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인사드립니다.(본문내용없음) 안녕하세요, 유키짱입니다. 30회까지 고민하던 1편을 삭제 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본편은 1화 <새로운 만남>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처음 쓰는 판타지라 문제가 많이 있는 글이지만 그냥 가볍게...시간 때우기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시고, 많은 충고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여러분, 행복하세요~! 추신 : 지금 나이를 수정중입니다. 다소 혼란이 있으나, 세실의 나이는 8살부터 시작합니다. (_ 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새로운 출발 1. "나가서 돈 벌어와, 이년아! 남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와장창~! "여보...그만..." "저리 비켜! 네년도 잘한 거 없어! 어디서 저런 개뼈다귀 같은 년을 딸년이라구 낳아가지고는! 둘 다 나가! 이 잡것들아! 나가서 돈이나 벌어와, 이 쓸모없는 것들!" 삐이걱! 쾅! 낡고 허름한 오두막.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의 판자문 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왈칵 열렸다. 다 헤어진 옷을 입은, 앙상하게 뼈만 남은 두 사람을 토해내듯 뱉어낸 문은 다시 커다란 소음 을 내며 쏜살같이 닫혔다. 마치 누군가가 들어올까 겁이 난다는 듯. 경첩이 떨어져 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힌 문 밖에 허리를 굽히고 겨우 서 있던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인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버렸고, 후다닥 뛰어나와 멍하니 서 있던 조그마한 인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하다, 세실. 엄마가..." "아니요. 엄마 탓이 아니야. 그냥 내가...못 나서 그래...엄마." 울먹이는 여인을 다독거리며 애써 미소를 짓는 작은 아이. 여기 저기 얻어맞은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는 피멍든 얼굴. 한번도 자르지 않은 듯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제대로 감은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잔뜩 엉클어져 있었고, 파리한 아이의 얼굴은 크고 반짝이는 두 눈이 반을 차지 하고 있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씨익 웃어 보이는 작은 딸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레니는 눈물을 주륵 흘리며 부들거리는 손으로 잔뜩 헤어진 치맛자락을 들어 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거친 모직으로 만든 천이 따끔거리기라도 하련만 눈을 반짝이 며 엄마를 보고 있는 세실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배....고프지?" 문득 들려오는 요란한 뱃속의 비명소리에 다시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하는 레니를 보는 세실의 고개가 힘차게 흔들렸다. "아냐~엄마! 배 하나도 안고파. 빵 먹었잖아! 이놈의 배가 주제도 모르고...속이 좀 안좋아서 그래. 가스가 찼나?" 아빠가 먹던 빵 부스러기를 주워먹은 세실의 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어서 빨리 밥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배를 쥐어박으며 멋쩍은 미소를 짓던 세실은 서둘러 일어나 축 늘어진 엄마의 팔을 부축했다. "엄마, 가자! 오늘도 시장에 미나 아줌마가 일거리 준다고 했단 말이야. 지금 가면 아침 먹을 수 있어. 엄마 배고프지? 빨리 일어나요. 응?" 이제 8살난 아이가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태어나서부터 한번도 배부르게 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답게 뼈만 남은 앙상한 팔로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성인을 일으키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아이의 심정을 헤아려서 인가 주춤주춤 일어난 레니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꼭 쥐고 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다, 세실. 엄마가..." "엄마! 엄마가 잘못 한 거 없어. 내가 딸이라서 그래. 알지? 난 괜찮아. 괜찮아, 엄마. 정말이야." "........." 아버지의 커다란 주먹에 얻어맞은 얼굴의 멍자국은 어느새 시꺼멓게 죽어가고 입술에도 피가 엉켜 딱지가 앉은 얼굴로 밝게 웃는 세실의 모습에 레니의 가슴을 찢어질 듯 아파왔다. 하루가 멀다하고 술주정을 하며 아이를 때리는 남편을 보며 한순간의 선택이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딸의 앞날을 암흑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죄책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임신을 했다고 결혼하는 게 아닌데...' 술버릇이 나쁘다며 한사코 결혼을 말리던 부모님을 떠올리던 레니는 이를 악물었다. 철모르던 시절, 아버지의 식당에서 일을 돕던 레니의 눈에 덩치 큰 용병이 멋있게만 보였던 것은 결코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단지, 또래의 남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 작은 영지 의 소작농으로 태어난 레니의 시야가 좁았을 따름이었다. 손님 접대를 업으로 하는 식당을 수년간 해온 레니의 부모는 한눈에 사내의 방탕함을 알아보았고 경솔하게 손을 내밀려는 딸을 말리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경고를 하려던 노부부는 이미 아이를 가졌으니 그 사내를 따라가겠다는 딸의 아집을 결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물어린 결혼식을 올린 후 사내를 따라 서둘러 수도로 올라온 레니는 그제야 남편이라는 사내 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나, 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산속의 마을에 자리를 잡은 사내는 용병을 그만두고 아이를 가져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일선으로 내몰았다. 삯바느질이며 허드렛일을 하며 푼돈을 들고 들어오면 어김없이 술배를 채우고는 재수가 없어서 발목을 잡혔다며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은 예사인 사내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배는 때리지 않았는데,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던 레니는 몇 년 후 그 이유 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남편, 마크가 첫째로 태어난 큰아들이 5살 되던 해에 인근 상인에게 금화 다섯 닢을 받고 팔아 버렸던 것이다.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레니는 그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아이를 찾아 나섰지만, 아들 마크를 데리고 간 상인은 벌써 노예상인에게 자신이 데리고 있던 아이를 인수한 후였다. 피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찾다가 실신했던 레니는 그길로 짐을 싸서 도망을 나왔으나 고향으로 가던 도중 다시 잡혀와 예전처럼 허드렛일을 하며 남편의 술값을 벌어야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도망갔다 잡혀오고 목까지 매달았던 레니는 그렇게 원한다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주겠다며 서슬 퍼렇게 달려드는 남편의 기세에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해 후 두 번째로 아이가 태어났고 송장같이 누워있는 아내의 배 위에서 열심히 헐떡이 던 사내는 다시 회심을 미소를 지으며 금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두 아이를 잃은 레니는 삶의 희망마저 잃어 버렸다. 이제나 죽을까, 저제나 죽을까 하루하루를 시체같이 보내던 레니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또 임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그녀의 유일한 등불, 세실리아가 태어나게 되었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시작하면서 탐욕스러운 눈으로 딸을 내려다보는 남편을 본 레니는 정신을 놓았다. 군침을 흘리며 속으로 금화를 헤아리던 사내는 이 아이 마저 팔면 죽여버리겠다고 밤중에 식칼을 들고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는 아내를 벙찐 눈으로 쳐다보다가 두 손을 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셋은 좀 심하지? 뭐...돈은 더 많이 벌어오겠지. 흠..." 무슨 꿍꿍이인지 뒤로 물러선 남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딸을 안던 레니의 귀에는 사내의 중얼거림이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려왔다. '개만도 못한 새끼!' 남편은 딸아이를 술집 작부로 일을 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어느 귀족이나 부호의 첩으로 내놓던지. 확실히 시골아이치고는 단정한 얼굴을 가지고 태어난 딸아이는 엄마인 레니가 봐도 걱정스러울 만큼 곱게 자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3살도 채 되기도 전에 딸아이를 데리고 수도 로 가려던 사내는 다시 목숨을 내건 아내와 몸싸움을 벌이곤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일이 있은 후, 세실은 마을 어귀로 내몰려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4살이면 다 자란거지! 두손 두발 멀쩡한데 무슨 일이든 못해?" 또래 아이 답지 않게 총명한 세실은 사내가 봤을 때, 밥만 축내는 식충이었다. 지금은 술독에 빠져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 해도 한 때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사내의 주먹은 제대로 맞으면 어른이라도 뼛골이 시릴 정도의 강도를 자랑했다. 그런 주먹으로 기회만 닿으면 아이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남편의 만행에 질린 레니는 눈물을 삼키며 아이를 마을로 데리고 내 려와야 했다. 그나마 집에 있는 것 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 하며 딸아이를 데리고 이집 저집 허드렛일을 하던 레니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서 일을 돕고 있는 딸의 총명함에 또다시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돈이 적다며 밤마다 얻어맞는 엄마를 도와 말없이 일을 거드는 세실은 이미 4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 일손이 딸리면 어디든 나타나 낑낑거리며 어른들 틈새에서 일을 하는 아이는 마을의 명물이 되었고, 1쿠퍼(구릿돈)든 2쿠퍼든 주는데로 받으며 감사하다고 환히 웃는 아이의 미소에 넘어간 사람들은 서로 아이를 불러 작은 심부름을 시키고 임금을 주었다. 그렇게 두 모녀가 힘들게 모아온 돈은 사내의 한 끼 술값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사내의 무자비한 주먹질에 매일 일터로 몰리는 생활을 언 4년 동안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수 년간의 악몽 같은 생활을 돌이켜 보던 레니는 자신의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며 삶의 이유인 딸아이의 조막만한 손은 여느 아이들처럼 보들보들 하지 않았다. 아니, 이것이 진정 8살 난 아이의 손이 맞는가 할 의심이 들 정도로 고목을 연상시키듯 굳은살이 잔뜩 베이고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었다. '태어난 걸 후회하겠지? 엄마 딸로 태어난 걸 원망하겠지?' 연신 재잘거리며 자신의 손을 잡고 잰걸음을 걷는 세실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던 레니는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말발굽소리를 듣지 못했다. 문득 들려오는 요란한 말 울음소리를 놀란 레니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하였으나, 아침부터 남편에게 혹사당하고 제대로 먹지 못한 깡마른 몸은 그녀의 제어를 벗어났다. "꺄악!" 히히힝~~~ "비켜!"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들었던 발이 꼬이며 아이의 손을 놓치고 땅에 쓰러진 레니의 머리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안돼!" 미친 듯이 달려오던 말은 멈추라는 주인의 신호에 충실하려 했지만 달려오던 가속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리고 있는 조그마한 물체를 향해 편자가 달린 무거운 다리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 그 찰나의 순간, 레니의 귀에 사내들의 거친 고함소리와 말발굽소리 사이로 그녀의 목숨보다 귀중한 딸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세실? 너무... 가까워!' 가까웠다. 세실의 비명소리는 아까보다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이상함을 느낀 레니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들려지는 순간 무엇인가가 그녀의 몸을 옆으로 밀어냈다. 파아앗! 히이힝~ "아이야!" "안돼!" "세상에!" "세실!" "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바로 앞에 내려꽂힌 거대한 말의 다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레니는 미친 듯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말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세실! 아가! 흐흐흑! 세실!" 놀란 말이 이리 저리 다리를 움직이는 사이로 뛰어든 레니는 사내들의 고함소리를 무시하고 딸의 모습을 찾았다. 시야를 가리며 자욱이 피어올랐던 먼지가 내려앉고 말들도 안정을 되찾은 후에야 레니는 조그마한 천 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실!" 대 여섯 마리의 말들이 한 곳에 몰려 조그마한 원을 만들고 있었기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가!"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힌 흔적이 완연한 아이의 옷은 걸레처럼 완전히 너덜거렸고, 그녀의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 작은 덩치를 잔뜩 웅크린 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아....!" 털썩!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잘거리며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던 딸아이의 몸은 성한 곳 하나 없이 뼈가 보일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그 주위로 검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배 밑으로 손을 넣은 레니는 조심스럽게 딸의 몸을 돌려 품에 안았다. "세실...아가? 제발...세실..." 미동도 하지 않고 축 늘어진 딸을 안고 눈물만 흘리는 레니의 귀에 싸늘한 고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죠? 도대체 뭐예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갑자기 사람이 쓰러지는 바람에..." "어서 가요! 이게 뭐야? 약속시간에 늦겠네. 빨리 출발해요!" "아...아가씨. 저 아이가..." "무슨 일인데 그래요? 누가 죽기라도 했어요?" "......." 비단 천으로 온몸에 두른 듯 펑퍼짐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잔뜩 멋을 낸 여자가 귀찮다는 듯 레니를 흘낏 쳐다보고는 자신의 앞에서 쩔쩔매며 서 있는 기사단장을 노려보았다. "꼴을 보아하니 농노나 평민 같은데 뭘 신경 쓰는 거죠? 오늘 백작가에서 약속이 있다는 걸 몰라요? 몇 푼 던져주면 되지 왜 이렇게 지체하는 거예요?" "........"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경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말이었다. 귀족가의 영양들이 그러하듯 세실을 짓밟은 말을 타고 있던 기사들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딸 또한 신분제도에 얽매인 우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있어 평민이하,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족과 왕족 외의 인간들은 감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천박하고 무가치한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려오던 기사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조그마한 아이가 자신의 엄마를 구하려고 뛰어든 것을 똑똑히 보았고, 그러한 아이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시간도 넉넉한데 급하다며 자꾸만 재촉하던 아가씨가 없었다면 멀쩡히 길을 가던 사람이 말발굽에 밟힐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서 있는 근위기사들을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던 영양은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는 추레한 여인을 표독스럽게 노려보고는 콧방귀를 끼며 등을 돌렸다. "그렇게 걱정되면 단장님은 뒤에 따라오도록 해요. 이런 일로 시간을 허비하다니..흥! 가자!" 더러운 꼴 봤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쓰며 마차에 오른 영양은 감사의 인사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기사단장을 모르는 척 하며 마부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마부의 채찍질 소리에 이어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하자 얼른 말을 비켜선 기사들은 기사단장 의 눈초리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굳히며 딸아이의 시신을 안고 울고 있는 레니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달려 마차를 따라갔다. *************************************************************************************** 문득 글을 올리다 보니...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이 안계시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습니다. 핫핫핫 음... 이건 장르가 달라서... 제 능력에 판타지 쓰겠다고 달려든것도 웃기지만...그래도...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실리아는 제 세례명입니다. 핫핫핫 생각나는 이름이 없어서.. 그래서...좋은 이름 없나 공모중입니다. 유나의 세번째 삶에서 부여받을 이름이지요. 앞으로 쭈욱...이 글이 끝날때 까지 계속될 이름이기도 하구요.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부탁드리고자 하는데요... 길고...고급스럽고...뭐 안그래도 됩니다. 그냥 예쁜이름...부르기 쉽고, 기억에 남는 그런 이름 있으면 좀 도와주세요 ㅠ ㅠ 무능한 유키 능력없음을 만천하에 알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구요,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Merry Christmas! 안녕하세요 여러분~! 즐거운 성탄절 보내고 계신가요?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라구요 행복하세요~~!! ♡♥♡♥♡♥♡♥ 사슴을 한마리씩 클릭 해보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새로운 만남 2. 『찾았다! 나의 아이! 두 번 다시 잃지 않겠다!』 하얀 꽃들이 만발하던 정원에 폭풍이 휘몰아치며 대기가 술렁거렸다. 은은한 목소리,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린 주인의 말을 따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곳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진 곳. 잃어버린 땅. 아틀란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가, 아가? 세실..제발 눈 좀 떠보렴...제발.....!" 어머니의 간절한 울음소리에도 축 늘어진 아이의 손발은 움직일 줄 몰랐고 그런 모녀를 바라 보고 있던 세바스티앙의 얼굴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곳에 신전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있다 한들 이미 숨이 끊어진 것 처럼 보이는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생각에 어깨를 늘어뜨린 기사단장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결코 속죄받을 수 없는 대죄를 지은 기분. 평소와는 달랐다.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하늘과 땅과 같아, 평민의 목숨은 귀족이 기르는 개만도 못한 것이 사실 이다. 그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세바스티앙 드 카르민. 카르민 자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기사 학교를 졸업한 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배너 백작가의 기사단장이 되는 데 불과 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타가 공인한 검의 천재. 그것이 세바스티앙 드 카르민이었다. 하지만, 지금 검의 천재라 불리던 그의 평정심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봐왔고 직접 귀족 능멸죄를 물어 목을 벤 적도 있었으나 오늘 자신 의 말발굽에 치여 숨이 끊어진 아이를 보니 왠지 모를 회의감이 들었다. 알 수 가 없었다. 그저 평민 아이가 죽은 것 뿐이다. 나이가 어린 것을 빼면 특이할 것도 없건만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이 죄책감은 무어란 말인가?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혼란스러워진 근위 기사단장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른 아이의 엄마 곁 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흑흑흑..." 귀족이 평민에게 말을 높인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일이건만, 레니의 귀에는 그의 음성이 닿지 않았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이를 안아들고 눈물만 흘리는 레니의 곁에 무릎을 굽혀 앉은 세바스티앙은 슬며시 아이의 몸을 받쳐 들었다. 흠칫 분명 가슴의 기복은 없었다. 하지만... '기가 느껴진다.' 조그마한 몸 안에서 미약하나마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마나가 느껴지자 세바스티앙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펴졌다. "살아있습니다." "...흑?" 그저 멍하니 눈물을 흘리던 레니는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고 멍하니 아이를 안고 있는 기사의 얼굴을 보았다. 희망을 읽었다. 살아 있다지 않는가? "살...아...있다구요, 나리?" "갑시다!" 아이를 조심스럽게 추슬러 안은 세바스티앙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말로 다가갔다.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진 모르지만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갈 정도로 출혈이 심했으니 시간이 문제였다. "나...리?" 주춤 주춤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레니는 다리의 힘이 풀렸는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말을 타고 신전까지 잘 달려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세바스티앙은 뒤 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땅에 쓰러져 의식을 놓고 있는 여인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팔 안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와 아이의 엄마를 번갈아보더니 무슨 생각인지 아이를 바닥에 조심스레 눕히고는 망토를 벗었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도 남을 망토로 아이를 감싼 세바스티앙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휙 들어올려 말 위에 척하니 걸쳐놓고 바닥에 쌓여있는 천 뭉치를 가슴에 대고 망토의 끝자락으로 자신의 몸을 둘러 묶었다. 조심 조심 말 위로 올라탄 세바스티앙은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시간이 급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과연 자신의 배에 매달려있는 이 작은 아이가 말의 흔들 림을 견뎌낼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시간이 없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내버려 둔 것이 잘못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지나간 일로 후회해도 아무런 수용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아이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고 내버 려둔 자신의 실책은 그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하긴 군용말들에게 짓밟히고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가슴을 통해 전해지는 미약한 숨소리를 확인한 세바스티앙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한번 기적을 달라 기도했다. 그리고...달렸다. 아이의 끈질긴 생명력을 믿었으며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신관을 불러오라!" "무슨...?" "빨리 신관을 불러오라 하지 않는가!" 말을 신전 안까지 몰고 들어온 흙투성이 기사는 신관을 찾으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잠시 후 백발이 성성한 푸른 띠를 두른 신관이 다가왔다. 세상만사가 편해 보이는 걸음걸이. 천기가 개벽해도 저렇게 여유가 철철 넘치게 걸을 것이 확실하다는 믿음을 주는 노신관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세바스티앙에게 다가가 그의 불룩 튀어나온 가슴을 보고 두 손을 모았다. 「ΨΩΠΞψφξ」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두 손 모아 기도하던 신관의 손에서 찬란한 금빛이 터져 나왔다. 그 눈부신 빛에 눈살을 찌푸리던 세바스티앙은 주름진 손이 그의 가슴으로 다가오자 놀란 눈으로 신관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의구심에 물든 눈으로 노신관을 바라보던 세바스티앙은 어느새 빛이 사라진 손으로 그의 망토 끈을 풀고 있는 신관의 손을 저지했다. "어찌 알았는가?" "....저는 신관이지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어찌 알았냐고 물었다." "척 보고 알았습니다." 미소가 걷히지 않는 신관의 얼굴에 파란 꽃을 그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세바스티앙은 신관의 경고에 한숨을 내쉬며 망토로 감싸고 있던 아이를 넘겨주었다. "아직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시려구요?" 협박도 아닌 것이... 묘한 어조로 반문하는 신관을 노려보던 세바스티앙은 말 등에 축 늘어져있는 아이의 어미를 어깨 에 메고 잰걸음으로 사라지는 신관의 뒤를 따라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이를 침대에 눕힌 신관은 함박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오래 기다렸단다. 고맙구나." "..........?" 노신관의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세바스티앙은 아이의 몸 주위로 서서히 밀려드는 낯선 기운에 경악했다. 바람이 아니었다. 주변에 맴돌고 있던, 존재하지만 결코 느낄 수 없고 없는 듯 어디서든 존재하던 공기들이 움직 이기 시작했다. 대기가 춤을 추었다. 마나가....요동쳤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세바스티앙이 경악에 찬 신음소리를 내건 경악을 하건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는 노신관은 평온한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아이의 이마에 살며 시 키스했다. "다시 돌아와주어서 고맙구나. 이카루스의 아이여..." 세바스티앙 드 카르민과 세실리아의 만남.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만남은 이런 처절함과 경악 속에서 이루어졌다. ***************************************************************************************** ....궁시렁궁시렁궁시렁.... 말도 안되는 설정에... 말도 안되는 내용에... 우에... ㅜ 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새로운 만남 3.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해줄 수 있는가? 저 아이는 누구지?" 세바스티앙 드 카르민은 자신이 보았던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을 해명해달라고 노신관을 몇 시간째 닦달을 하고 있었지만 앞에 앉아서 꿋꿋하게 차를 마시는 노인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관이 남긴 마지막 말. '이카루스의 아이.'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며 기다렸다는 말은 또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치료를 할 때 느꼈던 그 방대한 기운들은 도대체 어떤 연유인지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도대체가 궁금한 것 투성이다.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처음 안아들었을 때 몸속에 돌아다니던 마나. 처음에야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생각하지 못했지만, 마법사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이 느낄 만큼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꽈앙!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도대체 저 아이는 누구기에 몸에 마나를 담고 있는 건가? 그 현상은 또 뭐란 말이냐!" 나무로 만든 탁자를 두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를 지르는 세바스티앙을 힐끗 쳐 다 본 노신관은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탁자위에 가지런히 모아 깍지를 꼈다. 심각한 얼굴. "백작영애가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 신관의 반응에 얼굴을 피며 자리에 앉던 세바스티앙은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나자 다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신관. 그를 잠시 노려보던 세바스티앙은 이를 갈며 등을 돌렸다. "이것으로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말게. 다시 찾아오지. 그때는...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게. 뿌드득" 쾅! 나무문이 부서질 듯 큰소리를 내며 닫히자 노신관의 얼굴에 그려져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세바스티앙 드 카르민. 신의 숨결이 닿은 이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감사합니다." 자신을 기다리며 앙탈을 부리고 있을 백작영애를 생각하며 급히 걸음을 옮기던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말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는 낯익은 여인을 보 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이 급히 말을 몰지만 않았다면 딸을 잃을 뻔한 경험을 하지 않았도 되었을 여인. 원망을 들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건만 도리어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는 초라한 여인을 보는 세바스티앙은 착잡한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당연히 해야 했을 일. 딸이 무사해서 다행이오. 몸은 괜찮소?"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이 은혜 두고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문선답(先文先答)이 아닐 수 없으나 감사하다고 줄곧 인사를 하는 이나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기사나 신경쓰지 않았다. 계속 눈물을 흘리며 감사인사를 하는 여인의 손은 고목나무 보다 거칠었다. 수십 년 동안의 잡일은 곱디 곱던 손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고 굳은살을 만들어내었다. 거칠기만 한 두 손을 부여잡고 있던 세바스티앙은 작은 아이를 떠올리며 여인을 얼굴 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거친 피부와 벌써 잔주름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는 여인은 얼핏 보면 40대 정도로 보였으나,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투명한 눈망울은 실제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또한 자세히 볼 여유가 없어 몰랐지만 지금 가까이에서 보니 꽤 미인축에 속하는 단정 한 생김새였다. "일자리는....있소?" 귀족이 쓰는 반존대가 불편하기만한 레니는 세바스티앙의 물음에 이를 악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내가 소개장을 하나 써 줄테니, 카르민 자작가로 가 보시오." "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신전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기사를 멍하니 쳐다보던 레니는 화급히 고개를 흔들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닙니다, 나리. 아니예요. 전 괜찮습니다. 허드렛일을 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나리!" 귀족가에서 일을 하면 보수는 좀더 받을 수 있고, 고정수입이 생길 테지만 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세실을 맡겨둘 수도 없는 일이다. 절대로. 일자리를 준다는 소리에 사색이 되어 고개를 흔들며 따라오는 여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세바스티앙은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인상을 썼다. "과한 참견은 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단장님." 늙수구레한 목소리에 담긴 옅은 비난을 감지한 세바스티앙은 찌푸린 얼굴 그대로 뒤를 노려보았다. 예의 빙그레한 미소를 걸고 있는 노신관의 얼굴이 보이자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감히 귀족의 은혜를 저버린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운데 자신의 딸을 구해준 기사님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느낀 레니는 어쩔 수 없이 사정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죄.없.는. 노신관이 귀족의 화.풀.이. 대.상.이 되도록 만들 수는 없는 일. 세바스티앙이 레니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기가 차서 뒤로 넘어갈 일이었지만... "나으리,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할만한 곳이 없으니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먹고 살 수는 있답니다. 말씀만 으로도 감사합니다. 나으리." 평민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세바스티 앙은 노신관의 비꼼을 들으면서까지, 싫다고 거절을 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 음은 없었다. 자신의 호의가 묵살되었다는, 그것도 한낱 평민에게 거절당했다는 불쾌한 마음 그대로, 등을 돌린 세바스티앙은 망토를 휘날리며 자신의 애마에게로 걸어갔다. 뒤에서 계속 들려오는 감사의 인사가 왠지 모르게 서글프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참으로 좁으십니다." 휘익! 말에 올라타려는 순간 뒤에서 들리는 비아냥 소리에 몸을 비튼 세바스티앙의 오른쪽 손에는 롱소드가 잡혀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정도의 여유만 두고 칼이 멈춰있는 곳에 노신관의 목이 있었다. "도대체 나와 원수라도 진건가? 죽고 싶은가 보지?" 자신의 반응이 과민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나, 왠지 모를 초조함이 세바스티 앙의 여유를 앗아가 버렸다. 자신의 목에 칼이 데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신관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 움도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세바스티앙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단장님의 호의를 받아들이면 저 여인의 여식이 팔려갈 겁니다." 칼을 쥔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것이...무슨 소리인가?" 느닷없는 노신관의 말에 어이없는 얼굴을 한 세바스티앙이 멍청하게 되묻자 한숨을 푹 내쉰 신관이 차근 차근 대답을 해주었다.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저 여인의 품에는 세 아이가 있었지요. 잠들어 있는 아이는 막내딸입니다. 저 여인의 지아비라는 작자가 위에 아들 둘을 노예상에 팔아넘겼지요. 그래서 일을 할 수 없는 겁 니다. 자작가에서 쓸모없는 일꾼을 받아드릴 리가 없잖습니까? 돈 몇 푼 더 벌자고 그런 일을 하러가면 남편이란 사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단장님 호의를 거절한 겁니다." ".............." 레니의 이야기는 장안의 화젯거리였기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가난 때문도 아니고 단지 술을 마시기 위해, 자식을 하나도 아닌 둘이나 팔아넘긴 마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세바스티앙은 신관이 레니의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지, 자신의 사정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도 않았다. 단지, 그가 해주는 이야기만이 세바스티앙의 가슴에 기름을 붓고 있을 뿐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판다. 가난.... 가난 때문이다. 가난 때문에 자식을 파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실제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경악한 세바스티앙은 이어지는 신관 의 말에 어깨를 늘어트렸다. "게다가...그놈은 술주정뱅이지요. 젊어서는 용병질 한다며 안할 짓 못할 짓 뭐든 하고 다 니다가 어디서 순진한 아낙을 꼬셔와 자식들을 팔아 챙긴 돈으로 술만 먹으며 살고 있지요. 두 아이를 잃어 정신이 나갔던 저 여인의 마지막 희망은 오늘 보신 그 아이뿐이랍니다. 그 아이 마저 잃는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형제 자매가 있고 부모님의 사랑도 잘 알고 있다. 세바스티앙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신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앞에 서 있는 기사의 손아귀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바스티앙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노신관은 더 큰 미소를 선사하며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한 장 내 밀었다. "저 여인이 사는 곳입니다. 내일 데리러 가주십시오. 그리고...자작님 댁에 직접 데리고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 "내일입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하실 겁니다. 저 두 여인들은 부지런하거든요, 하하하" 영문도 모른 채 멀거니 서 있던 세바스티앙은 이제 이유를 묻기에도 지쳤는지 신관의 모습이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며 애마에 올랐다. "제기랄!" 뭔가 이용을 당한 것 같기도 한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 채 말을 재촉해 길을 가던 세바스티앙 은 언덕위에 올랐을 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비잔티움식 흰색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에 조그마한 물체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자세히 쳐다보자 신전 입구에 나와 흙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이는 바로 조금 전에 보았던 낯익은 여인이었다. "내일...아침..." 문득 신관이 당부한 말을 떠올리며 한손을 들어보인 세바스티앙은 말을 돌려 다시 길을 달렸다. '감사합니다, 나리.' 가슴깊이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가 세바스티앙의 가슴에 닿아 그의 결심에 불을 붙였다. "반드시..." ****************************************************************************************** 반드시 뭐? 허허 참 웃기는 놈이지 않나요? 바보같은 세바스찬 ㅋㅋㅋㅋ 자, 새해입니다. 여러분! 새해 복! 이따시 만큼 많이 받으세요!!! Happy New Year!!!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일 모두다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음편에서 인사드릴께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새로운 만남 3. 신관의 배려로 식사까지 한 레니와 세실은 뒤늦게나마 시장으로 나갔다. 행상을 하는 사람들이 세실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 아이의 옷을 보며 기겁을 하며 뛰어나왔다. "아가, 이게 무슨 일이냐? 레니 어떻게 된거예요, 얘 옷이 왜이래?" 호들갑을 떠는 여편네에게 팔을 잡힌 레니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동안 빵집 으로 불려간 세실은 푸짐한 몸매만큼이나 넉넉한 인심을 가진 한나에게 옷을 받았다. 막내딸이 입던 것이라 미안하다 말을 하는 한나에게 귀엽게 웃어 보인 세실은 자신이 입던 것 보다 훨씬 좋은 옷을 입고 한나의 심부름을 하러 동전을 받아들고 잡화점으로 달려갔다. "오, 세실이냐? 오늘은 좀 늦었구나." "안녕하세요, 아저씨. 한나 아주머니께서 밀가루 거룩 가루(베이킹파우더)를 달라고 하셨어요." 구리동전을 내밀며 생긋 웃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남자는 선반에서 조그만 주머니를 꺼내어 세실의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주고는 동전을 받아들었다. "밥은 먹었니?" "네." 활짝 웃으며 대답을 하는 세실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사내가 손뼉을 치며 안으로 사라졌다가 동그란 것이 달려있는 하얀 막대를 가지고 나왔다. "옛다. 이게 사탕이란 거다. 백작가에 들어가는 물건인데 조금 남겨놨다. 가면서 먹으렴." 세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사탕이란 것은 평민들은 평생이가도 구경하기 힘든 비싼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아낌없이 건네준 남자는 놀라서 눈을 치켜뜨고 사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커서 잘되면 이 아저씨 잊지말라는 뜻에서 주는 거다. 알겠지?" 평민의,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집안의 아이가 잘되어봤자 얼마나 잘되겠는가? 백작가에 물건을 납품하면서 남겨둔 것이라 해도 이것을 팔면 수십배의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내의 인정에 꾸벅 인사를 한 세실은 누가 볼까 두려운 듯 막대 사탕을 치마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빵가게로 달려갔다. 바짝 마른 아이가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는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레니를 보며 얼굴을 활짝 폈다. 어디서 넘어졌는지 온통 흙으로 얼룩진 옷을 입고 걸어가는 여인 의 어깨는 너무나 무거워보였다. "이봐요, 레니 아줌마. 일자리는 구했수?" 잡화점 주인의 물음에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던 레니는 그의 손짓에 따라 의아한 얼굴로 가게로 다가왔다. "일자리가 없으면 오늘 하루만 우리 일 좀 도와주지 않겠수? 글을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난 까막눈이라.." 귀족가에서 비밀리에 물건을 구해달라며 두고 간 물품 목록이 있었으나 글을 모르는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읽어달라고 했다가는 비.밀.리.에 지시한 귀족가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돈에 눈이 멀어 선뜻 나서서 일을 받았던 그는 내심 고민을 하고 있다가 레니의 얼굴을 보고 희망을 본 것이었다.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아는 사람들 중 레니만큼 착하고 마음씨가 고운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글까지 알고 있어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읽어주거나 대필을 해주는 일도 한 적이 있었으니 그에게 레니는 구세주와 같았던 것이다. 잡화점 주인의 말에 활짝 웃으며 달려온 레니는 그가 쥐어주는 종이를 읽어보고는 눈썹을 모았다. [레이몬, 사갈나무 뿌리, 페리즈마, 롱푸질, 맥시웰, 로즈윙, 페닐, 아르카지스... 각각 1파운드(약 0.45kg)씩]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을 읽어 내리던 레니는 사내의 손에 잡혀 가게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쉿! 비밀리에 구해야 하는 것이우. 이게 소문나면 레니 아주머니나 나나 죽은목숨이란걸 명심 하고, 알았수?" 사내의 낮은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던 레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있어야죠,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인데..." "약초라고 합디다. 그 백작가 자제가 병이 들었는데 이게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고 비밀리에 치료를 해야 한답니다. 자, 그걸 읽어주겠수?"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니는 그가 그 희한한 풀들의 이름을 다 외울 때까지가 수십번을 되풀이해서 들려주어야했다. 수 종에 달하는 약초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사내는 흐뭇한 얼굴로 레니의 손에 금화하나 를 얹어주었다. 눈이 왕방울만해진 레니을 보며 손가락하나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댄 사내가 윙크 를 했다. "우리 둘 만의 비밀이우.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으니 조용히 있어야 해요. 그쪽에서는 내가 글을 아는 줄 알거든? 그럼 한 가지 일을 더 부탁합시다. 내 지금 당장 가서 이것들을 구해올테니 그동안 가게를 좀 봐줘요." 그의 요청에 고개를 흔들던 레니는 그가 제시한 은화 50닢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장장 1니르(한 시간)에 걸쳐 그가 세세하게 일러주는 물건의 가격들을 열심히 받아 적은 레니는 가게 안에 앉아 주인을 대신해 장사를 시작했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지친 얼굴로 나타난 사내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레니에게 자신이 약속했던 은화를 건네주고 피곤하니 문을 닫아야겠다고 말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마을 뿐 아니라 근교의 약초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약초를 하나씩 사온 사내는 절대로 자신이 한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금화를 하나 더 쥐어주고는 문을 닫았다. 졸지에 금화 두 닢에 은화 50닢을 번 레니는 문이 닫힌 가게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딸아이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귀족의 길을 가로막았던 죄는 아이가 다침으로서 유야무야되어 넘어가고 귀족의 도움으로 신전에서 딸아이 치료도 받았으며 그곳에서 식사도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시장에 오자마자 이렇게 큰 돈을 벌게 되다니 정녕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밀을 강조하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자 막연하게 피어나던 불안감이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위험해' 알 수 없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레니는 양손에 주먹을 꽉 쥐고 달려오는 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 이것 봐요! 오늘은 이만큼이나 벌었어!" 양손 가득 들려있던 구릿빛 동전들을 레니의 손 위에 쏟아 부은 세실은 아직도 자신이 벌어온 돈이 믿기지 않는 듯 엄마의 손위에서 반짝이는 동전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을 떼면 사라질 것이라 생각이라도 하는듯... 딸아이가 전해준 동전을 세어보던 레니의 눈도 동전만큼 커졌다. 구릿돈이 80닢이나 되는 것이 아닌가? 100쿠퍼(Cupper;동화)가 1실버(Silver;은화)이고 남편의 술값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생활비로 쓰는 돈은 한달에 겨우 50쿠퍼 정도였다. "도대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한거니, 누가 주든?" 레니의 말에 얼른 고개를 내저은 세실은 귀엽게 웃으며 엄마의 호기심을 풀어주었다. "한나 아주머니한테 2쿠퍼를 받고 나왔는데, 또 다른 아줌마가 심부름을 시켰어. 또 2쿠퍼를 받았지. 그런데 편지를 전해주고 오니까 또 다른 아저씨가 부르는 거야! 오늘 시장에 있는 아저씨, 아줌마들은 전부 편지를 보냈어. 그리구 나한테는 꼭 2쿠퍼씩 줬어." 놀라운 일이었다. 하루에 10쿠퍼도 벌기 힘들었는데, 오늘은 80쿠퍼를 벌다니. 게다가 세실의 말로는 결코 필요 없는 돈을 쓴 것이 다름 없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분명 낮에 레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그런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굶는 한이 있어도 구걸은 절대로 하지 않는 그들 모녀를 잘 알기에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레니 를 대신해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적지 않은 돈을 준 것이다. 방긋거리는 딸아이의 손을 꼭 잡은 레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세실?" "응?" "오늘 받은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말려무나. 알았지?" 레니의 말에 세실의 작은 머리가 끄덕여졌다. 총명한 아이니 만큼 사람들의 숨은 온정을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두말하지 않은 레니는 눈물을 훔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집과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엄마 어디가?" "우선...상회에 가야겠다." "왜?" "이렇게 큰 돈을 가지고 다니다가 도둑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하겠니?" "음, 그렇구나."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레이븐 상회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물품 뿐 아니라 전장(은행)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돈을 상회에 맞기면 일정 기간마다 금액의 1할의 이자를 준다는 말이 있기 는 하지만, 상회가 가진 신용에 비해 금전을 거래하는 고객은 귀족들에 불과했다. 먹고 살기가 막막한 평민들이 여유 자금을 가지는 것은 길 가다 금화를 줍는 것 만큼 희귀한 일이 었기 때문이다. 겨우 80닢의 구릿돈을 가지고 돈을 맡기려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세실이지 만 집에서 그들이 돈을 벌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주정뱅이 아버지를 떠올리며 입을 닫았다. *************************************************************************************** 잠깐 제가 설정한 단위를 말씀드리지요. 콜록 무게는 파운드를 씁니다. 1파운드는 o.45kg정도이구요 길이(키)는 피텐(피드)로 30.48cm입니다. 1분은 1미르, 1시간은 1나르, 하루는 38나르, 한달은 25일입니다. 일년은 12개월로 3개월씩 4계절을 기본 설정으로 합니다. 제 역량이 이것밖에 안되니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구요 혹시 읽으시다 말이 안되는 부분이 있으면 꼭 말씀을 남겨주시길 부탁드릴께요. 다른 것을 함께 쓰느라 많이 늦어졌지만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편으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취직하다. 1. 레이븐 상회는 귀족가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번화가에 있었기에 모녀는 신전에서 시장으로 걸어간 것만큼 더 걸어가야만 했다. 마차를 타면 5분 정도면 될 거리를 장장 40미르(40분)동안 열심히 걸어 레이븐 상회 앞에선 두 모녀는 5층 높이의 커다란 건물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을 변두리에 있는 집과 시장만 왔다갔다 해온 이들이 번화가에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말로만 들었던 상회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그들의 기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봐도 구릿돈을 맡아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세실의 걱정과는 달리 레니는 딸을 손 을 꼭 잡고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손님을 맞이하던 20대 중반의 남자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시골 아낙과 역시 낡은 옷을 입은 귀여운 소녀를 보며 잠깐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레이븐 상회에 잘 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손님은 왕이라는 규칙을 충실히 지킨 사내는 보답으로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미소를 받 을 수 있었다. 8살 짜리 소녀의 황홀한 미소에 덩달아 기분 좋게 눈웃음을 짓던 사내는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의 조심스러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실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커다란 집무실로 안내한 사내는 수만가지 서류를 어지럽게 펼쳐놓고 열심히 뭔가를 긁적이고 있는 중년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돈을 맡기고 싶으시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던 남자는 방안에 서서 죄를 지은 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두 모녀의 몰골을 쭉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의자에 앉으시오. 가서 차 좀 내오지? 꼬마 숙녀님은 주스가 좋겠네." "네." 옷차림을 보면 분명 가질 것이 없는 것이 분명한데 싫은 내색도 없이 선뜻 손님으로 대접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감사함을 느끼던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기 저기 힐끗 거리는 딸아이를 끌고 가죽 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내렸다. 서류를 보고 있던 사내는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거의 6피텐(약 183cm)에 달하는 거구에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는 덩치가 무색하게 느긋한 걸음 으로 다가와 레니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제 이름은 카일 레이븐입니다. 저희와 거래를 하고 싶으시다구요?" "네. 저기 혹시 그...금액을 맡기는데 제한이...그러니까 음..." 말을 더듬는 레니를 보며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보인 카일은 그녀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저희들은 동전 한 닢도 맡아드립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 그럼 물건도...." "네. 물건도 함께요. 원하신다면 적당한 금액으로 처분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레니가 갑자기 윗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세실은 레니가 옷자락을 풀어헤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지만 카일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가슴선까지 옷을 푼 레니는 이제 손을 집어넣고 꼼지락거리기까지 했다. 아름답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고생한 것 치고는 고운 얼굴에 하얀 피부의 여인이 가슴을 내놓고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있는 카일의 눈에 재미있다는 기색만 스쳐갔다. 잠시 후 카일은 손을 내밀어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금속 목걸이를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주머니에서 안경알을 꺼내어 금빛이 나는 목걸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카일이 눈썹을 찌푸렸다. "진짜 금이군요. 그것도 순금입니다." 그의 말에 레니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이 사람 믿을 수 있어!' 부모님도, 남편도 모르는 그녀만의 보물이었다. 과거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보답으로 받아 한번도 몸에서 떼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본 남편은 모조품이라 여기며 하찮게 넘겨 버렸지만 그것은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속일 수도 있었을 텐데 대뜸 진짜라고 이야기하는 사내의 진실함에 레니는 마음을 놓았다. 한편 카일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체인에 달려있는 드래곤이 새겨진 둥근 패. 신성시 되는 드래곤들의 존재는 이미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지만 감히 드래곤을 일개 장식용 으로 사용하는 간 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수 천년전 사라진 드래곤들은 자신들의 상징을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고 긴 세월 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함부로 드래곤을 조각하거나 그리는 이들은 없었다. [감히 수호신의 영역을 넘보는 자,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저주가 내릴지니 그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보낸다.] 이제는 거대한 호수가 되어버린 곳, 이미 지도상에서는 사라져 버린 아틀란타 대륙의 바리진 호수는 아주 오래전 거대한 산맥이 있는 곳이라 했다. 그 호수 앞에 놓인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에 새겨진 이 경고문은 후대에까지 구전으로 전해지며 감히 드래곤이 남겨놓았다는 비석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드래곤을 국기에 그려 넣은 국가가 하루아침에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 가 떠돌아 다녔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드래곤이 새겨진 금패를 지닌 여인이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희망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분명 그러한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라에 들키면 일가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 '어찌해야하나' 물건도 받는다 약속을 했기에 신용으로 먹고 사는 카일은 그의 신념을 깨기 싫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먹는 것조차도 힘든 것이 분명한 이 여인이 이것을 내놓았을 때 어떤 각오로 그리한 것인지 집을 뛰쳐나와 맨손으로 시작해 이만큼 사업을 일으킨 카일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목숨보다 소중히 했을 것이다. "이것은...." "잠시 맡아만 주시면 되요. 나중에...나중에 제 딸이 찾으러 오면 돌려주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봐서는 안 되요. 그것을 제게 주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타인에게 절대로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잠시만 이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될 때 까지만 보관해주세요." 목숨을 건 맹세. 겨우 10세에 불과했던 레니의 머릿속에 각인된 목소리. 「혼자만 알고 있으렴. 누구에게도 보이면 안 된다. 나중에 자라 간절한 소망이 있으면 아틀란타 로 찾아오렴. 그곳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호수가 있단다. 그곳에 와서 호수에 이것을 던지렴. 그럼 내가 널 맞이하러 가마. 너와 나 둘만의 약속이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그 아름다운 아저씨가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며 당부했던 말은 아직 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약속은 깬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레니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본능이 이리하라고 시켰다. 이곳에 와서 이것을 맡겨야 한다고. 오늘 잡화상에서의 경험이 레니를 이렇게 행동하도록 종용했고 비단 주머니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넣고 고급스러운 상자에 주머니를 넣고 봉인 스크롤을 꺼내 상자를 잠그는 카일을 보며 레니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약속의 증표로 신용장 대신에 자신의 신물인 반지를 꺼낸 카일이 그것의 세실의 약지에 끼워주고 뭐라 중얼거리자 너무 헐거워 덜렁거리던 반지가 세실의 작은 손가락에 꼭 맞을 정도로 줄어들었 다. "이것은 레이온 상단의 증표입니다. 꼬마 아가씨가 성년이 되는 해 이곳으로 오셔서 반지를 보여 주시면 됩니다. 이 반지는 저 밖에 빼지 못합니다. 설사 손가락을 자른다 해도 반지를 빠지지 않습 니다." 손가락을 자른다는 말에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는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사내는 아이의 굳은 살 베인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제 허락 없이 반지를 탐한 이들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꼬마 아가씨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반지는 자동적으로 저에게 소환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지가 소환되면 이 물건은 세상에서 사라 질 것입니다." 목숨을 건 계약이 이루어졌다. 카일의 따뜻한 손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세실은 차를 들고 들어오는 사내를 보며 얼굴을 베시시 웃었다. 아이의 웃음이 마음에 드는지 잔을 내려놓은 사내는 아이의 앞에 과자 접시를 내려놓았다. 시키지도 않은 배려를 하는 부관에게 잘했다는 뜻에서 윙크를 해준 카일은 마법으로 봉인한 상자를 건네주었다. "가장 깊은 곳에 두게." 가장 깊은 곳이란 상회의 주인인 카일과 그 만이 알고 있는 레이븐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를 말한다. 그곳에 보관되여 있는 물건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었고 그것들 중 하나라도 잃어버린 다면 레이븐 상회 자체가 없어질 수 있을 만큼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들만 보관하는 곳이다. 카일의 말에 순간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상자를 받아들고 등을 돌렸다. "자 그럼 거래는 끝난건가요?" 홀가분하다는 카일의 얼굴을 보며 실소를 짓던 레니는 고개를 흔들며 주머니에서 동전을 한움큼 꺼내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금화 2개와 은화 50개. 동화 80개였다. 딸아이의 놀란 눈을 무시한 레니는 그 중 동화를 5개만 다시 집어 들고 카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과는 달리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모녀가 가지고 온 돈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카일은 묵묵히 장부를 들고 왔다. 돈을 기록하고 날짜와 상단이 망한다면 어디로 가서 돈을 받으라고 적혀있는 신용장을 내밀며 레니와 세실에게 싸인을 하라고 말했다. 혹시나 글을 모를까 하던 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평민이 글을 쓴다는 것에 놀란 것도 잠시 상당히 깨끗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은 레니 가 펜을 세실에게 전해주자 그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펜을 받아든 세실은 레니보다 더욱 아름다운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서류에 적어넣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렇게 글을 잘 쓰는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꼬마 아가씨께서 교육을 받으시는 건가요?" 카일의 경악에 찬 목소리에 레니는 자부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있는 서점에서 심부름을 하며 틈틈이 읽고 쓰기를 배운 딸아이는 그녀보다 더 많은 단어 를 알며 가끔 그녀를 대신해 대필을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모녀라는 생각에 눈을 굴리던 카일은 과자를 야금야금 먹으며 그에게 호소 어린 눈빛을 보내는 작은 소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요청과 대답이 있은 후 세실은 활짝 웃으며 접시에 담긴 과자들을 주머니에 넣었다. "세실!" 딸아이의 말에 기겁을 한 레니가 아이의 손을 잡았지만 카일의 만류로 한숨을 내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 딸아이가 이렇게 대가 없이 무언가를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과자를 주머니에 넣은 세실은 베시시 웃으며 반대쪽 주머니에서 막대기를 꺼냈다. "아저씨 과자 잘 먹을께요. 전 돈이 없으니까 대신 이걸 드릴께요." 아이가 내 놓은 것은 잡화상 주인이 주었던 막대사탕이었다. 포장도 끄르지 않은 값비싼 사탕을 그에게 내밀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를 보고 다시 놀란 카일은 생전 처음으로 말을 더듬고야 말았다. "아..그건....사탕...아니냐? 난...그저 그 과자를 준 것 뿐인데..콜록...사탕은..." 그의 말에 고개를 흔든 세실은 그의 손을 잡아 사탕을 쥐어주었다. "아저씨 원래는 엄마 주려고 두었던 건데 과자가 더 맛있어요. 사탕은 금방 녹아버리지만 과자 는 두고 두고 먹을 수 있잖아요? 배도 부르니까. 과자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구경할까 말까한 사탕을 선뜻 내놓으며 과자에 만족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일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니를 보며 주먹을 쥐었다. 참으로 바르게 자란 아이란 생각이 들었다. 구걸 하지도 않는다. 대가가 없는 것은 받지 않도록 배운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가르친 것이 이 허름한 옷차림을 한 고된 생활고에 찌들린 여인이란 생각이 들자 레니라는 여인이 다시 보였다. "그럼 사탕은 내가 잘 먹으마. 헌데 이것참 네가 손해보는 것 같지 않니? 이 사탕 하나면 그런 과자는 얼마든지 살 수 있을텐데." 장사꾼의 기질을 여김없이 발휘하던 카일은 8살짜리 여아에게 한대 더 맞았다. "아니요, 아저씨. 그건 제가 공짜로 얻은 거거든요. 심부름하러 갔던 가게 주인 아저씨가 주신 거죠. 전 한 일이 없는데 받았으니 손해 보는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맛있는 과자도 먹을 수 있으니까요." "험험 과자보다는 사탕이 더 맛있을텐데?" "한 번 맛을 보면 평생 잊지 못 할거예요. 하지만 과자는 제가 나중에 자라서 좀더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되면 살 수 있겠지요. 분수에 맞지 않는...음....분수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는요 무엇이든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에만 만족하라고 하셨어요. 제 능력으로는 평생을 가도 그런 사탕은 살 수 없거든요." 여기까지 이야기 했을때 세실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지만 이내 아이는 밝게 웃으며 손에 쥔 과자 를 한 입 더 베어물었다. "암튼 전 과자가 더 좋아요. 아저씨는 분명히 부자니까 그런 사탕은 얼마든지 살 수 있겠죠? 저도 이담에 과자를 살 수 있을테니 공정한 거래예요." 이게 무슨 여덟 살이란 말인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입을 쩍 벌리고 쫑알쫑알 이야기하는 아이를 넋놓고 바라보던 카일은 문득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분명 저 여인이 이렇게 가르친거겠지?' 어릴 때부터 식당 겸 여관을 겸하는 가게를 하던 부모님 밑에서 세상 이치를 배워온 레니는 그녀의 딸에게도 분수를 알고 열심히 노력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충고를 매일 해오고 있었다. 스스로의 위치를 망각했던 단 한번의 실수가 그녀를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몰아 넣었기에 세실만은 자신처럼 되지 말라는 레니의 선택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이었다. 어머니의 삶을 옆에서 똑똑히 지켜보며 살아온 세실 역시 엄마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 했고 절대로 레니와 같은 삶은 살지 않을거란 당돌한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갓난쟁이 때부터 주입된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실의 평생을 좌우하게 되지만 지금 당장 에만 해도 대상인 카일 레이븐을 경악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데 일조한 것 만은 사실이었다. 8살난 어린 아이에게서 새삼 인생의 경지를 맛본 카일은 고마움의 뜻으로 과자를 한 봉지 더 건네주었다. 갓 구은 향기로운 빵도 함께. "집에 가면서 먹으렴. 이건 이자다. 너에게 좋은 것을 배웠으니 이 아저씨가 감사의 뜻으로 주는 거야. 결코 대가없이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카일의 말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세실은 신용장을 치마단 속에 숨기는 레니를 보며 얼른 고개를 돌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분이 아빠라면 좋겠다...' 꽤나 영특한 소리를 중얼거리던 세실은 자신들을 처음 맞이해주고 과자까지 준 아저씨가 다가 오자 그에게 후다닥 뛰어갔다. 업무 보고를 하러 들어오던 사내는 어린 아가씨가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까딱거리자 얼른 허리 를 숙였다. 발뒤꿈치를 든 세실이 사내의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해주고는 뒤로 물러서서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과자 잘 먹었어요, 아저씨."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아가씨의 뽀뽀를 받은 사내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며 허리를 들었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배를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상관을 보며 잠시 얼굴을 찌푸렸 지만 기분이 좋은 관계로 무시해 버렸다. 카일과 사내의 배웅을 받으며 상회를 나온 모녀는 손을 흔들어주고는 어둠을 헤치며 사라졌다. "저 아이를 기억하렴. 크게 될 거야." 카일의 뜬금없는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사내는 아이가 입 맞춰 주었던 볼을 긁적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취직하다. 2.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한 레니는 남편인 마크에게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 얻어맞고 돈을 빼앗겼다. 쓸모없는 것이라며 딸아이의 목을 움켜쥐고 마구 흔드는 남편 에게 매달렸던 레니는 두 팔이 부러져 구석에 내던져졌다. 엄마의 덜렁거리는 두 팔을 보고 비명을 지르던 세실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마크는 아이의 작은 머리를 거친 나무문 에 찍어버렸다. 여리디 여린 아이의 두개골은 나무문에 부딪히는 순간 부서졌다. 피를 쏟아내며 의식을 잃은 아이를 보고 비명을 지르던 레니는 자신의 팔이 부러진 것도 모르고 남편에게 달려들었다가 다시 방바닥을 굴러야했다. "재수 없는 것들. 확 죽어버리면 속 시원하겠네, 쳇!" 엄청나게 피를 쏟으며 바닥에 널부러진 아이를 발로 툭툭 건드려보던 마크는 아이의 얼굴에 침을 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버렸다. "아가, 아가?" 두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아이에게 다가간 레니는 움직이지 않는 두 팔로 아이를 감싸안으려 노력을 하다가 아이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눈물을 흘렸다. 죽고 싶었다. 아침에 자신 때문에 죽을 뻔한 아이는 자신을 낳아준 아비의 손에 머리가 깨어져 피를 쏟으며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헌데 안아주지도 못한다. 이것이 삶이라는 것인가? 비명을 지르며 악을 쓰던 레니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내며 레니는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살려달라고.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부러진 두 팔로는 문손잡이도 잡을 수 없기에 문을 안으로 열어야 하는 집은 그녀를 가두는 감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울컥 울컥 솟아나는 핏덩이들은 무시했다. 아이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어떻게든 막아보려 다리로 눌러도 보고 치마로 깨진 부위를 막아보려고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낮에 흘렸던 피보다 훨씬 많은 피를 흘린 아이의 숨소리가 점차 약해졌고 레니의 비명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을까? 얼마나 울었을까? 난데없이 바람이 휘몰아치며 기적처럼 문이 활짝 열렸다. 산 너머에서 밝은 태양이 어둠을 밀어내며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새벽이다. 절망에 빠져있던 레니는 떠오르는 태양에 힘을 얻은 듯 쓰러진 아이의 옷을 덥썩 물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레니는 아이의 무게에 자신의 이빨이 뽑힐 것 같은 아픔을 느꼈지만 자신의 안위보다 아이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또다시 울컥 솟아나는 피를 꿀꺽 삼킨 레니는 입으로 아이의 옷을 문채 몸을 일으켰다. 신전은 너무 멀었다. 말을 타도 마을에서 한참을 가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르민 자작가를 찾으시오.' 문득 눈부신 갑옷을 입고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었던 기사가 생각났다. 또다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레니의 등을 살짝 밀어주었다. 이빨로 지탱하는 아이의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일단 집을 나선 레니는 아이를 입에 문채 비틀거리며 어두운 길을 헤쳐나갔다. '숨을 쉬지 않아, 어떻게 해야하지?' '도와줘, 숨을 쉬게 도와줘!' '들어주자. 무거워보여.' '우리한테 맡기면 금방 갈텐데.' 귓가에 소곤대는 목소리들을 무시하며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이던 레니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을 들어올린다고 느끼는 순간 비명을 삼켰다. 아이를 어서 자작가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래서 헛것이 들린다고 생각했지만,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이 느껴지지 않자 슬며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날고 있었다. 분명 자신은 서 있는데, 발이 땅위에서 조금 떨어진 채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지?' '몰라' '어디로 가야하는 거야? 이리로 가면 되는 거야?' '물어보면 되잖아!' '아이를 물고 있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 '우리말도 못 들을 텐데....' '어디로 가지?' '거기로 가자!' '어디?' '아이를 찾은 곳!' '맞아!' '가자!' 서로 묻고 대답하길 잠깐. 처음 집에 몰아쳐서 문이 열리도록 했던 것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자신들을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는 바람에 몸을 맡긴 레니는 주위를 살펴보려 했지만 그들을 감싸고 있는 회오리에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레니에게는 억겁같던 시간은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그녀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요동을 쳤다. 주위가 혼란스러워졌다. 또 다시 환청이 들렸다. '인간이다!' '인간이야!' '어떻게 하지?' '우릴 보면 안 되는데..' '지금 내려놓자. 저 인간이 도와줄꺼야.' '도와줄꺼야.'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바람이 순식간에 잠잠해지며 주위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살며시 땅에 발을 디딘 레니는 걸음을 옮겼다. 처음보다는 한결 몸이 가벼워진 느낌에 힘차게 발을 놀리던 레니는 순백색의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사를 보며 황급히 옆으로 몸을 비틀었다. "히이잉~" 신경질적인 말 울음소리 다음으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길옆으로 몸을 피한 레니는 앞만 보며 걸음을 옮겼다. "부인!" 말을 타고 있던 사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르민 자작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레니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귀족 따위에게 신경을 썼다가는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 신관의 말에 따라 해가 뜰 무렵 일어나 아이와 엄마를 데리러 가던 세바스티앙은 두 팔을 덜렁 이며 피를 흘리는 아이를 입에 문채 미친 듯이 걸어가는 낯익은 여인을 보며 경악했다. 놀란 마음에 말을 세우고 여인을 불렀지만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걸어온 길에는 길게 핏자국이 나 있었고 지금도 한걸음 걸을 때 마다 조그마한 아이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가는 여인을 보고 이를 악문 세바스티앙은 서둘러 말에 올라 여인을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레니에게 다가간 세바스티앙은 여인의 가는 허리를 낚아채어 말위에 올려놓았다. 그 와중에도 레니의 입은 벌어질 줄 몰랐고 덕분에 세실은 무사히 세바스티앙의 가슴에 안길 수 있었다. 부러진 두 팔을 흔들며 반항을 하려던 레니는 자신을 납치(?)한 남자가 그녀가 찾아가려 했던 백작가의 기사라는 것을 알고 눈을 감았다. 온통 피범벅이 된 여인과 아이를 보며 할 말을 잃은 세바스티앙은 어제 찾아갔었던 신전으로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어째 볼 때마다 피를 봐야 하는 건가?' 신전에서 치료를 받은 것이 겨우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다. 마치 자신은 이 작은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문득 떠올리던 세바스티앙은 신비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충고하던 신관의 말을 떠올렸다. "내일입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하실 겁니다. 저 두 여인들은 부지런하거든요, 하하하"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다면 그 뻔뻔한 낯짝으로 웃던 인간의 목을 베어버리라 맹세한 세바스티앙 은 숨이 차서 헐떡이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죽어라 말을 달렸다. ****************************************** 신전이 또 뒤집어졌다. 피범벅이 된 아이와 여인을 한꺼번에 안아들고 신전으로 뛰어들어 온 기사때문이었다. 어제도 날뛰더니 오늘 또 날뛰는 세바스티앙을 보며 자발적으로 뛰어간 사내는 새벽기도를 올리던 신관을 모시고 달려나왔다. 세바스티앙의 예상은 빗나갔다. 수련 신관의 소식을 듣고 뛰어나오는 노신관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던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실의 얼굴을 쓸어보던 신관은 그 자리에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세바스티앙의 눈이 커질 데로 커졌고 신전 앞에서 벌어진 소란에 밖으로 뛰쳐 나왔던 신관들은 무릎을 꿇고 이카루스를 부르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노신관이 기도가 다른 신관들의 기도와 합쳐지며 세실의 몸에서 금빛 광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아이의 몸에서 서기가 퍼져나오고 있었다. 밖에서 스며드는 것이 아닌 아이의 자그마한 몸 안에서 시작된 광채는 기도 소리가 커질수록 그 범위가 확산되어 신전 전체를 감싸며 둥근 막을 형성했다. 피는 이미 멈추었고 쩍 벌어져있던 두개골도 깔끔하게 붙었다. 덜렁거리던 레니의 두 팔도 제자리를 찾았으며 충격으로 뒤틀렸던 내장도 제자리를 찾았다. 기적은 모녀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신전 안에서 치료를 받아오던 환자들이 일어났다. 걷지 못하던 자들은 두 발로 일어섰으며, 뒤틀린 몸으로 고통 받던 이들은 반듯해진 몸으로 몸을 일으켰다. 크고 작은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었고 신관들이 손을 쓰기 힘들 었던 환자들마저 제 발로 신전 밖으로 뛰쳐나와 신관들 뒤에 엎드렸다. 기도를 올리고 있던 신관들은 그들의 몸에 스며드는 신의 은총에 눈물을 흘렸으며 여인과 아이 를 안고 있던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정체모를 기운에 혼란스러워했다. 신관들의 기도와 세실의 몸에서 일어난 기적은 해가 하늘 높이 솟아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신전 주위에 둥근 막을 형성하고 있던 신의 축복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기적을 마무리 지었다. 신의 손길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들은 신전에 머무르는 이들에게 국한되어 있으되 마을 전역으로 퍼진 기운 덕분에 산록은 더욱 푸르게 변했고 지쳐있던 대지는 생기를 되찾았다. 쉴새없이 흐르던 물은 더욱 맑고 깨끗해 졌으며 숲에 사는 동물들은 귀를 코를 킁킁거리며 맑은 공기에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노신관이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그는 세바스티앙의 팔에서 세실의 작은 몸을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안아 들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려던 세바스티앙은 다른 신관들에게 순서를 빼앗겼다. 무엇에 홀린 듯 눈물을 글썽이며 노신관의 뒤를 따르는 그들의 경건함에 한발짝 물러서던 세바스 티앙은 자신의 팔에 안겨있는 여인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관을 만나보는 것은 여인을 눕혀놓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총각이 유부녀를 안고 다니는 것이 소문나면 분명 들어오던 청혼도 물 건너 갈 것이 분명했기에... 성수로 아이의 몸을 깨끗하게 씻긴 그레고리 대신관은 이카루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는 의복을 정제하고 예배실로 향했다. 아직은 의식을 찾지 못했지만 제단에 누워있는 작은 소녀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존재였음이 들어났기에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활짝 열린 예배실 안에는 모든 신관들이 의복을 갖추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카루스 상 바로 앞에 만들어진 제단 위에는 신관들이 직접 짠 천이 몇 겹으로 덮여있고 그 위에는 신관들이 입는 의복을 입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소녀가 누워있었다. 단상을 돌아 세실의 앞에 선 그레고리 대신관은 기도를 올리며 손바닥을 아이의 작은 이마에 대었다가 눈물을 흘리며 손을 거두었다. 마름모 모양의 금빛 광채가 아이의 이마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가 사라졌다. 이카루스를 모시는 신관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 신탁은 단 하나였다. [선택 받은 날, 선택된 자가 올 것이니 그에게 신의 존재를 알려라.] 선택받은 날이 언제인지, 선택된 존재가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제 세실이라는 아이를 치료하며 신의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계시도 내리지 않았다. 아이의 짧은 앞날을 보고 젊은 기사와의 끈을 확인했기에 충고를 했지만 정녕 선택받은 아이인지 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자신의 충고를 따른 기사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본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을 느꼈다. 대신관 그레고리로서는 결코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평정을 잃는 다는 것. 한쪽으로 감정이 치우치는 것은 신을 섬기는 종으로서 위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몸에 손을 대고 진심으로 기도를 올리는 순간 그가 느꼈던 감정이 신의 개입으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의 이마에 남은 표식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대신관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잔뜩 굳은 얼굴 로 뛰어든 불청객에게 미소를 보였다. 앞으로 이 잠이 든 아이의 영원한 보호자가 될 선택된 존재. 신의 뜻으로 이루어진 만남이되, 신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아이의 옆에 남게 될 존재.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아이가 제단위에 있는 것을 본 세바스티앙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감히! 치료를 위해 데리고 온 아이를 신께 제물이나 바칠 때 쓰는 제단위에 아이를 올려놓은 신관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서슬퍼런 기색으로 칼을 뽑아들려던 세바스티앙은 잠이 든 아이를 번쩍 들 어 자신에게 넘겨주는 능글맞은 노신관을 노려보며 손을 뻗을 수 밖에 없었다. 줄때 안받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아이는 신관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의 선택을 받았으되, 홀로 걸어갈 운명을 지닌 자.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도록 인정받은 유일한 존재. 그 위대한 자의 탄생을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 그레고리는 다시 한 번 이카루스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찬바람이 씽씽 부는 얼굴로 아이를 안고 사라지는 세바스티앙에게 축복을 기원했다. "또 뵙게 될 겁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면 만나겠지.' 두 번 다시 저 인간의 얼굴을 보면 성을 갈아버리겠다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세바스티앙은 훗날 자신의 맹세가 얼마나 터무니없었던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어쨌든 예언의 능력이 없는 순진한 백작가의 기사는 산전수전 다 겪은 대신관에 의해 자신의 맹세대로 성을 가는 수모를 겪게 되나 그것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 될 터였다. **************************************************************************************** 레니의 성격은 변할겁니다. 아마. 제가 쓰는 세 가지 글의 모든 여자 주인공들이 착하고 순진하지요. 지금까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콜록 성격 개조를 해볼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들... 하렘을 한 번 만들어볼까요? 남자들이야 여기저기 여자를 만들어두어요 욕을 먹지 않지만, 여자도 과연 가능할까? 괜히 여자 주인공으로 했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노력해볼랍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 ``) [먼~산~) 자,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취직하다. 3, 아이는 일주일이나 잠이 들어있었다. 그 사이 레니와 세실의 신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레니가 자작가의 하녀로 취직된 것이었다. 세바스티앙과 함께 카르민 자작가로 들어온 레니는 그 자리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며 집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8살에 불과한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딸아이와 함께 거할 방을 배정받고 하녀복 뿐 아니라 필요한 생필품 모두 지급받았다. 지긋지긋하던 악몽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식을 되찾은 아이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더 이상 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되고 풍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에 행복해할 뿐이었다. 낮 동안 레니가 집안일을 하느라 바쁜 가운데 세실은 스스로 할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아직도 어리긴 하나 항상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서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던 세실은 그냥 얹혀 살 수는 없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할 일을 찾던 세실은 결국 마굿간에서 자리를 잡았다. 말들과 뛰어다니며 운동을 하는 것이 주된 임무요, 열심히 뛰어놀고 나면 마굿간 지기를 도와 밀짚과 여물을 나르기도 하고 나무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말의 갈기를 빗어주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냐고 고개를 내저었던 사람들도 새벽같이 일어나 말을 돌보는 것을 배워가는 작은 아이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니와 세실에게 생긴 새로운 보금자리는 그간의 고통을 모두 잊게 만들만큼 행복했다. 비록 셋째라 하더라도 엄연히 기사 작위를 받고 백작가의 근위기사 단장으로 있는 세바스티앙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기에 감히 드러내놓고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레니가 세바스티앙의 애인이고 세실이 그의 숨겨놓은 아이라는 소문이 잠깐 돌기는 했지만, 그러한 소문은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마을에 장을 보러 오고 가는 하인들이 술주정뱅이 마크가 도망간 마누라와 아이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닌 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다음부터였다. 더군다나 세실이 처음 이곳에 와서 일주일간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이유가 아이 아비에게 맞아 그랬던 것으로 밝혀지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 쉬쉬하기 시작했다. 마을뿐 아니라 번화가에서도 소문난 개망나니 마크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두 아들을 팔아치우고 그 돈을 술 먹는데 다 써버렸으며 3살 난 딸아이를 술집에 팔러 나왔다가 개망신을 당하고 돌아갔다는 것까지... 아비의 손에 팔릴 뻔한 소녀가 바로 세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하인과 하녀들은 그들을 보호해주 기 위해 입을 닫았다. 그렇다고 일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다시 남편에게 끌려가 고생할 필요는 없게 되었 다는 것 그것 하나 만으로도 레니와 세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귀족의 저택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두 모녀의 신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평소 카르민 자작과 친분이 있던 데니스 폰 베너 백작의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5피텐이 겨우 넘는 작은 키에 빵빵한 몸매를 자랑하며 마차에서 내린 백작의 옆에는 그의 키보다 약간 작은 아리따운 소녀가 함께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리스틴 영애도 함께 오셨군요." "음, 지나가다가 생각이 나서 들렸네만 지난번에 마셨던 그 향긋한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 는가?" "하하, 당연하지요. 들어오십시오." 백작과 그의 딸을 안내하며 등을 돌리던 찰라 그들의 뒤에 근엄한 표정으로 서있는 아들에게 윙크 를 살짝 날린 마르보 자작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백작의 호위를 맡아 집으로 오게 된 세바스티 앙은 말을 돌봐주러 뛰어나오는 마굿간 지기와 낯이 익은 작은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늙은 마부가 허리를 숙이고 말들을 몰아 사라지자 그의 뒤를 따라가려는 아이의 팔을 슬쩍 잡은 세바스티앙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실에게 예쁜 리본이 달린 주머니를 하나 건네 주었다. "간식으로 먹으렴."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과자 주머니를 받은 세실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나리." "일은 재미있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세바스티앙은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기사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전에 그 아이네. 얼마 전부터 우리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네." 그의 말에 벌게진 얼굴로 시선 둘 곳을 찾던 기사들은 자신들에게 쪼르르 달려와 방긋 웃는 소녀를 보며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나리님...들...? 에,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던 세실은 이내 세바스티앙과의 인연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인사를 했다. 말발굽에 치여 죽을 뻔한 소녀에게서 말도 안 되는 인사를 받고 민망해진 기사들은 저마다 헛기침 을 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열심히 살아라." 어떤 이들은 숨겨두었던 간식거리를,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아끼고 있던 육포를 아이의 자그마한 손에 쥐어주었다. 보답으로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미소를 받은 기사들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여 보이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붙임성 있는 아이라 생각했다. 과거의 악몽은 이미 잊은 듯 밝게 웃는 아이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슴 깊이 새겨졌다. "오, 세실. 거기 있었느냐?"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생활은 힘들지 않은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재잘거리던 세실은 자신을 찾는 집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자작님께서 차를 내오라시는데, 그 뭐냐. 네가 기르는..그...니...니...." "니아울리(Niauli)요?" 아이의 말에 손벽을 딱 마주친 집사가 반색을 했다. "그거 지금 가져올 수 있느냐? 이번에는 백작영애도 함께 오셨으니 세 분이 드실 만큼 가져오 너라. 아, 아직 어리시니 쓴 맛을 싫어하실 게야. 괜찮겠지?" 잠시 또로록 눈을 굴리던 세실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께는 아니시드가 더 좋겠어요. 지금 가지고 올께요." "어서 갔다 오려무나." 손바닥을 비비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집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세실은 기사들에게도 꾸벅 인사를 하고 건물 뒤편으로 뛰어갔다. "니아울리? 아니시드? 그게 뭔가?" 세바스티앙의 물음에 흠칫 하던 집사가 어깨를 들썩였다. 뭔가 신나는 일을 고하는 것 같은 태도. "아 글쎄, 세실 저 아이가 풀에 관해서는 이게 아닙니까요." 엄지손가락을 척 내민 집사는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셋째 도령에게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음..언제였더라. 올커니! 왜 얼마 전에 마님께서 머리가 아프시다고 누워계신 적이 있었지요? 헌데 그때! 저 아이가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향긋한 풀내음이 나는 잎사귀를 뜯어왔습죠. 꼭 차로 끓여드리라고 하기에 혹시나 해서 감정을 해봐도 독풀이 아니었습죠. 뭐 별다른 일이 있을 까 해서 마님이 아침에 드시는 차 대신에 그걸 조금 우려 드렸더니, 머리 아픈 것이 싹 나았다 이겁니다요! 알고 보니 저 아이가 마굿간 뒤에 여러 가지 풀을 심어서 기르고 있는데 그것이 먹을 수도 있고 약으로도 쓰고, 그 뿐이 아니라 요리에도 쓸 수 있는 거라고 하지 않겠습니까요? 잡화상에서 사서 쓰는 향료보다 훨씬 질도 좋고 향도 좋아서 지금은 모두 그 아이가 제배하는 풀을 쓰고 있습죠." 집사의 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세바스티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아니시드라는 것과 니아울리라는 것이 뭐냐는 것일쎄. 난 처음 들어보는데?" "그것이...저기....일종의 차로....저... "몸이 잘 아프지 않게 도와드리는 거라고 배웠어요. 니아울리라는 것은요. 그리고 아니시드는 차로 우려내면 향긋한 냄새가 나거든요. 사탕처럼요..." 식은땀을 흘리는 집사를 추궁하던 세바스티앙은 뒤에서 들려오는 숨찬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땀이 송글 송글 맺힌 얼굴로 엉겅퀴처럼 생긴 풀잎과 얇고 길쭉한 잎새를 두 손에 소담히 들고 서 있었다. 그것을 받아 잠시 냄새를 맡아보던 세바스티앙은 머리가 맑고 깨끗해지는 느낌에 눈을 크게 뜨며 집사에게 풀을 넘겨주었다. 세실 덕분에 위기를 넘긴 집사는 꾸벅 절을 하고는 차를 기다리고 있을 자작을 위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찌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지?" 세바스티앙의 물음에 살짝 얼굴을 붉히던 세실이 그에게 손짓을 했다. 허리를 숙이고 귀를 가져다 대는 세바스티앙에게 키를 맞춘 세실은 곁눈질을 하며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예전에 시장에서 약초상을 하시던 분께 배웠어요. 할아버지만의 비법이라는데 자식이 없으셔서 저한테만 가르쳐 주신다고 했지요. 이건 비밀인데요, 지금 기르고 있는 걸 기름으로 짜내면 무지 무지하게 큰 돈도 벌 수 있다고 하셨어요." 기름을 짜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아는 세바스티앙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으나 이 조그마한 아이가 약초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배운 걸 다 외우고 있느냐?" 그의 속삭임에 살짝 고개를 흔든 세실은 또 누가 들을 새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허리춤에서 작고 두꺼운 책을 꺼내보였다. 책장마다 표본으로 잎사귀들이 붙어있거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단정한 글씨로 빽빽하게 약초의 이름, 효능, 사용법, 주의사항 등이 적혀있었다.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꼬질꼬질 손때가 묻어있었지만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진귀한 것임 에 분명했다. 그런 것을 선뜻 보여주는 아이의 순수함에 다시금 놀란 세바스티앙은 조심스런 몸짓으로 책을 돌려주며 속삭였다.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보여주지 말거라. 이것은 너와 나 둘만의 비밀로 하자. 알았지?" 그의 말에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던 세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말을 훔쳐 들으려고 애쓰고 있는 기사들에게 방긋 웃어보였다. 헛기침을 하며 먼 산을 내다보던 기사들은 아이가 주머니에 넣어온 찻잎을 선물로 받았다. "다음에 오시면 많이 드릴께요. 피곤하실 때 우려서 드시면 좋아요." 정성스럽게 말려 부서지지 않도록 종이게 곱게 싸인 찻잎을 받아든 기사들은 화색이 만면한 얼굴 로 누가 가로챌 새라 자신의 품에 꼭꼭 숨겨두었다. 백작님까지 와서 얻어 마시고자 하는 찻잎이라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희희낙락하는 기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굿간으로 돌아온 세실은 곧 마르보 자작의 부름을 받았 다. 생전 처음으로 자작의 얼굴을 보게 된 세실은 잔뜩 긴장해서 거실로 들어갔다. 무엇인가 잘 못한 것이 있나 걱정을 하던 세실은 자신의 생각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아이인가?" "네, 백작님. 기특하게도 저 아이가 직접 기른 찻잎입니다." "호오~아이야 이리 가까이 와 보렴." 향긋한 차내음을 음미하던 백작은 이제 통통하게 볼 살이 올라오는 자그마한 아이를 가까이 불러 들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런 훌륭한 찻잎을 만든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 았지만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음, 네가 기른 찻잎이 향이 참으로 좋구나. 처음 마셔보는 것인데 이름이 무엇이라 하느냐?" "네, 니아울리라고 합니다." "내 것은 아버님꺼랑 맛이 틀리던데?" 바닥을 내려다보며 백작의 물음에 대답을 하던 세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옥구슬 구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곱슬머리에 눈부신 금발을 푸른 리본으로 묵고 레이스가 잔뜩 달린 아이보리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 푸른 눈의 소녀는 누가 봐도 탄성을 내지를 만큼 예뻤다. 하지만 그 푸른 눈이 주는 섬뜩함에 흠칫한 레니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아씨께서 마신 것은 아니시드라고 합니다." "흠...그래? 아빠, 나 이거 더 마시고 싶은데, 가져가면 안 돼요?" 자신도 탐이 나는 극상품의 차였지만 체면 때문에 말도 못하고 있던 백작은 자신의 가려운 부분 을 긁어주는 딸의 총명함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짐짓 난처한 얼굴로 자작을 쳐다 보는 백작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일렁였다. 식탐이 강한 백작의 성정을 익히 아는 자작은 세실에게 희망을 걸었다. "백작님께서 가지고 가실 찻잎이 있느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세실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미리 말려둔 것이 있습니다." "오, 그래? 험험...그런데 내가 그걸 받아가도 괜찮겠소? 공이 마실 것인데..커험" 절대로 안받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 백작을 보며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던 자작이 세실에게 얼른 찻잎을 챙겨오라고 말했다. 말린 것을 우려먹는 것도 괜찮으나, 그가 알기로 자신에게 올리는 찻잎 은 분명 금방 따온 잎을 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공기가 잘 통하는 얇은 종이로 찻잎을 말아 온 세실은 작은 손을 내밀어 백작의 앞에 두었다. 허리를 숙여 보이고 가려는 아이가 또 다시 발목을 잡혔다. "내 것은?" 크리스틴 백작영애의 말에 세실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달고 약간 새콤한 맛이 나는 것은 니아울리라는 것이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시드 입니다. 아씨." 전혀 당황하지 않고 또롱 또롱 대답하는 아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백작의 눈이 반짝 빛났다. 체면을 가려가며 찻잎을 얻어 마시는 것 보다 더욱 합.법.적.이고 당.당.한 방법! "흠흠, 아이야 너 몇 살이냐?" "여덟 살입니다. 백작님." "흠...이보게, 이 아이를 내 딸의 말동무로 삼았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르보 자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이를 데리고 온 아들이 세실이 란 아이를 얼마나 귀여워하고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이 백작영애의 말동무지 분명 고급스러운 차를 공.짜.로 마시고자 하는 백작의 흑심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망설이는 자작의 얼굴을 지켜보던 데니스 백작의 얼굴이 덩달아 찌푸려졌다. "험험, 뭐...마음에 들지 않으면...." 길게 말을 빼는 것이 여기서 거절하면 절대 좋은 꼴 못 볼거라는 은근한 압박이었다. 셋째가 백작의 근위기사로 있는 한, 아무리 권력에 욕심이 없는 마르보 자작이라 해도 백작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긴장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 아이 에게 시선을 던지는 마르보 자작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아이야, 백작님께서 널 데리고 가시고 싶다고 하시는 구나. 가서...짐을 챙겨 밖으로 가 있 거라." 자작의 무거운 목소리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세실의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무에게도 네 재주를 알려주면 안 된다. 복이 되기보다 화가 될 거야. 때를 기다려라.' 신신당부를 하던 약초상을 하던 한스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이미 그의 말을 어긴 것을 후회해 보았자 이미 늦었다. 넓은 텃밭에서 발견한 시트로넬라(염증에 좋은 약초)만 아니었어도 영지에 딸린 숲에 들어가 약초를 캐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마님의 두통이 심하지만 않았어도, 약을 쓰면 저항력이 약해 진다는 신관의 말만 아니었어도, 괜한 걱정에 자신이 기르던 약초를 건네지만 않았어도...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후회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실은 힘없는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집사의 귀띔으로 방에서 서성이고 있던 레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세실이 태어난 후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레니였다. 새삼 멀리 떨어진 도시로 딸아이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던 레니는 문득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금화를 벌었던 날 잡화상 주인이 사 모았던 약초들의 이름을. 세상물정을 너무나 모르고 아는 것도 없는 레니였으나, 같이 일하는 하녀에게서 들은 잡화상의 화재사건은 내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혼자서만 짊어지던 비밀을 딸아이에게 이야기 해준 레니는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을 보며 다짐을 시켰다. 딸아이의 반짝이는 눈은 그 약초들이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알아서 좋은 일도 있지만 모르는 것이 약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약초들이 무엇인지 이 엄마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치료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 구나. 그리고...잡화상을 하던 주인도 죽었다. 만약...혹시라도 내가 그 일에 관련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어찌 될지 모르지 않겠니? 그리고 만약에...만약에 말이다..." 레니가 불러주는 약초들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세실은 엄마의 차가운 손을 잡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엄마. 걱정하지마. 아무도 모르게 할께. 혼자서만 알고 있을께. 절대로 말하지 않아." 이미 자신의 지식을 드러냄으로써 어미와 생이별을 하게 된 세실은 엄청난 사실을 말해준 엄마의 뺨에 키스를 해주고 귀엽게 혀를 날름 내밀었다. "마크가...우리를 찾고 있다더구나. 여기서는 좋은 분들이 많아 다행히 아직까지 모르고 있지만, 백작님 댁은 번화가이니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가능하면 외출은 금하도록 해라. 알았지?" 도대체가 이제 여덟 살이 된 아이를 데리고 가서 뭘 하자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레니는 자신 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빨리 이야기 해주며 아이가 무사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의를 주었다. 절대로 반항을 해서도 안 되며, 절대로 허락이 없이는 입을 열어서도 안 되며, 노비는 아니나 하녀 의 신분이기에 여기서처럼 아무에게나 자신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아이의 머릿속에 깊게 주입시킨 레니는 딸아이의 몇 안 되는 옷가지와 그동안 모아두었던 동전들을 세실의 속치마안에 달아주었다. 중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옷가지에 숨겨두는 레니의 습성은 세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후에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선견지명으로 인한 것이 아닌 언제나 물건을 뒤지는 남편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것에서 비롯된 습관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꼭 한 번 안아준 레니는 딸아이의 당부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가능하면 편지를 쓸께요. 텃밭은 태워버리세요. 위험한 것도 많으니까,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될거야. 주인님이 마실 차들은 약초를 말리던 오두막에 있어요." 시험 삼아 이름 모를 약초를 캐내어와 실험을 해왔던 세실이기에 자신이 심어놓은 약초밭을 태워 달라 부탁을 하고 옷 보따리를 안고 집사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허락받지 않은 만남이었기에 눈물을 훔치며 주방으로 돌아가는 엄마를 일견한 세실은 마차 옆에 서서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순진하기만 한 아이의 웃음에 기사들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찻잎 하나에 아이를 넘긴 아버지를 노려봐준 세바스티앙은 아이가 낯설어 한다는 이유로 세실을 직접 안아들고 마차의 뒤를 따랐다. "잘 살겠지요?"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일꾼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세실의 뒷모습을 쳐다 보던 집사가 웅얼거리자 옆에서 눈물을 찍어내던 하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불쌍한 것, 얼마나 버틸지..." 하녀의 낮은 목소리에 흠칫하던 집사는 문득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실, 힘내라! 힘내야 한다!" 그 조그맣고 착한 아이가 견디기에는 세월이 너무 가혹하다 생각한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딸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는 레니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저, 단장님. 정말 괜찮을까요?" "큰일이네..." "입 다물어라." "단장님! 그 아이는....!" "조용히 하래두!" 마차의 뒤를 따라가던 기사들은 백작의 성이 보이자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기사단장의 품에 안겨 쌔근거리며 잠들어있는 소녀에게 향해있었다. 한 번 시작된 동요는 세바스티앙의 엄한 질책에도 쉬 가라앉지 않았고 도리어 말들까지 흥분하 기에 이르렀다. "제기랄, 이런 애가 말동무라니......!" 누군가의 울분에 찬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던 기사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화려한 금박 으로 장식된 마차의 뒤꽁무니를 노려보았다. "세상 참 불공평해..." "암...."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어디 있겠냐만은 세바스티앙도 더 이상 기사들의 투정을 말리지 않았다. 솔직히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대로 말을 달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뿐 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 때문에 아이를 넘겨준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원망스럽 기만 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던 세바스티앙은 아이가 건네주었던 약초 주머니를 더듬어보며 한숨을 삼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매를 맞는 아이 1. 세실의 생활은 일정하게 정해졌다. 새벽에 일어나 백작이 지시한 데로 텃밭에 찻잎을 가꾸고 오후에는 크리스틴 백작 영애의 말동무가 되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일 조차 단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백작영애에 대한 소문들. 세실이 백작가에 처음 들어온 날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그 걱정스러운 시선들은 몇일 지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이 더러운 것이, 감히 어딜 기어들어와!" 쨍그랑! 아가씨의 부름으로 영애의 방에 들어갔던 세실은 답례로 찻잔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아야했다. 어릴 때부터 맞는 것에 이골이 난 세실은 고개를 숙임으로서 얼굴이 찢어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으나, 새하얀 손바닥에 얼굴이 돌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짝! 짝! 짝!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양 볼이 퉁퉁 부어오를 때 까지 손찌검을 참아낸 세실은 주인마님의 부름으로 크리스틴 영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 까짓게 뭐라고! 쳇!" 겨우 2살 차이지만, 덩치로 보자면 자신의 2/3밖에 되지 않는 아이를 신나게 때려준 크리스틴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옆에서 찻잔을 치우고 있는 하녀에게 책을 집어던졌다. 빡! "악!" "뭘 잘했다고 우는 소리야!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더러운 것들! 감히....!" 도대체 무엇이 불만인지 세실이란 아이가 온 후로 하루가 멀다하니 발작(?)을 일으키는 백작영애 를 피해 쏜살같이 달려나온 하녀는 울먹이며 시녀장을 찾았다. "저 그만 둘래요. 세실은 눈도 안보일정도로 맞았는데...흑흑...저 그만 둘래요, 시녀장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의식하지도 못하는지 평소 엄하기로 소문난 시녀장 마리의 품에 파고 든 하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일말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시녀장은 자신의 품에서 펑펑 울며 일을 그만두겠다는 아이를 감싸 안고 하녀들이 거하는 숙소로 들어갔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을 때 까지 울던 수잔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시녀장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흑...아까 아가씨가 세실을 불러오라고 해서....제가 텃밭에 가서 세실을...흑...데리고 갔거 든요? 그런데 문이 열리자 마자 찻잔을 던지시는 거예요! 자기가 불러놓고 왜 왔냐고...흑" 수잔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실이 고개를 안 숙였으면 어떻게 됐을지...흑...그러고는 갑자기 다가오셔서 더럽다고 그 작은 아이 볼을 사정없이 내려치시는데! 입술도 터지고, 볼도 퉁퉁 붓고...전 싫어요! 이제 그런 꼴 보기 싫어요! 시녀장님, 저 집에 갈래요. 이제는 못 참겠어요!" 이제 중년에 들어선 마리는 자신의 옷깃을 잡고 애원을 하는 수잔을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하루 이틀일은 아니지만, 요사이 백작영애의 심술이 더욱 사나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노비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수잔처럼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은 천사같이 생긴 10살 짜리 소녀의 횡포에 일주일을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니 확실히 이야기하자면 세실이란 아이가 들어오고 난 후부터 백작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루가 멀다하니 매질을 당하는 아이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한달에 겨우 은화 1개를 받으며 찻잎을 기르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아이 덕분에 하인들도 영애의 괴롭힘에도 꿋꿋하게 버텨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우 여덟 살 난 아이가 하는데, 다 큰 어른이 못 하면 자존심이 상한 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매질을 당한 날이면 밤늦게 몰래 찾아와 약초를 발라주는 작은 소녀의 배려에 새로이 마음을 다잡아 왔던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자신이 받은 은혜만큼 아이를 보호해 줄 수 있다면... 모두들 같은 심정이었다. 딸 같은 아이가 역시 나이도 비슷한 영애에게 흠씬 얻어맞고 누워있을 때면 너도나도 먹을것이며 약이며 들고 찾아와 아이를 돌봐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서로 돈이나 벌면 그만, 어떻게서든 영애의 눈에 들어 매질을 적게 받아보려고 무슨 짓이든 서슴 지 않던 하인들이 스스로 뭉쳤다. 서로의 일을 봐주고 배려해주며 상처를 돌봐주는 분위기는 백작가에 온지 겨우 반년이 되지 않는 조그마한 소녀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백작 영애에게 꼬리를 치며 서슴없이 세실 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수잔처럼 자신의 상처보다 작은 아이의 몸에 난 상처에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이었다. 특히나 세실과 같은 시기에 백작가에 온 수잔은 세실을 마치 자신의 자매처럼 여겼다. 아주 오래전 굶주림 때문에 죽어버린 막내가 생각난다면 빵 한조각이라도 세실에게 더 먹이려 애쓰던 수잔이 이제는 지쳤다며 스스로 나가고자 애원을 한다. "같이...나가게 해주세요...제가....돌볼께요....제발...." 마리의 눈이 번쩍 띄여졌다. 이것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수잔의 눈물을 받아주었던 마리는 자신의 예감이 들어맞았음에 한숨을 내쉬 었다. 혼자 떠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데리고 가겠단다. 그 작은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없어 같이 내 보내달라고 애원을 하는 거다.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시녀장을 쳐다보던 수잔이 갑자기 옷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쫘르르~ 6개월 동안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던 은화였다. "풀어주세요." "안 된다는 거 알잖니?" "씰(세실의 애칭)도...고용인이지만 노예는 아니예요. 저처럼 가고 싶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인이잖아요?" 수잔의 말은 맞았다. 세실은 자유인이었다. 그 아이의 어미가 자작가에서 하녀로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마리나 수잔 자신처럼 일꾼으로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지 어딘가에 소유된 노예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 된다는거 네가 더 잘 알거다." 순간 수잔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놈의 찻잎 때문이죠? 제가 다 태워버릴래요! 겨우 한달에 1실버 주면서 그 아이를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는 백작가 따위 제가 불 질러....읍!" "쉿! 너 미쳤니? 죽으려고 용쓰는 거야? 누굴 죽이려고 이러는 거냐?" 수잔의 입을 틀어막고 경악을 하던 마리는 벌개 진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음약한 하녀를 보며 한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곧 괜찮아 질게야. 아가씨께서 아카데미에 가신단다. 수도에 있는 곳이니 방학때나 오실 꺼야. 후 내년에 있을 황태자비 간택을 위해 준비를 시키실거라 들었다. 조금만 버티면 돼. 너나 세실이나.......... 우리 모두." 직권 남용으로 목숨을 내놓은 마리는 자신이 주워들은 말을 소곤거리며 수잔의 입을 막았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왕방울만큼 커진 수잔의 눈이 희망을 담고 반짝였다. "아...아..카데미요?" "그렇다는데두. 너 혼자만 알고 있으렴. 네가 워낙 난리를 치니 일러주는 거다. 붉은 달이 뜨는 달에 가실거야." [붉은 달이 뜨는 달]은 가을의 입지로 일년 열두 달 중 일곱 번째 달을 말한다. 모든 곡식들이 풍성해져 추수를 할 수 있는 달. 달의 여신 안드로사의 축복을 받은 가장 살기 좋은 시기를 말한다. 지금은 [해가 넘어가는 달]인 일년 중 다섯번째 달이니 이제 겨우 2달이 남았을 뿐이다. 꿈을 꾸듯 몽롱한 얼굴로 두손을 마주잡고 헤실헤실 웃고 있는 수잔을 바라보던 마리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출혈과다로 죽기 전에 치료나 하자." "예전에 씰이 준 약초가 있어요, 시녀장님." 여전히 뜬구름 잡듯 불분명한 대답을 하는 수잔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깨끗하게 닦아낸 마리는 서랍 안에 들어있던 약초를 찾아내어 작게 벌어진 상처위에 붙여주었다. 어떻게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그 작은 아이가 만든 약초들은 상처에 발라두고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스며들어 표가 나지 않았다. 그 어리디 어린 아이의 뛰어난 능력이 오히려 해가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마리는 한숨을 쉬며 수잔의 머리에 꼼꼼히 약을 발라주었다. 드디어 '백작가의 마녀'가 아카데미로 간다는 소식에 수잔이 꿈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세실 역시 마님과의 대면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여기 있다. 네가 만들어준 차는 정말 잠이 잘 오더구나. 늘 고맙구나." 남편이나 딸과는 달리 부드러운 은빛 머리카락을 고풍스럽게 말아 올린 백작부인은 백옥같이 흰 치아를 가지런히 드러내며 세실의 볼에 찬 수건을 데어주고 있었다. 백작가의 어느 누구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만남. 백작부인과 세실의 만남은 아이가 처음 텃밭을 만들며 돌을 골라내고 있을 때 이루어졌다. 차가운 비바람이 스쳐지나간 자리에서 흙의 기운을 살려내고자 매일 같이 분뇨를 섞은 흙을 골고루 대지위에 뿌리고 두꺼운 천으로 바람막이를 만들고 있던 세실을 발견한 백작 부인은 감동을 받았다. 조막만한 손을 호호 불어가며 거친 비바람 속에서 천을 잡고 있던 작은 소녀 를 발견한 백작부인은 아이의 더러운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차를 내주었다. 필요한 것이 없으면 문안 인사 한 번 드리러 오지 않는 딸아이게서는 받지 못했던 기이한 감정을 느낀 백작부인은 그 후로 틈틈이 아이를 불러 담소를 나누었고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주인마님을 위해 세실은 특별한 약초를 제배하기 시작했다.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미용에도 좋은 약초와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백작부인의 고질병을 치료 할 수 있는 약초들을... 처음에는 반의반신하던 백작부인이었으나 마음에 드는 소녀의 깨끗한 눈에 거리낌 없이 약초를 받아 차로 우려 마셨고 얼마 되지 않아 맑고 깨끗해지는 피부와 깊은 숙면에 세실에 대한 신뢰감 은 더욱 깊어졌다. 은밀히 아이에 대해 알아 본 후 아이의 어미가 자작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며 겨우 한달에 은화 1닢을 받고 딸아이의 말동무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던 백작부인은 자신이 직접 남편 몰래 세실에게 급료를 지불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 이미 5달 전이었다. 덕분에 매달 은화 10닢이라는 거금을 받게 된 세실은 약초를 만드는데 더욱 매진하게 되었고, 자신이 받는 급료는 꼬박꼬박 레이븐 상회에 맡김으로서 상당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일은 힘들지 않니?"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식혀주며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백작부인에게 방긋 웃어보인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란 사람에게 당했던 것에 비하면 백작영애가 그녀에게 가하는 매질은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세실이었다. 그걸 모르는 백작부인은 마음이 착한 아이가 자신이 걱정할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여기며 눈물을 글썽였다. "힘이 들면...엄마가 계신 곳으로 보내주마. 그 정도는 내가 해 줄 수 있어." 백작부인의 따뜻한 말에 잠시 망설이던 세실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매일 세바스티앙 기사 단장을 통해 엄마와 몰래 서신을 주고받는 세실은 자신이 집에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서는 백작부인이 계시는 한 더 많은 돈도 벌 수 있었고 마음놓고 약초를 공부할 수도 있 었다. 자신이 제배한 찻잎을 궁성에 바침으로써 더욱 인기가 높아진 배너 백작이 자신을 놓아줄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배워버린 세실은 어떻게 하면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을 하고 있었고, 이렇게 큰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찾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 큼 불가능하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크리스틴 백작영애의 말동무 삼아 괴롭힘을 당하고 나면 영애가 낮잠을 자는 동안 얼마든지 책 을 읽을 수도 있었고, 백작의 배려(욕심 때문이지만)로 약초를 말리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오두 막도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단 한 가지 있다면 다음달 있을 생일날 자신의 어머니를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 을 하고 있는 세실이었다. 문득 얼굴빛이 어두워진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작 부인의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내가...재미있는 것 하나 보여줄까?"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미소를 짓던 백작부인은 자신이 숨겨두었던 능력을 선보였다. 굳은살 하나 없는 하얀 손을 내밀어 물이 담긴 은 그릇 위에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백작부인은 누가 들을 세라 작게 속삭였다. "운.디.네." 음악과 같은 작은 속삭임에 그릇에 담긴 물에 조약돌을 던진 듯 둥근 파동이 생기더니 동그란 물방울이 톡 튀어나와 백작부인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순간 손을 뒤집은 백작 부인의 손 위에 올려진 물방울이 점점 커지며 조그마한 인형이 생겼다. 사물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물방울이 만들어낸 인형은 활짝 웃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 백작부인 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와아~" 세실의 입이 쩍 벌어지며 탄성을 내질렀다. 순간 질투를 한 것인지 주위 공기가 요동을 치며 세실의 머리카락을 헤집었지만 '운디네'라 불린 요정처럼 생긴 물방울에 넋이 빠진 세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귀엽지 않니?" 자신의 얼굴을 옮겨 다니며 포르르 날아다니는 운디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백작부인이 세실 에게 시선을 돌렸다. 딸아이에게 맞아서 부어오른 뺨이 더욱 빨갛게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물방울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세실이 문득 손을 내밀었다. 잠시 멈칫 하며 백작부인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던 운디네는 겁을 먹은 강아지가 그러하듯 조금씩 주춤 주춤 하며 세실이 내민 손으로 다가갔다. 순간 창문을 통해 세찬 바람이 불어왔지만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운디네는 달랐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심통 맞은 얼굴을 하더니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세실의 얼굴에 척 달라붙었다. 백작부인에게 그러했듯이... 세차게 불어오던 바람이 세실의 머리카락을 어지럽히다 사라졌다. 일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차갑지만 시원한 느낌을 주는 운디네의 재롱에 푹 빠진 세실은 운디네를 손 위에 두고 이리 저리 돌려가며 장난을 쳤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백작부인의 눈이 반짝 빛이났다. 정령사는 희귀한 존재이다. 마법사는 많으나 고위급 마법사는 전설에서만 존재할 뿐 책을 보며 연구를 해도 진정한 고위급 마법사는 될 수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또한 이종족의 존재가 대륙에서 사라진 후 정령 들과의 친화력을 가진 인간들은 서서히 사라졌고, 정령사란 것은 너무나 희귀해졌다. 아주 어릴 때 모셨던 마법 선생에게서 마법보다는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하다며 운디네와 계약을 맺게 되었던 백작부인은 자신의 재능을 숨겼다. 그리 알려진 집안은 아니지만 손이 귀했던 남작가의 유일한 여식이 정령사란 소문이 나면 좋지 않다는 스승의 말에 자신의 재능을 묻어버린 백작부인은 정령사의 재능을 지닌 아이를 보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약초를 기르며 보여 주었던 아이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 혹시나 생각을 했었다. 대지를 사랑하고, 그들의 성의에 보답을 하며 자신이 기르는 약초에 언제나 따뜻한 말을 건네던 아이. 비록 자신은 물의 하급 정령과 계약을 했을 뿐이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아이는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자질을 지녔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운디네를 불러내어 아이에게 보낸 순간 불어오던 바람. 마치 질투를 하듯 운디네를 밀어내려 하던 바람의 존재를 잠시 느꼈고, 그것에 반발하듯 자신과 계약한 운디네가 아이에게 자발적으로 다가가 재롱을 떨고 있었다. '스승님께 연락을 해야겠어.' 여기 백작부인의 과감한 선택으로 세실을 위한 또 하나의 새로운 만남이 준비되고 있었다. **************************************************************************************** 세실의 능력을 어디까지 키워야할지 고민입니다. 확 먼치킨으로 만들어버릴까 수없이 고민하다 이제야 겨우 글을 올립니다. 의견을 들려주세요~ 행복하시구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매를 맞는 아이 2. "여보, 세실이란 아이 말이예요." 잠을 청하던 백작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속삭임에 몸을 일으켰다. "끄응...무슨 일이오?" "그 아이 급료가 1실버라면서요?" "헉!" 아내의 조용한 목소리에 헛바람을 들이킨 데니스 백작님은 죄 지은 사람처럼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로서는 아이가 그토록 훌륭한 찻잎을 만들어 낼거라고는 상상 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채 1달도 되지 않아 왕궁에 진상을 할 수 있을 만큼 효능 좋고 향이 좋은 찻잎을 만들어 낸 세실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결심하게 되었지만 급료에 관해 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핵심을 찌르는 아내의 말에 찔끔하던 백작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그 아이는..이제 여덟 살이고.." "다음달에 아홉 살이 되지요." "험험 아무튼 그 어린 아이가 돈이 필요나 하겠...." "세실이 만드는 찻잎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되죠?" ".............."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이불만 만지작거리는 백작을 째려봐준 백작부인은 은근히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찻잎 때문에 아이 엄마에게서도 떼어 놓았다고 들었어요. 겨우 여덟 살짜리 어린 아이를!" "흠흠" "한창 뛰어놀 나이에 그 찻잎이나 키운다고 매일 같이 분뇨를 만지고 벌레를 잡고, 게다가 그것만하면 또 몰라 크리스(크리스틴의 애칭)의 말동무까지 시키셨다구요?" "크흠" "왜 대답이 없으세요?" "..........." 추궁이 아니라 확신에 찬 비난에 볼을 긁적이던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잘못했소." "내일 당장 자작가로 연락을 넣으세요. 아이를 돌려보내겠다고." "헉! 그건 절대로 안 되오!" 펄쩍 뛰는 남편의 모습에 아미를 찌푸리던 백작부인이 해답을 요구하자 한참을 망설이던 백작이 결국 숨겨놓았던 꿍꿍이속을 털어놓았다. "그 아이가 만들어내는 찻잎의 비결은 아무도 몰라. 아무리 물어봐도 절대로 안 가르쳐 주더라구. 그래서 그 아이가 꼭 필요해, 여보. 벌써 황제폐하도 히솝(Hisop)과 프랑킨 센스(Frankincense)라는 차로 고질병인 배앓이(위장병)과 거담을 고치시고는 크게 흡족 해하셨다고. 문제는 그 아이가 재배하는 것 치고 이름조차 들어본 약재상이 없다는 거야. 혹시나 이름만 다른건가하고 직접 들고 가서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 사람을 시켜 풀을 구해오라고 해도 워낙 비슷한 것이 많아서 뭐가 뭔지 알 방법도 없고. 재배 방법도 모르니 기를 수도 없고. 이런 마당에 그 아이를 돌려보내면......" "자작님이 덕을 보신다구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아내의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흔든 백작은 탐욕과는 거리가 먼 마르보 자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럴 사람이 아니지 않아. 내 말도 안 되는 제의에 기사단장을 생각해서 선뜻 아이를 내보낸 사람이야. 욕심이 있었다면 그럴 리가 없지. 그래서 안돼. 일단 다시 받아들 이면 절대로 아이를 혹사 시킬리...헉....그..고생시킬 리가 없거든." "알긴 아시는 군요." 아이를 멋대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백작은 그날 밤, 세실이란 아이의 급료를 30실버로 올려주고(보통 하인들의 급료가 20실버 정도였다) 교육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세실이 재배하는 찻잎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백작부인조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나다는 사실은 묻어둔 백작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배를 두드리며 흐뭇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만약 왕성을 들락거리는 고관대작들이 찻잎 한 봉지에 수백 골드를 건네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내의 성격상 집이라도 한 채 내주라고 닦달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복덩이가 절로 굴러들어왔는데 그까짓 은화 몇 잎이 문제인가 생각하던 백작은 내일 부터 딸아이의 수업시간에 세실을 함께 들여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내를 만족시키고 세실을 교육시킬 수도 있고 비록 서서 들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제 능력이고, 선생을 따로 두지 않아도 좋으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생각을 하는 수전노 백작이었다. 이러한 백작의 결정으로 세실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게 될는지 상상도 하지 못한 백작부인은 그저 작은 소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확신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날 시녀장에게 불려간 세실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오전에 약초를 기르던 것을 오후로 미루고 아가씨의 수업시간에 착석하라는 명이었다. 말이 착석이지, 하녀가 주인의 공부시간에 옆에 서있는 다는 것은 매 맞는 아이가 되라는 것이었다. 귀족을 자제에게 매질을 하거나, 훈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대신 매 맞는 아이를 따로 두어 선생들이 학생 대신 혼을 내는 것을 말했다.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크리스틴은 자신의 천사 같은 미모만 믿는 깡.통.이라는 것을 모르는 하인들은 없었다. 그저 애교를 떨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장아장 걷 기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된 크리스틴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이라는 개념만 있 을 뿐 그 꼬부랑글씨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또한 그러한 딸아이 에게 실망한 백작부인은 절대로 매 맞는 아이를 두지 않도록 엄명을 내렸기에 백작가의 영애를 가르치러온 선생들은 멍하니 앉아서 공상에 잠겨있는 제자를 내버려두고 혼자 떠들다 시간이 지나면 벌떡 일어나 돌아가버리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특히 귀족가에 소문난 현자, 코리데스는 백작의 초청으로 단 한 번 찾아왔다가 남긴 한마디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링 정도였다. "역시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 수양을 더 해야 해." 단 1나르(1시간). 크리스틴 백작 영애를 가르친 시간이다. 무엇을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것인지 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런 의미모를 말을 한 마디 남긴 대륙에서 알아주는 현자는 훌쩍 은거에 들어가 버렸다. 이 사건으로 백작가의 하나뿐인 영애는 현자마저 두 손 두발 다 들게 만들만큼 비.범.하다 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 예쁘고 깜찍한 얼굴에 숨겨진 깡 소리 나는 돌머리는 백작가에서 만큼은 그녀가 기르는 강아지까지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 데니스 판 배너 백작은 절.대.로. 몰랐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수업시간 만은 철저히 지키는 크리스틴이기에 급료를 받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던 이안 남작은 오늘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백작가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1년 만에 처음으로 학생다운 학생을 만나게 되었으니, 아이의 이름은 세실리라. 성이 없는 평민이고 매 맞는 아이로 들어온 것이 분명하나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 이며 눈을 반짝이는 작고 귀여운 아이를 본 순간 이안 남작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애고 예쁜 것. 저 작은 것이 때릴 때가 어디 있다구 저리 고생을 시키누...쯧...백작님도 다시 봐야겠네' 이제 겨우 여덟살 정도 되었을까. 벌써 아버지를 닮아 좋게 말해서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있는 얼.굴.만. 예쁜 백작영애의 뒤에 오도카니 서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의 말에 푹 빠져 있는 작은 아이를 보며 남작은 혀를 내 둘렀다. "자, 그럼 오늘은 바이로니아의 역대 황제들의 업적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훌륭한 선생은 훌륭한 제자를 만든다는 말이 있지만 이 순간만은 그 말을 바꾸어야 했다. 훌륭한 제자는 훌륭한 선생을 만든다로... 세실의 열성적인 태도에 신명이 난 이안 남작은 전에 없던 열정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했고, 1미르의 쉴 새도 없이 장장 3나르 동안 열강을 하는 남작 때문에 크리스틴의 안색은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그녀가 스승을 모시게 된 5살 이후,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보통 40미르에 20미르의 휴식을 취하며 느긋하게 혼자 떠들던 남작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미친 듯이 수업을 진행시키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자, 그럼 백작영애. 오늘 들었던 것을 요약하여 내일 가지고 오십시오. 바이로니아의 국민 으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내용이니 중요한 것만 간추리면서 복습을 하는 겁니다. 후에 황.태.자.비.가 되시려면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럼..크험" 숙제까지 내다니! 이제나 저제나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리던 크리스틴은 남작이 남긴 말에 헬쑥하게 질린 얼굴로 손을 부르르 떨었다. '황태자비가 되시려면!' 남작의 은근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지만 도대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3나르 동안 무엇을 들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 한마디도... 한 뺨은 될 듯한 부피를 자랑하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문득 자신의 뒤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밉쌀스러운 아이를 노려보았다. '이럴 때 안 써먹으면 언제 써먹어? 아버지도 참...황태자비로 만드시려고 남작님께 압력을 넣은 거군.' 깡소리가 나는 만큼 단순한 크리스틴은 남작인 남긴 말에 혼자 흡족해 하며 들기도 무거운 책을 세실에게 집어던졌다. "들었지? 가서 정리해와." 오늘 수업한 분량만 치면 세실이 겨우 들고 있는 책 한권 분량이다. 크림을 먹은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백작영애의 말에 흠칫 하던 세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너...글은 아니?" 말없이 고개를 흔드는 세실. 세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빈정거리는 시선을 던지는 크리스틴을 보며 자신에게 심각한 얼굴로 주의를 주던 마리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네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해, 알겠니? 특히 아가씨께는 내색도 하지 말아. 경을 칠 일이다." 레니가 그랬던 것처럼 글을 모르는 하인들을 대신해 편지 대행업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이는 세실은 오늘 아침 일찍 찾아와 주의를 준 마리의 선견지명에 미소를 지었다. 한편 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숙제를 해달라고 넘길 수도 없고 분명 황태자비가 되려면 꼭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니 남작에게 밉보일 수도 없고(혹시나 소문이라도 나면 물건너 가는 것이지) 진퇴양난에 빠져 고민을 하던 크리스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갔다. 도저히 열 살난 아이로는 보이지 않는 섬뜩한 표정. "네 방에 가 있어. 어머님 좀 뵈어야 겠다." 제 말만 하고 벌떡 일어선 크리스틴은 2층으로 걸음을 옮겼고 두꺼운 부피만큼이나 행복감에 젖어든 세실은 얼른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어떻게 됐니? 안 맞았어? 혼난거 아니지?" 일이 없는 하녀들이 세실의 방에 옹기종이 모여있다 책을 안고 들어오는 아이를 보고 달려들어 이리 저리 몸을 살펴보느라 부산을 떨었다. "왜 이리 시끄러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마리의 싸늘한 호통소리에 입을 닫은 하녀들은 곁눈질로 세실의 몸을 위 아래로 살펴보고 다행이라는 미소를 짓는 시녀장의 모습에 실소를 지었다. 아이의 방 까지 찾아온 시녀장의 목적이 자신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한 하녀들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세실의 말에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과제를 내 주었다면 하늘이 두 쪽 나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크리스틴 영애를 대신에 분명 매질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녀들의 배려에 혼자 방에 남게 된 세실은 침대위에 주저앉아 두꺼운 책을 펴고 정독을 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기에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었으나, 역시 아이가 알고 있는 단어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업동안 들었던 내용을 책과 맞추어 보며 독서에 열중하던 세실은 백작부인의 부름에 아쉬움을 남긴 채 책을 덮고 2층으로 향했다. 마리의 안내로 백작부인 방에 들어선 세실은 크리스틴을 보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 며 절을 했다. "글을 모른다고?" "......네, 마님." "크리스 말로는 당장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 느냐?" 세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짓말을 한 것이 밝혀지면 혼이 날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자신의 실력으로는 책 한권도 제대 로 읽기 힘들다는 것을 방금 확인했으니, 세실이 뭐라 대답할 여지가 없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백작부인은 세실에게 하나의 서찰을 건네주었다. "다녀오려무나. 길 안내는 빌이라는 마부가 해줄께다. 가서 글을 배우고 오렴."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세실에게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그곳에 가면 어머님을 가르치셨던 분이 계셔. 오늘부터 매일 그곳에 가서 글을 배우고 오라는 거야. 책도 들고 가렴. 오늘 배운 것을 정리해서 써달라고 부탁하란 말이야, 알겠어?" 마치 바보에게 지시를 내리듯 또박또박 말을 하는 크리스틴이었지만, 절대로 자신이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딸아이의 모습에 한숨을 삼킨 백작부인은 황망한 눈으로 눈꼬리를 파르르 떠는 소녀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연락을 해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것을 접하며 기뻐할 아이를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던 백작부인은 질투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에 얼른 미소를 지웠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이나 이처럼 탐욕스럽고 욕심이 많고 이기적인 아이는 본 적이 없다 생각하는 백작부인이었다. 허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세실이 예뻐 보이기는 했지만 혹여나 딸아이의 심기가 상할까 미소를 지은 백작부인은 부드럽게 딸아이의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알고 있겠지만, 후 내년을 위해서 열심히 학업에 정진해야 한다. 저 아이가 널 대신해 주는 것은 잠깐이야. 명심하렴. 누가 뭐래도 황태자비는 네가 될 것이니 그때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제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품으로 뛰어드는 딸아이를 마주 안아주며 슬쩍 세실을 바라 본 백작부인은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의 맑은 눈에 고여 있는 눈물. 분명 멀리 있을 어미를 그리워하는 것이리라 확신한 백작부인은 틈이 나면 세바스티앙을 시켜 자작가로 잠시 데려갔다 오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백작부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운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던 세실은 크리스틴의 축객령에 절을 하고 물러났다. 백작부인의 소개로 찾아간 곳은 번화가 쪽이 아닌 숲 속에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이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뽀얀 연기를 소록소록 내뱉으며 서 있는 오두막은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참으로 그림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통나무로 지어진 소담한 집을 보는 순간 예전에 살던 곳을 떠올리며 움찔 하던 세실은 문을 열고 나오는 인자하게 생긴 노인을 보며 긴장을 풀었다. 이제 50,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은 흰 머리를 단정히 넘겨 검은 띠로 머리를 묵고 가슴까지 길게 내려오는 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하얗게 샌 머리와 수염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주름이 없는 얼굴에 깊고 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는 초록빛 눈을 반짝이며 인자한 미소 를 지어보인 노인은 스스로를 샌들우드라 소개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세실은 백작부인의 서찰을 건네주었고 그 자리에서 편지를 읽은 노인은 세실의 손을 잡고 오두막으로 안내했다. 스프를 끓이고 있었던 것인지 아궁이의 불에 걸어놓은 커다랗고 둥그런 솥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홀리고 있었고, 식탁위에 놓여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은 세실의 눈을 유혹했다. "꼬로록" 때마침 들려오는 소리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던 샌들우드는 세실을 자리에 앉히고 스프를 한 그릇 떠와 아이의 앞에 놓았다. "밥부터 먹고 공부를 하자꾸나." 마음을 맑게 정화시켜주는 듯한 맑은 목소리에 활짝 웃어 보인 세실은 샌들우드가 숟가락을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편안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끝나자 세실은 스스로 일어나 그릇을 들고 오두막 옆에 있는 냇가로 달려가 그릇을 씻어 왔다. 차가운 시냇물에 빨갛게 언 손으로 그릇을 내려놓는 세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책장 에 꼽혀있던 수백 권의 책 중 아주 얇은 책 한권을 꺼내 들고 세실에게 건네주었다. "읽어보렴." 순간 얼굴을 붉히던 세실은 식탁에 책을 펼치고 앉아 조용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정들이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흠뻑 빠져 정신없이 책을 읽던 세실은 갑자기 시선을 가리며 나타난 두꺼운 책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단어를 공부하는 것 보다 책을 읽으면서 깨우치는 것이 더 빠르겠구나. 읽어보렴." 오늘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이 담겨진 책을 펼친 세실은 서슴없이 글을 읽어 내렸다. 드문 드문 막히는 부분에서는 샌들우드가 자상하게 발음과 뜻을 일러주었다. 한 번 들었던 이야기라 그런지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에 집중하며 단 1나르만에 두꺼운 책 한권을 다 읽어낸 세실은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양피지와 깃털이 달린 마법펜을 선물로 받았다. "이제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글로 적어보렴."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었다. 책을 읽었던 방대한 내용들과 남작이 이야기해준 내용들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던 세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근 차근 내용을 써내려갔다. 세실의 단정한 글씨에 잠시 놀랐던 샌들 우드는 전혀 막힘없이 요점만 찍어내어 글로 옮기는 아이의 총명함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참으로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습니다. 총명하고 심성 또한 발라 인재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에 이렇게 스승님의 평정을 깨며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엘을 용서해주십시오. 약초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어 저희 남편이 궁에 소개하여 인기를 얻은 차(茶)바로 세실이란 아이가 제배 한 것 이랍니다. 제 조그마한 욕심으로 아이를 살펴보았는데 정령들과의 친화력도 뛰어나 보였습니다. 그냥 두면 이대로 묻힐까 걱정이 되어 아이를 맡기고자 하니 혹여 마음에 드신다면 스승님의 은혜를 내려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불민한 제자, 엘 드림.] 수십 년도 전에 궁중 마법사로 있을 때 우연히 눈에 띄어 잠시 제자로 받아들였던 남작가의 여식이 보낸 편지를 여러 번 읽어보았던 샌들우드였지만, 지금 조용히 앉아 열심히 글을 쓰 고 있는 아이는 그의 제자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였다. 친화력도 있다 하지만 그로서는 백작부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책으로 공부할 길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마법사이지 정령사가 아니었으니까. 한동안을 고민하던 샌들우드는 가지런히 정리된 세실의 글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너, 정령사는 때려치우고 마법이나 배워라." 인자하고 무게 있던 가식적인 모습을 내던진 샌들우드는 괴팍한 마법사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 며 세실에게 침을 흘렸다. "네?" "너 정령사 하지 말고 마법이나 배우라고. 내가 가르쳐줄께." 이 무슨 체신없는 말투란 말인가? 불과 몇 미르 전의 모습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아이들이나 쓰는 말투로 마법을 배우라고 종용 하는 인자하신 할아버지를 보던 세실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대답할 시기를 놓친 세실의 운명은 괴팍한 한 늙은이의 욕심에 단번에 결정되었다. "오냐, 지금부터 마법을 배우도록 하자!"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매를 맞는 아이 3. "오, 정말 훌륭합니다. 역시 백작영애는 황태자비로 손색이 없음을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훌륭하게 정리를 하시다니......!" 오늘도 크리스틴이 내놓은 양피지를 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남작은 본격적으로 바이로니아의 역사와 인접한 로레얼국, 세이지국, 잊혀진 대륙 아틀란타에 대한 역사 에 이어,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들을 아낌없이 전수하기 시작했다. 물론 남작은 매일같이 과제를 내 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깨끗한 글씨로 핵심만 정리 해둔 숙제를 검사하며 서슴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분명 세실리아라는 아이가 해 온 것이 확실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남작의 생각은 꿈에도 모르는 크리스틴은 어머니의 스승이었던 샌들우드가 해 준 숙제에 끊임없이 감탄하는 스승을 마음껏 비웃으며 여전히 공상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 오전에는 남작의 수업을 오후에는 텃밭을 가꾸고 저녁에는 샌들우드의 집에서 숙제를 하고 마법을 배우는 세실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벌써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크리스틴 백작영애가 아카데미를 떠난지 여덟 달이 바뀌었다. 그 사이 세실은 오전에는 밭을 일구고 오후에는 샌들우드에게 공부를 배우는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오고 있었다. 샌들우드가 마법으로 만든 파이어볼 아래서 열심히 마법 이론을 공부하던 세실은 문득 허공 에서 빛을 발하는 불덩이를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응?" "마법은 의지라고 하셨지요?" "그렇지." "그런데 웬 수식이 그렇게 복잡하고 주문이 긴 거지요?" ".............." 일순 할 말을 잃은 샌들우드는 자신이 겨우 7써클에 도달해서야 가진 의문을 이론을 공부하던 제자가 질문을 하자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들려주었다. "아마도...인간이니까 그런게 아닐까 한다." "..........." "너도 알다시피 마법은 의지. 의지만으로 일으키는 마법을 언령 마법이라 한다. 이는 시동어 조차도 필요 없다는 것은 알지?" 말없이 끄덕이는 제자를 바라보며 다시금 머릿속을 정리한 샌들우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언령 마법은 말이다, 드래곤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면 된다. 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마법 생물, 드래곤들만이 의지로 마법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8써클을 넘어선 자신도 의지만으로 마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래곤'이란 말에 세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드래곤이라는 것이 정말...있는 건가요?" "아무렴. 지금 사람들은 믿지 않지만, 나는 믿는다. 8써클에 도달한지 50년이 넘었지만 그 위에 또 다른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스승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몇달 전 아홉 번째 생일을 지낸 제자치고는 참으로 의심이 많다고 투덜거리던 샌들우드는 고개를 획 돌리며 볼을 부풀렸다. "나도 몰라." "엥?" "한 150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때가 아마 7써클 도입 때였지? 그리곤...잊었다." 머리를 긁적이는 스승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세실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 겨우 마법의 초입에 들어선 것 치고는 많이 삐뚤어진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마님 가르치실 때만해도 5써클이셨다면서요? 그럼 저희 주인마님 나이가 얼마나 된 건데요?" "쓰읍~! 당연히 속인거지! 생각을 해봐라! 이런 약소국의 궁중 마법사가 7서클이다! 라고 소문이 났다면 날 가만히 놔뒀겠냐? 더군다나 내가 그놈의 귀찮은 자리 때버리려고 죽은 시늉까지 했는데, 내가 정신 나갔어?" "헐~" 방방 뛰며 자신을 옹호하는 샌들우드를 멀거니 바라보던 세실은 고개를 흔들며 책에 시선을 돌렸다. 이론상으로는 샌들우드가 직접 연구하고 서술한 <8써클, 이것이 마법이다!>까지 독파한 세실은 마나를 느낄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책을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론은 다 외웠으니 이제 몸으로 마법을 익혀야 한다는 샌들우드의 말을 싸악 무시한 세실은 무슨 생각에선지 늘 이론책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겨우 여덟 살짜리가 이해해봤자 얼마나 이해하겠냐, 몸으로 배워라 하고 죽어라 매달리던 샌들우드도 단 한 달 만에 이론을 독파한 제자에게 혀를 내두르며 내버려두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마법 등을 달아놓은 채 샌들우드는 잠이 들었지만, 세실의 눈은 초롱초롱 하기만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불. 어둠을 밝히고 생명을 태우는 빛을 원하나니, 파이어 볼" 팟! 순식간에 오두막 전체를 발하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공중에 만들어졌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너 말고 더 작은 거" 피시식~ 바람이 빠지는 풍선을 본적이 있는가? 세실의 투덜거림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 전체를 환하게 밝히던 거대한 불덩어리가 단번에 손바닥 만해졌다. 작게 줄어들어 공중에 동동 떠다니는 불덩어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세실의 입에 비로소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이 읽고 있던 부분에 다시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도대체....수식을 언제 쓰는거냐구........" 그것이 문제였다. 그녀가 샌들우드가 만들어놓은 파이어 볼을 보고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며 입으로'파이어 볼' 을 외치는 순간 불덩어리가 만들어 진 것은 이론을 공부한지 보름이 되었을 때였다. 일단 한 번 만들어진 파이어 볼은 그녀가 원하는 데로 모습을 바꾸었고 크기를 변화시키는 것은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불덩어리. 마나는 느껴본 적이 없는 세실이기에 마법을 실현하기 위해서 마나를 언제 어떻게 다루며 주문을 언제 외우고, 또 수식은 어제 써먹어야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스승이 닦달하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읽은 책을 또 읽고 또 읽는 이유였다. 이처럼 원하기만 하면 마법이 실현되는데... 언령 마법은 드래곤들이나 썼다니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생각에 파이어 볼을 없앤 세실은 얇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 시냇가로 달려갔다. 자신은 결코 정.상.적.인. 마.법.사.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이 선 세실은 정령사에 도전해볼 까 고민 중 이었다. 참으로 샌들우드가 들으면 거품물고 까무라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세실이었다. 스승을 졸라 엘프어를 배운 세실은 드디어 오늘, 자신이 정령사의 소질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정을 내린거다. 약초를 제배할 때 마다 정령의 존재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볼 수도 있었다. 졸졸 흐르는 냇가에 털썩 주저앉은 세실은 또 다시 작은 불덩이를 불러놓고 책을 뒤적였다. +=========+========+========+=========+=========+==========+===== [Fairys Magic - for the beginner] Chapter I The process to make a contract with a soul 1. First of all, confirm whether you have an affinity for the elemental spirits. 2. Provide water, fire, wind, soil (all or the part of them) 3. Then convey a strong will to summon a soul 4. When a soul appears, ask the name of a soul (low-class souls' name ; water-Undine, fire- salamanda, wind-shylph, soil-norm) 5. If a soul ask "Would you want to contract" and so on...then just say "Yes!" On all occasions, you perform these orders Congratulations on your success! Now You're the one of the most wonderful soul elemental summoner. Notice : Keep in your mind just one thing. No matter how hard one may work, if a soul didn't appear. Then you have not the makings of a summoner. please give up and try to find another way. +---------+------------+해 석 +---------------------+------ [정령 마법 - 초급자용] 제 1장. 정령과 계약하는 법 1. 제일 먼저, 사대 정령들과의 친화력을 확인한다. 2. 물, 불, 바람, 흙을 준비한다. (전부 혹은 일부분) 3.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강하게 의지를 전달한다. 4. 정령이 나타난다면 이름을 물어보라 (하급 정령들의 이름: 물-운디네, 불-살라맨더, 바람-실프, 흙-놈) 5. 만약 정령이 "계약하시겠습니까?" 기타 등등으로 물으면 그냥 "옙!"이라고 대답하라. 위의 모든 사항을 수행하였다면,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하였음을 축하합니다! 이제 당신은 가장 멋진 정령사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의 :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정령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령사의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제발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봐라. +=========+========+========+=========+=========+==========+===== 이상이 샌들우드가 가지고 있던 정령마법을 위한 책의 1장을 해석한 부분이었다. 샌들우드에게서 배운 엘프어로 어렵지 않게 책을 해석한 세실은 언젠가 백작부인이 보여주었던 운디네를 떠올리며 강하게...의지를 내보이고는 싶었으나 그 방법을 모르기에 마음속으로 '운디네'를 줄기차게 불었다. 순간 졸졸 흐르던 시냇물이 요동을 치며 파문이 일었다. 이를 본 세실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마주 잡고 물 속에서 정령이 튀어나오길 기다렸지 만 파동은 일어나는 데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한참을 기대감 어린 눈으로 기다리고 있던 세실의 눈에 점차 실망감이 퍼져나갔다. "앙~ 운디네는 안되나봐..." 머리를 긁적이던 세실은 이번에는 마른 장작을 모아와 불러놓았던 파이어 볼로 불을 붙이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살라맨더'를 불렀다. 순간 붉게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커지더니 푸시식 꺼져버렸다. "이것도 아닌가봐......" 다시 흙을 동그랗게 모아놓고 '노움'을 줄기차게 부르는 순간 땅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잠잠해 졌다. 세실은 자신이 흙을 모아놓았던 곳만 쳐다보고 있었기에 그녀의 주위에 불쑥 흙더미가 튀어나오다 무엇인가에 눌린 듯 푹 꺼지고 이런 현상 이 한참동안 일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한숨을 길게 내쉰 세실은 멍 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실.프."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거리며 세실의 주위로 몰려드는 순간 어디선가 밀려드는 거센 바람에 깜짝 놀란 세실은 얼른 책을 잡고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힝~ 난 재능이 없나봐, 실프를 불렀는데 웬 태풍?" 휘이잉~ 세실이 떠나간 시냇가에 휘몰아치던 바람이 잠잠해 지며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천상에 다시 없을 미남이 떡 하니 나타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엉? 여기서 아이의 느낌을 받았는데? 어디갔어?" 주위를 휙 둘러보며 황망해 하는 존재에게 조심스럽게 몰려온 공기들이 시끄럽게 요동을 쳤다.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존재는 세실이 사라진 오두막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사라졌다. "난 돌아가면 맞아 죽을거야. 오늘 계약하고 오랬는데...흑...늬들....잘 지켜드려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울먹이던 거대한 존재가 자취를 감추자 그 기운에 숨어있던 존재들이 몸을 드러냈다. '야! 날 불렀잖아! 계약할 수도 있었는데. 우씨!' '켁켁 누구야, 내 모가지를 잡아 누른 것이?' '너냐? 네가 불 껐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 투덜거리던 존재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듯 감싸오는 존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안돼 안돼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해. 왕이 그렇게 하랬어. 늬들은 안된데' '까르르 그럼 그럼 안돼' '우리가 있는데!'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주위를 날아다니는 존재들을 노려보던 존재들은 열이 뻗힌 듯 신경질 적으로 발을 굴렀다. 순간 잠잠하던 시냇가에서 물보라가 일었고, 꺼져있던 불씨가 다시 살아나 춤을 추었다. 또한 흙더미가 들썩이더니 여기 저기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며 대지가 요동쳤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까르르 웃던 존재들은 약을 올리려는 듯 그들 모두에게 달려들어 차가운 기운을 전해주고는 오두막으로 몰려갔다. '우리가 먼저야' '먼저야' '까르르르' '바부팅이들...' 순식간에 바람이 잠잠해지자 그제야 물보라가 잠잠해지고 불씨마저 사라졌으며 대지가 침묵했다. 이 모든 일은 세실이란 아이가 정령과 계약을 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세실과 계약을 하려던 존재들과 그를 방해한 존재들은 알지 못했다. 세실의 두 번째 시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돈 버는데 목숨을 걸다. 1. 3년 후. "어서오십시오, 아가씨." "안녕하세요, 론. 아저씨 계세요?" "물론 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던 세실이란 아이는 레이븐 상회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사로 떠오르고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검은 머리를 가진 열 두살 난 아이를 직접 마중 나온 카일 레이븐의 오른팔이자 론 헤일리는 오늘도 무거운 바구니를 받아들고 카일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오, 왔나?" "네,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나야 물론 잘 있지. 급료를 받았구나." "네." 론의 안내로 자리에 앉은 세실은 우선 치맛단을 뜯어 짤랑거리는 은화들과 동화를 쏟아부었다. 전부 합해 43실버 50쿠퍼. 한 달 동안 받은 급료와 백작부인에게 받은 것, 그리고 편지 대행업과 부수적으로 약초를 판 대가로 번 돈이었다. 장부를 가지고와 아이가 건네주는 돈을 기입한 카일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번에 네가 개발한 향기 나는 양초에 대한 계약서다. 시험 삼아 시판을 해봤는데 호응이 좋아. 이익은 6 : 4 어떻겠니?" 당연히 세실이 6할이고 레이븐 상회가 4할이다. 이러한 비밀 거래는 크리스틴이 아카데미로 떠난 직후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약초 제배에 열을 올린 세실은 집사의 귀띔에 백작이 자신이 만든 찻잎으로 얼마나 돈을 벌고 있는지 알게 된 후였다. 30실버란 거금을 쥐고 눈물을 글썽이는 세실을 야릇한 눈으 로 지켜보던 집사는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며 세실의 귀를 열어주었다. 세상 물정을 배운 세실은 그 날로 레이븐 상회에 달려왔다. 자신이 직접 키운 약초를 이것저것 섞어 만든 차를 선보인 세실은 그 자리에서 카일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황궁에 상납되는 차보다 더욱 질이 좋은 차를 확보한 레이븐 상회는 모든 판 권을 담당하는 대가로 이익의 5할을 요구했고 백작가의 하녀에 불과한 자신이 장사를 하는 것 은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아는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손을 잡고 시작한 사업은 성공했다. 세실이 제배한 것만으로 만들어야 하는 취약점이 있었지만 그 희소성이 사업을 더욱 번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주문을 해도 찻잎 한통을 겨우 구할까 말까이니 소문난 귀족들치고 고객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 덕분에 겨우 열 두살이 된 세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실은 그러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고,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처음 카일 레이븐은 이 작은 아가씨가 거금을 번 후 독립을 할 것이라 생각을 했었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소녀의 어머니인 레니라는 여인도 은밀히 찾아와 자신이 번 돈을 세실의 이름으로 계속 맡기고 있었고, 아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꼬박꼬박 돈을 모으면서도 쓸 생각이 없는 모녀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 관해 뭐라 말을 꺼내본 적은 없었다. 단 한 가지. 세실이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번에 구호금의 일부를 신전에 기부하는 건 어떨까 하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세실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보인 카일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달에 천민촌의 아이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여 신전에서 키운다고 하더구나." "아....!" 카일의 말에 반색을 하던 세실은 계약서를 다시 내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계약을 해요." "응?" "아저씨는 4할로 하고 전 5할. 나머지 1할은 계속 신전으로 보내주세요." 순간 눈을 번뜩이던 카일이 상체를 숙였다. "꼬마 아가씨, 차(茶)를 만들어 파는 것에서 내는 구호금만으로도 충분할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의 은근한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인 세실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레고리 대신관님께는 필요할 거예요. 이카루스 신전은....앞으로도 계속 그 일을 할테니 여기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아이들을 모으겠지요. 그러니 돈이 많이 필요할거예요. 혹시 모자라면 제가 받는 것에서 더 빼도 상관없어요." 또박 또박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아이를 못내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카일은 어쩔 수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론을 불러 계약서를 다시 만들어오라고 시켰다. 옆에 서서 모든 대화를 다 듣고 있던 론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돈에 관해서는 수전노가 저리 가라 할 만큼 쓸 줄을 모르는 아이였지만 단 한 가지. 갈 곳 없고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을 도와주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벌어들이는 이익의 일부를 떼어 집을 지어주어나, 생필품을 전해 주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덩달아 빈민가로 눈을 돌리게 된 카일 또한 자선 사업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고 시급이라도 지불하며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레 이븐 상회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좋게 만들고 있었다. 한창 학교를 다니고 있어야 할 나이의 소녀. 조금만 대화를 나누어 보면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애냐 할 정도로 담백했지만, 반면 순수하고 깨끗한 심성에 '아 애는 애구나'라는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4년 남짓 겪어온 카일은 세실의 이번 결정에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쬐~금 놀랐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차분히 앉아 있는 그의 손만은 격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론이 내민 서류를 읽어보지도 않고 멋들어지게 싸인을 한 세실은 가지고 온 바구니에서 여러 묶음의 종이를 꺼냈다. "이건 향초를 만들 때 쓸 거예요. 혹시나 하고 가지고 왔는데 여기 이건 만들면 분홍색이 나고, 이거는 녹색, 이건 아이보리 색이 나요." 찻잎과 구분하여 약초들을 늘어놓은 세실은 일목묘연하게 설명을 했고 이를 귀담아 들으며 메모를 한 카일은 즉시 상품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마지막으로 론에게 과자봉지를 선물로 받고 그의 뺨에 뽀뽀를 해준 세실은 활짝 웃으며 상회를 나섰다. "사람을 붙여줘." "네?" "그 더러운 자식이 저 아이를 찾아냈다는 소문이 있다. 더 늦기 전에 사람을 붙여서 보호해주 도록." 조그마한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내려진 명령에 고개를 숙여 보인 론은 곧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뿌드득...네 뼈를 갈아 마시고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누군가를 향한 말인지. 이미 보이지 않는 소녀의 모습을 찾는 듯 사람들 사이에 시선을 고정시킨 카일 레이븐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스승님, 관절염에는 이게 좋아요." "아 됐다니까!" "무슨 마법사가 제 몸 하나 못 고친데요?" "험험 이놈아, 자고로 몸이란 것은 말이다..." "네네 면역력을 기르려면 함부로 마법을 쓰면 안된다구요?" "쯧" 오늘도 약초를 무릎위에 더덕 더덕 붙이고 화롯가에 앉아 제자의 안마를 받고 있던 샌들우드는 세실의 말투에 담긴 걱정스러움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것. 내가 무슨 복이 이리도 많아 이런 아이를 제자로 두었누?' 마법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록 1써클은 커녕 마나조차 느끼지 못해 마법사가 될 수 없는 제자이나 샌들우드에게는 하늘 아래 누구보다 소중한 아이였다. 해서 마법 지식뿐 아니라 잡다한 학문까지 아이의 작은 머리에 집어넣는 그의 단 한 가지 소원은 늙어 죽을 때까지 이 착한 제자를 끼고 사는 것이었다. 8써클에 이르면서 몸조차 재구성되어 마법으로 흰머리와 흰수염을 만들고 있는 그가 언제 죽을 수 있는지는 신만이 아시는 일이었으니, 그는 정말 욕심이 많았다. 평생 늙어 죽을 때 까지라니... 모르긴 몰라도 몸속의 마나란 마나가 다 빠져나가지 않는 다음에야 죽고 싶어도 못 죽을 것이 분명했다. 샌들우드가 이팔청춘보다 더 팔팔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는 세실은 날마다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는 스승 걱정에 밤잠을 설쳤다. 덕분에 그녀의 약초에 관한 지식을 날마다 높아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관절염을 치료하는(실험용 이었지만) 쾌거를 기록했지만 정녕 나아도 벌써 나아야 했을 스승님의 용태는 변화가 없었다. 매일 같이 스승님을 안마해드리고 약을 발라드리고, 몸에 좋다는 것들을 구해와 요리도 하는 동안 세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벌써 3피텐 정도로 키도 훌쩍 컸고, 어깨쯤 내려오던 머리는 허리에 닿아있었다. 백작가에서 보낸 4년의 세월은 세실의 모습을 좀더 성숙하고 귀엽게 만들어주었다. 짙고 숱 많은 머릿결만큼이나 깊고 검은 두 눈과 꾸준한 일로 다져진 단단한 몸과 거칠긴 하지만 햇빛에 그을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게만 보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다 스승의 옆에 앉아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고 백작가로 돌아온 세실은 싸하게 변한 집안 분위기에 의아심을 느꼈지만 이내 마리의 부름을 받고 주방으로 불려갔다. "오늘부터 행동을 조심해야 할거야. 백작님 신경이 곤두섰거든? 아가씨도 내일 돌아오신다니 각별히 신경쓰렴." 크리스틴이 돌아온다는 말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세실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인데요?" "황태자께서 쓰러지셨단다. 원인도 모른다고 하더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은 세실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 일 이 세실의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놓은 사건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오, 크리스. 어서 오너라. 피곤하지?" "아니요, 아버님. 어머님.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지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리스틴 폰 배너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14살이란 어린 나이가 무색하도록 봉긋 솟아난 가슴과 잘록 들어간 허리는 그녀가 이미 여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보낸 4년이 헛되지 않았는지 백작 영애의 모습에서는 품위과 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딸의 변화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백작 부부는 곧 그들의 생각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지만, 적어도 겉모습만으로 치자면 자신들의 딸아이는 완.벽.한. 황태자비로 성장했다고 확신했다. "쨍그랑!"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로즈마리로 가지고 오라고 했잖아!" 신경질 적으로 찻잔을 내던지는 버릇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깨진 그릇을 주워 담던 수잔은 생선을 문 고양이와 같은 미소를 짓는 아가씨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세실리아라고 했던가? 가서 그 아이 좀 불러오렴." 역시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세실리아는 지금 심부름으로 시장에 갔습니다." 한쪽 눈썹을 우아하게 들어올리고 수산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크리스틴의 눈이 표독스럽 게 빛났다. 새하얀 손을 들어 침실 옆에 걸려있던 끈을 당긴 크리스틴은 헐레벌떡 뛰어온 집사 를 보고 수잔을 향해 턱짓을 했다. "내가 아끼던 잔을 감히 깨뜨렸으니 보답은 해야겠지? 가서 따끔하게 혼내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죽이라는 뜻이다. 4년 동안 잠잠했던 괴행이 시작된 것을 인지한 집사는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소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씰을 찾기에 심부름을 갔다고..." "저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수잔을 팔을 잡고 걸어가던 집사는 멀리서 다가오는 마리에게 하녀를 인계했다. "험험 컵을 깨뜨렸답니다. 알아서 혼을 내주십시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크리스틴의 말을 전한 집사는 마리에게 눈짓을 하고 몸을 돌렸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부축한 마리는 재빨리 수잔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나가렴. 일자리는 내가 알아보마. 어서, 서둘러!" 마리의 심상찮은 모습에 옷가지를 가방에 쑤셔 넣던 수잔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씰은..." "내가 소식을 전해줄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한시가 급하다. 혹시나 아가씨가 내려오기 전에 서둘러라." 세실이 오후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백작부인 한 사람 뿐이었다.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한 아이를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수잔을 닦달하여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오던 마리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야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지금 어딜가는거지?" 우아한 모습으로 홀에 나와있던 크리스틴은 짐가방을 안아들고 엎드린 하녀과 시녀장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순간 홀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거냐?" 약간 날카로워진 백작영애의 말에 흠칫 하던 마리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씨게 죄를 지어 쫓아내려는 중이었습니다." "흥! 난 그 아이를 내보내라 이른 적이 없다. 혼을 내주라고 했어. 내 명령이 그렇게 우스운가?" "아...아닙니다. 아씨. 단지 이 아이는 자유인이라..." "그래서...그래서 혼을 낼 수 없다는 건가?" "아...아닙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끌고 가서 매질을 해. 시녀장도 데리고 가라. 함께 죄를 지었으니 같이 벌을 받아야겠지," 우아하게 명령을 내린 크리스틴은 그녀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나서서 두 여인을 끌고 가는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던 수잔은 입술을 깨물며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돌아오지마라. 씰. 도망가! 도망가렴, 제발!' 분명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반짝 빛나는 크리스틴의 눈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백작 영애는 세실의 목을 취하려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목이 달아날 위기에 놓인 두 여인은 스스로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가슴에 희망이 되어주었던 작은 아이를 떠올리며 그 아이가 무사히 위험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기사님, 한 가지....청이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근위기사에게 팔이 잡혀 끌려가던 수잔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했다. "............" "세실리아라는 아이가 있어요. 해가 질 때쯤이면 돌아올 텐데. 제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수잔이 집으로 갔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여기서 나가라고, 빨리 레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전해주세요. 제발..." '세실리아'란 말에 흠칫 하던 기사는 옆에서 시녀장을 잡고 있는 기사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고개를 주억이던 수잔은 시녀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죄송해요, 시녀장님. 저 때문에..." "아니다.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너무 오래 살았지. 너무 오래 산거야." "흑!" 노예도 아닌 자유인의 신분으로 귀족가에 일을 하던 평민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벌레보다 못한 존재이기에 존중받지 못했고, 하루살이보다 더욱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 갑자기 탄성을 지르던 수잔이 우뚝 섰다. 영문도 모르는 기사는 덩달아 옆에 서서 하녀가 보따리를 뒤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손때 묻은 동전들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꺼낸 수잔이 그것을 기사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세실리아에게 전해주세요. 그동안 고마웠다고, 정말 행복했다고." 어두운 얼굴로 동전 주머니를 받아들고 한참을 고민하던 기사가 문득 고개를 돌려 동료를 바라보았다. "가서 단장님 좀 불러오지." "알았네." 두말없이 마리를 놓아준 기사는 훈련장으로 뛰어갔다.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세 사람은 기사단장과 그를 부르러 갔던 기사뿐 아니라 수명의 사내들이 헐레벌떡 뛰어오자 옆의 숲쪽으로 몸을 숨겼다. 뒤따라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온 기사들은 호위를 하듯 세 사람을 둘러쌌고 세바스티앙 이 인상을 쓰며 수잔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세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의 말에 수잔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애칭으로 부르는 이 사람이 바로 씰을 데리고 온 기사가 맞을 것이다. "씰의 엄마가 살고 있는 자작님 댁을 아시나요?" "아네." "그럼...있다가 세실이 돌아오면...그곳으로 아이를 보내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야?' 백작 영애를 모시고 돌아온 지 이틀도 되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영문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세바스티앙에게 마리가 다가갔다. "단장님, 아가씨께서 이 아이의 목숨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실을 불러오라 하셨다는군요. 시장에 갔다고 대답을 하였는데 이 아이의 목숨을 취하라 하셨답니다."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세바스티앙이 수잔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이냐?" "네, 나으리. 분명 아가씨는 세실을 죽이실거예요. 발밑에 깔린 벌레보다 더 싫어하셨는걸료요.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그 아이에게 매질을 하셨습니다. 제발, 씰을..."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기사단장에게 겁을 먹고 목을 움츠리던 수잔은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 마리의 따뜻한 손을 맡잡았다. "그럼 나으리,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가봐야..." "어디를 간다는 거냐?" "감옥으로 데리고 가야합니다, 단장님." 기사의 대답에 짐짓 생각에 잠겨있던 세바스티앙은 고민에 휩싸였다. 혼을 내주라고 한 사람을 풀어주는 것은 주인에 대한 반역과 같다. 하지만 그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두 여인은 씰에게 꼭 말을 전해달라 당부하고는 스스로 나서서 기사들의 손을 잡고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에 들어가서 매질을 당한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했다. 살아난다 하더라도 십중팔구는 병신이 될 터였다. 끝까지 세실에 대한 걱정을 하며 옥으로 들어가는 두 여인을 본 세바스티앙은 인상을 쓰고 있는 기사들에게 훈련장으로 돌아가라 명하고 저택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렇게 해야 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돈 버는데 목숨을 걸다. 2. 기사단장의 요청에 거실로 나온 백작부인은 잔뜩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나 단정하고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사람이다. 차분히 앉아서 그의 말을 기다리는 백작부인 앞에 무릎을 굽힌 세바스티앙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릴수도 있다. 하녀들의 말만 듣고 움직이기에는 너무 성급하다 생각이 들었지만, 익히 아는 백작영애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그저 기우라고 넘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마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마르보 경?" ".....잠시...세실리아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다녀왔으면 합니다." "무슨......?" "너무 오랫동안 어미와 보지 못한 것 같아 인사차 다녀왔으면 합니다." 세실이란 아이를 데리고 온 후 단 한번도 이러한 요청을 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백작부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던 백작부인은 문득 몸을 일으켰다. "잠시 저랑 산책이라도 하겠습니까, 경?" "....네, 마님." 거실을 나선 백작부인은 먼저 나서서 저택 밖으로 나왔다. 무슨 목적에서인지 망설임없이 걸음을 옮기던 백작부인은 저택의 뒤편에 위치한 감옥안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에 세바스티앙을 뒤돌아보았다. "저 일과 관련이 있는건가요?" ".............." 무거운 침묵속에서 긍정의 답을 들은 백작부인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옥문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에 서둘러 앞으로 나선 세바스티앙은 백작부인을 말리는 대신 철문을 열었다. 쾌쾌한 냄새와 함께 요란한 채찍 소리가 쉴새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전만 하더라도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비명을 지르던 여인네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입이라도 막았는지 억눌린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서슴없이 치맛자락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던 백작부인은 온 몸에 피칠을 하며 축 늘어진 여인들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는 우락부락한 수문장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가서 그만하라 이르시오." "네, 마님." 누군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채찍질을 하던 사내는 세바스티앙 의 주먹 한 방에 더러운 오물이 쌓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누가, 감히.....! 헉! 마님!" "당장 저 사람들을 풀어주고 집 안으로 옮기세요." 조용한 목소리에 칼을 뽑아든 세바스티앙은 단번에 쇠사슬을 끊어내고 쓰러지는 두 여인을 양팔로 받아들었다. 두 여인을 어깨에 둘러맨 세바스티앙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백작부인의 뒤를 쫓아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 샌들우드에게서 공부를 배우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에 돌아온 세실은 백작부인에게 불려갔다. 그곳에는 백작부인뿐 아니라 백작과 크리스틴 영애가 함께 있었다. "오늘 당장 짐을 싸서 자작가로 돌아가거라." "부인!" "더 이상 이 아이를 갈취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오늘 돌려보냅니다." 찬바람이 쌩쌩부는 백작부인의 말에 반기를 들려던 백작은 아내의 싸늘한 눈초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저 아이는 엄연한 우리집 재산이예요. 왜 돌려주라 하시는거죠?" 당돌한 딸아이의 말에 무표정하게 세실을 내려다보던 백작부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불만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과 딸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탐욕스러운 얼굴이었다. 얼마나 저 아이의 피를 빨아야 만족할 건가? 아마 평생을 가도 지금 세실이 주고 있는 부귀영화는 결코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장난감을 빼앗기기 싫다는 듯 눈을 빛내는 딸아이를 보니 소름이 돋았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란 아이가 무엇이 아쉬워서 저 아이를 괴롭히려 하는 것인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없이 두 사람을 보았던 백작부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는 세실이란 아이를 보았다. 참으로 미묘한 위치였다. 하녀가 아니었다. 크리스틴의 말 처럼 재산이 아니다. 집안에 재산을 불려주는 존재이지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세실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백작부인은 아이에게 선택권을 넘겨보기로 했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다." 잠시 고개를 들려던 세실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험험, 부인. 급료가 작아서 그런 것이오? 그럼 내가 더 올려주겠소. 그러니 나랑 상의를 좀" "백작님." "왜 그러시오?" "제가 시집오고 난 후에...감옥은 폐쇄하기로 약조를 하셨지요?" "그랬지." "헌데 그곳이 열려 있더군요." "뭐라?" 영문도 모른채 눈을 크게 뜨고 아내를 바라보던 백작은 흠칫 하며 옆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해서 모든 하녀들과 하인들을 내보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뭐......?" "오늘 매를 맞은 사람 중에 하나는 제가 시집을 올 때 데리고 왔던 마리였어요." "........!" 비록 시녀장이기는 하나 마리라는 여인이 아내에게 어떤 의미의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아는 백작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또한 지금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제가 직접 고용했습니다. 제가 고용한 사람들이... 비록 백작님의 녹을 먹고 있다 해도, 제가 선택한 사람들이 매를 맞고 고통을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내보낸 후 저는 아버님께 가서 잠시 효도를 좀 하고 올 생각 입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딸아이를 노려보았다. "네 짓이였더냐?" "......." "네 짓이냐고 물었다!" "아...아버님...." "당장 대답하지 못할까!" 입술을 잘근 깨물고 시선을 둘 곳을 찾던 크리스틴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네! 제가 그랬어요. 말 안 듣는 것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기 위해 제가 그랬어요. 뭐가 잘못 됐나요? 그리고, 어머님. 저런 더러운 것이 있는 이곳에서 절 이렇게 망신을 주셔야 하나요? 저...저 천하디 천한 것이 있는 곳에서?" 반성은커녕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으로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는 딸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남편을 주시하던 백작부인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결정이 났군요. 저도 오늘 나가겠습니다." 딸에 대한 실망감에 앞서 세상 잘못 살았다는 회한만 가득했다. 십 수년을 함께한 아내의 심정을 백작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딸아이를 무시하던 백작은 작은 소녀를 데리고 문 밖으로 사라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의자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머니가 왜 이러시는 건데요? 아버지, 말씀 좀 해보세요! 아빠!" "닥쳐라!"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딸의 잔혹성과 제멋대로인 성정을 확인하게 된 백작은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처음부터 못을 밖았던 아내였다. 워낙에 착했던 탓에 큰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이 자랐고 어질기로 소문난 남작을 아비로 둔 그녀는 하인들을 물건 취급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혼인을 한 후에도 그것으로 몇 번이 나 부딪힌 적이 있었으나, 따끔하게 야단을 치더라도 절대로 매질은 하지 않는 아내의 모습 을 존경하던 백작이었다. 그래서 감옥을 잠그라는 아내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헌데 그가 내린 명을 딸이 어겼다. 그것도 이제 14살 된 아이가! 아니,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모르고 있었는지 고민을 해보던 백작은 이내 스스로를 비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하인들. 일주일을 넘지기 못하고 급료를 받을 생각도 없이 나가버리는 하인들. 아이의 망종을 그저 모르는 척했다. 겨우 세상을 알 나이에 벌써부터 평민들을 벌레 취급하며 목숨 귀한 줄 모르고 날뛰는 것을 방관만 했다. '날 닮았어.' 누굴 탓하랴. 차가운 얼굴로 딸을 외면하던 아내를 떠올리며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딸을 부정하고 남편인 자신을 부정한 것이다. 거짓 세월을 살았다 여기며 등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 흔한 첩 한번 들이지 않았던 백작은 자신의 결혼 생활을 뒤돌아보며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자조했다. 이번 일만 없었으면.... "마리는 네 어머니의 유모였다." "네?!" "스스로 자원해서 시녀장으로 남았지. 네가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야. 네 어머니의 어미와 같은 사람이다." 아내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젖을 먹여 키워주고 성년이 된 후에도 그녀를 걱정해 이곳까지 따라와 집안일을 해주던 유모 에게 매질을 가한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아무리 하인들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귀족이라 해도 유모라는 존재는 달랐다. 어버이와 같은 존재들이 아니던가. 백작의 말에 그제야 제 실수를 알아챈 크리스틴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백작부인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흑흑" 진심으로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딸을 가만히 안아든 백작부인은 방문 앞에 서서 미안한 표정 을 짓는 남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바스티앙이 안고 들어온 여인 중 하나가 자신의 유모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 지는 슬픔을 맞보았다. 아버님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분을 괜히 모시고 와 그러한 고통 을 당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메어졌었다. 화가 풀리지 않았다. 딸아이의 눈물마저 거짓으로 보였다.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딸이었다. 자신의 피를 이은 딸이 아니던가? 딸아이의 성정은 어쩌면 자신에게 숨겨져있던 성정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책을 하는 아내의 모습에 고개를 돌리던 백작은 문득 자신이 이용만 해먹으며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던 한 아이를 떠올렸다. 이 집안의 재산이라 부르던 딸 아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데리고 왔지?' 하녀도 아닌 아이를 종처럼 부려먹었다. 자신의 이기심에 잠시 한숨을 내쉬던 백작은 조용히 문을 닫고 집사를 불러 아이의 방으로 직접 찾아갔다. 아무도 없는 방. 나무 침대위에는 너덜너덜한 이불이 단정하게 접혀 있었고 작은 선반이 하나 달랑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이곳이 그 아이가 지내는 곳인가?" "네, 백작님." "흠....." 어두운 얼굴로 잠시 방을 둘러보던 백작은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 아이는 어디 있는가?" "글쎄...아마도 시녀장이나 수잔이 있는 곳이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집사는 예전에도 매를 맞거나 다친 하인들에게 세실이 직접 약초를 캐와 상처를 돌봐주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의 안내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녀장이 거한다는 곳으로 찾아간 백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피투성이 여인네의 몸을 닦아주는 작은 아이를 보며 가슴을 쳤다. 가죽으로 만든 채찍이 지나간 자리는 살이 찢어져 뼈가 드러날 정도였고 의식을 잃은 두 여인은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며 신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물이 담긴 그릇 하나는 피를 닦아낸 탓 인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고 또 하나에 담긴 물은 엷은 녹색을 띠고 있었는데 아마 약초즙을 짠 물 같이 보였다. 문이 열린 줄도 모르고 피를 깨끗하게 닦아낸 세실은 자신이 가지고온 약초들을 그릇에 담고 곱게 찧어 상처위에 발라주었다. 두 여인의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던 백작은 아내가 왜 그렇게 화를 냈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말없이 문을 닫은 백작은 나중에 아이가 나오면 서재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돈 버는데 목숨을 걸다. 3. 나란히 누워있는 여인들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 기도를 올리던 세실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새어나온 것은 모두가 잠든 새벽녘이었다. 한시도 떠나지 않고 약초 즙을 적신 천을 갈아주던 세실은 어둠 속에서 불도 켜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다 작게 속삭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회복.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힘. 힐*링*" 자신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주던 언니. 언제나 엄판 표정을 짓고 있지만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차가운 모습 속에 따뜻한 정을 감추었던 시녀장님. 두 사람이 어서 빨리 일어나기를.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기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고통스러워하는 두 사람이 한시 바삐 그 모든 아픔을 벗어던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저도 모르게 주문을 외우던 세실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따뜻하게 주위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모든 신의 주인이시며, 생명의 아버지. 이카루스께 비오니, 이 죄 많은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시어 축복을 내려주소서. 이 분들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해주세요.." 아주 오래전 신전에서 식사시간에 들었던 기도문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세실은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몸에서 퍼져 나온 광채가 가만히 누워있는 두 사람을 감싸며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왠지 모를 피곤함에 스르르 고개를 숙인 세실은 두 사람의 손이 어느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한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배너 백작가가 시끄러워졌다. 피투성이로 누워있었던 사람들의 몸이 씻은 듯이 깨끗해 졌기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누워 잠이 들었던 세실 역시 멀쩡한 몸으로 일어난 두 사람의 품에 안겨 한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쑥덕이던 사람들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너무나 착한 일을 많이 했기에 신이 축복을 내리신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던 것이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 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져나갔고, 그 일을 빌미로 백작가의 감옥은 폐쇄되었다. 크리스틴 영애는 수업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또한 세실은 방을 옮겼다. 하녀들이 거하는 곳이 아니라 시녀장의 바로 옆방에 배정 받은 세실은 곧 오두막이 있는 곳에 원한다는 집을 지어 줄 수도 있다는 백작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천성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급료를 금화 한 닢으로 올려준 백작은 인기가 떨어질 때까지 자신을 위해 찻잎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원한다면 자작가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과 함께. 이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세실은 약초 공부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녀가 만들었던 향초는 호응이 좋았고 이카루스 신전은 거액을 기부한 이름 모를 자선 사업가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 그리고 얼마 후. 급료를 맡기기 위해 상회를 찾아갔던 세실은 의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예전에 마리에게 들었던 적은 있으나, 그저 흘려버렸던 이야기. 바로 황태자의 용태에 대해서였다. "호흡도 불규칙하고, 의식을 잃은 지 여러 달이 되었지. 독이 아니라고 하더군. 게다가 소화를 못 시켜서 먹는 것도 못해 매일 마법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단다. 얼마 남지 않았 다고 대신관님이 고개를 내저으셨다." 카일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세실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요?" 순간 카일과 론의 눈에 번뜩임이 스쳐갔지만 세실을 깨닫지 못했다. "흠...글쎄. 나라에서는 유명한 의원이나 마법사, 신관을 찾는다고 하더라만..." "돈을...줄까요?" "응?" "만약에 그분을 치료해드리면...돈을 줄까요?" 세실의 물음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던 두 남자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니지. 더군다나 황태자 저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큰 상을 내릴거야"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세실이 눈을 반짝였다. "영지로....땅을 받을 수 있나요?" "너...치료할 수 있는거냐?" 심각한 카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실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던 카일은 자신의 손을 잡는 아이를 보고 엉덩이를 내렸다. "가능은 하지만 알려드릴 순 없어요. 제가 약을 드릴테니 치료가 끝나면 대가를 받아주세요." "정말이냐?" 해독약은 이미 3년 전에 만들어졌다. 누구에게 쓰인 것인지는 몰라도 워낙에 독특한 증상을 나타내기에, 귀족들 사이의 누군가가 당했다면 분명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해서 혹시나 만들어 둔 것이었다. 구하기 힘든 약초였기에 조금씩 사 모아 직접 제배를 하고 끝없는 실패 끝에 결국 해독약을 만들었다. 레이몬, 사갈나무 뿌리, 페리즈마, 롱푸질, 맥시웰, 로즈윙, 페닐, 아르카지스... 각각의 약초들은 그저 감기나 작은 염증에 쓰이는 약초들이었지만 그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복용하면 독이 되는 것들이었다. 그것도 조금씩 아주 소량을 장기간 복용하면 아무리 뛰어 난 의원이라 해도 독에 중독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더군다나 페닐이란 약초는 약초 특유의 냄새와 맛을 없애는데 일조를 하기 때문에 무색 무취 무미의 독약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몸의 기력이 떨어지다, 면역력이 약해져 잔병 치례를 많이 한다. 그것이 만성화되면 무기력증이 더해져 몸을 일으킬 수 없고 결국에는 의식을 잃고 호흡 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다. 어머니에게 약초의 이름을 듣고 놀랐던 것은 그 약을 제조한 사람은 분명 자신을 가르친 한스 할아버지만큼 약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소녀를 바라보던 카일은 말없이 론을 응시했고 짧게 고개를 끄덕인 론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 론 아저씨는요?" "음 심부름을 보냈다. 그럼 약은 언제 구할 수 있지?" "지금 당장에라도." 세실의 대답에 카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잠시만 기다리렴. 마실 것이라도 가지고 오마." 무슨 생각에선지 세실은 자리를 비우고 나가는 카일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턱을 괴였다. '잡화상 아저씨도 죽었어. 한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만약 저 분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분들이 아니라면....나도 죽겠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음료수를 가지고 온다던 카일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론이 무거운 얼굴로 돌아왔다. "꼬마 아가씨." "........." "황태자님의 병의 원인을 알고 있나?"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보여주는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실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챙! 순간 안으로 달려 들어온 사내들이 일제히 세실의 주위를 감싸며 칼끝을 소녀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절도가 있는 모습은 분명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말없이 자신에게 향해있는 번뜩이는 칼날을 보는 세실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반면 명령을 듣고 반역자일지도 모를 이를 잡으러 왔던 이들은 이제 겨우 12살 된 소녀라는 것을 알고 칼을 들고 있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세실을 주시하던 론은 한숨을 삼키며 칼을 치우라 손짓을 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그는 두 손을 깍지를 낀 채 세상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원인을 모르는 건가?" 말투가 달라졌다. 귀족들이나 쓰는 말투를 사용하는 론을 바라보던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을 알고 있다는 아이의 대답에 상체를 앞으로 당긴 론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해약을 만들었지?" 이번에는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입을 열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던 론은 결국 한숨을 지으며 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궁금한 것이 있을텐데?" "황태자님을 살리고 싶으신가요?" 순간 집무실 안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전보다 더 무시무시한 기운을 흘리던 론은 아이의 눈을 주시하다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너......?" "제 생각이 틀리다면 전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꺼예요. 잡화상 아저씨가 그랬듯이." 세실의 단호한 말에 론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푼 론은 지친 얼굴로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아이는 황태자의 병이 무엇때문인지,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 겁없는 소녀는 자신들을 믿고 제 목숨을 걸고서 서슴없이 해약을 내놓는다고 한 거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이였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테니.. 약이 있다는 말 한마디에 이들을 데리고와서 칼을 들이민 자신이 부끄러웠다. "휴.....그런가? 그랬군. 우리를 믿고 있었구나." 순간 세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도박은 성공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웃음을 짓던 세실이 벌떡 일어나 론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 "약을 드릴께요." "........!" 세실의 말에 벌떡 일어난 론은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베어 딱딱하기만 한 아이의 손을 잡은 론은 사내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지의 변두리에 있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스승님이 계시는 곳이예요." 단 한마디로 입을 닫은 세실은 오두막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사람들이 오두막 주위로 다가가자 통나무로 만든 문이 활짝 열리며 그들을 반겼다. "스승님!" 론은 작디 작은 손이 빠져나가자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짐을 느꼈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걸음을 옮겼다. "거기 떨거지들, 들어오지 않고 뭘 하는게야? 왔으면 인사라도 해야지 않는가?" 노인의 목소리에 주춤하던 사내들은 론의 뒤를 따라 줄줄이 오두막 안으로 발을 내밀었다. "호, 황궁에서 온 분들이시구먼." 근사하게 수염을 기른 마법사가 상큼한 냄새가 나는 물이 가득 담긴 물통에 다리를 담그며 앉아 있었다. 그의 말에 당황하던 론은 스르륵 문이 닫히자 뒤를 돌아보았지만, 허공을 두둥실 떠올라 식탁위에 놓여지는 10잔의 컵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마시게나. 내 제자가 만든 차야. 황제가 마시는 것보다 더 좋은 거야." 함부로 입을 놀리는 노인에게 발끈 하려던 이들은 론의 재지에 그냥 자리에 앉았다. 급조를 한 것인지 어깨 받이도 없이 둥그런 나무에 다리가 달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사내들은 차를 조금 홀짝이더닌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킬킬킬 그것 보라니까. 최상품이란 말이지." "에휴, 스승님, 좀 품위있게 웃으시라니까요!" "이 나이에 품위는 찾아서 뭘 하게? 약은 가져왔니?" "네." 어디 깊숙이 숨겨놓았던 것인지 한참만에야 나타난 세실의 온몸에는 먼지가 가득 묻어있었다. 그 꼴을 본 샌들우가 아무 말 없이 한 손을 휙 휘두르자 세실의 몸이 깜쪽같이 깨끗해졌다.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실현하는 노마법사에게 경기를 일으키던 사내들은 소녀가 내미는 영롱한 보랏빛이 나는 크리스탈 병을 보며 또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한 방울씩 사용하셔야 해요. 하루에 단 한 방울만. 그 이상 쓰면 독이 되거든요? 자요." 망설임 없이 병을 받아든 론은 세실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황태자님이 의식을 찾으신다면, 저에게 대가를 지불하셔야 해요." "........?"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피지를 쫙 핀 세실은 대륙의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척 가리켰다. "이곳은 죽음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바이오니어의 가장 끝에 있지만, 사라진 아틀란타 와 가장 가까운 곳. 이곳을 원해요." "그곳은...." "말 그대로 죽음의 숲이다. 아무도 살지 못해. 심지어 몬스터도 살지 못한다." 돈 대신 인간이 살지 못하는 쓸모없는 땅을 요구하는 아이가 걱정된다는 것일까? 한마디 씩 떠드는 사내들의 말에 세실은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독초들은 잘 살아가고 있어요." "..........!" "식물은 살아간다구요. 나무도 자라지요. 그러면 생명체도 살아간다는 거예요." 세실의 확신에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마법사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을 드려보겠다." "혹시 안되면 돈으로 주셔도 상관은 없어요. 그리고 제 이름을 밝히시면 안되요. 전 오래 살고 싶거든요." "암암...내가 늙어 죽을 때 까지 함께 살아야지." "스승님이 언제 돌아가실 줄 알고 그런 말씀 하시는 건데요?" "험험" 마법이라면 이력이 날 정도로 공부한 세실은 더 이상 샌들우드의 능청에 속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친손녀처럼 아끼는 분이시기에, 또한 아버지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정을 느꼈기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 다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었기에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거다. 깊은 신뢰와 사랑이 담긴 눈으로 말장난을 하는 사제지간을 구경하던 론은 정색을 하며 일어섰다. "그럼 가봐야겠습니다. 상회로 다시 갈거니?" 또 다시 말투가 바뀐 론을 보며 베시시 웃어준 세실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황태자님이 나으시거든 그때 찾아 뵐께요." "내가 사람을 보내마." "네." 배웅조차 하지 않는 두 사람들 남겨두고 밖으로 나온 론은 세실을 만난 후 처음으로 뺨에 뽀뽀를 받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볼을 긁적였다. 자신과 카일의 성급한 판단으로 세실과의 신뢰가 깨어진 느낌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론은 처음과는 달리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소리에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4년 간 쌓아온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을 거라 자신을 다독이면서... *************************************************************************************** 캬캬캬 보충분이 다 떨어졌습니다. No. C-2305도 이것도...켈켈켈 밤잠 안자고 써 둔 것이데 올리다 보니 미친듯이 다 올려버렸습니다. 죽겠네... 다른 작가님들은 꾸준히 하루에 한편씩 꼭꼭 올리시던데 한숨만 나오는 군요. 분면 7, 8회 올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벌써 15회라니... 호호....호 ㅠ ㅠ 음.. 내일은 캣츠 보러 갑니다. 늦을것 같아서 미리 올린거라 생각해주세요. 또 잠수 타면...화내실건가요 > < 어쨋든 열심히 노력해 보겠사와요.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황제를 만나다. 1. "씰, 사람이 찾아왔는데?" "응?" "같이 가자." 론이 세실에게 약을 받아간 후 닷새가 지났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세실이 약초밭에 쪼그리고 앉아 벌레를 잡고 있는데 수잔이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다짜고짜 아이의 손을 잡 고 저택 밖으로 나간 수잔은 경비병들 옆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문도 모른채 같이 고개를 기웃거리던 세실의 눈에 낯이 익은 사람이 보였다. "언니, 저 사람이 불렀어?" 세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수잔은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고 길 모퉁이에 기대고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박수를 쳤다. "맞아.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나한테 부탁하더라. 같이 갈까?" 막상 데리고 나오기는 했는데, 세실을 혼자보내기에는 내키지 않는지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수잔 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인 세실은 천천히 론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론은 맑고 깨끗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는 활짝 웃었다. 세실의 손을 덥썩 잡은 론은 여전히 문 앞에 서있는 수잔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시장쪽으 로 걸음을 옮겼다. "밥 안 먹었지? 밥 먹으러 가자." 환하게 웃고는 있지만 그 속에 담긴 긴장감을 알아챈 세실은 묵묵히 그의 손에 잡혀 커다란 식당 으로 따라갔다. 생전 처음 온 고급 식당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는 세실을 대신해 주문을 한 론은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괴고 소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똥말똥한 눈을 빛내며 론의 시선을 받아내는 세실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론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그 약 어떻게 구했는지 알려줄 수 있니?" "..........." "직접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는 말씀 드렸지만 아무래 도 네가 가봐야.." "싫어요." "세실!" 조금 음성을 높이는 론을 똑바로 바라보며 세실은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단어 책을 읽듯 말을 이었 다. "제가 궁에 들어가면 전 죽어요. 정말이예요. 아저씨가 더 잘 아시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지금 저는 제 자신조차 보호할 힘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지켜주마." 론의 확신에 찬 말에 회의적인 얼굴을 하던 세실은 애늙은이처럼 혀를 찼다. "아저씨는 황태자님이 어떻게 독에 당했는지 모르시잖아요." "독? 무슨 소리야? 병이라고 했다. 독이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실의 눈이 슬퍼보였다. "차라리...모르는 척 할 걸 그랬네요." "세실리아!" 풀네임을 부르며 화를 내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린 세실은 입을 닫고 식탁의 나무 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끄적였다. '따라가면 죽어. 이 사람이 너한테 도움을 많이 줬지만 다 포기하고서라도 만나지 않는게 좋아. 알잖아, 세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식탁위에 글을 써보던 세실은 문득 샌들우드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말 았다. "사람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 넌 너무 어려. 누군가가 지켜줘야 하지. 너처럼 나이에 비해 재능 이 뛰어난 아이는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크리스틴이란 아이가 널 괴롭히던 것을 생각해 봐라. 항상 네 능력은 절반 이상 감춰두고 드러내면 안 된다. 힘을 기를 때까지. 이 세상에서 믿을 것 은 자기 자신 뿐이야.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남을 믿어서는 안된다. 나조차도... 명심하거라." 황태자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하며 약을 맡기러 갔을 때 샌들우드는 침울한 얼굴로 세실의 손을 잡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너무 믿었어.'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거다. 두 사람, 카일과 론이 4년 동안 보여주었던 따뜻한 마음 하나 만으로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후회를 하게 된다. 함부로 약초를 재배하여 백작가에 의탁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후회했던가. 헌데 이번에는 눈 앞에 앉아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을 믿었다가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황태자조차 흔적도 남기지 않고 중독 시킬 만큼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서 그녀를 어떻게 보호하겠다 는 건가? 세실의 눈이 흔들리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포기하자.' 작은 소녀의 '모르는 척 할걸 그랬네요'란 말에 화를 내며 씩씩대던 론은 문득 아이의 얼굴이 점점 슬퍼보이자 문득 걱정이 들었다. 아이의 작은 얼굴 가득 담긴 슬픔과 실망감, 배신감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배신감.......!' 절대로 자신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마 하고 약속을 했다. 내심 심장 한 켠이 아련하게 조이는 느낌에 가슴에 손을 얹던 론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눈을 똑바 로 바라보는 세실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이제 아저씨와 카일 아저씨와 만나지 않겠어요. 제가 맡겨 두었던 돈은 필요 없어요. 그걸로 이번 거래는 끝내는 걸로 해요. 두 번 다시, 절 찾지 말아주세요. 전 잊을 거예요. 모두 다." 신뢰는 깨어졌다! 빠르게 할 말을 끝낸 세실은 음식을 가지고 오는 종업원을 피해 식당 밖으로 달려 나갔다. 눈앞이 흐리게만 보였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열심히 달리던 세실은 어느새 자신이 숲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승님......!" 세실의 울먹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와 약간 떨어진 곳에 밝은 빛이 덩어리를 이루더니 순식간 에 샌들우드를 토해내었다. 레이더라도 달고 있는지 제자의 작은 속삭임에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 를 텔리포트 해 날아온 샌들우드는 허리밖에 오지 않는 작은 아이를 안아들고 사라져버렸다. 아이의 뒤를 쫓아 숲으로 들어온 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서 있던 론은 이를 악물고 언젠가 세실이 안내해준 길을 따라 마법사가 있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근한 분위기의 오두막 앞에 선 론 은 한숨을 삼키며 문에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세실과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돌아가라.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다. 두 번 다시 이 아이를 찾지 마라. 이곳은 더 이상 너희들 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노한 음성에 움찔 했던 론은 어느새 자신이 레이븐 상회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더욱이 그의 옆에는 세실에게 붙여놓았던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해 하고 있었 다. "무슨 일인가?" 자신이 겪은 황당한 경험에 어리둥절해 하던 론은 뒤에서 들려오는 카일의 놀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잠시 망설이던 론은 천천히 세실이 건네 준 약으로 황태자가 깨어난 것과 황제폐하에게 불려갔던 일, 식당에서 있었던 일과 숲에서 보고 겪은 일에 대해 카일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카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다 세실을 안은 마법사가 시동어도 외치지 않고 사라졌다는 말에 참담한 표정으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잘못했군. 패를 잘못 뽑았어." "네?" "우리가 그 아이의 신뢰를 무너뜨린거다. 넌 분명히 그 아이에게 약을 준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 헌데 그걸 어겼어. 도리어 사지(死地)에 그 아이를 몰아넣으려고 한거야."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께서 직접 상을 내리겠다고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사지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까!"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지르는 자신의 오른팔을 보는 카일의 얼굴엔 측은한 표정이 가득했다. "넌 상인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상인에게는 이문을 남기는 것보다 신뢰를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 내 밑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하찮은 공명심에 상회의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아이를 호랑이 입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한거다! 그 아이 재능을 모르느냐? 그 약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그 아이가 만든 것이다. 연유야 알 수 없지만, 그 아이는 황태자의 병의 원인을 알고 있었어! 목숨을 걸고 약을 만들었고 목숨을 걸고 그것을 우리에게 준 것이다. 우리를 믿었 단 말이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던 카일은 곧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는 젊은이가 분명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부여설명을 덧붙였다. "황태자의 병이 단순한 병이라면 그토록 많은 의원과 마법사, 신관들을 불러들이지 않았을거다. 약초라면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 아이가 약을 만들어 두었었다. 그건 황태자의 병이 인위적이란 말과 같아. 그럼 황태자를 병들게 한 사람들은 누굴까? 분명 황궁에도 스스럼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고위 관리중 하나겠지. 황족일 수도 있다. 의심을 받지 않고 황태자를 병들게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분명 병을 고쳐준 사람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그 아이를 미끼로 해 서 범인을 잡자는 계략에 불과하다. 조금만 생각하면 12살짜리 아이도 알 수 있는 것을 넌 무시 해버린거야." 카일의 말에 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독!' 세실은 황태자가 독에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해.약.을 만들어두었던 거다. 자신을 믿었기에 약을 주었다. 아니, 그 아이는 약이 아니라 해.약.을 준다고 했었다. 잊고 있었던 말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론의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제 생각이 틀리다면 전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꺼예요. 잡화상 아저씨가 그랬듯." 아이가 말한 약초상이란 독약을 만드는 게 개입된 사람이 분명했다. 목숨을 걸고 신뢰를 보여준 아이를 카일의 말대로 사.지.로 몰아넣으려 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라는 것을 깨달은 론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의 병을 고쳐준 사람을 데리고 오게. 직접 보고 상을 내리고 싶네. 자네도 마찬가지야. 내게는 은인들이나 다름없으니 보상은 걱정하지 말고 약을 건네 준 사람을 데리고 와." 상회에서 어렵게 구한 귀한 약이라 진상한 것으로 단 오 일만에 황태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황제가 그를 직접 불렀다. 그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뒤로 물러섰던 카일을 대신해 황제폐하 를 알현한 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큰 상을 내리고 싶다는 대륙의 주인의 말에 감명을 받았다. 헌데 그 이면에는 자신들이 처음 가졌던 의구심도 함께였다는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약을 가지고 있다면 병들게 할 수도 있다는 간단한 이치. 세실이 처음 약을 언급했을 때 급히 황궁에 사람을 보내어 기사들을 데리고 왔던 것은 바로 세실 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4년이나 세실을 겪어본 그가 그러했는데 얼굴도 보지 못한 황제의 생각 은 어떠했을까? 만약 아이를 만나 황태자를 중독시킨 것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도 문제는 남아있었다. 바로 황태자를 병들게 한 배후 인물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음모를 무산시킨 아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황제가 치료약을 만든 이를 궁으로 불러들이려는 의도일 것이다. 가만히 두어도 먼저 존재를 드러낼 것이니 가만히 앉아 코를 푸는 격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책감에 가슴을 치는 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일은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한 번 잃은 신뢰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수십년간의 경험으로 배신으로 인해 생겨난 사람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마음을 병들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카일은 지금쯤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하고 있을 아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 많은 돈도 필요 없다고 했다.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했다. 잊는다고 했단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에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일어선 카일은 그동안 세실과 거래했던 장부를 꺼내 아이의 재산을 금으로 환산하여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멀리 떠나더라도, 그들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가 그간 모아둔 재산은 반드 시 돌려주어야 했다. 어딜 가도 이 정도 재산이면 큰 탈 없이 살 수 있을 터였다. 마법이 걸린 주머니에 황금과 보석을 집어넣는 카일을 본 론은 침을 삼켰다. 바짝 마른 입을 열기가 힘들었는지 혀를 내밀어 꺼칠해진 입술을 적신 론이 카일의 뒤로 다가갔다. "주인님."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묵묵히 자루를 채워넣던 카일의 귀에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의 기사들이....세실을 알고 있습니다." 쨍그랑~ 카일의 손이 힘을 잃고 쥐고 있던 보석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눈을 껌뻑이며 론을 바라보던 카일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어...어떻게....?" "세실이...약을 준다고 했던 날....궁에 들어가서 근위기사들을 불러왔었습니다. 그 마법사가 있는 곳까지 함께 갔었습니다." 퍽! 순간 카일의 주먹이 론의 얼굴에 직통으로 내리 꽂혔다. 벌게진 뺨을 만지작거리던 론은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문제를 일으켰으니 제가 들어가서 해결하겠습니다." "가라, 가서 그 약을 만든 사람은 죽었다고 이야기해라." ".....네." 론이 집무실을 나가자 잠시 문을 노려보던 카일은 보석과 황금, 동전들을 담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이븐 상회 어느 지점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신용증을 꺼내들고 마법 자루 를 둘러메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아이가 들어간 숲을 알고 있는 놈이 누구냐?" 카일의 호통에 조금전 카일과 함께 텔리포트 당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안내해라." 순간 두려운 듯 어깨를 움츠리던 사내는 카일의 살벌한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샌들우드의 오두막이 있는 숲의 입구. 이상한 경험을 한 것 때문인지 결코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내를 내버려두고 그가 일러준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카일은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소리에 자루를 팽겨 치고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허락되지 않는다 하였다! 어딜 기어들어보는 게야! 썩 꺼져라!" "마법사님! 이것을...제가 가지고 온 것을 세실에게 전해주십시오. 그 아이가 이제껏 모아두었던 재산입니다. 꼭 전해주십....헉!" 땅에 엎드려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애원을 하던 카일은 자신이 어느새 낯선 오두막에 와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따뜻한 불이 날름거리는 화롯불 앞에 놓인 흔들의자에 땅에 닿을 만큼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몸을 웅크리고 잠이든 아이를 안고 있었다. "넌 누구냐?" 울다 지쳐 잠이 든 아이가 깰세라 조용히 말을 하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돌린 카일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세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 레이븐이라고 합니다. 미흡하나마 레이븐 상회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미흡한 정도로 병신 같은 놈이지. 너 따위가 장사를 한단 말이지...약속하나 못 지키는 놈.." 샌들우드의 잔인한 말에 어두운 얼굴을 하던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앉아라." 죄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카일이 마음에 든 듯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의자를 권한 샌들우드는 세실에게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아이를 살며시 흔들며 조용히 속삭였다. "제자야, 이 늙은이 다리가 아프다. 웬만하면 눈 좀 뜨지 그러냐?" 따뜻한 말투와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을 하는 노인에게 놀란 시선을 던지던 카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르르 눈을 뜨는 세실을 보고 자리에게 벌떡 일어났다. "우웅...스승님. 저는 안아달라는 말 한 적이 없어요. 아함~" 옷자락을 꼭 쥐고 있는 폼과는 상반되는 말을 하며 하품을 하던 세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제자의 몸이 파르르 떨리자 말없이 꼭 안아준 샌들 우드는 눈치없이 끼어드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거기 앉아!" "넵!" 살기 등등한 명령에 냉큼 돌아서 자리에 앉은 카일은 세실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보고 안심을 한 것인지 샌들우드의 로브를 슬그머니 놓아준 세실은 퉁퉁 부은 얼굴로 카일 에게 물었다. "다시는 보지 않는다고 론 아저씨게 이야기 했는데, 왜 오셨어요?" 조용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세실의 말에 한숨을 삼킨 카일은 바닥에 떨어져있던 자루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론이 실수를 했더구나. 미안하다.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이것은 가지고 가야지. 면목이 없다만 또 한가지 알려주어야 할 것이 있어 왔다." ".............." "궁에서....꿀꺽....론이 데리고 왔던 사람들을 보았지? 그 사람들이 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구나. 이곳도 알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차마 빨리 도망가라는 말을 못하고 미적거리는 카일에게서 시선을 돌린 세실은 자신을 토닥거리는 샌들우드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인 샌들우드는 결정을 내렸다. 귀찮긴 하지만 이 사랑스러운 제자를 도망자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보는 마법사를 피해 바닥에 시선을 내렸던 카일은 귓속을 파고드는 말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래서....네가 감히...내 제자에게 도망가라고 말하는 것이냐? 누구 때문에 이리 되었는지 뻔히 알면서 그 뻔뻔스런 낯짝으로 이 아이를 도망자로 만드는 것이냐? 죽고 싶지? 그치? 죽여주랴? 그냥 이 자리에서 죽을래?" 나긋 나긋 말장난하듯 속삭이는 샌들우드의 말속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담겨있었다. 정말 죽여줄 생각인거다. 말 속에 담긴 진심에 몸을 부르르 떨던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론이...문제를 일으킨 아이가 황제폐하를 만나고 있을 겁니다. 약을 만든 사람은 죽었다고 전할 겁니다. 레이븐의 모든 것을 걸고 세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마찬가지야. 브랜이 어떤 놈인데 상인 놈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가겠나? 쯧쯧 어리석은 것들. 그 론인가 놈인가 하는 놈은 죽을께다." 브래들리 챗필드 개넌(Bradly Chatfield Gannon) 바이오니어 국의 32대 황제의 이름이다. 이를 서슴없이, 그것도 애칭을 부르며 혀를 차는 노인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카일은 론이 죽을 거라 는 말에 핏기가신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다 그 아이의 공명심 때문에 일어난 일, 후회는 없을 겁니다. 저도 그렇구요. 단지... 세실에게 못 할 짓을 한 것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저 고객에 불과한 한 아이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다 말을 하는 것이 어불성설이지만 카일의 말에 담긴 진실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세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샌들우드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왜?" 샌들우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염을 당겨서가 아니다. 키가 작은 제자는 항상 그의 주의를 기울일 때 수염을 당겼고 그것이 귀여워 죽는 노인이었으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갈께요, 스승님." 카일의 얼굴도 샌들우드 만큼이나 일그러졌다. 깊은 혜지(慧智)를 가진 노마법사는 아이의 눈에서 이미 그러한 결심을 보았고, 그래서 화를 낸 것이었다. 그 만큼이나 열받은 사람은 또 있었다. "장난하지 마라! 너는 내가 지킬 것이다. 레이븐 상회가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해도 내가 지킨 다! 어린 아이가 나설 일이 아니야!" 씩씩대며 소리를 버럭 지르는 카일이 마음에 든 샌들우드는 그것 보라는 표정으로 제자를 노려보았다. "봐라, 애들은 가라고 하지 않느냐? 어른들 말씀은 잘 들어야지 착한 아이다. 험험" "스승님, 제가 가지 않으면 론 아저씨가 죽는다면서요?" "네가 가면 네가 죽는다." "할 수 없죠, 뭐."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느냐? 쥐방울만한게 어디서 까불어! 좋은 말 할때 그냥 눈 딱 감고 있어라. 응?" 스승의 엄포에도 세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약을 만들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각오하고 있던 일인데요, 뭐." "됐다니까! 내가 가서 해결하면 된다. 뼈가 삐그덕 거리긴 하지만 금방 갔다오면 될 일이야." 아이의 고집에 그제야 속내를 털어놓았던 샌들우드는 제자의 눈속에 번뜩이는 존경심...이 아닌 비난의 눈초리에 찔금했다. "스승님은 돌아가신 분이예요. 더군다나 이제까지 살아있었다는 걸 알면 폐하가 가만 계시겠어 요? 도망다니는 건 제가 아니라 스승님이 될 거예요. 게.다.가. 전 스승님의 제.자.이니 같이 가야겠지요? 이래도 도망, 저래도 도망. 그나마 제가 가는게 한결 편하죠. 스승님은 그냥 가만 히 앉아 계시는게 돕는거예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당돌하게 이야기 하는 세실에게 두 남자가 얼이 빠져 있을 동안 세실은 바쁘 게 움직이며 오두막을 휘저어 놓았다. 자신이 없을 동안 마실 찻잎을 준비해두고 식재료며 마른 장작이며 확인하고 또 확인한 세실은 충격받아 거품을 물고 있는 스승의 손을 잡았다. 참으로 따뜻한 손이었다. "제가 가고 나면 백작가에 있는 마굿간 뒤에 세워진 오두막으로 가셔서 거기 있는 약재들을 몽땅 가지고 와 주세요. 텃밭에는 찻잎만 있으니, 심심하시면 가셔서 벌레도 좀 잡아주시고 물도 뿌려 주시고 찻잎이 다 떨어지면 뽑아다 바로 끓여드시구요."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처럼 몇 가지 당부를 한 세실은 카일이 가지고 온 자루에 담겨 있던 황금과 보석을 몇 개 집어 들었다. 그 정도면 웬만한 성 하나는 거뜬히 사고도 남을 엄청난 값어치가 있었다. 고집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카일에게 그것을 쥐어준 세실은 조용히 입을 열었 다. "백작가에 수잔이란 하녀와 마리 시녀장님이 계세요. 나중에...제가 궁에 들어가고 나면 이것을 나누어 주세요. 그리고 세바스티앙 기사단장님께는 아무말도 하지 말아달라고 전해주시구요." 묵직한 자루를 샌들우드의 무릎위에 내려놓은 세실은 방긋 웃었다. "행여나 궁에 들어와 황제폐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을께요. 이거 가지고 예쁜 집도 짓고 기다리세요. 가서 제가 상금 많이 받아올테니. 아셨죠?" 샌들우드는 불과 십 여년 전까지만 해도 바이오니어의 궁중 마법사였다. 은퇴를 하려고 발버둥치던 그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현 황제인 브래들리의 눈을 속이기 위해 과감히 자.살.을 하고 궁을 빠져나왔다. 그의 시체(마법으로 만든 인형)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 렸던 황제는 위대한 궁중마법사를 그리며 100일 동안 단식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황제의 스승이요 그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바이오니어를 지키는 기둥이었던 샌들우드가 번듯이 살아 궁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녕 신만이 아실 일이었다. 이를 익히 아는 세실은 샌들우드의 고집을 미리 꺾어놓고 카일의 손을 잡아 오두막을 벗어났다. "날씨가 참 좋네요." 높고 푸른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세실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울그락 푸르락하는 얼굴로 마법 지팡이를 들고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샌들우드가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것으로 이미 사라진 엘프에게 선물받은 것이라 자랑하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것을 흔들며 발악을 할 듯 보이는 스승에게 혀를 내밀어준 세실은 후다닥 달려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고집에 혀를 차던 카일은 뒤에서 밀려드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몸을 움츠리며 열심히 발을 놀리다 오두막이 사라질때쯤을 기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가 찾아가지 않았다면 세실이 궁으로 들어가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 테니, 황제를 이름으로 부를 만큼 대단한 마법사의 손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생각했다. 숲을 빠져나오자 그 앞에 턱을 괴고 주저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세실이 보였다. "너..그냥 돌아가라." "네?" "스승님한테 가. 내가 궁으로 가마. 직접 황제폐하를 뵙고.." "저 혼자 갈거예요. 한 사람만 붙여주세요. 아저씨가 직접 가시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 요." 