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 회] 프롤로그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란? 패러렐 라이프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어 평행선처럼 결코 서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뒷시대의 사람이 앞선 사람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 걷는 현상을 뜻한다. 패러렐 라이프를 살아간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패러렐 라이프를 발견한 프랭크 조셉에 대해서 말하자면 먼저 그와 이구나치우스 도넬리라는 사람의 삶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프랭크 조셉과 이구나치우스의 삶은 100년의 시간을 두고 많은 공통점이 있다. 1. 생년월일 (1) 이구나치우스 : 1831년 11월 3일 (2) 프랭크 : 1931년 11월 3일 2. 이름 (1) 이구나치우스 : 이구나치우스 도넬리 (2) 프랭크 : 본명은 이구나치우스 조셉이었지만 6세때 프랭크 조셉으로 삼촌이 변경 3. 생일선물 (1) 이구나치우스 : 57번째 생일날 황금만년필을 친구에게 선물받음 (2) 프랭크 : 57번째 생일날 황금만년필을 친구에게 선물받음 4. 직업 (1) 이구나치우스 : 고고학자 (2) 프랭크 : 고고학자 5. 관심분야 (1) 이구나치우스 : 아틸란티스(관련책자 여러권 편찬) (2) 프랭크 : 아틸란티스 6. 주소 (1) 이구나치우스 : 유년시절을 필라델피아의 108번가에서 생활 (2) 프랭크 : 유년시절을 일리노이의 108번가에서 생활 7. 유년시절 특이사항 (1) 이구나치우스 : 유년시절에 고대문자가 새겨진 목걸이를 숲속 나무밑에 묻음 (2) 프랭크 : 유년시절에 고대문자가 새겨진 목걸이를 숲속 나무밑에 묻음 8. 죽음 (1) 이구나치우스 : 1901년 1월 1일 (2) 프랭크 : 현재 살아있음 9. 죽음사유 (1) 이구나치우스 : 갑작스런 심장발작 (2) 프랭크 : 2001년 1월 1일 심장발작이 일어났지만 심장약 먹고 회생 1988년 11월경에 프랭크 조셉은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서 아틸란티스에 관련된 자료를 찾게된다. 그러다 우연히 이구나치우스가 편찬한 책을 발견하고 자신이 원하는 자료가 모두 책에 기록되어 있음에 기뻐한다. 하지만 프랭크는 이구나치우스가 편찬한 책의 내용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책에는 이구나치우스의 개인기록도 있었는데 생일, 이름, 직업, 주소, 관심분야, 57번째 친구에게 받은 생일선물 등 모든 것이 자신과 똑같았던 것이다. 프랭크는 이구나치우스에 대해서 연구를 거듭하다 그가 1901년 1월 1일에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죽었음을 알게된다. 프랭크는 자신이 2001년 1월 1일에 죽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는 죽지않기 위해서 이구나치우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한다. 프랭크는 이구나치우스와 자신을 패러렐 라이프라고 정한다. 그리고 결국 패러렐 라이프가 자신 이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되고 이것을 연구하여 학회에 제출한다. 이구나치우스가 죽은 날로부터 정확히 100년 후인 2001년 1월 1일 프랭크는 패럴렐 라이프의 연구논문이 학회의 최고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심장발작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는 이구나치우스처럼 죽지는 않았다. 프랭크는 자신이 죽을까 염려되어 항시 심장약을 가지고 다녔고 심장발작이 일어나자 곧바로 약을 먹고 회생한 것이다. 프랭크는 이구나치우스와의 운명적인 연결고리를 끊기위해 학회에서 주려는 최고상인 공로상을 거절한다. 수상을 거절한 이유는 이구나치우스도 그와 비슷한 상을 받은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프랭크 조셉은 2001년 7월 패러렐 라이프에 관한 책을 편찬한다. 프랭크 조셉과 이구나치우스 도넬리 이외에 암살자의 총격으로 사망한 미국의 두 역대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과 존 F 케네디도 패러렐 라이프를 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두 역대 대통령을 연구한 학자들이라면 그 둘의 출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암살과 관련된 여러 상황들이 100년의 시간을 두고서 너무나도 많은 점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1. 사망원인 (1) 링컨 :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 (2) 케네디 :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 2. 사망장소 (1) 링컨 : 포드 극장 (2) 케네디 : 포드에서 만든 링컨 자동차 3. 암살범의 체포상황 (1) 링컨 : 부스는 극장에서 암살을 하고 창고로 도망중 체포 (2) 케네디 : 오스왈드는 창고에서 암살을 하고 극장으로 도망중 체포 4. 부통령의 이름 (1) 링컨 : (앤드류) 존슨 (2) 케네디 : (린든) 존슨 5. 공헌 (1) 링컨 : 흑인들을 위해 많은 공헌 (2) 케네디 : 흑인들을 위해 많은 공헌 6. 의원 당선 (1) 링컨 : 1846년 (2) 케네디 : 1946년 7. 대통령 당선일짜 (1) 링컨 : 1860년 (2) 케네디 : 1960년 8. 사망요일 (1) 링컨 : 금요일 (2) 케네디 : 금요일 9. 암살자의 미확인 (1) 링컨 : 뒷머리에 총을 맞아 암살범이 누군지 의문 (2) 케네디 : 뒷머리에 총을 맞아 암살범이 누군지 의문 10. 암살당시의 부인 (1) 링컨 : 사망시 부인이 옆에 위치 (2) 케네디 : 사망시 부인이 옆에 위치 11. 부통령의 생년 (1) 링컨의 부통령 앤드류 존슨 : 1808년 생 (2) 케네디의 부통령 린든 존슨 : 1908년 생 12. 암살범의 생년 (1) 링컨의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 : 1839년 생 (2) 케네디의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 : 1939년 생 13. 자식의 사망 (1) 링컨 : 백악관에 있을 때 자식 한 명이 사망 (2) 케네디 : 백악관에 있을 때 자식 한 명이 사망 14. 비서의 이름 (1) 링컨 : 케네디 (2) 케네디 : 링컨 15. 이름의 알파벳 길이 (1) 링컨 : Lincoln - 7자 (2) 케네디 : Kennedy - 7자 16. 부통령 이름의 알파벳 길이 (1) 앤드류 존슨 : Andrew Johnson - 13자 (2) 린든 존슨 : Lyndon Johnson - 13자 17. 암살범 이름의 알파벳 길이 (1) 존 윌크스 부스 : John Wilkes Booth - 15자 (2) 리 하비 오스왈드 : Lee Harvey Oswald - 15자 18. 암살범의 죽음의 원인 (1) 존 윌크스 부스 : 의문의 죽음 (2) 리 하비 오스왈드 : 의문의 죽음 19. 전쟁 (1) 링컨 : 남북 전쟁 (2) 케네디 : 베트남 전쟁 대표적인 열 아홉가지를 나열했을 뿐이지만 이 외에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 링컹과 케네디를 두고서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설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가설 : 케네디는 링컨의 환생이다. 두 번째 가설 : 링컨과 케네디는 패러렐 라이프이다. 세 번째 가설 : 우연의 일치이다. 대부분 세 번째의 가설이 맞다고 생각하겠지만 링컨과 케네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 회] 1. 탄생 1 "아아아"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크라이 숲에서 여자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비명소리는 정확히 클라이 숲의 깊숙한 곳에 지어진 아담한 통나무집에서 울린 것이다. "아이네 조금만 참아." 네이브는 아내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아빠! 엄마 많이 아파?" "타르의 동생을 낳으시기 때문에 무척 아프시단다." "정말?" 네살이 된 타르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미소를 지었다. 타르는 자신에게 동생이 생기면 함께 놀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매일같이 크라이브 형하고만 놀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즘은 크라이브 형이 아버지에게 정령술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매일같이 마당에서 혼자 놀았다. "정말이구 말구." "우와! 이제 혼자 놀지 않아도 된다!" 네이브는 둘째 아들인 타르의 말을 듣고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첫째 아들인 크라이브가 일곱 살이 되었기 때문에 정령술을 가르쳐야 했는데 그 시간에 둘째 아들 타르는 마당에서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다. 타르의 어머니 아이네라도 함께 놀아줘야 했지만 그녀는 임신중이라 거동이 불편해 타르와 놀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아아" "아이네 아가씨 조금만 더 힘내세요." 네이브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아이네의 비명과 산파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랬다. 산파는 네이브가 크라이 숲의 아랫 마을에서 여러번 아이를 받아본 아주머니이다. 크라이 숲의 근처에는 500여명이 살고있는 작은 마을이 있기 때문에 산파를 구할수 있었던 것이다. "엄마 힘내!" "이 바보야. 조용히 해!" 크라이브는 동생 타르가 집안을 향해 소리치자 조용하라고 말했다. 타르는 집안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비명 소리보다도 자신에게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집안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비명이 그치면 동생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아아아아" 집안에서 들려오는 네이브와 결혼한 아이네의 비명소리는 점점 고음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크라이브와 타르를 낳을 때는 이렇게 오래거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길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이브는 아이네에게 무슨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응애응애" "응애응애" 집안에서 들려오던 아이네의 비명소리가 갑자기 그치더니 잠시 후에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이 생겼다! 엄마 화이팅!" 타르는 집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마당을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즐거워하였다. 크라이브도 자신에게 타르 이외에 한 명의 동생이 늘어난 사실이 즐거웠다. 두 명의 아이들이 마당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하는 동안에 네이브는 산파가 나오길 기다렸다. 자신에게 세 번째의 자식이 생긴 것은 즐거운 일이나 아이네가 아이를 낳다가 어찌되지는 않았을까 걱정된 것이다. "네이브님 축하드려요. 왕자님이에요." 집안에서 산파인 디엘이 걸어나오며 네이브를 향해 말했다. "아이네는 괜찮은가요?" "두 분 모두 건강하십니다." 네이브는 산파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리쉬었다. 네이브에게는 아이 보다도 아이네가 더 걱정되었던 것이다. 마음이 놓이자 모든 긴장이 풀려 몸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디엘은 네이브가 어느정도 정신을 수습하자 말을 하였다. "네이브님 그런데 엘프장로님은 아직 오시지 않으셨나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오실겁니다." 디엘은 네이브의 대답을 듣고서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크라이 숲에는 100여명의 엘프들이 살고있는데 그들의 심부름을 하는 정령사가 네이브의 가족이다. 정령사의 가족이 태어나면 엘프장로가 직접 방문하여 아이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려주는데 디엘은 축복을 내릴 엘프장로를 기다리는 것이다. 엘프장로의 축복을 받으면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정령과의 친화력이 보통 사람보다 높아지게 된다. 엘프장로의 축복은 오랜 유대를 맺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엘프들과 친근하게 지내지 않는 정령사는 절대 누리지 못하는 일이었다. 크라이 숲에서 살고있는 인간은 네이브의 부모님인 포그너와 세실리아 그리고 네이브의 가족까지 총 여섯 명이 전부이다. 네이브의 아버지 포그너와 어머니 세실리아는 엘프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식물의 씨앗을 얻기위해 한 달이 넘는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네이브와 아이네의 아이들이 엘프장로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의 노력보다는 부모님의 덕택이다. "세레나 장로님 누추한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어서 미안해요." 네이브는 마당에 갑자기 아름답게 생긴 엘프가 나타나자 인사를 건넸다. 엘프는 인간의 시력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네이브의 눈에는 마법을 이용해 나타난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늦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니요. 저희를 도와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세레나 엘프장로는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네이브의 부인 아이네가 침대에 이불을 덮은채로 누워 있었고 그녀의 품에는 귀엽게 생긴 아이가 안겨져 있었다. "세레나 장로님 안녕하세요." "힘드셨을텐데 그냥 누워계세요." 아이네는 세레나 엘프장로를 보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세레나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아이네가 일어나지 못하게 손으로 제지하였기 때문이다. "귀여운 아이네요. 이름은 지으셨나요?" 세레나 엘프장로는 아이네에게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자연의 축복을 내리기 위해선 아이의 이름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카인이라고 지었습니다." "좋은 이름이네요." 자연의 축복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조건에 부합되어야 한다. 부모중 한 명이 정령사이어야 하며, 태어난지 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아이어야 하고, 태어난 장소는 숲이어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엘프들의 신임을 얻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퓨리피케이션" 세레나 엘프장로는 아이를 아이네에게 건네받고 물을 정화시키는 정령마법을 시전하였다. 퓨리피케이션 정령마법은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와 계약을 맺은 정령사라면 누구나 시전 가능한 마법이다. 인간의 신체는 대부분이 물로 구성되어 있어서 신체에 존재하는 물을 모두 정화시키면 깨끗하고 순수한 인간이 된다. 세레나는 아이가 자연의 축복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몸을 정화시킨 것이다. "으앙 으앙 으앙" 훌쩍거리며 작게 울던 아이가 퓨리피케이션 정령마법의 고통에 우렁차게 울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신체에 변화가 찾아오는 상황이라 고통스럽지 않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연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엘레스트라" 세레나 엘프장로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를 불렀다. 처음에는 흐릿한 안개가 날개를 가진 새의 형태로 세레나의 앞에 생겨나더니 1분 정도가 지나자 완전한 형체를 이루었다. 최상급 정령은 다른 계급의 정령들과는 다르게 결정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계약을 맺은 정령사에 의해서 모습이 결정되어질 뿐이다.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가 새의 모습을 한 것은 세레나 엘프장로가 최상급 정령과 계약할 당시에 새의 모습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주인님 무슨 일이신가요?" "아이.... 후욱... 이 아이에게... 자연의... 축복을..." 세레나 엘프장로는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를 소환시키는데 막대한 마나가 몸에서 빠져나가자 숨을 헐떡 거렸다.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엘프는 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계약을 맺었다고 해도 최상급 정령이 소환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한 마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세레나가 장로가 된 것도 물의 최상급 정령을 부릴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크라이 숲에서 살고있는 100여명의 엘프중에서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엘프는 세레나 뿐이다. 방안에 있는 네이브와 아이네는 세레나 엘프장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긴장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 이같은 모습을 세 번째로 보는 것이라 놀라지 않았다. 세레나가 최상급 정령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힘들어 하고 있지만 그만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자식이 자연의 축복을 받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부모든지 자식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존경하는 엘라임님의 뜻으로 자연의 축복이 내려지리라..." 새의 모습을 하고있는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는 자신이 모시는 정령왕의 이름을 말하며 자연의 축복을 내렸다. 엘레스트라의 몸에서 파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 빛은 아이의 몸에 흡수되어 버렸다. "어라? 이상하네." 네이브는 세레나가 안고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첫째인 크라이브와 둘째인 타르의 경우는 자연의 축복을 받을 때 파란빛이 아이에게 흡수된 이후에 곧바로 방출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아이의 몸에 흡수된 빛이 방출되지 않는 것이다. "응애 응애 응애" 갑자기 아이의 비명소리가 커지더니 아이의 입과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인아" "내 아이가..." 네이브와 아이네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당장 달려가 아이를 안아서 살펴보고 싶지만 그들의 아이는 세레나 엘프장로가 안고 있었고 엘프장로의 앞에는 파란 새의 모습을 하고있는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부모가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레나 엘프장로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상급 정령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린 경우라봐야 이번이 네 번째이지만 지난 세 번째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꺄아악" 아이네는 자신의 아이을 안고있던 세레나 엘프장로가 쓰러지자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아이 카인이 자연의 축복을 받다가 피를 토하더니 이제는 세레나 엘프장로가 쓰러져 버린 것이다. 세레나가 쓰러져버리자 파란 새의 모습을 하고있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네이브는 가장 먼저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린 자신의 아이를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세레나 엘프장로를 안아서 옆의 침대에 눕혔다. 아무리 자식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령사로서 엘프를 보살필 의무는 당연한 것이었다. 네이브가 지금처럼 하급 정령사가 될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태어난 이후에 지금 눈앞에 쓰러져있는 세레나 엘프장로에게 자연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프는 1,20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의 축복 때문에 밖에 나가있던 산파인 디엘이 비명을 듣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이네가 낳은 아이의 입과 코에 피가 묻어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빠르게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나 세상에" 산파인 디엘은 잠깐 놀라더니 매우 익숙하게 아이네에게 아이를 건네받고 일일이 아이의 몸을 여기저기 두드리기 시작했다. 디엘은 한참이나 아이를 손으로 만지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입과 코에서 피를 흘렸으면 몸에 이상이 있어야 했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이다. "이상하네." "디엘 아이가 어떻게 된거죠?" "피를 흘린 것 빼고는 멀쩡한데요. 정말 이상하네." 산파인 디엘의 말을 듣고서 네이브와 아이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 더욱 중대한 일이 남아 있었다. 자연의 축복을 내리던 세레나 엘프장로가 쓰러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네이브와 아이네는 알수가 없었다. "아이네 엘프마을에 다녀올께." "빨리 다녀오세요." 네이브는 세레나 엘프장로가 쓰러진 사실을 엘프마을에 빨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엘프만이 알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네이브는 하필이면 이런 때에 부모님이 엘프들을 위해서 희귀 식물의 씨앗을 얻기위한 여행을 떠났는지 화가났다. 엘프들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엘프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찾기위해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이 네이브의 부모님인 포그너와 세실리아였던 것이다. 네이브의 아버지 포그너는 중급 정령사이다. 하지만 중급 정령을 소환해서 부리지 못한다. 정령을 소환하면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고 그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령사들은 간혹 자신보다 한 등급이 높은 정령과 계약을 맺은 경우가 존재한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휘귀한 경우도 아니다. 상위 정령과 계약을 맺음으로 인해서 하위 정령들을 좀더 유용하게 부릴 수 있기 때문에 기를쓰고 상위 정령들과 계약하려는 것 뿐이다. 물론 정령과 계약을 하는 도중에 잘못되면 정령의 지배를 받게되기 때문에 시도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을 뿐더러 시도해도 성공하는 확률은 매우 낮다. 정령의 계급에는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령왕이 존재한다. 물론 계급이 없는 자연계 정령들도 있지만 이들은 대체적으로 인간과 계약을 맺는 경우가 드물다. 인간들이 말하는 정령사는 물질계 4대 정령과 계약을 맺고있는 하급 정령사와 중급 정령사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상급 정령사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은 네이브의 아버지인 포그너의 경우처럼 단지 계약만 했을 뿐이지 절대 소환해서 상급 정령을 부릴수가 없다. 만약 상급 정령을 소환해서 부릴수 있는 정령사가 있다면 그는 6서클 혹은 7서클의 고위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을 갖춘 것이다. 사람들은 정령사의 능력을 평가할 때 항상 마법사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정령사와 마법사의 서클별 능력을 비교하면 하급 정령사는 1서클에서 3서클, 중급 정령사는 3서클에서 5서클, 상급 정령사는 6서클에서 7서클, 최상급 정령사는 7서클에서 8서클의 마법사와 능력이 비슷하다. 물론 정령은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에 따라서 그 능력이 천차만별이다. 아무리 하급 정령사라도 계약을 맺은 정령사가 뛰어나면 중급 정령의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이런 비교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사람들에겐 이렇게 알려지고 있다. ------ 세레나는 자신이 겪고있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계약을 맺은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에게 자연의 축복을 아이에게 내리도록 지시했었는데 무엇인가 잘못되어 아이는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자신은 알수없는 세계로 끌려온 것이다. 세레나가 있는 장소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세계였다. "여기가 어디지?" 인간이었다면 세레나처럼 절대 침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레나는 조화로운 엘프라 자연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며 왜 이런일이 발생했는지 생각하였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엘레스트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세레나는 아무것도 없는 암흑세계에 자신과 계약을 맺은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가 나타나 사과를 하자 지금의 상황이 엘레스트라 때문인 것을 알게되었다. "주인님에게 알려줄 사실이 있어서 정령세계로 초대한 것입니다." "이곳이 정령세계란 말이야?"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정령세계는 정신체만이 남은 영혼이나 정령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정령세계는 발도 들어지 못하는 신성한 곳이다. "네, 주인님. 물의 정령왕이신 엘라임님의 허락을 맡고 주인님을 초대하였습니다." "내가 정령세계로 들어오는 것을 엘라임님께서 허락하셨다고? 정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의 말에 할말을 잃었다. 자신이 정령세계로 오는 것을 정령왕까지 허락했다니 믿을수가 없었다. 세레나가 엘프로서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뛰어난 정령사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중급 정령사나 마찬가지였고, 그 외에는 엘프장로라는 직위 외에는 기타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었다. "엘레스트라 알려줄 사실이 무엇이길래 정령세계까지 나를 초대한 거야?" "정령세계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었지만, 주인님께서 저를 소환시킬 수 있는 시간이 1분이라 어쩔수 없이 엘라임님의 허락을 맡고 모셨습니다." "그렇구나."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의 말을 듣고는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밖에서 얘기해도 되는 사실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정령세계까지 오게된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레나는 창피하면서도 정령세계에 오게된 사실이 기뻤다. 정령세계에 발을 들여논 자체가 정령사로서 무한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주인님께서는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라고 들어보셨나요?" "패러렐 라이프? 그게 뭐지?" "방금전에 주인님의 명령으로 아이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리다가 축복을 받는 그 아이가 패러렐 라이프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의 말을 듣고 아이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되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크라이 숲에서 살고있는 100여명의 엘프들은 지금 숲에서 함께 지내는 정령사 가족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만약 아이가 잘못 된다면 엘프들은 슬퍼할 것이다. 엘프는 인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정령사 만큼은 예외로 둔다. "그럼 아이가 패러렐 라이프라는 병에 걸렸다는 거야?" "패러렐 라이프는 병이 아니라 운명이 결정된 사람을 뜻하는 거에요. 언제인지 알수 없지만 앞서 살아간 사람이 있는데,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앞선 사람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 걷는 현상을 말하는 거랍니다. 성녀, 예언자,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죠. 이들은 자신이 언제 죽게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앞선 사람의 운명을 따라갑니다. 패러렐 라이프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뿐이지요." "운명이 결정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의 말을 듣고는 할말을 잃었다. 성녀나 예언자와 같은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엘프나 인간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좋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엘레스트라의 말을 듣고나니 이것은 저주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카인이란 아이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리다가 알게된 사실이랍니다. 카인은 정확히 열 다섯살이 되는 생일을 맞이하며 죽게되는 운명을 가졌습니다. 패러렐 라이프의 짝이 누군지는 저도 알수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카인이 살아갈 수 있는 시간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주인님을 정령세계로 초대한 것이랍니다." "열 다섯살이라니... 정령사들은 인간보다도 두 배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죽는 운명을 가졌다니."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의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패러렐 라이프라고 해서 꼭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인이 열 다섯살에 죽는다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더욱이 정령사는 보통 인간들과 다르게 평균 수명이 150세나 된다. 정령을 소환할 때마다 신체가 정령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정화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자연의 축복은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지? 열 다섯살이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텐데. 운명을 벗어날 방법은 전혀 없는거야?" "죄송합니다."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의 대답을 듣고는 슬픔을 느꼈다.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인과율의 과정을 거치며 살아간다. 많은 선행을 해도 또는 악행을 해도 결정된 운명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매우 슬픈 일이다. 세레나는 엘프로서 패러렐 라이프가 조화를 깨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서 분노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정령도 엘프와 마찬가지로 조화를 따르잖아. 정말로 방법이 없는거야?" "신이 정한 것을 일개 정령이 바꿀수는 없습니다. 설사 정령왕 엘라임님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운명을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패러렐 라이프라니..." 세레나는 슬픈 표정을 짓고있는 엘레스트라를 바라보았다. 정령은 이성을 갖춘 존재로 계약을 맺은 정령사의 감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세레나가 슬퍼하자 엘레스트라도 슬픔의 감정을 느꼈다. 세레나는 암흑의 세계에 엘레스타라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서서히 흐릿해 짐을 느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깜빡였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정령세계를 벗어나는 거구나.' 세레나는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이 흐릿해지자 정령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엘레스트라에게 모든 사실을 전해들었기 때문에 더이상 정령세계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세레나는 엘레스트라에게 들은 사실을 아이의 부모인 네이브와 아이네에게 어떻게 전할지 걱정되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 회] 1. 탄생 2 네이브의 집은 엘프마을에서 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네이브는 세레나 엘프장로가 쓰러진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소환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최대한 빠르게 달렸다. 세레나가 쓰러진 원인을 알아내면 자신의 아이가 피를 흘린 이유도 알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이브가 엘프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더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오랜동안 소환하느라 모든 마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네이브는 태어날 때 세레나 엘프장로에 의해서 물의 최상급 정령에게 자연의 축복을 받아 물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은 높지만 바람의 정령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더욱이 친화력이 높지않은 정령을 소환하면 마나가 많이 소모되기 마련이다. "네이브 무슨 일이지요?" 네이브가 엘프마을에 도착해서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쓰러져 버리자 마을을 대표하는 카라테가 달려와 말했다. 엘프들은 네이브가 도착한 것을 하급정령이 알려주어 모두 알게되었다. 원래 정령들은 최소한 상급은 되어야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엘프들은 정령과 수백년을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하급정령이 느끼는 감정 만으로도 알수 있었던 것이다. "후욱 후욱 카라테님 큰일났습니다." "그것 보다도 일단은 휴식을 취한 후에 말씀하세요." 카라테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네이브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네이브의 몸을 운디네와 실프를 소환하여 씻겨주고 시원한 바람이 불도록 하였다. 엘프들이 정령사와 같은 숲에서 살고있긴 하지만 서로 왕래가 많지는 않기 때문에 많은 엘프들이 모여들어 네이브를 바라보았다. "카라테님 빨리 저의 집으로 가야합니다. 세레나 엘프장로님께서 제 아이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리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세상에" "어머나" 엘프들은 네이브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세레나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매우 고귀한 존재로 100여명의 엘프중에서 유일하게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분이다. 그녀가 있음으로 인해서 엘프들은 크라이 숲에서 지낼수 있는 것이다. 엘프들은 엘프장로가 없는 숲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장로가 될수 있는 자격요건이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을수 있는 엘프라야 가능하다. 만약 세레나가 잘못 된다면 100여명의 엘프들은 크라이 숲에서 살지 못하고 엘프장로가 있는 다른 숲으로 가야만 한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엘프들에게 전해오는 전통이며 역사인 것이다. 고대로부터 엘프장로들은 최상급 정령의 도움을 받아 많은 위기를 벗어났다. 정령은 대륙에 이성을 가진 종족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살아온 존재이기 때문에 알고있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의사전달이 가능한 정령은 최상급 정령 뿐이다. 상급 정령도 약간의 이성을 갖추었지만 겨우 세살이나 네살 된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대화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모두 포그너의 집으로 가세요!" "실라페" "실라페" 카라테가 네이브의 아버지인 포그너의 집으로 가자고 말하자 모든 엘프들이 바람의 중급정령을 소환하여 네이브의 통나무집을 향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갔다. 네이브는 엘프들이 자신이 살고있는 집을 아버지인 포그너의 집으로 부르자 약간 움찔하였다. 엘프들은 네이브의 아버지는 인정했지만 그의 가족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네이브가 지금까지 엘프들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크라이 숲으로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5년 동안 순찰을 한 것이 전부였다. 네이브가 실프를 소환해서 한 시간이나 달린 거리를 엘프들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엘프가 원래 민첩한데 바람의 중급정령 실라페까지 소환하니 그 속도는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네이브는 엘프들의 도움으로 중급정령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아이네 이제 걱정하지마. 내가 엘프분들을 모셔왔어!" 네이브는 통나무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산파인 디엘이 아이에게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자신이 없는동안 무슨일이 있을까 걱정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엘프들이 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하였다. "세레나 장로님 괜찮으신가요?" "저는 멀쩡하답니다." 네이브는 집안으로 들아오자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서있는 세레나 엘프장로를 바라보았다. 카라테를 비롯해 많은 엘프들도 집안에 머리를 들이밀고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를 바라보았다. 장로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것인데 멀쩡하니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마을에 가셨다고 에이네에게 들었습니다. 할말이 있었는데 모이셨으니 잘된 일이네요." 세레나는 성인이 된 엘프들만을 남기고 모두 마을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였다. 엘프들은 장로의 명령에 어리둥절 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레나가 최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장로의 신분이긴 하지만 세레나 보다도 오래 살아온 엘프가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명령은 아무때나 내리는 것이 아니다. 설사 간단히 엘프들을 모이게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장로님 무슨 일이신데 어린 엘프들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신 것인가요?" "이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크라이브와 타르는 저의 말을 들을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세레나는 네이브와 아이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실프를 소환하여 두 아이가 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인간마을에서 네이브가 데려온 산파 디엘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엘프들은 정령사가 아닌 인간을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이다. 정령사는 정령의 영향을 받아서 육식을 하지 않지만 보통 인간들은 육식을 하여 신체에 여러 생명의 잔재가 엘프들에게 느껴지게 된다. "네이브와 아이네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듣고서 놀라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세요. 그리고 엘프분들도 꼭 알아야 할 사항이니 경청해 주세요. 저는 이 아이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리기 위해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를 소환했습니다. 자연의 축복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세레나 엘프장로는 네이브와 아이네 그리고 성인이 지난 엘프들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정령세계에 다녀온 일은 엘프들에게 신기하고 영광스런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들은 내용은 네이브와 아이네 그리고 엘프들에게도 끔찍한 소식이었다. "패러렐 라이프라는 것이 있었다니..."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고?" "아이가 너무 불쌍하다." 조화로운 엘프에게 세레나의 말은 무척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엘프들은 조화롭기만 한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존재들이다. 죽음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엘프들이 모두들 인상을 찡그리고 아이네가 안고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나의 아가... 흑흑흑" "이럴수는 없어." 아이네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고, 네이브는 세레나의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열 다섯살에 죽을 운명이라니 그렇다고 믿지 않을수도 없었다. 하급 정령사로서 엘프나 정령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음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네이브는 차라리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크라이브와 타르는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정령에 의해서 아무런 소리도 들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레나는 두 아이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고는 엘프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엘프마을은 인간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대부분의 집이 나무위에 지어져 있고, 덩쿨로 집이 가려져 있어서 인간이 마을을 발견해도 신기하게 생각할 뿐이지 엘프가 살고있는 곳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태어난 카인이란 인간아이는 크라이 숲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제지하지 마세요. 설사 숲의 나무나 동물을 죽일지라도 말입니다. 장로로서 내리는 명령이니 제 뜻에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장로님" 세레나가 마을로 돌아와서 모든 엘프들을 불러놓고 카인이란 아이를 절대 건드리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숲을 지키는 엘프로서 절대로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성인을 거친 대부분의 엘프들은 장로가 그렇게 명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린 엘프들은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장로님께서 왜 그러신거지?" "무슨일이 일어났나?" "어떻게 된 일이야?" 어린 엘프들이 자기들끼리 장로의 말에 어리둥절 하였지만 어떤 성인엘프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어린 엘프들은 궁금해 하면서도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성인엘프 모두가 성인이 되면 말해준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세레나는 조화로움을 따르는 엘프로서 운명이 결정된 카인이란 아이에게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것이 운명이 결정된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조화를 따르게 하는 방법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성인엘프들도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고 있었다. 죽음이 결정된 운명을 이렇게라도 하여 바꿔보려는 엘프들의 작은 노력인 것이다. 크게 본다면 이것은 운명을 선사하는 신에게까지 조화를 따르도록 하려는 엘프의 마음이다. ------ 크라이 숲의 아래에 생긴 크라이 마을은 500여명의 인간이 디글이라는 곡식을 심어서 농사짓고 살아간다. 이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굶어죽을 각오로 대륙의 최남단인 이곳까지 내려와 정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지 않아서 농사짓고 살아가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정령사 가족이 이곳에서 몇십년 전 숲에 정착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할수 있게 되었다. 정령사 가족이 엘프들에게 부탁해서 가뭄이 들면 비가 내리게 해주고, 병이 들면 치료까지 해주는 것이다. 물론 도움을 받는 정령사 가족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했지만 도움을 받는 것에 비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을에서는 정령사 가족이 풍족하게 먹을수 있는 디글부터 시작해서 모든 생활 필수품을 주어야 했다. 마을에서는 정령사 가족에게 건네주는 물품들을 가장 최고품으로 주었다. 그들의 마음에 들어야만 가뭄이나 마을 사람이 아프면 정령사 가족을 통해서 엘프들에게 도움을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간단한 일은 정령사 가족을 통해서 도움을 받는다. 정령사 가족은 엘프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능력을 조금씩 사용하는 것을 마을 사람들도 알고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도 인간을 싫어하는 엘프보다는 같은 인간인 정령사 가족에게 도움받는 것이 부담이 없고 좋았다. 정령사 가족의 일원인 나는 숲에서 산다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모든 가족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 첫째 형과 둘째 형이 나를 괴롭히면 아버지는 형들을 혼내기 일쑤였고 인간마을에서 말썽을 부려도 부모님은 나를 혼내지 않으셨다. 하지만 형들이 잘못하면 나와는 다르게 크게 혼내신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첫째 형, 둘째 형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일곱 식구로 세 채의 통나무 집에서 살고있다. 우리 가족이 살고있는 곳은 크라이 숲으로 엘프들이 살고있다는 신성한 숲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엘프마을을 구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매일같이 놀라다니는 곳은 크라이 마을이라 불리는 곳으로 한 시간을 넘게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첫째 형은 매일같이 나를 친구들이 사는 마을로 데려다준다. 그러면 나는 둘째 형이 올때까지 신나게 친구들과 놀면서 지낸다. 점심은 마을에 살고있는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달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고 보살펴 준다. 친구들이 그러는데 나의 가족이 엘프들과 친한 정령사 가족이라서 그런다고 말해주었다. "카인 여기야. 여기!" "대장인 나를 기다렸구나. 하하하!" 크라이 마을에 도착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니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자 나도 큰 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힘도 강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대장노릇을 하고있다. 마을 어른들이 내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놀아야 한다." "알았어. 크라이브형" 크라이브형은 나를 크라이 마을까지 데려다 주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우리 가족이 마을이 아닌 숲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내가 부모님에게 마을에서 살자고 졸랐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던 부모님은 처음으로 거절을 하셨다. 아마도 우리 가족은 크라이 숲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 같았다. "카인 다들 어디있어?" "지금 숨바꼭질 하면서 놀고있는데." "뭐라구? 내가 오늘 신기한거 보여준다고 했잖아. 빨리 모두 모이라고 해." 나는 니트에게 말해서 숨박꼭질을 하는 친구들을 모두 모아놓으라고 말했다. 니트는 나의 말을 듣더니 마을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모두들 나의 말을 들어야만 앞으로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어서 모이지 않는 친구는 없었다. 나는 한 번 삐지면 마을 어른들을 찾아가 나하고 놀아주지 않는다고 일러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친구들은 부모님에게 회초리까지 맞아가며 엄청나게 혼난다. "대장 보여줄 것이 뭔데? 빨리 하고 다같이 숨바꼭질하자." "너 조용히 못해!" 나는 숨바꼭질을 다시 하고싶어 하는 친구를 향해서 소리쳤다. 대장인 나의 말에 감히 토를 달다니 나중에 마을 어른에게 말해서 혼내야 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 정령 구경한 적 있어?" "우리가 어떻게 정령을 구경해. 숲에서 살고있는 엘프들은 우리만 보면 싫어하더라. 저번에는 숲으로 들어가려는데 들어오지 못하게 화살까지 날렸는걸. 우리같이 어린애들한테 화살까지 날리다니 엘프들은 모두 겁쟁일거야. 그치?" "맞아. 엘프들은 겁쟁이고 나쁜 놈들이야. 숲이 자기들것도 아닌데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말이야." 친구들이 나를 향해서 엘프들에 대한 의견을 말해주었다. "내가 대장으로서 너희들이 정령을 볼수있는 특권을 내려주지. 하하하" "정말이야?" "어떻게 보여줄건데?" 친구들이 나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을 어른들은 언제부터인가 정령만 있으면 가뭄이나 병이 들어도 걱정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살기 때문에 정령에 대해서 무척이나 궁금해 한다. "내가 아빠한테 졸라서 정령과 친구가 되었어. 그래서 가장 허약한 정령 한 마리를 불러낼 수 있다!" "정말이야?" "정말이구 말구." 니트를 비롯해 친구들이 모두 나를 향해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우리 가족은 물의 정령과 아주 친하데. 나도 어른이 되면 물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아빠를 졸라서 물의 정령중에서 가장 약한 운디네라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그동안 무척이나 고생했다. 히히히!" "우와! 신기하다. 빨리 보여줘!" "보여줘" "어떻게 생겼는데 정말 보고싶다." 나는 친구들이 정령을 보고싶어 하자 기분이 좋았다. 이것을 노리고 그동안 아버지에게 얼마나 졸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허락을 맡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운디네라는 정령과 계약을 맺고 소환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소환에 성공하긴 했지만 3초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하고 친구들에게 정령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정령을 불러낼 테니까 잘 봐야해. 나는 오래 불러내지 못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니까 모두들 똑똑히 보란 말이야. 못보면 나도 책임못져." "알았어. 빨리 불러내봐." 친구들이 눈을 동그렇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지 않으려고 눈까풀을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친구들의 기대어린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가르쳐준 그대로 물의 정령 운디네를 생각하였다. "운디네" 내가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를 부르자 희미한 안개 비슷한 모양으로 날개를 가진 요정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운디네는 불러낸지 2초도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몸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시간이 짧은 이유가 마나가 부족해서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버지가 말하는 마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목적은 정령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지 정령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다. "우와! 나는 봤다." "뭐야? 나는 못봤는데." "나도 봤어. 날개를 가진 모습이었어." "신기하다." 나는 친구들의 말을 듣고서 아쉬움이 남았다. 40여명이 넘는 친구들중에서 열 명만이 운디네를 정확히 봤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그저 흐릿한 안개만 보았거나 아예 보지도 못한 것이다. 너무 짧은 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볼수 없었던 것이다. "대장 다시 보여줘." "아휴! 이게 얼마나 힘든줄 알아? 하루에 한 번 하면 더이상 못한단 말이야." 나는 니트의 말을 듣고서 화가났다. 나와 가장 절친한 친구인 니트가 운디네를 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못보는거야?" "아니. 니트 너는 나와 가장 친구하니까 내일 보여줄께." "대장 나도 보여줘." "대장 나도" 내가 니트에게 내일 보여준다고 하자 다른 친구들도 나를 향해서 말했다. 다른 친구들은 보았는데 자신만 보지 못했다면 억울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운디네를 본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정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내일 다시 보여줄께." "역시 우리 대장이야." 친구들의 말에 나는 어깨가 으쓱 하였다. 나는 이 세상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른들이 내 말이면 모두 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만지는 큰 돈도 내가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면 선뜻 주시기까지 한다. 가끔 두 명의 형들이 부모님에게 푸대접 받는 것이 불쌍하긴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면 형들에게 잘해주리라 생각하였다. ------ 크라이브는 열 다섯살이 되어서 이제는 성인이 되었다. 크라이브는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 보다도 자신이 가족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인간은 보통 성인식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이 없다. 하지만 정령사들은 엘프종족의 전통을 따르는 경우가 많아 성인이 되면 부모라도 자식의 의견을 존중한다. 즉, 모든 가족의 일들을 동등한 입장에서 상의해서 처리하는 것이다. "크라이브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크라이브는 할아버지인 포그너의 말을 듣고서 기뻤다. 크라이브가 열 다섯살이 되었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크라이브의 할아버지 포그너, 할머니 세실리아 그리고 아버지 네이브와 어머니 아이네까지 모여 있었다. 크라이브의 동생 타르는 마을에 놀고있을 카인을 데리러 갔다. 마을이 4km 밖에 있어서 걷는데만도 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찍 나간 것이다. "크라이브 축하한다. 이건 선물이란다." "네가 어른이 되다니." 크라이브는 네이브와 아이네가 건네주는 선물을 받고 즐거웠다. 하지만 크라이브는 성인이 된 것 보다도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막내 동생인 카인을 가족들이 왜 그렇게도 소중히 하고 편애하는지 말이다. 크라이브는 솔직히 그것이 편애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단지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을 하지만 그것에 대해 예전에 질문했을 때 무척이나 혼났기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호기심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모두 고마워요. 그런데 어머니는 제가 성인이 되면 무엇을 선물 받고 있는지 가장 잘 아실거에요." "흠." 크라이브의 말에 가족들은 미소를 짓다가 헛기침을 하며 엉뚱한 곳을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알아야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머니 꼭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크라이브는 어머니의 말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도대체가 카인은 태어난 순간부터 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크라이브가 철이 든 이후로 그것이 편애가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수 없구나. 당신이 얘기하세요." 아이네는 남편 네이브에게 말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아이네가 나가자 포그너와 세실리아도 슬픈 눈으로 크라이브를 바라보며 방을 나왔다. 모두들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라이브는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놀라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하였다. 부자지간만이 방안에 남게되자 네이브는 성인을 맞이한 자신의 첫째 아들 크라이브에게 카인에 대한 출생비밀을 말하기 시작했다. 카인이 패러렐 라이프란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마지막으로 카인이 열 다섯살이면 죽는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크라이브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불쌍한 막내 동생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크라이브는 성인식을 슬프게 맞이하고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 회] 1. 탄생 3 나의 첫째형 크라이브는 성인식을 치루고 나서 착한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내게 잘 대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에게 정령술을 배우지 않는 시간에는 나와 놀아주는 시간이 길어졌다. 형들이 놀아주는 시간이 많아지자 나는 크라이 마을에 놀러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물론 둘째형 타르는 크라이브의 변화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성인식을 치루면 모두 착해진다고 결론지었다. 나의 어린시절은 이렇게 행복하게 흘러갔다. 가족의 일들이 나를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나는 그것을 당연시 생각하였다. 아침식사에 올라오는 반찬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고 나는 형들과 다르게 정령술의 공부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크라이 마을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잠깐 아버지를 졸라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와 계약을 맺었을 뿐이다. 내게 정령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어서 아버지가 정령을 강제로 계약시켜 주었던 것이 전부이다. 어렸던 내게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거웠다. 호기심 많은 나의 성격을 첫째형 크라이브가 따라다니며 충족시켜 주었고 가지고 싶은 것은 부모님을 졸랐다. 내게 유일하게 제약을 거는 일이 있다면 엘프들이 살고있는 곳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곳으로 가려다가 아버지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다. 물론 나는 내멋대로 생활을 하다가 제제를 받게되자 너무 억울하여 하루내내 울었다. 그 다음부터는 엘프들이 살고있는 크라이 숲의 중앙으로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즐거웠던 것은 열 한번째 생일을 맞이하고서다. 그 해에 둘째형 타르가 성인식을 맞이함으로 해서 이제 가족중에 성인식을 맞이하지 않은 것은 나 뿐이었다. 둘째형 타르는 성인식을 맞이한 다음날부터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만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타르가 눈물 흘리는 것을 바라보며 첫째형 크라이브의 성인식을 생각했다. 타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성인식을 치루고 난후 착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분명하였다. 내가 생각하던 것이 정확히 맞았는지 둘째형 타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무척이나 잘 대해주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부모님의 지시로 함께 놀아주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지만 이제는 착해졌는지 크라이브와 마찬가지로 타의가 아닌 자의로 내게 정성을 쏟았다. 나의 성인식을 일년 앞두고 크라이 마을에는 재앙이 찾아왔다.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은 바로 가뭄이었다. 카르시온 제국에 살고있는 모든 인간들은 디글을 주식으로 삼는다. 크라이 마을도 디글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데 가뭄으로 인해 추수기간까지 디글이 자라지 못하는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가뭄이 찾아오면 인간도 아프기 마련이었고 크라이 마을이 많은 사람들이 풍토병(風土病 )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다. 크라이 마을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정령사 가족인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결국 마을의 위기는 나의 할아버지 포그너가 나서서 모두 해결해 주었다. 일단 마을의 풍토병은 아버지 네이브가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정령술로 치료해 주었다. 아버지는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을 소환할 수 있기 때문에 물의 정령을 이용한 치료술을 전개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마을사람들을 치료할 순 없었고 일부 심하게 앓는 사람만을 치료하였다. 정령사가 치료를 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경우에 한한다. 물의 정령만이 치료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바람의 중급정령사이지 물의 정령사는 아니다. 물론 물의 하급정령과 계약을 맺었지만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에 비해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엘프장로 세레나가 소환한 물의 최상급 정령에게 자연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물의 정령의 친화력 만큼은 뛰어나다. 마을 사람들의 풍토병은 아버지로 인해서 해결되었고 디글농지의 물부족은 엘프들의 도움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엘프마을을 찾아가 부탁하였던 것이다. 엘프중에 물의 정령사가 매일 찾아와 디글에게 매일같이 물을 뿌려주어 가뭄에도 불구하고 디글이 자라는 곳에는 물이 풍부하게 공급되었다. 물론 엘프는 인간들을 무척이나 싫어하기 때문에 엘프가 디글농지에 물을 주기 위해서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은 엘프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피해 있어야 했다. 그해 카르시온 제국에는 가뭄으로 인해 먹고살기 힘든 시기였다. 먹을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많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 살고있는 크라이 마을 사람들과 우리가족은 그것을 알길이 없었다. 가끔씩 마을 사람이 카르시온 제국에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여행갈 때만이 그런 소식을 전해오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엘프들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서 카르시온 제국에 다섯 명의 사람을 보내었다. 엘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크라이 숲에서 살고있지 않는 나무의 묘목이나 씨앗같은 것들이었다. 크라이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족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엘프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많이 구해왔다. 상당한 분량의 디글을 카르시온 제국으로 가져가 판매하고 받은 돈으로 구해온 것이다. 물론 운반도중에 디글 70퍼센트를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빼앗기는 수모를 겪은 후에 말이다. 사실상 카르시온 제국의 평민이 가진 재산을 귀족이 빼앗는 경우는 자주 있지만 귀족들도 나름대로 갈취의 예가 있기 마련이다. 카르시온 제국에는 어떤 경우라도 40퍼센트 이상의 세금을 백성들에게 요구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이 세금법을 어기면 귀족으로서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것은 물론이고 평민이 목숨걸고 제보할 경우 상당히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일정분량의 디글을 빼앗겼고 결국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 운반했던 디글의 30퍼센트 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에는 흉년이 들었던 상황이라 비싼 값에 디글을 판매할 수 있었고 그 돈으로 엘프들이 원하는 것을 구해온 것이다. 크라이 숲은 카르시온 제국에 속한 지역이긴 하지만 최남단이라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이곳에 사람이 살고있는 것조차 카르시온 제국에서 알고있지 못한다. 그래서 크라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엘프들에게 선물할 묘목과 씨앗을 구하기 위해 카르시온 제국에 다녀온 다섯 명의 마을사람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에서 가져온 신기한 물건이 많았고 또한 여러가지 소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500여명이 살고있는 작은 마을에는 그다지 흥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없기 마련이다. 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가져온 끔찍한 소식은 제국 전역에 발생한 가뭄의 소식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본 것을 과장하기 마련인데 사실상 제국을 직접 다녀온 다섯 사람은 과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 끔찍함이 말로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한 동안 크라이 마을에서 제국을 다녀온 다섯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매일같이 놀러다녔다. 제국의 수도 말린에서 보았던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 말들을 모두 믿을수는 없었지만 호기심을 누르진 못했다. 사실상 크라이 숲과 마을만 보고 자란 나이기에 머리속에서 상상이 불가능한 이야기 뿐이었다. "대장 빨리와!" "알았어" 나는 촌장의 아들인 니트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고는 얼른 뛰어갔다. 나와 함께있던 크라이브와 타르가 기다린다는 소리가 등뒤로 들려왔다. 나의 형들은 집에 함께가기 위해서 늦게까지 나를 기다릴 것이다. "나도 대장같이 착한 형들이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형들은 내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 히히" "부럽다." 니트는 멀리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크라이브와 타르를 바라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니트의 말에 어깨가 우쭐 하였다. "대장 여기야." "대장이 왔다. 이제 시작하자." 나의 친구들이 모두 개구리를 손에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굴 개굴" "개굴개 굴개굴" "대장이 맡긴 개구리 여기있어." 파인이 내게 커다란 개구리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집까지 개구리를 가져가기 귀찮아서 파인에게 맡겨놨던 것이다. 개구리의 색깔은 흑갈색으로 매우 흉측하게 생겼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장난감으로 보일 뿐이었다. "밥은 많이 주었지?" "물론이야. 대장이 시킨대로 지렁이, 잠자리, 파리, 개미, 귀뚜라미 그리고 거미를 잔뜩 잡아서 먹였어." "잘했어. 이놈 많이도 먹었네." 나는 개구리의 등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땅에는 친구들이 만든 개구리전용 트렉이 있었다. 양쪽에는 나무로 한뼘 정도 높이의 벽이 만들어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어깨넓이 만큼의 길이 있었다. 개구리 경주를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모두들 준비해." 친구들은 나의 말에 한 손에 쥐고있던 개구리를 트렉에 놓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나뭇가지에 개구리가 먹을만한 곤충을 매달아 놓았다. 모두들 개구리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 준비한 것들이다. 물론 개구리가 무조건 앞으로 뛰어가게 훈련시키면 좋겠지만 개구리가 그럴일은 절대 없기 마련이다. 먹이로 꼬시거나 뒤에서 소리를 질러 겁을주어 앞으로 뛰어가게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시작!" 나의 말에 모두들 개구리를 손에서 놓았다. 나도 개구리를 놓아주고 그 뒤에다 마을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귀찮게 먹이로 유인하는 것보다 뒤에서 소리 지르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방법은 목소리 큰 사람이 가장 유리하다. "달려라" "야아아아아" "짝짝짝짝" 개구리 바로 뒤에다대고 손뼉을 치거나 소리를 지르고 응원을 하는 갖가지 모습이 연출되었다. 