. 양측의 이권이 워낙 맞물려 있어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국왕 바디메오는 그런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문제를 외무대신에게 일임하고있었다. 그렇게 하루해가 저물어 갔다. 4 "그러면 제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길은, 그자를 찾아내는 것뿐이라는 것이군요! 아버님!" 침통한 표정의 부왕은 떨리고있는 조슈에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 옆에서 대신관 아우다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차마 왕자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대신관과 대책 논의로 밤을 지세며, 다음 날 아침에야 겨우 조슈에에게 상황을 설명 할 수 있었다. 왕자는 그 가녀린 몸을 충격을 받은 듯 심하게 떨며, 초점 없는 시선을 들어 옥좌 뒤에 걸려있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소피아 왕비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노랑 색의 드레스를 입고, 긴 금발을 여러 겹으로 따 올린 머리 위에 황금의 관을 쓰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지금의 조슈에의 모습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 얼굴에 떠올린 상냥한 미소와 마치 새끼 사슴 같은 순수함이 엿보이는 옅은 파란색의 눈동자 정도일 것이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조슈에는 도대체 저 가냘파 보이는 어머니의 어디에 그토록 강인한 힘이 있어, 왕국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이라 불리게 되었을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그 자랑스러움으로 새로운 기백을 얻어내고는 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남들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왕자는 결연히 고개를 끄떡이고는 부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부왕은 여전히 침통한 얼굴로 왕자의 섬세한 손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버님! 제가 직접 시돈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뭐.... 뭐라고?" 국왕은 잡고있던 손을 놓칠 만큼 자지러지게 놀라고 있었다. "와....왕자야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전쟁터에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냐?" "말도 안됩니다! 왕자님! 시돈은 지금 전쟁터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그런 곳을 가시 겠다니요? 그리고 상대는 인간들이 아니라 마계에서 뛰쳐나온 마물들입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슈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하였다. "바로 그 마물들을 움직이는 자가 저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가지고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방법을 강구하는 중이란다!" "그렇습니다! 왕자님! 비록 기르가스가 마석 아스나를 이용해 마물들을 조종하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아가의 그것에는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곧 방법이 나올 것입니다." 조슈에는 부왕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 자리를 피해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의 생각이 짧았군요. 지금은 머리가 복잡하니 물러나겠습니다. 아버님!" "그래 쉬거라! 왕자야! 이 아비가 꼭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니..." 조슈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연 분홍빛의 드레스를 살짝 끌며,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걷던 조슈에의 시선에 알현실에 앉아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 보였다. 조슈에는 한눈에 그들이 디베리아의 사신단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이미 소문으로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국왕과의 회담의 방향을 의논하던 일행은 일순 멈춰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금발의 미소녀를 보고 넋이 나가고 있었다. '세...세상에...' 외무대신 하멜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레도 왕자는 그녀의 자태를 보고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드레스의 끝을 살짝 끌어올리고 아름다운 자태에 어울리지 않게 씩씩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 몇 번 눈을 굴리더니 레도 왕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당신이 디베리아에서 온 사신단의 우두머리인가요?" 흠칫 놀라는 왕자를 일별하며, 외무대신 하멜이 일어나 예를 취했다. "제가 디베리아의 외무대신인 하멜입니다. 실례합니다만 아가씨는 누구 신지...." 그녀의 범상치 않은 기도에 그는 눈앞의 소녀가 상당한 신분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고, 당연히 언행은 조심스러워 졌다. 그러자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 살짝 그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이 이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듯 느껴졌었는데, 아니었나요?" 레도 왕자는 황급히 일어나 조슈에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당치 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저는 그저 수행원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성도 게드마에 여행 목적으로 신분을 속이고 찾아온 왕자로서는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가요? 나는 당신이 디베리아의 왕족쯤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군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던 그녀는 곧 외무대신에게 몸을 돌렸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 저 미모에 타고난 기품, 거기에 본능적인 통찰력이라니...'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도 왕자는 외무대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엄청난 미소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저 아가씨는 누구 신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앉으시죠! 저도 앉겠어요!" 겨우 입을 열어 또다시 개성 없이 질문을 반복하는 외무대신의 말꼬리를 자르며, 조슈에는 대신의 테이블의 맞은편의 의자를 빼서 안고있었다. 그리하여 레도 왕자는 그녀의 옆에 앉은 형상이 되었다. 그녀의 태도에 멍해진 대신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있는 동안, 레도 왕자는 횡재한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옆자리의 소녀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런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여자가 정말 존재했었군!' 왕자의 눈에 소녀는 그야 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목까지 올라오는 장식 없는 수수한 연분홍 드레스에 전혀 화장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구분되는 이목구비, 가볍게 빗어 넘겼을 뿐 전혀 손질한 흔적이 없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머리, 거기에 약간은 오만한 표정의 얼굴로 살짝 다문 빨간 입술은 사랑스럽게 도톰한 선을 그리고있어 만약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면 입맞춤을 하고 말았으리라. "당신은 카사의 영토권 문제로 오셨다고 알고있어요! 맞나요?" "그...그렇습니다만..." 결국 이 소녀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 내지 못한 듯 하멜은 벗겨진 머리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할 뿐이었다. "당신들은 결코 아카바에게서 그 땅을 돌려 받지 못해요! 알고 계시겠죠?" 소녀의 말에 발끈 하려던 레도 왕자는 갑자기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져 역시 발끈하여 대꾸하려던 외무대신을 눈짓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가 모두 손해 보지 않고 만족스럽게 해결할 방법은 있어요!" 더 이상 왜 이런 소녀와 국사를 논하고 있는지 이제는 잊어버린 듯, 외무대신은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관심 있는 눈초리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카바의 입장은 디베리아에게 강을 건너 침략해 올 교두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일 뿐 사실 이미 매년 차고 넘치도록 수확하는 곡창지대인 마리의 땅을 넓이는 데는 관심이 없어요!" "............" "그리고 마리로서는 다른데서 이주라도 해오지 않는 이상, 그 땅에 농사를 지을 인원은 더 이상 없죠! 그렇다고 귀국의 백성들이 강을 건너와 농사를 짓게 해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어느새 왕자이하 사신단의 인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녀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디베리아로서는 가장 걱정되는 일은 당장 강 밖으로 쫓겨나 집과 토지를 잃어 살 곳을 잃고 농사도 지을 수 없게된 백성들과 농노를 거느린 카사의 영주이겠죠?" "그..그렇습니다만..." "카사에는 아직 새로운 마을들을 지을 영토는 충분히 있지만, 역시 농토가 없으면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없으니, 소용없는 일일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그 잃어버린 영토가 절실한 이유는 식량생산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럼, 그 만큼의 식량이 무노동으로 확보된다면 카사는 오히려 그만큼의 노동력을 다른 곳에 활용 할 수 있겠죠? 그러면 더욱 이득이 되는 것은 당연 할테구요!" 대신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곧 고개를 끄떡였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렇다면 되었군요! 아카바는 그 땅에 우리의 백성들을 이주 시켜 농사를 짖게 하도록 하겠어요! 그리고 매년 카사에서 그 땅의 넓이만큼의 토지의 수확량을 산정해 보내시면, 우리가 그만큼을 보내 드리죠!" 멍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대신은 황급히 물었다. "저... 그러면 아카바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국왕께서 그런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그런 물음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조슈에는 싱긋 웃으며 답하였다. "그건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아시겠지만 같은 넓이의 토지라도 아카바의 식량생산량은 귀국보다 훨씬 많습니다. 공물의 일부만으로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어요." "..........." "새로운 영토가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결국 장기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고, 계속 하푼 강을 영토와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득이지 요!" "저! 실례합니다만 국왕폐하를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누가 폐하를 설득한다는 말입니까?"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도 왕자는 조심스레 의문을 제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환히 웃으며 당연한 듯 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제가 직접 아버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엇..!" 대신을 비롯해서 사신단 전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녀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있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주님! 몰라 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조슈에는 공주라는 말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는 손을 들어 그들의 예를 거두고, 약간은 짜증석인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뭐... 아무튼 걱정들 마시고 기다리도록 하세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간단히 인사하고 알현실을 나서 복도를 따라 다시 국왕의 방으로 사라져 갔고, 그제야 사신단 일행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고 있었다. "공주라니? 도대체 그녀는 누구입니까?" 레도 왕자는 아직도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며, 외무대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디메오 국왕께는 15년 전 돌아가신 소피아 왕비와의 사이에 두 명의 자식만을 두었었습니다. 지금 병중으로 올해 16세 되는 조슈에 왕자와 한 살 아래의 에레나 공주이죠."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에레나 공주이겠군요!" 대신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올해 15세가 된 것치고는 너무 지나치게 성숙한 몸을 가지고 계시던데..." "후후! 그 뿐 아니라, 미모에 지지 않는 출중한 지모도 갖추고 있더군요!" 왕자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 도도한 미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아름다운 왕국의 최고의 보물이다! 머리만 치장할 줄 알았지 그 내용물은 쓰레기로 가득한 나의 누이들과는 근본적으로 틀려! 그야말로 일국의 국모감으로 손색이 없는 여자다! 바디메오 왕이 정말 딸 하나는 훌륭하게 키우셨군!' 일순 레도 왕자는 미소 짓고있던 얼굴을 굳히며, 결연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에레나 공주라 했던가... 절대로 그녀를 차지하고야 말겠다! 그녀만이 내가 다스릴 디베리아의 왕비가 될 자격이 있다!' 진실은 꼭꼭 숨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디베리아의 셋째 왕자는 현실이야 어떻든 허망한 정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5 새벽 달빛이 중천에 떠있는 가운데, 한여름의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내궁의 호수 변... 달빛을 빌어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섬세한 인영의 있었다.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는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흰색가운에 금빛 끈으로 허리를 묶은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어 아름다운 몸매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 그녀는 그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 갈 수는 없다! 내 인생에 많은 계획들.... 나의 것이라 의심치 않았던 영광의 시간들을 이런 그릇 속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어!' 조슈에는 왼손을 뻗어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여인의 영상을 흩트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아버님은 낙관하고 계시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도대체 찾아야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려 줄 수 없는 상황에서 기사단을 보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조슈에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결국은 내가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야!' 무엇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떡이며, 돌아서던 그녀는 호수 변의 갈대밭에서 무엇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급히 경계하며 돌아보았다. 시선 끝의 갈대밭 안에는 등뒤로 달빛을 받아 얼굴을 볼 수 없는 훤출한 키의 인영이 서있었다. "누구냐!" 그녀는 경계하는 몸짓을 취하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인영은 흠칫하는 듯 하더니, 곧 갈대를 해치며 나왔다. "조르쥬?"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은 뜻 밖에도 근위대장 조르쥬였다. 경계를 풀며 젊은 근위대장의 얼굴을 바라보던 조슈에는 그의 달라진 신색을 보고 매우 놀라고 있었다. 달빛 앞으로 나온 그의 모습은 그야 말로 딱할 정도로 여위고 지저분하였다. 몇 일은 깍지 않은 듯 지저분하게 자란 턱 수염과 파리한 얼굴 빛, 그리고 무엇보다도 움푹 패인 눈구덩이가 그의 인상을 더욱 어두워 보이게 하였다. '아니! 조르쥬가 어쩌다가?' 그녀는 옛 친우의 몰골에 충격을 받은 듯, 자신의 상황을 잊고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설마 그녀가 그렇게 무방비로 다가올 줄 몰랐던지, 몸을 움츠리던 조르쥬는 조슈에가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얻자 가볍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의 떨림으로 겨우 자신의 처지를 기억해낸 조슈에는 실소를 머금으며, 그의 어깨에서 손을 서서히 내려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순간 근위대장의 갈색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이는 듯 하였다. 갑자기 그는 어깨에 얹었던 조슈에의 손을 잡아채더니 그녀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 당겼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에 놀란 조슈에는 그의 가슴에 안겨 가만히 조르쥬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거의 광기마저 느껴지는 옛 친우의 눈동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어엇?' 화들짝 놀라는 조슈에의 얼굴위로 조르쥬의 상기된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슈에는 몸을 빼기 위해 바동거려 보았지만, 그의 압도적인 힘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퍽- "으윽..." 급박해진 조슈에는 조르쥬의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 찾고, 그제야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이죠? 조르쥬!" 하마터면 사내에게 키스를 당할 뻔하였던, 조슈에는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한 빛이 역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강이를 걷어차여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것일까? 조르쥬의 눈빛이 다시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새근거리는 조슈에의 모습을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그러나 진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당신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 ?" "나의 심장은 당신의 두 손안에 있습니다!" 진실함으로 떨리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슈에는 눈앞이 하얗게 되는 듯 했다. '뭐....뭐야! 이 대사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차마 마주 볼 수 없는 듯, 조르쥬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누구의 것이 되든 나는 영원히 당신의 기사입니다!" 조슈에는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긴장한 그녀의 입술은 이 순간 주인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어떤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저.....!" 겨우 입을 열려는 그녀를 조르쥬는 오른 손을 들어 저지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고있습니다!" 조르쥬는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오른 손에 입맞추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진심이었습니다! 이 감정을 배신하는 짓만은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감정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아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나의 운명을 저주하고, 당신의 기사가 될 수 있는 축복을 내려 주신 여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합니다!" 비록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과 깍지 않은 수염으로 지저분한 몰골이었지만, 조슈에는 문득 그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르쥬는 한번 더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고 일어나 예를 취하고는 한번도 뒤돌아다보지 않고, 갈대 숲 사이로 사라져 갔다. 무슨 말인가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하고 그를 보내고 만 조슈에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NEXT 제6화 여정의 시작 "그래서 너에게 이야기 해두려는 거야, 샤레셀! 내가 편지는 써 놓고는 가겠지만, 몰래 궁을 빠져나가는 마당에 자세한 내용을 적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조슈에 왕자는 신녀 샤레셀에게 몇 일 밤을 지새며 고심한 끝에 결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조슈에!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 것 같아! 시돈은 지금 한창 전쟁 중이야! 도대체 그 난리 속에서 어떻게 기르가스를 찾으려는 거야!" "........" "그리고 만약에 찾을 수 있다 해도, 마석 아스나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대마법사를 상대로 어쩌려는 거야!"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겠어! 일단은 전쟁이 아직 시돈 왕국에 국한되어 있을 때 그를 찾는 것이 더 쉬울 거라 생각해!" 쉽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기실 왕자 자신도 상황을 그리 낙관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샤레셀은 그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걱정을 가득 담고, 조슈에의 표정을 주시했다.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조슈에가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 폐하에게 알려서 막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도망쳐서라도 나가겠지....'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한 기운을 한숨에 섞어 내보내며, 조슈에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아세르 여신님께 매일 너의 무사 귀환을 기원할게. 조슈에!" "고마워! 샤레셀! 약속대로 다녀와서 너에게 12일 밤낮동안 여행담을 이야기해 줄게.." 조슈에도 그녀를 꼭 껴안으며, 다부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를 사랑하는 친구를 떠나 보내는 샤레셀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1 이제 막 자정이 지난 깊고 깊은 밤, 시원한 밤 공기를 마시며 조슈에 왕자는 에레나의 궁전인 '새벽의 장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려는 듯, 회색의 긴 외투 안에 목이긴 검정색의 가죽 웃옷을 입었고, 역시 회색의 바지 위에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기사용의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등에 진 가벼운 봇짐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장검이 삐죽 나와 있는데, 말가죽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어져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에레나! 그리고 어머니!' 조슈에는 촉촉한 눈빛으로 궁성을 크게 한번 둘러보고는 장미 정원의 정원석에 양손을 올리고 가볍게 밀기 시작했다. 그르륵―. 무거워 보이는 거대한 현무암의 정원석이 손쉽게 밀려나며, 그 밑으로 계단이 드러났다. 왕자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으로 내궁을 한번 더 둘러보고는 그 밑으로 사라져 갔다. 왕자가 사라진 후 정원석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주위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에 휩싸였다. 2 "크으..... 이렇게 손님이 없어도 돼는 거냐!"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그대로 내리 쏘이는 민둥산 위에 기다림에 지친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이 뜨거운 태양아래 누군가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여기저기 찌그러진 상체만 가린 갑옷을 입은 위에다, 다시 또 가죽으로 얼기설기 엮은 짧은 망토까지 걸친 정신나간 이 사나이들은 어떻게 봐도 얼치기 산적들임에 틀림이 없다. "아이구! 두목님! 오늘은 들어갑시다! 이러다 쩌죽는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두목님! 돈도 좋지만 건강을 생각해야..." 쾅―. 두목이라 불리운 사나이가 무식하게 커다란 강철 해머를 땅에다 내리꽂자 부하들의 투정이 쏙 들어갔다. 언뜻 보기에도 무리 중 가장 큰 체격을 가진 그는 지저분한 턱수염에 흉흉한 눈빛, 그리고 왼쪽 이마부터 입가까지 그어진 긴 칼자국을 가지고 있어,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개성 없는 산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안에 껀수 하나 올리지 못하면 네놈들이 재수 없이 입을 놀려서라고 생각하겠다." 입을 잘못 놀렸던 두 산적은 제발 손님이 지나가기를 신에게 빌기 시작했다. 기도가 통한 것일 까? 순간 한 명의 산적이 동쪽의 오솔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두목님! 손님입니다." 과연 저 멀리 점이 되어 다가오는 인영은 따가운 태양을 피하려는지 회색외투에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가벼운 짐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짜식! 주제에 검을 가지고 있잖아?" 피식 웃는 두목의 말대로 인영의 등짐에서 반짝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이거 헛고생하는 거 아닌 지 모르겠다만.... 가자!" 10여명의 산적들은 무기를 꼬나들고 달그락거리며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슈에는 오솔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시돈이 전쟁중이고 성도 알본이 파괴된 지금, 역시 전투가 진행 중인 곳을 찾아가야 기르가스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조슈에는 심심한지 길가의 질겅이를 뜯어 씹기 시작했다. '성을 나온 지 사흘째인데 이제 겨우 페드라의 국경근처까지 왔다. 배를 탈 때까지 주로 산길을 다닐 것을 생각해 굳이 말을 타고 오지 않은 것이 실수였나?' 생각에 잠겨 있던 조슈에는 갑자기 인기척을 느끼고 멈춰서 정면을 주시했다. 오솔길이 끝나고 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일단의 무리들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 뜨거운 태양아래서 다 찌그러진 갑옷에 망토까지 걸치고, 검과 해머 그리고 들고 있는 것이 고작으로 보이는 커다란 양날 도끼까지 두서없이 들고 휘두르며 제 딴에는 위협으로 보이는 시위를 하고 있다. '뭐야? 저 패거리는...'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슈에를 아랑 곧 하지 않고, 두목으로 보이는 덩치가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자! 형씨! 상황은 알겠지? 서로 피곤하게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자구! 그 봇짐이나 내려놓고 가던 길을 가는 게 신상에 좋겠군!" 이렇게 관대한 산적이 또 있을까? 그러나 사실 두목은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저런 걸음걸이로 걷는 자는 상당한 검술 가이거나 무술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떠보는 것뿐이었다. "훗!" 가볍게 코웃음을 친 조슈에는 두목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목을 지나치려는 순간, 약발이 들지 않아 얼굴이 일그러진 두목이 벼락같이 해머를 휘둘렀다. 예상하고 있었던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 피한 조슈에는 잽싸게 짐에서 검을 꺼내며 봇짐을 풀숲에 던지고 물러나 여유롭게 자세를 잡았다. '이 자식 설마 기사거나 그 비슷한 건 아니겠지!' 자신의 기습공격이 너무 쉽게 무마되자 산적 두목은 일순 불안감이 밀려 왔다. '그래도 저 호리호리한 몸으로 세 봐야 얼마나....' "둘러싸라! 오랜만에 한 번 놀아 보자!" 두목이 소리 치자 우르르 몰려든 산적 패들이 조슈에를 삥 둘러쌓다. "죽어랏!" 쉽게 들어오지 못하고 긴 창끝으로 그녀를 어르고 있던 왼편의 대머리 산적이 창을 들고 다짜고짜 밀고 들어 왔다. 식이고 뭐고 없는 그저 돌진일 뿐이어서 조슈에는 진지하게 상대할 생각이 없어지고 말았다. 퍽---- 그녀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지 않은 채로 가볍게 창끝을 밀어내고는 등뒤로 돌아 대머리 산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가랏!" 그러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대머리 산적의 등뒤에서, 호리호리한 체격의 산적이 소리를 지르며 별안간 겨우 들고 있던 것 같은 양날 도끼를 두 손으로 집어던지자, 불의의 기습에 조슈에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하고 상체를 젖히며 날아오는 육중한 도끼를 검으로 아슬아슬하게 쳐내었다. 순간 충격으로 뒤로 밀려난 그녀의 외투의 모자가 벗겨지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엇...? 여자다!" "이...이쁘다." 산적들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미녀이리라! 두목조차도 할말을 잃고 잠시 멈춰 서서 넋 나간 듯, 그녀의 새하얀 얼굴과 금발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두목님! 횡재입니다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 산적의 입에 조슈에의 팔꿈치가 쑤셔 박히고 있었다. "횡재는 무슨!" "끄아악...." 너무도 고상치 못한 비명을 내지르고, 부러진 이빨들을 쏟아 내며 쓰러지는 산적의 등을 발판 삼아 튀어 오른 조슈에는 단번에 도끼를 집어던진 산적의 어깨를 검 집으로 내려쳤다. "우왁" 오른 쪽 어깨뼈가 부러진 산적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세 명의 동료들이 쓰러지자 산적들은 멀찍이 떨어져 감히 공격해 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실수였다! 어쩐지 불안하더니 예감이 맞았다! 제기랄...! 설마 여기사 같은 게 걸릴 줄이야!' 그러나 부하들이 셋이나 쓰러진 마당에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체면이 허락지 않아 진퇴양난에 빠진 두목은 갑옷 안으로 이 더운 날씨에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장식 없는 은빛의 장검을 자신의 어깨 위에 툭툭 치며, 여유로운 표정을 짖고있던 조슈에는 두목에게 시선을 돌리며 아까의 두목의 말투를 흉내내며 입을 열었다. "자! 형씨! 상황은 알고 있겠지? 서로 피곤하게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자구! 어딘가에 타고 온 말들을 걸어 놓았겠지? 얌전히 말 한 마리만 넘기고 가던 길을 가는 것이 신상에 좋겠군!" 진정 그녀의 말대로 하고 싶은 두목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기색을 보였다가는 다시는 체면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손에 땀이 배어옴을 느끼며 두목은 강철 해머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순간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더니 곧이어 숲을 뚫고 흑마가 나타났다. "이놈들 멈춰라!" ---------------- `NEXT 제6화 `여정의 시작` part 2 고함을 지르며 순식간에 말에서 몸을 날리듯 뛰어내린 사나이는 그대로 산적들에게 뛰어들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퍼억―. "우욱 ..." "저... 사실은... 카악...." 무언가 필사적으로 말하려는 산적들은 순식간에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별안간 나타난 사나이의 주먹에 쓰러져 갔다. 갑자기 나타난 훼방꾼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슈에는 사나이의 움직임을 보며 입가에 가볍게 이채를 띄었다. '주먹을 쓰고는 있지만 저 사람은 검사다! 그것도 기사급의....' 마지막 주먹에 두목이 그 억울함에 눈물 마저 뿌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나자 사나이는 양 주먹을 탁탁 털며 조슈에를 바라보았다. "어....엇!"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을까? 사내는 마음에 준비를 할 사이가 없었는지, 여과 없이 그대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눈앞의 미소녀를 바라보았다. "흥... !" 노골적으로 감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에 모욕감을 느낀 조슈에는 야멸차게 돌아서며 풀숲에서 보따리를 찾아 검을 갈무리하고 어깨에 짊어졌다. "저.... 산적이... 지나가다가..... 이렇게..... 내가.... 그래서....." 소녀가 그냥 지나쳐 쓰러진 두목에게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며 사내는 당황하여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희귀한 언어를 지껄이고 있었다. 조슈에는 복부를 심하게 얻어맞고 엎어져, 십 년 전에 먹은 닭고기까지 게워 내고 있는 두목을 오른 발로 뒤집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래서... 말은?" 불쌍한 산적두목은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숲 왼편으로 보이는 작은 민둥산을 가리켰다. "저 산 뒤편이란 이야기인가?" 두목이 고개를 끄떡이자 조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어...어이 아가씨...!" 사내는 당황한 목소리로 조슈에를 부르며 흑마를 끌고 급히 그녀를 뒤따랐다. 더 이상 게워낼 것이 없는지, 돌아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산적 두목은 파란 여름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폐업이다! 제기랄! 그만 둬 준다!" 아예 널브러져 마치 잠자듯 쓰러져 있는 부하들은 두목의 은퇴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3 "아가씨...! 이봐 아가씨...!" 불쌍한 산적두목을 조기 은퇴시킨 사나이는 산적들의 말들 중 쓸만한 것을 고르고 있는 약탈자를 끈덕지게 따라와 귀찮게 굴고 있었다. "뭐야!!!" 지겨운 듯 한 목소리로 겨우 그녀가 대답하자 사내는 기쁜 듯 떠들어 데기 시작했다. "하하... 겨우 말을 걸었네... 아가씨 나는 바알스 본! 용병이다! 아까는 좋지 않은 상황을 만났더군! 마침 내가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큰일 치를 뻔했지?" 오른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이 구해주었다는 것을 인식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역력한 목소리로 바알스 본이라는 사나이는 제법 호탕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마음에 드는 백마를 골라 올라타려던 조슈에는 용병이라는 말에 흠칫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열세에 몰린 시돈 왕국은 연합군이라도 결성되어 도와주기 전에는 용병을 대량으로 사들여 부족한 병력을 채울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다면 이자의 정보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여전히 자화자찬을 떠들어 대고있는 사내에게 조슈에가 말을 걸었다. "나도 용병이 되려는데,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그녀의 말에 사내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하! 검을 차고 있다고 다 용병이 될 수는 없지만 아가씨가 하겠다면 이 몸이 기꺼이 도 움을 주도록 하지! 아가씨라면 눈짓만으로 무적의 용병이 될 수 있을 거야! 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사내의 내민 손을 바라보던 조슈에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뭐 ! 잘해 보자고, 그런데 아가씨는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은 조슈...." 순간 조슈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지금 남자의 이름을 대봐야 우습게 들릴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조슈아! 조슈아라고 부르면 돼!" "오우! 예쁜 얼굴에 예쁜 이름이군... 하하 나는 아까 말했지만 바알스 본이다! 잘 지내보자구!"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며 연신 자신의 양손을 잡고 흔드는 용병 바알스 본을 바라보며, 조슈에는 참담한 기분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래! 내 생각이야 어떻든 원래의 나로 돌아오기 전에는 나는 자그마한 소녀일 뿐이다! 쓸데없는 상황들에 부딪히지 않으려면 그것을 잊어서는 안돼......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나는 조슈에가 아니고 조슈아인 거야!' 한낮의 무더위 속에 힘들지도 않은지, 아니면 좀더 그녀의 손을 잡아보려는 것인지, 아직도 열심히 그녀의 손을 잡아 흔드는 바알스 본은 그녀의 눈가에 언 듯 비친 눈물 방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 NEXT 제7화`용병들의 도시` part 1 아카바 왕국의 성도 게드마에서 대수로를 따라 하푼 강에 다다라 다시 서쪽으로 10여 일을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미카 대산맥에 둘러싸인 소국 '페드라'를 만나게 된다. 일찍이 남으로는 루기아의 바다에서 북으로는 디베리아와 맞닿은 하푼 강 유역까지의 넓은 영토를 가지고있던 대국이었지만, 300여 년 전 아카바인들에게 그 비옥한 영토를 모두 잃고 서쪽의 오지로 밀려난 신세가 된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지금은 글라우다와 아카바 왕국사이에 끼어 거의 양국의 입김에 의해 움직이는 종속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자원이라고는 미카 대산맥에서 얻을 수 있는 목재와 철광석 정도이고 농사는 생각할 수도 없어 결국 팔 것은 인력뿐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페드라의 사내들은 용병으로 외국에 고용되어 자국의 가족을 부양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용병으로 유명해지다보니 다른 지역 출신의 용병들도 고용자를 찾아 이 나라로 몰려온다. 페드라의 유일한 대도시랄 수 있는 '다테'는 그래서 언제나 쓸만한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 몰려든 각국의 대상인이나 귀족들 그리고 가장 많은 용병들을 고용해 가는 각국의 군 관계 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전투도시답게 바위산맥을 깎아 대로를 만들어, 거의 산 속이나 다름없는 요새도시다 테를 외부와 연결하고 있는 유일한 가도 위로 말을 달리는 두 사람이 있었다. 흑마를 탄 체격이 큰 사내는 훤출한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그야말로 타고나 전사의 몸으로 보였다. 숱이 많은 검은 곱슬머리가 큰 체격과 어울려 의외로 애교 있어 보이고, 태양에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를 그대로 들어낸 몸통만을 가린 검은색의 가죽 윗도리를 입고 있다.굵은 팔뚝에는 역시 가죽의 팔목 보호대를 차고 있는데, 어지간한 상대는 그의 팔뚝만 보고도 기겁 할 것 같았다. 시원스럽도록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생긴 그의 얼굴은 잘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랜 동안 씻지 않아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그는 말을 달리면서 옆의 백마를 타고 이 더운 날씨에 회색 외투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인물을 연신 돌아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 벙글거리고 있었다. "저기가 보이는 성문을 지나면 거기가 내 고향 다테야! 두 번 볼 것도 없는 황량한 도시지만 여기저기서 모인 재미있는 놈들로 가득하지! 하하하!" 구불구불한 산길위로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회색 외투의 인물은 외투에 달린 모자를 벗어 목뒤로 넘기며,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길고 가는 금발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며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미소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소녀는 오랜 여행과 더위에 지쳤는지 상당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상에서 꿋꿋이 허리를 펴고,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는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깊은 산 속에 잘도 도시를 지을 수 있었네! 바알스 본" 그녀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감탄한 듯 말하자, 바알스 본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바알이라고 부르라니까! 후후... 여기를 이 정도 만드는데 100년이 넘게 걸렸지! 그나마 페드라에서 이 정도의 넓은 평지는 여기 뿐이야! 나머지는 온통 바위산이나 늪지대라서 전부 작은 마을들뿐이지!" "그렇다면 페드라의 왕족들도 여기에 있겠군!" 순간 바알의 표정이 굳어졌다. 조슈아는 나둬도 혼자 열심히 떠들어대던 바알스 본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그는 입술을 깨물며 굳은 표정으로 분을 참고있는 것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야?" 바알은 꼭 다문 입술에서 비웃음 같은 것이 번지고 있었다. "훗... 그들도 왕족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왕국을 파멸시킨 원수들에 빌붙어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 돼지들..." 차갑게 대꾸하던 바알은 조슈아의 시선을 느끼자 순식간에 굳은 표정을 풀며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다는 얘기지... 이쁜 조슈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하하" 멋쩍게 웃으며 또 다시 이것저것 떠들어 데기 시작하는 바알은 놔두고, 조슈아는 이제 지척에 다가온 다테의 성문을 주시하며 바알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1 다테는 의외로 번화한 도시였다. 대체로 용병이라고 하는 족속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생들이어서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려 하기 마련이다. 조슈아는 성내에 차고 넘치는 술집들과 술집 골목 안으로 즐비한 창녀촌에 놀라고 있었다. 분명히 활기가 넘치는 도시의 모습이었지만 도시인의 대부분이 용병관계나 그들을 상대하는 직업에 종사하다보니 어느 모로 보다 삭막한 인생일 수밖에 없다. "자! 내가 잘 아는 술집으로 가자고, 조금 더 들어가면 돼!" 바알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기쁜지 연신 허허거리며 호탕하게 말하였다. 대로변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왕궁으로 보기엔 미적 감각이 엉망이지만 제법 큰 궁성이 보였다. 바알은 궁성은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쳤고, 무언가 물으려던 조슈아도 입을 다물었다. 다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처음의 말과는 달리 한참을 더 들어가자 특별히 더 허름한 술집이 나타났다. 여관을 겸하고 있는지 이층의 목조 건물은 지저분한 외관에 비해서는 꾀 큰 편이었고, 그들이 작은 호랑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들어서자 당장 12세 정도로 보이는 조그마한 소녀가 쪼르르 뛰어 나왔다. 소녀는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에 나이에 맞지 않는 영업용의 미소를 띄며 둘을 맞이하다가, 바알을 발견하자 그를 매우 잘 알고 있는지 영업용의 미소를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앗! 바알 아저씨!" 소녀는 잽싸게 달려오더니 힘차게 뛰어 올라 그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하하! 잘있었서? 에레나!" 조슈아는 순간 그리운 이름이 들리자 깜짝 놀라 소녀를 바라보았다. '후후.. 이 아이도 이름이 에레나이군!' 사랑하는 여동생을 떠올리며 조슈아는 미소 지었다. 소녀는 바알의 품에서 나와 의미심장한 눈으로 외투 모자의 그림자로 얼굴을 가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대리고 온 사람이야? 이 더운 날에 얼굴은 왜 가리고 있어?" 소녀의 물음에 바알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보면 놀랄 꺼다!" 조슈아가 그의 말에 살짝 눈을 흘겨 뜨며 모자를 벗어 넘기자! 소녀는 그 귀여운 입을 벌리며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옆에는 바알이 자랑스럽다는 듯 실실거렸다. "와! 정말 이쁜 언니네! 아저씨 색시야?" 하얗게 질린 조슈아의 눈에 소녀는 더 이상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색...색시라고...? 이 내가?' 소녀의 말에 바알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소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지금은 아직 아닌데 곧 그렇게 될 거야!" 그러자 소녀도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바알의 귀에 속삭였다. "저런 언니를 어디서 데려온 거야?" "산적들한테서 구해냈지!" "그럼 아저씨 꺼 맞잖아!" "그런데 자존심이 좀 강해서 말이야!" "아항... 그러니까! 저 예쁜 언니한테 아저씨가 잡혀 있는 거구나?" "저런 미인 색시를 얻으려니 어쩌겠냐!" "하긴...." 조슈아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며 수군거리는 두 인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따가운 눈초리에 바알은 핼쑥해져 헛기침을 했다. "아! 저 여기는 내 죽은 친구 놈의 마누라가 경영하는 술집이야! 여관도 겸하는데 음식솜씨가 그만 이지! 그리고 공짜 술을 노리고 주정뱅이 정보원 놈들도 많이 드나들어!" 바알은 말고삐를 소녀에게 넘기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 에레나! 마굿간에 데려가서 여물을 잔득 줘라... 그리고 피곤 할 테니 푹 쉬게 하고 내일 아침에 씻기거라! 아저씨가 용돈을 두둑하게 줄 테니..." "알았어요!" 소녀는 싱긋 웃으며 조슈아의 고삐도 받아 두 마리의 말을 끌며 마굿간으로 데려갔다. "저 아이는 당신이 말한 죽은 친구의 딸인가?" 조슈아가 마굿간으로 사라지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음... 딸은 맞는데 친딸은 아니야!" "그럼..." "여기는 용병도시잖아! 고아는 차고 넘친다고!" "그렇겠군...." 조슈아는 고개를 끄떡이며 씁쓸한 얼굴로 한동안 말을 묶고 여물을 주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주점 문을 밀치고 들어가는 바알을 뒤따라갔다. "어이! 나왔어!" 바알이 크게 소리치며 들어가자, 여기저기의 테이블에서 어떻게 봐도 용병으로 보일 뿐인 사내들이 술잔을 들며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여어! 바알! 또 살아 돌아 왔구먼! 그런데 마스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바엘 왕국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어 용병이 더 이상 필요 없다더군!" "그러게 이기는 쪽에 붙으면 오히려 일거리가 없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중앙의 테이블에서 커다란 맥주병을 들고있던 애꾸의 용병은 바알을 무척 잘 알고 있는 듯 스스럼이 없었다. 그러다 바알의 뒤에 들어오는 조슈아를 보고 그는 하나있는 눈을 있는 데로 치켜 뜨며 맥주를 테이블에 쏟고 있었다. 뒤이어 여기저기에서 휘파람 소리와 가벼운 함성이 들려왔다. "이..이봐 저 아가씨 자네가 데려 온 거야?" 사내는 일어나 바알의 어깨에 한쪽 팔을 얹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소개하지! 이 쪽은 조슈아야! 하하하! 용병이 되겠다고 해서 데려 왔는데 어때 기가 막힌 미인이시지!!! 후후... 그래도 헛물은 켜지 말게나..하하하!" 바알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어 재끼고 있었고, 애꾸의 용병은 멍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다가 오른 손을 바지춤에 쓱쓱 닦고는 손을 내밀었다! "레코바요! 바알이랑은 오랜 친구지!" 조슈아도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조슈아에요! 용병이죠! 바알과는 알고 지낸 지 얼마 안되었죠!" 그러자 술집이 있던 용병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 용병이라고 그 가는 팔로?" "크크, 아가씨 차라리 여기서 일하지 그래?" "그래그래 그러면 여기 매상이 열 배는 뛸 거다. 하하!" 그들의 말에 당장 검이라도 뽑을 것 같은 표정의 조슈아가 뭐라 말하려하자, 갑자기 바알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돼지 같은 놈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녀에게 다시 한번 그따위로 떠들어대면 이 바알스 본님과 검을 겨뤄야 할 꺼다!" 바알의 서슬 퍼런 고함에 그들의 조롱이 쏙 들어갔다. "이봐요! 바알! 손님을 다 쫓아낼 생각이에요?" 갑자기 적막을 깨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려보니, 주방의 문이 열리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오리구이를 들고 30살 정도로 보이는 짙은 갈색머리에 술집에 어울리지 않는 단정한 얼굴을 가진 여인이 걸어 나왔다. --------------- NEXT `제7화`용병들의 도시` part 2 "여! 레노아 잘 지냈어?" 언제나처럼 단숨에 표정을 풀며 바알이 손을 흔들었다. 레노아라 불리운 여인은 홀을 가로질러 구석의 테이블에 요리를 내려놓고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바알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알! 그 아름다운 아가씨 피곤한 얼굴이잖아! 그리고 저 고운 피부를 빨리 씻고 싶을 거야! 쓸 때 없이 문제 일으키지 말아!"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여인 앞에서 바알은 꾸중듣는 어린 애 같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자! 아가씨 나를 따라 와요! 지금은 방이 하나밖에 없으니 내 방을 같이 쓰도록 해요." 그러자 바알이 펄쩍 뛰며 나섰다. "어어... 잠깐 무슨 말이야! 조슈아는 나랑 일행이라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레노아는 얼굴을 들이밀며, 바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듯 말하였다. "저 아름다운 아가씨 옷 입고 있는 건 저래도 표정이나 행동거지를 봐봐! 그리고 저 새하얀 피부도... 어느 나라 귀족이거나 적어도 상당한 신분의 아가씨가 가출 같은 걸 한 것이 틀림없어! 저런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꼬셔와서는 이런 술집에서 한방에 묶겠다는 거야?" 바알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으으...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바알이 여기 오는 중에 저 아가씨를 건드리거나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 잘 알아! 그러니 끝까지 기사 역을 충실히 하라구!" "........" "저 아가씨는 아직 바알에게 마음을 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좀더 친해져서 확실한 신분하고 속마음을 알아보라구! 그래서 바알이 가져도 좋을 아가씨면 그때 알아서 해! 그 이전엔 저런 아가씨는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고 알았어?" 그녀의 반박할 수 없는 정론에 바알은 툴툴거리며 테이블에 앉아 애꾸눈의 친구 레코바의 맥주를 가로채 벌컥 벌컥 마시고 있었다. 레노아는 입가에 실소를 머금고,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조슈아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 따라 오세요!" 툴툴거리는 바알을 뒤로하고 조슈아는 레노아를 따라 나섰다. 술집을 나선 그들이 술집 뒤편에 마련된 조그마하지만 귀엽게 꾸며진 집으로 들어가자, 안에서는 이미 여물 주는 일을 끝냈는지 에레나가 주방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녀는 레노아와 함께 조슈아가 들어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 저 이쁜 언니는 왜 데리고 와?" "언니는 여기서 우리랑 같이 지낼 거야!" 엄마의 말에 소녀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기쁨을 가득 담고 팔짝팔짝 뛰어와 조슈아의 짐을 가로채며 조잘거렸다. "우후! 오늘밤은 재밌겠네... 언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에서 묵는 첫 손님이야!" "엄마는 장사 마치고 올 테니까! 언니 쉴 수 있게 잘 안내 해줘라! 알겠지?" 기뻐하는 소녀를 남겨 두고 레노아가 술집으로 돌아가자, 소녀는 짐을 들고, 조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슈아는 소녀를 따라 주방 옆에 자스민 향이 물씬 풍기는 조그마한 소녀 취향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소녀는 조슈아의 짐을 침대 옆 관물대의 갈대 바구니에 담고 방을 한번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는 에레나의 방이야! 나는 엄마랑 같이 자면 되니깐 언니는 여기서 자! 그리고 물 데우고 있으니깐, 주방 뒤편에 욕실에서 씻고 옷 갈아입어! 나는 저녁 준비를 할께! 아! 그리고 짐 보니깐 옷도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엄마 옷 꺼내서 욕실에 놔둘 게...." 숨도 안 쉬고 떠들어대던 소녀가 주방으로 사라지자, 조슈아는 침대 위에 쓰러 졌다.정말로 오랜만에 누워보는 침대였다. 발끝이 침대 밖으로 나올 정도로 작은 침대였지만, 세상 어느 잠자리보다도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 먼지투성이의 외투를 벗어 창밖에 털어서 걸어 놓고는 욕실로 향했다. 2 한 명이 겨우 들어 갈 크기의 제법 운치 있는 나무 욕조에 더운물을 가득 담고 목욕을 하자 조슈아는 그야 말로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여행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여자의 몸으로는 매우 힘든 여행이었다. '이제 시돈에 갈 용병단에 낄 방법을 찾으면 된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물 밖으로 팔을 꺼내어 씻어 내리다가 문득 떠나올 때보다 더 가늘어 졌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까 그 용병 놈들 말대로 다. 이런 팔로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을까?' 그녀는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욕조의 더운물을 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누구도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고는 용병으로는 고용해 주지 않아! 그리고 이왕 가려면 최전선에 나설 정예가 되어야 기르가스를 상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슈아는 물 밖으로 나와 걸어놓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결연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내 용병으로서의 지명도를 높일 방법을 찾아 봐야 해!" 3 조슈아가 거실에 들어서자 제법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거의 한 달간을 마른 고기만 씹던 그녀로서는 견딜 수 없는 냄새였다. "와! 언니! 엄마 옷이 딱 맞네?" 감자와 고기를 양파 소스로 한데 넣어 볶은 요리가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서 에레나는 주방의 커튼을 젖히고 나오다 요리 냄새에 멀뚱거리며 서있는 조슈아를 보고 말했다. "응! 그러내...." 조슈아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짜증이 나있었다. 그녀의 옷은 그런 대로 느낌이 좋은 천을 사용한 가벼운 하늘색 드레스이었는데, 가슴 부분이 조금은 지나치게 패인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유혹적인 드레스였다. 조슈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식탁의 접시 위에 요리를 나눠 담으며 재잘거렸다. "있잖아! 엄마가 그러는데 처녀시절에 그 옷을 입고 아빠를 꼬셨었네, 그런데 지금은 입지 안으니깐, 언니가 입어도 될 거야!" "그...그래 그렇구나!" 불평할 처지가 못 돼는 그녀인지라 그냥 한숨을 내쉬며 소녀가 빼준 의자에 조용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막 시작하려 하자 레노아가 들어왔다. "아아! 오늘은 끝이야! 바알이랑 친구들이 밤새도록 알아서 마실 테니 내일 아침 치우면 돼!" 조슈아는 의아한 얼굴로 레노아를 바라보았다. "가계를 그렇게 술꾼들에게 맡겨 놓아도 돼나요?" 그러자 레노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하였다. "하루 이틀 장사하나? 결국은 다 아는 사람들이야!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 같은 일은 안 벌어 진다구!" 레노아도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아 은근한 눈초리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에 조슈아는 저윽이 당황했다. "왜...왜 그러세요!" "아가씨! 내 처녀적 드레스가 잘 어울리네! 도대체 몇 살이야?" "16살이에요!" 레노아는 그녀의 말에 매우 놀랐는지 과장된 몸짓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에? 정말 16살? 내가 18세 되던 때까지 가슴이 작아서 그런 드레스는 몸에 맞지도 않았다구!" 의미 파악을 못한 조슈아는 가볍게 툴툴거리며 대답하였다. "음... 글쎄요! 가슴은 조금 조이는 편인데.. 허리랑 엉덩이는 넉넉해서 편하네요!" 순간 레노아의 이마에 조그마하게 혈관이 드러나며 가볍게 깨문 이빨사이로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가 들러왔다. "이봐요∼∼ 아가씨.. 손님처지에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않돼지요!!!!" "아! 죄송해요!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요?" 정말로 미안한 듯 사과하는 조슈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레노아는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가씨는 바알을 만나게 된걸 신께 감사해야 해요!" "예?" "바알이 아니라면 누가 아가씨 같은 미녀가 산 속을 해 매는데 가만 두겠어요?" "그렇군요!" 보리 빵에 양젖 버터를 바르고 있던 조슈아는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배가 고픈 나머지 그냥 맞장구를 치고있었다. "아무튼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물러요! 아가씨 체제비는 바알이 내 준다니까!" "예? 왜요? 저, 돈이라면 있어요!" 오랜만에 빵을 씹으며, 고기에 포크를 가져가던 조슈아는 놀란 표정으로 말하였다.그러나 레노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띄고 말을 받았다. "아가씨가 돈이 조금은 있으리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여자 몸으로 객지생활을 하는데 돈을 아껴야죠! 그리고 남자가 여자한테 돈을 쓰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런가요?" 그 남녀가 특별한 관계일 때라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조슈아는 건성으 로 답하며 눈앞의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그녀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레노아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귀족이야! 그것도 상당한 지위의...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곱게 자란 아가씨임에 틀림없어! 그런데 가끔 언뜻 비치는 기운은 마치 기사의 그것 같아! 착각일까?' 사람을 상대로 하는 장사를 오래하다 보니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게 된 그녀였지만, 도저히 눈앞에 있는 소녀의 정체는 파악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닐까?그렇게 조슈아는 용병 도시 다테에서의 첫 날밤을 무사히 넘기고 있었다. ---------------- NEXT 제7화`용병들의 도시` part 3 4 "이봐 바알 일어나!"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술병들 사이에 용병들은 술 냄새를 풍기며 쓰러져 있었다. 밤새도록 마셨는지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레노아와 그녀의 어린 딸 에레나가 청소를 하고 있다. "일어나라니까!" 퍽- 부르다 지친 조슈아가 엎어져 있는 바알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자 겨우 그의 눈이 뜨인다. "응? 뭐야..." "벌써 한 낮이라구!" "어이구 머리야! 나는 새벽까지 술독에 빠져 있었다구!" 한 손은 머리에 한 손은 옆구리를 슬슬 문지르며 일어나던 바알은 조슈아의 모습을 보더니 술이 번쩍 깨는지 눈빛이 순식간에 맑아지고 있었다. "우와! 정말 어울리는데! 아직도 있었네 그 드레스!" 바알이 고맙다는 의미의 눈웃음을 레노아에게 보내며 조슈아의 허리를 잡아들어 올렸다. "어..어이! 뭐하는 짓이야!" 조슈아가 기겁을 하며 바둥거렸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조슈아를 들고 마치 어린애를 들어 올려 장난치듯이 이리 저리 돌려 보고있었다. 그가 겨우 조슈아를 내려 주자 그녀는 도끼눈을 뜨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 같은 남자에게 들어 올려 저서 눈요기 감이 되고 기분 좋은 남자가 있겠는가? "이봐 조슈아! 그렇게 화낼 것 까진 없잖아!" 바알이 그녀의 표정에 주눅이 들었는지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기가 꺾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호호! 바알! 조슈아는 당신과 도시 구경을 나가려는 거야! 빨리 씻고 준비해야지? 숙녀를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곤란해!" "헤헤.. 그런 거야? 빨리 씻고 올게!" 그가 황급히 우물가로 씻으러 사라지자 레노아는 아직도 씩씩거리는 조슈아를 바라보며 달래는 투로 말하였다. "사내들은 다 애들 같은 법이에요! 마음에 너무 두지말아요! 조슈아!" 그녀의 말을 듣고도 조슈아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화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바로 그에게 너무 쉽게 들린 데다가 힘껏 반항했는데도 그의 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던 자신의 너무나 무력한 육체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었다. 레노아는 그녀가 그렇게 까지 분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청소를 계속 했다. 5 왕궁 외벽을 따라 노랑 색의 돌을 깔아 만든 대로에서 두 명의 남녀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수많은 용병들이 그 소녀를 보고 접근하다 곁에서 있는 거구의 사내를 보고는 툴툴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이 매 초 단위로 반복되고 있었다. "이봐! 그만 화풀라구!" 깨끗이 씻어 몰라보게 말쑥해진 바알은 그녀가 계속 골이 나있는 표정을 짖고있자, 정말로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조슈아를 대리고 도시 구경을 시켜 주러 나왔지만, 이래서는 흥이 나지 않는 것이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맹새할께! 아니... 조슈아가 된다고 할 때까지..."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바알을 바라보며, 조슈아는 계속 그에게 화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에겐 지나친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 바알! 당신 때문에 화내고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마!" 그제야 불쌍할 정도로 움츠려 있던 바알의 표정이 펴졌다. "헤헤... 용서해 주는 거야?" "그렇다고 해두지 뭐! 그나저나 내가 나오자고 한 건 안내를 좀 해달라고 그런 거야!" "어디를..." 바알이 얼굴을 들이밀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너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밀쳐냈다. "북구 쪽으로 떠나는 용병 단에 들어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어? 북구는 왜?" "시돈에 갈 일이 있어!" "시돈?!" 바알` 얼굴이 가볍게 굳어 졌다. "왜 그래?" 바알은 조슈아의 의아해 하는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친구 놈들한테 들은 게 있어! 시돈 왕국에서 대량으로 용병을 모집 중인데, 상대가 마물들이라더군! 그래서 상대해주는 놈들이 없었는데 평균임금에 5배를 내놓겠다는 거야!" "그러면 모두 거기에 가려 하겠네?" "그렇긴 하지만 나는 권하지는 않겠어!" "왜? 용병들은 돈 받고 전투를 하는 거잖아! 그런데 5배나 주는데도 안 간다는 거야?" 바알은 정말 모르냐는 표정으로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한숨 내쉬며 말하였다. "너는 마물들을 본적이 없나본데, 우리 용병들은 상대가 2배든 10배든 별로 무섭거나 하지는 않아! 그런데도 마법사가 소환한 마물을 상대하는 건 정말 싫어하지!" "그렇게 세?" "아니! 한 마리라면 4-5명 정도가 붙으면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야! 그러나..." "그러나?" 조슈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고 이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상대하다가 죽거나 하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는 거야!" "그건 또 왜?" "마법사와 정면으로 붙으면 문제없지만 말이야! 상대 마법사 10명 정도가 성안에 꼭꼭 숨어서 마물들만 번갈아 소환한다고 생각 해봐!" "........." "그러면 성밖에 진을 치고있는 놈들은 안에 있는 마법사 놈들을 잡아죽이기 전에는 죽도록 고생만 한다 이거야!" "그럼 이쪽도 마법사를 고용하면 되잖아!" "성의 마법사는 왕국 마법사 같은 상위마법사들이야! 마법사라는 놈들은 기본적으로 신관들과 같이 자존심이 강한 놈들이라 고용되거나 하지 않아! 개중엔 그렇지 않은 마법사들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쓸만한 마물을 소환할 실력이 없는 하급이기 마련이지!" "그렇군!" 조슈아는 수궁이 간다는 듯 중얼거리며 게드마 성의 왕국마법사들을 생각하고있었다.그들은 일년 내내 거의 왕실 마법원에 틀어박혀 마법 창조 때문에 나올 줄을 몰랐고, 나름 데로 대단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가려는 시돈의 마물들의 숫자로 봐서 아마 마법사들이 수백 명은 되는 것 같다고들 하던데! 그런 전쟁엔 가는 게 아니야! 양쪽 다 무식 한 소모전일 뿐이지!" "아니 그건 또 왜?" "상대가 어떻든 결국 전쟁이라는 거는 땅 따먹기야! 그러니 백성도 없이 그저 마물소환 만으로 하는 전쟁은 살육 외에는 의미가 없다는 거지!" 조슈아는 바알의 말에 언 듯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들은 단지 살육이 목적일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나?" "흠... 글쎄 일단 소환 한 마물들은 마계가 닫히면 다시 돌아가야 되니 그것들을 백성들이라 할 수는 없을 테고, 결국 백성이 없으면 그 땅을 다스릴 수 없지!" 조슈아가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바알은 그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살짝 쳤다. "뭘 그리 생각해? 시돈 따위는 놔두고 어디 재미있는 델 알아보자구! 분쟁지역 중에는 그리 위험하지 않고 보수도 센대가 많다고!" "아니! 나는 시돈에서 만나 봐야만 하는 사람이 있어!" 조슈아가 잘라 말하자 머쓱해진 바알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지금은 힘들걸? 5배의 보수에 혹해서 너도나도 가려는 바람에 그전하고는 달리 아무나 받아 주거나 하지 않아!" "............" "뱃길로 한 달거리이고, 성도 알본까지는 또 거의 두 달이 걸린다고, 전투를 하면서 밀고 올라 갈 테니 시간은 훨씬 더 걸릴거야! 그런데 그 멀리 까지 데려가서 쉽게 당할 놈이면 시돈도 손해가 막심해지니 말이야!" 조슈아로서도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이었다. 바알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이 채용되겠지만, 지금 조슈아가 용병으로 고용해 달라고 찾아가 봐야 그들은 콧방귀도 끼지 않을 것이었다. "바알! 이 도시에 서 가장 빠르게 전사로서 인정받는 길은 뭐지?" "에? 그건 또 왜?" "아무튼 말해봐!" "음... 가장 빠른 거라! 글쎄 일단은 다음 주에 있을 '왕국 무투회' 정도일까? 일단 상금 이 쌔고, 우승하면 페드라 왕국기사단이 되지만, 솔직히 페드라 따위의 왕국기사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 다시 또 왕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바알이었으나 상관치 않고, 조슈아는 다그치듯 물었다. "거기서 우승하면 용병으로서 지명도가 올라갈까?" "누가 거기서 우승하고 용병을 계속 하겠냐? 하여튼 전사들로 우글거리는 다테에서 무투회 우승을 한다면 일단은 누구라도 최고라 생각하겠지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알이 중얼거렸다. "거기에 참가하겠어!" "응! 어...어 뭐라구?" 얼떨결에 대답하던 바알이 펄쩍 뛰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당황한 듯 조슈아의 양어깨를 잡으며 소리쳤다. "이...이봐 조슈아! 거기선 예선전에서 만도 많은 놈들이 죽어 나간 다구!" 조슈아는 바알의 팔을 힘겹게 밀어냈다. "바알! 당신이 만약 거기에 참가한다면 어디까지 올라 갈 수 있지?"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그는 잠시 당황한 듯 하더니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따위 왕실에서 하는 행사에 참가할 일은 없겠지만, 중간에 다치지만 않으면, 결승까지는 가겠지!" "그 이후는?" "이봐! 조슈아! 내가 아무리 검을 잘 쓰고 힘이 있다 해도 여기는 전사의 도시 다테야! 결승에서 맞붙을 정도면 상대도 상당한 놈이라는 거라구!" "그렇겠지!" 조슈아도 수긍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머리로는 빠르게 계산을 하고있었다. '내가 아무리 아카바 왕실 비전 샤레타를 완벽히 익혔다해도 이 몸으로는 그것을 완전히 소화해 낼 수 없다! 아직 한 주가 남았다니 최대한 체력을 회복하고 근력도 좀 강화를 시켜 놔야 해!' 이미 결심을 굳힌 조슈아를 설득하기 위해 바알은 이제는 거의 처참의 극치를 이루는 표현들을 사용해가며 무투회를 마치 지옥의 아수라 전쟁으로 만들어 버리고있었다.조슈아는 침을 튀기며 한참 지옥도의 연출에 심취한 바알은 잊어버리고 머리 속을 온통 무투회에 대한 전략으로 가득 채웠다. ------------------NEXT 제8화 `무투회의 여전사!` part 1 페드라 왕국의 유일한 도시이자, 팔메라 대륙을 통틀어 가장 큰 용병시장인 다테에서는 매년 여름, 도시 최고의 행사 중에 하나인 '왕국 무투회'가 벌어진다. 100여 년 전에 시작된 이 무투회는 처음에는 왕실 근위대를 뽑는다는 취지로 시작하였었지만, 이제는 다테의 인기 행사로 도시민과 여행자들의 최고의 볼거리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이유라면 여느 나라의 기사단 시험과는 달리 가문이나 교양 등 기본 소양은 모두 배제 한 채, 오직 무위만을 보는데다가 또 전혀 보호구나 안전장치, 심판도 없이 투기장안은 완전한 무법지대가 된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인재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인 페드라 왕국으로서는 매년 보검과 상금까지 걸고라도 이런 행사를 통해 그저 강한 기사를 얻어야 만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는 기사임용에 제대로 된 기사가 찾아 올 리 없다. 힘은 있으나 무식하고 포악한 용병들이나 산적, 심지어는 타국에서 쫓기고 있는 범죄자들까지, 이 왕국 무투회는 그야 말로 쓰레기들의 각축장이다. 그리하여 타국의 왕국기사들은 페드라 왕국의 기사단이라 하면 기사라 생각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왕국 무투회는 안정된 생활을 원하는 용병이나 타국의 쓰레기들에게는 마지막 기회의 터전이었고, 그리하여 매년 여름 수백 명의 전사들이 다테의 원형 경기장을 찾는 것이었다. 1 화강암을 깎아서 그것을 맞대어 깐 다테 왕궁의 광장은 푹푹 찌는 한여름에는 그야말로 마치 고기를 굽는 석쇠같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거기에 더해 갑옷과 각종 무기를 들고 서있는 수백 명의 사내들과 같이 있으면 그것은 이미 사람 살만한 데가 아닐 것이다. 조슈아는 차례를 기다리다 지쳐 버리지나 않을 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해 언제나처럼 회색 외투의 모자를 덮어썼지만, 그 때문에 더위는 더욱더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바알이 계속 그녀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봐 조슈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도대체 일주일 동안 먹고 자기만 하고 무슨 시합을 하겠다는 거야! 네가 검술을 좀 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건 정말 무모한 짓이라고!" 바알은 일주일 전에 무투회에 참가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들었지만, 그녀가 연습하겠다 고 설치거나 하지 않고 쉬기만 해서 그녀가 농담을 한 것으로 여겨 가슴을 쓸어 내고 있었던 참에 당일 아침 무투회의 예선에 그녀가 나가려 하자 혼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그녀는 바알의 근심 어린 눈빛을 대하자 조금은 그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바알!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이 나는 약하지 않아! 사실을 말하면 나는 당신만큼 강하다구!" '그전이었다면 더 강했겠지만....' 속으로 울분을 삼키며 조슈아는 이제 자신의 줄이 원형경기장의 입구까지 이르렀음을 볼 수 있었다. 무투회는 총 16인이 토너먼트로 싸우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백 명의 참가자를 예선에서 추려 내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조슈아는 원형경기장 옆에 위치한 실내 투기장으로 안내되었고, 바알은 정문에서 걸려 안에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가운데 곧 석문이 닫혀 바알의 걱정스런 얼굴이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대리석바닥의 투기장을 바라보았다. '웃기는 나라네! 투기장 바닥이 대리석이라니! 넘어지거나 던져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텐데...' 순간 조슈아의 상념을 깨는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자! 예선전을 시작하겠다! '글라우다'의 시즈몬, '바산'의 라프 앞으로!" "흐흐! 내 차례군 박살을 내주마!" "네놈의 눈알을 파주마!" 이름이 불린 두 명의 거한 들은 별로 독창적이지 못한 대사를 읊으며 사각의 투기장으로 올라갔다. 글라우다 출신의 용병은 9척 장신에 엄청난 어깨 근육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무기인 거대한 강철 해머를 사용하면서 단련된 듯 싶었다. 그는 그 무거워 보이는 해머를 시위하듯 머리위로 가볍게 휘두르며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짖고 있었다. 그에 반해 멀리 남방의 바산 출신의 전사는 키는 그에 못지 않았으나 깡마른 체구에 가벼운 체일 아머(강철사슬을 엮어 만든 가벼운 갑옷)를 걸치고 양손 목에 꼬챙이처럼 보이는 길쭉한 기형 검을 달고 있었다. '헤... 저런 건 처음 보내!' 조슈아는 그가 그런 무기로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 궁금해 졌다. "시합은 어느 한쪽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항복하면 끝난다. 그러나 알아 둘 것은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면 실격이다. 시작!" 앞의 조건으로 볼 때 거의 의미가 없는 실격 조건을 읊으며 까마귀 같은 목소리의 노인은 경기 시작을 알렸다. "죽어랏!" 경기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강철해머의 전사가 해머를 상대의 정수리로 일찍 선으로 내리 꽂아갔다. 머리 위에서부터 체중을 실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리꽂는 강철해머를 맞는다면 상대의 머리는 형태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쾅―. 그러나 해머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면 바닥을 부수고 있었다. 말라깽이 꼬챙이의 사나이는 긴 다리로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가 대리석 바닥을 박살 내며 내리 꽃인 강철해머를 오른 발로 지긋이 밟고 있었다. 해머를 들어올리지 못해 당황한 거한이 고개를 들자 씨익 웃고 있던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길다란 기형 검으로 사내의 양 눈을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그어 갔다. "크악……." 거한의 사내는 얼굴을 감싸안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장님이 된 사내는 어떻게 긁혔는지 엄청난 양의 피를 쏟으며 기절했고, 곧 일단의 사내들에 의해 실려 나갔다. 그러나 곧 투기장 바닥에 고인 핏물이 씻겨나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차례가 호명되었다. 조슈아는 이 잔인 한 광경을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실력이 무서워 서가 아니라 시합에서 가차없이 한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잔혹함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녀는 그 이후 몇 차례 다른 전사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서서히 무투회의 수준을 판가름하고 있었다. '결국 거칠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 훌륭한 무위를 가진 자들은 없다! 몇몇 쓸만한 자들도 있지만, 정통검법을 배운 자는 없고 전장의 검만이 눈에 뛴다. 전쟁터라면 모를까? 일대일의 시합에서 정통검술을 대적하기에는 한참 모자란다.' "'아카바'의 조슈아! '페드라'의 사논!"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조슈아는 회색 외투를 벗어 던지고 검을 들고 일어났다. 순간 당연하지만 실내의 수십 명의 사내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억! 뭐야 저 계집은!" "세상에 저 얼굴좀 봐 !" "몸매는 더 죽이는데! 어이 아가씨 여긴 뭐하러 온 거야!" 물론 무투회에 여전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 어디에 이런 가녀린 미소녀가 거칠기로 이름 높은 페드라의 왕국 무투회에 참가한다고 생각하겠는가! 사내들은 여기가 예선경기장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조슈아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침을 흘리는 사내들 사이를 지나 투기장으로 올라갔다. 용병으로 보이는 페드라 출신의 전사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그는 거대한 참마도(전장에서 말의 머리와 함께 적을 한꺼번에 베기 위한 거대한 도)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는데, 역시 떡 벌어진 어깨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흐흠....시합은 어느 한쪽이 전투불능이 되거나 항복하면 끝난다. 그러나 알아 둘 것은 항복한 상대를 공격하면 실격이다. 시작!" 까마귀 목소리의 심판관도 당황했는지 상당히 뜸을 들이고 시작 신호를 내렸다. 그러나 시작 신호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좀처럼 공격해 들어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이봐 계집! 검을 뽑는 것도 잊었나?" 사내의 말대로 조슈아는 검을 은빛의 검집에 그대로 꽃은 체로 고정쇠 조차 열지 않고 자세를 잡아 가고있었다. "시합에서 누구를 죽이거나 할 필요는 없지!" 그녀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험상 굳게 일그러졌다. "계집이 예쁘장해서 적당히 놀아주다 끝내려 했더니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구만!" 사내는 참마도를 머리위로 들어 올려 횡으로 그어 갔다. '그런 대로 쓸 만 하군!' 조슈아는 날아오는 거대한 도를 바라보며 조금은 감탄하고 있었다. 카앙―. 조슈아는 어깻죽지를 노리고 날아오는 참마도를 가볍게 검으로 막아가며 머리위로 흘려 넘겼다. "어억! 저 계집 피하지도 않고 흘려 넘기잖아!" "이거 재미있겠는데.." "어이! 사논! 창피한 줄 알라고 크크크..." 의외의 상황에 장내는 매우 시끄러워 졌고, 자신의 혼신의 일격이 너무 쉽게 무마되자 사논이라 불린 용병은 치욕으로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으.... 계집! 어디서 검을 좀 배우긴 배웠구나! 이제 봐주지 않겠다!" 그는 참마도를 가슴에서 일직선으로 들고 아돌(빠르게 돌진하여 찌르는 공격)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봐! 참마도로 아돌을 하겠다고? 검술의 기본도 안되어 있군! 그건 휘두르는 파괴력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킨 형태의 도야! 그걸로 아돌을 걸어오면 내 반격을 피할 수 없게돼!"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까지 설레설레 흔들며 말하자, 그는 아예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분계하고 있었다. " 죽어랏! 계집! " 파앗…. 무거운 참마도인 만큼 그 중압감은 엄청났다. 그러나 조슈아는 여전히 한심하다는 얼굴을 지우지 않고, 장검으로 돌진해오는 참마도의 끝을 살짝 막아 옆으로 흘리며 마치 투우를 하듯 살짝 허리를 뒤로 빼, 무게에 밀려 그녀의 검을 따라 미끄러져 지나가는 용병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크윽..." 거구의 사내는 제대로 맞았는지 눈을 뒤집으며 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아카바'의 조슈아 승!" 그녀의 승리가 확정되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 졌고, 더 이상 농담을 던지는 이도 없었다.그들은 방금 쓰러진 사내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지라, 그를 마치 어린애를 가지고 놀 듯 상대하는 그녀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대단한 여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슈아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일회전을 통과하여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녀가 지나가자 사내들이 옆으로 밀려나 길을 내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태도에 절로 실소가 흘러 나왔다. '과연 용병 도시인가? 무엇 보다 실력이 우선이군! 이렇게 계속 올라가면 용병으로서의 지명도도 금방 쌓을 수 있겠는데?' 이미 그 이상이 되었다는 것을 그녀가 눈치 채고 있지 못한 것은 확실히 아직 그녀가 경험 부족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예선 8경기를 치르며 모두 검 한번 뽑지 않고 상대를 기절시킨 그녀는 본선의 16인 중 하나로 결정된 저녁 깨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온 다테 시에 기적의 여전사로 알려져 가고 있었다. 예선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고, 대개 입소문은 부풀어 지기 마련 이어서, 그녀가 예선을 마치고 레노아의 집으로 돌아가려 나오는 시각에는 이미 그녀를 보러 모인 수많은 사람들로 궁성의 광장은 들 끓고있었다. "저 여잔 가봐!" "저렇게 예쁜 여자가 어떻게 !" "언니! 여길 봐요!" 조슈아는 상황판단이 되지 않아 자신을 둘러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그녀를 둘러 싼 여자들 중 많은 수가 어린 창녀들이거나 창녀들의 어린 딸들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그녀를 잡고 놓지 않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때 당황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는 손길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바알이 그녀에게 놀라움과 기쁨이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크으... 조슈아! 얘기 다 들었어! 나는 감동 했다구! 도대체 그런 검술을 왜 숨기고 있었던 거야? 확실히 너는 내 색시가 될 여자임이 틀림이... 우욱 ..." 바알의 정강이에 조슈아의 뾰족한 부츠 끝이 박히며 그는 주저 앉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도 얼른 일어나 그녀를 무등태우고 여자들과 그녀를 보러 나온 시민들에게 그녀를 들어 보여 주었고, 사람들의 환호에 그녀도 어쩔 수 없는지 살짝 미소를 띄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이 후 소녀들의 행렬은 그녀가 레노아의 술집에 이를 때까지 그녀를 따라 오고 있었다. 2 레노아의 술집에서는 그날 밤 오랜만에 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알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그녀를 보러 온 또 다른 친구들이 몰려 와 일찍이 문을 닫고 술판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언제나 레노아의 집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던 조슈아도 레노아와 에레나가 잠을 자러 사라진 후에도 남아 오랜만에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자자! 아름다운 용병아가씨 조슈아를 위해 건배!" "내친 김에 우승해라! 아가씨 나는 팬이야!" "흐흐 얘기 못 들었나? 검 한 번 뽑지 않고 다 병신들을 만들었데 잔아!" "이봐! 이봐! 알려 면 똑 바로 알라고 나는 모두 머리통이 부서져 죽었다고 들었다구!" 조슈아는 처음으로 마셔보는 맥주가 마음에 드는 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바알은 자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녀가 맥주를 마시는 모양새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봐! 조슈아! 이제 말 해봐 나도 이야기로만 들은 거지만 운만으로는 절대로 본선에 진출할 수 없다구!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검술을 익힌 거야?" 약간은 취했는지 아름다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녀가 바알을 돌아보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 배웠는데 뭔지는 물어 보지 마!" 그녀는 약간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다시 양손으로 맥주 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그러다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바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바알! 물어 볼게 있는데!" " 응? 뭔데?" 조슈아는 빈 맥주 잔을 내려놓고 조금은 거북 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나를 보러 나왔던 여자들 말이야! 거의 어린 여자아이들과 창녀들이었던 것 같았는데..." "그래.." "왜 그렇게 나를 반기는 거야? 알지도 못하는 내가 무투회 본선에 진출했다고 해서 그들이 그렇게 까지 기뻐 할 이유가 없잖아?" 그녀의 질문에 바알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말이야! 조슈아! 여기가 다테이기 때문이야!" "그게 왜?" "너도 이제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 다테는 궁성에 사는 족속들을 제외하면 모두 용병이나 그에 관계된 일들로 먹고 살아가지!" "....." "그러니 여자들은 운이 좋으면 궁에서 일하거나 용병의 아내가 되어 가게나 술집을 경영하고 그렇지 않으면, 창녀로서 용병들을 상대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그래서..." 조슈아는 다테의 여자들의 비참한 삶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바알은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두눈에 핏기를 머금으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다테의 여자들 중 개중에는 여자용병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말이 용병이지 거 의 전장에서 다른 남자용병들의 욕구를 풀어 주고 돈을 버는 것이 대부분이지!" "........" "그래서 말이야! 조슈아! 너는 여기 다테에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창녀들과 미래가 없는 창녀의 딸들에게 희망의 빛 같은 존재 가 된 거라구!" "아!"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어린 소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려 옴을 느꼈다. 이제 열살 이 막 지난 듯한 어린 소녀들까지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 아직 모양도 잡히지 않은 가슴을 한껏 드러낸 깊게 파인 허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로 그 어린 소녀들조차도 모두 창녀들이었던 것이다. 허무함 마저 느껴지는 생기 없는 눈동자에 동경을 가득 담아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들... 그녀들이 떠오르자 조슈아의 파란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왔다. "어어? 우는 거야? 조슈아?" "아! 왜 이러지!" 저윽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가 황급히 눈물을 훔치는 것을 바라보던 바알은 곧 세상에서 제일 가는 보석을 발견 한 듯한 눈빛이 되어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내 생각 데로야!" "응? 뭐가?" 눈물을 닦으며 조슈아가 아직도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바알을 바라보았다. 바알은 그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적인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너는 정말 좋은 여자야! 조슈아! 그날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축복이었다고 생각해! 나는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운명을 느꼈어!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것이 돼어줘!" 술기운 탓이었을까? 평소 같으면 주먹이 날아갔을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조슈아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그저 아직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그를 가볍게 흘겨보고는 것이 전부였다.밤은 흘러 새벽을 향해 달려가고, 왕국 무투회는 이제 이틀을 남기고 있었다. --------------------NEXT 제8화`무투회의 여전사` part 2 "저! 조슈아님이 계신 곳이 여기인가요?" 전날 밤새도록 마신 술 탓에 숙취로 한낮이 되도록 머리를 싸매고 에레나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조슈아는 마당에서 들려오는 앳된 소녀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아직도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조슈아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레노아와 에레나는 가계에 있는지 뒤편 마당에 손님이 왔는데도, 나가 보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날 찾는 거지?' 조슈아는 얼른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왔다. 집밖으로 나와 보니 이제 11∼2세쯤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소녀가 눈에 들어 왔다. 그녀는 겁이 많아 보이는 크고 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별로 못 먹고 자랐는지 창백한 피부에 여기저기 해어져 각기 다른 천을 이어 붙인 조금은 우스워 보이는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조슈아를 보자마자 그 커다란 눈에 완연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업어질 듯 달려오더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당황하는 그녀의 양손을 잡고 차가운 오른 쪽 볼로 가져갔다. "이..이봐! 아가씨! 왜 이러는 거야?"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소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그녀의 손을 볼에 부비더니 동경이 가득한 눈으로 조슈아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사님! 제발 저를 제자로 삼아 주세요! 시키시는 건 뭐든지 다 하겠어요!" 조슈아는 숙취가 다 달아 나는 것 같았다. 소녀는 마치 생명 줄인 양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며, 그녀가 여태껏 본적이 없던 간곡한 눈동자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이봐요! 아가씨! 제자를 삼아 달라면 다른 용병들도 많은 데 왜 굳이 나를 찾아 온 거지?" 소녀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하는 그녀는 이 맹랑한 소녀의 양손이 매우 차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다른 용병이요? 남자들 말인가요?" 소녀의 눈에 언뜻 증오가 비치고 있었다. 겁이 많아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숨기지 못할 증오의 빛이 서리는 것을 보며 조슈아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들의 제자가 된다면.... 결국 저도 엄마 같이 몸을 파는 것과 다를 게 없어질 거예요!" 소녀는 절규하듯 소리치며 조슈아의 손에 얼굴을 파묻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어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저 손을 내어 맞기고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아가씨 이름은 뭐지?" 소녀는 조슈아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눈물로 가득한 두 눈에 희망의 빛을 띄우며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레크트라.... 에레크트라에요!"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며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일으켜서보니 소녀는 조슈아의 목에도 못 미치는 키였다. 소녀는 기대감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조슈아의 두 눈을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주시하고 있었다. "에레크트라! 잘 들어! 나는 여행자이구! 용병이야! 무투회 예선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찾아 왔나 본데... 만약 내가 우승한다해도 나는 여기 다테의 기사가 되거나 하지 않아! 여기에서의 일이 끝나면 멀리 북구로 떠나갈 거야!" 완곡한 거절의 의미가 담긴 그녀의 대답이었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전사님! 저는 전사님이 왕국기사가 되신다고 생각해서 찾아 온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전사님의 수발을 들어 드릴 수 있어요! 저를 여기서 데리고만 나가 주시면 뭐든 다 해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나는 먼 북구로 떠나야 해! 그리고 그것은 용병으로서 가는 거야! 그러니..." 소녀는 조슈아가 거절하는 눈치를 보이자 두 눈에 절망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제발...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이대로 돌아가면 저도 다음 주부터는 몸을 팔아야 해요! 저...저는 못해요! 차라리 죽어 버릴 거예요! 제발..." 소녀의 절규에 조슈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소녀의 양어깨를 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에레크트라! 그게 무슨 말이지? 다음 주부터 몸을 판다니 그게 도대체..." 소녀는 그녀가 양어깨를 잡자 불에 대인 듯 놀라며, 눈물이 흐르는 검은 눈동자를 들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전사님은 타국 분이시니 잘 모르시겠지만, 다테의 여자들은 정말 운이 좋지 않으면 거의가 몸을 팔아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 "그러나 다테에서도 12세 생일이 지나기 전에는 몸을 팔지 못해요∼" "그러면 네가..." 소녀는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요∼ 다음주에 저는 12세가 되어요! 흐흐흑" 통탄할만한 현실이었다. 축복 받아야 할 꽃다운 소녀들의 12세의 생일이 용병도시 다테에서는 처음으로 몸을 팔아 희망 없는 인생을 시작하는 비극의 날이 되는 것이다. "도대체 왜지? 이 나라는 왜 이런 거야?" "그건 아카바 왕국 때문이야!" 조슈아가 소녀의 어깨를 잡은 손을 떨며 분노에 사무친 목소리로 소리 치자 어디에선가 바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막 우물가에서 몸을 씻고 나오고 있었던지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칼이 목뒤로 달라붙어 있었다. 갑자기 출현한 바알에게 놀랐는지 소녀는 잽싸게 조슈아의 뒤에 숨고 있었다. "말해 봐! 바알! 이렇게 밖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이것이 모두 아카바 때문이라구?" 조슈아는 흥분하고 있었다. "조슈아! 잘 들어 둬! 너도 봐서 알겠지만 페드라는 그 어디에도 식량을 생산할 땅이 없는 바위산과 고지대의 숲으로만 이루어진 나라야!" "..........." "300년 전에 아카바는 페드라 백성들을 밀어내면서 전략적으로 가치 없는 론다 강 유역의 땅 조차 남겨주지 않고, 그렇다고 점령지의 백성들을 식민으로 삼거나 하지도 않았어!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 "............" 바알의 목소리에 살기가 번져 갔다. "아무 것도 나지 않는 이 산악지대에 풍요롭게 살던 그 많은 백성들이 무방비로 내쫓기게 된 거라구!" "그...그래서..." "첫 해에만 전체 페드라인의 절반이 굶어 죽었어! 서쪽의 국경을 접하고 있는 글라우다도 페드라의 난민들을 받아 주지 않았지! 이런데서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었겠어?" 조슈아는 할말을 잊고 있었다. 그녀의 등뒤에 숨어, 눈치를 보는 소녀는 조슈아의 허리를 잡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깍지를 낀 채 안고 있었다. '이 아이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야! 적어도 구해낼 수 있는 아이를 어제 보았던 그 어린 창녀들과 같이 만들어 버릴 순 없어!' 조슈아는 어제 보았던 어린 창녀들의 허무한 느낌마저 주던 텅 빈 눈동자들을 떠올리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결심을 굳힌 듯 그녀는 허리에 감긴 소녀의 팔을 풀고 돌아서서 소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무투회가 끝나면 용병단을 따라 멀리 북구의 시돈으로 떠나가게 될 거야! 거기는 전쟁터이고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어! 그리고 시돈에서 일을 마친다해도 다시는 여기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따라 오겠니?" 소녀는 작은 어깨를 떨며 발작적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자! 에레크트라! 그럼 너는 이제부터 나와 함께 지내는 거야!" "우왕...." 소녀는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거의 울부짖으며 조슈아의 품에 안겨 왔다. 조슈아가 소녀의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바알을 바라보자, 그는 한쪽 입술로 씽긋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건지 기쁘다는 건지 구분 못할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마워요..... 전사님..... 고마워요....." 소녀는 겨우 진정이 되는지 조슈아의 품에서 나와 눈물을 닦으며 평생 지어 본적 없을 환한 미소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에레크트라! 한가지 말해 둘게 있는데 나를 전사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줘!" 에레크트라는 아직도 눈물이 고인 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곧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어요! 그러면 나리라고 부를 까요?" "오! 맙소사! 에레크트라! 그냥 조슈아라고 부르면 돼!" 에레크트라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두 손을 휘 저었다. "그럴 순 없어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때 뒤에서 바알의 웃음 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라고 하면 되잖아! 뭐 그리 어렵게들 생각하나!" "어..언니요?" 그녀가 기쁜 듯이 반문하자 조슈아는 소녀가 그러길 바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에레크트라! 앞으로 나랑 다니려면 나를 언니라고 불러야해 알았지?" 제법 두 눈을 부라리며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엄포를 놓는 조슈아였다. 눈물 많은 에레크트라는 다시 그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조슈아의 품에 안겨 오며 속삭였다. "기뻐요 ∼∼" '뭐! 어떻게 되겠지.....' 조슈아는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험난한 앞날을 예감하고 있었다. 4 왕국 무투회의 아침이 밝아왔다. 다테의 원형경기장은 경기 시작 전부터 몰려온 관객으로 발디딜 틈도 없었다. 이날 아침 군중들의 최고 관심사는 뭐니뭐니 해도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금발의 여전사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돈이 오가는 도박판이기도 한 이 무투회에서 조슈아와 같이 어린 소녀인데다 첫 출전으로 훌륭한 예선 성적을 보인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도박사들조차 그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이틀을 푹 쉰 조슈아가 바알과 에레크트라를 데리고 원형 경기장에 들어서자 여기 저기서 그녀를 알아본 군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3000여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은 벌써 만원이었고, 개중엔 상당히 많은 다테의 창녀들이 끼어 있었다. "어이! 바알! 무투회의 입장료가 꽤 비싸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저 여자들이 여기 들어와 있는거야?" 조슈아가 의아한 듯 묻자 바알도 어깨를 으쓱할 뿐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언니!" 에레크트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전의 누더기를 벗어 던지고, 에레나의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 훨씬 생기 있고 귀여워 보였다. "저도 저희 마을의 아줌마들한테서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모두들 언니를 보고 싶어 난리도 아니었죠. 그래서 거의 한달 벌이를 탈탈 털어서라도 보러 오겠다는 아줌마들이 많았었어요. 빚을 내서라도 오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는걸요?" 조슈아는 에레크트라의 말을 들으면서 이 무투회가 이미 자신이 생각하던 것 이상의 그 무엇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쿠웅∼쿠웅∼-- 갑자기 북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출전자는 대기석에 오르시오!" 조슈아는 검을 들며 걱정스러운 얼굴의 에레크트라에게 윙크를 보낸 후, 바알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러자 바알은 어깨를 치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낮게 속삭였다. "조슈아! 여기 본선에 진출한 15명은 대부분 내가 아는 놈들이야! 그 중에 한 놈은 내가 최선을 다해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놈이라고! 절대로 방심하면 안돼!" 조슈아는 다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왕실특별석의 아래에 마련된 대기석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대기석을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모든 선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흉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탐색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그녀의 무위를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함부로 수작을 걸어오거나 하는 자는 없었지만, 무투회에 참가한 여검사를 못 마땅해 하는 것은 분명한 눈치들이었다.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페드라 왕실일가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국왕이 들어와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 의당 있어야할 환호성은 전혀 들려 오지 않고 오히려 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바알의 말대로 왕가와 백성들간의 골이 매우 깊구나!' 조슈아는 한나라의 왕자로서 그가 매우 측은하게 느껴졌다. 또다시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일견하기에도 장군으로 보이는 뛰어난 풍모의 사내가 원형경기장의 중앙에 마련된 넓은 대리석 투기장 위에 올라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핀 국왕 폐하께 영광있으라! '왕국 무투회'의 개막을 선언합니다!" "우와∼!" 군중의 환호 소리로 원형경기장은 떠나갈 듯 하였다. "16인의 전사들은 들으시오! 여러분의 본선 진출을 축하합니다! 이 무투회의 우승자에게는 명공 '쿠루투'의 보검과 함께 은화 2천냥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영광의 왕실근위기사의 자격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내의 말에 참가자들의 눈빛이 탐욕으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투기장에 올라, 시작 신호가 떨어진 이후에는 상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거나, 항복을 받아 내거나 혹은 투기장 밖으로 상대를 밀어내기 전에는 경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누구든지 죽어 나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조슈아는 본선 진출자들을 바라보며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룰이 룰이니 만큼 적당히 해서는 경기를 끝낼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체력으로 장기전을 할 여유도 없어!' "1 차전 상대는 디온의 게나베라, 베레야의 쥬다!" 호명과 동시에 대머리에 적룡의 문신을 새기고 양주먹에 철갑을 낀 거한과 뚱뚱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가죽 채찍을 목에 감은 사내가 걸어 나갔다. 대머리의 사내는 투기장에 사뿐히 올라가 이리저리 주먹을 휘두르며 관중의 환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알려진 전사로 보였다. 반면 얌전히 뒤뚱거리며 힘들다는 듯한 표정으로 투기장을 올라간 뚱뚱한 사내는 땀을 닦으며 목에 감고 있던 가죽 채찍을 슬슬 풀고 있었다. 무투회의 개막을 알렸던 거한은 투기장을 내려가 조금떨어진 자리에 마련된 의자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 도달하자 손이 들어 올려 지고, 두 전사와 관중들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시작!" 파앗……. 신호와 동시에 대머리의 사내가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며, 뚱보 사내의 사각으로 뛰어 들어 갔다. 미처 채찍을 휘둘러 간격을 확보할 기회를 잡지 못한 뚱보는 정확히 명치 부분에 철갑을 낀 무지막지한 주먹이 쑤셔 박히자 하얀 위액을 쏟으며 앞으로 쓰러져 갔다. 그러나 대머리 전사가 그대로 놔둘 리가 없다. 그는 쓰러지는 뚱보의 얼굴에 곧바로 오른쪽 무릎을 찍어 올렸다. 퍼억―. 뚱보의 얼굴에서 피가 튀었고,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뒤로 넘어졌다. "와아∼"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대머리 사내는 피로 젖은 철갑 주먹을 들어올려 환호에 답하였다. 그러던 중 믿지 못한 광경이 벌어 졌다. 쓰러져 있던 뚱보 사내가 드러누운 상태에서 채찍을 휘둘렀다. 촤악―. 가죽 채찍은 그대로 대머리 사내의 양 발목에 감겼고, 당황한 대머리 사내가 뒤돌아보았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늦은 후였다. 뚱보 사내는 엄청난 힘으로 그를 감아 올린 상태에서 채찍을 돌리기 시작해 곧 머리 위에 이르렀다. "우아악..." 곧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직감한 대머리 사내가 공포에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뚱보사내는 피범벅이 된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띄우고는 머리 위로 돌리던 대머리 사내를 큰 포물선을 만들며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푸각―. 순간 관중들은 눈을 돌렸다. 대머리사내는 바닥에 머리부터 박혀 허연 뇌수와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눈은 뒤집혀 있었고, 머리는 깨어 졌는지 정상적인 모양이 아니었다. 그냥 던져진다 해도 큰 부상을 면치 못할 대리석 바닥 위에, 온 체중이 실려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만약 살아날 수 있다 해도 다시는 걸어 다니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뚱보사내는 그냥 끝내지 않았다. 심판관이 일어나 경기를 끝내려는 순간에 그는 다시 한번 사내를 들어 올려 머리 위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베레야의 쥬다. 승!" 심판관이 급히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에 뚱보는 씨익 웃더니 공중에서 채찍에 감겨 돌려져 사방에 피를 뿌리며 늘어져 있는 사내를 그대로 사각의 대리석 투기장의 모서리에 내리 꽂아 버렸다. 푸욱―. 마치 물을 채운 가죽푸대가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대머리 사내의 상체가 부서졌다.투기장 밖으로 떨어진 그의 허리는 반대로 꺾여 있었고, 가슴은 갈빗대가 근육을 뚫고 여기저기 비쭉 나와 있는 몰골이었다. 관중석은 잠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지만 곧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들려 왔다. "와아∼" 그 속에서 조슈아는 관중들의 광기 어린 환성 속에 유유히 투기장을 내려오는 베레야 출신의 뚱보 전사를 바라보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살의를 경험하고 있었다. '저 뚱보 놈은 기사급의 고수다! 처음에 얻어맞은 것조차도 충격의 강도를 알고서 일부러 맞은 것이다. 피가 많이 나도록 일부러 코를 비스듬하게 맞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녀의 양주먹이 피가 날 뜻 쥐어졌다. '상대가 엄청난 실력의 차가 나는 것을 알면서도 좀더 확실히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 일부러 쓰러져서 안심시킨 후 완전한 빈틈을 노린 것이다. 그리고는 극한의 공포를 맛보게 하고는 투기장 밖으로 던져 실격시켜도 될 것을 머리 위에서 최대한 돌리다가 저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일부러 머리부터 매다 꽂았다.' 그녀는 왕실 특별석으로 눈을 돌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국왕 그리핀을 노려보았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왜 왕실근위대 시험이 이런 살육극이 되어야 하는 건가! 왜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는 거냐! 도대체 당신이 의도하는바가 뭐냐 페드라 국왕!' "2 차전은 아카바의 조슈아! 디베리아의 베론!" 우와……!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자 엄청난 함성이 들려 왔다. "까악∼ 언니 이겨요!" "조슈아 만세!" 관중석 구석에 모여 있던 창녀들과 어린 소녀들도 목이 터져라 소리 치기 시작했다.그러나 조슈아는 완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국왕이 있는 곳을 한번 노려보고는 찬바람이 일 듯 몸을 돌리며 장검은 들고 투기장으로 올라갔다. '이 무투회 내가 망가트려 주마! 페드라 국왕!' ------------------- NEXT 제8화`무투회의 여전사` part 3 조슈아가 투기장으로 올라가자 디베리아의 용병 베론도 천천히 따라 일어났다. 그의 등뒤로 본선 진출자들의 음침한 목소리들이 들려 왔다. "이봐! 저 계집이 결승에라도 진출하면 우리 모두의 망신이야!" "크크... 그래 얏 보지 말고 확실히 처리하라고!" 전사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그는 다분히 긴장한 듯 굳은 표정으로 투기장을 향했다.조슈아는 먼저 자리를 잡고 천천히 올라오는 디베리아 출신의 전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뜻 보기에 상당히 정통적인 검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소가죽으로 상체와 팔목을 싸고 있는 것 외에는 소매가 긴 푸른색의 윗도리가 팔락거리고 있을 뿐 보호구 없이 긴 장검만을 들고 있었다. '저자는 정말 정상적인 검사일까?' 예선부터 제대로 된 검객을 만나지 못한 조슈아로서는 조금은 의외의 상대였다. "시작!" 심판관의 신호가 떨어졌다. 그러나 두 전사는 서로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뭐냐! 설마 먼저 들어가라는 거냐?' 조슈아는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들었을 텐데 수비로 버텨 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훗! 수비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 시험해 볼까?' 조슈아는 은빛의 검을 머리 위로 들고 중간에 검 집이 풀리지 않도록 고정쇠를 점검하였다. 파앗―. "허엇..." 그녀가 열 걸음 밖에서 순식간에 일직선으로 쏘아가자 디베리아의 전사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뒤로 물러나 그녀의 검을 맞받아서 위로 빗겨 내었다. 쓰릉―. 검 집에 흠집이 나며 그녀의 첫 공격이 무마되자 조슈아는 다시 재빨리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이것 봐라! 충돌 시에 확실히 손바닥을 죄고 있다.' 재미있다는 표정의 조슈아와는 달리, 전사는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의 실력을 탐색해 보겠다는 것인지 여전히 다음 공격을 대비하는 자세였다. '역시 검집 채로 휘둘러서는 이 정도되는 자에게조차 나의 검술이 읽히는 군!' 조슈아는 상대가 예선전에서 보았던 자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고정 쇠를 풀어 검집을 던져 버렸다. 그녀가 궁정을 나온 이후 처음으로 검을 뽑는 순간이었다. '검을 뽑은 이상 나도 상대를 죽이지 않고 끝낼 수 있다고 완전히 장담할 수 없다.' 그녀가 검을 뽑아 어깨위로 비스듬히 들어올리자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예기가 흘러 나왔다. 실검이 주는 긴장감이 그녀를 장난치는 기분에서 벗어나 전투국가 아카바의 왕실 비전 검술 샤레타의 정통계승자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진검 승부인 것이다. 그녀의 달라진 기운에 디베리아의 전사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음... 저 기세로 들어오면 막아내지 못할 것 같다!' 그는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선재공격을 감행했다. "이얍!" 그의 북방 특유의 직도(直刀)가 공기저항을 최소화하며 일직선으로 그녀의 목줄기를 향해 뻗어 왔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목줄기를 향해 날아오는 그의 검을 그대로 맞는 듯 하던 그녀는 어깨 위에 수직으로 세운 검날을 목옆으로 이동시키더니 그의 검을 그대로 받아 아슬아슬 하게 목뒤로 흘려 넘기며 그의 뒤로 돌아갔다. "어엇?" 순식간에 등뒤를 빼앗긴 그는 돌아보면 당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대로 검을 휘두르며 몸을 회전 시켰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그녀가 없었다. "이...이런... 바보 같은...." 순간의 등뒤에서부터 그의 목덜미에 서늘한 검의 감촉이 느껴지며 의외로 부드러운 소녀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여기서 처음 보는 제대로 된 검사예요. 잘 싸웠어요! 그러나 실력의 차이를 아시겠죠?" 그녀는 뛰어난 검사로서의 그를 존중하고 있었다. 디베리아의 전사는 유령을 만난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곳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심판관을 향해 소리쳤다. "항복입니다!" 우와―. 원형 경기장을 가득 매운 관중들은 아까의 함성 보다 더욱 큰 소리로 열광하고 있었다.피를 흘리지 않는 페드라의 왕국 무투회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로서는 그녀의 싸움은 오히려 신선한 감마저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고 왕실 특별석을 노려보며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후훗... 저 아가씨는 나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올해로 52세를 맞는 페드라의 국왕 그리핀은 멀리서도 조슈아의 적의가 느껴지는지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그러시지요. 아버님?" 국왕의 왼편에 앉아 있던 16-7세 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녀가 조슈아에게 박수를 보내다 부왕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후후! 조제야! 저 아가씨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구나! 아까부터 나만 노려보고 있어!" "아버님도 참! 그럴리가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지자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주는 조슈아에 지지 않을 정도의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보오스! 기사장의 눈으로 보기에 저 아가씨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고 보나!" 국왕은 옥좌 뒤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황금 빛 갑옷에 빌로오드 망토를 걸친 긴 흑발의 사내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선 채로 가볍게 시립하며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소녀는 당장 기사단에 들어온다 해도 최고위를 차지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호오! 그 정도인가?" 국왕과 공주는 의외라는 듯 놀라운 표정을 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사내가 결코 허언을 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저런 식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기술은 저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저 소녀의 검술이 상당히 유서 깊은 정통 검술이라는 것은 알 수 있사옵니다." 그의 말에 국왕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다시 눈을 돌려 등을 보이고 자리에 앉은 조슈아의 반짝이는 금발머리를 바라보았다. "후후.. 글쎄 확실치는 않지만 예전에 나는 저 비슷한 검술을 아카바에서 본적이 있지..." 3 16인의 전사들 중 첫 시합에서만 2명이 죽어 나갔다. 8명이 남은 8강전에서도 베레야 출신의 뚱보 전사는 또 한 명의 상대를 산 체로 부서트려 죽이고 환성을 받으며 내려 왔고, 조슈아는 첫 경기이후 검을 뽑지 않고 모두 기절시키며 간단히 결선까지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당연한 전개이지만 대망의 결승전은 조슈아와 뚱보용병 쥬다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피로 더러워진 투기장이 치워지고 잠시 후 두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어 졌다. "왕국 무투회의 결승전이 벌어집니다. 아카바 출신의 조슈아!" 우와……. 엄청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녀에게 자신들의 한을 풀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창녀들과 그녀의 우승에 돈을 건 도박사들의 응원은 거의 광적이었다. "베레야 출신의 쥬다!" 와∼∼. "쥬다! 죽여라!" "여기는 계집이 노는 데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줘라!"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그녀가 결승에 진출한 것이 못마땅한 많은 사내들은 두 눈에 불을 키며 뚱보를 응원하였다. 쥬다는 핏발이 선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며 피로 흠뻑 젖은 가죽 채찍을 혀로 핥고 있었다. 반면 그녀는 그의 시선이 불쾌한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정면만을 주시 한 채 투기장으로 올라갔다. "결승전도 규칙은 같습니다. 어느 한쪽이 전투 불능이 되거나 항복하거나 투기장 밖으로 밀려나면 끝나게 됩니다. 그전에는 결코 경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심판관이 투기장을 내려가 손을 들자 갑자기 조슈아가 소리 쳤다. "뚱보! 나와 내기를 하자!" 장내가 갑작스러운 그녀의 제안에 조용해지며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쏠렸다. "크흐... 뭐냐 잘빠진 계집아!" 그의 교양 없는 말투에 약간 입술을 찡그리며 조슈아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너를 죽이지도 기절시키지도 안고 다만 항복을 받아 낼 것이다." 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 "어이 그게 무슨 말이야?"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검을 들이 덴다고 항복할 놈이 어디 있어?"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 여자인 건가?" 그러나 그녀의 말에 누구 보다 놀란 것은 뚱보 전사 쥬다였다. 그는 잠시 입을 벌리고 생각에 잠긴듯 하다가 소리쳤다. "그래서 내기는 뭐냐?" "내가 너를 항복시키지 못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 우와∼∼. 장내의 사내들의 눈이 뒤집히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쉬운 조건이 어디 있는가? 죽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에서 항복을 받아 내겠다니! 거기에 상대는 천하에 둘도 없을 미소녀가 아닌가? 모두들 뚱보 전사 쥬다가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할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쥬다는 입가 군침을 흘리며 그녀의 몸매를 훑어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흐흐흐...그러면 너의 조건은?" 조슈아는 그의 징그러운 시선에 치욕으로 가볍게 몸을 떨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가 만약 항복하면 여기 다테의 신전에 들어가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며 다시는 나오지 말아라!" 하하하!--- 그녀의 조건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어이 아가씨 그렇게 그 놈한테 안기고 싶었던 거야?" "하하! 쥬다! 이뿐 마누라를 얻을 좋은 기회가 아닌가?" 관중들의 웃음 섞인 응원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럴려고 작정한 쥬다였다. 그는 괴소를 흘리며 조슈아의 몸매를 위아래로 바라보더니 큰소리로 소리쳤다. "크크크. 그래 맹세하마 내 입에서 항복이 나오면 신전에 들어가마! 그러나 네 약속도 잊지 마라 계집!" 와아---- 관중들은 이 뜻밖의 전개에 더욱더 흥분하여 소리 쳤고, 상황을 주시하던 심판관이 장내가 수습되자 손을 내리며 소리쳤다. "시작!" 슈아악--- 신호보다 좀도 빨리 쥬다의 채찍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갔다. "크크... 계집 내 마누라가 될 귀하신 몸인데 다치게 해서는 안되겠지!" 그는 그녀를 감아 투기장 밖으로 던져낼 생각이었다. 순간 조슈아에게서 불가사이한 속도로 무언가 쏘아져 오는 것을 느낀 쥬다는 기겁을 하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휘잉---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비끼어 가는 은빛 검집이 보였다. '우웃... 발도하는 자세로 검집을? 계집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방금 날아간 검집의 속도로 볼 때 머리를 맞았으면 즉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순간 주의가 흐트러진 그의 시선에서 조슈아가 사라졌다. 사악-- 그는 왼쪽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이 번지며 등뒤로 돌아가는 가벼운 발소리를 들었다. "이..이런!" 슈아악-- 뒤를 돌아보지 않고 뱀이 또아리를 틀 듯 몸 주위에 채찍의 결계를 만들던 쥬다의 왼쪽 종아리에 또다시 사늘한 검날의 촉감이 쓸고 지나가며 뜨거운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엇?" 그는 무엇인가 잘 못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또 다시 몸을 돌리는 그의 등뒤에서 가벼운 파공성이 들리더니 그의 오른 쪽 허벅지에 검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커억!!" 드디어 그의 입에서 비명이 세어 나왔다. 그것은 고통 때문이라기보다 처음으로 무방비의 상태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심정에서 느끼는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근 10여 분을 미친 듯이 채찍을 휘둘렀지만 단 한번도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푸주간의 걸어놓은 돼지처럼 그저 무방비로 무수한 칼질을 당하고 있었다. 다시 또 10여분이 흐르고 관중석은 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잠잠해진 가운데 이제 뚱보 용병 쥬다는 피범벅이 된 채 감히 채찍을 휘두르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눈동자로 저녁 햇빛을 받아 자신의 등뒤에서 뻗어 나오는 소녀의 그림자를 바라 보고있었다.그가 피가 날 듯 이빨을 악물며 채찍을 들어올리자 그의 허리에 또다시 가차없는 일 검이 그어 졌다. 거미줄 같은 칼자국으로 가득한 몸에 또다시 검이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드디어 인내의 한계를 넘고 말았다. "히...히익.." 그는 마침내 채찍을 집어던지고 바닥에 쓰러져 감히 뒤를 쳐다보지도 못하며 벌벌 떨 고 있었다.핏물로 빤 듯한 그의 바지춤에서 누런 오줌이 세어 나왔다. 그러자 그의 등뒤에서 차가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항복은?" 그녀의 검 끝이 엎어져있는 뚱보의 등뒤에 닫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소리 쳤다. "끄아악... 항복입니다. 항복이에요! 제발 저를 신전에 보내 주세요! 으아악..." 조용한 장내에 이제 다시는 신전 밖으로 나오지 못할 불우한 사내의 비명이 메아리 치는 가운데, 한동안 얼빠진 듯 바라보던 심판관의 손이 들려 졌다. "조슈아 승!" "까악∼ 조슈아∼" "언니 사랑해요!" "만세∼" 거의 절규에 가까운 관중의 함성 속에 조슈아는 처음으로 검에 피를 묻힌 감상에 젖어 있었다. '지나쳤던 것일까?' 그녀의 검에 검붉게 말라붙은 핏물은 여간해선 그 냄새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바닥에서 공포에 질려 발발기고 있던 뚱보는 몇 명의 건장한 사내들에 의해 실려 갔고, 심판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승자 조슈아는 단상으로..." 그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조슈아는 천천히 걸어 검집을 찾아 들고는 검을 크게 한 번 휘둘러 대충 핏물을 씻어 내고 검집에 곶아 허리춤의 카라비너 (검집과 벨트를 연결하는 장치) 에 연결하고는 역시 천천히 단상으로 향했다. 이제는 텅빈 대기석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자 옥좌의 앞에 조그마한 단상과 기사단으로 보이는 훤출한 사내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서있는 뒤에 국왕 그리핀과 공주로 보이는 아리따운 소녀가 눈을 빛내며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옆의 사관으로 보이는 소년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조슈아는 검을 풀어 소년에게 넘겨주고 단상에 올라 썼다. 그제야 국왕 그리핀이 천천히 만면에 미소를 띄며 걸어왔다. 순간 조슈아는 처음으로 보는 국왕의 얼굴이 어딘가 낮이 익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 얼굴은 어디선가 본얼굴인데?' 그녀의 의아한 듯한 얼굴을 보며 국왕이 가볍게 손을 들자 관중의 환성이 멎었다. "훌륭한 경기였다. 소녀 검사여!" 그는 말을 하며 가볍게 옆의 사관에게 코끝으로 신호하는 듯 했다. 그러자 사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견하기에도 솜씨 좋은 명공의 작품임에 틀림없는 장검과 두둑한 은화 꾸러미를 들고 왔다. "자! 그대의 것이다. 받으라!" 조슈아는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그러나 공손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는 조슈아의 그런 눈빛을 보면서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정식으로 그대를 페드라의...." "기다려 주십시오!" 국왕의 말을 끊으며 그녀가 소리 치자 기사단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이런 무엄한..." 그들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국왕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하고 마치 손녀딸을 대하듯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무슨 할말이 있는가? 아가씨?" 조슈아는 그의 친근한 태도에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저는 페드라의 기사직을 거부합니다." 순간 단상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리핀 국왕의 표정도 조금은 굳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유는 무언가?" 조슈아는 고개를 치켜들고 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있게 대답하였다. "저는 보검과 상금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저에겐 더 큰 꿈이 있습니다." "우욱..." 기사들의 입에서 참다못해 신음이 세어 나왔다. 듣기에 따라서는 왕국 전체에 엄청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대답인 것이다. 단상 위는 기사단과 대신들이 국왕의 눈치를 살피며 언제나 국왕의 노여움이 터질까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국왕은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허리를 펴고는 조슈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여전히 친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도 그럴 수 있겠군!" 세상어디에 이런 관대한 국왕이 있는가? 국왕의 의외의 태도에 단상의 인물들뿐 아니라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기사들은 마치 가만히 서서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소녀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국왕을 바라보았고, 조제 공주도 의외라는 시선으로 부왕과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국왕은 조슈아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더니 손을 들어 술렁거림을 진정시키고, 선언하듯 소리쳤다. "우승자의 근위기사직 포기에 의해 올해는 근위조의 충원이 없다!" 관중은 또다시 떠들썩해 졌다. "어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미쳤나? 전 같았으면 저 아가씨는 죽었을 거야!" "국왕이 미쳤는가?" 국왕은 소란한 청중을 다시 손을 들어 잠재우고 재차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왕국 무투회의 우승자는 아카바 출신의 조슈아이다! 그렇게 기록하라!" 우와---- 긴장감이 감돌던 경기장은 다시 함성에 휩싸이며 축제분위기로 젖어 들었다. "소녀여! 손 정도는 들어 보여 줘야하지 않겠나!" 당황하는 그녀에게 국왕이 속삭이듯 말하였다. "예? 아! 예...." 얼떨결에 대답한 그녀는 곧 몸을 돌려 관중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 결을 바라보며 국왕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그 뒤를 기사장 보오드가 수행했다. 국왕은 특별석 뒤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젊은 기사장을 돌아보며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 어찌 보았나? 정말 예쁘고 씩씩한 아이가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흑발의 기사장은 덤덤히 대답하고 있었지만 국왕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 짓고 있었다. "집나간 아들놈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나 걱정했더니 저런 둘도 없을 며느리를 데려 오지 않았나? 후후 그놈..." 국왕은 하얀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멈춰서 기사장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신분만은 제대로 알아 둬야겠지? 분명히 저 기품과 몸가짐은 귀족의 그것인데 말이야! 아카바의 대귀족들은 거의 꾀고 있는데 저 아이만은 도무지 누군지 모르겠군!" 그러자 기사장의 입에서 이미 준비해둔 답인 듯 바로 대답이 나왔다. "저도 이미 손을 써서 알아보고는 있지만 실마리가 잡히지 않고 있사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말하기 전에 누구라고 그녀의 신분을 알아 낼 수 있겠는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던 국왕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후후... 그러나 단서라면 있네! 저 아이는 예전의 아카바에 소피아 왕비와 대단히 닮았더군! 그쪽 집안을 찾아보면 되겠구먼!"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덤덤하던 기사장의 얼굴에도 가벼운 이채가 띄어 졌다. "그 아론의 칭호를 가지고 있던 기사출신의 왕비말씀이십니까? 폐하?" "그렇지... 아! 그러고 보니 자네도 잘 알겠구먼! 18년 전의 아카바 내전 때 여기 까지 피신 온 에릭 공을 쫓아와서 100여명을 혼자 베고는 애원하는 그를 끌고 갔던 소녀 기사가 있었지 않나?" 기사장은 다시 덤덤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저는 그때 13세였습니다. 폐하!" "하하! 그렇군... 하지만 말이야!" 국왕은 비밀이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 소녀를 보고 완전히 반했었네! 그리고 마침 나도 홀로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어떻게든 아카바에 수소문해 엄청난 양의 금화를 내놓아서라도 그녀를 얻으려 했었다네!" "........" "그런데! 그 망할 바디메오 녀석이 역시 여자 보는 눈은 있어서 그녀를 무리를 해서까지 왕비에 앉혀 결국 가로채 가더구만... 하하하" 국왕의 농을 들으면서 기실 기사장 보오드는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다테의 광장에서 벌어졌던 100대 1의 전무후무한 대 결투! 부하들과 도망쳐온 반란군 맹주 에릭 공을 단신으로 쫓아와 부하들을 모두 가볍게 베어 넘기고, 건장한 그를 가볍게 제압해 그 가녀린 손으로 오라에 묶어 말 뒤에 매달던 17∼8세 정도 되어 보이던 금발의 소녀... 어린 마음에 그녀를 보고 기사의 꿈을 키우지 않았던가? '그래! 정말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얼굴과 매우 닮았군! 그 풍기는 기풍까지도... 그렇다면 역시 소피아 왕비의 직계라는 이야기인가?' 국왕은 여전히 기분 좋은 듯 실실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고, 그 뒤를 따르는 기사장은 어울리지 않게 옛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4 "언니.... !" 에레크트라가 조슈아를 둘러싼 군중들을 헤치며 뛰어와 안기고 있었다. 그 뒤로 바알이 질렸다는 얼굴로 서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왼쪽 눈을 찡끗 했다. "언니는 정말 영웅이에요! 나는 언니가 우승할 줄 알았다구요!" 그녀는 조슈아의 가슴을 눈물로 적시며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위험한 소녀가 될지도...)군중들은 그들을 둘러싸며 따라 왔고, 그 행렬은 레노아의 술집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그날은 들어오려는 군중을 밀어내고 일찍 걸어 잠근 레노아의 술집에서 조슈아와 바알, 에레크트라와 오랜만에 자러 가지 않고 술자리에 참가한 레노아 모녀만이 거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중 3명이 미성년자이지만 여기선 문제될 것이 없는 듯.) "하하! 그러더니 말이야! 이러는 거야! '내가 너를 항복시키지 못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 "호호호" "그놈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군침을 질질 흘리는 꼴이... 하하!" 조슈아는 뚱보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생각나 조금은 기분이 나빠졌는지 새침하게 앉아 양손으로 맥주 잔을 들고 조용히 마시고 있었고, 바알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레노아 모녀에게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무투회의 관전담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의 하는 양을 한참 놔두고 있던 조슈아는 생각났다는 듯이 맥주 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이제 나의 지명도 정도면 어느 용병단에 지원한다 해도 최정예로서 대접받을 수 있겠지? 바알?" 그녀의 말에 바알은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조슈아가 문 앞에만 서있어도 열 배를 주고 라도 고용하려 할걸? 하하" "그렇다면 에레크트라를 데려 간다고 해서 뭐라 그러지는 않겠군..." 그녀의 말에 맥주 반잔도 마시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던 에레크트라가 두 눈을 깜박이다가 곧 그 커다란 두 눈에 가득 눈물을 머금고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언∼니..." 또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소녀를 보며 조슈아는 팔짱을 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후... 에레크트라 너는 이 언니랑 같이 다니려면 그 헤픈 눈물 좀 어떻게 해야겠다!" 그녀의 말에 에레크트라는 얼른 눈물을 훔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하하하!" "호호호!" 뭐... 어쨌든 지나치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좋은 밤 좋은 술자리였다. ----------- NEXT 제9화`시돈으로 가는길` part 1 "어? 이봐! 저 여자 어제 무투회 우승한 그 아가씨 아닌가?" "어? 맞아! 맞어! 근위기사직을 거부했다며?" "여기는 웬일이래?" 조슈아 일행이 레노아 모녀와 작별을 하고 용병시장으로 나온 것은 해가 막 떠오르는 새벽 무렵이었다. 대부분의 계약이 오전 내에 이루어지는 시장의 특성상 아침 일찍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테의 주위에는 수로가 없으므로 계약을 맺은 용병단은 산을 내려가 서쪽의 '론다' 강까지 이동, 거기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목적지를 향하게 되는 것이어서 결국 계약은 아침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더위가 한풀 꺾인 시원한 새벽이었지만 조슈아와 바알은 무언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 바알! 왜 굳이 그먼 시돈까지 따라 오려는 거야?" 그녀의 말에 바알은 노골적으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슈아 이거 너무 하는걸? 전에 이미 이야기했잖아! 나는 너로 정했다고!" 중간에 끼인 에레크트라가 그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동안 둘의 말싸움은 계속 되었다. "전에 당신이 이야기한 게 또 있잖아! 마물 따위와는 싸우고 싶지 않다면서?" "그렇다면 또 한가지 이야기도 했었지! 지금 시돈은 평균 수당의 5배를 준다고! 그리고 나는 더 많이 받아낼 자신이 있어!" 둘이 이마를 맞대고 핏대를 올리는 것을 바라보던 에레크트라가 조심스럽게 끼어 들었다. "저! 언니는 바알과 결혼할게 아니었나요?" 파직--- 조슈아의 신경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면 잽싸게 고개를 돌린 바알은 지금 이 순간 에레크트라가 이 세상 누구보다 귀엽다는 표정이었다. "에...에레크트라! 그런 이야기를 누...가 하던?"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에레크트라는 큰 눈을 깜박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에레나가 그러던 걸요? 언니랑 바알은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요!" 조슈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에...에레나는 누구한테 들었데?"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바알도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우리의 에레크트라는 마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양 다부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레나가 바알이 언니를 자기 색시라고 했다고, 제가 언니 동생이 되었으니 나한테 는 바알이 형부가 된다고 했어요! " 퍼억--- "으갹∼" 바알의 입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양손으로 감싼 얼굴에서 쌍 코피가 터졌는지 손가락 사이로 코피가 세어 나오고 있었다. 지나가던 용병들이 그 광경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어어? 저자는 바알스 본이 아닌가?" "저 엄청난 용사가 얻어맞았어! 그...그것도 정통으로..." "으으... 무서운 여자!" "아이고..." 바알이 코를 쥐고 엄살을 떠는 동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된 불쌍한 에레크트라는 바알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코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세요? 언니! 세상에 남편을 이렇게 때리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크으.. 에레크트라!" 그는 아픈 코를 감싸 쥐고 있으면서도 눈물까지 흘리며 그녀의 고마운 착각이 그리도 기쁜지 연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조슈아는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이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흥∼" 그녀는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돌려 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못 마땅하게 바라보던 에레크트라가 바알의 얼굴을 닦으며 위로의 말을 던졌다. "바알 같은 좋은 남편감이 어디 있다고 언니는 이렇게 함부로 하는 걸까? 울 엄마는 나를 베고서 아빠를 쫓아 다녔는데도 버려졌다는데..." 별안간 바알은 그녀를 꼭 안고 들어 올렸다. "으으∼ 요 귀여운 것!" "어...어머 왜이래요? 바알!" 바알로서는 아픈 대가가 있었지만 흐지부지한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준 에레크트라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1 이 바닥에서 용병 중계인으로 40년을 살아온 페긴 노인은 지금 손바닥을 비비며 굴러 들어온 복에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헤헤... 그래서 아가씨가 시돈으로 가는 용병단에 들어가는데 수당은 그대로 월 은 화 10냥을 받는 대신 거기 그 조그만 아가씨를 데려가는 게 조건이란 말이구먼?" 조슈아는 냉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헤헤... 아가씨는 지금 다테에서도 최고급 상품이라고... 잘만하면 50배 이상은 받 을 수 있을 텐데.. 왜 헤헤.." 그로서는 한번 해보는 말일 뿐 속으로는 쾌재를 올리고 있었다. 비싼 물건을 싸게 중계하면 그에 비례해 용병단에서 훨씬 많은 중계료가 들어오는 것 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슈아도 물론 그의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나는 돈이라면 주체못하도록 가지고 있어요! 다만 시돈의 전투에 참가하는 용병단에 최우선으로 가야 하겠어요. 내 쪽에서도 섭섭지 않게 중계료를 지불하죠! 순서를 당겨서라도 끼워 줘요!" 말과 함께 은화 50냥을 꺼내놓는 그녀였다. "어이쿠 뭐 이런걸 다! 그러문 입쇼!!!" 페긴 노인의 손이 광속으로 뻗어와 은화꾸러미를 채갔다. "헤헤.. 아가씨의 상품성을 최대한 부풀려 줄게! 아마 처음부터 100인 대장이 될 걸? 시돈까지 독방에서 편히 지낼 수 있을 거야! 나를 믿으라고 헤헤헤...!" 노인이 등을 돌리고 나가려 하자 바알이 그를 불러 세웠다! "어이 페긴 노인 나도 잊으면 안돼!" "헤헤.. 바알 자네라면 얘기 꺼내기도 전에 채가려고 할걸 후후 기다리라고..." 거의 한달 매상을 하루에 올리게 된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심장이라도 꺼내 줄 듯 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곧 바로 사라 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조슈아는 바알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바알! 저..." "더 이상 이야기해도 소용없어! 조슈아! 나는 좋아서 용병이 된 자야! 좋아하는 여자가 가는데다 수당도 높은 일을 왜 마다 하겠어! 그러니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두자고.."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며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하였다. "에레크트라! 정말 엄마를 만나지 않고 떠나도 되겠니?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어!" 그녀의 말에 에레크트라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증오가 떠올랐다. "엄마를 이해 할 순 있어요! 하지만 저라면 죽어도 자기 딸을 창녀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엄마는 이제 내가 몸을 팔기 시작하면 좀더 상황이 나아질 거라며 기뻐했어 요! 나는 그것만은 죽을 때까지 용서 할 수 없어요!" 너무 어려서부터 아픔 속에 자라서일까? 그녀에게서는 이제 12세의 생일을 몇 일 남 긴 소녀라고 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노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내 생각 보다 이 아이의 상처는 너무 큰 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쉽게 치유시키지 못할지도...' 조슈아는 소녀를 다독거리면서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옛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놔두면 모처럼의 새로운 인생도 즐길 수 없게 되는 법이다. 바알도 조슈아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있었다. 2 "오오! 아가씨인가? 아가씨가 그 무투회 우승자 조슈아인가?" 과연 돈이 돈인지라 순식간에 강한 북방 억양의 말투를 가진 기사 복장의 사내가 안내되어 왔다. 매우 호인으로 보이는 그는 조슈아를 보고는 매우 놀랍다는 표정이 되었다. "무투회 이야기는 부하 놈들에게 들었네! 놈들이 엄청 충격 받은 것 같더구만! 하하하!" 보통 용병을 스카웃 하러 오는 기사들은 고자세에 재수 없고 건방진 젊은 하급 기사이게 마련인데 그는 대단히 달랐다. 호인으로 보이는 인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은 왕국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상위의 10인에게나 허용되는 금장의 갑옷인 것이다. 기사의 갑옷은 국가에서 지급해주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 만들어 입는 것이다. 그래서 근위조의 의전용 갑옷을 제외하면 모든 기사가 서로 다른 갑옷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문의 재력에 따라 갑옷의 가격에 차이가 나게 되어 하급 기사가 오히려 고급의 갑옷과 검을 가질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절대적인 규정은 있었으니 바로 허용된 소수의 엘리트 외에는 황금빛의 금장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용병의 스카웃을 위해 보내진 기사가 그런 신분이라는 것은 경험이 많은 바알로서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시돈 왕국에 정말 큰일이 있긴 있는 거군!' 바알은 그의 등장만으로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상위기사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이야기가 빠르다는 데에만 계산이 미친 조슈아는 매우 기분이 좋은 듯 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하녀들 외에 또래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기사들 그 중에서도 상위기사들과 어울려 기사놀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었기 때문에 이런 류의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또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벌써 소년 같은 미소를 띄고 노 기사와 악수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는 아시는 것과 같이 아카바 출신의 조슈아에요!" 그러자 노 기사는 반가운 듯 허허 웃었다. "이것 참 내 아내가 아카바의 메디나 출신이네! 자네는 어딘가?" 그녀가 아카바 출신이라는 것 외에 정확한 고향을 모르는 바알도 귀를 세웠다. "저는 성도 게드마 출신이에요!" 노 기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좋은 곳에서 자랐구만...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소녀가 왜 고향을 떠나왔나? 아가씨정도의 미모면 어느 귀족 집의 아들들이라도 줄을 서서 청혼했을 텐데..." 이번에는 에레크트라도 매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저 할아버지 가려운 데만 긁어 주는 군! 내가 물어 볼 땐 대답 안 하더니만!' 바알은 노 기사가 고마워 지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이런 류의 사람과는 빼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기사견습생이에요! 아카바의 근위기사가 되고 싶어서 무사 수행을 나온 거예요! " 노기사의 입이 찢어 질 듯 벌어 졌다. "하하하! 아가씨 정말 마음에 드는 구만! 내 딸년들은 하나같이 약골인 어미를 닮아서 그저 일찍 일찍 시집 보내서 적적하다네... 그러게 좀더 노력해서 아들을 낳아 두는 건데 하하하!" 조슈아는 이 노 기사가 정말로 마음에 들고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웃던 노 기사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아! 이런 실례였군! 나는 '이안'! '이안 프레드리'라고 하네. 시돈 왕국의 기사장을 맞고 있다네!" 조슈아 일행은 순간적으로 굳어 버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상위의 기사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기사장이라니... 조슈아는 황급히 목례를 했다. "실례했습니다. 기사장님! 몰라 뵈었군요!" 그녀의 태도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 기사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하! 그리 예를 갖출 필요는 없네!" 노 기사는 그녀를 가볍게 훑어보더니 놀리는 투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자네정도의 검사가 굳이 보통수준의 급료로 우리측에 참여하려는 게 바로 저 소녀 때문인가?"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화들짝 놀란 표정의 에레크트라가 바알의 뒤에 숨었다. 바알의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그녀를 보고 조슈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 아이는 에레크트라라고 합니다. 사정이 있어 제가 거두었죠. 이제 곧 12살이 되는 데 제가 한번 제자로 키워 볼까 합니다." 노 기사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에레크트라를 바라보다가 조슈아에게 살짝 다가와 옆 구리를 찌르며 귀엣말을 했다. "자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혹시 저 아이와는 그런 사이인가?" 조슈아는 얼어 버렸다. "네에?" "흐음... 내 그런 일에 익숙지는 안치만 그런걸 이해 못할 정도로 꽉막힌 노인네는 아니네! 안심하게나..." 그는 제법 얼굴까지 붉히며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으으..." 조슈아의 패닉상태가 된 두뇌는 순간 주인을 배반하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노 기사는 고개를 돌려 바알을 바라보았다. "자네이야기를 듣고 호박이 덩굴째 굴러 왔다고 생각했지..." "고맙습니다. 기사장 나리 !" 상당히 삐딱하게 나가는 바알이었다.그러니 역시 관록의 노 기사는 개의치 않고 있었다. "하하 벌써 시돈에는 1000명 이상의 용병들이 보내졌다네. 오늘 떠날 백인 대장들과 나머지 200명을 합하면 꽤 용병단다워 질 거네!" 그의 말에 바알이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떠들 썩 했던 것에 비해서는 별로 많이 보내지 않았군요?" 노기사는 어깨를 살짝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수당이 수당인데다 상대가 그런 놈들이니 되도록 이면 최상급의 용병들을 고르다보 니 그렇게 되었네..." '흠.. 그래서 한나라의 기사장이 직접 용병을 고르러 온 것이었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노기사장 이안은 만면에 웃음을 띄며 바알의 어깨를 쳤다. "하하! 그래도 자네들 같은 최상급의 용병들은 아직 구하지 못했었네! 어떤가 둘 다 100인 대장을 시켜 주겠네!" 파격적인 제안임에 틀림없는 노기사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바알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저는 조슈아와 같이 있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 주책 맞은 노인네를 더욱더 오해의 나락에 빠뜨릴 발언을 하였지만 그는 그런 것 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건 정말 큰일이 아닌가? 기사장이 추리고 추려 모아놓은 용병단이라면 나름대로 프 라이드가 높은 놈들일텐데 놈들이 조슈아를 좋게 볼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에다 수도까지 뱃길을 이용해 가지 않고 남부국경지역에 모여 진격해 간다는 것은 결국 점령지를 적진 돌파하며 밀고 가겠다는 것인데 잘못하면 단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다.' 바알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자신과 조슈아를 바라보는 기사장의 얼굴너머로 아직도 무언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서있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먼저 조슈아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일단 그녀의 뜻대로 해주고 그녀의 마음을 얻게 되면 그때 설득하자!'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기사장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추슬렀다. "에헴.. 자 그럼 가세나! 일단 론다 강 항구까지는 마차로 이동하네. 항구에서 범선을 타고 아빌라 국과 시돈의 국경 지대인 가사라에 정박하네, 거기서부터는 협곡을 따라 시돈에 들어가 정비를 하고 진군하게 된다네! 나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배를 타고 돌아가 정규군의 지휘를 맡게 되네! 마지막에 자네들 같은 훌륭한 용병들을 얻어 정말 기쁘네!" 기사장은 구석에서 손을 비비고 있던 페긴 노인에게 은화 꾸러미를 넘기고는 이제 막 패닉 상태에서 깨어나는 조슈아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를 죽음의 문턱까지 날려 버릴 한마디를 던졌다. "호오! 자네 예상보다 더 호탕한 소녀이군! 과연 여자의 몸으로 아카바의 근위기사를 노릴만해! 저 귀여운 소녀 뿐 아니라 건장한 청년까지... 그래도 조심하게나 몸 버리는 수가 있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통쾌하게 웃으며 중계소를 나가고 있었다. 그 뒤에 유체 이탈을 한 조슈아를 안고 뜻밖의 행운에 기뻐하는 바알과 거의 죽은 것으로 보이는 조슈아를 보고 절망적인 울음을 터트린 에레크트라의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겠다! ------------ NEXT 제 9 화 `시돈으로 가는 길`! part 2 넓은 평원이 화강암의 숲으로 덮여 쓸모 없는 땅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는 페드라의 대평원에는 100여 년의 역사 끝에 완공되었다는 동쪽의 론다 강까지 연결되는 길고 긴 가도가 가로지르고 있다. 이 가도가 없었다면 페드라의 유일한 도시 다테는 지금 정도의 발전을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여름의 태양 빛이 내리 쬐고 있지만 여느 때와 달리 조금은 시원한 늦은 오후, 관도를 달리는 수십 대의 마차들이 있었다. 마차들 앞에는 기사의 복장을 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질서정연하게 말을 몰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시돈 왕국의 상징인 포플라 잎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 위에 조그마한 중립국 인식기(모든 국가의 관도는 기본적으로 누구라도 지날 수 있지만 타국의 기사단이나 군대인 경우는 동맹국이 아닌 경우에는 노랑 색의 중립국 인식기를 달지 않으면 침략으로 간주된다)를 단 대형기를 들고 있는 기수가 있다. 아카바의 영토인 론다 강 유역에 다달은 그들은 인식기를 바짝 들고 적의가 없음을 알렸다. 선두의 마차에는 고급 용병으로 분류된 베테랑의 용병들이 몸을 싣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조슈아 일행이 끼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다테를 나와 보는 에레크트라는 마차의 걷어올린 천막 사이로 별로 볼 것도 없는 황량한 풍경을 신기한 듯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슈아가 아니었다면 다른 다테의 여자들처럼 죽을 때까지 그 도시를 빠져 나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꽤 큰 크기의 마차에는 조슈아 일행 외에도 9명이 더 있었는데 모두 얼굴에 '나는 비싼 용병이다'라고 써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매서워 보이는 거한들 뿐이었다. 그들은 이 용병 단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갈색머리의 어린 소녀와 눈이 돌아갈 만큼 미녀이지만 그 악명(?)만으로도 베테랑 용병들을 한 수 접게 만드는 금발의 미녀를 못 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로서도 바알은 잘 아는 동료였지만, 이 미녀는 그렇지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는 용병들의 잔치인 페드라의 왕국 무투회를 조롱하고, 동료 들을 차례로 꺾어 우승까지 거머쥔 데다 그 영광까지 마다한 어떻게 보며 매우 기분 나쁜 여자인 것이다. 그들에게 이 미소녀의 행적은 어딘가에 기사의 딸이 타고난 신분과 재능을 감당 못해 외유를 나온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소녀의 나이에 훌륭한 스승도 없이 그 정도의 실력을 쌓을 수는 없다는 것을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슈아는 사내들의 시선에는 아랑 곳 않고 기사장에게서 얻은 시돈의 지도를 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왼편에는 바알이 팔짱을 끼고 앉아 역시 '수작 부리기만 해봐라 용서 없다!'라고 써있는 듯한 얼굴로 사내들을 흘겨보고 있었다. 하루종일 마차를 타보기는 처음인 에레크트라는 힘이 들기 시작하는지 조슈아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언니! 얼마나 더 가야 강이 나와요?" 그녀의 질문에 조슈아가 잘 모르겠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자 바알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애꾸눈의 용병이 입술을 찡그리며 이죽거렸다. "어이 무투회 우승자! 저 애는 니 애인이냐? 전쟁터에 계집을 데려가다니 팔자가 폈구먼!" 그의 말에 조슈아와 에레크트라의 얼굴 색이 변하고 있었다. 쾅―. 바알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바닥에 검집을 내리 쳤다. "자카엘!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그러나 바알의 분노한 얼굴을 보면서 자카엘이라 불린 애꾸눈의 용병은 먹물을 뿌린 듯한 검은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며 더욱더 이죽거렸다. "이번 용병단은 죽여주는군! 금발의 미녀 100인 대장과 그 애인 그리고 사랑에 빠진 얼간이 인가? 하하하!" 바알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어들려 하자 조슈아가 그의 어깨를 잡아 말렸다. 그녀가 만류하자 바알은 이마에 핏발을 세우면서도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고 있었고, 에레크트라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조슈아의 허리춤을 잡고 떨고 있었다. "나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제군들!" 그녀의 입에서 찬 서리가 떨어질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크흐흐.." "눈치는 있군!" "제군이라... 흐흐" 여기 저기서 그녀의 말을 받으며 음소가 들려 왔다. 그녀는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나직이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고 누구의 위에서는 자가 아니다!" "무슨 말을 하자는 거냐?" 자카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서열을 정하겠다! 제군! 누구라도 좋다. 내 위에 서려면 강에 도착해서 시간을 마련할 테니 나를 꺾어라! 너희 모두 한꺼번에 라도 나는 상관없다!" 조슈아의 말이 의외였던지 사내들은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돌아왔다. "이런 건방진 계집! 무투회 우승자라 어느 정도 대접을 해주고 있었더니만!" "우리를 다 상대한다고? 원한다면 죽여주마 계집!" 조슈아는 그들의 욕지거리에 코방귀도 끼지 않고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정말! 저런 마누라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엄청나게 헛물을 켜는 바알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4 "호오! 그래서 자네가 그들을 모두 상대하겠다는 건가?" 사람 좋은 노기사장 이안 프레드리는 감탄했다는 듯한 목소리로 되묻고 있었다. "예!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기사장님! 저의 입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입니다." 기사장의 노안에 보기 좋은 미소가 깃들었다. "허허! 자네의 실력이 소문대로 라면 가능하겠지! 구경할 테니 멋지게 해치우게!" "고마워요! 기사장님!" 도저히 용병단의 내분을 목숨걸고 막아야할 기사장의 세리프로는 들리지 않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구경거리가 생겨 신이 났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부하를 시켜 가죽 의자를 가져오게 하는 그였다. (이 용병단의 앞날은?) 멀리 론다 항이 보이는 가운데 강변에 원을 그리며 세운 마차 변에 용병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어이! 도대체 무슨 얘기야! 그 무투회 우승한 아가씨하고 100인 대장 전체가 싸운다는 거야?" "그렇다나봐! 아! 저기 온다!" 분기를 식히지 못했는지 씩씩거리는 얼굴로 9명의 100인 대장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는 조슈아와 소문의 사랑에 빠진 불쌍한 용병 바알, 그리고 미녀 백인 대장의 어린 연인으로 알려진 조그마한 소녀가 따라 왔다. 소문은 꼬일 때로 꼬여 좌중은 9인의 백인 대장들과 조슈아가 바알을 놓고 결투를 한다는 측과 어린 소녀가 미녀 100인 대장을 선택하여 9인의 정상적인 사내들이 그녀의 마수로부터 소녀를 구하기 위해 벌이는 결투라는 측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의도야 어떻든 용병들에겐 소문의 여 검객의 실력을 볼 수 있는 최고의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고, 기사들로서는 용병들을 규합할 확실한 리더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대결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원을 그리고 앉아있던 용병들이 길을 내주며 넓게 물러서 앉았다.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그들은 결투의 간격을 잘 알고 있는지 알맞은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적당히 원을 만들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바알과 에레크트라를 안심시키고 조슈아는 무투회에서 받은 명공 쿠루트의 보검을 처음으로 꺼내어 휘둘러보고 있었다. 남방 풍의 양날 검은 화려한 금장이 조슈아의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날렵해 보이는 검신과 적당히 휘어 공기저항이 적어 보이는 칼날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 그녀에게 맞춘 듯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알맞은 무게였다. 그녀가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을 보며 자카엘이 옆의 동료에게 중얼거렸다. "저 계집은 우릴 정말로 무시하고 있군! 손에 익지도 않은 신검을 들고 나와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것 아냐?" 그때 일단의 기사들이 가죽의자를 들고 오는 뒤로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기사장 이안이 따라왔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용병들을 돌아보다가 의자에 앉아 호탕하게 소리쳤다. "자자! 항구에 저녁때까지는 들어가야 된다고! 빨리 안 하나?" 그는 손바닥까지 비비며 제법 결투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리저리 보검을 휘두르던 조슈아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검집에 검을 꽂고 9인의 100인 대장을 바라보았다. "자! 서열을 가려 볼까 아저씨들?" 그녀의 말에 사내들의 얼굴이 터질 듯한 분노에 휩싸여 가는 것이 보였다. "오냐! 네가 자초한 것이니 원망은 마라!" "크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이 우리 아홉 명을 모두 상대하겠다고? 그래 죽여주마!" 바알은 식은땀을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검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조슈아가 아무리 훌륭한 검술을 가졌다 해도 저 녀석들을 모두 상대하고 무사할 수는 없다! 약속을 어기게 되더라도 그녀가 불리해지면 내가 나서서 해치워야 한다!' 갑자기 검을 잡은 바알의 손에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에레크트라가 심하게 떨며 바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알 오빠! 언니는 강하죠? 진짜로 강하죠?" 바알은 그녀의 말에 씨익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래! 조슈아는 저런 놈들은 군단이 몰려와도 해치울 수 있을 만큼 강하단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조슈아는 유유자적하게 걸어가 용병들로 만들어진 원의 중앙에 서서 검을 빼어 들고 오른 쪽 어깨와 일직선으로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자! 와라!" 그녀의 도발에 제일 먼저 자카엘이 거대한 양날 도끼를 휘두르며 뛰어 들었다. "막아 보시지 아가씨!!!" 휘잉―. 언뜻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던 그의 양날 도끼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묘한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얼굴을 쳐갔다. 그러나 조슈아는 입가에 가벼운 이채를 띄었을 뿐 간단히 검을 들어 얼굴로 쏘아오는 도끼 날의 아랫부분을 비스듬히 부딪혀 가며 도끼를 그녀의 머리위로 미끄러뜨렸다. "어엇?" 자신의 도끼의 무게에 몸이 쏠려 앞으로 미끄러져 가는 그의 시야에 갑자기 그녀의 오른쪽 팔꿈치가 나타났다. '이..이런!'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의 왼쪽 턱에 갑자기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더니 그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릎이 풀려 주저앉고 있었다. 쓰러져 가는 그의 눈에는 다시 검을 치켜들며 자세를 잡는 소녀의 오른 쪽 무릎에 묻어 있는 핏자국이 보였다. '저것에 맞은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그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따...딱 일 합이었다!" "저 여자 도대체 뭐 하는 여자야?!" 그들은 백인 대장 자카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전쟁터에서도 대장의 역할을 해내는 베테랑 중에 베테랑으로 그의 거대한 강철의 양날 도끼는 하루에도 수 십명의 머리를 부숴 버리는 공포의 상징인 것이다. 그는 아무도 전장에서 그의 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을 만큼 냉혹하고 강인한 전사였다. 그런 그가 도끼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어!'하는 사이에 쓰러지고 있었으니, 그들의 눈에는 그녀가 이미 마계에서 뛰쳐나온 마녀쯤으로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 그녀의 상황은 보기만큼 그리 좋지 않았다. '아이고...' 조슈아는 자카엘의 턱을 올려 찍은 오른 쪽 무릎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으... 이런 기본 공격술 조차 무리라니... 정말로 쓸모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몸이로군!' 자신의 몸이 얼마나 추녀들의 부러움을 사는지 모르는 걸까? 이 순간 그녀는 그 어느 때 보다 더 예전의 튼튼한 소년의 몸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재주 좋게 밖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만 아픔을 표현하는지, 8인의 100인 대장들은 감히 함부로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고 그녀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덕분에 조슈아는 어느 정도 통증을 가라 안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바보들 아까 바로 치고 왔으면 무릎의 통증 때문에 피하기 어려웠을 텐데!'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시 사레타의 수비 식을 취하였다. 대치가 어느 정도 계속 되고 있는 동안 100인 대장 중 유일한 아카바 출신의 용병 '가토스'는 그녀의 기수식과 자카엘을 상대할 때 보여 주었던 공격방식을 보고 가장 놀라워하고 있었다. '뭐...뭐야! 저건 '샤레타'가 아닌가?' 100인 대장들 중 가장 전통적인 검사의 모습을 하고있는 그는 놀랍게도 그녀의 검술을 알아보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공격을 미끄러뜨려 상대의 중심을 빼앗는 수비식은 샤레타 뿐이다. 그리고 저 어깨와 일찍 선으로 검을 들고 선 상식을 벗어난 기수식은……. 그러나 저건 왕실 비전인데 어째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 슬슬 뒤로 몸을 빼고 있었다. '그래 저 소녀는 왕족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싸움 어떻게든 말려야만 한다.' 물러날 때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했던가? 그는 싸움을 포기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대치중인 100인 대장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들이 정말 한꺼번에 달려들면 아무리 나라도 어렵다! 나는 다(多) 대 일(一)의 실전 경험이 없지 않은가?' 그녀는 어깨 위에 일직선을 그리고 있던 검을 서서히 내려 허리 옆으로 돌려 세웠다. '선재 공격이다!' 파앗―. 순식간에 그녀의 신영이 사라졌다. "어엇!" 베레야 출신의 대머리 용병 '파간' 앞에 별안간 소녀의 신영이 나타나자 그는 기겁을 하며 두꺼운 강철도로 수비자세를 취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그녀가 그의 사각에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이∼이런! 죽어랏!" 부웅―. 그의 도가 그녀의 몸을 부숴 버릴 듯 휘둘려 졌지만 그녀는 이미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파악―. 대머리 용병 파간의 도를 잡고 있는 오른 쪽 손목에 그녀의 탄력을 받은 왼쪽 무릎이 쳐 올려지고 그는 극통을 느끼며 도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대로 손을 짚으며 그의 어깨를 타넘는 그녀를 쫓던 그의 당황한 얼굴에 또다시 그녀의 오른 무릎이 박혔다. 퍼억―. "우왁!" 그는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찍혀 그대로 그 거대한 거구를 땅바닥에 뉘이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둘러싸!" "말이야 쉽지!" 7인이 남은 용병들은 그래도 100인 대장들답게 빠르게 대형을 만들며 그녀를 포위했다. '방추진이냐? 양측 면에서 치고 오겠군!'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진식이나 병법을 배운 상급기사이상의 실력가인 것이다. 차라리 그냥 우르르 달려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가라!" 중앙의 쌍검을 든 검사가 소리 치자 역시 대열의 축을 돌며 처져있던 두 명의 용병이 양측 면에서 일제히 치고 들어왔다. 한 명은 맨손의 격투가로 그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은발의 청년이었고, 또 한 명은 제법 격식 있는 검 놀림을 보이지만 다리 놀림으로 보아 다리 공격을 주로 쓰는 검투사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측면을 파고들었고, 그녀가 발을 구루며 살짝 뛰어 오르자 정면의 9척 거한이 강철봉을 휘두르며 머리를 내리 쳤다. '그럴 줄 알았지!' 조슈아는 뛰어오르는 탄력 그대로 검편을 비스듬히 눕혀서 찍어 내려오는 철봉을 맞받아 그 방탄력을 이용해서 몸을 튕겼다. "어어?" 대형을 통괄하던 뒤쪽 중앙에 위치한 쌍검의 용병 지코는 그녀가 배면 비행을 하며 쏘아 오자 당황하여 십자방어를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파악―! 탄력을 받아 날아오던 그녀의 검이 십자방어의 중심을 그대로 통과해 방어 벽을 지렛 대 삼아 검편으로 그의 왼쪽 턱을 때렸다. 촤악……. "허억...." 마치 얼굴에 강철 채찍을 맞는 듯한 충격이었으리라! 그가 피가 터져 나오는 턱을 잡고 뒤로 물러서자 조슈아는 무너진 수비벽사이에 두발을 날리며 그의 얼굴을 디딤대로 하여 재차 몸을 날렸다.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온 체중이 실린 그녀의 두 다리에 얼굴을 가격 당하자 지코는 대여섯 걸음을 밀려가 쓰려졌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사뿐히 원래의 자리에 돌아와 자세를 취하였다. 설명은 길었으나 기실 이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6인이 남은 용병들은 이제 감탄을 넘어 경이감 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카바 출신의 용병 가토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친구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이 아가씨는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강하다!" 그러나 젊은 맨손의 격투가 그라프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 쳤다. "그래서 지는 개꼴을 보이자는 거냐? 가토스?"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토스는 고개를 돌려 차분한 목소리로 디베리아 출신의 9척 거한 강철 곤봉의 스쿠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용병이다! 좀더 강한 자가 이끌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꼭 지저분한 일이 터지게 마련이야! 너도 잘 알잖나? 스쿠!" 평소에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거인 스쿠는 말없이 그녀에게 거누고 있던 강철 곤봉을 거두며 정말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솜씨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보았으니 그걸로 족해! 아가씨가 대장이다! 나는 물러난다!" "뭐야! 스쿠! 가토스! 너희들 왜 그러는 거야?" 여전히 젊은이답게 혈기 넘치는 목소리로 소리 치는 그라프였다. 그러자 그라프의 어깨를 잡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100인 대장 중 가장 연장자인 세바 출신의 용병 자르델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봐! 너는 저 여자랑 같이 지내는 게 싫은 거냐? 저 여자가 우릴 화나게 하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어! 그거면 족한 것 아닌가? 나는 저 여자와 같이 지내는 게 기대 되는데 말이야! 다른 놈들도 내심 마찬가지일걸?" "으으∼" 사실 그랬다. 사내의 자존심도 있지만 누가 저런 미소녀와 함께 생활하는걸 마다하겠는가?그라프 자신도 할 수 있다해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주먹을 휘두를 자신은 없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다가 곧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쳇! 그래.... 마음대로들 하라구!" 그는 토라진 얼굴로 등을 돌려 구경꾼들을 헤치고 사라 졌다. "자네들은 어떤가 루이, 투루스!" 가토스가 돌아보며 묻자 긴 빨간 머리를 묶어 어깨 뒤로 넘긴 미남자 루이와 검투사 투루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도…그녀를 대장으로 인정하네!" 먼저 루이가 대답하고 투루스를 돌아보자 그도 조금 뜸을 들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원! 내 평생 처음으로 여자 1000인 대장 밑에서 일하게 생겼구먼! 잘 부탁하네 아가씨!" 와아―!!!! 용병들의 환호성이 들려 왔다. "너는 정말 엄청난 여자야 조슈아!" 바알이 환한 얼굴로 소리치며 달려와 조슈아를 무등 태우자 용병들의 환호는 절정에 이르렀다. "잘 해보쇼. 미녀 1000인 대장!" "아빌라에 가있는 놈들이 자기들 대장이 저런 미녀인줄 알면 기절을 할걸?" "아마 장난인줄 알걸?" "크크... 그러면 저 여자가 또 손봐주면 되겠지." "하하하 그렇구만!" 조슈아는 의외의 전개에 조금은 정신이 없었는지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바알의 어깨 위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가토스와 눈이 마주 쳤다. 그러자 그는 깊게 목례를 하 며 가볍게 예를 취해 보였다. '아니 저 사람이 왜?' 그가 자신이 아카바의 왕족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조슈아로서는 그가 왜 그리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일부러 나서서 보호하려 애썼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용병단의 입단 첫날에 1000인 대장이 되었고, 사상 최강의 전력이라는 그들을 통솔하여 시돈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고 말았다. 기사단장 이안은 기쁨으로 찢어질 듯 벌린 입을 하고 박수를 치며 조 슈아에게 다가 왔다. "하하하! 걱정이 좀 되었었는데, 소문보다 더 대단하군 아가씨! 우리 시돈의 기사 놈들보다 훨씬 나아!" 말과는 달리 노기가 서린 눈으로 살짝 돌아보자 구경하던 젊은 기사들은 자라목이 되어 움츠려 들었다. "과찬이세요! 기사장님!" 바알의 어깨에서 내려온 조슈아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으... 나에게 손자 놈만 있었으면 자네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자며느리로 들이는 것인데! 아깝구만! 그러면 증손자는 대륙 최고의 기사가 될 터인데!" 그의 말에 바알의 볼이 한 주먹은 나오고 있었다. "이제 자네가 1000인 대장이네! 잘해보게나!" 손녀딸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던 기사장은 사라지고 용병들에 둘러싸여 축하 인사를 받는 조슈아의 얼굴엔 조금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발끈해서 나서기는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걸?' 그녀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용병들에게 향해 졌다. 어느새 에레크트라가 용병들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래! 어차피 기르가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 전쟁을 이겨야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최고로 빠른 길을 걷고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16세 소녀의 몸으로 앞으로 1000명이 넘는 사내들과 같이 먹고 자고 싸워야 한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대로 그저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고 있는 우리의 조슈아였다. -------------- NEXT `시돈으로 가는길` part 3 처얼썩∼. 론다 강의 물살을 정면으로 맞으며 3척의 범선이 빠르게 북쪽강줄기를 따라 미끄러지듯 항해하고 있었다. 세 개의 돛을 단 원양선으로서 북방의 양식으로 건조된 이 범선들은 뛰어난 항해사들이 조종하는 듯,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며 남쪽으로 흐르는 론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조금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 배의 오른 편으로는 아카바의 비옥한 초원, 드문드문 보이는 요새와 초소들, 그리고 잘 정리된 개폐식의 수로들이 보였고, 배의 왼편에는 나무 한 그루 찾아 볼 수 없는 화강암의 돌산들과 모래 언덕들이 보였다. '어떻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땅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일까?' 조슈아는 선두의 범선의 선수상을 쓰다듬으며 착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페드라 왕국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온 이후로 도저히 그 소녀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바알이 한말대로 아카바는 너무도 잔인한 짓을 한 것이다. 사실 오른 편에 보이는 론다 강 유역의 대 초원에는 '자엘' 항과 몇몇의 군사기지 왜에는 거의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그저 방치된 땅이었다. 남부의 중계항으로 쓰이는 토지 이외에는 실재로 곡창지대인 마리와의 접견 지역까지 아카바로서는 쓸모가 없는 땅인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땅조차 그들에게 남겨 줄 수 없었을까? 그들이 개척하여 농토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모든 식량을 외국에 의존해야 하는 일만 없다면 다테의 소녀들에게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현실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감정적인 것일까?' 그러나 조슈아는 곧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무리 전쟁을 하고 서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이 있을 꺼야!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않은 거고,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잘못이야!' 그녀는 선수상에 올려놓은 두 손을 꽉 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저 론다 강변의 땅을 페드라에 넘겨주겠어!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건 그것이 용서와 화해의 밑거름이 되겠지!" 그때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왔다. 조슈아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등뒤에 다가오는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이 배에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에레크트라는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살며시 걸어오고 있었지만 치마가 스치는 소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후후! 에레크트라! 선실은 마음에 드니?" 그녀가 따뜻한 목소리로 물으며 돌아서자 에레크트라는 겁이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언니, 제가 방해한 건 아니에요?" '이 아이는 왜 이렇게 남의 눈치를 살필까? 이제 12살일 뿐인데.' 조슈아는 다가오는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에레크트라는 말 잘 듣는 고양이 같은 표정이 되어 그녀의 손에 머리를 맞기고 있었다. "에레크트라!" "예?" 머리에서 손을 떼고 정색을 하는 조슈아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에레크트라는 두 눈을 깜박였다. "너의 엄마, 아빠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 그녀의 말에 에레크트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에레크트라로서도 조슈아가 언제까지나 그 문제를 들춰 내지 않으리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역시 피해가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레크트라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조슈아였지만 이제 에레크트라는 자신이 직접 키우고 아껴 주어야 하는 누이동생인 것이다. 그녀에게는 여행이 시작되는 이 시점이 바로 에레크트라와의 사이에 마지막 벽을 깰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되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에레크트라의 얼굴은 조슈아의 모든 것을 감싸줄 것 같은 따뜻한 시선을 대하자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아이의 상처라는 것은 미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감싸줄 사람만 있으면 저절로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어른과 달리 그들은 그렇게도 강한 존재인 것이다. "저는 아빠의 얼굴을 한번 본적이 있어요!" 에레크트라는 조슈아의 따뜻한 파란빛의 두 눈을 올려다보며 오직 그녀에게만 들려 줄 수 있다는 투의 믿음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운을 띠었다. "아빠는 왕궁에 사는 기사였어요! 엄마는 내가 기사의 딸이라고 어릴 때부터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입버릇처럼 자랑하셨어요!" 에레크트라의 얼굴에 언뜻 아픔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자 조슈아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내 일곱 살의 생일날 엄마는 저를 시장에 데려가서 새 옷을 사 입히고 머리도 만져 주더니 오늘은 아빠를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저는 정말 기뻤어요. 엄마가 매일 집에 데리고 들어오는 징그러운 아저씨들 중에 한 명이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지만 그래도 정말로 기뻤어요!" 에레크트라는 경직된 어깨를 떨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분노의 기운이 엿보였다. "성 앞에서 아빠를 봤어요.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처음 보자마자 내 아빠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는 나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엄마에게 무언가 큰소리로 소리를 치더니 저를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성안으로 사라졌어요." "……." "엄마는 그 뒤로 술을 마셨어요. 그 전에 엄마는 몸을 팔아도 다른 아줌마들과 다르게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에레크트라의 두 눈에 참았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저를 언제나 공주처럼 대해 주었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그날 이후 달라졌죠. 저는 일곱 살 때부터 술집에서 일했어요. 처음엔 청소, 좀 자라서는 술잔을 나르거나 설거지를 하고 요리에 빨래에 궂은 일은 다했죠! 그래도 돈이 모이지 않았어요. 엄마는 몸을 팔아 번 돈과 내가 조금씩 가져오는 돈까지 모두 술을 마시는데 써버렸어요." 조슈아는 에레크트라의 떨리는 어깨를 안아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빠는 왜 그날 만난 거지? 약속이라도 했던 거니?" "엄마가 저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견습기사였대요. 그래서 엄마에게 내가 자라서 일 곱 살이 될 때쯤에는 자리가 잡힐 테니 그때 찾아오라고 했대요. 바보 같은 엄마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거예요. 나는 아빠가 그날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엄마가 술 주정하시는 것을 듣고 알았죠." "……." "아빠는 '저건 내 자식이 아니다! 너 같은 창녀가 누구의 씨를 받아 저런 더러운 사생아를 낳았을 줄 내가 어찌 아느냐! 젊은 나를 꼬드겨서 팔자를 고쳐보려 했었겠다만, 나는 이제 왕국기사다! 저 더러운 사생아를 데리고 꺼져라 창녀야!' 이렇게 소리 쳤었데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서 한 광이 새어나왔다. 조슈아는 그녀를 품에 꼭 안고는 등과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하지 않아도 돼! 에레크트라! 이제 그만해도..." "아니오! 하고 싶어요! 하게 해주세요!" 에레크트라가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이제는 흥분하여 소리치는 그녀를 막을 제간이 조슈아에겐 없었다. 조슈아는 이제 들어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었니?" 에레크트라는 그녀의 말에 말로 다하지 못할 고통스러움에 잠긴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는 취하면 저를 더러운 사생아라고 소리치면서 때렸어요! 저는 그 말의 뜻을 열 살이 되서야 알았고요! 그리고 열 한 살에 저는 엄마가 진 빚 때문에 술집에서 쫓겨났어요. 그러자 엄마는 그후로 제 열두 살의 생일만 오기를 기다렸어요. 열두 살이 되면 몸을 팔 수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2인용 침대가 하나 더 있어야 되겠다면서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그녀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엄마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런 인생은 살 수 없었어요. 나는 아빠가 있어요! 아빠가 있다 구요!" "……." 흥분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슈아는 자신이 안고 있는 이 소녀가 정말로 그 에레크트라인가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다. "저는 저번 달에 한번 궁을 찾아갔었어요! 그리고 아빠를 찾았죠! 성문에서 계속 얻어맞고 밀려나면서도 끈질기게 아빠를 찾았어요. 그러다가 아빠의 귀에 들어갔는지 한 병사가 두 장의 편지와 무엇인가 든 조그마한 꾸러미를 가져다주었어요! 저에겐 소용 없는 일이었죠. 저는 글을 못 읽거든요! 그래도 아빠가 보낸 꾸러미를 열어보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 안에는 은화 다섯 냥과 두 마리 비둘기가 새겨진 조그마한 반지가 들어 있었어요." 에레크트라가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그녀의 손가락에는 조그마한 동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에레크트라는 입술을 찡그리며 어린 소녀답지 않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편지는 찢어 버렸지만 이 반지를 버리지 못했어요. 자기 딸이 한달 후면 창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저를 은화 다섯 냥으로 쫓아버렸는데도! 후후 나는 지독히도 엄마를 닳아서, 못나 빠져서……." 에레크트라의 눈에서 이제는 눈물이 흘러 넘쳐 조슈아의 가슴 깨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조슈아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등만 어루만져줄 뿐이었다. 울음소린지 말소린지 구분 못할 에레크트라의 목소리는 이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잦아들고 있었다. "언니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날, 잠든 엄마의 머리맡에 은화를 모두 놔두고 언니가 절 받아 주시지 않으면 성밖 절벽에서 떨어져 죽기로 결심했었죠." 에레크트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니가 그날 저를 받아 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거짓 없는 감사와 동경, 희망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말없이 에레크트라의 등을 쓰다듬어 주던 조슈아가 그녀의 눈물로 젖은 볼로 손을 가져가자 에레크트라는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 두 눈을 사르르 감으며 조슈아의 따뜻한 두 손을 잡고 차가운 볼을 부비었다. 그러자 조슈아는 알 수 없는 열정에 이끌려 갑자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은 에레크트라의 몸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순간 그녀의 반응에 정신을 차린 조슈아는 얼른 물러나 정신을 추수렸지만 심한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이..이런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한 건가? 