안되면 혼자라도 갈 기세인 세실에게 두 손을 들고만 카일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직원을 불렀다. 론과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내. 마치 쌍둥이처럼 카일과 꼭 닮은 남자를 부른 카일은 세실을 번쩍 안아들고 꼭 안아주었다. "앤드류가 널 호위해 줄거다. 날 대신해 널 지켜줄거야. 꼭 돌아와라." 마치 날렵한 표범처럼 조용히 다가와 카일의 옆에 서 있던 앤드류라는 사내는 아이를 안아들고 준비되어 있던 마차에 올랐다.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잘 부탁하마." 거울에 비쳐지듯 꼭 닮은 얼굴의 동생에게 누차 당부를 하던 카일은 세실의 약지에 걸린 약속의 증표를 만지작거리다 등을 돌렸다. 축 늘어진 어깨로 천천히 사라지는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앤드류는 자신의 얼굴을 콕콕 찌르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가 이 반지를 주신 분이지요?" "........!" 놀란 눈으로 세실을 바라보던 앤드류의 얼굴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첫날 상회에 갔던 레니와 세실을 만난 것은 카일이 아니라 앤드류 레이븐이었다. 쌍둥이 형인 카일이 없을 때면 항상 대역을 해왔던 앤드류는 단번에 자신을 알아본 아이의 눈썰미에 혀를 찼다. "만나서 반가워요, 앤드류 아저씨." 생긋 웃는 아이가 귀여워 마주보며 웃어주던 앤드류는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일이다." "뭐가요?" "론은 제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는 것뿐이야. 죽지도 않을 거다. 지금쯤 제 집으로 돌아갔겠 지. 헌데 네가 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집으로 돌아가다니, 무슨 말인가? 앤드류의 의미심장한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세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가는 거예요. 차라리 론 아저씨가 책임을 질 수 있었다면 전 가지 않았을 거예요." "뭐?" "그 분의 본명이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귀족이겠죠? 황궁의 기사단을 움직일 만큼 위치도 높을 테죠. 아무튼 론 아저씨를 걱정해서 가는 것이 아니예요." 이미 론의 신분을 의심하고 알고 있었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영특한 아이에게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진 앤드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왜 가는거냐? 론이 나서서 네 일을 덮어둔다고 했으니 그냥 넘어갈텐데?" 세실의 작은 머리가 좌우로 흔들었다. "제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가만히 있지 않을 테지요." 아이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앤드류는 흠칫 하며 세실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실을 갈구하는 사내의 눈빛에 어깨를 으쓱한 세실은 속내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생각이 깊고 지혜로운 앤드류는 아이의 내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론은 집으로 돌아갔고, 배후 인물들은 드러나지 않았다. 황태자를 노린 것을 황제가 그냥 넘길 리는 없고...' "아!" 앤드류의 탄성에 얼굴을 붉힌 세실은 얼른 창문을 내다 보았다. "너.......!" 뭐라 입을 뻐끔거리던 앤드류는 애써 얼굴을 외면하는 아이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 었다.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이 아이였나?' 신뢰는 깨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론에 대한 신뢰는 깨어졌지만 카일과 앤드류가 있는 레이븐 상회와 세실 간에 쌓아두었던 신뢰는 깨지지 않았다. 한편 제자의 부탁으로 백작가에 다녀온 샌들우드는 오두막에 가득 쌓인 약초들 사이를 거닐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젠장, 그 놈이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말만 안했어도......끄응! 이 일을 어찌하누...제길, 내가 그놈만 안 데리고 왔어도....젠장! 젠장! 빌어먹을!" . . . 세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그녀를 지켜주려 했던 카일을 위해 사지(死地)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 사랑에 빠졌습니다. '캣츠' 말입니다. 어제 11시 30분 쯤 집에 돌아와 글을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 가슴 울리던 음악과 춤들이 절 놓아주질 않더군요. 어쩔 수 없이 다시 CD를 틀어놓고 멍하니 뮤지컬을 다시 보았습니다. 눈물나게 행복합니다. 특히.... 럼 텀 터거가 제 앞에 와서 가슴을 흔들때는....! 으윽! 심장마비 걸릴 뻔 했습니다. ㅜ ㅜ 지금도 손 한 번 못 잡아본 제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물을 흘리고 있지요...흑흑흑 아앙~ 그리고 Filen님아 분량이 너무 많나요? 조금 줄일까요? 사실은 분량이 늘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다 시피 하나의 소제목에 올라오는 편수가 딱 3개 뿐일겁니다. 혼자서 약속을 했지요. 하나의 소제목에 3편으로 나누어 글을 올리자고. 그랬더니만... 이렇게 분량이 많아지더구요. 음...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5편으로 늘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4편이나...그 정도는 되겠지요? 읽기 힘드시면 말씀해주세요. 좀더 나누어 올릴께요. ^^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리플 쩜 달아주세요오~~~ 귀찮으시겠지만...짧은 말이라도..훌쩍..오타 지적도 괜찮고 '잼없다!' 한마디도 괜찮고 아니 이건 왜 재미 없는지도 밝혀주셔야..콜록...잘 봤다! 한마디도 괜찮다는... 더불어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격려해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구요. 그래도 욕심이 많은 유키..훌쩍 한 마디만 해주고 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언제나 조아라를 확인해 본답니다. ㅜ ㅜ 또 사설이 길어기는 군요. 아무쪼록 행복하시고 다음편에 뵙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황제를 만나다. 2. "오! 이 아이 인가?" 가치를 따질 수도 없는 보석들이 수두룩하게 박혀있는 황제의 거처로 불려간 세실은 황궁이라는 곳이 보여주는 그 호화로움에 놀라고, 황제의 맑은 눈빛에 두 번 놀랐다. 금발이 섞인 청록색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왕관을 쓰고 있는 황제는 열다섯 명의 후계자를 둔 사람 같이 않게 겨우 20대 중반 정도로 젊어보였다. 내심 놀란 것은 세실뿐 만이 아니었다. 치료약을 만든 이가 황태자를 해한 인물과 관련이 있을 거라던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가 버린 후 였다. 치료제를 만들었다는 인물이 이토록 작은 소녀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황제, 브래 들리 머리를 조아리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을 잡고 몸을 일 으켜 세웠다. 고작 열 두살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의 손은 검으로 다져진 자신의 손보다 더욱 거칠고 딱딱했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에 아이의 얼굴을 조목조목 살펴보던 황제는 반짝 눈을 빛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과 아이를 데리고 왔던 앤드류가 밖으로 나가자 황제는 조그마한 아이의 손 을 잡고 내실로 들어갔다. 은은한 향이 방안 가득 퍼져있는 내실에 들어선 세실은 자신이 직접 만든 향초가 타고 있음을 확인하고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향초에서 시선을 돌린 세실은 화려한 침실에 누워 잠들어 있는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서 살펴보겠느냐?" 황제의 느긋한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세실은 조용히 침대로 다가갔다. 핏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미약하나마 숨을 내쉬고 있는 이는 분명 이미 치료되어 있었어야 할 황태자가 분명했다.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의식이 없는 것이 분명 론이란 사내가 거짓 을 말한 것이 분명했다. 세실은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작은 손을 내밀어 황태자의 차가운 손을 잡은 세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회복. 몸을 더럽히고 의식을 흐리고 있는 독을 태워버리기를,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카운터엑터포이즌(counteract a poison)*리커버리(recovery)' 얼마 전에 깨닫게 된 마법이라는 것. 세실의 경우에는 마나의 유동 없이도 마법의 실현이 가능했다. 아니 샌들우드의 말로는 주위의 마나를 끌어와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말로 수잔와 마리의 상처가 나은 것을 알게 된 것도 샌들우드 덕이었다. 신기한 경험이라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실은 심각한 표정으로 '너 마법 할 수 있지, 그치?!' 라며 이실직고 하라고 닦달하는 스승의 등살에 못 이겨 결국 그의 눈앞에서 '파이어볼'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눈물을 흘리며 '오 신이시여!' 하고 외치던 샌들우드는 드래곤이나 가능하다는 언령 마법을 단번에 사용할 수 있는 제자을 질투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나중에 드래곤이라도 만나면 소개나 시켜줘라.'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샌들우드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아무튼 그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세실은 아무도 모르게 마법 공부를 계속했다. 아니,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마법을 실현시키는 법을 연습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절대로 마법 능력을 드러내지 말라는 스승의 신신당부에 숨어서 공부를 하던 세실은 결국 마음속 으로 일으킨 의지 역시 마법으로 실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그녀가 실현하는 마법은 의지로 비롯된 것. 말을 하건 하지 않건 의지를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좋아라 방방 뛰던 세실은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샌들우드가 머리를 싸매게 만들었다. "주문은 왜 외워야 하나요?" 그리 멋지지도 않은 긴 말로 이미지를 만들고 시동어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세실이 의문을 제시 하자 삼일 밤낮을 고심하던 샌들우드는 벌게진 눈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그러면 너는 보지도 않은 것을 그릴 수 있겠냐?" 중요한 것은 의지. 마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지도 필요하나 우선 이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라이트(light)'라는 마법을 실현하려면 '빛'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남들이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여 마법을 실현할 때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며 마법을 일으켜야하는 세실은 남다른 주문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황태자의 피 속을 돌고 있는 탁한 물질을 몰아내는 상상을 하며 이를 말로 그려내어야 만 마법으로 구현되는 것처럼.... 하지만 남들이 들으면 배 아파 넘어갈 능력을 가진 세실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결국 남다르게 독.특.한. 주.문.을 외워야 한다는 사실에 쪽팔려 하며 절.대.로. 주문을 외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니...이로써 사상최초 언령마법을 구사하는 인간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도 시동어 조차 말하지 않고! (물론 속으로는 중얼거리지만 그걸 들을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한편 아들의 손을 잡은 아이의 조그마한 손에서 시작된 새하얀 빛이 황태자의 온몸으로 퍼져나가 는 것을 보게 된 황제는 옷깃을 물고 신음성을 참았다. '참아야 하느니라...' 혹여나 방해가 될까 숨을 죽이던 황제는 어느새 화색이 도는 얼굴로 편안한 숨소리를 내쉬는 황태자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설마 마법사였나? 아니 주문을 안 외우던데..그럼 신성마법인가? 저 아이가 신성력을....?!'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녀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널...의심하지 않는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세실의 얼굴에서 핏기를 가시게 만들었다. 새하얗게 바랜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던 세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한 계단을 올라간 것이다. 그녀에게 쏟아졌던 의심은 이 한 마디로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아이의 손을 놓치지 않고 있던 황제는 아이의 허름한 옷과 거친 피부를 보았다. 출신도 알 수 없는 이아이가 약을 만들었다니...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신성력(!) 또한 그를 더욱 더 의아하게 만들었다. "헌데...그 약은 어떻게 만든 것이냐?" ".......폐하." "말해 보아라." 입술을 잘근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세실은 사실을 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이리 될 것임을 알고 오지 않았던가. 레니의 일을 쏙 빼놓고 자신이 잡화점 주인에게 돈을 받고 약초의 이름을 읽어 주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 원인모를 불이나 주인이 죽었다는 것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약초를 구하여 해독약 을 만들어 보았다는 것 까지. 어느 누구도 믿어주질 않을 이야기를 늘어놓은 세실은 말없이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를 힐끗 바라 본 세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그녀의 의도였다. 상식적으로...이제 겨우 12살 난 아이가 약초를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약초의 이름을 알게 된 경위는 납득하나 그것을 알고 해약을 만들었다는 것은 개도 웃을 일이 었다. 그래서 상.식.적.인. 황제는 작은 소녀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을 고한다고 생각 했다. 약을 만든 사람을 이용해 배후 인물을 캐내려던 황제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자신의 결심 을 꺾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고 약초상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것에 관 해 조사를 해도 될 일이었다. 아이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까지 계획을 이행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 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참으로....착한 아이구나. 듣기로는 황금이 아니라 땅을 원했다지?" 누군가를 대신해 거짓을 하는 용기를 칭찬해준 황제는 세실의 뼈만 남은 어깨를 토닥여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쪼르르 달려가는 세실의 입에 달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지 못한 채... "헌데 말이다. 그 곳은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인데 어찌 할까......." 앞서 걸어가는 황제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었던 세실은 반짝이는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음....그런데 주인은 누구입니까?" "오, 그는 이 나라의 재상이란다. 험험. 오래전에 큰 공을 세우고 상을 내린다 했는데 기어코 고개를 졌더니 결국에는 그렇게 쓸모없는 땅이면 족하다고 하더구나. 험험"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하던 황제가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뒤로 획 돌아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너는 왜 그런 쓸모없는 땅을 원하느냐?" 의구심이 들었다. 재상이 '죽음의 숲'을 달라했을 때는 괜히 상을 받기 싫은 터라 그런 불모지를 달라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불모지를 원하는 사람이 나온 것이다. 이상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실은 그녀의 턱을 잡고 위로 들어올리는 커다란 손에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눈을 마주보고야 말았다. 맑은 수정 같았던 황제의 눈이 반짝이며 진실을 들려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생전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온기에 눈을 살며시 감고 얼굴을 붉히던 세실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주 오래전에....저에게 약초에 대해 가르쳐주신 분이 계세요.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분께서 말씀하시기를...아무도 살지 않는 '죽음의 숲'에는 풀 대신 독초가, 벌레 대신 독충이 우글 거리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 깊은 곳에 위대한 존재의 흔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기회가 된다면 꼭 그곳에 가보라고...약초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죽음의 숲은 그냥 불모지가 아닌 희망의 대지라 말씀하셨습니다." "..........." 열두 살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일목요연하게 말을 하는 세실의 얼굴을 주시하던 황제는 자신의 손으로 받치고 있는 아이의 턱을 놓아주지 않았다. 덕분에 발갛게 달아오르던 세실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만큼 붉어졌고 호흡도 점차 가빠졌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의 턱을 잡고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는 그의 등 뒤에서 들리는 호통소리 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놈아! 지금 누구를 희롱하는 것이냐! 얼른 그 더러운 손을 떼지 못 할까아~~~~!" 황제의 손길에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손길을 느껴보던 세실은 낯익은 목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이 나라의 위대한 주인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스승을 보며 기겁을 했다. 뻐억~! "꾸엑!" 200살이 넘은 노인답지 않은 힘으로 황제를 넘어뜨린 샌들우드는 경악하는 제자를 낚아채어 품에 꼭 끌어안고 세실의 몸을 살펴보았다. "어디보자. 저놈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더냐? 괜찮으냐? 응? 대답 좀 해보거라. 내 저놈을......!" 얼이 빠진 제자의 반응을 오.해.한 샌들우드가 부르르 떨며 마법 지팡이을 들어올려 꽝 소리나게 바닥을 내리쳤다. 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난 황제는 세실을 안고 서 있는 노인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가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두 팔을 벌리고 다다닷 뛰어왔다. "스승니임~~~~~!!" "징그럽다 이놈아!" 휘익 빡! 털썩! 세계수로 만든 지팡이는 드워프도 인정하는 강도를 자랑하는 만큼 그것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황제 는 단번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헉!" 사지를 대(大)로 쫙 뻗고 바닥에 누워 경기를 일으키는 황제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키던 세실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스승의 손길에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두 팔로 목을 감아오는 아이의 조그마한 몸을 감싸주며 황제가 앉는 의자로 다가간 샌들우드는 예의 오두막에서 그랬던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제자를 다독여주었다. "감사해요." 한 마디면 족했다. 환하게 웃는 제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왔던 샌들우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직도 의식을 못 찾고 있는 황제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끄으응......" 신음성을 터뜨리며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황제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황제는 조금 전과는 달리 엄숙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한 대 아니 두 대 맞고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황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내팽겨치고 스승에 대한 예의를 표한 황제는 천천히 샌들우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에게 잠시 질투심어린 눈을 보냈지만 이내 얼굴을 펴고 다시 돌아온 그의 스승에게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온 것이 반가우냐?" "네!" "그래? 험험." "돌아가시지 않은 것 알고 있었습니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샌들우드에게 멋쩍은 얼굴로 웃던 황제는 슬며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스승님이 만드신 인형은 100일째 되던 날 나무로 돌아갔거든요." "..........징한 놈" 입술을 삐죽이고 있으나 그 속에 담긴 감동은 숨길 수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라면 100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그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제자에게 감동을 먹고 일시간 할 말을 잃었던 샌들우드는 자신의 턱밑에서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쳐다보다 잠시 잊어먹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스승의 얼굴 표정이 돌변하자 핏기 가신 얼굴로 뒷걸음질치던 황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홀*드" 라는 주문 때문이었다. 음침한 얼굴로 옛제자를 노려보던 샌들우드는 어느새 인자한 얼굴로 세실을 돌아보며 아이의 머리 를 쓰다듬어주었다. "제자야, 자고로 여자라 함은 늑.대.들을 조심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네?" "저기 서 있는 저 겉만 번드르르한 놈은 말이다, 이 스승이 20년이나 키워봐서 아는데 치마만 두르면 그저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놈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해라. 나이 삼십에 벌써 자식 이 열다섯이야. 밥 먹고 그 짓만 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록이 나올 턱이 있나? 쯧쯧쯧 그러니 저놈이 네 전방 100m안으로 접근해오면 지금처럼 그 자리에 묶어놓고 멀리 도망가야 한다. 알았지?" 도대체가 열두 살짜리 아이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귀를 기울이던 황제는 못내 억울하다 는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저는 서른 여덟입니다, 스승님. 그리고 제가 뭐 볼 것 있다고 그런 코흘리개에게 침을 흘린단 말입니까? 제 자식만한 나이구만..." "땍! 저것 봐라. 저게 저놈 본심인게야. 뭐? 흥, 역대에 다시없을 성군이요 근엄의 표상이라구? 네가 근엄이면 난 시체다. 이놈아! 뺀질거리는 얼굴 하나 믿고 홀린 여자가 몇 명이냐? 듣기로 는 이번에 또 딸을 낳았다며? 네 열 번째 후궁이 나이가 얼마라고?" 방년 18세. 브래들리 황제가 들인 10번째 후궁의 나이는 열여덟이고 황태자와 3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 둘 곳을 찾던 황제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귀여운 아이 를 보며 찔끔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정말로! 하지만 마법으로 몸이 묶여 입만 살았으니 그 억울함을 어찌 풀까. 울먹이는 음성으로 세실의 턱을 만진 죄를 백배사죄하고 몸을 풀려난 황제는 그가 다스리는 백성 중 한 사람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였다는 것에 정말 부끄러워했다.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애써 근.엄.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던 황제는 샌들우드의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베시시 웃었다. "귀여운 놈. 나이는 헛 먹었구나...쯧" 한 마디면 족했다. 뒤에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단 한마디로 황제를 꼬리 흔드는 강아지로 만든 샌들우드는 자신이 들고 온 주머니를 하나 던져 주고 일어섰다. 물론 세실을 안은 채. "선물이다. 그건 이 아이가 만든 최상품의 찻잎이다. 요즘 네가 차에 빠져 지낸다는 소문은 들었 다. 나만 마시라고 내 제자가 만들어 준건데 다시 만난 기념으로 주는 거다. 괜시리 나 찾는다 고 귀찮게 굴지 말고, 혹시나 연락할 일 있으면 레이븐 상회에 카일인가 뭔가 하는 아이를 찾 거라. 그리고 재상인지 하는 놈 주시하는 게 좋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지 말고. 이만 가마."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주루룩 흘리고는 사라진 스승이 서 있던 자리를 주시하던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그가 남기고간 주머니를 주워들었다. "........!" 자신이 즐겨 마시는 차와 비슷한 냄새는 나지만 보다 상큼하고 훨씬 깊이가 있었다. 배너 백작이 진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세실이란 아이가 만들었다는 샌들우드의 말을 떠올 리던 황제는 황급히 사람을 불러들였다. 이제나 저제나 문밖에서 기다리던 앤드류는 세실이 먼저 돌아갔다는 말과 함께 주어진 10관의 황금을 실은 마차를 타고 상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다른 기사들은 급히 찻잎을 제조한 이를 찾아오라는 명을 받고 돌아갔다. 혼자 남아 황태자의 옆에 앉아 아이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는 은밀히 보좌관을 불러 오랫 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 오늘은...약간의 실험을 해 볼까 합니다. 어제 제가 남긴 글을 보시고 정말 많은 분들이 리플을 달아주셨지요? 행복해서... 헌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하지... 제가 만약 지금! 당장! 몇편을 주루룩 올리면? 과연 리플을 달아주시는 분들이 계실까? 하는 의문이 생기더군요. 해서... 조금 더 올려볼께요 ^^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황제를 만나다. 3. "도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황태자가 의식을 되찾았다?! 말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꽝!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려친 중년의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앞에 앉아 있던 몇몇 사내들은 헛기침을 터뜨리며 못 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그들의 시선이 집중 된 곳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늙은이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설마 해독제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해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분명 해독할 수 없는 독이라 하였어!" "아니 그것이....그것이..." "바른 데로 말하지 않겠느냐?! 죽고 싶은 것이냐!" 노한 음성에 바닥에 머리를 박던 초로의 노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재빠르게 굴러가는 눈이 그가 얼마나 잔머리를 굴리는데 이력이 난 위인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참을 머리박고 고심하던 늙은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두 손을 모았다. 오래전 그의 계략에 빠져 죽었던 노인이 남긴 비전을 떠올리던 노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옵고....그것은 분명 해독제가 없는 독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 그 독약의 비법을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저 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독초로 만든 것도 아니고 하찮은 병에나 쓰이지만 워낙 희귀해 아는 이도 별로 없는 약초들을 섞어 독성을 일으킨 것이니 해약이라고는 있을 수가......" "그런데 황태자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어제만 해도 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황태자가 오늘은 눈을 떴단 말이다! 어찌 해약이 없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 "그것이..뛰어난 마법사가 있거나 신관이 있으면...." "뭐라?"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독을 정화하는 마법을 썼거나 했다면....일시간 정신을 차렸을 수도 있습니다." 늙은 생쥐같이 쉴새없이 눈을 굴리는 늙은이를 바라보던 시선들이 번쩍 빛났다. "일시간?" "네, 그렇습죠." "자세히! 자세히 말해 보거라!" 이내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두 손을 비비던 늙은이는 실날같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둘러싸며 앉아 있는 삼인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 약초들은 말입지요, 골수로 파고듭니다. 다시 말해서 독성이 핏속에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골수로 파고들어 결코 해독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해서 서서히... 천천히 조금씩 먹인 것이지요. 절대로 없애지 못하도록! 골수와 몸 깊숙한 곳까지 축적이 된 독은 서서히 독성을 일으킵니다. 지금이야 일시간 해독을 한 것으로 보여도 골수까지 파고든 독성이 있으니 지금까 지 해왔던 것처럼 그렇게 계속 중독시킨다면...." "꿀꺽!" "이번처럼 서서히 병드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갑자기! 어느 순간......." "오호....!" 주름지고 비쩍 마른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노인을 보며 탄성을 내지르던 사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럼 지금처럼 계속 조금씩 약을 타면 된다는 건가?" "네. 어르신." "험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험험..." "저..어르신...이제...." "아 알았네. 보수는 약속대로 치러주지. 가보게나." "감사합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노인은 누가 붙잡을 새라 겁이 나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이 험한 장한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생각에 잠겨있던 사내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허면 저 노인의 말 대로 할 것이오?" "험....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저희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위험하지나 않을지..." "설마 이미 병을 털고 일어난 황태자가 실은 다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황제가 알기라도 하겠 습니까? 지금처럼만 한다면 다음은......" ".........!"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미소를 짓던 사내들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20대 중반 의 남자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조금 전에 황제 폐하를 직접 알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 "네." "무슨 일로?" "그것은 알 수 없고, 한 사람은 레이븐 상회의 주인으로 밝혀졌는데 같이 온 소녀는 나오지 않 았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내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레이븐 상회라고? 흠...무슨 일인가....소녀는 또 뭐야?" "그것까지는...두 사람이 들어갔는데 한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소녀가?" "네." "..........됐네. 나가봐. 뭐 유흥이라도 즐기신 게지. 쩝. 아들이 누워있다가 일어났다고 허참..."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번에 애너벨 후궁이 딸을 낳았다지요?" "허허...부럽다고 해야할지...원" "뭐 얼마 안 남았으니 마음껏 즐기라고 하지요. 핫핫핫" 거리낌없이 황제에 대한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사내들은 보고를 하러온 사내가 미적거리며 나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레이븐 상회의 주인과 함께 왔던 소녀가 겨우 열 두 살이며 그 아이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배너 백작가로 사람을 보냈다는 것, 그리고 알현이 있은 후에 보좌관이 황제와 면담을 했다는 것을 보고하지 못한 사내는 '뭐 그것쯤이야'하며 신경을 꺼버렸다. ******************************************** "아, 맞다!" "왜 그러느냐?" "스승님, 중요한 걸 말씀 못 드렸어요." "뭘?" "황태자님은 완치가 되신 게 아니라는 거요. 매일 약을 드셔야하는데..." "놔둬라. 나중에 카일인가 하는 놈한테 일러 언질을 넣으라 하면 된다. 더 이상 신경쓰지 마라." "........" 그래도 걱정스러운지 눈을 떼록 떼록 굴리는 제자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낯선 사내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곤 요즘 따라 이곳을 시끄럽게 하는 날.파.리.들 덕분에 나날이 신경질이 늘어간다 생각을 했다. '이사나 가버릴까...'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제자를 두고 어딜 가냔 생각에 이내 고개를 저은 샌들우드였다. 영악하긴 하나 심성이 너무 곱고 아직은 어린 아이였다. 자신이 보호하지 않으면 하루 살기도 힘들 것 같은 겁대가리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세실을 꼭 끌어안던 샌들우드는 제자의 이름을 부르며 종이를 내미는 남자를 보며 인상을 폈다. "마님이 보내신거다. 빨리 읽어보고 같이 가자. 백작님이 당장 너를 찾아오라고 하셨다." 여전히 스승의 품에 안겨 집사가 건네주는 편지를 읽은 세실은 얼른 샌들우드의 무릎에서 뛰어내 렸다. "스승님 지금 가봐야겠어요. 비상이네요." 멋쩍은 웃음으로 뭔가를 숨기는 제자를 유심히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보내주마. 행여나 또 쓸데없는 데 끼어들지 말고. 약초도 같이 보내줄테니 그놈한테 좀 가지고 가거라." 단번에 상황을 눈치 챈 샌들우드는 죄송스러운 표정을 짓는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주문을 외웠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바보같은 놈 때문이었다. 눈치도 지지리도 없지,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집사는 요란한 외침을 들으며 내장이 뒤집히는 고통속에서 백작가로 옮겨졌다. "얼른 가거라. 텔*리*포*트" '얼른 가거라'라는 말도 주문에 속한다면 말이다. 안전하게 오두막에 발을 디딘 세실과 달리 약초꾸러미를 안고 떨어진 집사는 일주일 전에 먹은 고기가 올라올 것 같은 울렁임과 등짝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세실의 손을 잡고 저택 으로 뛰었다. 아니 뛰고는 싶었는데 허리를 붙잡고 엉거주춤 잰걸음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안그래도 울렁거리는 속이 뛰면 그대로 넘어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미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저택안으로 따라들어온 세실은 집사의 손을 놓으며 슬그머니 회복마법 을 걸어주었다. 갑자기 멀쩡해진 몸이 이상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집사를 남겨놓고 거실로 들어간 세실은 눈에 익은 복장을 하고 서 있는 남자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황제의 거처를 지키던 황실 기사단의 사내였다. "흠흠. 왔느냐? 황제폐하께서 찾으신다. 차를 만든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으니 네가 좀 가 봐야 겠다. 옷을 준비해 뒀으니 가서 갈아입거라." 자신의 부가 일시에 날아가는 것을 느낀 백작의 말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사실 그로써는 이렇게 어린아이를 착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후 받을 벌을 걱정해야할 팔자 였지만 세실이란 아이가 보여준 순수함을 믿고 있었다. 결코 자신에게 해가 될 말은 하지 않을 아이였다. 해서 딸아이가 입던 옷 중 가장 괜찮은 것을 골라놓으라 시켰던 것이다. 그의 생각이야 어떻든 마리의 손에 잡혀 방으로 돌아간 세실은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보며 넋을 놓았다. 커다란 통에 받아놓은 목욕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마리가 입혀주는 데로 드레스를 입은 세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어머나.....우리 세실. 정말 귀엽네!" '아가씨보다 훨씬 잘 어울리다!' 라는 말은 억지로 삼킨 마리는 흐뭇한 얼굴로 세실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곱게 땋아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하고 연분홍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세실은 예뻤다. 게다가 홍조가 떠오른 발그스름한 볼과 햇빛에 그을은 얼굴은 도리어 생기가 넘치는 아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두 손을 마주잡고 세실의 모습을 감상하던 마리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집사의 기침소리에 아이의 손을 잡고 거실로 돌아갔다. "오....!" 정말 귀여웠다. 허름한 옷차람과 꼬질꼬질한 얼굴로도 충분히 귀여워보였던 세실은 정말 정교하게 만든 인형처럼 보였다. 게다가 사뿐 사뿐 걸어와 약간 고개를 숙이며 쑥스러워하는 아이의 모습은 영락없는 귀족가의 여식이었다. 옷이 날개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 백작은 서둘러 세실을 재촉해 마차로 다가갔으나, 기사의 제지로 한숨을 내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비단 천이 깔린 넓은 마차에 혼자 타게된 세실은 연신 의자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생전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였다. 낮에 레이븐에서 준비해준 마차를 타긴 했지만 이처럼 호화롭진 않았다. 아니 레이븐 상회의 마차는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깔끔하고 실용적인 마차는 편안하고 안락한 느낌을 주었지만 백작가의 마차는 호화로움을 넘어 넋을 빼놓을 정도였다. 밤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지붕에는 '라이트' 마법이 걸려있는 마법 구슬이 박혀있고 창문에는 실크로 만든 커튼이, 손잡이에는 루비를 비롯한 보석이 번쩍 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린 세실은 그런 보석에 눈독을 들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해서 궁으로 들어가는 그 20미르동안 세실이 한 것이라고는 넓디 넓은 비단 의자 위를 이리 떼굴 저리 떼굴 해보는 것이었다. 말을 몰며 마차 옆을 따라가던 기사들은 창문 넘어 보이는 세실의 모습에 배를 쥐고 입을 틀어막 아야했다. '못 말리겠네.' 애써 입은 치마가 구겨지든 뒤집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하얀 속바지를 내비치며 떼굴떼굴 굴러다니 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은 기사들의 즐거움이 되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앞뒤를 다투던 기사단은 잔뜩 굳은 얼굴로 이를 부득부득 가는 기사단장과 근엄한 표정으로 곁눈질을 멈추지 않는 황실 기사단에게 명당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환장하겠네..그렇게 좋은가?' 급기야 세실이 배까지 내놓고 대(大)로 누워 행복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얼른 시선을 돌린 세바스티앙은 목을 쭉 빼고 어떻게든 한번 더 보려는 기사단을 째려봐준 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집에 가면 마차에 비단부터 깔아야지.' 언젠가 자작자로 세실이 다시 돌아갈 날에 쓸 마차에 비단천을 깔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백작가의 마차에 뒤지지 않을 푹신한 의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한 세바스티앙은 건너편 창가에서 히죽 웃고 있는 황실 기사단에게 살기를 날렸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열두 살이나 된 아이의 추.태.를 감상하며 즐거워하는 기사단을 막느라 혼신 의 힘을 다한 세바스티앙은 황궁안으로 들어와서야 얼른 자세를 바로하며 치마를 매만지는 세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바스티앙은 마차문을 열고 나오는 세실을 보며 눈을 감았다. "큭큭큭" 억눌린 웃음소리를 흘리던 기사들이 누가 볼세라 세실의 주위를 둘러쌌다. 세실의 모습은 도대체 겨우 20미르동안 어떻게 구르면 저렇게 되는 지 의문을 가지게 만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리가 신경 써서 땋아준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왔고 고운 비단 드레스 는 마치 몇일을 입고 잠을 잔 듯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기사단들 때문에 발이 묵인 세실은 입을 삐죽 내밀고 드레스의 주름을 없애려고 손으로 비벼보다가 끝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깨.끗.한. 옷. 이놈의 주름이 좀 펴지기를...에...클*리*어*(Clear)' 겨우 겨우 머리를 짜내어 적절한 시동어를 찾아낸 세실은 순식간에 새것처럼 빛을 발하는 드레스 를 보며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등을 돌리고 서 있던 기사들은 이를 보지 못했고 아이의 머리를 땋아줄 의무를 맡은 세바스티앙은 장갑을 벗고 꼼지락거리느라 잠시 늦어 마법의 빛이 번쩍 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재주도 좋네...' 여전한 삐죽머리에 어느새 주름하나 없이 깨끗해진 옷을 입고 방실거리는 아이에게 다가간 세바스 티앙은 세실의 머리를 붙잡고 씨름을 하다 결국에는 양쪽으로 묶어주었다. 약간 젖은 상태에서 머리를 땋았던 터라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세실의 얼굴을 더욱 귀엽게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세바스티앙은 헛기침을 했고 그들을 둘러싸며 벽을 만들었던 기사들은 얼른 양쪽으로 나뉘어져 길을 만들어주었다. 순식간에 처음 출발했을 때의 모습을 회복한 세실을 보며 혀를 내두르던 기사들은 마중을 나온 시종관을 보며 뒤로 물러섰다. "들어가십시오. 황제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린 소녀가 온다는 것을 미리 언급받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타고난 것인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끝낸 시종관은 세실의 오른편 앞에 서서 길을 안내했다. 낯이 익은 문 앞에 선 세실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열린 문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가려던 백작가의 근위기사들은 그 자리에 열을 지어 서서 석상이 되었다. 황궁이기에 무기는 소지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근엄한 얼굴 표정만 보아도 세실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가 나올 때 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몸으로 표시하는 기사단에게 경의를 표한 시종들은 걸음을 살짝 옮겨 그들이 좀더 편안하게 자리를 차지 하고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함정에 빠지다. 1. "어서 오거라. 놀랐느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황제 앞으로 다가간 세실은 허리를 깊게 숙이고 백작에게 급조로 배운 황궁 예법을 무사히 소화해내었다. 조금 전과는 너무 달라진 아이의 새로운 면모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던 황제는 조그마한 크리스탈 병을 꺼내들었다. 세실이 해약을 담아 주었던 병이었다. 세실은 자신에게 약병을 건네주려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폐하 조금 전에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사오나 그 약은 황태자 저하께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다 치료된 것이 아닌가?" "아직....완쾌되신 것이 아닙니다." 세실의 대답에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리 오거라. 얼굴을 보고 싶구나."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황제 앞에 다가간 세실은 또다시 자신의 턱을 잡아 올리는 황제에게 멋 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버릇인가봐...' 여인의 턱을 들어올리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황제의 취미를 단번에 알아챈 세실은 살짝 얼굴 을 붉혔다. 잠시 아이의 눈을 쳐다보던 황제는 투명하도록 시린 검은 눈동자에 고인 눈물을 보며 손을 놓았다. "왜 우는 것이냐?" 황제의 나직한 물음에 그제야 눈앞이 흐리다는 것을 인식한 세실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생각이 나서. 절..아버지께서 사랑해주셨다면...아마 이런 느낌일까...아버지의 손길이 황제폐하처럼 따뜻할까...그런..생각을 했습니다." 끝내 맑은 눈물이 바닥을 적시고 말았다. 흐느낌과 같은 아이의 대답에 말을 잃었던 황제는 아이의 말뜻을 오해했다. 아비가 없는 아이로. 없느니만 못한 존재이나 졸지에 아비 없는 자식이 된 세실은 황제의 측은한 시선 속에 눈물을 훔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미소에 덩달아 미소를 짓던 황제는 문득 아이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황태자의 병이 다 나은 것이 아니라고?" "네. 폐하." 다시 세실의 얼굴이 바닥을 향하자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나. 고개를 들어라. 낮에는 잘도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만...바닥에 돈이 라도 흘렸느냐?" 그의 말에 얼굴을 붉히던 세실은 얼른 황공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백작님께서 그리.." "되었다. 아들을 살려낼 은인인데 그 정도도 못 봐주겠느냐? 얼른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말에 고개를 들려던 세실은 등 뒤에서 들리는 빈정거림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어린 아이까지 손대시렵니까? 꼴 사납게시리..." 웃음기가 담긴 소년의 목소리였다. 변성기가 지난 것인지 제법 굵직한 목소리로 빈정대며 다가온 소년은 세실을 힐끔 쳐다보고는 황제에게 다가갔다. "이런 버릇없는 놈.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보고 배운 것이 있어야 말이죠. 황.제.폐.하." "몇 주를 네 그 두꺼운 낯짝을 안 봐도 좋아라 했더니만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것이 이 애비 망신 을 주는 것이더냐?" "그 동안 제가 없어서 얼마나 속이 후련하셨을까...황제폐하를 두고는 감히 눈을 못 감지요. 암~" 실로 방자한 말투였다. 하지만 자세히 듣는다면 살벌한 공방전을 펼치는 두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만 노려보며 두 사람의 말다툼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세실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에 고개를 들려다 다시 목을 움츠렸다. "교육은 잘 받았네?" "장난치지 마라. 아들아. 널 살려주실 은인이다." "은인? 이 꼬마가요? 게다가 살려주실? 그거 미래형 아닌가요, 아버지?" "글쎄다. 나도 모르겠다. 아이의 말이 그러니. 아무튼 입 좀 다물어라. 그걸 물어보려고 했다." "보다는 꼬마 얼굴 보는데 더 집중 하셨죠. 아.버.님." 멋대로 호칭을 바꿔가는 아들을 노려봐준 황제는 다시 세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탁! 황제의 손을 탁 쳐낸 황태자는 볼을 부풀리는 황제를 외면하며 검은 머리의 소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꼬마야 얼굴 좀 들어봐라. 구경 좀 하자. 도대체 얼마나 예쁘면 아버님이 자꾸만 너한테 침을 흘리시는거냐?" 황태자의 베베 꼬인 말투에 상큼한 아미를 찌푸린 세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와 바다 같이 깊은 청록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황태자는 황제를 보며 멋쩍은 기침을 터뜨렸다. "뭐 아버님 취향 맞군요. 근데 너무 어린 거 아닙니까? 언제 키워서 언제 잡아 드실려고..?" "그만! 그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함부로 대하지 마라. 실례다." 느닷없는 황제의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던 황태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세실의 얼굴을 쳐다 보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개진 아들을 보며 히죽 웃던 황제는 의자에서 일어나 두 아이의 어깨를 잡고 테이블과 상아로 깎아 만든 의자로 데리고 갔다. "앉아서 이야기 하자꾸나."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황제는 조그마한 소녀와 조숙한 아들을 보며 약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우선 이것부터. 정말 네가 만든 약이냐?" 황제의 물음에 잠시 고심하던 세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세실은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이곳은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스승님이 마법을 걸어두신 곳이지. 걱정하지 마라." 샌들우드의 손길이 닿은 곳이란 말에 반색을 한 세실은 치맛단을 걷어 올렸다. 세실의 느닷없는 행동에 황태자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재미있다는 듯 세실을 지켜보던 황제는 낮에 스승님 이 남겼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행여나 들키면 그냥 기절하는 정도로 끝날 리가 없지. 암...' 샌들우드의 불같은 성미를 익히 알고 있는 황제는 도박을 하지 않았다. 잠시 비단천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무엇인가 탁자위에 놓여지는 소리에 눈을 뜬 황제는 낡디 낡은 작은 서책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말없이 책을 밀어내는 세실을 보고 서책을 펼친 황제는 잠시 후 경악에 찬 신음성을 터뜨렸다. "이것을...여기 있는 것을 다 외웠느냐?" 고개를 끄덕인 세실은 황제가 돌려주는 책을 받아들고 다시 치마를 걷어 올렸다. 휙~! 또다시 황태자의 고개가 좌로 돌려지고 황제의 눈이 질끈 감겼다. 중요한 것은 몸에서 떼지 말라 는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속옷에 달린 주머니에 책을 깊숙이 보관한 세실은 치마를 쓰다듬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 책은 제가 만든 것입니다." "........!" "아주 오래전에...저에게 약초에 관해 가르쳐주신 분이 계세요. 돌아가셨지만 많은 것을 배웠지 요. 그리고 독약을 만드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리고...어느 날 한스 할아버지만 알고 계시는 비법을 가지고 독약을 만들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초를 주문한 사람은 큰 돈을 주었고 비방을 읽어준...전 금화를 두 닢이나 받았어요. 귀족가의 자제를 치료하는데 필요하다고 했지 만 그것은 독약을 만드는 재료였습니다. 그 때부터 한스 할아버지도 모르셨던 해약을 만드는데 3년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배너 백작님이 충분히 도와주셨기에 부족함 없이 실험을 할 수 있었 고 공부를 했습니다. 황태자 저하께서 중독되신 것은 하루 이틀에 걸쳐 일어난 것이 아니예요." 입을 떡 벌리고 세실을 우러러보던 황제와 황태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또한...해약을 하는 데도 상당한 기일이 필요하지요. 얼마나 복용을 해야 하는지 저도 모릅니 다. 하지만...이미 몸 깊숙이 쌓인 독을 다 제거하려면 아주 오랫동안 이 약을 드셔야 해요. 이것은 해약제이기도 하지만 몸에 좋으니 황태자님이 완전히 해약된 후에도 계속 드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이번 일로 황태자님께 독을 쓴 사람들을 알아내기도 쉬울 겁니다." ".........!" 황태자는 이를 갈았고 황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은 또 무슨 말이냐?" "독을 만든 사람은 이것이 몸에 축적된다는 것도 알겠지요. 황태자 저하께서 의식을 되찾으신 것은 잠시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뭐라고?!" 경악을 하는 황제를 쳐다보던 세실은 베시시 웃었다. 볼 양쪽이 움푹 파이는 귀여운 미소에 근엄 을 찾은 황제는 다시 어깨에서 힘을 뺐다. "물론 그것은 이 약이 없을 때 이야기지요. 문제는 뼛속까지 파고든 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독성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또 중독을 시키겠군." "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황제는 고민에 빠졌다. 황태자가 독에 당한 것만 해도 세실을 만나고 서야 알아내었다. 헌데 어떻게 중독된 것인지 어찌 알아낸단 말인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황제를 구해준 것도 세실이었다. "은으로 검사를 하세요. 아니 황태자 저하께서 쓰시는 모든 식기를 은으로 바꾸시는 것이 좋아요." "은? 당연히 검사를 한다. 하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의심스러운 기색에 세실은 고개를 흔들었다. "독약은 아주 소량이예요. 게다가 색도 없고 맛도 없고 냄새도 없지요. 해약의 사용법을 아시지 요? 하루에 단 한 번. 한 방울만 복용을 해야해요. 그럼 독약은?" "..........아!" 황태자의 탄성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세실은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은으로 된 식기에 담아 10미르 이상 기다려야 해요. 모든 음식물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먹되 넓은 은그릇에 골고루 펴 담아 잠시 기다린 후에 다시 다른 그릇으로 옮기시고 그릇을 조사해 보시면 되죠. 마시는 것은 항상 은으로 만든 주전자에 담긴 것만 마시고 세수를 할 때도 은그 릇에 담아 사용하시는 것이 좋아요." 한 짐 덜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는 왠지 표정이 좋지 못한 황태자를 보며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 걱정이라도 있느냐?"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먹으면...음식이..맛이 없잖아요." 뚱하니 대답을 하는 황태자는 궁에서도 소문난 미식가였다. 양보다는 질! 언제나 맛있는 것만 찾던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실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계속 중독이 되시던가요. 남들은 굶어죽을 걱정을 하는데 음식 투정이라니...." 물론 뒤에 이어진 말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바로 옆에 앉은 황태자가 어찌 못 알아들을까? 검술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황제도 세실의 말을 듣고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일어난 황태자는 세실을 노려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언제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그가 이토록 모욕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어릴 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으며 칭찬과 아부만 듣고 자란 황태자가 비천한 신분의 백성의 비난을 웃어 넘길 만큼 아량이 큰 것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릴 듯 살기를 내뿜는 황태자를 힐끔 일견한 황제는 당돌한 꼬마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앉거라." "아버님!" "앉으라고 했다. 저 아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느냐? 네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까짓 음식 이 좀 맛이 없으면 어떠냐, 몇 일만 참으면 될 일이야. 독을 쓴 것만 잡아내면 누가 그랬는지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다. 더구나 바른 말을 한 사람에게 그토록 노한다면 누가 너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려 하겠느냐?"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황제의 말에 정신을 차린 황태자는 약간 가슴을 들썩이며 자리에 앉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실의 뒤에 샌들우드가 없었다면 당장에 목을 쳐올린 것은 황태자가 아닌 황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세실이란 아이의 정직함이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이 가는 아이. 황제는 바로 이 순간 세실이란 아이를 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황제가 일개 평민에게 호기심을 갖는 다는 것은 아주 큰일이었다. 황제의 생각이야 어쨌든 자신보다 어린 아이에게, 그것도 신분도 모르는 아이에게 모욕을 당한 황태자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붉히고 있는 세실을 보며 색다른 느낌을 받고 있었다. 겁도 없이 직언을 하는 아이. 저도 모르게 한 말에 스스로 당황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태자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너 몇 살이냐?" "열두 살이옵니다." "어디 사는데?" "지금은...배너 백작가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 "네." "너...하녀냐?" 문득 세실의 얼굴에 망설임이 서렸다. "저도...잘 모르겠습니다." "응?" "글쎄...급료를 받기는 하는데...집안일을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얼마나 받는데?" "금화 한 닢이요." "엥?" 돈의 값어치를 모르는 황태자는 그것밖에 안받냐고 의문했고 평민들 한달 생활비가 겨우 은와 한 닢을 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아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찻잎을 제배하고 받는 돈이겠지?" "네." "찻잎이요?" "그래. 배너 백작이 진상을 올리는 찻잎을 만드는 아이가 바로 이 아이다." "오!" "재능을 숨긴거지. 그렇지 않느냐?" 황제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얼굴을 붉히던 세실은 자신이 가지고온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황제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미 샌들우드가 두고 간 '최상품'을 맛 본 후였고 아이가 무엇을 주는 것인지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싱글 벙글한 얼굴로 주머니를 가져가는 황제를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황태자는 코를 킁킁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처음 맡아보는...?" "내 것이다." 황제의 단호한 목소리에 포기를 하기엔 황태자는 간이 너무 컸다. 감시 황제의 품을 뒤지는 불경을 저지른 황태자는 가죽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수십 봉의 종이 봉지중 하나를 꺼내들고 펼쳐보았다. "와우~!" 곱게 말려 조금씩 다져놓은 찻잎은 그냥 두어도 알싸한 향이 코를 간지를 정도로 질이 좋았다. 더구나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머리까지 상쾌해지는 향기에 취해 휘파람을 불던 황태자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찻잎을 싸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배너 백작가라고?" "네." "이거..파는거냐?" "아닌데요." "안 팔아?"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세실은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이 세상에서 단 두 분을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두...분?" "스승님과 어머니요." "어머니도 함께 사느냐?" 세실을 고아라고 생각했던 황제가 얼른 물었다. "어머니는 마르보 자작님 댁에서 하녀로 일하십니다."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세실의 대답에 황제를 의문을 가졌다. "네 어미는 자작가에 있는데 너는 왜 백작가에 있는거냐?" 잠깐 어두운 얼굴을 하던 세실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백작이 그토록 함구하길 바라던 내용을 입 밖에 내고야 말았다. 잠자코 아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황제와 황태자의 얼굴이 심상찮게 일그러졌다. 처음 마크라는 아이의 아비가 손찌검을 하여 의식을 잃고 나서 깨어보니 자작가더라... 라는 말을 할 때만 해도 그.냥. 이.만. 갈.던. 이들이 백작영애의 말동무로 불려와 찻잎을 제조하고 은화 한 닢을 받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이건 황태자가 물었다)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제 금화 한 닢을 받고 백작을 위해 일을 해주기로 했다는 말에 탁자가 부서져라 내리친 황태자는 황제가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세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가만 두지 않을 테다! 감히! 백작 따위가 그런 식으로 착복을 하고 너를 고생시켰단 말이냐?!" 백.작.따.위.란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불을 내뿜는 아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낮에 보았던 아이의 모습과 지금 아이가 하고 있는 모습이 왜 그리 달랐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백작이 쉬쉬하며 자신에게 찻잎을 직접 진상한 연유 또한 알게 되었다. 한낱 평민의 일에 지나치게 화를 내는 아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기에 앞서 백작이 세실에게 저지른 일은 황제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제 열 둘이 되었다면, 더군다나 평민 그것도 자유인이라 면 백작의 일은 백번 죽어 마땅했다. 갈 곳 없는 아이를 보담아 일을 시킨 것도 아니요, 부모가 있는데 그곳에서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데리고 와 아이가 만든 것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에게 지불하는 급료 또한 빈(貧) 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말에 길길이 날뛰며 살기를 피워올리는 두 남정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세실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으니... "그...러시면...아니되는데...흑....기사단장님이..훌쩍...백작가에 계시는데...흑...그러시면... 기사단장님이...흐윽!" 끝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눈을 비비는 작은 소녀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황태자는 아이를 안아들고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황제 역시 당돌하게만 보이던 아이가 백작의 목을 베겠다 는 말을 듣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이에게 있어 세바스티앙이란 기사는 은인이었다.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주고(황제가 생각했을 때 첫 번째 일은 병주고 약을 준 경우였지만) 그 악마 같은 아비의 손을 벗어나게 해준 사람이라는 것은 이해를 했다. 하지만 그토록 고생을 하며 착취를 당해도 묵묵히 이겨낼 만큼 고마운 걸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직접 차를 만들어 판다면 단번에 거금을 쥘 수도 있을텐데 미련한 것인지 우직한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다 생각을 하던 황제는 황태자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아무리 똑똑하고 총명하다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한편 뼈밖에 없는 비쩍 마른 아이를 안고 토닥거려주던 황태자는 지금 심각한 자기 성찰에 빠져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거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이의 말에 벌컥 화를 냈던 것이나(지금도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리지만) 기껏 평민인 아이가 운다고 해서 훌쩍 안아들고 등을 토닥이고 있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신 그만 울라고, 괜찮다고, 말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생각에 잠겨있던 황태자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꼴을 구경하고 있는 황제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야, 웬만하면 고만 울어라. 응? 쪽팔리게시리...' 아예 턱까지 괴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황제 보기가 민망한지 먼 산을 바라보며 아이를 토닥 이던 황태자는 세실의 흐느낌이 잦아들자 슬며시 팔을 풀었지만 내려놓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체온이 조금 높은 아이가 주는 감촉이 좋았던 것이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야릇한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황태자는 황제의 부름에 안으로 들어오는 20대 중반의 잘생긴 미남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쬐금....잘 생겼네.' "자네가 세바스티앙 드 카르민인가?" "네. 폐하. 미흡하나마 기사작위를 받았습니다." "기사단장으로 있다고 들었는데?" "네, 폐하." 절도있는 동작으로 예를 취하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기사가 상당한 수련을 쌓았음을 눈으로 확인한 황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능력이 있는 사내라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황제의 평소 지론이었다. "자네..궁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세바스티앙의 눈이 둥그레졌다. "내일 쯤...아니 시간이 나는 데로 궁으로 와서 시험을 받게. 통과 되느냐 마느냐는 자네의 역량에 달려있네만 내 보기엔 백작가의 근위기사로 있는 것은 아까워. 알겠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망설임이 담긴 우직한 기사의 말에 황태자의 품에 안겨 말똥말똥 눈을 빛내는 세실이란 아이를 일견한 황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닮았군. 우직한 것까지 닮았어...' 은혜를 베푼 이나, 은인을 섬기는 이나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표정을 바꾸었다. "이 아이는 어미가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황제의 은근한 말에 흠칫하던 세바스티앙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가 백작가로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탓이고 묵묵히 그 일을 감내해 내는 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터였다.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굳히고 있던 세바스티앙은 당돌한 목소리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이카루스여......자비를!' "백작님은 제가 원하면 언제든지 나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폐...하..." 호칭을 빼먹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세실에게 박수를 보낸 세바스티앙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딴에는 세바스티앙의 결심을 돕는다고 한 말이겠지만 그것은 황태자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저...놈을 좋아하는 건가?' 문득 드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흔든 황태자는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동생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품에서 아주 편안한 자세를 잡고 앉아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정수리에 턱을 고인 황태자 는 땅바닥에 금이라도 발라놓았는지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기사를 쳐다보았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흐른 후, 세바스티앙은 결정을 내렸다. "아직은...때가 아닌 듯 합니다만, 폐하의 하회와 같은 은총에 감히 도전을 해볼까 합니다." "그래? 잘되었군. 언제 올텐가?" "우선은...백작님께 말씀을 드린 후에야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작을 주공이라 부르지 않는다. "서약은 하지 않았는가?" "네."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없냐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세바스티앙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제는 여전히 황태자에게 안겨있는 아이를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게. 아이는 내일 보내지. 이곳에서 하루 묵고 보낼테니 내일 데리러 오게. 백작에게는 내 따로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네." 황제의 말에 잠시 당황하던 세바스티앙은 어두운 얼굴로 일어났다. 잠시 세실을 바라본 세바스티앙의 두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사건 일으키지 마라. 얌전히!' 무언의 부탁에 세실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볼우물이 쏙 들어가는 귀여운 미소를 짓는 아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봐준 세바스티앙은 황제에게 예를 취한 후 세 발짜욱 뒤로 물러나 등을 돌렸다. 기다란 망토를 펄럭이며 사라지는 세바스티앙 의 넓은 등을 넋 놓고 바라보던 세실이 문득 중얼거렸다. "멋있다..." 한번도 기사의 등을 본 적이 없었던 세실은 세바스티앙의 듬직한 뒷모습에 폭 빠졌고 이를 본 황태자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검술 연습을 더 열심히 해야겠군.' 적어도 이 검은 눈동자의 소녀에게서 황홀한 시선을 받을 만큼 멋있어 지겠다는 결심을 한 황태자 가 소원을 성취했을 때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 내려진 결정은 그의 인생에 있어 큰 전환기를 마련하게 됨이니, 세실이란 아이는 참으로 이곳 저곳에 많은 인연의 탑을 쌓아올리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소녀라 할 수 있었 다. ************************************************************************************* 자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소제목을 바꾸었기 때문에 몇편 더 올려 편수를 맞추어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신지...콜록 집에 반찬이 다 떨어져서 장을 보러 가야하는데 게으른 유키 계속 물에 밥 삶아 먹느라 신격을 쓰지 못했지요. ㅜ ㅜ 장보러 가야합니다. 흑(귀.찮.다!!!) 리플도....콜록 청화륜님 오랜만에 뵙지요?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리구요, 혹시 오타나 뭐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시면 바로바로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하든 리플이 확인하는데로 수정하겠습니다. 참고로...앞의 부분은 지적해주신 것 수정했습니다. ^^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함정에 빠지다. 2. "얘야, 아직도 여기 있었느냐?" 한눈에도 이곳이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황궁의 심처(深處). 백설이 내린 듯 새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기고 고급천으로 만든 제복을 입은 초로의 노인 이 어슴프레한 달빛을 받으며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젊은 남자를 찾아왔다. 한없이 인자한 얼굴, 나이와 걸맞지 않는 맑은 두 눈은 노인이 현명한 사람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었다. 바이오니어 국에서 이 사람을 모르면 간첩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명과 지지도가 높은 사람. 황족을 제외하고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노인이 한밤중에 자신의 집무실로 와서 찾은 사람은 누구일까? 노인의 걱정스러움이 담긴 목소리에 스르륵 몸을 일으킨 남자는 달빛을 등지고 서 있다가 책상 위에 놓인 초에 불을 붙였다. 아마도 레이븐 상회에서 구입한 향초인지 쌉싸름한 향이 순식간에 집무실의 공기를 청량하게 바꾸어 주었다. 자신이 아끼는 향초에 마음대로 불을 켜는 것을 본 노인은 잠시 아깝다는 표정 을 지었지만 이내 남자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잊으라 하지 않았느냐? 넌 네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원하던 만큼 능력도 쌓았고, 마음 을 비우라 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폐하는 너의 말이 있으나 없으나, 그 약을 만든 사람을 찾아 내셨을 것이다." "아버님....전...." 슬픈 얼굴로 망연히 서 있는 아들에게 다가간 노인은 그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잡았다. 동그란 패에는 가운데 오성진이 새겨져있고 그 주위를 룬어로 가득채워 둔 마법의 목걸이었다. 그것을 벗기려는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은 남자의 얼굴이 더욱 슬퍼졌다. "잠시만...잠시만 더 이러고 있으면...안되겠습니까?"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그렇게라도 마음에 걸린다면 직접 찾아가보면 될 일. 어차피 지금쯤 네가 죽었으리라 생각할게야. 더 이상 이 얼굴로 이 아비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말거라." 노인의 말에 한숨을 내쉬던 남자는 목걸이를 빼내는 아버지의 손을 막지않았다. 금패가 노인의 손에 쥐여진 순간 푸른 빛이 남자의 몸을 감싸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타나는 얼굴. 옥으로 깎아놓은 듯 쭉 뻗은 코와 노인을 닮은 듯하나 아직은 그리 깊지 못한 푸른 눈, 그의 집안을 상징하는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20대 초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로드리고, 내 아들. 이제야 내 아들을 찾았구나. 8년 만이지?" 아버지의 약한 모습에 한쪽 입술을 삐뚜름히 올리던 남자가 장난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론이란 사내가 종종 보여주던 것과 너무나 쏙 빼닮은 표정을 지어보이던 로드리고라는 사내. "그래도 종종 찾아뵈었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도 레이븐으로 오셨구요. 뭐가 8년 만입니까?" 하염없이 아들의 본래 모습을 눈 속에 담아두던 노인이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아들의 손을 잡았다. "네가 말한 그 아이가 지금 궁에 와있다고 하더구나." "........!" "듣기로는 황제의 성은을 입는다고 하더라만..." "네? 그 아이는 이제 열두 살인데요?" 로드리고, 아니 론의 말에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라? 정녕 열 두살이란 말이냐?" "모르셨습니까?" "몰랐다. 아니 아무도 모르지. 그 아이가 궁에 들어올 때 폐하가 엄명을 내리셨다. 그분이 거(居)하는 백색궁에는 어느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황태자 저하께서 일어나실 때 까지는 시종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발길을 들여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음.......!" 이내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긴 아들을 지켜보던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그 아이가 해약을 만들었다고 하더냐? 다른 누군가가 만든 것이 아니고?" "네. 아버지. 저도 믿을 수는 없지만 분명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비록 그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아니지만, 누군가를 대신해 목을 걸었을 수도 있지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니..." 문득 애잔한 눈길로 과거를 회상하던 론은 아버지의 떨리는 눈이 책상위에서 타오르는 향초를 향해 있는 것을 보고 의구심을 가졌다. "저 향초도 그 아이가 만들었다고?" "네." "내가 즐겨마시는 차도?" "네." "이름이..." "세실이라고 합니다." "오...그래...세...실....열두살...그래...열 두살이 되었구나. 허허허" 뿌연 습막이 떠오르는 노인의 푸른 눈을 직시하던 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께서도 관심이 있으신가보군요?" "허허..아무렴. 황태자 저하를 구해준 아이인데 어찌 관심을 두지 않겠느냐..." "........" 여전히 향초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어떠한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은 문득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가자. 이제 가서 쉬어야지?" ".....전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러려무나. 그럼 이 아비는 먼저 가 있으마. 내일도 일을 해야하니 너무 늦지 않게 돌아 오거라.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터이고, 여의치 않으면 그런 기회야 얼마든지 만들 수있다." '아니요 전 그 아이의 신뢰를 깨트린 제 자신이 싫은 겁니다. 아버지!' 자신의 속마음을 꾹 눌어버린 론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주고 등을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에 시선을 두고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귀여운 웃음을 짓던 소녀를 떠올리던 론은 자신의 아버지가 작게 중얼거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세실...세실리아. 그래 네가 벌써 열 둘이 되었구나...참으로..장하다. 나도 못한 일을 네가 해내다니...." ******************************************************** 황제가 그녀를 이곳에 머물게 한 이유는 저녁 식사 때 밝혀졌다. 원래가 황족이 쓰는 식기는 금과 은으로 만든 것이었고, 언제나 독살의 위험을 안고 사는 황제와 황태자의 식기류는 모두 은으로 되어있었다. 짐짓 투덜거리면서도 음식을 넓은 은접시에 펼쳐놓고 차를 마시자는 세실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세실에게 궁에서 있었던 비화나 황족에 게나 전해지는 일화들을 이야기해주며 시간을 보낸 황태자는 10미르가 지나자 아쉬움을 느낄 정도 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던 작은 소녀. 과거 이안 남작의 사랑을 받을 만큼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세실은 또래의 친구조차 없이 넓은 황궁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황태자의 말동무로서는 그 만한 아이가 없었다. 아들과 함께 음식을 내놓고 역시 차를 홀짝이던 황제는 유난히 말을 많이 하는 황태자와 헛짓 한 번 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아들의 말을 경청하는 세실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황궁에서는 보기 힘든 참으로 따뜻한 장면이라 생각했다. 10미르 후. 아쉬움을 접으며 황태자가 입을 닫고 지켜보는 가운데 세실의 작은 손과 시종장의 떨리는 손이 은쟁반 위의 음식을 다른 식기로 옮겨지고 황제가 직접 은접시를 하나 하나 검사했다. 음식의 종류별로 담아두었던 은쟁반은 무려 삼십 여개에 달했지만 황제는 결코 하나도 예사로 넘기지 않았다. 그리고 조그마한 은쟁반에서 검게 변색된 부분을 발견했다. 입맛이 까다로운 황태자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소스를 담았던 쟁반이었다. 시종장에게 입을 다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황제가 굳어진 얼굴로 변색된 쟁반을 세실에게 내미는 것을 본 시종장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이것을 가지고 온 이는 누구이지요?" 세실의 똘망똘망한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쟁반을 나른 하녀의 이름을 말한 시종장은 황제의 명으로 보좌관을 부르러 달려갔다. "이제 시작인가?" 쟁반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던 황제는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자신의 오른 팔을 보며 쟁반을 내밀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보좌관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식기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다. "시종장이 일러준 하녀에게 사람을 붙이게. 또한 음식을 준비하는 곳에도 사람을 둬. 은밀하게 그들의 거처를 뒤져서 증거물을 찾게. 허나, 아직은 시기가 아니니 찾기만 하면 되네." "네, 폐하. 송구합니다." "아니야, 이렇게라도 빨리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해야지. 겁 없은 놈들...뿌드득!" 어느새 새그릇에 담겨진 음식을 먹으려는 듯 포크를 쥐고 있던 황제가 이를 갈았다. "헉!" 지잉~ 삼지창이 늘어났다. 0.3 피텐(10cm가량)의 포크가 황제가 일으킨 살기와 더불어 2피텐(60cm)으로 쭉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던 보좌관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이 본 것을 입밖에 내어서는 안된다는 절대 절명의 각오를 한 보좌관은 금방 안색을 안정시키며 아무것도 못 본 듯 머리를 읊조리고 물러났다. "많이 느셨네요?" 독에 당할 뻔한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궁내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황제의 경지를 단번에 알아낸 황태자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황제의 손에 쥐어진 포크를 쳐다보았다. "뭐 남말 할때는 아니지않느냐?" 순식간에 검기를 거두고 편안한 안색을 회복한 황제는 황태자의 손에 쥐어진 나이프를 둘러 싸고 있는 푸른색 빛을 가리켰다. "뭐 이정도야..." 멋쩍은 표정으로 나이프를 감싸고 있던 마나를 거두어들인 황태자는 땡그란 눈으로 자신과 황제를 돌아보고 있는 세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야야 눈알 튀어나온다. 검기...처음 보냐?" 끄덕끄덕 정신없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작은 얼굴을 보며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던 황태자는 알만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황제를 애써 외면했다. '어쩌면 저렇게 날 쏙 빼닮았을까.....?' 벌써부터 여자 홀리기에 열중하는 아들을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제는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것은...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황제의 엄명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세실이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께두요?" "...........!" 세실의 말에 뒷통수를 맞은 표정을 짓던 황제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 분이야 벌써 알고 계실 껄? 하지만..그래 네 말이 맞다. 스승님께는 알려드려야지! 암!" 검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소드마스터(swordmaster)의 경지에 도달한 황제는 드디어! 자신이 스승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건수가 생겼다며 헤벌쭉 웃었다. 물론 과거 그에게 마법을 가르치려 애쓰다 끝내 그의 우둔함에 혀를 찼던 샌들우드가 과연 칭찬을 해줄까 문제이긴 했으나, 지금 그 는 그런것에 신결쓸 겨를이 없었다. 은근히...아주 은근히 반.드.시. 스승님께 고해달라는 압박을 넣은 황제는 아리송한 눈으로 자신 과 세실을 번갈아보는 황태자를 보고 찔끔했다. "스승님이 누군가요?" "험험" 이미 죽었다 알려진 분을 다시 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헛기침만 터뜨리던 황제는 세실에게 구원 요청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총명한 눈을 가진 작은 소녀는 황태자의 호기심을 다른 곳으로 바꾸는 데 성공을 하고야 말았다. "저...저는....배가 고픈데..." 앙상한 손으로 배를 감싸쥐며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눈길에 넘어간 황태자는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소스가 담긴 그릇을 치우고 얼른 식사를 하자고 큰소리를 쳤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포크로 사슴고기를 찔러가던 황제는 소녀의 접시에 담긴 커다란 고기를 먹기좋게 잘라주는 황태자를 보며 기침을 터뜨렸다. 아무리 작업(!)을 건다해도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고기를 잘라주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황제는 내심 '큰일이군'이란 말을 꿀꺽 삼키며 고기를 씹었다. 황태자가 열두 살난 소녀에게, 그것도 자신에게 성은을 입었단 소문이 난 소녀에게 (이건 황제가 시킨 것이었고 황태자는 모르고 있었다), 거기다 평민의 아이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이 소문이라도 나면...체면이 문제가 아니라(그런 경우도 종종 있었으니) 세실이란 아이가 스승님이 아끼는 제자의 목숨이 위태로울수도 있었다! 문득 어두워진 얼굴로 황태자와 세실을 지켜보던 황제는 샌들우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스승님만 믿습니다.' 오늘 당장에라도 레이븐 상회에 서신을 넣어야겠다 결심을 한 황제는 그의 예상이 그토록 정확 하게, 그토록 빠르게 맞아 떨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 . 그날 밤. "그러니까, 좀 만들어달란 말이지. 금화는 얼마든지 주마. 나한테만 팔면 되지 않겠느냐?" 벌써 몇 나르째... 잠도 없는지 황제가 마련해준 방까지 찾아와서는 뻔뻔스럽게 찻잎을 팔라고 졸라대는 황태자를 보며 세실은 이를 갈았다. '잠 좀 자요, 잠 좀!' 급기야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웠던 세실은 이불을 훌렁 벗겨내는 황태자의 행태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잠도 없어요? 자요! 자 자구요! 좀 자게 해주세요....흑흑!" 눈물을 글썽이나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세실을 보며 뒷통수를 긁어대던 황태자는 슬며시 아이의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래, 이해해라.' 생전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만난 황태자는 이 작고 귀여운 아이를 놓치기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끈을 이어보고자 고심한 끝에 낸 아이디어가 바로 '찻잎'이었다. 단 두 사람에게만 전해지는 최상품의 찻잎을 그가 가질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임도 보고 뽕도 따니(콜록) 그 얼마나 좋은가 생각을 하는 황태자였다. 아직은 순진하기만 한 세실은 잠도 재우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황태자가 원망스럽기만 했지만 끝내는 잠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웅...팔께요...판다구요....아함..." 졸린 눈으로 스르르 눈을 감던 세실은 자신의 말에 큰 소리로 웃어 재끼는 황태자가 정녕 인간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지만 꿈속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잠의 정령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덕분에 눈을 감은 순간 그녀의 이마에 닿는 따스한 온기또한 느끼지 못했다. 목적을 달성하고 증표(!)로 소녀의 이마에 첫.키.스.까지 선사한 황태자는 흐뭇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억지로 만들어낸 이 약속이 세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사춘기에 들어선 사내아이는 한 소녀를 만나 행복한 단꿈에 젖어들었다. ********************************* 세실이 황궁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폭신한 비단침대에 깊은 잠에 빠져든 그날 밤 데니스 폰 배너 백작은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기에 여념이 없었다. 『데니스 폰 배너 백작은 보아라. 짐은 찻잎을 만든 이를 직접 만나보고 느낀바가 많았다. 해서 그 아이에게 작은 상을 내리고 잠시 짐의 곁에 두고자 하니 조속한 시일 내에 아이를 입궐시키도록 명한다. 그 동안 그대가 착복했던 부(富)에 관해서는 덮어둘 것이니 그대는 이제껏 가질 수 있었던 것에만 만족하길 기대하겠노라. Bradly Chatfield Gannon (인장 꽝!)』 짧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서신이 배너 백작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황금거위는 그의 품을 떠나고 그가 저질렀던 만행이 들어나 그를 황제의 눈 밖에 나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어두운 얼굴로 그의 마음보다 더욱 검은 밤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작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궁에서...기사를 뽑는 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능력이 모라자기는 하나 아버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시험을 치러볼까 합니다." 세실을 데리고 갔다가 홀로 돌아온 그의 기사가 남긴 말을 떠올리던 백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모래가 되어 흩어져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허나 부에 관한 욕심은 누구보다 강하다 자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헌데 황금거위를 가지게 만들어 주었던 인연의 끈도, 황금거위 자체도 잃게 생겼다. 물론 지금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과 상납되는 것 또한 그가 죽을때 까지 흥청망청 쓰더라도 흔적이나 남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는 부족하다 여겼다. 그런 그가 겨우 한 달에 수천 골드를 벌어들이는 세실을 놓치는 것을 어찌 달가워할 수 있을까? 그 작은 아이가 벌어들이는 돈은 그가 두, 세달 동안 받아들이는 상납금과 맞먹었다. '배 아프다...' 자신이 그랬듯 황제 역시 세실의 재능을 탐내어 아이를 데리고 가고자 한다 생각했다. 원래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백작은 자신과 황제를 똑같은 선상에 두고 저울질 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단죄하겠다는 협박이 담긴 서신을 읽고 또 읽었던 백작은 결국 그 날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방학을 맞이하여 돌아온 딸을 마중나갔다. *************************************************************************************** 장보고 와서 혹시나 하고 들어왔다가 리플보고 넘어갈뻔 했습니다. ㅜ ㅜ 꺄아앙~ 코코님과 여느 다른 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은에..몸둘바를 몰라하던 유키 끝내 남은 여분의 분량 마저 올려버렸습니다. ㅜ ㅜ 도대체 나란 인간은....! 그리고 별빛바다님 따끔한 충고를 해주셨지요? 사실 저도 쓰기도 어렵고 읽기도 힘든 No-2305보다 자꾸 이 글에 애착이 갑니다. 지금 실마리라 풀리지 않아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마 어느정도 답이 나오면 이 글처럼 한번에 연참을 하지 않을까 싶구요. 한편써서 한편을 올리고 나면 다음 글이 연결이 안되는 이상한 습관이 생긴관계로... 습작 노트를 열심히 헤집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은 정.말.로. 여기서 마무리 하지요. 사건이란 것은 원래 기다리다 갑자기 터뜨려야 흥미를 끌 수있지 않을까...하는 작은 소망입니다. 그럼 여러분 정말 정말 행복하세요~~~~~~~~~!!! 추신 : 세실의 나이가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 좀 해주세요. 다 고친듯 한데... 제 눈에는 안보이는 군요...이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함정에 빠지다. 3. 쫘악~! "너 따위 것이! 너 따위가! 감히...이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고 얼마나 쥐고 흔들었는지 바닥에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듬성 듬성 빠져 있었다. 시퍼렇게 멍든 볼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세실은사람을 시키지도 않고 백작가를 직접 방문한 황태자를 원망했다. 황궁에서 돌아온 세실은 백작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손님방에 기거하도록 방을 준비해놓은 백작은 펄쩍 뛰는 딸을 말리는 대신 정신없어 하는 세실의 마음을 돌리는데 주력했다. 아무리 황제의 명이라고는 하나 소녀가 원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 아도 된다는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다. 행여나 재신(財神)이 날아가버릴까 전전긍긍하던 백작은 절대로 저 천한 것과 같은 층을 쓸 수 없다면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우는 딸을 무시해버렸다. 그냥 황제의 명에 따르자는 아내의 말도 무시했다. 그를 말리는 주변의 모든 사람의 충고를 무시한 백작은 식사시간에 세실을 불러 자신의 옆에 앉혔 으며 딸이 입던 옷이 아닌 새 옷을 지어 입혔다. 세바스티앙은 황궁에서 치러진 기사시험에 합격하여 황태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근위기사다 되었다. 하지만 세실은 남았다. 그것이 백작의 노력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세실은 그저 백작이 주는 것에 황송해하며 그렇게 약초를 제배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결국 황제의 칙서를 받고도 세실을 궁으로 보내지 않는 것에 분노하던 황제는 그것이 세실의 선택 이라는 말을 듣고 명을 거두었다. 하지만 세실의 선택에 분노하던 또 한 사람은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보석과 금으로 치장된 마차를 타고 온 황태자는 아주 당당한 태도로 백작가를 방문해 세실을 찾았 다. 황태자비가 되기를 꿈꾸던 소녀의 교태로운 몸짓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황태자가 직접 왔다는 소리에 뛰어 나왔던 세실은 그의 손에 잡혀 오두막으로 길을 안내해야만 했다. 잠결에 했던 약속을 들먹이는 황태자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스승님을 위해 만들어 두었던 찻잎을 건네준 세실은 100골드를 받고 까무라쳤다. 기겁을 하며 금화 하나만 남기고 모두 돌려주는 세실 에게 빠진 황태자는 그날 늦도록 백작가에 머물렀고, 황족을 보필해야 하는 백작은 몸살을 앓았다. 아니 백작가 전체가 들썩였다는 것이 더욱 정확했다. 그리고...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황태자 저하. 이렇게 저희 백작가를 방문해 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고맙소. 내 백작의 이러한 접대를 잊지 않을 것이요." 상이 부러져라 차려진 식탁 앞에서 예의바른 대화가 오간 것 까지는 좋았다. "헌데...세실은 어디 있는 것이오?" 이것이 문제였다. "전하, 그 아이는 지금쯤 마굿간에서 거름이라도 만지고 있을 시간입니다. 게다가 고귀하신 분이 어찌 그런 천한 것과 같이 식사를 한단 말인가요? 말씀 거두어주세요. 음식이 식습니다. 어서 드 시옵소서." 식사를 하려다 말고 문득 세실을 찾는 황태자에게 파드득 속눈썹을 떨며 대답을 한 크리스틴은 미간을 찌푸리는 황태자를 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비록 그동안 백작의 지시로 함께 식사를 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여느 귀족가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었다. 더구나 황태자가 아닌가. 귀족도 아닌 황족이 있는 식사에 평민이 함께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애의 말도 일리는 있소만...이미 그 아이는 궁에 와서 아바마마와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소 이다. 허니 괜찮다면 그 아이를 불러 함께 했으면 하는데 공은 어떻소?" 졸지에 총대를 맨 백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을 강구하다 결국엔 한숨을 삼키며 시종을 불렀다. 아무래도 황제의 승은을 입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 하다고 생각을 하며... 일련의 사태를 보며 이를 갈던 크리스틴 역시 백작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날 들었던 이야기. "어머나..그러면 그 아이가 폐하의 승은을 입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보죠? 세상에 그 어린 것이 얼마나 교태를 떨었으면...정말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황태자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예의상 짓고 있던 표정을 지은 황태자는 싸늘한 얼굴로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감히...어디서 그런 망발을 지껄이느냐! 황제폐하의 연세를 생각해보라. 겨우 열 두 살 난 아이 가 승은을 입어? 도대체 그런 썩어빠진 머리로 무엇을 배웠단 말이냐! 감히!" 크리스틴의 말은 예의에 어긋난 것일 뿐 아니라 당장 목이 베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큰 실수 였다. 사십대를 바라보는 남자가 열두 살 짜리 여아를 탐했다면..... 그것은 변태다. 한마디로 크리스틴은 황태자 앞에서 그의 아버지인 황제가 변.태.라고 지껄인 것과 같았다. 제딴에는 머리를 굴려 세실의 난잡함을 시사하고자 한 것이나 그것은 아이의 나이를 무시한 처사 였다. 분노에 떨며 버럭 소리를 지르던 황태자는 새파랗게 질린 백작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공도 그리 생각하시었소?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소이다. 황제폐하가 철도 들지 않은 어린 아이를 탐한다 그리 영애를 가르치셨단 말이지요. 내 잊지 않겠소이다. 공이 보여준 그 충.정. 절대로 잊지 않고 폐하께 아뢰어 드리리다." "전하! 소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추호도 추호도 그런 망상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저것이 아직 어려, 철없이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니 부디 용서를 해주시옵소서." 황태자의 말에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백작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구족이 멸할 일이었다. 어찌 감히 황제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살아날 수 있으랴?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해도, 아니 사실이라면 더 했다. 절대로 입밖에 내어서는 안되는 말을 한 죄, 구족을 멸하고 영혼까지 소멸되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자신의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정신차리지 못한 크리스틴은 황태자의 처사가 심하다는 말을 꺼내려다가 당장에라도 칼을 내려칠 듯 살기를 내뿜는 기사들을 보며 숨을 죽였다. 몇일 전만 하더라도 백작가의 근위기사에 불과했던 세바스티앙은 황태자를 보필하는 황궁의 기사 로서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못내 억울하고 못내 이가 갈리는 일이었다. 적어도 크리스틴의 입장에서는... "저...전하, 세실리아를 대령했습니다만..." 온통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식당 앞에 엉거주춤 서서 당황해 하던 시종은 그의 뒤에 서 있는 아이를 몸으로 가렸다. 분위기를 봐서는 당장에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런 곳에 아이를 집어 넣을 수는 없었다. 소녀를 감싸며 눈치를 보고 있는 시종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태자의 눈이 따스하게 빛났다. "내가 나갈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가서 기다려라." "네, 전하." 그대로 몸을 돌려 세실을 보호하듯 바짝 붙어서서 걸음을 재촉하는 시종을 가만히 살펴보던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백작가의 식솔들을 노려보았다. "내 이번 만은 영애의 나이를 생각하여 그냥 넘어가오. 이미 한 번 황제 폐하의 명을 어겼던 그대가 이러한 방자한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면...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오." "감읍하옵니다, 전하. 이 하찮은 목숨 그리 생각해 주시니 신(臣)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 전하의 하회와 같은 은혜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가슴 깊이 새겨두겠나이다!" 작두가 거두어졌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사신이 물러나자 백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백작일 일견한 황태자는 아직도 불만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영애를 노려봐준 후 기사들을 대동하고 식당을 나섰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승은이라니?" 가만히 걸어가다 느닷없이 물어오는 황태자의 뒤에 서 있던 세바스티앙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퍼뜨리신 소문입니다. 전하. 아마도 그 아이를 보호하려고 하신 일인 듯 합니다만.." "뿌드득. 그러니까 그 노망난 영감이 세실을 첩으로 들이겠다 벌써 침을 발랐다, 이거지? 빠직 빠직" 졸지에 '노망난 영감'이 된 황제를 떠올리며 혀를 차던 세바스티앙은 저 멀리 나무 밑에서 서성이는 젊은 시종과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적이는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변하지 않는 아이였다. 옷도 고급스러운 것을 받고 방도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한참이 되었는데 저처럼 예전에 입던 낡은 옷을 입고 바닥을 구르는 아이를 보니 너무나 기뻤다. 아이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 반가운 나머지 미소를 짓고 있던 세바스티앙은 그를 곁눈질하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황태자를 살피지 못했다. "여어~여기서 뭐하냐?" 황태자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벌떡 일어난 세실은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 던졌다. "부르셨다면서요?" 뾰롱퉁한 목소리였다. "아직도 삐쳤냐? 내가 돈 줬잖아. 더군다나 나한테 약속까지 해놓고 이러면 섭하지~" 능청스러운 대답에 벙찐 얼굴을 하던 세실은 볼을 부풀리며 바닥을 찼다. "전 기억도 못한단 말이예요. 그게 다 전하가 잠결에 절 졸라서 일어난 일이고..더군다나 지금 당장 스승님께 드릴 것을 다시 말려야한단 말이예요!" 빠락 소리를 지르는 세실에게 기겁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펄쩍 뛰며 아이의 입을 막은 시종은 몸을 틀어 세실의 몸을 가리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이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허 참 이 백작가에는 철없는 아이들 천지로구나. 그러는 너는 누구냐?" "예. 저는 미천한 하인입니다. 전하." "이름을 물었다." "저...프레드라고 합니다. 전하." "그래? 그러면 프레드. 나는 지금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숨막혀 죽기 전에 손 놓고 물러서는게 어떻겠느냐?"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당돌하게 아이의 목숨까지 구걸하는 시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참으로 맑은 하늘이군. 피를 보기에는 좋지 않아. 물러나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황태자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종은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내리며 세실의 뒤로 물러섰다. 난데없는 심각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하던 세실은 웃음을 꾹 참고 있는 세바스티앙과 다른 기사들, 어깨를 들썩이는 황태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죽을 죄를 지었나요, 전하?" "푸하하하하하핫! 클클클" 세실의 겁먹은 목소리에 배를 잡고 넘어가던 황태자는 급기야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고 있는 세바스티앙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허리를 숙였다. "미치겠네......! 낄낄낄" 체신도 버리고 한없이 웃어 넘기던 황태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험험, 그래 프레드라고 했느냐?" "네...전하." "나중에 할 일이 없어지거든 궁으로 오거라. 이것을 보여주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네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테니 꼭 찾아오기 바란다. 이만 물러가라." 황태자의 손에 끼고 있던 작은 금반지를 받아든 시종은 꾸벅 절을 하고 사라졌다. 옆에서 멀뚱 멀뚱 서 있던 세실은 자신의 손을 잡고 앞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잠시 반항을 했지만 이내 황태자의 품에 안길 수 밖에 없었다. 조그마한 소녀를 한 팔로 안아든 황태자는 아이의 거친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쪽! "헉!" "싫으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태자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를 열심히 부벼대던 세실은 황태자의 작은 목소리에 손을 딱 멈췄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세실은 황태자의 뒤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바스티앙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아이의 뺨을 톡톡 두드려보던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살 좀 쪄라. 살 좀. 뼈밖에 없구나. 아바마마가 한 짓은 내가 용서를 비마. 결국 넌 황제의 여인이 될 것이니 그리 억울하진 않겠지..." 뒷말은 워낙 작아 제대로 알아들을 수 는 없었지만 세실은 앞으로 열심히 먹어서 얼른 살을 찌워 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한 번 세실의 뺨에 쪽 소리나게 뽀뽀를 해준 황태자는 찻잎이 떨어지면 또 올 것이니 많이 만들어두라는 말을 남기도 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백작부인의 침실에 있어야할 목걸이가 없어졌다. 목걸이는 백작가에 시집온 여인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것으로 미스릴과 사프릴 원석으로 만든 가치를 따질 수조차 없는 물건이었다. 때문에 백작부인의 처소를 드나들 수 있는 몇몇 하녀들 과 세실은 감옥에 갇혀 추궁을 받았고 얼마 되지 않아 다른 하녀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세실만 제외하고. 본적도 없는 목걸이를 내놓으라 닦달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기만 했던 세실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찾아온 크리스틴을 보며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목걸이는 분명히 있었다. 집안 어딘가에... 홀로 감옥에 남아 추위와 싸우던 세실은 쇳소리와 함께 창살문 너머에 나타난 크리스틴 백작 영애 를 보고 눈을 감았다. "목걸이를 어디 두었지?" "........." "너처럼 천한 아이를 이 집에 둘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아량이 결국 이런 일을 일으켰으니, 너는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을거야. 그렇지? 자, 말해봐. 목걸이를 어디 둔거지?" 바닥을 노려보던 세실이 얼굴을 들었다. 새까만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크리스틴은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아이를 보며 이를 갈았다. "아씨께서 아시겠지요. 제가 죽은 뒤에 내 놓으실 건가요? 그 전에 내 놓으실 건가요?" "뭐...뭐라구?" 크리스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세실의 입술이 비틀렸다.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는 백작영애를 아니꼽다는 식으로 노려보던 세실은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께 등장한 백작과 백작부인을 보며 표정을 지웠다. 감옥에 들와있는 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 던 백작은 크게 노하며 크리스틴을 돌려보냈다. 나가지 않으려던 소녀는 백작부인의 야단을 맞고 서야 밖으로 나갔고 세사람만 남아있는 감옥안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구 짓인지 모르겠느냐?" 백작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낮아졌다. 그로서도 이번 일이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재물 따위에 눈독을 들일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그 뿐 아니라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의 질문에 잠시 얼굴을 들었던 세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이것참....정말 너에게 누명을 씌울만한 사람이 누군지 모른단 말이지?" 백작은 세실이 누명을 썼다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작부인 역시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세실의 몰골을 살펴보았다. 목걸이가 없어지고 그녀의 방에 들어왔던 모든 하녀들을 잡아놓으라 이른 것이 아침나절이었는데, 벌써 얼마나 고초를 당했는지 아이의 얼굴은 온통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백작님, 우선 아이를 나오게 한 후 좀 더 조사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아이는 항상 저와 함께 있었어요, 제가 부르지 않으면 방에 들어올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으십니까?" "아오, 안단말이요. 내가 어찌 모르겠소? 허나 어제 오후에 저 아이가 부인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으니...이것 참..." 순간 백작부인의 눈이 번쩍 빛이 났다. "누굽니까? 누가 이 아이를 봤답니까?" "그것이..." 백작부인의 반색에 잠시 고민을 하던 백작은 세실이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낮은 목소리로 소곤 거렸다. "크리스가 봤답니다. 분명 어제 저녁을 먹기 전에 당신을 부르러 갔는데 저 아이가 방에서 나 오며 두리번거리는 것을 봤데요." ".........."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을 돌린 백작부인은 그 길로 딸아이를 불러내렸다. 하인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불려온 크리스틴은 그 자리에서 추궁을 받았다. "네가 세실이 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고?" "..........네...어머니." "거짓말 하지 마라." "어머니!" "세실은 내 부름없이 내 방에 드나들 아이가 아니다. 더군다나 어제 오후면 그 아이는 이 집에 있지도 않았어. 어찌 집에 없는 아이가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느냐? 감히 네가 거짓부렁으로 아이를 감옥에 가두었단 말이냐?" 백작부인의 노한 음성에 깜짝 놀라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바짝 들었다. "어머니께서 그 아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세요? 한낱 더러운 아이가 집에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세요? 어머니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 아이를 감싸려고 어머니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거라구요. 말씀해보세요. 그 목걸이 어머니가 주신 거 아닌가요? 네? 잃어버리신 게 아니라 그 아이에게 주신거죠, 그렇죠?" "크리스틴!" 자신이 아닌 그 꼴보기 싫은 아이를 두둔하는 백작부인이 원망스러운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대들 던 크리스틴은 아버지의 호통소리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바른 대로 말해보아라. 정말 네가 그 아이를 봤어? 정말 그러냐?" "네, 아버지. 저만 본 것이 아니예요. 한나도 같이 봤어요." "흡!" 뒤에 서있던 하녀들 중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궁지에 몰린 쥐가 내는 소리를 내뱉은 소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목을 움추렸다. "한나? 한나가 누구냐? 썩 앞으로 나오거라." 백작의 명령에 엉거주춤 앞으로 나온 아이는 이제 고작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크리스틴 백작 영애를 시중드는 아이로 제일 오랫동안 일을 해온 아이였다. 하녀를 보는 백작부인의 눈이 차가워졌다. "정말 보았느냐?"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으로 눈치를 보던 한나의 눈이 질끈 감겼다. "빨리 말을 해라, 정말 보았니?" "......네...네! 마님. 어...제....어제...저...저녁에...아씨를...모시고..올라갔는데...마님... 방에서..." "언제 보았느냐?" "네? ...그것이...저....저녁..." "저녁 언제?"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그림이...! "저..저...저녀..." "식사 전에요,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러 올라갔을때였어요." "네! 마님. 그렇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시라 말씀을 전하려 올라갔다가 방에서...마님 방에서 나오는 그 아이를 보...보았습니다!" 나이 어린 하녀의 절규와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백작부인은 딸아이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가 가증스러워 보였다. "그래서...그래서 그 아이를 만났느냐?" "네? 저...저..." "아니요, 어머니." "너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다! 한나에게 물었다. 내 방에서 나오는 아이를 보고 그냥 넘어갔다고? 이상하다 생각도 않고?" "그..그것이...저는...저는...잘..." "모른단 말이냐?" ".....네...마님. 저는 그저 아씨를 따라...그..." 하녀의 작은 어깨는 중풍을 맞은 듯 사정없이 떨렸고 창백하게 질린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소녀를 노려보던 크리스틴은 백작을 보았다. "아버지, 전 어머니께서 그 아이를 부른 줄 알았어요. 당연히 어머니께서 부르지 않으시면 집안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이니 그런 줄 알았죠. 그래서 그냥 두었어요." ".........."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얼굴로 딸의 당돌한 시선을 외면한 백작은 거실 중앙에 달린 수백개의 양초가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를 보며 내심 침음성을 삼켰다. 자신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딸에게 시선을 돌리 지 않던 백작부인은 내내 생각에 잠겨있었다. 백작영애가 보았다는데 누가 그것을 감히 거짓이라 하겠는가? 생각은 하고 있으되 입밖으로 내지는 못할 터였다. "한나라고 했니?"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하녀를 부른 백작부인은 감옥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새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음을 터뜨린 아이는 하인들의 외면 속에서 힘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집사는 지금부터 사람들을 시켜 이 집안 곳곳을 수색하세요. 어느 곳 하나 빠트리면 안돼요. 백작님의 방도..제 방도..영애의 방도...아시겠어요?" "어머니!" 백작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크리스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니?" 백작부인의 반문에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던 크리스틴은 이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어머니. 하지만 제 방은 하녀가 살펴보도록 해주세요. 부끄러우니..." 어느덧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돌리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14살 나이가 무색하게 아름다웠다. 그런 딸을 보며 불길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던 백작부인은 저 멀리 보이는 오두막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하지만 집안을 수색한다면, 그 아이가 머무르는 곳도 살펴보아야지요? 그래야 공평하지요. 그렇지 않나요, 어.머.니.?" "음......!" 백작의 입에서 결국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 모여있는 이들 중 바보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바보라 할지라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있을 터였다. 옥에 갇혀 있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던 백작은 슬픈 얼굴로 딸을 쳐다보고 있는 아내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쥐고 거실을 벗어났다. "미안하오, 부인. 면목이 없군..." "아니요, 백작님. 제 딸인걸요...이렇게 되도록 키운 것이 저이니...다만..그 분께...그 분께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내를 토닥거려주며 백작은 조용히 아이가 찻잎을 제배하는 텃밭을 내다보며 눈을 감았다. *************************************************************************************** 원래는 이런 설정이 아니었습니다. 살짝 말씀드릴까요? 크리스틴이 황태자에게 갈 찻잎에 독초를 넣는겁니다! 그래서 역모죄로 잡힌 세실이..어쩌구저쩌구 하려고 했는데, 박식한 세실이 찻잎에 섞인 불순물을 확인도 않고 누군가에게 줄리도 없고, 그 돌대가리 크리스틴이 그런 약초를 구별해낼 리도 없고 해서..부랴부랴 내용을 수정했지요. 이것이...그것입니다. 원래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콜록 뭐..단순한 사건으로 옆구리를 찌른 그런 배신이라고 생각하시고 넘어가주시어요..흑흑 그럼 죄스러운 마음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미르님께서 조언해준데로 앞으로 전통 무협지에서 자주 나오는 복선, 이 아닌 예시는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일들을 예상하면서 읽으신다구요? > < 자 그럼 다음 편에서...도도도도도돗~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팔려가다. 1. 그 시각. 백작부인이 찾던 그 분은 '드래곤 저리가라'하는 분노를 터뜨리며 서 있었다. "내 이것들을 갈아마시지 않으면 성을 갈겠다! 뿌드득!" "스승님...갈 성이라도 있으세요?" "너...!" 바짝 마른 입술로 베시시 웃는 제자를 울분에 찬 얼굴로 쳐다보던 샌들우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자는데 무슨 고집이 트롤보다 질긴 것이냐? 지금 당장 가자니까! 이런 집안에서 무엇이 아쉬워 버티고 있다는 거냐!" 세실의 저지로 창살을 넘지 못한 샌들우드는 아이에게 누명을 씌우고 들어온 하녀를 잠재우고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제자가 걱정되어 백작가를 기웃거 리던 샌들우드는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세실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작가 대대로 물려오는 미스릴로 만든 목걸이. 샌들우드는 세실이 감옥에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디텍트(Detect) 마법을 써서 목걸이를 찾았다. 바로 세실이 약초를 말리는 오두막안에서. 그것을 찾자마자 이곳으로 날 아와 당장 나가서 증명을 하자고 소리를 쳤지만 소용없다고 고개를 흔드는 아이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쩔 것이야? 그냥 이대로 죽을거냐? 그럴거야?!" 요즘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참으로 많이 생긴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세실은 스승의 손에 쥐어져 있는 목걸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것을...가지고 가세요. 스승님." "뭐라?" "가지고 가세요. 나중에 시간이 나시면...아니 아주 나중에 제가 부탁드릴때 백작부인께 그것을 전해주세요. 전 이곳을 떠날거예요. 그때 다시 돌려드리면 되요. 스승님 말씀대로 나갈때가 되 었나보네요." "........" 눈을 끔뻑끔뻑하며 제자의 말을 되새김질하던 샌들우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그냥 매 맞고 치우겠다는거냐?" "좀 시달리다보면 풀어주겠지요." "너 순진한거냐, 바보같은거냐?" "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널 그냥 풀어줘? 증인도 있네. 여기 이것 말이다. 응? 응? 그런데 나가? 어딜 나가? 무슨 힘으로? 어떻게 말이냐?" "글쎄요...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걸 제 오두막에서 못 찾으면 전 나갈 수 있을거란 생각 이 들어요. 그냥...그래요, 스승님." "허어...너 정말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그렇지?" "네." "미치겠네~" 새하얀 서리가 내린 머리를 긁적이던 샌들우드는 이 고집불통 제자를 잠재워서 데리고 나갈까 고민을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저 성질에 그런 짓을 하면 분명 수염을 다 뽑아 놓을 것이 분명했다. 누명이 벗겨지기까지 죽어도 나가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이리 저리 서성이던 샌들우드는 피멍이든 아이의 얼굴을 치료해주려고 했지만 그것도 거절당했다. "자꾸 마법을 쓰면 면역력이 약해져요, 스승님." 두 번 다시 저런 말을 쓰면 마법사라 아니라고 울부짖던 샌들우드는 어서 가라는 제자의 말에 눈물을 머금고 텔리포트를 시전했다 ....는 것처럼 보였다. 텔리포트 대신 일루젼을 스스로에게 건 샌들우드는 플라이(Fly)를 써서 바닥에서 발을 땐 후 벽으로 가서 얌전히 떠 있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제자가 무사히 이곳을 나갈 때 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섭섭한 얼굴로 사라진 스승을 찾으려는 듯 빈 허공을 주시하던 세실은 한숨을 내쉬며 잠이든 하녀를 보았다. "좀 깨워주고 가시지...그대 꿈에서 일어날지니. 어*웨*이*크*(Awake)" "우웅..." 눈을 비비며 하녀가 일어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샌들우드는 터질 듯 심장을 부여잡았다. 제자가 마법을 시전하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저렇게 택도없는 것 까지 마법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못했다. 한마디로 세실의 마법은 상식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어웨이크awake?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동어였다. '아니, 아니지. 들어는 봤지. 엘프어로...일어난다. 일어나라? 그런 뜻이었나?' 제자가 사용하는 시동어의 근원이 엘프어란 것을 알아낸 샌들우드는 후에 오두막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세실에게 가르쳐준 엘프어를 다시 한 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새삼 세실의 능력을 감탄하던 샌들우드는 잠시 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들어온 예쁘장한 아이를 보며 마나를 모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듯 보이는 소녀는 대뜸 철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세실의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어디다가 숨겼어! 어디야? 빨리 바른데로 말하지 못해? 어디다 숨겼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조그마한 아이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다, 벌떡 일어나 발길질을 하는 아이를 보며 이를 갈던 샌들우드가 조용히 마법을 시전했다. "그만!" 세실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엉겹결에 발을 멈춘 크리스틴은 벽을 쳐다보며 애원의 눈길을 보내는 세실을 보며 얼이 빠졌다. "그만하세요, 스승님." 놀란 것은 크리스틴 뿐 아니라 샌들우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똑바로 쳐다보며 부탁을 하는 세실을 넋놓고 쳐다보던 샌들우드는 제자의 작은 속삭임에 주문을 외우던 마법은 그만두고 다시 일루젼을 걸었다. "수염이 삐져나왔어요..." 샌들우드가 세실의 능력에 제삼 감탄할 때 크리스틴의 눈은 파랗게 타올랐다. "너 따위것이 감히! 감히! 날 능멸한다 이거지? 오냐, 그렇게 소원이라면 내가 죽여주마!" 쫙! 쫙! 쫙! 백작을 닮아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툼한 손으로 인정사정없이 세실의 뺨을 갈기고 있는 크리스틴 은 자신의 뒤에서 죽음의 사신이 칼을 갈며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주머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내든 샌들우드는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만행을 작은 구슬안에 조용히 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넌 죽은 목숨이다, 크리스틴 폰 배너. 제자는 참아도 나는 못 참는다. 네가 엘의 딸이라해도 마찬가지야. 내 목숨보다 귀한 아이를 이렇게 괴롭힌 것, 두고두고 갚아야 할 것이다. 이 샌들우드 라 폰차르크. 목숨을 걸고 맹세하나니 너 크리스틴 폰 배너 영혼의 굴레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영원한 소멸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백마법사로는 있을 수 없는 저주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두고 두고 보려는 듯 그 끔찍한 장면들을 수정구에 담으며 기다렸다. 세실의 입에서 도와달라는 말이 나올 때 까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정신없이 세실을 내려차고 쥐어뜯고 손찌검을 하던 크리스틴은 어느새 달려온 시종에게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앞으로 이년에게 밥은커녕 물 한 방울 주지 마라. 목걸이가 어디 있는지 말할 때까지 어떤 것도 주지 말아! 그리고 매일 채찍질을 해라. 입을 열 때까지 매질을 해!" 이를 갈며 명령을 내린 크리스틴은 쓰러져있는 아이에게 침을 뱉은 후 등을 돌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하녀, 한나를 데리고. "세실, 큰일이다. 큰일이야. 목걸이가 없다. 목걸이가 없었어! 집안 어디를 찾아봐도 목걸이가 안나온다. 백작님도 백작마님도 노하셔서...!" 백작영애가 나가자마자 옥에 뛰어들어온 시종, 프레드는 아이의 찢어진 입술을 떨리는 손으로 닦아주며 연신 입을 놀렸다. 그토록 찾아 헤매는 목걸이가 그와는 겨우 3피텐(1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노인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찢어지고 피멍이 든 눈을 겨우 뜬 세실은 똑똑히 보았다. 작은 수정구와 미스릴 목걸이를 양손에 들고 허공에 붕 뜬 채로 분노에 떨고 있는 스승을. 일루젼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스승의 모습을 어찌 볼 수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그것이 더욱 세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자신이 스승님을 볼 수 있는 것 처럼 그녀의 스승 또한 자신이 매맞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는 것. 그것이 세실의 가 슴에 피멍을 만들고 있었다. '제발...가세요, 스승님.' 제자의 말없는 부탁에도 샌들우드는 핏발선 눈으로 세실의 몸 상태를 하나하나 담아두며 석고상처럼 떠 있었다.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두 눈을 부릅 뜬 채 세실을 직시하며 그렇게 샌들우드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또 몇 일. 그 동안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하고 매일 채찍질을 당하는 세실을 찾아온 크리스틴은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냐? 어디 있어? 분명히 그곳에 갔다 두었는데...어디 둔거야! 빨리 대답해! 빨리 대답하란 말이야!" 악에 받힌 크리스틴의 말에 감겨져 있던 세실의 눈이 스르르 열렸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만을 기다렸다. "어디에 두셨는데요...?" 까칠한 목소리로 반문하는 세실을 쳐다보던 크리스틴이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잇새로 으르렁 거렸다. "너도 알지? 분명히 한나는 오두막에 목걸이를 두었다고 했어. 분명히 내가 그 아이에게 목걸이를 줬고 그 아이는 오두막에 널어놓은 찻잎 사이에다 그것을 숨겨놨다고 했어! 그런데 어디있는거야? 빨리 대답해! 어디다 숨긴거냔 말이다!" 세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몇일동안 제자와 함께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샌들우드는 눈을 감았다. '이것이었느냐? 네가...기다리던 것이 이런 것이었느냐?' 어차피 들을 사람이 없으니 죄가 없음은 증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실은 스스로가 무죄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에게서 직접 그것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쿨럭, 아씨는 참으로 이상하시군요. 아씨가...숨겨둔 것을...제게서 찾으시면 어떻하십니까? 가서 잘 찾아보세요. 한...나...언니..가...쿨럭...잘..못...안 것일...수도...쿨럭..있지 않..겠어요?" 기력이 다하는 것인지 빛이 스러져가는 눈으로 크리스틴을 직시하며 힘겹게 말을 잇던 세실은 눈앞이 번쩍하는 순간 별을 보았다. 쫘악~! "너 따위 것이! 너 따위가! 감히...이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그것이 어떤 것인데...그것이 어떤 것인데! 빨리 말해! 빨리 말하라구!" 찢어진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하지만 세실의 입가에 달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몇 미르,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진 아이를 때리고 또 때리던 크리스틴은 제풀에 지쳐 씩씩대며 물러갔다. "아가...아가...가자. 이제 가자. 이제는 되었지 않느냐? 가자. 이 늙은이랑 이 더러운 곳을 어서 나가자..." 샌들우드의 물기가 담긴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뜬 세실은 스승의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뻗었다. "스..승님...조금만 쉬었다가...그러고 가요....아직..마님도 못 뵈었고...세바스티앙 아저씨도 못 뵈었고...조금만 있다가..그리고 가요." "치료는...치료는 해야지?" 세실의 얼굴이 조금 흔들렸다. 스스로도 할 수 있으나 참은 것이다.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이 곳을 걸어나갈 수 있는 순간을... 참담한 심정으로 제자의 찢어진 손을 꼭 잡고 있던 샌들우드는 끝내 눈물을 보이며 사라졌다. "짐을 싸놓으마. 네가 좋다면 어디든 갈 것이다. 세상에는 볼 것이 참으로 많다. 유람을 다니는 것도 좋겠지. 아무렴...기다리거나. 내 가서 짐을 싸 올테니.." 차마 눈물을 보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웅얼거리듯 말을 끝낸 샌들우드는 텔리포트로 사라 졌다. 샌들우드가 사라진 후 조금 뒤에 백작부인이 들어왔다.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지 초췌한 얼굴로 감옥으로 들어오던 백작부인은 세실의 몰골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뛰어왔던 하인들은 백작부인의 명으로 세실을 방으로 옮겼다. "어서 가서 신관을 모셔오너라, 어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리의 방에 옮겨진 세실을 따라온 백작부인은 손가락까지 피멍이든 아이의 거친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신경을 못 썼구나. 그놈의 목걸이 때문에 너를...신경을 못썼어. 미안하다. 마안하다, 세실!" 아이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백작부인은 잔뜩 굳은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온 백작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어쩌지요? 이제 어떻합니까? 목걸이는 없어요. 목걸이는 없고 이 아이는 이렇게 병이 들었는데, 이제 어떻합니까, 백작님!" 안타까운 마음에 원망을 담아 소리를 지르던 백작부인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세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백작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크리스틴이 들어왔다. "어머니, 어째서 또 이 도둑년을 감싸시는 거지요? 아직 정신을 덜 차렸으니 매질을..." "닥쳐라!" 뾰족한 목소리로 재잘거리던 크리스틴은 백작의 외침에 입을 닫았다. 놀란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아버지의 눈에 담긴 살기를 보고 뒷걸음질을 쳤다. "당장...당장....이곳에서 나가거라.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아카데미로 돌아가! 내가 부를 때까 지, 절대로 돌아오지 마라. 입도 뻥끗 하지 말고 당장 짐을 싸거라. 나가!" 백작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뒷걸음질을 치던 크리스틴은 애원이 담긴 눈으로 백작부인을 보았지만 그녀는 딸의 애원을 거부했다. "아버지 말씀을 들었으면 짐을 싸거라. 오늘 중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할거다. 다음 방학때도 돌아올 필요 없다. 우리가 부르지 않는 한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은 버려라. 나가보거라." 차가웠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은은한 냉기에서 느껴지는 숨길 수 없는 분노에 크리스틴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문을 닫고 나왔다. "분명 그것이 어딘가 숨겨놓았을텐데...아니면 팔아버린 건가?" 이미 백작이 온 천하에 배너 백작가의 가보인 목걸이를 찾아주는 이에게 거액의 상금을 내린다 는 명을 내려 보석상회와 도둑길드에서부터 정보길드까지 목걸이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모르는 크리스틴은 분명 세실이 자신이 숨겨둔 목걸이를 팔았을 꺼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보다 내가 먼저 찾아야 해. 그래야 그것을 없앨 수가 있어!'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평민 따위가 귀족가에서 하녀도 아닌 식객 대접을 받는 것도 싫었고, 아버지의 신임을 받으며 어머니의 귀여움을 받는 것도 싫었다. 자신만 보면 어깨를 움츠리며 자리를 피하는 하찮은 것들이 그 볼품없는 것을 감쌀 때면 얼마나 짜증이 났었던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집안을 보나, 무엇을 보나 자신이 그것 보다 나아도 훨씬 나은, 아니 비교조차 못 할 정도로 고귀한데 그런 것을 감싸며 베베도는 모든 상황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그 눈!' 티끌한 점 없는 맑고 검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속마음을 다 꾀뚫어 보는 듯 하여 소름이 돋았다. 마치 그 천한 것에 비해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 같아 더욱 싫었다. 거기다 자신에게는 개망신을 주던 황태자가 보이던 그 태도! 안아들고 뺨에 입까지 맞추어주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나가 두 사람을 떼어놓고 그 가증스러운 것을 갈갈이 찢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 천하디 천한 것의 비후를 맞추어주는 백작 때문에 참았다. 그리고 고민을 했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설마 그 목걸이가 없어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심혈을 기울여 쌓은 공든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절망감을 느끼며 뒤돌아서던 크리스틴의 눈에 급하게 달려오는 집사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네, 아가씨. 밖에 왠 사내가 와서 딸을 내놓으라고..." "딸?" "그것이...그 사람 말로는 딸이...세실이라고 하는데..." 크리스틴의 눈이 일순 반짝 빛났다. "그래? 내가 나가서 만나보지." "네? 저기...백작님께..." "그럴 것 없다. 내가 가서 만나보면 돼. 지금 그 아이는 정신을 잃고 있으니 내가 갈 것이다." 부모님을 방해하지 말라고 집사에게 주의를 준 크리스틴은 문밖에 서 있는 지저분한 남자를 보며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살포시 친근한 미소를 머금은 크리스틴은 코끝을 찔러오는 숨막히는 악취를 꿋꿋하게 참아내었다. "네가...세실의 아비라고?" 몇일을 세수도 하지 않았는지 더러운 몰골을 하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가슴까지 밖에 오지 않는 작은 여아(女兒) 대뜸 반말을 지껄이자 잠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이내 허리를 꾸벅 숙이며 머리를 좋아렸다. "그렇습니다, 아씨. 제가 세실의 애비되는 놈입니다요." 정말 무식이 철철 흘러넘치는 말투였다. 문득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이 슬쩍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래, 여기는 무슨 일로 왔지?" "네, 아씨. 사실은 제 딸이 도망을 가서 잡으러 왔습니다. 감히 애비를 내팽겨치고 도망을 갔습지요. 잡아다가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 "그만, 되었다. 네 말이 사실이지?" "어찌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요? 고것을 찾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신발이 다 너덜해 졌습니다요." 그러고 들어보이는 허름한 가죽신은 그의 말대로 밑창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스물스물 기어오르자 얼른 고개를 돌린 크리스틴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난 지금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는데...' 반짝이는 눈으로 탐욕스러운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크리스틴은 생선을 앞에 둔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속에 넣어두었던 황금을 두 덩어리 꺼내어 사내에게 던졌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누런 황금을 멍하니 쳐다보던 사내는 문득 고개를 들어 귀족가의 여식을 보았다. "이게...무슨...?" "집 앞을 지키고 있다가 아이가 나오거든 데리고 가라. 난 지금 아카데미로 떠나야 하니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하녀가 데리고 나갈 것이다. 기다렸다가 잡아가든 끌고가든 그것은 네 마음 이다. 지금은 못 나올테니, 있는 곳을 말해주면 하녀를 보내주마." "아이구, 아씨. 감사합니다요. 저는 지금 「붉은 장미」라는 여관에 묵고 있습니다요. 그곳에 서 마크를 찾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씨." "그래? 그러면 가서 기다려라. 세실이 일어나는데로 하녀가 소식을 전해줄거야. 그 후에 문앞을 지키고 있다가 아이가 밖으로 나가면 데리고 가면된다. 알겠느냐?" "네. 네. 아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하던 마크는 어느새 크리스틴이 없어진 것을 보고 군침을 흘리며 바닥에 떨어져있던 황금 덩어리를 주워들었다. "흐흐흐흐..이것만 있으면...꿀꺽...그년도 찾았겠다..이제 팔기만 하면...흐흐흐흐" 황금을 이로 깨물어도 보고 볼에 비벼도 보던 마크는 저 멀리서 몇 명의 신관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얼른 허리를 숙였다. "여기서 뭘 하는거요? 당신 누구야?" 시종의 호통소리에 머리를 조아리던 마크가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예? 아..아닙니다, 일자리가 없나 왔다가...지금 가는 길입니다. 예. 지금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얼굴을 숙인 채 뒷걸음질을 치던 마크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걸음아 나살려라 하면서 재빨리 백작가를 벗어났다. 그 꼴을 보며 인상을 쓰던 시종은 신관을 모시고 저택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의 방안으로 들어간 신관들은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를 일견하고는 모든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치료하는데 방해됩니다." 그 말에 엉거주춤 일어난 백작부인과 백작은 자리를 피해주었고, 말없이 문이 닫기기만 기다리던 신관들은 잠시 후 얼굴을 덮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카일과 그레고리였다. "괜찮겠습니까, 대신관님?" "이정도로 죽을 아이라면 벌써 열댓번은 죽었을테지, 걱정하지 마라." "그럼 치료를..." "재촉하지 마라. 네 아무리 우리 신전의 은인이라 해도 이 늙은이를 독촉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 "대신관님!" "험험, 알았다. 원 녀석도..." 원래 친분이 있었던 것인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던 그레고리는 살벌한 카일의 눈초리에 침대 가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깡마른 손을 내밀어 아이의 이마를 쓸어보던 그레고리 대신관은 보라빛으로 멍이 들어 있는 반듯한 이마 사이에 빛나는 금빛 광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시여...너무하시는거 아닙니까? 이 작은 아이를 얼마나 크게 키우시려 이런 고통을 선사.. 콜록" 투덜거리던 그레고리는 이마에 닿아있는 손에 정전기가 일어나자 얼른 입을 닫았다. "듣고...계셨습니까? 그러면...보고도 계시겠지요? 왠만 하면 이쯤에서 끝내주십시오. 네? 60평생 이카루스님을 모셔온 죄 많은 양의 부탁 좀 들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라면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랍니다. 아니면 이왕 축복을 주신거 몇 개 주심이..." 『준비해 두었다. 아이야.』 "네?" 『……』 뭔가 의심스러운 말을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린 그레고리 대신관은 아이의 이마를 만지작 거리며 계속 중얼거렸다. "험험 아무튼 이 아이를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은 이게 끝이였으면 좋겠습니다. 헛헛. 이 겁많은 심장이 버텨나질 못하니...제 기도 오래 받으시려거든 시련은 이제 그만 주시는 것이.." 『이것이 끝이요, 시작일 것이다. 아이야.』 그레고리 대신관의 낯빛이 변했다. 이제껏 평생을 신을 모시는 사자로 살아왔지만 이토록 명확하게 이토록 똑똑히 신의 음성을 들은 적은 없었다. 신탁을 받아도 그것은 뇌리에 새겨진 것이지 귀에 들린 것은 아니었다. 헌데 지금은 바로 옆에서 들은 듯 신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깊은 감동에 휩싸여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리던 그레고리 대신관은 카일의 목소리 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작은 기도를 올렸다. "죄사함은 이카루스의 뜻이오니, 그 모든 것은 신의 의지대로 이루어지소서. 다만 이 작고 어린양 신의 품안에서 숨쉬고, 뛰어놀 수 있도록 해주십사..." "그거 종부성사 아닌가요?" 종부성사 사람이 이카루스의 곁으로 갈 때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눕혀두고 신의 품안에서 뛰어노니 마니 하는 신관을 미덥잖은 듯 쳐다 보던 카일은 그레고리의 살벌한 눈초리에 고개를 숙였다. "니가 기도할래?" "..........." "험험, 어디까지 했더라? 그래...해주십사..." 그 순간 기다리다 지쳤는지 아이의 이마에서 은은한 광채가 빛을 발하며 서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작은 마름모꼴의 인장에서 시작된 빛은 아이의 몸을 감싸며 순식간에 상처를 치료하고 몸 안으로 사라졌다. 파앗~! 기적의 순간을 두 눈으로 확인한 카일은 입을 쩍 벌렸다. "우와....대신관님 신성력이 더욱 높아지신 것 같네요? 어떻게 기도도 하기 전에...!" 상처자국 하나 없이 깨끗해진 아이의 얼굴을 보며 감탄을 하던 카일은 보지 못했다. 카일보다 더욱 충격 받은 그레고리 대신관의 얼굴을... '제...기도가 그렇게 듣기 싫으셨습니까. 이카루스여.' 아마도 이번에 다시 신의 말이 들려왔다면 이런 대답이었을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아...』 . . 잠시 후, 치료가 끝났다는 말에 방안으로 뛰어들어온 백작부인은 세실의 맑은 웃음에 눈물을 터뜨렸다. 딸아이의 만행을 확신한 백작 역시 몸둘바를 몰라 하며 지금 당장에라도 원한다면 자작가나 황궁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몸을 추슬러야한다는 백작부인의 말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세실은 주방장의 특별식을 먹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굶었던 터라 묽은 스프와 부드러운 빵 뿐이었지만 주방장은 최상의 재료로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다. 덕분에 다시 홍조를 되찾은 세실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휴식을 취했다. 그러한 세실을 살펴본 후 혼자 방안에 오도카니 앉아 목걸이의 행방을 고민하던 백작부인의 앞에 샌들우드가 나타났다. "스승님!" "........" 말없이 백작부인을 쳐다보던 샌들우드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수정구를 그녀의 무릎위에 올려 놓았다. "리플레이*더*메모리(replay the memory)" 그리고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영상들... 열흘에 걸쳐져 세실에게 행해진 가혹한 행위들을 지켜보던 백작부인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찾아왔던 크리스틴. 두 아이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은 백작부인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음을 확인하며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제가...제가...자식을 잘못 키워...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용서하세요, 스승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묵묵히 백작부인을 내려다보던 샌들우드는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를 꺼내 백작부인에게 던져주고 수정구를 회수했다. "이것은...?"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만지다 고개를 든 백작부인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샌들우드를 찾으며 또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의 분노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시 찾아와 모든 것을 밝혀준 것 만해도 감읍할 따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백작부인은 손안에 느껴지는 낯이 익은 감촉에 얼른 속에 들어 있던 것을 꺼내보았다. "이...이것은...!" 청록색 광채를 내는 육각형의 보석이 박혀있는 목걸이. 원석을 감싸고 있는 금속은 분명 미스릴이었다. 백작가의 문양인 늑대가 뒷면에 새겨진 것까지 확인한 백작부인은 백작이 있을 서재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백작부인이 사라진 내실. 사라졌던 샌들우드가 무심한 눈길로 나타났다. "이것으로...너와 나 사이에 이어졌던 인연은 끝이라 생각한다. 엘리자베스 디 카만." 잠시 눈을 감고 과거 남작가의 여식이었던 제자를 떠올려보던 샌들우드는 탄식을 했다. "앞으로 내가 행할 모든 일들은 너의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입을 막는 것이되, 딸아이의 잘못은 그 아이뿐 아니라 너와 네 가족 모두의 업이 될 것이다. 사랑하던 제자 엘아...부디..." 끝말을 맺지 못한 샌들우드는 착잡한 시선으로 백작부인의 침실을 둘러보고 밝은 빛 속으로 사라 졌다. **************************************************************************************** 흠.. 오늘은 여기까지 올릴까 합니다. 혹시 모르지요, 밤새워 써둔 글이 있으니.. 리플보고 혹하면 또 일을 저지를지도...쓰읍~ 아무튼 제 부탁에 꼭꼭 리플 달아주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드리옵니다. alf님께서 남기셨던 *^^* <---리플... 결코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간나시면 비평란 한 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코코님께서 남기신 글이 있는데... 제가 살면서 그처럼 짧고 명쾌하고 쪽팔리는 추천글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콜록 (> < )b 이 부족한 글에 그처럼 금칠을 해주신 코코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구여 > < 이번 기회에 또 이벤트나 해볼까요? 또? 아시는 분은 아시지요? 제목 만들기...ㅋㅋㅋ <제목> 이벤트를 열겠습니다. 20회를 넘긴 기념으로...상품은...이 글이 완결나면 원고를 보내드리지요. 책으로 찍어낼 능력은 없으니 부족하나마 제가 글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부족한가요? - -a 음음 그럼 내일...다음편에서 뵙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팔려가다. 2. 마르보 드 카르민 자작가. "큰일났어요, 레니! 빨리 빨리!" 시장에 장을 보러 가던 하녀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빨래를 하고 있던 레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야? 왜...?" "오늘 시장에서 글쎄 마크를 봤는데!" "그...그래서?!" 잠시 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던 하녀는 무엇이 두려운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글쎄, 아주머니 남편 마크가 세실을 찾았데요! 그래서 벌써 그 아이를 데리고 갈 노예상하 고도 계약을 끝내고 선금도 받았다고...! 붉은 장미라는 여관에서 황금을 내놓고는 그 백작 가 아가씨에 받은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네요. 거기다 딸을 데리고 가라고 황금을 두 덩어리 나 받았다고 하는데...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같이 있는 사람은 분명 노 예상이 맞더라구요! 어떻게 하죠, 레니? 가서...세실을 데리고 와야...레니!" 갑자기 등을 돌려 저택 밖으로 달려나가는 레니를 말려보려던 하녀는 곧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을 빼앗겼다. 헐레벌떡 시장으로 나온 레니는 다시 [붉은 장미]라 쓰여진 허름한 여관으로 뛰어들어갔다. 우락부락한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여관안을 둘러보던 레니는 넉넉한 인상을 가진 잘 차려입은 중년의 사내와 술을 나누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있는 남편을 보며 이를 갈았다. "아니...이건 또 누구야? 복덩어리가 굴러들어오더니만 도망갔던 여편네도 나타났네?" 마크의 말에 어느 누구도 웃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 치고 그가 자신의 자식들을 팔아먹고, 순진한 아낙을 꼬셔와 피를 빨아먹고 살았 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또한 뜨네기 용병들 또한 이 여관에 와서 그가 떠벌리는 이야기들-도망간 딸년을 잡아올테니 선금을 내라는 말 등등-을 들은 이들조차 그를 사람취급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망갔던 여편네'를 운운하는 말에도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당신이 사람이야!? 당신이 사람이냐구! 이 짐승보다 못한 자식! 내가...내가 세실을 팔려가도록 놔둘 것 같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치던 레니는 끝내 손에 잡히는 술병을 들고 마크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미쳤나...?" 휘익~퍼벅! 쨍그랑! "아악!" 애초에 가냘픈 여자가 건장한 사내의 힘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달려가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날아가 구석에 처박힌 레니는 피를 꾸역꾸역 쏟아냈고 손놀림 하나로 레니를 해치운 마크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옷을 탈탈 털며 자리에 앉았다. "아, 그러니까 하녀가 온다니까요? 분명히 아가씨가 황금을 주면서 하녀를 보내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데리고 가라고 했다 이겁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습니까? 한두 번 거래도 아닌데...그러지 말고 선금으로 술값만 좀 주십시오. 고년이 제 어미를 닮아..." 벌써 몇 나르째 노예상에게 선금을 달라고 떼를 쓰던 마크는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지고 뭔가 끈적끈적한 것이 이마에 흘러내리자 손을 들어올렸다. 검고 붉은 끈끈한 액체를 본 순간 고개를 돌린 마크는 자신의 아내가 커다란 술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레니의 몸통 크기만 했고, 아랫부분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쌍소리를 하며 벌떡 일어선 마크는 자신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솥뚜껑 만한 손을 휘둘러 레니의 작은 머리통을 내리쳤다. 빠악! 털썩. 그것이 시작이었다. 주먹 한방에 바닥에 쓰러져있던 레니는 온몸이 부러지는 고통을 겪었다. 온갖 쌍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내를 사정없이 내려치던 마크는 그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내들 때문에 물러나야했다.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는 마크를 사내들이 잡고 있는 사이 여관 주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인을 안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신전을 찾아가려던 주인은 레니의 작은 목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시...시간...이...없어...요...정..보...길...드..아니...마법사...길드....." "어디요? 어디로 가고 싶은거요?" 사건의 전후를 알고 있는 주인은 지금 이 여인이 가고자 하는 곳이 딸아이를 위한 곳이라 확신 했다. 그리고 그가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흑...마..법..." "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에 망설이던 주인은 여인의 눈에 담긴 처절한 한을 읽고 마법사 길드로 발걸음을 돌렸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지금 여관 주인 은 레니라는 여자가 흑마법사를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 맹세하고 또 맹세하고 있 었다. 그녀처럼 이제 12살 난 딸자식이 있는 그는 앞서 낳은 아들뿐 아니라 멀쩡하게 잘 살아 있는 딸아이까지 팔아넘기려는 그 더러운 사내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무슨? 여기는 신전이 아닙..." "흑마법사가 있소? 흑마법사를 찾소! 서둘러 주시오!" 마법사 길드의 안내를 하고 있던 견습 마법사는 피에 절은 여인을 안고 뛰어들어온 중년의 사내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다 비상벨을 울렸다. 잠시 후 길드의 책임자인 5써클의 마법사, 크로네가 뛰어내려왔다. "무슨 일인가?" "흑마법사를 찾는 답니다." "뭐라?" 별로 흔하지도 않은 마법사 길드로 찾아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보기 힘든 흑마법사를 찾는 다는 사람들을 쭉 살펴보던 마법사는 사내의 품에 안겨있는 여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큐*어(Cure)" 밝은 오로라가 레니의 몸에 스며들어 상처를 치유했지만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그녀의 거친 숨결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참 신전으로 갈 것이지..." "마법사님, 제발 흑마법사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 여인은 꼭 흑마법사를 봐야 한답니다. 제발....!" 타인의 일을 제 일처럼 아파하며 마음을 졸이는 사내를 주시하던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견습 마법사를 보았다. "그곳으로 보내주게." "선생님....!" "보내줘. 책임은 내가 지지. 얼마 남지도 않아 보이는데...내 능력 밖이야. 단, 자네는 남게." "저..요?" "그래. 요금 계산은 해야지?"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사내는 자신의 품속에서 딸의 이름을 속삭이며 사경을 헤매는 여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알겠습니다." 사내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크로네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레니를 안아들고 마법진 위에 올려놓았다. 좌표가 적힌 책을 펼쳐들고 서 있던 견습 마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동어를 외치자 마법진 주위에 놓여져 있던 마나석이 요동을 치며 마법진에 눈부신 빛이 흘러 나왔다. "텔*리*포*드" 마법진 위에 누워있던 레니가 소리도 없이 안개처럼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는 한 쪽 손바닥을 내밀고 서 있는 견습마법사를 보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사내는 자신 의 주머니를 뒤적이며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놓았다. "헌데..도대체 무슨 일인가? 흑마법사를 찾다니?" ============= 흑마법사는 백마법사의 존재보다 더욱 희귀했다. 마나운용과 수식만을 연구하는 백마법사와는 달리 흑마법사들은 모든 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 마법이 발전하고 이종족들이 살고 있던 시절에는 백마법사가 흑마법사보다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알려진 바로는 흑마법사란 존재는 어둠속에 존재하는 마족과 계약을 맺어 마법을 발휘하는 것으로 많은 이들의 배척을 받으며 천시받았다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옛 이야기 일 뿐이었다. 지금의 흑마법사들은 오히려 백마법사들 보다 더욱 귀하고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마족과 계약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금술이라 하였다. 해서 마나 운용과 수식의 계산 뿐 아니라, 연금술에 대한 지식도 상당량 쌓지 않으면 흑마법사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에 숨어들어가 자신의 지식을 쌓고 목숨을 건 실험을 행했으며, 끊임없이 연구하는 존재로 존경받고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수십 년 전 바이오니어국의 인접국隣接國인 로레얼에서 유행했던 돌림병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은 순식간에 한 마을 전체를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사람뿐 아니라, 가축과 심지어는 그들이 기르던 풀과 곡식들까지 병들게 했던 그 병은 점차 영역을 확산하며 로레얼 전체를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다. 헌데 그 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흑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돌림병이 돌고 있는 곳에만!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아무튼 돌림병이 도는 곳에 모여든 흑마법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며 병인을 연구했다. 그리고 몇 달후. 로레얼 전체를 뒤덮고 있던 질병은 창백한 얼굴에 쾡한 눈을 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노마법사가 가지고 온 수백 개의 약병으로 해결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흑마법사에 대한 칭찬은 더욱 높아갔고 신전과 마법사 길드에서도 존경심을 표 했던 일이 있었으나, 그들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이런 저런 일로 소수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흑마법사들이었으니 쉽게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이들이었고, 그런 존재에게 보내진 레니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을 잡았는지 알 수 없 을 터였다. 어쨌든 지금 마법사 길드에 의.뢰.를 했다는 이유로 눈물을 머금고 돈을 건네주었던 여관 주인은 어느새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레니의 이야기를 열심히 떠벌리고 있었다. 그가 주었던 손때 묻은 동전들은 어느새 주머니로 다시 돌아와 있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열심히 이야기를 경청하는 수련 마법사는 차를 끓이는데 여념이 없었다. 또한 안 듣는 척 하며 사내의 앞에 앉아 멍하니 고개를 들고 천장을 쳐다보는 크로네는 연신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내가 내린 선택은 옳았어. 암...옳았고말고...' 레니의 인생역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흑마법사라는 존재를 찾아온 신기한 손.님.을 구경하러 왔던 마법사 길드의 모든 사람들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일부는 코를 훌쩍이며, 일부는 이를 갈며, 어떤 이들은 살기를 피워 올리며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몇 잔의 차로 입을 적신 사내는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다 벌떡 일어났다. "앗차!" "뭔가? 뭐야? 뭐 잊은 것 있나?" "그 마크라는 놈이 말하기는 백작가에서 하녀를 보낸다고 했는데! 제가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오, 그렇군. 그래. 어서 가게. 아니다. 마법진으로 보내주겠네. 장미여관이라고 했지?" "붉.은.장.미.여.관입니다." "암튼 알았네. 저기 가서 서 있게나. 갔다가 소식을 가지고 꼭 돌아오게. 우리 마법사들이야 체력이 영 딸리니...부탁하지." "물론입니다. 마법사님. 공짜로 이런 일까지 해주셨는데 그 정도야 뭐..." "아닐쎄, 아니야.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는 게야. 준비되었느냐?" "네, 선생님." "그럼 가보게." "감사합....." "텔*레*포*트" 서로 인사를 하느라 바쁜 가운에 견습 마법사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주문을 외웠다. 따가운 눈총에 샐쭉 하던 견습 마법사는 두꺼운 책을 탁 덮으며 소리쳤다. "인사하다가 늦으면 어떻게 해요?" "험험. 그래..그렇지. 잘했군. 그래 소식이 오면 연락하고...이만..."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마법사들이 하나 둘 사라지자 크로네와 견습마법사만 남았다. "선생님, 어떤 소원을 빌까요?" "소원?" "계약 말이예요. 레니라는 아줌마 분명 남편을 죽여달라고 하겠죠?" "글쎄다...그럴 거면 이곳이 아니라 암살 길드로 가지 않았겠느냐?" "아...맞다." "그리고 그분들 성정을 생각하면...글쎄...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지?" "헉! 설마...." "그래...나도 그것이 걱정이다. 전후사정을 알고 나면..." "꺄아아앙~" "무슨 의미냐?"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구요. 그 무시무시한 존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온 몸에 소름이......." "너....변태였구나." "............." 마법사 길드의 한 켠에서 이루어진 대화의 주인공은 그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존재와 만나고 있었다. 내장을 쏟아내던 핏덩어리들은 이미 멈췄고 호흡도 평온해졌다. 의식을 되찾고 주 위를 둘러보던 레니는 아무도 없는 깜깜한 공간임을 확인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세실...세실...흑흑....세실..." 딸아이의 이름만을 한없이 중얼거리며 울고 있던 그녀의 귀에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실이 누구야?" "글쎄...." "아이야, 세실이 누구냐?" ".........." 멍하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레니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물음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희망을 보았다. 딸의...미래를 보았다! "아 글쎄, 세실이 누구냐니까?" "저...흑마법사...세요?" "그건 또 뭐야, 먹는 거냐?" "장난하지 마라. 이놈아. 저 아이 몰골을 보면 모르겠냐? 그래 우리가 흑마법사다. 그런데 세실이 누구냐?" 참으로 끈질겼다. "딸..입니다." "딸?" "네, 이제 열두 살이고 지금은 백작가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제 딸아이를...살려주세요!" "엥?" "우리가 신관으로 보이느냐?" "몸이 엉망이더니 머리도 다쳤었나 보군. 흑마법사한테 와서 한다는 말이 사람을 살려달라?" "킬킬킬" "내 생애 최초로 들은 즐거운 농담이었어." "크크크크" "어르신들....제발...딸아이를 구해주세요!" "구해달라고? 살려달라면서?" "언제부터 그 말이 같은 뜻이 된 거야?" "너무 오래산게지..끌끌끌" 주거니 받거니 서로 말장난을 하는 흑마법사들을 찾으려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레니는 문득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편이 딸아이를...세실을 노예상에 팔거랍니다! 절 때린 사람도 그 사람이예요!" 로 시작된 레니의 말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 기회를 몰아 어린나이에 마크를 만나 결혼하고 이제껏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를 한 레니는 숨을 죽였다. 세실이 하녀로 일한다고 알고 있는 레니는 감히 딸아이를 데리고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또한 세실이 벌어들이는 부副와 레이븐 상회를 비롯한 샌들우드와 황궁에서의 인연, 심지어 백작부인과의 친밀한 관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딸아이가 팔려가는데 일조를 한 사람이 바로 백작가의 영애라는 것을. 자신의 남편의 단점을 속속들이 아는 그녀가 한 가지 믿는 것은 바로 마크의 정직함이었다.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소한 것을 침묵을 함으로써 오.해.를 일으킬망정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백작영애는 황금 두 덩이를 주었고 마크에게 세실을 데리고 갈 기회마저 만들어 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그녀가 흑마법사를 찾도록 만든 이유였다. "세상 참 많이 변했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레니는 갑자기 들려오는 처량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니야, 아니야. 언제나 그런 썩을 놈들은 있었어..." "아무렴...우리가 왜 이러고 사는데?" "떽! 뼈다귀만 남은 것들이라 쪽팔려서 안나가는 거면서..." "사돈 남 말하지 맙시다, 형님." "됐다. 말아라.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그렇지, 그렇지. 아이야 그래 넌 무엇을 원해서 이곳으로 왔느냐?" 기다렸던 질문에 레니는 냉큼 대답했다. "마족과...계약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엥?" "재가 뭐라는 거야?" "우리도 꼴보기 싫어하는 마족을 보고 싶다네?" "허허허...세상 참..." "아이야, 정말...그 베베 꼬인 종족을 만나고 싶은 것이냐?" "네! 계약을...계약을 할겁니다." "대가는?" "제 목숨이요!" "..........." 잠시 찬바람이 휙 몰아치고 지나갔다. "아서라. 안식조차 구하지 못한다." "아니요, 전 상관없습니다. 평생을 구천에서 떠돌아다닌다 해도 전 괜찮습니다." "소멸이다." "상관없어요!" "끝인데?" "네!" 끝없는 공방전이 치러졌다. 어떻게 해서든 말리려는 존재들과 단호하게 '무조건 계약할꺼야!'라는 레니의 말싸움은 결국 레니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가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 인자한 목소리에 잠시 침묵하던 레니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실과 너무도 쏙 빼닮은 웃음을 선사한 레니는 차분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 "말씀은 감사하지만, 마족과 계약을 하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것은...너무나 더러운 일이니... 어르신들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세실의 맑고 깨끗한 심성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보다 강해지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존심만은 잃지 않는 마음을 가진 레니 에게 감동을 받았는지 잠시 침묵하던 존재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소원이라면...들어주마. 그런데 혹시 네 남편이란 작자 말이다." "네?" "우리가 혼내주면 안될까? 널 만난 기념으로 말이다. 험험." "그래그래. 그 정도는 우리도 해줄 수 있네." "암, 괜히 그 잔대가리 굴리는 놈들과 계약하는데 조건만 늘일께 아니라 그놈은 우리가 혼내줄께, 어때? 괜찮지? 그렇지?" 삶의 의욕이 될만한 것을 찾은 듯 생동감 넘치는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레니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나중에...나중에...기회가 닿으신다면...부탁...드려도 될까요?" "켈켈켈. 걱정하지 마라. 아이야. 우리가 꼭 혼내주마." "나중에는 무슨 나중에? 네 일이 마무리 되는 데로 찾아갈 것이다." "암암...크크크크" 크로네와 견습 마법사가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졌다. 목숨을 건 계약을 하고자 하는 레니에 대한 배려인가. 편히 눈을 감고 가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팍팍 풍기는 어조로 마크를 혼내주겠다 약속한 흑마법사 들은 일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눈앞의 한 치도 보이지 않던 공간에 미세한 빛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 곳에서 시작된 밝은 빛은 그곳을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빛줄기를 만들며 대각선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또 다른 선을 이어내며 순식간에 육망성六網星의 마법진을 형성했다. 동시에 금빛 룬어들 이 빛을 발하며 마법진의 빈 공간을 빽빽이 채워놓은 순간 목소리가 사라졌다. 언뜻 들었던 말들을 믿고 흑마법사를 찾아 마족을 부르게 된 레니는 자신의 피를 마법진에 떨어 트리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이야 참아라!" "의식을 망치려고 하느냐!" "피를 뿌리면 안돼!" 갑자기 터져 나오는 호통소리에 베어진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쪽 빨아먹은 레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째 헛소문만 돌아가지고..." "할 수 없는 일..." "이참에 책이나 한 편 낼까요, 형님?" "무슨 책?" "마족과 계약하기!" "........" 찬바람이 휩쓸고 간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더욱 환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젠장, 이것들이 단체로 여행이라도 갔나..왜 이렇게 안나오..." "쉿! 온다!" 말이 끝나는 순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터져나오며 마법진 위에 빛으로 둘러싸인 한 인영이 나타났다. "제엔장! 내가 이래서 재내들 불러내기가 싫어. 지들이 무슨 천족이래? 허구헛날 저따위 퍼포 먼스나 뿌리고..." "세상 말세다, 말세지..암..." "그래...마.족.은 저렇게 나오면 안 되는 거야.." "누가 저걸 보고 마.족.이라고 하겠어? 안 그래?" "써글! 지겹다 지겨워" "저 꼴 안 보려고 내가 계약 안했지. 암." "우리 스승님만 해도 호기심에 마.족.하고 계약하려다 심장마비로 골로 갈 뻔 하셨다지, 아마..." 심퉁맞은 목소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족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던 레니조차도 성스러운(!) 빛에 둘러싸여 나타난 존재를 보며 입을 쩍 벌렸으니까... 『그대가 부르셨습니까?』 천상의 목소리가 이러할까? 푸른빛이 감도는 새까만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나타난 천상의 미를 간직한 남자의 목소리는 레니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그대? 부르셨....잘못 부른 거 아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레니가 소리쳤다. 약간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족.을 무시하고. "저...저분이 마족이예요? 아니죠? 아닐꺼야. 저런게(?) 어떻게 마족이야! 흑!" 또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울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레니를 보며 당황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아닙니다. 전 마족이...아..그렇군요. 저는 마왕입니다. 죄송합니다. 마족을 부르셨나요?』 이번에는 벙찐 얼굴로 자칭 마왕을 쳐다보던 레니는 발을 구르며 볼을 부풀렸다. "이건 사기예요! 마왕은 마족보다 더..음...아무튼! 그런데 저게 뭐야? 저게 마...왕이란 말이 예요? 아니죠? 그쵸? 사기죠?"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지 발을 꽝꽝 구르며 항의를 하는 레니를 보며 자칭 마왕이 식은땀 을 흘리는 동안 쥐죽은 듯 조용해졌던 목소리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저건...." "정말...." "말로만 듣던..." "마왕이네..." "........." "그런데 우리가 마왕을 부를 능력이 되나?" "아니요." "마왕이 저렇게 곱게 차려입고 나와도 되는 거냐?" "아니지요." "헌데 저 마왕은 왜 저러는 건데?" "모르겠는데요." "쓰읍~!" "........" 목소리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레니가 마법진 위에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저...정말...마왕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정말...잘...생기셨네요?" 순간 땀을 삐질거리던 마왕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저것 봐라, 저것 봐. 작업 건다, 작업 걸어." "나이가 몇 갠데 작업을 걸다니..." "마계도 다 됐네...쯧쯧"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빈정거림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마왕이 허리를 숙였다. 『계약을 원하십니까?』 "네!" 레니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마왕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의 긴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휘날리며 그의 어깨 너머로 까맣고 하얀 것들이 새록새록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날개였다. 총 9장. 양쪽으로 각기 아홉 장씩 돋아난 날개는 한쪽은 검고 한쪽은 새하얗게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헉!" "세카다..." "세카다 M 샤르!" ***************************************************************************************** 전편 리플이 15개(제가 쓴것 제외)된 것을 기념하여 한 편 더 올립니다. 너무 기분좋아 꺄아아~~~~ > < 여러분, 행복하세요~~~~~!!! (사설은 다음편에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세실, 팔려가다. 3. << 세카다 M 샤르 Secada M Sharr >> 모든 신들을 관장하는 최고의 유일신, 이카루스의 오른쪽 날개였으되 창조물인 인간과 사랑에 빠져 날개가 검게 물든 천족. 그는 신이되 인간이길 바랬고, 천족이되 악마의 길을 걸었다 기 록된다. 인간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과감히 신의 날개를 벗어나 암흑으로 돌아간 존재. 허나 여전히 이카루스의 사랑을 받은 유일한 존재. 참된 사랑을 이루라 명하시며 반쪽 날개만 검게 물들이는 벌을 내린 이카루스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수명이 다 하는 날까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전해진다. 그리고 그와 인간의 여인사이에서 낳은 자손들. 그들이 바로 엘프Elf라 고대의 기록은 말한다. 신의 눈물이란 의미를 가진 종족. 엘프Elf. 천족의 고귀함과 인간의 순수함을 함께 지니고 태어난 이들은 신들과 교류하며 모든 존재를 선 하다 믿는 유일종족이었다. 지금은 비록 사라지고 없으나, 한때 이종족과 인간들이 어우러져 살 아가던 시대에는 드래곤만큼이나 인간에게 존경받았다 세인들은 말한다. ========================================================================================= 창조록創造錄에서나 나올법한 존재를 직접 만나게 되었지만 레니는 세카다라 불린 마왕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뿐 아니라 지금 경악성을 내지르는 흑마법사들 조차 그러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단지, 지고지순한 천족이었으되 신의 분노로 마족이 된 존재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고대의 모든 기록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진 불멸의 대륙 아틀란타와 함께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이야 어떻든지 간에 수 만년의 기다림속에서 깨어난 세카다는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원하시는 바를...말씀하여 주십시오. 계약을 원하시는 분이여.』 ".....저...제가 원하는 것은...." 잠시 망설이며 이제껏 들려왔던 목소리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던 레니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앞으로 그녀가 할 말. 딸아이가 알면 얼마나 슬퍼하고 실망할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것뿐이라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려보던 레니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내 모든 것을 받쳐서라도 행복하게만 해줄 수 있다면... "제가 원하는 것은 제 딸, 세실리아의 영혼을 크리스틴 폰 배너 백작영애의 몸에 넣어주시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 아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고 칭찬받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틴 폰 배너 백작 영애의 영혼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고통 받는 존재의 몸에 넣어주세요. 그것이..." '마족과 계약을 할때는 말이지...최대한 세세하게! 자세하게 똑똑히 이야기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잣대대로 마음대로 휘저어 놓는다고 하더군.' 마족과의 계약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던 사람의 말을 떠올린 레니는 흠칫 눈을 떴다. 다행이 마왕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었다. "아, 딸아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그 아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함께 옮겨주세요. 아이의 몸에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하나도 빠짐없이 그 아이에게 전해주세요. 그리고, 크리 스틴 백작영애는 죽음이 다 하는 그날까지 고통 받고 손가락질 받고 비난받으며 살기를 원합 니다. 따뜻한 곳에서도 자지 못하고, 결코 행복하지 못하며, 더 이상 남을 괴롭힐수도 없는 삶을 살 기를 원합니다. 죽어서라도 고통 받도록,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영원불멸 의 연옥으로 데리고 가 주세요." 잔인하고 잔인한 주문이었다. 어미의 분노가 이토록 클 수 있다는 것을 레니는 증명을 하고야 말았다. ========== 영원불멸의 연옥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지옥이다. 마족이 아닌 악마들이 관장하며 신과 더불어 마계에서조차 버림받은 영혼이 운명의 굴레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영혼이 소멸되는 그 날까지 고통 받는 곳이라 알려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저주. 그것은 영원의 소멸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연옥에 떨어지길 기도하는 것이다. 감정조차 허락받지 못한 악마들의 손에 떨어져 생전에 느끼던 오감을 통해 고문을 받으며 고통 을 받으라는 저주. 그것은 인간으로서 입 밖으로 내어서도 생각해서도 안 되는 참으로 잔인한 저주였다. ============== 하지만 여기. 레니는 그것을 마족과의 계약으로 이루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 중 얼마나 그것이 이루어질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딸아이라도 행복했으면, 그것만이라도 이루어졌으면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이곳에서 만난 목소리들은 분명 자신의 남편을 혼내준다 하였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얼굴만 바뀐다면 더 이상 그는 세실에게 손을 댈 수 없을 터였다. 긴장된 기다림의 순간이 끝나고 아름다운 날개짓을 하며 허공으로 날아오른 세카다는 천천히 레니의 앞으로 다가섰다. 『대가는...?』 "저의 영혼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감히 마왕의 계약에 끼어들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면...저는 두 개의 영혼을 받게 되는 것이군요.』 "......?" 의문을 표시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레니를 보며 상큼한 미소를 보인 세카다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위에 생성된 동그란 구슬 모양의 빛은 어떠한 영상을 비춰주고 있었다. 호화로운 마차를 이끌며 달려가는 기사들. 그리고 그 장면이 더욱 가까워지며 이내 겉보다 더욱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 내부에 타고 있는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소녀를 비춰주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흐뭇한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흥얼거리고 있는 소녀. 『크리스틴 폰 배너』 "아.......!" 레니가 쥐고 있던 주먹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마크에게 황금을 준 아이. 감히, 딸아이를 데려가라 허락하고 길을 제시해준 아이. 말은 듣지 못했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딸아이가 사라지길 원했다면 결코 그 아이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란 예감. 자식을 사랑하는 어미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어도 모든 정황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손톱에 파여 피가 흘러내리는 손을 쫙 펴서 생글 생글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르킨 레니는 세카다를 직시했다. 이제껏 보여주었던 그 망설임과 순진함, 자책은 사라졌다. "저 아이의 영혼을 데리고 가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레니의 말에 세카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이 말하는 연옥 또한...마계의 관장 아래 있으니 제가 소유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연옥에...지옥으로 보내주실 건가요?" 레니의 질문에 세카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처럼 더러운 영혼은 마계에서 조차 환영받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 조차 지니지 못한...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순수함을 가지지 못한 영혼은 마계로 들어오도록 허락 받지 못합니다.』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그저 이 말이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인간의 아내가 가지고 있던 순수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던 세카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하는 레니라는 여인이 가진 영혼의 빛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들의 순수함은 언제나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세상이 혼탁해지고 멸망의 길을 걷는 그 순간까지도 인간들은 그 이면에 순수함과 따뜻함, 배려, 사랑의 감정을 깊숙이 숨겨두었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그것을 아무런 대가없이 꺼내보였다. 그것이 그가 인간을 사랑한 이유이고, 마계로 들어온 계기가 되었다. 허락된 사랑의 시간을 보내고 이카루스는 그의 아이가 다시 돌아오길 바랬으나 그는 스스로 어둠의 길을 택했다. 구원받을 수 있으되 기회를 박탈당한 존재를 구하고, 결코 구원받지 못할 영혼들을 영원불멸의 구렁텅이속에서 벌을 주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는 세카다를 위해 이카루스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그가 사랑하고 사랑했던 아름다운 영혼을 약속된 땅, 약속된 시간에 돌려주기로... 그리고...기다리던 때가 다가왔다. 그래서...세카다는 행복할 수 있었다. 한 번의 만남은 영원한 이별로 이어지겠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잠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세카다는 긴장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거두어드렸다. 『그대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그대의 영혼은 마계에 허락되지 않습 니다. 해서...저는 제가 보여드렸던 그 인간의 영혼만을 대가로 받겠습니다.』 "그럼...그럼...계약은...제 딸은...?" 딸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물을 글썽이던 레니는 그녀의 두 어깨를 감싸쥐는 앙상한 손에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그녀에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대가가 모자란다면 흑요석(어둠의 기운이 담겨있다 하여 흑마법사들에게는 마나석보다 더욱 가치 있는 보석)을 주겠소. 계약을 맺어주시오." "그래도 안된다면 우리의 영혼도 팔지. 단, 우리가 죽은 후에." "킬킬킬. 형님도 참...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고.." "적어도 마왕보다는 일찍 죽을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 "그렇군. 우리들 중 누구도 마족과 계약한 적이 없으니 우리의 영혼을 걸겠소. 마.왕."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말을 하고 있는 이들은 다섯명에 불과하되 검은 로브를 입고 얼굴을 가린채 나타난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의 등장이 의외이련가 눈썹 을 치켜올리던 세카다가 씨익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족 냄새가 풍기긴 했다. 『그대들은 이 분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관련? 뭐...이 여인이 우리한테 마족을 불러달라고 해서 불러줬고..." "조금 있다가 이 여자의 남편이라는 개망나니를 혼내주러 가기로 약속한 사이지." "그렇지." 『......결국에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 "..........." 찬바람이 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도리어 부탁만 들어준 것 같은데...그것도 대가도 없이?』 "우리는 마.족.이 아니야." "인간이다." "오래 산 인간이지." 세카다의 질문에 발끈 나서서 대답을 했던 흑마법사들은 뒤를 돌아보려는 레니를 제지했다. "보면 까무라친다. 아서라." "그래그래 눈만 버려." "궁금해 하지 마라." "세상에는 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것이 있다." "바로 우리들 모습을 보는 거지..킬킬킬" 듣기 싫은 음성이지만 너무나 따뜻한 목소리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그들의 말을 경청하던 레니는 양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감싸쥐고 있는 손... 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잡았다. 흠칫하며 손을 빼려는 것을 꼭 잡고 놓지 않은 레니는 작게 속삭 였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들의 따뜻한 마음..그 마음만 받을께요. 대가가 작아서 어쩔 수 없다면 제 몸속에 있는 모든 피를 뽑아서라도 대신하지요. 마족...음...마왕도 마족이니 마족 들에게는 사람들의 선혈이 유용하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탁하고 값어치 없는 것이나 부족하나마 그것을 대신할까 합니다. 어르신들께서는...제 남편...마크를 혼내주시는 것만으로도 평생을 가도 못 갚을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예요. 감사합니다. 정말...감사합니다." 고목나무처럼 비쩍마르고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손이 레니의 따뜻한 온기아래서 파르르 떨렸다. "젠장 누구는 손도 잡아주고..." "내가 먼저 할껄..." 인간의 온기가 그리워서 일까? 레니가 잡고 있는 손들이 부러운지 저마다 한마디씩 투덜거리는 이들은 레니의 인사에 멋쩍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세카다는 슬쩍 레니의 뒤를 호위하듯 서 있는 흑마법사들을 둘러보고 다시 레니를 보았다. 『계약의 대가는...하나의 영혼으로 충분합니다. 한 동안 그 영혼을 지켜보며 즐거워 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요. 별로 힘든 것도 아니니...그러면 지금 계약을 하시겠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왕의 대답에 양손에 쥐고 있던 앙상한 손을 꼭 잡으며 연신 감사하단 인사를 하던 레니는 그녀의 등을 찌르는 또 다른 손길에 얼른 손을 놓았다. "이 손 좀 놓아다오, 쑥스럽구나." "내 손 좀 잡아줄래?" "쉿! 저리가라. 계약한다지 않니?" "그렇군..." 또 잡다한 대화가 오고갔지만 세카다는 신경쓰지 않았다. 레니의 이마에 손을 내밀어 주문을 외우기에 바빴던 것이다. 『&@#%&*&%@$&%&$*@&*&%』 조금 전처럼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는 생소한 언어를 들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던 레닌 이마 언저리가 뜨거워지자 황급히 눈을 떴다. 미간의 조금 위쪽에 새겨져 있던 '약속'을 의미하던 마족의 언어는 레니의 눈이 떠지는 순간 사라졌다. 이것은 마왕의 표식으로 그와 계약을 한 인간임을 표시하며 다른 마족들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레니의 이마에 표식을 찍은 세카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법진 앞으로 다가갔다. 그저 말없이 마법진 위에서 그의 새하얀 손이 춤을 추듯 움직였고, 번쩍 빛을 발하던 마법진은 세실과 크리스틴을 뱉어내었다. "세실....!" 레니는 두 번 다시 못 볼거라 생각했던 잠든 딸을 안아보고 싶었지만 행여나 마왕의 일이 잘못 될까 다가가지 못했다. 거두어진 두 아이를 번갈아보던 세카다는 곧 손을 휘저어 영혼을 불러냈 다. 세실와 크리스틴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안개와 같은 옅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더니 순식간 에 덩어리를 만들어 공중을 부유했다. 하나는 오색빛깔의 영롱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혼탁하기 그지없어 가까이 가기도 싫은 그런 빛을 가지고 있었다. 두 개의 영혼을 보며 잠시 즐거워하던 세카다가 손을 휘두르며 주문을 외우자 밝은 빛을 발하던 영혼은 크리스틴의 몸속으로 사라졌고, 또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그 자리에서 출렁이다 모래가 흩어지듯 그렇 게 공중에서 분산되었다.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던 레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실의 영혼이 크리스틴의 몸속에 자리를 잡고 안정을 되찾는 것까지 확인한 세카다는 원래 몸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정보를 머릿속 깊이 각인시켜 둔 후 세실의 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주문으로 불러낸 작고 까만 요정들이 나타나 세실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본 것이다. 가늘고 귀여운 꼬리가 달려있고, 박쥐의 날개와 같은 것을 어깨 근처에 달고 조그마한 뿔이 두 개나 나 있는 작은 악마들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앤드류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한 반지와, 몇 개의 동전들, 그리고 세실이 열심히 만들어오던 약초에 관한 책을 들고 뽀르르 날아올랐다. 그것을 받아 쥔 세카다는 미소를 지으며 반지는 약지에, 책과 동전은 세실이 그러했듯 치마단을 뜯어 그 곳에 감추고 찢어진 부분을 원래대로 해놓았다. 평온한 숨소리를 내쉬며 잠들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잠시 쓸어주던 세카다는 작은 미소와 함께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천천히 사라지는 아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몸에 적응을 하실 때까지 수면기에 드실겁니다. 일어나신 후의 선택은 그대의 몫입니다, 이카루스의 아이여. 부디 행복한 꿈을 꾸시길...』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마족의 언어로 말을 끝낸 세카다는 껍데기만 남은 세실의 육신을 보며 고심에 잠겼다. 가지고 가자니 마계의 탁한 공기를 생각하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고 또 처분하자니 나중에 본래의 영혼이 돌아오고 싶어한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에 휩싸여 있던 세카다의 고민은 흑마법사들이 해결해주었다. "험험...마왕이시어..어색하군..쩝" "저..그 아이의 몸은..우리가 맡으면 안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다가...나중에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 어색한지 미적거리며 말을 잇는 이들을 쭉 둘러본 세카다는 반짝 눈을 빛냈다. 귀엽게 생긴 소녀의 몸을 보는 흑마법사들의 그것만큼 밝게. 잠시 시선을 교환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눈 세카다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뜻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은 레니가 볼까 두렵다는 듯 로브를 푹 눌러쓰고 앞으로 나와 세실의 축 늘어진 몸을 안아들고 어디 론가 사라졌다. "저...." "걱정하지 말거라, 아이야." "아무렴. 덕이 되면 덕이 되었지, 해가 되진 않아." "킬킬킬..." 조금 미덥잖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보여준 그들의 진실한 태도에 레니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간에 신뢰를 보여주는 그들을 지켜보던 세카다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짧은 주문을 외웠다. 잠시 검은 빛을 발하며 나타난 두꺼운 안개는 조금 전 흑마법사가 안고 사라졌던 세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이의 몸을 형성했다. 『첫고객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백작가로 보내져 그대의 남편이 데리고 갈 아이이며,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뿐입니다. 그리고 백작가에서 100피텐(3km정도) 떨어진 곳에 닿으면 흙으로 돌아갈 겁니 다.』 "멋지다~!" "나도 연구해 봐야지...!" "돈 되겠다!" 세카다가 시행한 마법은 단순한 일루젼이나 남의 이목을 속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의 권능을 지닌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창조 마법.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유有에서 다시 무無를 창조하는 경지. 인간들로써는 불가능한 경지를 선보인 세카다는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마족과의 계약을 고.려.해.보겠다' 고 말하는 흑마법사들을 남겨둔 채 세실을 흉내내어 만든 인형을 쥐고 사라졌다. 마지막 서비스를 위해 백작가로 간 것 같았다. 멍하니 빈 공간을 바라보던 레니는 자신의 등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려다 꾹 참았다. 자신은 괜찮으나, 그들이 원하지 않으니 함부로 훔쳐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허락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레니의 말없는 배려에 감동을 한 흑마법사들은 다시 어둠속에 몸을 감추고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사하고 마법사 길드로 워프시켜 주었다. 이렇게 레니가 그토록 바라던 일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끝났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악몽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 한편 오두막으로 돌아가 흥얼거리며 짐을 싸들고 백작가로 날아온 샌들우드는 아무리 찾아도 제자가 보이지 않자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 스스로 맹세한 백작부인을 찾아갔다. "세실을 내 놓아라!" "스승님?" "세실을 돌려달란 말이다!" "그 아이는 지금 방에서 잠이 들어..." "없다! 없단 말이다. 내가 올 줄 알면서 어디 갈 아이가 아니야! 빨리 말해라, 내 제자를 어디다 숨겼느냐!" 비록 신관의 기도로 몸은 건강해 졌다하지만 그간 겪었던 고초는 빨리 잊혀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서둘러 떠나려던 샌들우드는 또 다시 제자가 보이지 않자 이성을 잃었다. 혹여나 또 도둑으로 몰려 집안 어딘가에 갇힌 것을 아닌가, 백작의 저택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이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것이 샌들우드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어마 어마한 기운을 내뿜으며 살기등등하게 서 있는 샌들우드를 멍하니 보던 백작부인이 직접 일 어나 세실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세실!" 없었다. 마리의 방에 누워서 잠이 들어 있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며 방을 둘러보던 백작부인은 오두막으로 뛰어갔다. 역시 그곳에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이가 외출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백작부인은 결국 하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너희들 중에 세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는 나오거라." "........." 줄지어 서 있던 하인들이 의아한 눈으로 백작부인을 힐끔거리는 가운데 유독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녀 하나와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힐끗거리는 하인이 하나 있었다. "너! 거기, 너 말이다. 앞으로 나와라." 몸을 감추고 있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샌들우드는 눈치를 보고 있는 건장한 사내를 불러냈다. "보았느냐?" "그것이..." "말해라!" 백작부인의 싸늘한 목소리에 목을 움츠리던 사내는 곧 한 사람을 가리키며 자신이 본 것을 이실 직고 했다. "아씨께서 떠나시고 얼마 안 되서 저 아이가 세실을 엎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마님! 아닙니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하녀는 바로 한나였다. 백작부인의 얼굴이 얼음조각처럼 굳어졌다. "너는...내 방에서 나오는 세실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아! 아닙니다, 마님. 정말로 보았습니다...." 백작부인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내어 그것을 보여주며 화들짝 놀라는 하녀를 노려보았다. "그럼 이것은 무엇이냐? 크리스틴의 방에서 나온 이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졸지에 딸을 도둑으로 만든 백작부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는 하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사실대로 말해라. 세실을 어디로 데리고 간 것이지?" 백작부인의 살벌한 눈초리에도 한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노려보던 백작부인은 옆에 서 있던 집사를 불렀다. "가서 채찍을 가지고 오너라." "네, 마님." 서둘러 사라지는 집사의 뒷모습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하녀는 무슨 생각에선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백작부인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냥 협박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저것이 입을 열 때 까지 쳐라. 죽어도 상관없다. 치료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입만 열게 만들 면 돼. 입만 열면 된다. 세실이 어디에 있는지!" "마......!" 백작부인의 말에 급히 입을 열려던 하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비명을 지르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입만 뻐끔뻐끔하는 하녀를 오해한 집사는 자신이 들고 온 채찍으로 아이의 작은 등을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감정이 많이 쌓인 듯 보였다. 또한 그것을 지켜보는 하인들의 눈에도 동정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통쾌하다는 표 정이었다. 비록 백작영애의 말이 있기는 했으나, 세실을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은 것에 일조한 아이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낸 죄. 자신의 동료조차 버릴 수 있는 그 잔혹함. 그것이 하인들의 눈을 얼어붙게 만든 이유요, 샌들우드가 '사*일*런*스'마법을 시전한 원인 이었다. 팔짱을 끼고 묵묵히 지켜보는 스승이 마법을 걸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챈 백작부인 마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리고 싶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하녀가 맞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으나, 세실의 몸을 가득 채웠던 그 상처와 핏자국에 비하면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샌들우드가 보여준 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낳은 딸만 아니라면 직접 손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지금, 이 순간 백작부인은 풀어내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흐느적거리면 쓰러진 하녀를 내려치는 집사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으나 그의 손길은 여전 히 매서웠다. 열두 살. 또래 아이보다 훨씬 작고 깡마른 아이를 떠올리며 집사는 그렇게 무고한 아이에게 죄를 덮어씌운 이를 단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갔습니다! 아비한테 갔어요! 아가씨가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가 붉은장미 여관에 있는 마크를 찾고 성문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그 사람이 노예상에게 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데리고 갔습니다!" 느닷없이 터져나온 목소리에 샌들우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백작부인은 멈추려는 듯 손을 주춤하는 집사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자유인이 아닌 노예이다. 과거 죄를 지어 노예가 되었지? 네가 크리스틴에게 보여준 충정은 목숨으로 보상해주마. 죽을 때까지 쳐라. 그리고 내다 버려라. 무덤조차 아깝다. 아무 곳에나 내다버리고 그나마 짐승 먹이라도 되어 죄를 사할 수 있게 해주어라." 이집에 와서 고생만 하던 아이를 노예로 팔았다는 말에 분노한 백작부인은 한나에게 죽음을 내렸다. 그리고 지켜보던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요혈은 피했다. 열흘 동안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당하고 노예로 팔려간 아이를 떠올리며 집사는 그렇게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죽어라 채찍을 내리쳤다. ******************************************************************************************** 제 글이 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설명이 길고, 대화도 길기 때문인것 같더군요...한심...(휴....) 기운 빠지옵니다. ㅜ ㅜ 저, 그리고 제 글을 읽으실 때 만큼은 다른 판타지에서 보셨던 설정들은 떠올리지 말아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마법의 어원이나, 신, 천족, 마족, 악마, 이종족 이 모든 것들은 제가 만든 틀 안에 뛰어놀것입니다. 엘프가 탄생된 기원 정도 보여드렸으니 이해하시죠? 그리고 제 소설에서는 흑마법 조차 손가락질 받지 않습니다. 어둠의 존재이긴 하지만 다른 소설에서 처럼 그 사람이 착한일을 해서 일부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솔직한 존재로 그려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에... 마족과 악마가 등장하는데, 어느 설정에 보니 마족위에 악마가 있다고 하더군요. 여기서는 아닙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마왕에 데리고 나온애들이 악마입니다. 말 그대로...까맣고 박쥐 날개에 뾰족한 창이 달린 꼬리를 가진 걔네들 말이지요. ^^ 나머지 설정들은 차후 필요할때마다 지금처럼 조금씩 올려드릴까 해요. 한꺼번에 묶어서 올리는 것이 통상적이라 하나, 그것보다는 필요할때 보여주는게 머리가 덜 아플것 같아서... 기분전환하자고 읽는 판타지, 설정을 외우고 읽어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니까요 에또...마지막으로 저는 성선설과 성악설 모두를 믿습니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마왕의 존재이지요. 음...말씀 안드려도 아시지요? 사설이 길어질까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 <제목 만들기>가 꼭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1회를 없앨까 무쟈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끝에가야 거기 관한게 나오는데, 대부분의 독자님들이 1회를 보고 걍 가셨더군요...ㅠㅠ 조회수를 보며 늘 뿌듯해하지만, 더 이상 늘지 않고 항상 오시는 분들만 오셔서...(절대로 좋습니다!!! 오해 마세요 ㅜㅜ) 새로운 분들을 모시려면...콜록...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디어 좀 내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보다 사설이 더 길까 두려워하며...유키 물러가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샌들우드, 분노하다. 1. "없다! 없어...세실! 제자야 어디 있느냐? 이 스승이 널 데리러 왔는데 넌 어디에 있단 말이냐?!" 넓은 길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세실을 부르던 샌들우드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헤집으며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서 있는 자리를 기해 전방 4피텐(12미터 정도) 지름을 가진 커다란 원이 생겨나있었다. 시뻘건 액체가 흥건하게 고여 있고 검붉은 핏덩이들과 찢어진 천조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이었다. 바로 세실을 사갔다고 알려진 노예상인을 비롯한 호위병들의 잔해였다. 하녀의 말을 듣고 '붉은 장미'여관으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마크라는 사내는 마을을 떠난 후였다.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던 그에게 여관주인이 조심스레 다가와 세실을 데리고간, 즉 마크에게 돈을 주었던 노예상들이 향하는 길을 일러주었다. 결국 그가 마법을 써서 노예상인을 찾아내었지만 샌들우드가 찾는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마크에게서 산 아이를 내놓으라 말하자 도리어 사기를 당했다며 칼을 뽑아드는 이들에게 분노한 샌들우드는 눈이 뒤집어져 무작정 대단위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시체도 남기지 않고 조각조각난 핏덩이들을 일일이 뒤집어보며 세실을 부르고 있었다. "제자야...제자야...어디 있느냐? 내가 왔는데...어디를 갔는냐.." 넋이 나간 듯 주위를 헤매던 샌들우드는 문득 궁성근처의 시가지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어르신 여기는 무슨..." "세실이 없어졌다. 찾아라." "네?" "그 아이 아비란 인간이 노예상에 팔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없었어. 내가 직접 잡아 물어보았는데, 속았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마크라 하는 놈을 찾아!"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는 샌들우드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일이 잔뜩 굳은 얼굴로 쌍둥이 동생을 불렀다. "세실에게 붙여두었던 사람은 어떻게 됐지?"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잠시 불러들였..." "그 놈에게는?" "아직 지키고 있습니다, 형님." "불러라. 어디 있는지 당장 알아와!" "네, 형님."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달려나갔던 앤드류는 몇 미르도 흐르지 않아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와 함께 들어왔다. "지금 그 놈은 변두리에 있는 술집에 있습니다." "세실은? 혹시 여자 아이와 같이 있지 않았느냐?" "네?" 샌들우드의 물음에 영문을 모르고 반문을 하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길을 가다가 웬 병신을 주워들고 그 길로 술집에 가서 사달라고 실갱이를 벌이다가 어찌어찌해서 팔았는지, 그 돈으로 그곳에 죽치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병신?" "네, 생긴 건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말도 못하고...한 쪽 다리도 제대로 못 쓰는 병신이 었습니다. 어디서 주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세상에 눈뜨고는..." "가자, 안내해라!" 이번에는 카일이 더 빨랐다. 그의 명령에 앞장서서 걸어가던 사내는 마법사와 카일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에 거의 뛰다시피 하여 마크가 묵고 있는 술집으로 안내했다. "여깁니다." "수고했네, 여기서 잠깐 기다리게." 앤드류가 사내에게 말을 하는 동안 성질 급한 샌들우드와 카일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손님. 원하시는 거라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는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온 마담은 자신의 손 위에 놓인 금화를 보며 야시시하게 웃었다. "누굴 찾으시나요, 나리?" "어린 소녀를 데리고 온 사내가 있다고 들었소. 지금 있소?" "아...그 쓰레기...아, 그 남자 말씀이지요? 지금 캐시라는 애랑 같이..." "아이는?" "그...아이는 지금 길을 들이느라 헛간에 가두어두었는데...왜?" "안내해라." "네?" "그 아이에게 안내하란 말이다." 카일의 살기어린 눈초리에 몸을 부르르 떨던 마담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건물 밖을 나와 뒤에 딸려있는 낡은 헛간으로 갔다. 문을 막아놓았던 나무판자를 치우고 문을 열자 그 안에서 귀곡 성과 같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어으...어으...어으....으으..." ".....세실?" 샌들우드가 마법을 시전하여 주위를 밝혔다. 헛간에 깔아놓은 짚단 위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던 까만 머리 소녀가 불빛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헉!" "이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은 온통 찢겨지고, 피멍들고 퉁퉁 부어있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뻐금거리는 아이의 혀도 잘려있었다. 일으켜 달라는 듯 팔을 들어올린 아이의 손목에는 손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일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아이의 왼쪽 다리는 괴상한 방향으로 비틀려진 채 바닥에 축 늘어져있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아이의 몰골을 멍하니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좀 찔리는 표정으로 서있는 마담을 보았다. "네가 저렇게 만들었느냐?" "아, 아닙니다! 올 때부터 저랬습니다. 원래 저러..." "아비를 불러오라!" "네?" "죽을테냐 불러올테냐?" 샌들우드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마담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쁜 걸음소리가 들리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샌들우드가 아이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애처로운 얼굴로 그에게 두 손을 내밀며 뭐라 외치고 있는 아이에게 치료마법을 걸어주려던 샌들우드는 카일의 제지를 받았다. "신전으로 가서 치료하는 것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 정도 상처라면 마법보다는 신성력이 났습니다. 대신관께 맡기시는 것이..." "그래도 상처 정도는..."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제자의 모습에 한탄을 하던 샌들우드는 결국 손을 내렸다. 뒤틀린 뼈를 맞추고 손과 잘린 혀는 어찌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기 전에 섣불리 치료를 해버리면 나중에 완치가 힘들다는 카일의 말을 들은 것이다. 그저 가만히 다가가 발버둥치는 아이를 안아 올린 샌들우드는 마담의 뒤를 따라 아무것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며 따라오는 지저분한 사내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담과 함께 헛간 앞에 당도한 마크는 그 안에서 나오는 세 사람을 보며 의아 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세실의 아비냐?" "네? 저...." "네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아닙니다, 나리!" "그러면?" "그것이...저..." 대답이 궁한지 뭐라 웅얼거리던 마크는 자신을 둘러싸는 세 명의 사내들과 한 손에 불덩어리를 올려놓고 노려보는 마법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가 노예상에게 저 아이를 팔기로 했었습니다. 아니, 그랬었지요. 그런데..." ".............." "하녀가 데려왔는데....바보가 되어있지 않겠습니까? 병신처럼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선금을 받았기에 잔금을 치른 노예상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아 저렇게 되어서 마을 어귀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휴...."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카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뭐라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있건만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혀가 뭉텅 잘렸으니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손도 없으니 글조차 쓰지 못하지 않는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는 것은 샌들우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쉽게 죽였다!' 그것이 그가 후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마주친 노예상들은 분명 세실을 이리 만든 장본인이 분명했다. 그리고... "바보라고 했나?" 앤드류의 차분한 목소리에 안정을 찾았는지 마크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백작가에 이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만 해도 그 백작영애가..흡!" ".......계속해라." "아무튼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하녀가 잠이 든 딸아이를 엎고 나왔는데, 여관으로 데리고 왔을 때는 완전히 넋이 빠진 인형 같았습니다. 저도 못 알아보고, 눈도 풀리고...저는 그...누가 약을 먹였나 생각을 했습죠. 해서..노예상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냥 사겠다고 돈을 주고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어떻게 다시 찾았지?" "그것이...돈도 많이 벌었으니, 지긋지긋한 마을을 좀 벗어나려고...가던 중에..." "...그래서 이런 아이를 다시 팔려고 이곳에 온 건가?" 카일의 차가운 목소리에 목을 움츠리던 마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저렇게 병신이 된 아이를 치료를 할 능력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자리라도 마련해 주려고..." "술집에서?" "뭐...여자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도 아니고, 달리 그런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잖습니까?" 당연하다는 얼굴로 반문하는 마크를 보며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뒤에 서있던 마담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저리도 파렴치하고 더러운 말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솔하게 할까...하는 얼굴이었다. 이건 당당하다 못해 뻔뻔했다. 뻔뻔한 것도 이정도면 드래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는 확신이 들 정도였다. "이런 것도 인간이라고..." 샌들우드의 혀 차는 소리에 머리를 긁던 마크는 문득 노인의 팔에 안겨 자신을 노려보는 딸을 보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그것이 다 네 팔자다, 딸아. 내 딸로 태어난 것도 네 팔자고, 백작가에서 미움을 받은 것도 네 팔자지. 게다가 팔렸으면 얌전하게 있을 것이지 어떻게 했길래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다 네 팔자다. 그러니 눈에 힘 좀 빼라. 딸아." 왠지 모르게 세상사 달관한 노인장처럼 말하는 마크를 바라보던 카일은 몸을 돌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당장에 목이라도 졸라 죽여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의 혀를 자르고, 손목을 자르고, 다리를 분질러 줄 것이다. 네가 가진 황금 두 덩어리로 잘 치료해 봐라." 말을 끝낸 샌들우드는 카일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을 받은 카일은 세실의 파랗게 타오르는 눈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마크를 감시하라고 고용했던 용병이 새파랗게 질린 마크를 끌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끄아아아아악~!!" 숲에 살던 날짐승들이 푸드덕거리며 사방으로 놀라 뛰어갔고, 요란한 비명소리가 흐느낌으로 바뀌자 샌들우드가 세실을 카일에게 안겨주었다. "들릴 곳이 있다. 먼저 신전으로 가서 치료시켜라. 곧 따라 가마." "네, 어르신." 아이를 안고 있는 관계로 조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던 카일은 어느 새 마법사가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등을 돌렸다. "마차를 구해와라. 안고 가기에 멀다." 기운이 빠진 듯 축 늘어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일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바이오니어의 중심지. 황궁이 우뚝 서 있는 갈렌(Gallen)에서 100피텐(3km)정도 떨어진 대로 위에 회색빛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나타났다. 마차를 끌고 가던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고 자신의 상전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진을 구축했다. 하지만 마법사의 단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슬*립Sleep" 단 한방에 기사들을 잠재운 샌들우드는 유유자적한 동작으로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원단이 깔린 의자에는 우유 빛 살결에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잠 들어있었다. "이것은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너는 앞으로 말하지도 못할 것이며 걷지도 못할 것이며 손을 쓰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제자 세실에게 가한 가혹행위의 벌이 아닌 아이를 병신으로 만든 너의 죄이다. 또한, 네가 세실을 모함하고 채찍질을 가하고 고문한 행위에 대한 보상은... 네 육신이 죽고 난 후, 너의 영혼이 영원불멸의 연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받을 것이다. 크리스틴 폰 배너." 지옥의 사신과 같은 무감각한 목소리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저주를 내린 샌들우드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백작영애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것이 너에게 너무나 편한 형벌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만...세실의 경과를 보고 다시 찾을 것이다.' 샌들우드가 사라지고 난 후, 한 쪽은 검고 한 쪽은 새하얀 아홉 장의 날개를 가진 세카다가 나타났다. 『저런 저런 이것으로 크리스틴 폰 배너 양은 두 번의 연옥을 겪어야하는 저주를 받았군요.. 쯧쯧쯧...불쌍도 하지. 허나 이를 어쩌나...이미 계약을 했으니, 그 아이가 건 저주는 무효로 해주어야겠군. 아깝다...아무쪼록 올바른 선택, 올바른 길을 걸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세카다는 잠이 들어있는 크리스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의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준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아이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빛으로 흩어졌다. 파드드득 그 순간 마차의 창문으로 날아 들어온 새가 크리스틴의 머리위에 앉았다. 잡털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백색의 깃털과 자줏빛 귀여운 부리를 가진 스파로우(Java Sparrow문조)였다. 『젠장, 예나 지금이나 맨날 귀찮은 건 나만 시킨단 말이야...』 귀여운 생김새와 절대로 거리감 있는 말을 내뱉은 스파로우는 크리스틴의 이마를 부리로 콕 찍더니 볼 일을 다 봤다는 듯 쪼로롱 날아가 버렸다. 잠시 후 의식을 되찾은 기사들이 일제히 마차로 다가와 백작영애를 불렀으나,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흔들어도 백작영애가 의식을 찾지 못하자 기사들은 마차를 돌렸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아카데미가 있는 로먼(Romen)이 아니라 백작가가 있는 갈렌(Gallen)이었다. "어떻습니까, 대신관님. 치료가 가능합니까?" "............." 카일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그레고리 대신관을 보며 안달을 해보았지만 대신관은 쉬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이리 저리 갸웃하던 신관은 세실을 만난 경위를 듣 고 또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 아비가 노예상이 세실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고?" "네!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문제? ...전부 다 문제다, 이놈아!" "아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세요?" "쯧쯧쯧..." 귀를 막고 뒤로 물러서는 카일에게 혀를 차준 그레고리 대신관은 빛이 번쩍하는 순간 나타난 샌들우드를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치료는 했는가?" "아직입니다." "왜?" "그게...." 대신관의 눈치를 보던 카일은 대답도 않고 샌들우드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고리 대신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관님...." "꼭 치료를 해야겠나?" "네? 그게 무슨 말씀....?" "저기 누워있는 아이를 꼭 치료를 해야 하냐는 말이야!" 아예 샌들우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카일을 향해 소리를 빽 지른 신관은 그의 대답을 기다린 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 모습에 씩씩거리던 샌들우드가 한 발자국 움직였다. "치료를 안 하겠다는 건가, 지금?" "..........." "내가 마법사라서 상종 안 하겠다는 건가?" 의외로 샌들우드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것이 놀라웠는지 눈을 동그랗게 노마법사를 쳐다보던 카일은 대신관의 말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저주 거셨지요?" "............" "한 5미르 쯤 전에 저주를 거셨지요? 그것도 한 아이의 영혼에...그렇지요?" 대뜸 말을 높인 것도 놀라웠지만 그 내용은 정말 까무라칠 정도였다. ==== 저주는 아무나 거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하더라도, 저주에 대한 반작용을 생각하면 절대로 하지 않겠다 고개를 흔든다. 보통은 수명이 줄어들고, 어떤 경우에는 건강을 잃으며 심하면 영혼이 소멸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나를 다스리는 선택받은 이로서 다른 이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대가를 치뤄 야 하는 것이다. 신의 영역을 넘본 이들에게 주워 지는 형벌이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타인에 대한 저주는 쉽게 입에 담지 않는다. 헌데 지금 대신관은 샌들우드에게 저주를 걸었다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영혼에... 육신이 아닌 영혼에 저주를 거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에 대한 대가가 어떤 것이 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고, 윤회의 사슬로 돌아가는 영혼에 걸 수 있는 저주라는 것은...레니가 그러했고 샌들우드가 원했던 [연옥]과 [영혼의 소멸]밖에 없었다. 하기에 아직까지 영혼에 저주를 건 경우는 없다...고 기록된다. 그리고 여기 또 다시 '연옥'에 대해 크리스틴에게 저주를 건 이가 나타난 것이다. ++++++++++++ 레니가 이미 마왕과 계약한 것을 몰랐다 하더라도 어떤 반작용이 있을지도 모를 저주를 걸고 돌아온 샌들우드가 위대해 보이지 않으면 누가 그러하겠는가? 그렇기에 샌들우드를 바라보는 카일의 눈빛은 '존경'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떻게...알았나?" 침울한 얼굴로 되묻던 샌들우드는 야릇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지그시 눈을 감은 대신관을 보며 침을 삼켰다. '만약에...나 때문에 치료를 해주지 않겠다면? 그 아이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고...?' 원래 마법과 신성력은 둘 다 신의 숨결이기는 하되 성격이 달랐다. 해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교류는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스로 능력을 개발시켜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들은 똑같이 신에게 선택받았으나 선천적으로 신성력을 타고나는 신관들을 존경했다. 아니, 조금 양보해 준다는 것이 바른 말이다. 그리고 신관들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더욱 갈고 닦으며 수양을 하는 마법사들의 자유로운 삶을 일편 부러워하며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존중해주었다. 때로 수양이 부족한 것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샌들우드와 그레고리처럼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고위급 마법사라면 대신관과 거의 비슷한 경지이니 나이가 훨씬 작은 그레고리가 양보하는 것이 맞는 경우였다. 더구나 수 십 평생을 궁중 마법사로 지내온 샌들우드를 대신관이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좀더 양보하고 좀더 배려해 준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신관들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그것이 바로 저.주.였다. 살아있는 이에 대한 것이던, 죽은 이에 대한 것이던 그 어떠한 저주라도 용납하지 않았다. 허락하지 않았다.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저주를 걸고 싶다면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소견이었다. 거기에 대해 마법사들은 가끔 아주 가끔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자신을 희생하고 저주를 걸만큼 미친놈들은 없으니 걱정 말라고 큰 소리를 뻥뻥 쳐왔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다들 그렇듯, 마법사들 중에는 정말 그런 미.친.놈.들이 간혹 나타났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신관과 마법사들간의 충돌이 일어났었다. 저주의 낌세만 느끼면 번쩍 하고 나타나 자신이 자신 모든 신성력을 동원해 저주와 싸우는 신관들 덕분이었다. 샌들우드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저주를 건 것을 대신관이 알고 있으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곧 그의 제자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신의 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숙였다. 이백여년 살아오며 처음으로 정을 준 아이였다. 그의 괴팍한 성정을 웃음으로 받아주며 삭막하던 삶에 온기를 불어 넣어준 아이였다. 혀가 잘리고 손이 잘리고 다리가 문드러져도, 거친 사내들에게 겁탈을 당했다 하더라도 세실은 그가 말년에 얻은 사랑스러운 제자요 그가 인정한 유일한 제자였다. "내가 저주를 걸어 내키지 않는다면, 내가 떠날것이네. 그 아이는 나와 상관없는 아이가 될거야. 그러니 치료를 해주게. 어떠한 것을 요구하더라도 치료를 해주고 건강하게 만들어주게." "..............." 카일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고 그레고리 대신관은 눈을 번쩍 뜨고 샌들우드를 주시했다. "정말...지금 저. 안.에. 누.워.있.는. 아.이.를 버.리.시.겠.습.니.까?" 대신관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세실과 보내온 길지만은 않은 세월을 떠올렸다. 참으로 포근하고, 참으로 따뜻한 날들이었다. 내가 지켜줘야 할 아이. 이렇게라도 해줄 수 있다면... "버리겠네." 카일은 눈물을 보이고, 그레고리 대신관은 환한 미소를, 샌들우드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분량이 너무 많아 걱정입니다. 읽기 힘드신것은 아닌지...콜록 > < 리플을 쭉 읽어보다가 아껴두었던 나머지 분량을 손질하자 마자 올려버렸습니다. 오늘도 밤이 새도록 손가락부러져라 자판을 두드릴 생각을 하니... 팔목이 아파오는 군요... ㅜㅜ (대장금 끝나는 데로 글쓰기를 시작할 것이니...내일은 좀 늦더라도 봐주세요. 콜록) 그리고... 세실을 너무 많이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여러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어주겠습니다! 먼치킨 정도가 아니라 측천무후...(다랑어님 맞나요? 무슨 뜻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지무지하게 능력이 뛰어난 신을 때려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겠사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어요. 에, 마지막으로 미르님 도마 두꺼운걸로 준비해주시구요, gksmf님 우울증에는 즐거운 음악과 즐거운 영화, 즐거운 글이 짱이랍니다. (> <)b 힘내세요! 그 외에도 리플 20개를 만들어주신, 하레스, 네오아이, 일졸몽, 천년노송, 하얀마법, 나탁, 코코, 명, 청화륜, 은령, 별빛 바다..헥헥헥..님들 감사합니다. 있는거 다 올려드렸으니, 오늘은 이만 쉴께요 너무 감사드리구요, 행복하세요~~~~~~!! 아앗! 빠졌습니다. <제목 만들기> 이.벤.투. 벌써 25회 이니 원래 30회까지 할까 했는데...조금 늘여서 40회에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마 명색이 판.타.지.인데 50회쯤은 넘지 안을까 생각하면서... 이만 줄일께요. 같이 고민 좀 해주세요오~~~ ㅠ 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샌들우드, 분노하다. 2. "어찌 돌아온 것이냐? 내가 부르기 전에는 오지 말라고 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백작가로 돌아간 기사들은 문전박대를 당할 위험에 놓여있었다. 등을 돌리고 아예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 백작부인을 대신해 문 앞을 막고선 백작은 기사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화를 내느라 바빴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소리를 지르려던 그 찰라의 순간의 놓치지 않은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백작 영애께서 의식을 잃고 깨어나시지를 않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단번에 할 말을 끝낸 기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백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그것이 무슨 말이냐? 갈 때만해도 멀쩡했던 아이가 의식이 없다니?" "네. 길을 가는데 웬 마법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칼을 뽑았는데...."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영애께서..." "......마법사!" 백작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이 되었다. 차가운 얼굴로 말도 없이 사라졌던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꼭 감고 숨을 몰아쉬던 백작 부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백작님...영애를 안으로...신관을...신관을 불러주세요." "......가서 신관을 모셔오너라. 너희들은 영애를 방으로 옮겨라." 내막은 알 수 없으니, 백작부인의 떨리는 음성에 그리 명한 백작은 집사의 품에 안겨 마차 밖으로 나온 딸의 모습을 보고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크리스틴은 백작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벌을 받았구나...벌을 받았어...내가 받았어야 했는데, 네가 받았구나."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어있는 딸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백작부인은 백작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흐느껴 울었다. 그 구슬픈 울음소리에 몰려왔던 하인들이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세실에게 저지른 일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는 하지만 영애는 지고지순한 위치에 있는 백작가의 자손이었고, 그 아이는 한낱 평민에 불과했다. 귀족이 평민을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길을 가다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자리에서 목을 베이는 경우가 허다 했다. 그리고 백작과 백작부인 역시 귀족이었다. 비록 세실이란 아이를 아낀 백작부인이나 이렇게 의식을 잃고 있는 딸을 보니 눈물이 아니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내심 샌들우드에게 세실을 보낸 것을 후회하던 백작부인은 그렇게 아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오셨습니까, 이 아이를...이 아이를 좀 보아 주십시오. 깨어나질 못합니다." 백작부인의 안타까운 음성에 침대로 다가서던 신관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영문을 몰라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백작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크리스틴 영애의 얼굴을 주시하던 신관이 넙죽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부인. 이 분은...이 분은 감히 제가 치료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대신관 님을, 대신관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관의 떨리는 목소리에 어리둥절해 하던 백작부인은 사람을 시켜 직접 모셔오겠으니, 잠시만 아이를 돌봐 달라 부탁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 젊은 신관은 침대가로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여기 계셨습니까? 이곳에...이 곳에 계셨던 것입니까? 찾았습니다. 얼마나 찾았다구요, 신전 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대신관님도 혼란스러워하시고...저희는 신을 잃었다 한탄을 했습니다. 그런데...여기 계셨습니까? 이런 허울을 쓰고 여기 계셨던 것입니까,이카루스의 아이여!... 크흑" 자신의 눈에 똑똑히 보이는 신의 인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신관은 아이의 이마로 가져가려던 손을 내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아이가 아니다! 이카루스의 아이가 아니다! 그럼 이 아이는 누구란 말이냐? 이카루스의 아이는 어디가고 어디서 이런 추악하고 사악한 영혼을 가진 아이가 나타났더란 말이냐! 찾아라! 전 신전의 모든 이를 풀어서라도, 아니 성기사들을 풀어서 찾아오라! 우리 밖에 못 하는 일이다. 이카루스의 증표를 가진 아이를 찾아오라!" 신전에 항상 거금을 기부하는 카일이란 상인의 품에 안겨 돌아온 세실을 보고 눈이 뒤집힌 그레 고리 대신관은 신관들을 닦달했다. 그 소리에 놀라 방안으로 뛰어들어간 신관들은 아무리 살펴 봐도 아이의 이마에 증표가 보이지 않자, 통곡을 했다. 신이 자신들을 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손이 잘리고, 혀가 잘리고, 다리가 뒤틀리고 영혼의 저주까지 받은, 사악한 눈을 빛내며 복수를 다짐하는 그 검은 머리 아이는 이카루스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에서 신의 증표를 찾았다. 신관인 그에게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껍데기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신의 증표를 가진 자. 이마에 저처럼 밝은 빛의 축복을 받은 자가 바로 이카루스의 아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잠이 든 아이를 감히 내려다보지 못하고 침대 옆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리던 신관은 문을 벌컥 열고, 신경질 적인 걸음으로 들어오는 대신관을 보았다. "젠장, 이 바쁜 때에 무슨 백작영애를 고치라는 게야?! 내가 그놈의 기부금만 아니면...응? 넌 거기서 뭐하는 거냐?" "대신관..님..."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꽉 잠긴 목소리로 겨우 그레고리를 부른 신관은 천천히 백작 영애를 가르켰다. 두 손으로, 공손히... 그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대신관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왜? 왜....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아~~~!!!" 털썩 "............" 크리스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기를 일으키던 대신관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 꼴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던 신관은 놀라서 뛰어들어오는 백작부인을 보며 손짓을 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치..료에...방해..됩니다..." 까칠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신관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백작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신관이 저렇게 고생할 정도로 크리스의 몸 상태가 안 좋을까?' 기절한 대신관이 들었으면 배를 잡고 까무라칠 생각이었다. 찰싹~찰싹~찰싹~! 체신머리없이 대(大)자로 뻗어있는 노인의 뺨을 거침없이 내려치던 신관은 자신의 팔목을 덥썩 잡는 강한 힘에 다리위에 올려놓았던 대신관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턱! "쓰읍~" 뒤통수를 만지며 일어선 그레고리 대신관은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의 이마를 쓸어보던 대신관은 예의 마름모꼴의 표식에 손을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제가 그만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하겠다고 하셨지요? 끝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이게...이건 또 뭡니까? 아이의 영혼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대답 좀 하십시오. 네? 아... 이제 늙은이 기도는 필요없다 이거지요, 그렇지요? 아이도 찾았겠다 이제 저 같은 노물은 필요없다..." 『나의 뜻이 아니다』 "............" 변명을 하듯 얼른 들려오는, 근래에 들어 정말 자주 듣게 된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대신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카루스가 아니라는데 더 이상 투정을 할 수도, 원망을 할 수도 없었다. 내심 욕을 퍼부으며 아이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대신관은 기도를 올렸다. 짧고 간결한 기도였다. "이카루스의 아이에게 신의 축복을...." 기다렸다는 듯이 크리스틴의 이마에서 빛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감싸던 빛은 그녀의 목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흠...저주인가?" 신의 힘으로도 풀 수 없는 저주?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던 그레고리 대신관은 죽은 듯 누워있던 아이의 눈썹이 달싹거리자 긴장을 했다. 힘겨운 듯 몇 번을 달싹이던 눈썹이 드디어 위로 치켜세워지며 넓고 푸른 바다와 같은 빛깔을 가진 아이의 파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리스틴 폰 배너...영애." 순간 아이의 눈이 왕방울만큼 크게 벌어졌고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으시오, 영애?" 아이의 목이 좌우로 흔들리며 눈물이 흘렀다. 무엇을 부정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힘차게 고개를 젓는 아이의 얼굴엔 핏기하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글로 쓰시오. 영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종이와 연필을 쥐어주고 아이의 등을 받쳐준 대신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의 두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조차 움찔하지 않는 크리스틴을 안고 있던 대신관은 뭔가 감이 잡힌다는 표정으로 아이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한번 걸어보시오, 영애." 평소 '영애'에게 불만이 많았던지, 말끝마다 '영애'를 부르는 대신관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다 지친 아이는 그저 묵묵히 오른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털썩~! "헉!" 뒤에 서 있던 신관이 비명을 삼켰다. 아이의 왼발은 처음 바닥을 밟았던 그 상태로 굳어져있었다. 오른 다리를 구부린 채로 바닥에 쓰러진 크리스틴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움직이지 않는 왼발을 보았다. 또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양팔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신관을 올려다보 았다. '무슨 일이지요?' 아이의 맑은 눈빛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흠...말하자면 저주에 걸린 거지요. 그리 악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신성력으로도 풀리지 않습니다. 양팔과 외쪽다리의 근육을 뒤틀리게 만들고 성대를 움직이지 않게 만든 겁니다, 영애." 순간 바닥에 앉아있던 아이의 볼이 부풀어 오르며 고개가 또다시 좌우로 흔들렸다. "저주가 아니라구요, 영애?" 도리도리 고개를 열심히 흔들던 크리스틴은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대신관을 째려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어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찌릿 노려보는 14살의 소녀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런 소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대신관이 아이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넌 나가 있어라." "하지만..." "나가 있어." "네." 옆에서 분위기 파악에 여념이 없던 신관이 방을 나가자 대신관의 주름진 손이 크리스틴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샌들우드가 저주를 건 것이다, 아이야." ".......!"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레고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한 소녀가 카일의 품에 안겨 신전에 와 있다. 혀가 잘리고 손목이 잘리고 한 쪽다리가 뒤틀려있더구나." 푸른 눈이 반짝 빛나며 맑은 눈물을 토해내었다. "너를 이리 한 것은 네 스승의 뜻이었나 보다. 제자도 못 알아보는 바보 같은 늙은이...엥!" 샌들우드의 주름하나 없는 얼굴을 떠올리며 투덜거리던 대신관은 자신의 수염을 물고 늘어지는 아이를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수염을 물어뜯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알겠다. 잘못했다. 그것도 스승이라고 편애만 하는 거냐?" 그의 슬픈 목소리에 슬며시 입을 벌려 수염을 놓아준 크리스틴은 대신관의 눈을 쳐다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침대위에 떨어져 있는 종이와 펜을 주시했다.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요동을 치더니 펜과 종이가 두둥실 떠올라 그레고리와 크리스틴 사이에 놓였다. "오호...마법이냐?" 신기하다는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이 펜을 노려보았다. 「스승님은 괜찮으세요?」 "그 노인네야...험험..괜찮다." 「반.작.용?」 "글쎄다...아직은 모르겠구나." 순간 어깨를 축 늘어뜨리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주가 풀리면?」 "그야말로...고스란히 되돌아가게 되지." 그의 말에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펜을 주시했다. 「어떻게 된거죠?」 "나도 모른다. 네가 없어졌다가 나타났을 때 이미 너는 네가 아니었다. 지금 넌 크리스틴 폰 배너가 되었다." 아이의 눈이 다시 커졌다. 결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대신관이 화장대위에 놓여있던 크리스탈로 만든 거울을 가지고 왔다. "...........!" 입을 뻐끔뻐끔하며 거울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의 눈이 질끈 감겼다. 「아씨는?」 눈도 뜨지 않았는데, 펜이 혼자서 춤을 췄다. 그것을 보고 경악하던 그레고리 대신관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구나. 적어도 영애의 몸은 여기 있으니..." 「내 몸은?」 ".........." 「그 아이인가요? 신전에 있다는 아이? 혀가 잘렸다는 아이?」 "............."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대신관에게 머리를 박으며 눈물을 흘리던 크리스틴은 진이 다 빠진 듯 축 늘어졌다. 아이의 통통한 몸을 안고 일어난 대신관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눕혀주었다. "네 저주는 풀 수 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돼."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바닥에 떨어져있던 종이가 바람에 날린 듯 둥실 떠올라 그레고리의 눈앞에 펼쳐졌다. 「스승님을 불러주세요,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은 말씀하지 마시고, 스승님을 불러주세요. 그 아이를 치료해주세요. 함께 데리고 오라 말씀해주세요. 이곳으로 와달라고 전해주세요.」 "세실......." 대신관의 부름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참으로 맑고 깨끗한 눈이요, 미소였다. 비록 보조개는 사라졌지만...