개구리는 우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쇼를 보여주고 있었다. 뒤로 달리거나 혹은 트렉을 벗어나 숲을 향해 도주를 선택한 개구리도 있었다. 물론 나의 개구리는 저런 망나니 개구리들과 다르게 오직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내가 뒤에서 지르는 소리에 놀라서 뛰는 것인지 아니면 승리하기 위해서인지 알길은 없다. "1등이다!" "아깝다. 2등이네" 니트가 1등이었고 에리나가 2등을 차지하였다. 나는 3등을 겨우 차지할 수 있었다. 많은 친구들이 아직도 개구리와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가장 황당한 개구리는 선두로 달리다가 갑자기 꿈쩍도 하지않는 파인의 개구리였다. 나같으면 소리를 계속해서 질렀겠지만 파인은 누가 내성적인 성격 아니랄까봐 개구리를 쓰다듬으로 제발좀 뛰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열 마리의 개구리가 꼴인지점에 올수 있었다. 물론 다른 개구리들은 경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꼴인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을 향해서 뛰는 개구리들은 어쩔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다른 놀이를 해야했다. 개구리 시합으로 발생한 경주순위는 다른 놀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술래잡기를 할 때에도 개구리 시합에서 꼴지를 한 사람이 술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승리를 여러번 쟁취한 개구리는 꼭 구워먹는다. 만약 승리만 하는 개구리를 그냥 두면 항상 그 친구는 개구리가 죽지 않는 이상은 언제나 승리만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예전에는 승리를 쟁취하는 개구리가 있었지만 다섯 번이나 승리를 한 이후에 나의 배속에 고이 모셔질 수밖에 없었다. "참! 대장 엘프소식 들었어?" 나는 니트가 꺼내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엘프에 대해서 나쁘게만 생각하던 친구들이 가뭄을 겪고나서 나름대로 엘프들을 좋게 생각하고 있는 친구가 생겨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의 친구들은 크라이 숲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엘프들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 "엘프 소식이라니?" "대장은 크라이 숲에서 살면서 그것도 몰라? 내일 우리 아버지가 대장의 할아버지와 함께 엘프마을에 가신다고 했어.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에서 구해온 묘목하고 씨앗을 가져다 줄 거라고 했단 말이야." 나는 니트의 말을 듣고서 움찔하였다. 우리 가족은 나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지만 엘프들이 살고있는 크라이 숲의 중심에는 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단 말이지. 내일 엘프마을에 가려면 당장 집에가서 부모님을 졸라야되겠다.' 지금까지 내가 원해서 불가능했던 일은 엘프마을에 가지 못한 것 뿐이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엘프마을을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니트 나 당장 집에 가야겠어." "대장 아직 술래잡기가 끝나지 않았어." 니트는 내가 간다고 하자 불만을 이야기했다.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에 일찍 가버리는 것은 무척이나 못된 짓이라고 우리들끼리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내가 술래를 할께. 그러면 되지?" "정말이야? 그럼 다음에 오면 대장이 술래가 되는거야." "알았어. 나 먼저 갈께." 니트는 나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친구들에게 뛰어갔다. 내가 술래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서 다들 좋아할 것이다. 이런 피해를 감수하고 내가 집으로 일찍 가려는 이유는 오직 엘프마을을 가기 위해서이다. 할아버지를 만나 내일 함께 동행을 시켜달라고 졸라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 승낙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엘프마을을 구경하면 친구들에게 그것을 자랑하려는 이유가 가장 큰 것이고 다음으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족들이 엘프마을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엘프마을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은 나지만, 나는 엘프를 만나고 수십년 동안 슬픔을 간진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을 알지 못했다. ------ "카인아 안된단다." 할아버지 포그너는 나의 말에 고개를 흔들면서 안된다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우리 가족은 나로 인해서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엘프마을을 가는 할아버지와 함께 동행을 해야겠다는 나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가족들의 대립 때문이다. "카인아 엘프들은 인간을 싫어한단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엘프들은 정령사인 인간은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것은...휴우..." 할아버지는 나의 말에 손을 이마에 얹으시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엘프를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엘프는 한 달에 한 번 우리집에 찾아오기 때문에 엘프를 본적은 있다. 하지만 엘프들이 사는 마을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 엘프의 집은 어떻게 생겼느지 무슨일을 하는지 궁금하였다. "할아버지 그럼 마을 근처까지만 갈께요. 저는 그냥 마을만 보고 싶은 거에요. 엘프는 가끔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구경했으니 궁금하지도 않아요."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면 데려가주마." "할아버지 정말이죠?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기운을 얻었다. 무려 한 시간을 조른끝에 드디어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이제 아버지의 허락만 받으면 나의 뜻대로 내일 할아버지를 따라갈 수 있게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나를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셨지만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아빠! 어디있어?" 나는 아버지를 부르며 소란을 피웠다. "카인 왜그러니?" "아빠 내일 할아버지 따라서 엘프마을에 가도 되죠? 할아버지는 허락하셨단 말이야."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허락하셨다는 말에 깊은 생각에 빠지셨다. 사실 할아버지는 멀리서 마을을 살짝 구경하고 가라는 말이었지만 내 멋대로 말을 약간 바꾼 것이다. 아버지는 내 말을 믿으시고 고민을 하기 시작하셨다. 어머니까지 나의 말을 듣더니 우울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모든 가족이 내가 엘프마을로 가는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고민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엘프마을을 멀.리.서. 보고 곧바로 돌아올께요."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멀리서 엘프마을을 보고 곧바로 돌아온다는 말에 부모님의 얼굴이 약간은 밝아지셨다. "엘프마을을 보고 곧바로 돌아와야한다. 알았지?" "그럼요. 약속해요."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였다. 물론 나는 절대 마을을 멀리서 구경만하고 오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엘프마을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모두 구경하려는 생각이다. 내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나의 가족은 절대 나를 혼내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허락받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할아버지는 나의 말을 듣더니 무척이나 놀라셨다. "결국 알려줄 때라는 건가." 할아버지는 이상한 말씀을 중얼거리시더니 나를 포옹하셨다. "할아버지 왜 그래요?" "나의 손자가 귀여워서 그렇지." 나는 할아버지의 수염 때문에 얼굴이 따가와 발버둥쳤다. 열 네살이나 된 나를 아이처럼 포옹하다니 창피해서 속이 상했다. 하지만 이어진 할아버지 말 때문에 화는 금새 풀어졌다. "엘프마을을 멀리서 구경만하고 곧바로 돌아와야 한다. 알았지?" "그럼요. 걱정마세요." 크라이 숲은 맹수(猛獸)가 없기 때문에 내가 위험에 처할 경우는 없다. 단지 엘프들은 인간이 숲으로 접근하면 상당히 공격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그나마 우리 가족은 정령사라 숲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가족중에 나만 숲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 나는 이것 때문에 가족들에게 항의를 한 적도 있다. '내일 엘프마을을 구경하면 니트에게 제일 먼저 알려줘야지.' 나는 내일 할아버지를 따라 엘프마을을 구경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엘프마을만 제대로 구경하면 크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엘프마을을 구경했다고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엘프들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아는게 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것을 두고 하는 건가.' 나는 즐거운 고민으로 인해서 새벽이 되어서야 잠을 이룰수 있었다. 잠이 들고 꿈에서 가족들이 나를 향해 울고있는 모습을 보았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 회] 1. 탄생 4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엘프마을을 구경하기 위한 준비물을 챙겼다. 자세히 구경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테고 그렇다면 간식을 빼놓을 수 없다. 어머니가 가끔 만들어주시는 아끼며 먹었던 쿠키와 과일을 가방에 챙기고 등에 메었다. 또한 잊어먹지 않기 위해서 기록할 종이와 연필도 잊지 않았다. 종이와 연필은 마을에서 만들수 없는 물건이라 귀하다. 친구들은 마을에서 글을 배울 때 종이와 연필을 사용하지 않는다. 판판한 나무에 머쿠를 잡아다 썩혀서 그것을 찍어 사용한다. 가끔 마을에 있는 연못이 시커멓게 변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머쿠의 시체가 썩는 과정이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크라이 마을의 친구들은 여덟 살에 모두 글을 배웠다. 그래서 열 살이 되면 누구나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하다. 아무리 이곳이 최남단이고 문화가 떨어져도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나는 가족들의 비호아래 천방지축이었기 때문에 열 살이 넘도록 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 결국 열 두살에 스스로 친구들 앞에서 대장노릇을 하려면 모두들 알고있는 글을 알아야겠기에 배운 것이다. "카인아, 너도 같이 간다며?" "네, 플레인 아저씨" 크라이 마을의 촌장인 플레인이 내게 말했다. 플레인은 등에 커다란 등짐을 지고 있었는데 니트가 말한 나무묘목과 씨앗 같았다. 엘프들은 뭐하러 쓸데없이 나무를 키우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인도 아저씨처럼 짐이 있구나." "간식이에요. 그리고 종이하고 연필도 있어요." "준비가 철저하구나." 플레인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으셨다. 할아버지와 플레인 그리고 내가 가려는 것을 가족들이 배웅해 주었다. 할아버지도 엘프마을을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더구나 지금은 엘프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까지 동행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크라이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것을 전달해 줄수도 있지만 엘프들은 그런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플레인 아저씨는 엘프마을에 몇번 가보셨어요?" "이번이 처음이란다." "우와! 정말이에요? 나하고 똑같네요. 저도 처음이에요." 플레인의 대답에 나는 힘을 얻었다. 나만 기대에 부풀어 긴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어른인 플레인이 흘리는 땀방울은 등짐 때문이 아니라 나처럼 엘프마을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더욱이 플레인은 우리 가족처럼 정령사가 아니라 엘프들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인간이다. "할아버지 저것봐요!" 나는 길을 걷던 도중에 허공에 떠있는 괴상한 안개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잠시후 안개는 둥그런 형태를 갖더니 숲의 중앙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실프구나. 엘프마을의 주변에는 하급정령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놀랄 일이 아니란다." "정말이에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보여준 실프하고 모습이 다르네." "엘프들은 정령을 친구처럼 대하기 때문에 정령 스스로 형태를 자유롭게 한단다."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반적으로 정령은 계약을 맺은 주인의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인데, 엘프와 계약을 맺은 정령은 인간처럼 정령이 인간의 형태를 갖고 있다는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에 형태가 자유롭다. 반면 인간은 자신이 자라온 것을 기초로 세상을 바라보고 결론짓는 우물안 개구리의 오류를 자주 범한다. "플레인 아저씨 뭐하세요?" "아..아.. 아니란다." 플레인은 방금전에 보았던 실프를 보고 무척이나 놀란듯 말을 더듬으면서 나의 말에 대답했다. 할아버지에게 미리 말을 들었으면서 귀신보듯 놀란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저 아저씨가 어떻게 크라이 마을의 촌장이 되었는지 심각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걸어갈수록 여러 형태의 하급정령을 보게 되었다. 당장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정령을 그려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직 중요한 엘프마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카인 이제 너는 돌아가야겠다." "할아버지 무슨말이에요? 저는 아직 엘프마을을 구경도 못했는데요." 숲을 향해 걷다가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시고 내게 말했다. 신기하게 생긴 하급정령을 본 수확도 있지만 이것은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더욱이 오늘 할아버지가 엘프마을을 멀리서 구경할 수 있도록 약속했는데 돌아가라고 말하시다니 너무나 억울했다. "카인아 저기 큰 나무위의 덩굴 사이를 자세히 살펴봐라." 나는 할아버지가 손으로 가르키는 방향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둘레가 굵은 나무를 덩굴이 휘감고 있었고 나무 위를 자세히 바로보니 커다란 나무상자처럼 보였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니 가까이 가면 나무위에 지어놓은 오두막 같았다. "할아버지 저거 혹시 엘프집인가요?" "바로 맞췄다. 우리 카인은 똑똑하구나." 계속해서 바라보니 나무위에 오두막이 있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나무가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경우는 나무위가 아닌 바닥에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곳을 그냥 스쳐서 지났을 것이다. 더욱이 나무마다 뚜렷한 모양이 아닌 안개모습인 정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인아 이제 돌아가거라. 알았지?"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다. 나는 엘프마을을 구경했고 더이상 할아버지와 동행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집을 향해서 걷다가 손을 흔들고 계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곧바로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엘프집을 멀리서 본 것으로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엘프마을을 직접 보게되자 만지는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 보여줄 전리품이라도 얻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가면 할아버지와 마주치겠지?" 나는 할아버지가 가신 방향에서 우측 방향으로 한참이나 걸었다. 크라이 숲의 중앙에 처음오는 것이라 길을 잃지 않도록 바닥에 표시까지 하였다. 실수하면 엘프마을이 어디있는지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신중을 기한 것이다. 상당한 거리를 우회하자 나는 일단 가방에서 어머니가 구워주신 쿠키를 꺼내 먹으며 아까 보았던 정령을 종이에 그렸다. 누가 보았다면 이해하지 못할 추상화(抽象畵)지만 내가 보기엔 명화(名畵)나 다름없었다. "지금쯤이면 할아버지가 엘프마을을 떠나셨겠지?" 수십장의 명화가 담긴 종이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엘프마을을 향해 걸었다. 혹시라도 할아버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엘프마을에서 다른 방향으로 온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나는 천천히 엘프마을을 향해 걸었다. "저건가? 에이 아니군." "저것도 아니잖아." 엘프마을을 찾기 위해서는 나무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했다. 아까 보았을 때는 상자모양을 얹은 나무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나무가 덩굴에 휩싸인 모습이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엘프마을을 꼭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열심히 걸으며 엘프집을 찾아나갔다. "앗! 찾았다." 엘프마을을 찾았다는 기쁨에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 있던 새들은 나무에서 하늘로 날아올랐고 작은 동물들은 시끄럽게 울어댔다. "후두득 후드득" "찌리찌리 찌리찌리" "스르르르르" 나는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엘프마을을 대충 그리고는 살금살금 제일 크게 생긴 엘프집을 향해 걸었다. 나는 조용하게 걷는 것이었지만 나의 모습을 수많은 정령들이 바라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령사 가족의 일원이지만 정령기초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엘프집이 제일 큰 것 같으니까 나뭇가지 조금만 잘라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해야지.' 엘프마을에서 나무를 자른다는 생각을 가진 미친 정령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바로 크라이 숲에서 그것을 행하려는 무식한 인간이 바로 나인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사실을 배우지 못한 죄로 알지 못했다. "딱" 제일 큰 엘프집이라 생각되는 나무의 가지를 자르자 그 소리 때문인지 몰라도 나무에 있던 정령들이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무시무시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란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조건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후다닥. 후다다다다닥. 나무의 정령들을 피해서 열심히 도망가고 있지만 곧 잡힐 것 같았다. 정말이지 열 네살까지의 모든 생애중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어어, 어어" 정령을 피해서 달리는데 갑자기 누간가가 나의 진로를 막고 있었다. 나는 달리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탄성을 지르며 진로를 막고 있던 누군가의 품에 안겼고 뒤따라 오던 정령이 생각나 두 눈을 감고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자 두 눈을 떠 보았다. '어라? 엘프네.' 나의 진로를 방해하던 누군가는 엘프였다. 엘프를 쉽게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옷차림과 얼굴 때문이다. 숲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우리 가족과 엘프밖에 없었고 나를 막아선 엘프는 이쁘게 생겼기에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나를 향해 돌진하려던 정령들은 나의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엘프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엘프님 살려주세요!" "후훗" 나무의 정령들을 지켜보던 나는 엘프들이 정령과 친하다는 것이 생각나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하지만 엘프는 나의 말을 듣고서 소리내어 웃더니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정령들은 엘프가 말하는 소리에 반응하고는 하나둘 내게서 멀어졌다. "카인 저것은 나무의 정령인 드라이어드라고 한다. 네가 나뭇가지를 꺾어서 화난거야." "겨우 이것 때문에 정령들이 화난거에요?" "나무의 정령들에게는 그럴만한 일이란다." 나는 오른손에 쥐고있던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나무 주위를 돌고있는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나무의 정령이라서 화난 것을 이해는 하였지만 겨우 이것을 가지고 그러다니 너무한다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령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한 탓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잠깐 정령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앞에 있는 엘프가 나를 카인이라고 불렀음을 기억해냈다. "엘프님 저를 아세요?" "물론 알고있지. 네가 태어났을 때 자연의 축복을 내린 것이 나란다." "앗! 세레나 엘프장로님이시구나. 할아버지에게 들은적이 있어요." 나는 세레나의 말을 듣고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방금전까지 열 네살까지의 생애중 가장 위험한 고비를 겪은 것도 잊은채로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찾아오는 엘프를 멀리서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코앞에서 엘프를 보게되자 즐거웠다. 세레나 엘프장로의 머리카락은 귀신처럼 길었고 굶었는지 허리, 다리, 팔 그리고 목까지 모두 얇았다. 물론 이것은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아줌마들과 비교했을 경우였다. 나는 어른이 되면 세레나 엘프장로처럼 생긴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다. 절대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아저씨들처럼 굵직한 몸을 가진 아줌마들과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다. 물론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아줌마가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대부분 그렇다. "이곳은 어떻게 온 거니?" "그... 그건..." 나는 엘프를 만났다는 즐거운 표정을 곧바로 얼굴에서 지우고 말을 더듬거렸다. 내가 엘프마을에 왔다는 사실을 그대로 밝히면 내가 무슨짓을 당할지 무서웠다. 우리 가족이 무엇 때문에 엘프마을에 오지 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왜 그러니?" "구경하러 왔어요!" 세레나 엘프장로의 질문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사실을 크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나는 무슨 일이 생기게 될지 걱정하며 실눈을 뜨며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럼 구경하거라.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게 물어보려무나."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렸다. 별거 아니지만 내게는 우여곡절 끝에 이곳까지 오게되어 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안내해주마." "야호! 신난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마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시켜 주었다. 나도 나름대로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기록을 하며 그림도 그렸다. 하지만 세레나는 나의 추상화를 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은지 대신 그림을 그려주었다. 물로 내가 보기엔 나의 그림과 별차이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장로님 그런데 왜 마을에 엘프분들이 한 분도 없어요?" "후훗! 지금 모두들 카인이 놀랄까봐 숨어 있는 거란다." "정말이요? 어디 있어요? 어디? 아무데도 없는데요." 나는 세레나 엘프장로의 말을 듣자마자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지만 엘프는 하나도 없었다. 만약 이곳에 엘프들이 모두 숨어있다면 나중에 술래잡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무척이나 재미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안녕. 나는 카라테라고 한단다." "안녕. 반갑다." 갑자기 주변에서 수많은 엘프들이 모습을 보였다. 모든 엘프들이 모두 세레나처럼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고 매우 가냘프게 생겼다. 문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헤깔린다는 것이 문제다. 유일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옷 위로 두 개의 가슴이 불록하게 솟아난 엘프가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멋지다. 어디 숨어 있었던 거에요?" "엘프가 숲에서 숨으려고 마음먹으면 아무도 찾지 못한단다." "이야! 나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갑자기 엘프의 능력이 부러웠다. 엘프처럼 숨는다면 친구들과 술래잡기 할 때 술래할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엘프들이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세레나는 엘프마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100여명의 엘프가 살고있으며 엘프집은 30채가 전부라고 말해주었다. 또한 모두 비슷한 모습이지만 나이차가 상당하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내겐 상당히 큰 충격이다. 정령사 가족은 평균수명 150년인 것도 보통 인간들에 비해서 수명이 긴 것이다. 하지만 엘프에 비하면 하루살이만도 못한 짧은 삶이다. 물론 정령사중에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면 신체가 자연과 가까워지게 되어 보다 긴 삶을 살수 있겠지만 엘프하고는 비교조차 가소로울 뿐이다. 엘프들은 내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런 모습은 내게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이나 크라이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프마을에서 내가 보낸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고 결국 낮의 대부분이 지나가 버렸다. "어라? 벌써 어두워지려고 하네. 장로님 집에 가봐야겠어요." "그러니? 그럼 조심해서..." "아참!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깜빡 했네요." 나는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서 작별인사를 하는 세레나 엘프장로의 말을 끊고 말했다. 엘프들이 이렇게 잘해주는데 가족들이 왜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했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에는 감히 물어볼 생각조차 없었지만 함께 오랜시간을 보내니 세레나 엘프장로가 착한분이라 생각되었기에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데 그러니? 뭐든 물어보렴." "우리 가족은 모두들 제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하거든요. 오늘 엘프분들을 만나보니까 제게 잘 대해주시는데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세레나 엘프장로님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가족들이 내게 알려주지 않는 사실을 세레나 엘프장로는 내게 말해줄 것이라 생각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세레나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엘프들을 바라보아도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엘프가 고요를 깨고 내게 말했다. "너는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라서 걱정되어 그런 거잖아. 그것도 몰랐어?" "패러렐 라이프?" 나의 질문에 유일하게 대답한 엘프는 다른 엘프에 의해서 어디론가 끌려갔다. 또다시 찾아온 고요 때문에 오직 들리는 것은 새소리와 벌레소리가 전부였다. 시끄럽게 떠들던 엘프들은 모두들 입을 다문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라테" "네, 장로님" 세레나는 엘프마을의 대표를 맡고있는 카라테를 불렀다. 세레나자 엘프장로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카라테가 처리하고 있다. 물론 중대한 일은 장로인 세레나가 결정한다. "제 거처에서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서 자세히 적은 책자를 찾아주세요. 고대 엘프글로 작성된 것을 인간들이 사용하는 글로 옮겨적은 것이 있을 거에요." "하지만 장로님 아직은..." "어차피 카인에게 주려고 옮겨적은 거에요. 앞으로 얼마 남지도 않은 것을 아시잖아요." 카라테는 세레나의 말을 듣고서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약간 어리둥절 하였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분위기를 보니 내가 말할 입장이 아닌 것 같았다. 잠시후 카라테는 손에 책을 들고서 돌아왔다. 그리고는 세레나에게 책을 전해주었다. "카인아 이 책에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서 자세히 적혀 있단다. 집에 돌아가서 시간이 되면 꼭 읽어보도록 해라. 알겠니?" "네, 장로님" 나는 웃음띤 얼굴에서 갑자기 냉랭한 세레나의 얼굴을 보게되자 얼떨결에 대답하였다. 다른 엘프들조차 얼굴에서 미소가 없어진 상태인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하지 말아야 될 질문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세레나 엘프장로가 내미는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해라."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놀러오거라." 많은 엘프들이 내게 작별인사를 하였고 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엘프들이 나의 질문에 일순간 얼굴에 표정을 바꾼 사태에 대해서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말 그대로 잠시였다. 곧바로 엘프마을에 대한 것을 적은 종이와 그림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설레였다. 또한 엘프마을에서 가져온 나뭇가지까지 있으니 이것을 얻기위해서 친구들이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나는 엘프장로가 건네준 책을 잊은채 엉뚱한 생각만 하며 집을 향해 걸었다. ------ "아직까지 카인이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요?" 포그너는 부인 세실리아에게 말했다. 엘프마을에 크라이 마을의 촌장인 플레인과 함께 다녀오니 집에서는 카인이 없었던 것이다. 손자를 분명히 마을 멀리서 구경시켜 주고 곧바로 돌려보냈는데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크라이브와 타르가 크라이 마을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모두 물어보았는데 오늘은 카인을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어디를 간거지?" 포그너는 카인이 걱정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열 다섯살이 되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되어 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자란 손자이다. 더욱이 내년이면 열 다섯살이 되기 때문에 손자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온 가족이 노력중인 상황이었다. 온 가족이 정령을 소환하여 카인을 찾으려고 했지만 정령조차 카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카인이 갈 곳이라고는 크라이 마을과 집주변 밖에 없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것이다. 결국 포그너는 크라이 마을의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카인을 찾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집주변을 제외한 숲을 찾아보았고, 마을 사람들은 가뭄의 재앙을 벗어나게 해준 정령사 가족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구석구석을 찾아보았다. 카인을 찾는 어마어마한 수색작업은 어이없게도 그 당사자가 집으로 얌전히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령사 가족의 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편이었고 또한 정령사 가족이 카인에 대해서 끔찍히 아끼는 것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카인의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모습을 보였다. "카인! 지금까지 어디있었니? 모두들 너를 찾느라고 난리가 났었단 말이야." 타르는 카인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어? 정말? 나 엘프마을에 다녀왔는데." 카인은 타르의 흥분한 말에 엘프마을에 다녀왔다고 단순간단히 대답했다. 카인은 화가난 듯한 타르의 말에 어리둥절하여 미리 준비한 말을 하지 못하고 엘프마을에 다녀온 사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엘프마을에 다녀온 것을 숨기려고 했지만 얼떨결에 들통나고 말았다. "카인아 엘프마을에 다시 갔던거니?" "죄송해요. 너무 궁금해서 할아버지 몰래 가봤어요. 엘프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했는걸요." 가족들은 카인의 말을 듣더니 입을 떡하니 벌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카인은 가족들이 놀라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얼떨떨한 모습으로 가족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세상에" "엘프들과 이야기를 하다니 그렇다면." "설마..." 가족들의 감탄사는 한참이나 이어졌지만 카인은 더이상 계속해서 그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포그너가 카인에게 다가와 두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쏟아냈기 때문이다. "엘프들과 무슨 얘기를 했니? 말해보렴! 무슨 말을 했니?" "무슨말을 했냐니까? 카인아 대답해 보렴!" 카인은 포그너가 자신의 몸을 심하게 흔들어서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수가 없었다. 포그너는 한참이나 카인을 흔들어 대다가 자신의 실수를 느끼고는 손을 카인의 어깨에서 떼고 말했다. "내가 카인을 놀라게 했나보구나. 카인아 할아버지에게 엘프들이 네게 했던 말을 해주겠니?" "아휴, 힘들어. 할아버지가 흔들어서 어지럽네." "미안하다. 카인아. 할아버지가 물은 것에 대답을 해주겠니?" 포그너는 최대한 침착하게 앞으로 살날이 많지않은 막내손자에게 말했다. 포그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흥분한 이유는 엘프들이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종족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엘프가 카인에게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까 걱정한 것이다. 모든 것을 카인이 알게 된다면 카인은 앞으로 남은 짧은 삶을 우울하게 보내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가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겠는가. 어른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말이다. 그저 마지막까지 즐겁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가족들이 한마음으로 바라는 것이다. "모두들 궁금해서 그러는구나. 내가 구경시켜 줄께. 엘프마을은..." 카인은 가족들이 이렇게 자신을 구박하는 것을 엘프마을에 대해서 궁금한 것으로 생각하고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어 자신이 적은 기록들을 읽어주었다. 또한 멋지게 그린 그림도 보여주었다. 가족들은 카인의 말을 오랜동안 들어주었다. "엘프마을에서 재미있게 놀았나보구나. 그런데 혹시 패러렐 라이프라는 것에 대해서 엘프들이 말하지 않던?" "그게 뭔데? 아참! 생각해보니까 내가 오기전에 어떤 엘프가 그런말을 했던 것도 같은데." 카인은 할아버지 포그너의 질문에 곰곰히 생각하더니 모르겠는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카인의 모습을 보며 가족들은 세상에 떠나가는 큰 한숨을 내리쉬었다. "휴우" "다행이네." "신이 우리카인을 돕는구나." 가족들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앞으로 이런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먼저 카인이 다시는 엘프마을에 가지 못하도록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인을 좀더 주의깊게 바라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항상 크라이브와 타르가 함께하기 때문에 카인이 엘프마을을 다시 가는일은 없을 것이다. 카인은 이런 가족들의 조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대답만 할뿐 또다시 가족들 몰래 가볼 생각인 것이다. 지금 당장은 엘프마을에 대해서 기록한 종이와 그림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어 대장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친구들이 자신을 부러워 할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항상 느껴왔다. 카인의 이런 생각에 세레나 엘프장로가 선물한 책은 카인의 가방에서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 회] 2. 운명 1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고 싶다면 목숨걸고 엘프마을을 구경하라고 권장하고 싶은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서 엘프마을에서 겪은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나무의 정령에게 쫓긴 이야기와 엘프와의 극적인 만남은 영웅담이 되었다. 나는 친구들 이외에도 마을의 어른들에게까지 엘프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어른들은 처음에 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레나 엘프장로가 그려준 그림을 보고서 생각을 바꿔먹었다. 엘프들이 인간을 싫어하기 때문에 마을 어른들이 엘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극히 미비하였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정보들은 신비로운 사실들이었다. 내가 엘프마을에 다녀온지 한 달이 지났을 때 더이상 나의 이야기는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 된 것이다. 관심받길 원하는 내게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필요하였다. "카인아 오늘은 마을에 안가니?" "안가! 집에 있을거야." 나는 첫째형 크라이브의 말에 대답하고는 방에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영웅대접을 한 달이나 받다가 더이상 관심을 받지 못하니 나로서는 이것이 큰 고민이었다. '엘프마을에 몰래 가볼까? 아니야. 형들이 저렇게 거머리같이 달라붙는데 방법이 없어.'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무슨 좋은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개구리 경주나 술래잡기도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아까 마을에 놀러갈걸 그랬나.' 오랜 시간을 방안에 있다보니 어느덧 심심해졌고 마을에 놀러가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방안에서 이리뒹굴 저리뒹굴 지내는 것도 지겨웠다. 그렇다고 가족들과 놀수도 없었다. 가족들과 지내면 모두들 나에게 양보하기 때문에 도대체가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이다. 모든 놀이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언제나 승자가 된다면 그게 무슨 놀이겠는가. 예전부터 숨겨놓은 장난감을 꺼내어 시간을 보내어도 별다른 재미가 없자 나는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저 호기심을 자극할 그 무엇인가를 말이다. 하지만 나의 호기심을 자극할 아무것도 없었다. "아참! 엘프마을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이제 필요없지." 문득 가방이 눈에 보여서 그것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가방에는 엘프마을에서 가져온 나뭇가지와 종이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항상 가지고 다녔던 물건이지만 이제는 필요없으니 다른 것을 넣고 다녀야했다. "잘 보관해야지." 가방에서 엘프마을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꺼내어 장난감을 보관하던 상자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장난감 상자에는 그동안 나의 손에서 떠나간 것들이 가득했다. 가방에 있던 모든 물건을 상자에 넣고 닫으려는 순간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참! 책이 있었지." 나는 가방의 제일 안쪽에 자리를 잡고있는 책을 꺼내었다. 가방에 든 종이는 잘 구겨지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세레나 엘프장로가 준 책을 넣고 다녔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엘프장로가 책을 건네면서 한 말이 생각났다. "엘프장로님이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잘됐다. 심심한데 이거나 읽어야되겠다." 나는 장난감 상자와 가방을 모두 치우고 책을 두 손에쥐고 바라보았다. 책의 겉표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져 있지 않았고 그저 이상한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그림이라기 보다는 책의 전체가 그런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책을 자세히 바라보고 나서야 나는 책의 재질이 나무껍질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자 첫 장에 '사랑하는 카인에게'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었고 읽을 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여러 말들이 있었다. 정말로 이 책은 나를 위해서 써진 것이라 생각되자 기분이 좋았다. 장로의 신분을 가진 엘프가 나를 위해서 썼다고 하자 한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두 번째의 장에는 내가 패러렐 라이프란 것이 적혀 있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한참을 읽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고 책속의 내용에 점점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엘프마을에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떤 엘프가 말한 내용이 떠올랐다. '너는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라서... 그것도 몰랐어?' 하지만 이 때에만 해도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내가 설사 패러렐 라이프라고 해도 앞선 사람이 어떤 운명을 지녔는지 알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은 나의 착각이란 것을 알수 있었다. 패러렐 라이프라고 판단된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도 그 운명을 벗어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책의 내용중에 눈에 자꾸만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패러렐 라이프의 운명을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자살뿐이다.' 정말 섬뜩한 문구가 아닐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세레나 엘프장로가 이렇게 섬뜩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종족의 특성 때문이었다. 엘프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인위적으로 일찍 죽는다면 슬퍼할 것이지만 자연적인 죽음은 슬퍼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쉽게 쓴 것이지만 어린 인간인 나로서는 '자살'이란 단어가 들어간 문구가 섬뜩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책 한권을 읽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줄은 몰랐다. 책의 장수가 넘어갈수록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서 알게되는 사실들이 많아졌고 점점 손이 떨려오고 있었다. 책의 대부분을 읽고 거의 후반부에 가서는 내가 태어난 사실이 모두 적힌 사실을 알수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세레나 엘프장로가 찾아와 자연의 축복을 내리다가 최상급 정령에게 들었던 사실이 모두 담겨져 있었다. 객관적으로 적혀있는지라 내가 열 다섯살에 죽는다는 것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열 네살인 나로서는 도대체 믿지못할 사실이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내가 열 다섯살이면 죽는다고?" 책의 마지막장을 모두 읽고서 내가 한말은 '이럴수가'였다. 어린 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모를리가 없었다. 믿으려고 하지 않아도 책을 선물한 사람을 생각한다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가족들이 나만 잘해준 것이 내가 패러렐 라이프라서 그런 것인가?" "나무를 꺾고, 동물을 죽여도 혼내지 않은 이유가 패러렐 라이프라서?" "가족들이 나만 비호한 것이 그럼 모두 패러렐 라이프라서?" 그동안 내가 받았던 특별대접을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가족의 막내라서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 착각하였지만 이제보니 모든 것들이 내가 패러렐 라이프라는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가족들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나 행동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가끔씩 나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하고 또한 가끔씩 나를 포옹하고 울어버리는 가족도 있었다. "이것이 진실? 이럴수는 없어!" 나는 방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계속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죽음을 알게된 어린 나로서는 이것이 견디기가 너무나 힘이들었다. 인간은 장수를 위해서라면 살인이나 범죄도 서슴치 않는 종족이다. "내가 왜 죽어야 해? 왜 내가!"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나서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대상이 없었다. 가족들은 나를 위해서 오랜동안 마음고생을 했으니 가족에게 따질수도 없었다. 차라리 신이라도 직접 만나서 따지고 싶지만 이 세상에서 신을 만날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녀나 예언자와 같은 선택된 사람 뿐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알게되면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흥분하여 자살하거나 자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가 그나마도 이런 침착함을 보일수 있었던 것은 세레나 엘프장로가 책을 제작함에 있어서 죽음에 대하여 초탈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 쉽게 적어놓았고 인간이 어떻다는 것과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세시히 적어놓았던 것이다. 차례대로 읽는다면 모든 사실을 알게된다고 해도 침착할 수 있도록 만든 인간의 내면에 영향을 주는 책인 것이다. '이제 난 어떻게 하지?'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때 인간이 취하는 선택은 극복과 좌절밖에 없다. 가끔씩 용기를 가진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고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끝까지 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자포자기하여 우울하게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더 많다. ------ 크라이브는 막내동생 카인이 방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뭔가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하지만 방안에서 무슨일이 있으랴라는 생각으로 아버지가 가르쳐 준 정령술을 수련하였다. 어릴 때부터 해오던 것이라 이제는 아버지가 강제로 시키지 않아도 틈나는 대로 수련을 한다. 정령을 소환할 때마다 느끼는 신비로움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몸에 익숙하다. 많은 정령사들이 대부분 불의 정령을 선호하는 편이다. 불의 정령들이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 정령을 이용하면 쉽게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소환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도 위험스럽지만 그 외의 정령들은 소환해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불의 계열을 제외한 정령들은 정령사가 명령을 내려야만 공격이 가능하다. 더욱이 정신력의 소모도 더욱 크다보니 정령사들이 불의 정령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것은 강해지려는 마음을 가진 정령사의 경우에 한해서다. 물의 정령이 공격을 하려면 강력한 물질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물을 화살이나 창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그것을 적에게 돌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엄청난 정신력의 소모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정신력에 대한 것은 어디가 끝인지 알수없는 부분이라 꾸준히 수련을 하여 갈고닦는 방법밖에는 없다. 크라이브의 수련은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를 소환하여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공격을 위한 가장 쉬운 형태는 화살이나 창과 같은 날카로운 모습이다. 크라이브는 마당 가운데에서 그릇에 물을 떠다놓고 운디네를 소환하여 계속해서 수련을 하였다. 수련을 하면서 힐끗 카인의 방을 감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럴수는 없어!" 크라이브는 수련중에 카인이 방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카인이 계속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는데 대부분이 화났을 때 내뱉는 말들이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카인의 목소리가 매우 크게 들려왔다. "카인아 무슨 일이니?" "형은 몰라도 돼!" 크라이브는 동생이 걱정되어 카인의 방을 향해서 말했지만 들려온 대답은 동생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카인은 요즘들어 거머리같이 따라다니는 형을 떼어놓으려고 시도한 경우가 몇번 있었다. 크라이브는 그 일로 인해 동생이 화난 것이라 생각하고는 더이상 간섭하지 않기로 하였다. 카인을 보호하려고 매일같이 따라다니니 카인으로서도 짜증나는 것은 당연하리라. 저녁이 되기까지 카인이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적이 없자 크라이브는 동생이 무엇을 하고있는 궁금하였다. 그래서 카인의 방에 접근하여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동생은 누워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뭐야? 자고있잖아." 크라이브는 카인이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있자 걱정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다음에 들려온 카인의 이상한 신음에 제동을 걸었다. "음음음" 크라이브는 방문을 열고 방에 누워있는 카인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비롯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간간히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눈은 약간 풀려 있었고 침까지 흘리는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카인아! 카인아!" "음음음" 카인은 크라이브가 아무리 흔들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음소리만을 뱉어냈다. "아버지! 어머니! 도와주세요!" 크라이브는 큰 소리로 가족들을 불렀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않은 카인이 당장 죽는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열 다섯살에 죽기로 되어있는데 지금 카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자면 당장 죽을 것만 같은 모습인 것이다. "크라이브 어떻게 된거냐?"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카인의 아버지 네이브였다. 네이브는 빠르게 카인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고서 크라이브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겠어요. 방에 들어와보니 이렇게 땀을 흘리며 누워있었어요." "아직 이럴 단계가 아닌데 왜 이러지? 당장 가서 물을 떠와라. 열을 식혀야겠어." "네, 아버지" 네이브의 말에 크라이브는 방에서 나갔다. 잠시후에 모든 가족들이 모여들어 카인의 상태를 전해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장 연장자인 포그너가 카인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무척 놀란 것 같다. 무슨일이 있었길래 카인이 놀랐지?" "할아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포그너에 질문에 크라이브가 대답했다. 크라이브는 카인이 누워있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포그너는 카인이 놀란 사실을 알았지만 무엇에 놀란 줄은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가족들은 카인의 뜨거운 몸이 식을줄 모르자 항상 걱정되었던 사실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아버님 설마 벌써?" "엘프장로님이 하신 말씀이다. 절대 틀릴수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카인의 어머니인 아이네의 말에 포그너가 대답했다. 아이네는 아들의 죽음이 벌써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어 말한 것이지만 포그너의 대답은 그럴리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세레나 엘프장로가 최상급 정령에게 전해들은 죽음의 운명은 열 다섯이었기에 아직 카인이 죽을때가 아닌 것이다. 카인은 온몸을 땀으로 범벅으로 하며 다음날 새벽까지 혼수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거의 탈진상태에 이르른 아침이 되어서야 약간 정신을 차렸다. 그나마 카인이 이렇게 버틸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이 운디네를 소환하여 카인의 몸을 계속해서 식혀주고 치료하였기 때문이다. "카인 정신이 드니?" "엄마 괜찮아요." "정말 다행이다.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카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 아이네가 가장먼저 눈치채고 말했다. 아이네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안심을 하였다. 카인은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을 아무런 말도없이 지긋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엘프들을 위해 헌신적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그리고 나와 언제나 놀아주는 형들 모두가 카인의 가족들이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카인으로서는 고통스런 심정이었다. ------ 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 정신을 잃은 것을 끝으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 가족들이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생각뿐 몸은 나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눈을 뜬 나를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셨다. "카인 정신이 드니?" "엄마 괜찮아요." 나는 어머니의 말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이상하게도 몸이 나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심한 운동을 하고서 탈진한 것처럼 나른한 기분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어머니는 나의 말을 듣고서 안심을 하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가족들 또한 나를 바라보며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 정신을 잃기전에 생각하던 모든 것을 떠올려 보았다.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타고나 열 다섯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말도안되는 사실들을 말이다. '가족들이 나를 이렇게 지켜주는데.' 가족들은 정신을 잃은 내게 이렇게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가족들이 있는데 내게 죽음이 다가오다니 너무나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 내게 이런일이 생기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누군가 답해줄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나의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탈진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당장 일어나 가족들을 붙들고 내가 왜 죽어야하는지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 몽롱한 상태라 좀더 넓은 생각을 가질수 있었다. '내게 왜 이런일이 일어났을까? 아니야. 벌써 일어난 일이니 이것은 생각하지 말자.' 나름대로 운명을 받아들이고 내가 해야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자 마음이 좀더 편안해졌다. 어쩌면 지금의 이런 마음가짐은 몽롱한 정신이 맑아지고 탈진이 없어져 정상적인 몸상태가 된다면 마음이 변할수도 있었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데 내겐 일찍 찾아온 것일까?' '책에는 죽음이 나쁘다고 적혀있지 않았는데 정말 그럴까?' 문득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서 적어놓은 책에서 본 글귀가 떠올랐다. 책에는 죽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귀한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엘프가 아닌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말로 죽음이 고귀한 일일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몽롱한 정신속에서 세레나 엘프장로가 선물한 책의 내용만을 생각하였다. 열 네살인 내게 죽음은 너무나 무서운 것이지만 책의 내용만을 생각하면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다. 물론 가족들이 지켜보는 것도 내가 안정하는데 무척이나 많은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 한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았다. "카인 조금만 쉰다면 괜찮아 질거다. 일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좀더 자거라." 나의 할아버지 포그너가 말하였다. 포그너는 바람의 중급정령인 실라페를 소환하여 나의 정신상태를 어느정도 알아채시고는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였다. 최상급 이상의 정령들만이 의사전달이 가능하긴 하지만 하급 정령들도 나름대로 정령사의 의사를 약간이나마 전할수 있다. 포그너는 정령에게 단순히 내가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의 간단한 것만을 지시하여 알아낸 것이다. 물론 나는 나중에서야 이런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들을수 있었다. 부모님을 제외한 가족들은 나의 방에서 나가 휴식을 취하였다. 밤새 나를 간호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억울해. 왜 신은 내게 죽음의 운명을 정해놓았을까?' 죽음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너무나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차라리 이 사실을 모르고 열 다섯에 죽었으면 모를까 알게된 이상은 신이 저주스러운 것은 어쩔수가 없다. 책에는 분명히 패러렐 라이프가 신이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엘프장로는 이같은 사실을 최상급 정령에게 전해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령들이 가장 신과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다. 정령은 수백만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패러렐 라이프의 운명을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자살뿐이다.' 책에는 운명을 벗어나는 방법이 적혀 있었고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생각하며 그 모든 내용이 어떻게 모두 떠오를 수 있는지 신기하였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으면 모든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같은 경우 천재도 아닌데 모두 기억하는 것이다. 아마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집중력이 강하게 작용해서가 아닐까 생각하였다. '어차피 죽을거라면 운명을 벗어나고 싶어.' 어차피 내가 죽게된다면 신이 정해준 운명을 벗어나서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신에게 복수할 힘이 없다. 그저 신이 정해준 운명을 벗어나는 방법만이 나름대로 신에게 복수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고 대리만족과 같은 것이다. 오랜 시간을 몽롱한 상태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결정한 것이라고는 패러렐 라이프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살을 결심하였다는 사실과 남은 나의 삶을 가족들과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어린 나로서 대단한 결정을 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죽기전에 하고싶은 것은 몽땅 해봐야겠지?' 용감한 사람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받아들인 후에 행하는 일들은 대부분 자신이 못다한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무엇인가 뚜렷히 해야할 일들이 없다. 그렇다면 오직 한 가지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즐겁게 지내고 못해본 것들을 신나게 해보는 것이다. 어차피 죽게될 것 무엇인들 못할까.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어느정도 몸을 추수릴 수 있었다. 사실 보통 인간이라면 놀라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절하고 탈진상태를 보일수 없다. 내가 이런 상태가 되었던 것에는 정령사라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정령사들은 정신력이 크게 작용하는 정령들과 계약을 맺은 존재이다. 나도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와 계약을 맺은 정령사이다. 물론 소환하는 시간이 여덟 살때와 마찬가지로 3초가 고작이지만 정령사는 분명한 것이다. 정령사가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계약을 맺은 정령으로 인해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이런 연쇄작용으로 정령사는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심적인 안정을 꾀하는 방법이 개인마다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나는 정령사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아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내가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서 적은 책을 모두 읽고서 이성을 잃고 그것이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정령사로서 심적인 충격을 받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가족들 조차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 회] 2. 운명 2 머리가 맑아지고 몸상태가 좋아진 후에 내가 한일은 방안에서 가족들을 몰아낸 일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몽롱한 정신상태에서 두 가지의 목표를 세웠다. 첫째로 신이 내려전 저주스런 운명을 거부하기 위하여 자살을 한다는 사실과 둘째로 죽기전에 하고싶은 모든 것을 경험한다는 결심이다. 운명에 거부하는 것은 나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을 하고싶다는 말이다. 열 다섯살에 죽게 될 것이라면 열 다섯살의 생일을 맞이하기 전날에 자살을 하면 될 것이다. 하루 일찍 죽는다고 해서 내게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방안에서 가족들을 모두 몰아낸 이유는 두 번째로 결심한 사항을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죽기전에 하고싶은 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는 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내가 하고싶은 일을 모두 해보았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했다.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친구들이라면 하고싶은 것들을 말하라면 수십 아니 수백가지도 말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하고싶은 것이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 남지않은 삶을 하고싶은 일만 해야 후회가 없으리라. '내가 하고싶은 일이 무엇일까?' 그동안 하고싶으면서 해보지 못한 일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생각을 할수록 내가 가족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음을 느낄 뿐이었다.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친구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삶이다. 친구들은 집안일을 어느정도 해야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공부는 물론이고 집안일조차 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 물어보면 되는구나!"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내가 하고싶은 일이 없다면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은 해야만 하는 것들을 경험하고 싶다는 것이다. 역시 이것은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어른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저 마을에좀 다녀올께요." "카인아 날이 어두워지니까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엄마 괜찮아요." 내가 방문을 열고 크라이 마을에 다녀온다고 하자 어머니가 걱정하셨다. 가족들은 내가 방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내년에 찾아올 나의 예견된 죽음 때문에 걱정한다는 것을 이제는 쉽게 느낄수 있었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것이 신기할 뿐이다. 크라이 마을로 가기위해 형들도 나를 따라왔다. 나를 위해서 언제나 따라다니는 형들이지만 오늘따라 멋있어 보였다. 크라이 마을로 가는동안 나는 형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왠지 말을 하게되면 내가 모든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것을 말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크라이 마을에 도착하자 친구들이 놀고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내가 없는데도 재미있게 노는 친구들을 보자 왠지 심술이 났지만 지금은 이런 것으로 다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알아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라? 대장이네." "대장 이리와서 같이 놀자!" 친구들이 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모두 무시하고 촌장집을 향해서 걸었다. 촌장집에는 저녁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하루일과를 마치며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내가보기엔 할일 없어서 수다떠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그런 어른들이 촌장집에 많이 모여있길 바랬다. 촌장집의 거의 다다를 즈음에 크라이 마을의 산파인 디엘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말하였다. "카인이구나. 아이들은 모두 공터에서 놀고 있으니 그리로 가보거라." "친구들을 만나려고 온 것이 아니에요." 머리가 히끗한 디엘의 말에 내가 대답하였다. 디엘은 크라이 마을에 산파였지만 이제는 나이가 많아 산파일을 하지못해 그저 노인일 뿐이다. 