내가 여자의 몸이 되어 있다는 것을 또 잊고 있었지 않은가? 거기에 나를 믿고 따르는 아이에게 이게 무슨 추태인가?' 조슈아가 갑자기 당황해 물러서자 에레크트라는 서서히 눈을 떠 낭패한 얼굴의 조슈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었지만 조슈아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조슈아는 손을 들어 에레크트라의 옆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등을 돌려 선실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에레크트라는 그녀가 사라지고 한참 후까지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이 닫았던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 NEXT 제9화 시돈으로 가는 길part 4 "우리의 아름다운 1000인 대장을 위해 건배!" 술이라고는 궁에서 간간히 마셔본 한두 잔의 약한 포도주와 레노아의 집에서 마셨던 맥주가 전부인 조슈아에게 용병들의 권주는 그야 말로 고문이었다. 옆에서 에레크트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붉게 물든 얼굴을 바라보는 가운데 조슈아는 바알이 따라주는 20잔 째의 독하디 독한 시돈 산 백포도주를 마시고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로서는 그저 주는 대로 넙죽 넙죽 받아 마시고 있는 것이어서 순식간에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거친 용병들이라도 이렇게 연겨푸 술을 받아넘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주는 술은 마셔야만 한다는 사명감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또 다시 세바 출신의 용병 자르델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가볍게 털어 넣고 있었다. "이야! 아가씨 죽여주는데?" 조슈아를 끝까지 쓰러뜨리자며 길길이 날뛰었던 페드라 출신의 젊은 격투가 그라프는 이제 완전히 조슈아의 편으로 돌아선 듯 연신 싱글벙글 거리며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봐! 그라프! 아가씨가 뭐야! 아가씨가!" 그녀의 신분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아카바 출신의 용병 가토스는 마치 자신이 그녀의 보호자이기라도 하다는 듯 그녀가 선실에서 나오기만 하면 쫓아다니고 있었다. 바알로서는 입이 한자는 나올 상황이었다. "쳇! 사내놈들 꼬락서니하고는..." 턱에 큰 멍자국을 가진 애꾸의 사내가 구석에서 툴툴거리고 있었다. 전의 격투에서 제일 먼저 기절해 어찌해보지도 못하고 16세의 소녀를 두목으로 맞고 만 불우한 용병 자카엘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눈치였지만 이미 결정된 상황에 군소리를 하는 경우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카엘의 비꼬는 말투가 들려 이제 술에 완전히 절어 버린 조슈아가 게슴츠레한 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당신은 술이 없어? 이리와... 내가 줄게..."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그녀가 일어나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자카엘은 저으기 당황하는 눈치였다. 콰당……. "어어! 조슈아!" 결국 우려하던 데로 그녀는 거의 수직으로 넘어져 바닥을 뒹굴었고 바알이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을 때는 이마에 파란 멍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듯 그녀는 헤헤 웃으며 자카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더니 술병을 들고 그의 잔을 채워 주기 시작했다. "헤헤...술은 다같이 마셔야지..딸꾹" 자카엘은 그녀가 무방비로 등에 기대오자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처지를 잊은 듯 자카엘의 등에 가슴을 바짝 붙이고 진한 체향을 뿌리며 목뒤에서 손을 뻗어 술잔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자카엘은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을 등으로 느끼면서 처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술잔을 넘치도록 채우고는 이제는 힘에 부치는 듯 그의 목을 껴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쌕쌕거리기 시작했다. "이...이봐!" 자카엘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꿈나라로 떠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천천히 옆으로 넘어가자 바알이 잽싸게 달려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모두가 쓰러지려는 그녀를 안으려고 타이밍을 잡고 있었던지 기묘하게 팔을 벌린 포즈로 서있었지만 역시 역전의 용사는 달랐다. 바알은 용병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콧등으로 받아넘기며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그 뒤를 에레크트라가 걱정으로 질식할 듯한 얼굴로 따라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남겨진 용병들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모두 자리로 돌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적막을 깨며 글라우다 출신의 용병 지코가 입을 열었다. "이봐! 자카엘 이제 그만 그녀를 받아들이라구! 그녀로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봐서 알잖아? 그녀는 단지 콧대 센 소녀 검사가 아냐! 술이라고는 마셔 본적 없는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주는 술을 마다 않고 다 마시지 않았어? 그리고 제일 서먹서먹한 너에게 어린 소녀가 육탄 공세까지 퍼붙고 말이야!" 그 대목에서는 모두가 킥킥거리며 지코의 말에 벌개진 자카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조슈아가 단지 술이 좋아서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는 것을 알리 없는 이 순진한 사내들은 단지 16세 소녀가 100인 대장들과의 화합을 위해 큰 무리를 했다는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며 감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자카엘은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짓눌러 오던 감촉에 심장을 댄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있었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등과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던 목줄기……. 그는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적의가 사라졌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의도야 어떻든 강철 용병의 철담을 한방에 녹여 버린 주정뱅이 미소녀 조슈아는 바알의 품에 안겨 그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그 뒤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오는 에레크트라와는 달리 그는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바알 오빠! 언니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마셔댄 거예요?" "응...술은 좋은 거지..." 그녀의 물음에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으며 바알은 선실이 너무 가깝다는데 분계하고 있 었다. 1000인 대장인 조슈아는 기사단장이 쓰는 것과 같은 배 후미의 선장실을 쓰고 있었다. 물론 에레크트라와 한방을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부탁으로 선장용의 커다란 침대 옆에 승무원 용의 일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바알은 조슈아를 커다란 침대에 눕히고는 비단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발그레한 얼굴로 무언가 중얼거리며 꿈나라를 헤메는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바알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던 에레크트라는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것인지 언니를 보호해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으응.. 아직 더 마실 수 있어...이래 봬도 나는 사나이라구.." 피식―. 그녀의 잠꼬대에 바알과 에레크트라는 얼굴을 마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덕분에 견디기 힘든 욕망에 사로 잡혔던 바알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상체를 숙여 조슈아의 이마에 입맞추고는 에레크트라에게 조용하라는 시늉을 해 보이자 에레크트라는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자신이 잠든 사이 어떤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 졌는지 알지 못하는 죠슈아는 꿈속에서 100잔 째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7 머리가 지끈거렸다. 태어나서 이런 숙취를 처음으로 접하는 조슈아는 도무지 정신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겨우 눈을 뜨고 둘러보니 평소에 자던 승무원용의 침대가 아닌 에레크트라가 자던 비단침구의 넓은 침대였다. 아직 어두운 것으로 보아 새벽녘인 것 같았다. 선미의 큰 창의 커텐 사이로 달빛이 세어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달빛이 이르는 곳에 덩그렇게 비어 있는 승무원용의 침대를 보며 조슈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레크트라!' 깜짝 놀라 일어나려던 조슈아는 자신의 허리에 감겨있는 새 하얗고 가느다란 두 팔을 볼 수 있었다. 에레크트라는 에레나에게서 얻어온 흰색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었다. '이 아이가 왜?' 에레크트라는 깊이 잠들었는지 조슈아가 상당히 뒤척였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조슈아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녀의 팔을 살짝 풀고 침대를 빠져 나왔다. 일어나 보니 그녀 자신도 레노아로부터 얻은 긴 무명 잠옷을 입고 있었다. '응? 언제 갈아입었지?' 만약에 알게 된다면 바알은 그대로 차가운 디르사 강물에 던져 졌을 것이지만 조슈아는 불길한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술기운 때문에 잊었겠거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늦여름이었지만 의외로 강바람은 차가웠다. 조슈아는 하얀 나이트 가운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오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깜깜한 새벽이었지만 상선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맞은 편에서 오고있는 상선들은 중간에 어디를 들르던 결국 기착지는 게드마 항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조슈아는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궁을 나오고 이제 근 한달여가 지나고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오랫동안 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무척 놀라셨겠지? 에레나는 울었을 거야!' 떠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러자 조슈아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약해지면 안돼 조슈아! 너는 사나이라구!' 뚜벅뚜벅―. 그때 선미로 다가오는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천천히 돌아섰다. 하 갑판의 계단을 올라오는 그림자는 조슈아와 같이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조금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하품까지 해가며 기지개를 켜다가 하늘거리는 하얀 나이트 가운을 보자 딸꾹질 같은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여어... 1000인 대장인가?" 달빛 아래로 나온 사내는 100인 대장 중 44세로 최연장자인 세바 출신의 용병 자르델이었다. 그는 조슈아를 보자 경계를 풀고 하얗게 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조슈아는 싱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눈을 돌려 배 뒤로 일어나는 포말을 바라보았다. 자르델은 조용히 웃는 표정으로 옆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봐! 1000인 대장 잠이 안 오나보지?" 조슈아는 고개를 돌려 그의 사람 좋은 미소를 바라보았다. "1000인 대장이라고 부르니까 이상하네요. 그냥 이름을 부르세요! 아저씨!" 그녀의 말에 자르델의 미소가 더욱 짙어 졌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호탕하게 말하였다. "하하! 그래. 그러면 조슈아도 나를 자르델이라고 부르라고 나도 아저씨는 싫어!" 조슈아는 그의 호탕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럴 게요. 자르델!" 미소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은 그것이 욕이라고 해도 듣기 좋은 법이다. 자르델은 연신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하하! 조슈아를 보니 딸년이 생각나는데 그놈도 16살인데 어찌 이리 다를까? 하하!" 어딜 가도 이런 소녀는 없다는 것을 모르는 그로서는 돌아가면 딸을 구박할 기세였다. 조슈아는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자르델을 바라보았다. "아저씨....아니 자르델은 결혼을 했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심히 불만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이봐! 조슈아! 용병은 결혼도 안 하는 줄로 알았나?" 머슥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은근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나야 뻔한 용병 인생이야기밖에 풀어놓을게 없지만 조슈아는 어때? 이야기 거리가 많 을 것 같은데!" 조슈아는 누구나 다 예상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 편하리라 결론지었다. "사정이 있어서 다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저는 기사 견습생이에요. 만날 사람도 있고 경험도 쌓고 싶어서 용병단에 들어온 거고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자르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는데 그녀의 말대로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의 야릇한 표정에 뜨끔했지만 조슈아는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자르델은 야릇한 표정을 풀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바알 놈에게 조슈아의 이야기는 이것저것 들었는데 말이야!" '이것저것이라!' 조슈아는 생각과는 달리 귀를 세우고 있었다. "조슈아는 분명히 처녀 일거야! 그렇지?" 땡땡땡―. 상상도 못한 기습 공격이었다. 조슈아는 난간을 놓치고 얼굴을 들이받을 뻔하였다. 그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 그러면 그렇지 바알 놈 그럴 줄 알았다니까? 뭐 자기 여자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흐흐 놈..." 조슈아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사신의 그것 같은 흉악한 음성이 세어 나왔다. "바..바알...이 그러던 가요?" 자르델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라프와 루이 두 놈이 조슈아를 놓고 서로 자기 여자로 만들겠다며 싸웠었지." '자...자기 여자?' 감정 변화에 민감해서 논리는 보람이 있는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자르델은 손짓까지 섞어 가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 젊은 놈들이 다투는데 갑자기 바알 놈이 끼어 들어서는 '나는 조슈아와 같이 몇 주를 한 여관에서 지냈다. 헛물켜지 마라 바보놈들'이러는 거야." "우욱..." 조슈아의 입에서 신음이 세어 나왔다. "자네 괜찮은가?" 입이 웃고 있었지만 걱정스럽다는 투로 자르델이 말하자 조슈아는 몸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죠?" "후후... 놈들뿐 아니라 다른 몇 놈들도 밤새도록 술만 퍼마시더니 서로 껴안고 엉엉거리며 울더구만. 사내놈들이! 하하하!" 조슈아는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고 비틀거리면서 계단으로 향했다. "데려다 줄까?" 그녀의 몸이 심하게 비틀거리자 걱정이 되는지 자르델이 제의했지만 조슈아는 들리지 않는 지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선실로 사라져갔다. 조슈아가 사라진 후 여전히 미소 짓고 있던 그는 이제 서서히 떠오르려는 여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훗.. 예상데로 저 아이는 당차 보이지만 아직 어린아이로군. 이거 딸 같은 아이를 늑대 같은 놈들로부터 어떻게 지켜야 할지 원!" 자르델은 하얗게 센 머리칼을 긁적이고는 이제는 마음놓고 두 팔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고 있었다. NEXT 제10화 시빌 항에서 생긴 일 part 1 200명의 용병단과 기사단을 태운 선단은 디르사 강을 거의 빠져나갈 무렵 바다로 나가기 전의 마지막 항구인 시빌 항에서 보급을 위해 정박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바다로 나가게 되면 보급 없이 가사라 협곡까지 20여일을 항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항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은 거리와 시간을 생각할 때 가장 적당한 보급 기지인 셈이었다. 시빌 항은 글라우다 왕국 소재의 번화한 항구 도시로 서반구의 게드마라고 불리는 미항(美港)이었다. 일찍부터 중계무역이 발달했지만 규모 면에서는 내륙의 게드마에 못 미쳐 팔메라 제 2항으로 불렸다. 그러나 바다와 가까운 만큼 게드마보다 더 다양한 지역의 특산물과 원거리 항해에 대비한 선박 수리와 식량 선적, 그리고 무기류의 보급에는 이상적인 곳이다. 여느 때처럼 새벽녘에 일어나 갑판을 오르내리던 조슈아는 항구가 가까이 오자 가슴 이 설레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이렇게 오랜 뱃 여행을 해본 적이 없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선원들과 용병들이 보기에 언제나 제일 먼저 일어나 갑판에서 강바람을 쐬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 그녀가 바지런해서 라고 비춰졌겠지만 실은 선실이 답답해서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에레크트라는 배 멀미로 잠시 고생하더니 어린아이답게 순식간에 적응하여 초저녁부터 곤히 잠들곤 했는데, 조슈아가 취해 같이 잠들었던 그날 이후에는 아예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조슈아로서도 사실 어린 소녀가 혼자자기 싫다는데 굳이 막을 명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한번 비단 침구 위에서 자고 나자 승무원용의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싫어 졌던 것이다. 그래서 둘은 이제 친자매처럼 서로를 껴안고 자게 된 것이다. "음∼ 어째서일까? 여자아이를 안고 자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인데 전혀 거부감이 없으니……." 오늘도 새벽 공기를 마시며 안개 속으로 간간이 보이는 글라우다의 대초원을 바라보며 조슈아는 에레크트라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에레크트라와 잠자리를 같이 한 이후 조슈아는 그 생각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 고 있었다. 아무리 누이로 삼았다고 해도 그녀는 생판 남인데 아무 거부감 없이 잠자 리를 같이 할 수 있을뿐더러 소년으로서 소녀와 같이 있을 때 응당 느껴야할 어떤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오랜 여행을 함께 해야 할 상황에서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조슈아는 어쩐지 불안해지고 있었다. '호...혹시! 나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소녀가 되어 버리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슈아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판을 청소하는 척하며 그녀의 몸매를 감상하던 몇몇 선원들이 역시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그런 종류의 시선에 익숙해진 조슈아였지만 갑자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저들 눈에 도대체 어떻게 비춰지는 걸까?' 조슈아는 천천히 자신의 소녀다운 곡선을 보이는 아름다운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전엔 의식하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거지들이 불안해졌다. 이 어여뿐 소녀의 몸으로 도대체 자신은 어떤 모습들을 보였던 걸까? 혹시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이나 소녀로서 오해받을 어떤 일들을 하지는 않았었나 불안해 졌다. 아무리 자신이 실제로는 소년이라 해도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에 어느 정도는 부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조슈아였다. 그때 열심히 청소하는 척하고 있는 선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품을 하며 상갑판으로 올라오는 바알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사고가 있었던 걸까? 그의 양 눈두덩이는 심하게 부어 올라 있었다. 조슈아는 그의 몰골을 보며 일순 가슴이 뜨끔했다. 지금 생각하고 있던 일의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바알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 만든 조슈아를 보고도 헤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 언제나처럼 그런 일에 눈치가 빠른 그는 조슈아가 평소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봐 조슈아! 얼굴이 왜 그래? 아직도 배 멀미를 하는 거야?" 파랗게 물든 양 눈두덩이를 쑥 내밀며 걱정스러운 듯 묻는 바알의 모습은 얼마나 웃기는가? 그러나 조슈아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얼굴을 돌려 바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어∼. 바알." 그녀의 은근한 목소리에 바알이 뒤로 물러났다. "어..어이 조슈아 왜 그런 목소리를 내는 거야?" 너무 나긋나긋했던 걸까? 바알은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본적이 없었다. 조슈아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물러 나는 그를 끌어 당겨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저기 바알! 당신이 보기에 나는 여자 같아?" 그녀의 질문이 상상의 범주를 넘어선 걸까? 잠시 하얗게 굳어있던 그는 서서히 얼굴에 기쁨의 빛이 퍼져 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를 안아들어 올렸다. "하하! 조슈아 드디어 나를 받아들일 마음이 된 거야?" 퍼억―. "으갹―."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던 바알은 파랗게 멍든 오른쪽 눈 두덩이를 또다시 얻어 맞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조슈아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덕분에 언제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원히 기다려 보시지! 나는 여자는 안될 거야!" 찬바람을 날리며 조슈아가 선실로 사라지자 오른 쪽 눈을 문지르며 바알은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으으∼. 그러면 그 예쁜 얼굴이랑 몸매 좀 어떻게 해봐라! 그런 좋은 걸 가지고 왜 굳이 사내아이처럼 굴려는 거야?" 선원들의 킥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바알은 가만 놔두면 내년까지 투덜거릴 기세였다. 1 시빌 항에 다다른 선단은 식량 보급과 간단한 수리를 위해 하루를 잡고 있었다. 용병들과 기사들은 오랜만에 뭍에서 즐기게 된 것이 기쁜지 치장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용병대장이 된 조슈아와 그리고 시돈의 젊은 기사 멘디에타가 식량 구입을 위해 먼저 항구에 발을 딛었다. 조슈아는 다른 배에서 기사장과 함께 타고 있던 이 은발의 청년기사와는 처음 만나는 것이 었다. 그는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는지 기사장으로부터 선단의 식량을 구입하는 중요한 일을 위임받고 있었다. 옆에서 조슈아의 시선을 받자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으흠―. 아가씨 서두릅시다. 오늘 저녁 전에는 선적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제법 격식을 갖춰 말하는 폼이 귀족 집안의 자제 같았다. 조슈아는 이 어울리지 않게 샌님 같은 기사를 보며 아카바의 근위기사장 조르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나한테 키스를 하려 했었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왠지 겨울도 아닌데 몸이 떨려 왔다. 조슈아와 멘디에타는 포목점에서 이것저것 주문하여 배로 보내고 나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시빌 항은 조슈아의 상상보다 상당히 번화한 편이었다. 역시 바다와 가까워서인지 소금냄새 섞인 선원들로 붐비고 있는 시장에는 각종 바다 어패류가 싱싱하게 구비되어 있었고, 최 북부 페레나 섬의 특산물인 론의 가죽에서부터, 최 남부 바산의 특산물인 향수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둘은 가장 큰 식료품상을 찾아 건육, 호밀빵, 포도주 그리고 각종 해산물을 구입하여 값을 치루고 선적물과 함께 배로 돌아 왔다. 의외로 일은 빨리 끝나 이제 겨우 정오를 넘고 있었고, 늦은 저녁 정도이면 선적과 수리가 다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뭍에 발을 디뎌 기분이 좋은 조슈아에게 배에 남아있던 에레크트라가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꺼냈다. "언니! 아까 배에 어떤 여자가 찾는 사람이 있다면서 이것저것 묻고 갔었는데요. 제 생각에는 언니를 찾는 것 같았어요." 조슈아는 일순 긴장하였다. '아버지가 보내셨나? 그래 어차피 배로 시돈에 가려면 여기에 꼭 들려야 하니까!'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지 조슈아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 어떤 사람을 찾아다닌다고 했니?" 에레크트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곧 대답했다. "이름은 모른데요. 아마 바꾸었을 거라나요?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16세 정도의 소녀이고 검을 잘 쓰고 소년 같이 행동 한데요." '으…으음.' 조슈아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누구인지 참 자세히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돌려보냈니?" 조슈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이런 일에 눈치가 없는 에레크트라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여자가 말한 것 같은 여자는 우리 언니밖에 없다고 말해 줬죠. 언니가 오후 늦게 올 줄 알고 오후에 찾아오라고 말해 줬어요." '아아!' 당장 에레크트라를 강에 집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조슈아는 꾹꾹 눌러 참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왕 쏟아진 물이니 내가 만나지 않고 거짓말로 넘겨야겠다.' 조슈아는 심호흡을 한번하고는 눈을 빛내고 있는 에레크트라에게 입을 열었다. "에레크트라!" "예?" "나는 그 여자와 만나게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에레크트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어머.. 언니. 그러면 좋겠네요." 조슈아의 이마에 조그마한 핏줄이 돋아났다. "내가 하려는 일을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야! 에레크트라!" 또 다시 한참을 생각하던 에레크트라는 서서히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곧 죄의식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내가 큰 잘못을 했나요? 언니?"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너에게 그런걸 물은 거야? 다른 선원들도 있잖아!" 그러자 이제는 눈물까지 글썽이던 에레크트라가 눈물을 훔치며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원아저씨들은 언니 얘기를 물으니까 이상하게 모른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갑판에서 보고 있다가 말해 준건데……." '으으∼.' 결국 그녀의 사정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던 간에 용병들이나 선원들은 최대한 그 녀를 보호하기 위해 애쓴 것이다. 그런데 요 깜찍한 바보 녀석이 나서서 모든 것을 망쳐 놓은 것이다. 조슈아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 역시 거짓말 밖에 없어. 그런데 문제는…….' 조슈아는 커다란 갈색 눈에 절망감을 가득 싣고 자신을 바라보는 에레크트라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 아이에게 거짓말을 시키는 것은 무리인가? 그래도…….' 조슈아는 결심한 듯 에레크트라의 양어깨를 잡고 어르듯 말하였다. "에레크트라, 언니는 지금 고향에 돌아가서는 안될 이유가 있어! 그러니 나를 위해서 그 여자에게 거짓말을 좀 해줘야겠어!" 에레크트라는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작전을 설명하였다. "그 여자가 오면 언니는 선적물 구입으로 바빠서 들어오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그래도 기다리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이야기를 끌어서 내가 너의 친언니인걸로 믿게 해봐!" 에레크트라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그녀의 작전을 기억하려는 노력인지 그녀의 말을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조슈아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2 조슈아는 선실의 창문을 열고 커튼 틈으로 귀를 기울이며 다시 배로 찾아올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오셨어요?" 그녀가 일러 준대로 에레크트라는 큰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조슈아는 귀를 새우고 자신을 찾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다. 배 후미에 달린 창문으로는 각도 상 찾아온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나가서 보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때 손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조슈아에게 들리도록 큰소리로 말하는 에레크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는 오늘 안 들어오세요." 다시 조그마한 대답이 들렸지만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언니 이름이요?" '아차!' 조슈아는 일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이름은 원래 이름을 여성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바보 왜 미리 가짜 이름 하나쯤 알려주지 않았을까!' 조슈아는 제발 에레크트라가 다른 이름을 대 주기를 기도했다. 그때 에레크트라의 부자연스러운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 언니 이름은 에레나에요. 저는 에레크트라고요. 우린 '친자매'에요." 특별히 어색하게 친자매에 액센트를 주며 에레크트라는 득의 만만하게 소리 치고 있었지만 순간 조슈아의 머리에서는 괴종이 울리고 있었다. '에레나, 에레나라니!!' 에레크트라로서는 최선을 다해 순발력을 발휘해서 레노아의 딸인 에레나를 떠올렸겠지만 그것은 조슈아의 누이동생의 이름이기도 해서 상대에 따라서는 차라리 조슈아라고 말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그때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매며 주저앉은 그녀에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바보! 조슈에! 배 안에 있는 거 알아! 빨리 나와!" 조슈아는 정신이 번쩍 들며 순식간에 갑판으로 뛰어 나갔다. 배에 실을 물품들로 이리저리 어질러진 부두에 당황하여 쳐다보는 에레크트라 앞에서 조슈아가 나타나자 열심히 손을 흔드는 소녀가 보였다. "샤레셀!" NEXT 제10화 시빌 항에서 생긴일 part 2 이 더운 날씨에 흰색 공단의 외투에 긴 성포를 쓰고 눈물까지 머금으며 손을 흔들어 데는 소녀는 상급 신녀 샤레셀이었다. 에레크트라가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그녀는 잽싸게 배로 뛰어 올라와 조슈아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아앙! 조슈에 보고 싶었어!" 오랜만에 불리우는 이름이었다. 조슈아는 어리둥절하지만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샤레셀을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샤레셀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너 혼자 여기까지 왔어?" 샤레셀은 눈물을 닦으며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설명하자면 길어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구!" 예의 장난끼 어린 목소리로 돌아온 샤레셀은 선실을 턱으로 가르켰다. 조슈아는 아직 부두에서 멀뚱거리는 에레크트라를 손짓으로 안심시키고 샤레셀을 데리고 선장실을 향했다. 선장실에 들어선 샤레셀은 감탄하는 얼굴이 되었다. "조슈에 여길 쓰는 거야? 용병단의 배라고 들었는데?" "응! 내가 천인대장이거든." 샤레셀은 노골적으로 경탄한 얼굴이 되어 엄지 손까락을 치켜들었다. "헤헤. 여전히 싸움대장이구나, 너!" 그녀의 말을 들으며 싱긋 웃던 조슈아는 갑자가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가더니 활짝 열어 재꼈다. 그러자 문 뒤에서 귀를 바짝 대고 정황을 살피던 용병 몇이 굴러들어 왔다. "예! 갑니다. 간다구요!" 조슈아가 가볍게 인상을 구기자 그들은 잽싸게 기어 선장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닫고 돌아오는 조슈아를 바라보며 샤레셀이 속삭였다. "어째 더 늠름해 졌는데 조슈에!" "늠름?" 개성 없이 사례셀의 말을 반복하며 '소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이라고 생각하던 조슈아는 순간 자괴감에 주먹으로 머리를 쳤다. '소녀에게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단죄하는 불쌍한 소녀 조슈아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샤레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슈에 나는 여기서 너를 보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에? 보름?" 샤레셀은 등에 지고 있던 조그마한 봇짐을 풀어 무명포에 둘둘 말려 있는 물건을 건네주었다. 조슈아는 그것을 받아 궁금한 표정으로 천천히 풀어 보았다. 천을 풀자 그 안에는 은으로 만든 칼집에 정교한 황금 세공을 한 보검이 나왔다. 백금으로 만든 고정쇠에는 아세르 여신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고, 손잡이의 끝에는 4개의 빨간색 루비가 4방위로 정교한 황금 세공 위에 밖혀 있다. "이∼이런∼, 말고스잖아?" 샤레셀이 가져온 것은 놀랍게도 국왕의 신물이자 아세르 여신의 수호검인 말고스였다. 검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조슈아를 바라보며 샤레셀이 조금은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조슈아! 네가 떠나고 나는 바로 다음날 폐하께 너의 일을 말씀드리고, 에레나와 함께 간곡히 부탁 드렸어." 조슈아는 검을 다시 싸서 갈무리하고는 샤레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폐하께서는 처음에는 불같이 노하셨었지만 곧 너의 마음을 이해 하셨어. 그리고 이것을 검과 함께 전해 주라고 하셨어!" 에레나는 품에 손을 넣더니 기름 종이로 싼 편지를 꺼내 넘겨주었다. 조슈아는 재빨리 인장을 뜯어내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왕자야! 이 편지가 너에게 전해 질 수 있기를 여신께 빈다. 네가 떠나고 이 아비는 많은 생각을 하였단다. 처음에 네가 떠나겠다고 하였을 때 차라리 기사단과 함께 보내줄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구나! 아비는 '시돈'의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 군사를 파견하거나 역부족이면 연합군이라도 구축하여 기르가스를 치고 아스나를 되돌려 받으려 계획하고 있었지만 동맹국도 아닌 먼 북방의 시돈에 군을 보내기에는 대의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기다려 보려는 생각이었단다. 그러나 역시 너에게는 너무 힘든 시간들이었겠구나! 이해한다 아들아! 너의 능력이면 아비가 확실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시돈을 찾을 때까지 제 앞가림은 할 것이라 믿지만 그래도 지금은 여인의 몸이니 조심하거라! 그런 의미에서 이른 감이 있지만 선물을 보내니 잘 사용하거라. 너도 알겠지만 '말고스'는 선택받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성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의 결계로도 이 검을 막을 수는 없다. 기회가 닿으면 너에게도 힘을 빌려줄지 모르지. 말고스에 인정받도록 노력해라. 그렇지 않으면 검을 뽑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보게 될 날을 기약하자. 건강하거라! 조슈아는 가만히 부왕의 편지를 껴안고는 다시 소중히 접어 입 맞춘 후 품에 넣었다. 글재주가 없는 부왕으로서는 최대한의 문장력을 동원한 것이리라. 조슈아는 다시 말고스를 꺼내어 손잡이를 잡고 고정쇠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자력 같은 힘이 느껴지며 손가락이 밀려났다. 검이 그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검집 만으로도 훌륭한 무기가 되겠지만 이만 저만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조슈아는 겨우 그렇게 자위하고는 샤레셀에게 눈을 돌렸다. "그런데 너는 여기까지 혼자 온 거야?" 샤레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근위대장님과 함께 왔어!" "조르쥬?" 조슈아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자 샤레셀이 피식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찔리는 게 있겠지만 놀라지는 마! 너를 만나러 왔다는 건 몰라! 그냥 폐하께서 수행원으로 붙여 주셨어! 내 몸쯤은 내가 지킬 능력이 있는데도 말이야! 지금은 내가 설득해서 여관에 남겨 두고 왔어!" 가슴을 쓸어 내리던 조슈아가 재차 물었다. "지금 궁에서 내 일은 어떻게 알려져 있지?" "응! 어느 쪽 말이야? 왕자? 아니면 너!" 놀리는 게 분명했지만 둔감한 조슈아는 눈치 채지 못했다. "둘 다!" 샤레셀은 장난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후후 조슈에. 너는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 갈거야?" 순간 조슈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왜…왜 그러는데?" "모두들 네가 심한 병이 나서 비밀리에 경치 좋은 '계절 궁전' 같은 데로 장기 휴양을 떠난 줄 알고 있어. 그런데 문제는……." 조슈아는 입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감이 느린 그였지만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다. "서…서…설마!" 샤레셀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바로 그 설마야! 모두 네가 그 신비의 미소녀와 밀월여행을 즐기는 줄 알고 있지." 하얗게 질린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샤레셀은 잠시 키득거리더니 찰싹 소리가 나게 어깨를 쳤다. "너무 걱정하지마, 조슈에. 본래 대로 돌아오면 그냥 친척이 병시중을 든 거라고 해명하면 되니까!" "그…그럴까?" 병주고 약주는 그녀였지만 조슈아는 그런 것을 파악할 눈치는 없었다. 그때 샤레셀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아! 맞아 그리고 놀라운 소식이 있어!" 자신의 문제로 머리가 가득찬 조슈아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놀라지마! 조슈에! 에레나한테 청혼이 들어 왔어!" "에엑? 뭐라고?" 조슈아는 당장 튀어 오르기라도 할 듯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15세가 되었을 뿐인 사랑하는 누이에게 청혼이라니, 어디의 어떤 놈인가 만나면 흠씬 패주겠다'라고 써있는 듯 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 얼굴이었다. "그래서 어떤 놈이지?" 조슈아는 이를 갈 듯 한자 한자 씹어가며 질문하였다. "음..좀 의외의 인물이야! 얼마 전에 검성의 칭호를 받은 디베리아의 제3왕자야! 올 해 20살이라는데 이상한 건 에레나를 본적도 없으면서 동맹국도 아닌 우리 나라에 사 신을 보내서 에레나를 정실로 맞고 싶다고 했데." 조슈아는 그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디베리아에는 정실과 측실의 자식을 합해 9 명의 왕자와 3명의 공주가 있다. 그중 정실인 시즈 왕비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가 레도 왕자였다. 17세 때부터 전장을 누비며 그 용맹을 과시했던 그는 디 베리아에서는 유일한 검성 급의 기사이기도 했는데 조슈아로서는 같은 검사로써 한번쯤 대적해 보고 싶어하던 자였다. 수완도 좋아서 그는 형들을 제치고 차기 디베리아 국왕의 자리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자가 왜 에레나를?' 자기 탓이라는 것을 알리 없는 조슈아는 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아버지 같은 심정으로 속이 끓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조금은 기꺼운 감정이 생겨났다. '에레나도 결국 늦기 전에 혼인을 해야할 테고. 그렇다면 소문뿐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노여움이 지나가자 어쩐지 흐뭇해지는 조슈아였다. '그 녀석 여자 보는 눈은 있군! 그래 에레나야 어디에 가도 확실한 왕비감이지. 그럼.' 조슈아는 본래의 모습이 되어 돌아간다면 그를 꼭 만나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조슈아를 바라보던 샤레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나를 여기 우두머리에게 소개시켜 주어야지! 일어나 조슈에!"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멍청히 앉아 있던 조슈아는 말뜻을 깨닫자 번쩍 뛰어 일어나 샤레셀의 양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너…너 설마 나와 함께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샤레셀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하였다. "이봐! 조슈에 도대체 내가 여기까지 왜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같이 가는 거지!" 조슈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샤레셀은 그런 그녀를 잡아끌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조르쥬에게는 편지를 남겼으니까. 그리고 폐하도 알고 계셔. 폐하도 너의 정체를 아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면 괜찮겠다고 승낙하셨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샤레셀은 조슈아를 끌고 문을 나섰다. 그러자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조슈아가 말했다. "샤레셀 알아 둘 것이 있는데, 이 배에서 나는 조슈아야. 엉뚱하게 불러서 오해 사지 않게 해줘!" "어머 개성 없이 조슈아가 뭐야! 조슈아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도 한심하다고 느끼는 조슈아였지만 어쩌랴. 언제나 늦은 후에 후회하는 그녀였다. 조슈아는 툴툴거리며 샤레셀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3 "호오! 그래 아가씨는 신녀란 말인가?" "그래요! 조슈아와는 어릴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 사이에요." 샤레셀이 짤랑거리는 목소리로 애교 있게 답하자 노기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아세르 신전은 엄격하기로 이름 높은데 어떻게……." 기사장의 옆에서 의혹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젊은 기사 멘디에타가 말했다. 순간 조슈아는 뜨끔하였지만 샤레셀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얼굴로 냉큼 대답하였다. "저는 외신전의 의전에서 수행하고 있는 치료의 은사를 받은 신녀에요. 저희 의전 신녀들은 상급 신녀가 되기 전에 꼭 바깥 세상에 나가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 치료하며 일정기간을 외유해야 되죠. 저는 그래서 어차피 그럴거라면 무사 수행중인 조슈아와 다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조슈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가 상황을 의식하고 급히 다물어 졌다. 반면 순식간에 이야기를 하나 지어내 풀어놓은 샤레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새침하게 기사장을 올려다 보고있었다. 기사장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조슈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자네는 복덩이구만! 이제는 신녀까지 끌어들이다니, 허허!" 그는 샤레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미 본국에서 허락한 채용 인원은 다 채웠는데, 무보수라도 따라올 텐가?" 의례적으로 묻는 말이었지만 기사장은 이런 고급 인력을 무보수로 부리려니 조금은 미안한 기분인 듯 했다. 샤레셀은 가슴을 펴고 환한 미소로 답하였다. "그럼요! 오히려 제가 고마운 걸요!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하는 데다 능력 있고 귀여운 소녀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기사장은 기꺼운 얼굴로 샤레셀의 손을 잡고 크게 흔들었고, 여전히 못 미더운 표정의 젊은 기사 멘디에타는 샤레셀을 한동안 정탐하는 눈길로 쏘아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사라졌다. 배를 내려와 부두를 통해 자신의 배로 돌아가던 조슈아는 쌓아 놓은 짐들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며 자신과 샤레셀을 궁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에레크트라를 발견하자 미소지으며 소리쳤다. "이리와 에레크트라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에레크트라는 그녀가 불러주자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는 허리 뒤로 두 손을 깍지끼고는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에레크트라, 이쪽은 샤레셀이야. 아카바에서 온 내 오랜 친구지! 그리고 아세르 신전의 신녀이기도 하고." 천하게 자란 에레크트라로서는 조슈아가 샤레셀을 신녀라고 소개하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지 쭈뼛거리더니 곳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절을 했다. 그러자 조슈아도 당황했지만 샤레셀은 더욱더 당황했는지 황급히 그녀의 양팔을 잡아 바로 세워주었다. "절 같은 건 할 필요 없어요. 에레크트라!" 모친의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신전 근처에도 가지 못한 그녀에게는 신녀라고 하는 존재는 깨끗함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될 수만 있다면 가장 되고 싶은 것이 신녀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신녀를 처음으로 맞대면하게 되니 이런 과도한 예를 표하게 된 것이었다. 조슈아는 선망의 눈으로 샤레셀을 바라보는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샤레셀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다테에서 머물다가 내가 제자로 받아들인 아이야! '잘 부탁합니다. 샤레셀 언니' 해야지. 에레크트라!" 아이를 어르듯 말하는 조슈아를 한번 바라보고는 에레크트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 부탁 드려요! 샤레셀 언니!" "나도 잘 부탁해! 에레크트라!" 샤레셀은 제법 어른스럽게 답하며 에레크트라의 양손을 따뜻하게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정을 주는 사람에게 쉽게 넘어가는 에레크트라는 금새 그녀가 좋아 졌는지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아 흔들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바알은 어딜 간 거야?" 조슈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에레크트라가 대답했다. "바알은 언니가 자기한테 말도 없이 식량 구하러 나갔다니까 잔뜩 토라져서 아저씨들하고 술 마시러 갔어요!" 에레크트라의 이유 없이 자신이 미안하다는 투의 대답을 들으며 샤레셀이 물었다. "바알은 또 누군데?" 샤레셀이 금새 마음에 든 에레크트라가 조슈아의 대답을 가로챘다. "조슈아 언니의 신랑이에요. 샤레셀 언니!" 조슈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재빨리 샤레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샤레셀은 차마 표현 할 수 없는 엽기적인 표정을 지으며 조슈아에게 눈빛으로 이 경악할 명제 에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여! 조슈아. 일찍 왔네?" 그때 지지리 운도 없는 바알이 조금 취했는지 자르델과 어깨동무를 하고 약간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 바알 오빠. 어서 오세요! 여기 언니 친구 분이 찾아 오셨어요." 바알이라는 이름을 듣자 샤레셀은 목뼈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빨리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저! 샤레셀 그게 아니야!" 조슈아의 말을 귀 뒤로 흘리며 샤레셀이 마치 북해의 겨울 바람 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조슈아의 연인인가요? 바알이시라는 분?" 그녀의 말에 저윽이 당황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바알은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피의 전주곡이 될 한마디를 던졌다. "헤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짜악……. 샤레셀은 조슈아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모두 이 의외의 상황에 멍하니 둘을 바라보는 가운데 샤레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뭐야. 불결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로 자기가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싫어! 조슈에! 흑흑" 조슈아는 빰을 심하게 얻어맞았는데도 상관하지 않고 그저 샤레셀을 달래기에 바빴다. "이…이봐! 샤레셀. 아니야! 아니라구! 저 녀석이 농담한 거야! 아무려면 내가 남자를…아니야……." 배의 모든 인원들이 나와 이 촌극을 지켜보는 가운데 선원들과 용병들은 서로 쑥덕거리며 나름대로 이 상황을 분석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봐! 우리의 1000인 대장은 남자가 싫다고 하잖아!" "그럼 저 쪼끄만 계집애에 이어서 저 신녀까지?" "분명히 들었다구. '자기가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러 던걸?" "오오! 그런 것인가?" 그녀의 연애관에 관한 확증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용병들 중 조슈아에게 반한 상당수의 용병들은 착찹한 심정을 드러내 보이며 탄식했고, 개중에는 드디어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며 고개를 끄떡이는 자들도 있었다. 조슈아는 이제 아예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있는 샤레셀을 달래는데 정신이 팔려 이 상황이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4 조슈아 일행을 태운 선단은 시빌 항을 떠나서 만 하루를 항해하여 드디어 바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조슈아는 물론이고 에레크트라와 샤레셀도 바다는 처음으로 보는 것이어서 마치 소풍 나온 소녀들처럼 갑판에 모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정말 넓구나! 바다라는 건." 조슈아가 감탄한 듯 중얼거리자 샤레셀도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샤레셀은 이제 조슈아에 대한 오해가 풀렸는지 밝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에레크트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질린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구석에서 그녀들을 보고 있던 몇몇 용병들이 수근거렸다. "클클! 내 평생 이런 용병단은 처음이야!" "좋다는 거냐! 나쁘다는 거냐!" "말이라고 하냐? 물론 좋지! 어딜 봐도 꽃밭이잖아! 미녀 1000인 대장에 나긋나긋하 고 치료마법까지 쓰는 신녀, 술 잘 따라주는 꼬마까지! 흐흐∼." 물론 그의 말대로 이 배는 꽃밭이 되어 가고 있었다. 대게 사내라는 것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땐 더없이 거칠게 놀다가도 여자가 끼어 들면 행동거지가 조금은 조심스러워 지는 법이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이미 쓰레기장 같이 되어있어야 할 배가 마치 고급 기사들만이 타고 있는 것같이 깨끗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바다로 나선 3척의 범선은 남풍을 받기 위해 먼바다로 나와 저녁때가 되자 해류를 따라 북진하기 시작했다. NEXT 제11화 바다의 마물 part 1 "이봐 바알! 당신은 시돈에 가본 적이 있어?" 조슈아가 바알에게 물었다. 아직 자정은 되지 않았지만 거의 해가 지고 나면 씩씩하게 잠자리에 들었던 조슈아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포도주 잔을 들고 있었는데 한번 숙취에 심하게 당한 뒤어서 인지 그전과는 달리 매우 조심스럽게 양을 제가며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샤레셀이 마치 파계한 신녀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포도주 잔을 들고 있다. "시돈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아빌라 왕국에 고용되어 시돈 군과 싸워 본적은 있지!" 바알이 이제는 조슈아에게 맞은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얼굴을 들어 말했다. "시돈 군은 어때? 성도를 그리 쉽게 잃은 걸 보면 그리 강한 군대는 아닌가 보지?" 조슈아의 말에 바알은 손을 저어가며 부정했다. "웬걸! 근위기사단만치면 전 대륙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전투력의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구. 그리고 무엇보다 시돈의 마법문화는 내가 알기로는 대륙 최강이야." 바알의 말에 조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그만큼 적이 강하다는 거네?" 대화를 듣고 있던 샤레셀이 약간은 혀가 꼬인 목소리 입을 열었다. "바알씨!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 예!" 조슈아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라는 이 소녀를 대하기가 어쩐 일인지 매우 껄끄럽게 느껴지는 바알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시돈에선 지금 동시 다발적으로 마물이 출현하고 있나요? 아니면 국지적인가요?" "글쎄 잘∼." "그건 제가 말씀드리죠. 신녀님!" 바알이 더듬거리고 있자 선실의 문이 열리고 멘디에타가 들어오며 말했다. 밖에 비가 오는지 조금은 젖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잔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집 경력 4년의 소녀 에레크트라가 잽싸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포도주를 따른다. 그는 에레크트라를 바라보고 한번 씨익 웃더니 단숨에 한잔을 털어 넣듯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신녀님! 시돈의 북부 산악 지대에서 처음으로 마물들이 출몰했다는 것은 아시죠?" "알고 있어요!" 샤레셀이 대답했다. "처음엔 몇 마리의 마물이 이웃 마을을 습격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미친 마법사 가 장난을 치는 정도로 생각 했었죠." 그는 목이 타는지 또다시 컵을 내밀었고 에레크트라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포도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가득 따라 주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출몰과 공격 방법에 두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엘프 족 마법사가 왕궁을 찾아 왔지요." "엘프요?" 샤레셀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슈아도 엘프를 직접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표정이 되어 그에게로 돌아앉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들로서도 엘프 족이 인간의 왕궁을 자기 발로 찾아 온 일은 처음 이었죠. 그들은 드래곤 족 같이 고고한 종족이라서 여간해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엘프가 왜 왕궁을 찾아 왔대요?" 샤레셀이 다그치듯 묻자 그는 포도주 잔을 손바닥에 굴리며 먼 시선으로 기억을 더듬는 얼굴이 되었다. "엘프 마법사는 숲 속에 엘프의 마을들이 마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자신들의 힘만으로 상대할 수 없다며 인간의 힘을 빌리려고 찾아 왔다고 했지요." "그 엘프가 인간의 힘을 빌리러 왔다구요?" 샤레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엘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그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인간들보다 먼저 숲에서 그들과 싸워왔던 것이죠. 그래서 아직 인간들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었나요?" 이번에는 조슈아가 물었다. "아니오! 국왕 폐하는 확답 없이 그를 돌려 보내셨고, 그 후에도 군대를 파견하지 않으셨죠." 멘디에타는 무언가 부끄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갑자기 마물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폐하는 뒤늦게 기사단을 파견하셔서 저도 그 선발 진에 발탁되었죠." "……." "저는 거기서 놀라운 것을 목격했습니다. 온 숲을 가득 매운 마물군단을 본 것이죠." 바알은 온 숲을 덮고 있는 마물들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도 그렇게 많은 마물을 실제로 본적은 없는 것이다. "숲에 파견 된 2만의 기사단은 단 3일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후위에서 엄호하던 마법사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그만큼 상대 마법사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거의 전멸하고 '리베온' 성까지 물러나 응원군과 합류해서 또다시 격전을 벌였 죠. 낮에는 마물들의 기운이 약해져 치러 나갔고 밤에는 성에서 그들의 공격을 버텼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싸우다가 처음으로 적의 마법사들 중 하나를 생포할 수 있었습니다." "마법사들이라고요? 기르가스 혼자가 아니었나요?" "조슈아!" 조슈아가 그의 의외의 정보에 흥분하여 의심을 살 말을 입에 담자 샤레셀이 소리쳤다. "아니? 대현자 기르가스 님 말씀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아니에요. 이 아이는 평소부터 현자 기르가스 님을 만나고 싶어하거든요, 그래 서 말이 헛나왔나 보네요." 샤레셀은 그 대단한 순발력으로 말을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르가스 님이 아카바에 왕국의 초청에 가셨다가 돌아오신 후, 수행을 하신다며 떠나시고는 소식이 끊겨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죠." 그의 말에 조슈아의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역시 그 놈이었군.' 샤레셀도 조슈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래서 그 사로잡은 마법사는 어떤 인물이었지?" 바알이 이야기의 결론을 빨리 듣고 싶은지 말을 재촉했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놀랍게도 엘프였습니다." "에∼에?" 그의 말에 일행은 모두 기겁을 하였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여전히 먼 시선으로 말을 계속 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사실 마물에 쫓겨 숲을 나온 엘프의 난민이라고 생각 했었죠.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수백 마리의 마물들을 통솔하고 있었어요. 다행히 대낮에 이동중인 그들을 만나 그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만 그는 성에 잡혀와 심문을 당했는데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그래서 결국 마법사들이 마법을 이용해 정보를 알아내려 했는데, 그가 대답하려 하자 갑자기 머리부터 순식간에 녹아 내려 죽어 버렸죠." "노...녹았다고 했나요?" 조슈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아예... 어찌 해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논아서 피 곤죽이 되더군요." 조슈아는 이제 이 모든 일이 마석 아스나, 그리고 기르가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 상대를 산채로 녹여 죽이는 그 방식이야말로 기르가스와 레스타트, 마왕 마아가 등 마석 아스나와 관련된 자들의 특징인 것이다. 멘디에타는 조슈아가 자신의 말에 지나치게 흥분하자 그녀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로 엘프들이 상대 마법사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마물들은 점점 더 늘어나 결국 성을 포기하고 성도 알본까지 퇴각해서 방위선을 구축했죠. 그 뒤로는 여러분들도 아시는 대로 성도는 점령당해 파괴되고 국왕 폐하와 기사단은 남부로 피신하셨죠." 멘디에타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아픔이 들어 났다. "그러면 결국 국지전이라는 이야기네요!" 샤레셀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니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놈들은 이상하게도 성도를 점거한 후 급속히 전국으로 번져 갔어요!" "…….!" "알본을 점령하기 전까지는 수가 많아도 성 주위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방위에서 출몰했죠." 조슈아는 멘디에타의 말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상대를 기르가스 한 명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이렇게 되면 처신이 매우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 알본에는 기르가스가 세력을 넓혀 가는데 영향을 줄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일까?' 조슈아는 어쩐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일이 매우 복잡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광―. 별안간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배가 심하게 흔들려 조슈아는 술잔을 놓치고 말았다. 에레크트라는 갑작스러운 진동에 비명을 지르며 조슈아에게 매달렸다. "어어? 뭐야?" "암초인가?" 여기저기에서 선원들과 용병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는 재빨리 검을 찾아 일어나 갑판으로 달려나갔다. NEXT 제11화 바다의 마물 part 2 갑판으로 올라간 조슈아는 갑판장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크…크라켄(족두류의 일종으로 북구에 서식하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모양은 거대한 오징어와 같다)이야! 내 평생 그렇게 큰놈은 처음 봐!" 조슈아는 예전에 해양수에 관한 글에서 크라켄에 대해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봐요! 갑판장 아저씨. 크라켄은 인간이 공격하기 전에는 배를 공격하거나 하지 않잖아요?" 갑판장은 공포에 젖은 눈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다를 가리켰다. "틀림없이 놈이었어. 배 옆구리를 들이받고는 갑판근처까지 뛰어 올랐었다고 나는 확실히 봤어!" 바알도 크라켄에 대해 알고 있는지 긴장한 표정으로 검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에레크트라! 들어가서 아무거나 고정된걸 꽉 붙들고 있어!" "알았어요. 오빠!" 말 잘듣는 에레크트라가 잽싸게 뛰어 들어가자 선원들이 긴 고래잡이 작살을 낑낑거리며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잠을 자다 충격으로 깨어난 용병들도 하나 둘 일어나 무기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쾅―. "우왁……!" 또다시 배 밑이 육중한 물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판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중심을 잃고 쓰러 졌다. "도와줘!" 비명소리에 돌아보니 내려다보다가 떨어져 나간 듯, 용병 한 명이 시커먼 바다 위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보였다. "밧줄을……!" 처엄벙―. 조슈아가 선원들에게 명령하는 사이 허우적대던 용병이 있던 자리에서 큰 물체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놀라서 잽싸게 돌아보았지만 용병이 허우적대던 자리에는 큰 포말이 일고 있을 뿐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알! 보았어?" 조슈아가 소리쳤다. 바알은 충격을 받은 듯 굳어 있는 표정이었다. "크라켄이 맞아 그것도 엄청 크고 하얀 놈이었다." 보통 크라켄은 어른 두 명을 세워놓은 정도의 크기여서 이 정도의 배를 받아서 흔들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슈아, 나도 보았어! 그건 오징어 같은 몸에 사람얼굴을 하고 있었어!" 샤레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소녀인지라 크라켄의 힘보다는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놀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선원들이 작살을 들고 시위를 당기기 위해 도르래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슈아는 하 갑판의 난간을 움켜잡고 시커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촤아―. 순간 바로 조슈아가 내려다보던 자리에서 새하얀 물체가 튀어올랐다. "우왁!" 조슈아는 기겁을 하며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찌직―. 바다에서 쏘아져 오던 물체는 조슈아의 검격을 받고 가죽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잘려 갑판에 떨어졌다. 조슈아가 돌아보니 그것은 커더란 오징어의 촉수 같아 보였다. '정…정말이군!' 조슈아가 경악하는 사이 앞의 배에서도 불이 밝혀지며 시끄럽게 소리들을 질러 대고 있었다. "뭐야! 저기도 당하고 있는 거야?" "한 마리가 아닌 건가?" 조슈아는 상식을 벗어난 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원래 크라켄이라는 것은 무리를 이루지 않는 법이다. 그때 별안간 관망대에 매달려 있던 선원이 배의 왼편을 가리키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다. 저기 때로 몰려오고 있다!!!" 조슈아는 상갑판으로 급히 뛰어 올라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고 그대로 얼어붙을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멀리 시커먼 바닷물을 새 하얗게 물들이며 크라켄 때가 헤엄쳐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현 45도! 빨리 꺽어라!" 조슈아가 항해사에게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기이익―. 급하게 방향타가 돌아가며 배가 한쪽으로 쏠리자 돛대와 갑판의 나무 이음새에서 마찰음이 들려 왔다. 조슈아는 후미로 올라가 징그럽게 몰려오는 크라켄 때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후위에 바람을 받고 있는 범선의 속도는 따라 오지는 못하는 듯 했다. 콰광―. 그러나 안심하는 것도 잠시, 조슈아의 배의 뒤편을 따라 오던 수송선이 심한 충돌 음을 내며 흔들리더니 흰 거품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이…이런 침몰한다." 바알이 소리치며 발을 구르는 가운데 범선은 순식간에 기울며 가라앉아 갔다. "구하러∼." "소용없는 짓이요. 최대 속도로 벗어나야 합니다." 조슈아가 당황하며 선원들에게 구조를 명령하려하자 멘디에타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경험이 많은 선원들은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구조 보다 탈출이 먼저라는 것을 아는 듯 나머지 두 개의 돛까지 모두 올리며 침몰한 배의 반대 방향으로 키를 틀어 재난구역을 빠져 나갔다. "무…무슨 짓이야!" 조슈아가 소리치며 멘디에타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멘디에타의 표정은 단호했다. "당신이 이 배의 책임자입니다! 모두를 죽게 할 참이오? 이런 일은 전투가 아니고 재 해입니다! 뭍에서라면 몰라도 지금 우리는 도망칠 수밖에 없어요!" 조슈아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발끈하려하자 바알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쓰라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한심하게 당하는 거야∼?" 조슈아는 소리치며 바알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배는 멀찌감치 벗어나 더 이상 침몰선의 돛대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사고 현장을 한참 우회한 조슈아의 배가 현장으로 돌아 왔을 때는 이미 배는 보이지 않고 파편들만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역시 멀리 도망 쳤던 기사단장의 배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현장에 나타났다. 피해 상황을 보고 받기 위해 보트를 타고 건너온 기사장은 피해정도만 묻고 조슈아의 어깨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조슈아의 부어오른 눈을 보고는 더 자극하기 싫었던 것이다. 가라앉은 배의 잔해를 보면 몇 사람쯤은 매달려 밤을 견뎠을 만한데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순식간에 물이 들어차 휩쓸려 들어갔던지 아니면 떠오른 용병들을 크라켄들이 공격했던지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착잡한 시선으로 부유물들을 바라보던 조슈아에게 샤레셀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조슈아, 이리 좀 와봐! 내가 무엇을 좀 알아냈어!" 조슈아는 고개를 끄떡이며 샤레셀을 따라 하갑판으로 내려갔다. 하갑판에는 조슈아가 잘라 놓은 크라켄의 촉수가 있었다. 샤레셀은 촉수를 내려다보더니 그 위에 손가락으로 삼각형의 인장을 맺고는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잘린 지 꽤 지났는데도 싱싱하던 크라켄의 촉수가 묘한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녹아 문드러졌다. "어! 이거 왜이래?" 조슈아의 대사를 대신하며 바알이 소리쳤다. 그 옆에서 멘디에타도 놀란 얼굴로 서있었다. "이건 언-데드(un-dead) 계의 마법이야! 그것도 최상위의 재생마법인 '푸르카스 (Furcas)'의 고대어 마법이지." 샤레셀의 말에 일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그놈들은 좀비라는 거야?" 조슈아가 묻자 샤레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거야! 보통의 재생마법은 마법사의 마력의 영향권을 벗어나면 소멸하지만 푸르카스의 마법은 그렇지 않아! 마법사가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부활하는 거야!" 일동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그런 놈들을 그리 대량으로 재생시킨 거야? 목적이 뭘까?" 바알이 중얼거리자 멘디에타가 말했다. "시돈을 치고 있는 마물들 중에는 좀비로 보이는 놈들도 있었습니다만 저도 바다에서는 처음이군요." 샤레셀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복합 마법이에요! 종류는 모르겠지만 조직을 팽창시키고 내구력도 강화시켜 놓았어요." "그래서 놈들이 그렇게 거대해졌던 거군?" 바알이 중얼거리자 샤레셀은 가볍게 몸을 떨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상대는 마법의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마법사예요. 재생의 마법은 일단 죽은 생명체를 마력으로 부리는 일이기 때문에 목적을 정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요. 그리고 그 사체 특유의 부식 독 외에는 살아 있을 때보다 육체적으로 약한 것이 보통이죠. 그런데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살아있을 때 보다 더 강력했다구요!" 조슈아는 샤레셀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기와 달리 이 조그만 소녀는 마법에 관해서 라면 아카바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가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상대를 보지도 않고 그가 베푼 마법의 잔해만으로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멘디에타가 샤레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주며 의외의 따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신녀님. 바다이기 때문에 이렇게 당했지만 육지에서라면 충분히 상대할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의 따뜻한 태도에 샤레셀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조슈아는 완전히 녹아 내려 곤죽이 되어버린 크라켄의 촉수를 바라보며 생각났다는 듯 말하였다. "잠깐! 전쟁은 지금 시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잖아? 이런 것이 왜 여기까지 흘러 내려 온거야?" 그러자 멘디에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시돈 국경까지 뱃길로 거의 10여일 거리인데 이상하군요. 최근 근해에서 사고가 났었다는 보고도 없었는데요." 조슈아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멘디에타 혹시 여기는 시돈으로가는 전용 항로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멘디에타가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하였다. "북구의 멀리까지 가려면 해류를 타는 것이 빠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먼바다까지 나와서 해류를 타고 올라가는 겁니다." 조슈아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대단하다는 마법사 놈이 어떤 짓을 해 놓았는지 알겠어! 이 해류를 타고 북구로 향하는 배들을 무차별로 공격하여 지원을 막으려는 거야!" 그녀의 말에 일동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이제는 공포스럽기만할 뿐인 새파란 바다를 바라 보았다. "멘디에타! 신호를 보내서 항로를 바꿔요. 돛을 최대한 써서라도 가능하면 뭍에 바짝 붙어서 항해해야겠어요!" 멘디에타가 바짝 얼은 표정으로 갑판장에게로 달려가자 샤레셀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아아! 말려야 하는데…적은 너무 강대해.' 조슈아의 말에 겁을 먹은 듯 항해사는 배가 뒤집힐 정도로 최대한 꺾어 해류를 벗어나 고 있었다. NEXT 제12화 용병대장 조슈아 part 1 조슈아의 예상대로 항로를 바꾼 이후 다시는 크라켄의 공격이 없었다. 항해사들과 선원들이 조금은 고생하기는 했지만 항해는 주로 돛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빠른 북방해류만은 못해도 다행히 계절풍의 덕분으로 항해는 순조로워 사흘 정도가 지체되었지만 무사히 아빌라 왕국과 시돈의 국경지역인 가사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 해안선이 보이며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뒤로 울퉁불퉁한 바위산들이 즐비했다. 조슈아는 페드라의 황량한 국토가 생각났지만 이것은 아빌라와 시돈의 국경을 가르는 자연적인 경계로 유용한 역할을 하는 산맥으로서 결코 두 나라의 일반적인 토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선단은 한나절을 더 거슬러 올라가 조그마한 부두를 만나 정박하였다. 항구라고 하기엔 어색한 그저 해변에 조그마한 배 한 척이 정박할 수 있는 규모의 선착장이어서 배를 멀찌감치 정박시키고 모두 보트로 짐과 함께 해변까지 운반되었다. 조슈아는 근 20여일 만에 밟아 보는 땅의 감촉에 기분이 좋은 지 신발을 벗어 들고 모래를 직접 맨발로 느끼고 있었고, 에레크트라도 배 멀미의 고통에서 벗어 난 것이 기뿐지 모래사장 위를 팔짝팔짝 뛰고 있다. 뒤늦게 해변에 닿은 기사장이 조슈아에게 다가 왔다. "자! 드디어 도착이네." 노기사는 상당히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럴 것이 수송선의 침몰은 그에게는 상당한 손실이었던 것이다. "기사장님은 이제 정규군을 지휘하러 가시나요?" 조슈아가 아쉽다는 투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와 기사들은 가사라 협곡을 우회해서 폐하가 계신 '바리'로 가 군에 합류해야 하네. 그러나 걱정 말게 멘디에타를 남겨 두고 가니까. 그는 자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네." 그때 멘디에타가 다가 왔다. "기사장님 곧 바로 가실 겁니까? 조금은 쉬고 가시죠." 신임하는 젊은 기사의 말에 노 기사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하하 나를 늙은이라고 업신여기는 건가?" 멘디에타가 머슥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기사장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잘 듣게 자네들은 매우 어려운 행군을 하게 될 거네. 가사라 협곡을 통과하여 칼라마을에 가면 먼저 도착한 1000명의 용병단이 진을 치고 있을 거네. 거기서부터 조슈아 자네가 지휘를 맡고 이 친구의 안내를 받아 성도 알본까지 행군하게. 이것은 사실상 적진 돌파이네. 자세한 내용은 멘디에타가 차근차근 알려 줄 것이지만 한마디만 더하고 가겠네." 기사장은 한마디 뜸을 들이고는 조슈아의 어깨 위에 양팔을 얹었다. "절대로 쓸데없이 죽거나 하면 안되네. 피할 수 있는 전투는 피해 가도 무방하네. 자 네들의 최대 목적은 알본까지 무사히 진격하는 것이야. 해로가 봉쇄된 이상 최단 거리로 돌파해 가는 수밖에 없네. 알본에 도착하면 멘디에타가 해야할 일을 알려줄 거네." 그는 조슈아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더니 멘디에타를 일별한 후 몸을 돌려 기사가 끌고 온 백마에 몸을 실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떠나겠네. 건투를 빌겠네." 기사장은 기사들과 함께 흙먼지를 날리며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 조슈아는 어쩐지 기둥을 잃은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자 신이 용병단의 책임자인 것이다.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조슈아로서는 겁이 나지 않 는 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멘디에타의 시선을 느끼자 헛기침을 하며 태연을 가장했다. "자! 이제 준비되는 대로 행군하죠. 칼라 마을까지는 어느 정도 거리인가요?" "협곡을 통과하는데 꼬박 이틀을 행군해야 합니다. 그리고 협곡을 나서면 관도가 있어 반나절이면 마을에 도착하게 되죠." 그는 조금은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조슈아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해변의 용병단에게로 몸을 돌렸다. 해변에는 이제 모든 물자와 병사들이 내려져서 준비해놓은 마차에 물자를 싣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바알은 힘 자랑을 하는 듯 양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는 휙휙 수레에 집어던지고 있었고, 100인 대장들도 내기를 하듯 같은 짓을 하는 통에 선원들과 용병들은 멀지 감치 떨어져 바보들의 힘 자랑을 보며 오랜 뱃여행에 지친 몸들을 풀고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에레크트라와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던 샤레셀이 손을 흔들었다. "조슈아! 여기서 켐프할거야? 모두 지쳐 있는데……." 샤레셀의 말에 조슈아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아니, 곧바로 행군 할거야. 휴식은 칼라 마을에서 취해야지. 용병단의 정비를 할 시간도 생각해야 하니까!" 그녀의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보이는 샤레셀과 달리 그녀를 따라오던 멘디에타의 표정은 조금은 밝아 졌다. 그녀의 결정이 마음에 들었음이 틀림없는 표정이었다. 조슈아가 한창 100인 대장들의 힘 자랑이 무르익어 가는 마차 변으로 걸어가자 용병들이 길을 내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에서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더 이상 장난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실질적인 대장인 것이다. "여러분! 선발대가 머물고 있는 칼라 마을까지는 여기서부터 빠르면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예요. 그래서 여기서 캠프하지 않고 정리되는 대로 곧바로 행군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알도 짐을 싣던 일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며 소리쳤다. "자자! 굼뱅이들아! 술도 얼마 없는데 여기서 뭐하고 놀겠냐! 빨리빨리 준비하고 칼라로 가서 실컷 마시자!" 우와―. 같은 말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이 필요한 법이다. 용병들은 바알의 말에 환호하며 순식간에 정비를 끝내고 어느새 끼어 든 백인 대장들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만들어 행군 준비를 끝냈다. 정신없이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조슈아에게 함박 웃음을 머금은 바알이 말을 타고 다가 왔다. "조슈아, 이제 가자! 저 놈들 술이 엄청 고플거야!" 조슈아는 바알을 바라보며 자신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추스리고는 샤레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샤레셀! 너는 에레크트라와 함께 선두의 마차를 타도록 해. 선실에서 가져온 곰 가죽을 깔아 놓으라고 했으니까,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알았어. 조슈아! 들었지? 조슈아는 바쁘니까 이제 언니랑 노는 거야!" "알았어요. 언니." 어느새 그리 친해 졌는지 이제는 마치 친자매처럼 보이는 두 소녀는 손을 잡고 소풍가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조슈아는 바알과 함께 대열의 선두로 말을 몰아갔다. 거기에는 이미 멘디에타와 9인의 백인 대장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들을 천천히 돌아보니 최 연장자인 자르델이 그녀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조슈아는 그에게 입술을 싱긋해 보이고는 크게 소리쳤다. "출발!" 이제 조슈아의 용병단은 그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1 용병단은 가사라 협곡에 들어서 하루 밤을 쉬지 않고 행군하였다. 오랜 배 여행 끝에 쉬지 않고 하는 행군이어서 낙오자도 나올만하지만 과연 추리고 추린 정예 용병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빠르게 행군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선두에서 말을 몰며 자신의 용병단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오히려 말을 타고 있는 자신이 그들보다 더 지쳐가고 있는 것이다. "이봐! 조슈아! 마차로 가서 좀 쉬지 그래?" 그녀의 파리한 안색을 살피던 바알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는 행군을 시작한 이레 조슈아가 점점 힘들어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무…무슨 소리야? 대장에게 선두를 내주라는 거야?" 조슈아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조슈아, 무리하지 않아도 좋아! 여기 있는 누구도 너의 실력을 의심하거나 하지는 않아. 그래도 너는 여자라고, 체력까지 우리와 같을 수는 없어. 네가 마차에서 쉰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조슈아는 심한 갈등에 사로 잡혔다. 그녀는 정말로 쉬고 싶었다. 그녀가 원래의 몸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처음 하는 행군에 많이 힘들어했을 것인데, 그녀는 지금 가녀린 소녀의 몸인 것이다. 사실 그녀의 체력은 이제 거의 바닥을 기고 있다. "그러……." 조슈아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삐를 움켜쥐며 발작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힘들지 않아!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바알!" 바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을 지켜보던 자르델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어린 계집아이가 무리를 하는군. 조금은 힘든 모습을 보여도 애교로 봐줄 텐데.' 그때 갑자기 정면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정찰을 보냈던 병사가 나는 듯 말을 몰아 오고 있었다. "어? 뭐야? 뭔가 발견했나 본데?" 바알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정찰병은 조슈아 앞에 이르러 멈추어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 쳤다. "정면에 수백 구의 시체들이 있습니다. 훼손된 정도로 보아 인간의 짓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전선도 아닌 이곳에 시체들이?" 조슈아의 표정이 굳어 졌다. 그녀는 바알에게 눈짓을 보내며 급히 말을 몰아 갔다. 협곡 안을 가득 매운 시체들을 보며 조슈아는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시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저기 조각나 흩어져 있거나 심하게 뭉그러져 있는 시체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찰병의 말대로 인간의 짓은 아니야, 조슈아!" 바알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슈아는 말에서 내려 시체들은 관찰하였다. "바알! 이리와 봐!" "왜? 뭔가 발견했어?" 바알이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조슈아는 그런 데로 모양을 갖춘 시체를 가리켰다. 시체는 검은 구렛나루를 가진 거한이었는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고 한 손에는 부러진 도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자는 용병이 맞지? 그렇지?" 얼마간 용병들과 생활한 그녀는 이제는 척 보면 그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바알은 굳은 표정으로 그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자 뿐만 아니야. 여기 있는 대부분의 시체가 용병들이다. 조슈아!" 그의 말대로 모양을 알아 볼 수 없는 시체들의 주위에도 정규군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기류들이 널려 있었다. 조슈아는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몸을 떨었다. "서…설마 이들이 우리가 합류할 선발대일까?" 바알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 어쨋든 시돈에 용병이라고는 그들뿐이었을 테니까." "뭐야! 그렇다면 칼라마을이라는 곳은 이미 전멸했다는 뜻이야?" 조슈아가 소리치자 바알이 여지껏 보여 준 적이 없던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커. 이들의 시체가 모두 그들이라면 여기 보이는 것만으로도 선발대의 절반은 되는 숫자니까." 모든 일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틀어지고 있었다. 조슈아는 이를 악물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그들의 뒤에 용병단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NEXT 제12화 용병대장 조슈아 part2 1 "이 전쟁은 틀렸습니다. 대장! 돌아가던지 바리의 정규군과 합류해야 합니다." 100인 대장 파간이 그 매끈한 대머리에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자 가토스도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제가 둘러본 바로는 시체들은 모두 용병들이었습니다. 지금 매장하는 중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가는 길에 계속 이런 풍경들을 보게 될 겁니다." 시체의 매장을 위해 주위에 정군한 조슈아의 용병단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매장하는 중이었다. 조슈아와 백인대장들은 그녀의 천막에서 용병단의 향방을 결정하는 회의로 여념이 없다. 조슈아는 상석에서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앉아 있다가 생각났다는 듯 멘디에타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 보다 더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의 왼쪽 뒤편에 서있었다. "멘디에타! 칼라마을은 그냥 보통의 마을인가요? 이런 국경의 최전방에 위치한 마을은 보통 군사요지일 텐데요?" 그녀의 지적에 멘디에타가 힘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습니다. 칼라는 최고의 요새라고 할 수 있죠. 세 방위가 깎아질 듯한 절벽이고, 남쪽은 튼튼한 성벽이 가로 막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안에서 지키려고만 한다면 어떤 상대라도 쉽게 점령하기는 힘들다는 것이군요?" 조슈아의 의도를 조금은 눈치 챘는지 멘디에타의 눈에 희미하게 생기가 돌아왔다. 조슈아는 그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100인 대장들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발견한 시체들 중에는 민간인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그들이 요새를 점령당해 도망쳐 나온 것이라면 이렇게 골라 낸 듯이 그들만 빠져 나올 수는 없죠. 그래서 나는 이들이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계약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용병들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칼라에는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는 건가?" 바알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밤중에 쫓아온 마물들에게 당한 걸 겁니다. 낮에라면 그리 쉽게 당할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멘디에타가 조슈아 대신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대부분의 선발진이 죽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야. 도대체 어쩔 건가? 대장." 자르델이 떠보듯이 물어 왔다. "우리는 칼라로 갑니다. 조금은 남아있는 용병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공포에 떨고 있는 민간인들이 있어요. 우선 성에 다다라 상황을 보고 적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겠죠." 조슈아는 생각해보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묘한 설득력이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투덜거려야할 자카엘도 군소리 없이 그녀의 말에 따르는 눈치였다. 조슈아가 천막에서 나오자 샤레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막 매장을 마친 구덩이 앞에서 기도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조슈아, 아저씨들이 수근거리고 있어. 여기 죽은 사람들이 선발대라면서?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는 거야?" 그녀는 은근히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이대로 칼라까지 가야 해. 지금 칼라에는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마을사람들과 확실치는 안지만 동료 용병들도 있어." 조슈아가 그들을 동료라고 한 말에 이채를 띄며 샤레셀은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가면 무슨 수가 있는 거야? 탈출시킬 방법이라든지……." "아니! 가서 생각 해볼래." 조슈아는 다시 정색을 하며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샤레셀, 사실대로 말하라면 나도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어. 우리는 눈앞에서 그들을 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구." 조슈아를 바라보는 샤레셀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 아이는 잠시 보지 못한 사이에 많이도 컸구나. 이제 내가 돌봐주지 않아도 자기 길을 스스로 결정 할 만큼…….' 언제나 동생 같았던 철부지 왕자가 훌쩍 커버렸음을 느끼고 그녀는 조금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2 용병단은 행군 속도를 올려서 달리듯 협곡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런 꽉 막힌 협곡 안에서 한 밤중에 마물들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찌 해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조슈아는 이제 거의 창백해진 얼굴로 용병들을 격려하며 행군속도를 늦추지 않아 다행히 해질녘에는 협곡을 빠져 나와 길다운 길을 만나게 되었다. "이대로 간다면 자정 정도에는 성문에 닿을 겁니다." 멘디에타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상대를 만나도 전술적으로 어쩔 수 없는 좁은 협곡을 빠져 나와 한숨 돌리겠네요. 이제부터 정찰조를 짜서 모든 방위에 배치하세요. 그리고 가장 빠른 기수를 보내서 칼라에 기별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는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말을 돌려 후진으로 향했다.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바알이 다가 왔다. "저 친구 제법이야. 벌써 200이나 되는 용병들을 병과 별로 나눠서 순식간에 정리했다구. 저런 친구가 페드라에도 있다면 좋겠는데……." 그는 정말로 부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는 진짜 고급기사야. 왕국으로서는 꼭 필요한 인물이지. 저런 자를 이런 용병부대에 배치했다는 것은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중대한 일을 떠맡고 있다는 걸 거야." 조슈아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바알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가?'하는 표정이 되었다. 일단 가도로 들어서자 안정적으로 행군할 수 있게된 용병단은 예상보다 빨리 칼라 마을 외곽의 밀밭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적의 공격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밭에는 버리고 달아난 것으로 보이는 농기구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마물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널려 있었다. 마물을 실제로 본적이 없는 조슈아는 어쩐지 상대를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언덕 너머에서 말발굽 소리들이 들려오더니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순식간에 언덕을 내려와 용병단의 앞으로 달려 왔다. "와 주셨군요. 기별을 받고 성은 지금 축제 분위기입니다. 제가 칼라의 수비대장입니다. 대장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눈앞의 조슈아를 잠시 감탄한 듯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돌려 100인 대장들을 보며 말했다. "이분이 용병 대장이십니다." "예에?" 멘디에타가 그녀를 소개하자 수비대장은 기겁을 하였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당하니 기분이 나쁜 상황이었다. "내가 용병대장인 조슈아에요. 성까지는 아직 먼가요?" 조슈아는 용케 기분을 나타내지 않고 조금은 차갑게 말하였다. "아…네…저 언덕만 넘으면 성문이 보입니다. 실례했습니다. 조슈아 님." 그는 그녀의 태도에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3 성문을 들어서니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나온 듯 용병단을 환영하는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 했다. 군중들을 뚫고 영주쯤으로 보이는 70세 정도의 귀족풍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듯 손녀로 보이는 15∼6세 정도의 귀여운 소녀의 부축을 받으며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나는 칼라의 영주 트라젠 후작이오. 그런데 대장님은 누구……." 또 다시 짜증이 나려는 조슈아 대신 수비대장이 말에서 내려 급히 입을 열었다. "여기 숙녀분…아니…이 용사님이 용병대장 조슈아 님이십니다. 영주님." 엄청난 실수를 할 뻔한 수비대장은 조슈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이번에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영주의 노안에 놀라움이 퍼지고 그를 부축하고 있는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농담이겠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허…이거 정말…실례했소. 대장. 자! 피곤하실 테니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십시다." 과연 경험 많은 노영주는 순식간에 표정을 지우며 분위기를 바꾸어 그녀에게 길을 권하는 손짓을 해 보였다. 조슈아는 이제는 한계에 이른 피로와 아까 본 마물의 흔적에 의한 두려움 등에 딱딱히 굳은 표정이 되어 영주와 함께 성으로 들어갔다. 수비대장은 그녀가 자신을 죽일 것 같은 표정인지라 바짝 얼어 있다가 그녀가 자신을 지나쳐 가자 겨우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더러운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4 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밖으로 통하는 성문은 오직 하나였으며, 성벽주위에는 호 가 파져 있고, 도개교를 지나 성문을 들어 와도 또다시 성문이 있는 이중 구조였다. 그리고 성이 기둥 같은 모양의 산 위에 세워져 있어 성문 외에 방위로는 날아오기 전 에는 감히 침투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그야 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영주의 회의실에서 성의 구조도를 관찰하던 조슈아는 일단 성의 방위력에 안도하고 있 었다. 영주는 의자에 앉아 조슈아가 구조도를 보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 옆에는 흑발의 귀여운 소녀가 서있었는데 그녀는 연신 조슈아의 얼굴을 훔쳐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영주님. 오다가 협곡에서 선발진으로 보이는 시체들 을 발견 했습니다만 어찌 된 것입니까?" 조슈아가 구조도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치우며 입을 열자 소녀의 표정에서 어쩐지 분노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가더니 결국 당했군요. 그들은 첫 전투를 벌이고는 당신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을 거라며 모두 후퇴했어요. 그래서 얼마 안돼는 수비군과 마을 사람들이 성을 지켜 왔죠. 도대체 당신들 용병들은 사명감 같은 건 없나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떠나 버릴 수가 있죠?" "퓨어리스. 그만두렴! 이분은 여기까지 위험한 길을 마다 않고 오신 분이야." 소녀가 흥분하자 노 영주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그는 머슥한 표정의 조슈아를 돌아 보며 미안한 듯 말했다. "이거 딸아이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사실 우리는 매우 힘든 날들을 보냈다오." 그러나 조슈아는 딸이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따…따님이십니까?" 그녀는 놀라움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허허! 그렇소 늦게 얻은 내 외동딸이라오." 퓨어리스라고 불린 소녀는 조슈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녀의 태도에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조슈아가 말했다. "따님의 말씀대로 라면 그럼 이 성에 있던 용병들이 모두 떠났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그들은 확실한 대장이 없어 통제가 되지 않는 그저 오합지졸들이었지요." 그의 말에 조슈아는 조금은 납득이 가고 있었다. '여기 있던 용병단들은 후발대로 가는 백인 대장들과 자신들이 합류하여 제대로 조직을 개편한 후 전투에 참가할 용병들이었다. 그런데 우두머리도 없이 강대한 적의 공격 을 받아 조직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섞여 전투에 참가하게 되 었으니, 이미 그 시점에서 계약 내용에서 크게 벗어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로 합의하에 계약을 포기하고 성을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성의 주민들에게 그것은 큰 상처가 되었겠지.' 조슈아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단 이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확실히 저희들의 실수였군요. 영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확실한 지도자가 없어 자의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좀더 빨리 도착했어야 했는데 정말 면목없습니다." "당치 않아요. 당신들의 탓이 아니지 않소."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영주는 당황하여 손을 저어 보였고, 소녀의 표정에서도 싸늘한 기운이 사라지며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저희들이 왔으니 안심하십시오. 200명 남짓한 용병들뿐이지만 모두 최고급의 정예요원들이니까요." 조슈아는 고개를 들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녀의 행동은 확실한 효과가 있었는지 영주와 그의 딸은 한결 표정이 풀려 있었고, 회의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해갔다. 5 "여∼. 조슈아, 영주는 뭐라고 해?" 조슈아가 한 무더기의 두루마리 문서를 들고 나오자 바알이 얼른 받아들며 물었다. 그 옆에는 멘디에타도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부터 성의 인원들과 우리 병력을 나눠서 재배치 해야해. 멘디에타가 수고해 줘 요. 일단 자정이 되기 전에 어느 정도 구색이 잡히게만 해줘요." 그녀의 말에 멘디에타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급히 복도로 사라졌다. 조슈아는 바알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알은 100인 대장들을 회의실로 모아 줘." 그녀가 숨쉴 틈 없이 일을 전개해 나가자 바알은 질렸다는 표정이었으나 곧 씨익 웃으 며 군소리 없이 멘디에타의 뒤를 따라 뛰어 나갔다. 바알이 사라진 후 조슈아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두 눈에 손을 얹었다. 그때 그녀의 이마를 만지는 작은 손이 있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샤레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간 좀 내봐." 조슈아가 힘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떡이자 샤레셀이 나직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 다. 그러자 이마를 짚은 그녀의 손에서 옅은 푸른빛의 기류가 형성되더니 곧 조슈아는 머리 속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을 그러고 있던 샤레셀이 그녀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 내자 조슈아는 마치 가볍게 한잠 자고 일어 난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뭘 한거야? 샤레셀?" "체력 회복의 마법이지만 왠지 너는 마법이 잘 듣지 않는 구나. 조슈아." 샤레셀이 의아한 듯 말했다. "아니야. 이 정도로도 충분해. 몸이 훨씬 가뿐해 졌는걸?" 조슈아는 팔을 휘휘 돌려 보이며 힘있게 말했다. "조슈아, 그 정도여서는 안돼! 너는 아직도 창백해. 나는 최상급의 회복주문을 외웠 어. 이 정도 회복 마법이면 장정 10명 정도는 생생해 진다구. 그런데 너에게는 완전히 먹혀들지 않고 대부분이 중화되었어." "그러면 내 변화한 몸이 마법을 중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러면 좋은 거 아니야?" 조슈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샤레셀의 표정이 구겨졌다. "너 바보니? 검사인 네가 공격마법이라면 모를까, 치료계나 회복계의 마법까지 중화시키는 것이 뭐가 좋아." "그…그러면 나는 병을 가지고 있는 거야?" 조슈아가 당황해서 묻자, 샤레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의 몸은 불가사의 그 자체니까,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진데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너는 매우 위험해. 나로서도 네가 심한 상처를 입으면 구해줄 방법이 없어. 다른 방법을 연구해 보겠지만 그때까지는 방어구 정도는 확실히 챙겨 입으라구." 조슈아는 그녀의 엄포에 왠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제부터 생전 처음 보는 마물들과 전투를 치루어야 하는 그녀로서는 언제 큰 상처를 입을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은근히 샤레셀의 존재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약해 빠진 쓸모 없는 몸은 치료마법도 회복마법도 듣지 않는 콧대 높은 몸이시라는 것이다. 그녀는 당장 영주에게 부탁해서 가볍고 튼튼한 갑옷을 얻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00인 대장들은 회의실의 원탁에 둘러앉아 왠지 경악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매복해서 적을 치자는 거요? 대장!" 자르델이 확인하는 투로 말하였다. "그래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가 성에서 아무리 많은 마물들을 처치한다 해도 소 환사를 잡지 못하면 다 소용없는 헛수고일 뿐이에요." "그럼 뭐야. 마물들이 득실거릴 때 마법사를 찾으러 밖에서 버티라는 거냐?" 조슈아가 지형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남의 일처럼 대답하자 자카엘이 애꾸눈을 빛내며 소리 쳤다. 바알도 조금은 황당한 얼굴로 조슈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래서 지형도를 보고 연구하는 거예요. 적이 아직 성에 우리가 와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가정하면 성을 나와 자신을 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거예요. 그렇다면 최대한 전장을 한눈에 보며 마물들을 지휘하고 싶어할 것이고. 우리는 그걸 이용해야 하는 거죠." 그녀가 너무나 당연한 듯 말하자 백인 대장들은 혼란에 빠진 듯 술렁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확실히 놈을 잡지 못하면 마물들은 아무리 죽여봐야 우리만 피보는 거라구." "그래도 마물들의 힘이 넘쳐나는 한밤중에 성밖에 나가 있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닌가?" 모두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중에 가토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싸움이 시작되면 적은 성에 병력이 보강 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러면 신변경계를 강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조슈아는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바로 대답하였다. "그래서 첫 전투에서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겁니다." 그녀의 너무나 대범한 말에 좌중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자카엘의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킥킥... 이거야 원. 너는 마물들과 싸워 본적이 없군? 그러니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래요. 바알에게 들은 것이 전부예요. 보통 용병이 4∼5명이 붙어야 한 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조슈아가 조금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보통 그 정도지…그러나 그건 이쪽도 제대로 된 군단과 진형을 갖추고 있을 때 의 이야기야! 도대체 누가 마물로 득실대는 벌판에서 매복을 하겠나? 수당을 10배로 올려준다 해도 누구도 나서지 않을 거야." "당연히 우리들이 해야죠." "그렇지…에엑?" 얼떨결에 대답하던 자카엘이 의자 채 뒤로 물러났다. "왜 놀라죠? 당연히 가장 무위가 높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드디어 참지 못하고 가장 젊은 100인 대장 루이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는 우리를 다 죽일 참이구나! 하려면 너 혼자 해. 나는 내일 날이 밝는 데로 떠나겠어." 쾅∼. 조슈아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직 급료를 받지 않았으니 달아나도 잡지는 않겠어요. 그러나 무얼 하려해도 먼저 적을 처리하지 않으면 이 성을 나갈 수 없어요. 당신도 그 수백 구의 시체들을 봐서 알잖아요." 그녀의 호통에 루이가 감정을 주체못해 부르르 떨다가 주저앉았다. 조슈아는 목소리 를 가라앉히고 말을 이어갔다. "들어보면 그렇게 무모하기만 한 작전은 아니에요." 그녀는 지형도를 펼쳐 보였다. 지형도에는 성을 중심으로 마을과 밭의 위치, 산의 높이와 계곡의 넓이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를 보세요. 성문과 일직선상에 위치한 민둥산이 있어요. 그리고 조금은 각도가 좋지 않지만 그런 데로 전망이 좋은 곳은 이 두 곳이죠." 지형도에는 세 곳의 언덕에 붉은 표시가 되어있었고 과연 그녀의 말대로 전장을 관찰 하기에 가장 알맞은 위치는 성문 남쪽에 위치한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양쪽에 조금은 떨어진 위치에 또 다른 두 개의 언덕이 있었다. "제 판단으로는 적의 마법사가 그리 멀리 떨어져 마물들을 지휘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그리고 우리의 공격력을 얕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 우리는 조를 나눠서 이 세 언덕 근처에 숨어 있다가 성이 공격당하는 시점에 뛰어 나와 언덕으로 올라가는 거죠. 여러분이나 나라면 마물 몇 마리 정도는 쉽게 뚫고 마법사를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 아냐? 숨어 있다고 마물들이 찾아 내지 못할 리가 없잖아? 땅 밑에라도 숨으라는 이야기야?" "그래요." 바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조슈아가 바로 대답했다. 용병들은 그녀의 대답에 멍해졌다. "땅을 파놓고 숨어 있어야지요. 멘디에타에게 각 길목과 산등성마다 정찰병과 궁수를 배치하게 했어요. 마물들이 다가오면 바로 불화살로 신호를 보낼 거예요. 그러면 우리 는 재빨리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숨어 위장하고 있다가 전투가 무르익을 시각에 뛰어 나가는 수밖에 없죠. 일단 마법사만 처리하면 소환수들은 사라지니 최대한 빨리 언덕을 돌파해 마법사만 처리하면 되요." "끄응―." 누구의 입에서 나온 신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심정은 모두 똑 같았다. 그때 어느 정도 납득한 얼굴이 된 자카엘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마물들을 상대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 남쪽 언덕과 괜히 땅속에 숨어 있다 나와서 머리나 긁적이게 될지도 모를 나머지 두 곳 중 어디에 배치되느냐 이군." 그러자 모두 흠칫하며 노골적으로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전쟁을 하는 그들로서는 같은 값이면 위험한 작전은 피하려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남쪽에는 나와 지원자 두 명이 갑니다. 나머지 두 언덕은 알아서 결정하세요." "이...이봐. 조슈아!" 바알이 일어나 소리쳤지만 조슈아는 개의치 않고 있었다. "자! 지원자 두 분을 받겠어요." 바알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에 결국 포기하고 의자에 주저앉아 말했다. "당연히 내가 간다." 그의 말에 조슈아는 힘겨운 얼굴로 싱긋 웃어 보여주었다. '그래 같이 죽는 다면 부부귀신 정도는 되겠지.' 그는 불쌍하게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까지 헛물을 켜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한자리는 내가 채우죠." 갑자기 문을 열며 들어오던 인물이 말했다. 돌아보니 멘디에타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 사람은 이럴 때 꼭 밖에서 듣고 있다가 나타나는 것 같이 타이밍을 잘 맞춘단 말야.' 조슈아는 의아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러면 이제 되었군요. 나머지 자리는 여러분이 알아서 채우세요. 단, 힘의 균형을 생각 해서 배치하는 것은 잊지 마세요. 실패하면 여기서 굶어 죽을 때까지 나가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일동을 물리고는 멘디에타를 손짓해 불렀다. "멘디에타 씨, 맡긴 일은 잘 되었나요?" 그녀의 말에 그는 힘들었다는 듯 장난스럽게 어깨를 두드려 보였다. "이 곳 지형에 익숙한 수비군들과 마을 사람들로 구역을 정해서 이중으로 교대조를 만들었습니다. 일단 급습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수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한가지 오늘 밤 안에 해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그녀는 지도를 펴 보이며 말했다. "여기 표시된 곳에 3명이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엄폐물로 위장해 두세요.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 급히 처리해 주기 바래요." "알겠습니다." 체력도 좋은 멘디에타는 지도를 접어 품에 넣고는 나가려다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슈아!" "아! 예? 뭐죠?" 그가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처음이어서 조슈아는 당황하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계약당시와 조건이 틀려진 마당에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녀가 포기하지 않은데 감사하고 있음은 분명했지만 그녀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NEXT 제12화 용병대장 조슈아 part 3 다행히 첫 날밤에는 적의 공격이 없었다. 바로 전날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하루쯤 여유를 두는 것 같다는 방위대장의 말이 있었지만 조슈아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첫 날밤을 뜬눈으로 지센 조슈아는 마물들이 아침에 쳐들어오는 일은 없다는 이야기 덕에 아침부터 한나절까지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그녀가 방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정오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경험 많은 용병들은 이 상황에서도 푹 쉬었는지 벌써 무기손질을 하거나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는 자들도 있었다. 조슈아는 성 중앙의 지붕 없는 홀을 지나 영주가 머무는 내성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트라젠 후작은 민원을 처리 중인지 책상 가득 서류 더미를 쌓아 놓고 읽고 있었다. 그는 조슈아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으나 그녀가 헛기침을 하자 피곤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오. 자! 이리 앉으시구려." 후작이 자리를 권했지만 쭈뼛거리며 조슈아는 그대로 서있었다. "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인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서요." "개인적이라……. 말해 보시오." 조슈아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망설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이 성에 혹시 여자용의 갑옷은 없습니까?" 말하고 나서 시선을 돌려 딴청은 피우는 그녀였다. 그녀로서도 남자용의 갑옷을 입어 보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도무지 가슴이 방해되고 보기에도 어색해 입고 싶은 생각이 들지가 않는 것이었다. "여성용의 갑옷이라면 내 딸 퓨어리스에게 가면 있을 거요.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검술을 단련해 와서 지금은 상당한 수준이라오." 후작은 무언가 흐뭇한 얼굴로 답하더니 가볍게 예를 치하고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 마침 지금은 그 아이의 연무 시간이구려. 중앙홀의 왼편의 복도로 들어가면 연무장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요. 마침 딸아이와 체격도 비슷한 것 같으니 몸에 맞는 갑옷을 구할 수 있을 거요. 가서 부탁해보시오." 소녀는 4명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수비식을 연마 중이었다. 대개 검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게 되면 아무리 많은 적을 상대한다해도 한번에 4명씩 상대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어 가게 된다. 조슈아가 연무장에 들어섰을 때에 검고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영주의 딸 퓨어리스는 네 방위에서 쏟아지는 검격을 자유자제로 처내면서 보법까지 연마하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제법인데?' 조슈아는 제법 감탄한 얼굴이었다. '내가 10살 때쯤 하던 훈련이군. 저 소녀는 16세라고 들었는데 저 정도면 근위조는 아직 무리겠지만 왕국기사단의 일원으로 손색이 없군.' 생각은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실제로 아카바에는 16세의 소녀 기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조슈아의 어머니인 소피아 왕비가 근위조에 합격한 이후 아직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소녀의 검술은 대단한 경지인 것이다. 조슈아가 입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는 동안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눈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 곁눈질로 입구 쪽을 바라본 소녀는 조슈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조슈아를 발견하고 갑자기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것이 조슈아의 눈은 감탄했다기보다는 대견하다는 투로 자신의 훈련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멈춰요." 소녀가 차갑게 일갈하자 연습이 끝났다. 병사들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연무장을 빠져나갔고 곧 연무장에는 땀에 젖은 퓨어리스와 조슈아만이 남았다. 그녀는 적의를 숨기지 않고 불쾌한 눈빛으로 조슈아를 돌아보며 타올로 땀을 닦고 있었다. "용건이 뭐죠? 내 연습을 보러 왔나요?" 그녀가 자신을 지나치게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자 저윽이 당황한 조슈아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인지라 곧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영주님께 여성용의 갑옷을 좀 부탁드렸더니 아가씨에게 오면 얻을 수 있다고 하시기에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찾아 왔어요." 조슈아의 말에 소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당신은 용병이잖아요. 그런데 전장에 갑옷도 가지고 오지 안았다는 말인가요?" "그런 사정이 좀 있었어요." 자신의 궁에 있는 10여 벌의 멋진 갑옷들을 생각하며 조슈아는 시무룩해졌다. 퓨어리스는 이 믿기지 않는 미모를 가진 소녀 용병대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북구 최강 전투국가 귀족의 딸로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검술실력을 쌓기 위해 오랫동안 수련해 왔지만 소녀인 그녀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군대의 지휘였다. 상급 기사라도 되기 전에는 그녀가 군대의 지휘를 맞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질투심마저 유발시키는 이 금발의 미소녀는 사상 최강의 용병단의 대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일들을 자신이 아직 어린 소녀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 자위하던 그녀로서는 이만 저만 짜증나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거기다가 나이도 비슷한데다 자신보다 더 미소녀임에야……. 퓨어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더니 곧 입가에 싸한 미소를 머금고는 벽면에 걸려 있던 날이 없는 연습용의 장검을 꺼내어 조슈아에게 던졌다. 그러자 조슈아는 얼떨결에 검을 받아들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갑옷을 가지고 싶다면 드리죠. 그 대신 당신은 내 연습대가 되어줘야겠어요. 말해 두지만 내 갑옷은 비싼 값을 치루어 만든 명품이에요." 퓨어리스는 연무대로 올라가 그녀와 같은 날 없는 장검을 둘고 휘둘러 어깨를 풀며 차갑게 말했다. 조슈아는 대단히 당황하였다. 그녀로서는 어린 소녀와 검 상대를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는 일인 것이다. "저…저는 여자와 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현재 모습을 망각한 웃기는 대답이었지만 조슈아는 그것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퓨어리스를 더욱더 분노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감히 나를 조롱하는 거예요? 당신도 내 또래의 소녀일 뿐이에요. 자! 정말로 내 갑옷을 원한다면 이리 올라와요." 조슈아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일은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녀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연무대로 올라갔다. 퓨어리스는 검을 치켜들어 상단 공격 자세를 취하며 강렬한 눈빛으로 조슈아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저, 그러면 이렇게 하죠." "뭐예요?" 갑작스러운 조슈아의 말에 퓨어리스가 자세를 풀지 않고 대답했다. 조슈아는 그녀의 태도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아가씨는 수비식을 연마한 것 같으니 이번에 공격을 해보세요. 그러면 저는 오랜만에 방어식을 연마하고요. 그리고 체력을 아껴야 하니까 50수로 제한하죠. 어때요?" 딴에는 기사도를 발휘한다는 생각에 상대와의 실력 차를 감안해 제안했던 조슈아는 퓨어리스의 얼굴이 구겨지며 이제는 두 눈에 살기마저 띄우는 것을 보며 순간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그래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50합 동안 막을 수 있다면 막아 보시죠." 그녀는 악다문 이빨사이로 분노에 떨리는 대답을 하고는 검을 치켜들며 다리를 앞뒤로 벌렸다. '뛰어들 생각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검을 높이 들었는데?' 북방의 검술을 대해 본적이 없는 조슈아는 그녀의 이상한 기수식에 당황했다기보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이야앗―!" 다부진 기합을 지르며 퓨어리스가 뛰어들어 왔다. 아돌이라고 보기에는 뛰어드는 폼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내려치는 자세로 보기에는 검을 너무 높이 치켜들었다. '뭐지?' 조슈아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사각까지 밀고 들어온 그녀는 갑자기 그대로 꼬끄라지듯 앞으로 몸을 굴리더니 당황한 조슈아의 얼굴에 발뒤꿈치를 날렸다. '어엇?'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방법이었다. 조슈아는 그대로 검편을 들어 밑에서 올라오는 다리공격을 비스듬히 받아 쳐갔다. 그러자 갑자기 얼굴로 쏘아오던 다리가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며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바닥을 굴러 퓨어리스는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조슈아는 이런 식의 검식을 본적이 없어 매우 당황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지만 사실 놀라움은 퓨어리스가 더 컸다. 그녀로서는 한번에 끝내기 위해 필살의 기술을 쓴 것인데 조슈아의 민첩하고 적절한 수비에 막혀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강적이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첫 합에 아끼고 아끼던 필살기를 써버렸다. 이제는 통상 공격술로 끝장을 내야 한다.' 퓨어리스는 검을 등뒤로 숨기듯 치켜들고는 상체를 숙이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시돈의 검술이라는 것은 격투기와의 혼합술로 발달되었군. 이거 의외로 재미있는데?'그녀의 첫 공격을 막아낸 조슈아는 이제 대강 북방의 검술을 읽을 수 있었다. 타앗―. 다시 퓨어리스가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며 달려 왔다. 머리부터 밀고 오는 묘한 돌격이었지만 조슈아의 앞에서 갑자기 검이 나타났다. '어? 던진 거냐?' 퓨어리스의 등뒤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검이 어느 새 그녀의 양미간사이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뛰어들면서 허리 뒤에서 손목을 사용해 검을 띄운 것이다. '정말 잔꾀가 발달한 검술이군.' 검이 닫는 타이밍과 그녀가 뛰어들어오는 타이밍이 절묘해서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는 완전히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한번 씨익 웃더니 그대로 회전하며 날아오는 검의 검편에 정확히 검을 스치더니 그대로 돌려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흘리고는 달려오는 소녀의 이마에 검을 들이대었다. 그러자 당황한 퓨아리스가 다리를 구르며 그녀의 머리위로 몸을 날려 등뒤로 날아가더니 땅에 떨어진 검을 들고 반대편에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조슈아가 몸을 돌려 돌아보니 그녀의 눈은 경악으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막히다니 저 여자는 도대체 뭐지?' 그녀로서는 눈앞의 상대가 대륙전체에서도 10걸안에 들 검의 명인임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때 조슈아의 마치 평론을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가씨의 검술은 재미있군요. 그러나 너무 잔재주에 의존해서는 진짜 대가를 만나면 오히려 모두 헛점 투성이로 보이게 되요. 이제 진짜 검의 기술로 공격해 보세요." 마치 검술 선생 같은 말투였지만 실제로 조슈아의 기분은 그랬다. 눈앞의 소녀가 검을 익히기에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을 간파하고 지도해주고 싶은 충동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소녀의 기분을 참담했다. '잔재주라고? 시돈에서 3대 검술명가로 통하던 우리 가문의 비전검술이?' 그러나 할말이 없는 그녀였다. 저 용병대장인 금발의 미소녀는 자신이 가장 자랑하던 필살기를 모두 가볍게 막아 낸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는 검을 수직으로 들고 상단 공격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조슈아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샤레타의 수비자세를 취하였다. 퓨어리스는 여지껏 만나 본적이 없던 최강의 상대가 설마 자기 또래의 소녀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자신감은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전 대륙의 그녀또래의 검사를 통틀어 그녀의 일검을 받아낼 검술을 가진 자는 한 두 명 정도이고, 그나마 소녀들 중에는 그럴 만한 자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힘을 다해 눈앞의 미소녀를 쓰러 뜨려야 한다. "이야압!" 정통적인 아돌이 들어오고 있었다. 공격의 무게는 떨어 졌지만 가벼운 몸을 이용한 아돌은 속도만큼은 상급 기사 이상이었다. 조슈아의 눈에 감탄의 빛이 서리더니 곧 순식간에 쏘아져 오는 검을 가볍게 검편으로 받아 미끄러뜨려 어깨위로 흘려 버렸다. 퓨어리스는 온힘을 다한 공격이 힘의 방향을 잃고 미끄러져 버리자 참을 수 없는 묘멸감이 일었다. "핫!" 그녀는 미끄러지던 검을 그대로 머리 위에서 회전시키며 허리를 틀어 조슈아의 무릎을 베어 갔다. 그러나 조슈아는 여유롭게 오른발로 퓨어리스의 검손잡이를 차올려 시간을 벌더니 그대로 검을 내려 또 맞받지 않고 몸을 틀며 검을 미끄러뜨렸다. '이 여자는 나를 진지하게 상대하고 있지 않다.' 언뜻 소녀의 눈에 모욕감을 견디지 못한 듯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슈아가 자신의 공격을 가볍게 흘리는 기술을 보고 그녀가 자신의 공격을 맞받아 친다면 자신의 힘으로는 반동에 손을 다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조슈아는 마치 검술 선생처럼 그녀의 공격을 가볍게 흘리면서 자세의 흐트러짐이나 검끝의 흔들림을 검편으로 가볍게 밀어 교정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합이 흐르자 퓨어리스는 자신이 지난 몇 년간 아버지에게 배웠던 것 보다 더 많은 검술 공부를 이 짧은 시간동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모멸감과 질투심을 넘어 서서히 상대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이 싹터왔다. '이 여자의 검술은 나의 검술을 까마득한 데서부터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어. 왕국 근위대장이었던 아버지도 이 여자와 상대가 될 수 있을 지 나는 모르겠다.' "자! 여기까지입니다." 그 와중에도 수를 세고 있었던가? 조슈아가 그녀의 마지막 상단 찌르기의 자세를 검편으로 미끄러뜨려 교정해 주고는 조금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했던 50수를 채웠군요. 이제 갑옷을 얻을 수 있을 까요?" 퓨어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조슈아는 빨리 이 곤란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퓨어리스는 조슈아의 얼굴을 묘한 눈길로 쳐다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약속은 지키죠. 따라 오세요." 그녀는 먼저 몸을 돌려 연무대를 내려갔고 곤란한 표정의 조슈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그 뒤를 따랐다. 조슈아가 안내되어 들어간 방은 퓨어리스의 방이었다. 전체적으로 소녀 취향으로 꾸며져 있기는 했지만 벽면에 걸려 있는 무거워 보이는 장검과 은장식의 아름다운 갑옷들로 방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는 장식장에 있는 3벌의 갑옷을 꺼내어 탁자에 늘어놓았다. 모두가 가슴 부위가 튀어나와 있고 가슴의 튀어나온 안쪽 부위에는 가공한 양모가 붙어있는 여성용의 갑옷으로 조슈아는 이제 가슴이 쓸려서 아파 오던 남성용의 갑옷을 입지 않아도 되었다.그녀가 눈을 빛내며 갑옷들을 바라보자 퓨어리스는 훔쳐보듯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고는 중앙의 세밀한 은빛장미 문양이 새겨져 있는 갑옷을 들어 건내 주었다. "이것이 가장 좋은 거예요. 당신에게 드리죠. 일단 가볍고 착용감이 좋아요." 조슈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갑옷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상체에 걸쳐 보았다. 여성용의 갑옷은 앞뒤의 연결고리가 남자의 것과 반대여서 잠시 당황했지만 곧 고리를 채우고 품을 재보니 그녀의 몸에 딱 맞고 대단히 가벼웠다. 그리고 주먹으로 두드려 보자 진동이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훌륭한 갑옷이군요." 그녀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퓨어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신 정도의 검사가 갑옷도 없다는 것은 정말 이상하군요." "저는 남자용의 갑옷 밖에 없었어요." 조슈아가 씨익 웃으며 대답하자 퓨어리스의 얼굴에 문득 연민 같은 것이 지나갔다. '이제 조금 알겠어. 이 여자는 분명히 남자들 사이에서 혹독하게 검술가로 키워 졌을 거야. 저 미모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서 춤도 추고 자신을 숭배하는 소년들에게 둘러 싸여 있고 싶겠지만 그녀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야.' 마음대로 조슈아를 불쌍한 여검객으로 만들고 만 퓨어리스는 갑자기 그녀를 대하는 태도 가달라졌다. "자 이리 와요. 이 갑옷에 어울리는 바지를 줄게요. 당신이 입고 있는 품이 넓은 남성용의 바지는 도대체 어울리지가 안네요." 그녀는 조슈아의 뒤로 다가가 갑옷 안으로 말려 들어간 뒷머리를 빼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예에…그런가요?" 방금까지 차갑게 굴던 소녀가 뒷머리를 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대해주자 조슈아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그런 조슈아를 보며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NEXT 제12화 용병대장 조슈아 part 4 바알은 한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는 조슈아를 깨우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아갔다가 허탕을 치고 툴툴거리며 성벽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망루에 올라가 성안을 내려다보니 전쟁중 이라는 것이 믿기 지 않을 정도로 마을은 평화스러웠다. 확실히 적이 인간이 아니고 마물만이라고 한다면 대낮에 처들어오는 경우는 없을 테니 오히려 끊임없이 긴장해야만 하는 인간과의 전쟁보다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적의 공격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은 이런 훌륭한 요새로서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랄 수 있었다. 밤에 아무리 공격을 당해 성벽에 문제가 생겨도 낮 동안 방해받지 않고 보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알은 성밖을 내다보다가 멘디에타가 성문 밖에서 취약구역을 점검하는 것을 발견하 고 '참 바지런한 녀석이군'이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페드라' 왕국기사단 중에 저렇게 사명감 투철하고 실무에 능한 기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오스, 그 친구 내가 오랜만에 '다테'에 들렀는데도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았지.' 바알은 조금은 섭섭한 표정을 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섞어 빠진 왕실기사단의 유일한 기둥인 것이다. 일곱 살이 위의 그는 어릴 때부터 서로 친구처럼 지내기는 했지만 바알에게는 친형 같은 존재였고, 누이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바알 씨 여기서 뭐해요?" 그때 그의 상념을 깨는 짤랑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 볼 것도 없이 조슈아의 친구인 신녀 샤레셀이었다. 바알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경치를 좀 보고있었죠. 에레크트라, 잘 잤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바알 오빠?" 이제는 샤레셀의 추종자처럼 되어 버린 에레크트라는 그녀와 팔짱을 끼고 마치 어미 오리를 쫓아다니는 새끼 오리처럼 어디든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귀찮을 만도 하지만 정이 많고 무엇보다 외동딸이었던 샤레셀은 에레크트라를 상냥히 대해주어 그들의 관계는 이제 친자매 이상이었다. "조슈아를 보셨습니까? 방에 없던데……." 바알이 묻자 샤레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방에 갔다가 오는 길인데 이미 나가고 없더군요." 그때 갑자기 에레크트라가 성밖을 가리키며 소리 쳤다. "언니! 저기 봐요. 조슈아 언니잖아요?" 바알과 샤레셀이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니 두 명의 인물이 매끈한 흑마를 타고 성밖 정면의 언덕을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지만 멀리서도 확실히 구분되는 반짝이는 긴 금발머리는 분명 조슈아의 것이었다. "조슈아 옆에 검은머리 소녀는 누구지?" 샤레셀이 중얼거리자 바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어제 보았던 영주의 딸 같은 데. 벌써 둘이 나돌아다닐 정도로 친해진 건가?" "우리도 가볼까요?" "그래요. 오빠!" 샤레셀의 말에 에레크트라가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그러나 바알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언덕을 넘어 갔어요. 우리가 말을 준비하고 따라 갈 때쯤에는 어디로 갔는지 찾지 못할 걸요?" "하긴―." 그의 대답에 샤레셀과 에레크트라는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바알은 막 언덕을 넘어가는 그녀들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저 녀석! 제법이군. 하룻밤 사이에 영주와 딸의 신임을 얻은 건가?' 조슈아는 퓨어리스와 함께 말을 달리며 내내 어색한 기분이었다. 이 영주의 딸은 갑자기 조슈아의 소녀답지 못한 행동이나 몸가짐에 지나치게 신경 쓰며 일일이 지적하고 그러면서도 처음과는 달리 상냥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퓨어리스로서는 남자처럼 자란 불우한 여 검객을 위해 도움을 주려는 생각에서였겠지 만 조슈아로서는 이런 종류의 관심은 매우 곤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의 덕에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복장을 할 수 있게된 조슈아로서는 쉽게 불만을 토로 할 수도 없었다. 그럴 것이 그녀가 입고 입는 핑크 빛의 비단 브라우스와 고급 원단을 사용한 청색의 승마용 바지, 심지어 착용감이 그만인 고급 속옷들까지 모조리 그녀에게서 얻어 입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지만 얻어 입으려던 것을 땀에 젖어 축축하고 몸에 맞지 않아 여기저기 틑어진 속옷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한 퓨어리스가 기겁을 하며 갈아입지 않으면 억지로 벗겨내겠다고 하는 통에 결국 그녀의 속옷을 입고 만 것이었다. 조슈아는 처음에는 그녀의 간섭이 귀찮았지만 막상 갈아입고 나니 더없이 그녀가 고맙게 느껴졌다. "여기가 당신이 말하는 언덕이예요. 정말로 마법사가 여기서 지휘를 한다고 생각해요?" 퓨어리스가 말했다. 조슈아는 지도에서 보았던 이미지와 언덕의 실제 모습을 비교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언덕은 그리 높지 않아서 정상에서 보면 성 안쪽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그 러나 언덕너머로는 성이 보이는 각도에 위치한 높은 산이라고는 없었다. 결국 성을 보 면서 공격 지휘를 하려면 이곳이나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양쪽에 멀찍이 떨어진 두 개 의 민둥산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일단 언덕에 올라보니 이곳에서 적의 마법사 가 성을 내려다보며 마물들을 부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요. 틀림없이 여기예요." 그녀가 조금 뜸을 들이고 대답하자 퓨어리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어째서 3명이죠? 이왕 공격을 할거라면 좀더 많이 숨어 있는 쪽이 유리하지 않아요?" "아니오.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실 3명도 많아요. 마지막 순간까지 들켜서는 안되니까요." 조슈아의 대답에 퓨어리스는 질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 구덩이에 숨어 있다가 뛰어 나갔을 때 마법사 주위에 마물이 몰려 있으면 어쩔 거예요?" "그래서 성주 위에 확실히 마물들을 모으기 위해 위험 부담은 있지만 연극이 조금 필요해요." "무슨……." 퓨어리스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조슈아가 조금은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은 상당히 배팅이 커요. 적의 마법사를 잡기 위해 마물들에게 제일 성문을 내줘야 해요." "뭐…뭐라고요?" 당연한 일이지만 퓨어리스는 너무 놀라 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뻔 하였다. 그러나 조슈아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법사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성을 점령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야만해요. 그래야 최대한 마물들을 성 주위에 집중시킬 수 있죠." "이…이봐요. 그러면 도개교로 마물들을 통과시키라는 이야기인데 그러다가 두 번째 성문까지 부수고 들어오면 우리는 다 죽어요!" 퓨어리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핼쑥해 졌다. "그렇게만 보이면 마법사는 신이 나서 신변보호를 생각지 않고 밀어 붙여 올 거예요. 우리는 그걸 노리는 거죠. 그리고 마물들이 성문을 통과한다고 해도 용병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테고, 그전에 마법사를 처치하면 마물들은 사라지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태연을 가장 하고 있었지만 불안하기는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단번에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에 이 길 외에는 성의 병력으로 적을 물리칠 방법은 전무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퓨어리스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 드는지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떻게 되던 이번 전투가 칼라로서는 마지막 전투가 되겠군요." 퓨어리스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조슈아가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그래요. 어쩌면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밀리기만 하던 이 전쟁에서 적을 상대할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 낸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어찌되었던 칼라에서의 마지막 전투임에는 틀림없어요." 가슴을 무겁게 눌러오는 불안감에 두 소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 지 모르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NEXT 제13화 전투 part 1 밤의 장막이 대지를 덮고 있었다. 그러나 성벽 위의 망루마다 집광판(集光板)으로 반사시킨 횃불을 성밖에 비추고 있어, 성문 주위는 마치 대낮처럼 밝았다. 조슈아는 성문 위의 망루에서 성밖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달빛 마저 구름에 가려 그녀가 보려는 남쪽 언덕의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날씨지?" 그녀의 등뒤에서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돌아보니 바알은 멘디에타와 샤레셀을 데리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성벽의 보수와 방위대의 구성을 끝마친 멘디에타는 잠시 쉬러간다며 방으로 사라지더니, 목욕을 하고 왔을 뿐 조금도 자고 온 것 같지 않았다. "이봐요. 멘디에타 당신 자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신녀님이 회복 마법을 써주셔서 한 달은 자고 일어 난 것 같이 말짱합니다." 조슈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멘디에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어울리지 않게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멘디에타님! 체력을 회복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몸에 쌓이는 피로라는 건 마법으로 완전히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부탁해서 회복 주문을 쓰기는 했지만 정말로 몸 좀 아끼세요." 샤레셀이 쏘듯이 말하자 멘디에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정찰대는 제대로 배치된 거야? 만약 마물들이 근거리에 와도 발견 못한다면 작전은 의미가 없잖아?" 바알이 눈을 찌푸리며 보이지 않는 남쪽 언덕 방향을 주시하며 말했다. "모든 진입방위에 간격을 두고 겹으로 정찰대를 편성했습니다. 제 일선은 몰라도 두 개조가 다 놓칠 리는 없겠죠. 발견하면 즉시 불화살을 쏘고 모두 성으로 대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정장소로 이동하지요. 정찰대와의 거리가 상당하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다행히 워낙 어두워서 불화살을 쏘면 멀리서도 잘 보이겠네요." 조슈아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들판을 주시하였다. 그러자 멘디에타는 약간 거북한 말투로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로 도개교를 내려놓을 생각입니까? 그렇게까지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 까요?" "어차피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요. 어디에서도 보급을 받을 수 없고, 지금의 상황에 자급자족도 힘드니 이렇게 모험을 해볼 수 밖예요. 그리고 만약 에 이성에 계속 머물 수 있다해도 당신이라면 여기 계속 있겠어요?" 멘디에타는 그녀의 말에 마치 대답대신인 양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각, 나머지 두 군대의 언덕에 배정된 6인의 100인 대장들은 성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열려진 성문 밖 야경을 보고 있었다. 성문 주위를 제외하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는 들판이었지만, 그들은 묘한 침묵 속에 그저 지평선으로 예상되는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보게들! 나는 아무래도 기분이 영 찜찜해!" 평소의 여유를 찾아 볼 수 없는 자르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거대한 강철 해머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뭐가?" 역시 무언가 걸리는 목소리로 자카엘이 대답했다. "자네들도 우리에게 배정된 언덕을 가보아서 알지 않나?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곳에 진을 치지는 않을 거야."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바엘 출신의 검투사 투루스가 갈색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자 자르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가 배정된 곳에 마법사 놈이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야. 어쩔텐가? 내 생각에는 저 계집아이가 맡은 남쪽 언덕이 틀림없을 거라고 보는데!" "그래서 뭐야? 우리도 거기로 가자는 거야?" 자카엘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나 자르델은 개의치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니지, 각 언덕에 파놓은 구덩이에는 3명씩만이 들어 갈 수 있어. 우리가 괜히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발각되면 이 작전은 실패라고. 그래서 말인데 우리 서로의 언덕에 놈이 나타나지 않으면 남쪽 언덕으로 집결해서 옆구리를 치는 것이 어떻겠나?" 잡자기 9척 장신 스쿠가 애병인 거대한 강철 곤봉을 들고, 일어났다. "나는 찬성이다. 아가씨와 바알 그리고 그 젊은 기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언제나처럼 필요한 말 이상은 절대 하지 않는 그였다. "그래 성의 방위는 지코와 조금은 못 미덥지만 그라프가 잘 해낼 거다. 어차피 성이 공격당하면 밖에 있는 우리는 할 일도 없지 않나?" 상황을 살피던 가토스가 맞장구 쳤다. "너희들 사실은 그 계집애가 걱정되는 것 아니냐? 바른 대로 말해봐라!"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카엘이 이죽거렸다. "음... 그것도 사실이야. 그 아이가 죽거나 하는 건, 보고 싶지 않군."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자르델이 대답했다. 그가 너무 솔직히 말하자 자카엘은 할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한번 앓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계집이 사람 여럿 잡는 군. 이거 원."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이죽거리지 않았다. 모두가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자르델의 의도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자정이 막 지나고 있었다. 초저녁에 공격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긴장한 탓에 뒷목이 뻣뻣해져 온다. 조슈아는 한 시간에 한번 있는 정찰대의 횃불 신호로 대충 정찰조의 배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멘디에타의 말대로 정찰대는 모든 방위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고, 교대 방식도 합리적이었다. 2선의 정찰조가 1선으로 배치되면 1선은 성으로 돌아오고, 다시 성에서 가는 정찰조가 2선을 채우는 식으로 집중력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찰배치였다. 이런 식이라면 기습은 거의 무리라고 볼 수 있다. 조슈아가 가볍게 목을 풀며 돌아보니 바알은 과연 직업 용병답게 이런 와중에도 벽에 기대어 깊이 잠들어 있었고, 샤레셀과 멘디에타는 무언가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서먹서먹하게 대하던 멘디에타는 샤레셀의 타고난 붙임성 덕에 이제는 그녀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조슈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성밖으로 눈을 돌렸다. 순간 조슈아의 눈에 땅에서부터 별똥별이 올라가는 희한한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어?" 마음의 준비 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조슈아는 잠시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뒷목을 타고 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신호다! 일어나, 바알! 불화살이야!" 조슈아가 소리를 지르며 계단으로 몸을 날리자 멘디에타가 풀어놓았던 검을 차고 뒤따라왔다. 그러자 역전의 용사 바알은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튀어 오르듯 일어나 몇 번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 바로 상황 판단을 하고는 조슈아의 뒤를 따랐다. "조심해야 해! 조슈아! 그리고 당신들도요." 샤레셀이 등뒤에서 소리쳤다. "샤레셀, 성을 잘 부탁해!" 조슈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치며 계단 아래로 사라져 가자, 샤레셀은 긴장으로 떨리는 두 손을 모아 조슈아의 건승을 기원하였다. 성문 앞에는 대기시켜 놓은 9필의 흑마가 있었다. 일단 각 언덕에 도착하면 돌려보내야 하기 때문에 성으로 알아서 돌아오도록 훈련시킨 말들이었다. 그 앞에는 조슈아가 오기를 기다렸는지, 6인의 백인 대장들이 침중한 얼굴로 서있었다. 조슈아는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는, 말에 올라 급히 뛰어나온 영주와 그의 딸 퓨어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반드시 이 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합니다. 오늘 밤 이후로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예요. 조금 밀린다고 해서 당황하지 말고 적을 성문에 몰아 방어하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의 마법사가 성을 거의 점령했다는 착각을 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숨어 있는 언덕에 마물들이 나타나도 곧바로 뛰어 나가지 않고 마물들이 성으로 집중되는 것을 기다립니다. 최대한 훌륭한 연기를 해주세요." 어쩌면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었지만 조슈아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영주 부녀와 수비대장 등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말을 몰아 칠흑같이 어두운 들판으로 사라져 갔고, 바알과 멘디에타가 그 뒤를 따랐다. "자, 그럼 가볼까?" 자르델이 허리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말에 오르자 나머지 5인도 천천히 말에 올라탔다. 그는 묘한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들어 동쪽 언덕을 맡은 자카엘, 파간, 투루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약속은 잊으면 안되네..." 그러자 자르델이 툴툴거렸다. "너희들이야말로 제때 와라! 괜히 우리만 바보 만들지 말고!" 그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연신 투덜거리며, 가토스, 스쿠와 함께 순식간에 성문을 나서더니 동쪽 들녘으로 사라져갔다. "훗... 솔직하지 못한 녀석!" 자르델이 귀엽다는 투로 중얼거리자 파간과 투루스가 키득거렸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영주 부녀는 그들이 하는 냥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자! 그럼 갑니다. 우리가 나가도 도개교는 올리지 마십시오. 제 1 성문은 적의 공격으로 부서지게 놔두라는 이야깁니다." "알고 있어요. 몸조심들 하세요." 퓨어리스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르델은 처음과는 달리 용병들에게 매우 상냥해진 흑발의 소녀에게 특유의 금화 10만냥 짜리 윙크(본인의 말을 빌자면...)를 보내고는 황급히 말을 몰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퓨어리스는 그들이 사라진 깜깜한 들녘을 잠시 주시하고는 방위대장에게 소리쳤다. "이제부터 농성(籠城)에 들어갑니다. 전원 전투배치 하세요. 적이 성문 앞에 다가왔을 때 도개교의 사슬을 풀어서 고장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제 1 성문을 닫습니다. 서두르세요."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명령을 내리고는 몸을 돌려 성벽계단을 향했다. 그런 딸을 바라보며 영주는 어쩐지 딸이 전보다 더 늠름해(?)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NEXT 제13화 전투 part 1 조슈아 일행은 언덕에 도착하자 타고 온 말들의 엉덩이를 쳐서 성으로 돌려보냈다. 말들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언덕아래 위치해 있는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 밑 수풀 속에 흰색으로 칠해진 나무기둥이 박혀 있었다. 조슈아가 나무를 뽑아내어 멀리 던져버리고 그 밑에 줄을 잡아당기자 수풀 속에 가려진 엄폐물이 들어올려지며 그 아래로 장정 셋이 들어 갈 정도의 구덩이가 드러났다. 그때 언덕너머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 오더니 곧 일단의 무리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몰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 중 선두의 사내가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조슈아에게 말을 몰아왔다. "마물들이 동남쪽으로부터 새카맣게 몰려옵니다. 진행속도로 봐서 5 ∼ 6분 안에 여기에 다다를 겁니다."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언덕 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지나간 사람들뿐인가요? 나머지 정찰대는요!" 조슈아가 다그치듯 묻자 사내 대신 멘디에타가 대답했다. "워낙 정찰범위가 넓어 모든 방위의 정찰대가 다 성으로 돌아갈 시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멀리 나간 정찰조는 신호를 보면 그 주위에서 벗어나 아침까지 대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조슈아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빨리 돌아가세요. 성을 잘 지키시고요." 정찰병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한번 숙여 보이고는 순식간에 성 쪽으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던 조슈아는 곧 몸을 돌려 구덩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바알과 멘디에타가 따라 들어가 갈대 잎으로 만든 덮개로 구덩이를 막았다. 주위는 다시 정적에 휩싸이고 귀뚜라미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왔다. 1 성문으로 마지막 정찰병이 들어 온 것을 확인한 퓨어리스는 성벽 위에서 어두운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성에 남은 100인 대장 지코, 루이 그리고 그라프가 역시 긴장한 얼굴로 어둠 속을 주시했다. "빌어먹을…더럽게 어둡군!" 먹구름으로 덮인 새카만 하늘 덕에 적의 동태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불만인지 루이가 투덜거렸다. 이들이 하려는 연기는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적이 나타나면 도개교를 들어올리는 척하다가 도개교와 연결된 쇠사슬을 끊어 성의 수비에 문제가 있음을 적에게 보여야 했다. 그리고서 성문을 닫아야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성에 원군이 와있다는 것을 마법사에게 최대한 숨겨야하며 조금만 밀어붙이면 점령할 수 있다고 믿게 해야한다. 그런 위험한 곡예를 하는 그들로서는 무엇보다 시야확보가 중요했다. 적이 너무 가까이 오면 성문을 닫기 전에 마물들이 밀고 들어 올 것이고, 너무 일찍 닫으면 무언가 대비하고 있었다는 의심을 사서 신변보호에 신경을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슈아 일행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퓨어리스는 양 주먹을 소리가 나도록 꽉 쥐었다. 그때 땅에서부터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두 눈을 치켜 뜨더니 가볍게 오른 손 을 들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지코가 성 안쪽에 소리 쳤다. "시작이다. 전원 숨도 쉬지 마라!" 오른 손을 들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진동은 조금씩 그 강도가 더해지더니 이제 성문을 비추고 있는 횃불의 가시거리 안으로 들어올 듯 가까워져 마치 지진이 일어 난 것 같이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퓨어리스의 악다문 이빨사이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세어져 나왔다. 순간 어둠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밀고 들어오는 물체가 있었다. "시작해요!" 그녀는 물체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시작해라!" 지코가 그녀의 말을 받아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도개교의 도르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언제 나와 같은 패턴인지라 적들은 더 밀고 오지 않고 연못을 넘어 성벽을 공격할 준비를 하기 위해 성의 가시거리 밖의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보이진 않았지만 그 수가 여태 겪었던 중 최고라는 것을 어둠 속에서 풍기는 엄청난 기운으로 알 수 있었다. 그때 계획했던 대로 반쯤 올라가던 도개교가 큰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도개교를 따라 잘려진 쇠사슬이 흘러 내려가 연못으로 떨어져 물보라를 만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소리가 나도록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주위가 적막에 휩싸였다. 대열을 정리해 여느 때처럼 물량공세를 펼치려던 마물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다. 조슈아가 예상한데로 상대도 이 돌발 상황에 당황한 것이 틀림없다. "서...성문을 닫아요!" 계획 대로였지만 마치 정말 돌발사태를 만난 듯 당황한 목소리로 퓨어리스가 소리쳤다. 끼이익―. 정적 속에 성문을 닫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쿠오오오....... 때를 같이 하여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발…" 퓨어리스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성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너무 늦게 명령한 걸까?' 그녀의 질끈 감은 눈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콰앙―. 그때 성문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 왔다. 그녀는 눈을 뜨고 성밖을 내려다보았다. 마물 몇 마리가 도개교 위에서 성문에 몸을 부딪히고 있었다. '해냈구나!' 성문은 아슬아슬하게 닫혔고 뒤를 이어 마물들이 부딪혀 오는 것이 보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퓨어리스는 속으로 쾌재를 올리면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마물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3명의 100인 대장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그들로서는 이렇게 많은 마물을 한꺼번에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저…저건! 마치 거미 때 같은데?" 그라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런 놈들은 본 기억이 없군. 뭐야 저것들은…" 루이도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경험이 많은 지코가 입을 열었다. "운골리안트-Ungoliant-(길이 4∼5m, 거미모양의 마물. 강한 외골격을 가졌으며 촉수 에서 독기를 뿜어내고 상대를 밟아 죽이거나 체액을 빤다)라는 놈들이다. 저것들과 비교도 안돼는 숫자였지만 레기온 전투에서 본적이 있어." "자! 이제 내려가요. 저것들은 이제 성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거예요. 저 숫자를 상 대로 성벽 위에서 공격해 봤자 화살 낭비일 뿐이에요. 제 1 성문이 뚫리면 제 2 성문의 방어벽에서 공격해야죠." 퓨어리스가 몸을 돌려 성벽을 내려가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지코가 따라 나섰다. '자! 이제 당신 차례야 조슈아!'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는 맡은 일을 훌륭히 완수했다는 기쁨에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2 조슈아는 소녀의 몸이 되었던 그 저주받은 날을 제외하면 이렇게 숨막히는 긴장감을 느껴 본적이 없었다. 땅속에서 느끼는 마물군단의 진동은 그야말로 엄청난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숨어 있는 바로 옆에까지 마물들이 몰려 왔었지만 그녀의 예상대로 마물들은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를 그냥 지나쳐 그 앞에 있던 그들의 웅덩이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이제는 성 쪽에서 약한 진동음이 들릴 뿐 더 이상 웅덩이 근처에서는 진동이 느껴지지 않자 조슈아는 천천히 갈대 덮개를 밀치고 얼굴을 내밀었다. '흡…….' 그러나 그녀는 기겁을 하고 고개를 숙이며 재빨리 덮개를 덮었다. "왜 그래, 위에 있어?" 어둠 속에서 바알이 속삭였다. 그러자 심장이 멎을 뻔했던 조슈아는 겨우 숨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보는 마물들의 모습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언덕을 중심으로 겹겹이 늘어서 있어. 어두워서 모양은 잘 보지 못했지만 상당히 큰놈들이야!" "설마 실패한 걸까요?" 멘디에타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계획대로 되었다면 아직은 이런 상태인 것이 정상이죠. 제 1 성문이 무너 지면 마법사는 흥분해서 총력전을 펼칠 거예요. 여태껏 지루한 소모전만을 해왔을 테니까 이번엔 끝내고 싶겠죠." 조슈아는 자신을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위에서 또 한번 진동이 있은 후 뛰어 나가야겠군요." 그녀의 말에 멘디에타는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는지 편하게 자리하고 앉았다. 3 멀리 성문의 불빛이 보였다. 아마도 공격을 받고 있는 듯 성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는 아니군!" 자르델이 중얼거리자 가토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쪽언덕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빨리 가자구." 조슈아가 고국의 왕족임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녀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기다려야 한다. 성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해." 그러자 입이 무거운 수쿠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한마디했다. "피를 말리는군!" "그래 어린 계집아이가 빌어먹을 작전을 세웠지. 덕분에 우리는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니 말이야." 그는 자신의 목숨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조슈아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4 콰앙! 콰앙! 제 1 성문에서 한차례 충돌음이 들릴 때마다 퓨어리스의 심장은 마치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렸다.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연속해서 몸으로 부딪혀오고 부식독을 쏘아대니 튼튼한 강철 성문도 어쩔 수 없는지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성벽과의 이음새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조슈아의 명령대로 모두 제 2 성문 안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고, 마을 주민들과 방위군은 제 1, 2 성문 사이의 방위벽 위에서 마물의 침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쪽 방위 벽에서는 쇳물을 끓이는 화기와 긴장한 병사들의 체열로 엄청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쿠웅―. 순간 엄청나 굉음을 내며 제 1 성문이 안으로 찌르러지며 넘어지더니 순식간에 마물들이 밀고 들어 왔다. "공격!" 퓨어리스가 소리치며 검을 들어올리자 일제히 강궁(强弓)-도르래를 이용해 발사하는 거대한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쿠오―. 아무리 강력한 외골격을 가진 운골리안트들이라지만 이 거리에서 강궁을 퉁겨낼 수는 없다. 수십 발의 강궁은 마물들을 꿰뚫어 고기 산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 2 탄 장전 서둘러라!" 강궁을 끼우고 도르래를 돌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동료들의 시체를 밟으며 또다시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밀고 들어 왔다. "쇳물을 부어라!" 아직 장전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 마물들이 제 2 성문으로 다가가자 퓨어리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병사들은 부글부글 끓는 쇳물을 배수구에 붇기 시작했다. 촤아―. 키요오오오―. 방위벽의 배수로를 따라 흘러내린 쇳물이 제 2 성문 주위로 몰려들던 마물들을 태우자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마물들이 괴성을 질러 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몇 마리의 마물들이 성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장전 완료!" 강궁장(强弓長)이 재장전을 알려오자 퓨어리스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강궁을 아껴라! 성문 중위에 몰려드는 놈들은 활로 막아!" 그녀가 명령하기 무섭게 수십 명의 궁수들이 성문주위로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쇳물을 피한 몇 마리의 마물들이 수십 발의 화살을 맞고 겨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이런 식이면 앞으로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제 2 성문은 부서진다.' 퓨어리스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의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마물들의 제 2 성문에 대한 육탄공격을 완전히 저지하지 못했다. 강궁이 다 떨어질 때쯤이면 성문을 지킬 방법이 없어!' 그녀는 성안에서 마물들을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을 하며 몸을 떨었다. '제발 당신의 작전대로 되어야 할텐데…….' 5 "움직인다!" 바알이 흥분하여 상황을 잊고 소리쳤다. "쉬잇!" 깜짝 놀란 조슈아가 조용 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밖의 진동음이 워낙 커서 바알의 목소리가 세어나갈 상황은 아니었다. "당신의 생각대로 정말 끝장을 내려는 것 같군요. 조슈아!" 멘디에타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대단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바깥상황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했다. "저 소리가 멀어 지면 바로 뛰어 나가서 언덕을 오르는 거예요. 최대한 마물을 피해 마법사가 있는 곳까지 최단거리를 잡으세요." 그녀의 말에 바알과 멘디에타는 검에 손을 가져갔다. 마물들의 진동음은 서서히 멀어져 곧 멀리서 울려 퍼지는 마물들의 괴성과 전투의 함성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슈아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소리쳤다. "가욧!" 파악―. 세 명의 전사는 은폐물을 뚫고 몸을 날렸다. 어두운 들판 아래 수십 개의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지만 아까 보았던 숫자에 비할 바 는 아니었다. 조슈아는 검을 뽑아들고 최대한 허리를 숙이고는 언덕으로 몸을 날렸다. 과연 가장 가볍고 빠른 그녀인지라 순식간에 두 남자를 제치고 앞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 손에 쥐어져 바람을 가르고 있는 검은 페드라의 왕국무투회에서 받은 보검이었다. 아직 말고스를 쓸 수 없는 그녀는 샤레셀에게 검을 맡기고 온 것이다. 쿠악―. 적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마물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모여들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시꺼먼 그림자가 조슈아를 덮쳐왔다. 그러자 조슈아는 상대를 확인할 여유도 없이 검을 그어갔다. 카앙―. "어엇?" 그녀의 검은 강철기둥을 벤 것 같이 퉁겨졌고, 이어서 마물에게서 무엇인가가 쏘아져 왔다. "이얍!" 조슈아는 몸을 날려 날아오는 물체를 피했다. 퍼억―.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 마물의 다리가 박혀 왔다. 천천히 주위 환경이 눈에 들어오자 조슈아는 처음으로 마물의 모양새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일검을 튕겨낸 마물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거미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흉흉한 복안(넓게 퍼진 눈들)을 빛내며 촉수에서는 노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운골리안트인가?' 어려서부터 왕실의 영재교육을 받은 그녀가 괴물의 정체를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단번에 마물들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뒤따라오는 두 남자에게 소리쳤다. "상대는 운골리안트야! 등 쪽과 다리는 검으로 벨 수 없어. 독을 쏘아대니까, 얼굴 쪽으로 다가가지 말고 앞다리의 관절만 공격해." 잠시 그녀가 주위를 돌리는 동안 마물이 촉수에서 노란 액체를 내뿜었다. 그러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조슈아는 뿜어져 오는 독기 위로 몸을 날려 마물의 등을 밟고 또 한번 몸을 튕겨 언덕으로 돌진했다. "저 녀석 정말 몸이 가볍군!"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저만큼 앞서가는 조슈아를 바라보고 바알이 감탄한 듯 말하자 멘디에타가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옵니다." 조슈아에게 등을 밟힌 마물은 공격대상을 잃고 우왕좌왕 하더니 뒤따라오는 두 남자를 보고 쇳소리를 내며 몸을 날렸다. "어딜!" 쏴악―. 바알과 멘디에타는 조슈아의 말대로 마물이 다가오자 양옆으로 흩어져 앞다리의 무릎관절을 베고 지나갔다. 그러자 마물은 몸의 중심을 잃고 무거운 상체를 바닥에 박은 채 바둥거렸다. 6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앞의 두 개의 큰 다리로 몸의 중심을 잡는 것이 분명했다. 그대로 쓰러지는 마물을 보며 바알이 질렸다는 듯 소리쳤다. "그 녀석,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정말 출신이 의심스럽다니까?" 그의 말에 멘디에타는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마물의 앞다리를 베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조슈아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두 남자는 사력을 다해 마물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6 제 2 성문 안에서 몇 겹의 진세를 구축하고 서있는 200명의 용병들은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성문 멀리서 들려 오던 소리들이 이제는 성문 바로 밖에서 들려 오더니 급기 야 몸으로 들이받는 횟수도 잦아 졌다. 쿵쿵―. 또 다시 성문을 들이받는 둔탁한 굉음이 들려 왔다. 제 1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제 2 성문은 심하게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곧 성문이 부서진다. 궁수대 앞으로!" 100인 대장 그라프가 소리치자 수십 명의 궁수대가 불화살을 들고 진세 앞으로 나와 자세를 취했다. 콰앙―. 순간 더이상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제 2 성문이 부서져 내렸다. "꺄악!!!" 멀찍이 마을 어귀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마을 여인네들과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성문이 부서지며 일어난 흙먼지와 연기 때문에 마물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활을 아끼기 위해 그라프는 손을 들어올린 채 적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쿠오오―. 그러자 연기를 뚫고 거미모양의 마물이 모습을 들어냈다. "쏴라!" 피잉―, 피잉―. 수십 발의 불화살이 날아와 꽂히자 마물들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져갔다. 그러나 확실히 대인(對人)무기로는 완전히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듯, 뒤이어 들어오는 마물들은 화살을 맞고도 계속 밀고 들어왔다. 그러자 그라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육탄전만은 절대 피하고 싶었던 그로서는 궁수대로 어느 정도 적을 저지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활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돌진 명령을 내리기 위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갑자기 성안으로 들어서던 마물들이 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뒤로 밀려났다. "어엇?" 그라프를 비롯해 모든 용병이 이 뜻밖의 상황에 놀라 술렁이는 가운데 짤랑짤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부서진 성문대신 대마물(對魔物) 결계를 쳐놓았어요.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돌격은 최후의 최후까지 미루고 활로 공격하세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새하얀 무명 가운에 은색 성포를 쓴 소녀가 궁수대 앞으로 나와 두 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작은 몸에서는 성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파란색의 기류가 뿜어져 나왔다. "샤…샤레셀 신녀님!" NEXT 제13화 전투 part 3 파직―. 그러는 동안 수 마리의 마물들이 또다시 그녀가 쳐놓은 결계로 뛰어들다가 파란 불꽃을 튀기며 밀려났다. "뭐 하는 거예요? 어서 공격해요!" 샤레셀이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그라프가 손을 들어 올렸다. "궁수대 앞으로! 쏴라!" 휘휘휭―. 카오―. 신기하게도 그들의 화살은 결계를 통과해 무방비의 마물들에게 박혔다. 용병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숨어있는 마을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라프는 마물들이 결계에 부딪혀 올 때마다 샤레셀의 안색이 더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리를 하는 것이구나!' 그렇다. 아무런 촉매기구도 없이 그리고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씩 달려드는 마물들을 완전히 밀어내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일인 것이다. 다행히 아직 방위 벽 위에서 어느 정도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부서진 성문까지 도달하는 마물의 수가 한정적이지만, 만약 한꺼번에 밀려든다면 그녀로서도 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라프는 몸서리가 쳐짐을 느꼈다. "궁수대 전진! 최대한 마물들을 결계에 접근시키지 마라!" 그러자 샤레셀이 고개를 돌려 고맙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라프는 이 어린 신녀가 마음에 들었다. 7 파박―. 조슈아는 사력을 다해 언덕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가벼운 몸을 이용해 거의 열댓 마리의 마물들을 싸우지 않고 지나쳐 올 수 있었지만 언덕의 중턱에 다다르니 상황은 달라 졌다. 언덕 위에 마물들이 몰려 있는지 수십 마리가 진을 이루며 조슈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촤악―. 갑자기 조슈아의 정면에서 노란색의 부식독이 쏘아져 왔다. 그러자 그녀는 기겁을 하며 아슬아슬 하게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방향을 살짝 바꾸어 뛰기 시작했다. '조…조금만 늦었어도 온몸에 뒤집어썼을 거야. 놈들은 내가 보이는 걸까?' 어둠 속에서 기척도 없이 날아오는 부식독은 그녀로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아찔한 공격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그 부위는 썩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녀가 방향을 바꾼 위치에 두 마리의 마물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이런.' 조슈아는 몸을 날려 허리를 베어오는 마치 갈퀴 같은 마물의 앞발을 피하며 촉수로 여겨지는 부위에 검을 박았다. 카아…. 그러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 나는 마물의 입에서 부식독이 쏟아져 나왔다. 치이익―. "이…이런." 독이 튀면서 그녀의 갑옷 가슴께가 역겨운 냄새를 내며 타들어 갔다. 그러나 과연 명공이 달련한 보검은 부식독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녀로서는 천만 다행이었다. 그리고 가슴께를 태우던 부식독도 안쪽까지 타들어 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감을 얻어 오른편에서 쏘아오는 마물의 촉수를 검으로 긋고 그 얼굴을 발판 삼아 도약하여 한꺼번에 대 여섯 마리의 마물들을 뛰어 넘었다. 몸을 날리며 밑을 내려다보니 여기저기서 자신을 향해 노란 액체가 쏘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를 맞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제 거의….' 순간 언덕의 정상이 보이려하자 쾌재를 올리던 조슈아는 자신을 향해 불가해한 속도로 쏘아져 오는 붉은 빛의 '화이어 볼'을 보고 공중에서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퍼엉―. "아악!" 그러나 상상도 못한 공격에 당황하여 완전히 피하지 못한 그녀는 옆구리에 화이어 볼을 얻어맞고 수십 걸음을 튕겨 갔다. 퍼억―. 바람맞은 나뭇잎처럼 날아가던 조슈아는 그대로 그녀를 쫓던 마물의 단단한 등 껍질에 심하게 부딪히고는 한번 더 크게 튕겨 땅에 떨어 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 마리의 마물들이 그녀를 에워싸더니 독을 뿜어 대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그녀는 쉴 틈도 없이 온몸의 마디마디가 부서져 나가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사력을 다해 몸을 굴렸다. 치이이……. 그녀가 누워 있던 자리의 땅이 거품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몸을 일으키는 조슈아의 목을 노리고 마물의 앞발이 날아왔다. 차랑―. 그러나 그녀는 마치 거대한 낫 같은 마물의 앞발을 검으로 받아 어깨 옆으로 흘리고 그대로 눈에 검을 박았다. 순간 그녀의 오른 팔에서 극통이 전해져 왔다. "으윽…." 마물의 눈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있었지만, 순간 느껴진 극통으로 인해 그녀는 검을 뽑 아낼 수가 없었다. 오른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왼팔을 들어 검을 빼어 내려 하자 비명을 지르던 마물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파앗―. 결국 조슈아는 검을 포기하고 땅을 박차 몸을 날렸다. 그리고 마치 나무토막처럼 느껴지는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부러졌나?' 오른 팔이 축 늘어져 마치 어깨에 달린 장식품 같았다. 아마도 마물의 단단한 외골격과 충돌할 때 어깨가 빠진 듯 했다. 빠진 어깨가 신경을 건드려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아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는 멈출 수가 없었다. '바알이랑 멘디에타는 뭐하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느려터진 두 남자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이제는 무기도 없이 마물들 사이를 아슬아슬 하게 피해가며 다시 언덕을 향했다. '크윽…아까 그 공격은 마법사의 짓이다. 접근하는 방법만 생각하다가 정작 중요한 마법사를 잊고 있었어.' 그녀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존재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는 것이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일단 접근만 할 수 있으면 마법사 따위는 쉽게 처치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언덕 위에서 더욱더 많은 마물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꼭대기의 넓이로 볼 때 저 정도 숫자면 조슈아를 잡기 위해 주위에 모든 마물들을 내려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 중 일부는 아래쪽의 바알 일행을 막기 위해서인지 그녀를 지나쳐 언덕을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계획보다 너무 많이 뛰었다. 그리고 통증 때문에 눈앞이 흐려지고 있어.'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샤레타의 신법(身法)을 이용해 사방에서 날아오는 마물들의 부식독과 공격들을 가까스로 피하며 조금씩 정상을 향해 접근했다. 마물들은 기괴한 움직임으로 자신들의 모든 공격을 피하며 마법사에게 접근해 가는 그녀에게 약이라도 올랐는지 괴성을 지르면서 갈퀴 앞발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순간 눈앞의 갈퀴를 피해 몸을 회전시키던 조슈아는 왼쪽 옆구리에 불에 댄 듯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내려다보니 파이어 볼에 맞아 깨어진 갑옷 사이로 마물의 날카로운 앞발이 스치고 지나가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욱…." 갈비뼈라도 부러진 듯 숨을 재대로 쉴 수가 없게된 그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때를 같이해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녀의 목을 노린 마물이 촉수를 내리 꽂으려 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그녀는 거대한 촉수를 몸에 박힌 채 온몸의 체액을 빨리고 비참하게 죽어갈 순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끝나다니…….' 조슈아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질끈 감은 두 눈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에레나, 샤레셀 그리고 바알! 미안해요. 이렇게 허무하게……. 응? 바알?'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썹이 기분 나쁜 듯 치켜올려 졌다. '마지막 순간에 왜 그따위 녀석이 떠오르는 거야?' 기분이 나빠져 감았던 두 눈을 뜨고만 조슈아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노란 부식독을 질질 흘리며 오랜만의 먹이에 즐거운 표정―그럴 리야 없겠지만 조슈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을 지으며 마물이 촉수를 들이 대고 있었다. 그러나 비장한 최후의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인물을 떠올리고 만 조슈아는 갑자기 화 가 치밀어 옴을 느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 바알! 왜 쓸 때 없는데 끼어 드는 거야?" 휘리릭―. 조슈아의 고함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파공성을 내며 날아오는 물체가 있었다. 조슈아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굴렸다. 파악―. 키아악…. 조슈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마물의 촉수부근에 손잡이 부분이 겨우 보일 정도로 눈에 익은 검이 깊이 박혀 있었고 뒤이어 최후의 순간에 그녀를 기분 나쁘게 했던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조슈아! 괜찮냐?" 바알이 겨우 보이는 위치까지 올라와 그녀를 죽이려던 마물에게 던진 검 대신에 철갑을 낀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 옆에 독에 타들어 갔는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망토를 걸친 멘디에타가 검으로 마물의 무릎관절을 베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죽을 뻔했잖아. 이 나쁜 놈아!" 바알이 던진 검에 맞아 죽을 뻔한 조슈아가 소리쳤다. 그러자 바알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이…이봐! 피해라!"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굴린 조슈아는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에 마물의 앞발이 박히는 것을 보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숨도 쉬기 힘든 고통 속에 겨우 일어나 설 수 있었다. 그러자 재차 마물의 공격이 이어졌다. "바빠! 너무 바쁘단 말이야!" 조슈아는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한번 읊고는 몸을 날 려 달려드는 마물의 공격을 피하며 마물의 얼굴을 발판 삼아 몸을 튕겼다. 말은 쉽지만 그녀 같은 고급 신법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여기는 맡기고 올라가 조슈아!"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를 잡았다고 생각한 마물들이 거의 바알과 멘디에타에게 주의를 집중하고 있어 조슈아의 주위에는 마물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조슈아는 별로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몇 번 도움닫기를 하고는 몸을 날려 순식간에 언덕 위에 다다랐다. '잡았다.' 아까의 화이어 볼을 생각하고 마음의 대비를 하며 언덕위로 몸을 날린 조슈아의 눈에 고갈모자가 달린 긴 수도복 차림의 인물이 비쳤다. 그는 이번에는 기습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화이어 볼을 쏘지 않고 있었다. 조슈아는 한번 착지하여 허리를 깊게 숙이고 왼쪽 부츠에서 퓨어리스에게 받은 금빛 단검을 뽑아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여전히 마법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악―. "헉!" 마법사에게 몸을 날린 조슈아가 공중에서 무형의 벽에 부딪혀 퉁겨졌다. '이런! 결계구나!' 조슈아가 겨우 몸에 중심을 잡고 땅에 내려서자 언제 올라 왔는지 그녀의 등뒤에서 마물이 덮쳐 왔다. 몸을 피할 타이밍을 놓친 조슈아가 짧은 단검으로 마물의 앞발 공격을 막았다. 타앙―. 단검을 두 손으로 잡고 검편으로 공격을 흘리려던 조슈아는 그대로 밀려나 마법사 쪽으로 날아가 쓰러 졌다. "으윽…." 잽싸게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조슈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단검은 부러져 있었고, 검날을 잡았던 왼손이 찢겨 피가 흘렀다. 겨우 상체를 세우려는 그녀의 눈에 천천히 다가오는 마법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조슈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저 이 절망적인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천천히 고깔 모자를 들어 올렸다. '어? 이 녀석 꼬마잖아?' 서서히 먹구름이 걷히고 보름달이 얼굴을 내미는 가운데 마법사의 얼굴을 확인한 조슈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졌다. 고깔모자를 벗은 마법사의 얼굴은 놀랍게도 고작 11 ∼ 12세 정도로 보이는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조슈아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는 상관없이 꼬마 마법사는 그녀의 머리 위에 천천히 오른 손을 뻗었다. 조슈아의 눈에 소년의 비틀린 미소와 오른 손에서 일어나는 붉은 빛의 기류가 들어 왔다. 퍼억―. 조슈아는 순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바로 눈앞에서 웃고 있던 소년의 머리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나는 죽은 것인가?' 상처의 고통과 출혈과다로 집중력을 잃은 그녀는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로 갑자기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어엇……!" 손을 들어 얼굴에 쏟아지는 핏물을 닦아내는 그녀에게 소년의 몸이 쓰러져 왔다. 그러나 정신이 없는 그녀에게 그것은 별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떨결에 소년의 몸을 부여안은 조슈아는 몸에 목이 붙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몇 걸음 밖에 커다란 양날 도끼와 함께 아직도 야릇한 미소를 짖고 있는 소년의 머리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어…." 주위의 환경이 핑그르르 돌았다. 순간 그녀가 안고있던 몸통을 거칠게 치우며 그녀를 안아 올리는 건장한 팔이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어둠 속에서 몇몇 사내들이 모습을 들어냈지만 조슈아의 눈에는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안은 사내가 갑자기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겨우 눈을 들어 자신을 안아 올린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카엘?' 그녀의 얼굴에 뜨거운 땀방울을 흘리며 전력을 다해 어딘 가로 달려가는 사내는 놀랍게도 자카엘이었다. 그는 외눈을 반짝이며 무엇이 그렇게 걱정인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조슈아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별일이네. 이 녀석이 여기는 왜…?'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조슈아는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NEXT 제14화 새로운 여정 "으음…." 조슈아는 힘겹게 눈을 떴다. 마치 머리 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다. 조금씩 시력을 회복한 그녀의 눈에 처음 보는 천장이 들어 왔다. 누구의 취미인지 침대 위의 천장에는 반나의 아름다운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조슈아의 얼굴에 언뜻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알이 보면 좋아하겠네." "누가 그런 걸 좋아한다는 거야?" 그때 침대 옆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바알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뭐야? 바알? 왜 여기 있어?" 그녀는 상황 판단이 잘 되지 않는 듯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때 바알의 어깨 너머로 샤레셀의 얼굴이 나타났다. "조슈아, 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얼마간은 정신이 좀 없을 거야. 몇 번씩 깨어났다가 헛소리를 하고 다시 잠들었었다구." 사례셀의 얼굴은 무언가 심한 무리를 한 듯 새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기운마저 띄우고 있었다. "어…… 샤레셀 얼굴이 왜 그래?" 그녀가 걱정스럽게 묻자 멘디에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신녀님은 장시간 대 마물결계를 펼치신 데다 쉴 틈도 없이 부상당한 당신에게 회복마법을 쓰셔서 매우 피곤하신 겁니다." 그제야 조슈아는 지금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상황이 궁금해졌다. "전투는 어떻…우욱……." 상체를 세우려던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바알이 기겁을 하며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세를 펴주며 말했다. "이봐, 조슈아. 너는 갈비뼈가 4개나 부러진 데다 오른 쪽 어깨가 탈구된 채로 무리해서 뛰어 다녔었다구.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야." 조슈아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그날 밤의 전투를 기억해 내려 애쓰고 있었다. 확실히 마법사의 화이어 볼을 맞은 이후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그 이후로 많은 출혈을 해서 그런 것인가?' 그녀는 또다시 혈액 부족으로 멍해지는 의식을 수습하며 멘디에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전투는 어떻게 되었어요?" "물론 이겼지요. 당신의 작전이 주효했어요." 