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마주하며 같이 웃어주던 그레고리 대신관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축복의 키스를 해주고 늙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름진 손에는 세실이 마법으로 글을 쓴 종이가 들려있었다. "뼈마디가 쑤시는 구나. 어서 가서 데리고 오마. 기다리거라." 그의 말에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하다가 다시 행복한 웃음을 머금는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대신관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닫혀있는 문을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틴은 서둘러 들어오는 귀부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 다가와 앉은 백작부인은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괜찮니, 크리스?" 그녀의 인자한 눈빛에 잠깐 망설이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이의 얼굴이 위아래로 움직이자 입술을 꼭 깨물던 백작부인이 곱디고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내가 고쳐주마. 이 엄마는 할 수 있단다. 걱정하지마라, 크리스. 엄마가 고쳐줄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낮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는 백작부인을 쳐다보는 크리스틴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마님!' 영문은 알 수 없으나, 영애가 사라지고 자신이 크리스틴의 몸속에 들어온 것이 확실해졌다. 스프와 빵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보니 이 모양이다. 말도 할 수 없고, 두 팔을 들어 슬프게 울고 있는 백작부인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으나 한 편으로는 다행으로 여겼다. 목소리가 나왔다면 자신은 크리스틴이 아니라 세실이란 말을 해야하고, 그러면 자식을 잃고 슬퍼할 백작과 백작부인을 볼 낯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아가씨...어디에 계세요?' 언제나 심통맞은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던 예쁜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있던 세실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백작부인의 따뜻한 손길에 또 눈물을 흘렸다. '엄마....!' 레니가 보고 싶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만 싶었다. 힘들었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갔다. 가고 싶은 길은 가지 못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뜻에 따라 억지로 끌려다녔다. '누구 짓일까......? 왜 그랬을까?' 알 수는 없지만, 영혼이 바뀐 것을 이해해보고자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세실은 곧 포기를 해버렸다. 머릿속을 뒤집으며 조금씩 흘러나오는 희미한 영상들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잠을 자야 한다고. 새록새록 솟아났다가 금새 사라지는 수 많은 장면들과 생각들이 그녀에게 눈을 감으라 소리쳤다. 몸은 편안하나 머리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을 하던 세실은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또다시 잠이 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백작부인은 집사의 방문으로 거실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허름한 옷을 입고,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검은 머리의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냐?" 백작부인의 말에 얼른 머리를 조아린 여인이 입을 열었다. "마님, 저는 카르민 자작가에서 일을 하고 있던 레니라 하옵니다. 제 딸자식이 이곳에 온지 벌써 4년이 되었는데도 얼굴조차 보지 못해, 이렇게 감히 찾아왔습니다." "딸?" "네, 마님. 세실...그 아이의 이름은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제발 저를 하녀로 써주십시오. 안된다면 잡일도 괜찮으니...이 집에서 딸과 함께 살게 해주십시오, 마님." 레니의 간절한 애원에 숨겨져 있는 조소를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눈빛을 가진 레니에게서 얼른 시선을 거둔 백작부인은 난처한 얼굴로 서 있는 집사를 보았다. 세실이란 아이는 없었다. 아비인 마크라는 사내에게 잡혀갔는데 그를 찾으러 갔던 샌들우드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찾았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세실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함께 떠나기로 했다던 그의 말을 떠올린 백작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딸아이의 생사마저 모르게 된 불쌍한 저 여인 을 이렇게 내 칠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아이는 지금 이곳에 없다." "네?!" 경악을 하며 고개를 번쩍 든 여인의 눈 깊숙한 곳에서 번뜩이는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백작부인 이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 아이는 지금 참으로..훌륭하신 분과 함께 여행이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내가 그 아이에게 학문을 익히라고 스승을 한 분 소개해 주었다. 지금쯤 그분과 함께 이곳 저곳 여행을 하고 있을께야. 허니 너는 이곳에서 머물며 아이를 기다려라. 일을 하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고, 그저 머물기만 해도 상관없다. 마리, 저 여인에게 입을 옷과 방을...세실이 머물던 방을 내주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해주어라." 죄지은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먼 곳으로 시선을 둔 채 빠르게 말을 끝낸 백작부인은 서둘러 몸을 돌려 2층 계단을 밟았다. "감사합니다, 마님. 감사합니다." 레니의 외침이 백작부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결코 씻을 수 없는 죄. 자식을 둔 여인만이 느낄 수 있는 죄를 지었단 생각에 흐린 눈을 깜빡 이며 걸음을 옮기던 백작부인은 보지 못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는 말을 연신 쏟아내는 여인의 눈에 담긴 처절한 한을. 그 처절하도록 시린 분노를! 핏기 하나 없이 새파래진 떨리는 입술을! '당신들이, 당신들이 내 딸을 팔았단 말이지! 내 딸, 세실을 마크 그 더러운 놈에게 내 주었단 말이지! 흥? 스승이라구, 여행이라구! 그 알량한 눈에서 피눈물이 흐를 것이다. 나의 딸이 너희들의 모든 것을 받을 것이고, 너의 그 잘난 딸년 대신 공부하고, 사랑받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으드득!' 세실은 백작부인의 소개로 샌들우드를 만났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매를 맞는 아이가 된 것도, 약초를 재배하여 백작에게 부를 쥐어준 것도, 어느 것 하나 말 하지 않았다. 딸을 걱정하 느라 밤잠 못자는 어미가 알면 혹시나 걱정하고 슬퍼할까 세실은 애써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숨겼다. 하기에 레니는 백작부인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했고, 더욱 크게 분노했다. 분명 자신의 딸의 모습을 한 인형이, 세카다가 들고 갔던 인형이 마크의 손에 들어간 것을 확신 한 레니는 자신에게까지 사실을 숨기며 죄를 은닉하려는 귀족을, 백작가를 향해 이를 갈았다. ************************************************************************************ 잘렵니다. 욕하셔도 좋아요, 짱돌 던지셔도 맞을께요. 흑 ㅠㅠ 밤새 이것 밖에 못 썼습니다. 리플 확인도 제대로 못했지만 조금 자고 일어나서 확인하고 다시 찾아뵐께요. 머리도 멈하고 눈도 따갑고... 그럼..여러분들 활기찬 하루 보내시고, 나중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아함......ㅜ ㅜ 행복하세요오~~~~~~~~~!!! 도도도도돗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뒷부분만 수정...흑마법사 등장부터 보시길...ㅜㅜ) 3. "이봐요, 레니. 힘내세요. 세실은 돌아올거예요. 마법사님이 그 아이를 찾으러 가셨고 분명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알겠죠?" 레니가 세실의 어미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방문했다. 수잔이란 아이는 그녀가 마치 제 엄마라도 되는 듯 레니의 품에 안겨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백작가의 하인들이 모두 찾아와 등을 두드려주고 돌아갔다. 레니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쌕쌕 잠이 든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수잔이란 아이였니? 고맙구나, 고마워. 세실이 널 언니라 하며 이야기도 참 많이 했다.' 수잔이 찾아왔을 때 레니는 아이의 이름만 듣고도 눈물을 흘렸다. 친동생처럼 잘 해준다고, 주방일을 하는 터라 간식도 몰래 가져다준다고 세실의 편지에는 그렇 게 수잔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지라 차마 아는 척은 하지 못했 지만 두 팔을 벌리고 안겨드는 아이를 마주 안아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겨우 여덟살난 철없는 것을 다독여주고 보살펴 준 수잔과 마리라는 여인은 레니의 은인이었다. 딸이 보내 주었던 편지들은 그녀의 치맛단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다른 곳 보다 조금 두툼한 부분을 쓰다듬으며 어떻게 하면 백작영애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던 레니는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마리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왔어요, 세실이 왔어요! 레니. 마법사님이 데리고 왔어. 마님이 나와서 딸을 만나보래!" 활짝 웃으며 들어온 마리는 수잔을 깨우고 얼이 빠진 레니의 손을 잡아당겼다. 거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고 그 중앙에는 백작부인과 백작, 크리스틴 영애가 얌전히 의자에 앉 아있었다. 그리고 그 앞,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과 건장한 사내 둘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을 보며 떨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던 레니는 가만히 앉아 허공을 보고 있는 영애를 보며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았다. "오, 왔느냐? 이리로, 앞으로 나오너라." 백작부인의 손짓에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옆으로 가서 선 레니는 몸을 돌렸다. "......?"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의 품에는 커다란 눈을 가진 소녀가 한 명 안겨져 있었다. 누군가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딸과 너무나 닮은 아이. 하지만 달랐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눈도 다르고 코도 다르고 입도 달랐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엄마가 자식을 못 알아볼 수는 없었다. 아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레니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던 백작부인이 레니의 어깨를 잡았다. "인사...해야 하지 않겠느냐?" "누구입니까?" 레니의 말에 거실이 웅성거렸다. 아이를 안고 있던 샌들우드 조차 흠칫했다. "이 아이를 모르겠느냐?" 아이의 엄마가 찾는다는 말에 한걸음에 달려왔던 샌들우드는 딸을 못 알아보는 중년여인을 보며 화를 벌컥 내었다. "도대체 그 아이가 누군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샌들우드의 눈이 왕방울 만해 졌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크리스틴을 노려보고 있는 아이의 시선을 잡았다. "저기 서 있는 여인을 모르겠느냐?" 노인의 말에 고개를 돌려 레니를 쳐다보던 소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 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샌들우드조차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잠시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던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가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남자를 손짓했다. "나와 저 사람들은 누군지 아느냐?" "........."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던 아이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냐, 내가 누구냐?" 샌들우드의 흔들리는 음성에 눈치를 보던 아이는 한참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아이를 쳐다보는 샌들우드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신성력으로도 잘린 혀와 손목을 되살리지 못했고 다리만 고칠 수 있었다.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한데 아이의 어미는 소녀를 모른다 하고 세실 역시 제 어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는 사이 앤드류가 고개를 번쩍 들고 앞으로 나왔다. "어르신!" 그가 샌들우드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속닥거렸다. 갑자기 놀란 표정을 하고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샌들우드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뒤로 돌아간 앤드류는 카일에게도 뭔가를 속삭였고, 카일의 반응도 샌들우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참을 침묵을 지키며 그렇게 서 있던 샌들우드는 아이를 내려놓았다. 절대로 품에서 떼놓지 않겠다는 듯 꼭 안고 있었던 그가 아이를 내려놓자 두 발로 바닥을 딛고선 아이가 의자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백작과 백작부인을 보았다. 백작부인을 쳐다보는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질끈 깨문 소녀가 느닷없이 크리스틴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뭉텅 잘린 혀를 놀리며 괴성을 지르는 아이를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틴은 그녀의 앞으로 달려오는 아이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감히, 어딜!" 쫙! 크리스틴의 옆에 서 있던 백작이 그 큰손을 휘둘러 아이를 내려쳤다. 하지만 샌들우드나 카일은 나서지 않았다. 백작부인도 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눈을 했지만 백작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에 의자에 못 박힌 듯 앉아있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자신들은 아무리 봐도 세실이 확실한데 아이의 어미는 고개를 흔드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더군다나 크리스틴에게 죽기 살기로 달려들다니...너무나 이상했다. 아이의 어미까지 고개를 흔드는 판에 세실이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아이가 과거 크리스틴에게 벌을 받았던 아이 중 하나라 생각하며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백작영애의 성질에 병신이 되어 나간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자신들이 모르는 아이라 하더라도 언젠가 길을 가다 저리 병신을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백작부부를 비롯한 백작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 아이가 세실이 확실합니까?" 오직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서둘러 물어보는 백작과 그의 팔에 잡혀 몸부림을 치는 작은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늙은이의 눈이 잘못된 듯 하네...그 아이는...세실이...세실이 아니야." "헉!" "역시......!"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신음성이 터져 나오고 백작의 손에 잡혀 있던 아이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잡혀있는 상태에서도 크리스틴을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백작부인은 시선을 돌려 레니를 바라보았다. 레니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본 백작부인은 마리에게 고개 짓했고, 시녀장은 조용히 나와 레니의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갔다. 딸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한 듯 축 쳐진 어깨로 힘없이 걸어가는 레니에게 측은한 시선들이 쏟아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마리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는 레니의 마른 등에 꽂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의 주인공을... 크리스틴 영애의 눈에 고인 눈물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샌들우드의 뒤에 서 있던 카일이 앞으로 나와 백작의 손에서 아이를 잡아끌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너무 닮아서...이 아이는 신전에 의탁할 것입니다." "흠흠 그러게나." 딸아이를 해하려던 꼬마가 꼴 보기 싫다는 듯 얼른 손을 휘저은 백작은 노마법사를 쳐다보고 고개를 숙였다. "2층으로...함께 가시겠습니까? 잠시 드릴말씀이..." "싫다." "스승님!" 백작부인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샌들우드가 이를 갈았다. "나는..부인 같이 고귀한 귀족을 제자로 둔 적이 없소. 두 번 다시 아는 척..." 순간 불어온 바람이 노마법사의 수염을 마구 헤집었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도 못한 작은 바람이었지만 그것은 샌들우드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놀라 이리저리 살펴보던 샌들우드는 이내 슬픈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뭐...잠시 이야기 정도야..." "올라가세요, 올라가세요. 스승님." 샌들우드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화색이 만연한 백작부인이 한 손을 내밀어 그의 로브를 잡았다. "그럼 전 가서 사람을 풀어야겠습니다. 너는 남아 있다가 어르신을 모시고 상회로 와라." "네, 형님." 카일이 앤드류를 남겨두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잡고 서둘러 돌아가자 일행들은 백작의 안내를 받으며 영애의 방으로 들어갔다. 순백색의 레이스로 치장이 된 푹신한 침대에 크리스틴을 눕힌 백작부인은 샌들우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저 아이의 병을...저주를 풀어주십시오.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저 아이가 세실에게 저지른 죄는 제가 받겠습니다." 저주란 말에 백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여나 마법사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저어한 때문이다. 백작부인의 간절한 목소리에 천장을 올려다보던 샌들우드는 문득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미소... 그것이 샌들우드를 아이의 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참동안 아이의 눈을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영애의 푸른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세실도 저렇게 말똥말똥 날 쳐다봤었는데...' 이미 저주는 발동되었다 믿는 샌들우드는 그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입과 팔다리는 엉뚱한 아이 때문에 벌을 준 것이니 그것은 풀어주어야지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이대로 둬버릴까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있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적어도 몸은 아니지..' "그..그럼?" "마법을 건 것뿐이야." 맑고 큰 눈이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듯 갸르스름해졌다. 그 낯익은 표정에 볼을 뚱하니 부풀린 샌들우드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늙은이가 마법이라면 마법인게야! 버르장머리없이 어딜 꼬나봐!" 순간 아이의 눈이 긴 실선을 만들며 백옥 같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걸렸다. 샌들우드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가 뭔 말을 하면 눈을 샐쭉거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던 제자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러면 아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저처럼 웃고는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샌들우드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들 나가 있게." "어..어르신?" "나가 있어!" "아, 네!" 샌들우드의 말에 백작과 백작부인이 다시 쫓겨났다. 앤드류는 나가려다 샌들우드에게 발목을 잡혔다. 조개처럼 입을 딱 닫고 크리스틴을 바라보기만 하던 샌들우드는 아이가 베시시 웃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너...아니지? 그렇지? 아닐거야. 암. 아니고말고. 아니지, 그렇지?" 소녀의 작은 머리가 좌우로 도리도리 흔들렸다. 그것을 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샌들우드가 바닥을 내리쳤다. "이 눈깔 썩은 빌어먹을 놈!...이...런 빌어먹을!" 바닥을 내려치며 누군지 모를 이를 향해 이를 갈고 욕설을 퍼붓던 노인은 자신을 포근히 감싸 주며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마나를 느끼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악몽이다! 저주다! 그래 이건 저주야!" 마법에 의해 앉은 자세 그대로 침대위로 날아온 샌들우드는 아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떨리는 손으로 닦아주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던 샌들우드가 자상하게 중얼거렸다. "살이 쪘구나. 엄청나게 쪘어. 그 살 다 빼려면 억겁은 걸릴테지..." 순간 고개를 마구 흔들던 아이가 샌들우드의 커다란 손에 볼을 비벼댔다.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앤드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아둔함을 탓했다. "반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네, 어르신." "그렇군." 샌들우드가 안고 있던 아이가 세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는데 앤드류의 힘이 컸다. 앤드류는 손목이 잘렸으면 의당 돌아왔어야 할 반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뒤늦게나마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니 아이의 손목은 무사하고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한 것이다. "이곳에 와서, 확인해라. 이리 와봐." "네?" "내 옆으로 와." 여전히 통통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샌들우드가 지친 음성으로 앤드류를 불렀다. 주춤거리며 그의 옆으로 다가선 앤드류는 문득 크리스틴의 손을 바라보았다. "없는데요?" "손이 하나 밖에 없냐, 이 바보같은 놈아!" 샌들우드의 호통소리에 놀라 아이의 오른손을 바라본 앤드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아이의 통통한 손을 잡았다. "세상에!"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던 반지가 오른손 약지에 걸려있었다. "이게 도대체...!"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우선 치료부터...엥?" 힘차게 고개를 흔드는 아이를 보며 놀라던 샌들우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평생 그렇게 살려고?" 감옥에 갇혀 고생하던 모습이 떠오른 샌들우드가 심퉁맞게 묻자 아이가 또 베시시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디선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장의 종이가 팔랑거리며 샌들 우드의 무릎위에 떨어졌다. 「절 알아보시다니, 스승님은 천재예요. 성격이 급한 것만 빼면 정말 훌륭하시다 칭찬해드릴만 해요. 아씨를 찾아주세요. 아씨를 찾을 때 까지만 이러고 있을께요.」 "뿌드득!" 말도 못 하는 아이가 마법을 쓴다는 것에 대견해하기 보다는 또 다시 쓸데없는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아이를 보며 샌들우드는 이를 갈았다. "넌 언제까지 남 걱정만 하면서 살거냐? 이제 좀 네가 하고 싶은데로 하고 살면 안되냐?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기왕 백작영애가 된 거 좀 잘 먹고 잘 살면 안되겠냐?" 샌들우드의 간곡한 음성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의 눈은 '절대불가'를 말하고 있었다. "끄으응...그럼 하나라도 풀자. 응?"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를 향해 끝내 화를 내는 샌들우드. "아, 말이라도 해야 속이 덜 상하지!" 베시시 웃던 크리스틴이 어딘가를 쳐다보자 펜이 휙 날아와 샌들우드가 잡고 있는 종이 위에서 춤을 췄다. 「누가 이랬는지는 모르지만 실수한 걸 거예요. 아씨가 어디계신지 모르니 그때까지만 이 몸을 지켜주고 싶어요. 마님이 아시면 슬퍼하실테니 전 제가 누구인지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손으로 쓰듯 반듯한 글씨로 한자 한자 적혀지는 글을 주시하고 있던 샌들우드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치료를 받지 않은 것이냐? 그래서...치료를 하지 않은 것이냐?" 아이의 능력만으로도 자신이 마법에 걸렸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풀 능력이 충분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작가에 다녀온 대신관은 '신성력으로도 풀리지 않는 저.주'를 걸었다며 펄펄 뛰었지만 그것은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원하지 않았기에 풀리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 몸이 바뀐지도 모르면서 치료를 거부한 것이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 아이를 쳐다보던 샌들우드가 눈을 감고 마나를 유동시켰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한다. 널 이리 만든 것이 나이니, 널 치료하는 것도 나이다. 성대는 그대로 두마. 그 성격에 분명 목소리가 나오면 '전 세실이예요~'이럴테니 그냥 두는 것이다. 네 어미를 아는 척도 말고, 백작부인에게 행여나 글을 써서 사실을 알리지도 마라.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백작부인을 괴롭히기 싫거들랑 영애를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이러고 살아줘라. 그 성격 더러운 아이 대신에 너처럼 착한 아이를 자식으로 두게 되었으니 그들의 복이다. 영애는...레이븐에서 찾을 께야. 걱정하지말고, 영애로 살아라. 아니, 살아다오." 아이의 맑은 눈을 보면 결심이 흔들릴까 걱정한 듯 눈을 감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말한 샌들우드는 조그맣게 주문을 읊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수염을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느낌에 눈을 뜬 마법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미소 짓고 있는 제.자.를 안아주었다. "평민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 영애를 찾아 줄테니 그 사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아. 더 높은 학문을 익혀도 좋고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그리 해라. 귀족은 평민과 달라 어디든 마음껏 다닐 수도 있고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다. 더구나 백작가의 자제다. 누가 널 저어 하겠느냐. 그렇게 해라. 잠시나마..그렇게 하고 살아." 절대로 풀리지 않을 마왕과의 계약이라는 것을 모르는 샌들우드는 비 맞은 참새처럼 애처롭게 떨고 있는 아이를 안정시키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의 마음에 닿았는지 점차 몸의 떨림이 잦아든 아이는 고개를 들고 샌들우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미소를 짓고 있는 스승의 볼에 작은 손을 가져다 대었다. 예전의 굳은살이 잔뜩 베인 거친손이 아닌 부드럽기 그지없는 하얀 손으로. 잠시 스승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크리스틴은 옆에 서 있는 앤드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손을 마주잡아주는 낯익은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인 크리스틴은 제 발로 일어섰다. 낯선 몸이되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이 들어있는 사이 세실의 영혼은 크리스틴의 육신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크리스틴이 살아왔던 모든 기억이 세실의 영혼에 기억되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이 세실의 영혼과 융합되었다. 조금의 혼란스러움도 없었다. 마치 두 개의 삶을 살아온 듯 괴리감 이 느껴지지 않는 두 가지 기억에서 크리스틴의 몸을 가진 세실의 영혼은 레니를 사랑하듯 백작 부부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잠시 망설이며 샌들우드와 앤드류를 바라보던 아이는 작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문으로 뛰어갔다. "크리스!" "아가!" 초조한 얼굴로 문밖을 서성이던 부부는 문을 활짝 열고 뛰어나오는 소녀를 보며 두 팔을 벌렸다. 그 사이로 뛰어간 세실, 아니 크리스틴은 눈물을 글썽이며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다. 부모는 아니되 부모로 생각되는 분들. 가슴 깊이 각인되어있던 크리스틴의 기억이 세실의 영혼을 그리 만들고 있었다. 처음 눈을 떠 백작부인을 봤을 때 느껴졌던 거리감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험험...아직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네. 시일이 조금 걸릴 것이야. 해서..." "감사합니다, 스승님. 허면 이곳에서...?" 백작부인의 희망찬 눈길에 찔끔하던 샌들우드는 그들의 품에 안겨 베실베실 웃고 있는 제자를 째려봐주고 고개를 돌렸다. '찔리죠?'라고 눈을 빛내는 아이를 보기가 민망했다. "괜찮으면...아이가 있던 오두막에.." "안됩니다, 어르신. 어찌...그냥 이곳에 계십시오. 방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치료를 해주신 다니...그 정도라도 허락해주십시오." 귀족 특유의 거만함을 벗어던진 백작은 딸을 병들게 한 이가 치료를 해준 것임에도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아내에게 노마법사의 정체를 들은 그는 치료를 해 주겠다 나서준 것만으로도 감읍 할 따름이었다. 공손한 태도로 아이의 방과 가까운 곳에 있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백작에게 멋쩍 은 얼굴을 지어보인 샌들우드는 바닥을 툭툭 찼다. "뭐...방을 내어준다면...고맙게 받아들이겠네. 커험" 애써 상기되는 얼굴을 가리려는 듯 먼 산을 보던 샌들우드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부들 부들 떨고 있는 앤드류를 무시했다. 그가 결정을 내린 이후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백작의 명령으로 크리스틴의 옆방이 주인을 모시기 위해 몸살을 앓았고 기어코 식사를 하고 가라고 매달리는 백작부인의 만류에 남게 된 앤드류는 영애의 오른손에 끼여 있는 반지를 계속 주시했다. '이상해...이상하단 말이지..' 자신이 아니면 결코 뺄 수도 빠지지도 않는 약속의 반지였다. 몸이 바뀐 것이라면 응당 반지는 세실의 몸에 있어야 하건만 보란 듯이 크리스틴 영애의 손가락에 붙어있으니 그는 그 연유를 알아내야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잠시 후 하녀들이 음식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백작 부부 사이에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램 몸통 구이를 들고 들어온 사람은 레니였다. 물끄러미 레니를 바라보던 크리스틴의 푸른 눈이 검은 눈과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는 레니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짓던 크리스틴은 마법사의 헛기침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백작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애써 미소 를 짓던 크리스틴은 레니를 부르는 백작부인의 잔잔한 음성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사하거라, 세실의...어머니다." 아이의 놀란 얼굴이 죄책감으로 인한 것이라 해석한 백작부인은 격려의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틴 의 손을 잡아주었다. 곱고 부드러운 손이 전해주는 따스함에 망설이던 크리스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너무나 그리웠던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미안해요...' 딸의 얼굴조차 못 알아보는 레니에게 사과를 하며 거친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던 크리스틴은 어느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는 백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백작 의 눈이 시리도록 아프게 느껴졌다. 딸이라 착각을 하는 백작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목을 움츠 리던 크리스틴은 마주잡아주는 손에 힘이 들어가자 눈을 들어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니 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보았다. "제 딸을...보살펴 주셔서...감사합니다. 행복하게 살았겠지요...아비와 함께 갔다니...지금도 행복할테지요. 아가씨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훌륭한 어른이 되시어요. 지금 가지고 계신 그 고운 마음씨, 정직함 모두 가지고 훌륭한 어른이, 훌륭한 귀족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행복하세 사세요. 행복하시어요, 아가씨." 주루룩 눈물을 흘리며 앞날의 축복을 빌어주는 레니를 보는 크리스틴의 푸른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울지 마세요, 아가씨. 제 딸은 행복할 겁니다. 이 어미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행복하면 저도 행복하지요. 그 아이가 울면 저도 웁니다. 어미란 그런 것이지요. 자식이 행복하면...어디서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아가씨도 행복해야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행복하세요. 웃으세요. 많이 웃고 많이 즐거워하시고... 그래야 부모님도 행복하십니다." 마치 딸에게 하 듯 자상하게 일러주는 레니의 말에 애써 웃음짓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떨구고 거칠고 부르튼 손을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리웠어요. 그런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엄마. 행복할께요. 제가 행복하면 엄마가 행복하다 하셨죠? 행복할께요. 웃을께요. 즐거워할께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께요.' 레니가 한 말은 크리스틴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잠시 뿐이라 할지라도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로. 크리스틴의 영혼을 가진 이를 찾을 때까지라도 최선을 다해 귀족으로서 존경받고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그리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것이 어미의 바램이요 소망이라 생각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자식의 행복을 느낀다하였으니 언제나 행복하게 웃으며 살 것이라 맹세했다. 바다빛 푸른 눈을 빛내며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크리스틴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 를 지어보인 레니는 백작부인과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어색한 얼굴로 딸을 축복해준 이를 바라보던 백작부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레니, 한 가지 청이 있어요. 우리 딸을...딸 아이를 보살펴 주겠어요? 아이를 돌봐줄 아이가 없으니, 레니가 해 주시겠어요?" 과한 부탁이었다. 만약 딸을 아비가 데려가게 만든 것이 크리스틴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데 백작부인은 그러한 부탁을 한 것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았다. 딸아이를 바라보는 눈 에 담겨있는 진심을, 딸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그 마음을 확인했다. 백작부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레니의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마님." 세 여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남자들의 얼굴에는 단 한 가지 감정만 담겨져 있었다. 불안함. 백작은 사실을 알고 난 후 혹시나 레니가 딸을 해칠까 걱정했고 마법사와 앤드류는 세실, 아니 크리스틴이 레니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까 걱정했다. 남자들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기 투합한 세 여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정말 밝게 웃었다. ---------- "끄으응...."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서 신음성이 들려왔다. 피가 흥건하게 고여있는 가운데 누워있던 사내가 눈을 뜨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크크크크" 누군가가 지혈을 해준 듯 피는 멈췄지만 상처는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심했다. 왼쪽 팔은 어깨부터 뭉텅 잘려있고 오른쪽 다리도 허벅지 바로 밑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개를 빼서 자신의 몸을 살펴보던 사내는 털썩 땅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았다. '이제 된 것인가....?' 그의 생각을 알았음인가 공기가 요동을 치더니 칠흑 같은 검은 빛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 나타난 사내. 그는 놀랍게도 마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흑요석같이 밝게 빛나는 검은 눈...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심연의 눈을 가진 사내는 천천히 바닥에 누워있는 마크에게 다가갔다. 입을 벌리려던 마크는 자신의 혀가 잘린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말하라, 허락한다.」 심처에서 들리는 듯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미소를 지운 마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 를 노려보았다. "이제 되었소이까, 위대한 존재여?" 빈정거림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하찮은 존재를 주시하고 있던 남자가 품에서 한 개의 주머니를 꺼내어 마크의 옆에 던져놓았다. 「계약은 완료되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할 겁니까, 위대하신 존재여." 마크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과 불안함이 공존해있었다. 딸을 팔아먹으려 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세실에 대한 걱정을 가득 담은 음성으로 질문을 던지는 마크를 바라보는 사내의 입가에 실날같은 미소가 걸렸다.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너의 자식도 아닌 것을...」 "......." 할말을 잃고 눈을 감았던 마크는 이를 갈았다. "제...딸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군요. 위대하신 존재여. 그 아이는...제 딸입니다. 제 아내의 몸에서 낳은 제 딸입니다." 「..........」 그의 말이 의외였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사내는 여전히 강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는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감히 나의 일을 막아보고자 했느냐? 그래서 감히 그 아이를 죽여보려고 발버둥쳤느냐?」 ".........." 이번에는 마크가 할 말을 잃었다. 문득 그의 부릅뜬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마크는 얼른 눈을 깜빡여 흔적을 지웠다. 이를 악물고 사내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던 마크는 가슴을 들썩이며 감정을 감추었다. "제 몸을 고쳐주셔야지요, 계약을 할 때 제 몸에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 하셨으니 원상태로 돌려주십시오." 「흠....」 마크의 요구에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심을 하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허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시선을 돌리고 답을 회피한 정직한 남자 마크는 선물로 잘렸던 팔 다리가 재생되는 끔찍한 느낌에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눈물까지 흘리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마크는 고통이 사라지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없었다.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렸던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마크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주머니를 들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보석들이 광채를 뽐내며 아기자기 모여 있었다. "킬킬킬킬...어리석은 짓이라고? 이미 했지..암...너와 계약을 한 것부터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도 자식이라 죽이지 못한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킬킬킬킬" 미친 듯이 보석을 바라보며 울고 웃고 하던 마크는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자 고개를 들었다.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다섯 명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그리고 등 뒤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기운들. 앞에 서 있는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한 기운을 가진 자들이었다. 감히 돌아볼 용기가 없는지 앞만 주시하고 있던 마크의 입술이 비틀렸다. "뭡니까?" 시꺼먼 로브 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다섯 쌍의 붉은 빛이 활활 타오르며 마크를 주시했지만 분명 벌벌 떨며 겁에 질려야할 사내는 눈도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레니라는 여인을 아느냐?" ".......!"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마크의 눈이 빛을 잃었다. 빛이 사라진 마크의 눈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의 눈이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널 혼내주기로 약속했다." "우리 흑마법사들은 약속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지..킬킬킬" "암...널 혼내줄 것이다." "겁나느냐?" "겁날꺼야." 장난스럽지만 절대로 장난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기운을 풍기며 서서히 다가오는 흑마법사들을 바라보는 마크의 눈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그것을 즐기려는 것인지 음침한 기운을 흘리며 천천히 다가와 마크를 둘러싼 흑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억겁의 시간, 세상이 멸하기 전까지 너에게 죽음을 허락지 않는다. 흙으로 돌아가 윤회의 사슬에 오르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영원의 시간동안 고통받고 괴로워하고 네가 행한 일들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후회하고 또 후회하라. 허나 눈물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몸을 눕히고 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신조차 외면하는 존재가 될지니, 그것이 너의 미래가 될 것이다." 온몸을 둘러싸고 있던 살들이 썩어 들어갔다. 살이 녹아내리고 근육이 사라지고 혈관들이 먼지가 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눈을 감싸던 눈꺼풀도, 그 안에 들어있던 안구도 모두 사라졌다. 뼈만 남은 채 숨을 쉬고 멀쩡히 서서 흑마법사들을 바라보는 마크의 눈이 그를 노려보는 존재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게 변해갔다. 푸르스름한 안광을 빛내며 우뚝 서 있던 마크는 주문이 끝나자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새하얀 뼈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들어올려졌다. 자신의 변한 모습을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이리 저리 손뼈다귀를 뒤집어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스켈레톤은 빙글 뒤돌아선 스켈레톤은 숲을 헤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한 발자국 한 발자국 움직이면서 온몸의 뼈가 달그락 달그락 요란한 소리를 내었지만 마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 여유 자적한 모습에 푸른빛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던 흑마법사들이 중얼거렸다. "저렇게 나가면..."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놈들이 많을텐데..." "그렇지..." "좀...그렇지?" "흠..." 삐그덕삐그덕 새하얀 뼈다귀가 한 손에 가죽주머니를 들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뭔지 모를 심오함이 느껴졌다. 고개를 갸웃하며 동료들의 눈치를 보던 흑마법사가 손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공중에서 휙 날아든 검은 색 로브가 마크의 뼈다귀를 휘감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뼈다귀를 감싸안는 천을 보고 걸음을 멈춘 스켈레톤이 킬킬 걸이며 돌아섰다. "이거...돈이라도 내야 하오?" "쓰읍...사람들이 놀랄까 주는 것이다." 무뚝뚝한 대답에 고개를...해골을 갸웃하던 마크의 푸른 안광이 샐쭉 가늘어졌다. 그것을 본 또 다른 흑마법사가 손을 휘두르자 로브 아래로 삐져나와있던 다리뼈에 목이 긴 가죽 신이 신겨졌다. 손...가락 뼈를 건들거리며 로브를 걷어 올리자 새것이 분명한 바지와 윗옷이 입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뼈다귀를 감싼 옷과 로브를 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마크가 자신이 들고 있던 보석주머니를 로브 속으로 감추었다. "나..는...가진 것이 없소. 킬킬킬" "가라." "돈은 필요없다. 가라, 가" "넌 우리들에게 종속된 존재이니 어딜 가든 우리가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헛짓하지 말고 행여나 뼈다귀가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찾아내어 가루로 만들어주마." ".......그러면 죽는거요?" 심각하게 물어오는 뼈다귀를 노려보던 흑마법사들이 등을 휙 돌렸다. "가루가 아니라 먼지가 되어도 죽지 않는다." "아무렴! 고통은 느끼겠지만 금새 되살아날테니 그런 기대는 행여나 하지 마라." 뼈다귀를 삐걱거리며 서 있던 마크는 그의 귓가에 모기소리처럼 욍욍거리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킬킬거리며 웃었다. "고맙소이다...클클클....가거들랑 레니, 그 죽일 년에게 내 말을 꼭 전해주시오. 시간나면 고향에나 한번 들리라고...크하하하하핫!"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던 마크는 삐그덕삐그덕 소리(처음보다는 훨씬 작은 소음이긴 했다)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스켈레톤으로 변한 것에도 불구하고 태연하다 못해 초연한 모습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흑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어디 가서 사고 치는거 아냐?" "흥! 그러면 가서 가루로 내서 자루에 넣어 다니면 되지." "그렇군..." "고향이라...고향?" "그 여관을 한다는..." "레니 부모?!" "헉!" "잡아들여!" "에이..설마?" "아니다! 우리가 가자! 레니에게 이야기해서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거야!" "그래서?" "...헛짓을 하면..." "그 뼈마디를 조각조각 내주고 목걸이로 걸고 다니면 돼!" "말하는 목걸이?" "............" 찬바람이 힘차게 몰아치며 지나갔다. 잠시 서로 눈싸움을 하던 흑마법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레니의 부탁대로 일단 혼(?)을 내주기는 내주었는데 영 반응이 시원찮은 것이 뒷간 갔다가 닦는 것을 잊고 나온 듯 찜찜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데리고 다니자니 걸리적거릴 것 같고, 어차피 사람들 눈에 뜨이면 신전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할테니 내버려두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귀찮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흑마법사들의 대인기피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벌써 사라지고 없는 마크를 다시 잡아들일것인가 말것인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던 이들은 백작가에 있을 레니에게 이야기를 하여 고향이란 곳으로 가봐야 겠다는 결론을 내며 마법을 시전했다. 워*프 . . . . <수정 끝!!!!!> ************************************************************************************ 제목 만들기 이벤트는 정확하게 35회에서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No1 프레셔스(프레시어스) - 코코님 No2 미들소드 - 다랑어님 이렇게 두개가 들어왔습니다. ******************************************************************** 리플을 보고 다시 보고 몇 번을 봐도 이편을 그냥 넘기면 앞으로 정말 힘들어질 것 같아서 쓰던 부분 집어치우고 다시 고쳤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길지 않은데, 흑마법사들이 마법만 걸고 휙 사라지는 거였죠. 그래도 아~주 나중에 일어날 일을 조금 보여드릴까 하는 생각에 뒤의 내용을 덜렁 붙여놨더니.. 참으로..참으로...그부분을 지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다시 수정했습니다. 여전히 뭔가 어색하다 느끼시는 부분이 있을테지만 그 부분은 조금만 있으면 금방 표가 납니다. 왜 어색했었는지...그래도 말도 안된다 생각이 되시면 개인적으로 메세지 보내주시거나 리플로 달아주시어요. 모든 분의 입맛에 맞게 해드리겠다는 욕심은 부릴 수 없지만 틀린 말이 아닌경우 에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없이 글을 남겨주세요. 완전히 몰아서 올리면 이해하기는 쉽겠지만 제 필력이 따라주질 않으니 머릿속에는 맵도는 데 글로 만들어내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많은 이해 부탁드리구요, (죄송합니다.) 마음에 안드는 부분 고치고 고치다 보면 저번처럼 한두편 올리는데 이삼일 정도는 까먹게 되거든요 변명같이 들리시겠지만...전 썼던 부분을 조금 고치기 보다는 아예 확 지우고 다시 쓰는 성격이라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린답니다. 겨우 이거 쓰면서도 리플 보자마자 매달렸으니..거의 서너시간 되었군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게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여러분께 감사드리구요 앞으로는 최대한 노력하고 공부해서... 수정한다고 한회 쓸 시간을 두번 허비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패놓고 사랑한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분이 계셔서 짧게나마 말씀 드리자면 그런 인간들...많습니다. 의외로...팔이 아니라 다리가 부러져서 걷지도 못하고 턱이 빠져 밥을 못먹어고 온몸에 피멍이 들어 쪽팔려서 병원도 못가는데 다음날되면 멀쩡한 얼굴로 '몸 잘 추스 려라, 사랑하니까 그런거다. 다 잘되라고 그런거야'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 있답니다. (_ _) 또 사설이 길어지는 군요. 이만 줄이고, 다음편에서 인사드릴께요.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뒤집어지다! 1. 백작가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황태자의 방문 때문이었다. 세실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며 길길이 날뛰던 황태자는 샌들우드의 '슬*립' 한 방에 깊은 잠에 빠져 세바스티앙의 등에 업혀 돌아갔다. 어두운 안색으로 황태자를 보필하며 따라왔던 세바스티앙은 한동안 샌들우드와 대화를 나눈 후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하루도 되지 않아, 바이오니어 국가 전체에 두 사람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졌다. 한 사람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열두 살 난 여자아이로 본래 이름은 세실리아이며 약초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황태자를 독살하려는 음모에 관여했다는 죄목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용병 출신의 30대 남자로 이름은 마크, 그 역시 역모의 죄를 쓰고 수배령이 내려졌다. 아주 세밀하게 그려진 몽타주에 적혀있는 상금은 한 사람당 각각 100만 골드. 평민이라면 평생을 두고 써도 다 못 쓰고 죽을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또한 이것은 죽은 죄인에 대한 몸값이며 산 채로 데리고 오는 자에게는 장장 300만 골드를 지급한다는 황명도 함께 떨어졌다. 이에 바이오니어 곳곳의 관청이 매일 몸살을 앓으며 사람들이 끌고 온 수많은 죄인(!)을 상.담. 해야 했다. 그리고 몇일 후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여 데리고 온 이는 구류 30일, 벌금 50실버라는 황명이 다시 내려지자 관청으로 향하던 그 많은 인구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지 여전히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역모죄를 짓고 달아난 두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끄응...아가 이제 고만하고 밥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 두꺼운 서적을 탁 덮으며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던 샌들우드는 자신이 고른 것의 두 배는 더 두꺼워 보이는 책에 심취하여 열심히 독서를 하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을 못 들은 듯 아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은근슬쩍 목을 길게 빼고 책을 넘겨다보던 샌들우드는 의자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마계에 대한 모든 것」 저자도 불분명한 책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자신의 몸이 뒤바뀐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껏 서재에 박혀 읽 어온 책이라고는 「저주, 이것만 알면 100% 성공한다!」「마법으로 사람을 바꾸는 방법」내지는 「마족, 이들은 어떤 존재인가?」등등 뿐이었다. 안쓰러운 눈으로 벌게진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책을 읽는 소녀를 일견한 후 천천히 몸을 일으킨 마법사는 밖으로 나가 레니를 찾아 나섰다. 저렇게 얼토당토않은 내용에 빠져 있을 때는 레니라 는 여인이 딱 쥐약이었다. 어느 누구가 와도 꼼짝도 않던 아이가 레니만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옆에 놓아둔 교양도서를 읽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던 것이다. 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온 샌들우드였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다. 만약 레니라는 존재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밥도 먹지 않고 책만 파고들던 아이는 이미 말라죽 었을 것이기에...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통통하게 살이 올랐던 크리스틴의 몸은 또래의 아이들 보다 훨씬 마른 날씬한 몸매가 되어있었다. 여기 저기 백작가를 뒤지던 샌들우드는 크리스틴 영애의 방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레니를 발견 했다. 딸아이가 그리운 것인지 그녀는 가끔 이렇게 주인이 없는 방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고는 했다. 얼마 전 갑작스레 고향을 다녀온 후로는 그러한 증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고,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오랜 시간 겪어온 고생과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여인의 몸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험험. 이보게." "아, 네. 어르신." "거...바쁘지 않으면 크리스...한테 밥이라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레니는 기운 없던 모습을 던져버리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아가씨가 또 식사를 하지 않으시나요? 서재에 계시겠지요?" 얼굴에 다 써있다는 듯 마법사의 얼굴만 보고 대답을 들은 듯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레니의 기 운찬 발걸음을 보며 샌들우드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니야...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지. 딸네미가 엉뚱한 인간 몸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면..?' 레니를 볼 때 마다 고민을 해왔지만 도대체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딸아이에게 그러하듯 지극정성으로 크리스틴을 보필하는 레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것도 괜찮지?'란 생각이 들었다가, 또 멍 하니 앉아 생각에 잠겨 시름하는 여인을 보고 있노라면 '이야기를 해버릴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샌들우드는 그렇게 크리스틴의 주위를 맴돌며 어미닭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여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가씨!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어서 일어나세요!" ".....!" 레니는 그녀의 목소리에 얼른 읽던 책을 치우고 얇은 서적을 손에 쥐는 소녀를 못 본척하며 코를 쥐고 다가갔다. "어휴...책 냄새! 제가 말씀 드렸지요? 아가씨가 건강해야 부모님도 걱정 안하신다고. 이렇게 속 썩이실 거라면 백작님께 말씀 드려서..." 레니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던 크리스틴은 은근슬쩍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아양을 떨 듯 몸을 베베 꼬며 베시시 웃는 크리스틴을 찔끗 노려 보던 레니는 아이의 야윈 손을 잡고 식당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제가 마음 놓고 어딜 갈 수나 있겠어요? 제가 없으면 끼니도 안 챙겨 드시니, 어르신 보기에 죄송하지도 않냐구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는 모두 한 가지였다. 제발 걱정시키지 마라. 나날이 약해지는 몸을 생각하는 것인지 언제나 레니의 잔소리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몇 달이 지나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아이가 걱정스러운지 늘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부모님 을 뵙고 싶다고 고향에 다녀온 후 크리스틴에게 하는 잔소리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마치 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처럼 자신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며 말끝 마다 걱정시키지 말라 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다. 레니가 어떤 말을 해도 방긋방긋 웃던 영애도 그런 말을 할 때면 눈물을 글썽이며 도리질을 쳤다. 백작부인 역시 딸아이가 레니를 잘 따르자 처음에는 안심했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듯 보이는 레니를 보며 점점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해졌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냐던 백작부인에게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 대답을 했지만, 레니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오늘 당장에라도 떠날 사람인냥 이것저것 챙겨두고 크리스틴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레니의 모습은 그녀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레니가 백작가에 온지 1년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날도 어제처럼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크리스틴을 데리러 왔던 레니는 '아가씨'라는 말만 남기고 쓰러졌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레니라는 여인이 쓰러짐으로 인해 백작가는 웃음을 잃었다. 미소가 지워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다니는 크리스틴 영애 때문이었다. 백작의 요청으로 찾아왔던 신관은 '수명이 다 한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이를 전해 들은 영애는 레니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니에 대한 아이의 정이 그리도 깊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백작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작은 침대를 레니의 침대 옆에 붙여주었다. 백작부인은 평소 레니가 신명을 다해 크리스틴을 보살폈고 아이의 모난 성격이 사라진 이유가 레니의 부드러운 성격 덕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찌보면 자신보다 레니를 더욱 따르는 딸에게 섭섭하기도 했지만 기껍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백작부인의 말없는 배려에 레니의 병간호를 하게 된 크리스틴은 그 동안 자신이 받아온 보살핌 을 보답하려는 듯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매일 죽을 쑤어 레니의 입에 직접 떠먹여주고 몸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목욕을 시키거나하는 힘든 일은 마리가 해 주었지만 그 외의 모든 일은 크리스틴이 했다. 이를 지켜보던 백작가 하인들은 사람이 바뀌었다며 수군거리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의 진 심어린 태도에 점차 존경의 눈길로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고작 하녀에 불과한 사람을, 그것도 그토록 쫓아내려고 안달하던 아이의 어미를 친어머니처럼 대하는 백작영애의 그 마음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항상 어려워하고 피해가려던 사람들이 크리스틴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던 사람들이 지쳐 보이는 아이에게 힘을 주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모든 변화들은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그것을 옆에서 줄곧 지켜 보던 백작부부는 커다란 행복을 느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 레니가 처음 크리스틴을 만나 축복한 그대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잠시 크리스틴의 얼굴을 보러왔던 샌들우드는 레니의 부탁으로 아이가 잠든 후 다시 방을 찾았다. "무슨 일이요, 부인." "어르신께서는...제 딸의 스승님이었다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렇소." 행여나 왜 제자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냐는 원망을 들을까 걱정을 하던 샌들우드는 그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감사합니다. 전...백작부인의 말을 믿지 않았었지요. 거짓말을 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헌데...어르신처럼 훌륭하신 분께서 제 딸을 보살펴 주시다니...죽어서라도 감사할 겁니다." 가늘어진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이야기를 하는 레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샌들우드는 곧 죽을 사람처럼 말을 하는 레니에게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하지만 서서히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 가는 레니의 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제가 갈 때를 안답니다. 괜히 힘을 쓰지 마세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리고..어르신께 라면 무덤으로 가져가려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길텐데...앉으시겠습니까?" 죽음의 강을 건너려 준비를 하는 사람인 듯 차분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레니의 말에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은 샌들우드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잠이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여인을 지켜 보다 눈을 치켜떴다. "내 딸....세실리아....나의 모든 것이었고, 내세(來世)에도 그러할 아이...다시 만난다면 다음번 에는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게 살게 해주마. 꼭 약속할께, 세실." 금발머리의 아이를 쓰다듬어주며 따뜻한 약속을 한 레니는 경악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어르신. 바로...저랍니다." ========================= "으흑...흑....흑...." 쨍그랑~! 아침 일찍 죽을 쑤어 방으로 들어오던 마리는 침대에 엎드리고 앉아 울고 있는 백작영애를 보고 접시를 떨어트렸다. "아...가씨, 목...목소리가?!...아!" 일년이 넘도록 벙어리로 지냈던 백작영애의 목소리를 듣고 경악하던 마리는 아이의 앞에 누워있 는 레니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한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룻밤 새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잠을 자듯 누워있던 레니는 끝내 딸을 보지 못하고 간 것 때문 인지 눈을 감지 못했다. 반듯하게 누워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약간 눈을 뜬 상태로 무엇인가 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등진 여인. 그녀의 마지막을 오랜동안의 침묵을 깬 크리스틴의 울음 소리가 지켜주었다. "멀리서나마 딸아이를 지켜보고 싶습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세실이 돌아올 것이라 말하는 백작부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남겼던 레니는 제 소원대로 백작가가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묻혔다. 크리스틴 폰 배너. 15살의 숙녀가 된 그녀의 일상은 레니의 죽음으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샌들우드의 뒤를 쫓으며 앞마당을 가꾸고 자연에 대해 배웠다. 그 후에는 백작이 재초청한 이안 남작에게 공부를 배우고 점심을 먹은 뒤 레니의 무덤에 들러 인사를 한 후 신전으로 가서 고아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 정도만 해도 칭찬 받기에 마땅했으나,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영애는 직접 차를 끓여와 백작 부부의 무릎을 베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재잘거렸다. 마치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도 되는 듯 항상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밝게 생활하는 크리스틴은 백작부부의 빛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바뀐 영애를 믿을 수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없잖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흐뭇하게 받아들였다. 어쨌든지 앙탈부리고 하인들을 벌레처럼 취급하던 것이 사라졌으니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누나 왔어!" "누나라니? 아가씨라고 해야 해. 들키면 맞아 죽을꺼야!" "쉿! 오셨다." "헤헤 오늘은 뭘 읽어줄까나..?" 신전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아이들이 한 켠에 마련된 넓은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커다란 파이니들 나무 아래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은 크리스틴은 집에서 가지고 온 <요정 이야기>란 책을 펼쳐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제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옛 이야기나 신화에 관한 책을 읽어주던 크리스틴은 언젠가 '요정'이라는 것이 정말 있냐고 물어본 아이를 떠올리며 이 책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포이얄 요정은 붉은 장미를 지키는 요정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끝~" 경쾌한 목소리로 마무리를 한 크리스틴은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일 또 올께. 알지?" "네!" 매일 매일 똑같은 약속을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영애의 약속에 활짝 웃던 아이들은 그들 사이를 뚫고 걸어나오는 아이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어...저 얘는?" "뭘 들고 있는데?" 또래의 아이들 보다 몸집이 훨씬 작아 보이는 한 소녀가 두 손에 유리잔을 들고 크리스틴 앞에 섰다. 잔을 들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자세히 살펴본 이라면 한 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의 손이 팔목과 이어지는 부분의 피부색이 미세하나마 차이가 난다는 것을. 하지만 아이의 태도가 너무나 태연해 크리스틴은 그 아이의 손이 의수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아이가 웬일인지 낯이 익다 생각하던 크리스틴은 아이가 내민 잔을 받아 들고 미소지었다. "고맙다. 새로 온 아이니?" "아니요! 여기 온지 1년이 훨씬 넘었어요. 그리고 누나, 걔는 말을 못해요." 크리스틴의 말에 냉큼 대답하고 나선 소년은 젯밥에 관심이 더 많아보였다. 잔에 가득 담긴 우윳빛 액체를 바라보며 침을 흘리는 소년을 보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던 크리스틴이 아이의 이목을 상기시켰다. "토미! 오늘 읽어준 책의 내용을 다시 이야기 해주면 내가 이것을 네게 줄께." "쓰읍...누나, 정말요?" "그럼~"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틴과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한 토미라는 아이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며 가슴을 쭈욱 내밀었다. "크흠...그럼 잘 들어. 내가 다시 이야기 해줄께. 옛날 옛날에..." 어느덧 아이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에 심취해 이런저런 몸동작까지 취해가며 요정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열심히 이야기 하던 토미는 막힌 부분이 있으면 제 멋대로 말을 꾸며내고 드문 드문 애드립까지 넣어서 정말 재미있게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던 크리스틴은 또 다른 잔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이를 보며 의아 해했다. 자신이 들고 온 잔을 가리키고 토미를 가리킨 아이는 크리스틴에게 어서 마시라는 손동작 을 해보였다. "이거...나 마시라구?" 영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자신이 들고 온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이의 따뜻한 배려 에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어준 크리스틴은 들고 있던 우유빛 액체를 쭉 마셨다. "맛있구나, 고마....우웁!" "꺄아아악!" "누나!" 한 아이를 시작으로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신전전체에 울려 퍼졌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입안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붉은 액체를 손으로 받으며 헛구역질을 몇 번 하다 의식을 잃었다. 스르르 눈꺼풀이 닫히는 순간 크리스틴은 드디어 그 낯익은 아이를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해 내고 말았다. '그때...백작가에서...' 자신에게 음료를 권했던 아이가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고 신나게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새를 보지 못했다. 크리스틴이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나무의 앙상한 가지위에 올라가 아래를 주시하고 있던 새는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영애를 보며 구슬프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정말 몹쓸 아이로군...기회를 주었는데 또 다시 이런 짓을...흠..안되지 안돼.. 모처럼 만난 고객인데 첫계약은 확실히 해야지..그래 그것이 좋겠군.』 심연의 어둠 속. 방울 방울 달린 새빨간 푸드로를 따먹으며 새의 눈을 통한 영상을 구경하고 있던 세카다가 못마 땅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대 영혼의 저주를 받은 아이여, 너의 기억을 모두 거둘 것이니 이로서 갱생의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고 스스로의 안식도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나의 계약자 레니가 원한 데로 어느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할지니...기억마저 잃은 네가 어찌 살아갈 것인지는 끝까지 지켜보겠다. 날 즐겁게 해 줄 것이라 믿겠다, 크리스틴 폰 배너 란 이름으로 살았던 아이야.』 나무 넝쿨 속에 숨어 쓰러진 영애를 바라보며 사악한 미소를 짓던 아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에 빠져드는 것을 바라보던 세카다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가 시전한 것은 유有에서 무無를 만드는 마법으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을 백지로 돌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신전 밖으로 달려 나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세카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지켜보고 있겠다, 저주받은 아이야.』 "심각하군요...이렇게 독이 지독하다니..."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크리스틴의 얼굴은 연녹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대신관이 잠시 출타하는 바람에 수 십명의 신관들이 달려들어 신성력을 쏟아 부었지만 독은 해독되지 않고 몸속을 떠돌아다녔다. 또 아이들의 말을 듣고 카일이 데려왔던 아이를 찾아보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다행히도 원인도 모를 독에 중독 된 귀족가의 여식, 아니 이카루스의 아이는 끊어질 듯 힘든 호흡을 이으며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그들은 그저 대신관이 돌아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기다림의 순간이 지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신관이 돌아왔다. 의식을 잃은 영애를 보며 펄펄뛰던 대신관은 사람들을 쫓아내고 홀로 남아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대고 이카루스에게 원망을 하다 정전기 고문(빠지직~)을 당했다. "젠장! 그렇게 욕 듣기 싫으시거든 얘 좀 그만 괴롭히시라니까요!" 신관으로서는 담을 수도 없는 욕을 수없이 하며 기도를 올리던 그레고리는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에 펄쩍 뛰었다. 『........나의 뜻이 아니다.』 마치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들리는 이카루스의 말에 입술을 삐죽여 보인 그레고리는 어느새 눈을 뜨고 다 들었다는 듯 웃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래도 신관님이 잘못하신 거예요." "너도 그렇다. 널 해하려고 달려들었던 아이가 주는 것을 넙쭉넙쭉 잘도 받아마셨더구나." 문득 침잠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흔들었다. "못 알아봤어요. 얼굴이 많이 달라져서..." "흠...그렇긴 하지." 세실과 판에 박은 듯 닮아 보이던 아이는 시간이 조금 흐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가 조작이라도 한 듯 하루아침에 다른 얼굴이 되어버린 아이는 다른 아이 들을 무시하며 언제나 홀로 생활했다. 의수를 달아주었어도 아이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서고에 들어나 무언가를 찾는 듯 수많은 의서들을 뒤적이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는 했었다. 그것이 크리스틴을 노리고 독을 공부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아이는 이미 사라졌고, 대신관은 그 아이가 신전 밖에서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니 그것을 벌로 대신한다 명하고 함구하라 부탁했다. 크리스틴 영애도 자신에게 일어났 던 일이 알려지면 외출이 금지될 것이고, 아이들과의 약속을 어기게 되니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애는 마치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대.범.한. 태도에 신관들은 혀를 차며 경배(!)했고 아이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초월하는 크리스틴을 신과 동급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졸지에 대신관보다 더욱 존경받는 이로 승급된 크리스틴은 노인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천천히 신전을 벗어났다. "잡아오랴?" "킬킬킬킬" "말만 하거라. 내 고것을 담빵 잡아 오마." "아니요, 할아버지. 괜찮아요." "괜찮기는? 우리가 준 약이 아니었으면 신관놈들이 오기 전에 꼴까닥..." "따닥!" "꾸엑!" "이놈아 말을 가려서 해라." "어디서 그런 망발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해골이 쪼개지는 고통을 당한 흑마법사는 신음성을 흘리며 크리스틴 앞에 훌쩍 나타나 코를 킹킹 거렸다. 시꺼먼 로브 안에서 빛나는 푸른 빛 안광이 스산스럽게만 보이련 만 영애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기만 했다. "아가야, 내가 맞는 게 웃기느냐?" "큭큭, 할아버지. 이빨이 빠졌어요. 킥킥킥" "엥?" 고개를 돌리며 키들거리는 크리스틴을 멍하니 바라보던 흑마법사는 고목같이 말라비틀어진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입속을 만져보다 휙 사라졌다. "젠장. 내 틀니가 어디 간거야~~~형님 때문이잖아, 쪽팔려라아아아~~~~" 긴 여운을 남기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시꺼먼 로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그곳에는 일루젼으로 모습을 감추고 둥둥 떠 있는 수십 명의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막내 할아버지 틀니 만들어주실거죠?" 어디론가 사라진 흑마법사를 찾아서 달래주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왜?" "왜?" "해주실거죠?" "......." 생글 생글 웃으며 '해주실꺼야'라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흑마법사들은 머리를 긁적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가 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마라. 몇 미르면 된다." 귓속에서 맴도는 말을 음미하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크리스틴은 턱을 괴고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바라보았다. 레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흑마법사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 무덤가에서 울고 있던 크리스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레니에게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들이 자신들의 본모습을 드러내 고 의탁을 부탁했을 때 크리스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보며 "레니의 아기" 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머니와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어머니의 고향이 어디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 에 그리도 어미가 아파하고 한숨지었는지 그것도 언젠가는 이야기 해 줄 것이라 믿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란 생각에 호기심을 억누른 크리스틴은 언제나 하늘을 날.아.다. 니.는 흑마법사들과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해질 수 있었다. 대인기피증이 있는 흑마법사들에게는 크리스틴이 보여주는 그 초연한 태도가 아이에 대한 호감 을 키우는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호기심은 있으나, 억지로 묻지 않고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 는 것이 확실한데 이처럼 떼를 쓰거나 어리광(?)을 부릴 때 외에는 봐도 못 본 척 해주는 것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크리스틴의 입장으로는 그들이 어미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 습관 이 영 향을 많이 주었다. 흑마법사들이 말한 의탁은 의탁이 아니었다. 밥도 알아서 먹고(먹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잠도 알아서 자고(이것도 본 적이 없었다), 화장실 가는 것도 알아서 하고 (......) 그런 마당에 의탁은 무슨 의탁이란 말인가? 말은 의탁이되 하는 짓은 영락없는 보호자 이니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점점 호감으로 그것이 믿음으로 끊임없이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흙이 묻어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 나뭇가지로 땅에 뭐라 긁적 이던 크리스틴은 문득 베시시 웃었다. 아주 오래전 스승님이 계시던 오두막 근처에 있는 시냇가 에서 정령들을 불러내려고 시도했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N*o*r*m(놈)" 장난스럽게 중얼거린 말에 크리스틴의 눈 앞에 흙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불쑥 불쑥 솟아오른 흙이 한덩어리로 뭉쳐져 수염을 길게 기른 난쟁이 노인을 만들어내자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빌어먹을 놈들, 뭐. 일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지. 헹! 크하하하하핫!" 순식간에 밀려드는 세찬 바람을 향해 비아냥거리던 흙덩어리 난쟁이 할아범(?)이 불쑥 튀어나온 배를 잡고 웃어재꼈다. 그것을 보고 멍하니 앉아있던 크리스틴은 번들거리는 눈과 마주치자 눈을 깜빡였다. 소녀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은 표정을 가진 신기한 존재를 조목조목 살펴보는 동안 그 살아 움직이는 흙덩어리 역시 아이의 얼굴을 요모조모 따져보고 있었다. "너...참 귀엽구나?" "네?" "허허허...이 나이쯤 되면 귀여운 것이 좋지. 암..좋아..좋구말구..." 난데 없이 나타나 귀엽다느니, 다 자라면 미인이 되겠다느니 헛소리만 하던 흙덩어리가 크리스틴 의 손을 덥썩 잡았다. "반갑다, 아이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거의 5년은 기다린...쉿 저리가!" 소녀의 손을 마구 흔들어 대던 흙덩어리가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니 갑자기 바람이 잠잠해졌다. "헹! 날파리들 같으니, 어딜 넘봐? 오...그래 그래. 어디까지 했더라...아 맞다. 반갑다! 아가야. 내 이름은 Noahs(노아스)라고 한다. 네 이름은 뭐냐?" "에..저 세실...그...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합니다." "세실 그 크리스틴 폰 배너?" 재미있는 이름이라는 듯 은근히 눈을 감고 되풀이하는 노아스를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던 크리스틴 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원래 이름은 세실리아라고 하는데..지금은 크리스틴 폰 배너로 살고 있었요." ".......대단하구나!" ".........." "뭐 상관없다. 너 계약하자." "네?" "네~라고 대답해봐라. 이왕이면 귀엽게." "...네에~" "오호~좋고! 좋다! 세실의 영혼을 가진 크리스틴 폰 배너, 땅의 정령왕 노아스와 계약이 성사되 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자알~부탁합니다아~" 한쪽 눈을 찡긋하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린 노아스는 넋이 빠진 크리스틴의 손을 놓아주고 필요 하면 이름만 부르라며 흙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1등이닷~~~~!" ************************************************************************************* 꺄아아아앗~ 드디어! 드디어! 꽉 막혀있던 부분을 해내고야 말았습니다아~~~!! 크리스틴을 보며 이를 가시던 분들께 저 아이가 바로 그 아입니다! 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푸하하하핫 도대체 어디서 넣어야 할 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결국 해내었습니다아~! (덕분에 설명이 길어 지루하진 않았나 모르겠네요...30회 전에 모든 힘든 일을 마무리 하려니 조금 지루하지요?) 레니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서서히 풀어나갑니다. > < 지금 다 해버리면 나중에 쓸것이 없다는...콜록 세카다도 문제였지요. 흠... 거기다 이제 슬슬 세실을 키워야하니...아니다 앞으로는 크리스틴으로 부르겠습니다. 줄여서 크리스으~ 본명은 크리스티나아~ 너무 실어서 줄였지만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티나가 마음에 들어요. 크리스티나 아귈레나 캬아~~~ 좋고~! 노아수~ㅋㅋㅋㅋ 제일 좋아하는 정령왕입니다. 제가 만든 것 중에서. 대략 성격들이 다 비슷하지만 저랑 제일많이 닮은 것 같다는...콜록 에..그리고, 앞에 수정전 내용에 너무 쉽게 믿는다고 지적하신 분들 말씀에 내심 찔렸습니다. 제가..딱 그렇거든요. 역시 작가가 그모양이니 등장인물들도 따라가더군요...에휴..죄송합니다. 원래 제가 좀 앞뒤 안가리고 사람들 말을 덥썩 덥썩 믿는 경향이 있어서..나중에 뒤통수 맞고 후회하지만 안고쳐지더군요...글을 쓰면서 뽀록나다니..ㅠ ㅠ 아무쪼록 실수는 날카롭게 지적해주시고, (코코님, 하얀첫눈님 6회 20회 수정완료했슴다!) 맘에 안드시는 부분도 지적해주시고 제가 기운빠질 듯 하면 가끔 칭찬도...콜록 잘 부탁드립니다아~~~ 여러분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뒤집어지다! 2. 노아스가 사라진 후, 스스로도 놀란 듯 멍하니 앉아 있던 크리스틴이 벌떡 일어났다. "아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친 크리스틴은 저택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말고 기다 리라는 흑마법사들의 말은 사라지고 없었다. "꺄하하하하하하하!" 양팔을 벌리고 마구 웃으면서 대로변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가는 백작영애의 모습은 기리 남을 만한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소녀를 쳐다보았지만 무엇이 그리도 좋은 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는 아이를 보고는 이내 슬며시 미소를 지 으며 길을 비켜줬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도 모르고 한걸음에 백작가로 돌아온 크리 스틴은 샌들우드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스승님!" "헉, 뭐...뭐냐?" 읽고 있던 종이를 황급히 감추며 벌떡 일어난 마법사는 소녀의 손에 이끌려 정원으로 달려 가야했다. 어느새 백작부인이 가꾸는 꽃밭에 도착한 아이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샌들우드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손짓을 하는 제자 를 보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 크리스틴은 마음을 가다듬고 작은 손을 내밀어 바닥으로 향 했다. 아주 오래전 물을 떠놓고 그 위에 손을 내밀어 '운디네'를 부르던 백작부인의 행동 을 떠올린 것이다. "N*o*a*h*s"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에 흙덩어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예의 난쟁이 할아범의 형상을 이루었다. 노아스는 자신의 머리위에 닿은 아이의 하얀 손을 덥썩 잡고는 또 다시 마구 흔 들어대기 시작했다. "껄껄껄껄, 그래 이 늙은이가 그렇게도 보고 싶었단 말이지. 반갑네! 무엇을 도와줄까?" "아니요, 인사시켜 드리고 싶은 분이 계셔서..." 불과 몇 미르 전에 보았건만 오랜만에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노아스는 크리스틴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아스의 눈과 입을 쩍 벌리고 수염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샌들우드의 눈이 마주쳤다. 씨익~ 흙으로 만들어진 이를 드러내며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 노아스가 짧은 다리로 자박자박 걸어가 얼이 빠진 샌들우드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이런, 이런. 이게 누군가? 코찔찔이 샌디 아닌가? 많이 늙었네? 반가...엥?" 자신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노아스를 쳐다보던 샌들우드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쳇! 예나 지금이나 간이 콩알만 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끌끌끌. 타스테르가 봤으면 좋아했겠군...쯧쯧쯧" 뒤로 넘어간 샌들우드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며 중얼거리던 노아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을 모은 채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계약자를 보며 허리에 양손을 걸고 배를 쭉 내밀었다. 척 봐도 잘난 척 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스승님을 아세요?" "스승? 누가, 얘가?"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샌들우드를 가리키며 못마땅하게 인상을 쓰던 노아스가 다다닷 달려와 크리스틴의 앞에 우뚝 섰다. "저놈은 분명 마법사였을 텐데...너..계약자도 마법사인가?" "에...크리스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전 음...마법사 지망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망설이던 크리스틴의 대답에 노아스가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저놈한테 마법을 배우려고? 아서라..쯧쯧 저놈은 무늬만 마법사야. 타스테르가-이놈 스승인 데-그렇게 정령 마법을 가르치려고 하다가 안 되서 결국에는 마법책을 던져줬지." "네? 정령 마법이요?" 크리스틴의 놀란 얼굴에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듯 고개를 앞으로 삐죽 내밀며 노아스가 누가 들을 새라 작게 속삭였다. "원래 저놈 스승인 타스테르는 정말 뛰어난 정령사였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4원소 정령 왕들과 모.두. 계약한 유일 무이한 존재. 아, 뭐 너는 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는 않으니 걱정마라. 에...어디까지 했더라? 아! 어쨌거나 타스테르가 말년에 거둬들인 제자가 저 녀석인데 근성이 글러먹었어. 쥐뿔만한 친화력 믿고 까불다가 정령한테 버림받고 울며 겨 자 먹기로 마법사가 되었지. 쯧쯧" 노아스의 말처럼, 정령들에게 버림받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계약이라는 것은 쌍방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친화력이라는 것은 타고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갈고 닦아 친화력을 높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 로 아무리 뛰어난 친화력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정령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존중하지 않는 이 들은 정령들에게 미움을 받아 계약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원래 정령이라는 것은 본성이 자유롭고 억매이기 싫어하며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계약으로 인해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본시 약속이란 것은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 만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친화력이 뛰어나 계약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정령들이 고개를 흔들거나 소환되기를 거부하면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친화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기에 거의 99%는 불러만 주면 좋다고 달려간다.)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었으나, 정령사 자체가 귀하다 보니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샌들우드는 그 몇 안 되는 희귀 케이스의 대표적인 예로 정령계에 기록되어 있었다. 4대 정령왕과 계약 하는 신기록(新記錄)을 세운 뛰어난 스승에 뒤지지 않는 능력은 지녔으나, 어릴 적 샌들우드는 너무나 건방졌다. 잘 나가는 집안의 둘째로 태어나 사랑만 듬뿍 받고 자랐 던 그에게 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해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었다. 한마디 로 샌들우드는 세상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시건방진 아이였던 것이다. 처음 아이의 재능을 발견했던 타스테르는 그것을 그저 어린 아이의 치기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치기는 아집으로 발전했고 급기야 계약한 하급 정령들마저 하찮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는 어린아이 특유의 제멋대로인 성정과 귀족으로 학습한 것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가진 정령들은 급기야 그의 소환에 응하지 않으려 버티기 시작했고 정령왕에게 매달려 차라리 소멸을 시켜달라고 울부짖었다. 이에 심사숙고에 들어간 정령왕들은 매일 몸살을 앓는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샌들우드의 계 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한다 통보했다. 샌들우드는 어느 날 갑자기 정령들이 소환에 응하지 않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러한 감정은 정령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남의 탓을 하려는 성향이 강한 인간들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걔네들은 내 종.속.물.이예요. 계약을 했으니 내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제까짓 것들이 뭔데 제 멋대로 계약을 파기하는 건데요?" 열 여덟살 나이에 정령사로 이름을 날릴 준비를 하던 샌들우드는 자신이 정령들에게서 버림받 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던 테스테르는 고개를 흔들며 그의 손에 <마법 입문>이란 책을 쥐어주 었다. 어려서부터 책만 파고들던 아이라 뒤늦게 검을 잡아도 체력이 뒷받침 되어 주지 않으니 별 볼일 없는 기사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차라리 그것 보다는 그래도 학문의 한 갈래인 마법을 배우도록 권유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샌들우드에게 닥친 시련이 정령왕들의 장난기 어린 투정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깨달음이 있으면 정령들은 스스로 돌아오길 원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령들이란 그런 존재였다. 한없이 자유롭기를 원하되 자신을 불러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존재들. 그래서 그는 충고보다 침묵을 택했다. 이는 모두 제멋대로인 성정을 지닌 아이가 철이 좀 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일어난 일이였지만 결국 샌들우드는 스승의 기대를 멋지게 꺾고 보란 듯이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것이 샌들우드의 숨겨진 과거였고 정령들과의 악연이 시작된 이유이었다. 아무리 소환을 거부하고 계약을 파기 한다 하였다했지만 타고난 재능까지 어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령들의 입장에서는 조금만 존중해주었으면, 조금만 사랑해주었으면 영원히 그의 곁을 지키며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텐데, 어린 꼬마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넙쭉 마법 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적어도 타스테르와 계약했던 정령왕들의 생각은 그러했다. 미운 강아지는 뭔 짓을 해도 미워 보이기 마련이다. 때문에 샌들우드가 마법의 재능을 발견하고 정령들에게 등을 돌린 순간부터 이를 갈던 정령왕 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타스테르의 호출만 기다리고 있다가 소환만 되면 순식간에 계 약자가 원하는 일을 해주고 남은 시간은 샌들우드 괴롭히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테스테르도 자신과 정신적으로 이어져있는 동료(정령)들의 마음을 알기에 슬쩍 눈감아 주고 못 본 척 했다.(나중에 겨우 몇 년 만에 3써클에 도달한 샌들우드는 그게 다 스승님이 배 아파서 그런 거라고 투덜거렸다가 실.프.에게 매달려 절벽위에서 한나절을 버티는 수.련.을 해야 했었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샌들우드라 해도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도 없는 기운을 풀풀 날리며(일부러 그런 것이였다) 장난을(정령 왕들의 입장에서) 걸어오는 살벌한 존재들 때문에 급기야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까무 라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을 가진 샌들우드는 더욱 괴롭힘을 당했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떠보면 어딘지도 모를 바닷가 위를 표류하고 있거나, 까마득히 자라난 나무 꼭대기에 걸쳐져 있거나, 이글거리는 용암 옆에 놓인 얼음(!) 속에 갇혀있거나, 무덤이 빼곡히 둘러싸인 이름모를 산중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원래가 담력이 약했던 터라 기절했다 일어나면 늘쌍 눈물을 질질 짜며 스승을 목 놓아 부르고는 했는데, 그것을 즐겁게 지켜보던 정령들이 '코찔찔이 샌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좋았어..." 아주 먼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움에 잠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노아스는 어느새 깨어나 이를 부득부득 가는 샌들우드를 보며 빙글거렸다. "허참, 세월도 빠르지. 코찔찔이는 어디가고 이런 늙은이만 남았...얼레? 주름이 없잖아?" 샌들우드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던 노아스가 그의 양볼을 탁 잡고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너...좀 컸구나! 그렇지? 타스테르가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텐데...징한 놈~" 샌들우드의 말투가 어디서 나온 건지 심의를 해봐야 할 순간이었다. 흰수염과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20대 젊은이 마냥 팽팽한 피부를 가진 샌들우드를 보는 노아스의 눈에는 대견하다는 빛이 역력했다. 앉은키가 저보다 훨씬 큰 샌들우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던 노아스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맞다! 그래, 계약자..아니 크리스야. 너 다른 정령왕들도 불러봐라. 응? 응? 샌디도 만났는데 기념으로 파티나...엥?" "꼬로록~" 말만 듣고도 경기를 일으키며 다시 넘어가는 샌들우드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노아스가 심술궂은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이 자식은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꼬로록이야? 젠장..."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기절한 샌들우드를 흙으로 덮어버린 노아스는 손을 탈탈 털고 기대어린 눈으로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계약해라, 응? 지금 해. 불러라, 불러." 흙으로 빚은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노아스를 보기가 민망한지 고개를 돌린 크리스틴은 얼굴을 붉히며 땅을 끄적였다. "...전....능력이 안되서..." "엥? 그게 무슨 소리냐, 능력이 안 되다니?" "저, 예전에도 친화력을 알아보려고 정령들을 불러봤는데...안나오던데요? 오늘도 그냥... 생각이 나서 노옴Norm을 불렀는데...저기...노아스...에....할아버지께서 나오신 거구요." 정말 정령왕인지 확신을 못한 크리스틴은 볼을 긁적이며 애써 노아스의 시선을 피하며 더듬 더듬 말을 이었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노아스가 크게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하하! 걱정마라, 아이야. 넌 할 수 있어. 암~ 이 세상 천지에 나를 이름 하나로 불러낼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되겠냐? 넌 선택받은...흡!" 호탕하게 말을 잇던 노아스가 급히 입을 틀어막고 크리스틴의 시선을 피했다. 옆에서 세찬 돌풍이 불어와 장미 꽃잎을 흩날렸다. 잠시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노아스는 크리스틴의 귀에 뭐라 속닥거리고는 휙 사라 져버렸다. 무언가에 쫓기듯 처음처럼 흙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먼지로 화해서... "나중에 시간나면 나머지 정령들도 불러봐라. 정 의심스러우면 샌들우드를 졸라서 정령마법을 정식으로 배우는 것도 괜찮겠지. 다른 친구들도 지금쯤은 언제 불러주나 하고 있을께야. 네 자신을 믿어라." 노아스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스틴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하핫핫, 하...할아..버지..." 방긋 웃는 아이의 볼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눈의 착각이련가? 시퍼렇던 안광이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것을 보며 애써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이 묵묵히 서있는 흑마법사들을 보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우리가..." "가만히 기다리라고 했지?" "그런다고 약속도 했지?" "왜...." "말을 안 듣는 거냐!" "혼자서 다니면 위험하다고 얼마나 일러주었는데!" 귓속에 웅웅거리며 들려오는 노한 음성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일어난 크리스틴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할아버지들. 저...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아무리 친해졌다 하더라도 크리스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샌들우드 단 한 사람 밖에 없었다. 왠지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노아스와 계약한 사실을 숨긴 크리스틴은 흑 마법사들의 눈치를 보며 바닥을 긁적거렸다. "흠...그래, 우리가 저기 누워있는 놈보다 못하단 말이지?" "킬킬킬...질투요, 형님?" "저 흙이나 덥고 있는 놈이 뭐가 부러워서?!" "............." "아가야, 농담이다." "쫄았냐?" "신경 안 쓴다. 무사하니 다행이고..." 찡한 죄책감에 고개도 못 들고 있는 아이에게 장난스럽게 위로해주던 흑마법사들은 잠시 자기 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뭐라 쑥덕거리다 결론이 난 것인지 일제히 아이를 돌아보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바닥을 내려다보던 크리스틴은 물방울 모양의 푸른 돌이 달려있는 목걸이를 쥔 푸르스름한 손이 보이자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한 동안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 그러니 이걸 목에 걸고 있어라." "절대로 빼면 안 된다." "추적마법을 걸어놓은 거다." "목에서 빼면 안돼."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면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금속 줄 끝에 달려있는 푸른 돌 안에는 이상한 문자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 작은 글씨들은 돌의 표면에 물결무늬에 둘러싸인 역으로 이어진 고리모양의 입체적인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흑마법사의 표기다." "네가 우리들의 보호를 받는 자라는 의미야." "사람들 눈에 띠면 좋을 것 없으니 보여주지 마라." "귀찮은 일이 생긴다." "그래도 혹시나 마법사들한테 부탁할 일이 생기거들랑 이걸 보여주면 될 거다." 흑마법사들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에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우윳빛 피부와 썩 잘 어울리는 미세하게 금빛이 뿌려져있는 푸른색 돌은 가슴선 아래 깊숙이 내려가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배꼽 근처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뱃살을 집어넣어보려고 노력하는 아이를 보고 흑마법사들 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좀 자라면 가슴까지는 올께다." "킬킬킬...좀 차가울꺼야." "많이 먹고 빨리 크는 게 좋아." 흑마법사들의 농담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인 크리스틴은 배의 힘을 풀고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가슴이 나오지 않은 관계...콜록..로 절벽(?)을 따라 한 가닥 줄에 매달린 돌은 크리스틴 의 배를 간질이며 숨을 쉴 때 마다 앞뒤로 흔들거렸다. 생전 처음 해보는 목걸이의 감촉에 적응을 하려고 노력하던 크리스틴은 어딘지 모르게 서두르 는 기색이 역력한 흑마법사들을 배웅했다. "스승님? 스승님, 일어나세요." "끄으응....퉷! 퉷!" 흑마법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크리스틴은 서둘러 흙을 파헤치며 샌들우드를 깨웠다. 신음성을 내며 천천히 일어난 샌들우드는 입안에 들어간 흙을 뱉어내고 그것도 부족했 는지 입안에 남아있던 흙을 아그작 아그작 씹어서 삼켰다. 마치 흙.에 원수 진 일이라도 있다는 듯...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흙을 씹어 먹는 샌들우드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주문을 외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깨끗한 옷, 깨끗한 몸. 클*리*어*(Clear)"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쾌해지는 느낌에 이를 갈던 동작을 멈춘 샌들우드가 크리스틴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눈치 빠른 아이가 먼저였다. "정령마법을...가르쳐 주세요, 스승님." "끄으으으응"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푹 떨군 샌들우드는 왜 하필 제자가 제일 먼저 계약한 존재가 노아스여야만 했는지 하늘을 원망했다. '젠장, 노움Norm도 있고, 노엠Noem, 노에아스Noeas, 노이아덴Noeaden도 있는데 왜 하필 그 할방탱구냐고...! 150년이 지났는데 자리도 안 물려주고 뭐 한거야!' 제자의 뛰어난 친화력을 칭찬해주기에는 겨.우. 200여년을 살아온 샌들우드는 수련이 부족했다. 수염을 잡아당기며 피식 웃던 존재를 떠올리며 열을 올리던 샌들우드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정령왕은 약 1만년 정도 정령계를 통솔한다. 정령왕으로서 수명이 다하면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는데, 이때 전대의 정령왕은 마나로 돌아갔 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른 창조물이나 정령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샌들우드의 스승인 테스타 르는 그와 계약한 정령왕들의 연세가 무려 1.만.년.에 달하며 새로운 정령왕을 기다리고 있는 중 이라 말했었다. 그런데 마나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던 존재가 떡 하니 나타나 그 끔찍했던 과거를 되살리다니... '이건 분명히....이카루스의 농.간.이야!' 라고 확신하는 샌들우드였다.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크리스틴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정령의 기운. 그것이 샌들우드의 갈등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었다. '젠장!' 마법을 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지만 그에 선행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보통, 사람들은 하급마법사가 그저 수식에 능하고 마나만 잘 다루면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겨우 1써클을 마스터 하는데도 상당한 깨달음이 필요했다. 정신적인 성장. 마법뿐 아니라, 정령마법과 검술. 심지어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도 필수적인 요건이다. 마나 수련을 하는 동안 샌들우드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친화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령왕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정령들을 소환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심.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2써클에 도달한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자만심에 가득 찬 계약자에게 충격요법을 가하기로 결정했던 그들만의 배려. 인간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계약자를 단순한 계약자라기보다는 그들의 길고 긴 생애 중 만나게 된 동반자로 받아들였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환될 기회를 저버려서라도 계약자의 정신적인 성장을 도 와주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샌들우드는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젊은 날의 치기. 그랬다. 한낱 자존심에 금이 간 정도로 그들의 사랑과 배려, 관심을 모르는 척 애써 외면하고 더욱 마법 에 매달렸다. 덕분에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는 8써클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 횡하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항상 그를 괴롭혔다. 애써 잊고자 했는데, 애써 외면하고자 했는데 자신이 선택한 제자는 그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친화력이 있었던 엘(백작부인)에게도 그저 책만 던져주었다. 그래서 능히 물의 상급 정령뿐 아니라 바람의 정령과도 계약할 수 있었던 엘은 '운디네'에 만족하고 행복해했었다.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기에 샌들우드가 일부러 그리 만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달랐다. 세실이었던 그 때에도 마나의 운용을 깨닫지 않고 자연의 마나를 움직여 원하는 마법을 실현할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친화력...그의 스승보다 더욱 뛰어난, 엄청난 기운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는 영혼이 뒤바뀐 지금도 원래의 기운을, 능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능력은 타스테르를 능가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노아스가 예전의 그 노아스라는 사실을 확인한 샌들우드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까지 제자를 가르쳐야 하는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쪽팔림이냐, 외면이냐...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샌들우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활짝 웃으며 눈을 반짝이는 크리스틴을 보니 잘 선택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끄러운 4대 정령왕들이 혹시나 한 자리에 모이는 사건이 터지지나 않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노아스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티.를 하려고 들것이 분명하니... 샌들우드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정령은 소환이 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일반론이고, 정령왕들은 자신이 원한 다면 스스로의 힘을 사용해 얼마든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끄으으응"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나며 샌들우드의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뒷골이 당기는 느낌에 신음하던 샌들우드는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살펴보는 크리스틴을 보며 웃 어주었다. '내가 안 가르쳐줘도 할 텐데, 이왕이면...' 문득 크리스틴이 제대로 된 주문도 모르면서 노아스를 불러낸 아이란 것을 떠올린 샌들우드는 내심 자청해서 가르쳐준다고 약속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고개를 흔들었다가 정말로 크리스틴 스스로 다른 정령왕까지 계약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사이비 마법사에 사이비 정령사가 되겠지...' 마법에 입문한 후 단 한번도 불러보지 안았던 정령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는 샌들우드였다. "오늘부터 공부 할 테냐?" 길고 긴 고심 끝에 결론을 내린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저은 크리스틴은 조금전까지만 해도 기대로 가득 차 있던 얼 굴을 숙이며 바닥을 톡톡 건드렸다. "음...노아스 할아버지도 나중에 시간나면....꺄악!" 갑자기 휘몰아친 바람이 크리스틴의 치마를 휘저으며 하늘높이 치솟았다. 두 손으로 펄럭이는 치마를 잡고 씨름하는 크리스틴을 지켜보던 샌들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바람의 정령하고 계약부터 하는 게 좋겠다." '빌어먹을 바.람.둥.이.!' 속으로 중얼거린 욕을 들은 것인지 크리스틴의 치마를 뒤집으려는 듯 휘몰아치던 바람이 이번 에는 샌들우드의 수염을 사정없이 헝클어트렸다. 수십년에 걸쳐 고이고이 길러온 수염이 꼬불 꼬불 엉망이 되자 울상을 짓던 샌들우드가 크리스틴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누가 들으라는 듯이. "됐다! 성질 나쁜 바람은 관두고 한.멋.짐.하는 불.의. 정.령.이나 불러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잦아든 바람은 살랑살랑 미풍이 되어 샌들우드와 크리스틴의 코와 볼을 간질이며 주위를 맴돌았다. 정말이지 변덕이 심한 바람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응시하던 샌들우드가 짐짓 헛기침을 터뜨리며 크리스틴에게 주문을 일러주었고 주변에 깔려있던 공기들이 서서히 요동치며 몰려들 준비를 시작했다. "나 크리스틴 폰 배너,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하고자 합니다. 고...고만 나오시랍니다. 실피드Sylphyd...아...줌...마? 저, 스승님 정말 이러면 나와요?" 걱정스런 얼굴로 주문을 외우던 크리스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런 주문으로 정령을 부르는 것은 택도 없는 일... 이라고 생각한 순간 얼어붙었던 공기가 힘차게 주위를 맴돌며 회오리를 만들었다. 과거 '실프'를 불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찬 바람이 돌풍을 만들며 눈앞에서 회전 하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투명하리만치 아름다운 파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미.남.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으드득! 아.줌.마...라고, 샌디?" 동시에 샌들우드는 몸을 빼려는 듯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그의 등을 떠미는 장난 꾸러기들 때문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나름대로 예쁜 표정을 지어보이던 샌들우드는 입을 쫙 벌리고 실피드를 바라보는 크리스틴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저...기 얘가 놀라는데요..." 살랑~살랑~ 머리카락을 펄럭이며 살기를 내뿜던 기운이 봄바람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표정관리를 하고 얼이 빠진 아이를 쳐다본 실피드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계약을 원하십니까, 이카루스의 아이여." 눈을 깜빡이며 실피드의 말을 곱씹어보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흔들었고, 실피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그 모습에 샌들우드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터져나오는 웃음 을 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계...계약을...안하시려구요?" 원래 파르스름하던 얼굴이 이젠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정령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 크리스틴은 침을 꿀꺽 삼키며 힘차게 도리질 쳤다. 이젠 하얗게 질려가는 실피드. "저....저기...전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하는데...이카루스의 아이가 아니거든요? 잘못 오신 것 같은데..." "쿠헬헬헬헬~~~!"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 대답하는 크리스틴을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배를 잡고 뒤집어 지고 말았다. 하지만 계약의 성사를 눈앞에 둔 실피드는 훗날을 기약하며 애써 표정관리에 신 경을 썼다. "아, 제가 잘못 알았군요. 크리..." "죄송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휘이잉~ "끄으윽! 끄으윽! 나...죽네...끄으으으윽!"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바닥을 뒹굴며 발악을 하는 샌들우드의 입을 막은 실라페는 눈물을 글썽이며 허리를 숙이고 있는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이카...아니, 크리스틴 폰 배너. 바람의 정령왕 저 실피드Sylphyd와 계약을 원하십니까?" "......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떨리는 미소를 지어보인 실피드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아이의 앵두같은 입술을 주시했다. '네, 네, 네,...' "네. 계약을 원합니다. 실피드Sylphyd님." "예에쓰~!"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려 만세를 부르던 실피드는 다시 얼이 빠진 크리스틴을 보며 슬그머니 팔을 내렸지만, 이미 넋이 나간 아이의 영혼은 공중을 배회하고 있었다. '난 또 죽었다...젠장...'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어떤 존재를 떠올리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던 실피드는 사일런스(Silence) 마법에 걸려서도 끝까지 웃고 있는 샌들우드를 지긋이 밟아주었다. 공기를 압축하여 대기의 기압을 상회하는 압력으로 샌들우드의 얼굴을 누른 채, 목을 가다듬은 실피드는 예의 젊잔은 태도로 크리스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었다.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크리스틴 폰 배너. 바람의 힘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그럼 이만." 절도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약간 숙여 멋지게 인사를 하고 슬며시 사라지는 실피드의 얼굴이 약간 붉게 보인 것은 산너머로 숨기 시작한 태양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크리스틴은 생각했다. "큭큭큭큭" 그렇게 웃고 아직도 덜 웃었는지 바닥에 엎드려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며 웃고 있던 샌들우드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음성에 입을 틀어막고 딸꾹질을 했다. 「잠만 자봐라. 내 친히 프록시아 해海 수평선이 네 침대가 되도록 모셔다 줄테니, 기대해도 좋다. 코찔찔이 샌디!」 절대로 근엄하진 않지만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실피드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나무 꼭대기 위에 기절한 자신을 걸어놓은 것은 실피드의 작품이라는 것과 프록시아 해양은 대륙의 끝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의 이름임을 샌들우드는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몇 번 그곳에서 원 없이 수영한 적이 있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복수를 다짐하는 실피드의 음성에 벌떡 일어난 샌들우드는 어떻게 해서든 실피드의 망가진 위엄 을 되찾아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실피드를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눈빛 하나에 샌들우드의 목숨이 달려있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원래는 어제 한편 더 올리고 싶었는데 노력한다는 것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밥도 한끼만 먹고 방에 틀어박혀서 쓴것이 이게 답니다. 어제 오늘 글이 안써져서...한문장 한문장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더군요. 아무래도 또 못올릴것 같아서 큰맘 먹고 그냥 올렸습니다. 아바타 예쁘지요? 코코님께서 선물해주신 거랍니다. 제가 글을 쓰고 난후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예요. ^^ (자랑했습니다~코코님) 옆에서 요술봉 휘두르는 천사는 제가 글 안쓰고 놀까봐 달아주신 거라고 하시더군요 > < 도움이 되었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르나힘님. 보내주신 글과 달아주신 리플은 따로 모아두고 시간날때마다 생각날때마다 읽고 또 읽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답은 조금 유보해야 하겠지만 님이 달아주신 글이 제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제 마음에 달려있겠지요. 충고 감사드립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뒤집어지다! 3. "빨리 찾아라, 시간 없다." "형님 그게..." "빨리 찾아봐, 내가 귀한거라 간수 잘하라고 했지?" "그게 어디에다 잘 넣어 놨는데..." 음침한 지하 동굴. 빽빽이 늘어선 책상위에는 수천가지의 시약병과 약초꾸러미, 눈부신 보석들과 금속 덩어리가 쓰레기 마냥 어질러져 있었다. 십 여명의 흑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조그마한 주머니 안에 물건을 골라 넣고 어떤 이들은 벽을 둘러싸고 있는 책장앞에서 뭐가를 찾기에 열심이다. 그중에서 유독 목을 움츠리고 보석을 뒤지고 있던 흑마법사가 삐질삐질 앞으로 걸어나왔다. "저기...거시기...형님, 아무래도 없는..." "뭐야?! 도대체 어디다 두었기에 사르도닉스Sardonycs가 없다는 거냐!" "........" 바쁘게 움직이던 손들이 딱 멎었다. 그리고 천천히 책상 앞으로 다가와 보석이 있는 곳을 쳐다보던 흑마법사들이 목을 움츠리고 있는 동료를 노려보았다. 그 말없는 항의에 어쩔 줄 몰라 눈을 떼구르르르 굴리던 흑마법사가 경악성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에 눈에서 힘을 뺀 이들은 자신이 하던 일로 돌아갔고, 이것 저것 지시를 내리던 사람만 팔짱을 끼고 묵묵히 서 있었다. 사르도닉스 Sardonycs 연금술에 있어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광석鑛石이다. 아주 오래전 천족이 지상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던 그 시절에 어리석은 인간들이 신의 분노를 산 적이 있었다. 맑은 하늘에 떨어지던 그 많은 불덩어리에 샐 수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 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다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데에는 수천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역사 가들은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내려졌던 신의 분노는 흑마법사들에게는 천상의 선물이 되었다. 커다란 불덩어리가 남기고 간 자리. 유독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그 험지에 뛰어든 흑마법사들은 황갈색와 회갈색빛이 나는 금속을 발견했다. 어떠한 마법으로도 부수어지지 않던 돌덩어리는 여 러 약초를 우려낸 물에서 부식되었다. 그것도 독초만을 섞은 약물에서. 덜렁대며 돌아다니다 시약병을 돌 위에 깨트린 흑마법사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벌을 받기 보다는 그 귀한 광석을 보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오늘. 목적지에서 꼭 필요한 광석을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식은땀을 흘리던 흑마법사는 잠시 후 올리브색이 유난히 많이 나는 회갈색 돌을 들고 나타났다. "그걸로 뭘 한거냐?" "그것이...이게 말입니다, 형님. 옆에 두면 잠이 잘 와서...베게에..." 빠악~! "꾸에엑~!"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르도닉스Sardonycs를 베고 잤단 말이냐!" 빼앗듯 광석을 가로채 무한 주머니에 넣은 흑마법사가 돌을 가지고 온 동료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지만, 은근 슬쩍 고개를 돌리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선망의 빛이 역력했다. 귀한 광석이라 차마 침을 흘리지는 못했지만, 사르도닉스Sardonycs는 마법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그 광석의 원료분석과 효능에 대해 완전히 밝히지도 못한 상태였다. 마법석보다 뛰어나고, 어떠한 금속보다 단단하다며 독의 성분만 추출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 는 광석이며 독물과 반응하면 또 다른 재질의 광물로 바뀐다는 것은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사르도닉스가 가진 무궁한 잠재력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고 그들은 생각 했다. 연금술에 목숨을 건 흑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사르도닉스는 그처럼 소중한 물건이었다. 예전에는 마법석을 대신해서 사르도닉스Sardonycs를 가지고 다녔었다. 하지만 오래전 로레얼 국에 발생했던 병의 치료제를 만들 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광석을 모두 사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은 귀한 것을 베고 잠을 잤다는 사람이 있으니 어찌 부럽지 않았겠는가? 그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마법사 하나를 잠재운 사람은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지금도 움직이고 있으니, 빨리 가야한다. 준비는 다 됐나?" "그렇지." "다 했어." "그럼 가자~!" "낄낄낄 좋고~" "간만에 연구나..." "좋아, 좋아." 시끌 벅쩍 떠들어대던 흑마법사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의 끝. 끝도 보이지 않는 넓은 수평선이 길게 늘어져 잇는 프록시아 해양과 맞붙어 있는 바이오니어 제국의 가장자리. 소위 '죽음의 숲'이라 불리는 이곳에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던 불청객들의 침입이 잦아졌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숲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안개는 더욱 짙 어졌고, 바람조차 숨을 죽였지만 불청객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검은 로브를 둘러쓰고 나타난 흑마법사들은 녹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죽음의 기운이 내려앉아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아주 좋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독, 독충, 독물들...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신비. 그 모든 것이 흑마법사들을 유혹하며 족음의 숲 깊은 곳에 숨어있었다. "음...여기군." "그런데 그놈은 여긴 왜 온건데?" "낸들 아나?" "젠장, 뭐 일석이조이긴 하다만...좀 이상하지 않냐?" "뭐가?" "우리가 뼈다귀로 안 만들었으면 이리로 감히 올 생각이나 했겠냔 말이지..." "흠...." "어찌되었건 늙은이들이 시끄럽다고 난리니...잡아 가야지." "킬킬킬 덕분에 눈치 본다고 못 들어간 곳을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잖아.." "좋아, 좋아." 들뜬 기색이 역력한 음성으로 말을 주고받던 이들은 검은 안개로는 시야를 가릴 수도 없는 것 인지 유유자적하게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만남이 이어지는 곳, 이곳은 바이오니어 제국의 금지禁地 죽음의 숲이었다. "재상님,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숲으로 들어갔다는 보고입니다." 흑마법사들이 죽음의 숲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존재는 바이오니어 제국의 유일한 재상에게 알려졌다. 서리가 내린 듯 하얀 백발을 가지런히 빗어 넘긴 노인은 부하의 보고에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저 서류만 읽고 있었다. "재상님, 지시를..." "그냥두게." "네?" "그냥 두라고 했어. 흑마법사들일테지...죽음의 숲에는 독지가 있어. 알려지지 않은 생물들도 살지. 연구나 하러 간 것일게야, 아니면...그들이 만든 작품을 만나러 간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곳은 폐하께서 하사하신..." "됐네. 이제 그쪽은 신경 쓰지 말고 사람들을 불러들여." "재상님!" "그곳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받은 곳이야. 보낼 사람이 사라졌으니 가치도 없어졌다. 그냥 내버려두고 신경쓰지 말게. 나가봐." "....네. 명대로 하겠습니다." 젊은 사내가 사라지자 서류에서 고개를 든 늙은 재상은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감쌌다. 세상의 무게에 짓눌린 듯 지쳐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래...그 아이가 없으니...이제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차라리 잘 된거지..." 의미모를 말이 공중을 맴도는 곳은 황제의 집무실과 불과 100피텐도 떨어지지 않은 곳. 앉아서 천리를 내다본다는 바이오니어 제국의 재상이 일하는 곳이었다. 바이오니어 제국의 수도, 갈렌(Gallen)의 장터에 인물이 나타났다. 그 인물은 한 명의 소녀였다. 이제 열셋 정도나 되었을까? 말도 못하는 아이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거렁뱅이 아이는 갈렌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는 배너 백작가의 주위 를 맴돌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말로 타일러 보기도 하고, 때려서 쫓아내기도 했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배너 백작가 앞에 나타 났다. 의수인 듯 보이는 딱딱한 손으로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아이들이 행여나 부딪히면 미친 듯이 물어뜯고 발로 차서 만신창이를 만들어놓았다. 그리고는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돈이나 음식, 물건들을 빼앗아 달아나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처음에는 아이의 행색에 불쌍한 시선을 던지던 사람들의 눈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생긴 얼굴과는 너무나 다른 표독스러운 성격. 구걸을 하던 아이들조차 그 소녀를 기피했고, 혹여나 떼를 지어 다니다가 소녀를 만나기만 하면 시비를 걸고 발길질을 했다. 어린 소녀가 그 동안 작은 아이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잘 아는 사 람들은 차라리 돌을 던질지언정 다른 아이들이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자 소녀는 기회를 엿보며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아이가 보일라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작은 아이들이 있을때만 나타나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냉대와 학대에 길을 걷는 것조차 힘들어진 소녀는 백작가 담벼락에 붙어 그 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자석에 끌리는 철가루처럼, 쓰레기통을 뒤지 고 늘 하듯 어린거지가 구걸한 돈과 먹을 것을 빼앗거나 도둑질을 해서 배를 채우면 늘 백작가를 맴돌았다. 아이의 이상한 행동을 들은 마리는 거두어들여 일손으로 키울까 해서 나가봤다가 예전에 크리스 틴에게 달려들었던 아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수문장을 시켜 호되게 혼내주고 두 번 다시 근처에 알짱거리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다. 행여나 외출이 잦은 백작영애에게 또 달려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호위기사도 없이 백작영애가 외출을 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1년이 넘어서 고 있었다. 때문에 마리에게 신신당부를 받은 수문장들은 그 거지소녀가 나타나기만 하면 매질을 해서 백작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다버리고는 했다. "야, 저 병신 또 나타났네?" "오늘도 맞았나 본데? 저 얼굴 좀 봐라..." 온통 멍이든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소녀를 보며 쑥덕거리던 아이들이 하나 둘 돌을 주워들고 아이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딱! 딱! 따닥! "저리가! 병신아!" "얼레리 꼴레리~" "말도 못하고 손도 없는 병신이래요~" "킥킥킥킥" 물건을 양 손바닥으로 쥐는 것 때문에 의수란 것이 들통 난 아이는 이제 완전한 병신으로 불려 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던지는 돌을 맞은 소녀는 잠깐 비틀거리다 허리를 숙였다. 몸을 일으킨 아이가 앞으로 모은 손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돌이 잡혀 있었는데 돌을 던지던 아이들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으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작은 소녀를 보고 빙글거리던 아이들은 겁을 먹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고 무작정 달려오는 소녀가 오히려 웃겨 보이기만 했다. 쫘악! "아악! 아아아아앙~ 엄..엄마!" 소녀가 위로 들었다 내려친 손은 모여 있던 아이들 중 가장 키가 작은 꼬마의 얼굴을 내리쳤다. 형들을 따라와 구경만 하고 있었던 아이의 얼굴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왼쪽 이마에서 오른쪽 턱 까지 살이 쩍 벌어져 피가 솟아나왔다. 놀란 아이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의 형이 사악하게 웃고 있는 소녀의 목을 잡아올렸다. "이 개같은 년이!"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가는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숨통이 막혀 얼굴이 붉게 달아 오르면서도 울고 있는 아이를 향해 발길질을 하는 소녀를 보고 꼬마를 안아든 아이가 소리쳤다. "야! 어른들께 가자. 넌 그 계집애 끌고 와! 밴을 치료해야지!" 통증보다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을 잃은 꼬마를 안아든 아이가 마을 쪽으로 내달렸다. 뒤이어 다른 아이들이 발버둥치는 소녀를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머리카락과 옷, 팔, 다리를 들고 뛰어가는 소년들의 얼굴은 엄청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잠시 후 아이들이 사라진 공터에 예의 한 남자가 나타났다. 칠흑같은 머리카락에 흑요석의 눈을 가진 남자. 예전에는 마크라는 사내와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창백하리만치 희고 사요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그는 꼬마의 피를 묻히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삐죽한 돌을 집어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요, 참으로 사악한 웃음이었다. 『순수함을 버려라. 지금의 그 복수심을 잊지 마라. 네 아비에게 받았던 수모를 새겨두어라. 그 모든 것이 너의 힘을 강하게 해 줄 것이다. 네 심성을 약하게 만들었던 어미는 이제 없으니 더욱 분노하고 더욱 더러워져라. 네 더러운 영혼이 나에게 힘을 줄 것이고, 네 사악한 영혼이 세상에 피를 뿌릴 것이다. 세실리아, 나의 아이. 크하하하하하하하!』 마을 어귀에서 뛰어나온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으며 이를 악물고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는 아이가 보이는 것처럼 길 아래를 쳐다보던 남자는 통쾌한 듯 웃음을 터뜨리며 사라졌다. 『흠, 이런 이런 이런. 어디 숨어있었나 했더니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인가, 바르키세우스 샤르 키제스Varcheseus Sharchizes? 세실이 네 아이라고...? 허, 이것 참.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 는거냐. 게다가...내가 만든 아이도 못 알아볼 정도로 힘이 약해진건가? 아무튼 정말 재미있는 아이라니까. 큭큭큭. 기억이 없어도 제 집을 찾아가고 성정 또한 바뀌지를 않는구나. 어쨌든 인형을 새로 만들어야겠군. 이번에는 제법 튼튼한 걸로...기억을 지우길 잘 한것인가? 그나 저나 영혼이 바뀐 걸 알면...큭큭큭큭....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래 끝까지 지켜봐주지. 저주 받은 아이를...』 페밀리어Familier의 눈을 통해 의외의 장소에서 마계 서열 2위 바르키세우스 샤르키제스 Varcheseus Sharchizes를 발견한 세카다는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왕의 자리를 찬탈하려 반란을 일으켰던 바르키세우스는 그의 시도가 실패하자 달아났다. 마계의 지순한 율법대로 그를 처형하기 위해 모든 마족들이 찾아보았지만 바르키제스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었다. 세실을 대신해 만들어 놓은 인형을 보고 자신의 아이라 했던 그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세카다는 은밀하게 마련해 놓은 마계의 심처로 이동했다. ************************************************************************************ 좀 짧지요? 앞에서 너무 많이 올려 분량이 이것 밖에 안됩니다. 사설은 다음편에서 하도록 할께요. (꼭 읽어주세요!)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폰 배너 1. "......그래서 정령이란 것은 친구처럼, 가족처럼 생각하고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하는 거다." "........." 노아스에 이어 바람의 정령왕 실피스와 계약을 한 쾌거를 이룬 크리스틴은 그날 밤 늦도록 샌들우드에 정령에 관해 배웠다. '정령사 자질이 있다'라는 샌들우드의 말에 백작부인은 너무나 기뻐하며 밤참 까지 올려 보내 주었다. 백작에게는 함구하기로 했지만, 언젠가는 이야기 하고 싶다는 크리스틴의 말에 백작부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까지 쭉 이야기 해주며 정령은 살아있는 존재이고 말하고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존재임을 반드시 명심하라고 강조했다. 조용히 앉아 샌들우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크리스틴은 턱을 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느냐?" "......저, 정령과의 계약은 제가 하는 건가요 아니면 아씨와 하게 된 건가요?" 몸의 주인의 생각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이젠 이름조차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먼저 이야기를 하게 된 아이를 쳐다보는 샌들우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본시 친화력은 아이가 가진 재능과 관련이 있는데, 세실일 때의 능력이 크리스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것은 평생 남아 있을 능력이었다. "아직도 몸 주인이 돌아오길 바라느냐?"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슬픈 눈으로 지켜보던 샌들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지 마라. 그래서 이렇게 어중간한 생활을 하던 거였구나. 네 멋대로 살라고 하지 않았 느냐?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언제 찾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기다리며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거라. 게다가 찾는다 한들 영혼이 바뀐 이유도, 방법도 모르는데 어떻게 되돌린단 말이냐!" 아주 엄한 목소리였다. 무엇 때문인지 얼굴을 굳히고 노한 음성으로 화를 내는 샌들우드를 보며 어리둥절해하던 크리 스틴이 고개를 숙였다. 지난 1년간 그녀는 마치 방관자처럼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집안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배회하고 겉돌기만 했을 뿐이었다. "거짓이잖아요, 전...가짜잖아요. 가짜가 어떻게 뻔뻔하게 그렇게 살아요...." 아이의 커다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준 샌들우드는 짐짓 인상을 쓰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넌 가짜가 아니야. 그 아이의 삶이 모두 너의 것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어쩌면 그 아이는 벌써 죽었는지도 몰라. 살아있다면 제 발로 찾아오겠지. 그 성질에...냉큼 찾아와 네 머리끄덩이라도 잡아당기며 '내 몸 내놔라~'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겠지. 그렇지 않으냐?" "쿡!" 눈물을 흘리다 샌들우드의 말에 작게 웃음지은 아이는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해도 스승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자신처럼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며 자리를 찾기 위해 난리를 칠 것이다. 마치 영상을 보듯 눈앞에 자신을 때리고 괴롭히며 몸을 돌려달라고 윽박지르는 어떤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분명 나타날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 아이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감정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샌들우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시오, 레니. 자네는 참 많은 짐을 주고 갔어. 이 여린 아이가 어찌 자네 뜻대로 살 것이 라 생각하였는가...이 작은 몸에 그 무거운 죄책감을 어떻게 지고 살라고 그런 짓을 하였는 가...' 레니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샌들우드는 크리스틴 영애의 영혼을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가장 고통받고 가장 설움받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혹시라도 노예의 몸으로 들어갔다면 그가 말한데로 혹시나 집으로 찾아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천운天運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아이가 어려서 다행이야...' 15살인 크리스틴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에 놓여있었지만 소녀의 영혼은 이제 13살이었다. 그래서 샌들우드는 자신의 말이 잘 먹혀들어갔음에 안도했고, 어린 아이가 받았 을 상처를 생각하고 슬퍼했다. 모든 것을 제 탓인냥 스스로를 죄책감으로 갉아먹는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열심히 살아라. 가짜라 한들 너의 몸과 기억은 진짜이니...네 어미의 말대로 진정한 귀족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존경받고 사랑받는 아이가 되거라. 그렇게 살다보면...너도 진짜가 돼. 삶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네가 살아갈 날들은 후에 너를 평하는 척도가 된다. 네가 거짓이라 여기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면 다른 사람들 모두 너를 거짓된 존재로, 하찮은 존재로 볼 것 이다. 알겠니?" 샌들우드의 자상한 음성에 담겨있는 한없는 걱정과 근심을 눈치 챈 크리스틴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년이 지났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시간은 있었다. 그 때까지 열심히 살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되돌려주면 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건 어찌되던 그때 일은 그 때 생각 해보기로 결심했다. 한결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자가 대견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준 샌들우드는 밤이 늦 었다고 아이를 돌려보냈다. "어머니!" 방안으로 들어서던 크리스틴은 침대위에 앉아 있는 백작부인을 보며 반색을 했다. "그래 정령과 계약은 했봤니?" 백작부인의 말에 방긋 웃음을 머금은 크리스틴이 작게 속삭였다. "S*y*l*p*h" 주위를 감싸고 있던 공기가 기쁜 듯 춤을 추더니 조그맣고 작은 인영을 만들어내었다. 까르르 웃으며 나타난 파란머리 소녀는 반갑다는 듯 크리스틴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날아다녔다. 딸아이의 놀라운 재능에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백작부인은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크리스틴에게 달려와 작은 몸을 꼭 껴안아 주었다. 예전보다 살이 빠져 뼈가 느껴질 정도로 마른 몸을 안타깝게 쓸어보던 백작부인이 자신의 얼굴 에 볼을 비비는 딸에게 키스를 해주었다. "살이 좀 쪄야겠구나. 내일부터는 마리에게 특별히 신경쓰라고 말해야겠다. 옷도 맞추어야 하고. 옷이 헐렁해진것도 모르고...난 정말 못된 어미구나." 크리스틴은 백작부인의 목에 두 손을 꼭 감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 아니예요. 요즘에는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걸요? 옷은 이대로도 좋으니 괜찮아요. 못 입어본 것도 많은데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옷, 다 입어 봐야죠." 1년 전만 해도 언제나 '새 옷'타령을 하며 먹는 것에 낙이 있던 아이의 180°달라진 모습에 흐 뭇한 미소를 짓던 백작부인은 딸아이를 침대위에 눕혀주었다. 관심을 받지 못한 실프는 두 사람 주위를 맴돌며 따뜻한 바람을 일으켰지만, 크리스틴의 손짓에 입을 삐죽이며 정령계로 돌아갔다. "그렇게 말하면 내일은 옷을 수선하자꾸나.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잠시 망설이던 백작부인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크리스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어 주고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정령사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혼자 남아 천장에 그려진 천사들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벌떡 일어나 세수를 다시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순백의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잠옷을 입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크리스틴은 눈을 감고 샌들우드가 가르쳐준 주문을 떠올렸다. "태초의 시작이었고, 끝이 될 존재여. 그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꽃을 보고자 하는 이가 있습 니다. 모든 생명을 태우고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주는 존재, 신의 축복아래 화려한 꿈의 축 제를 벌일 이여 모습을 드러내소서. K*a*s*a(카사)" 처음으로 제대로 된 주문을 외운 크리스틴은 갑자기 나타난 작은 불씨에 침을 삼켰다. "노아스Noahs 영감탱이는 규정을 어긴거다. 네가 노움Norm을 불렀다면 하급정령이 나와야 하는데 규칙을 어긴거야. 원하는 정령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샌들우드가 말해준 것이지만 이것은 반 만 맞는 일이었다. 친화력이 아주 뛰어난 경우에는 상위급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자신의 친화도가 얼마나 되는 지도 모를 정령사가 언제나 자신을 불러줄지 알고 기다리겠는가? 기회만 닿으면 소환되려고 발버둥치는 정령들은 규정을 무시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크리스틴처럼 노움을 불렀는데 노아스가 나오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정령들의 성질(?) 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행이 이번에는 크리스틴의 소원이 성취되었다. 작은 불꽃을 감싸고 나타난 것은 타는 듯한 붉은 깃털을 가진 조그마한 새였다. 앙증맞은 부리를 딱딱거리며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작은 새를 보고 사랑에 빠진 크리스틴은 탄성 을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뽀로로 날아와 아이의 손위에 착지한 불새는 크리스 틴의 손을 콕콕 쪼았다. 아마도 만나서 반갑다는 뜻일 게다. "계약을 하시겠어요, 카사? 제 이름은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해요." 손위에 올려진 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짓을 했다. 그것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크리스 틴은 밝게 웃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하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만들어진 작은 새를 들어 볼에 비벼대던 크리스틴은 두 손으로 카사를 감싸 쥐고 침대에 누웠다. "반가워, 카사. 정말 예쁘구나~" 그 말에 기쁜 듯 쪼로롱 쪼로롱 울던 새가 작은 부리로 크리스틴의 볼을 비비적거렸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까르르 웃던 크리스틴은 한손을 올려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있잖아, 카사. 나는 크리스틴이 아니야, 사실은 세실이라고 하는데 어느 날 깨어보니 주인 아씨 몸에 들어와있었어. 얼마나 놀랐는지...그래서 가슴이 아파."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카사는 위로를 해주려는 듯 머리로 아이의 볼을 비비며 날개를 활짝 펴서 크리스틴의 몸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배려에 작게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새의 부리에 쪽 입을 맞추어 주었다. "고마워, 카사.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스승님 말씀대로 불의 정령은 정말 따뜻 하고 멋지고 다정하구나." 카사의 눈이 실선을 만들었다. 새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보이는 그 모습에 따라서 웃던 크리스틴이 부드 러운 날개를 쓰다듬어주었다. "있잖아, 너 한테라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말이야 엄마가 돌아가시는 걸 보지 못했어. 자고 일어났더니...눈을 뜨고 잠이 들어계셨어. 참 나쁜 딸이지? 엄마라고 불러드리지도 못했어. 행여나 사실을 알고 나면 슬퍼하실까봐 그랬던 건데 너무너무 후회 많이 했어. 그리고 난 참 나 쁜 아이야.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지금 난 너무 행복해. 그거 알아? 생전 처음으로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예쁜 옷도 입고 일하지 않아도 야단맞지 않아. 그게 너무 너무 행복해. 그래서 크리스틴 아가씨가 돌아오시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말 나쁜 아이지?" 크리스틴의 우울한 목소리에 카사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다 이해한다는 듯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이 담긴 카사의 맑은 눈을 보며 크리스틴은 주룩 눈물을 흘렸다. "있잖아...이건 비밀인데 난 매일 땅속에 누워있는 엄마한테 가. 가서 매일매일 원망만 해. 왜 나만 두고 갔냐고, 왜 옆에 있어주지 않느냐고 매일 화를 내고 매일 투정부리기만 해. 백작님 과 마님도...아빠, 엄마로 부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내가 싫어. 나한테도 엄마, 아빠가 있는 데 아씨 부모님을 그렇게 부르면서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아. 그런 내가 싫어. 너무 슬프고 가 슴이 아파.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 하나도 즐겁지 않아. 가짜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스승님이 원망스럽고, 그런데도 이런 삶이 좋아지는 내가 싫어. 싫어죽겠어...흐윽!" 끝내 작은 새를 두 손으로 감싸며 울음을 터뜨린 크리스틴은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마음껏 흘렸다. 몸을 감싸 안는 따스한 기운도 느끼지 못한 채 두려움과 원망,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눈물로 흘려보내던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잠의 요정의 품안에 파고들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든 아이를 커다란 가슴에 안고 있던 존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자알 한다. 카사가 언제부터 새가 되었나?" "치사한 놈! 저만 좋자고 그래 몸까지 바꾸고 아양을 떨어? 좋아라 하는 카사를 밀쳐내고 훌쩍 날아갈 때 알아봤지...끌끌끌" ".........." 주위를 시끄럽게 하며 나타났던 노아스와 실피드, 그리도 또 다른 존재는 눈을 부라리며 활활 타 오르는 불의 정령왕 샐라이온Salyone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품에 안겨 눈물에 젖은 얼굴 로 잠이 들어있는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바다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인이 슬픈 얼굴로 다가와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자 눈물이 꼬질꼬질 말라있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깨끗하게 변했다. 침대 주위에 모여든 존재들은 여전히 아이를 안고 누워있는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고 비.교.적. 얌전한(?) 불의 정령왕은 한 번 화를 내면 정령계가 뒤집어질 정도로 성질이 대단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또한 아이와 정신적으로 이어져 있는탓에 슬픈 감정을 고스란이 받아들이며 화를 삭이고 있는 존재를 건드려봐야 자기들만 손해라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그 분은...뭐라고 하시던가?』 입도 열지 않고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말에 잠시 볼을 부풀리던 노아스가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질투심어린 눈으로 샐라이온을 노려보는 실피드는 재껴두더라도 심상찮은 기 운을 퍼뜨리며 얌전히 서 있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Elqueneus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던 샐라 이온은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도마뱀 보다 새로 나타난 건 잘 한 일이라시고는...킁! 너보고 계속 옆에 주라 하시더구나. 젠장!』 노아스의 심술맞은 대답에 샐라이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 『부럽군요, 샐라이온. 불의 정령왕님.』 실피드야 원래 그렇다 쳐도 평소 고귀한 여성의 표상이던 엘퀴네스 마저 말을 꼬더니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이제는 입 모양까지 슬며시 반달을 만들던 샐라이온은 억지로 감정을 숨기며 목을 가다 듬었다. 그런다고 못 알아챌 존재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면...내가 아이 옆에 있을 테니, 이만 돌아가지 그러나?』 『간다, 가! 내 참 더러워서 간다!』 『........』 『흥!』 더러운 진흙덩이로 돌아가 창을 넘어사라지는 노아스를 시작으로 세찬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크리스틴에게는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피드가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공기 중에 있던 물방울들을 모아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으로 화한 엘퀴네스는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크리스틴의 주위를 한번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정적을 되찾은 방안에 아이를 안고 누워있던 샐라이온은 슬며시 눈을 감고 커다란 불새로 변해 크리스틴의 몸을 품었다. 행여나 깨어나 사람의 모습을 한 자신을 보고 크리스틴이 놀랄까 걱 정하는 샐라이온의 배려였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카사를 찾던 크리스틴은 커다란 눈망울을 껌뻑이고 있는 집채 만 한 거대한 불새를 보며 깜짝 놀라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카사~!" 아이의 반가운 미소에 어느새 손바닥만한 작은 새로 탈바꿈한 카.사.는 크리스틴의 얼굴에 부리 를 비비며 쪼로롱 쪼로롱 울어댔다. "내 옆에 있어주었구나, 널 돌려보내는 걸 잊었어. 미안해. 지금 보내줄까?" 크리스틴의 말에 작은 새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듯 아이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눈을 감고 가슴에 온기를 전해주는 카사를 쓰다듬어주며 크리스틴이 속삭였다. "고마워, 나도 보내고 싶지 않아. 카사라면...괜찮으면...내 옆에 계속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갔다가 부르지 않아도 나한테 와줘. 그래줄 수 있어?" 소환하지 않아도 나타나달라는 크리스틴의 말. 이것은 정령들에게는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카사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리를 쪼았다. 어차피 크리스틴이 가진 기운은 자연에 고루 존재하는 마나에서 비롯된 것.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가 말라비틀어지지 않는 한 카사 (로 위장한 샐라이온)가 정령계로 돌아갈 일은 없을 터였다. 심한 충격을 받으면 또 모를까...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생각에 카사에게 출입出入의 자유(!)를 주었다 확신에 찬 크리스틴은 하녀 가 들어오기 전에 얼른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깨에 작은 새를 앉히고 샌들우드를 찾아간 크리스틴은 아침부터 거품 물고 쓰러지는 스승을 지켜봐야했다. "꼬로록~" 한참 후에 깨어난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머리위에 앉아있는 새를 가리키며 온몸을 떨어댔다. "이것이...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저...저...." "카사요?" "엥?" 사시나무처럼 떨던 샌들우드의 넋이 세상구경을 나갔다. 방긋 웃으며 '카사'라고 당당하게 부르는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한숨을 내쉬 었다. "아가야, 잠시..내가......카...사랑 이야기를 좀 해봐도 되겠느냐?" "이야기요? 웅~대답을 못 하는데요...?" "괜찮다. 내가 해줄 말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런데 안돌려 보내도 되냐?" "아, 같이 있어준다고 했어요! 부모님께도 말씀드리려구요. 헤에~" 오랜만에 보는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는 크리스틴의 밝은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샌들우드 는 아이의 손위에 앉아있는 새에게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쪼아버리려는 듯 사나운 기세를 내뿜던 새는 크리스틴의 말에 늙은이의 손위에 옮겨 앉았다. "내 스승님이야, 카사. 말 잘 들어야 해." 다시 한번 당부를 하고 크리스틴이 백작부부에게 뛰어간 후, 작은 새와 잠시 눈싸움을 하던 샌들우드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게 뭔 짓입니까, 아저씨." 쪼로롱 쪼로롱 샌들우드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갈던 샌들우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지저귀는 새를 노려보았다. "소리내는 하급 정령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도마뱀이 아니시네요?" 휘이잉~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도 모를 차가운 바람이 샌들우드를 격려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요즘에는 정령왕이 새로 둔갑하고 다니는 게 유행인가보지요, 아.저.씨?" 『많이 컸구나, 코찔찔이 샌디야.』 "으드득!"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에 이를 갈아대던 샌들우드는 작은 새의 눈에 담겨있는 거대한 기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이지 요즘처럼 쉬 늙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샐라이온 아저씨. 계속 이러고 계실건가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새가 날개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기다란 불꽃을 뿌리며 공중으로 떠오른 샐라이온은 곧 샌들우드의 어깨위에 내려앉았다. 가늘게 경기를 일으키는 받침대는 가볍게 무시했다. 『아이가 많이 아파한다. 슬퍼한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는다. 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 어미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이의 운명이 더욱 뒤틀렸다. 네가 더 신경써야 한다. 어떤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강한 나무로 길러야한다. 너의 모든 것을 전해주고, 아이를 강 하게 만들어라.』 샐라이온의 입에서 이렇게 긴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된 샌들우드는 입을 쩍 벌렸다. "아저씨..말 잘하시는군요?" 『.......징한 놈』 수백년이 흘러도 샌들우드는 샌들우드라는 생각에 고개를 획 돌린 새는 닫혀져 있는 문을 뚫고 계약자에게 날아가 버렸다. 말 한마디로 샐라이온을 물리친 샌들우드는 그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단 말이지...저 아이 하나에게 4대 정령이 몰려드는 것도 그렇고..마법도 그렇고... 이상해..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강하게 키우라고? 쓰러지지 않는 강한 나무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으나, 아직도 신의 영역과는 거리가 먼 샌들우드는 감히 넘보지도 못할 사실을 고민하다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젠장, 이 늙은 나이에 이게 뭔 고생이람. 가자, 가서 밥이나 먹자." 실없는 소리를 하며 힘차게 발을 내딛는 샌들우드의 속마음은 겉과 달랐다. 『아이가 많이 아파한다. 슬퍼한다...』 슬픔을 감출 때면 더욱 밝게 웃는 제자를 알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샌들우드의 마음은 그의 발걸음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해, 방법을...' ***************************************************************************************** 공지 1. 한편 분량을 조금 줄일까 합니다. 대신에 편수를 늘리도록 하지요. 하루에 올라오는 분량은 전과 같되 편을 나눌까 합니다.(조회수가 적다고 메세지 날라시는 분들...됐지요?) 공지 2. 이게 제일 중요한데, 절 추천해주신 작가님들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얼마나 놀랐는지..) 그래서 가능하면 제게 알려주시고(개인적으로나 리플로) 작가님들께 감사하다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공지 3. 1편 삭제하겠습니다. 그동안 고민많이 했지만, 역시 지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두번째 날개님 복받으세요~) 공지 4. 제목 만들기 이벤트 마감 4회 전입니다. 올려주신 제목을 35회에 설문조사로 걸고 40회에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도와주실거죠? > <) *******************************************여기서 부터는 투덜거림이지만 꼭 읽어주세요 말씀 드리지 못했지만 몇 일 슬럼프에 빠졌드랬습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짜증내고, 혼자 훌쩍거리다가...또 제가 쓴 글을 보고 한숨짓고... '재미' 말입니다. 전 제가 재미있는 글을 쓴다고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거운 주제이기에, 무거운 내용이 라서 가능한 한 짧게 짧게 마무리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만한 메세지가 왔습니다. '글을 왜 쓰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제가 좋아서, 혼자만의 공상을 글로 옮기면 어떻까 하는 생각에 글을 쓴다 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읽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전...제가 쓴 글을 보며 만족을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생각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재미있습니다'라고 해주시면 그것만으로 족해서 또 다시 글을 써내려가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망종이었다 하시더군요. '자기 혼자 보고 즐길 글을 뭐하러 쓰십니까, 자기만족 아닌가요. 처음부터 이렇게 지루하고 짜증나는 글은 본적이 없습니다' 라는 말에 사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작가라고요? 이런거 써놓고 작가라고 합니까' 라는 말에 제가 언제 작가라 칭했을까 고민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자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차츰 제 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이...둥둥 뜨거든요. 성의가 없어졌어요. 재미? 그러면 이렇게 쓰면 재미있나요? 라는 의미로 마구 휘갈겨서 올렸습니다. 그랬더니만...이제는 좀 다른 판타지 분위기가 난다고 하시더군요. 하하하 자기가 쓴 글에서 자기 느낌이 나지 않는 글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요...울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너무 억울하고, 글 하나 마음대로 못쓰는 제 자신이 싫었습니다. 그러다가 에르나힘 님께 메세지를 받았지요. 솔직히 따불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밤새 다 때려치운다고 난리를 치다가 저에게 항상 힘이 되어 주시는 분께서 해석을 달리 해주시더군요. 그래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썼습니다. 그것이 이번 두편입니다. 저는 원래가 말이 많고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고 귀가 얇습니다. 제가 이런 글을 또 올리는(어제는 썼다가 지웠지만요) 이유는...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는 글을 쓸 자신이 없으니 그냥 제가 쓰고싶은데로 쓰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한 사람의 독자에게 휘둘리는 동안 그 변화를 감지하신 분들이 정말 많더군요. 그리고 글을 올리려고 들어왔다가 비평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래서 글쓰는 이는 펜을 들게 되는 구나...라구요. 두번째 날개님이시지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가 고민하던 것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데 님의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제가 정말 잘못된 길로 가서 해주시는 충고 외에는 감히 그냥 무시해볼 생각입니다.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면 두번째 날개님과 에르나힘 님 처럼 제게 지적을 해주시겠지요. 설문설답을 하는게 아니라... 차라리 조회수가 많아지지 않았을때가 더 좋았다 원망하며 억지로 글을 썼던 유키는 죽었습니다. 제가...죽였습니다. 더이상 휘둘리지 않으렵니다. 단 한번으로 끝낼지도 모르는 판타지 장르에 작은 흔적이나 남겨보렵니다. 노력할께요 그러니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사설이 글보다 더 긴 것 같아 정말 죄송합니다.(_ _) 여러분 감사드리구요, 언제나 행복하십시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폰 배너 2. 식당 분위기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모두들 음식만 깔짝거릴 뿐 그것을 먹는 사람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백작의 단 한 마디 때문이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거라." 식탁에 앉아마자 그 말을 들은 크리스틴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잘랐지만 목으로 넘어가 지 않는지 단 한 조각 삼키고는 아직까지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딸을 아카데미로 돌려보내 겠다고 결심을 한 백작도 그에 동의를 했던 백작부인도 입을 꾹 다물고 접시에 담긴 고기를 가루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달라진 크리스틴이 그들의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는지, 자식을 기르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건만 그들의 선택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샌들우드 역시 가족간의 대화에 끼이지 못한 채 입맛이 없는 얼굴로 접시를 뒤적였다. 한참 동안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마리가 들어왔다. "백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레이븐 상회에서 오신 분인데...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나간다고 해요. 거실로 안내해줘." "네, 백작님."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난 백작이 마리의 뒤를 따라 식당을 나갔다. 백작이 자리를 비우자, 세 사람만 남은 식당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저기...어머니, 저...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안되나요?" 크리스틴의 말에 고개를 들고 딸을 보던 백작부인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저었다. 세실이 사라지고 난 후 어찌된 연유(緣由)인지 샌들우드 가 크리스틴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거 세실에게 보여주었던 그 따뜻한 태도를 딸에 게도 보여주며 성심성의껏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계속 품에 안고 있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것이 세실을 대신해 크리스틴을 선택하여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백작부인은 기꺼운 마음 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황태자비 간택식이 있다. 넌 이제껏 그때를 위해 준비해오고 있었잖니? 그래서 아카데미로 돌아가 못 다한 공부도 마치고, 궁중예법을 배워 와야 한다. 제국의 비妃로서 갖추어야할 모든 것을 배우고 와야 하는 거야. 알았니?" 크리스틴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이제 13살인데...무슨 황태자비? 스스로를 자각하면서도 여전히 어리기만 한 소녀는 당황한 얼굴로 샌들우드를 보았다. 입을 쩍 벌리고 백작부인을 보고 있는 스승이 보였다. 아이의 시선에 얼른 고개를 돌린 샌들 우드는 어느새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한 쪽 눈을 찡긋 했다. "황태자비라고? 하하하하. 지금 애드리안이 열여덟이지 아마?" 애드리안 넌 챗필드 개넌Adrian Nunn Chatfield Gannon 바이오니어 제국의 황태자를 떠올려 보던 크리스틴은 울상을 지었다. 그것을 본 샌들우드는 손을 저으며 예의 장난스러운 어조로 아이의 기분을 달래주었다. "꿈도 야무지지. 엘, 아무리 그래도 면상에다 대 놓고 '황제가 변태라며?'했던 얘랑 결혼 할 만큼 애디Ady는 바보가 아니야.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그만 두지 그러냐?" 평소의 근엄함을 집어던진 샌들우드는 벌게진 얼굴로 포크를 만지작거리는 백작부인을 지켜봤다. 샌들우드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크리스틴이 말해주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자 시선 둘 곳이 없게 된 것이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샌들우드를 쳐다보던 크리스틴은 곧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희망에 찬 얼굴로 백작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크리스. 어릴 때 실수야. 황태자 전하도 눈감아 주신다 하셨고 그런 것에 꽁하니 있을 분이 아니니 걱정마라.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어릴 때라 해도 겨우 1년 전 일이다. 괜히 아이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은근한 부탁에 머리를 긁적이던 샌들우드는 희망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제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놈은 꽁해. 꽁한 정도가 아니라 꽉 막혔지. 쳐다도 안볼꺼야. 브래디가 어떤 놈인데, 또 그 아들 놈은? 아마 세실이 없어진 것도 다 백작 자네 탓으로 여길 것인데..이것 참' 혼자 머리를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샌들우드는 다시 우울한 얼굴로 고기를 자르고 있는 크리 스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가야하는 거면, 빨리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 하던 공부도 마저 하고, 세상도 좀 배우고. 또래 친구도 없이 혼자서만 생활하는 건 좋지 않아. 갔다 오렴. 백작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한 다." 믿었던 스승마저 배반하자 눈물을 글썽이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들고 백작부부를 보았다. "저...전...아직...엄마, 아빠랑...같이...있고 싶단...말이예요, 흑, 아앙~" 다 큰 소녀가 눈을 비비며 울음을 터뜨렸다. 복숭아빛 뺨을 흥건히 적시며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정말이지 어린 아이답게 품위 없이 울면서 '엄마, 아빠'를 부르는 딸을 보던 백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동안 딸을 어린 아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소유욕을 드러내 고 철이 들 무렵부터는 하인들을 괴롭히기에 여념이 없는 딸이 어찌 어려보일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한손에는 포크를, 한손에는 나이프를 들고 눈을 비벼가며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가슴 한 곳이 찡해졌다. 백작부인 역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딸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아이를 무릎에 앉 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딸을 품에 안고 다독여준 것이...까마득한 옛일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있던 백작부인은 어느새 딸꾹질을 하는 크리스틴의 머리에 키스를 해주며 생긋 웃었다. "이 엄마, 아빠가 그렇게 좋으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의 달아오른 볼을 쓰다듬어주던 백작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이 엄마도 크리스가 너무 너무 좋단다.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안돼. 사람들에게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기,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시기가 있단다. 조금 힘들겠지만 시간은 금방 지나갈꺼야. 엄마가 자주 만나러 갈께. 방학이 시작되면 엄마가 데리러 갈께. 그래도 안되겠니? 엄마는 네가 황태자비가 되지 않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는 걸 보고 싶어. 안될까?" 생천 처음으로 스스로를 '엄마'라 칭하는 백작부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백작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딸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1년에 걸친 병마는 딸아이의 심성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그것이 그를 너무나 흐뭇하게 만들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장면이요, 한없이 기쁜 마음뿐이었다. "흠흠...아빠도 종종 만나러 가마. 우리 딸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자주 찾아가마. 어르신도 함께 모시고 갈 것이다. 그래도 고민되느냐?" 장난끼가 다분한 백작의 말에 반듯한 이마를 접고 내낸 고민하던 크리스틴이 볼을 부풀리며 백작부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정말...자주 오실 거죠?" 웅얼거리는 소리에 백작부부 모두 큰 소리로 웃으며 그럴거라고 약속을 해주었다. 몇 번이나 다짐을 시키던 크리스틴은 결국 모두와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며 '안 오시면 카사를 보낼꺼예요!' 라며 협박을 했다. 아이가 앉아있던 의자 손잡이에 얌전히 앉아있던 카사는 크리스틴의 말에 뽀로록 날아가 아이의 머리 위에 앉았다. '카사가 접니다' 라는 의미로 날개짓을 하는 붉은 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백작부부는 '크리스틴이 어제 불의 정령과 계약을 했다네' 라는 샌들우드의 말에 까무라치고 말았다. 스승에 이어 부모님까지 기절하는 것을 보게 된 크리스틴은 서둘러 물의 정령과 계약하겠다 고 결심을 했다. 기절한 사람을 깨울 때는 시원한 물을 얼굴에 쏟아 붓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 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던 나머지 식사시간은 그럭저럭 즐겁게 지나갔고 크리스틴이 샌들우드의 손을 잡고 마 당으로 나가자 백작부부가 밀담을 나누었다. "도대체 정령이라니, 이런 일이!"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딸이 정령사란 말에 놀라움을 표현하던 백작은 운디네를 불러낸 아내를 보며 거품을 물었다. 운디네의 재롱을 받아주던 백작부인은 그동안 속여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 과를 했다. 하지만 아내와 딸 모두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백작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파티 를 열어야겠다고 말했다.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가 느끼는 기쁨을 어떻게든 표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해서 겸사 겸사, 날짜가 잡히는 데로 크리스틴의 복학復學 축하 파티를 열 기로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샌들우드와 함께 마당으로 나와 열심히 걸어가던 크리스틴은 낯익은 오두막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이의 손길을 받지 못해 그동안 방치되었던 밭에는 온갖 잡초와 약초, 찻잎이 뒤죽박죽 섞여서 자라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던 아이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제일 먼저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샌들우드는 끝내 한 마디 하고야 말았다. "크리스틴. 넌 귀족가의 영양令孃이다. 이런 것은 하녀에게 시켜야 해. 그리고 넌 지금 세실이 아닌 크리스틴 폰 배너다." 무뚝뚝하기 까지 한 샌들우드의 말에 잠시 잡초를 잡고 있던 손을 멈추고 있던 크리스틴이 천천히 일어났다. 샌들우드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은 조금 슬퍼보였다. 용기를 주려는 듯 어깨에 앉아있던 카사가 부리를 비비자 손을 내밀어 새의 날개를 쓰다듬어 주던 크리스틴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전 세실이예요. 그래서 전 스승님의 제자이고 레니와 마크라는 이름을 가진 분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예요. 제가...저를 버리면 전..아무것도 아니게 되요. 이 몸이 크리스틴 영애의 몸이 저의 것이라 말하지 마세요. 전요...크리스틴이고 세실이예요. 세실이고 크리스틴이기도 하지요. 몸을 빼앗았으니 크리스틴 폰 배너로 살고 있지만 전...세실리아예요. 스승님." 오랫동안 생각했다. 자신을 버리고 남으로, 완전한 타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였다. 물론 지금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신만이 아시는 일이라 하더라도 크리스틴은 스스로를 버리는 대신 '적응'을 하기로 결심했다. 변화가 아닌 적응. 크리스틴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 크리스틴이 살아왔던 그 11년의 세월에 적응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반짝이는 푸른색 눈을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의 너의 몫이다. 나는 지켜볼 수 밖에 없구나. 크리스틴 폰 배너." 그의 말에 크리스틴은 치마를 넓게 펼치고는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약간 내밀고 왼쪽 다리를 굽히며 허리를 숙였다. 완벽한 예법. 이제껏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크리스틴 영애로서 학습한 예법을 완벽하게 펼쳐 보인 크리스틴 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살짝 웃던 크리스틴은 예의 부드러운 동작으로 치마를 쓸어내리고는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끄으으응~" 아이의 고집스러움에 두손 두발 다든 샌들우드는 저택으로 돌아가버렸다. 잠시 혼자 앉아서 잡초를 뜯어내던 크리스틴은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있던 카사도 열심히 날개를 놀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언덕 위에 만들어진 작은 봉분封墳 앞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얇은 풀이 나 있는 동그란 무덤위에 얼굴을 기댔다. "엄마, 엄마. 저 아카데미로 가요. 거기는 로만(Romen)이란 곳인데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곳과 아주 가까워요. 그리고...저...기 있잖아요, 얼마 전에 저한테 독을 먹인 아이가 있어요. 기억나요? 그런데 그 아이가 자꾸 생각나요. 용서해야지, 난 살아났으니까 괜찮다고 생각을 하면 서도 문득 문득 그 아이 얼굴이 떠오르고 화가 나요. 그날...할아버지들이 잡아준다고 할 때 그렇게 할껄...혼내줄껄...뭐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 있죠? 나 자꾸 못되지나 봐요. 나한테 왜 독을 먹였을까...아가씨 기억에도 없는 아이인데...그리고 크리스틴 아가씨도 웃겨요. 공부 도 얼마나 안했으면 읽은 책이 저보다 더 없는거 있죠? 그런데 아카데미로 간데요. 맨 날 꼴찌 나 해서 창피만 당하고 친구도 하나 없는데 그곳으로 가야한데요. 스승님은 가서 공부하고 오 라는데...진급도 못해서 동생들과 공부해야 해요. 그런건 싫은데...엄마 나 나쁜 애죠? 지기 싫어요. 창피당하기 싫어요. 미움받는 것도 싫어요. 전..제가 그런 앤줄 모르고 살았어요. 엄마는...엄마는 알고 계셨어요?" 풀을 더듬으며 하염없이 중얼거리던 크리스틴은 머리카락을 물고 딱딱거리는 카사의 애교에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스스로를 비난하지만, 그럴 때면 카사가 장난을 걸어왔다. 예뻐보이고 싶고 착해 보이고 싶어서 스스로를 기만했다 생각이 들 때면 언제나 레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아가씨. 스스로를 속이지만 않으면 되요. 알고 있으면 된답니다. 남을 속이는 것도 괜찮아요. 내 양심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되요. 이기적으로 사셔야 해요. 세상이라는 것, 착하게만 살아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아가씨의 그 여린 마음이 정말 걱정이예요." 밤에 잠이 들 때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레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주고는 했다. 착하게 살지 말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 누구 좋으라고 희생하고 사느냐고. 고민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항상 옆에 있어주던 레니가 죽고 방황을 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찌 될지 모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의 능력을 키워야한다. 마법사가 될까, 정령사가 될까, 아니면 약초를 키워 돈을 벌까...무수히 고민을 해봤지만 아직 무엇이 좋은지는 결정내리지 못했다. 꿈 세실에게는 꿈이 있었다. 얼른 자라 큰 돈을 벌어서 엄마, 아빠와 행복하게 사는 것. 크리스틴 영애에게도 꿈은 있었다. 황태자 비가 되고 왕비가 되어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그런데 크리스틴이 된 세실에게는 꿈이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레니는 죽고 마크는 사라졌으니 세실로서의 꿈은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으니 길을 잃은 것이다. "꿈...." 레니의 무덤을 베고 똑바로 누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크리스틴은 문득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몬트리얼 국립 아카데미에 대한 영상을 떠올렸다. 황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만 거대한 전각들이 하나의 성곽을 이루며 우뚝 서 있는 곳. 그곳에서 본 모든 아이들도 크리스틴처럼 귀족가의 자재들이었다. 그 중에는 황족도 있었지만, 그것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지 크리스틴이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으로는. 그리고 크리스틴이 아카데미에 있을 때 배웠던 것들(거의 없어서 기억을 살리는데 겨우 몇 미르 걸렸다)과 여러 명의 스승들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던 아이는 스르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아이의 어깨 위.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보이는 새빨간 깃털을 작은 부리로 열심히 다듬는 카사가 앉아있었다. *************************************************************************************** 제일 먼저 비평란을 채워주신 별빛 바다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탁님. 제가 오타 없앨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모르시지요 (꺄아아아 > <) 시험적으로 앞으로 올릴 1회 분량을 올렸습니다. 적습니까? 대신에...연참해드릴께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네요.<제목 만들기> 이.벤.트. 원고가 필요없으시다는 거죠? 후보명이 2개입니다. 하나는 다른 분이 보내주신 것 까지 해서 3개. 우웅...연참하면 오늘 아님 늦어도 낼이면 35회인뎅...ㅠㅠ (삐짐~) 늦어도 좋으니...설문조사 마감하는 그날까지 기다릴께요. 흑 그리고.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마음가짐 부터가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귀가 얇은 것이 아니라 줏대가 없는 탓이겠지요, 아마. 사랑해주시고 언제나 잘되라 다독이고 충고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괜한 소리에 마음이 빼앗겨 절 지켜봐주시는 분들의 말씀은 세겨듣지 못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리 숙여 사과드릴께요.) 앞으로는 두번 다시 이런 일로 글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시험삼아 욕설 날리지는 말아주세요. 전....또 꼰지를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님들이 보내주신 충고들 모두 귀기울여 들으며 마음편히 읽고 쉬었다 가실 수 있게 편안한 글(?) 쓰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또 한 가지. 크리스틴의 나이가 10살이란 것을 기억하시지요? 이제부터 성장기입니다. 해서...원래 설정대로 50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튼 미래의 꿈을 찾을 때 까지 방황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약속드렸듯이 행복하게 말이지요. 본격적인 성격개조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쓰는 사람이 마음을 다잡았으니,,,쥔공도 달라지겠 지요 저도 기대 중입니다. 과연...변하기는 할까...쓰읍(불안 불안 --;;) 에 사설이 길어지기 전에 가야겠군요. 그럼...내일이 아니라 한 잠 자고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폰 배너 3. "그래서, 차는 더 이상 못 구한단 말이지?" "글쎄요..." 여기 값비싼 찻잎 때문에 고민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 레이븐 상회를 이끌고 있는 실질적인 주인 카일과 론의 빈자리를 채우며 모습을 드러내어 그의 오른팔이 된 앤드류였다. 세실이 크리스틴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앤드류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카일은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흑마법사의 존재마저 희미해진 지금 영혼을 바꿀 능력을 가진 존재는 신이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앤드류는 자신만이 뺄 수 있는 반지를 크리스틴이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알아보고 예전과 똑같은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고집스러운 카일은 스스로의 신념을 믿으며 앤드류의 주장을 무시했다. 그러나 지금 세실이 만들어 두었던 찻잎과 향초가 다 떨어지자 동생의 말을 믿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편 앤드류는 은근히 전국 방방곡곡, 다른 나라의 레이븐 지부에까지 세실의 몽타주를 돌리 고, 세실이 신용장을 들고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는 고집쟁이. 독립을 하고 싶다는 그 이유하나만으로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상회를 세운 카일이었다. 더군다나 상회를 키우는데 인력이 모자란다며 기사시험을 합격하고 떳떳하게 사회로 진출하려 던 동생까지 끌어들였다. "월급 줄께, 도와줘." 그 한마디에 짐 싸들고 따라나선 앤드류도 결코 정상적이라 보기에는 힘들지만 울며불며 매달 리는 부모님을 본 척도 않고 동생을 꼬셔서 가출하게 만든 카일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쌍둥이 형제가 공방전을 치룬지 어언 1년. 문제는 상회의 부(富)와 명성(名聲)을 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세실의 찻잎과 향초였다. 앤드류를 믿고 단 한번만 크리스틴을 만나보았으면 해결 될 일을 카일의 괜한 고집으로 재고가 바닥이 난 이날 까지 '세실이 어디에 있는가'란 문제로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글쎄, 만나보라니까!" "갔다 왔다." "어딜?" "어디긴 어디야, 배너 백작가(家)지." "그래서?" "그래서? 임마, 내가 할 말이다. 오두막은 거미줄투성이고, 텃밭은 잡초밭이 되었더구나. 세실이 정말 크리스틴이라면 그렇게 놔 뒀겠냐? 괜한 생각 말고 세실이나 찾아봐. 이번에 로레알로 갈 때 내가 만들어놓은 몽타주도 들고 가고. 알았어?" 카일의 빈정거림에 머리를 긁적이던 앤드류는 벌떡 일어나 말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왜?" 한 마리도 아니고 말을 두 마리 준비하라는 동생의 말에 시큰둥하니 묻던 카일은 앤드류의 손에 이끌려 배너 백작가를 또 찾아가야했다. 두 번이나 찾아온 카일을 보며 의아한 기색이 던 집사는 '백작영애'를 찾는 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다. 잠시 후 연분홍 치마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내린 금발머리 소녀가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앤드류 아저씨. 카일 아저씨." 친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는 소녀를 보던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크리스틴 영애와 만난 것은 단 한번. 세실과 닮은 아이를 찾아 이곳에 불려왔을 때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정식으로 인사를 할 시간이 없었고 당연히 크리스틴 영애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어야 했다. 잠시 앤드류의 말이 사실인건 아닐까 생각하던 카일은 문득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븐 상회는 갈렌에서도 알아주는 상회 중 하나이니 주인인 자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면 오늘 아침에 만난 백작이 이야기 해주었거나. 가슴 깊은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의구심을 꾹 누른 카일은 영애의 인사에 고개를 숙여보 였다. 답답한 얼굴로 고집스러운 쌍둥이 형을 바라보던 앤드류는 영애에게 텃밭을 보여 달라 고 요청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크리스틴이 손뼉을 치며 탄성을 지르더니 서둘러 치마를 잡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두막으로 들어간 크리스틴은 커다란 자루를 두 개 꺼내어 앤드류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찻잎이고 이건 향초예요. 아침에 카일 아저씨께서 다녀가신 후에야 생각이 났지 뭐예요. 아직도 팔리긴 하는 건가요?" 카일의 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넋이 빠진 형에게 윙크를 날린 앤드류는 흐뭇한 얼굴로 자루를 받아들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반응에 이상하단 표정을 짓던 크리스틴은 주머니에서 작은 향낭을 꺼냈다. "이건 황제폐하와 황태자 전하께 전해주세요. 선물이라 전하시고, 세실은 더 이상 찾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려주세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찾아가겠다고, 스승님과 함께 여행을 갔 다고 이야기 해 주세요." "알았다." 향이 세어나가지 않게 단단히 봉해진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갈무리한 앤드류는 여전히 정신이 나가있는 카일의 팔을 잡고 오두막 한 켠에 있는 텃밭으로 향했다. 아침나절 내내 잡초를 뽑고 풀을 베어낸 덕분에 약초밭은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다. "형님 말씀으로는 엉망이라더니.." 살짝 얼굴을 붉히며 바닥을 툭툭 차던 크리스틴이 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까지는 신경을 못 썼어요. 몇일 후에 아카데미로 돌아가면...또 그렇게 되겠지요." "아카데미?" "네. 몬트리얼 아카데미요. 가면 한동안 못 돌아오겠지만 방학 때는 집에서 보낼테니 그때 찻잎과 향초를 한꺼번에 드릴께요. 괜찮죠?" 짐짓 앤드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장사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세실이 분명한 아이가 백작영애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확인한 카일은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세실이냐?" "........."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이내 카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는 여자가 남자에게만 청할 수 있는, 남녀간에서는 아주 절친한 사이에서만 허락되는 인사였다. 군살 하나 없이 매끄러운 하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일의 눈썹이 더욱 모아졌다. 크고 두툼한 손을 내밀어 한주먹 크기도 안 되는 아이의 손을 잡은 카일은 점점 일그러지는 표정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누가...도대체...누가 이런 잔인한 일은 한거지?"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던 카일은 활짝 웃으며 서 있는 소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던가? 모습도 달라지고 목소리도 달라졌지만 아이의 눈만은 색은 다르나 예전과 똑같은 밝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거울 같은 눈빛. 더러움을 모르는 순수한 눈빛. 하늘이 담긴 듯 푸른색 눈망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일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과거에 그리하였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헛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내 마음이 따라주지 않아 진실을 외면했구나. 힘들었지? 지켜준다 말을 하면서 항상 한 걸음 늦구나. 미안하다." 카일의 따뜻한 말에 소녀의 영롱한 눈에 이슬이 맺혔다. 하지만 이내 크리스틴은 눈물을 지우고 베시시 웃으며 커다란 손안에 잡혀있는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노아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가워요, 아저씨. 이윤은 예전 그대로 해주시고, 계약서는 다시 써야겠지요? 제 이름은 크리스틴 폰 배너예요." "이름이야 상관없다. 너는 너야. 과거에는 세실이고 지금은 크리스틴이지만 네 영혼은 하나다. 그러니 이름은 개의치 마라." 크리스틴의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몸이 바뀐 후 이런 말을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샌들우드는 언제나 과거의 세실이었던 기억은 잊고 크리스틴으로서 살아가는데 충실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카일은 외면은 상관없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감을 떨쳐내며 겨우 스스로 서기로 마음먹은 이 날, 크리스틴은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고마워요, 카일 아저씨. 전....네. 이름은 상관없지요. 고마워요."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던져버린 듯 보이는 아이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카일의 얼굴은 야차 처럼 변해있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분노를 드러내며 이를 가는 카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앤드류는 백작가 입구에서 형과 헤어져 황궁으로 들어갔다. 황제 폐하에게 향낭과 세실의 소식을 알려줘야 했다. "그래, 세실의 소식을 가지고 온 자가 있다고?" 시종의 전언(傳言)은 황태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만들었다. 그 뒤에 서 있던 세바스티앙은 예의 야릇한 표정을 지었지만, 황태자가 돌아섰을 때는 이미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국사(國事)를 보시는 지라 아직 전언을 넣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소식을 가지고 온 자를 이리로 데리고 오라. 내가 친히 만나보겠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사춘기 소년 황태자를 향해 머리를 조아린 시종은 밖에서 기다리는 앤드류를 들게 했다. "그래, 세실의...세실리아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네, 전하. 우선 이것부터 받으십시오. 세실이 황태자 전하와 폐하께 직접 올리라 부탁한 것입니다." "그래?" 아름다운 꽃무늬가 곱게 들어간 비단(Silk)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향낭을 받은 황태자는 봉해진 입구를 살짝 열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봉했다. 이제껏 접해보았던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차(茶)라는 것은 냄새만 맡아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나와 아바마마께 드리라 했단 말이지? 돌아왔구나! 잘 되었다. 그래, 고맙다고 전해주어라. 아니다. 내가 직접 만나보겠노라.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황태자의 성급한 말에 잠시 주춤하던 앤드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세실은 지금 그 아이의 스승과 함께 세계 각지를 돌며 여행을 떠난다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후에 전하를 직접 알현하겠다고,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폐하께서 내리신 수배령을 거두어 달라 말했습니다." 세실과 마크에게 수배령이 내려진 것을 크리스틴은 몰랐다. 앤드류는 혹시나 그 소식을 알고 마음이 상할까 먼저 나서서 그런 부탁을 한 것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앤드류를 쳐다보는 황태자의 눈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스승이라고 했느냐? 여행이라고? 허면, 그 아이의 아비라는 그 마크라는 작자의 손에 세실이 팔려갔다는 말은 거짓이라 말하는 거냐?" "......" 대답이 궁해진 앤드류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바닥을 노려보았다. 이 때 조용히 황태자의 뒤에 서 있던 세바스티앙이 한 걸음 나섰다. "전하, 외람되오나 제가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카르민 경이? 무엇이오, 말해보시오." "황공하오나, 전하. 본시 이 나라뿐 아니라 현존(現存)하는 나라들 중에 세실이 만드는 찻잎 은 그 향이 독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 아이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 지요. 하오니 레이븐 상회에서 온 저자가 가지고 온 찻잎은 분명 세실이 만든 것이 분명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직접 드셔보신 적이 있으시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세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사오나 레이븐에 찾아가 황제폐하와 전하께 안부를 여쭈어 달라 부탁을 한 것은 사실이라 사료되옵니다. 아이의 바람을 들어주시지요. 약속을 했으니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뭔가 속은 느낌이 든다고 말을 하려던 황태자는 세바스티앙의 태연한 안색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속는 느낌. 그것이 황태자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듣기로는 경이 그 아이를 거두었다 들었소. 맞는가?" "네, 전하." "그런 아이가 노예로 팔려갔다는 소문이 떠돌 때 그대는 한 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네, 이유 가 뭔가?" "....그것은 전하. 저는 이미 전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된 후의 일이었습니다. 일개 평민 에 불과한 아이의 실종이 무엇이 그리 대단해 제 평정심을 흐리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황태자의 입술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뭔가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을 이 두 남자는 알고 있다는 확신이 섰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만해도 세바스티앙의 얼굴을 덮고 있던 먹구름을 똑똑히 보았었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가끔 이상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 때...!' "백작가에 소식이 온 모양이군, 그렇지?" "........!" "........!" 앤드류와 세바스티앙의 눈에 '아차!'하는 기색이 스쳐갔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지만 세바스티앙의 눈만 주시하고 있던 황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차를 대령하라 일러라, 백작가로 친히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리라." "전하!" 황태자의 명령에 앤드류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옳거니'하던 황태자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곳에는, 백작가에는 세실의 소식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제발...세실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 멀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틴이 겪고 있는 혼란을 황태자로 인해 가중시킬 수는 없었다. 억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5년이나 거래해온 고객에 대한 예의라 치부해도 좋았다. 더 이상, 더 이상 그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 었다. 진정으로 만류하는 앤드류를 보며 눈썹을 모으던 황태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명을 내렸소. 그대는 물러가도록 하오. 혹시나 세실을 만나게 되거들랑, 나에게 꼭 와 달라고 전하고 혹시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서신이나...그래, 서신으로 인사정도는 할 수 있 지 않느냐고 내가 말하더라고...그렇게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고집스러운 황태자의 말에 어두운 얼굴로 알현실을 나선 앤드류는 그대로 말을 몰아 백작가로 달려갔다. "나가지." 주머니에 넣은 향낭을 만지작거리던 황태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세바스티앙을 일깨우고 걸음을 서둘렀다. 세실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는 백작가를 방문하는데 펄쩍 뛰며 만류하던 앤드류가 정말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 자, 한편. 잠시 조아라가 다운 되서 심장도 다운 되었다는...콜록 다다다다닷~~~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폰 배너 4. "황태자 전하 납시오!" 동전을 세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백작이 급살 맞은 돼지마냥 부들부들 떨면서 아내와 딸을 대동하고 문 앞으로 뛰어갔다. '올 것이 왔구나!' 세실을 찾는다고 수배령까지 내린 것이 황태자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백작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평생 한 번 찾을까 말까한 배너 백작가에 직접 찾아와 찻잎을 사가고, 폐하의 승은을 입었다 는 말에 미친 듯이 펄펄 뛰었던 황태자다. 자신이 아끼던 아이가 사라지게 만든 백작가를 가만 둘 리가 없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백작은 가능한 한 빨리 딸아이를 아카데미로 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병마와 싸우느라 매우 약해진 아이를 어찌 보낼 수 있었겠는가? 해서 조금 지체한 것이 이런 결말을 가지고 오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오는 딸을 힐끗거리 는 백작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마차에서 내린 황태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백작과 비교적 평온한 얼굴로 그 옆에 서서 절을 하고 있는 백작부인과 영애를 보았다. 과거에 보았던 영애의 달 라진 모습에 잠시 눈을 치켜뜨던 황태자는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비록 지금은 야위고 약간 창백한 안색을 지닌 예쁜 소녀가 되어있었지만, 자신의 면전(面前) 에서 서슴없이 제국의 황제를 모욕하는 언사를 서슴없이 지껄이던 그 경박한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돼지가 살 뺀다고 사람이 되겠어?' 내심 꼴도 보기 싫은 크리스틴을 외면한 황태자는 백작의 안내를 받아 거실로 들어갔다. 상석에 앉아 다른 사람들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백작부부를 쳐다보던 황태 자가 힐끗 세바스티앙을 일견했다. 그의 근위기사는 크리스틴 영애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의외로...취향이 그렇군...' 그동안 살빼기에 열심이었는지 족히 2~30파운드(10kg 정도)는 살이 빠져 보이는 영애에게 시선을 던져보던 황태자는 이내 못 볼꼴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틴은 자신을 주시하는 세바스티앙에게 친근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천하군!' 감히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사교계에 되지도 않는 소문을 내고 다녔던 주재에 자신의 근위 기사에게 꼬리를 치는 장면을 목격한 황태자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백작을 노 려보았다. "내 세실리아라는 아이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소. 공(公)은 알고 있소?" 이미 사라진 아이를 들먹이는 황태자가 덫을 놓는 것이라 판단한 백작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만, 전하. 신(臣)은 그 아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사옵니다." 황태자의 얼굴에 짧은 순간 노기가 스쳐갔지만 이를 본 것은 단 한사람뿐이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전하." 약간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선 백작영애를 보는 황태자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래요? 무엇이오?" "그 아이...세..실은 지금 그 아이를 가르쳤던 스승과 함께 여행을 떠났사옵니다. 몇일 전 이곳에 들렀다가 아이가 거(居)하던 곳을 둘러보고 백작가를 찾았던 앤드류님과 독대(獨對)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여행을 간다 말하고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크리스틴의 말에 경악한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알현에 모여 있던 하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히 백작부부는 경악을 넘어서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또 거짓말을......!' 핏기가 가신 백작부부를 일견한 황태자가 실소를 지었다. 그리고 얼굴을 굳힌 채 의자의 손잡이를 내려쳤다. 쾅! "감히! 영애가 내게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그대의 작품이오? 레이븐을 이용해 그 아이의 소식을 전하고, 물건을 전하고, 수배령을 거두어 그 아이를 찾는 것을 방해하려 한 것이 그대의 소행이오!" 질문이 아닌 확신에 찬 황태자의 목소리에 크리스틴의 안색이 바뀌었다. "수배령이라니오, 전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크리스틴을 바라보던 황태자가 실소를 지었다. 그는 연기도 이정도면 수준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참으로..영특하오. 황제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어명(御命)을 모른다? 대단하군, 대단해. 솔직히 말해보시오. 백작가에서 도둑질을 하여 고문을 당한 아이가 하룻밤 새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것도 모른다 하시겠소?" "헉!"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 소소한일 까지 황태자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저마다 헛바람을 들이키며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또 한편으로는 세실의 소식을 꾸몄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다. 타고난 성정은 어쩌질 못한다. 비록 말을 못하는 1년 사이 영애의 행동이 눈에 띠게 달라졌고 그것을 좋은 일이라 받아들였지만, 그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면? 사람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가 아닌가?' 칭찬이 아닌 경악에 쌓인 절규였다. 자신의 더러움을 덮어버리기 위해 1년간 그토록 철저하게 스스로의 행동을 감추다니... 그것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철한 계산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황태자의 반격에 잠시 주춤했던 크리스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 한사람. 세바스티앙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전...지지 않아요. 누구에게도 당하지 않아요!' 그 짧은 순간 보여준 당당한 미소는 세바스티앙뿐 아니라 황태자의 눈에도 들어갔다. 차가운 눈으로 영애를 바라보던 황태자는 더욱 인상을 썼다.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한 걸음 앞으로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황태자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바뀌기로 했어.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해.' 전투태세를 가다듬으며 입술을 질끈 깨문 크리스틴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전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전...그 아이가 죽도록 미웠습니다." "헉!" 또 다시 터져 나온 경악은 백작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태자를 직시하는 크리스틴의 눈에 죄책감은 없었다. "전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최고였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뛰어난 집안에 훌륭하신 부모님 밑에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저의 것이었고, 또한 이 나라의 왕비가 될 꿈에 젖어 있던 저는 그렇게 확신했 습니다. 다 제 뜻대로 될 것이라고, 손가락 하나로 바이오니어 제국을 휘두를 수 있 을 것이라고." "세상에!" 도저히 15살난 소녀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말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그랬지요. 적어도...그 아이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요.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 참으로 영특하다 생각했습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니아울리' '아니시드'라 는 이름을 입에 담는 여덟 살짜리 평민의 아이를 보며...아, 정말 똑똑하구나 내심 감탄 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지요. 전 그 아이의 재능을 질투했습니다. 전하는 모르시겠지요, 아니 아버님 어머님도 모르셨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얼마나 시기하고 질투했었는지! 저는 머리가 나쁩니다. 아주 나쁘지요. 1나르 내내 들었던 수업내용은 1미르가 지나기도 전에 잊어먹는 저의 머리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누구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전...사람들의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습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누구에게 다가설 수 있었겠습니까? 어딜 가도 혼자였습 니다. 그래서 독해지자고, 그래서 나쁜 짓을 해서라도 사람들의 뇌리에 저를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나타났지요. 겨우 여덟 살이었습니다. 여덟 살이요! 전 그 나이에 제가 뭘 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 합니다. 그런데...그런데 그 아이는 이미 한 달에 수천 골드를 벌 수 있는 재능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그 아이를 종처럼 부리시며 돈을 버셨지만, 그 아이는 적어도 자유로웠습니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가며 어딜 가도 인정받고 큰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길렀습니다. 저는요? 저는...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 모님께서 주시는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먹고 즐기고 새 옷을 입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웠습니다. 그래서 괴롭혔습니다. 그 아이의 재능을 떠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 능력에 질투를 느꼈습니다. 제가 쌓았던 악행이 그 아이 때문에, 그 더러운! 아이 하나 때문에 두드러졌지요. 제가 한 대 때리면 머리를 조아리며 울음을 터뜨리던 종들이 그 아이가 나타난 후 절 피하더군요. 어떻게든 안 맞으려고 제게 꼬리를 흔들던 그 하찮은 것들이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저를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서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없어져 버렸으면 바랬습니다. 제 세상! 저만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이 백작가에 서 쫓아내고 싶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인 듯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영애의 눈은 애처로워 보였다. 당당하게 서서 흔들림 없이 말을 쏟아내는 영애의 모습이 시리도록 아파보였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마땅히 손가락질하고 욕을 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은...거실에 서서 크리스틴의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눈빛 역시 달라지고 있었다. 정점에 서서 모든 이를 내려다보며 살아온 황태자는 크리스틴이 느꼈던 시기와 질투, 절망을 공감할 수 있었다. 위에 선 사람들만이 느끼는 감정들. 하찮은 벌레라 생각했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발휘하면 그것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스스로를 얽매며 목을 조이는 덫이 된다. 시기와 질투.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 신분을 지닌 이에게는 독(毒)이 된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아랫것들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키워주는 것이 윗사람의 도리이듯이, 귀족뿐 아니라 황족 역시 그러한 덕(德)을 행해야만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다. 그것이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이들의 숙명이요, 반드시 행해야할 과제였다. 어려서부터 그런 것에 대해 훈련받고 교육받은 황태자이기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러 워할 때 크리스틴 영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크리스틴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그 아이를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제가 미칠 것 같았지요.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백작가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느꼈던...그것은 제 생애 있어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더러운 벌레보다 못한 존재를...인간이라 취급받지 못하는 아이를 황태 자께서는 따뜻하게 바라보고 계셨지요. 따스한 말로 아이를 다독여 주셨습니다. 저는 더 럽다고 만지지도 않는 아이를 안아주셨지요. 그래서... 그래서 어머님의 목걸이를 감추어 저를 따르던 시녀에게 그것을 그 아이가 쓰던 오두막에 숨겨두라 지시했습니다. 일은 거기서 꼬였지요. 그냥 목걸이가 나왔다면 전 제 소원대로 그 아이를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지 않더라도 도둑질을 한 그 아이는 벌을 받게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목걸이가 사라졌습니다. 전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적어 도 배너 백작가에서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전...그 아이가 목걸이를 발견하고 팔아버렸다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것을 그 아이는 뻔히 알고 있었 으니...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팔아버렸다고요...그리고 전 부모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심성을 믿으셨기에, 그것이 제가 씌운 누명이라는 것을 아셨지요. 아카데미로 돌아가려는 순간 마지막 기회가 왔습니다. 아이의 아비라는 작자였지요. 얼마나 더럽고 추악했는지 가까이 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아이가...그런 작자에게서 태어났는지...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두 번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기에는 전 너무 독했습니다. 네, 독했지요. 술에 절어 혀가 꼬인 사내가 12살짜리 여식을 대려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 아이의 험난한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을 주고, 하녀를 시켜 그 아이를 버렸습니다. 그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요." 사실 지금 크리스틴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영애가 가진 기억과 세실의 기억이 엮여 있었기에 생긴 혼란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시작한 도박, 끝까지 성공시켜야 했다. "그 아이의 소식을 알고 싶으시다구요, 전하?" 크리스틴의 미소는 서글퍼 보였다. 이미 답을 알 것 같은 황태자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영애는 끝까지 잔인했다. "그 아이는...죽었습니다." "아!"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함께 백작부인이 풀썩 쓰러졌다. 아내를 안아든 백작은 노여움과 번민, 연민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으로 딸을 지켜보았다. "그 아이는...혀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목이 부러진 채 죽었습니다. 어찌 그리 되었냐고 물으신다면 모른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모릅니다. 하지만...그 아이는 아이의 어미가 누워있는 그 곳에 묻혔습니다. 네...제가...묻어주었습니다. 세상의 잔인함에 목숨을 잃은 그 아이를 직접 화장(火葬)하고 뼈를 부수어 레니가...그 아이의 어미가 있는 곳에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고작 10살이 되었을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하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당했을 고통을 떠올리며 아파했다. 세상에 태어나 고생만 하다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친 검은 머리의 소녀를 떠올리던 사람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황태자는 멍하니 크리스틴의 담담한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도 돌리지 않고 자신의 눈을 마주보고 있는 영애의 푸른 눈에 담긴 애잔한 감정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황태자는 침을 삼켰다. "그 아이를...어떻게 만났는지...말 해줄 수 있겠소?" "그 아이의 스승이자 이제는 저의 스승이 되신 분께서 찾으셨습니다. 갈렌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에 버려져 있었다 말씀하시더군요." "스승이...누구십니까?" "말씀드리지는 못하오나 정히 알고 싶으시다면 황제폐하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런데...이 주머니는 어떻게 된 것이오?" 황태자의 손에는 세실이 만들어둔 향낭이 들려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만든 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잠시 망설 이다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그 아이의 치맛단 속에...한 권의 책과 그 주머니가 있었지요." "책! 그것을...그것을 보여주시겠소?!" 황태자의 간절한 외침에 크리스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태웠습니다. 찻잎을 만드는 방법만 적어 레이븐 상회에 전해주고 모두 태웠습니다." "이런...." 세실이 치마를 휙 걷어 올리고 속바지 안에서 손때가 꼬질꼬질 묻은 책을 꺼내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한데, 그렇게 자신을 웃게 만들었던 아이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이카루스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사람들이 있으니, 감정도 표현하지 못한다. 서글픈 얼굴로 천천히 일어선 황태자는 아직도 자신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눈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영애에게 다가갔다. "나는...그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소. 과거에 세실에게 했던 일은...이미 지나간 일이니 충분히 후회하고, 충분히 뉘우쳤을 거라 확신하오. 앞으로는...앞으로는 그런 일로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스스로를 더럽히는 짓은 하지 않기를 바라오. 이것은 제국의 황태자로서라기 보다는 황족으로 태어나야만 했던 앤드리아의 개인적인 말이라 받아들이 시오. 돌아가자." 한번쯤 무덤이 어디냐고 물어볼 만도 하건만 크리스틴에게 차갑지만 배려가 담긴 말을 남긴 황태자는 안타까운 눈으로 영애를 바라보고 있는 세바스티앙을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황태자가 궁으로 돌아가고 남겨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세실의 죽음' 언제나 웃고, 언제나 배려하고, 언제나 다른 이를 걱정해 주던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일터로 돌아갔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차라리 그냥 어딘가에 살아있을거라 믿으며 살았더라면 이렇게 안타깝고 가슴 아픈 감정은 느끼지 않았을텐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간 아이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그 아이를 질투하여 스스로를 원망하고 절규하는 크리스틴 영애의 영상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서서히, 아주 천천히 그들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지만 백작가에 있었단 모든 사람들은 아주 중대한 오류를 두 가지 범하고 있었다. '저는 사람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머리가 아주 나쁘지요...' '1나르 내내 들었던 수업내용은 1미르가 지나기도 전에 잊어먹는 저의 머리를 누가 알아 주겠습니까' 크리스틴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5년 전 세실이 말했던 '니아울리'와 '아니시드'라는 찻잎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크리스틴 폰 배너는 세실과 레이븐 상회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 백작 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향낭을 레이븐을 통해 황제에게 전했고, 또한 찻잎이 담긴 비법을 적어 레이븐에 주었다고 말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간과한 이 두 가지 오류. 이것은 크리스틴이 자신 스스로의 치부(恥部)와 죄악(罪惡)을 고변하며 흘린 덫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90%의 진실 속에 섞인 10%의 거짓으로 만들어진 크리스틴의 열변은 그녀가 레이븐과 연계가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함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크리스틴 폰 배너」가 「세실리아」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첫 번째이자 최후의 포석이었다. ***************************************************************************************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입니당~ 크리스틴은 정녕 동정을 받아 마땅한 인물일까요? 여러분들은 제게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욕할라치면 입을 막는다'고...크흐흐흐 그것은 저의 즐거움이자 또 다음편~~~!! 이라고 외치게 만들고자 하는 비.법.이 아니라 제가 원체 착해 나쁜 사람을 못만드는...(퍽!) 회익~! 철푸덕!~!! 끄으응...죄송합니다. 해답은...다음편에~~~~!!! > < 그리고, 제목 이벤트 마감이 다음편이군요. 후보명은 총 5개. 다음편 글 올릴때 개시 할테니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꾹 눌러주세요. (여러분께서 선택하신 클릭 한방에 심혈을 기울여 제목을 보내주신 분들의 정성이 원고 로 보답받을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뭐...그깟 원고정도야 뭐...하시겠지만 드릴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이해해주세요. 자, 그러면 전. 일단 2편 올렸으니...글쓰러 갈랍니다 .( * *)~ 연참이 나를 부른다아.....휘리릭~! 여러분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폰 배너 4. "꼭 그래야만 했느냐?" "......." "그렇게 까지 해야 했느냔 말이다!" 샌들우드의 노한 음성에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슬픈 얼굴이었다. "스승님...언제까지나 과거에 매이지 말라고 하신 분은 스승님이예요. 전...과거로 돌아갈 자신이 없기에..그래서 죽은 아이가 되기로 했어요. 나중에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지금 다 른 분들이 저를 떠올리며 슬퍼해준 것을 기억할 수 있을 테지요." 한 참을 서성이면서 제자를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뚱뚱하고 소리만 질러대던 크리스틴을 떠올 리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아이가 진정 너를 그렇게 질투하고 시기했던 것이라니...참으로...안타깝더구나. 옳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조금만 참았더라면...기회가 있었을 텐데..." 몸을 숨기고 크리스틴의 말을 들었던 샌들우드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생각을 짧은 몇 마 디로 정리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머금은 백작부인과 백작이 안타까움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왔다. 말없이 다가와 크리스틴의 마른 몸을 감싸 안은 백작부인은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위에 키 스를 퍼부으면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구나, 미안하다. 크리스. 내가 어리석어 널 제대로 보지 못하고 괴롭게 만들었구나. 얼마나 슬펐느냐, 얼마나 아팠느냐. 몰라주어 미안하다. 이해하지 못해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백작부인의 흐느낌에 크리스틴의 꼭 감은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작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침대 옆에 앉아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것은 미루도록 하자. 더 훌륭한 선생을 모시고 네가 당당할 수 있을 만 큼 준비를 한 후에 돌아가거라. 슬퍼하지 말고, 괴로워 하지마라. 모든 것이 내가 못난 탓이지 네 탓이 아니다. 딸이 스스로의 모자람으로 괴로워하는데 겉만 보고 등을 돌린 내 탓이다. 방법 이 있을 것이다. 어르신께도 조언을 구해보마. 혼자 아파하지 말거라. 기억력이 좀 나쁘면 어떠 냐, 이 아비의 얼굴조차 잊는다 해도 널 탓하지 않는다. 그 동안 얼마나 괴로웠느냐, 얼마나 울 었느냐. 불쌍한 것. 부모를 잘못 만나 그 작은 가슴에 아픔만 새겨졌구나." 백작의 위로에 끝내 울음을 터뜨린 영애는 백작부인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었다.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아이에게 결국 세실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 했지만, 백작부부는 이 일은 그냥 이대로 덮어두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괴로워하고 아파했을 딸에게 더 큰 아픔을 심어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딸꾹질을 하는 딸을 눕히고 친히 얼굴을 닦아주고 찬물수건을 눈 두덩이에 올려준 백작부인은 백작과 함께 아이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레니의 무덤에 뿌려졌다는 세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갈 생각이었다. 크리스틴의 새하얀 손이 그녀의 손만큼이나 흰 수건을 살며시 걷어냈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는 아이의 푸른 눈에서 또 다시 눈물방울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침대의 기둥위에 앉아 소녀를 지켜보던 카사가 소리 없이 내려와 아이의 눈물을 날개로 말려주 었다. 가만히 누워 카사의 온기를 음미하던 크리스틴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아름답고도 서글픈, 스스로에 대한 조소가 담긴 미소였다. "아씨는...질투하지 않았어. 나 같은 거...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그냥 싫었던 거야. 꼴도 보기 싫은 아이라 같은 집에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부터가 싫었던 거야. 처음부터 악연 이지. 내가...아씨가 웰던 백작가를 가던 중에 말발굽에 밟혀 죽을 뻔한 아이가 나라는 걸 안 순간, 끝은 정해져 있었어. 넌 아니, 카사? 아씨는...정말 잔인한 사람이야. 내가...자기 말을 안 듣는 것이 싫었데. 다른 하인들을 선동해서 반항하게 만든 게 나라서 싫었데. 아씨는 항상 1등이어야 했어. 아카데미에서도 그래서 미움 받았어. 자기보다 예뻐서... 자기보다 공부를 잘해서...어떤 일을 저지른 줄 알아? 참...무서운 사람이야. 그런데, 그런데 나는 이제 그걸 바꿔야 해, 카사. 아씨가 저질렀던 그 수많은 일들을...내가... 내가 지워야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아씨를 노려보던 그 시선들...그 무서운 눈들이 날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난 참 세상을 몰랐지. 오늘까지만 해도...앤드류 아저씨가 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황태자한테 내가 세실이라고 말 할 뻔 했어. 그런데..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씨의 마음속에서 난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 아빠한테 황금을 던져주면서...아씨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래, 데리고 가서 죽여라, 마음껏 괴롭히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만들어주어라.' 그것이 아씨의 본심이었어. 질투? 나 같이 미천한 것을? 하! 대단한 사람이지. 대단해...그래 배울 것도 있었어. 아씨는 머리가 나빠. 그런데 그걸 감출만큼 거짓말을 잘 했지. 그걸 배울 거야. 어느 누구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도록...그렇게 살아갈 거야. 오늘...모두들 속았어. 나의..이 크리스틴 폰 배너가 정말 자기를 비하하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보상받 으려 했다고...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약한 사람들을 때리고 괴롭히면서 진심으로 즐거워했던 아씨는 죽었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스스로를 속였던 세실도 죽었어. 난...내가 거짓으로 살아왔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을래. 아씨의 기억 속에는 내가 모르던 것들이 잔뜩 있어. 목이 떨어져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웃음을 감추고, 웃으면서 마음속에서 칼을 갈고 채찍질을 하는 방법. 거짓말 하나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방법.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으니...이제는...내가 써야겠지. 앞으로...내가 나로 살아가려면... 그렇게...그렇게...살아가야해. 오늘...내가 한 거짓에 모두들 넘어간 것처럼...난 그렇게 살아야해. 그래야 이미 죽은 세실을 다시 죽이지 않고, 크리스틴 폰 배너를....."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카사에게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며 크리스틴은 천천히 잠이 들었다. 오늘 그녀가 했던 그 말을 쏟아 붓기 위해 크리스틴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결과는 성공이었으나, 아이의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스로의 위선에 치를 떨며 슬퍼하고 아파하던 아이가 눈을 감자 카사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커다란 손을 내밀어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던 샐라이온은 침실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바람을 향해 손을 저었다. 『가까이 오지마라. 아이가 깨어난다.』 『........』 샐라이온의 무뚝뚝한 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실피드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 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변하는 거냐?』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한 시련일 뿐이다. 목표를 찾았으니...어찌 되든 해 낼 것이다.』 『........』 실피드는 실프들을 통해 들은 크리스틴의 엄청난 거짓말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짓은 크리스틴 같은 아이나 할 일이지 자신이 아는 세실은 그런 일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천성이 그러했다. 그런데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세실을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본래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결코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5년 가까이 지켜봐온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얼굴을 찌푸리던 실피드가 문득 태연하게 앉아있는 샐라이온을 째려보았다. 『넌...어째서 그것이 시련이라 하는 건가? 만약 정말 변한다면?』 『.....아이의 선택이라면...기꺼이 받아들인다.』 잠시 망설이다 대답하는 샐라이온을 바라보던 실피드가 바람의 기운을 모았다. 분노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뒤틀려...』 『처음부터! 그 모든 것을 이 아이에게 맡기려던 그 분의 실수다!』 화를 내려던 실피드의 기운이 사라졌다. 분노를 속으로 삭이며 '처음'을 부정하려는 샐라이온 때문이었다. 『영혼을...강하게 키우는 것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다. 굳이 아이의 운명을 그리 만들 필요가 없었어. 처음부터 실수였던 거다. 시작이 잘못된 것이다. 이용당하고 버려지고 마지막에는 희 생을 강요하는 생(生) 따위 처음부터 이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이의 어미가 일을 벌였다. 운명이 뒤틀렸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의 어미는 스스로를 희생하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네가...지켜보았으니 알 것이다. 왜 말리지 않았나? 너도 그 여인의 선택을 모르는 척 하지 않았나? 알고 있었겠지. 그러고 싶었겠지. 나또한 그러하다. 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기위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지켜볼 것이다. 지켜줄 것이다. 끝까지...함께 할 것이다.』 실피드의 눈이 살며시 잠겼다. 그리고 말없이 사라졌다. 텅 빈 실내를 바라보던 샐라이온은 오늘따라 말을 참으로 많이 했다고 생각하며 아이의 머리카 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카사로 돌아가 아이의 얼굴 옆에 앉아 깃털을 다듬었다.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 보이는 아이의 잠든 얼굴을 쳐다볼 수 없다는 듯이. 그 괴로움을 덜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잠시 크리스틴의 볼에 부리를 비벼대던 카사는 천천히 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의 마지막 말이 억겁의 세월동안 불을 다스려온 거대한 존재의 가슴에 한 방울의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야 이미 죽은 세실을 다시 죽이지 않고, 크리스틴 폰 배너를........죽일 수 있어." 꽈당~! 대신관이 머무르는 처소의 문이 박살났다. 황태자가 백작가를 뒤집는 동안, 카일은 그에게 사실 을 숨긴 뻔뻔한 대신관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달려왔다. "왜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레고리 대신관의 방으로 뛰어들어온 카일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부서진 문의 잔해를 발로 차버렸다. "왜 그 아이가 그렇게 괴로워해야 하는 겁니까!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었지요, 대신관님은 다 알고 계셨지요! 똑바로 돌려놓으실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그런데 왜 입을 다물고 눈을 감 고 계시는 겁니까!"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사실이 못내 분한 카일은 대신관의 안색이 창백하다는 것도 보 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그레고리 대신관은 카일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무엇이...똑바른 길이냐. 무엇이 옳은 일이라는 것이냐?" "........?" 대신관의 반문에 아연실색하던 카일이 이를 갈았다. "그 아이의 삶을 되돌려 주는 것이 똑바른 길입니다. 이미 홀로 설 능력이 충분한 그 아이가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란 말입니다!" 카일의 말에도 흔들림이 없던 대신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모르겠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틀린 것인지...나는 모르겠구나." "할아버지!" 카일의 외침이 신전에 울려 퍼졌다. 자신을 '할아버지'라 칭하는 카일을 바라보는 그레고리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요, 생소한 말이었다. "나는...이카루스의 사자(使者)다. 호칭을 바로 해야겠구나." "그게...문젭니까?" "그러면 무엇이 문제냐?" 예의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반문하는 대신관을 노려보던 카일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그 아이가 백작영애가 된 것입니까?" "나도 모른다." "흑마법사들 짓일까요?" "그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럼 누가.......마족입니까?" 카일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잊혀진 종족을 일깨우는 카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대신관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요?" 이번에는 꽤 침묵이 길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카일이 다시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대신관의 입이 열렸다. "있으나 말할 수 없다. 할 수 있으나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카루스의 분노인가? 신전의 앞마당에 떨어진 불꽃은 오래된 사이프러스 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놓았다. 하지만 대신관을 비롯한 신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신전에 머무는 아이들만이 두려움에 떨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날벼락'에 대한 반응이라 면 반응이었다. 갑자기 어두워지는 하늘을 창밖으로 쳐다보던 카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의미이십니까, 대.신.관.님?"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이나...인간은 모든 존재들이 부러워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것은...자유의지다. 운명을 개척하는 힘. 신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특권이지." ".....그래서요?" "나는 지켜볼 것이다." 콰과광~! 두 쪽이 났던 나무가 가루가 되었다. "그 아이가 선택하는 길을 지켜만 볼 것이다. 절대로..." 화르륵~! 가루가 되었던 자리에 불이 붙었다. "절.대.로. 그 아이의 운명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투두둑, 투두둑, 투둑, 투둑, 쏴아아~ 신의 눈물이련가. 그레고리 대신관의 단호한 외침이 끝나는 순간 하늘에서 거센 빗줄기가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일련의 사태들을 내다보고 있던 카일은 천천히 대신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처 알아보지 못했으나 대신관은 오늘따라 너무 창백해보였다. 마치... "말하는 시체 같습니다, 대신관님." 카일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피식 실소를 짓던 그레고리 대신관은 먹구름이 몰아치며 소나기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대신관님께서 내리신 결정과 저...정신 나간 하늘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알면서 묻는 것이었다. 묘한 어조로 반문하는 카일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까마득히 높을 곳에 떠다니는 비구름을 요모 조모 살펴보던 대신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의 결정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콰과과광!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천둥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흔들림 없이 하늘의 분노를 읽고 있던 대신관은 두 손을 모으고 카일을 보았다. "그 아이의 운명은 그 아이가 개척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 역시 그 아이의 선택으로 일어날 것이다. 나는...지켜볼 것이다. 그저...지켜만 볼 것이다. 가거라.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피곤하구나." 아닌게 아니라 대신관의 얼굴에는 핏기하나 없었다. 잠시 망설이며 입을 몇 번 달싹이던 카일은 울부짖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문짝 값은 청구서로 보내십시오. 보내 드리지요." 자그락 자그락 나무 파편들을 밟아가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진 카일은 문 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신관들을 지나쳐 사라져갔다. "들어오시게나." 대신관의 허락에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 신관들은 문이었던 나무 조각을 손으로 하나하나 주우며 대신관의 안색을 살폈다. "헛헛헛, 불안한가?" 