나는 부모님이 내가 태어날 때 디엘이 받아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이후부터 다른 어른에게 인사를 빼먹어도 디엘에게는 절대 잊지 않았다. "그럼 무슨일로 온거니?" "어른들께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디엘은 나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될 것을 촌장집까지 오다니 이해되지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마을에서 내가 하는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디엘은 어른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모두들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들어가봐라." "고맙습니다. 디엘 할머니" 나는 디엘에게 인사를 하고 촌장집으로 들어갔다. 가장 친한 니트의 아버지가 촌장이라 내겐 익숙한 집안의 모습이었다. 촌장집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마당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어른들을 볼수 있었다. 나는 마을의 어른들에게 다가가 말을 하려고 하였다. "카인아 네가 엘프마을에서 겪은 이야기라면 이제는 지겹다." 마을의 어른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기 전에 마을 사람중에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얼굴에는 동감이라는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와서 내가 엘프마을에서 겪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들려주었기 때문에 이제 질린 모양이다. 오늘도 내가 엘프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온줄 착각한 것이다. "오늘은 엘프마을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뭔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요." "그러니? 하하하 그럼 내가 골목대장 카인에게 미안하게 되었구나." "괜찮아요. 가리온 아저씨" 내게 말을 꺼낸 아저씨는 곧바로 사과의 말을 하였다. 가리온 아저씨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항상 아저씨라 부른다. 사실 가리온은 마을에서 결혼의 시기를 놓친 총각이라 아저씨라고 부르면 싫어하는 것이다. 마을에 살고있는 인원이 500여명이 전부다보니 시기를 놓치면 결혼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남녀비율이 들어맞아도 남녀가 눈이 맞지않는 이상은 결혼은 어려운 것이다. "카인아 무엇이 궁금해서 찾아왔니? 말하면 우리가 가르쳐주마." "어떤 남자가 일년 후에 죽는데 그가 하고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집에서 생각한 것을 조리있게 말했다. 사실 나에 대해서 모두 말해주고 앞으로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싶었지만 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족들만이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년 후에 죽는다면 평생 못해본 일을 해야겠지? 그것이 무엇일까?" "과연 무엇을 해야할까?" "카인이 무슨 질문이 그러니? 끔찍하구나." 마을의 어른들이 나의 질문을 되내이며 고민하였다. 대부분이 남자들이라 질문이 끔찍해도 그려러니 하고 넘어갔다. 만약 아주머니들이었으면 내가 질문한 의도를 조금이라도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그것도 몰라요? 왜 아무말도 안해요?" 어르들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않자 내가 재촉하였다.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는데 말을 하는 어른들이 없는 것이다. 어른들은 나보고 잠시 기다리는 손짓을 한 이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토론을 하였다. 나는 어른들이 내가 궁금한 것을 모두 해결해 주리라 생각하였다. 10분이 지나서야 가리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람이 태어나면 결혼을 해야한단다. 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죽기전에 결혼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구나. 물론 자식을 얻게되면 더욱 좋겠지." 결혼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당연히 총각 아저씨 가리온이었다. 어른들 몇명이 가리온의 말에 키득키득 거리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물론 가리온은 어른들의 웃음을 듣자 무서운 눈으로 쬐려보았다. 나는 가리온의 대답을 듣고 막연히 죽기전에 결혼이란 것을 경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동안 가보지 못한 곳을 구경하고 싶지 않을까? 멋진 산과 바다 그리고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와 같은 유명한 곳들 말이다. 물론 우리같은 사람들은 꿈도 못꿔보지만 말이다." "정말 멋지겠군요." 드디어 어느정도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기분이 좋았다. 못가본 곳을 구경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평민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카르시온 제국을 여행하려면 특수계층만이 가능하다. 상인, 용병 그리고 평민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에 한해서 말이다. 물론 평민도 영주의 허가증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귀족인 영주가 평민을 위해 허가증을 발부하는 귀찮을 일을 하려들지 않는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평민은 영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평민이 허가증이 없어서 여행을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느정도 영역의 제한을 주고서 그 안에서의 여행은 자유이다. 허가증이 필요없이 다닐수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와 제국의 남단으로 향하는 길목 전체이다. 제국의 수도는 상업의 활성화를 위해 당연히 허가증이 필요없이 그저 신분이 증명되기만 한다면 자유스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제국의 남단으로 향하는 길목으로의 여행이 자유스러운 이유는 남쪽으로는 기후나 농토가 좋지 않으며 계속 가다보면 결국 바다를 만나게 된다. 다른 방향이야 다른 나라가 접해 있지만 남쪽은 아무것도 없다. 본래 크라이 마을이 최남단이며 기후나 농토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나마 이렇게라도 살수 있는 것은 엘프들의 도움 때문이다. "일년 후에 죽는다면 그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을거야." "그것도 괜찮네요." 어른들이 하나하나 말을 꺼낼 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른들이라 하나하나 좋은 말들 뿐이다. 어떤 마을어른은 자신이 젊었을 때 꿈꾸던 것을 말해 주었다. 검술을 익혀서 기사가 된다거나 용병이 되어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말이다. 어른들의 말은 한참이나 계속되었고 모든 말들이 나의 머리속에 깊게 새겨졌다. 내가 어른들에게 질문한 대답을 계속 듣고 있을 때 크라이브와 타르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자신들의 동생이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서 모두 알게되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년 후에 죽게된다는 말을 이런 때에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형들은 내가 열 다섯살에 죽게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라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차마 내게 말은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지켜만 보고 있었다. 더욱이 마을어른들 앞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른들의 말은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내게 많은 도움이 되는 말들이었다. "이제 되었니?" "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궁금한 것 있으면 또 놀러오려무나." 나는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를 건내고 형들과 함께 집을 향해서 걸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마을에 왔기 때문에 집에 가는 길은 매우 어두웠다. 걸으면서 크라이브와 타르는 내게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고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형들이 짐작하고 있는거 맞아. 나 열 다섯살에 죽는거 알게되었어." "으아!" "알게 되었구나." 둘째형 타르는 비명을 질렀고 첫째형은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마을 어른들에게 질문한 사실을 들었으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형들은 그저 나를 바라보며 집으로 걸을뿐 아무말도 하지를 않았다. 아니 타르는 내게 말하려고 했지만 크라이브가 제지하였다. 어차피 집에 도착하면 가족들이 알아야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집을 향해 걸으면서 가족들에게 할말을 정리해 보았다. 모든 사실을 알게되었다고 밝히는 자체만으로 무척이나 놀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족에게 말하려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내가 결심한 것까지 말할 생각이다. 아직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결혼이란 것을 해보고 싶고, 내가 살고있는 제국의 수도도 구경하고 싶다. 그외에 디글이나 열매만 먹는 것이 아니라 크라이 숲에서 돌아다니는 동물을 잡아서 구워먹고도 싶다. 엘프들이 난리를 피우겠지만 알게뭔가. 죽기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그동안 못해본 것을 해보고 싶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 가족들에게 할말이 있다고 모두 모이라고 전하였다. 형들을 제외하고 가족들은 나의 부름에 무슨일인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어제는 내가 쓰러지기까지 해서인지 많은 관심을 보였다. 물론 어제 쓰러지지 않았다고 해도 많은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사실은 예전에 할아버지 몰래 엘프마을에 놀러갔을 때 세레나 엘프장로님이 제게..." 나는 한 달전에 세레나 엘프장로님이 주신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어제가 되어서야 그 책을 읽게되었고 나의 탄생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모든 사실을 말하였다. 가족들은 나의 말을 듣고서 여러가지 모습을 보였다. "불쌍한 우리 카인" 어머니는 나를 포옹하시고 나의 이름만을 계속해서 중얼거리시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아버지 또한 곁에서 슬픈 눈으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가족들의 슬픔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끝날줄을 몰랐다. 어머니의 포옹을 벗어난 나는 슬픈 가족들에게 충격 선언을 하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하였다. 어차피 죽게될 것이라면 하고싶은 것은 모든지 해보고 싶다는 것을 말이다. 결혼도 해보고,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도 구경하는등 마을 어른들이 말해준 것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가족들이 슬퍼하는지라 나 조차도 분위기에 동화되어 울먹거리며 말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나의 선언을 제대로 전해들었느지는 몰랐다. 다음날 아침까지 가족들은 나를 바라보며 그저 울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형들까지 온 가족이 우는 것이 초상집을 연상시켰다. 나도 그저 울기만 하였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기쁨을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전해들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죽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무섭고 억울했지만 가족들이 함께 슬퍼해주니 기분이 나아졌다. 우리 가족의 슬픔은 오랜동안 계속 되었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슬픔을 극복한 결과 일주일만에 정상을 되찾았다. 가족들 모두가 슬픈 한편 가슴이 시원함을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내게서 모든 사실을 가슴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매일같이 가슴조리며 살았는데 사실이 밝혀지자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한 것이다. 물론 내가 모든 사실을 알게되어서 가족들 걱정이 더 깊어졌지만 말이다. 가족들은 내가 말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방안을 짜내기 시작했다. 내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 일년도 채 살지못할 남자와 결혼할 여자가 어디있겠는가 말이다. 당연히 크라이 마을에서는 나의 결혼상대를 구할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들은 다른 마을로 찾아가 먹고살기가 무척이나 힘든 가난한 집에서 모든 사실을 말해주고 나의 결혼상대자를 구하기로 결정하였다. 정말이지 무척이나 사악한 우리가족이다. 결혼 이외에도 내가 죽기전에 하려는 일의 계획이 가족들의 손에서 짜여졌다. 여행에 관련된 것도 하나하나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생이 없는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는 준비할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영지를 통과할 때마다 경비병들에게 찔러줄 술이나 돈도 많이 필요했다. 가족들은 이것이 나와의 마지막 추억이라 생각하며 매우 헌신적이었다. 나는 가족들의 이런 사랑을 받으들이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 카라테는 하급정령 실프에게 숲에서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전해듣고 빠른 속도로 숲을 헤치며 달려갔다. 카라테 이외에도 몇몇 엘프들이 따라붙었는데 대부분 숲에서 이상한 조짐을 정령에게 전해듣고 카라테를 따르는 것이다. 숲은 엘프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 많은 관심을 쏟는 것은 당연하다. 쉬이익 스스슥. 엘프들이 숲을 헤치며 달리는 모습은 인간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몸무게가 얼마나 가벼운지 계속해서 나뭇가지나 풀위를 밟으며 달리고 장애물들은 다람쥐처럼 피한다. 숲속에 살고있는 어떤 생물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달리는 것이다. "아니 이럴수가" 카라테는 실프가 가르쳐주는 방향에 거의 도착할 때쯤에 동물의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엘프들이 살고있는 숲에서 누군가가 사냥을 한 것이다. 크라이 마을의 인간들이 몇년전에 크라이 숲에서 동물을 잡고 모닥불에 구워먹는 냄새를 맡은 경험이 있어서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그 인간들이 다시는 숲에서 사냥하지 못하도록 혼내주었었다. 그 이후로 크라이 마을의 사람들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 가축을 사육하고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인간들이 감히" "이 참혹한 비명소리" 엘프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생물들에게서 생명력을 느낀다. 하찮은 식물들에게도 생명력을 느끼니 생명을 가진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풀이나 열매만을 먹고사는 이유도 그것에서는 생명력의 기운이 매우 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약 엘프가 고기를 먹는다면 생명력이 꿈틀대는 느낌에 참을수 없는 혐오감을 느낀다. 카라테를 비롯해 그를 따르던 엘프들은 희미한 연기에 포함되어 흩어지는 동물의 생명력에 진저리를 쳤다. 이들에게는 그것이 비명처럼 들리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다. 모두 전투준비" 카라테는 실프가 막연히 숲에서 큰일났다는 의미를 전달하였지만 지금처럼 중대한 사건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숲을 파괴하는 사건은 엘프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카라테가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크라이 숲에는 지금까지 몇년 동안 인간들이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허가받은 정령사 가족과 얼마전 엘프들에게 생명력이 아름다운 묘목과 씨앗을 가져다 준 마을의 촌장을 제외하고 말이다. '포그너 가족들은 뭐하고 있었던거야?' 카라테는 속으로 정령사 가족을 생각하였다. 정령사 가족이 엘프들이 거주하는 숲에 살면서 엘프장로에게 자연의 축복을 받거나 정령사로서의 교육을 사사받는 조건으로 정령사 가족들도 숲을 보호한다라는 임무가 주어지는 것은 서로에 대한 묵시적인 계약이다. 정령사 가족은 매일같이 숲 내부가 아닌 외곽쪽의 경계를 맡는 편인데 인간이 침입해 사냥을 했으니 숲을 보호할 책임을 등안시 한 것이다. 엘프들은 카라테의 명령에 자신들이 항상 휴대하며 다니는 활을 조립하기 시작하였다. 전투를 하지않는 동안에는 활대와 시위줄을 분리하여 몸에 두르고 다닌다. 활대는 무척이나 유연한 나무로 만들며 시위줄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꼬아서 마법처리를 한 후에 사용한다. 엘프들은 모두가 정령사지만 마법실력도 매우 뛰어나다. 물론 인간의 경우는 정령사이며 마법을 익히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어느 하나에 충실하여 마스터가 되는 것으로도 짧은 인생이니 말이다. "준비되었으면 가자!" 카라테는 선두에 서서 생명력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이 거의 보일듯하자 곧바로 높은 곳으로 이동하였다. 화살을 쏘기 위해서는 높은 곳이 유리하다. 물론 정령술을 이용할 수 있기에 장애물이 있어도 공격하는데 어렵지 않지만 인간중에서도 가끔 강한자가 있기 마련이라 주의해야 한다. "준비" 카라테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자 조용히 명령을 내렸다.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엘프들은 뛰어난 청각으로 그 말을 듣고서 적당한 나무에 몸을 숨기고 활에 화살을 얹고 시위줄을 당겼다. 카라테는 작은 모닥불에서 심하게 나오는 연기를 보며 시야가 보이지 않자 인상을 찡그렸다. '초보 사냥꾼인가? 어떻게 모닥불을 저렇게 연기가 많이나게 하지?' 모닥불이라면 불이 보여야 정상이다. 하지만 카라테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연기뿐이라 사냥꾼이 얼마나 초보자인지 알수 있었다. 카라테는 위험할지도 몰라 함부로 모닥불 근처로 접근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희끗한 검은 물체를 보니 혼자인 것이 분명하지만 숲속에 혼자 돌아다닐 정도면 어느정도 실력에 자신이 있을 것이다. 숲에는 야생동물이 많아 위험해서 인간들은 혼자서 돌아다니지 않는다. '저건! 세상에 멀쩡한 나무를 잘라 모닥불을 피우다니?' 카라테는 높은 나무위에서 몸을 숨기고 한참을 보내다가 연기가 어느정도 걷히자 모닥불을 볼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생나무를 잘라서 모닥불을 만들었기 때문에 연기가 났던 것이다. 모닥불의 위에는 형체를 알수없는 고기 덩어리가 익으며 모락모락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인간도 모닥불을 피울 때는 죽은 나뭇가지를 사용하는데 모닥불 주인은 누군지 몰라도 엘프와 철전지 원수를 스스로 자처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인간이 한 명 있었던 같던데 어디갔지?' 연기가 걷히면 인간을 곧바로 공격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모닥불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카라테는 인간이 물이나 나뭇가지를 주으러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도저히 용서가 필요없는 인간이라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신체 한 부분 정도는 부러뜨려야 화가 풀릴 것 같았다. 엘프가 조화로운 종족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죽일 생각도 하였을 것이다. 스스슥. 스스슥. 모닥불 근처의 풀이 흔들리며 모닥불의 주인이 나타나려 하자 엘프들은 긴장하고 카라테의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인간이 모습을 들어내는 순간 모든 엘프들은 기운이 빠지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생나무를 꺾어 모닥불을 만들어 거기다 동물까지 잡아서 굽는 인간은 정령사 가족중에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가진 카인이었던 것이다. "모두 마을로 돌아간다." 카라테는 엘프들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엘프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동물을 죽인 인간을 혼내주기 위해서 모두 긴장하였지만 그것이 카인임을 알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조용히 마을로 향했다. 카라테는 마을로 돌아가면서 오래전 세레나 엘프장로의 말을 떠올렸다. 카라테를 비롯한 다른 엘프들도 엘프장로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엘프는 조화로움을 가장 우선시합니다. 얼마전 포그너의 세 번째 손자가 태어났지만 패러렐 라이프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모두 패러렐 라이프가 무엇인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패러렐 라이프는 신으로 인해 운명이 결정되어 조화로움을 가질수 없습니다. 저희 엘프는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신성한 종족으로 카인의 어떤 행동에도 간섭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설사 생명력이 가득한 숲을 헤칠지라도 말입니다.' 오래전 엘프장로의 말에 모든 엘프들이 동의를 하였고 카인의 부정적인 행동에도 간섭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카라테는 생명력이 죽어버린 모닥불에 쓰인 나뭇가지와 고기가 되어버린 동물 보다도 인간으로서 운명이 결정된 조화롭지 못한 카인이 더욱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더욱이 남은 삶도 채 일년이 남지 않았으니 엘프들의 마음은 무거울 따름이었다. 카인은 엘프들의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생명력 가득한 나무를 계속 잘라내어 모닥불을 피우며 고기가 익기만을 침삼키며 기다리고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 회] 2. 운명 3 후대에는 정령사를 일부에서 중개자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엘프는 조화롭지 않은 인간과 만나고 싶지 않지만 거래를 필요로 하였고 인간도 엘프에게 원하는 것이 많았다.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정령사는 나름대로 양측의 장점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개자 역할을 해냈다.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을 서로 말해주어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대가를 지불토록 말이다. 인간으로서 뛰어난 능력이 있는 정령사에게도 나름대로 말하지 못하는 고충은 있었다. 인간이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주(衣食住)가 기본적으로 갖추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령사에게는 단 한가지의 경우에 있어서는 풍족한 생활을 할수가 없었다. 그것은 먹는 것 바로 식(食)이다. 정령사가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정령과의 친화력, 소환에 필요한 마나 그리고 의지가 필요하다. 세 가지 모두가 필요한데 그중에 친화력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으로 나뉜다. 선천적인 것이라면 엘프처럼 조화로움 자체를 지니고 태어나거나 축복받는 것을 의미한다. 후천적인 것은 친화력을 노력으로 얻는 것을 말한다. 정령사가 숲에서 살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과정이 모두 후천적으로 친화력을 높이는 과정이라 말할수 있다.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명력이 강한 생물의 섭취는 피하는데 인간으로서는 강력한 의지가 없고서는 무척이나 힘든 과정이다. 엘프의 경우 풀이나 열매만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인간의 경우 간혹 영양부족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정령사라면 당연히 영양분이 충분하며 생명력이 약한 초식류의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육류(肉類)를 섭취할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그만한 능력과 자금이 있는데도 참아야 하는 것은 괴로움 그 자체이다. 엘프가 조화롭지 않은 인간중에 특별히 정령사만은 높이 대접하는 이유중 하나가 순수한 노력으로 정령과의 친화력을 높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간혹 인간중에 선천적인 친화력을 가지고 태어나도 후천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친화력을 모두 잃게되어 보통의 사람과 비슷해지기 때문에 모든 정령사들은 엘프에게 최소한의 대우를 받게된다. "냄새 좋다." 나는 모닥불에서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토끼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토끼를 어떻게 먹는지는 자세히 알고 있었다. 토끼의 가죽을 벗겨내고 배를 갈라 내용물을 모두 훑어낸 후에 불에 익히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을 손쉽게 해내고 눈앞에 결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익으면 되겠다. 히히" 나는 토끼를 얇은 나뭇가지로 찔러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맛있게 익어가는 토끼를 바라보며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해주신 아침밥을 먹으면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반찬투정을 하였다. 매일같이 올라오는 엘프가 알려준 풀로 만들어진 반찬은 맛있기 보다는 그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기전에 모든 것을 경험하자고 결심했었지!' 반찬투정을 하다가 어제 결심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가족들에게도 말했기 때문에 모두 알고있는 사실이다. 또한 가족들은 나를 위해서 여러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을 위해서 여행물품을 구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머니가 해주신 반찬을 바라보며 문득 죽기전에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도 생각이 났다. '고기를 먹어봐야겠다.' 정령사 가족이라 고기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크라이 마을에 있는 친구집에 놀러가도 고기는 구경조차 할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게 육류의 음식을 주지 말라고 전했기 때문이다. 정령사 가족의 말은 크라이 마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는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침식사를 하며 생각한 내용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사냥을 해서 고기를 먹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내게 사냥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이상하게도 작은 동물들은 나를 피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말로는 자연의 축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른다. 요리를 하는 방법은 친구들에게 예전에 전해들었었다. 크라이 마을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어린아이들은 동물을 사냥후에 어떻게 요리하는지 자세히 알고있는 것이다. 물론 친구들은 엘프가 사는 크라이 숲이 아닌 반대쪽 숲에서 사냥을 해야만 했다. 탁타닥. 타닥. 나는 나뭇가지가 불에 타면서 발생한 소리에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한 생각을 접고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죽은 나무로 모닥불을 만든적은 있어도 지금처럼 멀쩡한 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내어 모닥불을 만든적도 처음인지라 신기하게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모닥불에서 심한 연기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자 괜찮아졌다. "이제 익었겠지?" 육류를 먹어본 경험이 없는 내게 토기요리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뾰족한 나뭇가지로 모닥불 위에서 익고있는 토끼를 다시 찔러보았다. 아까보다 쉽게 나뭇가지가 파고들어 구멍을 내었다. 친구들에게 듣기로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찔러봐서 쉽게 박히면 고기가 익은 것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토끼고기가 모두 익었다고 생각되자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고기를 먹다가 엘프에게 들키면 크게 혼날 것 같았다. 물론 가족들에게 걸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 집에서 많이 떨어졌지만 혹시 몰라서 사방을 경계하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되자 나뭇가지로 만든 젓가락으로 토끼고기를 조금 떼어냈다. 많이 익혀서 그런지 쉽게 떼어졌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씹어보았다. 약간 탄맛이 느껴졌지만 씹을수록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맛이 느껴졌다. 탄맛은 아무래도 겉이라서 느껴진 것 같았다. 나는 토끼고기가 매달린 나무를 들고는 직접 입에대고 조금씩 떼어 먹었다. "별로 맛있지도 않네." 나는 배가 부르도록 토끼고기를 먹고서 그 감상을 말했다. 먹을만은 했지만 친구들이 말하는 정도의 신기한 맛은 아니었다. 괜히 가족들을 속이면서까지 먹은 것을 후회했지만 벌써 토끼고기는 나의 뱃속에 모셔진 후였다. '고기를 먹으면 정령을 소환할 수 없단다.' 문득 예전에 아버지가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려고 내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토끼고기를 먹었으니 이제는 정령사가 될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일년도 살지못할 것이라 후회되진 않지만 가족들을 속인 것을 후회하였다. 나는 토끼요리를 한 흔적을 모두 지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형들은 내가 크라이 마을에서 갑자기 없어져 나를 한참이나 찾아 헤매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매일 따라다니는 형들을 따돌려야했고 크라이 마을에 놀러가서 술래잡기를 하는 동안에 숲으로 왔던 것이다. "카인 지금까지 어디있었던 거야?" "술래잡기 하다가 잠이 들었었나봐. 미안해 크라이브형" 나는 크라이브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크라이브는 내게 무슨일이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대충 둘러대며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벌였던 일이 들키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크라이브와 타르는 내게 이상함을 느꼈지만 평소에도 엉뚱한 구석이 있었던지라 그냥 넘어갔다. "카인아 저녁 먹어야지." "알았어요. 엄마" 나는 어머니의 외침에 대답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어머니는 가족들의 저녁을 준비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들까지 식사를 하기 위헤서 방에 모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요즘 약초를 캐러 다니시는데 모두 여행에 필요한 것이다. 보통 여행을 하기가 쉽게 생각되지만 그렇지가 않다. 여행을 하면서 몬스터나 산적을 만날수도 있고 혹은 병이 날수도 있다. 여행을 하면서 별의별 일들이 발생한 것을 경험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가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를 구경하고 싶다는 것을 듣고 가장먼저 약초를 준비하는 것이다. "카인 너 대체..."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할아버지가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어이가 없는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낮에 먹었던 토끼고기가 생각나 순간적으로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족들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딸꾹. 딸꾹" 할아버지의 지적으로 나도 모르게 놀라 딸꾹질을 하게 되었고 배가 서서히 아파옴을 느꼈다. 인간은 음식을 빨리 섭취하거나 혹은 몸이 음식을 소화해내지 못하면 체하기 마련인데 내가 낮에 먹었던 토끼고기 때문에 체한 것이다. 이런 일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은 내가 비밀을 가족들에게 들킬까 긴장한 상태에서 할아버지가 황당한 표정으로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소리치자 몸이 경직되어 벌어진 일이다. "카인아" 어머니는 쓰러지는 나를 달려들어 안고서 천천히 바닥에 눕게 해주셨다. 할아버지는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 나에게 다가와 여기저기를 만져보시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 낮에 무엇을 먹었니?" "할아버지 그것이..."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에 고통이 심해지자 다른 새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이 지나길 바라며 배를 움켜쥐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토끼고기를 먹었어요." 할아버지의 반복되는 질문에 나는 어절수 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배가 너무도 아파서 다른 생각을 할수가 없었다. 배를 움켜쥔 상태로 가족들의 표정을 바라보니 괜히 사실을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놀라면서도 당장 나를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배아파 죽겠어요. 이것좀 어떻게 해주세요." "체한 것이니 약을 먹으면 된다. 그냥 참거라." 할아버지는 나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할아버지는 방에서 나가더니 잠시후에 약초를 손에 쥐고 들어오셨다. 할아버지가 들고온 약초의 이름은 애치토로 소화분량에 걸리면 먹는 약에 들어가는 재료이다. "체한 것이니 이걸 먹어라." "할아버지 체하면 약을 주셔야지 약초를 주면 어떻게요? 아이구 배야!" 나는 할아버지가 내미는 애치토를 바라보며 배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체하면 약을 먹는다는 기본은 알고 있기에 약초를 내미는 할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당장 배가 너무나 아파서 내가 고기를 먹은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약초를 직접 먹으면 빨리 치료된다." "정말이죠?"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얼른 애치토를 씹어먹었다. 정말이지 좋은 약은 입에 쓰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당장 배가 아팠기 때문에 쓰거운 것도 참으며 열심히 씹어먹었다. 할아버지가 내민 애치토가 나의 입으로 모두 들어가자 어느정도 배의 고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카인 아까 무엇을 먹었다고 했지?" 가족들이 한결같이 나를 둘러싸고 질문을 하자 모든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사가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은 엘프가 인간과 결혼하는 만큼이나 엽기적인 사실이다. 가족들은 너무도 기가막히고 어이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얼마 살지도 못할 사랑스런 나에게 화를 낼수도 없는 일이었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께요." 나는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계속 잘못을 시인하였지만 별다른 말이 없었다. 가족들로서도 어떻게 조치할지를 몰라 그저 황당한 표정을 지은채로 나를 바라만 보았다. 어느정도 가족들이 정신을 차리고 내게 무엇인가 말하려고 할 때 할아버지가 나를 방에서 나가게 하고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 포그너는 자신의 손자인 카인이 토끼를 잡아먹었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방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들어오는 손자에게서 이질적인 생명력의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직접 느끼기 보다는 실프의 기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끼고 말을 하였고 카인은 스스로 시인을 한 것이다. 가족들의 난리법석이 모두 끝나서야 포그너는 당장 시급한 문제를 떠올렸다. 카인이 크라이 숲에서 동물을 잡아먹은 사실을 엘프들이 몰랐을 이유가 없다. 포그너는 가족들에게 카인이 벌인 일로 엘프마을에서 무슨 조치를 내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였고 가족들까지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포그너는 곧바로 엘프마을로 향해 모든 사실을 먼저 알리기로 하였다. 엘프에게는 진실을 빨리 전달하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없는 일이다. 카인이 벌인 일을 포그너 자신이 모두 떠맡기로 하였다. 가족들은 크라이 숲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상상하기도 하였다. 카인이 벌인 일은 그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중대한 일인 것이다. "포그너씨 무슨 일인가요?" 포그너가 엘프마을에 들렀을 때 카라테가 다가와 말했다. 마을의 안전과 그외 전반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카라테는 언제나 포그너를 가장 먼저 반기는 엘프이다. "급히 알려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사실은..." 포그너는 자신의 손자인 카인이 벌인 일들을 사실 그대로 카라테에게 전하고는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강조하였다. 카라테는 포그너의 말을 들으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체 세레나 장로에게 안내하였다. 포그너로서는 엘프마을에서 중대한 일은 장로가 결정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따랐다. 포그너는 카라테의 안내로 세레나 엘프장로의 통나무집에 들어가 조용히 앉았다. 엘프마을에 자주 들렸기 때문에 엘프들의 관습을 약간이나마 알고있어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카라테가 장로에게 알수없는 말로 조용히 뭔가를 전하였다. "책임을 지시겠다고 하셨나요?" "저희 가족들을 쫓아내셔도 받아들이겠습니다." 포그너로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인이 저지른 잘못은 엘프들에게 있어서 살인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용서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보통의 인간이 저질렀다면 용서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포그너의 가족은 정령사 가족이다. 보통의 인간도 아닌 정령사 가족의 일원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 자체가 정령사로서의 포기를 뜻하며 더이상 엘프가 존중할 필요가 없는 다른 인간과 똑같이 분류되는 결과인 것이다. "포그너씨가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포그너씨도 아시다시피 엘프는 조화로움을 따르는 존재입니다. 만약 조화롭지 않은 존재가 있다면 저희들은 그를 조화롭도록 나름대로 도와줍니다. 보통 모든 존재들은 조화로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악마나 마족을 포함해서입니다. 하지만 조화로움 자체가 없는 존재가 있는데 그들은 신에게서 운명이 결정된 자들입니다. 예언자나 신의 사자와 같은 존재가 그러하며 카인도 패러렐 라이프로서..." 포그너는 세레나 엘프장로가 카인의 행동에 대한 처벌을 내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이해하지 못했지만 좀더 듣게되자 그것이 카인과 관련된 것임을 알수 있었다. 세레나 엘프장로가 마지막으로 꺼낸 이야기중에는 카인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엘프들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받아들인 말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포그너는 세레나 엘프장로의 말을 모두 듣고서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을 전하였다. 가족들은 포그너의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카인을 바라보았다. 카인은 포그너의 말을 듣자마자 방을 뛰돌아 다니며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엘프들이 자신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자 엘프마을에도 마음껏 놀러갈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한 것이다. 물론 특별히 무엇인가 하고싶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도 가지 못하는 곳에 자신은 마음껏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다. 다음날 가족들은 카인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기 위해서 하나하나 계획을 세웠다. 카인이 보고싶어 하는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를 여행하기 위해서 준비물을 구하였다. 또한 카인의 결혼을 위해 여자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가족들과 상의를 하며 토론을 하였다. 카인을 위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에 카인도 엘프마을과 크라이 마을을 마음껏 놀러다녔다. 카인은 여러명의 엘프들과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고 가족들에게 자랑하기도 하였는데 포그너도 그 부분만큼은 부러웠다. 엘프들과 가장 친분은 쌓은 것이라면 포그너인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엘프들은 패러렐 라이프인 카인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주는 상황이었다. 카인과 가장 친분이 높아진 엘프를 들자면 역시나 세레나 엘프장로이다. 직접 자연의 축복을 내려주다가 패러렐 라이프라는 것을 알게된 것이 원인이었다.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한 엘프장로가 유일하게 해결치 못한 일이 카인이기도 하다. 카인은 엘프들과 많이 지내면서 죽음을 쉽게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엘프장로가 죽음에 대해서 엘프식으로 가르친 결과인 것이다. 더욱이 패러렐 라이프에 대한 책자를 읽었기 때문에 도움이 크게 작용하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세레나 엘프장로가 죽음에 대해서 카인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선물한 책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 회] 2. 운명 4 엘프들의 얼굴이 익숙해 질때쯤 카르시온 수도를 구경하기 위한 여행준비가 모두 끝났다. 할아버지가 여행 경험이 많으셨기 때문에 준비물은 집에 모두 있었다. 단지 소비가 이루어지는 준비물만이 필요했다. 원래 여행이란 도보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초행인 나를 위해서 마차를 마을에서 빌리기까지 하였다. 만약 도보로 여행을 한다면 나의 체력으로는 무리일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판단 때문이다. 가족들은 모두들 나와 여행하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결정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영지를 통과할 때마다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가족은 어느 영지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제국의 최남단에 살고 있어서 신분을 증명할 길이없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중급정령사라 어느 정도의 신분에 구애를 받지 않겠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여행을 위해서 결국 경험이 많은 할아버지가 동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를 위한 여행이기 때문에 부담감을 주는 부모님을 제외하였고 다른 가족들은 여행경험이 없으니 결국 남은 가족은 할아버지 뿐이다. 나의 여행에 엘프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주로 약초나 열매를 선물로 주었다. 열매는 신선함을 유지시키는 마법까지 걸려 있었다. 여행의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장기간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다. 여행준비가 끝나자 나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마차에 오르고 가족들과 마을사람의 환대를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촌장아저씨 다녀올께요." "구경 잘하고 오너라." 나의 인사에 마을사람들중 가장 앞쪽에 서있던 니트의 아버지인 플레인이 대답해주었다. 플레인의 말을 이후로 다른 사람들도 손을 흔들며 환송해주었다. 마을을 떠나는 것은 위험을 동반한 모험이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카인아 빨리 돌아와라" "몸조심 해야한다." 할아버지가 마차를 출발시키자 가족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의 틈에 파묻혀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목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 마차가 멀어지자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마차를 향해 뛰어왔다. 친구들은 나의 여행을 무척이나 부러워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마을을 벗어나는 경우는 흔치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앉거라."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던 것을 멈추고 앉았다. "지금부터 여행할 때 주의할 점을 알려줄테니 잊지말고 기억하도록 해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영지를 지나쳐야 하며 영지마다 신분을 증명해야 하고 또한 우리처럼 특별한 영지에 속해있지 않으면 위험 요소가 몇배나 많다. 할아버지는 크라이 마을에서 내가 왕처럼 생활했지만 말린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참아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시켰다. 할아버지의 말은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도 끝날줄을 몰랐다. 내가 말린에 도착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심심하면 가차없이 평민의 목을 베어버리는 귀족,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느정도 뇌물을 주어야하는 경비병들, 숲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야생동물과 몬스터 그리고 산적, 마을에서 실수로 벌어지는 사소한 소동에 말려드는 위험 등등 할아버지의 주의는 지겨운듯 하면서도 처음듣는 이야기라 재미있게 들을수 있었다. 여행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마을에 도착했는데 내가 살던 크라이 마을과는 비교조차도 되지않는 엄청난 크기의 마을이었다. 할아버지는 이정도 마을은 크다고 말할수 없다고 했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름은 패로이 마을이었고 크라이 마을과 같이 숲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였다. 더욱이 이곳도 인간들의 손길이 적게 퍼져있는 곳이라 엄청난 수의 엘프들이 숲에서 살고있다고 한다. 패로이 마을은 5만여명의 인간들이 사는 마을이고, 숲에는 5천여명의 엘프들이 살아간다고 하였다. 또한 천여명의 정령사들이 머무는대 대부분 하급정령사 조차도 아닌 정령사가 되기위한 사람들이라 하였다. 우리 마을과는 다르게 엘프들이 많이 살고있는 지역이라 이곳에서 정령사가 많이 탄생하다 보니 제국에서는 정령사를 교육시키는 지역으로 잘못 오해하여 특별히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지역이기도 하다. 정령사들은 전쟁이 발발시 마법사와 기사 다음으로 강제 징벌되는 대상이라 세금에 대해서 특별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 실질적으로 정령사들은 전쟁터에서 많은 활약상을 보여주는데 대체적으로 적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한다. 이런 결과로 인해 정령사는 마법사 만큼의 대우는 아니더라도 기사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물론 정령을 소환하여 한 시간 이상 적을 공격하여 상해를 입힐 수 있는 정령사만을 말한다. 정령사가 되기 위해서 생명력의 소중함을 느껴야한다. 그리고 전쟁이 발생하면 정령사들은 자신들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인간을 죽이는데 모순된 일이 아닐수 없다. 일반적으로 생명을 죽이면 정령사들은 친화력이 감소하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인간의 생명력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여행을 시작한지 한 달이 되어서야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동안 겪은 일들은 말할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처음 패로이 마을까지 일주일이나 걸린 것은 평탄한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패로이 마을부터는 길이 있어서 마차로 하루만에 엄청난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영지를 지나면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다. 특별히 배우려 하지 않아도 보는 것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촌티를 모두 벗어던질 수 있었다. 많은 영지를 지나면서 할아버지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며 호기심을 충족한 결과였다. 할아버지는 영지를 지날 때마다 마차에서 조금씩 약초를 꺼내어 판매하였다. 여행에 필요한 자금은 충분히 있었는데 굳이 할아버지가 그러는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우와! 드디어 도착이다!" 나는 말린의 외곽 성벽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그동안 지나쳐 왔던 영지마다 외곽성이 있었는데 말린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성이 외곽에 있었고 그 내부에 또다시 내성이 여러개 있었다. "카인아 그만 앉거라. 다들 쳐다보잖니." "하하하 다들 안녕하세요." 나는 말린을 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피식 웃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보고싶었던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까지 도착했으니 말이다. 물론 할아버지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했지만 가만히 따라오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말린으로 들어가야 하니 주의하는거 알지?" "할아버지도 참. 이제는 다 아니까 걱정마세요." 나는 할아버지의 걱정스런 말에 대답해주었다. 영지를 통과할 때마다 신분을 증명하는 일은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다. 괜히 오해가 생기면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나 평민이란 신분은 경비병들이 가장 무시하는 부류이다. 아무런 죄가 없어도 죄를 만들어 죽여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평민 이하의 신분은 아예 영지를 이동하지 않으니 경비병들에겐 평민이 가장 하급 신분인 것이다. 말린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란 줄이 있었는데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옆으로는 사람들이 가끔씩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그곳은 평민이 아니라 평민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주로 몰락 귀족이나 평민이면서 평민 이상의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해당된다. "할아버지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 "참고 기다리거라. 말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원래 많아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이란다." "에휴" 나는 기다란 줄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만 않았으면 지루했을 것이다. 수도라 그런지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할아버지는 말린에 대해서 알고있는 사실을 말해주었는데 이런 입구가 여러개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대단한 곳이 아닐수 없었다. 세 시간을 기다려서야 나는 말린의 입구를 막고있는 경비병을 볼수 있었다. 영지의 경비병들과 별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경비병들은 먼저 마차를 대충 살펴보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자신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거만한 평민들을 싫어하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다. "신분증을 꺼내시오." "신분증이 없습니다. 하지만..." "뭐얏!" 경비병 두 명이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창을 들여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런 상황을 몇번 겪었는지라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병사님 제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저는 제국의 최남단에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포그너라고 합니다. 그리고 엘프와 함께 지내는 정령사라 신분증이 없습니다." "정령사? 흠흠" "허참" 두 명의 병사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는 헛기침을 하며 창을 내려놓았다. 경비병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말린을 들어가기 위한 평민들의 사고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린에 살고있는 평민들은 다른 영지에 살고있는 평민들보다 배운 것이 많아 경비병들이 대처하기 난처해서 강압적으로 나가야 쉽게 일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경비병들에게 수모를 당한 평민이 몰락귀족과 구면인 경우가 있어서 청탁을 하여 경비병들을 혼내주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영감 미리 말하든지 해야지. 괜히 오해하지 않도록 말이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이거 작은 거지만 일이 끝나시고 술이나 한잔 하십시요." "흠흠.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빨리 지나가시요." 할아버지는 허리를 깊게 꺾으며 경비병 두 명중 한 명의 손에 무엇인가 쥐어주며 말하자 곧바로 병사의 입에서 통과하라는 말이 떨어졌다. 굳이 뇌물을 쓰지 않아도 통과가 가능하지만 그러자면 할아버지는 정령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정령사라는 것을 증명하자면 정령을 소환해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한 번 이런일이 벌어지면 소문이 나서 여러가지 난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말린까지 오는 동안에 어떤 경비병이 뇌물을 받고도 정령사라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하자 결국 정령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영지에 소문이 나서 귀족들의 앞에서 광대 노릇까지 했었다. 정령사는 마법사처럼 흔하지 않았고 더구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다른 사람들처럼 높은 대접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쉽게 이런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나를 이끌고 말린의 중심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먼저 구경을 하자면 며칠 머물러야 하니 여관을 찾으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 수준에 맞는 곳을 골라야 비슷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모여 곤란한 경우를 당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한 시간이나 마차를 몰아서야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예전에 여행을 할 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카인아 지금부터 이곳에 대해서 말해줄테니 절대 잊지 말아라. 이곳은..." 할아버지는 말린에서 길을 잃게되면 이곳을 찾아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머리속에 기억하였다. 모두 신기해서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는 않았다. 더욱이 내가 그토록 구경하고 싶은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이니 잊을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찾아온 여관은 주위 건물에 비해서 오래된듯한 건물이었다. 방을 예약하고 마차에 있는 짐을 모두 방으로 옮겼다. 오는 동안에 많은 짐이 줄었기 때문에 쉽게 옮길수 있었다. 대부분의 짐이 식량과 요리도구들이었다. 두 명의 식량이야 부피가 크지 않지만 요리도구들은 의외로 부피를 많이 차지한다. 나는 방으로 짐을 모두 옮기고 곧바로 종이를 꺼내어 말린에 관한 것을 기록하였다. 집에 도착하면 친구들에게 모든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꼭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집에 도착하면 지금까지 겪은 것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인아 오늘 저녁식사는 여관에서 시켜서 해결하거라." "우와!"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즐거운 소리를 질렀다. 말린까지 오는동안 나는 수많은 맛있는 요리를 먹을수 있었다. 물론 할아버지는 정령사이기 때문에 오직 집에서 준비해온 풀반찬만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하지만 나는 간간히 여관에서 음식을 시켜 먹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맛있어서 이제는 광적인 집착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여관을 도착한 다음날은 구경하러 나가지 않고 할아버지와 앞으로 말린을 구경하기 위한 계획을 구상하였다. 여관에 머무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가장 멋진 곳을 알아내고 행선지를 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첫 번째로 모두다 황궁을 구경하라고 추천하였다. 황궁에 직접 들어갈수는 없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황궁을 구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황궁 이외에도 많은 곳을 추천받아서 앞으로 구경하는 곳을 특별히 정할 필요성은 없었다. "할말이 있으니 주의해서 듣거라." "할아버지 무슨 말인데요?" "며칠 볼일이 있는데 나중에 혼자 구경해야 할거야. 그러니 앞으로 구경하는 동안은 말린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호기심이 생겼다. 할아버지가 수도에 아는 사람도 없을텐데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할아버지 무슨 일인데요?" "너는 몰라도 된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더욱 궁금하여 재차 물었지만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말대로라면 내게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길을 잃을까 겁나기도 하지만 말린까지 오는 동안에 할아버지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어서 혼자 다녀보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린에 도착한지 이틀이 되어서야 할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먼저 황궁을 구경시켜 주었다. 황궁은 영주성에 비해 수십 아니 수백배는 커다랗게 보였다. 내부를 알수가 없으니 그저 외형만으로만 그렇게 판단될 뿐이다.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어느 누구도 황궁의 크기를 말해주어도 믿지 않을 뿐더러 짐작하지도 못할 것이다. 황궁을 멀리서 구경한 이후에는 매일같이 말린의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그저 구경하였다. 말린을 구경하면서 주의할 것이 있었는데 지나가는 귀족이나 마차에 진로가 방해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 부딪히면 그날로 목숨이 버려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차가 있지만 말린에서 마차를 모는 일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다. 어느정도 이상의 신분이나 특정한 목적이 있어야만 마차를 몰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특별히 국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다. 가끔은 기념품이나 선물이 될만한 것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주로 유용하면서도 비싸지 않은 물품으로 구입하였다. 말린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품은 대체적으로 비싸서 많이 구입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엘프들이 선물한 약초를 판매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쓰지않고 아끼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마을로 돌아가면 돈은 쓸모도 없을텐데 말이다. 말린에 도착한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할아버지는 볼일이 있다며 내게 혼자 구경하라고 하였다. 물론 혼자 구경하도록 하면서 주의할 점들을 귀가 따갑게 들려준 이후에 말이다. 솔직히 이제는 말린에 대해서 더이상 궁금한 점이 없어서 특별히 돌아다닐 곳이 없었다. 말린 대부분이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구경하고 싶은 중요한 지역은 귀족들이 많이 다녀 위험하기도 하다. 실제로 구경하면서 귀족들에게 심한 몰매를 당하는 평민을 몇번 본적도 있다. 그것도 나에겐 하나의 구경거리지만 문제는 몰매맞는 사람이 나와 같은 신분인지라 충분히 내게도 벌어질수 있는 일이다. 얼마 남지않은 삶이지만 몰매맞아서 죽고싶지는 않다. 여행을 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은 넓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세상에는 여러가지의 신분이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크라이 마을에서는 신분이라야 고작 세 부분으로 나뉜다. 엘프와 나의 가족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다. 그리고 신분은 다르지만 서로 돕고 살아가는데 이곳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잘못 걸리면 목숨이 순식간에 달아나니 말이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것을 많이 보고 느꼈지만 반대되는 일도 뼈저리게 느꼈다. ------ 포그너는 카인이 말린을 충분히 구경했다고 생각되자 가족들과 상의해서 결정한 일을 시행하기 위해서 빈곤층이 살고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카인에게는 말린을 혼자 구경하도록 말해두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지금 하려는 일도 카인에게는 무척이나 중대한 일이다. 말린의 빈곤층을 가기 위해서 여러 사람에게 빈곤층에 대해서 묻고서야 찾을수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라 칭하는 말린에는 밝은 곳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빈곤층이 모여사는 지역도 있는데 이들이 빈곤한 이유는 돈을 벌어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말린을 벗어나면 숲에서 열매라도 따먹거나 사냥을 하고 농사라도 짓겠지만 이들에게는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말린을 벗어나려면 신분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럴수가 없다. 운이 좋아서 말린에서 벗어나도 신분이 증명되지 않으면 곧바로 노예가 되기도 한다. 빈곤층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경우가 많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죽지못해 살고있는 사람들이다. "이게 무슨 냄새지?" 포그너는 빈곤층 지역에 들어서면서 쾌쾌한 냄새를 맡으며 코를 틀어 막았다.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공기중에서 나는데 바람의 정령사라 느끼는 정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무척이나 강했다. 물론 이런 행동이 빈곤층의 사람들에게 실례되는 모습이지만 도저히 참을수 없는 악취니 어쩔수가 없었다. "실프" 포그너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소환하여 자신이 숨쉬는 공기에 냄새가 들어오지 않도록 명령하였다. 물론 하급정령이 정령사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니지만 수십년 동안 소환한 관계로 정령사의 의지로 무엇을 원하는지 실프 스스로 느끼고 능력을 발휘해 냄새를 차단한 것이다. "휴우. 이제 숨을 쉴수가 있군." 포그너는 실프의 도움으로 악취의 고통에서 벗어나고는 지나가는 빈곤층 사람에게 여러번 묻고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포그너가 찾으려는 사람은 빈곤층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당연히 대표를 만나야 한다. 어느 지역이나 대표의 허락을 맡아야 하는게 법칙이고 빈곤층도 그것은 예외일 수 없다. "이곳인 것 같군." 사람들이 가르킨 곳은 빈곤층 지역에서 가장 외곽에 있으면서도 가장 커다란 집이었다. 밖에는 십여명의 사람들이 입구에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빈곤층 지역에는 사람들이 길가에 그저 아무런 할일도 없이 앉아있는데 왜 그런지는 포그너로서도 알수가 없었다. "누군데 들어가려고 하는거요?" 포그너가 들어가려고 하자 입구에 있던 사람이 막아서고 질문을 하였다.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나의 위아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옷을 깨끗히 입고서 빈곤층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빈곤층 사람들을 낮은 임금으로 노동을 시키려는 사람들 뿐이다. 그런데 포그너는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크라이 숲에서 온 포그너라는 사람이오. 아마 최남단 지역이라 당신들은 모를거요." "최남단? 거참 이상하네. 일거리 주러 온게 아니요?" "잘못 짚었소이다." 포그너의 말을 듣고서 막아선 사람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빈곤층 지역에 일거리가 없어서 여러가지로 애로사항이 많기 때문이다. "들어가서 그냥 방으로 들어가면 될거요." 입구를 막아선 빈곤층 사람은 포그너를 쉽게 들여보내 주었다. 아마도 포그너가 일거리를 주선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이었다. 포그너는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무척이나 단촐하지만 주위의 빈곤층 집에 비하면 고급이라 할수 있었다. "포그너라는 사람인데 이곳을 대표하는 사람을 만나러 왔소이다." "들어오시요." 포그너가 방에대고 소리치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집은 크지만 의외로 집안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아마도 빈곤층을 대표하는 사람만이 이곳에 머무는 것 같았다. 포그너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자신보다 더욱 늙은 모습의 노인을 볼수 있었다. 하지만 실재로 포그너가 앞에 앉아있는 노인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정령사들은 정령의 소환으로 신체의 불순한 기운들이 배출되며 초식(草食)만을 하기 때문에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무슨 일거리요?" "일거리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노인은 포그너의 말을 듣자 집밖의 입구에서 만난 사람처럼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빈곤층 사람들에게 얼마나 일자리가 필요한지 절실히 느낄수 있는 모습이었다. 포그너는 노인의 표정을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의외로 쉽게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방문한 이유가 뭐요?" 노인의 태도는 약간 적대적인 반응이었다. 대화를 하는데 서로 인사는 기본으로 오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금까지 노인은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고 또한 포그너가 누군지 묻지조차 않고 질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그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참으며 자신의 말을 꺼내었다. "나는 겉모습이 이래도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요. 정령사라고 들어보았소? 나는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이라 말할수 있는 크라이 숲에 엘프들과 살고있는 정령사요." "흠흠." 노인은 포그너의 말을 듣고서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실례를 느꼈는지 아니면 목이 아픈건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령사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마법사 만큼이나 만나기 힘든 사람이라 노인의 태도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곳에서 대표를 맡고있는 패터라고 합니다. 흠흠" "크라이 숲의 정령사인 포그너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인사가 오가고 서로에 대해서 예의상 말이 오갔다. 빈곤층을 대표하는 패터는 자신의 실수가 생각되는지 대화중에 자주 헛기침을 하였다. 포그너는 예의상 하는 말들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내게는 열 네살의 귀여운 손자가 있다오. 