멘디에타는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조슈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무언가 열심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마법사가 어린 소년이었던 것 같았는데……그리고 도끼가 날아 와서는……." 갑자기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제야 확실히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카엘! 자카엘이었죠? 마법사를 처치한 것은!" 그녀가 그를 찾아 방안을 두리번거리자 바알이 조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는 우리 밖에 없어 조슈아! 다들 아까까지 있다가 마을 복구 때문에 나갔다구. 그리고 마법사를 처치한 것은 자카엘이 맞아." 그는 조슈아의 목숨을 구한 것이 자카엘이라는 것이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눈치가 닫지 않는 조슈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질문을 이어갔다. "자! 이제 설명해봐. 상황은 어때?" "상황은 이렇습니다." 멘디에타가 고급기사특유의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가 누워서 고개만 돌리고 있는 그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적은 제 2 성문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샤레셀 님의 덕분이죠." "어머? 아니에요. 제 시간에 마법사를 잡지 못했으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샤레셀이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띄며 대답했다. "고마워 샤레셀." "어머 애는……." 조슈아가 진심에서 우러나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자 이런 일에 약한 샤레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져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녀를 보고 미소 짓던 멘디에타가 설명을 이어갔다. "일단 우리측의 인명피해는……." 운을 띄우는 멘디에타의 표정에 어쩐지 장난 끼가 번졌다. "놀랍게도 조슈아 님 혼자입니다." "하하하!!!" 바알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자 조슈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너무 나섰던 걸까?" 그러자 웃어 재끼던 바알이 정색을 하며 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지 않아 조슈아! 네가 마물들을 휘젓고 다니는 통에 마법사 놈이 너를 견제하느라 주위를 비워둬서 자카엘 등이 후위로 돌아가서 기습을 할 수 있었던 거야. 너 아니었으면 우리는 벌써 다 죽었을 거라구! 그러니 그런 말도 안돼는 생각은 하지 마!" "그렇습니다. 조슈아 님. 그때 당신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다면 성은 마물들에게 전멸당했을 것이고 기습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두 사내가 워낙 정색을 하며 말하는 지라 조슈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어찌되었던 사상자가 없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마법사의 정체는 밝혀졌나요?" 그녀의 질문에 멘데에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것이 이 마을의 소년이랍니다." "그…그러면 마법사가 아니었다는 건가요?" 조슈아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샤레셀이 대답했다. "아니. 마법사가 맞아. 사체를 관찰해보니까, 왼쪽 가슴에 마신 '바딘'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어. 조종당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다면 적의 대마법사는 누구든지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주면서 자기 마음 데로 조종 할 수도 있다는 거야?" 조슈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냐. 조슈아." 샤레셀이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 사이를 좁히며 대답했다. "그 정도의 대리 마법사를 만드는 작업은 대단한 마력과 시간이 필요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그리 대량으로 그런 자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 아마도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들에 그런 자들을 심어 놓았을 거야." "심어놓다니?" 조슈아가 물었다. "죽은 소년은 낮에는 멀쩡하게 마을을 돌아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전혀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그러다가 밤이 되면 성밖으로 나가 소환사가 되었던 거지. 한가지 종류의 마물만을 소환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있었지만……." 샤레셀의 대답에 조슈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굳이 왜 성 밖에 나가서 공격을 해오지? 성안에서 마물들을 불러내면 간단하잖아?" 그러자 한심하다는 얼굴로 샤레셀이 대답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성안에는 각각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어. 시돈은 전통적으로 무신(武神) '에알라'를 섬기고 있지. 지금은 모든 신관들과 마법사들이 전쟁에 동원되어 바리에 가있지만, 어쨌든 신의 축성을 받은 신전 근처에서 마물을 소환해봐야 그 영기에 눌려서 몇 마리를 소환하는 게 고작이야. 그런 전력으로 성안에서 공격을 강행하는 것은 바보짓이야. 그리고 한꺼번에 모든 마물을 소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수십 차례에 걸쳐 마물들을 불러내려면, 성에서 멀리 떨어져 소환을 행하는 것이 보다 많은 마물들을 들키지 않고 소환하는 방법이라는 거지." 그녀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나자 조슈아는 조금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때 바알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을 공격하는 마법사를 먹여 살리고 있었던 거군?"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결국 불쌍한 건 이용당한 소년이죠. 전쟁고아로 성에서 잡일을 하는 아이였다는데." 샤레셀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의녀의 훈련을 받았던 그녀는 사람의 시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이용당했다는 것 때문에 목이 잘린 소년의 시체는 그녀를 너무도 가슴아프게 했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모두가 숙연해졌고 조슈아는 기르가스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네놈은 도대체 뭘 원하는 거냐? 영토를 원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런 쓸 때 없는 전쟁을 일으킨 거야!' 벌컥―.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조용해 졌던 방안에 비명에 가까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언니……." 돌아보니 에레크트라가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밖에서 복구작업을 돕고있었던지 여기저기 진흙 따위를 뭍이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차마 보고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앙!" 조슈아의 침대로 날듯이 달려온 에레크트라는 차마 진흙 묻은 손으로 조슈아를 만질 수 없어 그저 이불에 얼굴을 박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슈아는 미소지으며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 대장 일어났구먼?" 때를 같이 하여 자르델과 나머지 8인의 100인 대장 그리고 영주와 그의 딸 퓨어리스가 들어 왔다. "걱정했어요. 이제 괜찮아요?" 퓨어리스가 만면에 웃음을 띄며 말했다. "이제 다 나았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물론 그럴 리야 없었지만 조슈아는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울고 있던 에레크트라가 고개를 들더니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소리치듯 말했다. "언니 다 나으면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 줘요. 나를 제자로 삼는다고 했었죠? 열심히 배워서 다음에는 언니를 괴롭히는 놈이 있으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 에레크트라의 순수하고 원색적인 분노에 조슈아는 저윽이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압도적인 감정에 밀려 결국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그래 몸이 다 나으면……."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구석에서 쭈뼛거리는 자카엘이 들어 왔다. 그러자 조슈아가 만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자카엘! 이리 오세요."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 눈에 보일 정도로 흠칫하던 자카엘이 애꾸눈을 빛내며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리고는 무슨 죄라도 지었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그녀를 지나 벽면에 시선을 두었다. 그런 그를 보고 샤레셀은 입을 가리고 웃었고 바알은 못 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고마워요.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해 주었어요. 평생 잊지 않을 게요." 조슈아로서는 태어나서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말해본 것이리라. 자카엘은 얼굴을 붉히며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딸꾹!" '!' '!' '!' 예기치 못한 그의 딸꾹질에 모두가 굳어 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동은 갈비뼈가 부러진 조슈아를 초주검으로 만들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크크크크!!!!" "하하하하" 조슈아는 터질 듯한 웃음을 참느라 16년의 인생동안 고생스러웠던 모든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차…참아야 한다. 잘못하면 죽어.' 사색이 된 그녀는 아랑 곳 않고 오랜만에 전투의 긴장감에서 풀려난 그들은 마치 내기라도 하듯 마음껏 웃어 재꼈다. NEXT 제14화 새로운 여정 part 2 1 조슈아는 꼬박 일주일을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자신은 일어나고 싶었지만 샤레셀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무리하지 않고 일주일을 쉰 그녀는 거뜬한 몸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원래대로 라면 한 달은 누워 있어야 할 상처였지만 샤레셀의 치료마법 덕분에 그나마 일찍 회복할 수 있었다. "하암∼" 오랜만에 방밖으로 나온 조슈아가 성 중앙의 지붕 없는 홀에서 햇볕을 받으며 기지개를 펴는데 난대 없이 시녀들로 보이는 열댓 명의 소녀들이 우루루 몰려와 조슈아를 둘러쌌다. "어머! 나오셨어요. 조슈아 용병대장님?" 주근깨가 귀여운 금발 소녀의 장황한 호칭에 조슈아는 당황스러웠다. "아…예!" "호호호…이제 다 나으셨어요? 그러면 우리랑 놀러가요? 네?" 그녀가 뭐 하는 여자인지 모르는 걸까? 조슈아는 철없는 소녀들의 말에 실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이런 소녀들을 다룰 줄 모르는 그녀로서는 그냥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를 구원해줄 단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몸도 불편하신 분에게 무엇 하는 거야? 가서 할 일 들이나 해!" 조슈아가 돌아보니 퓨어리스가 검술 훈련을 하고 나오는지 땀에 흠뻑 젖어 목에 수건을 두르고 서있었다. 그녀의 일갈에 시녀들이 군말 없이 사라지고 나자 퓨어리스는 표정을 바꾸며 다가와 조슈아의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조슈아는 소녀들에게 둘러 싸였을 때 보다 더욱 당황하였다. 퓨어리스는 팔짱을 끼고 얼굴을 들이밀며 그녀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단지 소녀들끼리의 친근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조슈아로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있잖아요. 조슈아! 당신 16살이라고 했지요?" "그…그래요. 그런데 이거는 좀 놓고……." 오른쪽 팔꿈치에 퓨어리스의 부드럽고 풍만한 젖가슴이 지긋이 눌러 오자 조슈아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퓨어리스는 더 바짝 붙어 정감이 좔좔 흐르는 목소리로 귀엣말을 했다. "그러면 우리 친구해요. 네? 조슈아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아…예!" 자신의 질문과 전혀 상관없이 흘러나온 대답을 듣고 퓨어리스의 얼굴이 환해 졌다. 그녀는 팔짱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났다가 갑자기 겨우 숨을 돌리고 있는 조슈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어……." 상큼한 소녀의 체향이 '훅'하고 전해져 왔다. 조슈아는 정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샤레셀 외에 자기 또래의 소녀에게 이런 식으로 안겨 본적이 없었다. 원래의 건강한 소년의 몸이었다면 다른 식으로 반응할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정신이 혼미해질 뿐 조금도 기쁘지 않다. 조슈아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비던 퓨어리스는 포옹을 풀고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정말 기뻐 조슈아! 나는 내 또래 여자 친구가 없었거든. 근위대장이셨던 아버지 탓 에 자기 몸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아무때나 '꺅꺅' 거리기나 하는 약해 빠진 계집애들과는 친구가 되기 힘들더라구." 조슈아는 그녀의 수다에 그저 정신없이 고개만 끄떡일 뿐이었다. 퓨어리스는 조슈아의 표정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 조슈아?" "예? 아…아니요!" "뭐∼야∼ 친구끼리 왠 존대야…말놔! 애!" 원래 이런 소녀였던가? 오지에 영주의 딸로서 그 타고난 신분과 검술실력 덕분에 주위에 친구를 만들기 힘들었던 퓨어리스는 일단 친구가 생기자 갑자기 본래의 16세 소녀가 되어버린 듯 태도와 말투가 변해갔다. "그…그래." 그녀가 다그치는 통에 조슈아는 그만 생각지도 않던 16세의 여자친구를 만들고 말았다. 2 "이런 식으로 '알본'까지 갈 수는 없어." 자르델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조슈아. 이번 전투를 겪어 봐서 알잖아. 지금의 숫자로는 어림도 없어. 앞으로 어떤 상대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200명 남짓의 병력으로는……." 팔짱을 끼고 상황을 주시하던 바알이 조심스럽게 자르델을 거들었다. 첫 전투를 치르고 10여 일이 지난 아침, 조슈아는 용병단의 향방을 결정하기 위해 100인 대장들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뜻과는 달리 상황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일단은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100인 대장들을 비롯해서 모든 용병들은 이미 더 이상의 진군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슈아는 끝자리에 앉아 얼굴을 붉히고 있는 멘디에타를 바라보았다. 계약 당시와 상황이 완전히 다른 지금, 그로서는 용병들의 결정에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그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계약 조건에는 용병단의 7할 이상이 손실을 입으면 정규군에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손실은 이미 그것을 훨씬 웃돌고 있는 것이었다. 조슈아는 난감한 얼굴의 멘디에타에게서 눈을 떼며 입을 열었다. "계약대로라면 여러분은 바리로 행군하여 정규군에 합류해야 해요. 그러고 싶은가요?" 그녀의 질문에 100인 대장들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생각이야 굴뚝같지만 용병인 그들로서는 정규군에 합류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적으로 깨고 젊은 100인 대장 루이가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자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은 하나둘 그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조슈아의 얼굴이 멘디에타에 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용병단의 안전을 생각해야하는 그들의 대장이었다. 그녀 마음대로 그들을 사지로 몰아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수로 정하겠어요. 먼저 이대로 알본으로 진군하는데 동의하시는 분 손을 드세요." 그녀가 질문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며 물으나 마나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면 바리의 정규군과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드세요." 조슈아의 예상대로 자신이 손을 들지 않아도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생각 했는지 몇몇은 개면 쩍은 얼굴이 되어 손을 들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자신 있게 손을 들어 올렸고 멘디에타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조슈아는 그를 한 번 바라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결정을 따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알본으로 떠납니다." "에엑?" "뭐라고? 죠슈아, 그게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야?" 바알과 멘디에타를 비롯해 장내의 모든 사내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조슈아는 단호했다. "나는 이 시간 부로 용병단을 탈퇴합니다. 개인으로서 알본으로 가겠다는 거예요." "이…이봐. 조슈아. 억지도 억지 나름이야. 이건 정말 말도 안돼는 일이라구." 바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자 조슈아는 조금은 바알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애초에 누군가를 찾으러 시돈에 온 거예요. 그리고 그는 알본 주위에 있을 가능 성이 높구요. 당신을 이용했다고 생각하면 미안해요, 바알. 그러나 나는 가야만 해요." 정말로 마지막인 듯 말투까지 변하는 그녀였다. '이…이런.' 바알은 정말로 화가 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나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 그에게는 애초에 조슈아의 의도 같은 것은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그녀의 주위에 머무는 것이 현재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정말 제멋 대로인 여자구나! 너는…." 바알이 낮게 으으렁 거리며 중얼거리자 조슈아는 당황했다. 그녀로서는 바알의 감정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바알은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당황한 조슈아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분을 삭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연인은 정말로 어린애로군.' 그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너와 함께 간다. 더 이상 그 문제는 말하지 마." 무언가 말하려던 조슈아는 바알의 분위기에 넘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도 갑니다. 알본에 가는 것이 저의 사명이니까요." 멘디에타가 상당히 밝아진 얼굴로 끼어 들었다. 조슈아로서도 그가 같이 간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가이드가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해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터라 만면에 웃음을 띄며 그의 말을 반겼다. "그래요. 분명 같이 간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바알의 볼이 한 주먹은 나왔다. '흥! 저 녀석은 반기고…….' 조슈아는 100인 대장들이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헛기침을 한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의례상 그들이 따라 일어 나는 것이 보였다. "저는 더 이상 여러분의 대장이 아니에요. 예는 차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그녀가 고개를 숙여 보이자 엉거주춤 하게 인사를 받던 자카엘이 말했다. "이…이봐!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만 두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서는 숨기지 못할 당혹과 서운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요. 자카엘. 저는 알본에 가야만 하거든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녀가 씁쓸하게 대답하자 멘디에타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슈아 님. 당신은 아직 용병단이에요." 그의 말에 당황한 조슈아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멘디에타는 평소답지 않게 실실거리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저와 함께 알본으로 가신다면 그것은 아직 계약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 되죠. 당신은 여전히 시돈 왕국의 용병대장 칭호를 사용하실 수 있어요." "용병대장 칭호를 사용할 수 있다구요?"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한 듯 조슈아는 개성 없이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는 순간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 어차피 남의 나라에 와있으니 그런 간판도 없다면 운신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환해진 얼굴로 멘디에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럼 앞으로도 잘 지내보도록 해요." 멘디에타가 오른 손을 허리춤에 쓰윽 닦더니 역시 기꺼운 얼굴로 그녀와 악수를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경애해 마지않던 미소녀 대장을 잃고만 8인의 100인 대장들은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든지 한사람 한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갔고 그녀의 뒤를 바알과 멘디에타가 따라 나섰다. 남겨진 사내들은 그녀가 방을 나갈 때까지 서서 배웅하고는 모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거 어째 버려진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인데?" 100인 대장들 중 그나마 쓸만한 문학적 소양을 가진 지코가 모두의 심경을 적확히 대 변한 한마디를 던지자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세어 나왔다. 3 조슈아는 샤레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내릴 결정을 짐작하고 있는 샤레셀은 그리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심히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결국 너와 바알 씨, 그리고 멘디에타씨와 나. 이렇게 결정된 거야?" "응. 그런데 꼭 따라올 거야? 샤레셀? 이제부터는 정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여행길이 될 거야." 조슈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샤레셀이 무슨 말이냐는 듯 턱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말해두지만 조슈아! 나는 내 몸 정도는 충분히 지킬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런 질문은 실례라구." 그녀의 당찬 대답에 조슈아는 머리를 긁적일 뿐 할말을 찾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언제나 그녀의 밀어 부치는 말투에 대응하지 못하는 조슈아였다. "저…저는요. 언니." 왠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퓨어리스의 옆에 주눅이 든 표정으로 앉아 두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레크트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조슈아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미 그녀의 처우를 생각해 두었던 듯 생각하는 기색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에레크트라, 너는 내가 알본에 다녀오면서……." "당연히 함께 가는 거지, 에레크트라. 무슨 걱정을 하는 거니?" 조슈아의 말을 끊으며 샤레셀이 대답했다. 그러자 멍한 표정이 된 조슈아와는 달리 어두워졌던 에레크트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샤레셀은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조슈아에게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귀엣말을 했다. "너는 정말 저 아이를 모르는 구나? 네 생각대로 제를 억지로 성에 남겨두고 떠난다면 저 소심한 애가 이 성에서 어떻게 되겠어." "……." "억지로 남겨두고 간다면 저 아이는 틀림없이 죽어버릴 거야. 보기보다 대단히 극단적인 성격이라고 저 아이는! 그러니 행여나 혼자 성에 남겨둘 생각은 하지마. 네가 거두었으니까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조슈아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에레크트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레크트라는 두 소녀가 자신의 문제로 귀엣말을 하는 것을 알고있는지 연신 불안한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자 배고픈 새끼 고양이처럼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결국 조슈아는 또 지고 말았다. NEXT 제14화 새로운 여정 part 3 "휴∼! 그래 에레크트라. 대단히 위험한 여행이 될 테니까. 언니들과 오빠들 말을 잘 들어야해. 알았지?" 그러자 숨이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두 소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에레크트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 졌고 그런 그녀에게 샤레셀이 눈을 찡끗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들과는 달리 조슈아의 심기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정말로 잘 결정한 걸까? 또다시 군의 지휘자로써 마물 군단과 싸울 일은 없다고 해도 위험한 시돈의 영토를 횡단해야만 하는데, 어떤 적을 만나게 될지. 음…정말로 저 아이에게 틈틈이 검술을 가르쳐야겠군.'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사례셀과 에레크트라는 서로 손을 잡고 조슈아를 물리친 것을 기뻐하는 듯,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가겠어. 조슈아!" 그때 구석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퓨어리스가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조슈아에게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에엑?" 조슈아는 그 아름다운 자태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걸 신경 쓸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무…무슨 말이에요? 왜 당신이 우리를 따라 온다는 거죠!" "또 그런다. 우리는 친구 했잖아? 그런데 말투가 그게 뭐야?"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퓨어리스는 자신 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조슈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당황한 조슈아가 상체를 뒤로 뺐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야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나는 근위기사단을 노리고 있는 예비 기사라구. 적어도 모두의 방해는 돼지 않을 거야!" 조슈아는 민망할 정도로 바짝 다가와 이야기하는 그녀를 피하기 위해 탁자에 팔을 딛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그거와 우리를 따라오는 게 무슨 상관인데?" 퓨어리스의 소원대로 조슈아가 말투를 바꾸어 더듬거리며 묻자 그녀의 표정이 환해지 더니 조슈아의 손을 잡으며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정말로 강한 검사야. 너 같은 친구를 가질 수 있어서 나는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런데 이런 식으로 헤어 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 "그런 이유로……." 조슈아가 무언가 말하려 하자 퓨어리스가 말을 끊었다. "후후, 그건 핑계고 적어도 네가 시돈에 있는 동안이라도 열심히 쫓아다니면 나에게는 많은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해. 물론 아버지도 허락해 주셨고. 그리고 어차피 갈 거라면 동행이 많을수록 재미있지 않겠어? 그렇지, 샤레셀?" "물론이지! 퓨어리스." '어…어느새…둘이?' 두 소녀가 똑같이 고개를 왼쪽으로 꺽으며 말투까지 통일하여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조슈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다. 그녀만 모르고 있었을 뿐, 이미 결정은 이미 나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의기 투합한 세 소녀는 조슈아의 기분이야 어떻든 관계없이 '화기애애의 결계'를 치고 진짜소녀들의 결속을 보여 주고 있어 가짜 소녀 조슈아는 어쩔 수 없이 그들 하고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4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데 이틀이 걸렸다. 다행히 적도 그리 많은 마법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소년 마법사를 해치운 이후로는 전혀 적의 공격이 없었다. 그리하여 조슈아 일행은 마음놓고 칼라를 떠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과연 딸을 그런 험난한 여행에 동행시킬까'라고 의심을 가지던 조슈아는 퓨어리스의 말대로 그녀의 부친인 트라젠 후작이 오히려 그녀의 여행을 반기는 것을 보고 그들이 상식 밖의 부녀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조슈아 일행이 떠나가는 날 아침. 용병들은 모두 대단히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9인의 백인 대장들은 못내 아쉬운지 언덕 배기까지 그녀를 마중 나왔다. "우리는 곧 바리로 행군해야 되! 아가씨. 그렇지만 열심히 싸워서 꼭 성도까지 밀어붙이겠어! 그러니 무엇을 하려는 지는 모르겠지만 쓸 때없이 싸우거나 하지 말고 무사히 알본까지 가라고 알았지?" 자르델이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보내는 딸에게 당부하는 말투로 이야기하자 조슈아는 그에게 환히 미소지어 보였다. "걱정 말아요. 자르델! 당신 말대로 잘 피해 다닐게요." 이 난리 통에 말도 안돼는 말을 지껄이는 그녀였지만 자르델은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는 그녀의 어깨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쭈뼛거리며 자카엘이 다가 왔다. 조슈아가 그의 태도에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는 고개를 돌리고 '험험' 대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조슈아는 얼떨결에 그가 내민 물건을 받아들고 내려다보니 그것은 금으로 조각된 기이한 얼굴 모양의 목걸이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얼굴을 돌리고 남에게 이야기하듯 입을 열었다. "그…그건 '케이보드'(Keivod)의 목걸이라는 거다. 마법사의 마법 탐지를 방해하는 놈이지. 그 놈 덕에 전의 마법사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거다." "이런걸 나한테 주는……." 조슈아가 황급히 목걸이를 돌려주려 하자 자카엘이 완고한 자세로 손을 들었다. "빌려주는 거야. 주는 게 아니다. 나중에 알본에서 만나면 돌려주면 돼." 그는 여전히 표정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바알은 그의 행동에 심통이 난 얼굴이 되었고, 자르델은 실실 웃고 있었다. "고마워요. 자카엘!" 돌아서는 그에게 조슈아가 생각났다는 듯 감사의 말을 던지자 자카엘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조슈아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자! 그럼 이제 가야 겠군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멘디에타가 말했다. 돌아서는 자카엘의 등을 바라보던 조슈아는 천천히 목걸이를 걸고 머리칼을 정돈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출발을 기다리는 일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슈아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고는 9인의 용병대장들에게 한번 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어색한 듯 인사말도 없이 말을 몰았다. 그런 그녀의 뒤를 바알과 멘디에타, 퓨어리스, 그리고 샤레셀과 에레크트라가 따라갔다. 그들이 언덕을 내려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자르델이 중얼거렸다. "무사해라 아가씨! 알본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침 안개가 햇살에 쫓겨 들판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멀어진 조슈아 일행을 바라보며 사내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제15화 바람의 마도사 part 1 조슈아 일행은 칼라 마을을 떠나고 이틀 후에 시돈의 등뼈라 불리우는 '게헤나' 산맥의 입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돈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이 길고 긴 산맥은 수많은 세월동안 외침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천연의 성벽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단 한번도 게헤나 산맥을 넘어 본토를 침공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게헤나의 산세가 험해서만이 아니었다. 북반구 최고의 전투 국가인 시돈의 방위력과 게헤나 산맥의 산세가 합작하여 그런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헤! 이렇게 순식간에 추워지는 거야?" 남방 출신의 바알이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그러게! 칼라에서 겨우 이틀을 왔을 뿐인데, 이렇게 날씨 차이가 나다니?" "칼라는 아빌라 국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공기와 북쪽의 찬 공기가 만나는 곳이라 그리 쌀쌀하지 않지만, 원래 시돈은 대륙 최북단의 추운 나라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여름이라 이 정도인 거죠." 조슈아가 역시 조금 추운지 잠시 고삐를 놓고 양손을 부비며 말하자 멘디에타는 웃으며 대답했다. "에? 그럼 겨울에는 더 추운가요?" "하하. 이건 추운 측에도 못 낍니다. 겨울에 시돈 북쪽지방은 정말 살을 에이는 강추위죠." 겨울이 없는 아카바에서 살아온 조슈아로서는 이만 저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이런. 생각지도 못한 장애네. 겨울이 오기 전에 이 일이 끝나야 할텐데.' 조슈아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샤레셀이 그녀의 생각을 읽고 피식 웃었다. 그때 선두의 맨디에타가 갑자기 긴장한 신색으로 말을 멈추었다. "왜 그러세요? 멘디에타씨?" 샤레셀이 의아한 듯 물어오자 조슈아와 바알도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정면의 참나무숲 길을 바라보며 말을 멈추었다. 쾅―. 갑자기 괭음을 내며 능선 앞의 참나무들이 부러져 튀어 올랐다. 챠랑―. 역시 돌발상황에 강한 바알과 멘디에타가 먼저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쿠와악……. "드…드래곤인가?" 바알이 기겁을 하며 몸을 떨었다. 참나무 숲을 가르며 튀어나오는 것은 놀랍게도 마치 드래곤 같은 머리와 몸통을 가지고 있었다. 빨간색의 핏기 흐르는 눈에 두개의 날카로운 뿔, 입 밖으로 튀어나온 아래위의 송곳니가, 보는 사람을 공포로 마비시킬 듯 괴기스러웠다. 그러나 완전히 참나무 숲을 나오자 그것은 드래곤과 달리 전갈의 꼬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에요. 저건 '무슈후슈'(Mushussu)-용머리에 전갈 꼬리를 가진 괴물, 전장 7∼8m-에요. 드래곤의 한 종류지만 우리 세계의 드래곤이 아닌 이계(異界)의 드래곤이죠." 샤레셀이 괴물의 꼬리를 보더니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말하였다. "예? 그럼 마물입니까?" 그녀의 의연한 태도에 놀라운 표정이 되어 멘디에타가 물었다. "누가 소환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저것은 지금 쫓기고 있네요." "무슨……."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일행이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괴물은 그들에게 다가 오지 않고 무엇에 쫓기는지 능선을 따라 전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괴물의 뒤편 참나무 숲에서 황금색의 불꽃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골든 화이어 볼?" 괴물을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던 샤레셀이 기성을 토해냈다. 퍼억―. 황금빛의 화이어 볼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그대로 괴물의 목뒤를 강타했고, 괴물은 소리도 질러 보지 못한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러자 뒤를 이어 숲을 빠져 나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하하. 느려 터진 놈. 겨우 거기까지냐?" 호탕하게 웃어 재끼며 숲을 나오는 사내는 '이 깊은 숲 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깨끗함을 유지할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새하얗고 긴 가운에 금실로 장식된 보라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조금 멀어서 잘 구분은 되지 않았지만 피부색이 푸르스름하다는 느낌이었고 긴 머리칼은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윤기 흐르는 은빛이었다. 일행은 서로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이 희한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현장으로 말을 몰아갔다. 슈우우―. 뒷머리를 직격당한 전갈꼬리의 드래곤은 상처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행이 말에서 내려 다가가자 뒷모습을 보이며 괴물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나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엇?" 일행을 대표하여 순발력(?) 좋은 바알이 먼저 상대에 따라 실례가 될지 모를 경악성을 터트렸다. 그들을 향해 몸을 돌린 상대는 놀랍게도 엘프였던 것이다. 멀리서 프르스름하게 보였던 피부는 가까이 보니 너무나 새 하얘서 그리 보였던 것이었다. 멘디에타와 샤레셀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처음으로 눈앞에서 엘프를 보게된 것이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신기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새하얀 피부에 약간 여린 선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강단이 있는 자주색의 눈동자와 안정된 눈매가 그것을 상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날렵한 몸매와 잘 어울리는 결이 가는 직모의 은발, 끝이 뽀족한 긴 귀가 엘프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뭐냐?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뭐라도 줄줄 아냐?" 일행을 돌아보는 그의 입에서 의외로 장난끼 어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인간을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는 엘프의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일행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돌리다가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적의가 가득찬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어떻게 네놈이…도대체 어떻게 네놈까지 부활했느냐?" 그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일행은 그저 멍해질 뿐이었다. 조슈아는 초면에 반말을 지껄이더니 이제는 헛소리까지 하는 이 건방진 엘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나를 언제 봤다고 난리냐? 그리고 내가 좀비냐? 부활하게?" 도대체가 그 아름다운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소년틱한 말투로 쏘아붙인 조슈아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턱을 치켜들며 앙칼지게(?) 맞고함을 쳤다. 그러자 엘프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나타나더니 아직도 경계하는 눈초리로 조슈아를 천천히 뜯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놈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 인간의 소녀에게서는 다른 영혼이 느껴진다. 그리고…….' 엘프 사내는 조슈아의 옆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은빛 성포를 쓴 귀여운 소녀 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저 소녀가 정말로 놈의 대리 육체라면 그런 자의 옆에 저런 고급 신녀가 붙어있을 리 없겠지.' 그는 샤레셀의 정체를 단번에 눈치 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믿기지 않도록 아름다운 소녀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분기가 가시지 안는 듯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후후…이제 알겠군. 일이 정말 재미있게 되어 가는데?' 그는 조슈아에게서 눈을 돌려 연기를 뿜고 있는 마물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괴물에게 눈을 돌린 일행은 순간 흠칫하였다. 괴물의 뒷목에 녹아 들어간 흔적이 급격히 사라지며 새살이 돋고 있었던 것이다. "푸르카스의 재생 마법?" "뭐라고?" 샤레셀이 경악성을 터트리자 일행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퓨어리스를 제외한 일행 모두는 시돈으로 오는 뱃길에서 그 마법을 경험했던 것이다. "호오…너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신녀군. 어느 신을 섬기나? 복장을 보니 여신인 것 같지만……." 여신을 모시는 증표인 은빛 성포를 보고 그는 조슈아에게와는 다른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저는 아세르 여신을 섬기는 신녀로 샤레셀이라고 해요." 왠지 처음보는 이 건방진 엘프 마법사에게 상당히 저자세로 나가는 샤레셀에게 일동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군. 그럼 아카바에서 왔냐? 너 정도면 대신전의 신녀겠지?" "이것 봐요! 도대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 말투는 뭐예요?" 그의 안하무인적인 말투에 더 참지 못하고 퓨어리스가 소리쳤다. 그러자 오히려 샤레셀이 당황하여 그녀를 만류하였다. "아니야. 퓨어리스!" 퓨어리스가 무언가 말하려 하자 갑자기 바알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이것 봐! 저 괴물이 일어나려 하잖아?" "호오…과연 빠르군." 당황한 조슈아 일행과는 달리 엘프는 마치 강의하는 듯한 말투로 샤레셀에게 입을 열었다. "너라면 푸르카스의 마법에 어떻게 대항하겠나? 신녀 샤레셀!" 그의 기분 나쁜 말투에 화를 낼만도 하지만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생각하여 답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일단 푸르카스의 재생마법이 행해진 상대는 그것이 소환수이든 이 세계의 생물이든 그것을 행한 마법사를 죽이기 전에는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후후. 그렇지. 그래서?" 괴물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이 긴박한 상황에 두 인물은 학술토론을 하듯 이야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물에게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바알도 그저 입만 뻥끗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저 소환수는 마법사의 영향권 밖에서도 정해진 구역을 돌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행하도록 마법인이 걸려있으므로 주위에 그것을 행한 마법사도 없을 테고 재소환도 불가하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나?" 샤레셀은 이제는 완전히 뒷머리의 상처가 아물어 새빨간 눈을 희번덕거리는 괴물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운다고 해도 그 안까지 완전히 태울 수도 없고…그럼 역시 재생할 정도의 조직을 남기지 않고 작은 조각을 내서 뿔뿔히 흩어 놓는 것뿐일까요?" 귀여운 얼굴로 무시무시한 대사를 읊는 그녀였지만 건방진 엘프 마법사의 얼굴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하하! 맞았다. 아세르 여신은 좋은 신녀를 두었군." 그는 호탕하게 웃고는 양손을 합장하듯 모아 나직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안드라스(Andras) 불꽃과 바람의 마신이여! 내 부름에 답하여 신의 이름을 건 계약을 이행하라! 계약의 집행자에게 너의 광기의 바람을 행사할 권리를……." 주문을 마친 그의 손바닥 사이에서 마치 지옥의 입구를 열어 놓은 듯 암흑 공간이 벌어지더니 멀리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어어? 저게 뭐야?" 갑자기 엘프 마법사의 손바닥 사이 암흑 공간에서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릴 정도의 새차고 어두운 기류의 회오리가 뻗어 나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일견하기에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검은 기류의 회오리는 조슈아 일행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다만 이제 막 몸을 일으켜 다시 달아나려는 괴물의 몸으로 뻗어가 7m나 되는 거구를 들어 올렸다. 괴물은 그의 조그마한 회오리바람에 싸여 공중에서 회전을 시작하더니 곧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기 시작하였다. 투드득―. 검은 기류 안에서 괴물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엄청난 회전력을 이기지 못해 온몸의 뼈 마디마디가 꺾여지고 부러지며 내는 소리였다. "세…세상에!" 차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물은 완전히 조각조각 분리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고 이제는 공중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자 마법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회오리를 거두었고 주위는 순식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에 휩싸였다. "후후. 괜찮은 솜씨지?" NEXT 제15화 바람의 마도사 part 2 자화자찬을 하는 건방진 그였지만 아무도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그들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그야 말로 공포스럽도록 강력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그는 일행을 한번 쓸어 보고는 마지막으로 조슈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지고 몸을 돌렸다. "저…." 샤레셀이 등을 돌린 그를 잡으려는 듯 입을 벌리자 그는 등을 보인 상태에서 잠시 멈춰 서며 말했다. "걱정마라. 아세르의 신녀여!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서서히 그의 몸이 일행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쳇! 신비한 척하기 좋아하는 녀석이군." 그가 사라지자 조슈아가 툴툴거렸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결코 곱지 않았음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신녀님. 그를 알고 계십니까? 왜 그렇게 그를 깍듯하게 대하신 거지요?" 툴툴거리는 조슈아에게 고소를 보내며 멘디에타가 물었다. 그러자 조슈아도 궁금한 듯 그녀에게 눈을 돌렸다. "그 분은 적어도 400세가 훨씬 넘은 대마법사니까요." "에엑?" 샤레셀이 엘프 마법사가 사라진 방향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하자 일행은 기겁을 하였다. "4…400살? 그 건방진 놈. 아니 그분이 400살이나 되는 노인이라고?" 조슈아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샤레셀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최소한 400세는 넘을 거라는 이야기야." "으음." 도무지 방금 전의 그 잘난척하는 엘프의 마법사가 그렇게 나이가 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 그가 그렇게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거야?" 퓨어리스가 묻자 잠시 사이를 두고 샤레셀이 대답했다. "그가 '골든 화이어 볼'을 사용했기 때문이야." "골든 화이어 볼?" 일행은 아까 괴물의 뒤통수로 날아가던 황금빛의 불덩이를 생각해냈다. "그래. '화이어 볼'은 가장 간단한 공격마법처럼 보이지만 마법사의 속성에 따라 그 빛이 결정되지. 흑마술을 쓰는 자는 검붉은 빛이나 주황색, 백마술은 흰색이나 파랑색 을 띄게 돼." "그러면 황금빛은 뭐야?" "모든 마법을 완벽히 융화시킨 자라는 뜻이지." 조슈아의 질문에 샤레셀이 무시무시하다는 듯 몸을 떨려 대답했다. "그래서 그가 최소한 400살이 넘었을 거라는 거야. 고금을 통틀어 그 정도 경지에 오 른 마법사는 100년 전의 대마법 대전 이후 홀연히 사라진 현자 스코올 뿐이야. 그가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것이 400세 이후였으니까, 방금 우리의 눈앞에 있었던 엘프 마법사는 적어도 그 정도의 나이는 되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는 거지." "그런 대단한 마법사가 나를 알아보는 눈치이던데 무슨 말인지." "하하. 그래 부활했다고 했었지? 좀비도 아닌데." 바알이 웃으며 말을 잇자 조슈아가 그를 째려보았다. "글쎄? 무슨 착각이었겠지. 아무튼 우리는 정말 대단한 마법사를 만난 거야." 그녀의 말에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멘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그런 대단한 마법사가 엘프족에 있다니 부럽군요. 저도 골든 화이어 볼을 본적은 없습니다만 어렴풋이 그와 관련된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오오. 대단하군. 그런 것도 읽었나?" 바알이 감탄한 목소리로 말하자, 퓨어리스가 마치 자기 자랑을 하듯 대답했다. "멘디에타 씨는 왕실 '성쇠 기사단'의 수장이에요. 그 정도야 당연하죠." "성쇠 기사단? 뭐야, 그게?" 조슈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묻자 퓨어리스의 말에 잠시 표정이 굳었던 바알이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시돈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모아 놓은 말하자면 영재 기사단 같은 거야. 전투력은 근위대에 좀 떨어지지만 시돈 군의 전술은 모두 성쇠기사단의 참모들에게서 나오지." "무슨…별거 아닙니다. 조슈아 님. 그저 전투력이 좀 딸리고 머리를 좀 쓰는 기사들만 모인 책 냄새나는 기사단이에요." 멘디에타가 얼굴을 붉히고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헤에…저 녀석이 그리 대단한 녀석이었단 말이야?' 조슈아는 속으로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얼굴에는 나타내지 않았다. "샤레셀은 좋겠네. 존경할 만한 대마법사를 만나서." 퓨어리스가 아직도 조금은 멍한 표정의 샤레셀에게 장난끼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응.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러자 샤레셀은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으며 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 아이가?" 저런 태도와 표정의 샤레셀을 본적이 없는 조슈아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혹시. 그놈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어 불길한 생각을 지워버린 조슈아였다. '설마, 말도 안돼. 엘프 마법사 따위에게 샤레셀이…….' 1 조금씩 먹구름이 끼어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조슈아 일행은 한나절을 이동해 산 중턱에 위치한 제법 운치 있는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광산촌인 듯, 마을 위쪽에 위치한 바위산에는 여기저기 광구(鑛口)들이 뚫려 있었고, 광산촌 특유의 탄 냄새가 은은히 풍겨 나왔다. "멈춰라." 조슈아 일행이 마을입구에 들어서자 수십명의 사내들이 삽과 곡괭이 등을 꼬나들고 앞을 가로막았다. NEXT 제15화 바람의 마도사 part 3 그들은 무엇이 그리 겁이 나는지 귀여운 얼굴의 샤레셀과 에레크트라,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소녀인 조슈아를 뻔히 보면서도 연신 몸을 떨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자예요. 산을 넘으려 하는데 비가 올 것 같네요. 혹시 묵을 곳이 있을 까요?" 그들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붙임성 좋은 샤레셀이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내들을 유혹이라도 할 듯 말하였다. 그러자 곧 서로 수근거리는 그들을 헤치고 히끗히끗한 머리에 근육으로 덮인 어깨를 가진 50대의 사나이가 걸어 나왔다. "여행자라고 이런 시국에? 당신들은 마녀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멘디에타가 말에서 내려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저는 왕국기사 멘디에타라고 합니다. 마녀라고요? 당신들은 마녀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까?" 그의 말에 마을 사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 "오오. 기사이십니까? 저는 이 마을의 촌장입니다. 정말로 반갑습니다." 촌장의 과도한 환영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멘디에타는 촌장이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마녀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멘디에타의 질문에 이제는 과도한 친절이 좌르르 흐르는 얼굴로 촌장이 손을 저었다. "일단 저희 집에 가시죠. 곧 비도 올 것 같은데. 그 일은 식사라도 하시면서……." 그의 태도에 실소를 머금으며 멘디에타가 뒤를 돌아보자. 일행은 긍정하는 눈빛을 보내었다. 촌장의 집은 마을 중간 정도에 위치한 모양 좋은 빨간 벽돌집이었다. 주위에서 좋은 흙이 나오는 듯 이런 산 속의 집치고는 매우 좋은 벽돌로 지어져 햇빛 에 달구어진 벽에서는 은은하고 향기로운 흙 냄새가 풍겨 나왔다. 촌장의 집에서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게된 조슈아 일행은 과도한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런 산 속의 탄광촌에서는 생일날이나 먹음직한 요리들이 속속 차려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냐 면, 바알이 먼저 나온 스프와 보리 빵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데, 뒤이어 통째로 구운 새끼 양에 토마토 소스를 바른 요리가 커다란 접시에 담겨 날라져 오고, 그 냄새에 반해 체통도 잊고 군침을 흘리는 동안 소의 염통에 향료를 채워 석쇠로 구운 요리가 날라져 오는 식이었다. "허어……. 안주인께서 요리솜씨가 정말 좋으신가 보군요." 어린 소녀 둘이 분주히 주방을 드나들며 식탁에 음식을 나르는 동안, 아직 음식에 손은 대지 못하고 연신 코를 벌름거리며 바알이 말했다. 그러자 촌장이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아내는 얼마 전에 잃고 모두 딸들이 한 겁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꿀리지는 않는 요리 솜씨들을 가졌지요." 말과는 달리 자랑이 분명했지만 일행은 그 냄새에 취해 그런 것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결국 그들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요리들을 개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디저트로 나온 산딸기 푸딩까지 말끔히 비우고는 포만감에 젖어, 치워진 식탁에 눌러 붙은 듯 뒹굴 거리고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만족하셨는지요?" 여전히 의심스러울 정도의 과도한 친절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촌장이 물었다. "아아…. 정말 훌륭한 만찬이었습니다. 왕실 만찬도 이보다 더하지는 안답니다." 역시 고급기사 특유의 세련된 궁중 아첨술을 터득한 멘디에타가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 로 일행을 대표해 최상의 찬사를 보냈다. 그러자 촌장과 뒤에 시립해 있던 두 명의 쌍둥이자매는 기쁨으로 얼굴이 붉어 졌다. "하하... 그러시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왕실 요리사 수준이네요. 두분 딸들은…우리 궁에도…학……." 조슈아가 진실로 탄복하여 일급비밀을 공개할 뻔 하자 옆에 있던 샤레셀이 잽싸게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자 조슈아는 실태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녀의 말에 멘디에타와 바알의 표정에 이채가 띄어 졌다. '역시 조슈아는 아카바의 왕족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바알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신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듯 했다. 그때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헛기침을 하며 조슈아가 말을 돌렸다. "그럼 이제 말씀해주시죠. 이 마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그녀의 말에 이야기를 꺼내주어 고맙다는 표정으로 촌장이 입을 열었다. "으흠. 그럼 말씀드리지요." 촌장은 포도주로 입을 축이고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여러분도 보셔서 알겠지만 우리 마을은 석탄을 캐내어 팔아 생계를 유지합니다. 산 속이라 농사를 지어먹고 살기는 힘들고 식량과 생필품은 모두 석탄을 팔아 얻어 오죠." 그는 딸들을 한 번 일별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깊은 산 속이라 변변한 가도가 나있는 것도 아니라서 한번에 나귀 몇 마리로 나를 수 있는 정도만 운반할 수 있죠." "힘드시겠군요. 가장 근방의 마을로 가져가는데도 이틀은 걸릴 테니까요." 멘디에타가 말했다. "하하. 그렇기는 하지만 팔 수만 있다면야 문제 될 것이 없지요." "아니 누가 방해라도 한다는 거예요?" 포도주를 홀짝이던 퓨어리스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것이 저희가 말했던 마녀입니다." "……." "석 달 전부터였습니다. 밤마다 마을 밖 숲 속에서 마녀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은. 실 제로 마녀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지만 그 무서운 울음소리로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죠." "그럼 피해를 당하거나 한 건 없는 거예요?" 조슈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밤만 아니라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만 몇 번은 밤에 마을로 돌아오던 청년들이 목이 뜯겨진 채 발견된 적이 있지요." "흐윽." 갑자기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쌍둥이 소녀 중 하나가 얼굴을 가리며 뛰어 나 가고 역시 침울한 표정의 소녀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러자 멍한 표정이 된 일행에게 촌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아이를 이해해 주십시오. 실은 마녀에게 당한 청년들 중 하나가 저 아이의 약혼자였답니다." "저런……." 일행은 잠시 숙연해졌다. "그런데 마녀는 직접 마을로 쳐들어오지는 안나보지요?"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번 몇몇 괴물 같은 놈들이 마을을 공격한 적은 있죠." "괴물이요?" "예. 여행자 복장을 한 놈들이었는데 마치 시체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더군요.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처치하기는 했는데 목을 잘라내도 움직이는 통에 기겁을 했었죠." "좀비다!" 바알이 중얼거리자 촌장은 그 말의 뜻을 모르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일행의 얼굴 은 어두워 졌다. "그렇다면 오늘밤에도 마녀는 숲에 나타나겠군요?" "그렇습니다. 매일 밤 산이 떠나가라 울부짖죠." 그러자 바알이 주먹을 들어올리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없이 좋은 상대잖아?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리까지 질러가며 자기 위 치를 알려 준다니." 그의 당찬 목소리에 촌장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그럼, 물리쳐 주시는 겁니까?" "비록 저희의 수는 적지만 국왕 직속의 용병단이고, 저는 그 수행원입니다. 이런 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지요." 멘디에타의 말에 촌장은 의외라는 얼굴로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헛기침을 하며 멘디에타가 말을 이어갔다. "여기 이분은 용병대장이신 조슈아 님입니다. 그리고 저분은 신녀이신 샤레셀 님이시 죠. 그리고 퓨어리스 님도 훌륭한 검사이십니다." 촌장의 얼굴에 놀라움이 비치더니 이번에는 샤레셀의 옆에서 마녀의 이야기에 오돌오 돌 떨고 있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조슈아가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저의 제자 에레크트라에요. 저희가 마녀를 상대하는 동안 좀 돌봐주셔야 겠어요." "아! 예! 그러지요." "자 그럼. 밥도 먹었고, 날도 서서히 어두워지니 준비하고 나가 볼까?" 조슈아가 짐을 챙기며 몸을 일으키자 일행이 따라 일어났다. "이층에 방 두 개가 비어 있습니다. 안내해드리죠." NEXT 제15화 바람의 마도사 part 4 "감사합니다." 촌장의 안내로 2층에 올라간 일행은 밖에서 본 것과는 달리 그의 집이 상당히 넓은 것에 놀랬다. 2층에 있는 3개의 방들 중에서 맨 안쪽의 방은 두 딸이 나눠 쓰고 있었으므로, 나머지 두 개의 방을 조슈아 일행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일행이 방에 짐을 나르는 동안, 울며 뛰어 나갔던 쌍둥이 자매가 아직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로 청소를 하기 위해 올라왔다. 곧 방은 깨끗이 치워지고, 각방에 하나씩 있는 침대를 6인이 나눠 쓰게 되었지만 숲에서 서리를 맞으며 야영할 뻔한 그들로서는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어차피 마녀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에레크트라만 남겨두고 모두 나갈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리에 눕지 않고 촌장의 딸들이 바닥에 이불대신 깔아놓은 양털 더미 위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그 마녀라는 건 숲에서 상주하는 걸까? 그리고 목소리만 들었지 본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마녀인지 어떻게 안다는 거야?" 바알이 편하게 기대어 앉아 의아한 듯 묻자 침대를 정리하던 쌍둥이 소녀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다른 한 소녀는 옆방을 치우러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녀가 마을 윗 산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들을 먹어 치우고는 피가 묻은 손으로 비석을 만진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시…시체를 먹었다구요?" 샤레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에레크트라가 조슈아의 품에 파고들며 오돌오돌 떨었다. "예! 왠지 마을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마을사람들의 무덤을 모두 파헤쳐 아직 다 썩지 않은 시체만 골라 파먹었어요." 소녀는 무서움보다는 원한에 가득한 눈동자가 되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탁자 위의 조그마한 기름램프에서 세어 나오는 불빛만이 방안을 비추고 있어 일행은 마치 한 여름밤에 방안에 둘러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마녀를 실제로 본 사람은 없다는 거군요?" 조슈아가 물었다. "예! 하지만 가끔 발견되는 피묻은 긴 머리칼이나 여자의 울음소리로 볼 때 여자임은 틀림없어요." 일행은 어쩐지 으슥해지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포만감에 젖어 이야기를 들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샤레셀, 이런 일은 네 전문이잖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 조슈아의 질문에 샤레셀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행은 신녀인 그녀가 귀신 이야기에 무서운 기색을 보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 그녀의 표정에 의아해졌다. "그…글쎄? 무덤을 파서 시체를 먹었다면 유령 같은 건 아닐 거야. 그리고 좀비는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거니까 마을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이 마을에는 성전이나 대 마물결계의 흔적도 없으니 결국 그 마녀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마을에 들어오지 않고 숲만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지." 그녀의 말에 멘디에타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그러면 그 마녀는 그저 좀비가 아니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말이군요." 샤레셀은 대답을 않고 고개를 끄떡였다. "이거 의외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는데? 도대체 숲에서 뭘 하려는 거야? 마녀는?" 바알이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바다에서 항로를 봉쇄하기 위해 풀어놓았던 크라켄의 좀비와 같은 것이 아닐 까? 오전에 보았던 그 희안하게 생긴 드래곤도 마찬가지고……." 조슈아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생각난 듯 말하자 바알이 손뼉을 쳤다. "맞아, 산을 넘으려면 이 마을을 지나야하니까 그 빌어먹을 마법사 놈이 세워놓은 마 물일지도 모르지. 결국 요소요소 중요한 길목마다 수는 적지만 모두 마물을 심어 놓았다는 거구만?" "그러면 바다에서 만났던 크라켄 때는 어떻게 설명하지? 그것들은 다수였잖아?" "그…그런가?" 말문이 막힌 바알이 다시 벽에 상체를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그런 그를 보고 실소를 머금던 멘디에타가 말했다. "아무튼 주요 길목마다 마물들을 심어 놓았다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그 넓은 범위에 많은 마물들을 심어 놓지는 못했을 겁니다. 각 구역마다 한두 놈이겠죠. 그리고 아마도 바다에서 만났던 크라켄의 경우에는 시돈으로 향하는 북방 항로가 한 줄기 뿐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공격력을 집중하려던 의도였겠죠." 역시 머리 좋은 성쇠기사단의 수장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일행은 어느 정도 불안감을 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카아아아아!" 일행이 가슴을 쓸어 내리는데 갑자기 등골을 얼음물에 담그는 듯한 소름 돋는 여인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시작이에요." 이제는 익숙해져 있는 듯, 소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카아아아아앙!" "저…저 소리예요?" 퓨어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소녀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때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무거운 발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촌장이 문을 벌컥 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녀가 나왔습니다. 전사님들!" 창문을 열자 밤바람이 들어와 기름램프의 불꽃을 흔들어 상기된 표정의 촌장의 얼굴이 흔들렸다. '후후, 아저씨 얼굴이 더 무섭군.' 에레크트라가 귀를 틀어막으며 품에 안겨오는 것을 보며 조슈아는 어쩐지 이 분위기와 상황이 재미있어졌다. 2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바로 근방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다가가면 그대로 거리를 두고 울려 퍼지잖아?" 여전히 소름이 돋는 여인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따라 숲에 들어선 조슈아 일행은 의외의 상황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마을 밖에 나온 지 한시간여가 되도록 마녀의 울음소리를 따라 숲을 달렸건만 울음소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들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울음소리에 요기(妖氣)가 없어. 저건 그저 보통의 여인이 울부짖는 소리같이 들리는데?"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커." 샤레셀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하자 조슈아가 숲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우리를 의식하고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군요." 멘디에타가 말했다. "아니? 누구인줄 알고 마녀가 우리를 피한다는 거예요?" 퓨어리스가 묻자 잠시 생각에 잠겨들던 멘디에타는 샤레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신녀 님 때문이 아닐까요? 신녀 님은 여신의 축성을 받으셨을 테니 마녀에게는 근처에 있는 것만도 괴로운 일이 될 것 같은데요?" "아!" 그제야 한심한 신녀 샤레셀이 장탄성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그렇군요. 제가 긴장해서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네요." "뭐야, 샤레셀. 멘디에타 씨의 말이 맞는 거야?" "응, 미안해. 마물이 때로 몰려오는 것도 아니고 요물 혼자라면 여간해선 내 주위에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조슈아가 다그치듯 묻자 정말로 미안한 얼굴로 샤레셀이 사과했다. "하하. 정말 편리하시겠군요. 알아서 마물들이 피해 간다니." "좋겠다 샤레셀은……." 샤레셀의 실태로 긴장감이 풀린 일행은 잠시 농을 하며 어둠 속에서 괴기스럽게 흘러나오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견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마을로 돌아가 샤레셀. 일단 접근을 해야 마녀를 잡던지 말던지 하지." 조슈아가 샤레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하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았어. 그럼 조심들해요." 샤레셀은 인사를 남기고는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려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NEXT 제15화 바람의 마도사 part5 "정말 신녀 님 때문 만이었을까요? 혹시 우리와 멀어져서 혼자 공격이라도 당하는 건 아닌지?" "마녀의 울음소리는 계속 정면에서 들리니까 우리가 계속 나아가면 괜찮을 거야." 바알이 대답했다. "그런데 어쩐지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데?" "정말이군." 조슈아의 말대로 마녀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정면의 풀숲 너머에서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바로 앞이야. 역시 샤레셀 때문에 접근하지 않은 거였어." 조슈아가 성검 말고스를 검 집채 뽑아 들었다. 그녀는 전의 전투에서 검을 잃은 데다가 마음에 드는 다른 검도 없어서 아직 뽑을 수는 없지만 말고스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성검인데 검 집채라도 도움이 되겠지.' 그녀는 스스로 그렇게 안심시키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멘디에타와 바알도 검을 뽑아 긴장된 눈으로 숲을 바라보고 있었고, 퓨어리스는 그래도 소녀인지라 인간이 아닌 마녀와의 첫 대결에 상당히 겁을 먹은 듯 창백한 얼굴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있었다. 까아아아아아! 드디어 마녀의 울음소리가 갈대 숲을 통과해오며 마치 정신 공격이라도 할 듯 기괴한 음향으로 울려 퍼졌다. "정말 시끄러운 마물이군. 그냥 쳐들어오면 될텐데 왜 저리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거야?" 파악―. 바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갈대 숲을 헤치며 새까만 물체가 튀어 나왔다. "흩어져서 둘러싸!" 조슈아가 소리치자 바알과 멘디에타, 퓨어리스는 쏘아져 오는 물체의 양옆으로 갈라져 몸을 돌렸다. 파악―. "이건 뭐야?" 조슈아가 쨉싸게 몸을 틀어 바라보고 의외의 상황에 놀라 소리쳤다. 그들이 서있던 자리에는 조그마한 몸집의 여인이 비온 뒤에 굳어 딱딱한 땅바닥에 손목까지 박고 귀기가 흐르는 주홍빛 눈으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자야? 너무 작잖아?" 바알의 말대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조슈아의 어깨 정도까지 올 듯 상당히 작은 키에 작은 몸집이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방심하면 안돼. 보기에는 저래도 마녀라고 무언가 대단한 능력이 있을 거야." 카아아아! 자신의 일격을 너무 쉽게 피한 것이 믿기 지 않는 듯 잠시 일행을 탐색하던 마녀는 땅에서 양손을 뽑아 조슈아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런…왜 내가 먼저야? 저기 남자들이 둘이나 있잖아?' 어이없는 불평을 하며 조슈아가 자신에게 쏘아오는 마녀에게 검을 휘둘렀다. 퍼억―. 카아아아! 마녀는 이마에 정통으로 조슈아의 검격을 맞고 뒤로 튕겨 갔다. 그녀의 이마는 움푹 패여 새빨간 핏물 안으로 뼈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마녀는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듯 계속 섬짓한 눈빛을 흘리며 조슈아에게 접근해 왔다. "이런 역시 목이라도 베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조슈아는 마녀가 검 격에 상관없이 재차 밀고 들어오자 상당히 당황하여 뒷걸음질쳤다. 푸욱―. 그러자 바알과 멘디에타가 달려드는 마녀의 양옆구리에 검을 깊이 쑤셔 박았다. 카아아아! 마녀는 양 옆구리를 꿰뚫려 선 채로 고기 산적이 되어 바둥거렸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던 조슈아가 온힘을 다해 마녀의 정수리를 내려 쳤다. 파악―. 아무리 검 집채라 해도 검술의 달인이 전혀 수비되고 있지 않은 머리를 온힘을 다해 내리친 것이다. 마녀의 머리가 무사할 리 없다. 정수리에서부터 양미간 사이를 베었다기보다 부수고 들어간 조슈아의 검은 마녀의 머리에서 흐른 뇌수와 피로 범벅되었다. 조슈아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쩌억―. 그러자 마치 흡판에 붙은 물체를 떼어 내는 듯한 기분 나쁜 음향과 함께 검이 들리고 그녀의 시야에 마녀의 부서진 머리가 들어 났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바알과 멘디에타도 마녀의 옆구리에서 검을 뽑아 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녀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 졌다. "이거 일이 지저분하게 되었군. 그냥 깨끗하게 목을 밸걸 그랬어. 그래도 겉보기는 인간인데 말이야." 바알도 개운치 않은지 쓴 미소를 지었고 긴장하여 끼어 들 찬스를 놓친 퓨어리스는 얼굴을 돌려 구토를 참고 있었다. 조슈아는 역시 쏟아지려는 구토를 참으며 거의 부서져 역겨운 모습으로 일그러진 마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녀의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번졌다. "바알. 이 얼굴은 어딘가에서 본 얼굴이 아니야?" 그녀의 말대로 달빛에 반사되어 창백한 마녀의 얼굴은 그들이 한번은 본 얼굴이었다. "촌장 집 딸의 얼굴이야. 아까는 몰랐는데 눈을 감고 있으니까 알겠어." 퓨어리스가 조슈아의 말에 구토를 참으며 마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떨며 말했다. "맞아. 얼굴이 같아. 분명히 그 딸들과 관계가 있는 여자야! 이 여자는." 바알이 말했다. "이거 우리가 잘못 짚은 것 아닙니까? 이 여자 마녀가 맞을 까요?" 멘디에타가 걱정스레 묻자 조슈아가 대답했다. "아까의 공격력과 느낌으로 봐서 이 여자가 마녀임에는 틀림없어요." 조슈아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마녀의 얼굴을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 파악―. "아앗!" 갑자기 얼굴의 반이 부서진 마녀가 손을 뻗어 조슈아의 목을 잡아챘다. 맨땅에 손가락을 박아 넣을 정도의 악력으로 보아 조슈아의 목 정도는 쉽게 꺾어 버릴 수 있는 마녀였다. 파악―. 그러나 조슈아가 경악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마녀의 손목을 밑에서부터 쳐 올리자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녀의 왼손목이 무참히 꺾였다. 캬아아! 그러나 마녀는 개의치 않고 몸을 퉁겨 일어나 일행을 가로질러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졌다. "이…이런 마을 쪽이야. 저 여자는 우리보다 훨씬 빠르다고. 빨리 쫓아가지 않으 면……." 뒷말을 들을 것도 없었다. 마녀가 이대로 마을 방향으로 간다면 마을로 돌아가는 중인 샤레셀을 만날 것이다. 과연 마녀는 검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은 신녀를 그냥 지나칠 것인가? 조슈아는 몸서리를 치며 마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3 샤레셀은 마녀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일행과 마녀가 멀찍이 떠나가 숲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숲을 헤치고 나와 언덕 배기를 넘어서자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정말 나 혼자 돌아가도 괜찮을까?" 그녀는 마녀의 힘이 어느 정도 일지 걱정되었다. 사사삭―. 잠시 멈춰서 상념에 잠긴 샤레셀의 등뒤에서 숲을 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인영이 있었다. "하앗?!" 샤레셀은 기겁을 하며 오른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인장을 맺었다. 파악―. 방어벽을 뚫고 손가락이 샤레셀의 목을 잡아챘다. 치이이익―. 까아아아! 그러나 그 손가락은 샤레셀의 목줄기를 잡아챌 수는 있었지만, 그 길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목을 베어 버리거나 목뼈를 부러트리지는 못하고 희뿌연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갔다. 강한 손아귀에 목을 잡힌 샤레셀은 숨이 막혀 주문을 외울 수 없었지만 더 이상의 공격이 없자 정신을 추스려 자신의 목줄기를 잡고 있는 손가락의 주인공을 바라 볼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 정체를 파악하자 그녀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꺼운 도끼날로 내리친 듯 코날의 바로 위까지 쪼개진 머리에서 허연 뇌수와 피를 뿌리며 서있는 여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녀의 수업을 받으며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를 보아온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이 여자가 마녀? 촌장집 딸들과 똑같이 생겼잖아?' 치이이익―. 그런 와중에도 샤레셀의 목을 움켜잡은 마녀의 양 손아귀는 계속 살타는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 갔다. 상급신녀로서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그녀를 헤치기에 마녀의 힘은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대가 조슈아 일행만 아니었다면 길 하나를 점유해서 막아서는데는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그녀는 상대를 잘못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마녀를 바라보는 샤레셀의 눈은 어쩐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이 마녀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었다. 파악―. 갑자기 마녀의 얼굴에 주먹만한 돌덩이가 날아와 그녀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러자 볼에서 피가 터지며 마녀는 샤레셀을 놓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낌새를 눈치채고 나온 마을 사람들이 횃불과 곡괭이 등을 들고 나와 큰 원을 그리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샤레셀은 콜록거리며 정면에 경악한 얼굴로 서있는 촌장과 그의 딸들에게 달려갔다. 촌장은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짧은 손목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그는 거의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하…한나?"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악다문 입술사이로 흘러나오자, 딸들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그녀들도 마녀의 얼굴과 옷을 보고 그녀의 정체를 파악한 것이다. "샤레셀!" 그때 숲을 막 빠져 나온 조슈아 일행이 언덕 베기를 넘어와 엄청난 속도로 마녀를 둘 러쌌다. 그러나 그럴 것도 없이 마녀는 촌장과 주저앉아 오열하는 두 소녀를 바라보며 얼이 빠 져 나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경악한 시선으로 마녀를 바라보며 감히 입을 열지 못 하고 있었다. "조슈아! 공격하지마! 저 분이 촌장님의 부인되시는 분이야." 샤레셀이 목줄기에 손가락 모양으로 찍힌 새파란 멍을 어루만지며 소리쳤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촌장이 도끼를 떨어뜨리며 마녀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하…한나? 이게 어찌된 거요. 당신을 내 손으로 묻었는데. 어떻게 이런……." 그러자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조슈아 일행에게도 전혀 두려운 모습을 보이지 않던 마녀는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촌장에게서 뒷걸음질쳤다. 크으으……. 마녀는 홱 몸을 돌려 달음질을 치려다 바알과 멘디에타가 뒤를 막고 서있자 낮게 으르릉 거렸다. "위험해요!" 촌장이 그런 마녀의 바로 뒤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샤레셀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촌장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없이 마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크으으으…….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온몸을 긴장감으로 바짝 세우고 조슈아 일행을 바라보던 마녀의 두 눈이 풀리며 그 팽팽하던 긴장감도 눈 녹듯 사라졌다. "한나! 한나!" 그녀를 뒤에서 안은 채 촌장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촌장님 떨어지세요. 그 마녀…그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에요. 푸르카스의 재생 마법으로 소생한 좀비라고요." 샤레셀이 소리치며 다가가려 하자 다시 마녀의 눈에서 주홍색의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바로 등뒤에 붙어있는 촌장의 안전을 생각해 아무도 더 이상은 다가 갈 수 없게 되었다. "쯧, 더 이상은 못 보고 있겠군." 갑자기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마녀와 촌장의 주위에 무형의 기운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휘이익―. 카아아! 갑자기 마녀와 촌장이 누가 억지로 붙들고 떨어 뜨려 놓기라도 한 듯 갈라져 밀려나고 마녀가 밀려 난 자리에 애초에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처럼 한 사내가 서서 밀려오며 그녀의 양팔을 잡아챘다. 카오오…! 마녀는 사내의 손아귀에서 양손을 빼어 내려고 발버둥쳤다. "얌전히 있어라. 이제 곧 편하게 해주마! 인간의 여인아." 그러자 믿기 지 않게도 마녀의 움직임이 멈추어졌다. "당신은 그 재수 없는 마법사잖아?" 조슈아가 검으로 밀려오는 마녀를 노리고 있다가 상대를 빼앗겨 당황하고 있다가 그를 알아보고는 기분 나쁜 듯 소리쳤다. 그는 바로 얼마 전에 만났던 추정연령 400살 이상인 은발의 엘프 마법사였던 것이다. "후후…. 입이 거친 소녀이군! 그러다가는 시집 못가!" 그가 예의 그 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답하자 조슈아는 모욕감에 폭발 직전이 되어 검을 쳐들었다. 그때 분위기를 깨며 샤레셀이 달려와 끼어 들었다. "마법사 님 이 분은 이곳 촌장님의 부인이세요. 어떻게 하시려는 거예요?" "이대로 너희들이 이 여자를 죽이면 얌전히 사라져 줄 것 같나? 아무리 조각 내서 묻어버려도 이 여자는 다시 살아날 거다. 그렇다고 마을사람들에게 이 여자를 죽여 태워버리라고 할까? 이 여자는 그 빌어먹을 놈이 건 마법 때문에 무덤에서 걸어 나온 거다. 그리고 산 속을 헤매며 피를 찾아다니게 된 것이지. 이런 여자가 왜 마을로는 쳐들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설마?" 조슈아가 무언가 눈치를 챈 듯 입을 열자 엘프의 마법사는 이제는 얌전해진 마녀의 팔목에서 손을 때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 마을의 근처로 오면 본능적으로 옛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리 속은 죽음으로 인해 백지가 되었지만 몸과 본능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래서 마을 근처에서 울부짖은 거야." 그는 마녀의 볼을 쓰다듬어 주며 굳은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의 아내는 지금 너무도 괴로워하고 있다. 산채로 지옥을 거니는 것 같은 악몽일 거야. 어찌 하겠나? 내가 편하게 해줄 수도 있다." 마법사가 무엇을 했는지 마녀는 남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마치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 멍한 시선으로 정면을 주시할 뿐이었다. 촌장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체통도 잊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아무도 위로의 말을 건낼 수 없었다. "해…해주십시오. 마법사 님. 아내를 편하게 해주세요." 마침내 촌장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고 마을 사람들과 조슈아 일행은 숙연한 분위기가 되어 뒤로 물러났다. "잘 결정하였다. 인간이여! 아내도 기뻐할 것이다." 엘프의 마법사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려 가볍게 입김을 불고는 주문을 외웠다. "안드라스(Andras) 불꽃과 바람의 마신이여! 내 부름에 답하여 신의 이름을 건 계약을 이행하라! 계약의 집행자에게 너의 광기의 바람을 행사할 권리를."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서 겨우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異)공간의 통로가 생겨나더니 깊이를 알 수 없는 갱저에서 나는 듯한 바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슈아아악―. 그의 손바닥에서 나온 검은 기류의 바람은 마녀를 휘감더니 머리위로 들어올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회전을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이 그 회전에 의해 몸이 부서지는 소리에 눈을 돌린 사이 마녀는 순식간에 분해되어 대기 중에 사라 졌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어 주위는 적막에 휩싸였다. "그 놈을 없애기 전에는 이런 일은 끝나지 않아." 촌장의 아내가 대기 중에 분자로 분해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며 마법사는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조슈아를 일별하고 몸을 돌려 숲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샤레셀이 쪼르르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법사 님 알려주세요. 당신은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는 거죠? 그렇죠?" 그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한쪽 입술을 찡긋해 보이며 대답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 신녀여! 그대로 해 나가면 되는 거야." 그는 애매한 대답을 남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제발 이름만이라도……." 그녀의 간곡한 청에 엘프의 마법사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인간들 중에는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놈들도 있다지만 나의 친구들은 나를 진이라고 불렀다. 다시 만나게 되면 너도 그리 부르려무나." 어둠 속으로 멀어진다 싶던 그의 모습은 갑자기 지워지듯 사라지며 목소리의 여운만이 주위를 맴돌았다. 샤레셀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며 애써 동요를 감추는 표정으로 경악한 듯 중얼거렸다. "그 위대한 전설의 현자의 아명을? 그가 정말로 그인가? 설마……." 새벽 안개가 밀려오며 마녀의 핏자국을 가려 주자 더 이상 여태껏 벌어진 일이 현실이었는지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었는지 구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그저 촌장 가족의 낮은 흐느낌을 들으며 습기 머금은 새벽 공기의 도움을 받아 이 악몽에서 헤어나려 노력할 뿐이었다. NEXT 제16화 요정의 숲 part 1 쏴아아―. 들판을 가로질러 기분 좋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며 경쾌한 꽃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덕분에 조슈아 일행은 오랜만에 기꺼운 기분으로 한낮의 고달픈 여행길을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일행이 마녀를 만났던 광산촌의 마을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지만 그 동안 단 한 마리의 마물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밤마다 샤레셀과 에레크트라를 제외한 나머지 4인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던 것도 점점 위험에 대해 둔감해지며 시들해질 정도가 되었다. "정말 황량한 땅이군. 이 시돈이라는 나라는. 우리 페드라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황량함이지만." 지난 사흘간 그 넓은 초지를 지나는 동안 단 하나의 마을도 만나지 못한 바알이 질렸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실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이제 막 게헤나 산맥을 지나왔을 뿐입니다. 시돈의 대도시들은 거의 북동쪽의 해변과 남동쪽 디온의 국경 지대에 몰려 있죠. 이런 대 초원에는 도시를 지을 만큼의 물을 공급하기 힘들어서 조그마한 마을들이 흩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자 조슈아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왜 용병단을 칼라에 모은 것이죠? 디온 국의 육로를 통해 처음부터 바리로 모 아서 진군을 하면 되는 것이잖아요? 대도시도 없는 이 지역으로 무엇 하러 1000이상이나 되는 용병단을 끌어들인 거예요?" 멘디에타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래서 칼라에 모은 겁니다. 바리에는 시돈 왕국의 전 전력이 모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적이 강대해도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방어에 중점을 둔다면 결코 우리가 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군의 정예를 바리에서 빼내어 이 일을 맡기기에는 만약의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시돈 동부의 해변로는 완전히 전쟁터이고 각 도시 별로 고립되어 열전을 치루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용병단은 처음부터 전투참가가 목적이 아니었던 거군! 그저 남동부의 전선을 거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알본으로 가기 위해 경호요원 정도의 목적으로 부른 것이라는 이야기인가?" 바알이 무언가 불만스럽다는 듯 말하자 멘디에타는 두 손을 황급히 저어가며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작전이 여의치 않으면 바리로 가서 정규군에 합류하라는 명령도 있지 않습니까? 조슈아 님이 알본으로 가신다고 하셔서 저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사실은 우리는 바리로 갔어야 하는 겁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조슈아의 눈치를 보며 말을 끝맺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이 여행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만큼 오로지 그의 임무는 조슈아의 마음에 달린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그로서는 조슈아를 자극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조슈아는 아무 말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그저 조용히 말을 몰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을 거야. 왜 알본에 가려 하는지. 다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알본의 파괴된 궁전에 적의 전력을 극대화시킨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고 멘디에타의 임무는 그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 뿐이야.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어. 이런 시기에는.' 그녀는 코끝을 스치는 이름 모를 꽃향기를 음미하며 가볍게 코를 문질렀다. '그나저나 그 엘프의 마법사는 시돈 땅에 사는 놈이었을까? 그런 엄청난 마법사가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지? 그리고 아무래도 이일의 원흉까지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전의 기분 나쁜 대화가 생각난 그녀의 아미가 가볍게 굳어졌다. '흥! 나를 보고 부활한 뭐라고? 이런 미소녀를 좀비 취급하고 그리고 그 기분 나쁜 물건을 쳐다보는 것 같은 눈초리는……. 정작 기분 나뿐 놈은 자기면서 400살 이상이나 먹은 괴물 놈이.' 자신을 스스로 소녀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조슈아는 따른 일로 기분이 상해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가도가도 꽃밭이군요. 어쩐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전에 이 길을 지나 간 적이 있었는데. 이런 꽃밭은 본 기억이 없어요." 퓨어리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그래! 조슈아. 아무래도 이 꽃밭에서는 요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옛? 그러면 우리는 마법사의 결계에라도 들어온 겁니까?" 그녀의 말에 당황하여 바알이 소리쳤다. "아니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아요. 다만 적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포근한 결계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그렇다하더라도 결계는 결계라는 거잖아? 부수기 전에는 계속 꽃밭을 맴돈다는 것이고." 조슈아가 상념에서 깨어나 의외의 상황에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샤레셀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솔직히 이런 아름다운 결계를 내 마음대로 부수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이런 가벼운 결계라면 곧 결계를 만든 이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이대로 조금만 가면 결계의 주인을 만날 꺼야. 그에게 이야기하자. 응? 조슈아." 어쩐지 일행을 가두고 있는 이 결계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샤레셀이 애교 있는 목소리로 조르자 결국 언제나처럼 넘어가고 마는 조슈아였다. 1 "저기에 있다는 것일까? 이 결계의 주인은?" 주인을 만나기 전에 결계를 임의로 부수지 않기로 합의한 조슈아 일행은 1시간 여를 더 이동하여 꽃밭에 둘러 싸여 있는 울창한 숲에 다다를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꽃 밭 한가운데 이런 숲이 덩그렇게 생겨날 수는 없는 것이니. 이건 인공적인 숲이야. 아니면 이 것이 진짜이고 꽃밭이 인공일 수도 있지만." 샤레셀이 여전히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퓨어리스가 의아한 듯 질문했다. "왜 그리 즐겁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샤레셀." "후후. 당연히 즐겁지! 퓨어리스. 시돈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기분 나쁜 흑마술의 기운만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기분 좋은 결계를 만나다니 신전에서는 금지되어 있지만 일부 고급마법사들은 일부러 이런 공간을 만들어 내어 휴가를 즐기기도 한다고 들었어." "그러면 이곳을 만든 자도 고급 마법사라는 이야기야?" 조슈아가 그 재수 없는 엘프 마법사를 떠올리고는 노골적으로 적의를 나타냈다.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 우리가 들어 올 수 있었다는 건 이 결계의 주인이 완전한 결계를 만들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다만 이 정도 규모라면 상당히 강한 마법사일 거야. 아니면……." "아니면?" 잠시 뜸을 들이던 샤레셀이 대답했다. "이 결계를 만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일행은 천천히 숲으로 들어갔다. 산림이 울창하고 그리 넓은 구역이 아니므로 말을 숲의 외곽에 매달아 놓고 맨몸으로 숲을 뒤지기로 한 것이다. 바알이 앞장으로 서고 맨 뒤를 멘디에타가 수행하는 대형이 되었는데, 검술의 실력으로 보면 조금은 어이없는 대형이었으나 건장한 사내들이 소녀들을 지킨다고 우기는 데야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지 상당히 좋은 취미를 가진 자인 것 같지? 나라도 계절 궁전보다는 이런 숲에서 쉬고 싶을 꺼야?" "호도 나무 냄새가 너무 좋아. 그러고 보니 에레크트라는 이런 숲은 본적이 없지?" 조슈아의 말에 샤레셀이 숲의 냄새를 음미하며 에레크트라를 돌아보았다. 돌산에서 태어난 에레크트라는 나무의 크기와 그 규모에 질렸는지 멍한 표정으로 샤레셀의 옷소매를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쉿―!" 갑자기 바알의 뒤를 따라 걷던 퓨어리스가 손을 들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바알은 그 커다란 등으로 정면을 가로막고 서서 그대로 굳어 있는 듯 했다. "왜 그래? 바알?" 조슈아가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리자 바알이 그녀에게 조용하라는 시늉을 보내고는 오른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쪽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던 조슈아는 조용한 숲의 공터에 왠 조그마한 구술 같은 물체가 느리게 날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호도잖아? 저게 어떻게 날고 있는 거야?" 어느새 퓨어리스가 무릎을 꿇고 앉아 호도가 날아가는 희안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바보니 너희들은? 그 밑을 봐." 샤레셀이 한심하다는 듯 속삭이자. 일행은 동그란 호도 밑에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생물을 발견하였다. 마치 벌새처럼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반투명한 날개를 움직이며 호도를 들어 나르고 있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요정이다!" 샤레셀이 경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조슈아가 놀라서 상황을 잊고 소리쳤다. "요정이라고? 그 수 백년 전에 멸종되었다는 요정족이란 말이야?" "쉿!" 샤레셀이 놀라서 만류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하늘을 날아가던 호도가 갑자기 멈춘 것이었다. 위잉―. 주위가 적막에 싸이며 아까는 들리지 않던 요정의 날개 짓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인간?" 그 작은 요정의 것이라고는 믿기 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지만 성별과 나이를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묘한 울림의 요정의 목소리는 아마도 무언가에 의해 증폭되는 듯 독특한 공명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하이." 선두에서 굳어 있던 바알이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이…이 녀석 바보인가?' 조슈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며 조그마한 요정을 바라보는 바알의 눈에는 놀랍게도 공포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으으∼. 싫다. 잡아먹힐지도 몰라.' 누구든지 빼빼 울던 아기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바알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무서운 세뇌를 받은 적이 있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바알스야. 또 손가락을 빠는 구나? 자꾸 그러면 요정들이 벌 때처럼 몰려와 네 손가락을 뜯어먹는단다……저런 또 이불에 오줌을 쌌니? 자꾸 그러면 네가 잠든 사이에 요정들이 너의 고추를 때어먹는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상당히 가학적인 육아를 즐기시는 분이었다. 물론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뇌리에 박힌 이미지는 그리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바알은 어쨌든 저 벌래 만한 요정의 화를 돋구고 싶지 않았다. 위잉―. 요정은 바알의 인사를 받고는 호도를 든 채로 천천히 다가왔다. 점점 다가와 윤곽이 분명해지자 일행은 요정의 모습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요정은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11∼12세쯤의 아이로 보이는 체형에 우유 빛의 피부가 반짝이고 있었고, 초록색의 머리칼은 촉수의 역할도 겸하는지 끝이 말려 올라가 두 개의 돌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록색의 눈동자는 '천사가 있으면 저런 눈 일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순수한 아름다움 그 차제였다. "예…예쁘다. 요정은 정말 예쁜 거구나." 샤레셀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던 에레크트라가 진심으로 감탄하여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약간은 굳어 있던 요정의 얼굴에 홍조가 띄어 졌다. "나 예뻐?" '허억…….' 의외의 전개에 에레크트라를 제외한 모두가 헛 바람을 들이 켰다. 그러니 역시 애들인 에레크트라는 달랐다. "웅. 천사 같아. 어떻게 그렇게 예뻐? 나도 너처럼 예쁘면 좋겠어." 쉽게 동경하는 그녀의 버릇은 여기서 그 막강한 위력을 과시했다. 요정은 까르르 웃더니 에레크트라에게 날아왔다. "손 내밀어봐." "아! 응." 에레크트라가 당황하여 두 손을 내밀자 요정은 제 머리보다 큰 호도를 그녀의 손바닥 위에 떨어 뜨려 주었다. "후후. 그거 먹어." "고…고마워." 일행이 요정과 에레크트라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멍해 있는 동안 숲의 공터 저편에서 요란한 날개 짓 소리가 들려왔다. "허억…요정 때가 온다." 조슈아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몸을 부를 떨며 소리치는 바알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숲 공터로 눈을 돌렸다. 과연 이 요정이 연락이라도 했는지 수백의 요정들이 날아와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인간이다." "까르르. 아저씨도 있어." "못 생겼다." "못 생겼어." "가운데 저 여자는 이뻐." "웅…이쁘다." 마치 어린 소녀들처럼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요정들은 모두 초록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고 크기가 작아서 외모의 차이를 거이 느낄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서로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들의 뒤에서 초록빛의 광채를 뿜으며 천천히 요정들을 헤치며 나타나는 것이 있었다. 모습을 완전히 들어낸 초록빛 광채의 요정은 다른 요정들과 달리 확실한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소녀의 몸이라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다른 요정들보다 2∼3배정도 큰 키와 몸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또 비할 대 없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좀더 긴 머리칼과 촉수, 특히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는 아이 같은 눈빛의 다른 요정들과는 달리 깊이가 있어 상당한 연륜이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세련된 날개 짓으로 일행에게 다가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알이 흠짓하며 검에 손을 가져갔지만 조슈아가 재빨리 제지하였다. 요정들의 수다가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그녀가 우두머리인 듯 했다. NEXT 제16화 요정의 숲 part 2 "그 인간의 마법사가 다시는 인간들은 이 땅에 나타나지 않을 거랬는데…당신들은 누구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양이 없어 적의는 물론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인간의 마법사가 이 땅에 인간이 다시는 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구요?" 이런 일에 강한 샤레셀이 확인하듯 되묻자 요정은 좀더 다가와 그 초록색 눈으로 샤레셀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당신은 인간들의 신을 섬기는 자군. 냄새로 알 수 있겠어." "냄새요?" 요정의 말에 샤레셀이 당황하여 물었지만 요정의 여왕은 이미 다른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여기도 더 있을 곳이 못되는군. 오랫만에 조용하게 쉴 수 있었는데." 여왕이 몸을 돌려 날아가려 하자 조슈아가 급히 나서서 소리쳤다. "인간의 마법사가 당신에게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알려 주세요." 그러자 의외로 상당히 친절한 성품을 가진 듯 여왕이 멈춰섰다. "그 마법사가 북쪽 숲에서 여름을 나던 우리를 찾아와서 산맥 쪽의 대초원에 더 이상 인간이 나타나지 않을 테니 돌아가도 좋을 거라고 하더군." "돌아가요? 무슨 말이죠?" 샤레셀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는 본래 우리의 고향이야. 옛날에 인간들이 너무 귀찮게 해서 북쪽의 숲으로 옮긴 것이지." "귀찮게 해요?" "인간들은 툭하면 우리의 숲을 찾아와서는 더러는 공격도 하고 일족을 잡아가기도 했어. 다른 종족과 달리 인간들은 우리가 신기 한가봐. 그래서 결계를 치는데 인간 중에 마법을 가진 자나 이 여자처럼 신을 섬기는 자들이 우리의 결계를 너무 쉽게 들어오더군." 그녀의 말에 일행은 얼빠진 표정으로 샤레셀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저만 없었으면 여기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라는 말인가요?" "그래. 보통은 그냥 꽃밭을 가로질러 우리의 숲을 지나쳤겠지. 너가 있어서 우리의 결계를 들어오게 된 것이야." 샤레셀은 일행에 지지 않을 정도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네 그 마법사는 거짓말을 했군. 얼마간 인간이 안 지나가서 정말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녀의 억양 없는 목소리에서 어쩐지 서운한 기운이 베어 나왔다. "왜 떠나려 하죠? 우리는 당신들을 헤치지 않아요." 조슈아가 손을 저어가며 말했다. "당신들이 그런 인간들이 아니라는 건 결계에 들어선 순간에 이미 알고 있었어. 다만 인간 중에는 우리를 싫어해서 귀찮게 하는 자들이 있어. 우리는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한 종족의 우두머리로서는 상당히 어이없는 대사였지만 그녀의 말은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돌아가겠어. 당신들은 어딜 가는 거야?" 전혀 쫓겨가는 자의 말투가 아닌 그녀의 지나가는 듯한 말투에 조슈아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우리는 이 땅의 인간들의 성도로 가는 중이에요. 원한다면 같이 갈래요?" 그러자 요정 여왕의 얼굴에 이채가 띄어 졌다. "알본에 가는 거야?" "허어? 당신은 인간들의 도시 이름도 아십니까?" 일행의 맨 뒤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멘디에타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그를 한번 주시하고는 까르르 웃었다. "당신은 전에 나를 한번 보았을 텐데. 나는 인간의 왕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알본에 간 적이 있어." "허억! 그럼 당신이 그때 그!" 조슈아는 멘데에타가 그렇게 당황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멘디에타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에? 그럼 전에 당신이 이야기했던 북쪽 숲에서 도움을 청하러온 엘프의 마법사가 이 분이라고요?" "아…아닌데요. 그 엘프 마법사는 남자였어요. 그리고 날개도 없고 훨씬 컸는데요. 그 촉수도 없었고, 음. 머리칼 색과 눈동자는 비슷한 것도 같았지만……." 여왕은 당황하는 멘디에타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투명한 날개에서 초록색의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온몸이 빛에 휘감기더니 갑자기 몸이 커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허어!" 바알이 바보 같은 감탄사를 터트리는 가운데 여왕은 더 이상 날개 짓을 하지 않고 거의 조슈아의 키 정도로 커져 일행의 앞에 서있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광경은 둘째치고 바알과 멘디에타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작은 몸집이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몸이 커진 상태가 되자 그녀는 벌거벗은 미녀로 보일 뿐인 것이다. 머리칼 끝에 촉수는 등뒤로 넘기고, 날개도 얌전히 접혀 어깨에 매달려있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크기로 커진 여왕의 얼굴은 아까와는 달리 더욱더 위엄을 풍겨 몸만 옷으로 가리고 그 뽀족한 귀만 안보인 다면 높은 신분에 미청년으로 보일 수도 있는 외모였다. "당신이 맞군요. 그때는 남자인줄로 알았었는데. 왜 그때는 그런 복장으로?" 멘디에타의 질문에 여왕은 아름다운 몸매를 과시하듯 가슴을 쭉 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본래의 모습으로 당신들의 성도를 찾아갔으면 나를 만나 주었을까? 그리고 이 모습은 나의 전투형태이기도 하지. 무리해서 변신한 것이 아니야."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에서 시선을 돌려 엉뚱한 건너편 호도나무를 바라보며 멘디에타는 재차 물었다. "그런데 당신들은 정말로 북쪽 숲에서 마물들의 공격을 받았었나요? 이 정도로 살아있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나는 공격을 받아서 인간의 왕을 찾아간 게 아냐. 숲에 가득 차 시끄럽게 구는 마물들이 싫었을 뿐이지. 그런데 인간의 왕에게 말하고 돌아오니까 그 인간의 마법사가 찾아오더군. 그리고는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거야. 더 이상 인간들이 그 주위에 얼씬하지 않을 테니 편하게 지내라고. 나는 긴가 민가 했지만 더 이상 계속 소환돼서 숲에서 울부짖어 데는 마물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일족을 이끌고 여기로 돌아온 거야. 그런데 그의 말대로 인간들이 지나다니지를 않더군."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잠시 아쉬운 듯 호도나무숲을 돌아 보았다. "이 숲은 원래 이 보다 훨씬 넓었어. 지금은 예전의 10분의 1도 안 될 정도가 되었지만." "에? 말도 안 되요. 나는 예전에 리베온에 가기 위해 이쪽 길을 지나 간적이 있어요. 그때는 그런 숲이 없었다구요." 퓨어리스가 소리쳤다. "퓨어리스씨 이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일대는 100여 년 전만 해도 어마어마한 산림이없어요. 다만 100년 전, 대마법대전 때 연합군이 마아가와의 칠 주야의 싸움동안 마물들을 한 대 모으기 위해 대부분의 숲을 태워 버리고 요새를 세우느라 벌목을 했지요." 멘디에타는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듯 여왕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먼 시선이 되어 입을 열었다. "나는 수백 년 간 온 대륙을 다녀 보지 않은 대가 없어. 그러나 그 어디에도 여기 보 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숲은 없었지." 그녀의 먼 시선 끝에는 100여 년 전 사라지고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들의 숲이 비치고 있는 듯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 정적을 깨고 에레크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이런 상황에 그녀가 나서서 말을 걸리라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윽이 당황하였다. 그러나 요정의 여왕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 주지 않던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에레크트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아이가 너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하더구나.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여왕의 뒤에서 에레크트라에게 호도를 주었던 작은 요정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 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보고 듣는 것을 공유하는지 놀랍게도 여왕은 얼마전의 일을 알고 있었다. "저……. 있잖아요. 북쪽의 숲이라는 데에는 그럼 아줌마의 마을이 또 있는 거예요?" 아름다운 미소녀의 외모를 가진 그녀에게 아줌마라는 호칭을 붙이자 일행은 여왕이 분명히 에레크트라를 태워 죽이리라 생각하고 당황하였고, 바알은 곧 요정들이 벌때처럼 몰려와 자신을 뜯어먹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지 줄행랑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나와 나의 아이들에게는 북쪽 숲에 또 다른 안식처가 있단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요정의 여왕은 아줌마라는 호칭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일행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에레크트라의 질문이 이어 졌다. "북쪽의 숲은 여기 보다 살기에 나빠요?" "여기보다는 훨씬 춥단다. 그래도 깊은 산속이라 인간은 어쩌다 오는 수행자 뿐이야. 그들은 별로 공격적이지 않지." 그녀는 귀찮지도 않은지 처음 보는 소녀의 질문에 일일이 친절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그럼. 지나가는 사람만 없다면 여기에 사시는게 좋겠네요?" "응. 나와 아이들은 여기 가 좋아. 인간들이 옛날에 여기에서 전쟁을 하다가 숲을 불사른 이후에 숲의 정기가 약해져서 우리의 결계는 매우 약해 졌단다. 그래서 가끔 인간들이 결계를 뚫고 들어와서 공격을 하기도 했지. 대부분은 격퇴했지만 내 아이들이 죽은 일도 있었단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던 그녀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아픔이 들어 났다. 인간들의 장난에 요정들은 많은 고통을 당한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조슈아도 짚이는바가 있었다. '우리 아카바 땅에도 옛날에는 요정이 있었다던데 결국 그런일로 멸종한 것일까?' 조슈아는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종족이 순식간에 좋아진 상태였다.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주고 싶었다. 그녀는 잠시 숲과 자신들을 둘러싼 꽃밭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대초원의 한가운데 덩그렇게 위치한 산림 따위가 시돈에 그리 중요할 이유가 없어.'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짖고 있던 조슈아는 곧 환한 표정으로 멘디에타를 돌아보았다. "멘디에타씨, 우리가 국왕폐하의 명령을 완수한다면 무언가 부탁을 한다는 것이 그리 무리한 행동은 아니겠지요?" "예?" 그녀의 말뜻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한 맨디에타가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론이지요. 원래의 입성계획이 엉망이 된 지금 우리만으로 알본에 다다라 임무를 완수한다면 여러분 모두에게 크나큰 영애를 주실겁니다. 아마도 작위 정도는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그저 조슈아 때문에 이일에 끼어든 바알과 샤레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에레크트라는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러나 퓨어리스의 표정에는 일말의 욕망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녀로서는 꿈에도 그리던 왕실 근위대의 일원이 될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만드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요정 님? 당신은 이 숲을 영원히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요." 의외의 말이었던가? 여왕의 얼굴에 이채가 띄어졌다. "무슨 말이지?" "당신을 우리 용병단의 일원으로 고용하겠어요. 그래서 같이 시돈 국왕 폐하가 우리에게 맡긴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숲과 주위의 땅의 영주가 되는 거죠. 어때요?" "무슨 말씀인가요? 조슈아님. 그런……." 멘디에타가 놀라 소리쳤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용병단장이에요. 숫자가 불리하면 내 임의로 용병을 고용할 수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은 가요?" "그렇긴 하지만……." 결국 그녀의 논리에 라기 보다는 기백에 지고 만 멘디에타였다. 그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습니다. 용병단이 정수를 채우지 못하는한 당신은 원하는만큼 용병단을 모집할 권한이 있습니다. 물론 그 경비는 시돈왕국의 몫입니다." 그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조슈아가 고맙다는 뜻의 미소를 짖자 멘디에타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할수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그녀의 제안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듯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여왕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뜻은 알았어. 그럼 나는 당신들을 따라나서야 겠군. 그럼 내 아이들은 어떻하지?" 그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며 수근거리고 있는 요정들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요정 님의 아이들은 괜찮을 거예요. 우리니까 이 숲까지 다다른 거지, 지금의 난리통에 누가 여기를 지나가겠어요? 당신은 정식으로 국왕 폐하로부터 이 땅의 권리를 넘겨받아 돌아오면 다시는 당신의 허락 없이 이 땅을 침범하는 인간이 없을 거예요." 조슈아의 조리 있는 설명에 요정 여왕의 마음은 거의 넘어온 듯 싶었다. 그녀는 가볍게 아미를 찡그려 고민하는 빛을 보이더니 결심한 듯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겠어! 인간의 왕에게 땅을 달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안들 지만 여기서는 그가 가장 강하니 할 수 없지. 그리고 대가를 치르고 얻는 것이니까." 겨우 수백의 일족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과연 그녀의 태도는 여왕답게 의연하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의외의 전개에 걱정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는 요정들에게 입을 열었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잠시 이별이다. 나는 인간의 왕에게서 이 땅을 얻기 위해 떠날거란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인간의 여자는 믿을 수 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없는 동안에도 너희는 안전할거야. 착하게 지내야 한다."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으로 수백의 요정들에게 어머니의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일행으로서는 조금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지요? 요정 님?!" 샤레셀이 센스 있게 분위기를 바꿔 이 특이한 동지를 일행으로 받아들이는 가도 역을 자청하고 나섰다. 요정 여왕은 뒤로돌아 서서 전체가 초록색으로 빛나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로 샤레셀과 일행을 하나하나 외우기라도 할 듯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들끼리 이름은 없지만 전에 알고 지내던 엘프의 마법사가 지어준 이름은 있어." "엘프의 마법사라구요?" 전의 미운 털이 박힌 엘프 마법사가 떠올라 기분 나쁜 듯 조슈아가 되물었다. 그러 나 좀처럼 자신이 이야기 할 때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특징인지, 그녀는 조슈아의 질문에 상관없이 말을 계속했다. "그는 나를 안티오페 라고 불렀어.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당신들도 그렇게 불 러줘." "옛 신화의 미의 여신의 이름이군요. 정말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역시 아는 것이 많은 멘디에타가 조슈아 용병단의 걸어 다니는 사전답게 바로 그 이름의 유례를 설명해 주었다. "그럼 잘부탁해요. 안티오페." 조슈아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안티오페는 무슨뜻인지 파악하려는 듯 잠시 망설이더니 곧 선선히 오른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조슈아가 잡은 손을 흔들자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 듯 그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끼를 머금으며 그녀의 손을 맞흔들었다. 순식간에 동료 하나가 새로 생겨서 아티오페로서는 처음으로 해볼 악수라는 사교행위를 즐기며 소녀들만의 화기애애의 장막을 쳐가는 동안, 바알과 멘디에타 두 사내는 차마 발가벗은 요정 여왕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하며 곁눈질로 그녀의 극미의 나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NEXT 제17화 버려진 마을의 풍경 part 1 "이해할 수가 없군. 도대체 가도가도 마을 하나 만나지 못하는 건 뭐야?" 바일이 황당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조슈아 일행이 요정의 숲을 떠나온 것도 벌써 사흘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알의 푸념대로 가도가도 인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멘디에타! 당신 혹시 일부러 마을들은 모두 비껴서 가고 있는 거예요?" 조슈아가 물었다. 그런 그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는 다시 작아진 안티오페가 앉아 주위의 경관을 표정 없는 얼굴로 감상하고 있었다. 퓨어리스의 옷을 입혀 말에 태워 보려고도 했었지만 여분의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일부러 커져서 말의 부담을 늘일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조슈아의 어깨가 그녀의 자리가 된 것이다. 조슈아의 질문에 멘디에타가 어깨를 으슥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은 그렇습니다. 한번 정도는 식량 보급을 위해 마을에 들려 봐야겠지만 굳이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의 말에 바알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일부러 야숙을 시켰단 말인가? 마을의 여관 같은 데서도 좀 자고 그래야지, 가뜩이나 추운 나란데 항상 딱딱한 맨땅에서 몸이 어디 배겨나겠나?" "사실은 술이 고픈 거지? 바알?" 조슈아가 놀리는 투가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술 이야기가 나오자 바알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것이 보였다. 실제로 그는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으으…술 구경 못한지 열흘이 다돼 간다구. 10살 때 이후로 이렇게 오랜 동안 술을 안 마신 건 처음이야." 입가에 침을 축이며 힘없이 대답하는 그는 마치 한달 간 피를 빨지 못한 흡혈귀의 얼굴 같았다. "10살? 10살 때부터 술을 마신 거예요? 바알 오빠?" 술집경력 4년의 소녀 에레크트라가 놀랍다는 듯 감탄성을 발했다. "훗. 에레크트라야. 이 오빠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10살 때 아버지에게 들켜 일주일간 술을 마시지 못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6살 때부터였다. 하하하." 터무니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분명하리라고 예상했지만 이 정도이리라고는 감히 예상하지 못한 일행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바알의 부모님 이야기를 못 들어 봤네? 얘기해 줄 거야?" 조슈아가 지평선 끝까지 지루하게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며, 이 황량한 여행길의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 바알의 신상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저윽이 당황한 얼굴이 된 바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응. 어머니는 5살 때 동생을 낳다가 돌아 가셨어. 아버지와 누이는 다테에서 살고 있지." 동생을 낳다 죽었다는 이야기에 조슈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도 그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잠잠히 생각에 잠겨 있던 멘디에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서 4∼5시간 거리에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만. 바알 씨의 말도 있고 하니 오늘은 거기서 쉬어 갈까요?" "오오! 정말인가?" 바알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소녀들도 오랜만에 차가운 개울물이 아닌 따뜻한 욕조에서 목욕을 해보고 싶어 견디기 힘든 차였기 때문에 기꺼운 얼굴이었다. "그러면 혹시 알본으로 가는 길에서 좀 벗어나야 하는 거예요?" 눈치 빠른 샤레셀이 조금 어두워진 멘디에타의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죠. 북동쪽에서 조금은 위로 치우쳤으니 반나절은 돌아가는 코스가 되겠지만 그리 멀리 도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마을이 무사히 있느냐가 문제죠." 그의 한숨 섞인 말에 일행은 여기가 전쟁터임을 새삼 깨달았다. 대도시가 몰려있어, 국왕의 기사단이 방위에 힘을 쓰고 있는 동부 해안과 동남부의 전선 안쪽을 제외하면, 이 서부의 대초원은 그야말로 버려진 영토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분위기를 깨며 조슈아가 어깨 위의 안티오페에게 말했다. "안티오페. 우리는 인간의 마을에 들어가게 되요. 지금은 전쟁시국이니 당신이 본모습으로 들어간다면 적의를 살 거예요. 적당한 모습으로 변해서 불편하더라도 옷을 입도록 해보세요." 그녀의 말에 눈을 깜박이던 안티오페가 조슈아의 어깨에서 내려와 그녀의 뒤에 앉았다. 그리고는 날개에서 초록색 광채를 발하더니, 곧 그녀의 키는 죠수아와 같을 정도로 커졌다. "으흠." 다시 한번 인간 크기의 아름다운 나신을 감상하게되어 기뻤지만 빤히 쳐다 볼 수는 없는 것이어서 두 사내는 얼굴을 돌렸다. 조슈아는 고소를 지으며 퓨어리스를 바라보았다. 퓨어리스는 말안장에 매놓은 봇짐에서 여분의 옷을 꺼내어 조슈아에게 넘겨주었다. 1 "여…여기가 당신이 말한 마을이에요?" 조슈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가 지고 1시간 가량이 지난 시각. 조슈아 일행은 부푼 꿈을 안고 근 일주일만에 인간의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을의 규모는 의외로 큰 편이어서 칼라마을의 2배 정도는 되는 듯했다. 그러나 전혀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이 마을은 마치 건물들의 공동묘지 같았다. "여기는 아무도 없어. 인간뿐 아니고 어디에나 있는 조그마한 짐승들의 기운조차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조슈아의 등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그 가늘고 아름다운 두 팔로 감고 앉아 있는 안티오페가 말했다. 그녀는 마치 우의(雨衣) 같은 분홍색 상의 안에 흰 브라우스를 입고있었는데, 결단코 속옷을 입지 않겠다고 우기는 터라 몸의 굴곡을 가리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평소라면 절대 입히지 않을 단추 많은 야전 상의를 입힌 것이었다. 다행히 바지는 헐렁하여 속옷을 입지 않은 티가 그리 나지 않았다. 그녀는 상당히 풍만한 가슴에 비해 엉덩이는 작은 편이었다. 요정에 대한 상식이 없는 에레크트라는 이런 조그만한 엉덩이를 가진 여자가 어찌 그 많은 요정들을 낳았을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무튼 안티오페의 말대로 마을에서는 전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멀쩡한 마을을 놔두고 어디로 사라진 거지?" 조슈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마물의 공격을 받았다면 이렇게 건물들이 멀쩡할 리가 없는데요." 멘디에타가 말에서 내려 마을 입구를 들어서려 할 때였다. "머…멈추시오." 갑자기 그들의 등뒤에서 당황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일행이 흠짓하여 돌아보니 그들의 등뒤로 소나무 숲을 막 빠져 나오고 있는 십 여명의 무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일행에게 달려왔다. 그들의 선두에서 소리를 질렀던 노인이 황급히 다가와 멘디에타에게 소리쳤다. "마을에는 지금 저주받은 인간이 머물고 있어서 개미새끼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오. 죽고 싶지 않으면 마을 안에 발을 들이지 마시오!" 멘디에타가 입구석(入口石) 안의 돌길에 발을 디디려다 황급히 물러서며 물었다. "당신들은 이 마을의 주민들입니까? 저는 왕국기사단의 멘디에타라고 합니다만. 자세히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의 표정에 희색이 돌았다. "오오! 드디어 기사단이 파견되는 거유? 이런 기쁜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마을사람들의 기쁨이 너무 컸다. 멘디에타는 그냥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은 듯 당황한 기색 없이 재차 물었다. "저희는 국왕직속의 용병단이고 저는 그 수행원입니다. 자! 이제 말씀해 보시죠. 무슨 일입니까?" "일단은 여기에서 벗어납시다. 매우 긴 이야기라오. 그리고 영 불안해서." 노인이 마을 안쪽을 공포스러운 듯 바라보더니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멘디에타는 조슈아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노인에게 입을 열었다. "제가 용병대장이에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안내하세요." 언제나처럼 이 아름다운 소녀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선에 더해 '헉! 이 여자가 용병대장?'이라는 의미의 경악의 시선을 받으며 조슈아는 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그러나 등뒤의 아름다운 소녀의 외모를 가진 안티오페 덕에 시선의 3할은 피해갈 수 있어 그녀를 데려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조슈아였다. 2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말을 달려 10여분 거리에는 제법 큰 개울이 U자 모양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위치한 큰 너도밤나무 숲은 마치 천연의 정원 같았다. 조슈아 일행이 안내되어 간 너도밤나무 숲의 중앙에 위치한 너른 공터에는 상당히 오랫동안 노숙을 한 듯 초췌한 안색의 마을사람들이 간이 천막에서 나와 모처럼의 방문자를 경계심과 약간의 기대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마을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거의 200∼30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천막을 쳐놓았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회색 천막이 하나 덩그렇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분들이 여기에서 지낸 지가 꽤 되는 것 같은데 맞나요?" 조슈아가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쪼르르 뛰어 나온 마을소년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벌써 두 달 여를 노숙하고 있지요. 워낙 소문들이 흉흉해서 다른 마을로 피난을 떠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촌장이라고 밝힌 70대의 백발노인은 걱정스러운 듯 마을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갈수록 추워질텐데 겨울준비는 되고 있나요?" 퓨어리스가 제법 쌀쌀한 밤 공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물었다. 그러자 잘 물어봐 주었다는 표정으로 촌장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벌써 새벽공기는 상당히 쌀쌀합니다. 모두 마을을 빠져 나올 때 여름옷과 가벼운 생필품만을 들고 나와서 이대로 겨울을 맞게되면 마을사람들은 모두 얼어 죽게될 겁니다." "도대체 마을 사람 모두를 피난 오게 한 인물은 어떤 자입니까" 멘디에타가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이야기는 일단 제 천막에 들어가서 하십시다. 상당히 긴 이야기가 될 터이니." 일행은 서로 한번씩 시선을 교환하고는 촌장의 안내로 조슈아를 따라 촌장의 커다란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중앙기둥을 기점으로 몇 개의 환기구가 있어 모닥불의 연기와 커다란 솥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밖으로 내뿜고 있었다. 조슈아 일행은 촌장의 권유로 천막 중앙에 있는 화로에 둘러앉았는데, 그 화로는 어른 열댓 명이 양손을 잡고 빙 둘러설 수 있는 넓이로, 무릎을 덮일 수 있도록 앉기에 적당한 깊이로 파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스프 냄비가 일행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개울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인 듯 옅은 비린내가 나는 스프를 받아든 그들은 뜨거운 것도 잊은 채 스프를 훌훌 들어 마셨다. 오랜 동안 따뜻한 식사를 하지 못했던 그들은 뜨거운 스프가 목구멍을 타 넘어가 위장을 데우는 감각을 즐기며 촌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 마을은 보시다 시피 그리 큰 마을은 아닙니다만 서반구의 마을들 중에서 그래도 자랑할 만한 역사와 제법 큰 규모의 신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조와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주변의 마을에서도 에알라 신께 참배를 하러오는 참배객도 많죠. 덕분에 년초에는 참배객들이 마을에 머물며 뿌리고 가는 은화가 마을 주민들의 생활을 꾸려 나가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습니다." "단지 신전의 규모가 크다고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의 사람들까지 이곳을 찾아온다는 건가요?" 언제나처럼 날카로운 샤레셀이 의아한 듯 질문했다. 그러자 그 이야기가 하고 싶어 유도 심문이라도 했었다는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촌장이 대답했다. "우리의 신전에는 100년 전 대마법대전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명공 데아스타 공이 직접 대리석을 깎아 만든 에알라 신상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멘디에타가 촌장의 말을 받아 일행을 돌아보며 설명하였다. "저도 들은 것입니다만. 데아스타 공은 맹인으로써 시돈 뿐 아니라 온 팔매라 대륙을 통 털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 조각가셨습니다. 어릴 때 부모에게서 버려져 채석장에서 노예로 팔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죠. 그분은 선천적인 맹인으로 채석장에서 맛으로 일급 대리석을 가려내는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호오. 맛으로 대리석의 품질을? 거 신기하구먼." 바알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다가 조각가가 되었다는 거예요?" 조슈아가 말을 끊은 바알 대신 궁금한 듯 뒷말을 재촉했다. "그렇습니다. 어느 날 최하급으로 판정나 버려진 대리석을 가지고 앉은자리에서 여인상을 조각했죠. 그런데 그것이 채석장에서 주방 일을 하던 노예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잠깐! 그는 장님이었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보지도 못한 소녀를 조각할 수가 있지요?" 샤레셀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씨익 웃으며 멘디에타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이 그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과 몸을 만져 보았다는 겁니다. 그와 소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거죠." "아!"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일행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래도 대단한걸? 보지도 안고 손의 느낌만으로 똑같은 모습의 조각을 할 수 있다니." 예술가라고는 도무지 태어나지 않는 조국을 가진 바알이 진심으로 경탄한 얼굴로 말하자 어쩐지 신이 난 멘디에타가 평소답지 않게 극적인 어조까지 동원하며 얘기를 이어갔다. "그것뿐 아닙니다.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도 거의 비슷한 얼굴을 만들어내는 재주까지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만들고자 하는 자의 자태를 설명해주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조각을 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왕궁에서 가만 놔뒀을 리가 없겠군요?" 왕실의 생리를 잘 아는 조슈아가 끼어 들었다. 그러자 신이 난 멘디에타는 손뼉을 치며 과장된 말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선선 대제이셨던 자펠 폐하께서는 그의 소문을 듣고 궁으로 불러들여 돌아가신 왕비님의 조각을 만들게 했지요. 거의 보름을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말로 일일이 설명해주면서 금을 깎아 만들게 한 겁니다." 금으로 죽은 왕비의 조각을 깎았다는 대목에서 바알의 표정이 굳어졌다. 낭비를 지극히 싫어하는 그로써는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국왕폐하는 만족해 했나요?" 샤레셀이 이야기에 몰입한 듯 상체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렇습니다. 대 만족이었죠. 그래서 명공의 칭호와 함께 노예신분에서 해방되고 왕국 수석 조각가가 된 겁니다. 물론 그의 청원으로 그의 연인인 노예소녀도 풀려나 그의 아내가 되었지요." "우와! 잘 됐네요." 발개진 얼굴로 흥미진진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레크트라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명공의 조각이 이런 오지의 마을에 있다는 건 좀 이상한데요? 이 근처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닌데." 해피엔딩의 이야기에 기쁜지 조금 상기된 표정의 샤레셀이 여전히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러자 오지의 마을이라는 말에 조금은 기분이 상했는지 입술을 찡그린 촌장이 대답했다. "그것은 이곳이 자펠 전하가 전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 일이……." 일행은 겨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전하께서는 이곳 자펠 마을 근처의 대초원에서 2만의 기사단과 함께 마아가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셨죠." "마을의 이름이 자펠이라구요?" 조슈아가 묻자 멘디에타가 대답하였다. "원래는 스피노라는 이름의 마을이었습니다만 전쟁 후 폐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자펠 마을이라 불리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마을에 그런 거창한 신상이 조각된 거군요." 악의는 없으나 확실히 심기를 건드리는 샤레셀의 말에 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 않고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마을 사람들을 쫓아냈다는 그 인물의 이야기를 해야 하잖아요." 그녀의 영양가 있는 지적에 일행은 고개를 끄떡이며 촌장의 찌푸린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촌장은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무언가 억누르는 어조로 말했다. "그것이 그 조각상과 관계 있습니다. 신전에서 그 조각상을 닦는 일을 맡았던 곱추 고아 놈이 말씀드렸던 저주받은 인간이니까요." "곱추 고아라고요? 그가 어떻게 신전에서 그런 중책을 맞게 됐죠?" 신전의 일에 대하여 정통한 샤레셀이 의아한 듯 물었다. 모시는 신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신전에서는 불구자나 지나치게 못생긴 인물을 쓰지 않는 법이었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리인지라 어디나 좀더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종류의 인물을 쓸 리가 없었다. 그러자 대답하기 껄그러운 질문인 듯 잠시 뜸을 들이던 촌장이 더러운 것이라도 입 에 물고있는 듯한 표정으로 씹듯이 대답했다. "말하기도 부끄럽군요. 그놈은 15년 전에 신전의 신녀였던 여자에게서 사생아로 태어났지요." 그의 말에 일동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히 신녀인 샤레셀의 표정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신전에서 살게 됐단 말인가요?" 굳어버린 샤레셀의 눈치를 보며 조슈아가 대신 질문하였다. "예! 신녀가 나은 아이니 바깥에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 여자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는지 그 놈을 낳다가 죽고 말았죠." 그는 마치 원한이라도 진 듯 한 목소리로 치를 떨고 있었지만 기실 조슈아는 가슴이 아파오고 있었다. '직접 관계도 없는 노인이 이런 정도인데 도대체 그는 얼마나 학대를 받으며 불구의 삶을 살아 왔을까!' 그러나 조슈아는 자신의 생각을 내색하지 않고 조금은 차가워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자! 그럼 그가 무슨 일을 했다는 건지 설명해주시죠." 촌장은 조슈아의 태도로 그녀가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그를 경멸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동질감을 느끼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70여일 전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온 시돈 땅에 난리가 나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 자펠 마을만큼은 그 소문의 무시무시한 마물들이 침략해 오는 일이 없어, 모두 자펠 선왕 폐하의 가호 덕이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그러자 근처의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멀리 리베온과 알본의 피난민들까지 우리 마을로 몰려온 적이 있었죠. 그런데 그 저주받은 날 저녁에 신전에서부터 마치 썩은 늪에서 나는 듯한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는 기류가 퍼져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는 마을은 아수라장이 됐지요. 신전 근처에 서있던 사람들부터 그 기류에 휩싸여 모두 순식간에 썩어 죽어 버린 겁니다." "썩는다구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듯 샤레셀이 소리쳤다. "아! 예. 일단 그 기류가 닿으면 피부에 습포가 생기면서 순식간에 고기 썩는 냄새를 풍기며 썩어갔죠." "썩은 늪에서 나는 듯한 향에 피부에 습포, 거기에 검은 기류라면……." 그녀는 입에 담기 두려운 듯 가볍게 몸을 떨며 말했다. "그것은 히데아(HIDEA )예요. 부식계 마물 중 최강이죠.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질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기생을 하는 수밖에 없지만 일단 소환되어 숙주에 착상하게 되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마물 중 하나죠." "히데아? 처음 들어보는 마물인데? 상대하기에 까다롭다니? 어째서 그런 건데?" 조슈아가 샤레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상대의 무시무시함을 직감하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자 샤레셀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정신을 추스리며 입을 열었다. "히데아의 무서운 점은 실체가 없다는 것 외에도 그 부식 독을 어떠한 방어 결계로도 막을 수 없다는 거야. 대신관급의 절대마법방어정도면 모를까? 인간이나 동물 등 생물만을 골라서 부식시키는 거지. 그러니 나의 방어결계정도로는 운이 좋아야 나 하나 정도 보호할 수 있다고 할까?" '절대마법방어로도 겨우 막을 정도라고?' 그녀의 설명에 몸서리를 치던 조슈아가 촌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곱추에게 마물이 씌었다는 이야긴가요?" "그렇습니다. 신전의 신관들이 모두 썩어서 죽고, 겨우 살아 나온 사람들이 그 검은 기류의 가운데에 유유히 서있는 그 녀석을 목격했답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이죠?" 샤레셀이 물었다. "토레즈라고 합니다.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정말 재수 없게 생긴 놈이죠." "토레즈라……. 그 부식 독 가운데에 서있으면서도 무사했다면 역시 그에게 히데아가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겠군요. 그런데 그가 왜 마을에 머물고 있지요? 마을사람들을 죽일 생각으로 소환된 마물이 계속 빈 마을에 머물고 있다니 이상하잖아요. 벌써 여기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 있을 텐데?" 일행을 대신하여 계속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샤레셀이었다. 촌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더듬거렸다.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기세로 뻗어 나오던 검은 기류가 점점 그 퍼져 나가는 속도를 줄이더니 결국 마을 밖으로 나가기 바로 전에 멈추더군요. 그래서 거기서 끝인가 보다 했죠. 그래서 마을 청년들이 정찰을 갔었는데 마을에 들어서자 똑같이 썩어 죽어서 아직도 마을 안에 그 놈이 있다는 걸 알고있는 겁니다." 일행은 침묵에 휩싸였다. 이런 종류의 적을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아온 바알 조차도 어찌해야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생선 스프를 들고 마시지는 않고 그 온기만 즐기고 있던 안티오페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히데아에게 접근만하면 잡을 수 있다는 것인가?" 의외의 타이밍에 의외의 인물의 질문이었다. "그래요. 안티오페. 히데아는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일단 접근해 숙주에 심어진 원정(元精)만 파괴하면 이 세계에 머물 수가 없어요." 샤레셀이 일말의 기대감이 서린 눈동자로 대답하자 안티오페는 '그럼 뭘 고민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거라면 내가 도와 줄 수 있겠군. 히데아의 부식 독 따위로는 나를 어쩌지 못해." "에?" 그녀의 의외의 대사에 일동이 기겁을 하는 가운데 샤레셀이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맞아요. 안티오페는 요정이잖아요. 정(精)의 기운에 영기가 서린 고차원의 존재예요." "그래도 육체를 가지고 있잖아? 그녀도 결국 생물이 아니야?" 기가 질려 있던 퓨어리스가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매를 훑어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엘프와 달리 요정은 숲이나 물 등의 정령이 물리력을 행사하기 위해 분자를 이용해서 형체를 강화한 것일 뿐,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가진 것은 아니죠. 그러니 생물만을 부식시키는 히데아는 그녀를 어쩌지 못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정기는 마물에게는 상극이에요. 어차피 히데아의 부식독도 마기(魔氣)인 이상, 어느 정도 범위까지는 침투를 막아 줄 거에요." "오오! 이분은 요정이십니까?" 요정을 본적이 없는 촌장은 흰자위가 없는 초록색의 눈동자에 뾰족한 귀를 가진 그녀를 엘프려니 생각하고 경원시하고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일수록 그런 종류의 마음의 벽이 높은 법이다. 그러나 당장 도움이 된다고 하니 당장 태도가 돌변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아랑곳 안고 안티오페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아가 인간에게 기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깊은 밤에 공격하는 게 좋을 거야. 히데아는 들러붙은 상대의 상태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잠을 잘 시간에는 약해질 수밖에 없지." 청순한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전술에 대해 조예를 가진 듯한 그녀의 발언에 일동 은 '역시 겉보기는 저래도 수 백살을 먹은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멘디에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티오페 님과 함께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안전할까요? 얼마만한 범위를 막아줄 수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 흥분한 샤레셀이 멘디에타의 정론에 침음성을 내었다. "누가 들어간다고 했지? 나는 그런 마물 따위의 더러운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갑자기 안티오페가 기분 나쁜 말이라도 들었다는 투로 말하자 일동은 당황하였다. "당신이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안티오페!" 조슈아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따지듯 소리치자 안티오페가 손을 들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원래 속옷을 입지도 않았을 뿐더러 야전상의 안에 브라우스 만을 입고 있는 터라 경고 없이 옷을 벗는 통에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그녀의 나신을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왠? 뜬금 없이? 갑자기? 별안간?" 바알이 입을 빠끔거리며 붕어눈을 하고는 모닥불에 반사되는 그녀의 황홀한 나신을 바라보며 불만인지 기쁨인지 모를 탄성을 지르는 순간 모닥불 건너에서 노인의 답답한 신음성이 들려 왔다. "우욱." 평생 처음 접한 극미(極美)의 나신 공격에 심장을 다쳤는지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헐 떡이는 모양이 여간 낭패스러워 보이지 않는 70대의 노촌장이었다. 조슈아가 얼굴을 붉히며 안티오페에게로 잽싸게 다가가 자신의 몸으로 그녀의 나신을 가렸다. 그녀도 속은 소년인지라 그녀의 나신에 정신이 사나왔지만 제법 앙칼진 목소리로 정신 없이 안티오페의 나신을 바라보는 두 청년에게 소리쳤다. "바알. 멘디에타. 눈 돌려요. 뭘 그리 뚫어지게 보는 거예요? 그리고 안티오페. 말도 없이 그렇게 옷을 벗어 재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촌장님이 심장 마비로 돌아가실 뻔했잖아요." 어느새 샤레셀이 주저앉은 촌장의 가슴에 손을 대고 회복 마법을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옷을 다 벗어 던져 버린 안티오페는 별로 개의치 않고 등뒤의 투명한 두 장의 날개를 펴서 몇 번 펄럭이더니 촉촉한 초록색의 눈동자를 들어 일행을 쓸어 보며 말했다. "나는 누구를 공격하는 일은 하고 싶지도 않고 재능도 없어. 그러니 당신들에게 요정 가루를 듬뿍 뿌려 줄 테니 가서 적을 물리치고 와." NEXT 제17화 버려진 마을의 풍경 part 2 "결국 이런 것이군." 바알이 투덜거렸다. 초승달이 서쪽 하늘에 비스듬이 걸쳐져있는 늦은 새벽녘에 조슈아와 바알 그리고 멘디에타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결국 타격에 의한 공격 외에는 적을 상대 할 수 없으니 우리가 들어 갈 밖예요." 멘디에타가 씨익 웃으며 말했으나 바알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퓨어리스만이라도 같이 왔으면 확실히 도움이 되었을 텐데. 요정 가루는 그게 한계라고? 날개에서 흩날릴 때 보니 넘치는 게 가루더니 그 이상한 아줌마……!" 조슈아도 바알에 지지 않을 정도로 투덜대었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그리고 검으로 상대해야 하는 이상 실력자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그나저나……." 바알이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더욱 영롱하게 반짝이나 초록빛의 몸을 내려다보며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어. 요정 가루라는 것, 확실히 효험이 있는 것 같군. 마을로 들어오니까 빛이 훨씬 강해지는데?" "그렇군요. 그 히데아의 마기에 대항하여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바알과 멘디에타의 대화를 들으며 조슈아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얼마나 버티어 줄지는 알 수 없는 거잖아? 나는 이런 종류의 싸움이 가장 싫어. 여하튼 빨리 찾아내어 처치하자구." 그녀의 지적에 두 남자는 흠짓하여 뛰기 시작했고 고개를 가로 졌던 조슈아도 그 뒤를 따랐다. 마을의 중앙로를 거슬러 올라가 우물가를 지나자 촌장의 말대로 아치모양의 대리석 탑이 보였다. "저기가 맞군. 마기(魔氣)가 무시무시하게 흘러나오는데?" 바알이 긴장한 목소리로 상황 설명을 하자 조슈아와 멘디에타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새하얀 대리석 신전에서는 그들로서는 전에 어디서도 구경해 본적이 없을 정도의 새카만 마기(魔氣)가 스멀스멀 세어 나오고 있었다. 그나마 밤인지라 이 정도로 보이는 것이지 낮이라면 그 무서움에 감히 접근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이 세 용사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 정도라면 그다지 자존심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신전에서 세어 나오는 마기(魔氣)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들어가자!" 침을 한번 소리 내어 삼킨 바알이 앞장을 서 나가자 조슈아와 멘디에타는 '짜식 나서기는'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내심 기꺼운 마음으로 선두를 내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신전은 확실히 자랑할만한 수준이었다. 그 규모야 여타 대도시의 대신전에 비해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아름답고 세련된 건축술과 곳곳에 비치된 훌륭한 조각품들은 세 남녀(?)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정말 훌륭한 신전이군." 역시 언제나처럼 모국의 예술 수준이 가장 떨어지는 바알이 진심으로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정도의 차는 있었지만 그것은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중앙 통로의 왼쪽 모서리에 세워진,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여신상을 막 지나칠 무렵 선두를 걷던 바알이 흠칫하여 멈춰 섰다. "무슨……." "쉿, 들어봐!" 조슈아가 무언가 물으려 하자 바알이 오른손을 들어 조용하라는 신호를 했다. 조슈아는 긴장감으로 자신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릴 지경이어서 주의를 집중하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서서히 경직된 몸을 풀고 귀를 기울여 바알이 잡아낸 소리 를 들으려 애썼다. 찬장에 채광 창이 있었으나 달빛의 각도에서 크게 벗어나 횃불하 나 없는 신전의 중앙 복도는 그야 말로 칠흙 같은 어둠 속이었다. 마기(魔氣)에 반응한 안티오페의 요정가루는 이상하게도 주위를 밝혀 주지는 않고 몸 에서만 초록색의 빛을 내뿜고 있을 뿐이어서 그 속에서라면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상황이었으나 긴장한 조슈아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으으." "핫!" 순간 어둠 속 저편에서 옅은 신음 소리가 같은 것이 들려와서 조슈아는 깜짝 놀라 검 에 손을 가져갔다. 여전히 뽑을 수 없는 말고스를 들고 다니는 그녀였지만 어쨌든 성검이라는 이름을 가진 검인만큼 미덥지 못한 다른 검을 쓰느니 검 집채라도 들고 다니는 게 낫다고 결론 내린 터였다. "으으."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남자의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음부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칙칙하고 답답한 신음성이었다. 아마도 바위산에 깔려 100년을 보낸다면 저런 소리를 낼 거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이건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인데요? 보통 신전의 구조상 이쪽 벽 너머에는 제식장(制式場)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토레즈라는 소년은 이 벽 안쪽에 있군요." 멘디에타가 속삭이듯 말하자 바알이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 검편을 오른편 어깨에 기대었다. 어둠 속에 들고 가다가 벽에 부딪혀 소리가 날 것을 염려한 행동이었다. "그럼 조금 더 가면 제식장의 입구가 나오겠군." "바알! 상대가 흥분해서 더 많은 마기(魔氣)를 뿜어내면 안티오페의 가루로도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어. 일단 입구에 닿으면 상대가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뛰어가 공격해야해. 샤레셀의 말대로 라면 히데아가 붙었다해도 몸이 강화되거나 하지는 않는다니까 목을 베어 숙주가 죽으면 일단 히데아가 기생하는 원정이 드러날 거야." 검 집채로 내려 쳤을 때 상당히 지저분한 꼴을 본 적이 있는 조슈아는 되도록 목을 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강한 검격으로 원정만을 치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심정을 알았는지 바알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그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얼굴 윤곽을 따라 묻어 있는 요정가루의 흐름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지 실제로 본 것은 아니었다. 3명의 절정 검사가 십여 걸음을 전진하자 문이 없는 개방형의 입구가 나타났다. 제식장의 안쪽에서 금빛의 광채가 세어 나와 주위의 복도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어찌된 거야? 어떻게 여기서 금빛의 광채가 세어 나오는 거지? 히데아는 검은빛의 기류를 방출하잖아?" 조슈아가 말고스를 들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제식장 안에 발광석(發光石)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걸로 이렇게 밝을 수 있을까?" 멘디에타의 자신 없는 의견에 바알이 조용히 지적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조슈아가 바알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어쨌든 잘 보인다니 우리에게는 좋은 거지. 모서리를 도는 순간 바로 뛰어 들어가 목줄기를 단번에……. 그리고 튀어나오는 원정을 나나 멘디에타 먼저 손 닫는 사람이 치는 거야. 잘해야 해! 바알." 일에 대한 걱정인지 바알을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조였지만 바알은 마음대로 후자를 선택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볼을 토닥거렸다. 조슈아가 도끼눈을 뜨며 그를 쳐다보았지만 오늘의 그는 특별히 용기의 신이 그를 수호하는 날인지 그녀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검을 어깨에서 내려 자세를 잡았다. "자! 간다." 제식장 입구의 왼쪽 모서리에서 자세를 잡은 바알이 나직이 속삭이자 조슈아와 멘디 에타가 고개를 끄떡였다. 파앗―. 바알이 입구의 반대쪽 벽으로 몸을 날려 벽을 발판 삼아 도약하자, 조슈아와 멘디에타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그 뒤를 따랐다. 슈우욱―. 십여 걸음 앞으로 바알의 믿음직한 등이 보이는 가운데 그 어깨 너머로 촌장이 자랑해 마지않던 에알라 신상이 보였다. 주위는 흑 빛의 마기(魔氣)와 성스러운 기운 마저 풍기는 황금빛이 뒤엉켜, 마치 우유에 검은 물감을 떨어뜨려 휘져어 놓은 듯 괴기스러운 색조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새하얀 대리석의 에알라 신상은 창과 방패를 들고 다분히 작위적인 표현양식이랄 수 있는 북방풍의 외모에 북방풍의 옷을 입고있었다. '어라? 이게 뭐야.' 그러나 새하얀 대리석의 신상에서는 일정한 공간을 두고 쉴새없이 검은 색의 기류가 흘러 나오고 있었고 그 기류는 그 아래 쪽 바알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에 의해 상당 부분 중화되는 듯 보였다. 조슈아는 순간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저 만치 앞서 가는 바알에게 소리쳤다. "잠깐! 바알! 아니야! 무언가 틀려!" 싸악―. 그녀의 외침이 무색하게 인간을 베는 소리가 분명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어엇?" 바알이 큰 칼 짓으로 검을 휘두르고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제서야 조슈아는 정면의 상황을 볼 수가 있었다. 잿빛의 우중충한 머리칼에 먼지를 잔뜩 뭍힌 소년의 목이 반쯤 잘려 앞으로 기울어 있었고 그의 등뒤에 곱사등은 피범벅이 되어 그의 추한 몰골을 더 추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가 아니야." 조슈아의 눈에는 목의 절반이 잘린 소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러운 황금빛이 급속도로 쇠락해가며 무신 에알라 신의 거대한 석상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전율스러운 광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4 "무사해야 할텐데. 마을에 들어간지 벌써 한시간 가까이 지났잖아? 곧 해가 뜰텐데." 퓨어리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을 어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뒤에는 샤레셀과 무리를 해서 따라나온 에레크트라가 서서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짖고 서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마을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고, 용서할 수 없게도 안티오페는 촌장의 천막을 차지하고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 마을 밖 참나무 숲가에는 이들 세 명의 소녀만이 서있었다. 마치 바다로 나간 어부 남편을 기다리는 듯한 시선으로 신전 쪽을 바라보던 에리크트 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샤레셀 언니. 저 기분 나쁜 검은 안개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에레크트라의 말에 흠짓한 두 소녀가 마을 입구를 바라보자. 마을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던 검은 기류가 스물 거리며 그 경계를 넘고 있었다. 조슈아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던 두 소녀는 급속한 속도로 마을을 벗어나 흘러나오는 마기(魔氣)의 확장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잘못된 거야. 마기가 더 강해지고 있어." "어찌 된거지? 적어도 마기가 마을 밖으로는 나오지 않고 있었잖아?" 퓨어리스가 발을 구루며 안타깝게 소리치자 샤레셀이 눈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그사이 마기는 세력확장을 거듭해 그녀들의 십여 걸음 밖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이런! 이대로 가면 마을 사람들까지 위험해. 에레크트라를 대리고 뛰어가 퓨어리스. 나는 잠시라도 막을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그렇지만……." 그녀의 말에 당황한 퓨어리스가 무언가 항변하려 하자 샤레셀이 소리쳐 말을 끊었다. "빨리 가! 나는 아카바의 상급신녀 샤레셀이야. 적어도 이런 일로 죽지는 않아." 퓨어리스는 입술을 자근거리며 샤레셀의 결연한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움직이지 않으려는 에레크트라의 손을 잡아끌며 마을 사람들의 천막촌을 향해 뛰어갔다. 등뒤로 두 소녀가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샤레셀은 바람에 나부끼는 은빛 성포를 뒷섭으로 밀어 넣어 고정시키고 충혈된 눈으로 다가오는 마기(魔氣)를 직시하였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건 조슈아와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 그녀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 같기도 하고 한숨 같기도 한 처연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물이 흐르려는 걸 억지로 눌러 참아 감정이 폐부를 쥐어짜는 소리였다. 갑자기 그녀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발작적으로 양손을 치켜들었다. '아니야. 나의 조슈에가 이런 대서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어. 그 아이는 살아서 나올 거야.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샤레셀은 치켜든 두 손으로 인장을 맺으며 기도하는 듯한 어조로 나직이 그러나 힘있게 소리쳤다. "새벽의 어머니, 질서의 수호자 아세르여! 당신의 영광을 증거하는 자에게 천상의 방패를." 부오오―. 샤레셀의 인장으로부터 푸른빛의 기류가 일어나더니 서서히 몸을 벗어나 그녀의 정면 에 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우욱." 갑자기 샤레셀은 허리를 숙이며 한 움큼의 핏덩이를 토해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핏기가 싹 가신 초췌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여…역시 절대 마법 방어는 아직 무리인 건가?' 그렇다. 그녀는 놀랍게도 대신관급의 고급신관이나 구사할 수 있는 절대마법방어를 행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넓은 범위를 방어하기 위해 무리해서 결계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절대마법방어는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서 대신관에게 행해지는 정도의 가호를 받지 못하면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그 결계 밖으로 밀어내는 이 절대의 방어결계는 그만큼 위험한 주술인 것이었다 웬만한 신관이었다면 그 충격으로 이미 혈맥이 터지거나 오그라들어 죽었을 것이지만 태어나서부터 신녀의 재능을 타고 난 이 고급 신녀는 그 어마어마한 압력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 "제발! 빠져 나와 조슈아! 너가 나오기 전에는 나는 여기서 움직이지 않아. 이 몸이 흙먼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왕을 수호하는 자'라는 의미의 나의 이름 그대로 나는 너를 수호 할 거야." 카아아……. 히데아의 무시무시한 부식성의 마기(魔氣)가 그녀의 절대마법방어의 결계에 다가오며 소름끼치는 괴음을 내고 있었다. 파지직―. 이윽고 마(魔)의 검은 기류가 결계에 부딪혀 파란불꽃을 내며 흩어져갔다. 그러자 피가 흐르는 입술을 굳게 다문 샤레셀이 인장을 맺은 손을 천천히 이마위로 올려가자 결 계는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 천막촌의 방향 거의 전부를 커버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샤레셀의 얼굴에서는 점점더 핏기가 사라져 갔다. NEXT 제17화 버려진 마을의 풍경 part 3 조슈아는 평생 이렇게 무서운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다. 바다에서 크라켄 떼를 만났 을 때에도, 그리고 수십 마리의 운골리안트를 상대했을 때도 나름대로 물리칠 방법이나 살아 남을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적어도 생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높다란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큰 키에 창과 방패를 들고 흉흉한 눈빛―그녀에게는 그렇게 보인다―을 빛내며 세 남녀를 내려다보는 상대는 경악스럽게도 석상이었던 것이다. 쿠웅―. 석상이 석반에서 한발을 내리자 그 엄청난 무게에 땅이 진동하였다. "뛰…뛰어! 모두." 조슈아가 가위에 눌린 것처럼 중얼거리듯 말하자. 역시 멍한 표정으로 석상을 올려다보던 바알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저런 놈이 날뛰게 되면 상대해보지도 못하고 신전의 잔해에 깔려 죽을 거야. 일단 나가야 해. 자! 뛰어!" 기실 그녀는 가위눌린 듯 공포에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깨우기 위해 소리친 것이었다. 그것은 효과가 있어서 그녀는 곧 떨어지지 않는 두발을 바닥에서 때어 내어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를 바알과 멘디에타도 바닥을 박차며 뛰어 쫓았다. 쿠오오―. 그 들의 등뒤에서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부합하는 석상의 포효가 들려 왔다. 그러나 돌아볼 사이 없이 세 전사는 태어나 가장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 순식간에 입구를 돌아 복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파바박―. 복도 천장의 창문에서 옅은 붉은 빛이 새어 들어 왔다. 여명이 떠오르는 것이리라. 그 순간 벽 안쪽에서 돌벽을 부수는 괭음이 울려 퍼졌다. 아마도 석상이 신전을 부수기 시작한 것같았다. "저 히데아라는 건 생물에만 기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바알이 달리면서 조슈아에게 소리치자 조슈아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저번의 크라켄을 생각해봐. 그 마법사는 상식을 뛰어 넘기를 좋아하는 놈이라구. 아마도 신상을 고렘―마법인이나 고대어 문자 주문 등을 새겨 넣어 물체를 움직이는 고등마법 기술―으로 쓰고 거기에 히데아를 소환한 거겠지." 그녀의 논리적인 예상에 바알이 졌다는 투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그야 말로 완벽한 놈이군. 석상의 단단한 육체에다 접근하는 놈은 다 부식시켜 죽인다니. 상대할 방법이 없잖아?" 조슈아도 그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새 남녀는 '달리기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할만한 경탄할 주법으로 순식간에 복도를 지나 신전 입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콰광―. 그들이 막 신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입구가 무너지며 돌부스러기와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파앗―. 조슈아는 마을 중앙 광장까지 한달음에 달려 몸을 돌려 말고스를 치켜들고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조금 사이를 두고 두 남자도 그녀의 양옆에 자리하여 검을 뽑아들었다. 처참히 부서진 신전의 잔해에서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며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석상이 걸어 나왔다. 세 검사는 검을 치켜들고 공격자세를 취하였지만 어떻게 봐도 그림이 맞지 않았다. 그냥 세 남녀가 의미 없이 새벽공기를 마시며 마을 광장에서 검을 들고 체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서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야 어떻든 그들은 비장한 각오로 그 자리를 고수하였다. 그때 분위기를 깨며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도망가도 비웃지 않겠어, 바알!" 그러자 바알이 평소라면 감히 하지 못할 대답을 읊었다. "다 마누라를 잘 둔덕이지.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할 수 없는 거야." 멘디에타가 그들의 대화에 상황도 잊고 피식 웃는 가운데 조슈아는 '바알에게 아내가 있었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콰앙―. 신전을 멋지게 가루로 만들어 버린 석상은 역시 돌로 만들어진 창과 방패를 들고 위풍당당 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을 광장에 세 명의 인간이 꼬챙이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자신 을 노려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으르릉―코웃음이었을 지도 모른다― 거리더니 위압적인 발소리를 내며 그들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땅에서 시작해 두 발을 타고 올라온 무시무시한 진동음은 뱃속을 울리고 가슴께를 타 고 올라와 뇌를 진동으로 휘저어 공포라는 이름의 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도움이 되던 안되던 작전 세우기를 좋아하는 조슈아가 경탄할 만큼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놈이 아무리 돌덩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부수다 보면 원정이 숨겨진 곳이 드러날 꺼야. 우리는 그것만 찾아 부수면 돼." 그러자 바알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쉬운 일이라 눈물이 나려고 하는 구만. 도대체 저 커다란 놈을 엎드리게라도 하기 전에야 어떻게 그걸 찾아내느냔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들고 있는 건 검이지 돌다듬는 쇠망치가 아니야." "그러면 발목만 중점적으로 공격해 일단 넘어뜨리고 봐야 겠군요." 갑자기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멘디에타가 말했다. "맞아요. 머리 좋은 데요? 멘디에타."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순발력이 좋은 것이었지만 상관치 않고 조슈아가 왼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 튕겼다. 일단 공격의 방향이 정해지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일단 넘어뜨리고 보는 거야.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고쳐 잡은 조슈아는 자신의 몸에 뿌려진 안티오페의 요정가루가 점점 그 빛을 잃어 가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6 "세…세상에." 촌장을 비롯하여 10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퓨어리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남쪽 언덕위로 집결하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을의 중앙광장에서는 온 대지를 진동시키는 괭음을 내며 자신들이 그렇게도 자랑해 마지않던 에알라 신의 석상이 무언가를 쫓는 듯한 동작으로 뛰어다니며 마을을 부수고 있었고, 마을 어귀의 소나무 숲 앞에서는 멀리서도 확실히 보이는 흰 공단 가운에 은색 성포를 쓴 여신관이 푸른빛의 결계를 쳐 마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검은 마기(魔氣)를 막아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신상이 괴물이 되다니 도대체 신정에 들어가서 무얼 한거람?" "애초에 이방인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었어." 마을 청년들이 들으라는 듯 떠들어대자 더 참지 못한 퓨어리스가 한 청년의 멱살을 잡아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쳤다. "봐! 저 안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안보이나? 저들은 당신들을 위해 싸우는 거야!" 그때 촌장이 나서 퓨어리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 놈을 용서하시오. 여전사님. 아직 철이 없는 놈이라오." 퓨어리스가 아직도 도끼눈을 하고 청년을 놔주자, 그는 캑캑거리며 마을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걸 까요? 그러면 그 마물이 씌인 것이 토레즈가 아니었다는 겁니까?" 촌장이 아직도 씩씩거리는 퓨어리스에게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마도 아니었나 봐요. 저 석상에게서 마기(魔氣)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똑똑히 보이잖아요."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대답해 상황을 확실히 정리하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토레즈 놈은 뭐야? 그놈은 그 마기 속에서도 멀쩡했다고 했잖아?" "그 놈이 마귀와 결탁하고 신상에 이상한 짓을 한 것이 아니야?" "아무튼 모든 일의 원흉은 그놈일 꺼야."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흘려들으며 퓨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토레즈라는 소년은 왜이리 미움을 받는 거야? 단지 신녀의 사생아라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걸까?' 영주의 딸로 자란 그녀로서는 신분이 낮은 자일수록 오히려 더욱 상대의 신상의 약점을 용서 못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신화를 새겨 놓은 벽화에서나 볼만한 장면들로, 마을사람들은 어느새 불안감도 잊고 이 평생의 빅 이벤트를 지켜보았다. 7 조슈아와 두 남자의 계획은 애초에 빗나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둘러 대는 석창 때문에 도무지 접근할 엄두를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파팟―. 콰앙―. 자신을 노렸다기보다 그저 두서없이 휘두르는 창에 기겁을 하며 조슈아가 몸을 날렸다. 여기저기서 그 압력에 부서져 흩어지는 돌 조각들 때문에 치명상을 당할 정도의 파편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날리다보니 그것만도 이만저만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바알! 내가 시선을 끌어볼 테니 뒤로 돌아가서 뒤꿈치를 노려봐!" 조슈아가 소리치며 대답을 듣지도 않고 부서져 날아오는 대리석 조각을 검집으로 쳐내며 석상의 정면으로 몸을 날리자 바알은 무언가 말하려 하더니 곧 포기, 이를 악물며 반쯤 무너진 대리석 건물의 뒤편으로 몸을 날리더니 담을 뛰어 넘어 마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기닷! 마물!" 조슈아가 검을 치켜들고 석상의 앞에서 소리치자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석상은 발목까지밖에 오지 않는 조그만 소녀가 꼬챙이를 들고 뭐라 하는 것을 발견하고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이것 봐라'―적어도 조슈아에게는 그리 보였다―라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바…바알에게 맡길걸.' 막상 적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나자 왜 이런 작전을 세웠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가 없게된 불쌍한 미소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것은 바알이 돌아간 골목길에 석상의 뒤꿈치가 정확히 놓이게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를 얕잡아 보는 것인지 아니면 가던 길을 가려는 것인지 석상은 조슈아의 의도대로 그녀를 따라 몸을 틀어 쫓아 왔다. 쿵! 쿵! 발을 내디딜 때마다 울려 퍼지는 진동음에 영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지만 감히 뒤를 돌아 보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콰악―. 쿠오오―. 갑자기 조슈아의 뒤에서 단단한 물체에 무언가를 박아 넣을 때 나는 경쾌한 음향과 함께 석상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했구나!!' 조슈아는 잽싸게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바알이 얼빠진 표정으로 몇 걸음 물러나 손을 떨고있었고 그의 검은 석상의 왼쪽 발뒤꿈치에 깊이 박혀 있었다. '아차!' 조슈아는 주먹으로 뒷통수를 치고 싶었다. 바알은 너무나 단단한 석상의 뒤꿈치를 베려 하다보니 그만 그 진동에 잠시 넋을 잃은 것이다. 그나마 그 엄처난 힘 덕에 검을 박아 넣을 수는 있었지만 빼어 내지는 못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지만 아까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그녀였다. 크으으으―. 그 와중에 신음성 같은 괴성을 흘리며 석상이 돌아섰다. '크으으라고? 어쨌든 충격을 받는다는 거군?' 바알의 공격에 석상이 반응하는 것을 보며 조슈아는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타앗―! 조슈아는 엄청난 진동에 충격을 받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바알을 찔러 죽이기 위해 창을 들어올리는―밟아 죽이는 것이 나을 텐데―석상에게 몸을 날려 미처 다 돌지 못해 오른쪽 발의 복숭아 뼈―그런 것이 있다면―를 노리고 말고스를 휘둘렀다. 퍼억―. "어랏?" 성검 말고스의 영향인지 조슈아의 검격에 우스울 정도로 쉽게 발목부분의 돌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쿠오오―. 그러자 앞뒤를 돌아보기 바쁜 석상이 더욱더 큰 괴성을 지르며 바알의 검이 박혀 있는 채로 왼발을 들어 올렸다. "우웃!" 조각상의 발바닥은 생각보다 냄새가 심했다 라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조슈아는 경악성을 발하며 잽싸게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너무 빠른 공격에 몸을 돌릴 틈도 없어 뒷걸음질을 치는 형국이어서 까딱하면 석상의 발에 밟혀 그 아름다운 몸을 땅에 묻게 될 판이었다. 쿠르르르―. "여기닷!" 갑자기 석상의 등뒤에서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나타나지 않던 멘디에타가 어울리지 않게 당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뒷걸음 치는 자신을 내리 찍어오는 석상의 냄새나는 발바닥에서 소리 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 조슈아의 시선의 접점에 내리막길에서 물통을 가득 실은 4륜 마차를 밀고 내려오는 멘디에타의 모습이 보였다. "멋져! 멘디에타!" 순간, 달리 떠오르는 대사가 없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어색한 대사를 읊으며 조슈아는 등뒤에서 무서운 기세로 굴러오는 마차소리에 잠시 주춤한 석상의 발바닥에 일검을 가했다. 콰직―. 왼쪽 발바닥에 대리석 조각이 부서져 흩어지며 어른 한 명이 들어갈 정도의 흠집이 생겨 났다. 내리 누르는 힘에 조슈아의 완벽한 검격이 더해져 만들어진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결코 그것만으로는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조슈아는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이 말고스의 힘이야. 검집만으로 이런 공격이 가능하다니!' 그녀는 갑자기 칼라성에서 운골리안트를 상대할 때 말고스를 들고 나가지 않았던 것이 아쉬워 졌다. 조슈아가 석상의 발바닥을 부수고 그 방탄력으로 십여 걸음을 물러남과 동시에 바알이 정신을 추스리고 등뒤에서 달려오는 마차에 기겁을 하여 피할 시간을 놓쳐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바알이 충격에서 회복되는 시간을 미리 계산한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 원한이 있어 이 기회에 죽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지, 멘디에타는 아랑곳 안고 바알의 엎드린 몸 위로 내리막길에 가속도가 붙은 4륜 마차를 발바닥이 부서져 엉거주춤 한 자세로 서있는 석상의 종아리에 받아버렸다. 콰광―. 무거운 파괴음을 내며 마차가 해체되어 튀어 오르고, 물통이 터져 바알과 멘디에타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린 순간, 도저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무신 에알라의 석상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 지기 시작했다. "끼악!" 바알이 물이 튀어 아픈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다가 자신을 향해 서서히 넘어져 오는 석상의 모습에 평생 놀림감이 될지 모를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순간 마차에서 뛰어 내린 멘디에타가 아직 충격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바알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퍼억―. "크억." 바알은 멘디에타의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그대로 10여 걸음을 미끄러져 구석에 쌓여 있던 나무상자에 밖혀 버렸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멘디에타는 그 반대 쪽으로 몸을 날리고 바알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 큰 포물선을 그리며 석상이 쓰러졌다. 콰앙―. 무거운 석상이 거의 일직선으로 쓰러지자 온 마을의 지붕이 들썩이는 듯 했다. 구석에 처박힌 바알은 겨우 몸을 추스려 어기적 거리며 일어나 쓰러진 석상에 시선을 던지다 기겁을 하였다. 그럴것이 쓰러진 석상의 얼굴이 바알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 빛을 띠는 석상의 섬짙한 눈빛에는 그럴리야 없겠지만 분노 같은 것이 서려있는 듯 했다. "이야압!" 순간 뾰족한 소녀의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바알이 돌아 보니 쓰러진 석상의 배위로 튀어 올라가 다시 도약, 거의 어른 4∼5 명의 키만큼을 튀어오른 조슈아가 성검 말고스를 ―사실은 검집을― 등뒤까지 젖히고 석상의 머리로 날아들고 있었다. 크르―. 갑작스러운 소녀의 기합에 놀란 석상이 고개를 돌리는순간 조슈아의 검격은 그대로 석상의 미간을 꿰뜷었다. 파아악―. 아무리 가벼운 몸이라지만 그 대단한 도약에 더해 조슈아의 검격은 팔메라 대륙을 통털어 10걸에 드는 대단한 것이었다. 거기에 검집 채라지만 어쨋든 성검 말고스의 일격! 석상의 미간이 쩌억 갈라지며 순식간에 두부 전체에 균열이 일어났다. 쩌어억―. 조슈아가 석상의 몸에서 뛰어 내리자 때를 같이 하여 석상의 머리가 부서져 흩어졌다. "우옷. 대단해 조슈아!" 바알이 아픔도 잊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다가 옆구리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우웃. 석상과의 싸움에서 받은 충격은 별거 아닌데 멘디에타 놈이 걷어 찬대가 으으.' 바알이 옅구리를 만지며 얼굴을 찌프리는 동안 반대 편에서 멘디에타가 뛰어 왔다. "처치한 것입니까?" 바알을 걷어 찬 것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얼버무리려는것인지 그는 바알과 눈한번 맞추지 않고 걱정스레 쓰러진 석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말고스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머리가 부서진 석상을 바라보고 있던 조슈아는 석상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더욱 짖어 지는 것을 보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아직 아니야! 아직 일어나지 못할 때 몸까지 확실히 부수어 버리자구!" 소녀의 세리프로는그리 사랑스럽지 않은 대사를 읊으며 조슈아가 몸을 날려 쓰러진 석상의 왼쪽 어깨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상황이 종료되지 않은 것이 분명함을 깨달은 멘디에타도 검으로 석상의 몸을 무차별로 그어 갔고 멘디에타는 철갑을 꺼내어 주먹에 쒸우고 몸통에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조슈아의 공격에 한쪽 팔이 부서져 버리고 잠시 동안 많은 흠집을 내기는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각이었고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들은 돌산위에서 곡괭이 질을 하는 인부들로 보일 뿐 석상의 몸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웃!" 갑자기 바알과 멘디에타가 답답한 침음성을 내며 석상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조슈아가 놀라 돌아보니 그들의 들어난 피부에 조금이지만 습포가 생기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벌써?" "아무래도 물에 젖어 요정가루가 많이 씻겨 내려간 것 같습니다." 조슈아가 당황하여 소리치자 멘디에타가 낭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순간 타이밍도 좋게 석상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하였다. 조슈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소리쳤다. "일단 후퇴야! 안티오페에게서 좀더 가루를 얻어야 겠어." 그녀의 말이 없더라도 그들은 더 이상 경딜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세 남녀는 온힘을 다해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NEXT 제17화 버려진 마을의 풍경 part 4 이제 샤레셀은 거의 한계에 다달아 있었다. '이대로 라면 십분을 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이 새가 아닌 이상 급속도로 뻗쳐나가는 마의 기운으로부터 도망갈 곳은 없었다. 결국 그녀가 포기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에레크트라와 퓨어리스도 죽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샤레셀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추스려 결계를 강화하였다. 덕분에 잠시 잠식당할 뻔한 우변의 결계에서 마기가 퉁겨 나가며 괴이한 소리를 냈다. "훌륭한 결계네?" 샤레셀의 등뒤에서 억양이 없어 조금은 어색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티오페?" 샤레셀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단번에 파악하고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 순간 도움이 될만한 인물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 할머니(?)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퓨어리스의 하늘거리는 비단 잠옷을 빌려 입은 안티오페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유유자적한 걸음거리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여전히 속옷을 입지 않아 막 떠오르는 새벽 태양의 붉은 빛이 몸매의 굴곡을 비추며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까 히데아가 기생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석상인 것 같더군. 누군지 상당히 고대어 마법에 능한자야." 전혀 걱정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곤혹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는 듯 팔짱을 끼며 마을 어귀를 바라보는 안티오페였다. "그러면 조슈아가 처치할 수 없을 거라는 거예요?"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샤레설은 흥분한 어조로 나오려는 말을 억누르며 나직히 물었다. "조금있으면 내 가루의 효험도 다 떨어질꺼야. 그녀가 현명하다면 지금쯤은 도망을 오고 있겠지. 아무리 말고스를 가지고 있다해도 아직은 검집채, 한번에 그 놈을 쓰러트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의 말에 샤레셀이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결계가 부서질 뻔하였다. "안티오페! 당신 성검 말고스를 아는 거예요?" 안티오페는 그녀의 놀라움에 별로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하였다. "예전에 아카바에서 바론이라는 왕이 메디나에서 출몰하던 레드 드래곤을 그 말고스로 처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 나는 그의 용맹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내 머리칼을 잘라주었지." 순간 샤레셀의 뇌리에는 국왕 바디메오의 갑옷 망토 걸이를 장식한 초록색 끈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설에 의하면 그것은 바디메오 국왕의 4대전의 선왕이자 검성이었던 바론 대제가 240년 전 요정의 머리칼을 얻어 갑옷을 장식한 것으로 마력의 중화와 해독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안타오페와 우리는 보통인연이 아닌거야.' 먼 시선으로 마을 쪽을 바라보던 안티오페가 고개를 꺄웃거렸다. "어째서 마을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더 강해졌을까? 아마도 마기를 억누루고 있던 무엇이 사라진 것 같아." "그럼, 역시……." 샤레셀이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듯 그녀의 말을 받자 안티오페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아까 그 노인네의 말을 듣고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 토레즈라는 인간의 소년은……." "샤레셀!" 순간 안티오페의 말을 끊으며 조슈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레셀과 안티오페가 흠칫하여 정면을 주시하니 검은 마기를 뚫고 조슈아와 그 뒤로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두 남자가 뛰어 오는 것이 보였다. "이런 물에 젖었군." 바알과 멘디에타가 흠뻑젖은 것을 보고 안티오페가 말했다. "조슈아! 여기는 절대마법방어가 되어있어. 정면의 결계를 잠깐 열 테니까 잠깐 기다려." 아세르 여신의 절대마법방어는 다른 마법방어와 달리 마법뿐 아니라 모든 물리력까지 퉁겨내는 결계였다. 자칫해서 퉁겨나가면 페레나 땅에는 가야 시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바알과 멘디에타가 푸른빛의 결계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가운데 샤레셀이 인장을 이마로 집중하며 이미 거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집중력을 총동원하여 중앙의 결계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안티오페 도와줘요." 