자신에게 묻는 듯한 질문에 신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묵묵히 부서진 문을 치우고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신관은 두꺼운 천을 가지고와 문 위에 달아주었다. 임시방편으로 나마 문의 역할을 하며 거센 바람을 막아주길 기대하면서. 신관들의 배려로 정적을 되찾은 대신관은 모으고 있던 손위에 이마를 얹었다. 『신의 뜻을 거부하는 것인가?』 칼날 같은 음성이 대신관의 귀를 스쳐갔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사자의 신분으로 신의 말을 거부하는 가!』 노여움에 가득 찬 음성이 들려왔지만 이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하찮은 미물...』 "흉내는 그만 내셔도 좋습니다." 『.......!』 "이 늙은이가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의 음성하나 구분 못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하찮은 미물 에게 무엇을 그리도 요구하십니까, 위대하신 천족 나으리." 『........!』 "대신관은...신을 모시는 사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모르셨습니까? 허락되지 않은 명을 들고 찾아오신 분께서는 이만 돌아가십시오. 분노를 가장한 협박으로 죽은 나무는 이카루스 신전의 수명과 맞먹는 존재였습니다. 되살려 주시고...돌아가십시오." 『신의 뜻이다. 신이 바라시는 일이다, 아이의 운명을 돌려놓아라.』 강경한 어조에 대신관의 입술이 떨렸다. "어디로 말입니까? 그 아이의 육신은 혀가 잘리고, 팔이 잘리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대신관의 떨리는 음성에 '천족 나으리'라 불리었던 지고지순한 존재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의 육신은...흑마법사들의 심처에 있다. 찾아라. 되돌리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 잠시 커졌던 대신관의 눈이 가늘게 줄어들었다. 웃고 있는 듯...마치 음성의 주인을 비웃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의 뜻이라구요? 이카루스님의 뜻이 그러하단 말입니까?" 『그렇다.』 "천족도...거짓말을 하는 군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카루스님의 의지대로 될 것입니다. 허락받지 않은 분이시어.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잊으십시오. 인간은 신의 종이 아닌 의지를 가진 자식들임을 기억 하십시오." 일순 대신관은 자신의 신성력을 차단하며 주위를 압박하던 무거운 공기가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가시기 전에 사이프러스를 살려주시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혼나실테니..." 분명 이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대신관은 창문 너머 보이는 거대한 나무가 자랐던 곳에 파란 새싹이 돋아나 키 작은 나무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늘을 뒤흔들고 세찬 비를 뿌리며 신의 분노를 흉내 내던 기운도 사라졌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은 대신관은 멍하니 허공을 주시했다. 『아이야, 너의 바람대로, 나의 뜻대로, 그 아이는 스스로 원하는 길을 갈 것이다.』 희미하지만 아련히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대신관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두 팔을 양쪽으로 뻗고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위대하신 창조주이시자, 모든 이들의 아버지이신 이카루스님. 부디...부디 어린양의 길을 꺾지 마옵시고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갈 수 있는 축복을 거두지 말아주소서..."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똑 똑 똑 눈을 감고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는 대신관의 얼굴이 비치는 대리석 바닥에 굵은 물방울이 떨어 져 내렸다. ***************************************************************************************** 드디어...음...주제가 나오는 군요. 앞으로 전재되는 내용에는 이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잘 기억해두세요 핵.심.이니까요 홋홋홋(퍽!) 크리스틴은 소녀였습니다. 세실은 아이였지요. 그 갭을 극복하기 위한 세실의 투쟁이 이제 시작될 겁니다. 아마도... 괜히 나중에 나올 이야기 했다가 내용이 달라지면...험험...걱정이군요. 하지만, 제 글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서는 이쯤에서 대강 고개를 끄덕이시겠지요? (들썩 들썩~ > <) 아니면 제 필력이 모자라니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콜록 오늘 연재는 여기에서 끝낼께요. 아무래도 비축분이 모자라...앞부분 수정이 힘들것 같아서.. 40회까지는 조금 쉬면서 갈까합니다. 왜냐구요? 다음편의 <공지>에 나올 제목 이벤트 때문이지요~!! > < 새로운 분들이 많이 보이시던에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만...혹시 하셨더라도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사설이 길어지기 전에 이만 물러가지요. 여러분 다음편 공지 꼭! 읽어보시고, 설문조사 꾸욱~! 부탁드릴께요. 에헴.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제목 이벤트> 투표 다시 부탁드립니다. 본내용은 없습니다만, 꼭 읽어주시고 설문조사에 참여해주시길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제목 응모 이벤트> 1. 코코님 : precious(프레시어스/프레셔스) 고귀한, 사랑하는 아이. 존경할만한, 귀중한, 귀여운 (---> 아마도 세실에 대해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라 생각하신듯 ^^) 2. 별빛 바다님 : 빛의 환생 1편에서 나왔던 유니가 세실로 환생한 것 + 빛을 의미하는 세실의 행동 (세실은 빛의 아이라는 부연 설명이 있으셨습니다. ^^) 3. 면점사님 : 이카루스(철자는 아직 고심 중...) 원제 신의 아이 --> 이카루스의 아이 --> 이카루스 (아이는 흔해서) 4. Filen님 : 이카루스의 꽃(Icarus' Flower) 세실은 이카루스의 아이이기 때문에...(이카루스의 베이비는 심하다시는군요) 5. alf미르님 : 여로 힘든 여정이라는 뜻도 있지만 식물중에 여로 라는 것도 있더군요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 0.5∼1m. 굵고 짧은 땅속줄기는 땅속 옆으로 뻗으며, 여러 개의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뻗는다. ) 아름다운 꽃이라는 원래 제목에서 생각도 나고 세실의 여정이 힘든 길이라는 생각도 들길래 적어봅니다. (-----> 추가 제목에 있습니다.) 6. 원제 : 신의 아이 워낙 응모하신 분이 안계셔서 이것도 올려봅니다. (설마...없겠지요...- -a) <<<추가>>> 수지니님 : 빛의 아이 (--- 메렁이시랍니다. - -;;) 뽀실님 : 이카루스의 날개 비행돼지님 : 이카루스의 눈물 *********************************************************************************** 이제껏 글을 읽어오셨으니 어느 것이 가장 '이거다' 라는 느낌을 주는지... (무슨...시험도 아닌 것이...) 설문조사에 올릴것이니 가장 마음에 드시는 것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리플로 '...는 좋아요'란 선택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귀찮으시더라도 클릭 한 번 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목때문에...안 읽으신 분들이 많다고...(내용과 편수도 문제지만요..ㅠㅠ) 하셔서 조금이나마 조회수를 올리려는 발악이라 하셔도 좋습니다. 좀 괜찮을 제목을 가진 좀 괜찮은 글을 남기고 싶은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니 따뜻하게 봐주세요. 혹시나 나중에라도 생각이 나시거나, 좀더 의미를 부여하시고자 하는 분은 저에게 메세지나 리플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_ _) 행복하세요~!! ************************************************************ 투표한 것이 없어져서...제가 실수로 수정이 아니라 종료를 눌러서...삭제하고 다시 재개합니다. 추가로 넣을 부분을 생각하질 않아서...죄송합니다. (_ _) 한 번 투표 하면 두 번 못하지요? 코코님의 의견이 계셨는데, 1번 12표, 4번 6표, 5번 1표, 6번 1표 였습니다. 두번 하지 않으시겠다면...말씀해주세요. 참작하겠습니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인재(人才)들의 양성소? 요기서부터는 크리스틴의 나이가 15세(세실 13세) 입니다. 앞부분은 일단, 내용 수정 전에 나이부터 고쳤습니다.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세실이 세바스티앙을 만나고 백작가로 들어가는 나이가 여덟이죠. 그리고 그곳에서 4년을 생활하고, 1년 전에 레니가 마왕과 계약을 한 것으로 수정합니다. ********************************************************************************** 1. 황태자가 다녀간 뒤 백작가는 침울해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 부끄러워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크리스틴은 마치 우울증에 걸려 현실도피를 하려는 사람처럼 눈 한번 뜨지 않고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세실의 죽음과 영애의 고백으로 우울해 하던 사람들은 뒤에 이어진 크리스틴의 반가사(半假死) 상태에 더욱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서야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던 백작가가 서서히 깨어났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소녀가 눈을 뜬 것이다. 깨어난 아이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을 보며 마치 백치처럼 웃었다.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사람마냥 환하게 웃는, 그 시리도록 아파보이는 그러나 너무나 밝 은 미소에 사람들은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아이가 잠이 든 후, 계속 침대 옆을 지켰던 백작부인은 깨어난 아이를 안고 또다시 펑펑 울었고, 백작은 지난 일을 다 잊고 앞만 보고 살면 된다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 깨어난 크리스틴은 그 이후로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달랐다. 가슴 속의 무거운 짐을 다 던져 버렸다는 듯이 방실 방실 웃으며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영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측은함이 가득했다. 크리스틴이 아무리 밝게 웃어도 그들의 눈에는 과거에 표독스러움과 잔인함으로 무장했던 모습을 이제는 웃음으로 바꾸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감추고자 처절하게 발버둥치는 소녀로만 보일 뿐이었다. 백작가의 사람들은 백작영애를 지켜보며 한 가지 묵시적인 약속을 했다. 그녀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건, 어떤 짓을 저질렀건 모두 잊어버리기로. 황태자 앞에서 서슴없이 내뱉었던 말은 그들의 가슴 속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그것만이 끊임없이 스스로와 싸우며 현실에 적응하려는 영애에 대한 작은 배려라 생각했다. 과히 크리스틴의 도박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백작가의 영애, 크리스틴 폰 배너는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서 스스로를 감추는 법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있었다. 일주일 후. "정말...괜찮겠니? 아카데미는 나중에 가도..." 크리스틴의 고변이 있고난 후, 백작부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딸을 붙잡아 두려고 안달을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지금 늦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확고한 태도로 부모님의 만 류에 고개를 흔들었고,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결국 백작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행이 학기가 이미 시작된 후였지만 복학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떠나는 그날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배웅하는 백작부인에게 베시시 웃어 보인 크리스틴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작게 속삭여주고는 뺨에 키스를 남기고 마차에 올랐다. "다녀오겠습니다!" 활기차게 웃으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 딸을 지켜보던 백작은 마차가 사라진 후에도 움직일 줄 모르는 아내의 어깨를 잡았다. "크리스가 뭐라고 했소?" "..........." 얼이 빠진 듯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백작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작을 보았다. 경악과 혼란, 황당함이 어우러진 백작부인의 눈을 쳐다보던 백작은 아내가 해준 말을 듣고 모래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스승님이...기억력이 좋아 지는 마법을 걸어주었으니 걱정 말라고..." 휘이잉~ 난데없이 찬바람이 휘몰아치며 뻣뻣하게 굳어있는 백작부부를 위로하려는 듯 슬쩍 안아주고 사라졌다. 나름대로 부모님을 위.로.해 드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오른 크리스틴은 생전 처음으로 (세실로서) 갈렌을 벗어난다는 흥분에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져보는 자유. 그것이 이제 13살의 영혼을 가진 소녀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그 시작과 끝도 알 수 없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이 전해주는 감미로운 속삭임에 푹 빠져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전원을 감상하던 크리스틴은 문득 마차 가까이 말을 몰며 주위를 경계 하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바이너 경?" 창문 옆에 붙어오던 기사를 부른 크리스틴은 기사가 돌아보자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안아달라는 듯. 의아한 눈으로 아이의 희디 흰 손을 보고 있던 클랜 바이너는 어느새 볼을 뚱하니 부풀리더니 창문 밖으로 기어 나오는 영애를 보고 기겁을 했다. "아가씨!" 벌써 엉덩이까지 쑥 빼고 당장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보이는 영애를 엉겁결에 받아든 기사는 소녀의 몸이 깃털만큼이나 가볍다는 생각에 앞서 자신을 째려보는 기사단장의 살기에 기가 죽었다. 떨어질 것 같아 받기는 했는데,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따님에게 함부로 손을 대었으니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것이다. 백작영애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던 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아카데미에 오가는 날이면 꼼짝도 않고 잠만 자던 영애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차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수행기사의 품에 안겨 넋을 놓고 있으니, 난감하기만 했다. 살이 많이 빠져서 이제는 좀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아이가 발그스름하게 볼을 붉히고 두 눈을 반짝이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영애가 타고 있는 말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가 등 받힘대로 쓰고 있는 남.자.가 문제였다. 백작가의 여식이, 그것도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소녀가 수행기사의 가슴에 안겨 행복한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눈앞이 캄캄해진 기사단장 리차드 허드슨은 은근히 수하들에게 눈짓을 해서 클랜의 말 주위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둘러쌌다. 10여기의 말이 동그랗게 원형진을 이루며 길을 가는 동안 그 안에 갇힌 크리스틴의 볼은 시간이 흐를수록 열 받은 복어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다. "막스 님, 조금만 뒤로 가주세요, 안보이잖아요." "하렐 님, 앞으로 조금만 앞으로...아이...옆으로가 아니고 앞.으.로. 가주세요" "페르한 님, 고개 좀 숙여보실래요?" 귀족가의 여식이 존칭까지 써가며 부탁하는데 버틸수가 있으랴! 기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말을 앞으로 몰았다, 천천히 몰았다, 고개를 숙였다 내렸다,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이어 지는 요구를 들어주랴, 호위하랴 정신이 없던 이들은 자신들의 어깨너머로 주위를 구경하면서 연신 탄성을 지르는 백작영애를 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떼구르르르 떼구르르르~' 기사 단장이었던 세바스티앙과 황실기사의 눈치를 봐가며 마차 안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던 아이를 훔쳐보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 지 밖은 신경쓰지도 않고 비단 천 위를 구르기 바빴던 아이. 황실로 가는 그 30여 미르 내내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아이도 저처 럼 얼굴을 붉히며 눈을 반짝였었다. 마차를 내릴 때 그 아쉬워하던 표정. 순식간에 지나가는 풍경을 보려고 목을 길게 빼고 한탄을 하는 백작영애의 얼굴도 그 아이와 많 이 닮아있는 듯 보였다.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피식거리던 기사들은 어느 순간 얼굴을 굳히고 앞을 노려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길 한가운데에 낯이 익은 회색로브가 펄럭이고 있었다. 1년 전 백작영애를 호위 해 아카데미로 가던 중에 만났던 마법사가 분명했다. 자신들을 잠재우고 백작영애를 벙어리로 만든 자! 그 마법사가 백작가의 식객, 아니 크리스틴 영애의 스승이라는 것을 모르는 기사들은 속으로 전날의 치욕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이카루스의 이름을 부르며 경배했다. 그리고 중간에 서 말을 모는 클랜의 품에 안긴 영애를 일견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흘리며 칼을 뽑아들었다. 채챙! 기사들을 태운 말들의 움직임이 더욱 민첩해졌다. 주인이 흘리는 긴장감에 감각이 예민해진 탓이다. 영문도 모른 채 살기를 내뿜으며 앞을 주시하는 기사들을 보고 덩달아 긴장하고 있던 크리스틴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법사를 보며 활짝 웃었다. "스승님!" "헉!" 갑자기 하늘 높이 날아오른 마법사를 보며 이를 갈던 이들은 영애의 외침에 칼을 떨어트릴 뻔한 위기를 겪었다. 얼빠진 얼굴로 그들 가운데 사뿐히 날아든 마법사를 바라보던 기사들은 클랜의 품에서 뛰어내리는 영애를 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크리스틴은 주위사람들의 턱이 떨어지건 말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배웅 하러온 샌들우드의 품에 안겼다. "스승은 무슨 얼어 죽을 스승이냐! 너 때문에 내가 내 명에 못 죽는다, 이놈아!" 작은 새처럼 파드득 날아드는 크리스틴을 부드럽게 안아든 샌들우드는 아이를 안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네?" "내가 기억력 좋아지는 마법을 걸어줬다고?" "아!" "순진한 아이 꼬드겨서 바보 만들었다고 엘이 펄펄 뛰더구나. 등쌀에 못 이겨서 나왔다." 눈치를 보아하니 잔소리를 피해서 도망 온 것이 분명했다. 세상천지에 기억력이 좋아지는 마법이라니?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고 이가 갈렸다. 다 늙은 스승한테 뭐가 아쉬워서 기대를 거는 것인지 '정말 그런 마법이 있지요? 그렇지요, 어르신?' 하며 눈을 빛내던 백작이 떠오르자 살이 떨리고 피가 마르는 샌들우드였다. "그런 게 있으면 세상천지 바보가 어디 있겠어!" 영문도 모른 채 백작의 방문을 받았던 샌들우드는 졸졸 따라다니며 물어보는 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백작부인에게 잡혀 엄청난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그것도 순.진.한. 딸아이가 그 엉터리 말 하나 믿고 아카데미로 갔는데 그 책임은 어떻게 질거냐고. 결국 귀가 따가울 기경에 이르러서야 현명한 샌들우드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영상을 담을 수 있는 수정구' 수업 내용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쓰면 되지라고 중얼거렸다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전에 전해주고 오라고.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이번 일은 그냥 못 넘어가요, 빠드득" 이를 갈며 손톱을 내미는 백작부인을 피해 부랴부랴 텔레포트로 길을 막고 섰더니 기사라는 것들이 칼을 뽑아들고 살기로 그를 맞이한 것이다. 샌들우드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똑똑하기는 그 지혜가 하늘 끝에 있는 샌들우드였지만 우격다짐을 웃어 넘길만한 담력은 없었던 것이다. 주절주절 한탄을 하는 스승을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괴고 지켜보던 크리스틴이 이야기가 끝나자 손을 내밀었다. "뭐냐?" 샌들우드는 눈앞에 내밀어진 아이의 작은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수정구요. 저 주신다면서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생글 생글 웃으며 귀엽게 애교를 떠는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수정구를 꺼내어 작은 손 위에 얹어주었다. "다 가져가라, 다~가져가!" 어차피 줄 생각이었는지 새것이 분명한 수정구를 척 얹어준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벌떡 일어나..려다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좀...낮지요?" 벌게진 얼굴로 욕도 못하고 이를 갈며 허리를 굽히고 있는 샌들우드에게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인 크리스틴이 베시시 웃었다. "끄으응, 그건 영상구슬 겸용 통신구슬이다. 혹시나 일이 있거들랑 그냥 내 이름을 불러. 시동어는 '콜(Call)'. 너만 쓸 수 있도록 처음 마나를 부여하는 이에게만 열리도록 되어있다. 가서 또 괜한 짓하고 돌아다니지 말고, 밥도 꼬박 꼬박 챙겨먹고, 누가 괴롭히거들랑-아마 그 아이 성격에 적이 한둘이 아닐테니-재깍 재깍 연락해라. 험험...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곧장 나갈 것 같이 굴던 샌들우드는 마차의 문 손잡이를 잡고 끝없는 당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차가 로먼으로 들어가 아카데미의 정문앞에서야 비로소 입을 다문 샌들우드는 입을 떡 벌리고 자신을 존경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제자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텔레포트했다. "여기 좌표가...이거였군." 아카데미 좌표를 알아보기 위해 장장 40미르 내내 충고를 빙자한 잔소리를 했다니... "스승님..." 텅민 마차에 앉아 샌들우드가 사라진 지점을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틴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샌들우드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항상 지켜볼 것이다.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려 주실 것이다. 샌들우드의 따뜻한 손을 떠올리며 잠시 흔들렸던 크리스틴은 마차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순진한, 어찌보면 백치미를 풍기는 소녀로 되돌아가 있었다. "고마워요, 바이먼 경.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네, 아가씨. 열심히 하십시오."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크리스틴의 배웅을 뒤로하고 기사들이 백작가로 돌아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느닷없이 양 뺨을 자신의 손으로 찰싹 때린 후 중얼거렸다. "이제...시작이다. 힘내라, 크리스틴." 웅장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 늘어진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크리스틴은 '학장실'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크리스틴이 과거 학장과 대면 한 것은 단 한번. 어떠한 사건에 연루되어 불려갔을 때가 전부였다. 그 희미한 기억을 따라 길을 찾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것이다.더군다나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거대한 건물 내부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저자도 심한 길치이기에 크리스틴의 마음을 십분 공감한다...) "아이 참...." 아카데미에 도착한 지 30미르가 지나오록 크리스틴은 방황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개미새끼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것을 어찌해야 할까? 1년간 열심히 단련한 덕에 다리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소녀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음...여기서 오른쪽으로 꺾고 그리고 다시 보이는 첫 번째 복도에서 왼...꺅~!" "헉!" 기억을 되살리느라 낯이 익은 장식들을 돌아보느라 미처 앞을 보지 못한 크리스틴은 사내의 등 에 부딪혀 발라당 넘어졌다. 바닥에 구른 크리스틴은 자신도 당혹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고 사내는 머쓱한 얼굴로 부축하려고 내민 손을 거두었다. 이제 한 20대 초반 쯤 되었을까? 귀한 초록색머리카락과 푸른 숲을 연상시키는 청록색 눈을 가진 사내는 죄송하다고 허리를 숙이 는 아이를 보고 눈을 반짝 빛냈다. "크리스틴...폰 배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크리스틴은 눈앞에 보이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카를로스 학장님!"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난 두 사람은 서로가 기억하고 있던 이미지와는 너무나 틀린 상대를 보며 내심을 감추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철이 좀 든건가?' 인사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길가다 부딪혔다고, 눈에 거슬린다고 후배들을 괴롭히는 악녀로 소문난 크리스틴은 과거 그가 보았던 아이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죄를 지었음에도 발뺌을 하며 도리어 벌컥 화를 내던 모습은 지금 미안한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의 태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더 젊은 것 같아...' 크리스틴의 기억으로는 학장의 나이는 이미 40대가 넘었다. 그리고 희미하긴 하지만 거의 드래 곤에 맞먹는 살벌한 기운을 펄펄 풍기며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차가운 눈빛을 가진.... "정말 학장님이세요? 더 젊어지신 것 같은..." "쿡쿡쿡"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소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키득거리던 사내는 따라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학장실로 가나보다...라는 생각에 서슴없이 따라가던 크리스틴은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학장 실로 가는 길을 머릿속에 입력하는데 집중했다. 보통은 졸업할때까지 학장실을 방문할 일은 없었다. 큰 사고를 치지 않는한. 하지만 이미 한 번 불려갔던 전적이 있는 그녀였기에, 또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기에 크리스틴 은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혹사시키며 비비 꼬여진 길을 하나 하나 눈에 새기고 머릿속에 새겨두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온 것을 환영하려는 듯 좁은 복도의 끝에 환상처럼 커다란 문이 우뚝 서 있었다. "오!" 알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는 낯익은 문을 보며 작게 탄성을 내지른 크리스틴은 노크를 한 후 문을 열어주고는 가만히 서 있는 학장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먼저 들어가도 되요?" 학장이 웃음기가 역력한 장난기가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안으로 들어서던 크리스틴 은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학...학장님?!" ******************************************************************************************** 땡땡이에 절단마공이라...좋지요?(퍼벅!) 사실 어제 외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외갓집에 좋은 일이 있으라고 언냐, 오빠들 다 시집 장가가서 제가 따라갔습니다.(짐꾼으로...) 청도에 있는 어디 산이라는데...거기가 거기같고, 저디도 여기같더군요. (길치...- -) 아무튼 짐을 등에 지고 산자락을 타고 올라갔을때만해도 좋았습니다. 내려오고 난뒤에가 문제였지요. 온몸이 쑤시고 결리고, 피곤해 죽겠는데 잠은 안오고.. 조금만 자고 올려야지 그러다...좀 전에 일어났습니다. 사실은 나이가 나오는 부분을 수정하고 이편을 올리려고 했는데, 워낙 많고 찾기가 힘들어서 조금씩 할까 합니다. 괜찮지요? 나중에 내용 수정하면 보시는게 나을지도..콜록 아무튼, 어제 놀고 오늘 1편 올렸으니... 빨리 담편 써야겠지요. 새로 오신 분들! 제가 시간이 없어서 리플을 달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리고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지만 열심히 노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좀 괜찮아질거라...기대하고 있습니다. ㅠㅠ 많이 아껴주시구요,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인재(人才)들의 양성소? 2. "하...학장님?" "들어오게, 배너양." "아...네." "키득키득" 근엄한 얼굴에 차가운 눈을 가진 사내는 분명 크리스틴을 안내해준 남자와 너무나 똑같았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쌍둥이처럼 닮았지만 한 사람은 젊고 한 사람은 좀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것. 책상 앞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는 청록색 눈의 주인은 분명 30대 중반으로 보였 다. 잠시 기억을 뒤져, 학장과 중년사내가 동일 인물임을 확인한 크리스틴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 10년 정도는 젊어 보이는 학장이 빙글거리며 서 있었다. "앉게." "아...네." 마음 놓고 놀랄 새도 없이 카를로스 학장의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크리스틴은 황급히 소파위에 앉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학생을 물끄러미 쳐 다보던 카를로스는 천천히 일어나 아이의 앞에 앉았다. "복학을 하고 싶다고?" "네, 학장님." "역시 차가운 달(겨울 초입)에 있을 간택식 때문인가?" 절대로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닌 학장의 말에 잠시 심호흡을 한 크리스틴은 청록색 눈을 직시 하며 또박 또박 말을 이었다. "저는 황태자비 간택식에 참여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못합니다. 학장님." ".......?" "전...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그것은 황태자 전하도 아시지요. 더 이상은...제 능력이 닿지 않는 곳을 올려다보지 않을 생각이예요."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 크리스틴을 지켜보는 카를로스의 눈빛이 변했다. "이건...또 다른 장난인가? 천하에 무서울 것 없던 크리스틴 폰 배너가 1년 사이 겸양의 도를 닦고 왔다?"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곳, 몬트리얼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경영자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사감(私感)이 어린 말이었다. 조소가 가득한 학장의 얼굴을 응시하던 크리스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전....전...벌을 받았어요. 1년 동안...말을 못했지요. 한동안 양팔과 다리를 못 쓴 적도 있었어요, 학장님." 백작가에서 쉬쉬하던 내용을 입에 담은 크리스틴은 놀란 표정을 짓는 카를로스를 향해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애처롭고 안아주고 싶은 가녀린 모습. 창백하기까지 한 우유빛 피부를 가진 금발머리 소녀는 어찌 보면 금방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와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카를로스 는 문득 이 학생의 몸이 예전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 토실 토실하던 살은 몽땅 사라지고 여위고 순진해보이기만 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벌을 받았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제가 저지른 일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그리고 황태자 전하 께서도 알게 되셨지요. 제가 얼마나..."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크리스틴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마주잡 았다. "그저...아카데미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잘하지는 못하지만...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를 하고 싶어서..그것 뿐입니다." 뼈마디가 드러나는 새하얀 손등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 크리스틴을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생각하고 있던 카를로스는 아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그랬던가?' 문득 아무리 잔인한 짓을 했더라도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진난만한 시기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어른보다 더욱 잔인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크리스틴은 참으로 악독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눈물을 흘릴 줄 안다면 희망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독기가 줄줄 흐르는 눈으로 비웃음만 가득하던 얼굴은 백치미가 느껴질 정도로 순진하게 변했다. 눈물을 흘릴 줄 안다는 것. 스스로에 대해 정직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 그것이 카를로스의 결심을 바꾸게 만들었다. "1년을 쉬었으니, 월반은 무리고...아무래도 반은 예전에 배너양이 있었던 3-D반이 좋겠지? 피곤할 테니 가서 쉬고 내일부터 수업에 나가도록 해요. 시간표나 기타 필요한 것은 오후에 하인을 시켜 보내줄테니. 카민, 크리스틴 폰 배너의 건물은 '윈드프리(wind free) 3호실' 이다. 지리를 잘 모를 테니 안내해주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문에 기대고 서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건낸 카를로스는 창백한 얼굴로 비 칠거리며 일어나는 크리스틴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등을 돌렸다. "몬트리얼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 네 말대로 끝까지 해냈으면 좋겠구나." 카를로스는 그의 허락에 애처롭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카민의 뒤를 따라 나가는 크리스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변화를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3년간 지켜보았던 학생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 린 아이였다. 그래도 조금은 달라진 느낌을 주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회를 준 것 뿐이었다. "아로니에의 일은...잠시 묻어둔 것뿐이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두고 보면 알겠지." 1년 전에 일어났던 아카데미 최대의 사건을 떠올리며 닫힌 문을 노려보던 카를로스는 통신구슬 에서 빛이 반짝이자 생각을 접었다. "링크(Link)" 카를로스의 말에 책상위에 놓여있던 수정구에서 빛을 발하며 낯이 익은 학부모의 얼굴이 담겨 졌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도는 얼굴. 카를로스는 차분한 얼굴로 배너 백작의 말을 기다렸다. "안녕하십니까, 학장님. 저 데니스 폰 배넙니다. 크리스가 도착했습니까?" 피식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카를로스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수정구에 정신을 모 았다. 학부모가 자식의 일로 학교에, 그것도 학장실로 연락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드물었고, 배너 백작역시 단 한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 딸아이가 좀 많이 아팠습니다. 몸이 많이 허해져서 좀 배려를 해주십사하 고 연락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를로스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그는 평소 배너 백작의 성정에 대해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돈 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관심을 두지 않는, 어찌 보면 탐욕스럽다 할 수 있지만 버는 만큼 쓰는 법도 잘 아는 귀족보다 는 상인에 가까운 인물이란 평을 받는 사람이었다.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력에는 도채 관심이 없어, 권력을 가진 귀족들 사이에서는 '배너만 물면 일국을 뒤집을 능력이 생긴다.' 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안하무인격의 배너 백작이 고개를 숙이는 대상은 오직 바이오니어의 황제, 브래들리 챗필드 개넌 뿐이었다. 그런 그가 이처럼 저자세로 나오는 것도 이상했지만, 딸의 건강을 걱정해서 연락한 것도 몹시 놀 라운 일이었다. "혹시...크리스틴 양이 말을 못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식은땀을 닦아낸 배너 백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화면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에 두툼한 손바닥이 보이고 이어서 백작의 얼굴이 화면에 들어왔다. 아마 자리에 앉아서 수정구를 다시 조종하는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가 말씀을 드렸군요?" 백작의 대답에 카를로스는 아이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1년 동안 말을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휴...그렇게까지 말씀을 드렸으니...사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움직이지도 못했습 니다. 마법사님이 겨우 팔, 다리는 고쳐주셨는데 목소리가 나오는데에는 1년이 넘게 걸렸습니 다. 그사이 잘 먹지도 못하고 많이 야위었지요. 그리고...몇 일전에는 의식을 잃고 이틀이나 누워있었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연락을 드렸었는데...예전과 다르게 아이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약이나 좀 지어 보낼까 하구요. 아무래도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려면 체력도 체력 이고...그것이..." 뭔가 할 말은 있는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백작을 보며 의아해하던 카를로스는 이어지는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했다. 몇 번이나 면목이 없다고, 선처를 부탁한다고 고개를 조아리던 백작과의 통신이 끝나고 카를로 스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지그시 머리를 눌렀다. 아무래도 고질병인 편두통이 시작되려는지 뒷골이 당기면서 오른쪽 관자놀이가 조이듯 아파왔다. 신경성으로 침침해진 눈을 비비던 카를로스는 문득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디아나 만 아로니에? 그게 누군데요? 전 모르는 사람이예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1년을 함께 공부했던 동문을 모른다고 발뺌하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그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거짓을 확신했고 그 뻔한 거짓말을 마음껏 비웃었다. 확증이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만 사람들의 그녀의 짓임을 확신했었다. "대질심문을 해야 했나? 이런...백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카를로스는 문득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그 아이는 사람들의 이름을 잘 못 외운답니다. 얼굴은...아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 지요. 그리고..절 닮아 머리가 좀...기억력이 좀 많이 안 좋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집에 와서 한참을 앓았지요. 선처를...부탁드립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1년을 함께 생활한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성적이 나빠 월반을 하지 못한 것도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공부에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딸의 선처를 바라는 백작을 비웃던 카를로스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 디어에 눈을 반짝 거렸다. 만약 백작의 말이 사실이라면...오늘 당장 확인해 볼 수도 있는 일 이었다. "치크 대가리란 말이지..." 치크...전설속의 몬스터로 금방 먹이를 먹고도 뒤돌아서면 까먹는 아주 단순한 동물이었다. 조류와 육식동물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알려진 치크는 얼룩무늬 고양이의 몸에 푸른색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잡식성이나 무조건 본능적으로만 움직이며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라면 어떤 것이든 먹이로 인식한다. 식탐도 강해 자신이 방금 먹이를 먹었다는 것도 잊어버리 고 눈에 보이는 것마다 먹어치우다가 종종 배가 터져 죽는 경우도 있다는 몬스터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사람들은 만인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머리가 나쁜 사람을 '치크 대가리' 리라 부르기도 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키득거리며 즐거워하던 카를로스는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카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내해줬니?" "네." "네 소개는 했고?" "네." "느낌이 어떻더냐?" 카를로스의 말에 카민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꽤 영특하다 싶다가 또 한편으로는 바보 같던데요." "바보?" "세상에 제가 살다 살다 그런 길치는 처음 봤어요. 기숙사 앞에서 길을 알려주고 뒤돌아서 나오는 데 복도를 뱅글 뱅글 돌더니만 입구로 다시 나오더라니까요. 내참...그래가지고 이 곳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었는지...결국에는 제가 직접 여자 기숙사까지 들어가야만 했어요. 가면서 보니까 길 잃어 먹을까봐 눈에 핏대를 세우고 여기저기를 살펴보는데...휴..." 카민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카를로스는 짧은 명을 내리고 오후에 보고를 하러 오라고 말했다. 학장의 말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카민은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렸다. "아는 척도 하지 말고, 이름만 물어보고 와." "쳇, 내가 무슨 종도 아니고...이렇게 잘생긴 미남 이름을 까먹을 여자가 어디 있다고..." "내 이야기 하는 거냐?" 궁시렁거리며 밖으로 나오던 카민은 뒤에서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에 혀를 내밀었다. "그런걸 보고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노.망.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머리 위로 날아오는 책을 가볍게 피한 카민은 검지 손가락을 들어 카를로스를 향해 까딱거려주 고는 냉큼 문을 닫았다. 카를로스는 놀라운 순발력으로 위기를 넘기고 가뿐이 사라지는 카민을 보며 혀를 찼다. "저게 아들이야? 웬수지..." 한편 카를로스 부자(父子)의 입에 오르내린 크리스틴은 화려하게 꾸며진 내실에 앉아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학장을 멋지게 속여 넘기고 눈물을 떨굴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었다. 일단 크리스틴 폰 배너가 강하게 심어놓았던 이미지가 그 절묘한 타이밍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에 많이 희석되었다는 것은 아카데미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카민이란 사람의 안내로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부터 크리스틴의 걱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기숙사의 지리는 너무나 희미해 자세히 알아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해서 카민이 알려준 데로 열심히 길을 찾았건만 도착하고 나니 기숙사 밖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머리를 가지고, 어른들의 잔심부름을 해왔던 세실에게 있어서 길을 찾는 일이란 눈감고 물마시기였다. "변했어..."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크리스틴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학생들의 이름도 모르고(이것은 단순히 관심이 없어서 생긴 일일 뿐이지만) 선생들은 얼굴만 알고, 아카데미의 지리도 몰랐다. 그러면 그토록 똑똑하던 세실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수정구로 다가간 크리스틴은 샌들우드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뭐라고? 길을 못 찾아?!" 경악에 찬 스승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일도 있나요?" "혹시 그 아이가 길치였냐?" 그 아이란 몸의 주인을 말한다. 눈을 감고 가만히 기억을 되살려보던 크리스틴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길을 잃거나...한 적은 없었어요." "허...이것 참..." 두 사람이 머리를 마주대고 열심히 고민을 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낭패어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크리스틴을 보고 있던 샌들우드가 피식 웃었다. "됐다. 너무 완벽해도 못쓰는 법이다. 한 가지 약점 정도는 가지고 있는게 좋아. 길치라...큭큭.. 좋은 습관이 생겼구나, 축하한다." "스승님!" 소리를 바락지르는 크리스틴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린 샌들우드는 아마도 영혼이 몸에 적응하면서 생긴 부작용 같다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마 약속을 하며 크리스틴을 안심시켰다. "아, 그리고 백작이 학장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더구나. 혹시나 누가 이름 물어오거들랑 모른다 고 해라. 똑똑한 척 하지 말고, 알았냐?" "에...저기 정말로 기억하는 이름이 거의 없는데요?" 그녀의 말이 의외였는지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라고 충고를 하고 통신을 끊었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수정구를 주머니에 넣던 크리스틴은 방에까지 찾아온 낯익은 사 람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학장님?" "........" ****************************************************************************************** 흠...학장님? 으로 시작해 학장님?으로 끝나는군요. 수정을 하려고 앞부분을 읽으면 읽을 수록 다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ㅠㅠ 코코님, islike님 죄송해요, 사실은 어제 저녁에 올리려고 했는데, 컴 금지령이 내려져서.. 지난 달 전기세가...흑흑... 일단 어찌 되었든, 새벽 2시까지 기다리시다 잠드신 코코님을 위해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사담은 다음편에서...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인재(人才)들의 양성소? 3. 크리스틴의 물음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학.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40대 늙은이로 보이냐?" "아! 저 그럼..그..." '누가 이름 물어오거들랑 모른다고 해라.' 샌들우드의 말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이름을 부르기 위해 열었던 입을 뻐끔뻐끔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크리스틴을 보던 카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너...설마 내 이름 까먹은 건 아니지?" "........."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크리스틴을 보고 벙찐 얼굴을 하던 카민이 다시 물었다. "그럼..너 우리 아..학장님 이름은 아냐?" "카..카를로스...." "성(姓)은?" "........." 소녀의 목이 없어졌다. 어깨로 쑥 들어간 크리스틴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카민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가서 네 이름을 물어보고 와라. 혹시나 이름을 잊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아봐.' "이런 이런 이런....너...이렇게 잘 생긴 미남 얼굴하고 이름도 몇 미르만에 까먹더니 학장님 이름도 제대로 모르냐?" "그게...들은 기억이 없고, 너무 닮아서..." "어딜!" "저기..." 두 손을 마주대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크리스틴을 노려보던 카민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아무리 닮았다 해도 카를로스는 40대 초반이었다. 검을 잘 써서 젊어 보이긴 했지만 그와 동격으로 본다는 것은 카민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었다. '이름도 까먹다니!' 스스로에 대해 자신만만해 하던 카민이 겪은 최초의 패배감이었다. "난 카민 라그나로크다(Carmine Lagnaroke). 나이는 열 일곱..." "네에?!" 나이를 말하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고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 렸다. "그럼 몇 살로 보이는데?" "............." 고개를 팍 숙이고 귀까지 붉히며 입안으로 웅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은 카민은 있는대로 인상을 썼다. "뭐, 스물 네엣?!" 용케도 그런 것까지 알아듣고 펄쩍 뛰는 카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옆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자신 또래의 소녀를 본 순간 어깨를 쫙 폈다. 지금은 세실리아가 아닌 크리스틴 폰 배너이다. 크리스틴 폰 배너는 결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어머~이게 누구야, 크리스틴 아가씨 아냐? 안 보이길래 아카데미에서 쫓겨난 줄 알았더니 어떻게 왔니?" 그것이 적(敵)이라면. 돌머리로 유명한 크리스틴이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름 중 하나. 모이라 데 멜포레스(Moira De Melphoreus) 바이오니어의 일곱 명밖에 없는 공작 중 한 사람인, 사이먼 데 멜포레스(Simon De Melphoreus) 의 둘째 딸이다. '모이라(Moira)'라는 이름은 신화의 일부분에 나오는 모든 지적인 예술 활동을 관장하는 천족 의 이름이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예술을 관장하는 천족, '모이라'의 숨겨진 또 다른 이름 은 '메데세우스(Medeseus)'. 광기와 분노를 관장하는 천족의 이름으로 모이라의 분신(分身)이 기도 했다. 이름 덕분인지 다방면에 있어 팔방미인인 모이라는 천족'모이라'의 이중적인 면 또한 닮았는지 손속이 잔인하고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물론 뒷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때문에 평소 크리스틴에 대한 반감이 심한 그녀는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도 서슴없이 그녀를 비꼬 고 망신 주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자존심하나는 세계 1위인 크리스틴 폰 배너가 기억하는 숙적, 절대로 넘어서야하는 마(魔)의 벽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이라 데 멜포레스 영애." 자신의 아비보다 직위가 높은 공작의 여식에게 약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크리스틴은 이내 얄궂은 인상을 쓰고 있는 카민을 향해 약간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끄러워서 방해가 되었나 봅니다....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모이라 데 멜포레스 영애." 교묘하게 이름을 부르지 않는 크리스틴을 샐쭉한 눈으로 쳐다보던 카민은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파르르 눈썹을 떨며 크리스틴을 노려보고 있는 모이라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보인 후 먼저 돌아섰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크리스틴의 길 안내를 자청한 것이었다. 한없이 어리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던 크리스틴이 난데없이 차가운 가면을 쓰고 당당한 모습을 보인 것에 흥미가 일기도 했다. 그리고... '설마 또 까먹었으려구...' 자신의 이름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그것이 정말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은근히 말을 흐리던 것이 못내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모이라의 사나운 시선을 무시하고 카민을 뒤따라가는 크리스틴의 입술이 살짝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을. "자, 여기가 몬트리얼에서 제일 좋은 경치를 자랑한다는 사티나 호수야. 멋지지?" 구불구불한 길(크리스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을 지나 한적한 숲에 이른 카민은 키가 작은 나무들을 좌우로 가르며 턱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 개를 돌린 크리스틴은 수면위에 눈부신 빛을 반사시키며 반짝이고 있는 잔잔한 호수를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와~" 어린아이의 치기를 버리지 못했는지,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호수 가까이로 걸음을 옮기 려던 크리스틴은 카민에게 팔을 잡혔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카민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못 들어봤구나. 아주 오래 전에 사랑하던 연인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가 이곳에서 자살을 했데. 그래서 그런 건지...많은 여학생들이 이곳에서 익사(溺死)했어. 가까이 가면 위험해. 이곳에서 죽은 여인이 자살을 충동질 한다나..뭐 그렇다네. 그래서 이 사티나는 가장 경치가 좋지만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몬트리얼의 3대 금지(禁地) 중 하나야." "아..." 그저 잔잔하게 물결치고 있는 넓은 호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이 문득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카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까먹었지?" "........" 민망한 듯 고개를 떨구는 크리스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카민은 한 장의 손수건을 꺼내 쫙 펼쳐들었다. 여자에게 선물을 받은 것인지 푸른색의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운 손수건의 왼쪽 아래에 Carmine Lagnaroke라는 글씨가 금색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손수건을 펼쳐 크리스틴의 눈앞에서 흔들어준 카민은 그것을 몇 번 접더니 이름이 나오는 면을 위로 해서 앞으로 내밀었다. "내 이름은 카민이야. 절대로 잊지 마라. 이건 내 자존심이 걸린 일이야, 이 아카데미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여학생은 간첩이다." "전...몰랐는데요." "..........." 크리스틴의 당당한 대답에 짐짓 고개를 흔들던 카민은 그러니까 이걸 주는 거라고 크리스틴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손수건을 턱하니 올려주었다. "내 얼굴이 보이면 손수건부터 꺼내들고, 이름 확인해주기 바란다. 세상 천지에 너보다 더 이름 못 외우는 사람은....아니! 너 모이라는 알고 있었잖아? 사람 차별하는 거야, 아님 날 놀리는 거야?" 비실비실 웃으며 노려보는 꼴이 장난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말을 들은 크리스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던 것처럼 허리를 곧게 펴고 가슴을 활짝 펼친 크리스틴은 카민의 얼굴을 직시했다. "모이라 데 멜포레스 영애에게만은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카민 라...라그나로크님." "오호...자존심이란 건가?" 모이라의 풀네임을 한자도 틀리지 않고 불러준 크리스틴이 슬쩍 손수건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 을 말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본 카민은 뺨을 긁적였다. 하긴 그라도 모이라처럼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약점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있기는 한가 스스로가 생각해도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잡다한 생각을 털어버리고 크리스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준 카민은 싱긋 웃으며 자신들이 걸어왔던 길을 가리켰다. "난 이제 가봐야 되는데, 길이 달라서...저쪽으로 쭉 가면돼. 혹시 기억 못하지는 않겠지?" 순간 크리스틴의 얼굴에 스쳐가는 낭패감을 본 카민은 이만 헤어지자는 뜻으로 손을 흔들어주고 왔던 길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부스럭부스럭 소리에 이어 뒤를 따라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본 카민은 짐짓 인상을 쓰며 다른 방향을 가리 켰다. "기숙사로 가려면 저리로 가야해. 내가 가는 쪽은 남자 기숙사..." "저기, 무..무서워서 그러는데, 큰 길까지만 따라갈께요." 다급하게 말을 하는 크리스틴의 얼굴에는 정말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난으로 한 번 운을 띠웠다가 여자를 울리게 만들 뻔한 카민은 보상으로 기숙사 앞까지 안내를 해주었다. 망설이듯 몇 번을 뒤돌아보던 크리스틴은 결국 가만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카민의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숙였다. "카민 라그나로크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기억하겠습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내미는 크리스틴을 보고 있던 카민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선배라고 불러. 7-A 기사 지망생이다. 종종 만나면 인사나 하고, 아카데미 생활 잘 하기 바란다. 그건 너랑 만난 기념으로 주는 거니까, 혹시나 내 이름 생각 안 나면 꺼내보도록 해. 아, 학장님 성함은 카를로스 파 샐런(Calos Pa Shallen)이다. 잘 지내라." 손수건을 본채도 않고 크리스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카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관으로 걸어갔다. '어쨌든 한 시름 놓은 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능력을 발.휘.하느라 혼신을 다했던 크리스틴은 내심 따끔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억지로 허리를 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던, 카민 라그나로크. 그는 분명 몬트리얼의 학장, 카를로스 파 샐런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름이야 둘째 치고 그 똑같은 외모를 보고도 짐작 못한다면 바보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학장을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자신에게 호위를 베풀어준 이까지 속여야 한다는 중압감에 짐짓 인상을 쓰며 방을 찾아가던 크리스틴은 예의 낯선 계단이 눈에 들어오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어디지?' 크리스틴의 방은 4층으로 계단을 세 번만 올라가면 되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지은 사람은 무슨 생각에선지 계단을 얼기설기 만들어놓고, 'ㄹ'자로 지어진 기숙사를 이어놓았다. 덕분에 자신의 방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1층과 2층, 2층과 3층, 3층과 4층, 각각의 층마다 계단을 잘 선택해서 올라가야했다. 아니면 크리스틴처럼 엉뚱한 방 앞에 서서 여기 가 어딘지 심각한 고찰에 빠져보아야 할 것은 자명한 일. 난감한 얼굴로 계단을 다시 가려던 크리스틴은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또래의 소녀와 눈이 마주 치자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아카데미겠지.' "돌아왔구나, 크리스틴 폰 배너." 조금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살기를 담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학생에게 고개를 숙인 크리스틴 은 작지만 당당한 목소리고 대답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이름을 불러주고는 싶었지만, 기억에 없는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월반 한 것은 아나보지?" "네, 제가 휴학을 하기 전에 4-A 반으로 들어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지금은 5-A반이다." 차가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옆으로 비켜서 소녀가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몬트리얼 아카데미에서는 반을 나눌 때 각 학년마다 성적이 우수한 순으로 A, B, C, D 네 반 으로 나누며 그 중에서도 기사 지망생은 별도로 나누어 A, B, C등급으로 구분하여 가르쳤다. 다른 아카데미와 비교하여 몬트리얼 아카데미의 가장 특이한 점을 뽑으라고 한다면 철저한 능력제 교육과 귀족과 평민의 분산 교육을 들 수 있었다. 설명을 하자면 모든 학생들은 입학을 할 때 나이의 적고 많음을 떠나서 1학년에 배치된다. 성적에 따라 반이 갈라지는 것은 2학년 때부터이고 시험을 통해 분류된다. 월반을 못하거나 시험 성적이 나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반으로 배정되었을 때에는 언제든지 재시험을 치르고 월반을 하거나 반을 바꿀 수 있었다. 또한 평민과 귀족을 나누어 교육을 시켰는데, 건물 자체도 달랐고 가르치는 학문도 많이 달 랐다. 먼저 귀족들의 자제들을 위한 아카데미에서는 검술과 교양, 기타 귀족으로서 반드시 익혀야할 학문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평민들의 경우에는 검술뿐 아니라 마법과 잡다한 학 문을 가르쳐 후에 관료가 되거나, 상인이 되거나, 혹은 어느 쪽으로든 생업을 가질 수 있도 록 지식을 길러주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몬트리얼 아카데미에는 학생이 원하는 수업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제 도가 있었다. 때문에 모든 학생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학문만을 이수하며 일정 학점을 따고, 성적이 되면 졸업을 할 수 있었는데 수업과목 역시 귀족과 평민의 자제가 배우는 과목이 상 이하게 달랐다. 한 가지 예로, 남학생들은 주로 기사반을 준비하고 여학생들은 집안을 다스리는 법에 중점을 둔 과목을 선호했다. 물론 여학생들 중에도 개인차이가 있었으니 순종적이고 현실에 안주하려 는 학생뿐 아니라 무엇인가 이루려는 야심에 찬 학생들이 있었고, 남자들 못지않게 '검술' '제왕학' '경영학' '역사' '지리'등을 파고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귀족 출신의 학생들이 배우는 과목에 마법이 없는 이유는 남자들의 경우 그런 어려운 학문을 배워 가문을 일으키기 보다는 기사가 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는 남작가 이상의 자제들은 절대로 마법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마법사 자체가 귀하고 너무나 어려운 학문이기에 주는 것에만 만족하며 살아온 자제들은 어려운 길로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종종 마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평민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기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것이 몬트리얼의 원칙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고 일정 수준을 쌓아야만 졸업을 할 수 있는 학원. 졸업생은 그리 많지 않고, 어느 정도의 수준을 넘기기만 하면 수료증을 발급하여 학생을 내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사람들은 졸업을 했건 수료를 했건 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에게 는 존경심을 표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입학은 자유로우나 졸업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몬트리얼의 졸업장을 가 진 학생들은 어딜 가도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수료를 한 경우에도 지닌 학문의 수준은 다른 여타 아카데미에서 배출한 학생들을 웃돌았기에 나름대로의 인정은 받으나 스스로를 부끄러 워 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뜬소문으로는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퇴.를 하는 것이 더욱 쉽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몬트리얼 아카데미 출신'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 지는 신과 본인만이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런 제도에서 순식간에 2학년을 월반하고 거기다 A반에 들어간 소녀가 얼마나 뛰어 난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7학년 A반 소속인 카민의 경우도 그러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한다'라고 말을 하는 크리스틴을 잠시 주시하던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험은 칠건가?" 함께 입학했으되 이제는 대선배가 되어버린 이름모를 소녀를 보며 크리스틴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이 많은데,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목표가 있고, 그것을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왔으니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능력이 모자라니 꿈에도 못 꿀 일이지요." "...분수는 아니 다행이군."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크리스틴의 푸른 눈에 번뜩임이 지나간 것을 보지 못한 소녀는 예의 당당한 걸음으로 등을 휙 돌리고는 사라져버렸다. "분수라..." 다시 1층으로 내려와 낯익은 정문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 보며 한숨을 지었다. "카사" 화르륵 소리를 내며 작은 불씨를 감싸고 나타난 카사를 어깨 위에 앉힌 크리스틴이 작게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야, 그렇지?" 위로를 하려는 듯 쪼로롱 울며 볼을 비비는 카사를 쓰다듬어준 크리스틴이 문득 저 멀리 보이는 우거진 숲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사티나를 보고 싶어...안내해 주겠어, 카사?" 크리스틴의 우울한 목소리에 두어번 날개짓을 하고 날아오른 카사는 하늘 높이 올라 사티나 호수 위를 선회하며 주인이 찾아올 수 있도록 길안내를 해주었다. 시리도록 푸른빛을 머금으며 잔잔한 파장을 만들어내는 사티나를 내려다보던 크리스틴은 눈을 꼭 감고 품에 안긴 카사의 등에 고개를 묻었다. "힘들어..." 단지 몇 나르, 네 사람을 만났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크리스틴으로는 그보다 더 힘든 일은 없었다. 집에서야 어떤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넘어가주었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철저한 크리스틴으로... 철저한 악녀에서 평범한, 절대로 튀지 않는 인물이 되기 위해 서는 넘어야할 벽이 너무나 많았다. 더구나 사람을 속이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던 세실이었기에,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친 한숨을 내쉬며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문든 한 손을 내밀어 호수 쪽으로 뻗었다. "부르면...나올까, 카사?" "쪼로롱"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를 퍼덕이는 카사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 크리스틴은 호수를 응시했다. "생명의 근원이여,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의 중심이 되는 존재의 모습을 만나고자 하는 이가 있습니다. 허락해주시겠어요, 운디네(Undine)." 잔잔한 호수위에 물결이 일었다. 둥근 동심원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물줄이가 뽀록 솟아나더니 예의 호수만큼이나 푸른색의 머리 를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나타났다. 파르스름한 얼굴에 친근한 미소를 띠고 크리스틴을 바라보 는 여인의 시선은 마치 어미가 자식을 보고 있는 듯 따뜻하기만 했다. 『계약을 원하십니까?』 "아...네."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계약을 원하는 아가씨?』 쪼로로롱~ 아주 능청스럽게 크리스틴을 모르는척하며 우아하게 계약을 수행하려는 존재를 비웃으려는 듯 카사가 날개짓을 하며 시끄럽게 울어댔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네, 저는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합니다." 『크리스틴 폰 배너,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Elqueneus)와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아, 네! 앞으로..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령에게도 여성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크리스틴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엘퀴네스를 보며 '왜요?'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대한 반응인지, 파랑이 이는 잔물결을 뒤로하고 쭉 앞으로 몸을 내민 엘퀴네스는 차갑지만 따뜻하고, 시원하나 온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크리스틴을 감싸안았다. 순식간에 심신의 피로가 풀리는 개운함에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녀는 자신의 이마에 살짝 키스를 하며 손가락으로 미간을 쓸어주는 정령왕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하지만 너무 어려운 길로 가려고는 하지 마세요. 조금 주위를 돌아보면 기꺼이 손을 내밀어줄 존재들이 많이 있답니다. 혼자 아파하고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힘들어하던 크리스틴에게 너무나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충고를 해준 엘퀴네스는 필요하면 언제 든지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길안내에는 실피드만한 적격자가 없답니다, 크리스틴.』 ***************************************************************************************** 앞으로 종종 '천족'에 얽힌 신화가 나올겁니다. 어라, 신이 아니었나? 하시는 분이 계실것 같아서 몇 말씀 덧붙이자면, 크리스틴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유일신을 모십니다. 그 아래로 신의 날개로 불리는 천족들이 현대에 전해지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대신합니다. (그 외의 나머지 것은 차츰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그리고 우선 아카데미에 관해 읽으실때에는 정령사와 마법사의 존재가 극히 미비함을 떠올려주세요 나머지는 차츰 알아보기로 하지요. ^^ 크리스틴이 일으킨 사건은 차후에 밝혀집니다. > < 에, 또...은자림에 연재를 요청해주신 Zephyrus님께 이자리를 빌어 사과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죄송하구요, 저는 조아라에서만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먼길이지만, 가능하면 이곳에서 글을 읽어주세요. 나중에...제가 좀더 능력이 되고, 인정을 받으면 직접 원고를 들고 찾아갈테니...^^ 에헤~그리고, 설문 조사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회가 마감이니... 바뀐 제목은 [아름다운 꽃(바뀐 제목)]로 올라갈 겁니다. 아직 공지 못 보신 분들도 계시고, 지금 제목에 익숙하신 분들이 많으니.. 마지막으로, 제 글을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구요, 추천글을 읽고 찾아주신 분들께도 허리 숙여 감사인사 드리겠습니다.(_ _) 미흡한 글이나, 많은 사랑 부탁드리고, 따뜻한 관심 가져주시길 감히 바랍니다. 며칠 땡땡이를 쳤으니, 이제 열심히 해야겠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다음 편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 수정 후 추신. 나탁님과 별빛 바다님 감사드립니다. (_ _) 제가 고치고도 남아있는 곳이 또 있었군요...ㅠㅠ 해서...40회는 내일 올릴께요. 다시 확인하고, 수정도 좀 하고..손도 좀 보고...내일 오전에 올리도록 할께요. (혹시나 오셨다가 다시 가실분들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나탁님께 '오, 오타가 많이 없어졌군!'이란 말씀을 들은것이 엇그제인데..흑흑...) 그럼,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뵐께요. (오타 지적 환영. 태클환영. ㅠ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인재(人才)들의 양성소? 4. "돌아왔다고? 그 아이가...돌아왔다고 했느냐?" 어두컴컴한 실내. 촛불 하나만이 빛을 발하는 넓은 방안은 그야 말로 검은색 일색이었다. 과거에는 분명 화려한 장식이 방을 가득 채웠을 것이 분명하나 지금은 검은 천이 모든 가 구와 장식물 위를 덮고 있어 방안을 온통 암흑천지로 만들고 있었다. 그 중 커다란 침대의 네 기둥위에서 늘어져 있는 검은 망사는 그 안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인의 윤곽을 희미하 게나마 비춰주고 있었다. 경악에 가득 차 있으나, 가늘고 힘이 없는 주인의 목소리에 허리 를 숙이고 있던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분명 모이라 아가씨께서 만나셨다고, 옆방을 배정받았다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았어. 나가보렴." "네, 아가씨." 머리를 조아리고 황급히 숨 막히는 방을 빠져나온 하녀는 문 밖에 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누가 볼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졌다. 그리고 혼자 남아 암흑과 같은 방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던 여인은 천천히 백옥 같은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쓰다듬었다. "크리스틴...폰 배너..." 미묘한 흐느낌 같은,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음날 아침 어슴프레 밝아오는 시각에 눈을 뜬 크리스틴은 운디네의 도움으로 목욕재개를 하고 뒤늦게 나타난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아가씨, 머리는..." "됐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편해. 고마워요." 아침햇살만큼이나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고 책을 챙겨 방을 나온 크리스틴은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아카데미 안내서>라는 작은 책자가 들려있었다. 물론 엘퀴네스의 조언에 따라 실피드에게 부탁을 해도 되겠지만 왠지 길안내를 받는데 정령왕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책을 보고도 못 찾는다면 그때는 실프를 불러 부탁하면 될 일. 해서 크리스틴은 작은 책에 나와 있는 지도를 보며 미로와 같은 기숙사를 빠져나와 꽤 멀리 떨어진 건물로 향했다. 식당 내부는 화려하다기 보다는 크고 깔끔했다. 게다가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정복 을 입고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는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띠였다. 결국 해냈다는 마음에 서둘러 식판을 들고 줄을 섰던 크리스틴은 시끌벅적한 학생들을 돌아보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똑같은...정복(正服)...?' 식당에 모여 있는 학생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손목과 칼라에 남청색 테두리가 수놓아진 흰색 정복을, 여학생들은 흰색 칼라가 달린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언제부터 교복을 입었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낭패한 기색으로 잠시 서 있던 크리스틴은 뒤에 줄을 선 한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저, 교복은 언제부터 입었지요?" "........" 크리스틴의 질문에 별 희한한 아이 다 본다는 듯 그녀를 아래위로 살펴보던 학생이 눈썹을 모았다. "입학하면 교복이 지급되는데, 몰랐어요?" "네?" "그런데..."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흰색 드레스였지만, 분명 고급천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선 여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귀족이예요?" ".......그게 왜?" "아하~잘못 왔네요, 여긴 평민들이 쓰는 식당이거든요." "하지만 여기는 분명.." 비교적 친절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지도에 '식당'표시가 되어 있는 곳을 가르쳐 보였다. 목을 빼고 함께 지도를 보던 학생은 싱긋 웃으며 크리스틴의 손가락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는 지도의 반을 손으로 덮었다. "이쪽 흰색 건물들은 귀족들이 쓰고, 회색은 평민들 구역이예요. 제가 손으로 가린 부분은 우 리가 쓰는 곳이죠." "아...고마워요." "뭘요, 배식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시간 맞춰서 가려면 서둘러야 할껄요." 끝까지 친절함을 보이는 여학생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지도를 노려보던 크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소위 귀족들을 위해 지어진 식당과 완전히 반대방향이었다. 잠시 시간을 따져보던 크리스틴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었다. "저기..여기서 밥을 먹고 가려면 돈을 내야하나요?" "여기서요?" "네." "뭐 돈은 안내도 되지만...입에 안 맞을텐데..." "너무 멀어서...제시간에 맞춰 수업에 못 들어갈 것 같거든요." 의외로 예의가 바른 귀족 아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학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마음대로 하세요." 여학생이 턱을 위로 살짝 치켜세우더니 앞쪽을 가리켰다. 앞에 줄을 섰던 학생들은 벌써 자리를 찾아 앉았고 여러 가지 음식들이 놓여진 곳에 서 있는 하녀들이 주걱을 들고 크리스틴을 기다리 고 있었다. 아침부터 일이 많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 조금씩 음식을 받은 크리스틴은 배식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식탁에 앉았다. "어이, 저거 귀족아가씨 아니신가?" "오호" 스프를 떠먹으려던 크리스틴은 앞에서 들려오는 걸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열대여섯 되었을까, 조금은 어려보이는 남학생 서넛이 숟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키득 거리고 있었다. "별 일 일쎄, 귀족이 평민식당엘 다 오고." "귀족들도 미아(迷兒)가 되나 보지." "오늘은 해가 남쪽에서 떴나보네. 큭큭큭" 크리스틴과 여학생의 대화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크리스틴을 힐끔거리며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밥을 먹던 학생들은 하나 둘 숟가락을 놓고 숨을 죽였다. 식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식당 안에서 남학생 들의 키득거림만 남았지만 그들은 결코 입을 닫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같은 아카데미에 다닌다 하더라도 귀족과 평민 간에는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크리스틴이 날뛰면 아이들의 목은 그 자리에서 날아갈 수도 있는 일. 일촉즉발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크리스틴은 천천히 빵을 스프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태연한 행동이 촉발제가 되었는지 남학생들의 시시껄렁한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식사 를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크리스틴을 비웃는 소리를 제외하면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일어난 크리스틴은 다른 아이들처럼 잔반을 모아두는 곳으로 가서 식기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아직도 그녀를 보며 키득거리는 아이들을 직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식당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제껏 웃고 떠들던 아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옆도 한번 힐끗거리지 않고 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음을 옮긴 크리스틴은 세 명의 남학생이 앉아있는 식탁 앞에 섰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에 정적이 깨어지고 짐짓 서로 눈치를 보던 남학생들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목이라도 쳐보겠다 이거야, 귀족 아가씨?" 아이들의 키는 의외로 나이보다 조금 컸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아진 남학생 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불청객임을 알기에 참은 것이다. 너희들의 그 태도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야. 만약 이 곳이 아카데미가 아니고, 너희들이 학생이 아니었다면 나는 참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노리고 한 짓일 수도, 아니면 내가 여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며 너희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아카데미로 보내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 을 한거다. 어리석은 일. 목숨을 걸고 장난을 걸만큼 재미가 있었나? 너희들 목숨이 귀족하나 희롱해서 죽어도 될 만큼 가치가 없느냐? 현명하게 살아야 해. 이곳에 왔으면 무엇인가 배웠을 터인데 어리석기만 하구나." 크리스틴의 목소리는 식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단순히 화를 내고 펄쩍 뛰는 것이 아닌, 뭔가를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아이들은 일제히 먹는 것을 멈추고 크리스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께 효도를 하려면 우선 살아야겠지? 살아 있어야, 뭔가를 할 수 있는 거다. 앞으로는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숙이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좋겠구나. 귀족들의 망종은 손가락질 받으면 그만이나 평민들의 망종은 죽음을 부른다. 명심하도록 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는 아이들을 일견한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경악에 찬 눈빛들 을 무시하고 유유자적하게 식당을 나섰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시리도록 높고 푸른 하늘위에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엄마...' 레니의 활짝 웃는 미소를 담은 하얀 솜구름을 쳐다보던 크리스틴은 등 뒤에서 들리는 기침소리 에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그녀에게 따끔한 야단을 맞았던 아이들이 서 있었다. "아...저, 죄송합니다." 평민은 귀족에게 절대로 평대를 쓰지 못하며, 귀족은 평민에게 예를 취하거나 말을 높이는 경우 가 거의 없었다.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학생들을 본 크리스틴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남학생들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겠지. 기분 좋게 시작해야 할 아침시간을 망쳐서 미안하구나." 고귀한 신분임을 그대로 내보이는 말투에 씨익 웃어 보인 아이들은 머리를 긁적였다.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장난기가 다분한 대답에 그렇다면 다행이라 대답해준 크리스틴은 작은 서책을 펼쳐들 고 본관으로 향했다. 그 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존경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이, 나 오늘 정말 멋진 귀족을 본 것 같아." "음." "예쁘기까지..." "그래봤자 귀족인걸..." "에휴휴..." '너희들 목숨이 귀족하나 희롱해서 죽어도 될 만큼 가치가 없느냐?'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받지만 기회를 노리려면 살아야 한다는 충고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단순히 부러워서, 괜히 기가 죽기 싫어 이죽거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죽음의 사신 앞에서 짱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비웃었던 귀족은 망종을 용서해주었을 뿐 아니라 가슴 깊이 새겨둘 가치가 있는 충고까지 해주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리고 귀족 중에도 존경하고 따를만한 사람이 있다는 새로운 인식도 생겼다. 이름도 모를 귀족 아가씨가 올려다본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십년감수했다, 이놈들아!' 라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친구들에게 혀를 내밀어주었다. 어쩌다 괜찮은 귀족을 만나 목숨 구한지 나 알라고 서로 웃고 떠들어대던 아이들 뒤로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학생 식당 한 구석에서 말없이 식사를 하던 남자였다. 텁수룩한 머리에 수염을 기른 남자는 시끄 럽게 장난을 쳐대며 사라져가는 아이들을 보다가 크리스틴이 걸어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꽤...괜찮았어." 왠지 모를 흐뭇함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충고를 하던 여학생을 떠올 려보던 사내는 곧장 아이들이 수업을 받는 건물로 사라져갔다. "에, 또...여기가 음 교무실." 언젠가 이 아카데미를 설계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한대 때려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크리스틴 은 장장 20미르를 헤맨 끝에 찾아낸 교무실을 바라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 크리스틴은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보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눈에 익은 사람 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 크리스틴 양?" 3학년을 맡고 있는 베르디 곤잘레스는 아침 일찍 자신을 찾은 학생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나요?" 그녀가 크리스틴을 맡은 2년 동안 학년 주임을 찾아온 크리스틴의 입에서는 늘 불평불만이 끊이 지 않았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분명 무슨 불만이 있어 찾아온 거라 지래짐작했던 베르디는 크리 스틴이 내민 수업시간표를 보며 인상을 썼다. "죄송하지만 과목을 조금 바꾸었으면 합니다." "...이건?" 크리스틴이 내민 시간표 위에 적혀있는 메모를 보며 고민을 하던 베르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 정을 지었다. "가능하면 이 과목들을 수강하고 싶어요. 안될까요?" 크리스틴의 대답에 다시 메모가 된 부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베르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초학> <의학> <체술> <마법>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는 학문이었다. 한 분야만 파고들어 평생을 공부해도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말까하는 어려운 학문이 줄줄이 적혀있는 곳에서 시선을 땐 베르디가 크리스틴을 노려보 았다. "교양과목도 제대로 통과 못해 유급을 한 것도 모자라 장난을 하겠다는 건가요?" 학년 주임의 싸늘한 목소리에 잠시 머뭇거리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수업만 들어도 족하다고 생각해요, 선생님. 분명 올해에도 진급은 못하겠지만 꼭 배워보 고 싶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진급을 못 할거라 못을 박고 시작하는 학생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베르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교과서는 여기서 받아가고 담당 선생에게는 내가 이야기를 할 테니 수업에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교양과목도 제대로 이수를 못해 낙제를 하더니 이제는 발악을 하나보다... 라는 생각에 쉬이 허락을 해준 베르디는 각 과목 선생들에게 통보를 했다. 배너 백작이야 돈이 넘치는 사람이니 딸이 10년이든 20년이든 아카데미에 남고 싶다고 하면 얼마든지 학비를 대줄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다. 어떻게 3학년이 되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인 학생을 잠시 떠올려보던 베르디는 짐짓 고개를 흔들고는 신경을 꺼버렸다. '유급을 하든, 평생 3학년으로 지내든 제 팔자지...' 아침 일찍 서두른 덕에 무사히 볼일을 마친 크리스틴은 자신을 비웃는 주임선생을 뒤로 하고 책을 챙겨 평민들이 쓴다는 회색 건물로 향했다. 식당 건물을 지나쳐 강의실로 들어간 크리스틴 은 교실 안에 앉아있던 10여명의 학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산적 두목같이 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오전에 학생식당에 있었던 그 사람이 분명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있었는데 그 안에는 온갖 풀들이 소담하게 담겨있었다. 팔자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교탁 앞에 바구니를 내려 놓은 남자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쭉 둘러보고는 교실 구석에 홀로 앉아있는 크리스틴 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런 귀족 아가씨가 아닌가? 여기는 웬일인가?" 빈정거리는 기색이 아닌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목소리였다. 선생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틴은 무릎을 살짝 굽혀 반절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약초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는 바가 없고 단지 호기심에 왔을 뿐이니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이 호기심에 왔으니 신경 쓰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자 산적두목은 목젖을 드러내며 껄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신경 쓰지 않으마. 반말해도 괜찮지?" "네, 선생님." "그래, 그럼 거기 계속 앉아있어라. 수업을 시작하마. 너희들 모두 나와서 이 풀들을 종류별로 구분해봐라." 이전 수업의 계속이었는지, 선생의 말에 일제히 앞으로 나간 아이들은 저마다 약초를 구분해 책상 위에 놓았다. "흠..." 아이들이 구분해놓은 것들을 확인한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름과 효능, 사용법, 독성 기타 등등 아는 데로 적어라. 다 적으면 가도 좋아."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한 시간은 약초에 대해 설명을 하고 다음 시간을 약초를 직접 가지고 와서 분류하고 시험을 친다. 그리고 또다시 이론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익숙해진 수업 방식이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태도 로 전날 공부한 것들을 종이에 적어 제출을 하고 교실을 나갔다. 남은 시간 동안에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너도 볼테냐?" 아이들이 내놓은 답안지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있던 선생이 넌지시 말을 걸자 크리스틴은 두꺼운 책을 들고 교탁으로 나갔다. "이 약초들...조금씩 가져가면 안 될까요?" "왜?" "그림보다는 실물이 나으니까요." "뭐, 그러든지..." 절대로 무관심한 태도로 일임하는 선생을 보며 생글 웃어 보인 크리스틴은 책장마다 해당되는 약초를 조금씩 끼워 넣기 시작했다. 약초를 들어 냄새를 맡고 조금씩 먹어보거나, 손으로 비벼 가며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맞추어보는 크리스틴을 곁눈질하던 선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냐?" "크리스틴 폰 배너입니다." "나는 마커스 투르벨이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마커스 선생님." 크리스틴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고개를 든 마커스는 생글 생글 웃고 있는 학생을 보며 윙크를 날렸다. "그럼 더없는 영광이겠지." "네." 의미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은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마커스는 채점을 크리스틴은 약초 공부를. 어려서부터 익혀온 내용들과 책에 있는 것들을 비교해보며 정리를 해나가던 크리스틴은 종종 마커스에게 질문을 던졌고, 질문을 받은 마커스는 고개도 들지 않고 짧게 핵심만 찔러 대답을 해주었다. 참으로 기이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나 두 사람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듯 보였다. '한스 할아버지...' 오래전 어린 세실에게 약초를 가르쳐주던 한스 영감도 그러했다. 언제나 약초를 먼저 던져주고 세실이 그걸 들고 책을 뒤지며 공부를 하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대답을 해주는 방식. 그것은 약초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공통되는 태도였다. 스스로 알아 내고, 스승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1나르 동안 열심히 나름대로 정리를 한 크리스틴은 여전히 시험지에 코를 박고 있는 마커스에게 인사를 하고 다음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뛰어갔다. "좀...쓸만한데.." 예의 작은 서책을 들여다보며 바쁜 걸음을 놀리는 크리스틴의 등을 바라보던 마커스는 아침에 부여했던 점수에 +α를 주었다. ***************************************************************************************** 에고 에고 어깨가 아프군요. 아침에 올리고 자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기다렸습니다. 어째 이넘의 오타는 보고 보고 또 봐도 보이는건지...ㅠㅠ Filen님이 친히 알려주신 싸이트는 '공사중'이라고 나오고 한글에서도 걸리지 않는 오타는 참으로 많고...괴롭사와요. 흑흑 아, 그리고 제목이 결정되었군요.[10표 이상 받으신 분들입니다] 1위 39표 코코님 프레시어스Precious 2위 17표 Filen님 이카루스의 꽃 3위 15표 비행돼지님 이카루스의 눈물 4위 12표 alf미르님 여 로 -------------------------------------------- 그 외에도 면점사님, 별빛바다님, 수지니님, 뽀실님, 그리고 제가 치크대가리라 투표에 올리는 걸 까먹었던 다랑어님(미들소드였지요, 정말 죄송합니다.(_ _)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사드리구요, 설문 조사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아름다운 꽃' '프레시어스' 'precious'어떤 걸로 쳐도 나옵니다. > < (멋지당~!) 에, 근데 표지 어떤가요? 생전 처음으로 포토샵이란 것으로 그림을 그려봤습니다. 제 동생한테 부탁할까 하다가 욕먹을까봐 손으로 끄적끄적...장난아니던데요. 쥔공 세실이지요. 어떤가요? 제 눈에는 쩜 예뻐보이는뎅...ㅠ ㅠ (자화자찬...퍼벅!) 사설은 그만 두지요. 좀 자고 일어나서 다음편 올리겠습니다. 리플 환영, 태클 감사. ㅠㅠ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인재(人才)들의 양성소? 5. 의학 공부를 하는 시간. 전 시간과 달리 크리스틴은 완전한 외면을 받았다.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 모두 그녀를 보길 돌 같이 봐주었다. 본시 의사란 직업은 천한 직종으로 신관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의술을 펼치지 못했다. 신관 들의 기도 한 번이면 신께서 치유를 허락하신 모든 병이 고쳐지는데 누가 의사를 찾겠는가? 때문에 의사들은 주로 신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평민들 이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술을 펼 칠 수밖에 없었다. 돈이 많거나, 귀족들의 경우에는 여타한 일이 없이는 주로 신관들에게 치료 를 받았고,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 없는 한 의사를 부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해서 의사들은 보통 자신들의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특히 기득권층에 대해서는 심한 반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귀족이 분명한 크리 스틴의 등장은 절대로 환영받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네는 무슨 생각으로 이 하찮은 수업에 들어온 것인가?"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나간 후에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선생이 크리스틴에게 처음 으로 말을 붙였다.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귀천(貴賤)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관은 신에게 부여받은 능력으 로 사람을 고칩니다. 하지만 그들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어요. 전 신성력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 "귀족이?" "귀족도 사람이고, 사람의 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일이지요. 제가 평생 귀족으로 살 거란 보장은 없지 않나요?" 부모에 대한 불경의 말이었다. 백작가의 여식이 자신의 앞날을 예견할 수 없다는 말을 하다니, 집안이 폐가망신할지도 모른다 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평민과 눈이 맞아 도망이라도 갈 것이란 말인가? 어찌 되었든 그런 망발(妄發)을 서슴없이 내뱉는 학생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귀천이 없다라...자네 이름이 뭔가?"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는 선생에게 이름을 밝힌 크리스틴은 곧 얼굴을 붉혔다. "2년째 유급이라지?" "....네." "내 수업엔 몇 년이나 들어올 생각인가?" "...만족할 때까지요." "........." 보통은 1년 정도 배우다가 확실히 진로를 정하면 졸업때까지 의학을 배우는 것이 관례였다. 헌데 의사가 될 가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학생이 만족할 때까지 수업을 듣겠다니... 필요하면 계속 유급이라도 하겠다는 말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크리스틴의 담담한 말에 참으로 맹랑하다 생각을 하던 선생은 곧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 이름은 로한 블레이즈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로한 선생님." 학생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던 로한은 책장에 뭔가를 긁적이는 크리스틴을 보며 고개를 내밀 었다. "뭘 하는 겐가?" "선생님 성함을 잊을까 적어두는 겁니다." "..........." 찬바람이 쌩쌩 휘몰아치는 교실 가운데 서 있던 로한은 다음 수업을 위해 교실을 빠져나가는 크리스틴을 보며 혀를 찼다. "꽤 오래 보겠구만...쯧쯧" 좋다는 건지 한심하다는 건지 의미가 불분명한 말이었다. "저것이 귀족이라고?" "그렇다네." "...대단하군." 크리스틴이 세 번째 찾은 교실은 마법강의가 있는 곳. 꽤 많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개중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몇몇 있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다닥 다닥 붙어있으니 구별을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는 일. 크리스틴은 교실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 는 듯 없는 듯 수업을 듣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다른 수업과는 달리 의외로 여학생들이 몇 있었고 그녀들은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리따운 소녀를 힐끗거 리느라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회색 로브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잠시 학생들을 둘러보던 마법사는 크리스틴을 주시했다. "오늘 새로운 학생이 들어온 것은 알 것이다. 크리스틴 폰 배너라지? 일어나서 인사를 하게." 냉랭한 말투에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틴은 자신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쳐다보는 귀족 자제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신분은 불필요하다. 모든 것은 자신이 이룬 경지에 의해 인정받을 뿐이 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모두 이미 1써클에 오른 아이들이니, 네 선배가 될 것이다. 허리를 숙여 인사해라." 싫으면 나가라는 말이었다. 말투만큼이나 반감이 서린 마법사의 눈을 주시하던 크리스틴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선.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 였다.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헉!"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경악하던 학생들은 그들만큼이나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마법사를 보았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저 때문에 수업에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만..." 봄바람 같은 기운을 풍기며 살짝 미소를 짓는 크리스틴을 보며 남학생들은 입을 쩍 벌렸고 여학 생들은 얼굴을 붉혔다.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 당당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간 크리스틴의 분위기에 휩쓸렸던 마법사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크로네다. 평민이라 성은 없네." 레니를 흑마법사에게 보내준 마법사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레니가 마법사 길드를 찾아갔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고 크로네 역시 그 여인 의 딸이 크리스틴이란 영애의 몸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이래서 세상은 넓고도 좁다던가? 과거 레니와 인연이 닿았던 크로네는 엉켜진 인연의 그물에 엮여 그토록 동정했던 여인의 씨앗 을 만나게 되었다. "자네는 마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크로네의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크리스틴은 자신이 가장 궁금해 하던 것을 물어 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음을 깨달았다. "마법이란 의지구현이라 들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시적인 형태로 이루어내는 것. 그 것이 마법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어째서 자신의 의지를 발현하는데 있어서 수식 따위가 필요한가요? 마나는...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아니 생명체란 것은 어떤 것이든 마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숨을 쉬 는 공기에, 돌에도, 자연에도 마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법사란 존재가 이토록 귀하고 마 나를 느끼는 이들이 점차 줄어드는 것입니까?" 쉴새없이 이어지는 크리스틴의 말에 아이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크리스틴이 처음 말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오호~!'하던 표정을 지었던 크로네는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경악에 찬 얼굴로 변해갔다. 종국에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크로네는 자신의 입만 바라보는 학생을 보며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크리스틴이 던진 질문에는 '마법'이란 학문에 대한 요지가 담겨있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풀고자 하는 비밀. 수세기에 걸쳐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밝히고자 노력했던 문제들. 그것이 한 학생의 몇 마디 안 되는 질문 속에 모두 담겨있었다. 8써클에 이른 대마법사 샌들우드 조차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던 질문. 잠시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던 크로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빛내며 답을 갈구하는 크리스틴을 보았다. "자네의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을 걸세. 이제껏 수많은 마법 사들이 자네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를 해왔지. 지금도 그러하네. 그래서...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아주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어. 그래도 듣고 싶은가?" 크리스틴은 약간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란 것은 실질적으로 마나의 변형이야. 다시 말하면 내 것을 이용하든 자연을 이용하든 그것이 담고 있는 마나를 이용해서 자연의 이목을 속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네. 예를 들어 '라이트'라는 마법을 생각해보게. '빛'이라는 형태를 이루기 위해 마법사들은 어떤 방법을 쓸까? 없는 걸을 만들어낼 수는 없어. 그래서 약간의 속임수를 쓰는 거야. 대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입자들을 충돌시켜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나를 주입해서 입자들이 계속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해. 이때 필요한 것이 수식이야. 마나란 것은 항상 움직이지만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지.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경제적으로 존재하는 마 나를 인위적으로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 '수식'이야.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듯이, 마나를 뒤틀고 흔들어주는 것으로 마법을 실현시키게 된 거야. 계산을 하는 거지. 마나를 어느 정도, 어떻게 뒤틀면 어떠한 마법이 실현되는지 연구를 해온 거지. 이때 써클이란 개념이 생겨나게 되는 거야. 가장 단순한 단계. 처음으로 마나를 유동시켜 마법실현을 하게 될 때는 아주 작은 범위에 일정한 목표가 있어야 가능한데 이 단계를 1써클로 묶어 둔거야. 그 다 음은 조금 광범위하게 목표를 지정한 단계. 3써클부터는 마법을 실현시킬 수 있는 범위가 무한 정으로 넓어지게 되지." 단숨에 말을 이어가던 크로네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예를 들어 '워프'라는 마법은 좌표만 있으면 자신이 가보지 않은 곳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데, 자연의 마나를 속이는 거지. 내가 여기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다고 속여 몸을 이동시키 는 방법이야. 4써클에나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이것도 거리에 한계가 있어. 거리에 대해 극 복한 것이 8써클에서 가능한 '텔레포트'. 지금은 8써클 마법사가 사라져 직접 실현하는 마 법사는 없지만 마법진을 이용해 보다 적은 마나로 '텔레포트'를 쓰기도 하지." 이 대목에서 문득 시도 때도 없이 '텔레포트'를 시전하는 샌들우드를 떠올리며 실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스승이 왜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지 마라! 노년에는 편안하게 살고 싶다'며 노래 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크로네가 '8써클 마법사는 사라졌다'라고 말을 했으니, 만약 그러한 존재가 나타난다면 탐구 욕에 불타는 마법사들의 등살에 말라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왜 마법사가 희귀해졌냐는 질문에는...과거의 '마녀 사냥'을 떠올리는 것이 빠를 거야." 크로네의 씁쓸한 대답에 크리스틴은 한숨을 삼켰다. '마녀 사냥' 이것은 아주 오래전 모든 나라에서 일제히 행해졌던 '마법사 대학살'을 말한다. 수백 년 전 로레얼 국의 건국 초기에 나타났던 7써클의 마법사로 인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는 백마법사였으나 흑마법에도 달통한 사람이었다. 로레얼의 초대왕 벤자민 로이아나의 친우로 알려진 그는 그 당시 로레얼의 건국에 반기를 들었던 다른 세 나라를 향해 대단위 마법을 실현시 키며 무작위로 사람들을 학살했다. 덕분에 로레얼은 자신들의 피는 거의 흘리지 않고 나라를 세 울 수 있었으나, 타국 뿐 아니라 자국의 백성들의 신망(信望)까지 잃게 되었다. 그래서 마법사로 인해 수백, 수천의 목숨을 앗아간 일을 해명하기 위해 로레얼이 선택한 방법은 마법사의 희생. '7써클 마법사의 악랄한 행위는 마법 써클이 높아질수록 사악함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것은 로레얼의 건국을 가능하게 만든 대마법사에 대한 시기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 당시의 건국왕, 벤자민의 암묵적인 허락하에 전 국가에 사악한 마법사에 대한 '공식 사과문' 이 배포되었다. 친우에게 배신당한 마법사는 모든 인간들에게 '마나의 저주'가 있으리란 말만 남기고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마녀 사냥'이 시작되었다. 7써클 대마법사가 남긴 저주의 말. 그것이 마법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의 눈가리개가 되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이들은 '저주'를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닥치는데로 학살을 자행 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백년에 걸친 학살로 마법사들의 씨를 말린 후에야 비로소 대마법사가 말한 '마나의 저주'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마나의 저주는 마법의 소멸. 어둠을 밝혀주던 빛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부싯돌을 이용해 불을 켜야만 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사용하던 포션이 떨어진 후로는 큰 돈을 들여가며 의사나 신 관을 찾아야했다.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통신구를 이용하거나 텔레포트 마법진을 쓰는 대신 직 접 말을 달려 며칠을 고생하여 먼 거리를 이동하고 편지를 주고받아야 했다. 끝임 없이 계속되는 불편한 생활들. 생활 곳곳에 스며들었던 터라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마치 있는 듯 없고 없는 듯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는 공기처럼 사라진 마법은 사람들을 물통도 없이 사막에 떨어져 끊임없이 갈증을 호소하는 그러한 존재로 만들었다. 마나를 사랑하고, 이를 연구하는 이들이 사라진 후에는 그때까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던 모든 마법이 사라질 것임을, 그것이 바로 '저주'가 될 것임을 예견한 마법사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믿었던 친우에게 배신당한 그는 인간들의 이기심과 탐욕,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시기심과 두 려움을 이용해 그들 스스로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리려는 음모를 세운 것이었다. 그의 도박은 성공했고, 이를 깨달은 사람들은 선조들의 어리석음을 원망하며 뒤늦게 후회를 하 였지만 이미 마법이란 것은 몇몇 선택된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후였다. 반면에 마법사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 어리석기는커녕 범인보다 몇 배는 뛰어난 이들은 과 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어 사람들의 손에 칼을 쥐어주기 보다는 그들의 호기심을 위한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리고...처음을 잊었다. 마법이란 것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탄생된 것. 마법의 시작은 '환상'이라 전해진다. 축복받은 이가 자신이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최초로 '빛'을 만들어보였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축복이 되었고, 마법의 시 발점이 되었지. 태초의 시작을 잊은 마법사들은 마나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마녀 사냥' 으로 '마나의 저주'를 받았던 어리석은 선조들처럼 마법사들도 스스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이 그리 늦지 않은 시점에서 그것을 깨닫고 앞으로 나섰지만 이미 대마법 들은 사라지고, 비법은 묻혀버렸다. 그것이 다 각기 연구에만 몰두하다 초야에 묻힌 선조들 덕분이지만 그걸 탓할 수는 없는 일.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우리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크로네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던 마법 지망생들의 얼굴도 별반 다르 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사람. 크리스틴 만은 달랐다. '마법의 시작은 환.상. 자신의 축복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려고 시작된 것이 마법이다.' 그녀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주는 그 몇 마디 말이 크리스틴을 희열에 차게 만들었다. '내가 가진 능력은...환상이야.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언젠가는 필요한 능력일 터였다. 신은 이유 없이 재능을 부여하지 않는다. 생각만으로 마법이 구현되고 별다른 노력 없이 3대 정령왕과 카사와 계약을 했다. 항상 고민해 왔던 것. 어째서 그녀에게 그토록 큰 능력이 부여되었을까? 그것을 마법을 공부하면서 알아내고 싶었다. 마나에 대한 남다른 연구를 해왔던 학문이기에 뭔가 실마리가 될까 했던 것인데, 의외의 장소, 의외의 시간에서 앞으로 걸어갈 길을 찾았다. '더욱 노력하고, 더욱 강해져야 해. 의미가 있는 거야. 내게 주어진 능력은 의미가 있는 거야.' 자기만의 만족을 위해 실력을 갈고 닦은 마법은 서서히 죽어갔다 했다. 그러니 그녀가 가진 그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은 분명 타인을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스스로만을 위해서라면 그녀 가 가진 지식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지난 몇 년간 가져왔던 의문을 풀 실마리를 찾고,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함을 깨달은 크리스 틴은 반개한 눈으로 창문너머 눈부신 빛을 발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신의 뜻대로...나의 의지대로...'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 마법 수업이 끝나고 크리스틴은 가벼운 경장 차림으로 연무장을 찾았다. 꽃 한 송이 찾아볼 수 없는 넓은 연무장에는 떡대같은 남학생들이 웃통을 벗어재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약간 달라붙는 소재의 블라우스와 남자들이 입는 바지를 입고 나타난 크리스틴에 게 시선이 쏠렸다. "휘익~" 느닷없는 휘파람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크리스틴은 낯이 익은 초록색 머리를 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여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카민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크리스틴은 가벼운 레더아머 (leather armor;가죽으로 만든 갑옷)를 입고 자신을 째려보는 몇 안되는 여인들의 살기어린 시선을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그녀의 인사에 다가오려던 카민은 그들과 비슷한 경장 차림의 선생들이 다가오자 윙크를 날려주고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에 모여있던 학생들은 모두 네 갈레로 나뉘어져 각기 선생을 찾아갔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예외였다. 자신의 반이 어디인지, 선생님이 누구인지 몰라 머뭇거린던 그녀는 저 멀리서 손짓을 하는 회색 머리 선생에게 뛰어갔다. "기사가 되고 싶은건가?" 체술은 일반적으로 기사 지망생들이 듣는 수업이었다. '검술'이 아닌 '체술'은 기본적인 체력을 단련하고 잡다한 무기들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은근히 비꼬는 투가 역력한 체술 선생의 말에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며 크리스틴 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여기는 왜 온건가?" "체력을 길렀으면 합니다." "체력? 가만히 앉아서 주는 밥 먹고 수뜨기만 하면 될 텐데 웬 체력?" "큭큭큭큭" "키득키득" 연무장 곳곳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애초에 목청을 높여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말을 한 선생이 잘못되었다 할 수 있지만 크리스틴 은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있는 3학년 이상의 학생들이 자신에게 가진 반감을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생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돈 많고 시간이 남아돌아 형식상 아카데미에 다니는 골칫거리. 학년 주임을 비롯한 크리스틴을 가르쳤던 모든 선생들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 본시의 성격으로는 원래가 다른 사람 이목을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그 냥 넘어갔지만, 지금의 크리스틴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했기에 '분노'가 깔린 '놀림'을 그냥 받아들였다. 한편 분위기를 조장했던 선생은 도리어 질책이 섞인 시선을 받고 내심 뜨끔해하고 있었다. 학생 하나를 바보로 만들고 비웃음을 사게 만들었지만, 이곳에서 수업을 하는 아이들은 검을 잡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항상 바른길로 가고자 노력하고 약자를 지키는 것을 배운다. 남학생들의 반발이 담긴 시선을 외면하던 선생은 담담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놓고 망신을 당했으니 펄펄 뛰거나 지금쯤 거품을 물고 그녀를 비웃은 자 신이나 다른 여학생들을 노려보아야 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다. 선생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못 들었나? 이곳은 반반한 얼굴하나 믿고 날뛰며 사람이나 헤치는 인간이 올 곳이 아니다." "........!" 순간 연무장 전체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사람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와 단상에 서 있던 선생을 휘감은 거센 돌풍때문이었다. 분노를 담은 듯 느껴지는 돌풍. "으흣!" 온몸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버티려던 선생과, 놀란 눈으로 그 이상현상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크리스틴의 작은 입술이 달싹거린 것을 보지 못했다. '실피드 화내지 말아요, 당연한 일인걸요.' 소환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나타나 분노를 드러내는 실피드를 살짝 달랜 크리스틴은 그 사이 너덜너덜해진 옷과 까치집이 된 머리로 얼빠진 듯 서 있는 선생을 보며 웃음을 참기 위해 최 선을 다했다. 이것은 비단 그녀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현상이었다. "킥" 짧은 웃음소리에 귀를 벌겋게 붉히던 선생은 잠시 몸풀기를 하고 있으라는 말만 던지고 황급히 숙소로 돌아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크리스틴에 대한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선생은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처음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든 선생을 비난했던 남학생들도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과거 저질렀던 잘못, 아니 사실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라 확신하고 있는 사건을 몬트리얼의 상급생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읽은 크리스틴은 저 멀리서 힐끗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카민에게 약간 미소를 지어보인 후 나무 밑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준비운동을 하거나, 검이나 도를 잡고 휘두르기를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시작이 좋지 않아...' 학생들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크리스틴의 안색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 에헴~! 아직 저번편에 올린 글에 오타지적이 안나와서 므흣~또 한편 올립니다. > < 앙 코코님 천사좀 쉬게 해주시면 안되나요? 꿈에서까지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세실이 쫓아오면서 소리칩니다. "글이나 써라~~~안쓰면...매우 쳐랏!!" 이러니 제가 어찌 그 압박을 견디겠...콜록 아침에 올렸는데 의외로 읽으신 분들이 많아서 저녁에 올리지 않고 지금 올립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열심히 리플과 태클을...콜록(_ _) 코코님 다시 한 번 축하드리구요, 이벤트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불꾸불한 그림을 칭찬해주신 幻魔府主님 감사합니당~~~ (> <) 자, 그러면 여러분 오늘 하루 좋은 일 가득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오~~~~~~!!! *********************** 수정 후 추신 : 궁디님, 에 풀플레이트 아머더군요. 더구나 그것은...무거워서...거시기 수련할 때는 방해가 된다는 콜록(ㅜㅜ어쩐지 머릿속에서 단어가 툭 튀어나온다 했지...흑) 해서, 레더 아머로 바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얀첫눈님 유급과 진급이란 단어도 모르고 사는 유키를 용서해주세요. ㅠㅠ (언제 해봤어야 알지...퍼벅!)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과거는 악몽이 되어... 1. 잠시 후,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단정히 묵고 나타난 체술 선생은 더 이상 크리스틴을 무시하지 않았다. 볼을 뚱하니 부풀리고 있는 폼이 꼭 어디서 누구에게 뭔 소리를 듣고 온 사람 같았다. "체력을 기르고 싶다고? 수업 끝날 때까지 연무장을 돌도록. 쉬는 것은 용납 못한다. 못 따라 오면 자동 낙제이니, 다음시간부터 수업 들으러 올 필요 없어." 그늘진 곳에 멍하니 앉아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일갈을 한 체술 선생은 곧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가서 성심성의껏 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을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른 진 지한 모습이었다. 마치 골이 난 사내아이같이 구는 젊은 체술 선생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 크리스틴은 조금 전에 봐왔던 몸풀기 동작을 흉내 내고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체술 선생의 말이 성질을 건드렸다. 조금 빠른 걸음 정도로 시작한 달리기는 이내 보통 달리기 수준 정도로 빨라졌고 그 속도는 수 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크리스틴이 언제쯤 쓰러질지 궁금해 하며 힐끗거리던 학생 들과 선생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쌕쌕 거센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리를 멈추지 않는 가녀린 여학생을 지켜보며 경악을 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던 크리스틴은 귓가에 들리는 낯이 익은 투덜거림에 신경을 쓰느 라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만하지 그러냐. 땀 좀 봐라 비 온다, 비와. 안쓰러워 못 봐주겠네.』 『크리스틴, 힘들지 않나요? 이제 그만해도...』 『힘내라, 꼬마야. 땅 밟기가 수월하지? 저 시건방진 것들의 콧대를 뭉개줘라!』 실피드와 엘퀴네스, 노아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어졌다.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수분을 머금은 촉촉한 공기가 크리스틴의 열이 나는 몸을 조금씩 식 혀주었고, 가벼운 미풍이 땀을 말려주었다. 고운 흙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땅은 크리스틴의 발이 닿는 곳마다 부드럽게 출렁이며 평생 운동이라고는 구경도 못한 크리스틴의 다리가 충격을 덜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역시 소환자가 아닌 정령들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 당장 그만두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힘을 내게 만들어주는 존재들 덕분에 크리스틴은 끝까지 버틸 수가 있었다. "헉...헉...헉..." 종소리가 들리자 후들거리는 다리로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땅을 밟고 서 있던 크리스틴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녀의 독한 모습에 어이없어하던 체술 선생은 식은땀을 흘리며 열에 들뜬 신음성을 내는 학생을 들어올렸다. 입속으로 욕설을 궁시렁거리며 크리스틴을 치료실까지 안아 들고 간 그는 거칠지만 조심스러운 태도로 소녀의 여윈 몸을 침대위에 눕혔다. "젠장, 내 이름은 유노 이슈타르(Uno Ishtar)다. 선생 이름 정도는 알아둬." "헉...헉...자...알...부탁....합..니다, 유노...선..생님..." 파랗게 질린 입술로 끝까지 인사를 한 크리스틴은 눈앞에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정령들이 도와주었다고는 하나, 태어나서 난생 처음으로 운동을 한 그녀의 몸은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무의식을 찾으며 몸의 회복을 노렸다.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학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유노는 거친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 며 자신을 노려보는 신관에게 투덜거렸다. "뭡니까?" "...나가 보시지요, 치료를 해야 하니. 으드득" 이를 갈며 다가온 신관을 피해 치료실을 나오려던 유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일반적으로 큰 상처를 입지 않는 한 학생들의 치료는 치료사(의사)가 맡는다. 그런데 고작 달리기 를 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을 신관이 맡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니 크리스틴의 이마 를 쓸어내리며 축복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신관이 눈에 들어왔다. 치유의 기도가 아닌 축복의 기도. 은은하지만 눈부신 금빛 광체가 신관의 손에서 흘러나와 크리스틴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어?' 잠시 소녀의 반듯한 미간 사이에서 마름모꼴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듯한 착각에 눈을 비비던 유노는 자신의 등을 탁 치는 손길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 잘 아는 얼굴. 가능하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능구렁이 같은 얼굴이 빙글거리며 서 있었다. "이봐, 내 학생을 죽여 보낼 셈인가?" "무슨 용무입니까, 학장님. 그 무거운 엉덩이를 어기적거리며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오호~말빨이 많이 늘었군. 하지만 아직 멀었어. 헌데 우리의 골칫덩어리는 어찌 된 건가?" "뭐 달리기 좀 시켰더니..." 카를로스의 청록색 눈이 가늘어졌다. "수업 시간 내내 달리기를 시켰다지? 내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나?" 유노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급작스런 돌풍으로 낭패를 당해 처소로 가던 유노는 중간에 학장 에게 잡혀서 일장 연설을 들었어야 했다. "몬트리얼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 누구라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수업을 들을 권리가 있는거야! 비록 낙제를 시키더라도 배움의 욕구를 무시하는 태도는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 아니고..어쩌고 저쩌고..." 로 시작된 학장의 말은 그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빌어먹을, 그러면 저 약 먹은 병아리처럼 비실거리는 것을 데리고 뭘 하란 겁니까, 네?!" 버럭 성질을 내던 유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칼날 같은 시선에 얼른 문을 닫고 치료실을 나섰다. "이봐, 그렇게 성질 낼 일이 아니야. 저기 지금 기절한 학생은 장장 1년이나 병마와 싸워온 아 이라고. 그 후로는 풀썩 풀썩 잘도 기절한다고 하네. 해서 백작가에서 직접 초청한 신관이 우 리 치료실에 온 거고. 알겠나?"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두드리는 카를로스를 향해 인상을 쓰던 유노가 이를 악물 었다. "디아나는...압니까?" 유노의 말에 카를로스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아직은...뭐 수업도 다르고 학년도 다르니 마주칠 일은 없겠지, 소문만 안 듣는다면..." 학장의 대답에 머리를 긁적이던 유노는 복도 한 곳에 어깨를 기대고 그들을 지켜보는 아이를 보며 이를 갈았다. "어째 저 놈은 가면 갈수록 학장님을 닮아 가는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정말 재수 없다는 태도로 임하는 유노를 보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어깨를 들썩인 카를로스는 예의 한 멋짐하는 미소를 입술에 띠우고 뒤에 서있는 카민에게 손짓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안 닮으면 누굴 닮나?" 카민의 풀네임은 카민 라그나로크 파 샐런이다. 카를로스의 둘째 아들이며, 샐런 가문의 자제들 중 유일한 기사 지망생이다. 카를로스의 첫째와 셋째 아들은 그의 뒤를 이어 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외모로 봐서 그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카민이었다. 그것이 제일 불만인 유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물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 오는 제자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젠장, 내가 내 명에 못살지." "에이...선생님, 그러시면 제가 섭하죠." 제 아비와 판에 박은 듯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카민의 머리에 주먹을 날려준 유노는 자신을 잡고 늘어지며 차나 한잔하자는 학장을 쓰러트리고 처소로 돌아갔다. "그래. 문병 왔냐?" "뭐, 뚝심이 마음에 들어서..." 50미르 내내 단 1초도 쉬지 않고 연무장을 돌던 크리스틴의 모습을 떠올리던 카민은 카를로스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머리를 긁적였다. "가지고 노는 거야 상관없다만, 가까이 하지는 마라. 어떤 아이인지 아직 파악도 되지 않는다." 카를로스는 일단 과거의 사건은 덮어두고 차근차근 크리스틴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으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문제는 꼭 밝혀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카를로스의 말에 잠깐 멈칫하던 카민은 예의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제가 어린앱니까?" 대답도 듣기 싫다는 듯 서둘러 닫히는 문을 멍하니 보던 카를로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등을 돌렸다. "사춘긴가..." 이유 없는 반항기,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황금의 시절. 세상에서 제일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사춘기의 자식들을 둔 부모님일 것이다. "여어~괜찮냐?" 시트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크리스틴에게 다가간 카민은 옆의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방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신성력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열기를 물수건으로 닦아주던 신관은 카민을 슬쩍 노려보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가지고 놀려고 오셨나요?" 학장의 말을 들은 듯,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소녀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카민이 고개를 저 었다. "지천에 널리고 깔린 게 여자야. 너처럼 어린애는 관심 없으니 걱정마라."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카민의 말에 실소를 하던 크리스틴이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의 절반 이상이 여자라 하더라도 카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여자는 몇 되지 않겠지요." 뭔가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말인 듯 느껴졌다. 아련한 과거를 돌아보듯 조용히 말을 하는 크리스틴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민은 내심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소녀의 머리에 알밤을 먹여주었다. "에라이, 어디 이 오라버니를 놀리려는 것이냐? 이 세상 천지에 내가 마음먹어 안 넘어올 여자 는 없다!" 농담 반, 자신감 반으로 가슴을 탕탕 치던 카민은 그를 올려다보는 크리스틴의 눈에 깊은 슬픔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 것인지, 아니면 축 쳐진 기분을 풀어주려고 한 것인지 장장 1나르 동안이나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크리스틴을 웃게 만든 카민은 다음 체술 시간 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치료실을 나섰다. 카민은 문을 닫으며 왠지 가슴을 설레게 만들던 환한 미소를 떠올리느라 그의 등 뒤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크리스틴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안 넘어올 여자는 없겠지만,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한 적은 없으시지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크리스틴의 볼에 두 줄기 눈물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신관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몇 나르간 치료실에서 푹 쉬고 일어난 크리스틴은 멀쩡한 몸 으로 일어나 기숙사로 향했다. 체술 시간 다음에 교양 수업이 2개 있었지만, 첫 날부터 본의 아니게 불참을 하였으니, 방으로 돌아가 공부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잊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안내서!" 분명 체술 수업시간에 들고 갔었는데, 유노가 크리스틴만 달랑 들어 치료실로 옮긴 것이 문제 였다. 내심 그래도 설마 이틀이나 지냈는데, 기숙사 건물하나 못 찾겠냐는 심정으로 열심이 낯이 익은 건물을 찾아들어가 4층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도서관>이란 푯말을 보고 넋을 잃었다. "이럴 수가....!" 기숙사에는 도서관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그러면 여기는 어디인가? 잠시 안내서에 담겨있던 내용을 뒤적이던 크리스틴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원망했다. 「도서관 : 본관 4층」 치료실도 본관에 있었다. 그러니 크리스틴은 본관 정문으로 나와서 한 바퀴 빙 둘러 반대 방향에 나 있는 후문으로 다시 들어온 것이었다.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어이없음에 넋을 잃고 울부짖던 크리스틴은 '전화위복, 전화위복'이란 말을 중얼거리며 내친김에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4층 전체가 도서관으로 만들어진 듯, 분야별로 벽을 새우고 칸을 만들어두었지만 문은 달려있지 않았다. 높은 천장위에 닿을 듯 솟아있는 수백 개의 책장들이 줄줄이 서서 엄청난 분량의 책들 을 가슴에 품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양피지 냄새에 잠시 황홀경에 빠져 허우적대던 크리스틴은 체구가 작지만 제법 깐깐하게 생긴 여인이 다가오자 정신을 차렸다. "찾으시는 거라도...?" "아, 이곳에는 처음 왔는데 도서 목록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셀 수도 없는 책의 목록을 내놓으라는 학생을 보며 어이없어하던 사서는 혀를 차며 두꺼운 책을 10권 꺼내주었다. "새로 들어온 책은 아직 정리중이라 며칠 후에나 볼 수 있을 거예요. 분야별로 나누어놨으니 읽어보세요." "아, 저기 책은 빌려갈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저...배달도...콜록...해주나요?" "........." 잠시 살기어린 시선과 민망함에 위축된 시선 사이에 불똥이 튀었다. 역시 귀족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던 사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 장의 종이와 펜 을 내밀었다. "이름, 학년, 반, 기숙사 방 번호를 적고 빌려 가실 책 제목을 적으시면 배.달.해.드리지요. 기한은 일주일입니다." "아, 네. 고마워요." 드디어 방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크리스틴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사서의 넋을 빼놓고 는 '약학' '의학' '언어' '문학' '역사' 분야의 목록을 빠른 속도로 읽어가기 시작했 다. 어려서부터 비싼 책은 살 기회가 없었던 크리스틴은 마을 서점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틈틈이 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득한 속독법을 이제야 제대 로 발휘하며 휘리릭 책장을 넘기던 크리스틴은 사서가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제목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접하는 엄청난 양의 책을 보고 학구열에 불타오른 크리스틴은 무려 30권에 달하는 책을 대출했고, 족히 0.5피텐(15cm) 두께의 책들을 열댓 권씩 양팔에 안아든 하인들 2명을 대동 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책으로 집이라도 지으려나..." 권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책의 두께 때문에 크리스틴의 키만큼 쌓여있던 책을 떠올리던 사서 는 자신이 도서관을 맡은 후 최초로 만난 일회 최다 대출자의 이름을 확인하며 경악하고 말았다. "돌대가리 크리스!" 입학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도서관을 찾은 적이 없고, 2년이나 3학년에 머물렀던 유명인. 예쁜 얼굴이 무색하게 성질 더럽고, 깡 소리 난다고 아카데미에 소문이 난 학생이었다. 그런 학생이 입학 5년 만에 처음으로 도서관에 와서 그것도 책을 30권이나 빌려가다니... 천기가 개벽할 일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크리스틴 폰 배너'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읽어보던 사서는 종이가 찢어질세라 조심스럽게 갈무리하여 귀중한 서류를 보관하는 금고에 넣었다. "불쏘시개라도 하려고 가져갔나...혹시 모르니 청구할 때 써야지." 책이 파손되면 무조건 책값을 물어야 한다. 그러니 읽을 리도 없는 책을 엄청나게 빌려간 백작영애가 그것으로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나, 나중에 안 가져갔다고 발뺌하면(누구라도 믿어줄 터였다) 사서인 그녀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암, 절대로 그럴 일이 생기면 안 되지!" 한 권에 수백 골드는 족히 나가는 책들만 골라간 영애에게 이를 갈며 금고를 잠근 사서는 두 손을 탈탈 털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발뺌은 안 될거야, 크리스틴 영애."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자신의 좋은 머리를 칭찬하며 킬킬거리던 사서는 도서관 곳곳에서 조용히 책을 읽던 학생들의 사나운 눈총을 받아야했다. 사서를 째려보던 학생들이 일제히 가리키는 도서 관 입구에는 커다란 문구가 적혀있었다. <절.대.정.숙.(絶對靜肅)> "하아~" 하녀에게 안내서를 몇 권 더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한 크리스틴은 방안 가득 쌓여있는 수십 권 의 책을 보며 행복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가씨. 여기 있습니다." 불과 몇 미르도 되지 않아, 음료와 간식, 3권의 안내서를 가지고 온 하녀는 더 이상 할 일이 없 다는 크리스틴의 말에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조용해진 방안에 홀로 남은 크리스틴은 어느 샌가 나타나 쪼로롱 울어대는 카사를 어깨위에 앉히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책이 전해주는 지식 들은 크리스틴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었고, 덕분에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을 잊고 눈을 빛내며 밤새 책을 읽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난 크리스틴은 어쩔 수 없이 하녀를 시켜 방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첫 수업을 듣기위해 열심히 뛰었다. 안내서를 찾을 여유가 없어 결국 실프를 부른 크리스틴은 뚱하니 볼을 부풀리고 나타난 실피드에게 손을 잡혀 날듯이 뛰어가야 했다. 『내가 있는데 실프는 무슨...말도 못하는 것들이 뭐가 좋다고...』 교실이 있는 건물 앞까지 길안내를 자청한 실피드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서슴없이 깎아내리며 다음부터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자신을 부르라고 신신 당부를 하고 사라졌다. 드르륵~ 종소리가 울리는 시간에 겨우 맞춰 교실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요란한 문소리를 내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 뒤를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역사 선생이 들어왔다.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재작년에도 역사를 가르쳤던 선생으로 이름은...기억나지 않았다. "음, 오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네. 인사하겠어요, 크리스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말을 거는 여선생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크리스틴은 자신보다 2, 3살씩은 어려보이는 소년, 소녀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크리스틴 폰 배너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여기에서 유급을 했으니 나이가 많네, 혹은 원래는 내가 선배니 알아서 깍듯이 모시라는 소리가 나오길 기대했던 역사 선생은 깔끔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 크리스틴을 보며 고개를 갸웃 했다. 재작년에만 해도 1년 유급한 것이 뭐 그리 큰 자랑이라고 1살 어린 학생들에게 거들먹거 리던 학생을 떠올려보았지만, 차분하게 앉아있는 지금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결국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재미있는 장면을 못 보게 된 아쉬움을 털어버린 역사 선생은 수업을 시작했다. 예의 딱딱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이었다. '우와...정말 지루하다...' '그치. 책으로 공부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책에서 얼굴도 들지 않고 장장 1나르에 걸쳐 열심히 책만 읽는 선생은 내버려 두고 저희들끼리 숙덕거리는 아이들을 구경하던 크리스틴은 문득 창문 너머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난 여인은 크리스틴이 수업을 듣고 있는 교실 창문 앞에 서서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망사에 가려져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여인의 시선은 분명 크리스틴을 향해 있었다. '눈에 익은데...' 어디서 보았는지 알아내려고 열심히 머릿속을 뒤적이면서도 크리스틴은 낯이 익은, 장례식에나 어울릴만한 복장을 하고 서 있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종이 울리고 역사 선생이 인사를 받고 나간 후 창문 밖에 서 있던 여인이 사라졌다. 왠지 모를 안타까움에 길게 한숨을 내 쉬고 책을 챙기고 일어서려던 크리스틴은 눈앞을 가득 채우는 검은 천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 었다. 쫘아악~! 엄청난 소리가 교실 전체를 울렸다. 크리스틴은 눈앞이 번쩍한 순간 얼얼한 정도가 아니라 점점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화끈 거리는 뺨에 손을 올렸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공기들이 서서히 달아오르며 공격의사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정작 크리스틴은 망사 너머로 보이는 아스라한 금빛 눈동자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 디아나 만 아로니에(Diana Mahn Aronie)를 감히 잊었다고는 하지 않겠지, 크리스틴 폰 배너." 검은 망사 사이로 새하얀 이가 드러나며 새파란 빛을 발했다. ***************************************************************************************** 홍홍홍 리플을 보고 꺄악~놀랐습니다. 감사합니다. (_ _) 해서...한 편 더 올릴께요. 흑흑(비축분인뎅...ㅠㅠ)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과거는 악몽이 되어... 2.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죄송하지만...누구시지요?" "..........." 다짜고짜 뺨을 휘갈긴 여인이 민망함을 느낄 정도였다. 기억을 못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정말 크리스틴의 기억력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날 모른다고 이야기 하는 건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되묻는 여인을 보며 어느새 퉁퉁 부어오른 뺨을 긁적이던 크리스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죄송합니다만...진짜 모르겠는데요." "어떻게...어...어떻게...네가! 네가 나를 모를 수 있어! 어떻게!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넌 날 알고 있어야 해! 어떻게 네가 날 모른다고 할 수 있어!" 울분을 토하려는 듯,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분노를 터뜨리며 절규 하는 망사의 여인, 아니 동급생 이었던 사람을 멍하니 보고 있던 크리스틴은 어느 새 나타나 교실 문가에 기대고 서 있는 카민을 보았다. "결국...만났구나." "앗!" 등 뒤에서 들리는 카민의 낮은 목소리에 황급히 뒤돌아선 여학생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그녀를 붙잡을 생각도 않고 도리어 몸을 비켜준 카민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디아나가 뛰쳐나간 곳을 보고 있는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학장님이 부르신다. 수업은 안나가도 되니까 따라와." "아...네." 주섬주섬 책을 챙겨들고 걸어가던 크리스틴은 문을 막아서는 카민의 행동에 고개를 들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크리스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카민이 천천히 손을 들어 소녀의 빨갛게 부어오 른 볼을 쓰다듬었다. "많이 아프냐?" 말없이 고개를 흔드는 크리스틴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짓던 카민은 그녀의 손에 들린 책들을 받아 들고 등을 돌렸다. 크리스틴은 디아나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고, 카민도 먼저 설명하려 들지 않 았다. 묵묵히 학장실로 안내한 카민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크리스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라." "네." "보아하니...만난 것 같군. 그렇지?" "네?" "디아나 만 아로니에." "....아!" 크리스틴이 탄성을 지르자 카를로스는 시선을 돌려 문에 기대고 서 있는 카민을 보았다. 아버지의 시선을 받은 카민은 고개를 저었고, 카를로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크리스틴의 볼을 쳐다보았다. "1년 반...전에도 넌 그 아이를 모른다고 했다. 직접 만났는데도 생각이 안 나는거냐?" 1년 반 전이란 말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생각을 더듬어보던 크리스틴이 숨을 들이켰다. "그...그럼...그 디아나 만 아로니에란 사람이 제가 만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리어 반문을 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카를로스는 카민에게 손짓했다. 나가있으라는 카를로스의 신호에 카민은 도리어 어슬렁 어슬렁 걸어와 크리스틴의 옆 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아들을 노려보던 카를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크리스틴을 지켜보았다. '병신 같은 계집애. 뭐? 제 까짓게 황태자비가 된다고? 어리석긴...그래, 그러면 되겠군. 좋은 일이야, 호호호호홋' 1년 전까지 크리스틴의 하녀는 세실을 모함했다가 백작부인의 명으로 죽임을 당한 한나였다. 한나의 이야기를 듣고 뭔가를 숙덕거리며 지시를 내린 후, 화려하게 꾸며진 내실이 떠나라가 웃음 을 터뜨리는 자기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얼굴은 몰랐지만 그 여학생을 계속 걱정하고, 동정했었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누군지는 모르나, 그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 그녀 자신이었고 그녀가 잘 아는 사람과 관련이 있었기에 더욱 안타까워 했었다. 그녀는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카민의 청록색 눈을 바라보았다. '이분을 사모했던 사람이...그럼...!' 무엇인가 깨달은 듯 경악에 찬 얼굴로 카민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린 크리스틴은 그녀를 주시 하고 있던 카를로스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이 난건가?" 카를로스의 말에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인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은 여전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그녀가 느끼고 있었던 감정은 명백했다. 그리고 그 때 크리스틴이 느꼈던 당혹감 역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좀 하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카를로스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생각을 정리하던 크리스틴은 예전의 영애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유추해 내었다. '이대로 무너지면...끝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과거에 행했던 악행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전...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 오래전에 이미 들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 당시에는 확증이 없다 뿐이지 크리스틴이 저지른 일이라고 확신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단 한 마디가 카를로스의 의 구심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카를로스의 청록색 눈을 바라보며 자신 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할 것인지 아니면 때를 기다릴 것인지 계산을 해보았다. '아직은...' 스스로 밝히도록 만들어야한다. 입술을 질끈 깨문 크리스틴은 말없이 자신의 말을 기다려주는 카를로스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보 였다. "조금만...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아직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잊고 있었어요. 저와는 상관 없다는 생각에..디아나 영애에 대해서는 완전히..잊고 있었습니다." 죄책감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조소가 어린 크리스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를로스는 고 개를 끄덕였다. 뭔가 잘못 짚고 있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분명 크리스틴은 뭔가를 알고 있는데, 그것을 밝히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눈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기억을 은폐시킨 거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에 사로잡힌 카를로스는 크리스틴을 보는 시각을 달리해보았다. '남작가의 여식의 상해사건에 백작영애가 사주한 것으로 지목되고...당사자는 부인, 피해자는 절대로 확신을 했다. 그리고...또...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있었어!" 카를로스는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카민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소녀의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평정을 찾았지만 핵심을 찔린 사람처럼 크리스 틴이 동요하는 것을 본 카민은 카를로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눈치 챈 크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성공한 건가?' 살짝 발을 빼는 것은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카를로스의 시선에는 더 이상의 적대감이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가 저질렀던 일 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것이 아무리 나쁜 일이라 하 더라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녀를 대신해 지목될 대상 역시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 '이제는 기(氣)싸움인가...' 어차피 아카데미로 돌아올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한나는 죽었고, 유일한 증인은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없어진 사람을 다시 나타나게도 할 수 없 으니, 한나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크리스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한 번에 탈피할 수 있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약간 긴장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억.지.로. 짓고 있는 크리스틴을 쳐다보는 카를로스의 눈 속에 측은함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권력이란 거겠지...' 부모의 부와 권력은 자식에게도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그 단편적인 예를 아카데미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그의 생각이 맞다면 지난 1년간 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분노 를 샀던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혹은 절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제 기억이 났으니, 사정을 이야기해도...아는 것만 이야기해도 돼."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질문을 던지는 카를로스를 보며 정말 속이 뻔히 보인다 생각을 하던 크리 스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 크리스틴이 부모님 앞에서 자주 써먹었던 행 동이었다. 소위 말하는 '깨물어주고 싶도록 약한 모습 보이기 1탄'. 역시 검증된 바 있는 행동이라 그런지 은근슬쩍 헛기침을 터뜨리며 대화에 끼어든 카민이 크리스 틴의 편을 들어주었다. "뭐, 꼭 오늘이 아니라도 되잖아요. 수업도 들어야 하고...나중에 계속하죠?" 더 이상 괴롭히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늬앙스를 팍팍 풍기는 카민의 말투에 짐짓 인상을 쓰던 카를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아무짝에 쓸모없다니까...' 카민이 들었으면 언제 덕 보려고 낳았냐고 펄쩍 뛸 소리를 꿀꺽 삼킨 카를로스는 나중에 다시 부르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틴은 책을 들어주 겠다고 나서는 카민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학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복도 끝에 디아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앞만 보며 똑바로 걸어가는 크리스 틴의 머릿속에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게, 왜 오해 살 짓을 하고 그랬지? 어리석긴...되지도 않는 남자한테 침 흘리다가 엉뚱한 화살받이만 됐군. 쯧쯧쯧, 불쌍하기도 해라. 깔깔깔깔' 환청처럼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던 크리스틴은 디아나의 뒤에 줄줄이 서 있는 여러 명의 여학생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학장실에 가서 뭐라고 했지? 네가 저지른 일을 이야기 한건가?"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날카 로운 시선을 던지는 여학생들에게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크리스틴은 디아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디아나 양에게 일어났던 일은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잘못 짚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군요." 짜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대낮에 별똥별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된 크리스틴은 차갑게 얼어붙는 주위의 공기를 묶었다.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상냥한 실피드이지만 그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은 유노의 일로 확실히 알게 된 크리스틴이었다. 분노에 휩싸여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상대가 백작가의 영애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을 바라보던 크리스틴 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디아나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얼굴이 맞붙을 듯 가까이 다가 선 크리스틴은 디아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누가 영애를 괴롭힌 사람인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겠지요. 더 이상 엉뚱한 사람 잡고 시 비를 걸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요. 어차피 싸움이 되지 않는 다는 거 영애가 더 잘 알고 있 을테죠. 안된 일이지만, 더 이상은 참아줄 수가 없어요. 두 번은 용서하나 세 번은 못 참습니다." 크리스틴의 작지만 재빠른 속삭임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드러내던 디아나가 갑자기 크리스 틴의 머리채를 잡고 쥐어흔들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만들고도 잘난 척이지? 네가 뭔데!" 그것을 시작으로 디아나와 함께 와있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크리스틴을 쥐어뜯고 물고 차고 화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반항하지 않았다. 노렸던 상황이고, 그녀가 기다렸 던 인물은 기대한 것보다 더 훌륭하게 역할을 해주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사실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을 터였다. '불쌍한 것 같으니...호호호호호' 언젠가 디아나의 소식을 듣고 혼자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던 크리스틴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도대체 여기서 뭣들 하는 짓인가! 디아나 만 아로니에! 로잘린! 캐서린! 스타샤! 헤스티아! 당장 학장실로 들어와!" 카를로스의 노한 음성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여자들의 투닥거리는-일방적으로 욕하고 구타하는-소리에 목을 길게 빼내고 구경을 하던 학생들 은 카민의 거친 손길에 바닥으로 쓰러지는 여자들을 보며 혀를 찼다. 쓰러진 여학생들 사이로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지고 옷은 찢어진 채 군데 군데 피를 흘리며 서 있는 크리스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심하게 당했는지,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거의 다 드러난 어깨와 목, 얼 굴의 새하얀 살결 위에는 손톱에 긁혀 피가 나는 곳을 제외하고는 온통 피멍이 들어 마치 알록 달록 물감을 칠해놓은 듯 보였다. 카민과 학장의 등장에 놀라 바닥을 굴렀던 여학생들은 살기를 흘리며 자신들을 밀쳐내고 크리스틴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남학생을 보며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어...어떻게...어떻게 선배가 그 년 편을 들어요?!" 한 여학생의 고함소리에 욕을 퍼부어주려던 카민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성을 흘리는 크리스틴 을 번쩍 안아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헉!" "말도 안돼!" "세상에...!" "선배!"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카민을 올려다보던 학생들은 그의 뒤에 나타난 학장 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삼켜야했다. "너희들이...이따위 썩어빠진 정신머리로 몬트리얼에 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당장 학장실 로 들어가 있거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떠는 여학생들을 노려봐준 카를로스는 디아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른 아이들을 선동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실망이다, 디아나 만 아로니에. 넌 내가 부 를 때까지 네 방에 가서 짐을 싸놓고 기다려라." 카를로스의 눈에 담긴 차가운 분노에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번쩍 들었던 디아나는 카민의 품에 안겨있는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이를 뿌득뿌득 갈며 몸을 떨어대던 디아나는 문득 카민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획 돌려 기숙사로 달려갔다. 디아나의 뒷모습을 치켜보는 카를로스의 얼굴에는 착잡함이 가득했지만 고개를 돌려 크리스틴 의 몰골을 보았을 때는 어쩔 줄 모르는 민망함이 자리를 대신했다. 찢어진 천 사이로 검붉게 피멍이든 속살이 내비치는 크리스틴에게서 시선을 돌린 카를로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눈 치를 보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학장실로 가라고 턱짓을 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크리스틴을 곁 눈질하던 여학생들은 천천히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치료실에 데리고 가 있거라. 연락을 하면 학장실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던 카를로스는 등 뒤에서 들리는 크리스틴의 작은 목소리에 걸음 을 멈추고 말았다. "아카데미에...돌아올 때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학장님. 디아나 영애는 분노를 풀 곳이 필요 했고, 저 만큼 적절한 표적은 없었을 거예요. 어느 누구도...이 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절 믿어주지 않았으니까요. 당연한 일이지요."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내심 찔리는 바가 있던 카를로스는 은근히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는...믿는다." 이제는 믿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심하게 당하면서도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크리스틴을 믿지 않는다 면 누굴 믿을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참으로 달라졌다. 예전의 그 안하무인격의 성격은 어디서 갈아 치웠는지 스스로의 역량을 잘 파악하고, 모든 것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려는 그 태도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따끔거리는 양심을 무시하며 얼굴 뜨거운 말을 내뱉은 카를로스는 성큼 성큼 걸어가는 아들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태가 이정도로 번졌으면 조용히 넘어가기는 물 건너 간 일이었다. 학부모들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던 카를로스는 문득 크리스틴을 보호하려고 살기를 피워대던 카민의 얼굴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 되는데...' 카를로스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건 말건 카민은 나름대로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참는 듯 눈을 깜빡이는 크리스틴을 내려 다보며 으드득 이를 가는 일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자신이 벗어준 옷을 꼭 쥐고 있는 손목이 푸르스름한 색을 띠며 부어올라 있었다. 양쪽 볼 역시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퉁퉁 부어있었고, 입가에는 실줄기 같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여자들이 화를 내면 남자들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곳은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오선지와 멍자국를 남겨놓은 아이들의 독기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핏기마저 사라져 으슬으슬 떨고 있는 크리스틴을 안아들고 걸음을 옮기던 카민은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억지로라도 크리스틴을 배웅해주었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자신이 느끼는 기이한 감정의 실체를 아직 깨닫지 못한 카민은 그것을 어린 여학생에 대한 보호 본능이라 규정지었다. 하지만 옆에서 쭉 지켜본 아버지가 그것이 어떠한 감정의 시발점에 불과하 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기에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 아잉~ 디아나의 얼굴은 다음편에서 나옵니다. 아카데미에 귀족들이 뛰어오죠. 우글우글...만인이 보는 가운데 모든 것이...! (뭔 소리야..ㅠㅠ) 별빛바다님 22kb분량이 그리우시 다구요? 하지만...하지만...흑 잘 나가는 판타지들은 10kb를 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ㅠㅠ(퍼버벅~!) 저도 노력중이랍니다. 그리고 음...개인적으로 메세지를 보내주신 코코님, 힘내세요! 아자! 홧팅!!! 앙, 여러분 오늘 하루 많이 많이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과거는 악몽이 되어... 43회에 이어져야 하는 부분인데, 빠졌더군요.(용량이 적더라니..- -;;) 이번 44편은 코코님을 위한 위문공연...콜록...입니당. 회심의 비축분이 사라졌으니...몰라요..흑 ㅠ ㅠ (리플로 압박주신분들 미워용...ㅠㅠ) **************************************************************************************** -3 크리스틴은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치료를 받고자 했으나, 카민이 만류했고 신관이 고개를 저었다. 백작이 도착하기 전까지 는 치료를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처음 치료실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호들갑 을 떨며 당장에라도 기도를 올릴 것 같던 신관은 견갑골 부위의 살이 쩍 벌어져 피를 콸콸 쏟아 내는 것을 보고는 손을 거두었다. 피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지혈을 해주고 통증을 느끼지 않 도록 해주었지만, 상처를 없애주지는 않았다. 등 쪽이었기에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워낙 맞은 곳이 많아 온몸이 욱신거렸기에 크리스틴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뼈가 드러날 정도로 푹 파인 상처가 분명 칼에 의한 것이라 확신한 두 남자는 체면도 버리고 살기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카를로스의 허락도 없이 수정구로 백작가에 연락한 카민은 크리스틴의 등에 길게 난 상처를 보여 주고 당장 아카데미로 와주십사 부탁을 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딸아이의 몸에 난 상처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백작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갔다. 당장에라도 다 뒤집어엎을 기세였다. 생전 처음으로 엄청나게 화를 내는 백작을 보게 된 크리스틴은 신관의 팔을 잡고 눈물을 글썽 였다. 치료를 해달라고, 이제 괜찮으니 치료를 해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신의 아이를 애써 외면 한 신관은 내친김에 신전에 연락을 해서 대신관을 닦달했다. "도대체 기도는 하시는 겁니까! 왜 이런 일만 생기는 건데요! 네? 대신관 맞아요? 정 기도가 안 되겠으면 다른 사제님께 직위 넘기고 산에 들어가서 수행이라도 하시지요. 이카루스님께 뭐 잘못하신 거 있어요? 네? 네?" 말 그대로 닦달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신관에게 엄청난 훈계를 들은 대신관은 그날로 천일기도에 들어간다고 선언한 후 물통만 들고 기도실로 들어갔다. 이번 기회에 아예 누구누구의 귀가 따갑도록 밤낮으로 기도를 올려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아카데미에 파견된 첫날 두 번이나 치료실로 실려 온 크리스틴을 보 고 울컥했던 신관은 속 시원하게 화풀이를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레고리 대신관이 기도 실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신관은 만세를 외치고는 치료를 해달라고 떼를 쓰는 영애를 슬쩍 잠재우고 영애를 위해 기도를 드려야겠다면서 예배당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치료실에 크리스틴과 단 둘이 남아있던 카민은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며 주위를 서성 이다가 문득 잠이 들어있는 크리스틴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종이위에 알록달록 색을 칠한 것 같아보였다. 멀쩡한 곳 하나 없이 온몸이 멍과 손톱자국이고 등 뒤에는 당장에라도 치료를 해야 하지만 겨우 지혈만 시켜놓은 한 뼘 길이의 칼자국도 있을 터였다. "젠장! 빌어먹을!" 열 받은 음성으로 참았던 욕설을 내뱉던 카민은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아 크리스틴의 머리를 부 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주었다. 몇 나르 후. 카를로스의 부름을 받고 여전히 의식이 없는 크리스틴을 안아든 카민은 학장실로 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가운데 소녀와는 전혀 닮지 않는 백작과 딸에게 아름 다운 미모를 물려준 백작부인이 벌떡 일어났다. "크..리스" 백작부인의 희디 흰 손이 크리스틴의 잠든 얼굴에 닿았다. 무의식적으로도 어미의 손길을 느낀 것인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던 아이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어...머니?" "크리스, 아비도 왔다!" "아버지?" 얼굴의 피멍도 피멍이지만 잔뜩 엉클어진 몰골에 남자 옷을 입고 카민의 품에 안겨 나타난 크리 스틴과 백작내외의 이산가족 상봉을 방불케 하는 애잔한 만남이 연출되었다. 내심 크리스틴의 몰골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던 사람들은 그녀가 배너 백작의 하나밖에 없는 여식이란 것을 깨닫고 학장실 한 구석에 한 줄로 서 있는 자신의 딸을 노려보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작위는 있으나, 여기에서 배너 백작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여식을 저리 만든 것이 자신들의 딸이었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배너 백작의 푸들거리는 살과 살기어린 작은 눈이 그들의 살을 갈라 피를 마시고, 뼈를 갈아 축배를 들고 말겠다는 맹세를 하고 있음을 분명 히 깨달았기에 두려움은 더욱 컸다. '저 자식은 치료를 해서 데리고 오라니까!' 여기 또 한 사람. 카를로스는 감히 자신의 말을 어기고 치료는커녕 옷도 갈아입히지 않고 크리스틴을 안고 들어온 카민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그의 간 큰 아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딸을 보다듬으며 울먹이는 백작부인과 이를 가는 백작의 눈치를 보면서 침묵이 계속되 는 가운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로니에 남작님." 카를로스의 인사에 사람들의 이목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이제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무거운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다. 조금은 빛이 바랜 검은 머리에 드물게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6피텐(180cm정도) 정도 되는 장신의 남자였다. 잠시 아로니에 남작과 배너 백작사이에 눈싸움이 오고갔다. 아로니에 남작이 도착한 후, 카를로스는 차를 내오라 시키고 학부모들에게 모두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주춤 주춤 자리에 앉은 귀족들은 남작과 백작 간에 생긴 냉담한 분위 기에 숨을 죽였다. 똑똑똑 디아나 만 아로니에가 나타났다. 그녀는 학장실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흠칫 하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 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백작부인의 품에 안겨 자신을 보고 있는 크리스틴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리로 오게." 카를로스의 부름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의자 옆으로 다가간 디아나는 자신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 내는 친우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작님,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아로니에 영애를 저희 아카데미에서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결정 을 내렸습니다." "..........!" 카를로스의 단호한 목소리에 배너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로니에 남작과 디아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학장을 노려보았다. 그 옆에서 분위기 파악에 여념이 없던 사람들은 파랗게 질린 얼 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딸자식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게...무슨..왜...왜 제가 나가야 한다는 건가요? 나가야 될 사람은 저 애지 제가 아니예요!" 절규와 같은 비명소리에 카를로스는 잠시 크리스틴을 보았다. 손가락질을 받은 크리스틴은 약간은 굳은 얼굴로 디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동정심은 사라졌다. 죄책감이나 스스로에 대한 조소도 없었다. 단지 앞뒤 구분 못하고 복수에 여념이 없는 디아나에 대한 실망과 함께 아련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의 그러한 심경 변화를 확인한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손가락을 분질러 버릴 것 같은 백작은 제쳐두고라도 디아나를 노려보고 있는 아들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든, 디아나 양은 크리스틴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영애의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학우들을 선동해서 한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 그제야 줄줄이 비엔나처럼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이 왜 이곳에 불려왔는지 깨달은 남작은 부들 부들 떨고 있는 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들 간에 직위의 높고 낮음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가르쳤습니다만...글쎄요. 이번 경우에는 그것을 따져봐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작가의 영애가 그보다 직위가 낮은 부모를 둔 학 생들을 이끌고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거기다 칼까지 썼지요, 죽이려고 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 카를로스의 말에 냉큼 끼어들어 조소를 날리는 카민에게 경악에 찬 시선들이 쏟아졌다. "아니야! 전 안 그랬어요!" "저두요!" "칼이라니!" "아니예요!" 산발적인 비명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핏기가 가신 아이들은 자신들은 절대로 칼을 가지고 오지도 만진 적도 없다며 소리를 질렀고, 단 한 사람 디아나만이 아무런 동요 없이 크리스틴을 노려보고 있었다. 학부모들 역시 놀란 얼굴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일제히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디 아나를 쳐다보던 크리스틴은 백작부인의 품에서 일어나 천천히 등을 돌리고 섰다. "아..!" "음!" "세상에!" "이..이럴수가!" 카민이 입혀준 옷을 비스듬히 벗자 여기 저기 피멍이 든 맨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깨 어림에 난 한 뼘 가량의 상처를 본 사람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피는 멈추었고, 그리 긴 상처는 아니었지만 울긋불긋한 속살이 쩍 벌어져 새하얀 뼈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작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고, 백작부부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로니에 남작...." "...네, 백작님." "내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는 앞으로 두 발 뻗고 잘 수는 없을 거요. 데니스 폰 배너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 사과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록 치료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지금 딸아이의 모습을 두고두고 곱씹어 볼 것이라 맹세했다. 살기를 줄줄 흘리며 남작에게 마지막 통보를 한 백작은 벌게진 눈을 깜빡이며 망토를 벗어 딸아 이의 어깨를 감싸주고 품에 안았다. "치료를...해야겠구나." "아니요, 아버지. 아직...끝난 게 아니예요." "뭐?" 크리스틴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던 백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답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죽어버리지! 조금만 깊이 찔렀어도 죽었을 텐데, 호호호호호홋!" 고개를 쳐들고 큰소리로 웃어대는 디아나의 음성은 처절하기 까지 했지만 남작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디아나 만 아로니에!" 백작의 호통소리에 웃음을 뚝 그치고 잠시 침묵하던 디아나는 배너 백작을 바라보았다. "저희 가문을 망하게 만들겠다고 하셨나요? 그까짓 상처 때문에 제 아버지를 협박하셨나요? 자신의 딸이 어떤 년인지도 모르면서...얼마나 잔인한지, 얼마나 위선적인지 그것도 하나 제대로 파악 못하고 백작이랍시고 우리 아버지를 모욕하고 협박하시다니요!" "이..이런!" "디아나!" "세..상에..." 디아나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배너 백작 일가는 동요하지 않았다. 백작내외는 크리스틴이 말한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사람들을 또다시 경악 속으로 밀어 넣은 디아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머리위에 덮고 있던 검은 망사를 잡아 당겼다. "헉!" "........!" 사람의 얼굴이라 말 할 수 없었다. 또한 피부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마치 화상을 입은 듯 울퉁불퉁 튀어나온 살들은 누런 진물이 조금씩 맺혀있었고, 뒤틀린 입술은 왼쪽으로 쏠려있었다. 눈썹도 없고, 코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기포가 생긴 빵반죽처럼 보이는 얼굴에 황금빛 눈동자만이 생생하게 살아서 광기어린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경악에 찬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디아나의 시선이 크리스틴에서 멈추었다. ".........." 동정도, 죄책감도, 고소하다는 기색도, 즐거움도 없는 푸른 눈을 주시하던 디아나는 문득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금빛 가루가 흩뿌려진 듯 디아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카민의 냉담한 시선 속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던 디아나는 손바닥에 묻은 누런 진물을 치마에 쓱 닦아내고 두 손을 모아 가슴위에 얹었다. "절...이렇게 만든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이 그토록 잘못된 일인가요, 학장님? 백작님, 당신의 딸이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자, 이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 가문을 멸하고, 자식의 수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절 죽이시렵니까?" 배너 백작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조소를 날리는 디아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크리스틴을 보았다. "이것이냐?" "네." "네가 해결할 것이냐?" "네." "자신이...있느냐?" "...제가 한 것이 아니예요." 의미모를 말을 주고받은 부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딸의 눈만 지그시 바라보던 백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널 믿는다." ".......!" 그 짧은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절대적인 믿음. 절대적인 신뢰. 얼굴이 망가진 사람이 크리스틴을 가해자로 지목하고 있으나, 그녀의 부모는 믿는다 하였다. 그것도 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딸아이의 거짓말일 수도 있는 짧은 몇 마디의 말을 믿는다 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물결 속에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은 문득 디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황금빛 눈동자에 스며든 불안함, 불신, 갈등, 번민, 그리고...의혹? 크리스틴을 죄인으로 몰아가며 당당했던 태도에 금이 가고 있었다. 죽이겠다고 칼을 휘둘렀던 그 악에 받힌 행동들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째서..어째서 그렇게 당당한거지? 어째서 넌 그렇게 태연한거지? 내 얼굴을 보고도, 그렇게 당당하다니...넌 정말...정말..." "당당하다구요?" 백작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던 크리스틴이 휘청 거렸다. 피도 많이 흘렸고 상처에서 비롯된 고통이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말을 하는 것 도 힘든 지경이었다. "상처부터 고쳐라, 이 바보 같은 제자야!" 식은땀을 흘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크리스틴은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노기가 가득한 샌들우드가 그녀의 등에 난 상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우리보다 먼저 오셨단다. 굳이 숨어 있으시겠다고...콜록" 백작부인의 민망함이 섞인 말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리던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카를로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턱은 땅에 닿아있었고 눈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돌출되어 있었다. "내가 제자를 고친다는데 불만 있는 놈은 나와라." ".........." 있을 턱이 있나. 살기를 풀풀 풍기는 마법사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어떤 일을 당할지 이카루스만이 아실일. 거기다 여차하면 한 수 거들겠다 는 듯 두 팔을 걷어 올리는 백작도 무섭기는 맨 한가지였다. "큐어(Cure)*힐링(Healing)*리커버리(recovery)*클리어(Clear)* " 순식간에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크리스틴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크리스 틴은 카민의 옷만 아니었다면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팔짱을 척 끼고 물러 나는 샌들우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크리스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 는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제가 당당한 것이 불만이라지요? 제가 자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 싫으시다구요? 왜 그런가요? 왜 제가 그래야 하지요?" "이....이...!" 말도 못하고 이만 갈아대는 디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한숨을 내쉬며 카를로스를 돌아보았다. "저희 부모님과, 남작님하고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학장님."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카를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마법사를 우러러보고 있는 사람들을 휴게실로 쫓아내었다. 디아나를 거들어 크리스틴을 때렸던 여학생들도 함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정적을 되찾은 학장실에는 디아나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했다. "제가 아니라는 것, 디아나가 더 잘 알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 "저를 걸고 넘어간 것까지는 그냥 봐줄 수 있지만, 오늘 제게 한 일은 절대로 용서 못 합니다. 아니, 할 수가 없어요." "흥! 네가 뭔데? 네까짓 게 뭔데 그런 말을 하지?" "내 딸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지. 그렇지 않소, 남작!" 두 소녀의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자신감을 얻은 백작의 목소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딸아이의 눈 속에서 흔들림을 보았던 남작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아버님!" "그만 하거라. 넌...이런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냐?" 딸을 추궁하려는 듯 보이는 남작을 말린 카를로스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백작 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먼저 사정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백작님께서는 전혀 모르시는 일이니..." 선뜻 총대를 메고 나선 카를로스는 1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디아나 만 아로니에의 중독 사건이었다. 한 밤중에 하녀의 등에 업혀 치료실에 실려 온 디아나는 신성력이나 마법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 는 독에 중독이 되어 얼굴이 완전히 망가졌다.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으나 뛰어난 미모를 자랑 하던 디아나의 독살 미수 사건은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의식은 되찾은 디아나는 '크리스틴 폰 배너가 준 온 음료를 마시고 의식을 잃었다' 라고 진술했다. 졸지에 범인으로 지목된 크리스틴은 학장의 질문을 극구부인 했고, 그녀의 방에서도 독약은 나오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디아나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펄쩍 뛰는 크리스틴 때문에 좀 더 사건을 조사를 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당사자의 말이 있기는 했지만, 증거도 없이 백작 가를 뒤집어가며 크리스틴을 추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크리스틴이 갑자기 휴학을 했다. 크리스틴이 사라지자, 디아나는 입을 닫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그녀 가 스스로가 저지른 일이 들통 날까 두려워 아카데미를 그만두었다고 수군거렸고, 얼굴이 망가진 디아나는 검은 망사를 뒤집어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아카데미에 남았다. 카를로스의 말이 끝나자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던 백작이 크리스틴을 보았다. 딸의 깊고 푸른 눈에는 죄책감은커녕 일만의 동요도 없었다. 내심 무죄를 다시 한 번 확신한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죄지은 사람처럼 서 있는 남작을 보았다. "내 딸이 그랬다고 생각했나?" "............." 백작의 질문에 침묵으로 대답한 남작은 스스로가 느끼는 혼란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디아나가 '크리스틴이 한 짓'이라며 울부짖을 때만해도 어떻게 해서든 사실을 규명하여 영애 의 죄값을 치르게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딸아이를 중독 시켰던 약물 의 출처를 찾느라 동분서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 딸이 크리스틴에게 한 짓 은 그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비겁한 행위였고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왠지 백작영 애의 당당함이 그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던져주고 있었다. 철석같이 믿어왔던 사실에 대한 불신...을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크리스틴에게 '너를 믿는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백작을 떠올리자 부끄러움에 한숨이 나왔지만 디아나의 흔들리는 눈은 그의 확신에 희미한 의혹을 제기하도록 만 들었다. 크리스틴이 정말 그랬을 수도 있고, 디아나가 착각을 했는지도 몰랐다. 스스로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진실은 불변이나 인간들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저는 제 딸을 믿습니다. 하지만...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남작의 불신에 싸인 목소리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디아나는 태연한 얼굴로 앉아있는 카민을 힐끗 거린 후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전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전 크리스틴 영애가 준 음료수를 마시고 독에 중독 되었지요. 깨어나 보니 얼굴은 이 모양이고, 그것이 다입니다." ".........제가 준 음료수?" 카민과 카를로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미 크리스틴은 디아나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디아나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직접 음료수를 가져다 줄 정도라면 적어도 얼굴은 알 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직접 받아 마셨나?" 백작의 말에 흠칫하던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저 아이 하녀가 주었어요. 크리스틴이 몸에 좋은 거라고 전해달라고..." "끄으응..." 이미 죽은 하녀가 등장했다. 도대체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못 잡은 사람들은 크리스틴과 디아나를 내버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제 하녀가 어떻게 생겼던가요?" "......너무 오래 되서...그게..." 몇 번이고 연습을 했건만 막상 말을 하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희마하게나마 기 억을 하고 있던 하녀의 모습은 막상 말을 하려니 뿌연 안개에 휩싸인 듯 이미지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디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 하녀는 네가 보냈다고 했단 말이다!" "왜요?" "..........." "왜 내가 보냈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나요? 디아나와 난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을 텐데... 그렇지? 평소에 모이라에게 놀림을 당하는 나와 이야기를 해본 아이들이 있었어? 단 한마디도, 인사도 한 번 하지 않았던 내가 왜 너에게 음료를 보낸 건지 네가 설명해줄래?" 얌전하던 태도를 집어치운 크리스틴은 서서히 이를 드러냈다. 모이라의 비웃음을 사며 무시를 당했던 예전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자신이 당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 당시 크리스틴이 느꼈던 굴욕감과 비참함,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가슴을 활짝 펴고 이를 드러내는 크리스틴을 지켜보던 백작내외는 작게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고,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 남작을 비롯한 카를로스와 카민은 디아나를 보았다. 짓뭉개어진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해있었다. "너희들이 날 비웃을 때 상관하지 않았어. 내 모자람을 알았으니까. 모이라에게 밉보이면 어떻 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 그리고 넌 모이라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었지, 아닌가? 아이들과 숙덕거리면서 저런게 백작가의 여식이냐고, 아둔함을 비웃으며 즐기지 않았던가? 내 가 무엇 때문에 너에게 마실 것을 보냈다고 하는 거야? 아니 사실이라 하더라도 뭘 믿고 마신 거지?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네가 비웃었던 내가 너에게 준 것을 어떻게 덥썩 받아마셨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 크리스틴의 울분에 찬 목소리에 카민이 벌떡 일어나려다 카를로스의 만류로 다시 앉았다. 디아나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한번 화를 내기 시작한 크리스틴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얌전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서운 법이지...암...' 생전 처음으로 세실이, 아니 크리스틴이 진심으로 분노하는 것을 목격한 샌들우드는 편안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고 기대어린 눈초리로 제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역사적인 광경을 길이길이 남기기 위해 수정구를 꺼내들고 영상을 저장하면서... 크리스틴은 자신의 반격에 디아나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날 걸고 넘어진거야 그렇다고 치자. 넌 머리도 없어? 정말 누구 말대로 꼬랑지 살랑살랑 흔들 어대는 개처럼 살다가 주인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그렇게 인정하기 싫었니? 알량한 자존심인가? 그게 네가 가진 본성이였어? 고귀한 척, 잘난 척, 똑똑한 척 하더니 꼴좋구나. 그 꼴로 동정심 이나 사서 날 이렇게 몰아넣으려고 일.부.러. 치료도 받지 않았니?" "헉!" "...........?" 디아나는 숨을 들이켰고,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인가? 저 아이의 독은 치료할 수가..." "있어요. 있다구요, 남작님. 저건 단순히 독기가 얼굴에 뭉쳐진 것일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 지요. 그렇지 않나요, 디.아.나. 영.애. 아마도 신관에게 부탁해서 치료를 받지 않은 것이겠 지요." 크리스틴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는 디아나를 바라보던 남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신음성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반응이야 어떻든지 간에 디아나만큼 놀란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틴이 어떻게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지, 심지어 자신의 상태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 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해서든 크리스틴을 궁지로 몰 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녀가 움추리고 살았던 1년을 보상받아야했다. "어...그것 봐! 네가 쓴 거니 아는 거야, 제 무덤을 스스로 파다니 정말 네 어리석음에 감탄할 뿐이다. 네가 그 말을 해주길 기다린 거야, 몰랐니?" 디아나의 빈정거림에도 사람들은 그녀를 보려하지 않았다. 무덤을 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디아나 자신이었다. 다 드러난 마당에 끝까지 크리스틴을 범인으로 몰고 가려는 디아나는 한심하기 까지 보였다.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딸의 말을 무시한 남작은 크리스틴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이 남작을 돌아보았다. "예전에...중독이 되었었는데, 치료를 받고도 여독이 남아 저렇게 얼굴이 망가진 사람을 본 적 이 있었어요. 원한다면...신전에서 치료를 해 줄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차분히 서 있던 크리스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디아나를 노려보았다. 이 정도면 된 거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한 짓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 이제는 제가 사과를 받아야겠네요. 왜 절 끌어들이셨죠?" 남작의 신뢰도 깨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자신들을 기만한 디아나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더군다나 딸아이를 왕따시킨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 한 남작의 여식을 바라보는 백작 내외의 눈은 뱀의 그것처럼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민의 눈... 경멸어린 시선이 디아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사람들의 냉담함에 흔들리던 디아나는 결국 담담 한 얼굴로 예의바르게 질문을 던지는 크리스틴의 차분함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너야! 네가 그런거야! 난 알아! 네가 아니고서야 없지. 내가 널 괴롭혀서 복수한거지? 그렇지? 그래서 술잔에 독을 넣었어.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독이라니요? 전 독을 넣은 적도, 보낸 적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거야 아가씨는 그저 수면제라고 했단 말이야!" "...................." ****************************************************************************************** 휘이잉~~~~~~~ 흠...후르츠바스켓에 빠져있습니다. 이 글을 시작하고 내내 1편에서 26회중에 몇 개를 뽑아서 보고 있지요. 오늘은 비축분을 보고 흐뭇해서 1편부터 쭉 보고 있다가 리플 구경하러 왔다가 맘 약한 유키...흑...님들의...압박을 이기지 못했사와요. (책임 지시어요!!) 맘에 드시나요? 알고 보면 간단한 사건이지요. 크리스틴이 독을 먹였다.->디아나 얼굴이 망가졌다.->크리스틴은 독을 준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범인은 누구? 힌트랑 답은 앞의 글에 다아~ 나와있지요.(뭔 소릴 하는건지..쩝) 아~빠가네코(ぱか 猫ねこ 주: 바보 고양이), 코우가 왜 DVD에서는 멋져보이는 걸까...흑흑 코코님 위로가 좀 되셨나요? 님들 기분이 좋으신가요? 자, 그러면 전 또 내일 올릴 글을 쓰기 위해...밤을 새야합니다. ㅠㅠ   아잉~~~> < 리플 많아 달아주시고, 태클 환영하고(없을꺼야..내가몇시간 씨름했는데..ㅜㅜ) 여러분 내일 뵙겠습니당~~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과거는 악몽이 되어... 4. 자투라망(自投羅網; 스스로 덫에 걸려듬) 격이었다. 이성을 잃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은 디아나는 급하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뒤로 물러 섰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의혹이 확신으로, 믿음이 불신으로 변해가는 것을 목도한 디아나는 떨리는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비명 을 삼켰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크리스틴의 눈가에 스쳐지나가는 안도감을 보지 못했다. 디아나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 엄청난 실수였지만 크리스틴으로서는 기회가 되었다. 스스로가 쌓아놓은 더러운 이미지를 단번에 벗어 던질 수 있는 기회. "아.가.씨.가 누구를 말하는 거지?" 카를로스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나던 디아나는 남작을 비롯한 학장실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분노어린 눈초리에 눈물을 글썽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아니, 동정은커녕 이해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너에게 수면제를 주었다는 사람이 누구냐?!" 디아나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가는 것을 노려보던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로니에 남작은 평소에도 거짓말과 비겁함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때문에 능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정계로 진출하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디아나는 남작의 추궁에 온몸을 떨어대며 시선을 피했다. 결코 밝히지 않아야 할 진실. 그녀의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진실. 눈물이 가득 고인 황금색 눈이 청록색 눈동자를 찾았다. 하지만 평소에는 모든 것을 감싸주는 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던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검게 변해있었다. 입술을 비틀고 자신을 노려보 는 카민과 시선이 마주친 디아나는 황급히 눈을 돌렸지만, 그녀를 빤히 보고 있는 푸른색 눈을 보며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너 때문에! 너 같은 돌대가리가 어떻게...넌...." "내가 너무 똑똑해진 것이 불만인가요?" 크리스틴의 빈정거림에 백작내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보기에 크리스틴은 똑똑해 진 것이 아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서지 못해 입을 다 물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디아나가 말했던 제 3의 인물. '아가씨'에 대해서는 이미 크리스틴 이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었다. 모이라 데 멜포레스 사실 카를로스의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 '모이라에게 밉보이면 어떻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떠올랐다.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던 배너 백작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를 힐끔거리는 남작 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공작가문이다. 어쩌면 크리스틴의 어리석은 일이라 평할 수도 있었다. 정면승부. 그것은 그녀가 그만큼 단순하고 스스로에 대해 자만하고 있었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겨우 직위만 가진 남작가의 여식은 달랐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디아나의 행동은 차라리 현명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이미 정계에 몸을 담은 많은 귀족들이 일곱 명 밖에 되지 않는 공작들의 눈에 들기 위해 그녀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는 배너 백작과 그런 권력 과는 하등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남작은 디아나의 선택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대가리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부모의 권력을 믿고 우리 딸을 따돌리고 비웃었단 말이지... 게다가...모함을 했어?! 으드득!' 참으로 편리한 기억력을 가진 배너 백작은 그의 딸 역시 집안만 믿고 망나니처럼 살았다는 것은 벌써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래서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크리스틴에게 손을 댄 인 물들을 비롯한 아로니에 남작에게 철퇴를 가해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못하도록 만들 결심을 한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목표는 멜포레스 공작이었다. 혹시나 그의 속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비웃지 못 할 것 이다. 그만큼 배너 백작이 가진 부(富)는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돈을 버느라 연줄이 닿아있던 사 람들은 하나 같이 쟁쟁한 인물들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일단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멜포레스 공작 이라 하더라도 100% 이긴다는 보장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단 한마디로 디아나의 입을 닫게 만든 크리스틴은 살포시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학장실 앞에서 만났을 때처럼 디아나의 코앞에 도달한 크리스틴은 베시시 웃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밝은 미소였다. "모.이.라.는 네가 황태자를 노릴까봐 수를 쓴 거였어. 네가 ...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는 모르고 있었단 말이지." ".........!" 경악에 찬 디아나의 눈을 직시하던 크리스틴은 한 걸음 물러나서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더 이상 날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만 뒀으면 좋겠네요, 디.아.나.영애." 불신에 찬 눈으로 크리스틴을 쳐다보고 있던 디아나는 뒤돌아서는 크리스틴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디아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샌들우드는 마나를 모았고, 카민은 당장에라도 튀어오를 듯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남작은 긴장한 얼굴로 딸의 손을 주시했고 백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한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놀란 디아나는 메마른 웃음을 짓고 있는 상대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크리스틴의 주장대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으나,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던 사실. "어떻게 네가 그걸 알고 있지? 정말이야? 네 말...사실이니?" 흔들리는 황금색 눈은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스스로는 답을 알고 있는 눈빛. "알잖아?" "아....아냐!" 크리스틴의 단순한 대답에 절규를 하며 고개를 흔들던 디아나는 눈물을 흘렸다. "주인을 물려고 달려드는 개는 버림을 받기 마련이지. 그것이 오해였다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해. 주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텐데...?" 결정적인 타격을 먹인 크리스틴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하얀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듯 손가락 두 개로 디아나의 손을 떨쳐낸 크리스틴은 다시 한 걸음 물러 났다. 두 번의 기회를 차버리고, 자신에게 칼을 휘둘렀던 이에게 이정도면 충분히 보답을 해주 었다 생각한 크리스틴은 점점 허물어지는 디아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으로 인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디아나를 지켜보는 자신의 눈이 너무나 냉정하다 여겨졌다. 예전 같으면 함께 눈물이라도 흘려주었을 텐데 불쌍하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왠지 과거의 크리스틴이 되어가는 것 같아 몸을 부르르 떨던 크리스틴은 자 신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커다란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안타까움이 가득한 백작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딸아이가 겪고 있는 혼란을 이해하고 있었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세실의 죽음을 계기로 크리스틴은 서서히 변해갔다. 그런데 잊혀지던 과거가 현실과 이어져, 악몽으로 나타났으니 그 녀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독기를 뿜어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 거다. 애써 버리고자 했던 자신의 어두운 속마음이 다시 드러나는 두려움. 백작은 크리스틴의 얼굴에 가득 담긴 두려움의 근원을 그렇게 판단했다. 사실 완전히 역(逆)으로 해석을 해보면 백작의 생각은 정확했다. 크리스틴은 세실로 살아갈 때의 그 순후하던 마음과 지금 그녀가 느끼는 분노와 복수심, 타인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독심(毒心) 사이에 생겨난 괴리감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스스로가 변하고자 했으나, 막상 현실로 닥치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러한 심경의 변화들이 자연스러운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누구나 겪게 되는 혼란. 영혼과 신체의 나이차로 인해 조금 빠르게 자아성찰의 시기를 맞이한 크리스틴은 자신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앞으로도 계속 고민을 하게 될 터였다. 어찌 되었든 혼란스러운 얼굴로 백작에게 몸을 기대던 크리스틴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카민을 돌아보며 착잡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카민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옆에 앉아있던 카를로스 역시 얼굴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부자는 조금 전 크리스틴이 디아나에게 속삭인 말을 듣고 당황하고 있었다. 「모.이.라.는 네가 황태자를 노릴까봐 수를 쓴 거였어. 네가 카.민.님.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 을 그녀는 모르고 있단 말이지.」 '카민님...우리 아들?' '설마....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디아나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카민은 자신의 귀가 너무 밝 은 것을 원망했고, 카를로스는 얽히고설킨 사건이 단 하나의 오해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어이없어했다.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얼이 빠진 듯 생각에 잠겨있던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증명할 수 있니?"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을 불가능(不可能)으로 받아들인 디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어지는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들고도 뻔뻔하게 위로해주던 인물에게. 백작영애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복수를 할 수 있는 희망이 보였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영애.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넌 계속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돼. 그래도 괜찮아?" 미끼를 내던지는 디아나의 얼굴이 정말 뻔뻔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겨우 평정심을 되찾아가던 크리스틴은 이를 악물었다. 남작의 딸이 보여주는 태도에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사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지요, 뭐. 별로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구요." 비웃음이 담긴 대답이었다. 하지만 딸의 빈정거림에 백작내외는 가슴이 아려왔다. 크리스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에는 황태자 앞에서 절규하던 딸의 모습이 가슴속에 너무나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보려는 디아나를 일견 한 크리스틴은 고개를 돌리고 백작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딸을 꼭 안아준 백작은 며칠사이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야윈 것 같은 크리스틴을 번쩍 안아들었다. "아카데미 그만 두지 그러냐." 이제껏 가만히 있던 샌들우드가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염증이 가득했다. 그것은 크리스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는 정말 더러운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숨이 막혀. 더 있으면 너도 물들 거다. 가자, 그만두고 집에서 공부해라. 내가 직접 선생들을 찾아보마. 가자." 샌들우드의 말에 남작과 카를로스는 고개를 숙였고,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정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마. 더 좋은 곳이 있을 거야. 네게 맞는 곳이." 몬트리얼은 바이오니어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인정하는 일류 아카데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서슴없이 이곳 보다 더 나은 곳을 찾아준다 말하고 있었다. 면전에서 아카데미를 모욕하는 언사가 오가는 것을 듣고도 카를로스는 더욱 고개를 숙였고, 남작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반응을 둘러보던 크리스틴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는 백작부인을 보았다. "네가 선택하려무나." 크리스틴은 언제나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배려해주는 어머니에게 감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버지, 스승님..." "썩을! 그래 남겠다, 이거지? 그렇게 흙탕물에서 뒹굴고 싶은 거냐?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뭘 배운단 말이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저런 것들이 바글바글할 텐데 어떻게 견디려고 그러는 거야! 너도 배울래? 너도 저렇게 추악하고 더러운 벌레들처럼 자라고 싶은 거냐!" 익히 제자의 심성을 잘 아는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말을 막으며 펄쩍 뛰었다. 샌들우드가 난리를 피우며 선수를 쳐서 입을 막아버리자, 크리스틴은 뚱하니 볼을 부풀리며 백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스승님, 여긴 사람을 가르치는 곳이예요."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실.례.예요, 스승님." "쩝" 확실히 변하긴 변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는 디아나를 위해 샌들우드가 말한 '추악하고 더러운 벌레들'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일러주는 친절을 베푼 크리스틴은 키득거리는 카민을 째려보았다. 제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샌들우드는 이를 갈았다. "네놈은 누구냐! 보아하니 저놈하고 판에 박은 것이 아들인 것 같구나, 그래. 너! 거기 파란 머리, 너 말이다!" 손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은지 턱으로 카민을 가리키던 샌들우드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보는 소년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크리스한테 침 흘리면 죽.는.다. 명심해라." 장난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감정도 제대로 파악 못한 소년에게 엄중한 경고를 던진 샌들우드는 찔끔하는 카를로스 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들 교육 똑바로 시켜." "아...네. 어르신." 머리를 긁적이며 얼른 고개를 끄덕이던 카를로스는 눈치 없이 '애들은 취미 없어요.'라고 반박 하는 카민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자기가 크리스틴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 태에서 그녀를 위해 아비의 명까지 어기며 이를 갈던 아들이 과연 제 감정을 깨닫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 지는 하늘만이 아실 일이었다. '꼴에 뭐, 애들은 취미 없어? 한심한 놈' 이미 마음이 쏠렸다는 게 뻔히 눈에 보이는구만 덜떨어진 반응으로 일관하는 아들을 노려봐준 카를로스는 눈을 부라리는 샌들우드를 보며 목을 집어넣었다. 제자에게 무안을 당한 화풀이를 엉뚱한 곳에 풀어버린 샌들우드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백작내외는 천천히 디아나에게 시선을 모았다. 백작내외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이는 제가 저지 른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뉘우치지 못하고, 샌들우드의 말에 엄청난 굴욕감을 느끼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저렇게 한심할 수가...' 주제파악을 못해도 저렇게 못할 수는 없었다. 내심 저런 아이를 딸이라고 애지중지 키웠을 남작을 측은한 시선을 바라보던 배너 백작은 은근 히 압력을 넣었다. '자네가 해결하지?' 계속 망신을 당하고 싶냐는 백작의 배려어린 침묵에 한숨을 길게 내쉰 남작은 무거운 몸을 일으 켜 디아나에게 다가갔다. 잔뜩 굳은 얼굴로 다가오는 아버지를 보며 잠시 몸을 떨던 디아나는 애써 애처로운 눈빛을 지으며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아로니에 남작의 실망감은 대해보다 넓고 하늘보다 컸다. "다 이야기 하렴." "아...아버지..."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라고 했다." "아..저...제가 잘못알고 있었나 봐요, 하..하지만! 배...백작영애가 도와만 준다면...그렇게만 하면 다 해결할...수 있어요, 아버지! 굳이 제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잖아요." 디아나는 더듬더듬 겁에 질린 듯 변명 아닌 변명을 해나가며 크리스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에 비웃음이 담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직 차가운 분노를 드러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남작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을 뿐이었다. "설명을 하라고 말했다." "아..아버지! 안 되요, 그럴 순 없어요. 싫어요.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그냥 넘어가주세요. 제발..." "....그렇다면 죽어라." "......!" "난 너를 이렇게 키우지 않았다. 비겁한 것도 정도가 있어. 넌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짜리가 권력에 휘둘려 사람을 모함하고 그것도 모자라 칼까지 빼들었다. 그리고 이용할만하니 손을 내밀었지. 난 살아오면서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타협하지 않았다. 너는 우리 집안의 수치다. 자결해라." 챙그랑~ 남작은 허리춤에 걸려있던 단도를 빼내어 디아나의 앞에 내던졌다. 1피텐 정도 되는 길이에 늘씬한 몸체를 자랑하는 단도의 손잡이에는 남작가의 표식인 검은 늑대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이건...." 아로니에 가문의 가주에게만 전해지며 단 한번도 피를 묻힌 적이 없다고 알려진 신물이었다. 가문이 멸할 위기에 처했을 때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자결을 하라는 의미에서 만들어 졌다는 물건. 그것이 디아나에게 이를 드러냈다는 것은 디아나의 목숨 뿐 아니라 가주의 죽음을 의미했다. 남작은 그의 뒤에서 일련의 상황을 주시하는 배너 백작이 언젠가는 반드시 그의 가문을 박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리 선택한 것이었다. "네가 자결하면, 크리스틴 영애의 명예는 내가 되찾아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널 따라가마." "으...." 디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스스로 칼을 줍지 않으면 대신 해주겠다고 말하는 굳센 의지가 담긴 눈을 보며 부들부들 떨던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민을 보았다. "이야기...하겠어요. 하지만...선배님은...이 일과 상관이 없으니..." "불가(不可)하다." 디아나의 요청을 단 한마디로 묵살한 카를로스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것에 대해 짜증이 일었다. 그토록 사람을 괴롭히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일의 실체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민은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나 하게." 카를로스의 차가운 명령과, 배너 백작과 이름모를 마법사의 살기,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아비의 얼굴이 디아나에게 어서 입을 열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카민이 있는 곳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체념어린 눈으로 고개를 돌린 디아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크리스틴을 직시했다. ************************************************************************************** 아 실수했습니다. 이번 편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마구 써서 10장을 만들었더니...이제 4편이더군요. ㅠ ㅠ 그리고 이상하네요? 아침 9시 30분부터(이때는 자고 있었지요) 2시까지 조아라가 점검 중이란 메세지가 뜨던데요. 그래서 뒤에 내용 좀 긁적이면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왔더니.. 님들은 어떻게 리플을 다셨나요? 0 0 어찌 되었든... 오래 기다리셨으니...사과도 드릴겸 한 편 더 올릴께요. ( _ _ ) 죄송합니당~~~(그러나 이것은 제 잘못이 아니예요!! 왜! 난 튕긴건데.....) 흑 행복하시어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과거는 악몽이 되어... 5. 크리스틴은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하건 상관없다는 듯이 백작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었다. 정말이지 편안한 얼굴이었다. 디아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걸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웃음이 나왔다. 피식 실소를 짓던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어떤 일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황금빛 눈동자에 어리는 수많은 감정들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저...전...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약간의 연극을 준비했어요. 처음...그 사람을 봤을 때 전 그것이 운명임을 알았지요. 그런데 제 존재는 너무나 미비했기에 시선조차 마주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디아나의 고백은 첫마디부터가 경악이었다. "모...모이라 아가씨께 의논을 드렸지요. 아..아가씨는 기꺼이 도와주신다며 수면제를 탄 음료 를 보내주신다고 했어요. 약물에 중독이 되어 쓰러지면...아카데미의 시선이 온통 저에게 쏠릴 것이고 그중에는 그...그분의 시선도 있을 것이라고...하...하지만 아..가씨가 한 짓임이 드러 나면 안 되니, 아카데미에서 가..가장...미움 받고...덜 떨어...모자라는 몬트리얼의 수...그. ..아무튼 그런 짓을 해도 모두가 믿어줄 만큼 어리석은...인물을 이용하자고." "뿌드득" 백작의 이가 부서질 듯 마찰을 일으켰다. '아예 가루를 내서 씹어 먹어 줄테다!' 자신 만큼이나 통통한 몸매를 자랑하는 어떤 인물을 떠올리며 이를 갈던 백작은 아내의 손길에 안정을 되찾고 귀를 기울였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래서 애들은 애들이라 하나보다. 정말이지 그 사이에 끌어들인 것이 크리스틴만 아니라며 배너 백작은 배를 잡고 웃으면서 이야 기를 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잠이 든 듯 품에 안겨 고른 숨소리를 내쉬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 어주며 백작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의 하녀는 약을 받아 음료수에 타서 크...백작영애의 하녀를 찾았어요. 그걸 나에게 전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에게 그것을 전해주었지요. 애초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 시킨 일에 하녀 따위가 거절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전...수면제가 잔뜩 든 음 료수를 마시고 잠에 빠졌어요. 그런데...일어나보니..이...이렇게...아가씨께서는 분명히 수면 제를 넣으셨다고...저...백작영애가 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중간에 독을 넣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디아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 경멸이 스쳐갔다. 고작 남자의 관심을 사기위해 그런 자작극을 벌리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평소에 그들이 그렇게 비웃었던 학생을 희생양으로 끌어들였다는 이야기였다.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잔인함에 소름이 끼쳤다. 만약에 크리스틴의 방에서 독약이라도 나왔다면? 증인이라도 나타났다면? 카를로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틴이 백작가의 영애라는 것이 이토록 다행스 럽게 느껴진 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안도감은 조금 이른감이 없잖아 있었다. 왜냐하면 이야기 속에서 딸이 등장할 때부터 눈에 핏발을 세우기 시작한 백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백작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크리스틴을 안은 상태 그대로 몸 을 일으켰다. 그의 피둥피둥 살이 찐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대신 디아나에게 고정되어 있는 작은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파란 점을 두개 콕 찍어놓은 것 같은 눈빛은 그녀의 전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으며 잔인한 광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학장." 이제 더 이상 존대고 뭐고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 아카데미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적이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평소에 크리스틴의 행동이 조금이나마 착실했다면 그녀가 이용당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백작은 크리스틴의 아버지였다. 하기에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의 분노를 인정해야만 했다. 어이없는 희생양.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 카를로스는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백작님. 설마 아이들이 이런 일을 꾸민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독을 넣었다고 우리 딸을 추궁했었지 않나!" "........." "하나가 할 수 있으면 다른 것들도 할 수 있다는 말이네. 자네는 평소 우리 딸의 모자람만 보고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묵인한 거야. 그 책임...꼭 물어야 할 것이네." 카를로스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이 옷을 벗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탓이다. 남작은 자신의 자식 하나 때문에 명문 아카데미까지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하자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 제가 자식을 잘못 가르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져야지. 그런데....혼자서? 자네 목숨이 수백개라도 되나? 기다리게. 순서가 돌아갈테니." ".......!" 이번에는 남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배너 백작의 콩알만한 눈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있었다. 백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직위에 있으면서도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배너 백작의 뚱뚱한 몸집과 과장된 태도, 돈에 집착하는 모습만 보고 그를 잘못 판단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결코 돈만 좋아하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분노 하는 배너 백작은 마치 거대한 해일(海溢)보다 더 큰 존재로 비춰지고 있었다. 겨우 5피텐이 조금 넘는 작은 키에 땅딸막한 체구를 가진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는 장신의 사내 들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다가 옷깃을 당기는 작은 손길에 얼른 살기를 거두었다. "오, 일어났느냐?" 딸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백작은 자신을 올려다보 는 크리스틴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 "으...응?" "애들 싸움에 어른들이 끼어들면 보기 추해요." "끄으응~" 백작을 대신해 샌들우드가 신음소리를 냈다. 슬립(Sleep)이라도 걸었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를 하던 그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반박을 하려는 백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제껏 지켜본 바로, 백작이란 인물은 강자들에게는 대쪽같이 뻣뻣하나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아내와 딸이라면... '게임이 안되지...끌끌끌' 하지만 백작은 고집을 부렸다. 이미 마음먹은 것,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베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그러면 공작만이라도..." 공작이 뉘집 개 이름이라도 된다는 듯 아무렇게나 내뱉던 백작은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 지는 따뜻한 손길에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백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떻게 해서든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크리스틴 의 눈에 담긴 진한 애원을 뿌리치고 뒤에서 무언의 압력을 넣는 아내의 손길을 거부하기에는 그 의 심장이 너무 약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구원을 받게 된 카를로스와 남작은 눈을 반짝이며 백작의 입을 주시했고,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크리스틴의 앞날을 훤히 밝혀주는 빛이 되리라 맹세를 했다. "너는...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냥 묻어 둘거냐? 용서할것이냐?" 백작의 체념어린 목소리에 작게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디아나를 쳐다보 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마무리를 지어야한다. "전...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 "오호~!" 크리스틴의 단호한 목소리에 찬탄을 하던 샌들우드는 자신을 째려보는 백작부인의 사나운 눈초 리에 입을 닫았다. 잠시 환호성을 올렸던 사람들은 다시 비탄에 빠진 얼굴로 크리스틴을 바라보 았고, 백작은 희망에 찬 얼굴로 딸의 말을 기다렸다. "제가 나서지는 않을 거예요." "응?" "전 이번 일에 나서지 않을 거라구요." ".........."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크리스틴은 황금빛 눈동자를 외면하면서 카를로스를 쳐다보았다. "제가 어떻게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한나가 이야기 해줬어요. 모이라가 하녀와 나눈 대화를...디아나에게 먹일 약을 사오라고 모이 라가 하녀에게 명령하는 것을 들었던 거죠.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전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모이라의 시종이 한나를 찾았을 때 전 예상할 수 있었지요. 아...날 이용 하려는 거구나.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나에게 그대로 하라고 이야기했죠." "어째서 가만히 있었느냐? 왜!" 백작의 화난 목소리에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몸에 해가 되지 않는 약을 쓸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짝사랑을 하는 친구를 도와줘야 겠지? 모이라는 그녀의 하녀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과연...그 아이들 생각대로 일이 풀려나갈까? 친구는 누구지? 모이라에게 친구라 할 수 있는 아이가 있었나?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쓸까? 뭐 그런 거지요. 전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언제든지 스스로를 변론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왜 디아나를 모른다고 했느냐?" 카를로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크리스틴의 푸른 색 눈빛이 검게 물들었다. "전...디아나를 몰랐어요. 얼굴은 몇 번 봤지만 그저 모이라의 추종자 중에 하나였을 뿐 제게는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한나가 찾아갔던 인물이 독에 중독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깨 달았지요. 아..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버림을 받았구나." "헉!" 디아나가 거칠게 숨을 들이켰지만 어느 누구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크리스틴의 입만 주시하고 있었다. "버림을 받았다고?" "네. 그제서야 전 그 아이가 짝사랑 한 상대가 누군지 짐작을 할 수 있었어요." "누구냐?" "안돼!" 남작의 질문에 이어 디아나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크리스틴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때, 아카데미에는 여학생들이 한 번쯤이라도 만나봤으면 하는 사람이 와 있었어요." "아.......!" "도대체 누구야?" 백작의 신경질적인 말에 카를로스가 나섰다. "황태자 전하입니다. 그 때 저희 아카데미를 시찰하고 싶으시다고 친히 방문을 하시고 이레를 머물다 가셨지요." "그럼...?" "모이라는 디아나가 황태자 전하의 이목을 끌기 위해 도움을 구한다고 생각을 한거죠. 그래서 그녀는 고민에 빠진 디아나를 돕는 척 하면서 정적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없애기로 결정 을 내린 거예요." "사람...들?" "네. 하나는 주인을 물려고 달려드는 개, 정정하죠. 자신의 추종자인 디아나." 남작과 디아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철들 때부터 주제파악도 못하고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떠들고 다녔던 어리석 은 인물. 그렇게 두 사람이 선택되었죠." "...........!"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크리스틴은 자신을 꼭 껴안아주는 백작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학장실로 불려와 추궁을 당했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제가 말을 한들 믿어줄 사람은 없었어요. 그리고 고민을 했죠. 왜 디아나는 스스로 화를 자초한 걸까? 모이라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왜 그랬을까?" "혹...?" 남작의 의혹이 깃든 음성에 디아나는 서둘러 얼굴을 가렸고, 카를로스와 카민의 얼굴이 인정사정 없이 일그러졌다. "네. 디아나가 짝사랑하던 사람은 황태자 전하가 아니었죠. 그는..." "됐다." 황급히 크리스틴의 말을 끊은 카를로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디아나를 일견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런 게 며느리가 된다면 샐던가는 망한다.' 솔직히 정말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으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래서...넌 어떻게 하려는 거냐?" "저요?" 백작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크리스틴이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생각도 안했군...' '그렇군...'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제야 고민에 빠져든 소녀를 보며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정말이지 단순무식의 대명사 크리스틴 폰 배너의 면모를 확실하게도 증명해 보인다 생각을 하던 카를로스는 문득 천진난만한 소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응?' 순간 눈이 마주친 카를로스는 바다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에 스쳐가는 번쩍임을 놓치지 않았다. 카를로스의 경악에 찬 눈을 보고 살짝 눈웃음을 치던 크리스틴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백작의 품 에 고개를 기대고는 예의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가만히 있어도 학장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으로 믿어요." 카를로스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오싹함을 느꼈다. 크리스틴 폰 배너는 결코 모자라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들이 백작의 겉모습만 보고 오판을 했듯이, 그의 딸 역시 진실한 면모를 숨겨둔 능구렁이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이나 유급을 한 인물이 저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 성설이었다. 아이의 영악함을 보고 숨이 넘어가던 카를로스는 쏟아지는 시선에 얼른 생각을 접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 "모이라의 하녀를 잡아라." "네?" "그 모이라라는 아이 몰래 하녀를 잡아들여 추궁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공작은 내가 책임진다." 샌들우드가 나섰다. 그는 드디어 크리스틴의 앞길을 평탄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때문에 매우 흡족해 하고 있었다. "하녀를 데리고만 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정 안되면 기억을 읽어 내거나, 고문을 하면 된다고 결정을 내린 샌들우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카를로스에게 압력을 가했다. "약은...마을 어귀의 약화상이나, 잡화점에서 샀을지도 모르지요." "아!" 크리스틴의 작은 중얼거림에 카를로스와 남작의 눈이 번쩍 떨어졌다. 약을 구한 것이 크리스틴이라는 생각에 은밀한 곳만 뒤져왔던 남작 역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떠올리며 손뼉을 쳤다. 크리스틴의 명석한 두뇌에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지를 때 단 한 사람, 샌들우드만은 어두운 얼굴로 제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허비되기는 했지만, 학장실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한결 가벼운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일어날 수 있었다. 배너 백작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지만 이번에 크리스틴을 구타한 아이들 모두 일정기간 정학을 시키고, 모이라의 죄를 밝힐 수만 있다면 아카데미에서 쫓아내겠다는 카를로스의 말에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마차에 오르면서 끝까지 지켜보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도움이 필요하 거든 언제든지 이야기를 하라고 은근한 압력을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후 계속 울고 있던 디아나는 남작의 손에 잡혀 치료실로 끌려갔고 샌들 우드는 크리스틴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사람을 시켜 마을에 있는 모든 약재상과 잡화점을 탐문수사 하라고 지시를 내린 후, 학장실로 돌아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카를로스 부자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 탓이다." ".........." "내가 널 너무 잘난 아이로 낳은 것이 잘못이다." ".........." "앞으로는 자중해라. 지천에 깔린 게 여자라고 가르치기는 했다만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난 세상을 헛살았어.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게다. 가능한 한 여자를 멀리하고 될 수 있는 한 웃지 마라. 쳐다보지도 마라. 얌전하게 독수공방하다가 이 아비가 골라주는 착하고, 순진하고, 얼굴이 좀 안되는 애랑 결혼하도록 해." "............." 삶의 회의가 느껴지는 카를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카민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마법사 와 함께 사라져버린 크리스틴을 떠올리며 따끔거리는 가슴을 거머쥐었다. "그 아이가 한 짓이냐?" 반짝이는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의 옆에는 크리스틴이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기대고는 멍하니 사티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야..." "네, 스승님. 크리스틴이 한 짓이에요." "........" 크리스틴의 작은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린 샌들우드는 아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야기 해보렴." "모이라는...디아나가 황태자를 노린다고 생각하고는 샤우트(보통 식용으로 쓰이나 샤우트의 뿌리는 복용하면 전신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며 일 시간 혀가 마비되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다)를 구해오라고 했어요. 아마 자신의 것을 노린 디아나를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이 었겠지요. 그런데...그걸 들은 크리스틴 영애는...하녀가 찾아간 잡화상에 사람을 보내어 주문을 바꾸어놓았어요. 플래진져로 말이에요." "플래진져?" "네. 한 스푼을 먹으면 의식을 잃고 두 스푼을 먹으면 시력을 잃고 세 스푼을 먹으면 목숨을 잃는다는 독초지요." "그런..." "그걸 1파운드나 주문을 했고, 하녀는 멋도 모르고 샤우트가 아닌 플래진저를 넣었어요. 주문했던 것 보다 양이 많았지만 잡화상 주인이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버렸지요. 그리고 증거 를 남기지 않으려고 1파운드의 플래진저를 몽땅 넣었어요." "....다행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하녀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겠지. 그런데 그 얼굴은 어떻게 된 거냐?" 샌들우드는 마법사였다. 디아나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것이 크리스틴의 말대로 독기가 뭉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독기가 몰려 그리된 것이라면 독을 치유할 때 없어져야만 했다. "...크리스틴 영애가 노렸던 것이 바로 그거였어요." "뭐라고?" "플래진저가 유명한 이유는 독초라서가 아니라, 부작용 때문이에요. 디아나의 얼굴은 플래진저 를 먹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에 불과한 거죠."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담담한 말을 들으며 불과 14살에 불과했던 백작영애의 심성이 얼마나 악독했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면...치료를 할 수는 있는 거냐?" "네." "흠..." "도대체...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한나라는 아이는 분명 크리스틴의 하녀 였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뒤집어쓸 줄 알면서 그런 짓을 한거지?" 샌들우드의 중얼거림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얼굴은 몰랐지만 모이라의 친구는 크리스틴의 적이라는 공식이 성립한 거예요. 더군다나 디아 나는 모이라가 준...것을 먹었으니 당하고 나면 분명 그녀를 배신한 모이라에게 칼을 들이밀 것이라 생각을 했죠. 일석이조. 은근히 둘 사이를 갈라놓아서 자신을 부각시킨다. 죽어도 좋 고 살아도 잘만 이용하면 성공이라 생각했던 거죠. 잡화점에 사람을 보내어 약초를 산 사람을 알아내면 모이라로 밝혀질 것이고 디아나는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면 크리스틴은 자작극 에서 비롯된 중독사건의 가련한 이용물이 되어 사람들의 환심을 사게 된다.... 크리스틴 영애는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지, 미움을 사고 있었는지 몰랐어요. 그걸 뒤늦게 깨닫고 도망치듯 아카데미를 뛰쳐나왔죠." ".....