그런데 그 애가 앞으로 일년밖에 살지 못하는 병에 걸렸소. 다행히 그 병은 죽기전까지는 아무런 고통도 없고 일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점이요. 나는 그 아이가 죽기전에 결혼을 시키고 싶소이다." "정말 불쌍한 아이로군요." "그렇소. 정말 불쌍한 아이요. 그 아이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요. 만약 도와만 준다면 내 손자와 결혼하려는 여자아이의 식구들에게 많은 사례를 함은 물론이고 당신들에게도 사례를 하겠소. 여기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요. 그 돈에서 일정부분 떼어다 여자의 가족들에게 줘야 할거요." 포그너는 말을 끝내고 품에서 말린으로 오는 동안에 엘프들이 건네준 약초를 판매한 돈을 모두 꺼내 놓았다. 약초를 판매한 돈은 모두 2,000 포르로 값싼 노예를 한 명 살수도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노인은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는 그 무게감에 놀라고 그것을 열어보고 또다시 엄청난 금액에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이?" "값싼 노예 한 명을 살수도 있는 돈이요. 여자 노예를 구입해서 손자와 지내게 할수도 있지만 나는 진정으로 내 손자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있는 여자아이를 구하는 것이요. 당신이 최대한 노력해 주시요. 그리고 만약 쉽게 돈을 먹을려고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소. 정령사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겠지?" 포그너는 손을 방안의 나무기둥을 향해 실프를 소환해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나무기둥은 무척이나 튼튼한데도 불구하고 주먹만큼 나무가 바스러져 버렸다. 포그너는 패터가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약간의 겁을 줄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으악!" "만약 돈을 노리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면 나를 비롯해 나의 가족들이 용서하지 않을거요." "흠흠. 걱정하지 마십시요. 아주 참한 아이로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포그너는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을 꺼낸 이유는 이들이 자신에게 무슨짓을 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2,000포르는 그만큼이나 큰 돈이라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다. 포그너는 이만하면 패터가 더이상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손자에게 필요한 결혼할 여자아이에 대한 의견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물론 2,000포르에서 최소한 30퍼센트 이상을 그 가족들에게 떼어준다는 말도 단단히 못박았다. 너무 많은 금액을 그 가족들에게 떼어준다면 나쁜 일을 당할 가능성도 많아서 포그너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 만한 금액이었다. 패터와 포그너의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패터는 포그너가 돌아가자 곧바로 빈곤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포그너에게 들었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패터의 말을 듣고서 몇사람이 그것은 사람을 팔아먹는 노예상인만도 못하는 일이라고 반대하긴 했지만 너무나 큰 금액이라 다수의견에 의해서 어쩔수 없이 무시되었다. 요즘 서서히 굶어죽는 사람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이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2,000포르에서 30퍼센트를 제외한 돈만으로도 빈곤층 사람들은 최소한 반년치의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0 회] 3. 자살 1 사비나는 빈곤층 마을에 살고있는 소녀로 이웃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를 굶주린채로 살아가고 있다. 열 여덟살이 되었지만 결혼을 할 형편도 아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열 아홉살이 되면 노처녀나 다름없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비나! 얼른 패터씨댁에 가보거라." 사비나는 동생들을 돌보다가 어머니의 말을 들었다. 패터는 외부에서 오는 사람에게 일거리를 얻어내고 그것을 소개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빈곤층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일 때문이죠?" "무슨 일인지 몰라도 마을에 젊은 여자들을 모두 부르는 것 같으니까 빨리가야 네게도 일거리가 돌아갈거다." "네, 어머니" 어머니의 말에 사비나는 헤어진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요즘은 형편이 좋지않아 가족들이 꿀꿀이죽을 먹고 있었다. 꿀꿀이죽은 음식쓰레기를 끓인 음식으로 빈곤층에 살고있는 사람들이나 먹는다. 꿀꿀이죽은 세 가지의 등급을 가지고 있는데 최고등급은 귀족들이 머무는 저택과 여관에서 얻어온 음식쓰레기로 만든 것이고, 중간등급은 잘사는 평민들에게서 얻은 음식쓰레기로 만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하등급은 말린에 살고있는 평민들이 버린 음식쓰레기로 만든 것으로 사비나의 가족이 매일같이 먹고있는 음식이다. 평민들의 음식이라도 여관과 같은 숙박업소의 음식쓰레기는 상당부분 그대로 음식쓰레기로 버려지지만 평민들의 집에서 버리는 음식쓰레기는 며칠동안 썩힌 것도 있어서 꿀꿀이죽을 먹은후 배탈이 나는 경우를 빈곤층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다. 후욱. 후욱. 사비나는 가쁜숨을 몰아쉬며 패터의 집을 향해서 달렸다. 다큰 처녀가 달린다는 것이 무척이나 우수운 일이지만 사비나에게는 가족들의 생사가 달린 일이다. 일거리만 있다면 끔찍한 꿀꿀이죽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꿀꿀이죽도 부모님이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구입하지만 가족이 많다보니 그것도 큰 부담이다. "사비나도 왔구나." "오랜만이야. 이랜" 사비나가 패터의 집에 도착하자 친구인 이랜이 반겨주었다. 그녀도 사비나와 비슷한 동기로 숨가쁘게 달려온 모습이었다. 사비나와 이랜은 가까운 곳에 살지만 사는게 어려워 만나기도 힘들다. 어려운 형편에 친구를 만날수도 없었고 부모님은 일을 나가시니 집에서 할일은 너무나도 많았다. 패터의 집앞을 조금 지나자 빈곤층에 살고있는 수많은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모두들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었다. 보통 일거리가 있으면 말린이 나름대로 정한 순번대로 공평하게 일거리를 주는데 오늘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빈곤층에 살고 있는 사람중에도 넉넉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며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이 넘게 한 종류의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귀족들은 그것을 직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위계급들에게는 직업이란 있을수 없었다. 그저 시키는대로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패터의 집앞에 모인 여자들은 오늘이 평소와 다른 이유가 일거리가 아니라 일자리를 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 기대어린 눈빛이었다. "모두들 조용히" 많은 여자들이 모이자 패터가 방에서 나와 사람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패터의 옆에는 남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일거리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없다면 빈곤층 모든 사람들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굶어죽을 것이다. "시작들하게." 패터가 옆에있던 남자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남자들은 패터의 말을 듣더니 모여있는 여자들을 하나둘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가끔 일거리를 줄때 부적당한 사람을 일차로 돌려보낸 후에 여러가지 심사를 거쳐서 배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일거리를 주는 남자들 얼굴에 긴장감이 있음을 쉽게 알수 있었다. 남자들에게 지적당해서 돌려보내지 않은 여자는 단 서른명 뿐이었다. 그외에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졌고 그들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오늘같이 심사를 하는 경우는 일자리를 줄 때에나 벌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주저없이 돌아가야 한다. 해당되지 않는데도 끝까지 남아있는다면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들 모두가 피해를 입을수 있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겠지?" 패터의 말에 사비나와 이랜 그리고 다른이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일거리 때문에 능력도 되지 않는데 거짓말로 심사를 통과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말로 일거리를 얻은 사소한 일이 무슨대수냐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당사자가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하면 그 잘못이 사람을 소개해준 이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패터는 다시 그곳에서 일거리를 얻기 힘들게되어 결국은 패터가 아닌 함께사는 이웃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것이다. 패터는 남은 서른명의 여자들에게 이상한 조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여자와 몸에 병을 가지고 있는 여자도 돌려보냈다. 그 외에도 패터가 말하는 조건은 무척이나 많았고 그것에 해당되는 여자는 결국 다섯 뿐이었다. "누구 병간호 경험이 있나?" "제가 있습니다. 아픈 할아버지를 반년 동안 수발들었습니다." 패터의 질문에 사비나는 차분히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 사비나의 할아버지는 오랜 병생활을 하였고 집안사정 때문에 남자가 아닌 사비나가 할아버지를 보살펴야만 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수가 없다. 패터의 질문은 무척이나 많았고 다섯 명은 정확히 대답을 하였다. 모든 질문이 끝났을 때 패터는 다섯 명에게 순번을 정했는데 사비나가 가장 먼저였다. 사비나의 친구인 이랜도 다섯명중에 포함되었는데 순번은 마지막이었다. "지금 말했던 순번은 너희들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거다. 물론 순번이란 것이 가장 앞사람에게 주어지고 그 사람이 거부했을 때만 다음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주기 바란다. 지금 하는 말은 절대 다른사람에게 하지 말고 가족들에게만 말하도록 해라. 물론 결정이 되면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다." "네, 패터씨" 다섯명의 다짐을 받고서야 패터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패터의 뒤에는 남자들이 사비나를 비롯한 다섯명의 여자들을 기대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낮에 포그너란 노인이 찾아왔었다. 그는 제국의 최남단에 살고있는 사람으로 엘프들과 함께살아가는 정령사라고 하더구나. 그가 찾아와서 말하길..." 패터는 낮에 포그너가 방문한 사실과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다섯명의 여자들은 모든 사실을 알게되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처절한 빈곤층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인줄 알면서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일년밖에 살지못하는 소년인가요?" "포그너란 사람이 그렇다고 하더구나. 너희들이 혹시 포그너란 사람이 사기꾼이 아닌지 궁금하게 생각되겠지만 절대 아니다. 정령사는 마법사 만큼이나 희귀한 사람이고 그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보장하마." 패터는 이랜의 질문에 포그너란 사람을 자신의 이름으로 보증하였다. 포그너가 사기꾼이 아닌 것을 누구나 쉽게 알수있을 것이다. 2,000포르나 되는 큰 돈을 지불한 것이며 나무기둥을 부순 무시무시한 능력까지 사기꾼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모두 패터가 제시한 것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단 한사람에게만 기회가 돌아갈 것이다. 순번이 높은 사람이 정하면 낮은 사람은 기회조차 돌아가지 않는다. 사비나가 일년의 목숨이 남아있는 소년에게 시집가면 가족들에게는 무려 600포르에 가까운 돈이 지급되는 것이다. 일확천금의 기회가 가족들에게 돌아가지만 사비나 자신의 삶은 끝장이다. 물론 사비나의 이런 고민은 다른 네 명의 여자에게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들 고민은 그만하거라. 잠시후에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모든 것을 말하거라. 내일아침에 결정을 내게 알려주도록 해야된다. 물론 순번이 낮은 사람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순번이 높은 사람이 결정하면 다음 사람에겐 기회조차 없음을 상기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네." 패터의 말에 다섯명의 여자가 대답하였다. 다섯명 모두가 빈곤층에서 그나마 미인측에 드는 여자들이었다. 패터가 말하는 것들은 사실상 사람을 팔아먹는 노예짓이었지만 빈곤층 사람들을 위해서 어쩔수가 없었다. 600포르를 다섯명의 여자중 누군가의 가족들에게 주어지고 나머지 1400포르는 빈곤층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것이다. 1포르만 한 가구에 돌아가도 빈곤층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금액이다. 1포르는 100끼의 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다. 빈곤층 가구수를 생각한다면 1포르 이상의 상당한 금액이 배당될 것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큰 도움이다. 물론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생기겠지만 다섯명의 여자들중 조건을 모두 거부할 가능성은 드래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 만큼이나 희박한 일이다. 다섯명의 여자들은 집에 돌아가 모든 사실을 말하였고 아침이 되도록 다섯 집에는 불이 꺼지질 않았다. 부모님이 자신의 딸에게 희생을 요구한 집도 있었을 것이고 그와 반대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사비나는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에게 패터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절대 그럴수는 없단다. 굶어 죽을지언정 말이다." "네년이 미쳤구나. 그런 말을 듣고 오다니" 사비나의 부모는 밤이 늦도록 일을하고 돌아와 딸의 말을 듣더니 역정을 내었다. 하지만 가족들 모두가 꿀꿀이죽을 먹으며 생각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사비나가 포그너란 손자에게 시집가면 이 지긋지긋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600포르면 거대 상회에 맡겨놓고 이자만 받아도 가족들이 평생 행복하게 살수있는 거금이다. "엄마 여기 종이나왔다. 헤헤" 사비나의 동생은 부모의 마음도 몰라주고 꿀꿀이죽에서 종이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건저내며 히죽 웃었다. 하지만 사비나에게 동생의 행동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평소에도 종이 이외에 별의별 것이 나오지만 오늘은 특별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택하면 가족들이 꿀꿀이죽을 다시는 먹을 필요도 없는데, 하지만.' 사비나는 가족과 자신의 삶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족을 위해서라지만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긋지긋한 빈곤층 삶이지만 언제나 희망은 있었고 가끔 성공하여 이곳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일년후에 포그너란 사람의 손자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걸까?' 사비나의 고민은 아침까지 계속되었고 사비나의 부모도 딸에게 단호하게 말은 했지만 그들 역시도 다른 네 명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속삭임을 피할수는 없었다. 딸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수 없음을 알면서도 인간인 이상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아마도 아침이 된다면 사비나의 부모는 자신의 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결혼해서 일년만 살고 혼자된다고 해도 최소한 이놈의 꿀꿀이죽은 먹지 않겠지! 그걸로 만족하는 거야. 너무 큰 것을 바라지 말자.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사비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결정할 수 있었다. 사실 자신의 삶이 아까워서 선택을 할수 없었지만 밤새 생각해보니 이곳에서 자신이 아무리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결국은 꿀꿀이죽을 먹는 신세가 한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차라리 포그너란 사람의 손자와 결혼한다면 일년후 그 소년이 죽는다고 해도 자신은 그들의 가족으로 살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비나는 정령사란 사람들이 삶이 풍족해도 절대 육류의 섭취는 피하고 반찬으로 엘프들이 가르쳐준 풀만먹고 산다는 것을 알수 없었다. 아침이 밝자마자 사비나는 자신의 생각을 부모에게 말했고 사비나의 부모는 딸의 말을 듣고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들은 밤을 지새우며 패터의 제의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사비나가 패터의 제의를 수락하길 바랬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자신의 선택이 가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패터의 집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남았던 다섯명의 여자들과 관련된 친인척 모두가 모여 장사진을 이루었다. 하지만 결국 순번이 가장 높은 사비나가 결정을 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겐 기회조차 돌아가지 않았다. 사비나의 가족에게는 600포르라는 거금이 주어졌고 며칠후 빈곤층 모든 가구에는 각각 일정한 금액이 지급되었다. 말린에 있는 빈곤층에는 오랜만에 행복한 날이 며칠간 계속되었고 사비나는 더이상 마을에서 볼수 없었다. 그녀의 선택을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고 그녀의 가족또한 비난받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가난은 태어날 때 주어진 것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벗어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임을 말린에 살고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이런 젠장할" 올리버는 바닥에 꿀꿀이죽을 버리고는 욕을 뱉어냈다. 자신이 목숨걸고 구해온 음식쓰레기가 상당부분 남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구입하려고 줄서서 기다렸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것들이 배딱지가 불러터졌구만. 너희들이 언제까지 이러나 두고보자." 올리버는 허공에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올리버는 이제겨우 열 여섯살이지만 꿀꿀이죽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꿀꿀이죽은 빈곤층에서 아무나 판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식쓰레기를 얻으려면 밤늦게 말린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어른이 밤늦게 도시를 활보하면 경비병에게 붙들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더욱이 빈곤층 사람이라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것이 말린의 경비병들이다. 하지만 올리버와 같이 어린아이가 밤늦게 돌아다니다 걸리면 그런일은 당하지 않는다. 경비병들도 어린아이라면 한수 접어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올리버는 음식쓰레기를 얻기위해 만나는 경비병들에게 약간의 뇌물을 주어야했고 그 대가로 늦은밤까지 말린을 돌아다니며 음식쓰레기를 마음껏 구할수 있었다. 물론 귀족의 저택 근처와 같이 위험한 곳은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구해온 음식쓰레기로 꿀꿀이죽을 만들어 빈곤층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강한 정신력과 체력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올리버의 꿀꿀이죽 판매는 며칠전부터 갑자기 불황(不況)을 맞기 시작했다. 최하품의 꿀꿀이죽 판매이지만 이곳에서는 없어서 못팔고 있던 음식이다. 불황의 이유를 알아보니 패터라는 사람이 집을 갖고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 것이다. 자세히 알아보니 사비나란 여자가 돈많은 사람에게 팔려가서 그 일부가 사람들에게 분배된 모양이었다. 자세한 것은 알수 없었지만 꿀꿀이죽이 판매되지 않은 이유는 확실하였다. 돈이 생겼으니 쓰고 싶어졌겠고 가장 싫어했던 꿀꿀이죽을 먹기 싫었으리라. "이제 나는 뭐하지?" 하품의 꿀꿀이죽 판매량이 줄어들자 올리버의 수입은 계속 줄어들었다. 그의 꿈은 많은 돈을 벌어서 지긋지긋한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다. 몇년만 더 꿀꿀이죽을 판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갑지가 불황을 맞다보니 수입은 커녕 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수입보다 경비병들에게 찔러주는 뇌물값이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어쩔수 없이 다른일을 찾아야하나?" 올리버는 꿀꿀이죽의 판매를 계속 하고싶었다. 어른보다도 수배에 가까운 돈을 벌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올리버는 일주일 동안을 고민하였고 그 기간동안 자신과 같이 꿀꿀이죽을 판매하는 아이들도 다른 일을 구하러 다녔다. "맞다! 이것이 기회야." 올리버는 지금의 상황이 조금만 기다리면 끝나리라 생각하였다. 빈곤층에 살고있는 모든 집에 거금이 각각 지급되었지만 그것은 얼마 못가서 바닥날 것이 분명하다. 돈이 바닥나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사람들은 다시금 꿀꿀이죽을 찾을 것이다. "나같이 꿀꿀이죽을 판매하는 놈들이 모두 포기했을테니 그것을 이용해야겠다." 올리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자신과 비슷한 어린아이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면서 음식쓰레기를 얻어오는 방법과 꿀꿀이죽을 만드는 것도 교육시켰다. 꿀꿀이죽은 음식쓰레기를 단순히 끓이는 것에 불과하지만 좀더 가공이 필요했다. 음식쓰레기에 포함되어 있는 이물질들을 골라내고 아주 값싼 야채들을 함께 집어넣어 끓이는 것이다. 두 달이 지나자 올리버의 예상대로 빈곤층 사람들은 올리버가 판매하는 최하품의 꿀꿀이죽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패터가 지급한 돈이 바닥나자 더이상 자신들의 일자리에서 얻은 돈으로는 꿀꿀이죽을 먹을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올리버는 자신이 교육한 아이들에게 음식쓰레기를 얻어오도록 시키고 그것으로 꿀꿀이죽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모든 판매대금이 올리버에게 들어왔고 그중에 일부분만이 교육을 받고 일하는 아이들에게 지급되었다. 두 달전에 꿀꿀이죽을 판매하던 아이들은 더이상 꿀꿀이죽 판매를 할 수가 없었다. 올리버가 그들의 진출을 막기도 했지만 올리버의 꿀꿀이죽이 빈곤층 사람들 모두에게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올리버의 꿀꿀이죽 판매는 호황을 이루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개선되었다. 얻어온 음식쓰레기도 차별을 두기 시작했고 값도 천차만별이었다. 또한 일년이 지나자 굴꿀이죽의 맛은 상당부분 개선되어 빈곤층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진정한 음식메뉴가 되었다. 그후 올리버는 꿀꿀이죽 사업만이 아니라 빈곤층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또한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다. 올리버는 자신의 사업이 더이상 번창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는데 그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사비나란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녀가 어떤 알수없는 사람에게 팔려가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돈을 얻게되자 모두들 분수도 모르고 꿀꿀이죽을 구입하지 않았던 이야기로 그것을 이용해 자신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버의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분수를 알아야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고 그것은 빈곤층 사람들에게 전설이 되어 전해졌다. ------ < 꿀꿀이죽에 대한 설명 > 1950년대 말 우리나라가 분단을 겪은 이후 서울의 여러 포장마차에서는 꿀꿀이죽을 판매했는데 그것은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음식쓰레기를 가져다가 끓여서 판매한 것이다. 가격은 5원이었고 식사도중 담배꽁초나 면도칼과 같은 이물질이 종종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꿀꿀이죽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음식쓰레기를 펄펄끓인 것이 꿀꿀이죽이기 때문에 절대 종이가 발견될 수는 없습니다. 종이가 있었다면 가루가 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사비나의 동생이 꿀꿀이죽에서 종이를 발견한 것은 눈이 좋아서도 아니고 초능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단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사비나의 동생에게 발견될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종이 이외에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이물질이 있다면 의견 부탁드립니다.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1 회] 3. 자살 2 말린에서 더이상 구경할 것이 없게되자 할아버지는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마차에는 말린에서 구입한 선물이나 필수품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값나가는 물건들은 아니지만 최남단에 위치한 크라이 마을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는 물건들이었다. "할아버지 내일 곧바로 출발하는거죠?" "내일 오전에 말린에서의 마지막 볼일을 보고 오후에 출발할거란다." 할아버지가 나의 말에 대답하였다. 나는 집으로 간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당장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여행한 이야기를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집까지 가려면 또다시 한 달이나 걸리겠지만 지금 기분이라면 내일당장 집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할아버지는 아침식사도 거르고 외출하였고 정오가 되어서 돌아왔지만 나갈 때와는 다르게 혼자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곁에는 약간 지저분한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있었는데 얼굴은 땅을 향하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카인아 인사하거라. 사비나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할아버지의 소개에 간단히 고개만을 숙이며 인사하였다. 할아버지는 나의 인사가 끝나자 사비나라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말한 카인이란다." "안녕하세요. 사비나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사비나라는 여자가 나에게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였다. 나는 사비나의 인사를 받으며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키가 큰 것으로 보아 나보다 나이가 많을텐데 어린 나에게 허리를 깊게 숙일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여관점원을 불러 사비나가 목욕할 수 있도록 말하고 사비나의 옷까지 점원을 통해서 부탁하였다. 사비나가 입었던 옷은 거지들이나 입을 정도로 좋지 않은 상태였고 이상한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에 사비나가 누군지 묻지 않을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누구에요?" "너와 결혼할 여자란다. 네가 결혼하고 싶다고 해서 어렵게 구해온 아이란다." "네? 그게 무슨...?"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기가막혀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저분한 것은 그렇다치고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모든 결혼하는 남자가 여자보다 다섯 살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경우가 보통이다. 나는 갑작스럽게 할아버지에게 결혼이란 말을 듣게되자 너무 놀랐다. "카인 너보다 나이어린 여자와 결혼할 수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나보다..." "카인아 너에게 잔인한 말일지 몰라도 너는 일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스스로 알고있지 않느냐. 사비나는 그것을 알고서 나를 따라온 것이다. 사비나는 빈곤층에 살고있는 아이로..." 할아버지는 사비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빈곤층을 방문하여 어떤 방법으로 데려왔는지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다. 이야기를 듣는동안 나는 할아버지가 행한 사항에 대해서 감탄하였다. 그런 방법으로 나의 신부감을 구할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사실 일년후에 죽을 나와 결혼할 여자가 없으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돈을 이용한 것인데 괜찮을까요?" "사비나가 선택한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마을에서 결혼할테니 그렇게 알고있거라." "네,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사비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동안 사비나는 깨끗히 목욕을 끝내고 새옷을 입었다. 좋은 옷은 아니었지만 새삼 사비나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옷이었다. 빈곤층에서 젊은 여자들중에서 심사를 거쳐서 뽑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우와! 이쁘다." 사비나의 새로운 모습에 나는 감탄을 하였다. 크라이 마을에서 내또래 중에 가장 이쁜 에리나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나보다 키도 크고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지만 말이다. 사비나는 나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깊게 숙여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새옷이 어울리는구나." "포그너씨 감사합니다." 사비나가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하였다. 새옷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사실 빈곤층에서 새옷을 입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대부분 누가 입던 옷을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사비나로서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마을에 도착하면 카인과 결혼할테니 이제부터는 사비나도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네, 할아버지" 사비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부끄러운듯 고개를 깊게 숙이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나는 사비나와 할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마을에 도착하여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였다. 할아버지와 사비나의 대화가 끝난후 우리는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였다. 여관을 떠나는 우리들은 어색한 분위기라 말은 적었지만 사비나에게만은 흥분된 시간이었다. 평생 빈곤의 늪에 빠져 탈출하지 못할 것 같은 곳에서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야호!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말린의 외곽 성문을 지나게 되자 나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최남단인 크라이 숲에서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에 도착하여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며 이제 돌아가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쑥덕대었지만 어린 내게는 상관없었다. 사비나는 외곽 성문을 통과할 때 할아버지가 외곽성 출입을 담당하는 경비병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공포심 가득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빈곤층 사람이라 신분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정령사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쉽게 지나갈 수 있었다. 크라이 숲까지 돌아가는 여행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말린에 갈 때에는 할아버지와 단 둘이었지만 지금은 사비나까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비나를 어떻게 불러야되나 고민하였지만 그것은 할아버지가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사비나가 나보다 네 살이나 많지만 나와 결혼할 사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나와 사비나를 앉혀두고 사비나가 나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이유를 카르시온 제국의 문화까지 들먹이며 자세히 설명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이나 일리시아 제국 모두에서 남자의 신분은 여자보다 높게 평가된다. 그것은 남자가 갖게되는 기본적인 의무 때문인데 남자는 적으로부터 가족이나 마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존재한다. 특히 소외된 지역의 경우는 몬스터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남자들의 전투로 인해 여자가 많아지는 현상을 초래해 결국 소수의 남자권리가 많아진 문화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는 어쩔수없이 생겨난 문화에 속하고 여자는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의무가 존재한다. 물론 남편이 기본적인 의무를 모두 수행할 때에 여자의 의무도 타당성을 가진다. 이런 문화는 전투가 없는 지역의 경우에 해당사항이 없어야 하지만 몬스터가 없는 지역에서도 전통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사비나는 카인에게 존대를 쓰도록 해라. 그리고 카인 너는 사비나에게 존대를 할 필요가 없다. 어색하겠지만 내가 설명했으니 이해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사비나와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어색하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말도 몇번 건네보지 못한 낯선 여인이기 때문이다. 사비나로서도 마찬가지 기분인지 멀뚱히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비나와 나의 관계는 한 달의 여행동안 별로 발전되지 못하였고, 크라이 마을에 도착할 때쯤이야 겨우 대화가 가능한 정도였을 뿐이다. 사비나는 나와 결혼할 상대이며 나이가 많기 때문에 어려웠고 사비나 또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대화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크라이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때 우리는 모두 즐거운 기분이었다. 사비나는 드디어 말린을 벗어나여 정착할 장소가 어떠한지 호기심이 생겼고 할아버지와 나는 드디어 편안한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무척이나 오랜 여행이었고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누구도 말린을 나만큼 오랜동안 구경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인아!" 크라이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때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미리 실프를 소환하여 집에다 도착을 알렸기 때문에 가족이 마중나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이 모여 있어서 우리를 반겼다. "우리 아가 괜찮니?"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나의 몸을 구석구석 만져보았다. 수도까지 오가는 거리만도 두 달이 걸리는 여행인데다 말린에서 지낸 기간까지 합하면 무척이나 오랜 기간이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일단 할말이 있으니 집으로 가자구나." 아버지는 나보다도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어머니는 그때서야 자식만을 챙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카인은 그동안 멀쩡히 지냈으니 걱정말아라."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을 하고서 마차를 집으로 돌렸다. 마을 사람들은 가족들과의 상봉에 참견하지 않고 단지 돌아온 것을 축하해주었다. 오늘 저녁에 마을에서는 우리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릴 것이다. "카인아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돌아왔구나." "카인아 여기야. 여기!"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나도 답례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친구들을 본지도 무척이나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당장 뛰어가서 부둥켜 안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일단 가족들과 집으로 가야했다. 가족과의 인사를 나누는 동안 사비나는 외톨이가 되어 마차안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로서는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할아버지나 내가 그녀를 소개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서야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사비나를 소개해주었다. "사비나는 피곤할테니 일단 카인방에서 쉬도록 해주거라." "네, 아버님"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하였다. 그동안 사비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여행하는 동안 불편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사비나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모든 식구를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내가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비나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모든 식구들이 눈망울을 초롱거리며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사비나는 가족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사비나가 이제 우리의 가족이 되는 것이니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사비나에게 우리 가족을 하나하나 소개시켜 주었다. 사비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보기엔 정신없어 보였다. 일주일 동안은 무척이나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사비나를 크라이 마을로 데려가 소개해주고 그녀가 나와 결혼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마을에서는 두 형이 있는데도 제일 어린 더욱이 성년식도 치루지 않은 내가 결혼한다는 것에 의아해했지만 모두 축하해주었다. 결혼식 준비는 마을에서 하나하나 준비해가고 있었고 며칠후 가능할 것 같았다. 사비나가 나의 방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크라이브형의 방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결혼식 준비를 하는동안 우리 가족들은 엘프들의 허락를 받고서 크라이숲 외곽에 집을 한채 짓기 시작했다. 나와 사비나가 살게될 집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길 원했지만 가족들은 사비나를 배려한다며 그렇게 결정이었다. 사실 가족들과 따로 살게된 큰 이유중에 하나가 사비나가 정령가족의 생활을 이해하기 힘들 뿐더러 적응하기 어렵다는 결정 때문이었다. 나와 사비나가 결혼후에 지내게 될 집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집의 위치가 숲의 외곽인 이유는 사비나가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라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령사들의 생활은 일반 사람들이 무척이나 이해하기 힘들다. 먹는 음식 자체도 다를 뿐더러 매일같이 정령을 소환하여 수련하고 숲을 거니는 것이니 말이다. ------ "카인과 사비나의 결혼식을 거행합니다." "우와아아" "하하하! 카인이 결혼하는구나." 촌장인 플레인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결혼식을 모두들 축하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결혼식을 거행하기 직전에 포그너가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에서 구입한 선물을 받아서인지 무척이나 기쁜 모습이었다. 카인은 결혼식 예복이 어색하여 자꾸만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려 마을 사람들의 놀림을 받고 있었다. "하하하 신랑이 신부보다 키가 작구만." "아직 성년식도 지나지 않았는데 밤일은 치룰수 있으려나!" "하하하" 카인은 마을 사람들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만약 결혼식만 아니었다면 당장 쫓아가서 한바탕 싸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평소에 카인은 정령사 가족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장난삼아 많이 괴롭혔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도 이런 기회를 이용해 철저히 복수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름대로 친하다는 표현이었지만 당사자인 카인은 얼굴을 붉히며 결혼식을 진행하는 동안에 수많은 실수를 연출하였다. 카인이 흥분한 마음으로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사비나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사실 사비나는 돈에 팔려온 것이나 마찬가지 신세였기 때문에 노예생활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결혼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저 일년의 삶이 남아있는 카인이란 소년과 함께 지내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럼 카인과 사비나가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플레인의 말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카인과 사비나에게 찾아와 축하인사를 하고 각자 차려진 음식을 먹으며 결혼식의 흥을 돋구었다. 크라이 마을에서 결혼식은 마을의 커다란 잔치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정령사 가족의 결혼식이라 더욱더 신났음은 당연하다. 결혼식을 크게 열어주여야 정령사 가족의 도움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뜻깊은 의미가 담긴 것이다. 결혼식의 음식중에 특이한 것이 있다면 처음보는 수많은 과일들이 나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엘프들이 카인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보내준 과일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엘프들이 가져온 과일을 먹으며 그 맛에 감명받고 눈물까지 흘리기도 하였다. 엘프들이 선물한 과일은 매우 특이하여 사람의 입맛을 당기고 있었다. 정령사 가족의 결혼이 아니라면 엘프들이 키운 과일을 언제 먹어보겠는가. 크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여러가지로 즐거운 잔치였다. 마을의 잔치는 어둠이 찾아와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인과 사비나는 자신들이 앞으로 지낼 집으로 향했다. 가족들이 크라이 숲의 외곽에 지어준 집으로 엘프들의 양식을 많이 포함한 집이었다. 집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주로 인간들의 물품위주였다. 정령사 가족들의 생활용품은 매우 복잡하다. 엘프들의 식생활을 닮기 때문에 불을 이용한 음식보다는 과일이나 초식류의 음식을 선호한다. 정령의 수련을 극대화 하려면 생명력이 강한 음식물은 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인의 경우는 앞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굳이 정령사로서의 지켜야 할 식생활도 없어서 사비나의 생활위주로 준비한 물품들이다. "카인 들어오세요." 사비나는 집안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어린 신랑을 방으로 불렀다. 방에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간단한 음식과 술까지 있었다. 사실 카인과 사비나는 결혼식이 끝나고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받느라 제대로 식사조차 못했다. 결혼식에는 신랑에게 술을 권하는 것이 전통인데 카인이 정령사 가족이라 마을 사람들 누구도 술을 권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정령사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갖고있기 때문이다. 오직 과일이나 풀만먹고 살며 생명이 강한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 또한 정신력을 흐리는 술과같은 음식도 먹지 않는 것을 누구나 알고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카인의 삶이 얼마 남지않아 정령사로서의 모든 생활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말린으로 향하는 동안에 맛나는 육류까지 먹었다는 것을 알게되면 마을 사람들은 기절할 것이다. "배고프실텐데 식사부터 하세요." "응, 고마워" 카인은 방에 들어오자 사비나가 식사를 권하자 곧바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결혼식 때문에 하루종일 먹지 못했다. 결혼식 하기전에는 긴장되서 먹지 못했고 결혼식 이후에는 축하인사 받느라고 먹지 못했다. 카인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입에 음식물을 가득 채우고 우물거리다 문득 사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비나도 배고플텐데 먹어." "예." 사비나도 카인의 말을 듣고서 같이 식사를 하였다. 사비나도 빈곤층에 살았기 때문에 굶는다는 것에 무척이나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사비나는 식사를 하면서 카인이 많이 먹는 반찬을 먹기 좋도록 옮겨주었다. '사비나가 있으니까 좋네.' 카인은 사비나가 집에서 지내며 결혼식을 치루는 기간동안 무척이나 편한 생활을 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기도 하고 귀찮은 일을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 방청소는 물론이고 자신의 빨래는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아닌 사비나가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이집에서 사비나와 둘이서 살아야되나? 심심하지 않을까?' 카인은 식사를 하며서 결혼을 결심한 자신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비나와 결혼해서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이 자신이 생각한 것인데 엉뚱하게 가족들은 사비나와 자신을 따로 살도록 결정한 것이다. 카인이 식사를 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사비나는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령사 가족은 마을 사람들이 디글을 마음껏 먹을수 있도록 준다니 결혼하길 잘했어.' 카인의 생각과 다르게 사비나는 마음속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정령사 가족은 마을 사람들이 디글을 먹을만큼 준다는 것을 결혼식을 치루며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빈곤층에 살면서 가족들은 디글을 구경조차 못했다. 꿀꿀이죽에 디글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많이 끓였기 때문에 묽은 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디글을 마음껏 먹을수 있는 생활을 할수가 있다. 사비나는 카인이 오래 살았으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일년후 죽는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은 정령사 가족의 일원으로 배를 굶주리며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카인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더욱이 자신보다 작을 뿐더러 귀엽기까지 하니 금상첨화이다. 풍족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적인 부분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다. 그와 반대로 카인은 마을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순진 그 자체임을 사비나는 자세히 알고 있어서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게될지 의문이 드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사비나는 자신의 귀여운 신랑이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편식을 하는 꼬마신랑을 보며 사비나는 반찬배치를 바꾸기까지 했지만 신랑은 창피해 하지도 않았다. '후후훗 귀여운 나의 꼬마신랑' 사비나는 카인의 식사를 챙겨주면서도 자신도 맛나게 식사를 하였다. 이제는 이곳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살아갈 곳이다. 카인이 식사를 하는동안 방안을 살짝 살펴보았다. 벽은 나무로 되어있는데 결무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자신이 살던 빈곤층의 집들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수없는 집이다. "아휴 이제 살것같네." 카인이 식사를 마치자 사비나는 상을 옆으로 치웠다. 카인과 사비나는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마땅히 할말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부부가 할일을 해야했지만 상당히 어색하니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해야하나?' 카인은 가족들보다도 마을 어른들이 말해준 것을 지금 해야될 때임을 알았지만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비나가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키도 크니 왠지 마음속으로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 그냥 방에 앉아서 눈을 바라보아도 약간 고개를 위로 쳐들어야 했으니 상당히 창피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카인과 사비나는 멀뚱히 앉아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간단한 대화만을 가끔 할 뿐이었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나서야 사비나가 먼저 카인의 앞에서 옷을 벗고 방안에 펼쳐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카인은 자신이 먼저 행동하지 않은 것에 후회했지만 신부가 벌써 옷을 벗었으니 어쩔수가 없었다. 사실 신부는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않는 무책임한 카인이었다. '마을 어른들이 신부의 옷을 벗기라고 했는데 이러면 어떻게 해야하지?' 카인은 마을 어른들이 들려준 이야기중 신부의 옷벗기는 장면을 생략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였다. 옷을 모두 벗고서 사비나가 들어간 신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을 어른들이 들려준대로 행동하였지만 자신이 제대로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후훗' 사비나는 자신이 결국 기다림에 지쳐 먼저 옷을 벗어 알몸인채로 이불속으로 들어가자 어쩔줄 모르는 카인을 바라보며 그렇게 웃길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인이 알몸인채로 이불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몸을 더듬자 더이상 웃어 넘길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알지못하는 두려움에 빠져 몸을 자꾸만 움츠렸다. 사비나가 느끼는 공포심은 세상의 모든 처녀가 남자를 경험할 때 겪는 감정이었다. '마을 어른들의 말이 하나도 틀린게 없네.' 카인은 마을 어른들의 말대로 하나하나 행동할 때마나 사비나가 그대로 행동하자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사비나와 결혼식을 하기 전까지 카인은 사비나에게 무척이나 자신감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고 원하는 것을 말하면 그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카인은 사비나의 몸을 마음껏 더듬으며 신기함을 느꼈다. 사실 카인이 열 네살인 사춘기를 겪는 나이이기 때문에 여자의 몸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가족들의 보살핌으로 아무런 충동심이나 혼란을 겪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비나의 몸을 마음껏 더듬으며 충격아닌 충격을 받고 있었다. '여자의 가슴은 다 이렇게 큰건가?' 카인이 사비나의 가슴을 더듬으며 머리속에 온통 여자의 신체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할 때 사비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혼했으니 당연히 겪는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다가오니 두려움은 물론이고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카인은 사비나의 몸에 중요한 부분을 더듬으며 나중에는 키스도 서슴치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인의 행동이 과감하게 변하는 동안 사비나의 행동은 매우 소극적으로 변하였다. 사비나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을 제외하고 할수있는 행동이 없었다. 여인의 성격이 아무리 적극적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게되면 신체구조상 성관계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남편에게 만큼은 소극적으로 변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성생활 때문이다. 카인은 결국 사비나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고 입술이 닳도록 키스를 하고난 이후 자신의 신체 한 부분을 사비나의 몸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카인에게 어른들이 말하길 무척이나 즐거울거라 말해주었지만 사실은 즐거운 것도 있었고 즐겁지 않은 것도 있었다. 카인은 어른들이 가르켜준 결혼한 남자가 신부에게 행하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 사비나의 몸 위에서 밤새도록 움직였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2 회] 3. 자살 3 나는 행복한 꿈의 나라에서 향긋한 음식냄새를 맡으며 일어났다. 사비나가 아침식사를 방안에 차려놓고 깨우려 할 때 일어난 것이다. "씻고 식사하세요." "응" 나는 사비나의 말에 어떨결에 대답하고 얼른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일어났을 때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태어나서 이처럼 옷을 빨리 입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밤에 있었던 일이나 사비나를 앞에 두고 옷을 입어야만 하는 내 처지는 겪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 늦잠을 자다니.' 밖을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니 어이없게도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늦게 잠들었으니 늦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첫날밤을 보내고 식구들에게 인사를 가지도 못했으니 아주 큰일인 것이다. 간단히 세면을 하는일도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새로운 집이다보니 세면에 필요한 기본물품들이 엉뚱한 곳에 있어서 일일이 찾아야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닦으로세요." "고마워, 사비나." 내가 세면을 끝내자 사비나가 다가와 수건을 건네주었다. 하룻밤을 함께 보냈건만 우리 사이는 생각처럼 편하지가 않았다. 물론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마을 어른들이 말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세면을 끝내고 식사를 마친후 가족들을 찾아가 일일이 인사드렸다. 가족들은 주로 나에게 보다는 사비나에게 여러가지 말들을 해주었다. 앞으로 가장 어려움을 겪을 사람이 사비나였기 때문이다. 정령사 가족이 아니며 크라이 숲의 마을사람도 아닌 외톨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것이다. 사비나는 가족들의 관심에 눈물까지 흘리며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는 마지막으로 마을의 촌장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났다. 이제는 더이상 인사할 필요없이 집에서만 지내면 된다. 보통 인간문화로 따지면 결혼한 부부는 일정기간 동안 부모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우리는 정령사 가족이라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비나는 다음날부터 매일같이 집에서 온갖 굳은일을 하면서 몸을 혹사시켰다. 비질을 하여 마당에 있는 아름다운 나뭇잎을 쓸어내고 먼지도 없는 방안을 청소하며 그것도 모자라 집앞에 텃밭까지 만들고 있었다. 정령사 가족은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는 대가로 많은 것을 얻기 때문에 사비나처럼 텃밭을 가꿀 필요가 없다. 또한 자연의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마당에 있는 나뭇잎도 쓸어버리지 않는다. 사비나의 행동들은 내게 무척이나 신선한 충격이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이 사비나처럼 부지런히 행동하는 것을 봐왔지만 정령사가 아닌 사람들은 원래 그려러니 했다. 하지만 이제 나와 함께 지내는 사비나가 그렇게 행동하니 느낌이 달랐다. 나는 사비나가 힘들게 텃밭을 가꾸자 한마디 안할수가 없었다. "사비나 텃밭을 가꿀 필요없어. 마을 사람들에게 얻어오면 된다구."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사비나는 나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도 않고 집앞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을에 내려가 채소 씨앗을 얻어다 뿌렸다. 채소가 잘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사비나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았다. 정령사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대가로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간단한 치료조차도 마을 사람들은 해결하지 못하지만 정령을 이용하면 손쉽게 치료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달이 지나자 집은 사비나의 손길이 여기저기 묻어나 새롭게 변하였다. 집앞에는 채소가 자라는 텃밭이 생겨났고 여러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생겨났다. 사비나가 직접 만들거나 마을에서 얻어온 것들이다. 사비나에겐 우리 가족과는 다르게 여러가지 필요한 물품이 많은 것이다. 사비나의 행동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식이다. 내가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까지 여행을 하는동안 행복한 이유중에 하나가 음식 때문이다. 물론 할아버지는 내내 채식만을 하였지만 나는 여관에서 해주는 육류를 비롯해 각종 희귀한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했었다. 사비나는 매일같이 맛나는 음식을 해주어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한 달의 기간이 지나자 사비나와 나는 무척이나 친해질 수 있었다. 밤이면 살을 맞대며 운동을 하고 낮에는 같은 집에서 지내니 친해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동안 친구들은 나를 찾아올수가 없었다. 나의 집은 외곽이긴 하지만 크라이 숲에 지어졌고 이곳은 엘프에게 인정받은 인간만이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비나와 친해지자 그동안 궁금했던 사실을 물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사비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사실 내가 하려는 질문은 사비나에게 슬픔 부분을 생각나게 할지도 몰라 무척이나 고민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인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 과감히 물어보았다. "사비나는 이곳에서 지내는게 즐거워?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버리고 또한 앞으로 얼마 살지도 못하는 나와 결혼까지 했는데 말이야." 사비나는 음식을 하기위해 채소를 다듬다가 멈칫하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깊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사비나가 다듬던 채소는 집앞 텃밭에서 기른 것으로 가끔은 형들이 찾아와 정령으로 병든 채소를 치료까지 해준다. 그러니 집앞 텃밭에서 채소가 무척이나 잘 자란다. "카인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제가 살았던 빈민촌은 사람이 가축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곳이에요. 하지만 지금 저를 보세요. 저는 이곳에서 카인의 가족에게 보살핌을 받고 예전에 매일 먹어야만 했던 꿀꿀이죽이 아닌 디글을 먹고 있어요. 카인도 여행을 하면서 보았겠지만 대부분의 평민들은 디글을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사람들처럼 마음껏 먹으며 지낼수가 없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제게 행복을 누릴수 있도록 해준 카인이 너무나 고마워요. 만약 제가 카인을 대신해 죽을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나는 사비나의 말을 듣고서 너무나 기뻤다. 물론 빈민촌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은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 특히 꿀꿀이죽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 그래도 사비나의 말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알수 있었다. 사비나도 나처럼 음식에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나와 반강제로 결혼을 하였지만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비나가 어쩔수없이 결혼했기 때문에 마음 한편으로 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마음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었다. "사비나 정말 고마워." 나는 사비나를 가볍게 안아주며 말하였다. "제가 고마운걸요." "하하하" 사비나의 말을 듣고서 나는 긴장된 마음이 풀어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나와 사비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시간이 늘어만갔다. 가끔씩 가족들을 만나고 마을을 다녀오는 것이 하루일과였다.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내가 집에서 할수 있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사비나가 집안일을 할 때는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방해인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심심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비나에게 요리를 배웠다. 요리를 배우면서 알게된 것인데 사비나의 요리가 맛있었던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조미료의 사용에 있었다. 모든 요리에는 당연히 조미료를 사용한다. 조미료는 각 가정마다 만드는 방법이 다른데 이것 때문에 음식의 맛이 독특해지게 된다. 조미료는 짠맛, 단맛, 신맛, 구수한 맛, 감칠맛 등의 맛을 내도록 하는 재료인데 음식에 약간만 넣어도 맛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매우 강하게 만든다. 내가 그동안 이런 맛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정령사 가족들은 정령과의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 절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미료는 대개 짜기 마련이고 짠 음식은 정령과의 친화력에 상당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 사비나도 요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다. 사비나의 말로는 자신이 살던 빈민촌이라는 곳은 음식을 요리해 먹을수 있는 환경요건을 갖추지 못한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녀가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요리를 할수 있었던 것은 남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기 때문이라도 말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무척이나 오래 지속되었고 매일 요리를 함께하여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끔씩 크라이 마을에 들리면 어른들이 깨소금이 쏟아진다며 놀려댔지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저 결혼을 하는 사람이면 원래 듣는 소리려니 하였다. 그 전에도 마을 처녀총각이 결혼하면 이런 소리를 어른들이 하였기 때문이다. 결혼한지 어느정도 지나자 마을 사람들은 사비나의 임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결혼한 사람들은 열렬한 사랑이 넘쳐나서인지 몰라도 대개 서너달이 지나면 부인의 배가 서서로 불러와 임식소식을 알리는데 사비나에게는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다. 크라이 마을의 어른들은 내가 성인이 아닌 것이 원인이라며 어린애 취급을 하였다. 나는 어른들에게 열 네살짜리도 어른들 못지않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성인식의 날짜가 다가오며 서서히 막을 내렸다. 나의 운명은 열 다섯이 끝이었고 죽음이 다가올수록 사비나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예전에 내가 죽는다해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말이 진실인지 알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시간이 늦게 흐르길 바랬지만 점점 빠르게 흘러만 가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위해 매일같이 엘프마을을 찾아가 세레나 엘프장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프장로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말해주었다. 오직 엘프와 드워프와 같은 이종족만이 죽음을 자연으로 회귀(回歸)하는 축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마음을 다지기 위한 정신계 정령들에 대한 말을 해주었다. 밝은 감정의 정령들인 사랑의 정령 에페리얼, 용기의 정령 브레크로지, 희망의 정령 데지리쉬, 믿음의 정령 페이트리스 그리고 어두운 감정의 정령들인 공포의 정령 튜리크, 혼돈의 정령 레프리컨, 분노의 정령 퓨리, 증오의 정령 휴트리드, 파괴의 정령 루이넬, 다툼의 정령 레디스퓨트, 질투의 정령 질리엇 등등 수많은 감정의 정령들에 대한 신긴한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 인간의 정령사들은 쉽게 익힐수 있는 물질계 4대 정령만을 익히기 마련인데 가끔씩 정신계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들도 나타난다. 하지만 정신계 정령들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들로부터 정령사로서의 대접을 받기 힘들다. 요즘에 들어서는 물질계 정령사들이 취미삼아 배우는 정령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신계 정령의 장점이 있다면 굳이 4대 물질계 정령들을 수련하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 채식만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대비해 엘프마을을 향하고 있다. 숲을 걸으면서 오직 사비나에 대한 생각만이 머리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족들은 엘프처럼은 아니지만 죽음에 대해서 조화로운 입장을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오래전부터 나의 죽음을 알고 있어서 커다란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저 예전보다 조금 슬픔의 강도가 높아졌지만 그것은 사비나의 입장과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결혼할 때부터 나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밤 악몽에 시달리고 이제는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 조차도 불안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카인이 오늘은 늦었구나." "네, 코스트씨" 엘프마을에 다가오자 마을을 지키는 코스트가 반겨주었다. 엘프들은 순번을 정해가며 마을을 지키는데 그 기간이 무려 최소 3년이 넘는다. 엘프가 수천년의 삶을 살아가니 당연한 것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놀라운 것이다. 