잠시 마기에 무방비상태가 된 자신에게 마기가 엄습해가자 뒤를 생각지 않았던 샤레셀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부욱―. 급박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들던 비단 잠옷을 찢으며 안티오페가 투명한 날개를 활짝펴 날개 짖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등뒤에서 초록빛의 가루가 나와 샤레셀의 온몸에 뿌려지고 잠시 열린 틈 사이로 뚫고 들어온 마기가 샤레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휴우∼!" 마기가 온몸을 덮었으나 특별히 이상한 느낌이 없자 샤레셀이 안동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슈아와 두 남자가 결계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다시 결계를 강화하여 틈을 막아 버렸다. "헉헉. 십 년은 감수했군." 태어나 가장 빠른 속도로 뛰어 본 바알이 스스로에게 경탄한 어조로 숨을 고르며 말했다. 조슈아도 그에 뒤지지 않게 헐떡거리다가 샤레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럴 것이 언제나 양 볼에 양치기 소년처럼 건강한 붉은 혈기를 품고있던 건강소녀 샤레셀의 얼굴은 그녀가 평생 본적이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 이제는 푸르스름한 빛 마저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샤레셀! 괜찮아?" 괜찮을 리야 없겠지만 달리 할말이 없는 조슈아였다. "말시키지마, 조슈아! 조금만 정신이 흐트러지면 우린 모두 죽을 지도 몰라!" 샤레셀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는 거의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이 넓은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끼악!!" 갑자기 바알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마을 입구의 호신석을 부수며 머리와 왼쪽 어깨가 부서진 석상이 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행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루 밤에 두 번이나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살아있는 한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일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묘하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저…저걸 어떻게 막아야 하지? 아무래도 아까보다 더 열이 받은 것 같은데? 응? 어쩌지?" 바알이 검을 치켜들고 의견을 묻는 것인지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를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조슈아가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싸울 수밖에 없지. 저런 놈이 부딪혀 온다면 샤레셀도 오래 견디지는 못할 꺼야."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갑자기 그들의 뒤편에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창백한 샤레셀과 무시무시한 자태로 뛰어 오는 석상에 정신이 팔려 안티오페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안티오페! 마침 여기에 있었군요." 조슈아는 죽은 어머니를 만난 것 같은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의 천막촌까지 그 속도로 뛰어 가면 도착 전에 심장마비로 죽을 것이라 은근히 걱정하던 그녀 였던 것이다. 그러나 발치에 비단 잠옷을 찢어 밟고 있는 요염한 요정 여왕은 여전히 자신이 말핼 때 타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정면을 주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신전 안에 그 소년을 죽였나?" "그…그랬는데……." 그녀의 말에 바알이 죄지은 것 마냥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소년을 죽이니까 저 석상이 움직였지?" 마치 점장이처럼 맞추어 내는 그녀의 말에 일행은 놀라고 있었다. 그러자 조슈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알지요? 안티오페! 당신 말대로 소년의 목을 베니까 갑자기 저 석상이 움직였어요. 당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이제는 감히 입도 열지 못할 정도로 결계의 유지에 벅찬 샤레셀을 힐끗 쳐다보며 안티오페는 다가오는 석상을 바라보았다. "일반에는 알려지지 않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신전에서는 수백년에 한번 일어 나는 일이지. 그 소년은 신족의 하프일 꺼야." "에엑?" 세 남녀가 경악성을 터트렸지만 샤레셀은 이미 알고 있었던지 아니면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족? 설마 그건 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조슈아는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믿기지 않는지 반문하였다. "그래. 가끔 신녀들 중 신과의 교감이 특별히 강한 신녀가 있기 마련이야 신에 따라 틀리지만 가끔 그 신녀를 총애한 신이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기도 하지. 여기는 에알라 신전이니 결국 그 소년은 에알라 신의 아들인 셈이겠지." 그녀의 황당한 말에 조슈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어쩌면 신관들은 그 소년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지도 몰라. 그래서 그런 불구소년을 신전에서 키웠겠지.' "그…그럼, 나는 신족을 죽인거야?" 바알이 조슈아가 멈추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중간에 검을 거두기는 했지만 목의 절반을 베고만 곱추 소년의 뒷모습을 생각하고는 몸서리를 쳤다. "너무 지래 짐작 아닐까요? 신족과 인간의 하프가 그런 모습일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언제나처럼 말이 한차례 돈 후 의견을 제시하는 영리한 멘디에타가 지적했다. "그래! 그렇겠지? 응? 설마 신족을 죽여 천벌을 받거나 하지 는 않겠지?" 결국 걱정되는 것은 그것뿐이었던지 어느 정도 안도하는 바알을 보며 조슈아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런 건 문제가 아냐. 저 석상을 어떻게 처치하느냐만 생각하라구! 안티오페, 요정가루를 뿌려 줘요." 그녀의 말에 안티오페는 귀찮은 일을 한다는 표정으로 날개 짓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날개 안쪽에서 초록색의 가루가 흘러나와 그들의 몸으로 날아가 착상하였다. 자신의 몸에서 다시 초록색의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조슈아가 소리쳤다. "샤레셀! 놈이 몸으로 부딪혀 올 때, 최대의 방탄력으로 한번 만 버텨죠. 놈은 분명히 네가 장시간 결계를 칠걸 예상하고 첫 공격에 그리 강력한 반탄력으로 대항할거라 생각지 않을 꺼야. 틀림없이 넘어지거나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을 꺼야. 그러니 한번에 힘을 집중해서 최대한 놈을 밀어 내주고 결계를 거둬." 그러자 여지껏 말이 없던 샤레셀이 시체 같은 얼굴을 들어 악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달아 나는 속도로는 이 마기를 벗어 날수 없어!" "어차피 방법은 없어. 네가 계속 막을 수도 없는 것이고……. 놈이 쓰러지면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빨리 쳐부순다. 너는 나중을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놈을 밀쳐 넘어트릴 생각만 해줘." 샬레셀은 무언가 대꾸하려다가 결국 그녀의 말에 수궁하는 지 고개를 끄떡이며 이마 위에 맺은 인장을 천천히 머리위로 올려 갔다. 그 순간 석상은 바로 코앞까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고 새빨간 여명을 배경으로 검은 마기를 뿌리며 달려오는 그 모습은 바로 사신의 그것이었다. "이야압!" 마치 검을 휘두를 때의 기합 같은 장소성을 발하며 샤레셀이 인장을 풀어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부오오―. 그러자 엄청난 범위를 커버하며 마기를 막고 있던 푸른색의 결계가 일순간에 범위를 좁히며 그녀의 정면으로 집중되어 엄청난 바람을 일으켰다. 아마도 새벽에 변화하는 대기를 결계로 가로막고 있다가 그 결계가 열리자 극심한 기압의 변화로 바람이 일어 나는 것이리라. 쿠오오―. 석상은 한발만 더 뻗으면 일행을 밟아 죽일 위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순간 샤레셀이 앞으로 뻗은 두 손의 손바닥을 활짝 폈다. 콰아앙―. 무방비로 달려오던 석상이 엄청난 방탄력에 튕기어 거의 십여 걸음(석상의 보폭으로)을 밀려가더니 이윽고 바닥에 거의 어른의 키 정도는 될 법한 선명한 긁힌 자국을 남기며 뒤로 넘어졌다. "좋았어! 샤레셀!" 조슈아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는 당찬 소녀답게 말고스를 들고 쓰러진 석상을 향해 내달렸고 그 뒤를 바알과 멘디에타가 뒤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달려가는 순간 긴장감이 풀린 샤레셀이 마치 좀비 같은 얼굴이 되어 앞으로 쓰러져 가는 것을 그들은 보지 못하였다. NEXT 제17화 버려진 마을의 풍경 part 5 위잉―. 뒤에서 남의 불구경 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있던 안티오페가 우아한 날개 짓으로 날아와 쓰러지는 그녀를 뒤에서 안아들었다. 샤레셀보다 조금 더 클 뿐이었지만 너무나 가볍게 그녀를 안아들은 안티오페는 왼쪽입술을 찡긋하며 기절한 샤레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저 소녀를 그리 사랑하는 거지? 같은 소녀인데 당신의 사랑에서는 소년을 사랑하는 소녀의 냄새가 나."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안티오페는 금발을 휘날리며 쓰러진 석상의 배 위로 뛰어 올라가는 조슈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 인간들 중에는 드물게 같은 성끼리의 슬픈 사랑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데 혹시 그런 것일까?" 샤레셀이 기절해서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것은 신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일대는 그녀의 분노로 초토화되는 비극을 맞았을 것이었다. 안티오페의 비극적 오해야 어떻든 조슈아는 쓰러진 석상의 배 위에 올라가 또다시 돌산을 캐는 광부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다른 두 인부인 바알과 멘디에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칼질에 석상의 가슴께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콰악―. 그녀가 혼신의 검격을 가할 때마다 재미있을 정도로 쉽게 돌덩이가 튀고 구멍이 패여 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시각, 멀리서 보면 그들은 여전히 돌산 위의 인부들일 뿐이었다. 그때 쓰러진 석상이 정신(그런 것이 있다면)을 차린 듯, 몸을 부르르(음?) 떨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런! 도대체 원정이란 건 어디 있는 거야?" 바알이 몸을 일으키려는 석상의 옆구리를 철갑을 낀 주먹으로 두드리며 소리치자 석상의 껍질이라도 벗기려는지 날카로운 직도(直刀)로 오른쪽 허벅지를 베고 있던 멘디에타가 대답했다. "아마도 가장 깊은 곳에 있지 않을까요?"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어쨌든 정론을 말하는 멘디에타였다. 그사이 완전히 정신(으음?)을 차린 석상이 상체를 일으키자 조슈아는 가슴에서 미끄러져 석상의 다리사이로 떨어 졌다. "조슈아!" 바알이 잽싸게 몸을 날려 떨어지는 조슈아에게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가? 조슈아는 공중에서 가볍게 회전 낙법을 하며 몸을 날린 바알의 얼굴을 밟고 재차 뛰어 올랐다. "어랏?" 너무 빨리 바닥에 발이 닿아 당황한 조슈아가 석상의 부서진 머리를 향해 뛰어 오르다 밑을 내려다보니 바알이 코피를 분수처럼 흩뿌리며 뒤로 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아니, 바알이 왜 저기에……?' 그러나 생각도 잠시, 조슈아는 말고스를 치켜들고 반쯤 부서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은 면상을 경쾌하게 내리쳤다. 퍼억―. 그녀의 혼신의 검격에 그나마 남아 있던 석상의 머리 부분이 다 부서져 흩어졌다. 그리고 석상의 부서진 머리 위로 날아 등위로 몸을 날리는 조슈아의 시야에 부서진 머리 부분 아래 마치 흑요석 같은 검은 광석이 박혀있는 것이 보였다. "원정이다!" 그녀가 그리 단언한 것은 머리가 부서져 없어지자 그 흑요석 같은 광석(이 아닐지도 모른다)에서, 마치 펄펄 끊는 냄비의 뚜껑을 열어 놓은 듯 급격히 검은 기류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석상의 등뒤로 뛰어내린 조슈아가 여전히 석상의 피부를 벗기고 있는 멘디에타에게 소리쳤다. "멘디에타! 원정은 석상의 목 깊숙한 곳에 있어요. 머리를 부쉈더니 원정이 들어 났어요." 그사이 완전히 몸을 일으킨 석상은 그나마 남아 있던 머리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없어지자 앞을 볼 수 없는 듯 괴성을 지르며 주위를 휘젓고 다녔다. 그러자 더욱 당황한 것은 그들이었다. 저 커다란 몸으로 두서없이 주위를 밟고 창을 휘둘러 대니 도저히 접근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억―." 그때 얼굴 가득 코피를 흘린 바알이 석상의 발을 피하려다가 석창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바알!" 조슈아가 다급히 소리 치며 그에게 몸을 날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석상이 쓰러진 바알의 몸 위로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조슈아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조금 있으면 바알은 수레에 깔린 쥐의 모양으로 비참히 객사할 참이었다. 그가 기절하여 곧 일어날 끔직한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피이잉―. 콰앙―. 그때 무언가 날렵하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며 석상이 힘껏 발을 디디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슈아가 눈을 뜨고 정면을 주시하자 바알이 멋지게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의 환시, 축늘어진 바알의 커다란 몸을 언제 날아왔는지 안티오페가 안아 들고 석상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멋져! 안티오페!" 조슈아는 안도감에 눈물까지 찔끔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안티오페의 억양 없는 목소리가 들여 왔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마기가 언덕 위의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다다를 꺼야. 빨리 처치하라구." 그녀의 말에 놀란 조슈아가 고개를 돌려 참나무 숲 너머의 민둥산을 바라보자 그 꼭대기에 개미 떼처럼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인영이 보였다. 마기는 이미 숲을 지나 언덕의 밑에 부분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이런."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고 있었다. 얼핏보기에도 몇 분 안에 마기는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다달을 것으로 보였고, 샤레셀은 더 이상 결계를 형성할 힘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원정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으니까.' 조슈아는 타고난 낙천가답게 도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고스를 치켜들고 석상에게 몸을 날렸다. 일단 석상이 일어서 있으니 도저히 쓰러뜨리기 전에는 머리 위의 원정을 건드릴 수가 없는 형국이어서 일단 다시 쓰러뜨리기로 작정하였다. "발목이에요. 멘디에타! 발목을 공격해요." 그렇게 소리친 조슈아가 날아가는 바알 쪽으로 몸을 돌리고있는 석상의 발뒤꿈치를 가격하자 아제는 소리를 내지 않는 석상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일격에 발뒤꿈치의 돌조각이 상당히 많이 부서져 내렸지만 여전히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사이 바알은 멋지게 날아서 참나무 숲 쪽에 샤레셀이 누워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 조슈아는 날아가는 바알을 바라보며 여전히 석상의 껍질을 벗길 듯 날렵하게 베었다가 몸을 빼는 것을 반복하는 멘디에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멘디에타의 세련된 궁중 검술은 이런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파괴력만이 필요한 것이다. 조슈아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까마득한 높이에서 마기를 뿜어내는 석상의 목 부분을 바라보았다가 여전히 쓸데없는 공격을 사명감 있게 하고 있는 멘디에타에게 소리쳤다. "나를 올려 줘요! 멘디에타!" 조슈아는 전속력으로 그에게 달려가자 멘디에타는 당황하여 대답했다. "오…올려 달라고요? 어…어떻게!" 그러나 역시 순발력 있는 멘디에타! 조슈아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일순간에 그 뜻을 파악해 양손에 검을 쥐고 검편을 뉘워 허리를 숙였다. "타앗!" 조슈아가 그대로 멘디에타의 검편을 밟고 몸을 튕겨 올리자, 때를 같이 하여 멘디에타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검을 들어 올렸다. 파앗―. 가벼운 몸을 최대한 날려 석상의 허리 께까지 올라간 죠수아는 허리의 벨트 장식을 한번 더 박차고 재차 도약하여 석상의 목 위쪽까지 날아올라 갔다. 그녀의 시야에 검은 기류를 뿜어대는 흑요석이 들어 왔다. "죽어랏!" 기합대신 일갈하며 조슈아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성검 말고스를 내리 꽂았다. 타앙―. 검은 빛의 매끈한 광석은 그녀의 검격에 청명한 격타음을 내며 금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기의 분출에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듯 스멀거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마기는 그 속도와 양이 전혀 줄지 않았다. "원정이 아닌가?" 조슈아는 석상의 목위에서 마기가 거의 언덕 위에 다다르는 것을 보며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사이 흑색의 광석에서는 계속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며 조슈아의 몸을 덮어 갔다. "흐읍……!" 조슈아는 숨이 막힘을 느끼고 호흡을 멈추었다. '아무리 안티오페의 가루라도 이렇게 가까이서 마기를 맞으니 견디지 못하는구나.' 그때 갑자기 석상이 머리에 앉은 파리를 잡는 듯한 포즈로 조슈아가 서있는 머리 부분에 손바닥을 가져오는 것이 보였다. "우왓!"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기겁을 하며 몸을 날렸다. 콰앙―. 우수수―. 석상의 일격에 목 부분의 돌조각들이 튀며 조슈아의 검격 때 보다 더 많은 흠집이 났다. 조슈아가 석상의 등뒤로 뛰어 내려 올려다보니 목뒤에서 허리 께까지 손이 들어갈 정도로 금이 간 것이 보였다. 그러자 그 금사이로 반질반질한 느낌의 흑석이 괴기스러운 빛을 내는 것이 보였다. "저…저렇게 큰 것인가? 저게 다 원정이야?" 조슈아가 경악성을 지르자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석상이 몸을 돌려 창을 휘둘렀다. 움직일 때마다 돌 조각이 떨어져 나갔지만 아직도 완전히 활동을 정지시킬 정도로 만들려면 수 시간은 이렇게 싸워야 할 것 같았다. "어…어떻게 하지?" 그녀는 뒤로 몸을 날려 두서없이 휘두르는 창을 피하며 언덕 배기를 바라보았다. 멀리 점처럼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마기를 피해 우루루 밀려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 같은 결투 씬을 본 것은 좋았는데 자칫하면 한 명의 증인도 남기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간 조슈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NEXT 제17화 버려진 마을의 풍경 part 6 "우왁!" "살려줘!" 언덕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멀리서 싸움을 구경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한 순진한 마을 사람들은 샤레셀의 결계가 깨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단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던 퓨어리스조차 그들의 싸움에 흥분하여 마기의 접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샬레셀의 결계에 석상이 퉁겨나가 쓰러지자 환성을 지르던 마을 사람들은 아까의 일격에 마물을 해치웠다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승리에 젖어 있었다. 퓨어리스만 아니었다면 다들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을 것이었다. 여하튼 마기는 이제 거의 언덕위로 올라와 마을 사람들을 덮치고있었다. 퓨어리스는 에레크트라의 손을 잡고 온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꺄아악!" 마을사람들에 밀려 뒤로 처진 30대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 오자 퓨어리스는 뒤를 돌아보고 당장 돌아 본 것을 후회하였다. 그럴 것이 비명을 지르는 여인은 등뒤로 다가온 마기를 피하려다 미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마을 청년의 등을 보지 못하고 떠밀려 그 안으로 퉁겨 들어가 넘어진 것이었다. 강력한 부식성 마기는 순신 간에 여인의 몸을 부식시키며 온몸을 수포와 노란 고름으로 덮어 버렸다. "끄아악!" 비명 소리에 돌아보니, 썩어들어가는 얼굴을 감싼 양 손 사이로 피 석긴 고름을 흩뿌리며,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마기를 벗어나려 애쓰다 결국 선체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 쓰러지는 처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일단 언덕의 꼭대기까지 올라온 마기는 더 이상 거칠 것 없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도저히 인간의 속도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예감한 퓨어리스는 그녀를 붙잡고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에레크트라의 두 눈을 가려 주었다. "조금만 지나면 돼. 에레크트라. 조금만 참아……."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에레크트라를 달래는 그녀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에레크트라를 달래는 그녀의 얼굴에 슬픔보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마기는 이제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화아악―.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서 마치 태양이 폭발한 듯한 황금빛 광채가 쏟아져 내렸다. "아악!" 퓨어리스를 비롯한 마을 사람 모두가 감히 그 빛을 직시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 와중에 두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시린 눈을 가늘게 뜬 채 밖의 상황을 내다보던 에레크트라 시야로 그 무시무시한 검은색 마기가 마치 늑대를 만난 양 떼 같은 형상으로 쫓겨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몇 분 후 마기는 달아나듯이 순식간에 멀어져 언덕 아래 참나무 숲까지 밀려갔고, 감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하던 황금빛의 광채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어…어떻게 된 일인가?" "오오. 에알라 신의 가호다." 절대적인 죽음의 아가리에 몸의 절반을 담그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은 이 믿기지 않는 기적에 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하였다. 그사이 역시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언덕 밑으로 밀려간 마기를 바라보던 퓨어리스는 자신의 등뒤에 떠오르는 태양이 어떤 그림자에 의해 가려 져있음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앗!" 죽음의 순간에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경악성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그리고 모두 그녀의 시선의 끝에 다다르자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밝은 아침 태양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눈도 깜박하지 못하였다. 퓨어리스의 뒤쪽 하늘 위에서 오직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태양의 후광을 달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양어깨에서 뻗어 나온 순백의 아름다운 날개에 은발의 머리칼이 극치의 예술적 조화를 이루고 굴강한 근육질의 몸매에 조형의 신의 축복을 받은 듯 위엄마저 흐르는 유려한 얼굴선,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신의 그것 같은 강하고, 자애로우면서도 잔혹한 깊고 깊은 금빛 눈동자. 비록 나체의 모습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들이 그리는 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도…도대체!" 퓨어리스가 힘겹게 입을 때자 신의 모습을 한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퓨어리스도 에레크트라도 그의 미소를 받고 영혼까지 떨리는 아찔함을 느꼈다.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매혹시킬 처절한 아름다움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남자에게 느끼는 소녀의 감정과는 다른 종류의 좀더 원초적인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었다. '저…정말, 신인 걸까?' 스스로 그렇게 질문을 던져 보는 그녀였지만 그녀는 이미 저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존재가 신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오오. 에알라 신이시여……!" 촌장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리고 곧이어 마을 사람 모두가 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오체복지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퓨어리스와 에레크트라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저런 아름다운 존재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조아리는 걸까'라는 것이 그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를 잘못 알고 있어요." 그때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신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촌장이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아버님이시라구요?" 결국 그는 스스로 신의 자식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치 고개를 드는 순간이 죽는 순간인양 땅에 머리를 박고 공포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자신들의 신을 두려워하다니, 상당히 아이러닉한 인간들이었다. 스스로 신의 아들임을 자처한 날개 달린 청년은 멀리 석상이 그의 시선에 당황하여 움찔(?)하는 것을 보며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아버님의 석상에 저런 장난을 하다니!" 그렇게 말하며 그가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올리자 그의 치켜든 손에서 황금빛의 불덩 이가 만들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퓨어리스는 당황하여 급히 소리 쳤다. "신이시여. 잠시만! 저 아래는 저 괴물과 맞서 싸우던 저의 동료들이 있어요." 그러자 그는 그녀의 호칭에 실소인지 자애로운 미소인지 모를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 저도 그들을 보고 있었어요." 어마어마한 신분에 비해 의외로 소박한 말투를 쓰는 그였지만 어쩐지 상당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그는 다시 눈을 들어 석상을 노려보더니 머리위로 치켜든 손을 그대로 석상에게 뻗었다. 파아악―. 순간 눈을 태워 버릴 듯한 황금빛 광구(光球)가 완만한 속도로 석상에게 날아갔다. '뭐야, 저속도는……?' 날아가는 속도로 보아 걸어서도 피할 정도의 불의 공을 보고 퓨어리스뿐 아니라 하나둘 고개를 들고 상황을 주시하던 마을 사람들도 속으로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완만한 불의 공이 날아가는 동안 석상은 가위에라도 눌린 듯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마치 포박이라도 당한 듯 간혈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이윽고……. 콰아아―. 마치 템포가 느린 꿈을 꾸는 듯한 시간이 지나고 황금빛의 광구는 그대로 석상의 가슴에 직격하며 엄청난 굉음을 냈다. 끄아아아―. 마물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석상이 내는 소리가 아닌 소환수 히데아가 내는 고통에 찬 괴성이있다. "저…저런!" 누군가 언덕 밑의 상황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믿어지지 않게도 거대한 석상은 그 공포의 파편조차 남기지 못하고 철저히 분해되어 거대한 자갈밭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검붉은 빛의 흑요석이 아침햇살을 받아 기괴한 빛의 반사광을 비추고있었다. "저것이 원정인가요?" 퓨어리스가 이제는 전혀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날개 달린 사내에게 묻자 그는 여전히 붙임성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것이 원정이지요. 누군가 저 석상안에 원정의 씨앗을 심어 놓고 때를 기다린겁니다." 그가 대답하는 동안 이제는 자갈밭이 된 언덕 아래의 들판 위에서 조슈아와 멘디에타가 망연자실한 포즈로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곧이어 안티오페가 바알을 안고 언덕위로 날아 올라왔다. "당신은?" 추욱 늘어진 바알을 내려놓고 안티오페가 그 극미의 나신을 자랑하듯 도발적으로 가슴을 내밀며 물었다. 그러자 이 신족의 사내는 의외로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토레즈라고 합니다. 요정의 여왕님." 순간 머리를 조아리고있던 마을 사람들이 경악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토…토레즈? 토레즈 라니 그 곱추의……." 촌장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리치자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 진지는 것을 퓨어리스는 놓치지 않았다. 그때 안티오페의 억양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에알라 신의 아들이군요. 냄새로 알 수 있어요. 이 세계에서 그를 본 지가 벌써 300년이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어때요? 그는 건강한가요?" 신의 건강 상태를 묻다니 상당히 비상식적인 요정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녀 의 속내는 그를 공식적으로 신의 아들로 마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려는 의도였다. "오오……." 과연 그녀의 의도는 적중하여 마을 사람들은 다시금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들 마세요. 저는 여러분이 갓난아기일 때부터 보아온 바로 그 토레즈입니다." 그의 말에 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지금의 그 모습은 무엇입니까? 여지껏 저희를 시험하신 겁니까? 신이시여?" 토레즈는 신! 이라는 칭호에 거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은 저의 아버지이시지 제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신족과 인간의 하프일 뿐입니다. 그리고 히데아의 공격을 받기 전에는 저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물의 공격을 받고나서 저의 힘을 발견하였죠. 그래서 신전에서 마기의 확산을 막으며 깨달았습니다. 저의 저주받은 외모는 신기(神氣)와 인간의 속성이 융합되지 못해 그런 모양으로 변한 것이라는 것을요. 그러다가 저기 요정의 여왕님께서 안고 오신 전사님이 저의 육체를 파괴해 주셔서 이렇게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그가 자신들이 학대하고 경멸해 마지않던 곱추 소년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한일이 있는지라 지금은 이리 부드럽게 이야기하지만 곧 그의 분노로 마을이 초토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신의 아들 토레즈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천천히 땅위로 내려와 촌장에게 다가갔다. "히이익! 제발 용서를……."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70대의 노촌장이 체통도 잊고 이마를 머리에 박으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토레즈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켜 새웠다. "이러지 마세요. 촌장 할아버지. 저는 모양은 이레도 토레즈에요. 여러분들과 신관님들이 키워주신 바로 그 아이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마을 사람들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자 그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안티오페가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지금 이 시돈에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있나요? 100년만에 또 마물들이 설치고 있어요. 겨우 10여년 전에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 당신을 낳았다면 결국 이 세계에 오긴 온다는 건데 어째서 가만 놔두는 거죠?" 그녀의 질문에 토레즈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막 신족의 힘을 각성한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인 듯 했다, "요정님. 아시겠지만 저희 신족이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이제 막 각성한 저조차 이미 견디기 힘들어 지고 있어요. 그러니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영원히 자신을 모시는 인간들을 지켜 봐주고 가끔 도움이 될 영웅의 길을 인도하는 정도입니다. 아쉽게도 모든 문제를 신이 해결해 줄 수는 없어요." 신관이 들으면 자신의 직업에 상당한 회의를 불러일으킬지 모를 대사였지만 다행히 신녀 샤레셀은 저 아래 참나무 숲에서 명부의 입구를 들락날락 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당신도 결국 그 엄청난 힘을 고스란히 가지고 신계라는 데로 올라가 버린다는 말이에요? 이 나라를 이대로 내팽개치고?" 그때 거의 기절직전의 에레크트라를 안고 있던 퓨어리스가 따지듯 소리쳤다. 그러자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이 된 토레즈가 침중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일단은 그럴 수밖에 없군요. 그러나 신탁을 알려 드릴 시간은 있겠네요." "오오!" 신탁이라는 말에 언제나처럼 놀라기만 할뿐인 마을 사람들이 더욱더 머리를 조아리며 귀를 세우는(으음. 당나귀 떼인가?) 것이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토레즈는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편 채, 시 낭송을 하듯 신탁을 읊기 시작했다. "위대한 강철의 무신(武神) 에알라가 나를 섬기는 시돈의 백성들에게 말하노라!" "오오!" 또 다시 개구리 때 같은 마을 사람들의 감탄성이 들려 왔다. 과연 마을의 신관들이 신탁이랍시고 읊던 것과는 그 격조에서 엄청난 차이가 느껴졌다. 확실히 신탁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누가 읊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빌어먹을 마법사의 장난으로 네놈들이 얼마나 더러운 상황에 쳐해 있는지 이 위대한 무신 에알라는 잘 알고 있다." 퍼엉―. 마을사람들을 비롯한 퓨어리스와 에레크트라까지 모두 유체이탈을 경험하고 있었다. 다만 안티오테 만이 언제나처럼 의연한 자세로 서서 그의 말을 표정의 변화 없이 듣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이 너희를 죽어라 싫어한다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걱정할 것은 없다." "오오!" 또 다시 이제는 장엄한 기운 마저 느껴지는 마을 사람들의 탄성의 합창소리가 울려 퍼졌다. 걱정할 것 없다는 그의 말에 그의 신답지 않은 어조는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와서 귀찮게 내가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너희를 구원해줄 영웅이 곧 성도에서 일전을 치를 것이다." 어이없는 신이었다. 자신이 나서기는 귀찮다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멍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퓨어리스가 따지듯 소리 쳤다. "그 영웅이 이기지 못하면 어찌 되지요? 신께서는 그에게 무언가 능력을 주셨나요?" "오오!" 이제는 완전히 탄성의 합창에 재미를 들린 마을 사람들이 의미 없이 탄성을 발하였 다. 신이 씌인 듯 표정마저 변한 토레즈가 그녀를 돌아보고 히죽 웃었다. "그건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는 엄청난 무기를 소유하고 있지. 나는 그 무기의 주인에게 찾아가 그를 도와달라고 조를 생각이다. 아마도 많은 술을 마시게 될 것 같구나." '으음…….' 퓨어리스는 할말을 잊고 말았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기도해 오던 위대한 신은 의외로 무책임한 자였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마당에 무슨 삶의 의욕이 일어나겠는가? 결국 그녀는 시간을 두고 무책임한 아버지에게서 독립하는 딸이 되어야만 하는 이 허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트레즈가 몸을 부를 떨더니 아까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는 퓨어리스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이더니 마을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인간으로서의 10여년 간 저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신계로 떠납니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오오!" 마을 사람들의 비명에 가까운 장탄식이 들여 왔다. 악의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조만간 다시 보자는 그의 말은 지운 죄가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색이 된 마을 사람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서서히 날개 짖을 하여 몸을 띄우더니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의 어머니의 묘지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촌장님." "아! 예! 그러믄 입쇼." 그의 협박(?)에 가장 충격을 받은 70대의 노 촌장이 돼지 같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가 날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다가 흠칫하여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부탁에 대답을 하고 난 촌장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자신에게만 특별히 그런 주문을 한 저의를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이날 이후 타락한 신녀로 낙인찍혀 잡초만 무성하던 트레즈 모친의 무덤은 거의 성인의 무덤과 같은 보살핌을 받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마을사람들에게 한번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는 빠르게 날아올라 순식간에 구름 근처 에 다다르더니 이윽고 성스러운 황금빛을 발하며 사라져 갔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이마를 땅에 박고 몸을 떨고 있는 가운데 안티오페가 그 극미의 나신을 가릴 생각도 않고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훨씬 낫군! 그 에알라 신은 변할 생각을 안 하니, 도대체 순진 한 신녀들을 얼마나 더……." "우왓! 저기 봐랏!" 그녀의 경천동지할 대사는 다행히 마을 청년의 고함소리에 묻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조슈아 일행의 활약에 투덜거리다가 퓨어리스에게 얻어터질 뻔한 청년이 용케도 살아남아 원정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일동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내려다보니 아침 햇살에 매끄럽게 반짝이던 원정이 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숙주를 잃은 원정이 태양 볕을 견디지 못해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언덕 위의 사람들은 물론, 멀리 녹아 내리는 원정 앞에서 이 의외의 결말을 바라보고 있는 조슈아와 멘디에타까지 방금 자신들이 죽을 뻔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내고 몸을 떨고있었다. 사람들의 공포의 시선을 받으며 원정은 완전히 녹아내려 급격히 땅으로 스며들었다. 아마도 몇 세대가 지날 때까지 그 들판에 다가가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NEXT 제18화 검과 소녀 part 1 시돈 서반구의 조그마한 마을 '자펠'을 성지로 바꾸어 놓은 대 이벤트가 벌어진지도 벌써 사흘이 지나갔다. 마을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은 석상의 난동으로 부서진 마을을 복구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조슈아 일행은 마을의 은인으로써 대접받고 있었다. 계획 대로라면 벌써 마을을 떠야 했지만 바알의 부상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무리한 마력 방출을 한 샤레셀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조슈아는 그날 쓰러진 이후 한번도 깨어나지 않고 파리한 안색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샤레셀을 깨어나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안티오페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배고프면 일어날지도……." 그녀는 농담을 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워낙에 진지한 말투로 말하는 지라 일부는 그녀의 말을 믿고 있었다. 아무튼 샤레셀이 가냘픈 호흡을 유지하며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빠진지 사흘 째 되는 날, 조슈아는 더 이상 그저 지켜 볼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고 낮 시간의 대부분을 마을 어귀의 소나무 숲에서 보내는 안티오페를 찾아갔다. '어떻게 보여도 결국은 수 백살 먹은 할머니.' 라는 생각에 결국 최후의 상담역은 그 녀 이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 "샤레셀은 마법의 잠을 자는 것이란 말이에요?" 조슈아가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정면에는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숲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안티오페가 보였다. 한창 더울 늦여름의 오후였지만, 겨울이 없는 아카바에서 온 조슈아에게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이런 기후에 상당히 익숙한지 나체인 체였다. 그녀의 나신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온 마을의 청년들이 모두 숲에서 진을 치고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그녀는 현재 본래의 작은 요정의 몸으로 돌아가 있어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안티오페는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샤레셀은 지나치게 많은 신령력(神靈力)을 소비했어. 마력과 달라서 그건 영혼의 힘 자체를 소비하는 거지." 그녀의 말에 조슈아는 대신관급의 절대방어마법이 마력을 쓰는 것이 아님을 상기하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일어날줄 알았는데, 벌써 4일째예요. 저러다 영영 못 일어나는 건 아닌지……." "그런 건 누구도 알 수 없어, 소모된 영기를 보충하기 위해 스스로 마법을 걸어 영기가 보충 될 때까지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마법의 잠'이니까.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아니면 그대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잠만 자게 될지도……." "주…죽을 때까지요?" 조슈아는 전신 이 싸늘해지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개성 없이 되물었다. 그러자 숲의 냄새를 맡는지 턱 끝을 들고 지긋이 눈을 감고 있던 안티오페가 조슈아에게 얼굴을 돌렸다. "하긴 재생의 마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한한 인간의 육체로는 영기를 보충하기 전에 몸 쪽이 먼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군." 그런 것이 이제야 떠오른 것일까? 그녀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워낙에 표현에 인색하다 보니 조그마한 감정의 변화도 쉽게 노출되는 그녀였다. 전에 없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조슈아는 다급히 소리쳤다. "당신은 수 백년을 살았잖아요? 안티오페! 무언가 방법을 알고 있지 않나요?" 조슈아의 절박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안티오페는 서서히 나무 밑 둥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긋함을 넘어 무심한 경지에 이른 그녀도 이제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편법이긴 하지만 영기를 보충해줄 방법은 있어." "이…있어요?" 조슈아는 죽은 어머니를 만난 것 같이 기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안티오페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뒷머리의 긴 촉수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런데 당신들이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라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곳에는 나 같은 요정은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에……." "그곳이라고요? 어디인데요?" 안티오페는 무신경여왕 답지 않게 조금 뜸을 들이다가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하루거리에 인간들이 '스코올의 성'이라 부르는 협곡이 있어. 그리고 그 협곡의 가장 안쪽에는 인공의 거대한 동굴이 하나 있지." "'스코올의 성'이요? 혹시 100년 전의 대현자 스코올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조슈아가 그 이름을 알고있는지 다그쳐 묻자 안티오페는 고개를 끄떡여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바로 그 스코올이야. 그는 만약을 위해 그런 동굴을 많이 만들어 놓았지." "만약이라고요?" "그 같은 대마법사는 마력과 영기의 소모가 극심하여 보충이 필요 할 때를 대비해 곳곳에 그런 동굴을 만들어 놓기 마련이야. 그래서 동굴 가장 깊은 곳에는 영기를 액화시켜 담아둔 약병 있다고 하지." 그녀의 말에 조슈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 안에는 대현자 스코올의 영기를 모아 놓은 거잖아요? 그런 것이 샤레셀에게 효험이 있을 까요?" "영기라고 하지만 영혼 자체는 아니야. 그저 영혼에서 파생되는 힘일 뿐이지. 샤레셀에게 부족한 것은 그것이니까." 조슈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펴졌다. "서쪽으로 하루거리의 협곡이라고요? 쉽게 찾을 수 있겠군요. 그럼 당장 떠나겠어요." "기다려!" 그녀가 몸을 돌려 달려가려 하자 안티오페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어. 스코올 정도의 대현자가 그런 중요한 곳에 아무나 들어 갈 수 있게 해 놓았을 것 같아?" "그렇다면……." 자신이 너무 경솔했음을 깨닫고 조슈아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며 안티오페가 강의하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도 듣기만 한 것이지만 스코올은 그 동굴 안에 결계를 쳐놓았어. 마물이나 다른 영적 존재는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육체를 가진 존재만 들 수 있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종류의 결계가 있지." "……" "나도 그 정확한 종류는 몰라 그러나 대충 들은 내용으로 짐작해보면 아마도 정신공격을 행하는 마법진일 꺼야." 조슈아는 고개를 꺄웃거리다가 조금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신공격이라면 혹시 환상 같은걸 보여 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무언가 물리적인 공격은 없다는 것이군요?" 그녀의 태도에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안티오페가 대답했다. "그게 더 무서운 거야, 숫자에 상관없이 모든 인물에게 작용하는 정신공격마법이야. 그리고 그것에 걸려들면 누군가 약병이 들어있는 석관을 깨부숴버리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그 안에서 잠들어 있게 되는 거지." 그러나 조슈아에게는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근 계속된 벅찬 상대들과의 대결로 인해 다른 종류의 전투라면 이제 가볍게 느껴지는 그녀였던 것이다. 조슈아의 표정을 보며 주의를 주나 마나 라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잘해낼것이라고 믿는 것인지, 안티오페는 다시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이왕 갈 거면 보름달이 뜨는 3일 후에 가는 것이 좋겠군. 정신공격마법은 태양 신 '프론'의 힘을 빌리는 것이니, 달의 여신 '세레나'의 기운이 가장 강한 보름에 그 영향력이 가장 약해지니까." 역시 수 백살 먹은 할머니 안티오페는 조목조목 영양가 있는 정보만 던져주고는 할 일을 다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명상(?)에 들어갔고 조슈아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며 이미 마음은 '스코올의 성'에 가있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구해줄게 샤레셀, 이번엔 내가 너를 도울 차례야.'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나게 될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장점 중 하나겠지만 이 순간 그녀는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고있어 이 불타오르는 의욕을 품은 채 앞으로 3일을 버텨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2 따악―. "허리를 좀더 움직여 에레크트라! 타격순간에 손바닥을 조이는 것도 절대 잊으면 안돼!" 조슈아가 제법 근엄한 스승의 목소리로 땀에 후줄근 젖어 목검으로 아름드리나무를 내리치는 에레크트라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곳은 자펠 마을에서 말을 달려 서쪽으로 한나절 거리에 위치한 '스코올의 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협곡의 입구. 조슈아는 급한 마음에 도저히 마을에서 머물 수가 없어 충분한 식량과 야영 준비를 하고 모두와 함께 미리 와서 캠프를 차려 놓고 약속대로 에레크트라에게 검의 기초를 가르치는 일을 소일거리로 삼아 초조함과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샤레셀은 비교적 멀쩡한 촌장의 집에 모셔져 마치 성녀의 유골(?)같은 대접을 받고 있어 안심하고 맡기고 올 수 있었다. 따악―. 또다시 목검으로 아름드리 나무를 내려치던 에레크트라가 손아귀의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자신이 조른 수련이니 만큼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그녀는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연신 도끼질을 하는 듯한 엉성한 포즈로 뒷머리까지 활짝 젖힌 목검을 힘껏 내리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멀찌감치 앉아 바라보는 바알과 퓨어리스, 멘디에타는 마치 자신의 손바닥이 아픈 듯 제법 둔탁한 격타음이 들릴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저 녀석 정말로 검을 배우고 싶었나보군." 초기 검술 훈련의 고통을 잘아 는 바알이 12세의 연약한 소녀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감탕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처음 검을 잡았을 때는 요령만 피웠었는데요." 멘디에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조용히 에레크트라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 퓨어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심각한 표정의 퓨어리스는 기실 조슈아의 검술 지도법을 보고있는 것이었다. 따악―. "그만!" 500번의 검격을 끝으로 겨우 휴식시간을 주는 조슈아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바알이 '첫 연습치고는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말을 던지려는 순간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손바닥이 아프지? 에레크트라!" 말과는 달리 걱정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에레크트라는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목검을 놓고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12세 소녀의 여린 손바닥은 여기 저기 물집이 터지고 또 터져 진물과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허리춤의 조그마한 약병에서 노란 약물을 뿌려 그녀의 왼손에 감아주었다. 그러자 매우 쓰라린 듯 에레크트라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졌다. "나의 검술을 배우려면 익숙해 저야 할 것이 있단다. 에레크트라야." 그녀가 나직이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애써 얼굴에서 고통의 흔적을 지우며 에레크트라가 고개를 쳐들어 배움의 의욕을 표시했다. "아무리 아파도 많은 상처를 입어도 검손잡이 상단을 잡은 오른 손으로 모든 감각을 그대로 느끼도록 해야해." "에? 무슨 말이야?" 그녀의 말에 오히려 바알이 황당하다는 듯 대꾸하자 조슈아가 손을 들어 그의 참견을 저지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픔은 잠시란다. 익숙해지면 아프지 않게 검격을 가 할 수 있게돼. 그러나 검을 휘두를 때 오른손으로 느끼는 모든 반동과 검의 흐름에 따른 저항의 감각은 직접 느껴가며 배워야해. 그래야만 나의 검술을 배울 기초가 닦여진단다." 조슈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왼손에 손수건을 단단히 묶고는 다시 검을 들어 쥐어 주었다. "기억해둬. 왼손으로는 힘, 오른손으로는 흐름의 조절이야. 왼손만으로 검을 휘두른다는 느낌이 들도록 훈련해야해. 그리고 그 반동은 오른손으로 모두 느껴! 요령 피우면 소용없는 훈련이야. 잊지마 이건 좀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훈련이란다. 상처는 계속 생길 것이지만 그래도 어느 수준에 이르기 전에는 오른손을 치료 해줄 수 없어. 그러면 감각이 흐트러지니까." 에레크트라는 피범벅이 된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따악―. 따악―. 그녀는 조슈아의 말 그대로 조금도 요령 피우지 않고 내려치는 목검의 반동을 고스란히 오른손으로 느끼며 신음소리도 내치 않고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녀는 바라보며 조슈아는 외외라는 눈빛으로 그녀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 정말 강해지고 싶었던 거구나.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는 결국 나중에 재능의 유무로 결정 나겠지만…….' 조슈아는 이를 악물고 목검을 휘두르는 에레크트라를 놔두고 일행이 앉아 있는 천막주위의 모양 좋은 바위로 걸어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바알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애한테 저런 훈련을 시켜도 되는 거야?"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슈아가 대답했다. "처음에만 힘든 거야. 고비만 넘기면 쉽게 방향을 찾아 갈 수 있어." 이번에는 퓨어리스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슈아! 그런데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야. 힘은 왼손, 조절은 오른손? 오른손잡이인 에레크트라가 왼손만의 힘으로 검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을까? 근육이 받쳐주지 않을 텐데?" "쓸 때 없는 근육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애라 더욱 효과가 있는 거야. 처음부터 나의 검술로 단련시킨 근육을 만들 수 있으니까. 이미 다른 것으로 단련된 근육으로는 최상급검술을 익힐 수 없지, 에레크트라에게는 내 최고의 검술을 전수 할 꺼야." 에레크트라의 의욕에 감복했는지 상당히 상기된 표정의 조슈아가 대답했다. 그런 그 녀를 보며 바알이 넌지시 물었다. "전부터 알고 싶었던 건데? 너의 검술은 어디의 검술이야? 그런 식으로 남의 검을 흘 리는 검술은 본적이 없었어. 그거 일부러 그렇게 하려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조슈아는 상념에서 깨어나 잠시 당황하는 얼굴로 3남녀의 호기심 어린 얼굴을 바라보다가 에레크트라 쪽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전에 말했잖아. 가전검술(家傳劍術)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검술은 아니지만 꽤 쓸만한 검술이야." '쓸만한?' 그녀의 말에 3명 모두가 피식 웃었다. 방금 자신의 입으로도 최고의 검술이라고 한데다 3명 모두 그녀의 엄청난 검술실력 을 목격하거나 직접 격은 바가 있는데, 그녀의 그런 말을 상당히 어이없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서인지 조슈아는 헛기침을 하며 협곡안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하며 황토 빛의 반사광으로 기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협곡은 그 안쪽에서 심하게 굴절되어 안쪽까지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이틀 밤 후 보름달이 뜨면 저 안으로 들어가야 될텐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협곡의 경치로 눈을 돌린 일행은 샤레셀을 살려낼 방법이라는 말에 당차게 따라 왔지만 막상 와서야 협곡 안에 마련된 결계의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안티오페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정확히 어떤 종류의 결계인지 알 수 없다고 한마당에 자신들이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부딫여 보는 것 뿐, 달리 방법은 없었다. 따악―. 따악―. 아까 와는 달리 이제는 조금씩 시원한 격타음을 만들어 가는 에레크트라의 검격성(劍擊聲)이 조용해진 협곡 안을 울려, 묘한 반동 음을 내며 울려 펴지는 가운데, 일행은 마음속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정체불명의 상대를 한없이 부풀리고 있었다. NEXT 제18화 검과 소녀 part 2 안티오페는 거의 백여 년만에 진심으로 긴장하고있었다. 지금 인간의 크기로 커진 그녀의 눈앞에는 분홍색 비단레이스로 장식된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침대 위에 마치 시체 같은 얼굴빛을 한 샤레셀이 곱게 누워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샤레셀의 호흡이 점점 약해지는 듯 하더니 이제는 귀를 기울이 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잦아들고 있어, 무심 여왕 안티오페로서도 식은땀이 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서늘한 오른손을 들어올려 샤레셀의 이마에 얹어보고는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영기의 회복 속도에 비해 마법의 잠에 소모되는 마력이 너무 많은 거야. 이대로 라면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고 생명을 잃게 되겠지.' 샤레셀의 이마에 얹은 안티오페의 새하얀 손이 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온 달빛 탓인지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초점 없는 시선으로 샤레셀의 얼굴을 바로 보던 안티오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투명한 두 장의 날개를 활짝 펴고 가볍게 날개 짓을 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일은 하면 안돼 지만, 당신이 눈앞에서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군. 역시 인간과 관계를 가지게 되면 이런 귀찮은 일이 꼭 일어난다니까." 투정인지 자조인지 모를 말투로 중얼거리던 안티오페의 날개에서 초록색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곧 어깨를 타고 내려와 샤레셀의 이마에 얹은 양손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슈우우―. 샤레셀에게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방안은 커튼 밖에서 들어오는 약한 달 빛 외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그어둠 속에서 마치 숲의 향기가 날 듯한 상쾌한 느낌의 초록빛의 빛무리는 더없이 아름다운 기류를 형성하며 샤레셀의 창백한 몸으로 쓰며들어 갔다. 그리고 안티오페는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셔레셀의 조그마한 몸을 가볍게 껴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을 구할 방법은 나에게 없어. 다만 나의 마법의 잠에 당신을 끌어들일 수밖 에……." 샤레셀을 옆에서 껴안은 안티오페의 눈은 졸음으로 인해 조금씩 감기고 있었다. "잘자. 귀여운 아가씨. 당신의 동료들이 당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내가 대신 마법의 잠을 자주도록 하지. 다음에 일어 날 때는 살아 있도록 해봐." 그 말을 끝으로 안티오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이 시간 이방에 들어온다면, 사이좋은 두 처녀가 서로를 껴안고 자고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기실 그녀는 엄청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샤레셀의 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깨어나는 것을 전재로 자신의 마법의 잠에 그녀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것은 샤레셀이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그녀 역시 깨어나지 못하고 언제 까지고 잠들어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무신경 요정 여왕이 무심(無心)이 지나쳐 자신의 안위조차 생각지 않는 것인지, 샤레셀에게 특별히 애정이 있어 이러는 것인지는 차차 지켜봐야 할이 이었다. 아무튼 극미의 나신을 한 겹의 얇은 담요에 감싸고, 요정여왕 안티오페는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품안의 샤레셀은 안색에 조금씩 혈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이대로 둘 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대로 신전에 모셔두고 경배해도 괜찮을 듯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며, 두 처녀(?)는 깊은 수면의 호흡을 일치시켜 갔다. 4 이제 드디어 해가 완전히 기울고 보름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조슈아 일행은 협곡의 황토 빛 토 벽이 달빛을 받으며 퍼르스름한 기운을 내뿜는 것을 보며 안티오페의 주의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낮에는 협곡 안에 어떤 이상한 조짐도 보이지 않아 정말로 안에 정말 결계가 있는 것인지 의심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보름달이 비추자 결계와 달빛이 작용을 하여 반사광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과연 결계가 존재했음을 확인하고 낮에 뛰어 들어 가지 않게 자제심을 준, 각자의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슈아는 유리병을 넣을 가죽주머니를 허리춤에 묶고 성검 말고스를 집어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에레크트라가 불안한 눈초리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양손에는 노란 약물이 잔뜩 베어 있는 손수건이 동여매어져 있었다. 오른손의 치료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3일동 안 어느 정도 훈련의 성과가 있는 듯 했다. 조슈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에레크트라의 시선을 의식하고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걱정마 에레크트라.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꺼야. 안티오페의 말로는 협곡 입구에서부터 영액이 있는 곳까지 걸어서 20여분 거리라고 하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돼." 무슨 방해 요소가 있을지는 전혀 계산에 넣지 않은 말이었지만, 조슈아의 말을 신의 계시 마냥 신봉하는 에레크트라는 열심히 고개를 끄떡이며 손수건으로 감싼 손을 들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할말이 없을 때 그녀가 잘하는 행동이었다. 조슈아는 빙긋 웃으며 에레크트라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 해주고는 그녀를 기다리는 일행에게 몸을 돌렸다. 달빛 탓인지 일행의 긴장된 얼굴이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웃을 수 있는 타이밍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헛기침을 한번하고는 안티오페에게 들은 주의 사항을 다시 읊기 시작했다. "일단 협곡에 들어가면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혼자 들어간다는 기분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동굴 안의 석관을 깨면 마법진은 저절로 사라진다고 하니 동료를 신경 쓰지 말고 누구든 손 닫는 대로 먼저 석관을 찾아 깨도록 하세요." 말을 마친 그녀에게 바알이 의미 불명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슈아는 이상한 분위 기에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당차게 소리쳤다. "자! 상대는 물리력이 없는 그저 보통의 환각마법진이에요. 빨리 끝내고 돌아가 샤레 셀을 깨워서 술이나 마시자구요." 피식―. 그녀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참느라 긴장감은 깨지고 말았다. 한달 여간 용병생활을 하며 익힌 사기상승용의 세리프 이었건만 도무지 이런 류의 대사와 분위기가 어울리 지 않는 미소녀 조슈아였다. 자신의 의도가 무참히 깨어지자 완전히 홍당무가 된 조슈아는 일행을 지나쳐 터벅터 벅 협곡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가까스로 웃음을 입밖으로 내보내는 불상사만은 막 은 일행은 아직도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초장부터 어설픈 대사 선택으로 사기를 잃은 조슈아와 그로 인해 긴장감을 잃고만 바 알, 멘디에타 그리고 퓨어리스. 그들의 앞에는 한창 달빛을 받아 마력이 중화되어 기 묘한 빛을 뿜어내는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 그들을 떠나보내는 에레크트라는 두 손을 모아 팔메라의 모든 신들에게 그들의 건 승을 빌고 있었다. 파르륵―. 결계와 외 공간이 육안으로 식별이 되지 않아 한발한발 앞으로 전진해 가던 조슈아 는 갑자기 얼굴에 닫는 공기의 온도가 달라 진 것을 느끼며 일순 기압의 차이인지 귀 가 멍멍해졌다.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는 순간 조슈아는 자지러지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없다!' 그랬다. 그녀의 뒤에는 방금까지 걸어온 협곡의 입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황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주변의 풍경도 변해 있어 그녀가 서있는 곳은 돌아 갈길 없는 깎아질 듯 한 절벽의 외길이었고 저 멀리에는 음침한 기운을 풍기는 고성(古城)이 자 리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당하는 일인지라 겁이 없는 조슈아도 마음을 가라 안치는데 한참을 소모해야했다. 조슈아는 말고스를 든손에 힘을 주고는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주의하며 한발 한발 앞 으로 나아갔다. '예상대로 공포감을 주는 환각마법진이구나. 이 안에서 다치면 정말 충격을 받는다던 데 그래도 발만 헛 딛지 않으면…….'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는 절벽 밑을 내려다보고 기겁을 하였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의 길 저 밑에는 파도가 부딫이며 일어나는 포말과 높은 절벽이 만들어 내는 묘한 음향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기이한 분위기와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음침한 색조와 음향이 혼자라는 감정과 더불어 그녀의 공포심을 자극하 였다. 그러나 역시 당찬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공포심을 가라 안치고는 자세를 낮 춰 조심스럽게 멀리 보이는 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휘이익―. 순간 몸을 날려 버릴 듯한 광풍이 휘몰아쳤다. "도…도대체 이 바람은……." 조슈아는 절벽 길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넙죽 엎드려 최대한 몸을 바닥에 붙였다. 곳 멈출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산이었다. '아무래도 성에 닿을 때까지 바람을 멈출 것 같지 않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슈아는 툴툴거리며 바닥에 가슴을 데고 엉덩이를 든, 결 코 우아하지 않은 자세로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몸을 들었다간 여지없이 바람에 쓸려갈 상황이어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그 저 앞으로 전진하였다. 파앗―. 그녀의 긴 금발을 하나로 묶고 있던 머리 끈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풀려 날아가 머 리칼이 미친 듯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풍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강타 해 대는 광풍은 곧이어 비바람으로 변해가서, 바람을 타고 마치 비수 같은 빗방울이 그녀의 온몸을 강타하였다. '가죽 갑옷을 입고 오기를 잘했구나!' 머리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호 할 수 있었지만, 등을 노출한 상태에서 이 비바람 을 고스란히 맞으며 성까지 기어간다면 아마도 그녀는 실신하고 말았으리라. 그리고 다행히 그녀의 바지는 전에 게헤나 산맥의 탄광촌에서 얻은 북구 특유의 해마 가죽바지로 무릎부분을 이중으로 대어서, 바닥을 기는 그녀의 무릎을 보호해 주고 있 었다. '다들 무사할까? 나와 바알과 멘디에타는 몰라도 퓨어리스는 소녀인데.' 자신도 소녀라는 것을 잊어버린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묵묵히 절벽 길을 기어가던 조슈아는 갑자기 허리춤에서 묘한 열기가 일어 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여 허리춤 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왼쪽 허리에 비스듬히 매달아 놓은 성검 말고스가 푸른빛의 광채를 뿜어내며 열기를 발산하는 것이 보였다. '말고스가?' 파악―. 순간 성검 말고스에서 눈을 지질 듯한 섬광이 뻗어 나오더니 곧 조슈아의 주위에 기 류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그녀를 날려 버릴 듯 휘몰아치던 광풍이 쫓겨나듯 밀려나며 갈길 읽은 바람이 무형 의 벽에 부딫여 묘한 음향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환상자체를 없애지는 못하는지 주위의 환경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역시 성검! 이런 효험도 있는 거구나.' 조슈아는 진정 감탄한 얼굴로 허리춤의 말고스를 톡톡치 고는 무형의 벽에 막힌 비바 람을 한번 주시하고 몸을 일으켜 천천히 고성을 향해 걸어갔다. 언제 다다르나 걱정되던 성문은 바람의 방해를 받지 않아 몇 분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처음 절벽 길에 들어서서 무턱대고 들어 온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던 조슈아는 말고 스의 힘을 믿고 힘차게 성의 철문을 밀어 열었다. 끼이익―. 커다란 성문은 마치 누군가 들어오기를 기다린 듯 쉽게 열렸다. 환상이라는 것이 믿 어지지 않을 정도의 질감과 촉감, 거기에 습기와 소음기를 머금은 공기까지, 그야 말 로 완벽한 환영(幻影)이었다. 성안에는 예상대로 고색 찬연한 고대 장식품과 조각들로 가득했는데 그 음침한 색조 와 더불어 멀리서 들려 오는 바람소리에 의해 뒤돌아 서면 당장 에라도 움직여 그녀 를 덮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달라도 어려서부터 팔메라 대륙 남반구 최고 최대의 궁성에서 자란 조슈아에게 이런 풍경은 상당히 익숙한 것이어서 별 거부감 없이 입구의 조각상들을 지나쳐 천장과 벽의 양 축을 십여 걸음 간격으로 바치고 있는 거대한 십여 개의 기둥 들이 늘어선 중앙 홀에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자 기둥에 장치된 기름 등에 불이 붙으며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으로 홀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운치(?)있는 조명은 장대한 고성의 건축양 식과 어울려 장엄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멋진데?" 자꾸만 움츠러들려는 자신을 추스르려는 듯, 사람도 없는데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조슈아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대한 기둥들에 반사되어 묘한 울림으로 돌아와 조슈아는 뒷골이 쭈뼛해졌지만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흔들리는 기름 등에 자신의 그림자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중앙 홀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중앙 홀의 끝에는 양면에 흉악한 모양을 한 수인상이 지키는 가운데에 깨끗한 대리석 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석관이 보였다. '저거구나!' 조슈아는 일이 너무 쉽게 풀려나가자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이제 저 석관을 부수면, 이 분위기만 잔뜩 잡는 환영은 없어질 테고 영액이 든 약병 을 가지고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슈우―. 그녀가 들뜬 마음에 하느작거리는 발걸음으로 석관에 다가가자 갑자기 한숨을 쉬는 듯한 여린 바람소리가 들리며 제일 안쪽기둥사이에 쳐진 커다란 커튼 안에서 황금빛 의 안광(眼光)이 나타났다. 조슈아가 기겁을 하며 돌아보니 커튼 안의 안광은 흉흉한 빛은 토해내며 마치 탐색하듯 그녀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조슈아가 말고스에 손을 가져가자 그녀를 꽤 뚫어 볼 듯 쳐다보던 안광이 사라지고 마치 지옥의 파수꾼의 그것 같은 음침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몸이 된 기분이 어떤가 창녀의 아들아!" 긴장감을 단번에 날려 버릴 듯한 뜻하진 않은 망발이었다. 이 순간 조슈아에게는 어떻게 저 음성이 자신의 본래 성별을 알아 맞추었는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무엄한 놈! 감히 뭐라고?" 조슈아가 눈앞의 현실을 잊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재차 영혼을 끓어 내는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틀리는가? 너의 어미는 창녀였고, 너의 아비는 왕이 되기 위해 일가 친척을 모두 살해한 피에 굶주린 승냥이였다. 기사출신의 왕비라고? 젊은 왕자를 유혹하기 위해 너의 어미가 어떤 짓을 하였을 것 같나? 이제부터 내 친히 네 핏줄의 더러움을 보여주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광이 빛나던 커튼에 마치 환상처럼 영상이 나타났는데, 조슈아는 곧 영상이 비추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영상은 화려한 금제 장식들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분홍빛의 비단으로 벽면을 장식한 침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방의 화려함에 비해 상당히 단아한 느낌의 상아빛 침대 위에는 일견하기에도 앓아 누운 지 오래 된 듯한 60대의노인이 상당히 추운지, 비단 담요를 목까지 끌어 당겨 핏기 없는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할아버님?" 조슈아는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순식간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직접본적은 없지만 '장미의 전원'궁전의 초상화로 수없이 보아온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상황도 잊고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감개무량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침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이 보였다. "어엇!" 그러자 그녀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놀랍게도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꿈에도 그리던 그녀의 어머니 소피아 왕비였던 것이다. "어머니!" 조슈아가 마치 다가가 껴안기라도 할 듯이 한 걸음 다가가자 영상 속의 아름다운 모친을 불렀다. 그러나 곧 그녀는 멈추어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표정으로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소피아 왕비는 이제 막 18∼19세 정도가 되어 보이는 모습으로 노란색의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한창 피어오를 나이인데다 조그마한 몸집에 비해 검으로 단련된 어깨와 허리선이 그녀의 자태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 주었다. 그러나 조슈아가 놀란 것은 모친의 아름다운 자태 때문이 아니었다. 방에 들어선 소피아 왕비의 오른손에는 섬칫할 정도로 잘 갈아져 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은색 침검(鍼劍)-거의 송곳 같은 굵기의 검으로, 베기보다는 찌르기를 위한 호신용 검이다-이 들려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은 조슈아가 감히 자신이 아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요사스럽고 속되었다. 조슈아가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소피아는 천천히 국왕에게 다가가 색기와 잔혹함이 베어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늙은 국왕의 입을 틀어막았다. "허억!" 조슈아가 헛 바람을 들이킴과 동시에 영상 속의 할아버지도 신음소리에 가까운 당혹 성을 내질렀으나 그녀의 손에 막혀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음소를 지어 보이던 소피아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왕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은 쓸 때 없는 인생을 너무 질질 끄네요. 당신과 나의 비밀은 영원히 내 사랑의 귀에 들어가선 안되죠. 내 사랑과 왕국의 번영을 위해 오늘 그만 떠나 주셔야겠어요." 푸욱―. 갑자기 국왕이 두 눈을 튀어나올 듯 부릅뜨더니 온몸을 심하게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소피아가 국왕의 왼쪽 귓구멍에 날카로운 침검을 그대로 박아 넣은 것이다. 그녀의 팔뚝길이 정도 되는 침검이 손잡이만 남기고 모두 늙은 국왕의 귓속으로 들어가 박히고 소피아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검손잡이를 잡고 조금씩 휘저었다. 이윽고 국왕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고 얼굴 근육이 사후경련을 일으키며 간혈적으로 떨리는 것을 보며 검을 빼낸 소피아는 준비해온 물수건으로 검을 닦아 소매 춤에 넣고,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귀속에 응고제를 뿌려 넣었다. 그녀가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가볍게 시아버지를 살해하고 뒤처리를 하는 동안 조용히 문이 열리며 조슈아의 아버지 바디메오가 들어왔다. 그는 조슈아가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보다 훨씬 생기 있고 강해 보였으나 그의 눈빛은 음흉하고 무언가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자 잔혹한 눈빛을 바꾸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의 그 아기사슴의 촉촉한 눈동자로 돌아온 소피아는 음흉한 미소를 짖고 서있는 남편을 바라보고는 색정이 흐르는 미소와 천진함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요소가 모두 긷든 형용불가의 음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품에 안기었고 둘은 곧 열정적인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런 그녀의 소매 춤에는 아직도 핏방울이 묻어 있는 침검이 삐죽 나와 있었다. 바디메오는 씨익 웃더니 그녀의 소매에서 침검을 꺼내어 검편을 가볍게 핥았고 그것을 바라보던 소피아도 묻어 따뜻한 시아버지의 핏방울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슈우우―. 영상은 거기에서 끝났다. 그러나 조슈아는 선체로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거…거짓이야! 어떻게 이런 말도 안돼는 환영을 보여 주는 거야? 네놈은 정체가 뭐야!" 조슈아가 검을 들고 발작적으로 소리치자 커튼 안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저것이 거짓이라고 믿고 싶은 게로군. 너의 어미는 16세에 왕실 근위대가 되기 위해 늙은 국왕에게 몸을 바치고, 그 아들 마저 유혹한 천하의 색녀, 창녀였다. 그리고 네 아비는 일찍 국왕이 되기 위해 병중인 아비를 살해하도록 시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씌워 힘있는 친지들을 모두 살해했지. 크크크……." 조슈아는 충격과 당혹 감에 빠져 머리가 터질 듯 하였다. '거…거짓이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여준 환영은 너무도 그럴 듯 했고, 자신의 혈통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진 그녀에게 이런 종류의 모략(謀略)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던지라 결국 그녀는 이성을 놓치고 말았다. 화르륵―. 갑자기 주위 풍경이 변하더니 거의 다가갔던 석관은 사라지고, 사방이 온통 검은 기류에 둘러싸였다. 그러나 그녀의 두눈은 눈앞의 커튼에 못 박혀 있었고 말고스를 든 손은 분노와 당혹 감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야앗!" 파앗―. 이윽고 커튼을 힘껏 재친 조슈아가 말고스를 휘두르며 뛰어들어갔다. 휘잉―. 일순 무언가 베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 조슈아는 그대로 끝도 모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분노로 타버린 정신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NEXT 제18화 검과 소녀 part 3 "이거 정말 짜증 나는 구만!" 바알이 투덜대었다. 조슈아가 무형의 벽을 넘어가는 순간 사리지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따라 들어간 바알은 갑자기 나타난 허리까지 차 오르는 늪에서 어기적거리며,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고 당장 비라도 올 듯한 어둑어둑한 하늘에 저 멀리 을씨년스러운 고성이 보였다. '저기에 있겠지?' 짜증스럽게 다리를 붙잡는 질퍽질퍽한 진흙을 헤치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던 바알은 갑자기 발을 디딜 곳을 놓쳐 늪에 얼굴을 박고 쓰러지고 말았다. "우엇!" 당황하여 허우적거리던 바알은 겨우 몸을 세워 뒤로 물러나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이…이런 갑자기 깊어지는 곳이 있는 건가?" 바알은 발로 바닥을 조심스럽게 훑으며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10여분을 주위를 돌아다니며 발로 확인해보자 과연 바닥에 일정한 크기의 길이 만들 어져 있었고, 나머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었다. "이거 정말 귀찮은 일이 되겠는데? 도무지 바닥이 보이지 않으니 일일이 바닥을 훑으며 지나가야 하잖아?" 바알은 식은땀을 훔쳐내며 중얼거리며 저 멀리 성을 바라보았다. 그냥 뛰어간다면 10분이 체 걸리지 않을 거리였건만, 보아하니 길은 직선으로 나있지가 않았다. "만약에 보이지도 않는 길에 미로이기까지 하다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바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바알은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풀러 고정 쇠를 확인하고 허리까지 차오는 늪에 검을 넣고 지팡이 대신 바닥을 훑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키가 큰 바알인지라 아무래도 자세 잡기가 힘들었지만 일일이 발끝으로 훑는 것보다 는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이 아니고 창을 가지고 오는 것인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바알은 연신 투덜거리며 길을 찾아 전진을 계속했다. 6 퓨어리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멈춰선 그녀의 앞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결벽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 백년을 썩힌 듯 쾨쾨한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는 보고 있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듯했다. 그래도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던 퓨어리스는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섞어 문드러진 쓰레기들 사이로 조그맣게 길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대충 보아도 산더미 같은 쓰레기 벌판의 길은 저 멀리 보이는 고성을 향해 직선으로 뚫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쓰레기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로 꼬불꼬불한 미로 같은 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쓰레기를 타넘으며 성을 향하자니, 그 역겨운 냄새와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더러움에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퓨어리스는 결국 직선 코스를 포기하고 망토를 끌러 얼굴에 감싸 냄새를 최대한 막고는 성으로 통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운 좁은 길을 걷기 시작했 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위안하듯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도 3명이나 있는데, 가다보면 누군가 결계를 부수겠지!" 최후의 순간에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리라는 것은 뻔했지만, 그녀로서는 저 더러운 쓰레기 밭을 건너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16세 소녀로써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7 언제나 처럼 신중한 멘디에타는 눈앞의 상황을 분석하느라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들판에 멀어서 확실히 구분되니 않지만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이 여기 저기 무더기로 널려 있었고 들판을 가로질러 십 여분 거리에는 고색 찬연한 거대한 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건 무슨 뜻일까?" 그가 서있는 땅은 눈앞의 황량한 모래밭과는 달리 빨간 벽돌을 곱게 깐 벽돌 길이었다. 그러나 그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그 길은 성과는 멀리 떨어져 왼편으로 보이는 언덕을 끼고 우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까운 길을 골라 모래밭으로 발을 옮기려던 멘디에타는 흠칫하며 멈추어섯다. 그가 디디려는 바로 앞의 모래땅에 웬 새하얀 물체가 삐죽 나온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멘디에타는 허리를 숙여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손…손가락인가?" 그랬다. 모래에 파묻힌 하얀 물체는 인간의 손 부위 뼈였다. 조금만 파헤치면 바로 연결된 다른 부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는 감히 손을 내밀지 못하였다. 그 손뼈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여성용으로 보이는 초록색 에메랄드가 박힌 고급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이 순간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 모래밭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의 머리는 온통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여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널려 있는 뼈들로 미루어 모래밭에는 무언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벽돌 길로 걸어가자니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연결된 이 길은 결국 성으로 향해 있다고 해도 어마어마하게 돌아가는 길임에 틀림이 없었다. "내가 마법사라면?" 그는 오른손으로 수염도 없는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10여분을 생각에 잠겨 있던 멘디에타는 턱을 만지던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탁! 소리가 나게 치더니 품에서 기름 종이에 쌓인 조그마한 꾸러미를 꺼내어 펼쳤다. 그 안에는 의외로 큼직한 햄 조각을 넣은 롤빵이 들어 있었다. "아깝지만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멘디에타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바탕은 때때로 남몰래 품에 숨겨두고 먹는 간식이었단 말인가? 라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다행히 이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멘디에타는 롤빵에서 햄을 꺼내어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모래밭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리고는 모래밭에 떨어져 이제는 먹을 수 없게 된 먹음직한 햄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10분 여 가 흐른 후, 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멘디에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 모래밭에는 무언가 있군. 머리 좋은 마법사라면 무언가 던져 넣어 시험해 볼 것을 예상했겠지. 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오히려 그것이 모래밭을 지나 성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속임수였을 거야.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저기를 들어가기를 바란다는 거지." 결국 자신의 잣대로 결론을 내리고 만 멘디에타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툴툴거리며 올해 안에 성에 닿을지나 의심스러운 벽돌 길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먹기 위해 아껴두려는 듯 햄이 빠져 쭈글쭈글해진 롤빵을 다시 기름 종이에 싸서 품에 소중히 갈무리하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도 어디에선가 들은 것 같은 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걷다보면 누군가 먼저 결계를 깨주겠지." 언제나 냉철한 그로서도 모두가 비슷한 상황은 연출하고 있으리라는 예상을 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아무튼 멘디에타는 1시간 안에 성에 닫지 못하면, 품속의 롤빵을 꺼내 먹어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모처럼의 이국적인 분위기의 산책로에서 휘파람까지 불며 유유자적하게 걷기 시작했다. 아까운 햄 조각은 햇볕에 달구어진 모래밭에서 노릇노릇 하게 익어 먹음직스러운 벌건 빛깔을 내고 있었다. 8 휘오오오―. 북쪽에서 시작된 바람은 협곡 안을 훑으며 삭풍이 되어 돌아 나왔다. 에레크트라는 두꺼운 면 웃옷에 양가죽으로 만든 외투까지 걸치고도 추위에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막에 들어가지 않고 불안감으로 커진 눈동자로 협곡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행이 협곡 안으로 들어 간지 벌써 3시간 여, 곧 있으면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할 터였지만 조슈아는 물론 그 누구도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요란한 굉음과 붉은 빛 무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언니가 20분이면 나온다고 했는데……." 에레크트라는 불안감으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콰과과―. 그런 와중에도 협곡 안은 더욱더 살풍경 한 모양 세를 보여주며 에레크트라를 절망의 나락에 빠트리고 있었다. 그녀가 얼핏 듣기에도 태양이 떠오르면 협곡 안의 결계는 더욱더 강해진다고 하였었는데, 20분이면 나온다던 조슈아는 새벽녘이 되도록 나오지 않고, 달빛이 약해 질수록 협곡 안에서는 더욱더 강한 바람이 부는 것이었다 에레크트라는 손수건으로 감은 양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무언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협곡 안의 겁나는 풍경을 주시하더니 곧 결심한 듯 입술을 다부지게 깨물고는 연습용 목검을 들고 협곡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읍……." 약을 바른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감싸고 있었지만, 다시 검을 잡자 상처가 쓰라린지 얼굴을 찌푸린 에레크트라는 목검의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단 3일 여 만에 반들반들해진 목검의 손잡이에는 빨간 핏자국이 여기저기 스며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열심히 닦았건만, 나무 결 사이로 스며든 핏물만큼은 어쩔 수가 없어, 목검손잡이는 마치 붉은 물감으로 장식을 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지난 몇 일간 전혀 요령부리지 않고, 아니 지나치게 열심히 검술훈련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에레크트라가 타고난 성격이 강해서 그렇게 열심히 수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픔을 견뎌가며 사력을 다해 검술 지도를 따라가자, 사랑하는 언니이자 스승인 조슈아가 한번도 보여준 적 없던 특별한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는 것이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무예를 가진 조슈아 이지만, 정식으로 제자를 두고 가르쳐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즐거운 감정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었지만, 에레크트라 로서는 사랑하는 언니에게 계속 그런 시선을 받을 수만 있다면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2세 소녀 에레크트라는 양손이 피범벅이 되도록 검을 휘둘러 댄 것이고, 조슈아로서는 에레크트라가 이렇게 까지 열심히 수련하리라 예상하지 못해 결국 그녀의 손의 상처는 조슈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아픔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조슈아는 그녀에게 다음부터 본격적인 검술을 가르켜준다는 약조를 하며 너무 무리한 기초 연습은 삼가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에레크트라는 아픔도 잊고 잠시 행복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아무튼 목검을 잡고 상대도 없는데 유일하게 배운 내려치기 자세를 취한 에레크트라는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당차게 협곡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휘오오오―. 그녀가 어느정도 다가가자, 마치 협곡을 둘러싸고 바람의 결계라도 처져 있는 듯,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몸을 밀어냈다. 그러나 다부지게 입술을 깨 물은 에레크트라는 바람을 내려치기라도 할 듯, 목검을 머리 뒤까지 젖힌 그대로 밀고 들어갔 다. 파앗―! "어어?" 한발 한발 겨우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는 몸을 날려 버릴 듯 밀려오던 바람이 갑자기 사라지자, 앞으로 쏠려 넘어질 뻔하다가 목검으로 땅을 찍어 일직선으로 넘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목검을 지팡이 삼아 무릎을 꿇고 앉은 에레크트라는 한숨을 돌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본 에레크트라는 희한한 풍경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땅은 훌륭히 포장된 대리석 길이었는데, 가뜩이나 새하얀 대리석 길은 한낮의 태양 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정면으로 10여분 거리에는 역시 온통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성이 있었는데 그녀와 성 사이의 들판은 마치 잔디 같은 바늘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바늘들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마치 은빛 갑옷을 입은 수백만의 군사들이 성을 둘러싸 지키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에레크트라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한 것이지만 대리석 길은 성을 향해있지 않고 동쪽의 지평선너머 까마득한 곳까지 펼쳐져 있었다. 당황하여 정신이 없는 그녀가 보기에도 이 길로 성까지 간다는 것은 요원하기만 한일이었다. "언니는 저 안에 있는 걸까?" 조슈아가 그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한 것은 분명히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는 에레크트라였다. 한시라도 빨리 조슈아의 곁으로 가야만 했다. 자신이 구해주지는 못할 망정, 조슈아에게 불상사가 생겼다면 적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레크트라의 삶에 있어 그녀의 비중은 조슈아로써는 상상도 하지 못한 정도의 것이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해도 에레크트라가 가진 정도의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감정은 영원히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에레크트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새우고 보기만 해도 질릴 듯한 바늘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망설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언니 기다려요!" 에레크트라는 눈앞에 마치 조슈아가 있는 것 처럼 낮게 속삭이고는 주저 않고 바늘 밭에 오른발을 디디었다. 푸욱―. "아악!" 손가락 길이 정도의 예리한 바늘은 에레크트라의 얇은 신발 밑창을 뚫고 그녀의 여린 발바닥을 무참히 찔러 들어왔다. 수십 개의 바늘이 뼈 속까지 찌르는 아픔에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도 에레크트라는 다시 왼발을 바늘 밭에 들여놓았다. 잠시 왼발을 든 사이에 오른발에 체중이 실려 바늘이 더욱 찔러 들어오며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또다시 왼발을 꽤 뚫리는 고통에 에레크트라는 하마터면 바늘 밭 위로 엎어질 뻔하였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겨우 두 다리로 선 에레크트라는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참으며 두발을 내려다보았다. 신발밑 부분뿐 아니고 신발 등까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아마도 바늘이 발등까지 뚫고 올라온 듯 했다. "흑흑……." 마침내 에레크트라는 참자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울음 속에서도 다시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쭈우욱―. 발에 박힌 수십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뽑히며 오히려 더욱 심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에레크트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선명한 피빛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지옥의 10여분이 지나가고 에레크트라는 겨우 성문 앞의 대리석 길에 다다라 쓰러지듯 몸을 날렸다. "헉헉!" 이제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고통을 참는데 지친 그녀는 바닥에 엎어져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그녀는 목검을 지팡이 삼아 이제는 핏물이 가득 고인 가죽 신발을 질질 끌며 육중한 성문을 몸으로 밀었다. NEXT 제18화 검과 소녀 part 4 끼이익―. 어른 팔뚝 두께의 강철 성문이 거북한 쇳소리는 내며 열렸다. 에레크트라는 발의 아픔도 잊고 겁먹은 얼굴로 성안을 들여다보았다. 다행이 성문과 성은 일률 구조로 바로 현관을 거쳐 중앙 홀로 연결되어 있어, 무엇보다 더 걷는 것이 괴로운 그녀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탁―. 에레크트라는 목검을 지팡이 삼아, 감각도 없는 두 발을 끌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쾅―. "까악……." 갑자기 그녀의 등뒤에 성문이 큰소리를 내며 닻이자. 에레크트라가 비명을 질렀다. 어린 그녀에게는 아픔보다 두려움이 더 고통스러웠다. 화르륵―. 그사이 성안 홀의 양 축을 받인 수 십개의 기둥들에서 노란 불꽃이 올라 왔다. 공포에 질린 그녀가 조금씩 마음을 가라 안치고 바라보니 기둥의 중앙 부분에 조그마한 구멍이 파여져 있고 그 안에는 은칠을 해둔 반사막과 가죽 심지가 있었는데 아마도 기름으로 태우는 듯, 작지만 화력 좋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에레크타라는 지팡이 대신 쓰던 목검을 들어올려 조슈아에게 유일하게 배운 목뒤까지 치켜든 자세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당장에 두 동강을 낼 기세였지만 두 무릎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현관을 지나고 기둥이 늘어선 홀에 들어선 에레크트라는 양 벽에 장식된 갖가지 괴물 상을 보고 기겁을 하였지만 자신의 목검을 믿고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자신의 실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철없는 12세 소녀는 조슈아의 칭찬 몇 번에 자신이 이미 괴물 몇은 상대 할 수 있으리라 믿는 듯 했다. 우우웅―.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지 석상과 기둥사이에서 묘한 울림이 들려왔다. 에레크트라는 이를 악물고 양옆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대리석 석관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녀도 저것을 부수면 이 환상이 없어지고, 조슈아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검을 치켜들고 식은땀을 흘리며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어둑어둑한 기둥들을 지나치던 에레크트라는 3분 여를 걸어 겨우 마지막 기둥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실제로는 3분 여였다지만 그녀에게는 마치 억겁의 시간인 듯 느껴졌으리라. "하아…." 석관으로 통하는 4단의 계단 앞에 다다른 에레크트라는 한숨을 내쉬며 석관을 부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에레크트라는 자신의 오른편에서 옆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기겁을 하며 왼편으로 물러섰다. "허억―." 그녀의 시선의 끝에는 마지막 기둥사이에 쳐진 분홍빛 커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문제의 커튼 안에는 빨간빛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에레크트라는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꾹꾹 눌어 참으며 검을 치켜들고 어제의 연습때 조슈아가 던진 말을 떠올리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에레케트라야 지금의 일격이면 단련된 전사라도 쓰러트릴 수 있어. 어깨가 흔들리지 않게 좀더 수련 해봐.' 물론 그것은 상대가 가만히 서서 그녀의 검격을 맞아 줄 때의 이야기였다. 조슈아는 아직 검식은 가르쳐 주지 않았고, 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도록 휘두르는 훈련만 시킨 것이었지만, 태어나 칭찬이라고는 받아 본적이 없는 에레크트라에게는 더 이상의 격려의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튼 검을 치켜들고 일격에 부숴 버릴 듯 흉흉한(?) 기세로 커튼 안을 노려보는 그녀에게 질린 것인지, 아니면 가소로운 것인지, 붉은 안광은 잠시 눈을 좁혀 뜨며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듯 쓸어 보았다. 그러나 용기 백배한 에레크트라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검을 들고 유일하게 배운 상단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감히 창녀의 딸이 이 신성한 성지에 발을 들여놓다니……." 갑자기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비웃는 투도 아닌, 지극히 절제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별로 큰 목소리도 아니고 마치 속삭이는 듯한 한마디 였지만, 에레크트라에게는 마치 머리 속에서 괴종이 울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이상, 다시는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이라고 믿었던 것을 이런 곳에서 듣게 된 것이다. 갑자기 전의를 불태우던 에레크트라의 두 눈에서 기백이 빠져나가고 두 무릎은 눈에 띄게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놓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 졌다. "네 어미는 아직도 몸을 팔고 있는데, 너는 네 나라를 멸망시킨 인간의 후손의 품에 안겨 위안을 받으려는 것이냐? 네 어미보다 더 더러운 것." "내…내 나라를 멸망시켜요? 누가요?" 에레크트라는 검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웃는 듯한 어투로 안광이 대답했다. "후후. 너를 거둔 놈이 그놈 외에 또 있느냐? 그놈이 진정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이냐?" 에레크트라는 그의 말에 언 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자신 없게 입을 열었다. "설마, 조슈아 언니는 아카바의 왕족인 거예요?" 아무리 어리지만 페드라 인으로써 에레크트라에게도 아카바의 에브라임 왕조에 대한 원한은 뼈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라고 우겨도 그녀도 전혀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카바 출신이며 대단히 유서 깊은 집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왕족일지도 모른다고 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히 묻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고 있었던 것인데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조슈아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었다. 정체 불명의 목소리가 거짓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신상까지 단숨에 알아 맞추지 않았는가? 목소리는 계속 그녀의 마음의 틈을 파고들었다. "네 아비는 네 어미를 가지고 놀다가 버리고, 너는 더러운 배설물처럼 이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자란 너는 역시 어미처럼 기생하지 않고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적의 품에서 깨끗한 척 하는 것이냐? 후후. 너와 네 어미라는 계집은 하나도 다르지 않아. 고향에서 도망쳐 나오면 너의 더러운 피가 희석 된 다더냐? 크크크." 에레크트라의 얼굴에서 핏기 가 사라졌다. 어려서부터 온갖 조롱과 고통을 받아 왔지만 이렇게 바닥부터 무너지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조롱과 멸시에서 12세의 어린 그녀가 피할 곳이 아무대도 없었다. "흑흑…." 결국 자신을 방어할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무너져 갔다. 그런 그녀를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목소리는 잔 혹의 피치를 올렸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어라 계집아! 너는 너를 거둔 녀석과 그 주변의 놈들에게서 빛을 보았겠지? 다시 예전으로 돌아 가사 살아갈 수 있겠느냐? 평생 더러움을 가리고, 너의 더러움을 다 아는 빛과 살아 갈 수 있겠나? 그럴 만큼 뻔뻔하고 약한, 단지 더러운 배설물 인 것인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그녀의 주위 풍경이 조금씩 변해갔다. 멋진 성의 모습은 검은 기류에 지워지듯 조금씩 사라지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수의 공간으로 채워져 가며, 그녀의 영혼의 고통을 어둠 속으로 묻으려는 듯 모근 소리와 빛이 차단되어 갔다. 그러자 아까 와는 다른 조금은 어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했다 소녀여. 이제 영원히 너의 더러움을 조롱할 존재는 없을 것이다. 영원의 어둠 속에서 편이 쉬려……." "당신 말은 다 맞아요." 갑자기 그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에레크트라가 고개를 들며 낮게 말했다. 고개를 든 그녀는 극심한 영혼의 고통으로 더 이상 어린 소녀의 눈빛을 하고 있지 않았다. 눈물이 흘러 넘쳐 얼굴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결의 같은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치켜들며 아직도 울음 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러나 당차게 소리쳤다. "내가 죽을 줄 알아? 당신 말은 다 맞아, 나는 쓰레기고 더러워. 그러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말해줄까? 이제부터 죽을힘을 다해서 최고의 여자가 될 꺼야. 내가 누구인지 잊을 정도로 최고의 여자가 될 거라고." 의외였던 것일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는 붉은 안광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나는 최고의 여자가 되어 언젠가는 깨끗하고 강한 남자와 결혼을 할거야. 결혼을 할거라고. 그러면 언니도 나를 인정해 주겠지?" 사생아이며 창녀의 딸인 그녀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 말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다짐하듯 소리쳤다. "그래서 자식을 많이 나을 꺼야. 아들은 아빠를 닮은 기사로 키울 거고, 딸은……." 에레크트라는 다시 울먹였다. 그녀가 딸을 어찌 키워야 하는지 어찌 감이나 잡을 수 있겠는가? "너와 네 남편에게 기쁨을 주며 깨끗하고 아름답게 자랄 것이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잔잔한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에레크트라는 눈물로 가득한 두 눈을 깜박이며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으로 커튼 안을 주시하였다. 도저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앞의 붉은 안광이 한 말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따뜻한 목소리에 듣고 싶었던 그대로의 답이었다. "어……. 저……." 이 예상 못한 상황에 에레크트라가 더듬거리는 동안, 주위를 덮던 검은 기류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러나 에레크트라는 그런 것은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재차 따뜻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의지는 잘 알았다 소녀여! 자 이제 네 소원을 이루려무나." 그 말을 끝으로 안광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안광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에레크트라가 급히 소리쳤다. "어…언니는 어디 있어요?" 그러자 완전히 안광이 완전히 사라진 커튼 안 저 멀리에서 먼 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들어온 목적을 잊었느냐? 그대로 행하거라." 그제야 에레크트라는 고개를 돌려 석관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성의 모습은 이제 그전처럼 을씨년스럽지는 않았다. 에레크트라는 소리나게 침을 한번 삼키고는 목검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 석관 앞에 서서 검을 치켜들었다. 석관에는 그녀로써는 처음 보는 문자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는데 기실 모국어로 써있다 해도 그녀가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글을 모르는 것이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그녀는 목뒤까지 넘긴 목검을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쳤다. 따악―! 힘껏 내리쳤건만 석관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다만 양손에서 상처가 터져 다시 피가 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에레크트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양손에 감은 손수건을 풀어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속에는 어제 목검으로 아름드리 나무에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 을 만들어 내자 조슈아가 감탄하며 한말이 생각났다. '생각 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구나. 지금의 감각을 잊지마, 손을 다쳐도 계속 검을 휘두르게 한 이유는 어쩌다 이런 식으로 터지는 타격의 감각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야. 계속 지금같이 요령 불이지 않고 훈련하면 성과가 있을 거야.' 에레크트라는 호흡을 고르며 여기저기 흠집이 생긴 목검을 천천히 들어 올려 목뒤까지 넘기고 허리를 폈다. 더 이상의 방해는 없고 주위의 이미지는 그녀에게 더 이상 공포를 주지 않는다. 에레크트라의 마음은 이제 잔잔한 호수가 되었다. "하압!" 파악―. 그녀의 기합과 함께 수 천번 단련된 유일한 검격 동작인 상단 공격이 내리 꽂히며 검이 부러져 나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리석 석관의 중앙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 의 흠이 생기며 석관 윗 부분 전체가 쩌억 갈라졌다. "우욱……." 에레크트라는 양손을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양손에서는 쉴새 없이 붉은 피가 베어 나왔다. 슈우웃―.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의 눈에 갈라진 석관의 틈에서 황금빛이 세어 나오는 것이 보이며 주위의 풍경이 급격히 변해 가는 것이 보였다. "어…언니!" 마치 그림에 물이라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주위의 영상이 사라지고, 그녀의 눈에는 초록색의 야광석이 박혀 밝게 빛나는 동굴 벽과 주위에서 기괴한 자세로 허우적거리다 앞으로 넘어지는 바알, 갑자기 변한 환경에 놀라 두리번거리는 멘디에타와 퓨어리스 그리고 구석에 기절한 듯 쓰러진 조슈아의 모습이 들어 왔다. 에레크트라는 상처도 잊고 쓰러진 조슈아 에게 급히 달려갔다. 그녀가 가서 보니 조슈아는 창백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을 뿐 부상을 입은 흔적은 없었다. 그때 나머지 3인이 기가 막히다 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에레크트라! 설마 네가 석관을 부순 거니?" 바알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그녀의 손을 보며 감탄한 듯 말했다. "저 손과 부러진 목검을 보세요. 에레크트라가 해낸 겁니다." "그보다 오빠 빨리 석관을……." 에레크트라가 조슈아의 머리에 무릎베개를 대주며 말하자 바알과 멘디에타가 머리를 긁적이며 석관에 다가가 갔다. 석관은 이미 깨어져 조금 힘을 쓰니 상판의 절반을 쉽게 밀어 낼 수 있었다. "도대체 제가 이런걸 어떻게 부순 거야?" 바알이 질렸다는 투로 말하자 멘디에타가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석관 안에는 예상대로 황금빛의 영액이 담긴 조그마한 유리병이 비단 고정 대에 끼어 있었다. 바알은 그것을 꺼내어 준비해온 가죽 주머니에 넣어 품에 소중히 갈무리하였다. 돌아와 보니 조슈아는 천천히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황 판단이 안돼는 지 두 눈을 깜박이며 동굴 천장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몸을 일으켜 일행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결계를 부순 거야? 바알?" 그러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바알이 대답했다. "결계를 부순 것은 에레크트라야. 그리고 영액은 챙겼고, 그런데 바로 얼마 전 까지 있었는데 안에서 뭘 봤는지 기억이 안 나는군."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군요." "응? 나도 그러네?" 그의 말에 멘디에타와 퓨어리스도 무언가 도둑 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는 기억해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던 에레크트라가 조슈아의 경악에 찬 시선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속삭였다. 조슈아는 일행이 결계 안에서 본 것을 깡그리 잊었다는 것 보다 에레크트라가 결계를 깼다는데 충격을 받아 할말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할말을 찾지 못한 조슈아는 결국 에레크트라를 품에 안아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 했고 에레크트라는 눈을 감고 그녀의 품에 안겼다. 나머지는 일행은 여전히 상황을 정리하기 못해 기억을 더듬는 가운데 에레크트라는 일생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NEXT 제19화 요정의 노래 part 1 기억조차 남기지 못한 영양가 없는 여행을 끝내고 조슈아 일행은 마을로 돌아 올수 있었다. 그러나 일행이 돌아 왔을 때 마치 친자매 처럼 샤레셀을 안고 자고 있는 요정여왕 안티오페가 그들을 실소 캐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리 없는 그들은 이 느긋한 요정여왕이 그저 졸려서 자고 있다고 밖에 생각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아 일행은 포기하고 먼저 샤레셀을 깨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조슈아가 샤레셀의 살짝 벌어진 입술사이로 황금빛 영액을 흘려 넣자 영액은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마치 녹아 없어지듯 그녀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윽고 샤레셀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굳었던 몸도 조금씩 풀어지며 숨소리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으응……." 비록 기지개를 켜는 소리였지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샤레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릴 시간도 주지 않고 조슈아가 샤레셀의 품에 뛰어 들었다. "어어?" 잠에서 완전히 깨기도 전에 누군가 자신을 덮치자(?) 놀란 샤레셀이 당황하여 조슈아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워낙 완강히 껴안고 있는지라 결국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다. "조슈아?" "흐흑, 샤레셀." 조슈아는 정말 아이처럼 울로 있었고 그 옆에서 먼저 안을 기회를 놓친 에레크트라가 훌쩍이고 있었다. "이봐요. 신녀 님 이제 괜찮은 거요?" 바알이 이제 거의 초상집 분위기를 연출해가며 목놓아 울고있는 두 소녀를 곤혹스럽게 바라 보며 물었다. 그러자 영문도 모르고 조슈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샤레셀이 고갤ㄹ 들어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이제 정리가 되는군요. 저는 마법의 잠을 자고 있었던 거죠?"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 눈물을 훔치며 조슈아가 그녀의 품에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래!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그대로 죽어 버리는 줄 알았구." "그래요 언니,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옆에서 이제나 저제나 그녀를 안아볼까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레크트라가 울먹이며 말하자 샤래셀은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비범벅이 되어 천으로 감싼 그녀의 손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 "어머.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야? 손을 다친 거니?" 샤레셀이 그녀의 양손을 잡아끌고 천을 벗겨 내자 여기저기 물집이 터진 자리에 살가죽이 벗겨져 핏물이 세어 나오는 상처자욱이 보였다. 특히 오른손바닥 중앙에 상처는 파열되어 근육안쪽이 들여다 보일 정도여서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아마도 지독히 아프겠지만 에레크트라는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슈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거야?" 당사자에게 묻지 않고 엉뚱하게 조슈아에게 묻는 것은 그녀가 에레크트라의 스승이자 후견이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녀의 추궁에 조슈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에레크트라가 손을 감싸쥐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제가 검술 훈련을 하다가 실수해서……." "사실은 당신의 잠을 깨우기 위해 스코올의 영액을 구하기 위해 '스코올의 성'에 가서 석관을 부수다가 생긴 상처이지." 갑자기 에레크트라의 말을 자르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여 왔다. "안티오페." 모두가 돌아보는 가운데 샤레셀의 옆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던 요정여왕 안티오페가 방금 일어났을 텐데도 여전히 깨끗하고 말짱한 얼굴로 에레크트라의 손을 쳐다 보고 있었다. "용케도 목검 따위로 석관을 부수었네? 장정 여럿이 쇠망치로 내리쳐도 흠집을 내기도 힘든 것인데, 무언가 스코올의 마음에 들 일이라도 한거야?"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이 맞추어 네는 그녀를 보고 에레크트라는 이 여자의 정체가 마녀이거나 신과 친척쯤 되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들었다. "스코올의 성? 이 근처에 그것이 있나요? 세상에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줄이나 아는 거야? 아카바에도 그런 곳이 3군대 있지만 아무도 들어가지 않아.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그런델 들어 간거야? 놔두었으면 언젠가는 깨어 날텐데." 질렸다는 투로 쫑알대던 샤레셀은 에레크트라의 손을 잡아끌며 나직이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에레크트라의 손을 감싸쥔 그녀의 손안에서 푸른빛이 방출되는 것이 보였다. "자…잠깐 샤레셀 지금 회복 마법 같은 걸 써도 되는 거야?" 이제 막 마법의 잠에서 회복된 그녀가 회복 마법을 쓰는 것을 보고 조슈아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러자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있던 샤레셀이 조용히 대답했다. "마법에 잠은 영력이나 마력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는 깨어지지 않아. 그리고 스코올의 영액 정도라면 보통사람 천명 분의 영력이 들어 있어. 나는 지금 영력을 포식해서 유령이 다 보일 지경이라구." 그녀의 말에 조금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바알을 보며 멘디에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완전히 나으신 거군요. 그런데 안티오페 님은 왜 옆에서 주무시고 계셨단 겁니까?" 그러자 무언가 생각이 머릴 스치고 지니 갔는지 샤레셀이 흠칫하며 안티오페를 돌아 보았다. 그러자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린 안티오페가 손을 들어오리며 그녀가 하려는 말을 져지 했다. 할수 없이 샤레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녀도 이 옆의 무심 여왕이 생명을 걸고 (그런 것이 있다면…) 자신의 생명을 구했음을 짐작한 것이었다. "날씨가 추워져서 신녀를 안고 잔거야. 의외로 따뜻하더군." 요정으로써는 별로 싱빙성이 없는 변명을 늘어 놓으며 안티오페가 몸을일으켰다. 그 사이 에레크트라의 손바닥의 상처에서는 새 살이 돋고 고통은 씻은 듣이 가시고 있었다. "자! 되었어 에레크트라. 이제 조심해서 수련 하도록 해. 그리고 고마워!" 쪼옥―. 샤레셀이 에레크트라의 왼쪽 볼에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하자 에레크트라는 자라목이 되어 얼굴을 붉혔다. 이상한 감정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그런 것이었다. 모두의 칭찬을 받은 데다 존경해 마지않는 상급 신녀의 키스를 받은 것이다. 칭찬이라고는 받아 본적이 없는 어린 그녀는 앞으로 자주 이런 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위험한 생각에 젖어 들었다. 1 다행히 손의 상처를 제외하면 에레크트라가 스코올의 성에서 입은 환각에 의한 상처는 어린 그녀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없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을에 들어 선지 일 주일만에 조슈아 일행은 마을을 뜨기로 결심하였다. 마을의 은인이라지 만 사정도 좋지 않은데 무위도식하는 조슈아 일행이 달갑지 않았는지 떠난다고 하니 과도한 환송을 하는 그들을 뒤로하고 조슈아 일행은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자펠 마을을 떠났다. 자펠 마을을 떠나 북으로 향하는 가도에 들어선 조슈아는 북구의 대국 시돈이 얼마나 황량한 나랄 인지 절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국 아카바의 경우, 론다 강 유역의 대초원을 제외하면 이렇게 까지 황량한 허허 벌판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시돈 이라는 나라는 국경을 넘은 지 한달 여가 지나도록 도시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마을도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었던 것이다. 아무리 도시가 모두 동부해안에 모여 있다지만 이것은 지나치다고 느끼는 그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부에 도시가 없기 때문에 퓨어리스의 고향 칼라 등 국경지대를 제외하면 기르가스의 공격이 그리 걱정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용병 단을 서부를 통하여 알본으로 진격시키려 한 것은 비록 실패했지만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휘이이―. 초저녁이지만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추위를 대비해 마을에서 따뜻한 양털조끼를 얻어 온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었다. 마을을 떠난 이래 날씨는 더욱 추워져 이제는 한낮을 제외하면 입김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입에서 하얀 수증기가 나오는 이 희한한 현상을 처음으로 겪어 보는 조슈아, 샤레 셀, 에레크트라 이 세 명의 소녀들은 일부러 입김을 만들어 보며 황량한 여행길의 지 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지루한 행군에 조금은 지쳤을 법한데 마상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 조슈아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에 앉아 표정 없는 얼굴로 아무 것도 없는 지평선 끝을 주시하고 있는 안티오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본래의 크기로 작아져 있는 그녀는 이 추운 날씨에 하루종일 맨몸으로 앉아있으면 서도 전혀 추운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안티오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당신은 추위를 전혀 안타는 것 같은데 왜 북쪽의 숲을 떠나 온 거죠?" 그녀의 질문에 조용히 말을 몰던 일행모두가 궁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이를 만들기가 힘들기 때문이야." "흐흠……." 그녀의 말에 의외로 순진한 멘디에타가 얼굴을 붉히며 더욱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할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샤레셀과 한말을 타 그녀의 허리를 안고 피곤할 얼굴로 앉아있던 에레크트라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안티오페 아줌마가 그 많은 애들을 혼자 다 낳은 거예요? 언니들이 여자가 엉덩이가 작으면 애 낳을 때 고생한다고 했는데." 에레크트라가 안티오페의 늘씬한 몸매를 훑어보며 묻자 샤레셀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티오페는 요정이잖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요정은 풀이나 나무, 물 등의 정기(精氣)에 신기(神氣)를 불어넣으면 태어나는 거야." "허어, 그럼 이 요정, 아니 요정 님을 낳은 분도 존재한다는 겁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바알이 새삼스럽게 안티오페의 나신을 조심스럽게 감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샤레셀은 아미를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정에 대한 기록은 읽어 봤지만 요정 여왕에 대한 기록은 없어서 모르겠네요. 그냥 요정은 오래된 깊은 숲 속 같은데서 저절로 생기는 줄 알고 있었는 데……." 당사자를 앞에 놓고 잘도 떠들어대는 바알과 샤레셀이었지만, 안티오페는 여전히 감정적 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 싫던지, 관심이 없거나 둘 중에 하나 이리라. 그녀가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머쓱해진 일행은 규칙적인 말발굽소리를 벗삼아 다시 지루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하루종일을 말 위에서 시달린 조슈아 일행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행군을 멈추고 야영을 위해 간이 천막을 쳤다. 두 명의 사내들은 모닷불 주위에서 가죽모포를 덥고 자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조슈아를 비롯한 4명의 연약한(?) 소녀들이야 어디 이 추운 들판에서 그냥 잘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날씨가 점점 추워지자 튼튼한 사내들이라고 예전처럼 그냥 자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걸어 다니는 사전답게 지혜를 짜내었다. 바알과 함께 야전삽으로 무릎까지 땅을 파더니 그 안에 잡목을 태워 숯을 만들어 그 위에 흙을 덮었다. 그러자 구덩이 안에 숯의 열기가 남아 가죽 모피를 깔자 완벽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구덩이 안의 열기에 감탄한 일행이 너도나도 구덩이로 들어가서 한번씩 누워보더니 나오기를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튼튼한 두 사내가 3개의 구덩이를 더 파서 때아닌 중노동을 해야 했다. 육체노동이 익숙지 않은 멘디에타로서는 괜한 일을 벌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남자끼리 껴안고 자기는 싫었는지 자신을 위한 구덩이를 하나 더 파고 작은 소녀들은 두 명씩 들어갈 수 있도록 도합 4개의 구덩이가 파여졌다. 멘디에타의 지혜로 따뜻한 잠자리를 얻었건만 일행은 감사의 말도 없이 각각의 구덩이로 들어가서 피곤한 몸을 지지며 뒹굴기 바빴다. 그리하여 결국 천막에는 짐만 그득하게 되었고, 사내들은 잠결에 모닷불로 굴러들어 가는 일이 없어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안티오페와 한 구덩이를 쓰게 된 조슈아는 알맞은 온도로 등을 지지는 숯의 열기에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며 소금에 절여 냄새를 없앤 양가죽 모포를 목까지 끌어당기고 새카만 하늘에 총총히 뜬 별들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에 대 초원의 풀 냄새가 싱그럽게 전해져 왔다. 천막 안에서 4명의 소녀가 오돌오돌 떨며 잘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여행의 정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조슈아는 편안한 잠자리와 밤하늘의 포근함에 이끌려 저절로 감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궁성을 떠나오고 벌써 세 달여가 지나갔다. 그 동안 평생 격은 것 보다 더 많은 사건들과 다양한 인물들을 만났고, 또 전혀 생소한 소녀라는 입장에서 그것들에 대처해왔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잘해온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대견함이 느껴지기도 했고, 운도 많이 따라 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드르렁……. 퓌우……. 별안간 간만의 여유로 운 감상을 무참히 깨부수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소음이 들려왔다. 조슈아가 기겁을 하며 돌아보니, 잠자리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까지 붉히며 구덩이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뒹굴던 퓨어리스가 순식간에 잠이 들어 여태껏 들려준 적 없던 수준의 코골음을 들려주고 있었었다. 아마도 깊은 잠을 자야만 나오는 버릇인 듯 했다. 다행히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어, 풍성한 검은 머리칼이 어느 정도 그 소음을 흡수해 주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조슈아는 코를 고는 사람 옆에서 잠을 자본적이 없었다. 아니, 궁을 나와서 에레크트라와 잠자리를 같이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과 같이 자본적도 없는 그녀인 것이다. 그 신경을 긁는 듯한(실제로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조슈아에게는 그렇다.) 코골음에 결국 정신만 더욱 말똥말똥해진 조슈아는 밤하늘의 별을 새며 잠의 여신이 그녀를 이끌어 주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탁탁―. 그때 별안간 그녀의 옆에서 바닥에 깐 모피를 탁탁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안티오페가 조그마한 몸으로 자신이 눕기 좋도록 양털 모피를 그 앙증맞은 손바닥으로 탁탁 소리가 나도록 치고 있었다. 그녀도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이 포근한 잠자리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지 바닥에 등을 대고 자고 싶은 듯 했다. 조슈아는 생긋 웃으며 오른손으로 그녀가 두드리는 곳을 꾹 눌러, 조그마한 그녀가 눕기 쉽게 만들어 주었다. 안티오페는 잠시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더니 자신이 눕기에 알맞도록 양털이 다듬어 지자 그 자리에 들어가 누웠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건만 어깨의 투명한 두 장의 날개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듯, 그녀의 허리에서 옆으로 살짝 삐져나와 달빛에 반사되어 예쁜 빛깔을 만들어 냈다. 조슈아는 잠이 잠들 때까지 그녀와 수다를 떨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 안티오페?" 그녀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안티오페가 풍성한 머리칼과 연결된 두개의 초록색 촉수 로 몸을 감싸다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이 무심한 요정여왕의 초록색 눈동자는 정말로 아름다웠 다. 새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느낌마저 드는 그녀의 피부는 달빛을 받으니 묘한 반 사광을 내뿜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나이가 무척 많지요? 그전에 대충 들어보니 수 백년 전의 일도 직접 본 것 같던데, 정확한 나이를 말해 줄 수 있어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가? 안티오페의 무심한 얼굴에 조금은 곤혹스러운 기운이 나타났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안티오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 라보며 나직히 대답했다. "인간이 말하는 시간으로 어느 정도인지 나도 몰라, 내가 태어난 날은 기억하지만 나 를 만든 존재는 보지 못했어."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하는 그녀였지만 어쩐지 조금은 쓸쓸한 감정이 느껴진다고 생각 하는 조슈아 였다. "그럼 당신의 아이들도 모두 시간이 지나면 당신 같이 되나요?" 그녀가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었다. 그녀 같은 존재가 많다면 지금같이 요정 의 수가 적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안티오페는 별의 숫자라도 새는지 촉수를 가볍게 흔들며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했다. "인간보다는 오래 살지만 내 아이들도 그렇게 길게 살지는 못해, 아이를 만들지도 못하고……." "그럼 당신 같은 여왕은 어떻게 태어나는 거예요? 당신 같은 존재가 또 있나요?" "……." 한참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조슈아는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 고 실소하고 말았다. 이 무심 여왕은 그녀의 질문에 아랑 곳 없이 촉수에 연결된 풍성한 초록색 머리칼을 덮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조슈아는 안티오페에게는 조금은 무거울 법한 두꺼운 가죽 담요를 끌어다 그녀의 목 까지 덮어주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 이제는 리듬까지 타며 울려 퍼지는 퓨어리스의 코 골음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였다. NEXT 제19화 요정의 노래 part 2 "지…짐이 없어!" 태양이 막 떠오르는 이른 시각, 바알의 거창한 당혹 성이 들려 왔다. 그의 커다란 목소리에 모두가 깨어나 굴 밖으로 나오는 너구리들 같은 표정으로 이 슬 맞은 모포를 재치고 얼굴을 내민 일행은 바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앞에 처참히 찢 겨진 천막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식량은? 모두 다 없어 진 거야?" 조슈아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풀어놓은 혁대를 매고 검을 들고 구덩이에서 뛰어 나 왔다. 그녀의 말에 와서 보라는 투로 턱으로 천막을 가리킨 바알은 분한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천막 안에는 마을에서 얻어온 식량 외에도 가죽 주머니에 가득 담은 포도주가 있었 던 것이다. "아니, 천막이 이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니 어떻게 된 거지?" 퓨어리스가 황당하다는 투로 부서진 천막을 발로 차며 말하자, 멘디에타가 머리를 긁 적였다. "역시 불침번을 섰어야 했는데, 너무 방심했군요. 그런데 짐만 없어진 것이라면 들짐 승의 소행은 아닌 것 같군요." "들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에요. 천막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짐까지 가져갔는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발자국도 없으니……." 신중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샤레셀이 조용히 지적하자, 그제야 모두는 그들의 주 위에 누구도 접근 한 흔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러면 마물이라도 왔었다는 건가? 새 같은 것이 이렇게 지능적으로 물건만 가져 갈 수는 없었을 텐데." 바알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설 마요. 마물이었다면 우리를 가만 놔두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정도의 무사들이 모여있는데 이렇게 까지 기척 없이 일을 해치우고 가다니 상대가 정말 궁금해지는 군요." 그러자 '우리정도의 무사'에 들어가는 4인의 검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하다기 보다는 무심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려진 아이들의 짓이야. 아마도 천막주위에 작은 결계를 쳤겠지." 일행이 돌아보니 막 일어났어도 전혀 부시시하지 않은 초자연적인 미모를 자랑하며 구덩이에서 날아 나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얇은 날개를 바닥에 대고 잠을 잤으니 조금은 더러워지거나 구겨 질만도 한데, 아침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의 두 날개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유연하고 세련된 날개 짖을 보여 주고 있었다. "버려진 아이들이라고요? 무슨 말이죠? 안티오페?" 조슈아가 제일먼저 반응을 보이자 자연스럽게 날아오던 안티오페가 그녀의 오른쪽 어 깨위로 내려와 앉아 모두를 한번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들 눈에는 안보이겠지만, 이 주위에는 요정들의 가루가 잔뜩 떨어져 있어. 요정 들이 무언가 힘을 써야 할 때 날개에서 방출되는 거야." "허어! 그럼 당신과 같은 요정들의 짓이라는 거군요. 그런데 버려진 아이들이라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바알이 순발력 있게 그러나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나 이 요정여왕을 대하기가 껄끄러운 그였다. 이 무심 여왕이 별로 이상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파악했지만 그래도 어릴 때의 세뇌는 그와 여왕의 관계 를 어느 정도 선에서 정체시키고 있었다. 아무튼 그의 질문에 그 무심한 얼굴에 조금은 씁쓸함 같은 것을 띄우며 안티오페가 대답했다. "당신도 나의 아이들을 보았겠지? 그 아이들이 어머니를 잃으면 누가 그 아이들을 가 르치고 돌볼 수 있겠어?" "그렇다면 이 일을 한 요정들은 당신 같은 여왕을 가지지 못한 요정들이라는 겁니 까?" 멘디에타가 조금은 알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에 따라서는 아주 나쁜 아이들이 되기도 하지." "그 예쁜 요정이 나쁜 아이가 되기도 한다는 거예요?" 잠이 덜 깬 눈으로 샤레셀의 허리춤을 잡고 서 있던 에레크트라가 의외라는 듯한 목 소리로 물었다. 에레크트라는 일전에 안티오페의 숲에서 보았던 아름답고 착한 요정들 을 떠올리고는 도무지 나쁜 짓을 하는 요정을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잃었는지 살짝 미소지으며 안티오페가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니야. 죽는 날까지 자기들끼리 서이 좋게 잘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 어. 그러나 가끔 나쁜 길로 빠지는 아이들도 있지." 요정들이 마을을 습격했었다는 옛 전설을 들은 적이 있는 모두 였지만, 요정 여왕의 관점에서 그녀의 입으로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마치 인간사와 같은 그저 일 반적인 일 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식량과 술등을 그 작은 요정들이 다 먹어 버린다는 걸까?" 바알이 아직도 술을 잃은 것이 그리도 분하고 억울한지 이를 갈았다. "응? 그러고 보니 요정이 인간의 음식을 먹나? 그전의 안티오페의 숲에서도 호도만 먹는 것 같던데. 그리고 안티오페도 과일이나 어쩌다 스프 같은 것만 먹잖아?" 평소에 그녀의 식생활을 주의 깊게 봐왔던 조슈아가 말했다. 그러자 안티오페가 고개 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며 대답했다. "당신들의 식량을 먹으려고 가져 간 것이 아니야. 다만 상대가 곤란해 할만한 장난 을 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뿐이지." "우옷! 그러면 녀석들을 잡아내면 술을 찾을 수 있다는 거구만, 으음…식량도." 안티오페의 희망적인 메시지에 기뻐하던 바알이 조슈아의 째려보는 눈길을 접하고 얼 른 말을 바꾸었다. "그런데 전혀 증거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대를 잡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안티오 페 씨는 혹시 방법이 있으신 지요?" 바알의 태도에 실소하며 맨디에타가 물었다. 그러나 무언가 생각에 잠겨 살짝 아미 를 찡그린 안티오페는 대답은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한참을 조용히 있더니, 할 수 없 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애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그래도 식량이 없으면 곤란하겠지? 그러면 찾을 수 있게 도와 줄 테니, 가서 짐을 찾아오도록 해봐." 그녀는 말이 끝나게 무섭게 조슈아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투명한 날개를 위잉∼ 소리 가 나도록 파닥이더니, 전에 유용하게 쓴 적이 있었던 초록빛의 요정가루를 흩날렸다. "이 가루를 받아서 눈에 발라. 그러면 그 아이들이 간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에 긴가민가하며 제일 먼저 조슈아가 다가와 가루를 손바닥에 받아 손가락 에 찍어 눈에 발랐다. 잠시 모래가 들어 간 듯 쓰라린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곧 사라 지고 눈을 떠보니 조금은 이질 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 왔다. "어랏? 저것이 뭐지?" 그녀의 눈에 아침 햇살에 들판에서 밀려나는 안개 속에서 마치 물결치듯 요란하게 날 아다니는 작은 생명체들이 들어 왔다.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바라본 그녀는 그것이 소녀의 모습을 한 정령들임을 알 수 있 었다. "아…안개의 정령인가?" 조슈아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샤레셀이 얼른 안티오페의 가루를 받아 눈에 바르고 조슈아의 시선을 따라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어머! 정말 정령이 보이네? 소환 마법으로 정령을 부른 적은 있어도 저런 하위 정령 을 실제로 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데." 그녀의 말에 모두가 앞 다투어 안티오페의 가루를 눈에 바르고, 평생 다시 보기 힘 들 안개 정령들의 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눈에 바른 가루는 눈물에 녹아서 얼마 안가 없어지는데……."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안티오페가 지나가는 말투로 지적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조슈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려 머리를 두들기며 검을 허리춤에 차고 주위를 두리번거 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서쪽 언덕 배기에 옅은 초록빛의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요정들의 흔적인가 보지? 안티오페의 것과는 비교도 안돼 게 약한 초록빛이지만……." 그녀의 말에 안티오페가 고개를 끄떡였다. "아이들의 가루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한 빛을 가지고 있어. 자 그 럼 빨리 가봐. 사나운 애들일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순간 바알을 제외한 모두가 조그마한 요정이 사나와 봤자! 라고 생각 한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귀여운 요정에게서 짐을 찾아오는 것은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일보다 조금 어 려운 일 정도로 받아 들여 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조슈아, 바알, 멘디에타, 퓨어리스 이렇게 4인의 검사는 샤레셀과 에레크트라 의 배웅을 받으며 소풍가는 기분으로 드문드문 떨어진 요정 가루를 따라 말을 몰았다. 3 아침의 가을 바람에 상큼한 꽃향기가 실려 왔다. 조슈아는 오랜만의 꽃향기를 즐기려는 듯 연신 깊이 들이마셔 지금은 마치 취한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벽녘에는 그리도 춥더니, 요정의 가루를 따라 말을 몰아갈수록 따뜻한 기운이 퍼 져 나오는 듯 해, 모두는 기분 좋은 소풍을 온 듯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이거, 근처에 꽃밭이 있나 본데? 혹시 그전의 안티오페의 결계 같은 것이 있는 것 아니야?" 바알이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그건 결계는 요정 여왕만이 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티오페 님의 말로는 그 요정들은 여왕이 없다고 했으니 결계는 없겠죠." 멘디에타가 순발력 있게 대답하자 퓨어리스가 기분 좋은 얼굴로 긴 흑발을 쓸어 넘겼 다. "그나저나 정말 기분 좋은 냄새 내요. 꽃향기 인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이것이 어 떤 꽃의 향기죠?" "글세? 자스민 같기도 하고, 수선화 같기도 한데? 어쩌면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일지 도 모르지." 조슈아가 여전히 향기에 취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일행의 눈에는 평범한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초록빛의 요정가루의 길이 보이 고 있었다.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서쪽을 향한 요정 가루의 길은 바람의 방향과 일치하여 아마 도 이 꽃향기가 나는 곳에 요정들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이 정도의 향기라면 모르긴 해도 대단한 규모의 꽃밭일 거야.' 규칙적인 말발굽소리를 들으며 조슈아는 들판 가득 핀 꽃의 향연을 떠올리고는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듯 했다. 본래의 소년이었을 때 자신이 별로 꽃향기를 좋아하지 않았 었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이상한 변화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조슈아는 생각났다는 듯 멘디에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 안티오페가 오래된 요정일수록 사납다고 했잖아요? 멘디에타는 혹시 이 일대에 서 우리와 같은 피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멘디에타는 의식의 전환에 시간이 걸리는지 잠시 두 눈을 깜박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이 일대를 지나가 본적은 없어서 그런 세세한 일은 잘 모르겠군요. 여기서 북 동쪽으로 사흘 정도를 가면 '페리얼' 강이 나오는데 저는 그 방면으로 여행을 한 적 은 있지만……." "근처에 강이 있다는 말이에요? 왜 이제 말하는 거예요! 어디로 연결되지요?" 조슈아가 왠지 기쁜 목소리로 물어왔다. 혈기 왕성한 16세 소년(?)이 이렇게 변화 없 고 황량한 길만을 여행해 왔으니 변화라면 무조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왠지 별로 달갑지 않은 태도로 한참 만에야 입을 때었다. "일단은 북해에서 대 산림을 가로질러 성도 알본의 남방으로 흘러 '페레나' 해로 연결됩니다만……." "허어! 그러면 굳이 해안선을 따라 배를 몰고 알본으로 갈 것 없이, 북해까지만 가 면 강을 따라 성도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구먼, 그러면 일단 강으로 가서 배를 구해 알본으로 가면 훨씬 시간이 단축되겠는데?" 바알이 멘디에타의 침중한 분위기는 아랑곳 않고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멘디에타! 혹시 그 페리얼 강이라는 데도 마물이 있는 거예요?" 멘디에타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죠슈아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자 여전 히 표정을 풀지 않은 멘디에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사실 성도가 점령당하고 제가 용병 단의 소집을 위해 바리에서 떠나올 때까지도 페 리얼 강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페레나 해를 통해 강으로 들어가 북구의 숲에 정찰 을 보내기도 했었으니까요. 적어도 강변에서 전선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랬으니 지금 은 어떤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러면 지금은 훨씬 아래쪽에 전선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군요?" "음… 그렇죠. 그러나 한 개의 전선을 만들어 대적하지 않고, 동부의 거성들을 묶어 전선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남부 끝의 바리는 그 최종 보루인 샘이고 적의 주력의 힘을 모르는 이상 모험은 하지 않고 소모전으로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자 바알이 기가 막히다 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군사 대국 시돈의 백만 대군을 상대로 소모전을 할 정도라면 도대체 상대가 얼마나 많은 거야?" "그것을 모르니 아무리 100만 대군의 시돈이라도 돌이키지 못할 전력의 피해를 우려해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서로 지루한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 조슈아가 무언가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용병 단이 왜 전선의 한참 북쪽의 알본으로 가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자신을 비롯해 1000여명의 용병단은 애초에 싸움을 위해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멘디에타의 알려지지 않은 사명을 위해 호위 역할을 하는 것뿐인 것이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멘디에타가 전에 보았던 지도상의 마을들을 살짝 살짝 비껴가며 최대한 직선의 행군 코스를 택한 것을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공격을 받거나 점령된 마을의 해방은 계획에 없는 것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알본에 무언가 용건이 있다 하더라도 서부의 고립된 마을들의 해방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고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첫 번째 싸움으로 명확해 졌다. 상대는 비록 주력이 아니라 마을 단위로 드문드문 있는 마물들이라 하더라도 1000여명의 용병 단으로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100만의 군단과 수만의 기사단으로도 성도를 빼앗기고 남방으로 밀려났다고 하지 않 은가? '그렇다면 서부는? 서부의 수많은 마을 들 중에 지금까지 멘디에타의 안내로 몇 개의 마을에 만을 지나왔을 뿐이지만, 모두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수 백개의 소도시들과 마을들은 모두 비슷한 상황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슈아는 시돈의 24대 국왕 레온에게 심한 반감을 느꼈다. 그는 남부 깊숙이 위치한 거성 바리에서 진을 치고 부유한 동부의 도시들만을 방위하 고는 서부의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영토 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그들의 상황을 봐온 그 녀로서는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마석 아스나를 탈취하고 본래의 몸으로 돌아간다면 연합군을 조직하는 문제를 생각 해봐야지, 아니면 무리라 하더라도 아카바 만이라도 응원군을 보낼 수 있도록…….' 자신의 결심이 후일 어떤 형태로 대륙의 정국에 영향을 끼칠지 알리 없는 그녀는, 씩 씩하게 말을 몰아 멀리 꽃바람이 불어오는 지평선 끝에 시선을 던졌다. 4 조슈아 일행은 정면의 전경을 보고 절로 경탄의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곳은 꽃향기의 출처로 야영지에서 말을 달려 3시간 여 거리에 위치한 한적한 연못이었다. 연못은 작은 호도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고 그 규모는 헤엄을 잘 못치는 바알이라도 30초면 건널 수 있는 정도의 넓이였다. 아담한 연못가에는 수선화와 연꽃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유혹적인 향기를 마음껏 흩날리고 조금 떨어진 들판에는 자스민과 제비꽃을 비롯해 온갖 기화요초 들이 늦은 오전의 기분 좋은 햇살을 받기 위해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정…정말 멋진 동네로군." 바위 산 출신의 바알이 제일 먼저 이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찬사라기에는 별 천지 만큼의 격차가 있는 대사를 읇었다. 그로서는 최대의 찬사였겠지만 음유시인이 들었다면 아마도 그가 '시의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연못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아니 조금은 다듬어진 아름다움이랄까? 마치 누가 손질이라도 한 듯 일정한 길이로 자라난 들잔디와 쓰러져 썩은 꽃 하나 없는 조금은 비자연 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취한 일행에게 그런 것까지 관찰할 정신은 없었다. 안티오페의 요정가루의 효과가 거의 사라져 가는 그들의 눈에도 연못 주위의 꽃과 나 무에서 바람을 타며 춤을 추는 정령들의 모습이 생생히 보일 정도로 이곳은 생명력과 요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위이잉―. 그때 그들의 상념을 깨는 귀에 익은 날개 짓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하 지 않는 조슈아 일행. 작은 날개 짓 소리와 함께 호도 나무 숲 속에서 예상한 대로 초록색 머리칼에 흰자위 가 없는 초록빛의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요정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바알이 조금 긴장했을 뿐 모두가 이 귀여운 요정을 어떻게 달래서 짐을 찾을지 고민 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무섭게 굴면 당장에 울어 버릴 것 같은 연약한 요정 꼬마 인 것이다. "아! 저……." 조슈아가 일행을 대표해 말에서 내려 앞으로 나서며 제일 먼저 말을 꺼내려 했다. "카아아!" 순간 그 귀여운 요정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끔찍한 장소성이 울려 퍼졌다. "허억!" 마치 정신공격이라도 하는 듯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요정의 고함소리에 모두가 귀를 틀어 막았다. 그리고 이 의외의 상황에 놀라 귀를 막고 요정을 주시하는 일행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슈우우―. 마치 허물을 녹이는 듯 노란색의 연기를 내며 요정의 피부가 녹아 내리더니 그 안에 서 일견하기에도 딱딱한 청동색 갑충류의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귀여운 얼굴도 서서히 변하여 얼굴이 세로로 갈라지며 촘촘히 박힌 이빨과 몇 가닥의 촉수가 드러났다. 아마도 얼굴 전체가 입으로 변한 듯 했다. 일행이 요정의 변화에 기겁을 하는 사이 호도 나무 숲에서 또 다른 날개 짓 소리가 들리며 이미 변했거나 변화하고 있는 중인 수백의 요정들이 날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NEXT 제19화 요정의 노래 part 3 "도…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바알이 굳어 버린 일행을 대표해 상황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대사를 읊었다. 그러 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에 경직된 조슈아가 움찔 하더니 말고스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이 허허 벌판에서 날아오는 녀석들에게서 어떻게 달아난다는 거야? 상대하는 수밖에." 이미 마음은 저만큼 달아나 있는 일행도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려 검을 뽑아 들었다. 그 사이에도 변태를 계속한 요정들은 모두 전혀 귀엽지 않은 형상을 하고 흉흉한 기 세로 날아 왔다. 다가오는 그들을 바라보니 얼굴전체가 세로로 찢어져 변화한 입에서 초록색의 침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전에 보았던 안티오페의 아이들의 귀여움을 생각하면 하늘 과 땅 차이의 추악한 모습이었다. "그래 어차피 도망가기에는 늦었어!" 바알이 식은땀을 흘리며 가장 늦게 검을 뽑았다. 카아아―. 순간 선두의 요정-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이 듣기 거북한 괴성을 지르며 조슈아를 덮 쳐 왔다. '또…또 내가 제일 먼저네?' 언제나 처럼 가장 먼저 공격을 받는 그녀는 더 이상 놀라지는 않았지만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어 그 억울함을 담아 빠르게 날아오는 요정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올려쳤다. 파악―. 전투형태로 커졌다고는 해도 겨우 어른 팔뚝정도의 크기나 될까 말까한 요정이었다. 그녀의 검격을 맞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요정은 초록색의 액체를 토해 내며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녀가 예상한 것처럼 몸이 산산조각이 나지는 않고 바닥을 기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마도 강한 외골격의 영향인 듯 했다. "이 녀석들 의외로 단단한데?" 조슈아가 조그마한 요정을 공격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반 탄력에 손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오오―. 드디어 수십, 수백의 요정들이 그들을 덮쳐왔다. "우와앗!" 경악 성인지 기합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바알이 검편이 넓은 페드라의 직도(直刀)를 휘둘렀다. 상대가 마물이 아닌 이상, 정확도와 스피드라면 몰라도 파괴력에서 바알의 검격은 조슈아의 검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푸자악―. 마치 철퇴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세 마리의 요정이 한꺼번에 부서져 분해되었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멘디에타와 퓨어리스도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상대가 아무리 날아다니는 작은 요정들이라 해도, 이들 모두는 절정의 기량을 가진 검사들이었다. 검은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듯 상하 좌우로 날아오는 요정들을 가차없이 날려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용케도 베어지지는 않는 것이 표피의 단단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결국 바알 처럼 일격에 부수어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다지 효과적 인 공격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조슈아는 이런 식으로 얼마나 될지 모르는 요정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십여 초가 지났을 뿐이지만 그들의 몸은 요정들의 체액으로 초록색이 되어 있었 다. 파아악―. 끄아악―. 마치 요정들의 처형대가 되어 버린 착각이들 정도로 일방적인 살육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슈아는 이대로 가다가 힘이 빠지면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옆구리를 노리고 이빨을 박아오는 요정의 입에 검을 처박으며 소리쳤다. "도망쳐! 안티오페는 어떤 방법이 있을 꺼야." 그 무신경 여왕이 조금만 귀뜸 해주었어도 이렇게 대책 없이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 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캠프에서 편히 쉬고 있을 추정연령 수백 살의 무신경 여왕이 이 종족의 우두머리이니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것 뿐이었다. 말이 끝나게 무섭게 바알이 제일 먼저 등뒤의 말에 올라탔다. 퓨어리스의 고향 칼라 마을에서 최고의 명마만 골라온 잡티 하나 없는 흑마들은 겁 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요정이 다른 동물을 공격하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인지, 전혀 동요 없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일행의 검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도 정면의 요정 두 세 마리를 쳐서 떨어뜨리고 말에 올라 말 옆구리를 찍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찌직―. 갑자기 왼쪽 어깨에 칼로 긁고 지나간 듯한 화끈한 통증이 일어나 돌아보니 한 마리 요정이 그녀의 어깨를 물고 늘어지다가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이빨이 미끄러져 어깨를 훑고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다른 동료들의 상황도 만만치는 않았다. 바알은 그 떡대로 등뒤에 달라붙는 요정을 흔들어 떨어뜨리고 말을 달려갔지만 멘디에타와 퓨어리스는 연신 검을 휘두르며 마상에서 낭패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조슈아는 목뒤를 물어오는 요정을 검 손잡이로 내리쳐 떨어뜨리고는 말을 몰아 그들에게 달려 갔다. 퍼버벅―. 그녀의 화려한 검술에 수 마리의 요정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일부는 정 확히 반쪽이 나거나 부서지기도 했지만 확실히 검집 만으로는 공격에 한계가 있었던지 몇 마리가 그와 중에도 그녀의 팔이나 어깨를 무는데 성공했다. 상대가 그리 크지 않아 아직 힘이 있을 때는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 떨어뜨리고 달아 날수 있겠지만 일단 지쳐 쓰러지면 꼼짝없이 밥이 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자! 이제 빨리 달아나!" 조슈아가 소리치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아 달아나고 있었다. 결국 조슈아는 제일 뒤에서 그들을 쫓아 검을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5 안티오페는 샤레셀과 수다를 떨고 있는 에레크트라의 어깨 위에 앉아 표정 없는 얼굴로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가벼운 이채가 떠오른 것은 짐을 찾으러간 조슈아와 3명이 떠난 지 4시간여가 지난 시각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표정변화는 이런 일에 세심한 샤레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왜 그러세요? 안티오페? 무슨 일 있어요?" 샤레셀의 질문에 입술을 살짝 찡그린 안티오페가 짜증이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 선에서 알아서 했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이런 일은 정말 싫은 데……." 무엇이 싫다는 것인지 알 리 없는 샤레셀과 에레크트라의 멍한 얼굴을 뒤로하고 드물게 정말로 싫다는 감정을 얼굴 가득 드러내며 안티오페가 날아올랐다. "모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샤레셀이 그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얼굴 가득 불안감을 띄우며 날아가는 안티오페의 등뒤에 소리쳤다. 그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려운 행차를 하는 안티오페는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했다. "짐 찾으러간 당신 친구들이 문제가 아니야. 불쌍한 아이들이 문제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끝으로 안티오페는 언덕을 넘어가 그녀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따라가 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 언니?" 에레크트라가 침중한 얼굴의 샤레셀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자 샤레셀은 표정을 바꾸어 생긋 미소지으며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가 따라가 봐야 도움 될 것도 없고,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 모르는데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니? 그리고 지금 너의 손으로 검이라도 휘두르려는 거야?" 샤레셀이 에레크트라의 물집 투성이의 불어 튼 손을 보며 한숨을 내쉬자 에레크트라는 얼른 손을 감싸쥐어 가렸다. 전의 일이 있은 후에도 에레크트라는 잠시라도 틈이 나면 목검을 휘둘러온 것이다. 이제는 12세 소녀치고는 제법 폼이 잡혀가고 있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검을 배우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손에 상처가 늘어가는 것에 아랑곳 않고 기본 연습만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상처가 커지면 샤레셀이 치료해주면 그만이지만, 계속적으로 생기는 상처는 그녀로서도 지켜보는 수밖에 달리 어쩔 수 없었다. "언니, 제가 조슈아 언니의 나이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검을 쓸 수 있게 될까요? 더도 말고 언니를 도와 줄 수 있을 만큼이라도……." 샤레셀의 눈치를 보던 에레크트라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녀의 질문에 샤레셀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겨우 4살의 나이 차가 날 뿐이었지만 샤레셀은 마치 에레크타의 작은 이모 같았다. 그만큼 둘의 자라난 배경의 격차는 극명했던 것이다. "조슈아는 4살 그 이전부터 검을 수련해왔어, 단시일에 따라 잡으려고 욕심을 부려선 안돼. 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뭐든지 지나치면 화를 입게 되는 거야, 알았지?" 그녀의 애정 어린 충고에 얼굴을 붉히며 에레크트라는 샤레셀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며 샤레셀은 안티오페가 사라진 언덕 배기를 바라보았다. 비록 지금 요정가루를 눈에 바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고급 신녀 인 그녀의 눈에는 미약하나마 초록빛의 가루들이 흩뿌려진 들판이 보이고 있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따라 갈 것을 그랬나?' 그러나 샤레셀은 곧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에레크트라를 허허벌판에 혼자 남기고 따라가기는 여의 치가 않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내력의 안티오페가 따라갔으니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결국 그들이 돌아 올 때까지 어린 에레크트라가 상심하지 않도록 같이 수다 나 떨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샤레셀이었다. 6 위이잉―. 등뒤에서 들리는 요란한 날개 짓 소리가 일행의 혼을 다 빼놓고 있었다. 힘껏 말을 달리고는 있지만 숨을 곳도 없는 허허 벌판에서 언제까지 도망만 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조슈아 였다. 결국 말이 지치는 것이 먼저냐, 요정이 지치는 것이 먼저냐의 내기인데 상대가 날개 달린 요정이고 보면, 말에게 더 점수를 주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맞서 싸우거나 숨을 곳을 찾아야 하는데 상대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고, 숨기에는 마 땅한 장소가 없었다. 거기다가 동료를 잃은 놈들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쫓 아오고 있어, 마치 벌집을 잘못 건드린 것 같은 상황인 것이다. '느릿느릿 오기는 했지만 야영지에서 여기까지 오는데도 3시간이 걸렸다. 이 속도로 계속 말을 달릴 수는 없어.' 그때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몰아가던 조슈아의 눈에 가뭄으로 사막화된 들판에 나무들이 말라죽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죽은 숲의 전경이 들어 왔다. 일행의 진행방향에서 상당히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지만 적당한 높이에 어지럽게 뻗어 있는 썩은 나무 가지들이 어느 정도 요정들을 막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조슈아는 말을 몰면서 등뒤의 요정에 신경 쓰느라 정신없는 일행이 들을 수 있도록 날카롭게 소리로 소리쳤다. "저기 오른쪽의 숲으로 들어가!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놈들을 저기로 몰아넣고 빠져 나오면 훨씬 숫자를 줄일 수 있을 거야." 모두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숲을 한번 쳐다보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틀었다. 아마도 모두 비슷한 의견이거나 그녀를 전적으로 믿는 것이리라. 그런 중에도 지칠 줄 모르는 변태 요정들은 그들의 뒤를 바싹 쫓고 있었다. 숲은 의외로 넓었다. 나무의 키들이 그리 크지 않아 말을 탄 조슈아 일행에게 상당히 불편했지만 상체를 최대한 숙이자 어느 정도 공간이 있었고, 일부 잔가지도 대부분 썩어 있어 그리 문제없이 숲을 통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잔가지들만으로 조그마한 요정들이 운신하기에는 상당한 제약이 되었다. 숲에 들어서자 등뒤의 날개 짓 소리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조슈아는 속으로 쾌재를 올리며 말 등에서 상체를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퓨어리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퓨어리스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상체 곳곳이 긁히거나 물려서 요정의 체액에 초록색으로 물든 옷의 여기 저기가 찢긴 사이로 빨간 피가 베어 나와 있었다. 조슈아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지만 일행 중 유일한(?) 소녀인 퓨어리스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자괴감 같은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이! 조슈아! 이제 어쩔거야?" 앞에서 그 튼튼한 몸으로 잔가지를 부수며 말을 달리던 바알이 소리치자 조슈아는 상념에서 깨어나 다시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숲을 지나고 나면 다수의 요정들을 따돌리고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그 다음은 아직 생각 중이야." "역시 안티오페 밖에 기대할 것이 없나?" "안티오페 씨가 이 놈들을 만나기를 상당히 꺼려했던 것 같은데 과연 방법이 있을까 요?" 바알의 불안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째서인지 일행 중 가장 상태가 좋은 멘디에타가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안티오페의 태도가 이상하긴 했어!" 퓨어리스가 멘디에타의 말에 생각났다는 듯 동조하자 조슈아는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안티오페 에게 방법이 없다면 괜히 샤레셀과 에레크트라만 말려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 조슈아는 일순 허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그녀는 곧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상황이 그렇다면 이 숲에서 나가봐야 뾰족한 수가 없어. 결국 우리에게 유리한 이 숲 안에 있는 동안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 봐야겠지.' NEXT 제19화 요정의 노래 part 4 그녀는 마상에서 살짝 허리를 틀러 등뒤를 바라보았다. 상당수의 요정들이 나뭇가지 사이를 헤치며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지만 아까 처럼 대책 없이 한꺼번에 날아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니 숲의 중앙에 공터가 눈에 들어 왔다. 나뭇가지로 지붕을 덮은 듯 한 구조의 공터는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4명이 운신하기에는 충분한 넓이였다. 그녀는 순발력 있게 작전을 세우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크게 소리쳤다. "저기 정면의 공터에서 진을 짜도록 해! 요정들이 수 가 많기는 해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망적인 숫자는 아니야. 저 안에서 숲을 통과해 공터로 뛰어 드는 놈들을 차례로 없애는 거야." "결국 다 죽일 때까지 싸우자는 거야?" 바알이 그녀의 작전에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그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군요. 밖에서는 놈들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 니……." 결국 그녀의 작전을 따르기로 한 일행은 적이라고는 하나 그 많은 요정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속이 쓰려옴을 느꼈다. 언제나 도망치는 것이 빠른 바알을 선두로 일행은 숲 중앙의 공터에 들어가 말에서 뛰어내려 검을 빼어 들었다. 바로 뒤따라 들어오는 소수의 요정들을 순식간에 베어 버리고 일렬로 서서 자세를 잡았지만, 겁이 없는 요정들은 상황이야 어떻든 숲을 빠져 나와 부나방처럼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끄아악―. 요정의 비명을 듣기는 모두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 할 것이다. 요정들이 가지사이를 힘겹게 빠져 나와 얼굴을 내밀 때마다 일행의 검이 가차없이 그들의 몸을 부수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벤다는 느낌보다는 부순다는 느낌이 더 컷다. 그러나 지금 그들을 동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녀석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당해 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이 놈들은 왜 그리 다짜고짜 달려 든 거야? 우리가 공격을 하는 기미를 보인 적도 없는데." 바알이 초록색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휘두르며 이 상황이 매우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자 제일 먼저 공격을 당했던 조슈아가 힘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우리가 잘못 짚은 건 아닐까? 이렇게 공격적인 놈들이라면 우리가 자는 사이에 짐만 가져갈 리가 없지 않아?" "아마도 자신들의 아지트에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겠죠." 멘디에타가 여전히 일행 중 가장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이들의 이런 변화한 모습이 안티오페가 말한 나쁜 아이들의 모습일까?" "그러게, 말해주려면 제대로 해주지 나는 나쁜 아이들이라기에 말투가 험악한 정도인줄 알았지 이런 것일 줄은……." 조슈아의 말에 퓨어리스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겉보기에 일행 중 가장 상태가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보기와 달리 아직 행동의 제약을 받을 정도의 상태는 아닌 듯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자잔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상당해, 16세 소녀로서는 용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 장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푸하악―. 조슈아의 검을 정면으로 맞아 머리가 부서져 땅바닥을 뒹굴던 변태 요정이 초록색의 체액을 토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이제는 바닥에 쌓인 수 십 마리의 요정들이 발에 걸려 함부로 뛰어 다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 놈들은 공포라는 것이 없는 것인가? 이렇게 많이 죽고도 계속 달려들다니?" 바알이 몇 마리 째인지 알 수 없는 요정의 머리를 부수며 질렸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의 말이 무색하게 새로운 요정들이 계속 적으로 잔가지를 헤치고 날아 왔다. 그러나 몸은 강화되었지만 그들의 얇은 날개로는 이런 잔가지가 많은 숲은 통과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한꺼번에 공격해오거나 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슈아의 작전은 미봉책이나 그런 대로 효과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정 사형대가 된 듯한 기분으로 계속 적으로 베어 넘기는 대도 요정들은 끊이지 않고 날아들었다. "바…발 밑을 봐요." 갑자기 힘에 겨운지 고개를 숙이는 시간이 많아진 퓨어리스가 비명에 가까운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행은 검을 휘두르기 바쁜 두 손 밑으로 잠시 시선을 돌리 발 밑을 내려 다 보고 경악하였다. 이제 거의 백 여 마리에 육박하는 요정들의 시체가 본래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요정의 모양새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공격형으로 변태 했던 것이, 죽은 후 어느 정도가 지나면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듯 하군요." 멘디에타가 애써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설명했지만 모두의 심경은 더욱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변태 때는 덜했지만 마치 귀여운 아이 같은 본래의 외모로 돌아오자 그런 요정들을 전멸시켜야만 하는 것이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들로써도 설마 이들과 이런 식의 싸움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놈들 숫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야? 설마 다 죽을 때까지 덤비려는 걸까?" 바알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뻔한 질문을 하자 멘디에타가 순발력 있게 대답했다. "안티오페의 숲에 있던 요정의 수도 어림잡아 200∼300 안팎이었던 것 같은데 이놈들도 그 정도이지 않을까요?" 그러자 기겁을 한 표정으로 퓨어리스가 몸서리를 쳤다. "그러면 최소한 지금의 3배 정도는 더 있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더 있을 수도 있고 덜 있을 수도 있지만 아까 전에 본 숲은 확실히 안티오페 씨의 숲보다는 작았으니 더 적을 확률이 크겠죠." "아무튼 이 놈들도 생물이니 전멸 할 때까지 싸우지는 않을 꺼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관측을 하는 멘디에타의 말을 귀 뒤로 흘리며 조슈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날이 없는 검집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요정들을 지속적으로 상대하다보니 가장 빠르게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 상대하는 요정들보다 수십 배 강한 상대라도 한 놈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나을 상황인 것이다. 위이잉―. 그때 갑자기 그들의 머리 위에서 엄청난 수의 날개 짓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모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안한 예측에 호흡도 멈추고, 공중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억!" 약속이나 한 듯 경악 성을 발하는 일행의 머리 위 옅은 잔가지의 지붕 위에 어림잡아도 백 마리 이상의 요정들이 흉흉한 기세로 동족의 원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숲을 통과하여 공격해들어 간 동료들이 각계격파를 당하자 후위의 요정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오른 것이리라. "이…이런!" 조슈아가 절망작인 신음 소리를 냈다. 그녀로써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바로 머리 위를 빼앗긴 이상 도망칠 수 도 없다. 가장 우려하던 데로 다수의 요정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조슈아를 비롯해 모두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요정의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여기서 죽는 거야?" 모두의 심경을 대신하여 퓨어리스가 제일 먼저 아무도 애써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을 발설하고 말았다. "젠장! 더럽군!" 바알이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 대한 반응인지 구분 할 수 없는 욕지거리를 하며 긴장한 목뼈를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꺾어 풀었다. 파아악―. 바알의 목뼈 꺾는 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요정들이 나무 가지를 해치며 한꺼번에 밀고 내려왔다. 조슈아는 이를 악물고 피로에 지친 팔을 들어 올려 목을 노리고 찍어 내려오는 요정 수마 리를 순식간에 쳐 떨어뜨리고 그 간격으로 들어온 한 마리의 요정은 어깨로 밀치고 몸을 굴렸다. 뛰어다니며 피하기에는 바닥에 널브러져 아직 변태한 체인 수많은 요정의 시체가 방해가 되었다. "까아악!" 퓨어리스가 여태껏 들려준 적 없던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몸을 굴렸다가 잽싸게 일어나 또다시 얼굴로 날아드는 변태 요정을 올려치던 조슈아가 돌아보니 목에 달라붙은 요정을 때어 내려다가 공격을 늦춘 퓨어리스에게 수 마리의 요정이 달려들어 이빨을 박고 있었다. "퓨어리스!" 조슈아가 이제는 체액으로 미끄러워 제대로 잡기도 힘든 검손잡이에 손수건을 감아 고정시키고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우욱!" 그러나 엄청난 수의 요정들은 그녀가 잠시 다른 곳에 신경 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 새 뒤편에서 날아온 두 마리의 요정이 그녀의 등뒤에 달라붙어 뾰족한 이빨을 박아 넣은 것이다. 마치 단도에 찔린 듯한 아픔이었으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 등뒤의 요정을 떼어 내기 위해 공격을 멈춘 동안 다시 수 마리의 요정이 그녀의 어깨와 팔에 달라붙었다. 순간 조슈아는 절망을 느꼈다. 이제 그들을 떼어낼 힘조차 없는 것이다. 그녀는 왼쪽 목줄기에 화끈한 통증을 끝으로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조슈아!" 순간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지려는 그녀의 의식을 잡아끄는 우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앗―.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쓰러진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묵직한 물체가 덮여 요정들이 더 이상 달라붙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꺼져 가는 의식을 겨우 살려 천천히 눈을 떴다. "바알?" 그녀의 눈앞에는 익숙한 체취의 가슴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바알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안고 요정의 이빨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욱!" 조슈아가 당황하여 무언가 말하려 하자 바알이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 소리를 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지금 바알의 상황이 어떨지는 잘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 새카맣게 달라붙은 요정들이 곧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이었다. "바알! 뭐하는 거야? 당신이라도 도망가!" 소용없는 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조슈아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나 바알은 연신 격한 신음 소리를 낼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밀쳐 내려 애도 써보았지만 지금 그녀의 힘으로 그 거구를 밀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보! 뭐 하는 거야? 당신이라면 도망칠 수도 있단 말이야!" 드디어 조슈아는 눈물을 흘리며 주먹으로 바알의 가슴 깨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통을 눌러 참는 것이 분명한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누라를 버리고 어디로 달아난다는 거야?" '!' 순간 조슈아는 이 절망적인 상황과 상관없이 머리에서 핏기가 가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전에 아내가 있다더니, 이 자식 설마 나…나를 두고 한 이야기야?' 불쌍한 바알……! 결국 최후의 최후까지 가서야 조슈아를 이해시킨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반응인 그녀의 반발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막이 된 바알의 품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감정을 넘어서 처음으로 이 우직한 사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무리 튼튼한 몸의 바알이라도 자신을 안고 달아 날수도 없고, 더 이상은 견디지도 못할 것임을 떠올린 조슈아는 이를 악물고 발작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 같은 왈패가 어디가 좋다는 거야! 빨리 도망가지 못해! 누가 네 아내 따위를 한다는 거야! 이 자식아! 나는 이래봬도……. 흐읍……." 갑자기 뜨거운 이물질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 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조슈아의 머리 속은 형용불가의 감각과 감정으로 마비상태가 되어버렸다. '키…키스야?' 그렇다!(ㅠㅠ) 그녀는 바알에게 키스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숯 많은 갈색 고수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크고 두툼한 입술은 그녀의 경악하여 벌어진 입술 사리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녀가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럴 힘이 없는 것도 크게 작용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키스에 패닉 상태가 되어 버린 정신의 영향이 더 컷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슈아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며 꺼져 가는 투지에 기름이 부어 지는 듯한 뜨거운 감정의 폭풍에 사로 잡혔다. 그녀에게도 소년으로서의 꿈이 있다. 바로 어머니를 닮은 아름답고 현숙하고 강한(?) 소녀를 만나 첫 키스를 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껴두고 아껴두던 첫 키스를 사내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때 갑자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바알이 속삭였다. "몸을 이렇게 떨다니 그렇게 좋은 거야? 조슈아. 응?" 퍼억―. "으갹……." 조슈아의 혼신의 일격이 바알의 아랫배를 관통했다. 그녀의 무릎이 바알의 무거운 몸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쳐 올려진 것이다. 역시 분노의 힘은 대단했다. 그리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벌떡 일어나 바닥에서 핵핵 거리는 바알을 걷어차려는 조슈아! 그러나 그녀의 다음 행동은 뒤에서 그녀를 안아오는 손길에 의해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흠칫 하여 뒤를 돌아본 조슈아는 퓨어리스가 상당한 출혈을 하면서도 미소지으며 헐떡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그녀를 껴안고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없다!" 그렇다. 그들을 죽음의 문턱까지 인도했던 수백의 요정 때들은 누군가 몰고 가기라도 한 듯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멘디에타가 얼굴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했던 그도 여기 저기 찢긴 상처로 덮여 있어,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면 틀림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유야 어떻든 살아 남았다는 안도감에 그저 피식 피식 웃음이 나오는 모두였다. 그때 등이 피범벅이 된 바알이 끄응 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저 소리가 들리지 않아?" 지나친 안도감에 주위의 환경에까지 감각이 닿을 여력이 없던 일행은 바알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격정적인 전투의 감각이 식혀 지자, 숲을 관통하는 시원한 가을 바람 사이로 마치 속삭이는 듯한 아름다운 여인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희귀한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일행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심 여왕 안티오페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소리가 들리자 마자 놈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날아갔다고. 아마도 안티오페가 와 있는 거야." 바알이 아랫배가 아픈지 쿨럭 거리며 말하다가 조슈아의 살기 뛴 눈빛에 자라목이 되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분노도 그의 피범벅이 된 등을 보고는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 아무튼 고마워." 바알은 그녀가 화를 푼 듯 하자, 엄청난 출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씨익∼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흠……. 아무튼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죠." 멘디에타가 헛기침을 하며 이상하게 흐르려는 분위기를 깨고 상황을 수습했다. 모두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힘든 발걸음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정의 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미 말들은 그사이 멀리 달아나 일행은 다리를 질질 끌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숲을 빠져 나와 동쪽의 민둥 언덕을 바라보니, 수백의 요정들이 본래의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와 일행의 눈에 뜨일 정도의 선명한 초록색 요정가루를 뿌리며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정에게 춤이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일행의 눈에는 요정들의 날아다니는 폼이 춤으로 보일 정도로 그들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 언덕의 정상에는 안티오페가 앉아, 평소의 그녀의 표정이나 자태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간이라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아름답고 따뜻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비록 뜻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영혼의 밑바닥까지 울리는 아름다운 광채를 가진 목소리가 요정들 뿐 아니고 조슈아 일행까지 사로잡고 있었다. 