그런 짓을 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널 모함했단 말이구나." "........." 끊임없는 악행의 연속이었다. 혀를 끌끌차며 시리도록 푸른 호수를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문득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래 넌 여기 계속 남아 있을 것이냐?" "네." "이유가 뭐냐?" "배우고 싶어요." "그건 어디서든 할 수 있다."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 "전 오늘 제일 큰 사건을 해결했어요. 이제 남은 것은...제 자신을 위해 갈고 닦는 일 뿐이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도망치는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크리스틴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보란 듯이 우뚝 서 보일 거예요. 그것이 평민으로 살면 서 이용만 당했던 세실리아의 마지막 소망이고, 어머니의 바람이에요." 처음으로 내심을 털어놓은 크리스틴은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로 샌들우드를 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의 얼굴위로 겹쳐지는 검은 머리에 흑요석 같은 눈을 가진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짓던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할 수 있을 거다. 네가 원하는 길로 가려무나. 그 뒤에는 항상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샌들우드의 축복어린 말에 밝게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푸르른 하늘 위에 붉은 빛을 발하며 날개짓을 하는 카사를 보며 두 팔을 뻗었다. 쪼로롱~ 언제나 주인의 곁을 지키려는 듯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몸을 감추고 있던 카사는 두 팔을 벌리고 이름을 불러주는 크리스틴의 품속으로 내려 꽂히듯 날아들었다. ****************************************************************************************** 음...모이라는 다음편에 등장합니다. 혹시 기대하셨나요? 에헤.....에..넘어가죠.(쉿~ 비밀입니당 > <) 오타 찾느라 고생하시지요? 아마 이번 두편은 기대하셔도 좋을 듯...콜록 오타는 관두고 속도를 올려달라는 幻魔府主 님의 명을 받들어...에헹... 그리고 코코님, 뭐하다니요? 썼습니다! 글 썼어요. 이번편 마무리해서 올리려고 죽어라 타자를 쳤다구요. 흑. 덴당... 어제 비축분 모조리 올리는 바람에 후루츠고 유키고 다 버려두고 밤새 글만 썼는데...흑흑 12장 내리 쓰고 수정하는게 쉬운줄 아세요 흑, 코코님 미워잉~~~~~ㅠㅠ 도도도도도도도도돗~ 철푸덕! (크허억~!) 흑흑 행복하세영~~~~~~~~~ (오늘은 하늘이 두쪽 나도 후루츠를 독파하리라~~~!! 아잣!)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유유상종(類類相從) <<진실은 드러나고...>> 1. 남작과 함께 치료실로 갔던 디아나는 젊은 신관에게 치료를 거부당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100일 기도를 드리러가야 하기 때문에 치료를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디아나의 얼굴을 슬쩍 한 번 봐주고는 이내 고개를 숙인 신관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감히 신의 아이에게 칼을 휘두르고 어디에서 치료를 받으려는 것인가!' 뒤돌아선 신관의 얼굴은 신을 모시는 사람답지 않게 분개한 표정이었다. 그도 인간이었다. 절대로 마음이 가지 않는 환자를 신의 사자라 해서 치료해주느니 차라리 신관을 때려치우 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카루스도 아들의 분노를 이해해주고 용납해주었다. 기도실로 들어가 바닥에 엎드린 신관은 온몸을 감싸 안는 따뜻한 기운에 자신의 망종이 용 서받았음을 깨닫고, '이카루스의 아이'를 위한 100일 기도에 전심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치료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남작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전을 찾아갈까 하다가 풀이 죽은 아이를 보고는 다시 학장실로 향 했다. "어...그랬습니까? 이것 참..." 신관이 치료를 거부했다는 말을 들은 카를로스는 내심 백작이 특별히 모시고온 신관이라 그런가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헛기침을 하며 고민에 빠져있던 카를로스는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아카데미에도 의사가 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카를로스의 말에 반색을 표한 남작은 다시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딸의 손을 잡고 하인의 안내를 받아 선생들이 머무는 숙소로 찾아갔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라. 진작 치료를 받았으면 이런 일은 일 어나지 않았을테니." 아로니에 남작은 딸을 위로하기보다는 따끔한 충고의 말을 내뱉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 장이라도 집으로 끌고가 벌을 주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일이 완전히 해결 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남작은 어쩔 수 없이 철딱서니 없는 딸에게 야단을 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작의 차가운 말에 더욱 고개를 숙이던 디아나는 저 멀리 걸어오는 지저분한 장신의 남자를 보며 얼굴을 돌렸다. 딸의 버릇없는 행동에 짐짓 미간을 찌푸리던 남작은 거칠 것 없는 걸음 으로 다가와 고개를 까딱하는 산적두목에게 예의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데니얼 만 아로니에라고 합니다." "마커스 투르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약초학을 가르치는 마커스 투르벨이었다. "저...죄송하지만 제 딸아이의 얼굴을 좀 봐주십사하고..." "네?" "예전에 독에 당했는데 여독이 남아 얼굴이 좀 상했습니다. 학장님께서 선생님께서 의술이 뛰어나시다고 소개를 해주시더군요. 시간이 허락하신다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정조의 말이나 비굴해보이지 않았다. 당당함을 버리지 않고도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남작에게 감탄을 하던 마커스는 검은 망사를 둘 러쓰고 있는 학생을 보았다. "걷어봐라." "......." 냉큼 반말을 하는 마커스의 태도에 모욕을 느낀 디아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망사를 살며시 들어올렸다. "흠...독이라고?" "아닙니까?" "글쎄...낯이 익긴 한데...이건?" 두툼한 손을 내밀어 디아나의 얼굴에 난 혹들을 마구 눌러보고 당겨보던 마커스가 머리를 긁 적였다. "이런...왜 이렇게 될 때 까지 놔 둔거냐? 일찍 치료를 했으면 금방 나았을 텐데...너! 그러고 보니 네가 디아나라는 아이였구나."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마커스가 딸의 이름을 부르자 남작이 의문을 표시했다. 그의 반응에 크게 웃으며 손을 휘젓던 마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독에 당하고도 치료를 받지 않는 학생이 있다고 예전에 있었던 신관이 투덜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매일 검은 옷에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학생을 몬트리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치료를 거부한 것을 알고 있던 마커스는 디아나의 연출을 비웃고 있었다. 스스로를 동정 받는 존재로 몰아가는 학생이 얼마나 어리석게 느껴졌는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해도 배를 잡고 뒤집어졌었다. 그러니 막상 그 소문속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자 실실 웃음이 터져 나 오는 것이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정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는 듯 위아래를 훑어보는 마커스의 눈길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 디아나는 얼른 망사를 내리고 몸을 비틀었다. "아버지 전 신전에서 치료를 받고 싶어요." '이런 사람에게 치료를 받기 싫어요'란 말을 꿀꺽 삼킨 디아나는 자신의 가느다란 팔을 잡아 옆으로 끌어당기는 강한 힘에 어쩔 수 없이 마커스의 얼굴을 마주보아야 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 딸이 철이 없어서..." "뭐 어린거야 여기 있는 아이들이 다 그렇지요." 머리를 긁적이며 아로니에 남작의 사과를 받아들인 마커스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자, 제 약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일주일분 약을 지어드리지요." "일...일주일이요?" 디아나의 떨리는 음성에 마커스가 윙크를 날렸다. "뭐 1년이나 그러고 있었는데 며칠 더 가리고 다닌다고 하늘이 뒤집어 지는 건 아니지 않느냐? 1, 2주면 될 꺼야. 따라와라. 따라 오십시오." 장난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냉랭한 어투로 디아나에게 면박을 준 마커스는 먼저 등을 돌리고 약제 실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따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디아나는 남작의 싸늘한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겨야 했다. 교사들을 위한 처소 옆에는 임상 실험을 할 수 있는 건물이 붙어 있었는데 마커스가 사용하는 약제실 역시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꽤 큰 방에는 수천 개의 약병들이 알록달록 오색빛을 자랑 하며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방 중앙에 놓인 거대한 책상위에는 수많은 책들과 시약병들이 어 지럽게 널려있었다. "아무 곳에나 앉아있어라,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저 차나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네. 부탁드립니다." 남작의 대답에 마커스는 방 한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간이 열기구를 이용해 차를 끓여 책상위에 내려놓고는 즐비하게 늘어선 약병들 중에 몇 가지를 골라 조금씩 섞기 시작했다. "그런데 범인은 잡았습니까?" "네?" "플래진저를 저 아이에게 먹인 범인 말입니다." "....플래진저요?" 남작의 반문에 마커스가 도리어 어리둥절해 했다. "저 아이 얼굴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플래진저 뿌리를 먹은 사람들은 다들 저렇게 얼굴이 뒤틀리고 물 혹 같은 것이 생겨나죠." "처음 듣는 것인데...그것이 뭡니까?" 남작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마커스가 쥐고 있던 약병들을 내려놓고는 의자 하나를 끌어 당겨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 왜 저렇게 된지도 모르고 저한테 왔단 말입니까?" "아...그것이...신관이 바빠 치료를...." "......." "죄송합니다." 남작의 낭패어린 사과에 손을 흔들어 보인 마커스는 애써 기분 나쁜 표정을 지웠다. "우리 치료사들이야 언제나 신관들보다 대접 못 받는 게 현실인데요, 뭘.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아! 플래진저라는 건 말입니다. 커다란 노송나무 밑에서만 자라는 한해살이 풀입니다. 먹을 것이 없거나, 입에 풀칠하기 힘든 빈민들이나 평민이 그것을 뜯어 끼니를 연명하지요. 맛도 괜찮고 몸에도 좋아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 딸은..." "제가 드린 설명은 플래진저의 줄기와 잎을 이야기 한 것이고, 뿌리는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먹을 경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유독 사람이 먹으면 독성을 나타내는 특징이 있지요. 뭐 염증 치료에 효과가 있어서 우리 치료사들이나 연금술을 하는 마법사들이나 쓸까 플래진저 뿌리는 먹지 못합니다. 하지만 종종 멋모르고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백이면 백 다 저렇게 얼굴이 망가지지요. 게다가 정제한 것은 구하기는 힘들지만 돈은 몇 푼 안합니다. 때 문에 정말 원수진 일이 있거나, 질투 때문에 뿌리를 정제한 것을 은밀히 구해다 쓰는 사람들 도 있지요. 그러고 보니...저 아이 어디 원수진 일 있습니까? 죽이려고 했으면 독을 쓰지 일 부러 플래진저를 구해쓰지는 않거든요. 얼굴을 망가뜨리려고 작정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핫핫하...하..." "............" 싸한 바람이 약제실을 휘몰아쳤다. 자신의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남작을 보고 있던 마커스는 괜한 말을 했나 생각을 하며 약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플래진저는 흔히 평민 여자들이 자주 쓰는 약이었다. 보통은 치정에 얽힌 일에 많이 사용되는데 목표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눈이 멀게 만들거나 얼굴을 망가뜨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플래진저 정제물은 약 제상들 사이에서도 꽤나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품목이 되었고, 치료사들은 죽어라 연구에 매달려 결국 해독제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 해독제는 정제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로서는 정말 마음씨 좋은 의사나 신관을 만나지 않는 다음 에야 플래진저 뿌리로 인한 독성을 없앨 방법이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물약과 얼굴에 바르는 고약을 만들어낸 마커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아십니까?" "......"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아이가 독을 먹였다고 하던데...사실입니까?" 마커스의 질문에 남작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제 딸이 오해를 해서 그런 소문을 만들어낸 겁니다. 진범은...곧 잡히겠지요. 더군다나 선생 님 덕분에 독초의 이름까지 알아내었으니..." "....아, 그렇군요." 내심 수업시간에 만났던 크리스틴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마커스는 뛸 뜻이 기뻤다. 크리스틴은 약초 수업뿐 아니라 의학수업도 듣고 있어, 원하기만 한다면...아니 머리만 따라준 다면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로 키워볼 생각이었다. 귀족가의 여식이 치료사가 되면 정말 세상 살기가 편안해 질것만 같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잘됐군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열성을 다해 별로 효과가 없는 약을 만들어낸 마커스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는 디아나에게 두 개의 약병을 건네주었다. "보라색은 자기 전에 얼굴에 바르고, 파란색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두 방울씩 물에 타서 마시도록 해라."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약병을 받아 쥔 디아나는 인사도 없이 벌떡 일어나 약제실을 나가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버릇없게 구는 딸 때문에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던 남 작은 자신의 품안에 있던 가죽 주머니 하나와 작은 메달을 꺼내 마커스에게 내밀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치료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가문의 인장인데 혹시나 도움이 필요 하시면 언제든지 찾아주십시오. 가진 것이 별로 없어 이런 것 밖에 드릴수가 없군요. 죄송합 니다." 검은 늑대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진 메달을 받아 목에 건 마커스는 흐 뭇한 얼굴로 가죽주머니를 받아 챙겼다. "워낙 오래 방치를 해서 치료하는 데 시일이 걸릴 겁니다. 정 안되면 신전에 찾아가셔도 되고요." "아...아닙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조소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마커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 남작은 이번 일만 해결되면 정말 딸 교육부터 다시 시켜야겠다는 맹세를 중얼거리며 약제실을 벗어났다. 남작이 떠나고 약제실에 혼자 남은 마커스는 목에 걸었던 메달을 빼서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쨍그랑~ "웃기는 것들. 어디 그 약 가지고 한달을 발라봐라, 없어지는가. 킬킬킬. 저런 말종도 자식이 라고 배 아파 가며 낳은 남작부인이 불쌍하다, 퉷!" 키득거리며 디아나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던 마커스는 더럽다는 듯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는 의사였다.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셀 수도 없는 많은 환자들을 잃었다.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든 사람들은 약 살 돈이 없어 병이 들어도 변변찮은 치료도 한 번 받아 보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무능력함에 얼마나 비탄에 빠졌었는지는 하늘만이 아실 일이었다. "꼴에 귀족이라 이거지...큭큭큭" 부모 잘 둔 덕에 언제든지 신관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주제에 동정심을 사기 위해 치료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이를 갈았다. "더러운 것들!" 스스로가 가진 축복을 과신하며 배부른 줄 모르고 살아가는 디아나를 마음껏 욕하며 마커스는 신경질적으로 약병을 정리했다. "젠장! 어디 가서 신관이나 붙잡고 치료를 받겠지. 빌어먹을! 더러운 세상!" 신관만 아니라면 치료를 한답시고 돈이나 뜯어내며 몇 달은 족히 고생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의 의술은 아카데미에서도 평판이 자자했고, 플래진저의 독성을 없앨 수 있는 비법은 그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 원체 돈이 되는 약이라 그것을 발명한 사람들은 자신의 비법을 남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마커스도 우연한 기회에 혼자 연구를 해서 알아낸 방법이었다. 버르장머리라고는 약에 쓸려도 없는 디아나를 혼내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마커스는 죄 없는 책들을 집어던지듯 정리를 하며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신전에서까지 치료를 거부당해 울상을 짓고 찾아온 디아나를 맞이하며 마커스는 하늘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실 이카루스를 향해 경배를 드렸다. '앞으로 제 수익의 10%는 무조건 신전에 기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카루스님!' "앞으로 아로니에 남작가의 치료는 무조건 거부하라!" 이카루스의 아이에게 칼을 휘두른 이가 남작가의 여식이라는 말이 전국에 있는 이카루스 신전에 전해지는 데는 불과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파견 나갔던 신관이 전한 소식을 듣고 광분한 대신관의 명령으로 마커스는 그의 소원대로 남작에게서 거액의 치료비를 뜯어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약속대로 수익 중 10%를 가장 가까운 신전에 기부했고, 이카루스 신전에서는 행복한 마음으로 비가 새던 지붕을 고치고 구호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음..." 어두컴컴한 방안, 몬트리얼의 학장 카를로스는 깊은 사색에 잠겨 간간히 신음성을 내고 있었다. "이거야..원...헉!"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긁적이며 고민에 빠져있던 카를로스는 인기척도 없이 방 한가운데에 나타 난 마법사를 보며 경기를 일으켰다. 심장마비로 급사할 뻔한 위험을 간신히 넘긴 카를로스는 식 은땀을 닦아내며 울그락불그락하고 있는 샌들우드에게 사정조로 애원했다. "어르신...제발 문으로 다니시면 안 됩니까? 저건 멋으로 달아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오고 가 는데..." "도대체!" 주절주절 한탄을 하는 카를로스의 말을 냉큼 잘라낸 샌들우드는 노기가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를 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모이란지 닭모인지 하는 것을 내버려 둘 것이냐!" "저..." "증인도 있겠다! 증언도 들었겠다! 그 하녀가 자백까지 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이냐! 냉큼 고하지 못할까아~!" 콰앙! 쩌저적 말을 끝내며 마무리로 마법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친 샌들우드는 세계수 나무의 강도를 이기지 못해 금이 가는 바닥을 힐끔 내려다보고는 한발자국 물러났다. 나타날 때마다 대리석 으로 만든 바닥을 박살내는 샌들우드를 보며 이마를 짚은 카를로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 개를 흔들었다. "그게...모이라가 극구 부인하고...하녀도 자신은 수면제를 주문했을 뿐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샤우트다." "아, 네. 샤우트..." "그래서?" "그래서...플래진저를 판 곳을 알아내야 하는데...찾을 수가.." "없어?" "찾았습니다. 찾긴 찾았는데 로먼에 있는 모든 약재상과 잡화점에서 플래진저를 팔았답니다." "......." 볼을 씰룩거리며 카를로스와 잠시 눈싸움을 하던 샌들우드가 손을 휙 저었다. 자리에 앉아있 었던 카를로스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강한 힘에 뒤를 돌아보다 또 다시 심장을 부여잡 았다. "어...어르신..." 순식간에 카를로스에게 블링크(Blink)를 걸어 자신의 손아귀에 거머쥔 샌들우드는 대답도 않고 워프를 시전했다. "스승님? 학장님?" 침대위에 앉아 과자를 베어 먹으며 책을 읽고 있던 크리스틴은 빛을 발하며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무슨 일이세요?" 카를로스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슬그머니 손을 놓고 이마를 긁적거렸다. "그게...벌써 한달이나 지났는데, 해결이 안되서 네 아비가 날 보냈다. 어떻게 된거냐고, 더 이상은 못기다리겠단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백작은 일주일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서서히 전쟁준비 를 하고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정도가 안 되면 돌아가면 된다고 주장하던 백작은 부인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한 대비'라는 명목으로 병사를 끌어 모으고, 상인들을 독촉해 정보를 모아두고 있었다. 백작은 전쟁까지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보고 혀를 차던 샌들우드는 간만에 몸 좀 풀 수 있겠다고 여유를 부리다가 백작부인에게 쫓겨났다. 정말로 공작가와 전면전이 일어날 일은 없으나 백작의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이라며 어서 가서 해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요청이었다. '협박이었지...' "제 딸 안도와주시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못 만날 줄 아세요!" '암...협박이고 말고...' 과거에 그토록 순하기만 하던 엘이 어떻게 그리 변했는지 참으로 인생무상이라 탄식을 하던 샌 들우드는 어느새 차를 내오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혀를 찼다. "네 아비는 전쟁 준비를 하는데, 너는 소꿉장난이나 하느냐?" "네?" "어르신!" 크리스틴과 카를로스의 비명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아무생각 없이 던진 말에 즉각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흔들던 샌들우드가 백작가 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던 카를로스는 당장 로만에 있 는 모든 약재상 주인과 잡화상 주인을 잡아들이겠다고 나섰다가 샌들우드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어리석은 놈!" "하지만 어르신...그렇게라도..." "아니요 학장님." "응?" "그 사람들을 불러들이지 마시고 하녀의 얼굴을 들고 조사를 하세요. 그냥 플래진저를 판 사람 을 알아보았으니 그리 될 수밖에요. 허니...스승님? 영상구 가지고 계시지요? 가셔서 모이라 의 하녀를 수정구에 담아 약재상과 잡화점을 조사하라고 시키세요. 분명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거예요." '1파운드나 사간 사람은 그녀밖에 없으니까요...' 보통은 한 두 스푼 정도 사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목표는 달성되니까. 한나에게 모이라의 하녀로 분장시켜 잡화점으로 보낼 때 크리스틴은 머리를 아주 잘 굴렸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탐문수사 과정에서 모이라의 하녀를 똑똑히 기억해낼 증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술수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계략을 세우는데 있어서 크리스틴의 소름끼치도록 뛰어난 능력이 이번만큼 도움이 된 적이 있 었을지 의문을 가져보던 크리스틴은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어떻게 그 생각을 못했을까'하며 머리를 쥐어박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후 서둘러 겉옷을 걸쳤다. "어디 가는거냐?" "디아나를 만나러 가요." "왜?" 샌들우드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크리스틴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치료가 너무 길어져서 지금쯤 엄청나게 분노를 하고 있을테니...마커스 선생님과 의논해서 조금 더 찔러볼까 해서요." "찔러?" "네. 그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으면 디아나 만 아로니에가 아니지요. 지금이야 치료를 위해서 참고 있겠지만 시일이 엄청나게 걸린다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지 알아보러가요. 스승님 께서는 일이 끝나시면 모이라 영애에게 가셔서 지켜보고 계시다가 혹시나 디아나가 찾아가면 대화를 저장해주세요." ".........." 계략은 크리스틴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녀보다 똑똑하면 똑똑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은 세실 역시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아이였다.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틴의 말에 호응을 한 샌들우드는 입을 쩍 벌리고 제자를 보고 있는 카를로스의 목덜미를 잡았다. "우리는 그 하녀에게 가자. 수고하거라." "스승님께서도 수고를 좀 해주세요. 죄송해요." "아니다, 신경쓰지 마라.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구나." 서로 닮은꼴의 미소를 주고받은 샌들우드는 카를로스와 함께 하녀의 숙소로, 크리스틴은 마커스 를 찾아 나섰다. "그래서? 날 더러 어쩌란 말이냐, 지금 당장이라도 치료를 해주랴?" 볼을 뚱하니 부풀리고 불만을 표시하는 약초학 선생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가셔서 치료가 좀 더 길어질 것 같다고, 아무래도 힘들 것 같으니 새로운 약을 만들 어야한다고 말씀드려주세요." "새로운 약?" "이를테면...돌아간 입이라도 제대로 돌려주는 약제를 넣은 거요." "........." 마커스는 눈앞에 앉아 있는 소녀가 이미 그가 하고 있는 장난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 "전 선생님의 선택에 대해 뭐라고 할 자격이 없어요. 옳다고 생각하시기에 그리 하시는 거겠죠. 전 선생님을 믿거든요." 크리스틴의 눈에 담긴 진실을 읽은 마커스는 할말을 잃었다. 잠시 소녀의 순진한 얼굴을 물끄 러미 바라보던 마커스는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감사합니다." "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정도도 못해주겠냐?" 볼을 붉히며 환하게 웃는 소녀의 머리를 토닥여준 마커스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지난 한달간 지켜본 바로는 그의 제자가 되는 소녀는 손을 쓸 수 없는 길.치.였다. 수업 시간은 용케 맞춰서 들어왔으나, 실습을 위해 숲으로 견학을 가거나 약제실을 방문할 때에는 여지없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아이를 찾아 나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아이를 믿 고 내버려두었다가는 오늘 하루 종일 헤매도 디아나의 처소에는 가지 못할 것이 자명한 일. 혹시나 뒤따라오다 다른 곳으로 샐까 힐끔 힐끔 뒤로 시선을 돌려 크리스틴이 바짝 붙어 따라 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똑똑똑"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문에 노크를 한 마커스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여전히 검은 색 일색의 방을 눈썹을 모으고 둘러보던 마커스는 침대 안에서 뛰쳐나오 는 환.자.를 보며 실쭉 웃었다. "선생님! " 처음의 그 시건방지던 모습은 어디다 내던졌는지 반색을 하고 나타난 디아나는 망사로 얼굴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맨발로 달려나왔다. 플래진저의 독은 신관들도 고칠 수 없다는 이카루스 신전의 전언에 절망에 빠져있던 디아나에 게는 마커스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의외로 플래진저의 독성을 치료할 수 있는 이들은 찾기가 힘들었고, 마커스가 로먼에서도 아주 유명한 의사였으며 플래진저의 해독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단번에 태도를 바꾸었다.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냥(디아나의 입장에 서는 그랬지만) 손수 차까지 대접하며 때 아닌 시기에 방문한 이유를 물으려던 디아나는 뒤 늦게 마커스의 뒤에 서 있던 크리스틴을 보았다. "이런...영애도 오셨군요." 따뜻한 목소리였다. 크리스틴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직도 모이라의 마수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고 결정 적으로 퇴학을 면하게 해준 크리스틴은 디아나에게 너무나 고마운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앉으세요, 영애. 미처 못 봤어요. 선생님도 앉으세요. 차를 한 잔 더 끓여올께요." 간식으로 먹으려고 준비해둔 과자까지 내어준 디아나가 차를 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마커스와 크리스틴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마커스가 헛기침을 하며 디아나의 주의를 끌었다. "음, 내가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약을 좀 바꿔봤으면 해서 말이다." "네?" "그...얼굴에 생긴 수포들이야 서서히 독기를 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치가 되겠지만 입이 돌아간 것은...조금 힘들 것 같아서 말이다." 아주 조금씩 수포가 작아지고 있는 것에 그나마 만족을 하고 있던 디아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커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디아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그러면...치료가..안 되는 건가요?" "아니, 아니다! 치료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거지." "그게 그 말 아닌가요?" "영애. 진정하세요. 지금 마커스 선생님은 특별한 치료를 위해 새로운 약을 연구중이시란 말씀 을 하시는 거랍니다." ".....아!" "흠흠. 아무래도 너에게 플랜진저를 쓴 사람이 정말 악독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네?" "보통은 그저 수포가 생기는 것으로 그만이지만, 양을 많이 쓰면 너처럼 입이 돌아가거나 심하 면 실명을 하게 되거든? 눈에 띠게 수포가 줄어드는데도 입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엄청나게 많이 사용한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치료가 더딜 리가 있겠느냐?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도록 해라. 지금 더 좋은 약을 만 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니 조만간 돌아간 입도 고치고 얼굴도 빨리 낫게 해주마. 알았지?" "....아...네." 마커스의 말을 불붙은데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치료가 더뎌 억지로 불안함을 억누르고 있던 디아나는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독을 넣은 누군가를 향해 이를 갈았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 던 디아나는 슬그머니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두 사람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벽거울을 가려놓 았던 천을 확 걷어내었다. "........!" 주먹만하던 혹들은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붉은 입술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음을 확인한 디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으로 입술을 만졌다. "이럴 수는...이럴 수는 없어!" 금빛으로 반짝이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 자신의 몰골을 살펴보던 디아나는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보석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챙겨들고 방 을 빠져나왔다. 멀리서 디아나의 방문을 지켜보던 두 사람은 기둥 옆으로 몸을 숨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구나." "글쎄요...저도 디아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확신을 못하겠어요." "뭘 기대했는데?" "디아나가 모이라를 추궁하는 것이요." "....그렇게 할까?" "아마도...직접 찾아가서 따지겠지요, 그리고 그 대화는 스승님이 수정구에 담으실테구요." 크리스틴은 지금쯤 모이라의 뒤를 은밀하게 따르고 있을 샌들우드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결코 발뺌 할 수 없는 증거를 잡기 위해서였다. 샤우트든 플래진저든 상관이 없었다. 모이라가 디아나에게 약을 탄 음료를 먹였다는 것만 잡아내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흠...네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구나. 행여나 복수한답시고 독을 먹이거나 그러면..." "설마...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크리스틴의 순진무구한 대답에 한숨을 삼킨 마커스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인간이란 그런 거야. 제가 당한 만큼 남에게 고통을 준다. 더구나 그 아이 성정을 생각하면 그것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구나...' 솥뚜껑만한 커다란 손이 전해주는 따스한 온기에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귓가에 들리는 작은 속삭임에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만... 네가 가진 그 마음 그대로를 간직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세상의 더러움을 몸서리치게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요, 소망이었다. ************************************************************************************ 음, 9시에 올리고 싶었는데...이제 일어났습니다. > < 에또 후르츠 바스켓은 일본작가가 펴낸 만화책이지요. 애니도 만들어졌고, 내용은 길어서 생략. 전 연애소설빼고는 다 봅니다. 애정영와를 제외한 모든 영화를 봅니다.(제미만 있으면) 그래서 그런지...남녀사이의 일에 무쟈게 둔한경향이 있어서...글을 쓸때도 안돌아가는 머리를 엄청나게 혹사시켜야 합니다. ㅠㅠ 나이를 생각하면 비참하게 보이지만 엄청나게 열받았을때는 동화책을 봅니다. 친구들은 절 보고 '니가 애냐!'라고 하지만 전 동화책이 좋습니다. 해리포터도 좋아하지요.(요즘은 성격이 뒤틀려서 짜증이 나고 시리우스가 죽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만...어떻게 되겠지요.) 음, 산딸기님 축전 보내주신다구요? 므훗~ 제 멜 주소는 ocean210nate.com / falcon1052@hotmail.com입니다. (_ _) 기대 기대~ 에또...앙, 세바스티앙은 말입니다. 지금은 몸을 기르는 중입니다. 보쌈이라도 하려면...콜록 황태자비 간택식에 등장하지요. 그리고 세실의 몸으로 돌아가느냐! 마느냐! 는 오직 세실에게 달려있습니다. 흐흐흐흐... 에, 마지막으로 4화에 리플이 달린 것을 보니 마법스펠이 영어라 싫으신 분이 계시는듯... 쓰면서도 좀 한자나 영어를 너무 쓰나 싶기도 했는데, 님들 생각은 어떠세요? 근데 다른 용어야 모르겠지만 (불화살fire-arrow) (물공, 물폭탄water-ball)는 좀 이상하지 않나요? 워프, 블링크(짧은 공간이동?) 텔레포드는 어떻게 구분할까요? 흠흠흠 고민에 빠진 유키.. 이정도면 60개가 넘는 리플에 달린 작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된 것이라 믿으면서... 찾아주셔서 감사하고, 기뻐해주셔서 더욱 행복한 유키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유유상종(類類相從) 2. 와장창~! 값비싼 도자기가 우아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그 치크 대가리 같은 것이 날 이렇게 물 먹일 수 있지?!" "아가씨, 진정하세요."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됐어? 학장실로 불려간 게 수십 번이야! 매번 디아나에게 독을 먹인 게 사실이냐고, 똑같은 질문을 수십 번을 받았는데 나더러 지금 진정하라고?" "아가씨..." 검은 머리에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있는 대로 물건을 때려 부수고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방안을 왔다갔다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절 기억하는 곳은 없을 뿐더러, 분명히 샤우트를..." "샤우트가 문제가 아니야! 어찌 되었든 크리스, 그 계집애에게 가야할 시선이 내게 쏠렸다는 거야. 간택식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그래도 학장님께서는 백작이 왔다가는 바람에 그 아이 말만 듣고 재조사를 하는 거라잖아요. 예의상 하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누가 공작가를 건드리겠어요?" "아니야, 만약에 디아나가 입을 열면?" 이미 그녀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을 모르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오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입막음을 해야 해...어떻게 해서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방안을 서성거리던 소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거렸다. "나가봐, 나 피곤하니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오늘은 안 된다고 해." "네, 아가씨." 방안 여기 저기에 굴러다니는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피해가며 방을 빠져나간 루시는 얼마 되지 않아 낭패어린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저, 아가씨. 디아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래? 나갈께. 차 좀 내오고 방을 치워놔." "네, 아가씨." 직접 찾아가서 만나려던 디아나가 먼저 왔다는 것에 반색을 표한 모이라는 흐트러진 옷매무세를 바로하고 언제 성질을 부렸냐는 듯 고고한 태도로 방문을 열었다. 검은 망사를 쓰고 있는 소녀 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디아나." 모이라의 작은 목소리에 디아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가씨....흑!"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리며 품으로 뛰어드는 디아나를 마주 안으며 짐짓 인상을 찌푸리던 모이라 는 루시가 차를 가지고 오자 어깨를 두드려주며 표정을 바꾸었다. 참으로 포근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만 진정하고, 좀 앉아. 차도 좀 마시고." "네...흑...고마워요, 아가씨." 모이라에게 부축을 받으며 휘청거리듯 자리에 앉은 디아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잔을 내려놓은 디아나는 짐짓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너무 힘들어요. 크리스 그것이 절 궁지에 몰아넣고...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 어요. 흑" 또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한탄을 하는 디아나를 보며 한숨을 내쉰 모이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 어나 찬장으로 걸어갔다. "이것 좀 먹어봐. 아버지께서 이번에 로레얼에 가셨다가 보내주셨는데, 정말 맛이 좋아. 힘이 없을 때는 단 것을 먹으면 좋데. 좀 진정하고 이야기 좀 하자." "...네...아가씨."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아끼는 사탕을 선심 쓰듯 몇 개 내놓으며 환심을 사려는 모이라의 태도에 입술을 잘근거리던 디아나는 떨리는 손으로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이제...이런 것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것도 끝일거야, 모이라.' 망사로 가려진 두 눈을 반짝이며 동그란 사탕이 전해주는 달콤함을 음미하던 디아나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모이라의 말을 기다렸다. "도대체 그 애가 어떻게 날 끌어들였니?" "그건...그 아이도 모르게 한 말이었어요. 학장님께 불려갔을 때 자기는 절대로 안 그랬다고, 만약에 그럴 사람이 있으면 아가씨 밖에 없을 거라고..." 디아나의 우물거리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이라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러면! 학장님이 그 말에 날 불러들인단 말이야? 세상에, 아버지께 일러서라도 가만두 지 않겠어. 어떻게 감히 그런 말 한마디에 날 문초할 수 있지?" 비분강개하는 모이라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디아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배너 백작이 찾아와서 학장님을 협박하셨어요, 당장 아가씨를 조사하지 않으면 아카데미를..." "고작 백작따위가? 흥!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러는 거지? 꼴에... 으드득" "그런데 아가씨?" "응?" "저...제가 좋아한다던 사람 말인데요....." 디아나의 말에 잠깐 아미를 찌푸리던 모이라는 얼른 얼굴을 펴고 자리에 앉아 디아나의 손을 잡 았다. "미안해, 디아나. 네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야. 그 때도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서둘러 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하지만 이번 간택식에서는 꼭..." "네? 무슨 말씀이세요?" 열심히 위로를 해주던 모이라는 디아나의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이냐니? 그거야 저번에는 네가 잠들어 있는 사이 황태자 전하께서 그냥 가버리셨으니 이번에야 말로 내가 다리를 놔주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너도 치료에 전념해서 얼른 얼굴을 고쳐야..." "전 간택식에 나가지 않을 건데요?" "응?" "아가씨, 제가 사모하는 분은 황태자 전하가 아니에요. 어찌 아가씨의 부군이 되실 분을 제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펄쩍 뛰며 고개를 흔드는 디아나를 보고 모이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그럼...누구를?" "당연히 카민 선배님이시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아카데미에서 가장 잘생기고, 신비한 인물!" "..........."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는 표정으로 디아나에게 몇 번이나 사실을 확인하던 모이라가 허리를 쭉 펴고 앉았다. "어머...콜록..미안해. 내가 잠시 오해를 했나보네. 난 그것도 모르고..." '독을 타셨나요?' 모이라의 태도를 보고 디아나는 크리스틴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평소 모이라의 태도를 봤을 때 자신이 노리는 황태자비 자리에 침을 흘리는 디아나를 그냥 놔뒀 을 리가 없었으니까. 잠시 차가운 눈으로 모이라를 노려보던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 아가씨께서 주신 수면제를 먹고 얼굴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선배와는 아직 말도 못해봤 어요. 관심도 보이지 않고. 저에게 문병을 왔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도 선배님을 없었어요. 그래서 치료도 받지 않은 건데...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아가씨?" "응? 아! 수..수면제. 그래. 내가 수면제를 줘서 그렇게 쓰러졌는데...카민이 아직도 널 봐주 지 않았단 말이지?" 멍하니 디아나의 말을 듣고 있던 모이라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떨결에 반문을 하고 말았다. 고양이 눈처럼 동공이 가늘어진 황금빛 눈동자를 보지 못한 모이라는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기 위해 차를 마셨다. 평소 즐겨마시던 것보다 조금 씁쓸한 맛이 나긴 했지만, 입안이 껄끄러워 그러는 것이라 가볍게 넘겨버렸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해결해 줄께." "아가씨, 저번에 써먹었던 방법도 소용없었는데...어떻게..."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때야 내가 혹시나 해서 약을 조금 많이 넣는 바람에 네가 너무 오랫동 안 잠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확실하게 카민과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줄께. 그래! 간택식전에 우리 집으로 와. 초청장을 보내줄게. 학장님을 비롯해서 아카데미 학생들도 몇 초대할 테니까, 그때 카민이랑 다리를 놔주면 되잖아?" "어머, 아가씨. 정말이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더군다나 저 번 일로 아가씨께서도 곤란하실텐데..." "아니야, 그 계집애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당연히 학장님도 백작 때문에 얼마간 시늉 만 하는 거겠지. 호호호호." 막힌 것이 뻥 뚫렸다는 상쾌함에 신나게 웃던 모이라는 갑자기 현기증이 나자 머리를 짚었다. "으음..."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 아...잠시 좀 어지러워서. 이상하게 목이 마르네..." 심한 갈증을 느끼며 찻잔에 남아있던 차를 한꺼번에 훌쩍 마셔버린 모이라는 다시 한 번 디아나 에게 다리를 놔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일어섰다. 아무리 차를 마셔도 없어지지 않는 갈증 때문이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디아나에게 사탕과 과자를 더 내어주고는 물을 마시던 모이라는 갑작스러운 노크소리에 펄쩍 뛰었다. "아가씨, 학장님이 오라십니다." "지금?" "네, 디아나 아가씨도 찾으신다고..." "그래?" "그리고...저도..." "응?" 잠시 세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모이라는 학장이 조사를 하는 시늉만 하는 거라 확신을 하며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대동하고 학장실로 향했다.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직후 화려한 커튼 옆에서 마법사 로브를 푹 눌러쓴 샌들우드가 동그란 수정구를 들고 모습을 드러내 었다. "흠...크리스가 알면 좋아하겠는데? 그 파란머리도 뭔가를 알아냈나 보지? 기막힌 타이밍이야... 후후"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학장실로 워프를 하던 샌들우드는 자신이 들고 있는 영상구슬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장님, 부르셨다고...!" 차분한 태도로 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이라는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크리스틴을 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펴고 미소까지 지으며 카를로스에게 다가간 모이라는 뒤에 서 있 던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마침 디아나도 저와 있었기 때문에 함께 왔습니다." "앉아라." "네." 크리스틴과 마주보는 곳에 곧은 자세로 앉은 모이라는 엉거주춤 자신의 옆에 엉덩이를 걸치는 디아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카를로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들여보내!" 순간 모이라와 디아나, 루시가 들어왔던 문이 활짝 열리며 40대의 중년사내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흡!"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헛바람을 들이키던 루시는 모이라의 사나운 눈초리에 얼른 손을 내리고 애써 표정을 지웠다. 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주시하던 카를로스는 루시의 반응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래, 어서 오시오. 바쁘신데 이렇게 오시라 하여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 "이 일은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시지요?" "아, 물론입니다. 어르신." "그러면 이곳에서 낯이 익은 사람이 있는지 좀 살펴봐주시겠습니까?" 카를로스의 부드러운 말에 고개를 든 사내는 우선 소파에 앉아있는 세 명의 소녀를 보았다. 검은 망사를 쓴 디아나에게서 잠시 시선이 멈췄지만 이내 스르르 고개를 돌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루시를 보았다. "아..! 있습니다요!" "....누구요?" "저기 서 있는 아가씨 말입니다. 딱 한 번 왔었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죠. 정말 똑같은데요..." 영상으로 보았던 것과 실물이 똑같다는 탄성이었지만 루시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크게 메아리 쳤다. '어떻게 해..어떻게...' 어깨를 움츠리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모이라를 바라보던 루시의 눈에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다고 모른다는 듯,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태연히 앉아있는 모이라의 회색빛 눈을 보고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린 루시는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보았습니까?" "한 1년은 더 넘었지요? 한 밤중에 나타나서 플래진저를 1파운드나 주문을 했습죠." "거짓말이예요! 거짓말. 전 그런 것 몰라요. 제가 안 그랬다구요." 이것만은 사실이었다. 루시의 얼굴에 담겨진 절박함에 고개를 흔들던 카를로스는 잡화점의 주인을 보았다. 시선을 받은 그는 신이 난 사람처럼 떠벌리기 시작했다. "글쎄, 그때 처음에는 샤우트를 주문했다가 몇 미르도 안돼 다시 와서는 주문이 잘못되었다고 플래진저를 1파운드나 주문을 했습니다. 세상에 그 많은 것을 어디다 쓸거냐고 했더니 말을 안 듣는 쥐를 혼내주려고 한다면 깔깔깔 웃었드랬지요. 그리고는 황금도 한 닢 주면서...아... 그렇군요.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군요." ".............." 학장실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절대로 자신을 만났던 사실을 이야기 하면 안된다고 금화를 쥐어주며 신신당부를 했던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가의 여식을 중독 시킨 범인을 찾는다면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명심에 선뜻 나섰지만, 입을 다물고 있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잠시 썰렁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난 후 모이라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것이냐! 바른 대로 고하거라!" 먼저 선수를 쳐 루시를 추궁하는 모이라를 보며 감탄을 하던 카를로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괴고 루시를 보았다. 새파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던 루시는 모이라의 호통에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전...저는...수면제가 필요해서..잠이 오지 않아서 수면제를 주문했었는 데...그것이...정말입니다! 분명 저자에게 약을 산 적은 있지만 그건 수면제였어요! 그리고 제게 수면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나가 찾아왔었습니다. 주인이 잠을 못 잔다고 사정을 하기 에 불쌍해서 조금 나눠줬는데...그것뿐입니다. 전 샤우트가 뭔지 플래진저가 뭔지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는 루시의 모습은 정말 아무런 죄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물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참으로 훌륭한 연기에 불과했지만... 모든 죄를 뒤집어쓰면서도 끝까지 크리스틴을 물고 늘어지는 루시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카를 로스는 잡화점 주인을 보았다. "어찌 된 것이요? 수면제를 샀다고 하는데?" "네? 그럴 리가요. 수면제라는 것은 보통 약화상에서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건 치료사들만 쓸 수 있는 약인데 그런 것을 저희 가게에서 팔 리가 없지요. 걸리면 이건데요..." 손칼을 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이던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루시를 바라보았다. 수면제는 치료사만 처방을 내릴 수 있음을 몰랐던 루시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모아라를 보았지만, 모이라 역시 몰랐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디아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검은 망사를 쓰고 앉아있는 디아나는 예의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이라의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주인의 얼굴을 살펴보던 루시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바닥으로 똑 똑 떨어졌지만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크리스틴에게 시선을 던진 루시는 마지막 패를 내놓았다. "아가씨가 그러셨지요, 한나에게 독을 구해오라고. 한나는 제게서 받아갔습니다. 어디 쓸 것이 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는 주인 아가씨가 쓰기 위해 구해오라 하셨다고 했지요. 나이가 어려 어디에서 독을 구해야 할지 몰라, 찾아왔기에 제가...주었습니다."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담담하게 크리스틴을 몰아세운 루시는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고, 이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던 크리스틴이 몸을 일으켰다. 사그락 사그락 비단천이 끌리는 소리만 나는 가운에 루시의 앞에 우뚝 선 크리스틴은 잠시 눈을 감고 있는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쫘아악! 새하얀 손을 들어 힘차게 내려친 크리스틴은 고개가 획 돌아간 채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루시를 노려보았다. 쫘악! 쫘악! 쫘악! 쫘악! 아무 말도 없었다. 양손을 들어올려 번갈아가며 루시의 뺨을 내려치던 크리스틴은 손이 얼얼해 질 때까지 손찌검을 했다. 그 어이없는 행동에 일 시간 멍해있던 모이라가 벌떡 일어나 카를로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학장님! 저 아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저 애가 독을 가져간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말려주세요, 루시는 한나라는 계집에게 약을 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럼 네가 맞을래?" "........너...너...네가...감히!" 크리스틴의 빈정거림에 손가락으로 크리스틴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어대던 모이라는 크리스틴 이 몸을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네가 맞고 싶냐고 물었어. 모이라. 얼마나 날 괴롭혀야 만족할건데? 얼마나 날 사악하게 만들 어야 만족할건데! 얼마나 날 몰아세워야 만족할거야!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날 나쁜 아이로 만드는 건데! 왜 날 가만히 놔두지 않는거야! 그렇게 보고 싶니? 내가 얼마나 사 악하고,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 그렇게 보고 싶었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시작된 크리스틴의 말은 비명이 되어 학장실에 메아리쳤다. 작은 소녀의 음성에 담긴 처절한 비애를 피부로 느낀 카를로스는 탄식을 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찌 모르겠는가? 끝까지 입을 닫고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려준 아이다. 백작이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공작가에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언제까지고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아이를 이렇게 몰아세운 것은 다름 아닌 모이라였다. 루시는 끝까지 크리스틴을 잡고 늘어졌고, 그 뒤에는 모이라가 있으니 그녀가 시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크리스틴의 입장에서는 모이라가 적이었다. 푸른 눈동자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악을 쓰는 크리스틴을 멍하니 바라보던 모이라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네 까짓게 뭘 할 건데? 내가 뭘 어쨌다고? 다 네가 저지른 일 이잖아? 난 모르는 일이야. 네 그 덜떨어진 머리로 끝까지 연구해봐라, 답이 나오는가. 이 치크 대가리야. 흥!" 모이라의 눈에 비친 크리스틴은 아무능력도 없으면서 그물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쥐새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크리스틴의 면전에서 빈정거려준 모이라는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디아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가자, 디아나. 이런 것하고 이야기 할 가치가 없어. 학장님 전 가 봐도 되지요? 루시가 자백을 했으니 제가 더 이상 할 일은 없네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고 크리스틴이나 처리를 하 시죠. 가자." "기다려. 디아나, 서요." 크리스틴의 한 마디에 모이라의 손에 잡혀 끌려가던 디아나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디아나를 쳐다보던 모이라는 소녀의 작은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설마, 저 말을 믿는 건 아니지? 알잖아. 난 상관없는..." "스승님, 멜포레스 공작님을 모셔오세요. 남작님도, 우리 아버지도 함께요." "알았다." 크리스틴의 차가운 음성에 허공에서 시원한 대답이 들려왔다. 의외의 주문에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카를로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얼이 빠진 중년 사내에게 나가 있으라 부탁하고는 모이라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너의 아버지를 뵙고 싶은가보구나. 앉거라. 디아나도 앉아라. 크리스틴, 할 말이 있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크리스틴은 카를로스의 부름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흔들 었다. '죄책감에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 오늘 끝내자. 다 끝내는 거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한 것이 아니야.'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결심을 굳힌 크리스틴은 얼이 빠진 모이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가 날 물고 늘어졌듯이 이번에는 내 차례야. 황태자비가 되고 싶다고? 꿈 깨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어. 너 같은 게 바이오니어의 안주인이 된다면 그건 나라 망신이다. 모이라." "이....이...." "앉으세요, 아가씨."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모욕감에 온몸을 떨어대던 모이라는 자신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 앉는 디아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모이라의 살기어린 눈과 크리스틴의 차분한 눈이 마주쳤다. 번개가 내려치듯 두 사람 사이에 눈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허공에서 빛이 발하더니 정복차림을 하고 있는 뚱뚱한 중년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타났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왜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는지 의아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한 소녀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모이라!" "아버지!" 학장실 한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사이먼 데 멜포레스 공작의 품에 뛰어든 모이라는 서러운 눈물 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황궁에 갈 차비를 하고 있던 중에 샌들우드에 의해 학장실로 이동 한 멜포레스 공작은 자신의 의문을 풀기도 전에 자신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딸을 다독여주느라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학장?" "그것은 제가 대답해드리지요, 공작님." 카를로스에게 시선을 돌리던 사이몬은 등 뒤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반색을 하고 뒤돌아섰다. "이런, 배너 백작이 아니오. 오랜만이요. 헌데 그대도 이곳에 불려온 것이오? 난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소이다." 일국의 공작이란 신분이 무색하도록 예의바른 태도였다. 사이몬의 그런 태도가 의외였는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든 모이라의 눈에 언뜻 두려움이 스쳐갔다. "공작님, 우선 제 딸부터 소개해 드리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합니다." 치마를 넓게 펼쳐들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감탄을 하던 공작은 아직도 고개를 들지 않는 딸을 내려다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헛헛, 미안하구려. 내 딸이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이해해 주시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마치 백작이 공작 같고, 공작이 백작 같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 궁에는 언제쯤 들리시려오? 황제폐하께서 공의 소식을 궁금해 하시더이다. 요즘에는 통 궁에 출입을 않으신다고요?" "아...좀..그럴 일이.." 정말이지 이를 갈고 있던 백작마저 공작에게 예의바른 태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백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공작의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이 안 쓰러울 정도였다. 언제나 궁에 가면 다들 저런 태도로 자신을 맞이하는 것이 익숙한 백작만 태 연한 얼굴로 공작의 말에 입을 맞추어줄 뿐이었다. '저 정도였나, 배너 백작의 위치가...' 직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위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공작이 백작에게 저런 저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의 영향력이 거대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눈으로 확인해보 니 내심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백작이 자신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는 것을 알 게 되면 공작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실없는 생각에 머리를 굴려보던 카를로스는 샌들우드의 망 토를 잡고 나타난 남작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로니에 남작이 아니가? 자네는 또 여기 웬일인가?" 백작의 퉁실퉁실한 얼굴을 보고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남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 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렇게 뵙게 되서 송구합니다, 멜포레스 공작님." "........?" 혼자서만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던 사이먼은 그제야 학장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긴장감에 물세 례를 받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주겠소?" 공작의 굳은 목소리에 모이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배너 백작이 한발 빨랐다. "우선 앉으십시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제 딸아이가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흠, 그래요?" 뭔가 자신의 딸과 크리스틴이란 아이 사이에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접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품안에 안고 있던 모이라도 떼어놓았다. 그는 공과 사는 확 실히 구분할 줄 아는 인물이었고, 어떤 일인지는 모르나 자신이 나서야 할 일이라면 정신을 차려 야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크리스틴의 눈짓을 받은 샌들우드는 헛기침을 하며 조금 전에 모이라 의 방에서 저장했던 영상을 틀었다. 주홍빛이 감도는 수정구에서 뻗어 나온 빛은 허공에 어떠한 장면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헉!" 검은 머리의 소녀가 방안을 휘저으며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시작한 영상은 모이라가 두 소녀 를 이끌고 방을 나가는 것까지 이어졌다. 물론 대화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담겨 있었다. "..........." 화면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공작의 옷깃을 잡고 있던 모이라는 천천히 자신 의 손을 떼어내는 아버지의 두툼한 손길에 눈물을 글썽였다. "이것이...도대체 무슨 말이요?" 공작은 디아나의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입장에서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디아나가 자신의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 했었기 때문에 학부모들 중에는 남작을 제외하고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백작조차 한달 전에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다면 영영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고. 무거운 안색으로 해명을 요구하는 공작을 보며 난색을 표하던 카를로스를 샌들우드가 구해주었다. 두 번째로 꺼낸 구슬 안에는 크리스틴과 디아나, 남작과 백작이 주인공이었다. 영상에 담긴 디아나이 맨얼굴을 보고 기겁을 하던 공작은 검은 망사를 쓰고 있는 소녀를 보며 탄식을 했다. "이런..." "공작님께서 여기 오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배너 백작의 차가운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던 공작은 디아나와 크리스틴의 작은 손을 모아 쥐었다.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데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느냐. 미안하구나. 미안하오, 백작. 남작 자네에게도 면목이 없네." 구차한 변명도 없이 대뜸 사과부터 한 공작은 두 아이의 작은 손을 놓아주고 천천히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이제 말해 보거라. 날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크리스틴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공작의 태도에 모이라는 기겁을 했다. "아버지!" 공작은 딸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틴만 보고 있었다. "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없다고?" "네." "그러면 난 왜 부른 것이냐?" 공작의 담담한 태도에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소를 지었고 남작은 얼빠진 얼굴로 공작을 보았다. 카를로스 역시 남작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사이먼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인식한 공작은 헛기침을 했다. "내 말은, 이렇게 증거가 명백하니 학장이 알아서 처리를 하면 될 일인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 가 있었느냐 하는 말이요. 그렇지 않소?" "물론이지요, 공작님." 배너 백작의 음성은 들떠있었다. '마음에 들어. 딸은 못났지만 공작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군.' 오늘까지만 해도 이를 갈던 상대를 180° 달리 보게 된 백작은 싱글거리며 공작의 말에 맞장구 쳤고 내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던 공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딸이 문제가 아니야, 배너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다행이군...' 배너 백작이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밀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던 공작은 방실 방실 웃고 있는 데니스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도 흘리지 않고 위험을 모면했다는 안도감 에 백작과 미소를 교환하던 공작은 자신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는 딸을 노려보았다. '덜떨어진 것!' "뭐냐?" "아...아버지..!"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해결하거라. 난 아이들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 백작가의 여식을 보고 좀 배우지 뭘 하고 있었느냐?" 딸을 면박 주며 은근히 크리스틴을 띠워준 공작은 엉덩이를 들썩이는 백작을 보며 흐뭇한 미소 를 감췄다. 그로서는 딸보다 집안이 더 중요했다. 어차피 시집을 보내면 사돈만 잘 맞아들이면 될 일, 미래를 내다보고 있던 공작으로서는 배너 백작의 반기를 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잘 보여두는 거지...' 배너 백작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카를로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얼이 빠진 모이라를 쳐다보았다. '불쌍하군...' 디아나 역시 아비에게 버림받은 모이라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 좀 안좋은 일이 있어서..그랬는지 갑자기 감기기운이 돌더니 지금도 열이 나고 머리가 멍하네요. 낮에도 글쓴다고 끄적이다가 그대로 잤습니다. 일어났더니 3시가 넘었더군요. 애써 쥐어짜낸 아이디어로 글을 썼는데...어떠신지...동생이 약지으러 갔으니 약먹고 자면 괜찮아질것이라 기대중입니다. 그리고... 세실의 몸을 돌려달라고 외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개인적으로 메세지까지 보내주시다니.. 부담이 되어..콜록...조금 더 끌고 가면 실망하시고 안보실건가요? 왠지 이런저런 부탁을 받으면 부담이 됩니다. 실망하시겠어요? 짜증내실건가요? 몸이 안좋아서 그런지 기분도 우울하고... 좀더 맑은 정신으로 글을 확 써내려가서 가능한 한 만족하실 콘티를 짜내도록 하겠습니다.(_ _) 자, 여러분. 언제나 행복하세요~~~~~~~~!! (동생이 약 사왔다네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유유상종(類類相從) 3. "자,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그래도 되겠지?" "아...네. 공작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이먼은 모이라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백작과 남작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눈물어린 눈으로 공작을 지켜보던 모이라 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창백해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급기야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던 모이라가 공작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백작 과 인사를 나누던 사이먼은 미처 보지 못했다. 털썩 "아가씨!"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땅바닥에 쓰러진 모이라를 보며 루시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모이라를 보았을 때, 이미 그녀의 얼굴을 시퍼렇다 못해 검게 변색되어 가고 있 었다. "모이라!" "저건..." "독?!" 의식을 잃고 쓰러진 딸을 안아들던 공작은 아이의 손끝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기 겁을 했다. 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얼른 다 가선 샌들우드가 해독마법을 걸었지만 모이라의 안색을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이런...도대체 무슨 독이지?" 마법으로 없어지지 않는 독이 있는가 열심히 고민을 하던 샌들우드가 문득 크리스틴을 바라보 았다. 아이의 얼굴은 모이라보다 더욱 시꺼멓게 죽어있었다. 어떤 독인지 알고 있는 듯 보이는 크리스틴을 보며 급히 말을 걸려던 샌들우드 그녀의 시선이 디아나에게 향해있음을 알고 혀를 찼다. 크리스틴의 눈길은 무시무시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디아나를 노려보던 크리스틴은 샌들우 드의 로브를 잡고 학장실 구석으로 끌고 갔다. 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모이라를 향해 있는 틈 을 타, 샌들우드에게 뭔가를 급히 부탁한 크리스틴은 샌들우드가 사라지자 학장실을 뛰쳐나갔다. "실피드, 절 약제실로!" 크리스틴의 급박한 부탁에 대답도 없이 소녀를 안아든 실피드는 아이의 몸을 감추어주며 약제 실로 날아갔다. 학장실의 문 앞에서 시작된 회오리바람은 약제실까지 이어졌고, 난데없는 바람 에 휩싸인 학생들은 '실내에도 돌풍이 부는구나..'라며 허둥거렸다. "선생님! 마커스 선생님!" "응? 왜 그러느냐?" "지금 당장 쓰세리즙, 로우바티움, 푸디가루를 준비해 주세요. 있지요?" "있긴 하다만..." "빨리요, 선생님!" 크리스틴의 난입에 어리둥절해하던 마커스는 서둘러 약병을 꺼내주었고,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약물을 조금씩 섞어 연보랏빛이 도는 시약을 만들었다. "실피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크리스틴의 흔적을 뒤쫓으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마커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몇 개의 시약병을 꺼내들고 학장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이라! 모이라! 애야, 정신 차리렴! 애야! 이것 보게, 이것이 어찌 된 것인가? 응?" "그것이..." 푸르스름하게 변색된 얼굴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서서히 호흡이 잦아드는 모이라를 안고 어쩔 줄 몰라하던 공작이 카를로스를 닦달했지만 그라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 들이 호들갑을 떨며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단 한 사람, 검은 망사를 쓴 소녀만이 회심의 미소 를 지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모이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어디론가 뛰어나간 크리스틴 이 신경에 거슬리긴 했지만, 그 아이라고 해서 답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커스 선생이라도 불러오려나, 아니면 신관?' 생각보다 약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진행이 너무 빨랐다. 하지만 증거도 남지 않고, 해독약이 없는 독이니 어떤 수를 쓰던지 살려내지는 못할 것이며, 어느 누구도 그녀가 독을 썼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 할 것임이 확실했다. 시간도 없었고, 마법사가 저장한 영상에서도 그녀가 하독하는 장면은 잡히지 않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주 조심했던 것은 천운이었다. '완벽해!' 아주 오래전, 호기심에 훔쳐두었던 독이 이처럼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디아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뛰어 들어온 크리스틴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퇴학을 면하게 해준 것도 고맙고, 복수를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돌대가리 크리스.' 망사로 가려진 얼굴아래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틴에게 눈길을 보낸 디아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서서히 혼수상태로 빠져드는 모이라의 모습을 감상했다. "학장님. 사람들과 모두 나가 계세요. 모두요." "무슨...?" 크리스틴의 얼굴에 담긴 절박함에 카를로스는 영문도 모르고 사람들을 몰아 학장실을 나섰다. 펄펄 뛰며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작의 팔을 잡고 디아나와 남작, 백작, 루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던 카를로스는 저 멀리서 약병을 안아들고 뛰어오는 마커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틴이 불렀습니까?" "아, 예. 학장님. 들어가보겠습니다." 때를 맞춰 뛰어온 마커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학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언제 준비를 했는지 모이라의 입에 가는 나뭇가지를 꼽고 약제실에서 만들어온 약을 조금씩 흘려보내는 크리스틴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지르던 마커스는 중독현상을 보이는 모이라를 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내..." 어딘가로 서둘러 달려가던 디아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던 마커스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약을 먹이고 있는 크리스틴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알기로 세상에 쓰세리즙, 로우바티움, 푸디가루 따위로 해독약을 만든다는 소리는 들 어본 적이 없었다. 쓰세리는 소염진통제, 로우바티움은 진정제, 푸디가루는 해열제로 쓰이는 약초였다. 그런데 그것을 섞어 독에 중독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에게 먹이다니. 마커스로서는 크리스틴의 행동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안고 온 시약병을 내밀었다. "크리스틴, 이 약들을 쓰거라. 웬만한 독은 다 해독되니.." 마커스의 걱정스러운 말에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선생님. 모이라가 먹은 건 독이되 독이 아니니, 해독제로는 독을 없앨 수가 없어요." "응?" "죄송해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그렇게 이해해주세요. 지금 제가 약을 먹인 것도 비밀로 하셔야 해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마시고, 선생님께서 치료를 해주셨다고 해주세요. 네?" 조금 전에는 본 척도 않고 사라져버린 주제에 이제는 자신더러 치료를 했다고 이야기해달라니 고개를 갸웃하며 크리스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커스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틴이 먹인 것이 효과가 있는지는 모이라의 변색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호흡은 조금 안 정되어 보였다. 하지만 흡사 식물인간을 보는 듯 위태롭게만 보였다. "해독이..되기는 하는 거냐?" "아니요, 이건 응급조치예요. 그저 호흡이 멈추지 않도록 이 상태를 유지해주는 거죠." 창백한 얼굴로 모이라의 상태를 지켜보던 크리스틴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이카루스님. 이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남작님이...디아나가 이것을 쓴거 아니죠? 아닐 거예요.' 당당하고, 정의롭게만 보이던 아로니에 남작을 떠올리며 안타까워 가슴을 치던 크리스틴은 샌들 우드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 있다." 볼을 뚱하니 부풀리며 나타난 샌들우드는 투명한 보랏빛 약이 든 크리스탈 병을 내밀었다. 조금 덜어온 것이 아니라 황태자의 약을 통째로 빼앗아 온 것을 보고도 웃지 못한 크리스틴은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받았다. 너무나 아파보이는 얼굴로 시약병을 받아든 크리스틴은 그것을 가슴에 안고 눈을 감았다. '어찌 해야 하는가...어찌 해야하지?' 크리스틴의 갈등을 알았음인가, 샌들우드가 입을 열었다. "브래디는 신경쓰지 마라. 알아서 처리했으까..." 황제의 처소에 난입해서 황태자의 약을 빼앗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황제의 뒤통수를 후려 갈겨 잠재워 놓고 왔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샌들우드의 말이 도움이 되었는지, 크리스틴은 한결 차분한 태도로 해독제가 든 병을 기울여 모이라의 입에 흘려 넣었다. 황태자처럼 서서히 중독된 것이 아니기에 보다 많은 양으로 피 속에 맴도는 독을 완전히 없애야했다. 조금씩 안색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크리스틴은 모이라의 이마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것을 본 샌들우드는 마커스에게 슬립마법을 걸어 잠재웠다. 털썩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작은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이 작은 영혼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건강을 기원합니다. 몸속의 피를 더럽히는 모든 것을 정화시켜 주시고, 의식을 흐리는 불순물을 태워주시고, 뼈 속에 남아있는 잔재를 사하여 주십시오. 저 크리스틴 폰 배너가 비오니 세상 모든 것의 아버지이신 이카루스님, 이 상처받고 허물어진 영혼을 다독여주시고 축복을 내려주소서. 정*화(Purification)"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이마에서 시작된 빛이 영롱한 오색빛을 내며 소녀의 작은 손에서 시작된 황금빛 마나와 어우러져 모아라의 몸을 감싸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성스러운 빛이 크리스틴의 작은 몸뚱아리를 감싸고 모이라의 창백한 몸을 안아들었다. 눈부신 빛을 반짝이며 몇 미르동안 계속되던 신성력과 마나의 춤은 처음 시작되었던 그 순간 처럼 서서히 크리스틴의 이마로 모여들며 자취를 감추었다. "아......" 울렁거리던 속이 편안해지고 찢어질 듯 아프던 가슴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사라진 미지의 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린 크리스틴은 발그스름한 얼굴로 평온한 잠에 빠져든 모이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 손길이 닿은 곳에 도착할 때까지 꿈의 요정들과 함께 하길...슬*립(Sleep)" 모이라을 잠시 잠재운 크리스틴은 애잔한 얼굴로 샌들우드를 보았다. 나이 생각도 못하고 눈물 을 떨구던 샌들우드는 서둘러 눈을 비비고 모이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진실 된 모습을 감추고, 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켜라. 일*루*젼(Illusion)"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8써클에 이른 후 단 한번도 완전한 주문을 읊어본 적이 없었던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간절한 기도를 떠올리며 마나를 움직였다. 새하얀 빛이 샌들우드의 손끝에서 터져나오더니 모이라의 몸을 감싸고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모이라는 조금 전 독에 침식당해 의식을 잃고 있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되었느냐?" "네, 감사해요. 스승님."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잡았구나. 안타까운 일이야." ".......네." 이심전심이랄까. 샌들우드와 크리스틴 두 사람 모두 남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고는 마커스를 깨웠다. "으음..."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일어난 마커스의 손을 잡은 크리스틴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일단은 응급처치를 한 격이니, 공작님께 어서 모이라를 데리고 대신관님께 가라고 해주세요." "..........알았다."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목격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것을 추궁하고 있을때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마커스는 슬쩍 몸을 감추는 마법사를 일견하고 모이라를 안고 있어났다. 문밖에서 서성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곧장 공작에게 다가간 마커스는 크리스틴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일단은 응급처치를 한 것 뿐입니다. 대신관님이 계시는 갈렌으로 가십시오. 나머지는..." 이미 모이라의 몸에 남아있던 독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는 마커스는 내심 크리스틴이 먹인 그 보랏빛 약이 해독제이길 빌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감사합니다." 공작은 모이라를 중독시킨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일단을 딸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고, 무사함을 확인하는 즉시 사건을 조사해보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여전히 중독이 된 상태로 겨우 숨만 붙어있는 모이라를 안은 공작은 무거운 얼굴로 마커스의 말 대로 수도로 가서 대신관 을 만나봐야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뒤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차분한 얼굴로 서 있는 디아나를 힐끔 거렸지만 뭐라 말은 하지 못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것. 처음부터 꼬이던 사건은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모이라가 중독되는 바람에 흐 지부지 사건을 넘겨버린 카를로스는 씁쓸한 얼굴로 백작을 보았지만, 배너 백작은 딸을 설득하 느라 너무 바빴다. "돌아가자, 크리스.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못된다. 가자." 절대로 졸업을 하고 말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딸을 붙잡고 씨름을 하길 몇 나르. 끝내 크리스틴의 고집을 꺾지 못한 배너 백작은 그와 별반 다르지 않는 얼굴로 서 있던 샌들우드 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아로니에 남작의 귀에 한 마디 속삭였다. 크리스틴의 배웅을 받으며 배너 백작이 사라진 후, 아카데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아로니에 남작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딸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한 짓이냐?" "아니요, 아버지." "........." 담담한 음성으로 단호하게 부정하는 딸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남작은 준비된 마차에 오르며 배너 백작처럼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넌...네 어미를 쏙 빼닮았구나." 그 날 오후, 어두운 방한 구석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음미하던 디아나는 뒤통수를 맞았다. "뭐야, 치...치료를 했다고?" "그래! 모이라 아가씨를 대신관님이 직접 치료를 해주셔서 멀쩡하게 나으셨데. 잘됐지? 그치?" "어...응. 그래, 잘됐구나." 모이라의 소식을 가지고온 추종자들 중 한 아이는 검은 망사 안에 숨겨진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누군지 모르나, 그런 독을 쓰다니 정말 몹쓸 인간이라며 천벌 받아 마땅 하다고 비분강개하기 바빴을 뿐이었다. 덕분에 천벌 받을 인간, 디아나의 얼굴이 경기를 일으키며 부들부들 떨리게 만들었지만 당사자는 물론, 디아나의 처소에 몰려들었던 아이들 역시 그것을 보지 못했다. "분명히, 치크 대가리 크리스가 한 일일거야. 아가씨가 자기를 걸고넘어지니까 그런 짓을 한 거 라고!" "맞아, 맞아." "흥! 돌대가리는 돌대가리지, 신관에게 치료를 받으면 금방 해독된다는 것도 모르고, 독을 쓰다니.." "그러니까 돌대가리 크리스지." "그렇지? 이번에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면 분명 가만히 안 있으실거야." "당연하지!" 아이들의 대화는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모이라는 디아나가 배신한 것을 보았다. 샌들우드가 틀어준 두 번째 영상에서 자신이 모든 일을 고백한 것을 보았던 것이다. '어떻게...치료를 할 수 있었던 거지? 분명히...' 두 손을 마주 잡고 부들부들 떨던 디아나는 피곤하다며 다른 아이들을 몰아내고 침대 깊숙이 숨겨두었던 약병을 꺼냈다. 손가락 길이에 조그마한 크리스탈 병에는 연녹색의 액체가 아주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분명히...해독약은 없어. 내가 한꺼번에 써서 그런 걸까?' 어두운 얼굴로 거의 두, 세 방울 정도만 남은 극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 며 다시 침대 밑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어찌되었든, 내가 한 일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니까...모이라가 돌아오면 더 신경을 써야겠어.' 디아나는 마커스 선생을 데리고 와 자신의 일을 망친 금발머리 소녀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어리석은 것!' 가만히 있어도 넝쿨째 굴러들어올 복을 차버린 크리스틴이 한심하게만 생각되었다. '어차피 모이라가 돌아와도 내가 그랬다고는 상상도 못 할테니...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건가. 하지만...아쉽군...' 얼굴을 뒤덮고 있는 수포들 사이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사악한 빛을 머금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 우와...50회 넘기기가 이렇게 힘들다니...100회는 어림도 없겠는데요..흑 어제 잠이 안와서 글을 썼는데, 일어나서 읽어보니 정말...마음에 안들더군요. 이번 편은 원래 2개로 나뉘어져 있던 것인데 제가 짜집기를 해서 하나로 합체를 시켰습니다. 너무 솔직하게 다 드러내면...재미없잖아요 > < 어제 신약에 한약을 한꺼번에 먹었더니, 밤새 뒤척이며 악몽을 꾸었습니다. 여전히...검은 머리 소녀와 금발 머리소녀가 손톱을 세우고 따라오더군요.(머리 아포...) 일단, 농땡이는 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이라...한 편 올렸지만, 몸 상태를 봐서는 오늘 저녁은 기약못드리겠습니다. 내일..월요일은 하루 종일 바쁠 것 같아서 비축분이..필요하거든요. 에또...제게 힘을 나누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 드리구요. 세실의 몸에 관해서는...글쎄요. 몇일간의 압박으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긴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앙~사건을 비비꼰다고 화내지 마시어요. 어떻게 해서든 세바스티앙과 재회를 시켜주기 위해서이니...(_ _) 자, 그러면 사설이 본문보다 길어지기 전에 물러가겠습니다. 행복하세요~~~~~~~~~!!! 추신 : 몰랐는데 오늘이 화이트 데이더군요. 사탕은 다들 받으셨는지... 저는 담달에 자장면 먹으러 가야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는 그림으로나마..콜록 >(@@@)< <-- Candy 또 추신 : 산딸기님...그림이 안왔더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50회> 축 전 모 음 크리스틴 폰 배너 vs 세실 by 산딸기님 산딸기님 감사드립니다. 너무 예뻐요 > < Little Princess, 크리스틴 by 아루세님 아루세님 감사합니다. 너무 귀엽군요. > < music ; The Trouble With Love Is - Kelly Clarkson love can be a many splendored thing can't deny the joy it brings a dozen roses, diamond rings dreams for sale and fairy tales it'll make you here a symphony and you just want the world to see but like a drug that makes you blind it'll fool ya every time the trouble with love is it can tear you up inside make you heart believe a lie it's stronger than your pride the trouble with love is it doesn't care how fast you fall and you can't refuse the call see you've got no say at all Now I was once a fool it's true I played the game by all the rules but now my world's a deeper blue I'm sadder but i'm wiser too I swore i'd never love again I swore my heart would never mend said love wasn't worth the pain but then I hear it call my name the trouble with love is it can tear you up inside make you heart believe a lie it's stronger than your pride the trouble with love is it doesn't care how fast you fall and you can't refuse the call see you've got no say at all every time I turn around I think i've got it all figured out my heart keep callin' and I keep in fallin' over and over again the sad story always ends the same me standin' in the pourin rain it seems no matter what I do it tears my heart in two the trouble with love is it can tear you up inside make you heart believe a lie it's stronger than your pride the trouble with love is it doesn't care how fast you fall and you can't refuse the call see you've got no say at all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유유상종(類類相從) 4. 다음 날 아침. 책을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크리스틴은 상쾌한 아침부터 불청객을 맞이해야 했다. 꽈당! 노크도 없이 문이 부서져라 열고 들이닥친 인물들은 총 6명. 절대로 반가울 수 없는 사람들이 었다. 제일 먼저 살기등등한 기세로 무단난입한 사람은 모이라 데 멜포레스. 어제만 해도 시체 처럼 실려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는 멀쩡한 몸으로 돌아온 공작영애는 자신에게 독을 먹인 범인(!) 을 응징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추종대를 이끌고 크리스틴을 찾아 온 것이었다. "크리스틴 폰 배너!!" "안녕하세요, 모이라 데 멜포레스 영애." "이...!" 들고 있던 책을 내릴 생각도 않고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를 한 크리스틴은 모이라의 뒤에 줄줄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검은 망사를 쓰고 있는 소녀 뒤로 낯이 익은 소녀들 다섯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디아나. 그리고...음...근신 중이신 네 분. 죄송해요 이름이 기억나지 않네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크리스틴을 삿대질하는 모이라의 뒤에 서 있던 디아나와 로잘린, 캐서린, 스타샤, 헤스티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방실거리며 인사를 하는 소녀를 보며 이를 갈았다. "네가 나에게 독을 먹이고도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냐!" "흠..." 모이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크리스틴은 무거운 의서를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런...그 일로 오셨단 말이지요. 그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 참으로 태연한 기색, 태연한 음성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한 말에 입술을 잘근거리던 모이라가 크리스틴의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 손을 휘둘렀다. 휘익~ "............" "제가 맞아 드릴거라 생각하셨나요?" "이...이...이 더러운 손 놔!" 힘차게 휘둘렀던 팔목을 맥없이 잡힌 모이라는 크리스틴의 작은 손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기운에 약간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틴에게 잡힌 팔을 빼려고 몇 번 손목을 비틀던 모이라는 자신 의 몸을 옭아매며 조여드는 끔찍한 살기에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게..." 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모이라는 문가에 기대고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초록색 머리의 남학생 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학장님이 부르신다. 따라와." 용건부터 밝힌 카민은 팔짱을 낀 그대로 가만히 모이라를 주시했다. 자신에게 살기를 뿌리는 사람 이 카민이란 것을 알고 잠시 주춤하던 모이라가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손을 풀어주고 한 발자국 물러난 크리스틴은 카민을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 기숙사에 당당하게 들락거리면...소문이 날 텐데요, 선배." "동급생들끼리 독이나 먹이고 술수나 부리는 것들 얼굴이나 보러 왔다. 나와라, 가자." 멍 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싹 무시를 한 카민은 크리스틴의 인사에 사람 좋은 웃음을 지 어보인 후 손을 까딱했다. 그의 손짓에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크리스틴은 디아나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몸은 괜찮냐?" 카민은 자신의 앞에 선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뒤늦은 안부를 물은 후 소녀의 작은 손을 잡고 등을 돌렸다. "근신중이면서 쥐새끼마냥 돌아다니는 너희들도 호출이다." "......!" 뭐라 항의를 하려고 입을 열었던 네 명의 소녀들은 카민의 차가운 목소리에 찔끔하며 모이라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모이라는 자신을 무시하고 등을 돌린 두 사람을 노려보느라 너무 바빴다. 씨근덕거리다 못해 울화통이 터지는 얼굴로 성큼 성큼 걸어가는 모이라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쉰 아이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잰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들어오너라." 학장실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응접실에는 멜포레스 공작과 배너 백작이 함께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제 모이라가 중독 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신색은 태연 하기만 했다. 그때까지 카민에게 손을 잡혀있던 크리스틴은 얼른 손을 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 다. 배너 백작의 눈이 자신의 손에 향해있다는 것을 안 카민이 슬그머니 손을 놓아주었기에 가능 한 일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구나. 잠은 잘 잔게냐?" 아닌게아니라, 눈 밑이 조금 거무스름해진 크리스틴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백작은 모이 라와 디아나, 다른 다섯 명의 학생들이 뒤따라 들어오자 딸을 손짓해서 불렀다. 행여나 뒤따라 들어오던 아이들이 크리스틴 가까이 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백작의 말 없는 배려에 그의 옆에 앉은 크리스틴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공작을 외면했다. "그런데...난 모이라와 디아나만 불렀는데 로잘린, 캐서린, 스타샤, 헤스티아는 여기 무슨 일 이지? 근신 중 아니었나?" 카를로스의 말에 디아나와 함께 서 있던 학생들이 불안한 얼굴로 카민을 힐끔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카민의 입에서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크리스틴 양 방에 갔을 때 같이 있더군요. 근신이 뭔지 이해를 못한 것 같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크리스틴 방에?" "모이라, 디아나, 그리고 이 아이들 모두 크리스틴 양 방에 있던데요. 뭐 덕분에 다리품 팔일이 없어 좋긴 했지만, 모이라의 손찌검을 막느라 크리스틴 양이 좀 힘들어 보이긴 하더군요." "..........." 학장실에 싸한 공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학장의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일제히 모이라에게 구원요청을 했으나, 그녀 역시 뾰족한 방법은 없어보였다. 배너 백작보다 차가우면 차갑지 절대로 나아 보이지 않는 시 선으로 공작이 딸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학을 주려다 크리스틴이 용서해주라고 청을 넣어 근신으로 했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지. 너희들은 당장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라. 연락은 내가 할테니." "학장님!" "저희는 저 계집애가 모이라 아가씨께 독을 썼다는 소리를 듣고..." "누가 누구에게 독을 썼다는 것이냐! 내 이것들을!" 억울하다는 듯이 항의를 하려던 아이들은 배너 백작의 호통소리에 급히 입을 닫았다. 목을 쑥 집어넣고 울먹이는 아이들을 노려보던 백작이 카를로스를 노려봤다. "학장!" "네, 백작님." "저것들이 어느 집 아이들인지 말하시오. 내 저리 잘난 자식들을 낳은 집안이 어디인지 꼭 알아 야겠소. 그리고 크리스틴은 오늘 부로 아카데미를 그만두오. 아시겠소!" "아버지!" 백작의 말에 기겁을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백작의 옷깃을 잡고 늘어지던 크리스틴은 이를 갈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어 쩔 수 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런 크리스틴을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던 카를로스는 끝까지 문제를 만드는 학생들을 하나 하나 뜯어보았다. "그럴게 아니라, 백작. 차라리 저 아이들을 내보내면 어떻소?"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사이먼이 나섰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선 배너 백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싫습니다. 공작님. 제 딸을 이렇게 추잡스러운 곳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백작의 단호한 말에 한숨을 내쉬던 사이먼이 어깨를 들썩였다. "이대로 백작의 여식이 아카데미를 그만두면 이제껏 쓰고 있는 누명을 그대로 지고 가야하오. 그래도 마다하시겠소? 내 공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아이가 명예를 되찾을 수 있는데 지금 그만둔다는 것은 이 아이에게도 좋지 않소이다. 조금만 더 시 간을 주시구려." "흠흠..." 크리스틴의 누명을 벗을 기회를 박찰 것이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백작이 슬며시 딸을 내려다 보았다. "아버지..." "허...참..." 크리스틴의 간절한 목소리에 머리를 긁적이던 백작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를로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치만 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근신을 받고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은 너희들의 잘못이다. 스스로가 한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 학장의 명까지도 우습게 본 아이들을 아카데미에 둘 수는 없다는 것이 내 결정이다. 너희들은 무기정학이다. 다른 아카데미를 알아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말이 정학이지 실제적으로는 퇴학이란 말이었다. 명문 아카데미에서의 퇴학. 이것은 그들이 한평생 짊어지고 살아야할 주홍글씨가 될 불명예였다. 집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몬트리얼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시집을 가는데도 엄청난 지장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일.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아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눈물을 터뜨 렸다. 바로 한 달 전 아카데미에 불려왔던 부모님들이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던가. 그런데 이제는 퇴학이란다. 자신들이 뭘 잘못한 것인지 파악조차 못한 아이들은 억울하다며 눈물을 흘리며 항의를 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아카데미를 문을 닫게 만들 수 있는 실력자가 둘이나 버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역시 이번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착한 일은 한 번이면 족해.' 아이들의 정학을 막아준 것만으로도 자신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크리스틴이었다. 두 번의 기회를 주었으나, 모이라가 돌아오자 기세등등하게 권력에 빌붙은 아이들을 보고 있노 라니 참으로 신물이 올라왔다. 추하고 더러워 보였다. 한편 아이들을 선동하는데 앞장섰던 모이라는 믿었던 아비마저 등을 돌리자 그제야 자신이 얼마 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독에 당했는데도 크리스틴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녀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상황을 보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 는 불안감을 억지로 삼키던 모이라는 태연한 얼굴로 앉아있는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말려주세요. 저 아이들은 그저 제가 걱정이 되어.." "무엇을 걱정했단 말이냐?" 공작의 목소리는 무감각했다. "제가 독에 당한 것이 저 아이 짓이니, 그래서..." "닥쳐라." 조용한 목소리였다. 크리스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으려던 모이라는 사이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얼른 입을 닫았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사방팔방에서 덮쳐오고 있었다. 카민과 카를로스, 배너 백작과 공작이었다. 딸을 향해 살기를 뿜어대던 사이먼이 문득 크리스틴을 보았다. 평온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는 소녀를 보니 탄성이 절로 일어났다. '대단하군...!' 디아나의 사건에 이어, 이번 일에도 역시 하독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도 끝까지 태연할 수 있는 그 자세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반면에.. "어리석은 것!" 모이라를 돌아보며 딱 한 마디 던진 사이먼은 입을 딱 벌리고 눈이 풀려가는 딸을 외면하고 이를 갈고 있는 배너 백작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공이 너무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싶지 않은가?" ".....뿌드득" 딸이 이토록 무시를 당하는 것이 아비의 직위가 낮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말에 이가 부서져라 갈아 대던 백작은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작고 따뜻한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전, 아버지께서 백작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받았다고 생각해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아버지 만큼 튼튼한 울타리는 없어요." 환한 미소를 짓는 크리스틴의 얼굴에는 일말의 가식도 없었다. 딸의 밝은 미소에 응어리져있던 가슴이 확 풀리는 느낌에 덩달아 미소를 짓던 백작이 헛기침을 하는 공작을 꼬나보았다. '부럽지요?' '부럽군.' "그깟 직위가 무슨 소용이냐! 등 따시고 배부르면 만사가 편안한데!" 배너 백작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황제가 제의하는 재상직도 마다하고 돈 굴리기에만 열중 하는 백작을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 하지만 1년, 2년...세월이 흐를수록 권력에 허리를 숙이며 비굴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고고하고 빛나보이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데니스 폰 배너 백작이었다. 권력의 허망함을 깨닫고 황실의 암투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그제야 배너 백작이 남겼던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거센 폭풍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붙이마저 도구로 삼아야 했고, 세상에는 적들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권력이고 그것이 부귀영화를 노린 이들이 마주쳐야 하는 현실이었다. 한시도 편한 날 없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뒤를 봐주는 이들에게 조금 더 잘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많은 상납금을 받쳐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그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조금 이나마 높이기 위해 이리저리 치이며 정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할 때, 배너 백작은 고고한 한 마리의 학처럼 홀로 우뚝 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렇군...' 권력이라는 것. 직위 명분이라는 것. 배너 백작은 자신을 유혹하는 수많은 인물들에게 피식 웃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었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백작이란 작위 하나면 떡을 칠 일이라며, 그 이상은 언감생심 꿈도 꾸고 싶지 않다고 실소를 짓던 백작을 떠올린 사이먼은 잠시 자신의 처지를 생각 해보았다. 황족이 아닌 귀족으로서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위치라 불리는 공작의 직위도 끊임없는 암투 속에서 지켜온 자리였다. 이번 기회에 백작과 좋은 연을 만들어 가는 끈이라도 쥐어 볼까 생각을 했었던 사이먼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욕심을 접었다. 인간적으로 친밀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면 족하다고. 배너 백작이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뜬 구름처럼 잡기 힘드나, 도리를 아는 인물. 데니스에 대해 그렇게 결정을 내린 공작은 그의 겉모습이 주는 '돈만 밝히는 돼지'의 이미지를 집어던졌다. 또한 아비의 직위에 연연해하지 않고 그저 세상의 시름을 막아주는 가장 튼튼한 보호막으로 생 각해주는 크리스틴이란 아이에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주었다. '모이라가 저 아이 반만 닮았더라면...' 그랬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으나, 모이라의 꿈은 황태자비가 되고, 바이오 니어의 왕비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귀족가의 여식들 치고 그러한 꿈을 한 번쯤 꾸어보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나, 황태자비가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공작가의 여식 들이었다. 현실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바로 모이라의 콧대 높은 자존심의 발로라 할 수 있으나, 지금에 와서는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애초에 황태자비가 될 욕심에 친우를 친우로 보지 않고 자신의 수족으로 여기며 하찮게 생각하던 것이 디아나에게 독을 먹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오늘 성급한 판단으로 크리스틴에 대해 곡 해하고 달려드는 바람에 애꿎은 아이들 넷 만 집안에 먹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세상만사 모든 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연한 태도로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디아나를 보며 사이먼은 눈썹을 모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모이라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뭔가 반격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예전처럼 딸의 뒤에 서 있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기회주의자인가...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정말 내 딸을 따르 는 것인가' 이미 모이라를 한 번 배신했던 아이였다. 비록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실을 모두 털어놓은 것 자체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약조를 깬 것이다. 그런데도 태연히 모이라의 뒤를 따르다니. 게다가 그것을 용인해준 모이라 역시 이해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들의 행동이 이제 십대에 불과한 아이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믿 어지지 않을 정도이고, 권력 다툼이 난무하는 황궁에서의 암투를 방불케 하는 것 만 같아 심기 가 불편했다. 겉으로는 편안한 안색이었으나 속으로는 갖은 인상을 쓰고 있던 공작이 문득 카를로스를 보았다. "그래, 모이라의 일은 알아보았소?" 공작의 말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 보인 카를로스가 문득 크리스틴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어떤 독인지, 누가 모이라에게 독을 썼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허...이것 참...뭐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 그제야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생각에 반색을 하던 모이라는 곧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크리스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방에서 두문불출한 것이 일주일이 넘었다. 그간 수업도 들어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없어요. 오전에는 그냥 수프를 조금 먹고, 오후에는...디아나가 와서 차와 사탕을 몇개 먹었 을 뿐이거든요. 디아나도 함께 먹었는데 저 아이는 멀쩡하니..." 모이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디아나에게 머물렀다 곧 사라졌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소녀는 아직도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맑은 하늘과 같은 푸른 색 눈. 한점의 가식도,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그저 바다보다 맑은 파란색 눈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까짓게 뭘 알겠어...' 자신처럼 고개만 숙이면 될 것을, 괜히 잘난척하다가 4년 동안 모이라에 의해 괴롭힘을 받았던 어리석은 인물을 보며 비웃어준 디아나는 또 다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다 급히 눈을 감았다. 울창한 숲을 연상시키는 청록색 눈. 카를로스와 닮았으나 조금은 덜 자란 나무와 같은 눈이 디아나의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워 당장에라도 울고 싶을 만큼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제발...' 쳐다보지 말아달라고... 그토록 원하던 시선이건만 지금 이순간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운 눈빛이었다. 의혹이 담긴 시선. 세상사람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보아도 단 한 사람만은 따뜻하게 봐주길 기대한 적이 있 었다.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지금처럼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서늘한 눈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시선이길 기도했었다. '받은 만큼 준 것 뿐이야. 어차피 살아났으니 무슨 상관이람...' 내심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던 디아나는 문득 자신에게 꽂혀 있는 푸른색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장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에게 향했어야할 따뜻한 청록색 눈이 크리스틴을 향해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어야 할 커다란 손이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크리스......' 모이라에 대한 적개심은 그녀가 독을 이겨내고 멀쩡한 몸으로 돌아왔을 때 사라져버렸다. 어느 누구도 공작가의 여식과는 맞서 싸울 수 없다. 아니,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손해 보는 짓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디아나의 지론이었고, 승률이 없는 싸움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가 눈에 들어왔다. '날 구해준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크리스틴 폰 배너. 카민님이 웃어준 만큼 울게 될 것이고, 카민님이 널 봐준 만큼 괴로워하게 될 거야. 돌대가리 크리스.' 순간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던 디아나는 자신을 바 라보는 크리스틴의 눈이 전하는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디아나 만 아로니에.' 결코 차갑다 할 수 없는, 번민이 가득한 푸른 눈을 가진 이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 자신의 운명이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디아나는 그렇게 자신이 찍어놓은 다음 먹이를 보며 달 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크림을 눈앞에 둔 고양이와 같은 미소를... ***************************************************************************************** 정말이지...약에 취해 잠을 자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밤이고, 약먹고 또 자고 일어나니 새벽이라니...이런 허망한 일이... 일어나자 마자 컴을 붙잡고 씨름하여...에...이번 장을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산딸기님, 50회에 축전 양보했습니다. ^^ 기분 같아서는 50회 기념, 조회수 10만 돌파로 광참이나 하고 싶으나...몸과 머리가 안따라 주는 관계로 제가 건강해질때까지 미루도록 하지요...콜록 하루 한편 만 올렸더니...음...리플도 적어지더군요. 제가 답을 못달아드려서 그런건가요? > < 그래도 하루 종일 모아놨다가 한꺼번에 읽으니...우와...엄청난 양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힘을 내서...한 편 더 가죠!!! 행복하시어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유유상종(類類相從) 5. 잠시 자신들만의 생각에 빠져 조용해졌던 학장실이 배너 백작의 헛기침소리로 활기를 되찾았다. "모이라의 일이야 천천히 조사를 하면 될 일이고, 우선을 저 아이의 일부터 마무리 하는 것이 어떻소?" 사태를 관망하던 태도를 벗어던진 공작은 자신의 딸을 제물로 내놓으며 사건을 마무리 지으라고 종용했다. 그의 협조적인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를로스는 디아나와 모이라, 크리스틴 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우선은 독을 산 것으로 판명된 루시라는 하녀는 공작님께서 처리를 해주십시오. 모이라의 개인 시녀였다고는 하나 처벌은 주인인 공작님이 하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걱정 말게." 사이먼의 한 마디로 루시에게는 사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디아나와 모이라 두 사람에게는 1년간 정학을 명합니다." "......!"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에 고개를 번쩍 들었던 두 소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소리를 질렀지 만 공작의 한 마디로 기각되었다. "입 다물어라." "이유는...이미 아시겠지만 디아나의 일은 어이없는 자작극이었습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이었지요. 몬트리얼의 명예를 실추시켰을 뿐 아니라 한 학생의 명예 또한 더럽혀졌습니다. 그것 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원칙적으로라면 두 사람 모두 퇴학입니다." "흡!" 모이라와 디아나 모두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켰다. "하지만 모이라 또한 원인 모를 이유로 중독이 되었고, 디아나 역시 그간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어느 정도 정상참작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갔던 모든 대화는 내일 아침 아카데미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밝힐 생각입니다." "음......" 카를로스의 마지막 선언에 공작은 침음성을 디아나와 모이라는 눈물을 주륵 흘렸다. 정학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자퇴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나, 명백한 퇴학이었다. 카를로스는 100년이 넘도록 이어진 명문 몬트리얼 아카데미의 위신을 떨어트린 이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겨우 짝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작극을 벌이다 못해, 독을 먹이고(이건 크 리스틴이 한 짓이지만), 죄 없는 이를 끌어들여 손가락질을 받게 만들었던 아이들을 보담아 안기 보다는 내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남는다 치더라도 그들은 졸업을 할 그 순간까지 전교생에게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힌 채 학창 시절을 보내야 한다. 그것은 크리스틴이 겪었어야 할 시간을 보상해주고자 하는 카를로스의 안배였다. "불만이 있으십니까?" "..........." "제발...그것만은....그것만은..." "무엇을 말인가, 디아나?" "전교생 앞에서..망신을 주는 것만은...하지 말아주세요." 디아나의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검은 망사를 주시하던 카를로스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 망사부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떠냐? 네가 그것을 쓰고 다닌 1년 동안 몬트리얼의 모든 학생들과 선생들이 크리스틴을 손가락질 했다는 것을 잘 알텐데? 게다가 넌 네가 꾸민 일을 크리스틴에게 덮어씌우고 칼까지 휘둘렀다. 그것은 어떻게 보상을 할 수 있느냐, 적어도 네 가 한 일의 일부는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 ".........." 학장의 대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디아나는 고개를 푹 숙였고, 뒤를 이어 모이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학장님! 말도 안되요. 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다시 영상을 보여 줘야 인정할테냐!" 공작이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일갈을 토한 카를로스가 모이라를 노려보았다. 그 동안 억지로 참고 있던 분노가 눈을 흐리게 하고, 맑은 정신을 붉게 물들였다. "넌 도대체 생각이 있는 아이이냐? 저 뒤를 봐라. 네가 가진 공작가의 여식이란 타이틀 하나만 믿고 있던 네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네가 저들을 구해줄 수 있느냐? 아버지의 위신 없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 아카데미에서 4년을 다니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지가 의 심스럽다. 그렇게 생각 없이 사니, 애꿎은 아이들만 다치는 것이다. 디아나의 얼굴이 저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네 잘못이라 할 수 있는데 끝까지 발뺌을 하고 싶더냐? 그렇게 당당 하고 그렇게 잘 났거든 혼자서 잘 하면 되지 왜 아이들을 선동하는 것이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을 이끌고 크리스틴을 찾아갔지? 무엇이 그렇게 잘 났느냐? 황금이라도 먹고 사느냐? 아니면 얼굴에 금칠이라도 하였느냐? 아버지가 공작이라는 것을 제외 하고 네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이 있느냐?" 정신없이 아이를 몰아치던 카를로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이라의 얼굴에는 눈물이, 공작의 얼굴에는 민망함이, 백작의 얼굴에는 통쾌함이 가득했다. "험험...거 학장, 오늘 보니 쌓인 것이 많았나 보오." "........." 사이먼의 중얼거림에 얼굴을 붉히던 카를로스는 학장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억지로 참았다. '젠장....!' 솔직히 그로서는 디아나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1년 간 마음고생 했던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더군다나 요 한 달간 백작의 압력을 받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것도 참으로 억울한 일이 었다. 기분같아서는 아카데미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도망이라도 갔으면 하던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번 들었었다. 그 분함을 누가 풀어줄 것인가? 헌데 모든 일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이 뻔뻔하게 대드니 자제력을 잃은 것이다. "휴...물러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어느새 10년은 폭삭 늙어 보이는 카를로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사이먼이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허허허! 신경 쓰지 마시오. 아비가 되어서 딸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했으니 내가 사과를 해야 하오. 아이를 아카데미에 보낼 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 구워먹든 삶아먹든 처분은 학 장의 몫이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지 않소. 배너 백작과 학장을 보기에 민망할 뿐이오." 참으로 일국의 공작답게 호쾌하고 시원시원한 태도였다. 대범함으로 무장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카를로스의 사심어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공작 은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지나쳐 멍하니 앉아있는 크리스틴의 어깨를 잡았다. 손아래에 느껴지는 뼈만 남은 듯 앙상한 몸이 공작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듣기로는 백작가의 여식이 그의 아비를 닮아 통통하단 말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살이 얼마나 빠졌으면 뼈가 만져질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이토록 말랐을까 생각이 들었다. "험험. 면목이 없구나. 내 딸의 일도 그렇고...어제는 정신이 없어 인사를 못했다. 고맙다. 네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고 대신관님께서 칭찬을 하시더구나." 완전히 독을 몰아내고 마법으로 독에 중독된 것처럼 꾸며 신전으로 모이라를 보낸 크리스틴의 기지에 그레고리 대신관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신성력이 아니면 절.대.로. 없앨 수 없는 독을 일 시간 막아놓다니, 누.군.지.는 모.르.나. 참으로 장한 일을 했습니다!」 물론 그는 모이라의 정체를 안 순간 그녀를 치료한 인물이 '이카루스의 아이'라는 것을 한 눈 에 꿰뚫어보았다. 그의 능청스런 연기에 속아 넘어간 공작은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약초학 선생 을 부르러 뛰어갔던 크리스틴의 대범함과 재치, 뛰어난 판단력을 높이 샀다. 크리스틴의 마른 어깨를 다독이며 칭찬을 해대는 공작을 보며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모이라였다. "아...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아이는...!" "널 살려주었다." "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딸에게 한심하단 얼굴을 지어보인 공작은 내심 어제의 그 급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네가 갑자기 쓰러지고 우리는 모두 정신이 없었다. 네게 해독마법을 걸었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 숨은 점점 미약해지고, 얼굴은 검게 죽어가고...모두들 손을 놓고 얼이 빠져 있을 때 이 아이만이 재빠른 판단을 내렸다. 네가 쓰러지자마자 달려 나가 치료사 선생을 모시고 왔다. 그 분이 네가 더 이상 독에 침식당하지 않게 손을 써주셨고 그 길로 대신관님을 찾아가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조금만 응급처치가 늦었다면 넌..."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공작의 말이 이어질수록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잘근거리던 모이라의 시선이 크리스틴에게 향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금발머리 소녀가 보였다. 장장 4년이었다. 겨우 백작가의 여식 주제에 '황태자비'가 될 것이라 큰소리를 치고 다니는 것이 보기 싫어 괴 롭히기 시작한 것이. 죄책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주제파악 못하고 날뛰는 어리석은 바보를 혼내 준다는 생각으로 4년을 괴롭혔다. 다행히 크리스틴은 머리가 나빴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미.모.를 가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괴롭히고, 대놓고 무안을 주며 한껏 비웃어주었다. '돌대가리 크리스' 그것도 모이라 자신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식당 한 가운데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던 모이라를 노려보던 푸른 색 눈이 이제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평온하게만 보였다. '나 같으면 그냥 구경이나 했을텐데...' 아무리 버르장머리가 없고 콧대가 센 아이라 하더라도 모이라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살리는데 일조한 사람을 보고도 코웃음을 치며 그냥 넘기기에는 아직 어렸다.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입을 막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독을 먹인 것이 크리스틴이라고 확신하며 달려 나가지 않았던가. 그 긴 세월동안 상대방을 괴롭히고 비웃으며 즐거워하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를 살리기 위해 열심히 달렸을 크리스틴의 모습이 겹쳐지자 차마 입을 열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가슴 가득 차오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크리스틴을 바라보는 모이라의 시선에서 적개심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있던 디아나의 입술이 비틀렸다. 두 사람은 계속 반목을 해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자신의 계획에 도움이 될 터인데, 여기서 두 사람이 화해를 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공작과 백작이 힘을 합치면 남작가 정도는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녀의 불안함이 전달된 것인지 묵묵히 앉아있던 크리스틴의 시선이 디아나를 향했다. 무슨 생각에선지 한참을 디아나를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가 한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한 것입니다, 공작님.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저에 대한 오해가 풀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솔직히 남은 세월동안 비웃 음을 사며 공부하기에는 제 신경이 그리 튼튼하지 않거든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날름 내미는 크리스틴의 얼굴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보였다. 넋을 잃은 듯 소녀의 붉은 입술을 쳐다보는 아들의 발을 힘껏 밟아준 카를로스는 자신이 서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는 백작의 시선에 얼른 아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들 교육 똑바로 시켜!' 이곳저곳 벽도 없이 뚫고 다니는 마법사의 경고가 지금 듣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뇌리에 울려 퍼졌다. 아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크리스틴을 훔쳐보느라 목을 길게 빼던 카민은 발을 짓 누르는 엄청난 압박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젠장 좀 보면 닳기라도 한데?' 그저 귀엽고, 보호해주고 싶고,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 다가간 것뿐인데 그것이 큰 죄라도 되는 양 구는 아버지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너무 가까웠다. 겨우 백작의 시선에서 카민을 보호한 카를로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울고 불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하인들을 불러 방으로 쫓아내고 아직 멍하니 크리스틴을 보고 있 는 모이라와 깊은 사색에 빠진 디아나 역시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남아있는 공작에게 허리 를 숙여 인사한 카를로스는 모이라가 독에 당한 연유를 조사해보겠다고 약속을 했다. "흠흠...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네." 백작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내심 실소를 흘리며 공작을 배웅한 카를로스는 그때까지 학장실에 남아있던 백작부녀를 보았다. "지금...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우리 딸 좀 잘 부탁하네." 언제부터 백작에게 반말을 듣게 되었는지 심각한 고찰에 빠져있던 카를로스는 백작과 함께 나가 려는 크리스틴의 발목을 잡았다. "카민, 네가 백작님을 배웅해드려라. 백작님, 크리스틴과 잠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만..." "흠흠. 알았네. 크리스, 나중에 연락을 하거라." "네, 아버지.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어머니께도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시고요." "알았다." 딸과 헤어지는 것이 싫은지 몇 번이나 건강하라고, 힘들면 당장에라도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한 백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카민을 노려봐주고는 학장실을 빠져나갔다. 크리스틴의 아버지에게 좋지 못한 시선을 받은 카민은 우울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고 학장실이 조용해 지자 카를로스가 크리스틴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뭔가 할말이 있지?" 대뜸 먼저 말을 하라고 청하는 카를로스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보인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 처분에 대해서라면 하지 말라고 하고 싶구나." ".........." 절대로 결정을 유보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카를로스는 소녀의 고집스러운 시선을 외면했다. "모이라에게 독을 먹인 사람을 알아요." "..........!" "그래도...안되나요?" 결코 고개를 흔들 수 없는 조건을 걸고 결정을 물려달라고 청하는 크리스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이럴 때는 말이다, 학장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진다. 말해보렴." 미안한 마음을 담아 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조그마한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샌들우드가 남기고간 영상 수정구였다. 자신의 책상에 있어야할 것이 크리스틴의 손안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카를로스는 곧 그것이 샌들우드가 주고 간 것보다 조금 작다는 것을 알아채었다. "제가 보여 드리는 것은 비밀로 하셔야 해요.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되요. 약속해주 실 수 있나요?" 크리스틴의 요구에 잠시 인상을 쓰던 카를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안될 말이다. 이번 일은 멜포레스 공작님이 부탁을 하셨어. 아니, 공작님이 아니더라 도 밝혀내는 것이 내 임무다. 우리 아카데미에서 독살 사건이 일어나다니...안될 말이지."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눈을 감고 생갹에 잠겨 있던 크리스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학장님의 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라두요?" ".........?" "이번 일은...궁에서 조사가 나올지도 몰라요. 그래도...비밀을 지킬 수 없으세요?" 카를로스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그것이...그것이 무슨 말이냐? 궁에서 조사가 나오다니!" "조용히 처리를 해야 해요. 하독을 한 사람도 모르게...본인은 자신이 한 짓을 들켰다는 것을 몰라요. 그 상태로 조용히 조사를 해야 해요." "..........."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는 카를로스를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수정구를 앞으로 내밀었다. "리플레이(Replay)" 손바닥만한 작은 수정구에서 눈부신 빛을 발하며 학장실의 절반 크기의 원반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낯이 익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모이라와 디아나가 차를 마시는 장면, 아니 정확하게는 모이라가 찬장 쪽으로 등을 돌리는 순간 디아나가 사탕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 장면이 펼쳐졌다. "스탑(Stop)" "이게 무슨...?" "디아나의 손을 보세요." 디아나는 사탕 접시 위에서 손을 뻗어 모이라의 찻잔을 가리키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사탕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손가락 끝이 어디에 있지요?" "그거야....응?" 디아나의 손끝은 찬잔 위에 있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찻잔의 가장자리의 조금 안쪽으로 손가락하나가 길게 뻗어있었다. 그냥 습관적인 행동이라 봐도 무방하건만 굳이 이 장면에서 화면 을 정지시킨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카를로스를 일견한 크리스틴은 영상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모이라가 찬장으로 다가가고 그 몇 세크(초) 동안 디아나의 사탕을 고르는 행동은 그 상태 그대 로 유지되고 있었다. "세상에!" 영상을 담고 있던 샌들우드의 키가 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뻔히 보고도 그냥 넘어갈 뻔했다. 시야가 대각선 아래로 향해있는 덕이었다. 디아나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연녹색 액체가 투 명한 차 속으로 흘러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색 깔이 있는 액체가 무색의 차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는지 의문을 갖기도 전에 그저 손가락 끝에 서 피처럼 흘러나오는 액체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저것이...모이라에게 사용된 독이에요." "..........." 얼이 빠진 얼굴로 화면만 주시하고 있는 카를로스를 보던 크리스틴이 말없이 영상을 껐다. 빛을 잃은 수정구는 다시 크리스틴의 품안으로 사라졌고 멍하니 그것을 따라 시선을 주던 카를로 스가 언뜻 정신을 차렸다. "설명을..."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이 독은 해독제가 없는 것으로 과거에 황태자 전하께서 중독되신 것과 같아 보인다고 하셨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스승님께서는 황제 폐하와도 친교가 있으셨다고 들었어요. 해서...몇 년 전에 있었던 황태자 전하의 병환 때문에 궁에 가신 적이 있었지요. 지금도 조사 중이라고 들었 는데...황태자 전하께서는 병으로 쓰러지신 것이 아니라 독에 당하신 거였다고 하셨어요." 카를로스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엄청난 사실을 들은 것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황태자가 중독이 되고, 그 독을 디아나가 쓸 수 있는가? 뒤죽박죽된 머리를 애써 정리를 하려던 카를로스는 백기를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다려주세요." "..........?" "공작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그냥 내버려두시고 조사를 하시는 척만 하시면 되요." 크리스틴의 말에 쓴웃음을 짓던 카를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이것을 알려준 대가로 내 입을 막고, 내 결정을 유보해야 하는 것이냐?" 학장의 권위란 것은 없다. 적어도 카를로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내심을 짐작한 크리스틴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저는...내일 학장님이 하시겠다고 약조하신 것을 취소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디아나의 일...묻어두셨으면 좋겠어요." 카를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냐? 왜 굳이 불명예를 안고 살려고 하는 것이냐?" "그건..." '죄책감 때문이에요. 제가 한 일이 아니지만, 제가 한 것이니까요...' 시야가 흐려지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인 크리스틴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굳이...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전 손가락질 받을 행동을 했고 결과였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바뀌면 시선도 달라질테죠. 힘들겠지만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구나...이미 지나간 일인데 그것을 들추어서 모이라와 디아나의 명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요. 이미 벌을 받았으니. ..1년이나 정학을 내리신 것도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요." 어깨를 들썩이며 장난스럽게 입을 닫는 크리스틴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런 아이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동안 아이를 잘못판단하고 편견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알았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그렇게 해주마. 하지만 1년 정학은 못 물린다. 몬트리얼에서는 유독 퇴학당한 학생들이 많았지. 나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이번 일은 정말 많이 양보한 것이 야. 네가 그것을 알아야한다." 몬트리얼. 졸업이 힘든 만큼, 중도에서 탈락한 이들은 이제까지 졸업장을 딴 학생들의 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졸업생이 입학자의 30%가 되지 않으니, 나머지 70% 중 일부는 수료생, 그 외에는 모조리 퇴학 혹은 자퇴였다면 말 다한 것이 아니겠는가? 명문 아카데미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몬트리얼은 학생들을 퇴출시키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아카데미에 수치가 되거나 학생 신분을 망각한 이들은 가차 없이 퇴학이었고 있는 집안 아이들은 자퇴를 권유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크리스틴 역시 여섯 사람이 정학을 당한 것에 있어서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의 강경한 목소리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2년이나 유급을 당한 전 왜 퇴학을 당하지 않은 거죠?" 참으로 일찍도 물어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던 카를로스가 철퇴를 내려쳤다. "한 번만 더 유급당하면 퇴학이다." 몬트리얼 학칙 제 1조. 한 학기당 3과목 이상 낙제를 받으면 유급. 3회 유급을 한 경우, 학생의 본분을 망각하고 학업에 충실하지 않은 결과로 판단되는 바, 이유를 불문하고 퇴학이다. 크리스틴이 소홀히 넘긴 학칙이 그녀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 짜자잔~~~ 이번편 끝났군요. 므흐흐흐 제가 이것을 끝내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실테지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어져 결국에는 원점. 뭐 다 그런거 아닐까요. > < 크리스틴의 성장기를 조금 앞당기기 위해서 사건을 엮었습니다.(특기지요, 2개를 한개로 묶기) 에또...제가 태그를 쓸 줄 모르거든요. 어찌 50회를 만들었냐고 물어보신다면...짜집기라고 과감히 말씀드리겠나이다. 그림을 좀 키웠으면 싶던데..어떠세여? 방법을 아시는 분...도움을 좀...콜록(네 저 컴맹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도 같이 엮어놨는데, 시간 나시면 그림도 보고 음악 감상도 하시고 식상하면 리플달아주시면 음악정도야 바꿔드리지요. 생전 처음 받아보는 축전이라...코코코코 앞으로도 혹.시. 그림 보내주시면 산딸기 님이 보내주신거랑 같이 이어서 붙이거나, 아니면 계속 자리를 마련해드릴께요. 편수가 문제가 아니지요. > < 엥, 그리고 새로오신 분들이 계시더군요. 30회 전후로 새로 생긴 리플을 읽어보니...하루만에 이걸 다 읽으셨더군요! 대단하십니다! 저도 못하는 것을...(_ _) 존경, 존경....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구요, 끝까지 함께 해주시길 감히 바랍니다. 여러부운~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이 런.....! 1. 모이라를 비롯한 다섯 명의 아이들이 정학을 받고 다음해를 기약하며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간 다음 날. 아침부터 카를로스의 학장실이 난데없는 사람들의 난입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큰소리로 항의 를 하며 떠들어대는 사람들 덕분에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학장실 중간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카를로스는 그저 이만 갈아댈 뿐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자작극이라니요!" "그런 학생을 어떻게 정학만 시킨 겁니까!" "맞습니다, 당장 퇴학을....!" "이런 것이 소문이 나면 아카데미 위신이.....!" "학장님 재고를...!" "아이들도 난립니다! 그런 아이들과 공부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물고 계시다니 학장님 왜 그러신 겁니까!" "크리스틴이란 아이가 억울하지 않습니까아!" "학장님, 대답을...!" 대답은커녕 귀가 멍멍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내 이놈의 자식을......!' 지난 밤 엄청난 보안을 뚫고 학장실을 털어간, 간 큰 도둑이 있었다. 디아나와 모이라의 일을 묻어두기로 한 크리스틴과 한 약속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 밤중에 학장 실을 침입한 도둑은 두 개의 수정구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것도 모르고 꼭두새벽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여 산책을 나갔던 카를로스는 수련장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 도.둑.놈.은 단상위에 올라가 음료수를 홀짝이며 뻔뻔스러운 얼굴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수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과 선생들을 대동하고! 더군다나 경악한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친 도둑놈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것이 아닌가? "너...이 놈, 카민 라그나로크!!!" 그 다음 순간부터 카를로스의 기억은 온통 함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호통을 치려던 카를로스는 어떻게 학장이 이런 일을 덮어두려 했는지 이해 가 되지 않는 다며 몰려드는 군중을 피해 학장실로 도망을 가야했다. 거기다 학장실의 출입이 자 유로운 선생들은 볼을 부풀리며 항의를 하는 학생들의 뜻을 등에 업고 카를로스를 뒤따라 들어와 쉴새없이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몇 나르. 풀린 눈으로 머리를 쥐어뜯던 카를로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마안!!!!" ".........." 발작적인 외침에 입을 닫은 선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카를로스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을 쓱 둘러보던 카를로스가 고개를 팩 돌렸다. "이번 결정은 크리스틴 폰 배너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뿐이요." "그...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설마 그렇게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아이들을 용서해달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요?" "공작님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말도 안돼!" 또 다시 터져 나오는 원성을 손짓으로 무마시킨 카를로스가 이를 갈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젠장! 크리스틴이 덮어두자고 했단 말이요오~~~~~!! 누구는 퇴학시키기 싫어서 안 할줄 아시오! 내가 그렇게 물렁해보이오! 정학도 없던 일로 해달라는 걸 아카데미 역사까지 들먹여가며 설득 한 나요! 젠장! 빌어먹을! 다 나갓!! 빠드득!" 붉게 핏발선 눈, 까치집이 된 머리,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여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다 엎어버릴 기세에 찔끔한 선생들은 서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교환하며 학장실을 나갔다. "제엔장!!!!!!" 챙그랑~! 콰직! 콰지직! 문이 닫히자마자, 드래곤의 포효소리 저리가란 외침에 뒤를 이어 집기가 부서져나가는 소리가 적 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이런..." "쌓인 게 많으셨나봐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학생들...." 콰과광!!! 미련을 못 버린 듯 한 마디 하려던 선생은 등 뒤에서 들리는 엄청난 소음에 입을 닫았다. "사실인가 보네..." "그렇군..." "크리스틴이 그런 부탁을 했다니..다시 봐야겠네." "그러게..."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줘야지요?" 처음에 카민은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다며 동급생들만 불러들였다. 그렇게 모여 돌려보던 영상은 몇 미르도 되지 않아, 수많은 학생들과 선생들이 보게 되었다. 그것은 영상을 보고 분개한 몇몇 학생들이 친구들을 끌고 오고, 선생들에게 항의를 하러 갔기에 그리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쯤은 전교생 모두가 그 일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미친 듯이 발광하는 학장을 내버려두고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휘적휘적 걸어가던 선생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돌대가리 크리스한테 그런 아량이 있었다니....! 별명을 바꿔줘야겠군.' 「해심화(海心花) 크리스틴」 바다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아름다운 꽃이란 의미에서 만들어진 별명. 후에 아카데미를 비롯한 바이오니어 전국을 진동시킬 별명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모이라, 디아나와 나머지 네 아이들 모두 정학을 받아 집으로 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정녕 몰매를 맞아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사건은 그렇게 카민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 한편 정작 사람들의 이목을 한 곳에 집중시키게 만든 장본인은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듯 충혈된 눈으로 방안을 서성대고 있었다. "이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그야 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2년이나 유급을 하고, 1년을 휴학한 학생이 단 번에 학과 시험을 패스하면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은 자명한 일. 그렇다고 자신의 계획대로 유급을 받자니 퇴학이라니....! 밤새 이 문제로 고민을 하던 크리스틴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작에 공부 좀 하지...얼굴이 밥 먹여줘요?" 아카데미를 다니는 4년 동안 크리스틴이 관심을 가진 것이라고는 옷과 장신구, 몸매 가꾸기, 얼굴 가꾸기 등등 이었다. 그나마 3학년으로 진학한 것만도 천운이오, 후배들을 협박해 답지를 몰래 훔쳐본 결과였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군 크리스틴은 어깨위에서 날개짓하며 쪼로롱 울어대는 카사의 부 드러운 몸을 쓸어주었다. "한심해......" 어두운 얼굴로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스틴이 갑자기 화색이 도는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거야!" 손뼉을 짝 치며 활짝 웃던 크리스틴은 얼른 실프를 불러내려다 실피드를 불러 길안내를 부탁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교무실에 뛰어 들어간 크리스틴은 선생들의 야릇한 시선이 자신을 향해있다 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마커스 선생님!" 덥수룩한 얼굴에 수염도 깍지 않은 상태로 게슴츠레한 눈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마커스에게 달려간 크리스틴은 그의 두툼한 팔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선생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낑낑거리며 팔을 잡고 늘어지는 조그마한 소녀를 보며 실소를 짓던 마커스가 커다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뭐냐,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냐?" "선생님..." 상기된 얼굴에 이제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아이를 보고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던 마커스는 어슬 렁어슬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복도가 아닌 건물 밖까지 나간 마커스는 크리스틴을 내려다보았다. "여기면 되느냐?"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크리스틴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마커스 의 얼굴을 향해 까닥까닥 손짓을 했다. 그녀의 행동에 엉거주춤 허리를 숙인 마커스는 그의 귓가 에 속닥거리는 크리스틴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커트...라인(cut-line)?" 그의 반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라면서요? 얼마나 점수를 받으면 합격이에요?"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크리스틴을 주시하던 마커스는 아이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뭐냐, 너 커트라인만 알면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이냐?" "노력할께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상기된 얼굴로 파이팅을 외치는 소녀를 보며 피식 웃던 마커스가 이내 껄껄 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마음먹은 데로 되느냐? 어찌되었든 각 과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만점에서 70% 이상은 맞아야한다." "70%...."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던 마커스가 어깨를 들썩였다. "왜 유급할까봐 겁이라도 나느냐? 신경 안 쓰는 것 같더니?" 그 말에 볼을 긁적이던 크리스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5피텐이 조금 넘는 아담한 키에 세상 모든 시름을 한 어깨에 짊어진 듯 조그마한 입술을 달싹이며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억지로 꾹 눌러 참던 마커스는 귀를 기울여 아이의 말을 경청했다. "한 번만 더 유급하면 퇴학이래요." ".........." 크리스틴의 중얼거림에 아이를 치료사로 키워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던 마커스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며 크리스틴의 작은 어깨에 솥뚜껑만한 두 손을 척 올려놓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열심히 하거라." 찬바람이 불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듯한 착각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크리스틴이 예의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마커스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네!" "합격!" "네!" "진학!" "네!" "가서 공부해라. 수업 때 보자." "네, 감사합니다!" 몇 번을 다짐을 받은 마커스는 그래도 불안한 얼굴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리스틴의 등을 두드려주고 열심히 달려가는 아이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크리스틴...그곳은 기숙사가 아니다...." 기숙사가 있는 곳과는 정반대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는 아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마커스는 털레털레 교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마커스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선생들을 보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뭐...뭡니까?" "크리스틴이 뭐라고 하던가요?" "혹시 학장님께 부탁드린 거 철회한다고 그러지 않던가요?" "네, 그렇죠? 역시 퇴학이지요?" "...........그런 것을 제게 이야기해서 어쩌자는 겁니까? 제가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학장님께 죄송하니까, 선생님께 부탁한 것 아닌가요? 그렇죠?" "그럴꺼야,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물어오는 선생들을 보고 입맛을 쩝쩝 다시던 마커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아이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이더군요. 오늘 일도 모르는 것 같고..." "네?" "한 번만 더 유급하면 제적이라고, 합격 커트라인을 물어보러 왔더군요." "............" 그제야 아카데미의 학칙을 떠올린 선생들은 마커스와 별반 다르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그렇군...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군..." "저런..." 모이라와 디아나의 처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깡소리나는 머리로 이번 학기에 제대로 점수를 받아 아카데미에 남는 것이 문제였다. 한결 썰렁해진 분위기로 자리에 앉은 선생들은 한마음 한 뜻으로 이번만은 제발 '돌대가리 크리스'가 공부를 열심히 해주기를 기도했다. 아카데미에서 불명예를 얻었으니 그것을 회복 하는 것도 아카데미에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급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지난 1년 동안 그 아이를 손가락질했던 행동을 보상해줄 수 있을 테니까... 드르륵~ 첫 수업 시간. 제일 먼저 교실로 들어서던 학생은 구석에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소녀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암울한 오로라를 풍기며 책을 파고 있는 인물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아이였기 때문 이었다. "크...크리스틴?" "......안녕하세요." 소년의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짧게 인사한 크리스틴은 예의 심각한 얼굴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아침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크리스틴의 분위기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책을 보는데 목숨을 걸고 있는 듯한 심각한 분위기. 하지만 크리스틴이 보고 있는 책이 교과서가 아닌 의학도서라는 것을 알았다면 기절을 했을 것 이다. '일단...분위기는 잡아놓았고...' 어떻게 해서든 열심히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야 아슬아슬 합격을 해도 이상 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신기한 모습이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크리 스틴은 자신의 연극에 심취해 역사 선생이 들어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흠흠, 수업을...시작하겠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에게 인사를 시키며 크리스틴을 놀렸던 역사 선생은 교실 한 구 석에 틀어박혀 눈에 불을 켜고 책을 파고 있는 소녀를 보고도 애써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눈을 빛내며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던 크리스틴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선생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에...시험이 이제 한 달 남짓 남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우~~~" "요즘 너희들의 수업태도가 너무나 훌륭해 이 선생님이 조금 힌.트.를 줄까한다." "우와~~~~!" "험험, 그럼 선생님이 지금부터 일러주는 범위 안에서 문제가 나올 테니 메모를 하도록, 준비 가 되었나?" "네에~!" 몬트리얼 아카데미 역사상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싱글벙글 메모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크리 스틴만 지켜보던 역사 선생은 손에 땀을 쥐었다. '크리스, 펜을 들어라, 그래! 그리고 열심히 적는 거다! 내가 말해주는 것만 봐도 합격은 무난 하니 제발...외우기만이라도 하거라.' 하루아침에 크리스틴을 보는 시각을 바꾼 역사 선생은 그동안 맘고생이 심했을 단 학명의 학생을 위해 과감하게 시험 문제를 찍어주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물론 평소 3개를 가르치며 10개를 까먹는 크리스틴의 단단한 머리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간 아이를 비웃었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차분한 얼굴로 또박또박 교과서 페이지까지 불러주며 힌.트.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일러준 역사선생은 뿌듯한 얼굴로 교실 을 벗어났다. '차라리 커트라인을 낮춰달라고 건의를 해볼까...' 자신이 만들어놓은 문제가 있는 부분을 거의 다 가르쳐주고도 불안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등을 돌 리던 선생은 다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설마 한 달을 공부해서 그 정도도 못 외우겠어?' 그녀는 예전의 크리스틴이라면 한 달이 아니라 한 학기를 꼬박 밤을 새워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다. 크리스틴이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 아카데미에 돌풍을 몰고 왔다.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던 학생이 난데없이 도서관을 출입하며, 아예 그곳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질 않는 모습은 다른 학생들의 귀감이 되었다. '도대체 저 아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라며 울부짖던 사서 역시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시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모이라와 디아나가 크리스틴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이 파다하게 퍼져나가며 그런 술수에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다녔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단한 아이라 입의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버렸다. 다른 학생들 역시 제적(除籍)을 당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혀 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은근히 그녀가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말을 걸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들로서는 카민이 보여준 영상구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목숨을 걸고 공부하는 학생을 방해할 만큼 눈치가 없는 아이 들이 아니었다. 크리스틴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지 일주일이 지나자, 학생들과 선생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흘러 다니기 시작했다. "야, 들었어? 돌대가리 크리스가 사실은 돌대가리가 아니래!" "쉿! 말도 마라, 모이라 그 계집애 등살에 일부러 바보처럼 군거래!" "불쌍하다, 그치?" "그래도 대단하잖아! 장장 4년이야! 4년을 그렇게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아카데미에 남았 잖아, 나 같으면 벌써 다른 곳으로 갔을텐데..." "3학년을 2년이나 한 것도 알고 보면 모이라를 피하려고 그랬던 거래!" "디아나는 또 어떻고! 그 뻔뻔한게 망사 쓰고 연극한 걸 생각하면...으드득!" "정말 못 되먹었지? 그러고도 크리스를 칼로 찔렀대잖아!" "뭐?" "못 들었니? 크리스가 복학하고 나니까 자기들이 저지른 일이 들통날까봐 칼로 찔러서 입막음 하려고 했었데!" 참으로 소문이란 것은 무서웠다. 어떻게 4년이나 손가락질 받고 무시당하던 인물이 채 몇 주도 못 되어 이토록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반면에 무서울 것 없이 종횡무진, 아카데미를 휘젓고 다니던 공작파(일명 모이라파) 학생들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욕을 먹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간사하다 하는 것일까? 모이라를 위시하여 돌대가리 크리스를 한번쯤 비웃어보지 않았던 이들이 없었건만 그들은 자신들 이 했던 행위는 몽땅 잊고 오로지 모이라와 디아나를 욕하며 그들의 추종자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크리스틴의 훌륭한 태도를 우러러보았다. 당연히 이것은 복학을 한 후 보여준 크리스틴의 달라진 모습이 일조를 했다 할 수 있었다. 수업시간 마다 보여주던 '당당하게 졸기' 혹은 '거울 보며 얼굴 가꾸기'등의 행동은 일체 삼가고 틈만나면 책을 읽는 모습이 그녀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결코 나서는 경우는 없으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물론 일부에서는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 노릇한다'며 모이라가 없는 몬트리얼에서 인기를 구가하는 크리스틴을 비웃었지만, 크리스틴은 남들이 뭐라 하건 절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공부를 했고, 잠자는 시간마저 줄이며 몸을 혹사시키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 자, 12시 3분 전입니다! 코코님 되었지요! 흑... 귀얇은 유키...오늘도 다 잤네요. 엄마는 약들고 문앞에서 짜증내고 12시는 다가오고.. 15일 3연참 하기 위해 장금이도 포기했습니다아~~~~~~~!!! 여러분 힘을 나누어주세요! 유키가 30kb 광참을 할 수 있게될 그 날까지. 화이팅~!!!! 초록배님 학교가셔야지요? 주무세요. > < 그럼 내일 인사드릴께요. 여러분 행복하세요오~~~~~~~~~~~~!!! 글 올린 후 추신 : 급박하게 글 올리느라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까먹었습니다. - -+ 생각나면...내일 올릴께요. ㅠ ㅠ (돌대가리 유키......흑) 앗 생각났당! 2회부터 나이를 수정하긴 했는데, 혹시나 빠진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길... 제 글을 읽는다는건...고문이더이다...ㅠ ㅠ (정말 싫었습니다...흑)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이 런.....! 2. 모두가 잠든 시각. 몬트리얼의 기숙사 한 곳에서 마나가 요동쳤다. "무슨 일이냐, 이 시간에." 한 밤중에 크리스틴의 연락을 받고 급히 날아온 샌들우드는 어두운 침실에서 걸어 나오는 작은 인영을 보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너!" 어둠과 동화되어 구별이 안 될 정도의 칠흑 같은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남자들이나 입는 검은 바지에 검은 와이셔츠를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머리색과 분위기는 다르나 분명 크리스틴 이었다. 소녀의 푸른 바다와 같은 반짝이는 눈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스승님, 죄송해요. 전 이곳 지리를 모르니...도움이 필요해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정보 길드로...가야겠어요." "지금?" "네." "왜 하필이면 이 밤중에....?"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이유를 물어보는 샌들우드의 눈은 분명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이 검게 물들인 머리카락. 그것이 그의 마음에 한 가닥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단지 마법으로 머리색을 바꾸었을 뿐인데 사람이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는지 의아해하던 샌들 우드는 푸른색 눈을 가진 크리스틴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이는 또 다른 소녀의 슬픈 얼굴을 애써 지워냈다. "낮에는...공부를 해야하거든요." 샌들우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살짝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히던 크리스틴은 한참동안 대답이 없자 이상하단 표정으로 샌들우드를 보았다. "스승님?" "아...공부? 헛, 그래. 넌 학생이니 공부를 해야지.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 "네." 뭔가 말을 돌리는 듯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어깨를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에 미소를 지었다. "텔*레*포*트" 바이오니어의 수도 갈렌에 위치한 한 술집. 【그림자의 쉼터】라는 음침한 이름답게 시가지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술집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거리를 지나치는 술주정뱅이를 보고 몸을 피하려는 듯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 문을 닫을 시간이건만 그들이 찾아들어간 곳만은 아직 태연한 얼굴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손님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노소(老少)를 살펴보았지만 그들 은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모르는 척하며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헌데 이곳은 미성년자는 출입할 수 없는 술집입니다만..." "이 아이는 내 손녀이네. 보호자가 있으면 상관없지 않은가?" "아...네." "콰이나 주스 한잔하고 난 블랙 버블을 주게." ".........." 샌들우드의 주문에 술집 안이 조용해졌다. 뭐라고 떠들어대던 손님들이 일제히 입을 닫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태연한 얼굴로 살기어린 기운에 코웃음을 치던 샌들우드가 탁자를 내려쳤다. "블랙 버블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사이 주문이 바뀌기라도 했는가?" 사실 샌들우드는 자신이 정보 길드를 찾은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에 스스로도 자신 없어 하면서 결코 내색을 하지 않는 그는 정말 그의 주장대로 200세를 바라보는 백전노장임에 틀림이 없었다. 한편 큰소리를 뻥뻥치는 스승을 보며 그것이 허풍이라는 것을 간파한 크리스틴이 작게 한숨을 쉬며 슬그머니 카운터 아래로 손을 내리는 바텐더를 직시했다. 티끌 하나 없는 푸른 눈에 찔끔 하던 바텐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 상쾌해질 정도로 밝은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소녀를 보고 칼 을 쥐려던 행동을 멈추었다. "의뢰를...하러 왔어요. 인사를 드렸으면 하는데, 너무 늦어서 곤란한가요?" 미안함이 담긴 솔직담백한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던 바텐더는 소녀와 함께 들어온 노인이 이 를 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그게 주문이 바뀐 지 5년이 넘었습니다. 블랙 버블이 아니라 블랙 소샤입니다. 어쨌거나... 따라오시지요." 소샤. 알콜 도수가 50도가 넘는 독한 술 이름이었다. 그 사이 주문이 바뀌었단 말에 머리를 긁적이던 샌들우드는 바 뒤로 열린 작은 문으로 빨려가듯 사라지는 크리스틴의 뒤를 따라 바삐 걸음을 옮겼다. '겁도 없지...' 예가 어디라고 저렇게 낯선 사내를 냉큼 따라가는 것인지, 크리스틴의 무대포 정신에 혀를 내두 르던 샌들우드는 낯이 익은 골방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생긴지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냐? 돈 좀 벌었을텐데...치장이라도 좀 하지. 쯧쯧" 정보 길드라는 곳이 생긴 지 겨우 120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에 놀라던 바텐더는 노크를 하려고 들어올렸던 손이 무색하게 벌컥 열리는 문을 보며 한걸음 물러났다. "들어가시지요." 공손한 태도로 '손님은 왕'이란 상가의 모토를 충실히 지킨 바텐더는 서둘러 돌아갔다. 활짝은 아니나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린 문틈을 보고 샌들우드를 올려다보던 크리스틴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정보 길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안은 삭막했다. 책상하나, 방안을 밝히는 등 하나. 어둠침침한 분위기 속에서 책상위에 다리를 걸치고 등을 기대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다리를 내리고 책상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앉으라는 말도 없이(의자도 없었다) 용건만 간단히 물어보는 사내의 태도에 샌들우드가 콧방귀 를 꼈지만 크리스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둠을 밝혀주세요, 라이트" 다만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소녀의 작은 속삭임에 터져 나온 밝은 빛은 방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사내의 얼굴. ".......!" "이런...!" "젠장!" 사내가 불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명백했다. 이제 갓 서른 둘, 셋 정도 되었을까?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사내는 선이 고운 얼굴에 밝은 회갈색 머리카락을 곱게 길러 어깨까지 늘어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상흔.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자상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부드러운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왼쪽이마에서 시작된 상처가 턱까지 쭉 이어져 얼굴을 2/3 등분으로 갈라놓고 있었는데, 날카로 운 검이 아닌 마치 톱으로 잘라낸 듯한 거친 상처였다. 그 잔인한 손속으로 왼쪽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검은 구멍만 뻥 뚫려 있었고 청색이 도는 검은 눈동자 하나 만이 유일한 빛을 받으며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얼굴이 드러나자 책상 서랍을 뒤져 검은 끈이 연결된 천 쪼가리를 주어드는 반응으로 봐서는 아마도 밤이라 안대를 풀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상관없습니다." "........." 신경질적으로 안대를 꺼내든 사내가 자신의 상처를 수치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장사에 지장될까 저어한다는 것을 간파한 크리스틴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의 행동을 만류했다. 어려서부터 볼꼴 못 볼꼴 다 보고 자란 아이이기에 그의 얼굴에 난 상흔정도야 별것 아니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괜히 보이고 싶지 않아하는 것을 본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면식은 했으니 하는 생각에 마나를 거둬들인 크리스틴은 다시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는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용건만...간단히 해야겠지요?" "말씀...하시오." "물건을 훔치는 것도...의뢰할 수 있나요?" ".........?" 샌들우드와 사내의 눈길이 동시에 크리스틴을 향했다. 이해할 수 없는 주문에 의아한 기색을 보이던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금액에 따라 그 정도 서비스는 할 수 있소. 그래, 어떤 것을 원하시오." 정보 길드의 시작은 도둑 길드였다. 처음 도둑길드를 시작하여 부당한 부를 착취하는 이들의 금품을 거두들이던 자들은 이내 자신들 의 직업으로 얻을 수 있는 부가적인 이점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정보였다. 어떤 곳이든 마 음만 먹으면 희생을 치러서라도 침투할 수 있고, 어떤 물건이든 꺼내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들은 차츰 돈이 될 수 있는 정보를 팔아먹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탄생된 것이 정보 길드였다. 외부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정보 길드의 모체는 도둑 길드요, 지금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둠을 지배하게 된 형제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었지만, 두 번의 수고를 덜게 된 크리스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작은 소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디아나 만 아로니에...로버트 만 아로니에 남작님의 따님이 가지고 계신 독...약이 필요해요." "조금...상세하게 이야기 해주실 수 있소?" "병의 크기는...아마도 손가락하나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작을 것이고, 독약의 색은 연녹색이 에요. 비용과 시간은 얼마나 들던 상관이 없으니 그것을 찾아주세요. 그리고...남작가 전부 를 털어서라도 연녹색 액체가 든 병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내어 위치만 알려주세요. 증거는. ..하나면 충분합니다." 크리스틴의 요구에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사내가 어깨를 들썩였다. "확답은 못하겠소만...일단 의뢰는 받아들이지. 그것이 다요?" "남작가의 식솔들 모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가족관계, 출신, 남작가에 드나드는 사람들 명단 모두요." "........아가씨...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 "아니, 손님이라고 합시다. 손님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뭐요? 알려줄 수 있소?" 사내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크리스틴은 단도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사를 해보시면 알게 되실 테지요.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득 사내의 뇌리에 하나의 단어가 스쳐지나갔지만 애써 무시했다. "용건은 그게 다요?" "우선은 남작님의 가족 분...그러니까 일가친척과 남작부인에 대한 정보를 먼저 조사해주세요. 보고는...몬트리얼...아카데미 윈드프리(wind free) 3호실이에요. 제 이름은...밝히지 않아도 아실테죠." 크리스틴의 확신에 찬 음성에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그녀가 올려놓은 주머니를 집었다. "휘익~!" 주머니를 열어본 사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동안 크리스틴이 모아두었던 재산의 일부를 보석으로 바꾸어 둔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황궁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 도망을 가라고 찾아왔던 카일이 준 것 중 하나였다. 흠집 하나 없는 최상급의 보석들이 뿜어내는 광체를 음미하던 사내가 천천히 주머니를 내려놓고 서랍을 열어 두꺼운 철이 된 서류뭉치를 올려놓았다. "일단 아로니에 남작과 남작부인, 친척들에 대한 신상명세요. 추가적인 사항은 알아서 전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한 뼘은 족히 될 듯한 두꺼운 서류를 안아든 크리스틴이 목례를 했다. "이제 용건은 끝이냐?" "감사합니다. 아, 성함을 여쭈어보지 않았네요. 실례되지 않는다면..." "실례 되오. 우린 얼굴이 없는 자들. 이름이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냥 '민'이라고 부르면 되오." "네, 민님. 잘 부탁드립...."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던 소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자 사내는 경악을 하는 대신 크리스틴이 남기고간 가죽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크리스틴 폰 배너와 샌들우드 라 폰차르크...백작가의 여식과 15년 전에 죽었다던 궁중 마법 사라...역시...인가? 흥미 있는 일을 물었군..." 사내의 새하얀 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며 희미한 등불아래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험험...그런데 그런 건 왜 파고들려는 것이냐?" 기숙사로 돌아온 다음에 샌들우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검은 머리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마법의 시동어도 읊조리지 않고 손을 댄 것만으로 흑발을 금발로 바꾸어버린 샌들우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서류를 뒤적이는 크리스틴을 닦달했다. "이유를 알아야 도와줄 것이 아니냐!" 끝내 역성을 내고만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덩달아 이마를 찌푸렸다. "스승님?" "왜?" "저기...바이오니어에서 가장 큰 상회의 이름이 뭐죠?" "그거야 아가트 상회다." "그 다음은요?" "글쎄다...음...아마 레이븐 정도 될까? 아가트와 레이븐을 제외하면 다들 고만고만할 테지. 상회는 왜?" "남작부인...말이에요." "음?" "남작부인 친정이...아가트 상회라는데...사실인가요?" 크리스틴의 질문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던 샌들우드는 이내 손뼉을 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 바이오니어의 귀족가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 맞다! 한낱 상인의 딸이 남작과 결혼한다고 소문이 자자했었다. 황궁이 떠들썩할 정도 였어. 그게 아로니에 남작이지. 이름이 뭐였더라...마가린? 아니야, 마가렛? 그래 마가렛이였 지. 성도 없는 평민이라 기억이 나는 군. 험험." 평민과 귀족의 결혼은 절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단 한번, 아로니에 남작의 결혼을 제외하고는. 첩실도 아닌 정실로 평민의 여성을, 그것도 상인 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남작에게는 그것이 정계로 진출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미천한 출신의 여인을 아내로 둔 사내. 하지만 원체 청렴결백으로 똘똘 뭉친 남작이었기에 그를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도 이내 '아로니에 남작이라면 그러고도 남지'라며 그의 담백한 성정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허참...그런 사내에게 뱀꼬리같은 딸자식이 태어나다니..아로니에의 앞날이 훤하지 뭐냐. 크흠..." 내심 크리스틴에게 칼을 휘두르고, 자신이 독을 먹인 자에게도 뻔뻔스럽게 달라붙은 디아나를 떠올리며 혀를 차던 샌들우드는 심각한 얼굴로 서류를 주시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글쎄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무엇이 이상한지는 몰라도 꺼림칙한 것이 있는데 정확하게 짚어내기에는 아이의 나이나 경험이 일천했다. 이내 생각을 접으며 한숨을 내쉬던 크리스틴은 두 장의 종이에 뭔가를 끼적이더니 곱게 접어 샌들우드에게 건네주었다. "우선은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지 확인을 하고, 궁에 알렸으면 해서요. 이건 민님께 전해주 시고, 또 다른 하나는 카일 아저씨께 전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아예 날 부려먹으려고 작정을 하고 부른 게로구나." 말과는 달리 냉큼 두 장의 종이를 받아 다른 주머니에 집어넣은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에게 슬쩍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일어났다. "일찍 자거라. 네 신경이 무슨 미스릴로 만든 것도 아니고 푹 쉬고 학업에만 열중해라. 그렇지 않아도 네가 또 유급당할까 백작이 걱정을 하더구나. 은근히 다른 아카데미도 알아보는 것 같 고." 혀를 끌끌차며 걱정을 하는 샌들우드에게 귀엽게 혀를 내밀어보인 크리스틴이 방긋 웃었다. "제가 낙제할 것 같으세요?" "설마...." 자신 만만한 태도로 눈을 반짝이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샌들우드는 다시 정보 길드로 좌표 를 정하며 한숨을 내쉬고는 끝내 한 마디 남겼다. "이것저것 신경 쓰다 네 일에 지장이 생길까 그것이 걱정이다." 자신의 일보다는 언제나 남의 일에 먼저 앞장서는 크리스틴의 성정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샌들우드 의 본심이 담긴 말이었다. 샌들우드가 훌쩍 떠나가고 홀로 방안에 남은 크리스틴은 회복마법으로도 풀리지 않는 피로감을 느끼며 침대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때까지 침대의 기둥위에서 졸고 있던 카사가 쪼르르 날아 와 소녀의 머리에 부리를 비벼댔다. "미안해서 어쩌지, 카사? 항상 내 옆에 있어주는데, 난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쪼로롱 쪼로롱 순간 작은 날개를 활짝 펴서 크리스틴의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 안은 카사는 서서히 잠이 드는 아이를 지켜보며 그렇게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생각보다 늦게 일어난 크리스틴은 연무장으로 열심히 뛰어갔다. 물론 실피드를 불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1세크가 아까운 마당에 길을 잃고 헤맬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행이 지각은 하지 않았는지, 유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크리스틴에게 한 아이가 다가왔다. 주근깨가 가득 뿌려진 귀여운 얼굴에 갈색 머리를 정수리에서 질끈 묶은 여학생은 4학년 학생이었다. "저기, 크리스틴?" "아, 안녕하세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걸었던 여학생은 크리스틴의 밝은 미소를 보고 얼굴을 확 붉혔다. 재작년에 같은 반 동급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틴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저기...그게...음....있잖아...." "네?" "저기...그 동안 비웃어서 미안해. 공부 열심히 해라, 꼭 합격해서 진급했으면 좋겠다!" 귀까지 벌게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빠락 지른 여학생은 그대로 등을 돌리고 자신의 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가 버렸다.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크리 스틴의 눈에 우르르 몰려있던 아이들이 그 여학생의 등을 두드려주며 뭐라 신나게 떠들어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는 것 같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과를 받고 어리둥절해 하던 크리스틴은 아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또 다른 시선들을 느꼈다. 한 두 곳이 아닌, 연무장 곳곳에서. 주위를 휙 둘러보니 한, 두 명씩 모여 있던 여학생들을 비롯한 남학생들 모두 크리스틴과 방금 사과와 격려의 말을 하고 간 여학생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이람...' 체술 수업을 받은 이래로 한번이라도 그녀와 말을 나누어본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아는 척 인사 를 해주는 이들도 없었다. 그녀는 바람이었고 공기와 같았다. 단 한사람, 카민을 제외하고.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7학년과 같은 수업이 있는 날뿐이었고 그 동안 크리스틴은 언제나 차가 운 냉소어린 외면 속에서 이를 악물고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이상했다. 술렁거리며 그녀를 힐끔거리는 것도 그렇고 몇 번 말을 걸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 얼굴을 붉히 며 뒤로 물러서는 아이들이 그랬다. 저마다 크리스틴의 본심(?)을 모르고 그동안 비웃었던 것에 대해 사과는 하고 싶은데,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말을 꺼내기 조차 힘들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어찌 되었든 싱숭생숭한 분위기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태연히 넘겨버리고 초연한 태도를 되찾은 크리스틴은 유노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얼른 자리를 잡았다. 그녀를 힐끗 거리며 말을 걸 타이밍을 찾아내려 애쓰던 아이들만이 머뭇거리다 뒤늦게 열을 지어섰다. 연무장에 도착한 유노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카민이 보여준 영상구슬을 본 최초의 선생이었고, 아이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러했으니까. 첫날 수업을 들으러온 아이를 세워놓고 얼마나 망신을 주었던가? 그런데도 변명 한 마디 없이 계속 수업에 참여하는 크리스틴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자신이 덜 자란 어른 같아 쑥 스럽기 그지없었다. 잠시 연무장을 둘러보며 열을 지어 서 있는 아이들을 쭉 둘러보던 카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윗몸 일으키기 500회, 팔굽혀펴기 300회, 끝나면 대련 준비를 하고, 크리스틴은 앞으로 나 와라. 시작!"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일제히 바닥에 드러누워 다리를 잡아주는 이도 없이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했다. 단 한 사람 크리스틴만 제외하고. 부러운 눈으로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손짓을 하는 유노에게 달려갔다. "시험을 칠거냐?" "........." "내 과목을 포기해도 상관없지 않겠니?" "........." 3과목을 낙제하면 유급이었다. 그러니 유노의 말 대로 한 과목 정도 포기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을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성격이 문제였다. "실기 시험만 치나요?" ".....필기도 함께 친다." 얼핏 화색이 도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노가 머리를 긁적였다. "필기가 30, 실기가 70. 100점 만점이다." "..........."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신 크리스틴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유노를 보았다. "어떤 시험을 치게 되나요?" "내 수업은 체술이다." "네." "대련을 하지." ".........." 이제 겨우 한 달, 그것도 기본적인 팔 동작만 배웠을 뿐이다. 무슨 수로 대련을 한단 말인가? 수업시간에 하는 것도 대련 상대도 없이 혼자서 팔을 휘두르는 법만 익혀왔다. 체념어린 얼굴로 한숨을 삼킨 크리스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든...시험은 치겠습니다." 애초에 1학년때부터 수업을 들어왔던 아이들을 크리스틴이 따라잡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심 크리스틴이 체술 수업을 선택한 것이 너무 늦었다 생각하면서도 쫓아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머리를 벅벅 문지르던 유노가 어깨를 들썩였다. "과외 수업을...할 수 있겠냐?" 크리스틴의 눈이 반짝이며 햇살처럼 빛났다. 크리스틴의 희망에 찬 얼굴을 보며 과연 이 아이가 진정 돌대가리 크리스, 아니 안하무인격의 백작가 여식이 맞는지 심각하게 고찰을 하던 유노는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고 고개를 저었다. "매일...원한다면 저녁을 먹고 1시간 후에 연무장으로 와라. 어떻게든...실력을 쌓아 합격하게 만들어주지." 순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것만으로도 좋다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무장 한켠에 있는 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발을 걸고 윗몸일으키기를 할 수 있도록 그녀가 넝쿨을 이어놓은 곳이 있었다. 나무 밑으로 뛰어가 흙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워 윗몸일으키기를 시작하는 크리스틴을 물끄 러미 바라보던 유노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왜 못 봤을까...' 윗몸 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등은 매 수업마다 하게 되는 기초 체력훈련이었다. 그럴 때마다 연무장을 벗어나는 학생을 보며 그는 크리스틴이란 아이가 수업을 받기 싫어 나무 밑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단단하게 흙을 다져놓은 연무장과는 달리 나무가 서 있는 곳은 다듬어놓지 않아 습기를 머금 은 키 작은 풀들로 인해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그런 곳에서 자신의 몸에 맞게 넝쿨을 이어놓 고 윗몸일으키기를 해왔다니.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도 보지 못했다. '난 정말 선생 자격이 없는 건가...'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던 유노는 어느새 비지땀을 흘리며 비틀거리며 상체를 들어올리는 소녀 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크리스틴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았던 이들은 유노의 시선이 닿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얼른 원위치 시켰다. '젠장! 쪽팔리는구만...'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저리도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를 비웃었던 자신들을 욕하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팔굽혀 펴기에 몰입했다. 몇 번을 하고 있는지 숫자놀이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저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땀을 뚝뚝 흘려가면서도 아직도 윗몸일으키기를 하느 라 낑낑거리는 크리스틴을 힐끗거리느라 바빴다. 겨우 100개나 채웠을까 울상을 짓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상체를 들어올리기 위해 몇 번이나 시도하는 크리스틴을 지켜보던 아이들의 얼굴도 울상이 되었다. '보는 게 더 힘들다!' 그만하라고, 속으로 몇 번을 외치다 지친 아이들 중 한 남학생이 벌떡 일어나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너무 무리하면 더 안 좋아. 몸을 적응시켜야지. 한꺼번에 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씩 늘여가는 거야. 우린 벌써 3달이나 해 왔으니 따라오려고 무리하지 마라." 얼굴 가득 흥건한 땀은 둘째치고라도 벌게진 얼굴에 눈물을 글썽이는 금발머리 소녀가 왜 그렇게 귀여워보였을까? 충고를 하러 다가갔던 소년은 손을 내밀어 아이의 흙 묻은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워주고 등이며 엉덩이, 다리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칼날같이 꽂히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로 돌아서서 연무장으로 돌아오는 소년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득했다. '우와~~귀엽잖아!' 옷을 털어주느라 미처 보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릴 때 소년은 똑똑히 보았다. 발갛게 상기된 가는 목덜미를! 외간 남자의 손길에 숨을 할딱이며 얼굴을 붉히던 그 귀여운 얼굴이 눈에서 떠나지 않아 싱글 벙글 미소를 짓던 소년은 자신을 노려보는 살기어린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으 로 당황해하며 나무 밑에 뿌리를 박고 얼어붙은 소녀의 주위에 휘몰아치는 싸늘한 바람도 인지 하지 못했다. "흠...." 팔짱을 끼고 그 꼴을 말없이 지켜보던 유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남학생에게 까닥 고개 짓을 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주춤 나선 소년은 '어라 흙이 묻었구나?'라는 유노의 중얼거림에 이어 대낮에 별을 보는 축복을 받고야 말았다. 따악! 시원스럽게 소년의 뒤통수를 후려갈겨준 유노는 질투심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대련을 시작하라 소리를 지르고 아직도 굳어있는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냐?" 귀족가의 여식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부모 밖에 없다. 그것도 여자 아이를. 평민으로 살았던 세실 역시 소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어깨를 다독이는 정도랄까? 아직 어리긴 하지만 또래 소년의, 검을 잡아 굳어진 손바닥이 등 뒤를 모조리 만지고(!) 지나 갔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서 있던 크리스틴의 푸른 눈이 천천히 유노의 얼굴로 향했다. 뚝 뚝 뚝 "............" 아이의 상기된 볼을 따라 뚜둑 뚜둑 떨어지는 구슬을 말없이 바라보던 유노는 한숨을 푹 내쉬며 크리스틴의 머리를 부비부비 해주었다. 옆에서 위협하듯 휘몰아치는 광풍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늘은...여기까지 하고 들어가서 씻어라. 저놈은 내가 혼내주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볼을 부풀리고 유노를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없이 실피드의 위로를 받으며 기숙사로 향해 걸어갔다. "꾸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얼마나 걸었을까, 아카데미가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낯익은 괴성에 흠칫 뒤로 돌아보려던 크리 스틴은 자신의 몸을 휘감아 기숙사로 날아가는 실피드의 굳은 얼굴에 눈을 감아버렸다. 덕분에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도 대련이 아니라 집단 폭행을 당하며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는 한 소년의 처절한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 음...늦잠을 잤습니다. ㅠㅠ (폐인이당....) 지금 병원가봐야 하는데, 늦었네용, 아궁. 어찌 되었든 무사히 한 편 끝냈고, 앞으로 전개를 이렇게 밤 낮으로 나뉘어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건이 일어났으니...해결을 해야겠지요? 콜록 에또 그리고 스티븐 식칼님의 말씀처럼...오지랖이 넓다는 말의 의미는 쓸데없이 이것저것 끼어드는 사람을 칭하는 것으로...유키의 모자람을 탓하며 별명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무엇이냐?! 짜잔.........「해심화(海心花) 크리스틴」뜻: 바다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아름다운 꽃 므후후후후...콜록, 사실은 이것도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시간이 여의치 않고 돌을 쥐어짜봐야 물밖에 더 나오겠습니까? ㅠㅠ 제 한계를 실감하며...타 싸이트에서 쓰는 아뒤 '백야화(白夜花)에서 따왔습니다. ...이제 슬슬 몸도 만들어야하고...이래 저래 바빠질 듯 하지만, 시험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게 될지는...지 마음이겠지요. - -a 자 그러면 조금 늦었지만 한 편 올렸으니...유키 이만 물러갑니다. (용량보고 좀 봐주세염 _ _) 여.러.부운~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공지...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몸이 너무 안좋아서 연중...은 아니고 이틀만 쉬려고 이렇게 공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글을 안쓴것도 아니고, 비축분도 있기는 한데... 전편하고 전혀 연결이 안되는 바람에 그것 붙잡고 밤새 씨름을 하다가...고열로 쓰러졌습니다. 오늘..약속이 있었는데. 그것도 못 지키고 새벽녘부터 낑낑 앓다가 글을 올리려고 시도는 했는데 아무래도 못 올리겠더이다. 완전히 새로 쓴게 두 번째인데...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쉬고(오늘 하루만요!) 머리 굴려서 새로운 마음으로(내일 부터 쓸께요!) 글을 써서 모레...인사드릴께요. 54회...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들쭉날쭉하지요??? 원래 생각했던 것을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눈뜨는 것도 버겁고... 지금 제가 뭔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루만...아무 생각않고 그냥 잠을 잤으면 합니다. 정말 면목없고 죄송합니다. 점심때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잤습니다. 지금도 잠에 취해..뭘 하는건지... 재탕하신다고 앞으로 가신분들이 많더이다...ㅠㅠ 이 죄를 어떻게 해야할지... 이틀만 기다려주세요. 어떻게든 이 뽀개질것 같은 머릿속을 정리 좀 하고 돌아와서 반.드.시. 연참할께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_ _) 메세지로 글을 올려달라고 하신 분들께도 죄송합니다. 답을 못해드린 것도 죄송하고... 아파서 죄송합니다. ㅠ 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이런...계속편 3. 한 달 후 고대하고 고대하던 시험이 끝나고 성적 발표가 있는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성장을 하고,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후 기숙사를 나선 크리스틴은 실피드를 불렀다. "본관으로...부탁드릴께요. 매번 죄송해요." 아카데미에 온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기숙사의 지리를 익히지 못한 크리스틴은 기다렸다 는 듯이 모습을 드러낸 실피드에게 베시시 웃었다.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구나. 좋으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모습을 감추고 말없이 날아가던 실피드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집...." 마음의 고향. 편히 몸을 누일 수 있고,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 자신이 태어났던...아니 과거의 크리스틴 폰 배너가 태어났던 곳. 잠시 어두운 얼굴로 언제까지 이렇게 이중적인 과거를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인가 생각을 해보던 크리스틴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좋아요." 『....힘내렴.』 본관 앞에 소녀를 내려준 실피드는 한마디 속삭여주며 정령계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백작가를 집으로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녀가 여덟 살 나이에 세바스티앙의 품에 안겨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비록 그 전까지 레니와 마크와 함께 살던 오두막이 있었지만 그곳은 지옥이었지 집은 될 수가 없었다. 또한 레니와 짧으나마 함께 했던 카르민 자작가에서도 역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배너 백작가에서 살았던 그 5년의 세월은 세실로서는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었고, 아름 다운 기억을 남기게 해준 백작가는 곧 그녀의 고향이 되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황제의 명으로도, 백작부인의 권유로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아가씨가 태어났고, 나의 고향이 되어버린 곳...." 두 사람 몫의 기억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크리스틴에게 백작가는 '집'이 되었다. 실피드의 말 한마디로 아카데미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겨우 일주일 남았다는 것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들뜬 흥분과 진한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던 크리스틴은 교무실을 찾기 위해 본관을 헤매기 보다는 무작정 4층으로 올라갔다. '도서관' 이제는 크리스틴에게 있어 제 2의 고향이 되어버린 곳.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아련히 느껴지는 낯익은 양피지 냄새에 가슴을 들썩이던 크리스틴은 도서관 입구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 소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성적 보러 안가냐?" 카민의 삐딱한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크리스틴은 말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야, 화 좀 풀어라. 응?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도서관 앞이라는 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지른 카민은 자신을 외면하는 소녀의 가는 팔을 잡고 앞으로 잡아당겼다. 유노의 과외 수업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앞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가 손목 을 부드럽게 휘두르며 팔을 빼낸 크리스틴은 카민의 경악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배님께서는 카를로스 학장님의 신의를 어기셨습니다. 또한 제가 스스로와 약속한 바를 어기 게 만드셨어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결정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도서관이니 소리치지 말아주세요, 선배님." 물처럼 부드러운 동작으로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소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민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못 볼 텐데...끝까지...화난 상태로 헤어져야 하냐?" 카민의 씁쓸한 말투에 걸음을 멈추었던 크리스틴은 천천히 등을 돌려 도서관 문을 닫고 카민의 앞에 섰다. "선배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학장님께서 내심 흡족해하셨다는 것도 압니다. 단지...단지 저 하나 때문에 이곳을 떠나야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뿐이에요.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보상해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저 스스로 에게 화가 난 것뿐이에요. 선배님께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크리스틴이 카민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된 것은 겨우 이주 전이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다가서려 해도 크리스틴이 만들어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은 여전했고, 그것에 불만을 가진 아이들이 그녀의 앞으로 몰려가 투덜거리고 말았다. "우리가 잘못한 거 사과 좀 하고 친하게 지내자는데, 그렇게 잘난 척 하기야? 이제 다 밝혀졌으 니까 상관없다 이거지?" 시험공부에 여념이 없던 크리스틴은 식당에서 한 아이에게 팔을 잡힌 채 영문모를 소리를 들어야 했다. 도대체 무슨 사과를 할 것이 있냐고 반문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그제야 그녀가 아무것도 모 른다는 것을 알아차린 학생들은 우물쭈물하며 카민이 보여준 영상 구슬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 았다. "디아나와 모이라가 저에게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시기가 좋지 않았고, 중간에 사고가 났을 뿐 입니다. 저에게 사과를 하실 필요가 없어요. 전 욕을 먹을 짓을 했고, 여러분들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못 본 것으로 해달라는 말씀은 감히 드리지 못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며 저에게 사과를 하지는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일간 그녀의 주위에서 맴돌던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게 된 크리스틴은 물의를 일으켜 정말 미안하다고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여 사죄를 했다. 그 모습에 아이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 것은 당연한 일. 허나 디아나의 술잔에 독을 탄 것이 자신이라 밝히지 못하는 스스로의 비겁함을 비난하던 크리 스틴은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더욱 자신을 감추고 더욱 차가운 아이로 행동했다. 그리고 헐레벌떡 뛰어와 주제넘은 짓을 해서 미안하다는 카민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사과를 받을 일이 없다며 뒤로 물러섰을 뿐이었지만, 그에게는 돌려치나 매치나 매 한가지 였다. "정말...나한테 화난 게 아니면...웃어주라." "네?" 크리스틴의 동그란 눈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카민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옆으로 획 돌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웃으라고. 맨날 화난 얼굴로 있으니까...미안하잖아. 그래도 후회하는 건 아니야. 그 계집애들 당해도 싼 거 맞고, 아버지가 비겁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너도 그만큼 당했으면서도 욕 한번 못하고 네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해 못해.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아. 단지...네가 안 웃으 니까...그게 미안한거야. 알았어?" 지난 이주동안 단 한번도 미소를 지어보인 적이 없는 크리스틴이 보기 싫다는 듯 투덜거리던 카민 은 애써 미소를 지으려는 소녀의 얼굴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빌어먹을 계집애들!' 미소가 아니라 우는 것 같아 보였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자 미소를 짓는 크리스 틴을 보니 지금 눈앞에 모이라와 디아나가 있다면 모가지라도 비틀어줘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 다. 이를 드륵드륵 갈며 크리스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카민은 등 뒤에 들리는 비아냥에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불타오르시는 군요. 과연 백마탄 기사와 비운의 여주인공인가요?" 척 보기에는 이제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찰랑거리는 검청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흰자위가 또렷한 갈색눈을 빛 내며 서 있는 소녀의 시선은 카민이 아니라 크리스틴을 향해 있었다. "그 매스꺼운 연극 좀 그만하면 안 되니? 소름이 돋는 구나, 크리스틴. 언제까지 카민 선배를 네 치마폭에서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황태자비가 되겠다며? 왜,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디아나가 좋아하던 카민 선배라도 가지고 싶었니? 가증스럽기는..." 크리스틴은 눈앞의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아카데미에 온 날, 기숙사를 헤매다 마주친 적이 있었다. 3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했다던 학생. "죄송합니다, 선배님. 하지만 그런 말씀 들을 만큼 제가 잘못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뭐...뭐라고?" "들으셨지 않나요? 전 황태자비가 될 욕심도 없고, 카민 선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연극 이라..글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모든 행동이 연극인 것 같긴 하지만, 얼굴밖에 모르는 선배 님에게 그런 욕을 먹을 만큼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 크리스틴의 단호한 대답에 카민와 소녀 둘 모두 석상같이 굳었다. 그런 사람들을 휙 둘러보던 크리스틴은 한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이 아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려던 순간 크리스틴은 다시 뒤로 돌아서 두 사람을 직시했다. 아니 갈색눈에 분노를 담고 자신을 노려보는 소녀를 같이 노려봐 주었다.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군요. 이렇게 뵙게 되는 것도 마지막일거라 생각이 들어 한 말씀드 리자면...제가 디아나와 모이라의 일을 숨기려했던 것에는 분명 제 잘못도 있었기에 그들을 욕할 자격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카민 선배에게 받았던 지나친 관심은 저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그런 감정에서 빚어진 것 이구요. 정...말입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저를 봐주셨고, 말을 걸어주셨고, 과거의 저를 떠올리지 않고 지금의 저를 봐주셨던 분이시기에 제가 지나치게 응석부린 것도 있습니다. 또, 디아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 싶었냐고 물으신다면...헛소리 좀 작작하라고 말씀드리 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를 했겠지요. 더러운 수작을 부리며 눈길을 끌려고 한 것은 제가 아니라 디아나였습니다. 비난을 받을 행동을 했다면 받아도 아무 말 하지 않겠지만, 선배의 그 근거 없는 적개심은 절 화가 나게 만듭니다. 아시겠어요? 제가 과거에 선배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제 기억에 없는 분이시 니 별것 아니었나 봅니다. 절 볼 때 마다 벌레 보듯 하시는 선배께 제가 존칭을 쓰는 것은 이 번이 마지막 일테니 앞으로 제 앞에 설 생각 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때까지 몸을 떨며 그녀를 노려보던 소녀가 냉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냐?!" 소녀의 거만한 태도에 실소를 베어 문 크리스틴은 하얀 손 위에 거대한 기운을 모았다. 진심으로 분노한 소환자의 의지에 따라 몰려든 정령들은 실피드의 기운을 받아 거대한 결정체를 만들며 주위의 공기를 찢을 듯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어놓을지도 모르지요. 제 성질...그만 건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이런 적개심을 참아주는 데에 신물이 나니까요." 허리까지 이어지는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던 기운들이 차가운 광풍이 되어 소녀의 온몸을 한 바퀴 휘돌며 그녀가 있고 있던 곱디고운 치마를 당장이라도 찢어놓을 듯 요동 을 쳤다. "헉!" 헛바람을 들이키며 경기를 일으키는 작은 소녀를 일견한 크리스틴은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카민에게 서글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배...전 착하지 않아요. 절대로 착한 아이가 아닙니다. 과거의 죄를 씻으러 아카데미에 왔 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 작별을 해야겠네요.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고, 고마 웠습니다. 안녕히..." 지친 얼굴로 뒤돌아선 크리스틴은 자신의 주위를 맴돌며 재롱을 피우는 바람의 정령들에게 몸을 맡겼다. 등을 돌리고 실프에게 정신을 모으고 있었기에, 크리스틴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두 사 람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티나..가 보고 싶어, 데려다줄래?" 실피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세한 기운들이 서서히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며 크리스틴의 가벼운 몸을 감싸 앉았다. '소환자의 뜻대로...' 얼핏 작은 속삭임을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크리스틴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호수를 보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정말 못된 아이야....." 그동안 억눌러놓았던 분노가 죄 없는 소녀에게 터져나갔음에 후회하며 눈물을 떨구던 크리스틴은 호수 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을 안아주는 엘퀴네스의 품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해요, 엘퀴네스. 너무나 속상하고, 너무나 한심스럽고, 절 저주해요! 제가 싫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지요? 언제까지 제가 저지른 일도 아닌 것에 얽매이며 살아야 하지요?"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자처한 굴레임을. 얼마든지 회피하고,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건만 그녀 스스로가 오욕의 장소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비난하는 눈들을 원망했고, 사실이 알려진 후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자 기뻐했다. 스스로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양심 을 콕콕 찔러대는 소녀를 보고 분노를 터뜨렸다. 스스로를 비난해야 하건만, 엉뚱한 곳에서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어린 아이처럼 큰소리를 내며 엉엉 울어대던 크리스틴은 숲을 헤치며 다가오는 인기척에 엘퀴네스 가 몸을 숨기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물의 정령을 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던 크리스틴 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따뜻한 손길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래서 내버려둘 수가 없어. 이러니까 혼자 놔두기 싫은 거야. 왜 널 원망하는 거니? 왜 널 싫 어하지? 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아? 왜 속으로 끙끙 앓으면서 혼자 아파하는 거지?" 중얼거리듯 말을 늘어놓던 카민은 퉁퉁 부은 눈으로 눈물을 떨구는 소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닦아 주었다. "넌 착해. 그래서 혼자 두지 못해.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도, 네가 아파하는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냥 두니. 아버지도 아시니까 내 행동을 비난하지 않으셨어. 도리어 잘 된 일이라 하셨어. 그래서 다른 아이들도 네가 아무리 뒷걸음질쳐도 한 마디 더 해보려고 투덜 거리는 거야. 모르겠니?" "하지......" "알아. 네가 전에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못된 아이였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과거에 얽매이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야.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 지 넌 모르는구나.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만 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널 돌대가리 크리스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모두들 널 노력파라고 칭찬을 해. 네가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그곳에 웅크리고 있을 건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얼굴을 계속 닦아주던 카민은 한숨을 내쉬며 아이 의 작은 머리를 꼭 껴안았다. "내게 동생이 있는데, 꼭 너처럼 허풍만 치는 겉멋만 잔뜩 든 겁쟁이거든. 척 보면 알지. 고슴 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면서 접근을 막는데, 그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얼른 끄집어내달 라고 비명을 질러대. 왜 모르겠니. 넌 미소로 무장하고 나타나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고 있더구나. 그것이 왜 그렇게 아파보였는지 몰라. 내 동생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지. 변명 한 마디 안하고 죄를 뒤집어쓰고도 '그건 내 잘못이니까' 체념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 었어. 그러지 말아. 세상은 그렇게 착하게 살아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야. 넌 너무 어리 고, 너무 여려. 더 강해지고 더 독해져도 돼.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넌 강한 아인데.... 스스로를 너무나 몰라. 그래서 아픈 거야. 마음껏 강해지면 돼. 누가 뭐랄 사람 아무도 없어. 눈치 보지 말고 강하게 살아. 그러면 사람들이 저절로 우러러 보게 되지. 그게 사람이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카민의 충고는 어느새 레니의 잔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똑같은 말. 똑같은 어조. 똑같은 행동. 마치 죽은 어머니가 되살아온 듯한 느낌에 안정을 되찾아 가던 크리스틴은 카민의 등 뒤에 나타난 작은 소녀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 우와...열심히 글을 옮겨서 사설을 쓰는데....갑자기 코멘트가 나오면서...아무리 뒤로 버튼을 눌러도 애써 문단 나누기 한 것이 안나오더군요. 덴당! 아침에 일어나서 들어오려고 했는데, 공사중...이라고 뜨던데요. 해서 병원가서 약지어왔습니당 환마부주님 말씀대로..한약이 써서 양약지으러 갔는데...항생제 몇 알하고 주사만 무자게 아픈 거 맞았습니다. ㅠㅠ (주사가 한약보다 더 싫어요...) 에...음, 제가 비축분으로 만들어놓은 것 중에...엄청난 오류가 있어서...꿈을 꾸다 알았다는.. 콜록...에...자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거라 아직 수정 못했는데, 일단 한 편 더 가고 수정해서 올릴께요.(음화화...원래 56. 57은 하나 분량인데 화면이 먹히는 바람에 성질나서 반만 긁었다는) 그럼 여러분 너무너무너무 감사드리구요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이런...계속편 4. "그러게 연극 좀 그만하라니까, 기어코 터졌구나. 쯧."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예의 비아냥거리던 소녀는 카민의 사나운 눈초리에 꼬리를 말았다. "오빠도 좀 그만하면 안돼? 눈꼴시어서 못 봐주겠네, 쳇! 우리 큰오빠한테 다 꼰질러버릴까보다!" "이샤!" "왜!" "입 다물어!" "흥!" 두 사람의 친근한 대화에 넋을 잃고 있던 크리스틴이 두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다. "어...저기..." "사과는 안받아. 나중에 맛있는 거나 사주면 돼." "......." 다 알고 있다는 듯 종알거리던 소녀는 촐랑거리는 태도로 치마를 걷어붙이고 크리스틴의 옆에 앉았다. "반갑다. 분명 내 이름은 모를 테니, 내가 인사해야지. 아~한심해라. 왕년에 황태자비가 되겠 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던 인물이 날 기억 못하고 있었다니...비참해. 그 여우같은 모이라는 알고 있었으면서..." 이름을 가르쳐준다고 시작된 푸념은 카민이 이를 갈 때까지 이어졌다. "뿌드득!" "이샤 리쿠에 파 크레이오(Isha Lique Pa Kreio), 바이오니어 제 1공작, 슈메르 파 크레이오 (Shumer Pa Kreio)의 외동딸이지. 만나서 반가워. 젠장 몇 번째야..." 투덜거리며 작은 손을 내민 이샤는 얼이 빠진 크리스틴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오해는 말아. 황태자비는 내가 될 거야. 벌써 오래전에 약정된 것이니 아무리 침 흘려도 안돼. 뭐 원한다면 후궁 자리 정도야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이샤!" "헉!" 떠벌 떠벌 입을 놀리던 작은 소녀는 그들의 등 뒤에 나타난 검청색 머리에 푸른빛이 도는 검은 눈 을 가진 1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을 보고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하다, 이 녀석이 크리스를 찾아갔다는 소리를 듣고..."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소년은 이샤에게 차가운 눈초리로 경고를 보내고 카민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카민의 품에 안긴 크리스틴을 보며 휘파람을 휙 불었다. "내 동생이 울렸냐? 미안하다. 이 자식이 좀 그래. 네가 이해해라." 볼을 부풀리고 냉큼 입을 열려는 소녀의 머리를 손으로 꾹 눌러버린 소년은 크리스틴의 눈 앞에 커다란 못 박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시로넨 리쿠에 파 크레이오(Sironen Lique Pa Kreio). 이 녀석 오빠지. 만나서 반갑다. 그냥 시로 오.빠.라고 불러줘." 카민의 눈치를 보며 슬쩍 인사를 건넨 시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이 빠진 크리스틴을 보며 혀를 찼다. "얼마나 충격을 먹었으면 말을 못하냐...내가 있다가 이놈을 혼내줄게.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나한테 반하면 안돼. 카민이 치...꾸에엑!" '카민이 침 발라놓은 여자는 절대로 안 건드린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시로는 카민에게 목을 졸린 채 숲 속으로 끌려갔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눈물이 쏙 들어가버린 크리스틴은 턱을 괴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샤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야 아까 부른 거...그거 정령이지, 그치?" "아...." "불러봐. 너 나 또 만나면 갈기갈기 찢어버린다며? 불러봐" 농을 하는 건지, 성질을 건드리려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어조로 바람의 정령을 불러달라고 주문을 넣는 당돌한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산 넘어 태산이야....' 어디선가 엘퀴네스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외면한 크리스틴은 자신의 추태를 보고 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 간 큰 소녀를 위해 실프를 불렀다. 다행이 이번만은 실피드가 자신의 아이를 대신해 나타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와!!!" 살랑거리는 바람을 몰고 나타난 실프가 애교를 떨 듯 크리스틴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을 목격한 이샤는 입을 쩍 벌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너...정령사야?" 이때까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던 크리스틴은 어쩔 수없이 입을 열어야했다. 사과를 해야하는데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저...어머니께서..." "와! 그럼 백작부인도 정령사야? 몰랐는데..." "그런...비밀로...콜록." "아항~ 비.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옆으로 살짝 꼬나보는 소녀는 정녕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보 였다. 하지만 은근히 약점을 잡고 늘어질 기색을 보이는 이샤는 크리스틴에게 절.대.로 귀엽게 보일 수가 없었다. "아...부..부탁...드릴께요, 선배님." "...언제는 두 번 다시 존칭 쓸 일이 없다더니?" "콜록, 죄..죄송해요, 선배님." 얼굴을 붉히며 땅을 긁적이는 크리스틴을 보고 키득거리던 소녀가 손을 쭉 내밀었다. "뭐, 내가 먼저 시비건 거니까 그 정도는 봐줄께. 대신에 실프를 만지게 해주면 용서해주지." "......." 이샤의 주문에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실프에게 손짓을 했다. 소환자의 의지에 따라 날아오른 실프는 완강한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뚱하니 볼을 부풀리고 있는 폼이 역시 조금 전에 소환자가 분노를 뿜어낸 상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실피드를 닮아 제멋대로의 성향이 강한 실프는 크리스틴의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을 잡으려고 달려드는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까르르 웃어버렸다. 진심이 섞인 장난이 되어 버린 술래잡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던 크리스틴은 양쪽 눈이 퍼렇게 멍이든 채 카민의 손에 잡혀 끌려오는 시로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아...친구끼리 대화를 잠깐...근데 잰 뭐하는 거냐?" "저거...실프 아니냐?" 모습을 드러내고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바람의 하급 정령을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이샤 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쉰 시로는 크리스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런 놈이 벌써 5학년이라니...아카데미가 망하려는 징조다." "크레이오 공작가가 망하는 거겠지." "......할 말이 없다. 저렇게 덜 떨어진 놈이 황태자비가 되면...우리 나라가 망하는 걸테지." "흠......" 뭔가 심오한 대화가 오고가는 중에 그녀가 정령사라는 것에 놀라는 기색이 없는 소년들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던 크리스틴은 카민의 대답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다들 모르는 척 해준 거야. 체술 시간에 생각 안 나? 유노 선생님을 걸레로 만든 광.풍. 비록 우리 학교에 정령사가 없다지만 눈이 없는 건 아니거든. 나도 궁에 있는 정령사를 만나 본적도 있고. 어떻게 소환도 하지 않았는데 기운을 불러들인 건진 모르지만, 일단...그때 그걸 본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 킁킁" "아......" 사람들의 말없는 배려에 감탄을 하던 크리스틴은 귓가에 들리는 투덜거림에 미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지 애비만 아는 일은 다 안다고? 흥! 뻔뻔하기는...그것도 훔쳐들은 주제 에...』 바람의 이목을 속일 존재는 몇 되지 않는다. 카를로스가 샌들우드와 나누던 대화를 훔쳐들은 카민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혀를 끌끌 차던 실피드 는 키득거리는 소녀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어주고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실프의 뒷덜미를 잡아채어 정령계로 돌아갔다. "아....!" 아쉬운 얼굴로 뒤돌아서는 이샤를 보고 미안한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소녀를 보고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있잖아~~~" 몸을 뒤틀며 콧소리를 내는 소녀를 보며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크리스틴이 먼저 선수를 쳤다. "실프를 강제로 계약하게 할 수는 없어요. 저도 어머니께 재능을 받은 덕에 겨우 계약을 한 걸 요. 죄송해요." "히잉~~~" 억지로라도 실프를 달라고 떼를 쓸 폼을 하고 있던 이샤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킹킹거렸다. 그것을 보고 실소를 짓던 시로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위로했다. "아그야,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랬다고. 웬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요구하는 것이냐, 꿈깨라 이~~" 이것도 위로라면 말이다. 시로의 말에 상처 입은 듯 휘청거리던 이샤는 스르르 크리스틴의 품안으로 쓰러졌다. 5피텐(150cm)도 되지 않는 작은 소녀였기에 거뜬히 받아낸 크리스틴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 거리는 소녀의 행동에 기겁을 했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이처럼 친근한 행동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힝...정말 가지고 싶은뎅...." ...안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였다. 안타까운 얼굴로 소녀를 주춤 안아들고 있던 크리스틴은 카민과 시로에게 구원요청을 했지만 그 들은 먼 산을 보며 두 소녀의 우.정.어린 스킨쉽을 모르는 척 했다. "저...기, 선배님?" "이샤." "네?" "이샤라고 불러도 돼. 넌 봐 줄께." "......저..기 그만 일어나셔야...수업이..." "이.샤." "아, 네. 이샤님." "이.샤." "큭큭큭큭" 시로의 숨죽인 웃음소리에 얼굴을 붉히던 크리스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세요, 이...샤." "응!" 이름을 불러주자 대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샤는 얼른 일어서는 크리스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넌 성격이 모나서 친구가 없으니까, 대신 내가 놀아줄께. 고맙지? 고마울꺼야. 그래, 계속 고마 워하면 돼." 마치 적선해주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태도였지만 조금 전처럼 거슬리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감정에 놀라며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망설이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친구가 생겼네. 축하한다." "내 동생 좀 잘 봐주기 바란다. 이런 과한 부탁을 하다니...면목이 없다." 두 소년의 격려어린 말에 이샤의 작은 손을 잡은 크리스틴은 아이의 갈색눈이 전하는 사과를 미소 로 받아들였다. "넌 재작년에 날 보고 딱 한 마디 했어. 콩알만한게 까불지 말라고. 덕분에 이 악물고 공부해서 5학년이 됐지만 그래도 키가 자라지는 않아. 그게 억울해서 화풀이 좀 했어. 이해하지?" "아....!" 소녀의 컴플레스가 작은 키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크리스틴은 그제야 이샤가 가진 적개심을 이해 했다. "콩알만 하긴 했지..암...그때야 4피텐(120cm)이 겨우 넘었으니까." "오빳!" "미안하다. 험험. 그래도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 걸 어쩌겠냐, 귀엽잖아?" "귀여운 게 싫단 말이지. 크리스, 나 좀 봐봐. 내가 어딜 봐서 14살 같아?" "네?" "나 열 살하고도 네 살 더 먹은 사람이야. 그렇게 보여?" 사실을 말하자면 많이 봐봐야 10. 11세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 나 상처 받아'라고 강하게 눈빛 공격을 하고 있는 이샤에게 대뜸 대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크리 스틴은 풍부한 감정이 살아 숨쉬는 갈색눈을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외모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이샤. 이샤 선배의 눈은 깊어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눈을 가지고 계시네요." 그랬다. 어리게만 보이는 갈색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현기가 가득했다. 14살이 아니라 어른의 그것과 같은 눈. 이제껏 또래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크리스틴은 자신이 만나왔던 멋있는 어른들과 닮은 눈을 가진 10대 소녀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상대 역시 크리스틴의 판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그렇게 생각해?" "그렇다고 확신해요, 이샤 선배." "흠...그래? 들었어, 오빠?" 어리긴 하지만 가끔씩 숨길 수 없는 천재성을 드러내던 동생이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본 시로는 실소를 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널 알아봐 주는 아이를 만나 행복하겠구나...' 정말 큰오빠다운 미소를 지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시로는 진심어린 눈길로 크리스틴을 보았다. "내 동생 잘 부탁한다." 이제 일주일 남짓 남은 아카데미 생활에서 무엇을 부탁하겠다는 것인지 이해를 못한 크리스틴은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이것이 이샤 리쿠에와의 끈질긴 인연의 시작에 불과하며, 카민의 뒷공작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크리스틴과 이샤가 만나기 전 날. "아, 글쎄. 내가 왜 그런 싸가지를 만나야 되는 건데?" "일단 만나만 봐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라니까?" "아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야, 그래도 네 호적수를 제거해준 은인이잖냐." "호적수? 흥! 그 모이라 따위가 내 적수나 돼?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지. 은인은 무슨 은인 이야, 지들끼리 그러다 어차피 엎어질 운명이었어, 걔네들은." 콧방귀를 킁킁 뀌며 딴청을 피우는 작은 소녀를 설득하려던 시로가 두 손을 들고 물러났다. "뭐, 정 그렇다면 맨날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남은 2년을 살던지. 아깝네...그 얘 정령도 부린다던데...아쉽기는 하지만 뭐..." "오빠, 정령? 정령이라고 했어? 정말이야? 진짜? 진짜지! 그치! 응? 응? 응?" 어려서부터 요정이나 정령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동생의 성향을 알고 있던 시로는 속으로 만세 삼창을 외치며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싸가지라며? 만나기 싫다며? 갑자기 웬 흥미?" "아잉~오라버니 그러지 말고, 나 좀 봐주라. 응? 크리스가 정말 정령을 가지고 있데?" "허참 속고만 살았나. 그 애 어머니도 정령사란다. 백작부인은 운디네. 크리스는 실프!" "우와아아아아~~~~! 대단하다!" "그렇지? 하지만 뭐 싸.가.지.를 공작가의 여식이 만날 수야 없겠지?" 속으로 배를 잡고 뒤집어지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히 먹이를 흔들어대는 시로의 덫에 걸린 이샤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두 손을 마주 잡고 시로에게 눈빛 공격을 퍼부었다. "오.라.버.니. 나~ 정령을 보고 싶어. 응? 안될까? 응?" "글쎄...그럴려면 싸.가.지.를 만나야 하는데?" "싸가지? 그게 누구야? 난 모르겠는데? 크리스틴을 만나고 싶어, 오빠. 도와 줄 거지? 그치? 이제 학기가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응? 나 좀 도와줘요, 오.라.버.니." 시로를 살살 녹이며 꼬랑지를 흔들어대던 이샤는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오누이의 공방전을 지켜보며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카민을 미처 보지 못했다. '성공이군...' 이샤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심했다. 거기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것 역시 주위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거의 자폐아처럼 기숙사 방에만 틀어박혀 미친 듯이 공부 만하던 동생을 걱정해서 친구를 만들 어주고 싶었던 시로와 어떻게 해서든 외톨박이 크리스틴의 미소를 보고 싶었던 카민의 뜻이 맞 아떨어진 음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제가 써놓은 글에서 치명적인 오류는 사이먼(모이라 아빠)와 크로이네 1공작이랑 바꾸어 생각했 다는 것이지요. 짜다라 써놨는데, 지금부터 그거 고쳐야 합니다. 흑...바부팅이... 앞에서 미처 말씀드리기 못했지만, 제게 힘을 나누어주시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며칠만에 연재 속도 따라오신 몇몇 분들께도 새롭게 인사드릴께요. 부족한 점이 많은 글이나 사랑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리플 달아주신 것 모두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에...마왕 세카다가 나오는 부분에 많은 분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정확하게 어떤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좀 알려주세요. 제가 쓴거라 그런지...아시지요? 콜록 자, 그러면 지금 수정작업 들어가서, 1편 더 써서 비축분 만들고 저녁에 뵐께요. 연중인데도 찾아주신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쿄쿄쿄 여러분~ 행복하세요오~~~~~~~~~!!! 쓩~=3=3=3==3=3=3=3=3=3=3=3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이런...계속편 5. "...합격이구나." "수고 했다." "이번 학기 열심히 하더니 이렇게 잘 한 것을, 다음 학기에는 좀더 노력하렴." "잘 했다." 시험 성적이 게시판에 붙었다. 그 앞에 서서 점수를 확인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선생들을 보며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열심히 했더구나. 내 과목 점수가 제일 높았지? 잘했어. 크리스틴. 정말 대견하다." 머리까지 쓰다듬어주며 함박 미소를 지어준 역사 선생은 얼굴을 붉히는 학생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비록 문제를 찍어주긴 했지만 그것을 다 외우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버젓이 만점을 받은 시험지를 볼 때 마다 크리스틴을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지 로 눌러야했다. 다른 과목들은 모두 70점대를 겨우 넘어 합격을 했으나, 오직 한 과목. 역사만은 만점을 받았 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과연 크리스틴이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어떤 과목보다 더욱 신경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만점을 받아놓고도 얼굴 을 붉히는 학생의 볼을 가볍게 잡아당겨 애정을 표시해준 역사 선생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 무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바톤 터치를 한 것인지 의학 선생 로한 블레이즈와 약초학을 가르치는 마커스 투르벨 이 나타났다. 심각한 얼굴로 크리스틴에게 다가온 두 사람은 각기 아이의 한 팔을 잡고 교정으 로 나갔다. "불어라." "네?" "왜 그따위 장난질을 한 것인지 말하란 말이다." 로한의 화난 목소리에 찔끔하던 크리스틴은 대견하달지, 화를 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마커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일부러 그런 답지를 써냈다는 것을 안다. 이유가 무엇이냐? 당당히 만점을 받을 수 있 었다. 혹여나 몰랐는데요, 란 대답 따위는 듣지 않겠다. 이유가 뭐냐, 왜 어려운 문제만 풀 고 1학년 수준의 문제는 답을 비워둔 것이냐!" 로한의 엄한 음성에는 절대 변명을 하지 말라는 엄포가 담겨 있었다. 의학과 약초학은 애초에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는 과목으로, 치료의 근간이 되는 약초와 처치 법에 대한 문제를 내었다. 각각 난이도를 달리하고 배점의 비중을 명시해둔 시험에서 크리스틴 은 난이도가 가장 높은 것부터 차례로 풀어, 겨우 합격점을 넘었다. 하위 수준의 문제는 일부러 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로한과 마커스는 이번 시험 점수가 크 리스틴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 확신을 하게 된 것이다. 실망한 얼굴로 추궁을 하는 로한을 보고 있던 크리스틴은 죄스러운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너 이번 학기에 유급할 생각이었느냐?" "........" 마커스의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푹 숙이는 크리스틴을 본 로한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우리에게만 알린 것이냐? 일부러 점수를 만든 것을? 왜 그런 것이냐?" 한참을 망설이던 크리스틴이 발로 흙바닥을 긁적였다. "죄송...하니까요. 선생님들의 가르침...모두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야 하위점으로 합격을 해도...조금이나마 덜 실망하실거라고...죄송해요." "휴......" 그들의 가르침에 보답을 하기 위해 난위도가 있는 것만 다 풀었다는 대답에 뭐라 할 수 있을까? 한숨을 내쉰 로한이 소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튀지 않으려고?" "............." "사람들이 놀랄까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자를 다독이던 로한이 싱긋 웃고 있는 마커스를 보았다. "귀족 중에...그것도 백작의 여식이 치료사가 된 일이 있었던가?"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겠습니다." "허...그렇다면 우리가 그 별을 따는 최초의 인물로 기억되겠구만, 그렇지 않느냐?" 어느새 노기를 풀어버린 로한의 음성에 고개를 번쩍 든 크리스틴은 활짝 웃었다. "그래, 그래. 이번만 그럴 것이 아니라 다음에도 이렇게 할 것이냐?" 자신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크리스틴이 다시 얼굴을 붉히자 로한은 껄껄껄 웃었다. "다음에는 더 어려운 문제들만 내야겠구나. 다른 아이들은 다 떨어져도 너는 합격하겠지?" 확신에 찬 질문이었다. 이미 마커스로부터 모이라의 일을 전해 들었던 로한은 크리스틴이 가진 지식들을 쉬이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마커스를 가르친 사람이 로한이 아니었던가. 그가 혀를 내두를 정도라면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 확신을 했다. "왜 지금까지 기다렸느냐?" 이제껏 '돌대가리 크리스'의 오명을 벗지 않고 있었던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답이 궁해진 크리스틴은 볼을 긁적이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독립을...했으면 해서요." 이렇게 크리스틴이 마커스와 로한에게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 보인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그녀를 기억하고 있지 않는 것에 있었다. 알고는 있으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카민처럼. 지금 그녀가 가진 능력과 재능, 실력과 노력을 보고 있는 그대로 평가해준 유일한 분들이었다. 하기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독립?" "설마...가출을 말하는 것이냐?" 로한과 마커스의 경악에 찬 얼굴을 본 크리스틴이 볼을 부풀렸다. "독.립.이요, 선생님. 가출이 아니라." "하.하.하." "허어...이것 참. 그래 언제 독.립.할 것이냐?" 밑천까지 드러내라 종용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볼을 긁어대던 크리스틴이 누가 들을 새라 눈을 또로록 굴리더니 작게 속삭였다. "성인식을 한 뒤요." ".......!" 보통 귀족가의 여식들은 성인식, 즉 18세가 되기 전에 출가를 한다. 시집을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당당하게 시집을 가는 대신 가출을 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그것도 백작가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 "피바람이 불겠구만..." "웬걸요. 바이오니어가 뒤집어 지겠지요." 시한폭탄을 던져주고는 정작 자신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본관으로 돌아가는 크리스틴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한과 마커스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데니스 백작이 가만있으면...백작이 아니지." "암요...황궁이라도 엎을 겁니다." "말릴까?" "어떻게 말입니까?" "......미리 귀띔을 해주면..." "성인식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보따리 싸들고 도망갈텐데요." ".........." ".........."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멋진 치료사를 길러보겠다고 꿈에 부풀어있던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한 아이의 가.출.을 부추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늘이 무너지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화살받이...' 분명 언젠가 백작은 딸이 치료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은...그 모든 분노를 고 스란히 받아야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도망가자." "네?" "도망가자." "어디를요?" "어디든. 화풀이 상대가 되느니...월급은 모아뒀지?" "네." "3년 뒤에...저 아이가 성인식을 하는 날 도망간다." "...