물론 모든 엘프가 기본적으로 마을과 숲을 생명처럼 지키지만 순번에 해당하는 엘프는 좀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세레나 엘프장로를 만나고 인사를 나누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정신계 정령에 대해 들었다. 정신계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인간이 갖고있는 공포의 본질을 이해하고 앞으로 나의 죽음이 자연스럽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는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받아들여 열 다섯살을 맞이하는 날에 죽고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다. 그 전에 자살을 함으로서 이런 짧은 삶을 선사한 신에 대해서 저주하며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레나 엘프장로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보려무나." "제가 죽으면 저와 결혼한 불쌍한 사비나를 보호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나는 세레나 엘프장로를 바라보며 간절히 말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어제밤 사비나가 내가 죽는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왠지 그녀가 앞으로 행복하지 않으면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걱정말거라. 크라이 숲에서 지내는 동안은 보호해주마." "고맙습니다. 장로님" 세레나 엘프장로의 허락에 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족들도 사비나를 보살펴준다고 말해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엘프장로의 말에 더욱 마음이 놓여졌다. 엘프들은 절대 거짓을 말하는 않는 종족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은 죽는 순간까지 지키기 때문이다. 물론 사비나의 보호에 대한 정의는 정신적인 부분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카인" "네, 장로님" "네가 며칠전 말한 것은 엘프들이 모두 동의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세레나 장로는 내게 말을 하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사실 며칠전 나의 자살에 대해서 엘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살을 하더라도 처참하게 죽는 것은 싫었다. 아무런 고통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삶을 마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엘프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내가 선택하고 싶은 자살은 정신계 정령을 통해 즐겁고 행복한 생각이 가득찬 순간에 죽고싶다는 것이고 어제 세레나 엘프장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나는 엘프들에게 정령을 통해 강제로 행복하게 해주고 엘프가 제일 끔찍히 여기는 살생을 부탁한 것이기 때문에 허락받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부탁했는데 세레나 엘프장로가 엘프들의 동의를 받은 것이다. "장로님 그것이 정말인가요?" "카인 정말이란다. 엘프들은 생명력이 강한 인간을 죽이고 싶지 않지만 너의 경우에는 조화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니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계약을 맺은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도 그렇게 대답했단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나는 눈물을 흘리며 세레나 엘프장로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엘프가 살상(殺傷)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이 얼마나 어렵게 나왔는지 알고 있었다. 나의 마지막은 엘프들의 도움으로 행복하게 끝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먼저 사비나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었고 가족들에게도 전하였다. 차츰 나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별다른 것은 없었다. 크라이 마을의 친구들에게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에서 내가 쓰던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친구들은 나의 인사에 아무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인사를 받았고 모두들 어린놈이 결혼하더니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다며 놀렸다. 사비나는 집에서 내가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기를 바랬고 애초에 버리려던 계획을 바꿨다. 앞으로 내 물건들을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겠다는 사비나의 말에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나의 열 다섯번째 생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사비나가 심하게 불안감을 갖자 가족들이 찾아와 함께 지냈다. 어머니는 사비나를 끌어안고 함께 울기도 하셨다. 엘프들까지도 나의 집에 찾아오는 횟수가 많아졌고 나는 앞으로 살날이 줄어들수록 신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서 생겨났다. 결국 열 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하루전날이 밝아왔다. 신에 의해서 결정된 운명에 의해 내일이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삶은 내일이 아닌 오늘로 끝을 맺을 것이다. 신에 대한 복수겸 운명을 거부하는 것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결정한 나의 자살은 지금에 이르러 약간은 후회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과 다르게 지금 내 옆에는 결혼한 사비나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루라도 내가 더 살기를 바랬지만 하루 더 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3 회] 3. 자살 4 크라이 숲의 모든 엘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가족들과 마지막 이별의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형 크라이브, 작은형 타르 그리고 나의 사랑 사비나와 갖는 이별의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가족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세레나 엘프장로는 나를 준비된 나무판자 위에 눕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니?" "고마워요. 장로님" 장로의 질문에 나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대답해 주었다. 장로를 비롯해 엘프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나 다름이 없다. 정신계 정령을 이용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강제로 머리속에 떠올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워있는 판자에는 알수없는 마법수식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는 알수 없지만 이것도 나의 편안한 죽음에 도움이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카인아... 흑흑흑" "카인" 마법수식이 새겨진 판자위에 누워있는 내게서 엘프장로가 떨어지자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장로가 말해준대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가족들이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만 당장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좋았을까?' 마음속으로 후회하는 마음이 약간이나마 생겼지만 곧 다른 생각을 하였다. 장로가 내게서 멀어진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쉬이익. 휘이이.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는 엘프마을에 갑자기 수많은 정령들이 소환되어 바람이 강하게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엘프들이 각자 자신있는 정령을 소환하여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따르는 물의 정령왕이신 엘라임이시여 카인에게 자연의 촉복을" "자연의 조화로움을 따르는 바람의 정령왕이신 실프드이시여 카인에게 자연의 축복을" "자연의 조화로움을 따르는 불의 정령왕이신 샐리온이시여 카인에게 자연의 축복을" "자연의 조화로움을 따르는 땅의 정령왕이신 노아스이시여 카인에게 자연의 축복을" 많은 엘프들이 자신이 소환한 정령의 힘을 빌어 내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본래 자연의 축복은 오직 최상급 정령만이 가능한 일이지만 수많은 정령의 힘을 이용하면 그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이런 축복의식은 거의 행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조화로움이 벗어난 존재인 나를 불쌍히 여겨 베푸는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인가' 세레나 엘프장로는 며칠전에 자살에 대한 도움의 방법을 내게 말해주었다. 엘프들이 소환한 정령의 힘을 빌어 축복을 내려주고 다음으로 정신계 정령을 통하여 내 의식의 고통을 없앤후 마법을 이용해 나를 냉동시켜 엘프마을에서 오랜동안 지켜주기로 말해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자연으로 환원하지 않고 냉동시켜 조금이라도 신의 분노를 덜어주거나 피하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결정했으리라. 휘이익. 쉬이익. 또다시 알수없는 소리가 들려왔고 여러가지 생각에 빠져있는 나는 육체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사라짐을 느낄수 있었다. 오직 의식만이 남아있고 육체는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정신계 정령에 의해서 서서히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리라. 의식만이 남아있는 내게 수많은 즐거운 일들이 떠올랐다. 크라이 마을의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생각, 가족들과 지내던 생각,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을 여행하며 겪은 즐거웠던 사건의 생각, 사비나와 함께 지내던 생각 등 오직 즐거운 생각만이 머리속에 가득하였다. '언제나 이런 기분이었으면.' 나는 마음속으로 지금의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음을 간절히 바라며 의식이 점점 알수없는 깊은 곳으로 잠드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행복한 시간을 오래 느끼기 위해서 깊은 곳으로 잠드는 것을 지연시키려고 했지만 의식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 세레나 엘프장로는 모든 엘프들이 판자위에 누워있는 카인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려주자 잠깐동안 조용히 기다렸다. 카인이 누워있는 판자는 세레나 앨프장로가 직접 만들었으며 자연의 생명력을 모아서 전해주는 마법수식이 그려진 상태이다. 그저 카인이 무의식 상태에서 정신계 정령을 통해 전해주는 행복한 생각을 좀더 오래도록 느끼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다. 본래 생명력을 모아주는 마법수식은 마법에 대해 능숙하다고 해서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에 관련해서는 오직 엘프들만이 제어할 수 있는 고유능력으로 최상급 정령을 이용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인간의 경우는 마법만을 이용하여 리치와 같이 기나긴 수명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엘프들은 최상급 정령을 가지고 생명력을 모아 수명을 자유롭게 느릴수도 있지만 절대 그러한 짓을 하지않는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그저 카인이 무의식 상태에서 즐거운 시간을 오래도록 갖길 원하는 마음에서 최상급 정령을 이용해 생명력을 모아 전해주는 마법진을 그려준 것이지만 그것이 카인의 운명을 빗겨나게 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장로는 판자에 새겨진 생명력을 전달하는 마법수식이 활성화되자 정신계 정령에 능숙한 엘프들에게 미리 말한 것을 지시하였다. 휘이익. 쉬이익. 엘프들이 소환한 수많은 정신계 정령에 의해 엘프마을은 괴기스런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들 웃음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신계 정령은 엘프들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제어가 불가능한 존재들이었다. 물질계 정령과 다르게 오직 소환자의 정신력에 의해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호호." "헤헤. 히히." 바람소리에 섞인 정신계 정령들의 웃음소리를 통해 장로는 정령의 정체를 대부분 알수 있었다. 기쁨의 정령인 아리엔의 웃음소리가 가장 진하게 들려왔고, 사랑의 정령 에페리얼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그외에 용기, 희망, 믿음의 정령의 소리도 들려왔지만 기쁨의 정령 아리엔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다른 존재들은 약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카인에게로..." 세레나 엘프장로가 엘프들을 향해 말하자 모든 밝은 감정의 정신계 정령들이 카인의 주위를 헤집고 다녔다. 잠시후 정령들이 카인에게로 흡수되더니 곧 사라졌다. 이제부터 카인은 오직 밝은 감정의 정신계 정령에 의해서 타의로 즐거운 생각들만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육체에 대한 오감을 느낄수 없을 것이고 이제는 설사 누군가 죽인다 하더라도 행복하게 삶을 마감하리라. "카인아 흑흑흑" "엉엉엉" 카인의 가족들은 정령들이 카인에게 흡수되자 잠시나마 그쳤던 울음을 터뜨렸다. 카인이 행복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 방금전의 의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울음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사비나를 제외하고 모두 정령사 가족이라 대부분 엘프들의 처사에 고마움을 생각하면서도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카인의 운명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잠시후에 가족들은 엘프들이 소환한 얼음정령 그류페인과 마법에 의해서 카인이 서서히 얼어가는 것을 볼수 있었다. 가족들의 울음소리에도 불구하고 세레나 엘프장로는 카인이 편히 쉴수 있도록 냉동을 시켰다. 엘프들은 보통 숲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대로 시체를 방치하지만 카인의 경우는 엘프들의 뜻대로 할수가 없었다. 신에 대한 분노를 피하려면 어느정도 자연의 축복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카인이 냉동된 또다른 이유중에 하나는 본인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카인은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냉동시켜 언제나 만날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물론 카인 자신이 왠지 그냥 죽는다면 나중에 자신을 잊을까하는 개인적인 생각도 한몫을 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없어진다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까하는 의문을 갖는 마음도 이같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객관적으로 인간 한 명이 죽거나 없어진다고 해도 세상은 아무런 변함도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카인은 생명력을 모아주는 판자와 함께 투명한 얼음으로 휩싸여져 있었다. 직육면체의 얼음덩어리 자체에 카인이 미소진 채로 들어가 있었고 그것이 카인의 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비나는 얼음위에 엎드린채 하염없이 울어서 카인을 계속해서 불렀다. 하지만 얼음속에 냉동된 카인이 사비나의 목소리를 들을수도 없을 뿐더러 대답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비나 그만 카인을 편해 보내주려무나" "안돼요." 사비나는 카인의 얼음관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사비나가 그저 슬퍼서 그런 것이라 이해했지만 시간이 지나서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얼음관에는 카인이 얼굴에 미소를 띈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당장 웃지는 않을까하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카인의 얼음관을 마을의 생명수 나무에 보관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엘프들의 행위가 조화로웠던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방금 엘프들은 카인이란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을 죽인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불이익이 생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인이 조화로움을 벗어난 인간이라 도움을 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사비나 카인은 행복하게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거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구나." "아니에요. 저는 카인과 함께할 거에요." 카인의 아버지인 네이브가 카인의 얼음관에 붙어있는 사비나에게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사비나는 얼음관에서 떨어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카인의 얼음관에서 절대 떨어질수 없다며 더욱 강하게 얼음관을 감싸안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음관의 냉기로 인해 사비나의 피부가 벌겋게 변하자 가족들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카인의 가족들은 엘프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그나마 빨리 카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신을 차렸지만 사비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카인이 죽는다고 해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 말은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없어졌다. 카인의 가족이 정령사들이라 따로 살았던지라 이제는 혼자가 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예전 빈민촌에 살았던 것이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가족들은 사비나를 잠들게 하고 데려갈 생각도 했지만 그럴경우 나중에 마음의 상처가 더욱 심해질 것이 우려되어 그럴수가 없었다. 결국 세레나 엘프장로의 도움으로 가족들은 한숨 돌릴수가 있었다. 당분간 카인의 얼음관을 사비나의 집에 두기로 한 것이다. "사비나 장로님께서 카인의 관을... 아니 카인을 당분간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단다." "정말인가요?" 사비나는 카인의 할아버지인 포그너의 말에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당분간 카인을 데리고 있어도 된다. 마음이 안정되면 카인이 편히 쉴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카인과 너무 가까이에 있으면 냉기 때문에 네게 해가되니 조심하거라." "고맙습니다. 할아버님" 사비나는 포그너의 말을 듣고서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카인은 죽었지만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안될 것 같았다. 카인은 사비나에게 단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힘이되는 존재인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자 사비나는 극도로 차가운 냉기에 고통이 찾아왔다. "으으으 추워요." 사비나는 슬픔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얼음관에서 풍기는 냉기가 그대로 전해지자 깜짝 놀랐다. 얼음관에 엎드려서인지 가슴과 팔 그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비나가 냉기로 고생을 하자 지켜보고 있던 세레나 엘프장로가 다가왔다. "카인은 마지막까지 행복했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얼음관은 마법으로 오래도록 냉기가 유지하도록 했으니 냉기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네" "힐링" 세레나 엘프장로는 사비나에게 조언을 해주고 정령마법으로 치료를 해주었다. 힐링은 물의 하급정령인 운디네를 소환하면 누구나 펼칠수 있는 정령마법이다. 3서클의 큐어(Cure) 마법도 있지만 굳이 정령마법을 이용한 것은 힐링의 정령마법은 처녀가 사용할 경우 다섯 배에 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신분상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녀는 최상급 정령의 소환이 가능한 유일한 엘프이며 장로의 신분이라 모두 귀하게 취급하여 생긴 현상이다.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장로가 없게되면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다른 엘프마을로 옮겨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녀의 정령수련에 도움이 되도록 모두들 도움을 아까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세레나 스스로 선택하였고 엘프의 특성답게 강제성은 조금도 없었다. "고마워요. 엘프장로님" 세레나는 사비나의 말을 듣고서 미소를 지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얼음관을 카인의 가족들이 들었다. 그리고 카인과 사비나가 지내던 집을 향해서 떠났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카인의 얼음관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신에 의해서 운명지어진 것을 슬퍼하였다. 카인이 웃는 모습으로 잠든 얼음관은 사비나가 머무는 옆방에 세워놓았다. 처음에는 사비나와 카인이 지내던 방에 놓았다가 냉기로 인해서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에 옆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언제나 볼수 있도록 얼음관을 세워놓은 것이다. 카인의 가족들은 사비나에게 얼음관에 냉기가 강하니 자주 드나들지 않도록 당부(當付)하였다. 카인의 가족들은 사비나가 걱정되어 마을에 카인의 죽음을 알리고 사비나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크라이 마을은 카인의 죽음에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정령사 가족이라면 죽지도 않는 특별한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정령사들은 보통의 인간보다 두 배의 수명을 가지니 마을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다. 마을에서 사비나의 비슷한 나이의 젊은 여자가 한동안 사비나의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카인의 가족들은 모두 찬성하며 고마움을 표시하였고 마을 사람들도 정령사 가족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당연한 조치였다. 물론 사비나의 집이 크라이 숲에 있었기 때문에 사비나와 함께지낼 마을의 여자들은 엘프에게 숲으로 들어올수 있는 허가를 받아야했다. 사비나는 매일같이 옆방에 놓여진 카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고 자신을 카인이 보고 있을거라 생각하며 지냈다.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비나에게 마을에서 뽑혀온 자신의 또래 몇명이 함께 지냈고 그나마 가끔씩 웃음을 찾을수도 있었다. 사비나가 슬픔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때쯤에 사비나 자신은 물론이고 카인의 가족과 엘프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까지 놀라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비나의 임신이 밝혀진 것이었다. 얼음관에서 카인이 얼음을 깨고 살아날 것만 같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사비나는 자신의 임신사실을 너무나 기뻐하였다. 홀로 외톨이로 지내게 될줄 알았던 자신에게 피붙이가 생긴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카인이 살아있지는 않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사비나의 임신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복받은 것이라 축하해주었다. 크라이 숲의 외곽에 지어진 집에서 사비나는 카인이 미소짓는 얼음관과 함께 세월을 흘려 보냈다. 카인의 가족들이나 엘프들도 그렇게 시간을 흘려 보냈고 마을 사람들은 그저 옛 이야기를 꺼낼때나 카인이 등장하였을 뿐이다. 카인을 매일 볼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얼음관이 보관되어 있는 집에서 살고있는 사비나 뿐이었다. 카인의 가족들이 카인의 얼음관을 보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카인과 아무런 관계없는 그저 카인이 머물렀던 육체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음을 가족들은 알고있기 때문이다. ------ 기적을 일으키는 신관, 수만년을 살아온 정령을 소환하는 정령사 그리고 마족과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로부터 얻은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의 종류는 매우 많지만 대게 천신과 악신으로 구분된다. 천신의 경우 신관들이 주로 믿는 신으로서 믿음을 대가로 힘을 나누어주어 인간들에게 이로움을 선사한다. 악신의 경우 천신과 반대로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들을 이용한다. 인간 이외에도 지적 생명체라면 모두 신의 개입이 이루어지며 그들은 신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 특히 엘프 종족의 경우에는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정령왕이라는 신을 믿으며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엘프가 아니어도 조화로움을 따르면 정령왕의 헤택을 받지만 그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소수의 인간들이 정령왕으로부터 혜택을 받아 인간사회에서 정령사라는 칭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는데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천신을 믿음으로 힘을 행사하는 신관들을 살펴보면 인간에 대한 신의 개입이 매우 제한적인 것을 쉽게 알수가 있다. 죽은자를 살릴수도 없을 뿐더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곧바로 해결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을 믿어주는 인간인 신관에게 약간의 힘을 선사하여 그들을 통해 개입할 뿐이다. 결국 어떠한 사건이 발생해도 신은 직접 개입하지 못하므로 신을 믿어주는 지적 생명체는 극히 소수이다. 신의 개입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가끔 나타나는데 그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신관의 수십 수백배의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성자나 성녀,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자 등과 같이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신의 개입을 직접적으로 받은 자들이다. 이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수 없지만 본인은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저주라고 생각한다. 신이 특정의 지적 생명체의 운명에 간섭하면 그것은 다른 신의 개입을 통해 풀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수 있다. 인간들이 믿는 천신의 일에 다른 신이 간섭하려면 같은 부류의 천신은 간섭할 수 없고 악신이나 다른 신이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신의 개입으로 운명이 결정짓게 되고 다른 신의 개입으로 자유로워 진다면 그 생명체는 모든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 카르시온 제국의 현자가 남긴 기록중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4 회] 4. 생명수 나무 1 세레나 엘프장로는 크라이 숲에 정착할 때를 떠올리며 생명수 나무를 바라보았다. 생명수 나무는 엘프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신성한 존재이다. 보통의 나무가 엘프들의 보살핌으로 수명이 늘어나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보살핌의 기간이 늘어나면 신기하게도 특별한 능력이 생기게 된다. 힘을 자각한 생명수 나무는 자신을 보살펴준 엘프들에게 도움을 주며 숲이 파괴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율하는 존재가 된다. 생명수 나무가 존재한다면 엘프들은 수고스럽게 숲을 가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엘프마을에 생명수 나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밝은 미래가 있음을 의미한다. 생명수 나무는 대게 수백년 이상을 엘프들에게 보호받은 존재로 그 기간이 오래될수록 능력이 매우 다양하고 강력하다. 강력한 생명수 나무는 천재지변이 발생하여도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숲을 보호한다. 숲을 보호하는 생명수 나무를 엘프들은 세계수 나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엘프에게 있어서 숲은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크라이 숲의 생명수 나무를 위해 매일같이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보살핀다.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마을의 모든 엘프들도 정령을 소환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설사 생명수 나무가 힘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행위는 엘프들에게 매우 신성시된다. 세레나는 생명수 나무속에 카인의 얼음관을 집어넣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년전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정령사 가족의 카인이란 소년이 엘프들의 도움으로 삶을 마감했었다. 그리고 그때 소년과 결혼한 인간여자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어쩔수없이 잠시 얼음관을 맡겼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인간의 삶으로 생각하면 그녀도 남은 삶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얼음관을 돌려준 것이다. 정령사라면 좀더 오래 살겠지만 그녀는 정령사가 아니다. 크라이 숲에서 인간이며 정령사가 아닌 존재는 그녀 단 하나이다. 나무는 자신의 수명을 다하면 속이 썩어가기 시작한다. 생명수 나무의 경우도 원래의 수명이라면 속이 썩었겠지만 엘프들의 보살핌으로 그 현상이 지연될 뿐이다. 엘프들의 보살핌을 받아 나무의 수명이 길어졌다 할지라도 내부가 썩어서 텅빈 공간이 발생되는 자연현상을 막을수는 없다. 물론 그것까지도 인위적으로 막을수 있겠지만 그것은 조화로움을 따르는 엘프에게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동족이 죽음을 맞이하면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숲에 그냥 방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을에서 죽었을 경우에는 그냥 방치할 수 없어서 생명수 나무의 내부에 보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30년만에 돌아온 카인도 엘프마을에서 죽었기 때문에 생명수 나무의 내부에 집어넣는 원칙을 따랐다. 세레나는 생명수 나무에 카인의 얼음관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생명수 나무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은 아마도 카인이 처음일 것이다. 더욱이 엘프들의 축복까지 받고서 말이다. 아무리 얼음관이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녹아내릴 것이다. 정령과 마법으로 얼려진 것이라 매우 느리게 녹겠지만 엘프들에게 그것은 길지 않은 시간이다. 설사 얼음관이 녹는 기간이 100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조화로움이 가득하길..." 카인의 얼음관이 세계수 나무의 내부로 모습을 감추자 엘프들은 모두 30년전 자신의 손으로 삶을 마감시킨 어린 소년을 위해 축복을 내려주었다. 감정의 표현을 극도로 피하는 엘프들로서도 카인이란 인간은 특별한 존재였다. 신에 의해서 삶이 결정된 존재를 엘프로서도 만나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 '나는 왜 생각할 수 있을까?' 문득 나란 존재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어떻게 된 것일까?' 수많은 의문이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고 시간이 지속될수록 나는 호기심과 궁금중을 참을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아야했고 그런 기분이 지속되어 결국 궁금중을 약간이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지금의 현상을 알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동안 궁금중에 대한 해답을 찾다보니 결국 내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죽었다면 지금처럼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느낄수 없으니 죽은 것이 확실한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죽음에 대해 수많은 견해를 세레나 엘프장로에게 들었기 때문에 지금의 현상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세레나의 지식들은 대부분 최상급 정령을 통해 얻은 것이라 거짓이란 가능성은 있을수 없었다. '그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인가?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내가 살아있다면 오감을 느낄수 있어야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인가 느끼지도 못할 뿐더러 냄새는 커녕 볼수도 들을수도 없었다. 생각만을 할수 있는 존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죽었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인간이 죽으면 지금처럼 나와같이 되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름대로 자살을 준비하면서 죽음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알수있었다. 내가 죽은후 기억을 잃은채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설과 사후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그리고 세레나에게 들었던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생각해도 지금의 현상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밖에 없으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보아도 결국 있을수 없다는 결론만이 나왔다. '내가 패러렐 라이프라서 죽음도 상식을 벗어난건가?' 다른 사람과 죽음이 다른 이유가 내게 주어진 운명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충분히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할수없이 그저 생각만이 전부인 내게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짧지만 즐거운 기억이 많았던 행복한 삶이었어.' 오랜 시간을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짧은 삶이었지만 나름대로 훌륭하게 지냈다고 생각되었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낸 기억들과 마을 사람들과의 기억 그리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까지 후회없는 삶이었다. 더욱이 마지막에는 성인식도 지나지 않았으면서도 결혼생활까지 했으니 못해본 것은 없었다. '사비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아껴주고 사랑한 사비나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내 처지에 수많은 궁금중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궁금중도 많아졌고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기는 한걸까?' 흘러간 기억만 떠올리며 존재하는 나에게 시간을 느낄수 있는 기준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어둠이라도 느꼈으면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막연히 누군가를 느껴보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소리쳐 누군가를 부르고 싶어도 입이 있어야 말할수 있는데 나는 그럴수 없는 존재인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혼자인 것은 싫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수 없지만 나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애타게 불렀다. 그저 생각밖에 할수없는 내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설사 악마라 할지라도 말이다. '누구를 찾는거니?' 대화가 필요했던 내게 누군가가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가 스스로 만든 환각이라 생각하였다. 오랜 시간을 홀로 생각만을 하면서 지내다보니 가끔은 이와 비슷한 착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흘러간 시간을 회상하며 공상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는거지?' 또다시 들려온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하였다. 내가 공상을 하여 들려온 소리가 아닌 정말로 누군가가 내게 하는 말이었다. 물론 아무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나에게 소리가 들려올리 만무하였다. 그저 마음속으로 전달되어 내가 느낄수 있는 것이었다. '안녕.' '그래. 안녕.' 내가 인사를 건네자 상대방도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스스로 만든 공상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느끼지 못하니 이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싶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싶다는 것을 얼마나 바랬는지 혼자 지내보지 못한 사람은 알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봤었지? 카인이라고 해. 정말 반가워.' '응. 반가워. 그런데 나는 누굴까?' 나를 소개하자 상대방이 한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자신을 소개하려 했는데 스스로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상대방이 나와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 나도 아무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누구임을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결국 카인임을 자각했었다. 자신이 누구임을 자각한다고 할지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그나마 외로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누구지?' '나도 처음에는 너와 같았어. 스스로 자신이 누구임을 끊임없이 생각하다보면 저절로 알게되니까 걱정하지마.' '정말이야? 가르쳐줘서 고마워.' 누군지 알수없는 상대방에게 나는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말해주며 외로운 시간을 극복하였다. 나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 어떻게 되었어?' '결국 엘프들의 도움으로 죽은거야. 아마도 엘프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편안한 죽음을 맞지는 못했을거야.' 또다시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와 함께 지내게 된 존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직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엘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무척이나 좋아한다. 특히 내가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해주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오감이 없는 우리에게는 상대방의 생각에서 흘러드는 파장을 느낄수 있다는 것은 매우 분노하거나 즐거울 때 뿐이다. 내가 얼마전 분노하자 함께 지내는 존재가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혼자 지내게 되면 분노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다. 나는 왜 혼자일까. 하구많은 사람중에 왜 내게 이런일이 생겼을까. 수많은 의문에 빠져 결국은 분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엘프는 어떻게 생겼어?' '저번에도 말해 주었잖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았지?' '알았어.' 혼자가 아님을 안도하는 나이지만 정말이지 엘프에 대해서 자꾸만 질문만 하는 상대방이 정말이지 얄미웠다. 대화를 하고 싶지만 요즘들어 점점 증세가 심해지고 있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 존재를 만질수 있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다. 그나마 함께 존재하게 되어 심심하지는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엘프에 대해서 알고있는 것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럼 엘프는 생명력이 약한 식물만 먹고사는 거야?' '나무나 식물에게서 얻어지는 열매와 곡식을 가장 선호하고 그게 없을 때는 그럴거야. 나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자세히 모르겠어. 우리 가족이 정령사인데 나는 어릴 때부터 패러렐 라이프란 것으로 인해서 자세히 배우지 못했거든.' 얼마나 오랜동안 대답을 해주었는지 알수가 없다. 똑같은 질문에 지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대답을 하다보니 심심하지도 않았고 좀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도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고 질문이 반복되는 경우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마도 예전의 나처럼 스스로를 자각하는게 아닌가 싶다. 나와 대화를 하는 존재는 어느순간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질문을 하면 그저 생각할 것이 많다며 조용히 있을 뿐이다. 이제는 반대로 내가 질문을 하게 된다.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님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한 동안 조용히 있다가 무슨 소리야?' '네가 예전에 말했던 자각이란 것을 한 것 같아. 정말로 신기해.' 나는 한동안 조용했던 존재의 대답을 들으며 어리둥절 하였다. 자각을 하였다면 누구인지 알았으면 그만이지 신기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살아생전에 왕이라도 했었어? 뭐가 신기해?' '아무래도 나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뭐라구?' 자신을 자각하게 된 존재는 신기한 말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내게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은 나무였고 엘프라는 존재들에게 보살핌을 받아 지금의 자신이 있게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지금 농담하는거지?' '아니야. 아무래도 나는 살아있는 존재같아. 지금도 살살거리는 바람이 느껴지고 주변에 수많은 생명력을 지닌 것들이 느껴지거든.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야.' '무슨 소리야? 살아있다니?' 자각을 한 존재의 말에 나는 괴이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나도 지금의 내가 죽은 것인지 살아있는 것인지 오랜동안 고민했었는데 결국은 죽은 것이라 단정했었다. 그저 패러렐 라이프란 운명을 가진 인간은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무야. 아주 커다란 나무야. 이제야 알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나무가 어떻게 생각을 해?' '네가 엘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내가 왜 흥분했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엘프들에게 보살핌을 받아서 이렇게 이성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야. 분명해. 네가 없었다면 나를 자각하지 못했을 거야. 정말로 고마워.' 그동안 대화를 나누었던 존재가 나무라니 정말이지 어이없는 사실이며 커다란 충격이었다. 문득 세레나 엘프장로가 재미삼아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엘프마을에는 생명수 나무란 것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대화를 나눌수도 있고 숲을 보호하는 존재라고 말해주었었다. 물론 크라이 숲에도 생명수 나무가 존재하는데 아직 엘프들의 보살핌을 받은 기간이 짧아서 머나먼 훗날이 되어야만 자각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정착한지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엘프들의 기준이었고 인간들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다. '그때 세레나 장로님의 생명수 나무에 대한 말이 정말이었던가?' '생명수 나무라는 그것이 뭔데?'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엘프마을에는 생명수 나무란 것이 존재하는데 엘프들은 정령을 소환하여 그 나무를 아기돌보듯 보살펴. 내가 말했던 크라이 숲에도 생명수 나무가 있기는 한데.' 내가 생명수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함께했던 존재가 나무라면 분명히 엘프들이 보살피는 생명수 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나는 엘프마을에서 보았던 생명수 나무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설마 맞는거야?' '아무래도 네가 말한 생명수 나무가 나인 것 같아.' '네가 크라이 숲에 심어져있는 그 커다란 생명수 나무라니.'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엘프마을에 존재했던 생명수 나무에 대한 모습을 떠올리며 말하자 모든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수 있었다. 아쉽게도 나와 함께했던 존재는 크라이 숲의 엘프마을에서 엘프들의 보살핌을 받는 생명수 나무가 분명하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아무래도 너는 내 속에 있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생명수 나무는 나와 오랜동안 대화를 나누어서인지 인간식의 대화를 하였다. 스스로 나무임을 자각하면서도 인간처럼 대화를 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커다란 나무라서 안이 텅텅 비어있는데 그 속에 네가 있는 것 같아. 네가 거기서 느껴지고 있거든. 약간 추운듯한 느낌이 전해지는데 그 안에서 너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그렇다면 설마...' 문득 자살을 준비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죽는다면 생명수 나무에 보관하도록 한다고 세레나 엘프장로가 말했었다.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 없지만 지금 나란 존재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육체는 얼려져 죽었는지 몰라도 생각을 할수 있다면 적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난 살아있는 거야. 살아있어.' 나는 너무나 즐거워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생명수 나무도 나와 기쁨을 함께하였다. 나는 살아있다는 것이 기뻤고 생명수 나무는 스스로를 자각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되어 기쁜 것이다. 우리 둘은 함께 즐거움을 만끽하며 한 동안 대화를 나누며 지냈다. 생명수 나무는 엘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듣기를 원했다. 자신을 보살핀 엘프들이 궁금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수 나무에게 하나하나 자세히 들려주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내가 엘프에 대한 지식이 낮다는 것이다. 또한 100여명의 엘프 뿐이지만 이름도 모두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각각의 엘프의 개성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세레나 엘프장로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있어서 나름대로 기억하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정령에 관해서도 생명수 나무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내가 정령사 가족이지만 정령에 대해서 깊게 알지 못하여 생명수 나무가 많은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생명수 나무는 살아있는 존재지만 스스로 느끼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과 햇빛을 받을 때 기분이 좋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나무에 눈과 귀가 없다는 것이 이처럼 아쉬울수가 없었다. 만약 생명수 나무에 눈과 귀가 달렸다면 엘프마을이 어떻게 변했는지 간접적으로 알수 있을텐데 말이다. '오늘은 어때?' '그냥 맑아. 비가 오면 좋을텐데 말이야.' '흠. 그래?' 요즘들어 대화를 나누는 주제가 약간 바뀌었다. 내가 알고있는 기억이 아닌 생명수 나무가 느끼는 것으로 말이다. 하루하루 새로운 소식이지만 생명수 나무가 느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막연한 기분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좀더 느낄수 없어?' '그래도 낮과 밤을 구별하고 날씨도 알수 있는게 어딘데 그래.' '무슨 생명수 나무가 그래? 좀더 느껴봐.' 생명수 나무는 나의 불평에 자신도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나와 오랜동안 대화를 나누나보니 인간적인 오감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각한 것이 나의 대화 때문이라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볼수 없고 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생명수 나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커다란 문제이다. '어라? 들린다. 들려.' '뭐가 들리는데? 뭐! 네가 어떻게 소리를 들을수가 있는데?' '바람소리를 들었어.' 생명수 나무는 궁금중을 참지 못하다가 결국 외부의 소리를 들을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나무 특유의 감각으로 진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생명수 나무는 바람소리를 듣게 된 순간부터 매일같이 들려오는 소리를 내게 알려주었다. 생명수 나무가 듣는 소리는 무척이나 다양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만도 그 종류를 헤아리기 힘들었고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도 다양하였다. 생명수 나무가 소리에 점점 민감하게 반응할 때 나중에는 그가 가장 궁금해 하던 엘프의 소리마저도 들을수 있었다. 엘프는 걷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데도 생명수 나무가 소리를 들을수 있었던 것은 그 능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쉽게 알수있는 부분이었다. 주변의 소리를 듣게 되자 생명수 나무는 자신을 보살피는 존재인 엘프를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끊임없이 하지만 생각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의 경우는 나무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감각기관을 통해 알수 있지만 바라보는 것은 인간과 같이 눈이라는 감각기관(感覺器官)이 있어야 가능했다. 주변을 느낀다면 모를까 바라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내가 생명수 나무에게 인간적인 영향을 끼친 것에 대해서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생명수 나무는 그런 내게 오히려 위안을 주었다.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카인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거야. 카인과 엘프들은 나의 가족이나 다름없어.' '말이라도 고마워. 하지만 내가 네게 나쁜 영향을 끼친것이 아닐까 걱정이 돼.' '아니야. 난 지금의 내가 좋아.' 나는 생명수 나무에게 인간적인 영향이 나쁨을 알려주었지만 그 자신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문제는 매우 심각하였다. 생명수 나무가 스스로 소리를 듣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처럼 오감을 느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지못해 분노하기도 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였다. '나무는 원래 눈이 없는 존재야. 그저 듣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될까?' '만족할 수 없어. 난 엘프가 보고싶어. 카인 네가 설명한대로 생겼는지 말이야.' '너도 참.' 나는 더이상 생명수 나무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나로서도 생명수 나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대화나 나누며 시간을 지낼 뿐이다. 생명수 나무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나 자신도 무엇인가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생겨났다. 생명수 나무가 느끼는 것을 들으며 지낼 수많은 없기 때문이다. 생명수 나무는 언제나 보고싶다는 생각을 강렬히 원했고, 나도 무엇인가 느껴보고 싶다는 욕망을 원했다. 우리는 서로 불가능한 것을 원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대화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물론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기준이 없었기에 그저 흘러간다는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5 회] 4. 생명수 나무 2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엘프들은 100여명 가량으로 8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엘프마을보다 열약한 점이 무척이나 많았다. 장로도 세레나뿐이고, 인간과 교류를 갖기위한 인간 정령사도 포그너 가족뿐이다. 그러다보니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다른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보다 좀더 많은 시간을 바쁘게 보내야했다. '이제는 걱정할 것이 없어.' 세레나는 더이상 걱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알수없는 계기로 인해서 엘프마을의 생명수 나무가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레나는 최상급 정령사라 다른 엘프보다 생명력을 보다 세밀하게 느낄수 있는데 며칠전 생명수 나무에게서 이성(理性)을 느끼게 되었다. 이성이란 오직 생각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나타날 수 있다. 보통 생명수 나무는 엘프들에게 최소한 수천년 동안 보살핌을 받아야 이성을 갖추는데 이상하게도 800년의 짧은 보살핌을 받은 생명수 나무가 이성을 갖게된 것이다. 세레나는 믿을수가 없어서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확인까지 받았다. 엘레스트라는 생명수 나무가 이성을 갖게되고 자각한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정령은 수만년 이상을 살아온 존재로 그들이 알고있는 지식을 소환자에게 모두 알려주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수만년 동안 알게된 모든 지식을 소환자에게 알려준다면 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장로님 모두 모였습니다." 카라테가 미소짓고 있는 세레나에게 말했다. 세레나가 중대한 발표가 있다면서 카라테에게 모두 모여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즐거운 소식인가보죠?" "네, 맞아요. 이 소식을 들으면 모두 즐거워할거에요." 카라테는 세레나의 말을 듣고서 무슨 소식인지 궁금하였다. 엘프장로의 신분은 사실 연락을 담당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정령들은 정령계에서 서로 만날수 있는데 그것을 이용해 최상급 정령사들은 서로 연락을 할수 있다. 그래서 세레나는 크라이 숲에 있으면서도 다른 숲의 엘프장로들과 대화를 나눌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최상급 정령이 다른 최상급 정령에게 내용을 전달받고 알려주는 간접적인 방법이지만 말이다. "오늘은 또 무슨일일까?" "전쟁소식을 알려주려는 걸까?" 엘프들은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레나는 얼마전 대륙에 발생한 전쟁 때문에 수백여명의 엘프가 죽었다는 소실을 알려주었다. 대륙 전체로 보면 극히 미비한 수의 엘프가 죽은 것이지만 엘프가 태어나는 수를 생각할 때 많이 죽은 것이다. "모두 조용하세요. 오늘은 크라이 숲이 축복받을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세레나는 수다를 떠는 젊은 엘프들을 향해 말했다. 일부 엘프들은 세레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소식이길래 장로가 미소까지 짓는지 궁금하였다. "저희가 크라이 숲에 정착한지 800년이나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른 엘프마을에 비해 무척이나 짧은 역사지만 모두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의 숲이 있게되었고 마을이 생긴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크라이 숲에는 저희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희망과 미래를 열어주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의 말을 듣고서 눈치를 채는 엘프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엘프는 세레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일부 젊은 엘프들은 캐캐묵은 역사를 들먹이는 장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다. 하지만 감히 장로의 말을 끊거나 하는 엘프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숲을 보호하는 생명수 나무의 존재 여부입니다. 물론 저희 숲에도 생명수 나무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보통의 나무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우리의 보살핌을 받아야 힘을 자각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며칠전 저는 기적을 느꼈습니다. 저희가 800년의 짧은 보살핌을 받은 생명수 나무가 이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지못할 사실이었기에 엘레스트라를 통해서 확인까지 하였습니다." 세레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생명수 나무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장로의 말을 듣고서 엘프들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않고 그저 고개를 생명수 나무로 돌렸다. 너무도 어이없는 소식이라 모두들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했다. "장로님...그...그것이 정...정말인가요?" "네, 정말입니다." 카라테가 정신을 차리고 말을 더듬거리며 다시 묻자 세레나는 시원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그제서야 모두 정신을 차리고 장로에게 생명수 나무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장로는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며 엘프들의 즐거운 미소를 바라보았다. 세레나는 생명수 나무가 무슨 원인으로 자각을 빨리 했는지를 제외하고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였다. 크라이 숲의 엘프마을에는 한 동안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생명수 나무의 보살핌에 열의를 더욱더 올렸다. 생명수 나무가 자각한 것이 지금이지만 앞으로 제대로 된 힘을 보유하기 위해선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라도 줄이기 위한 엘프들의 노력이 시작된 것이다. 엘프들로서는 생명수 나무를 보살피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생명수 나무가 이성을 갖게된지 10년이 흐르자 숲에 변화가 찾아왔다. 모든 식물들의 생명력이 강해짐은 물론이고 숲이 좀더 울창하게 변화되었다. 이제는 굳이 엘프들이 직접 숲을 돌아다니며 가꿀 필요도 없었다. 20년이 지났을 때에는 생명수 나무의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어 진화하자 엘프들을 또다시 놀라게 하였다. 나무의 한쪽이 약간 평평해지더니 눈과 코 그리고 입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세레나는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생명수 나무의 변화에 대한 사실을 듣게되었다. 엘프들로서도 전해지지 않는 오래전 생명수 나무는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를 거듭하였다. 그 때에는 각 종족이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에 생명수 나무의 모습도 다양하였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각 종족이 불신의 벽이 생겼고 생명수 나무는 식물로서의 모습만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엘프가 조화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 편견으로 인해 생명수 나무가 식물로서의 힘만 자각하고 진화를 거듭했던 것이다. 크라이 숲의 모든 엘프들은 세레나 장로가 소환한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를 통해 인간의 형태로 진화한 생명수 나무를 엔트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엔트로 진화하는 생명수 나무는 얼굴 형상이 생기고 눈과 코 그리고 입의 감각기관이 생겼지만 제대로 느끼며 말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좀더 시간이 흐른다면 볼수도 있고 냄새도 맡을수 있으며 말할수 있으리라 믿었다. ------ 엘프마을에 찾아온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채 나는 생명수 나무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죽지 않았음을 알수 있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생명수 나무는 현재 나의 처절한 상태를 알려주었다. 요즘들어 생명수 나무가 인간이 느낄수 있는 오감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약간이나마 모두 느낄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명수 나무는 오감을 통해 나의 얼음관이 자신의 신체와 땅과 접촉한 부분의 내부에 보관되어 있음을 알렸다. 물론 이런 사실은 생명수 나무가 자각했을 때 알게된 사실이라 별로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나의 얼음관이 녹아내려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제서야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패러렐 라이프의 운명을 벗어났건만...' 나는 정말로 죽기 싫었다. 어쩌면 살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죽지도 않았으며 영혼이 그대로 육체에 남아 있으니 9서클의 마법으로 육체를 부활시키면 충분히 살수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어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줄수가 없었다. '입이 생겼다면서 말도 못해?' '입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걸 낸들 어째. 나두 답답해 미치겠어.' 생명수 나무는 자신이 갖게된 감각기관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제대로 통제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눈이 생겼지만 밝음과 어둠만 느낄 뿐이었다. 조금씩 모든 감각기관이 좋아지고 있지만 최소한 수년은 더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통제가 가능할 것 같았다. 아쉽게도 얼음관의 내 육체는 생명수 나무가 감각기관을 제대로 통제할 때쯤에 모두 녹아버리고 썩어버려 나란 존재가 없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사실 한가닥 희망을 생명수 나무에게 걸고 있었다. 생명수 나무가 나의 상태를 엘프들에게 말한다면 설사 부활하지 못하더라도 얼음관이 녹는 현상을 막을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이 좋다면 9서클을 사용하는 엘프나 인간마법사를 초빙하여 부활 마법으로 예전의 상태로 부활시켜줄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존재한다. '내 얼음관이 얼마나 녹은 것 같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냉기가 무척이나 줄어들었어.' 생명수 나무에게 나의 육체가 보관된 얼음관의 상태를 들을 때마나 피를 말리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육체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끔찍하였다. 지금의 상황을 피하는 방법이라고는 생명수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것 뿐이다. 생명수 나무도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하기 좋아했다. 매일같이 조금씩 감각기관이 좋아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생각만 가능한 존재라 생명수 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수 나무도 자신을 자각시키도록 도와준 나를 위해 자신의 감각기관 중에서 특히 입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나에게 대화하듯이 생각을 엘프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빠르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큰일이야. 얼음관의 녹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아.' '할수없지. 그나마 지금까지 네가 있어서 심심하진 않았어.' 나는 얼마후 죽을 생각으로 마음이 뒤죽박죽이었다. 생명수 나무에게 나의 처지를 엘프에게 알리라고 독촉하기도 하고 반대로 체념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미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 할수 있을 정도로 내가 감당해야하는 심리적인 압박이 너무 심했다. 얼음관이 녹아서 육체가 썩는 것이 눈앞에서 어른거릴 정도였다. 차라리 그냥 죽는다면 이런 기분은 아닐테지만 서서히 죽음이 다가옴을 알수 있다는 것은 큰 괴로움을 동반한다. '얼마나 지나야 얼음관이 모두 녹을 것 같아?' '길어야 두 달이야.' 생명수 나무는 안타까운듯 자신의 생각을 내게 전했다. 우리는 두 달의 기간동안 나의 얼음관이 녹는 상황을 저지할 수 없었다. 생명수 나무는 나의 육체를 두 달의 기간동안 발달해진 오감을 이용해 얼음관의 녹는 속도를 느끼며 가슴아파했다. '지금의 내가 있도록 도와준 유일한 동반자를 잃을순 없어. 무슨 방법이 있을거야.' 체념한 나와는 다르게 생명수 나무는 나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나를 보내지 않아야한다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두 달의 기간이 흐른 지금 육체를 보호하는 얼음은 모두 녹아버리고 육체만 남아 이제는 아마도 작은 벌레나 곤충에 의해서 구멍이 나서 썩어갈 것이다. '생명수 나무야 그동안 즐거웠어.' '무슨 소리야? 우리는 언제나 함께할거야.' '고마워. 안녕.' 생명수 나무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며 육체가 썩으면 지금의 나도 소멸하리라 생각하였다. 두 달의 기간동안 피를 말리는 시간을 견뎌온 내 자신이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다. 신은 어찌하여 내게 두 번의 죽음을 내리게 하였는지 직접 만나서 따져보고 싶었다. '고맙다니 무슨소리야? 너는 이대로 죽을수 없어.' 생명수 나무는 작별인사에 거부감을 느끼고 냉기가 더이상 흐르지 않는 나의 육체를 느껴보려고 하였다. 요즘들어 감각기관의 통제가 약간 이루어져 엘프의 모습을 볼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수도 있었다. 물론 말하는 것은 아직까지 진척이 없었지만 많이 발전한 것이다. '이대로 너를 보낼수 없어.' 생명수 나무는 마음의 벽을 쌓고 오직 나의 육체를 보호하려고만 들었다. 내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나는 하루면 떠나갈 사람이라 생명수 나무의 행동에 더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러다 말겠지라는 태평한 생각에 죽음을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나에게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느껴져 생명수 나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내가 외부의 상황을 알수 있는 방법은 생명수 나무를 통해서인데 그가 대답을 하지 않으니 나로서는 무슨일이 생긴건지 알수가 없었다. 생명수 나무는 그후로 한참이 지나서야 나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거야?' '한 달이 지났어.'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거지? 그리고 왜 그동안 대답이 없었던거야?' 사실 생명수 나무가 나와 대화를 하지 않으니 나로서는 하루하루가 지나감을 알수 없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내가 죽지않고 살아있는 이유를 먼저 알고 싶었다. '드디어 방법을 찾아냈어. 그동안 대답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방법이라니 무슨 소리야?' '카인 네가 죽지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되었어. 육체가 썩을까봐 나의 생명력으로 너의 육체를 보호하는데 이상하게도 네 육체는 생명력을 흡수하더라구. 직접적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고 네 육체를 받치고 있는 나무판자를 통해서 말이야. 그동안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는 나의 생명력을 네 육체에 넣어주느라 그런거야.' 생명수 나무의 말을 듣고서 나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친구와 같은 존재의 수명이 줄게된 것을 슬퍼하였다. 