그렇게 10여분의 노래가 계속되고 안티오페의 노래의 운율이 점점 변화하였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어쩐지 처연한 감정이 묻어나는 노래였다. 그러자 그녀의 노래의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추던 요정들은 하나 둘 안티오페의 발치에 내려앉아 투명한 두 장의 날개를 접고 서로 엉겨 붙어 눈을 비비며 잠들기 시작하더니 곧 모두가 그녀의 발치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안티오페의 노래가 끝이 났다. 더 듣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조슈아 일행이 조심스럽게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요정들은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체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슈아는 왠지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티오페를 바라보고 귀엣말을 하듯 속삭였다. "어떻게 한 거예요? 안티오페."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언덕 위의 바위에 앉은 그대로 짓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어깨에서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은빛 가루가 흘러나와 바람도 없는데 언덕 위에 골고루 흩뿌려 졌다. "헉!" 그러자 제일 먼저 순발력 좋은 바알이 경악 성을 발하는 가운데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던 요정들의 몸에서 초록색의 기류가 올라오더니 그 조그마한 육체가 순식간에 기화하여 대기 중으로 사라 졌다. 그렇게 수백의 요정들은 눈 깜작할 사이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고 놀랄 타이밍을 놓친 모두는 그저 입을 벌리고 언덕 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요정들의 자해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허사였다. 그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고, 심지어 모두의 옷에 베어 있던 초록색의 체액들까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모두의 기막힌 표정을 쓸어 보며 안티오페가 평소의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은 나를 엄마로 착각한 거야. 그래서 나의 노래에 몰려 든 거지. 엄마를 잃은 지 오래 되어서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한 거야." "……." "나도 그 아이들이 이 정도로 오랜 전에 엄마를 잃은 아이들 인 줄은 몰랐어. 오래 될수록 전투형태가 강해지니까. 알았다면 당신들을 보내지 않는 것인데……." "혹시 당신은 전에도 이런 일을 해왔던 거예요?" 겨우 정신을 수습한 조슈아가 어렵게 질문했다. 설마 그녀가 요정들을 다 없애 버리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녀로서는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질문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러자 조슈아의 시선을 피한 안티오페가 잠시 사이를 두고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도 나를 어떻게 불러 야 할 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나 같은 존재를 만나지 못했어. 가끔 저런 아이들을 만나게 되지만, 모두 엄마가 예전에 떠나버리고 없었지." "당신 외의 여왕들은 도대체 다 어디를 간 겁니까?" 멘디에타가 모두를 대표해서 가장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두 눈을 깜박일 뿐, 왠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저런 아이들은 보호해줄 엄마가 없기 때문에 오랜 시달림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익히게 되고, 자신들의 거처를 발견한 인간은 절대로 살려 보내지 않지. 그리고 그것은 또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쳐 우리 종족에게 적대적인 행동으로 돌아오지. 그러니 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그리고 저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주는 것이 좋아." 순간 일행은 머리 속에서 어릴 때부터 듣던 요정 전설의 실마리가 풀림을 느꼈다. 결국 전설 속에 마을을 습격하는 요정 이야기는 이런 엄마 잃은 요정들의 짓인 것이다. "그…그렇다고 이렇게 다 죽여야 하나요? 당신의 아이들과 같이……." "이미 저렇게 된 아이들은 내 아이들을 오염 시키게돼." 조슈아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요정들을 애써 동정하자 안티오페가 처연한 미소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래도…. 그래도…." 할말을 찾지 못한 조슈아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가운데, 안티오페의 아이들을 제외하면 이 땅의 마지막 종 족 일지도 모를 요정 족의 최후를 목격한 모두는 상처의 아픔과 피로도 잊고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그렇게 수백의 요정들이 또 다시 이 땅에서 사라져 갔다. NEXT 제20화 어색한 만남. 터벅―. 터벅―. 조슈아 일행의 느린 말발굽 소리만이 너른 들판에 울려 퍼지고 언제나 처럼 주위는 적막에 사로 잡혀 있었다. 요정들의 공격 후 다행히 칼라 마을의 명마(?)들은 괘씸하게도 캠프로 돌아가 있었고, 조슈아를 비롯한 모두의 상처는 샤레셀의 치료 마법으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상처보다 더 큰 정신적 피로가 일행을 괴롭혔다. 식량을 찾은 것은 좋았지만 귀여운 요정들을 몰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요정들의 연못으로 짐을 찾으러 가보니 아마도 그들의 정기로 유지되고 있었던 듯, 연못과 주위의 꽃밭은 순식간에 말라죽어 모래밭으로 변해 있었다. 안티오페는 그일 이후 극단적으로 조용해져 조슈아의 어깨 위에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고, 바알은 바알 대로 덩달아 조용해진 조슈아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한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이 눈치 챈다면 바알은 샤레셀의 혼신의 공격마법으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바알은 경솔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결코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입술에 키스한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다리에 힘이 풀려 걷기조차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넋이 나간 조슈아를 보자 감히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알 씨. 조슈아가 왜 저러는 거예요?" 갑자기 상념을 깨며 샤레셀이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그녀도 워낙에 넋이 나가 있는 조슈아 인지라 어떻게 말을 걸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알이 어떻게 그 이유를 말해 주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신녀에게 말이다. "그…글쎄요. 워낙 충격적인 일을 당해서가 아닐까요?" 바알이 머리를 긁적이며 정답에 가까운 대답을 하자, 샤레셀이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보지 못했지만 요정의 공격을 받은 자리에는 퓨어리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평생 써먹을 무용담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는 태도 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소년(?)인 조슈아는 어째서 그리도 충격을 받은 걸까? 너무도 넋이 나가 치료마법에 더해 정신 안정의 주문까지 은연중에 밀어 넣었건만 효 과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일행은 자괴감의 소용돌이에 빠진 조슈아와 안티오페로 인해 덩달아 침체된 분위기 에 빠져 지루한 침묵 속에 여행길을 재촉했다. 1 "우왓! 강이다!" 에레크트라가 기쁨에 겨워 팔짝 팔짝 뛰고 있었다. 이곳은 시돈 북부와 동부를 잇는 교통의 대동맥이며 군사적 요충지인 페리얼 강. 이제 이곳에서부터 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동해안과 맞닿는 곳에 성도 알본이 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왔다면 이미 훨씬 전에 알본에 다다를 수 있었겠지만 바다가 마물의 영향력에 들어간 이상 이 자연의 수로를 활용할 수 없었던 일행은 고달픈 육로로 여행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퓨어리스와 안티오페라는 든든한 동료를 얻었으니 그리 억울한 일은 아니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페리얼 강은 의외로 매우 큰 규모의 강이었다. 북에서 동으로 빠르게 흐르는 지라 거슬러 올라가려면 상당히 애를 먹겠지만 일단 물줄기를 타고 내려간다면 성도까지 매우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배를 타고 알본으로 가게 되나요? 멘디에타." 조슈아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빠르게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듣기 민망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바알이 뜨끔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멘디에타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강이 안전한지 알아보려면 역시 배를 타봐야 알겠지만, 어차피 알본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니까요. 일단 선착장을 찾아 봐야겠군요." "근처에 선착장이 있는 거야?" 바알이 조심스럽게 질문하며 조슈아의 표정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입을 열자 조슈아가 시선을 돌리며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으으……. 키스 한번에 대가가 너무 크군. 이렇게 까지 서먹서먹해 지다니…….' 후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그녀의 태도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바알 이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감지했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멘디에타가 대답했다. "여기서 하류로 좀더 내려가면 군용 보급 선착장이 있습니다. 수비대가 배치되기는 하지만 이미 전선이 무너졌으니 아마 비어 있겠죠. 강 주위로 마을들이 있기는 하지만 동부로 가기 전에는 모두 강 건너에 몰려 있죠. 사견입니다만, 만약 뱃길로 갈 수 없다해도 지금 상태라면 일단 강을 건너 행군하는 것이 안전할 겁니다." "그렇겠죠. 전선에서 멀수록 안전할 테니까." 조슈아가 먼 시선으로 강 너머의 숲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 접점의 풍경은 강 남부의 풍경과 상당히 이질 적이었다. 일단은 숲이 우 거지고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비옥한 토양인 것으로 보였다. 사암과 모래땅으로 덮인 남부와는 천지차이였다. 마을들이 강 너머에 몰려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환경 차이였다. "자! 여기 더 있으나 마나 이니 그만 하류로 내려가 보기로 하죠. 저녁때쯤이면 선착장에 다다를 수 있을 겁니다." 달리 대안이 없는 일행은 멘디에타의 인도를 받아 강줄기를 따라 말을 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린 조슈아 일행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저녁때가 다되어서야 선착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강바람과 북부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얼굴이 얼어버릴 지경이었지만 일행의 피로 도는 평소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평소에 삭막한 대초원과 사암의 민둥산만을 바라보며 행군한 모두였다. 시원하게 흐르는 강과 그 건너편의 풍요로운 숲을 바라보면서 말을 달리니 그것은 이미 행군이 아닌 한가한 여행길이 되는 것이었다. 조슈아도 여전히 꿍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눈을 즐겁게 해주는 주위의 풍경에 어느 정도 동요하는 것은 분명했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렸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주위에 풍경은 보지 않고 하루 종일 그녀의 옆얼굴만 바라보고 달려온 바알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선착장은 멘디에타의 예상대로 비어있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인공적으로 여울을 만들어 자연석으로 고정시키고 그 안쪽의 만에 대형 전투함 한두 척이 정박할 수 있을 정도의 선착장과 도크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뒤로 숲과의 경계를 즈음해서 2층 구조의 목조 건물과 역시 나무로 만든 커다란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에 지붕을 보며 자게 되겠군요." 멘디에타가 강바람에 움츠려든 몸을 풀며 조슈아에게 말했다. 그 너머로 샤렐셀과 에레크트라가 말에서 내리며 아픈 허리와 엉덩이를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바알은 벌써 마구간에 말을 데려가 묶고는 선착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조슈아는 바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한숨을 쉬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바알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키스 한번에 망가진 그녀와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이대로는 같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힘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말을 빨리 매어 놓고 쉴 수 있도록 제 빨리 마구간을 나와 정찰 겸 도크에 들어가고 있었다. 도크에 전함이 남아있을 리야 없었지만, 내륙인 페드라 출신의 그가 배를 만들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운이 좋아 조그마한 조각배라도 남아 있는 지 보러 온 것이었다. 투덜거리며 걸어가 도크의 문에 손을 댄 바알은 순간 흠칫하였다. 문의 나무 손잡이에 미약하나마 열기가 남아 있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 라면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온기 이었지만 고급 용병인 그가 사람의 흔적을 놓칠 리 없다. 그는 근육이 긴장하여 팽팽히 부풀어올랐다. 여태껏 마물들만 상대하여 경력을 써볼 틈이 없었던 바알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인간이었다. 이런 전선 안쪽의 위험 지대에 인간이 있다는 것은 분명 상대가 적이던 아군이건 보통의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바알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상체를 숙여 안으로 들어 간 후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초저녁인데다 도크 안에는 조명이 없어서 강과 연결된 커다란 입구에서 들어오는 달빛만으로는 안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바알은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리다가 발검자세를 취한 채 상체를 숙여 조용히 전진했다. 처얼썩―. 도크에서 수리한 배가 강으로 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커다란 입구는 개폐식이었으나 활짝 열려있어 강물이 부두에 부딫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주의를 집중하고는 있었지만 워낙에 숨을 공간이 많은 지라 상대가 숨고자 한다면 찾아 낼 방법이 없는 바알은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더라도 일단은 상대를 도발을 해서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허리를 펴고 입수관-배를 물에 넣기 위해 강에 비스듬히 연결된 통로- 으로 다가갔다. '어엇? 누군가 배를 만들고 있었군.' 그의 눈앞의 입수관 상단에는 커다란 나무 침목으로 고정된 거의 완성단계의 범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바알이 보기에도 이 배는 별로 잘 만들어 진 것 같지는 않았다. 돛의 위치도 부자연스러웠고 뱃머리의 곡선도 별로 매끄럽지 않은 것이 그 증거 였다. '누군가 강을 타고 가려 했던 거군.' 바알은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고는 조용히 도크를 빠져 나오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멘디에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언가 있습니까?" 그런 그의 등뒤에는 퓨어리스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 거의 다 만든 배가 한척……." 말을 이어가던 바알은 퓨어리스가 들어오고 문이 닫치는 그 짧은 순간에 다른 누군가가 숨어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고 헛 바람을 들이키며 소리쳤다. "퓨어리스! 등뒤에……." "까악!" 바알의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퓨어리스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차랑―. 바알과 멘디에타는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다 흠칫 하며 멈추어 섯다. 어둠 속에서 매서운 안광을 빛내며 한 사내가 퓨어리스의 오른 팔을 등뒤로 꺽고, 단검을 목덜미에 대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놈이 아니다.' 바알은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고 검을 겨눈 상태로 낮게 신음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 만 퓨어리스 정도의 검사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킨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오랜 용병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도 저런 기운을 풍기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 였다. 그때 흉흉한 눈빛을 발하던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누구냐? 보아하니 무사들인데 이 구역에는 무슨 일이지?" 그의 목소리는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히 미끄럽고 정확하고 세련된 남방 귀족풍의 엑센트 여서 바알과 멘디에타는 상대가 결코 잡배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통할수도 있는 상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국왕직속의 용병 단으로 성도로 가는 길이요." 멘디에타가 '국왕직속'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주며 경계를 풀지 않고 딴에는 강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용병 단? 혹시 너희 중에……." 파아악―. 갑자기 그의 문이 부서지더니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윤기 흐르는 금발을 출렁이며 조슈아가 날아들어 왔다. 그러나 보였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파앗! 하며 사라진 그녀는 어느새 괴인의 등 앞에 다다라 말고스로 어깨를 부술 듯 내려치고 있었다. "허억!" 타협의 여지가 없는 쾌속의 공격에 당황한 괴인은 헛 바람을 들이키며 퓨어리스에게서 떨어져 왼쪽으로 몸을 굴려 피하며 단검을 던졌다. 타앙―. 그러나 어두움에 눈이 익을 시간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슈아는 정확히 단검을 쳐서 떨어뜨리고 자세를 잡았다. 단검을 던진 사내도 그사이 장검을 뽑아들고 침착하게 조슈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그들의 한차례 격돌만으로 바알은 상대가 고급기사 이상의 실력자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방금 전의 조슈아의 기습정도라면 자신도 피하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 남을 수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속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겨우 피할 수 있다 해도 검을 뽑을 기회를 잡지 못하고 몰리다 죽음을 당했을 것인데 그는 가볍게 피해낸 데다 검을 뽑을 시간까지 벌어낸 것이다. 아마도 조슈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둠 속이었지만 상당히 긴장한 파란 눈동자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퓨어리스는 바알과 멘디에타에게로 떠밀려와 검을 뽑아 들고 뒤로 꺽였던 오른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서로 최상급의 검객끼리의 대결이었다. 그들의 간격에는 누구라도 쉽게 끼어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야압!"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정체 불명의 검사가 정직한 상단 찌르기를 걸어 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주위에 폭풍이 이는 듯 한 위력이었다. 이런 식으로 완성된 검격이라면 기본 공격 술이라 해도 편법으로는 막아 낼 수 없는 것이다. 차앙―. 그러나 과연 초절정 미소녀 기사 조슈아! 역시 완벽한 수비 자세를 만들어 그의 상단 찌르기를 올려치며 오른편으로 흘리고 있었다. 차라랑―. 이런 공격을 받아치는데 더해 흘리는 기술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내는 어둠 속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흠칫하며 갑자기 조슈아의 어깨 너머로 흘러 넘어 가던 검을 그대로 손에서 놓고 전속력으로 뒤로 물러났다. 바알은 그의 상식 밖의 행동을 보고 순간 당황하였다. '저 녀석 미친 건가? 검을 놓다니!'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 졌다. 조슈아가 형용불가능의 속도로 흐르는 검의 결을 따라 검손잡이를 찍어 갔던 것이다. 파앗―. 이미 상대가 그 자리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슈아의 검손잡이가 마치 무언가를 가격한 듯 파열음을 냈다. 너무도 빠른 검격이 공기를 관통하며 내는 소리였다. 순간 상황도 잊고 모두가 경악하였다. 동료인 그들조차도 조슈아가 이런 식의 살검(殺劍)을 쓰는 것을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상대가 검을 잡고 있었다면 그 가공할 검식에 머리가 박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알을 비롯해 모두가 그의 움직임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당황하였다. 특히 조슈아는 사내가 검을 잃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다가가지 못하고 경악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나의 비검을 알고 있다는 말이야?" 그러나 놀라기는 상대도 마찬가지 인 듯, 방어자세를 풀고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샤레타? 설마 했는데 샤레타가 맞군. 너…너는 누구냐? 어떻게 왕실 비전 검술을 쓰는 거지?" 조슈아가 공개되지 않은 자신의 비술을 깬 데다 검술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상대에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부서진 문으로 샤레셀과 에리크트라가 램프를 들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조슈아?" 상황을 모르는 샤레셀은 부서진 문의 나무 조각을 발로 걷어 차 치우며 기름 램프로 도크 안을 비추었다. 은박의 반사 막을 씌워 정면만 비출 수 있는 램프의 불빛은 먼저 일행을 비추고 천천히 어둠 속에 버티고 선 사내를 비추었다. 먼저 남방 풍의 가벼운 갈색 가죽 바지와 목이긴 검은 색 부츠, 은장의 검집이 달린 가죽 혁대가 눈에 들어 왔다. 그 위로 더러워진 흰색 블라우스와 몸에 딱 맞는 가벼운 방어구인 기사용의 가죽 조끼, 멋지게 각이진 턱에 지저분하게 자란 턱수염, 그리고 얼굴은……. 순간 조슈아와 샤레셀이 동시에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 쳤다. "조르쥬?!" NEXT 제20화 어색한 만남 part 2 그렇다! 놀랍게도 그는 아카바의 왕실 근위대장 조르쥬 였던 것이다. 비록 상당히 고생을 했는지, 지저분한 수염과 초췌한 얼굴을하고 있었으나 조슈아와 샤레셀이 어찌 그를 못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경악은 이 사내의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샤레셀은 쳐다보지도 않고 조슈아 만을 넋 나간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던 조르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세상에 당신이 어떻게……."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말이 되 어나오지 못하고 신음 소리에 가까운 격한 숨소리 되어 장내에 진동했다. 갑자기 조르쥬는 조슈아의 발 밑에 한 쪽 무릎을 끓고는 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는 당황하여 손을 빼려는 그녀의 오른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초췌한 얼굴에 핏기 없는 차가운 입술이었지만 조슈아는 마치 손등이 대 이는 듯 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손을 빼지는 못하고 있었다. "뭐…뭐야! 조슈아, 아는 녀석이야?" 바알이 그의 행동에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며 사납게 소리 쳤다. 그러자 그녀의 손등에서 입술을 땐 조르쥬가 바알을 한 번 돌아보고는 조슈아에게 아직도 격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아! 조슈아 아가씨 이셨군요. 오늘에야 당신의 아름다운 이름을 알게 되었군요." '으음!' 조슈아의 비록 그의 열렬한 흠모의 눈동자에 굳어 버려 대처할 방법이 없기는 했지만 이 상황이 거북하기 이를 대 없었다. 그때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난 조르쥬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는 갑자기 사늘한 표정으로 바알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찬 서리가 내릴 것 같은 경멸이 가득한 목소리가 세어 나왔다. "보아하니 용병인 듯 한데, 감히 용병 따위가 존귀하신 아카바의 황태자 비 되실 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네놈이 죽고 싶은 게로구나!" "에엑?" 순간 제일 먼저 조슈아가 그 청초한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경악 성을 내 뱉었지만 모두의 귀에는 그녀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르쥬의 말이 종소리 처럼 맴돌며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감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히 멘디에타였다. "무…무슨 말을…….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러자 긍지 높은 남반구의 최강국 아카바의 왕실 근위대장 조르쥬는 고급 귀족 특유의 자신감을 표정 가득 담고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카바 왕국의 왕실 근위대장 조르쥬 아비아티 이다. 자네는 기사인 것 같군. 관등성명을 밝히게." "호오, 아카바의 근위대장님이 이런 곳까지 무슨 일로. 저는 시돈 왕국 성쇠 기사단장 멘디에타 쿠로우입니다." 조르쥬의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조금은 차갑게 대답하였으나 과연 공작가의 자제인 멘디에타는 표정을 흐트려 트리지 않고 격식을 차려 대답했다. 그러자 조금은 놀란 얼굴로 멘디에타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성쇠 가사단 이라면 재상 직속의 두뇌 집단이 아니오? 그곳의 수장이시라니 이거 몰라 뵈었군요." 역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같은 류의 사람은 깍듯이 챙기는 법이다. 그의 직급 만으로 조르쥬의 태도가 180도 달라 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멘디에타는 그의 예를 역시 가볍게 되받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조슈아 님이 아카바의 황태자비가 되신다고요?" 모두가 멘디에타와 조르쥬를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나게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자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온 조르쥬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일행과 조슈아 사이에 비스듬히 서서 조슈아를 오른 손으로 가리키며 공식적인 말투로 소개했다. "이분은 아카바 왕국의 제7대 국왕 바디메오 폐하의 유일의 왕위 계승자 조슈에 왕자님의 왕세자 빈으로 내정되신 에도니 가문의 영양, 조슈아 에도니 님입니다." 조슈아와 샤레셀의 황당한 표정은 아랑곳 없이 모두가 이 믿기 지 않는 현실에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아카바다 어떤 나라인가? 비록 역사는 짧지만 대륙 최고의 경제 대국이며 대륙 4강 의 군사 강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바의 무시무시한 점은 정치, 경제적 영향력이 대륙의 모든 나라를 통털어 최강이라는 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지껏 용병대장을 해온 이 당찬 미소녀의 신분이 그 엄청난 왕국의 왕세자빈 이라는 데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특히 바알의 표정은 거의 형용불가의 경지가 되어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지만 달리 할말도 없고 이미 타이밍을 놓친 조슈아는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저!"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샤레셀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조르쥬는 그제야 그녀의 존재에 신경을 돌리고는 갑자기 굳은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자 샤레셀은 마치 큰 죄라도 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조르쥬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자라목이 된 그녀를 보고 일행이 다 들을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어떻게 된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샤레셀 신녀님." 그러자 그의 말과 샤레셀의 태도에 어느 정도 상황을 인지한 조슈아가 샤레셀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설마 샤레셀 너, 말도 안하고 그냥 따라 온 거야?" 굳은 표정의 조르쥬의 눈치를 보며 샤레셀이 조슈아에게 애교스러운 눈빛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쉰 조르쥬는 일행을 쓸어 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일단 제가 치워놓은 관사에서 이야기를 합시다." 먼저 몸을 돌려 앞장을 서려던 그는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자 초췌한 얼굴을 붉히며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조슈아 아가씨도 해명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왕궁에서는 아가씨 께서 병중이신 죠슈에 왕자님의 수발을 들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말씀해 주셔야 겠습니다." 그말을 끝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는 고급기사 조르쥬의 넓은 어깨를 바라보고 시선을 돌린 조슈아의 눈에 충격을 넘어서 정신적으로 거의 질식 직전의 상황에 처한 바알의 얼굴이 들어왔다. 조슈아는 첫 키스 이후의 서먹함도 잊고 그에게 의미 불명의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샤레셀과 함께 조르쥬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해졌던 일행도 곧 그들을 뒤따라 도크를 나갔다. 한참을 도크에 혼자남아 초점 없는 시선으로 어둠 속을 보던 바알도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그들을 뒤따랐다. 2 군용 선착장답게 도크 뒤의 2층 목조건물은 상당히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조르쥬를 따라 옆 계단으로 2층 수병 숙소에 들어간 일행은 머무는 인물의 성품을 말해주듯 깨끗이 치워진 침실에 안내되어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조르쥬가 방 중앙의 탁 자위에 놓여 있는 기름 램프에 불을 붙이고 커튼을 제치자 방안의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들어 왔다. 그러다 방 구석의 간이 침대에 시선을 돌린 일행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어느 세 무심 여왕 안티오페가 자그마한 몸을 엷은 이불로 덮고 푹신한 베개에 푹 파묻혀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잠자리부터 찾은 듯 했다. 그녀는 불이 밝혀지자 잠깐 눈을 떠 일행을 돌아보고는 새 인물에게 잠시 이채로운 시선을 던진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정말로 무적의 요정 여왕다운 행동이었다. "아…아니 저 요정은 여러분의 동료입니까?" 조르쥬가 그녀를 보고 경악하여 검을 뽑으려다가 모두가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분은 요정 여왕 안티오페라고 합니다. 저희 용병단의 일원이죠." 남자 둘에 소녀가 셋, 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자그마한 요정 하나. 누가 보아도 이상한 용병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조르쥬는 노골적으로 못 미더운 표정으로 일행을 돌아 본 후, 조슈아 앞의 탁자를 얼른 빼 그녀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조슈아는 의외로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그가 빼준 의자에 앉았다. 그의 티가 나도록 특별한 친절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의 앞에서는 할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왼 편에 샤레셀을 앉히고 자신은 조슈아의 오른 편에 자리를 잡았다. 상당히 의도적인 자리 배치임이 분명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무어라 할 상황은 아니어서 모두가 조용히 대충 자리를 잡아 앉았다. 다행이 카드 놀이 용의 원형 탁자는 상당히 크고 의자도 많아서 7인이 앉고도 두 자리가 남았다. 자리가 마련되자 오히려 서먹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이야기를 하러 들어 온 것이었지만 아무도 선 듯 운을 띄지 못하는 것이었다. "먼저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근위대장님." 샤레셀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먼저 사과로써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조르쥬의 질문이 이어졌다. "샤레셀 님이 여관에 남기신 편지를 읽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십니까? 폐하께서 신녀 님을 안전하게 보호 해 일을 마치면 모셔 오라 하셨는데 배를 타시다니요. 그것도 어떤 배인지 말씀도 않하시고……. 겨우 용병단의 배를 타셨다는 것을 알아내고서 얼마나 힘들게 신녀 님을 찾아다녔는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그의 꾸중을 들으며 샤레셀이 자라목이 된 사이, 조슈아를 제외한 모두는 샤레셀의 신분이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 보다 더욱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 놀라고 있었다. 특히 에레크트라는 경애해 마지않는 스승이자 언니인 조슈아가 아카바의 왕세 자빈이라는 이야기에 넋이 나가 있었는데, 샤레셀 마저 국왕의 친애를 받는 신분 높은 신녀라는 것을 알고는 어쩐지 두려워 지고 있었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슈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온 거죠? 설마 뱃길로 온 거예요?" "아닙니다. 아빌라 국경까지 상선을 타고 와서 가사라 협곡을 지나 칼라라는 성에서 신녀 님의 이야기를 듣고 알본에 가신다는 것을 알았죠." 조르쥬가 그녀의 질문에 순식간에 굳은 표정을 풀며 나긋나긋(?) 하게 대답했다. 그때 자신의 고향이야기를 듣고 퓨어리스가 상체를 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칼라에서 아버님을 만나셨나요?" "으음. 혹시 영주 님의 따님이십니까? 무사 수업 차 용병단을 따라 가셨다는 따님이 퓨어리스 님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바로 퓨어리스에요. 아버님은 건강하신 가요?" "영주님의 따님이셨군요. 예! 제가 떠나 올 때까지는 분명 건강 하셨습니다. 떠나신지 이틀 후에 제가 도착했지만 말입니다." 그녀의 신분을 알게되자 조르쥬는 앉은 채로 가볍게 예를 표하고는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친절히 대답했다. "그럼 우리가 시빌 항을 떠나고 바로 따라 오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 용병단 이후 시돈이나 아빌라 국경 지대로 오는 배편은 분명히 끊어 졌을텐데요." 조슈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러자 조르쥬가 무언가 아깝다는 표정으로 나직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신녀 님이 타신 배 이후에는 시돈으로 가는 배가 없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밀수선을 하나 매수했죠. 덕분에 가지고 온 금화를 모두 허비 했습니다." "밀수선이라구요? 당신이?" 평소 그의 행실을 잘아는 조슈아가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그녀의 표정에 왠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르쥬는 헛기침을 한번하고 샤레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신녀님, 이제 왜 이런 곳까지 오게 되신 것인지 말씀해 주시죠." 둘의 대화에 눈을 굴리면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던 샤레셀이 '올 것이 왔구나!'라는 듯한 표정으로 호흡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어째서 시빌항에 파견되었는지 알고 계시죠?" "대충은……. 어떤 분께 폐하께서 맡기신 물건을 전해 드리라는 것이었죠." "바로 그 사람이 근위대장님도 알고 계시는 조슈아 아가씨에요." 그러나 조르쥬는 그 정도는 상황을 보아 예상했었다는 듯 별로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 물건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을까요?" 그의 말에 샤레셀이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조슈아에게 눈짓하자, 조슈아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말없이 허리춤에서 검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허억!" 별 표정 없이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려 장식없는 수수한 은빛의 검을 바라보던 조르쥬는 곧 심장이 튀어나올 듯 경악성를 내뱉었다. 도크에서의 대적 때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지만 등불을 받은 은빛의 성검은 성스러운 기류를 흩뿌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반사광을 내뿜고 있었다. "마…말고스! 말도 안돼! 왕가의 신물이 어째서……." 어전 행사 때 어깨 너머로 한 두 번 보았을 뿐이지만 성검 말고스를 못 알아 볼 그가 아니었다. 검술을 수련하는 모든 소년들이 가장 동경해 마지않는 전설의 신검이 바로 눈앞의 이 말고스 인 것이다. NEXT 제20화 어색한 만남 part 3 "아니! 이것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까? 설마 그 전해야 할 물건이라는 것이 말고스 이었던 것입니까?" 조르쥬가 놀라움과 긴장으로 터질 듯한 얼굴이 되어 소리치자 샤레셀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슈아는 다 년 간의 경험으로 샤레셀의 저 표정이 거짓말을 위한 사전 제스추어 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에 되려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요. 워낙에 기밀을 요하는 일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근위대장님을 속이게 되었지만 실은 저에게 내려진 폐하의 명령은 조슈아 아가씨에게 성검을 전하고 임무를 마칠 때까지 수행하는 것이었어요. 아시겠지만 왕가의 신물이 궁 밖으로 나간 것이 알려지면 큰일이지요. 그리고 만나야 될 상대가 조슈아 아가씨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근위 대장 님을 때어 놓아야 했는데 편지를 보시고 그냥 돌아가시지 않았군요. 사실은 이일에 조슈아 아가씨가 개입된 것도 큰 비밀인데 일단 알게 되셨으니 할 수 없지요." 쩌억―.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을 어쩔 수 가 없었다. 조슈아는 상황도 잊고 천재적인 이야기꾼인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경외에 찬 시선을 던졌다. 그런 그녀에게 샤레셀이 보이지 않게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들의 행동으로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조르쥬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바알을 비롯해 모두가 어쩐지 이 대귀족 출신의 고급기사가 마음에 들이 않던 터라 굳이 눈치를 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을 생각에 잠겨 있던 조르쥬는 정리를 마쳤는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주제넘게 나서서 일을 어렵게 만든 것이군요. 그러나 일단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신녀 님과 조슈아 님을 도와 칙명을 완수하도록 돕겠습니다. 조슈아 아가씨의 검술 실력과 신녀 님의 능력은 잘 알고 있지만 역시 알게 된 이상, 장래의 왕비 폐하를 전쟁터에 방치하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순간 조슈아는 그의 '장래의 왕비'라는 말에 바알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어째서 인지 빨리 이야기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려 하자 이미 그녀의 마음을 예상했는지 샤레셀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이야기를 막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근위대장님! 조슈아 아가씨는 아직 조슈에 왕자님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어요." "에엣?" 순간 조르쥬와 바알의 입에서 동시에 의미불명의 경악 성이 터져 나왔다. 조슈아도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지만 샤레셀이 허벅지를 꼬집는 통에 겨우 입밖으로 뱉어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그러면 궁에는 어쩐 일로……." 명백히 기뻐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조르쥬가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조슈아 까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샤레셀을 바라보았고 바알은 숨조차 쉬지 않고 긴장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샤레셀의 입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시다시피 조슈아 아가씨는 소피아 왕비 님의 아주 가까운 인척이세요. 그리고 왕자님과 나이도 같으셔서 이름도 그렇게 지으신 거죠." 단지 조슈아의 센스가 부족하여 그런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 없는 모두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나름대로 그럴듯한 해답을 유추해 내고 있었다. 특히 조르쥬는 이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고 바알은 아까의 충격으로 시체 같이 변해 있던 얼굴 색이 그런 대로 살이 있는 사람의 것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모두를 한번 돌아보고는 의기양양해진 샤레셀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왕자님은 조슈아 아가씨와 어릴 적부터 알고 계셨고, 아가씨를 평소에 연모해 오시다가 올해 16세 생일에 청혼을 하셨으나 아가씨는 거부 하셨죠. 혼인하기에 너무 가까운 친지인데다가 아가씨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다른 꿈이라면……?" 퓨어리스는 무엇인지 짐작이 간다는 듯,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애 최초의 여자 친구인 조슈아가 대륙 최강국의 왕비자리를 걷어 찬 당찬 소녀라는데 희열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스승이자 양언니가 왕가의 친척이자 왕비 후보라는데 놀라 두려움에 하얗게 질려 있는 에레크트라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 상태인 것이다. 조슈아는 그녀의 흠모와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에 얼굴을 붉히며 바알에게 살짝 시선을 돌렸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바알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고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녀석이 저런 미소를 지을 수도 있었나?' 확실히 여태껏 보여주지 않았던(기회가 없었을 수도…….) 시원하고 깨끗해 보이는 미소였다. 조슈아는 그의 환한 미소에 정신이 팔려 잠시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굳어 있다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른 고개를 돌려 샤레셀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바알이 아직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슈아는 왠지 붉어지려는 얼굴을 평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그래서 조슈아 님이 아카바의 국모의 자리를 마다하시면서 까지 성취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때 그들 사이의 감정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조르쥬가 참지 못하고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샤레셀은 연극적인 쓴웃음을 지으며 차분히 그러나 선언적인 어투로 대답하였다. "조슈아 님은 기사가 되어 약한 자를 보호하고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시고자 하십니다. 물론 자유기사로써 말씀입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답이었지만 그녀의 연극적 흡입력은 이 순간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어, 방안의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고 있었다. 모든 귀족 소녀들의 꿈인 강대국의 왕비자리를 마다하고 이 눈앞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미소녀는 고달픈 기사의 길을 가려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자유 기사란 무엇인가? 특정 왕국이나 기사단에 적을 두지 않고 오직 기사도와 정의감으로 움직이는 고달픈 정의의 순례자인 것이다. 모두는 새삼스럽게 감탄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듣고 있는 조슈아가 다 감동을 받을 지경인데 그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때 모두와 마찬가지로 감동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멘디에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으음……. 그렇군요. 확실히 왕비가 되시면 기사를 하실 수 없으니 까요. 허 어……. 저도 돌아가신 소피아 왕비 님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 에도니 가문은 대단하군요. 2대에 걸쳐 이런 여검사를 배출하다니……." 결국 조슈아는 완전히 어머니의 가문인 에도니 가 사람으로 몰려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외가는 돌아가신 모친이 왕비가 된 이래 단 한번도 사교계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어 그녀도 단 한번 외할아버님을 본적이 있을 뿐이었다. 외할아버님은 평민이었으나 학식이 풍부한 운둔 학자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그만큼 고지식하여 자식이 왕비가 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집안의 영달에 이용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에도니 가문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더욱더 존경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문에 대하여 잘 알고 싶었던 그녀에게는 어릴 적부터 외가의 그런 태도가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었다. 조슈아는 일행의 눈이 잠시 맨디에타에게로 쏠린 사이 살짝 바알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평소 아껴두었던 아찔하게 멋진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는 얼른 고개를 돌려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바알의 평소답지 않은 이상한 미소를 머리 속에서 지우려 노력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샤레셀이 말한 내 거짓 신분에는 그리 놀라는 것 같지 않았어.' 그렇다! 모두가 그녀의 가문 이야기를 했을 때 놀라움을 넘어 경악하던 표정들이 역력했는데 바알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던 것을 그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나는 바알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 ' 조슈아는 그의 오랜 동거(?) 상대의 정체에 대하여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튼 모두가 감탄을 넘어 존경의 시선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는 동안 샤레셀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조슈아에게 맡겨두면 엉뚱한 의심을 사게 될 거야. 내가 확실히 마무리 해야지.' 그녀는 열띤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는 조르쥬에게 비밀이야기를 하듯 재차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위 대장 님도 왕자님이 병으로 몸져누우신 이후 아가씨가 궁으로 찾아오신 것은 알고 계시죠?" 조르쥬가 고개를 돌려 고개를 끄떡여 긍정을 표했다. "이것은 사실 비밀인데 아가씨가 궁에 오신 이유는 왕자님의 병이 아가씨에 대한 상사병이었기 때문이에요." '허억!' 모두가 그녀의 말에 놀라워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조슈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이다. 자신을 상사병으로 몸져누운 얼간이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모두가 샤레셀의 말에 수긍을 하고 있는지라 감히 끼어 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조르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떡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샤레셀의 그럴 듯한 설명으로 조슈아를 처음 본 이래, 매일 밤 그를 괴롭혀 오던 애틋한(?) 사랑의 상처에 새 살이 돋아 옴을 느꼈다. 상황을 불편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샤레셀 이었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멘디에타가 탁자 위의 성검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조슈아 님은 아카바에 왕자님의 병간호를 하다가 갑자기 칙명을 받고 시돈에 왔다는 것인데, 상황으로 봐서 조금은 이상하군요. 어째서 조슈아 아가씨를 보낸 겁니까? 목적은 무엇이죠?" 그의 정확한 지적에 조르쥬도 그 말을 하고 싶었다는 표정으로 샤레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슈아는 흠칫 했지만 샤레셀은 이미 생각해 두었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전에 아가씨가 멘디에타 님에게 대충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아가씨와 저는 시돈에 누군가를 찾으러 왔어요. 그리고 사정상 자세히는 말씀 드릴 수 없지만 성검 말고스와 관련이 있지요. 아시다시피 아가씨는 훌륭한 검사이지만 아직 16세로 어리셔서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칙명을 완수하여 기사 작위를 받고 싶어하시죠. 그리고 그 일은 폐하와 저희만 아는 비밀이기 때문에 다른 기사 님을 쓸 수도 없는 기에 부득이 가까운 친지이신 조슈아 아가씨에게 칙명을 내리 신 거예요." "허어∼. 그럼 아가씨는 알본에서 칙명을 완수하시면 기사 작위를 받으시는 겁니까? 만약 성사된다면 대륙을 통 털어 여인으로써 가장 빠른 작위 수여가 되겠군요. 거기다 왕실 기사단도 아니고 자유 기사가 되신 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멘디에타가 그녀의 말 솜씨에 넘어가 손뼉을 치며 감탄해 했다. 조르쥬도 감탄한 얼굴은 마찬가지 이었으나, 아직도 조금은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비밀 칙명이라 시니 제가 여쭐 수도 없겠지만 한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그 칙명은 이 전쟁과 관계가 있습니까?" 순간 의기 양양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가던 샤레셀이 조용해졌다. 이 대답만큼은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 단에 들어온 것이니까요. 저의 사명과 시돈의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샤레셀이 눈치를 주기도 전에 조슈아가 먼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런 이야기 전개라면 자신이 왕가의 신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럼 그 아카바의 왕자는 어떻게 할거지?" 그때 처음으로 계속 부담스러운 미소를 짖고 있던 바알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당연하지만 조르쥬가 발끈 하며 일어나 소리쳤다. "이런 무엄한……!" "근위 대장님 여기는 아카바가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용병단원일 뿐이고요." 그때 조슈아가 나긋나긋(?)하나 꾸짖는 듯한 느낌의 목소리로 끼어 들어 조르쥬는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끄응'하며 주저앉았다. 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미 망가진 조슈에 왕자의 이미지는 포기한 듯 처연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왕자님이 저를 원하셨지만(으음…) 저는 기대에 부흥 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계속 저를 원하셔서 저는 흥정을 했지요. 제가 이번 칙명을 완수하면 저를 포기해 주시라고요. 그래서 허가를 받았지요." 떠억―. 식당 개 3년이면 수프를 끓인 다고 했던가? 이번에는 샤레셀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차례였다. 조슈아의 마무리로 완벽한 거짓말이 만들어 진 것이다. 미심 적은 표정이었던 조르쥬도 이제는 완전히 믿는 눈치였다. 콰당―. 갑자기 바알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나 입이 귀까지 닫을 정도로 함박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그러면 그 칙명이라는 걸 완수하면 조슈아는 자유라는 것이구먼? 하하하! 좋았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완수하게 도와주지!" 용기 백배한 바알의 믿음직한 웃음에 기가 질린 것인지 아니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번에는 조르쥬도 반박하지 않고 상기된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조슈에 왕자님에게는 죄송하지만 나도 이번에는 포기하지 못한다. 아가씨 쪽에서 왕비가 되는 것을 마다하신 것이지 않은가? 조르쥬! 너에게도 기회는 있는 거 야.' 두 남자가 연분홍 빛 꿈에 절어 있는 가운데, 너무 시끄러워 잠에서 깨어나고 만 안티오페는 사랑의 분홍빛 오라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도대체 인간의 사내라는 것들은 변하지를 않는군. 그저 예쁜 여자만 보면 발정난 노새처럼 열들을 올리니." 마치 그런 류의 경험을 많이 해본 것 같은 그녀의 말투였지만 다행히 아무도 듣지는 못한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현은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한 남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며 분발을 다짐하고 있었고, 다른 한 남자는 초췌한 얼굴에 장미 빛의 홍조를 띠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간 이 두 바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들이었다. NEXT 제20화 어색한 만남 part 4 조르쥬가 두 주에 걸쳐 만들고 있던 소형 범선은 이제 거의 완성단계였지만 강에 띄어 보기 전에는 쓸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일행 중 누구도 배를 만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태로워 보이는 엉성한 배라해도 일행에게는 감지덕지, 일행은 그들을 미리 기다리고 있던 조르쥬 덕에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멤버가 멤버다 보니 빠른 행군이 불가능했고 이런저런 사건도 많았던 조슈아 일행과 달리, 이곳까지 일사천리로 달려온 조르쥬는 고급기사 답게 조슈아 일행이 육로로 성도 알본에 간다면 이 선착장을 경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샤레셀을 기다린 것이겠지만 이제는 오직 조슈아 만 눈에 들어오는 그였다. 모두가 합심하여 범선 건조에 피치를 올리기 시작한지 이틀, 드디어 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입수식을 하기로 결정을 보고 그 날밤은 바알과 조르쥬가 경쟁을 하듯 잡아온 산짐승들과 멘디에타가 잡아온 물고기들을 의외의 재능을 많이 가진 샤레셀이 훌륭히 요리해내어, 오랜만에 풍성해진 저녁 식탁은 그대로 파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연적이 되어 버린 두 남자에게 술이 들어가게 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우장창―. 바알이 의자를 밀치며 일어나는 바람에 주위의 식기들이 밀려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나마 도크 앞 잔디밭에 식탁을 차려 아까운 식기가 깨지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 이었다. "이 자식! 네 놈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는 거냐?" 결국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사랑하는 남자는 민감하다고 했던가? 조르쥬는 이 신분 낮은 용병 출신의 사내가 조슈아를 사랑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누구라도 보면 알겠지만.) 그를 조슈아의 주위에서 밀어내기 위해 그의 신분을 물고 늘어지며 그를 벌레 보듯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당히 저열한 방법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상대에 따라서는 언제나 상당한 효과를 거두는 공격방법임에는 분명하다. 그래도 조슈아의 언질이 있어 참고 있는 두 남자였지만 둘 에게 술이 들어가자 묵혀 두었던 감정이 극에 달해 드디어 오늘밤에 일이 터지고 말았다. 조르쥬는 술자리에서 바알이 페드라 출신의 용병이라는 것을 비꼬아 말장난을 쳤고 술이 들어간 바알은 그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고함을 치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바알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지만 누가 저녁식사에 검을 차고 나오겠는가? 조슈아는 가운데 끼어 붉어진 얼굴로 포도주 홀짝이며 이 촌극을 지켜 볼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 알 리가 만무한 그녀 였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조슈아 라지만 이제 그녀도 아리따운 소녀로서의 경력이 4개월 이상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어쩐지 조르쥬 앞에서는 평소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궁에서 조르쥬의 사랑고백에 한번 압도된 이래로 도저히 그의 앞에서 이렇다할 힘을 쓸 수 없게된 것이다. 그녀는 그저 불안한 눈을 두 남자를 훔쳐보는 에레크트라의 손을 잡아 안심시키고 헛물을 키는 두 남자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샤레셀을 흘겨보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남자의 사랑싸움에 여자가 끼어 들면 화롯불에 기름을 뿌리는 격이라지 않던가? 아무튼 혈기 왕성한 두 사나이가 당장 에라도 서로 피를 뿌릴 듯 불꽃을 튀기는 것을 바라보던 멘디에타가 맛있게 요리된 사슴고기 한 접시를 깨끗이 먹어 치우고는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달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자자! 두 분다 진정하시죠. 숙녀 분들이 걱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운을 땐 멘디에타는 조슈아를 힐끗 돌아보며 동조를 구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평소라면 무언가 눈치를 챌 두 남자였겠지만 이미 상당히 취해 있는 데다 흥분까지 해서 그의 그런 행동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조슈아는 멘디에타가 무엇을 바라는지 파악하고, 일단 칼부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연약하고 걱정에 가득한 얼굴 표정을 만들어 냈다. 예전 같으면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지어 보이지 않을 표정이었으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소녀로서의 처세술에 익숙해지고 그 편리함도 이용할 줄 아는 슬픈(?) 적응을 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남자는 멘디에타의 말에 흠칫하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멘디에타는 '숙녀 들'이라고 했건만 그들은 노골적으로 조슈아에게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에레크트라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떨고(으음….)있는 극미(極美)의 16세 미소녀……. "끄응……." 누가 먼저랄 것도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의미 불명의 신음 소리가 세어 나왔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두 명의 절정 검사들이 이대로 분을 삭히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 역시 머리 좋은 멘디에타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독한 포도주가 가득 담긴 소가죽 수 푸대를 식탁 위에 올려놓더니 마치 싸우는 제자 사이에 끼여든 선생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두 분에게는 결투가 필요한 것 같군요. 그러나 아리따운 숙녀 분들 앞에서 피를 보는 일은 삼가 해야 갰죠." 아리따운 숙녀들이라는 말에 에리크타라가 상황도 잊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퓨어리스와 조슈아, 이 두 소녀 검사들은 두 사내의 결투 따위야 저녁 식사의 여흥 거리 정도로 밖에 인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일단 그의 말대로 나머지 두 명의 소녀들 앞에서 피 터지는 싸움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멘디에타가 말한 아리따운 숙녀들은 엄밀히 따지면 샤레셀과 에레크트라 뿐 인 것이다. 하여튼 두 사내는 아직도 애처로운 표정으로 도배하고 있는 조슈아의 얼굴 덕에 멘디에타의 말에 공감하며 그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결론은 무식한 사내들을 위한 무식한 싸움의 대명사 주량 대결! 바알이 가져온 세 푸대의 포도주와 조르쥬가 창고에서 발견해 쌓아 두었던 정체 불명의 과일 주 다섯 통이 운반되어 왔다. 술의 양을 확인하는지 잠시 푸대와 통들을 살피던 멘디에타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두 남자를 위협적(?)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두 분에게 공평하게 술을 따라 드립니다. 먼저 기권하시거나 쓰러져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된 쪽이 지는 겁니다." 그의 미심 적은 태도에 아랑곳 안고 바알이 술집용의 걸쭉한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죽을 각오를 해야 될 거다. 왕실 기사 출신의 샌님아! 이 몸은 태어나자마자 모유 대신 술을 마신 몸이다. 네 놈이 내일 일어나지 못하면 이 몸이 친히 강물에 던져 깨워주마!" 허세라기에는 수준이 낮고, 협박이라기에는 현실성이 없는 싸구려 술집용의 세리프 이었지만 어쩐지 억지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은 바알의 재능이라면 재능이리라. 하지만 조르쥬는 그의 말을 콧등으로 받아넘기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훗! 싸구려 용병의 싸구려 술로 과연 주력이 단련이 될까? 이 몸은 어린 시절부터 최상급의 술로 단련되어 왔다. 네놈이 주독(酒毒)으로 죽으면 산짐승에게 먹이 감으로 던져 주고 가마, 아마 냄새가 나서 먹지도 않겠지만." '바보 같은 녀석들. 쓸 때 없는 싸움이나하고, 도대체 싸움에 사설이 왜 이리 긴 거야? 그냥 둘 다 쓰러뜨려 놓고 우리끼리 가버려?' 사내들의 유치한 입담을 듣고 있던 처연한 미소의(재미를 붙인 듯….) 미소녀 조슈아는 만약 두 사내가 모두 쓰러진다면 친히 강에 던져 고기밥을 만들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두 사내의 나무 술잔 가득 '자펠' 마을에서 가져온 덜 숙성된 햇 포도주가 따라 졌다. 숙성이 덜된 포도주는 향취는 약하나 그만큼 알코올 기운이 강한 법이다. 맥주 잔이나 다름없는 커다란 나무잔에 가득한 포도주에서는 냄세 만으로도 취할 듯한 화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실제로 조슈아와 샤레셀은 작은 잔으로 반잔을 마셨을 뿐이었지만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미 대 여섯 잔을 마신 두 사내는 저것으로 대결을 한 다는 것이다. 다 큰 사내들이 벌이는 시끄러운 촌극에 언제나 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무심 여왕 안티오페도 어느새 조슈아의 어깨에 날아와 앉아 때에 따라 한심하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내와 술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식사라고는 과일을 조금 먹을 뿐인 그녀 였지만, 코를 톡 쏘는 독한 포도주 향에는 관심이 있는 듯 냄새를 음미하는 것이다. "자! 시작하시죠.!" 상황을 보고 있던 멘디에타가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두 사내는 둘의 사이에 끼여든 다면 누구라도 눈빛에 맞아 죽을 정도의 험악한 눈싸움을 하다가 멘디에타의 신호 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술잔을 들고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콰앙―. 그리고 동시에 소리나게 술잔을 식탁에 내려놓는 두 사람……. 씨익―. 보기만 해도 취할 것 같은 독한 포도주를 한번에 위장에 부어 버린 두 사람을 감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행은 아랑 곳 없이, 바알과 조르쥬는 배속에서 끓어오르는 화기를 감당하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객기를 부리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는 기괴한 미소를 서로 에게 지어 보였다. 그러나 딴에는 호기를 부려 본 것이겠지만 둘의 미소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었다. 둘의 상태를 살피던 멘디에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두 잔 째의 포도주를 부었다. 쪼르륵―. 커다란 술잔에 독하디 독한 포도주가 다시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내는 재주 좋게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서로 내색은 하지 않고 딴에는 승리를 확신한다는 의미의 처절한 미소를 풀지 않았다. "크크, 농! 벙썽 해롱댕능 겅이냐? 긍 엉그는 뭐냐?" 바알이 먼저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음은 남방사투리라서 그려러니 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엄청난 주력으로도 이런 독주를 한번에 마신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흐흐, 나는 술이 맛있어 음미하는 중이었다. 네놈이야말로 그 발음은 뭐냐? 페드라에서는 그런 사투리를 쓰는 것이냐?" 조르쥬는 바알보다 언어 기관의 기능을 회복하는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린 듯 잠시 입을 뻐끔거리더니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크게 되받아 쳤다. 발음기관은 정신력으로 회복하였으나 청각은 그렇지 못해 자신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알도 마찬가지여서 바보사내들의 대결을 관전중인 모두는 술취한 두 사내가 형용불가의 기괴한 언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을 계속 들어야할 판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열 두 번째 잔에 이르러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두 사내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바알에 비해 잔을 비우는 속도는 떨어 졌지만 과연 극한으로 단련된 검사인 조르쥬는 정신력으로 버티었다. 그의 붉은 색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이제는 새 하얗게 질려 있었건만 그는 술잔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주당인 바알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도 이미 한계를 넘어 서고 있는 이상 이것은 이제 정신력 싸움인 것이었다. 타악―. 바알이 열 두 번째의 잔을 들이키고 숨을 돌릴 세도 없이 조르쥬가 빈 술잔을 식탁에 내리쳤다. 이미 그것은 호기를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아닌 어둠 저편으로 넘어가려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한 행동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조금도 사정 보지 않고 두 남자의 잔에 말없이 열 세 잔 째의 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조슈아는 아마도 이 음흉한 시돈의 젊은 기사가 두 남자를 적국의 스파이로 여겨 주살 하기로 마음먹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때 열 세 번째의 잔을 들고 사약을 받은 대역죄인의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던 에레크트라가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어머, 저런 독한 술을 열 세 잔이나 마시다니. 오빠들이 죽으면 어쩌죠? 내가 일했던 술집주인 아줌마도 저 정도의 독한 술은 스무 잔이 한계였는데……." "흐읍……." 분명히 청각이 마비되었을 두 사내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헛 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세어 나왔다. 일행도 모두 놀라고 있었지만 지금 열 세잔 째의 술에 목숨을 걸고있던 두 사내에게 철없는 에레크트라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두 남자는 이후로 일 곱잔의 독주를 더 받는 끔찍한 상상을 하고 만 것이다. 이미 이성은 꿈의 여신 루리아의 치마폭에서 징그러운 어리광을 부리며 뒹굴고 있었고, 모든 감각과 신경은 개미 열 마리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경지로 망가져 있었지만, 어쩐지 그녀의 말만은 뇌리에 울려 퍼져, 겨우 현상를 유지하고 있던 정신력의 버팀목을 사정없이 도끼질하였다. "우웨엑……."(ㅠㅠ) 두 사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가장 우려하던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식탁 위는 두 사내가 사이좋게 뿜어내는 포도주로 흥건히 젖었고, 순간 모두가 기겁을 하며 식탁에서 멀어졌으나 천재 검술 소녀 조슈아 만이 완벽히 피했을 뿐, 나머지는 두 사내가 뿜어대는 포도주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우우우……." 거의 죽음 직전의 상황에서 해방된 두 사나이는 승부 중이라는 것도 잊고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바닥으로 허물어 졌다. "아앙! 이게 뭐야!" 졸지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만 일행을 대표하여 샤레셀이 우는 수리를 내며 붉게 물든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술집경력 4년의 12세 소녀 에레크트라는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잽싸게 일어나 더러워진 식탁을 닦아 내어 출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면 무승부이군요. 이 상태로는 더 싸울 수도 없을 테니 그냥 자게 놔두죠?" 일행 중 조슈아 다음으로 피해가 적었던 멘디에타가 한숨을 내쉬며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자 더 이상 시끄러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두가 침묵으로 동의를 표하였고, 조슈아는 쓰러진 두 남자의 주독으로 일그러진 처참한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던 걸까? 역시 처음부터 관계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이 녀석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하니…….' 그녀는 서로 엉켜 넘어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두 사내를 바라보며 살짝 얼굴을 붉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급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다행히 뒤처리에 바쁜 일행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당신은 어느 쪽이지? 저쪽의 덩치 큰 전사야? 아니면 왼편의 자긍심강한 사내야?" 그때 갑자기 조슈아의 오른편 어깨에서 의표를 찌르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 와 그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였다. 조슈아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느라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요정여왕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엉덩이에는 흡판이라도 달렸는지 쏟아지는 오물을 피하기 위해 심하게 움직였던 그녀의 어깨 위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세를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무…무슨 말이에요? 안티오페? 어느 쪽이라뇨?"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돼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인정 할 수 없는 그녀의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인간적 감정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한 안티오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정론을 내 뱉었다. "저 두 남자 중에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는 말이야. 당신이 누군가를 선택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많은 사내들이 당신 때문에 싸우고 더러는 죽기도 할거야. 그리고 인간의 소녀는 사랑을 받으면 언젠가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니까. 그럼, 아직 정하지 않은 거야?" "……." 어디서 저런 류의 고리타분한(?) 상식을 얻은 것일까? 그녀는 의외로 확실한 연애 관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상황에 맞물려 어쩐지 그녀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안티오페의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소녀는 사랑을 받으면 언젠가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니까.' 조슈아는 마음속으로 안티오페의 말을 돼 내이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틀 동안 두 남자의 행동으로 자신이 소녀로서 주위에 미치는 영향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 해온 것이다. 표면적으로야 자존심 싸움이지만, 두 남자가 자신을 놓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그녀였다. 예전 같으면 두 남자가 모두 조슈아에게 얻어 터져 강에 버려졌을 터였으나, 어떤 정체 불명의 감정이 있어 그녀를 선뜻 나서지 못하도록 막았었다. 그런데 인간도 아닌 요정의 말한 마디로 그녀는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감정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다. '나는 저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약해진 것인가?' 끝에 가서 또 엉뚱한 대로 빠지는 그녀 였지만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답이 나와 있었다. 다만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본래의 긍지 높은 16세 소년으로써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무엇인가가 붕괴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리라. 조슈아는 추한 모습으로 한 대 엉켜 사경을 헤매는 두 남자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가볍게 상기된 것은 오직 안티오페 만이 볼 수 있었지만 무심한 요정여왕은 어느 세 집어들었는지 조그마한 술잔을 양손으로 받쳐들고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비록 술에 절어 있었지만 제법 쌀쌀해진 늦가을의 강가, 두 남자도 추위를 느끼는지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최대한 몸을 붙여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였다. 그리고 뒷정리가 끝나 모두가 숙소로 자러가고 십 여분 후, 커다란 모포를 들고 나와 두 남자를 덮어주고 죄라도 지은 듯 황급히 숙소로 사라지는 소녀가 있었다. 달빛을 받아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화려하게 빛나는 긴 머리칼이 그녀의 정체를 말해 주고 있었지만 두 남자는 본능적으로 모포를 끌어당길 뿐, 모포를 가져온 상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적과의 동침에 치를 떨겠지만 여하튼 지금으로써는 평화로운 풍경을 연출하는 두 남자였다. NEXT 제21화 수인족(水人族)의 공격. 다음날 아침, 적과의 동침을 하고 만 두 사내는 다행히 우려할 만한 충돌은 일으키지 않았다. 둘이 따로 깨어난 덕도 있었지만, 무엇 보다 엄청난 숙취로 인해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정오가 되어 계획했던 대로 드디어 공들여 만든 배의 입수 식이었으나, 두 남자는 구토를 참는 것이 역력한 누런 얼굴로 멘디에타와 4인의 소녀들이 버팀목을 쳐내어 배를 강에 띄우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첨벙―. 입수로를 따라 강으로 시원하게 미끄러져 들어간 범선은 큰 포말을 일으키며 배 앞머리가 조금 가라앉았었으나 금방 떠올라 도크 앞의 여울에서 출렁거렸다. 촤악―. 배에 묶어둔 닷 줄이 수면을 때리며 채찍 소리를 내는 가운데, 모두가(사실은 조르쥬 혼자) 힘들여 만든 범선은 걱정과 달리 별 무리 없이 강 위에 떠 있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 보다 매우 잘 만들어 진 것 같군요." 빠른 물살을 감안해 자신의 주장대로 상당히 보강된 뱃머리를 바라보며 멘디에타가 조금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크가 인공적인 여울 위에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빠른 강물 줄기가 도크의 화강암 부두에 부딫이며 그 앞에 조그마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의 초보들이 만든 중형 범선이 별로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유유히 떠 있는 것이 다. 그때 아직도 샛노란 얼굴로 당당하게 떠있는 배를 바라보던 조르쥬가 조금은 실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을 대비해 전선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냥 수송선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군요." "아니에요. 정말 훌륭한데요." 그의 말에 조슈아가 위로의 말을 던지자 샛노랗던 조르쥬의 얼굴에 살짝 화기가 돌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바알이 아니꼬운 시선으로 배를 바라보았지만 조슈아의 말대로 배는 상당히 괜찮은 모습을 하고 있어 꼬투리를 잡았다간 이상한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었다. "자! 일단 닷 줄을 당기도록 합시다." 멘디에타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크게 소리치며 팔을 걷어 부치자 모두가 닷 줄에 매달려 배를 당겨 부두에 정박시켰다. 그때 배에 실을 짐을 체크하던 멘디에타가 마구간을 바라보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일단 물살이 빠르기 때문에 제대로만 간다면 알본 까지 3일이면 다다를 겁니다. 그러나 혹시 모르니 식량은 가급적 많이 실어야 겠죠. 그리고 6마리의 말을 태우고 갈 수도 없으니 아쉽지만 놔주도록 합시다." "그러면 알본에서는 어떻게 이동하지? 그리고 그 이 후 에는?" 바알이 '설마 걸으라는 말이냐?'라고 써있는 듯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러자 조슈아의 응원에 기력을 찾은 조르쥬가 기회라는 듯 냉랭하게 대답했다. "훗! 용병이라는 녀석이 그런걸 일일이 말해주어야 알아 듣냐? 알본은 바로 이 강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강만 건너면 전선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다. 알겠냐? 바보 놈아!" 뿌드득―. 조르쥬의 도발에 말려든 바알이 이빨을 갈며 검을 뽑아들려 하자 조슈아가 둘 사이에 끼여들어 날카롭게 소리쳤다. "둘 다 그만 두지 못해요? 조르쥬, 애들도 아니고 그 싸움 거는 듯한 말투는 뭐예요? 그리고 바알, 만약 검을 뽑으면 다시는 말도 안 붙일 줄 알아!" "끄응……." 당장에 서로 에게 달려들려 했던 두 남자는 동시에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나 바알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조슈아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씨이∼. 저 녀석에게는 존대고 나는 반말이냐?' 그리고 조슈아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바라보던 조르쥬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바알의 우직한 얼굴을 바라보며 내심 질투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으음∼. 나에게는 깍듯한 존대이고 저 싸구려 용병 놈에게는 친숙하게 반말이라 니……. 내 저놈을…….' 둘의 적대감은 어이없는 이유로 더욱더 부풀어올랐지만 조슈아는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누구의 말인데 거역하겠는가? 두 남자는 흉흉한 시선을 서로에게 던졌지만 그대로 조용히 물러나 묵묵히 짐을 짊어지고 배에 나르기 시작했고, 위압적인 분위기에 얼어 있던 소녀들도 곧 자잘한 물품들을 들어 배로 날랐다. 그 사이 조슈아는 마구간으로 가서 말들의 고삐를 풀러주고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지만, 짧은 여행 동안 정이 들었던 흑마에게 작별을 고했다. 말도 그녀와의 이별이 아쉬운 것인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문지르며 애교를 떨었다. 배에 모든 물품을 싣고 닷 줄을 풀어 여울에서 멀어질 때까지도 말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르쥬가 키를 움직여 물살을 따라 배를 강으로 이동시키자 배를 따라 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안녕!" 일행을 대표해 에레크트라가 제일 먼저 말들을 향해 울먹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배가 물살을 타며 급격히 빨라지며 말들과 서서히 멀어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되자, 12세 소녀 앞이라 체면 때문에 참고 있던 나머지 일행들도 결국 에레크트라를 따라 열심히 손을 흔들며 여행길에 충실한 벗이었던 말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 들은 예상보다 훨씬 강한 물살에 당황하여 키를 붙잡고 사색이 되어 있는 조르쥬는 눈에 들어오고 있지 않는 듯 이미 보이지 않는 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의 여운을 음미하고 있는 가운데, 오직 안티오페 만이 불쌍한 조르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조그마한 가죽 주머니에 담아온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1 조슈아 일행을 태운 배는 졸속으로 만든 것치고는 상당히 시원스럽게 강을 가르며 알본을 향해 나아갔다. 처음 예상 보다 매우 빠른 물살에 당황했던 조르쥬도 하류로 내려 갈수록 강폭이 넓어지면서 그에 비례해 물살도 약해져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더 이상 바알과 조르쥬의 충돌이 없는 것은 일행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선착장을 떠난 이래 마치 토라진 어린애들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첫 날밤은 모두가 조심스럽게 둘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조르쥬와 바알이 돌아가며 키를 잡았고, 이틀째 되는 날 아침에는 멘디에타가 긴장한 얼굴로 키를 잡았다. 물살이 강하여 조금만 방심하면 강가의 바위들을 들이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잠시도 키를 놓을 수가 없어 남자들이 계속적으로 돌아가며 배를 몰아야 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었건만 일행이 걱정한 것과 같은 마물의 공격은 없었다. 그리하여 일행은 어느 정도 긴장을 풀고 간만의 배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소녀들만의 이야기이지만……. 쏴아아―. 이튿날 정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해가 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 빗줄기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시돈 땅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맞는 비여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조슈아 일행은 추위에 떨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열사의 땅인 페드라에서만 살아온 에레크트라는 보기에도 딱한 지경으로 심하게 떨고 있었지만 배의 구조상 얇은 천막으로 비를 피할 수밖에 없어서 샤레셀의 품에 안겨 겨우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음에는 어린 그녀에게 독한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어느 정도 체온을 유지하였지만 그나마 배 멀미로 토해버리니 방법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 기온에 비까지 내리다니, 이틀은 더가야 하는데 선실도 없는 배에서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언제나 처럼 바알이 제일 먼저 투덜거렸다. 그러자 일행은 긴장한 얼굴이 되어, 비를 맞으며 묵묵히 키를 잡고 있는 죠르쥬에게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만든 배에 투덜거리는 그에게 당연히 화를 내어야 할 수순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기가 죽은 얼굴이 되어 연시 조슈아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상대가 반응이 없어 흥이 깨어진 바알도 입을 다물고 가볍게 몸을 떨며 안개 낀 강 하류로 시선을 돌렸다. 사나이로서 이런 일을 기회 삼아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판단한 것이리 라.그러나 그의 그런 예상은 조르쥬의 실제 생각과는 달나라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조슈아 아가씨가 말씀은 안하고 계시지만 대단히 추우실 것이다. 아아∼ 나는 왜 이리 멍청한가! 어째서 설계 때에 선실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냐!' 누가 보아도 첫 작품으로서는 훌륭한 범선이었으나 이런 경우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그를 자괴감의 늪에서 건져 줄 수 없었다. 소녀들은 모두 가죽옷 안에 모피까지 걸치고 옹기종이 모여 앉아 있었지만 밤새 내린 비를 고스란히 맞아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거기다 배 위이기 때문에 불을 지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배를 정박하고 쉬고 가려고도 생각해 보았었지만 알본 항에 다다르기 전에는 중형범선을 댈 만한 선착장이 없었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변에 바위가 많아 접근하기도 쉽지 않고 조각배도 없는 것이다. 그때 심하게 떨고 있는 에레크트라를 안고 있던 샤레셀이 한기를 겨우 참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밤이에요. 오늘밤에도 계속 비가 내린다면 저희는 몰라도 에레크트라의 체력이 감당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안티오페를 바라보았다. 안티오페는 나신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추위를 타지 않는 듯,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안개 속에서 풍겨 나오는 소나무 숲의 냄새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샤레셀을 쳐다보았다. "저, 안티오페. 폐가 안 된다면 우리를 강변까지 좀 날라주실 수 있겠어요?" "아∼!" 순간 모두가 추위도 잊고 탄성을 질렀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모두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안티오페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별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 생각해보는 기색도 없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폐가 돼." "허억!" 이번에도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헛 바람을 들이켰다. 설마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싫다는 데 어쩌겠는가? 이렇게 가냘픈 요정에게 모두를 들어 옮겨 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강요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과연 철없는 12세 소녀 에레크트라는 달랐다. "안티오페 아줌마. 제발 부탁드려요. 너무 추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전에 바알 아저씨를 쉽게 안아 들고 언덕까지 오르신 적도 있잖아요." 그러자 역시 생각 해보는 기색도 없이 안티오페가 대답했다. "좋아. 그럼 여기에 배를 멈추도록 해. 내가 한 명씩 날라줄게." "에엣?" 또 다시 의표를 찔린 모두가 의혹의 합창을 내 뱉었다. "방금 안된 다고 했었잖아요!" 부탁을 들어준다는 데도 불구하고 샤레셀이 체면도 잊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안티오페는 조슈아의 어깨에서 날아 내리며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대답하였다. "당신은 폐가 안되면 도와 달라고 했잖아." 유구무언. 무슨 말을 하겠는가? 샤레셀은 기가 막힌 듯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때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조르쥬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질문하였다. "그런데 저 요정이… 아니 요정 님이 정말 저 몸집으로 우리를 들어 옮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비밀을 알고있는 바알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크……. 놈! 눈이 빠지지 않게 조심하거라." "?" 순간 바알이 어떤 의미로 그런 말하는지 잘 아는 소녀들이 모두 그를 째려보자 바알은 자라목이 되었고, 조르쥬는 멍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조슈아의 어깨 위에서 떠올라 큰 날개 짓을 하며 반짝이는 초록색 가루를 흩뿌렸다. 그리고……. "허억!" 조르쥬는 일행이 기대하던 것 이상의 반응을 보여주며 자지러 지고있었다. 키잡이용의 고정된 나무 의자에서 넘어지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른 것이다. 아카바의 근위대장인 그로서는 죽는 순간에도 보여주어서는 알 될 장면이었으나 그런 것은 지금 그에게는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올해로 22세가 되는 아카바의 최연소의 근위대장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인의 나신을 보게된 것이었다. 거의 조슈아의 키만큼 커진 안티오페는 그의 신선한 반응에 조금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도발적인 자세임에 틀림이 없는 포즈를 취하며 비에 젖은 초록색 머리칼을 쓸어 넘겼 다. 이미 익숙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얼굴이 조금은 붉어 졌건만, 조르쥬는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으음……. 그럼 닻을 내리도록 하지요." 멘디에타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말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두 남자는 대답 없이 강철로 만든 무거운 닻에 매달렸다. 선착장의 도크에는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물품이 모두 있었고, 당연히 닻도 있었지만, 전함 용 뿐이어서 이런 범선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크기를 자랑하고있었다. 풍덩―. 은빛의 거대한 닻은 순식간에 어두운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곧이어 닻줄이 팽팽해지며 이음쇠 부분에서 마찰음이 들려왔다. "좀더 강가로 가서 배를 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샤래셀이 질문했다. 그러자 조르쥬가 아직도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한 얼굴로 나직이 대답했다. "신녀님, 지금은 안개도 많고 날도 어두워서 배 밑이 보이지 않습니다. 함부로 강변으로 갔다가 바위에 부딫 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요. 특히 페리얼 강은 암초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강가에 보급 항이 필요한 겁니다. 그전에 보신 그 선착장도 병력을 동원해 인공적으로 여울을 만든 것이죠. 보통 조각배면 몰라도 중형선 이상이 정박할 곳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멘디에타가 거들었다. 그사이 닻이 강바닥에 닿았는지 배가 한번 심하게 흔들리더니 곧 멈추었다. 그때 도르래에 남아 있는 닻줄의 길이를 본 바알이 소리쳤다. "이거 정말 깊은 강이구먼, 남은 줄이 이 정도라면 깊이가 거의 장정 열 명 이상을 세워놓은 정도이겠는데?" 그의 말대로 닻이 바닥에 닿으면 걸려서 더 이상 빠져나가지 않도록 장치된 도르래에는 거의 닻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 감아 놓은 닻줄의 길이가 거의 바알의 키에 10배정도 였으니 그의 큰 체격을 감안하면 강의 깊이는 상당한 것이었다. 수영을 못하는 바알로서는 이만저만 겁나는 일이 아닌 것이다. 평소 같으면 '용병이 수영도 못한다는 말이냐!'라고 놀려대었을 조르쥬도 도르래에 남은 닻줄을 보고 하얗게 질린 얼굴이 더욱더 질려 있었다. 산간지방인 메디나 출신인 그도 수영을 배워볼 기회가 없기는 마찬 가지였던 것이다. "누가 먼저 갈 꺼야?" 그들의 두려움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안티오페의 억양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극미의 나신을 드러낸 채, 도발적인 포즈로 서서 모두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의도한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슴 밑으로 팔짱을 끼고 서있는 그녀의 자세는 매우 색정적(?)으로 보였다. 아마도 그녀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남자를 유혹하여 정기를 빨아먹는 마녀로 비쳤을 것이리라. 잠시 세 남자들과 함께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조슈아는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먼저 에레크트라를 대려 가세요. 강 왼편에서 소나무 숲 냄새가 나니 그쪽으로 가지요. 그 다음은 샤레셀, 퓨어리스 그리고 나. 나머지는 알아서하세요." 자신도 겉보기에는 소녀인지라 마지막에 가겠다면 세 남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고 한말이었다. 안티오페는 팔짱을 풀고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에레크트라를 안아 들었다. 겉보기와 달리 힘이 좋은 그녀는 12세 소녀인 에레크트라를 마치 갓난아이를 안아 들 듯 가볍게 안아 들고 비에 젖은 투명한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안티오페의 품에 처음으로 안겨본 에레크트라는 그녀의 풍만하지만 차가운 가슴의 감촉과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이질적이지만 매혹적인 향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한마디도 못하고 그녀의 목을 감고 안겨 있었다. 위잉―. 그녀의 날개에서 요란한 날개 짓 소리가 들려 왔다. 요정의 날개는 새의 것과는 달리 매우 얇은 것이다. 그런 날개로 사람 하나를 안아들고 날아오르려 한다면 보통의 날개 짓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었다. 에레크트라를 안아 들고 날아 오른 그녀는 곧 배를 벗어나 강변을 향했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에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저만큼 날아가던 안티오페가 갑자기 멈추어섣다. 그녀의 날개 짓에서 생겨난 강한 바람이 수면에 파문을 만들고 있는 가운데, 일행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곤혹스러움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요? 안티오페, 무언가 잘못 되었나요?" 조슈아가 더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안티오페의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아이를 안고 피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일행은 무언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차랑―. 눈치 빠른 바알과 멘디에타가 잽싸게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조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안티오페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 촤악―. 순간 안티오페의 정면의 수면에서 커다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꺄악∼!" 에레크트라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안타오페가 거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의 속도로 높이 날아올랐다. 누구도 그녀가 저리 빨리 날수 있으리라 생각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따라 올라오는 물기둥의 속도는 더욱더 빨랐다. 파앗―. 순식간에 안티오페의 몸을 강타한 물기둥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안티오페는 에레크트라를 안은 채 강으로 추락했다. 첨벙―. "아앗!" 모두가 강으로 떨어진 그녀들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뛰어난 안력의 소유자인 조슈아는 안티오페의 몸을 강타한 물줄기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반투명한 물체가 포말을 일으키며 강으로 뛰어든 것을 발견했다. 워낙 경황이 없어 자세는 보지 못했지만 안티오페의 몸을 강타한 물줄기 안에는 분명히 생물체가 있었다. NEXT 제21화 수인족의 공격 part 2 "어떻게든 해봐요. 물에 빠졌잖아요!" 샤레셀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바알과 조르쥬 이 두 남자는 강에 뛰어 들려는 시늉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멈추었다. 그들은 경황이 없어 자신들이 수영을 못한다는 것을 잠시 깜박한 것이었다. 풍덩―. 모두가 얼어 있는 사이 차가운 강물에 흰 포말을 일으키며 뛰어드는 두 인 영이 있었다. 바로 조슈아와 멘디에타 였다. 조슈아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영재교육에는 당연히 수영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정도 강은 몇 번이고 건널 수 있을 정도의 수영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세련된 포즈로 힘들이지 않고 현장으로 헤엄쳐 가는 동안, 멘디에타는 그녀의 뒤를 바짝 쫓고있었다. 그도 상당한 수영의 실력가로 보여 졌지만 어쩐지 그 폼은 전혀 세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비록 엄청난 속도로 팔다리를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개헤엄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용케 속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개헤엄 술을 극에 이르도록 수련했다고 생각되었다. "에레크트라! 안티오페!" 조슈아가 소리치며 둘이 떨어진 위치까지 헤엄쳐 갔지만 둘은 아직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는 어두운 강물 속에 머리를 박았다. 뽀그르르―. 머리를 박고 강속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어두운 강물 안에서 올라오는 공기 방울들을 발견하고는 몸을 완전히 거구로 세워 혼신의 힘을 다해 팔다리를 저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데다가 강의 깊이가 워낙 깊어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조슈아는 느낌으로 이 밑에 그녀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헤엄쳐 들어갔을까, 그녀는 저 앞에 빠르게 움직이는 초록색 광채를 발견하고 쾌재를 올렸다. 그 것은 그녀에게는 매우 익숙한 빛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안티오페가 물 속에서 저렇게 움직일 리가 없는 것이었다. '무언가 그녀를 잡아끌고 다니는 거구나! 그렇다면 에레크트라도 함께 갰지?'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친 조슈아는 부츠에서 단검을 뽑아 입에 물로 광채의 예상방향으로 헤엄쳐갔다. 광채는 큰 원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어, 일단 한번 보면 쉽게 괘도를 파악 할 수 있었다. 슈우우―. 그녀의 예상대로 시계방향으로 크게 한번 돈 초록색 광채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이동해 왔다. 꽈악―. 그 속도에 조금은 주눅이 들기는 했지만, 조슈아는 왼손을 정면으로 향하여 격돌에 대비하며 단검을 말아 쥔 오른손에 천천히 힘을 가했다. '왔다!' 초록색 광채가 바로 근처까지 접근하면서 그녀는 어두운 강물 속에서 날개를 접고 실신한 것으로 보이는 에레크트라를 꼭 안고있는 안티오페를 발견하였다. 안티오페의 날개에서는 의도적인 것이 분명한 초록색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어찌 된 것인지 그녀를 붙들고 헤엄을 치고 있어야할 다른 존재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어떻게 된 거지?' 그때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안티오페가 눈을 뜨더니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흰자위가 없는 초록색 눈동자를 들어 자신의 등뒤를 가리켰다. 순간 무언가 눈치챈 조슈아는 안티오페의 등뒤에서 초록빛의 광채가 이상하게 굴절하는 것을 발견해내고 검을 등뒤로 가져가 반사광을 가리고 그녀를 스치듯 지나가는 안티오페의 다리를 왼 팔로 붙들었다. 쏴아악―. 그녀의 발을 붙들자 같이 끌려가게 된 조슈아는 엄청난 속도에 의한 압력에 눈을 뜰 수가 없었지만 한번의 공격 기회를 잡을 시간은 충분하였다. 싸악―. 그녀는 안티오페의 등뒤에서 빛이 굴절되는 부분을 노리고 단검을 크게 그어갔다. "카아악!" 물 속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찬 괴성이 확실히 들려 왔다. 조슈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재차 검을 들어 아래로 내리 그었다. 파악―. 그러나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무언가 심하게 바동거리며 그녀의 검을 퉁겨내더니 빠른 속도로 안티오페의 등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수압에 단검을 떨어뜨리고 만 조슈아는 안티오페를 한 팔로 안고 혼신의 힘을 다해 헤엄쳐 올라갔다. 거의 한계까지 헤엄쳐 들어갔던 그녀의 패와 고막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자 겨우 수면이 보였다. 조슈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물방울이겠지?), 안고있던 안티오페를 놓았다. 안티오페는 그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에레크트라를 안고 잽싸게 다리를 움직여 수면으로 올라갔다. 파악―. 순간 막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하던 조슈아의 발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꼬르륵―. 조슈아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그만 패에 물을 들이키며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공격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휘저었지만, 이미 패에 물이 들어간 이상 그녀에게 승산은 없었다. 충격으로 텅빈 그녀의 머리 속에 막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 수면을 향해 하늘거리는 그녀의 두 팔을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 팔을 억세게 잡아 채었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그녀의 발 밑으로 빠르게 헤엄쳐 들어가는 두 인 영이 있었다. 퍼벅―. 물 속에서 선명한 이중의 격타음이 들리더니 그녀의 양발을 잡고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손을 잡고 사력을 다해 수면으로 올라갔다. 촤악―. "콜록! 콜록!"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민 조슈아는 눈도 뜨지 못하고 패에 들어간 강물을 기침으로 토해 냈다. 그때 그런 그녀를 안고 등을 두들겨 주던 손의 주인공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제일먼저 올 줄 알았지. 용케도 거기까지 들어 왔네?" 겨우 물을 다 토해내고 바라보니 그녀를 안고 있는 것은 안티오페였다. 그런 그녀의 왼편에는 멘디에타가 실신한 레레크트라를 안고 있었는데 다행히 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는지 약하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멘디에타는 무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에레크트라를 안고 헤엄쳐와 조슈아에게 안겨 주며 말했다. "빨리 배로 돌아가시죠.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조슈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티오페의 품에서 빠져 나와 에레크트라를 받아 안고, 의외로 멋진 포즈로 말없이 저만치 헤엄쳐 가는 안티오페를 따라 배로 향했다. 그녀들이 배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멘디에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겨우 배 위로 올라온 조슈아는 에레크트라를 눕혀 놓고 한숨을 돌렸고, 안티오페는 긴 초록색머리칼을 손으로 잡아 물을 짜내고 있었다. "조슈아, 괜찮아?" 샤레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 차갑게 식은 얼굴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괜찮을 리야 없겠지만 조슈아는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에레크트라가 걱정이야. 회복 마법을 써보는 게 어때?" 조슈아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에레크트라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하자. 샤레셀은 곧 그녀에게 다가가 가슴에 손을 얹고 조문을 외워 푸른색 기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에레크트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곧 호흡도 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겨우 숨을 돌린 조슈아는 겨우 주위 상황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가 배에 오르도록 도와 준 퓨어리스는 활을 꺼내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고, 머리칼의 강물을 다 짜낸 안티오페는 이제는 완전히 사물화해 버린 조그마한 가죽 푸대를 열고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에? 바알은? 조르쥬는?" 촤악―. "우왁! 어머니!" 그녀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 큰 사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돌아보니 배 오른편의 수면에서 멘디에타에게 뒤에서 목을 잡힌 바알이 꽥꽥 소리를 지르며 팔다리를 휘젓고 있었고, 조르쥬는 두 눈을 꼭 감고 멘디에타의 허리를 두 팔을 감고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천하의 두려울 것이 없는 두 용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써먹을 놀림거리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 속에서도 선명히 들려오던 아까의 격타음을 생각하면 헤엄을 못치는 저 두 사내가 조슈아의 발을 붙들고 늘어지던 괴물에게 주먹다짐을 했었다는 것인데. 그녀가 어찌 그들을 놀릴 수가 있을까? "킥킥킥……. 콜록! 콜록!" 결코 웃어서는 안될 상황이었지만 나오는 웃음을 어쩌겠는가? 조슈아는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패에 조금 남은 강물이 기관지를 건드려 심한 기침을 해야 했다. 그 웃음은 두 사내가 누렇게 뜬 얼굴로 배 위로 끌어 올려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샤레셀이 에레크트라의 가슴에서 손을 때자 마치 편히 자고 일어 난 것 같은 얼굴로 에레크트라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녀는 생전 처음 물에 빠졌던 상황을 기억해 내고는 샤레셀의 품에 목놓은 울기 시작했고, 두 남자는 배 바닥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 겨우 웃음을 가라 안친 조슈아는 쓰러진 두 사람의 가운데에 앉아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두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콜록! 이놈이 발목을 잡는 바람에 늦었던 거야 조슈아!" "무슨……. 네 놈이 물 속에서 나에게 발길질만 하지 않았으면 벌써 조슈아 님을 구했었을 것이다." 감사의 말을 더 이상 할 여지가 없을 만큼 두 사내의 책임 전가는 오래도록 지속되어 졌고 결국 조슈아는 물러나서 활에 화살을 메기고 있는 멘디에타에게 다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놈은 뭐였죠?" "수인족(水人族)입니다. 예전에는 깊은 강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살고있었는데 지난 십수년 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죠." NEXT 제21화 수인족의 공격 part 3 "수인족? 설마 그 비싼 가죽으로 유명하던 놈들 말인가?" 겨우 물을 다 뱉어내었는지 조금은 안정된 얼굴로 바알이 질문했다. 그러자 활을 들 고 시커먼 강물을 들여다보던 퓨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어머니의 드레스 중 가장 비싼 것이 수인족의 지느러미로 만든 레 이스가 달린 것이었어요. 반투명한데다 빛을 받으면 멋진 빛깔을 내서 아주 좋아하셨 었죠. 그런데 옛날에 멸종했다고 들었었는데 아직도 있었다니……." "수인족은 원래 얕은 여울에서만 살던 종족이야." 갑자기 안티오페가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리자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하였 다. 그녀는 아직도 변신한 몸인 채로 물통 위에 앉아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안티오페는 자신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잠시 뜸을 들이고는 술푸대를 내려놓 고 재차 입을 열었다. "수인족의 가죽은 등 부분은 딱딱하고 반투명해 투구의 재료로 쓰였고, 가슴부분은 부드럽고 깨끗한데다 거의 투명해서 고급 옷감으로 비싸게 팔렸었지. 그러다 보니 인 간들이 너도 나도 사냥하기 시작하면서 어울리지 않게 깊은 강속으로 숨어들기 시작 한 거야." 의외로 훌륭한 상식을 가진 그녀에게 모두 경탄의 시선을 보내었다. 그러나 샤레셀 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얕은 여울에서 살던 종족이 갑자기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깊은 물 속으로 생활권을 옮기는 것이 가능 한가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피하고 잠시 먼 시선으로 안개에 가린 소나무 숲을 바라보던 안티오페는 드물게 한숨을 내쉬며 거북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륙을 통틀어서 이제 그들이 남아 있는 강은 그리 많지 않아. 깊은 강속으로 들어 가지 못한 수인족은 멸족하고 말았지. 그런데 살아남은 수인족들에게 마술을 걸어주 어 속성을 바꾸어준 인간의 마법사가 있었어." "속성을 바꿔여? 어떻게 말이죠?" 이번에는 조슈아가 그녀의 말에 끼여들며 질문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별로 개의 치 않으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였다. "원래 수인족은 얕은 여울에 자라는 수초의 뿌리는 먹고사는 평화로운 종족이었어. 그러나 그 인간의 마법사는 그들이 깊은 물 속에 살수 있도록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체질로 바꾸어 주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공격적인 성향을 심어 주었지. " "허어∼.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는 건가? 금시 초문이군." 바알이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가 긍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 나 일행 중 마법 상식이 가장 풍부한 샤레셀은 무언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십 여년 전에 멸족된 종족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인간의 마법사 가 건 마법은 수인족의 다음 대에까지 전해진다는 건가요? 그런 마법이 존재 할 리가 없어요. 만약 수인족의 체질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그것은 그 대에 까지만 가능 할 텐데." 그녀의 마법 상식으로는 다음 대 까지 전해지는 생체 개조의 마법은 생각할 수도 없 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사였어. 수인족의 수명은 길어야 인간의 나이로 15 년 정도니까 지금 까지 그들이 있다는 것은 아기를 낳는 다는 것이겠지." 그녀의 말에 모두가 시커먼 강물로 시선을 돌리며 물 속에 우글거릴지도 모를 수인족 의 영상을 떠올렸다. 특히 수영을 못하는 두 남자는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도대체 그 마법사의 이름이 뭐예요? 안티오페, 혹시 알고 있나요?" 일행을 대표하여 조슈아가 가장 궁금한 부분을 질문하였다. 그러자 긴 촉수를 만지작 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안티오페가 가볍게 아미를 찌그리며 입을 열었다. "한번 만나본 것뿐이지만 분명히 이 시돈 출신의 마법사였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인 간의 마법사와 닮아서 혹시 그의 자식이 아닌가 생각했었지. 이름은……. 레스타트라 고 했어." "레…레스타트!?" 조슈아와 샤레셀이 마치 용수철처럼 퉁겨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들이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17년 전 게드마 성의 대신전에 침입하여 수많은 기사들과 대신관을 가공할 마력으로 녹여버리고 바디메오 국왕과 소피아 왕비에 의해 죽으면서 아직 태아였던 조슈아에게 저주를 걸어 16세 생일에 죽음에 이르는 저주를 걸었던 아카바의 제일 공적이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조슈아가 지금의 처지에 이른 것 도, 그녀의 모친인 소피아 왕비가 일찍 세상을 뜬것도 모두 그의 탓인 것이다. 조슈아가 분노로 이를 가는 것을 보며 샤레셀을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 다. 왕실 근위대장인 조르쥬도 자신이 임관하기 한참 전의 일인지라 그의 이름까지는 알지 못하는 듯, 처음으로 보는 분노에 일그러진 사랑하는 미소녀의 얼굴에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왜 그래? 혹시 그 빨간 머리 청년을 아는 거야? 인간치고는 요정에게 상당히 우호적 인 자였는데." 자신의 대답에 조슈아와 샤레셀이 심각을 넘어 지나치게 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조금 은 당황한 표정으로 안티오페가 질문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개의치 않고 조슈아가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를 그 이후 다시 본적은 없나요? 소문이라도……." "아니. 그 이후로는 없어. 그가 남쪽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했었지만 그 이후로는 소 식을 못 들었어. 그 정도의 마법사면 꽤 이름이 알려지리라 생각했는데." '남쪽으로 간다고 했다고?' 조슈아는 겨우 속으로 화를 삭히며 생각에 잠겼다. '그 정도의 마법사가 남쪽으로 간다고 하고 그 이후 소식이 없었다면 게드마로 처 들 어오던 그 때였다는 이야기이군. 아버지는 그가 말고스에 심장을 찔려 마법의 잠에 빠 졌다고 하셨었는데 그 정도의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다는 걸까?' 그때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의 어깨를 만지는 손길이 있어 바라보니 샤레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와 함께 자란 샤레셀은 조슈아에게 있어 레스타트라는 자가 어떤 존 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분노로 경거망동 할 것을 걱정한 것이리라. 여하튼 샤레셀은 조슈아의 본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입장인 것이 다. 조슈아는 알았다는 듯 샤레셀에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표정을 풀며 주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수인족이 이렇게 공공연하게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의 정확한 지적에 멘디에타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저도 이 페리얼 강을 많이 지나 다녔었지만 수인족의 공격을 받았다거나 그들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모두가 답을 찾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조르쥬가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며 말하였다. "일단 여기에 정박해야할 의미가 없어 졌으니 다시 닻을 걷어 올려야 갰군요." 그가 대답도 듣지 않고 닻줄에 매달리자 바알과 멘디에타도 말없이 줄에 매달려 끙끙 거리며 닻줄을 잡아 올렸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아무래도 오늘밤도 추위에 떨어야 갰군. 그나저나 수인족 이 배를 직접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네." 세 남자가 닻을 내린 것을 후회하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배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 는 거창한 대형 닻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며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가뜩이나 추위에 떨다가 그에 더해 차가운 강물에 수장될 뻔하였던 에레크트라는 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샤레셀의 품에서 하얀 입김을 뿜고 있었고 샤레셀은 신녀 용의 공 단가운 안에 에레크트라를 들여놓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이제 해도 완전히 저물어 어두운데 그나마 안개 때문에 달조차 보이지 않아 일행의 마음은 더욱더 어두워 졌다. 멘디에타가 램프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부싯돌이 비에 젖어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바알은 긴장한 얼굴로 키를 잡고 있었는데, 사실 거의 물살을 따라 그저 흘러가고 있 는 상황이었고, 조르쥬는 활을 들고 앉아 수면을 주시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조슈아는 그와 같이 경계를 하려 했지만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데다 소녀의 몸으 로 더 이상의 체력 소모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에 젖 은 가죽 모포를 덮고 돛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자 혼자 구석에서 모포로 몸을 칭칭 감 고 앉아 있던 퓨어리스가 조슈아의 모포 안으로 기어 들어와 그녀의 왼쪽 허리에 팔 을 감고 몸을 찰싹 붙여 앉았다. 조슈아가 당황하여 바라보니 그녀는 씨익 웃더니 조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눈 을 감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겉보기는 어떨지 몰라도 속은 소년인 불쌍한 미소녀 조슈아는 도저히 잠을 이 룰 수가 없었다. 16세의 당차지만 귀여운 긴 흑발 소녀의 새근거리는 숨결이 귓가를 간 지르는 상황에서 어찌 혈기 왕성한 소년이 잠을 청할 수 있겠는가? 그때 이제는 다시 작아져 조슈아의 오른쪽 어깨에 앉아 있던 안티오페가 가볍게 날 아 내려 부스럭거리더니 조슈아의 가슴 깨로 파고들었다. 조슈아는 기겁을 하였지만 양해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16세 소녀의 가슴속으로 파 고든 무심 여왕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 골짜기 사이로 파고 들어가 비스듬히 기대어 누 워서는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잠을 청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꺼내서 저만치 던져 버리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눈앞에서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두 개의 초록색 촉수를 바라보며 그녀도 상당히 추웠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 고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소녀의 몸이 된 이후 부끄러움에 자신조차 만져 볼 엄두를 내지 못한 가슴속 에 비록 요정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품고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러나 무심한 안티오페는 그 자리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지 잠자기에 편한 자세를 찾아 비비 적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잠자기는 그른 조슈아 였다. NEXT 제21화 수인족의 공격 part 4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2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21화 수인족의 공격 part 4 20001107 191 4 장편 2 조슈아의 눈 밑에 수면 부족으로 작은 기미가 생긴 것 이외에는 다행히 별다른 소동 없이 하루 밤이 지나갔다. 모두가 일어난 새벽녘에는 비가 그치면서 안개도 옅어져 강변이 보이게 되자 키를 잡 고 있는 바알도 어느 정도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위에 하얗게 질려 있던 에레크트라는 몇 겹의 모포와 샤레셀의 따뜻한 체온 덕에 독감에 걸리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던지 상당히 안정된 얼굴 색을 하고 있어 일행을 안심 시켜 주었다. "강폭이 더 넓어 진 것 같은데? 물살도 약해 졌고." 바알이 강변에 내려앉아 일행을 신기 한 듯 바라보고 있는 온갖 물새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왠지 흥분된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여기서 바다로 이어지는 삼각주까지는 이제 하루거리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성도 알 본이 있지요. 생각보다 빠른 항해였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이면 목적지에 다다르는 거예요?" 조슈아가 왠지 실감이 나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록 알본에 간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의 인생에서 첫 여행 의 중요한 분기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샤레셀을 바라 보았다. 그러자 같은 심정이었던 샤레셀 이 밝은 미소로 답하였다. "그런데 과연 무사히 성도까지 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수인족의 공격을 받게 될 텐데." 갑자기 조슈아의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모두가 놀라고 있는 가운데, 오랜만의 따뜻한 잠자리에 상당히 체력을 회복한 듯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초록색 머 리칼을 쓸어 넘기며 안니오페가 조슈아의 가슴 깨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바알과 조르쥬의 노골적으로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조슈아 의 가슴에서 기어 나와 몸을 한번 부르르 떨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우리가 공격을 받은 곳은 수인족이 많이 사는 곳은 아니었어. 아마도 이제부터 그들 의 구역에 들어가게 될 거야." "그런데 도대체 지금까지 인간을 피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수인족이 그렇게 공공연 하게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너무도 태연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품에서 기어 나오는 그녀의 태도에 얼굴을 붉히며 조슈아가 질문했다. "아마도 나와 같은 배경일거야. 나에게 남쪽의 숲으로 돌아가라고 충동질했던 인간 의 마법사가 그들에게도 무언가 수를 쓴 것이 아닐까?" "허어∼. 도대체 그 마법사는 뭐 하는 자이지? 혹시 이 나라의 전쟁과 관련이 있는 자일까?" 안티오페의 대답에 바알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 마법사의 정체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역시 그가 기르가스 임에 틀림없어. 도대체 그는 무엇을 바라고 이런 쓸 때 없는 전 쟁을 일으킨 걸까? 마치 성도 주위에 다른 누군가를 접근시키지 않는 것만이 목적인 듯 하지 않은가? 혹시 마석을 훔쳐간 이유도 이 전쟁과 관련이 있을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조슈아는 곧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지웠다. 결국 직접 만나보 기 전에는 풀어지지 않을 의문인 것이다. 그녀는 밤잠을 설친 덕에 멍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세수를 하기로 마음먹고 양동이 를 들고 뱃전으로 향했다. 바알이 만든 이 양동이는 강물을 퍼 올릴 수 있도록 손잡이 에 밧줄이 달려 있어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양동이를 강에 던지기 전에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조슈아는 전날의 충격 과 수면 부족으로 눈 밑에 조그마한 기미들이 낀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하였다. 비록 그녀의 엄청난 미모에 비추어 보면 작은 잡티일 뿐이었지만 여지것 백옥처럼 깨 끗한 피부를 유지하던 그녀에게는 상당한 충격인 듯 했다. 조슈아는 잽싸게 강물을 퍼서 세수를 하고 다시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세수 를 한다고 피로에 의해 생긴 기미가 갑자기 없어질까? 그녀는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일이 끝나면 에레나에게 부탁해서 장미 잎 목욕이라도 해야겠네. 그 곱던 피부가 이 게 뭐야?' 얼굴의 잡티에 신경 쓰느라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중요한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 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외모에 대하여 16세의 절세 미소녀다운 관심과 비중을 두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다시 한번 수면에 비친 얼굴을 쓸어 보고는 천천히 양동이의 물을 강에 버렸 다. 촤아아―. 생각 없이 수면에 번지는 물보라를 바라보던 조슈아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분명 히 수면위로 양동이의 물을 버리고 있건만 물 속을 들여다 보고있는 얼굴의 영상이 흐 트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어?" 순간 무언가 깨달은 조슈아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끼며 잽싸게 몸을 뒤로 젖혔다. 파아앗―.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몸을 피하기가 무섭게 어마어마한 속도의 물기둥이 쳐 올라왔 다. 피하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조슈아는 얼굴에 직격을 맞았으리라. "뭐얏!" 조르쥬가 단숨에 달려와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지려는 조슈아를 받쳐 주었다. 키를 잡고 있어 기회를 놓친 바알이 이를 가는 동안 두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촤아앗―. 배의 왼편에서 날아올라 등을 보이며 서있던 멘디에타에게 쾌속으로 달려드는 물체 가 있었다. "이야압!" 그러나 멘디에타가 누구인가? 비록 엄청난 검사들 사이에 끼어 있어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시돈의 왕실 기사단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급 기사가 바로 그였다. 등을 보이는 자세 그대로 검을 뽑은 그는 허리를 트는 탄력을 살려 날아오는 물체를 비스듬하게 올려쳤다. 싸아악―. 카악―. 살이 베이는 소리와 듣기 거북한 비명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며 반투명한 생물체가 배의 오른쪽 구석으로 떨어져 퍼덕거렸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달려가 파란색 액체가 묻은 검을 들 어 그대로 꽤 뚫어 버렸고, 가슴 부분을 정확히 꽤 뚫린 놈은 잠시 경련을 일으키더 니 이내 잠잠해 졌다. 아침 햇살을 받아 파란빛을 내며 반짝이는 생물체의 모습은 놀랍도록 인간과 닮아 있 었다. 다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얼굴과 미간에서부터 이어진 등지느러미, 비정상적으 로 긴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투명한 막이 그들이 수인족임을 알려 주고있었다. 조슈아는 겨우 정신을 추슬러 쓰러진 수인족에게 다가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으 로 보이는 부분에서 연신 파란 액체를 토해내고 있는 수인족의 얼굴에는 그녀의 얼굴 이 그대로 비추어졌다. '아까 내가 본 것은 수인족의 얼굴에 반사된 나의 얼굴이었구나.' 다시 한번 등골이 시려옴을 느끼는 그녀였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수인족의 얼굴에 대 고 기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니 얼마나 위험 천만한 상황이었단 말인가? 그녀가 수인족을 관찰하고 있는 동안 바알도 키를 놓고 검을 잡았고, 조르쥬와 퓨어 리스는 활을 꺼내어 화살을 맥이고 있었다. "샤레셀 에레크트라를 부탁해." 조슈아가 검을 들고일어나 소리치자 샤레셀은 아직 잠이 덜 깨어 눈이 반쯤 감긴 에 레크트라를 꼭 껴안고 고개를 끄떡였다. "온다!" 활을 들고 수면을 주시하던 조르쥬가 배의 오른 편을 가리키며 소리쳐 돌아보니 저 멀리서 배를 향해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헤엄쳐 오는 반투명한 등지느러미들이 보였 다. "이거 어림 잡아도 수 십 마리는 되겠는데?" 바알이 긴장한 목소리로 검을 고쳐 잡으며 소리치자 일행 중 가장 뛰어난 활 실력을 가진 조르쥬가 빠르게 활시위를 당겼다. 슈우욱―. 거의 어깨 넓이만큼 당겨진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 었다. 조르쥬가 쏜 화살은 움직이는 배 위에서 쏘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확하 게 날아가 선두의 수인족의 등부분을 강타하였다. 타앙―. 그러나 일행의 기대와 달리 화살은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며 튀어 오르더니 곧 강으 로 사라졌다. "이런! 등 부분은 역시 대단히 딱딱하군. 얼굴이나 가슴을 맞춰야겠는데?" 그러나 등을 보이며 헤엄 치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맞춘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 가? 멘디에타와 퓨어리스가 활을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조르쥬는 신중 한 표정으로 두 번째의 화살을 날렸다. 퓨웅―. 또다시 선두의 수인족을 노린 그의 화살은 물 속에 잠겨 있는 얼굴부분으로 정확히 날아가 꽂혔다. 끄아악―. 정통으로 맞았음을 알리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해요, 조르쥬!" 조슈아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소리치자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 졌다. 퓨우웅―. 조르쥬의 선전에 힘을 얻은 멘디에타와 퓨어리스도 잇달아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그 들의 화살은 거의 등딱지에 맞거나 살짝 빗겨 가기 일수였다. 결국 활을 포기하고 다시 검을 잡은 멘디에타가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놈들이 튀어 오르면 검으로 내려 쳐서는 안됩니다. 등 부분은 공격하나 마나 에요. 콧대를 후려치거나 가슴 부분을 올려치세요. 그러나 무엇보다 주의하실 것은 공격에 밀려 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전에는 한 마리라 어찌 할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 에서는 일단 강에 빠지면 구할 방법이 없어요." 그의 말에 일행은 최대한 자세를 낮게 하고 적의 공격을 기다렸다. 촤악―. 조르쥬가 몇 마리를 맞춰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적의 숫자는 전혀 줄어 있지 않았다. 배의 오른편에 접근한 수인족들은 마치 돌고래처럼 튀어 올라 배 위로 날아올랐다. 공격방식으로 보아 몸으로 부딫여 데미지를 주거나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놈들은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었다. 돛대에 기대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두 소 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절정검사인 것이다. 퍼억―. 싸악―. 카아악―. 여기저기서 파육음과 듣기 거북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배 위는 수인족들의 시 체와 파란 핏물로 범벅이 되었다. 조슈아는 마치 그 냄새가 아카바 항구의 어시장에서 나던 비린내와 같다는 생각도 들 었지만, 상대의 모양이 워낙 인간을 닮아 있어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닌 듯, 시체가 높이 쌓여 갈수록 모두의 얼굴에 전투의 피로 때문으로는 보이지 않는 다른 종류의 불쾌감이 떠올랐다. 특히 안티오페는 돛대 끝에 앉아, 이 일방적인 살육전에 전혀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강변을 바라고 보고 있었다. 파악―. 스무 마리 째의 수인족의 두개골을 부순 바알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숨어서 잘살고 있던 놈들을 이렇게 죽도록 부추긴 놈이 누군지 한번보고 싶군. 만나 기만 하면 똑같은 꼴을 만들어 줄텐데." 말은 안하고 있었으나 모두의 심정은 똑같았다. 그러나 조슈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인간과 닮았으니 수인족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도 하군. 그런데 이렇게 까지 우리와 닮은 종족을 어떻게 가죽을 얻기 위해서 그리 많이 잡아죽일 수 있었을까?' 그녀는 예전에 궁에서 누이인 에레나가 입으라고 가져다주었던 드레스들 중 투명한 파란빛을 내던 레이스가 달린 것들이 섞여 있었음을 상기해내고는 몸서리를 쳤다. 기습이라면 모를까?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오는지 아는 상태에서 당할 일행이 아니었 다. 그리하여 이 일방적인 살육 극은 초저녁까지 계속 되었고 강폭이 급격히 넓어지는 하 류에 다다라서야 겨우 멈추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일행의 기분은 최악의 상태에 였다. 모두의 몸은 수인족의 비린내나는 피와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비록 모두 강에 버리기는 했지만 미쳐 치워내지 못한 작은 육편들로 배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오랜 긴장과 격한 움직임으로 추위는 면할 수 있었지만 차라리 추운 것만 못한 상황 이었다. 다행히 별로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의 마음은 상당한 상처를 입고 있 었다. 마치 인간 수백을 베어 넘기고 그 피로 목욕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공격이 완전히 끝나자 바알이 다시 키를 잡고 조르쥬와 멘디에타가 물을 길어 갑판 에 뿌려 피와 작은 고기 덩어리들을 강으로 씻어 내었다. 그사이 에레크트라는 헛구역질을 참는 얼굴로 훌쩍이며 모포와 짐에 묻은 육편들과 피를 닦아냈고, 샤레셀은 왼쪽 어깨에 타박상을 입은 퓨어리스를 치료하고 있었 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끝끝내 돛대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모든 뒷정리가 다되고 모두가 말없이 잠자리에 든 늦은 저녁에야 내려와 전 날밤과 마찬가지로 조슈아의 품에 파고 들었다. 조슈아는 또다시 차가운 몸둥아리로 가슴속에 파고드는 그녀를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 러지 못하였다. 이 무심 여왕의 몸이 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차마 나가라 고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결코 추워서 몸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 때 문이었다. 이제 드디어 하룻밤만 지나면 이 여행의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흥분 이 되지도 기대가 되지도 않았다. 조슈아는 작은 요정여왕 안티오페의 등으로 손을 가져가 가볍게 쓸어내려 주며 잠을 청하였다. 내일 아침에는 보기 흉한 눈 밑의 기미가 없어져 주기를 빌면서……. NEXT 제22화 성도에서 만난 운명 part 1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3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 20001109 210 4 장편 넓은 강폭이 무색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의 다리가 두 동강이 난 체 강 위에 을씨년스 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알본 성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고 있었을 거대한 돌다리는 시돈 제국 군이 후 퇴하며 시간을 벌기 위해 끊어 놓은 듯, 곳곳에 인위적인 파괴의 흔적이 남아있었는 데 끊어진 다리는 물새들의 둥지로 안성맞춤인 듯, 수많은 물새들이 둥지를 트고 그 안에서 조슈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와 맞닿아 있는 북쪽강변에는 거대한 항구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도크들 과 항구의 기타 제반시설들은 모두 타서 골조만 겨우 남아있어 항구는 마치 유령이라 도 나올 듯이 음침했다. "호오∼. 이거 정말 대단하구만. 항구의 규모가 이 정도면 도시는 더 어마어마하겠는 데?" 중부산간지역 작은 도시 다테 출신인 바알이 진심으로 경탄한 얼굴로 떠들었다. 간밤 내내 키를 잡고 추위에 떨었건만 역전의 용병인 그는 멀쩡한 얼굴로 선수에 서 서 허리를 쭈욱 뽑은 과장된 몸짓으로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는 항구의 규모가 고향 게드마의 것보다 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방파제 와 부두의 석재, 항구에 타지 않고 남아 있는 석조 건물들을 보고 질적인 면에서 게드 마의 건축이 훨씬 우세한 것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멘디에타는 자국의 국력을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여러분이 보시고 계시는 알본 항은 팔메라 대륙을 통틀어 규모면 에서 최고입니다.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선착장에는 한번에 2000척의 상선과 500척의 군함이 정박할 수 있고, 한꺼번에 100여 척의 함선을 만들고 수리 할 수 있는 조선소와 하루에 50여 척 의 전함을 완전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조병창이 있지요." 그가 마치 유람선의 안내원 같은 말투로 자랑스러운 모국의 힘을 과시하는 동안 조슈 아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항구만 보아도 성도 알본이 얼마나 대단한 요새인지 알 수가 있다. 시돈의 정규 병력이 200만 정도라고 하던데 항구의 크기로 보아 이 도시는 그 정도 병력을 소화하 고 진을 칠 수 있는 정도의 규모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를 버리고 남부에 도시들과 연합 전선을 구축해야 할 정도로 강대한 적을 만났다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이유로 일부로 후퇴한 것일까?' 조슈아는 아직도 침을 튀기면 자랑에 여념이 없는 멘디에타를 바라보며 살짝 아미를 찡그렸다. 그런 그녀의 눈 밑에는 다행히 그리도 고민하던 깨알같은 기미가 없어져 다 시 묻어 날 듯 새하얀 피부로 돌아와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어떤 임무를 명 받고 여기까지 그 먼길을 돌아 온 거지?' 멘디에타의 자랑이 한참 무르익고 있는 동안 왠지 별로 힘이 없어 보이는 조르쥬는 천천히 배를 가장 가까운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1 휘이이―. 을씨년스러운 항구에 너무도 어울리는 소금기 머금은 차가운 삭풍이 조슈아 일행을 움츠리게 하였다. 바다로 이어지는 삼각주는 항구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었지만, 소금기는 바람을 타고 날아와 일행의 후각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었다. 배에서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떠들어대던 멘디에타는 일행의 선두에 서서 심각 한 표정으로 텅빈 부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도는 텅 빈 것 같은데? 마물이 있을 것 같으면 벌써 달려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거의 10여분을 움직이지 않고 서있는 멘디에타의 긴장한 어깨를 바라보며 바알이 입 을 열었다. 일행 중 누구도 대답은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의 말에 동의하고있었다. 샤레셀과 에레크트라를 빼면 이 자리의 모두가 절정검사였다. 그러므로 적의 기척을 느끼는 감각은 극도로 발달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 풍겨오는 기운에서는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 고 있었다. 멘디에타는 한참을 더 그러고 서 있다가 무언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웃 거린 후 안심했다는 것인지 실망했다는 것인지 판단이 어려운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일단 궁성까지 가보도록 하지요." 어쩐지 맥이 빠진 일행은 그를 따라 부두를 빠져나갔다.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화강암을 깎아 양옆에 쌓아놓은 완전 밀폐형 진입로를 빠져나 가자 그야말로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풍경이 일행을 반기고 있었다. 반듯한 가도와 그 양옆에 멋지게 늘어선 석조 건물들, 가로수들은 손질이 되지 않아 대부분 시들거나 보기 흉하게 흐트러져 있었지만 여하튼 오랜만의 도시의 풍경은 모두 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 올라가 도시 중앙의 거리에 들어서자 마물의 공격에 의한 것이 분명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어 대 마물 전투 가 얼마나 치열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시돈 제국 군이 성도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겠군. 일단 마물을 상대로 전 선이 무너져 시가전이 되고 보면 방어가 불가능해지겠는걸?" 폐허가 된 시가지를 바라보며 조르쥬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자 멘디에타가 씁쓸 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상대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마물들이니 만큼, 일단 성벽이 무 너져 백병전이 되면 일방적인 싸움이 되어 버리죠. 그래서 전투 개시와 동시에 수십만 의 시민들을 남쪽으로 피난 보내고 시간을 벌기 위해 다리를 끊고 성벽이 무너진 뒤에 도 후퇴하지 않고 백병전을 펼친 겁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모두 투루, 레아론 성 등으 로 피난 갈 시간을 벌었죠." "그럼 기사단은 어떻게 후퇴했죠?" 조슈아가 기가막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하자 멘디에타가 깊은 한숨을 내 쉬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최후까지 성도에 남아있던 자들은 1만 명의 병사들과 1천명의 이름 있는 향사들, 그 리고 500명의 성도수비기사단 이었습니다. 이미 성벽이 무너지면서 왕실근위기사단과 성쇠기사단, 신전 기사단은 국왕폐하와 함께 다리를 건넜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 다. 명령 없이 다리를 끊은 것도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진정한 영웅들이었죠." "세…세상에 그럼 모두 전멸했다는 이야기네요?" 샤레셀이 부서진 건물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 그렇게 오랫동안 인기척을 찾으려 노력한 거예요?" 조슈아가 부드럽게 질문하자 멘디에타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하! 아닙니다. 성도를 지나서 강을 건너 마물들이 남부 전선까지 내려온걸 보면 살아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일행이 어쩌면 적진 한가운데일지도 모를 유령 도시에서 긴장감 없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저 멀리 한눈에 왕궁임을 알아 볼 수 있는 거대한 궁전이 눈에 들어 왔다. 주위의 건물들이 모두 심하게 파손되거나 불타 있는 것에 반해 궁전은 언 듯 보기에 전혀 손상이 없는 듯 아침 햇살을 받아 다섯 개의 탑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 다. 백금으로 덮어놓은 네 개의 탑이 중앙의 거대한 아치모양의 황금 박 지붕을 가진 건 물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는데 아마도 외궁과 내궁 인 듯 하였지만, 대륙 남반구 최 고의 부국인 아카바의 왕위계승자 입장에서 보아도 궁전 외벽 전체에 금박을 씌운 것 은 결코 좋은 취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확실히 아름답다는 것만은 부 인 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분한 조슈아 였다. 모두가 궁전의 화려함에 넋을 놓고 있는 그때 멘디에타의 얼굴이 극적으로 흥분에 휩 싸이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샤레셀 옆에 꼭 붙어 겁먹은 표정으로 일행의 눈치만 살피던 에레트라는 그 런 그의 변화를 제일먼저 발견하였다. "왜 그래요? 멘디에타 아저씨." 아저씨라는 부당한 호칭으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에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멘디에타는 마치 취한 듯 한 얼굴로 성문의 도개교가 내려져 있는 위병 초소 앞으로 내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놀라 성문을 바라본 일행은 다음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 었다. 초소 뒤의 1차 성문 위에는 창과 방패를 수놓은 거대한 제국군기가 펄럭이고 있 었던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궁전은 점령되지 않았다는 말이야?" 덩달아 뜀박질을 시작한 일행을 대표하여 바알이 소리쳤다. 그러자 흥분으로 연적의 말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조르쥬가 친절하게 대답하였다. "군 단기가 그대로 있다는 것은 성에 군대가 무사히 버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 야. 만약 점령하였다면 저 깃발을 그대로 둘 리가 없는 거지." "그렇다면 마물들은 끝끝내 왕궁은 점령하지 못하고 그대로 남부로 이동하였다는 말 이 되는데 후방에 적을 방치하고 전진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언제나 정론을 이야기하는 샤레셀이 오랜만의 뜀뛰기에 숨이 턱까지 차 올라 헐떡거 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것까지 알 수 있겠는가? 그저 생존자가 있다면 그 것 보다 반가운 일은 없는 것이었다. 엄청난 흥분에 흐느적거리는 듯한 이상한 주법으로 달려간 멘디에타는 위병 초소의 바로 앞까지 다다르고 있었고 일행도 곧 숨을 헐떡이며 그의 뒤에 정렬하여 흥분한 얼 굴로 위병소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때 조슈아의 어깨 위에서 멘디에타의 떨리는 어깨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안티오 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인간의 기척도 마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이렇게 까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 는 곳은 처음이야." "그럼 여기에는 아무도 없다는……." 끼이익―. 조슈아의 말을 끊으며 위병소의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은빛의 강철장갑이 드러났다. 일행이 기쁨과 긴장으로 상기된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는 동안 위병소의 강철 문은 완 전히 열리고 가슴부분에 방패와 창의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어딘가에 부딫였는지 약간 찌그러진 투구와 금이 간 검 집에는 성도수비 기사단임을 나타내는 방패모양의 인장이 새겨진 검이 꽂혀 있었 다. "성…성쇠기사단장 멘디에타다. 무사한 것을 보니 무엇보다 기쁘다. 귀 기사단의 건 승을 축하한다." 멘디에타는 감격하여 떨리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갖추어 치하의 말을 던지 며 악수를 나누기 위하여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서 떨어져!"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안티오페가 갑자기 여태껏 한번도 들려준 적이 없던 날카 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푸욱―. 안티오페의 갑작스러운 고함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려던 멘디에타는 무언가 날카로 운 물체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자신의 가슴을 꽤 뚫는 것을 느끼고 벼락을 맞은 듯 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언제 검을 뽑은 것일까? 그의 시야에 양손으로 검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깊 이 쑤셔 넣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는 기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까악!" 이 기막힌 상황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에레크트라였다. "이 자식!" 카아앙―. 그녀의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린 조슈아가 말고스로 기사의 투구를 내리치자 그녀의 분노가 실린 무시무시한 검격에 기사의 목은 그대로 떨어져 나가 위병소의 벽에 부딫 이더니 한번 크게 튀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기사는 여전히 검을 놓지 않고 서있었고 조슈아는 그의 양 팔목을 내리그었 다. 파아악―. 손목이 강철 장갑 체 부서져 사방으로 튀며 검을 놓친 기사가 조금 물러나자 바알이 달려들어 그대로 몸통으로 위병소 벽에 받아버렸다. 콰직―. 듣기 거북한 파육음을 내며 은빛 갑옷이 심하게 찌그러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피는 베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멘디에타!" 조수아가 검을 가슴에 박은 체 쓰러지려던 멘디에타를 안아 바닥에 천천히 뉘이며 소 리쳤다. "커억∼." 멘디에타는 오른쪽 가슴에 박힌 검을 붙잡고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었다. 그사이 샤 레셀이 황급히 다가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 피를 토하며 빠르게 창백해져 갔다. "어…어떻게든 해봐 샤레셀. 여기서 이렇게 죽게 해서는 안돼!" 조슈아가 멘디에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가슴 깨를 물들이며 심하게 떨리는 목 소리로 소리치자 샤레셀이 난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검을 박은 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일단 검을 뽑은 다음에 지혈을 해야해. 회 복 마법으로는 부족한 피를 어떻게 할 수 없단 말이야." "제가하지요." 조르쥬가 손을 걷어붙이고 무릎을 꿇고 앉아 검손잡이를 잡았다. "우욱!" 가슴을 꽤 뚫고 있는 검에 힘이 가해지자 멘디에타는 극심한 통증에 마치 활에 맞은 사슴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재빨리 뽑으세요. 최대한 피를 덜 흘렸을 때 지혈을 해야 해요." 그냥 박힌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가슴을 꽤 뚫은 검을 빼낸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일 이 아니다. 빼내기 힘들다고 이리저리 휘저으면 조직이 다쳐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까악! 언니 뒤를 봐요!" 갑자기 에레크타라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슈아는 멘디에타에게서 시선을 때어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고 머리카락이 쭈 뼛 서고 말았다. 목이 잘리고 손목이 부서진 데 더해 몸통까지 부서져 만신창이가 된 기사가 벽면에 몸을 대고 비비적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푸르카스의 재생마법?"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2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4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22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2 20001110 202 4 장편 샤레셀의 경악성이 아니더라도 일행은 모두 저 기사가 어떻게 해서 움직일 수 있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콰앙―. 바알이 좀비 기사를 들어 올려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자 부서진 깨어진 갑옷 사이에 서 푸르스름한 살조각들이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 다. 카아아―. 일행이 모두 이 황당한 일에 굳어 있는 동안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이 도개교를 건너 고 있었다. 감히 투구를 열고 그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기괴한 울음소리만으로 도 얼굴의 모양을 대충 연상 할 수 있었다. 조슈아는 멘디에타를 샤레셀의 품으로 넘기고 검을 들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조르쥬! 빨리 가슴에서 검을 뽑도록 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저 놈들을 상대할 동안 멘디에타를 대리고 안전한 건물로 피하도록해요. 샤레셀은 그를 치료해주고 에레크트 라는 언니를 따라가!" 긴장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상황에 맞는 대사를 조리 있게 읊은 조슈아는 바알과 퓨어리스의 옆으로 달려가 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였다. 그사이 조르쥬는 크게 한번 침을 삼키고는 한 손을 멘디에타의 왼쪽 가슴에 대고 끙! 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검을 뽑아 내었다. "우악!" 뼈와 살을 관통한 강철검이 억지로 뽑혀져 나가는 고통이 어떠하랴? 예상했던 대로 멘디에타는 충격에 의한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조르 쥬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 한 손으로 상처부위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상처가 관통상이니 만큼 한쪽만 압박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었고, 폐를 관통 당한 이상 그대로 방치하면 폐에 피가 차서 잘못하면 자신의 피로 인해 익사 당할 판이었 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은 사내였다. 이 자리에는 아카바 여신관중 최고의 치유 마법능 력을 가지고 있는 고급신녀 샤레셀이 있는 것이다. 부오오―. 샤레셀이 그의 가슴에 손을 대고 나직이 주문을 외우자 푸른 빛의 기류가 일어나 그 의 상처 부위에 스며들더니 무서운 기세로 뿜어져 나오던 검붉은 피는 신기하게도 그 기세가 현저히 떨어졌다. "자! 대충은 지혈했어요. 이때 빨리 옮겨요." 피범벅이 된 손을 가슴에서 때어 내며 샤레셀이 소리치자 조르쥬는 그를 안아들고 걱 정스러운 눈으로 도개교 쪽으로 뒤돌아 서 검을 들고 있는 조슈아의 금발머리를 바라 보며 소리쳤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말을 끝으로 조르쥬는 그래도 체격이 좋은 편인 멘디에타를 마치 아기를 안은 듯 가볍게 안아들고 뛰기 시작하였고 그 뒤를 샤레셀과 에레크트라가 따랐다.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는 사랑하는 소녀를 조금이라도 빨리 도우러 오기 위해 서 두르는 기색이 역력하게 전해져 왔다. "쳇! 일이 더럽군." 바알이 무엇이 불만인지 분명하지 않은 대사를 읊으며 언제나 처럼 무식해 보이는 직 도(直刀)를 머리위로 쳐들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고 상황에 감정적인 대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퓨어리스는 동경해오던 제국기사단을 상대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 검을 든 손이 간혈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흔들려서는 안돼! 퓨어리스. 저것은 그냥 좀비 일 뿐이야." 조슈아가 생각 같아서는 엉덩이라도 차주고 싶다는 얼굴로 멍해진 자신을 바라보며 소리치자 퓨어리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검을 곧추 세웠다. 사아악―. 예고도 없이 정면의 좀비 기사가 조슈아의 정수리를 검으로 내리그었다. 차앙―. 그러나 가볍게 기사의 검을 맞받은 조슈아는 그 엄청난 힘에 놀라면서도 조금도 내색 하지 않으며 검을 가볍게 어깨 뒤로 흘러 넘기며 소리쳤다. "이봐! 아저씨. 여자는 서두르는 남자를 싫어한다구." 어…어디서 그런 저속한 대사를 들을 기회가 있었던 것일까? 기사의 검을 상대의 힘 을 이용해 미끄러뜨린 조슈아는 그 대사를 기합 삼아 검 손잡이로 투구와 갑옷의 연 결 부위를 올려쳤다. 우직―. 상대의 엄청난 힘을 이용해 검편을 지렛대 삼아 탄력을 살려 목을 꾀 뚫는 왕가의 비 전 샤레타의 필살기였다. 아무리 투구를 쓰고 있다고 무사할 리가 없다. 조슈아의 공격을 받은 기사의 목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며 투구끈이 끊어져 투구는 뒤로 벗겨져 떨어졌다. "으음……." 조슈아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투구를 벗겨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거의 초록빛을 띈 쭈굴쭈굴한 얼굴, 조금씩 썩어가다가 좀비가 된 듯 여기저기 살점 이 떨어져 나간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노란 얼굴뼈, 그나마 체액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건조한 피부이고 추운 날씨라 구더기는 없었지만 마치 썩은 물감으로 그려 놓은 듯 쾡한 두 눈은 반쯤 튀어나와 당장이라도 조슈아를 향햐 날아올 것 같았 다. "우웁……!" 인간의 좀비를 처음 본 그녀는 구역질을 참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싸울 상대를 앞에 두고 구역질을 해서야 어떻게 싸우겠는가? 콰직―. 차앙―. 그사이 바알과 퓨어리스가 뒤이어 달려든 좀비 기사들을 상대로 어지럽게 손을 놀리 고 있었다. 바알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검을 처내며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고, 퓨어리스는 날렵한 몸으로 검을 가볍게 피하여 목줄기나 겨드랑이 사이, 어깨의 이음쇠 안쪽을 노리며 검 을 찔러 갔다. 상대가 마법으로 어느 정도 강화된 좀비이기는 하지만 일단 죽은 자들인 이상 검술 은 두서가 없었다. 몸으로 밀어붙이는 거대한 마물이 아니고 검을 들고 달려드는 상대 인 이상, 퓨어리스도 충분히 상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였다. 아무리 단순한 검술을 쓰는 그들이었지만 일단 힘만은 일품 이었고 좀비 인만큼 두려움도 없었다. 만약 숫자가 많다면 가장 거북한 상대인 것이 다. "이래서는 끝이 없어. 이렇게 많은 수의 좀비 기사가 상주한 다는 것은 안에 마법사 가 있다는 걸꺼야. 그를 잡아야해." 조슈아가 세 명째의 기사를 쓰러뜨리며 소리쳤다. 갑옷이 방해가 되기는 했지만 일 단 틈만 생기면 성검 말고스는 대단한 효과를 냈다. 가볍게 닿기만 해도 초록색 연기 를 내며 닿은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이런 상대가 수백이 된다면 당할 제간이 없었다. 여하튼 상대는 죽었 어도 일단은 기사인 것이다. 바알은 목이 잘려 바둥거리는 좀비 기사를 방패 삼아 검격을 막으며 네 번째 상대의 투구를 꾀 뚫어 버리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있는 자와의 파워전에서는 아무래도 그 가 연악한(?) 두 소녀들 보다는 유리했다. 조슈아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떡여 긍정을 표하는 바알과 퓨어리스를 보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곧 바알과 퓨어리스도 따라 오겠지만 누구도 그녀만큼 빠르고 가벼운 경신술은 익히 지 못하여 언제나 처럼 혼자 치고 나가는 형국이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3∼4명의 기사를 자나쳐 도개교를 건너가자 감정이 없어 보이는 좀 비 기사들은 놀랍게도 당황한 기색을 비치며 허둥지둥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내 생각이 옳았구나.' 그녀는 좀비들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상대 마법사는 성도를 점령하 고 전선 밖으로 제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리하여 이 곳에는 죽은 기사들을 이용해 방어망을 구축한 것이리라. '안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놈이 기르가스 일 것이 다. 나는 놈을 베고 아스나를 되찾아 돌아가면 되는 거야.' 그녀는 기르가스를 죽이는 것만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는 다면 더 이상 상관하지 않 고 아카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제 목표가 눈앞에 있는 이상, 이 지긋지긋한 소녀 의 몸에서 한시바삐 본래의 16세 소년의 몸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카앙―. 그녀의 엄청난 돌파력에 등뒤를 빼앗겨 당황한 좀비 기사가 허리를 틀어 그녀의 뒷머 리를 노리며 검을 휘둘렀지만 최대한 상체를 숙인 채 달려가는 조슈아는 뒤에도 눈이 달린 듯 가볍게 몸을 틀며 검집으로 퉁겨내고 그 반동으로 정면에서 이마를 찔어 오 는 기사의 겨드랑이에 날카로운 검 손잡이를 박아 넣었다. 푸시시―. 성검 말고스는 신이 날 정도로 쉽게 기사의 겨드랑이 부위의 조직을 태우며 왼쪽 팔 을 끊어 떨어뜨렸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 이니 만큼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기대할 수 는 없었다. 조슈아는 한쪽 팔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음 소리한번 내지 않는 기사를 뒤로하 고 도개교를 지나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NEXT 제22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3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5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3 20001111 187 4 장편 2 "우우욱……." 샤레셀이 치료의 주문을 외우는 중에도 멘디에타의 신음은 계속되었다. 파괴된 조직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고 있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다친 부위가 부위다 보니 충격이 너무 큰 것이었다. "흑흑……. 힘내세요. 멘디에타 오빠!" 힘을 내게 하기 위한 술책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에레크트라는 갑자기 아저씨 에서 오빠로 호칭을 빠꾸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조르쥬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싸움이 시작되었군요. 어엇? 조슈아 아가씨는 어디를 간 것이지?" 상당히 멀리까지 뛰어 왔건만 성한 건물이 몇 없었기 때문에 2층 석조건물인 이곳의 창문에서도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성문과 위병 초소가 보이고 있었다. "여기는 되었으니 이제 가보셔요. 아마 조슈아는 마법사를 찾아 성에 들어갔을 거예 요. 저렇게 조직을 갖춘 좀비를 부린다는 것은 주위에 마법사가 있다는 것 일 테니 까 요." 조르쥬가 안절부절 하는 것을 본 샤레셀이 여전히 파란색 기류를 멘디에타의 가슴에 흘러 넣으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두 소녀와 창백한 얼굴로 샤레셀의 무릎을 배고 누 워있는 멘디에타를 바라보던 조르쥬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창문에서 뛰어 내렸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조르쥬의 믿음직한 어깨를 일별하며 에레크트라가 울먹이는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니들이랑 오빠들은 괜찮을 까요?" "조슈아가 성안의 마법사를 처치하면 저들은 모두 그냥 시체일 뿐이야. 걱정하지 말 거라." 샤레셀은 연기임이 분명한 어색한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은 걱 정으로 가득했다. '조슈아가 억지를 부려서 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런 식으로 전장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어. 상대가 대국 시돈을 상대로 마물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대마법사라면 조슈 아가 마법사를 일대 일로 만난다 하더라도 승산은 없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많은 생각으로 터질 듯한 머리를 식히기 위함인지 정기의 방출로 차가워진 왼 손바닥을 이마로 가져갔다. 그런 그녀의 눈에 식은땀을 흘리고는 있지만 점차 안정된 안색으로 돌아가고 있는 멘디에타의 얼굴이 들어왔다. '맞아. 멘디에타! 멘디에타가 받은 칙명은 무엇이었을까? 생존자의 확인? 아니야. 그 런 일이라면 그 많은 용병 단을 구성하고 이런 고급기사를 보낼 리가 없어. 멘디에타 는 분명히 무언가 이 전쟁의 방향을 바꿀 중요한 칙명을 받은 거야.' 샤레셀은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때어 치유마법에 좀더 박차를 가했다. 그녀의 손바 닥에서는 좀더 짖은 파란색 기류가 방출되고 있었다. '여하튼 멘디에타가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아.' 그녀의 무리한 마력 방출에 힘입어 멘디에타는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3 조슈아는 1차 성문에 이어 2차 성문을 통과하면서부터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많아지 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검과 몸으로 부딫여 오는 수 십 명의 좀비 기사들은 그녀의 힘을 빠른 속도록 고갈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본래의 소년의 몸이었다면 다음날 아침까지라도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지금 연약한 소녀인 것이다. 소녀치고는 어깨와 다리의 골격이 훌륭했지만 역시 근육은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여 쉽게 지치고 있었다. 겨우 20여명의 기사를 쓰러트렸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있 었다. "헉헉! 느려터진 바알! 왜이리 늦게 오는 거야?" 자신이 먼저 치고 나갔다는 것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녀는 멋대로 투덜거리며 넓은 광장을 새카맣게 메우고 있는 좀비 기사의 숲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조금씩 앞으 로 나아가고 있었다. 만약 성검 말고스를 재대로 쓸 수 있었다면 훨씬 쉽게 적을 상대 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가 들고 휘두르고 있는 것은 무(無)장식의 은빛 검집이었다. 카아앙―. 몇 번째의 적을 쓰러트렸는 지 이제는 세는 것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검을 잡은 손아귀의 감감도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인간과의 싸움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이런 마물 들이나 좀비 같은 것들과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신이 택한 싸움이었다. 처음 시돈에 간다고 했을 때 적극 만류했던 바알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너는 마물들을 본적이 없나본데, 우리 용병들은 상대가 2배든 10배든 별로 무섭거 나 하지는 않아! 그런데도 마법사가 소환한 마물을 상대하는 건 정말 싫어하지!" "그렇게 세?" "아니, 한 마리라면 4∼5명 정도가 붙으면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야! 그러나……."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을 상대하다가 죽거나 하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는 거야!" "그건 또 왜?" "마법사와 정면으로 붙으면 문제없지만 말이야! 상대 마법사 10명 정도가 성안에 꼭 꼭 숨어서 마물들만 번갈아 소환한다고 생각 해봐!" "……." "그러면 성밖에 진을 치고있는 놈들은 안에 있는 마법사 놈들을 잡아죽이기 전에는 죽도록 고생만 한다 이거야!" 결국 바알의 말대로 였다. 그저 여기까지 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였 다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특히 사랑하는 친구들과 제자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던 가? 그녀는 어린 객기에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는 것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외전의 성문까지의 거리만도 상당했고 기사들은 계속해서 보강되고 있었다. 광장에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갑옷들은 어림잡아도 그 수가 200 이상, 성도수비 기사단의 정수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기사단 전체가 좀비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 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슈아는 다리가 풀려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의 뒤로 돌아온 좀비 기사가 잠시 자세가 흐트러진 그녀의 뒷머리를 노리 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헉!" 조슈아는 자신을 약하게 만들던 상념에서 빠져 나와 헛 바람을 일으키며 허리를 교묘 하게 틀어 검을 피하고 밑에서 기사의 턱 끝을 올려쳤다. 파아악―. 그녀의 일격에 투구 밑 목 부위를 맞은 기사는 초록색 연기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그런 그의 목은 뒤로 꺾여 등뒤로 넘어가 있었다. 조슈아는 역겨운 시체 썩는 냄새에 나오려는 구토를 참으며 다시 양옆에서 찔러오는 검을 공중제비로 피하고 정면의 기사의 정수리를 엄청난 속도로 내리쳤다. 카아앙―. 온몸의 힘을 실은 검격에 투구가 찌그러지고 그 안의 내용물이 부서져 흘러내렸다. 조슈아는 썩은 고기에서 나는 듯한 그 역겨운 냄새와 부서진 머리뼈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내용물들을 보며 겨우 약해지려는 정신을 추스를 수가 있었다. '나도 이렇게 죽는다면 좀비가 되어 기르가스 놈의 졸개가 될지도 몰라.'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고스를 고쳐 잡았다. 왕가의 신물 성검 말고스는 좀비의 살점과 조금 남은 체액들이 말라붙어 심한 꼴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흠집하나 나지 않았다. 검집에서 뽑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 이 없겠지만……. "조슈아!" 갑자기 등뒤에서 그렇게도 그리고 그리던 믿음직한 바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에∼." 손, 발이 너무 바빠서 뒤돌아 볼 새가 없었지만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는 작은 미소 가 매 달려 있었다. 힘을 얻은 그녀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자세로 검을 휘두르며 재차 도약 하여 한번에 수명의 기사들을 뛰어넘어 돌진해 갔다. "저 녀석 왜 저리 힘이 넘치는 거야." 바알이 마치 나는 듯 가볍게 적사이를 뚫고 전진하는 조슈아를 보고 자신의 등뒤에 딱 붙어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퓨어리스에게 소리쳤다. 상대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많은 기사를 쓰러뜨리고 여기 까지 왔지만, 조슈아 같이 기사들을 뛰어넘어 전진할 수 없는 데다 퓨어리스를 혼자 남겨 둘 수도 없는 바알은 그 무식한 힘과 두꺼운 검으로 좀비 기사들을 박살내며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저만큼 앞서가던 조슈아는 외궁의 입구로 들러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끄응……." 바알은 뜻 모를 신음 소리를 내며 더욱더 무섭게 검을 휘두르며 철갑을 낀 주먹을 휘 둘렀다. 팽팽하게 긴장한 그의 근육은 당장 에라도 가죽 웃옷을 찢고 나올 듯했고 외 전의 입구를 향해있는 그의 두 눈은 당장 에라도 뇌전이 튀어나올 듯 흉흉하게 빛나 고 있었다. 파아악―. 그때 갑자기 그들의 둥 뒤에서 무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엇?" 바알과 퓨어리스가 놀라 돌아보니 양손에 남 방풍의 양날 검을 든 조르쥬가 이를 악 물고 한번에 두 세 명의 좀비 기사를 베어 넘어뜨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검은 약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는데 여태껏 쓰던 직도(直刀)와는 달리 등뒤에 매달아 놓고 꺼내 쓰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붉은 색의 검은 좀비 기사 들의 강철 갑옷을 한번의 검격으로 쉽게 베어 그 안쪽까지 파괴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내력이 있는 검임이 분명했다. 그들이 놀라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달려온 조르쥬는 그들의 머리 위를 가볍게 뛰어넘 어 갑자기 나타난 막강한 상대에 당황한 좀비 기사들을 차례로 베어 넘기며 저 만치 앞서 갔다. 그 역시 뛰어난 경신술을 익힌 듯 훌륭한 체구에 비하여 대단한 도약력과 돌파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알은 저만치 앞서가는 조르쥬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으으……. 제기랄. 요즘은 이놈저놈 할 것 없이 다들 날아다니는 구나. 나도 이번 일만 끝나면 경신술을 배워주고 만다." 그러나 그것도 일단은 살아 남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바알은 미래의 아내(자기 마음대로)를 빨리 도우러가지 못하는 분노를 주먹에 담아 정면의 좀비 기사의 머리를 한방에 등뒤로 꺾어 버렸다. 4 외 궁의 복도를 지나 내 궁으로 연결되는 홀에 들어선 조슈아는 홀 건너편의 강철 문 을 보고 흠칫하여 멈추어 섰다. 어른 다섯을 세원 놓은 높이인 강철 문은 두 깨도 상 당해 보였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강철문의 닫혀진 틈 사이로 선명한 주홍빛의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마법 지식이 없는 그녀로서도 그것이 엄청난 마력의 방출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 였다. '도대체 놈은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조슈아는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손바닥 때문에 검이 미끄러워 지자 손바닥을 가슴 깨 에 문질러 닦으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러 강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쿠오오―. 홀의 중간 정도에 다다랐을까? 갑자기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요란한 괴성과 함께 무엇 인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내려 왔다. "헉∼." 조슈아는 상상도 못한 공격에 당황하였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퍼억―. 카아악―. 보지도 안고 느낌으로 최 접점의 빠르고 정확히 가격하는 것은 그녀의 타고난 재능이 자 오랜 세월 단련된 검술의 결과였다.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 꽃이던 괴 물체는 그녀의 검격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다 시 날아올랐고 그 사이 그녀는 검을 고쳐 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런 세상에!!!" 조슈아는 자신의 머리 위를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괴 물체를 보고 긴장 감을 상회하는 경악성을 발하고 있었다. 상당한 높이의 홀은 그 천장과 기둥사이에 청동으로 독수리 상을 깎아 장식하고 있었 는데 그녀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흉흉한 눈빛을 번득이는 것은 바로 그 청동 독수 리 였던 것이다. "크크크……." 갑자기 철문 안에서 마치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들고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독수리를 눈으로 쫓고 있던 조슈아는 강철문 안에서 들려오는 음소에 몸서리를 쳤다. '네 놈인가? 기르가스?' 조슈아는 당장 에라도 철문을 부수고 뛰어들어가 자신에게는 반년 가까이를 소녀의 몸으로 지내는 모욕을 맛보게 만들었고 시돈의 백성들에게는 이유 없는 마물 전쟁을 일으켜 터전을 잃게 만든 원흉을 잡아 산채로 심장을 도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이 눈앞의 적을 물리쳐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머리 위를 배회하며 빈틈을 노리고 있는 놈을 어떻게 잡는 단 말인가? "이리 내려와서 싸우자 독수리야. 치사하잖아!" 한시라도 빨리 기르가스를 처치하고 마석 아스나를 회수하여 본래의 소년으로 돌아가 고 싶은 성급한 마음이 그녀의 사고를 마비시킨 것일까? 그녀는 적에게 하는 말치고 는 상당히 우호적인 말투로 소리치고 있었다. 키우욱―. 그러자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커다란 울음소리를 낸 청동독수리는 저만치 앞 에 날아 내려와 그녀와 대치하였다. "호호(으음…), 말을 잘 듣는 놈이군. 거기 가만히 있거라." 조슈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장 에라도 도약하여 목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그러 나 상황은 그녀의 마음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키아아―. 또 다른 괴성이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기겁을 한 그녀의 시선에 7마리의 청동 독수리 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홀을 장식하고 있던 8마리의 청동 독수리가 모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이런!" 조슈아는 낭패한 신색으로 방어자세를 취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곱 마리의 독수 리는 당장 에라도 날아 내려와 그녀의 목을 뽑아 갈 듯 날카로운 발톱을 번뜩이며 기 회를 노리고 있었고, 정면에 날아 내린 첫 번째 독수리는 선발대라도 되는지 그녀의 검격에 조금 깨어진 부리를 앞으로 내밀고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절대 절명 이런 식이면 조슈아는 도망칠 수도 싸울 수도 없었다. 첫째 독수리의 공격 을 막는 순간 하늘의 일곱 마리 독수리가 그녀의 빈틈을 노리고 목줄기를 뽑아갈 상황 이었다. 그러나 목표의 바로 코앞까지 와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검을 고쳐 잡고 먼저 정면의 독수리를 빠르게 격퇴하고 나머지를 생각할 수밖 에 없었다. '선제공격이 최선이다.'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이야압!" 두려움을 쫓으려는 듯 거창한 기합소리와 함께 조슈아는 바람 같은 속도로 정면의 독 수리를 향해 쏘아 갔다. 슈우욱―. 그녀의 갑작스러운 돌진에 당황한 독수리가 잠시 판단에 혼선을 일으킨 사이 조슈아 의 검은 그대로 독수리의 콧대를 후려쳤다. 파아악―. 허점을 노린 무시무시한 검격이었다. 청동독수리는 머리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 체 비 틀거렸고 그사이 기다렸다는 듯 나머지 독수리들이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 내렸 다. "당할 줄 알고!" 조슈아는 틈을 주지 않고 날아 내리는 독수리를 피하기 위해 무리한 자세로 몸을 틀 며 어지럽게 검을 휘둘렀다. 파파박―. '하나, 둘, 셋…….' 세 마리 째의 독수리의 머리를 날려 버린 조슈아는 네 마리 째를 놓치고 말았다. 한꺼번에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날아드는 놈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 던 것이다. 카앙―. "꺄악∼." 네 마리 째의 독수리의 부리에 어깨를 강타 당한 조슈아가 소녀다운(?) 비명을 지르 며 검을 놓치고 말았다. 왼손으로 감싼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서는 붉은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공 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안돼!" 재차 자신의 이마를 노리고 날아오는 누런 청동 부리를 보며 조슈아는 눈을 감았 다. 화르륵―. 갑자기 눈을 감은 그녀의 귀에 강한 불꽃이 점화하며 내는 음향이 들여오더니 뒤이 어 코를 자극하는 메케한 탄내가 풍겨왔다. 처음에는 머리가 날아가며 느끼게 되는 미지의 감각이리라 생각했던 그녀는 곧 조심 스럽게 한쪽 눈을 떠 상황을 살펴보았다. 푸쉬이이―. "에에?" 다음순간 그녀는 놀라운 장면에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청동독수리들이 여기저기 쓰려져 쇠 끓는 소리를 내며 녹아들고 있는 것이 었다. "어…어떻게?" "처음부터 당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빨리 도망가세요. 죠슈에 왕자." 갑자기 그녀의 등뒤에서 경천동지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등뒤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놀랍 게도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슈아는 천천히 몸을 돌려 등뒤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먼저 금장의 벨트 위에 훌륭 한 근육질의 배가 보였다. '에? 어떻게 여기에 배가?' 그녀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것보다 상대의 키에 더 놀라고 있었다. 그 럴 것이 상대의 키가 아무리 크다해도 그녀의 눈 높이에 배가 있다는 것은 결코 정상 적인 일이 아닌 것이다. 조슈아는 눈을 들어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복근 위의 가슴 근육, 긴 은발에 덮인 넓은 어깨 근육까지 조형의 신이 조각한 듯 강 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그는 양손에 독수리의 목을 잡고 가볍게 으깨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강하게 빛나는 후광 때문에 눈이 부셔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금빛의 아름 다운 눈동자에서는 자애로움과 강인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는 등뒤에 자신만을 위해 디자인된 듯한 깨끗한 두 장의 날개를 펄럭이며 재차 입 을 열었다. "빨리 달아나세요. 당신이 바로 조슈에 왕자라면 절대로 그와 만나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토레즈?"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4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6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4 20001113 201 4 장편 그렇다. 그는 바로 자펠 마을에서 바알에 의해 육체를 파괴당하여 신족으로 각성한 에알라 신의 아들 토레즈 였던 것이다. 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은 없지만 멀 리서 본 그의 자태는 잊지 못하고 있었다. 조슈아가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매료시키는 아찔한 미모 의 신족 청년을 보고 멍해 있는 동안 토레즈는 긴장한 신색으로 주홍색 마기가 흘러나 오는 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콰앙―. 그때 갑자기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던 강철 문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고 열리며 그 충격으로 석벽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내렸다. 조슈아는 기겁을 하며 검을 고쳐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슈우우―. 그녀의 상상과는 달리 강철문 안의 내전은 그저 보통의 신전 통로의 모습을 하고 있 었다. 다만 신전이 주홍빛 기류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신전 깊은 곳에서 누군가 엄청 난 마력을 방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도…도대체 안에서 무얼 하는 거야?" 영혼을 녹여 버릴 듯 강렬한 마력의 기운에 기가 질린 조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 리쳤다. 그녀로서는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마력은 아니더라도 이토록 지독한 마기 앞 에 서있는 것은 처음인지라 숨이 막혀오려 할 정도 였던 것이다. "당신을 찾지 못해 당신이 아버지의 신전에 찾아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도 당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셨다가 아세르 여신을 만나고 나서야 당신에 정체를 아시게 되셨죠. 당신의 심정은 알지만 도망가십시오. 그가 아직 당신의 정체를 모를 때 도망 가세요. 이 세계에서는 저도 그를 당하지 못합니다." 토레즈가 더욱더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그는 조슈아의 머리 속에 직접 이 야기하는 듯, 큰 목소리에 대하여 귀에서 느껴져야 할 진동이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유도 모르고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겠는가? 조슈아는 검을 치켜들고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바로 눈앞에 나를 이 꼴로 만든 마법사 놈이 있어요. 어떻게 물러 날수가 있죠?" "……." "당신의 아버지가 전에 내린 신탁에서 그를 상대할 용사란 저를 이야기 한 것이죠? 그리고 그 강력한 무기란 성검 말고스를 이야기 한 것이고요. 그렇다면 내가 그를 처 치할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앗! 그 말은……." 조슈아가 말고스를 언급하자 토레즈가 눈에 띄게 당황하여 만류하려는 듯 그 커다란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성검 말고스? 너는 누구냐?" 갑자기 홀 전체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이런!" 푸스스―. 토레즈가 눈동자에서 금빛 안광을 뿜어내며 이를 가는 동안 신전에서 뿜어져 나오던 주홍빛의 기류의 일부가 천천히 뭉쳐져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가더니 이윽고 상급마법 사용의 긴 회색 법의를 입은 인물의 모습이 되었다. "너어……." 조슈아가 이 유체이탈이라는 고급마법에 놀라워하기에는 눈앞의 상대에게 가지고 있 는 원한이 너무 컸다. 법의에 달린 고깔모자의 등뒤로 넘긴 창백한 얼굴의 청년은 적당히 큰 키에 뒤로 묶 은 암갈색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갈색머리칼로서는 드물게 깨끗한 초록색 눈동자 를 가지고 있었다. 조슈아는 왕궁에 초대되어 찾아 왔던 그를 먼발치에서 한번 본 것뿐이었지만 지난 몇 개월 간 단 한순간도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는 적이 없었다. 그녀가 어찌 자신에 게 평생 잊지 못할 치욕을 준 상대를 잊을 수 있겠는가? "기르가스. 네놈을……." 평정 심을 잃고 만 조슈아는 상대가 허상이라는 것도 잊고 엄청난 속도로 도약하여 원수의 얼굴에 혼신의 일격을 가하였다. 파악―. 마기로 이루어진 잔상이 잠시 흐트러졌을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기르가스의 얼굴은 믿어지지 않게도 기뻐하고 있는 듯 했 다. 조슈아는 허공을 베어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고 분기를 못 이겨 씩씩거리다가 전 혀 뜻하지 않았던 그의 반응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기르가스는 개의치 않고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고정 쇠로 검집이 고정되어 있는 은빛의 검을 번갈아 살펴보고는 마치 길가다 보석함을 주운 듯 한 표정으로 이가 드러날 정도로 짙은 음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이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찾아와 주시다니. 아카바의 조슈에 왕자 님이 아니 십니까?" 촤악―. "어엇?" 그녀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토레즈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어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느긋한 자세로 서있는 기르가스는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미소 지 으며 입을 열었다. "훗. 드디어 신 족이 나섰는가? 그러나 이곳은 이미 나의 결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 는 나의 영토다. 에알라가 직접 온다하더라도 내 손에서 달아 날수는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그의 형상은 사라지고 거대한 강철 문도 서서히 닫혀 외전의 중앙 홀 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이거 놔요! 도대체 왜 내가 그를 만나서는 안된 다는 거예요?" 조슈아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가는 토레즈의 품에 안겨 가슴을 두들기며 소리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가슴을 검으로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감히 신 족 을 공격할 수는 없어 마치 앙탈 부리는 소녀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 아가씨!" 조슈아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품에서 고개를 돌려내려다 보다가 너 른 복도 벽에 붙어 경악한 표정으로 토레즈를 올려다보고 서있는 조르쥬를 발견하였 다. 조르쥬는 상급 근위기사에게만 보급되는 진홍빛의 양날 검을 양손에 들고 서 있었는 데 수많은 적을 베고 온 듯 온몸에 노란 체액과 살점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잠시 토레즈의 어마어마한 위세에 눌려 경직되어 있다가 조슈아가 안겨 있는 것 을 의식하고는 쌍검을 교차하여 십자모양을 만들며 소리쳤다. "이놈 아가씨를 놔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 분은 우리편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조르쥬의 말을 끊으며 조슈아가 소리쳤다. 그 사이 토레즈는 그를 지나쳐 멀리 뛰어 가고 있었다. 토레즈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토레즈의 거대한 등을 바라보다 가 곧 바로 그 뒤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뛰기만 하는 그였다. "헉헉…. 어떻게 된 겁니까? 다시 나가다니요? 외전 밖은 아직도 좀비 놈들이 바글거 립니다. 마법사는 찾지 못하셨습니까?" 겨우 토레즈를 따라 잡은 조르쥬가 헉헉거리며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소리쳤 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겠는 가? 그녀는 다시 긴장한 토레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부탁했다. "토레즈. 제발 다시 들어가요. 나는 그를 처치하고 얻어야만 하는 것이 있단 말이에 요." 그러나 토레즈는 막무가내, 어느 세 셋은 외전의 입구를 나서 고 있었다. 입구를 빠져나가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니 경신술을 쓰지 못하는 바알과 퓨어리스가 여전히 광장의 중앙에서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대단한 수를 쓰러트렸지만 아 직도 남은 좀비 기사의 수는 어마어마하였다. 바알은 한 손에는 무식하게 두꺼운 직도를 다른 한 손에는 철갑을 끼고 한번에 한 놈 씩 착실하게 처리하고 있었지만 이미 지쳐 버린 퓨어리스는 겨우겨우 공격을 막으 며 바알의 등뒤에서 힘겨운 소모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아직 토레즈와 조슈아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토레즈는 계단 위에 멈추어 서서 광장을 가득 매운 좀비 군단을 내려다보더니 망설이 는 기색도 없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장소성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우오오오∼" 인간이나 다른 어떤 동물도 낼 수 없을 듯한 풍부한 성량의 목소리 였지만 조슈아가 듣기에 귀를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굉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멋진 중저음으로 마치 신이 노래하기 전에 발성연습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카아악―. 