왜 하필 그땝니까? 지금이라도 여기 관두고..." "별을 따야지. 같이 가면 될게 아니냐.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혼자 보낼 수도 없고, 함께 떠나면 된다. 지금부터 자금을 모으고, 슬슬 준비해라. 3년이면...떡을 칠게지." 스승이 너무 앞질러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내심 고집스럽게 보이던 크리스틴 의 얼굴을 떠올린 마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언제가 될지도 모를 크리스틴의 기나긴 여정에 두 명의 동반자가 예약을 했다. 거뜬히...는 아니고 간신히 합격선을 넘어 진학이 결정된 크리스틴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기 숙사로 돌아왔다. 물론 그 사이 도서관에 들러 그동안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던 책을 수십 권 빌려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책을 한 아름 안고 크리스틴에게 길안내를 해준 하인들은 거실 구석에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이전에 빌려놓았던 것들을 수거해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중 가장 위에 있던 것을 펼쳐들고 침실로 들어가려던 크리스틴은 묘한 위화감에 걸음을 멈추었다. "...카사?" 언제나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던 카사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얼굴로 방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던 크리스틴은 소파에 앉아 뒹굴 거리고 있는 낯익은 사내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카사는 침대의 기둥위에 앉아 날 카로운 눈으로 무단침입을 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어~ 손님!" 검은 안대로 얼굴의 반은 가리고, 그 위로 결이 좋은 회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장신의 사내 는 참으로 잘생겨보였다. 물론 그것이 숙.녀.의 방에 마음대로 기어들어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소파에서 뒹굴 거리고 있는 사내만 아니라면 말이다. 잠시 아미를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던 크리 스틴은 거실로 나가서 차를 만들어 돌아왔다. 그리 싫은 내색도 없이 차를 내어주고 얌전히 앉은 소녀를 보고 있던 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세 를 바로 잡았다. "음...의뢰하신 걸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의 말에도 별 다른 표정변화 없이 할 말 있으면 해보란 식으로 차를 홀짝이던 크리스틴은 새 빨간 눈으로 민을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날개짓을 하는 카사를 보았다. "손님이야, 카사." 쪼로롱~ 신경질적으로 울음을 터뜨린 카사는 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그의 머리 위를 한바퀴 휙 선회한 후 소녀의 작은 어깨에 내려앉았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깃털을 가진 작은 새를 신기 하다는 얼굴로 구경을 하던 민은 왠지 모를 섬뜩함에 자신이 가지고 온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슴속에 품고 있던 조그마한 나무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어보였다. "아......!" 태연한 안색으로 앉아있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돌변했다. 허름한 상자의 안에는 고급 비단천이 푹신하게 깔려있었고, 그 중앙에는 영롱한 빛을 뿜어대는 연녹색 액체가 가득 담긴 아름다운 크리스탈 병이 우아한 자태로 누워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에 놓인 병을 쓸어내리던 크리스틴은 자신을 주시하는 검청색 눈을 보았다. "이...것이 남작님 댁에 있던가요?" 떨리는 입술로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크리스틴을 보고 있던 민의 눈가에 야릇한 한광이 스쳐갔다. "물론, 디아나 영애의 침실에서도 이것과 똑같은 병을 찾았습니다. 약은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더군요." "아......" "이봐요, 작은 숙녀님. 이런 일에 끼어들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내 생각이 틀린 건가?" 민의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집스러운 얼굴에 애틋한 감정이 어려 있음을, 반짝이는 푸른 눈에 슬픔이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 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크리스틴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이런 일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위험을 무릎 쓸 필요가 없잖아요?" 진심어린 말이었다. 위로가 담긴 따뜻한 말이 크리스틴의 작은 가슴을 가득 채웠다. 끝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 로 사내를 보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의 부정적인 대답에 이맛살을 찌푸리던 민은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소녀의 푸르른 눈을 직시했다. 몸을 파르르 떨던 크리스틴이 그의 눈 을 피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숙녀의 마법사에게 맡겨도 해결될 일. 굳이 나서서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민의 다정한 목소리에 그만 크리스틴의 눈에서 눈물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가리는 안개를 흘려보낸 크리스틴이 앵두같은 입술을 조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리고 다행히 민이란 사내는 그것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 로 귀가 밝았다. "이...독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두 명밖에 없었어요. 한 사람이 평생을 걸쳐 독을 연구하면서 만들어내었고 그 비법은 아주 어린 제자에게 넘어갔지요. 그리고 그리 얼마 되지 않아 독약을 만들어낸 분은 돌아가셨고, 그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사람은...그것을 알고 는 있으되 기억에서 지워버렸지요. 그런데...몇 년 후에 모습을 드러낸 독약은...안타깝게도 남아있던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해독약을 만들어 사람의 목숨은 살렸지만 남아있던 사람은 생각을 했어요. 오래 전에 돌아가셨던 그 분의 죽음을...그리고 그분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고 가게에 불을 지른 침입자를..." ".......!" "시신조차 온전하게 묻어드리지 못했던 남은 사람의 비애를...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불에 녹아버린 시신의 그 노쇠한 가슴어름에 꽂혀있던 칼을...." 바들바들 떨면서 말을 이어가던 크리스틴은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놓인 선반으로 다가가 서랍 속에서 검게 변색된 하얀 천 뭉치를 안고 돌아왔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것이 오랫동안 방치를 해두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천에 묻어있던 피 와 그을음에서 시작된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천이 조심스럽게 펼쳐지고 그 안에서 붉은 루비가 박힌 단도가 드러난 순간 민은 '남아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독약을 묻혔었는지 시리도록 푸른빛이 도는 단도에는 온통 검은 딱지로 얼룩져 있었다. "저에게 모든 것을 전해주신 분...그 분의 기억이 담긴 일지를 가지고 사라졌을 침입자를 잡고 싶어요. 자식도 없이 외로운 삶을 사시던 그 분의 모든 것을 훔쳐간 그 살인자를 잡고 싶어요. 기회를 잡았고, 꼬리를 보았으니..." '복수만 남았어요.' 하늘을 담은 파란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금방이라도 빨려들어 함께 분노로 날뛰게 될 것만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서 고개를 돌린 민은 피와 재에 얼룩진 천에 싸인 단도로 시선을 돌렸다. '대단하군...' 이제 겨우 15세. 아직은 부모의 품 안에서 어리광을 피우며 세상물정 모르고 날뛰어도 할 말이 없는 어린 소녀가 일국을 뒤흔들 수도 있는 일에 과감히 뛰어 들었다. 그것을 도대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단지 오래전 자신을 가르친 한 노인의 죽음에 가려진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서 말이다. '정말 재미있는 일을 물었어. 의뢰인도...그런데...이 단도, 어딘지...낯이 익은....?!' 무심코 보고 있던 단도의 한 곳에 보이는 작은 흔적. 주시해서 보지 않으면 결코 찾을 수 없는 그것은 한 가문의 인장이었다. 손잡이 부분에 작게 조각이 된 늑대.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모든 퍼즐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내었다. "이런...!" 민의 탄성이 가진 의미를 미처 알아채지 못한 크리스틴은 여전히 서글픈 눈으로 단도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할아버지는...미처 해독약을 만들 시간이 없으셨어요. 제가 만들게 되었지만 이 독약은 두 번 사용되었고, 처음 시작되었던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황태자...!" "전 물러설 수가 없어요. 몰랐다면 잊었으되, 알게 되었으니 찾아야지요. 이해...해...주시겠 어요?" 어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었던 분노를 드러낸 크리스틴은 깊은 상념에 빠져 든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의외로...쉬울지도..." 단도를 보고 알아낸 사실을 가슴 속에 묻어두며 혼자 중얼거리던 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 동안 심각하게만 보였던 그의 눈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오래토록 고심하던 문제를 풀어 버린 어린 아이마냥 빙글거리는 표정으로 크리스틴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던 민은 자신 이 들고 온 가죽 주머니를 뒤적이다 몇 장의 양피지를 꺼내보였다. 한 장은 붉은 엑스자가 또렷이 그려져 있는 어느 집안의 구조를 상세히 기록해 놓은 설계도였 고 또 한 장은 수 십 명의 이름과 그들의 신상명세서가, 또 다른 한 장에는'로드리고 라 암 브로시아(Rodrigo La Ambrosia)'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독약이 숨겨져 있는 곳, 이건 남작가와 아가트 상회, 레이븐에 연결 되어있는 인물들, 그리고 이건 '론'이란 사내의 신상 명세서입니다. 작은 숙녀님." 약간 긴장된 얼굴로 민이 보여준 서류를 자세히 읽어보던 크리스틴이 문득 '로드리고'라는 이름 에 집중했다. "알렉산드로 라 암브로시아(Alexandro La Ambrosia)...재..상..?" "론이란 사내의 아버지죠. 지금 황태자의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자입니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 의 바로 밑에서 전권을 휘두르며 발 벗고 나선 인물이 사이먼 데 멜포레스 공작입니다." "아!" "평소에는 앙숙 같던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범인을 색출한다...좀 이상하긴 하지만 글쎄요.." 묻지도 않았던 것을 줄줄 털어놓는 민은 이미 이 일에 뛰어들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암시라도 하려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미 은퇴할 나이가 지난 알렉산드로 재상이 그의 후임으로 사이먼을 추천했다는 것, 제 3공작으 로도 만족을 하지 못해 어떻게 해서든 재상직에 오르려 했던 야심만만한 공작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상을 돕고 있다는 것. 때문에 겉으로는 엄청나게 열심히 뛰어다니고는 있으나 실상은 그리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 등등... 두 사람의 알력으로 인해 황태자의 시해사건 용의자들은 하나도 잡히지가 않았고, 이에 분노한 황제가 두 사람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털어놓은 민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 리스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다는 듯 야릇한 얼굴을 하고 민의 입을 주시하던 크리스틴인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지럽게만 보이던 사건은 모두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래서 세상만사 새옹지마(世上萬事 塞翁之馬)라 하지 않던가. 꼬리는커녕 그림자도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일을 추진해온 사람들이 이렇게 어이없게 뒷덜미를 잡히게 될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그것도 한 소녀의 망동(妄動)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독을 쓰는 바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상상도 못하고 있을 디아나를 떠올 리며 어깨를 추스르던 크리스틴은 작은 종이를 꺼내어 단문장을 적었다. 그것을 곱게 접어 자신 이 아끼는 찻잎을 한 묶음 꺼내어 종이를 끼워 넣은 후 민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멜포레스 공작님의 처소에 놓아주세요. 그리고 지켜봐 주세요." "뭘...?" "혹시나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튈지 모르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스승님께 말씀 드려놓을 테니 이 수정구를 가지고 가셔서 공작님이 움직이시면 연락을 주세요." 샌들우드가 주고 간 통신 수정구를 함께 전한 크리스틴은 약간 무거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의외로...쉽게 해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조금 더 서류를 살펴보고 계획을 짜야했으나, 공작이 뒷걸음질쳐서 재상을 칠 생각이라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두 사람 모두의 힘이 필요했다. 이런 사안에 있어 자중지란 (自中之亂)은 적들이 원하는 바였을 테니까. 일을 많이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크리스틴의 작은 얼굴을 보고 있던 민이 씨익 웃었다. "시키신 일은 확실하게 해 드리지요. 추가 요청이 있었으니 선불을 미리 받겠습니다." 시원스럽게 대답을 하고 몸을 벌떡 일으킨 민은 어느새 눈물을 지운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슬며시 허리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 히며 이마를 만지작거리는 작은 소녀에게 윙크를 날리고 마법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텔레포트" 서른이 넘어 보이는 사내의 입맞춤(!)에 넋이 나간 크리스틴은 엄청난 불길을 일으키며 마법으로 사라진 민의 흔적을 따라 날아가는 카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르륵 겨우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카사...나 시집 다 갔나봐..." 여인의 순결은 목숨보다 귀중한 시대였다.(물론 겉으로만...) 이미 오래전에 황태자가 미리 찜해놓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크리스틴은 민의 기습에 머리를 부여 잡고 비틀거리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소환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내며 모습을 드러낸 엘퀴네스가 카사를 대신하여 크리스틴의 지친 몸을 감싸 안으며 아이의 눈물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잠시 후, 로먼과는 멀리 떨어진 바이오니어 수도 갈렌의 한 모퉁이에서 어마어마한 불길이 치솟 았다. 【그림자의 쉼터】란 술집에서 시작된 거대한 불기둥은 희한하게도 그 자리에만 머물며 혀를 날름거렸다. 옆으로 번지지 않고 한곳에서만 집중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넋이 나간 사람들은 그 속에서 시꺼멓게 그을린 몰골로 튀어나와 황급히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사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한 붉게 타오르는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발하는 새 한 마리가 그의 뒤를 따라 날아가는 것 역시 보지 못했다. 군데군데 화상을 입은 덕에 비칠거리며 공작가에 침입한 민은 자신의 품속에 숨겨놓았던 찻잎 주머니를 공작의 집무실 책상위에 올려놓고 커튼 뒤로 숨었다. 잠시 후, 뒤뚱거리며 들어온 공작은 자신의 책상위에 올려진 주머니를 열어보고 입이 귀에 걸 렸다. 그는 고급 찻잎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있느라 민이 주문을 읊조리는 것을 듣지 못했다. "오오오~~이것은...바로 레이븐 상회에서만 판다는 그 차가 아닌가! 허허..누가 이렇게 좋은 것을...응?" 주머니를 봉해둔 끈에서 흘러내린 종이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공작은 그 안에 적힌 글을 보고 온몸을 푸들푸들 떨어댔다. 그의 푸짐한 살덩어리들이 출렁거리며 분노를 표출하는 동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려는 듯 걸음을 옮기던 공작은 집무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집사를 보 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난 바쁘네!" "허나, 공작님. 지금 황제폐하께서 당장 입궁하시랍니다. 지금 당장이요!" "으드득!" 집사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자신이 쥐고 있던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책상위에 던져버린 공작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으드득!"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는 집사는 보이지도 않는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망토를 펄럭이던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고 마차를 준비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혀를 내두르며 슬며시 몸을 드러낸 민은 책상위에 보란 듯이 배를 내밀고 있는 메모를 보고 머리를 긁적이다 곧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모이라 영애에게 사용된 독은 황태자께 하독 된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 ***************************************************************************************** 저녁에 올리려고 이제까지 개겼는데...훌쩍... 그리고 크리스틴의 성격이 착해서...짜증이 난다시는 분들이 계셔서 몇 자 적을까합니다. 음...착하다. 네, 착하지요. 세실은 착합니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착한가요? 아니지요. 그러면 두 사람의 기억 모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착한 세실이 크리스틴의 기억을 100% 물려받았습니다. 두 가지 삶을 살게 된 거죠. 이제 1년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1년 2개월 정도? 1년은 레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내가 누군지 고민하며 보냈지요. 그리고 이제 2달. 크리스틴이 살아왔던 곳에 와서, 적응을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아, 그 아이는 그 아 이고 난 나니까, 룰루랄라 살면돼'라고 생각한다고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다른 판타지에 그런 내용이 많이 나왔지만 그들은 적응을 잘만 하고 살아가더라 하고 말씀하시면 할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만들어놓은 주인공은 '나 잘났어'란 마음은 애초에 없었지요. 스스로의 능력도 제대로 모르고,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얼마나 큰 힘인지도 깨닫지 못한 어린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 대뜸 두 사람의 기억을 가르며 난 나야, 이러면...제가 키운 세실 이 아니지 않나요? 전 그런 아이를 만든 기억이 없습니다. 하나의 과도기로 봐주세요. 언제까지 징징 짤거냐고 물으신다면, 제 자리를 찾을때까지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리렵니다. 성격개조를 한다고 했지요, 13살짜리 소녀가 멀쩡한 사람한테 얼굴 망가지라고 독약을 쓴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까? 그냥 히죽 웃으며 그건 내가 아니니까, 이러고 넘길까요? 그러면 백작부부에게 '엄마아빠'라 부르는 것 부터 잘못된 것이지요. 언젠가는 떨쳐내겠지요. 이렇게 방황하게 만든것은 제 잘못입니다. 잠시간의 짧은 고통으로 영 원히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만큼 가치가 있을 거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음...좀 흥분한듯... 그리고, 급진전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부분이 어떻게 급진전 되었다고 생각이 드시는 건지...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그 동안 공부하고, 노력하는 부분이라면...이야기를 끌지 않아 그리했다 답변하겠습니다. 벌써 60회를 바라보고 분량으로 300p가 훨씬 넘었는데 아직도 아이로 살아야 하기에 좀...빠른 진척을 위해 건너뛰었다고 봐 주세요. 그래도 마음에 안드시면, 제가 버린 부분을 이어드릴께요. ^^ (연결이 안되는 부분이 그거였거든요) 시간이 흐르는데로...쓰자니 양이 너무 많아지고, 연결도 잘 안되고... 그런 문제로 어제 하루 고민하다 다시 쓴 것이니, 혹시나 걸리시거들랑 콕 찍어주시길. 사설이 엄청나게 길어졌군요. 메세지로 보내시는 분들도 계시고, 리플에 달아주신 분들고 계시고, 주인공이 착해서 짜증내시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쓰는 저도...짜증나거든요. 그래서 독한 인물 붙이고, 모자라는 부분 채울려 고 했는데, 제가 봐주셨으면 하는 부분은 넘어가시는게 속상합니다. 사실 제가 물러터졌습니다. 저 답답한 성격이 쓰는 놈 성격이려니하고 봐보세요, 그리고 이샤는 제 성격을 고치는데 일조가 아닌 10년이나 닦달을 해온 친구를 모델로 한 겁니다. 그럼...이만 물러나겠습니다.(뭔소리를 한건지...)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1. "흠...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스승님?" "알게 뭐냐." "....예?" "나도 모른다. 그냥 부르라니 부른 것뿐이야." "........" 레이븐 상회에서 매주 보내주는 최고급 차를 홀짝이던 바이오니어의 황제, 브래들리는 볼을 뚱하니 부풀리고 있는 샌들우드를 보며 실소를 지었다. 세실리아란 아이가 없어졌을 때만 해도 산불 맞은 멧돼지마냥 펄펄 뛰며 제자를 찾아내라 닦달을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동안 소식도 없이 잠적해 있던 샌들우드가 찾아와 지금 당장 공작과 재상을 불러들이라고 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데 막상 일을 저지르라 종용한 사람이 예의 뾰롱퉁한 얼굴 로 심술을 부리다니... 허허로운 얼굴로 차를 마시던 황제는 난데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 다. 잠시 후 대실의 문이 콰당 열리며 정령사와 마법사가 함께 뛰어 들어왔다. "폐하, 어서 피하셔야! 거대한 기운이...헉!" "으허헉!" 이제 상위급 정령과 계약을 한 정령사는 샌들우드의 주위를 맴도는 실피드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가슴을 부여잡았고, 마나의 유동을 감지하고 함께 달려왔던 마법사는 아련한 기억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낯익은 얼굴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나가봐." "헉......그...새...샌..." "나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본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라!" 황제의 일갈에 정신을 못 차리던 두 사람은 충격에 빠져나왔다. "죄...죄송합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치던 두 사람의 귀에 천둥보다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죽은 사람이다. 떠들어대면...알지?" 알기는 뭘 알겠는가? 하지만 그의 말에 담긴 살기는 바보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몸은 정직했다. 등 뒤로 줄줄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처량하게 실감하며 재빨리 뒷걸음질 친 마법사는 '난 아무도 못 봤어, 난 아무것도 몰라' 라고 수십 번 수백 번 되내이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궁중 마법사로 있을 때에도 무려 100세가 넘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샌들우드였다. 그가 죽었다고 믿는 마법사들은 없었지만 그의 은거를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속 보이는 연극 을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 난 것이다. 온몸을 옭아매는 기운에 기겁한 마법사는 문가에 도달하자마자 여전히 실피드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는 정령사의 팔을 잡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입을 열면 죽습니다. 참으십시오, 잊으십시오. 우리는 유령을 본 것이오. 절대로! 절대로! 함구해야 하오! 아니...차라리, 내가 기억을 지워 주리다. 빨리 갑시다. 기억을 지워야 합니다!" 처절한 절규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샌들우드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한 브래들리는 혀를 끌끌 차며 차를 홀짝였다. "어째 스승님 악명은 갈수록 높아지십니다." "악명이 아니라 위.명.이다. 그리고 알아서 기는 것이니 뭐라 할 말은 없다. 킁!" 그토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왔던 사람치고는 편안한 기색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후배의 피를 모조리 말리고도 태연히 대답한 샌들우드는 실피드의 전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흠...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머릿속에 울리는 말에 입을 열어 대답한 샌들우드는 알현을 청하는 재상과 공작의 소식이 들리 자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아이들이 들어오면 일의 진척이 있었는지 물어라. 그리고 공작을 몰아붙이란다. 뭔가 알고 있 으니 추궁하면 뭔가가 나올 것이다. 두 사람을 이어라. 손을 잡게 만들어야한다. 오늘...저녁 에...다시 찾아오마." 바람이 전해주듯 아련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황제는 굳은 얼굴로 대견실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이것이었습니까, 스승님. 이제까지 그것을 알아보고 계셨던 것입니까...' 황제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황태자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나타났던 소녀의 그림자가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샌들우드 가 세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은 맞으나, 그가 머리를 굴린 것은 아니었다. 귀찮은 것이 싫어 은거를 한 노인이 무슨 덕을 볼 것이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겠는가? 크리스틴의 요청만 아 니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았을 위인이었다. 하지만 세실이 죽었다 믿고 있는 황태자는 그동안 찾아오지 않았던 샌들우드가 세실의 뒤를 이어 자신의 일을 도와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오해를 하고 말았다. 스승님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한 황제는 이제껏 조사를 하는 흉내만 내면서 꼬리를 흔들어댄 재상과 공작, 아니 정확하게는 공작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한편 누가 보낸 지도 모를 메모에 정신이 나간 공작은 황제의 살기어린 시선도 알아채지 못한 채 상념에 빠져있었다. 누가 보낸 것인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의 범인을 잡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까지 재상을 물 먹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시간을 낭비했던 일에 대한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 었다. 미리 알아내었다면 딸아이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었다. 또한 한 번 일어난 일, 두 번 일어나지 않는 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를 갈며 주먹을 쥐어 봐도 자신의 욕심으로 인한 태만으로 그러한 일을 만들어내었다는 죄책감 이 사이먼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앉으라."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한 황제는 삶의 무게에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재상과 삼천포로 빠진 것이 분명한 공작을 세세히 뜯어보았다. '두 사람을 이어라.' 샌들우드의 음성이 환청처럼 머릿속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공작." "....네, 폐하." "알아낸 것이 있으시오?" 재상은 본 척도 않고 자신을 물고 늘어지려는 황제를 보고 식은땀을 흘리던 사이먼은 태연한 안 색으로 앉아있는 재상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늙은이..!' 그는 재상이 능력이 없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가 공을 세워도 그것은 두 사람 모두의 것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밍기적거리며 연극을 했다. 일단 황제의 분노를 재상에게 돌려 그의 목을 친 후, 자신이 재상직에 오르면 그때부터 열심히 범인을 잡으면 된다고, 그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모이라의 일은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감히...나의 딸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바이오니어에 있는 일곱 명의 공작들 중 딸이 있는 가문은 단 둘, 멜포레스와 크레이오 공작가 뿐이었다. 하지만 크레이오 공작의 딸은 너무 어리게 보이고, 철이 없다는 소문이 파다해, (겉보기에는) 여러모로 보나 완.벽. 그 자체인 모이라 데 멜포레스가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로 떠오르고 있었다. 물론 이번 아카데미에서의 일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하기에 분명 황태자비가 될 모이라를 시해하기 위한 것 일거라 생각을 한 공작은 생각을 정리 했다. 여기서 발뺌을 하고 혼자 공을 세울 수도 있으나, 황제의 분노한 얼굴을 보니 시간이 없 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련한 공작의 예상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이번 일은 공들 모두에게 일임한 일이었소. 하지만 이미 1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진척이 없 으니...책임을 모두 함께 져야하지 않겠소? 그냥 지금 옷을 벗으시겠소?" 황제의 협박에 공작은 이를 갈았지만 재상은 태연했다. 마치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재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폐하.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의 실책이니 제가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공작의 눈이 번쩍 빛났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린 공작은 말도 안 된다 는 표정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아니, 재상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공은 입을 다무시오." "......." 황제의 싸늘한 말에 입을 닫아건 사이먼은 실룩이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슬며시 고개를 틀었다. "이보시오, 알렉산드로." 황제의 친근한 목소리에 잠시 헛기침을 하던 재상이 어려서부터 지켜봐온 브래들리를 보았다. "난...재상이 있어야 하오. 아시지 않소? 공이 몇 해 동안 궁을 떠나 있던 시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르오. 날 이런 작자들 속에 팽겨 치고 그냥 떠나려합니까?" ".......!" 졸지에 '이런 작자'가 되어버린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보았다. 그리고 엄청난 모욕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폐하, 신(臣)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나, 그런 말씀은..." "듣기 싫은가?" "......." "허면 왜 자네 혼자 공을 세우려 발버둥친 것인가? 나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이 바이오니어의 시작과 함께한 암브로시아를 밀어내고 재상직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공을 내가 뭐라 불러야 하오?" "폐하, 충신을 두고 그런 모욕을 하시는 것은 용안을 더럽히는 말씀이옵니다. 시정하십시오!" 입술을 비틀며 사이먼에게 사정없이 모욕의 말을 내던지던 황제는 재상의 눈에서 불똥이 튀며 호통소리가 터져 나오자 어깨를 들썩였다. 감히 황제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시정하라 윽박지르다니 신하로써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하지만 소리를 친 노인이나 야단(?)을 맞은 황제는 마치 늘 그래왔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내가 내 얼굴에 침을 뱉든 칼질을 하든 공은 떠날 사람 아니오, 무슨 상관이오?" 이것이 과연 나이 40을 바라보는 일국의 황제가 할 말이던가? 충격을 받아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이먼은 신경도 쓰지 않고 벌떡 일어난 재상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황제를 노려보았다. "선황(先皇)께서 그리 가르치시더이까! 바이오니어 어느 역대를 뒤져보아도 폐하처럼 신하에게 모욕을 주고 수족을 잘라내는 비방을 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어찌 하시려고 이리 막 나가시는 겁니까! 종아리라도 맞으실테요?! 이 늙은이가 정녕 회초리를 들게 하시려고 이러시는 겁니 까?!" 주름 잡힌 얼굴 가득 노기를 띠고 펄쩍 뛰던 재상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황제를 보고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미 제상을 제외하고 그의 나이 대에 있는 귀족들 중, 궁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들은 모두 황제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중에서도 대대로 재상직을 맡아왔던 가문의 알렉산드로 라 암브로시아는 자식을 늦게 보는 바람에 지금의 황제를 아들처럼 보살펴왔다. 황제를 대신해 업어주기도 하고, 짬짬이 글도 가르치고, 나무타기도 가르치고, 말을 안 들으면 회초리도 휘둘렀다.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서 이미 물러서야 할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황제의 옆에 있었다. "폐하...이것은 국사이옵니다. 제가 비록 물러선다 하더라도 떠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흙으로 돌아가도 벌써 갔어야 할 늙은이를 언제까지 붙잡아 두시려 하는 겁니까." 빙빙 돌려 말하지만 그가 지난 1년 동안 해온 말은 한결 같았다. 보내달라고. 이만 편히 쉬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청하는 재상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장성한 자식이 있는 일국의 황제라 하더라도 선황의 유일한 지기이자, 부모와 같은 분의 손을 놓기 싫은 것을 어찌하랴. 고집스럽게 재상의 청을 외면한 황제는 벌게진 눈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공작에게 화살을 돌렸다. 알렉산드로는 뼛속까지 바이오니어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 설사 황좌를 달라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야망으로 눈이 먼 인간은 달랐다. "공은 알고 있는 바를 지금 당장 이야기 하시오!" 당장에라도 목을 뽑아버리겠다는 살기를 팍팍 뿌리는 황제를 보고 어이없어 하던 공작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폐...하...그..그것이..." 이곳으로 불려오기 전에 보았던 메모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내 공작이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당장 털어놓으시겠소, 아니면 이대로 시간만 보내다 옷을 벗으시겠소?" '이것이었나?' 황제의 엄포를 들은 공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나태함을 그저 눈감아 준 것임을 확신을 했다. 제 1공작, 크레이오와 재상을 누르고 그 위에 올라서려는 그의 야심을 알고도 지켜봐 준 것이다. 시퍼런 칼날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사이먼은 떨리는 눈으로 일 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차갑도록 시린 눈을 보았다. "얼마 전에...제...딸아이가 독에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 조사한 것을 말하라고 했더니, 웬 딸? 재상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공작을 보았지만 황제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 르지 않았다. 그런 황제를 보고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다시 한 번 확신한 공작은...알아서 기었다.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 몰랐으나, 나중에...그 아이에게 쓰인 독이 황태자 전하께서 중독 된 것과 같다는..." "뭐요!" 공작의 말에 놀라려던 황제는 재상의 외침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지친 얼굴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분노로 가득 채워진 재상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그 러져있었다. "똑바로 말해보시오, 영애가 당한 것이 전하께 사용된 것과 같다고 하시었소!" 자기 딸의 일에 자신보다 더욱 분노하는 재상을 보며 입을 쩍 벌렸던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았다. 재상의 눈에 반짝이는 이슬을. "어찌...치료가 된 것이오, 난 공의 따님이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네?" 해약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공작은 재상의 질문에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샌들우드가 황태자의 약을 훔쳐갔다는 것을 알고 있던 황제는 어떻게 해야 저리 격동 하고 있는 재상을 진정시킬지 고민을 해야 했다. "그..그것이 신..신전에서..." "말도 아니 되오! 그 독이 어떤 독인데 신적에서 치료를 했단 말이오! 그 전에 죽었을 것이 분명하거늘!"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재상의 눈에는 이미 황제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단어. 한 소녀의 이름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 해약을 만들어낸 유일한 소녀. 그녀가 없다면 모이라가 살아날 수 없었음을 확신한 재상은 어떻게 해서든 인연의 끈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의 처절한 기색 때문이었을까, 그저 그를 잘라내려고만 생각했던 공작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 이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카데미에서 크리스틴이 마커스 선생을 데리고 와 응급처 치를 해주었단 말을 한 공작은 머리를 긁었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건만, 떠벌 떠벌 이야기 한 것이 민망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은 재상은 달랐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알렉산드로는 공작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분명 마커스란 사람이 독이 퍼지는 것을 억제했다 하시었소?" "네." 공작의 단호한 대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재상은 황제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 렸다. 그 뒤에 남아있던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활짝 열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행히 먼저 정신을 차린 황제는 조금 여유가 있는 태도로 의자의 등 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사이먼 공." "네, 폐하." "내 자네의 욕심을 모르는 것이 아니네. 사내라면 당연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네." "....그..그것이.." 애써 변명을 하려는 공작의 말을 막은 황제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물러서려고 했지. 내가 잡고 있었네. 하지만 이번 일만 해결하면 보내 주기로 약조를 했어. 아니 더 이상 잡고 있는 것은 나의 과욕일테지. 그래서 재상이 공을 천거 한 것이야. 그런데 말일쎄...자네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니..마음이 놓이지가 않아. 공작 영 애의 일로 심란하기도 할 것이고. 해서..다른 사람을..." "폐하! 제가 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암브로시아 공을 보필하여 반드시 해결하겠 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아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딸을 위협한 놈들이었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맡긴 단 말인가. 더군다나 재상과 황제의 약조가 있었다면 다음 재상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두 눈을 벌겋게 뜨고도 놓친다면 그는 사이먼 데 멜포레스 공작이 아니었다. 결의에 찬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사이먼을 보며 한숨을 삼킨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정말 내키지 않지만 한 번만 더 봐준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명 채찍과 당근 요법. 고대로부터 그것의 효험은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내 그동안 공이 보여준 충심을 보아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소. 허나..."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날카로운 복수의 칼을 세우며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사이먼에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아비의 마음이겠지..." "....!" 황태자 역시 독에 당했다는 것을 떠올린 공작은 벌게진 얼굴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 렸다. "신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용서하십시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제 목을 걸겠나이다, 기다리십시오! 적이 하늘이라 하더라도 베어 오겠나이다!" 모이라가 쓰러졌던 그 몇 나르 동안 겪었던 억겁 같은 악몽을 떠올린 사이먼은 황태자의 일을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로 본 스스로를 책하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비의 마음' 황제도 사람이고, 한 소년의 아비였다. 그가 한 소녀의 아비인 것처럼. 그러고도 신하라 할 수 있는가, 그러고도 일등 공신이라 자부하였던 가! 찢어질 듯한 죄책감에 가슴을 치며 머리를 조아리던 공작은 눈시울을 붉히며 대견실을 물러났다. '반드시...반드시 목을 베어 바치겠나이다. 폐하...더 이상 심려마옵시고 편히..기다리십시오.' 알렉산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화를 내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 한켠에 찬바람이 불었다. 또한 그의 말을 듣고 분개하며 어디론가 달려 나간 재상이 떠오르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바이오니어의 신하라 자부했다. 스스로가 군주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있는 현명한 인물이었고, 현황제의 오른팔이 되는 것이 그 의 유일한 목표요 야망이었다. 브래들리의 뛰어난 업적에 동참하여 수천 년 수만 년 이어질 바이오니어의 역사책 한 구석에나 마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 절대 패륜적인 인물로 기록될 생각은 없었다. 충심을 다한 신하로 기억되는 것. 그가 처음 권력을 잡은 날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야망을 떠올린 사이먼은 황태자와 모이라, 황제와 자신의 얼굴이 겹쳐지자 눈을 감았다. '내가...재상과 내가 잡는다.' 바이오니어 제 3공작, 사이먼 데 멜포레스가 다시 태어난 날. 그는 이제껏 적으로 여겨온 재상과 손을 잡고 황제 브래들리 쳇필드 개넌의 유일한 오른팔이 되어 바이오니어의 역사 한 자락을 휘두르는 충신으로 기억될 터였다. ************************************************************************************** 사설이 길다고 하신 코코님, 별빛바다님이 무서워 올린 글은 아닙니다. ㅠㅠ (흑흑) 음. 일단 올렸고, 뽀쁘님 띄어쓰기는 마음에 드시나요? 지루하시다고 하셨는데... 어디가 지루하셨는지 여주어보아도 될런지... 그리고 또 난데 없이 왠 인물? 이러실까봐 노파심에 한말씀 올리자면 로드리고가 궁으로 돌아온 날 기억을 되살리시길. 그때 분명히 재상은 '세실리아'를 알고 있었지요. 흠흠흠 두 사람 관계를 다음편에 알려질 것이고... 자, 그러면....흐흐흐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제가 말이지요, 조아라에 글을 쓴지 1년이 넘어가는데 여지껏 제가 쓴 글을 확인하게 위해 어떻게 했는지 아시나요? 통합작품검색에서 <....> 작가검색 <유키짱> 이라고 쳐서 찾아 찾아 글을 읽었드랬지요. 그런데...어제. 작가의 뜰이란 걸 눌렀습니다. 혹시 그림을 올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그랬더니...제 글을 읽을 수 있게 창이 뜨더군요. ㅠㅠ 1년이나 바보짓을 하며 검색을 해서 제가 쓴 글을 읽어왔다는 생각을 하니...손가락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듯 하더이다..바보 유키. 암튼 그랬구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리플, 태클, 비평 다 환영합니다만... 이유를 정확하게 적어주세요. 추천의 글을 읽으면 날아갈듯 기쁘듯이 이유도 모른채 싫은 소리를 그것도 몇날 며칠 연구하고 몇시간을 고생고생해서 올린글에 대해 비난을 받으면 기분이 상합니다. 왜 그런지 이유라도 알면 고치기라도 하겠지요. 그럼...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바꿀께요. 여러분 행복하자구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2. 한편 정신없이 궁을 나온 알렉산드로는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아카데미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찾아야한다!' 독을 억제하는 방법이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독의 종류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검은 손의 실마리 를 잡을 수 있을거라 확신을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작은 소녀의 손길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 을까...아련한 기억을 더듬으며 몬트리얼로 들어간 알렉산드로는 곧장 학장실로 들었다. 시험이 끝나고, 바쁜 업무를 보고 있던 카를로스는 연통도 없이 찾아온 노인을 보고 벌떡 일어 났다. "재상님!" "마커스라는 선생을 부르시게." "네?" "지금 당장 불러들이시게. 공작 영애의 독을 막은 이가 있다고 들었네." "아...네." '궁에서 사람이 올지도 몰라요.' 몇 달 전에 들었던 크리스틴의 말을 떠올리며 안색을 바꾼 카를로스는 서둘러 마커스 투르벨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앉으십시오, 차라도..." 그때까지 정신없이 서성이던 알렉산드로가 헛기침을 하며 긴 의자에 앉았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별달리 할 말이 없던 터라 재상의 창백한 안색을 걱정하던 카를로스는 바람처럼 나타난 마커스 를 보며 손짓을 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마커스 선생." "아...네." 알렉산드로를 처음 보는 마커스는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앞에 앉아 학장이 내어주는 차를 마셨다. "자네가...공작 영애의 독을 막았다는 소리를 듣고 왔네, 사실인가?" 노인의 물음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마커스는 애매모호한 시선으로 알렉산드로를 쳐다보았다. "뭐 제가 만들어둔 해약제를 섞어서 먹였더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왜...그러십니까?" 마커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렉산드로가 카를로스에게 손짓을 했다. 그에 머리를 긁적이던 카를로스는 허리를 숙여 보이고 학장실을 떠났다. "사실대로 말해주게.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야. 일국의 운명이 걸려있을 수도 있네. 그래도 말하지 못하겠는가?" "......." 난처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마커스는 문득 푸른 눈을 가진 작은 소녀를 떠올리고는 고개 를 흔들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시험 성적까지 조작한 아이였다. "한 마법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약을 가지고 오셨지요. 보라색이 나는 액체였는데...그것을 먹였더니 괜찮아졌습니다." 마커스의 말에 흠칫 하던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신전에는 왜 보낸 것인가?" 찔끔하며 볼을 긁적이던 마커스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전들 압니까, 마법사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걸요." 뭔가 빠진 것이 있었다. 마커스가 이야기 한 것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크리스틴...이라고 하던가? 그 아이를 불러오게." 알렉산드로의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마커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아이는 이번일의 피해자입니다.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행여나 추궁할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신지는 모르나 그 아이를 취조할 수는 없습니다. 배너 백작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겁니다." 절대로 아이를 내줄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마커스를 본 알렉산드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자네가 아끼는 제자라도 되나? 마음이 와 닿는군. 그 아이를 보고 싶네. 추궁하려는 것이 아 니야. 의심하는 것도 아니네. 그 상황에서 현명하게 판단한 총명한 아이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야. 부르게. 아니면 내가 학장을 불러야겠나?"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알렉산드로의 노안을 노려보던 마커스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공작 같으니!' 거짓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를 불러와서 어찌하려는가? 답답한 마음에 가슴만 치던 마커스는 직접 데리고 오겠다며 학장실을 빠져나왔다. '젠장! 도대체 저 노인네는 누구야!' 씨근덕거리며 크리스틴이 있는 기숙사로 찾아간 마커스는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소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아픈 것이냐?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베시시 웃는 아이의 이마에 솥뚜껑만한 손을 올리고 미열이 있음을 확인한 마커스는 아이의 손을 잡고 치료실로 향했다. "어리석은 것, 아프면 치료를 해야지 무슨 깡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냐!" 생각 같아서는 번쩍 들어 안고 갔으면 싶지만 이미 열 다섯이나 된 다 큰 숙녀에게 마음대로 손을 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이의 뜨거운 손을 잡고 치료실로 간 마커스는 신관이 기도를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쉬셔야 합니다." "지금 이 아이를 찾는 손님이 있어, 가봐야 하네." "손...님이요?" "그래, 널 데리고 하더구나. 모이라의 일을 물으려고 온 모양이야." 마커스의 말에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신관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매일 신세를 지네요." "이카루스님의 축복이지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전혀 귀찮지 않다 말해주는 신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크리스틴은 마커스의 커다란 손에 이끌려 학장실로 걸어갔다. "네가 약을 만든 것은 말하지 않았다. 마법사님이 가지고 온 약을 먹여 치료했다고 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혹여나 괜한 말로 오해를 살까 충고를 해준 마커스는 크리스틴과 함께 학장실로 들어갔다가, 기다리고 있던 카를로스의 손에 잡혀 쫓겨났다. "왜 이러십니까?" "저 분은 황제 폐하 다음으로 높으신 분이네." "그래서요?" "그..그러니까.." "폐하 다음으로 높은 사람은 아무나 붙잡고 심문해도 된다는 법이라도 있답니까?" 신경질적으로 못마땅함을 드러낸 마커스는 학장실로 들어가려했지만 그의 팔을 잡고 매달리는 카를로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절대로 해가 될 일을 하실 분이 아니네. 크리스도 알고 있었어." "그게...무슨 말입니까?" "그 아이가 전에 나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네. 모이라의 일을 조사하러 궁에서 사람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 똑같이 침울한 얼굴이 된 두 사내는 노인과 소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학장실 문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어떤 이야기가 오고가는지는 모르나, 크리스틴이 무사히 나오기만을 기다릴 생각 이었다. "만나서 반갑구나, 네가 크리스틴이라는 아이냐?" "........." 학장실 안으로 들어선 크리스틴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거는 노인의 얼굴을 보고 넋을 잃 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멍하니 알렉산드로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던 크리스틴의 입술이 파르 르 떨렸다. "...아...한..한스...할..아버지?" "........!" 소녀의 작은 목소리에 재상의 푸른 눈이 파르라니 떨렸다. "누...구라고?" "아! 아..아니에요. 잠시...어르신과 너무 닮으신 분이 생각이 나서..죄송합니다." 두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던 크리스틴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아주 오래전 자신의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노인의 얼굴을 가슴 한 곳에 고이 접어두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알렉산드로 앞으로 갔다. 크리스틴이 그의 앞에 앉을 때까지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살펴보던 알렉산드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아니다. 헌데 네가 공작 영애가 쓰러졌을 때 마커스 선생을 데리러 갔다고 했느냐?" 알렉산드로의 질문에 크리스틴은 문득 노인의 깊고 푸른눈을 보고 있다가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론...로드리고....혹시...알렉산드로 라 암브로시아 재상님?" ".....!" 아이의 정확한 추측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알렉산드로 라 암브로시아. 그런데 로드리고를...내 아들을 어떻게 아는 것이냐?" "아....!" 모습을 아무리 바꾼다 해도 절대 숨길 수 없는 곳이 하나 있었다. 눈. 4년 동안이나 보아왔던 그 눈을 어찌 몰라보겠는가? 더군다나 세실이 그리도 좋아했고, 비록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그런 소녀를 배신한 사람의 눈을. 잠시 과거를 떠올리며 알렉산드로의 눈을 살펴보던 크리스틴은 그의 얼굴위에 겹쳐지는 또 다른 노인의 얼굴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저...멀리서나마 잠시 뵌 적이 있습니다. 눈이...많이 닮으셨어요." '한스 할아버지와도 정말 닮으셨어요...'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알렉산드로의 나직한 음성 역시 크리스틴에게는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 로 들려왔다. '세실, 이놈아! 그것은 거기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던 약화점의 주인. 한스의 말투는 언제나 무뚝뚝하고 교양이 없었지만, 은근히 귀족들이 쓰는 어투가 숨겨져 있었음을 백작가에 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연극을 하고 어투를 바꾼다 하여도 평민과 귀족이 쓰는 말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론이 귀족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약초에 대해 가르쳐 주었던 한스 할 아범 역시 신분을 숨기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얼굴도 닮았고, 음성도 똑같은 알렉산드로의 인자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추억에 잠겨 있던 크리스틴은 문득 자신의 치맛단 속에 숨겨놓은 낡고 두툼한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금방이라도 한스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움에 젖은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크리스틴은 알렉산드로에게도 그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분명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소녀인데 전혀 낯설지 않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묘한 인연의 고리를 느끼며 자신의 눈처럼 푸르나 더욱 밝은 하늘을 담고 있는 소녀의 반짝이는 눈을 주시하던 알렉산드로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넌...내가 알던 꼬마랑 참으로 많이 닮은 것 같다. 그 아이도 뭔가 생각을 할 것이 있으면 그렇게 사람 눈을 빤히 쳐다보며 똘망똘망 눈을 빛냈더랬지. 허허허. 이미 없는 아이인데, 요즘 따라 그 아이 생각이 부쩍 나더니, 이리도 닮은 널 만나려고 그랬나보다.' 크리스틴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알렉산드로는 촉촉이 젖어드는 아이의 눈을 거친 손으로 닦아주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가 이리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니 그 사람은 어디 있든 행복할 것이다. 울지 말거라.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떠난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게야." '나도 그러하니...울지 말거라.' 측은지심에 위로의 말을 중얼거리며 아이의 볼을 쓸어주던 알렉산드로는 갑자기 동그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고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소녀를 보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흑....!" 눈물을 주룩 주룩 흘리던 소녀는 예의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미친 듯이 볼을 비비며 흐느낌을 발했다. 알 수 없는 아릿한 느낌에 그저 소녀가 하는 데로 내버려둔 알렉산드로는 그저 빨리 눈물을 그치기를, 더 이상 울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스스로의 감정에 놀라 손을 거두려던 알렉산드로는 더욱 크게 울며 손을 붙잡고 매달리는 아이를 기어코 안아들고야 말았다. 그의 앙상한 몸으로도 거뜬히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마른 소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엉엉 울었다. "아가야...아가야...울지 말거라. 무엇이 그리도 슬픈 것이냐..." 탄식을 하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몸을 흔들어주던 알렉산드로는 크리스틴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비명과 같은 절규를 듣지 못했다. 낯익은 체취, 낯익은 손, 낯익은 몸. 낯익은 얼굴. 낯익은 음성. 낯익은 눈.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조금 더 마르고, 조금 더 슬퍼보였지만 그의 모든 것이 크리스틴의 기억 속에 똑똑히 각인되어 있었다. '한스 할아버지! 한스 할아버지! 돌아가신 줄 알았잖아요! 돌아가신 줄 알았잖아요! 왜 숨기셨 어요! 왜 거짓말 하셨어요! 세실을...절...그렇게 못 믿으셨어요? 할아버지도 론 아저씨랑 똑같아! 거짓말쟁이들! 거짓말만 하고...할아버지, 살아계셔서 감사해요, 절 잊으셨다 해도... 이렇게 살아계셔서 감사해요!' 아장 아장 걸어 다니던 3살 무렵 레니의 손을 잡고 시장에 따라 나왔던 소녀는 약화점의 주인의 잔심부름꾼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글을 배우고, 약초 정리를 돕고, 책을 읽으면 매일 동화 한 닢을 받았다. 그렇게 그의 밑에서 일을 배우고 약초를 배운 것이 장장 5년이었다. 그녀가 여덟 살이 되던 그 해, 약화점의 주인은 소녀에게 가르쳐주던 비법이 담긴 책 한권만 남기고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잿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얼마나 울었던가, 얼마나 슬퍼했던가. 그의 심장에 꼽혀있던 칼을 노인의 피 묻은 천조각으로 감싸며 영원히 기억하겠다 맹세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 역시 지금까지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있었다. 얼마 전에 발견한 살인자의 흔적으로 복수를 할 수 있다 생각했다. 드디어 그의 아비이고 스승이었던 사람의 가슴에 칼을 꽂고 불을 질렀던 살인마를 잡을 수 있다 확신했다. 그런데...죽었던 사람이 살아왔다. 그것도 일국의 재상으로 멀쩡하게 나타났다. 웃어야 하는 가, 울어야 하는 가.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들이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끊어졌다 생각했던 인연의 한 조각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기에, 인사를 할 수 없기에 더욱 슬프고 더욱 아팠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 것인지 자지러지듯 울던 소녀는 어느새 지친 숨을 내쉬며 알렉산드로의 품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독약을 쓴 자들의 실마리를 잡으러 왔다가 어이없는 인연의 끈을 주은 노인은 소녀의 가슴을 헤아려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녀의 감정에 전이가 된 것인지 너무나 지치고, 너무나 슬픈 얼굴로 마커스의 품에 크리스틴을 넘겨준 노인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나중에...기회가 닿으면...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그래...그렇게 전해주게." 퉁퉁 부은 얼굴을 치료해서 학장실에 보냈더니 아예 기절할 정도로 울어버린 학생을 조심스럽게 안아든 마커스는 알렉산드로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등을 돌렸다. 무심한 사내의 등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알렉산드로는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카를로스에게 웃어 보이고 궁으로 돌아갔다. "크리스틴 폰 배너라..." 탄식과 같은 지친 음성이 넓은 마차 안을 잠시 맴돌다 사라졌다. ***************************************************************************************** 알렉산드로와 세실의 만남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단편으로 올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아 볼 수있냐고 묻지 마세요. 아버지 못 알아보는 딸이 있습니까. 이건 제 경험인데 제가 어릴때 다른 식구들과 4년 정도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4, 5년 되지요. 그래서 전 제 아버지가 그 분인줄 알았습니다. 집에 와서 매일 아침 9시 뉴스에 나오는 앵커앞에 앉아서 펑펑 울었더랬지요. '아빠~~~!' 하구요. (정말 꼭닮으셨더라구요 잘생긴 우리 아빠...> <) 얼빠진 우리 아부지 맨날 용돈 1000원씩 쥐어주시면서 환심사기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셨지요, 하지만 지금도 그분들 댁에 가면 저는 외칩니다. '엄마, 아빠~!!! 오빠야! 언냐!' 하구요. 울 부모님 그것만 보면 엄청나게 화내시지만 어쩌겠습니다. 영혼에 각인된것처럼 끈이 이어진 것을... 흠흠 그분을 떠올리며 알렉산드로를 만들었습니다. 멋있는 분이죠. 개인적으로 무쟈게 좋아합니다. 므흐흐 에,,,사설은 이쯤하고, 왜 또 올리셨냐고 물으시면 조회수가 말이죠, 20만이 넘었지 않겠습니까 헐. 로그아웃하려고 코멘트 읽다가 문득 보니...20~로 시작하는거 있죠. 그래서 당장 돌아와 올렸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지적되면 좀더 보강할테지만 이정도로 진도를 빼겠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행복하자구요~~~~!!! (이상타...- -a)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3. 꽈앙!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된 일이요, 사이먼이 그 늙은이와 손을 잡았다니!!!" "허참...글쎄요. 저희들도 영문을 알 수가..." "알아내야지! 알아내야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물러설 수는 없어! 도대체 황제가 어떻게 사이먼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인가?" "혹시..." "말해보게." "혹, 폐하가 재상직을..." "음?" "사이먼 공작이야 원래 재상직을 노리고 있었으니...그것을 약조 받은 거라면..." "말도 아니 되네. 폐하가 그 늙은이를 놓아줄 것 같은가? 우리가 왜 그 죽지도 않는 늙은이 에게 손을 쓰지 못했는지 잊었는가? 그 늙은이는 궁에서 죽을 것이야. 황제가 그렇게 할 것이야." "아!" 화려하게 꾸며진 내실에 머리를 마주대고 끙끙 앓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기른 50대를 넘어선 사내였다. "사이먼 공작이 그걸 몰랐을 수도 있지요. 황제가 거짓으로...아니, 재상이 죽을 때까지 직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을 어찌 몰라?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 인것을...."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사람들의 귀에 천둥소리보다 큰 중얼거림이 들렸다. "뭐 당장에라도 넘겨줄 듯 연극을 한 것일지도..." "그렇군!" "그래!" "그래, 자네 말이 맞아....그래...그거야!" 구겨졌던 얼굴이 활짝 만개하고, 침침하던 두 눈에 별빛이 반짝였다. 무거운 시름을 던져버렸다는 듯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사내는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을 불러 채비를 차리라 명했다. "지금 늙은이와 사이먼이 같이 있다고 하였겠다? 가서 초를 쳐주지. 큭큭큭. 어서 서둘러라, 궁으로 간다!" "너무 늦은..." "잡초 뿌리는 서둘러 뽑아야 하는 법. 행여나 이대로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만사 도루묵이야. 그들에게 밤이 아니듯, 우리에게도 아직 밤은 오지 않았네." 큰소리를 뻥뻥 치며 하인이 가지고온 망토를 어깨에 두른 사내는 다소 불안한 얼굴로 앉아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파렐을 이리로 불러오게. 내 일이 끝나면 만날 것이니, 파렐에게 그 늙은이도 함께 데리고 오라고 전하게." "늙..은이라면?" "들어간 김에 그 분도 만나고 올 생각이야. 시일을 조금 앞당겨야겠어. 파렐이 들으면 좋아라 손을 거들겠지." ".......!" 5년이나 계획해온 일은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는 지도자를 보고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사람들은 저마다 할 일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폐하, 이 늦은 밤에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밤늦게 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분석하며 열심히 의논을 하고 있던 재상과 공작이 늦은 시각 황제의 부름을 받고 대견실을 방문했다. 옥좌에 앉아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황제는 탁자위에 놓인 산처럼 쌓인 자료를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내 경들의 정성에 탄복한 바...조금 힌트를 주기 위해 불렀소이다." 참으로 태연한 말이었다. 바로 오늘 낮에만 하더라도 당장 범임을 잡아들이지 않으면 칼이라도 휘두를 기색으로 펄쩍 뛰던 황제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마치 '이건 내 일이 아니야, 내가 낸 문제니 늬들이 잘 풀어봐, 힘들어? 그럼 조금 도와줄까?'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황제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던 두 사람은 셀 수도 없이 가득 쌓인 종이를 보고 넋을 잃었다. "흠흠, 나도 다방면으로 알아보았네. 우선 알아낸 것은 그것이 다야.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일단 살펴보고 정리해서 내일 보고를 올리게." 황제는 양피지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약속대로 모습을 드러낸 샌들우드는 소환마법으로 저것을 불러들였다. 우수수 떨어지는 수많은 서류를 보고 기가 질린 황제는 모든 것을 공작과 재상에게 일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서류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었다. 매일 노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악한 재상은 모든 국사를 황제의 선에서 끝내도록 교묘히 조작 을 해왔다. 밥 먹고, 땀 빼는(?)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서류더미에 묻혀 사는 그였기에 과감 하게 스승님이 주신 자료에서 고개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만약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일부나마 알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이처럼 태연해하지 못했을 것 이다.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붙잡고 3일 밤낮을 파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그저 단순히 샌들우드가 수집한 자료에서 몇 가지 건질 것이나 있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에 재상과 공작에게 일을 떠넘겼다. 설마 재상과 공작이 지난 1년 동 안 알아낸 것 외에 무엇이 더 있으랴 하는 생각도 있었다.(솔직히 양에 질린 거다!) 그리고 파랗게 질려가는 두 사람을 보며 황제는 자신의 선택이 현명한 일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암...내가 이 나이에 저 많은 서류에 파묻혀 죽어야겠어?' 가벼운 마음으로 수명의 시종들을 불러 재상의 업무실로 서류를 옮겨주는 친절까지 베풀어준 황제는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배웅해 주며 활짝 웃었다. 따악! "헉!" 문이 닫히자마자 황제의 등 뒤에 나타난 샌들우드는 멋들어지는 동작으로 앙상한 팔을 휘둘러 지고지순한 옥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괘씸한 노옴~~~!!! 이 늙은이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모은 정보를 한 번 보지도 않고 저리 넘긴단 말이냐!" "스...승님..." 분명 조금 전에 돌아갔을 것이라 굳게 믿고 일을 벌였던 황제는 눈물을 글썽이며 샌들우드에게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백전노장 샌들우드의 사전에 '용서'란 없었다. "아직도 그 꾀부리는 것을 고치지 못했단 말이지...오냐,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오늘 네 그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마. 으드득!" 샌들우드가 누구던가? 그동안 쉬지도 못하고, 크리스틴의 부름에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던 울분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마법사 로브를 휙 걷어 올리고 황제의 머리 위에 달랑 거리던 왕관을 고이 다른 곳으로 옮긴 샌들우드는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치는 황제를 향해 세계수 나뭇가지로 만든 지팡이를 겨누었다. "스..." "문답무용!" 빠악! 그 앙상한 팔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있었는지, 두 팔을 들어올려 지팡이를 막으려 했던 황제는 비명한 번 못 지르고 단 한방에 쓰러졌다. 털썩~! 개구리처럼 사지를 쫙 펴고 뻗은 황제에게 슬쩍 치료마법과 슬립을 걸어 침소로 옮긴 샌들우드 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되었느냐?" 황제가 앉아있던 옥좌 뒤에서 조그마한 인영이 톡 튀어나왔다. "수고 하셨어요, 스승님. 정말...제가 스승님을 화나게 만드신 지는 미처 몰랐어요. 죄송해요. 너무 과한 부탁을 한 것 같아...흑" 고개를 살짝 돌리고 눈물을 글썽이는 크리스틴을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샌들우드는 소녀를 번쩍 들어올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니다, 화가 나다니. 절대로 그런 일 없다. 아무렴, 내가 제자를 위해서 뭔 일인 듯 못하겠느냐?" 괘씸함에 눈이 멀어 괜한 소리를 했단 자책을 하던 샌들우드는 눈물을 글썽이며 눈을 반짝이는 소녀의 앙큼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죄송해요, 스승님.' 눈물을 쓰윽 닦으며 베시시 웃음을 머금은 크리스틴이 샌들우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는 스승님 뿐 이에요. 한스 할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을 보았으니...이제 되었어요. 감사 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자신을 친손녀처럼 보살피는 사람에게까지 알렉산드로와의 인연을 숨겨야함에 자책하던 크리스틴 은 그와의 기억을 옛 추억으로 묻어두기로 하였다. 세실은 죽었고, 한스 할아버지도 5년 전 그날 죽었다. '그것으로 된 거야. 그것으로 되었어.' 주름진 손으로 자신에게 밥을 떠먹여주고, 글을 가르쳐주고, 약초를 알려주고, 용돈을 쥐어주던 자상한 사람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일도 아니었고, 그 분을 죽인(!) 살인자의 꼬리도 잡았으니 이대로 계속 가면 되는 거다. 살아있으니, 멀쩡히 살아 훌륭한 아들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았 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이 일부러 알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을 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을 꼭 껴안고 다독여주는 샌들우드의 커다란 손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는 과거로. 지금 그녀의 곁에서 함께 해주는 이는 샌들우드였다. 누가 뭐라 해도 그녀의 단 하나뿐인 스승. 힘들 때나, 즐거울 때 항상 함께 해주기 위해 스스로의 은거를 깨고 나오신 분.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을 찾겠는가. 샌들우드의 마른 목을 꼭 껴안고 볼을 비비적거리던 크리스틴이 영롱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우리 이왕 온 김에 재상님이랑 공작님이 일하시는 거, 구경하면 안 될까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과연 앙숙 같던 두 사람이 어떻게 머리를 맞대고 씨름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다고 청하는 크리스틴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는 흑요석처럼 빛나던 맑은 눈에 반했고, 지금은 하늘을 닮은 넓고 푸른 눈빛에 싫은 소리를 못하게 되었다. 이럴 때면 새삼 자신의 마지막 제자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눈빛하나로 대마법사 샌들우드를 이리 저리 휘두르는 아이라...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물렁함을 원망해보지만, 그는 그것으로도 좋다는 생각에 힘차게 주문을 영창 했다. "워프" 재상의 집무실. 수십 개의 양초를 켜놓고 그것도 모자라 밝은 빛을 내는 수정구를 여러 개 밝혀놓고 황제가 전 해준 서류를 뒤적거리는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한없이 무거운 얼굴로 간간히 침음성을 흘리며 맨 위에 높여있던 한 장의 서류만 뚫어지게 살펴보던 사람들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것을...믿어야 합니까, 재상님?" "......." "폐하는...알고 계셨을까요?" 사이먼의 나직한 말에 알렉산드로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서류더미의 맨 위에 목록이 있었던 것이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황궁의 인물들. 그것만 보고 단 세 사람의 이름과 그동안의 행동거지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태연한 얼굴로 서류를 넘겨주던 황제가 떠올랐다. "알고 있었을 리가 없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당장 칼을 뽑아 달려나가 셨겠지. 그 분은 항상 읽으라고 몇 번을 닦달을 해야 겨우 집중을 하시지. 자네도 알아두게나. 항상 옆에 있어야 하네. 툭하면 도망가려 하시는 분이니 농땡이 치지 않게 꼭 붙어있어야 해." 알렉산드로의 얼굴은 비교적 평안했다. 후사를 부탁하듯 황제를 헐뜯는 재상을 보며 피식 웃던 사이먼은 지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오늘 아침만 해도 재상직에 올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알렉산드로가 너무나 부러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좀 더 계시지 그러십니까?" 사이먼의 말이 의외였던가, 알렉산드로의 눈썹이 찡긋 거렸다. "그럼 자네는 어느 세월에 재상을 하려고 하는가? 설마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알렉산드로의 말에 볼을 긁적이던 사이먼이 자신이 읽고 있던 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사람들하고 싸우고 계셨는지 몰랐습니다. 조금 더 계시면서 정리는 하고 가셔야지요." "뭐라?" "전...자신 없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 누구 덕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무섭습니다.' 어느새 장난스러운 기색은 지우고 굳은 얼굴로 자신이 꼭 쥐고 있던 주먹을 내려다본 사이먼은 탄식을 하는 재상의 시선을 외면했다. 【엘레나 프로라 쳇필드 개넌】 【마리아 개넌】 【스테판 쳇필드 개넌】 최근 들어 잦은 만남을 가지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인물들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는 사이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들이 읽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겁이 나는가? 두려운가? 배신을 하게 되어...아픈가?" "......아직은 아닙니다. 두렵냐구요......하하" 벌게진 눈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던 사이먼이 멍하니 자신의 옆에 놓인 향초를 보았다. "누가 두렵지 않겠습니까, 재상님은...아니 그러신가요? 어느 누가 일국의 황제 폐하를 낳으신 분과 싸우려 들겠습니까. 절 아끼셨던 분이십니다. 제가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뒤를 밀어 주신 분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그리고.." "슬프지..." "하....네. 참으로...참으로...슬픕니다." 엘레나 프로라 쳇필드 개넌. 황제 브래들리의 친모였다. 엘레나는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멜포레스 가문을 잊지 않고 사이 먼의 뒤를 봐주었으며 마리아 개넌을 선택하여 비로 맞아들이게 만들었다. 원래는 황비로 선택 되었으나, 황제의 반발로 후궁이 되었다. 그리고 스테판 쳇필드 개넌. 황제의 제 1후궁 마리아 개넌이 낳은 아들로 황태자 애드리언의 둘째 동생이었다. 나이는 17세. 황후의 소생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애드리언만 아니라면 가장 훌륭한 왕제라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애드리언만 아니라면... 더군다나 서류에는 황태자가 먹은 음식에 쓰이는 독약을 가진 시녀가 후궁인 마리아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이며, 황태후 엘레나가 마리아와 잦은 만남을 가지며 스테판을 자주 불러 담소를 나눈다는 것. 세 사람의 행동들과 결정적으로 하녀와 마리아와의 접촉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느 누가 봐도 이것은 이들 두 사람이 황태자를 독살하고 스테판을 보위에 올리려는 음모로 보였다. 이제껏 알렉산드로가 아무리 시녀의 뒤를 밟아도 꼬리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계속 누군가가 접촉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여인들만의 장소에 들어가서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어떻게 알아 낼 수가 있 었으랴...혹시 본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비가 되어 궁의 시녀들을 다스리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어떻게...황태후 전하께서 2황자 편을 드시는 지...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이먼의 탄식에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돌아가신 세레네님을 그분께서 간택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그분은 처음부터 마리아님을 마음에 두고 계셨지. 하지만..." 사이먼은 처음 황제가 정실도 두지 않고 후궁부터 두었을 때 황궁이 뒤집어졌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브래들리 황제가 황후를 맞아들인 것은 그가 보위에 오르고 자리를 확고히 다진 뒤였다. '후작가의 여식은 절대 황후가 될 수 없다!'고 펄펄 뛰며 난리를 쳤던 황태후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던 사이먼은 볼을 긁적였다. "그래도 어쩌시려고 이런 짓을 꾸미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폐하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나라를 버리고서라도 세레님과 혼인하셨을 분입니다. 그 분의 아드님이신 애드리안 전하를 몰아내시려고 하시다니..." "잊으신게지. 황태자 전하가 안 계신다면...당연히 다음은 스테판 왕자이니, 자연스럽게 일을 벌이려고 하신게지. 폐하의 독심을 잊으신게야." 혀를 끌끌 차며 서류를 내던진 알렉산드로는 바이오니어에서 가장 행복한 어미를 떠올렸다. '어미라도 용서가 되지 않는 일...어쩌시려고 이빨을 드러내셨습니까...' 인심 좋은 황제의 얼굴 뒤에 가려진 잔인한 손속을 알고 있는 재상은 당장에라도 황궁에 피바람 이 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황제는 자신을 낳아준 어미라 하더라도 세레네가 낳 은 아이를 해하려했던 사람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럴 자신이 있었기에 묵묵히 1년이고 2년이고 기다린 황제였다. 누가 그의 분노를 막아줄 수 있단 말인가. 황태후의 고집을 꺾고 기어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황후에 올린 사람이다. 이런 일에 끼어들기엔 스스로가 너무 늙었다 자책을 하던 재상은 어느새 결심을 했는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인양 다부진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먼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결심이 섰는가?" 알렉산드로의 평온한 목소리에 주먹을 불끈 쥔 사이먼은 불과 몇 나르 전에 했던 결심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공작으로서, 바이오니어의 수족으로서 해결할 것입니다. 하늘이라 하더라도 베어드리 겠다 했습니다. 제 목을 받쳐서라도 목을 베어드린다 하였습니다. 해야지요. 반역입니다. 어찌 그냥 두고 볼 것입니까. 제 목을...걸었습니다." "허허허허...."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을 정말 잘 골랐다는 생각에 너털웃음을 짓던 알렉산드로가 사이먼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네. 내 자네만 믿고 물러나도 되겠어. 하지만 걱정 말게나. 이번 일은 내 선에서 처리할 것이야. 자네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물러나있게. 자네는 앞으로 폐하를 위해 할 일이 많 은 사람이야. 재상직에 오른 뒤에는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지. 오를 때부터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어." 알렉산드로는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러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손으로 기른 아들과 같은 황제를 위해 마지막으로 할 일. 그의 손으로 깨끗이 정리를 하고 물러서고 싶었다. 하지만 사이먼은 달랐다. "이미 맹세를 했습니다. 폐하께 한 맹세가 아니더라도 제 스스로 약조를 했습니다. 제 딸을 해하고, 황태자 전하의 옥체를 해한 자들을 반드시 제 손으로 잡는다고 말입니다. 물러서지 않으렵니다. 못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태후가 관련된 일이라 하여 주춤거리던 사이먼은 갈기를 새운 한 마리의 사자가 되었다. 황태후의 은혜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는 황제의 사람이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우를 범한다면 그는 바이오니어의 신하가 될 수 없다 생각했다. "권력이 좋습니다. 네, 전 황제 폐하의 옆에 서고 싶습니다. 그러니...막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속물로 몰아가며 고집을 내세우는 사이먼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음성에 묘한 음률을 맞추며 혀를 차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 이제부터 상상만 하셨던 인물들이 마구 튀어나올겁니다. 싸움이요...없습니다. 그건 나중에 신물나게 해야하니 이번에는 깔끔쌈빡하게 마무리 할 까합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올리는것이 늦었던 이유는 앞부분에 매끄럽지 못하다는 말씀이 있으셔서 몇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했는데 못 찾아냈습니다. 해서...도움을 청할께요. 도와주세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적당히 비축분 만들면 그때 수정 들어갈 생각입니다. 아마도 담주중이 아닐까 하구요. '이거 내가 쓴거 맞나?' 하는 부분부터 새로 씁니다. 물론 골격은 바꾸지 않겠지만, 글쎄요 어떻게 변할지는 저도 모르지요. 아무튼 그러하니,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어색하고 껄끄럽고 이해가안되고, 말도 안되는지 메세지로 날려주세요. 아무래도 다 알고 보는 저보다는 독자님들이 확실히 알고 계실테니까요. 제가 뒤에 넣어야지 하는 부분이 앞에서 필요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_ _) 그리고...호칭은 밤새 뒤적여봤는데, 없더군요. 덴당. 그래서 황태후 전하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폐하, 전하로 불렀다고 하는데 황제를 '폐하'로 칭하고, 황태후를 '황태후 전하' 황태자를 '황태자 전하'로 칭합니다. 후궁인 마리아는 그냥 '마리아 님'으로 갑니다. 이번장은 좀 길것 같아요. 두 장으로 나누려니 더 길어질 것 같아서, 소소한 사건들은 이번 편처럼 담소나 짧은 설명으로 이어갈 생각입니다. 빠진 부분이나 헛점이 있을테지요. 분명. 제가 쓰면서도 좀 빼먹은 부분이 있고, 어설픈 곳이 있을겁니다. 그러니...아시지요. 보이는데로 마구 찔러주세요. 유혈사태가 나더라도 꾹 참고 수정들어갑니다. 므흐흐흐 이럴땐 독자님들께 너무 기대는것 같아 죄송하지만, 어쩌겠어요. 처음 쓰는 판타지이니, 프로이신 여러분들께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죄송하고...미리 감사드립니다.(잘 받겠습니다.) 단! 근거없는 태클과 비난은...삼가해주시기를. 30만 돌파하면 코코님 말씀대로 10연참 한번 해보지요. 저...또 울리지는 말아주세요. ㅜㅜ 사설이 길군요. 그럼....다음편 수정하는데로 올리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4. "쯧쯧쯧..." "누구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앉아라, 이 넘아. 할애비 오셨다." "누...아니, 어르신!" "앉으라는데 다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샌들우드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읽으며 고생할 두 사람을 보러 왔더니 서류를 달랑 한 장 읽고서 펄펄 뛰는 폼이 너무나 한심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품에는 여전히 크리스틴이 안겨 있었 는데 여전히 보이지는 않게 몸을 감추고 있었다. 한 쪽 팔을 구부리고 뭔가를 안고 있는 듯한 폼으로 나타난 마법사를 보며 경악하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재상님...아시는 분입니까?" "자네는?" "아, 아카데미에서 뵈었습니다." "흠..." 사이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알렉산드로는 자신을 '이 넘'이라고 부른 '할애비'에게 고 개를 숙였다. 그저 아카데미에서 영상을 보여주고 모이라에게 해독마법을 거는 것을 보고 '괜찮은 마법사인가 보군'하던 사이먼은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하는 알렉산드로와 샌드우드를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께 돌아오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됐다. 허례허식은 관두고 앉자. 근데...차나 한 잔 내오지?" "아...알겠습니다." 샌들우드의 은근한 목소리에 사이먼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직접 차를 준비해올 생각인 듯 하였다. 잠시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샌들우드가 알렉산드로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많이 늙었구만. 내가 떠날 때 같이 나갔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었군?" "아...네. 잠시...여행을 좀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놈이 불렀지?" "아...뭐..." 주름진 얼굴을 붉히며 새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를 긁적이던 알렉산드로는 황제를 이놈 저놈 하는 샌들우드에게 실소를 보였다. "어르신은 더 젊어지신 것 같군요. 세월이 거꾸로 가나 봅니다." "아...좀 그럴 일이 있었지. 그래, 이번 일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가?" 핵심을 찌르는 샌들우드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던 알렉산드로가 주먹을 꼭 쥐었다. "혹시...저 서류들, 어르신이 보내신 겁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그랬겠나." "허..." "어떻게 할 것이냐 묻지 않는가?" "일단은...증거를 확보해서, 목을..." "치겠다? 브래디(브래들리 애칭) 어미를? 애디(애드리안 애칭)의 할미를? 또 그 형제를?" 자네 노망났나? 라고 물어보는 듯한 어조로 시큰둥하게 말하는 샌들우드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알렉산드로는 어딘가에서 들리는 작은 키득거림에 얼른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폈다. 환청을 들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 그는 똑똑히 들었다. "스승님, 그렇게 놀리시면 어떻게 해요." 낯익은 소녀의 목소리를.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샌들우드를 똑바로 보고 있던 알렉산드로는 마법사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스르르 나타나는 소녀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험, 내 제자야. 인사하게,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하지." "안녕하세요, 재상님.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리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짓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렉 산드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샌들우드의 품에 편안한 자세로 안겨 있는 소녀를 보고 있 자니 웬일인지 화가 났다. 아니, 소녀를 꼭 안고 있는 샌들우드에게 질투가 생겼다. 부러웠다. 스스로의 감정에 깜짝 놀라 고개를 흔들던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던 소녀의 영상을 억지로 지웠다. 지금은 영문모를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왜 궁에 소녀를 데리고 나타난 것인지 이유를 물으려던 재상은 어두운 얼굴로 찻잔을 들고 나 타난 사이먼을 보고 입을 닫았다. 샌들우드의 품에 안긴 크리스틴은 보이지도 않는지 탁자위 에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은 사이먼이 재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개빈 공작이 와 있습니다.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를 좀 하잡니다." "개빈 공작이...왜?" 알렉산드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문을 했고, 그의 의문은 크리스틴이 풀어주었다. 다분히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 1후궁 마리아 개넌의 처녀적 성이 개빈이었다. 개빈 공작의 사촌 누이.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한심해보이지 않겠는가. "당연히 공작님을 뵈려고 왔겠지요. 재상님과 공작님은 손을 잡으면 안 되니까요. 서류를 아직 덜 읽으신 모양이지요?" "아니...너?" 그제야 크리스틴을 보고 경악하던 사이먼은 소녀의 말에 더욱 놀란 듯 보였다. "아니 그걸 어찌 아느냐?" "스승님이 보내주신 서류에 다 나와 있는...읍읍..." 궁시렁거리듯 종알거리는 크리스틴의 입을 틀어막은 샌들우드가 실쭉 웃었다. "불러서 이야기 해 보면 알게 돼. 이리로 불러. 재상이랑 우리는 몸을 숨기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부르게." 저 서류는 어떻게 하냐고 물으려던 사이먼은 눈앞에 앉아있던 세 사람과 서류 더미들, 그리고 그가 들고 왔던 찻잔도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사라지자 멍한 시선으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 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얼이 빠진 사이먼만 빼고. "어서 부르게." 허공에서 들리는 재상의 음성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이먼이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보다는 조금 날씬하나 막상막하의 듬직한 몸에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40대 후반의 남자와 집무실로 들어왔다. "앉으시오. 자리가 어수선하지요, 일이 좀 바빠서..." 사이먼의 머뭇거리는 기색에 허허 웃던 개빈 공작은 먼저 의자에 앉아 책상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래, 황태자 전하의 일에는 진척이 좀 있습니까?" "......" "듣기로는 재상님과 함께 계신다고...?" 은근슬쩍 떠보는 개빈 공작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던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이야 피곤하시다며 조금 전에 침소로 가셨소만..." "그 분이라...흠...언제부터 공이 재상에게 존칭을 썼소?" 개빈 공작의 말에 더욱 이맛살을 찌푸리던 사이먼이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존칭을 쓰지 않은 적도 있었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하하. 내가 공을 모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재상직을 노리시던 분 치고는 참으로 공경 하는 태도를 보이신다 싶어서..." 말을 슬쩍 흐리며 사이먼의 안색을 살펴보던 개빈은 좀더 큰 먹이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듣기로는 폐하가 공에게 재상직을 약조하셨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오이까?" 그의 말에 흠칫 하던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반응만 살피고 있던 개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당연히 아니겠지요. 재상이 누군데 황제가 놓아주려 하겠습니까. 솔직히 공이야 말로 재상직에 딱 맞는 사람인데 폐하가 몰라주시는 것이지요. 아마 재상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는 암브로시아의 것일테지요, 그렇지 않소?" 은근히 약점을 찌르며 약을 올리는 개빈을 보며 한숨을 삼킨 사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만 하더라도 그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개빈 공작에게서는 뭔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아주...지독한 냄새가. "그래 그 말씀을 하시러 예까지 오신 겁니까?" "뭐 공이 늦은 시각까지 폐하의 명을 이행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하셔서 얼굴이나 한 번 볼까 하구요. 황태후 전하께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시더이다. 후에 재상으로 공이 적격이란 말씀도 하셨지요. 하하하" 자신의 연극에 취해 호탕하게 웃어대던 개빈은 사이먼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진 것을 알아 채지 못했다. 다만 아무 말을 않고 있는 그를 보고 내심 재상과 손을 잡은 것을 후회하여 그러 는 것이라 오해를 했다. "재상이 물러나기만 기다리시면 아니됩니다. 황태후 전하께서 공을 면밀히 살펴보시고 계시니 언제 처소에 한 번 들리십시오. 좋은 일이 있을 테지요. 연극은 아니 하셔도 됩니다. 괜히 재상과 손을 잡았다가는 눈 밖에 날 수도 있는 일. 적당히 하시면서 기회를 보세요. 재상이 물러나고 공이 정권을 잡은 후에 일을 해결해도 되지 않습니까? 왜 죽 쒀서 개를 주려 하십 니까, 다 공의 업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을...쯧쯧" 끝까지 '황제가 너 물먹이는 거니까 알아서 해'라는 늬앙스를 팍팍 뿌려준 개빈은 살기를 일 으키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이먼을 남겨두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사실을 안 사이먼이 알렉산드로와 황제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으음...." 조용해진 집무실 한곳에서 낮은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모습을 드러낸 알렉산드로는 눈을 부릅뜨고 분노로 떨고 있는 사이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자네와 내가 손을 잡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군..." 그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사이먼이 벌게진 눈으로 알렉산드로의 평온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못 들으셨습니까! 황태후랍니다! 저 놈도 한팹니다! 모르시겠습니까아!" 어떻게 그 정도도 모르냐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던 사이먼은 샌들우드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앉아라, 이놈아. 여기 귀 먹은 사람 없다. 어디서 빠락빠락 대드는 것이야!" 샌들우드의 빈정거림에 사이먼은 꼭지가 돌았다. "감히 네 놈이 누구기에 이리 막말을 하고, 나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이 빌어먹..." 퍼억! 살기를 줄줄 흘리며 샌들우드에게 대들던 사이먼은 이번엔 알렉산드로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몸을 휘청이며 자신들을 노려보는 사이먼을 보며 스스로가 한 짓에 의아해하던 알렉산드로가 헛기침을 했다. "진정하게. 이분이 누군지 정녕 기억을 못하는가? 샌들우드 라 폰차르크님이시네!" "........!" 알렉산드로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뜬 사이먼이 입을 뻐끔거리며 샌들우드를 가리켰다. 그의 벌벌 떨리는 손가락을 노려보던 샌들우드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나다. 모르겠냐?" "어...어르신!" 20년 전에 보았을 때 보다 더욱 젊어진 마법사의 얼굴을 그제야 알아본 사이먼이 고개를 숙였다. 7써클에 오른 희대의 대마법사 샌들우드 라 폰차르크. 얼굴을 잘 내보이지 않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나, 그의 죽음은 바이오니어 전체를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었다. 나라의 방패가 스러진 것에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슬퍼하 였던가. 그런데 멀쩡한 모습으로, 아니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해진 얼굴로 나타난 것을 보니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두 눈을 껌뻑이며 샌들우드를 멍하니 보고 있던 사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그럼...아카데미에서..." "그래, 나다." 잘난 듯 뻐기던 샌들우드는 그들 세 사람을 보며 생글거리고 있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 어주었다. "스승님, 정말 성이 있으셨네요." "아무렴,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냐. 핫핫핫" 아주 오래전, 배너 백작가의 감옥에서'성을 갈겠다'던 노성에 '갈 성이라도 있으세요'하고 놀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주고받던 사제(師弟)는 묘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알렉산 드로와 사이먼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그 아이가 어르신 제자였습니까?" "몰랐나? 아니라면 내가 그 귀찮은 짓을 왜 해?" 사이먼의 질문에 냉큼 대답한 샌들우드는 여전히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귀찮은 일이라니요?" 알렉산드로의 얼굴에 흥 콧방귀를 뀐 샌들우드는 아카데미에서 모이라와 디아나의 영상을 담으려고 몇 미르나 방에 숨어있었던 것이며, 모이라의 독을 없애기 위해 황궁까지 왔었다는 것을 죽 털어 놓았다. "그...그러면, 어르신께서...세...세실리아가 만든 해약을 쓰셨던 분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알 아보시고...." 알렉산드로의 질문에 샌들우드와 크리스틴이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건 어떻게 알았나?" 로드리고에게 들었다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한 재상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거야 공작 영애에게 쓰인 독에는 해약이 통하지 않으니...황태자 전하를 위한 해약을 쓰셨 을 테니까요."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렉산드로의 중얼거림에 사이먼의 귀가 번쩍 뜨였다. "오늘 오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제 딸이 죽은 소리를 못 들었다고, 그리고 그 독약이 어떤 독약이냐고...그러셨지요? 알고 계셨던겁니까? 황태자 전하께 쓰인 독이 무엇인지 아 시고 계신겁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알렉산드로에게 추궁을 하는 사이먼의 눈이 의심으로 물들어갔다. 해약이 없다는 독.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독을 만들거나 그것을 썼거나 해약을 만든 사람이다. 그런데 재상은 해약을 만든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그것에 대해 알 수는 없었다. 물론 황제 역시 세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재상이 알고 있는 것인가? 크리스틴을 제외하고 샌들우드, 사이먼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알렉산드로에게 꽂혔다. "자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행여나 브래디에게 들었다는 소리는 애초에 그만둬. 난 자네가 아직도 재상을 하고 있는 걸 몰랐고,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브래디 가 너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을 리가 없어. 사실대로 말해봐. 어떻게 알았지?" "........" 샌들우드의 날카로운 추궁에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알렉산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산드로가 한스 할아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크리스틴은 그가 진퇴양난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 독약을 만들었다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레이븐에 아들이 얼굴을 숨기고 일을 했다고 말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입을 꾹 다물고 바닥을 노려보는 알렉산드로에게서 시선을 땐 크리스틴은 샌들우드의 수염을 잡 아당겼다. 일명 '나 좀 봐주세요'란 행동. "뭐냐?" "재상님의 아드님이 아시고 계셨어요. 해약을 가져다 준 세실이란 아이와 친했거든요." "응?" "론...아시죠?" 크리스틴의 속삭임에 눈을 크게 뜨고 알렉산드로와 크리스틴을 번갈아 보고 있던 샌들우드가 황급히 주위에 막을 만들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만들었다. "론이라고?" "네, 론 아저씨 아버지가 재상님이세요. 그러니 알고 계셨지요. 저도 알고 계시구요." "이런...이것을..." "그러니 그냥 넘어가시고, 나중에 황제폐하께 설명이나 해주세요. 어찌되었든 재상님은 범인을 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셨고, 지금도 일부러 입을 다물고 계신거니까요." '아들을 위해서...' 란 말을 삼킨 크리스틴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주시하는 알렉산드로와 사이먼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크리스틴의 설명에 납득을 한 샌들우드는 방어막을 거두고 알렉 산드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넘어가고, 나중에 브래디에게는 내가 이야기를 해주겠네. 자네가 하기에는 곤란할 테니. 퉁얼거리면 그러려니하고 넘겨. 그리고, 자네." "네?" "저 놈은 범인이 아니야. 내가 보장하지. 그리고 자네 딸에게 독을 쓴 것은 디아나거든." "......!" 은근슬쩍 화제를 돌려버린 샌들우드는 핏발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사이먼을 보며 실쭉 웃었다. "왜 입 다물고 있었냐고? 증거를 모으려고. 저기 저거 보이지? 저게 다 증거야. 이제부터 자네 들이 할 일은 저걸 다 읽는 거야. 우리는 앉아서 구경이나 할테니 열심히 노력해서 범인을 알 아내. 힌트를 줬으니 이제 답은 자네들이 알아내야지?" 샌들우드의 말에 도리어 알렉산드로와 사이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답이라니요? 이번 일은 황태후 전하께서..." "이것 보게, 내가 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가? 겨우 한 장 달랑 읽어놓고 문제를 해결했네~하는 자네들 때문이야. 한심하긴, 엘렌(황태후의 애칭)은 궁에 틀어박혀 밖으로 안 나온지 벌써 수 년은 되었어. 가만히 앉아있으면 독이 나오나? 꼬리를 친 놈을 잡아야지. 왜 이제껏 가만히 있던 엘렌이 나섰는지, 아무리 세레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애드리안은 그 아이 친손자야. 설마 그것만 보고 엘렌의 목을 벨 생각은 아니지? 그렇지?" 설마 그렇게 덜떨어졌으려구 하는 의미로 두 사람을 쳐다보던 샌들우드는 얼빠진 얼굴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이봐, 엘렌은 할미야. 어느 할미가 손자끼리 칼을 휘두르는 걸 좋아하겠나? 속인거야. 알았어? 독에 당한 것도 모르겠지. 그저 마리아의 술수에 속은 거야. 문제는 마리아와 개빈이 손을 잡은 놈이야. 그놈들이 독을 쓴 놈들이지. 그리고 모이라...일도 해결해야지?" 은근히 미끼를 흔들어대던 샌들우드는 미끼를 덥썩 물고 발버둥치는 사이먼을 보며 흐뭇한 미소 를 지었다. 대답도 없이 등을 획 돌리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쌓여있는 서류를 차례대로 읽 어나가는 사이먼을 보고 있던 알렉산드로도 그의 옆에 앉았다. 그것을 보고 만면의 미소를 지은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을 품에 안은채 차를 홀짝이며 그의 말대 로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타인의 고통은 자신의 기쁨이라 생각하는 샌들우드에게 다른 사람이 열심히 일할 때 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축전이 도착했습니다. 50회에 산딸기님 그림과 함께 올려놓았고, 혹시 못보실까봐 이번편에 올립니다. 아루세님...감사합니다.(_ _) Little Princess, Christine by 아루세님 역시 태그는 어렵습니다. 손가락도 아프고, 그림을 올리기 위해 전 문장 앞에 'br'을 붙이는 것이 몇 달 만인지...콜록... 귀엽지요? 뾰룡통한것이...콕 찌르면 톡! 터질것 같지 않습니다. 핫핫 오늘 저녁에 글을 못올릴 것 같아 이렇게 올립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컴을 너무 오래 끌어안고 있어서 그런거라고...동생이 면박을 주더이다. 몇 시간이라도 끄고..책이나 좀 볼까 하구요. 자, 그러면 태클 환영, 리플 대환영, 선작 눈물로 환영(꺼이꺼이 감사해요), 비평 환호성을 올리며 환영(꺄우~아파라..ㅠㅠ) 여러분~ 행복하자구요~~~!! 꺄아아아아(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ㅜ 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5. "음...따분하군." 몇 나르가 지났는지도 몰랐다. 저 멀리 햇살이 비치는 것을 보니 해가 뜰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때까지 수십 잔의 차를 마시며 석상처럼 앉아 기계처럼 서류만 읽어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샌드우드는 자신의 품안에서 코로롱 코로롱 잠들어있는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속 편한 놈. 먼저 잘 거면 뭐 하러 여기 있겠다고 했누..." 버리고자 했으되 잊지 못한 알렉산드로의 모습을 잠시나마 더 오래 보려고 고집을 피웠다는 것을 모르는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이 좀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다리를 움직여 아이의 몸을 추슬러주었 다. 아침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났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에 이른 샌들우드는 기지개를 펴며 일어난 소녀의 얼굴을 씻겨주고 식사를 주문했다. "배고프지?" 크리스틴에게 한 마디 던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샌들우드의 목소리에 번뜩 고개를 든 알렉산드로는 그때까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노소를 보고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수많은 시종들이 풀코스가 차려진 상을 들고 나타났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서류더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집무실 한 구석에 식탁을 차린 시종들은 식사가 끝나시면 부르라는 말만 남기 고 사라졌다. 호화롭게 차려진 식사는 본 척도 않고 서류를 파고 있던 사람들은 샌들우드와 크리스틴이 만복감 에 포크를 놓았을 때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야릇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알렉산드로와 사이먼은 후식으로 푸딩을 떠먹고 있는 크리스틴의 양 옆에 앉았다. "그래 답은 나왔나?" "아..." 초췌해진 얼굴로 고기를 썰던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그릇을 가지고가 대신 고기를 잘라주는 크리스 틴을 보며 고맙다는 미소를 던진 후 천천히 와인잔을 들었다. "아가트 상회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요. 저희 바이오니어에 있어 상권을 잡고 있는 일등 상회 입니다." "그래서?" "버릴 수는..." "그래서?" "......."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는 아가트를 살려야했다. 해마다 그들이 내는 세금은 국고의 절반을 차지했다. 또한 그들이 발을 뻗은 타국에서 들어오는 이익 역시 결코 쉬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 분명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주려 해도, 보고를 기다리는 황제는 다를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내일 당장 모든 상인들이 문을 닫아거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아가트를 깡그리 없애버릴 것이다. "아로니에 남작도 마찬가지이지요. 설마 그런 야심만만한 여인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사이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싱글거리던 샌들우드가 턱을 괴었다. 고기를 먹기 좋게 자른 크리스틴은 알렉산드로의 앞에 그릇을 놓아주고 부드러운 빵을 앞으로 당겼다. 그런 제자의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끼던 샌들우드는 '노인공경'이란 말을 떠올리 며 그냥 흘려버렸다. "마누라 단속도 남편의 몫이야. 설마 마가린하고 마리아하고 동기 동창일 줄 누가 알았나?" "허...마가렛입니다. 어르신." 황제의 제 1후궁 마리아 개넌과 마가렛 아로니에는 몬트리얼 출신이었다. 어떻게 평민과 귀족이 어울리게 되었는지는 미지수이나, 두 사람 간의 교류는 그들이 졸업하고 각기 후궁과 남작부인이 된 후에도 계속되었고 모든 증거는 마가렛 아로니에의 처소에 고이 간 직되어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들과 마가렛이 마리아에게 보낸 물품목록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붉은 줄이 그어져있던'안식의 물'은 분명 황태자에게 사용된 독을 명명하는 것이라 짐작되었 다. 그리고 황궁의 출입을 언제든지 허락한다는 내용이 담긴 황태후의 윤허를 얻은 신용장 역시 마가렛의 처소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황제 폐하의...결정에 따라..." "9족이, 아니 씨도 안남기고 모조리 말릴거다. 아로니에건 마리아 친정인 개넌이건, 모두 다 죽어. 엘렌도 무사하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으냐?" 샌들우드의 반문에 말이 막힌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에 가만히 앉아있던 크리스틴이 입을 열었다. "독을 만든 사람을 잡으세요. 그는 아가트 상회의 인물이거나 남작가의 사람일겁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크리스틴에게 몰렸다. "근거는?" "그 사람...남작가의 인장이 찍힌 칼을 썼습니다. 잡아주세요. 독을 만든 사람을 잡아주세요." 시리도록 푸른 눈에 한광이 돌았다. 어떤 수를 써서든 독을 만든 이를 잡아 달라 요청하는 소녀를 보고 영문을 몰라 하던 알렉산드 로가 나섰다. 그도 그동안 독을 만든 사람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왔다. 하지만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알기로 독약 역시 시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 다였다. 지금 현재 남작가에 독약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크리스틴과 민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리스틴은 독약에 대한 정보는 싹 빼버리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작가의 칼이라니?" 알렉산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를 찌른 칼이요.' 그 당시의 경황을 알 수가 없으니, 섣불리 드러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칼에 꽂혀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신분을 감추고 궁으로 돌아오기 위해 만든 자작극이라면? 조그마한 의문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을 꾹 눌러버린 크리스틴은 알렉산드로의 눈을 직시했다. "독을 만든 사람을 잡고, 남작 부인과 아가트를 엮어서 개빈 공작과 나머지 두 사람의 후작을 잡으세요. 황태후 전하는...저희 스승님이 만나실거예요." "엥?" 샌들우드가 어림도 없다고 펄쩍 뛰자 크리스틴이 방실 방실 웃었다. "그러면 전하의 목이 떨어지길 바라세요?" "무엄하다!" 사이먼의 호통소리에 샌들우드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내 제자다. 누가 무엄하게 내 제자를 꾸짖는 것이냐!" 엄하디 엄한 질책의 말에 얼른 입을 닫은 사이먼은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알렉산드로를 보고 볼을 부풀렸다. 망발의 죄를 물어야하는 사람이 웃고 있다니. "제 2 황자님은....황태자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몫은 황태자 전하께 넘기시면 황궁에 피바람이 불 일은 없을테지요." "허...이것 참..." "그렇게 해. 브래디를 살살 구슬리란 말이지. 바이오니어에서 형제끼리 칼부림을 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 역사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래야 하고." 샌들우드의 자부심어린 말에 재상과 사이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수 천 년에 이어진 황가에 있어 바이오니어 만큼 깔끔한 곳도 없다고 기록은 전한다. 역사가들은 바이오니어에서는 거의 대부분 황제가 선택한 가장 현명한 황태자가 보위에 올랐다고 입을 모은다. 가끔 힘을 겨루어 옥좌에 오르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겨루기에 불과했다. 황태자보다 자신이 뛰어나다 생각이 들면 세력을 모아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기면 황태자를 대신해 보위에 오르는 것이오, 그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완벽한 강자존의 법칙이 지켜지는 곳, 단 골육상쟁의 기록은 전혀 없었다. 단 한번도. 물론 보이지 않는 암투는 있었겠으나,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패륜은 없었다. 힘겨루기에서 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보위를 양보했고, 승자는 그가 막내이건 삼촌이건 형이건 상관없이 패자의 지지를 받으며 당당하게 보위에 올랐다. 대신 죽어나가는 이들은 황족을 제외한 그들을 따랐던 모든 사람들. 어찌 보면 더욱 잔인하다 할 수 있지만 황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효수했다. 그래서 바이오니어에 서는 함부로 반역을 하거나 황권을 뒤집어엎으려는 인물들이 극도로 적었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크리스틴의 제안은 핵심을 찌른 거라 할 수 있었다. 황태자의 중독사건은 어디까지나 반역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와 아가트 상회를 등에 업은 마가렛이 일으킨 일. 실제적으로 스테판 왕자 가 개입을 했는지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니 그에 대한 결정은 황태자에게 맡기고, 황태후 는 얌전히 있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일단 황족들 간의 문제는 정리가 되는 것이고, 마리아의 일은 황제의 몫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죽음뿐이겠지만 개빈 공작이 내쳐진다면 후궁이라 해도 자리 보존은 어려 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래 저래 이번 일에 연루된 이들에 대한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했다. "죽겠군." 황태자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는 애드리언 챗필드 개넌이 아 니었다. 피가 어디 가겠는가, 지금쯤 그들의 보고만 기다리며 이를 갈고 있을 황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던 이들이 샌들우드를 보았다. "아가트는...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국고를 윤택하게 해주는 일등공신을 떨쳐내기는 힘들다. 아무리 상인들이 천하다 손가락질 받는다 하더라도 상권과 권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자금도 없이 나라를 운영할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권력자들보다 상인들의 힘이 더 크다고도 볼 수 있으나, 그들의 신분은 비천했고 그들의 공을 인정해주는 이가 극히 적었을 뿐이다. 그러니 바이오니어의 국고에 큰 보탬이 되는 아가트를 잘라내는 것은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수족을 잘라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받치던 공물을 어디에서 충당한 단 말인가. 앞날을 걱정하며 결정을 보류하려던 알렉산드로는 샌들우드를 보았다. 3대에 걸쳐 황제를 모셔온 궁중 마법사에게 해안을 구하던 이들은 또 다시 작은 숙녀에게 고개 를 돌려야했다. "레이븐을 키우시면 되잖아요." "........" "레이븐은 아가트 다음으로 바이오니어에서 큰 상회예요. 또한 적어도 황궁과 연결이 있는 사 람은 없어요. 지금은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곧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가요. 남작가나 개빈가, 후작이나 아가트와 관련이 있는 이들 모두." 카일과 미리 서신을 주고받은 크리스틴은 확고한 어조로 말을 던졌다. 이미 그들 명단이 카일의 손에 들어갔고 지금쯤이면 벌써 정리가 다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지적한 '황궁과 연결된 사람'이 로드리고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챈 알렉산드로는 찔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트를 버린다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라도 다른 상회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알기로 레이븐은 비교적 중립을 지키는 상회라 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사이에서 묘한 균형을 이루며 서서히 자라고 있는 중견 상회. "레이븐이라..." 어느 한 곳만 편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찻잎과 향초를 독점하는 상회에 끌리기는 사이먼 역시 마찬가지 였다. 혹한 얼굴로 잠시 레이븐의 이름을 떠올려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럼, 보고를..." 알렉산드로의 말에 사이먼이 서류들을 주섬주섬 모았다. 다 들고 가면 분명히 쫓겨날테니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 들어있는 부분만 간추렸다. 서류를 작성한 이들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너무나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더 이상 손댈 곳이 없었다. 그렇게 간추려도 한 아름이 되는 서류를 들고 사이먼과 알렉산드로가 집무실을 나가자 샌들우드가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가면 되느냐?" 아쉬운 얼굴로 푸딩을 떠먹던 크리스틴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푸딩이 참 맛있어요." "응?" "이런 거 잘 팔리겠지요?" "그...그렇지." "그럼...여기에다 몸에도 좋고 향도 좋고 색도 나는 약초를 섞어서 팔면...팔릴까요?" "........." 크리스틴의 맑은 두 눈동자위에 굴러다니는 금화를 보고 식은땀을 흘리던 샌들우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글쎄다..." "거기다 살도 안찌는 거라면?" "흠...." 그제야 심각하게 골몰하던 샌들우드가 손바닥을 쳤다. 문득 배가 잔뜩 나온 사이먼이 열심히 푸딩을 떠먹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거...돈이 될지도..." "그렇지요? 흠...좋아요. 아이들도 좋아하고, 여자들도 좋아하고, 사이먼 공작님처럼...남자들 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살도 안찌고, 몸에 좋은 푸딩을 만들면...음..." 어느새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는 차를 홀짝 홀짝 마셨다. 이제는 한시름 놓고 발 뻗고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꽈당! "폐하를 잡아주십시오~~~~~~!!!" 사이먼의 비명을 듣기 전까지는. "황태후마마 처소로 가셨습니다, 아니 후궁 처소...아니 모르겠습니다. 칼을..."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리스틴의 손을 잡은 샌들우드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을 보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사이먼은 자신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는 알렉산드로를 보았다. "정말...저분이 말리실 수 있는 겁니까?" 황제는 그들의 보고가 시작되고 몇 미르도 되지 않아 칼을 뽑아들고 뛰어나갔다. 말리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다. 지금 알현실 문이 두 쪽으로 쪼개져 덜렁거리는 것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황태후와 후궁, 2황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살기를 펄펄 풍기며 검을 뽑아든 황제는 검기를 쭉 뽑아내고는 가로로 휘저었다. 옥좌에 앉아 10피텐(300m 정도)이나 떨어진 문을 날려버린 황제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긴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여야 하는데 사이먼과 알렉산드로는 덜덜 떨며 주저앉고 말았다. "소...소....소..." 그랬다. 황제 브래들리가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네 명, 황태자와 세실, 보좌관과 샌들우드뿐이었으니. 황제의 경지를 꿈에서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알렉산드로와 사이먼은 황금빛 마나로 휘감겨 쭉 늘어난 검을 보고 넋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친 듯이 샌들우드에게 달려온 것이다. "그분이 아니면 누가 말리겠나. 재워서라도 말리실테니 걱정 말게." "늦었으면요?" 눈 깜짝할 사이에 10피텐 거리에 있던 문을 쪼갠 검기가 떠올랐다. 아차 하는 순간에 황태후건 후궁이건 그의 아들이건 걸리는 데로 목이 날아갈 것은 분명한 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 마주보던 두 사람은 후궁들의 처소가 있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제 글을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을 욕되게 하는 것 같아 앞에서 투덜거렸던 것은 몽땅 삭제했습니다. 죄송해요, 그리고 잘못했습니다. (_ _) 광천광야님 일은 독자로서 더욱 화가 났고 이곳은 저의 공간이기에 마구 화를 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독자님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것 같아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에또...음..그렇군요. 지금 이번 장 마무리 하고 있는데...지금까지 쓴 것의 2배 정도 되더군요. 소제목을 바꿀까 하다가 이번에는 그냥 9편 정도로 마무리할께요. 그리고!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키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러분들 두고 쓰러지겠습니까! (몸이 아픈거면 또 몰라...ㅜ ㅜ) 그냥 나이값도 못하는 철 덜든 녀석 어리광피웠다고 생각하고 봐주세요. 그리고 혹시 누가 농부나 세라, 돈(머니 매니아) 이 올라오는 곳 아시면 좀 알려주시구요. 에...완결낼께요. 반.드.시.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완결낼테니 걱정하시 마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따랑해염~~~~~ > < (꺄아아아아ㅏ~)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6. "빙고~!" 샌들우드는 단 한번에 황제의 목덜미를 잡아챌 수 있었다. 후궁인 마리아 개넌이 거하는 처소 앞에 뛰어들었던 황제는 검을 들어올린 순간 집무실로 워프 당했다. 휘익! 쩌저정~! 눈부신 빛에 둘러싸여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검을 휘두른 황제는 뻥 뚫린 벽 너머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보고 이를 갈았다. "이...이것이..." 분명 후궁의 처소의 문을 갈랐는데, 수도 갈렌의 정경이 펼쳐지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던 황제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샌들우드와 그의 옆에서 입을 틀어막고 부들 부들 떨고 있는 소녀를 보고 검을 집어넣었다. "후욱...스승님이 여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고 절 왜 이리로 데리고 오신 겁니까, 또 저 아이는 누굽니까?"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그 밑에 깔린 서늘한 기운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샌들우드는 황제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크리 스틴의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내 제자다. 무고한 사람이 죽을까 데려왔다. 어제부터 계속 있었다." 황제의 질문에 역순으로 대답한 샌들우드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황제를 보 며 측은한 시선을 던졌다. '불쌍한 놈...' 항상 웃고 있으나 그 뒤에 감추어진 황제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성군으로 칭송을 받는 황제 브래들리의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샌들우드였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던 여인이 죽은 날, 그의 품에서 울부짖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드리안을 낳다가 산고로 죽은 여인은 브래들리 챗필드 개넌에게 있어 유일한 사랑이었고, 그의 목숨이었다. 만약 그녀가 분신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가 과연 성군으로 남아 있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황제는 세레네를 사랑했다. 마음을 주고, 심장을 주고, 목숨을 주었던 여인이 죽고 난 후 그 는 더욱 여자를 밝히며 미친 듯이 후궁을 들였다. 하지만 그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도 두 번 다시 정을 주지 않았다.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들이 낳은 소생 역시 단 한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후궁들이 아들을 낳건, 딸을 낳건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 브래들리는 애드리안 단 한 사람만을 아들로 인정했다. 다른 자식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참으로 독한 인간. 참으로 불쌍한 인간. 참으로 잔인하면서도 너무나 순수한 인간. 샌들우드가 보는 브래들리란 남자는 그랬다. "앉아라." "스승님..." "앉으라고 했다. 이야기나 좀 하자." 알렉산드로가 황제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다면 샌들우드는 그의 우상이었다. 그런 사람의 말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힘겨운 얼굴로 옥좌가 아닌 접견실의 의자위에 털썩 주저앉은 황제는 그래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칼집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제자라고 하셨습니까? 이 아이는 세실이 아닌데요, 스승님."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를 쓰던 황제가 문득 크리스틴을 보았다. 숨겨놓은 딸이라도 되냐는 말투에 인상을 찌푸리던 샌들우드는 소녀를 번쩍 안아들어 황제의 앞에 앉았다. "신경쓰지 마라.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백작가의 여식이다." 세실리아가 살았던 백작가의 여식이란 소리를 듣고 슬며시 얼굴을 찌푸리는 황제에게 혀를 차준 샌들우드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한 오해 말아라. 나에게 세실은 크리스틴이고 크리스틴이 세실이다. 외모가 무엇이 그리 중하누..." 샌들우드의 말에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크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천지에 누가 영혼이 뒤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황제는 세실을 잃은 슬픔에 그 아이를 대신하여 가까이 있던 소녀를 제자로 삼은 샌들우 드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지금 황제와 샌들우드 모두 서로를 불쌍하다 동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한눈에 간파한 크리스틴은 키득거리며 샌들우드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고, 샌들우드는 소녀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보고나 들어라." "네?" "두 놈이 돌아오면 보고를 마저 들어. 선불 맞은 멧돼지 마냥 날뛰지 말고 지그시 참고 끝까 지 들어라."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산발이 된 머리로 비지땀을 흘리며 나타난 사이먼과 알렉산드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제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신들이 미력하여..." "보고 하라." 길게 말을 늘어놓으려는 사이먼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버린 황제는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에 두 사람은 장장 1 나르에 걸쳐 샌들우드가 가져온 내용을 설명했다. "그래서...어쩌겠다는 것이오." "송구하옵니다만, 마리아님과 개빈 공작의 발을 묶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로니에 남 작과 남작부인을 추궁하는 것이 빠른 길이라 생각이 되옵니다. 독약을 만든 범인도 잡아야 하고, 남작가를 확실히 잡을 수 있는 증거 역시 찾아야..." 꽈과광! 덜렁거리던 문짝이 가루가 되어 흩어져버렸다. 열심히 머리를 짜내어 세운 계획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손짓하나로 문을 날려버리고 씨근덕거리며 집무실에 나타난 황태자가 탁자위에 은쟁반을 집어 던지듯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구는 쟁반으로 향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손톱만큼 변색되었던 그릇이 이제는 거의 직경 0.5피텐(15cm)에 이를 정도로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샌들우드를 보았다. "기다려야 합니까?" 아직도 그릇을 보고 있던 샌들우드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이것은 황태자에게 하독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변색이 되었습 니다. 그런데....오늘은 심하군요." 황제의 굳은 어조에 황태자가 모여 있던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 샌들우드의 품에 안겨있는 소녀를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사이먼과 알렉산드 로에 이어 황제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이제 식은 밥 먹는 거 그만둬도 된다는 겁니까, 아바마마? 젠장!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는 겁니까!" 이제 18살이 된 소년은 어깨가 딱 벌어지고 음성도 굵직하게 변해있었다. 또한 그동안 좀더 차가워지고 좀더 무서워보였다. 장난스러운 미소만 지어보이던 황태자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던 크리스틴이 종알거렸다. "그러면 그냥 죽으시던가요." ".......!" 사람들의 시선이 크리스틴에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소녀는 무엇을 믿는 것인지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이제 끝장을 보려고 약을 많이 쓴 것 같은데 과연 황태자 전하의 몸에 쌓여있던 독이 다 제거되었을까요? 그럼 그냥 중독 되시던가요. 남들은 굶어죽을 걱정을 하는데 아 직도 음식 투정이라니...황태자란 사람이..." 중얼거리듯 하고 싶은 말을 톡 쏘아붙인 크리스틴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샌들우드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멍하니 크리스틴을 보고 있던 사이먼과 알렉산드로의 얼굴에 노기가 차오르는 찰나 황제가 손을 흔들었다. "그대들은 나가보라. 조금 뒤에 부를 것이니..." "폐하, 이 아이는...!" "신경 쓸 것 없다. 그럴 만도 하지. 목숨이 달린 일이야. 그것도 내 아들의 목숨이. 들어야 할 충고라면 들어야한다. 나가보라." 황제의 면전에서 황태자에게 감히 망발을 한 소녀가 용서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두 사람은 썩은 배추를 입에 문 사람들처럼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사라졌다.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황태자가 크리스틴의 어깨를 잡았다. "어디다 손을 대는 거냐! 넌 욕을 먹어도 싸!" 행여나 크리스틴이 화를 입을까 아이를 꼭 껴안은 샌들우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황제도 황태자도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호통을 치는 마법사는 눈에 보 이지도 않는지 크리스틴의 팔을 잡고 몸을 돌린 황태자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 누구한테 들은 것이냐?"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는 황태자의 눈은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다른 얼굴을 찾고 있었다. '그럼 그냥 중독되시던가요. 남들은 굶어죽을까 걱정하는데 음식 투정이라니...' 처음 세실이 황궁에 들어와 식은 음식은 맛이 없다고 투덜거리던 황태자에게 한 말이었다. 방금 들은 것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말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이야기하는 소녀를 어찌 그냥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우연이라 해도 좋았다. 세실이란 아이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황태자의 간절한 눈빛을 본 크리스틴은 자신의 경망스러운 입을 원망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아무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이렇게 자신을 잡고 늘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도리질을 치는 소녀를 보고 있던 황제가 샌들우드를 보았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샌들우드는 의구심으로 빛나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턱을 치켜 올렸다. "왜 내 제자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저 녀석이 철들려면 아직 멀었다.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식은 밥 타령이야? 욕먹어도 싸지. 암..." 콧방귀를 뀌며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샌들우드를 똑바로 쳐다보던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뿌드득, 도대체 노인장은 누구기에 아바마마께 하대를 하고, 이리 막 대하는 것이오? 그대 의 목숨은 열개라도 되오?"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치기어린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차분한 어조로 분노를 드러내는 황태자를 보며 '오호~이것 봐라'하던 샌들우드가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널 쏙 빼닮았구나. 아들 하나는 잘 두었다. 그래, 많이 컸어." 알렉산드로보다 황제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 있다면 샌들우드라 할 수 있었다. 제자였던 브래들리를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아비의 행동거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보이는 애드리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샌들우드는 황제와 똑 닮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고심하 는 황태자를 보며 실소를 지었다. "이놈아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할아버지?" 아주 어릴 적 눈부신 빛으로 환상을 보여주며 울고 있던 자신을 달래주던 마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커다란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샌들우드의 얼굴을 뜯어보던 황태자가 샌들 우드의 빙글거리는 웃음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돌아가셨잖아요?"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다. 단번에 어른스럽던 행동을 집어던진 황태자가 샌들우드의 마법사 로브를 꼭 붙잡았다. '내가 이래서 여기 오는 게 싫었어.' 황제도 그렇고 황태자 역시 샌들우드를 좋아했다. 사람들을 귀찮아하고 툴툴거리기만 하는 노 인이 좋아질 일이 뭐가 있냐 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것을 어찌하랴. 아마도 아주 어릴 때부터 울거나 떼를 쓸 때면 여지없이 나타나 마법을 보여주던 인자한 모습이 만들어낸 그늘이 너무 크기 때문일 터였다. 3대에 걸쳐 황제를 키운 사람.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궁중 마법사로 알려져 있던 샌들우드 라 폰차르크는 황족들에게 그러한 존재였다. 단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다는 이유로 황자의 방에 무단난입하여 엄청나게 큰 라이트며 파이어 볼, 워터 볼 같은 것을 띄워놓고 울고 있던 황자들을 까르르 웃게 만든 사람. 그래서 역대 황제들에게 어미, 아비보다 더 많은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 황제 브래들리도 그러하였고. 그의 아비도, 또 그 아비의 아비도 그의 마법을 보며 자랐다. 황태자 역시 샌들우드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가 보여주었던 마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마법을 보여주세요'라고 떼를 쓸 듯 로브를 잡고 늘어지는 황태자의 손을 슬그 머니 떼어버린 샌들우드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크리스틴을 안아들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만 가 보마. 더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 아들과의 해후를 가만히 지켜보던 황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도 계셨다지요? 오늘은 푹 쉬시고 돌아가십시오. 저 녀석도 할 말이 많을 것이고, 저도 오늘은 보내드리지 않으렵니다. 제가 칼 들고 어마마마 처소로 가면 아니 되지 않습니까? 마무리하는 건 보고 가셔야지요." 능청스러운 얼굴로 샌들우드의 발목을 잡은 황제는 샌들우드 몰래 크리스틴의 얼굴을 힐끗거 리기 바빴다. 샌들우드와의 재회로 크리스틴이 했던 말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황태자와는 달리 그는 소녀가 남긴 말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과연 황태자 전하의 몸에 쌓여있던 독이 다 제거되었을까요? 그럼 그냥 중독 되시던가요. 남들은 굶어죽을 걱정을 하는데...아직도 음식 투정이라니.」 「나에게 세실은 크리스틴이고 크리스틴이 세실이다. 외모가 무엇이 그리 중하누.」 브래들리 챗필드 개넌은 황제였다. 황제는 눈치가 빨라야하며, 머리 회전 또한 빨라야 한다. 어느 누구보다 상황을 면밀히 검토 하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어야한다. 그래야 수천, 수만의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를 지키 고 키워나가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다. 황제는 지금 그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는 어떠한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리며 면밀히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크리스틴을 친손녀처럼 감싸고 앉아 질투로 으르렁거리는 황태자를 본척만척하는 샌들우드와 그의 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듯 편안한 자세로 안겨있는 크리스틴의 모습을 뚫 어지게 쳐다보던 황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득이 될지...화가 될지...' 세실이란 아이의 죽음 이후 하루하루 얼음같이 차가워지는 아들을 보며 걱정을 해왔다. 황태자는 간택식에서도 자신의 비가 될 사람은 없다며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서야 세실이 황태자의 마음을 가져가버렸다는 것을 알고 이미 죽은 아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사춘기에 누구나 겪게 되는 일시적인 열병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조금 전 크리스틴의 말에 난색을 표하며 울듯한 표정을 짓던 황태자를 떠올리자 자신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의 사랑을 하였다. 만약 자신의 아들도 그러하다면? 그 끔찍한 생각에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황제는 크리스틴의 맑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 로브를 붙잡고 늘어지던 황태자가 그의 소원대로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거꾸로 매달린 채. 사지를 바둥대며 대롱대롱 날아다니는 황태자를 보고 까르르 웃는 소녀도 보였다. "한 번만 더 조르면 아예 바다에다 던져 버릴테다, 징한 놈!" 샌들우드의 호통에 뭐가 그리 좋은지 피가 몰려 벌게진 얼굴로 키득거리던 황태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멍하니 체면도 잊고 장난을 치고 있는 세 사람을 보고 있던 황제는 스스로가 그의 예상이 맞기를 바라는 것인지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지끈거리 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지켜보는 수밖에...' 황태자비 간택식은 불과 몇 주 남았을 뿐이었다. *************************************************************************************** 어라? 분위기가 달라졌네...? 의아하시지요? 캬캬캬...콜록. 그렇습니다. 이번장은 단 이틀ㅡ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마무리 하기 전날(샌들우드와 크리스틴이 황궁에 온날)부터 일당(?)을 처리하고 그 다음날 아침(샌들우드가 돌아가는 날), 딱 만 3일에 걸쳐 일어나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들쑥날쑥할 수도 있고 이야기가 좀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해서...유키가 감히 권하기를...각각 보시고 이해가 안되시면...이번 장 끝나고 다시 재탕을...콜로..아니면 쭉 기다리셨다가 새로운 장 딱 뜨면! 그때 뫼비우스의 띠를 쫘락~! 에헤...이것이..이것이 넷연재의 한계인것을 어찌합니까아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편은 그 중간날, 이틀째 되는 날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입니다. 음...앞으로 에...이것이 6편인고로..앞으로 3편 더 남았군요. 콜록 그렇습니다. 앞서 샌들우드가 밤을 새운 63회부터 67회까지는 하루동안 일어나는 일이지요. 어라 길잖아~하셔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여기서 더 빼면(지금도 무쟈게 줄인건데) 이야기가 이어지질 않아요. 참으세요. 흑. 제발 참고 읽어주시어요. 반드시 월요일에는 이번장 마무리 올려드릴께요. 앙....(이뿐척) 그리고, 음...어제..있었던 일은 송구하단 말씀밖에 못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에또...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 제가 버럭 화를 냈던 그런 분들은 없을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면목없습니다. (_ _) 그럼...다음편은...저...잠 좀 자고 올릴께요. 이거 끝내느라 밤을 세웟다는... 좋은 하루 보내시고 즐거운 일요일 되시고 여러분 따랑해염~~~> <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7.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엄숙한 분위기를 되찾은 황제는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사이먼과 알렉산드로, 황실의 근위 기사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집무실을 가득매우고 있던 기사들은 한가로이 외따로 떨어져 차를 마시는 노소를 보고 어이없어 했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폐하..." "긴 말 할 것 없소. 오늘 황태자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는다면 다들 꽁지가 빠 져라 도망갈 것은 자명한 일. 오늘 마무리를 하겠소." "네?!" 단호한 어조로 그들의 입을 막은 황제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국사를 처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소녀. 애써 기억을 떨쳐버린 황제는 칙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태후전을 봉쇄하고 앞으로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가하지 않는다. 또한 후궁 마리아 개넌을 스테판 챗필드 개넌과 함께 궁에 감금하라. 무고가 밝혀질 때까지다. 그리고 개빈 공작, 카르케 후작, 맨턴 후작, 아로니에 남자가의 모든 식솔들을 잡아들 이고 재산을 몰수하라. 하인 하나라도 놓쳐서는 아니된다. 또한 아가트 상주와 그의 식 솔들을 잡아드리라. 이들의 죄목은 반역이다. 그들의 죄가 완전히 밝혀지기 전까지 아가 트 상회의 모든 상권을 동결한다. 시한을 주겠다. 1나르. 증거를 보여 달라하면 각기 사이먼 공이 나누어주는 서류를 보여 주어라. 그래도 반항하거든 목을 베어도 좋다. 가라!" 황제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벌떡 일어난 기사들은 기사단장의 명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손을 쓸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명이 내려지자 얼이 빠져있던 사이먼은 그의 앞에 몰려드는 기사단장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크리스틴이 샌들우드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며 속닥거렸다. 눈썹을 치켜세우고 이마를 짚던 샌들우드는 한 곳에 떨어져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알렉산 드로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네?" "험험, 자네가 남작가에 가서 약을 찾아오게나." "약...이요? 이것은...?" 독약이 숨겨져 있는 지도를 건네준 샌들우드가 알렉산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원래는 우리가 가서 직접 찾아낼 생각이었네만, 자네가 가는 것이 좋겠어. 보면 알거라 고 하는 군." "네, 누가 그런 소리를...?" 알렉산드로의 의아한 시선이 크리스틴에게 향하는 것을 본 샌들우드가 황급히 그의 시야를 가렸다. "내가 한 말이야. 웬 말이 그리 많은가? 지도에 표시 되어 있는 곳에 독약이 있을 것이고, 디아나의 침대 매트리스 밑에 또 한 병이 있을 것이라는 군. 사이먼이 알면 난리를 칠 것 이니 자네가 조용히 찾아와. 그 아이가 그걸 어디에 썼는지는 내가 증명해 줄 것이야. 이 참에 사이먼의 화도 풀고, 정리를 해야지." "......" 샌들우드의 말에 안색을 바꾼 알렉산드로는 그가 전해준 약도와 마가렛 아로니에에 관한 서 류를 챙겨 기사단장과 함께 사라졌다. 혼자 남아 이것 저것 서류를 추려 기사들에게 전해주던 사이먼은 내심 투덜거리기에 바빴다. 사실 서류를 들이밀 필요도 없었다. '반역'에 있어서 변명의 여지는 없었으니까. 예로부터 그래왔다. 증거가 있으니 잡아들이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손가락질 받지 않는다. 무슨 생각으로 그들을 잡아들이라 하는 건지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일단 황제의 명이니 받 아들일 수밖에. 일도 팽겨 치고 사라져버린 재상을 욕도 해보고, 괜히 일만 만든 황제에게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이 할 일을 깔끔하게 끝낸 사이먼은 샌들우드의 옆에 앉아 차를 마셨다. 칙서를 내린 황제는 황태자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기에 입을 쑥 내밀고 차를 마시던 사이먼이 마음 놓고 투덜거릴 수 있었다. "도대체...왜 잡아들이시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면 그냥 거기서 다 죽이면 된다고?" "어차피 그리 될 일 아닙니까? 굳이 궁에 불러들여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다니요...거기다 식솔들에 하인들까지라니...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합니까." 증거가 명백하고 죄가 모두 드러난 마당에 살려주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궁에 몸을 담고 있는 이 시기에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두운 얼굴로 차를 들이키는 사이먼을 보고 피식 웃던 샌들우드가 크리스틴의 귀를 막았다. "이봐, 여기는 황궁이야.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나? 이번 일은 덜떨어지게 덜미가 잡힌 놈들이 바보인거야. 역대로 그래왔어. 반역이 없었는 줄 알아? 황비가 황후를 죽이고 자신이 황후가 되고, 황태자를 독살하고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고, 대련한다고 형을 죽이고, 간식을 준다고 동생을 죽였다. 황후가 맘에 안 들어 며느리를 죽인 태후도 있었어. 그리고 그걸 들킨 놈들도 조용히 사라졌지. 자네 착각하지 말아. 바이오니어는 깨끗한 나라가 아니야. 더욱 더럽지. 패륜이 없는 나라? 하, 엿 먹으라고 해. 어느 나라보다 더러웠다. 정신 차려. 이제 재상직에 오르면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살테니 불쌍해서 충고하는 거다. 맨정신으로 살아가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오늘 일어나는 일들 머릿속 깊이 새겨두는 것이 좋아." "그런 말도 안 되는...!" 오늘 아침 만해도 바이오니어의 역사에는 패륜이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하며 펄쩍 뛰던 사이먼은 샌들우드의 진지한 눈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왜 안 믿어지나? 브래디가 어떻게 황태자 자리를 지켜왔는데. 설마 그놈 형이, 아장 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말을 탔던 놈이 실.수.로 낙마해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막내 가 자맥질하다 익.사.한 것은 또 어떻고?" "헉!" "합심해서 브래디에게 자객을 보낸 것이 들통 나서 조용히 갔지. 살아남으려면 당당하게 전쟁 을 했어야 했어. 비겁하게 뒤통수를 치다 걸린 놈들 중에 목숨을 부지한 놈은 없어. 그럴 만도 했지...선황은 브래디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어. 개넌 집안의 피가 그래. 패륜이 없다 기록이 되는 것은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야.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자의 귀를 틀어막고 더러운 기억들을 줄줄이 털어놓던 샌들우드는 지금쯤 어떻게 자신의 아들 을 조용히 죽여줄까 고민을 하고 있을 황제를 떠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어미의 욕심이라 해도 그냥 넘어가지 않아. 다 죽는 거지." 그제야 황제의 숨은 뜻을 알게 된 사이먼은 사색이 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이 집무실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없었으나 그의 얼굴을 펴질 줄 몰랐다. "이게 다 마리아인지 하는 덜떨어진 계집의 무지 때문이야. 정말 태후와 손을 잡았다면 이런 식으로 꼬리가 잡히지 않았겠지. 아니 시작도 못 했을 거야. 어느 어미가 아들의 목숨을 걸 고 반역을 꿈꾸나. 그것도 애디가 죽으면 제 아들이 황태자가 되기는커녕 그 전에 브래디가 황족을 모두 죽이고도 남을 상황에서. 알았다면 못해. 황제가 얼마나 잔인한 놈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면 다 그 년 죄지. 누굴 탓할 일도 아니야."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이먼이 눈을 부릅떴다. "화...황족을...죽이다니요?" 그런 모습을 보고 킬킬대던 샌들우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수염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제자의 귀를 막느라 손을 들 수 없었다. "자네 생각보다 순진하구만. 알렉산드로는 알고 있었을 텐데 자네는 몰랐나?" "무...무엇을 말입니까?" "허긴...아는 사람이 몇 안되긴 하지. 혹시 자네 세레네의 유모를 만난 적이 있나?" "유모 말입니까? 글쎄요, 황태자 전하께서 태어나신 후로는..." "못 봤지? 왜 못 봤을까? 어디로 갔을까, 소식은 들은 적 있나?" "그거야 모실 분이...어?" 황후인 세레네가 죽었다 하여도 그의 아들이 있으니 당연히 황태자를 그녀의 유모가 돌보게 된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황태자가 태어난 직후부터. 순간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샌들우드의 깊은 눈을 바라보던 사이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잊겠습니다. 황제폐하는 성군이십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 로도 그럴 것입니다." 묘한 눈으로 사이먼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샌들우드가 크리스틴의 귀를 열어주고 킬킬거렸다. "브래디가 지금까지 얌전하게 성군 노릇을 해온 것은 애디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회초 리를 휘두르는 재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황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본 심을 보인다. 모든 백성을 사랑하지만, 궁에 있는 인물들 중 그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단 네 명 뿐이야. 하나는 죽었고 이제 셋 남았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황족이 아니라 태양이라도 가른다. 사랑을 받아보라고. 재상의 뒤를 이을 수 있다면 자네가 지켜야 하네." 세 명. 그리고 죽은 하나. 사이먼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은 이는 분명 세레네 황후다. 살아있는 이는 황태자, 재상, 궁중 마법사.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을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끙끙거리며 머리를 부여잡는 사이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샌들우드의 얼굴은 비교적 밝아보였다. '자네 정도면 되지. 열심히 하게. 브래디를 잡아줘. 잘 지켜줘야 해.' 개넌 가의 모든 황제들이 극도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피가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양면성은 언제나 황위에 오른 후 눈부신 빛을 발해왔다. 사람 좋은 미소 뒤에 숨어있는 야수. 평소에는 얌전했으나 자신의 것을 건드리는 존재에게는 가차 없이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시신도 남기지 않고 가루로 만들었다. 자신의 것. 소유욕이 남다른 황제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확고히 지정해 놓았고 그 선을 넘어서는 이들은 피붙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았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런 황제의 옆에는 항상 충신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바로 암브로시아 였다. 그들은 대대로 황제의 광기를 제어하며 성군으로 이끄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였다. 더러운 일은 덮어두고 부드러운 성정을 끄집어내어 세상에 둘 도 없는 성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러한 일을 해온 알렉산드로는 늙었고, 로드리고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그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지목된 것이 사이먼 데 멜포레스 공작.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차라리 이것이 악몽이길 빌었다. 샌들우드의 눈 속에서 보았던 진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추악한 과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현실이지...' 지금 그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들. 「이제 셋 남았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황족이 아니라 태양이라도 가른다.」 이미 황제는 샌들우드의 말을 몸소 증명해보였다. 알렉산드로를 잡기 위해 자신의 면전에서 비난을 퍼부어대지 않았던가. 또한 황제가 인정한 유일한 아들, 애드리안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 황제는 숨겨두었던 난폭함을 드러내며 포효하고 있었다. 문득 어두운 얼굴로 자신이 책임질 테니 처음부터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다던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으려하기 보다는 방관을, 현재의 일 보다는 미래의 일을 신경 쓴 것이다. 한 번 칼을 뽑아든 황제는 쉽사리 검을 집어넣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해하려 했던 존재들을 용서해줄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어깨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쓰다듬던 사이먼은 문득 다리위에 느껴지는 작은 무게에 고개를 돌렸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슬퍼하지 마세요. 실망하지 마세요. 황제폐하는 성군이세요. 그리고 공작님은 그 분을 더욱 훌륭한 황제로 기억되도록 노력하시는 충신이 되실 분이세요. 스스로의 무게에 지지마시고, 주위의 비바람에 흔들리지 마세요. 재상님의 빈자리와 스승님의 빈자리를 채우시고 황제 폐 하의 오른팔이 되시면 되요." 이것이 열다섯 살 난 소녀의 눈인가. 샌들우드와 사이먼의 경악에 찬 얼굴이 크리스틴에게 향했다. 샌들우드는 일루젼 마법을 뚫고 자신을 보았던 제자가 귀를 틀어막으며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 했던 자신의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한숨이 나왔다. 크리스틴이 못 들을 거 라 확신하고 황실의 숨겨진 비화를 털어놓았더니 저 어린 아이는 그것을 다 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무게에 짓눌려 휘청거리는 중년의 사내를 위로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요...참으로 따뜻한 분이세요. 황태자 전하 역시 그러하지요. 단지...질투심이 많으신 거예요. 일국을 다스리시는 분이 그 정도 소유욕이 없다면 결코 황제가 되실 수 없 으셨겠지요. 이 나라는 황제 폐하의 것이고 모든 백성들의 것이듯, 공작님 또한 황제폐하 의 신하이시고 모든 백성들의 손과 발이 되시는 분이세요. 힘을 내시란 말씀 드리지 못하겠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공작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주실 테지요. 재상님이 후임으로 선택하신 분이시니까요."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지혜로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이렇게 모자란 놈이었던가...' 충신은 성군을 만든다. 성군이 충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면 되지 않은가,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는가. 어차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에 들어와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그것 아닌가. 그러고도 살아남았다. 그러고도 공작이 되었다. '바보 같은 놈!' 스스로의 비겁함에 치를 떨던 사이먼은 소녀의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어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배너 백작은 행복한 사람이다. 너처럼 큰 아이를 품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겠느냐, 고맙구나." 한 마디면 족했다. 세상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를 죽여 가던 사이먼이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샌들우드는 그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격려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믿을 만한 사내. 앞으로는 모르나 적어도 요 이틀간 지켜본 사이먼은 재상의 직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황태후와의 사사로운 정을 끊고 황제의 명을 받들고, 황가의 숨은 비화를 듣고 황제의 어두운 면을 알면서도 성군으로 보아주었다. 또한 어린 소녀의 주제넘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깨달은 바를 인정하고 감사를 표하는 인물은 알렉산드로의 뒤를 이을 만한 재목이라 생각이 들었다. 흐뭇한 얼굴로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샌들우드는 문가에 서서 야릇한 얼굴로 그들 을 지켜보다 모습을 감추는 황태자를 보며 혀를 찼다. '다 들었을까?' 아직 세상을 모르고, 스스로의 본성을 깨닫지 못한 황태자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큰일 이었다. 그런 샌들우드의 생각을 알았음인가 크리스틴이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아무것도 못 들으셨어요. 방금 오셨거든요. 실피드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아주었어요." 제자의 말에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던 샌들우드는 준비를 해야겠다며 일어나는 사이먼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잠시 후에 죄인들이 오면 문초를 해야 할테니, 정리를 좀 해야겠습니다." 답이 나와 있는 상황을 정리하려는 사이먼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을 안아올렸다. "피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닐테지? 이만 갈까?" "아니요, 오늘 피를 볼 것 같지는 않은데요, 스승님. 황제폐하의 분노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아 보였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황태자 전하께서 살아계시니까요. 그리고 스승님이 계시고, 재상님이 계시니까요. 참으실거 예요. 최소한 스승님과 제가 있는 곳에서 피를 보게 하지는 않으실 거란 생각이 들어요." 크리스틴의 맑은 하늘빛 눈동자를 보고 있던 샌들우드는 자신을 붙잡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 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 묵고 가자꾸나. 아카데미에 수업이 없어 다행이지?" 일주일에 이틀의 휴일이 있는 날에 때를 맞추어 황궁에 온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브래디가 어떻게 할까?' 그 시각. 바이오니어의 황제 브래들리 챗필드 개넌은 황태후를 알현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마마." "오랜만입니다, 폐하. 헌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시었습니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 셨습니까? 얼굴빛이 안 좋으십니다." 이제 겨우 60세쯤 되었을까, 새하얀 서리가 내린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작은 관을 쓰고 있던 황태후는 황제의 미소 속에 숨은 일그러진 얼굴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 로 자리에서 내려온 엘레나는 주름진 손으로 장성한 아들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얼굴이 너무 어둡다. 마치..." 평생을 두고 탐탁치 않아했던 며느리가 죽었을 때처럼 보인다 말을 하려던 엘레나는 자신의 손 을 잡아 슬그머니 내리는 아들을 보며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시아버지의 눈에서 보았고, 남편의 눈에서도 보았던 난폭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 청록빛 눈 때문 이었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황제들의 눈 속에 분노가 담길 때면 언제나 황궁에 피바람이 불어왔다. 도대체 무엇이 저리도 거대한 분노를 일으켰을까. "무엇이...널...이 바이오니어의 황제인 너를 분노하게 만든 것이냐?" 침착한 얼굴로 이유를 물어보는 여인은 일국의 황태후답게 매우 절도가 있었다. 그런 어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황제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주었다. "분노라니요, 어마마마. 그럴 리가요, 단지 저는 재미있는 소식이 있어 그것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 엘레나의 깊은 회색눈동자 안에서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을 읽어낸 황제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어마마마께서 총애해 마지 않던 여인이 나.의. 아.들.에게 독을 먹였나이다. 해독도 없다는 독을 먹여 어마마마의 사랑을 받는 2황자를 황태자 보위에 올리겠다 단꿈을 꾸었나이다. 그것도 자신의 사촌 오라비와 어마마마의 신용장을 받은 평민 계집과 손을 잡고 말입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활짝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있던 엘레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그것이...사실이더냐, 그...것이..." 생전 처음으로 보는 어미의 눈물을 손으로 슬며시 닦아준 황제가 엘레나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오늘...모든 것이 끝납니다. 1년을 기다렸으니 파티 정도는 해야겠지요. 초대하겠습니다. 성장을 하고 기다리십시오.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어.머.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굳어있는 엘레나의 얼굴을 놓아준 황제는 망토를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어머니께서 그 여자를 제 아내로 만드셨지요. 하하하!" 황홀한 미소를 입에 단 채 사라지는 황제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던 황태후가 비틀거리며 주저 앉았다. "아니 된다. 아니 된다. 어찌...어찌...그런 짓을 하였느냐! 마리아. 넌...넌...잠자던 사신 (死神)을 깨운 것이다. 그런...."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황태후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며느리를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머님, 제 아들이 어떠신가요. 참으로 훌륭히 자라지 않았습니까? 호호호호!" 얼마 전부터 장성한 2 황자를 데리고 궁을 드나들며 환한 미소를 짓던 제 1후궁 마리아 개넌의 얼굴이 암흑 속으로 빠져드는 황태후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어리석은 것...." 황태후를 만난 후 후궁의 처소로 가려던 황제는 발목을 잡혔다. 굳은 얼굴로 궁 앞에 서 있던 사이먼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황제의 냉정한 말 속에 들끓고 있는 용암을 간파한 사이먼이 고개를 들었다. "폐하, 지금 기사들이 죄인들을 잡아오고 있습니다. 대전으로 가시지요." "다 모이면 가면 될 것을..." "폐하께서는 모든 결정을 보류한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죄를 명확히 밝히고 벌을 내리신 연후에 나머지 일을 처리하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나머지 일?" 신경질적으로 되묻던 황제는 허리춤에 걸린 롱소드를 만지작거렸다. 당장 들어가서 후궁의 목을 벨 생각이었다. 황자가 보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도 곧 처리될 것이니. 그런데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사이먼을 보고 있자니 '그냥 베고 지나가?'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인상을 찡그리는 황제를 보고 한숨을 삼킨 사이먼이 그를 따라왔던 시종들을 물렸다. 몰랐으면 모르되 샌들우드에게 사실을 듣고 난후 황제를 보니 그의 양면성 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피를 봐야 속이 시원하다며 날뛰고 있는 야수를.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이 곳에 감금되신 분들의 신변은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몫이옵니다. 서두르지 마옵 시고, 먼저 해결해야 할 일에 신경을 써주시옵소서." 황제의 눈이 번쩍 빛났다. "황태자라고?" "폐하. 언젠가는 걸어야할 황제의 길입니다. 성군이 되실 황태자 전하이옵니다. 이번 일의 진상도 알려드리지 않고 폐하의 손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이미 성인이 십니다.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고, 현명한 길을 선택하실 안목을 지니셨다 사료가 되옵니다." "........." 사이먼의 멋들어진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황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사이먼의 단호한 태도는 그를 절대로 후궁처소로 보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사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황제 자신을 위해서. 지금 들어가서 피를 보는 것 은 성군이라 불리는 황제의 위명에 누가 되는 것이 분명하니까. 사이먼은 지금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보다 좀더 냉철하고 현명하게 일을 처리하라는 충언 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이먼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공은...달라졌군, 그렇지?" "......." "내 사람이 되기로 한거야....재상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폐하. 그동안 신이 어리석어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폐하의 높으신 은덕으로 뒤늦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신을 벌하여 주십시오." 진지한 얼굴로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사이먼을 보고 검을 놓은 손으로 볼을 긁적이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벌? 재상이 되는 것. 그게 벌이네.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화려하지 않아. 충분히 벌이 될 테지. 기다리고 있게나." 주름진 알렉산드로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던 황제는 오늘 아침과는 또 달라진 모습 으로 나타난 사이먼을 지나쳐 대전으로 걸어갔다. 이에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재빨리 따라가던 사이먼은 샌들우드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었다. 「사랑을 받아보라고. 재상의 뒤를 이을 수 있다면 자네가 지켜야 하네.」 '제가...지킵니다. 사랑을...받아보겠습니다!' ***************************************************************************************** 어라, 이건 또 웬 엄숙한 분위기? 이러시지는 않겠지요. 음...황가의 소유욕(나중을 위해서)과 광기....라 불리우는 난폭한 성정을 설명하는 장이었습니다. 마음에...드시나요? 음...뭐 별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만... 새벽에 잠이 많이 와서 빼먹었는데, 별빛바다님! 63회 비평란 감사드립니다. 건 제 글에 대한거라기 보다는 제 마음가짐에 대한 충고로 받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_) 언제 철이 들련지.. 에또...독약난무하다고 하신 분이 계셔서...독이...똑....나..올지도....앙~ 지금 그거 붙잡고 좀더 극적으로 바꿀 수 없을까 연구를 하고 있지만 잘 안됩니다. - -;; 문제요! 1번 <<세실+크리스틴>>이 사람을 죽였다! 반응은...?((주관식입니다.)) 이 문제의 답이 빨리 나올수록 다음편이 빨리 나옵니다아~!! (젠장 머리 안굴러갈때는 의논을..엥? 협박이라구요? 캬캬캬캬 퍼퍼퍼벅~! 쓰읍~ )어쩌겠습니까, 또 독쓰면 다들 욕하실텐데요. 어여모여서 답을 주시어요. 또 세실이 충격받아서 ;아잉 나 사람죽였어~~'이러고 괴로워하면 안되잖아요. 음...그렇죠? *추가 설명: 음...이해를 못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일단, 현.재. 크리스틴이 한스 할범(?)을 죽인 사람은 찾았습니다! 그렇다면...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는 소문이 날까요??? 입니다. 그리고 죽인다면 죽인 후에 크리스틴의 반응은??? 예시1> 칼로 심장을 푹 찌르고 불을 지른다(한스 할범과 똑같이)---> 이게 제가 써놓은 설정입니다. 그리고 손에 묻은 피를 보며 절규한다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이건 아닙니다. 예시2> 황제가 죽이도록 내버려둔다. (어차피 가만냅도도 죽을거 손에 피 묻힐 필요없다) 멀거니 죽는 거 보고 알렉산드로 한 번 보고 씨익 웃어준다 (그래도 복수는 했으니까) 예시3> 그냥 냅둔다(왜 크리스틴은 착한 아이이니까) 음...써놓고 보니...잔인하군요...- -;; 2번 아, 그리고 음. 제가 사건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냄새(엥?)가 많이 난다고 하던데욤.... 어디가 작위적인 경향이 강할까요? 설마...전부다~ 뭐 이러시면...저 삐칩니다.(소설인데 조작맞아요 ㅜㅜ) 3번. 제 글 중에서 가장 매끄럽지 않은 부분 Best 10위. 이건 나중을 위해서...콜록. 위의 세 문제를 맞추시는 분들에게는(?) 푸짐한 상품(!)과 경품(!!)이.... 없을 예정이지만 모르지요 혹 또 선택되신 분들께 원고라도...아니, 상품...음...책갈피? 핸펀줄? 음...몰겄다. 암튼 나중에 봐서...능력되면 뽀뽀라도...쿨럭(퍼벅!) 도와주세여어~~~~~~!! (이게 뭔 짓이람...벌써 다 썼으면서...- -'') 그리고 여러분 행복하자구요~~~~~~~!! (아잣 아잣 아잣!)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8. 수천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대전에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네 가문의 식솔들과 하인과 노예, 아가트 상회의 상주들이 모조리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 수백 명이 그들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로니에 남작가의 식솔들은 단 두 사람을 제외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 이었다. 황제의 칙서가 내려졌다는 말에 두말 않고 일어난 아로니에 남작은 아내와 딸을 데 리고 얌전히 궁으로 들어왔다. 치료가 끝난 듯 매끈한 얼굴을 드러낸 디아나는 대전에 몰려있는 사람들 중 가장 어리고 유 일한 소녀였다. 물론 귀족들 중에서. 우윳빛 피부에 검은 머리,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15세 의 소녀는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였고 그녀의 옆에 있는 여인과도 많이 닮아보였다. '디아나...' 특별히 황제의 윤허를 얻어 죄인들을 심문하는 자리에 샌들우드와 함께 앉게 된 크리스틴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디아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봐주었다. '독을 쓰지 말았어야했어...네가 너의 가문과 아가트 상회를 파멸시켰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래도 날 노려볼 수 있겠니? 지켜봐 줄께. 디아나 만 아로니에.' 독기를 머금은 금안과 무감각한 푸른 눈이 끈으로 연결이라도 해놓은 듯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성장 차림에 롱소드를 허리에 찬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제폐하 납시오!" 시종장의 외침에 일제히 무릎을 꿇은 사람들은 그들 사이를 거침없이 가로질러 들어가는 황제의 새하얀 망토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황제는 흐뭇한 미소 를 지으며 좌중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기쁘십니까?' 황제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면 그리 물었을 것이다. '무엇에 그리도 분노하십니까?' 광풍이 휘몰아치는 그의 눈을 보았다면 그리 물었을 것이다. 청록색 눈에 담긴 의미와는 상반되는 미소를 짓고 있던 황제가 알렉산드로를 보았다. "시작하게." "개빈 공작, 카르케 후작, 맨턴 후작, 아로니에 남작은 지금 앞으로 나오시오." 알렉산드로의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힘찬 목소리에 네 명의 사내가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조금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은 역모를 꾀하였다는 이유로 잡혀왔다. 죄를 인정하느냐?" 황제의 음성은 평이했다. 하지만 대전의 모든 이들은 심장이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버릴 듯한 살기가 그들 모두의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가자미눈을 하고 주위를 살펴보던 개빈 공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 억울하옵니다! 신은 죄를 지은 것이 없사옵니다. 하물며 역모이라니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피를 토할 것 같은 절규요, 참으로 진솔한 음성이었다. 억울함이 절절히 드러나는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동정표를 던질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던 황제가 알렉산드로에게 손짓을 했다. "마가렛 아로니에 남작 부인, 디아나 아로니에 영애, 파렐 아가트는 앞으로 나오라." 알렉산드로의 외침에 아로니에 남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옆에 주루룩 앉는 아내와 딸, 장인을 보고 있던 남작이 천천히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황제는 젊고 능력 있고, 누구보다 청렴결백했던 신하를 보며 혀를 찼다. 안타까운 일이나 그라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로니에 남작과 영문도 모른 채 불려나온 디아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서서히 드러나는 자신들의 세력을 보며 점점 얼굴의 핏기가 빠져나가던 개빈 공작은 이를 악물고 숨겨놓은 마지막 패를 보았다. 저 멀리 군중들 속에서 주위를 두리 번거리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식으로 눈을 굴리고 있는 쥐새끼가 보였다.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 바로 황태자에게 쓴 독을 만든 인물이었다. '절대로 나오지 마라. 절대로...으드득!' "죄를 인정하겠느냐?" 또다시 황제가 질문을 던졌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 대전 안은 점점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개빈 공작과 아가트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폐하, 억울하옵니다! 신은....." "억울하옵니다. 이것은 음모이옵니다! 증거가...!" "증거?"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듯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의 입을 막아버린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작의 옆에 있는 30대 초반의 아리따운 여인을 보았다.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억울한가? 증거가 없으니, 죄가 없다 하겠느냐?" 황제의 청록색 눈은 독을 제공하였다는 여인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 마가렛 아로니에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제가 이곳에 불려나온 이유를 모르겠나이다. 역모라니요, 당치 도 않으신 말씀이시옵니다. 한낱 남작가의 안주인으로 제가 무슨 힘이 있어 그러한 일에 가담 할 수 있었겠나이까." "대담하군." 짙은 갈색머리를 틀어 올리고, 눈부신 보석들과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서 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었다. 약간 창백해진 얼굴이 그녀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으나, 여기 대전에 모인 이들 중에 그녀보다 얼굴색이 나은 사람은 없었다. 마가렛 아로니에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황제가 혀를 끌끌 차며 알렉산드로를 보았다. "증거가 필요하다고 한다." "네, 폐하." 황제의 명에 시원스럽게 대답을 한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직접 찾아낸 고풍스러운 조각이 새겨진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다가가 상자를 건네주었다. 차츰 얼굴의 핏기가 가시며 눈 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남작 부인을 주시하며 상자를 받은 황제는 그것을 직접 열어 안을 확 인하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열린 부분을 밖으로 돌렸다. "이것이 무엇인지 말해보라." "....저는...모르겠사옵니다." "모른다? 재상, 이것을 어디에서 찾았소?" "아로니에 남작 부인의 침소에서 찾았습니다." "헉!" 영롱한 연녹색 빛을 발하는 액체가 가득 감긴 수십 병의 크리스탈 병을 보고 식은땀을 흘리던 마가렛은 알렉산드로의 대답에 입을 틀어막았다. "폐...폐하...그..그것은...저희..저희 집안 대대로...전해지는 것으로..이번 일과는 상관이 없는..." "상관이 없다?" "네! 그..그렇사옵니다." "대대로 물려받았다고?" "아...네." 스스로 덫을 향해 열심히 뛰어 들어가는 여인을 보고 실소를 짓던 황제가 상자 안에 든 병을 하나 꺼내어 알렉산드로에게 주었다. "대대로 물려받는 것이라면 무엇인지도 잘 알겠지. 먹여라." "네, 폐하." "헉! 폐하! 그것은 집안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자결하라는 의미에서 전해지는 독약....!" "집안에 위기가 닥쳤으니 자결하라고 주는 것이다. 할 말이 있느냐?" 독을 마시고 죽든지, 사실을 고하라는 뜻이었다. "마셔보라고 하였다. 해약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그것이 황태자에게 쓰였던 것인지 아닌 지는 네가 마셔보면 밝혀질 일이다. 마셔라." 귀찮은 듯 손을 휘저으며 말을 하는 황제를 보고 사색이 된 마가렛은 벌벌 떨면서 남편을 보았다. 하지만 도와달라고, 살려달라는 아내의 청을 외면한 남작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이 나아.' 어차피 반역으로 불려왔으니 결국엔 참형이다. 근거도 없이 죄인을 잡아들이는 것은 황제의 성격과 맞지 않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독안에 든 쥐. 지금 이대로 먼저 죽는 것이 어쩌면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시선을 외면한 것이다. 하지만 마가렛은 스스로 죄를 고하라는 아로니에 남작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과하고 평민이었던 자신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끔찍이 사랑해 주던 남편의 어이없는 배신에 치를 떨었을 뿐이다. 귀족이라 하여 결혼하였으나, 말뿐인 귀족이었다. 가진 것 없고 껍데기만 귀족이란 것도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남들은 청렴결백하다 칭송을 했지만 그녀에게 그런 칭찬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남편이란 작자는 이렇다할 권력도 없고 그렇다고 재산을 불리는 것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답답하여 후궁이 되었으나 힘이 없어 고민을 하던 마리아와 손을 잡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자신의 무.능.력.한. 남.편.을 올려놓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을 쳐왔거늘 어찌 그가 자신을 배신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나를 외면할 수 있지? 어떻게!' "폐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는 죄가 없어요, 어떻게...이렇게 잔인하실 수가 있습니까! "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던가. 남편의 외면에 분노한 마가렛은 새파란 한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며 알렉산드로가 내미는 손을 탁 쳐버리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주위의 사람들은 숨을 들이키며 노한 황제가 당장 목을 베라 명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죄가 없다네, 재상. 자네가 잘못 안 것이 아닌가? 저 여인은 죄가 없다고 하네. 그것은 정말 가보(家寶)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은가?" 심문을 하자는 것인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의 말이 의외였던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은 인상을 쓰고 있는 알렉산드로를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황제의 의도는 무엇일까. 배가 부른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절대 쥐를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죽이는 것도 아니고 먹으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배가 고파질 때까지 먹이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때를 기다린다. 지금 황제의 행위 역시 배부른 고양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가며 죄가 없다고 바락바락 대드는 죄인들을 보며 숨통을 조였다 놓았다 하면서 피를 말리고, 지루해지면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밀고 목을 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불려나온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일일이 귀를 기울여주며 재상의 판단력까지 의심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황제의 내심을 짐작한 샌들우드와 알렉산드로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너그러운 황제를 보고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죄인들은 그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과연 죄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성.군.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참아낸 알렉산드로는 '내가 뭐?'하는 의미로 눈을 멀뚱멀뚱 뜨고 모르는 척 앉아있는 황제에게 이를 갈아주고 문가에 서 있던 기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한들, 황제에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죄인을 끌고 오라!" 대전을 울리는 고함 소리에 한 기사가 밖으로 나갔다가 겁에 질려 걸음도 제대로 못 옮기는 시녀를 끌고 들어왔다. "저 여인은 또 누구인가?" 능청스럽게 '난 몰라'라는 연기를 무리 없이 해내는 황제는 쳐다보지도 않고 앞으로 끌려나온 시녀에게 다가간 알렉산드로는 품안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어 그 앞에 던졌다. "열어보고, 네 것이 맞는지 확인하라." 이제 황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아예 밤을 새도 끝내지 않을 것임을 간파한 것이다. 한편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낯이 익은 상자를 조금 열어보던 시녀는 못 볼 것을 봤 다는 듯이 얼른 상자를 덥고 옆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맞느냐?" 알렉산드로의 차가운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인 시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들어올렸다. "그것을 어디에다 썼느냐?" "........" "고하라!" "저...황태자 전하의 음식에....음식에...흑...살려주...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용서해주십시오!" 사색이 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닥에 머리를 박아대는 시녀에게서 등을 돌린 알렉산드로 는 그것을 황제에게 전해주었다. "이것이 황태자 전하께 사용되었던 독이옵니다." 황제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처음과 같이 고요한 얼굴로 알렉산드로가 내민 상자를 받아들고 그 안을 열어본 황제의 입술 양끝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라...그래, 저 시녀가 그대의 집안사람이었나?" 차라리 소리를 지르면 덜 무서웠을 것이다. 조용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이야기를 하던 황제는 입술을 꼭 깨물고 시선을 외면하는 마가렛 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심문을 가장한 죽음의 퍼레이드에 불려나왔다는 것을 깨달은 죄인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의 경악에 찬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직접 보아라." 툭! 풍성한 치맛자락 위에 던져진 상자는 열어볼 생각도 않고 머리를 굴리고 있던 마가렛은 그녀에게 알렉산드로가 천천히 다가오자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말하라." "......" "더 이상의 거짓말은 용납지 않는다. 이것을 만든 이가 누구냐!" 알렉산드로의 일갈에 고개를 번쩍 들었던 마가렛은 무의식적으로 낯이 익은 사람을 보았다. 그는 누가 자신을 볼 새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가렛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알렉산드로의 입술이 삐딱하게 걸렸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시니컬한 모습이었다. '파울로....!' 알렉산드로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아가트 상회에 몸을 담고 있다가, 상주의 여식이 남작가로 시집가던 날 함께 남작가로 들어간 하인. 언제나 금화를 들고 한스 영감의 약화점을 찾아와 약초를 사갔던 손님들 중 한 사람이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5년이나 봐온 인물을... 파울로는 아가트에서 향료와 약초를 만들었던 실력 있는 제조사였다. 또한 그의 해박한 지식에 탄복한 한스 영감은 한동안 그와 친분을 쌓았고 자신이 독초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 그리도 가까이 있었는데 생각을 못했었는지 스스로가 이상했다. 마가렛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인물. 그동안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부분이 풀리며 모든 정황이 깨끗하게 맞아떨어지자 알렉산드로의 입술에는 확신에 찬 미소가 걸렸다. "남작가의 하인 중 파울로는 앞으로 나오라." "헉!" 알렉산드로의 나직한 음성에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과 군중 속에서 숨 막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을 쏠린 가운에 무릎에 머리를 박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늙은이의 다리사이 에서 축축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 앉아있던 어느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순순히 나오거라." 알렉산드로의 음성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에 오줌을 지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노인이 네 다리(!)로 엉금엉금 기어 앞으로 나왔다. 이리 저리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던 노인은 자신을 보며 이를 갈고 있는 개빈 공작을 피해 얼빠진 듯 앉아있는 아로니에 남작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대가 독을 만든 작자인가?" 알렉산드로의 낮은 음성에 흠칫 하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다 입을 쩍 벌리고 부들부들 떨리 는 손으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네가 독을 만들었는지 물었다." 죽었던 아비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어도 이처럼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눈은 알렉산드로의 주름진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고 쩍 벌어 진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너..너..너...." 차마 말도 못하고 더듬거리는 노인 앞으로 살며시 다가간 알렉산드로는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죽인 사람은 나의 그림자였지. 설마 날 잊고 있었나, 파울로?" 자신의 손으로 심장을 찌르고 불로 태워버린 사람이 버젓이 살아 나타났으니 어찌 아니 놀라겠 는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가슴을 들썩이던 늙은이는 알렉산드로가 천천히 고 개를 들고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죄를 묻는 것을 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는 당사자(!)가 있으니 부정을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던 노인은 천천히, 아주 힘겨운 동작으로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옆에서 사정없이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죄를 인정하겠느냐?"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또 다시 부드러운 황제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너무나 부드러워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낯이 익은 인물들이 모두 모이자 아가트의 상주인 패럴은 한탄을 하며 눈을 감았고, 두 후작 역시 개빈 공작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파울로라 불린 노인을 노려보던 개빈 공작은 뭔가 말을 하려고 머리를 들었으나 황제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고는 그냥 고개를 숙였다. "저...저...저는...제가 왜...여기에 나왔는지...모르옵니다." 조용했던 대전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떠듬거리며 겨우 말을 마친 음성의 주인공은 15세의 소녀였다. 척 봐도 역모의 죄로 불려나온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이. 사람들의 동정적인 시선을 받으며 머리를 조아리던 디아나는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폐하, 제 딸은 아직 어리옵니다. 벌을 받게 되더라고 잠시 물려주시기를 감히 청하옵니다." 아로니에 남작의 차분한 음성에 황제가 머리를 짚었다. "공은 죄를 인정하는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작은 그의 옆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내와 장인을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폐하, 내자의 잘못을 모르고 있었던 것 또한 신의 잘못이옵니다. 신은 죄인이옵니다. 그리고... 참으로...참으로...송...구하옵니다." 뚝 서글픈 미소로 시작된 남작의 고변은 눈물로 끝을 맺었다. 알았다면 막았을 것을. 조금의 낌새 라도 느꼈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것을. 후회만이 가득한 아로니에 남작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 던 눈물이 대전의 시린 바닥위에 떨어졌다. 그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탄식을 하며 디아나를 쳐다보았다. "자네 딸이 죄가 없다 하였지?" "......?" 황제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어올린 남작은 흐리게만 보이는 눈을 맑게 하기 위해 급히 눈을 깜빡 였다. "자네 딸은 말일쎄..." 잠시 말을 끊고 크리스틴과 디아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황제가 알렉산드로를 보았다. 아끼던 신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 한사람만이라도 살려주고 싶으나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가만히 앉아있던 샌들우드가 벌떡 일어났다. "폐하. 이 늙은이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오." "디아나 아로니에는 비록 자신도 모르게 한 일이었으나, 죄인들의 신분을 드러나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나이다. 또한 남작 역시 이번 음모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사옵니다. 아녀자를 돌보는 것 역시 남편의 책임이라고는 하나, 부녀의 공을 생각하시어 아량을 베풀어주 십시오." "아량이라 하였소?" 왠지 황제의 음성에 생기가 돈다 생각을 하던 샌들우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입을 주시 하고 있는 죄인들을 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궁금할꺼야, 궁금하겠지.' "작위는 파하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의 여식 또한 아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선처를 하여 주십시오." "아니됩니다!" 샌들우드의 말에 전적으로 반발을 하고 나선 사람은 사이먼이었다. 그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나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록 남작의 여식이 독을 써서 그들의 죄가 드러났다고는 하나, 그 심성 역시 사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찌 15세에 불과한 소녀가 해약도 없는 독약을 사람에게, 그것도 같은 학우에 게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에 무죄로 풀려난다면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어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반역이옵니다. 반역의 죄를 다스림에 9 족을 멸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신 또한 남작의 청렴결백함을 아끼고 있습니다. 또 그가 알고 있었더라면 미리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황태자 전하께서 미리 해약을 드시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 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대전 전체에 싸한 냉기가 감돌았다. "네...네가...?" 마가렛 아로니에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돌려 눈물을 글썽이며 목을 움츠리고 벌벌 떨고 있는 디아나를 보았다. 쫘아악! "헉!" "저런!" 오래토록 계획해온 음모가 딸의 어이없는 행동으로 드러난 것에 분노하던 마가렛은 자신의 처지 도 잊고 디아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병의 수가 워낙 많아서 일일이 세어보지 않은 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어떻게 딸이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훔쳐갈 수 있었는지는도 중요 하지 않았다. 문제는 어리석은 딸로 인해 자신들의 모든 야망이 물거품이 되었고 모두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재미있구만." "........" 황제의 중얼거림에 모든 사람들이 숨을 멈추었다. "재상은 이들의 죄를 낱낱이 밝히도록 하라." "네, 폐하." 황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앞으로 나선 알렉산드로는 발밑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문서를 들고 줄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개빈 공작은 카르케 후작, 맨턴 후작과 함께 황태자 전하를 독살하고 반역을 꾀하였는바... (중략)...이에 아가트 상회의 상주인 파렐 아가트는 이들에게 군자금을 주었고...(중략)... 아로니에 남작 부인인 마가렛 아로니에는 그의 집에 일을 하던 파울로를 시켜 그가 가지고 있던 비법으로 독약을 만들어 개빈 공작에게 주었으며...(이하 생략)...." 장장 20미르 동안 죄목이 밝혀지는 동안 마리아 개넌이나 스테판 챗필드 개넌, 혹은 엘레나 프로라 챗필드 개넌의 이름은 철자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황태자를 독살하고 2황자를 보위에 오르게 하려던 일은 쏙 빠지고 오히려 개빈 공작이 황권을 찬탈하기 위해 역모를 꾸미고 군자금을 모았다고 몰아붙였다. 마리아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독 약을 건네주었던 마가렛의 죄는 친정인 아가트를 등에 업고 사사로이 독을 만들어 개빈 공작에 게 독을 전해 준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한 마디로 황족의 존재는 이번 반역의 굴레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바이오니어의 역사는 항상 이런 식으로 만들어져왔다. 패륜이 없는 나라. 자신이 직접 적은 죄상을 죽 읽어 내린 알렉산드로는 평온한 얼굴로 양피지를 말아 황제에게 올렸다. 그것을 받아든 황제는 죄인들을 하나 하나 뜯어보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을상이었다. 인재를 아끼는 성군으로서 아로니에 남작을 진심으로 아끼던 황제는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고개 를 숙이며 죄를 비는 남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들의 식솔들 을 둘러보았다. 더러는 죄지은 표정으로 울먹이고 있었고 더러는 억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죄가 드러난 마당에 내가 친히 식솔들과 노예와 하인들을 불러들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황제의 음성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그의 한마디면 여기 있던 수천 명의 목숨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의 대를 이어 다음 황좌에 오를 사람은 황태자 애드리언 챗필드 개넌 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어떠한 반역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오늘 나 브래들리 챗필드 개넌의 이름으로 천명한 다. 혹시나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9족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씨앗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모조리 지워버릴 것이다." 황제가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목을 움켜쥐었다. "허나, 오늘만은 본보기로 주도자들과 그들의 식솔들만을 처형할 것이며 앞으로 1년간 그들의 목을 수도의 성곽에 효수할 것이다. 또한 죄인들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환원 될 것이며 바이 오니어에 있는 아가트 상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처형하라!" 채챙~! "........!" 주도자들과 그들의 일가족만 처형한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가리 며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대전에서 목을 베라고 명을 내릴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폐하!" 기사들이 칼을 빼어들고 앞으로 나오려는 순간 가만히 앉아있던 황태자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태자." "폐하. 이들이 비록 죄인이라 하나 한 나라의 녹을 먹으며 충을 행했던 자들이옵니다. 그러한 자들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벤다는 것은 과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허면?" "여기 있는 평민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시는 것이..." 무고한 백성에게 피를 보게 하지 말아달라는 청이었으나 크리스틴을 힐끗 거리는 폼이 그녀를 의식한 것이 분명했다. 슬쩍 말꼬리를 흘리며 선택의 여지를 넘겨주는 황태자를 보며 대견하다 는 눈빛을 보내던 황제가 사이먼을 보았다. 평민들은 모르되 노예도 엄연한 재산이었으니, 여기에 있는 노예가 모두 황궁의 재산이 된 것이다. "공은 지금 즉시 이들을 돌려보내고 성문을 열어두어라. 갈 곳이 없는 노예들에게는 거처를 마련해주고 주인이 결정될 때 까지 보살펴 주어라. 죄인들의 참수는 이들이 돌아간 후에 한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감사합니다, 폐하!" "참으로 성군이십니다!" "감사합니다!" 한때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축복에 황태자와 황제를 칭송하던 노비와 평민들이 기사들의 뒤를 따라 대전을 나섰다. 웅성거림이 가라앉고 고요해진 대전 안. 샌들우드가 황제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험험..." "무슨 일이십니까?" 주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자, 샌들우드가 마법을 쓴 것을 깨달은 황제가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는 스승을 보았다. "그것이 말이다. 저기 파울로라는 놈을 좀 데리고 갔으면 하는데." "저...독을 만는 놈 말입니까?" 절대로 싫다는 의미로 인상을 찌푸리는 황제를 보고 크리스틴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샌들우드가 고개를 낮추었다. "세실이라고 알지?" "......?" "그 아이한테 약초를 가르쳐준 노인 말이다." "설마...저 놈...아니.." 설마 파울로가 그 노인이냐고 물으려던 황제는 샌들우드가 손을 휘휘 젓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험. 그게 아니고, 그 노인이... 살해를 당했다는데...그게 저놈 짓인 것 같다." "네?" "세실이 말하기를 그 노인의 가슴에 칼을 꽂고 불을 지른 놈이 독약을 만든 거라 했거든. 내게 그놈을 잡아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어떠냐? 내가 처리해주마. 그리고 목은 따로 잘 챙겨서 곱 게 씻어서 보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맡겨라. 응?" 떼를 쓰는 아이마냥 발을 동동 구르던 샌들우드는 그에게 무거운 임무를 맡기고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는 크리스틴을 힐끗 거렸다. 당연히 얻어다(!) 주겠다고 큰소리는 쳤는데 황제가 고개를 흔들면 때려눕혀서라도 훔쳐(!)가야 할 형편이었다. 제발 그럴 일이 없기는 바라는 간절한 마음 으로 황제를 지켜보던 샌들우드는 그의 야릇한 시선이 크리스틴을 스쳐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뭐...세실이라면 황태자의 은인이니. 당연히 그렇게 해 줘야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무 하나 보내 주마." "...또...나뭅니까." "똑같아. 뭘 걱정하는 거냐? 그때보다 실력이 좋아졌으니까 아무도 모를 테니 걱정하지마라. 금방 돌려주마." '그게 문젭니까아~!' 속으로 나무를 붙잡고 100일이나 울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를 갈던 황제가 결국 고개를 끄덕 였다. 아무리 기다려 봤자 저 입에서 속여서 미안하다는 사과가 나오기에는 애저녁에 글러먹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가져다 놓든 인형을 가져다 놓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오냐!" 황제의 퉁명스런 목소리에 시원스레 대답한 샌들우드는 예의 건들거리는 폼으로 크리스틴에게 돌아갔다. 소녀의 귀에 뭐라 속닥거리는 폼이 자랑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 속 보이는 행동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된 황제는 파울로를 감옥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을 내린 후 그의 뒤를 따라가는 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뻘건 피를 뿌리며 하나 둘 떨어지는 죄인들의 목에서 시선을 돌린 황제는 높디 높은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머리에는 죄인들에 대한 생각이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확실한 건가...이카루스여....!' 쉬익! 툭! 떼구르르르~ 쉬익! 털썩! 떼구르르르르~ 쉬익! 털썩! 쉬익! 투둑! 등 뒤에서 들리는 묘한 음률을 들으며 샌들우드의 손을 잡고 파울로란 노인의 뒤를 따라 걷던 크리스틴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디아나!' 넋을 잃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길이 지워지지 않았다. 정말 몰랐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거냐고.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그 아름다운 금안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리 될 거라 상상은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하고 등을 돌린 자신의 나약함에 몸을 부르르 떨던 크리스틴은 손을 꼭 잡아주는 샌들우드를 올려다보았다. "사이먼이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희망은 없었다. 브래디는 원했지만 황제의 뜻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리고...개인적으로 나는 사이먼의 생각과 같다. 한 번 독을 품은 자들은 언제고 다시 독니를 드러낸다. 알고 있지?" 이유도 없이 세실을 괴롭히던 크리스틴이 떠올랐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샌들우드의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을 뿐이다. "스승님, 전 디아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니라니, 좀 전에는 청을 넣어 달라 하지 않았느냐?" 샌들우드의 말처럼 조금 전 그가 황제 앞에 나선 것은 크리스틴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하니 눈에 고인 눈물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작님을 위해서...그런 것 뿐이에요. 전요...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삶도 있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순수한 백지에서 시작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미 더렵혀진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아주...아주...힘들다고 생각해요."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 자신이 크리스틴이 걸어온 그 더러운 길을 깨끗하게 청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어차피 사면을 받더라도 귀족은 될 수 없어요. 더군다나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그 죄를 뒤집어쓰고 겨우 목숨만을 부지해서, 그것도 그 분들의 죄를 밝히는데 공을 세워서 구걸한 목숨인데...얼마나 괴롭겠어요. 얼마나 원통하겠어요.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 남작님도 홀로 남으신다면 분명 자결을 하셨겠지요. 둘이 남았다면 하나는 죽이고 스스로 목을 그으셨을테지요. 다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좋아요. 그것이 모두를 위해 행복한 일이지요. 그래서 전 슬퍼하지 않아요." ".....그러면 무엇이 슬픈 것이냐?" "....단지 그 아이의 마지막을 볼 용기가 없는 것이 슬퍼요. 끝까지 지켜봐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해주어 안타까워요.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을 사람은 저 뿐인데 제가 고개를 돌린 것이 슬퍼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샌들우드가 크리스틴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 소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하여 부드러운 손으로 다독거려주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마땅하다면 죽은 사람을 잊어주는 것이 산 사람의 도리다. 누가 그러더냐, 그 아이를 기억할 사람이 없다고. 모이라란 아이는 기억할 것 이다. 사이먼도 기억하겠지. 이를 갈면서 잘되었다 환호를 하면서 기억할 것이다. 네가 알아서 좋을 아이가 아니었고 기억해서는 더더욱 아니된다. 과거는 과거로. 그냥 스쳐지나간 바람이라 생각해라. 네 가슴에는 널 사랑해주는 사람만 담으면 된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을 담아두라고 이카루스님이 너에게 그렇게 커다란 마음을 주신 것 이 아니다. 사랑만 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삶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거라." 마지막 복수를 남겨놓고 파울로를 따라가는 길 내내 스승의 말을 되새기던 크리스틴은 슬며시 눈물을 닦고 다시 한 번 웃을 수 있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사랑으로..아름다운 기억만으로..가슴을 채워라...' ******************************************************************************************* 이번 편 용량 장난아닌데요. 애라 내 처지에 무슨 비축은...이러면서 그냥 다 올렸습니다. 뒷부분은 지금부터 다시 써야하구요. 조아라가 자꾸 튕겨서..열받아 그냥 올렸다고 하면...콜록 일단 올려놓고 지적들어오는 부분 잡고 수정할려구요(역시 머리나쁜 유키 이런건 잘 안되염) 그리고, 증거 자료를 너무 쉽게 모으셨다고, 샌들우드가 무슨 만능기계인양 말씀하신분이 계신데 제 설명이 불충분한건 인정합니다만, 샌들우드가 자료를 모으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못하시다니.. 섭섭한데요. ㅜㅜ '민'이 정보를 모았지요. 정보길드에서 남작가와 아가트 상회를 조사해서 황궁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잡아낸 겁니다. 물론 중간에 길어져서 잘라내긴했지만(이건 보충을 해야겠네요) 설명을 드리자면 재상과 공작은 황태자에게 독을 넣은 시녀를 중점으로 황궁에 초점을 둔 조사를 했습니다. 독약의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후궁처소를 드나들며 직접 받아냈다는 것을 알아내지 못한게 1년이나 시간을 끈 이유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접촉해오는 인물이 없으니 오리무중일 수밖에. 하지만 크리스틴은 디아나가 쓴 독이 바로 황태자에게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남작가를 뒤진거지요. 그리고 독약을 찾아냈지요? 또 남작의 성정을 생각해 모든 식솔들의 출신과 만나는 사람들으 조사하고 거기서 아가트와 마리아 후궁과의 관계, 개빈과 두 후작간의 연계를 알아내고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이나 물품, 자금 이동을 조사한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똑똑하냐고 물으신다면 우연이었지요. 디아나가 독을 안썼으면..아마...안밝혀졌을걸요. 제 생각에는. 재상과 공작, 그리고 크리스틴은 수사 방향이 달랐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당연히 밑에서 치고 올라온 정보길드쪽이 훨씬 빠를 수 밖에 없지요. 뿌리에서 올라가는 것이었으니까. 자, 이제 설명이 좀 되었나요? 분명 샌들우드는 서류를 궁에 실어다 준 죄(?) 밖에 없습니다. 그의 위명이 높고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엄청나게 잘나보이지만 실제로 그 영감 한 일이 별로 없지 않나요? - -;;(너무 잘나게 봐주셔서 제가 황당하다는...) 에또...읽어보시고, 걸리고 말안되는 부분은 찔러주세요. 일단 급한데로 설명 보충하고 나중에 시간나는데로 수정들어갈께요. 이렇게 쭉 올려놓고 서서히 수정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열이 열보다는 수천이...좋지요? (네...저 무능력해요..ㅜㅜ) 앗 그리고, 앞장 문제 2. 3. 은 계속 될겁니다. 이거 끝날때까지. 달아주신 리플들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워드에 옮겨놓았으니, 언제든지 걱정말고 올려주세요. 딴지, 리플, 태클, 비평, 추천, 선작(속보인다..) 대대대적인 환영 및 어서옵쇼~입니다. (_ _) 마지막으로....재미있는 시나리오..콜록 2~5분 짜리 2D 애니 만들만한 시나리오나 아이디어 가지고 계시는 분 적선 좀 해주시겠어요? 음...산디전 공모에 낼 것인데, 잘만 되면 제가 한턱 쏠께요. 맛있는거든, 선물이든, 술이든, 밥이든, 안되면 티겟으로라도 보답할테니...좀 도와주세요. 제가 원체 '재미'라든지 '엽기'라든지 '아이디어'와는 거리가 먼사람이라 부탁드립니다. 너무 짧아서, 혹은 너무 엽기적이라서, 혹은 재미는 있는데 쓸데가 없어서..이런 거 다 좋습니다. 도와주실꺼죠? 무흣 > < 유키의 체면이 걸렸다는...콜록..... 그럼. 사설 이만 줄이고 내일 뵙겠습니다. 여러부운~ 행복하세요오~~~~~~~~~~~~!!! ********************** 추신 : No. 수호천사...음...그거 아직 손도 못대고 있습니다. 죄송해요. 일단은 이번 사건 마무리 짓고 틈나는데로 글써서 마무리 지을께요. 아무래도 수호천사는 제 첫자식이라..애정이 가서... 미련을 못버리고 있다는 =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9. 기사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힌 파울로를 따라간 샌들우드와 크리스틴은 몸을 숨기고 간수장이 다른 곳으로 갈 때 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디서 소환한 것인지도 모를 통 나무 하나를 파울로의 모습으로 바꾼 샌들우드는 쇠고랑을 차고 울고 있던 늙은이를 어디론 가 이동시키고 그 자리에 나무토막을 가져다 놓았다. "갈테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틴의 손을 잡은 샌들우드는 자신의 오두막을 떠올리며 텔레포 트했다. "누...누구...?" 오두막 앞에 버려져 있던 파울로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두 사람을 보며 뒤로 주춤 주춤 물 러났으나, 곧 「홀드(Hold)」에 걸려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떼록 떼록 눈을 굴려가며 얼굴을 이리 저리 돌리는 것뿐이었다. "스승님, 저..." "알았다. 일 끝나면 불러라." 망설이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샌들우드는 미련 없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곧 굴뚝에서 연기가 소록 소록 오르는 것이 차라도 끓이려는 것 같았다. 문득 오두막 안에서 들리는 부산스러운 소리를 듣고 있던 크리스틴이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는 노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턱을 괴었다. "약화점...하셨던 한스 할아버지 아시지요?" ".......!" 파울로의 쭉 찢어진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는 것을 확인한 크리스틴이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왜...죽이셨어요?" "........" "그냥 비법이 필요했으면 훔쳐 가면 될 걸, 왜 죽이셨냐구요." 방실 방실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 치고는 매우 살벌한 말이었다. 눈동자를 쉴새없이 굴리며 주위를 살펴보던 파울로는 소녀의 밝은 미소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그...그는...그는..." "....살아 있다구요?" "헉!" "살아있다고, 그것도 조금 전에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세요?" 오두막에 있는 샌들우드를 의식하는 것인지, 작은 목소리로 방긋방긋 웃으며 그의 말을 거들어준 크리스틴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검붉은 천 조각을 끌러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칼을 꺼 내들었다. 검은 피딱지가 붙어있는 곳을 제외하고 시퍼런 독기를 줄줄 흘리며 모습을 드러낸 단 도는 조그마한 소녀의 손에 딱 들어맞았다. "제가 이해시켜 드릴께요. 그 분은 이 나라의 재상이에요. 알렉산드로 라 암브로시아. 아시겠 어요? 약화점을 하시던 한스 할아버지는 5년 전에 파울로라는 사람에게 칼에 찔리고 불에 타 죽었어요. 이해가 되시지요?" "네! 네! 됩니다! 되었습니다! 네, 제...제가 한스를 죽였습니다. 전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그 분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눈앞에 내밀어진 눈부신 단도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 파울로는 미친 듯이 크리스틴의 말에 동의 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제발...칼을...." 당장에라도 칼을 찔러버릴 듯 칼날을 그의 심장어름에 가져다대고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보고 있노라니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파울로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크리스틴이 입술을 달싹 거렸다. "이제...돌아가면 죽을 텐데 제 손에 죽으나 궁에서 목을 베이나 무슨 차이가 있지요?" 크리스틴의 말이 의외였던지 입을 쩍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뻐끔거리던 파울로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그..그러면...절...죽이시..려고...?" "아니면 제가 왜 모셔왔겠어요?" "........." 재상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납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한스가 알렉산드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도록 협박을 하고...풀어줄 거라 생각했다. 죽일 것이라면 뭐 하러 그런 약속을 받아내겠는가? 당돌하게 물어보는 소녀의 질문 에 넋이 빠진 파울로는 어느새 문이 활짝 열리며 샌들우드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장난은 그만 하거라. 죽이고 싶으냐?" 말 한마디면 당장에 죽여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샌들우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크리스틴은 한스 영감과 알렉산드로의 얼굴 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냐는 질문에 크리스틴은 다시 파울로를 쳐다보았다. "한스 할아버지에게서 훔친 것." "........." "주세요." 오른 쪽 손으로는 단도를 들고 왼쪽 손을 쭉 내미는 소녀를 보고 어이없어하던 파울로가 샌들 우드를 쳐다보았다. "어...어르신, 뭔가 잘못 아시는 것..." "주세요." 샌들우드를 보며 동정을 구하려던 파울로는 자신의 얼굴 앞에 나타난 새하얀 손바닥을 보고 치를 떨었다. "그...그것은 제 방 침대..." "카사!" 삐이익! 크리스틴의 날카로운 음성에 하늘에서 내려 꽂힌 카사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파울로의 머리를 스쳐 소환자의 어깨위에 내려앉았다. "이..이런..." 잠시 스쳐갔을 뿐인데도 파울로의 앞머리가 홀랑 타버렸다. 지지직 소리가 나며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에 울상을 짓던 파울로는 또 다시 그의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세.요." "....방..." 화르르륵! 온몸의 깃털을 곤두세운 카사가 위협적으로 불길을 일으키며 파울로를 노려보았다. 분명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가운데 태연히 앉아있는 작은 새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던 파울로가 샌들우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르...쳐 드릴테니 살려주십시오!" "......" "그것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저만 아는 장소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르신!" 검붉은 피딱지가 묻어있는 단도를 들고 불새로 위협하고 있는 소녀에게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었다. 한다 해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샌들우드가 어떤 인간 인지 전혀 상상도 못했다. 만약 두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샌들우드가 아니라 크리스틴에게 죽 어라 매달렸을 터였다. 하지만 의외로, 샌들우드의 인자하게만 생긴 겉모습에 속아 감히 잡혀온 주제에 거래를 청한 파울로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좋다!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가..감사합니다!" 이제 살았다 하는 표정으로 실죽거리는 파울로를 보고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크리스틴 은 은근히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보고 있는 스승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파울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솔직히 파울로는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온몸이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는데 무슨 수로 물건을 건네주겠는가. 그저 철없는 아이의 투정인양 크리스틴의 말을 씹어버린 파울로는 샌들우드에게 소리쳤다.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풀어주십시오." "그냥 죽어라." "........"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냉큼 들려오는 대답에 식은땀을 흘리던 파울로는 더 이상 잔머리를 굴리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 하루는 그가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힘들었고 상상도 하지 못 했던 인물까지 만났다. 만약 여기서 도망간다 하더라도 평생을 도망자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파울로는 지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그의 존재가 드러났기에 어딜 가더라도 재상으로 되살아난 한스가 그를 절대 그냥 놔두지 않을 터였다. "책은...제 품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냉큼 손을 뻗으려던 크리스틴은 샌들우드에게 번쩍 들려져 저 멀리 놓여졌다. "이 옮는다." 왜 그러냐고 물어오는 제자에게 한 마디 던진 샌들우드는 지린내와 쾌쾌한 냄새가 뒤죽박죽 섞인 파울로의 더러운 옷자락을 헤치고 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누런 책자를 한 권 발견했다. 그 책에는 깔끔한 글씨로 알아들을 수 없는 수많은 약초들과 효능 등이 적혀있었는데, 세실이 만들어왔던 서책과 유사했으나 더욱 상세한 설명이 깨알 같은 글씨로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약초들의 이름만 주룩 적혀있었는데, 그 위에는 삐뚤삐 뚤한 글씨로 「안식의 물」이라 적혀있었다. 아마도 파울로가 첨부한 듯 보였다. 그리고 페이지의 맨 아랫부분에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글이 반듯하게 쓰여 있었다. - 아직 해약을 만들지 못했으니, 그것은 너의 몫이다. 열심히 하거라. 아마도 한스는 세실에게 그 책을 물려줄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평민치고는 참으로 글을 잘 쓴다 생각을 하던 샌들우드는 마지막 장을 펼쳐든 채 크리스틴에게 책을 넘겼다. "아마도 이걸 너한테 주고 싶었나보다." "아.....!" 조그마한 서책을 받아들고 탄성을 지른 크리스틴은 잠시 낯익은 글씨체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며 베시시 웃었다. 크리스틴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덩달아 미소를 짓던 샌들우드는 그에게 열심히 눈짓을 하고 있는 파울로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약...약속을..." "잠깐만요." 파울로에게 손을 뻗는 샌들우드를 말린 크리스틴이 다시 눈치를 보고 있는 늙은이 앞에 다가갔다. "이야기 덜 끝났지요? 한스 할아버지 왜 죽이신거지요?"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소녀에게 기가 질린 파울로는 눈을 딱 감고 주절거 리기 시작했다. 아가트에서 일을 하다가 남작 부인을 따라 아로니에 남작가로 간일, 그곳에서 약화점 주인 한스를 만난 일, 뭔가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체고 은근히 접근한 일...등. "저도...저도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마님께서 그 놈이 독을 연구한다는 것을 아셨을때 제게 그것을 훔쳐오라고 하셨지요. 정말입니다! 그냥 훔칠 생각이었습니다. 반항만...반항만 하지 않았더라면...그랬더라면....제 얼굴을 봤기 때문에...그래서.." 5년이나 거래를 해오고 비교적 친분이 있었던 사이였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궁으로 돌아가 있던 알렉산드로를 대신해 가게를 지키고 있던 그림자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냥 도망쳤을 것이다. 자신이 확실히 죽였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았으니 그 억울함이야 어찌하랴. 정신이 없었던 경황 중에 남작부인에게 받았던 단도를 쓰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것이 그의 발 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다. 아니 한스가 키우던 세실이란 아이가 황궁과 연이 닿을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을 하지 못했기에 처음부터 지옥으로 향하는 표를 예매한 것과 같았다. "음...그랬군요." 크리스틴은 이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왜 그때 알렉산드로가 약화점에 없었는지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으나, 그걸 알아내기 위해 본인 에게 물어 볼 생각은 없었다. "스승님, 약속은 지키실거죠?" "당연하지." 제자의 질문에 확신에 찬 태도로 대답을 한 샌들우드는 화색이 만면한 얼굴로 헤벌쭉 웃는 파울로에게 손을 뻗었다. "이곳만 벗어나게 해주면 되는 거지?" "네, 네! 어르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잘 가게. 텔*레*포*드" 눈부신 빛에 싸여 순식간에 사라진 파울로가 앉아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크리스틴이 은근슬쩍 샌들우드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자신의 작은 손을 살짝 밀어 넣었다. 어른들보다 조금 체온이 높은 작은 손을 꼭 쥐어준 샌들우드는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난 정말 천재야! 하하하하하" "네, 네. 폐하와의 약속도 지키고 파울로란 사람의 약속도 지키고...참 훌륭하세요." "합!" 크리스틴의 중얼거림에 얼른 입을 닫은 샌들우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어..어떻게 알았느냐?" "목을 깨끗이 씻어서 보내주신다구요?" "...하...하...하.." "뭐 산체로 보내드렸으니 약속은 확실히 지키신거네요." 완전히 눈감고 '아웅'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모르는 척 해준 제자의 머리를 부비부비해준 샌들우드가 당황하던 태도를 던져버리고 씨익 웃었다. "이.곳.에.서.만. 벗어나게 해주면 된다지 않았니. 난 약속을 어긴 적 없다." "핫핫핫, 누가 뭐래요?" 샌들우드의 웃음소리를 흉내 내던 크리스틴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는 많은 죄를 지었고 타당한 벌을 받는 것뿐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던 디아나의 죽음도 차라리 잘 된 일이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고, 파울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아, 나쁜 짓을 해서 벌 받은 거구나'정도랄까? 스스로가 너무 무감각한 건 아닐까 고민을 해보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며 샌들우드를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크리스틴의 기억 속에 각인된 행동들 중 그 효험이 이미 검증된바 있는 애교 모드 제 2탄. 「안아주세요」포즈를 취하는 제자를 보고 실쭉 웃던 샌들우드가 힘찬 동작으로 크리스틴을 번쩍 안아들고 천천히 마나를 모았다. "어째...1년 사이 키가 거의 자라지 않는 것 같구나." 눈부신 빛에 싸여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내심 자신이 걱정하던 것을 콕 찌르는 샌들우드의 목에 얼굴을 묻은 크리스틴이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이대로 어리광만 부리며 살래요." ***************************************************************************************** 원래를 9편으로 나누려고 하다가 어제 충격이 너무 커서 10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캬캬캬 농담이구요, 30kb면 11장 정도 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둘로 나눕니다. 어제 내 드린 문제 1번 답은...없지만 2번이지요? 흐음님, islika님, 푸루메님, 혜리님. 별빛바다님, 혼수상태님, 나탁님, riverijh님, 에느라힘님, 류엔님, 환마부주(幻魔俯主)님, 바람따르기님, 하이론님 축하드립니다아~~~~~~!!! 안타깝게 답이 빗나간(?) 꿈의 노래님 아무래도 마왕이 나타나 꿀꺽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요? 그리고 만님 1, 2번은 재미없고 3번은 착해서 짜증나시면...어떻게 하란 말씀이셨습니까아아~~~!! 그리고, 왜 재상이 독을 못알아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셔서. 일단 답변을 드리자면 콜록 우선 세실은 백작가로 갈때 레니에게 독약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해약을 연구했습니다. 3년 걸렸지요. 그리고 그 뒤에 황태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코마상태로...그때 어떻게 황궁에 있는 재상이 모를 수가 있냐고 물으신다면 '안식의 물'이라는 독의 특성을 떠올려주세요. 그건 일단 한 방울 한방울 씩 매일 사용합니다. 그래서 뼛속으로, 조직, 장기속으로 독을 축.적.을 시키지요. 증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역치에 이르러 핏속에 떠돌 정도가 되면 그제야 독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재상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만들었던 독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되지만, 시간이 없었지요. 독을 만드는 방법은 알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겁니다.(그 부분은 앞을 수정할까, 뒤에 독백을 넣을까 고민중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모이라와 황태자의 증상을 비교하면 됩니다. 세실의 독약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5년이나 지난후에 황태자가 쓰러졌지요, 하지만 모이라는 엄청난 약의 독을 한꺼번에 복용했기때문에 대번에 증상이 일어나며 순식간에 호흡마비증상을 일으켰습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재상이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독이 너무나 은밀하게 사용되었고, 증상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 그 뿐입니다. 에또...제가 '억지로' 만든 전개에 대해서는...조금 더 관심있게 봐주시길 부탁드릴 수 밖에요. 비평란에 글 남겨주신 '공작과 백작의 소환'은 어거지가 없는 설정이라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백작은 2번. 공작은 1번 아카데미로 갔습니다.(몇 번인지 기억도 안나신다고 하셨지요? 저 충격받았습니다) 백작이 두 번 간 것은 크리스틴의 상처를 보고 마누라랑 함께 뛰어간 것이고, 또 한 번은 사건을 해결하고 마무리(학생들 처리) 문제로 공작과 대면을 한 것이지요. 그걸 보고 억지스럽다 하시면... 아...또 사설이 길어지는... 일단 저녁에 시간봐서 나머지 한 편 올릴께요. 그럼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뫼비우스의 띠 10. 크리스틴이 파울로를 심문(?)하던 그 시각 바이오니어의 재상 알렉산드로는 지하 감옥에 수감된 통나무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이보게, 파울로. 그 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유를 묻고 있지 않나. 대답을 해보게. 도대체...응?" "헉!" 두 눈을 멀거니 뜨고 멍하니 앉아있는 파울로에게 열심히 말을 걸던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파울로 옆에 또 다른 파울로가 나타나 헛바람을 들이키는 것을 보고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이 잡고 있던 파울로를 보았다. "이...이런..." 통! 떼구르르르르 알렉산드로가 손을 놓자 팔뚝만한 통나무로 변신(?)한 파울로가 바닥을 굴렀다. 어이가 없다는 듯 저 멀리 떼굴떼굴 굴러가는 통나무를 보고 있던 알렉산드로는 곧 새롭게 나타나 말을 하는(!) 파울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경악에 찬 시선이 마주쳤다. 파울로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는 충격에 빠질 겨를도 없이 조금 전의 협박이 이때를 위한 것이라 확신을 하며 재.상.에게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재상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오물이 가득한 바닥에 대고 부들부들 떨던 파울로는 인자한 얼굴로 자신을 속인 샌들우드를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을 탓했다. '젠장, 이 나라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할 것을...' 잔머리의 대가로 정평이 난 파울로가 어찌 모르겠는가. 마법사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곳.을 벗어나게만 해달라고 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미 사지(死地)로 돌아온 이상 곱게 죽는 것이 그의 소망이라면 소망이었다. 어차피 재상이 자신을 알아보았을 때 살기는 글렀다 생각하지 않았던가. 체념어린 얼굴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던 파울로는 5년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음성을 듣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날...한스를 죽인 이유가 무엇인가?" "썩을! 이놈이나 저놈이...헉!" 크리스틴의 얼굴이 떠오르며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파울로는 욕설을 퍼부으려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알렉산드로를 보고 입을 막았다. "이놈...저..놈?" 한스의 가슴에 찔러 넣었던 칼이 눈앞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거야! 심장에 칼을 꽂고 불에 타 죽던지, 얌전히 목을 베이라는...이거였어!' 드디어 굳이 자신을 불러 협박을 했던 소녀의 의도(!)를 알아낸 파울로는 자신의 입을 쥐어뜯 으며 헤헤 웃었다. "아..아닙니다요, 어르신. 한스..그.......를 찾아간 것은 마님의 명이었습니다요. 제가 입방 정을 떨어 누구도 모르는 독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제 잘못이었습니다요. 그리고 정말! 죽일 의도는 없었습니다요. 믿어주십시오. 그저 그...한..스가 연구하던 일지... 를 훔치기만 하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나타나서 제 얼굴을 보는 바람에..."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한심한지 얼굴을 푹 숙인 파울로는 애꿎은 허벅지만 꼬집었다. '젠장, 그 놈이 그 놈이 아닌 줄 누가 알았나....' 한편 파울로의 고백을 듣고 있던 알렉산드로는 그 기가 막힌 타이밍에 혀를 차고 있었다. 황제의 소환명을 받고 궁으로 들어갔던 날, 자신이 신분을 숨기고 있던 약화점에 화재가 났었다. 그때 그는 황제에게 조금 더 말미를 달라고 청하러 궁에 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눈치체지 못하도록 자신으로 분장한 노인을 그곳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겨우 겨우 허락을 받고 마을로 돌아갔더니 약화점은 불에 타 없어지고 화재로 죽은 한스는 세실의 손에 의해 이미 땅에 묻힌 후였다. 그 어이없던 순간을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차던 알렉산드로가 진중한 얼굴로 파울로를 보았다. 그때 그는 한스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고 단순히 화재가 나 애꿎은 사람이 죽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황태자가 독에 당해 쓰러지기 전까지는. 호흡이 가늘어지며 가사상태에 빠져든 황태자의 얼굴과 손에 독기가 나타났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자신의 과오로 인해 황태자를 살릴 수 없을 거라 절망하기도 하였다. 세실이 해약을 만들어놓지 않았더라면, 아들인 로드리고가 세실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일지라 하였지? 내가 연구한 것을 적어놓은 노트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에 파울로의 찢어진 눈에 야릇한 빛이 반짝였다. '한 편이 아니였어?! 이놈은 그 아이를 모르는 거야...흐흐..그렇다면?' 알렉산드로의 질문은 파울로의 머릿속에 서광을 비추어주는 태양으로 떠올랐다. 파울로는 크리스틴이 재상의 정체와 그와의 관련을 알고 비법을 강탈해간 것으로 생각했다. 어찌 소녀와 재상이 한 편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비법이 적인 서책을 가지고 간 크리스틴으로 인해 제 2의 파울로가 나오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파울로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알렉산드로에게 대답을 했다. "그것이...약을 만들고 난 후에 누가 볼까 두려워 태워버렸습니다. 제 머릿속에...만 남아 있지요." 작고 흐리멍텅한 눈을 빛내며 자신의 머리를 콕콕 찔러준 파울로는 알렉산드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내심 통쾌하게 웃어주었다. '머저리 같은 놈, 또 당해봐라. 큭큭큭. 그 년도 아마 주인마님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 보아하니 고위급 아니 황족쯤 되어 보이던데...킬킬킬' 대전에서 황태자와 나란히 앉아있던 것을 보았다. 스스로의 명민함을 자화자찬하며 크리스틴의 존재를 묻어준 파울로는 언젠가 다시 나타날 독약으로 괴로워할 알렉산드로의 얼굴을 상상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파울로의 탐욕이 어린 얼굴을 보고 비법을 태워버렸다는 것을 순순히 믿어버린 알렉산드로 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사실 파울로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파울로에게 측은한 시선을 던진 후 천천히 일어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감옥을 빠져나오던 알렉산드로는 어느새 고개를 슬쩍 들어올린 파울로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기대어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지옥에서 지켜 볼 거야. 네 놈이 다시 나타난 안식의 물을 보고 괴로워하고 고민하게 될 그 날을...큭큭큭' 잠시 후면 죽을 터이지만 조금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수로 협박을 하면서까지 서책을 빼앗아간 그 소녀의 푸른 눈이 그에게 안심하라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한스의 제자였던 세실이 크리스틴이며, 비법을 넘겨받은 그녀가 바로 해약을 만들어 자신들의 죄를 밝혀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울로는 끝까지 자신의 추측을 굳게 믿었고, 그래서 목이 날아가는 그 순간까지 입에 미소를 담고 있을 수 있었다. 샌들우드와 크리스틴이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마법을 썼는지, 피비린내가 가득하던 대전에는 시원한 샤프란 향이 은은히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전으로 공간이동해온 두 사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온 사이먼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사이먼이 크리스틴의 눈치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제폐하께서 마리아님께 저희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약을 선물로 드리랍니다. 아니면 직접 목을...그리고 황태자 전하는 2황자님께 대련을 청하셨습니다." 어린 소녀를 의식하여 말을 돌리려해 시도는 해보았으나 영 신통하지 않았다. 난처한 얼굴로 서 있는 사이먼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딱 한 마디 했다. "깔끔하군." "......." 얼어붙은 사이먼을 내버려두고 대전을 나선 샌들우드는 그의 말과는 달리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다. "스승님, 폐하께서 정말 그 분을..." "그게 문제가 아니다. 엘렌이 위험해." 황궁 전체를 탐색하여 황제의 기척을 알아낸 샌들우드는 걸어가던 상태 그대로 후궁 처소로 워프했다. "뭐하십니까, 어마마마.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극상품입니다." 편안한 얼굴로 황태후와 함께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황제가 마법으로 모습을 드러낸 샌들 우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벌써 볼일 끝나신겁니까?" "왜, 일찍 와서 실망했느냐?" 장난기 하나 없는 심각한 얼굴로 반문한 샌들우드는 방구석에서 오돌 오돌 떨고 있는 30대 초반 의 여인과 그녀의 품안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2황자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황태후가 앉아있는 옆 자리에 앉았다. 엘레나는 난데없이 나타난 마법사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독이 든 찻잔을 노려보느라 바빴으니까... "나도 한 잔 다오." "스승님...." "나에게 차를 주던지 버려라." 샌들우드의 단호한 음성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황제가 자신이 마시던 차를 앞으로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번 만은 안 됩니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부드러운 태도를 집어던진 황제는 창백한 얼굴로 석고상같이 앉아있는 황태후를 노려보았다. "오늘...제 신하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무지(無知)도 죄(罪)랍니다. 어마마마 정도 되시는 분이, 저 여자의 의도를 몰랐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모르는 척 하셨겠지요. 그냥 눈 감아 주셨겠지요. 그래도 친손자인데,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가 낳은 소생 이라 하여도 황제인 제가 인정한 자식임을 아시면서도 눈을 감고 귀를 막으셨더이다. 그래서... 조용히 처리하려고 합니다. 굳이 더러운 역모의 죄로 보내드리고 싶지는 않으니 그냥...조용히 가십시오. 어마마마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2황자와 유일하게 인정하신 며느리도 곧 뒤따라 갈테니 걱정 말고 먼저 가서 기다리십시오." 