나는 생명수 나무에게 뭐라 말하지 못할 정도로 감격하였다. 이 세상에 어느누가 남을 위해서 생명을 나눠주겠는가. '생명력을 넣어주다니 미쳤어? 그럼 너는 어쩌려고?' '괜찮아. 내가 갖고있는 생명력의 대부분을 네게 넘겨주었지만 나는 숲으로부터 생맹력을 약간씩 가져오면 돼. 그리고 엘프들도 나를 도와줄거까 상관없어.' 나는 생명수 나무의 말을 듣고서야 어느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생명수 나무의 엄청난 생명력을 나의 육체에 넣었다니 놀랄 일이다. 더욱이 움직이지도 못하는 육체에 수백년에 해당하는 생명력이 주입했다니 낭비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살아난다면 인간으로서는 꿈도꾸지 못할 일들을 할수도 있을 생명력이었다. '생명수 나무야. 정말 고마워.' '뭘 이것 가지고 그래. 우리는 그동안 함께했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우리의 생활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 돌아갔다. 생명수 나무는 인간처럼 오감을 좀더 많이 느끼도록 노력하였고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10년이 흐르자 생명수 나무는 오감을 인간보다 뛰어난 수준으로 발전시킬수 있었다. 자신을 보살피는 엘프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고 냄새도 맡을수 있었다. 오직 입을 통해서 말을 할수 없음을 제외하고 말이다. '생명수 나무가 뭐야. 엔트라고 부르라니까.' '알았어. 에휴.' 생명수 나무는 얼마전 엘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엔트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 이후로 내가 생명수 나무라고 부르면 엔트라고 부르라며 화를낸다. 생명수 나무중에서 인간처럼 진화하면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수십년이나 부른 호칭을 당장 바꿔서 부르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입을 통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하니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엘프에게 말은 못하고 듣기만 하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나 놀리는거지? 정말 이럴거야?' '네가 말하면 나도 살아날수 있잖아. 빨리 말이나 배워.' 생명수 나무는 엘프들의 말을 듣고서 모두 이해하는데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엘프가 말을 하면 그 소리가 들리지만 진동을 통해 듣기 때문에 언어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나마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것마저도 수백년이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들어 생명수 나무는 엘프들과의 대화에 하루시간을 모두 보내고 있다. 생명수 나무는 엘프의 말을 듣고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을 한다. 자신의 가지를 흔들수도 있고, 입으로 소리를 낼수도 있으며 눈을 깜박이기도 한다. 아마도 엘프들의 감각기관이 인간과 비슷했다면 절대 생명수 나무의 표현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엘프들은 인간의 수배에 달하는 오감을 가지고 있기에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나도 말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보채지좀 마.' '알았어.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했어?' 오늘도 생명수 나무 아니 엔트에게서 엘프들이 했던 이야기들을 전해들었다. 생각같아서는 숲에서 발생한 재미없는 이야기좀 그만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엔트는 즐겁게 듣는 것 같지만 나는 재미없는 소식이었다. 그나마 야생동물이 서로 싸운 소식이 흥미거리였다. 매일 숲에대한 소식을 전해듣다 보니 상상속의 숲이 머리속에서 떠올랐다. 나의 오랜친구 엔트가 말을 배우기 시작한지 6개월이 되어서야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엘프들은 신이나서 엔트에게 말을 가르쳤을 것이다. 엔트의 발전이 곧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네?' '왜?' '내가 엘프들에게 네 이야기를 전하면 너는 다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엔트는 말을 할수 있게 되었는데도 엘프들에게 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과 여러가지 복잡한 심정 때문이다. 나도 엔트의 그런 마음에 별달리 재촉을 하지 않았다. 수십년이나 함께 지내며 다시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했는데 좀더 길어진다고 해서 변화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도 인간이었어. 단지 육체가 없었을 따름이야.' '카인 너는 내가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 부모님이자 친구같은 존재야.' 엔트의 말을 듣고서 나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예전처럼 다시 돌아다닐수 있다면 그것은 엔트가 생명력을 나의 육체에 전해주어 지금까지 살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엘프들이 엔트가 전해준 생명력만 가득한 죽은 나의 육체를 부활시켰을 때의 일이다. 엔트는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서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엘프들에게 말해주었다. 엔트는 엘프들이 나의 육체를 부활시켜준다고 약속하였다고 내게 전했다. 이제 엔트는 더이상 나란 존재가 필요치 않았다. 함께할 엘프들이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엘프들은 엔트를 보살피기 때문에 나처럼 화를 내지도 않는 존재이니 더욱 훌륭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6 회] 5. 행복 1 크라이 숲의 엘프마을에는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생명수 나무이자 엔트라 불리는 존재의 주위에는 수많은 엘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명의 엘프가 손으로 땅을 파내고 있었다. 땅을 파내는 지점은 엔트의 뿌리 근처로 조금만 파내면 속이 빈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은 엘프가 죽었을 경우 안식을 취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빨리좀 해." 긴장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굵직한 목소리가 엘프들에게 들려왔다. 엔트가 느린 동작으로 조심스럽게 땅의 흙을 파내는 두 엘프에게 말하는 소리였다. 엔트는 주변에 자라고있는 나무보다 수배나 크고 한 쪽의 면은 얼굴모양을 하고 있었다. 눈과 코 그리고 입의 크기가 엘프의 몸체만하니 말할 때 소리가 멀리 울려퍼지는 것은 당연하다. "엔트님의 신체가 다치지 않도록 해야하니 어쩔수 없습니다. 잠시만 참아주세요." 세레나가 엔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전에도 엔트를 조심스럽게 다뤘지만 오늘처럼 직접 손으로 땅을 파내지는 않았다. 땅의 정령을 소환하여 짧은 시간에 처리했던 것이다. 흙을 파내는 두 명의 엘프는 엔트의 말을 듣고서 좀더 빠르게 움직였지만 별로 차이는 없었다. "할수없지. 수십년을 기다린 카인인데 이것을 못참을리 없을테니까." 엔트의 말을 한 시간이나 더 듣고서야 두 명의 엘프는 흙을 모두 파낼수 있었다. 파낸 흙의 양이 극히 적었지만 그것을 파내느라 두 명의 엘프는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하였다. 엘프들에게 가장 중요한 엔트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엔트의 크기를 생각할 때 집체만한 상처가 나도 상관없지만 엘프들은 자신의 몸보다 더욱 소중히 다루었다. "수고하셨어요." "당연한 일인데요. 엔트님에게 도움되는 일을 하게되어 자랑스럽습니다." 세레나 장로의 말에 흙을 파낸 엘프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성시되는 엔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엔트의 뿌리에 사소한 상처하나 남기지 않고서 마무리까지 지었으니 더욱 뿌듯했다. 엘프가 흙이 파헤치진 구멍으로 넓은 공간의 내부가 보이고 있었다. 구멍으로 보이는 엔트의 내부는 지름 2m 가량의 공간으로 지금은 인간으로 판단되는 어린소년이 나무판자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60년전 카인의 얼음관을 엔트의 내부에 보관했는데 지금은 얼음이 모두 녹아내려 없어지고 오직 카인의 육체만이 보이고 있었다. 육체가 썩어야 정상이었지만 엔트가 자신의 생명력을 넣어주고 또한 썩지 않도록 보호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카인이 저런 모습이었구나." 엘프들이 카인을 꺼내자 엔트는 큰 두 눈으로 신기한듯 바라보았다. 지금의 자신이 있도록 도와주고 함께한 카인의 존재는 상상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엔트는 신체를 이용해 대략적인 형태만 알았을 뿐이지 지금처럼 모습 전체를 알수가 없었다. 더욱이 엘프들의 외모만 보다가 카인의 육체를 보자 실망스런 부분도 있었다. 물론 엔트가 카인의 외모가 실망스럽다고 해서 관계가 변화될 것은 아니었다. '카인 지금 네 모습을 보고있는데 네가 예전에 말한대로 인간은 엘프보다 못생겼네.' '내가 못생겼다고? 인간과 엘프를 비교하지마!' 엔트가 카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자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엔트는 지금 일어나는 사실들을 카인에게 생각으로 모두 알려주어야 했다. 지금 일들이 카인에게 무척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엔트는 카인이 살아서 자신과 생각을 전하는 방법의 대화가 아닌 말을 하면서 대화하고 싶었다. 카인의 육체가 엔트의 내부에서 꺼내지자 곧바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카인을 되살리기 위해서 먼저 지금 처한 상황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을 가진 엘프들이 먼저 카인의 육체를 살펴보았다. 당연히 정령사로서는 장로가 가장 뛰어났기에 일순위로 세레나가 카인을 살펴보았다. 엔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카인의 육체를 조사하는 일은 며칠동안 계속되었다. 카인의 육체에 대한 조사가 끝났을 때는 무려 보름이란 기간이 흐른 뒤였다. 엘프들은 그 수명 만큼이나 다양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방법을 이용해 조사를 한 것이다. 더욱이 지금의 카인과 같은 경우는 예전이나 앞으로나 있을수 없는 일이기에 조사가 느렸다. 보름이 지나자 세레나는 엔트에게 카인에 대해 조사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엔트님 카인의 육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청하지." 세레나의 말에 엔트가 대답하였다. 카인의 육체가 어떠한 상황인지 엔트에게 보고하는 것은 당연했다. 엔트와 카인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엔트 본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모든 엘프가 알고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진실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단지 저희들이 판단한 것일 뿐입니다." "궁금하니까 어서 말해." 엔트가 세레나의 말을 듣고서 대답하며 조사한 것을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세레나는 자신들이 조사한 사실이 확실하겠지만 엔트에게 있어서 어떠한 편견도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엔트가 카인에게 영향을 받아서 인간적인 성격으로 인해 숲과 엘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카인이 자살을 결심했을 때 저와 마법에 뛰어난 엘프는 그를 위해 얼음관을 준비하였습니다. 좀더 행복한 순간을 오래 느끼도록 축복을 내렸으며 얼음관의 주축이 되는 밑바닥 판자에 생명력을 흡수하는 마법진을 그렸답니다. 이것은 최상급 정령을 소환한 정령사가 도와주어야 가능한 마법진이었기 때문에 제가 직접 참여하였고, 이 마법진의 영향으로 엔트님이 카인에게 생명력을 나눠주실 때 그가 엔트님의 생명력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거로군." 세레나의 말을 듣고서 엔트는 자신이 예전에 생명력을 카인의 육체에 넣어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불가사의한 사건이 지금이 되어서야 그 원인을 알게된 것이다. "카인을 조사한 결과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9서클의 부활 마법이 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카인의 육체는 죽어있지만 영혼은 육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부활 마법만 시전한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이로군. 그렇다면 당장 살려내면 되겠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엔트님. 저희 마을에는 9서클의 부활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엘프가 없습니다. 부활마법은 조화로움에서 벗어난 마법이라 설사 9서클의 마스터 엘프를 다른 숲에서 초빙한다고 해도 그것을 익혔을리 만무하며 시전해 줄지도 의문입니다. 또한 9서클의 마스터 엘프를 초빙하려면 그 숲의 장로들에게 허락을 맡아야 할텐데 저희의 사정을 설명한다고 허락맡기가 어려울듯 싶습니다." 엔트는 세레나의 기나긴 설명을 조용히 들었다. 그동안 엘프들을 통해서 엘프의 역사와 그들의 지식을 많이 전해들어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상 부활마법은 부정적인 성격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일단 부활마법을 생각하면 인간들은 악의 존재인 리치를 떠올린다. 그것은 엘프들도 마찬가지로 인간보다 거부감이 더욱 심하다. 인간의 경우야 리치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오랜 삶을 살아가는 엘프에게 있어서 리치의 존재는 평생 보지못할 존재는 아니다. 일생에 한 번쯤은 만나게 된다. 리치의 탄생은 대부분 인간의 마도사가 오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며 그들은 인간을 피해 깊은 숲속에서 지내다보니 어쩔수 없이 엘프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카인을 살릴수 있는거지?" "어려운 일이지만 인간 마법사를 초빙하면 됩니다. 9서클을 마스터한 인간을 초빙하면 좋겠지만 인간중에서 그런 마법사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8서클 마법사 두 명을 초빙하여 마법진을 병행하면 카인을 살릴수 있습니다." 세레나의 말을 듣고 엔트는 당장 인간마법사를 초빙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9서클이 아닌 8서클의 인간마법사를 초빙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인간들의 마법사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하고 마법실험에 미쳐있는 존재가 대부분이었며 같은 인간에게 높은 대우를 받고있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8서클의 인간마법사가 탐을 낼만한 가치있는 것을 대가로 주어야만 했다. 육체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드래곤은 모든 가죽이 도검불침은 물론이고 마법저항과 같은 신기한 능력이 있으며 몬스터들은 종류별로 다양한 가치를 가진다. 몸안에 보석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가 있는가하면 피가 약이되는 희귀한 몬스터도 있다. 물론 모든 종족의 육체가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육체처럼 식용 이외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경우도 무척이나 많다. 인간 마법사들은 수많은 마법실험을 원하고 있으며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마법실험의 재료가 비싸다보니 그들은 권력과 재력이 있는 누군가와 협력하며 지낼 수밖에 없고 마법사는 협력한 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야만 했다. 세레나를 비롯한 엘프들은 8서클의 인간마법사를 초빙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였다. 인간마법사가 아무런 대가없이 엘프의 요청을 받아들일리 만무하니 충분한 대가가 있어야했다. 하지만 엘프들이 돈이 있을리도 없었고 숲에서 특별히 값비싼 무엇인가가 있지도 않았다. 물론 엘프들만 키우는 신비한 약초가 많이 있고 그것을 인간에게 판매한다면 어마어마한 돈이 되겠지만 8서클의 인간마법사를 초빙할만한 재력은 아니었다. 결국 엘프들은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신체일부인 머리카락을 대가로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엘프의 머리카락은 그 값어치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만큼 귀하다. 100명에 달하는 엘프의 머리카락은 8서클의 인간마법사 두 명을 초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엘프의 머리카락은 종족 자체의 특성이 살아있어서 자체적으로 강한 마법저항 능력이 있으며 어떤 마법에도 쉽게 동화되어 마법물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탁월한 성과를 발휘하는 재료이다. 구하려면 오직 엘프를 살상해야만 가능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카르시온 제국의 법령을 어겨야했으니 구하기가 얼마나 어렵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레나는 인간마법사를 초빙하기 위해서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으로 카인의 할아버지인 포그너를 보냈다. 카인의 가족은 지금 카인이 살아있는지 모르는 상태이다. 카인이 엔트를 통해서 자신의 상황을 가족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카인이 살아나지 못할 가능성도 어느정도 내포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마법사를 초빙하기 위해서 떠난 카인의 할아버지 포그너는 무려 120살이 넘은 상태이다. 인간으로서는 수명이 다한 나이지만 정령사이기에 아직도 30년 정도는 거뜬하다. 포그너는 정령사이지만 10년 전부터 직접 엘프마을에 방문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포그너 뿐만이 아니고 그의 가족 전체가 그러하였다. 자각한 엔트를 엘프들이 보살피느라 어쩔수없이 정령사 가족의 방문을 통제한 것이다. 하지만 포그너는 1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세레나 엘프장로에게서 마을에 엔트란 존재로 인해 어쩔수없이 통제하였다는 말을 듣고서야 지금까지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레나는 포그너에게 8서클의 마법사 두 명을 초빙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지만 포그너는 중대한 일이라 생각되었고 초빙한 두 명의 마법사에게 100명의 엘프에게서 잘라낸 머리카락을 준다는 말까지 들었을 때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포그너가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여 8서클의 인간마법사 두 명을 초대하는데는 무려 1년에 세월이 걸렸다. 말린까지 가는데만 한 달의 기간이 소비되었고 그곳에서 마법사 길드를 찾아가 거래내용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도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사실상 포그너가 마법사 길드에 제시한 내용은 허무맹랑하였기 때문이다. 100명에 달하는 엘프 머리카락을 준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포그너는 우여곡절을 겪고 1년이 지나서야 두 명의 8서클 마법사를 크라이 마을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두 명의 마법사가 믿지않을 것을 대비해 우선 약간의 엘프 머리카락을 주었고 그들이 해야할 일을 설명하였다. 엘프들은 두 명의 인간마법사를 믿을수 없기 때문에 엘프마을로 데려갈 수 없었다. 세레나는 카인의 육체를 크라이 숲의 외곽으로 옮기고 그곳에 부활마법을 시전하기 위한 마법진을 그렸다. 부활마법은 생명력을 다루기 때문에 마법진을 최상급 정령을 이용해서 완성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을경우 리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카인을 중앙에 놓아두고 두 명의 8서클을 마스터한 인간마법사와 6서클의 마법을 익힌 세 명의 엘프 그리고 최상급 정령사인 세레나가 동시에 마법진을 활성화 시켰다. 마법진이 활성화 되었지만 결과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두 명의 인간마법사는 결과를 지켜보기 원했지만 세레나가 엄청난 분량의 엘프 머리카락을 건네주고 쫓아버렸다. 마법사란 부류가 마법실험에 미친 존재라 엘프 머리카락을 얻게되자 자신들이 엘프들과 함께했던 실험은 생각도 하지않은채 곧바로 떠나갔다. 크라이 숲에는 한 동안 긴장감이 지속되었다. 엔트가 카인의 걱정으로 안절부절한 감정을 갖게되자 숲에도 그 영향이 미친 것이다. 엘프들도 덩달아 카인의 부활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카인이 이대로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꿈이자 희망인 엔트가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 언제부터인가 엔트와의 대화가 불가능하였다. 아마도 부활마법을 시전한다는 엔트의 생각을 전해받은 이후부터라 생각되었다. 생각만이 가능한 나에게 혼자가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슬프고 외로운 일이었다. 그런 내게도 축복을 받을만한 신비로운 느낌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느낌이었다. '내가 고통을 느끼다니.' 무엇인가 느껴진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물론 그 느낌이 고통이라 아쉽기는 하였지만 충분히 만족한다. '따뜻하네. 하하' 고통에 이어서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가지 감각을 느꼈다. 물론 그와 비례적으로 내가 겪어야하는 고통도 증가하여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 무엇인가 알수없는 소리가 내게로 들려왔다. 정말 신비로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단순한 호기심에 무슨 소리일까 생각하다가 나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수 있었다. 내가 소리를 들을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난 건가?' 말은 할수 없지만 지금 느끼지는 고통은 육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육체에 영혼만 머무른 상태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아서는 부활마법이 성공하여 육체가 살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고통의 느낌이 나에게 행복을 줄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나의 육체를 모두 느낄수 있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수 없지만 수십년을 생각만 하며 지내왔기 때문에 어느정도 시간의 흐름을 오감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다. 나의 몸을 예전과 다름없이 통제하는데는 무려 1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부활된 몸이 나에게 익숙하도록 1년의 재활기간(再活期間)이 필요했지만 그 시간동안 엔트와 생각을 전하는 방식이 아닌 대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고 엘프들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재활기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는 반병신의 내 모습이 불쌍한지 엘프들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재활기간 동안 나는 신기한 것을 경험하였다. 세레나 장로는 내가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바람의 정령술을 가르쳤는데 그 성과가 상상하지 못할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나의 정령술이 천년을 살아온 엘프보다도 뛰어난 것이다. 모든 엘프들이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지만 의문은 쉽게 풀려버렸다. 그것은 엔트가 내게 전해준 800년에 가까운 생명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엔트는 식물이라서 그 생명력이 엘프나 인간과는 전혀 다른성질이다. 엘프의 생명력이 인간보다 순수하긴 하지만 식물의 생명력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다. 단지 식물은 많은 생명력을 가지고있지 못할 뿐이다. 결국 순수한 식물의 생명력을 가진 엔트의 800년 생명력이 나의 몸에서 정령술에 영향을 준 것이다. 나는 육체에 불필요하고 넘치는 생명력을 알게되어 부담스러웠다. 나름대로 고민끝에 엔트에게 생명력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식물의 생명력과 인간의 생명력은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아쉽게도 식물의 생명력이 인간에게 옮겨갈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절대 불가능한 이치 때문이다. 나는 재활기간 동안에 취미삼아 정령술을 수련한 결과 물질계 4대 정령을 최상급까지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엘프가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면 장로가 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난 능력이었다. 순수한 인간의 능력으로 평가해도 최소한 8서클의 마법사와 비슷한 힘이다. 한 종류가 아닌 네 종류의 최상급 정령의 소환이 모두 가능하니 비교조차 어려운 일이다. 물론 아무리 생명력이 많다해도 정신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내가 육체도 없이 존재한 60년의 세월을 버텨낸 정신력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엘프들은 최상급 정령과 대화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수 있어서 즐거웠다. 세레나 엘프장로가 소환하는 최상급 정령은 고작 1분의 시간동안 소환되기에 이성을 가진 정령과 대화를 나눌수 있는 영광을 모든 엘프들이 누릴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최상급 정령을 무려 한 시간이나 소환시킬 수 있었다. 최상급 정령은 이성을 갖추고 있어서 소환하면 친숙한 엘프들과 대화를 자주 나눈다. 수만년의 세월을 살아온 최상급 정령에게 엘프들은 배울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물론 정령은 자신의 지식중에서 그들의 신 정령왕이 금지하지 않은 지식만 전할수 있다. 나와 계약을 맺은 최상급 4대 정령은 자신들이 정령세계가 아닌 현실세계에서 하루에 한 시간이나 소환되어 있을수 있는 것에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또한 소환자가 정령에 대한 편견도 없어서 자신들 스스로 원하는 모습을 이룰수도 있었다. 보통 최상급 정령은 소환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소환되기 마련인데 나는 정령을 소환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서 정령 스스로 자유로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최상급 정령은 현실세계를 마음껏 느껴보았고 엘프들은 그들에게서 대화를 나누는 영광을 가졌다. 나는 되도록 최상급 정령을 오래 소환하여 엘프들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장 가슴아픈 것은 엘프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짧은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모습을 손상시켰던 것이다. 나를 부활시키기 위해 두 명의 인간마법사를 초빙하느라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었다는 것을 볼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크라이 숲의 모든 엘프들은 모두 단발의 모습이었고 세레나 장로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지금 찾아가려고?" "네, 장로님." 나는 세레나 장로의 말에 조용히 대답하였다. 1년의 기간동안 부활된 몸이 이제는 완전히 적응되었고 그동안 고민하던 문제도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정상이되면 사랑하는 사비나를 곧바로 찾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니 그것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사비나와 헤어진지 무려 60년에 세월이 흘러갔으니 이제 사비나의 삶도 거의 끝나가는 시점인 것이다. 세레나 장로에게서 나의 가족과 사비나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내가 없는동안 가족이 많이 변했다는 것이다. 나의 두 형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서 조카가 있다는 것이고 또 그 조카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가족 일부는 카르시온 제국의 전쟁에 참가하여 죽은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세레나는 가족의 변화가 나와 결혼한 사비나에게도 생겼다고 알려주었다. 사비나에 대해서 무척이나 궁금해서 좀더 많이 알려달라고 했지만 더이상 들을수는 없었다. 엘프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삶을 전할 때 너무 객관적이다보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객관성이 잘못된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결심이 확실한거지?" "마음 같아서는 사비나를 찾아가면 곧바로 제 생명력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최상급 정령들이 그것은 인간으로서 견뎌내기 어려운 것이며 당사자를 불행하게 할 것이라고 말해주어서 포기했습니다. 그저 사비나가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잘 생각했어." 세레나는 나의 결심이 힘들었던 사실을 이해해 주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사비나에게 나의 생명력을 나누어 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조화로움을 벗어나는 행동이라 세레나 엘프장로가 허락하지 않았고 나와 계약을 맺은 최상급 정령들도 거부하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사비나가 나와같은 정신력이 없기 때문에 생명력을 버텨내지 못한다는 말이 결심을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비나가 60년이나 지나서 살아돌아온 저를 기쁘게 받아줄까요?" "당연하지. 사비나가 카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크라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거든." 세레나 장로는 내가 고민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막상 가족을 만나려고 하니까 고민되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나를 만나게되면 기뻐할까? 아니면 어떻게 생각할까? 온갖 상상이 머리속에 휘몰아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카인이 드디어 가족을 만나러 가는구나." "엔트야 다시 돌아올께." 나는 엔트와도 작별인사를 나누고 엘프들과도 인사를 하였다. 앞으로 크라이 숲에서 살아가겠지만 이제는 엘프마을이 집같이 느껴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떠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나의 집은 사비나가 살고있는 곳이다. 사비나가 얼마나 늙었는지 혹은 어디 아픈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이 떠오르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60년이 지나서야 가게되는 집이다. 저벅저벅. 집으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멀었다. 아니 멀게 느껴지고 있었다. 숲은 엔트의 능력이 강해진 탓으로 울창해졌고 넓어졌다. 다행히 크라이 숲은 인간이 살고있는 크라이 마을쪽으로 넓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엔트가 인간들을 위해서 배려해준 탓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엔트는 숲이 넓어진 것을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인간이 숨을 저절로 쉬는 것처럼 엔트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행해지는 자연스런 힘이리라. "푸드득" 내가 숲을 걸을 때마다 수많은 동물들이 울음소리를 내거나 피했다. 야생동물이 있다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최상급 정령의 소환이 가능한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최상급 정령은 소환자의 보호를 위해 소환자의 명령이 없이도 스스로 소환되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와같이 최상급 정령을 자유자재로 소환가능한 정령사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걷는도중에 가끔씩 야생동물이 내게 달려들려고 하였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쉽게 쫓아낼수 있었다. 간단히 존재감만을 높이면 야생동물은 자신보다 강한 존재로 인식하고 피하기 마련이다. 재활기간 동안에 엘프들에게 배운 능력이다. 엘프들은 숲에서 생활하다보니 이런 능력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로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 배워야만 했다. 물론 반병신이 된 몸으로 누워있었기에 심심해서 배운 것이지만 말이다. 많은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내가 살았던 집앞에 도착해 있었다. 집은 60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흘러간 시간을 따져볼 때 이처럼 변화가 없는 것은 무척이나 관리하는데 정성을 쏟았다는 것이다. 사비나의 손길이 묻어났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막상 집앞에 도착하니 사비나를 만나게 되어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오래도록 망설였다. "누구냐!"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깜짝 놀랬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화살을 내게 겨냥한 인간이 있었다. 화살에는 물의 하급정령이 소용돌이 치고 있어서 그가 뛰어난 정령사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는 누군데 감히 크라이 숲에 침입했느냐?" 화살을 내게 겨냥한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또다시 외치며 질문을 던졌다. 상대방은 나를 보고서 크라이 숲에서 볼수 없는 얼굴이라 침입자라고 판단했으리라 생각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는 순간 집안에서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롤드니? 무슨일이기에 소리를 지르고 있는거냐?" 나는 집안에서 방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주름살이 가득한 여성으로 인상을 찡그린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집안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화살을 내게 겨냥한 그가 노인을 향해 외쳤다. "어머니 침입자에요. 들어가세요!" 대화를 듣고보니 모자(母子)사이로 화살을 들고있는 아들이 어머니가 숲을 침입한 내게 해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소리인듯 싶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참으로 어이없었다. 이들은 60년전에 떠난 나의 집에서 살고있는 사람들 같았다. '세레나 장로님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사비나와 함께 살고있는 사람들인가?' 세레나 장로는 60년전 떠난 집에 아직도 사비나가 살고있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부활하고서 세레나 장로는 그동안 나의 가족들에 대한 사실을 많이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알려줄경우 엘프의 입장에서의 진실을 말할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인 나의 견해에서는 상당히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저는 침입자가 아니라 이 집에 살고있는 사비나라는 여자를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나는 화살을 들고있는 그에게 나의 목적을 알려주었다. 이들 모자가 사비나와 함께 살고있는 크라이 숲의 정령사라 생각되었다. 정령사 아니고서 크라이 숲에 살수있는 인간은 오직 사비나 뿐이기 때문이다. "가...감히 성함을 함부로 말하다니!" 그는 나의 말을 듣고서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더니 내게 겨냥한 화살을 그대로 날려보냈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화살은 곧바로 나의 앞으로 이동되었고 그가 소환한 물의 하급정령도 화살을 따랐다. 하지만 화살은 내 앞에서 그대로 막혔고 뒤따라오던 물의 하급정령도 튕겨져 정령계로 강제송환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의 앞에는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이 나타났다고 곧바로 사라졌다. 최상급 정령은 계약을 맺은 주인의 위험을 스스로 판단하고 소환되어 주인을 보호한다. 최상급 정령이 완전한 이성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상급 정령도 어린아이 정도의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어떻게?" 내가 화살을 날린 그는 지금의 상황에 당황하였다.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못하고 화살을 날린 사실에서 당황했고 화살과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가 튕겨난 것 때문에 두 번째로 당황하였다. "저도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정령사입니다. 침입자가 아닙니다."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정령사는 우리 가족뿐인데 너는 누구냐?" 그는 나의 말을 듣고서도 믿지를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말을 듣고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정령사가 한 가족 뿐이라면 당연히 우리 가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금이 과거로부터 60년이 지난 사실을 떠올렸다. '60년이 지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나도 참 바보로군. 그럼 저 사람은 내 가족이겠군.' 나는 지금에서야 어느정도 상대방이 누군지 알게되었다. 아마도 내가 없는 사이에 생겨난 우리 가족이 분명하였다. 내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으니 모습을 보아서 조카가 아닐까 싶었다. 막상 상대방에게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려니 앞이 캄캄하였다. 내가 당신 가족이라고 말한다면 미친놈 취급받기 적당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 앞에 활을 들고있는 조카라 짐작되는 그는 흥분된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런일이" 조카라고 생각되는 그와 내가 대치된 상황에 갑자기 옆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가락을 내게 향하고 눈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 이럴수가'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머니 위험하니까 들어가세요!" 조카라 생각되는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내 옆까지 온 사실을 경악하고 곧바로 들어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서 계속 귀신이라느니 혹은 이럴수가 없다눈 말만 반복하였다. 문득 나는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보고서 놀랐다면 무엇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카인은 죽었어. 죽었어. 죽었단 말이야. 귀신일거야. 귀신이야." 나는 노인의 반복되는 말을 듣다가 그 중간에 나의 이름이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나를 알고있는 사람은 가족과 마을 사람뿐이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내게 익숙하다고 생각되었다. 보고싶은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까? 누구지? 설마...?' 나는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서야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사비나였던 것이다. 60년의 세월이 젊고 어여뿐 그녀를 지금의 노인으로 만든 것이다. 60년이 지남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녀임을 알게되니 나또한 심장이 멈출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비나? 정말 사비나야?" 울고있는 사비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어깨를 잡고서 사비나가 맞느냐고 질문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놀랬는지 아까와 같은 말만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만남이 60년만이라니 정말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다. 사비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놈이 누군데 감의 나의 어머니 성함을 부르느냐?" 내게 화살을 날렸던 그가 달려와 나를 밀쳐내고 어머니를 부측하여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했는지 아니면 어머니를 위해서 그랬는지 그것도 아니면 두 가지 모두였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가 사비나를 방안으로 부축하여 들어간 이후로 한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게 아들이 있었나?' 사비나를 부축한 남자를 생각하며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였다. 내가 죽은후 사비나가 재혼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재혼했다면 굳이 크라이 숲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 복잡한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처음에는 조카라 생각되었지만 사비나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도 아니다. 덜컥.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다가 방문이 활짝 열리며 그가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입을 벌리고 숨을 쉬지도 않고 눈이 찢어질듯 치켜떴다. "정...정말로 아버님의 모습과 똑같다니!" 그는 방안에서 사비나로부터 무엇인가 들은 것 같았다. 나는 당장 사비나에게로 달려가 내가 살아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지만 놀랄까봐 그럴수가 없었다. 더욱이 사비나는 그냥 쓰러져도 죽을 것만 같은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사비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하였다.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였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엘프가 찾아와 내 말이 진실임을 확인해 주고서야 믿어주었다. 사비나는 내가 겪어온 이야기를 눈물을 흘리며 들어주었다. 나는 사비나의 모습에 생명력이라도 나눠주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가슴아팠다. 엔트에게라도 찾아가 생명력을 사비나에게 넣어달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사비나는 생명력을 감당할 정신력이 없다. 나도 사비나가 겪어온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비나를 어머니라 부른 남자가 내 아들임을 듣게되었을 때 가장 놀랐다. 내가 죽은후 임신을 알게되었다니 말이다. 재혼을 하지도 않고 이곳에서 조용히 살았다니 불행한 그녀의 삶이 안타까웠다. 나의 아들 이름이 하롤드란 사실을 알게되었고 하롤드가 나중에서야 나의 얼굴을 보고 놀란 이유를 알았다. 30년 전까지 나의 얼음관이 집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롤드는 어머니가 나를 너무나 애타게 그리워하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행복을 찾아주기 위해서 오직 정령사로서의 삶만을 살아왔던 것이다. 가정을 꾸리지도 않고 오직 정령술만 익혔던 것이다. 그래서 하롤드는 인간으로서 60의 나이지만 중급 정령사가 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비나 그리고 갑자기 생겨난 나의 아들 하롤드까지 우리 세 가족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하롤드는 갑자기 나타난 젊은 모습의 내가 이상한지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저 어머니가 60년을 그리워한 나를 만나서 행복한 모습에 즐거워했다. 하롤드는 나의 아들이지만 내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으니 부자지간이라 할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겉모습을 바라보면 반대상황이어야 정상이었다.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고 아침이 되어서야 나의 부모님을 찾아갔다. 부모님은 의외로 모든 사실을 알고서 나를 맞이해 주셨다. 세레나 장로는 1년전 나의 할아버지인 포그너에게 두 명의 8서클 인간마법사를 초빙하는 역할을 맡겼고 그것을 어제 찾아와 설명한 것이다. 아마도 어제밤 사비나를 만나면서 엘프가 찾아와 확인까지 하는 사실을 듣고서 겸사겸사 말한 것 같았다. 나를 배려해 준 세레나 장로가 고마웠다. 의외로 예전 가족들은 나를 쉽게 받아들였다. 정령사 가족은 엘프종족의 영향으로 조화로움을 따르는지라 자연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슬픔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할아버지 포그너의 경우가 가장 담담하였다. 우리 가족은 무척이나 많이 변하였다. 예전에 생각하고 있던 가족 이외에도 알지 못하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첫째형 크라이브와 둘째형 타르는 오래전 크라이 마을의 여성과 결혼했지만 내가 두 형수님을 만날수는 없었다. 형수님들은 정령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노환으로 돌아가셨던 것이다. 형들은 형수님들에게 정령술을 가르쳤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삶을 원했기에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셨다. 그 외에도 형수님들이 낳으신 많은 조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제국의 전쟁에 참가했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60년 동안에 제국은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그 과정에서 반강제로 정령사들이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크라이 숲이 최남단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정령사까지 전쟁에 참가했다면 얼마나 제국이 전쟁을 많이 했는지 알수 있었다. 나는 제국이 일으킨 전쟁에 많은 조카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더욱이 지금도 전쟁중이란 사실에 어이없었다. 결국 나를 맞이한 가족은 할아버지, 부모님, 두 형, 두 명의 조카 그리고 두 명의 종손자 이렇게 아홉명 뿐이었다. 60년의 세월동안 변화한 가족의 모습이다. 조카들이 제국의 전쟁에 반강제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조카들이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을테니 최소한 20명이 넘는 대가족이 되었을텐데 정말로 아쉬웠다. 사실 조카들의 죽음에 분노하기는 했지만 슬픔이 크지는 않았다. 만나보기는 커녕 대화조차 못해본 조카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하급 정령사인 것이 이렇게나 기쁠줄 몰랐다. 어머니의 연세는 무려 100세이다. 정령사가 보통 능력에 따라 다르지만 150의 수명을 가진다고 감안할 때 조만간에 우리 가족중 노환으로 죽을 사람은 없다. 아니 정령사가 아닌 사비나는 예외이다. 사비나는 지금 78세로 보통 인간의 평균수명을 넘기고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7 회] 5. 행복 2 니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촌장이었다. 그러다보니 니트는 언제나 골목대장이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 감투를 차지하였다. 물론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카인은 예외로 두었을 경우이다. 카인은 크라이 마을에 어려움을 막아주는 정령사의 가족이라 특별한 존재였다. 마을의 어른들까지 어린 카인에게 무엇이든 양보했을 정도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인은 정령사 가족이란 특혜를 가지고 골목대장 니트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오랜시간 함께 지내다보니 결국 둘은 친해지게 되었고, 니트는 가끔 카인의 가족을 만나게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카인의 가족은 마을 출입을 극히 자제하기 때문에 그들과 인연을 맺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니트가 열 네살이 되는 해 카인은 제국의 수도까지 여행을 다녀오고 말린에서 신부를 구해와 마을 사람들의 축복아래 결혼까지 하였다. 니트도 카인의 결혼식에서 맛나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니트는 그때 카인을 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후로 니트는 카인을 61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다. 카인이 결혼을 한지 1년이 지나자 그와 결혼한 사비나가 카인의 죽음을 알려왔다. 마을 사람들과 카인의 친구들은 그 소식에 어리둥절 하였다. 카인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인을 알고있는 마을 사람들은 슬퍼할 기회조차 없었다. 카인의 장례식이 마을에서가 아닌 정령사 가족만이 드나들수 있는 크라이 숲에서 치뤄졌기 때문이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니트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갖게되자 마을 사람들은 니트를 촌장으로 임명하였다. 크라이 마을의 촌장은 오래도록 니트의 아버지가 맡아서 했었고 그가 늙자 다른 사람이 도맡았었다. 하지만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못하여 마을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니트가 촌장이었던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 생각하고 그를 촌장으로 임명하였다. 물론 니트가 정령사 가족과 친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무척이나 만족하였다. 니트는 정령사 가족과 친하였기에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실 니트가 촌장직을 맡기전에 촌장을 했던 사람은 정령사 가족과 만나길 꺼려해서 많은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니트를 제외하고 마을 사람들은 정령사 가족과 유대관계가 없는 편이다. 그것은 정령사 가족이 원한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스스로가 가진 편견 때문에 생긴 관계였다. 니트가 촌장이 된 이후로 정령사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많이 가까워졌다. 마을에서 아리따운 두 명의 처녀가 정령사 가족과 친해지게 되어 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후로 마을은 정령사 가족의 힘을 지원받으며 좀더 발전하였다. 마을의 사람도 늘어났고 경작지도 좀더 넓어졌다. 숲을 파괴하는데는 엘프들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그것도 쉽게 이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전적으로 정령사 가족의 도움이라고 생각했다. 크라이 마을의 발전은 카르시온 제국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끝을 맺었다. 정령사 가족중 일부가 반강제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국에서는 능력있는 마법사나 정령사가 필요하여 커다란 숲의 정령사들은 회유를 하였고 크라이 숲과 같은 작은 곳은 반강제로 징집한 것이다. 사실 정령사 가족중 젊었던 이들은 작은 크라이 숲에 만족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보다 넓은 세상에 나가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지만 결과는 참혹한 죽음이었다. 정령사 가족의 참변에 이어서 10년 전부터는 엘프들이 마을에 도움을 주지도 않으며 발걸음조차 없었다. 정령사 가족도 엘프들의 입장을 알수 없었다. 그때 엘프들은 엔트란 존재가 자각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외부에 대해서 신경쓰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전에는 정령사를 통해 엘프들과도 대화를 통해서 어려움이 생겼을 때 도움을 받았지만 10년 전부터는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마을에 큰 도움을 주었는지 몸소 느낄수 있게 되었다. 크라이 마을은 인원이 늘게되었지만 농사짓는 농토가 넓어져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라에 세금조차 내질 않으니 천국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이 병이들면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치료술에 능숙한 정령사 가족의 도움은 가뭄든 때 내리는 단비나 마찬기지였다. 이렇게 엘프가 아닌 정령사 가족의 도움만으로 생활한지 10년이나 지속되었다. 니트가 늙어 더이상 촌장직을 수행할 수 없게되는 시점에서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10년 동안이나 조용했던 엘프들이 마을에 다시금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농지에 조금이라도 병든 곡물이 있으면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중에 아픈 사람도 엘프의 손길을 받게 되었다. 정령사 가족의 치료술과 엘프의 치료술은 하늘과 땅이었다. 그동안 심한 중병을 앓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걷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엘프가 10년만에 마을에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보다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죽었다던 카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현실이다. 니트는 61년이나 지나서 카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놀라움을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늙었는데 반해 카인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카인은 자신의 모습이 엘프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이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마을 사람들은 엘프들에 대해서는 경외시하는 입장이라 어떤 말을 해도 이유없이 믿어버린다. 카인의 기억에 남아있는 마을 어른들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친구들 몇명만이 남아 있었다. 카인은 그들을 찾아가 정령술로 조금이라도 아픈곳을 치료해주고 도움을 주었다. 마을에 갑작스럽게 활기가 넘쳐 흐르게 되었다. 엘프들은 앞으로도 10년 전보다 많은 도움을 준다고 약속했다. 물론 숲의 파괴는 철저히 허락을 받아야된다는 조건이 있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카인 밥먹자." "알았어." 니트의 늙고 힘없는 목소리에 카인이 대답하였다. 카인은 하루에 한 번씩 니트의 집에 찾아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치료를 하고 있다. 카인의 치료술이 뛰어나다보니 굳이 엘프들이 찾아올 필요도 없게 되었다. "우와! 고기반찬이네?" 카인은 니트가 앉은 밥상 반대편에 앉아서 반찬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정령사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카인의 모습을 보고 기가찼을 것이다. 정령사란 절대 육식을 하지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인의 정령술은 육식에 죄우되는 수준이 아니기에 상관이 없었다. "치료받은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거야." "그렇구나. 잘먹을께." 니트는 카인이 매일 자신의 집에 찾아오자 너무나 기뻤다. 더욱이 카인이 지난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싶어 할 때는 이 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본래 사람은 늙으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늙은 노인의 옛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카인은 고기반찬을 무척이나 많이 집어먹었다. 니트로서는 카인처럼 고기를 먹을수는 없었다. 나이들어 육식을 많이하면 소화가 되지않기 때문이다. "잘먹었다!" "후후" 니트는 카인이 배가 불룩하도록 먹는 모습에 웃음지었다. 오래전 카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카인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오직 카인만 변하지 않은 것이다. 식사가 끝나자 니트의 며느리가 밥상을 치웠다. "카인 고마워." "뭐가?"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줘서." 니트의 말에 카인은 그저 미소만을 지었다. 카인은 늙은 사비나를 비롯해 친구를 만나게되어 처음에는 기뻤지만 얼마후 그들이 죽는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차마 슬픈 얼굴을 비추지는 못하고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오후에 한 시간 동안은 꼭 찾아올께.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집을 찾아오면 될거야. 그리고 오늘같이 고기반찬이 올라오면 어떻게서든 찾아올께." "그건 걱정마. 며느리에게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매일 준비하도록 일러줄 테니까." 카인의 말에 니트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이제는 마을 사람중에 특별히 아픈 사람도 없는데도 찾아온다니 니트로서는 말동무가 생기게 되어 기뻤다. 니트는 오후가 되면 언제나 카인을 기다리게 되었고 카인 또한 니트의 바램대로 찾아오지 않은 날이 없었다. 카인의 방문은 니트가 촌장직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카인은 예전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마을의 사람이 모두 죽을 때까지 마을의 방문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기뻤지만 그들이 모두 죽고나자 방문자체가 스스로를 슬프게 만들었다. 다행히 사비나는 엘프들이 재배하는 각종 신비한 약초의 도움으로 보통의 인간으로는 크라이 마을의 사람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물론 그녀도 죽음을 피할수는 없을 것이다. ------ 나의 하루일과는 언제나 규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별히 원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본래 나는 삶이 얼마 남지않은 사비나를 위해 그녀와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전에 일어나면 사비나가 힘들게 차려준 아침을 먹고 엘프마을을 찾아간다. 그리고 엔트에게 전해받은 800년의 생명력을 이용해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자유를 만끽하게 해준다. 본래 생명력은 함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소드마스터나 마법사가 생명력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이룬다면 그들 자신의 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보통 사람은 생명력을 이용조차 할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생명력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사용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엘프들이 내가 소환한 최상급 정령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엔트와의 시간을 갖는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만큼 서로 느끼는 상황에 대한 견해가 많았다. 엔트는 숲의 신비로움에 관심이 많았고 나는 반대로 숲의 신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의견의 차이가 있다해서 서로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둘의 존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엔트는 식물이라 하기에는 이성과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 긴 수명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정오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 사비나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나서는 사비나와 함께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형들을 만나서 시간을 보낸다. 모든 가족이 함께모여 보내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가 가장 즐겁다. 물론 이때 종손자나 나의 아들 하롤드는 자리를 피한다. 종손자는 자신보다 어린 모습을 한 내가 작은할아버지란 사실을 믿으면서도 가슴속으로는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나의 아들인 하롤드도 마찬가지다. 오후에 한 시간 정도는 크라이 마을에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니트에게서 지난 61년 동안 마을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실들을 알고 싶어서이다. 내가 없는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니트도 옛날 이야기 하기를 좋아해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니트를 방문할 때 병든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치료술을 발휘하면 특별히 신체일부가 붙어있는 이상 치료되지 않는 병이 없었다. 저녁이 되면 사비나와 둘 만의 시간을 갖는다. 예전처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지는 못해도 그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서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며 지난 세월동안 나누지 못했던 사랑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사비나와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사비나는 정령사도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길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니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우리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요?" "그것이 무슨 소리야?" "당신은 이제 열 다섯살이 된 듯한 모습이고 저는 늙은 노인이잖아요." 나는 사비나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찢어질듯이 아팠다. 너무 슬펐지만 눈물을 보이지 못하고 그저 미소만을 억지로 나타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슴아파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의 사비나도 좋지만 지금도 예전 못지않아. 60년이나 지나서 집에 돌아왔는데 당신마저 없었다면 나는 무척이나 슬펐을거야. 정말 고마워." "저는 살아돌아온 카인이 더 고마워요." 사비나가 나의 말에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눈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하였다. 사비나는 자신이 지난 세월동안 겪은 슬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늙은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롤드는 언제 결혼시킬거야?" "하롤드가 결혼하지 못한 것은 제탓이에요. 제가 언제나 카인 당신을 그리워하며 얼음관까지 옆방에 두고서 지냈으니 그 애가 지금처럼 변한것은 당연해요. 카인 당신이 정령사 가족이라니까 자신도 뛰어난 정령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오직 정령술만 수련하다가 지금의 모습이 된 거에요. 다행히 하롤드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사비나가 하롤드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롤드는 중급 정령사가 되었으니 150살 이상까지도 살아갈 것이다. 사비나는 정령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은 알고있는 편이다. 지난 60년의 세월동안 정령사 가족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아들인 하롤드가 정령사이니 저절로 알게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자 사비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였다. 내가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요리를 할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저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을 소환하여 사비나가 움직이는데 힘들지 않게 도움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사비나는 그것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삶이 계속되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하였다. 하지만 슬픈 사건도 찾아오게 되었다. 크라이 마을에서 예전의 나를 기억하는 존재가 하나둘 노환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사비나는 엘프들이 재배하는 약초를 섭취하여 예상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삶이 끝나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비나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음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주었다. 사비나는 마지막으로 고향을 가보고 싶었다. 자신이 태어나서 가족과 함께보낸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을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린의 빈민촌을 가리킨다. 사비나의 가족들은 그때 나의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으로 풍족하게 살았을 것이다. 사비나는 가족의 소식을 내가 죽은 뒤에야 한 번 받았고 그후로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아마도 사비나의 희생으로 가족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들이 용기내어 찾아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사비나의 마지막 부탁을 위해서 말린을 향한 여행준비를 하였다. 가는데만 한 달의 기간이 필요한 여행이라 많은 나이인 사비나에게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준비할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경비였고 그것은 엘프들의 도움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엘프에게서 가장 쉽게 얻을수 있는 가치있는 것은 역시나 약초이다. 엘프의 손길이 머문다면 아무리 재배하기 어렵고 희귀한 약초라도 잡초자라듯 쑥숙 자라나니 말이다. "카인아 이것을 받거라." 말린을 위해 출발하기 위해 작별인사를 나눌 때 아버지가 내게 둘둘말린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귀중한 종이를 보관하기 위한 통으로 짐작되었다. "아버지 이것이 무엇인가요?" "크라이 숲에 살고있는 정령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적힌 허가서다. 내 손자들의 희생으로 얻은 피맺힌 저주가 담겨진 것이지만 네가 정령사란 것이 알려지면 곤란할까봐 전해주는 거란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전해준 원형모양의 문서보관통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넣었다. 제국에 전쟁이 항상 발생하니 능력있는 자는 언제나 나라에서 반강제로 데려가니 이것이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조심해서 다녀오거라. 너는 최상급 정령사이니 항상 소식 잊지말고 전해야한다."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가족들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사비나는 편안히 마차안의 공간에 자리를 마련했다. 마을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사비나 만큼은 마차에서 편안히 쉴수 있도록 약간 개조를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차가 우습게 변했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마을을 떠나도 가족들은 나를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최상급 정령사이기도 하며 언제나 필요하면 소식을 전할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계약맞은 정령에게 소식을 전하면 정령은 세레나 엘프장로의 정령에게 소식을 전하고 그것은 세레나 장로를 통해 가족에게 전달된다. 물론 이것은 최상급 정령사만이 가능한 일이다. 사비나 때문에 여행은 무척이나 느렸다. 원래의 예상대로라면 한 달이 필요했지만 두 달이 걸릴 것 같았다. 나이가 많은 사비나에게는 여행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사비나가 태어나서 여행을 하기는 이 번이 두 번째이다. 처음은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크라이 마을까지 왔던 것이고 지금은 그와 반대이다. 크라이 숲을 떠나서 처음 도착한 마을은 패로이 마을이다. 이곳은 무척이나 많은 엘프와 정령사가 살고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정령사가 많은 이유는 이곳 주변으로 엄청난 수의 엘프마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남단인 크라이 숲의 바로 윗 마을이지만 상당히 먼 지역이라 유대가 거의 없다. 패로이 마을은 크라이 마을의 수십 수백배나 크니 당연하다. 마을에 들어서자 곳곳에 엘프들이 재배한 약초만을 판매하는 상업행위가 무척이나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엘프들이 많다보니 약초상인들이 이곳에 아예 터를 잡고있는 것이다. 나는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전해준 약초를 처분하여 상당한 여행자금을 마련하였다. 60년이나 지났건만 금전적인 역사는 변한 것이 없었다. 패로이 마을을 지나고 나서도 마을이 보이면 항상 들려서 숙식을 하였다. 사비나의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움직이는데 도움을 주고, 물의 정령으로 사소한 상처도 치료까지 하지만 노환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수 없는 무서운 병이다. 나와 사비나는 마을에 들릴 때마다 귀찮은 사건을 접했다. 영주가 발행하는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정령사임을 밝혀야했기 때문이다. 