그러나 좀비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100∼200에 이르는 좀비 기사들은 모 두 처절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더니 갑옷 사이로 노란 체액을 흘리며 녹 아들었다. "토레즈 님!" 죽음의 문턱까지 같던 퓨어리스가 상황을 파악 못해 헐떡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두 리 번 거리 다가 토레즈를 발견하고는 무릎을 꿇으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쨌든 토레즈는 그녀가 모시는 신의 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안게 해낸 토레즈는 전혀 뻐기는 기색 없이 조 슈아를 가슴에 안은 채 다시 뛰기 시작하였다.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바알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조슈아는 토레즈의 태도에서 상대에 대한 무서움을 실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정도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토레즈가 대적해볼 생각도 않고 도망을 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놈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그녀는 상황을 물어 볼 기회도 놓치고 토레즈에게 안겨 있는 조슈아의 뒤를 따라 그 저 말없이 달리고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가볍게 몸서리를 쳤다. '역시 말고스를 재대로 쓸 수 있기 전에는 상대할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샤레셀이 마 력으로 뒤를 받쳐준다면 더 쉽게 싸울 수도……. 앗!' 성문 밖에서 멘디에타를 치료하고 있을 샤레셀과 에레크트라를 떠올린 조슈아는 갑자 기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를 바라 보았다. '어…없다! 안티오페!' 조슈아는 성문 밖에서 좀비와 싸우기 시작한 시점부터 안티오페의 존재를 잊고 있었 던 것이었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무심 여왕의 모습은 어디에 도 없었다. "바알! 퓨어리스! 안티오페와 같이 있지 않았어?" 조슈아가 토레즈의 어깨너머로 겨우 머리를 내밀어 소리치자 오랜 싸움 끝에 다시 뜀 박질을 해야하는 상황에 툴툴거리고 있던 바알이 소리쳐 대답했다. "너와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야?" "아니. 아까부터 보이지 않아. 설마 어디 다쳐서 쓰러져 있는 것 아니야?" "전에 뵌 요정의 여왕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슈아의 불안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토레즈가 달리는 와중에도 호흡하나 흩트리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당황한 조슈아는 그의 가슴에 찰싹 붙어 있는 상태여서 보이지도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떡여 긍정을 표했다. "그 분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인간계에서라면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한 분입니다." "에엣? 안티오페가 그렇게 강하다고요?" 그녀의 과장된 반응에 토레즈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힘이 강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인간계에서 그 분을 해칠 수 있는 상대란 존재 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스스로를 해치기 전에는 말이죠. 아마도 무언가 할 일이 있 어 사라지신 걸 겁니다." 토레즈는 알송달송한 말을 던지며 어느 세 성문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가 슴에 안겨 성문을 나서던 조슈아는 도개교 위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뜻밖의 인물들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샤레셀, 에레크트라?" 놀랍게도 도개교 위에는 멘디에타를 돌보고 있어야 할 두 소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 로 성벽주위에 파놓은 인공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레셀은 토레즈를 보고 잠시 대경하였으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내 정색을 하며 조슈아에게 소리쳤다. "메…멘디에타가 깨어나자 마자. 우리를 뿌리치고 여기로 달려와서는 연못에 뛰어 들 었어. 어떻게 하지?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리고…. 잘못하면 죽는 단 말이야." 그녀가 소리치는 사이 예의 바른(?) 12세 소녀 에레크트라는 신의 아들 토레즈를 보 고 대경하여 이마를 땅에 박고 과도한 예를 표하고 있었다. 토레즈는 그녀에게 미소지 어 보이며 한 손을 뻗어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올려 가슴에 안았다. 아마도 어깨에 부상을 당한 조슈아와 함께 이 조그마한 소녀는 자신들을 쫓아오는 것 이 힘들다고 생각한 듯 했다. 그의 품에 안긴 에레크트라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이 없는 상태여서 그녀의 반응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연못에 뛰어 들었다고? 도대체 왜?' 그녀는 도개교 위에서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성벽 주위에 파진 인공연못의 깊이는 상당하여 밑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조슈아는 재차 달리기 시작하는 토레즈의 품안에서 이 이상한 상황들을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피를 좀 흘려 현기증이 나기는 했지만 결코 느긋할 수 없는 상황이었 다. '그래! 연못 속에 비밀통로가 있는 거야. 그는 그곳을 통해 성의 중심으로 들어가 무 언가 일을 저지르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이 그에게 내려진 칙명이라는 것이군.'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뛰어 쫓아오는 샤레셀과 성문을 나서 그녀와 합세하고 있는 나 머지일행을 일별하며 조슈아는 아직도 피가 베어 나오는 어깨를 손으로 압박하였다. '아까는 흥분해서 달려들었지만 일단 나는 치료를 받아야해. 그 다음 비밀 통로를 이 용해 놈을 칠 궁리를 해보자.' 조슈아는 일련의 사태로 또다시 안티오페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 조그마한 무심 여왕이 언제나 말없이 어깨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5 휘이이―. 무시무시한 마기가 금빛 결계에 부딫여 가공할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주홍빛의 마기가 실내를 가득 매운 이곳은 알본 성의 외전과 내전 사이에 위치한 대 신전의 제식장. 거대한 신상들과 온갖 상징물들로 가득한 이곳은 북구 최강의 마법 왕 국 시돈이 자랑하는 지상 최대 규모의 거대한 실내 광장이었다. 2000명의 인원을 수요할 수 있는 홀은 대리석바닥이었고 통로에서 제단으로 연결되 는 중앙통로는 황금이었다.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홀이 아닌 광장으로 불리 우고 있 었지만 놀랍게도 그 무거운 홍석(虹石) 천장을 받치고 있어야할 기둥은 많이 눈에 띄 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천장의 압력 대부분을 영구적인 부유 마법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콰아아―. 잠시 소강상태이던 마기가 다시 엄청난 기세로 뿜어져 나오며 폭풍을 일으켰다. 그러 자 그에 반하여 광장 바닥의 금빛 광채는 더욱 강해져 마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광장 바닥에는 결계가 만들어져 있는 듯 외공간과 내공간의 경계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였는데, 자세히 보면 황금으로 만들어진 중앙통로에는 법문이 새겨진 백금 판들이 몇 걸음의 간격을 두고 박혀 있었고 수십 개의 판들 중 이 미 7할 이상이 부서져 있었다. 상황으로 보아 주홍빛의 마기는 결계를 부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위이잉―. 이때 이 어마어마한 광경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날개 짓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몸집 에 초록색의 긴 머리칼, 투명한 두 장의 날개를 가진 인물이 광장에 들어서고 있었 다. 조그마한 방문자는 무심한 눈으로 짙은 마기에 둘러 쌓인 광장의 중앙을 바라보고는 바닥에 내려와 가볍게 날개 짓을 하여 초록색의 가루를 온몸에 흩뿌렸다. 그러자 초록 색 기류 속에서 서서히 몸이 커지더니 15∼16세 소녀 정도의 몸이 되어 성장을 멈추었 다. 황금빛과 주홍빛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조명을 받고 서있는 그녀의 나신은 사랑의 여 신이 부러워 할만한 극치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기가 일으키는 매서운 바람에 맨 몸으로 맞서고 있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당신에게 할말이 있어." 파아아―. 그녀의 무심한 표정과 너무도 어울리는 억양 없는 목소리에 무섭게 휘몰아치던 마기 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마기가 사라진 광장의 한 가운데에 정좌하고 있는 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회색 법의에 달린 고깔 모자를 벗어 뒤로 넘기고는 만면에 미소 를 지으며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왔다. "후후∼. 설마 당신까지 여기에 오셨을 줄은 몰랐군요. 아름다운 안티오페."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5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7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5 20001114 175 4 장편 기르가스는 대단히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 전혀 거리낌없이 그녀의 오른쪽 볼에 키스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그가 하는 데 로 내버려두고는 언제나 처럼 남의 말을 하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전에 당신은 나의 숲에 인간들이 발을 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어. 나는 당신 의 능력을 보고 그 말대로 아이들을 대리고 힘든 이주를 했었고." 그녀는 비난을 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전혀 따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 았다. 그러나 기르가스의 초록색 눈동자에는 놀랍게도 당혹감 같은 것이 어리고 있 었다. 그는 수줍은 시골 청년처럼 얼굴을 붉히고 암갈색 머리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 다. "면목이 없군요. 아름다운 안티오페. 저도 지금에야 놈들이 무엇을 계획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국 군에게는 서부를 가로질러 이곳에 군단을 투입할 여력까지는 없으 니 민간인만 견제 할 수 있는 정도의 마물만 곳곳에 심어 놓으면 될 것으로 생각했는 데 아무래도 놈들이 이 곳 까지 온 것을 보니 계획이 틀린 것 같군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기르가스였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 올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심성의 대현자 이자 대마법사인 그가 그녀 앞에서는 연신 실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과장된 말투로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안티오페는 그의 그런 반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아니면 그런 반응이 당연 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광장 중앙로 위에 거의 다 깨어져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백금 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을 바라보던 안티오페의 입에서 낮은 한숨 소리가 세어 나왔다. "이제야 당신이 누구인지 알겠어. 당신도 마아가의 전철을 되밟는 군. 이런 짓을 해 서 얻는 게 뭐지?" 기르가스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깨어진 백금 판들을 바라보고 의미 불명의 미소를 지 어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어쩐지 조금 씁쓸한 기운이 떠오르고 있었다. "후후∼. 가업(家業)이니까요." "당신은 정통 계승자가 아닐텐데? 왜 가업을 잊지? 당신가문의 정통 계승자는 언제 나 같은 외모였지 않아?" "……." 그녀의 지적에 기르가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졌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개의치 않 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당신이 누구인지 몰랐어. 전에 당신의 형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왜 그가 가업을 잊지 않지?" "그만!" 기르가스가 동요된 감정이 그대로 묻어 나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무표정한 안티오페 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안티오페의 얼굴을 내려 다보던 그는 더 노려보지 못하고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우리들의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은 몰라도 저는 그것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았죠. 후후……. 당신을 미워하는 것만은 절대로 할 수 없군요." 그의 손길에 전혀 거부감을 보이지 않던 안티오페도 그 말에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옛날 일이라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아. 그리고 그는 당신들의 아버지가 아니야. 그가 어떤 마법을 썻는 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은 각각 다른 인간들에게서 태어났잖 아." 기르가스는 그녀의 말에 가볍게 미소지어 보이고는 등을 돌려 다시 광장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고 계시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만 방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이일이 끝나면 다시 는 인간들을 볼일이 없는 평화로운 땅에서 살수 있도록 해드리죠." "아직도 그런 꿈을 꾸는 거야? 그들을 불러내서 세상을 휘젓고 다니게 도와주면 당신 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거지? 당신도 그처럼 바보인 거야? 왜 세상을 가만 두려 하 지 않지?" 그녀치고는 상당히 격양된 목소리고 소리친 것이리라. 그러나 기르가스는 열기 어린 표정으로 황금으로 장식된 중앙로를 노려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후후∼. 저는 아버지와 생각이 다릅니다. 당신 말대로 정통계승자가 아니니까요. 그 러니 거기서 세상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세요. 마침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최상의 마법 도구까지 저의 영토에 제 발로 찾아 와주었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기르가스는 다시 정좌를 하고 앉아 나직이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휘이이―. 어떤 마법 도구도 없이 그저 작게 주문을 읊었을 뿐이었지만 마치 깨끗한 물에 주홍 색 물감을 떨어뜨린 것 같이 순식간에 주홍빛 마기가 뿜어져 나와 광장 전체를 덮어 버렸다. 안티오페는 마기에 덮여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기르가스를 바라보며 무언가 갈등에 사 로잡힌 듯, 흰자위가 없는 맑디맑은 초록색 눈동자를 간헐적으로 떨고 있었다. 6 조슈아는 여전히 토레즈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에레크트라가 치마를 찢어 어깨에 묶어준 덕에 어느 정도 지혈이 되고 있었지만 이 미 상당한 피를 흘린 그녀는 열심히 뛰는 토레즈의 품안에서 빈혈과 멀미(?)에 의해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대로를 가로질러 항구의 입구에까지 다다라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의당 있어야 할 마물의 공격이나 방해공작이 없었다. 그때 에레크트라는 토레즈의 어깨 너머로 숨이 턱까지 차 올라 뛰어오고 있는 나머지 일행을 미안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조르쥬는 긴 가운이 발에 걸려 빨리 뛰 지 못하는 샤레셀을 안고 뛰고 있었고, 바알은 싸움으로 파김치가 된 퓨어리스를 업 고 있었다. 에레크트라는 어깨 너머로 그들을 지켜보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토레즈의 아름다운 날 개를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토레즈 님은 왜 날지 않는 거예요? 훨씬 빠를 텐데요." 그러자 토레즈는 여전히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대답하였다. "아가씨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곳은 강 외에는 모두 몇 겹의 결계로 덮여 있습 니다. 저라고 해도 날아서 통과할 수가 없어요. 저 혼자라면 신전을 통해 빠져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의 말에 당황한 조슈아와 에레크트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 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 그 어디에도 인공적인 결계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 다. "하하!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는 결계의 내공간과 외공간의 접점이 보일 정도로 허 술한 마법은 쓰지 않으니까요." 조슈아는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경황 중에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하 기로 마음먹었다. "아까 하다만 이야기를 해줘요. 전에 에알라 신께서 내려주신 신탁에서 언급한 용사 는 제가 맞죠?" "……." "그 정도는 저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엄청난 무기란 말고스를 이야기 한 것이라 는 것도요. 내가 말고스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하셨었죠? 그런데 왜 그냥 도망만 치는 거죠?" 그녀의 따지는 듯한 말투에 난감한 표정을 짖고 있던 토레즈는 생각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지 잠시 사이를 두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을 이 소녀 분 앞에서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원하시니 말씀 드리 죠. 당신은 이미 말고스를 쓸 수 있는 상태 였습니다." "에에?" 조슈아는 체통도 잊고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괴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쓸 수 있는 상태라니요? 그게 무슨……." "아시겠지만 성검 말고스는 아카바의 정식 왕위 계승자로서 신전에서 축성을 받은 자 중에 극에 이른 검술의 소유자에게만 그 사용권이 허용됩니다. 당신은 뛰어난 검술 가로 이미 14세에 그 정도의 검술을 완성했고 계승자로서 축성도 받아 그 권리를 가지 고 있으니 다른 한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언제라도 검을 쓸 수 있는 상태였죠." "왕위 계승자요? 언니가요?" 그때 반대쪽 품에 안겨 있던 에레크트라의 경악 성이 들려 왔다. 그러나 조슈아의 귀 에는 에레크트라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빨리 말고스를 계승받아 기르가스 를 제대로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때문이었다. 일단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기 만 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해결되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의 조건이란 무엇이지요?" 그러나 토레즈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답답 해진 조슈아는 뾰족한 목소리로 재차 질문하였다. "그 조건이란 게 뭐예요!" "그것은……." 푸하학―. 갑자기 입을 때던 그의 얼굴에서 듣기 거북한 폭발음이 들려 왔다. 갑작스러운 폭발 음에 놀라 토레즈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두 소녀는 혼이 달아날 듯한 충격에 휩싸여 있 었다. 토레즈의 얼굴이 사라진 것이다. 아니 머리가 통째로 녹아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 다. "꺄아악!"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에레크트라였다. 그 사이 순식간에 머리가 사라져 버린 토레즈는 인간계에서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물질들이 빠른 속도로 기화하여 대기 중으로 사라져 갔고 그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두 소녀는 꼴사납게 땅바닥을 구 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픔을 호소할 겨를 이 없었다. 선착장의 입구에서 주홍빛광채를 뿜으며 회 색 법의(法衣)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르가스!" 조슈아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덕에 더욱 벌어진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웃옷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나도록 이를 갈았다. 그녀는 여전히 뽑히지 않는 말고스를 들고 에레크트라를 등뒤로 숨기고 자세를 잡았 다. 그 사이 뒤 처져 있던 나머지 일행이 그들에게 나가오고 있었다. "후후……. 신 족이 끼어 있어 조금은 놀랐지만 그 놈은 이제 한동안 인간계로 돌아 오지 못합니다." 기르가스의 환영은 얼굴 절반을 고깔모자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 묘하게 말려 올라간 입술모양으로 볼 때 그녀와 일행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일행을 한번 쓸어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 레 저었다. "상당한 능력의 신녀 님이 한 명 끼어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이 집단은 무엇입니까? 전투능력이 없는 어린 계집애 하나에 소녀 검사, 기사가 둘이라니. 흠…. 그나마 한 명은 기사도 아니군요. 설마 이런 패거리를 몰고 와서 나를 치려 한 것입니까?" 그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조슈아의 아름다운 몸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모두를 도발하 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아무도 쉽사리 나서 그를 공격하지는 못하 고 있었다. 신족인 토레즈를 너무도 쉽게 몰아 내던 그의 어마어마한 힘을 방금 목격하지 않았는 가? '저런 환영을 상대해봤자.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어. 일단 강으로 도망쳐서 다시 기 회를 잡아야 해.' 대량 출혈로 시야까지 좁아지고 있는 그녀였다. 이제 이 상태로 조금만 지난다면 눈 앞에서 기르가스가 목을 대주고 있어도 벨 수 있다고 확신 할 수가 없었 다. 조슈아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는 검을 고쳐 잡았다. '돌파다. 이단 저 놈을 지나가야 해.'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 채었는지 어느새 그녀의 옆에서 있던 바알도 도약을 준비하 고 있었다. "가랏!" 발악적으로 고함을 지르며 조슈아가 최후의 힘을 모아 도약하였다. 그녀는 기르가스 의 머리 위로 날아올라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정수리를 내리쳤다. 상대가 실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환영을 흩트려 놓으면 잠시 동안은 힘을 쓸 수 없 다는 마법 상식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파앗―. 마치 안개를 벤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잠시 환영이 일그러졌고 그 사이 모두가 기르가 스의 뒤로 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됐어!" 조슈아가 속으로 쾌재를 올리며 그의 머리를 뛰어 넘어 막 일행을 따라 가려는 순간 이었다. 텁석―. "헉!" 그녀는 자신의 뒷목을 잡아채는 강한 손의 감촉에 기겁을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파앗―. 그러나 그녀의 검은 허공을 베었을 뿐이었다. "조슈아!" 그녀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눈치 챈 바알이 저 만치 달려 가다가 소리를 지르며 되돌 아 왔다. 그러나 그는 조슈아의 눈앞에서 무형의 벽에 부딫인 듯 심하게 퉁겨 나뒹굴 었다. "네 놈이!" 무형의 벽에 얼굴부터 부딫인 바알이 흐르는 코피를 손등에 닦으며 일어났다. 콰앙―. "우욱!" 그사이 바알보다 한발 늦은 조르쥬가 눈앞에서 바알이 코피를 터트리며 퉁겨 났는 대 도 불구하고 똑같은 짓을 하여 퉁겨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기분 나쁜 마법사의 손이 조슈아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 이성을 잃 은 듯 했다. "물러서세요." 갑자기 샤레셀이 두 남자의 틈새에 끼어 들며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더 이 상 신녀의 얼굴이 아닌 마녀의 그것 같아 두 남자는 이 사람 좋은 신녀가 이런 표정 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조슈아를 놔줘요. 그러면 당신과의 싸움은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겠어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샤레셀의 오른손에서는 파란 색의 기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아마도 주력을 모으고 있는 듯 점점 그 농도가 짙어 지 고 있었다. "우욱. 이거 놔!" 그사이 조슈아는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그녀를 잡고 있 는 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조슈아를 놔주세요." 샤레셀은 주력이 모인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며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재차 소리쳤다. "후후……. 이제 보니 조슈아 란 당신을 이야기하는 것이었군요. 이거 정말 재미있 군. 그럼 저 두 사내는 당신이 소녀 인줄로 아는 겁니까?"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6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8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6 20001115 193 4 장편 "그만둬!" 조슈아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녀는 이런 자리, 이런 상황에서 진실을 밝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기르가스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후후∼.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저들은 당신이 마법 때문에 소녀의 몸이 된 것 을 모르고 있군요." "그게 무슨?!" 바알과 조르쥬는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특히 조르쥬는 무언가 감 을 잡은 듯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새하얗게 질려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다시 한번 말하겠어요. 조슈아를 놔줘요." 샤레셀은 그녀의 안전만이 지상과제 인 듯, 돌아가는 상황에는 전혀 관심 없는 표정 으로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오른 손에는 이미 터질 듯한 주력이 모여 소용 돌이치고 있었다. "크크∼.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 소녀는 나의 원대한 계획에 가장 중요 한 부분 이라 서요." 그는 여전히 기분 나쁘도록 예의 바른 말투로 일관하며 조슈아을 천천히 품에 안았 다. 그러자 바동거리던 조슈아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애를 놔줘!" 샤레셀이 폭갈하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파아앗―. 짙은 파란빛의 광구(光球)가 기르가스의 얼굴을 향하여 무시무시한 속도록 쏘아 갔 다. 그러나 기르가스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날아오는 광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콰아앙―. "아아악……." 샤레셀의 공격이 무형의 벽에 부딫이자 폭음과 함께 엄청난 반탄력이 모두를 십여 걸 음씩 날려 버리고 있었다. "으으윽……." 가장 먼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것은 역시 바알 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찢어진 가 죽 보호구 사이로 약간의 피를 흘리고는 있었지만 워낙에 튼튼한 몸인지라 비교적 멀 쩡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일행의 상태는 그렇지 않았다. 에레크트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와 입에서 피가 흘리며 혼절 해 있었고, 퓨어리스는 그런 그녀를 껴안은 상태로 바닥을 구르다 다쳤는지 머리에서 는 피를 흘리며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조르쥬였다. 그는 폭발 순간 샤레셀과 바알 앞에 서서 그대 로 충격파의 직격을 맞은 것이었다. 그의 눈, 코, 입, 귀에서는 연신 검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두 겹으로 받쳐입은 가 죽 보호구도 산산이 찢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그 안이 어떻게 되었을 지 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아∼!" 그런 그의 뒤에서 샤레셀의 탄식이 들려 왔다. 그녀는 조르쥬가 온몸으로 막아준 덕 에 머리를 가리고 있던 성포가 찢어져 떨어져 나가고 머리칼을 덮고 있던 가는 은철사 로 만든 망사가 날아가, 허리까지 오는 길고 풍성한 빨간 머리칼이 드러난 것 외에는 여기저기 조그마한 찰과상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는 자신의 상처나 상태 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익숙하지도 않은 공격마법을 사용했다가 오히려 동료들을 낭패에 빠뜨린 것이 다. 그때 넋이 나간 샤레셀의 귀에 기르가스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한 실력이지만 여기서는 원하는 만큼의 주력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어야 죠. 이 땅에서는 당신이 모시는 아세르 여신이라 해도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리 억울 해 하지는 마십시오." 기르가스가 샤레셀을 위로(?)하는 동안 그의 품에 안긴 조슈아는 서서히 사라져 가 고 있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샤레셀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털고 일어나 야멸 차게 소리쳤다. "아직도 남의 걱정을 하시다니……. 후후, 그 전에 살아나갈 궁리를 해보시죠." 슈아악―. 이제 조슈아는 완전히 사라진 가운데 기르가스의 환영은 천천히 양손을 들어 손바닥 에 주홍빛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불꽃의 마신 기놈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의 적은 기놈의 적! 불꽃의 정령들이여. 나 의 적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태워버려라. 폭렬주박(爆裂呪剝)!" 파아앗―. 그의 입에서 기합에 가까운 주문이 흘러나오더니 모두를 둘러싸는 거대한 불꽃의 원 이 만들어 졌다. "아앗!" 불꽃의 화기덕에 깨어난 퓨어리스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에레크트라의 치마에 붙 은 불을 밟아 끄고는 그녀를 안고 샤레셀과 바알에게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기르가스의 눈에는 장난기 같은 것이 어려있었다. "후후∼. 이 불꽃은 당신들이 완전히 타서 재가되어 사라지기 전에는 결코 꺼지지 않 는 정령의 불꽃입니다. 아주 천천히 당신들을 향해 간격을 좁혀 오겠죠. 충분히 즐기 시기를……." 그 말을 끝으로 기르가스의 환영은 대기 중에 녹아들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언니 뜨거워요." 에레크트라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비록 이름은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샤레셀은 에레크트라가 꿈속에서 부르는 언니가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 다. 지난 몇 개월의 여행으로 둘은 이제 친자매 이상으로 가까워져 있는 것이었다. 샤레셀은 입술을 깨물며 조슈아가 끌려갔을 궁전 방향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오 른손에 주력을 모으고 나직이 주문을 읊었다. "새벽의 어머니, 질서의 수호자 아세르여! 당신의 영광을 증거 하는 자에게 천상의 방패를!" 부오오―. 샤레셀은 신녀가 된 이례 두 번째로 절대마법방어 결계를 치고 있었다. 비록 성도 전체를 덮고 있는 마법진의 방해로 그전 보다 상당히 엷은 빛을 띄고 있기 는 했지만 그녀의 손바닥에서는 성스러운 느낌의 파란 빛 기류가 뿜어져 나와 일행을 모두 보호할만한 크기의 결계를 만들었다. 전에 한번 한계를 넘어설 정도의 거대한 절 대마법방어를 펼쳤던 그녀에게는 이제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 상대를 다 태워 재로 만들기 전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의 결계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 지는 그녀도 알고 있지 못했다. 화르륵―. 용의혓바닥 같은 붉은 불꽃이 절대마법방어결계에 부딫이자 더 진행하지 못하고 결 계 벽면을 타고 올라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알 씨, 조르쥬와 에레크트라를 대려와 주세요. 치료가 늦으면 위험해요." 결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어차피 죽는 것인데 무슨 걱정일까? 라고 생각 할 수 도 있겠지만 그녀는 신녀,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를 돌보지 않을 수 없다. 바알은 그런 샤레셀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얼굴로 무언가 물으려 하는 듯 했다. 그 러나 샤레셀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어 그는 할 수 없이 한숨을 내쉬 며 조르쥬를 끌고 그녀의 앞으로 대려 갔다. 슈우우―. 샤레셀이 절대마법방어를 펼친 상태에서 치료마법의 행사라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 여 주는 동안 바알은 공포에 떨고 있는 퓨어리스의 품에서 에레크트라를 받아 안고 있 었다. 그러나 상황에 밀려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심장은 의문과 걱정으로 터질 듯 했다. '마법으로 소녀가 되었다는 놈의 말은 도대체 무엇이야! 그렇다면 원래는 그렇지 않 다는 이야기인가? 신녀 아가씨의 반응도 놈의 말을 수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던가?' 그는 헛소리를 하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한 손 으로는 결계를 유지하고 한 손으로는 치유 마력을 조르쥬의 가슴에 밀어 넣고 있는 샤 레셀의 풍성한 붉은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의 경험으로 요령이 생겼는지 상당히 안정적으로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지 만 마음의 동요만큼은 숨길 수 없는지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바알은 그녀를 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듯 손톱이 손바닥 에 박혀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가? 나의 사랑하는 여인을 적의 손에 넘겨주고? 그리고 진실 도 알지 못한 채?' 비록 샤레셀의 활약으로 화기는 사라 졌지만 이제 죽음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는 절망감과 더불어 다른 종류의 절망감이 바알을 괴롭히고 있었다. 7 "이것 풀어 줘! 이 자식아!" 이곳은 대신전의 제식장. 조슈아는 이 아름다운 실내 광장의 제대 위에 양팔을 벌린 채 떠올라 심하게 바동거 리고 있었지만, 무형의 사슬에 묶인 팔다리는 완전히 고정되어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 였다. 피에 젖은 가죽 보호구는 벗겨져 바닥에 떨어져 있어 겉옷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비 단 블라우스가 드러나 있었는데 어깨의 상처는 마법으로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그런 그녀 앞 제단 위에는 성검 말고스가 마기로 덮인 신전의 공기에 반응하고 있는 듯, 서늘한 은빛 기류를 흘리며 놓여 있다. "아가씨가 입이 거칠군요." 그녀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느긋한 목소리의 갈색머리 청년이 짙은 주홍빛 마기를 뚫 고 그녀에게 다가오며 이죽거렸다. 딴에는 상당히 친절한 말투였지만 조슈아로서는 그 의 빈정거림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네…네놈이……. 네놈이 나를 아가씨라고 부른단 말이냐?" 언제나 처럼 도발에 잘 넘어가는 그녀였다. 그러나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을 뿐 이었다. "그 동안 여인으로서 잘 지내 오신 것 같군요. 이 사지(死地)로 사내를 둘이나 끌어 들이다니, 후후∼. 역시 미녀에게는 남자들이 꼬이기 마련이죠."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이 빌어먹을 놈아!" 조슈아는 그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부끄러워서 인지 아니면 화 를 못 이겨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거의 물감을 들인 듯 붉어 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반응은 그의 장난기를 더욱 부채질할 뿐이었다. 기르가스는 더욱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하하! 나를 원망하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의 생명을 연장해준 은인인데, 어찌 나를 원망하시는지? 무엇보다 나는 방법만 알려준 것이지 실제로 한 것은 당신 측근들이 아 닙니까?" "그렇다면 마석 아스나를 훔쳐 간 것은 왜 이지? 하필이면 내가 이런 몸으로 변해 있 을 때 가장 중요한 마법 도구를 훔쳐간 이유는 뭐야!" 조슈아는 분노와 부끄러움에 일그러진 얼굴로 한마디 한마디 씹어 가며 소리쳤다. 그 녀로서는 그가 마석을 훔쳐 간 것 보다 하필이면 그 시간을 골라 가져 간 것이 원망스 러운 것이리라. 기르가스는 잠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후∼. 어차피 아시게 될 일이고 시간도 많으니 말씀 드리도록 하죠. 당신이 본래 의 몸으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조슈아의 머리는 그의 전혀 뜻밖의 대답으로 대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신은 마석 아스나를 이용해 무언가 일을 저지르려는 것이 아니야? 내가 본래의 몸 으로 돌아가는 것이 왜 당신에게 문제가 되지?" 지나친 의구심 때문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기르가스는 이마를 덮은 암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피에 젖어 몸매의 굴곡이 내비 치는 비단 블라우스를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 선은 16세의 소녀라기에는 너무도 농염했고 그 이상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탄력이 있어 보였다. "으으……." 조슈아는 그의 시선에 치를 떨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피식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 다. "훗∼. 아직도 당신과 아카바 왕국의 바보들은 왕비의 뱃속에 있던 당신에게 건 주문 이 시한살법(時限殺法) 같은 저급한 마법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그…그럼 아니었다는 거야?" 조슈아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16년간 자신과 가족들을 끈질 기게 괴롭히고 결국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저주이지 않았던가! 만약 아니었 다고 한다면 그 동안의 고통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말해! 나에게 걸려 있던 마법은 무엇이었지?" 조슈아는 뜸을 들이는 기르가스의 태도를 더 참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소리쳤 다. 기르가스는 눈물을 흘리는 극미(極美)의 미소녀를 마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눈 으로 쓸어보며 천천히 그러나 뚜렷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의 형이 당신에게 건 마법은 시한전생(時限傳生)의 마법이었습니다."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part 6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69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7 20001117 184 3 장편 "전…전생? 그리고 형이라고?"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전생의 주문을 건 레스타트는 저의형이었죠." 조슈아는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의 충격을 받고 있었다. '전생! 전생이라니.' 그녀의 경악한 표정을 보고 있던 기르가스가 천천히 다가와 성검 말고스에 손을 얹었 다. 쓔우우―. "흐음……." 검에 닫은 기르가스의 오른 손바닥에서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타는 역겨운 냄 새가 풍겨 나왔지만 그는 가볍게 침음성을 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치이이―. 마치 자신의 손바닥을 태우는 것을 즐기는 지, 한참을 그렇게 성검에 손을 얹고 서 있던 기르가스는 검에서 손을 떼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화상을 왼손으로 문질렀 다. 그러자 거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타들어 갔던 오른손 손바닥이 순식간에 치유되었 다. "과연, 아무리 레스타트라 해도 이런 것에 심장을 꽤 뚫렸다면 별다른 수가 없었겠는 걸? 왕비에게 당했다고 해서 놈을 비웃었었는데 그럴 만도 하군." 레스타트를 형이라고 밝혔건만 그의 말투에서는 어쩐지 적의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 었다. 그때 혼란에 빠진 조슈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직 확실히 대답하지 않았어. 전생의 마법이란 것이 무엇이지? 설마 부활 의 마법 같은 것인가?" 그가 한 말을 곧이 곧 대로의 의미로 해석하여 받아들이기에는 그녀의 프라이드와 상 식이 너무 견고했다. 그러나 상대는 역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 마법사 기르가스였 다. 그는 조슈아의 핏기 없는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죽을 위기에 처한 레스타트가 허세를 부린 것이지요. 아무리 놈이 라 해도 육체가 파괴당한 상태에서 숙주(宿住)도 없이 마법의 잠을 잘 수는 없는 것이 니까요. 그래서 놈은 태아인 당신의 몸을 빌어 마법의 잠을 자면서 그 시한을 16세로 잡아 놓은 것입니다. 후후∼. 그렇다고 그런 고위 마법을 드러나지 않게 행사 할 수 도 없으니 그런 연막을 친 것이죠." "……!" 화를 참지 못한 조슈아가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팔다리를 잡고 있는 무 형의 결박은 그녀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자유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조슈아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망정 아직 눈빛은 흐트러트리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적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는 최후의 자존심 때문이리라. 그러나 16세 소녀에 게 지금의 분기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차가운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16세에 처참하게 죽을 것이라는 저주는 왜 한 것이지? 왜 그런 쓸 때 없 는 말을 한 거야!" 뻔한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이일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저런∼. 모르시겠습니까? 왕과 왕비를 괴롭히기 위한 장난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그 들로 인해 마법의 잠을 자야할 상황으로 몰려 큰 손해를 보게 되었으니까요. 어차피 전생의 마법을 알아내고 해제할 정도의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믿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죠. 어땠습니까?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말 한마디로 충 분한 효과를 거두었죠?" "으아아!" 조슈아는 울부짖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과 굳건 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제 겨우 16세가 되었을 뿐인 것이다. 이렇 게 까지 운명에 조롱을 당하고 견딜 능력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를 그만 괴롭혀. 적어도 당신 아버지는 여성에게는 친절했어." "……!?" 조슈아는 적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격하게 울부짖다가 전혀 뜻밖의 목소리에 당황하 여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소리가 난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쉴새없이 소용돌이치는 주홍빛의 마기를 뚫고 천천히 걸어오 는 미소녀가 비쳤다. "안티오페? 어떻게!" 조슈아가 뜻밖의 인물의 등장으로 당황하고 있는 동안, 안티오페는 주홍빛의 조명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나신을 과시하며 제단 앞에 멈추어 서서 무심한 눈으로 기르가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르가스가 이죽거리는 표정 을 거두고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안티오페는 그런 그에게서 시선을 때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조슈아를 일별하고는 무 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겠군. 당신은 형의 부활을 막기 위해 조슈아가 소 녀의 몸으로 변화하도록 수를 쓴 것이지? 당신 가문의 힘은 사내에게만 전승되니 소녀 로 바꾸어 놓으면 전생(傳生)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조슈아는 겨우 울음을 삼키고 자신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안티오페와 눈을 맞 추었다. 이 무심 여왕이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 태연한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워낙에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기행을 일삼던 그녀인지라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 억 지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는 조슈아였다. "당신을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이자와 대적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해. 하지만 그리 나쁘게는 하지 않도록 도와줄게." 마치 애들 싸움에 끼여든 언니 같은 말투의 안티오페였지만 조슈아는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안티오페의 한마디에 기가 죽어 잠자코 있던 기르가스가 억울하다는 말투로 입 을 열었다. "제가 여인을 괴롭히다니요. 아름다운 안티오페. 그렇지 않아요. 당신도 이제 아시다 시피 그녀는 소녀가 아닙니다." 그러자 안티오페는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대답하였 다. "조슈아는 이제 소녀야. 당신도 잘 알 거야. 저 정도의 변이 마법이면 영혼의 성질 마저 변화한다는 것을." "무…무슨. 말도 안돼. 나는 사내예요. 자랑스러운 아카바 왕국의 제1왕자 조슈에 라 구요." 조슈아는 기가 막힌 대사를 단정적으로 읊는 그녀에게 분계하며 발작적으로 소리쳤 다. 그러나 자신이 흥분한 소녀의 말투로 날카롭게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 하고 있었다. 안티오페는 씩씩거리는 조슈아를 바라보며 달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점점 깨닫고 있었을 텐데? 변화 한 것은 그 육체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내 가 간파하지 못할 정도의 변이 마법이었어. 무언가 엄청난 힘을 가진 마법 도구를 이 용했다는 거야. 영혼의 색깔이 바뀔 정도로 말이지. 당신이 겉모습만 변화한 것이라 면 내가 벌써 알아챘을 거야." "……." "인간에게는 우리 요정과 달리 육체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에 영혼의 색깔이 있어. 외모와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색깔은 일치하는 편이지. 당신이 가 진 영혼의 색깔은 완전한 소녀의 것이야." 조슈아는 할말을 잃고 있었다. 16년간 가족과 자신을 괴롭혀왔고 결국은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저주가 단지 속임수였다는 믿기 어려운 진실과 자신을 소녀의 몸으로 만든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 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하는 까닥할 수 없는 이 상황만으로도 그녀는 정신적으로 한 계에 다다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완전한 소녀라는 말을 듣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감정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마음속으로는 안티오페의 말에 수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part 8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0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8 20001117 198 4 장편 "후후∼. 아가씨는 나에게 감사 해야합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환생한 레스타트에게 몸을 빼앗겼을 겁니다." 기르가스는 패닉 상태에 빠진 조슈아를 보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투로 이야 기했다. 그러나 조슈아가 감사할 입장인가? 그녀는 이죽거리는 기르가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결국 모든 것은 당신 형제들이 저지른 일이잖아. 왜야! 도대체 이일들은 다 뭘 위 한 것이지?" 그녀의 눈에서는 또 다시 구술 같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아무 리 이런 상황이라 해도 자신이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고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다. 일단 자신 의 변화를 인정하고 나니 이런 감정의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었 다. 기르가스는 팔짱을 끼고는 갈색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초록색 눈동자를 들어 조슈아 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당신 없이는 저의 일을 마무리 할 수 없고, 성전의 결계를 깨는데도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시간도 훨씬 단축되게 되었으니 말씀 드리지 않는 것도 실 례이겠군요. 그럼 긴 이야기이지만 해드리도록 하지요." 이미 실례라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도 늦었다고 소리 치고 싶었지만 현명한 조슈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사이 잠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 할 것인지 고민하는 표정이던 기르가스는 먼 시선으로 안티오페의 반짝 반짝 윤기가 흐르는 초록색 머리칼을 쓸어 보며 입을 열었 다. "저와 저의 가문, 당신과 이 세계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먼 옛날 이야기를 하 여야 하겠군요." "……." 그는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조슈아를 곁눈질하고는 고대 전설을 읊는 음유시인의 말 투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당신은 지금은 고대라고 불리는 멀고 먼 옛날, 신 족과 마족, 온갖 영물들과 특히 인간을 닮은 엘프와 요정 족들이 이 세계에서 한대 어울려 살았던 시대를 들어 알고 있을 겁니다." "그건 전설이잖아. 신 족이나 마족은 우리 세계에 그렇게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구. 그리고 엘프나 드래곤들도 이제는 거의 이야기 속 존재잖아. 물론 안티오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그냥 전설이고 과장된 것이라고 사서(史書)에서 배웠어." 조슈아는 무슨 쓸 때 없는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투였지만 이야기를 하는 기르가스와 안티오페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안티오페의 그 무심한 표정 속에서는 어쩐 일 인지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인간들은 벌써 자신들이 한 일을 잊고 있군요. 후후∼. 저도 여하튼 인간이니 이유 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카바 정도 되는 왕국의 왕자님이 진실을 몰라서야 말이 안 되죠." "그럼, 아니라는 거야?" 조슈아는 어느새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기르가스는 그런 그녀에게 마치 강의를 하듯 그녀가 배워온 역사관을 송두리째 바꾸 어 놓을 이야기를 이어갔다. "실제로 1000여 년 전만 해도 팔메라 대륙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 족과 마족, 다른 수십 차원의 존재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차원의 중립 지대 같은 곳이 었죠. 각각의 차원의 문이 연결되어 있어 모두 이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인간들은 지금처럼 살고 있었지만, 다른 종족들과 잘 화합하였고 배타적 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땅에 영향력이 큰 신 족이나 마족을 자신들의 신으 로 모시고 그 신앙을 기초로 신전을 새우고 나라를 발전 시켜 갔죠. 신들과 마족들은 자신을 받드는 인간들을 위해 도움을 베풀어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죠." "그럼 예전에는 직접 신을 만날 수 있었다는 거야?" "후후∼. 당신의 나라 아카바에서 모시던 질서의 여신 아세르도 신전에서 직접 신탁 을 내리거나 다른 마신의 공격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 했었죠." 조슈아는 대신전에 새워져있는 연대불명의 아세르 여신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1000년 이전에 아직 우리 민족이 레스돌 섬에서 생활하던 시대보다도 한참 이전에 만들어 진 것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설마 진짜로 여신을 보고 만든 조각상?' "그렇습니다. 게드마 성의 대신전에 있는 여신상은 실재 아세르 여신의 모습이지요." "어엇?" 자신의 생각을 읽히자 당황하여 경악성을 내 뱉는 조슈아를 보며 기르가스는 그 정체 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리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그 행실만 아니라면 어떻게 보아도 마음 착한 고급마법사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신과 가깝게 지내왔었다면 지금은 왜 그렇지 못한 거지?" 조슈아는 그의 사람 좋은 미소에 속아넘어가지 않겠다는 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 하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는 기르가스는 여전히 의미불명의 미소를 머금으며 여유롭게 답하였다. "그것이 내가 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잘 들으세요." "……." "본래 신족과 마족 싸우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말이죠. 왜냐 하면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차원을 부수고 싶지 않아서이고, 무엇 보다 자신 을 믿고 따르는 인간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였지요. 그래서 꼭 실력행사로 해 결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장소를 정하여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곳이 어디이지?" "후후∼. 당신도 잘 아시는 팔메라 남부의 '루기아'와 '바산'과 해안선이 겹치는 레 스돌 해역과 이 시돈 왕국의 동해안 너머에 있는 얼음의 땅 '페레나' 이지요. 당시만 해도 그곳에는 인간이 거의 살지 않았고 서로의 결계의 문과 가까워서 자주 싸움터로 이용되었지요." "결계의 문?" "아까 말씀드린 신 족과 마족이 이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차원 회랑(回廊)의 문 같 은 것입니다. 특별히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위치만큼은 고정되어 있지요. 신 족의 주 영역인 신계와 연결된 문과 마족의 영역인 마계와 연결된 문이 있지요. 나머 지 다른 고차원의 존재들도 그 양편 중 하나에 속해 그 문으로 드나들게 되는 겁니 다." "그렇다면 그 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이지?" 조슈아는 이제 더 이상한 이야기가 나와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당해오고 겪어 온 일들은 특별한 경험들인 것이다. 기르가스는 그녀의 마음의 변화를 눈치채고는 눈웃음을 치며 턱 끝으로 마법사가 빠 져나와있는 데도 계속 소용돌이 치고있는 주홍빛 마기를 가리켰다. "마계의 문은 바로 저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천계의 문은 당신의 고향 게드마 성 어 딘가에 있지요." "!"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조슈아 였다. 그녀는 바로 그 아름다운 게드마 성에서 16년여를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 어 본적도 없었고, 그런 거창한 구조물을 본 기억도 없었다. 기르가스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고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훗∼. 문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우리 가문이 왜 그리 고생했겠습니까? 우리는 인 간들이 막아놓은 마계의 문의 위치를 찾는데 수 백년을 허비했습니다." "인간들이 막아? 어째 서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신족과 마족이 큰 전쟁으로 힘이 약해 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 "지금부터 1000년 전 인간들은 각각의 신들과 마신들의 이름을 걸고 역사사상 유례 가 없는 대 전쟁을 벌였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익하고 어리석은 전쟁이었죠. 처음에는 신들도 말려 보려 했지만 결국은 애들 싸움에 끼여든 부모들처럼 싸움에 개입하게 되 어 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어느 한편에 끼지 않으면 무조건 죽임을 당하는 최악 의 극단적인 배타성을 나았죠. 그 중에 특별히 모시는 신이 없는 인간 외의 다른 종족 들은 그 광기의 시대에 적이 아닌 적으로 몰려 거의 전멸 당하는 참사를 빚은 겁니 다." "그런……." 조슈아는 할말을 잃고 더듬거리며 조용히 기르가스의 말을 듣고 있는 안티오페를 바 라보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하고 있는 그녀는 겉보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가볍게 떨리고 있는 두 개의 촉수가 그녀의 심경 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심경을 아는지 기르가스는 안티오페에게 다가가 양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초록색 눈동자로 그의 가슴 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한숨을 쉬며 기르가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신도 이미 눈치 챘겠지만 요정 족도 당시 거의 멸족을 당했었습니다. 상대가 인간 들 만이었다면 일반 요정은 몰라도 안티오페 같은 요정 족의 여왕들을 어찌하지는 못 했겠지만 당시 인간의 왕들은 신에게서 받은 강력한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죠. 바로 당 신의 성검 말고스 같은 신물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 것을 이용해 여왕들을 척살 하 였고, 살아남은 여왕들은 이후 수 백년간 인간을 피해 대륙을 떠돌았죠. 전쟁이 끝난 그 이후에도 말입니다." "그 이야기는 되었어. 당신이 하려는 건 그 이야기가 아니었잖아!" 갑자기 안티오페가 모두가 놀랄 정도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슈아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본 기억이 없었다. 기르가스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때 며 개면 적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군요. 제가 쓸 때 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슈아는 그런 그를 보며 둘의 관계가 궁금해 견디기 힘든 지경이었다. '저 나쁜 마법사 놈이 왜 저리도 안티오페를 어려워하는 것일까? 마치 연인을 대하 는 것 같잖아?' "흐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죠."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읽는 기르가스도 그것만은 답해주지 않고 헛기침을 하며 분위 기를 전환하였다.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 100년 간 전 대륙을 황폐화시킨 대전쟁은 승리자도 패배 자도 없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만 남긴 채 끝나고, 신족도 마족도 엄청난 힘 의 낭비로 얼마간 자신들의 차원에서 요양을 하던 잠정적인 평화의 시대에 4인의 대마 법사가 천계와 마계의 문을 봉인해 버린 일이 발생했습니다." "에에?" 조슈아는 죽이고 싶은 원수 앞이라는 잊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경악성을 내뱉었다. "세상에 그런 대단한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거야?" "그래서 이 위대한 내가 대마법사라고 한 것입니다." 그의 자연스러운 자화자찬(自畵自讚)에 할말을 잃은 조슈아가 조용해진 사이 기르가 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들의 정확한 정체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명은 시돈 출신이고, 나머 지 두 명은 옛 아카바 땅의 주인이었던 페드라 왕국 출신이라는 것 밖에는요. 차원의 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런 대로 이해가 가는 배합이지만 갑자기 그런 정도의 마법사 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각각 차원의 문 을 강력한 결계로 봉인하고는 그 위에 벽돌 하나 하나에 항마법탐지(降魔法探知) 주문 을 새긴 성을 세웠습니다. 몇몇 지도자들을 제외하면 그 문의 위치를 알고 있는 자들 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더 이상 신들이나 마신들이 인간과 직 접 상대하는 것을 꺼린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후후∼. 그래서 오히려 진실을 숨기고 신과 인간의 사이에 끼여든 신전은 더욱더 발전했습니다. 보이는 신보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더 매력 있는 일이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뭐야! 당신은 지금 저 결계를 부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계의 문을 열어서 무얼 하려는 거야! 당신이 얻는 게 무엇이지? 도대체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이 유가 뭐야!" 흥분한 조슈아가 그의 말을 끊으며 두서없이 질문하자 기르가스는 자신의 가슴을 엄 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의 몸에 마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9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1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9 20001121 175 3 장편 "마…마족?" 경악한 조슈아가 개성 없이 반문하며 쳐다보기도 싫은 그의 얼굴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머리에 뿔이 달리고 깃털 없는 검은 날개를 가 진 마족의 모습과 눈앞의 그를 비교하고 있는 듯 했지만 그녀의 노력은 전혀 소득이 없었다. 그는 어딜 봐도 그냥 평범한 인간의 청년인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르가스에게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마족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대단히 억울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고는 손가락을 장난스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마족의 모습은 신족을 모시는 인간들의 마족에 대한 적의를 표출 한 것으로서 최대한 보기 흉하게 그리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실재로 마족은 매우 세련 되고 아름다운 종족이죠." 세련되고 아름다운 마족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 는 생각이 드는 그녀 였다. 아무튼 신족과 견줄만한 강인한 종족이 아니던가? 그리고 아무리 강하더라도 보기에 추하다면 모시는 인간이 생 길리 만무한 것이 다. "그럼 당신은 왜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지? 설마 지금의 모습이 마족의 모습이 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그가 마족이라고 한말을 의심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정도의 마법사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조슈아의 그런 마음을 읽은 기르가스는 그녀로서는 매우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지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을 도와주었던 그 신족의 하프는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신의 것인 거의 신족 에 가까운 인물이었죠. 그리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육체를 버리고 완전히 신성 을 각성하였더군요.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미 오 래 전에 인간계에서 사용할 영적(靈的) 육체를 잃은 마족의 전생(轉生)이 반복된 결 과, 그 본래의 속성이 많이 희석된 다른 의미의 하프라고 할 수 있죠." "마계로 돌아가지 못한 마족이라구? 다들 힘을 많이 소모해 마계로 돌아 가 있을 때 입구를 봉인했다고 했잖아!" 조슈아가 그의 말을 끊으며 지적했다. "후후∼.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무신 에알라와 최후까지 남아 싸웠었죠. 그는 전쟁의 마신 '델라베가'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싸움에서 패배한 델라베가는 시돈의 벌 판에 쓰러졌고, 역시 심한 상처를 입은 에알라는 신계로 돌아갔을 때 마계의 문이 닫 히고 만 것입니다. 결국 동료마신들과 부하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그는 마계의 차원과 완전히 단절되면서 대부분의 힘을 잃고 상처도 치유하지 못해 죽을 수밖에 없 었죠. 그리하여 어쩔 수없이 지나가던 인간에게 전생의 마법을 걸어 이 세계에서 살 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상황에 맞는 멋진 반응을 보여 줄만한 사람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아쉬운 상 황이었다. 그러나 상황이야 어떻든 과연 일 국의 왕자인 조슈아는 놀라움에 앞서 이 사실이 밖으로 세어 나간 다면 신족과 마신을 모시는 나라들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 루 있는 팔메라 대륙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기르가스가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는 것을 보며 조 슈아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질문하였다. "그런데 그 마신의 전생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그렇게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거지? 결 국 그는 너 자신이잖아!"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생을 수 없이 반복한 다른 의미의 하프라고요. 마왕 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온 기억들을 계속해서 물려받으며 거의 900년을 이어왔 습니다. 지금의 저는 이미 델라베가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의 기억과 약간의 힘만을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900년간 전생(轉生)한 수 십 명의 인간들의 지긋지긋한 기억들도 이 머리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죠. 전생 마법의 최대의 약점입니다. 가끔은 더러운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죠. 후후∼." "……." 조슈아는 자의식과잉(自意識過剩)인 이 엄청난 대마법사의 얼굴에 나타난 씁쓸한 표 정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나타났던 만큼 빠르게 자취 를 감추고 그는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 했다. "아무튼 대부분의 힘을 잃은 델라베가는 인간의 몸으로 전생(轉生) 한 상태에서 마계 의 입구를 찾아 헤매었죠. 그러나 이미 입구는 완전히 봉인되었고 대마법탐지결계(對 魔法結界) 까지 처져 있어 찾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차원의 입구는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신족이나 마족의 경우 약간의 힘만 쓰면 인간계의 어디에 있던지 그곳을 통해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위치를 주위의 풍경 같은 것으로는 기 억해두거나 하지는 않지요.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마력으로 위치를 탐지 할 수 없게 되자 이 넓은 시돈 땅 어디에 입구가 숨겨져 있는지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죠. 설 마 시돈 인들이 천도(遷都)한 이 알본 성에 입구가 숨겨져 있을지는 몰랐었죠. 놈들 은 마계의 입구를 막고 그 위에 이 성을 세운 겁니다." "천도? 수도를 옮겼었단 말이야? 그렇다면 본래의 수도는 어느 곳이었지?" 조슈아가 질문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녀 였지만 시돈의 역사까지는 손이 미치 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겠죠. 시돈 인들조차 거의 모르고 있는 일이니까요. 모든 역사 서에서 천도 사실이 지워졌거든요. 오직 비주류(非主流)의 역사 서에만 그 기록이 남아 있죠.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만 아마도 이일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하여튼 델라베가는 수 백년을 헤매어 결국 단서를 찾아내어 이곳의 위치를 알아내고 단신으로 알본 성을 공격했었죠." "……."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야사(野史)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마계로 돌아 가지 못한 마족이 마계의 입구를 열기 위하여 인간의 성을 공격하다! 이 얼마나 신화 적인 멋진 이야기 거리 인가?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적 이 없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놈들은 설마 자신들을 공격했던 자가 마족의 잔당이라고는 생 각하지 않았을 테니 생각하시는 것 같은 기록이 남았을 리 없지요. 그냥 미친 마법사 정도로 생각했겠죠. 마계의 문이 닫히면서 대부분의 힘을 잃은 데다 인간의 몸으로 사 용 할 수 있는 마력도 한계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당연히 몇 번의 실패를 맛보고 더 러는 잡혀서 죽임을 당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끈질기게 부활하여 결국 그런 방식으로 는 시돈 같은 대국을 상대로 봉인을 깰 시간을 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력을 연 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몸이지만 그렇게 몇 대에 걸쳐 쌓아올린 힘을 계승하여 발전 시켜 가자 그럭저럭 무적에 가까운 힘을 가지게 되었죠. 그리하여 대량의 마물들 을 소환하여 400여 년만의 대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마계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 그 런 정도의 마물을 소환하는 것은 이만 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덕분에 시돈 북부 를 완전히 점령하여 봉인을 깰 시간을 벌었죠. 그러나 그는 한가지 실수를 했습니다. 단지 알본성 주위에 전력을 집중하고 봉인의 해제에 총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수백 년 간의 원한 때문에 쓸 때 없이 너무 많은 인명을 살상했죠. 그래서 이에 위기감을 느낀 다른 왕국들이 연합군을 구성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전면전으로 몰고 간 겁니다." "설마 100년 전의 대마왕 마아가를 이야기하는 거야? 그럼 당신은 마아가의 부활?" 조슈아는 이 이야기라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정신적 스승이자 전대의 대신관이었던 루우엘이 아버지에게 들려주었었다는 마왕 마아가와의 전투이야기는 어 린 그녀에게는 최고의 옛날 이야기이자 잠자리의 공상거리이었던 것이다. 비록 팔메라 대륙 역사상 유례가 없는 공적(公敵)이었다고는 하지만 대륙최강국들의 정수를 모은 연합군을 상대로 홀로 전쟁을 치른 일은 그 배경이야 어떻든 전쟁을 격 지 않은 세대의 소년들에게는 영웅담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 다. 조슈아가 그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 볼 리야 없겠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치기 어린 마 음을 읽고 가볍게 미소 짓고 있었다. "마아가는 바로 제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자입니다. 형과 저는 별로 그런 감정을 가지 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보통 전대를 아버지라고 부르죠." "그런데 어떻게 그가 당신들의 아버지가 되지? 100년 전의 인물이었잖아. 그리고 그 는 3개의 마석에 봉인되어 부활이 불가능해졌을 텐데?" "후후∼. 결국 이야기가 거기 까지 갔군요." 파아악―. 갑자기 그들의 이야기를 끊으며 단단한 금속물체가 으깨지며 나는 쇳소리가 울려 퍼 졌다. 조슈아는 당황하여 마기(魔氣)의 폭풍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마기가 워낙 짙어 그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77개의 봉인들 중 69개째가 깨어 졌군요. 이제 8개가 남았습니다. 100년 전 마아가 가 25개를 깨고 봉인의 보충이 없었던 덕에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습니다. 마아가가 잠시 방심한 사이 그 교활한 스코올 놈이 그를 함정에 빠뜨려 3개의 마석에 가두어 버 리지만 않았었다면 그는 벌써 목적을 이루었었을 겁니다만 덕분에 저에게 이런 기회 가 오게 되는 군요." 조슈아는 마음이 조급해 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8개의 봉인만 해제하면 마계의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는 힘으로 안된 다면 말로라도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은 이미 마족이 아니라고 했잖아. 마계의 문을 연다고 당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 다는 거야? 그들이 당신을 동료로 인정할까?"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읽고 있는 기르가스가 그녀의 의도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었 다. "후후∼. 무슨 생각을 하시는 줄은 알겠지만 걱정 마십시오. 마계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봉인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새…새로운 봉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조슈아는 그의 말을 개성 없이 반복하며 머리를 꺄웃거렸다. 그러나 과연 요정여왕 안티오페는 달랐다. 그녀는 말뜻을 단번에 파악하고 두 개의 촉 수가 빳빳해 질정도로 흥분하여 기르가스에게 소리쳤다. "당신 설마 마계의 힘을 독식하려는 거야? 마아가는 그런 비겁한 일은 생각하지도 않 았어." 그녀의 신랄한 비난조의 목소리에 기르가스의 얼굴이 잠시 굳어 졌다. 하지만 그녀에 게 화를 내거나 하지는 못하는 그로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감정을 삭히는 수밖에 없었 다. 마치 오랜 세월 아내에게 잡혀서 살아온 공처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조 슈아의 입장에서는 안티오페와 기르가스의 눈에 보이는 유대 관계는 매우 기분이 나 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후∼. 그렇게 말해도 할 수 없지요. 저는 마아가의 기억을 가지고있지만 마아가 는 아니니 까요. 이 봉인을 해제한 후 저의 봉인으로 마족의 출입을 막고 델라베가의 힘을 되찾아 이 세계를 지배할 생각입니다."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별러 대수롭지 않게 지껄이는 기르가스 였지만 조슈아에게 그 의 말은 충격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이 닥치면 영리해지는 그녀는 이 순간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었다. '일단 그의 배경을 캐야 해. 전말을 알아야지 대처 할 것 아닌가? 안되면 하다 못해 시간이라도 벌어야한다.' 일단 마음을 먹은 그녀는 일단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일관하던 얼굴을 펴고 조금은 가 라앉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있어. 분명히 마왕 마아가는 3개의 마석에 가두 어져서 아무도 손 댈 수 없도록 방열 처리를 하여 엥갈스 화산에 던져 졌는데 어떻게 부활을 한 것이지?" 기르가스는 가볍게 미소 짓고는 품속에 손을 넣어 보라색의 가죽 주머니를 꺼내고는 주머니를 열고 그 안에서 아미색의 보석을 꺼내었다. 처음에는 그 빛깔 때문에 진주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주먹만한 호박이었다. "아스나!?" 조슈아는 기르가스의 오른손바닥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보석을 보고 몸을 떨 며 소리쳤다. 몸만 자유로웠다면 벌써 그의 손에서 그것을 가로채서 고향으로 돌아갔 으리라. 기르가스는 조슈아의 눈앞에서 마치 전시하듯 아스나를 들어 보이고는 다시 가죽주머 니에 넣어 품에 갈무리하고 씨익∼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신대로 이것은 마석 아스나입니다. 이 안에는 인간계에서 마법사로 몇대를 전생하 며 수 백년 간 모아온 마력이 모여있죠. 당신도 아시다시피 당시 스코올은 거창한 마 법의식을 통해 3개의 보석에 영혼, 육체, 마력을 봉인하였습니다. 후후∼. 현명한 처 사였죠. 없앨 수 없는 것은 분리해서 봉인해야 후환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영 리한 그놈도 인간의 욕심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순간 처음 마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이후 내내 그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어 떤 가정이 조슈아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예! 바로 그렇습니다. 중간에 마석을 가로챈 것은 아카바 왕국 뿐 이 아니었다는 것 이죠." "……." "시돈 왕국은 영혼을 봉인한 마석 '라아마'를 가로챘고, 디베리아 왕국은 육체를 봉 인한 마석 '바우아'를 중간에 가로챘습니다. 엥갈스 화산 분화구에 버려진 3개의 마석 은 결국 모두 가짜였다는 것이죠."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0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2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0 20001122 170 4 장편 조슈아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아카바의 제1왕자로서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어 오던 유일한 사건이 바로 100년 전 타 국들 몰래 마석 아스나를 가로챈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한 것이 아카바 뿐 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시점에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결국 레스타트 와 기르가스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아카바와 달리 나머지 두 왕국은 마석의 관리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런 조슈아의 생각을 읽은 기르가스가 친절하게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아카바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시돈과 리베리아의 왕궁마법사들은 마아가의 마력의 비 밀을 찾아내기 위하여 연구를 상당히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런 엄청난 마력을 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힘의 근 원을 찾아내기 위하여 육체와 영혼을 봉인한 두 개의 마석을 가지고 거의 수 십 년을 연구했죠. 그러나 두 나라는 연구를 공개 할 수도 없는 만큼 철저히 밀실 연구가 이루 어졌고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그만큼 연구에 동원된 상위 마법사들의 불만과 피로는 커져 간 것이죠. 거의 2대에 걸친 연구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렇다면 불만을 가진 마법사들이 마석을 깨버린 거야?" 조슈아로서는 오랜만의 지적 순발력을 발휘해 본 것이겠지만 기르가스는 손가락을 흔 들며 부정했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는 없지요. 대신 빠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지극히 위험 한 실험을 하게 됩니다. 먼저 리베리아의 마법사들이 마석의 봉인을 풀고 부모가 없 는 갓난 사내아이를 골라 그 봉인을 이식하는데 성공했지요. 그리고 시돈의 마법사들 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보…봉인을 이식했다고? 왜 그런?" 조슈아는 기가 막혀 얼굴이 다 붉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살아있는 인간에게 마법 실험을 한다는 말인가? 적어도 아카 바에서 는…….' "아카바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기르가스가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읽고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카바가 빼돌린 것은 마력을 봉인한 마석 아스나 이었으니까요. 가정 실리를 챙긴 것이죠. 굳이 힘의 원리를 연구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그 힘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 였기 때문에 그런 식의 실험을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후후∼. 그래도 그 어마어마한 힘을 이용해 기껏 기후 조절에 의한 지속적인 풍작이라니, 정말 웃기는 일이죠. 무기 로 이용하기 위한 연구도 했겠지만 그 위험 부담이 너무 커서 아마 중단되었을 겁니 다. 까딱 잘못하면 게드마 성 정도는 한번에 날려 버릴 만한 마력이 모여 있으니까 요." 조슈아는 잠시라도 다른 두 나라에 대한 모국 아카바의 인도적(人道的) 우월성을 느 끼려던 찰라, 얄미운 기르가스의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으로 그 시도가 깨어지자 가볍 게 이를 갈았다. 그녀에게 있어 적에게 쉽게 마음을 읽힌다는 것은 그야말로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그 러나 그 마음마저 읽어낸 기르가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가 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 자신을 노려보는 조슈아의 날 카로운 눈빛을 여유 있게 받아넘기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저능아 같은 아카바의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100년 가까이 과분한 물건을 가 지고 사소한 장난을 치는 동안, 나머지 두 나라는 아무 것도 밝힐 수 없는 마석 연구 를 포기하고, 확실히 눈에 보이는 실험 체를 얻기 위하여 사내 아기에게 그 힘을 이식 하지요. 말씀 드린 대로 그것을 먼저 성공시킨 것은 비교적 이식이 쉬운 마아가의 육 체를 봉인한 마석 바우아를 가진 디베리아 왕국 이였습니다. 그리고 예상하시는 대로 그 아기는 그 봉인되었던 육체의 형질대로 마아가의 몸으로 자라나지요." "그런 그 아기가 바로 레스타트?" 조슈아는 성검 말고스에 심장을 찔려 마법의 잠에 빠진 레스타트가 마왕 마아가를 그 대로 빼어 닮았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후후∼. 그렇습니다. 그가 바로 저의 형 레스타트 이죠." "그럼 그 레스타트가 탈출이라도 한 거야? 단지 육체가 부활한 것이라며 기억도 없 을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그녀가 처음으로 그럭저럭 날카로운 질문을 하자, 기르가스는 좋은 지적이었다고 말 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도 저와 같은 경험을 했을 겁니다. 아마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겠죠. 아침부터 밤 까지 온갖 마법 실험과 학대. 더러 그것을 즐기기도 하는 마법사 놈들도 있었겠지요. 아마 그런 놈들 중에 하나가 이야기 해주었겠지요. 후후∼. 자신들이 함부로 다루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신의 힘의 일부가 잠재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죠." "마신의 힘? 분명 마력은 모두 아스나로……." "마신의 힘은 마력이 아니죠. 그것은 신령력(神靈力)에 가까운 것입니다. 마계의 입 구가 봉인되면서 그 힘의 대부분을 잃게 되어 인간의 마력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지만 최대의 힘은 역시 그것이지요. 우리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스코올 놈도 그 힘을 눈치 챌 수는 없었고 그래서 힘을 자각한 이후 탈출할 때를 기다린 겁니다. 그리고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마법사 놈들을 죽이고 성을 탈출하는 수순이었죠. 후후∼. 저보다 훨씬 먼저 탈출한 형의 경우 탈출하자 마자 타고난 재능과 각고의 노력으로 마법을 수 련하였겠지요. 그리고 저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어딘가에 아스나와 라아마도 분명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만 다시 마아가의 힘을 완전히 소유 할 수 있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형도 설마 자신과 같은 입장의 인간이 또 있음을 알지 는 못했을 겁니다. 알았다면 죽여서라도 나에게 있는 나머지 마신의 힘을 빼앗으려 했 겠지요. 후훗∼. 그러나 탈출 이후 운 좋게 형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었던 저는 먼 저 태어난 만큼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그를 피해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마법과 학문을 닦았으며 때를 기다렸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새 시돈 왕국에서 대현자라고 불리 우는 인물이 되어 있었죠. 그 이후, 그리고 지금 까지는 당신도 이미 아시는 대로입니 다. 저는 갑자기 사라진 형을 찾지 못해 애를 먹다가 대현자라는 명성 덕에 아카바에 초청되어 갔다가 먼발치에서 당신을 보고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이 당신의 몸 을 빌어 마법의 잠을 자고 있다는 것과 마석 아스나가 게드마 성에 있다는 것까지 말 입니다." 드디어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긴 이야기를 그녀에게 쉬지 않고 들려준 기르가스였다. 그는 친절하게도 그녀의 모든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조슈아 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엄청난 진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해 있는 사이,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기르가스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 진 것을 눈치채 지 못하고 있었다. 16세 소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조롱하는 듯한 장난기 흐르는 눈빛은 사라지고 어느 새 대등한 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녀의 혼란에 빠진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다. 안티오페의 무심한 얼굴에 이채가 떠오를 때까지, 마치 일생일대의 적을 상대하는 듯 한 시선으로 조슈아를 노려보던 기르가스는 찬바람이 일 듯한 서늘한 목소리로 강하 게 소리쳤다. "이제 우리의 관계를 알았겠지? 그렇다면 상황도 알았을 거다. 이 소녀가 나의 손에 들어온 이상, 너는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어. 절대로 다시 본래의 소년이 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무…무슨!" 자신을 바라보며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치는 기르가스의 태도에 당황한 조슈아 였지만 기르가스는 개의치 않았다. "너의 힘을 흡수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결국 너의 힘을 빌려야하겠다. 아스나 를 손에 넣었지만 반쪽 짜리 인 나로서는 그 힘을 흡수하거나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 다. 너의 도움 없이는 그 힘을 원하는 대로 쓸 수가 없어. 너나 나나 원하는 것은 같 다. 너도 작게는 복수, 크게는 절대적인 힘을 원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기르가스가 품속의 가죽 주머니에서 마석 아스나를 꺼내 다시 손바닥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초록색 눈동자에서 눈을 태울 듯한 안 광을 뿜으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선택하라! 그 소녀의 작은 몸 안에 봉인되어 그녀의 오감(五感)으로 밖을 내다보며 한평생을 보내겠는가! 아니면 가지고 있는 힘으로나마 빌려주어 나와 같은 꿈을 꾸어 보겠는가!" 조슈아가 자신에게 얼토당토한 말을 퍼부어 대는 기르가스에게 무언가 대꾸하려던 순 간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 저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너의 승리다! 아우여. 참으로 나는 복수와 절대의 힘을 원한다.' "허억!" 조슈아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사내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어쩐지 이질적이지가 않았다. "하하하하!" 그녀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대답을 들은 것일까? 기르가스는 득의 한 얼굴로 대소 를 터트리며 마석 아스나를 든 오른 손을 들어올리고는 나직이 주문을 읊기 시작하였 고, 그런 그의 눈에서 뿜어 나오는 주홍빛 안광은 점점 더 강해 졌다. 슈우우―. "어엇!" 조슈아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통해 전류가 흐르는 듯한 형용불가의 미지의 감각에 정 신을 잃을 뻔하였다. 겨우 적응하여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그녀의 몸에서 기르가스의 것과 같은 주홍색 마기가 무서운 기세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1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3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1 20001122 172 4 장편 부오오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에서 흘러나온 주홍빛의 마기는 기르가스가 이끄는 대로 마석 아스나로 모여 쉽게 융화되었다. "무…무슨 짓을 하는 거야?" 조슈아가 기겁을 하며 소리 쳤지만 주문에 몰입한 기르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의 몸에서 레스타트의 힘을 이끌어내어 저 마석과 함께 조종하려는 거야. 혼자 서는 저런 엄청난 마력을 조종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안티오페가 오랜 침묵을 깨고 기르가스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파아아아―. 그사이 두 사람의 힘은 마석에 의하여 수 십 배로 증폭되고, 마치 안개 같았던 마기 는 주홍빛의 광선이 되어 마치 뇌신 의 화살처럼 광장의 중앙으로 뻗어 나아갔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광장 중앙에서부터 눈을 지져 버릴 듯한 금빛의 불꽃이 피어올랐 다. 아마도 갑자기 너무도 강력해진 마기에 나머지 9개의 봉인이 반응하여 그런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안티오페! 이 정도의 마력을 쓰고 있다면 그는 무방비 일 거예요. 그가 이대로 봉인 을 해제하게 놔둘 거예요?" 조슈아는 엄청난 광선을 직시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있는 안티오페에게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기르가스의 얼굴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 고 있을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가악―. 또 하나의 봉인이 깨어지며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냈다. 과연 엄청난 힘을 얻은 기르 가스는 손쉽게 봉인을 깨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안티오페!" 다급해진 조슈아가 다시 한번 무심 여왕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안티오페는 흠칫하 며 조슈아를 올려다보았다. 조슈아는 그녀의 흰자위 없는 초록색 눈동자에서 극심한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러나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슈아는 재차 소리쳤다. "그가 마신의 힘을 회복한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어요? 그는 복수 를 원해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자신을 견제할 자가 없는 이 세계를 영원한 암흑 시대로 만들 거라고요. 그래도 좋아요?" "하지만 그는 마아가 이기도 해!" 갑자기 안티오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조슈아는 그녀의 의외의 반응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소리치는 것을 어디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그는 마아가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내가 어떻게 마아가의 적이 될 수 있지?" "도대체 마왕 마아가와 당신은 어떤 관계……." 카앙―. 조슈아의 질문을 끊으며 또 하나의 봉인이 깨어졌음을 알려주는 파괴 음이 들여 왔 다. 조슈아는 갑자기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머리가 하얗게 빌 정도로 당황하였다. '너…너무 빠르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빨리…….' 아스나에 봉인되어 있던 마아가의 마력과 그의 분신인 두 남자가 그 동안 쌓아온 마 력이 합해져 오히려 마아가의 생시 보다 더욱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마 법상식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겨 우 6개의 봉인이 남았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제 나머지 봉인마저 다 해체되고 나 면 기르가스는 마왕의 힘을 회복하고 자신의 봉인으로 다시 마계를 막아 역사상 유례 가 없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의 대마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조슈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꼼짝 않고 있는 안티오페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제발, 안티오페! 이제 와서 이런 말한다면 염치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당신 과 당신 종족을 괴롭혔던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에요. 샤레셀, 에레크트라, 그리 고 나도 있잖아요. 그 외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이제는 옛날 같 이 타 종족을 무조건 미워하던 시대가 아니라 구요." 조슈아는 안티오페가 이모든 일을 지켜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인 간에게 받은 상처 때문이리라고 믿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한숨을 내쉬 며 그녀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런 일은 이미 예전에 잊었어. 나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아. 당신, 그리고 같이 여 행했던 모두를 좋아해. 하지만 마아가의 복수만큼은 하고 싶었어. 그런데 나의 힘으로 는 그 일을 할 수 없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조슈아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전대의 대마왕 마아가와 그녀의 관계는 그녀가 상상 한 이상인 듯 하지 않은가? 만약 그녀가 정말로 완전한 마아가의 편이라면 그들은 애 초에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구차한 일을 신경 쓸 때가 아니 었다. "하지만 그는 복수로 끝내지 않을 거예요.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구요! 그것이 어떤 일인지 당신도 알 텐 데요. 결코 세상은 그의 것이 되려 하지 않을 거예요. 팔메라 대 륙은 전쟁터가 될거라구요. 그것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이요!" "……." 비록 안티오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조슈아는 그녀가 자신의 말에 수긍하 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슈아는 안티오페가 모든 세상사에 관심 없는 무심 여왕처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남의 불행과 상처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아마도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남의 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철저한 무반응이 라는 처세술을 익힌 것이리라. 그러나 천성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주력의 집중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기르가스에 천천히 걸어갔 다. 파아악―. 그사이 또 하나의 봉인이 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그런 일에는 관심 없 는 듯 기르가스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로 손을 가져가 볼을 쓰다듬다가 갑자기의 그의 입술에 키스하였다. '에에?' 그녀의 상상도 못한 행동에 당황한 조슈아가 마음속으로 경악성을 발했다. 하지만 그 녀의 반응은 기르가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마치 첫 키스를 하는 소년이라도 되는 듯한 얼굴이 되어 그녀 를 내려다보았다. 파아앗―. 때를 같이 하여 홀 전체를 덥고 있던 마기의 폭풍과 마석 아스나에서 뿜어져 나오던 주홍빛의 광선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넓은 제식장의 모습이 환히 드러났다. 조슈아는 처음으로 이 아름답고 엄청난 규모의 제식장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지 만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상황이 아니었다. '안티오페가 기르가스에게 키스를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오랜 입맞춤이 끝나고 안티오페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기르가스는 키 스의 여운에 취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티오페는 그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무심하지만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잘 알아. 하지만 그건 실수였어. 또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 게 하고 싶지 않아. 나와 같이 떠나, 다시 같이 사는 거야. 나와 나의 아이들은 아직 도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 이제는 숲에서 나오지 말자. 이제 헛된 꿈은 잊어. 당신은 충분히 해냈잖아. 응? 마아가." '가…같이 살자고?' 조슈아가 그녀의 말에 얼어 있는 동안 잠시 심하게 동요하던 기르가스는 천천히 안티 오페의 아름다운 얼굴로 손을 가져가 볼을 어루만지며 엄지손가락으로는 그녀의 차갑 고 도톰한 입술 선을 쓸어 내렸다. "내 마음 속 마아가의 기억이 아프군요. 아름다운 안티오페. 당신과 이 세상을 떠나 살게 된다면 분명 더 없이 행복하겠지요." 그는 양손을 안티오페의 목으로 가져가 살며시 감싸쥐고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키 스하였다. "역시 당신이 존재하는 한 저는 마아가로 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겠군요. 이렇게 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니, 후훗∼. 멸종한 요정족의 최후의 생존자 따위를……. " 갑자기 변한 그의 어투에 안티오페 보다 오히려 조슈아가 더욱더 황당한 표정이 되었 다. 그러나 어째서 인지 안티오페는 그의 모욕적인 말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 신의 목을 감싸쥐고 있는 그를 무심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죽일 꺼야?"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2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4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2 20001123 165 4 장편 안티오페의 억양 없는 목소리에 목에 얹은 기르가스의 손이 잔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억센 손은 당장이라도 가냘픈 안티오페의 목을 꺾어 버릴 수 있을 듯 했지만 그 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하는 것이리라. 두 남녀는 팽팽하게 대치하며 차 한잔 마실 시간을 그대로 굳은 듯 서있었다. 그리 고 마침내 기르가스가 그녀의 목에서 손을 떼었을 때, 조슈아는 안티오페의 새하얀 목 덜미에 붉은 손자국이 나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전혀 아픈 내색 도 하지 않고 무언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기르가스를 올려다보았고, 조슈아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이 엄청난 세월을 살아온 차가운 안색의 요정 여왕이 어쩌면 대단히 애교 에 능할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이 손으로 헤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마치 자신의 손으로 심장 을 쥐어뜯는 것 같았습니다. 마아가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했군요." 마치 사랑 고백을 하는 듯한 기르가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티오페는 의미 불명의 미 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떡였고, 그는 열기가 흐르는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붉은 손자국이 남은 안티오페의 목덜미에 입맞춤하였다. 조슈아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원수이자 모든 인간의 적인 그가 사랑하는 친구 안 티오페에게 하는 역겨운 행위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오히려 눈을 지그시 감고 뾰족한 귀를 빳빳하게 세우며 그의 키스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만들어 보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화사한 미소까지 지으며……. '둘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어. 그렇다면 안티오페는 애초 에 적이었다는 것일까?' 자신은 아랑곳없이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두 남녀를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안티오페는 더 없이 행복감에 젖은 달콤한 목소리로 기르가스에게 무언가 속삭 이고 있었다. "당신이 이런 몸으로 환생했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나와 떠나자. 이제 는 의심하지 않아. 당신은 나에게 돌아오기 위해 부활한 거야. 30년 정도밖에 안돼는 짧은 시간은 잊어 버려. 괴로웠다면 내가 그 기억을 잊게 도와 줄께. 우리가 같이 보 낸 시간들을 기억해내. 괴로운 기르가스의 기억 따위는 버리고 나의 마아가로 돌아와 줘." 순간 기르가스는 감정을 주체 할 수 없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에게서 한 걸 음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멀어진 것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려는 것이었 다. 그 증거로 그의 눈동자에는 최강의 적을 상대하고 있는 듯 노여움과 당혹 감이 교 차하고 있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이 대마법사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성가시고 힘겨 운 적이 있다면 아마도 이 아름다운 요정여왕일 것이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씹듯이 소리쳤다. "쿠쿡∼. 전생(轉生)을 할 때마다 이런 일을 신경 썼었다면 아마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마아가가 아니야. 잘 봐라. 나의 어디가 마아가를 닮았는가? 마아 가의 모습을 찾고 있다면 레스타트는 이제 다시 볼일이 없으니, 안되었구나 요정 족 의 여왕이여. 너의 마아가는 다시는 이 세상에 부활할 수 없……." "레스타트라면 이미 만났어." 무언가 억지로 공격적인 말투를 쓰는 듯한 기르가스의 말을 끊으며 안티오페가 달콤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례하게 나오는 그의 속내를 읽고 있는 듯, 여전히 애정과 기대감이 충만한 표정으로 그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마아가가 아니었어.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도 그는 나의 마아가가 될 수 없어. 그저 껍데기일 뿐이니까. 그러나 당신에게서는 마아가의 냄새가 나. 당신은 마아가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처럼 나를 사랑하고 있어. 나에게는 당신의 사랑이 느껴져. 어 떤 말로도 나를 속일 수는 없어 마아가." "으으……." 기르가스는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미지의 감정으로 인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이 를 갈았고, 안티오페는 그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오른 손을 그의 뺨으로 가져갔다. 파아악―. 조슈아는 자신이 잠시 환영을 보았다는 착각이 들고있었다. 기르가스의 몸에서 뻗어 나온 주홍빛 화이어 볼이 가냘픈 안티오페의 몸에 직격하며 그녀를 그대로 십여 걸음 밖으로 날려 버리는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안티오페!!!!" 조슈아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저 멀리 날아간 안티오페는 대답이 없 었다. "이…이 자식이!" 조슈아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 거렸다. 하지만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그녀로서는 그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떨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조슈아의 눈에 저만치 날아간 안티오페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 나는 것이 보 였다. 안티오페는 바닥에 심하게 부딫인 듯, 아름다운 나신의 여기 저기가 심한 타박상과 찰과상으로 찢겨, 상처 부위에서는 초록색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 다 깊은 상처는 가슴 한복판에 나 있었다. 파이어 볼에 직격 당한 그녀의 가슴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는데, 짙은 초록 색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타들어 간 상처의 깊이로 보아 뼈가 으 깨어 졌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티오페의 표정에서는 일말 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아 혹시 고통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마비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 각이들 정도였다. 잠시 가슴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안티오페는 곧 몸을 추스르고 다시 기르가스에게로 걸어왔다. 조슈아에게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자살 행위로 비쳤지만, 안티오페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어, 오히려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뻗고 있는 기르가스의 얼굴이 더 초췌해 보였다. "여기를 떠나라! 요정! 다음 번은 봐주지 않는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 라." 기르가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최후 통첩을 하려 하였겠지만, 이 순간 그의 목소리는 주인을 배신하고 듣기에 딱할 정도로 심하게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안티오페는 더욱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에게 성큼 성큼 다가왔다. "당신은 허풍쟁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아? 당신에 대해서라면 모 든 것을 다 알고 있어." 혼자보기 아까운 장면이었다. 초록색 눈을 빛내며 투정부리는 듯한 콧소리를 내는 안 티오페는 놀랍도록 사랑스러웠다. 조슈아는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귀여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하고있었다. 전대의 대 마왕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그녀가 마음만 먹으며 사랑의 포로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평소의 무심함은 그 사랑스러움의 에너지를 최대한 축적하여 한꺼 번에 터트리기 위해서라는 말인가?'라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해보는 조슈아였다. 그사이 안티오페는 기르가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조슈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팽팽히 긴장한 기르가스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내 민 그의 손은 바로 안티오페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그런 공격을 받는 다면 아무리 요정여왕 이라 해도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피로 범벅이 된 가슴을 그의 오른손에 대며 환하게 미소지었 다. 그녀는 정말로 그가 마아가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 다. 조슈아로서는 어느 쪽이 되던 최악의 상대이겠지만 적어도 안티오페를 지극히 사랑했 다는 마왕 마아가 쪽이 이야기가 통할 상대라는 생각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둘의 대 치를 지켜보았다. "킥킥킥킥∼. 당신은 정말 못 당하겠군요." 갑자기 기르가스가 허리를 숙이며 키득거렸다. 주력을 모으고 있던 그의 오른 손은 이미 안티오페의 가슴을 향하고 있지 않았고 말 투도 본래의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당신을 헤치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군요. 그러나 당신의 승리는 아닙니다. 떠나지 않겠다면 머물러 계십시오. 그리고 제가 앞으로 할 일들을 지켜보세요. 그래도 저에게 서 마아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제부터 행할 나의 복수와 폭거를 견딜 수 있 다면 그때는 나도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이…이런!' 조슈아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결국 상황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었다. 그 러나 조슈아의 실망은 안티오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나던 그 녀의 초록색 눈동자는 이 순간 암울하게 젖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기르가스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애써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 며 다시금 나직이 주문을 읊기 시작하였다. 슈우우―. 조슈아는 또다시 기분 나쁜 방출 감을 느끼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주홍빛의 마 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봉인 파괴는 막판에 다다라 있었고, 기르가스는 더욱더 엄청난 마력을 봉인에 쏟아 부었다. 파아악―. 72개째의 봉인이 깨어지는 요란한 파괴 음이 조슈아의 귀에 울려 퍼졌다. '이 속도라면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봉인이 다 깨어 질 거다.' 조슈아는 실망감에 어깨를 떠는 안티오페를 보며 현기증을 느끼고 있었다. 기르가스가 어깨의 상처를 치유해 주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 고 이제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녀의 기력을 급속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다들 뭐 하는 걸까? 아직도 아무도 여기까지 오지도 못한다는 말인 가? 도대체 바알은 왜이리 뭉그적거리는 거야!' 조슈아는 손만 뻗으면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무방비의 기르가스를 내려다보며 동료 들의 느린 발을 원망하고 있었다. 경황없이 납치(?)되어 오는 바람에 나머지 일행들 이 현재 겪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3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5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3 20001124 174 4 장편 8 화르륵―. 샤레셀의 절대마법방어는 하늘빛을 닮은 파란 광채를 내며 일행을 향해 마치 용의 혓 바닥 같이 격하게 타들어 오는 붉은 마의 불꽃을 퉁겨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르가스 가 사용한 폭렬주박(爆裂呪剝)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주문은 상대가 모두 타 재가 될 때까지는 결코 꺼지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록 마의 불꽃이 절대마법방어를 뚫을 수 없다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전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절대마법방어를 사용한 적이 있는 샤레셀은 상당히 쉽게 결 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결코 도망 갈 수 없다는 변치 않는 상황 앞에 절망하고 있었 다. 상대는 보이지도 않는데 그가 베풀어 놓은 마력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얼 마나 비참하고 굴욕적인가? "빠져나갈 수 없겠지?" 퓨어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벼운 찰과상과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 뿐이었지만, 살아나갈 수 없게 되었다 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짙은 갈색 눈동자는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다. "제기럴∼." 바알이 두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 쳤다. 퓨어리스가 절망감에 내 뱉고 만 말은 결계에 갇혀 있던 지난 한시간 여 동안 아무 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던 것이었다. 모두가 현 상황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분하고 두려 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퓨어리스의 한마디로 일행의 이성을 아슬아슬 하게 지켜주고 있던 그 몽환적인 자기 방어의 결계는 무참히 깨어진 것이다. "흑흑∼. 조슈아 언니." 퓨어리스의 품에 비스듬히 안겨 누워있던 에레크트라가 훌쩍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퓨어리스에 비할 바가 아닌 상당한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샤레셀의 치료마법 덕에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 이제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깨어나지 않는 것이 그녀를 위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언니이자 스승인 조슈아는 적에게 잡혀갔고, 왠지 바알 오빠와는 사이가 좋 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친절했던 조르쥬 아저씨는 폭발의 직격을 고스란히 맞은 덕에 샤레셀의 치료마법에도 불구하고 전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라 온 환경의 영향으로 비록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두려움이 없는 에레크트라 이지만, 무 엇 보다 사랑하는 것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린 그녀에게 있어, 이 모든 일은 감 당하기에 너무나 벅찼다. "오빠에게 오너라. 에레크트라." 바알이 팔을 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정신적으로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퓨어리스는 어린 에레크트라를 돌봐줄 상 황이 아닌 것이다. 에레크트라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마치 밀랍인형 처럼 하얗게 질려 굳어 있는 퓨어리 스의 품을 빠져 나와 바알의 가슴에 안겼다. 바알은 에레크트라를 품에 안고 피에 젖은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 다. "좀더 잠을 자두는 것이 낫지 않겠니?" "……." 에레크트라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핏기하나 없는 얼굴로 샤레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조르쥬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아도 조르쥬는 숨을 쉬는 것이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하 고 있었다. 비록 겉보기에 대단한 상처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고 그나마 대부분의 상처는 샤레셀 의 치료마법으로 이미 아물었지만, 정말로 심각한 것은 내상인 것이다. "전에 술집에서 같이 일하던 언니의 애인 용병 아저씨가 술에 취해 싸우다가 칼로 배 를 찔린 것을 본적이 있어요." 창백한 조르쥬의 안색을 바라보며 에레크트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때 언니는 미친 듯이 울었어요. 아저씨는 아직 살아 있는 데도 언니는 곧 죽게 된 다면서……. 저는 믿지 않았어요. 그때의 언니 애인의 얼굴 색은 조르쥬 아저씨와 똑 같았거든요. 숨도 쉬고 있어서 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울부짖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바알은 그녀가 말을 하게 네 버려 두기로 마음먹은 듯,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와는 상황이 틀리단다. 여기에는 샤레셀 언니가 있잖니. 저 놈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 할거다." 그의 그런 말투에 에레크트라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도 조르쥬 아저씨랑 사이 좋게 지낼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나는 보았어요. 폭 발의 순간에 아저씨와 샤레셀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 졌잖아요" '끄응∼.' 샤레셀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 얼떨결에 자신까지 보호하는 상황이 된 것이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하였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꼭꼭 눌러 참는 바알이었 다. 진실이야 어떻든 결과가 이런데 어쩌겠는가? 바알이 연적(戀敵)에게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속으로 궁시렁 거리 는 동안 에레크트라는 고개를 돌려 나무라는 눈빛으로 바알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그…그래 놈…아니 조르쥬 아·저·씨가 깨어나면 오빠가 고맙다고 해주마." "그게 뭐예요. 사이좋게 지내야지요. 한쪽이라도 먼저 친절하게 굴면 싸움은 해결되 기 마련이라 구요." 이런 일에 끈질긴 에레크트라였다. 마치 애들 싸움을 중재하는 것 같은 그녀 였지 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래, 깨어나면 사이좋게 지내도록 노력할게." 결국 약점이 잡힌 바알은 감당 못 할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살아나가지 못하 면 그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알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언제나 처럼 주위의 사람들에게만 신 경 쓰는 그녀가 대견한 듯 꼭 껴안아 주고는 그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런 그의 눈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샤레셀의 얼굴이 들어 왔다.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났는지 그녀는 더 이상 치유마법을 행사하지 않고 결계의 유지에 만 힘을 쓰면서 조금은 여유를 가진 듯 했다. 그러나 바알과 눈이 마주친 샤레셀은 죄 라도 지은 듯 급히 눈을 돌렸다. 눈치가 느린 바알이었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이 기르가스가 했던 해괴한 말과 관계 가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바알은 한숨을 내쉬며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말씀해 보세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결코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샤레셀은 눈에 띄게 몸을 떨며 애써 그 를 외면하였다. "나는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 "허어∼. 이것은 절대마법방어(絶對魔法防禦)로군. 이 기운은 아세르 여신의 것인 가?" 별안간 바알의 질문을 끊으며 결계의 밖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에 바알 은 헛 바람을 들이켰다. 이런 곳에서 설마 일행 외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리라. 그 사이 샤레셀은 새로운 적의 등장에 긴장하여 결계를 좀더 강화하려는지 인장을 머 리위로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까지 덮은 불꽃에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 내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둘러싸고 있는 건 불꽃의 마신 기놈(GINOM)의 것이군. 폭렬주박(爆裂呪剝)이었던 가? 이런 중 상급 공격 마법을 막기 위해 절대마법방어(絶對魔法防禦)를 쓰다니. 그 것 참 이상하군. 절대마법방어(絶對魔法防禦)를 쓸 정도면 이 정도의 공격마법은 간단 히 깰 수 있을 텐데." 사내의 악의 없는 목소리에 샤레셀이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사실 그녀의 마법 수행은 순서가 엉망이었다. 타고난 재능으로 급한 김에 절대마법방 어(絶對魔法防禦)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어이! 지금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가?" 정체불명의 사내가 장난스레 소리쳤다. 그러나 바알에게는 그의 말투가 적의 조롱으 로 들릴 뿐인 듯 했다. 바알은 얼굴까지 붉히며 사내에게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우…우리가 이 안에서 그럼 소꿉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냐? 빌어먹을 놈 아!" 바알이 전장에서 단련된 어마어마한 목소리로 사납게 소리쳤지만 사내는 별로 개의 치 않는 듯 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 잠시 조용해 졌다가 다시 느물느물한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설마 너는 아닐 테고, 안에 있는 아세르 여신의 신관은 누구인가?" "에! 예?" 그의 의외의 질문에 샤레셀이 당황하여 얼떨결에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 를 들은 사내는 과장된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하하! 이거 여기서 만나게 되는 구만. 아세르의 여신의 총애를 받는 신녀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라구." 영문을 몰라 두 눈만 깜박이고 있던 샤레셀은 이어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사내가 무언가 가볍게 주문을 읊자, 결계를 온통 뒤덮고 있던 마신의 불꽃이 그 잔 영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와 함께 어느새 그녀의 절대마법방어(絶對魔法防禦)까지 해제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몇 겹의 마법진이 쳐진 적의 요새라서 완전한 결계를 칠 수 없었다고 해도 이 렇게 쉽사리 거둘 수 있는 종류의 결계가 아님은 그녀는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소름 끼치도록 강력한 대마법사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사이 사라진 불꽃의 남은 화기를 유유히 뚫고 상상을 초월하는 대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한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상체에서 무릎께까지 덮고 있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천으로 만든 흰색 가운과 금실로 장식된 보라색 바지였다. 어떻게 보아도 결코 좋은 센스는 아니었지만 큰 키와 늘씬한 몸매 그리고 어깨까지 오는 직모(直毛) 의 은발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오랜만이군 아가씨. 더 예뻐졌는데? 이름이 샤레셀 이었던가?" 그는 자신을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샤레셀에게로 걸어와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인사를 건네었다. 신비한 자주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긴 은발을 뚫고 나온 뾰족한 한 쌍의 귀를 장난스 레 흔들며 그의 얼굴을 본 이후 왠 일인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샤레셀의 두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뭐야! 당신은 전에 만난 잘난 척 하는 엘프 마법사잖아!" 바알이 굳어 버린 샤레셀을 대신 하여 먼저 아는 채를 했다. "이봐! 이봐! 이 몸의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내 이름은 진∼! 이라구."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4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6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4 20001127 177 3 장편 그렇다! 그는 조슈아 일행이 아직 게헤나 산맥에서 헤매고 있을 때, 무시무시한 마력을 보여 주었던 바로 그 잘난척하는 엘프 마법사(바알의 표현을 빌자면…) 진이었다. 조슈아는 그를 어째서인지 상당히 싫어했었지만, 마법을 공부하는 샤레셀에게 있어 그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녀로서는 꿈의 레벨이나 다름없는 골든 화이어 볼을 자유 자제로 날리던 인물이니 만큼, 만약 기회가 닫아 그에게 사사를 받을 수 있다면 더 바 랄 것이 없는 것이다. 샤레셀은 그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려다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조르쥬를 인식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경황이 없더라도 신녀인 그녀가 환자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것이 부끄러워서 이었으리라. "이런, 이 친구는 전에 보지 못한 인간이군. 상당한 내상을 입었는데, 폭발에 의한 것인가?" 그제야 샤레셀의 무릎을 베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조르쥬에게 시선을 돌린 진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찾다. "예! 그래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저로서는 여기까지가 한계 에요." 샤레셀이 눈물을 글썽이며 간곡한 목소리로 간청하였다. 이제 겨우 세 번째 만나는 그였지만 어쩐지 자신의 청을 거절할 것 같지 않다는 이상 한 확신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육감은 언제나 처럼 적중률이 형편없 었다. "그럼 나에게 뭘 해 줄 거지?" "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당황한 샤레셀은 바보 같은 표정이 되어 장난 끼가 넘 쳐흐르는 마법사의 자주색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이 엘프 마법사 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샤레셀의 옆 이마로 내려온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으며 장난을 쳤다. 이 곳이 아카바 이었다면 그는 벌써 사형에 쳐해 졌겠지만, 워낙 당당하게 장난을 걸 어오는 지라 어쩐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샤레셀이었다. '다시는 누구도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정체 불명의 엘프 마법사가 신녀인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데도 불구 하고, 샤레셀은 잠시 상황도 잊고 감상에 젖어 들었다. 성포와 고정망사가 날아간 덕에 한 바구니는 될 듯한 숱 많은 빨간 머리칼이 드러나 어깨를 덮고 있는 그녀는 여느 때와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불꽃의 요정이랄까?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빨간색의 곱슬머리는 감탄 할 만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 조금은 둥굴둥굴한 얼굴로 보이던 그녀 였지만, 이마와 머리칼이 드러나자 결코 평범한 미모가 아니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경황이 없어 그녀의 변화를 잘 보지 못했던 바알도 엘프 마법사 진이 그녀의 귀 주위 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말아 늘어뜨리는 것을 보며 '저런 예쁜 소녀를 평생 신녀로 살게 하는 건 죄악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만약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머 리를 꾸미고 거기에 화장까지 한다면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샤레셀은 모양 좋게 말린 옆 머리칼이 바람에 나풀거 리는 것을 느끼며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이 신녀로 선택되지 않았었다면 지금쯤 공작가의 영양으로써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귀 족 청년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매일 저녁 지루한 듯이 사교 만찬과 무도회를 출입하 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리라. 비록 지금에 와서 그런 생활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어디에 무도회를 싫어하 는 소녀가 있겠는가? 특히 6살 이후 언제나 사교계에 데뷔하는 13세 생일 파티에 조슈 에와 첫 댄스를 추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던 평범한 귀족 소녀였던 그녀임에야. '나…나는 지금 무슨 말도 안돼는 상상을 한 거지?' 그러나 현실 복귀가 빠른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황급히 진의 손을 밀쳐 내고 예 쁘게 말려진 머리칼을 신경질 적으로 풀어내며 소리쳤다. "저희는 지금 심각해요. 도와줄 것이 아니면 놀리지 말고 떠나 주세요." 흥분한 샤레셀은 그가 목숨을 구해 주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하였다. 파앗―. "신녀 님에게서 떨어져라 마물!" "꺄악∼." 샤레셀은 갑자기 자신을 한 손으로 번쩍 안아들고 순식간에 진의 십여 걸을 밖으로 물러나는 강한 사내의 손길에 당황하여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 팔 의 주인을 확인하기도 전에 에레크트라의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이 들려 왔다. "아아앗∼! 조르쥬 아저씨." 샤레셀은 자신의 허리를 한 손으로 안아 등뒤로 숨기고, 진에게 붉은 색의 장검을 겨 누고 있는 자가 조르쥬 임을 확인하고 기쁨에 앞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녀의 상식으로 조르쥬는 깨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오늘을 넘기는 것이 힘든 상태 이 었던 덧이다. 그런데 그는 깨어나기만 한 것이 아니고 완전히 평소의 기력을 회복하 여 엄청난 반응속도를 보여 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해답은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진의 느물느물한 미소 속에 있었다. '그럼 아까 내 머리칼을 만지는 동안 이미 치료를?' 그사이 처음 보는 엘프에 당황하여 잠시 탐색을 하던 조르쥬가 샤레셀을 풀어 주고 한발 앞으로 나서려 하자 겨우 상황을 인지한 샤레셀이 소리쳤다. "근위대장님 저분은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신 마법사 님이세요. 실례가 있어서는 안돼 요." 당장 에라도 몸을 날리려던 조르쥬는 그녀의 말에 순식간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말 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샤레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며 입을 열었다. "전에 우리를 도와주신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모두의 목숨까지 구해 주셨어요. 근위 대장 님의 상처까지 치료해 주셨구요." '그러고 보니.' 폭발의 순간 죽음을 떠올리며 혼절했던 것을 기억해 낸 조르쥬는 자신의 가슴 깨로 시선을 돌리고 흠칫하였다. 두꺼운 가죽 갑옷이 거의 피에 젖어 걸레가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에는 상처 하나 없는 것이었다. 조르쥬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검을 등뒤의 검집에 넣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 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였다. "저…정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실례했습니다. 마법사 님. 신녀님을 보호 해주 신 분에게 이런 무례를…….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과연 아카바의 왕실근위대장 조르쥬였다. 이 자리에 다른 동료들을 구해준 것은 전혀 개의 치 않고 오직 왕가와 관계된 인물 을 도와준 것만을 감사하고 있지 않은가? 왕실 기사로서 다른 나라의 인물과 얽히지 않으려는 합리적인 처세술은 훌륭했지만 조금은 너무하단 생각을 해보는 샤레셀 이었 다. 그때 여전히 느물느물한 표정을 풀지 않은 진이 눈을 들어 시가지 쪽을 바라보며 입 을 열었다. "뭐. 나는 대가를 받았으니까 되었어. 신녀 아가씨의 머리칼이 아름다워서 만져 보 고 싶었거든. 그런데 전에 그 예쁜 금발 아가씨는 예상대로 잡혀 간 건가? 후후∼. 놈 이 기뻐서 눈물을 다 흘렸겠군." "겨…결국 구하지 못한 겁니까?" 그의 말에 현 상황을 돌이켜 보게 된 조르쥬가 갑자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몸 을 일으켜 샤레셀을 돌아보았다. '아아∼. 이분은 진실을 알게 되셨구나.' 샤레셀은 조르쥬의 눈빛을 보며 당혹 감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역력한 그의 눈동자에서는 조슈아를 적에게서 구해내지 못했다 는 자괴감 외에 또 다른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일에 눈치가 빠른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더 이상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조르쥬의 입가에 허탈감 을 넘어 허무함 마저 느껴지는 쓴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후∼. 정말 천치 같은 놈이었군 나란 녀석은.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세상 에 샤레타를 쓸 수 있는 자가 왕위 계승자 외에 누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얼마 나 오랜 동안 조슈에 왕자님을 보아 왔던가?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그 분이 겹쳐 지지 않았던가? 그 마법사 놈의 한마디에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사랑에 눈 먼 나는 그런 가능성은 일부러 보려하지 않은 거다. 이 무슨 미친…….' 갑자기의 조르쥬의 머리 속에 너무도 사랑하던, 기개 있고 아름다운 16세 금발소녀 의 영상이 스치고 지나가며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붉게 충혈된 눈으로 샤 레셀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진에게로 몸을 돌려 양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소리쳤다. "아카바 왕국, 왕실 근위기사단장 조르쥬가 위대한 마법사 님께 청합니다. 보신대로 소관의 힘만으로는 상전을 구출해 드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제발 저희 왕가를 도와 주십시오. 그분은 아카바 단 한 분 뿐인 왕위 계승자이십니다. 결코 은혜는 잊지 않겠 습니다." 엄청난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결코 직분을 잊지 않는 조르쥬 였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왕가의 방패인 근위기사단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바알은 순간 그 커다란 몸이 휘청할 정도로 눈에 띄게 동요하 고 있었다. '하…하나 뿐인 왕위 계승자? 왕위 계승자란 말이냐?' 바알은 아카바의 왕위계승자인 제 1 왕자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7년 늦게 태어난 아카바의 제 1 왕자는 검성의 칭호를 가진 군왕 바디메오 와 아버지가 연모해 마지않던 전설의 여기사 소피아 왕비사이에서 온갖 축복을 받으 며 태어났다. 그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엄청난 임시 세금을 거두어 축의금 을 보내었던 굴욕적인 기억은 그를 지금까지 괴롭히고 있지 않던가? 그로서는 증오와 부러움이 교차하는 강국 아카바의 왕자로서 최상의 신분에 더해 신 의 축복을 받은 아름다운 미모와 뛰어난 오성을 가졌다고 했다. 13살에 이미 왕립대학 에서 수학하고 왕실 비전 검술을 완전히 마스터하여 법왕청에서 검성의 칭호를 받기 위하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 여러 가지 소문들만으로도 반짝 반짝 빛나던 그야 말로 대륙의 샛별이었던 것이다. '그래. 이름이 조슈에 였지.' 바알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초상화와 더불어 침전의 벽면을 장식한 커튼 속 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아름다운 미소녀의 그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미모를 가진 그림 속의 금발 소녀는 상냥한 미소 를 짓고 있었지만 한 손에는 붉은 빛이 감도는 장도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카바 왕 실 근위대의 마크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어머니의 자리를 몰아낸 원수 같은 여자 였지만, 바알은 그녀 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대륙전체가 인정하는 말 그대로 재색을 겸비한 제왕의 여자 였던 것이다. 바알은 기억의 저편에서 소피아 왕비의 얼굴을 새삼스레 떠올려보며 자신이 사랑하 는 말괄량이 미소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래. 그랬구나. 그녀의 자식이었구나. 그가 어떤 사정으로 소녀가 된 것이구나.' 바알은 이제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닮은 얼굴이 외가 쪽의 먼 친척일 리가 없는 것 이다. 그러나 이제 그 원인과 결과는 어찌되었던 상관없는 일이었다. 털썩―.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간 바알이 큰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바알 오빠?" 영문을 알 턱이 없는 에레크트라가 소리쳤고 그가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퓨어리스 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이미 눈을 뜬 채로 기절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연한 것이 아닐까? "제발, 부탁 드립니다. 저희 왕국을 구해 주십시오." 그 와중에도 조르쥬는 고개한번 돌려보지 않고 진에게 계속 간청하고 있었다. 그리 고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제 샤레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역시 무릎을 꿇었다. "저의 친구를 구해주세요. 그 아이는 저와 왕국에 너무도 소중한 존재랍니다." 샤레셀은 눈물을 흘리며 붉은 머리칼이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무언가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진은 조르쥬는 쳐다보지도 않 고 그녀에게 급히 다가와 손을 잡아 일으키며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가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하려는 일은 결과적으로는 그 아이를 도와주는 게 될 거야. 나는 놈이 그 아이를 손에 넣고 힘을 회복하기를 기다렸어. 그럼 놈은 봉인 을 빨리 깰 수 있을 테니까. 후후∼." "조슈아를 손에 넣어 힘을 회복해요? 그리고 봉인이라니요?" 정황을 모르는 샤레셀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계 속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나라도 놈의 결계가 수백 겹 둘러싸인 이곳에서 놈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 해. 놈이 전의 힘을 완전히 회복한 지금은 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놈은 봉인을 다 깨었을 때, 인간들이 생각한 만큼 그렇게 바보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후 후∼. 나까지 멋지게 속인 놈들이니 말이야."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조르쥬가 겨우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그의 눈은 여전히 격한 감정에 충혈 되어 있었지만, 이미 그 절반은 사명감이었다. 그런 그를 이채가 흐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가…감사합니다." 조르쥬가 다시 한번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너희들이 할 일이 있어." "하명하십시오." 필요할 때는 철저히 저자세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말로 고급기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의 과도한 반응에 진은 의미불명의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 다. "놈은 곧 궁성의 제식장에서 최후의 봉인을 부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 것을 막으라는 것은 아니야. 그저 잠시 내가 주력을 모을 시간만 벌어 주면 되는 거 다." 그의 말에 샤레셀이 아미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기능 할까요? 제가 상대해본 바로는 저희의 능력으로는 마법사 님이 주력을 모 으실 정도의 시간을 끄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요." "이런! 이런!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의 신녀 아가씨." 그녀의 말에 진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과장된 폼으로 팔을 들 어올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진이야. 마법사 님이 뭔가 정떨어지게. 부탁이니 진이라고 부르라고. " 그의 의외의 태도에 당황한 샤레셀은 잠시 할말을 잃은 듯 두 눈을 깜박이더니, 곧 생각났다는 듯이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무슨…….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었지? 자! 빨리 해봐!" "……." 도대체 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엘프 마법사가 왜 이러는 것일까? 그는 자주색 눈동자에 기대감을 가득 담고, 한 손을 귀에 대며 그녀를 재촉하였 다. 결국 샤레셀은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지…진." "지진?" 그는 너스레를 떨며 더욱더 뾰족한 귀를 그녀에게 들이대었다. 결국 샤레셀은 울상 을 지으며 목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조슈에를 제외하면 그녀가 언제 남자의 이름을 그 렇게 불러 보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샤레셀은 소리가 나도록 침을 한번 삼키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 을 부르고야 말았다. "진∼." 부르르∼. 샤레셀에게 이름을 불린 진이 갑자기 몸을 부를 떨었다. 아마도 대단히 뿌듯한 듯, 입이 거의 귀밑에 붙을 정도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아무리 보아도 조금은 맛이 간 엘프 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여튼 잠시 그대로 여운을 즐기고 있던 그는 샤레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고는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방법은 있어. 내가 강화 마법을 걸어주지. 말해줘도 모르겠지만 상당히 쓸만해. 잠 시 힘과 속도가 10배 이상 빨라져서 아무리 놈이라도 쉽게 잡을 수 없고, 마력을 직격 으로 맞지 않는 이상, 한번에 죽이지 못할 내구력도 가지게 되지. 자! 숫자는 많을수 록 좋아. 어떻게든 놈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게 목적이니까. 번거로우니 한꺼번에 해주 지." 조르쥬와 샤레셀이 긴장한 얼굴로 그의 앞으로 다가갔고 곧이어 퓨어리스도 그 뒤를 따랐다. 에레크트라도 비장한 얼굴로 목검을 꺼내 들었으나, 진이 단호한 표정으로 손 가락을 흔드는 바람에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알은 끝내 그 커다란 몸을 일 으키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지은 죄가 있어 나서지 못하는 샤레셀을 대신하여 조르쥬가 그의 앞으로 걸어 갔다. 차가운 가을 바람에 갈색 고수머리를 흩날리며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바알은 햇빛을 가리며 서있는 조르쥬를 천천히 올려 다 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조르쥬를 올려다보던 바알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짜증스러운 얼굴로 건조하게 말하였다. "설마 네놈은 나더러 같이 가자는 것이냐?" "그럼 안 간다는 말이냐?" 바알은 조르쥬의 태도에 기가 막힌 듯 가볍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조르쥬는 전혀 상 관없다는 태도로 재차 입을 열었다. "정말 유치한 놈이군.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보인다. 그래서! 사랑하 는 여인을 적의 손에 넘겨주고 너는 떠나기라도 할 생각이냐?" "그 녀석은 소녀가……."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네가 사랑한 사람은 조슈아 아가 씨가 아니었더냐? 적어도 너는 원하기만 한다면 기억 속의 그녀라도 사랑할 수 있는 놈이지만 나는 그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단 말이다." 바알의 말을 끊으며 조르쥬가 차갑게 소리쳤다. "그게 나와 무슨……." 발끈 하려던 바알은 조르쥬의 충혈 된 두 눈에 소량이지만 눈물이 고이는 것을 발견 하고 목구멍 까니 넘어온 말을 삼키고 말았다. 두 남자는 마치 그대로 굳어 버린 듯,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눈 빛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그 침묵을 깬 것은 역시 아무 것도 몰라 행복한 에레크트라 였다. "도…도대체 뭐 하는 거예요! 조슈아 언니가 나쁜 놈에게 잡혀 있다 잖아요. 바알 오 빠는 남편이 되가지고 설마 겁이 나서 못 가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나를 보내 줘요. 마법사 님." 그러나 엘프 마법사 진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서 두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알은 조르쥬 에게서 고개를 돌려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샤레셀을 쓸 어 보았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에레크트라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 다. 그녀는 바알의 태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얼굴로 두 눈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 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에레크트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바알은 쓴웃음을 짓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마 음의 결정을 내린 듯 점점 본래의 넉넉한 얼굴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래∼. 그랬었지. 에레크트라야. 오빠가 잘못했다. 내가 머리를 다쳐 잠시 미쳤었 나 보구나. 그래 내 장래의 아내를 구하러 가야지." 바알이 그 짧은 시간에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신만이 알 일 이었다. 그리고 그 결 론이 그와 조슈아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역시 신만이 알 일이다. 여하튼 자리를 털고 일어난 바알은 이미 평소의 바알이 되어있었고, 그의 입가에는 그로서는 상당히 정상적인(?) 측에 드는 음흉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래! 무슨 상관이냐. 내가 사랑한 건 조슈아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앞으 로 해야 할 일은 한가지지.' 그 한가지란 무엇일까? 그것은 말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러나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없는 대마법사 진은 무언가 짐작한 듯, 생기를 되찾은 바알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NEXT 제 22 화 성도(聖都)에서 만난 운명. part 15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7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1 20001128 176 3 장편 콰아앙―. 그 광도(光度)를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강렬한 주홍 빛 마기(魔氣)가 또 하나의 백금 판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며, 한번에 2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너른 대 신전의 제식장이 들썩일 정동의 거창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이 곳은 성도 알본의 대신전 정 중앙에 위치한 대륙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실내 제식 장. 마법의 왕국답게 부유 마법을 이용하여 기둥이 필요 없게 설계되었다는 거대한 석조 건물이다. 그 넓이는 이미 설명한 대로이지만 수용인원은 어디까지나 제식에 참여할 인물들을 위한 금장 테두리의 넓이를 이야기 한 것으로, 실제 넓이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 다. 그러나 지금 이 넓고 아름다운 대제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에알라 신과 그 옛 영광을 재현한 황금 조각상들의 성스러운 광채도 아니었고, 신에 대한 헌신의 상징 으로 끊임없이 태우는 값비싼 티롯 나무 뿌리의 향도 아니었다. 휘이이―. 짙은 주홍빛의 마기가 제식장 정중앙을 중심으로 맹렬한 기세로 소용돌이치고 있었 다. 그러나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듯한 강렬한 마기의 폭풍은 신기하게도, 일정 범위 의 공간에만 그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리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주위의 물건을 빨아들 이거나 하지도 않아 다행히 벽면을 장식한 아름다운 예술품들을 다치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마기의 농도와 강렬한 회전력을 생각하면 무언가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 다. 제식장 전체를 날려 버릴 듯 강렬한 폭발음이 울려 퍼진 이후 잠시 적막이 찾아온 가 운데, 이곳의 훌륭한 공명구조를 확인하려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대소를 터트리는 사 내가 있었다. "하하하하∼! 마지막 세 개의 봉인이 좀 더 강력해서 시간을 지체 하기는 했지만 이 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군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당신이 할 일은 이제 곧 끝납니다. 본래의 힘을 회복하고 나면 인간계에서 겨우 수 백년간 모은 마력 따위는 필요 없게 되죠." 제단 위에 마치 천상(天上) 미소녀의 조각처럼 양팔을 벌리고 떠있는 조슈아에게 기 르가스가 말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고르지 못한 호흡으로 가슴을 들썩이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의 심경을 극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광기에 가까운 격한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는 짙은 초록빛 눈동자였다. 그러나 그의 것과 같은 초록빛의 눈 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요정 여왕은 그와는 전혀 상반된 기운을 풍기며 조금 떨어져 그 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나신은 초록빛의 체액으로 조금 더렵혀져 있었지만, 거의 뼈가 드러 날 지경이었던 가슴의 상처만은 이미 깨끗이 아물어 있었다. 아마도 이 사연 많은 요정여왕은 엄청난 자가 치료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육체의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 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르가스는 히죽 웃으며 안티오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안티오페. 그러게 실망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이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마신의 힘을 되찾게 되면 이 인간계에서 나의 반려 자로 당신 이상의 존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신을 이 세계의 여왕으로 만들어 드리 죠." 그 짝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대 현자 기르가스는 지금 이 순간 지식과 사 랑의 기술은 전혀 별개임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그 정도 되는 마법사조차 안티오 페의 마음만은 읽을 수 없는지, 그녀의 마음과는 수십 광년 떨어진 분석으로 더욱도 상처받을 말만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에 둔감의 극치를 달리는 조슈아 조 차 '바보 같은 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혀를 찰 정도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 가? 그러나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한 기르가스는 더욱 더 신이 나서 그녀에게 연신 실없 는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어 갔다. "이제 곧 마지막 봉인이 깨어지고 제가 이 성도에 베풀어 놓은 수백 겹의 결계를 집 중하여 새 봉인을 하면 마계의 힘을 고스란히 저의 것으로 쓰면서도 다른 마신들과 마 물들의 출입은 통제할 수 있게 되지요. 그야말로 무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뭐 잠시 시 끄러운 전쟁을 치르게 되겠지만 900년도 기다렸는데 그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 이후는 당신과 영원히……." 갑자기 기르가스의 말소리가 뚝 끊기더니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당혹 감으로 잔 경련 을 일으켰다. 안티오페가 찬바람이 일도록 몸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선이 아름 다운 어깨와 두 장의 투명한 날개를 파르르 떨며 힘없이 걸어나가는 그녀는 비록 등 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울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안티오페. 지금 우는 거야?' 자신의 앞을 지나쳐 가는 요정 여왕의 흰자위 없는 초록색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투 명한 액체를 보게된 조슈아는 대량 출혈로 희미해져 가던 의식이 되돌아 올 정도로 놀 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기르가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조슈아와 달리 그녀가 우는 이유는 파악하지 못한 듯 하였지만,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도 안티오페가 울면서 이 자리에서 떠나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고 있었다. "아…안티오페." 파앗―. 기르가스가 당혹 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따르자, 소용돌이 치던 주홍색 마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마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제식장 의 중심부가 확연히 드러났다. '아아∼. 이제 정말 하나만이 남아 있구나.' 조슈아는 깨어져 흩어져 있는 백금 판의 잔해들 중 정 중앙에 위치한 유일하게 깨어 지지 않은 원형의 백금 판을 보며 탄식하였다. 황금의 중앙로를 따라 박혀있는 백금 판들은 십자모양의 중앙로가 만나는 제식장 정중앙의 원형 백금 판으로 이어지는 구조인데, 그 양옆에는 다른 것보다 조금은 큰 두 개의 삼각형 백금 판이 깨어져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거대한 원형판 뿐이 었다. 엄청난 기세로 소용돌이치던 마기가 거두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르가스의 몸에서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소량의 마기에 반응한 마지막 백금 판은 푸른빛의 광채를 내며 아직도 봉인이 살아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사이 기르가스는 저만치 걸어가는 안티오페를 따라잡아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 우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음모의 유일한 목격자인 조슈아로서는 안티오페 덕에 조금이라도 봉인 의 해제가 늦어지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두 연인(?)에게는 다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한 명은 대마왕의 전생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이제 겨우 27년여를 살아 왔 을 뿐인 그 이름도 유명한 대 현자 기르가스, 또 한 명은 도대체 몇 년을 살아 왔는 지 알 수 없는 이 세계에 마지막 남은 요정 여왕 안티오페, 도무지 구색이 맞지 않는 내력의 두 남녀는 지금 마치 평범한 연인들이 사랑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자세로 마 주 서서 조용히 서로의 눈빛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기르가스 였다. "아름다운 안티오페. 어째서 입니까? 당신과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던 저를 설득 한 것은 바로 당신이 아닙니까? 저는 이제 버리기로 마음먹었던 마아가의 기억 중에 서 당신만은 인정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제가 이 모든 일을 시작함에 앞서 제일 먼저 당신을 찾아갔던 것은, 제가 결코 마음속에서 당신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제는 무익한 싸움은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째 서……."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힐 시간을 두고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하는 기르가스 였 지만 아직도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안티오페는 그런 그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아까 당신이 한말이 맞아. 당신은 마아가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나 의 마아가는 이제 어디에도 없어. 마아가는 단지 나와 자신을 괴롭혔던 이 나라의 인 간들에게 복수하려는 마음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비록 마기에 빠 져 폭주하기는 했지만,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았어." "이해 못하시는 군요. 우리는 모두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요. 마아가도 결국 저와 같 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당신도 아실 텐데요." 그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던 때에 반해 오히려 상황이 역전된 기르가스는 진땀을 흘 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는 결코 떠나 보낼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양어깨를 잡은 손에 더욱더 힘을 넣고 있었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의외로 단호했다. "생각하는 것과 실재로 하는 것은 달라. 마아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전쟁을 바란 적이 없어. 당신은 마아가 처럼 마기에 빠져 든 것도 아니면서 즐기듯이 싸우고 있고, 곧 더 큰 거대한 힘을 얻어서 인간들 모두와 싸우려 하는 거잖아. 당신이 아무 리 거대한 힘을 가진다 해도 싸우지 않고 모두를 복종시킬 수 있어? 도대체 얼마나 많 은 인간을 죽여야 하는 지 생각이나 해본 거냐구." 인간에 의해 멸종 당한 요정 족의 여왕 안티오페가 이렇게 까지 인간을 생각 해 주리 라 생각해보지 못한 조슈아로서는 그녀가 너무도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인간을 생각해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일 이었다. NEXT 제23화 새로운 전설 part 2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8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2 20001129 174 3 장편 "당신이 그렇게 인간을 걱정해 주게 될 줄은 몰랐군요. 아름다운 안티오페. 그러나 내가 델라베가의 힘을 돼 찾으려 하는 것은 그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 "저는 이제 전생(轉生)의 마법으로 생을 연장하는데 질렸습니다. 다시는 다른 인간 의 기억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비록 언제나 죽음에 이르러 전생 이후, 바로 활동 할 수 있는 육체를 찾아 이동하여 그 육체의 영혼을 의식의 밑바닥에 가두고 외모까 지 우리의 것으로 변형 시켜 오며 수 백년을 살아 왔지만 그 기억만큼은 어찌할 수 가 없더군요. 저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의 기억들을 이 머리에 속 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 래서 영원 불멸의 육체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것 만이라면, 굳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생각 같은 건 할 필요 가 없잖아. 그건 포기하는 것이 어때? 이런 세계를 정복해봐야 관리하는데 피곤하기 만 할텐데." 목을 빼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슈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대륙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논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어이없는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 녀의 심정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왕 봉인의 해제를 막을 수 없는 바에야, 세계 정복의 야망만이라도 포기하게 만들어보자는 것이 그녀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안티 오페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기르가스는 조슈아를 돌아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답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인간에게 그저 고통만을 주기 위하여 세계를 지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는 인간입니다. 이유 없이 인간을 괴롭히고 즐기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욱더……." "그러나 이 세계는 신이 필요합니다. 어쩌다 신탁이나 내려주고 이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력은 없는 껍데기 신이 아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신이. 그러나 1000년 전 대 전쟁이 일어난 것은 이 좁은 세계에 신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입니다. 그래서 나 는 다른 신들과 마신들의 침입을 막고 인간들의 유일신이 되려는 겁니다." "유…유일신?" 기르가스의 기막힌 망상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조슈아가 개성 없이 반문하였다. 마신의 힘을 부활 시켜 복수를 위한 대 전쟁을 일으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고 아예 대륙 전체의 종교와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생명과 나라를 읽어도 종교만은 포기하지 않는 법, 그렇다면 그가 일으킬 전 쟁은 대륙의 모든 인간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당신 정도 되는 대 현자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거 야?" 조슈아가 겨우 유지하던 평상 심을 잃고 더듬거리며 반문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을 읽는 기그가스는 가슴을 펴며 조금도 생각 해볼 여지가 없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정신이 아득해 질 때까지 생각했습니다. 당신들 보통 인간들은 길어야 100년을 살 수 있는 때문에 그 정도 희생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의 시간을 놓고 볼 때 어느 것이 인간을 위해 더 이득입니까?" 조슈아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인간이라 칭한 그였지만, 그는 이미 인간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제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발상의 바탕이 전혀 틀린 자와는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고, 오직 실력 행 사에 의해 굴복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은 일찍부터 제왕 학을 배워 온 그녀에게 있어서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가 미치광이 이거나, 조그마한 힘 을 믿고 우쭐한 바보일 경우에 적용되는 것. 눈앞의 상대는 대륙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대 현자이자, 거기에 더해 곧 마신 의 힘까지 손에 넣을 무시무시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하기에는 그 결 과가 너무나 무서웠다. 어떤 구차한 이유를 들어 서라도 그를 막아야만 한다는 조급함에 조슈아는 떨리는 목 소리로 소리쳤다. "안티오페… 안티오페의 마음은 생각 안 해? 당신이 마아가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잖아.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거 야?" 평소 같으면 절대로 이런 식의 논법을 전개 할 그녀가 아니었지만, 부끄러움에 얼굴 을 붉히면서도 조슈아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기르가스는 잠시 침묵하며 안티오페의 맑디맑은 초록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진주 같은 눈물 방울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철 담을 가진 사내라도 이런 얼굴로 부탁을 한다면 심장이라도 빼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 할 정도의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으음……."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를 내며 기르가스는 안티오페의 어깨에서 손을 때며 물 러났다. "당신을 아프게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름다운 안티오페. 저는 이제 당 신을 떠나 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가하려는 일을 보시는 것이 그렇게 마 음이 아프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순간 안티오페와 조슈아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 에서 나온 말은 그녀들의 기대를 완전히 빗나가 있었다. "당신이 아파하는 것만은 볼 수 없으니, 앞으로 벌이질 모든 일들을 보지 않아도 되 도록 얼마간 당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겠습니다." "에에?" 안티오페를 대신하여 조슈아가 황당한 목소리로 경악성을 내지르는 동안 기르가스의 두 눈에서 엄청난 주홍빛 안광이 폭 출 하였다. 파아앗―. 순간 안티오페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무형의 힘에 저항하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올랐 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마기의 영향력 안에 들어 있었다. "이 것 놔!" 투명한 두 장의 날개를 빠르게 퍼덕거려 보았지만 그녀는 공중에 뜬 채 꼼짝하지 못 하였다. 잠시 몸을 뒤틀며 빠져나가려 하던 안티오페는 분노한 눈빛으로 기르가스를 내려다보 며 소리쳤다. "마아가 라면 절대로 나에게 이런 짓을 하지 않아. 감히 나를 구속하다니. 나와 싸우 고 싶지 않으면 당장 이것을 풀어." 그러나 그런 그녀를 씁쓸한 눈빛으로 바로 보는 기르가스의 얼굴은 단호했다. "거기서 쉬세요. 당신의 아이들도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세계를 정복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테니, 당신은 그저 기다리시면 되는 겁니다." "나를…나를…. 이렇게 치욕스럽게 만들다니……." 안티오페는 얼굴을 분노로 붉게 물들이며 치를 떨었다. 기르가스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화이어 볼의 공격까지 고스란히 받아 내었던 그녀가 이런 일에 그렇게 분노하리라고는 조슈아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목숨을 잃게 되는 순간이 오기 전에는 결코 남을 공격하지 않는 기품 있는 요정 족 의 여왕인 그녀는 그만큼 그 프라이드도 엄청난 법이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타의에 의해 자유를 잃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요정 족의 상식이 없 는 조슈아가 알 리 없는 것이다. 위이잉―. 갑자기 안티오페의 날개에서 초록빛의 요정가루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것은 조슈 아가 전에 보았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작은 입자 하나 하나가 마치 작은 요정들 같이 심하게 요동치고 날아다니며 강렬하 고 짙은 초록빛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반항할 생각입니까?"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 듯 기르가스의 목소리가 조금은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파앗―. 안티오페의 자유를 빼앗고 있던 무형의 결박이 깨어지며 주홍빛 마기가 마치 결계에 막힌 듯 안티오페의 주위에서 물러났다. '아…안티오페가?' 저 아름다운 무심 여왕이 저런 식으로 힘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 해 본적이 없는 조 슈아에게 안티오페의 실력행사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파바박―. 결박에서 풀려난 안티오페는 가볍게 바닥에 날아 내려 기르가스를 노려보고 있었는 데, 기르가스의 주홍빛 마기는 그녀의 몸에 닫지 못하고 무형의 벽에 막혀 그녀의 주 위에 주홍빛의 구(求)를 만들었다. 기르가스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지마세요. 아름다운 안티오페. 그렇게 힘을 쓰시면 저로서도 당신을 다치지 않 고 억제 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의 생각 없는 말은 그녀를 더 자극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나를 억제해?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여 이 자리를 떠나려 한 줄로 아는 거야? 내가 마아가의 힘에 굴복하여 그를 사랑했던가? 나는 다만 이 세상에서 조금 피해를 입더라 도 더 이상 피를 보기 싫어서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것 뿐이야. 이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당신 안에 남아 있는 마아가를 사랑하는 여자이기 전에 요정 족 의 여왕이야!" 그녀의 예상 밖의 과도한 노여움은 기르가스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었 다. 그러나 그대로 그녀를 풀어 줄 수도 없었다. 지금의 기세로 보아 풀어 준다면 다 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것 같지 않은가? "용서하세요. 사랑하는 안티오페." 기르가스가 낮게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이마에 모아 인장을 맺고 주력을 강화하였다. '아앗!' 조슈아는 또다시 자신의 몸에서 허용량을 넘어선 거대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기 분 나뿐 방출 감에 몸을 떨었다. 급해진 기르가스가 모든 힘을 동원하려는 것이 분명 했다. 콰아아―.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나간 주홍빛 마기는 무섭게 소용돌이치며 날아가 안티오페를 집어 삼켰다. 슈우우―.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의 주위에서 격하게 움직이는 초록색 입자들은 그 무시무시 한 마기를 너무도 쉽게 일정 범위 밖으로 퉁겨 내었고 일부는 오히려 잠식까지 하고 있었다. '대…대단하구나 안티오페!' 조슈아의 감탄에 시선을 받으며 안티오페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닐텐데? 정말로 나를 원하고 굴복시키려면 좀더 힘을 써 야 할거야." "힘으로 굴복시키면 나의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기르가스가 난처한 듯 이마를 찡그리며 묻자, 바로 안티오페의 답이 돼 돌아왔다. "할 수만 있다면!" 안티오페가 정말로 무엇을 바라고 저런 행동을 하는지 조슈아로서는 알 길이 없는 것 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르가스를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튼튼한 대리석 바닥이 무시무시한 압력에 밀려 움푹 들어갈 정도의 마력 싸움을 하 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슈아의 눈에 두 남녀는 그저 연인끼리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으니 말이다. 잠시,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안티오페의 초록색 눈동자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기르가스 는 마기를 거두고, 천천히 두 손을 모아 손바닥 위에 마법진을 만들어 그 위에 나직 이 주문을 외기 시작하였다. "새벽의 영광, 정령의 어머니 루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원소의 정령들은 나 의 힘이 되어라." 슈아아―. 기르가스의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안티오페의 몸 주위에서 격하게 움직이던 초록색 의 입자들이 순식간에 기르가스의 손바닥위로 모여 주먹만한 초록빛 공을 만들고 있었 다. 츠으으―. 엄청난 에너지가 압축되어 있는 듯, 손바닥 위에 초록광구에서는 연신 정전기가 불꽃 을 튀기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러나 기르가스는 개의치 않고 두 손바닥을 모아 합장을 하며 눈부시게 빛나는 초록 빛 광구를 가볍게 으깨어 버렸다. 파아악―. 별로 거창한 반응도 없이 안티오페의 비장의 무기(?)는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고 어느 새 기르가스는 안티오페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너무도 싱겁게 끝난 싸움에 조슈아가 절망감을 느끼는 동안 기르가스와 안티오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르가스의 눈에는 승리감 같은 것은 한 점도 드러나 있지 않았고, 안티오페의 눈동 자에서도 패배감 같은 것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기르가스는 안티오페를 잡아 당겨 품에 안고 자연스럽게 키스하였고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절망감과 뜻 모를 배신감에 젖은 조슈아는 고개를 돌리며 탄식하였다. '안티오페는 그가 옛 연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버리지 못해 결국 싸움에 패하여 굴복하였다는 것으로 그를 인정하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거야.' 그녀로서는 상당히 빠른 심리 분석이었지만 안티오페가 어떤 식으로든 기르가스의 적 이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의 해석이 정 말로 맞는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오랜 키스가 끝나고 안티오페는 겨우 그의 품에 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손 은 여전히 기르가스에게 잡혀 있었고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이제 저의 뜻을 따르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당신을 속박하지 않고 두겠습니다. 모 든 일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셔도 됩니다." 기르가스는 아까 와는 달라진 느긋한 태도로 그녀의 동의를 구하였다고, 그런 그를 올려다보는 안티오페의 시선 또한 이미 예전의 가장된 무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 고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조슈아는 사랑하는 친구 안티오페가 다음에 하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안티오페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온화한 기르가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는 찰 라였다. 슈우우―. 그녀는 기르가스의 등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물체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그 를 밀쳐냈다. 그러나 그 물체는 너무나도 빠르게 날아와 이미 완전히 피하는 것이 불 가능하였다. 푸욱―. 선명한 파육음과 함께 기르가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바라 보았다. 인간의 힘으로 쏘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화살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어깨를 뚫고 지나가 주먹만한 구멍을 만들면서, 뼈가 드러난 상처에서는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의 아픔도 잠시, 자신의 어깨에서 시선을 떼어 화살의 진행 방향을 따라 간 기르가스의 두 눈은 경악과 분노로 피 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어깨를 부스고 지나간 화살은 안티오페의 새하얀 가슴 정 중앙을 꽤 뚫고 화살 끝이 등에서 빠져 나와 아직까지 그 힘의 여파로 부르르∼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안티오페!" 조슈아가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기르가스의 품으로 무너져 내린 요 정 여왕은 이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파앗―. 그때 넓은 제식장의 입구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네 놈들이!" 혼절한 안티오페를 품에 안고 분노로 몸을 떨고 있던 기르가스는 자신을 향해 쏘아 져 오는 5개의 인 영을 발견하고 폭갈하며 오른손을 횡으로 그어 갔다. 콰아아―. 대리석 바닥을 가르며 진공의 검이 형용불가의 속도로 쏘아져 오는 인물들에게로 날 아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5개의 인형은 그것을 가볍게 피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 르가스를 둘러쌌다. 콰앙―. 목표를 잃은 진공의 검은 그대로 반대쪽 벽면까지 날아가 거의 어른 한 두 명이 들어 갈 정도의 구멍을 뚫어 버렸다. "모…모두 무사했던 거야?"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조슈아는 진공검에 의한 먼 지 바람이 겉이고 기르가스를 둘러싸고 있는 5인의 인물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자 상 황도 잊고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강화 마법에 의해 비록 잠시 지만 엄청난 힘을 얻게 된 바알, 샤레셀, 조르쥬, 퓨어리스 이렇게 4인의 전사들과 그들을 구해주고 강화 마법을 베풀 어 준 엘프 마법사 진이었던 것이다. "이…이런." 그때 선두에서 어깨에 두 자루의 검을 매고 장궁을 들고 있던 조르쥬가 기르가스의 품에 늘어 져있는 안티오페를 발견하고 창백해진 얼굴로 신음성을 발하였다. 아마도 화살은 그에게서 날아온 듯 했다. 기르가스는 그런 조르쥬를 돌아보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씹듯이 소리 쳤다. "네 놈이냐? 이 화살을 날린 놈이!" 비록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동료를 맞추고 말았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조르쥬는 벙어리가 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하얗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 다. 그때 바알의 뒤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깨는 느긋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그런 것으로 죽지 않아. 잠시 충격으로 기절했을 뿐이야. 활을 뽑아주고 안 정하면 곧 깨어나게 되지." 기르가스는 바알의 등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은발의 엘프 마법사를 발견하 고 잠시 경악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무언가 납득 했다는 얼굴로 두 눈에서 주홍빛 안광을 뿜으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스코올! 네 놈이구나!" NEXT 제23화 새로운 전설 part 3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79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3 20001130 173 4 장편 "그래, 마아가 오랜만이구나. 설마 네가 기르가스의 몸을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두 인물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듯, 사이좋게(?)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그 대 화의 내용은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만한 것이었다. "스…스코올 이라구? 그 대현자 스코올 말이야?" 일행의 대표하여 순발력 좋은 바알이 경악 성을 터트렸다. "말도 안돼. 그는 100년 전에도 이미 수 백 살 이었다구. 아직도 살아 있을 리가 없 어. 그리고 이자는 엘프 마법사잖아." 전에 만난 재수 없는 엘프 마법사가 자신의 동료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어 리둥절해 있던 조슈아도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바알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바알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이며 얼굴을 붉혔다. 잠시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지만, 아까의 사태로 어쩌면 바알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불안감으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 핏발선 눈으로 스코올과 일행을 노려보던 기르가스는 안티오페의 가슴에 박힌 화살은 잡아 그대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이미 화살이 가슴을 완전히 꽤 뚫었기 때문에 잡아 빼는 것보다는 등뒤로 밀어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부르르―. 그의 품에 축 늘어져 있던 안티오페가 기절한 채로 격하게 몸을 떨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벌써 즉사를 면치 못하였겠지만 과연 요정 여왕은 달랐다. 가슴 의 정 중앙을 화살에 꽤 뚫리고도 그녀는 아직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일행은 바로 이 순간 허점 투성이의 기르가스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기습의 기회는 놓쳤고, 안티오페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있는 상태에서 그를 공격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내는 잠시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치 상태를 유지하 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활로 연약(?)한 요정 여왕을 맞추고 만 고급기사 조르쥬는 거 의 전투 불능 상태로 보일 지경이었다. 툭―. 초록색 체액으로 범벅이 된 은빛 화살이 안티오페의 등뒤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아직 안티오페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바닥에 눕힌 기르가스는 옷을 찢어 그녀의 뒷머리에 대주고 손바닥에서 주홍빛 기류를 방출하여 그녀의 가슴에 쏟 아 붙고 있었다. 그 주홍빛의 기류는 예전의 마기와 빛깔은 같았지만 느낌은 전혀 틀려, 마치 봄바람 을 타고 온 아지랑이처럼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는 치료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 하였다. 슈우우―. 그녀의 가슴에서 묘한 소리가 나며 주먹만한 구멍이 서서히 매 꾸어 졌다. '대단하구나.' 전에 샤레셀의 치유마법을 본적이 있는 일행들이었지만 이렇게 큰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할 수 있는 치유 마법을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일행이 모두 그의 놀라운 치유 마법에 놀라고 있는 사이, 어느 새 치료를 끝낸 기르 가스는 안티오페의 이마에 살짝 입맞추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압적인 눈빛으로 일행을 쓸어보던 기르가스의 차가운 눈동자는 활을 들고 있는 조 르쥬에게서 멎었고 그의 그런 눈빛을 접한 조르쥬는 상대가 적이라는 것도 잊고 자라 목이 되어 움츠러들었다. "그녀를 다치게 한 죄는 매우 크다. 기사여. 너만은 용서 할 수 없다. 내 너를 죽지 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씹듯이 내뱉은 저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르가스의 눈동자에서 주홍빛의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피해!" 바알의 고함소리가 아니더라도 이미 모두가 황급히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광―. 별다른 주문도 외우지 않고 오직 염력만을 이용한 충격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이 서있던 대리석 바닥에는 놀랍게도 족히 지름 4 ∼ 5 m는 되어 보이는 웅덩이가 생겨났 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법. 어느새 몸을 피한 모 두는 빠르게 흩어져 일정한 진을 형성하며 간격을 좁혀 왔다. "무신 에알라의 전신강화마법(全身强化魔法)인가? 준비한 번 단단히 했구나. 스코 올." 의미를 알 수 없는 음소를 머금은 기르가스가 일행에게 연속해서 다섯 개의 진공 검 을 날리며 소리쳤다. 촤아악―.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내면서 대리석 바닥을 가르며 날아간 진공의 검은 그대로 5 인 의 인물들을 두 동강 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눈의 착각이었다. 무시무시한 속도의 진공검은 단 하나도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고 일행을 아슬아슬하 게 빗나갔고, 제일먼저 바알이 기르가스의 사각을 비집고 들어와 그의 목을 노리고 무 지막지한 힘으로 직도를 그어 올렸다. 부앙―. 평소에도 엄청난 힘을 가진 바알 이었으니 만큼, 10배의 힘과 속도가 실린 그 검격 은 이미 인세에서는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소리부터가 예전과 달 랐다. 그러나 기르가스는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파앗―. "허엇!" 바알이 갑자기 사라진 기르가스를 놓쳐 허공을 베고 잠시 엉거주춤한 사이 갑자기 그 의 뒷 목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낙아 채는 것이 있었다. '어…언제!' 바알이 헛 바람을 들이키며 그대로 몸을 돌릴 새도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검 을 휘둘렀다. 싸아악―. 그러나 그의 검은 옷자락이라도 베었는지 천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등뒤 에서 인기척이 사라졌다. "머리 위다." 갑자기 멀지 감치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엘프 마법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여 왔 다. "우왓!" 상상도 못한 적의 움직임에 바알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리는 수밖에 없었다. 연속으로 두 번이나 무리한 자세로 검을 휘두른 그는 이미 다음 동작으로 연결할 타 이밍을 잃고 말아서 지금 머리 위에서 공격을 당한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 상황인 것 이다. 그러나 지금 싸우고 있는 것은 그만 이 아니었다. 파아앗―. 보기 흉하게 바닥에 몸을 굴리는 바알의 눈에 샤레셀이 공중을 향해 푸른색의 화이 어 볼을 날리는 것이 보였다. 퍼엉―. "우욱∼." 기르가스는 신음소리를 내며 실 끊어진 연처럼 십여 걸음을 날아가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기대한 것 같은 충격은 주지 못한 듯, 전혀 무리 없는 동작으 로 바닥에 내려선 기르가스는 오른 손을 뻗으며 빠르게 주문을 읊었다. "죽음의 마신 피에룸의 이름으로 명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집행자 사신의 낫 서 바여! 나의 무기가 되어라." 츠으으―. 기괴한 음향을 내며 기르가스의 양손에서 붉은 기류가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갔다. "뭐…뭐지?" 소환 마법에 실패한 것일까? 무언가 거창한 것을 소환하려던 것 이 분명한데 일행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르가스가 회심의 미소지으며 오른 손을 뻗 어 무언가 잡고 있는 듯한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자의 손에는 지금 사신의 낫 서바가 들려 있다. 지금의 너희들이라도 크게 베이 면 죽게 될 거야." "에에?" 너무도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한마디씩 하는 스코올이었다. 그 러나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일행은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죽어라!" 기르가스가 무형의 낫을 양손에 고쳐 잡고 크게 휘둘렀다. '서…설마 저 거리에서?' 십여 걸음 밖에서 마치 삽질이라도 하는 듯한 폼으로 무언가 휘두르고 있는 기르가스 를 바라보며 설마 하던 바알은 자신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시무시한 무형의 강기에 기겁하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직 몸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허리가 통째로 날아갈 뻔한 그는 몸을 굴리며 뒤를 향해 소리쳤다. "허리를 베어 온다. 피해라."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가 공중으로 뛰어 올라 사신의 낫을 피하였다. 솨아아―. 거대한 낫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바람을 일으켰다. 바알의 경고가 없었다면 무 슨 일을 당했을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다람쥐 같은 녀석들……." 바알과 조르쥬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호칭이었지만 계속되는 공격이 무마되자 조금 은 짜증이 난 듯 기르가스는 낮게 투덜거리며 손을 저어 사신의 낫을 거두었다. 