샌들우드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칼을 뽑지 않은 것 만해도 황제로서는 엄청나게 참아주고 있는 것이었다. 샌들우드의 분노한 얼굴과,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는 황제의 얼굴, 그리고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황태후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크리스틴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 거렸다. 「꿈의 요정들이여 저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불쌍한 이들을 짧은 시간이나마 망각의 시공 속으로 데려가주세요. 슬*립(Sleep)」 털썩, 털썩 마나의 유동도 일으키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후궁과 그녀의 아들을 잠재운 크리스틴이 황태후 앞에 내밀어진 찻잔을 들어 바닥에 부어버렸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는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스승님, 황태후 전하를..." 샌들우드는 황태후에게 슬립을 걸어 침대위로 이동시켜버리고 예의 흥미로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엄청나게 분노한 황제와 척 봐도 화가 났음이 명백한 크리스틴의 공방전을 구경했다. "즐거우신가요, 폐하." "........" "즐거우시냐고 물었습니다. 건방지다 욕하지 마시고 똑바로 들으세요. 황태자 전하는 살아 계십니다. 폐하의 바로 뒤에 서 계시지요." 크리스틴의 단호한 음성에 얼핏 뒤로 고개를 돌리려던 황제는 이를 갈며 조그마한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가 크리스틴의 망발을 참아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스승인 샌들우드의 마지막 제자라는 사실. 그것을 알고나 날뛰는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노려보던 황제는 뒤통수를 맞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셀레네 황후님께 사약을 내리시는 것이 보고 싶으신가요?" "........!" "자식은 부모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폐하께서 이러한 행동을 하실 수 있는 것 또한 선황께 배우신 것이겠지요. 폐하께서 하시려는 행동은 패륜이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께 세 레네 황후님의 무덤을 뒤집어 업는 행위를 가르치는 행위입니다.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드님 이신 애드리아 전하께서 그러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다면 만족하시겠습니까?" ".........." 황제의 부릅뜬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하던 샌들우드는 몸을 일으켜 차분한 얼굴 속에서 엄청난 분노를 감추고 있는 크리스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식이 부모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자식을....자식을...죽여서도 아니 되겠지요. 낳았으니 거두는 것도 부모의 권리라 하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왜 낳으셨습니까? 책임지지 못 할 짓은 하지 마셨어야지요. 왜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어 부모의 손에 죽는 그런 비참한 생을 살게 하시는 겁니까." 냉정한 얼굴로 차분히 말을 하고 있으나 크리스틴의 눈에 흐르는 피눈물이 똑똑히 보였다. 어려서부터 아비에게 온갖 학대를 받아왔던 크리스틴은 마크의 모습과 황제를 겹쳐 보고 있었다. 그래서 묻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왜...왜...그토록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면서, 서슴없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없으면서...자식을 본 겁니까? 이유가 뭐지요? 왜 낳으셨나요? 애드리안 전하만이 폐하의 아드님이시라면...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가 무엇이 있었나요? 한 여인만 사랑하고 그녀의 자식만을 사랑하신다면 다른 여인들은 무슨 죄가 있어 폐하의 잔인함에 희생되어야 하는 겁니까. 이유를 생각해보셨나요? 이런 결과는 당연한 일이었어요. 폐하께서 외면하신 그 순간부터 언제 어느 때고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후궁이 저분 혼자 인가요? 지금이야 잘 해결되었다고는 하나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거라 누가 그러던가요? 그때도 이리 처리하시렵니까? 아예 다 죽여버리세요. 그러면 후사(後事)를 걱정 하지 않 으셔도 되지요. 황태후 전하의 목도 베고, 후궁들도 그들의 아이들도 모두 죽이세요. 그러면 되겠지요?" 무감각한 어조로 말을 늘어놓던 크리스틴의 입이 한순간에 닫혔다. 황제의 경악에 찬 눈을 피해 시선을 돌리던 크리스틴은 자신이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소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어두운 과거가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 던 샌들우드는 길게 탄식하며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두었다. "울어라. 묻어둔다고 사라지는 기억이 아니다. 마음껏 울고 다 씻어버려라. 너무 오래 참았다. 진즉에 이리 했어야 했어. 내가 어리석었다. 실컷 울고 실컷 원망해라." 얼이 빠진 황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자신의 수염을 붙잡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크리스틴을 다독이던 샌들우드가 문득 황제를 보았다.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침대 위에 누 워있는 황태후와 마리아, 그리고 스테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별로 본 적이 없어 낯설게다. 어미를 많이 닮았어." 샌들우드의 말대로 스테판 황자는 마리아의 판박이였다.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에 금발, 그리고 눈은 감고 있으나 그 속에 감추어져있는 고동색 눈동자. 황제의 얼굴을 쏙 빼닮은 애드리안과는 달리 스테판의 얼굴은 황제에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크리스틴의 말 중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가 황제에게 먼저 충격을 주었기에 귀에 들렸을 뿐이지 그의 마음을 움직 이지는 못했다. 그러한 황제의 내심을 짐작한 샌들우드는 혀를 끌끌 차며 개넌가(家)의 고약한 핏줄을 원망해 보았지만 이번 일은 그로서도 별로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크리스틴의 말대로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면, 마리아가 황태자를 독살하려 하지 않았어야 했다.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금지(禁地)를 건드린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 게 될 것이다. 다만 황태후 엘레나의 일은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분명 마리아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을 터였다. 한 참을 말없이 앉아있던 황제가 샌들우드의 품에 안겨있는 크리스틴의 작은 몸을 빼앗아 안았다. 그리고 소녀의 파들거리는 몸을 다독여주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의 형을 죽였고 나의 동생을 죽였다. 그것이 비록 나의 아버지의 손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그 뒤에서 부추긴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저 여인 역시 용서하지 못한다. 나의 아들은 죽지 않았으나 언제고 또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알기에, 나의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2황자는 황태자의 몫 이다. 나의 아들이니 그 아이가 원하는 데로 결정될 것이다." 자신의 말에 몸을 부르르 떠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황제가 문득 눈물로 젖은 크리스틴 의 턱을 치켜 올리고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황제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 아이의 아비이기도 하지. 난 나의 분신과 같은 아들을 위 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 수 있다. 이 나라 전체를 버린다하여도 나는 나의 아들을 선택할 것 이다. 이해...하겠느냐?" 마치 세상 어느 누구보다 크리스틴의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내심 을 털어놓은 황제는 가만히 심판을 기다렸다. 황제의 커다란 손길이 전해주는 온기를 느끼며 흐느낌을 가라앉히던 크리스틴은 아주 오래전 이 손에서 아비의 손길을 그리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던 레니도 기억해내었다. 마크에게 받은 고통은 그녀만의 몫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상회하고도 남을 만큼 벅찬 사랑을 받아왔음을 기억했다. 크게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던 크리스틴이 작은 두 손을 내밀어 황제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에 볼을 가져다 대었다. "일시간의...혼란으로 폐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리고 폐하의 사랑을 받으시 는 황태자 전하의 선택 역시 옳을 것이라 생각해요. 또한...폐하께서 걸으시려는 피의 길은 황태자 전하를 위한 가시밭길이니 소녀가 어찌 반대하겠습니까. 폐하의 크신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 부러울 뿐입니다." ".....고맙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과거의 악몽에서 비롯된 시련을 견뎌내고 다시 일어선 크리스틴은 자신을 암흑 속에서 건져준 따뜻한 손길과 진실 된 마음에 감사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황제 의 청록빛 눈을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하지만 레이븐에서 애써 구해준 찻잎에 독을 푸신 것은 용서받으실 수 없으세요." '제가 그거 말린다고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세요?'란 말을 꿀꺽 삼킨 크리스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황제를 향해 엄숙하게 약속을 구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차에 독을 타서 사람을 해하지 않겠다 약속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않으면?" "카일...레이븐 상단의 상주님께 부탁해서 황제폐하께 두 번 다시 찻잎을 가져다 드리지 말라 고 부탁하겠어요." "........." 정말 진지한 얼굴로 약속을 요구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잠시 비지땀을 흘리던 황제는 옆에서 키득 거리는 샌들우드를 노려봐준 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않으마." '미안하다.' 마지막 말을 꾹 눌러버린 황제는 어느새 눈물을 지우고 방긋 웃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슬슬 살기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샌들우드에게 얼른 넘겨주었다. "나가실테지요?" "너는?" "어마마마를...처소로 옮겨주십시오. 그 분과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문제는...황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애디가 저 아이와 대련을 하는 날." 이로서 두 모자의 제삿날이 결정되었다. 비록 사서에는 기록되지 않는 비공식적인 접전이 될 것이나 그 날 황제는 황족들에게 이 후로의 반역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선전포고를 하게 될 터였다. 이를 이해한 샌들우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태후를 태후전으로 옮기고 황제와 크리스틴과 함께 대전으로 워프 했다.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든 모자는 일어날 때가 되면 일어날 것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날 밤. 황제가 준비했던 파티는 제 1후궁 마리아 개넌과 스테판 개넌의 자살소동으로 막을 내렸다. 마법에서 깨어난 모자는 바닥을 뒹구는 독이 든 찻잔을 보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황태후가 이미 독살되었다 짐작한 마리아가 잠이 든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은 후 스스로 목을 매달고 자살을 한 것이었다. 잠시 술렁대던 황궁은 제 1 후궁 마리아의 정신 상태가 평소에도 조금 불안정했다는 황태후의 발언에 따라 조용히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 모자의 죽음으로 뛰어왔던 황족들은 황제의 집무실에 불려가 단 한마디의 경고를 받고 처소로 돌아갔다. 「한 번은 용서하나, 그 이후에는 죽음뿐이다.」 그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마리아의 죄상이 담긴 문서와 그들의 가슴 속 깊이 새겨진 황제의 경고는 이 후 황태자의 앞길을 훤하게 비춰주는 태양이 될 터였다. 황제가 거하는 백색궁의 심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사용되는 처소의 한곳에 검은 야행복을 입은 인물이 나타났다. 마치 자신의 안방이라도 된다는 듯 거침없이 어둠을 뚫고 나타난 인영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아름다운 천족이 조각되어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달빛이 은은히 비춰주는 방안에는 거대한 침대가 놓여있었고 안개와 같은 새하얀 휘장이 늘어 져 있었다. 기둥 위에 앉아 있던 한 마리 붉은 새가 침입자를 보고 깃털을 곤두세웠지만 이내 살기를 거두고 날개 속에 부리를 묻었다. 침입자가 주인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듯한 태도였다. 가만히 문을 닫고 침대가로 걸어온 침입자는 그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금발머리 소녀를 한 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세..실?" "우우웅~" 아직은 어린 듯 보이는 소녀가 소년의 나직한 음성에 얼굴을 찌푸리며 베게 속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세실!" "아우, 왜요. 아우웅" 소년의 음성이 약간 높아졌지만 소녀는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고 베게 속에서 웅얼거렸다. 소녀의 대답에 잠시 멈칫 하던 소년이 가슴을 들썩이더니 손을 뻗어 소녀가 꼭 붙잡고 있는 이불을 잡아당겼다. "야! 찻잎 좀 팔아!" "아우웅~ 전하, 저리 가요." "세실, 그 찻잎 나한테 팔라니까? 금화 많이 줄께!" "아우, 안 팔아요. 필요 없어요. 잠 좀 자요, 전하. 아우웅~" 잠을 자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며 짜증을 내는 소녀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던 소년이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달빛에 환히 드러나는 눈부시도록 새하얀 얼굴을 쳐다 보았다. "정말...너...였구나..." 소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넋을 잃고 있던 소년이 그녀의 베게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하...하...욱...흐윽...크흑..."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은한 달빛에 소년의 청록색 머리카락과 그보다는 훨씬 짙은 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백색궁의 주인인 황제 브래들리가 인정한 유일한 아들, 애드리안 챗필드 개넌은 어깨를 들썩 이며 힘겹게 울음을 참아내었다. 그리고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소녀의 이마를 만지작거리다 얼굴을 내렸다. 소년의 바짝 마르고 거친 입술이 소녀의 매끈한 이마에 뜨거운 흔적을 남겼다. "세실...크리스틴 폰 배너. 네가 누구든...껍데기는 상관없다. 두 번 다시 널 놓치지 않아." 기둥위에 앉아있던 카사가 어느새 고개를 들고 그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애드리안은 굳어진 얼굴로 방을 나갔다. 그는 황제가 생각한 것처럼 샌들우드의 재회로 크리스틴이 했던 말을 잊을 만큼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다. ************************************************************************************** <<공지입니다>> 코코님께서...일을 내셨습니다. daum아시지요? 음...거기에...거시기...카페가 하나 생겨부렀습니당. 주소는 cafe.daum.net/ukilovepeople 이구요, 카페 제목은 핫핫핫 <유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랍니다. ((쪽...쪽팔려라...)) 혹시 시간 널널하시고, 여유가 되신다면 가입을..콜록(유키가 첫번째 회원이자 마지막이 될수도..) 그리고 부샵을 모집 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실분이 계시다면...코코님께 말씀드려주세요. 꿈도 크다 하시겠으나, 카페를 만들어주신 분을 위해 이정도 못하겠습니까. 안되면 둘만의 카페로...캬캬캬(퍼버벅!) 나중에 회원 많이 늘어나면(쓰으읍) 거기도 글을 올리기로 약속은 하였습니다. (어찌될지는..) 에또..메신저로 정팅도 하기로 했는데 관심있으시면 얼굴이나...핫핫핫 앗! 맞다, 부샵 모집은요 코코님께서 카페 관리하시는 법을 몰라서 응~ 도와주실분을 찾는거예요. 저도 컴맹인 관계로...콜록 카페 소개는 이쯤 하고, 음...제 글의 미흡한 부분은 일단 제가 설명을 달겠지만 수정도 할겁니다. 그러니 걱정마시고 이해 안되시는 부분은 어떤 것이 이해가 안되는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수정을 하고 보완을 할 수 있습니다. (_ _) 그리고 수정은 처음부터 들어갑니다.(다행히 아직까지 앞부분에 지적이 들어온 적은 없습니다만 들어온다면 적절한 보충을 해야겠지요. 뭐 설정이 맘에 안들고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서 보기 싫다고 하신분도 계시지만 어쩌겠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제 능력밖이란 생각이 들어 과감히..,생입니다.( ``) 제 말빨 셀거라 생각하시는 분들...아닙니다. 글로서는 네, 제가 써놓고도 감탄할때가 있습니다만 말은...못합니다. 가슴에 쌓아두는 스타일이라서...사람들한테 싫은소리 잘 못하지요. 물론 저도 사람인 관계로 엄청나게 열받으면(이럴때는 한동안 꾹 눌러놨다가 한꺼번에 터질때지요) 그때도 말은 못하고...손발이 먼저 나갑니다. 핫핫핫. 그냥 옆에있는거 물고 뜯으면서 쓰러져서 울어버리지요. 친구들이 맨날 답답하다고 하더군요. 음...홧병난다고...그렇습니다. 아무튼 예쁘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새로운 분들이 많이 늘어나셨더군요. 한꺼번에 읽으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한편씩 따라오신 분들보다는 좀 이해가 나았으려나...(- -;;) 아무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리고 30만..10연참(별빛바다님 20연참이 아니라 10연참입니다)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은 관계로.. 조회수 올라가는 것이 유키에게는 두려움이 되어버렸습니다. ㅜ ㅜ (걍 튈지도...) 감사드리고,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나는...간택식이 싫어요! 1. "아우웅~~카사!" 쪼로롱~ 아침 일찍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 크리스틴은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아 볼에 부리를 비비며 애교를 떠는 카사를 쓰다듬어주며 방실 방실 웃었다. "있잖아, 어제 무지하게 기분 좋은 꿈 꿨다? 황태자 전하가 나한테 차를 팔라고 막 떼를 쓰는 거였는데 음...아마 궁에 오니까 기억이 되살아 났나봐. 아무래도 나...떼돈을 벌 것 같아. 그치? 응? 킥킥킥. 정말 기분 좋은 꿈이었어. 금화 준다고 찻잎 팔라고 할 때 그냥 팔 걸 그랬나...우웅...어쨌거나, 음..뭔가 큰 건수가 들어올 것 같아." 한심하다는 듯 떼로록 눈을 굴리며 날개짓을 하는 카사의 부리를 통 튕겨주고 일어난 크리 스틴은 운디네를 불러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따라 나오려는 카사에게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 있으라고 말하고는 샌들우드의 방으로 뛰어갔다. 『전혀...못 느꼈군.』 『둔하다...』 침대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샐라이온이 중얼거리자 그의 옆에 모습을 드러낸 실피드가 볼을 긁적이며 맞장구를 쳤다. 어젯밤 황태자의 침입을 그냥 눈감아 준 이유는 황태자의 절절한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에 대한 소환자의 호감 역시 감응하고 있었 기에 황태자의 무단침입을 슬쩍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거라 생각했던 크리스틴은 그것을 꿈이라 치부해버렸다. 잘되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 저 둔한 소환자를 일깨워줘야 하는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던 샐라이온과 실피드는 엘퀴네스의 등장으로 쫓기듯 정령계로 돌아가야 했다. 『남의 연애사에는 간섭하는 게 아니에요. 촌스럽습니다.』 "스승님~!" 정령들이 쑥덕거리거나 말거나 밝은 얼굴로 샌들우드가 있는 방으로 뛰어든 크리스틴은 아직 잠옷을 입고 있는 노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냐?" "스승님, 있잖아요. 우리 아카데미로 가기 전에 레이븐에 들렀다 가요!" "왜?" "아무래도 약초를 섞은 푸딩이 대박날 것 같아요! 므흐흐흐...어제 돼지꿈을 꿨어요. 금화를 준다는 꿈이요! 이건 성공 할 거예요. 꼭!"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크리스틴의 얼굴에 뛰어다니는 금화가 눈에 선했다. 두 눈을 슥슥 비비며 어린 소녀의 얼굴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금화를 보고 있던 샌들우드가 피식 웃으며 크리스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 이미 차와 향초로 돈을 많이 벌었지 않느냐. 거기서 더 벌어 무얼 하려고? 나라라 도 세울테냐?" 샌들우드의 말에 고개를 획 들어올린 크리스틴이 볼을 부풀렸다. "다다익선(多多益善)! 엄마가 말씀하시길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니, 모을 수 있을 때 가득 모아두라 하셨어요.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는 거라고 만약을 위해 열심 히 모아두라구요!" 레니의 인생지론을 열심히 떠들어대던 크리스틴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샌들우드를 보고 씨익 웃어준 후 방을 뛰쳐나가며 소리 질렀다. "돈 많이 벌면 스승님 잠옷도 사드릴께요!" 큰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샌들우드가 천천히 자신의 잠옷을 내려다 보았다. 알록달록 귀여운 하트가 점점이 박혀있는 새하얀 잠옷이었다. "이게 뭐 어때서?"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크리스틴이 했던 말을 떠올리던 샌들우드가 끌끌 혀를 찼다. "어째 백작을 닮아가는 듯한 것이...." 그랬다. 돈이라면 환장을 하며 설치는 뚱뚱한 배너 백작의 모습과 두 눈에 금화를 담고 떼돈을 벌거라 호언장담하던 크리스틴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부전여전이로고...쯧쯧쯧" 샌들우드를 만나고 힘차게 달려나가던 크리스틴은 낯익은 사람이 복도를 걸어오는 것을 보고 반색을 했다. 그리고 얼른 옷매무세를 단정히 한 다음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사뿐 사뿐 걸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좋은 아침이지요." 반짝이는 은색 갑옷에 멋들어진 롱소드를 차고 나타난 금발의 기사는 백작영애에게 예를 취해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행복하신가요, 영애." 나지막이 들려오는 부드러운 음악소리에 약간 얼굴을 붉히던 크리스틴이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많이 받고 있습니다, 기사님." 기품 있으나,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담긴 대답에 씨익 웃어준 기사는 몸을 일으키며 슬쩍 손을 들어 소녀의 곱슬거리는 금발을 쓰다듬어 주었다. "행복해야한다." "네." 누가 볼 새라 얼른 손을 내린 기사는 스쳐가듯 지나친 그 짧은 만남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시름을 던져버렸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되찾고 소녀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네, 행복할께요." 발목까지 내려오는 남청색 망토를 멋지게 휘날리며 복도를 걸어가는 늠름한 기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어느새 마법사 로브를 뒤집어쓰고 방을 나서는 샌들우드를 보았다. "아직 여기 있었느냐?" "아...세바스티앙 님을 만났어요." "그래? 흠흠. 이야기는 좀 했니?" "이곳은 황궁인걸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든 크리스틴은 샌들우드의 마법사 로브로 뛰어들어갔다. 벌써 열 다섯이나 된 큰 처자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누가 볼까 두려워해야 하건만 샌들우드 역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크리스틴을 안아들었다. "그래, 지금 갈까? 아니면..." "폐하께서는...황태후 전하와 말씀 나누셨을까요?" 반짝이는 눈 안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아직 어리긴 어리다는 생각에 피식 웃던 샌들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가 먼저 브래디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사과를 했겠지. 뭐 맘에 안 들어도 어쩌겠느냐, 제 어미이고 애디의 할미인 것을." "스승님도...계셨어요?" "글쎄다..." 어제 저녁 마리아가 자살했다는 전갈이 오기 전에 그녀는 샌들우드를 찾아왔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달려온 것인지 다급한 얼굴로 황제의 지인이 머문다는 처소에 뛰어 들어온 엘레나는 샌들우드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샌들우드 님!" 선황제, 시아버지의 마법사였으며, 아들을 키워주고, 손자의 어린시절까지 지켜봐준 대마법사를 기억해낸 엘레나는 차를 마시고 있던 샌들우드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황태후가 백색궁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샌들우드의 방을 찾은 황제는 그 장면을 보고 넋이 빠진 듯, 그저 문가에 서서 마치 어린 아이인양 울고 있는 육순이 넘은 어미를 보고만 있었다. "마리아가...그 어리석은 것을 막지 못했어요. 이 일을 어찌 해야 합니까! 어찌 해야 합니까!" 태황후, 엘레나가 눈물을 터뜨리게 만든 것은 죄책감이었다. 자신이 아꼈던 며느리였기에 또한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비(妃)로 들인 것이 자신의 욕심이었기에, 그래서 황제의 분노를 사게 만들어 황궁에 피바람이 불게 만들었다 자책감에 몸부 림치고 있었다. "들이지 말 것을! 그 아이가 그토록 바라지 않던 아이를 들이지 말 것을! 어리석은 제 욕심으로 그 아이가 피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이제...이제...전 어찌해야 합니까, 목이라도 매달아 자살이라도 하면...그리하면 그 아이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겠습니까? 그리하면 제 손자, 애드 리안의 가슴에 응어리졌을 한이 사라지겠습니까? 말씀해주세요. 저만..저만 죽으면 그 아이들 이 다시 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 속에는 마리아나 스테판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오직 자신의 친아들인 브래디와 그가 사랑하는 아들, 애드리안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아들과 손자가 받았던 상처를 지울 수 있는지. 그녀의 고민은 오직 하나 그것뿐이었다. 그런 황태후를 토닥거리며 멍하니 서 있는 황제를 보고 실쭉거리던 샌들우드가 엘레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엇을 걱정하느냐, 브래디는 강해. 애디도 강하지. 선황이자 네 남편인 카렐의 핏줄이고 또 너의 자식이고 손자이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일어선다.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아요. 이 못난 어미 때문에 자식이 죽을 뻔한 기억을 어찌 잊겠습니까! 셀레네 그 아이를 사랑해야 했었습니다. 그 착 하고 순진하기만 하던 아이를...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죽지 않았겠느냐?" "......!"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하였다. 이카루스의 뜻인게다. 네가 셀레네를 받아들였다 하여 그 아이의 명(命)이 길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마리아를 들이지 않았겠지요. 그랬더라면...애드리안에게 감히 누가 있어 해를 가한 다 말입니다. 그리고 제 아들 역시 아파하지 않아도...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요." 흐느낌과 같은 엘레나의 음성에는 죄스러움이 가득했다. 그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가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셀레네를 보고 착하다 했느냐? 순진하다 하였느냐? 정말 그렇게 생각했느냐? 허면 왜 반대를 하였느냐?" 황제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향하는 것을 확인한 샌들우드는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무는 엘레나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이 곳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하나 믿고 살아가기에 이곳 은 너무나 더럽고 너무나 추하고 너무나 차갑습니다. 그것이 싫었습니다. 황후는 강해야 한다 고, 누구보다 강하여 자신을 누르고 올라오려는 비들을 경계해야하고 황제의 뜻에 반하는 세 력을 눌러야 합니다. 그래야 우습게 보이지 않고 그래야 황제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그 아이는 후작가의 여식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순수했습니다. 그 티없이 맑은 눈 을 보고 있노라면...저도 문득 웃음을 짓고 말았지요. 하지만 궁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생 각했습니다. 그 아이가 가진 성정을 모두 덮어줄 만큼 아들이 큰 그릇이라는 것을 몰랐지요. 네...그 아이는 저의 아들이기 이전에 카렐의 아들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강한 여인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그래야 황제의 길이 편안해진다고..." "네 이야기이냐?" 샌들우드의 탄식에 황제와 엘레나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혜안(慧眼)이 그곳에 있었다. "너도 그랬지. 기억하고 말고. 카렐이 지 아비에게 너와 결혼한다 하였을 때, 그 당시의 태황 후 역시 걱정을 했었다. 개넌 가는 항상 그래왔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만을 황후로 들인다. 아내가 죽어도 절대 비를 황후로 앉히지 않았다. 너도 그랬지. 그래서 반대한 것이야. 그렇지? 시아비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형제를 죽이는 것을 보았고, 네 남편이 아들의 형제를 죽이는 것을 보았지. 세레네를 위해 그리 한 것이야. 네가 걸었던 그 길을 걷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샌들우드의 말에 입술을 파르르 떨던 황태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 아이가 부족했어요. 황후가 되기에는 부족했어요!" "그래서 야심있고 똑똑하고 황제를 사랑하기는커녕 집안을 일으켜 세울 생각만 하는 그 아이를 비로 들였느냐?"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엘레나가 중얼거렸다. "내 아들을 사랑한다고...하더이다. 평생을 두고 사모해왔다 그리 말하였습니다. 게다가 독하 기도 하였지요. 후궁들을 들인다 하여도 그 위에 설 수 있다 생각하였습니다." "네게는 없는 면을 본거다. 너에게 없었고, 네 시어미에게도 없었던 것을 본 것이다. 너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야. 선대 황후들 모두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태황후 가 되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가끔 있었지. 하지만 대게는 그러했다. 그래도 말이다... 세레네는 강했어." "......?" "세레네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모든 치료사와 신관들의 반대 에도 불구하고 애디를 낳았지. 그 보다 더 강한 여인이 어디 있겠느냐?" 엘레나의 눈에 스민 경악을 보고 옅은 웃음을 짓던 샌들우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감고 있는 황제를 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몸이 약해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 하였다. 아니 낳을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브래 디는 아내와 동침하기를 거부했어. 하지만 세레네는 해냈지. 하긴 세상 어떤 남자가 알몸으로 뛰어드는 여인을, 그것도 사랑해마지 않는 여인을 마다할까." "헉!" 황제의 숨죽인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나, 다행히 황태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단이 났지. 한 번 터진 수로는 다시 막기 힘들다. 몇 년을 참다 일을 내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지. 너도 기억할게다. 브래디가 헤실헤실 웃으며 다닐 때를. 물론 극도로 조심했고 치료사에게 은밀히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약도 받았다. 하지만 세레 네는 달랐어. 어느 날 덜컥 아이가 생긴 것을 알고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배가 불러오고 나서는 브래디에게 반항을 하였다. 남편을 거부했어.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끝내 목숨을 버리고 남편에게 자식을 남겼다. 그래도 약하다 생각 을 하느냐?" "아....!"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너처럼 말이다. 부드럽지만은 않았어. 한없이 여리기만 한 외모에 숨은 강철을 너는 보지 못한 것이다. 너도 그러했지 않느냐? 브래디의 두 형제가 죽는 것은 막지 못했으나 그들의 어미는 살려주었다. 그리고 몰래 빼내어 도망시켜 주었다. 그렇지?" "어..어..." "이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모른다." 그 자신만만한 대답에 일순 휘청이던 엘레나가 샌들우드의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네, 샌들우드님은 이 개넌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분이시지요. 그리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이냐?" "제가 조용히,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홀로 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더러 자살하는 걸 도와달라는 말이냐?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샌들우드님. 전 아들이 주는 차를 마실 수가 없었어요. 그 아이가 어미를 죽인 패륜아로 만들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랬어야 한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제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니 어리석은 제가 책임을 져야합니다. 도와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후사를 돌보아 주세요. 많이 아파할 것입니다. 핏줄인걸요? 그 피를 반만 이은 형과 동생을 잃고 절 평생 원망했던 아이 입니다. 여리지요. 겉모습만 어른이지 속은 아이랍니다. 아시잖아요. 돌보아 주세요. 지금처럼 훌쩍 떠나지 마시고 옆에 있어주세요. 그래..주실 수 있으시지요?" 엘레나의 긴한 회색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문가에서 조용히 모습을 감추는 황제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이놈의 개논가는 그를 평생토록 부려먹고도 모자라 아예 뼈를 묻으라 요구하는 욕심 많은 가 문이라 생각했다. "헛꿈 꾸지 마라. 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있고 싶은 곳에 있는다. 아들은 네가 지켜보 면 돼. 뭘 망설이느냐. 직접 가서 내게 했던 말과 똑같이 하면 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잘못 했다 용서를 빌 수 없느냐? 그러면 하늘이라도 무너지느냐? 가서 잘못했다 하여라. 세레네를 인정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마리아의 욕심을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여라. 네 말대고 그렇 게 착하고 여린 놈이면 용서해주겠지. 가거라." 한심하다는 얼굴로 주절주절 충고를 하던 샌들우드는 말이 끝나자마자 엘레나를 황제의 처소로 옮겨버렸다. 정말 이럴 때는 자신이 마법사인 것이 천운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가에 서 있다가 그의 말에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는 황제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샌들우드는 그제야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아 마리아와 스테판의 부고(訃告)가 들려왔고, 태연한 얼굴로 나타난 황태후는 며느리가 정신이 나갔었다 증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황제가 있었다. "아무렴 지 애미인것을..." 어젯밤 그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단 일련의 상황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던 샌들우드는 크리스 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바이오니어의 역사에 남은 패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애디의 대까지는...' 샌들우드의 말에 다행이라는 얼굴로 베시시 웃던 크리스틴이 문득 저 멀리 빠른 걸음으로 다가 오는 두 사람을 보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어젯밤 꿈이 생각나며 그녀의 얼굴에 홍조를 만들고 있었다. "스승님, 지금 가도 되지요? 레이븐에 들렀다 가려면 시간이 모자라요." "음...그럴까?" 아무것도 모르고 제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샌들우드는 여느 때처럼 인사도 남기지 않고 훌쩍 황궁을 떠났다. "이런!" 샌들우드가 사라진 지점에 나타난 닭 쫓던 개는 발을 동동 굴리며 이를 갈았다. 일부러 아침 일찍 성장을 하고 호위기사가 오자마자 크리스틴을 찾아왔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 지는 것을 보게 된 황태자는 세바스티앙을 원망했다. "내가 일찍 오라 하지 않았느냐! 조금만 더 빨리 올 것이지...가자!" 어리둥절해하는 기사에게 일갈을 한 황태자는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휘날리며 휙 돌아섰다. 아무래도 간택식에 초대할 인명부를 약간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다. 황제가 있는 대전으로 걸음을 옮기던 황태자의 머릿속에는 크리스틴의 음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처음 그런 환각이 시작된 것은 '아직도 음식투정'을 하느냐던 영애의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세실의 죽음을 알리던 영애의 말을 똑똑히 기억해내었다. 「저는 사람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머리가 아주 나쁘지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니아울리' '아니시드'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여덟 살짜리 평민의 아이를 보며...」 「그 아이는 이미 한 달에 수천 골드를 벌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영애는 스스로를 모자란다 하면서도 세실이 재배하던 약초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백작과 세실만이 알고 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작이 세실로 인해 수천골드를 벌어들인다며 떠벌리 고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요, 하물며 그의 딸이 그런 것에 신경 쓸 위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다. 그깟 평민의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은 귀족의 영애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혀가 잘리고,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목이 부러진 채 죽었습니다.」 「제가...묻어주었습니다. 세상의 잔인함에 목숨을 잃은 그 아이를 직접 화장(火葬)하고 뼈를 부수어 레니가...그 아이의 어미가 있는 곳에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세실의 죽음을 알리며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던 영애의 눈빛, 그리고 태연하기만 하던 세바스티앙의 반응,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던 눈빛들. 그 모든 것들이 어젯밤 늦은 시각에 크리스틴 영애가 머무는 침소에 잠입하여 그녀를 『세실』 이라 부르도록 만들었다. 「아우, 안 팔아요. 필요 없어요. 잠 좀 자요, 전하.」 12살 난 아이의 침소에 들어가 찻잎을 팔라고 떼를 썼던 그때를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잠결에 태연히 대답하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믿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이기도 하였다. 누가 믿어줄 것인가. 이 세상의 어느 누가 크리스틴의 몸에 세실이 있다는 것을 믿어줄 것인가. 하지만 황태자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잠이 든 소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자신이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굳게 믿고 있음을 알았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놓치기 싫은 인연을 다시 되찾았음에 뛸 듯이 기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잠시뿐이야. 넌 내 아내가 되어야 해. 잠시뿐인 자유다. 어디든 도망 가봐. 얼마든지 잡아주지." 자신을 보고도 태연한 얼굴로 샌들우드과 함께 사라져버린 크리스틴을 떠올리며 피식 웃던 황 태자는 긴장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는 세바스티앙을 힐끗 거렸다. "그래...넌 황후가 될 거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 소녀의 부드러운 이마에 인장을 찍은 탐스러운 입술을 쓰다듬던 황태자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이 없다는 바이오니어의 황태자만이 지을 수 있는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 아잉~오늘도 고비를 넘겼습니당. 므흣 어제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놀다가 그냥 자버렸습니다. 다행히..2장 써둔것이 있어 후다닥 써서 올립니다. 캬캬캬캬(퍼버벅~!) 아...드디어 30만이 넘어부렀습니다. 어찌합니까아~~~!! 자신만만해했던 비축분은 그제로 쫑이나고 겨우 오늘 반나절 힘써서 한편 올린것을!!! 흑흑흑(철푸덕!) 한 열흘만 말미를 주세요. 하루 두 세편씩 쓸 수 있다고 가정을 했을때, 평균 1,2회 연참하면서 10흘 버티면 10편 연참이 가능할테니. 설마...그때까지 40만이 넘지는 않겠지...흠흠 이제는 더 이상의 아픔은 없을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밝아지리라 예상을 하면서...핫핫핫 술레잡기를 좀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잡아준다니 잡아보라지요. 황태자가 어디까지 쫓아갈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지 않습니까? 음화화화화. 글쟁이가 쏠로면 쥔공도 쏠로여야 합니다. 캬캬캬캬캬(퍽!) 에구에궁 어찌되었든 카페에 가입해주신 43분께 감사드리고, 그 중에서도 쥔장이신 코코님과 운영자 자리를 덥썩 물어주신(!) 별빛바다님, 해준하고 해놓고 도망가신 실드님, 음악을 주신 행복이란?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_ _) 그 외에도 저와 대화를 나누시러 늦은밤 학교와 직장엘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들어오셨던 이루아님, 독각와룡님, Egotism님, Kalon님 감사드립니다. (빠지신분 없지요) 에또..카페 소식으로 <추천 계시판>이 생겼습니다. 독자님들 중에 직접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코코님의 배려와 별빛바다님의 수고로 생긴 게시판이니 많이 들러서 글을 추천해주세요. 본인의 글을 올리시길 권장합니다. 줄거리나, 한 번 읽어달라 직접 홍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글을 찾아보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유키를 위한 것입니다만 캬캬캬캬) 마음껏 자랑하시고 홍보해주세요. (_ _) 그럼 여러분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추신 : 재상이 왜! 해약을 못 만들었을까의 의문은 67회 사설에 있습니다!!! 또 추신(긴급) : 아하하, 관조자님...빼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 _) 죄송해요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페 정팅있습니다.(공지만! 본문내용없음) ===========<<카페 공지>>================================================================ 안녕하세요. 올리라는 글은 안올리고 이렇게 공지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밤 12시 카페 채팅이 있을 예정이오니 시간이 허락되시는 분은 참여부탁드립니다. 시간은 다음주 부터 바뀔 예정이니 공지란에 원하시는 시간을 올려주세요. (오늘은 장금이 완결을 봐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12시입니다) 그리고 일단 화요일 정팅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절대로 바꿔야한다 생각되시면 공지에 올려주세요) 카페 주소는 http://cafe.daum.net/ukilovepeople (유키를 사랑하는 사람들) 입니다. 카페 채팅으로 들어오시거나 메신저를 사용해주시면 됩니다. ======================================================================================= 벨러님 비평감사합니다. 전 제 글이 그렇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 핫핫 앞으로 더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부터 수정 들어갈 예정입니다. 긴 시간을 두고 처음부터 수정할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좀 바뀔 수도 있음을...콜록...유념하시고 가능한한 자세히 설명을 해주세요. 물론 연재에 지장이 되지 않는 선에서 차근차근 해나갈테니 시간이 걸릴 겁니다. 설정상 문제점이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 개인적으로 맘에 안드는 부분(이유 필), 말도 안되는 부분 등등 메세지로 보내주세요. 혹은 메일(sweetangel210@hanmail.net)로 보내주세요. 앞으로 한메일은 조아라 분들만 사용하게 될 겁니다.(아는 사람이 한 사람 밖에 없었다는) 감기 조심하시고(저는 아직 안나았습니다ㅜㅜ) 언제나 행복하세요!!! 이런식으로 어물쩍 70회를 넘기는 군요, 캬캬캬캬캬(퍼버벅!) 철푸덕! ㅠ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나는...간택식이 싫어요! 2. 레이븐 상회에 들러 카일과 독대를 하고 나온 크리스틴은 언제나 그랬듯이 샌들우드의 품에 안겨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단지 이틀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도 왜 그렇게 기숙사 방이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백작가로 돌아가 식사를 해야겠다는 샌들우드를 배웅을 한 크리스틴은 도도돗 달려가 침대위에 풀썩 뛰어올랐다. "음...좋아, 좋아. 음..." 황궁의 일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고, 더 이상 신경을 쓸 일이 없었다. 앞으로 열심히 학문을 갈고 닦아 독립을 위한 대비를 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결의를 다 진 크리스틴은 낑낑거리며 일어나 책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방을 나섰다. ".......!" "안녕." 한손에는 책을, 한손으로는 문손잡이를 잡고 방을 나서려던 크리스틴은 문 앞을 막고 서 있는 검청색 머리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방 주인의 놀란 얼굴에도 불구하고 빤히 그녀 의 얼굴을 쳐다보던 이샤 리쿠에 파 크레이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웃었다. "역시 먼저 집으로 간 게 아니었네. 소식도 못 들었고, 그렇지?" 크리스틴이 들고 있는 책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아샤가 별안간 크리스틴의 몸을 밀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 방인 양 거실의 소파에 앉아 손짓을 했다. "국상(國喪)이 있어서 종업식 없이 이번 학기는 공식적으로 오늘 끝났거든. 학장님이 어 제 모든 학생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공지를 보냈는데, 몰랐구나. 어디 갔다 왔니?" 이야기를 하는 폼이 어제도 왔었던 것 같았다. "아...." 국상이란 말에 마리아와 스테판을 떠올리던 크리스틴은 급히 책을 놓아두고 이샤를 남겨둔 채 방을 뛰어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막는 이가 있었다. 왠지 긴장되어 보이는 얼굴로 나타난 카민이 크리스틴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이야기도 않고 어딜 갔다 온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들어가자. 일단 지금 아카데미 에 남아있는 학생들은 우리밖에 없어." "네?" "선생님들도 모두 자리를 비우셨다. 스테판 황자님이 돌아가시고, 마리아 황비님이 어제 변 을 당하셨어. 그분이 우리 아카데미 출신이라 학장님이랑 함께 궁으로 가셨다. 국상은 3일 후부터야. 준비를 해야겠지." "......" 카민에게 어깨를 잡힌 채 방으로 들어온 크리스틴은 나란히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두 사 람을 위해 손수 차를 끓이고 과자를 내어왔다. "시집가면 사랑받겠네, 그치?" "콜록" 이샤의 삐딱한 말에 기침을 하던 크리스틴은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며 뭐라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카민을 보았다. 그리고 차분히 자리에 앉아 손님이 입을 열길 기다려주었다. "어제 어디 갔었어?" 성질 급한 이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소녀를 잠시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런 관심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일편 불편하기도 했다. "꼭 말씀을 드려야 하는 건가요? 휴일에는 어디든 다녀 올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크리스틴의 대답에 이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제...널 궁에서 본 사람이 있어서 그래." ".......!" "그것도 디아나가 죽는 걸 네가 보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정말이니?" "........." 자신의 질문에도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는 크리스틴을 노려보고 있던 이샤가 덮어두었던 말을 꺼냈다. "분명히 넌 황태자비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어. 그런데 어떻게 황태자 전하와 나란히 앉아서 반역자를 처리하는 걸 본 거지?" 분명 그녀의 아버지인 슈메르 파 크레이오에게 들은 이야기일터였다. 일국의 공작이 되어서 백작의 여식 얼굴을 몰라봤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크리스틴의 예상을 깨고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추궁을 하는 이샤를 보고 피식 웃던 크리스틴이 차가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선배님은 디아나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렇지요? 제가 황태자비 가 되는 것이 그리도 문제가 되나요? 전 분명히 간택식에 나가지 않을 거라 말씀드렸었지요. 그리고 황태자비는 선배님이 하실 거라 확신하지 않으셨나요? 친하지는 않았지만 학우였던 이의 죽음을 그리 쉽게 넘겨버리고 혼인에 집착하실 정도라면 선배님도 조금 힘들기는 하겠군 요. 나가주십시오. 짐을 꾸려야하니 방해가 됩니다. 카민 선배도 나가주세요." 염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무엇에 대한 염증인지는 알 수없어나 그녀의 말 곳곳에 숨겨진 실소를 못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굳어진 얼굴로 이샤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킨 카민이 크리스틴에게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안하다. 괜히 심란할텐데 방해를 했어. 미안하다." 안도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카민은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이샤의 입을 틀어막고 방을 나갔다. 조용해진 방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크리스틴은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속물." 크리스틴의 말에 화르륵 불길을 일으키며 나타난 카사가 위로를 하듯 그녀의 볼에 부리를 비볐다. "정말 웃기지 않니, 카사? 귀족들이라는 게 다 저럴까. 반역이 일어났어, 마리아님도 스테판 황자님도 돌아가셨지. 동급생이 죽었고, 남작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었는데 내가 황태 자비 자리를 노릴까 걱정이라니...정말...신물이 난다." 아침까지만 해도 상쾌하던 기분이 오물통에 들어갔다 빠져나온 듯 금새 엉망이 되었다. 우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크리스틴은 주섬주섬 책과 옷가지를 챙겨 샌들우드에게 통신을 보냈다. "스승님, 저 피곤해 죽겠어요. 좀 데리러 와주시면 안되요?" 몇 미르 전만해도 생글 생글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던 제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짐 가방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샌들우드는 대답도 없이 아카데미로 날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니요. 국상이 있을 거라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데요." "흠...그렇겠군." 턱을 만지작거리며 크리스틴의 옷가방을 백작가로 워프 시킨 샌들우드는 소녀의 작은 손을 잡 고 방을 나섰다. "산책이나 하자. 아직 여기 구경도 못했지? 시장에 들러 구경도 하고 천천히 걷다가 피곤하면 마법을 쓰자꾸나." 샌들우드의 배려어린 말에 다시 미소를 되찾은 크리스틴은 언제 우울해했었냐는 듯이 스승의 따뜻한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기숙사 건물 앞에서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카민과 이샤를 보았지만 아는척하지 않았다. 그들도 샌들우드의 등장에 놀랐는지 뭐라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렇게 모르는 척 두 사람을 스쳐간 크리스틴은 곧 아카데미 정문 앞을 서성이는 네 명의 소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희들끼리 머리를 마주대고 숙덕거리며 문 앞을 서성이던 남자아이 중 하나가 크리스틴과 샌들우드를 보고 히죽 웃더니 친구들의 등을 두드렸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소년들은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 "저, 지난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과의 의미로...음...저희 집이 대장간을 하거 든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조금씩 모아서 이걸 만들었습니다. 받아..주시겠어요?" 대장간을 한다던 소년이 내민 것은 구리로 만든 목걸이였다. 동전을 녹여서 만든 것인지 동화(銅貨)와 색깔이 똑같은 목걸이의 끝에는 조그마한 별이 반짝 이고 있었다. 구리로 별의 테두리를 만든 후 작은 수정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그것을 말없이 받아든 크리스틴은 함박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서 구리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또래의 소년들에게 받아보는 최초의 선물이었다. "어울...리나요?" "아...." 살짝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는 크리스틴의 얼굴을 보고 넋을 잃고 있던 소년들이 우윳빛 피 부위에서 반짝이는 구리 빛 목걸이와 수정을 보며 헤헤 웃었다. "나중에 돈을 벌면 은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소년들의 맨 뒤에 서 있던 소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까만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16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은 허름한 옷차림에 그저 평 범하게 생긴 그저 그런 소년이었다. 식당에서 제일 먼저 그녀를 보며 빈정거렸던 소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또래보다 덩치가 큰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보답으로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마음이 담긴 선물이에요.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평온한 어조로 마음을 담아 인사를 남긴 크리스틴은 입이 귀에 걸린 채 옆으로 길을 비켜주는 아이들 사이를 걸어갔다. "인기가 좋구나. 험험" 절대로 싸구려처럼 보이는 목걸이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 마디 한 샌들우드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자꾸만 미소를 짓고 있는 제자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너도 다 컸구나." "네?" "남자 아이들에게 선물을 받을 만큼 많이 컸어. 시집을 가도 될 나이긴 하지." 아쉬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말을 듣고 어이없다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이 계속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소년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겉보기에는 시집을 가도 될 나이죠." "겉보기?" "그럼요. 전 아직 스프를 만들 줄도 몰라요." "스프?" "스프도 못 만들면서 시집을 가면 큰일이지요. 남편을 굶겨죽일 수는 없잖아요?" "하하하. 인석아, 그러면 아예 스프를 끓일 줄 아는 놈한테 시집을 가면 되지 않느냐?" "아!" 샌들우드의 농담에 탄성을 내지르던 크리스틴이 활짝 웃었다. "그래요! 맞아요, 스승님. 요리를 잘 하는 사람과 혼인을 하면 되는 거군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틴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샌들우드가 혀를 끌끌 찼다. '요즘 세상에 요리를 잘 하는 남자가 어디 있누, 주방장이라면 또 모를까. 아니지, 하인을 시키면 되는데 갑자기 웬 요리?' 독립을 할 것이라 굳게 다짐한 크리스틴의 속내를 모르던 샌들우드는 그녀의 대답에 의아심을 가졌으나, 그냥 농담이려니 넘겨버렸다. 반면 자신이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 나야지 하고 결심한 크리스틴은 이제 13세가 된 자신의 나이를 떠올리며 피식 웃어버렸다. '이 나이에 웬 혼인?'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크리스틴은 저 멀리 보이는 노점상을 보고 눈을 반짝 빛냈다. 몇 피텐이 떨어진 곳까지 구수한 냄새를 퍼뜨리는 주인공은 노릇노릇 구워져 우아한 자태로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스쿨터 구이였다. 동그란 몸통에 오톨도톨 빨판이 달린 수십 개의 늘씬 한 다리가 달린 스쿨터는 기다란 막대기에 몸을 배배 말고서는 먹음직한 브라운소스를 덮어 쓰고 '나 먹어봐라'하고 유혹하고 있었다. "저기..스승님?" "응?" "저...기..저..스쿨터..비쌀까요?" 침 흐르는 소리에 귀에 들렸다. 어려서부터 지나다니며 보기는 했지만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아 언제나 구경만 했던 그림의 떡이 크리스틴에게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스쿨터 구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피식 실소를 짓던 샌들우드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늦으며 제자의 입에서 침이 주룩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야 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이거 얼만가?" "아, 네. 5쿠퍼입니다." "허, 그럼 그걸 10개, 아니 20개만 주게." "네?" "스승님!" "네 입만 입이냐? 나도 좋아한다. 험험."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꾹 눌러준 샌들우드는 재신을 만난 듯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스쿨터를 바쁘게 커다란 종이에 싸는 상인을 보고 동전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5개 더 넣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헛헛. 고맙네. 많이 팔게나." "감사합니다." 은화 한 닢을 들고 싱글벙글하며 고개를 숙이는 주인을 뒤로 하고 등을 돌린 샌들우드는 스쿨터 구이를 하나 꺼내어 크리스틴에게 주고 자신도 하나 입에 물었다. "음....맛이 변한 건 아니군." 스쿨터 자체의 꼬질꼬질한 맛은 씻은 듯 없어지고 쫄깃쫄깃, 오톨도톨, 오독오독 소리가 나며 입안에 가득 퍼지는 새콤달콤한 맛을 음미하던 샌들우드는 스쿨터 구이를 입에 물고 주룩 눈물 을 흘리는 크리스틴을 보며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냐?" "....흑...너...너무...마이서요...흑..." "......." 생전 처음 먹어보는 스쿨터 구이에 빠져버린 크리스틴은 손에 쥐고 있는 구이 하나를 먹는데 장장 30미르를 소비했다. 너무 맛있고 아까워서 조금씩 먹어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반면에 순식간에 15개를 해치워버린 샌들우드는 제자의 몫을 탐내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크리스틴의 모습에 다시 20개를 샀다. "이건 내 돈으로 사는 것이니, 다 내꺼다. 됐느냐?" 그 말을 듣고서야 안심한 듯 손에 쥐고 있는 스쿨터를 조금씩 야금야금 뜯어먹는 제자를 보고 푹 한숨을 내쉬던 샌들우드는 이번에는 자신도 천천히 먹으며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본격적인 시장나들이가 시작되었다. 여기 저기 펼쳐진 노점상을 일일이 구경하고 음료수며 빵이며 과자 같은 것을 늘어놓고 파는 곳을 절대로 놓치지 않고 찾아가 조금씩 사서 입에 넣어 맛을 보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 으면 그것을 사가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까지 노점상에 주저앉아 구경을 했다. "마음에 들면 사려무나." 샌들우드의 말에 도리질을 친 크리스틴이 작게 중얼거렸다. "소중한 게 많아지면 치마가 무거워져요." "........." 구리로 만든 목걸이도 소중히 여기는 크리스틴이니 뭐라 더 할말이 있겠는가. 지금도 약초를 공부하며 만든 서책과 한스 영감이 남긴 비법이 적힌 책, 한스 영감의 가슴에 박혀 있던 단도와 레니와 주고받은 편지들 때문에 치마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축 늘어나 있는 것을. '참으로 고약한 습관일쎄...' 뭔가 중요한 것이 생기면 무조건 치맛단 속에 집어넣는 제자의 버릇을 익히 알고 있던 샌들우 드는 무한주머니라도 하나 만들어줄까 고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구경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두 사람은 결국 로만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식당은 지 나치고 허름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여관 겸 식당을 찾아갔다. "왜 하필 여기냐?" "웅...여기 푸딩이 맛있데요. 스승님." "......." 오늘 참으로 말문이 많이 막힌다 생각을 하던 샌들우드는 가벼운 식사와 종류별로 푸딩을 시 키는 크리스틴을 보고 혀를 찼다. 잠시 후 식사는 뒷전으로 하고 가지각색의 맛과 색을 가진 푸딩을 모두 맛보며 뭔가 고민을 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녀의 의도를 알았다. "사전조사냐?" "당연하죠. 음...여기 것은 다 좋은데 너무 달아요." 냉큼 대답을 하면서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혓바닥을 길게 내미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던 샌 들우드는 크리스틴의 알록달록한 혀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게다가 재료가 너무 싸구려예요. 몸에도 좋지 않은 색소를 써서 이렇게 물이 드는 거죠. 보이세요?" "넌 어떻게 아느냐?" 궁에서 처음으로 푸딩을 먹어본 아이치고는 모르는 것이 없다 혀를 차던 샌들우드는 손가락을 하나 세워 까닥거리는 크리스틴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일 아저씨가 일러주셨어요. 평민들이 먹는 푸딩은 값이 싸지만 질이 너무 안 좋다고. 흠흠. 이제 우리는 그곳을 공략하기로 했어요." ".....공략?" "맛도 좋고, 몸에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고, 누구나가 먹을 수 있는 푸딩!" 결국에는 그것이었다. "돈...이구나." "그럼요!" 샌들우드의 넋이 나간 얼굴을 향해 씨익 웃어준 크리스틴은 그제야 옆으로 밀어놓은 그릇을 당겨 음식을 깨끗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스쿨터를 3개나 먹고, 주먹만한 빵을 하나 먹고, 과자를 2, 3개 집어먹고, 상큼한 라이모니아 주스를 두 잔이나 마시고 푸딩을 20개나 맛본 아이답지 않게 참으로 굶주려 보이는 모습이었다. "부전여전이야..." 레니에 대해 거의 알지못하는 샌들우드로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렇게 밖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정신이 나갔나봅니다. 비축분도 하나 없는 주제에 이렇게 주루룩 적어서 올려버리면...연참은...흑 이게 다 님들이 공지 띄웠다고 원망하신 덕분이니 연참이 늦어져도 용서해주셔야 해요. 흑 그리고 시간이 많이 늦어 못 오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알지만 쥔장님이 오늘 인사를 하자니 어쩌겠어요. 힘없는 유키 걍 가야지요. 캬캬캬캬...컥 오늘 못오시는 분들은 걱정마시고 원하시는 시간 공지에 올려주시고, 다음주에 뵈요. 그리고 음..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전국구로 정모나 한번...흠흠흠 ( ``)~ 처음부터 지금까지 연재따라오신분들...뭐라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힘드시지요? 글을 쓴 저도 그걸 한번에 다 읽는 것은 불가능한데...(제가 쓴 한글 원고는 또 몰라도...) 등이라도 두드려드려야 하는데(토닥토닥)...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멜은 언제나 열려있으니 메일로든 카페로든 글을 남겨주시고 메세지(점점 늘더군요), 리플, 추천(아 속보여), 선작(이만하면 된터이지만...). 태클. 지적,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마족의 계약 개인적으로 기분좋게 읽은 책입니다만 어디가 닮았다는 것이지요? 궁금하다는... 자, 여러분 사설 길어지기전에 물러나겠습니다. 행복하세요오~~~~~~!!! 추천 : 왜! 시나리오는 안보내 주시는 거지요?? 흑흑 연참을 원하시면 시나리오나 아이디어를 던져주세요!(버럭!) 앗 그리고 이거는 소설을 쓰는게 아니라 2D 애니로 만들어 산업디자인 작품전에 쓸것이여요. 2~5분짜리. (_ 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나는...간택식이 싫어요! 3. 로먼에 있는 식당이란 식당은 다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모든 종류의 푸딩을 섭렵하고 난 후, 크리스틴이 샌들우드와 함께 백작가 로 돌아간 것은 매우 늦은 시각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샌들우드의 손을 잡고 거실로 워프 한 크리스틴은 자신을 향해 두 팔을 활 짝 벌리고 있는 백작부부의 사이로 뛰어갔다. 아카데미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것인지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을 아무 말 없이 반겨준 백작은 인사가 끝나고 크리스틴을 데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크리스틴의 밝은 얼굴을 주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궁에 있었다고 하더구나." "......." "사이먼 공작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알았다. 어르신을 따라간 것이냐?" "...네." "처형을 할 때에도 있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네." 망설임이 느껴지는 크리스틴의 대답에 짧게 숨을 들이키던 백작은 혀를 차며 딸의 손을 잡았다.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손을 잡은 백작은 살며시 딸의 작 은 몸을 끌어당겨 포근히 안아주었다. "할 말이 있느냐?" "......." "남작가에 대한 소식은 들었다." "아..." "울고...싶으냐?" 1년 전만 하더라도 백작은 결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약해진 딸의 모습을 보았고, 이번 일을 감당하 기에는 딸이 너무 어리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크리스틴은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말없이 백작의 품을 벗어난 크리스틴은 떨리는 눈으로 아비 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제가...죄책감을...느껴야 하나요? 제가...슬퍼해야 하는 건가요?" 크리스틴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백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최소한 자신이 알던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면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슬픔 따위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아니 그간의 달라진 모습을 생 각한다면, 아무리 자신을 괴롭힌 아이라 하더라도 같은 학우가 죽은 것에 대 해 슬퍼하는 것이 크리스틴의 성정에 맞는 일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소녀의 눈에는 자신의 대답이 아비를 실망시킬까 걱정하는 기색이 있 을 뿐 그 어떠한 망설임이나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간 것일까, 그 작은 손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사람의 목이 베이는 것을 보고도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과거의 크리스틴이 되어 버린 것일까 고심을 하던 백작이 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심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했느냐? 슬프지 않았다면...남작의 여식이 죽을 때 어떤 생각을 하였느냐?" "........" 백작의 질문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백작은 그녀가 슬퍼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학우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흔들리 길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백작을 걱정하게 만든다는 것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아버지..." "말해보거라." "저는...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빌었어요." ".....?" "권력도 없고, 탐욕도 없고, 사람을 해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곳에서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기도했어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백작에게 다가간 크리스틴은 그의 숱 많은 머 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흰머리를 쳐다보았다. 약간 처량해 보이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담긴 크리스틴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고 결코 열릴 것 같지 않던 소녀의 작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람들이 죽은 것이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어요. 디아나의 죽음은 슬 펐지만 그것은...제게 아무런 감정을 남기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 왜 그 런 짓을 했을까 안타까웠지만 제 가슴에 와 닿지 않았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 이상했어요. 사람들의 죽음.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왜 이 런 걸까요?" 문득 시선을 돌린 크리스틴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백작을 보았다. 처형장을 벗어나면 느꼈던 그 짧은 혼란과 샌들우드가 파울로를 감옥으로 보내 는 것을 보고도 무감각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듯 크리스틴의 머리 한 구석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며 요 란한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죽음을 보지 않아서...처형되기 전에 고개를 돌려서? 아닌걸요. 전 디아나의 눈을 보았어요. 그 아이의 눈에 가득하던 두려움, 원망, 믿을 수 없다는 경악,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들...그런데 저는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어요. 살아있으면서...부모와 외가를 죽음으로 몰아넣 은 대가로 살아남은 삶 보다는...그것이 났다고...아.." "......" "더럽게 살지 말고, 그냥 가는 것이 좋다고. 다른 사람들 역시...황태자 전 하께 독을 쓴 것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둘 중 하나가 죽 어야 한다면 미래를 위해 그들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을 잡기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황태자 전하는 돌아가셨겠지요. 그 자리에 스승님이 안계셨다면 모이라도 죽었겠지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죽었 을까요? 전 그렇게 남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거라고.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해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 따위 없어져야 한다고...사람이라면...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준비를 했었나봐요.'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경종을 울려대던 경종이 부서져 내렸다. 황태자에게 해약을 해주는 순간부터 자신이 그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 다는 것을 깨달은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서던 크리스틴은 자신을 잡으려는 백작의 손을 뿌리쳤다. 푸르기만 하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세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또 다른 하나의 세실을 찾은 것만 같았다. '난...그들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담담했었다. 하나 둘 사람들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코로 스며들어 머리를 마비시키는 짙은 피 냄새를 맡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죽였어?' 모이라에게 쓰인 독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함구하고 디아나를 집으로 보내 주었다. 얼마든지 잡아들일 수 있기에 그녀가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 겨주었다. 그리고 민에게 모든 정보를 캐오라 의뢰를 했다. 카일에게 레이븐을 정리하 라 종용을 하고, 샌들우드에게 궁으로 가자 청을 넣었다. 그리고...지켜보았다. 한스를 죽이고, 황태자를 독살하려한 사람들의 목숨을 재상과 공작의 손에 쥐어주고 그들이 포박되어, 심문을 받고, 처형되는 것을 말없이, 한없이 기 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세상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무언가에 쫓기듯 그렇게 뒤로 물러서던 크리스틴은 등 뒤에 느껴지는 차가 운 감촉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영문을 몰라하며 다가오는 백작을 피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내달렸다. "아가...!" "크리스?" 눈물을 흘리며 문을 열고 뛰어나가는 크리스틴을 보며 샌들우드와 백작부인 이 따라가려 했으나 백작의 만류에 걸음을 멈추었다. 심각한 얼굴로 크리스틴이 사라져버린 곳을 쳐다보던 샌들우드가 이를 갈았다. "무슨 말을 했느냐!" "....어르신...저 아이는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혼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찌 웃을 수 있었다 생각하십니까? 스스 로를 속인 겁니다. 그 감정이 되살아나 슬퍼하는 것이니 잠시 그대로 두십시오." "하지만...!" "강한 아이이지 않습니까? 과도기라 생각해주십시오. 오래전에는 그렇지 않았 지만 저 아이는 병 치례를 한 후 성정이 많아 부드러워졌습니다. 시간이 필요 하겠지요." 백작의 간곡한 어조에 노기를 누그러뜨린 샌들우드는 그래도 불안한 눈으로 활 짝 열린 문을 노려보았다. 크리스틴의 성정과 세실의 성정은 확연히 달랐다. 아니 아예 극과 극이었다. 어제 그 일을 보고도 아침 일찍 웃으며 나타난 것을 보고 그 차이를 극복해 내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그런데 소녀의 아비는 그것을 자위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며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걱정을 하면서도 딸이 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간섭을 피 하는 백작을 보며 혀를 차준 샌들우드는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 갔다. 크리스틴이 돌아올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정령들이 붙어있고, 수정구를 가지고 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부를 터이니 이번 만은 백작의 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백작부부가 어두운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들 중 어 느 누구도 백작이 착각한 것임을 알 수 없었다. 크리스틴이 뒤늦게 죽음이 란 것을 인식하고 감정의 혼란을 느끼는 것이라 오해하고 말았다. 잠시 스스로를 추스릴 시간을 주기 위해 뒤로 물러났던 세 사람은 깜깜한 밤중에 크리스틴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 왜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는지 간과 하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아!!!!" 카사의 불빛에 의지해 언덕위로 뛰어올라간 크리스틴은 커다란 나무 밑에 볼록 솟아난 무덤위에 쓰러졌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숨도 쉴 수 없었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거칠게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던 크 리스틴은 그녀를 안아주는 따뜻한 기운을 느끼지도 못했다. "엄마! 나...나...나...난..." 아주 오래전에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거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더러운 숨을 내쉬며 제대로 먹지도 못해 뼈만 남은 모녀를 학대하던 검은 머리의 사내가 크리스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누굴 탓할 것인가?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아비의 더러운 피를 받아 다른 사람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욕심만 채운 것에 대해 도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왜...왜..낳았어요! 왜 낳았어요, 엄마. 나...왜 낳았어요!" 차가운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손톱으로 땅을 긁어대며 울부짖던 크리스틴 이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부었다. "똑같아...내가 디아나와 다를 게 뭐야. 내가...파울로와 다른 게 뭔데! 내가...아빠랑 다른 게 뭐가..뭐가...있는 거야...흑...흑흑.." 마크의 학대는 세실의 작은 가슴에 분노를 쌓았다. 한스의 죽음은 세실의 가슴에 한을 만들었다. 레니의 죽음은 절망을, 디아 나의 행위는 독심을, 알렉산드로의 등장은 배신감을 낳았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크리스틴을 변하게 만들었다. 서서히..아주 서서히..자기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란 것을 메마르게 만들었다. '몰랐어...' 진정 느끼지 못했다. 한스가 만든 독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 순간 세실은 복수를 꿈꾸었다. 그리고 살인자와의 기약 없는 만남을 그리며 해약을 연구했다. 3년 동안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스를 죽인 사람을 찾아 그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한껏 비웃어주며 한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고 불을 질러주리라 맹세했다. 크리스틴을 비웃으며 권력에 빌붙었던 디아나가 그토록 추종하던 모이라에게 그 독을 썼을 때 차라리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살인자를 잡을 수 있다고. 세실이 5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던 그자를 만나게 되었다고. 그리고 아량을 베풀어주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디아나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수사를 하려는 학장을 말렸다. 그리고 천천히 시간을 두고 황태자를 시해하려 했던 이들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자료와 증거를 모았다. 그렇게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짜며 자신은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사람들의 동정적인 시선을 굳건히 견뎌 보이며 홀로 우뚝 섰다. '어떻게...내가...!' 그리고 모든 것에 자신이 생긴 순간 공작을 끌어들였다. 그녀가 모았던 증거만 해도 재상 혼자서 충분히 해결 할 수 있었고, 굳이 그들의 손을 벌리지 않더라도 샌들우드가 황제를 만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도 공작과 재상을 끌어들이고, 그들이 해결하는 것으로 조작을 했다.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인 양 그들이 민이 모아온 자료들을 보며 괴로 워하고 슬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응징이었나? 세실을 속인 알렉산드로와 모이라의 아비인 사이몬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을 보고 즐기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스스로는 두 사람이 손을 잡게 만드는 것이 황태자를 위한 일이고, 황제를 위한 길이며, 나라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한스가, 알렉산드로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파울로의 죽음을 막 지 않았다. 살려줄 수도 있었지만 당연하다는 듯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 디아나가 죽는 것을 보며 다음 생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다.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고, 1년간이나 성곽에 효수된다는 것을 알면서 도 그것이 오히려 났다고 주장했다. 그러고서는 그녀의 죽음을 외면하고 끝까지 스스로를 기만했다. '행복했다...' 그래서 웃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샌들우드의 위로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디아나가 독을 쓴 그 순간부터 크리스틴에게 있어 그녀는 죽은 사람이었다. 한스를 죽인 살인자와 관련이 있는 공범. 그 외의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고대했던 처형식과 더불어 과거 세실을 괴롭혔던 모든 원흉 들이 사라졌기에 가뿐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느냐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였다. '5년이나 준비했어.' 레니에게 독약을 만드는 약초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그 순간을 꿈꾸어 온 것이다. 이를 악물로 해약을 만들고, 그 모든 상황을 발 벗고 나서서 뛰어다닌 목적 이 그것 하나였으니까. 자신이 받았던 모든 슬픔과 절망과 배신을 그들의 죽음으로 보상받고자 하였다. '난...악마야.'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주위 모든 사람을 속이고 태연히 착한 척 살아왔을까. 눈물마저 메말라 버린 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자신을 안고 있는 커다란 새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쪼로롱~ 커다란 눈을 팽그르르 돌리며 머리를 갸웃하는 불꽃을 닮은 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쓰라린 눈을 흙 묻은 손으로 비비적거렸다. 카사의 붉은 날개가 그것을 저지하려는 듯 다가왔지만 크리스틴은 차가운 손 으로 그의 온기를 밀어냈다. "이제...내 곁에 있어주지 않아도 되요. 정령계로 돌아가세요. 그동안...고 마웠어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듯, 치마를 털며 일어난 크리스틴은 다시 크기를 줄여 그녀에게 다가오는 카사를 밀어내었다. "계약을 해지하는 것을 배우지 못해 지금은 자유롭게 해드릴 수 없지만. 곧 놓아드릴께요." 크리스틴의 건조한 얼굴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는 카사를 외면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늘 높이 날아올라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카사를 외면한 크리스틴은 서둘러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물과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똑바로 들고, 가슴을 활짝 편 크리스틴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 옆에 자리하고 있는 신전을 보았다. 은은한 달빛아래에서 반짝이는 신전이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된 것인 양 앞만 보고 걸어가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머리 위를 맴도는 새를 의식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소리를 내는 하급정령은 없어요. 그리고 카사는...도마뱀이지요. 새가 아니라. 실피드의 존재를 느끼고도 제 옆에 있을 수 있는 존재는... 그와 동급인 정령왕 밖에 없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름만 부르지 않았지, 이미 '카사'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크리스틴의 작은 속삭임에 '삐익!'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하강하던 카사는 그의 날개를 붙잡고 늘어지는 실피드에게 불꽃을 피워 올렸다. 『가게 내버려둬. 어느 때고 지켜본다 했지. 어떻게 하든 내버려둔다 했지. 가만히 있어라. 조용히 따라가면 돼. 널 거부한 게 아니다. 스스로를 거부하 고 도망가는 거야. 아니,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흥분하지 마라. 홍염의 불꽃.』 샐라이온이란 이름이 가진 의미를 말하며 바람을 일으키는 실피드를 보고 잠시 주춤하던 카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하늘 높이 올라갔다. 『몇천 년 만에 보는 진지모드군.』 언제나 덜렁거리는 실피드에게 충고를 받은 것이 못내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어느새 진정이 된 낮은 목소리로 빈정거려준 샐라이온은 벌써 신전 입구에 도착한 크리스틴을 따라 날개짓을 하기 시작했다. 『젠장, 정체를 들켜서 쪽팔리면 쪽팔린다고 해라, 이 도마뱀아!』 『그 정도도 못 알아보면 그 분의 아이가 아니다. 파란 바람둥이.』 『우드득!』 샌들우드가 붙여준 별명으로 맞대응 하며 여유롭게 날아가는 샐라이온을 찢 어버리고 싶다는 듯 광풍을 일으키며 발광을 하던 실피드는 억겁의 세월동안 함께 해온 불덩어리를 노려보며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 아무리 원수 같은 사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소환자가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크리스틴의 소유였고, 그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존재였다. 실피드가 모습을 감추고 신전으로 날아가는 그 때를 맞추어 대지의 기운과 물의 기운 역시 대신관 그레고리가 거하는 신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와아....늦었지요? 죄송해요 아침부터 올리려고 했는데 점심시간까지 조아라가 절 싫다고 외면하더군요. ㅜㅜ 지금 병원 앞 pc실이예요. 혹시나 하고 디스켓 들고 왔습니다 .캬캬캬 훌륭하지 않습니까. 콜록. 지금 침맞으러 들어가야 해요. 그래서...웅... 오늘은 이게 다 일것 같다는... 침맞으면서 열심히 구상해서, 내일은 분량 많~~~이 올려드릴께요. 그리고 오늘부터 카페에도 연재합니다만...읽기가 힘든 관계로..콜록 누구 태그 아시는 분 좀 가르쳐 주세요. 백그라운드 색이랑 글자 크기 조절이 안된다는.. 일단 시간이 없어 이정도로 하고...밤 늦게나 들어올듯합니다. 여러분 건강! 또 건강 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추신:분위기가 조금 어둡지만 금방 괜찮아 질테니 너무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내일까지 꾹 참았다가 읽으심이..콜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나는...간택식이 싫어요! 4. 언제 어느 때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던 신전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저녁 기도가 끝나는 시간이면 더 이상의 방문자를 받지 않는 다는 의미로 그리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크리스틴은 새하얀 신전의 문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며 뒤돌아섰다. 물론 문이 닫힌 것은 안식(安息)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밤이 늦더라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여기 왜...왔을까..." 문은 두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손이 가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본심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와 크리스틴의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복수, 원망, 미움, 배신감, 그리고...복수를 이루었다는 승리감과...미래에 대한 희망. 가장 힘들다 생각했던 것을 단번에 풀어내었으니 이제는 두 발로 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이라 불러도 좋고, 독립을 위한 노력이라 하여도 좋았다. 홀로 설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다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신전 입구의 계단을 내려온 크리스틴은 그녀를 이곳을 오게 만든 사이프러스로 다가갔다. 천족의 분노로 두 갈래로 쪼개어지고, 불에 타 사라졌던 사이 프러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와 다름없는 늠름한 모습으로 신전을 지키고 있었다. 혼자 우뚝 서 있으나, 너무나 크고 너무나 위대해 보이는 나무. 이카루스 신전의 수명과 함께 한 나무의 거대한 몸을 쓰다듬으며 그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던 크리스틴은 지친 듯 나무에 등을 받치고 앉았다. 그리고 멍 하니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은하 수를 만들며 쏟아져 내리는 별빛을 보았다. "아름답다..." 하나, 둘...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에 몸을 웅크리며 물끄러미 별을 세고 있던 크리스틴의 눈에 뭔가 이질적인 것 을 발견했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선회하고 있는 붉은 점. "카사..." 삐이익! 크리스틴의 작은 속삭임에 기다렸다는 듯이 적막을 깨며 괴성을 지른 한 마리의 불새가 마치 해성처럼 긴 꼬리를 휘날리며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함께 있어주지 않아도 되요. 정령계로 돌아가세요, 샐라이온."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내려오는 새를 본 크리스틴은 혼잣말을 하며, 카사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조금 전과는 달리 소환자의 명령을 무시한 샐라이온은 여유 있는 몸짓으로 크리스틴 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파드득 날개짓을 하더니 서서히 몸체가 커지며 새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꽃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화르르 솟아난 화염(火焰)은 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홍옥과 같은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남성체로 변화했다. "샐라이온..." 『언제 알았냐고 묻지 않겠습니다, 소환자여. 하지만 저를 돌려보내시겠다는 말씀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아닌 의지를 전달하는 샐라이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낮고 차분한,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저음의 목소리였다. "제가 계약을 하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침대만큼이나 커다란 불새가 눈을 깜빡이고 있 었지요. 그때 카사가 도마뱀이 아니었던가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스승님이 샐라이온을 보았을 때의 표정을 보고 확신을 했지요. 하지만 의심하지 않았어요. 실피드도, 노아스도, 엘퀴네스도 제가 부른 이름과 상관없이 스스로 나타나서 계약을 했어요. 왜...불의 정령왕만 은 나타나지 않았을까. 혹시 내가 못 알아 본 것은 아니었을까. 계약을 하자는 말도 없었는데 어째서 카사만은 항상 나의 곁에 있어주는 것일까. 과연 실피드와 같은 정령왕이 있는데도 물러나지 않는 하급정령이 있을까..." 독백을 하듯 이어지는 크리스틴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샐라이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의 주위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알고 계시다니 편안하게 대하겠습니다.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저는 카사로 크리스와 함께 할 것입니다. 저의 의지는 신의 뜻과 함께 하니, 소환자의 원.치. 않.는. 명령을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다시 커다란 불새로 화해 차츰 차츰 불꽃을 줄여나가던 샐라이온은 손바닥만한 카사로 돌아갔 을 때에야 몸을 둘러싸고 있던 화염을 지우고 크리스틴의 어깨위로 포르르 날아올랐다. 그리고 추위에 떨고 있던 소녀의 작은 몸을 따스하게 안아주며 위로해 주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건만 그것이 소환자가 진정 원하는 바가 아님을 지적하며 얼굴에 부리를 비벼대는 샐라이온의 몸을 쓰다듬어주던 크리스틴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 거렸다. 그의 말처럼 정말 떠나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격이 없다 생각했을 뿐. "저는...샐라리온의 보살핌을 받을 만큼 착한 아이도, 가치가 있는 아이도 아니에요. 전... 전..." 지친 얼굴로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던 크리스틴은 입술을 꼭 깨물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중에 스승님께 여쭈어보고 계약에서 자유롭게 해 드릴께요. 지금은...고마워요." 샐라이온의 온기가 없었더라면 몸을 벌벌 떨고 있었으리라. 이기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샐라이온이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욕하던 크리스틴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지금은...너무...피곤해요..." 크리스틴이 샐라이온의 품속에서 따뜻하게 잠들어있던 그 시각, 백작가는 꿀을 강탈당한 벌집 처럼 소란스러웠다. "빨리 나가서 찾아와! 못 찾으면 죽음뿐이다!" 토실토실한 살을 푸닥거리며 하인들을 닦달하고 잠을 자던 사병들을 불러들여 딸을 찾아오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른 백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차는 샌들우드를 외면했다. 잠시 나가서 머리를 식히고 오라고 내보낸 크리스틴이 해가 뜰 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사람들을 보내어 찾아볼 생각을 한 것이다. 집을 지키는 기사들을 제외 하고 남녀노소 모두가 크리스틴을 찾아 나선 후에야 거실로 돌아온 백작은 긴 응접실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는 백작부인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멀리 가지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지요, 백작님." "큼...부인. 사람들이 찾으러 갔으니.." "제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설사 그들이 못 찾는다 해도 어르신이 나가셨으니 데리고 오시 겠지요. 하지만 왜 백작님이 그 아이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일깨워주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네, 쓸데없지요. 디아나란 아이는 반역을 저지른 집안의 아이이고, 크리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하던 아이였습니다. 제 잘못을 쏙 빼놓고 제 딸에게 칼까지 휘둘렀지요." "내 딸이기도 하오, 부인." "......" 백작부인이 크리스를 혼자만의 딸인 양 이야기 한 것이 못마땅한지 슬쩍 끼어들었던 백작은 부인의 사나운 눈초리에 입을 닫았다. 안하무인,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그라 하여도 아내와 딸에게는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내본 역사가 없었다. 찔끔하며 뒤로 물러서는 백작을 보고 한숨을 삼킨 백작부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차를 들이키며 숨을 가다듬었다. "문제는 그 아이가 죽었다면 좋다고 박수를 쳐도 모자랄 판에 백작님은 크리스가 죄책감을 가지게 만드신 겁니다. 그것이 문제지요. 왜 우리 크리스가 그 아이의 죽음에 책임을 느껴야 하는 거지요? 왜 우리 크리스가 그 몹쓸 아이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나요?" 평소 하인들까지 세세한 신경을 쓰며 사려 깊은 행동을 보여주었던 백작부인으로서는 참으로 냉혹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을 떠나, 딸이 상처받 지 않기를 원하는 어미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며 답을 요구하는 백작부인에게 뭐라 입을 열려던 백작은 샌들우드의 품에 안겨 나타난 소녀를 보고 입을 닫았다. 눈물과 흙으로 꼬질꼬질해진 얼굴을 샌들우드의 목에 기대고 잠이 들어있는 아이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15살이면, 평민 자식들은 벌써 혼처를 알아보고 시집갈 준비를 할 나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이 딸을 어찌 해야 하는 것인가. "깨워주십시오." 백작의 차가운 말에 잠시 멈칫하던 샌들우드는 슬쩍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어깨를 흔들어 크리 스틴을 깨운 후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짜악! "......!" "백작님!" 어안이 벙벙해진 샌들우드와 백작부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크리스틴만 노려보던 백작은 엄한 얼굴로 딸의 손을 잡고 서재로 향했다. 다짜고짜 딸의 뺨을 때리더니 어디론가 끌고 가는 백작을 노려보던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능구렁이 같은 것." "그렇지요." 한 순간이나마 딸에게 손찌검을 한 것에 분노하던 백작부인은 혀를 끌끌 차는 샌들우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준 후, 사람을 시켜 크리스틴을 찾으러 나섰던 사람들을 찾아오라 명했다. 따뜻한 차도. "기다릴 것이냐?" "네." "흠......." 마크에게는 질릴 정도로 맞아본 세실이었으나, 크리스틴으로서는 생전 처음 당한 손찌검에 울지도 못하고 딸꾹질을 하며 허리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자신을 주시하는 백작의 시선을 피했다. "왜 이런 짓을 하였느냐?" "......." "우리가 걱정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느냐? 말도 않고 뛰어나가 들어올 생각도 않다니! 내가 그리 가르쳤느냐!" "......" 백작의 호통에 눈물을 글썽이며 입술을 잘근거리던 크리스틴은 대답도 못하고 바닥을 노려보았다. "울 생각은 하지도 마라! 나이가 열 다섯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눈물로 잘못을 비는 것이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백작의 목소리에 서둘러 눈을 비벼 눈물을 지워냈다. 그것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던 백작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슬프더냐, 그렇게 아프더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이어지는 백작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럼 되었다. 잊어라." "......!" "울만큼 울었고, 아파할 만큼 아파했다니, 그만 하란 말이다." 영문을 몰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딸을 쳐다보고 있던 백작이 실날같은 가는 눈을 쭉 늘이며 씨익 웃었다. "내가 그 남작의 여식에 대해 일깨워준 것은 혹시나 네가 스스로를 속이고, 마음속에다 또 묻어두고는 있지 않은지 걱정을 해서다. 지난 세월 네가 품어왔던 고통에 더 큰 상처를 만 들 필요는 없어. 그때그때 다 털어버리고 앞만 보며 살면 된다." "......"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아가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어제는 어제다. 한 번 지나간 일은 돌아오지 않아. 감정도 마찬가지다. 현실에만 충실해라.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난 네가 그런 아이가 되길 바란다." 백작의 차분한 음성에 담긴 진한 사랑을 느낀 크리스틴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하지만..." "........" "하지만 저는 나쁜 아이예요. 아버지. 전 디아나가 죽길 바랐고, 그 사람들이 죽어서 잘 되 었다 생각했어요. 그리고...그리고..." "그것이 뭐가 나쁘냐?" 울먹이는 크리스틴의 말을 냉큼 잘라버린 백작은 혀를 끌끌 찼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든 크리스틴은 멍하니 백작의 입을 보았다. "아버지, 이해 못하시겠어요? 스승님과 함께 정보길드에 찾아간 것도 저예요. 디아나가 독을 쓰는 장면이 담긴 수정구를 감추고 제가 그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증거를 찾으라 했어요!" "잘했구나." "......" "반역은 반역이다. 누가 뭐라 해도 그 사실이 변하지 않아. 어차피 죽을 목숨들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감히 내 딸에게 칼을 휘두르고도 살아있을 줄 알았느냐? 그것도 나쁘다 할 것이냐?" 삼천포로 빠진 백작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던 크리스틴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크리스틴의 말을 되묻던 백작이 씨익 웃었다. 회심의 미소 같기도 하고 승리의 미소 같기도 한...진정 사악한 미소였다. "설...설....아...버지?" "오냐." "혹시...그 다른 아이들도...아니지요? 그렇지요? 설마, 아버지가 그러셨을 리가 없어요. 그렇지요?" "뭘 그랬을 리가 없느냐?" "........" 백작의 반짝이는 푸른 눈 안에 담긴 의미모를 섬뜩함에 입을 닫은 크리스틴은 또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리던 백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하라지 않았느냐! 뭐가 나쁘다는 것이냐? 혼날 짓을 하면 혼나야 하는 거야. 미운 짓을 한 놈은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죽을 짓을 했으니 죽은 거야! 미워할 놈 미워하고, 죽을 놈 잘 죽었다 박수를 쳐 주는게 나쁜 짓이냐? 당연한 것이다. 암..당연하고 말고." 큰소리를 빵빵 치고 있는 백작도 조금 전에 크리스틴에게 마음을 들여다보라 한 것이 내심 찔리는 지 헛기침을 했다. "그게 사람이야. 알았느냐? 슬퍼할 줄도 알아야하지만 잊어주는 현명함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잊어라. 울었으니 되었다. 슬퍼했으니 된 거다. 넌 네가 해야 할 일은 다 한거야." 이해를 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보는 크리스틴의 두 어깨에 두 손을 척 걸친 백작이 실죽 미소를 지었다. "난 아무리 싫어했던 놈이라도 죽으면 장례식엘 간다. 그리고 거기서 마음껏 울어준다. 그렇다고 내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놈을 좋아했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기 때문에 해주는 거다." "...네?" "죽었으니 울어주는 거다. 잘 가라고 빌어주지. 그리고 뒤돌아서면 잊는다. 일생 도움도 안 되는 놈을 기억해서 뭐 하느냐? 남들 보니까 울어주는 거야. 뭐, 쬐끔 슬플 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괴롭힐 놈이 없어서 섭섭한 거야. 이해하느냐?" '나 사악해요'표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틴의 맑은 두 눈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백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 너는 네 어미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아 걱정이다만, 뭐 괜찮아 지겠지. 알아두거라. 그것이 귀족의 삶이다. 내가 죽고, 네 어미가 죽어도 당당해져야 한다. 하물며 널 손톱만큼도 생각해주기는커녕 이용하려고 발버둥치고 널 죽이려 했던 인간을! 감히! 황제 폐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시해하려 한 놈들은 목을 백번 쳐도 모자란 법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서 열심히 죄나 빌라고 기도해주면 되는 거다." ".........." "그런 놈들은 백해무익한 존재들이다. 세상에 수천이 있다 해도 일생 도움이 안돼. 그런 놈들 때문에 네 인생을 허비하지 마라. 조금 전에는 울고 싶을 때 울어야 속에 쌓이는 것이 없어 그리 말한 것 뿐이었다." 서슴없이 이어지는 백작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딸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던 백작이 작게 속삭였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너무 행복하게 웃으면 욕먹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면 적당히 슬퍼하는 척 해주고 웃음을 삼켜라. 넌 속마음이 너무 드러나. 자신을 7할 숨겨라. 그것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아...!" "가족들 앞에서는 솔직해도 된다. 널 믿어주는 사람들 앞에서는 솔직해야한다. 하지만 세상 에는 믿을 수 있는 놈들보다 경계해야할 놈들이 더 많아. 그것이 어렵지. 단 하나라도 괜찮다. 세상에 네가 의지하고 목숨을 걸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많다. 그것을 유념하고 처신 해야한다. 알겠느냐?" "......" 크리스틴은 자신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백작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잊을 수 있겠지?" "......." "싫으냐? 싫어도 해야한다. 아비의 말을 명심해라. 동정심도 좋고 배려도 좋다만 지나치면 해가 된다. 넌 그렇게 살면 안돼. 이 아비를 봐라. 나처럼 살아라. 그리고 웃어라. 그 놈들의 죽음이 진정으로 잘되었다 생각하면 마음껏 웃어라. 그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그럴 가치도 없는 놈들이다. 너에게 미움을 받은 놈들은 오죽했으면 그러할까. 안 봐도 뻔하다. 마음껏 기뻐해주고 남들 보면 조금 울어주면 돼.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 해라.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겠느냐?" "....그런건...비겁한 것 같아요, 아버지. 전 가진 것도 많고 충분히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럴 능력도 있었지요. 그런데...제가 사지로 몰아넣었어요. 어떻게...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크리스틴의 진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백작은 딸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여주었다. "넌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한 대를 맞으면 열배로 갚아줘라. 그래야 다른 놈이 찝쩍거리 지 못한다. 은혜를 받으면 이자를 쳐서 갚아주고, 빚이 생기면 수백 배 이자를 물어 받아 내거라. 그것이 돈을 버는 지름길이다!" "......." 뭔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 말을 들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던 크리스틴은 백작의 얼굴 위에 겹쳐지는 또 다른 얼굴을 기억해내었다. 「대가없는 것은 받아서는 안 된다. 무슨 꿍꿍이가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해. 능력에 맞는 것만 취하고 구해라. 못 올라갈 나무를 쳐다봐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능력을 펼치고 미래를 준비해라. 그것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언젠가 레이븐 상회를 다녀온 후, 마크에게 줄 돈만 빼놓고 돈을 저금하던 레니는 입일 닳도록 그리 충고를 했었다. 「신분이 천하니 돈이라도 있어야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신분을 살 수도 있다. 마음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돈이 있어야해. 돈을 모아라. 미래를 준비하는 거다.」 어딘지 모르게 돈에 집착하던 레니와 백작의 모습이 겹쳐지자 눈을 깜빡이며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잠시간 그녀를 흔들어대며 지옥으로 가라 소리를 지르던 마음속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버지...제가 그렇게 해도 비겁하지 않은 것인가요? 제가 그 사람들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아 도 괜찮은 건가요? 그래도..괜찮은건가요?" 희망을 달라고, 그렇다고 대답해 달라 애원을 하는 크리스틴의 푸른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백작이 껄껄 웃었다. "비겁? 비겁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건 능력 안되고 덜떨어진 놈들이나 쓰는 말이다. 네가 능력 이 없느냐, 무엇이 부족하냐? 비겁하지 않다. 당연한 거야. 힘 있는 놈들은 힘을 쓰라고 신이 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것을 썩혀서 무엇 하느냐,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신의 뜻이 다. 이 아비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겁? 어느 놈이 비겁하다 손가락질 할 것 같으냐? 넌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것이다. 자랑스러워해라.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서라. 넌 칭찬받아 마땅하다. 만에 하나 손가락질 하는 놈이 있으면 부러뜨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힘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힘을 기르면 된다." "......." 정말 뭔가 이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힘을 쓰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기대며 그들의 힘을 빌렸다. 그렇게 능력이 없었을까? 아니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다 자부해도 될 만큼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 과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허면, 그것으로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그저 약초나 팔아 돈이나 벌고, 언제나 스스로를 죽여 지냈다. 아카데미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않은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당당해질 수 있었건만 그들의 비난을 감내하며 어떻게든 이미 지를 바꾸려 노력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나만 당당하면 되었던 거야!' 크리스틴의 마음 곳을 어지럽히던 먹구름이 물러갔다.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른 듯 활짝 개인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든 크리스틴은 흐뭇한 얼굴로 지켜 보고 있는 백작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마법, 정령, 뛰어난 머리.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재능을 썩혀두고 있었다. "아버지!" "고맙지?" "네!"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숨길 수 없는 대견함을 드러내며 딸을 다독여주던 백작은 크리스틴의 머리에 살짝 입맞춤을 하며 속삭였다. "많이 아팠지?" 뺨을 때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세실로서는 그런 손찌검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 했다. 여린 피부가 아직도 화끈거리기는 하지만 기분 좋은 아픔이었다. 부모의 사랑이 담긴 매를 어찌 아프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크리스틴은 아니되 크리스틴으로 살아가는 세실에게 있어 난생처음 느껴본 부정이다. 기꺼웠다. 이런 손찌검이라면 얼마든지 맞을 수 있다 생각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감사해요." "...딸을 혼내고 고맙다 인사받는 사람은 나뿐일거다." 아비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주는 딸을 번쩍 안다든 백작은 크리스틴의 여윈 몸을 토닥여주며 백작부인과 샌들우드가 기다리고 있을 거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면돌파하는 것은 시간은 단축될지 모르지만 상처가 남는다. 너무 곧은 나무는 부러져.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돌아가며 살아라. 어떤 비바람에 휘둘리더라도 절대 부러지지 않는 갈대가 되어라." 언제나 곧게 생각하며, 은근히 고집스러운 딸아이의 성정을 걱정한 백작은 주옥같은 충고를 해주었고, 보답으로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보답으로 받았다. 며칠 후, 은밀히 찾아온 민은 수도에 있던 자작가 네 곳이 폐가망신하여 시골로 쫓기듯 내려 갔다는 소식을 들고 왔다. 그들이 거래하던 아가트 상회가 문을 닫으며 휘청거릴 때 의문의 사업가가 그들의 상권을 모두 사들이고 그들과의 거래를 거부한 것이 타격이 컸다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레이븐에서는 절대 손을 거들어줄 수 없다 고개를 저었고 덕분에 휘청거리던 살림을 건사하지 못해, 빚을 갚으려 저택까지 팔고 일부는 작위까지 팔았다 하였다. 한달도 되지 않아 폐가망신하고 작위를 반납하고 도망간 집안의 자녀들 중에는 크리스틴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름들이 몇몇 있었다. 로잘린 페론, 캐서린 가빈, 스타샤 로우먼, 헤스티아 그린. 디아나와 함께 몰려와 크리스틴을 구타했던 소녀들의 이름이었다. 「내가 가만히 둘 줄 알았니? 너에게 칼을 휘두르고 모욕을 준 인간들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다.」 머릿속에 맴도는 백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크리스틴은 민에게 차를 권했다. "정말 위대한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차분하나, 뭔가 속이 시원하다는 목소리에 차를 홀짝이던 민은 통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부정은 위대했다..였다.) ***************************************************************************************** 정말 죄송합니다. 어제 하루종일 너무 바빠서 글을 올릴 시간이 없었어요. 게다가 먼길 다녀오느라 몸살이 나는 바람에 이제야 올립니다. 에...양으로 승부하죠! 한번만 봐주세요...흑흑 ㅠㅠ (철푸덕!) 음 크리스틴은 아직 소녀라 생각하고 봐주세요. 어른들도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만 순수한 아이들은 그 정도가 심하다 생각합니다. 쉽게 고민하고, 쉽게 떨쳐버리고, 쉽게 마음을 상하고, 쉽게 일어섭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면...음...이건 크리스틴의 성장기라 할 수도 있겠지요, 마음껏 고민하고 마음껏 아파하면서도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설 수 있는 그런 강한 여인이 되기 위한 시련으로 생각합니다.(핫핫 괴롭히면서 제가 즐거워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조금이나마 제가 고심해서 늘어놓는 글을 보고 도움이 되셨으면...조금이나마 인생 사는데 도움이 되는 충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백작의 입을 빌었습니다. (이건 어제 제가 먼 길에서 만난 어느 신사분의 충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입니다. 절 보시더니 백작처럼 휘어지는 삶을 살라고 하시더군요. 강하면 부러진다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그 말이 떠나질 않아 이렇게 적어보았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 자, 그러면 다음편은...또 열심히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고, 칭찬해주셔서 감사하고, 크리스를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나는...간택식이 싫어요! 4. "이제 괜찮으냐?" "네, 스승님. 감사해요." "나에게 감사할 것이 뭐가 있느냐?" "...전부 다요." 샌들우드의 인자한 얼굴을 보며 방긋 웃던 크리스틴은 문득 자신의 어깨위에 앉아있는 카사 (계속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의 날개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스승님, 계약한 정령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해요?" "응?" "계약을 해지하려면...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방법이 있지요?" 그 순간 샌들우드는 보았다. 카사의 금빛 눈동자가 붉게 변색되는 것을.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 안에 이글거리는 화염을 안고 무언의 협박을 하는 카사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던 샌들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지만 가르쳐주면 4대 정령왕이 그를 살려두지 않 을 것임을 카사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200세도 못 넘기고 이카루스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방법은...없다." "네?" "그래, 네 친화력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나처럼 정령들한테 미움을 받으면 가능할까 의지만으 로는 불가능하다." 다시 금안으로 변하는 카사의 눈을 보며 히죽거리던 샌들우드가 문득 굳은 인상으로 나타나 크리스틴의 위치를 알려주던 실피드를 떠올렸다. "헌데...계약을 해지하고 싶으냐?" "아..." "왜? 남들은 못해서 안달인데?" "그게...그냥...궁금해서요." "아, 그래?" 카사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말을 바꾸던 크리스틴은 밝은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짓을 하는 카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해요. 투정 부렸나봐요.' 쪼로롱~쪼로롱~ 기분이 좋은 듯 금안을 가늘게 뜨고 부리로 크리스틴의 볼을 비벼대는 카사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피곤했을테니 이만 자거라. 내일 보자." 따뜻한 손으로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샌들우드는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 을 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백작부부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틴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한 통의 서신을 받았던 백작은 딸의 일 때문에 미처 펴 보지 못했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나?" "뭐 하나지요. 이렇게 초대장까지 보내준걸 보면 진심이겠지요." "흠..." "그래도 이샤와 모이라라는 공작영애들이 있는데 감히..." 약간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백작부인을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던 백작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 우리 가문이 어때서 그런 말을 하는거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돼지 같은 작자들보 다야 우리가 훨씬 낫지. 더구나 크리스가 어디 그런 아이들하고 비교라도 되오?" 이래서 팔불출이란 말이 나왔나 보다. 황태자의 면전에서 황제를 비웃었던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백작은 왜 황실에서 크리스틴에게 간택식에 꼭 참석하라는 황제의 친서가 담긴 초대장을 보내왔는지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반면 샌들우드는 백작이 꼭 들고 있는 금박이 박힌 초대장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뭐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들이 많기는 많군...' 황태자가 크리스틴의 정체를 눈치 챘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는 샌들우드는 그 초대장이 단순히 자신을 의식해서 보낸 것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만에 하나 크리스틴이 지목된다 한들, 정작 당사자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 이미 혼사는 물 건너 간 것이 아닌가? 안되면 도망이라도 갈 제자의 고집을 익히 아는 샌들우드는 '딸이 황태자비가 되면!'을 외 치면서 주먹을 불끈 쥐며 희열에 차 있는 백작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빽이 있으면 우리는.....크흐흐흐흐!" 보아하니 동전 굴리기를 하고 있었나 보다. 쨍그랑 쨍그랑 소리가 나는 웃음을 터뜨리던 백작은 백작부인의 손에 잡혀 침소에 들었고 홀로 남아 책상위에 있던 초대장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샌들우드도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돌아 갔다. 크리스틴이 초대장을 보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하면서... 다행히 샌들우드의 궁금증은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속시원하게 풀렸다. 그것도 배너 백작가의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화끈하게 풀렸다. "저~~~~얼대로 안가요, 아버지! 이건 황제 폐하가 아니라 이카루스님의 뜻이라도 안가요!" "왜!" "싫어요!" "뭐가?" "황태자 전하가 싫어요! 간택식도 싫어요! 제가 왜 그따위 간택식 때문에 궁에 가야하는 건데요!" "초대장이 왔지 않느냐! 폐하께서 친히 글도 남기셨다. 이건 어.명.이야!" "어명이고 어묵이고 전 안가요!" "가!" "안가요!" "도대체 무슨 고집이 그리도 센 것이냐! 가서 얼굴만 보이면 된다는데? 누가 너더러 황태자비 가 되라고 하더냐? 가서 얼굴만 보이고 와!" "싫어요! 어차피 스승님 때문에 보낸건데 제가 뭐 하러 가요? 스승님이나 보내세요." "....아!" 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든 백작부부가 거실 한 곳에 앉아 차분한 얼굴로 차를 마시는 샌들우드를 보았다. "뭐냐?" "........" 그제야 황제의 의도를 짐작한 백작은 침울한 얼굴로 초대장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것 보라는 듯 볼을 뚱하니 부풀리고 눈을 떼구르르 굴리는 크리스틴을 노려봐준 후 머리를 짚었다. "젠장. 한 건 하나 생각했더니만..." "......." 오로지 돈 벌 생각만 하는 백작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그런 백작을 보고 한숨을 폭 내쉬던 크리스틴이 백작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아버지, 사업 하나 하실래요?" "엥?" "제가 생각해둔 게 있는데, 그렇게 돈을 벌고 싶으시면 저랑 동업해요." "도...동업?" "제가 구상해둔 것이 있는데 아버지가 자금을 대주시면 5 : 5 로 이윤을 나누어 드릴께요." 간택식에 가야한다고 윽박지르던 모습을 내던진 백작이 얼른 몸을 일으키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머리에는 '사업'이란 말만 맴돌고 있었다. 백작부인과 샌들우드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왠지 닮아 보이는 두 부녀는 머리를 마주대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을 번쩍이며 크리스틴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백작이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흠...그러면...6 : 4로 하자." "5 : 5. 제가 구상한 거니까 그 이상은 못 드려요. 어차피 아버지께 말씀 안 드렸으면 다 제 것인데 제가 뭐가 아쉬워서..." "투자금을 주잖아!" "레이븐에서도 받아요!" "내가 더 많이...아니, 내가 다 내면 되잖니!" "이미 계약 끝났어요!" "헉!" "제 이윤의 50%니 많이 드리는 거예요. 자, 그러니까 저 간택식에 안가도 되지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간택식에는 가야지." "왜요!" "폐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는데 안가면 불충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빠지세요!" "싫다!" "아버지!" "이미 알았으니 양보 못해.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나 몰라. 크흠. 그런 큰 건을 그냥 넘기면 내가 배너 백작이 아니지. 껄껄껄. 우리 딸 누굴 닮아 이렇게 똑똑할까. 자, 그러면 너는 가서 옷이나 맞추어라. 나는 레이븐에나 다녀와야겠다." "아버지!" "부인 잘 부탁하오. 가장 예쁜 후보로 만들어주시오. 험험. 난 이만 바빠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대는 크리스틴을 남겨두고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고 급히 거실을 나가는 백작을 보고 얼이 빠져있던 백작부인이 딸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저러시니?" "어머니, 힝. 제가 잘못했나봐요." "응?" "제가요...음...아니에요. 그런 것이 있어요." '푸딩이군...' 백작부인의 말에 슬쩍 꼬리를 내리고 먼 산을 보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샌들우드는 피식 웃어버렸다. 어차피 투자금이라 해봐야 다 크리스틴이 약초와 향초 를 팔면서 얻은 이윤의 일부를 쓰는 것뿐이었다. 레이븐이 아니라. 그러니 전적으로 자신의 몫인데 그것에 백작을 끼워준 크리스틴을 보며 실실거리던 샌들우드는 묘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백작부인을 보며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험험. 그러면 가서 준비나 해야지? 대단한 집 영애들하고 겨뤄야 하는데 고친 옷으로는 좀 그렇지 않나?" 살이 빠진 후 단 한 벌의 옷도 주문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것을 고쳐서 입는 것을 슬그머니 지적해준 샌들우드는 벌떡 일어나 투지를 불태우는 백작부인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가야하는 것이니, 두말 말고 채비를 하거라. 직접 가서 마담을 만나야겠다." "네?"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그곳에 가서 좋은 옷감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가서 옷 갈아입고...아니다. 그냥 가자꾸나. 나가자. 스승님도 같이 가시겠어요?" 절대로 가장 아름다운 후보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백작부인의 시선을 외면한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구원요청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었다. "다녀오거라." "스승님...어머니..." "잔말 말고 가자." "그래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다. 잠깐 갔다가 얼굴만 내비치고 오면 될 것을 뭘 그리 고민하느냐?" "정말...그래도 되요?" "된다." "...." 샌들우드의 단호한 대답에도 못미더운 것인지 망설이던 크리스틴은 결국 백작부인의 손에 잡혀 마차에 올라야했다. 백작에게는 괜히 이야기를 했다고 후회를 하던 크리스틴은 그날 하루 종일 옷가게에서 수천 벌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곤욕을 치러야했다. 그날 밤 헬쓱해진 얼굴로 백작부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다시 한 번 옷을 입고 백작과 샌들우드에게 보여주어야했다. "흠...예쁘구나." "예쁘다." 두 신사의 동의를 받은 크리스틴은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벗어던지고 백작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버지 어떻게 되셨어요? 정말 하실거예요?" 크리스틴의 말똥말똥한 눈을 보며 실실 웃던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시장조사도 끝냈고, 구상도 다 해놓았더구나. 이제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만 물건을 만 들어내면 된다. 어떻게 이런 획기적인 생각을 했는지 대견하구나." "헤...궁에 갔을때 푸딩을 먹어봤어요. 사이먼 공작님을 보니까..번쩍 떠오르더라구요." 크리스틴의 대답에 자신의 몸매와 별다를 것이 없는 사이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백작이 반짝 눈을 빛냈다. "정말...살도 빠지는 것이냐?" 내심 나날이 솟아오르는 배를 보고 고심을 하던 백작에게는 그보다도 좋은 일은 없었다. 백작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크리스틴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진 식사만 해온 사람들에게는 섬유소가 풍부한 음식이 필요했다. 몇 가지 실험을 해봐야 알겠지만, 몸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속을 씻어내리는 약초를 섞는다면 충분히 불필요한 몸의 찌꺼기를 뽑아낼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식사시간마다 차와 함께 푸딩을 먹는다면 과식을 하더라도 많은 부분이 몸에 흡수되지 않고 빠르게 몸 밖으로 배출되도록 해 줄 터였다. 이미 몇 가지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 시간이 나는 데로 실험을 해보면 될 것이라 생각을 한 크리스틴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백작의 칭찬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충동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백작의 배경을 등에 지고 사업을 벌인다면 그야 말로 탄탄 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한거야.' 그저 간택식에 가기 싫어 슬쩍 건넨 말이었지만 의외로 호응을 해주며 투자하겠다 결정을 내린 백작을 꼭 안아준 크리스틴은 바닥에 떨어진 옷은 쳐다보지도 않고 침실로 뛰어갔다. 크리스틴이 방으로 돌아가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어르신.." "그것이...험험. 먼저 말해보게." "우리 크리스가 언제 저렇게 명석해진 거지요? 저는 오늘 너무나 놀랐습니다." 레이븐에서 내 놓은 계획서를 차근차근 읽어보고 온 백작은 딸이 그런 생각을 해내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웠다. 그런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그것까지는 모르겠고, 궁에서 푸딩을 먹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군. 살 안찌는..푸딩 이거 돈 되죠?! 이러면서...얼마나 황당하던지..." 혀를 끌끌차며 은근슬쩍 말을 돌린 샌들우드는 백작부인이 살기를 펄펄 날리며 백작을 노려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돈...되죠?" "험험험." 배너 백작의 18번 '돈 된다!'를 그대로 답습한 말이 아니던가? 하나밖에 없는 딸을 망쳐놓았다는 의미로 백작을 실컷 째려봐준 백작부인은 실실 웃고만 있는 샌들우드의 눈치를 보며 크리스틴이 던져놓은 드레스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군요, 백작님.'이란 살벌한 말을 남겨두고. 나중에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울 놈 없다는 것이 평소지론이던 백작도 백작부인의 '나중에 보자' 는 그 격을 달리함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경기가 들린 듯 딸꾹질을 하며 백작부인의 등을 쳐다보던 백작은 은근히 샌들우드에게 눈치를 주며 중얼거렸다. "우리 딸이 정말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없습니까?"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린 듯 하는 백작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가 은근히 물었다. "자네 크리스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시집가서 온갖 비리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에 들어가 늙어가길 바라나?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밀어줄 수도 있네." 샌들우드의 말에 쩍 얼어있던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권력이 싫어 궁에도 잘 가지 않는 백작이다. 또한 밤낮으로 손을 비벼대며 아부하는 작자들이 싫어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았다. 그런 더러운 삶이 싫어 작위만 가진 백작으로 살아왔던 그가 아닌가. 샌들우드의 말처럼 딸이 그런 삶 속에서 이리저리 고통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할 리가 없었다.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드는 백작을 보고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준 샌들우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잡을 거야. 자네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줄을 서겠지." "물론 입니다. 누구 딸인데요!" 샌들우드의 말에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를 탕탕 친 백작은 싱글벙글하며 일어났다. 황태자비가 되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뭐 나라의 안주인이 되면 백작가의 위상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많은 이익을 볼 수 있겠지만, 크리스틴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여지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테니. 은근히 황태자가 크리스틴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기대도 해보았지만 지난번 세실의 일로 인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욕심을 버리고 홀가분한 얼굴로 일어난 백작 은 하루 빨리 간택식이 다가와, 크리스틴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두 손을 마주잡았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간택식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 참여할 것이니 이 참에 우리 크리스의 진면목을 자랑하고 괜찮은 신랑감이 없나 살펴보면 좋겠지요. 하하하하" 뚱뚱한 배를 들썩이며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백작은 안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백작부인의 기분을 어찌하며 풀어줄 수 있을지 고심을 하며 거실을 떠났다. "꿈도 야무지지..." 예전의 크리스틴이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는 그런 일 따위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하던 샌들우드는 지금쯤 편안한 잠자리에 들어 단꿈을 꾸고 있을 크리스틴을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잘만하면...못 다한 여행도 할 수 있겠군." 왠지 은근한 기대감이 어린 말이었다. ***************************************************************************************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늦었습니다. 전복죽사준다고 사촌 오라버니가 꼬셔서 나갔다가 외갓집에서 줄창 놀아버렸습니다. ㅜㅜ 쩌어기요...헤헤...제 글이 선작 best 50위 안에 들었답니다. ㅋㅋㅋㅋ 입이 귀에 걸린거 보이세요? 세상에....그 대단한 작품들 속에 프레시어스가 떡하니 붙어있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것이 다 선작해주시고, 끊임없이 추천 눌러주시고, 리플 열심히 달아주신 독자님들의 사랑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직접 뵙고 인사드릴 수는 없으나 허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네...해서..오늘부터 밤잠 안자고...열심히...손가락 부러져라..노력해서...아무도 하지 못했던! 10연참!!! 달성하고야 말겠습니다. (편수가 아니라 용량...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콜록) 오늘 슬쩍 20kb 올리고 넘어갈려고 했더니...안먹히더군요. ㅠㅠ (이게 다 제가 평소에 너무 많이 올려 그런것이 아니겠습니까. 홀홀홀) 열심히 해서 곧 만족시켜드릴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세요. 삐짐이님 설마 숨넘어가시기 전에야 할 수 있을 겁니다. 약속드리지요! 여러분 너무 감사드리고, 언제나 언제나 독자님들 덕분에 유키가 힘을 내서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 알아주세요.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시간이 여의치 않아 수정을 제대로 못하고 올린 것이니 오타...지적 부탁드립니다. _ _) 자랑이닷 (퍼버벅!)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나는...간택식이 싫어요! 5. 황태자비 간택식이 시작되는 첫 날. 간택식은 3일간 계속되는 무도회를 말한다. 그 3일 동안 초대장을 받고 온 영양들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황태자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하기도 하고, 은근히 다른 귀족 자제들을 살펴보고 유혹하기도 하는 공인된 헌팅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는 달리 동떨어진 곳에 숨어 어두운 얼굴로 우 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도회장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겨우 5.3피텐(160cm정도) 정도나 될까, 무도회장에 모여든 여식들 중 키가 작은 편에 속하는 영양은 순백색의 새틴 천에 아름다운 분홍색 레이스가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곱슬거리는 금발 머리를 반만 우아하게 틀어 올려 분홍빛 아칼리시스 꽃으로 장식한 15세의 소녀, 크리스틴 폰 배너였다. 금가루를 곱게 갈아 머리카락에 뿌린 덕분에 동화에 나오는 어린 요정처럼 순수하고 신비 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소녀는 대전을 가득 채우며 춤을 추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을 보며 기가 질린 듯 보였다. "지루하냐?" "무서워요." "....." 슬쩍 옆으로 다가와 물어보는 샌들우드에게 단 한마디만 던진 크리스틴은 활짝 열린 창문 밖에 떠 있는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어서 빨리 무도회가 끝나기를 빌었다. '내가 정신이 나간 거야. 이런 짓을 3일이나 하라니...' 이미 무도회가 시작된 것은 5 나르 전이었다. 온갖 치장을 하고 눈웃음을 살살치는 영애들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황태자를 기다리며 은근슬쩍 남자들을 힐끔거리느라 바빴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보이면 주위를 맴돌며 신경전을 벌이며 그의 시선을 끌어보고 자 노력을 했다. 일부는 과감하게 부모를 앞세우고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스스로 다가가 음료를 청하게 만드는 고도의 접근전을 펼치는 처녀들도 있었다.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보고만 있던 크리스틴은 여자들의 그 억척같은 행동에 기가 질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것도 1, 2 나 르지 장장 5나르 동안 그것을 보고 있자니 점점 시들해지고 있었다. 지친 얼굴로 샌들우드를 반기던 크리스틴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 을 던졌다. "저렇게...시집이 가고 싶은 걸까요?" "......." 여자의 마음을 2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어떻게 알겠냐만은 무도회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영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신랑감 내지는 애인을 만들려고 피터지게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런 질문이 이해가 되었다. 크리스틴의 질문에 잠시 심사숙고 하던 샌들우드는 눈이 맞아 슬쩍 밖으로 나가는 두 연인을 보며 혀를 찼다. "아무래도...여자들이야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가요?" 배너 백작 부부의 경우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는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그저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결혼을 한 사이이나, 의외로 서로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결혼 생활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사이로 발전한 드문 케이스였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서슴없이 애인을 만들고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진정 크리스틴의 경우에는 운이 좋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실의 부모는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으나, 그것은 모두의 악몽이 되었다. 크리스틴이 생각을 했을 때 사랑해서 결혼을 해도 그것이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었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얼마나 충실하냐에 따라 결혼생활의 희비가 달라짐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어렸고,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남자들의 눈에 들려고 노력하는 영애들이나, 은근슬쩍 추파를 던지 며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들을 보며 왜 저런 짓을 할까 의문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나이가 많은 노총각(?)인 샌들우드로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세상의 이치가 이렇다 이야기를 해주며 어물쩍 질문을 넘긴 샌들우드는 사람 들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고심하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손에 금가루가 묻어나며 아래로 부스스 떨어졌지만 그것은 크리스틴의 모습을 더욱 환상 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주었다. "콜록!" 멋도 좋지만, 정말 불편하다 투덜거리던 크리스틴의 눈에 낯이 익은 사람들이 눈에 들 어왔다. 한 사람, 아니 한 소녀는 검청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내려 화려하게 꽃 장식을 하고 귀여운 프릴이 달린 옷을 입은 귀여운 소녀였고, 또 다른 검은 머리의 소녀는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진주로 장식이 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우아하게 부채를 흔들어대며 대화 를 나누는 두 사람. 모이라 데 멜포레스와 이샤 리쿠에 파 크레이오, 제 1공작과 3공작의 영애들이 살포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문득 실소를 지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느냐?" "아...한 쪽은 귀엽고, 한 쪽은 우아하니...황태자 전하께서 머리 꽤나 아프시겠는데요?" "응?" 크리스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던 샌들우드는 겨우 열 살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와 모이라가 담소를 가장한 신경전을 치르는 것을 보고 실소를 지었다. "아무리 애디가 브래디의 아들이라 해도 저 작은 아이는 너무 하는 구나. 너무 어려." "14살이에요, 스승님. 제 선배이기도 하구요." "......" "이샤 리쿠에 파 크레이오. 1공작님의 여식이지요." "허허허...동안(童顔)이구나. 좀...작기도 하고." '짧군.' 5 피텐이 겨우 넘을까, 그것도 아주 높은 구두를 신어 그 정도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해보던 샌들우드는 두 소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크리스틴을 쳐다보자 슬쩍 몸 으로 그들의 시선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인사 하러 갈거냐?" "글쎄요...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불가능하겠는데요." 샌들우드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치마를 보며 대답을 한 크리스틴은 여왕처럼 여러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등장하는 모이라와 그녀의 옆에서 아장아장 걸어오는 이샤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봐도 언니와 막내 동생 같아 보이는 저 두 사람이 연적이라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모이라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던 크리스틴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애. 잘 지내셨는지요?" 크리스틴의 태연한 인사에 잠시 머뭇거리던 모이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부채를 내렸다. 그리고 우아한 태도로 작은 손을 내밀어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크리스틴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동안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최대한 감정을 자재하며 말문을 연 모이라는 눈을 동그 랗게 뜨고 그들을 지켜보는 이샤를 무시하고 크리스틴의 손을 잡은 채 음료수가 진열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심각해 보이는 얼굴 때문인지 그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크리스틴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고 이샤는 모욕감을 드러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 때문에 고생한거...미안해. 그 말 꼭 하고 싶었어." 모이라의 얼굴은 진중했다. 디아나가 처형되던 날 공작에게 불려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대강 들었던 모이라는 자신 의 행동을 후회했다. 더구나 자신을 따라다녔던 아이들의 집안이 한꺼번에 망해 시골로 쫓기듯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비참하다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카데미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는 것을 이샤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녀를 따르던 아이들이 되려 욕을 먹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래저래 자존심이 상해 펄쩍 날뛰던 모이라는 자신에게 독을 쓴 것이 디아나였고, 그들 의 집안 역시 반역죄로 처형당했다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와 크리스틴의 담담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마음을 털어놓고 의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배경을 보고 따라오는 사람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주는 친구. 왜 갑자기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그러한 - 크리스틴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나보고...황태자비가 되기에는 그릇이 모자란다고 했지?" "......" 얼마나 자신을 몰아붙여야 속이 시원할 것이냐며 악을 쓰던 크리스틴을 떠올리며 피식 웃던 모이라는 담담한 얼굴로 서 있는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난 욕심이 많아. 꼭 될 거야. 그릇이 되지 않으면...그렇게 만들어 보이겠어. 이런 말 하기 뭐 하지만...난 아카데미로 못 돌아가.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설 곳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포기하는 거야. 그냥...그 말을 하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미안했어." 아마 모이라가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어색한 표정과 잔뜩 굳은 말투는 크리스틴의 눈에 미소를 담게 만들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으로 살짝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모이라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영애. 아카데미의 일은...도망간 것이 아니라 생각해요. 스스로 선택을 해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는 것이니 누가 뭐라 할 필요가 없겠지요. 저 때문이 아니라 말씀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 그릇이 달랐다. 모이라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금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소녀와 집안의 재력만 믿고 날뛰던 자신 의 차이를.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를 쫑긋 세우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똑똑하지만 이기적인 작은 소녀의 그릇 역시 자로 재듯 알아낼 수 있었다. "황태자비는 꼭 내가 될 거야. 네가 그러길 바란다는 거 알지만 그것만은 양보 못해. 하 지만...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아마도 난 아직 정신 못 차리고 날뛰고 있었겠지.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뒤를 힐끗 쳐다 본 모이라는 크리스틴의 맑고 푸른 눈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진정 아름다운 미소였다. "저 뒤에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고양이 역시 네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가능하면 가까 이 하지 마.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널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조심하는 게 좋아." 이샤를 이미 만났었다는 것을 모르는 모이라는 나름대로의 충고를 하고 등을 돌려 추종자 들 속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 소년이 주는 음료를 받아들며 미소 를 지었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잠시 모이라와 크리스틴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이샤는 이를 악물로 크리스틴에게 다가 오려고 했지만 그 순간 정적을 깨며 나타난 황태자의 등장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가질 수 없는 크리스틴의 정령보다 좀더 현실적인 황태자비가 더 매 력적으로 보인 듯 했다. 아쉬운 눈으로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던 이샤는 중후한 중년사내 의 곁에 서서 무도회장을 가로지르며 나타난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키지 않는 만남을 제지해준 황태자의 등장에 기꺼워하며 허리를 숙이고 있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앞으로 슬며시 다가와 헛기침을 하는 소년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20세 가량의 청년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크리스틴의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친 보기 드문 청록색 머리에 짙은 갈색눈을 가진 소년은 조금 어눌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실례합니다. 저는 라이엘이라고 합니다. 저...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라이엘님.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순진함이 물씬 풍기는 청년의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짓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 를 건넸다. 그녀의 친절함이 의외였을까 더욱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청년은 슬그머니 주위를 살펴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저기...춤...청해..도..." "아직 황태자 전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는데요?" 웃음을 참으며 은은히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도회 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크리스틴은 귀까지 붉히며 중얼거리듯 사과를 하며 돌아서는 청년의 발목 을 잡았다. 왠지 그의 어리숙한 행동에 무척이나 호감이 갔다. "괜찮으시다면 주스...한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조...조...감사합니다." 크리스틴의 바로 옆에 있는 음료를 얼른 떠서 앞으로 내민 청년은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떼구르르 굴리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소년들을 보고 살짝 눈 썹을 찌푸렸다. "저기...자리를..." "네?" 영문도 모르고 라이엘의 말에 의문을 표하던 크리스틴은 그들의 주위로 다가오는 사람들 이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저 실례지만..." 하나 둘 다가와 자기소개를 하고 신분을 밝힌 남자들은 크리스틴의 반짝이는 금발 머리 와 시리도록 푸른 눈을 보며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무도회장 구석에 가만히 서서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던 크리스틴이 라이엘의 접 근을 허락하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황태자가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주위로 다가가지 않는 크리스틴의 행동 역시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한 이유 중 하나라면 하나라 할 수 있었다. 황태자비의 자리에 관심이 없는 아름다운 소녀. 적어도 또래의 남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들의 인사에 정신없이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저 멀리 입술을 꼭 깨물고 애처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엘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에 반색을 하며 사내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오려던 라이엘은 자신을 확 잡아끄는 거친 손길에 인상을 쓰다가 입을 닫았다. "형,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아버지가 얼마나 찾으셨는지 알아?" "어..." 대답도 못하고 버벅거리는 책벌레 라이엘을 노려보던 소년은 신경질 적으로 소란의 중심 에 서 있는 소녀를 노려보다가 눈을 껌뻑거렸다. "크...크리스틴?" "아는 사이냐?" "아...어." 넋이 빠진 듯 난색을 표하며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리스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민은 라이엘의 팔을 잡은 채 사람들을 헤치고 크리스틴에게 다가갔다. 카민의 등장을 지켜보던 크리스틴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왔구나." "네." "안 올지 알았는데." "조금...사정이 있어서요." 좀 서늘한 대화가 오고가고 그 사이에 끼여 눈치를 보고 있던 라이엘이 급히 입을 열었다. "저기 몬트리얼에 다니십니까, 영애?" "아, 네. 라이엘님. 카민님은 저희 아카데미의 선배세요." "아...예. 저도...다니는데..." "네?" "저도...음...7학년입니다." "아!" 3살이나 나이차이가 나는 형이 동생과 같은 학년이라는 것을 밝히기가 꺼려지는지 어물 쩍 넘어간 라이엘은 반가운 미소를 지어주는 크리스틴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미소를 보고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민은 그들 쪽으로 재빨리 다가오는 안경을 쓴 더벅머리 소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다 모이는 거냐...' "형님들, 아버지께서 지금 오시랍니다." 칼같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라이엘과 카민에게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하던 소년이 크리스 틴을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라이엘과 카민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냐...!' 여자 형제가 없는 삼형제는 유별나게 취향이 비슷했다. 생김새는 각각 차이가 있었으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있어서는 마치 쌍둥이들처럼 꼭 같았다. 때문에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막내를 쳐다보는 카민과 라이엘은 그의 내심을 짐작하고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찾으신다며 성질을 내던 소년이 멍하니 크리스틴을 보고 있는 것에 한숨을 내쉬던 카민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서 가자미눈을 하고 그들을 노려보는 남자들도 신경에 거슬리고 있었다. "이쪽은 먼저 인사를 했겠지만 라이엘, 여기는 우리 집 막내이자 너와 나이가 같은 네이븐이라고 해." "아..." 그제야 세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 크리스틴은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리스틴 폰 배너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이븐님, 라이엘님." "아...네...저기 반갑습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히던 네이븐은 금가루를 날리며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동생 과 형의 팔을 잡은 카민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찾으신다니 가봐야 해. 만나서 반가웠다. 다음 학기에 아카데미에서 보자." 속으로는 내심 안타까워하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인 카민은 두 다리로 버티며 움직이 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책벌레들을 양팔로 껴안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재미있는 놈들이구만." 언제 다가왔는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샌들우드가 한 마디 던졌다. "하나도 안 닮았지요?" '적어도 하나는 닮았더구나.' 크리스틴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침을 흘리는 것은 생김새와 상관없이 똑같았다. 그것을 상기시키려던 샌들우드는 그들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크리스틴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저 아이들이 카를로스의 아이들이냐?" "네." "흠...아비를 닮은 것은 둘째 뿐이군." "네...너무 닮았지요." 카를로스와 판에 박은 듯한 카민을 두 번이나 학장으로 착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 을 붉히던 크리스틴은 그녀에게 말을 걸까 기회를 노리던 남자들이 일제히 질투어린 눈 으로 카를로스에게 다가가는 세 형제를 노려보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간택식이 열리던 첫 날, 이성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백치와 다름없고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던 크리스틴은 아름답고 친절하여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으나 결코 꺾을 수 없는 꽃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크리스틴은 배너 백작의 바람대로 성공적으로 사교계에 등장하게 되어 수많은 혼사가 쏟아져 들어오는 쾌거를 이룩하게 되나 이것은 그녀의 바람도, 샌들우드의 바 람에도 어긋나는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에...그리고 오늘부터는 하루에 한 편씩 올리려고 합니다. 음...언제까지? 이렇게 물으신다면 영광의 10연참을 달성하는 날까지!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목표는 다음주...안에. 제가 처절하게 느낀 것은 하루 쓸 수 있는 분량이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해서...그날 썼던 것을 마구 올려버리면 꿈에도 그리던 10연참....그건 꿈이 된다는 거지요. 콜록 그러니 몇 일만 참아주세요. 지금 열심히 분량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오니 꼬시지 말아주세요. 더 달라고 애원도 하지 말아주세요. 심약한 유키 또 그런 리플보며 다 올려버리고 자폭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다음편은 본문 내용이 없으니, 시간이 나시거나 정말 할 일없으시면 한 번 읽어주세요. 단, <이카루스>의 이름을 바꾸어 달라 하신 분은 필.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76회를 보지 않으시면 또 다시 그런 말씀하실터이니... 그럼 좋은 하루보내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추신: 커피가 부족해......ㅜㅜ (이게 없으면 글을 못쓰는뎀....유키에게 캔커피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질의 응답>>1. 이카루스는... <<이카루스에 대하여>> 이카루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섬의 미궁(謎宮)을 설계한 다이달로스의 아들로, 커다란 날개를 달고서 태양을 향해 비행했던 사람의 이름입니다. (태양에서 가장가까운 궤도를 돈다는 작은 행성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조금 덧붙이자면, 미노스 왕이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미궁을 설계한 다이 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를 바로 그 미궁에다 가두어 버립니다. 다행히 손재주가 뛰어났던 이들 부자는 새의 깃털을 모아 촛농을 이용해 날개를 만들어 달고는 미궁을 빠져나오지요. 그리고 무사히 착륙을 해서 아비를 내려준 이카루스는 다시 날개를 달고 날아오릅니다.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한 이카루스는 '더 높이 더 높이!' 하고 외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깃털을 붙이고 있던 밀납이 뜨거운 햇볕에 녹아내리는 바람에 바다에 추락 해서 죽습니다. 물론.....님의 말씀처럼 이카루스를 어리석은 인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 로마신화를 해석하며 이카루스를 허황된 꿈을 꾸거나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교훈을 준다 말합니다. '이카루스의 날개'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것은 '바벨탑'의 신화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헛된 욕심을 경계하는 뜻으로 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반면 젊은 시절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뜨거운 열정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카루스는 하늘의 끝에 닿고자 하는 욕심에 화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고, 신화라는 것은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그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으로 제각각 다른 교훈을 얻는다 생각합니다. 아주 쉬운 예로 '콩쥐 팥쥐'를 들어볼까요? 오래전 저는 그 동화를 보며 콩쥐가 불쌍하다 생각을 하며 팥쥐 모녀가 벌을 받는 것을 보며 손뼉을 쳤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콩쥐를 칭찬하기보다 팥쥐의 처세술을 칭찬합니다. 시대가 달라졌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전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했습니다. 과연 콩쥐는 행복했을까? 과연 신분의 격차를 무시하고 결혼을 했으되 그 갭을 완전히 극복하고 행복했을까? 비슷한 환경에서 2, 30년을 살아온 두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도 사소한 가치관의 차이로 엄청난 싸움을 하는데, 그들은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당시 시대상황을 떠올려보며 생각했습니다. 과연 행복했다면 콩쥐는 얼마나 희생하고 양보하며 살아야했을까.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콩쥐처럼 착한 사람으로 살면 복을 받는다 들으며 자라왔건만 성인 이 된 지금에와서는 이제 우리의 아이들에게 콩쥐처럼 어리석은 인물은 되지 말라 충고 를 해야합니다. 이처럼 한 가지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제각기 다르듯 제가 본 이카루스도 달랐습니다. 하늘의 끝에 도달하고 말겠다던 이카루스의 꿈, 열정, 희망. 그것이 과욕이 되어 신의 분노를 사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나 과연 그의 욕심이 그의 열정 을 그저 어리석고 모자란 것으로만 생각을 해야 할까요? 인간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꿈을 꿉니다. 허황된 것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길을 걸었고 지금 우리도 그러한 길 을 걷고 있습니다. 가령, 처음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그 이전에 기구를 만들어 이미 하늘을 날아올랐던 몽골피에라는 프랑스인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과연 하늘을 날고자 연구를 할 때 사람들이 '정말 훌륭하군!'하고 호응했을까요? 아니 그들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고 있는 모든 문명이기들을 발전 시키고 개발한 사람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감내 하며 꿋꿋하게 열정을 바쳤고 끝내 성공을 하였습니다. 뒤늦게 빛을 받은 이들도 있었고 죽은 후에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들 모두 사람들의 불신과 비난 속에서 꿈을 이루었습니다. 전 이카루스라는 사람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무모한 열정으로 목숨을 버렸지만 그가 이루 고자 했던 그 궁극적인 목표, 하늘을 지배하고자했던 열정은 지금 우리들 모두가 꿈을 꾸 고 있는 그것이라고 말입니다. 천공을 지배한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우주로 나아가 그 거대한 신비를 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1C 전만 하더라도 허황된 꿈이 아니었나요? 그래서 전 이카루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그 신화를 읽었을 때의 안타까움, 그리고 손에 잡힐 듯 느껴지던 열정을. 물러설 때를 아는 현명함을 가지지 않은 어리석은 인물이라 욕하기 전에 저는 그를 보며 꿈과 희망을 쫓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무모한 한계에 대한 도전을 하는 인물. 제 자신 또한 그러한 인물입니다. 허황된 꿈을 꾸며 현실에 안주하지 못해 이렇게 상상 속에서나마 작은 만족을 찾으려 꿈을 그려나갑니다. 더러는 욕을 먹고 더러는 칭찬을 받지만 저는 제 자신을 어리석은 인물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감히 꿈을 접지 못하는 모자라는 인간입니다. 현실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저처럼 비겁한 인물이 아닌 암담한 현실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주인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카루스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프레시어스>>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세실이 <신의 아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여 보지 말아 주십시오. 그 아이가 신의 아이이듯 여러분들 모두 신의 창조물입니다. 신의 아이라 해서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큰 시련을 견뎌내고 우둔한 창조물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짊어져야 하는 막중한 의무가 있습니다. 종교 이야기를 하면 편파적이다 하실 수도 있으나, 저는 유일신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계시나요? 그 분은 평범한 한 가정에 태어나 목동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아주 어린 나이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 나는 신의 아들이니 위대한 존재였어. 그러니 과감하게 희생하고 세상을 구원하자.' 이렇게 생각하셨을까요? 글쎄요, 저는 그 분이 무척이나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심정 은 어떠했을까요? 얼굴도 모르고 존재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희생하라 하시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분은 결국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선택하셨으나, 그 사이 그 분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고 얼마나 고민하셨을지 그저 추측만 해보았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분은 신의 아들이었으나, 인간이었지요. 인간은 고뇌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존재이지요.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은 결국 도태되고 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우리더러 현실 에 안주하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라고 강요합니다. 우리를 틀에 가두어놓고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 안에 뛰어놀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세뇌를 시킵니다. 몇몇 극소수의 권력자들에게 농락당하며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를 모아 대항을 해보지만 그 힘이 너무나 미약함에 분노하지 않습니까? 좌절하고 몇 번을 쓰러진다 하여도 다시 일어서서 맞서 싸우지요. 그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신이 허락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한 모습을 담아내고자 만들어낸 인물이 '세실리아'입니다. 신의 뜻을 꺾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창조물, 인간. 어떻게 보면 답답하고 짜증이 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날 정도로 좌절하고 슬퍼하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미래를 갈구하며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길을 열어갑니다. 무모에 대한 도전이라 하셔도 좋습니다. 말도 안 되는 처절한 비극의 연속, 신파극이라 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던지는 그 모든 시련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그러한 비극들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철저한 자기 자신으로 일어서서 한계에 도전하는 인물. 그것이 제가 바라는 크리스틴 폰 배너의 삶을 사는 세실입니다. 제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어떠한 시련도 이겨내며 강철같이 단련하여 이 험한 세상에서 꿈과 희망을 쫓을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저의 바람이고, 제가 꿈꾸던 삶이고, 제가 이카루스를 제 글의 중심에 세운 이유입니다. 그렇기에...전 이카루스의 이름을 버릴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올리라는 글은 안올리고 이렇게 미력한 필력으로 나름대로의 철학을 펼쳐낸 유키를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이카루스의 이름을 바꾸어 달라 말씀하신 ......님의 말씀에 제 생각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 그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여 나름대로의 생각을 펼쳐내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제 글은 항상 뒷북을 치지요. 등장인물의 성격이건, 사건의 해결이건, 글의 흐름 자체가 아주 느립니다. 스피디하게! 라고 외치고 문득 뒤돌아보면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려있음을 알게 되고 하나 하나 목을 매다보면 필력의 부족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 됩니다. 매일 한, 두편 올리는 글에 달리는 그 수많은 리플들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제가 갈 방향을 수정하기도 하고, 옆길로 새고, 자폭도하는 저이지만 단 한 가지, 제가 쓰는 글에서 주고자 하는 생각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이 '이카루스'이며 '꿈과 희망, 용기'라 말하겠습니다. 제글을 보시며 짜증내고 화내시면서도 다음편! 외치시는 분들은 이해해주시겠지요? 아마...저넘은 언제쯤 주인공 안괴롭히고 화통하게 뒤집어 줄까! 이러시면서 계속 봐주시는 거라 들었습니다. 콜록. 면목없습니다만...어쩌겠습니가...저란 놈은 그런 놈인걸요...^^ 에, 또 사설 길어지기 전에 이쯤에서 오늘 마무리 하겠습니다. 쓸데없으나, 제 글이 담는 핵심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추신: 우리 동네 벚꽃은 다 떨어졌더이다.(어제 알았다는 ㅜㅜ) 결국....올해도 꽃놀이는 커녕 벚꽃이 폈는지도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군요. 누가 저 좀 보쌈해주시면 안될까요!!! (놀러가고 시포!!!) 또 추신 : 저어기...이것도 한 편으로 쳐주시면 안될까요??? > < (이쁜척~)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분노하다. 1.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황태자는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라고 손짓을 하며 침묵을 지켰다. 이에 약간 실망감을 드러내던 영애들은 일찌감치 찍어놓은 남자들을 파트너로 삼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화려한 꽃잎들이 휘날리듯 아름다운 선율에 어우러져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휘 날리며 파트너와 함께 무도회장을 누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춤 솜씨를 구경하던 크리스틴은 샌들우드를 바라보며 두 손을 마주잡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스승님, 얼굴을 보였으니 되었지요? 이제 가면 안 될까요?" 주위에서 춤을 신청할까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꺾이지 않는 꽃'의 명성이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크리스틴의 간절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샌들우드는 그녀의 뒤로 다가오 는 거대한 물체를 보며 실쭉거렸다. "험험. 그건...좀 힘들겠구나." 샌들우드의 난처함이 서린 얼굴에 얼른 뒤돌아보던 크리스틴은 울그락 불그락 하고 있는 백작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크리스틴의 기억 속에 있는 부모의 손에 이 끌려 인사를 하러 다니던 악몽이 떠올라 샌들우드의 뒤로 숨으려 노력을 했으나, 크리스틴의 동작보다는 백작의 손이 더 빨랐다. "가자. 이곳까지 왔으니 뭔가 건지는 거라도 있어야지. 이 참에 두루 인사나 하고 가자꾸나. 어차피 넌 오늘 돌아갈 것이 아니냐?" 예의상 간택식에 왔다는 것을 황제에게 알리고 이미 퇴청을 허락받은 백작이었다. 의무적인 것은 아니나 보통 3일간은 궁에서 머무는 것이 상례였고, 오기 싫다고 울 먹이는 딸을 억지로 끌고 온 백작은 실례를 무릎 쓰고 황제에게 친히 알현을 청해 야만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허락을 받았다. "공이 그토록 원하니 내가 뭐라 할 수 있겠소. 이리 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 오늘 돌아가도록 하오." 평소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황명이라 명령하지 않는 다음에야 궁에 발을 디디지 않는 백작의 평소 행실을 콕 찌르며 대답한 황제는 느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허락을 받았으니 오늘 하루, 궁에 들어온 김에 딸의 얼굴이나 알릴까 했던 백작 은 몇 미르도 되지 않아 사라져버린 딸을 찾아 하염없이 헤매고 다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이를 갈며 딸의 팔꿈치를 받친 백작은 어느새 웃는 얼굴로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들어 그와 친분이 있는 이들만 찾아가며 크리스틴을 인사시켰다. "아, 저기 배너 백작..." "안녕하십..." "백작...."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같은 작위를 가진 백작이나 그 보다 높은 후작 이라 하더라도 과감히 무시하는 담력을 자랑했다. 그런 백작의 태연한 무례에 기겁을 하던 크리스틴은 곧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아비를 따라 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조금만 견디면 돼. 아버지가 이렇게 까지 하시는데 참아야지...' 무시를 당하고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뒤에서 쑥덕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허리 를 쫙 편 크리스틴은 배너 백작만큼이나 당당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내 딸이지...' 슬쩍 크리스틴의 미소를 보며 얼굴을 확 편 백작은 뒤에서 욕을 하건, 안타까운 탄성을 지르던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사람들의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안녕하십니까, 암브로시아 재상님. 잘 지내셨습니까?" 드디어 마지막 목표물(?)을 찾아낸 백작은 얼른 걸음을 옮겨 젊은 사내와 대화를 나누 고 있는 알렉산드로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이에 고개를 돌리던 재상은 백작의 옆에 서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친근한 미소를 보내왔다. "오, 배너 백작. 잘 지냈소? 내 미리 공에게 인사를 하러 갔었어야 했는데 미안하오." "인사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여기 제 딸 크리스틴입니다. 이제 15살로 몬트리얼에 다니고 있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딸을 앞으로 슬그머니 내민 백작은 재상의 조금 뒤에 서서 그들을 보고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들이군.' 재상과 꼭닮은 푸른 눈에 은회색 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묵고 있는 사내의 매끈한 얼굴 을 뜯어보던 백작은 내심 짐작이 맞다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재상은 크 리스틴의 귀에만 들리도록 나직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폰차르크 님의 제자라 하였지? 그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고맙구나. 나중에 시간이 되면 식사나 함께 하지 않겠느냐?" 재상의 따뜻한 말에 잠시 망설이던 크리스틴이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재상님. 오늘...돌아가기로 했어요. 어차피 형식상 인사를 드리러 온 것 이라 그리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대답에 설핏 서운한 표정을 짓던 알렉산드로는 가슴속에 부는 싸 한 바람을 억지로 무시하며 그의 뒤에 서 있던 로드리고를 앞으로 이끌었다. "이쪽은 내 아들 로드리고라고 하오. 공은 처음 보는 거겠지요? 인사드리려무나. 데니스 폰 배너 백작님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드리고 라 암브로시아라 합니다." "반갑네. 멋진 청년이군요." "크리스틴 폰 배너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이 로드리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자 크리스틴이 허리를 약간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론 아저씨...' 자신을 대신해 궁에 들어간 뒤 소식이 끊겼다는 사람이 눈만 빼고는 나이도 다르고 외모도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기뻐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 갈피 를 잡지 못하던 크리스틴은 그가 '론'이었단 과거는 잊기로 했다. 스스로가 더 이상 「세실」이 아니듯 그도 「론」이 아니었다. 인사가 오고 간 후 잠시 담소를 나누던 네 사람은 곧 다음에 꼭 한번 식사에 초대하 겠다는 백작의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크리스틴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마음에서 잊는다 생각은 했지만 어렸을 적 그녀를 친아버지 이상으로 사랑 해준 사람을 앞에 두고 태연히 연극을 하는 것은 15살 소녀에게는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피곤한가 보구나. 이제 갈까?" "네, 아버지." 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샌들우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무도회장을 나서던 백작은 낯이 익은 기사를 대동하고 그들의 앞길을 막는 18세의 소년을 보 며 난색을 표했다. "황태자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잘 접히지도 않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한 백작은 말없이 예를 표하는 크리 스틴을 보호하려는 듯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하지만 황태자는 백작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크리스틴의 담담한 얼굴만 주시했다. "오지 않았는지 알았는데, 와 있었군." "네, 전하." "나와...춤을 추시겠소?" "헉!" 한 손을 내밀며 춤을 청하는 황태자의 주위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간택식에 있어서 황태자가 춤을 청하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황태자비 후보의 선택. 그리고 마지막 날 최종적으로 그가 선택을 하여 춤을 추는 여인이 그의 여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얼굴로 황태자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살벌한 기운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얼핏 미소를 지었다. 독기를 펄펄 날리며 노려보고 있는 이샤와 그녀의 옆에서 우아하게 부채질을 하며 경악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모이라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대신...저 보다 더 나은 춤 상대를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경악에 빠졌던 사람들이 일제히 거품을 물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중에는 크리 스틴의 아버지인 배너 백작도 있었다. 역대의 간택식에 있어서 황태자의 춤을 거절한 여성은 없었다. 최초의 불문율을 당당하게 깨버린 크리스틴은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그녀를 노려 보는 황태자의 앞을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이샤에게 다가갔다. 경악에서 벗어나 이제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주시하는 모이라와 눈이 마주친 크리스틴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없이 이샤의 작은 손을 잡고 황태자 앞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이샤의 손을 황태자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청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 될 것입니다, 전하. 부디 크레이오 영애와 함께 춤을 춰주십시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키 작은 요정과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황태자가 이를 갈았다. "지금...나를 우롱하려는 것인가?" 졸지에 황태자의 어마어마한 살기를 받게 된 이샤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크리스틴을 힐끗 거렸다. 지난 번 만남에서 크리스틴에게 '황태자비의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건만 그녀가 직접 이렇게 황태자와 대면시켜 준 것을 고마워해야할지 아니면 이렇 게 살기를 받게 되었으니 욕을 해줘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이었다. 황태자야 인상을 쓰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던 크리스틴은 파르르 떨리는 이샤의 손을 꼭 잡고 황태자의 눈앞으로 내민 후 명령조로 입을 열었다. "제가 부탁을 드린다 하였습니다. 전하께 어울리는 여성이 어떤 분이신지는 모르나 적어도 저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여 황태자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스승님과 만나실 시간을 드릴 테니, 절 붙잡지 말아주세요." 황태자의 접근과 초대장이 샌들우드를 노린 것이라 확신을 한 크리스틴은 어안이 벙벙한 황태자의 앞에 이샤를 밀어놓고 백작의 뒤로 물러났다. "그럼...전하.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눈치 빠른 백작은 기회는 이때다 하며 얼른 인사를 하고 크리스틴을 앞세워 사람들 사이 를 헤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샌들우드의 곁으로 다가서는 순간 황태자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옆으로 물러나 길을 만들었다. 이샤의 손을 잡은 황태자가 노기를 띤 얼굴로 백작과 크리스틴, 샌들우드를 주시하고 있 었다. 황태자의 손짓 하나에 물러선 사람들은 과연 춤 신청을 거절한 크리스틴이 어떠한 벌을 받을까 기대감이 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시오." 사람들의 눈이 많은 것을 의식한 것인지 단 한마디만 남긴 황태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샤의 손을 잡은 채 등을 돌렸다. '최초이자 마지막 부탁이라니 들어주는 것이다.' 홍조 띤 얼굴로 기쁜 미소를 짓고 있는 파트너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스텝을 밟아나가던 황태자는 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세바스티앙을 미처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지금 가기는 무리인 것 같다. 기다리시라니 기다려야겠지?" 백작과 크리스틴은 동시에 불만이 어린 얼굴로 샌들우드를 노려보았다. 진즉에 먼저 가서 만나면 될 것을 사람들의 이목까지 끌어가게 된 것이 다 그의 잘못 이라 탓하는 두 부녀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던 샌들우드는 헛기침을 하며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그것이..." 간택식이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황제를 만나러 갔을 때만 해도 별다른 언질이 없었다. 더군다나 황제의 옆에 앉아 그와 대화를 나눈 황태자가 끝까지 그의 발목 을 잡게 될 것이라고는 그라서 상상이나 했겠는가? 살벌한 눈초리를 피해가며 난감해 하던 샌들우드는 의미심장하게 오늘 궁에 머무를 것이냐 물어보던 황태자를 떠올리고는 혀를 찼다. '징그러운 놈. 그렇게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다니...' 황태자는 처음부터 크리스틴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껏 샌들우드와 함께 있었으니 어찌 몰랐을까, 그러면서도 태연히 몰랐다 이야기를 하던 황태자의 뻔뻔한 낯짝을 떠올리며 씨근덕거리던 샌들우드는 자신에게 자꾸 뭔가 눈짓을 하는 세바스티앙을 보며 인상을 팍 썼다. '저놈은 또 뭐야?' 자꾸 문 쪽으로 고개 짓을 하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세바스티앙을 보며 신경질을 내던 샌들우드는 춤을 추자마자 성큼 성큼 다가오는 황태자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냥 기절시켜 버리고 가버릴까...?' 하지만 그의 심란한 고민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들에게 다가온 황태자가 조금 전의 성급한 모습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아바마마께서 찾으십니다. 대전에 계시니 가보세요. 백작님도 함께 모시고 가십시오. 전...영애와 함께 있겠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사람을 부르지 않고 황태자의 입을 빌린 것인지 잠시 고민을 해보던 샌들우드는 곧 백작과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혼자 남아있던 크리스틴은 물어볼 것이 있다는 황태자의 말에 흔쾌히 따라 나섰다. 보나 마나 샌들우드의 이야기 이거나 세실의 이야기 일 것이라 추측한 크리스틴은 무도회장을 벗어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 으로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거하는 백색궁이 아닌 로드궁에 초대를 받은 크리스틴은 단 한 사람의 시종만 을 대동한 황태자와 함께 차를 마시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그토록 관심 있어 하는 푸딩도 함께. 달콤한 맛이 나는 아바론 차와 역시 달지만 조금 새콤한 맛이 나는 푸딩의 조화를 즐 기며 말없이 침묵을 즐기던 크리스틴은 문득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는 황태자를 보았다. 묘하게 어두우나, 야릇한 기대가 섞인 얼굴. "저에게 물어보시고 싶은 것이 있다 하셨지요?" "....그대는...세실이란 아이를 기억하오?" 내심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인한 크리스틴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행복할까?" "네?" "내 말은...그 아이...그토록 고생만 했던 아이인데 행복했을까 궁금하단 말이오." 원래의 크리스틴이라면 황태자의 말에 발끈 했어야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황태자가 세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리 물어본다 여기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행복했었지요." "그대가...어떻게 아오? 이렇게 물어보면 이상하겠지만...꼭 그대는 그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아...저는...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셨고, 스승님이 계셨고 그 외에도 그 아이를 황태자 전하처럼 생각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에 행복했다 확신합니다." 크리스틴의 따뜻한 미소와 확신에 찬 말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있던 황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행복했었다니 다행이오. 그리고 내 청이 하나 있소." "무엇인지..." "나의 비가 되어주시오." "........!" 황태자의 짧은 대답에 경악에 찬 얼굴로 벌떡 일어서던 크리스틴은 핑 도는 머리를 짚으 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됩니다. 전 황태자 전하의 비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마음이...없다?" "네, 전 아직 어리고 황태자 전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과 혼인하고 싶은 생각은...없...습...니다..." 눈앞에 핑핑 도는 현기증을 느끼며 억지로 말을 끝맺은 크리스틴은 얄궂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벌렁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없다라...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혼인을 못한다...그러면...이제부터 알 아가면 되겠지. 마음은 몸이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오. 그리 고...나는 그대의 마음이 움직여지기 전에 먼저 확신을 받고 싶소."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을 부여잡은 크리스틴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안...." 점점 시야가 흐려지며 평형성을 잃은 크리스틴은 안기듯 황태자의 품안에 쓰러졌다. 약에 취해 쓰러지는 작은 소녀를 품에 안은 황태자는 그의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눈짓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는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운명이다. 어느 누구도...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 그것이 설사 신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절대 용서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춤을 신청한 자신에게 다른 여인을 들이밀며 단호하게 물러서는 모습에 충격을 받 았고 분노했다. 그리고 크리스틴이 자신의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상 처를 받았다. 상처를 받은 새끼 사자는 분노했고, 판단력이 흐려졌다. 과감한 선택. 설사 신이라 하더라도 절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사건을 만들고 말리라 결정을 내린 것은 크리스틴이 차갑게 등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다고. 금방이라도 화려한 날개짓을 하며 창공을 날아오를 것 같아 보이던 그 가녀린 등을 본 순간 결정을 내렸다. '오늘...내 여자로 만들 것이다.' 낌새를 눈치 챈 듯 어두운 얼굴로 자신과 크리스틴을 유심히 살펴보던 세바스티앙을 억지로 떼어버린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해, 아주 오래전 궁중 마법 사인 샌들우드가 거하던 로드궁을 선택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다른 누구의 침입도 허락지 않는 불멸의 요새. 불끈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의 품안에 안긴 채 금빛 가루를 뿌려대는 소녀를 소중히 안아든 황태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종이 준비해 둔 처소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노려보는 사나운 눈초리를 생각지도 못한 황태자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제발 그의 아버지가 백작과 샌드우드를 확실하게 잡아주기를 기도했다. ****************************************************************************************** 안녕하세요. 드디어 오늘도 한 편 올렸군요. 그런데 용객님, 그거 정말 효혐있는 건가요? 과거 제가 잠안오는 약이란걸 사먹은 적이 있었는데 미칠것 같은 두통에 시달리다 잘...잤습니다. 콜록 그리고 또 약이냐!! 이러실까봐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이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것이 칼과 약입니다. 독약, 미약, 기타 등등 그러니 또 약먹였다고 화내시지 마시고 꾹 참아...(퍼버벅!) 콜록. 에...이쯤 하고, 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월요일 잘 보내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분노하다. 2. 『기다려라.』 크리스틴이 약에 취해 쓰러지는 것을 본 순간부터 사나운 기운을 끌어 모으며 황궁을 모두 날려버리겠다는 듯 기를 쓰고 있는 실피드의 분노를 슬쩍 잠재운 샐라이온은 금 안을 빛내며 황태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기다리라니!』 『바람을 다스리는 자이면서 냉정을 잃었구나. 분노하지 마라. 눈을 떠라. 그리고 느껴라.』 『무엇을....!』 빠아악! 털썩! 분노로 이성을 잃고 날뛰던 실피드는 그제야 그들 주위를 맴돌던 낯익은 기운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기억해내었다. 황태자가 크리스틴을 로드궁에 데리고 올 때부터 뒤를 밟았던 인물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 죄는 제 목숨으로 용서를 빌겠습니다. 하지만...이 아이만은 안 됩니다." 칼의 손잡이로 시원스럽게 황태자를 때려눕힌 세바스티앙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자신에게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를 훌쩍 안아들고 로드궁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문가에는 황태자 와 마찬가지로 사지를 쭉 뻗고 기절해 있는 시종이 있었지만 가볍게 밟아주고 궁을 나섰다. 은밀히 움직인 것 덕분인지 세바스티앙이 로드궁을 벗어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거하는 백색궁 앞을 지나칠 때 그의 앞을 막아선 근위병들이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번쩍이는 창을 들고 나타난 근위병들은 여인을 어깨에 걸치고 달려나가던 세바스 티앙의 앞을 막아서고 외벽을 돌던 기사들까지 불러드리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에 그들을 뚫고 나가려했던 세바스티앙은 자신을 알아보는 누군가에 의해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누구냐! 세바스티앙님? 그 여인은...?" "무슨 일이십니까?" "비켜라!" "네?" "비키라고 했다!" "세바..." "황태자 전하께서 쓰러지셨다!" 세바스티앙의 얼굴에 나타난 절망적인 표정에 주춤 물러서려던 기사는 저 멀리 로드궁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얼굴을 굳히며 세바스티앙의 앞을 막아섰다.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호위기사이신 분이 전하의 안위에 신경을 쓰지 않다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황태자를 쓰러트린 것이 세바스티앙이라 확신하고 있는 태도였다.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는 기사를 보고 고개를 흔들던 세바스티앙은 크리스 틴의 엉덩이를 받치고 이를 악물며 칼을 뽑아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어깨위에 얹고 있는 소녀를 확인시켜줄 생각도 못한 세바스티앙은 무조건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백작과 샌들우드가 황제와 함께 있으니, 황태자의 일에 황제 도 개입되었다 생각을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황태자가 깨어나기 전에 궁을 벗어나려던 세바스티앙은 그의 거친 태도 때문에 근위병들의 오해를 샀다. 그리고 그러한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실피드와 카사가 뛰어들었다. "헉!" 시뻘건 불덩어리가 날아들며 나무를 태우고 거친 광풍이 몰아치며 근위병들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거센 불길과 바람으로 사람들이 휩쓸려간 자리는 성문까지 이어지며 널찍한 길을 만들어주 었다. 그런 신기한 현상에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세바스티앙은 길을 터주는 불꽃과 바람의 기운의 도움을 받으며 황궁을 벗어나 무작정 달려가기 시작했다. '숨겨야한다!' 황태자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백작가에 찾아가 크리스틴의 고변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니 그 이전에 반역자들의 일을 처리할 때만 해도 '천박한 것'이라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궁에 머물던 그 하룻밤 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음날 황태자는 직접 황제를 알현해 크리스틴을 간택 식에 불러 달라 청했다. 그리고 오늘 크리스틴을 노리는 황태자를 보며 세바스티앙은 그가 크리스틴을 억지로 취 하려할 것이라 생각했다. 세실이 죽은 후, 마음을 닫아걸고 차츰 싸늘해지던 황태자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언제나 무관심 일색으로 여자를 대하던 황태자가 갑자기 크리스틴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 그저 장난감처럼 하룻밤 취하고 버리는 것으로 결론을 지은 세바스티앙은 어떻게 해서든 크리스틴의 명예가 망가지는 것을 막아야했다. 그래서 과감히 황태자의 옥체를 상하게 하고 그가 취하려던 여인을 업고 달아나기로 한 것이었다. 궁을 벗어나 이카루스의 품안으로 달려가는 기사를 일견한 실피드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카사를 남겨두고 궁으로 돌아갔다. 소식을 알려주어야 하는 덜 떨어진 놈이 한 놈 있었다. 그 시각, 황제는 샌들우드와 백작을 앉혀놓고 하염없이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궁으로 돌아오십시오." "싫다." "공도 궁으로 돌아오게." "싫습니다." 몇 미르째 이런 씨름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아달라 부탁을 한 황태자의 말 때문에 시답잖은 말로 그들을 괴롭히길 몇 미르.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며 황제의 말 을 씹던 샌들우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차가운 기운에 벌떡 일어났다. 『어리석은 놈!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냐!!』 진정 분노한 실피드의 음성에 얼굴을 굳히던 샌들우드는 대전의 문이 부서져라 박차고 들어와 헐떡이는 근위병을 보고 황제를 노려보았다. "폐하! 황태자 전하의 호위기사가...여자를 납치해 달아났습니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크리스틴은 어디에 있느냐! 빨리 대답하라!" 영문을 몰라 하는 백작과 아차 하는 황제의 얼굴을 본 샌들우드가 마나를 모으며 황제에 게 호통을 쳤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백작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제를 노려보았다. "저.." "애디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 그저 몇 나르면 되니 백작과 샌드우드를 붙잡아 달라 부탁을 하던 황태자를 떠올린 황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청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 두 사람을 공황상태에 빠트린 황제는 사색이 된 얼굴로 엎드려 있는 근위병을 닦달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은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바스티앙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냐!" "그것이...그 분이 로드궁에 잠입해 황태자 전하를 기절시키고 여인을 강탈하여 도주하 였습니다." 『약을 먹였다. 지금 신전으로 가는 중이다.』 "빌어먹을 개논놈들! 다시 돌아오마. 그 목 잘 씻고 있어라. 으드득!" 살기를 펄펄 날리며 백작의 손을 잡은 샌들우드는 황제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세바스티앙 이 달려갔다는 신전으로 워프했다. "이런...!" 샌들우드가 백작의 손을 잡고 사라지는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황제는 근위병들에 게 이 일에 대해 함구하라 명을 내리고 황태자를 사람들 몰래 데리고 오라 사람을 보내었다. "빌어먹을!" 대전에 홀로 남아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황제는 분노를 드러내며 자신을 노려보던 샌들우 드와 배너 백작의 눈을 떠올리며 머리를 짚었다. "치료를 해주시오! 대신관을.....!" 흙먼지와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크리스틴을 어깨에 걸치고 신전으로 난입한 세바스티앙은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 밖에 없는 문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거친 방문에 우왕좌왕하던 신관들은 그가 내려놓은 소녀를 보고 헛바람을 들이키며 일제히 몰려들어 신성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나타난 대신관은 어느새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던 미약에서 깨어나 말똥말똥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크리스틴을 보며 혀를 찼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의식을 잃고 실려 온 것이 이번으로 네 번째. 두 번은 세실로, 한 번은 신전에서, 이번에는 크리스틴의 몸으로.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그려...' 아무리 시대가 변해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에 독약보다 좋은 것은 없다하나, 크리스틴만큼 많이 당한 아이는 없을 거라 단정할 수 있었다. "어...안녕하세요, 대신관님. 그리고...에...세바스티앙님?" 황태자와의 대화 중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흐릿하게 굳은 얼굴로 뭐라 이야기를 하던 황태자와 땅이 울렁거리는 느낌, 그리고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왔다 갔다 하던 것만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살 펴보던 크리스틴은 딱딱한 얼굴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세바스티앙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제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 전 황태자 전하와 함께 있었는..." "크리스!" 궁금증을 해결하려 세바스티앙에게 질문을 던지던 크리스틴은 그의 뒤에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드는 백작과 샌들우드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기절한 듯한데 어느새 신전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누워있고, 대화도 제대로 나누어 보지 못했던 세바스티앙이 나타나고, 노기를 띤 샌들우드와 백작이 등장했다. 떼굴떼굴 머리를 굴려가며 이런 저런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해보던 크리스틴의 얼굴에서 갑 자기 핏기가 가셨다. '나의 비가 되어 주시오.' 그리고 점점 희미해지던 의식. 한 가지 난해한 문제를 풀어낸 크리스틴은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세바스티앙의 옷가지를 잡았다. "아무 일도...없었지요?" "......!" 어린 소녀가 너무 총명해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저 어른들이 나서서 해결하면 될 일에 너무나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가 처했던 상황을 알아낸 크리스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세바스티앙 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도 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울 필요도 없었다. "...황태자이지요?" 잇사이로 튀어나온 짧은 말에 침음성을 삼킨 세바스티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를 보고 있던 샌들우드와 백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신관들은 이카루스를 부르며 두 손을 모았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크리스틴만큼 분노하지 못했다. '감히.....!' 여자의 순결은 목숨과 같다. 또한 한 번 지아비를 섬긴 여인은 결코 그의 둥지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홀로 서 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생애 첫 남자가 여인의 마지막 남자가 되며, 평생토록 헌신해야 하는 배후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평민의 경우, 하녀로 일을 하다 주인의 눈에 띄여 그와 동침을 하게 되는 여인들은 시집갈 생각을 버려야했다. 단 한번의 동침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부도덕은 사내들의 비난 을 받았고 정말 사랑하지 않는 다음에야 더럽혀진 여인을 받아들이는 남자들은 없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청혼을 거절당하자 미약을 먹였고 그 뒤에 숨은 의도는 겨우 13살 난 세실 이라 하더라도 단번에 알아 낼 수 있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문란한 귀족들보다 평민들의 생 활이 그런 쪽으로는 더욱 개방적이라 할 수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평민의 자식들은 어린나이에 일선에 뛰어들고 가사를 돕는다. 그리고 여식들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해 집안을 돌보기 위해 창녀가 되는 경우도 많았고 조금 이라도 나은 형편의 남자를 만나면 성년이 아니더라도 시집을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세실의 기억을 바탕으로, 크리스틴은 황태자의 의도를 훤하게 꿰뚫어 보았고, 그 뒤틀린 소유욕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번의 실수!' 레니는 마크와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다. 첫눈에 반해 마크의 유혹에 넘어가 동침을 하고 그 한번의 실수로 임신을 했고, 부모의 반대 를 무릎 쓰고 결혼을 했다. '널 낳을 수 있었으니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배고픔에 떨며 마크에게 맞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던 레니는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말했다. 세실리아란 딸을 낳아 행복함이 무엇인지 경험하기 위한 필연적인 만남. 그것이 레니가 생각하는 마크와 그녀와의 인연이었다. 아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자기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며 자식을 팔아 먹었던 마크와 스스로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크리스틴에게 약을 먹였던 황태자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던 크리스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손을 내미는 세바스티앙의 배려를 무시하고 신전의 아치형 천장에 새겨져 있는 조각을 바라보았다. "실피드" 크리스틴의 붉디붉은 입술에서 조그마한 속삭임이 흘러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를 진동시키며 나타난 실피드는 소녀의 작은 몸을 감싸 안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헉!" 여기저기서 억누른 신음성이 터져 나왔으나 크리스틴의 머릿속에는 싸늘한 청록색 눈동자 를 가진 18세 소년의 얼굴만 가득했다. "궁으로...!" "크리스!!!" "어딜 가는 것이냐!!"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어른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크리스틴은 실피드의 품안에 안겨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황궁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안으로 날아 들어간 크리스 틴은 침대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황태자와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황제를 보았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허락지 않을지니 잠시 잠들어있기를, 스*완(swoon)" 단 한번의 손짓으로 황제를 기절시켜버린 크리스틴은 사뿐히 바닥을 딛고 서서 황태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대 무의식의 축복을 받은 이여, 외적인 상처는 치유되지 않되 이제 잠에서 깨어나 나의 눈을 보게 될지니, 리*커*버*리(recovery)" "흐음...."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신음을 하며 천천히 눈을 뜬 황태자는 시퍼런 한광 을 번뜩이며 내려다보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신음성을 발했다. "일어나세요, 전하." "........" 마치 얼음조각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차가운 냉기를 뿜어대는 공기도 그러하였고 소녀의 차가운 얼굴에서 내뱉어진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 역시 그러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의 두 눈 속에 휘몰아치는 차가운 분노와 경멸,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불신과 원망이 황태자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자신이 계획했던 일이 물거품이 되었고 크리스틴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 하지 않았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행한 것 이었다. 그의 의도가 성공을 했건 그렇지 않았건 결과와는 상관없이 지금처럼 크리스틴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잡을 수 없는 환상. 적어도 황태자의 눈에 비친 크리스틴은 그렇게 보였다. 스스로가 원하지 않는 한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뜬구름 같은 존재. '이제 알았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욕심을 부렸고, 만용을 저질렀다. "일어나세요." 크리스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축 늘어져 있던 황태자의 상체가 번쩍 일으켜졌다.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닌 실피드의 의지로 인한 것.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는 바람의 힘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킨 황태자는 이를 악물고 분노한 크리스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후회하지 않는다. 아쉬울 뿐이다." 정말 그러했다. 황태자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잡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경멸을 받아도 좋았다. 손가락질 받아도 좋았다. 자신의 것만 될 수 있었다면...! 굳은살이 베인 두툼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실소를 짓던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크리스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넌 잡을 수가 없었다. 항상 한 발 먼저 내 곁을 벗어났지. 언제나 그러했다. 네가...나의 청을 받아들이기를...그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했을 거야. 비겁하다 욕해도 좋고, 천하에 몹쓸 놈이라 비난해도 좋아. 내 옆에 있어만 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순간 충격을 받은 듯 파르르 떨리는 크리스틴의 눈을 보게 된 황태자는 피식 웃으며 힘없이 손을 떨어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조급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넌 아무것도 몰랐을 거야. 그렇지? 널..." "전하!" "사랑한다." "......!" 욱신거리는 뒤통수와 눈이 빠질 것 같은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틴의 핏기가 가신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황태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다리를 바닥에 내리고 크리스틴을 마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진심. 그것이 크리스틴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내 아내가 될 사람은 너 뿐이다.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난 네 곁에 있을 수가 없어. 널 잡아둘 수밖에 없었다. 넌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안개 같은 아이야. 자유롭지. 오늘 그것을 알았다. 그 어떤 것도 네가 원하지 않 는 한 널 머무르게 할 수가 없어. 백작은 할 수 있을까? 너의 부모는 네가 떠나는 것을 막 을 수 있을까?" 한눈에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현기가 담긴 눈으로 크리스틴의 실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황 태자는 한 쪽 입술꼬리를 치켜 올리며 피식 웃었다. 세실이란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 있었다. 하기에 크리스틴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녀가 평생토록 거짓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앞을 내다보며 꼿꼿하게 서 있었던 아이였다. 어찌 거짓된 삶에 안주하며 머무를 수 있을까.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휘청이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그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넌...정말 떠날거야. 그렇지? 그래서 잡고 싶었다. 시간이 없을까봐,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할 시간이 모자랄까 두려웠다. 가지 말라고 해도 넌 갈거야. 내가...네가 없어지면 난 또 한 번 죽을 거란 것을 알아도 넌 떠나겠지. 그렇지?" 이쯤 되면 크리스틴은 황태자가 누구에게 고백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야만 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굳은 머리는 현실을 외면하고 황태자의 진심을 밀어내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난생처음 받은 사랑의 고백에 어쩔 줄 몰라하던 크리스틴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쭉 뻗는 황태자의 너무나 슬픈 얼굴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진정 자신의 고백에 마음이 혹한 행동이 아니라, 천성이 순후한 크리스틴의 본능적인 행동 이었기에 황태자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움이 절절한 눈으로 크리스틴의 푸른 눈 속에 담긴 검은 눈동자를 그려내던 황태자는 자신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아름다운 소녀 의 부드러운 두 손을 잡았다. '네 손은 이렇게 부드럽지 않았어. 하지만...그렇게 되어 가고 있구나.' 어느 누구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 매일 남들 모르게 흙을 만지고 약초를 연구하며 거칠어져가는 손을 쓰다듬던 황태자는 크리스틴의 떨리는 두 손을 놓아주고 눈을 감았다. ****************************************************************************************** 어제 새벽에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이 되었습니다. 열심히...딴짓을 하고 있었는데(Filen아 미안하다), 콜록, 화면히 새까맣게 변하더니 마우스도 안먹히고, 전원이 꺼지지도 않고 놀라서 코드를 확 뽑아서 동생방으로 뛰어갔지요. 했더니... "어느 싸이트 들어갔어!!!" 이러잖아요. 흑흑...전 다움에 있었는데...그렇게 이야기했두만 안믿더군요. 쓸데없는 싸이트가서 바이러스 먹었다고 길길이 날뛰는 동생을 내버려두고 아침 일찍 수리하러 다녀왔습니다. 꼬박 3시간을 서 있었어요. 심장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는...!! 평소 동생이 백업 안시켜놨으면 여러분들하고 영원히(?) 빠이빠이는 아니더라도...한참 못 뵐 뻔 했다는... 바이러스...그런 거 만들어 뿌리는 넘들을 잡아 응징해야합니다!!! (불끈!!) 평소에도 인터넷이랑 한글을 같이 띠워놓으면 뻑 하면 다운되더니만 그것도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돈 깨지고, 심장 깨지고, 동생한테 깨지고...제가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ㅜ ㅜ 그.리.고. 에헴~ 오늘 유키가 이따~~~시만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캬캬캬캬(자랑하려고 쓴 글 맞음!) 코코님께서요 무쨔~게 비싼 티포트랑, 제가 읽고 싶었으나 못구해서 못읽은 책3권이랑, 카모마일이라는 허브티 한통이랑, Dilmah에서 나온 카모마일 찻잎을 보내주셨어요! 쿡쿡쿡쿡 아바타도 꾸며주시고, 신경 날카로울때 마시라고 차와 티포트까지 보내주신(강조!) 코코님 감사합니다. 유키가 받은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선물! 너무나 감사하게 잘 받았고, 잘 읽고, 잘 쓰고, 잘 마실께요.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되지요, 자랑? ㅋㅋㅋㅋ) 여러분,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시어요~~~!!! 추신: 리플 환영!, 태클 환영!, 오타 지적 대대적인 환영!!! 선작!, 추천 환여어어엉~~~~!!! (기분이 날아갈듯하니 뭐든 반갑게 맞이합니다아~~~!!! 욕설 제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분노하다. 3. "날 죽이고 싶다면 그리 해도 좋아. 하지만 날 살려준다면 난 평생 너의 뒤를 쫓을 것이다. 황좌도 필요 없어. 끝까지 따라간다. 그것만은 기억해라. 난 널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다." 어린 소녀에게 무슨 힘이 있어 18세나 된 소년을 죽일 수 있을까. 하지만 황태자는 그것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의 말 한 마디면 자신 의 목이 떨어질 것이라는 걸 의심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 황태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제게 미약을 먹인 것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의 그 비뚤 어진 마음이 저의 마음을 파괴할 뻔 하였기에, 수많은 여인들이 그러한 굴레에 잡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기에 감히 제게 그러한 짓을 하신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마음 역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전달되는 또 다른 대답을 들은 황태자는 피식 웃으며 눈을 떴다.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성급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아직 포기 하지 않았다." 입으로 말하지 않았으되 마음으로 들은 거절에 대한 황태자의 대답은 크리스틴의 눈에서 독기를 사라지게 하였다. "무엇이 그리도 전하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신 겁니까? 무엇이 저에게 미약을 쓰라 종용 한 것입니까? 시간은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시간은..." "없었다. 네가 없다 대답하였다. 다른 여인의 손을 건네주며 그녀를 선택하라 부탁한 네가 나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단 한마디로 거절하고 쉽게 등을 돌린 너의 그 단순함이 미약을 쓰게 만들었다. 넌 기회를 주지 않았어. 그것이 나의 등을 떠밀었다." "......." 단 한번의 거절. 춤을 신청했던 황태자의 손을 거절했던 것이 그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자존심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조차 잡아주지 않고 다른 여인을 그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그의 손을 외면하고 다른 여인의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잔인했던 것일까. 그녀의 단순한 행동이 황태자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잘못된 길을 가게 만들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왜 말하지 않았냐고, 진즉에 이야기를 하지 왜 내색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려던 크리스틴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실이 아닌 크리스틴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가 알았다면...' 원래의 크리스틴이 황태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저 바이오니어의 지고지순한 자리에 앉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차라리 잘 된 거겠지.' 그 욕심 많은 여인이 황태자비가 되고 국모(國母)가 된다면 그것은 크리스틴 자신에게는 몰라도 황태자에게는 재앙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황태자가 실망 했을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과거의 크리스틴이 아니었고, 황태자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크리스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겪는 갈등과 회환을 눈으로 확인하던 황태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그토록 이야기를 했건만 이 둔한 여인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그가 사랑을 고백한 인물이 누구인지 헛짚고 있었다. "......세실?" "네?.....헉!" 깊은 사색에 잠겨 있던 크리스틴은 황태자의 부름에 냉큼 대답하는 우를 저질렀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한 발짝 물러서려던 크리스틴은 황태자의 얼굴 가득 환한 빛을 내며 반짝이는 웃음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어쩌다 네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중요하지 않고, 상관 하지 않는다. 다만..." "......." "내가 고백한 상대는 네 껍데기가 아니다. 나의 목숨을 구해주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 검은 머리 소녀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나의 여인이다." 진중한 표정으로 나직이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며 한 손을 들어 크리스틴의 손을 잡으려던 황태자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서는 소녀를 보며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눈앞에 별이 보이며 지독한 현기증에 쓰러질 뻔 하였지만 무사히 몸을 일으킨 황태자는 어렴풋이 그의 몸을 받쳐주는 미지의 존재에 기대어 눈물을 글썽이는 크리스틴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안타까운 얼굴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넌...항상 내 마음속에 있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세실이던 크리스틴이던 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네가 이 몸이 아닌 어떤 몸에 있다 하여도 네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듯 너를 향한 나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꿈이...아니었어." 크리스틴의 중얼거림에 히죽 웃던 황태자가 빙글거리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눈물을 삼키려는 작은 소녀의 머리를 부벼주었다. "네가 없어졌을 때 널 찾아내어 나의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런데 네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포기할 수 없었지만 이미 세상에 없기에 내세를 기약했다. 하지만 살아 있었 지.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과거와 똑같은 눈으로 날 보며 이야기하는 널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네가 어떻게 알까. 다시 태어난 것을 기뻐했고, 내 앞에 나타나 준 것에 감 사했다. 그래서 널 보내지 못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널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고백에 정신을 못 차리던 크리스틴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뒤로 물러서려했으나 성년이 된 청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늘기만 한 두 어깨를 잡고 키가 작은 소녀를 앞으로 끌어당긴 황태자는 조용히 속삭였다. 마치 누군가가 들을까 두려운 듯. "네가 네 자신으로 돌아가려 노력할 것이라 생각했다.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했다. 나의 생각이 기우이길 바랐지만 너의 눈은 단호했어. 넌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몸은 이곳에 있되 너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렇지? 나도 그곳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난 황제의 아들이고 그 것이 족쇄가 되어 쉬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당장에라도 황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함께 떠나자, 아니 따라가겠다 이야기를 할 것 같은 황태자의 입을 급히 막은 크리스틴이 도리질을 쳤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허락?" "황태자 전하는 이 바이오니어의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크리스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태자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를 드러내었다. "그러면 네가 함께 해 줄 것이냐?" "......." 무언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눈은 '불가(不可)'라 말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던 황태자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니 난 황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와..." "안됩니다." "그렇게 될 것이다." "아니요." 황태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흔든 크리스틴은 진지한 얼굴로 그의 청록색 눈을 직시했다. "황태자 전하는 황태자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신분을 버리신 황태자 전하께서 무엇을 할 수 있으신가요?" 꼭 황태자가 아니면 넌 정말 쓸데없는 놈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크리스틴이 말하는 바도 그러했고. 모욕감이 아닌 자존심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소리를 들은 황태자는 이를 악물고 크리 스틴의 맹랑한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내가 황태자가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황태자 전하는 스프를 끓일 줄 아시나요?" "그건 주방장이..." "황태자가 아니면 직접 하셔야 해요. 스프를 끓일 줄 아세요?" "...배우면 된다." "어느 세월에요?" "......." 신랑 후보 자격에 대해 연설을 할까 고민을 해보던 크리스틴은 한숨을 삼키며 얼이 빠진 황태자의 손을 토닥여주고 그의 손을 내렸다. "전하의 말씀이 맞으실지도 모르지요. 전 떠날 거예요. 다시 돌아오게 될지 그렇지 않을지 아직 몰라요. 언제가 될지도 몰라요. 목적도 없어요. 그냥...혼자 서기를 하러 갈 생각이에요. 함께 가고 싶으시다 말씀 하셨지요? 전하께서 잘 하시는 것이 검을 쓰는 것 말고 더 있나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검을 잘 써서 사람 죽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뭔데요?" "......." "검을 쓰는 것 밖에 모르는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밖에 없지요. 그리고 전 용병은 싫어요."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말을 불쑥 꺼낸 크리스틴은 황태자의 얼굴을 직시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가 이 궁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편안한 삶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어려운 길을 가지 못해요. 평민들의 삶이라 는 건...투쟁의 연속이지요. 전 그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갈 거예요. 그래서 황 태자 전하는 안되요. 전 아직 어리고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사랑만으로 행복하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행복해 지기 위해 여행을 하려는 거예요. 지금도 행복하지만 제가 얻은 행복이 아니기에 제 스스로가 구하기 위해 떠날 겁니다. 황태자 전하는 전하께 주어진 삶에 충실하세요. 전하는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지 저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확실한 거절이었다. 크리스틴의 강직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던 황태자는 지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 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라를 위해 존재한다고?" "스테판 황자님을 기억하시고, 마리아님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 해를 가 했던 사람들을 기억하세요. 황태자 전하는 이미 피를 뿌리고 그 자리에 서 계십니다. 도망가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에요." "도망?" "전하를 사랑하기 때문에 황제폐하께서는 성군의 탈을 벗고 직접 칼을 잡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외면하지 마세요. 그분의 뒤를 이을 사람은 전하 한 분뿐입니다. 나라를 어지럽히지 마세요. 황제 폐하께 불효를 하지 마세요. 그것도 하찮은 소녀를 위해서..." "하찮지 않다! 넌 그런 존재가 아니다. 나의 목숨이 되고 나의 운명이 될 여인이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데요?" "......" 알아야 할 것은 알고 있다 대답을 하려던 황태자는 크리스틴의 눈에 담긴 슬픔을 보고 입을 닫았다. "제 자신을 찾으러 떠나려는 저에 대해 얼마나 아시는데요? 저도 모르는 저에 대해 아신다 말씀하실 건가요? 제가 진정 전하의 운명이 되고 목숨이 될 여인이라면... 시간이 대답을 해줄 것이라 믿어요. 지금 전 제 두 발로 서는 것조차 힘겹습니다." "나와 함께 서면 되지 않느냐?" "이곳에 갇혀서요?" "전 아직 어리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해요. 전하의 마음은 알겠으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각해요." ".......!" "사랑을...소유라는 말로 구속할 수 없다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길 기도합니다." 마크의 사랑은 소유였다. 그가 말한 레니에 대한 사랑은 그러했다. 레니를 소유한 주인으로 그는 자신 나름대로의 사랑을 한다 말했고, 자식들조차 그에게 는 소유물에 불과했다. 그러한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얼마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인지 끔찍할 정도 로 경험해본 크리스틴은 황태자의 사랑을 다른 각도로 보고 있었다. 소유욕은 독점욕이다.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미래. 적어도 크리스틴이 본 황태자의 사랑은 그러했다. 일방통행의 사랑은 두 사람 모두를 지치게 만들 뿐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랑에 기대어 행복하다 말하지만 크리스틴은 그렇게 생각하 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배려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황태자가 말하는 사랑은 크리스틴 의 이상적인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하늘을 담은 푸른 눈이 말하는 절실함에 뭐라 대답을 하려던 황태자는 그녀의 말이 일편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 작은 새를 잡아둘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 않았나.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러한 절망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유로운 존재를 구속한다는 것은 그녀의 숨통의 죄는 행위였다. 드넓은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새를 잡아 새장에 가두면 그 새는 곧 죽고 만다. 크리스틴의 말은...황태자의 손을 거두게 만들었다. 힘없이 한 걸음 물러선 황태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말하며 그녀의 날개를 꺾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그러면 너와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이었다. 곧 떠나버릴 존재에게 어떻게 자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황태자는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를 원망하며 크리스틴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시간이 흘러도 저와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스프를 끓이세요." "......?" "전 저에게 스프를 끓여줄 남자와 혼인할 생각이에요." "......."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크리스틴의 말을 음미하던 황태자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미처 생각해지 못했던 사실. 15세 소녀의 몸안에서 숨 쉬고 있는 존재는 세실이었다. "너...몇 살이었지?" "......" "세실...로서 말이다." "열세 살이요." ".........." 그 명쾌한 대답에 이마를 짚고 천장을 올려다보던 황태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열...세살..." '젠장!' 패를 잘못 돌려도 한참을 잘못 돌렸다. 열 세살짜리를 겁탈하려 했다니. 껍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말했던 자신이 사실은 크리스틴의 겉모습만 보고 늑대처럼 침을 흘렸음을 깨달은 황태자는 텅 빈 눈으로 멍하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스스로의 성급함과 어리석음을 질책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대체...열 세살짜리 소녀를 붙잡고 자신은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일까? 적어도... "오년은 기다려야 하는 거냐. 젠장!" 물론 조숙한 아이들은 그 나이에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조숙한 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은 흔히 그 나이의 사랑은 풋사랑이 라 말하지 않는가. 그것을 뒤늦게 인식한 황태자는 자신의 어이없는 행위가 크리스틴의 가슴에 상처를 준 것이 아니었는지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음을 깨달았다. 순백의 도화지에 시뻘 건 물감을 통째로 집어던진 듯한 찜찜한 느낌에 어쩔 줄 몰라하던 황태자는 자신이 한 행위를 후회하고 있음을 인식했다. "미안하다." "......" "정말...미안하다." 육신의 상처는 마음을 병들게 한다. 순수한 아이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큰 죄악을 저지를 뻔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 황태자는 진심을 담아 크리스틴의 맑은 눈을 보았다. 더 이상의 분노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 푸른 눈 깊은 곳에 깔려있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성에 대해 알기 전에 상처를 받고 말았다. 치유될 수 있을까? 자신이 저지르려 했던 짓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 절절히 인식한 황태자는 두 손으로 크리스틴의 볼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남자는 늑대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침을 흘리고 소유하고자 이를 드러낸다. 나도 남자고 널 사랑한다. 두려워하고 경계해야하는 것은 맞아. 하지만 내가 저지른 짓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지 마라. 눈을 감지 말고 마음을 닫지 마라. 미안하다. 내가...잘못했다." 번들거리는 청록색 눈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혹여나 크리스틴이 이성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까 겁을 내는 청년이 그곳에 있었다. 혼인을 할 수 있는 나이라 착각을 한 것에서 빚어진 잘못. 그것을 어떻게 보상해야하는지 몰라 허둥대는 성년의 문턱을 넘어선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틴은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주었다. 조급했다 하였다. 자신의 존재를 알고 성급했다 인정했다. 스스로의 무지를 알기에 그것이 황태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었으나, 다행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는 스스로 조심하면 될 일었다. 하지만 이해는 이해고, 받아야 할 것은 받아내야 했다. "정말 미안하신가요?" "그래." "두 번 다시 이런 짓 저지르지 않겠다 약속도 해주세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럼...한 대만 맞으세요." "......." 볼을 감싸고 있는 황태자의 두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린 크리스틴은 살짝 웃었다. 순간 온몸의 털이 몽땅 곤두서며 소름이 돋아나는 섬뜩함에 얼른 눈을 감은 황태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여기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마나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분노가 아닌 용서의 의미로 벌주고자 하는 이가 있으니 힘을 빌려주세요, 스*트*렝*드(strength)' 오른쪽 손목 아래로 모아지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팔을 들어올린 크리스틴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 주먹을 쭉 내질렀다. 빠아악! "........" 주르륵~투둑투둑 허공을 가로지르는 소리도 없이 솜방망이처럼 살며시 다가왔던 조그마한 주먹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황태자는 멍하니 자신의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를 보며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리고 입안 가득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입을 벌려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뱉어냈다. 투두둑 "......흠..." 말 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검기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된 몸으로 15살짜리 육신을 가진 소녀의 주먹한방에 후두둑 떨어지는 이빨 세 개를 멍하니 보고 있던 황태자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크리스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팠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고통과 더불어 왼쪽 볼에서 시작되어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는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던 황태자는 입안에서 주륵 흘러내리는 핏덩이를 의식하고 얼른 입을 닫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호되게 맞아본 역사가 없었던 황태자는 인정사정없이 자신의 뺨을 때린(?) 크리스틴의 푸른 눈을 보며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의 행로가 결코 평탄치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주먹 한 방의 위력이 이 정돈데 만약...정말로 크리스틴의 용서를 받지 못할 일을 저지 르게 된다면?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로 크리스틴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던 황태자는 두 번 다시 그녀를 화나게 만들 짓은 하지 않겠다 맹세하고 말았다. 그리고 절대로 이 소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않겠다 스스로 다짐했다. 남자로 태어나 죽는 것이 두려울까 만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맞아죽는 일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화가...조 후려니?" 벌써 한 쪽 뺨이 시퍼렇게 멍이 들며 주먹만 하게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겨우 질문을 던진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여주는 크리스틴을 보고 이 영광의 상처를 결코 마법으로 치유하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미약을 먹여 겁탈하려던 상대를 주먹한 방으로 용서해준 크리스틴의 넓은 마음에 감사 하면서 그렇게 오늘 일을 곱씹으며 두 번 다시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다. "미아...하다.." 황태자의 또 한번의 사과에 고개를 끄덕여준 크리스틴은 바닥에 떨어진 이빨들을 보며 자신이 후회를 하는 것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심사숙고 해 보았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한 번은 모이라의 시녀인 루나, 그리고 이번엔 황제의 아들이자 장차 이 바이오니어 국을 다스릴 황제가 될 사람.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어떤 것이 확 풀렸다. 더불어 황태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것을 알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사랑해준다는 것. 그것은 상대방이 누가 되었든 감사할 일이고, 행복한 일이었다.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얼른 내리고 새침한 얼굴로 황태자의 부풀어 오른 뺨을 외면 한 크리스틴은 침대 옆에 누워 잠들어 있는 황제를 보고 한숨을 삼켰다. '치료를 해줘야 하나?'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황제가 깨어나 황태자의 얼굴을 보면 얼마나 화를 낼지 가히 상상이 가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한 크리스틴을 상념에서 구해준 것은 다름아닌 황태자였다. "아바마마..시겨..쓰지마라" "아..." 최대한 똑바로 발음하려 애를 쓰며 크리스틴을 구제해준 황태자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크리스틴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미아..." 작은 속삭임과 동시에 이마에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 그리고 비릿한 피내임과 함께 축축한 액체가 이마에 묻어나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을 놓아주는 황태자의 품에서 벗어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출혈과다로 죽을 생각인지 쌍코피가 터져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으려 노력하기는커녕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황태자를 보며 입술을 잘근거리던 크리 스틴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대신 소매의 천자락을 부욱 찢어 그것으로 코피를 닦아주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어..." "미워하지 않을께요." "....." "원망하지 않을께요." "....." 부드러운 손길로 피를 닦아주며 조용히 속삭이는 크리스틴의 붉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히죽 웃던 황태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크리스틴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가자." "스승님!" 등 뒤에서 들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리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손을 잡아 당기는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내가...가께. 기다려줘." 짧은 약속의 말을 남긴 황태자는 굳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샌들우드 앞으로 크리 스틴을 밀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황제가 있는 곳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을 보고 뭐라 말을 하려던 크리스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황제에게 건 마법을 거두어들이며 샌들우드의 품에 안겼다. "텔*레*포*트(teleport)" ****************************************************************************************** 푸르메님, 게시판에 올려놓으신 글이 사실이라면 어느 카페인지 알려주세요. 그리고, 어떤 분이신진 모르시겠지만 허락받지 않고 글을 퍼가신 분은...알아서 카페 나가주시길 바랍니다. 전 님들을 믿고 글을 올렸고, 배신당할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알아서...탈퇴해주세요.(별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사과 한 마디는 해주시겠습니까?) ========================= 다음편 내용까지 조금 붙였습니다. 마음에 드셨는지요? ㅋㅋㅋㅋ 오늘 조아라가 되길래 냉큼 올렸지요. 