최남단에서 세금도 내지않으니 신분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정령사가 아니었다면 여행조차 불가능했으리라. 결국 이런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말린에 도착하기 전에 큰 마을이나 도시를 발견하면 용병으로 등록하려고 계획했다. 용병이 된다면 신분증명에 아무런 하자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신분증명을 하기위해 정령사라 밝히고 정령을 소환해서 보여주는 쇼를 언제까지나 계속 할수는 없었다. "사비나 괜찮은거야?" "카인 걱정하지 마세요. 한숨 자면 괜찮을 거에요." 사비나는 걱정하는 나의 말에 힘겹게 대답하였다. 나는 마차전체를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이용해 덜컹거리지 않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하다가 여행을 하다보니 무심코 떠오른 방법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동안 보지못한 커다란 도시가 보이고 있었다. "지나오면서 들린 도시와는 비교조차 되지않네." "그렇네요. 말린에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이런 도시를 많이 만나겠죠?" "사비나 걱정하지마. 조금만 가면 될거야." 나는 사비나에게 말린이 가깝다는 말을 했지만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비나를 위해 천천히 여행한 것 때문이다. 도시에 들어가기 위한 곳에는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과 마차가 줄지어 있었다. 내고 온 방향이 아닌 반대편에서 온 사람들이다. 남단에서 북쪽으로 오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기 마련이다. 도시를 들어가기 위해서 경비병들이 벌이는 일상적인 검문은 많은 불편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책략이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않는 것이다. 영지의 경비를 강화하면 그만큼 안전이 보장되어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활발한 상업행위로 인해 세금을 많이 걷게되어 부를 축적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세금을 내야하는 평민이 다른 영지로 이주하거나 노예가 탈출하는 경우를 막는 역할도 겸한다. "신분증을 보여라!" 나의 차례가 오자 경비병이 큰 소리로 위엄있게 말했다. 평민들이라면 주늑들게 마련이지만 나는 정령사라는 특권계층으로 귀족에 가까운 대우를 받을만한 존재이다. 물론 실리적인 측면만 말한 것이고 사람으로서의 신분은 평민일 뿐이다. "나으리 저는 신분증이 없습니다." "뭐야?" 갑자기 의례적인 검문을 하던 경비병이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다른 경비병까지 덩달아 창을 집어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으리 저는 남단에 있는 크라이 숲에서 온 정령사입니다." "뭐야? 정령사!" 경비병들은 창을 내쪽을 향해 있다가 뒤로 약간 물러났다. 정령사는 평민이면서도 마법사와 함께 귀족보다 높은 대접을 받는 존재이다. 더욱이 요즘같이 작은 전쟁이 끝도없이 발발하던 때에는 그 가치가 더욱 높다. "혹시 모르니까 보여주게." "네, 나으리" 경비병은 어린 나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반존대로 말했다. 재수없으면 그들로서도 뒷감당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 정신나간 귀족이 평민처럼 다녀서 경비병들이 수난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니 말이다. "실프" 휘이익. 휘이익. 내가 실프를 부르자 어린 여자아이 모습이 투명하게 생겨나더니 바람이 휘몰아쳤다. 경비병들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실프의 장난으로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바람 때문에 생겨난 먼지가 가라앉자 실프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나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쳤다. "우와, 대단하네." "남단에서 오는 정령사를 검문해봤지만 저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는데." 경비병들이 실프를 보면서 말했다. 주변에서 도시에 들어가기 위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정령을 보았다고 신이나서 떠들었다. 하급이나 중급 정령사들은 하급 정령이라도 나처럼 뚜렷하게 소환하지는 못한다. 소환하기 위해 필요한 마나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정말 정령사시군요. 죄송하지만 정령사라도 방문목적은 적어야하니 알려주시겠습니까?" "할머니와 함께 말린으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간단히 마차에서 사비나를 확인하고 보내주었다. 이곳에 오기전 다른 마을에서도 마법사나 정령사 그리고 상인과 같이 주의가 필요한 사람들은 방문목적을 일일이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누군가를 추적하거나 범죄자를 구별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것 때문에 많은 범죄자들이 특정 영지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영지로 도주하는 것을 방지한다. 나는 경비병에게 사비나를 나의 친할머니로 소개하였다. 부부라고 말한다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뿐더러 그것으로 인해 다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비나도 그것을 가지고 뭐라하지는 않았지만 가슴아픈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통해 사비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느껴지니 말이다. 여행경비가 많았기 때문에 사비나를 위해서 가장 비싼 여관을 찾았다. 그리고 사비나가 편히 쉴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주었다. 여행을 시작해서 사비나는 목욕을 한 번도 할 필요가 없었다. 물의 정령을 이용해서 간단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한 종류가 아닌 물질계 4대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나이기에 편리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보통 정령사들은 한 종류의 정령에 수련을 집중한다. 그리고 중급 정령사가 되면 자신이 수련한 정령과 반대되지 않는 성질의 정령을 하급까지 수련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정령사가 되기위해 정령술을 익히는 과정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하급정령을 좀더 효율적으로 부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신력의 집중이 필요하고 그것은 정신력의 강화효과를 나타낸다. 그렇다고 모든 정령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다. "카인 오늘은 일찍 잘께요." "푹 쉬도록 해. 나는 용병길드에 다녀올테니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사비나는 피곤한지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잠들었다. 이곳은 큰 도시라 용병길드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신분증이 없어서 겪어야만 했던 문제로부터 벗어나려면 당장이라도 용병길드가 발행하는 신분증이 필요했다. 여관의 점원을 통해서 용병길드를 알아내고 그곳을 찾았다. 용병길드의 건물은 약간 외진곳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일부 사람들은 용병이라기 보다는 짐꾼에 가까운 사람도 있었다. 낮은 등급의 용병은 짐꾼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람이 많이 북적거릴 뿐이지 용병길드의 직원이 바쁘지는 않았다. 몇명의 길드직원은 의자에 앉아서 용병들이 바쁜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실례좀 하겠습니다." "어떤 의뢰를 하실거죠?" 용병길드 직원이 말한 나에게 용건을 물었다. 길드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게 게시판에 적혀있는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서 찾아온다. 마음에 드는 의뢰가 있으면 직원에게 말하고 직원은 용병의 등급을 보아서 허가여부를 판가름하고 알려주는 간단한 일을 처리하니 언제나 한가하기 마련이다. 나는 직원이 대뜸 의뢰에 대해서 묻자 잠시 멈칫거렸다. "그것이 아니라 저는 용병이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가요? 저쪽으로 가보세요."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직원이 가리킨 쪽으로 걸어가자 나이가 많은 노인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심심한지 무척이나 무료한 표정으로 말이다. "용병이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나의 얼굴부터 발끝가지 한차례 훑어보더니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이 모두 나와같은 대접을 받는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기록이 끝나자 노인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질문을 하였다. "어디서 살았어?"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 있는 크라이 숲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가 있었나? 어린놈이 멀리서도 왔군."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기록을 마치자 다른 질문을 하였다. "어느 영지의 신분증을 가지고있지?" "없는데요." 노인은 대답을 듣고서 고개를 쳐들며 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용병이 되기 위해선 어느 영지의 사람인지 기록해야 했다. 그리고 영지가 없는 지역에 살았다고 할지라도 평민은 신분증이 있어야 어느 곳이든 돌아다닐 수 있다. 그것 이외에도 용병길드에서는 용병이 어느 영지민이었는지 기본적인 기록은 있어야했다. "남단에서 여기까지 왔다면 중간에 어느 영지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이 있을테니 그것을 주게. 그게 없었다면 이곳까지 올수가 없었을테니 말이야." "정령사라서 신분증이 필요 없었는데요." 노인은 대답을 듣자마자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갔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모습이 아닐수 없었다. 나는 노인이 정령사란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정령사란 참으로 희귀한 존재로 사비나와 여행하는 동안 많이 느꼈다. "저 아이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밝혔습니다." 노인은 험학하게 생긴 누군가에게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도 내가 정령사란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약간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꼬마야 네가 정령사가 맞느냐?" "네, 맞습니다. 용병이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라고? 네가 문제란다. 네가 아직 꼬마라서 모르는 것 같은데 정령사는 나라에서 벌이는 전쟁에 의무적으로 1년 이상은 참여하게 되어 있다. 그래야 카르시온 제국에서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을경우 숲에서만 생활해야만 한다. 물론 너는 꼬마이니 그런 것을 몰랐을테지? 그러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나는 노인이 데려온 험상굳은 사람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되었다. 정령사가 전쟁에 1년이상 참여하지 못한다면 돌아다닐 자유조차 없다니 기막힌 사실이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마법사와 정령사를 이용하기 위해서 결정한 사항임에 틀림없다. 어느정도 그들이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게 1년이란 기한을 두었지만 말이다. 노인이 데려온 사람은 험상굳은 인상과 다르게 무척이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죄송하지만 이것을 봐주시겠어요?" 나는 가슴속에 간직했던 문서보관통을 꺼내고 개봉하여 그안에 보관된 종이를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노인도 종이를 받아들더니 읽어보았다. 문서에는 크라이 숲의 정령사중 나의 조카의 이름이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었고 전쟁에 참여하여 죽음을 맞이한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라에서는 마법사와 정령사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여 죽은자의 가족에게는 전쟁에 참여할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공표하고 문서로 공증하였다. 공증의 내용에는 가족중 한 명의 정령사가 전쟁에 참여하여 죽을경우 두 명의 가족이 의무를 면제받을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더구나 크라이 숲의 정령사는 한 가족이었고 무려 여섯 명이 죽었기 때문에 모든 가족이 의무가 면제된 것이다. "꼬마야 이 문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구나. 나는 이곳 카바스 영지의 용병길드를 맡고있는 테르반이라고 한다. 이분은 용병의 가입을 받는 분인데 네가 정령사라고 하니까 놀라서 내게 알린 거란다. 그건그렇고 너는 하급 정령사가 용병이 되면 최하급 등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느냐?" 테르반은 험학한 인상으로 최하급 용병이 겪어야하는 일들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내가 어린 모습이라 정령사라 한다면 의례 하급 정령사라고 짐작하는 것이리라. 왠지 앞으로 지금과 같은 경우가 생긴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카바스 영지까지 오는데도 어린 모습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벗어나려면 높은 실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물론 모든 것을 보여주게되면 또다른 고초를 겪을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했다. "누가 하급 정령사라는 거죠? 저는 이래뵈도 중급 정령사에요. 크라이 숲의 엘프에게서 어렸을 때부터 정령술을 배웠단 말이에요." "뭐라고?" "네가 중급정령사?" 노인과 테르반은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중급 정령사는 3서클이나 4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게 현실이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더욱이 실력이 뛰어난 중급정령사의 경우에는 5서클의 마법사와 비등한 실력을 나타낸다. 나는 테르반에게 중급 정령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중급 정령을 소환해서 보여주어야 했다. 보통의 인간 정령사들은 네 가지의 정령을 소환할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만 보여주었다.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을 보여주니 테르반은 더욱 놀랬다. 중급 정령사를 만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들이 정령을 소환한 모습을 보기도 드물기 때문이다. 테르반은 길드에서 정령사에 대해 적어놓은 사실을 하나하나 들쳐보며 내게 여러가지 주문을 원했다.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사이니 물의 정령을 이용한 치료술과 바람을 이용한 공격과 방어를 보여주었다. 테르반이 나를 가지고 테스트하는 모습은 길드직원만이 함께 볼수 있었다. 테르반이 직원을 부른 것은 정령사에 대해서 보여주려고 부른 것 같았다. 테르반이 가장 놀란 것은 바람의 중급 정령 실라페를 이용한 공격이었다. 돌까지도 바람에 의해서 한쪽이 부서졌으며 그 범위도 상당히 넓었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바람에 의해서 반쪽이 났을 것이다. 테르반은 테스트를 거친후 아무런 의심도 거치지 않고 A등급 용병패를 건네주었다. 오러를 사용하는 검사나 되어야 받을수 있는 용병패인 것이다. 보통 A등급 용병패는 모든 용병들이 갖고 싶어하는 용병패인데 나는 쉽게 얻은 것이다. A등급 용병패는 일정한 경험이 있어야 받을수 있는데, 테르반은 내게 경험도 필요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라고 말해주었다. 중급 정령을 오래 소환할 수 있으니 체력이 급격히 소모되는 A등급 용병보다도 더욱 뛰어나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직접 A등급 용병패를 발급하게 되다니 기쁘군." "고맙습니다. 테르반님" 나는 테르반이 건네주는 용병패를 받으며 감사인사를 하였다. 그는 A등급 용병패를 발급하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고 알려주었다. 길드직원이 용병에게 잘못된 등급을 발급하면 상당한 처벌을 받는데 그는 걱정없다는 태도였다. 그것은 테르반 뿐만이 아니라 테스트를 지켜본 길드직원의 공통적인 태도였다. 나는 용병패를 받고나자 사비나가 걱정되어 곧바로 돌아왔다. 아침이 되자 용병길드에 있었던 이야기를 사비나에게 전해주었다. 사비나는 용병패를 바라보며 앞으로 내가 정령을 소환하면서까지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며 좋아했다. 나 때문에 덩달아 사비나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기 때문에 많이 곤란했었다. 이곳 카바스 영지의 도시에서는 사비나가 걱정되어 며칠 더 머물고 길을 떠났다. 중간에 테르반이 찾아와 의뢰를 맡아달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할머니를 말린까지 모셔야한다며 거절했다. 말린을 향하는 동안에 카바스 영지보다 큰 도시를 쉽게 만날수 있었고 그것은 말린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까지 도착하는데 A등급 용병패는 유용하게 쓰였다. 작은 사고는 용병패를 들이미는 것으로도 해결되었고 신분증명에도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간혹 어린아이가 남의 용병패를 훔쳤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지만 간단히 정령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말린에 도착해서 먼저 값비싼 여관에 투숙하고 사비나가 체력을 회복하길 기다렸다. 사비나의 체력이 회복되자 그녀가 보고싶은 곳을 안내해주었다. 예전 살았던 장소는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말린의 빈민촌은 예전과 색다른 모습이었다. 빈민층이라 할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빈민촌은 오래전에 올리버란 훌륭한 인물이 자선사업를 벌여서 없어졌다고 알려주었다. 올리버 가문은 빈민촌에서 상업을 일으켜 지금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힘쓰고 일자리를 주고 있다고 한다. 나또한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에 감탄하였고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다. 사비나는 예전 빈민층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되살려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샘솟았다. 그래서 나는 많은 돈을 주고 용병길드에 사람찾는 일을 의뢰했다. 많은 돈을 준만큼 사비나의 가족은 쉽게 찾을수 있었지만 그들은 사비나와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사비나가 늙어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많은 부를 축적한 자신들에게 찾아왔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만남을 거부했지만 어떤 경우는 사비나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후손까지도 있었다. 나는 가슴아파하는 사비나가 행복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비나의 행복을 위해 투숙한 여관이 내가 갖고있는 여행경비를 모두 탕진하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귀족이나 엄청난 갑부의 상인들이나 머무는 여관에서는 장기간 투숙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사비나는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했고 그것을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직업을 가져야만 했다. 그것도 사비나를 지켜보며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직업을 말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18 회] 5. 행복 3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는 오래된 역사를 가진만큼 모든 조직들이 엄격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같은 종류의 업계가 모여서 길드가 창설되었고, 창설된 길드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하며 선의의 자유경쟁을 유도했다. 그러다보니 비슷한 업종의 길드가 같은 지역에 집중된 결과를 가져왔고 그것이 많은 이득을 창출하게 되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대륙의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대부분의 병력이 북쪽으로 치중된 상태이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안전을 보장받고 싶은 귀족들은 말린의 중심에서 약간 남쪽에 자리를 잡았고, 전투의 참여로 삶을 유지하는 용병들은 말린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만약 어떠한 나라가 말린을 침략하려면 수많은 용병길드가 위치한 곳을 뚫어야만 할 것이다. 황실에서도 용병들이 북쪽에 위치하면 도시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곳에서 발생하는 세금을 약간 낮추기도 하였다. 제국의 수도인 말린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남쪽으로는 귀족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멋지고 고급스러운 건물이 수없이 많은 반면에 북쪽으로는 딱딱한 느낌이 나거나 부실한 건물 뿐이었다. 도시의 북동쪽과 북서쪽에는 한때 빈민촌까지 있기도 하였다. 황궁은 도시의 중앙에 있지만 도시에 머무르는 수많은 용병이 외곽에서 생활하며 철저히 지켜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도시의 북쪽 외곽에는 수많은 용병길드가 존재하는 만큼 그에따라 부차적으로 생성되는 부산물들이 많았다. 용병에게 필요한 각종 무구를 제작하여 판매하거나 손질해주는 대장간, 용병의 피끓는 본능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창녀촌, 다친 용병에게 돈을받고 치료해주는 치료사, 의뢰를 마치고 쉴수있는 주점과 여관 그리고 용병의 가족들이 머무는 허름한 집들 외에도 말할수 없을만큼 많았다. 용병길드도 무척이나 많았다. 다른 도시들은 커다란 용병길드 한 두개가 점령한 편이지만 말린은 의뢰가 많다보니 작은 용병길드도 생겨나기만 한다면 망하는 경우가 없을 정도였다. 더욱이 몇십년 전부터 작은 전쟁이 쉴세없이 일어나 용병의 몸값이 높아진 상태이다. 작은 길드의 경우에는 등급이 낮은 사람만 모여서 대부분 잡부로 일하기도 하는데 요즘같은 때에는 용병을 구하기가 힘들어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 것보다 쉽게 돈을 벌기도 한다. 물론 그만큼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역사가 깊은 용병길드는 철저하게 등급을 관리하며 길드에 이득이 생길지라도 등급을 속이지 않는다. 등급을 올려서 용병을 의뢰자에게 보낼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길드의 명성에 흠집이 생기게 되어 다음 의뢰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병길드에서는 높은 등급의 용병을 확보하기 위해 따로 각종 무구에 능숙한 용병에게 등급이 낮은 용병을 무료로 훈련시켜 주기도 한다. 자금이 뒷받침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 작은 용병길드에서는 꿈도 꿔보지 못하는 일이다.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가장 큰 용병길드로는 러쉬길드와 이그노길드가 있다. 두 길드는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체계적으로 용병을 관리하고 있다. 두 용병길드 외에도 많은 중소 용병길드가 있기도 하지만 높은 실력을 갖추어 성공하길 원하는 용병은 러쉬길드와 이그노길드를 찾는 것이 보통이다. 작은 용병길드에서는 고아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고 작은 일을 시키며 키운다. 필립은 고아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작은 용병길드에 우연히 자리를 잡았다. 용병길드에서는 아이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진 못하지만 숙식을 해결하고 쉽게 일꾼을 구하는 길이라 대부분 채택하고 있다. 고아인 아이들로서도 버려진채로 쓰레기나 뒤지며 살아가는 것보다 좋은 상황이라 불평이 없었다. 필립은 자라서 철이들자 자신도 용병이 되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어린티를 완전히 벗자마자 말린에서 가장 큰 용병길드를 찾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필립으로서는 용병으로 거절된다 할지라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작은 용병길드에서 잡일이나 해주며 먹고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가진게 없다보니 큰 욕심도 없었다. 필립이 찾아간 용병길드는 이그노길드였다. 필립은 어렵사리 시험을 통과하여 용병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용병패를 지급받게 되었다. 문제는 필립이 받은 용병패는 D급이라 할수 있는데 그것은 용병이 되면 누구나 처음으로 받는 최하급 등급이었다. 용병길드의 의뢰 게시판은 대부분 등급별로 따로 존재하는데 D급 용병전용의 게시판이 가장 의뢰가 많았다. 문제는 D급 용병의 의뢰는 물건을 나르는 것과 같이 일꾼을 구하는 의뢰가 대부분이었다. 20살이 되도록 필립은 이그노길드에서 무료로 가르쳐주는 교육에 빠지는 날이 없었다. 높은 등급의 용병이 가르쳐주는 무기술은 대부분이 실전위주였다. 기사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적을 위한 치사한 모든 방법까지도 서슴치 않고 가르쳤다. 필립은 가끔씩 D급 의뢰게시판에 올라오는 호위 의뢰를 하였다. 사실상 D급 의뢰게시판에 호위와 같은 중요한 의뢰가 올라오는 이유는 의뢰자가 돈이 없거나 매우 안전하다는 사실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꾼을 필요로하는 경우이다. 필립은 25살이 되던해 C급 용병이 될수 있었다. 그만큼 교육을 받으며 실력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작은 의뢰를 해결해 경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C등급의 판정을 받았다는 것은 필립이 드디어 자신이 꿈꾸던 진정한 용병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등급이 높아짐에 따라 의뢰를 수행하여 받는 의뢰비도 함께 높아졌다. "필립 오늘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괜찮아. 다음에 술이나 한잔 사." 필립은 의뢰를 함께 수행한 용병에게 말하며 자신이 속한 이그노길드를 향해 걸었다. 오늘은 의뢰를 하면서 함께 일하던 용병의 위험을 벗어나게 해주어 정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고아인 내가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게 되었다니.' 필립은 자신 모습에 매우 만족하였다. 고아였을 때는 용병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고 이제는 자신이 꿈꾸던 용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용병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필립이 싫어하는 용병들도 꽤 많았다. '망할 놈들' 필립은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 술이취해서 여자나 희롱하고 있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곳에서는 용병의 횡포에 피해를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생계 때문에 이곳을 떠날수는 살수 없는지라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필립도 처음에는 저들 하나하나를 도왔지만 자신의 도움은 그때 뿐이었다. 장기적으로 볼때 도움으로 인해 결국 피해가 곱절로 불어나게 되는게 현실이다. 길드에 들어서자 많은 용병들이 바닥에 앉아서 할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뢰가 있을 때까지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용병의 생리이다. 그래야 좀더 좋은 의뢰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뢰가 없으면 자신의 등급보다 낮은 등급의 일을 해야하고 그러면 의뢰비를 적게 받기 마련이다. 필립은 의뢰를 마쳤다는 사실을 길드직원에게 알려주고, C등급 용병의 의뢰게시판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필립이 의뢰게시판을 살펴보는 동안에서 길드직원이 게시판에 의뢰내용의 메모를 떼어가거나 새로 붙이고 있었다. 필립은 고아였고 D급 용병으로 생활할 때 글을 몰라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글을 모르는 용병이 많았기에 그것은 흠이 아니었고 단지 불편할 뿐이었다. 다행히 길드직원에게 약간의 글을 배웠지만 능숙하게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더듬더듬 말하는 정도로 읽는 것이지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필립이 게시판에서 의뢰목록을 더듬더듬 읽으며 살펴볼 때 세 명의 용병이 치료사에 대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전 새로운 치료사가 생겼다며?" "다녀온 사람들 말로는 대단하다고 하던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험학하게 생긴 용병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용병이 대답했다. 모두들 무료했던지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귀를 기울였다. 용병은 소문에 매우 민감하며 그것은 가끔 의뢰를 맡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치료사 놈들이야 우리돈을 긁으내려는 놈들이니 대단해 봤자지." "그렇긴 하지만." 두 명의 대화를 듣고있던 다른 용병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네들 잘 모르는구만. 내가 말해주지." 치료사에 대해 떠드는 용병의 대화에 그는 입맛에 맞는 의뢰가 없었는지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 대화에 끼어들은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알고있는 것이 있었기에 시간을 보내는데 제격이었다. 보통 용병이라면 남는 시간에 수련을 하며 지내야겠지만 그런 용병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뭘 모른다는거야?" "새로 온 치료사는 치료비를 적게 받으며 실력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원래 A등급 용병인데 할머니를 모시는 것 때문에 치료사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 나이가 겨우 열 다섯살이라고 하던데." 두 명의 용병은 치료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A등급 용병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인사을 찡그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작은 용병길드에게 상당한 금액을 주고서 A등급의 용병패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열 다섯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에 확신을 주고 있었다. "작은 용병길드에게서 얻은 등급이겠지." "맞아. 요즘 작은 용병길드에서는 도대체가 등급관리를 엉망으로 한단 말이야." 두 명의 용병이 크게 말한 소리를 들은 주변의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러쉬길드나 이그노길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용병길드에서는 등급관리가 무척 소홀하다. 중소 용병길드에서 A등급을 받은 용병이 러쉬길드나 이그노길드에서 실력있는 C등급의 용병과 비슷한 실력이라는 것이 알려진 상태이다. 물론 모든 중소 용병길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 "나도 처음에는 자네들처럼 생각했지. 하지만 그 치료사의 용병패를 확인한 사람이 말했는데 러쉬길드에서 발급한 용병패가 맞다더군. 길드에서 확인하까지 했는데 열 다섯살이며서 A등급 용병패를 받은 이유가 있더군. 놀랍게도 열 다섯살이지만 엘프에게서 정령술을 배워 중급정령사라는 사실이 밝혀진거지." 두 명의 용병은 비웃다가 사실을 듣고나자 더이상 웃을수가 없었다. 러쉬길드라면 자신들이 속한 이그노길드와 마찬가지로 등급관리에는 무척이나 철저하다. 길드에서 등급관리에 실수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런일이 발생하면 용병패를 발급한 길드직원은 엄청난 문책을 당하고 쫓겨나기 때문이다. "세상에 러쉬길드에서 A등급을 받은 용병이라고?" "중급정령사?" 두 명의 용병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함께 비웃던 용병들까지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A등급 용병패를 받는 일은 그들이 갖는 꿈이었다. 또한 중급정령사에 대해서 용병들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 있었다. 하급정령사야 용병들이 무시하기 마련이지만 중급정령사는 C급 용병 100여명과 맞대결 할수 있는 실력자이다. 물론 중급정령사도 나름대로 실력에 좌우되지만 어느정도 인정되는 통설(通說)이 있었다. "아직 놀라기에는 일러. 자네들 정령사에 대해서 알고있나? 자네들이 아까말한 치료사가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을 이용할 수 있는데 물의 정령은 치료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더군. 거의 신관과 비슷한 능력의 치료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거야." 주변의 용병들이 새로생긴 치료사에 대해 말하는 용병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도 소문만 들었을 뿐 상당히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관은 천신을 믿는 힘으로 치료술을 펼치는데 대부분 그 혜택은 귀족과 같이 높은 자들에게만 돌아간다. 용병들이 신관의 치료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실력이 좋은 신관의 경우 떨어진 팔다리도 멀쩡하게 붙이기까지 하는 것이 정설이다. 신관과 비슷한 치료술을 발휘한다니 귀가 쏠깃하는 것은 당연하다. "설마 신관만큼 실력이 좋을라구." "아니 그럴지도 몰라. 러쉬길드가 중급정령사라는 것을 인정했으면 테스트까지 거쳤을거야. 내가 예전에 전투에 참여해서 중급정령사를 한 번 본적이 있는데 정말 어마어마했어. 수십명을 장난치듯이 죽이더라구.." "맞아. 나도 얼핏 들은거 같아. 하급정령사는 우리같은 C급 용병들도 쉽게 상대할 수 있다지만 중급정령사 이상은 실력이 좋아 제국에서 마법사 다음으로 높은 대우를 받고 있다잖아." 필립은 용병들의 대화를 들으며 자신의 오른쪽 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오래전에 생긴듯한 끔찍한 흉터가 있었는데 사실은 두 달전에 생긴 흉터였다. 의뢰를 수행하다가 몬스터를 만나 오른팔이 거의 절단되는 상처를 입었었다. 그러나 필립은 우연히 찾아간 치료사에게 완벽한 치료를 받고 지금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카인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필립은 오늘 카인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용병들이 말하는 치료사는 자신을 치료했던 카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필립은 자신처럼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있었다. 아무리 중급정령사라 할지라도 거의 절단되어 간신히 붙어있는 팔을 예전과 다름없이 고칠수는 없다. 그것은 신관으로서도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어찌되었든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지.' 필립으로서는 카인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모두 전해줄 생각이다. 그동안 별다른 계획이 없어서 돈을 모아놓긴 했지만 쓰는 것도 많아서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저번과 같이 용병일을 피치못할 상황으로 그만두는 경우를 대비해서 일정금액은 저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0 회] 6. 사비나 1 사비나와 함께 지내면서 할수 있는 직업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사비나가 편안하도록 가장 고급스러운 여관에 투숙했지만 더이상 머물수가 없었다. 나의 행동을 살피던 사비나는 결국 모든 사실을 알아채고 고급 여관이 아닌 허름한 곳으로 옮기자고 하였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마음에드는 일자리 하나 구할수 없다니.' A급 용병은 희귀하여 용병길드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으며 의뢰비도 상당히 많이 지급된다. 또한 다른 일자리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수십년이나 혼자 살아온 사비나를 생각하면 멀리 떠나야만 하는 일들을 할 수가 없었다. 사비나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까지 함께 생활하고 싶은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민은 여관에서 벌어진 기사의 결투를 구경하고 끝을 맺었다. 여관에 투숙한 두 기사가 알수없는 이유로 결투를 벌였고 그것은 말린에서 흔하게 목격된다. 결투에서 패한 기사는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함께있던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신관의 치료술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기사의 상처가 치료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신기한듯 바라보았다. 신관이 치료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크라이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던 일이 생각났다. 치료를 받은 마을 사람은 언제나 보답을 하고 싶어했다. 나는 엔트에게 생명력을 전해받아 정령을 이용한 치료술을 마음껏 펼칠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그거야. 치료사가 되면 모든게 해결될거야.' 그동안 나는 사비나와 함께하면서 많은 돈을 얻게되는 일자리를 찾아헤맸다. 하지만 일자리만을 원했지 직접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비나는 이런 나의 생각을 전해듣고 무척 기뻐하였다. 치료사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좋지가 않았다. 말린에게 가장 고급스러운 여관이라 길에 돌아다니는 평민들조차 부유한 측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관을 직접 찾아가 많은 돈을 헌납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라 치료사가 필요없었다. 치료사들이 몰려있는 장소를 물색하다보니 결국은 용병길드가 모여있는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용병은 의뢰를 수행할 때마다 목숨을 잃거나 상처입는 것이 생활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급 여관을 빠져나오며 남은 돈으로 용병길드 근처에 작은 집을 얻었다. 다행히 용병길드가 위치한 곳은 말린에서 가장 땅값이 낮은 곳이라 구입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집을 얻게되자 사비나는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였다. 사비나가 약간 굽어있는 허리로 청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정령술로 치료를 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치료사들처럼 약초라든가 수술도구와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상처입은 손님만 필요할 뿐이다. 집앞에 치료사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10일이 지나도 손님이 찾아오지를 않았다. 용병길드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길에 상처입은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쉽게 목격되었다. 또다시 10일이 흘러 20일이 되었을 때 다른 치료사의 집을 방문했다. 더이상 수중에 가진 돈도 떨어져서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되어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말이다. 나는 다른 치료사의 집을 방문하고서야 손님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용병들중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란 사실과 치료사가 생기면 용병길드를 찾아가 통보해야 용병이 상처입었을 때 찾아온다는 것이다. 20일 동안 손님이 없어 안절부절한 내 자신이 정말로 한심스러웠다. 즉시 큰 용병길드를 찾아가 직원에게 새로운 치료사의 집이 생겼음을 알렸다. 직원은 약도를 간단히 그리더니 게시판에 붙였다. 그 후부터 가끔씩 치료를 받기위해 찾아오는 손님이 생겼고 그들은 치료술에 감탄했다. 정령을 이용한 치료라 고통도 없이 치료되니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면 문제가 생길것을 걱정하여 중급정령사 이상의 치료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물론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에게는 좀더 높은 치료술을 몰래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카인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나가겠습니다." 나는 방에서 사비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대답했다. 두 달이 지나자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져 직원까지 고용했다. 지금은 여러명의 직원을 두어 치료시간을 정해놓고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사비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사비나 찾아온 사람들 치료하고 올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나는 사비나의 걱정스런 말을 들으며 방을 나섰다. 이제는 예전과 반대로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서 걱정할 상황이었다. 찾아오는 손님을 줄일수 있는 방법이라야 치료비를 높이는 일인데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나마 지금처럼 일정시간만 손님을 받는 것이 좋을듯 싶었다. "길버트 위험한 사람은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평소와 마찬가지입니다." 길버트는 나의 말에 공손히 대답했다. 처음 나를 알게된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로 취급한다. 열 다섯살의 모습이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주위에서 나를 어린아이라 취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소문으로 A급 용병이란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A급 용병이 되려면 많은 몬스터나 사람을 죽인 실력자라고 알려졌으니 함부로 대하다 무슨일을 당할지 무서운 것이다. 길버트도 소문을 들은 상태에서 내게 고용되어 처음에는 설마하며 조심스럽게 나를 대했다. 다음날 내가 치료술을 발휘하는 것을 바라본 이후에는 자신의 선택을 대견하게 생각하는듯 하였다. 특히 정령마법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환자의 옷을 실프로 갈갈이 찢을 때는 겁먹은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사용하는 치료술은 두 가지이다. 상처부위에 직접 정령마법을 시전하는 방법과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을 소환하는 경우이다. 정령마법은 정령의 힘을 빌좁?정령사의 육체를 통해 사용하는 마법이라 정령을 소환할 필요가 없어 마나의 소비가 적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운다인을 소환하는 방법은 정신력과 마나의 소비가 높지만 정령이 스스로 환자를 치료하기 때문에 환자에게 일일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물론 나로서는 엔트가 전해준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마나의 소비에 신경쓸 필요도 없고 정신력 또한 높아 그저 연습삼아 두 가지를 번갈아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기 오는 소년이 소문의 그 꼬마인가보네." "저런 꼬마가 A급 용병은 맞는거야?" "이봐 입 조심해. 러쉬길드에서 A등급을 받은 용병패도 갖고있다구. 겉모습은 저래도 아마 사람 수십명 아니 수백명은 죽였을거야." 길버트와 내가 나타나자 찾아온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아마도 그들은 아파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환자를 데려온 사람들일 것이다. 여기저기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생명력을 느껴보니 당장 목숨에 지장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길버트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카인님" 길버트는 나의 말에 대답하더니 다른 직원들과 함께 환자가 아닌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더이상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사비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치료사의 일을 하는 것이라 치료사로서 성공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이상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오른팔이 부러졌는데 또다시 부러져서 더이상 일을 할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딸린 식구도 있는데 제발좀 고쳐주세요. 치료사님 부탁드립니다." 내가 다가가자 왼팔로 오른팔을 감싸고 있던 중년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팔이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일을 하다가 또다시 다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부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작은 상처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또다시 같은 장소에 상처를 입게되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럴 경우에는 오랜 회복기간이 필요할 뿐더러 회복된다해도 예전처럼 생활할수 없는 경우가 많다. "으아아아" 부러진 팔에 둘둘말린 천조각을 벗겨내려고 하자 환자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정식으로 치료술을 배웠던 것이 아니라 정령술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처럼 기본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초보자나 다름이 없었다. "실프" 내가 실프를 소환하자 곧바로 부드러운 바람이 나를 감쌌다. 그리고 나의 명령을 들은 실프는 환자의 팔의 근처로 다가가 천조각을 모두 벗겨버렸다. 칼날과 같은 바람을 일으켜 천조각을 하나하나 잘라낸 것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환자의 팔이 잘려지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나에겐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천조각이 벗겨진 환자의 팔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기이하게 꺾여진 상태였다. 이런 환자를 여럿 보았지만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다. 뼈가 부러졌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고통을 참아내고 일을 하다가 찾아온 것이다. 뼈가 부러진 환자는 정령마법으로 치료하면 잘못 치료될 가능성이 있어 운다인을 소환하였다. 운다인에게 치료를 부탁하면 스스로 뼈나 근육의 손상에 일일이 신경써서 치료해주니 편리하다. "사람살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을 바라보고 환자가 비명을 질렀다. 실프는 작고 빠르게 움직여 희미하게 보였지만 운다인은 중급 정령이고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누구나 쉽게 볼수가 있었다. 갑자기 처녀가 희미한 모습으로 코앞에 나타난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리가! 저리가란 말이야!" 팔이 부러진 환자가 한 팔로 휘젓다가 안되겠는지 상처입은 팔까지도 휘둘렀다. 그러다 처녀모습을 한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이 사라지자 한 숨을 내리쉬었다. 다른 환자들은 처음에 정령의 모습에 놀라서 난리를 피우다가 나중에는 환자를 보고 놀랐다. "저거 부러졌던 팔 아니었어?" "방금전까지 움직이지도 못했던 팔인데." "정령으로 치료한다더니 방금 나타난게 정령인가보네." 다른 환자들이 팔이 부러진 환자를 바라보며 서로들 떠들었다. 자신들도 어딘가 아파서 왔을텐데 고통도 잊고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팔을 다친 환자는 운다인이 사라지자 다행이라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모두들 자신을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를 몰랐던 것이다. "이봐, 자네 팔 부러지지 않았었나?" "뭐?" 팔이 부러진 환자는 다른 환자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팔을 만져보았다. 고통은 없었고 부러진 팔은 예전과 다름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팔을 돌려보고 만져보고 두드려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부러졌던 팔인지 의심스러운 기분이었다. "멀쩡해졌네. 치료됐다. 치료됐어. 우와!" 팔이 부러진 환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했다. 가족의 생계가 달린 팔이 당장 일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치료되었으니 좋아할만 했다. 주위에 치료를 바라본 환자들도 축하해 주어서 기쁨을 함께했다. 자신들도 모두 치료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팔이 부러진 환자의 치료모습을 바라본 사람들은 고통도 잊은채 내게서 치료받기를 기다렸다. 의외로 치료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 환자야 정령이 무서워서 난리를 피웠지만 한 번 봤던 사람들은 그것이 나타나야 치료된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지도 않았다. 치료사들은 대게 직원을 고용할 때 치료술을 배우는 수련생을 채용한다. 치료술을 가르치는 대신 약간의 고용비만 지급하는 것이다. 이런 체제는 어디든 똑같이 적용되어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가 필수이다. 하지만 우리집에서 일하는 직원은 치료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식으로 말하자만 나는 정령사이지 치료사가 아니어서 가르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치료된 환자에게 치료비를 받고 곧바로 쫓아내 버렸다. 예전에는 감격스러워하는 환자의 인사를 모두 받았지만 매일 그렇게 생활하니 여러모로 불편했다. 모든 환자가 빠져나가자 나는 바람의 중급정령 실라페로 피냄새와 악취를 없애고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으로 깨끗히 청소했다. "길버트 여자아이 한 명만 구해주세요." "여자아이요? 어떤 일을 시키려고 하시는지요?" 길버트가 나의 말을 듣고 말했다. 사실 직원이 많아 일하기가 편해서 길버트로서도 고용주인 내게 미안한 감정이 앞서고 있었다. 일은 적게하고 돈을 많이 받고있으니 직원들 모두가 맡은일에 적극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직원을 구하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아이면 됩니다. 할머니가 요리하거나 방청소를 할 때 힘들어 하셔서 그렇습니다. 되도록이면 말을 듣지못하는 아이면 더욱 좋습니다." "귀머거리 말씀인가요?" "네. 그런 아이가 필요하빈다. 만약 그런 아이를 찾기된다면 귀머거리를 나중에 치료해 줄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세요." 길버트는 나의 말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내가 귀머거리 아이를 구하려는 이유는 사비나와의 대화를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비나를 나의 할머니로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옆에서 대화를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비나와 대화를 나눌 때 항상 실프로 소리를 차단하고 있다. 물론 외부의 소리는 전달되고 내부의 소리는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 차단을 말하는 것이다. 길버트에게 귀머거리 아이를 구해달라고 부탁하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의외로 집이 넓지가 않아서 생활하는데 불편하지만 사비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사비나는 한 시간만에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마주하고 치료받은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카인 어떤 환자가 있었어요?" "어제와 비슷해. 팔이 부러진 사람, 불에 그을려 화상을 입은 사람, 싸우다 온몸에 멍이든 사람, 화살에 찔린 사람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까지 매일 똑같아." "특별한 사람은 없었나요?" 사비나는 내게 평소와 다른 무엇인가 듣기를 원했다. 이제는 사비나가 혼자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라 대화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정령의 도움이 없다면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요리를 하거나 방청소를 하려는 사비나가 안쓰럽다. "아, 맞아. 눈이 보이지않는 장님도 찾아왔었어. 일년이 넘도록 장님으로 생활하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더라구." "그 장님을 치료했나요?" "당장 치료해서 눈이 보이면 또다른 충격으로 문제가 생길수도 있어. 그래서 정령마법으로 서서히 치료되도록 해줬어. 아마도 내일이면 빛을 느낄수 있을거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빛을 많이 느끼게 되어서 결국은 한달이 지나면 앞을 볼수 있을거야." 나의 말을 들으며 사비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요즘들어 작은 일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깊은 생각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음을 스스로 느끼고 준비하는 것이리라. 나도 한때는 사비나처럼 죽음을 느끼고 시간을 보냈었다. "장님으로 살다가 앞을 보게되면 얼마나 기뻐할까요? 그 모습을 상상해봤어요. 저도 그와같은 경우를 겪었으니까요. 죽었다고 생각한 카인이 다시 살아왔을 때 제 기분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사비나 울지마." 사비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가에는 많은 주름이 밉살스럽게 많았지만 흉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받친 여인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다가오는데도 행복해하는 사비나의 모습에 왠지 씁쓸하게 생각된다. "아참, 오늘 길버트에게 부탁해서 사비나를 시중들어줄 아이를 찾아보라고 했어. 더이상 사비나가 요리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 "꼭 그래야 했어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우리사이를 어떻게 설명할 거에요?" "걱정하지마. 귀머거리 아이로 구해달라고 말했으니까." 사비나는 나의 말을 듣고서 좋은 생각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로서도 점점 약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있으니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서 모든 일을 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데 또다시 길버트는 환자가 많이 찾아온 사실을 알려주었고 치료사의 일을 하기 위해서 방을 나섰다. 치료사는 대개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이며 환자들을 치료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환자가 찾아오면 죽지않을 상처라면 무조건 기다리게 하고서 일정한 수가 채워지면 길버트가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환자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면 환자의 수가 적어도 치료하게 된다. 오후 늦어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두 달전에 팔이 거의 끊어진 환자를 치료해 주었는데 그가 고마움으로 자신의 전재산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필립이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이그노 용병길드에서 C급 용병으로 생활한다고 말했다. 막무가내로 떠넘기는 돈을 받자 그는 기쁜듯 미소지으며 돌아갔다. 나는 필립과 같은 사람을 볼 때면 치료사로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간혹 생긴다. 많은 환자를 치료하다보니 정령사로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령이 소환되기 위해선 정령사의 마나가 필요하다. 마나란 자연에서 생기는 힘을 말하며 모든 종족이 다른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자가 기록한 책을 살펴보면 자연의 힘에는 오러와 마나 그리고 생명력이 있다고 정의한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사용하는 자연의 힘은 오러이고, 오러를 사용하는 마법사나 기사가 실력이 높아져 오러가 정제되면 그것을 마나라고 부른다. 나는 생명력을 마나처럼 사용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선 엄청난 마나가 필요로하는데 아주 적은 생명력으로 대치할 수가 있다. 현자의 기록대로라면 내가 갖고있는 800년의 생명력은 마나로 환산하면 상상하지도 못할 능력이란 결론이다. 현세에서는 아직까지 9서클의 마법사나 그랜드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마나를 생명력으로 정제하지 못했다. 가끔 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 걱정되기도 한다. ------ 길버트는 카인의 지시를 듣고서 직원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길버트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카인에게 고용되어 일하면서 많은 고용비를 받았는데도 별로 힘든일이 없었다. 그저 찾아오는 환자들이 난동부리지 않도록 하는일이 전부인 것이다. "귀머거리 아이가 흔하진 않잖아. 어디서 구하지?" "그런 아이가 있다면 주위에 소문이 났을 거라구. 더구나 카인님이 나중에 치료까지 해준다고 했으니까 찾기만 하면 모든게 해결될거야." 길버트가 함께 일하는 에드윈의 말에 대답했다. 카인에게 고용된 직원들은 다들 길버트의 친구들이었다. 처음 카인에게 길버트가 고용되었고 환자가 많아져 직원이 더 필요해서 길버트가 친구들을 추천한 것이다. 에드윈도 길버트를 친구로 둔 덕택으로 지금같은 좋은 일자리를 얻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길버트는 친구들과 함께 귀머거리 여자아이를 찾기위해 말린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의외로 카인에게 필요한 아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귀머거리를 몇명 찾기도 했지만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카인의 할머니를 시중들수 없는 아이가 대부분이었다. 길버트와 친구들은 일주일이 지나도 결국 카인이 원하는 아이를 찾지 못하여 실망스런 마음이었다. "길버트 너무 실망하지마.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그건 그렇지만 나는 카인님에게 도움을 받은게 많아서 보답하고 싶었거든. 고용비를 많이주는 것은 둘째치고 우리집까지 찾아와서 아픈 어머니를 치료해 주셨잖아." 길버트의 말에 모두다 어깨가 쳐졌다. 길버트의 친구들은 친구덕에 지금의 일자리를 얻어 풍족한 생활을 하다보니 그가 힘이없자 자신들까지도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웃음을 달고사는 에드윈까지 어깨가 늘어졌다. "내가 좋은데 구경시켜 줄테니까 다들 따라와." 에드윈은 갑자기 쳐진 어깨를 으쓱하며 친구들의 기분을 풀어준다며 어디론가 앞장섰다. 에드윈은 밝은 성격 때문에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어서 모두다 그를 좋아한다. 모두들 지금의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에드윈을 아무말없이 따라갔다. 에드윈이 친구들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암시장 근처였다. 암시장은 제국에서 금지된 물품을 판매하기 위해 상인들이 모인 장소를 뜻한다. 위험한 만큼 차익이 많아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리는 상인이라면 모두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기 마련이다. "에드윈 이곳에는 왜 온거야?" "우리를 죽이려고 그래? 여기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간 사람이 몇명인데." 에드윈은 친구들이 말하는 소리에 꿈쩍도 하지않고 길을 재촉했다. 친구들도 여기까지 와서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조용히 에드윈을 따랐다. 설마 친구를 위험한 곳에 데려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어이 에드윈 아니야! 또 구경온거냐?" "오늘은 친구들하고 왔으니까 자리좀 부탁할께." "걱정하지마. 저번에 신세진 것도 있으니 말이야." 에드윈은 허름한 건물앞에 서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에드윈은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며 조심스럽게 친구들을 그 안으로 불러들였다. 모두들 무엇을 구경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들어가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부터 한마디도 하지마.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절대 아는척하면 안돼. 알았지?"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만해." 에드윈은 친구들에게 여러번 주의를 시키고 건물 안으로 데리고갔다. 건물내부로 들어오자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문도 여러개라 잘못하면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했다. 암시장 전체가 미로이긴 하지만 이곳은 지하까지 내려가니 그만큼 무엇이 나타날지 모두들 궁금증이 극에 다다랐다. 막다른 곳에 도착한 내부는 의외로 무척이나 넓은 극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기다란 의자가 빼곡히 있었고 제일 아래에는 높은 단상이 있었다. 에드윈이 안내한 곳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는 곳으로 단상과 무척이나 먼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제일 앞자리에 있는 것과 비교되는 상황이다. "너네들 재수가 무척좋다. 지금부터 보여주는게 제일 재밌거든." 에드윈의 작은 소리로 친구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단상에 서있는 사람의 말에따라 의자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후 단상위에 어떤 사람이 올라와서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하인으로 쓰여질 상품을 공개하겠습니다." 단상에 서있는 사람의 말이 끝나자 손과 발에 쇠사슬이 메어진 소녀가 뒤에서 나타나 단상위로 걸어올라왔다. 에드윈이 데려온 곳은 노예를 판매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노예판매는 불법은 아니지만 황궁에 모두 신고하게 되어있다. 암시장에서는 노예를 황궁에 신고하지 않고 거래하여 많은 차익을 남기는 것이다. 엄연히 따지면 반만 불법이라서 걸린다고 해도 큰 범죄는 아니다. "허억! 대단하다." "에드윈 고맙다. 이런 곳으로 데려와주다니." "정말 멋지다." 모두들 에드윈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단상위의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소녀는 온몸에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누드차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말린에서는 정기적으로 크게 노예시장을 정기적으로 열어서 거래하도록 하지만 나라에서 실시하는 것이라 세금을 내야했다. 노예시장이 열리면 말린의 모든 시민들이 모여서 그것을 구경하여 축제나 다름없는 기간이 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누드차림의 노예소녀는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대부분 등장하는 즉시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경매를 통해서 곧바로 구입하기 때문이다. 좀더 노예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상인들이 늦게 구입하길 원하지만 거래는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예들의 상태가 좋지않아서 흥미롭기 보다는 더러운 기분이었다. "지금 이 소녀는 아직까지 처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지만 요리와 청소를 잘합니다. 좀더 자라면 성노로 써도 괜찮습니다. 아니 지금당장 성노로 쓰여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단상위에서 지금 소개했던 노예는 앞에 앉아있는 상인들이 아무도 경매에 참가하지 않았다. 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장님과 귀머거리에 대한 좋지않은 속담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미신이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외로 그것을 피하려는 사람은 많다. "거참 재수없게 왜 귀머거리를 데려오고 그러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귀머거리를 우리에게 팔려고 그러면 쓰나." 노예를 구입하던 상인들이 앞다투어 단상위에 서있는 사람에게 짜증나는 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단상에 소개된 소녀는 뒤로 물러났고 다른 노예는 올라오지 않았다. 노예의 경매가 끝난 것이다. 노예를 소개하던 사람도 미신 때문에 귀머거리 노예소녀를 제일 마지막에 올렸으리라. "바로 저거야!" 노예소녀의 감상이 끝나자 모두들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길버트가 작게 말했다. "길버트 무슨소리야?" "우리가 며칠전부터 계속 찾아다닌 귀머거리 여자아이잖아." "하지만 노예잖아. 노예가 얼마나 비싼데 그래." 길버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노예란 것이 문제였다. 노예가 아무리 값싸다고 해도 평민들이 데리고 살기엔 부담이 많았다. 주위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볼 것이고, 노예를 부리기 위한 돈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노예라도 일을 시키려면 먹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족이 아닌 평민이 노예를 데리고 다니면 온갖 위험을 피해야 한다. 일반 상식으로 노예가 있으면 일을 시켜서 그만큼 돈을 벌어들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노예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노예를 구입한 돈을 그 노예가 벌어들이려면 평생 일해도 어렵기 때문이다. "에드윈 당장 카인님에게 같이 찾아가보자." "어, 알았어. 천천히 가자." 에드윈은 길버트의 손에 이끌려 갑자기 밖으로 끌려나왔다. 다른 친구들은 흥분한 길버트의 모습에 황당했지만 친구의 기쁜 표정을 보고는 위안으로 삼았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길버트와 에드윈은 카인을 찾아와 자신들이 목격한 노예소녀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에드윈이 그곳에 알고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요?" "네, 카인님" "길버트 당신에게 제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전재산을 드릴테니 에드윈과 함께가서 그 소녀를 구입해 오세요. 돈이 모자르면 그냥 오시구요." 카인은 길버트와 에드윈에게 말하고 곧바로 방에 두었던 전재산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돈을 받아든 길버트와 에드윈은 순간적으로 이것을 갖고 도망가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누구나 큰돈을 받게되면 헛된 망상을 하게된다. 길버트와 에드윈은 상상을 상상으로 그쳤다. 길버트와 에드윈은 암시장에서 활동하는 노예상인의 위험을 알기 때문에 친구들을 모두 모아서 찾아갔다. 노예상인으로서도 그동안 귀머거리 소녀를 미신 때문에 곁에 둘수도 없고 판매하자니 구입하는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거래는 쉽게 이루어졌지만 길버트와 에드윈은 상인과 거래할 수 있는 주변머리가 없어서 결국 카인이 준 전재산을 주고서야 소녀를 건네받았다. 순진한 그들이 노예상인과 거래를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만약 노예가 귀머거리 소녀가 아니었다면 노예상인은 그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지옥으로 보내고 돈만 차지했을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1 회] 6. 사비나 사비나를 도와줄 하녀를 구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나와 사비나가 결혼한 사이라는 것을 숨길수 있도록 듣는 것에 장애를 갖추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버트의 도움으로 노예소녀를 구입하는 것으로 쉽게 해결되었다. 진작 노예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한심스러운 생각이었다. 노예라면 굳이 귀머거리가 아니더라도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하니까 구차하게 나와 사비나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열 다섯살의 귀머거리 노예소녀를 구입하는데 그동안 치료사의 일을 하면서 벌어들인 대부분의 재산이 소모되었다. "카인" 사비나가 노예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는 나를 불렀다. "세렌은 말을 못하나봐요."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말도 못하기 마련이야." 사비나는 곁에 조용히 앉아있는 노예소녀를 안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길버트가 건네준 노예증서에는 노예에 대한 소개가 들어 있었는데 이름과 귀머거리에 대한 사항 외에는 기록된 것이 없었다. 노예증서에 자세한 소개가 들어있는 경우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값비싼 노예와 위험한 노예 뿐이었다. "너무 불쌍해요." "사비나가 잘 대해주면 되잖아. 그리고 길버트가 말하는데 노예들은 노예상인에게 매일같이 학대를 받으니까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던데." 사비나는 나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비나도 노예들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는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와 결혼하기 직전에는 말린의 빈곤층에서 자랐기 때문에 노예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그들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노예소녀인 세렌은 사비나에게 손을 내맡긴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사실 귀머거리들은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나 입모양을 통해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노예신분의 세렌이 감히 주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세렌 내말을 듣거라." 