일단 정체를 파악한 이상, 현재 일행의 움직임으로 보아 사신의 낫의 속도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 사이 또 무엇이 나올지 몰라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일행을 쓸어 보며 기르가 스가 소리쳤다. "도망가지 않는 용기는 가상하다만, 너희들에게 걸려있는 에알라의 강화마법이라는 것은 그렇게 장시간 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법이 해제되면 도망치지도 못하 고 약한 마기(魔氣) 만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될 터인데 그래도 그렇게 버티고 있을 것 이냐?" 그로서도 이제 겨우 하나의 봉인을 남겨 둔 채 이런 귀찮은 전투를 하고 싶지는 않 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가 용쓰는 재주가 있어도 마법사인 이상 상대가 강화마법으 로 항마력과 내구성까지 강화된 데다 저런 식으로 빠르게 움직여서야 견제 할 수는 있 어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도망친다 하더라도 일단 마신의 힘을 되 찾고 나면 세상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어 처치 할 수 있는데 굳이 이런 귀찮은 전투를 왜 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의 협박은 별로 소득도 없이, 바로 완곡한 거부의 의미가 담긴 대답이 날 아 왔다. 슈우욱―. 조르쥬에 의해 엄청난 힘으로 당겨진 장궁에서 은빛 화살이 흉흉한 음향을 들려주며 기르가스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일반적으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기 마련 이었지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쏜 화살이 아닌지라 마치 제비갈매기가 급상승하듯 급 격히 떠올라왔다. 콰직―. 기세 좋게 날아가던 화살은 기르가스가 가볍게 오른 손을 젖자, 바로 코앞에 이르러 마치 철벽에라도 부딫인 듯 깨어져 사방에 은빛 파편을 날렸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개시의 신호에 불과하였다. 그가 화살을 막기 위해 잠시 허점을 보인 사이, 바알과 퓨어리스가 몸을 날려 양옆구리를 노리고 검을 그어 갔고, 때를 같 이하여 샤레셀의 화이어 볼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훅∼!" 이 정도 입체 공격이 되고 나면 아무리 전설의 대마법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르가스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어지럽게 양손을 저어 강기를 만들어 냈다. 콰아앙―. 먼저 샤레셀의 화이어 볼이 기르가의 바로 앞에서 강기에 부딫여 폭죽처럼 터져 사라 졌고, 뒤이어 바알의 직도(直刀)가 두 번째 강기에 퉁겨 나가며 그 무지막지한 반동 에 바알이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나 겨우 몸을 가누었다. 그러나 기르가스도 애매한 타이밍으로 베어온 퓨어리스의 검까지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파악―. 선명한 파육음이 들리고 잠시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모두는 득의한 얼굴로 반토막이 났을 기르가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두의 표정은 실망감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대로 기르가스를 반쪽 낼 기세로 베어가던 퓨어리스의 양날 검은 그의 허리에 박 혀 꼼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어!" 분명히 손에서 느낀 감각으로는 충분히 베고도 남았을 텐데 별로 깊이 베지 못한 것 이 의아한 듯 어리둥절해 하던 퓨어리스는 갑자기 기르가스가 머리를 노리고 커다란 손을 뻗어 오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려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녀의 움직임은 그렇게 빠르지 못하였다. "꺄악!" 기르가스의 손에 머리를 잡히고 만 퓨어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마도 어린 그녀에게 는 평생 가장 두려운 순간이리라. "아슬아슬하게 강화마법의 효과가 끝났나? 후후∼. 하마터면 이 육신을 못쓰게 될 뻔 했어. 아가씨." 기르가스가 오른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왼손으로는 검을 뽑아 내며 음소 하 였다. "마아가의 힘을 전처럼 간단히 이용할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싸움을 할 필요도 없었 겠지만 전투에서는 이 정도가 한계이거든. 자! 어떻게 해줄까? 먼저 너를 손봐주고 나 머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 "으으으……." 주홍빛 마기가 일렁이는 기르가스의 눈동자를 접한 퓨어리스의 입에서 두려움에 절 은 신음 소리가 세어 나왔다. "그녀를 놀리지마. 아직 어린 소녀잖아." "!" 갑자기 그의 등뒤에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무심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기르 가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활짝 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가 슴을 어루만지며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제단에 기대어 일어서는 안티오페의 모습이 들 어왔다. 상당히 많은 양의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전혀 생기를 잃 지 않고 여느 때처럼 반짝 반짝 윤기가 흐르고 있어 요정 여왕의 생명력을 과시하였 다. "오오∼. 안티오페." 그녀의 힐난조의 말 한마디에 잡고 있던 퓨어리스의 머리를 놔주며 기르가스는 재빠 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부축하였다. 그러자 지옥의 입구까지 들 어갔던 퓨어리스는 거의 구르다 시피 하여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안티오페 무사했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미 그녀를 적의 여자인 것으로 심증을 굳혔음에도 불구하고 조슈아가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티오페는 그런 조슈아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장 내의 인물들을 쓸어 보다가 샤레셀의 옆에 조용히 서있는 엘프의 마법사를 발견하고 가볍게 이마를 찡그렸다. 은발의 엘프 마법사는 상황이 급격히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긴 장하지 않고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스코올. 이제는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비록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으나 장내의 모두는 그녀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 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군요. 안티오페. 마아가는 당신에게 돌아온 겁니까?"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마라. 스코올. 네 놈과 그 녀석들을 당장에 없애 버리고 싶지 만 안티오페가 싫어하는 것 같아. 참고 있는 거다." 스코올의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기르가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무엇을 믿는 지 그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스코올이었다. "후후∼. 그녀의 이름을 지어 준 것이 나라는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당연히 나에게 는 부를 권리가 있지. 그리고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이놈이!" 슈우우―. 격조한 기르가스의 몸에서 주홍빛 마기가 스멀스멀 일어나 그에게로 뻗어 갔다. 그러 자 그 힘을 알고 있는 조슈아가 일행에게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무…물러나 모두!" 그러자 안티오페가 안심하라는 듯 조슈아를 달랬다. "걱정마. 마아가는 스코올 만 공격하려는 거야." 그러나 빠른 속도로 자신들에게 뻗어오는 마기를 보면 누구라도 두려움을 느끼고 도 망갈 만 한데, 스코올을 뿐 아니라 일행 중 누구하나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마!" 흥분한 기르가스와는 달리 냉정한 눈빛으로 스코올을 바라보고 있던 안티오페가 무언 가 눈치 챈 듯 급히 기르가스의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함정이야! 힘을 거둬 마아가!" "하하하! 걸려들었구나! 마아가!" 화아악―. 순간 스코올의 득의 한 웃음소리와 함께 눈을 지져 버릴 듯한 강렬한 황금빛 광채가 장내를 가득 매우 더니 일정한 방위를 유지하고 서있던 5인을 중심으로 정체 불명의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이…이런. 어느 사이에……." 기르가스는 당혹 감을 감추지 못하며 안티오페를 등뒤에 숨기고 양손을 뻗어 급히 마 기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방출된 마기는 황금빛의 마법진에 가두어져 그 안에서 급격한 소용돌이를 만들며 마기와 더불어 기르가스 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하 였다. NEXT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4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0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4 20001201 180 3 장편 슈우우―. 급격히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허수 공간으로 기르가스는 소리한번 질러 보지 못하고 빨려 들어갔다. 딴에는 무언가 반항을 시도해보려 했었겠지만 엄청난 황금빛의 마법진 은 그럴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비…비열한……." 마법진에 가두어진 기르가스가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 미소녀의 조각상인양 두 팔을 벌리고 떠있던 조슈아가 결박이 풀렸는지 공중제비를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반사신경이 뛰어난 그녀는 너무도 우아한 포즈로 자세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착지하였다. "조오다의 절대항마진법(絶對降魔陣法)은 언제나 효과가 만점이란 말이야. 그러나 예 전의 너였다면 이렇게 간단히 당하지 않았을 텐데, 역시 아직 3개로 나누어진 힘을 융 화시키지 못했구나." 마법진 안에서 합장을 하며 진법의 압력에 대항하고 있는 기르가스를 바라보며 스코 올이 히죽거렸다. 도무지 그 나이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거지를 보여 주는 그였 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뭐라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것이 행동이야 어떻든 이 엄청난 대 마법사는 세상 누구도 어쩔 수 있을 것 같 지 않던 마왕의 부활체인 기르가스를 너무도 가볍게 제압해 낸 것이다. 그러나 상대 가 상대이니 만큼 상황이 이렇게 간단히 끝날 리가 없다. 비록 마법진을 깨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기르가스의 표정에서는 전혀 낭패한 기색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크크∼.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스코올. 조오다의 절대항마진법(絶對降魔陣法) 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잘 알고있다만, 이것은 고정 마법진이 아니다. 법술가는 엄청난 영력을 소비하여야 하고 일단 마법사가 자리를 떠나면 채 10분을 유지 할 수 없는 것이 이 절대항마진법(絶對降魔陣法)인 것이다. 네 놈의 영력이 아무리 강하다해 도 나를 죽일 수 없는 한 언젠가 나를 풀러줄 수밖에 없고, 그러면 네놈은 도망칠 기 력도 남기지 못하고 나의 손에 죽을 것이다. 후후∼. 너는 지금 스스로 공격 방법을 제한하면서 나를 보호 해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바보 같은 놈!" "에에? 그게 정말이야?" 조슈아를 비롯해 모두가 기르가스의 말에 기겁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잘 난 척 하는 엘프의 마법사는 계획도 없이 적의 심장부를 쳐들어 온 것이 아닌 가? 그러나 천성이 유들유들한 스코올은 별반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단에 몸 을 기대어 복잡한 시선으로 기르가스를 바라보고 있는 안티오페에게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졌다. 안티오페는 자신의 연인이 싫은 인물의 마법진에 가두어 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당 황하거나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조슈아가 보기에 그녀는 오히려 한숨 돌렸다는 표정 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조슈아는 제단 위의 성검 말고스를 허리에 차고 안티오페 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은 거예요? 안티오페." 조슈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안티오페는 돌아보지 않고 다만 가볍게 고개를 끄떡 여 보였다. 아마도 다른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스코올이 전혀 긴장감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금발 아가씨. 여차하면 그녀를 막아 줘. 이 마법진을 유지하는 동안 나는 무 방비라고. 그녀가 공격이라도 해오면 우리는 그대로 끝이야." "이…이봐! 당신 바보야? 그런 이야기는 숨기는 게 상식이잖아!" 그의 기막힌 태도에 바알이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그러나 조슈아는 안티오페의 등뒤 에 서서 별다른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왠지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것 같은 생각 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조슈아 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저 느물느물한 엘프 마법사의 태도에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안티오페는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스코올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 에는 조금이지만 노기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이래서 나는 언제가 지나도 결코 당신을 좋아 할 수가 없어. 당신과 만나면 나는 언 제나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하잖아.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런 식으로 말 돌리지마.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이 가장 싫어." 비록 평소의 무심한 어투로 돌아온 그녀였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가 이런 식으 로 다른 사람을 힐난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느물느물한 스코올도 그녀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아니면 더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인 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사이 안티오페는 조슈아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마법진으로 다가가 기르가스 를 들여다보며 스코올에게 와는 전혀 다른 천사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아가. 내 말을 들어. 나는 스코올은 싫지만 그가 하는 일이 언제나 옳다는 것은 잘 알아. 100년 전 그가 당신을 가둔 것은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고통이었지만 그의 잘 못은 아니야. 당신은 잘못 생각하는 거야. 이 세상은 당신이 지배할 만 한 가치가 없 어." "……." 기르가스는 사랑하는 안티오페가 원수 같은 엘프 마법사 스코올의 편을 들고 있는데 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결코 분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도 사랑 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표정을 지 을 수 있는 이유는 30년을 채 살지 못한 조슈아 일행에게는 그야말로 수수깨끼였 다. 안티오페는 기르가스의 그런 표정에 답이라도 하듯 생긋 웃어 보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 세상에 대하여 단 한가지 터득한 것이 있어. 이 세상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거야. 모 든 것을 하나로 만들려는 헛된 노력을 그쳐야해. 상대를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거야." 조용해진 제식장 안에는 오직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만 이 울려 퍼졌다. 마치 설교 라도 하는 듯한 그녀는 다른 모든 인물들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데도 불구하 고, 마치 기르가스와 단둘이 있는 듯 한 태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에 몰 두하고 있었다. "신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 세계에는 여러 차례 심각한 전쟁도 있었고, 그 외에도 인간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실수들을 해왔어. 그러나 그들과 이 세계를 멸망에 이 르게 하는 짓은 하지 않아. 그것은 신이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는 대부분 의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과 안전한 삶이 그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 문이야. 이 세계가 명망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신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경우와 신들이 직접 이 세계에서 싸울 경우 뿐이야. 인간은 거기까지 세상을 몰고 가지는 않 는 다구." '그럼 뭐야! 결국 어떤 신이 되었던 신들이 돌아오는 걸 안티오페는 바라지 않는 다 는 건가?' 조슈아는 자신의 믿음을 자극하는 안티오페의 말에 조금은 불편해하고 있었지만, 그 녀의 불편한 심기는 샤레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소녀는 이 자리에서 그 녀의 말에 반박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아무튼 안티오페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르가스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 말 많은 스코올 조차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기르가스는 그녀의 설득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전혀 표정에 변화가 없 어 안티오페를 절망케 하였다. 기르가스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곧 눈을 뜨고 적의 함정에 빠 져있는 상태라고는 믿기 지 않는 여유롭고 온화한 표정으로 아름다운 안티오페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생각은 정말로 맞습니다. 사랑하는 안티오페. 그러나 인간들 중에는 제법 강 력한 힘을 가진 바보들이 있어요. 그 놈들은 세력의 힘이나 작은 마력을 믿고 스스로 신이 되려합니다. 어느 시대에도 그런 강력한 저능아들은 꼭 있게 마련이죠. 그러나 언제 그런 놈들 중 하나가 그 일을 해낼지 모르는 일입니다. 기량이 부족한 자가 세계 를 지배하려 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 까!" "세상 어디에 세계를 다스리기에 충분한 기량을 가지 자가 있다는 말이야! 그런 기량 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당신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었잖아. 신들이 충분치 못한 능 력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관여하여 그들의 신으로 받들어 진 것이 애초에 가장 큰 실 수 였다구." "그 말을 한자는 마아가 였습니다. 인간들 스스로의 능력으로 공멸(攻滅)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시절의 그였지요. 세상이 자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지배 해 줄자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신과 인간을 모두 경험해 본 자, 바로 저 같은 존재 말이 죠. 저는 인간과 그 외 다른 모든 존재들을 지배해 왔던 그 어떤 신들 보다 이 세계 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스코올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 두께를 짐작 할 수 없는 홍석(虹石) 천장을 올려다보았 다. 그가 무엇을 안배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스코올은 안티오페가 기르가 스를 설득해 주기를 바랬었던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르가스의 완고하게 굴절된 세 계관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때 잠시 찾아온 정적을 깨며 안티오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정말 이제는 나의 마아가로 만은 살아 줄 수 없는 거야? 겨우 이런 세상을 차지 하려고 둘만의 삶을 거절하는 거야? 100년이나 혼자 외로움에 떨게 만들고는 또 그러 려는 거야?" 흠칫―. 기르가스를 비롯해 장내의 모두가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에 몸을 떨었다. 무심 여왕 안티오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오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섬세한 열 개의 손가락 사이로 끊임없이 맑은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비록 울음소리를 내고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심한 슬픔과 절망감에 빠져 있는지는 모두가 가슴이 아프도록 느낄 수 있었다. "아…안티오페. 내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서 당신을……."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영역을 더듬고 있는 둔감한 사내 기르 가스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 해 보려 하였지만 안티오페는 눈물을 그치 지 않았다. 그녀는 초록색 눈동자 가득 절망감과 슬픔을 담고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저 스코올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 곳까지 찾아 왔을 것 같아? 왜 바보 같이 내 말을 듣겠다는 한마디를 못하는 거야! 당신은 나와 함께 삶의 기회까지 걷어 찬 거 야." "그것이 무슨……." 쿠오오오―. "꺄아아∼." 별안간 기르가스의 질문을 끊으며 엄청난 폭음과 함께 제식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만 난 듯 흔들리자 샤레셀이 중심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파앗―. 그러자 기르가스를 축으로 형성된 마법진과 5인의 인물과의 황금빛 연결 고리가 끊어 지며 마법진은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뭐야! 지진이라도 일어난 건가?" 바알이 흔들리는 지면에서 겨우 중심을 잡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스코올은 착잡한 시 선으로 기르가스와 안티오페를 번갈아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답답해진 조슈아가 창백해진 안티오페를 부축하며 스코올에게 소리쳤다. "이봐! 마법진은 다시 안 칠 거야? 곧 그가 풀려나게 되잖아." "이제 필요 없어. 살고 싶으면 빨리 여기서 나가도록 해. 이제 몇 분 후면 이 곳은 완전히 봉쇄 될 거야. 나라도 갇히면 나갈 수 없어." 스코올은 까마득한 어린 소녀가 반말을 쓰는 대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먼 시선으 로 입구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보…봉쇄?" 바알이 개성 없이 반문하였지만, 눈치 빠른 샤레셀은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나며 천 장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아까부터 수상했는데, 저 부유마법으로 받쳐진 빨간색 천장에는 온갖 마법방어주문 과 봉인마법진이 새겨져 있을 거예요. 아마 저런 것이 땅속에도 있겠죠. 그런 것에 갇 히게 되면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일 이……." "너희들과 같이 왔던 시돈의 고급 기사가 있었지? 그 자가 신전 바닥에서 부유마법진 을 해제하고 있는 거다. 그자도 곧 탈출하겠지." "그래도 기르가스가 마지막 봉인을 깨면……." 조슈아가 걱정스러운 듯 반문하자 스코올이 입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쓸 때 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여기를 나가라. 그렇지 이봐! 덩치. 저 아가씨는 지 금 피가 부족해서 뛰기 힘들다. 좀 안고 가야겠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다." 덩치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드는지 바알이 투덜거리며 조슈아에게로 달려왔다. "자…잠깐 바알!" 바알이 의사도 묻지 않고 자신을 번쩍 안아 들자 조슈아가 얼굴을 붉히며 바동거렸지 만, 스코올의 말대로 그녀에게는 지금 힘이 없었다. "빨리 나가야 돼. 죠슈아!" "……." 바알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조슈아는 그의 평범한 목소리 어디에서 그런 것을 찾 아 낼 수 있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바알은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본의 아니게 바알의 품에 안겨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어느 때 보다 불편하고 두려웠다. 그러나 품에 안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바알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안티오페 가지 않을 겁니까? 이제 몇 분 후면 나갈 수 없게 됩니다." 스코올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 며 마법진 안의 기르가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가요. 사랑하는 안티오페. 나는 마지막 봉인을 깨고 힘을 되찾아 이곳에서 벗어나 면 되지만 요정인 당신은 이 밀폐된 공간에서 봉인이 깨지는 충격을 견디지 못해요." 스코올이 따뜻한 목소리로 안티오페를 달래었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 히 묵묵부답이었다. 슈우우―. 그사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기르가스를 봉인하고 있던 절대항마진(絶對降魔陣)이 효력을 잃고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봉인만을 남긴 그는 달아날 생각 은 없는 듯 조용히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당신이 원하시니 저 소녀는 놓아주겠습니다. 마지막 봉인만 해제하면 되니 혼신의 힘을 다하면 얼마 안 걸리겠지요. 그러니 빨리 나가 주세요." 쿠구구―.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여지 것과는 다른 굉음이 신전의 바닥 깊은 곳에서 부터 울려 퍼졌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빨리 떠야만 한다."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겠는 듯, 스코올이 샤레셀을 안고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어두운 눈빛으로 바알과 조슈아를 돌아보던 조르쥬도 퓨어리스를 안아들고 급히 그 뒤 를 따랐다. 그러나 조슈아는 뛰려는 바알을 제지하고,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안티오페에게 소리 쳤다. "안티오페 빨리 나가야만 해요. 이대로는 당신이 죽는 다구요." "나…나는……." 안티오페가 더듬거리는 사이 이미 나머지 일행은 모두 입구까지 달려가 있었다. 그러 나 신전을 빠져나가기 전에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용서하세요. 사랑하는 안티오페!" 더 이상 그녀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기르가스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가 강하게 밀쳐 내었다. 파아악―. "아앗!"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주홍빛의 기류는 그대로 안티오페와 조슈아, 바알을 둘러싸더 니 모두를 가볍게 들어 올려 입구를 향해 날려버렸다. "마아가!" 안티오페는 눈물 방울을 흩날리며, 순식간에 멀어지는 기르가스에게 소리쳤다. 그러 나 그녀를 보내는 기르가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자신의 운명도 모르는 채……. 1 쿠와아아―. 궁성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폭음이 들려 오기 시작한 이래, 에레크트라는 걱정으로 혼 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기에 저런 무시무시한 소리가……?' NEXT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5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1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5 20001202 185 4 장편 인간의 싸움으로는 저런 류의 굉음은 낼 수 없다는 것을 알리 없는 그녀는 궁성 안에 서 신들의 대결에 필적할 대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쿠구구구―. "꺄악∼!" 다시 한번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녀가 서있는 제 2 성문 안의 광장까지,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의 격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겨우 몸의 중심을 바로 잡은 그 녀의 눈에 저 멀리 성 중앙의 4개의 탑이 누가 밀기라도 한 듯, 안쪽으로 서서히 밀 려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안돼!"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친 에레크트라는 무너져 내리 기 시작한 궁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녀에게는 조슈아와 샤레셀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궁성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슈우욱―. 텁썩―. 흙먼지를 뚫고 불가해한 속도로 날 듯이 달려나온 인물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어 성 밖으로 달려나갔기 때문이었다. 기겁을 하며 바동거리려던 에레크트라는 너무도 익숙한 손길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 지는 감촉에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다 나오고 있어. 에레크트라 걱정하지마." "아앙∼. 샤레셀 언니."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긴장감이 풀린 에레크트라는 샤레 셀의 손을 잡고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을 안고 달리고 있던 힘도 좋은 엘프 마법사 스코올이 에레크트라를 곁 눈 질하며 히죽거렸다. "내 동굴에서 영액을 훔쳐낸 것이 이 아가씨이지? 정령들이 가르쳐 주었었지만, 후후 ∼.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나?" 칭찬하는 것으로는 들리지 않았지만 결코 비난하려는 의도도 아닌 것이 분명한 장난 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사실을 알리 없는 에레크트라는 두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그녀로서는 영액을 훔친 자가 다른 자였다면, 자신을 안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마법 사가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슈아 언니는 요?" 스코올의 어깨너머로 빼 꼼이 얼굴을 내밀며 뒤를 바라보던 에레크트라는 흙먼지에 가려 나머지 일행이 보이지 않자, 다시 불안한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슈아악―.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던 스코올의 오른쪽 옆을 지나가는 세 개의 물체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주홍빛 반딧불처럼 뒤로 빛 무리를 뿌리며 한 대 뭉쳐 날아가는 것은 놀 랍게도 바알과 안티오페 그리고 바알의 품에 안겨 있는 조슈아 였다. "조슈아 언니!" 에레크트라가 스코올의 품에서 뛰어 내리기라도 할 듯 한 자세로 그녀를 애타게 부르 자, 조슈아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순식간에 그들을 지나쳐 저만치 앞서 갔다. "쳇, 마아가 놈. 어지간히 급했구먼." 스코올이 투덜거리며 그들을 쫓기라도 하려는지 달리기에 피치를 올렸다. 2 콰아앙―. 비록 영향권을 훨씬 벗어난 지점까지 와 있었지만 거대한 성이 무너지는 모습은 충분 히 공포스러웠다. 성문을 빠져 나온 조슈아 일행은 왕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쪽대로와 연결된 언 덕 배기 위에서 알본 성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무너지는 것은 신전의 제식장 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두는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철저히 무너지는 왕궁을 보고 몸 을 떨었다. "남의 왕국의 성이라고는 하지만, 600년 이상 된 위대한 건축물이 무너지는 건 정말 아깝군요." 일행의 심정을 대표하여 조르쥬가 감상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행들 중 가장 늦게 궁성을 빠져 나온 그는 퓨어리스와 함께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 어쓰고 있었는데, 거의 탈진 상태로 창백한 얼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급기사 답께 전혀 내색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때 일행 중 가장 먼저 감상에서 깨어난 조슈아가 아미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 결국 기르가스의 계획은 막을 수 없게 된 것이잖아?" 그녀는 무너진 궁성에서 당장 에라도 마신의 모습을 한 기르가스가 튀어나올 것 같 은 불안감에 입술을 자근자근 씹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어. 그는 이제 영원히 나오지 못해." "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요정 여왕의 대답에 조슈아가 순발력 있게 의아성을 터뜨렸다. 아직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는지, 한 손을 샤레셀의 왼쪽 팔뚝에 얹고 부축을 받고 있던 안티오페는 여태껏 과는 다른 의미의 무심하게 깊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무너진 궁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았지만, 조슈아는 그녀가 오히려 오열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은 사랑의 경험이 없는 어린 그녀가 보기에도 이 무 심 여왕의 영혼의 일각이 무참히 붕괴되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기르가스가 봉인을 해제하면 저런 것은 쉽게 부수고 나올 수 있지 않아요?" 스코올에게서 대략의 사정을 들은 샤레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신 녀인 그녀에게는 대단한 혼란을 가져올 이야기 였지만, 놀라는 것도 타이밍이 있는 법.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른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코올은 착잡한 시선으로 안티오페를 바라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허어∼. 안에 있는 자가 대 현자 기르가스 였군요. 그것은 제가 대답하지요." 그때 갑자기 침묵을 깨며 일행의 오른 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앗! 멘디에타 무사했어요?" "메…멘디에타 아저씨!" 조슈아와 에레크트라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성문이 무너지던 아슬아슬한 순간에 조르쥬와 퓨어리스가 빠져 나올 때까지도 모습 을 보이지 않아,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그가 살아 나온 것이다. 어찌 기쁘지 않 겠는가? 그러나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완전히 치료하지도 않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는 바람에 가슴의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는데, 덕분에 극심한 빈혈로 얼굴빛은 거의 하얗다 못해 푸른빛 을 띄고 있었다. 거기에다 가뜩이나 떨어진 체온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가 기 사로서 단련된 인물이 아니었다면, 서있는 것은 고사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정상 인 것이다. "세…세상에 멘디에타 씨. 당신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요." 샤레셀이 안티오페의 부축을 조슈아에게 맞기고 그에게 달려갔다. 옷으로 대충 덮어놓기는 했지만, 그의 가슴에 상처는 아직도 갈비뼈가 들여다보일 정 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검에 찔릴 당시, 샤레셀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즉사를 면치 못 했으리라. 부우우―. 샤레셀이 손바닥에서 푸른 색 기류를 방출하며 치료마법을 행하는 동안, 창백한 미소 를 지으며 그녀의 빨간 머리칼을 내려다보던 그는 무언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모두의 시선을 느끼고는 헛기침을 하였다. "으흠∼. 안티오페 님의 말씀대로 그는 이제 나올 수 없습니다. 워낙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 한정되어 있어서, 심증이 닫는 자들 중 기르가스도 끼어 있었 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그 일 줄은 몰랐군요. 잘도 십 수년을 왕국의 모두를 속이 고……." "그래서! 그가 왜 못나온 다는 거예요?" 안티오페와 그와의 관계를 알리 없는 그가 호들갑을 떨자 조슈아가 안티오페의 손을 꽉 잡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머쓱해진 멘디에타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다들 내막을 아시는 것 같으니 말씀 드리지요. 성도 알본에는 애초에 마계의 문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 거창한 77개의 봉인들은 모두 마족의 잔당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지요. 진짜는 국왕이 계시는 바리에 있습니다. 실재의 봉인은 단 하나 입 니다. 여기 같은 눈 속임용의 다중 봉인이 아니지요." "……." 모두가 이 기막힌 대답에 할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멍해진 일행들과 달리 스코올 과 안티오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안티오페! 이일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안티오페의 차가운 손에서 조금도 동요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조슈아가 질문하였 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멘디에타는 그런 그녀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사이 허탈해진 바알은 긴장이 풀린 듯,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아예 팔베개를 하고 대자로 누워 버리며 피곤함과 해방감이 함께 느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일은 끝난 건가? 이제 돌아가는 일만……." "아∼. 이럴 수가!" 갑자기 조슈아가 머리를 감싸쥐며 소리쳤다. "왜…왜 그래 조슈아!" 바알이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넋이 나간 듯 하던 안티오페가 다 깜짝 놀랄 지경으 로 큰소리를 지른 조슈아는 무너진 궁전을 바라보며 주저앉고 있었다. "아아∼. 아스나를 잊고 있었다니. 바보! 바보!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진짜 이 유를 잊을 수가 있지?" 그렇다! 그녀는 너무도 예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 덕에, 자신의 진짜 목 적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그러고 보니 아스나는 어떻게 된 거야? 조슈아!"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샤레셀이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 앉은 조슈아는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못되었다. '기르가스를 절대항마진(絶對降魔陣)에 가둘 때,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마석 아스나 를 집어들기 만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어떻게 그런 것을 까맣게 잊을 수가 있지? 내 가 여긴 온 이유를 완전히 잊고 있었어!' 이제 와서 후회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일생이 달린 물건을 바로 눈앞 에 두고도 집어 오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였다. 그것도 상황에 밀려 서도 아 니고, 다만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조슈아와 샤레셀이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성을 토하자 당황한 바알이 입을 열었다. "아스나가 뭐야? 혹시 그 놈 손바닥에 있던 돌맹이를 이야기하는 거야?" 번쩍―. 바알의 의외의 질문에 조슈아와 샤레셀이 고개를 들고 바알을 태워 버릴 듯 두 눈에 서 안광을 뿜었다. "바…바알. 설마 그것을 가지고 나온 거야? 그것이 없으면 나는……." 기대감으로 터질 듯한 목소리로 조슈아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의 흥분으로 터질 듯 한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의혹의 표정을 짓고 있던 바알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 였다. "흠∼. 그게 말이지. 놈을 마법진에 가둘 때 그 돌이 내 쪽으로 퉁겨 오잖아. 그런 데 빛이 나는 걸로 봐서는 대단히 뜨겁게 달구어진 물건 일 것 같더라구. 그래서 누 가 밟기라도 할까봐서 멀리 차 버렸었지." "아아악∼." 완전히 희망을 잃고만 조슈아가 무너져 내렸다. 너무도 황당하여 눈물도 나지 않았지 만, 표출이 안돼는 만큼 속은 더욱더 괴로웠다. 강직한 그녀가 이런 식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 나머지 일행들은 어찌할 바 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무심 여왕 안티오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억양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꼭 그것이 아니라도 전이 마법을 해제 할 수도 있어." "……." 그녀의 말 한마디에 조슈아는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 준 것처럼 순식간에 감정 의 폭주를 멈추었다. "지…지금 뭐라고……?" "아스나가 없어도 당신에게 걸린 성변이(性變異)의 마법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구." "서…성변이요?" 조슈아가 안티오페의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퓨어리스가 기절할 듯한 얼굴 표정으로 소리쳤다. "성변이가 뭔 데요. 언니?" 퓨어리스의 과도한 반응에 놀란 에레크트라가 그녀의 소매를 흔들며 질문하였다. '아아∼! 결국 여기 까지…….' 눈치 없는 안티오페 덕에 가장 원치 않던 상황에 부딫이고 만 조슈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샤레셀을 돌아보았다. 샤레셀은 그녀에 지지 않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지만 빠르게 평상 심을 되찾고는 조슈아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래 아스나 없이도 본래의 몸으로 돌아 올 수 있다는데. 언제까지 숨길수도 없는 일이고. 용서를 빌어야 되겠지? 그러나 바알과 조르쥬는…….' 자신을 사랑하는 두 남자를 생각하자 머리 속이 싸 해질 정도의 긴장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조슈아는 머리를 흔들어 두려움을 지워 버렸다. '애초에 내가 정체를 밝힐 수도 없는 것이었고, 자기들이 쫓아다닌 것인데 내 탓이 랄 수는 없어. 어차피 조르쥬는 근위대장이니 나를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고, 퓨어리스 는 이일로 기사가 될지도 몰라, 바알도 용병으로서 충분한 대가를 받게 될텐데 뭐. 누 구도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닌 거야.' 끝임 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 조슈아 였지만, 막상 고개를 들고 바알과 조르쥬의 시 선을 접하자 그녀는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조르쥬는 착잡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얼굴을 굳혔고, 바 알은 무언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나는 본래 사내애예요." 긴장감을 참지 못한 조슈아의 입이 주인을 배신하고 준비단계도 없이 어이없는 운을 띄웠다. NEXT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6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2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3 화 새로운 전설 part 6 20001202 199 4 장편 '아차!' 얘기치 않게 순식간에 최후의 영역을 돌파하고 만 조슈아가 기겁을 하며 돌아올 반응 에 겁을 집어먹고 눈을 감아 버렸다. "……." 그러나 한참 시간이 자나도록 기대한(?) 것과 같은 화려한 리 액션은 누구에게서도 연출되지 않았다. 에레크트라 만이 이상한 분위기에 두 눈을 깜박이며 조용해진 언 니, 오빠들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던 것이다. "저…. 조…조슈아. 그러니까 너는 원래 사내인데, 어떤 마법으로 여자애가 된 거라 는 말이지?" 한참을 숨도 쉬지 못하고 멍한 표정이 되어 서있던 퓨어리스가 설마 하는 투로 질문 을 던졌다. 이 순간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조슈아였지만, 그녀가 들어갈 만한 쥐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눈을 꼬옥 감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수밖에……. "정말 미안해요. 모두들. 죄송하다는 말로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 죄 할 깨요. 저는 아카바의 제 1 왕자 조슈에 예요.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소녀의 몸 이 되어 여러분을 만났어요. 여러분을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야기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너무도 부끄럽고 미안했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 당연한데 어째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레크트라와 퓨어리스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 다. "응. 그러니까. 조슈아 언니가 그럼 실은 마법에 걸린 왕자님이었다는 이야기예요?" "그…그런 것 같아. 에레크트라. 마법에 걸린 왕자님이었데." '마법에 걸린 왕자님?' 어째 이상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주고받는 두 소녀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고 지은 죄가 있는 만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조슈아였다. 털썩―. 그때 갑자기 샤레셀이 조슈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더 큰 거짓말이 되도록 만든 건 저예요. 사실을 말할 수 없 어서 이렇게 까지 되었어요. 근위대장님 정말 죄송해요. 실은 저도 폐하께 왕자님을 따라와도 된다는 허가를 받지 못했었어요." 언덕 위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조슈아와 샤레셀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가운데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도 나서서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이 두 소녀에게는 이 런 적막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차라리 화를 내주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 다. 거의 차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동안 지속된 적막을 깨준 것은 의외로 에레크트라였 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일행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언니들이 어째서 그렇게 미안한 건데요?" '?' 의표를 찔린 조슈아와 샤레셀이 고개를 들자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생긋 웃어 보였 다. "나라도 그런 일은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조슈아 언니가 원래 왕자님이었다는 것은 놀랍지만, 그래도 별로 이상하지 않아요. 언니는 너무 멋있거든요. 저…그럼 이제 왕 자님이라고 해야 하나요?" "에…에레크트라." 조슈아가 사랑하는 제자의 말에 감격하여 훌쩍이자 얼른 달려온 에레크트라가 그녀 의 품에 안겼다. "언니가 뿔이 달린 무서운 악귀라 해도 나는 언니 편이에요. 언니를 만나지 못했으 면 나는 벌써 목숨을 끊었을 거라 구요. 그러니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언니. 아…아 니 왕자님인가요?" 그녀가 호칭에 혼란을 느끼며 더듬거리자 조슈아가 눈물을 훔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은 언니라고 해도 돼. 에레크트라. 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나서 오빠라 고 하면 된 단다. 잊지 말거라 너는 에브라임 가문 사람이야. 내 누이 동생이구." "예! 언니." 어린 만큼 적응이 빠른 에레크트라는 아직은 어색한 표정을 풀지 못하였지만, 벌써 조슈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에레크트라도 방금 조 슈아의 선언으로 자신이 어떤 입장이 되었는지 눈치 챈다면 이렇게 침착함을 유지하 지 못했으리라. 용병도시 다테의 창녀의 딸로 태어난 12세 소녀 에레크트라는 지금 이 순간 대륙 최 고의 부국 아카바의 제 2 공주가 된 것이었다. 비록 훨씬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그녀 가 에브라임의 성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노…놀라운 일이지만 워낙 희한한 일들을 보아와서 그런지 가능 할 것도 같네. 그 럼 나의 첫 여자 친구는 샤레셀이 되는 건가? 조슈아는 그럼 남자 친구?" 퓨어리스가 검은 머리칼을 긁적이며 난처한 듯한 얼굴로 끼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 의 목소리 어디에도 비아냥거림 같은 것은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어려워하 는 조슈아와 샤레셀이 불편한 듯한 태도랄까? 이렇게 해서 4인의 소녀들(?)은 또다시 자신들만의 화기애애의 장막을 치며 서로 얼싸 안는 것만으로 본래의 관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수다 나 포옹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처 입은 두 명의 남자 조 르쥬와 바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꼭 다물고 있었지만 표정은 사뭇 틀렸다. 조르쥬는 무언가 허무함이 느껴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먼 시선으로 하늘을 올 려다보고 있었고, 바알은 무언가 상당히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더니 왜 저런……?' 조슈아의 의혹에 찬 시선을 느낀 바알은 겨우 정신을 수습한 듯 자리를 털로 일어나 서로 얼싸 안고 있는 4인의 소녀를 표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던 안티오페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 아스나 라는 것이 없이도 조슈아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겁니 까?" "바알! 왜 그런……." 조슈아가 의외의 전개에 당황하여 되물었지만 바알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사이 설마 그가 그런 질문을 던지리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깐 머뭇거리던 안티오 페가 천천히 대답하였다. "나보다 스코올이 잘 알겠지만 결국 조슈아를 변화시킨 힘과 같은 종류의 힘을 끌어 쓸 수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런 힘이 있어야지 말이죠." 자신의 일인지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조슈아가 끼어 들었다. 그러자 안티오페 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스크올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스코올은 그녀에게 조금은 난처하다는 듯한 제스추어를 해 보였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안티오페 님이 부탁하시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대답해 주지 금발 아가씨. 내가 마아 가를 나누어 가두었던 3개의 마석은 그냥 보석 같은 것이 아니야. 본래 그것들은 현자 의 돌이라는 신석으로 고대 마법사들이 주력을 모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 해 만든 최고의 마법도구지. 나는 그것들을 지금은 폐허가 된 페레나의 고대도시에서 찾아내었는데. 결국 마아가를 가두는데 그 아까운 것들을 다 쓰고 말았어." "그럼 이제 그 돌들이 없으니 나는 어떻게……."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 조슈아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잠시 곤혹스러 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스코올이 조금 사이를 두고 대답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아가씨를 본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줄 수 있어." "예에? 정말이에요?" 너무도 의외의 말에 존댓말을 쓰고 만 그녀였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 다. 지난 몇 개월간의 고통을 단숨에 끝내 줄 수도 있는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제…제발 저를 원래대로 만들어 주세요." 하라고 한다면 신발에 키스라도 할 기세로 스코올에게 달려드는 조슈아 였다. 그러 나 스코올은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아가씨에게 걸려있는 정도의 변이 마법을 마법 도구의 도움 없이 풀 수 있는 사람 은 대륙을 통틀어 몇 안돼. 그리고 그 중에 왕국에 속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찾는 다는 것은 거의 힘들겠지.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야. 아가씨 안에 들어 있는 또 한 명의 마아가가 문제이지." "아!" 그제서야 조슈아는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레스타트의 존재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의심도 했었지만 기르가스의 질문에 마음속에서부터 들려오던 그의 대답을 똑똑히 듣지 않았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이 생각을 읽고 있을 지도 모른 다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조슈아 였다. "아무튼 아가씨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놈을 분리해서 다른 곳으 로 옮겨야 하는데 결국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자를 봉인하려면 현자의 돌 뿐이야. 그러 므로 아가씨에게는 현자의 돌과 레스타트를 봉인 해줄 최상급 마법사가 필요한 것이 지. 그리고 그 봉인된 돌로 다시 한번 변이 마법을 하면 끝이지." "그럼 조슈아는 그 돌을 찾지 못하면 다시 남자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까?" 너무 나서서 관심을 보이는 바알이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최고의 관심사에 그가 너무 나서서 끼어 들자 조금은 불만스러운 표 정이 되었지만 스코올은 무언가 눈치 챈 듯 씨익∼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떡였다. "지금으로선 그렇지. 아무튼 흔한 돌은 아니니 말이야." "아아∼." 조슈아가 절망적인 탄식을 내뱉었다. 결국 그는 바람만 잔뜩 넣어 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알은 그의 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여전히 묘한 열기에 사로잡힌 표정이었 다. "그럼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돌을 찾지 못할 수도 있는 겁니까?" "바알 도대체!" 더 이상 참지 못한 조슈아가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방금 정체를 밝혔는데도 불구하 고 버릇은 무서운 것이어서, 그녀의 고함은 어떻게 들어보아도 앙칼진 소녀의 그것이 었다. 그러나 바알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런 두 남녀를 재미있다는 듯이 쓸어 보던 스코올은 손가락을 이마로 가져가며 생각 에 잠기는 듯한 포즈를 만들어 보이더니, 태도와 달리 생각해보는 기색도 없이 대답하 였다. "그래. 찾지 못할 수도 있지." 결코 듣고 싶지 않던 말을 듣고 만 조슈아는 현기증이라도 느끼는 듯, 이마에 손을 얹고 샤레셀의 품에 기대었지만 바알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표정을 풀고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사라락―. 조슈아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는 것을 느끼고 흠칫 하여 샤레셀의 품에 서 고개를 들었다. "바알?" 만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을 손가락 사이로 흘리던 바알 은 그녀가 자신을 의아한 듯 바라보자 그녀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흠칫―. 그러나 지은 죄가 있는 조슈아는 그가 볼로 손을 가져가자 뺨을 얻어맞는 다고 생각 했는지 흠칫 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실소를 흘리며 바알이 손을 내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 다. "조슈아. 잘 들어. 나는 네가 나를 속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 는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보여 주었어. 소녀를 가장한 어떤 거짓스러움도 없 었지. 후후∼. 갈수록 조금은 변하기도 했지만." "……." "나는 용병이다. 친구를 잘 사귀지 않지만 마음에 드는 친구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 아. 네가 예뻐서 따라 다닌 것도 사실이지만 그 무엇 보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어. 그러므로……." 의외의 태도에 할말을 잃은 듯,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조슈아의 머리를 살짝 쓰 다듬으며 바알은 선언하듯 손을 들었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옆에서 도와주며 떨어지지 않겠다." "킥킥킥∼." 그의 바라지도 않았던 파격적인 제안에 조슈아는 더욱더 현기증을 느끼는 듯 했지 만, 샤레셀과 퓨어리스는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때 잠자코 그들이 하는 냥을 어두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조르쥬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이 손수 그런 일을 하실 거라고 보냐? 이제 방법을 안 이상 게드마 성으로 돌 아가면 모든 인원을 동원하여 그 현자의 돌이라는 것을 찾을 거다. 너는 바리에서 보 상이나 받고 그만 돌아가라." "조르쥬∼." 다시는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그가 이런 식으로라도 이야기를 꺼낸 것이 반가운지 조 슈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 용서를 받고는 싶었지만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절세 미소녀로 지내며 단련된, 사내에 따라서는 필살기가 될 수도 있는 처연한 미소을 지어 보였다. "으음∼." 심장에 이상이 있는지 잠시 얼굴을 찡그리던 조르쥬는 곧 정색을 하며 조슈아 앞에 부복하였다. "소관이 왕자님께 지은 죄,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왕자님을 수행해 야 하는 입장. 일단 궁전으로 돌아가서 죄를 물어주십시오." "무슨…. 말도 안돼요. 조르쥬! 죄라니요. 잘못은 내가 했잖아요! 그러지 말고 일어 나세요. 내가 너무 불편해요." 오히려 잘못을 비는 그 앞에 당황한 조슈아가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그러시다면……." 침울한 표정으로 부복해 있던 조르쥬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바알과 달리 그의 안 색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조슈아는 생기가 사라진 그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죄의식으로 마음이 찢어지 는 듯 아파 왔다. '죽을 때까지 내 오랜 친구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지 않으려면 내가 직접 좋 은 여자를 구해 주어야 할거야.'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당히 어이없는 결론을 내린 그녀였지만, 어쩌면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생기를 잃은 이 친구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기 전에는 회복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쯤해서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멘디에타가 입을 열 었다. "저로서도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조슈아 님은 그대로 지금의 신분을 유지해 주시 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조르쥬 님도 신분을 숨겨 주십시오. 어찌되었든 이 전쟁 은 끝났고 마물들이 사라진 전선에서 곧 기사단이 올라올 텐데, 이미 성도는 파괴되었 으니 우리는 폐하를 뵙기 위해 바리로 가야만 할겁니다. 그런데 동맹국도 아닌 아카바 의 왕족과 귀족이 우리 왕국을 허가 없이 활보했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본래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으시겠지요?" 충분히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는지, 별로 과장된 반응을 보이지 않고 평소대로 주도면밀하게 행동하는 멘디에타는 과연 고급기사다웠다. 다음 행선지도 정해지고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조슈아는 일행을 하나 하 나 돌아보다가 여전히 먼 시선으로 왕궁을 바라보고 있는 안티오페를 발견하고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안티오페는 어쩔 거예요?" 조슈아는 이 아름다운 요정 여왕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 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만큼 그녀의 눈에 비친 안티오페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 나 잠시 대답은 않고 등을 보이며 서있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조슈아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평소의 무심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것이 다행 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평소와 비슷하다는 것은 그럴 만큼 안정되었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나도 바리에 가야겠지. 일단 조슈아의 말대로 우리의 숲을 영지로 요구할 생각이 야. 이 용병 단에서 전혀 활약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그 정도는 들어주겠지. 만약 땅 을 얻게 되면 다시는 거기서 나오지 않겠어." 자신을 탐색하듯 바라보는 조슈아의 파란 눈동자에 살짝 아미를 찡그리며 안티오페 가 대답하였다. "그렇군요." 조슈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서 탐색의 시선을 거두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럼 치료와 보급이 끝나는 데로 여기를 뜨도록 해요. 일단 타고 온 배로 강을 건 너 정규군을 만날 수 있는 곳까지만 가면 수월한 길일 거예요. 바리는 해변 도시이니 바다에서 배를 타면 금방 이겠지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지. 나는 왕국에는 볼일이 없거든." 엘프 마법사 스코올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아!" 그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샤레셀이 당황한 얼굴로 한발 따라 나섰다. 그녀의 마음 을 읽은 것일까? 저만치 걸어가던 스코올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 을 열었다. "후후∼. 빨간 머리의 신녀 아가씨. 너무 서운해하지마.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나를 믿으라구." 말을 끝낸 엘프의 마법사는 휘파람을 불며 언덕을 내려가더니 곧 일행의 시야에서 사 라졌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는 바람에 아무도 인사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지만 에레 크트라는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사리가 밝은 멘디에타로서는 유유히 사라진 엘프 마법사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직 접 보았다면 결코 그냥 보내지 않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 시간에 궁전의 지하 통 로를 헤매고 있었다. '결국 아스나도 구하지 못했고, 성검 말고스도 뽑지 못했지만, 많은 경험들을 했고 조금은 막연하지만 해결 방법도 찾았으니 첫 여행치고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상에 젖어 있던 조슈아는 여기저기 찢겨 가슴이 들여다보일 듯한 상의를 추스르다 가 피에 젖어 목에 매달려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고는 낮게 실소하였다. 그것은 적의 마법 탐지를 피해 가는 효과가 있다며 디베리아 출신의 다혈질 용병 자 카엘이 빌려주었던 케이보드의 목걸이라 불리우는 찌그러진 얼굴조각상이었다. '자카엘, 지코, 자르델……. 다들 무사할까?' 목걸이를 양손을 꼭 쥐며 잠시 동안이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동료애를 느끼게 해준 백인 대장들을 떠올려 보았다. 결국 그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도록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물건이었음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자카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너무도 유용하게 썼다고 말해주리라 마음을 정 한 조슈아였다.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1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3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1 20001203 188 5 장편 조슈아 일행이 성도 알본을 떠난 것은 기르가스와의 싸움 후, 이틀이 지난 이른 새벽 이었다. 워낙 철저히 파괴된 도시인지라 보급이 여의치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 슈아와 멘디에타의 치료와 체력 회복에 시간을 허비하였다. 자기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떠나가 버린 엘프 마법사 스코올이 손봐주었다면 가볍 게 털고 일어났겠지만, 샤레셀로서는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멘디에타와 많은 피를 흘 려 기력이 약해진 주슈아를 치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완전치는 않지만 이동이 가능해지자마자 성도를 떠난 조슈아 일행은 조르쥬 의 배로 강을 건너 육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바다로 나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단 바리까지 배를 몰 자신이 없었고, 중간에 기사단이나 정찰대를 만나게 된다면 바 리까지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더욱더 설득력이 있었다. 1 휘이이이―. 늦가을의 삭풍이 조슈아 일행의 얇은 여름옷을 뚫고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전의 전투에서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조슈아 일행 은 조르쥬의 망토를 찢어 헤진 부분을 매 꾸고 있어 거의 넝마를 입고 있는 수준이었 다. 그나마 멘디에타가 성쇠기사단의 마크가 찍힌 은빛 갑옷을 입고 있어 그들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은 다행이랄 수 있었다. "정말 시돈 인들은 알뜰하군. 어떻게 그 넓은 도시에서 옷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싹 쓸어서 피난을 갈 수가 있지? 덕분에 정규군을 만나기도 전에 얼어죽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네." 언제나 처럼 가장 먼저 투덜대는 것은 바알이었다. 그는 웃옷 옆구리와 가죽바지의 발목 부분이 찢어 진 것 외에는 조슈아나 조르쥬에 비해서는 그래도 나은 상황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연시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의 장단에 맞춰줄 정도의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겉옷은 완전히 찢겨져 버려졌고, 속에 입은 블라우스도 목 부 분부터 가슴까지 심하게 손상되어 풍만한 가슴라인이 유혹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퓨어리스가 거의 한 짐이나 되는 속옷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녀의 불편하도록 커다 란 가슴은 퓨어리스에 비길 것이 못되는 지라 이미 속옷을 입지 않은지 한참이 지나 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녀는 조르쥬의 빨간색 망토를 사각형으로 잘라 블라우스의 안쪽에 바느질한, 보기에 결코 아름답지 않은 웃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이…이런 것을 입고 기사단이라도 만난다면…….' 이런 복장만 아니라면 누가 레이스로 범벅이 된 드레스를 준다해도 입을 용의가 있 는 조슈아였다. 잿빛으로 물든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보던 샤레셀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성 포와 고정 망을 분실하여 여전히 숯이 많은 빨강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 다. "조슈아. 일단 정규군을 만나면 갑옷이라도 구해 입으면 되잖아." '그들도 내 모습을 보기는 마찬가지잖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워낙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하는 친구인지라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속으로 끙끙대는 조슈아 였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며 낮게 실소하고 있던 조르쥬는 고개를 돌려, 호밀 밭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너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전투를 위해 불을 놓았었는지 시커멓게 타 버린 들판은 듬성듬성 남아있는 밀 줄기들 로 예전에 이곳이 밀밭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마물들이 지 나간 듯, 여기저기 어지럽게 파헤쳐진 들판은 다시 밭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앞 으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게 될 지 짐작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저 성쇠기사단의 수장은 게드마에 천계의 문이라는 것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렇 다면 누군가 그 문을 노리고 이곳과 같은 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정복과 방위를 위하여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본 그였지만 이런 식의 전쟁이 자국에서 일어난 다는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라면 다시 돼 찾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파괴가 아닌가? 이런 전쟁이 아카바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돌아가면 무언가 조치를…….'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조르쥬는 자신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 를 돌려 시선의 주인을 바라보고 흠칫하였다. 조슈아가 파란 눈을 빛내며 어색한 시선 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슈아는 그에게 용서를 빌기는 하였지만, 지난 이틀 동안 자신에게 단 한마디도 하 지 않는 그가 야속한 듯 했다. '으음∼.'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한쪽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고 응석부리는 듯한 눈 초리로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모시던 왕자님이라는 것을 알도 있었지만, 어떻게 그녀의 매력에 서 헤어날 수 있을지는 지금의 그로서도 자신이 없었다. 지금 상태라면 그녀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간다해도 다시는 예전의 관계를 회 복하는 것이 불가능 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안돼. 너는 근위대장이다. 언젠가는 국왕이 되실 분을 평생 이렇게 느끼면서 왕실 의 방패가 될 수 있겠느냐?' 바리에서의 일이 끝나면 아카바로 돌라가서 입산 수도라도 해서 그녀의 기억을 지워 야겠다고 마음먹는 조르쥬 였다. 그러나 과연 한번 영혼에 새겨진 마음의 연인을 마음 속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 가능할 까? 조르쥬는 조슈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을 가장하여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 여다보았다. 조슈아의 깨끗한 얼굴에서는 게드마에서 보았던 류의 차가움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 다. 그는 그녀의 그런 점에서도 매력을 느꼈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처음 그녀를 만났 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온몸에서 넘쳐흐르고 있었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조슈아의 영혼의 성질이 변해 버린 것을 알리 없는 그는 지금의 그녀도 나름대로 귀 엽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때 조슈아는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맞춰주는 그가 고마운지 활짝 미소 를 지었다. '허억∼.' 그녀의 미소에 심장이 멎을 뻔한 조르쥬는 속으로 헛 바람을 들이키며 그녀에게서 급 히 떨어져 황량한 들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르쥬는 모두의 앞에서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사 10계를 암송했 다. '기사는 군주를 목숨으로 받들고, 용기가 있을 것이며, 사욕에 휩쓸리지 않고…….' 그의 그런 태도에 아직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조슈아가 한숨을 내쉬자,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앉아 한 손을 조슈아의 귀에 얹고 있던 안티오페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 리로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남자로 돌아가고 싶기는 한 거야?" "그…그게 무슨?" 다른 사람이 안티오페의 질문을 듣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조슈아는 살짝 다른 동 료들의 눈치를 살피고는 낮게 속삭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티오페. 당연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요." "그런데 왜 남자들을 유혹하는 거야?" 머엉―. 머리 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설마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생각 해보지 못한 조슈 아 였던 것이다. 잠시 할말을 잃고 입만 벌리고 있던 조슈아는 곧 억울하게 중상을 당 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안티오페. 내가 누구를 유혹했다는 거예요? 다들 내 정체를 알고 난 다음에는 창피해서 말도 못 붙이고 있다고요." 조슈아가 얼굴까지 붉혀가며 자신을 변호했건만 안티오페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었다. "나는 인간의 표정을 보고 감정이나 의도하는 바를 읽어내지 못해. 인간들이 워낙 연 기를 잘하니까. 그렇지만 풍기는 기운으로 그런 것을 읽어낼 수는 있지. 당신은 저 두 사내를 상대할 때마다 유혹의 향기를 내뿜고 있어. 인간의 소녀들이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지만 당신은 그들을 사랑 할 마음 같은 것은 없잖아. 그런데 왜 그들을 괴롭게 만드는 거지? 인간의 남자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유혹인 줄 모르는 거야?" 어디서 이런 상식을 얻은 것인지 또 한번 의심하게 만드는 요정 여왕이었다. 그녀는 조슈아의 태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조슈아는 그런 그녀에게 화가 나기 보다는 허를 찔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마…말도 안돼요. 나는 그런 적 없다 구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조슈아가 소리를 질렀다. "조슈아 왜 그래?" 에레크트라의 손을 잡고 힘겹게 걷고 있던 샤레셀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아니야." 안티오페와의 사이에 오가던 말의 주제를 일행들에게 들키느니 차라리 얼음 바다 속 으로 잠수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조슈아 였다. 그녀의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안티오페도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안티오페가 던진 한마디는 그녀의 마 음속을 탈출 불능의 미궁으로 만들어 버린 후였다. '유혹이라고? 이 내가?'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돼 묻고 있는 그녀였지만, 전혀 집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소녀라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포즈를 취하고, 어떤 목소리로 말하느냐에 따라 너무 도 쉽게 영향을 받는 두 남자가 귀여웠다. 아니, 다른 의미로는 자신의 소녀로서의 영 향력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녀가 그것에 너무 익숙해 졌다는 것이 었다. 절세 미소녀의 외모라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16세 소년이 그것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장난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의 경우 그녀는 이미 그 장난감에 조정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것이 더 이상 장난감이 아 닌 그녀의 모습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부정 할 수 없었다. '아아∼. 그래.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나는 마음속까지 완전히 이 겉모습에 조정 당하게 될 거야. 왜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영혼의 색깔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긍지 높은 소년으로서 15년을 살아 왔다. 되찾으려고 스스로 노력만 한다면 너무도 쉬운 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조슈아는 자랑스러운 아카바의 제1왕자인 자신의 본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남을 잘 배려할 줄 몰라. 능력을 과 신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어설프게 나서는 것은 싫어하지. 강한 검사나 전사들을 찾 아 실력을 겨루고 강한 자만 친구로 사귀었고, 또래의 다른 애들 같이 말을 많이 하 는 것보다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것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일 찍 깨달아서, 언제나 기품 있게 행동했고 검술 실력을 과시하기 좋아했어. 그를 좋아 하는 아름다운 귀족 소녀들 중 마음에 드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수치라고 생각해서 가까이 하지 않았어. 사랑을 호소하는 소녀들을 이유도 설명 해 주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밀어내서 마음에 상처만 주었었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은 못된 아이였지만 그래도 귀여운…….' 우뚝―. 상념에 잠겨 묵묵히 걷던 조슈아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조슈아. 왜 그러는 거야? 안색이 안 좋아." 샤레셀이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지만, 조슈아 는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이 는 화려한 금발이 가을 바람을 맞아 파란 눈동자 앞에서 살랑거리며 눈을 자극했지 만, 그녀는 눈을 깜박이지도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고 있었다. '누…누구인지 모르겠어. 도대체 조슈에가 누구였지? 나…나는 그 애를 몰라.' 기막힌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완전한 타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를 떠올리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느 다른 소년을 떠올리는 것과 전혀 다르 지 않았다. 조슈아는 부들부들 떨며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껴안았다. 평소에 입던 두꺼운 가죽 옷이 없는 지금, 얇은 블라우스를 통해 풍만한 가슴의 질감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더 이상 이질적이지 않은 그 매혹적이고 아리한 감촉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더 욱더 선명한 의문을 제시하였다. '너는 다시 그 조슈에라는 소년으로 살아 갈 수 있겠어? 그럴 수 있는 거야? 조슈 아.' 히히히힝―. 갑자기 저 멀리 숲길의 입구 쪽에서 선명한 말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오오∼. 드디어 정찰대라도 올라온 건가? 여기 까지 오는데 이틀이 걸렸다면 전선 이 그리 멀지는 않았었다는 거군." 바알이 손뼉을 치며 기꺼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울음소리가 들리고 십여 초 후, 참나무 숲을 빠져 나오는 일단의 기마대가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마상의 인물들 외에 말들까지 은빛 갑옷으로 완전 무장을 한 것으로 보아 단순한 정찰대가 아닌 것은 분명하였다. 잠시 두 눈을 모으고 그들을 관찰하던 멘디에타가 얼굴을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소리 쳤다. "레아논 유격기사단(遊擊騎士團)이군요. 저들이 건제 하다는 것은 북부 도시들이 마 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졌다는 겁니다." 이제 피로한 도보 여행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모두가 기뻐하는 동안, 그들을 발견 한 기마대가 말머리를 돌려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순간 불쌍한 절세 미소녀 조슈아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성이라는 이름의 배가 삐거덕거리며 침몰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이∼!" 그녀의 마음을 알리 없는 일행들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기사단을 반기고 있었다. '아∼! 그렇지 나는 지금 옷매무새가…….'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런 정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옷차림을 떠올린 조 슈아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위해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바램일 뿐, 다음 순간 그녀는 땅이 올라오는 듯한 환상을 보며 서서히 바닥을 향해 침몰해 갔 다.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2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4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2 20001204 169 10 장편 2 "지나! 아직도 안 일어났니? 도대체 요즘, 밤에 무얼 하 길래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 지를 못하니? 빨리 나와! 시녀장님이 아시면 호되게 야단 맞게 될 거야." 『응? 지나? 시녀? 꿈인가?』 조슈아는 짤랑짤랑한 소녀의 목소리에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천천히 몸 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몸 움직임이었다. 『어? 정말 꿈이네? 그런 것치고는 정말 선명한 데? 이렇게 얼굴의 촉감까지 완벽하 게 느낄 수 있다니?』 아직 잠이 덜 깬 소녀가 힘겹게 눈을 뜨고 게슴츠레 한 눈으로 방안을 둘러본다. 소녀의 방은 매우 좁았다. 반 지하인지, 나무 천장과 벽이 만나는 곳에 자그마한 창 문이 달려 있어 그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방바닥 여기저기 벗어 놓은 옷가지 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는데, 침대 맞은 편에 장식 없는 참나무 옷장이 있는 데도 불 구하고 이렇게 옷이 바닥에 뒹군다는 것은 그녀의 성격이 털털하거나 누군가 그녀의 옷을 벗긴 것이 분명했다. "아함∼." 소녀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낡은 나무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 가지들을 주어 입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헤에? 이 얘 잠잘 때 아무 것도 안 입는 건가?』 소녀의 알몸을 보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한 조슈아는 눈을 돌리려고도 해 보았지만,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녀의 눈에 비치는 영상을 고스란히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나라고 불리 운 소녀는 바닥에 뒹구는 속옷을 대바구니에 던져 버리고, 옷장에서 깨끗한 속옷을 챙겨 입었다. 바닥에 함부로 옷을 던져 놓는 소녀치고는 매우 깨끗하 게 정돈된 옷장이었다. "지나! 나 먼저 갈게! 빨리 와!" 문밖의 소녀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쿵쿵거리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소리가 들 려왔다. 그러나 이 지나라 불린 낙천적인 소녀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콧노래까 지 부르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녀 옷을 집어들었다. "아앙∼. 단추가 떨어져 나갔잖아?" 하루 밤을 방바닥에서 굴러다닌 덕에 꾸깃 해진 시녀 복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려던 소녀는 목 부분의 단추 두 개가 떨어져 나간 것을 발견하고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시 녀 복을 내려다보는 소녀의 목소리에서는 짜증스러움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무언가 좋은 일을 떠올리고 있는 소녀의 들뜬 분위기랄까? 아무튼 여분의 시녀 복은 없는 지 그대로 단추가 떨어져 나간 시녀 복을 걸친 소녀 는 옷장 옆에 새워져 있는 전신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헤에∼? 이 아이 남방 출신이구나.』 거울에 비친 소녀는 남방출신 임을 알려주는 이국적인 갈색 피부에, 하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14∼15세나 되었을까? 조그마한 몸집에 탄력 있는 몸매를 가진 소녀는 워낙 뛰 어난 미모에 익숙해진 조슈아에게 그리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그리 흠잡을 때 없는 이목구비에 밝은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한 해맑은 눈동자와 건강한 치아,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좋게 만드는 깨끗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정리하고, 단추가 떨어져 나간 목 부위를 어루만지 고는 얼굴을 붉히며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 왕자님은 장난꾸러기라니까?" 『와…왕자님? 이 아이 왕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 건가?』 단번에 이 귀여운 이국의 소녀가 마음에 들어 버린 조슈아는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내 뱉은 말에 저으기 당황하였다. 아카바의 제 1 왕자로 자란 그녀로서는 시녀와 왕자의 금지된 사랑이야기 따위는 왕 국 야사를 통해 너무도 많이 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이 좋은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이 아이도 결국 상처만 받고 궁에서 추방당하게 될까? 그래도 아직 그렇게 깊 은 관계가 아니라면…….』 그러나 그 가정은 이미 의미가 없어 보였다. 정황으로 보아 그녀의 옷을 찢은 것은 그 왕자이고 그 일은 바로 이 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왕 자가 시녀의 방에까지 몰래 찾아 들어올 정도라면 이미 둘의 관계는 상당히 진행된 상 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귀여운 소녀에게 닥쳐올 불행한 결말을 상상하며,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몸을 떨어보는 조슈아 였다. 『왕자의 왕위 계승 서열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 아이에게 닥쳐올 고통은 더 심해질 거야. 아아∼. 어떤 녀석인지 그런 것도 모르고 시녀를 건드린 걸까? 그래도 혹시 왕 자가 정실의 자식이 아닌 서자라면, 이 소녀를 귀비 쯤 으로 앉히는 것은 가능할지 도…….』 그 사이 소녀는 뜯어진 단추를 꽤 맬 시간이 없는 듯, 잠시 고민하더니 조그마한 상 자에서 구리 옷삔을 꺼내어 상의 안쪽에 꽂고, 옷깃을 내려 자국을 감추었다. "자! 오늘도 열심히 일해야지. 지나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거울 속의 자신에게 행복한 얼굴로 쌩긋 미소지어 보이던 소녀 는 곧 서둘러 방에서 뛰어 나갔다. 소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조슈아의 가슴속 에 여과 없이 전해 졌다. 조슈아는 마치 자신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참 이상한 꿈이다. 저 아이의 행동과 성격, 외모까지 전혀 낯설지가 않아. 거기에 다 품고 있는 감정까지 그대로 전해져 오니.』 더욱더 꿈속의 소녀에게 깊이 빠져든 조슈아는 이 소녀가 현실에서처럼 정해진 수순 대로 불행한 결말에 이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꿈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치켜볼 밖에……. 『그래도 꿈인데, 혹시 현실과 다른 행복한 결말이 있지 않을까? 이 아이가 어떻게 되 는지 좀더 지켜보아야지.』 자신의 꿈이었지만 어쩐지 그 재미에 푹 빠져든 조슈아는 이 꿈속의 소녀를 좀더 지 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소녀의 일과는 여느 시녀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늦잠을 잔 것을 시녀 장에게 들키기는 하였지만, 초로의 시녀 장은 그녀를 상당히 귀 여워하는지 가볍게 주의를 주었을 뿐이었다. 소녀는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다른 시녀들이 붙어 다니 며 수다를 떨었고, 그녀는 귀찮지도 않은지 일일이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아침에 그녀를 깨우러 왔던 까무잡잡한 피부에 조금은 통통한 몸매를 가 진 하이마 라는 소녀는 완전히 친자매 같았다. 그녀는 소녀와 같이 궁성의 중앙 복도 와 침전의 청소를 맞고 있었는데, 거의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같이 일하였다. 조슈아는 이 이국의 소녀들이 일하고 있는 궁전의 건축양식으로 이 나라의 대강의 위 치를 알 수가 있었다. 드물게 복도를 흑석으로 깔고, 큰 건물끼리 연결되어 있는 회랑 에 천장이 없고, 높은 궁전의 지붕이 어김없이 방추형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루기아, 세바, 바산, 디베리아 이 4개국 중 하나 일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저런 피 부색을 가진 민족들은 남부로 가면 상당히 많은 편이었지만 이런 건축양식은 그리 흔 한 것이 아니었다. 조슈아의 선조 들이 대륙의 최남단인 얼음의 땅 레스돌 섬에서 지금의 영토로 이주하 기 전에는 아카바 땅에는 페드라 인과 디베리아 인이 살고 있었고, 디베리아는 남부 의 같은 인종의 나라들과 이웃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카바로 인해 남부의 다른 나라 들과 떨어져 중부에 고립되어 있는 형국이어서 팔메라 대륙 중부에서는 갈색 피부를 가진 유일한 민족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디베리아는 대륙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남부 인으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나라들에 대해서는 책에서 읽은 지식 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선명 한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이지?』 잠시 의아해 하기도 하는 그녀였지만, 꿈이라고는 해도 공짜로 이국의 궁전을 감상한 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지나의 시각과 청각을 빌어, 아름다운 남국의 정취를 느긋하게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오전의 일과가 끝나고 식사시간이 되었다. 구획별로 나뉘어 일하고 있던 100여 명의 시녀들이 커다란 식당에 모여 한꺼번에 식 사하였다. 그 사이에도 10대 중반의 한참 혈기 왕성한 소녀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수 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지나는 묵묵히 빵에 버 터를 바르고 있을 뿐 소녀들의 잡담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조슈아는 이 소녀 가 사랑하는 왕자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때 시녀들과 잡담을 하고 있던 하이마가 넋이 나가있는 지나의 어깨를 툭 치며 호 들갑 스럽게 떠들었다. "어머어머∼. 너도 들었니? 지나야? 아론 왕자님께 혼담이 들어 왔데. 그 왜 있잖 아. 작년 감사절 때 사절단과 함께 오셨던 세바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님. 그분이 우리 들의 왕비 님이 되시는 것 같아. 무지 상냥하신 분이었는데. 그 분이 왕비 님이 되시 면 정말 좋겠다." 툭―. 순간 지나는 경악한 얼굴로 들고 있던 빵을 발 밑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흥 분한 친구 하아마는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입에서 침까지 튀기며 정보 전달 에 여념이 없었다. "왕자님이 스무 살이 다 되시도록 여자를 거들 떠도 안 보신다고 걱정하시던 폐하께 서 적극적으로 국혼을 추진하고 계신다나 봐. 다행이지 뭐야. 참, 이상하지? 왕자님 같이 미남에 뛰어난 기사이시고, 최고의 지위를 가지신 분이라면 적어도 첩 한 두 명 은 있어야 할텐데 말이야. 혹시 숨겨 두신 걸까?" "흐윽∼!" 지나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얘…얘! 지나야!" 눈치 없는 하아마가 쫓아 일어났지만, 이미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식당을 뒤쳐나간 후였다. 『저런, 그 아론이라는 녀석이 이 소녀가 사모하는 왕자인 거군? 아론? 듣던 이름인 것 같은데……. 그런데 세바 왕국의 공주가 시집을 와? 그렇다면 이 나라는 도대체 어 디야?』 자신이 알고 있는 왕족들의 정보를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최근 세바의 공주가 시집 을 갔다는 이야기는 접해 본적이 없는 조슈아 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순간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잠시 현실과 착각했군. 이건 단지 꿈일 뿐인데…….』 조슈아는 슬픔과 절망감으로 가득한 소녀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이 너무나도 생생한 꿈에서 그녀는 단지 관찰자일 뿐이었다. 식당을 뛰쳐나온 어린 시녀 지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 다. 소리가 세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워낙에 격 하게 울부짖고 있는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욱더 이상한 울림을 만들어 내며 복도까지 흘러나가고 있었다. 끼이익―. 그때 그녀의 등뒤에서 천천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슬픔에 빠진 지나 는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돌아가! 지금은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아직 점심 시간이니까 혼자 있게 내버려 두란 말이야!" "왜 우는 거지? 지나." 그녀의 평소답지 않은 격한 목소리에 답한 것은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에 20대 청년이 었다. "아아∼." 그의 목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던 지나는 언제 울었었냐는 듯,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 으며 목소리에 주인공에게 달려가 안기고 있었다. 청년은 매우 키가 커서 지나의 얼굴 은 겨우 그의 명치 부위에 닫을 정도였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청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어르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 었다. "왜 그러지? 지나. 누군가 너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이냐? "아니에요. 왕자님. 지나는 행복하답니다." 소녀는 잠시도 그에게서 떨어지기 싫은지, 그의 품에서 얼굴조차 들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흘러내리는 눈물이 가슴 깨를 적시고 있어, 청 년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품에서 때어내었다. 『헤에∼. 잘생긴 녀석인데?』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미소년이었던 조슈아가 감탄할 정도로 눈앞의 청년의 외모는 출 중하였다. 섬세함과 강직함이 잘 조화된 극적인 얼굴 선에, 마치 조각 한 것 같은 오뚝 한 코 를 가진 그는 남성미의 극치를 이루는 잘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를 갖추고 있어, 어떻 게 보아도 뛰어난 전사로 보였지만, 그 서늘하면서 깊이 있는 갈색 눈동자는 마치 시 인의 그것 같았다. 조슈아는 이 순진한 소녀가 이런 위험한 사랑을 하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여자라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사내가 아닌가? 『음∼. 그런데 이 녀석 누군가와 닮은 것 같은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조슈아는 자신의 기억 속에 이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지만 그가 누구였는지 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분명 그 녀가 본 누군가와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역시 꿈은 무언가 본 것을 반영하는 거군.』 자기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조슈아는 이 금단의 사랑이야기가 해피 앤딩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왕자는 이 보 잘 것 없는 시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야. 너는 방금 너무도 슬피 울고 있었다. 네가 울면서 뛰어가는 걸보고 내가 여 기까지 쫓아 온 거야. 자∼. 속 시원히 이야기 해보거라." "아아∼. 왕자님." 아무리 숨겨둔 연인이라 해도, 일 국의 왕자인 그가 시녀가 우는 것을 보고 그 처소 까지 쫓아온 것이다.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지나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리며, 죄라도 지은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 다. "죄송해요. 왕자님. 왕자님께서 국혼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주제넘게 질투 를 했었어요. 이제 괜찮아요. 저… 이런 저에게 혹시 화나셨어요?" 거짓말을 못하는 그녀는 자신이 질투에 사로 잡혀 있었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있었 다. 그녀의 정직한 대답에 왕자뿐 아니라 조슈아 까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아이 정말 귀엽구나. 왕자가 이 아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군. 정말 맑은 아이 다.』 왕자도 조슈아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오른쪽 볼을 어루만 졌다. "그래, 그 이야기를 들은 거구나." 그는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에 앉아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 상당히 익숙한 행동인지, 지나는 너무도 자연 스럽게 왕자의 무릎에 앉아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허리를 껴안았다. 왕자는 그런 그녀가 귀여운지 머리 위에 가볍게 입맞춰주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 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지 않기를 바랬는데. 결국은 먼저 들었구나. 그래. 나로 서도 이번 혼담은 물리치기 힘들 것 같다. 사실 나도 왕국을 위해서라면 그녀를 맞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거라. 내가 사랑하는 것 은 오직 너 하나 뿐이야." 이 순간 지나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왕자의 상의가 소녀의 눈물로 푹 젖어 버린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생리를 잘아 는 조 슈아의 생각은 달랐다. 『저 친구가 지나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녀에게 확실한 지위를 주지 않으면 언 젠가는 왕실에서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라도 제거할거다. 아카바도 아니고 남방의 왕국 이라면 얼마든지 첩을 들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망설이는 걸까?』 또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잊고 고민에 빠져들고 마는 조슈아 였다. 그날 오후 지나는 고민을 말끔히 털어 버리고 여느 때의 그녀로 돌아와 열심히 일하 였다.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조슈아 에게 그녀의 하루 일과는 매우 신선하게 받 아 들여 졌다. 물론 항상 그런 일을 한다면 견디지 못하겠지만……. "지나야. 아까는 왜 그런 거야? 어디 아프니?" 점심식사 때 보여준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오후 내내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던 하아마가 그녀의 풀어진 표정을 보고 다가와 질문을 던졌다. "후후∼. 아니야. 조금 피곤했을 뿐이야. 걱정 끼쳐 주어서 미안해 하이마." 그녀는 왕자의 사랑 고백에 지나치게 흥분하여 두발을 거의 땅에 붙이고 걷지 못할 정도였다. 아마도 오랜 동안 사랑을 나눈 둘이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은 오 늘이 처음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사랑의 포만감에 조슈아가 다 행복 해질 지경이었다. 그 날밤도 소녀는 잠들지 못하고, 불꺼진 방에서 침대에 홀로 앉아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창으로 달빛이 세어 들어오기는 했지만, 방안은 너무도 어두워 옆에 누가 있어 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휴우∼. 오늘은 안 오시려나? 하긴 너무 자주 오셔도 의심을 살 거야." 달뜬 한숨을 내쉰 지나는 실망하는 것인지 안도하는 것인지 모를 목소리로 중얼거렸 다. 끼이익―. "아∼!" 갑자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 후, 다시 천천히 문 이 닫혔다. 순간 조슈아는 안도하는 듯이 말은 했지만, 실은 이 소녀가 얼마나 왕자 를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쯤해서 꿈이 깨어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해보는 조슈아였다. 『저……. 재미있는 꿈이기는 한데, 이렇게 남이 사랑을 나누는 것을 고스란히 보고 있어야 할까?』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혹시 그녀의 감각으로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가 더 욱더 걱정이 되었지만, 꿈에서 경험해보지 않을 걸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아∼. 왕자님." 지나는 홀린 듯한 목소리로 왕자를 부르며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껴안았다. 『어엇?』 지나의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던 조슈아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녀가 안겨있는 것은 아까 그 왕자의 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퍼억―. "헉∼!" 『헉∼!』 갑자기 명치를 얻어맞은 지나가 기절한 듯 추욱 늘어 졌고,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곧 조슈아의 의식도 함께 멀어져갔다.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조슈아는 지나를 들쳐 업은 사내의 몸에서 신전에서나 쓰는 티롯 나무 뿌리를 태운 연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촤아악―. 별안간 끼얹어진 차가운 물에 지나와 조슈아가 깨어났다. 그녀가 깨어나 처음으로 느 낀 것은 온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 놓은 철제의자의 감촉과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나는 상상도 못한 상황에 겁먹은 듯 몸을 떨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어두운 실내 에 그녀를 향해 집중되어있는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정면에서 조금은 짜증 섞인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이는 소녀이지 않은가? 왜 이런 아이를 대려온 건가? 게다가 적어도 14세 이상 은 되는 것 같은데." 그러자 멋진 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중년 사내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 리로 대답하였다. "이 아이는 전쟁고아 출신입니다. 2년 전에 죽은 전대의 시녀 장이 대려온 아이죠. 이유 없이 사라진다 해도 가족이 없으니 쉽게 무마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 보 다 제거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 왕비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시 고 명 받은 대로하십시오." 잠시 침묵이 찾아 왔다. 지나는 무언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이 믿어지지 않는 듯, 무언가 연신 소리치려고 하고 있었지만, 입이 막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조 화인지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며 몸을 일으키자 여기저기서 옷 깃 스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이…이 자식들 도대체 뭐야!』 조슈아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개에 당황하는 동안, 그녀가 결박되어 있 는 의자를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삥 둘러서더니, 이윽고 그녀의 앞에 자그마한 집 광판이 놓여졌다. 그 안에는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박여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향해 집중 되어있는 조명 덕에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극히 위험한 작업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칠 수도 있으니 만큼 절 대적인 집중을 요합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의 사항을 읊은 노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고 주문을 외우 기 시작하였고, 뒤이어 장내의 인물들도 그를 따랐다. 그들의 소리로 보아 장내에는 적어도 30∼40은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슈우우―. 갑자기 정면의 집광판에서 주홍빛 기류가 퍼져 나오더니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도 전에 급격히 지나의 온몸을 덮어 왔다. 『아아악∼.』 이런 고통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꿈속에서 이런 고통을 느끼리라 생각해보지 못한 조 슈아는 준비단계도 없이 엄습해오는 극통에 영혼이 빠져나갈 듯 했다. 마치 온몸의 세 포 하나 하나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도 조슈아는 기절하거나,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칼끝 같이 민감하 진 감각으로 그 지옥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그러나 영원한 고통은 없는 법, 십여 분을 지속되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거두어 졌다. 이 고통이 지나라는 소녀에 게 정서적으로야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르는 일이지만 곧 죽을 듯 했던 것이 믿기 지 않을 정도로 고통은 말끔히 사라져있었다. "오오∼. 성공입니다." "축하 드립니다. 대사제 님." "이제야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일이 훨씬 쉬워지겠지요." 『이…이 자식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자신의 꿈에서 고문을 당한 것이 기가 막힌 듯, 이를 갈던 조슈아는 고통에 넋이 나 가 간혈적으로 몸을 떠는 지나가 곧 죽지나 않을 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와 같은 전사 라면 몰라도 평범한 소녀에게 이런 고통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 다. 그때 일단의 사내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포박을 풀어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들 쳐업고 서로 자축하기에 바쁜 장내의 인물들 사이를 지나 방을 빠져나갔다. 『다음에 만나면 자 자식들을 다 죽여 버릴 꺼다!』 이미 꿈이든 뭐든 상관이 없었다. 조슈아는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저자들 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콰앙―. 석실의 철문이 닫히며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냈다. 지나는 발가벗겨진 채로 지푸라기가 조금 깔려 있을 뿐인 석실 바닥에 내 팽개쳐졌 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바닥에 쓸린 무릎이 쓰라렸지만 지나는 거의 반응을 보이지 못하 고 있었다. 비록 눈을 뜨고 누워 있었지만 아까의 고통으로 신경을 다친 듯, 거의 몸 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드르륵―. 갑자기 너른 석실 위의 나무 창문이 열리더니 일단의 인물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하 나 같이 50대 이상의 노인들로 보이는 그들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감탄하고 있는 듯 했다. "허어∼. 저 사내아이가. 그 놈인가? 정말로 성공한 것이군." "이걸로 대륙 최강국의 꿈에 좀더 접근하게 되었군요." "모두 폐하의 은덕입니다." 『저 놈들이 미친 건가?』 너무도 당연한 듯이 그녀를 사내아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들은 그녀의 눈에 미친 노 인 내들로 비칠 뿐이었다. 그때 폐하라고 불리 운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풍채 좋은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왕자야. 수십 년 연구의 개가를 보지 않을 셈이냐." 갑자기 웅성거리며 왼쪽 창문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노인들의 얼굴이 빠져나가고 젊 은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저…저 자가?』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젊은 사내는 놀랍게도 불운한 시녀 지나가 자신의 영혼보다 더 사랑하는 연인 아론 왕자였다. 그를 발견한 지나는 이런 일을 당한 자신을 내려다보는 왕자의 시선이 마치 전혀 모 르는 타인을 바라보는 듯 하자, 충격을 받아 온몸을 떨며 깜박이지도 못하는 눈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왕자는 얼굴을 무언가 싫은 것은 보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마 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국왕은 그런 왕자를 보며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지 낮게 실소하고는 호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네가 이런 일을 싫어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내 뒤를 이어 우리 디베 리아 왕국을 다스릴 왕위계승자로서 너의 의무를 생각하거라. 그런 의미에서 저 실험 체의 이름은 네가 정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국왕은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 왕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국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 려다보았다. 지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하였지만, 마비되어 비린 신경은 그녀에게 눈물을 흘릴 자유 외에는 아무 것도 허용하고 있지 않았다. 왕자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 을 열었다. "저 아이는 레스타트라고 하겠습니다. 고대어로 '빈 그릇' 이라는 뜻이지요. 실험 체 에게는 잘 어울리는 이름일 겁이다." 파앗―. 너무도 충격적인 왕자의 말에 경악 성을 터트리려던 조슈아는 갑자기 눈앞에 낙뢰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지나라는 소녀의 악몽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아∼." 조슈아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 몸을 일으킨 곳은 창문의 커튼 사이로 달빛이 흔들리 고 있는 넓은 선실의 침상 위였다. 전에 천인 대장으로서 전함을 탄 적이 있는 그녀 는 이 곳이 대형 전함의 선장실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 챌 수 있었다. 주루루―. 잠에서 깨어난 조슈아는 자신의 볼 위로 구술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 는 것을 느끼고 방금 자신이 꾸었던 너무도 사실적인 악몽을 떠올려 보았다. '세…세상에 그런 거였어? 정말로 그놈들이 그런 짓을 한 거였어? 응? 레스타트?' 자신을 이런 운명으로 만들어 버린 그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조 슈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의 꿈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과 고통의 감정을 그대로 느낀 조슈아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 다. "이제 괜찮아?" 갑자기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서 들려온 억양 없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조슈아 는 눈물을 소매 춤에 닦으며 고개를 돌려 베개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새하얀 피부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베개에 걸터 앉아 조슈아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무심 여왕 안티오페였다. 그녀는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깨어 있었던 듯 했다. "당신이 쓰러지고 나서 닷새가 지났어. 그 동안 잠도 못 자고 당신을 간호했던 당신 동료들은 열이 내린 걸 확인하고 아까 겨우 눈을 붙이러 갔고, 저기 의자 위에는 샤레 셀과 에레크트라가 앉아있는데 깊이 잠들어 있지. 몸이 불편하면 깨워 줄까?"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조슈아는 곧 낮게 실소 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에 눈 이 익자 침대 왼편의 흔들의자 위에 잠들어 있는 샤레셀과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에레 크트라를 볼 수 있었는데,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무리를 했는지 창백해진 얼굴의 샤레 셀은 에레크트라의 머리에 턱을 괴고 깊이 잠들어 있었고, 에레크트라는 샤레셀의 얼 굴이 무거운지 연신 투덜거리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자게 놔주지요. 그런데 5 일이나 지났다구요? 여기는 그럼 시돈 군의 전 함인가요?"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3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5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3 20001205 169 5 장편 조슈아가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묻자 안티오페가 조슈아의 어깨 위에 날 아올랐다. "그 말 탄 기사들을 만나고서 그들을 따라 바로 강 하류로 돌아갔어. 바다에서 배들 이 올라 왔더군. 수십 척의 배에 타고 온 수많은 병사들이 도시로 들어갔고, 우리는 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어. 그 멘디에타라는 기사는 상당히 높은 지위의 기사 였나 봐. 그가 명령해서 당신이 이 제일 큰방을 차지하게 되었어." "우리가 떠난 지 5일 째라면 바리까지는 얼마가 가여 한다고 하던가요?" "내일 낮쯤 도착한데, 그때까지도 당신이 깨어나지 않을 까봐 걱정하더군." 조슈아는 자신이 5일 간이나 혼수 상태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선명 한 꿈이었기 때문에 그 시간의 흐름까지 느낄 수가 있었던 그녀로서는 만 하루가 지 난 정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루한 뱃 여행을 건너 뛸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쓰윽―. 조슈아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그 조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는 안 티오페의 손길을 느끼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미소지었다. 아마도 안티오페는 자신이 조슈아에게 너무 심한 말을 해서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정에 약한 요정 여왕이었다. 조슈아는 깊이 잠들어 있는 두 소녀를 바라보고는 샤레셀과 에레크트라가 자고 있는 동안 꿈에서 본 레스타트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 수 백 살 먹은 요정 여왕의 의견을 들 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꿈에서 지나라는 14세 소녀를 만났었어요.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디베리아 왕국의 궁 전 시녀 더군요. 그 아이는 현 디베리아 왕국의 국왕인 아론의 숨겨든 연인이었는데 세바에서 지금의 시즈 왕비가 시집오기 전 주변 정리를 위하여 제거 된 것 같아요."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낸 조슈아는 이야 기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고개를 돌려 안티오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티오페는 머리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조슈아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조슈아는 그녀의 시선에 씽긋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 아이는 결국 신전으로 납치되어 어떤 마법의식에 의해 몸이 변화되었어요. 저는 그 아이의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아 이가 바로 레스타트라는 것은 알 수 있었어요. 변화한 이후 왕자를 만났지만 그는 그 녀를 못 알아보더군요. 아마 그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겠지요. 그 소녀가 너무도 불 쌍해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 그 이후 얼마나 많은 마법 실험이 그 녀의 여린 몸과 마음을 고문하였을 것인지.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던 걸까요? 혹시 내 영혼 안의 레스타트가 나를 혼란 시키기 위하여 보여준 악몽이었을 까요?" 조슈아가 슬픈 얼굴로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하였지만, 안티오페는 그다지 놀 라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눈빛으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볼 뿐이었다. "레스타트는 당신에게 일부러 그런 꿈을 보여줄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의 자존심이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지. 그가 당신을 혼란시키는 것이 가능할 정도라면 이미 당신 의 영혼을 차지했을 거야. 당신은 다만 그가 경험한 일을 꿈으로 꾼 거야." "아아∼." 안티오페의 확실한 대답에 조슈아가 탄식하였다. 그렇다면 그 불행한 운명의 소녀는 정말로 레스타트라는 것이 아닌가? 조슈아는 또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 춤으로 훔쳐내야만 했다. "지금 이라도 그 놈들을 찾아내서 죽이고 싶을 정도예요. 단지 왕자의 사랑을 받았다 는 것 만으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아아∼.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나 안티오페는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표정이 되어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그런걸 나에게 물으면 내가 뭐라 대답하지? 그것이 바로 당신들 인간들이 하는 짓이 야." 조슈아는 안티오페의 대답에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이 요정 여왕은 겨우 16년을 살아 온 자신 보다 인간들의 더럽고 잔혹한 행위들을 더욱더 많이 보아온 것이리라. 오히 려 인간인 자신이 요정인 그녀 보다 인간에 대하여 더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 사이 촉수를 위 아래로 흔들며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던 안티오페가 낮 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기르가스도 레스타트의 사연까지는 확실히 몰랐던 거군. 자신과 비슷한 일 을 당했을 것이라 추측만 했었지 본래 소녀였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던데." "그렇다면 기르가스는 그에 비하여 매우 행운아 였군요? 갓난아기 때 실험 체로 선택 되었으니 적어도 그 몸의 기억을 가질 필요는 없었을 것 아니에요. 그러나 레스타트 는 한참 꽃다운 나이에 소녀의 몸으로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렇다면 레스타트의 성격 은 그 소녀의 것과 같은 걸까요?" 조슈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잠시 그녀의 얼굴을 이채롭게 바라보던 안티오페가 무언 가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떡였다. "왜…왜 그래요? 안티오페." 그녀의 그런 태도에 당황한 조슈아가 더듬거리며 질문했다. 그러자 안티오페는 이야 기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잠시 입술을 찡그렸다. "괜찮아요. 말해봐요. 안티오페." 노골적으로 무언가 말하기 싫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안티오페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 라보며 조슈아가 답을 청하였다. 한참을 그렇게 조르자 결국 안티오페는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슈아가 다시 기절이라도 할까봐 걱정하여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내가 전부터 해주었던 이야기가 있었지? 당신이 그 변이 마법으로 영혼의 성질까지 변해 버렸다구." "예. 그래요. 변이 마법이 심하면 그런 일도 있다고 했었지요." 안티오페는 또 다시 뜸을 들이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레스타트가 본래 그 지나라는 소녀 였다면, 문제가 달라져. 영혼의 성질이라는 것 은 육체를 따라가게 되어 있고,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어?" "모…모르겠어요. 어떻게 되지요?" 오히려 그녀가 질문을 해오자 머리가 복잡해진 조슈아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무 언가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그것을 자신이 추측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이다.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쉰 안티오페는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하였다. "지금 당신의 영혼은 바로 그 지나라는 소녀의 것이야." "……!"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 체 부정하는 이런 말도 안 돼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누구라 도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해야 정상이겠지만 조슈아는 그러지 못하고있었다. 아니, 오 히려 너무도 담담한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있는 그녀였다.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전혀 놀랍지가 않 지? 그럼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뭘까?'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생각해보는 그녀 였지만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그때 잠자 코 조슈아의 반응을 보고 있던 안티오페가 그녀의 생각을 잃고 위로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영혼이 그 소녀의 것이라고 해서. 당신이 그 소녀가 되는 것은 아니야. 결 국 중요한 것은 기억이니까. 당신이 본래의 소년 일 때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당신은 그가 되는 거지. 그러나 당신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테지만, 성격은 영혼의 성 질을 따라가는 거야. 당신의 소년으로서의 기억이 당신의 행동을 대부분 결정하지만 어떤 일에 대한 반응과 생각하는 방식은 이미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거지." 긍지 높은 아카바의 제 1 왕자인 그녀에게는 너무도 어이없는 이야기 였지만, 조슈아 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서 그 아이를 보았을 때 그렇게 끌렸던 거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그 애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그렇다면 내 몸에는 레스타트는 어떻 게 된 걸까? 지나와 레스타트는 전혀 다른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 착한 소녀가 단지 몸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몇 년 사이에 그런 인물이 될 수 있는 걸까?' 생각할수록 머리만 더 복잡해지는 그녀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의 성격과 생각 이 성의 변화로 인해 지나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라면, 레스타트를 제거 하고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쉽게 예전의 성격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만큼, 이제 본래의 소년으로 돌아갔을 때, 걱정했던 것과 같은 이질감은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조슈아에게 있어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던 것이다.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4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6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4 20001205 180 3 장편 '그래.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같이 의문들은 차차 풀리게 되겠지. 지금은 닥친 일이 나 생각하자. 일단 여기 일을 마무리하고 아카바로 돌아가 현자의 돌에 대한 단서를 얻어야 해.' 어떤 문제이든 우선 순위를 두고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는 것은 그녀의 장점 중에 장 점이었다. 조슈아는 이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지나라는 소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본래의 몸으로 돌아 가 힘을 회복한다면 디베리아의 국왕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어둠 속에 묻어 버리기에는 지나가 너무도 불쌍하였던 것이다. 그때 잠시 다베리아 왕국을 떠올려 본 조슈아는 전에 샤레셀이 에레나에게 청혼이 들 어 왔었던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러고 보니 에레나에게 청혼하였다는 디베리아의 제 3 왕자는 아론 왕과 시즈 왕비 의 자식이었지? 그럼 레스타트의 나이로 생각해 보아도 지나가 사라지고서 바로 1∼2 년 안에 결혼하였다는 거군. 그렇다면 나에게는 좋지 않…….' 조슈아는 점점 비약하는 사고를 멈추고 자신의 실태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숨겨진 힘을 각성한 레스타트가 마법사들과 신관들을 살해 하고 탈출 할 때, 그런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도 왕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국 왕이 된 아론 왕자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야. 모르긴 해도 아론 왕도 사라 진 그녀를 찾아 헤매었었겠지만, 왕실의 방해로 끝내 실패했었겠지. 결국 이제는 복수 할 대상은 황태후 정 도 뿐인데, 그러나 과연 지나가 그걸 원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굳이 지나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슈아의 마음을 결정 하는 것은 바로 그 불행한 별자리의 소녀 지나의 영혼이었던 것이다. 조슈아가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안티오페는 수시로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워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예상한 것과 같은 정신 붕괴의 징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 내리는 안티오페였다. "으응……." 그때 샤레셀의 무거운(?)얼굴에 눌려 힘든 표정으로 잠들어 있던 에레크트라가 불편 한 신음 성을 내며 천천히 깨어났다. 잠시 정신이 없는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침대 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침대에 일어나 앉아있는 조슈아를 발견하고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을 치켜 뜨며 벌떡 일어났다. 퍼억―. "아야∼." 다음 순간 당연하지만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괘고 잠들어 있던 샤레셀은 턱을 부딫여 비명을 질렀고, 에레크트라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아픔도 잠시, 두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조슈아에게 달려와 그녀를 얼싸안았 다. 워낙 격하게 안겨오는 지라 안티오페가 어깨에서 밀려 침대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녀들에게 그런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아앙∼. 조슈아 언니." 에레크트라는 마치 조슈아가 그녀의 눈앞에서 죽기라도 했었던 듯이 격하게 울부짖었 고, 잠시 조슈아의 품에 안겨 있던 샤레셀은 너무도 심하게 울부짖는 에레크트라를 달 래기 위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괜찮아. 에레크트라. 걱정 끼쳐서 미안하구나." 조슈아는 에레크트라를 꼭 껴안고 이마에 입맞춰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린 그녀 를 달래었다. 지나의 꿈에 의해 자신의 변화의 정체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어서 인 가? 샤레셀은 더욱더 행동과 말투가 부드러워진 조슈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꺄웃 거렸지만, 에레크트라는 그런 조슈아의 변화한 태도야 어떻든 그녀가 깨어난 것이 그 저 좋기만 한 모양이었다. 콰당―. 그때 선실의 문이 부서 질 듯이 열리며 3인의 인물이 넘어질 듯 뛰어 들어 왔다. "무…무슨 일이야! 조슈아가 깨어났어?" "무엄한 놈! 경어를 써라." "오오∼. 정신을 차리셨군요."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에 배 안의 모두를 깨울 듯이 시끄럽게 떠들며 뛰어 들어온 이 들은 당연히 바알, 조르쥬, 멘디에타 이렇게 세 사나이였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금빛 포플라 잎의 문양이 새겨진 청색 상의와 회색 바지를 똑 같이 맞춰 입고 있는 세 사내는 전혀 닮은 구석은 없었지만 마치 한 형제들 같았 다. "쿠쿡∼." 조슈아가 세 남자의 모습에 상황도 잊고 입을 가리며 키득거리자,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한 세 사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말이야. 이 전함에는 선원 복 외에는 크기 별로 맞춰진 옷이 없어서 이렇게 맞 춰 입을 수밖에 없었어. 너도 그걸 입고 있잖아 조슈아." "에에?" 바알이 그녀의 웃음이 불만스러운지 툴툴거리며, 일행을 대표하여 지적하자 조슈아 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옷은 그들과 똑같 은 맞춤 단복이었다. 샤레셀과 에레크트라가 전과 같은 옷을 손질하여 입고 있었고, 경황이 없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였었던 것이다. 조슈아가 마치 소년 예비기사단의 옷 같은 유아틱 한 시돈 수병복을 부끄러운 듯 내 려다보자, 멘디에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그런 것 밖에 없지만, 내일 바리 항에 닫아 궁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울리 는 옷을 고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옷을 입고 폐하를 알현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요. 그러고 보니 전의 백인 대장 분들도 만날 수 있겠군요. 전쟁이 끝났으니 성과급 을 받기 위해 전선에서 바리로 내려와 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의 활약 이 대단했다는 군요. 이안 기사장 님께서는 용병단장 들 보다 못한 전공을 세웠던 기 사들은 모두 각오하라며 벼르고 계신답니다." "후후∼. 녀석들이 한 놈도 죽지 않고 다 살아 있다는 군. 다른 놈들은 더러 죽거나 다치기도 한 모양이지만 백인 대장으로 온 놈들은 상처 하나 안 입었데. 크크∼. 필 시 용병답게 진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모두 피해간 것이겠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바알이 그들의 무사건승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겠지만 바알의 말에 조르쥬는 그냥 넘어가지를 못하였 다. "훗∼. 그렇지. 죽어버리면 돈도 소용없으니 말이야." "핫핫∼. 내가 전장에서 오랜 동안 지켜 본 바로는 기사들은 죽지 않아도 될 장면에 서 쓸 때 없이 목숨을 버려서 전력 낭비를 하더군." 그의 공격 패턴을 조금은 숙지한 걸까? 바알이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맞받아 쳤 다. "으으∼. 전력 낭비라니. 조국을 위해 장렬히 전사하는 것 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 느냐!" "흐흐∼. 그래서! 장렬히 전사한 기사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냐? 살아남아야 써먹을 수 있을 것 아니냐!" "네 놈이!" "자자! 여러분 그만 하시죠." 방금 깨어난 환자 앞에서 밤이라도 세울 것 같이 떠들어대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조슈 아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어쩌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녀의 감각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을지 모르는 불행한 소녀 지나 에게 속삭였다. '이제 외로워하지마. 내가 너를 기억 해줄게. 너와 나에게는 우리를 사랑해주는 수많 은 친구들이 있어. 살아가면서 더욱더 많은 친구들이 생기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꼭 너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 볼께.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만나면 가슴이 아프겠지만 꼭 그러고 싶겠지?' 3 조슈아 일행을 태운 전함은 안티오페의 이야기대로 정확히 정오에 바리 항에 다다랐 다. 바리 항은 북반구에서는 소문난 미항(美港)이었지만, 그 규모는 그리 알본에 비하여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오면 페레나 방면에서 밀려오는 빙산들로 항구로서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버리기 때문에 확장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멘디에타의 귀뜸 이 있었지만,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하는 조슈아에게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바리 항구 의 풍경이 무식하게 크기만 한 알본 항 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몇 일을 푹 잔 덕에 기운을 차린 조슈아와 동료들은 갑판 위에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선착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함들이 항구 외곽의 방파제 쪽 선착장을 이용 하고 있는데, 그녀의 배는 거의 항구 가장 깊은 곧 까지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 배 안에 고급기사가 타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사실 조슈아와 일행들은 자신들과 상당한 기간을 함께 여행했던 멘디에타라는 기사 가, 얼마나 대단한 신분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돈 군을 만나보니 그 의 군에서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함장 이하 일반 수병들은 물론이고, 일개 성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방위기사단장 까지 감히 그와 눈도 마주 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슈아 일행과 있을 때와 그 들과 있을 때의 그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철저히 주변의 모 든 것을 챙기는 그야말로 고급기사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드디어 조슈아 일행을 태운 배는 선착장에 다다랐고, 선원들은 닻줄을 던지 고 돛을 정리하는 등 착함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우스운 옷차림이 부끄러워 왕궁에서 마차가 올 때까지 갑판 위에 있 기로 마음먹고 행여나 선착장의 누군가가 볼까 두려워 상 갑판의 안쪽에 서서 일행들 과 함께 항구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배가 착함 하기가 무섭게 선착장에 내려진 판때기 를 쿵쾅거리며 뛰어 올라오는 일단의 사내들이 있었다. 배에 숨어 있으면 그만 이리라 생각했던 조슈아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에 당황하여 얼 른 바알의 뒤에 숨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더 이 상 숨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와앗∼! 대장 아가씨! 어디 있는 거야! 우리가 왔다고!" "자르델?" 바알과 샤레셀, 에레크트라, 멘디에타가 버티고 서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조슈아 만 을 찾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세바 출신의 중년 용병 자르델 이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옷차림도 잊고 바알의 등뒤에서 빠져 나왔다. "모…모두들 정말 무사했군요." 조슈아의 앞에는 9인의 100인 대장들이 만면에 웃음을 띄고 자신들의 1000인 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두에는 자르델이 하얗게 샌 머리칼을 바다 바람에 흩날리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뒤로 파간, 지코, 스쿠, 가토스, 루이, 투루스, 그라프 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그녀를 다시 만나 기뻐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얼굴들 이었다. 그리고 맨 뒤에서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면서 동료들의 어깨 너머로 힐끔거리 며 그녀를 바라보는 애꾸눈의 사내는 그녀와 눈이 마주 치자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환 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조슈아가 단순한 복장이라 더욱 더 티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빌려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상당히 감동한 듯한 얼굴이었 다. "여러분 너무 반가워요. 그런데 어떻게 알고들 나왔어요?" 조슈아가 자르델과 가토스의 팔에 손을 얹고 모두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 자 자르델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이틀 전에 전서구가 와서 우리는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구. 우리고 겨우 이틀 전 에 도착했어. 마물들이 갑자기 모두 사라져서 어떻게 된 일인가 했더니, 모두 아가씨 와 그 부하들이 한 일이라며? 그 이야기를 듣고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아가씨와 그 부하들? 이봐! 설마 나를 두고 한 이야기야!" 바알이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치켜들며 으르렁 거렸다. "오호∼. 바알 자네도 있었나? 그러고 보니 모르던 친구도 있구먼. 신녀님 은 왜 머 리를 풀고……." 잠시 나머지 일행을 돌아보며 호들갑을 떨던 자르델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을 비볐 다. 그는 샤레셀의 풍성한 빨간 머리칼을 한 손으로 잡고 그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요정 여왕 안티오페를 발견한 것이었다. 경험 많은 용병인 그로서도 요정을 보는 것은 처음인 듯,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자 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이…이보게들. 저 신녀 님 어깨 위에 앉아있는 날개 달린 조그마한 소녀가 보이나? 혹시 나만 보이는 건가?" 자르델이 더듬거리며 손가락질을 하자, 모두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고 기겁 을 하였다. 그 와중에도 안티오페는 사내들의 노골적인 놀라운 표정에 전혀 관심이 없 다는 표정으로 두 개의 촉수를 흔들며 저 멀리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바리 성을 바 라보고 있었다. "아! 소개할게요. 이분은 요정 안티오페 예요. 알본에 가는 중간에 만나 우리를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서 구해 주신 분이지요. 보기와 달리 나이가 매우 많으시니까 실례 는 하지 마세요." 9인의 무시무시한 사내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자 조슈아는 낮게 실소하며 안티오 페를 소개하였다. "허어∼. 요정이라. 정말로 있었구먼. 우리 할아버지가 숲에서 요정이 산딸기를 따는 걸 보신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예…예쁜데? 진짜 사람 크기만 해진다면 조슈아 대장과 좋은 상대가 대겠어." 역시 백인 대장 들 중 가장 젊은 21살의 청년 루이가 안티오페의 아름다운 자태에 가 장 먼저 관심을 보였다. 안티오페도 예쁘다는 말에는 관심이 있는지 잠시 고개를 돌려 침이라도 흘릴 듯이 벌 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젊은 용병을 바라보았다. 그때 바삐 움직이는 선원들을 헤치며, 또 한 때의 무리들이 갑판위로 올라왔다. 갑옷 이 덩커덕 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기사들임에 틀림이 없는 십 수명의 사내들 이었다. "오오∼. 멘디에타. 정말로 수고했네! 그리고 여러분도 정말로 수고 하셨소. 정말 뭐 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기사장님. 직접 마중 나오시다니요." 십 여명의 기사들을 대동하고 배 위에 오른 사람은 바로 조슈아를 용병 단에 받아 들 였던 시돈 왕국의 기사단장 이안 프레드리였다.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갑 옷을 입고 다니는 그는 호인답게 붉게 물든 볼이 보기 좋은 정정한 은발 노인이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멘디에타를 가볍게 포옹하고는 조슈아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 다. 전부터 이 할아버지가 좋았던 조슈아도 미소지으며 노 기사장의 손을 꼭 맞잡았 다. "멘디에타가 보낸 전서구를 읽고 감격했소.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이 전쟁은 끝내지 못했을 거요. 설마 칼라에 집결시켰던 용병 단이 전멸 할 줄을 상상도 못했었는데 아 가씨가 끝까지 임무를 포기하지 않은 덕에 알본 까지 갈 수 있었다더군. 그러고 보니 신녀 아가씨도 고맙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 친구를 살려 주었다면서? 하하∼. 만 약 이 친구가 죽기라도 한다면 정말 난리가 났을 거네. 평생 수절을 할 아가씨가 생기 게 되니 말이야." '헤에∼? 멘디에타에게 연인이 있었구나.' 조슈아는 이 얌전한 청년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확실히 신분이 높고 잘생기기는 하였지만, 도무지 여자를 다루는 요령은 없어 보이는 그 이기 때문이었 다. "어엇? 조르쥬.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나?" 잠시 멘디에타의 연인을 상상하고 있던 조슈아는 기사장의 입에서 조르쥬의 이름이 나오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조르쥬의 대답이었다. "반갑습니다. 고모부 님. 거의 5년 만인가요?" "고…고모부 님?"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 세 손을 맞잡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처제가 보낸 편지에는 자네가 근위대장이 되었다고 하던 데. 어떻게 용병 단에 끼어 있는 건가?" '이거 잘못 하다가는…….' 조슈아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식은땀을 흐렸다. 그러나 조르쥬는 전혀 당황하 지 않고 불안한 눈빛으로 눈을 굴리고 있는 샤레셀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분을 따라 찾아 왔습니다.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어느 지고하신 분의 친척이 되 시거든 요. 그런데 신녀 수업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멀리 나오셔서, 어쩔 수 없이 찾 아 나서게 된 겁니다." 머엉―. 조슈아로서는 상상도 못할 순발력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런 종류의 순발력이라면 둘 째가라면 서러운 샤레셀이 정말로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기사장님께 말씀 드린 데로, 신녀 수업을 위해 전장을 찾아다니다가 친구를 만나 여 기 까지 온 거예요. 본의 아니게 바쁘신 근위대장님을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그래도 많은 공부가 된 여행이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아가씨는 처음부터 알아보았지만, 정말 복덩이구만. 저 용병들 사이에서 유명한 덩치 큰 친구를 대려오더니 뒤이어 신녀 아가씨가 따라 붙고, 거기에 아카바 의 근위대장 까지. 하하∼. 대단해 정말 대단해!" 정말로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일수록 적으로 돌리 면 더욱더 무서운 것이리라. 조슈아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연신 자신의 손을 잡고 흔드는 기사장에게 어쩐지 미 안 해 지고 있었다.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5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7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5 20001206 182 4 장편 4 배 아래의 부두에는 긴치마 같은 정복을 입고 있어 갑판에 오르지 못한 여러 대신 들 도 조슈아 일행을 환영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소문의 미소녀 용병대 장을 보기 위해 집무도 때려치우고 따라 나온 자들이 상당수 끼어 있었지만, 아무도 후회하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소문의 미소녀 용병대장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 다. 거기에다 탐스러운 빨간 머리칼을 가진 귀여운 이국의 신녀와 냉랭한 얼굴이 매력 적인 소녀 검사, 그들의 시선에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는 12세 소녀가 그들을 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고, 무엇 보다 전설에서나 듣던 초록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아 름다운 요정까지, 그들은 만사를 제치고 기사장을 따라나오길 잘했다고 수근 거렸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조슈아의 시선을 결코 곱지 않았다. 이 뚱뚱한 노 대신들은 자국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태평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장 이하 모든 기사들의 얼굴에 전쟁의 피로와 복구 의 열기가 완연한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되었다. '이 놈들은 이 안전한 도시에서 호의호식하며 전쟁이 끝나기나 기다리고 있었겠지? 어딜 가나 전쟁의 피해자는 일반 백성과 군인들뿐이라는 말이 맞군. 내가 국왕이 되 어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제일 먼저 대신들을 일선에 세워 줄 거다!' 실재 상황에서 그럴 리야 없겠지만, 용병 단의 입장에서 본 태평한 그들은 정말 밉살 스러웠다. 그때 한참을 마치 품평회라도 하듯 조슈아와 그녀의 동료들을 둘러싸고 입방아를 찧 던 대신 들의 중앙에서 요정 여왕 안티오페를 보고 당황하여 입만 벌리고 있던 유일 한 금장 대신 복의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일행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조슈아는 그 노인이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지위가 높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가슴 부분에 여러 종류의 보석을 박아 놓은 황금 판에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는 기호 들을 새겨 놓은 노대신은 다른 자잘한 대신들과 달리 어떤 슬픔과 피로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헤에∼. 제대로 된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군.' 조슈아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이 노인이 누구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였다. 왕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풍기는 기운만 보아도 그가 충신인지 아닌지 대충은 알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노인이 일행에게 다가오자 멘디에타가 일행을 대표하여 깊숙이 목례를 하였다. "대공께서 직접 나오시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소관은 여 기 이분들의 도움을 받아 칙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대공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멘디에타의 두 손을 잡았 다. "무사한 것이 무엇 보다 기쁘네 멘디에타. 훌륭히 칙명을 완수했구먼. 어려운 일을 너무도 잘해 주었네. 자네 덕에 100년 전 보다 훨씬 피해를 줄일 수 있었네. 그리고 여러분도 고맙습니다. 먼 이국에서부터 찾아와 저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주셨소." 대공이라면 국왕의 형제이거나 그에 필적하는 대 귀족인 것이다. 아무리 조슈아가 본 래의 모습으로 나선다 하더라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직위였다. 조슈아는 생전 처음 하는 일에 떪더름 하기는 했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부복 정도 는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억―. 조슈아가 먼저 부복을 하자, 노인의 어마어마한 신분에 얼어 있던 퓨어리스도 창백해 진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고, 일행들이 왜 들 그러는지 몰라 두리번거 리던 에레크트라는 이유도 모르면서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시간의 차는 있었지만 나 머지 일행도 툴툴거리며 조슈아를 따르고 있었다. "대공저하 같은 분께서 직접 치하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희들은 용병, 그 렇게 치하 받을 일은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 조슈아는 자신도 모르게 세련된 궁정억양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 보던 대공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곧 얼굴에 이채를 띄고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말에 관심을 표명했다. "저희 동료들 중 두 사람은 용병 단이 아니고 시돈 땅의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누구 보다 칙명을 완수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이므로 저희들과는 공과를 구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허어∼. 그들은 누구인가?" 어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사리를 구분하는 조슈아가 대견하다는 듯 대공 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붙임성 있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대공의 호의적인 반응에 안심한 조슈아는 몸을 일으켜 퓨어리스와 샤레셀의 어깨 위에 앉아 대공을 바라보고 있던 안티오페를 가리켰다. "바로 이들입니다. 칼라 성주의 영양인 퓨어리스와 요정 족의 여왕인 안티오페입니 다. 이 들이 없었다면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부디 그들의 공을 높이 사주시기 바랍니다." "허어∼. 칼라라고 했는가? 그럼 전대의 근위대 장이었던 트라젠 후작의 딸이겠군. 아버님은 건강하신가?" "에∼! 예. 감사하옵니다." 설마 말을 걸 줄은 몰랐었던가? 퓨어리스는 홍당무가 되어 엉뚱한 대답을 하고 있었 다. 잠시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던 대공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안티오페를 바 라보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누군가 요정을 주워서 애완용으 로 대리고 다니는 것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이 예쁘고 자그마한 요정이 뛰어나 활약을 보였다고 하니 어찌 곤혹스럽지 않겠는가? 그는 이 요정의 주인에게 많은 돈을 지불해 서라도 손녀의 생일 선물로 사 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으흠∼.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안티오페야." 수근∼. 그녀의 대답에 좌 중이 수근 거렸다. 아마 저 자그마한 요정이 말을 했다는 것이 신 기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등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반말에 대 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 했 다. 대공을 비롯해서 모든 대공들은 그녀의 나이는 상상도 못하고 있는지라, 귀여운 손녀 가 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그녀 의 귀여운 목소리와 자태에 몸을 부르르 떠는 대신들까지 있었다. 대신은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무언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 를 끄떡였다. "내가 폐하께 그대의 뜻을 전하도록 하지. 자! 그럼 마차에 오르게 모두 함께 궁으 로 가도록 하세. 비밀 칙명이었던 만큼 영웅들을 맞는 시민들의 환호 같은 것은 없겠 지만, 궁에 가게 되면 그리 섭섭하지는 않을 거네." "황공하옵니다." 대공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눈치챈 바알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조슈아는 별 로 기대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왕실파티 같은 것은 그냥 귀찮은 연례 행 사 일 뿐인 것이다. 그저 이 모든 일들이 빨리 마무리되고, 배편을 얻어 아카바로 돌 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의 눈앞에 갑자기 손이 내밀어 졌다. 그녀가 화들짝 놀 라 바라보니 대공이 미소지으며 그녀를 에스코트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아니 이 노인이 왜?' 조슈아는 이 사람 좋아 보이는 대공이 혹시 자신에게 흑심을 가진 것이 아닌지 의심 하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러나 보는 눈이 있는지라 거부 할 수도 없는 그녀는 마지 못해 노 대공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대공은 생각한 것 과 같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 을 얹은 채로 화려한 육두 마차로 그녀를 이끌었을 뿐이었다. 달칵―. 그때 조금은 안심하던 그녀는 이 넓은 마치에 오직 자신과 대신 만이 탄 상태에서 문 이 닫히자 기겁을 하였다. "아! 저…저 혼자 타는 겁니까?" 조슈아는 불안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며 창밖으로 구원의 시선을 던지자, 안티오페 가 샤레셀의 어깨에서 날아와 마차 안으로 들어 왔다. 위이잉―. 조슈아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눈길을 보냈는지 알 길이 없는 안티오페 였지만, 자신 에게 누군가 와주기를 바라는 것은 눈치 챈 것이리라. 그때 그녀의 불안한 얼굴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은 대공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하하∼.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오. 다만 아가씨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말이 야." 그러나 조슈아는 더 불안해 졌다. '그게 다른 뜻이지 뭐야.' 잠시 배를 붙잡고 웃던 대신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부드러운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우리 나라로 귀화할 생각은 없는가?" "예에∼?"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6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8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6 20001206 184 8 장편 너무도 의외에 말에 당황한 조슈아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일국의 대공이라는 자가 일개 용병에게 귀화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도 잘알고 있는 조슈아 였다. "자네의 이야기는 기사장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네. 그 친구는 자네를 정말 로 마음에 들어 하여 나에게 자네의 중용을 청하더구먼. 자신이 할 수도 있는 일이지 만, 좀더 직위가 높은 자가 하는 것이 약발이 먹힐 거라더군. 하하하∼." '야…약발?' 전혀 그 신분과 청수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다. 그러나 용병(?)인 그녀에게 일부러 소탈 하게 보여 거리감을 줄려 보자는 의도도 섞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만 큼 이 노 대공은 그녀가 마음에 쏙 든 것이리라. "기사장의 추천으로 자네는 바로 근위기사가 될 수도 있네. 그 친구의 말로는 자신 의 부관으로 삼아 경험을 쌓게 하고, 장래 왕국 최초의 근위대장, 혹은 기사장까지 만 들어 주고 싶다고 하더군. 자네가 남자였다면 검성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을 거라며 아까워하던데. 하하∼. 작위는 걱정 말게. 그 친구가 자네를 양녀로 받 아 들여 자신의 성을 줄 생각 인 것 같으니 말이네. 그런데 자네가 정말 그렇게 뛰어 난 검술을 가졌나?" 앉은 채로 얼굴에 금칠을 당하는 조슈아 였지만, 절대로 기꺼운 상황은 아니었다. 일 국의 왕자인 그녀가 뭐가 아쉬워 남의 나라 기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이 자리에서 거부한다면 아마도 누구라도 그녀를 미쳤다고 하리라. 여하튼 현재 그녀는 보 잘 것 없는 용병인 것이다. "저∼.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지금 대답 할 성질의 것이 아니 온지라……." 행여나 자신의 거절이 동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 눈치를 보는 조슈 아 였다. 그러나 대공은 의외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그녀의 어깨를 치는 것이었 다. "어려운 결단이라는 걸 잘아내. 궁전에 천천히 생각해 보게나. 폐하께서도 상당히 기 대하고 계시다네." 태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것은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왕이 기대하고 있다하지 않는가? 그때 잠시 대답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는 조슈아의 아름다운 얼굴을 의미심장한 눈 으로 바라보던 대공이 더욱더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자네가 아카바의 전 왕비 이셨던, 소피아 왕비의 친척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예에∼?" 사람을 여러 번 놀래 키는 노인이었다. 비록 한참 빗나가기는 하였지만, 설마 여기에 서 어머니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그녀는 놀란 가슴을 안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착각한 대공이 만면 에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떠들었다. "오∼. 역시 그렇구먼. 어쩐지 꼭 닮았다했지. 하하∼. 에도니 가문이었지? 그 집안 딸들은 정말 대답하군. 또다시 자네 같은 소녀 검사를 배출하다니 말이야. 나도 들어 서 알고 있네 만, 자네 가문은 왕실의 외가 친척이라는 지위로 영달을 꾀하지 않을 것 을 선언하고 절대 관직을 사양한다면서? 그렇다면 자네도 어차피 아카바에서 기사를 하거나 관직에 오르지는 않을 테니, 이 기회에 우리 시돈에 터를 잡아 보는 것이 어떻 겠나?" 어떻게 그녀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여기까지 넘겨짚을 수가 있는 것일까? 비록 틀리기는 했지만 정말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욱 더 궁금한 것은 이 먼 시돈 땅의 대공이 어떻게 어머니 얼굴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었 다. "저 그런데 어떻게 저의 어머… 고모님과 제가 닮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보신 적이 있으신 가요?"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조슈아는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어머니를 고모라고 하는 것이 가슴 아프기는 하였지만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자 대공은 입이 찢어 질 듯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덥 석 잡았다. "자네의 고모님 이셨구먼. 그렇다 해도 정말로 닮았는데? 나는 자네의 고모님을 결혼 식에서 뵈었다네. 당시 나는 왕국의 사절로서 먼 뱃 여행을 하고 난 터라 매우 짜증 이 나있었는데 왕비 님을 보고 싹 가셨지 뭔가? 사절단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친절하 게 인사를 건네 섰었지. 그 분을 보기 전에는 더러는 평민 출신이라고 비아냥거리던 녀석들도 있었는데, 워낙 기품 있고 아름다운 분이시라 모두 순식간에 반해 버렸다 네. 나도 그분을 한번 본 것뿐이지만, 지금 까지 잊지 못하고 있지. 정말로 착하고 아 름다운 소녀 이셨는데 말이야. 도대체 그 가냘픈 몸 어디에 힘이 있어서 근위대에서 도 손꼽히는 검사로 불리 운 것인지……. 그분이 난산으로 돌아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 고 정말로 슬펐다네." 조슈아는 괜 시리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꼭 꼭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먼 타국에도 자신은 한번도 본적 없는 모친을 연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도록 자랑스러웠다. 그녀의 침묵을 곡해한 노 대공은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지 더 이상 입을 열 지 않고, 그녀의 어깨에 앉아있는 안티오페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안티오페와 눈이 마주친 이 주책없는 노인네는 마치 귀여운 강아지에게 하는 것 같은 어르는 듯한 미소 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안티오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 노 대공 이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인간의 노인치고는 상당히 귀여운 표정을 지을 줄 아내?" 5 조슈아 일행은 항구에서 마차로 20여분을 쉬지 않고 달려, 도시 중앙의 언덕 위에 위 치한 고색 찬연한 희색 궁전에 다다랐다. 성도로서는 형편없는 규모였지만 조슈아의 눈에 이 바리 성은 알본 성보다 훨씬 격조 가 있어 보였다. 게드마 성보다야 떨어 졌지만 규모가 작은 만큼 크기만 한 알본 성보 다는 훨씬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신전의 종 탑과 궁전의 뾰족한 지붕이 성의 양 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모 양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예술적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화강암으로 성벽 을 쌓아 조금은 탁한 맛도 있었지만 워낙에 질이 좋은 화강암이라, 멀리서 보기에 질 감은 거의 대리석과 같은 느낌이었고, 가까이서 보면 성벽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넝쿨 가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리고 궁전과 신전의 벽은 모두 결이 고운 대리석과 백 석들이어서, 마침 정오의 햇 빛을 받아 눈이 부실 지경이었었다. 알본 성같이 금도금을 입힌 지붕이나 은으로 천장 을 만든 회랑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일행에게는 이런 곳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마차를 타고 궁전 앞까지 들어간 조슈아 일행은 곧 남녀로 나뉘어 각각의 방으로 안 내되었다. 다행히 멘디에타의 말대로 지금의 복장으로 국왕을 알현하지는 않을 모양이 었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수병 복장은 정말로 창피한 것이었다. 외전의 복도를 통해 궁성에 들어간 조슈아와 소녀들(?)은 욕탕으로 안내되어 오랜만 에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두 개의 방이 덧문으로 연결된 화려한 침실로 안내되었 다. 조슈아만 따고 목욕을 하겠다고 우기자 시녀들이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냈지만, 본 래의 신분을 들킨 마당에(안들 켰더라면 했을까?) 어떻게 그녀들과 같이 목욕을 하겠 는가? 에레크트라가 방의 화려함에 탄성을 지르는 가운데, 불안함 심정으로 옷장을 열어본 조슈아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이 옷장 가득 걸려 있는 옷들은 치렁치렁 한 드레스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흰색 공단의 드레스도 섞여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누가 입 어도 상관없는 류의 정장이었다. 그 사이 벌써 퓨어리스와 샤레셀은 여기 저기 찢어진 옷가지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옷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 샤레셀은 마치 파계한 신녀 처럼 옷을 고르는 재 미에 푹 빠져, 정말 오랜만에 또래의 소녀다운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벌써 조슈아의 본래 신분을 잊은 것일까? 두 소녀는 조슈아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 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듯 했다. 조슈아는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구석에서 옷장 가득 히 들어 차 있는 비싸 보이는 옷가지들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 에레크트라를 발 견하고 실소하였다. 아직 까지도 다테의 술집 소녀 에레나에게서 받은 싸구려 원피스 를 입고 있던 에레크트라는 눈앞에 펼쳐진 예쁜 옷의 산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이 마음대로 골라 입어도 된다는 것을 알 리도 없고,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에레크트라야. 곧 폐하를 뵈러 가야해. 언니가 골라 줄까?" 조슈아가 에레크트라의 등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 예, 언니가 골라 주세요." 그제야 이 옷들을 자신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에레크트라가 얼굴을 붉혔다. "저, 그런데 안티오페는 그 대로 갈 건가요? 국왕을 만나려면 그 대로는 좀……. " 결국 신분이 신분인지라, 풍성한 치마는 고르지 못하고 다리에 딱 붙는 품이 좁은 하 늘색 드레스를 고른 샤레셀이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아 소녀들의 옷 잔치를 지켜보고 있는 요정 여왕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런 것은 생각해보지 않은 듯 두 눈을 깜 박이던 안티오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그럼 내가 커져서 인간의 옷을 입고 가야 할까?" "그럼요." "그러세요. 안티오페." 그녀의 옷 입은 모습을 보고 싶었던 소녀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평소에 나신 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이 요정 여왕이 드레스를 입는 다면 정말로 맵시가 날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조슈아도 아름답기는 했지만, 안티오페에 비해서는 아직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소녀들을 돌아보며 안티오페는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 떡였다. "그래, 그럼 내 옷은 내가 고를 깨. 전에 한 벌 있던 남자 옷을 입고 갔었는데 영 기 분이 나빴었어." 소녀들은 이 무심 여왕이 어떤 옷을 고르는지 궁금하여, 자기가 옷 입는 건 잊고 옷 장 앞으로 날아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폐하, 용병대장 조슈아와 그 일행들입니다." 조슈아를 당황하게 하였던 회색 머리의 노 대공이 알현 실에 들어오는 소녀들을 가리 키며 옥좌에 앉아있는 60대의 노인에게 고하였다. "오오∼." 조슈아와 그녀의 동료들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뜻 모를 탄성이 들려 왔다. 당연한 것이지만, 일행의 선두에 선 조슈아로 인해 터져 나오는 감탄의 탄성이었다. '조금은 사내같이 입고 오려 노력했는데, 역시 더 이상해 졌나?' 조슈아는 모두의 시선을 모으는 것이 싫어, 되도록 이면 남성적인 복장을 하려고 노 력하였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 였다. 꽉 끼는 무늬 없는 회색 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갈색 부츠를 신고, 아랫배까지 내려오 는 자주색 상의는 볼륨 있는 가슴을 가리기 위해 명치쯤에 끈을 묶어 주름을 만들었는 데, 오히려 그 안에 얼마나 모양 좋고 풍만한 가슴이 숨어 있을 까 상상하게 되는 결 과만 낳았다. 그리고 하나로 묶어 옆으로 늘어트린 긴 금발은 이 자리의 모든 사내들 을 유혹이나 하듯이 살랑거렸는데 차라리 두 개로 땋아 고정시키는 것이 나았다고 생 각해보는 조슈아 였다. 차라리 그녀의 뒤에 따라 오는 퓨어리스나 에레크트라 처럼 눈 딱 감고 간단한 드레 스를 입는 것이 좋았으리라. "오오오∼." 그때 갑자기 조슈아 에게 보다 더 큰 탄성의 합창이 들려왔다. 조슈아가 돌아보니 맨 마지막으로 안티오페가 알현 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정말 예쁘다. 안티오페. 과연 요정 여왕이야.' 아까도 보고 감탄하였지만,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조슈아 였다. 스스로 옷을 고른 안티오페는 의외로 옷장에 있던 것들 중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골 라 입어 모두를 놀라게 하였었다. 어여쁜 귀족 아가씨가 무도회에나 입고 나갈 직한 분홍빛 비단드레스는 풍성한 겉치 마에 속치마, 거기에 빨간색 가운까지 세트로 구비되어 있었는데, 치마와 달리 약간 각이 지도록 제단 된 웃옷은 연 분홍빛 망사 가운과 일체형으로, 긴 초록색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아 양쪽 가슴 깨로 내린 그녀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촉수가 조금 거슬리 기는 하였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더 신비한 매력을 풍기는 요소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입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입는 순서가 까다로운지. 처음엔 그녀가 경험이 없어 그런 옷을 고른 줄 알았던 소녀들은 이 요정 여왕이 너무도 익숙하게 드레스를 챙겨 입는 것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그녀는 전에 이런 것들을 질리도록 입어 본 것이 틀림없었다.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7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89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7 20001206 186 9 장편 "폐하!" 너무도 아름다운 안티오페의 자태에 체통도 잊고 입을 벌리고 있는 국왕을 못마땅하 다는 듯 한 목소리로 부르는 여인이 있었다. 이제 18세나 되었을까? 대단한 미모는 아니었지만, 온몸에서 넘쳐흐르는 기품이 예사 롭지 않은 그녀는, 단정하게 틀어 올려 망사로 고정시킨 적갈색 머리칼에 짙은 밤색 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신분일 것이 분명하였지만, 수수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이 그녀의 기품을 더욱 더 빛내 주었다. "으흠∼."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국왕은 헛기침을 한번 하여 분위기 전환을 꾀하였지만, 붉어 진 노안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짐이 레온 국왕이다. 내 아우에게 이야기는 잘 들었다. 그래 그대가 조슈아 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조슈아가 깊숙이 고개 숙이며 공손히 대답하였다. "허어. 정말 아름…으흠. 늠름하구나. 그래 긴 여행에 어디 상한 곳은 없는가?" '느…늠름?' 계속되는 국왕의 실수에 오히려 대신들과 소녀의 얼굴이 더 붉어지고 있었다. 그러 나 웃을 입장이 아닌 조슈아는 터져 나오려는 폭소를 죽을힘을 다해 눌러 참으며, 공 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께서 심려해주신 덕분으로 다친 곳 없이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바알이나 자르델 이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언행이었다. 소녀들의 뒤에 꿔다놓은 보리자루 마냥 뻣뻣하게 시립 하여 있던 역전의 용병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이 소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들 중에 하나가 국왕을 상대해야만 했으리라. 모르기는 해도 불경죄로 목이 잘리 거나 돈도 못 받고 쫓겨났을지도……. "호오……." 의외로 격조 있는 그녀의 태도와 왕실에서나 씀직한 기품 있고 또렷한 남부 액센트 에 잠시 감탄하는 듯 하던 국왕은 자신의 오른 편에서 뭐가 그리 좋은지 벙글거리고있 는 대공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버린 대공이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돈 왕국이 그대들에게 진 빛은 계산 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작은 보상밖에 해주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유념해 주기를 바라노라." 결국 계약금 외의 성과급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입다물고 조용히 물러나라는 이야기 를 근엄하게 늘어놓은 대공이 젊은 기사가 들고 온 두루말이를 받아 들고 또 다시 근 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먼저 바알, 자카엘, 파간, 지코, 자르델, 스쿠, 가토스, 루이, 투루스, 그라프 이렇 게 10인의 100인 대장들에게는 각각 5000 냥의 황금을 지급하고, 원한다면 그에 상당 하는 보석류로 대체한다. 그리고 100인 대장 바알은 주요 작전에 동원되었으므로, 성 과급 1000냥을 추가한다." "오오∼." 정작 본인들은 잠자코 있는데 오히려 대신들과 기사들이 감탄 성을 내뱉었다. 그러 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표현은 하고 있지 못했지만, 보상은 모두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었다. 잠시 좌 중의 반응을 지켜보던 대공은 잠잠해 지기를 기다려 다시 천천히 두루말이 를 읽어 내려갔다. "용병대장 조슈아에게는 황금 1만 냥을 지급하고, 성과급 5000냥에 특별 수당 2000 냥. 도합 1만 7000 냥을 하사하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황실 직속 기사에 임명한다. 4 개의 황실 직속 기사단 중 선택은 본인에게 맞기며, 직급은 차후 결정한다. 좋은 대답 을 기대하네." "우와아∼!" 끝에 말투를 바꾸어 진심으로 그녀의 승낙을 기대한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치는 대공 이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이 자리가 부담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거부한다 해도 파티다 뭐다 해서 나를 붙들어 놓고 압력을 가해 올 텐데. 몰래 도망 이라도 가야 할까? 그래도 배가 없으면 나가지도 못하니…….' 왕실의 생리를 잘 아는 조슈아는 이들이 결코 그녀를 호락호락 놔주지 않을 것임을 알 고 있었다. 결국 강국의 제 1 조건은 인재, 한번 눈에 띈 인재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시대 왕국들의 철칙인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든 도망칠 궁리를 하는 동안 발표는 계속 되었다. "본인이 극구 포상을 거부한 아카바의 신녀와 용병대장의 제자에게는 시돈의 시민권 과 영구 면세 권을 준다." "우와!" 시민권과 면세 권은 어떻게 보면 황금보다 더 큰 포상이랄 수 있었다. 그녀들이 마음 만 먹는 다면 이 나라에 정착하여 어떤 일을 하든 세금을 뜯기지 않고 쉽게 부를 쌓 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녀인 샤레셀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 고, 그 포상의 의미를 모르는 에레크트라에게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별 세계 이야기였 다. "그리고 트라젠 후작의 딸 퓨어리스는 가문을 이을 권리를 주며, 년 말 12인의 작위 수여 자들과 함께 기사작위를 수여한다." "화…황공하옵니다." 퓨어리스에게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포상이었다. 딸로 태어난 덕에 가문을 이 를 권리가 없던 그녀는 자신의 대에서 가문의 대가 끝남을 아쉬워하시던 아버지에게 언제나 죄스러운 기분으로 살아왔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후작의 작위를 상속받 게 되었고, 그에 더해 그렇게 바라던 기사작위까지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그녀는 몇 개월 후면 시돈 역사상 첫 여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 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귀여운 듯 바라보던 대공은 두루말이를 접어 기사에게 넘기고, 조금은 곤혹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안티오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을 유혹이라도 하는 듯,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이 요정 여왕은 그가 자신을 쳐다보자, 흰자위가 없는 신비한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의 시선을 맞 받았다. '으음…….' 대공은 그녀의 시선에 가슴이 진탕해 옮을 느끼면서도 겨우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국왕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한참을 대공의 말을 듣고 있던 국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염소 수염을 어루만지며 부 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요정 족의 여왕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소. 그래. 그대는 어떤 보상을 원하오?" 조슈아는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안티오페가 평소대로 반말이라 도 하면 어찌되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나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숲을 영지로 원해요. 그리 넓은 땅도 아니고 주위에 도시 도 없으니 그리 피해를 보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의 미모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억양은 없는 귀여운 목소리에 잠시 멍해 있던 레 온 국왕은 일행의 오른 편에서 서있던 멘디에타에게 질문하였다. "호오∼. 그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멘디에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멘디에타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부 해안 근처의 게헤나 산맥 북쪽에 위치한 작은 숲이옵니다. 트리안 영주의 영토 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주위가 대초원에 둘로 쌓여 있기 때문에 영토로서의 가치는 전 혀 없습니다." 전혀 가치 없는 땅이 있을 리야 없겠지만, 그 말을 이상할 정도로 강조하는 멘디에타 였다. 그의 의도를 간파한 안티오페가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국 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려 일행을 불안하게 만들더니, 곧 대신을 돌아보며 고민스럽다는 투로 질문하였다. "어떨까? 게헤나의 서부해안 쪽이면 개국이래 누구도 영지로 원하지 않던 곳이 아닌 가? 그런 곳을 내주어도 괜찮을까?" "그런 변방을 영지로 내어주면 관리가 어렵사옵니다. 폐하. 반란이라도 꽤하면 곤란 하지 않사옵니까? 차라리 바리 주변의 숲을 내주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반란? 바리 주변의 숲? 이 노인네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국왕과 대공의 음흉한 계획을 알리 없는 조슈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짖고 있는 동안, 서로 죽이 잘 맞는 두 노인은 착착 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흐흠∼. 인간도 아닌 그대에게 그렇게 먼 곳에 영지를 주고서는 안심할 수가 없소. 이 곧 바리 남쪽의 대숲지도 그곳 못지 않게 기후도 좋고 훨씬 넓은데, 어떻소? 이 곳 으로 아이들을 대려와 살도록 하는 것이. 물론 바리의 남쪽 숲은 당신의 영지가 되는 거요. 그 숲에서 나는 모든 것은 당신과 아이들의 것이오." "가…감사하옵니다. 폐하!" 그의 뜻밖의 제안에 오히려 조슈아와 그 일행들이 더 기뻐하였다. 그러나 안티오페 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 었다. "그럼 나의 숲에는 인간들이 다니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도시 근처의 숲이라면 인간 들이 다니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건 걱정 마시오. 인간들이 길을 이용하기는 하겠지만 당신의 영지인 숲의 어떤 것 도 훼손 할 수는 없소. 만약 그런 다면 국법으로 다스려 질 거요." 정말로 뜻하지도 않은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요정 족의 여왕인 그녀에게 드디어 안주의 땅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잠시, 뒤이어 국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일행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영지를 받은 만큼 그대는 나의 신하. 영지의 대가로 세금을 내야만 하오." "예에∼?" 안티오페를 대신하여 조슈아가 경악 성을 터트렸다. 그때 잠자코 국왕의 말을 듣고 있던 적갈색 머리칼의 소녀가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요정 족에게 세금을 받으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 들이 무슨 수로 세금 으로 낼 곡식이나 금화를 만들어 낸다는 말씀입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흐음∼. 그도 그렇군." 여인의 지적에 정말로 고민하는 듯 이마를 찡그리고 생각에 잠기는 시늉을 하던 국왕 은 대공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곧 정색을 하며 엄숙히 선언하였다. "마리안의 부탁도 있고 하니, 세금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도록 하겠오. 요정 족의 여 왕에게 바리 남부의 숲에서부터 국경선까지의 숲 지를 영지로 주고 영구 영주로 임명 하오. 작위는 그에 맞게 차후 결정하도록 하고 이름도 원하는 것을 쓰시오. 이 명은 시돈 왕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켜 질 거요. 내 후손은 이 명을 거둘 수 없소. 그 렇게 기록하시오. 대신 아름다운 요정 족의 여왕께서는 짐의 신하로서 적어도 한 달 에 한번은 왕실 무도회에 참가 하여야하오. 짐은 성도가 완전 복구 될 때까지 바리에 머물겠소. 설마 근방의 영주로서 국왕의 초청을 거부하지는 않겠지요?" 그제야 국왕과 대공의 흑심을 파악한 모두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요컨대 이 두 노인 은 이런 아름다운 요정 여왕을 가까이 두고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도의 완전 복구가 적어도 20∼30년이 걸릴 어마어마한 대공사임을 생각하면, 국왕 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옆에 두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의도를 읽지 못한 안티오페는 드레스 뒤로, 마치 장식처럼 조금 빠져 나와 있는 귀여운 두 장의 날개를 까딱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곧 고개 를 끄떡였다. "좋아요. 생각한 것과는 많이 틀리지만, 그러도록 하지요."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행복한 시돈 국의 국왕 레온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잘하면 대륙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 미녀를 둘씩이나 신하로 거느리게 되지 않 았는가? 거기에다 두 소녀는 미모와 능력, 희소성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하하∼. 오늘의 만찬은 무도회로 바꾼다. 시종장은 준비하라."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8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0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8 20001207 164 6 장편 6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조슈아가 기가 막히다 는 듯이 투덜거렸다. 이곳은 바리 성 내궁의 대무도회장에 딸려 있는 휴게실. 말이 휴게실이지 본래는 무 도회에 참가한 귀족 아가씨들의 낮잠장소이자 화장을 고치는 장소였다. 왕실 무도회에 초대받은 조슈아 일행은 무도회준비를 위해 배속된 시녀들에 의해 마 치 인형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특히 화장대까지 따로 배속 받은 조슈아와 안티 오페는 그 정도가 심하였다. 시녀들은 그녀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보일 수 있는 곳은 모두 한번씩은 다 듬었고, 처음 하는 화장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조슈아는 거울 속에서 거의 요사스 럽도록 아름답게 변해 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 의 몽롱해진 시선으로 아름다운 그녀를 치장해주고 있는 시녀들은, 조슈아를 꾸며주 는 것이 일생일대의 과업이라도 되는 듯,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때 오른 편 화장대에서 4인의 시녀들에게 둘러 쌓여 그녀와 같은 꼴을 당하고 있 던 안티오페가 길게 다듬어져 말려 올라간 속눈썹을 거울에 비춰 보며 나직이 중얼거 렸다. "화장은 정말 오랜만이네. 그럼 앞으로는 한 달에 한번은 이런걸 해야 하는 건가?" "도대체 당신은 전에 어떤 생활을 해왔던 거예요. 가만히 보면 상당히 이런 일들에 익숙한 것 같은데." 조슈아가 이 성에 들어온 이례 가장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안티오페는 생각해보는 기색도 없이 얼굴을 거울에 요리조리 비춰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하였 다. "전에 같이 살던 남자가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어. 어딘가에 다녀온다 싶으면 옷가지 나, 화장품, 보석 같은 것들을 잔뜩 들고 왔었지. 나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 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어. 뭐, 숲에 난 불로 다 잃기는 했었지만……." 그 같이 살던 남자라는 것이 마아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조슈아는 등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안티오페가 마아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인 것이다. 만약 그 랬었다면 궁전전체가 뒤집힐 정도의 소동이 벌어 졌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이제는 그의 기억으로 그렇게 괴롭지는 않은지, 자연스럽게 그의 일을 입에 담는 그녀의 태도 에 안도하기도 하는 조슈아 였다. 빰빠라라∼. 빰빠빠∼. 왕실무도회의 개최를 알리는 요란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미 무도회장의 대기 플로어에는 후작이상의 귀족들과 대신들, 고급기사, 그들의 아 내들과 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성의 규모에 맞지 않게 이 무도회장은 그야말로 호화찬란하였다. 남방의 옥석(玉石) 으로 만든 거대한 기둥이 정사각형의 무도회장의 네 방위에 위치하여 아치형의 대리 석 천장을 받치고있었는데, 천장의 중앙에 달린 화려한 샹제리에의 은은한 조명이 옥 석 기둥에 반사되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무도회장의 중앙에는 황금으로 도금한 거대한 마루가 있었는데, 벽 쪽의 테이블 구역 과 확실히 구분이 되어, 춤 상대가 없는 불행한 남녀들이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개탄 하며 포도주를 홀짝일수 있게 되어있다. "국왕 폐하께서 납십니다." 시종장의 고함소리와 함께 곧, 왕실 전용의 중앙통로를 통해 국왕과 그의 딸, 마리 안 공주가 들어왔고, 그 뒤로 대공과 그의 세 아들들이 따라 들어왔다. 대공의 세 아들들은 20∼30대의 청년들로 모두 아내를 대동하고 있었는데, 현 국왕 인 레온 에게는 후계자가 없는 듯 했다. 아마도 올해 18세가 되는 마리안 공주를 차지 하는 자가 국왕이 되거나, 대공의 아들 중 하나가 후계자가 될 것이 분명하였다. "조슈아와 안티오페는 아직 인가?"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들부터 찾는 주책 맞은 노 국왕이었다. 본래 대로라면 왕실 무도회에 국왕보다 늦게 나타나는 자는 엄벌을 받는 것이 관례이 지만, 국왕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는 듯, 자신에게 예를 표하는 무도회장의 인물 들을 쓸어 보고 있었다. "오오∼." 그때 무도회장의 입구에서 그녀들이 무도회장에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감탄 성이 들려 왔다. 현재 이 궁전에서 저런 식의 감탄 성을 유도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슈아 와 안티오페 두 여인 뿐 인 것이다. 국왕은 체통도 잊고 목을 쭈욱 빼어 무도회장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무도회장의 입구 에 서있던 사람들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두 여인. "허억∼." "아버님∼." 심장이 멎을 뻔한 국왕이 비틀거리자 마리안 공주가 얼른 달려와 부축하였다. 그러 나 왕실 가족 누구도 국왕의 용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대공을 비롯하여, 각각 아내를 데려온 그의 세 아들들의 심장에도 이미 뽑는 것이 불 가능한 매혹의 화살이 박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아내들까지 감히 질투하지 못 하고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 상황인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조슈아는 자신을 태워버릴 듯한 따가운 시선에 거의 죽을 맛이었다. 