그리고 제가 10연참 하게 될...(이번주 언젠가) 날까지 하루 한 편 올린다고 했잖아요 ㅜㅜ (에르나힘님 미버욧! 흑흑) 그리고...의외로 황태자가 좋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그건 안됩니다. 만약 된다고 하더라도 아직 멀었지요. 이유는...이번 편 보시면 알겠지만...13살짜리가 어떻게 결혼을 합니까아~~~!!! (지들은 된다 해도 제가 안됩니다!! 퍼버벅!) 어찌되었든... 오늘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분노하다. 오늘 바쁜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새벽에 올립니다. 양해바랍니다. 불펌에 대한 공지도 함께 올립니다. 마지막 사설 다 읽어주시길 부탁드릴께요. =============================================================================== 4. "어찌된 일이냐? 괜찮으냐?" 신전으로 돌아온 샌들우드는 굳은 얼굴로 크리스틴의 팔을 잡고 물어보는 백작을 보며 혀를 찼다. 세바스티앙은 입을 꾹 닫고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고, 궁금증 을 풀 길이 없었던 백작은 크리스틴이 나타나자마자 닦달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되었다, 집으로 가자. 자네도 함께 갈텐가, 아니면 궁으로 갈텐가?" 한 쪽 구석에 앉아 검을 닦고 있던 세바스티앙은 샌들우드의 질문에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웃었다. "궁으로 돌아가야지요." 죽음을 각오한 그의 결연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던 샌들우드는 평온한 얼굴로 세바스티앙에게 다가가는 크리스틴을 보고 혀를 찼다. "감사해요, 세바스티앙님. 언제나 제 목숨을 구해주시네요." "아..." 크리스틴의 밝은 미소를 보며 말문이 막힌 세바스티앙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었고, 자신이 이 작은 소녀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꼭 그녀의 보호자가 된 기분이었고, 작은 소녀가 진정 행복해지길 기도했다. "웃는 것을 보니 좋구나. 다행이다." "아...감사해요, 세바스티앙님." 설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늠름한 기사를 보며 방긋 미소를 지은 크리스틴 은 그의 뺨에 키스를 해주고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고작 이런 것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뒤에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백작의 헐떡임을 가뿐히 무시해버린 크리스틴은 자신 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거친 손길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땀냄새와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장한 사내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레니와 세실을 구해주고,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주고, 크리스틴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 해 목숨을 건 사내. 어떤 사람이 이 사람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까지 한 소녀 를 구해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서줄 것인가. 진정 고마운 분이라 생각을 하며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하고야 말겠다 결심을 한 크리스틴은 백작의 헛기침 소리에 억지로 고개를 들어 세바스티앙의 눈을 바라보았다. "행복하면 된다." "......" 크리스틴의 눈에 담긴 미안함과 고마움을 읽은 기사는 싱긋 웃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 내었다. "그것이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이다.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보고 싶다." 여기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행복만을 빌어주는 세바스티앙의 마음을 읽어낸 크리스틴은 한없이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또 다시 그의 넓은 품속에 뛰어들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에 불과하건만 어찌 이런 인연이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샌들우드와 백작 역시 세바스티앙의 얼굴에 담긴 진심을 보고 감동했다. 저런 사내는 흔치 않다고, 약한 이를 보호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던질 용기 가 있는 사내는 진정한 사내라고 그렇게 감탄을 하던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감탄은 감탄이었다. 다 큰 딸이 장성한 사내의 품에 안겨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것을 아비가 되어 어찌 보고 만 있을 쏘냐. 크리스틴의 어리광을 이해하지 못한 백작은 반쯤은 질투어린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다 끝내 행동에 옮기고야 말았다. 세바스티앙의 품에 안겨있는 크리스틴을 번쩍 들어올린 백작은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는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게. 폐하께는 내가 따로 연통을 넣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백작은 황제가 그의 청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황태자의 근위기사가 목숨을 걸고 딸을 구출해야만 할 정도로 큰일이었음을, 샌들우드가 분노하며 황제에게 소리를 칠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기에 백작은 자신할 수 있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으나, 결코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 그것은 황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것이고 백작은 이번 기회를 몰아 약속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황태자는 안돼.' 백작은 아버지였다. 어느 아비가 딸에게 위해를 가하려던 인간과 짝을 맺어주겠는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시작된 일이라 하더라도, 상처입고 분노하던 딸의 모습을 목격한 백작은 황태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치졸한 행위. 안 봐도 뻔하지 않는가? 의식을 되찾은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는지를 먼저 물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는 보았으되 듣고 싶지 않았다. 잊어야할 기억이라면 지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만 한 가지. "한대를 맞으면 백대를 때려주면 된다."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마디 한 백작은 그의 말에 호응을 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샌들우드와 마주보며 미소를 교환했다. 샌들우드는 세바스티앙을 먼저 궁으로 보내주고 신관들의 배웅을 받으며 신전에서 백작가로 워프했다. 아무리 단거리라 하더라도 이 늦은 시각에 지친 아이와 함께 걸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맴돌며 잔소리를 해대는 실피 드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그래 간택식을 다시 열지 않는다고?" "네." "이유가 무엇이냐?" "5년...뒤에 열겠습니다." "......." 절대로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황태자를 또 다시 기절시켜 억지로 치료 하게 만든 황제는 멀쩡한 얼굴로 굳은 결의를 내비치는 아들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를 말해 보거라." "5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무엇을 기다린단 말이냐?" "제 아내가 될 아이가...성년이 되려면 5년이 필요합니다." ".......!" 황제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황태자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혀를 찼다. "5년이면 충분할 것 같으냐?" "네?" "5년만 기다리면 그 아이를 네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 자신하느냐 말이다." "....." 황제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던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피가 들끓는 열혈청년의 열정적인 대답에 혀를 끌끌 차던 황제가 서신을 한 장 내밀었다. "읽어봐라." 「세바스티앙 드 카르민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는 안 됩니다.」 이제껏 황제에게 이런 협박장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이름도 없고, 황제에게 예를 보이는 것도 아닌 달랑 두 문장이 적혀있는 편지 를 몇 번이고 읽어보던 황태자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큭큭큭큭" "......." "닮았습니다." "응?" "참으로...닮았습니다. 인연일까요? 이렇게 닮은 부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세...크리스틴을 말하는 것이냐?" "네." "무엇이 그리도 닮았느냐?" "허락하지 못한다 하더군요. 제가 이 궁을 벗어나 자기 옆에 있겠다는 것을 허락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리고 전 황태자가 아니면 가치가 없는 놈이라 하더군요." "무슨....!" "전 황태자로 태어나 바이오니어를 이끌어나갈 황제가 되어야 가치가 있는 놈이라 하더군요. 그리고 절 받아들이지 않겠다 했습니다. 참으로 닮은 부녀가 아닙니까?" "아..." "맹랑하다, 생각을 하였지만 그녀의 아비까지 이토록 당당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은 모르겠지요, 그들 두 사람의 성정이 얼마나 닮아보이는지."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것인지 키득거리며 백작과 크리스틴에 대해 칭찬을 하던 황태자 는 웃음을 뚝 그치고 황제를 보았다. "해서 주방장을 하나 은밀히 붙여주십시오." "주방장을? 왜?" "스프를 만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스프?" "네. 스프를 만들 줄 아는 사내한테 시집을 가겠답니다. 검만 쓸 줄 아는 사내가 할 일이 뭐가 있냐고, 사람을 죽이는 것 말고 뭐가 있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요리를 배우겠습니다." "......." "요리를 배워서 그 아이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신랑이 되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투지를 불태우는 아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리던 황제는 검 대신 부엌칼을 들겠다 부르짖는 황태자를 말려야 할지 열심히 하라고 훌륭한 주방장을 붙여주어야 할지 고심을 해야 했다. 과연 애드리안이 크리스틴이란 아이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아들의 미래를 그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황제는 갑자기 등 뒤에 흐르는 싸늘한 냉기 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핏기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했던 황제는 그의 코앞에 내밀어진 주먹만한 지팡이 손잡이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스프 만드는 법을 배운다고?" "....."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샌들우드는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들고 황제의 머리를 겨눈 채, 자지러질 듯 떨고 있는 부자를 보고 이를 갈았다. "애비나 자식이나, 똑같이 이기적인 놈들. 뭐 사랑? 하! 그래 네놈들이 말하는 사랑이 어린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겁탈이나 하는 그런 것이냐? 내 제자는 용서해도 나는 못 한다, 이 돼지보다 못한 놈!" 빠악! "컥!" 이를 으득으득 갈며 살기를 뿌려대는 샌들우드를 보며 뭐라 대답을 하려던 황태자는 그의 지팡이에 가슴을 얻어맞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황제의 몸을 받아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스*트*렝*드(strength)!" 크리스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차가운 목소리로 강화마법을 시전 한 샌들우드는 바닥에 처박혀 있는 부자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일런스(silence)를 걸었는지 일체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황제의 처소 안에서 쉴새 없이 '퍽! 퍽!'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덜너덜해진 몰골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황태자가 비칠거리며 일어났다. "포기...못합니다." "포기 못해? 으드득! 네놈은 안 된다고 하지 않느냐! 포기해!" "못합니다!" 개넌가의 성정을 익히 아는 샌들우드는 어떻게 해서든 황태자의 포기 각서를 받으려 했으나, 이미 눈이 먼 황태자의 청록색 눈은 죽어도 그리할 수 없다 말하고 있었다. 그 고집스러운 눈과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실실 웃고 있는 황제를 노려보던 샌들우드가 지팡이를 치켜올렸다가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 "꿈 깨!" 콰콰쾅~!! 갑자기 백색궁 전체가 흔들리며 세계수 나무가 깊이 박혀 들어간 바닥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궁 밖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리며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근위병 이 황제의 처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흠씬 얻어맞아 널부러져 있는 황제와 황태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바닥에 머리를 박은 근위병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폐하! 로드궁이 무너졌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함성과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오는 가운데 황제 에게 소식을 가지고 온 근위병은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 무언가에 쫓기듯 밖으로 뛰어나 가버렸다. 드드드드드드드드 지축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미세한 가루가 흘러내렸다. 로드궁이 무너졌다는 소리에 얼이 빠진 부자를 내버려 두고 영상구를 통해 밖의 사정을 살펴보던 샌들우드는 혀를 끌끌 차며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돔 형식으로 지어진 커다란 궁이 화염에 휩싸인 채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 주위의 정원마저 파괴하려는 듯 광풍이 몰아치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거기다 불쑥불쑥 솟아오른 흙덩어리들이 로드궁의 잔해를 날름날름 받아먹으며 아예 파 묻어버릴 듯 요동치고 있었고 그곳에서 치솟아 오른 불꽃이 다른 전각으로 퍼지지 않도 록 미세한 빗방울이 토독토독 주위를 감싸며 기현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샌들우드의 분노와 더불어 응징의 날개를 휘두른 4대 정령왕의 작품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지은 로드궁이, 샌들우드가 거처로 삼았던 그 역사적인 장소가 먼지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고 있는 샌들 우드를 보았다. "더 욕심 내지 마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라. 하늘이 두 쪽 나도 저 놈은 안 된다." "스승님...!" "왜 너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드느냐?" 넋이 빠진 듯 영상을 보고 있는 황태자를 일견한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전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제 아들이 좋다고 하니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래?" 뭔가 원하는 데로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에 빙긋 미소를 짓던 샌들우드는 얼굴에 묻은 피를 쓰윽 닦아내고 앞으로 나서는 황태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세실을 놓칠 수 없습니다. 제가 궁을 떠나면 되지요. 그것도 말리시겠습니까?" "애드리안!" "아버지는 빠지십시오. 아무도...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전...그 아이와 함께 할겁니다!" 황태자의 번뜩이는 눈을 지그시 노려보던 샌들우드가 이를 갈았다.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것이냐? 네가 고집한다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널리고 널린 것이 여자다. 하물며 일국의 황태자이고 황제가 될 네놈이 손을 댈 여자가 얼마나 될지 누가 아느냐! 절대로 넌 안 된다. 무엇을 보고 세실을 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만, 그 아이를 이런 더러운 곳에 둘 수는 없어!" "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그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황태자고 뭐고 때려치운다 하지 않습니까!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겁니다! 그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 으로 만들어줄 겁니다!" "그래서 약을 먹였느냐? 그래서 억지로 취하려고 했느냐! 네가 도대체 뭔데? 황태자를 때려치워?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네 마음대로 관둔다 하는 것이냐! 네가 황태자가 아니었어도 그렇게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만들어가며 약을 썼겠느냐! 탐하는 것이 아니라고? 넌 소유하려고만 들었지 네가 그 아이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꽃 한송이 준 적이 있느냐? 마음 한 조각 내비친 적이 있느냐? 넌 네가 황태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아이 도 널 받아줄거라 착각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왜 진즉에 마음을 밝히지 않았느냐? 노력하지 않는 자는 어떠한 것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진리다! 너라고 해서 예외라 생각하지 마라. 스프를 끓이는 걸 배운다 했느냐? 그래서? 스프를 끓이는 것을 배우면 그 아이 마음이 너에게 올거라고? 착각도 유분수지. 넌 그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주는 것만 받아먹으며 노력하지 않는 너 따위 인간은 그 아이의 인생에 도움이 되질 않아! 단념하고 놔줘라. 네 그 썩어빠진 소유욕에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경고 하는 것이다. 한 번 만 더 이런 일이 있을시에는...그때는" 숨도 쉬지 않고 호통을 치던 샌들우드의 싸늘한 눈빛이 황제와 황태자를 쓸어갔다. "너희들 모두 죽는다. 이 바이오니어도 없어질 것이다. 개넌가의 더러운 핏줄을 모르는 줄 아느냐? 해서 경고하는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합니다. 제가 잘못한 것 은 인정합니다. 앞으로 노력한다 하지 않습니까! 여인이요? 전 아바마마가 아닙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는 쏟아 부어도 싫습니다. 그 아이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평생 그 아이만 보고 살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지요." "........" 두 사람의 공방전을 보고 있던 황제, 이제는 그가 거품을 물고 쓰러질 차례였다. 설마 다른 여인을 마다하겠다는 소리까지 나오다니. 정녕 저것이 내 아들 맞나 하는 눈으로 황태자를 쳐다보던 황제는 샌들우드의 기세가 약간 꺾인 것 같다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갸르스름해진 눈으로 황태자의 굳은 얼굴을 뜯어보던 샌들우드가 입꼬리를 스륵 말고 씨익 웃어보였다. "그래? 그 아이가 아니면 혼인을 하지 않겠다?" "물론입니다!" "그러면...네 말에 책임은 져야지?" 샌들우드가 드디어 허락을 하는 거라 생각을 한 황태자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틴의 주먹에 맞아 이빨이 몇 개 빠져 벌건 잇몸이 횡하니 드러났다. 그런 황태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황제를 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말 비(妃)를 하나만 두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뭐...저처럼 일을 당하지는 않을 테니, 차라리 잘 된 일이지요." 정말 질리도록 똑같은 부자였다. 황제가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후궁을 들인 것은 황태후 엘레나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내를 먼저 보낸 슬픔에 여러 여자를 거느려왔으나, 그것은 욕정을 풀기위한 것이었지 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스테판의 사건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던 황제는 황태자의 생각에 냉큼 동의하며 자신처럼 잘못된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부자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샌들우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로 황태자를 가리켰다. "정녕 후회하지 않는다 이말이지?" "물론입니다!" "그 아이가 아니면 안된다고?" "맹세합니다!" 몇 번이고 황태자의 다짐을 받던 샌들우드의 입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밀려올라갔다. 진정으로 사악해 보이는 미소. 그의 미소를 보고 있던 황제는 그 뒤에 숨은 광기와 당장에라도 터져나올것만 같은 분노 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샌들우드의 나직한 말이 커다란 방의 정적을 깨트렸다. "임*포*턴*스(Impotence)" "헉!" "......" 샌들우드의 주문이 끝나자 세계수의 지팡이 끝에서 터져나온 눈부신 빛이 황태자의 전신을 감싸며 휘몰아치더니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 억겁과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마나의 기운 이 갈무리되자 황태자는 멍한 시선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보았고 황제는 헛바람을 들 이키며 벌떡 일어났다. "스승님!" "사랑이라 했겠다.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시험해주마. 그 아이와 혼인하게 된다면 풀어주 도록 하지. 그 전에야 네 말대로 여인을 백 명을 줘도 싫다 하였으니 쓸 일이 없을게야. 뭐,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다른 여자랑 혼인을 하게 된다면 그 전에 이야기 하거라. 행운을 빌어주마." 얼이 빠진 부자를 보고 쓰윽 턱을 내밀어준 샌들우드는 언제든 크리스틴을 포기 하고 싶다 면 이야기 하라는 말만 남기고 횡하니 사라져버렸다. 썰렁해진 대전 안, 자신의 아랫도리만 자꾸 쳐다보는 황제의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은 황태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소유하려고만 들었지 네가 그 아이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꽃 한송이 준 적이 있느냐? 마음 한 조각 내비친 적이 있느냐?」 "아버지..." "응?" "꽃...이 좋을 까요, 보석이 좋을까요?" "........" 아들이 성불구가 된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황제는 물기가 묻어나는 황태자의 푸른 눈을 보고 침대 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태자는 자신의 몸 상태를 신경쓰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크리스틴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 황태자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던 황제는 울먹이는 얼굴로 볼을 붉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소중한 것을 알지 못했던 아들.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기에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던 아들이 드디어 원하는 것이 생기고, 갈구하는 것이 생겼다는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자신 또한 그러했기에 그래서 그 마음이 더욱 안타까운 것을 어찌 할 것인가. "네 어미는...참으로 시를 좋아했었다. 음악도 좋아했지. 덕분에...생전 읽어보지도 않던 시집을 보고 밤새 몇 줄 긁적여 월담을 해 네 어머니를 보러 갔었지. 누가 들을 새라 창문가에 매달려 조그맣게 시를 속삭이며 나는...치크가 되는 줄 알았다." "...." "낯이 간지러워 죽을 뻔 했었지. 그런데 네 어미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내가 쓴 그 말도 안 되는 시를 들을 때면 눈물을 글썽이며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나는 행운아였다. 너와 달리...네 어미는 첫눈에 나와 사랑에 빠졌었다고..그렇게 이야기 해주었다." "아...." "하지만...너는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구나. 그 아이는 너와는 다르다. 아니 너 뿐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다른 아이이다. 네가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구나." 잘못하면 유일하게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갈 황제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걱정에 한숨을 삼키던 황제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옛된 소녀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 아이에게는 보석은 무가치할 것이다. 마음을 담은 꽃 한송이, 시 한 줄이 더 어울릴 테지. 그리고...네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 "노력하거라. 해도 안 되면 할 수 없는 일이나, 네 마음이 가는 데로 하려무나. 인연이란 것은 무서운 거다. 또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힘 내거라." 장성한 자식이지만 감정면에서는 아직 어리기만 한 황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황제는 아들의 멍든 얼굴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울긋불긋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신관을...불러주마." "아니요." "......" "그냥...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정말 치료받지 않겠습니다. 샌들우드 할아버지 말씀처럼...전 노력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아버지." 치기어린 모습을 드러내며 품안에 안기는 덩치 큰 아들을 다독여주며 미소를 짓던 황제는 과연 무너진 로드궁을 재건하는데 얼마만큼의 예산이 필요할지 또 다른 고민 에 빠져 들어야했다. '솜씨 좋은 주방장도 구해야하고...내일...재상한테 잔소리 듣겠군...' 주름진 얼굴로 살기를 날리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댈 알렉산드로의 얼굴을 떠올리 며 부르르 떨던 황제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아들의 뒤를 밀어주리라 결심했다. '암, 모름지기 사내라면 칼을 뽑아 무라도 썰어야지.' ************************************************************************************** 이것이 제가 예상한 황태자의 강간미수 사건의 마무리였습니다. 또한...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강간범들을 고자로 만들어버려야 한다는...콜록...주장이기도 하구요. 커험. <<공지>> 잠시 유키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료 공유 카페에 제 글을 발견하셨다는 분이 계셔서..음...일단은 카페가 만들어진 시점과 겹치는 바람에 제가 카페에 가입까지 해주신 분들을 의심하는 사태가 벌어졌었습니다. 그 점 정말 허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절 믿고 와주신 분들을 제가 믿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카페 연재는 계속 될 것이고, 앞으로는 절대로 신의를 깨는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뭐라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 글을 퍼가시는 모든 분들께 부탁드리건데. 제발 카페에 올리신 분 처럼 다른 곳에 공유할 목적으로 돌리지는 말아주십시오. (그곳만 해도 벌써 540분 이상이 다운 받아가셨더이다. 주인장도 삭제를 안해주시더군요) 퍼가시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하셔서 당당하게(?) 가져가시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냅니다.(남들 못하는 것을 하시면서 얼마나 뿌듯해햐셨을까...진정 존경스럽습니다. 진심으로!) 하지만 그것은 개인소장용으로 해주십시오. 제 글...문제가 많다는 것은 여러분이 알고 저도 알고, 세상이 다 알지요. 그러니 제발...어디서 내돌리지 말아주세요. 또한!!! 퍼가시는 김에 정녕 글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시거들랑, 반드시 공지도 함께 올려주십시오! <<반드시 조아라에 가입하여 아름다운 꽃-프레시어스-을 선작하고 추천하고 리플을 남길 것!!>> 이것은 의무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믿은 만큼 신뢰를 저버리신 분께 드리는 의무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눈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피땀흘려 노력하는 것에 책임감을 가지듯이 그것에 반하여 글을 불법으로 공유하는것에 대해 님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글을 퍼가시면 반드시 글을 홍보해주시고, 추천과 선작을 필히 하셔야 한다고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수정 분 나오면 반드시 퍼가십시오! 괜히 수정 전에 글만 돌다가 욕먹으며 사장되기 싫으니, 나중에 제대로 된 수정분이 나오면 자신이 올린 곳에는 반.드.시. 수정분을 올려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아~~~~~~~~!!! 제 마음을 상하게 하신 만큼 갚아주세요! 사과도 안하실꺼지요? 뒤에서 비웃으실 거지요? 그래도 할 말은 합니다! 선작필! 추천필! 젠장 이것도 안해주시면 정말...미워할꺼예요. ㅠ ㅠ 에또...코코님께서 말씀하신 표절에 관한 것입니다만. 물론 제 글을 읽으시면서 '어라, 이거랑 비슷하네? 저거랑 비슷하네?'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엄연히 이건 제가 쓴 글이고, 제 머리에서 나온 글이니 어디서 표절입니다!란 소리가 들리면...그것만은 용서 못합니다. 제일 짜증나는게 비슷하다 소리를 듣는 것이고, 제일 화가 나는 것이 표절시비일겁니다. 혹시나 드리는 말씀이나 남들이 봐서 '저건 아름다운 꽃이야'이런 말이 나오면 저작권 침해로 고소해버릴랍니다. 그리고...저 잠수 타버릴래요. (협박중...) 그럼 알아서 홍보해주시고, 알아서 갈무리 해주시리라 믿고...이만 물러날께요. 안녕히 주무세요~~~!!! 행복하자구요~~~!!! >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크리스틴, 분노하다. 5. 다음 날 궁에 몰려들었던 귀족들은 아침 일찍 쫓기듯 궁 밖으로 내몰렸다. 지난 밤 궁을 소란스럽게 만든 침입자들로 인해 황태자의 옥체가 상해서 간택식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황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마차를 타고 떠 나는 소녀들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며 하나 둘 궁을 떠났다. 그리고 배너 백작가에는 때 아닌 선물 공세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분노한 백작은 황태자가 보낸 선물 더미를 보지도 않고 그대 로 황궁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러기를 며 칠. "황태자 전하 납시오~!!" "방으로 가거라, 나오지 마라!" 거실에서 단란한 가족들끼리 차를 마시고 있던 백작은 크리스틴을 방안으로 쫓아보 내고 어리둥절해하는 백작부인만 대동하고 밖으로 나갔다. 샌들우드에게 맞은 상처 가 아직 났지 않았는지 여기 저기 붕대를 감고 나타난 황태자는 멋쩍은 얼굴로 백작 의 인사를 받았다. "영애를...만나고 싶소." "없습니다." "......" "돌아가시지요. 지금은 집에 없습니다." 문전박대도 이런 문전박대가 없었다. 저택 안으로는 발도 들이밀지 못하고 마당에 오도카니 서 있던 황태자는 칼을 뽑아 드는 기사들을 저지하고 세바스티앙을 보았다. 황태자의 옥체를 상하게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상을 받고 무사히 복직이 된 상태였다. "세바스티앙의 얼굴도 보기 싫답니까? 백작. 사과를 하러 왔소. 만나게 해주시오." "...지금 집에 없습니다. 전하. 송구한 말씀이오나 전하의 사과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잔뜩 굳은 백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해야 하오? 내가 어찌 해야 그대의 마음이 풀리겠소?" "제 마음이 풀린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얼마나 놀랐을지, 얼마나 상처받았을지는 하늘만이 아실 일이지요." 이것이 딸 가진 아버지의 유세였다. 당당한 태도로 황태자의 입을 닫게 만든 백작은 근엄한 얼굴로 세바스티앙에게 허리 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제 딸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세 남자 사이에 오고가는 긴장된 시선을 지켜보고 있던 백작부인이 살짝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백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황태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목이 떨어질 수도 있건만 무엇을 믿고 저리도 당당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백작부인은 별다른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는 황태자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백작과 신경전을 벌이던 황태자는 곧 마차로 되돌아가 준비를 해온 꽃다발과 조그마한 바구니 하나를 백작에게 내밀었다. "이것을...전해 주시겠소? 미안하다는 말은 무용지물일 것이오. 나도...내가 잘못 한 것을 잘 아오. 어찌 해야할지 모르겠소. 하지만...미안하다 전해주시오. 그리고 다시 오겠다고 전해주시오. 그 정도도...아니되오?" 황태자의 간절한 말에 잠시 그가 내민 꽃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작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잘 가라고 허리를 숙여 보이고 획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한 백작부인이 죄를 빌었으나 황태자는 싱긋 웃기만 하였다. "신경 쓰지 마시오, 부인. 내 청을 받아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요. 그럼..." 미래의 장인 장모가 될 사람에게 잘 보일 생각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나 백작부인에게 미안한 미소를 지어보인 황태자는 두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그의 뒤를 따라 백작가를 힐끗 쳐다보던 세바스티앙은 2층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 금발머리 소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딸이라...' 과연 백작은 크리스틴이라는 '딸'이 세실이라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고심해 보던 세바스티앙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마차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어찌 될 것인가..." 매일 같이 선물 공세를 하며 남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찾아드는 황태자를 보며 혀를 차던 세바스티앙은 크리스틴이 이대로 황태자비가 되면 어떨까 생각을 하 다 문득 그가 궁으로 돌아갔을 때의 황태자의 반응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설마...' 「말려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난 죽어서라도 씻지 못했을 죄를 지을 뻔 했다. 달리 뭐라 할 말이 없다. 고맙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곁에 있어주기 바란다.」 샌들우드의 지팡이에 흠씬 두드려 맞아 울긋불긋해진 얼굴위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얹어놓고 누워있던 황태자는 세바스티앙을 반겨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던 황태자는 급기야 상까지 내리겠다 말을 했고,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세바스티앙의 반대로 겨우 명을 거두어들였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샌들우드와 백작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그의 마음에 조그마한 불씨를 타오르게 만들었다. '설마...아니겠지...' 좋지 않은 만남으로 점철되었던 백작 영애에게 갑작스레 구애를 하기 시작한 황태자 를 떠올리며 흠칫 하던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상상이 그저 기우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 며 그렇게 궁으로 돌아갔다. "아...역시 안 되겠어."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마차와 수십기의 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크리스 틴은 고개를 돌려 화병에 꽂힌 흐드러지게 피어난 프레아시스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일 때문에 백작이 황태자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것도 보았고, 황태자의 안타까운 시선이 2층을 향하는 것도 보았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일로 인해 빚어진 것. 나라에 충성을 해야 하는 백작이 황태자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보자 아련히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방안을 돌아다니며 서성이던 크리스틴은 황태자가 주고 갔다는 작은 바구니안을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 앉아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기 그릇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냈다. "이런..." 향기로운 향이 물씬 풍기는 아카리쿠스(버섯의 일종)를 송송 썰어 넣고 바질과 기타 향신료를 뿌려놓은 부드러운 크림스프가 소담하게 담겨 있는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 던 크리스틴은 바구니 안에 들어있던 작은 쪽지를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스프를 끓이는 것을 배웠다.」 황태자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칼날같이 서 있는 깔끔한 글씨를 보며 입술을 잘근 거리던 크리스틴은 바구니에 들어있던 은수저로 스프를 한 입 떠서 입안에 넣었다. "으으으응~~~~" 때 아닌 야릇한 신음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던 카사는 한 손에든 스푼을 하늘로 치켜올리고 몸을 베베 꼬는 소환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맛있잖아~~~~아잉..."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버섯 내음을 음미하던 크리스틴은 조금씩 조금씩 스프를 떠먹으며 자지러질 듯 비명을 질러댔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표정으로 황태자가 만들었다는 스프를 먹고 있는 소환자를 보며 뾰로롱 울어대던 카사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크리스틴을 슬픈눈으로 쳐다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간택일 이후, 카사는 크리스틴에게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기에 나서서 애교 를 떨 수는 없었기에 일찌감치 미련을 버린 행동이었다. 잠시 후, 그릇 밑 바닥까지 깨끗하게 닦아먹은 크리스틴은 발그스름해진 얼굴로 두 뺨 을 감싸고 헤벌쭉 웃다가 다시 도리질을 쳤다. "곤란해..곤란하단 말이지. 먹을 것에 넘어가면....아! 버섯 푸딩!!! 음...일단 맛이 야. 입안에서 톡 터지는 버섯이 어디 없나..." 어느새 스프 그릇은 멀찌감치 밀어두고 미리 찾아놓은 도서를 뒤적거리며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아낸 크리스틴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그러다 어느새 시무룩한 얼굴로 황태자가 넣어두었던 쪽지를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던 크리스틴이 터벅터벅 침대로 돌아가 처연한 동작으로 푹신한 담요위로 기어올라가 털썩 드러누웠다.. "안돼...여기서는 안 된단 말이지...흠..." 때 아닌 오수(午睡)를 즐기려는 것인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운 크리스틴은 이불을 푹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 모두들 잠든 시각. "음...우선 이것하고, 이것하고...아, 이것도!" 촛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어수선하게 무언가를 늘어놓고 이것저것 집어내던 크리스틴이 획 고개를 돌리고 화장대 위에 앉아있던 카사를 노려보았다. "안보이잖아요! 불 좀 더 키워요!" 뀨우~ "귀여운 척은..." 볼을 뚱하니 부풀리고 고개를 팩 돌린 크리스틴은 애처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날개짓을 하는 카사를 무시했다. 어제 그 일이 있은 후 샌들우드를 붙잡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실피드는 '한 동안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요'란 크리스틴의 호통에 눈물을 뿌리며 정령계로 돌아갔다. 또한 '샐라이온이 말렸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실피드 덕분에 황태자의 만행을 미리 막아주지 않았다는 원망을 카사 혼자 한 몸에 받아야했다. 무시당하는 것은 기본이고, 지금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밤중에 불빛이 새어 나갈까 조심을 하며 어둠을 몰아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까지 부여받았다. 어쩌다 불의 정령왕이 달밤에 불이나 밝히고 있어야 하는가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던 샐라이온은 이것이 다 세바스티앙을 믿고 '인간의 일은 인간이!'라 생각한 자신의 잘못이라 반성했다. 당장에라도 황궁을 날려버리려던 실피드를 말린 것도 샐라이온 자신이었고, 미연에 경고를 할 수도 있었건만 그냥 내버려둔 것도 그의 잘못이었다. 샐라이온의 방관 때문에 애꿎은 세바스티앙이 다칠 뻔 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던 크리스틴에게 뭐라 이야기 할 수 있었을까. 그저 기가 팍 죽어 얌전하게 '불 켜요!' 이러면 불이나 켤 수밖에. 평소에는 '쪼로롱'울어주면 방긋방긋 웃어주던 소환자가 비난까지 퍼붓자 숫제 기가 죽은 샐라이온은 크리스틴이 온 방을 헤집으며 짐을 챙기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다. 말을 붙여주는 것만 해도 어딘가! "이 정도면 되었나..." 조그마한 가죽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차근차근 다시 확인한 크리스틴은 주머니 를 옆에 내려두고 잡다하게 끄집어냈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를 하고 깨끗해진 방을 휙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쪽 어깨에 주머니를 메고 미리 써둔 편지를 한 장 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샌들우드가 자고 있는 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스승님?" 샌들우드는 이미 잠이 든 것인지 고른 숨소리만 들려오는 어두운 방 안으로 몸을 집어 넣은 크리스틴은 카사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수신호에 얌전히 침대위로 날아간 카사는 샌들우드의 얼굴위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웁!" 쪼로롱 쪼로롱~ 그간 크리스틴에게 무시당한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인지 샌들우드의 얼굴 위에 착륙한 카사는 조그마한 발로 그의 얼굴을 꾹꾹 눌러주며 통통한 뱃살로 부벼주는 것 도 잊지 않았다. 잠결에 얼굴이 간질거리고 숨이 막히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던 샌들 우드는 경기를 하며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엥? 너...?" 자신의 머리 위에 날아오른 카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어슴프레 비치는 달빛 아래 우뚝 서 있는 크리스틴을 보고 입을 쩍 벌리던 샌들우드가 급히 침대에서 뛰어내려왔다. "지금 가는 거냐?" 아예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투였다. 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크리스틴을 일견한 샌들우드는 옷가지를 들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가 몇 미르도 되지 않아 시꺼먼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나왔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조그마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목에 거는 폼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가자." "....." 싱글벙글한 얼굴로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받아들고 어딜 가고 싶냐고 물어보는 샌들우드를 보며 어이없어 하던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그냥 가면 가출이잖아요. 인사정도는 해야지요." "....." '인사를 해도 가출이다.' 혀를 끌끌 차며 크리스틴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 쭉 읽어보던 샌들우드가 펜을 들고 그 밑에 몇 줄 긁적이고는 마법을 이용해 어디론가 편지를 이동시켰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이냐?" "우선...아카데미로 가야해요." "아카데미는 왜?" "마커스 선생님께 좀 빌릴 것이 있어서요." "빌릴 것?" "네." 크리스틴의 당당한 얼굴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샌들우드는 정령계로 돌아가는 카사 를 보고 아카데미에 있는 마커스의 약제실로 텔레포트했다. "그것이 빌리는 것이냐?" "그럼요?" "......" 달덩이만한 라이트를 불러내고 약제실에 있는 선반에 놓인 약병을 주욱 살펴보던 크리스틴은 정신없이 약병들을 가죽 주머니 안에 챙겨 넣고 있었다. 평소 마커스의 깔끔한 습관 덕분인지 하나 하나 라벨이 붙어있는 약병을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샌들우드가 준 무한 주머니 안에 집어넣은 크리스틴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한 장 꺼내들었다. 그리고 뭐라 고심을 하며 메모를 하는 크리스틴을 멍하니 보고 있던 샌들우드는 횡 하니 빈 약제실을 보고 혀를 찼다. '이건 도둑질이지...' 선반을 비롯해 책상위에 놓여있던 수 백병의 병들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던 빈병들은 아예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드문 드문 남아있는 약병은 분명 어느 곳에 가도 구할 수 있는 흔해빠진 시약이 분명했다. 아카데미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는 덕분인지 거의 모든 약제들이 원액으로 담겨 있었고 크리스틴은 그것을 모두 챙겨 넣은 것이다. "음...이정도면 되겠지요?" "어디 보자." 「마커스 선생님께. 죄송해요, 선생님. 크리스틴은 수련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이렇게 서신으로 인사드려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시약을 몇 병 빌.려.가요. 나중에 돌아와서 꼭 갚아 드릴께요. (급하시면 저희 아버지께 이 편지를 들고 가셔서 받으셔도 되요.) 열심히 수련하고, 실전을 쌓아서 훌륭한 치료사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하시고, 로한 선생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크리스틴 올림.」 끝까지 빌려간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내일 그 산적 두목같이 생긴 선생이 숨넘어가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텅 빈 책상위에 편지를 얌전히 놓아두고 크리스틴을 보았다. "이제 다 된 것이냐?" "음...한 군데 더 가야 하는데요, 스승님." "어디냐." "황궁이요." "...그 못된 놈을 보러 가는 것이냐?" 이를 으득으득 가는 샌들우드를 보며 생글 웃어준 크리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론...재상님께 잠시 들리려구요." "재상은 왜?" "아...그 '안식의 물' 해독법이 적힌 책을 드리려고..." "그 한스라고 하는 영감이 썼던 책 말이냐? 그건 너에게 소중한 것 아니냐. 그냥 메모만 남기면 되지 무슨...?" "에헤...혹시 또 모르잖아요. 듣기로는 재상님도 약초에 상당히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요?" "뭐, 쓸데없이 연구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 그런데...그걸 줘도 괜찮겠냐?" "네. 책에 적혀 있던 메모는 모두 필사해놓았어요." "뭐 네가 좋다면야 나야 할 말이 없다만..." 그렇게 파울로를 협박을 해서 얻어낸 한스 영감이 남긴 마지막 흔적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주겠다는 크리스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샌들우드는 궁에 들어가 는 대신 책을 재상의 집무실로 워프 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개논놈들은 쳐다보기도 싫다." 크리스틴에게 약을 먹이고 겁탈하려 한 황태자를 죽이고 말겠다고 방방 뛰던 것을 말린 사람은 크리스틴이었다. 충분히 혼을 내주었으니 되었다며 말렸지만 샌들우드는 아직 화가 풀린 것이 아니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지 수염을 부르르 떨며 핏대를 세우 는 샌들우드의 품에 매달린 크리스틴은 그의 노한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어주었다. "이제 레이븐으로 가요, 스승님. 거기서 좀 머무르다가 떠나요." "지금 가는 게 아니었냐? 레이븐은 왜? 돈이라면 나도 있다." "아...그게 아니라, 푸딩을 만들어야지요." ".......푸...딩." 끝까지 푸딩을 노래 부르는 크리스틴의 환한 미소를 보며 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샌들우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크리스틴을 안아들고 약병을 집어넣은 무한 주머니를 챙겼다. "텔*레*포*트(teleport) ************************************************************************************** 오늘도 일이 있어서...새벽에 올리는 것입니다. 10연참...멀고도 험한 길이지요. 핫핫. 토요일. 약속드릴께요. 사시미와 비평은 글 올리고 난 후에 듣겠습니다. 조아라 운영자님께 문의해봤는데 한 편 제한 용량이 50kb래요. 10편 올리는 건 상관없다고 답변이 왔습니다.(이 새벽에!!!) 고마우신 운영자님. 고로....토요일에 인사드릴께요. 샹슈님 군대 가시더라도(19일이요?) 혹시 들리실 일 있으면 인사나 하고 가세요. ^^ (100일 훈련 받고 오시면 이 글도 뭔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나 있겠지요) 그리고 아스엔님 컴 사셨다니 부러울 뿐입니다. ㅜ ㅜ (유키는 고물 컴퓨터...) 추신 : 새벽에 토끼사랑님 비평에 올렸던 글은 제가 잘못한 일이니 사과드리겠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죽음의 숲으로 드디어, 10연참 시작합니다. 일단 시간이 많이 부족해서 오타나 문맥이 맞지 않는 문장이 많을거라 생각해요. 지적 부탁드리고, 시간이 없어, 사설은 이정도로 남깁니다. 다녀와서 저녁에 다시 인사드릴께요. 행복하세요~~~!!! ======================================================================================= 1. 「아버지, 어머니께. 스승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마침 방학도 되었고 할 일도 없으니 세상 구경을 좀 하고 올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도 계시고 가끔 연 락을 드릴께요. 사랑해요. 크리스틴 올림. 추신: 나도 같이 가니까 걱정하지 마라. 크리스가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아 바람이나 쏘이러 간다. 잘 다독여서 데리고 올 테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 어라. 행여나 찾는다고 사람 풀지 말고.」 "이것이...이것이...!!!" 크리스틴이 샌들우드와 함께 레이븐으로 잠적한 다음날 아침. 배너 백작은 온몸의 살들을 떨어대며 자신의 배 위에 놓여있던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어보다가 벌떡 일어나 성장을 하고 마차를 불러오라 하인들을 닦달하기 시작 했다. 영문도 모르고 남편의 펄쩍 뛰는 모습을 보고 있던 백작부인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 는 편지를 받아들어 쓱 읽어보고는 잠옷 바람으로 크리스틴의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꽈당~! "크리스!!!" 잠을 잔 흔적조차 없이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방안을 하염없이 둘러보던 백작부 인이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대체...무슨 일이 있었기에...?" 간택식이 있던 날부터 심상치 않다 생각을 했다. 느닷없이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선물을 주고, 또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편이 그것을 뜯어보지도 않고 궁으로 돌려보내고, 불경을 저지르고. 그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지켜보면서도 해맑게 웃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딸을 보고 안심하고 말았다.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부여잡고 크리스틴의 이름을 하염없이 부르던 백 작부인의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이 또로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괜한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다는 크리스틴의 말 때문에 백작은 그 일에 대해서는 함구를 했고, 딸이 무엇 때문에 마음고생을 겪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백작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크리스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며 뭐라 이야기를 꺼내려던 백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마차에 올라타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단 한 줄로 이루어진 문장. 「크리스가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아...」 "으드득!" 백작은 저 멀리 우뚝 솟은 황궁을 보며 이가 부서져라 열심히 갈아댔다. 샌들우드는 떠나는 그 날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자신의 몫을 백작에게 슬쩍 떠넘긴 것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백작은 지금 딸아이가 가출을 한 연유가 황태자에게 있음을 확신했고, 아무리 든든한 보호자가 있다 하여도 마음의 상처를 입고 떠난 자식생각에 이번 일을 결코 그냥 넘길 수 없 다 다짐하고 있었다. 쾅! "도대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하!" "......." 단걸음에 황궁으로 뛰어온 백작은 기별도 없이 황태자의 처소에 쳐들어와 테 이블이 부서져라 내려쳤다.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침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황태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크리스틴의 여행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일을 앞당 긴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그것을 알고 있던 황태자는 벌게진 얼굴로 바락 바락 소리를 지르는 백작을 보면서도 별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영애는...내가 찾아주겠소. 걱정하지 말고...아바마마께 가보시오. 기별도 받지 못했지요?"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이만 부득부득 갈아대는 백작을 보며 고개를 내저은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로드궁이 무너지는 바람에 예산을 세우기가 무리한 모양이더이다. 공을 찾 으신다 이야기를 들었으니 한 번 가보시오. 그리고...영애의 일은 내가 책 임지겠소." "책임이오? 무슨 책임말씀이십니까? 설마 소문이라도 나서 명예가 망가진 아이를 전하께서 거두시겠단 말씀이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절대로...절대로...제 딸은 그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보내고 말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전하께 보내느니 차라리 거지한테 주겠습니다! 으드득!" 한 번 분노한 아비는 무서웠다. 황태자의 면전에서 거지보다 못하다 욕을 해준 백작은 씨근덕거리며 황제가 집무를 보는 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었나?" "네, 전하." 백작이 바람과 같이 사라지자,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세바스티앙을 부른 황태 자는 손의 깍지를 풀며 머리를 짚었다. "가서 찾아라. 찾아서 연통을 보내. 일주일을 주마. 일주일 안에 찾던 못 찾던 나에게 연락을 해라. 사람들을 풀겠지만, 네가 직접 찾아다오.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은 없으나...넌 찾을 방법이 있을 거라 믿는다. 혹시나 흔적을 찾아 이동하게 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소식을 보내야 한다. 알겠느냐?" 황태자는 자신의 명에 깊게 절을 하고 뒷걸음질을 쳐서 방을 빠져나가는 세바 스티앙을 묘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를 배울 시간인가? 그 정도 시간이면...충분하겠지." 아직 멍이 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황태자는 황제가 직접 초빙해온 서바이벌 요리의 일인자 쿠거가 있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샌들우드가 황궁을 초토화한 다음날부터 황태자는 미래의 아내를 위한 요리 실습과 평민의 삶에 대해 공부해오고 있었다. "자금을...말씀이십니까?" 황제를 찾아왔다가 재상과 독대를 하게 된 백작은 갖은 인상을 쓰며 알렉산 드로의 시선을 피했다. "흠흠. 우선 상회에서 돈을 빌리고자 했는데, 레이븐에서 거절을 했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네." 알렉산드로의 집요한 시선을 교묘하게 피하던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메기의 그것같이 생긴 쭉 뻗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자꾸만 하늘 향해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손을 쓴 것이 바로 백작이 아니던가. 더구나 앞으로 100일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궁에 들이는 모든 물건을 최하품은 아니나, 그에 가까운 질이 낮은 물건을 보내기로 이미 약조한 바 있었다. '기한을 더 늘여야 했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넉넉잡아 한 3년 부를걸.' 혹시나 있을 반품이나 항의는 백작이 직접 나서서 무마해주기로 약조를 하고 카일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딸의 명예를 생각해 말하지 못했으나 만약 손해 가 생긴다면 무조건 그가 책임지고 보상을 해 주겠다 강력하게 주장을 하며 결국 카일의 승낙을 얻어낸 것이 이미 3일 전의 일이었다. 사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어느 누구보다 소식에 민감한 상인들이 궁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과, 황태자가 백작영애에게 선물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 찌 모르겠는가. 대강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카일은 내심 백작의 요청에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못 이기는 척 계약서를 작성하고 약조를 해주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백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일말의 후회는커녕 도리어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험험. 그래서 올해에는 개축 공사도 해야하고, 헤이븐 지방에도 도로를 깔아야 하는데. 예산이...음..." 역시 돈을 빌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 일인가 보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위치에 앉은 재상이 저리도 버벅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쯤이야 콧방귀한번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담력을 자랑하는 백작은 평소의 지론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일명...눈 뜬 사람 코 베어가기. "다른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성금을 모으시던가...그것도 아니라 면 토지를 좀 나눠주고 돈을 벌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내 놓으라고 윽박이라도..." 백작의 말이 이어질수록 얼굴색이 시꺼멓게 죽어가던 재상이 고개를 획 돌리며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흠흠. 이번일은 아주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다들 두 손을 거들기가 꺼려진 다고 하더군. 해서...공의 재력정도면 충분하다 싶어 부른 걸쎄. 이자는 주 겠네. 돈을 빌려주게나." "네? 일.개. 백.작.인 제가 무슨 돈이 있어 로드궁 재건비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 "빌려주는 것일쎄." 사실 이번 일에 손을 거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굳이 백작을 끌어 들인 것은 크리스틴 때문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날 세바스 티앙이 일으킨 소동은 재상의 귀에 들어갔고, 후에 황제에게 로드궁이 무너진 것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바로 샌들우드의 분노 때문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어찌나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던지, 알렉산드로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회초리 를 들고 황제를 쫓아다녔다. 아들 교육 제대로 못시킨 어이없는 아비라고. 부전자전이 따로 없음을. 보고 배운 것이 그런 것 밖에 없으니 황태자가 그리 되었다면 펄펄 뛰던 재상은 며칠 후부터 궁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을 보고 기함을 했다. 시들시들해진 채소들과 썩으려고 준비 중인 과일들. 갓 잡은 싱싱한 고기가 아닌 며칠 푹 숙성시킨 육류와 도정도 제대로 되지 않은 곡식들. 때를 맞추어 레이븐 상회에 손을 벌렸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제야 그것이 백작의 농간임을 알아낸 재상은 음식이 맛이 없다 투덜거리는 황태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전하께서 하신 행동 때문에 이리 된 것을 누굴 탓하시는 겁니까! 그냥 드십 시오! 평생 그러고 사시란 말입니다!" 재상에게까지 야단을 맞은 황태자는 쥐죽은 듯 고요하게 식사를 마쳤고, 모든 것은 그대가 해결하라는 근엄한 명령을 내린 황제는 그 날 이후 코빼기도 보 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사건들 뒤에 결국 홀로 일을 해결해야할 처지에 놓인 재상은 사이먼 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는 상인들 때문에 바빠 짬을 낼 수 없다 답신만 보내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듣자하니 요즘 자주 파업을 하는 상인들이 많다지요?" "네?" "사이먼 공에게 들으니, 요즘 우리나라에 오가는 상인들 발길도 뜸해졌다고 하더이다. 덕분에 국고는 자꾸 줄어들고...흠..." 재상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피식 웃으려던 백작은 알렉산드로의 칼날 같은 시 선에 얼른 입꼬리를 내리고 멀뚱멀뚱 눈을 굴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슬쩍 꼬리를 빼며 어벙한 표정을 짓는 백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알렉산드로 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포기를 해버렸다. 말이 백작이지 하는 짓만 봐서는 영락없는 상인인, 배너 백작이 손을 대지 않은 상권은 없었다. 음으로 양으로 그가 손댄 사업을 따져보자면 황궁에서 가지를 치고 있는 것 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을 것이기에, 눈귀가 밝은 백작이 이렇게 발뺌을 하는 것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백작의 심기를 풀어주는 것이 우선. 뭐 공권력으로 어떻게 처리를 해버릴 수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백작의 전면 적인 거센 항의를 받아야할 지도 몰랐다. 황태자가 일으킨 불미스러운 사건. 만약 딸아이의 명예를 생각하는 아비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해지는 재상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궁에 납품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을 것이오. 전적으로 전하의 잘못이니 공의 심정 십분 이해하오. 해서..." "......?" "자금을 융통하는데 도움을 주셨으면 하오. 어차피 레이븐과 손을 잡게 된 것도 공의 여식 덕분이니 이제와 바꾼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고...어찌하 겠소.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재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씨익 미소를 짓던 백작이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것은...?" "얼마든지 도와드려야지요. 나라가 곤란하다는데. 하지만 저도 먹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신다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요즘 식욕이 뚝 떨어 져서 살이 빠지고 있습니다. 커험." 숨만 크게 들이쉬면 터져버릴 것만 같아 보이는 빵빵하게 조이는 옷을 물끄러 미 바라보던 알렉산드로는 스스로가 말하고도 멋쩍은지 헛기침을 하는 백작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것이 제가 원하는 거래 내용입니다. 읽어보시지요." 백작이 슬쩍 내민 종이를 받아든 재상은 그것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읽어가며 분명 자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1. 이자는 3할. 그 이하는 절대로 안 됨. 단 이것은 원금에 해당하는 이자로, 매달 1일에 납입하되 원금상환에 있어 1년이 지체될 시 이자를 4할로 상향조 절한다. 2. 황태자 전하의 포기각서를 요구함. (배너 백작의 외동딸 크리스틴 폰 배너는 결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음을 알리는 서신일 것) 3. 앞으로 황태자 전하는 크리스틴 폰 배너, 우리 딸의 근경 100피텐 내로 접근을 금지함을 약조할 것.」 "끄으으응~~" "뭐 간단하지요?" 이건 계약 문구가 아니었다. "이것인가? 자네의 목적이?" "맞습니다. 더 이상 제가 뭘 바라겠습니까?" "돈을 빌려줄 생각도 없었군. 그렇지?" "그런 더러운 기억이 남은 곳이 다시 세워지는 것이 싫습니다. 어르신이 오죽하면 무너뜨리셨는지 이해 못하시겠습니까? 재상님이 보셨어야만 했 습니다. 제 딸이 두려움에 떨며...제 몸을 샅샅이 살펴볼 때의 그 표정을! 절대로...절대로 용서 못 합니다." 가슴 깊이 와 닿는 아비의 마음이었다. 어느새 가식적인 웃음은 던져버리고 살벌하게 이를 갈며 나직이 말을 하는 백작을 보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던 알렉산드로는 종이를 얌전히 놓아두고 그 위에 두 손을 포개었다. "그것만이 아닐 거야. 오늘 황태자 전하의 처소에 먼저 들렀다고 들었네. 무슨 일이 있었나?" "..........." 순간 배너 백작은 알렉산드로가 아직 크리스틴이 집을 나갔다는 것을 모른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알 리가 없지..." "뭐라고 했나?" "아, 제 딸이...어젯밤에...여행을 떠났습니다." "......!" "어르신이 함께 가셨지만...마음고생이 심해 잠시 여행을 다니며 위로를 해주시겠다고 하시더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그 날 이후로 매일 같이 저희 집으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놀란 눈으로 백작을 보던 재상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물들은 모두 재상과 황제가 머리를 마주대고 앉아 황태자의 구혼을 성사 시키기 위해 고심을 하여 보낸 것이었으니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마지막 날에...어제 낮에 전하께서 직접 오셨었습니다. 상처를 받고 충격을 받았던 아이가...전하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전 여자가 아니 라서 모릅니다만...저 같으면 죽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 짓을 해놓고... 청혼이요? 결혼만 하면 다입니까? 전 그런 전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딸아이가 집을 나간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오죽했 으면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겠습니까." 단추 구멍 같은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눈물 때문인지 살기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백작의 그 작디작은 눈은 마주보기가 힘들 정도의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딸을 가지지 못했던 재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자식을 가진 부모로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던 알렉산드로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영애가...그 아이가 집을 나갔다?" 시리도록 푸른 두 눈으로 똘망똘망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반역자들이 처형되던 그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이 심판 받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 피비린내나던 대전을 걸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도망갈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어렸던가. 그토록...상처 받았던가.' 그 당당하고 똘똘한 아이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상상해보던 알렉산드로는 찡해져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젯밤?!" 별안간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난 재상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을 매만졌다. 5년 만에 돌아온 자신의 책. 세실에게 물려주려 빼곡히 적어놓은 자신의 지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책. 더불어 마지막 장엔 자신도 알지 못했던 안식의 물의 해독 약을 만드는 법까지 적혀있던 책이 그곳에 있었다. 그 두툼한 책을 어루만지면 백작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쳐다보던 재상 은 머리를 짚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우연일테지...우연....그 아이는 세실이 아닌걸...' 그리움에 젖은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재상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쳐가는 영상이 있었다. 「...스...할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품안에서 비 맞은 아기 새처럼 애처롭게 울어대던 소녀! 번뜩이는 눈으로 과거를 회상해보던 알렉산드로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내는데 성공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아, 아닙니다! 혼잣말...제가 태워버렸습죠.」 그리고 파울로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던 의미심장한 미소와 그것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던 모습.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며 재상의 머리를 강타했다. '설마!!!' "자네..그 세실이란 아이가 죽은 게 언제..아니 언제쯤 자네 집을 나갔는지 아는가?" 난데없이 세실의 이야기를 꺼내는 재상을 보고 눈썹을 찌푸리던 백작이 머리를 짚었다. "한 2년 쯤 되었습니다.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 아이가 사라지고 제 딸이 아팠는데..." 지나가듯 던지는 백작의 말에 재상의 눈이 번쩍 빛났다. "영애가 아팠다고?" "그렇습니다. 한동안 말도 못하고...1년이나 앓았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살도 몰라보게 빠지고..키도 크지 않고...심성도 변해서..." "심성이 변해?" "아...좀...어려졌다고나 할까요.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지 툭하면 울고...핫핫 마치 어린아이일때로 돌아간 것 같아 한동안 놀랐었지요. 지금이야 더 귀여워 보이지만. 핫핫핫" 크리스틴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떠올리며 그때의 놀라움을 되새김질하던 백작은 그의 얼굴과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경악에 찬 얼굴로 주먹을 부르르 떠는 재상을 미처 보지 못했다. "딸이..영애가 어디로 간 것인지 아는가?" 재상의 물음에 언제 웃었냐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백작은 처량한 얼굴로 고 개를 흔들었다.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르신과 함께 갔으니 원하기만 하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요." "어디든...원하기만 하면..." 시름에 잠긴 얼굴로 다시 의자에 주저앉은 재상은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알렉산드로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백작은 문득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딸아이의 푸른 눈이 생각이 났다. '고얀 것. 그렇다고 달아날건 뭐 있느냐. 이 애비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을...' 한편으로는 야속하나, 그 마음 잡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더 드는 것은 아비 라서 일까. 샌들우드가 함께 갔으니 어디 가서 굶지나 않는지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집을 나가면 고생이라는데 평생 아카데미와 안락한 집에서만 살던 아 이가 혹시나 고생하고 있지나 않을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닌 백작이었다. "이보게." "...아, 네." 각기 다른 상념에 빠져 침묵을 지키던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혼사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하지 않나. 어차피 전하의 뜻이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그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네. 아니 그런가?" "......." 그거야 일반인의 경우에 그러한 것이고, 황명으로 시집을 오라 하는데 누가 거부를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말하는 '전하'라는 사람이 '황제'의 '아들'이란 것을 간과하고 있는 재상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백작은 이어지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서서 말려줌세. 그렇지 않아도 황태자 비가 되겠다는 여식들은 줄을 서고 있지. 어떻게 해서든 말려주겠네. 거기에 관해서는 폰차르크님도 동의하실 것이야. 또한 폐하께서도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 분명하네. 그 정도는 약조할 수 있어. 그래도 안 되겠나?" 어느새 '영애'에서 '그 아이'로 호칭이 바뀐 알렉산드로의 말엔 신경을 쓰지 못한 백작은 그가 던진 커다란 미끼에 걸려 허부적거리고 있었다. "여인의 삶이란 것은 남편을 얼마나 잘 만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아이의 마음이 더욱 중요해.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나? 그렇지 않나?" "그렇지요! 제 말이 그겁니다!" 황제에게도 과감히 일침을 날릴 수 있는 재상이 편을 들어준다는데, 더군다나 샌들우드에 황제까지 들먹여가며 강조를 하는 알렉산드로의 유혹에 넘어가버린 백작은 어느새 꼬리를 흔들며 침을 흘렸다. "그러니, 2, 3번 조항은 넘어가고 1번 조항을 손을 좀 봤으면 하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백작의 요구를 씹어버린 재상은 몰아친 김에 뿌리 를 뽑아버렸다. "5푼. 단 1년 안에 못 갚으면 6푼. 2년이면 7푼 5리 어떤가." 알렉산드로의 말에 백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보통 돈 거래는 상인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또한 돈을 빌려주거나 할 때 이자를 붙이는 비율은 절대로 3푼을 넘지 않았다. 자칫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기에 은연중이 상인들끼리 약조한 사항이었다. 아무리 이자가 좋다지만 원금을 못 받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세상 어디에서 돈놀이(!)를 하더라도 이렇게 높은 이자를 받은 역사는 없었다. 이제는 눈에 금화를 붙이고 침을 질질 흘리며 주판알을 튕기던 백작이 알렉산 드로의 야윈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핫핫핫. 역시 재상님은 다르시군요. 흠흠. 당장에라도 자금을 풀어드리지요. 하루만 아니 반나절만 기다리십시오." 돈에 넘어간 그대의 이름은 데니스 폰 배너라. 어느새 딸의 가출사건까지 싹 다 잊고 계약서 만드는데 열중을 해버린 백작은 헤벌쭉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재상의 배웅을 받으며 궁을 나와서야 그제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젠장!!! 이게 아니잖아!!! 당장 마차 돌렷!!!" 풍채 좋은 백작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청거리다 길 한 가운데에 우뚝 선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가 달려와 한 장의 종이 를 내밀었다. "마차 돌리라니까, 뭐하는 거야!" "백작님, 재상님께서 이것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물론 중간에 가다가 백작이 발광을 하면 전해주라 했다는 말은 쏙 빼버린 기사는 얼른 서신을 펴들고 죽 읽어 내린 백작이 또 다시 헤벌쭉 웃으며 마차 문을 쾅 닫는 것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집으로 간다! 당장! 서둘러!" 단 몇 세크 동안 명령을 수시로 바꾸는 백작의 말에 우왕좌왕 하던 마부 는 결국 백작가로 서둘러 말을 몰았다. 마차 안에서 대마왕 저리가라는 음침한 웃음소리에 이어 길 가던 사람들 이 전부 길을 비켜줄 정도로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므흐흐흐흐흐....크하하하하하하하하핫!" 퉁실퉁실한 몸을 때굴때굴 굴리며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백작의 발 밑 에는 단정한 글씨가 적인 한 장의 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전하는 며칠 전부터 아침마다 기상하시던 것(?)을 못하시게 되었네. 걱정하지 말게. 폰차르크 님 작품이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죽음의 숲으로 2. 그리고 여기 또 한사람. 가벼운 경장차림에 칼을 찬 사내 하나가 신전을 방문했다. "그레고리 대신관님을 뵙고 싶습니다." 신관의 대문을 부셔버리기 위해 만든 것쯤으로 생각하던 사내가 정중하게 노크를 하고, 그것도 혼자나타나자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던 신관들은 그의 점잖은 요청에 대신관의 거처로 안내했다. "들어오시게나." 문에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던 수련신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들어가십시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 이제껏 제대로 된 인사도 한 마디 해보지 못했던 기사에게 짧은 축성의 기도까지 해준 수련신관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차를 들고 나타 나는 신관에게 찻잔을 받아 대신관의 책상위에 내려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간의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세바스티앙이 그레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실...을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인가. 아련한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로 검은 머리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세바스 티앙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그레고리는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네에게는 외모가 중요한가?" "......." "우리들의 눈에는 과거에도 이카루스의 아이였고, 지금도 그러하네. 껍데기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자네는 그 아이의 겉모습만 보고 얽매 이는 것 같네. 그러한가?" 그레고리 대신관의 말 속에는 행여나 세바스티앙이 크리스틴의 행복을 깨어버릴까, 또 다시 그 아이를 심연의 어둠 속으로 밀어낼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기에 잠시 깊은 사색에 잠겨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던 세바스티앙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그 아이의 이름이 이대로 사라질까...그 아이의 흔적이 이대로 묻혀버릴까 그것이 두려웠을 뿐입니다. 혹시나 돌아갈 곳이 없을까, 혹시나..." "몸의 주인이 돌아오면 그 아이가 설 곳이 없을까 걱정이 되었나?" "........" 차마 크리스틴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몸의 주인이라 돌려 말하는 대신 관에게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이던 세바스티앙은 대신관의 노안에 담긴 깊 은 시름을 보고 입을 닫았다. "나도...그것을 걱정하고 있네. 하지만 몸의 주인은 마음의 주인을 가리 키는 것일쎄. 자네는 아는가? 그 아이의 주인은 세실이야. 그 본질은 변하지 않지. 기억이 있다 뿐이지 그 아이는 과거의 백작 영애가 될 수 없네. 이미 모든 적응은 끝났어. 스스로가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의 몸은 온전한 그 아이의 것이야.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정할 수도 바꾸어 놓을 수도 없네. 그것은...사실이지." "......" "하지만...결국 선택은 그 아이의 몫이 될 것이네. 다른 사람 모두가 원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원한다면 결국 그리 될 일이야." "그 말씀은...설마.....!" 경악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바스티앙에게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대신관은 창문 너머 보이는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았다.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듯 보이는 저 나무가 불과 며칠 사이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저만큼 자랐다면 누구라서 믿어줄 것인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틴과 세실에게 일어난 일 역시 그러할 터였다. 본인 스스로와 그것을 지켜본 자들만이 아는 사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찻잔을 잡았던 대신관은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알아채고 잔을 놓았다. "그 아이의 몸은 아직 살아있다고 하네. 나도 들은 이야기야. 누구에게 들었냐고 묻지 말게. 신벌 받을까 두려우니." 멀쩡한 하늘에서 내려 꽂히던 번개를 떠올리며 슬쩍 농담을 던졌던 그레 고리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젊은 기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선택권은 주어야 하나 그러고 싶지 가 않아. 그리 되길 원하는 존재가 있으나 그것이 그 아이를 희생하는 길 이 될 것이기에 그리 하지 못하네." "희생이요? 그게 무슨...?" "깊이 알려고 들지 말게. 아직 때가 아니야. 언젠가는 내가 말 하지 않아 도 알게 될 걸세. 흠...그런 그렇고 자네는 내가 그 아이에게 어딘가에 육신이 남아있단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그레고리의 질문에 다시 침묵을 지키던 세바스티앙은 반짝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응? 자네는...그리 되길 원한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전...다만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이와 지금의 크리스틴은 같은 아이 라는 것을 압니다. 어디에 있든, 어떤 껍질을 쓰고 있든 제 눈에 비친 아이는 저의 말발굽에 밟혔던 그 아이입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 세바스티앙의 단호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레고리는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랬군. 운명은 뒤틀렸으나 인연의 고리는 아직인게지. 끝이 아니야. 차라리 잘 된 것인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건넨 그레고리는 어리둥절해하는 세바스티앙의 향해 시원스럽게 웃어보이고 벌떡 일어났다. "그 아이는 지금 레이븐에 있네. 허나 자네는 잠시 여기 머무르다가 나와 함께 가야해. 나도 갈 거야. 허나 지금은 1000일 기도 중이라 아직은 이 곳을 떠나지 못하네. 잠시만 기다리게." "천...일이라구요?" "음...이제 한 달 정도 남았지. 기다릴 수 있겠나?" 황태자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소식을 전해 줘야하는 그로서는 난감한 일이 었다. 벌써 황명이 내려져 크리스틴 폰 배너를 찾는 일이 은밀하게 확산되 는 가운데 버젓이 수도에 남아있었다니. 정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가며 어찌 하는 것이 크리스틴에게 좋은 일인지 고심을 해보던 세바스티앙은 그의 답변을 기다리는 대신관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한 달 후에...그 아이를 만나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굳이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세바스티앙의 느긋한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준 그레고리는 자 신의 부탁대로 샌들우드가 크리스틴을 잘 잡아주기만을 기도하며 몸을 씻으 러 밖을 나섰다. "일단...갈렌으로 해볼까..." 일주일이 되려면 아직 며칠 남았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시늉은 해야 하니 사람을 시켜 갈렌으로 보낼 생각을 한 세바스티앙은 과연 크리스틴이 레 이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꾹 눌러버렸다. 어차피 한 달만 기다리면 알게 될 일. 조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이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여.행.을 한다고 떠나 서는 레이븐으로 잠적한 크리스틴은 하루 하루 바쁜 날들은 보내고 있었다. "쿨럭!" "쓰으읍" "웅...역시 맛이 없어요?" 카일과 앤드류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는 것을 말똥말똥 지켜보던 크리 스틴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한 스푼 떠먹었던 말랑말랑한 푸딩접시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크리스틴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카일이 마련해준 연구실로 들어갔다. "히잉...왜 맛이 없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처량하게 방안으로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일과 앤드류는 문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안 의 것을 꿀꺽 삼키고 옆에 앉아있던 샌들우드를 보았다. "되었습니까?" "뭐 그 정도면 수준급이다. 많이 늘었구나." "이것 참,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잘 팔릴 텐데 언제 까지 이런 연극 을 해야 하는 겁니까?" "말했지 않느냐? 황제가 포고문을 거두고 성문이 열릴 때까지다." "......." 샌들우드와 크리스틴이 한밤중에 레이븐으로 난입한 뒤로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레이븐에 잠깐 들려 미리 실험해 보았던 것으로 직접 상품을 만들어보고 떠나려고 했던 크리스틴의 계획은 다음 날 아 침 바이오니어 수도를 지키던 모든 병사들이 두 사람의 몽타주를 들고 곳곳을 수색하러 다니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물론 마법으로 슬쩍 사라지면 그만이었지만 크리스틴도 모르는 사정이 생겼고 덕분에 카일 형제는 매일 같이 크리스틴이 내놓는 푸딩을 먹고 연극을 해야 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것을 먹은 척 최대한 얼굴 표정을 일그 러뜨리는 연극을. 그것이 다 크리스틴의 발목을 잡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성문이 열리지 않더라도 떠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조금 초조해 보이는 카일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어준 샌들우드는 멀거니 창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기다리십시오. 아직은 이릅니다. 잠시 기다리셨다가 저와 함께 가시지요.」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카일에게 들어서 온 것이었지만-레이븐에 도착한 다음날 찾아온 대신관 그레고리는 간곡한 어조로 샌들우드의 발목을 붙잡 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부탁을 하는 이를 두고 어찌 훌쩍 떠날 수 있으랴. 크리스틴에게는 말 하지 말아 달라 이야기를 하는 대신관의 얼굴에 담긴 절박함을 보고 고 개를 끄덕인 샌들우드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푸딩'을 만들기 전에는 떠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크리스틴에게 다짐을 받았다. "스승님은 빨리 떠나자고 하셨잖아요?" 크리스틴의 맑은 눈을 보며 대답이 궁해진 샌들우드는 얼굴을 붉히며 슬쩍 한 마디 내던졌다. "나도 제자 덕 좀 보려고 그런다. 그러면 안 되느냐?" 샌들우드의 이 같은 대답은 크리스틴의 투지를 불타오르게 만들었고 그 날 로부터 한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카일 형제에게 선보였다. 물론 스승님께는 가장 훌륭한 것을 드리고 싶다는 크리스틴의 주장으로 매 일 같이 달짝지근한 푸딩을 먹는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샌들우드는 멀찌감치 떨어져 시식을 하는 카일 형제의 표정을 평가했다. "대단해..." "그렇지요?" 방안에서 꼬물꼬물 흘러나오는 달콤 쌉싸름한 냄새를 음미하며 미소를 교환 하던 카일 형제는 쏙 들어간 아랫배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이미 크리스틴이 내 놓았던 버섯을 곱게 갈아 만든 푸딩은 그들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빈 접시만 남은 상태였다. "게다가 효과도 탁월하고." 겨우 한 달.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3주하고 4일이 되었다. 레이븐에 온 첫날 크리스틴은 자신이 생각해놓았던 약제들과 과즙, 과육, 그리고 향료들을 늘어놓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었다. 목표는 약초가 가지는 특유의 쓴맛을 없애고 다른 재료들과 맛이 어우러지게 만드는 것. 그리고 색소를 넣지 않더라도 예쁜 색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이 세가지였다. 쓴맛의 성분을 없애는 것은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었다. '아도린' 작고 새빨간 열매가 조롱조롱 열리는 한해살이 식물로, 주로 설탕을 살 수 없는 평민들이 아도린의 열매를 말려 곱게 빻아 감미료로 사용하며, 그 잎은 서늘한 그늘에서 말리거나 약간 쪄서 찻잎으로 쓰기도 했다. 워낙 흔한 것이 라 사람들은 그 열매만 쓸 줄 알았지 잎을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고, 그와 반 대로 크리스틴은 열매의 용도는 모르고 잎으로 차를 만드는 방법만 알고 있었 다. 혹시나 색을 낼 수 있을까 하여 아도린의 열매를 구하러 갔던 크리스틴은 그 것으로 감미료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재들과 섞어 추출액을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 아도린은 단순히 단맛만 내는 것이 아니라 약간 떫은맛도 났 는데, 이것을 약초와 섞으면 쓴맛이 상쇄되어 다른 과육들과 맛이 어우러져 달콤 쌉싸름한 맛만 남게 되었다. 단 아도린과 섞어 단맛을 내는 약초들은 정해져 있었고, 이러한 발견을 계기로 크리스틴은 다른 과실과 과육을 이용해 약초의 쓴맛을 없애는데 몰두했다. 그리고 이 틀. 단 이틀 만에 약초의 즙을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자체를 푹 쪄서 말린 후 그것을 아주 미세한 가루로 만들어 쓰면 본래 약초가 가지는 성분은 거의 변하지 않고 다른 재료들과 섞어도 쓴맛이 거의 나지 않는 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 굳이 푸딩의 색을 진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색소 는 모두 빼버리고 과즙과 약초 가루를 섞고 과육을 덩어리째 넣어 반투명한 푸 딩을 만들었는데, 기존에 나와 있던 달기만한 푸딩과는 완전히 색다른 맛의 푸 딩이 탄생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크리스틴이 신경을 쓴 것은 맛과 모양. 일단 몸의 불순물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볼록 튀어나왔던 아랫배가 쏙 들어간 카일의 증언으로 확인되었고, 푸딩의 단맛과 잘 어우러지는 찻잎도 몇 가지 알아내어 상품 목록에 첨가해두었다. 나중에 푸딩과 함께 묶어서 판매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 며칠째 그녀를 고심하게 만드는 것은 맛. 카일과 앤드류의 얼굴을 시뻘겋고 시퍼렇게 만드는 것은 크리스틴이 배합한 약초가루가 가진 특유의 향과 맛, 그리고 과육의 어우러짐에 있었다. 어떠한 과육은 쓴맛을 배가시키기도 하고, 어떤 것은 묘하게 쉰 맛을 내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뒷맛이 떫은 경우도 있었다. 수만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서서히 제 모양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푸딩들은 차곡차곡 크리스틴의 일지에 이 름을 남기며 상품으로 나설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레이븐 상회에 방문자가 찾아왔다. "대신관님! 세바스티앙님!" 약초를 뭉글하게 끓이며 추출액을 만들어내느라 커다란 솥 앞에서 비지땀을 흘리던 크리스틴은 그녀의 연구실로 찾아온 두 사람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지금 잠시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고,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절대로 비밀이었다. 헌데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태연히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을 보며 경악을 하던 크리스틴은 세바스티앙의 손에 들린 커다란 가방을 보고 안도 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함께 가려고 왔다. 여행을 간다지?" "아..." 대신관의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슬쩍 세바스티앙을 곁눈질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너를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리셨다. 물론...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알려드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네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널 지 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상한 말투는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무겁게 느껴지는 세바스티앙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 틴은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푸딩을 샌들우드가 특별 제작한 속을 깊게 파낸 커다란 얼음 덩어리 안에 넣고 물을 끓이지 시작했다. "앉으세요. 함께 가시는 거야 상관없지만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샌들우드도 모르는 곳을 그들이라고 알 턱이 있나. 하지만 어딜 가든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두 사람은 수십 가지 시약병과 약초들, 과일들이 배를 드러내놓고 마음껏 굴러다니고 있는 탁자 앞 에 앉았다.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크리스틴은 멍하니 주전자에서 올라오는 새하얀 김을 보고 있다가 불을 끄고 옆에 있던 찻잎을 한줌 넣고 잠시 기다 렸다. 찻잎이 우러나오는 동안 얼음 속에 들어있던 차갑게 식은 푸딩을 꺼내 그릇에 옮겨 담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차를 따라 그 옆에 놓았다. "이게 이번에 시판될 푸딩이에요. 이건 제가 직접 배합한 찬데, 스윗포츈 (sweet-fortune)이라고 해요." 붉은 구슬 같은 것이 촘촘히 박혀 있는 노란 과육을 중심으로 동글동글 모양 을 낸 푸딩과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나는 에메랄드 빛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 던 두 사람은 천천히 푸딩을 한 입 떠먹고 차를 홀짝였다. 차갑고 새콤달콤한 맛 뒤에 따라오는 따뜻하고 쌉싸름한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주며 속까지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놀라운 맛에 눈을 크게 뜨던 대신관은 '탐식은 죄악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달지만 단맛이 강하지 않고, 입안을 부드럽게 휘감으며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푸딩을 조금씩 떠먹는데 열중했다. 본래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세바스티앙 역시 평소 입에도 대지 않았던 푸딩을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몽땅 먹은 후 체온보다 약간 높은 온도의 찻잎을 홀짝 홀짝 들이부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푸딩과 차를 마시는 대신관과 세바스티앙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던 크리스틴은 한숨을 폭 내쉬며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죽음의 숲으로..갈까 해요." "콜록!" "컥!" 입안에 남아있던 차를 쏟아내며 미친 듯이 기침을 하던 두 사람이 벌게진 눈으로 크리스틴을 노려보았다. "농담이지?" "우릴 질식시키려고 장난한거지?" 말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그곳이 어떠한 곳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죽음의 숲은 그곳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미지의 숲이었고,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숨이 막혀 죽는다 소문이 난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가겠다니!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크리스틴을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너 제정신 아니지? 그렇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죽음의 숲으로 3.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유연하게 받아넘긴 크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마실 차를 한 잔 들고와 홀짝거리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던 그레고리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고, 몇 미르가 흐르자 우당탕 거리며 샌들우드와 카일, 앤드류가 방으로 뛰어들왔다. "거짓말이지?!" "정말이냐?!" "죽음의 숲!!!" 거품을 물며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던 크리스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행동을 해보였다. 그것을 보고 아장아장 기어다니는 아이가 겁도 없이 2층에서 뛰어내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 양 펄쩍 뛰며 난리를 피 우던 사람들은 곧 제풀에 지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나 알고나 하는 말이냐?" 샌드우드의 침음성에 고개를 끄덕여준 크리스틴은 또 다시 소리를 지르며 광분하려던 군중을 막고 입을 열었다. "한스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셔서 잘 알고 있어요. 사람들은 살 수 없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다고 하시더군요." "소문? 그런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곳에 들어간 놈들은 다 죽는다!!" 때려주고 싶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몸을 떨던 샌들우드가 거칠게 대답을 하자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왜 한스 할아버지가 그곳에 꼭 한 번 가보라 권했을까요. 알렉산 드로 재상님이 왜 그 불모지인 죽음의 숲을 하사받으셨을까요?" "........." 처음 황제에게 재상이 그 땅을 원해 주었다 말을 들었을때를 떠올린 샌들우드 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젠장, 내가 그 구닥다리 늙은이 속을 어찌 아느냐! 상은 받기 싫고 쓸데없 는 것이나마 받는 시늉이라고 했겠지. 그리고 그 한스라는 영감도 설마 네 가 그곳에 갈 수 있을거라 생각못하고 농담을 한 것일게다." 과연 그 두 사람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샌들우드와 그 외 다수의 얼굴을 조목조 목 뜯어보던 크리스틴이 배시시 웃었다. 절대 양보하지 못한다는 고집을 앞세울 때 써먹는 표정. 그것을 보며 미리 경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곧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을 잃어버렸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 수 있어요." "끄으응...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한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그 곳에 퍼져 있는 안개는 인위적인 거라 하 셨어요.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시면 모른다고 대답해드릴께요. 일단 들으세요."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며 비밀을 털어놓듯 진지한 얼굴로 말문을 연 크리스틴을 보고 이마를 짚던 사람들은 천천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안식의 물과 비교도 되지 않는 독이 담긴 호수가 있다고 하셨어요." "독? 호수?" "아주 아주 옛날에 인간들의 탐욕을 벌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린 이카루스의 눈물 이 담겨 있다는 전설의 호수이지요." "......." 무언가 심오한 것을 기대하던 이들은 크리스틴의 대답에 입을 쩍 벌리고 눈을 껌뻑거렸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말도 안되는 전설을 믿는 것인가. 몇몇 음유시인들의 입으로만 전해지는, 이제는 거의 잊혀져 버린 옛 이야기를 꺼내는 소녀를 보며 고개를 흔들어주던 사람들은 또 다시 귀를 기울여야했다. 이번에는 보다 현실적이었기에. "그래서 그 곳을 중심으로 독지가 형성되었고 수많은 동물들과 독충들이 살아 간다고 했어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짙은 안개가 만들어지고 사람들 의 출입을 막는 금지로 변했다고. 그것은 인위적이라 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이 고 과거에 사라졌다던 흑마법사들의 짓이라고도 말이지요." ".......!" 흑마법사라는 말에 대신관의 안색이 돌변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카루스를 부르던 그레고리는 천둥 소리보다 더 큰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가볼 생각이에요. 일단 그곳에 가서 정말 연구해볼만한 독초가 있는지, 또 독기를 중화시킬 약초 또한 자란다 하였으니 그것도 확인하고 싶어요. 그리고...가능하다면 한 동안 그곳에서 머물렀으면 하구요." "........." '따라올테면 따라와봐'란 식으로 과제만 툭 던져놓고 턱을 괴고 흥미진진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돌변하는 안색을 지그시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살풋 웃었다. "꼭 가보고 싶어요." "끄으응...." "함께 가시고 싶으신 분?" 이것이 무슨 땅따먹기 게임도 아니고, 냉큼 '내 편은 손 들어줘'라는 어투로 한 마디 툭 내던지는 말에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의 손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는지 모두 오른손을 번쩍 들고 눈을 빛내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며 얼른 손을 내렸다. "형님은 여기 계십시오." "왜?" "장사는요?" "......." 아직 이렇다할 후계자를 키우지 않은 상태라 레이븐을 맡길 사람이 없었던 카 일만 남고 크리스틴과 함께 죽음의 숲으로 들어갈 일행이 정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 떠날거냐는 물음에 '내일'이라 대답한 한 소녀 때문에 발이 부르트도록 여행 장비를 구하러 다녀야만 했다. 이곳 저곳 기사 수행으 로 여행을 다녀보았던 세바스티앙은 용하다는 해독약과 외상에 바를 포션, 스네크라를 몰아내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앨럼(alum)과 비트리올(vitriol), 담뱃재등을 가득 구해 자루에 담아왔다. 일행중에 엄청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와 대신관이 함께 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앞날을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나마 주워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시장을 샅샅이 돌아다닌 세바스티앙은 음습하고 독기가 가득하다는 곳을 지나가는데 필요하 다고 주장하는 상인들의 말에 따라 빈손으로 나갔다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자루를 메고 돌아왔다. "쯧쯧 평생 그곳에 살아도 되겠구만..." 비지땀을 흘리며 낑낑대며 돌아온 세바스티앙을 보며 혀를 차던 샌들우드는 그 보다 더 큰 자루를 두 개나 들고 오는 앤드류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또 뭐냐?" "아, 예. 거긴 습기도 많고 공기도 통하지 않는다 소문을 들어 옷을 좀 준비 했습니다." "설마...그게 다 옷이냐?" "사람이 몇 인데요. 이정도도 적은 거 아닙니까?" "그냥 한 벌만 가져가서 빨아서 입으면 되지 않느냐?" "그래도 혹시 모르지요." 샌들우드의 투덜거림을 싹 무시해버린 앤드류와 세바스티앙은 사람들의 수에 맞추어 옷가지와 물품을 나누어 각기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샌들우드 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애처러운 눈길이란... "뭐냐?" 나이가 가장 많은 연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이제껏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던 샌들우드는 그들의 눈이 전하는 불길한 기운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준비라고 하고 있었던 것처럼 튼튼해 보이는 가죽주머니를 5개씩 쑥 내민 앤드류와 세바스티앙이 씨익 웃었다. "무한 주머니...만들어주십시오." "........" 어쩌겠는가. 다들 그의 제자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을. 인상을 팍 찌푸리고 싫은 내색을 팍팍 풍기며 엉기적거리며 주머니를 낚아챈 샌들우드는 '노인공경도 모르는 것들'이라 싸잡아 욕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더 있다가는 또 무슨 부탁을 받을지 몰랐기에. 그리고 그의 선견지명에 축하라도 할 의도였는지, 때를 맞추어 커다란 가죽 포대를 들고 뛰어온 카일이 샌들우드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두드렸다. "어르신! 보존 마법을 걸어주십시오! 밥은 먹어야할 것 아닙니까? 이왕이면 무한 주머니도 하나 만들어주시면, 제가 야영 준비까지 싹 다..." "내놔!" 열심히 문을 두드려가며 잘 먹는 아이가 잘 큰다고 누누이 강조를 하던 카일은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빽 지르는 샌들우드에게 꾸벅 절을 하고 자신이 들고 온 포대(包袋)를 얼른 내려놓고 희희낙락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초췌한 안색으로 등장한 그레고리 대신관은 한아름의 포션 병을 들고 나타나 샌들우드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어르신..." "옛다!" 말도 꺼내지 전에 벌컥 열린 문사이로 휙 날아드는 무한 주머니를 보며 역시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라 칭찬을 하던 대신관은 그를 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 남정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험험. 아닙니다. 그런데 왠 포션을 그렇기 사오셨습니까? 저도 사왔 습니다만..." 세바스티앙의 의아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레고리는 침착한 태도로 병을 준비해온 천으로 둘둘 말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성수(聖水)로 만든 것이네. 혹시나 몰라 준비한 것이지." 신성력을 담은 성수로 만든 포션은 아직까지 선보인 적이 없었다. 신관들이 그것을 상품이나 기타 다른 용도로 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 었는데, 그레고리의 대답을 들은 사내들이 놀란 눈을 하고 보여달라고 떼를 썼지만 그는 '크리스를 위한 것'이라 일축을 하며 거실을 나가버렸다. 그런 대신관의 행동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이들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나중에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고 한참 만에 나타난 샌들우드는 괜히 허리를 두드리며 무리를 해서 몸살이 날 것 같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다음 날. 카일의 눈물어린 배웅을 받으며 레이븐에서 곧장 죽음의 숲으로 텔레포트 한 일행은 시꺼먼 안개가 뭉클뭉클 솟아나는 검은 숲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껏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와본 사람은 없었던 터라 그만큼 긴장을 하고 있던 가운데 겁도 없이 숲 안으로 성큼 발을 디디는 크리스틴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아가야! 좀더 알아보고 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개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버린 크리스틴을 보고 서둘러 걸음을 옮긴 일행들은 짙은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의 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둠 속을 비춰주는 밝은 빛이 되어, 길을 알려주세요. 라이트(light)' 갑자기 주위를 밝히며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번쩍이는 빛을 보고 숨을 들이 키던 일행들은 예고도 없이, 거기다 시동어도 외치지 않고 라이트를 시전 한 샌드우드를 노려보았고, 애꿎은 누명을 쓰고 눈썹을 찡긋하던 샌들우드 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방실방실 웃고 있는 크리스틴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젠 아예 대놓고 시전한다 이거지?' 최소한 자신에게는 눈치를 주고 할 것이지 엄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크리스틴 앞으로 다가가던 샌들우드는 귓가에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쉿!" 그래도 일행 중 검을 수련했던 세바스티앙과 앤드류가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덩달아 긴장한 기색으로 가만히 서 있던 크리스 틴은 자신의 등 뒤에 닫는 차가운 기운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이 째져라 비명을 지르는 크리스틴을 보며 칼을 뽑아들고 마나를 모으던 사람들은 어느새 그들이 시꺼먼 그림자들에게 포위를 당했음을 알고 이를 악물었다. 안타까운 눈으로 정체불명의 존 재에게 사로잡힌(?) 크리스틴을 힐끗거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려던 일행은 어느새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커먼 그림자들을 보며 약간 긴 장을 풀었다. "꺄아아아아아~ 꺄아아~ 꺄아~ 합!"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그 늠름하던 모습은 어디다 내다버렸는지 쉴새 없이 귀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대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입을 덥썩 막아버리는 차가운 손을 느끼며 눈만 떼굴떼굴 굴리며 팔을 휘저었다. "그 아이를 놓지 못하겠느냐!!!" "감히!!" 긴장을 풀었던 사람들이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며 크리스틴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괴한을 노려보았다. 노기를 띤 얼굴 로 그를 노려보던 샌들우드는 반항을 하다말고 자신의 입을 덮은 앙 상한 손을 만지작거리는 크리스틴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뭐하는거냐! 그 손 떼거라!!" 샌들우드의 고함소리에 놀랐던 사람들은 이제 크리스틴의 행동을 보고 기함을 했다. 조금전에 비명을 지르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크리스틴이 아예 핏기 하나 없는 앙상하게 메마른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팔짝 팔짝 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어이없음과 황당함을 뉘라서 설명할 수 있으랴. 이제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괴한의 낡은 로브를 붙잡고 앞으로 잡 아당기기 까지 하는 크리스틴을 본 일행들은 과연 저것이 반항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생각대로 안아달라는 포즈를 취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크리스틴의 그러한 행동에 놀란 것은 비단 샌들우드의 일행 뿐 아니었다.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는 소녀의 괴성을 막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던 괴한은 로브를 잡아당기며 자신에게 앞으로 와달라 무언의 부탁을 하는 소녀를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먹여서 키우면 이렇게 크는 거야?' 「재미있을 겁니다. 직접 다녀오시지요. 캬캬캬캬」 열심히 일을 하던 중에 찾아와 은근히 등을 떠밀던 제자를 떠올린 괴한은 이를 갈며 이 간 큰 소녀의 얼굴이나 봐야겠다 결심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들을 경계하며 슬쩍 크리스틴을 돌려세운 괴한은 그 아이의 시리도록 푸른 눈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뭔가 놀란듯한, 이내 실망이 가득한 눈이 그를 원망한다 항변하고 있 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리 실망스럽냐고 왜 자신을 원망하느냐고 물 어보려던 괴한은 어느새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보고 혀를 찼다. "끌끌끌...나도 늙었군." 무슨 쇳덩이를 긁어서 내는 소리 같았다. 음침한 숲과는 너무나 잘 어울리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선사할 수 있을 정도로 거친 쇠 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괴한이 크리스틴을 놓 아주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로브를 너무 깊게 덮어써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사람 들을 알고 있었다. 조금전 크리스틴의 얼굴을 본 이후로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있다는 것을.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크리스틴의 반짝이는 눈이 로브속에서 번뜩이 는 괴한의 푸른 눈과 마주친 순간 소녀의 작은 입술이 반달을 그렸다. "할아버지?" "헉!" "끄으응~" 분명 앞의 신음은 대신관의 것이었고 낑낑대는 소리는 샌들우드의 것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들이야 신경을 쓰건 말건 자신의 시선을 잡은 괴한을 보고 호기심을 드러내던 크리스틴이 목에 걸어놓았던 가는 줄을 끄집어냈다. 1년 사이 거의 키가 자라지 않아 여전히 배꼽 근처에 달랑거리던 물방울 모 양의 푸른 돌을 꺼낸 크리스틴이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괴한에게 내 밀었다. "이거...아세요?" "......" 푸른 빛이 나는 안광이 가늘어지며 돌의 표면에 드러나는 기하학 무늬를 향했다. 그리고 시선을 올려 크리스틴의 푸른 눈을 보았다. 그녀의 손에 올리고 있는 돌 보다는 연하나 훨씬 맑고 푸른 눈이었다. "따라오너라." 괴한의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괴한의 목에 칼을 대고 있던 세바스티앙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제가 아는 분들의...음..." "선배지." "아...! 그렇다네요." 어째 가는 곳마다 인연이 끊이지 않던 아이답게 역시 죽음의 숲에서 마저 인연의 끈을 찾아낸 크리스틴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괴한 의 로브를 꼭 잡았다. 그리고 이를 갈며 주먹을 불끈 쥐는 샌들우드의 질투어린 시선도 아랑곳하 지 않고 자박자박 걸음을 옮겼다. "겁도 없지..." 대신관의 한숨 섞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던 일행들은 어느 새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열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시커먼 것 들..." 제일 뒤에서 있는 데로 인상을 쓰며 따라가던 샌들우드는 쉴새없이 욕설을 늘어놓았다. 레니의 죽음 이후 크리스틴의 주위를 맴돌던 10여명의 검은 기운을 그라서 어찌 몰랐겠는가. 그들이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크리스틴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었다. 헌데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죽음의 숲 앞에 펼쳐놓은 검은 안개가 그놈들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자 저절로 이가 갈리는 건 어쩔 수 가 없었다. 같은 마법사이면서, 더군다나 현 백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는 이들 을 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묻는 다면 샌들우드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 한마 디로 대답할 것이다. "그냥 싫어!" 받은 것 없이 미운 놈들. 샌들우드에게 있어 흑마법사들은 그러한 존재였다. 제자가 자신에게까지 숨겨주었던 인물들. 그래서 더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던 샌들우드는 조금 전 시꺼먼 로브를 뒤집어쓴 신비한 척하는 놈을 냉큼 따라가며 자신에게도 안 쓰는 '할아버지'란 말을 서슴 없이 하던 제자를 떠올리며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죽을 때까지 싫어해 줄 테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죽음의 숲으로 4. 크리스틴 일행이 괴한을 만나게 된 그 순간, 아카데미 한 곳에서는 그 보다 더욱 긴장된 사람들이 마주보고 앉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어딘지도 모르시면서 찾으러 가신다구요?"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나이 생각 좀 하십시오. 그리고 이 약병들이야 도둑이 든 것이다 신고를 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야! 이 아이 말대로 백작가에 찾아가는 건 우리더러 아예 땅 파 놓고 드러누워라 하는 소리와 같아. 흙은 백작이 덮어주겠지." "......." "끄으응...이 놈이 이렇게 뒤통수 칠 줄이야...." "뭐 그 정도 실력이면...." "실력?! 이제 겨우 2달 배웠다! 뭘 알고 있다는 것이냐? 네가 말하는 그 지식들? 하! 그런 죽은 지식이다. 또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알아보고 판별해내는 것은 경험이 없으면 안돼. 그런데 수행이라니...끄으응!" 버럭 성질을 내다가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는 로한을 얼른 의자에 앉힌 마커스는 크리 스틴이 남기고 간 메모를 슬쩍 감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치료를 할 학생도 없고, 대부분의 선생들도 집으로 돌아가고, 가정이 없고 일이 남은 몇몇 선생들만 방학을 아카데미에서 보냈기에 약제실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 화근 이었다. 시약들이야 거의 가 정제하여 만든 것이고 마법이 걸린 병에 담겨있어 서늘하고 어두 운 곳에만 놓아두면 변질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한 번도 확인 해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갑자기 찾아와 약을 좀 조제해 달라 요구하는 로한 때문에 약제실의 문을 열었던 마커스는 그 황량한 방안을 보며 자신이 방을 잘못 찾아왔다 생각을 했 을 정도였다. 크리스틴의 편지를 발견한 것은 미친 듯이 발광하며 선불 맞은 맷돼지 마냥 펄펄 뛰는 마커스가 아니라 차분히 방안 곳곳을 살펴보던 로한이었다. "음...일 쳤군요."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로한이 전해주는 편지를 쭉 읽어본 마커스는 단 한 마디로 논평을 하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누가 가지고 간 것인지 알고 나자 오히려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전혀 놀라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인지했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책을 모두 기숙사로 옮겨놓은 것이 일편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 많은 약들을 몽땅 털어갈 정도라면 책도 가지고 갔을테니... '재주도 좋은 놈.' 단단하게 자물쇠를 달아둔 약제실을 마음대로 드나들다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느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횡하니 찬 바람이 쌩쌩부는 약제실을 쭉 둘러보던 마커스는 아직도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 로 한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경험도 없고, 이렇다할 수련도 하지 않은 아이가 치료사가 되겠다며 뛰쳐나 갔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약을 가져간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나 그것이 섣불리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그리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한은 혹시나 하는 마음과 함께 떠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것에서 오는 분노로 이지(理智)를 상실하고 혼자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가자! 짐 챙겨라! 뭐 3년 기다리려고 했다만 지금 가면..." "어디로요?" "어디든! 찾다보면 만나겠지!" "휴...스승님, 바이오니어를 한 바퀴 도는데도 한 달이 넘게 걸립니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요. 그런데 무슨 재주로 찾습니까?" "이놈아! 그러면 그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둘 것이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하였다. 멋모르는 아이가 분에 넘치는 짓을 하려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 일단 가서 찾 으면 된다!" "스승님!" 사람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로한에게 큰소리로 소리를 지른 마커스는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로한을 자리에 앉히고 차를 끓여왔다. "진정하십시오, 스승님. 지금 우리가 나선다고 그 아이와 만나게 될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드세요!" "......." 뭐라 또 대답을 하려던 로한은 왕방울만한 눈을 부라리며 찻잔을 가리키는 마커스의 행동 때문에 억지로 찻잔을 들고 조금씩 홀짝였다. 입안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며 속을 씻어내리는 그 쌉싸름한 맛에 흥분이 가라앉는다 느끼던 로한은 턱을 괴고 그의 얼굴 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마커스를 노려보았다. 노망도 아니고,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린 제자 앞에서 추태를 보인 것이 떠오르 자 두 뺨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빤히 쳐다보는 마커스를 보며 '뭘 쳐다봐'하며 힘껏 노려봐주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스승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피식 웃어버린 마커스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스승님 심정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 그 아이가 함부로 치료사 흉내를 낼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그걸 어떻게 아냐구요?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의 성정을 생각하면 당 연한 일이지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추어 생각을 하지요. 그런 아이가 과연 허가증도 없이 사람을 치료하려 하겠습니까?" "사....!" "사람의 앞날을 어찌 아냐구요?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희들에게 도움이 되겠지요." "무...!" "무슨 말이냐구요? 당연히 이제 열 다섯 되는 어린 치료사가 나오면 소문이 나겠지요." "아, 그렇군!" 말을 댕강 댕강 잘라먹으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먹는 괘씸한 제자를 보며 이를 갈아대던 로한은 그제야 마커스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소식이 없으면, 그냥 어디 놀러갔다 생각하면 될 것이고, 소식이 들려오면 당장 찾아 나서면 됩니다. 그렇지요?" "흠...." 조금 편안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로한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짓던 마커스는 손에 깍지를 끼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스승님, 돈...얼마나 모으셨습니까?" 뭔가 음침한 음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커스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리던 로한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쓸 만큼 있다. 그건 왜?" "이렇게 스승을 걱정시키는 제자가 괘씸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는 마커스를 본 로한은 그제야 그의 제자가 크리스틴 에게 화가 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그렇긴 하지. 쬐끔...아주 쬐금..." "그러시지요? 그러니 가만히 앉아 소식만 기다리기에는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마커스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등골이 오싹하던 로한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대답 하나에 크리스틴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불길 한 예감에 당장에라도 찾아나서자 펄펄 뛰던 모습을 싹 지워버린 로한은 흔들리는 눈 으로 마커스를 보았다. "무슨...방법이 있는 것이냐?" "돈만 충분하다면...갈렌에 정보길드가 있습니다." "......!" "성년도 되지 않은 것이 제 멋대로 집을 나가고, 거기다 약제실까지 털어가다니... 흐흐흐흐...가만히 앉아있으면 마커스 투르벨의 이름이 울지요. 흐흐흐흐흐" 텅빈 약제실과 음산하게 웃는 마커스의 시커먼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한은 이마 를 짚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카루스여!!!' 냉정하게 상황분석을 하고 있었다 생각을 했던 제자가 이미 뚜껑이 열려 폭발직전에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로한은 한숨을 꿀꺽 삼키며 오랜만에 신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꼭꼭 숨어라, 크리스. 잡히면...죽음이다.' 귓가에 들려오는 나직한 웃음소리를 음악 삼아 크리스틴의 명복을 빌어준 로한은 어 디든 좋으니 숨어만 있으라고, 제발 나타나지만 말아달라고, 아니 나타나더라도 최 대한 늦게, 마커스의 분노가 사그라질 때쯤에나 나타나라고 쉴새없이 기도했다. "크크크크, 잘 다녀오셨습니까." "재미있으셨지요?" "킥킥킥킥. 마음에 드실 줄 알았다구요." "캬캬캬캬" 아...이 얼마나 그리웠던 웃음들인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안내된 크리스틴 일행은 그 안에서 푸른 안광 을 빛내며 건들건들 다가오는 낯익은 사람들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할아버지~~~!" 얼굴가득 홍조를 띠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들 사이로 뛰어든 크리스틴은 뒤에 서 있던 일행들이 질투에 눈이 멀어 이를 갈건 주먹을 불끈 쥐던 상관하지 않았다. 단 한사람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대신관은 침음성을 삼키며 흑마법사들로 보이는 자들과 크리스틴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정말 이런 낭패가 없었다. 단 30여일 전만 하더라고 세바스티앙에게 절대로 크리스틴에게 그녀의 본래 몸이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겠다 말을 했건만 그 당사자들이 만나버리다니. 이건 정말 신의 농간이 아니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하늘을 원망하던 대신 관은 저 멀리서 녹색안광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한 마법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일그러진 대신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법사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의 품에는 자수정과 같은 보라색 눈을 가진 칠흑같이 검은 털을 가진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이런 저런 인사를 나누며 재회를 즐기던 흑마법사들은 그의 등장에 얼른 자리를 비켜주며 뒤로 물러났다. "이 아이가...그 아이인가?" "케케케케. 네, 그렇습니다." "흠...과연...완벽하군." 무엇이 완벽하다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안광을 빛내며 크리스틴의 얼굴과 몸 전체를 찬찬히 뜯어보던 마법사가 품에 안고 있던 검은 고양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네가 길러보지 않겠느냐?" 아직 어린 듯 크리스틴의 품안에도 쏙 들어오는 작은 고양이는 소녀의 품이 더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럽게 가르랑거리며 크리스틴의 새하얀 목에 코를 비볐다. 고양이의 애교에 홀딱 반한 크리스틴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푸른 안광들이 잠시 붉게 변하며 가늘어지는 것도, 그들이 고양이를 건네준 이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샌들우드는 달랐다. 유심히 녹색안광을 빛내는 이를 노려보던 샌들우드가 성큼 앞으로 다가가 크리스틴의 품에서 고양이를 휙 빼앗아 예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마법사에게 집어던졌다. "그런 재수없는 것을 가까이 하게 할 수 없다. 이봐, 여기 정화마법 좀 걸어줘." "킥킥킥킥" "역시...크크크크" "캬캬캬캬" 어리둥절해하는 소녀의 등을 떠밀어 대신관 앞으로 밀어낸 샌들우드는 아무말없이 크리스틴에게 신성력을 쏟아 붓는 그레고리를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의 행동을 지지하는 듯 킬킬대는 흑마법사들을 쭉 둘러보고 그 중간에서 가늘게 안광을 빛내며 그를 노려보는 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몸을 버리더니...퇴보했군." "......!" 샌들우드의 의미심장한 말에 녹색안광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나머지 흑마법사들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버린, 순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윤회의 사슬을 넘어버린 샌들우드가 보기에 그들의 앞에서 뻐기고 있는 뼈다귀쯤은 발가락의 때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오래...살다보니 지겨워진건가? 저런 더러운 것들을 불러내다니..." 힐끗 마법사의 품으로 돌아가 털을 곤두세우고 그를 노려보는 고양이의 보랏빛 눈 을 노려보던 샌들우드는 뒤에서 기도를 올릴 폼을 잡는 대신관을 말렸다. 그리고 가만히 긴장한 채 그의 입만 주시하는 흑마법사들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이것 보라고. 난 내 제자가 좋아하는 것들한테는 가능한 한 손을 대지 않아. 걱정 붙들어 매라고. 하지만...저건 안 되지." "......" 먼저 나서서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겠다 약속의 말을 던진 샌들우드는 날카 로운 눈으로 그를 뚤어져라 보고 있는 검은 고양이의 목을 집어 들었다. "캬아악!"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위협을 하는 손바닥만한 고양 이를 노려보던 샌들우드가 지그시 그 보랏빛 눈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어쩌다 그러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서약을 어기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자칭 위대하신 존재여. 모쪼록...제 제자에게 다가가는 일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 가죽...참으로 탐스럽습니다. 우리 제자 목도리나 만들어주면 정말 좋겠는 데 말입니다." "키엑~꺄우웅~" 아무도 들을 수 없는 - 물론 귀를 쫑긋 세우고 귀를 기울이던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은 예외다- 나직한 목소리로 고양이를 위협(!)하던 샌들우드는 어느새 갸 르릉거리며 꼬리를 흔들어대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의 앞에 서 있던 흑마법사에게 던져주었다. "간수 잘 하라고. 괜히 민털고양이 만들지 말고. 자네 작품인가?" 인사는 하지 않았으되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확신에 찬 샌들우드의 행 동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마법사가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크리스틴을 보았다. "제자라고...?" "부럽지?" "......" "무언은 긍정이라지. 험험.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는 해야지. 여기는 멀쩡하게 백마법을 배우다 가출한..." "독립이다." 순간 썰렁한 바람이 동굴을 휩쓸고 지나가며 사람들의 마음을 횡하니 만들었다. '독립'이란 말을 듣는 순간 동료의식을 느끼는지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모으던 크리스틴은 그녀의 시야를 가리는 세바스티앙의 넓은 등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험험. 어찌 되었든...가...음...독립을 하고, 흑마법사가 된. 에..데...메..." "카르멘이다. 으드득." "핫핫핫. 100년도 더 되었으니 화내지 마라. 살 빠질라." 뼈만 남아 가죽만 씌워놓은 몸에 살이 빠져봤자 얼마나 빠지겠는가.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으면서도 능청을 떠는 샌들우드를 보며 이를 갈아대던 카르멘은 크리스틴의 속삭임에 고개를 획 돌렸다. "친하셨나봐요..." "누가 누구랑!" "재수 없는 소리!" 동시에 발끈 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던 두 마법사는 서로를 노려보다 고개를 팩 놀리고 가슴을 들썩였다. "친하셨군요..." "큭큭큭큭" "케케케케케" "임자 만났네..캬캬캬캬" 생김새는 흑과 백이나 하는 행동은 쏙 빼닮은 두 사람을 보며 크리스틴이 또 한 마디 던지자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던 긴장감이 깨어지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게진 얼굴로 천장을 노려보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 일행의 뒤 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고 그 행동까지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해골바가지!" "재수 없는 중늙은이!" 어느새 자리를 잡고 뒤에서 한 마디씩 하는 욕설에 키득거리던 사람들은 처음 크리스틴을 데리고 왔던 사람의 만류로 겨우 웃음을 그치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마법을 거둬들인 것인지 눈앞을 가리며 자욱이 피워 올랐던 안개들이 사라지고 밝은 햇살이 내려 비추며 울창한 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러나는 진실들... 1.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낸들 아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고 가장 뒤에 처져 있던 샌들우드는 카르멘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었다. 100년을 훌쩍 넘어서 이루어진 재회. 샌들우드가 10대 시절, 정령사 수업을 때려치우고 마법을 배울 때 그의 스승 인 타스테르가 소개해준 마법사가 카르멘의 스승이었다. 그때 만난 두 사람은 은근히 서로에게 경쟁의식을 가지고 마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도중에 수련을 빙자한 가출로 카르멘이 사라져버리자 그의 스승은 제자를 잃은 상심에 은거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간간히 들려오는 흑마법사 카르멘의 명성을 들었던 샌들우드는 은근히 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곧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건가?" "그렇지..." "연락이나..." "스승님이 모으셨던 재산을 몽땅 털어간 놈이 무슨 낯으로?" 카르멘의 자조어린 목소리에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는 그 당시 그가 가출을 하게 된 연유를 떠올리며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실험실 하나 날려먹어서 얻어 맞은 게 그렇게 억울했나?"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 "큭큭큭큭." "젠장! 생전처음 맞아본 거라고. 내가 얼마나 충격 받았을지 생각이나 해봤나? 자네는 안맞아 봐서 몰라. 난 그때 정말이지..." 벌써 150세는 훌쩍 넘은 노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흔들던 샌드우드가 킬킬 거리고 웃었다. "뭐 나중에 그 분이 우리 스승님과 함께 계셨으니 괜히 걱정하지 마라. 편안 하게 가셨어." "......" 말을 빙빙 돌려가며 과거사를 물으려했던 카르멘은 샌들우드가 선수를 치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를 쓰다듬어주었다. "다행이네..." "유언을 하셨지." "......." "괘씸한 놈! 그래 할 짓이 없어, 흑마법사냐!" "음..." "이왕 한 거 최고가 되거라!" 아주 오래전에 윤회의 사슬에 몸을 맡긴 고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장난스럽게 유언을 전해준 샌들우드는 고개를 푹 떨구는 카르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다행히 늦지 않아 네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 눈을 감으셨다. 다행이지?" "그렇군." 뼈만 남은 앙상한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며 동정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던 샌들우드는 문득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검은 고양이를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도대체 이건 뭐 하러 가지고 있는 건가?" 자칭 고귀하신 존재라 불러주고 경어까지 썼던 사람은 어디 간 것인지 고양이 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투덜거리는 샌들우드를 보며 키득거리며 웃어대던 카 르멘이 녹색 안광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음침한 로브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퍼런 얼굴을 보고 혀를 끌끌 차던 샌들우드는 카르멘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헐레벌떡 나타난 대신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저...저기..." 카르멘과 샌들우드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대신관이 문득 카르멘이 안고 있던 고양이를 가리켰다. "혹시 마족 아닙니까?" "........" "........" 그레고리의 질문에 고양이의 보라색 눈이 번쩍 빛났고, 샌들우드와 카르멘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나누었다. "왜?" "....그것이..." 분명 고양이가 목표는 아니었다. 빨리 이유를 말하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샌들우드의 시선을 피하며 이리 저리 눈을 굴리던 대신관이 급히 카르멘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기...들었습니다." "....?" "세실...음....세실의 몸이..크흠. 흑마법사들의 심처에 있다고..." "........." "사실인가?" 그레고리의 말에 침묵을 지키는 카르멘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샌들우드가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한참 동안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알고 있는 듯하니, 따라오게. 보여줄 것이 있어." 다시 횡하니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카르멘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샌 들우드가 비지땀을 흘리는 그레고리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알았나? 누구한테 들었지? 그 아이 어미도 그것만은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네?" 대신관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던 샌들우드가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그 아이가 어떻게 몸이 바뀐 건지 모르는 건가?" "모릅니다." 참으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슴없이 그렇다 대답을 하는 그레고리에게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지던 샌들우드는 혀를 끌끌차는 소리에 앞을 보았다. 어느새 동굴의 끝 에 닿아 작은 공간을 열어두고 서 있던 카르멘이 낸 소리였다. "들어가게." "아...싫어라. 음침한 건 싫어." "불 좀..." "안 들어갈래?" 이제까지 걸어왔던 동굴의 어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깜깜하게만 보이는 시커먼 공간 앞에서 밍기적거리던 두 사람은 카르멘의 안광이 피보다 붉게 달아 오르고서야 미적미적 걸어 들어갔다. "오오..." "흠...!" 단 한 걸음. 뭔가 물컹거리는 액체 속을 지나는 느낌이 사라지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넋이 빠진 두 사람은 카르멘의 모습이 달라진 것도, 검은 고양이가 사라진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들어가지. 이곳은 우리들이 수 백년 동안 연구해서 만든 공간이다." 신경 거슬리던 소리 대신에 맑고 매끄러운 음성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던 샌들 우드와 그레고리는 새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검은 눈을 가진 인자하게 생 긴 노인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사기잖아." "놀랍군요." 환상이 만들어낸 모습이라 하여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장난기가 다분한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배 아파하는 샌들우드와 감탄을 해주는 그레고리에게 고 개를 까딱이며 우아하게 인사를 해준 카르멘은 넓은 들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밑에 만들어진 커다란 호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것 좀 봐주게." 카르멘의 장난기가 담긴 말에 서둘러 걸음을 옮겨 호수 안을 바라보던 두 사람 은 물의 표면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아름다운 머메드라를 보고 탄성을 내지르다 말았다. "헉!" "아니!!!" 반은 인간의 모습이고 반은 비늘이 덮인 머메드라의 얼굴을 보게 된 샌들우드와 대신관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축늘어진 머메드라를 땅위로 올려놓았다. "클리어(Clear)!" 샌드우드의 노기를 띤 음성에 촉촉하게 젖어있던 머메드라의 몸이 깨끗하게 씻기고 몸의 물기가 말라갔다. 그리고 또 다시 두 사람을 경악에 빠트리는 일이 벌어졌으니... 바로 머메드라의 하반신을 감싸고 있던 비늘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인간의 다리가 생겨났다. 또한 삐죽 솟아나 있던 귀가 사람의 그것과 같이 동그스름 하게 줄어들며 귀의 뒷부분에 작은 상흔처럼 보이는 아가미만 남겨두고 사라 져버렸다. "이게 도대체...!" "어때 멋지지 않은가? 그것뿐만이 아니지. 밤에는 바트로도 탈바꿈할 수 있고, 원한다면 검은 안개로 몸을 숨길 수도 있지. 또한 재규어처럼 민첩성과 트롤 뺨치는 재생능력! 거기다..." "잠깐!!!" 눈을 빛내며 자신들이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발명품을 설명하던 카르멘은 그의 말을 툭 끊으며 불쑥 끼어든 샌들우드를 보며 볼을 부풀렸다. "뭔가?" "도대체 세실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거기 있지 않나." "어디?" "거기." "여기?" "그렇네." "혹시..설마...이거,,,는 아니겠지. 그렇지? 아닐거야. 아니야, 그렇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니라고 말해 달라 애원하는 샌들우드를 보며 생뚱맞은 표정을 짓던 카르멘이 바닥에 누워있는 그것을 가리키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게 아니면 뭐냔 말이야! 어때 마음에 들지 않아?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최고의 몸! 핫핫.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입 닥쳐!" 단박에 카르멘의 입을 막아버린 샌들우드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차갑게 식어 있으나 미약한 온기가 느껴지는 마메드라의 얼굴을 쓰다듬어보았다. 5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윤기나는 검은 생머리를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세실의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고 있던 샌들우드가 카르멘을 노려보았다. "사람의 몸으로 장난을 쳐?" 그의 말은 카르멘의 자존심을 부셔놓았다. "장난? 그게 장난으로 보이는가? 우리가 그 몸을 만들기 위해 2년을 투자했어! 알아? 어차피 주인도 없는 몸인데 실험을 하면 또 어때? 뭐가 장난이야!!"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을 욕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서로를 노려보며 씨근덕대던 샌들우드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세실의 몸 위에 로브를 벗어 덮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보았다. 생소했다. 5년 동안 크리스틴의 부드러운 머릿결에 익숙해진 그의 손은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는 머릿결을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이미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찌 할 것인가. 레니가 세실의 몸이 흑마법사들 에게 있다는 소리만 해줬어도 2년 전 흑마법사들의 존재를 알았을 때 어떻 게 해서든 해결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늦었고 차라리 잘 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샌들우드는 넋이 빠진 얼굴로 세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대신관을 보지 못했다. 고개를 흔들며 축 늘어져있던 샌들우드가 세실의 몸(?)을 안아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봐, 그걸 어디에 가지고 가려고?" "무슨 상관이냐?" "상관? 있지. 그건 여길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뭐라고?" "그건 여기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그 호수를 떠나서는 1나르도 견디지 못해." "도대체...!!!" "진정해, 진정하라고. 그래서 지금 연구 중..." "너 이 빌어먹을 놈!!!" 주위의 마나를 끌어드리며 억눌러놓았던 분노를 드러내는 샌들우드를 보며 비지땀을 흘리던 카르멘은 샌들우드의 품에 안겨있던 그것을 빼앗아 호수로 집어던졌다. 풍덩~! "이...!!!" 카르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를 갈며 호수로 달려가려던 샌들우드는 끈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세실의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유연하게 물살을 헤치며 까르르 웃는 것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이게..." "험험." 카르멘의 멋쩍은 헛기침 소리에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린 샌들우드는 그의 눈 가득 담겨있는 죄책감을 보고 인상을 썼다. 장난이라 하기에는 지나친 일이었다. 무엇인가...아주 나쁜 일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뭐지? 뭘 숨기는 거냐? 왜 저따위 인형으로 나를 속이려고 했지?" "인형이라니! 저건 엄연히 명칭이 있네. 키.메.라.라고 불러주게." "....으드득" 대답도 없이 이만 갈아대는 샌들우드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던 카르멘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긁적였다. 심란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카르멘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샌들 우드는 아직도 넋을 놓고 호수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키.메.라.를 보고 있는 대신관을 힐끗 거렸다.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진지한 태도로 질문을 던진 샌들우드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긁적 이는 카르멘을 보며 혀를 찼다. "이야기를 해. 어차피 알게 될 일 아닌가? 세실의 몸은 어디에 있는 건가? 혹시 잊어버렸나?" 샌들우드의 조용한 말에 고개를 흔든 카르멘은 고개를 들어 자신이 만들어놓 은 아름다운 공간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말이지..." "......" "없어." "...없다니?" "휴...없다니까." "뭐가?" "그...몸 말일쎄." "....세실의 몸?" "그렇다네." "......" 이번에는 샌들우드가 할 말을 잃었다. 잊어버린 것도 아니고 없다니? 분명히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면 저 키메라는 뭔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수백 가지 상념을 떨쳐버린 샌들우드가 카르멘의 어깨를 잡았다. "어쩌다가, 왜? 어떻게...?" 샌들우드의 질문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카르멘이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아이 어미가 마왕과 계약을 한 것은 알지?" "그렇네." "조건이 무엇인지도?" "그저 딸의 영혼만 백작영애의 몸에 넣어달라 했다더군. 그리고 백작영애의 영혼을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존재의 몸에 넣어달라고...했다더군. 그런데 왜?" "그것뿐이 아니네." "........?" "그 아이의 어미는 자기 딸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 백작영애에게 부여된 모든 특권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달 라고 했다네. 그리고...백작영애의 영혼에 저주를 걸어달라 했지." ".......!" 자신도 이미 저주를 걸었었기에 카르멘이 말하는 영혼의 저주가 무엇인지 알고 있던 샌들우드는 그 연약하고 착하게만 보이던 여인의 얼굴 뒤에 숨어있던 강인 한 어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 그 마왕이란 놈이...그 아이 영혼을 세실과 꼭 닮은 인형에다 집어넣은 거지. 제 딴에는 그것이 좋다 생각을 했었겠지." "......!" 순간 떠오르는 기억에 경악을 하던 샌들우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러나는 진실들... 2. "설마..."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세실을 본 따 만든 몸에 크리스틴의 영혼을 집어넣었지. 어미의 바람과는 달랐겠지만 일단 손이 잘리고, 혀가 잘리고, 다리가 잘려 병신이 되었지.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백작가 주위를 서성 거리기 시작했어. 거기다 지금 그 아이에게 독을 쓰기도 했었어. 기억이 있었기에 그리된 것이야. 그래서 세카다는 또 하나의 완벽한 인형을 만들고 그 아이의 기억을 지워버렸어." "끄으응..." "그러면서 다시 우리에게 찾아왔었다. 그 아이의 몸을 없애버리라고. 계약을 이행하는데 방해가 되니 없애라고 하더군." "그럼....!" "우리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지. 이미 어미의 허락을 받고 우리가 지켜주 기로 약조를 했었어. 그러니 그것을 깰 수는 없다고 했어." "......" "그런데, 얼마 후에 연구실에 어떤 저주받을 존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아 이의 몸을 태워버렸어." "흠..." "그때 아이들은 모두 크리스틴이라는 아이의 곁에 있었지. 아무도 모른다 안 심을 한 것이 잘못이었어. 우리는 연구를 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고, 뒤늦게 달려갔을 때는 이미..." '재만 남았겠군.' 그제야 세실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키메라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고양이 생각나지?" ".......!" "그래 그놈이 바로 그 저주받을 존재다. 최초의 약속을 잊고 인세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한 존재야." "역시..." 잡 털 하나 섞이지 않은 칠흑 같은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의 자수정보다 짙은 보라색눈을 떠올린 샌들우드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저주받을 존재. 또한 일부는 자칭 위대한 존재라 불리는 종족들. 이미 지상에서는 사라졌다 알려져 있으나, 아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신의 조각에서 파생된 존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양면성을 가지되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두 종족. 절대적인 선(善)을 표방하는 천족과 그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어두운 면만을 받아들여 탄생되었다 전해지는 종족. 세상에 수많은 창조물들이 있으나, 보라색 눈을 가진 종족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마족.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샌들우드는 한 눈에 검은 고양이가 마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또한 카메론을 알아보았기에 그 위대한 존재가 힘을 잃어버리고 미개한 창조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때 잡은 건가?" "자네도 알거야. 세카다의 오른쪽 날개." "바그다 카마일...." "그래." 정식 명칭은 바그라시드 카르마일리안, 마계 서열 3위의 마족이었다. 실상 세카다에게 반역을 한 서열 2위 바르키세우스 샤르키제스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말도 있었으나, 어찌되었든 서열상 3위의 바그다는 세카다 의 오른쪽 날개, 바르키세우스는 그의 왼쪽 날개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하급 마족도 아닌 서열 3위라는 바그다가 세실의 몸을 없애러 왔다는 것 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건만 아무리 고위급이라고는 하나, 하찮은 인간에게 잡혀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역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능력이 좋군." "뭐...운이 좋았지." 자신이 마법을 걸긴 했지만 그것이 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카르멘은 은근슬쩍 샌들우드의 칭찬을 넘겨버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저걸 만들어내었나?" "그래." "왜? 이유가 뭔가? 어차피 그 아이는 내가, 아니 나와 저 놈만 입을 닫으면 모르고 지나갈 거야. 그런데 왜 굳이 그 아이의 모습을 본딴 키메라를 만든거지?" 샌들우드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숨을 내쉬던 카르멘이 저 멀리 떨어진 곳에 멍하니 앉아있는 신관을 보고 혀를 찼다. "저 신관이 어떻게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 "그는 우리가 그 아이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자네가 말했을 리 없고 그 아이의 어미가 자네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야기를 했을거라 생각되지 않아. 어떻게 된 일일까?" 그제야 이상한 점을 알아챈 샌들우드는 그레고리를 부르려다 입을 닫았다. 옆에 앉아 있는 카르멘이 대답을 해줄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을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아마도 내가 바그다를 잡은 것과 관련이 있을거라 생각해." ".......?" "처음 그 아이의 몸을 보고 놀랐다. 그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신성력." "아..!" "그 아이의 몸은 인간의 그것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신성했다. 신성체... 그 자체였어. 아니 완전체라고 해야하나...그 아이의 몸에는 탁기가 없었다. 또한 어떠한 마나도 담을 수 있는 상태더군." "그런...?" "마법을 하지? 정령도 부릴 줄 안다고 들었어. 신성력도 쓰겠지. 과연 우연일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저주받을 존재와 계약을 하려했던 어미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의 아비 역시...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그런 신체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제껏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을 사정없이 지적하며 따지고 드는 카르멘을 보며 이놈은 역시 천성이 흑마법사라 생각을 하던 샌들우드는 스스로의 어 리석음에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걸로 좋다고. 능력이야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대한 답은 우리로서는 알아낼 수가 없어. 단지...이유가 있을거라 추측할 뿐이지. 그리고 아이들이 크리스틴을 살펴보았다. 결과는...그 아 이가 가진 본연의 능력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거야. 너무나 커. 헌데 영혼을 담는 그릇이 받쳐주질 못하는 거지. 그래서 스스로, 본능적 으로 능력을 자제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생각해본적 없지?" "....그 아이...키가 자라지 않는다." "역시..." "능력에는 변화가 없어. 시동어도 없이 의지만으로 마법을 실현한다. 그 아이 에게는 써클이란 개념조차 불필요하더군. 원하기만 하면 대신관보다 뛰어난 신성력을 일으킨다. 이미...4대 정령왕의 수호를 받고 있지." "그게 문제라는 거야.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 그 아이의 원래 몸을 살펴보며 이건 그러한 능력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그릇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심처에 숨겨두었다. 그런데..." "으드득!" 그릇이 깨어진다는 것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죽음. 영혼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마왕 세카다는 세실의 능력을 몰랐 기에 그러한 우를 저질렀다. 만약 알았다면 세실의 겉모습만 바꾸어주었을 것 이다. 굳이 영혼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 그저 단순한 생각으로, 크리스틴 폰 배너 영애의 기억을 심어주기 위해 영혼을 뒤바꿔버렸다. 어긋난 운명. 뒤틀린 선택. 그제야 레니의 선택이, 아니 세카다의 행동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 인 지하게된 샌들우드는 호수 안에서 찰박거리며 그레고리에게 꼬리를 치는 키메 라를 보았다. "그래서...저것을 만들어낸 것인가?" "벌써 수 백 개는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런 몸은 만들 수가 없었어. 완전체라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인간들로서는 불가능해. 그래서 최대한 큰 그릇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계속 실패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확답할 수가 없어." "......."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세카다가 과연 영혼을 바꾸어줄지 그것이 문제가 된다." "......?" "새롭게 만들어진 인형은 지금 다른 나라에 있다." ".....!" "어떻게 알았냐고는 묻지 말게. 그냥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어. 다른 이름으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다른 외모로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이 허깨비에 불과하다 는 것은 모르고 살고 있다.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지." 크리스틴에게 숨겨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겨버렸다. 갈수록 무거워지는 가슴을 추스르며 '차라리 잘 되었다' 수십 번을 되내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기억을 되찾은 그 존재가 달려와 겨우 일어선 아이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버릴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그의 걱정을 알아챘는지 카르멘은 신중한 얼굴로 말을 골랐다. "세카다의 마법은 풀리지 않는다. 그것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그는 자신 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저지르는 존재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신체를 만들어낸다면 당연히 원래대로 해주어야 하는 것 이 아닌가?" "그게 아니야. 그는 자신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을 거다. 차라리 또 하나의 인형 을 만들어내겠지. 또한 우리가 만드는 것은 세실의 분신이다. 그 아이의 어미가 원했던 계약 중 하나는 크리스틴 폰 배너로 살아가는 것. 그러니 그가 양보를 할지 알 수가 없어." "............." "굳이 마왕의 존재에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됩니다." 카르멘의 대답에 침음성을 흘리던 샌들우드는 난데없이 대화에 끼어드는 그레고리 의 지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눈물이 가득 고인 노안으로 키메라를 지켜보던 그레고리가 힘없는 목소리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신의 날개가 해줄 겁니다. 몸만...준비된다면." ".......!" 충격과 경악에 휩싸인 두 마법사를 보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그레고리는 시꺼멓게 죽은 얼굴로 웅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들이 저에게 다시 몸을 찾아주라 종용했었습니다. 제가...거부를 했습니다. 제가...그 아이가 살아남을 길을 막아버린 겁니다." 나직한 말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비애와 후회,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눈치 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처음...그 아이의 존재를 알았을 때 신의 계시라 하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허나 진정 제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그 아이를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트 리기 위해 강요하는 것이라 혼자 결정내리고 그들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제가...그 아이의 목숨을 없애버렸습니다." 말을 끝내며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레고리는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릇이 깨어진단다. 영혼을 담기에는 바뀐 그릇이 너무나 평범하기에 견디지를 못한단다. 어찌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모르고 흑마법사들과의 재회를 즐기고 있을 크리스틴을 떠올리며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레고리는 그의 어깨를 짚는 차가운 손길에도 쉬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아주 오래전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던 그 목소리를 떠올린 그레고리는 괜찮다 고, 분명 괜찮을 것이라고, 분명 어떤 방법이 생길 것이라 그렇게 자조를 해보아 도 도저히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안고 있는 사람처럼, 소리죽여 울고 있는 신관의 등을 두드려주던 샌들우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탓이 아니야. 나라도 그리 했을 거야. 평민의 아이가 살아간다는 건 쉽지가 않아. 자네가 후회할 필요는 없네." "하지만..." "방법이야 찾으면 되는 거야. 뭘 걱정하는가? 어차피 이리 된 거 처음부터 시작 하면 될 일이야." 샌들우드의 단호한 결심이 서린 어조에 겨우 고개를 든 그레고리는 나이답지 않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옷자락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방법이 있냐고 카르멘을 보았지만 그의 얼굴 역시 밝지 않았다. 자신만만한 것을 샌들우드 뿐이었다. "시간이 관건이다. 과연 우리가 적당한 몸을 만들때까지.." "잠깐 만들어야만 하는 건가? 꼭 그런 방법밖에 없는 건가? 찾아볼수도..." "불가능해. 그 아이의 능력을 무난히 받아낼 수 있는 그릇은 적어도 지금 이 대륙에는 없다." "그러면?" 샌들우드의 재촉에 어깨를 으쓱하던 카르멘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모르지 어딘가에 신의 현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육체가 있다면, 아니면 드래곤이나...가능할까..." "말 장난 하지 마라. 그러면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잖나!" 짜증스럽게 소리를 버럭 지른 샌들우드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레고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없다는 거야." "하지만..." 신의 현신이 일어났던 것은 수천년 전의 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있었으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잘 찾아보면 있을거라 생각하던 그레고리는 샌들우드가 혀를 차는 것을 보고서야 생각을 거두었다. "이봐, 만에 하나 있다 한들. 누가 아 그러십니까? 하고 냉큼 몸을 바꿔줄 것 같나? 그러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야. 게다가 인간이 신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건 단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릇은 금방 깨질 수도 있을 만큼 연약해진다. 모르지는 않겠지? 완전하지 않아. 안 돼." 설사 지금 당장 그런 사람을 찾아내고 그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유희에 불과하게 된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샌들우드의 지적에 겨우 체념하게 된 그레고리는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는 카르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꼭 몸을 바꾸어야 하냐고 물었지?" "아니, 나는 만들어야...." "그거야!" "뭐가?" "둔한 놈." 혀를 끌끌 차며 샌들우드를 째려봐준 카르멘은 무엇이 그리도 흐뭇한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좋아하며 북치고 장구치는 카르멘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던 샌들우드가 문득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시간도 없고, 영혼을 옮기는 것도 문제야. 우리가 계속 연구를 했던 것은 그 아이에게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여기 와있으니..." "안돼!" "그럼 방법이 있나?" "연구해, 만들자고. 만들면 된다." "2년 동안 줄곧 실패했다는 걸 잊었나?" "저만큼 해냈으면 성공했다 말 할 수 있지 않나?" 호수 밑으로 내려가 버린 것인지 더 이상 수면위로 보이지 않는 키메라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을 하는 샌들우드를 보며 한숨을 내쉰 카르멘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문제가 많아. 더 이상 자라게 하지도 못했다." "그 아이의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할 수는 없어." "실험이 아니라 깨어지지 않게 강하게 만드는..." "엎어 치나 매치나 매 한가지다." "고집은..." "연구실은?" "왜?" "실험하러 가야지." "지금 말인가?" 카르멘의 질문에 몸을 획 돌려 출구로 걸어가는 샌들우드의 태도가 모든 것을 대답해주고 있었다. 고집스럽게만 보이는 등이 왠지 아파 보인다 생각을 하던 두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법으로 만들어놓은 공간을 찢어버릴 듯 마나를 일으키는 샌들우드 때문이었다. 별 다른 말도, 별 다른 감정표현도 하지 않았으나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휘몰 아치는 고요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십분 그의 감정에 공감한 두 사람 역시 굳은 얼굴로 그의 위를 따랐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러나는 진실들... 3. "냐아오옹~~~" 바그마는 진정 재수가 없는 고양이었다. 억지로 태연함을 가장하며 공간을 빠져나온 샌드우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이 그였으니. "으드득!" 아무런 말도 없이 이만 한 번 갈아준 샌들우드는 바닥에서 기지개를 켜는 고양 이의 목덜미를 잡아 번쩍 올렸다. "빌어먹을, 저주받을 놈들!" "꺄우웅,,,,,켁켁"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고양이를 갈아마셔버릴 듯 노려보던 샌들우드가 검은 고양이의 목을 틀어쥐고 카르멘을 돌아보았다. "실험실은?" "아......" 숨겨두었던 분노를 드러내며 살기를 풀풀 날리는 샌드우드를 피해 옆으로 걸음 을 옮긴 카르멘은 연구실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얌전히 따라가던 그레고리는 방해되니 나가보라는 샌들우드의 말에 동굴 입구로 향했다. "구이가 좋을까, 삶을까? 어느 것이 맛있을 것 같나?" 세계 최초로 마족을 잡아먹은 인간이 나올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분위기를 파악한 바그마는 미친 듯이 다리를 휘저으며 애처로운 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적당히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샌들우드의 억센 손아귀 속에서 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스승님?" "이런..." 뒤에서 들리는 경쾌한 목소리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로브속으로 감춘 샌들 우드는 팔짱을 척 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아...저기 할아버지들하고 여기 저기 구경을 좀 했으면 하는데요, 같이 가실래요?" "아니다. 난 이놈하고 이야기 할 것이 있어서. 그냥 다녀오렴."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샌들우드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던 크리스틴은 그의 옆에 서있는 카르멘을 보고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들에게 대강 들어 알게 되었지만, 카르멘이라는 마법사가 흑마법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동굴 로 거처를 정하고 떠난 적이 없다 하였으니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아주 오래되었 다 생각했다. 그리고 회포를 풀려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얼른 동굴 밖으로 뛰어나가던 크리스틴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구원을 요청하는 고양이의 가느다란 울음을 무시했다. 「그 고양이는 선배님이 특별히 제작한 키메라야. 병균이 득실거리니 가까이 가지 마라. 그게 예뻐 보여도 알고 보면 성질이 더러워서 선배님 말고는 다룰 주 아는 사람이 없어. 알겠지?」 조금 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를 둘러싼 흑마법사들은 절대로 고양이의 근처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거의 세뇌를 시켰다. 그들의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나 분명 이유가 있으니 그리 주의를 준다 받아들인 크리스틴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 을 했다. 그래서 뒤통수를 자꾸만 잡아당기는 구슬픈 울음을 억지로 못 들은척 하며 동굴을 벗어난 크리스틴은 저 멀리서 무리를 지어있는 흑마법사들과 대신관, 앤드류와 세 바스티앙에게 달려갔다. "이곳이다." "불 피워라." "...그냥 마법으로 하면 안되나?" "귀찮아." '그러면 불 피우는 나는 안 귀찮으냐!'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카르멘은 어느새 털이 홀랑 깎기고 발그스름한 살을 드러내놓고 가냘프게 울고 있는 고양이를 일견 하고는 서둘러 마른 장작에 불을 붙였다. "펑!" 얼마나 쓰지 않았으면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오른 찰나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시꺼먼 재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녔다. 아궁이에 불 한 번 붙이려다 재투성이가 되어 버린 두 마법사는 동시에 시선을 돌려 보라색 눈을 노려보았다. "저주받을 놈!" "재수 없는 놈!" 본연의 모습도 잊은 채 고양이의 몸속에 들어가 있던 바그마는 뜬금없이 욕을 하 는 주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가르랑 목을 울리다 어느새 기다란 꼬챙이를 들고 입안으로 들이미는 샌드우드를 보며 미친 듯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말은 하지 않았으되, 세실의 몸을 태워버렸다는 바그마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없다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녕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성을 마비시켜며 타오르던 불꽃은 눈앞에 보이는 고양이에게 쏟아졌고, 샌드우드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꿰뚫어버릴 듯 쇠꼬챙이를 들고 바그마의 아름다운 보랏빛 눈을 직시했다. "...세카다를...부를 수 있나?" "........" "할 수 있지?" 생각이 바뀐 것일까, 갑자기 마왕을 들먹이는 샌들우드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카르멘은 어깨를 들썩였다. "알 수 없는 일이야. 예전에는 마왕을 부르려고 시도 한 것이 아니었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우연인가?" "글쎄..." "일단 부르자고. 불러서 뭔가..." "연구는?" "......" 사실 샌들우드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세실의 몸을 흉내낸 키메라를 만들어 아이의 영혼을 심어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바그마를 보는 순간 분노로 이성을 잃었으나, 그의 보랏빛 눈을 보고 있자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계약이었지?" "음..." "마왕이 아니라, 마족이라도 좋아. 어느 놈이든 불러봐." "거기 있잖아. 그게 마계에서는 그래도..." 샌들우드의 손에 들려 있는 바그마를 가리키던 카르멘은 이를 갈며 노려보는 샌들우드의 거센 반발에 입을 닫았다. 그리고 삐거덕거리는 손을 들어올려 항복을 표시했다. "알았네. 거참...일단 기다려봐. 혼자서는 못해. 다 돌아오면 진을 만들고...아!" "....?" "그게 말이야, 이 숲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법진이 있더군. 한 1년 되었나? 그..." "되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고, 일단 크리스가 돌아오면 일을 시작하도록 하지. 난 가서 책이나 좀 뒤적여봐야겠어. 서재가 어디있지?" 카르멘은 지난 1년간 매달렸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구동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마법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다 샌들우드에게 외면을 당하자 화가 나는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손을 휘저었다. "나가서 오른 쪽 첫 번째 방이다. 암튼 성질머리 하고는...그 놈은 어떻게 할건데?"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어봐야지. 거래를 할 수 있을지 누가 아나? 자네가 좀 맡고 있어." 벌건 살을 드러내놓고 있는 작은 고양이를 카르멘에게 휙 집어던진 샌들우드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살아생전 마족을 보게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오래전 동문수학하던 친구가 흑마법사가 되었다는 것을, 또한 크리스틴이 죽음의 숲으로 여행지를 잡은 것을 감사했다. '다행이야...' 모르고 있었다면 절망속에서 속절없이 아이를 보냈어야 했을 것이다. 문을 찾았으니 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어떤 열쇠가 될지는 그로서도 알수가 없는 일이었으나, 이렇게 든든한 동지가 생겼으니 뭔가 해결책이 있을터였다. '영혼이라도 걸면 되지 않는가...'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천족이나 마족의 사고방식은 그 근원부터 달랐다. 편파적이고 시야가 좁은 인간들과는 달리 이들 두 종족은 창조주의 조각으로 모든 것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앞날을 예견한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만나보지 못했으니-바그마는 완전히 무시하는 샌들우드였다.-알 길이 없었으나 그래도 과거 그들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대 의 고대 기록들을 보았던 샌들우드는 분명 길이 있을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 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과연 그레고리가 말 한 것처럼 크리스틴의 몸을 다시 바꾸어야 한다던 천족의 명령이 그저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어긋난 운명을 걸어가게 될 세실의 운명 을 돌려놓고자 그랬던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완전체...' 신이 창조한 모든 생명체들 중에 '완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천족과 마족 역시 완전하다 부를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한 쪽으로만 치우친 불완전한 존재들이었다. 천족은 순수만을 본다 하였고, 마족은 그 이면에 숨겨진 더러움만 본다 하였다.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낮과 밤이 묘한 균형을 이루며 하루를 완전하게 만들 듯이 천족과 마족 역시 선과 악이라는 균형을 이루며 평형을 유지했다. 그런데 세실의 운명에 마족이 끼어들고, 천족이 끼어들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본시 고대기록들이 전하기를 이들 천족과 마족, 지고지순한 이카루스의 날개들 은 절대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다 하였다. 천족의 경우에는 현신을 하거나, 기도에 응하여 축복을 내리거나, 이카루스의 결정에 따라 천벌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카루스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 었다. 마족들의 경우 역시 계약의 형식으로 세상사에 간섭은 할 수 있으되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본연의 의지대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였다. '도대체 무엇인가...' 신의 조각이자, 가장 위대하다 존경받고 두려워하면서도 경배하는 존재들이 그러할진데 카르멘은 세실의 몸을 '완전하다'평을 내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리고 레니의 바램으로 마족도 아닌 마왕이 나타나고, 뒤를 이어 천족이 나타난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카르멘이 알려준 서재로 들어간 샌들우드는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장서들 중에서 천족과 마족, 신에 대해 서술해놓은 책들을 모두 뽑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슴프레한 방안을 밝힐 라이트를 불러내고 의자에 앉아 손을 뻗었다. <마족과 계약하는 법> 저자도 분명하지 않은 책을 제일 먼저 들어올린 샌들우드는 언젠가 몸이 뒤바뀐 연유와 되돌릴 방법을 찾느라 서적을 뒤적이던 크리스틴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를 짓다가 이내 얼굴을 굳히고 깨알같이 적혀있는 고대어에 집중했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 편, 흑마법사들과 한 명의 기사와 기사학교를 졸업한 상인의 호위를 받으며 죽음의 숲을 탐험하던 크리스틴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바닥 위로 굵은 뿌리를 드러내고 있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없어요?" "그렇다니까." "힝...정말요?" "아, 그렇다니까! 없어! 없다고.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건 없는거야." "에에에...한스 할아버지는 있다고..." "다 말라버렸다." "......." "정말이다. 아칼레우스는 없어. 흔적은 남아있지만, 거기엔 늪이 만들어졌다. 없어." "에잉..." 흑바법사의 진지한 대답에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크리스틴은 그녀의 양 옆에 앉아있는 앤드류와 세바스티앙을 힐끔거렸다. 근사한 롱소드를 허리춤에 달고 앉아있는 두 남자의 늘씬한 체구를 홀린 듯 바라 보던 크리스틴은 아카데미에서 유노에게 체술을 배우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도...할 수 있을까?' 몸을 움직인다는 것. 바람에 몸을 맡기고, 상대가 내지르는 힘의 흐름에 순응하며 몸을 움직이던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칼이 부러워보였다. "저기...아저씨?" "응?" 양 쪽에 앉아있으니 한쪽을 보기도 힘들고 무작정 바닥을 쳐다보며 입을 연 크리 스틴은 양쪽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대답에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발로 흙을 톡톡 차던 크리스틴은 양손을 마주대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들의 부름 에 답했다. "저기..저...음....검을...배우고 싶어요." "......!" "저..체술을 조금 배웠었는데, 그런 것도 괜찮고 나중에, 음..제가 자격이 되면 그때 검을 가르쳐주실 수 없나요?" 누구를 향한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에게 던진 대답일 수도... 어느 누구라도 그러마 하는 사람에게 매달릴 준비를 하고 있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머리를 부벼주는 커다란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냥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는 앤드류와 손을 들어올리고 있는 세바스티앙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잡는데...자격은 없다. 누구든 원한다면 배울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을 계속 하고 하지 않고는 스스로가 결정을 해야한다. 정말 바라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말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확답을 요구하는 세바스티 앙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틴은 앤드류를 돌아보았다. 빙긋거리며 그녀를 보고 있던 앤드류는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고개를 흔들었다. "정식으로 검을 배웠던 것이 오래 되었다. 기사님이 가르쳐주신다는데 왜 쳐다보는 것이냐?" "에..." 숲에 들어와서 계속 이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볼을 붉히며 몸을 베베 꼬는 이상한 습관이 들어버린 아이를 보며 혀를 차던 앤드류는 세바스티앙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호신술 정도면 가르쳐 줄 수 있다. 그 이상은 능력이 모자란다." "에헤헤~" 기분이 좋은 듯 두 손을 양 볼을 감싸고 배시시 웃던 크리스틴은 뚱하니 그들을 지켜보는 흑마법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뭔가 기둥뿌리를 뽑으려고 작정을 한 사람처럼 보였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흑마법사들을 쭉 훑고 지나간 후, 식은땀을 흘리며 비칠거리 던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며 크리스틴을 재촉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만 가자. 그...기다리실테니." 선배와 인연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당체 뭐라 불러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흑마법 사들은 샌들우드의 이름을 슬쩍 빼먹으며 앉아있던 세 사람의 발길을 재촉했다. 스승이 기다린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냉큼 일어나 흑마법사들의 뒤를 따라 걸어가던 크리스틴이 갑자기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그들의 무리 속에 쏙 끼어들어간 크리스틴은 처음 그들을 안내해주었던 마법사에게 다가가 로브를 잡아당겼다. ".....?" "저기요...할아버지, 텔레포트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워프는요?" 이론적으로는 거의 샌들우드의 지식과 맞먹는 마법 지식을 가진 크리스틴이 가장 난해하다 생각하는 것이 바로 공간 이동이었다. 수식의 개념은 알지만 적용 방법을 몰라 일반적인 방식으로 마법을 실현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자기 의지로 마법을 실현하는 크리스틴은 이번 기회에 확실히 궁금증 을 풀기로 결심했다. 매번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샌들우드를 부르는 것도 그랬지만,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샌들우드는 절대로 공간이동에 대해서는 그녀의 호기심을 풀어주지 않았기에 흑마법사들의 재등장은 크리스틴에게 있어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며 호기심을 드러내는 작은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흑마법사는 과연 이 소녀가 원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크리스틴의 비밀은 흑마법사들이 모두 알고 있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녀를 위한 새로운 신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2년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어느새 주위를 감싸고 둥근 원을 그리고 있던 흑마법사들 은 앤드류와 세바스티앙의 접근을 막으며 크리스틴이 로브를 잡고 있는 흑마법사 를 주시했다.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그들의 선택권도 달라질 것임을 직감한 이들은 과연 가장 연장자의 대답이 어떤 것이 될지 귀를 쫑긋 세우고 침묵을 지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러나는 진실들... 4. "공간이동은 말이다..." "....!" 길게만 느껴지던 망설임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입을 연 흑마법사는 말을 하다 말고 그들의 뒤에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두 사내를 보았다. "자네들은 먼저 돌아가 있게나."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앤드류와 세바스티앙은 한 쪽에서 스펠 북을 꺼내들고 주문을 외우는 흑마법사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워*프" 환한 빛에 감싸여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편안한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던 흑마법사가 손을 휘저었다. "마나를 느껴보았느냐?" "웅...아마도..." 어떤 이미지를 그리며 주문을 외울 때 그녀의 주위에 맴돌던 낯선 기운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는 흑마법사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간이동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다...음...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공간을 왜곡시켜 순식간에 몸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가령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동굴 사이의 거리를 두개의 마주보는 점으로 인식하는 거다. 지금 내가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면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진다. 하지만 내 보폭만큼 밖에 이동하지 못한거지.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장소를 여기가 아닌 내가 원하는 장소로 만들어버리면?" "아...!" "지금 서 있는 곳과 내가 원하는 곳의 좌표를 선상에 두고 그것을 마주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공간이동이다. 시작점과 끝점, 그것을 좌표라 부른다." 일반적인 개념이라고는 하나, 그의 설명은 조금 다른 곳이 있었다. 개념의 원리를 설명해 준 것. 크리스틴이 배웠던 공간이동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원리. 그것은 정말 그녀에게 필요했던 산 지식이었고, 크리스틴의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짓게 만든 요인이었다. "이해가 되었느냐?" "네! 그런데..음...좌표...음..." 흑마법사의 질문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크리스틴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다. 수식이 없이 마법을 실현한 그녀로서는 좌표라는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떠한 틀에 맞추어 마법을 실현하는 것은 써클의 개념조차 적용되지 않는 크리스틴 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잠시 이것저것 끼워맞추며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스틴은 천천히 눈을 감고 샌들우드 가 있을 동굴을 떠올렸다.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동굴 속의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말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스승님이 계시는 곳으로...가고 싶어...' 좌표의 개념은 필요했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공간이동을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크리스틴이 원하는 것은 샌들우드가 있는 곳이었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마나는 그녀의 부름에 응답을 하고야 말았다. '안녕~' '안녕, 안녕~' '이제야 들리는구나, 오래 기다렸는데~' '까르르르~' 온몸을 포근히 감싸주며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주는 미지의 존재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크리스틴은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느낌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함께였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 하며 지켜주었다. 안아주었다. '...마...나?' '까르르르~맞아!' '둔하긴!' '너무 늦어, 너무 늦어!' '반가워!' 귀를 통해 머리에 전달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스며드는 의미들. 어떻게 웃음이 전달되는지, 어떻게 목소리가 되어 가슴을 진동시키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단지 그저 느낄 뿐이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야 들 리는 음성들. 그 뜻이 너무나 명확하고, 너무나 희미하기에 그것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어디에서 들리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없었다. 너무나 반갑게만 느껴지는 존재들. 마치 잃어버린 피붙이를 만난 듯 아련히 전해오는 그리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끼며 그녀를 안아주는 마나를 향해 손을 내밀던 크리스틴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고 싶어, 데리고...가 줄래?' '당연하지! 까르르르르' '조금만 기다려!' '꺄아아~ 드디어!' 무엇이 그리도 좋은 것인지 크리스틴의 부탁에 가슴속까지 시원스럽게 해주는 해맑은 웃음소리를 전해주던 존재들이 크리스틴의 몸을 안아들었다. 동시에 몸 안 가득 채워지는 따스한 기운을 음미하던 크리스틴은 자신의 몸이 마치 미세한 입자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활짝 미소 를 지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소녀에게 숲의 기운들이 몰려들더니 순식간에 크리 스틴을 감추어버린 놀라운 기현상에 입을 쩍 벌리고 있던 흑마법사가 서둘러 주문을 영창 했다. 좌표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간이동을 한 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도전이다. 왜곡된 차원사이에 끼여 말라죽을 수도 있으며, 어딘지도 모를 엉뚱한 장소로 떨어질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정말 엄청난 행운이 있어야 하는 일이며, 일반적으로는 일그 러진 공간사이를 방황하며 여생을 마쳐야만 했다. 왜곡된 공간사이에 갖혀 있 다면 신이 아닌 다음에야 절대로 찾을 수가 없기에 제발 어딘가로 이동해 있기 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주문을 외운 흑마법사는 커다란 목소리로 시동어를 외쳤다. ".....기운을 담은 사르도닉스여 지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나라. 디텍트 타겟(Detect the target)" 흑마법사들이 크리스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탐지하며 허둥대고 있던 그 순간, 마족과 천족에 관한 고대기록을 읽고 있던 노인은 조그만 인영이 등 뒤에 매달 리자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헉!" "스승님!" "너...어떻게...?" 마나의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스스로의 능력에 회의를 가질 찰라 샌들우드는 보았다. 크리스틴의 온몸을 감싸며 휘몰아치는 거대한 기운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정설이건만 가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아이의 몸을 안고 있는 마나의 결정체를! "너....!"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 마나를 휘감고 다닌 다는 것은 전설 속의 드래곤이나 그러할까, 살아있는 생명체 에게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신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들은 고유의 마나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담고 있는 것이었다. 형태가 있는 것이기에 마법사들은 모든 창조물을 '그릇'이라 명명했다.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 그렇기에 마나를 담을 수는 있지만 마나를 소유하고 그 자체가 마나가 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거대한 기운을 이기지 못해 그릇이 깨어져버 릴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 크리스틴은 지금 마.나.가 되어있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대기 중에 모여 있는 마나와 동화되어 있는 상태. 그렇기에 거슬림이 없었고, 고위급 마법사인 샌들우드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샌들우드는 경악하기에 앞서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다. '사라진다! 이대로는...사라져버린다!' 크리스틴의 이마에 찍혀있던 신의 인장이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신관 그레고리가 이카루스의 사제가 아니면 결코 볼 수 없다 했던 신의 인장. 그것이 샌들우드의 눈에 보일 정도로 빛을 발하며 크리스틴을 감싸고 있는 마나와 어우러져 금빛 광채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지 않느냐!" 칭찬을 받을 거라 기대하고 있던 크리스틴은 벌겋게 핏발선 눈으로 호통을 치는 샌들우드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스...승님?" 소녀의 슬픔이 전달되어서 일까, 그녀를 맴돌던 빛이 더욱 빛을 발하며 아이의 몸을 감추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안된다! 안된다!" 점점 투명해지는 크리스틴의 팔을 잡으려 손을 휘두르던 샌들우드는 형태는 있으 되 만져지지 않는 소녀의 몸을 보며 울부짖었다. "내 아이를! 내 아이를 내놓아라! 안된다! 세실! 안된다! 그만 두거라, 당장 그만둬! 어딜 가려는 것이냐! 이 늙은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점점 희미해지던 크리스틴의 몸이 일순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세실'이란 말을 들은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샌들우드의 눈에 고인 눈물이 볼을 따라 주르르 흘렀다.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이 늙은이를 두고...어딜 가려고...그러는 것이냐... 안...된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느껴지지 않는 제자를 붙잡으려 애쓰던 샌들우드는 자신 의 얼굴을 감싸 안는 포근한 기운에 두 팔을 뻗었다. 하지만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그가 항상 느끼고 있던 자연의 기운. 그것뿐이었다. "아가야, 넌 사람이다. 넌 나의 제자다. 레니의 딸이다. 엘의 딸이고, 데니스 의 딸이다. 기운을 버려라, 마나의 손을 놓아라. 넌 사람이다. 세실...." 또 한 번의 부름으로 샌들우드의 손에 미약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전달되는 심장의 달음박질 소리. 콩...... 콩.... 콩... 콩.. 콩 콩 아직 어린 소녀이기에 조금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 박동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샌들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눈부신 빛을 발하며 당장에라도 아이를 데려가려던 신의 인장이 사라 지고 없었다. 크리스틴의 온몸을 감싸 안고 사라지려 했던 마나도 더 이상 몰려들지 않았다. 인간이 되었다. 그릇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 삐거덕거릴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의 몸은 마나의 배려 덕분인지 별다른 이상 없이 온전한 그릇으로 되돌아왔다. 또렷하게 보이는 아이의 푸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가 지친 얼굴로 손을 들어올려 크리스틴의 약간 상기된 볼을 쓸어내렸다. "어디로 가려고 했느냐, 이 늙은이의 호통소리가 그토록 듣기 싫었느냐?" 수십 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꺼칠꺼칠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는 샌들우드의 손에 볼을 비벼대던 크리 스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아이들이...저와 같이 가자고 했어요. 제가 그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이 저라고...같은 존재라고...절...태어나게 해주신 분께 가야한다고..." "그래서 이 늙은이를 버리고, 널 낳아준 어미를 버리고, 널 키워준 부모를 버리고 가려고 했느냐?" 샌들우드의 말에 죄책감어린 표정을 짓던 크리스틴이 작게 도리질을 쳤다. "놀라서...스승님께서 화를 내시니까...놀라서...숨고...싶다고...도망가고 싶다고...생각했어요. 그랬더니 그 아이들이..도와준다고...."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샌들우드의 노안을 바라보던 크리스틴이 그의 목에 얼굴 을 묻었다. "흑! 죄송해요, 스승님! 잘못했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를 꼭 안아주며 다독이던 샌들우드는 안 도의 한숨을 내쉬며, 욕심 많은 신을 욕했다. '그렇게 데리고 가고 싶었습니까? 신이시여...어찌 이 작은 아이의 어깨에 감 당하지 못할 무게를 주시어 제 발로 신께 가려 만드십니까. 참으로 야속하십니다. 차라리...만나게 하지나 마시지요. 못 보냅니다. 못 보내지요. 제 목숨이 다 하는 그 순간까지 이 아이를 잡고 있으렵니다. 절대로 보내지 않습니다. 이 아이가 지치면 제가 지켜 줄 것이고, 이 아이가 넘어지면 제가 일으켜 세우렵니다. 이 아이는...저의 목숨이 되었습니다.' 제자의 작고 가벼운 몸을 소중하게 안아들고 있던 샌들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크리스틴의 갸름한 턱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어찌된 일이냐?" 차분한 목소리에 덩달아 안정이 된 것인지 어느새 눈물을 그친 크리스틴은 샌들 우드의 질문에 그의 손 위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떼루룩 굴렸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었는지, 인간이 아닌 마나와 동화되어 자연 으로 돌아갈 뻔한 위기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음...흑마법사 할아버지가 공간이동에 대해 가르쳐 주셨어요. 스승님께 오고 싶었는데...좌표를 몰랐어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냥...그냥 스승님께 오고 싶다고, 동굴을 그려보고 있었는데...그런데... 이제까지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오늘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어요." "목소리?" 마나가 말을 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의아한 눈으로 반문하는 샌들우드를 보고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던 크리스틴이 생각에 잠겼다. "그건요...음....실피드나, 엘퀴네스, 노아스가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어요. 정령들은 여기로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들의 목소리는 이곳으로 들렸어요."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콕콕 찌르던 크리스틴이 마나를 떠올리며 심장 부위 를 문질렀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다시 듣고 싶어..하지만...' 다시 한번 마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욕구를 꾹 눌러버린 크리스틴은 샌들우드의 간절한 눈을 보며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스승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 말을 했고, 자신도 어렴풋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머릿속 한 구석에서 적신호를 보내고 있는 무의식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 스틴은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며, 주위를 맴돌면서 그녀가 불러주기만을 기다 리는 마나를 억지로 외면했다. "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느껴졌어요. 들린 게 아니라 느껴졌어요. 참 이상하죠? 그런데 귀로 들은 것 보다 더 똑똑하게 들렸어요. 그리고...마나란 것이 항상 저와 함께 있어주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떻게 아냐고 물으시면 안 되요. 그냥...그냥 알았어요. 지금도 있거든요. 실피드가 항상 절 지켜보는 것처럼... 아니 그 아이들은 항상 저와 함께 있어요. 항상요..." 샌들우드의 간절한 바람에 마나의 손을 놓았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한 순간,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안아주던 마나가 물 러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통스러웠다. 너무나 아팠다. 가슴 한 켠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옆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아팠다. 미안했다. 함께 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기에 피붙이와 생이별을 한 듯 가슴이 아려왔다. 크리스틴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애써 미소를 짓는 얼굴에서 샌들우드는 슬픔을 보았다. 강제로 손을 놓았기에, 소녀가 바라기는 했으나 자신의 부름으로 인해 손을 놓았기에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샌들우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잠재웠다. 잠시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마나가 출렁거렸지만, 절대로 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샐라이온, 나오십시오." 『........』 "어찌된 일입니까, 왜 이 아이가 마나로 돌아가려 한 것입니까? 신성력은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알고 계시지요? 저더러 준비를 시키라 하셨습니다. 이유를 물 어야겠습니다. 알려주십시오." 미칠 듯한 분노를 억지로 억누른 듯한 낮은 목소리에 이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샐라이온이 카사의 모습으로 현신하였다. 그리고 샌들우드의 절망적인 시선을 보고는 푸드득 날개짓을 하며 공중으로 비상했다. 화르르륵~ 불길에 휩싸인 카사의 모습이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화해갔다. 그리고 주위를 맴돌던 바람들이 몰려들며 또 다른 사내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들썩이며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더니 땅딸막한 노인의 모습을 토해내었고 창밖에서 날아 들어온 물줄기가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실피드, 노아스, 엘퀴네스, 샐라이온...."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드러나는 진실들... 5. 샌들우드의 침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완전한 형태를 이룬 4원소 정령왕들이 무감각한 얼굴로 소녀를 안고 있는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진실 된 모습.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환자에 관련된 감정일 뿐, 그들의 눈에 비친 샌들우드는 인간이란 종족의 일부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크리스틴의 앞에서 샌들우드에게 보여준 모습은 유희에 불과했다. 『무엇을 알고자 하는 것이냐』 맨 처음 부름을 받은 샐라이온의 차가운 음성이 서재를 울렸다. 그들만큼이나 냉정한 모습으로 차분히 앉아있던 샌들우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존재하는 의미를 묻고자 합니다. 만들어진 그릇입니까?" 샌들우드의 질문은 핵심을 찔렀다. 대답을 하려면 모든 것을 설명해야하는 상황. 서로 시선을 교환하던 정령들 중 엘퀘네스가 그의 질문을 받았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 회피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대답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 『각성이다.』 엘퀘네스가 회피한 질문을 샐라이온이 받았다. 순간 나머지 정령왕들의 기운이 샐라이온을 향해 휘몰아쳤지만 그는 손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들의 반발을 무력화시켰다. 『알아야 할 것은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막을 수 있다.』 『그런...!』 『조금 전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그 아이는 시작이자 끝이 되었을 것이다. 부정하려는가?』 『.......』 샐라이온의 반문에 입을 꾹 닫은 정령왕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였다. 소환자이자 그들이 지켜야할 소녀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는 샐라이온이었기에 양보를 한 것이다. 『어미의 그릇된 선택으로 아이의 운명이 뒤틀렸고, 그 때문에 시기가 어긋난 것이다. 아직은 이른 시간, 절대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기운이 아이의 운명에 개입하려 하였다. 네가 막아주었기에 물러섰으나,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 이다. 그분의 뜻이었으나, 운명이 뒤틀려 아이를 만든 존재가 깨어나고 있다. 그는...아이를 되찾으려 노력할 것이며 그의 뜻은 우리들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창조주의 축복을 받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아이야, 그 아이를 지키지 위해 목숨을 걸어라. 지켜라.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샐라이온의 차가운 음성에 숨겨진 아릿한 감정을 느낀 샌들우드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가슴으로 전해지는 샐라이온의 숨겨진 의지는...희망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존재들은 감정을 담지 않는다. 드러내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신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면 그만인 것을, 그것을 부정하고 맞서 싸우려는 기색을 보이는 샐라이온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샌들우드는 문득 뒤에 서 있 는 나머지 정령왕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긍정도 부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지킵니다." 『결코...쉽지 않다.』 실피드의 나직한 목소리에 피식 웃어버린 샌들우드는 잠이 든 아이의 고운 머리카 락을 쓰다듬어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깨어질 그릇인지 모른다 하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뒤바뀐 육신의 한계를 들먹이는 샌들우드를 보며 침묵을 지키던 정령들 중 엘퀴네 스가 우아한 몸짓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그대가 하고자 계획한 일 역시 신의 뜻 안에 있으며, 그 아이의 운명 또한 신의 뜻 안에 있습니다. 레니라는 여인이 행했던 일은 아 이의 주어진 운명을 어긋나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 또한 신의 안배였음을 명심 하십시오.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고, 그대가 원하는 일을 행하세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대답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걱정을 하며 크리스틴의 주위를 지켜보았던 것은 아이의 육신이 얼 마나 버텨줄지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소녀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고, 스스로, 본능에 따라 능력 을 드러내는 것을 자제해왔다. 그렇기에 말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흑마법사와 크리스틴이 재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간은 신이 창조한 생명체들 중에 유일하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 운명의 굴레 를 벗어나는 것 또한 신의 뜻 안에서 허락받으며, 끊임없는 투쟁으로 윤회의 사슬 조차 벗어나는 것을 허락받은 존재입니다. 지금 그 의지를 잃지 말고, 그대의 간 절한 소망을 포기하지 마시길 기도합니다.』 노파심이라고 해야할까, 그들의 앞에 놓인 험난하기만 한 미래를 예견하며 싸우다 지친 샌들우드가 스스로의 의지를 꺾고 포기해버릴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슬쩍 내비친 엘퀴네스는 진지한 얼굴로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뜯어보는 노마법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킬 겁니다." 『....!』 한 마디면 충분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샌들우드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이 살짝 미소를 짓던 정령왕들은 스르르 형태를 없애고 자연으로 돌아가며 그의 선택에 지지를 보내듯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사라졌다. 「그 아이들이 저와 같이 가자고 했어요. 제가 그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이 저라고. 같은 존재라고. 절 태어나게 해주신 분께 가야한다고.」 「운명이 뒤틀려 아이를 만든 존재가 깨어나고 있다. 그는 아이를 되찾으려 노력할 것이며 그의 뜻은 우리들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아이를 만든 존재라니...이해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말이 아닌가. 분명 세실은 레니와 마크의 자식이고 평범한 인간의 아이이건만 샐라이온의 대답은 샌들우드을 혼란 속에 빠트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니 크리스틴에게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을 되짚어 보며 사색에 잠겨 있던 샌들우드는 잠이 들어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해야 하느냐, 참으로...힘들고 긴 여정이 될 것 같구나, 아가야." 꽈당!!!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억겁같은 침묵의 시간이라 생각했건만 문이 부서져라 힘 차게 서재의 문을 열고 나타난 흑마법사들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였다. "역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를 의미가 불분명한 탄성을 내지르며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흑마법사들 사이를 헤치고 나타난 카르멘은 샌들우드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텔레포트를...했다고 들었는데..." "아아..." "괜찮은거냐?" "아아..." "금이 간건..." 거대한 기운을 담아 공간이동을 한 아이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앞으로 다가선 카르멘은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를 듯 일그러진 샌들우드의 얼굴을 보고 뒤에 주루룩 서 있던 흑마법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귀찮으니 나가 있어. 마족을 소환해야 하니 준비하고." "....!" 카르멘의 명령에 숨을 죽이고 경악하던 흑마법사들은 일제히 그 저주받은 물건 들을 보기 싫다고 발광을 하며 펄펄 뛰었으나, 샌들우드의 한 마디에 꼬리를 내렸다. "죽고 싶나?" "......." "마나를 제어할 수 있는 팔찌가 필요해. 있는가?" "흠...그런 거라면 금방 만들 수 있지. 가서 사르도닉스를 가지고 와."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카르멘도 한 수 물러준 대마법사의 한 마디에 찍 소리 못 하고 등을 돌리던 흑마법사들은 또 다른 요구사항에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 녀야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광석, 사르도닉스(Sardonycs)를 조심스럽게 들고 나 타난 흑마법사는 그것을 가공할 때 필요한 약물과 함께 카르멘에게 전해주고 밖 으로 나갔다. 짧은 침묵과 어색한 시선이 오고 간 후, 카르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본 샌들우 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나? 잠깐 놀랐을 뿐이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니 신경쓰지 마라." "...정말..." 그것 뿐이냐고 물어보려던 카르멘은 이내 입을 닫았다.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샌들우드는 자신의 제자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면 되는 것이었다.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를 추궁하는 것은 실례였다. 시간이 흘러 스스로가 원한다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할 것이라 고개를 끄덕인 카르멘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광물을 샌들우드에게 내밀었다. "내가 해줄까?" "아니..내가 하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광물을 보고도 시큰둥하던 샌들우드는 카르멘이 내민 사르 도닉스를 받아들고 책상위에 놓인 시약병을 들어 그대로 들이부었다. 수만 가지 약초를 우려낸 물이 손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책상 위를 흥건하게 적시며 바닥 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렁물렁해진 사르도닉스를 만지작거리는 샌들우드를 묵묵히 지켜보던 카르멘은 여전히 스승의 무릎위에서 잠들어 있는 크리스틴의 순진한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음...빠져도 단단히 빠졌군...' 한시도 떼어 놓지 않으려는 듯 팔찌를 만드는 그 순간에도 다리를 움직이지 않는 샌들우드와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부러움을 드러내던 카 르멘은 이번 일만 해결하게 된다면 필히 제자를 구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샌들우드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스네크라가 그 기다란 몸을 둘둘 말아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으로 팔찌를 만들어낸 샌들우드는 가만히 주문을 외우며 크리스틴에게 건 수면마법을 거두어들였다. 잠에서 깨어난 크리스틴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자한 얼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스승님?" "앞으로...마나의 부름에 응하면 아니 된다. 이 샌들우드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느냐?" 노인의 말에 공기가 달라졌다. 어느 누구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주위를 맴돌며 귀를 기울이던 마나의 의지로 비롯된 것이었다. 나이를 잊어버릴 만큼 오래 살면서 겪었던 경험을 다 합쳐도 세실이란 아이를 만나 고 크리스틴이란 아이의 모습으로 바뀐 제자와 함께 하며 겪었던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확신을 하던 샌들우드는 마나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그의 힘에 반발하며 날뛰려는 마나를 억지로 묶어두며 샌들우드는 크리스틴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두 눈을 감고 비명을 질러대는 마나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던 크리스틴이 고개 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 순간 주위에 몰려들었던 마나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그 아이들은 항상 제 곁에 있어요. 그렇지요? 목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저의 목소리는 듣고 있겠지요?" 자신들을 거부한 존재로부터 조용히 물러가려던 마나가 크리스틴의 작은 속삭임에 행복한 듯 출렁였다. 마법은 의지. 신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알려져 있는 마법의 원천은 마나. 마나는 신의 숨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고리를 만들며 서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크리스틴은 자신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마나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 었다. 마나의 포근함 속에서 서서히 형태가 없어지던 순간 들려온 샌들우드의 울부짖음은 그녀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너는 인간이다.' 크리스틴의 푸른 눈은 더욱 깊어졌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늑한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아이의 눈이 현자의 그것을 닮아간다고 생각했다. 잠시 잠이 들어있던 그 짧은 순간에 이처럼 사람의 깊이가 달라질 수도 있는가하며 잠시 경악하던 샌들우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마법을 시전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숨거나 도망가려고 하지 마라. 아무리 슬픈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닥쳐도 절대로 도망가서는 아니 된다. 약속해줄 수 있겠느냐?" "네." "내가 있다. 이 샌들우드가 있고, 정령들이 있다. 신의 축복과 마나도 함께 할 것 이다. 그 외에도 널 지키려는 자들은 많이 있다. 대신관이 그러하고, 카일도 그러 하고, 앤드류와 세바스티앙도 그러하다. 그리고 백작부부 역시 그러하다. 이해하느냐?" "......네."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니 여럿이 나누어지면 될 일. 함께 힘들면 되고, 함께 괴로우면 된다. 혼자 훌쩍 도망갈 생각은 버려라. 약속하겠느냐?" ".........." 어려운 주문이었다. 다른 사람과 괴로움을 나누느니 차라리 홀로 지고 없어지는 게 났다고 생각하는 아이 였다. 그것을 알기에 샌들우드는 억지로 약속을 받아내려 하고 있었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크리스틴의 몫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 질 것이다. 다른 이들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기에 홀로 지고 사라져버리기 전에 그들에게 선택권을 달라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짙푸른 색으로 변해버린 크리스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약속하겠느냐?" "......네...네. 스승님!" 힘겹게 대답을 하던 크리스틴은 샌들우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미, 아비가 없어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샌들우드가 말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 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녀가 가진 무한한 능력과 관 련된 시련을 그들이 함께 지려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너무나 슬펐다. 언제나 받기만 했다. 언제나 도움을 받는다. 언제쯤 도와줄 수 있을까, 언제쯤 보답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신의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을 원망하던 아이는 샌들우드가 나누 어주는 온기에 취해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제가 지켜드릴께요, 제가 나누어 드릴께요, 그때까지만...그때까지만 지켜주세요. 강해질께요. 받은 만큼 돌려드릴 수 있게...그렇게 강해질께요' 작은 두 손으로 로브를 불끈 쥐고 가슴에 얼굴을 부벼대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샌들우드는 책상위에 놓아 두었던 팔찌를 크리스틴의 가는 팔에 채워주었다. "마나를 제어하는 것이다." ".......?"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아니나 항상 일정 수준을 유지하게 한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너의 능력으로는 생각만으로도 내가 걸어둔 제약 마법을 해지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내 말을 명심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니 팔에서 빼지 말도록 해라." 마치 스네크라가 팔뚝에 감겨 있는 듯, 빙글 빙글 원을 그리며 팔꿈치 윗부분을 감싸고 있는 투박한 팔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크리스틴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쯤은 거부를 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 샌들우드는 아무런 반발도 없이 쉽게 그의 말을 따라주는 제자를 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가 지켜주마. 언제나...함께 할 것이다. 너의 웃음을...지켜주마. ' 정령왕들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굳게 마음을 먹은 샌들우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순진하게 웃고 있는 크리스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몸을 일으켰다. 마법진을 그리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하였지만, 다른 흑마법사들이 돌아왔으니 금방 끝날 터였다. 과연 마왕 세카다가 그들의 부름에 응할지는 미지수였으나, 지금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 생각이 들었다. '영혼을 걸고라도...' 영문도 모르고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앤드류와 세바스티앙은 소녀를 데리고 산책이나 하라며, 흑마법사를 한 명 붙여주고 등을 떠미는 샌들우드 때문에 다시 다리를 움직여야했다. "음...나온 김에..운동이나 할까?" 이미 반 나절을 숲을 헤집고 다녔던 사람들로서는 다시 산책을 빙자한 탐사는 사양하 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카르멘과 할 일이 있다는 스승을 방해하지 않기 위 해 밖으로 나왔던 크리스틴은 세바스티앙의 중얼거림에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키득거리던 앤드류는 과연 저 순진하기만 한 소녀가 얼마나 성장할지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굵은 나뭇가지를 잡고 검을 잡는 법을 배우는 크리스틴을 멀뚱멀뚱 눈을 굴리던 흑마법사가 문득 등 뒤에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동굴 입구를 힐 끗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에, 정령에, 신성력에...이제는...검인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마왕 세카다의 선물 1.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닥을 빙 둘러싸고 서 있던 흑마법사들이 이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현대에서는 쓰이지 않는 고대어 로 된 마계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주문이었다. 그저 흙먼지가 쌓여 검게만 보이던 공간에 미세한 빛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미 그어놓은 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한 곳에서 시작 된 밝은 빛은 그곳을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빛줄기를 뻗어나가며 순식간에 육망성을 만들어내었다. 동시에 금빛 룬어들이 빛을 발하며 마법진의 빈 공간을 빽빽이 채우자 쉴새없이 주문을 외우던 흑마법사들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긴장된 얼굴로 생전 처음 보는 소환 마법진을 쳐다보고 있던 샌들우드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성스러운 빛으로 둘러싸여 마법진 위에 나타난 인영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광경이지..." 카르멘의 침울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샌들우드는 뒤늦게야 흑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외면하며 궁시렁거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정말 적응 안 돼..." "차라리 천족을 불러볼까...." "그래...그게 더 났겠다." "썩을! 지겨운 놈들..." "미치겠네...저 꼴을 또 보게 되다니..." 여기 저기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투덜거림속에서도 꿋꿋하게 모습을 드러낸 세카다 는 아예 처음부터 아홉 쌍이나 되는 아름다운 흑백의 날개를 활짝 펴고 싱긋 미소 를 짓는 것으로 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바람도 없는 상태에서 매끄러운 푸른빛이 도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천상 의 미소를 지어보이던 세카다는 멍하니 그를 보고 있는 샌들우드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계약을 원하는가?』 "꾸에엑!" "내가 저 꼴 안 보려고 계약 안 한거야..." "우웩!" 부드럽게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웠고 동시에 모든 흑마법사들이 이마를 짚으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유일하게 샌들우드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던 카르멘은 넋이 빠진 샌들우드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잘해보게. 저게 마.왕.이란 거네." 흑마법사들의 반응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마왕에 대한 거부감. 그가 일부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동반한 경배를 받는 위대한 존재라는 건 아예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대놓고 저주의 말을 중얼거리던 흑마법 사들은 이내 입을 닫고 다시 등을 돌렸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고, 할 일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당장에라도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은 입을 꾹 닫아건 흑마법사들은 샌들우드 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레니라는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호오...그것 때문에 날 불러낸 것인가?』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세카다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샌들우드는 과연 마왕이 나와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던 카르멘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담담한 얼굴로 세카다의 금빛이 뿌려진 보랏빛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 았다. 천족이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는 변색된 눈. "아시고 나오셨던 것 아닙니까? 아니면...요즘에는 소환에 응해줄 마족이 없어 대신 직접 뛰시는 겁니까?" 『.........』 샌들우드의 칼날을 숨긴 느긋한 질문이 세카다의 미소를 지웠다. 지금쯤이면 배를 잡고 뒤집어져야 했을 흑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숨을 죽이고 마왕과 샌들우드의 눈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은 세카다가 한 걸음 물러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마왕을 눈앞에 두고도 투덜거릴 수 있었던 이유는 마족과 인간이 느끼는 모욕의 정의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무슨 말을 하더라 도 슬쩍 흘려버리는 마족들은 은근히 인간들의 그런 혼란스러움을 즐기는 편이었 다. 반면 지금처럼 그들이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부분을 찔러대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 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분노를 일으킬 수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계약을 원하냐고 물었다.』 태연하던 태도를 집어던진 세카다는 본연의 광폭함을 드러내며 샌들우드를 노려보 았다. 하지만 샌들우드의 눈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의 몸을 없앤 것을 후회하시지 않습니까?" 『..........』 "몸을 변화시켰으면 될 일을 굳이 영혼을 바꾸어가며, 그 아이의 어미에게 보여주 기 위해 그 아이의 그릇을 바꾼 것을 후회하시는 것 아닙니까?" 『계약자가 원한 것이다.』 "운명을 바꾸어 달라했지 영혼을 바꾸라 말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세카다님의 의지에 달려있었지요.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후회하라는 것이냐? 네 말대로 계약을 이행하는 방식은 내가 정한다. 계약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고, 나는 계약을 완료했다.』 "완료했다고 하셨습니까, 지금?" 『......』 보통 마족들은 거짓말을 잘 한다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실상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단, 문제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만 말을 하거나, 교묘하게 돌려서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오해를 하게 된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만들고 그것을 지켜보며 즐거워한다. 그러한 성향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던 샌들우드는 세카다가 발뺌 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행복해 보이셨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셨습니까? 그 아 이의 능력을 다 펼쳐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언제 깨어질 지도 모르는 그릇 안에서, 스스로를 억제하며 끊임없이 투쟁을 하며 살아온 그 아이가 진정으로 레니가 바라던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발악이었다. 아이에게 운명에 순응하라고, 뒤바뀌어진 몸에 연연하지 말고 적응하고 그렇게 살아 가라고 말해왔던 스스로에 대한 질책도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한 샌들우드의 심리를 꿰뚫어보면서도 세카다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은...완전하지 않았다.』 "......!" 세카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모든 이들이 경악하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다만 단 한사람 샌들우드만은 침울한 얼굴로 세카다를 보고 있었다.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도 아실거라 믿습니다." 『........』 "대답도 가지고 계실거라 믿습니다. 또한...지켜 보셨다면 모든 것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령들과의 대화를 말하는 것이리라. 샌들우드의 확신에 찬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날개만 파닥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세카다가 카르멘을 보았다. 『키메라에 영혼을 옮기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 『영혼이 적응할 수 없다. 그건 인형이다. 인간이 될 수는 없지.』 그제야 자신들이 해온 일이 부질없는 발악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흑마법사들 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며 로브를 만지작거렸다. 단 몇 마디로 부질없는 희망을 부수어버린 세카다가 다시 샌들우드를 보았다. 『많은 생각을 하였고,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 아이를 다시 다른 몸으로 넣는다면 ...그 아이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 ".......!" 『지켜보아서 안다. 강하지 않아. 전혀 강하지 않더군.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정신력만은 보통 인간들 보다 훨씬 연약하다. 불안정하고 불안했다. 혼란스러워하고 희미해지기도 하였다. 지금은 다시 본연 의 모습을 되찾아가며 강해지고 있다. 그런데...다시 한 번 변화된다면... 견딜 수 있겠나?』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옆에서 지켜봐온 샌들우드 조차도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그릇이 깨어지기 전에, 채 피기도 전에 신의 품에 안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할 생각만 하였다.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그릇이 바뀐들 뭘 하겠다는 것인가. 어미의 욕심으로 육신이 바뀌었을 때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시들어가던 아이 를 알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마왕이 한 것이라 하여도, 자신에게 주어진 그릇을 벗어나 타인의 몸에 적응한다는 것은 보통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세카다 역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실수. 단순히 몸을 바꾸어주면 거기에 적응해서 잘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의 영혼은 너무나 순수하고 불안정했다. 주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스스로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엄격한 아이.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평민의 딸로 태어나 철없던 시절 잠깐 타오른 불길에 몸을 내던져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던 레니가 자신의 영혼을 걸고 세카다와 계약한 것 역시 그러한 맥락 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시대에게 가장 인간 대접을 받는 것은 귀족과 황족뿐이다. 평민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귀족들의 부속물에 불과했고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런 삶을 살아왔던 레니가 보았을 때는 분명 딸이 귀족이 되기를 바 랬던 것은 당연하다 말할 수도 있었다. 무엇이든 마음껏 할 수 있고, 어떤 것도 가질 수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일을 해도 비난을 받지 않는 지고지순한 신분. 그것만이 딸에게 행복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레니를 어떻게 탓할 것인가. 또한 귀족이었으되 마법사의 길을 걸어온 샌들우드 역시 그러했다. 세실의 뛰어난 능력을 너무나 아꼈기에 스스로 서는 어려운 길 보다는 이미 닦여있 는 쉬운 길로 가라 등을 떠밀고 말았다. 능력이 뛰어난 평민들은 언제 어느 때고 귀족들의 수족 노릇을 하며 평생을 착취당하며 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몸이 뒤바뀌었을 때는 차라리 잘 되었다 박수를 쳤다. 그리고 활짝 날개를 펴고 드넓은 창공을 날아오르라고 기도를 했다. 그 아이가 그토록 고통 스러워하고, 방황하며, 스스로를 죽여갈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어리기에, 순수하기에 금방 적응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라는 것은 얼마되지 않아 증명 되지 않았던가. 모든 사람들이 공범이었다. 순수하고, 영악하고, 엄청난 능력을 지닌 소녀를 그저 어리게만 보고 보호할 대상으로 본 모든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다시 한 번 그러한 일을 겪는다면...?' 조금 전, 자신의 호통소리에 눈물을 뿌리며 마나와 동화되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 샌들우드는 눈을 감았다. '안 된다.' 강해지려 노력하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나 진정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불길 속에도 뛰어들 존재들이 주위 에 있었기에 그리 행동한 것이었다. 위태롭게 서 있으면서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 들을 위해 강해지려 노력했던 아이. 다시 한 번 시련이 닥친다면...생각하기도 싫었다. "어찌 해야 합니까...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비명과 같은 질문에 세카다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카르멘을 보았다. 『그릇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아느냐?』 ".......!" 카르멘이 제의했으나, 샌들우드가 반대했던 방법을 제시한 세카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난색을 표하는 카르멘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그 아이의 몸을 없앤 것은 실수였으나, 옳은 일이었다.』 "그게 무슨?" 『한 번은 모르되 두 번은 그 아이가 견뎌내질 못할 것이다. 만약 견뎌낸다 하더라도 결코 예전과 같지 않겠지. 어미가 원하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없앤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세카다는 세실이라 불리웠던 아이에게 내려졌어 야 할 재앙이 또 다른 인형에게 부가되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좋았다. 어미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이의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돕겠다. 모든 것은 그 아이의 능력에 달려 있으나,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세카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샌들우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야기를 해야합니까?" 『다른 수가 있느냐?』 "그런......!"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과연 그 아이의 눈을 막고, 귀를 막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구나.』 진정 마왕답지 않은 마왕이었다. 이토록 하찮은 인간에 대한 걱정스러움을 드러내며 스스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세카다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샌들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습니다." 『지키고 싶다고 하였지?』 "......."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압니다." 『행운을 빌어주마.』 "마왕이 안 빌어줘도, 전 충분히 복이 많은 놈입니다." 퉁명스럽게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신의 반쪽 날개를 외면한 샌들우드는 어느새 무거운 짐을 던 듯 키득거리며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카르멘을 노려보았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 계약을 하기 위한 만남이 아닌, 토의 장소가 되어 버린 동굴 안에서 마왕 세카다를 둘러싼 샌들우드와 카르멘, 10여명의 흑마법사들이 머리를 마주대고 수군거리길 몇 나르. 자신들에게 부여된 과제를 들고 흑마법사들이 사라지자 세카다와 마주보고 앉아있던 샌들우드가 카르멘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어디있습니까? 정말...기억을 찾을 확률은 없는 겁니까?" 묻어두었던 존재를 꺼내며 무거운 얼굴로 질문을 던지는 샌들우드를 가만히 주시하 던 세카다는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계약자가 원하는 바가 아니기에,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바이오니어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벨라(Bella)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 『계약을 원하는가?』 끝까지 목적을 잊지 않고, 철저한 직업정신을 내보이는 세카다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짓던 샌들우드는 밧줄로 칭칭 묶어 구석에 박아 놓았던 민털고양이를 내밀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선불입니다." 『...이번 일은 레니라는 여인과 했던 계약의 연장선으로 생각한다. 원하는 것이라... 가지고 있거라.』 지겹다는 듯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을 향해 가르랑거리는 바그마를 쳐다보던 세카다는 손을 쭉 뻗어 고양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소환에 응하여 모습을 드러내었으나, 이 이상 내가 도와줄 수는 없다. 이것을 선물 로 주고 갈테니 그 아이의 곁에 두도록 해라. 자각은 하되, 그 아이의 허락 없이는 능력을 드러내지 못한다. 도움이 되겠지.』 중얼거리듯 바그마의 제약을 일부 풀어준 세카다는 고양이의 이마에 생겨나는 뚜렷한 흰점을 보고 싱긋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의 날개를 앞으로 내밀어 새하얀 빛을 발하는 9장의 날개에서 각기 하나씩 깃털을 뽑아 샌들우드에게 주었다. 『보름달이 뜨는 날, 시약을 만들되 함께 넣어라. 도움이 될 지도...』 신의 기운이 그대로 담겨있는 천족의 날개를 선사한 세카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아름다운 순백색의 깃털을 들고 눈물을 글썽이는 샌들우드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 마법 진 위로 날아올랐다. 『천족을 조심해라.』 단 한마디. 나직하나 진지한 음성으로 마지막 주의를 준 세카다는 어리둥절해하는 카르멘과 샌들우 드에게 천상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빛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정말...적응 안되는 군." 아무 생각 없이 세카다의 퍼포먼스에 대한 감상을 말한 카르멘은 멍하니 깃털을 보고 있는 샌들우드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 되었군. 난 마족이 이렇게 착한 존재인 줄 몰랐어. 앞으로는 신이 아니라 마족을 모셔볼까 생각중이네." 카르멘의 장난스러운 어조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샌드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카르멘의 녹색 안광을 보았다. "천족을 조심하라니, 무슨 말일까?" "글쎄...그 대신관이라는 놈은 알까?" "........." 마족과 천족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완전히 반대된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를 외면하는 두 존재가 서로를 비방한다 하여 이상할 것은 없었으나, 세실의 신체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던 천족을 조심하라 경고하는 세카다의 말에는 신경이 쓰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경고를 남기고 사라진 세카다가 서 있던 마법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샌들우드는 아홉 개의 깃털을 소중하게 갈무리 했다. 영혼을 담을 그릇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는 것은 그토록 고민 한 것이 어이없을 정도로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러나 왠지 더 큰 시련이 닥쳐올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던 샌들우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르멘을 보았다. "그레고리를 만나야겠어. 같이 가겠나?" ************************************************************************************* 꺄아아아~~~드디어 끝났습니다. 길고 ,지루하고, 잠도 못자게 만들고, 손목에 염증이 생길정도로 힘들었던 10연참...끝이군요 철푸덕! 므흐흐흐흐 즐거우세요? 저도 즐겁습니다. 오늘 만은 모든 것을 잊고 우아하게 코코님이 보내주신 차를 마시면서, 그동안 아껴두느라 못 썼던 아로마 향초를 켜 놓고...님들이 날리시는 사시미를 즐길랍니다. 캬캬캬캬 마음껏 던져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수정은 잠 좀 자고 천천히 할 생각입니다. 콜록. 이거 분량 맞추느라 어제 밤을 샌 관계로.. 아, 그리고 오늘 10시에 정팅 있습니다. 오실 분들...사시미 많이 들고 오시고, 그리고... 흑 3시간 밖에 못 자는군요. ㅜ ㅜ 어찌되었든 유키 약속 지켜부렀습니당~~~!!! (내용이 부족한 것은 천천히 수정할때 보충할께요) 추천, 리플, 선작, 음...태클 환영합니다. 캬캬캬 (선작 베스트 30위 안에 들었다네요. 좋아 죽겠다는...> < ) 너무 너무 감사드리고, 이 기쁨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나이다. ㅋㅋㅋㅋ 여러분 행복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