그녀는 낮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싶었지만, 국왕이 손수 골라 보내었다는 드레 스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취미와는 거리가 먼 빨간색 드레스를 처음 받아 보 았을 때 그 얼마나 놀랐었던가? 다행히 그녀가 닭살이 돋도록 싫어하는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소녀 풍의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빨간색 드레스는 차라리 그런 것이 낫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을 품 게 만들었다. 먼저, 풍성한 치마의 상단 쪽은 약간 두툼하게 말려 올라가 횡으로 주름이 잡혀 있었 고, 허벅지 아래는 종으로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워낙 잘록한 허리를 가진 그녀인지 라 풍성하게 부풀린 엉덩이 부위의 치마 상단은 설명하기 곤란한 지경의 묘한 분위기 를 연출하였다. 유려한 허리선을 강조하기 위해 가슴 선 바로 아래까지 약간 조여지도록 재단된 덕 에 목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한 비단 조끼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밀려 위로 치켜지 는 형태로 조끼 밑으로 옅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는데, 차라리 속옷을 입고 있는 것 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나마 긴 황금빛 머 리카락을 귀 뒤로 다듬어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덕에, 하얗게 드러난 등과 어깨를 어 느 정도 가릴 수 있는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이 사람들 여자를 처음 보나? 도대체 저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가진 것은 언제나 그리 커 보이지 않는 법이다. 조슈아는 언제나 익숙하게 봐 왔던 자신의 미모가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 감히 상상 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르륵―. 그때 드레스를 살짝 끌며 안티오페가 조슈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꾸미는 동안 계속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슈아는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훔쳐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우∼. 안티오페가 만약 인간이고, 내가 본래의 몸이었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녀 에게 청혼했을 거야.' 대륙 최고의 부국의 왕자로서 자신을 유혹하려던 수많은 미소녀들을 접해본 그녀였지 만, 지금의 안티오페와 감히 비교가 될 만한 상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워낙에 아 름다운 모친과 누이동생을 가지고 있던 그녀인지라 어지간해서는 눈에 차지 않는 것 이 당연했겠지만, 안티오페에게서는 단순히 아름답다는 것 외에도 설명할 수 없는 다 른 미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마도 오랜 연륜과 육체가 노쇠하지 않는 덕에 미모에 대 한 강박관념이 없는 것이, 그녀에게서 미녀 특유의 미묘한 긴장감을 지워버려, 그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안티오페도 조슈아와 같이 낮에 입었던 것과 달리 훨씬 화려한 흰색 드레스를 선물 받아 입고 있었는데, 궁시렁거리는 조슈아 와는 달리 그 옷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눈 치였다. 조슈아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도발적인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무엇보다 안티오페의 분위기와 너무 대조되는 옷 배합이 싫었다. 마치 안티오페는 정비, 자신 은 귀비 같은 느낌이 아닌가? 안티오페의 순백의 드레스의 치마에는 주름이 없고, 치마 끝에 비단 레이스가 달려 살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바느질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치마 끝에서 허리 부분까지 어디 한군 데 바느질 자국이 없었고, 어깨와 목이 깊게 파인 장식 없는 드레스 상단은 그녀의 있 는 그대로의 모습을 강조하며 창백한 피부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러나 정말로 귀여 운 것은 어깨에서 마치 투명한 리본처럼 반짝이고 있는 두 장의 날개였다. 아무리 훌 륭한 재단사라 해도 그녀의 날개 같은 멋진 리본을 만들어 붙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단정하게 땋아 내린 초록색 머리칼과 날개가 스쳐 듣기 좋은 마찰음을 만들어내었다. 다만 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난 풍만한 가슴이 문제였지만, 조슈아는 물론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가 조끼 같은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가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때 장내의 흥분된 분위기를 가르며 우렁찬 노기사장의 목소리라 들려왔다. "용병대장 조슈아, 요정족 여왕 안티오페는 앞으로 나오시오." 조슈아와 안티오페는 그녀들의 뒤에서 긴장으로 얼어 붙어있는 동료들을 한번 돌아보 고는 천천히 무도회장의 황금마루를 가로질러 옥좌로 나아갔다. "으흠∼. 잘 와 주었소. 조슈아. 안티오페.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구려." 국왕이 입 꼬리가 귀에 닫을 정도로 히죽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조슈아는 속으로 이 를 갈았다. '저 노인이 직접 고른 옷이겠지? 어디 두고 보자! 같이 춤이라도 추자고 하면 발등 의 뼈를 밟아서 으깨 주마.' 그녀의 무시무시한 계획을 알리 없는 국왕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허허∼거리 더니, 손을 들어 올려 웅성거리는 군중을 진정시켰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발표하오. 요정 족의 여왕 안티오페는 이번 전쟁에서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하여 시돈의 백성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단 맥 된 루아드 가문 의 백작부인으로 봉하겠소. 계승자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바리 남부 숲을 경계로 국경까지의 땅을 주겠소. 비록 영지는 좁지만 바리성은 언제나 그대의 방문을 환영할거요." "우와∼." 단번에 이 극미(極美)의 요정 여왕에게 반해버린 귀족들이 손뼉을 치며, 그녀가 시돈 의 대 귀족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였다. 그녀와 동료들은 눈치 채고 있지 못하였지 만, 그녀가 잊게 된 루아드 백작 가는 비록 지금은 단 맥 되었지만 한때는 시돈에서 왕가 다음가는 세도를 누렸던 유서 깊은 가문이었던 것이다. 정식 백작이 아니고 백작 부인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지만, 거의 영원의 시간을 가진 그녀에게 그런 것은 문제 가 아니었다. 후계자가 필요 없는 만큼, 백작부인의 칭호만으로도 영주로서 운신하기 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앞으로 그녀가 살아갈 세월을 생각하면, 그녀가 귀족 사회 최고의 배분을 가지게 되 는 것은 결국 시간 문제였다. 인간 중에 누가 있어, 그녀 보다 장수하겠는가?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9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1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9 20001207 161 5 장편 "축하해요. 안티오페." 조슈아가 진심에서 우러나는 축하의 인사를 보내자. 잠시 두 눈을 깜박이던 안티오페 는 조용히 조슈아를 포옹하였다. 왼쪽 볼로 그녀의 차가운 체온을 느끼면서 조슈아는 이제는 백작부인이 된 요정 여왕 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은 아카바 왕실과도 영원한 친구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저뿐 아니고 저의 후손 들도 기억하고 사랑해 줘요. 여유가 생기면 잊지 말고 꼭 찾아오고요. 언제가 될지 모 르겠지만, 혹시 후계자라도 생기면 꼭 인사시켜 주세요." "그래. 고마워. 당신이나를 대려와 준 덕에 내 아이들은 이제 두려움에 떨며 살 필요 가 없어 졌어. 인간들과 잘 어울려 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노력할게. 그리고 언젠 가 나와 같은 아이를 낳게 되면 꼭 대리고 찾아 갈 테니 걱정하지마." 그때까지 조슈아가 살아 있기나 할지 모를 일이었지만, 안티오페는 그런 날이 꼭 오 리라 믿고 있는 듯 했다. 두 소녀가 다시 긴 포옹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국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용병대장 조슈아는 본인의 선택에 따라. 시돈 국적과 기사작위를 주고, 남작으로 봉 하겠소. 그리고 역시 원한다면 기사장의 프레드리 가문의 성을 주고 그 상속자가 될 수도 있소. 성에 머무는 동안 심사숙고하기 바라오." "우와!" 이미 답이 나와있는지라,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그녀와 달리, 국왕의 말대로 결 정되었다고 착각하는 장내 백 여명의 귀족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조슈아는 나중에야 어떻든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그녀의 태도를 곡해 한 국왕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무도회의 시작을 선언하였다. "자! 궁정악단은 연주를 시작하라. 무도회를 시작하겠소."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고 국왕이 마리안 공주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자 조슈아와 안티오페는 가볍게 절을 하고 물러났다. "하하∼. 아가씨 첫 춤을 나와 추는 영광을 주시겠나?" 그때 물러 나는 조슈아의 등뒤에서 귀에 익은 노기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기사 장님." 부드러운 목소리로 춤을 청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돈의 기사장 이안 프레드리 였 다. 조슈아는 자신을 너무 예쁘게 봐주는 이 노 기사의 바램을 저버리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녀는 여하튼 아카바의 왕위 계승자인 것이다. "좋아요. 기사장님. 저와 춤춰요." 잠시 머뭇거리던 조슈아는 활짝 웃어 보이며 기사장의 손을 잡고 무대로 나아갔다. "저어∼. 저랑 추시겠습니까? 루아드 백작부인?" 그때 혼자 남은 안티오페에게 정중히 춤을 청하는 목소리가 있어, 기사장의 손을 잡 고 무대로 나아가던 조슈아가 돌아보았다.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스러워 감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용기 좋게 도 첫 댄스를 권한 자는 놀랍게도 멘디에타였다. 그는 깨끗하고 날렵해 보이는 갈색 무도 복을 차려 입고 깃털이 달린 모자까지 쓰고 와서 보기와 달리 의외로 멋쟁이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잠시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멘디테타를 올려다보던 안티오페는 곧 고개를 끄떡이고 앙증맞은 오른 손을 내밀었다. 멘디에타는 씨익∼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무대로 이끌었다. '헤에∼? 저 녀석이 안티오페에게 춤을 청해? 연인이 있는 것이 아니었나?' 대공으로부터 그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조슈아 였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기품 있는 몸 동작으로 안티오페를 무대 중앙으로 이끌어 한 손으 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티오페는 고개를 까웃 거리고 는 한 손 을 그의 손에 맞기고, 한 손은 그의 어깨에 얹고는 가볍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오오∼." 마치 한 쌍의 나비처럼 너무도 가볍게 무대를 누비고 다니는 멘디에타와 안티오페에 게 탄성이 쏟아졌다. '자…잘 추잖아?' 그저 돼는 대로 스텝을 밟고 있는 조슈아와 기사장과는 달리 너무도 우아한 그들에 게 조슈아 마저 놀라워하고 있었다. 기실 조슈아는 춤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워낙에 박자를 못 맞추는 기사장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춤을 출 수가 없었다. 덕분에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도회의 주인공은 이제 백작부인이 된 아름다운 요 정여왕과 성쇠기사단의 젊은 수장이 차지하게 되었다. "허허∼. 이제 나도 늙었구먼, 그럼 노인 내는 그만 쉬도록 할 터이니 좀더 즐기게 나." 젊었을 때라해도 별로 춤에 인연이 있었을 것 같지 않은 그였지만, 스스로 물러나 주 는 것은 정말 고마웠다. 사실 조슈아는 더 이상 여자로서 춤을 추고 싶지는 않았던 것 이다. 이미 초연해진 것 같았지만, 춤을 춰보니 현재 자신의 모습이 그 어느 때 보다 확실하게 인식되어 조금은 괴로웠다. '저 둘은 안 떨어지나? 아직도 추네?' 이제는 죽이 착착 맞아 새로운 스텝까지 만들어 가며, 시원스럽게 무대를 휘젓고 다 니는 안티오페와 멘디에타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젖는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잠시 숨을 고르며, 60대의 노인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피로한 기색 없이 연 속해서 3곡을 추고 있는 국왕과 그의 딸 마리안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창 즐길 나이인 18세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난 왕비를 대신해 전혀 불만 스러워 하지 않고 아버지와만 춤을 추는 그녀는 현모양처가 감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 다. 왕비가 없는 시돈에서 그녀는 실질적인 국모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잠시 흐믓 한 미소를 띄고 왕과 공주를 바라보던 조슈아는 그 현숙한 공주가 아 버지의 어깨 너머로 안티오페와 멘디에타가 멀리서 춤추는 것을 힐끔 훔쳐보며 살짝 아미를 찡그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에에?'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반복해서 같은 행동이 반복되자 감이 느린 그녀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아하∼! 멘디에타의 연인이 바로 저 공주 였구나.' 그렇다. 비록 숨기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였지만, 공주는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 다. '멘디에타, 의외로 능력 있네?' 빨리 장난을 그만 두고 자신의 연인을 기쁘게 해주기를 바라며 다시 눈을 돌린 조슈 아는 자신의 동료들을 찾아보았다. '어어? 다들 어디 있는 거지?' 한참을 둘러보아도 단 한 명의 동료도 찾을 수 없자, 당황한 조슈아가 인파를 해치 고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갔다. "저…저 아가씨 저와……." "아니, 제가 먼저……." 옥좌가 있는 계단 위에 서있던 그녀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귀족 청 년들이 자신의 파트너를 버려 두고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들을 떠다밀다 시피하며 하며 춤을 거부하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동료를 찾고 있어요. 춤이라면 나중에……." 혈기왕성한 청년 수십 명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누이동생이 에레나가 어째서 무도회만 끝나면 몸살에 걸리는 것인지 이제 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일행을 찾아 헤맨 조슈아는 무대 외곽 창문 가의 테이블 구역에, 마치 친남매 들처럼 한 대 뭉쳐 앉아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는 일행을 발견하였다. 9인의 100인 대장들은 이미 상당수가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졌고, 샤레셀은 자카엘 과 대작을 하고 있었는데 게드마의 대신관이 보았다면 당장에 파문을 시킬 만치 고혹 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누구의 술잔이 비었나 관찰하다가 술잔 이 비기가 무섭게 열심히 술을 따르는 에레크트라는 역시 타고난 술 시중꾼이었다. "아니 여기서 무엇 들 하는 거예요? 무도회에서 술판을 벌일 셈이에요?" 설마 자신의 동료들이 이런 자리에서 술이나 축내고 있으리라 상상도 못한 조슈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 쏘아 붙였다. 그러자 자르델이 억울하다는 투로 대답하였다. "저, 대장 아가씨. 우리 중에 이런 곳에서 추는 춤을 아는 놈은 하나도 없다구. 우리 가 무대에 나가기라도 하면 당장에 아가씨들이 비명을 지를걸?" "그래 조슈아. 나도 명색이 신녀 인데 남자와 춤을 출 수도 없고, 에레크트라는 어리 잖아. 나중에 천천히 배워도 늦지 않아." '그럼 술은 마셔도 된다는 말이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꼭꼭 눌러 참는 조슈아 였다.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가 춤을 추고 싶으면서도 꾹꾹 눌러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자신의 눈치를 보며 포도주를 홀짝이는 덩치 큰 100인 대장들을 둘러본 조슈아 는 그 들 중에 바알과 조르쥬가 빠져 있음을 발견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그는 어 디에도 없었다. 그때 그녀의 태도에서 의도하는 바를 읽은 에레크트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알 오빠라면 언니가 춤출 때부터 빠져나갔어요. 방으로 가서 잠이나 잔 다 던 데 요? '왕실 무도회 따위는 질색이야!'라고 했었어요. 그리고 조르쥬 오빠는 아예 여기 들어 올 때부터 뒤로 빠졌고요. 화장실 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자러 갔나봐 요." 그녀의 말에 조슈아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바알이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조르쥬가 왜? 호…혹시 어딘가 에서 둘이 싸우고 있 는 것 아니야?' 그러나 조슈아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럴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아무리 바보 같은 사 내들 이지만, 왕궁에서 싸움을 할만큼 분별이 없는 인물들은 아닌 것이다. "와아∼." 갑자기 무도회장이 떠나갈 듯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일행이 돌아보니 여전히 힘이 남아도는 국왕이 이번에는 안티오페를 안고 얼굴을 붉 게 물들이며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멘디에타와 마리안 공주가 귀엣말을 하 며 짝을 이루는 것이 보였다. 옷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노 국왕의 얼굴 뿐 아니 라 온몸이 붉게 물들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늘그막에 얻은 연상(으음∼)의 아리따운 백작부인에게 폭 빠진 국왕은 이미 꿈속에 서 꽃밭을 걷고 있는 듯 했다. 다행히 안티오페는 춤을 대단히 즐기는 것 같아, 국왕 의 핑크 빛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잠시 그들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던 조슈아는 다시 일행들을 돌아보고 장난스레 얼굴 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자! 나는 춤을 추기 싫지만, 여러분 중 하나라면 출 용의가 있어요. 누가 나설 레 요?" "푸웃∼." 그녀가 그런 제의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듯, 여기저기서 포도주의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조슈아는 양손을 허리에 얻고 마치 검 술 시합을 하려는 듯한 태도였고, 기가 질린 사내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마침내 조슈아는 실력행사에 나섰다. "일어나요, 자카엘. 음악이 흥겹지 않아요?" "에에에에∼?" 무언가 거부의 말을 하려 하였지만, 조슈아가 팔을 끌어안아 자리에서 끌어내자 숨 이 막힐 듯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자카엘 이었다. "허허∼. 저 친구가 춤을 춘다고? 대장 아가씨의 발등을 밟는다는데 10냥 걸지." 기뻐하는 것인지 두려워하는 것인지 파악이 불가능한 표정으로 조슈아 에게 끌려가 는 동료를 바라보며 자르델이 이죽거렸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동참의 목소리가 들여 왔다. "나는 발등 뼈를 부러트린 다는데 20냥." "나는 아가씨에게 얻어터진다는 데 50냥이다." "이봐! 이봐! 다들 그런 식이면 내기가 성립이 안 되잖아." 그때 용병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귀가로 흘리며 살짝 무도회장을 바라보던 샤레셀 은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뻗어 에레크트라의 팔을 낚아채 자리에서 일 어났다. "어…언니 왜?" "춤추는 거야, 에레크트라. 너도 이제 곧 정식으로 무도회에 데뷔해야 할 나이가 온 다구. 그 전에 언니가 조금 가르쳐 줄게. 자! 나가자!" "아아아∼. 용서해 주세요, 언니!" 도대체 뭘 용서해 달라는 걸까? 에레크트라는 왠지 신이 난 샤레셀에게 거의 질질 끌 려가다 시피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결국 냄새나는 사내들끼리 덩그렇게 모여 앉아있게 된 8인의 100인 대장은 한숨을 내 쉬며, 이제는 비싼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체력 좋은 조슈아가 자신들 모두와 춤을 춰주리라 마음먹은 것을 알리 없는 불행한 사내들은 아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마치 홀아비 모임이라고 쓰여져 있는 듯 한 음울한 기류를 방출하고 있었다. 밤은 길고, 조슈아는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다. 그들은 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리라. NEXT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10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2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4 화 용사들의 휴식 part 10 20001208 145 4 장편 7 가슴이 답답해 잠을 잘 수도, 쉴 수도 없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자신을 믿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이라 는 이름으로 배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방 침대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팔 베개를 하고 누운 바알은 눈도 깜박이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누가 나를 미쳤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 조슈아가 본래의 몸이 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소년이 된 모습을 상상해본 바알은 곧 몸을 부르르 떨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 어 그 영상을 지워 버렸다. '싫다!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계속 지금의 모습을 유 지한다고 해서, 과연 내가 그녀를 차지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언젠가는 나를 사랑해줄 까? 내가 하고 있는 짓을 알고 나를 경멸하지나 않을까? 그리고 혹시 나의 신분을 알 게되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지며 심사가 복잡해진 바알의 두 눈이 더욱 붉게 충 혈 되었다. 삐끄덕―. 큰 체격의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1인용 침대의 이음쇠 부분에서 마찰음이 들려 왔다. 바알은 침대 밑으로 손을 넣어 자신의 가죽 웃옷을 꺼내었다. 옷을 옷장에 걸지 않 고 침대 밑에 넣어 놓은 것은 그 안에 중요한 물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 라. 쓰윽―. 여기저기 피와 먼지가 말라붙어 오히려 남성적인 멋은 만들어 내는 가죽 보호대를 살 펴보던 바알은 그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여기 저기 보풀이 인 회색 주머니를 꺼내었 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그 안의 내용물을 천천히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아스나! 마석 아스나 였다. 바알의 손바닥 위에서 아미 색의 반사광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먹만한 호박은 틀림없 이 알본의 제식장에서 분실한 마석 아스나 였다. 그렇다면 그는 마석을 가지고 나와 서 조슈아를 속이고 있다는 말일까? 마석을 바라보는 바알은 자기 비하와 자기 연민의 이중의 의미를 담은 씁쓸한 미소 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는 나를 보려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이것을 가지 게 되어도 나는 그녀를 잃겠지? 나는 어찌 해야 될까?" 너무도 괴로운 사랑을 하고 있는 바알 이었다. 그는 결코 사랑하는 소녀가 소년이 되 어 버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원하고, 언젠가는 돌 아가야 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아카바의 왕위계승자가 아닌가? 바알은 자신의 사랑이 보답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 나 조르쥬 처럼 포기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를 이런 상태 로 잃고는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너를 잃는 다면 나는 폐인이 되고 말 거다, 조슈아! 아아∼. 차라리 그날 너를 만나 지 못했었다면……. 그러나 너를 만나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마치 눈앞에 그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처연한 목소리로 모순된 대사를 중얼거리는 바알이었다. 똑똑―. "허억∼!" 인기척도 없었는데 갑자기 울려 퍼지는 노크 고리에 기겁을 한 바알이 아스나를 얼 른 가죽 보호대 안주머니에 넣고 침대 밑에 숨겼다. 그리고 마치 나쁜 장난을 치다가 걸린 사내 아이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야! 자겠다고 했잖아!" "잠시 얼굴 좀 보자! 설마 이 시간에 졸려서 누워 있는 건 아니겠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의외로 조르쥬였다. 설마 그가 자신의 방을 찾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한 바알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살짝 얼굴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 다. "그래, 나간다. 기다려라." 비록 이제 연적은 아니었지만 그를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거북한 일이었다. 쏴아아―.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십 가닥의 물줄기가 달빛에 반사되어, 마치 달의 여신 의 눈물방울 인양 한 방울 한 방울 구별되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왕궁을 올려다보니, 높은 베란다 안쪽에서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행복한 웃음소리 그 리고 귀에 익숙지 않은 북방 풍의 춤곡이 들려 왔다. 이곳은 내궁과 외궁 정 중앙에 위치한 장미정원.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분수가 운 치를 더해주는 바리 성 최고의 쉼터 였다. 이 시간 정도 되면 무도회에서 눈이 맞은 선남선녀들 하나, 둘쯤은 산책을 빙자한 연 애놀음을 할만한 장소인데, 아직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무도회가 그만큼 재미있 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바알을 불러낸 조르쥬는 한쪽 다리를 분수대에 올려놓고 조금은 거북한 표정으로 어 떻게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가 무슨 어떤 종류 의 이야기를 늘어놓을지 잘 아는 바알은 덤덤한 표정으로 무도회장을 올려다보고 있었 다. 한참을 어색한 침묵으로 일관하던 조르쥬는 분수대에서 발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바알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네가 왕자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되었 는데 너는 계속 왕자님을 따라 다닐 생각이냐? 나도 너와 같은 가슴 아픈 경험을 했 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해야 하지 않겠나? 더 끌어 봐야 남는 것은 더욱더 짙어지는 절망감 뿐 일거다." 단숨에 생각하는 바를 다 읊고 바알의 반응을 살피는 조르쥬 였지만, 바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도회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자, 조금은 짜증난 목소리로 조르쥬가 소리쳤다. "그냥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며 갈 수 있는데 까지 질질 끌어볼 생각이냐? 그래. 왕자 님이 언제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실 수 있는 날이 언제 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렇 다해도 너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거냐? 도대체 무얼 바라……." "그녀가 다시는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누가 왕위 계승자가 되나?" "……?" 갑작스러운 바알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문 조르쥬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네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그럴 가능성은 적다. 아카바는 반드시 현자 의 돌을 찾아 낼 거야." "그건 네 생각이고, 아무튼 그녀가 본래의 몸이 되지 못하면 아카바의 왕위 계승자 는 누구냐?" 잠시 얼굴을 찡그리고 바알의 얼굴 표정을 읽던 조르쥬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바에는 여왕이 없다. 만약 왕자님께서 끝내 소녀의 몸으로 남으신다면 현 국왕 이신 바디메오 페하께서 재혼을 하셔서 왕자님을 얻으셔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 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복 동생이신 오드니 대공께서 물려받으시거나 그 후손이 되 겠지. 그러나 오드니 대공은 국왕 폐하와 연배가 비슷 하 신데다 역시 아들이 없으시 고 딸이 한 분계시지. 바로 샤레셀 님이시다. 그러니 굳이 다음 왕위 계승자를 꼽자 면 아마도……." 이야기가 거기 까지 진행되자 잠시 말을 끊고 얼굴을 찡그리는 조르쥬 였다. "아마도 에레나 공주 님의 아드님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성을 이어 야 하기 때문에 남편은 국내의 귀족 들 중 하나가 되겠지. 그리고 또 하나 조금은 기 분 나쁜 가능성도 있는데……." "뭐냐?" 조르쥬가 어울리지 않게 얼굴까지 붉히며 말끝을 흐리자 바알이 흥분한 목소리로 다 그쳤다. "와…왕자님이 누군가와 결혼하여 아드님을 낳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말할 것도 없 이 그 분이 왕위 계승서열 1위가 되지. 그러나 과연 왕자님이 그런 일을 하실 까? 나 는 그 분을 어릴 때부터 보아 와서 잘 안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본다. 결국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시면 아마도 평생 혼자 사시려 하실 거야." "처…처녀 귀신이 된다는 건가?" 처녀 귀신이라기에는 어패가 있었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결국 조슈아가 엄청난 심경의 변화가 있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남편을 구하지 않는 한, 그녀는 죽을 때까지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아니, 현 상황으로 보면 그것은 거의 틀림이 없어 보였다. "아아∼. 조슈아! 조슈아!" 바알이 머리를 짚으며 분수대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던 조르쥬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래서 너는 왕자님이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에 기대를 걸고 그 분 을 주위에서 모시며 기회를 보려는 것이었구나. 그러나 포기하거라. 나라고 그런 생각 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분은 결코 그러지 않으실 것이다. 차라리 그분을 가까 이서 모시려면 근위대에라도 들어오지 그러나? 너 정도의 실력이면 근위대에서도 손꼽 히는 정도일 텐데. 그것이 그 분을 지켜보지도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연적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 조르쥬 였지만, 바알은 이미 대답을 할 수 있는 정 신 상태가 아니었다. "와아아아∼!" 또 다시 무도회장에서 한바탕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분수대의 물소리를 들으며 침묵에 잠겨있는 두 사내의 마음에는 세찬 찬바람 이 일고 있었다. 8 "그럼 잘 자요. 모두들!" 조슈아가 9인의 100인 대장들에게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였다. "잘 자라. 대장 아가씨!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그…그래. 내 평생 최고의 밤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해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얼굴 가득 만족한 미소와 홍조를 떠올리 며 열심히 손을 흔드는 사내들이었다. 아마도 체력도 좋은 조슈아는 처음 마음먹은 대 로 그들 모두와 춤을 춰준 것이 분명하였다. 사내들이 연신 실실거리면서 손을 흔들며 자신들의 숙소로 통하는 복도로 사라지자 겨우 들뜬 한숨을 내쉬며 등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거의 파김치가 된 샤레셀과 에레크트라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두 소녀는 아마도 무도회 내내 쉬지 않고 춤 교습(?)을 했던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샤레셀, 그러게 좀 쉬면서 하라니까! 뭐가 그리도 신이 나서 15곡을 쉬지도 않고 춰 대는 거니? 에레크트라를 좀 봐봐! 창백해졌잖아!" 조슈아가 걱정된다는 듯 에레크트라의 볼에 손을 가져가자, 샤레셀이 가슴을 쓸어 내 리며 대답하였다. "에레크트라 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다 너 때문이야!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쉬지 않고 춤을 출 수 있니? 그것도 우리처럼 얌전 하 추는 것도 아니고 무대를 휘젓고 다 니면서 용병아저씨들 아홉 명, 국왕 폐하, 멘디에타, 대공 님, 대공 님의 세 아드님 들, 심지어 안티오페하고도 추었잖아! 다 너에게 휘말려서 이렇게 된 거라구!" "저는 괜찮아요. 언니. 정말 재미있었는걸요? 그리고 스텝이란 것도 많이 배웠고요." 에레크트라가 밝은 목소리로 부정하자 샤레셀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껴 안았다. "그랬니? 에레크트라? 이번 주에 두 번은 더 한다니까 그럼 또 열심히 추자!" "예! 언니!" 심각하게 춤바람에 빠져들고만 신녀와 제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이던 조슈아 는 갑자기 등뒤에서 나는 인기척에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납빛으로 물든 바알의 얼굴 이 시야에 들어 왔다. "아…아니, 바알. 그 얼굴은 뭐야? 배탈이라도 난 거야?" 자신의 고민은 전혀 모르는 듯한 조슈아의 밝은 얼굴을 내려다보던 바알은 세상이 끝 난 듯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그녀의 볼에 손을 가져갔다. "바알, 왜……?" 그의 그런 행동에 당황하였지만 분위기에 말려들어 손을 밀치지 못하고 그냥 볼을 내 맡기고만 조슈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알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쓰라린 감정이 여과 없이 전해져 오는 목소리로 입 을 열었다. "내일 아침 너에게 전해줄 중요한 물건과 이야기가 있어. 아침 식사 전에 내가 방으 로 찾아갈게." 바알은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 보고 있기 힘들 다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니,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응? 바알.' 그의 얼굴에서 너무도 극심한 고통의 감정을 읽어낸 조슈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 고 잔 경련을 일으키며 뛰어가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두 남녀 모두 잠을 자기는 그른 밤이리라. · · · 뚜벅―. 뚜벅―. 무도회장의 텅 빈 마루 위를 걸으며 자신의 구두소리가 만들어 내는 묘한 울림을 즐 기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무심한 눈빛으로 무도회장 옥좌 맞은 편의 거대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증명하듯 아직 여명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무도 회장 입구에서 또 하나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검은색 평상복을 입은 사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이 시간에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이 빈 무도회장을 찾아오리라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긴장하던 사내는 달빛에 비친 방문자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멘디에타. 당신도 잠이 안 오는 거요?" "허어∼. 당신도 여기에 계셨군요. 조르쥬 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내는 별다른 인사말 없이 나란히 무대 위에 서서 옥좌를 바라보 았다. 상아빛의 옥좌는 달빛을 받아 더 없이 청아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두 사내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단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눈을 고정시킬 곳을 찾 은 것이리라. 한참동안 이어진 영양가 없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멘디에타였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말들은 안하고 있지만 당신이 아카바의 근위대장이라는 것은 이 미 다들 알고 있어요. 일단 내궁에 들어오면 안에서는 감시하는 눈이 없어 이렇게 쉽 게 돌아다닐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장소에 타국의 기사가 혼자 서있는 것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중요한 장소? 무도회장이 중요장소라는 거요?" 조르쥬가 고개를 꺄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멘디에타는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밟고 있는 황금빛의 무대가 바로 마계의 문을 막은 봉인이기 때 문이지요." "그…그런 말도 안돼는……. 아니 그런 엄청난 것 위에다 무도회장을 만들었단 말이 오?" 너무도 기가 막힌 말에 말을 더듬는 조르쥬였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하루가 멀다하고 수백 명이 춤을 추어대는 장소에 봉인을 만들어 놓을 수가 있는가? "후후∼. 그러나 사실입니다. 너무나 눈에 띄는 장소라 오히려 아무도 예상하지 못 한 것이었지요. 대마법탐지결계도 이 무도회장 주위에만 처져 있습니다. 마아가나 기 르가스는 너무도 철저하게 방비가 되어 있는 알본에 이 것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지 요. 물론 가짜봉인을 만든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알본 성의 봉인의 효력은 사실 이 것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그것을 깨는 것은 훨씬 어렵게 만들어져 있지요. 마아가도 기르가스도 가짜를 가지고 100년이 넘게 시간 낭비를 한 겁니다." "허어∼." 시돈 인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조르쥬 였다. "그럼 우리 게드마 성에 있다던 그 천계의 문도 실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건 가?" "그렇지는 않아요. 게드마 성 어딘 가에는 분명히 이것과 같은 봉인이 있습니다. 왕 국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다만 마계의 문같이 철저히 보안이 되지 않은 것 은 일단 천계의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자가 없고, 어떤 협정이 맺어져 있기 때문이지 요." "협정이라면?"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드는 조르쥬 였다. 이런 기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 하는 멘디에타의 저의는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궁금증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멘디에타는 은근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륙의 최고 기밀을 속 삭여 주었다. "만약 한쪽의 봉인이 깨어지게 되면 균형을 위해 다른 한쪽도 깬다는 것이지요." "오오∼!" 이제야 이 모든 일의 전말이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신 족과 마족을 모시는 나라들이 1대1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팔메라 대륙에서 어느 한쪽의 문만이 열린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 전 쟁, 혹은 대 학살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국들은 1000년 전의 대 전쟁으로 신들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교훈을 깨달았고, 그 리하여 대 현자들의 합의하에 두 개의 문을 모두 막아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개 의 문은 눈에 보이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위치는 둘 다 신 족을 모시는 나라의 땅에 있었고, 마족을 모시는 나라들은 그것이 불안하여 언제나 시돈 땅을 주시하게 되 었다. 만약 신 족들을 모시는 왕국이 마족들의 봉인을 방어하며 신 족들만을 불러들인 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1000년간 그 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 대륙은 신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일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잠시 깊은 생각에 조르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이어갔다. "흠∼. 그래서 봉인의 위치를 왕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군. 그렇다면 시돈 왕국은 애를 먹었을 텐데. 이 바리 성은 디온과 아빌라, 이 마족을 모 시는 두 나라와 매우 가깝지 않소?" "그래서 마계의 문의 위치를 알본 성이라고 속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자신들의 국 경선과 가까운 곳에 마계의 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이 땅을 차지하고 자신들이 관리를 하고 싶어했겠지요. 그래서 눈속임을 위해 천도를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 에 속아넘어간 것은 왕국들만이 아니었지요." "휴우∼." 조르쥬는 자신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야사에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22년 인생에 처음으로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던 엄청난 대 마법사는 인간들 의 농간에 넘어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결계에 가두어지고 만 것이다. "쿠쿡∼." 갑자기 조르쥬가 무슨 재미있는 일이 떠올랐는지 허리를 숙이며 낮게 웃었다. 그러 자 의아한 표정으로 멘디에타가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습니까?" "하하∼. 그 기르가스라는 마법사를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말이오. 그가 나에게 한 협박에 거의 오줌을 지릴 뻔했었는데.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소." 그제야 멘디에타도 생각났다는 듯, 살짝 실소하였다. "아∼. 그렇지요. 안티오페 님을 다치게 한 당신을 꼭 손봐주겠다고 했었지요? 무사 해서 정말 다행이군요. 그런 마법사의 어깨를 부숴 놓고도 무사 하셨다니. 운도 좋으 시군 요." 한 동안 멘디에타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조르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는 기지개 를 켜며 몸을 돌렸다. "당신 덕에 이제 잠이 올지도 모르겠소. 좋은 이야기 고마……." 갑자기 조르쥬의 목소리가 끊기더니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눈이 치켜 떠 졌다. 그러자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낀 멘디에타가 의아한 듯 머리를 꺄우뚱거리 며 질문하였다. "왜 그러시지요?"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려 멘디에타를 바라보는 조르쥬의 얼굴 에는 놀랍게도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드러나 있었다. "다…당신이 어떻게 그걸 아는 거지? 당신은 그때 신전 지하에 있었잖아! 잘못해서 안티오페를 맞춘 이야기는 했지만, 아무도 내 화살이 마법사의 어깨를 꽤 뚫었던 것 은 이야기 해준 적이 없는데!" "아∼! 그건 말이지요." 푸욱―. 조르쥬는 잠시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왼쪽 가슴에 오른손 을 깊숙이 쑤셔 박은 멘디에티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조르쥬가 의식의 끈을 놓치기 전에 마지 막으로 떠올린 것은 오직 영원한 헌신을 맹세한 그의 어린 군주이자, 자신의 영혼보 다 더 사랑한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아∼. 알려야 하는데. 왕자…내 사랑을 피신 시켜야…….' 멘디에타의 손이 가슴에서 뽑혀져 나가자, 무도회장의 황금 마루로 검붉은 핏물이 분 수가 되어 쏟아져 내리며 조르쥬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최후까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하던 그의 눈동자는 서서히 빠져나가는 생명력과 함 께 그 안광도 파리하게 점멸 해갔다. 한 사람의 목숨을 너무도 쉽게 빼앗아 버린 멘디에타는 여성용의 흰색 손수건을 꺼내 어 피로 얼룩진 오른 손을 닦고는 조르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깨우쳐 주지 않았으면 잊을 뻔하였군요. 기르가스의 일이기는 하지만 당신과 의 약속은 지켜야겠지요. 이 멘디에타라는 친구의 기억 속에는 참으로 많은 비밀들이 담겨 있더군요. 덕분에 지난 수 백년간 내가 얼마나 바보짓을 해왔었는지를 알 수 있 었습니다. 당신이 눈치챈 덕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억울해 하지는 마 세요. 이제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인간들이 곧 당신을 뒤따를 테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멘디에타는 서서히 양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 위에 주홍빛 마법진을 만들었다. 파지직―. 그러자 황금빛 무대의 여기저기에서 파란 불꽃이 튀며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마법 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봉인의 반응을 확인한 멘디에타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낮 게 중얼거렸다. "후후∼. 이렇게 외부 공격에 약하니, 그런 가짜를 만들 수밖에 없었겠지. 그럼 이 제 곧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들이 닥 칠 테니. 싸움 준비를 해놔야 갰군." 휘이이―. 바람도 없는데 그의 옷소매가 부풀어오르더니 방안이 격하게 흔들리며 창문이 바깥으 로 깨어져 나갔다. 그리고 때를 같이하여 명부에서 들여오는 듯한 음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그의 주위에 수십 인의 고깔모자를 눌러쓴 마법사 복장의 사내들이 나타나 그를 둘러쌓다. 언 듯 보면 실재 사람 같지만 그들은 주홍빛 기류가 한 대 뭉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모두 하복부에 인장을 맺고 낮게 주문을 읊고 있었다. "이걸로 꽤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럼 오랜 세월 나를 바보로 만들었던 약해 빠진 봉인을 깨고, 튼튼한 봉인을 심어 볼까?" NEXT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1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3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1 20001209 140 3 장편 땡땡땡―. "뭐…뭐야! 갑자기!" 막 목욕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조슈아가 별안간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놀 라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샤레셀과 에레크트라는 이 시끄러운 종소리에도 깨 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밤을 세며 춤을 춘 덕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샤레셀과 에레크트라는 방에 들어오자 마자 목욕도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거의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콰아앙―. 쨍그랑―. "꺄아악∼!"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깨어날 것 같지 않던 그녀들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창문이 깨어져 나가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그때 조슈아에 이어 욕탕을 쓰고 있던 안티오페가 여기저기 비누 거품이 뭍은 채로 욕실에서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조슈아는 얼른 창문으로 달려가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화르륵―. "어어!?" 엄청난 수의 기사들이 횃불을 들고 내궁 북쪽을 향하여 뛰어가고 있었다. 국왕이 머 무는 궁전에서 그것도 이른 새벽에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은 궁전 내 전투를 의미 한다는 것을 조슈아는 잘 알고 있었다. 드드드―. 그때 외궁의 성문이 열리면서 완전 무장을 한 이안 기사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 관과 함께 뛰어 들어와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제 1 지급이다! 근위대, 외궁, 내궁, 신전의 모든 궁전 방어 기사단은 투계 장으로 집결하고, 내궁 안전 기사단은 무도회장으로 향하라! 봉화를 올려 항구의 유격기사단 과 항구 방위기사단, 성도 외곽에 나가있는 성쇠기사단 까지 모두 불러 들여라. 이것 은 칙명이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마라! 마법사들이 도착 할 때까지 적에게 2차 방어 결계를 만들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무…무슨 일이지?" 샤레셀이 조슈아의 옆으로 달려와 상기된 얼굴로 밖으로 내다보며 말하였다. 그러자 이런 일에 밝은 조슈아가 팽팽하게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무래도 어떤 적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도회장 주위를 점거 한 거야. 그 적이 강 대하기 때문에 내궁 안전기사단은 시간을 벌기 위해 죽음으로 적의 침전 진입을 저지 하러 가는 것이고, 확실한 전력이 모일 때까지 다른 기사단은 투계 장에서 기다리는 거지. 이것은 벌써 무도회장 주위의 근위조는 전멸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왕실 가족들 은 벌써 친위대에 의해 지하 통로로 빠져나가고 있을 거야!" "그…그렇게나?" "성밖의 기사단들까지 모두 불러들이고 있잖아! 궁전 내 전투의 특성 상, 일반 병사 는 소용이 없으니 각자 자리를 지키겠지만, 아마도 성밖의 모든 마법사와 신관들도 호 출될 거야! 이건 이미 총력전이야! 그 만큼 상대가 강하다는 거라구!" "도대체 그런 상대가 내궁에 진입할 때까지 아무도 모를 수 있을까?" 그때 아직도 여기저기 비누 거품을 묻힌 채인 안티오페가 그녀들의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어 밖의 상황을 바라보며 샤레셀의 질문에 답하였다. "저 노인이 적에게 2차 방어 결계를 만들 시간을 주지 말라고 했어! 그건 상대가 대 단한 마법사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군. 아무래도 바로 내궁에서 일 을 저지른 것을 보면, 내부 인물이 저지른 일 같은데, 궁성 안에서 결계를 쳐 놓고 소 강 전을 해? 기습을 하려했다면 침전을 먼저 노렸어야지!" 그녀의 정확한 지적에 조슈아와 샤레셀이 감탄을 넘어 경이의 시선을 보내었다. "아니, 안티오페 그런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인간의 전술이나 학문을 배운 적이 있 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살아 왔다고 생각해? 당신들의 전략 전술이라는 건 그 생성 시기부터 직접 보아 왔고, 수 백 번의 전쟁을 직접 보았어. 그리고 책이라면 질리도록 보았었다 구. 쓸모 없는 것이 대부분 이었지만, 마아가가 가지고 있던 책들 중에는 이런 일에 관한 것도 있더군." 조슈아의 질문에 그 내력을 알 수 없는 요정 여왕은 덤덤하게 대답하였다. 콰아앙―. 그때 갑자기 방문이 부서질 듯 열리더니 바알과 9인의 백인대장들이 황급히 뛰어 들 어 왔다. "조슈아! 전쟁이다! 궁전 내에서 전쟁이래!" 용병인 바알은 무언가 신이 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사내들이 노크도 없이 숙녀 의 방에 뛰어들 때는 무언가 목적이 있는 법. 9인의 100인 대장들은 기대치를 훨씬 웃 도는 엄청난 광경에 할말을 잊고 말았다. 나신의 안티오페가 왜 그렇게 시끄럽냐는 표정으로 자신들을 돌아보았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녀는 극미(極美)의 나신을 가릴 생각은 않고 양손을 허 리에 얹은 자세로 흰자위 없는 초록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있었다. "우오∼!" 신음소리인지 탄성인지 모를 의미불명의 합창을 하는 사내들을 돌아보며 조슈아가 소 리쳤다. "달아날 것이 아니면, 빨리 투계 장으로 가세요. 절대로 단독으로 무도회장에 가면 안돼요. 꼭 기사단과 함께 행동해요. 우리도 곧 갈 깨요." "기…기다렸다. 같이 가면 안될까?" 이제는 거의 몽롱해진 눈빛으로 천천히 비누거품을 닦고 있는 요정여왕을 바라보던 자르델이 중얼거렸다. "뭘 보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당신들의 10대 조상들보다도 나이가 많다고요! 빨리 가세요." 조슈아가 야멸 차게 쏘아붙이자 할 수 없다는 듯, 끝가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뒷걸음 질 쳐 방을 나서는 사내들이었다. 그들이 완전히 나가는 것을 확인한 조슈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다시 안티오 페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당신도 이제 자주 궁전 생활을 하게 될 텐데 좀 자제하세요, 안티오페. 누가 보면 최소한 가리는 척이라도 해야지요." 그러나 안티오페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슈아를 돌아보며 무슨 바보 같은 말이냐는 듯 한 말투로 대답하였다. "보고 싶어하는 걸 보여 주는 게 왜 나빠? 내 몸은 인간의 기준으로도 매우 예쁘다 고 했었단 말이야! 누구라도 예쁜걸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마아가가 말했었어." "허억∼." 세 명의 소녀가 그녀의 말에 헛 바람을 들이 켰다. 조슈아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레온 국왕은 안티오페 때문에 심장병으로 오래 못 살겠군. 어쩌면 앞으로 의 시돈 국왕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지나치게 앞서가는 예상이었지만,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였다. 앞으로 이 나라에 태어날 왕자들이 어릴 때부터 현세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아름답 고 독특한 요정 백작 부인의 매력을 계속 접하며 자라나서 과연 평범한 인간의 소녀 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엄청난 미소녀도 그녀 앞에서는 평범하게 보이고 마는 데 말이다. 상황에 맞지 않게 시돈 왕실의 암담한(?) 미래를 상상하던 조슈아는 곧 현실로 돌아 와, 옷장에서 잽싸게 파란색 평상복을 찾아 입고 그 위에 가벼운 가죽 보호대를 걸쳤 다. 그리고는 성검 말고스는 허리에 차며 소리쳤다. "샤레셀! 같이 가자 이런 전투 상황에는 좀 그렇지만 후방 지원에는 네 힘이 도움이 될 거야. 퓨어리스도 그만 침대에서 나와 너는 춤추러도 안왔었잖아. 에레크트라는 지 금 같이 어수선하면 성밖도 위험하니까. 여기에 남아 있거라. 언니들이 곧 돌아올게. 그리고 안티오페는 제발 옷 좀 입어주세요. 그래야 같이 갈 수 있지요." 그러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지못해 옷장을 열고 무도회장에서 입었던 흰색 드레스 에 손을 가져가는 안티오페!!! "그것 말고 욧!" 조슈아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하여 소리치자, 안티오페는 한숨을 내쉬며 결국 구석에 있는 하늘색 평상복을 꺼내었다. 전투 개시 전부터 티격태격 거리며 불안한 출발을 보인 조슈아 일행은 바알 일행이 떠난 지 10여분 이 지나서야 겨우 방을 나설 수가 있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에레크트라는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언니들이 그저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오기만을 빌며 침대 위 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NEXT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2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4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2 20001210 131 6 장편 2 "안전 기사단 전멸! 적의 '환영(幻影) 마법사'가 증가합니다! 마법사의 지원이 없으 면 성전 기사단은 내전 입구까지 밀려나게 됩니다." "국왕 폐하 이하 왕실가족 전원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마을의 성전에서 전서구가 왔 습니다." "좋아! 친위대는 원무궁을 통해 무도회장으로 통하는 길을 사수한다. 그곳에 통로를 확보 해놔야 시간을 벌 수 있다. 유격기사단은 입구에서부터 정면 돌파하라! 마법사들 이 도착할 때까지 압박을 그쳐서는 안 된다! 마법사들과 신관들의 지원이 도착하면 우 리도 나아간다. 목숨을 아끼지 마라! 놈도 2차 결계를 만들지 못하면 방어에 힘이 부 칠 것이다. 틀림없이……!" 조슈아 일행이 외궁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투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투는 극에 달해 있었고, 바알 과 백인 대장들은 어디에 배속되었는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보통 궁전 내 전투는 기습이 실패하여 국왕이 탈출하게 되면 그 시점에서 전투는 끝 나고 적 잔당은 도망치다 각계 격파를 당하는 것이 순서인 법인데, 오늘의 전투는 그 양상이 전혀 달랐다. 적은 오히려 세력을 강화하고 도망 갈 곳도 없는 궁성에서 소강 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안에서 무얼 하는 거야? 상대는 몇이고?" 조슈아가 사색이 되어 뛰어 다니는 소년 사관을 붙들고 소리쳤다. "자…잘은 모르지만 무도회장에서 누군가 환영 마법사를 부려 기사단의 진입을 막고 있데요. 바리 내에는 지금 그리 많은 기사단이 없어요. 대부분 북부나 도시 외곽에 있 다고요. 환영 마법사를 상대할 때 마법사의 도움 없이는 사상자가 너무 큰 대 기사장 님은 계속 기사단을 밀어 넣고 있어요. 이…이건 미친 짓이에요.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거기에 이렇게 까지 해서 지켜야 할게 뭐가 있다고……." 숨을 헐떡이면 불만을 토로하던 소년 사관은 곧 그녀에게서 풀려나 양피지를 들고 투 계장 밖으로 뛰어 나갔다. 조슈아는 투계장 안쪽의 돌계단 위에서 지휘에 여념이 없는 기사장을 바라보며 샤레 셀에게 소리쳤다. "도대체 환영 마법사라는 게 뭐야? 내궁 안전 기사단이 그리 쉽게 당했다면 보통 놈 들이 아닐 텐데?" "환영 마법의 최고기술이야! 온갖 환영 술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환영 마법사는 가 장 처치하기 힘들어. 심장 부위의 겨우 주먹만한 핵을 정확히 가격하지 못하면 없앨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어. 놈들은 한 가지 씩 마법기술 밖에 쓰지 못하지만 수가 많다 면 그것은 문제가 안 되지!" 소년 사관의 말을 듣고 잠시 얼어 있던 샤레셀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 답하였다. "그렇게 굉장한 마법이라면 그렇게 장시간 쓸 수도 없을 텐데?"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던 퓨어리스가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며 지적 하였다. 그러자 이 곳에 도착해서부터 어째서인지 흥분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안티 오페가 샤레셀 대신 대답하였다. "그것은 무도회장에 있는 자가 애초에 이 전투를 길게 끌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는 걸 꺼야!" "그럼 놈은 어차피 잡혀 죽을 것을 알고 그 전에 폭주라도 하고 있는 건가?" 조슈아는 그녀의 대답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샤레셀은 안티오페 의 말과 태도에서 무언가 눈치를 챈 듯 겁먹은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려 입을 가렸 다. "왜 그래 샤레셀?" "세…세상에 이제야 알겠어. 무도회장에 마계의 문이 있었던 거야!" "에에?" 두 소녀가 경악하고 있었으나 안티오페는 그저 가라앉은 눈빛으로 기사들의 움직임 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할 말을 잃고 굳어 있던 조슈아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상기된 얼굴로 소리 쳤다. "아니, 그럼 마족의 잔당이 또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분명히 기르가스는……." "그가 빠져 나왔을 거야. 아까부터 그가 방출하는 것과 같은 마력이 느껴지거든. " "허억!" 안티오페는 지나가는 말투로 한 이야기였지만 조슈아와 샤레셀, 퓨어리스의 놀라움 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처치했던 상대 이었던가? 이렇게 쉽게 그 가 풀려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고 있던 그녀들은 이제 놀라움이 점점 공포로 바뀌 어 가고 있었다. 전에 멘디에타가 한 말에 의하면 이 곳에 있는 봉인은 외부의 공격에는 매우 약하다 고 하지 않았던가? "오오∼. 아가씨들도 나왔군! 이쪽으로 들 오게!" 그때 계단 위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노 기사장이 그녀들을 발견하고 우렁찬 목소리 로 소리쳤다. 처처척―. 아기씨들∼이라는 말에 수백 명의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갑옷을 입은 체 고개를 돌리 면서 거창한 쇳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봐요. 할아버지. 지금은 전쟁중이라고요. 아가씨가 뭐예요? 아가씨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불만의 말을 겨우 삼키고 사내들의 뜨거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기사장에게로 다가가는 조슈아였다. 조슈아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평소의 여유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노 기사장이 정색 을 하며 소리쳤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기사들은 아직 정확한 상황을 모른다네. 그러나 자네들은 이미 어떤 상황인지 예상하고 있으리라 믿네. 방금 전투에서 돌아온 자네들에게 할말은 아 니지만 어차피 이기지 못하면 어느 누구 하나 살아 남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네. 그러나 자네들 정도의 실력자들에게 지금 상황에서 우리 기사단과 같이 행동하라 고는 할 수 없고, 한가지 부탁을 한다면 방법은 자유 내만 어떡하든 무도회장 까지의 길을 열어주게. 어느 하나의 진입로라도 확보되고 기사단과 마법사의 증원이 오면 제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견딜 수 없을 거야. 잘 부탁하네." "저의 다른 동료들은 그럼 모두 무도회장으로 향하고 있나요?" 단숨에 자신이 할말만 다하고 재차 손을 흔들며 기사단을 지휘하는 노 기사장에게 조 슈아가 소리쳤다. 그러자 기사장은 쳐다보지도 안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알 수 없네. 정문으로 들어간 선발대에 섞여 들어갔는데, 그곳 상황이 아직 접수가 안 되고 있어. 그들은 몰라도 기사단은 거의 전멸했을 거네." '저…전멸?' 기가 막힌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기사장이었다. 조슈아는 더 이야기 할 것도 없다는 듯한 얼굴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였다. "조…조슈아 어디로 가려는 거야?" 퓨어리스가 갑작스레 뛰기 시작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질문을 던지자, 조슈아가 격 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바보들이 선발대를 따라 갔다잖아! 이런 궁전 내 전투에서 선발대는 죽음으로 적 이 넓은 구역으로의 진출하는 것을 막아 후발대가 전력을 강화할 시간을 버는 거라 구! 그 바보 자식들 그런 기초 중에 기초를……!" 3 "헉헉∼" 바알은 평생 이런 낭패를 당한 기억이 없었다. 전에 조슈아와 했던 것 같은 여행도 아니고, 제대로 진용을 갖춘 상태에서의 전투에 서 이런 식의 일방적인 전개는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벽에 어깨를 기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바알은 핏발선 눈으로 등뒤를 돌아보았다. "으으∼!" 그리 큰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역전의 용사인 그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세어 나왔다. 이곳은 내전의 중앙 홀로 통하는 너른 복도, 내전입구에서 상당히 안쪽에 위치한 곳 이었다. 이런 곳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목숨을 건 강행 진입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 었다. 어두운 복도 안에서 바알이 볼 수 있는 거리까지의 바닥에는 온통 처참히 찢겨 지거 나 타다만 시체들뿐이었던 것이다. 바알과 9인의 100인 대장들은 궁전 내에서 설마 이런 식의 전투 양상이 벌어지리라고 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내란의 진압정도로 생각하고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선발대를 따라 뛰어 들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 그 자체 였 다. 슈우우―. "또 온다!" 어둠 속에서 자카엘의 터질 듯이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 부분이다. 다른 곳은 어떻게 공격해도 전혀 벤 느낌도 없는 괴물들이다. 화염 에서부터 독무까지 벼라 별 마법을 쓰는 놈들이 섞여 있다. 알아서 피해라." 바알이 몇이나 살아 남았는지 알 수 없는 동료들에게 소용없는 주의의 말을 던지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화르르르―. 그때 어둠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날린 바알의 얼굴을 향해, 용 의 혓바닥 같은 새빨간 불꽃이 날아 왔다. "이…번 놈은 화염 마법이다. 한 군대 붙어 있지 마라!" 바알이 급격히 몸을 틀어 바닥에 몸을 굴리며 소리쳤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크아아악∼." 어둠 속에서 누군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온몸에 불이 붙은 사내가 바닥을 뒹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겨우 몸을 일으킨 바알이 불이 붙은 사내 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몇몇 정신나간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그 녀석에게서 떨어져라. 놈도 우리를 보지 못하고 그냥 대충 쏘아 대는 거야! 그 녀석 주위에 있으면 표적이 된다." 화르륵―. 또다시 소리를 지르는 바알을 향해 화염이 날아 왔다. 그러나 바알은 기다렸다는 듯 한 표정으로 몸을 숙여 화염 밑으로 낮게 몸을 날렸다. "죽어랏!" 별로 독창적이지 못한 대사를 기합 삼아 화염이 나오는 위치의 상단 왼쪽을 정확히 찔러 가는 역전의 용사 바알! "카아아아∼!" "또 하나 잡았다!" 듣기 거북한 적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바알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여태껏 이 어둠 속에서 이런 식으로 상당히 많은 적을 홀로 처치해 온 듯, 꽤 익숙 한 손 놀림이었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그저 위험한 곡예일 뿐이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과 경험의 소유자라 해도 이런 식으로 계속 적을 쓰러뜨리 는 것은 불가능한 일, 결국 지쳐서 집중력을 잃기만 하면 한번의 실수로 바로 목숨을 읽게 되는 것이다. 슈우우우―. "또 왔다!" 또 다시 어둠 속에서 긴장한 자카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까의 공격을 용케도 피 한 것이리라. '도대체 저 놈은 죽지도 않는 군! 그런데 아까 중앙복도에서 갈라진 놈들은 다들 무 사할까?' 앞으로 나서지는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계속 따라오는 자카엘이 밉살스러운 지 가볍게 이를 가는 바알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누가 더 현명한 용병인 걸까? 슈우우우―. 바알은 새로운 적이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독특한 음향을 따라 검을 고쳐 잡고 조금 씩 앞으로 나아갔다. '놈이 공격을 해오면 그 위치를 잡아 심장부위를 날려 버리면 되는 것이다. 긴장할 것 없다. 놈의 공격은 언제나 하복부 중앙에서 날아온다. 이 놈들 키는 다 똑같고 결 국 공격이 나오는 그 위치만 잡으면…….' 파앗―. 갑자기 바알의 상념을 깨며 그의 오른쪽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물체가 있었다. "아악∼!" 그리고 뒤이어 그의 등뒤에서 갑옷을 부숴 버리는 시원한 격타음과 함께 또 하나의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뭐…뭐였지?" 바알이 무언가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오른쪽 볼로 손을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그 는 적의 공격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지금의 공격에서도 여전히 살아 남 아있는 자카엘이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얼음 화살이다. 이건 얼음 화살이야!" "허억∼!" 바알은 예기치 못한 돌발 사태에 헛 바람을 들이켰다. 이런 식이면 적의 위치를 잡는 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대강의 위치를 잡는다 해도 정 확히 심장을 가격 못하면 다음 공격에 그가 당하게 되는 것이다. 파앗―. 어둠 저편에서 또 하나의 얼음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알은 기겁을 하 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제는 섣불리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없게된 그는 뒤의 사내들과 함께 죽을 때까지 이리저리 피해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모두 엎드려요!" 그때 그들의 뒤편에서 전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앳된 소녀의 고함소리가 들여 왔다. 그러나 이미 소녀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 엎드려 있는 상황. 화아악―. 바알은 자신의 등뒤에서 파란 색의 불꽃이 날아오더니 그의 머리 위에서 멈추어 밝 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고 혼이 다 달아날 정도로 기겁하였다. 누가 쏘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파란 불꽃 덕에 바닥을 뒹굴고 있는 바알의 위치가 환히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든 바알은 자신의 이마를 향 해 정확히 날아오는 얼음의 화살을 발견하고 혼신을 힘을 다해 몸을 굴렸다. 파악∼! 쉬이이―. 얼음 화살은 바알의 오른 편으로 비껴가고 때를 같이하여 엄청난 속도로 그의 몸을 뛰어 넘어 적을 향해 몸을 날리는 인물이 있었다. 바알은 급히 몸을 굴리다가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인 영의 긴 금발머리를 언뜻 보았을 뿐이었다. 퍼어억―. "캬아아악∼." 시원한 격타음과 함께 괴물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의 심장을 정확히 가격한 것이리라. "우왓! 조슈아!" NEXT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3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5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3 20001211 124 5 장편 죽음의 문턱까지 날아갔다 순식간에 귀환한 바알이 사랑하는 여전사의 이름을 반갑 게 불렀다. 그러나 조슈아의 반응은 차가웠다. "도대체 당신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궁전 전투에서 선발대는 언제나 죽으 로 들어가는 거라구! 당신과 동료들은 바보 같이 그런 상식도……." 그녀의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하였다. 샤레셀이 시야 확보를 위해 만들어 놓은 밝 은 푸른색 불꽃 주위로 하나둘 모여드는 '죽으러 들러온' 선발대들이 모습을 드러내 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조슈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황급히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가 기 시작하였다. "조슈아! 같이가!" 처참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있던 샤레셀과 퓨어리스가 그녀의 뒤를 따랐고 안티오 페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들 위를 가볍게 날아 지친 몸을 복도 벽에 기대고 있는 기 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녀는 날개를 움직이기 편하도록 옷의 어깨 주위를 찢어 놓 은 상태였다. 겨우 몸을 일으킨 바알은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고 저만큼 앞서가던 조슈아를 따 라 잡았다. "조슈아! 이 전투의 목적을 아는 거야? 우리는 설마 이란 식의 전투 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러나 조슈아는 동료들이 걱정되어서 이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고 싸워온 기사들을 모욕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얼굴을 붉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 자 그녀의 뒤를 따라온 샤레셀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입을 열었다. "바알 씨 놀라지 마세요.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어요. 정체 불명의 적이 점거하 고 있는 곳에는 바로 그 마계의 문을 막은 봉인이 있어요." "허억∼!" 상상도 못한 전개에 바알과 자카엘이 사이 좋게 헛 바람을 들이 켰다. 자카엘은 온몸을 핏물에 담근 것 같은 상태 였는데 다행히(?) 그 중에 그의 피는 섞 여 있지 않고 모두 다른 기사들의 피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샤레셀이 뒤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자카엘 씨, 다른 사람들은 요? 서…설마 모두 당했나요?" 그제야 자신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원무궁으로의 길을 포기하고 정문으로 들어온 목적 을 깨달은 조슈아도 긴장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니야! 놈들은 궁전 전투에서 정면으로 들어가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중 앙 복도에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어. 많이 우회하는 길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지금쯤에는 무도회 아래층의 홀에 도착했겠지." 노련한 자카엘은 이미 궁전의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그때 샤레셀의 경천동지 할 말에 얼어 있던 바알이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잠깐! 그러고 보니 무도회장 아래층? 아니 어떻게 마계의 문을 봉인한 곳 이 건물 의 윗 층일 수가 있지? 그 밑의 공간은 그럼 뭐야? 그 좁은 공간 사이에 마계의 문이 있다는 거야?" "차원의 문이라는 건 그 주위에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소용돌이 같은 거예 요. 들어 갈 수도 나올 수도 있지만 아무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 차원의 형질을 가 진 자만 출입이 가능해요. 그래서 그런 그 문을 막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마법자장을 만들어서 그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려 평상의 공간처럼 만들어야 하는 거지요." "그…그게 무슨 말이지요. 알기 쉽게……." 샤레셀의 장황한 설명에 자카엘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였다. 그러자 헐떡이는 샤레 셀을 대신하여 우아한 날개 짓으로 그들의 머리 위를 날고 있던 안티오페가 대답하였 다. "차원의 문이라는 건 어떤 이유로 공간이 일그러져서 다른 차원과 연결된 소용돌이 야. 실제로 그 문 바깥이 바로 마계이거나 한 것은 아니지. 그러니 그 일그러진 공간 을 평소의 공간으로 만들면 마계의 문은 없어지게 되는 거야. 예를 든다면 수면 위에 파장이 일어 날 때 주위에 비슷한 파장이 또 생겨나면 둘 다 사라져 버리는 것과 비슷 한 거야." "아아∼!" 정말로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알과 자카엘은 감탄 성을 내며 고개를 끄떡였 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슈아가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간단한걸 왜 기르가스는 그렇게 고등기술인양 떠들어 덴 거지?" "그 기술 자체는 그렇게 고급기술이 아니야. 문제는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힘을 정확히 측정하는 거지. 인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니. 그 힘을 측정하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하지. 그 힘의 비율이 정확하지 않으면 마계의 문을 닫을 수가 없거 든." "그럼 마계의 문이라는 건 이 주위에 있을 뿐 그 봉인에 직접적으로 봉인되어 있다 는 것은 아니로군? 그렇다면 그 봉인을 한 자들도 인간의 힘만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 는 보기 힘들겠군." 과연 머리 좋은 조슈아는 안티오페가 알려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거의 정답에 근접 하고 있었다. "그래, 실재로 이 근처 어디에 마계의 문이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무도회장에 있는 봉인의 힘이 그 일그러진 공간을 중화시키고 있는 것이지.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런 정확한 계측이 불가능해. 내 생각에는 신족이나 마족 수준의 지식과 감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기술이지." 샤레셀이 친구의 영민 함에 놀랍다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를 긁적 이는 바알과 자카엘.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 세 내전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중앙 홀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의 복도에서는 마치 어미오리를 따라온 아기 오리들처럼 그들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여 왔다. 슈우우―. "우왓! 왔다." 또 다른 환영 마법사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기분 나쁜 음향에 거의 노이로제에 걸린 바알이 시끄럽게 소리쳤다. "샤레셀! 불꽃을 홀 공중으로 보내서 최대한으로 주위를 밝게 만들어 줘. 아무래도 후발대를 위해 싹 쓰러 줘야 갰어."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말투로 소리친 조슈아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 을 날리고 있었다. 조슈아가 대책 없이 달려나가는 동안 샤레셀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던 불꽃을 공중으 로 날려보내고 인장을 맺었던 오른손바닥을 활짝 폈다. 화아악―. 순간 푸른색 불꽃의 광도가 수십 배로 강화되면서 넓은 중앙 홀의 전경이 한눈에 들 어 왔다. "우와악!" 바알과 자카엘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밝아진 조명에 적응하기 위해 가늘게 뜬 그들의 두 눈에 홀 아래층 중앙에 마 치 유령처럼 떠있는 주홍색 마법사들의 군단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좁고 어두운 복도에서 감각만으로 상대하던 것 보다 오히려 더욱더 공포를 자아내는 상대였다. 그러나 언제나 기습을 좋아하는 조슈아는 상대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의 코앞까지 달려가 있었다. 파아악―. "캬아아악∼!" 경쾌한 파공성과 함께 한번에 환영 마법사 둘의 심장을 날려 버리는 조슈아 였다. 화르륵―. 쏴아아―. 당황한 환영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온 이 정신나간 소녀 검사의 행동에 당황하여 불꽃과 독무를 쏘아 대었지만, 상대가 보이기만 한다면 샤레타의 계 승자 조슈아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공격이었다. 게다가 적이 형체가 없는 이상, 공격만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빠르기만 갖추고 있으 면 오히려 그녀 같은 가벼운 몸 움직임이 특기인 검사에게는 더 없이 좋은 상대인 것 이다. 환영 마법사들의 마법 공격은 그녀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고 있었고, 조슈아는 보 는 사람이 신이 날 정도로 쉽게 그들을 헤치도 다니며 한번에 한 놈 씩 빠르게 처치 해 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만 두세요!" 바알이 조슈아의 활약에 고무되어 한발 나서자 샤레셀이 그를 저지하였다. "바알 씨의 실력을 잘 알지만 저 많은 환영 기사들을 상대로 저 안에 뛰어 들어 가 서 공격을 피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힘이라면 몰라도 바알 씨의 빠르기로는 저렇게 피 할 수 없어요. 지금 이 나라를 통틀어서 저런 식의 싸움을 할 수 있는 것은 조슈아 뿐 일거예요. 지금은 힘을 아끼세요." "으으음……." 가슴이 쓰라리긴 하였지만 그녀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한 놈 한 놈 곡예를 하듯 해치우는 것은 운이 좋아 가능했지만, 저런 식 의 연속 공격을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몸놀림으로 가볍게 피하는 조슈아 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 비해 부족한 무예의 소유자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한 두 번 피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공격은 엄두도 못 내고 결국 온몸에 마력을 뒤 집어쓰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바알은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화려한 금발 머리를 찰랑이며 엄청난 무위를 보여 주고 있는 사랑하는 여 전사를 바라보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얼마나 비참한가. 나는 사랑하는 소녀를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도움조차 되지 못 하는 구나.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자만심에 빠져 그쳤던 검의 수련을 다시 시작하여야 갰다. 비록 그녀를 뛰어 넘지 못한다 해도 도움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이 순간 너무도 분한 바알은 조슈아에게 마석을 전해주기로 마음먹은 일 따위는 까맣 게 잊고 있었다. 그가 마석을 돌려주면 다시는 조슈아는 그의 사랑하는 소녀가 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헉헉∼!" 그 사이 중앙 홀의 환영 마법사들을 모두 처치한 조슈아가 끊임없이 무리한 연결 동 작으로 검을 휘두른 후유증으로 숨을 헐떡이며 검을 의지해 주저앉았다. 아마도 그 짧 지 않은 시간 동안 단 한번도 호흡을 가다듬을 세가 없었던 것이리라. "조슈아!" 샤레셀이 달려가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얻고 체력 회복의 마법을 행하려고 하였지만 조 슈아는 손을 밀쳐 내며 거부하였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곧 본 진이 들 어 온다. 그들이 이런 것들을 상대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게 해서는 안돼. 어떻게든 길을 열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된다구." 조슈아는 다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지도 안고 중앙 계단을 뛰어 올 라 갔다. 바알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피가 나도록 입술 깨물려 샤레셀을 안아들고 그 녀의 뒤를 따랐다. "어맛!" 잠시 놀라는 듯 하던 샤레셀 이었지만 기실 그녀를 어떻게 따라 갈까 고민하고 있었 던 지라 거부하지는 않았다. 철컥 철컥―. 한참을 복도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이제는 마치 그들의 두목이 된 것 같 은 자카엘의 뒤를 따라 갑옷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뛰어 나왔다. 그러나 어째서 인지 안티오페는 그들 모두가 사라질 때 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 모두가 계단을 따라 올라가 거창한 철갑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무표 정한 얼굴로 거의 천장에서 바닥까지 닫는 거대한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몸을 날려 창문을 들리 받았다. 챙그랑―. 거대한 창문이 깨어지면서 엄청난 양의 유리 파편이 쏟아져 내렸지만 날렵한 그녀는 이미 저 밖까지 날아가 있었다. 홀 밖으로 나온 그녀는 한번 몸을 부르르 떨어 작은 유리 조각들을 털어 내고는 엄청난 속도로 상승하여 내전의 북쪽으로 향했다. 그 방향 은 이 모든 소동의 시발점인 무도회장이 있는 방향이었다. NEXT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4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6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4 20001211 124 4 장편 4 "후후∼. 지금이라도 멀리 도망가지 않고, 하나, 둘 기어올라오다니. 머리가 나쁜 놈 들이군. 하기야 지금부터 피해 봐야. 어디까지 가겠냐 만은!" 여유로운 자세로 뒷짐을 지고 서서 눈앞에 만들어진 마법진으로 밖의 상황을 보고 있 던 멘디에타가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발아래 황금빛의 무대는 계속 듣기 거북한 파열음을 내며 파란 불꽃을 일 으키고 있었는데, 딱히 어딘가 파손 된 것은 아니었지만 곧 부서지리라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파열음 사이로 엄청난 압력에 일그러지는 소리가 섞여 들려오 고 있었던 것이다. 위이잉―. 그때 가벼운 날개 짓 소리와 함께 깨어진 베란다의 창문을 통해 요정 여왕 안티오페 가 날아들어 왔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의미불명의 실소를 지어 보였을 뿐 별다른 반응 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앞에 내려선 안티오페는 상대가 멘디에타라는 것과 그 발치에 피의 연못을 만들 며 엎어져 있는 조르쥬를 발견하고도 조금도 놀라워하는 기색 없이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이 터졌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로 당신이었군. 어떻게 살아 남 았지?" 그녀는 멘디에타에게서 어느 정도 옛 연인의 남겨진 파편을 기대하였겠지만, 그는 기 르가스와는 전혀 달랐다. 멘디에타의 기억들이 마아가의 기억을 더욱더 희석시킨 것이 리라. "그런가? 요정! 후후∼. 내가 살아 남아 불만이겠지. 깜찍한 얼굴을 하고서는 잘도 나를 속였더군, 그곳에 가짜 봉인이 있음을 미리 알고도 너의 연인을 배신하다니. " "……." 잠시 안티오페의 무표정한 얼굴에 쓰라린 감정이 드러났지 만 곧 지워 졌다. 그녀는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불행한 아카바의 근위대장을 내려다보며 평상 심을 가장한 목소 리로 대답하였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게 놔둘 수 없었어. 그래 서……." "닥쳐라! 요정!" 파아악―. 갑자기 폭갈하며 멘디에타가 주홍빛 파이어 볼을 쏘아 냈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빠르 게 날아올라 가볍게 몸을 피했다. 콰아앙―. 파이어 볼은 무도회의 단단한 대리석 벽면을 파괴하더니 거창한 파괴 음을 내며 밖으 로 튀어 나갔다. 예전에 알본 성의 신전 제식장에서 그녀에게 했던 것 같은 공격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살기 가득한 파이어 볼이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죽이려 한 것이었다. "다…당신……." 안티오페가 공중에 뜬 상태에서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더욱 더 짙은 살기를 내 뿜을 뿐이었다. "당신? 후후∼ .내가 아직도 마아가 인줄로 아는 것이냐? 요정! 나는 너에게 복수심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괴롭히고 괴롭히다. 죽여주마." 파아악―. 멘디에타가 악을 쓰며 안티오페에게 양손을 뻗자 그 손에서 연속적으로 파이어 볼이 방출되었다. 위이잉―. 그러나 요정 여왕인 그녀가 피하고자 마음만 먹는 다면 무엇인들 못 피하겠는가? 안 티오페는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흉흉한 기세로 날아오는 파이어 볼들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조금씩 그에게로 다가갔다. 평소의 작은 몸으로 변하기만 하면 더 쉽게 피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지 않는 것은 아마도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리라. "쿳! 나를 공격 해볼 생각이냐?"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멘디에타가 비웃으며 한 손으로 파이어 볼을 방출하며 다른 한 손으로 이마에 인장을 맺으며 주문을 읊었다. "불꽃의 마신 기놈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의 적은 기놈의 적! 불꽃의 정령들이여. 나 의 적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태워버려라. 폭렬주박(爆裂呪剝)!" 화르르―. 그의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안티오페의 주위에서 지옥의 불 꽃 같은 마화(魔火)가 일 어나 그녀를 전 방위에서 압박해 왔다. 위이잉―. 그러나 안티오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온몸에서 초록색의 광채를 내며 그대로 붉은 불꽃의 벽에 몸을 부?여 갔다. 파아아악―. 다음 순간 안티오페는 믿어지지 않게도 샤레셀도 어쩌지 못했던 불꽃의 벽을 상처 하 나 입지 않고 뚫고 나왔다. 다만 끔찍한 화기에 입고 있던 옷이 모두 타서 가루가 되 어 흩어졌을 뿐, 그녀는 머리카락 한 올 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허어∼. 네가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가?" 멘디에타는 의외의 전개에 조금은 당황한 듯 하였지만 조금도 위축된 얼굴은 아니었 다. 그사이 적을 가두는데 실패한 폭렬주박(爆裂呪剝)은 대기 중에 흩어지고 어느새 멘디 에타의 코앞까지 날아간 안티오페는 초록색으로 빛나는 몸 그대로 육탄 공격을 행하였 다. 위이잉―. 슈아악―. 그러나 맨디에타는 간발의 차이로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엄청난 속도로 내리 꽃 이던 안티오페는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매며 제자 날아올랐다. 아무리 대마법사의 전생 (轉生)이 된 그였지만, 그런 속도로 날아오는 안티오페와 정면으로 부?였더라면 뼈 도 추리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이야 어떻든 그는 아직 인간의 몸인 것이다. 위이잉―. 요란하게 날개 짓을 하며 무도회의 천장까지 날아올라 언제든지 빠르게 움직일 수 있 는 태세를 갖추고 있는 안티오페는 과연 이 여인이 정말로 지금까지의 그녀인가 의심 이 갈 정도의 냉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 번 거렸다. 아마도 순간 이동을 한 멘디에 타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대비하는 것이리라. 파앗―. "죽어라! 요정!" 아니나 다를까? 별안간 안티오페의 등뒤에 나타난 멘디에타는 짙은 주홍빛의 마기(魔 氣)가 타오르는 주먹으로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다. 퍼어억―. 불의의 일격을 당한 안티오페가 한 움큼의 핏덩이를 토하며 실 끊어진 연처럼 떨어 져 내렸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파아앗―. 퍼어억―. 또 다시 순간이동을 한 멘디에타는 안티오페의 낙하지점에 나타나 떨어져 내리는 그 녀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올려쳤고, 그녀는 거의 십여 걸음을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콜록∼. 콜록∼." 괴로운 신음 성을 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기침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짙은 초록색 의 핏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내상의 심각함을 알려 주고있었다. 그러나 과연 무심 의 요정 여와 안티오페는 얼굴 하나 찡그리고 있지 않았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 일까? 아니면 참고 있는 것일까? 무리해서 참고 있는 것이라면 참고 있는 이유는 무엇 일까? 뚜벅∼. 뚜벅∼. 멘디에타는 바닥에 손을 짚고 힘겹게 앉아있는 안티오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이제 최후의 일격이면 그녀를 죽일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녀 앞에선 멘디에타는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정! 무슨 꿍꿍이냐. 내가 바보인줄 아느냐? 일부러 내가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하 고, 너는 피할 수 있는 데도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며 정통으로 공격을 당했다. 너는 설마 아직도 나에게서 마아가를 찾는 거냐? 그렇게 배신을 해놓고?" 안티오페는 대답은 하지 않고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야기를 할 때는 나를 봐라. 요정!" 멘디에타가 으르렁거리며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행하도록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안티오페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초록색 눈을 내리 깔며 그의 시선을 피하였다. "으음……." 뜻 모를 신음 소리를 내며 한참을 그녀의 얼굴을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멘 디에타는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조금씩 자신의 얼굴을 밀착시키며 음험한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다 요정! 왜 그런 짓을 했나? 어째서 마아가를 배신했지?" 자신이 마아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해온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 는 그였다. 안티오페는 그런 그의 눈을 올려다보며 두려움이 아닌 다른 어떤 감정으로 인해 격하 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배신은 누가 먼저 했지? 당신은 분명히 마계의 문을 열어서 다시 마신의 힘을 회복 하면 마신 델라베가 로서 정식으로 나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었어. 아내만 되어 준 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주겠다면서 거의 1 년여를 쫓아다니며 조르고 또 졸랐었잖아. 도대체 몇 년을 살아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내가 20살도 안 된 인간의 청년에게 그런 말을 듣고 승낙의 말을 하기 하기까지 얼마나 두렵고 부끄러웠 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당신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행한 수많은 살생도 나는 눈감 아 주었어. 당신이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당신을 말리지 않았지. 그래서 결국 당신을 잃고 말았잖아! 그후로 100년을 마치 1000 년처럼 슬픔과 후회 속에 살았어. 그런데 100년만에 겨우 부활해서 하는 이야기가 유 일신이 되어 이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겠다고? 내가 당신이 마신이라 사랑 했는 줄 알 아?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귀여워했었는지 잊은 거야? 나는 당신이라는 인간을 사랑 한 거야. 당신이 정말로 기르가스 같은 인간이었다면 나는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았어." 안티오페의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는 감정의 폭풍에 잠시 할말을 잃은 멘디에타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촉촉이 젖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 서는 이미 어떤 적의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거의 차 한잔 마실 시간동안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의 상처 입은 눈동자를 들여다보 고 있던 멘디에타는 무언가 갈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안티오페." 흠칫―. 그의 입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호칭이 흘러나오자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가볍게 몸을 떠는 안티오페 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멘디에타의 행동은 그녀를 더욱더 혼란의 늪 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아∼."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안티오페의 입술사이로 뜻을 알 수 없는 신음소리를 흘 러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멘디에타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차가운 입술을 삼킬 듯 덮 쳐왔다. 안티오페는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입술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기쁨의 감각에 자신을 맡겼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100년 전 잃고만 너무도 소중하고 가슴 아픈 꿈 을 되찾는 듯 했다. "쿡쿡쿡쿡∼."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그녀의 입술을 점령한 멘디에타의 입술사이로 세어 나오는 비 뚤어진 웃음소리로 인해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타악―. 맨디에타는 다음 순간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떼어 내듯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밀쳐내 며 그녀의 상처받은 영혼에 독기를 쏟아 내었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너는! 10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이 내가 또 넘어갈 뻔했어. 크크크∼. 그러나 나는 다르다. 멸종한 요정 족의 찌꺼기 따위에 빠져서 원대 한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는 없지. 우선 나의 기억에서 너를 지우기 위해 너와 관련 된 모든 것을 이 지상에서 깨끗이 파괴하여야 하겠다. 너의 아이들까지 말이야." 부르르―. 안티오페의 몸이 학질이라도 걸린 듯 심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멘디 에타의 두 눈동자는 더 없이 차갑기만 하였다. 파아악―. 다음 순간 멘디에타의 양손에서 소리 없이 뻗어 나온 무형의 강기가 안티오페의 양 쪽 어깨를 꽤 뚫어 그녀를 옥좌 위의 벽면에 박아 버렸다. "하악∼." 그제야 안티오페의 입에서 처음으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세어 나왔다.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 보았지만 이미 어깨와 날개를 통 채로 뚫고 들어간 눈 에 보이지 않는 물체가 두꺼운 벽면 깊은 곳까지 파고든지라 꼼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러나 그녀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절망감과 상실감 에 생명력을 잃은 두 눈으로 이제는 적이 되어 버린 옛 연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하하∼. 이제 곧 봉인을 깨고 나의 힘의 절반을 되찾으면 제일 먼저 네가 보는 앞에 서 너의 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 그리고 내 절반이 숨어 있는 금발의 아가씨를 흡수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 갰지." 마치 오래 전부터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살아있는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멘디에타가 이죽거렸다. 콰아아앙―. 그때 갑자기 엄청난 폭음과 함께 무도회장 입구 전체가 날아가며 은빛의 갑옷과 장창 을 든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일정한 진을 이루며 밀고 들어 왔다. 그런 그들의 뒤에 는 똑같은 붉은 옷을 걸친 수십 인의 마법사들이 간격을 두고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들 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주력이 기사들의 갑옷에 반응하여 청량한 느낌을 주는 은빛 광 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사들을 돌아보는 멘디에타의 얼굴표정에는 그저 비 웃음이 떠올라있을 뿐이었다. "훗∼! 생각 보다 빨리 왔다만……." 슈우우―. 그러나 그의 비웃음을 길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느긋하게 기사들을 공격에 대처하려던 멘디에타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 형용불가의 속 도로 날아드는 것을 느끼고 헛 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틀었다. 싸아악―. 그러나 거의 눈에 비치지도 않는 빠르기로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인영은 그 검풍 만으로 그의 이마에 벤 듯 한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크으∼. 조슈아 인가?" 멘디에타가 계단 위에 사 뿐이 내려앉은 금발 소녀에게 이를 갈며 소리쳤다. 만약 그가 멘디에타의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이었다면 이미 목을 꽤 뚫리고 말았 으리라. 그러나 기습에 실패한 조슈아는 멘디에타의 그것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경 악하고 있었다. "메…멘디에타? 당신이?" NEXT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5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7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5 20001212 126 5 장편 조슈아는 상대가 멘디에타라는 것에 경악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의 발치에서 피의 연못을 만들고 있는 조르쥬를 내려다보았다. "아아∼." 순간 조슈아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지며 믿기지 않는 현실에 강 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조르쥬가……." 파아악―. 그 사이 은빛의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장창을 앞세워 멘디에타에게 돌격해 왔다. "훗∼. 성기사단인가? 생각보다 빨리 소집하였다만 이미 늦었다." 비웃음인지 동정인지 알 수 없는 실소를 흘리며 멘디에타는 단전에 인장을 맺고 마법 진을 만들었다. 부오오―. 정면에 주홍빛의 선명한 마법진이 생겨나자 그는 그 위에 빠르게 주문을 읊었다. "살모나(Zalmonah)! 끝없이 어두운 자여! 피의 맹약을 지키라! 그대의 어두움에 영원 히 가두어 지는 고통을!" 싸아아―. "크아악∼." 은빛 갑옷의 성 기사단은 마법사들의 강화마법의 보호를 받고있었지만, 마치 땅을 순 식간에 부식시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자신들에게 뻗어 간 검은 그림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마치 바닥 없는 늪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수 십 인의 기사들이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그러자 기사단의 뒤에서 유일하게 황금갑옷을 입고 서서 멘디에타를 바라보며 경악하 고 있던 이안 기사장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성 기사단은 물러나라! 성 기사단은 방어 결계가 완성되기를 기다려라. 궁수 대는 마력이 모일 때까지 명령을 기다려라. 두려워하지 마라. 적의 공격 마법은 우리의 결 계까지 뻗어 오지는 못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마법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후위까지는 검은 그림자가 뻗어 나가 지 못하고있었다. 그 사이 성 기사단은 후방으로 빠져나가고 마법사의 뒤에 진을 치 고 있던 궁수대가 화살을 먹인 활을 들어 올렸다. 비이이잉―. 그들의 화살촉은 모두 은빛이었는데 마법사들의 주력에 반응하여 마치 불에 달군 것 같이 점점 밝은 붉은 빛을 띠어 갔다. 성 기사단과 함께 지금 이 자리의 모든 자들은 마법처리를 한 무기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조슈아! 비켜라!" 그때 아직도 조르쥬의 주검 앞에 얼어 있는 조슈아에게 바알이 소리쳤다. 그는 후위로 빠진 성기사단의 왼 편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서있었는데, 9인의 백인 대장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다른 길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리라. "발사!" 슈우욱―. 기사장이 검을 휘두르며 명령하자 수십 명의 궁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마력으로 붉게 달구어진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인장을 풀어 주력을 거두어들이고는 거의 코앞까지 나라온 화살들을 가볍게 피해 냈다. 파바박―. "안돼!" 조슈아가 화살을 피해 몸을 날리며 소리 쳤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궁사들의 화살 중 일부는 이미 바닥을 뒹굴고 있는 조르쥬의 시체에 꽂히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일부는 옥좌 위의 벽면에 매달려 있는 안티오페를 아슬아슬하게 빛나갔다. "제대로 쏘아라! 백작 부인까지 맞추려는 거냐!" 자신들의 공격이 너무도 쉽게 무마되자 궁사들이 당황하는 동안 기사장이 이를 갈았 다. "으으∼. 상대가 그저 마법사가 아닌 상급 기사의 몸을 가진 자라는 것을 잊고 있었 다. 마법사라면 몰라도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놈을 이런 느려 터진 마법도구공 격으로 쓰러뜨릴 수는 없지 않은가?" "우와아아∼!" 그때 기합인지 고통에 찬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조슈아가 재차 몸을 날 렸다. 조르쥬의 죽음이 그녀의 이성을 잃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마법사에게 뻔히 보이는 상태에서의 정면 공격은 의미가 없는 것이 다. 파아악―. "흐읍∼!" 멘디에타가 날린 주홍빛의 파이어 볼을 성검 말고스로 튕겨낸 조슈아가 그 무시무시 한 압력에 답답한 신음성을 내며 마법사들이 진세 뒤 편 까지 날아갔다. 그러자 바알은 커다란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몸을 날려 떨어져 내 리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조슈아 괜찮아?" 바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흥분한 조슈아는 자신이 머리부터 땅에 떨어지지 않게 받아 안아준 그에게 전 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다시 몸을 날리려 하였다. 그때 몸을 날리려던 조슈아의 등뒤에서 샤레셀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조슈아! 지금은 복수보다 봉인을 지키는 것이 우선 이야! 너의 행동은 기사단의 공격을 방해하고 있는 것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이야!" 흠칫―. 사랑하는 친구의 한마디에 분노의 늪에 빠졌던 조슈아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러나 여 전히 분노를 주체 못해 마치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는 육체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조슈아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 주저하는 사이 샤레셀이 달려와 등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지금은 기사단과 마법사들에게 맞기고 우리의 공격은 모든 것이 실패하였을 때를 대 비해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야 하는 거야! 너도 알잖아. 기습이 실패한 이상 우리의 힘 만으로는 그를 헤치 울 수 없어. 다시 나서면 너는 죽거나 그의 손에 잡힐 거야. 그러 면 그에게는 선물 이상의 것이 아니야? 근위대장님은 이미 죽었어. 복수는 언제 해도 늦지 않는 단 말이야." 조슈아는 자신의 목덜미로 샤레셀의 뜨거운 눈물을 흘러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겨우 평상 심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전투는 그녀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녀는 이 일과 이 왕국에서 어디까 지나 손님이었다. 콰아앙―. 그때 무도회장에서 원무궁으로 통하는 문 주위의 벽면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며 일 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들어 왔다. 그들은 모두가 어떻게 보아도 낭비로 보일 뿐인 황금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일견하기 에도 성기사단들과 체격과 풍기는 기운부터가 틀린 고급기사 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중앙에 황금 장검과 화려한 장식의 방패를 들고 서있는 기사는 비싼 무 기류와 방어구의 전시장에나 서있으면 어울릴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 체격의 당당함은 정말 놀라웠다. 그와 비교하면 바알은 거의 꼬마로 보일 지경인 것이다. 잠시 기사단이 태세를 정비하기를 기다리던 걸어 다니는 황금덩이 기사는 검을 들어 올리며 체격에 어울리는 무시무시한 저음의 목소리로 소리쳤다. "신전 기사단 앞으로! 적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마라. 에알라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 다." 척척척―.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엄청난 체격의 기사들은 검을 뽑아 방패를 두들기며 5명씩을 짝을 이루어 멘디에타에게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성전 기사단이 벌써 왔는가? 저 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신전에서 원무궁으로 통하 는 길에 환영 마법사를 많이 배치하였는데 역시 대단한 놈들∼." 현재 그를 지배하는 영혼이야 어떻든 시돈의 고급기사 출신인 멘디에타는 그들의 위 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돈의 신전 기사단은 다른 국가의 신전 경비를 맞고 있을 뿐인 방어 기사단과는 거 리가 먼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왕가와 신전에 심각한 위협이 있기 전에는 죽을 때까 지 신전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다는 신비의 기사단인 것이다. 성쇠 기사단의 수 장인 그도 그들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베일에 싸여있는 최강의 전투 엘리트 들 이었다. 척척척―. 그 사이 성전 기사단들은 전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한발 한발 다가갔다. 그들이 방 패를 두들기는 소리는 단순히 상대를 위협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의미가 있 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기세에 너무도 멋지게 어울리고 있었다. 잠시 긴장하던 멘디에타는 다시 마법진을 만들어 주문을 읊기 시작하였다. "죽음의 마신 피에룸의 이름으로 명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집행자 사신의 낫 서 바여! 나의 무기가 되어라." 슈아아―. 다음 순간 멘디에타는 보이지 않는 사신의 낫을 어깨까지 들어 올려 성전 기사단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피…피해욧!" 사신의 낫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아는 샤레셀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성전 기사단 중 누구도 진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촤아악―. 다음 순간 마치 장내의 인물들은 너무도 끔찍한 장면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5명 씩 짝지어 앞으로 나아가던 성전 기사단들의 제 3 열 까지가 무참히 허리가 잘려 바닥 을 뒹굴고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성전 기사단! "저…저런 무모한……!" 조슈아가 그들의 무모한 공격 방식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공격 방식은 멘디에타에게도 확실한 위협이 되는 듯 했다. 그는 여태껏 보여 준 적이 없는 긴장한 얼굴 표정으로 다가오는 기사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신의 낫 서바로 겨우 3 열까지? 이 자식들 도대체 뭘 입고 있는 거야!" 휘이잉―. 한번에 15명의 허리를 날려 버리고도 불만인 대 마법사는 재차 보이지 않는 사신의 낫을 휘둘렀다. 촤아악―. 그러나 여전히 신음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쓰러지는 15인의 기사들과 그래도 계속 방 패를 두들기며 밀고 들어 7, 8, 9 열의 기사들. 아무리 용쓰는 재주가 있는 멘디에타라도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 다. "성전 기사단에게만 맡겨 놓을 샘이냐? 놈도 양면 공격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성 기사단 앞으로!" "우와아∼!" 성전 기사단의 활약에 고무된 기사장이 검을 뽑아들며 소리치자 입구에서 상황을 지 켜보던 수백 명의 여타 기사단들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꺼번에 몰려들어간다면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혼자 힘으로 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수백의 기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육탄으로 밀고 오는 것을 긴장한 눈빛 으로 바라보던 멘디에타는 잠시 발 밑의 황금 봉인을 내려다보았다. 기기기기―. 그가 베풀어 놓은 봉인 파괴의 마법진에 반응하여 계속적으로 푸른 색 기류를 흘러내 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완전 파괴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듯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된다. 조금만 더!" 잠시 초조한 얼굴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오른 손목을 입으로 가져 가 물어 뜯었다. 찌이익―. 자신의 손목을 마치 고기를 찢듯이 이빨로 물어뜯은 멘디에타는 흘러내리는 피를 바 닥에 뿌리며 소리쳤다. "데라! 내 싸움의 벗이여! 피의 계약을 기억하라! 나의 적에게 죽음에 이르는 공포 와 절망을……." 주문을 마치자 과도하게 흘러내린 멘디에타의 피가 순식간에 기화되어 대기 중으로 사라지더니 갑자기 성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쿠아아―. "우왓! 무슨 일이야?" 바알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조슈아는 비정상적인 대기의 기운과 엄청난 중량 감을 느 끼며 천장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위에 무언가 있어! 그것도 무시무시한 놈이!" 콰아악―.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장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마치 흑석으로 깍은 듯 한 거대한 손이 뚫고 들어오더니 그대로 천장 중앙을 뜯어내어 멀리 던져 버렸다. 콰아앙―. "우와악∼." 밖의 상황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만으로 어떤 일이 벌어 졌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 다. 아마도 날아간 천장의 대리석 돌무더기가 밖에 있던 기사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 린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도 그런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장내의 모두는 무도회장 지붕 위에서 뜯겨진 천장사이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자신 들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석상을 발견하고 전신과 육체가 모두 굳어 버린 것이었다. "저…저게 도대체!" 노 기사장이 이 기막힌 장면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사이 장내의 기사들을 쓸어 보던 석상은 마치 템포 느린 꿈을 꾸는 장면을 연출하며 천천히 뜯겨져 나간 천 장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콰직―. 어떻게 피해 볼 사이도 없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 같이 굳어 있던 성전 기사단 서넛이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석상의 손에 의해 으깨져 바닥을 뒹굴었다. "우와아악∼." 그러자 비명소리와 함께 최초의 도망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물론 보통의 기사들과 궁수대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그 파급효과는 매우컸다! 성전 기사단들조차 분위기에 휨쓸려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저게 뭐지? 샤레셀? 전에 보았던 에알라 신상의 고램과 같은거야?" 조슈아가 이제는 완전히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열을 무너뜨리며 도망치기 시작하 는 기사들 사이에서 겨우 몸을 가누며 소리쳤다. "모…몰라! 다만 저건 그냥 고램 같은 게 아닌 것 같아. 보기에는 석상 같지만 관절 같은 부분이 너무 자연스럽게 움직여 저건……." "우와아악∼." 그러나 샤레셀의 말을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였다. 또 다시 손을 밀어 넣는 석상에 기겁하여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된 기사들이 앞다투어 밀려 나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 다. "전진하라! 저 마법사 놈만 잡으면 저런 것은 그냥 사라져 버린다. 달아 나는 놈은 내가 직접 죽여주겠다." 기사장이 이마에 핏발을 새우며 소리 쳤지만 한번 무너진 사기는 다시 추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달아나는 기사들 사이에서 기백 있게 서서 소리를 지르는 노 기 사장은 석상의 좋은 목표가 되고 말았다. 콰아악―. "우와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기사장의 온몸의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끝까지 왕국과 이 세계를 지켜보려던 노 기사장은 석상의 손아귀에 잡혀 공중에 뜬 상태에서 처참하게 압사하고 말았다. "이…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조슈아는 자신을 친 딸 처럼 귀여워 해주던 기사장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몸을 날리 려 하였지만 좁은 구역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려는 기사들에 밀려 전혀 운신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샤레셀과 퓨어리스는 밀여나가는 기사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쓸려 나았고, 바알은 저멀리에서 조슈아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동안 무적의 성전 기사단은 이미 거 의 절반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손아귀에 잡히는 족족 으깨어진 고기 덩이가 되어버리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멘디에타에게로의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조슈아는 공포에 질린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숲 사이로 멘디에타의 득의 한 얼굴을 바 라보며 몸을 떨었다. '저 놈이 정말 안티오페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나? 어째서 사랑하는 여인을……. 그렇 다면 저놈은 이제 이야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 사이 갑옷으로 포장한 으깬 고기 덩이 수십 개를 남긴 체, 대부분의 기사들이 빠 져나가고 멀리까지 밀려 나갔던 듯 한 샤레셀과 퓨어리스가 숨을 헐떡이며 되 돌아왔 다. 다시 운신할 공간을 얻은 조슈아는 당장에라도 멘디에타를 향해 뛰어 들고 싶었지만 석상의 손이 휘젓고 다니는 터라 그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죽 음의 손아귀를 피해간다 하더라도 사신을 낫을 들고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 에게 정면으로 날아가서 어쩌겠는가? 그는 성전 기사단의 잔당들은 석상의 손에게 맞기고 오직 그녀의 빠른 기습만을 대비 하고 있는 듯 했다. 이 자리에 잠시 만 한눈을 팔아도 자신의 목을 베어갈 수 있을 정 도의 실력자는 오직 그녀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쩌어억―. 갑자기 멘디에타의 발아래 황금 마루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봉인의 파괴가 임박했음 을 알려 왔다. '어…어떻게 하지? 아아∼! 신이시여. 제발 기적을 베풀어주세요.' 무력감에 빠진 조슈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의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파앗―. 그녀의 기도가 통했던 걸까? 갑자기 왕실 가족이 드나들던 옥좌 오른쪽의 통로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기습적으로 뛰어 들어와 멘디에타의 등뒤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허엇?" 맨디에타도 설마 이런 상황에서의 기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사신의 낫을 휘두 를 타이밍을 놓쳐 헛 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틀어 전신에 쏟아지는 검격을 피하였다. "모두들!" 조슈아가 멘디에타를 정신없이 몰아 치고 있는 9인의 용병대장을 보고 기쁨의 함성 을 지르는 동안 잠시 주인의 명령이 끊긴 석상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바알! 검편으로 나를 최대한 높이 띄워 올려 줘!"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조슈아는 몸을 날려 한번 크게 공중 제비를 돌더니 바알 의 얼굴을 향해 다리부터 떨어져 내렸다. "우와왓!" 조슈아의 말에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검을 뽑은 바알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성을 터트리는 것인지, 아니면 힘을 쓰기 위해 기합을 넣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장 소성을 내 뱉으며 자신의 얼굴 위로 검편을 눕혀 들어 올렸다. 파앗―. 엄청난 도약력에 바알의 무지막지한 힘까지 겹쳐지자 거의 제비 처럼 날아오르는 조 슈아였다. 순식간에 지붕까지 날아올라간 그녀는 부서진 지분의 모서리를 박차고 한 번 더 도약 하여 단숨에 허리를 숙인 석상의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이야압∼!" 파아악―. 혼신의 힘을 다한 무시무시한 검격이 정확히 석상의 정수리에 직격하였다. 조슈아는 엄청난 반동에 거의 비명을 지르고 싶은 지경이었지만 그녀의 공격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여 주었다. 콰아악―.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시야에 머리가 부서진 석상이 천천히 뒤로 넘 어 가는 광경이 들어 왔다. 그러나 조슈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비켜요!" 그녀는 말고스를 고쳐 잡고 9인의 백인 대장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그녀의 의도 를 알아챈 자카엘이 눈짓으로 신호하였고 모두가 고개를 끄떡이고는 멘디에타에게서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멘디에타는 자신의 정수리를 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검격을 느끼고 있었지 만, 이미 완벽히 피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살짝 고개를 틀어 그녀의 검을 오른 쪽 어깨로 받았다. 촤아아아―. 듣기 거북한 파육음을 내며 조슈아의 검은 멘디에타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가 거의 명 치에 다다라 멈추었다. "커어억∼!" 설명은 길었지만 실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시간은 거의 눈 깜박 할 사이였다. 멘디에타는 거의 몸의 절반이 갈라진 체, 사방으로 피 분수를 뿜으며 조슈아의 온몸 을 물들였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심장이야, 심장을 부수지 않으면 죽지 않아." 이런 상태에서도 상대가 죽지 않자 당황한 조슈아에게 샤레셀이 소리쳤다. 그러나 조 슈아는 당황한 얼굴로 검을 뽑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니야. 이 손의 벤 느낌은 분명히 심장이야. 이 놈은 심장이 오른쪽에 있다 구." "쿠쿠∼." 그때 검집 체로 거의 박살을 내다 시피하며 몸을 부수고 들어온 검을 내려다보며 멘 디에타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는 기겁을 하며 검을 뽑아 내며 뒤로 물 러났다. 쩌어억―. 마치 끈적끈적한 흡판에서 검을 때어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음향이 조용해진 무도회 장에 울려 퍼졌다. "만약 그 성검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일 수 있었을 터인데. 아깝군. 이제 끝이다 인간들이여. 쿠쿠쿠∼." 검을 뽑아 내자 마자 그 커다란 상처를 순식간에 복구시킨 멘디에타가 비웃음을 흘렸 다. 파아아아―. 순간, 그의 비웃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성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굉음과 함께 발 밑 의 황금 마루가 깨어져 튀어 올랐다. "우왓!" 조슈아 일행과 살아남은 성전 기사단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대주위에서 물러났다. 휘오오오―. 부서진 황금 마루가 거의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마치 지옥의 입구 같은 어둠의 공간 이 드러났다. "우하하하∼!" 공중으로 떠오른 멘디에타는 광소를 터트리며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쿠우우우―. 무너진 지붕 사이로 눈을 지져 버릴 듯한 주홍빛 낙뢰가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고, 그 엄청난 위력에 장내의 인물 모두가 눈과 귀를 막고 엎어 졌다. 휘이이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두를 날려 버릴 것 같던 폭풍이 그친 것을 확인한 조슈아 는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 그녀는 무도회장 안의 상황을 보고 싶었지만 워낙에 먼지가 심하여 몇 발짝 앞을 보 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무도회장을 가득 매운 먼지는 곧 어디에선가 불어온 바람 에 의해 깨끗이 날아가 버리고 모두는 두려움과 호기심에 몸을 떨며 무대 쪽을 바라보 았다. "……?" 거창한 마법의식에 비해 일견하기에는 멘디에타의 모습은 별로 달라진 구석이 없었 다. 다만 격한 소용돌이에 의해 조르쥬의 시체가 다른 시체들과 함께 벽면까지 날아가 있 다는 것과 멘디에타의 발 밑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거대한 주홍빛의 마법진이 만들어 져 있는 것이 달라진 것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 주홍빛의 마법진을 발견한 성전 기사단장은 마치 학질에 걸린 듯 몸을 떨 더니 검과 방패를 집어던지며 주저앉고 말았다. "도망가라. 제기랄∼. 소용은 없겠지만!" NEXT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6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8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제 25 화 피의 제전 part 6 20001213 122 8 장편 "크크∼. 그래 소용없는 짓이다." 성전 기사단장의 말을 받은 멘디에타가 낮게 음소 하였다. '아아∼. 기어코!' 조슈아는 이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와 장내의 인물들은 지금 1000년만에 찾아온 대 재앙의 산 증인이 된 것이었 다. "우우∼." 상대가 너무 강하면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게도 용맹하게 죽음의 진격을 해 보였던 성전기사단들은 공포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주저앉고 있었다. 멘디에타는 그런 그들은 관심 없다는 듯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볍게 얼굴을 찡 그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급한 데로 청소를 해야 갰군. 아무래도 이 성체로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 말이 야?" "성체로 움직여?"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조슈아가 반문하였지만 대답 할 리 만무한 멘디에타였 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장내의 인물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였다. 그가 가볍게 오른 손을 들어올리자 그 무도회장 전채 벽과 지붕이 통째로 뜯겨 올라 가는 것이었다. 쿠과과과―. 안티오페를 박아 놓은 옥좌 뒤의 대리석 벽을 제외한 모든 벽이 날아가고 내궁의 제 일 윗 충에 있던 무도회장이 덩그렇게 드러났다. '세…세상에 어떤 마법을 쓰는 기색도 없었는데. 그럼 그는 의지만으로 이런 일을 한 다는 말인가?' 조슈아는 상대에 힘의 거대함에 두려움을 넘어 경외감 마저 느끼고 있었다. 비록 외견상 어떤 변화도 없었지만 이미 그의 힘은 인세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것 이 아닌 것이다. "으으∼." 그제야 상황을 완전히 깨달았는지 샤레셀이 탄식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 엄청난 힘으로 한순간에 건물을 시원하게 개조한 멘디에타는 다시 주위를 쓸 어 보다가 이번에는 바닥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날려 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연 히 그 사이에는 조르쥬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아…안돼!" 조슈아가 소리 치며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옛 친구의 시체는 멀리 날아가 보이지 않 았다. "아아아∼." 조슈아가 눈물을 흘리며 친구의 시체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는 동안 청소(?)는 더 할 나위 없이 말끔하게 되어 있었다. 시체는 모두 멀리 날아갔고, 바닥에 고여 있던 핏물들도 시화하여 사라졌다. 무도회장이 있던 층의 건물들도 모두 날아가고 무사한 아래층과 계단으로만 연결된 무도회장은 마치 언덕 위의 제단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막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당사자들에게는 마치 1년 여를 끈 것 같은 느낌이었겠지만 실 제시간은 채 두 시간이 넘지 않는 것이었다. "후후∼. 해가 뜨는 군! 그럼 나머지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슬슬 떠나 볼까?" 눈을 가늘게 뜨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던 멘디에타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살아 남은 성전 기사단들을 돌아보았다. "으으으∼." 그의 시선에서 쉽게 의도를 파악 할 수 있었지만 공포에 질린 그들은 누구도 달아나 지 못하고 있었다. "잘 가라!" 파아악―. 멘디에타는 오른 손을 장난스럽게 휘저었을 뿐이었지만 수십 명의 성전 기사단들은 비명 한번 질러 보지 못하고 까마득하게 날아올라 성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굳이 따라가 보지 않아도 그들이 어떻게 되어 있을 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야압!" 순간 조슈아가 고개를 돌린 멘디에타의 허점을 노리고 검신합일(檢身合一)이 되어 몸 을 날렸다. 그러나 상대는 예전의 멘디에타가 아니었다. "훗∼." 가볍게 코웃음을 치던 그가 조슈아에게 오른 손을 뻗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바로 코앞까지 날아간 조슈아가 얼음의 결정에 가두어 진 것이다. 그러나 자세 히 보면 그것은 얼음이 아니고 반투명한 아교 같은 느낌의 구속 물이었다. 그 반투명 물질은 대기 중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그녀를 여전사의 조각상으로 만들 어 버리고 있었다. "으으∼. 이거 놔라!" 그런다고 놔줄 리야 없겠지만 입장에 맞는 당연한 요구를 해보는 조슈아 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생성된 반투명 물질에 의해 다리와 허리, 검을 치켜든 손과 검 손잡 이, 그리고 그 위의 검집이 단단히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이 순간 뽑을 수 없는 성 검 말고스는 그녀의 수갑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잠시 조각상을 감상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멘디에타는 천천히 시선 을 돌려 바알과 샤레셀, 퓨러리스를 차례로 쓸어 보았다. 그들은 멘디에타의 시선이 닫을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느긋하게 뒷짐을 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 셋은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에 목격자가 되어 줘야 갰다. 아무래도 혼자 는 지루하거든. 그럼 나머지 놈들은 치워야 갰군." '나머지 놈들'이라 불리운 9인의 100인 대장들은 그의 말에 의미를 깨닫고 사색이 되 었다. 그러나 호락호락 당하기만 할 그들이 아니었다. "해볼 테면 해보아라!" 자카엘이 외눈을 빛내며 도끼를 들고 달려들자 나머지 8인도 흩어져 몸을 날렸다. 그 러나 멘디에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퍼어억―. 먼저 자카엘의 도끼가 그의 정수리를 내리 쳤고, 뒤이어 파간의 철봉이 그의 가슴을 찍어 왔다. 그러나 누구의 무기도 그의 몸을 어쩌지는 못하였다. 파아앗―. 멘디에타는 또 다시 장난처럼 오른 손을 저었고, 9인의 100인 대장들은 마치 거대한 거인에 의하여 들어 올려지는 것 같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우와아아악∼!" "제…제발 그만둬!" 조슈아가 하얗게 질려 소리 쳤지만 이미 9인의 불행한 사나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아간 후였다. "아…악마! 이 악마 같은 자식아!" 포박 당한 조슈아가 심하게 경련하며 악을 썼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그런 그녀를 비 웃을 뿐이었다. "그래 잘 아는군. 비록 아직 반쪽 짜리 이기는 하지만, 나는 마신이다." 그의 말에 할말을 잃은 조슈아가 이를 가는 동안 멘디에타는 9인의 동료들의 너무도 허망한 죽음에 망연 자실 해있는 세 남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너희 셋도 이제 그만 얌전히 있어줘야 갰다." 슈우우―. "어엇?"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의를 상실한 바알과 샤레셀, 퓨어리스는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조슈아의 것과 같은 반투명한 구속 물질에 결박당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 모두의 운명은 적이 되어버린 옛 동료였던 성쇠 기사단의 수장의 손에 달 려 있게 된 것이다. 그때 무형의 강기에 의해 벽에 박혀있던 안티오페가 분노와 두려움에 몸을 떠는 조슈 아에게 생기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망 갈 수 있을 때 도망 갔어야지. 왜 남의 나라 싸움에 끼어 든 거야?" "아∼. 안티오페 괜찮아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정 여왕의 목소리에 잠시 상황도 잊을 정도로 반가워하는 조슈 아 였다. 그러나 안티오페의 상태는 인간이라면 이미 명을 달리 했을 정도의 수준이었 다. 그녀의 뚫린 양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초록빛 체액이 벽면을 타고 흘러 내려 작은 연 못을 만들고 있었는데, 몸의 크기를 생각하면 몸 안의 거의 모든 피가 뿜어져 나온 것 이리라. 그때 안티오페의 생기 없는 목소리를 들은 멘디에타가 천천히 뒤로 돌아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예전 과 같은 사랑의 감정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제부터 개인적인 복수와 모든 왕국들을 향한 공식적인 선전 포고를 할 생각이다. 잘 지켜 봐주기 바란다. 물론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너희 모두에게는 가혹한 죽음이 기 다리고 있으니 기대는 하지 말라!" "개…개인 적인 복수라면……." 조슈아가 더듬거리며 묻자 낮게 음소 하던 멘디에타가 대답하였다. "두고 보면 알 일이다. 편안히 지켜보도록!" "당…당신이 어떻게 해서 멘디에타의 몸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알려 줘요. 어떻게 그 럴 수가 있었죠?" 그때 두려움과 절망감에 질려 하얗게 질려 있단 샤레셀이 소리쳤다. 그녀로서는 그 가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이리라. 그녀의 질문에 잠시 귀찮은 듯 아미를 찡그리던 멘디에타는 팔짱을 끼고 서서 천천 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떠나고 나서 완전히 결계에 가두에 지고 나서 나는 그 봉인이 가짜라는 것 을 깨달았다. 그러나 탐색 해보니 지하에 빈 공간이 있더군. 그래서 급히 마력으로 틈 을 벌리고 뛰어 들어 갔더니 이 몸의 주인이 부유 마법진을 다 깨고 마침 빠져나가고 있더군. 그래서 빠르게 판단했다. 어차피 그 상태로 나가봐야. 스코올에게 당할 것이 뻔하니 이 놈으로 전생(轉生)하자고 말이야. 그래서 놈을 끌고 지하 통로가 닫히기 전 에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와 전생의 마법을 행했지. 그런데 놈의 기억 속에는 의외로 내가 원하던 정보들이 가득 차 있더란 말이야." "아아∼." 샤레셀은 궁금증이 풀려서인지 더욱더 절망감에 사로 잡혀서 인지 알 수 없는 신음성 을 내뱉었다. 멘디에타는 미소녀의 조각상 같이 되어 버린 조슈아에게 천천히 다가와 손을 뻗었다. 흠칫―. 무슨 짓을 하려는지 파악하지 못한 조슈아가 흠칫하였지만 그의 손은 말고스로 향하 고 있었다. 멘디에타는 말고스의 검집을 쓰다듬으며 실소하였다. "네가 성검을 뽑지 못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꼼짝없이 죽을 뻔하였군. 전에 그 신족의 애송이가 한 말을 보면 이미 자격은 갖추고 있다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후 후∼. 하여튼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라. 너에게는 델라베가의 반쪽이 들어 있으니 말이야. 지금은 이런 몸을 빌어 힘의 사용에 제약이 있지만 네 안의 반쪽과 완전히 결 합할 방법을 찾아내면 나는 완전히 부활하게 된다." "잠깐 그렇다면 나에게도 너와 같은 힘이 생겨야 하는 것 아니야? 어째서 너만 그런 힘을 가지는 거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조슈아가 고개를 쳐들고 소리 쳤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와 같 은 힘만 있다면 단번에 목을 말려 버릴 기세였다. "후후∼. 너는 그 힘을 끌어 쓸 방법을 모르니까 말이야. 너의 몸을 지배하는 것은 나와 달리 델라베가의 영혼이 아니거든." "으음∼." 조슈아가 뜻 모를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지켜보며 음소 하던 멘디에타는 몸을 돌려 계단 위 옥좌로 걸어가 앉았다. 옥좌 위에는 안티오페의 핏물이 튀어 조금 더러워져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럼 이제 그만 떠나자!" 콰아아아앙―.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루에 있는 주홍빛 마법진의 빛이 짙어 지면서 엄청난 폭 음과 함께 궁전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어?"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일행이었지만 다음에 벌어진 일은 그 한계를 넘어 서고 있었다. 내전 전체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드드드드―. 가청력의 한계를 넘어선 굉음이 울려 퍼지며 마치 지옥의 뚜껑을 열어 놓은 듯한 장 면을 연출하며 들어 올려 지는 내궁! 이 것은 그야말로 신의 힘이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힘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1000년 전에는 이런 존재들이 활보하 고 다녔다는 것이 아닌가?' 압도적인 힘에 전의를 상실한 조슈아 였지만 이 힘이 마신 델라베가의 힘에 체 2 할 에도 미치지 못한 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쿠하하하∼. 천년, 천년이었다! 이제 인간 놀음은 끝이다! 먼저 내 안에서 너를 지 우겠다. 요정 족의 여왕이여!"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안티오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아아악―. 순간 마법진에서 엄청난 광채가 일어나 모두의 시각을 마비시키더니, 다음 순간 마 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몽환적인 감각이 엄습해 왔다.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감각이랄 까? 조슈아 일행 모두는 잠시 정신과 육체 모두가 마비되는 듯한 감각을 느낀 후 자신들 이 전혀 이질 적인 하늘 아래로 이동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무슨 일이 벌어 졌는지 깨닫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멘디에타는 손을 뻗어 마법진 위에 마법으로 영상을 만들어 내었다. 슈우우―. 그것은 서리가 내린 넓은 대초원 가운데 덩그렇게 위치한 아름다운 숲의 영상이었 다. "아아∼." 순간 안티오페가 초록색 눈에 습막을 만들며 신음하였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아이들 이 머물고 있는 게헤나 산맥의 숲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절망감에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멘데에타가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는 너의 아이들이 잠자는 숲의 상공이다. 너의 아이들은 세상 모르고 자 고 있겠지? 나도 그 아이들 하나 하나를 모두 기억한다. 후후∼. 모두 귀여운 아이들 이었지.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곧 나를 아빠처럼 따랐었어." 잠시 옛 추억에 잠기는 듯 조용히 미소 짓던 멘디에타는 갑자기 고개를 흔들어 표정 을 바꾸며 광적으로 소리쳤다. "그래서 죽어 주어야 갰다. 그것도 네 앞에서." 화아악―. "아…안돼!" 안티오페가 목이 터져라 소리 쳤지만 영상 속의 숲은 이미 주홍빛 광선에 의해 불바 다가 되고 있었다. 네 방위에서 숲을 둘러싸 태워 들어간 광선은 집요하게 숲의 구석 구석을 태워 재로 만들며 누구도 그 죽음의 화염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아아악∼!"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안티오페가 마침내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를 위해서는 오히 려 잘된 일 이리라. "어…어째서. 그런…. 사랑하면서! 당신은 그녀와 아이들까지 모두 사랑하잖아! 왜 사랑하는 상대를 죽여야 하는 거야!" 조슈아가 불타는 숲의 영상을 핏발 서린 눈으로 바라보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러 자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의 멘디에타가 대답하였다. "그래! 인정한다. 나는 안티오페와 방금 내 손으로 죽인 아이들. 시돈 왕국의 모든 백성들과 마리안 공주, 심지어 너와 네 친구들까지 사랑하지. 1000년간 내가 사랑해 온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지 셀 수나 있을까?" 멘디에타는 옥좌에서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와 섰다. 조슈아는 그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쓰라린 감정을 잃을 수 있었다. "그…그러면서 왜! 나는 당신이 아직도 안티오페를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이 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 당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을 힘을 가지고 있잖아." "나는 인간이 아니야! 1000년이라는 세월동안 수많은 인간의 몸을 빌어 쓰며 그들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마신 델라베가다. 이 내가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 는 내 손으로 끊어야 한다. 이 육체와 기억들에 관계된 모든 것을 잔인하게 끊어야 해!" "아니야! 당신이 살아온 세월들은 버려야 할 무가치한 세월들이었어? 그렇지 않을 거 야! 당신은 아픈 기억도 있겠지만 그 중에는 끊어 버리고 싶어 할만큼 사랑하고 있는 기억들이 있잖아! 왜 소중할걸 부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아닌 거야? 당신이 살아온 세월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으로서 살아온 시간들이잖아!" "……." 멘디에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조용히 서있던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볼로 손을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이 몸의 주인이 원하던 것에는 너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감히 원하는 것을 말하지 도 못했지. 너는 그런 것은 눈치도 채지 못했었겠지? 인간의 삶이란 그런 거야. 나는 수없이 반복되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들의 꿈을 가슴에 담고 있는 데 지쳤다. 내가 마신으로 살아온 세월동안에 이런 기억들은 없어. 나는 이제 이 지겨운 운명의 고리를 끓을 거다." 조슈아는 그의 상상 밖의 고백에 할말을 잃었다. '멘디에타가? 전혀 그런 기색은…….'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며 실소하던 멘디에타는 마법영상에 나타난 숲이 완전 히 타 없어지고 새까만 들판이 되어 버리자 조슈아의 볼에서 손을 때어내었다. "후후∼. 순서가 틀리기는 했지만 이제 천계의 문을 영원히 봉쇄하러 가볼까? 다시 는 누구도 손댈 수 없도록 철저히 덮어 버리겠다." "허억∼!" 슬픔에 젖어 있던 조슈아와 샤레셀이 경악 성을 터트렸다. 천계의 문은 바로 그들의 사랑하는 성도 게드마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의 말은 다음 차례로 게드마 성을 공격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서…설마 게드마 성을?" 조슈아가 더듬거리며 묻자 히죽 웃어 보인 멘디에타가 대답했다. "다른 할 일도 많지만 먼저 게드마 성의 왕궁을 없애 버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급 한 김에 신 계의 문을 열어 버릴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후후∼. 봉인 해제 마법이 아 니면 외부의 공격에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니 용암으로 덮어 버릴 생각이다." "아…안돼……." 그러나 그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아까 전과 같은 기묘한 감각과 함께 또다시 순간 이동에 들어 간 것이다. 파아앗―. 잠시 꿈속을 지난 것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정신을 차린 조슈아는 마법의 영상 에 드러난 은빛 왕궁을 발견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네 개의 궁전들에 아침햇살을 반사 하여 비추고 있는 은빛의 왕궁은 그야말로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아아∼!" 눈물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너무도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 게드마 성의 상공에 와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 앞에 닥친 상황은 너무도 잔인하였다. 조슈아는 멘디에타가 하려는 일을 떠올리고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제…제발 그러지마! 내가…내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피신시킬 시간이라도 줘." "후후∼. 이것은 타 왕국들을 향한 협박의 의미도 있는 실력행사이다. 왕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그럼 네 왕국의 최후를 지켜보아라."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아서 이 겁난을 막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조슈아 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너무도 무력하였다. 조슈아는 이제는 자신의 수갑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 성검 말고스를 올려다보았다. 왕국이 멸망의 위협에 처해 있는데도 이 왕조의 신물은 전혀 뽑힐 생각을 않고 있었 다. '내…내게 뭐가 부족한 거지? 지금 왕국을 멸망으로 몰고 가려는 자가 눈앞에 가슴 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그 힘을 쓸 수 없다면 뭐가 성검이야! 내가 아버지의 검술보다 못하다는 거야? 나에게는 이미 자격이 있다고 했잖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뽑히겠다 는 거야! 수호할 왕국이 없으면 성검이 무슨 소용이 있어? 뽑혀 뽑히란 말이야! 상대 가 바로 눈앞에 있잖아!' 그러자 그녀의 마음을 읽은 멘디에타가 뒷짐을 지고 서서 이죽거렸다. "너에게 무엇이 부족한 지는 모르겠다만, 후후∼. 너에게 닥쳐왔던 수많은 위협 속에 서도 뽑히지 않은 걸 보니 너를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구나! 그럼 특등 석에서 충분히 즐겨주기를 바란다. 보기 흔한 장면을 아닐 테니까!" 말을 마친 멘디에타가 서서히 오른 손을 들어올리자 다시 마법진의 주홍빛이 강렬해 지더니 엄청난 폭음과 함께 마법 영상이 흐려졌다. "아아악―." 조슈아의 비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다시 회복된 마법영상에 드러난 처참한 광경은 그녀를 거의 실성하게 만들기에 충분 한 것이었다. "언니를 놔줘 이 괴물!" 그때 갑자기 원무궁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목검을 들고 달려오는 소녀가 있었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미친 짓 이었다. "에…에레크타라! 안돼!" 조슈아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이미 에레크트라는 의외의 방문자에 재미있다는 표 정을 짓고 있는 멘디에타의 앞까지 달려와 유일하게 배운 상단 치기로 그의 정수리를 내리 치고 있었다. 따악―. 시원한 격타음이 들리고 주위가 잠시 조용해 졌다. "아아∼." 에레크트라는 인간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너무도 강한 반탄력 에 손바닥의 혈관이 터져 작게 신음하며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목검을 놓치지 않고 있 었다. 그런 그녀를 기특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멘디에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에레크트라는 마치 가위에 눌린 듯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 다. "그…그 애를 헤치지 마!" 거의 실성한 표정의 조슈아가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던 멘디에타가 히죽 웃으며 장난스레 대답하였다. "나도 이 아이를 좋아하지. 후후∼. 바로 죽이지는 않아. 좀 심한 꼴을 보게 될 테 니 보기 실으면 눈이라도 감으라구." "아악∼!" 퍼억―. 갑자지 공중에 떠올라진 에레크트라가 가슴부터 무서운 속도로 대리석 바닥에 내동댕 이쳐지며 그 가녀린 뼈들이 부서지는 끔찍한 음향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멘디에타는 마치 애들 장난이라도 한 듯 히죽거리고 있었다. "후후∼. 좋은 구경거리였지? 한 두 번만 더하면……." 거의 핏덩이가 되어 경련을 일으키는 어린 소녀에게서 득의 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리던 멘디에타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였다. 부르르―. 도대체 언제 박혀진 것일까? 그는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두 눈을 깜박이며 자신의 오 른쪽 가슴에 박혀 있는 은빛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의 정면에서 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조슈아는 오히려 그보다 더 경악하고 있는 듯 하였다. "이…이런 그런 거였나? 전대의 계승자가 죽어야만 너에게……. 이 내가……. 말도 안돼는……. 쿠어억!" 검으로부터 몸을 뽑아낸 멘디에타가 주저앉으며 피를 토해 내었다. 그런 그의 피에서 는 검은색 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심장을 정확히 꽤 뚫린 것이리라. 슈우우―. 그 사이 조슈아는 힘을 잃은 반투명한 구속 물질로부터 풀려나고 있었다. "우욱∼. 이렇게 허무하게……. 완벽히 힘을 회복하기도 전에……." 조슈아가 광기어린 눈으로 성검 말고스를 들고 다가오자 멘디에타가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퍼억―. "커억―." 겨우 몸을 가누고 있던 멘디에타가 그녀의 발길질에 의해 몇 걸음 밖으로 날아가 완 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슈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바닥에서 헐떡거리는 그에게 달려간 조슈아는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다시 걷어차 바 닥에 눕히더니 발로 그의 배를 지그시 밟고 말고스를 높이 쳐들었다. 멘디에타는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고 피를 토하며 키득거렸다. "킥킥∼. 그래 내가 바보였다. 역시 마지막 순간에 무른 건 변하지를 않는군. 그러 나 기억해 두어라. 결국 너는 나의 반쪽. 언젠가는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될……." 푸욱―. 성검 말고스가 다시 한번 그의 오른쪽 가슴을 파고들며 그의 저주의 말을 끊었다. 조슈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차갑게 식어 가는 멘디에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년의 세월동안 쌓아온 야망도 수많은 인간들의 꿈과 사랑의 기억들도 급속히 그의 육체를 빠져나가 허무의 공간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아! 안티…오페……." 죽음의 순간에야 겨우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걸까? 그 말을 끝으로 멘디에타라는 이름의 육체를 가진 마신의 반쪽은 영원히 숨을 거두었 다. 슈우우―. 숨을 거둔 그의 육체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순식간에 녹아 내리더니 곧 모두 기화하 여 대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조슈아는 그 모든 과정을 허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조슈아! 성이 서서히 추락하고 있어. 이대로는 게드마 성 위에 떨어 진다구."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는 샤레셀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가 돌아보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샤레셀과 그녀의 뒤 에 피투성이의 안티오페와 에레크트라를 안아들고 있는 바알과 퓨어리스가 다가 오고 있었다. 샤레셀은 조슈아의 멍한 표정에 어깨를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그가 걸어놓은 마법진이 무사하지만 명령이 없으니 부력을 잃고 떨어지는 거야. 이 대로는 충돌 할 때의 충격에 퉁겨 나가 떨어져서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어! 다행히 속도는 느리니까 모두 충격에 퉁겨 나가지 않게 뭐라도 붙들고 꼭 붙어 있어야 해!"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반반하게 깎여 나간 넓은 무도회장에는 몸을 고정시킬 만 한 물건이 없었다. 그러자 일행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 던 조슈아는 가볍게 이를 악물고 성검을 들어 올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검의 거의 절반이 들어가도록 박아 넣었다. 차아앙―. 검을 박아 놓고 한 걸음 물러난 조슈아는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알이 힘이 좋으니까! 검을 잡아! 우리는 당신을 잡고 있을 테니까. 절대로 놓치 면 안돼!"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바알은 곧 힘차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양손으로 검을 잡 고 주저앉아 두 발을 검편에 고정 시켰다. 자세는 조금 우스웠지만 몸을 고정시키기에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조슈아는 안티오페를 품에 안고 한쪽 팔을 바알의 오른쪽 다리에 감아 가슴에 껴안았 고 퓨어리스는 에레크트라를 안고 샤레셀과 함께 바알의 등에 허리에 매달렸다. 그 사이 성은 점점 더 빠르게 떨어져 내려 모두의 머리카락이 그 속도에 떠오르기 시 작하였다. "아아∼. 에일라 신이시여." 퓨어리스가 눈을 감으며 무책임한 무신(武神)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너의 여행은 모두 끝인가? 조슈아?" 바알이 긴장감을 견디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궁금해서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무표정하게 자신의 다리를 껴안고 있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조슈아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곧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현자의 돌을 찾아 계속 여행을 해야 겠지. 그러나 지금은 일단 살아 남는 것 을 생각하자." 말을 마친 조슈아는 다시 고개를 숙여 그의 다리에 얼굴을 밀착시켰다. 덕분에 바알 은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숨길 수 없는 기쁨의 감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새로운 힘을 얻은 바알의 이마와 팔뚝에서 힘줄과 혈관이 터질 듯이 불거져 나왔다. "그래. 일단 살아 남는 걸 생각하자!" 콰아앙―. 아카바의 성도 게드마 성 한가운데에, 시돈 왕국의 왕궁이 떨어져 내린 전대미문의 대 사건 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거창한 폭음이 온 성도에 울려 퍼졌다. 아카바력 357년, 에브라임 17 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NEXT ??? [이전] [목록] [다음] [연재하기] [수정] [삭제] 번호 이름 ID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구분 99 장진우 omnipoten 프린세스 조슈아 최종화 함께 한 시간들, 그리고 함께 할 시간들. AND 에필로그 Epilogue 20001214 134 8 장편 영원히 대륙의 전설이 되어버린 대 사건이 일어난지도 벌써 나흘이 흘렀다. 물론 조슈아 일행은 살아 남았고, 수없이 많은 인명 피해를 낼 줄 알았던 충돌도 빠 른 대피 덕에 생각보다 훨씬 미비하였다. 그러나 조슈아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아카바의 제 7대 국왕 바디메오는 끝내 그 시 신조차 찾아 내지 못하였다. 어마어마한 열기에 녹아 버린 왕궁이 식어 거대한 화강암 동산을 만들어 버린 것이었 다. 결국 아카바 왕국은 유례가 없이 시신이 없는 국장을 치 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국장을 주재한 것은 아카바의 제 1 왕자 조슈에가 아닌, 국왕의 이복 동생 오드니 대공과 에레나 공주였다. 왕자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여 오드니 대공은 왕자가 건강을 회복 할 때까 지 섭정의 형식으로 국정을 맞게 된 것이었다. 조슈아는 신전의 구석에서 검은 상복으로 얼굴을 가린 체 오열하며 시신도 없는 아버 지의 장례식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장례 복이 어울리지 않는 바알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있었고, 퓨어리스는 눈물을 흘리며 조슈아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었 다. 샤레셀은 제단 주위의 수많은 신녀들 중에 섞여 있는 듯 보이지 않았다. "우우우∼!" 장엄한 신관들의 허밍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신도 들어 있지 않은 황금 관 에 대신관의 축성이 베풀어 졌고, 왕실 가족과 신관들에 의해 들어 올려진 관이 신전 밖으로 옮겨졌다. 신전 밖으로 나가면 그대로 준비된 황금 마차에 실려 시내에서 백성 들의 전송을 받으며 왕실 가족 납골당으로 이동하여 안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후 의 의식은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이제는 돌산이 되어 버린 옛 왕 궁터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조슈아는 아버지의 유품들이 들어 있는 황금 관이 마차에 실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 이르고 버거운 작별의 인사말을 건네었다. '아버지 영원히 사랑해요. 제발 편히 잠드세요.' 두두두두―. 두 눈 가득 습막이 일어나 일그러진 마차의 영상이 서서히 멀어 졌다. 그러나 마차 가 왕궁을 빠져나가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그녀는 움직이지 못하였다. 1 "말도 안 된다! 왕자야! 어째서 네가 다시 떠난다는 말이냐? 어떻게 살아 돌아 온 너 인데 이 숙부가 그깟 현자의 돌인가 하는 물건 하나를 찾아 주지 못할 것 같으냐?" 오드니 대공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형과 달리 외모가 출중하지 않고 서자라는 신분에 괴로운 젊은 시절을 보내 덕에 솔 직한 감정 표현에 인색한 편인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흔한 경우가 아니었 다. 이 곳은 소실된 왕궁대신 임시로 쓰고있는 '장미의 정원'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소 궁전. 조슈아는 지금 궁전 접견실에서 아버지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랑하는 친구 샤레셀의 아버지인 오드니 대공과 마주 하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검은색 상복 입고 있는데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 앉혔는지 의연한 태도와 표 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오른 편에는 오랜만에 깨끗한 신녀 복을 입은 샤레셀과 역시 상복을 차 려 입은 누이동생 에레나가 오랜 슬픔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말은 않고 있었지만 표정으로 보아 조슈아가 대공의 말을 듣기 를 바라는 것 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조슈아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숙부님께서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과연 아카바에서 왕국의 힘을 이용하여 공공연히 현자의 돌을 찾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도 그 이유도 설 명해 줄 수 없는 상황에서요. 만약 타국의 귀에 우리가 현자의 돌이라는 어마어마한 마법도구를 찾아 기사단을 풀었다는 소문이라도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전쟁이 라도 준비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친위대를 써서 비밀리에……." "아니요! 저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숙부님 저는 비록 이런 몸이지만 홀로 세 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끄응∼!" 사랑하는 조카의 의지가 너무도 완강함을 확인한 오드니 대공은 의자 뒤로 몸을 눕히 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의 벗겨진 앞머리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살피던 에라나가 끼어 들었다. "오빠! 잘 생각해봐! 단 몇 개월이라도 기다리다가 수색이 효과가 없을 것 같으면 그 때 가서 모두 같이 나가자. 지금은 왕국이 너무 어수선하단 말이야. 갑자기 아버님께 서 돌아 가셔서 주변국들의 움직임도 불안하고. 그래! 에레크트라! 오빠가 대려온 에 레크트라가 완치되는 것도 보아야지. 그 아이가 일어나서 오빠가 떠나 버린걸 알면 이 넓은 왕궁에서 어떻게 버티겠어?" "그래서 빨리 떠나려는 거야. 멀쩡히 움직일 수 있게 되면 그 아이가 나를 따라오려 는 걸 말릴 수 없게 되니까. 그리고 지금은 네 말대로 왕국의 제 정비에 힘 써야 할 때이지 내 개인 적인 일에 국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야. 이 일은 내 힘만으로 충분해. 내가 찾아내지 못할 것을 기사단이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 조슈아의 말에 모두가 절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이 왕국에 누가 있어 그녀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여하튼 아카바의 제 1 왕자인 것이다. 조슈아는 그들의 낙심한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부드러운 목소리 로 재차 설득하였다. "나는 이 나라의 왕위 계승자라는 신분이 아니라면 절대로 이 왕궁에 머물 이유가 없 어. 벌써부터 내가 왕궁에 머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구. 나는 본래의 몸을 되찾지 못하면 왕궁에 머물어서는 안돼는 거야. 그것이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는 그대로 어디인지도 모르는 계 절 궁전에서 병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 져야만해. 그것이 이 나라의 정통 왕위 계승자 로서 내가 해야할 일 인 거야." 잠시 말을 끊은 조슈아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숙부에게 고개를 숙 여 보였다. "그러니 부탁 드립니다. 숙부님. 제가 만약 스무 살이 되는 생일날까지 본래의 몸으 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병사를 공식으로 발표하시고, 아카바 제 8 대 국왕의 위 에 오르십시오. 저는 그때까지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에레나 의 아들이 다음 왕위계승자가 되도록……." "오빠∼!" 에레나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흐느꼈다. "미안하다 에레나. 그러나 숙모 님은 더 이상 아이를 낳으실 수 없고 샤레셀은 신녀 야. 결국 우리 왕실의 미래는 너에게 달려 있단다. 꼭 훌륭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거 라. 그래서 아들을 많이 낳는 거야. 오빠가 본래의 몸으로 돌아 왔을 때 조카가 많으 면 좋겠구나. 오랫동안 우리 왕실 가족은 너무 수가 적었어. 그래서 이런 일도 겪는 거란다." "흑흑∼." 마침내 에레나가 목놓아 울기 시작하였다. 조슈아의 말대로 현재 아카바의 왕실 가족은 이 자리에 있는 네 명과 샤레셀의 어머 니 헤레나 공작 부인까지 다섯 명이 전부, 그것도 조슈아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본래 의 몸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네 명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그럼 꼭 무사히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오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이 나라의 제 1 왕자이고 나의 사랑하는 조카란다. 그때까지 이 숙부가 네가 다스릴 왕국을 훌륭히 지켜 나가마." 마침내 대공의 허락이 떨어 졌다. 조슈아는 숙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어린 시절 자주 보지도 못한 그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 이다. 곧 이들 서먹서먹했던 왕실 가족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깊은 포옹을 나누 고 있었다. 접견실 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온 초저녁의 붉은 햇살이 따뜻하였다. 2 "이 아이를 잘 돌봐 줘. 지금은 정식 국왕이 없어 할 수 없겠지만 이 아이는 우리의 동생이야. 꼭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어야해." 조슈아가 에레크트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누이 에레나와 샤레셀에게 부탁 하였다. 극심한 부상을 입은 에레크트라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연 닷새 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치유 마법을 행하기는 하였지만 가슴과 무릎의 뼈가 산산이 부서지고 거의 온몸의 뼈가 마디마디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살아난 것이 기적인 상태였다. 그나마 떨어질 때 두 팔로 얼굴을 감싸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린 그녀는 즉사를 면치 못하였으리라. "호호∼. 나도 얼마나 동생을 바랬다고. 걱정마 오빠. 내가 꼭 잘 보살펴 줄게. 샤레 셀과 함께 이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게 많아. 얘는 깨어나는 순간부터 고생길이라 구." 오빠(?)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한 에레나는 손을 뻗어 조슈아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니 이 아이가 얼마나 변해 있을 지 꼭 보러 돌아 와야 해. 오빠가 어떻게 되든 나는 영원히 오빠의 누이동생이야." 조슈아는 말없이 사랑하는 누이동생을 꼭 껴안아 주고는 그 뒤에 시립하고 있는 퓨어 리스를 바라보았다. 바알은 어디에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고, 치료도 받지 않고 자신 의 생명력만으로 간단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안티오페는 샤레셀의 어깨에 앉아 무표정 한 얼굴로 그녀의 흰색 성포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퓨어리스,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이제 작별이야. 너는 아카바 왕국의 귀빈으로서 왕실 전용선을 타고 시돈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칼라에서 아 버님을 뵙고 다시 바리로 돌아가. 국왕일가는 무사하실 테니 정식으로 작위를 받아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거야." "흐윽∼." 퓨어리스가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조슈아의 품에 안겨 왔다. 조슈아는 이제 전과 같은 거부감 없이 그녀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었다. "꼭…꼭 시돈에도 찾아와 줘. 이대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래. 꼭 찾아가 볼게. 너는 내 최초의 여자 친구이니까. 그러나 그때에는 꼭 근위 대가 되어 있어야 해! 알았지?" 퓨어리스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조슈아의 오른쪽 볼에 키스 하였다. "너는 내 인생 최초의 친구야. 너와의 약속은 꼭 지킬게." 조슈아는 그녀의 대답에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퓨어리스에게서 떨어진 조슈아는 침대 옆에 준비되어 있던 봇짐을 어깨에 짊어지며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가야겠어. 말 한대로 조용히 비밀통로로 나갈 꺼야. 이 시간에 여행자 복 장을 한 왕자의 연인이 나다닌다면 안 좋은 소문이 돌겠지? 바알은 나를 보기 싫은 것 같으니 어쩔 수 없군. 만약 돌아온다면 그의 임용을 권해봐. 그런 검사는 정말로 흔치 않아." 위이잉―. 그때 샤레셀의 어깨에 앉아있던 안티오페가 가볍게 날아올라 조슈아의 오른 쪽 어깨 로 옮겨왔다. 그러자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조슈아가 고개를 틀며 안티오페를 만류하 였다. "이러지 말아요, 안티오페. 당신은 이제 시돈의 백작부인이잖아요. 이제 당신의 땅 을 가지고 있어요. 다시 아이도 낳고 조용히 사시는 게……." "나는 이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예에∼? 도대체 왜요?" 그녀의 놀라운 선언에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 안티오페는 조슈아의 귀에 손을 얹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내가 아이를 만들어 그 어려운 정착을 했던 것은 외로움에 지쳤기 때문이었어. 그리 고 만들다보면 나와 같은 아이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 그러나 끝끝내 나 오지 않더군." "그런데 왜∼?" 조슈아가 더듬거리며 묻자 안티오페는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는 외롭지 않게 때문이야. 바로 조슈아가 있으니까.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나 는 외롭지 않을 거야." "휴우∼."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요정여왕은 다른 어떤 것 보다 분명하고 거절하기 힘 든 이유를 들어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도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죽어요. 그런 생각은 안 해 보았어요?" "당신이 낳을 아이들을 사랑하면 되지." 그녀의 기가 막힌 대답에 모두가 굳어 버렸다. 특히 조슈아의 안색은 거의 사색이 되 고 있었다. "누…누가 아이를 낳는다는 거예요. 아무튼 그렇게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어요. 후 회하지 마세요." 이상한 상상에 얼굴을 붉히며 자신을 바라보는 세 소녀를 더 이상 마주할 수 없게된 조슈아는 성검 말고스를 챙겨 봇짐에 끼우고는 샤레셀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샤레셀은 그녀와 눈이 마 주치자 장난스레 오른 손을 허리춤에 쓱쓱 비비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아마도 악수를 청하는 것이겠지만 그녀 식의 작별인사는 다음 순간 예상하지 않던 선물이 되어 돌아 왔다. 쪽―. 조슈아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는 소리가 나도록 그녀의 입술에 키 스하였다. 언제나 꿈꾸어 왔지만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그 어느 순간부터 단지 꿈이 되어 버린 그녀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조슈아는 얼굴을 붉히며 거의 실신 직전의 샤레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아직도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했구나. 그러나 더 늦기 전에 해야겠지? 그때 너 를 신전에서 구해내지 못했어. 우리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구나.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어. 정말 미안해 샤레셀." "아∼." 그녀를 지나친 조슈아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지만 샤레셀은 돌아보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내 사랑. 잊지 않고 있었구나.' 기쁨과 슬픔으로 벅차 오르는 가슴을 끌어안으며 16세 신녀 샤레셀은 멀어져 가는 옛 연인의 발소리에 작별을 고하였다. '안녕. 그리고 고마워. 마지막에 소녀로서의 나에게 작별을 고해주어서. 건강해야해 조슈에.' 어린 그들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7년 전 그날 신녀가 되어버린 순간부터 멈추어 있던 그녀의 영혼 속에 삶이라는 이름의 시 계는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멈추는 일이 없 으리라. 3 그르르륵―. 소리를 내지 않게 위해 조심은 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잠든 조용한 밤중에 커다란 석 상을 소리 없이 움직인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이곳은 성밖 가도 변에 위치한 작은 공소. 궁전의 비밀 통로로 빠져 나온 조슈아는 옆으로 밀쳐낸 아세르 여신상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안에서 미는 것은 쉬웠는데 다시 본래대로 만드는 것은 이만 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이∼." 조슈아가 용을 쓰는 동안 무심 여왕 안티오페는 여신상의 어깨 위로 날아올라 시원 한 밤 바람을 맞으며 어두운 가도 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키워서 도와 줄 수도 있을 터이지만, 언제나 처럼 부탁하기 전에는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는 그녀였다. 마침내 혼자 힘으로는 소리를 내지 않고 석상을 원상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 은 조슈아는 석상에 기대어 숨을 헐떡거리며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헉헉∼. 도저히 안되겠어요. 좀 도와줘요, 안티오페. 내가 혼자 했다가는 돌 긁히 는 소리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깨어나겠어요." 그러나 안티오페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않고 다리를 까딱이며 억양 없는 목소리로 대 답하였다. "그런 건 나에게 부탁하지 말고 바알에게 시켜. 체격 좋잖아." "그럴 수 있으면 내가……." "도와줄까, 조슈아?" 조슈아가 그녀의 무신경한 대답에 신경질을 내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귀에 익은 사내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믿음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그녀의 인생에 가장 즐겁고 두려웠던 여행을 처음부 터 함께 하였던 친구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알∼?" 반가워하는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조슈아는 천천히 몸을 여 신상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얼굴을 이미 안티오페가 다보고 있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어둠 속에서 바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일견하기에도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튼튼 한 가죽 보호대에 멋진 회색 망토까지 걸치고 대공으로부터 직접 받은 백금 벨트에 검 을 차고 있었다. '헤에∼? 저렇게 차려 입혀 놓으니 꽤 멋있네?' 잠시 그의 변한 모습에 감탄하던 조슈아는 다시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어떻게 알고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기는 왕실 가족과 대신관 밖에 모르는 비 밀 통로라 구." "네 누이가 알려 주더군.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어. 오빠를 잘 돌봐 달라고." 의외의 대답에 할말을 읽은 조슈아가 멍해 있는 사이 공소 안으로 들어온 바알은 그 녀가 끙끙∼ 거리며 매달려도 어쩌지 못한 여신상을 가볍게 들어 올려 소리하나 내지 않고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아니, 그럼 그 애가 나에게 말도 안하고 당신에게 왕실 비밀 통로를 알려 주었단 말 이야? 이 통로가 알려지면 국왕을 살해하는 것도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쉽다구. " 조슈아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색이 되어 따져 묻자 바알이 씨익∼ 웃어 보이면 대 답하였다. "그래서 왕국의 비밀을 알려주는 대신 너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철저히 지켜달 라는 조건이 붙은 거야. 너는 참 좋은 동생을 두었더군." "자…자기들 마음대로……." 그때 석상 위의 안티오페가 언제나 정론이지만 확실히 상황을 악화시키는 한마디를 던졌다. "같이 있으면 좋지 뭘 그래 조슈아?" "……." "……." 그녀의 무심한 말에 잠시 굳어 버린 두 남녀였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 다. "몰라! 따라오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 화가 난 조슈아가 어깨를 좁혀 걸어가며 씩씩거렸다. 바알은 저 만치 앞서가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새 가 죽보호대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양심 의 가책이 느껴지고 있었다. "미안해, 조슈아. 이것은 돌려 줄 수 없어. 정신이 아득해 질 때까지 다시 생각해보 았다. 그러나 나는 너를 보낼 수 없어. 언젠가는∼, 언젠가는 꼭 돌아가지 않은 것이 행복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줄게." 위이잉―. 그때 바알은 자신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요정 여왕의 날개 짓 소리에 혼이 다 달 아날 뻔하였다. 그는 이 무심 여왕이 석상 위에 앉아 있었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이었다. 그러나 그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심 여왕 안티오페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투로 한 마 디를 던질 뿐이었다. "숨길 거면 확실하게 숨겨." "……." 그 어느 때 보다 가장 두려운 순간을 맞이했던 바알은 그녀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두 려움에서 해방되어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하였다. 그때 저만치 앞서가던 조슈아가 몸을 돌려 뒤돌아보며 신경질 적으로 소리쳤다. "빨리 안 따라 오고 뭐하는 거야? 놔두고 갈까?" "아…아니야. 같이 가자구!" 바알은 짐을 챙겨 들고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달빛이 아름다운 아세르 여신상에 고즈넉이 내리 쬐며 더 없이 청아한 반사광을 만들 어 내고 있었다. 아카바 왕국의 제 1 왕자이자, 공주이기도한 아름다운 16세 소녀가 홀로 첫 여행을 떠났던 그때, 그 장소. 그러나 이제 두 번째 여행을 떠나는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흑심을 품고 따라 다니는 정체 불명의 용병과 마신의 연인이었다는 어마어마(?) 한 신분의 요정 여왕이 그 동반자였지만, 뭐! 어떤가! 운명의 신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거니와 그들은 자신들의 지나온 인생과 앞으로 다가 올 인생에 만족해 할 것이다. 에필로그 Epilogue 아카바 왕국의 섭정왕 오드니 대공은 알현실에 마련되어 있는 황금 옥좌에 앉아 초조 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대공의 오른 편에는 고급 신녀 복장을 한 샤레셀이 시립하고 있었는데, 그녀 역 시 아버지와 같이 긴장한 얼굴빛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알현실의 문으로 바라보았 다. 그때 더 이상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오드니 대공이 손수건으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식 은땀을 닦아내며 탄식하였다. "아아∼. 뭐라고 하면 좋은가? 에레나와 레도 왕자의 혼사를 성사시키는데 도움을 부 탁한다며 디베리아 국왕이 보내온 황금 10만냥까지 받았던 내가 섭정왕이 되었다고 해 서 어떻게 이제 와서 거부한다는 말이냐!" "그러게 누가 애초에 그런걸 받으랬어요? 모두 아버지가 자초한 것이니 스스로 수습 하세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따갑게 쏘아붙이자 자라목이 되어 버리는 불쌍한 섭정왕이었다. 그는 정말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16 개월 전, 아카바 왕국 북쪽에 위치한 비동맹국 디베리아의 제 3 왕자가 에레나 공 주에게 청혼하였을 때, 모두가 그가 미쳐서 그런 것일 것이라고 수군거렸었다. 그러나 곧이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사신단과 함께 속속 도착해 오는 어마어마 한 선물들에 기가 질린 사람들은 왕자가 디베리아의 국왕자리를 노리고 처가의 힘을 빌려 형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디베리아 국왕 아론이 국혼을 원하는 정식 친필 서한을 보내고 이 모든 일이 단순히 왕자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 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당시 바디메오 국왕은 이미 소문과 첩자들의 정보로 레도 왕자에 대하여 좋은 인상 을 가지고 있었고, 오랜 앙숙이었던 디베리아와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 굳 이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왕자의 일로 골머리를 앓던 그는 상황에 밀려 정확 히 1 년 후 대답을 주겠다면 사신 단을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러자 바디메오 왕의 생각을 곡해한 아론 왕은 오드니 대공에게 혼사를 성사시켜줄 것을 부탁하는 서한과 함께 상당한 뇌물을 보내온 것이었다. 오드니 대공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조카딸인 에레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아카바 왕국을 위해서도 너무도 훌륭한 혼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어쩌면 그녀가 낳은 자식이 유일 의 왕위 계승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어떻게 타국에 시집을 보낸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에레나도 그 결혼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아∼. 내가 미쳤지. 그때 왜 그런걸 받았을까?" 아버지가 또 다시 뒤늦은 후회의 말을 내뱉자 샤레셀이 도끼눈을 뜨며 위협적(?)으 로 소리쳤다. "그 나마 그 돈을 이미 시골 성의 보수에 다 쓰셨다면서요? 정말 한심해요!" "……." 정말로 할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고향에 방치되어 있던 어머니의 성을 수 리하는데 10만냥의 황금을 다 써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곧 들이닥칠 사신 단에게 오리발을 내밀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카바 왕국의 섭정 왕이라는 자가 돈을 받고도 깨끗이 입을 씻더라'라는 소문이라 도 나게 되면, 그 소문은 너무도 빨리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가, 내일 아침쯤이면 세바 왕국의 두매 산골 술집에서 그를 씹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질 것이다. 그렇다고 국비로 그 돈을 매 꾸자니 양심이 하락치 않았고, 무엇보다 딸의 시선이 무 서웠다. 아버지가 섭정 왕이 된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신전을 빠져 나오는 딸은 그에게 사랑 스러운 목의 가시였다. 언제나 옆에 서서 '허튼 짓만 해봐라!'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 는 그녀 때문에 섭정을 하는 동안 (비록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는 이권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디베리아의 사신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갑자기 시종장이 탁한 목소리로 사신이 도착하였음을 알려왔다. "드…들라 이르라∼!" 소리가 날 정도로 침을 삼킨 오드니 대공이 평상 심을 가장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끼이이―. 알현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소심한 그에게는 거의 관 뚜껑 열리는 소리로 들렸으리 라. 문이 열리자 마치 죄라도 지은 듯 머리를 조아리며 사신이 들어오고 왔다. 그는 전에 영토 분쟁으로 신분을 숨긴 레도 왕자와 함께 게드마 성을 찾아 온 적이 있는 디베리아의 노 외무대신이었다. 그 사이 무슨 고생을 했는지 그의 머리는 더욱 더 하얗게 새어 있었다. "잘 오셨소. 자! 자리에 앉으시구려." 잘도 평소의 속을 잃을 수 없는 차가운 얼굴 표정을 되찾은 대공자리를 권하자 송구 스러운 듯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 노 외무대신이었다. 오드니 대공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이왕 맞을 매 빨리 맞아 버리자 는 심정으로 빠르게 본론을 꺼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에레나 공주는……." "송구스럽사오나 전하! 이 혼사는 없었던 일로 하여 주십시오." 머엉∼. 자신이 하려던 어려운 말을 상대가 대신 해줄 때 보다 더 기쁠 때가 있는가? 오드니 대공과 그의 딸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섭정왕의 기쁨이 지나쳐 멍해진 표정을 곡해한 외무대신은 사색이 되어 머리 를 탁자에 박으며 용서를 빌었다. "제발 용서하소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 드리겠사옵니다. 실은 왕자님께서는 에 레나 공주 님을 다른 분으로 착각하고 계셨던 겁니다. 먼발치에서 그분을 뵙고 단지 돌아가신 소피아 왕비 님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분을 에레나 공주 님이라 착각하 신 것이지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대공과 그의 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참을 수밖에 없 었다. 이제 상황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불쌍한 레도 왕자는 조슈아를 보고 사랑의 열병에 빠진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흘릴 샤레셀이 아니었 다. 샤레셀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디베리아의 외무대신에게 호통을 쳤다. "그런 말도 안돼는 착각을 하다니. 공주 님이 얼마나 상심을 하시겠어요." "으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대신 사죄의 뜻으로 황금 100만 냥을 선물로 가져 왔으니, 제발 노여움을 푸십시오." '배…백 만냥?' 오드니 대공은 거의 천장까지 튀어 오를 뻔하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겹 경사가 아닌 가? 그러나 이번에도 선수를 치는 샤레셀이었다. "좋아요. 그 정도 성의라면 받아들이지요. 재무 대신에게 상의해 보세요. 그럼 되었 으니 그만 물러가세요." '끄응!' 또 다시 한몫 건질 기회를 놓치고 만 대공이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그러자 쓸 때 없이 황금 백 만냥을 날렸다는 것을 알리 없는 노 외무대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잠깐만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레도 왕자는 그녀가 에레나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게되었지요." 샤레셀이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지자, 불쌍한 외무대신은 소매 춤으로 이마에 흘러 내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저∼. 그것이 한 달 전에 나라를 시끄럽게 하던 산적 때들을 일망타진하고 그 두목 을 잡아 기사단에 넘긴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만나보신 왕자님께서 그들 중에 그 아 가씨가 계신 것을 발견하신 겁니다." "예에∼?" 샤레셀과 대공은 그의 예상 밖의 대답에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 샤레 셀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들에 대하여 좀도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꺄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외무대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한 명은 송구스럽게도 왕자님께서 에레나 공주 님으로 착각하셨던 금발의 미소녀 였 고, 다른 한 명은 체구가 좋은 용병, 그리고 믿으실 지 모르겠지만 요정이 하나 있었 사옵니다." 순간 모녀는 기쁨의 눈빛을 교환하였다. 외무대신이 전해준 이야기는 성을 나간 조슈 아와 그의 친구들이 무사하다는 최초의 소식인 샘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대사는 잠시 동안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런데 왕자님께서는 한사코 떠나시겠다는 금발 아가씨를 쫓아 결국 성을 나가시 고, 따라나선 기사들도 따돌리셔서 아직 까지고 연락이 안 되는 실정입니다." "허억∼." 두 모녀가 상황도 잊고 헛 바람을 들이키자 당황한 외무대신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소…소인이 죽을죄를……." "아…아니에요. 그만 나가 보세요." 더 이상 이 늙은 외무대신을 괴롭혔다가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 샤레셀이 재빨리 정신 을 차리고 그를 내보냈다. 맞은 바 사명을 별 탈없이 수행한 사신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알현실을 빠져나갔고, 둘만 남겨진 모녀는 새로운 고민거리에 가슴이 답답해 옮을 느꼈다. "아아∼. 어딜 가도 말썽이네 그 녀석은∼." 샤레셀은 한숨을 내쉬며 옥좌 뒤편에 있는 두 개의 초상화로 시선으로 돌렸다. 바디메오 국왕이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여 명공을 시켜 그리게 한 아름다운 초상화 외 에 벽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초상화가 또 하나 결려있었다. 백마에 올라타 검을 뽑아 들고 마치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림 속의 소년은 그 옆의 소피아 왕비의 쌍둥이 남동생 같았다. 그렇다. 그림 속의 소년은 지금은 소녀의 몸으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난 조슈에 왕자였 다. 바디메오 국왕은 궁을 떠난 왕자가 그리워 또 한 장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시킨 것이 었다. 샤레셀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거봐! 나가면 고생이라고 했잖아. 그래도 무신경한 너는 재미있다고 하겠지?' THE END --------------------------------------------------------------------------- -- 아아~ 드디어 1부가 끝났습니다. 이제 곧 길고 긴 프린세스 조슈아의 세계에 본 무대 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동안 프린세스 조슈아를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으로 써보는 소설이 보시기에 어떠하셨는지 감히 묻기가 겁이 나는 군요^^ 그러나 나름대로 열심히, 그러나 즐기면서 써왔답니다. 비록 짧은 필력이나마 제 사 상과 즐거움을 양립하려고 애쓴 흔적이 눈에 띈다면 성공했다고 봐야겠지만 글쎄요... 조슈아 2 부는 게으른 작가의 재 충전을 위해 황금가지상 시상식이 있은 후 어느정 도 성과가 있으면 쓸 생각입니다. 그전에는 보너스로 외전을 써볼까 합니다. 만약 나의 조슈아가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다면 그녀의 여행은 계속 되겠지요. 아니면 또 다른 모험담이 탄생 하게 될터인데. 글쎄요^^ 아마도 배경은 달라도 그녀 또한 조슈아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겠지요. 저는 그녀를 사랑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