나는 조용히 앉아있는 세렌의 양쪽 어깨를 잡고서 나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하고서 말했다. 최상급 정령을 통해서 생각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더욱 놀랄까봐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손짓도 함께 하였다. "앞으로 저분을 도와드려야한다. 내말을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주겠니?" 끄덕.끄덕. 세렌은 고개를 두 번 끄덕거리고 나를 바라본 것이 무슨 죄라도 된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세렌에게 내가 정령사인 것도 알려주었다.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말했지만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노예인 세렌이 정령사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저 내가 소환한 정령이 사비나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놀라지 말라는 의미해서 밝힌 것이다. 세렌이 나의 말을 이해하자 사비나와의 관계는 쉽게 풀어졌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고생할 줄 알았는데 세렌이 사비나의 곁에서 눈치만으로 사비나의 생각을 쉽게 알아챈다는 것이다. 사실 나와 사비나가 함께 지내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직접적인 도움을 줄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인을 구하면 사비나와 마음놓고 대화를 할수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집안에서 했던 청소나 요리의 절반은 세렌이 하였다. 물론 요리의 경우 사비나만큼 잘하지는 못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세렌을 구입하는데 많은 돈이 들었지만 그만한 가치를 하고 있었다. 사비나를 위해서라면 돈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사비나와 세렌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도 개인적인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 그동안은 치료사의 일을 끝내면 무조건 사비나와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사비나는 세렌과 함께 지내면서 그녀를 자신의 딸처럼 아끼고 보살펴주었다. 물론 육체적인 보살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말한다. 나는 여유가 생기자 60년전 할아버지와 말린에 도착하여 함께 돌아봤던 곳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예전과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면서 내가 얼마만큼의 시간을 잃어버렸는지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말린의 발전이 상당히 빠른 것인지 아니면 60년의 시간이 많았던 것인지 변한 것은 무척이나 많았다. 예전 방문했던 상점들은 아직까지 유지하는 곳이 거의 없었고 그저 큰 건물들만이 그대로였다. "카인 요즘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에요?" 사비나가 밖에서 돌아온 내게 말했다. "예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방문했던 장소를 찾아다니고 있어. 그런데 예전과 변한 것이 너무나 많아. 내가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야." "무려 60년이나 지났잖아요. 저도 카인과 마찬가지에요. 빈곤층 마을이 없어진 것이 좋긴 하지만 왠지 지난 세월이 너무 그리워요." 사비나가 나의 말을 듣고서 함께 우울한 기분에 젖었다. 곁에 앉아있던 세렌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아마도 세렌은 나와 사비나가 어떤 관계인지 헤깔릴 것이다. 노예가 주인에게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당장 무슨 관계인지 물었을 것이다. "세렌하고는 어떻게 지내?" "마음에 들어요. 말하지 않아도 제 생각을 척척 알아맞추어 행동하거든요." "아마도 어릴 때부터 노예에 대한 교육을 받아서 그럴거야. 더욱이 세렌은 장애를 갖고 있으니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는 더욱 뛰어난 것일수도 있고 말이야." 사비나가 나의 말을 듣고서 생각에 잠겼다. 사비나는 나보다 세렌을 더욱 위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불쌍해서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노예들은 자신이 불쌍하다는 것을 모른다. 더욱이 세렌처럼 어릴 때부터 노예교육을 받으면 그 정도가 심하다. 오직 노예의 신분이 아닌 사람이 피치못할 사정이나 강제적으로 노예가 된 경우라야 자신이 불쌍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카인 세렌의 귀를 치료해주면 안될까요?" "좀더 시간을 주어야돼. 세렌 자신도 너무 많이 변하게되면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수도 있거든." "네, 카인" 사비나가 나의 말에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비나가 세렌과 친해지면서 가끔 세렌의 귀를 치료해달라고 조르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해줄수도 있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세렌에게도 좋지 못하다고 길버트가 노예상인에게 들었던 충고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나와 사비나의 대화를 세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이다. 세렌과 함께 지낸지 한 달이 지났을 때 나의 치료술에 대한 소문은 좀더 널리 퍼졌다. 물론 말린에는 많은 신관들이 있기 때문에 말린의 북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특히 용병들에게는 거의 신관에 버금가는 치료사로 알려진 것이다. 용병의 신분으로 신관에게 치료받기란 어려우니 그들을 배제하고는 최고의 치료사나 다름없다. 나의 치료술에 대한 소문 때문에 다른 치료사에게 여러가지 압력을 받았다. 같은 업종에 속하는 사람들은 길드를 창설하여 더 많은 이득을 얻기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치료사의 경우는 아직까지 길드가 없었는데 나의 치료술이 너무 유명해지자 다른 치료사들이 피해를 보고 서로 힘을모아 길드를 창설한 것이다. 나의 집 근처에 다른 치료사의 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본의 아니게 다른 뛰어난 치료사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적으로 내집 주위에 들어선 치료사집을 몰아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로서도 나에게 대항하기 위해 창설된 치료사 길드에 도움을 요청하여 주위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치료사의 집을 모두 쫓아냈다. 그리고 그곳에는 치료사 길드에 가입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치료사들이 차지하였다. 세 달 가량이 지나자 내집 주위에는 뛰어난 치료사의 집이 많아지게 되어 용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치료사들이 주위에 많아지자 처음에는 일거리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해도 주위에 치료사의 집이 많으니 구태여 우리집까지 찾아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주위에 들어선 치료사들은 치료사 길드에서 나름대로 실력을 보장하는 치료사니 말이다. 하지만 치료사들이 모이자 다른 문제점이 생겨났다. 치료사가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치료못한 환자를 다른 치료사가 치료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실력이 낮다는 것을 다른 치료사들이 쉽게 알아채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치료사집들이 따로 떨어져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좁은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니 소문이 퍼지게 되어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치료사들끼리 보이지 않는 서열에 생겨났다. 나는 치료사 일거리가 줄어들어도 하등 문제가 없었다. 그저 내가 운영하는 치료사집을 운영할 수 있는 약간의 자금만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정령술로 치료하니 다른 치료사들처럼 값비싼 약초값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내집 근처에 치료사의 집이 밀집하다보니 찾아오는 환자가 줄어들었지만 다른 치료사들이 치료가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나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치료사 길드가 나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골탕먹이려고 환자를 보냈던 것이지만 보내는 환자를 모두 치료해서 돌려보내니 그들로서도 나의 치료술이 뛰어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관계가 지속되면서 의례적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는 대게 나에게 보내지는 체제가 되어버렸다. "카인님 환자입니다." 길버트가 숨찬 목소리로 방에있는 내게 소리쳤다. 사비나는 세렌과 대화를 나누다가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를 바라보았다. "카인 어서 나가봐요."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기다리지 않아도 돼." 나는 사비나에게 말하며 방을 나섰다. 가끔 환자를 오래 치료하게 되면 사비나는 늦게까지 기다린다. 식사 시간이 되면 함께 식사를 하기위해 기다리고 늦은 밤이면 함께 자기위해 기다린다. 그나마 지금은 세렌이라도 함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길버트 어떤 환자인가요?" "어디가 아파서 찾아온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걸으며 길버트에게 여러가지 물었다. 길버트는 환자를 겉으로 보아서는 어디가 아픈지 알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사비나와 머무는 집은 치료를 하는 장소와 약간 떨어진 곳이다. 환자에게 나는 피냄새나 비명소리를 사비나가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집이 넓지 않았다면 여러가지로 불편했을 것이다. "당장 치료사를 데려오지 못하겠느냐!"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내가 환자를 치료하는 장소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나의 직원이자 길버트의 친구인 에드윈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침착하게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항상 일어나기 때문에 놀랄 일도 아니다. 단지 오늘은 에드윈에게 검이 향해져있는 것을 빼자면 말이다. "제가 치료사입니다. 제 직원에게서 검을 치워주시겠습니까?" "당장 이분을 치료해라. 다른 치료사놈들이 네놈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더군. 네놈이 치료하지 못한다면 네놈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를 향해서 외치는 사람 이외에도 환자 주위에는 세 명이 더 있었다. 가끔 누군가에게 쫓기다 다친 자들이 찾아와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경우 치료를 해주긴 하지만 나중에 걸릴경우 말린의 병사들에게 치도곤을 당하게 된다. 나는 혹시 이들이 범죄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무슨일로 다친거죠?" "네놈은 알필요 없다. 독에 당한 것 같은데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내게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에드윈에게 향한 검을 내게로 방향을 바꾸었다. 또한 같은 일행인 세 명도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검을 쥐고 있었다. 나는 검이 무서운 것보다 이들이 범죄자일까 걱정이 되었다. "검 때문에 신경쓰이니까 저리좀 치워주시죠." 나는 환자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서 정령의 힘을 빌어서 몸을 살폈다. 이제는 치료술을 펼칠 때 겉으로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육체에 소환하여 다른 사람에게 정령이 보이지 않게하고 치료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정령사를 신기하듯 바라보는 모습을 피할수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어깨에 토크가 박혀 있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아픈 것 같습니다.' 엘레스트라가 내게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생각으로 알려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환자의 손을 잡고서 생각에 잠긴 치료사의 모습이다. '토크가 뭔데?' '토크는 극독을 품은 가시나무로 깊은 숲속에서 가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크와 같이 피부가 두꺼운 몬스터가 아니면 가시에 찔리는 것만으로 죽을수 있습니다.' 나는 엘레스트라가 마음 속으로 전해주는 말을 듣고서 눈을 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검을 들고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혹시 깊은 숲속에 다녀왔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환자는 울창한 숲에서만 서식하는 토크라는 극독을 품은 가시나무에 찔려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말린 주위에는 토크가 자라는 숲은 없는걸로 알고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죠?" 나는 환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기위해 토크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사실 치료만 해주어도 상관없지만 나중에 혹시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름이나 다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토크에 대해서 밝혀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극독이라... 그렇다면 어쌔신 놈들이로군. 치료를 할 수 있겠지?" "이정도야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환자의 손을 잡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엘레스트라로 하여금 내 육체를 통해서 환자의 몸을 괴롭히는 토크의 독을 모두 없애버렸다. "치료가 끝났습니다." "그냥 손만 잡고 있었는데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 정말이지 이번에 환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무척이나 쉽게 흥분한다. 이제는 나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져서 굳이 정령으로 치료했다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데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나는 정령술사요. 정령으로 치료하는데 뭐가 문제인거요? 당신들이 정령이라도 볼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거요? 그리고 저기 환자의 얼굴만 본다면 독이 치료된 것을 어린아이도 알수 있을거요." 나의 말을 듣고서 네 사람은 환자를 살피고서 심히 안도의 한 숨을 내리쉬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하였다. 환자를 위해 정말이지 많은 고생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아니 환자가 나한테까지 왔다는 것은 다른 치료사에게 여러차례 보였을 경우임에 틀림없으니 상당히 고생한 것이리라. "그럼 치료비를 내고 돌아가시요."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자리를 떠나려고 하였다. 뒤에서 고맙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별로 듣고싶지가 않았다. 왠지 치료를 한 것이 문제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토크가 깊은 숲속에서 자생하는 것이라면 이 주위에 숲이 없으니 누군가가 그 환자를 중독시킨 것이다. 그저 방금 치료한 환자로 인해서 곤란한 일이 없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치료비는 주로 길버트가 관리한다. 내가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굳이 돈에 대해서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나와 사비나가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낼 정도의 돈이면 충분하다. 지금은 환자가 더욱 적어진만큼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를 치료하기 때문에 들어오는 수입은 예전과 비슷하다. 수입은 비슷하면서 시간은 더욱 많아진 것이다. 방으로 돌아오자 사비나는 세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사비나가 세렌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세렌은 지겹지도 않은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모두 듣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듣는 것이 아니라 사비나의 입을 읽고 있었다. 사비나도 이제는 세렌의 표정이나 동작을 보고서 이해했는지 아니면 이해하지 못했는지 정도는 약간이나마 알아맞추기도 한다. 사비나와 세렌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이제는 세렌의 귀를 치료해 주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와 사비나 관계도 모두 밝혀리라. 세렌은 나의 노예이니까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물론 세렌이 이해하지 못한다해도 노예의 주인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굳이 이해시킬 필요도 없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세렌을 싫어한다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비나가 아닌 존재에게 굳이 나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 뿐이다. "사비나는 세렌이 좋은가보네." "그냥 편해요. 그리고 세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사비나가 세렌에게 말하다가 나의 말을 듣고서 대답했다. 사비나는 모르고 있지만 세렌은 사비나와 함께 있을 때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표정은 그렇지가 않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정령사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기분을 어느정도 알수 있다. 물론 독심술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말이다. "사비나가 허락한다면 내일 세렌의 귀를 치료할까 생각중이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엘레스트라의 능력을 살펴볼 때 치료될 확률이 높아." 나의 치료술은 엄밀히 말하자면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의 힘이다. 가끔은 나의 능력이라 착각하지만 말이다. 엘레스트라를 소환하는 능력 또한 엔트에게서 전해받은 생명력 때문이니 참으로 나란 인간은 복을 받은 존재이다. "카인 정말인가요?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세렌에게 내일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말해줘." 사비나는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요즘 사비나는 세렌에게 말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듣지 못하는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이 어떠한 소리를 내는지 알수 없기 때문에 주위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야하기 때문이다. 듣지 못하는 아이의 곁에서 수년 동안 그것을 가르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귀머거리들은 말을 못하는 것이다. "세렌 너도 이제는 들을수 있을거야. 내말 알아듣니?" 사비나는 세렌을 끌어안고 말하고 있었다. 세렌이 그녀의 입모양을 보지 못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모른채로 말이다. 세렌은 사비나가 흥분에서 벗어나 끌어안은 자신을 놓아주자 그제서야 사비나의 입모양을 보고서 알아들었다. 하지만 세렌의 반응은 사비나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듣지 않아도 살아왔는데 소리를 듣게 되어도 그것이 왜 좋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세렌 오늘은 일찍자자. 아니 나와 함께자자." "사비나!" 나는 사비나가 세렌과 함께 잔다는 말에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렌은 따로 옆방에서 항상 잠을 잤다. 하지만 사비나는 오늘만큼은 그럴수 없다는 입장을 내게 설명했다. 사실 내가 사비나와 함께 잔다고해서 60년전처럼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와 함께 자는 것만으로 정신적 안정을 찾는다. "다같이 자요. 내일은 세렌이 소리를 듣게되는 날이잖아요." 결국 사비나의 말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나는 무엇이든 해줄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사비나는 세렌을 꼭 끌어안고 잠들었고 나는 그 옆에 약간 떨어져서 잠이 들었다. 사실 사비나는 기뻐서 함께 잠든 것이지만 노예인 세렌으로서는 무척이나 불편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사비나의 기대에 부흥해 세렌의 귀를 엘레스트라의 힘을 빌어 치료해주었다. 귀를 치료하고 곧바로 소리를 들을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아무리 물의 최상급 정령이 치료한다 할지라도 만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세렌이 치료를 받고서도 곧바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세렌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사비나는 세렌이 소리를 듣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세렌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나중에는 귀를 자꾸 만지는 것이다. 사비나는 세렌이 걱정되어 내게 그 원인을 물었고 나는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그 이유를 알아냈다. 청력이 돌아오면서 세렌이 적응하지 못해 당황한 것이다. 사비나는 세렌이 소리를 듣는 것을 겁내지 않고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또한 말하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나도 가끔씩 세렌이 말하는 것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순전히 사비나를 위해서였지 세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비나와 세렌이 행복한 모습으로 지내기 때문에 나는 열흘 전에 있었던 토크에게 중독된 환자에 대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디가 잘못된거죠?" "잠시 기다려주세요. 좀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오늘도 다른 곳에서 치료받지 못해 보내진 환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제는 찾아오는 환자 대부분이 치료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경우에 속한다. '엘레스트라 아직도 원인을 찾지 못했어?' '죄송합니다. 주인님' 엘레스트라가 환자를 살피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다. 가끔씩 엘레스트라의 힘을 이용해도 치료하지 못하는 환자가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럴경우 치료는 못할지라도 엘레스트라가 병의 원인을 알아내어 내가 그 이유를 환자에게 알려준다. '주인님 알아냈습니다. 이 사람은 불순한 마나가 몸에 스며들어서 잘못된 것입니다.' '치료할 수는 있는거야?' '저는 주인님의 생명력을 바탕으로 소환되는 정령입니다. 정령은 소환자가 전해주는 생명력이나 마나만 제어할 수 있을 뿐이지 다른 마나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엘레스트라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가끔씩 이런 경우를 당할 때마다 정령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령이 있음으로 편하게 생활하다보니 이제는 절제하지 않게된다. '그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해?' '실력이 좋은 마법사라면 치료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 생명력을 직접 이용해서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엘레스트라의 대답을 듣고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환자에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라도 알려주지 못한다면 치료사로서 상당히 치욕이다. 물론 엘레스트라가 내가 직접 생명력을 이용해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엔트가 전해준 엄청난 생명력을 정령소환 이외에는 직접적으로 사용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특별한 능력의 힘에 나쁜 영향을 받은적이 있나요? 예를들어 마법사, 신관, 정령사 그리고 술사들과 같은 사람에게서요." 환자는 나의 말을 듣더니 곰곰히 생각하다가 무엇인가 생각난듯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쳤다.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그 때의 상황을 말로 설명하자면 날을 새도 모자를 겁니다. 제가 작년에 일리시아와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일리시안 제국의 마법사가 날린 엄청난 마법에 맞았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도 살아났던 제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있는데 얼마전부터 갑자기 이유없이 몸상태가 나빠지더니 지금처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반병신이 된 것입니다." 환자는 자신이 참가했던 전쟁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운듯 말했다. 카르시온 제국은 전쟁이 끊이질 않다보니 전투에 참여한 남자라면 어느정도 명예를 갖게된다. 그런 이유로 전쟁에 참여한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전과(戰果)를 부풀려 말하기 마련이다. 이 환자도 마법에 맞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사람이 마법에 맞으면 바로 즉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크게 빗맞은 것을 부풀려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군요. 자세한 것은 알수 없었지만 몸이 나빠진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언제인지 몰라도 마나가 당신의 육체에 스며들었던 것이 원인입니다. 마나의 불균형이 육체에 점점 영향을 주다가 얼마전에야 그것이 심해진 것입니다." "치료할 수 있나요?" "마나를 다루는 사람을 찾아가시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정령사이지만 마나를 다루는 실력이 높지 않아서 치료할 수 없습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 신관, 정령사, 술사를 찾아가 치료를 부탁하세요. 아참, 기사중에서도 마나를 다루는 사람도 있으니 참고하시구요." 환자는 나의 말을 듣고서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그동안 병명을 알지못해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인 것이다. 치료비가 상상할 수 없을만치 많이 들지라도 병명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차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막연히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환자가 전쟁에서 정말로 마법사에게 마법을 맞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길버트 오늘은 이만 정리하죠." "알겠습니다." 환자가 돌아가자 직원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였다. 내가 약초를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치료사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몇가지 있었다. 환자가 눕기위한 침대와 상처주위를 닦아주기 위한 천과 물도 필요하다. 직원들과 치료를 위한 도구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무기를 들고있는 병사들이 문을 열어제치고 쳐들어왔다. "모두 움직이지마라!" 문으로 들어온 병사들은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둘러쌌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사비나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고 일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무슨 일인지 알수 없었기에 어리둥절하였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두 명의 병사가 사비나를 양쪽에서 잡고서 내가 있는 방향으로 끌고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집에 있는 사람을 모두 한 곳으로 모이게 한 것이다. 나는 노환으로 허약한 사비나가 걱정되었다. "아악" "사비나 괜찮아?" 병사들이 사비나를 바닥에 팽개치자 땅에 부딪치지 않도록 바람의 정령을 병사들 모르게 소환하여 도와주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사비나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카인 무슨일이지요?" "나도 모르겠어." 나는 사비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무슨일인지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알수가 없었다. 그동안 병사들이 찾아올만한 행동을 한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 카인이라는 치료사가 누구냐?" 병사들이 나와 직원들 그리고 사비나까지 한군데 모두 모이도록 하자 밖에서 병사들의 지휘자라 짐작되는 사람이 찾아와 소리쳤다. 병사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한 복장이었다. 아마도 어떤 귀족의 사병이 틀림 없었다. 제국의 병사는 복장이 통일되는 반면에 귀족들의 사병은 각각 가문의 특색에 따라서 복장을 갖추기 때문이다. "제가 카인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같은 꼬마가 치료사라니 이곳이 맞는가보군. 나는 파도루 가문의 기사대장 핸리님이시다. 이곳에서 얼마전 독에 중독된 놈을 치료한 적이 있느냐?" "이곳은 치료사의 집입니다. 당연히 독에 중독된 환자는 이틀에 한 번꼴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나는 핸리라는 기사의 말을 듣고서 열흘 전에 찾아왔던 환자가 생각났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환자가 중독된 독이 무척이나 희귀한 것이었고 아무래도 좋지않은 일에 관련될 것 같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열흘 전에 독에 중독된 상태로 찾아온 환자를 말하는 것이다. 다른 치료사의 집에서 이곳에서 그놈들이 머물다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놈들은 어디로 갔느냐?"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독을 치료해 달라기에 치료하고 보냈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당연히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그놈들은 범죄자들이다. 감히 그놈들을 치료해 주다니!" 핸리는 무척이나 흥분하여 분한듯이 검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핸리의 흥분된 모습에 긴장을 하자 몸속에서 정령들이 약간 날뛰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역은 말린의 북쪽 지역이라 용병들이 많아서 글도 모르는 문맹인들이 많다. 그래서 환자가 찾아왔을 때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없어서 핸리에게 알려줄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파도루는 내가 치료한 사람들에 대해 여러가지 질문을 했지만 그들의 생김새를 말해주었을 뿐이었고 그 대답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이 무기를 들이대어 살발한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 사비나가 많이 걱정되었다. 노환으로 몸도 편치않아 움직이는 것도 내가 소환해준 바람의 정령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는데 강제로 끌려나왔으니 말이다. 다행히 세렌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네놈은 치료사 주제에 귀족을 살해한 범인을 취료해준 극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놈을 당장 포박하고 끌고가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그들이 범죄자인줄 몰랐습니다." 나는 파도루의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대답했다. 설마 나를 잡아가려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가끔 범죄를 저지른 용병을 치료해 준적도 있지만 그것으로 병사들에게 끌려간 적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에도 그저 좋지않은 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날줄 알았던 것이다. "네놈이 치료한 놈들은 파도루 가문의 귀족을 살해했다. 네놈이 한패는 아니겠지만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큰 죄목이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각오는 해야할 것이다." "카인" 병사들이 창을 들이밀어 포위한 후에 끈으로 포박을 하기 시작하자 사비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병사들이 막아서자 사비나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사비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수가 없었다. 여기있는 모두들 사비나가 나의 할머니로 알고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렌만이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녀가 그것을 믿는지 알수 없다. "길버트 내가 없는동안 이곳을 부탁해요." "알...알겠습니다. 카...인님." 길버트와 친구들은 내가 잡혀가는 동안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있었다. 나야 한 번 죽음을 경험했던 몸이지만 이들은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더구나 기사라면 귀족이 아닌 평민들을 파리 목숨만큼도 아끼지 않는 자들인 것이다. 병사들 또한 평민이라면 극구 피하는 족속이니 아무리 이들이 용감해도 떨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면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정령을 소환하여 이들을 제압하고 사비나와 이곳을 떠날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나에 대한 것이 알려진다. 그리고 크라이 숲에 있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생길 것이 분명하다. 직접적으로 내가 무슨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시간만 지나면 풀려나리라 생각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2 회] 6. 사비나 말린의 북쪽지역은 용병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생활하는 하층민들이 대부분이다. 하층민의 지역이다보니 수도를 경비하는 경비병들에게도 소외되기 일수이고, 작은 범죄는 대부분 이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간으로 살기에는 좋은 곳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계급적인 편견이 적으며 귀족 또한 없으니 말이다. 용병길드에서는 최근에 치료사들에게 발생한 현상을 무척이나 환영하였다. 그동안 용병의 고혈을 빨아대던 치료사들이 길드를 창설하고 발전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료사들이 하나의 장소에 모이자 어쩔수없이 능력별로 위계질서가 잡히게 되었고, 그것은 치료사끼리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게 되었다. 뛰어난 치료사는 인정을 받았으며 그렇지 않은 치료사는 더이상 치료사로서 생활할 수 없었다. 용병들이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치료비가 상당부분 낮아졌다는 점이다. 예전 같았으면 작은 상처나 큰 상처나 똑같은 치료비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작은 상처에는 낮은 치료비를, 큰 상처에는 높은 치료비를 내야만 하는 공정한 체제가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또한 치료사의 능력에 따라서 치료비가 달라지게 되어서 환자에게 많은 선택권을 주게 되었다. 물론 뛰어난 치료사는 반대로 치료비가 예전보다 높아지게 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낮아졌다. 용병들이 환영하는 치료사들의 변화는 수개월 동안에 체계적으로 변화되어 결국은 안정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카인이라는 정령 치료사는 어느날 들이닥친 파도루 귀족가문의 기사대장이 이끄는 병사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죄목은 귀족을 헤아려던 범죄자를 치료했다는 이유였다. 정말이지 치료사로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만 힘없는 자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치료사 길드에서는 그동안 불치에 가까운 환자를 치료한 카인이라는 정령 치료사가 길드의 위상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었기에 그를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치료사들이 정성으로 카인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는 글을 모아 파도루 귀족가문에 보내기도 했다. 이런 치료사들의 행동은 귀족에게 반하는 행동이라 그들로서도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파도루 가문에서는 하층민들의 의견 따위는 언제나 무시했기 때문에 아무런 힘이 되지를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인이 속한 러쉬 용병길드에서 카인의 석방에 도움을 줄지 알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용병길드에서 용병에게 주는 의뢰중 상당부분이 귀족이 의뢰한 것이라 그들에게 밉보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말린의 북쪽지역에 살고있는 하층민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라 카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러쉬 용병길드의 입장을 비난하지 못했다. 사실 일반 귀족가문이었다면 러쉬 용병길드에서 충분히 도움을 줄수도 있었다. 길드라면 안면이 있는 귀족가문이 많았고 그들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카인을 데려간 파도루 귀족가문은 말린에서 뿐만이 아니라 카르시온 제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권력가문이라 도움을 줄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루바인님" 핸리는 고개를 숙여 파도루 가문의 가주인 루바인을 향해 말했다. 루바인은 고개를 숙인 핸리의 말을 듣고서도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채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어쌔신이 사용한 독이 치료될줄은 몰랐습니다." 루바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핸리는 자신으로서도 어쩔수 없었다는 이유를 말했다. 기사대장인 핸리로서는 파도루 가문에 충성을 맹새했기 때문에 루바인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파도루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있는 가주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내 계획이 잘못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쌔신의 독이 치료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조용히 창밖을 주시하던 루바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 소리에 핸리가 빠르게 대답했다. 겉으로 보기엔 힘없는 노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진 모습이지만 핸리에게는 절대 그렇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수백 수천의 목숨을 냉정한 모습으로 간단히 결정하는 것을 여러차례 지켜본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계획은 아주 간단했지. 그렇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루바인님께서 가족들을 위험에 노출시키자 곧바로 그놈들이 나타났지요. 그동안 파도루 가문을 괴롭히던 자들이 분명했습니다." "그놈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일부러 잡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 어쌔신 길드에 의뢰하여 독에 중독시켜 일행의 일부를 죽여서 추적하기 쉽도록 했는데, 설마 어쌔신들이 사용하는 독이 치료되어 추적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없어질 것은 나조차도 예상 못한 일이었네." 루바인은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것에 대해 생각하고는 한숨을 쉬며 원인을 제공한 정령 치료사를 직접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가문을 카르시온 제국에서 손꼽히는 권력가로 만들기 위해 저지른 사건들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파도루 가문에 적대적 감정을 갖고있는 자들이 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귀족에게 적대적 감정을 갖고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많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파도루 가문은 그 적대적 감정을 갖고있는 대상이 다른 귀족가문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그 수가 많았고 결국 단체라 불릴 정도로 많아졌다. 루바인은 고민끝에 가족을 미끼로 그들의 일부를 유인하여 정체를 파악하고 일망타진 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하였고 미끼가 되었던 가족중 한 명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루바인님 계획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쌔신에 버금가는 전문가들이었고 잡히면 목숨도 스스로 끊는 자들이라 일행을 독에 중독시켜 추적하자는 계획을 세운것이 아닙니까? 단지 치료사의 해독술이 너무 뛰어났다는 것이 문제였을 따름입니다." "의뢰를 수행했던 어쌔신은 뭐라고 말하던가?" 루바인은 핸리의 말을 듣다가 이상한 부분을 생각해내고 물었다. 어쌔신이 사용하는 독이라면 신관도 치료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독이다. 어쌔신은 나름대로 전통이 있고 그들이 사용하는 독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독이 아무리 뛰어난 치료사라 할지라도 쉽게 치료될리가 없는 것이다. 신관도 치료하기 힘든 독을 어찌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문제로 어쌔신 길드에 비상이 걸린 상태입니다. 그들조차도 이런 경우는 처음 당한 것 같습니다. 길드에서는 문제의 치료사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요청은 무시하게. 암살이나 하며 먹고사는 주제에." 루바인은 핸리에게서 어쌔신의 요구를 듣고 어이없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도둑질이나 암살을 하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자들과 관계를 갖은 자체가 혐오스러운데, 말도 안되는 요구까지 하다니 말이다. 귀족으로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만 했지 요구를 받은 적은 없는데, 그것을 어쌔신이란 자들에게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치료사는 어떻게 할까요?" "당분간 죽이지 말고 잡아두게. 좀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 루바인은 당장 치료사의 신병에 대해서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고 애꿋은 가족 한 명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 뒷처리를 하기 위해서 처리할 일이 많았다. 귀족이 죽게되면 간단히 장례만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이유를 황궁에 보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황궁에서는 귀족의 존재를 관리하고 기록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등록된 사람만이 귀족이라 인정되는 것이다. 귀족의 작위는 혈연으로 세습되기 때문에 황궁에서 관리하지 않으면 자칫 혼란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핸리는 가주인 루바인의 방을 빠져나오며 앞으로 할일을 생각했다. 핸리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파도루 가문의 기사대장이 된 것은 권력과 부를 탐해서이다. 황궁에 속한 제국의 기사가 된다면 명예스럽지만 부를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귀족가문의 기사가 된다면 명예스럽지는 못해도 그 둘을 누릴수가 있다. '치료사놈을 이용하면 돈좀 만질수 있겠는데.' 핸리는 카인이란 어린 정령 치료사를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어쌔신 길드에서는 치료사가 어떻게 그 독을 알아냈으며 치료했는지 알고 싶어했다. 또한 치료사란 존재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존재이다. 그것을 잘 이용한다면 한몫 단단히 잡을만한 건수임에 틀림없다. ------ 병사들에게 이끌려 파도루 귀족가문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시선을 받았다. 포박당한채로 끌려가는 존재가 어린 소년이라 나오는 반응들이다. 어린 소년이 얼마나 대단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궁금해서 병사에게 다가와 묻는 사람까지 있었다. 파도루 귀족가의 저택에 도착하자 핸리라는 기사대장은 병사에게 나를 지하감옥에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귀족들이 머무는 저택은 대게 가문의 문장을 표시한 복장을 입고있는 병사가 입구를 지키고 있기에 누구나 알아보기 쉽다. '이곳이 파도루 귀족가문의 저택이었군.' 나는 파도루 귀족가문의 저택을 보며 감탄에 빠졌다. 말린에서 지낸지 반년이 넘었기 때문에 지리에 익숙하다. 예전에 이곳을 지나면서 한 번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결국 이렇게 방문하게 된 것이다. 입구에는 저택을 지키는 병사가 위엄있는 모습으로 지키고 있었고, 그 뒤로는 수십미터나 하늘로 치솟은 건물이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 모습을 축소시킨듯한 모습이었고 전통을 증명하는 모습이다. 신흥귀족을 제외하고 귀족가는 대게 최소한 수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평민들조차도 귀족에게 경외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수명이 100년도 안되는 인간이 수백년은 기본이고 수천년의 전통을 갖는다는 것은 경외심을 갖을만한 사실인 것이다. 핸리가 저택으로 들어가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던 병사들이 각자 어디론가 흩어졌다. 나를 포박하고 있던 네 명의 병사도 저택으로 들어갔지만 핸리가 저택건물로 향하는데 반해서 나는 저택건물의 좌측으로 끌려갔다. "빨리 따라와라!" 나는 병사의 외침을 듣고서 저택을 감상하다 정신을 차렸다. 손목이 묶여 있어서 병사가 포박한 줄을 강제로 당기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끌려가면서 저택의 멋진 모습을 감상하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상당히 넓은 공터가 있었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좌측에는 기사와 병사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하인이거나 노예라 짐작되는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토크에 중독되어 내게 치료받은 사람은 이곳을 어떻게 들어와서 귀족을 죽였던거지? 대단한 사람들이네.' 많은 기사와 병사들을 바라보고 내가 끌려오게 된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기사란 존재가 용병과 비교조차 어려운 무위를 갖고있다고 해도 이곳을 몰래 들어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저택 자체가 성벽에 버금갈 정도로 경비가 철저하고 마법사나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까지 있었을텐데 말이다. 나는 병사들이 훈련받는 좌측으로 지나서 저택의 후방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저택이 얼마나 큰지 걷는데만도 한참이나 걸렸다. 간혹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나 마법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설마 눈치채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정령 치료사란 것을 알고 있겠지만 모두들 최상급 정령사란 것은 모르는 상태이다. 이곳은 카르시온 제국에서 손꼽히는 귀족가문이니 뛰어난 마법사나 기사라면 나의 실력을 알아채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원래 실력이 낮은자는 상위 실력자의 능력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나의 경우는 수련을 통해 높아진 능력이 아니라 엔트가 전해준 800년의 생명력 때문인지라 들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역사 이래로 소드마스터나 9서클 마법사와 같이 무엇인가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간 존재가 하나도 없다. 영웅이 되거나 악당이 되어 기록될 뿐이다. 나는 운명을 가까스로 벗어났고 이제 사람처럼 살고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평범한 삶을 최대한 누려보고 싶은데 능력이 드러나게 된다면 사람들을 피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저택이라 부르는 건물의 뒤쪽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창문도 없는듯한 건물을 지키고 있는 험학한 병사들이 있었다. 저택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기사라면 응당 보호장구라도 착용하고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복장은 병사지만 용병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새로운 놈인가? 어리군." "어린녀석이 화끈하게 일을 저질렀나보군." 건물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갖고있는 무기조차 통일되지 않았고 각자 독특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수많은 살인을 했던 경험을 갖고있는 눈빛이었다. 내가 정령사이기에 생명력에 대한 느낌을 쉽게 느낄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지하감옥이군.' 나는 이곳까지 끌려오면서 네 명의 병사들의 대화를 통해서 지하감옥에 수감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앞에 지하감옥의 건물을 지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곳이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수 있었다. 이곳을 침입하거나 탈출하기 위해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건물 자체에 창문도 없고 오직 하나의 입구만 있으니 적은 병력으로 지키거나 방어하기엔 소수의 뛰어난 실력자면 충분하다. "핸리 기사대장님께서 3층에 수감시키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끌고온 병사가 앞에 다가온 병사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그러도록 하지. 가보게."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요." 네 명의 병사가 포박당한 나를 두고서 돌아갔다. 앉아있는 병사들은 한동안 나를 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앞에 서있던 병사가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포박당한 줄을 풀어주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나는 드리안이다. 지하감옥의 경비책임을 맡고있지. 기사대장이 너를 3층에 수감하라니 마법사라는 족속인가보군. 3층 이하로는 마나사용이 억제되니까 그렇게 알고있어라." "마나억제?" "네놈이 어리니까 이렇게 설명해주는거다. 엉뚱한 짓을 벌이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할테니 각오해라." 나는 드리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마나억제란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동안 아무런 동요도 부리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끌려온 것은 한가닥 정령사로서의 능력을 믿고있는 마음 때문이다. 나를 죽이려하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오면 탈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봐 이놈을 3층으로 데려가." 드리안은 옆에있는 병사에게 말하고는 나머지 병사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자신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듣고 싶었지만 혹시 몰라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슈이야. 앞으로 할말이 있으면 나를 부르도록 해. 저분들은 살인도 눈하나 깜짝않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함부로 부르면 안돼. 그건 그렇고 보통은 2층에 수감하는데 말이야. 왜 잡혀온거지?" "저는 정령 치료사입니다. 귀족을 죽인 범인을 치료해주어 잡혀온 것 뿐입니다." "뭐야? 겨우 그것뿐인가? 이상하네. 보통 그런경우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는데 말이야." 슈이는 나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슈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앞장서서 계속 걸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곡식이다. 그 외에도 마법으로 얼려진 냉동된 육류와 과일까지 보관되어 있어서 식량 창고임을 알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지하2층에 내려오자 곧바로 많은 노예들을 볼수 있었다. 보통 귀족가의 노예들은 이마에 인장을 찍어 누구의 소유인지 명확히 하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 또한 그런 노예들은 평생 거래가 불가능하여 많은 권력을 갖고있는 귀족가나 절대 판매하지 않을 노예에게만 주어지는 인장이다. 지하감옥은 노예들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하감옥이라고 해서 상당히 협소한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넓었다. 또한 공기가 지하 치고는 맑은 것으로 보아서 마법을 동원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노예들이 관리하지만 병사도 간혹 있었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노예를 부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리라. 슈이가 나를 지하3층까지 데려가는 동안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경비 만큼은 철저하게 이루어져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구조를 갖고 있었다. 모든 통로가 두 명만이 드나들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각 층의 주요지점에는 노예가 아닌 병사가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군." 지하3층에 도착하자 책을 읽고있던 노인이 슈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환영해 주었다. 지하3층을 들어서자 곧바로 이상한 기분이 몸에서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나의 통제에 반응하던 생명력의 상당부분이 없어진듯한 느낌이다. 사방을 둘러보니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에 복잡하게 생긴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페이닌님. 새로운 수감자입니다." 페이닌은 슈이가 간단한 인사만 하고서 나가자 읽고있던 책을 책상에 내려놓고 나를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페이닌이라는 노인의 신체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임에 틀림없다. 기사가 사용하는 마나와 마법사의 마나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져 구분할 수 있다. "새로운 녀석인가? 무척이나 오랜만이군. 그런데 너무 어리잖아." 지하3층의 지하감옥은 의외로 2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2층은 각자 따로 가둘수 있는 구조인데 반해서 이곳은 여러명의 수감자가 함께 생활하는 감옥이다. 아마도 마나억제 마법진을 크게 설치하여 모든 수감자에게 동일하게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을경우 작은 마나억제 마법진을 수없이 설치해야 할테니 말이다. "이봐, 이놈 들여보내." 가만히 서있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페이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했다. 그곳에는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보기엔 지하감옥은 병사에게 무척 편한 곳이다. 노예들이 사소한 것은 처리하고 그저 편하게 사소한 것만 처리하면 되니 말이다. 물론 공이 없으니 승급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병사들에게 이끌려 감옥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서야 진정으로 갖혔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저택에 도착할 때에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끌려서 문초를 당할줄 알았다. 그때 자초지정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일단 가둬두고보니 하소연을 할 곳이 없는 것이다. 내가 죄가없음을 떠들며 난동을 부려도 저택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를 것이다. 그저 나로서는 문초할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걱정스런 마음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자 모든 수감자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마법사 길드 소속이냐?" "어디 출신이지?" "궁금하니까 빨리 대답해라." 갑자기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 비슷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했다. 젊은 사람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30대 이상의 사람들이었다. 주의깊게 바라보니 마법사들로 짐작되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거죠?" 모든 수감자들이 나의 출신을 줄기차게 질문하기에 나도 그들이 그것을 왜 궁금해하는지 물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중급 정령사인 사실은 알려진 것이고 크게 비밀도 아니라서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모두 진정해. 갑자기 어린애를 닥달하면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하겠나. 내가 납득시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할테니 조용히 하게들." 많은 사람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질문을 하는데 어떤 노인이 수감자들을 헤치고 틈을 별려 모두 물러나도록 조치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노인의 말을 듣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각자 흩어졌다. 감옥 내부가 무척이나 넓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감자는 대략 30여명 가량이었고 그중 반이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 흩어졌지만 시선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당황했을텐데 어린 자네에게 미안하군. 나의 말을 듣게되면 우리가 왜 그런건지 이해할 수 있을걸세. 먼저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마디런이라고 하네." "카인이라고 합니다." 나또한 마디런의 정중한 말을 듣고서 대답해주었다. "그럼 여기 수감자들이 자네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유를 말하지. 여기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법사라네. 대부분 자유 마법사들이라 할 수 있지." "자유 마법사요?" 나는 자유 마법사란 말을 처음 듣게되었다. 마디런은 나의 질문에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개 마법사는 많은 마법실험을 통해서 실력을 향상시켜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자금이 소요된다. 마법실험에 필요한 재료가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무척이나 많았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이 마법사 길드이다. 마법사 길드에서는 제국에서 무한한 자금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제국에 그들의 힘을 빌려준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무력을 동반한 마법사를 필요한 때에 사용할 수 있어서 국력의 향상을 가져온다. 마법사의 입장도 마찬가지로 마법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어서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관계인 것이다. 마법사 길드에 속한다고 해서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국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마법사를 지원해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게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하는 마법사가 생겨났다. 이런 마법사를 자유 마법사라고 부르는데 대개 용병들의 틈해서 귀한 대접을 받고 생활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시간이 지날수록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보다 실력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수련을 하고 싶어도 수련에 필요한 마법서나 마법재료를 마음껏 구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 마법사가 대부분 용병의 틈에서 생활하는 이유는 용병길드에서 높은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부가 많은 상인이나 귀족에게서 길드와 비슷한 입장으로 생활하기도 한다. 최소한 마법사 길드에 속하여 제국에서 무조건적으로 지우는 의무를 행하는 것보다 자유스러우니 말이다. '나라면 그냥 마법사 길드에 가입해서 생활하겠네.' 마디런의 자유 마법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내가 마법사라면 차라리 마법사 길드에 가입해서 편하게 생활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와함께 수감되어 있는 모든 수감자들이 자유 마법사라는 마디런의 말에 의문스런 눈빛으로 수감된 마법사들을 둘러보았다. 마법사는 제국의 아주 중요한 인력이기 때문에 병사들도 함부로 수감할 수 없다. 그것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용병으로 생활하다가 이렇게 잡히게 된 것이야. 용병이 어떤 곳인지 알고있나? 의뢰만 들어오면 특별히 제국에 반하는 의뢰가 아니라면 모두 수행하는 곳이지. 실수로 어찌하다보니 파도루 가문과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은 이런 처지가 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용병으로서 생활하다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당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된 경우는 없었다는 거야. 큰 죄도 아닌데 파도루 가문에서는 단지 우리가 자유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가둬놓고 풀어주지 않는 입장인 것이지." "아니 왜요?" 마디런의 설명을 모두 듣게되자 나는 나의 처지도 잊은채 약간 흥분하여 반문했다. 길드에 소속된 마법사가 아니라지만 존재 가치만으로 제국에 힘이되는데 가두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우리를 이용하려는 수작이야. 더구나 우리가 이렇게 있어도 누가 도와주겠나? 마법사 길드는 우리가 가입되어 있지 않으니 도와줄리 만무하고, 용병길드에 가입되어 있지만 용병길드가 파도루 가문에 함부로 압력을 행사할 수는 없는 것이지. 더구나 파도루 가문은 마법사 길드라 할지라도 함부로 하기엔 위험하단 말일세." "세상에" 마디런의 푸념섞인 말에 나조차도 할말을 잊고서 탄성을 질렀다. 죄가 없는데도 갖혀있는 심정이 어떤 것일까. 나같은 경우야 귀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들의 가족을 죽인 살해범을 치료했으니 이렇게 당할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오직 뒷배경 없는 자유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이용하려고 이렇게 가둬놓은 것이다. "어쩌면 파도루 가문에 속해서 전쟁이나 전투에 참가해주면 우리를 풀어줄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마법사 길드에 가입하는게 낳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수도 없는 입장이라네. 지금이라도 마법사 길드에 가입한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텐데 말이야. 우리에 대해서 그만 이야기하고 본론을 말하겠네." "말씀하세요. 마디런님" 나는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일어나 극존칭을 사용하였다. 단순한 제국의 의무를 피하기 위해 마법사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들은 존경할 만한 존재인 것이다. 누구나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하는데 단순한 자유를 위하여 그것을 포기하다니 말이다. "여기 수감된 자유 마법사는 수감된 기간이 다르지만 모두 여기서 지낸지 1년 이상된 사람들이야. 카인 자네가 근 1년여만에 처음 들어온 마법사라 할수 있지. 무슨 죄를 지어서 들어온지 모르지만 자네는 나이로 볼때 빨리 나갈 것 같더군. 그러니 자네가 풀려나면 마법사 길드로 찾아가 파도루 가문의 지하감옥에 갖힌 30여명의 자유 마법사들 모두가 가입하고 싶다고 전해주게."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마디런의 말을 듣자 이들에겐 그 방법이 최선임을 알수 있었다. 마법사 길드에 가입하면 곧바로 제국의 보호를 받을수 있으니 파도루 가문에서도 이들을 풀어줘야만 한다. 마법사 길드의 소속된 마법사의 능력을 높이는 길은 제국의 국력을 키우기 위한 범제국적인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지낼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외부에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서 죄가 가벼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마디런은 내가 얼마후 풀려날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말했던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되게 말해야 내가 부탁을 들어줄 것으로 믿고 말이다. 하지만 마디런은 오해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첫째로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곳에 수감된 사람이 모두 자유 마법사라고 생각되었기에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령사이고 정령사란 존재도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면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곳에 수감되었다. 둘째로 내가 이곳에서 곧바로 풀려나리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귀족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그들의 가족을 죽인 살해범을 내가 치료해주었으니 복수하려도 풀어주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자유 마법사의 입장보다 내가 더 비참한 상황이다. 최소한 이들은 이곳에서 이용되어질 마법사이기에 나름대로 좋은 음식을 제공받고 어느정도 대우를 받지만 나는 복수의 대상으로 처형될 가능성이 크다. "마디런님 죄송한데 여기 계시는 자유 마법사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실은..." 마디런은 나의 말에 깜짝 놀라서 바라보았다. 다른 자유 마법사들도 눈치껏 엿듣다가 함께 놀랐다. 나는 차분하게 내게 벌어진 사건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수감된 자유 마법사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딱한 사정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파도루 귀족놈들이 그렇게 허술할 이유가 없어. 우리가 이런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서 떠들었는데 그것을 알고서 곧 풀려날 사람을 이곳에 수감시킬 이유가 없잖아. 설사 풀려날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저놈이 우리가 이야기한 사실을 모두 보고했을테니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을거야. 안그래?" 나의 사정을 모두 듣게된 자유 마법사중 누군가가 밖에서 책을 읽고있는 페이닌을 향해서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나는 밖에서 감시하는 사람이 6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이고 직접 이곳에 마나억제 마법진을 완성시킨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마나억제 마법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들을수 있었다. 마나억제 마법진은 대개 그것을 설치한 사람보다 열배 이상의 마나를 보유한 마법사를 억제시킬 수 있다. 그러니 최소한 7서클의 마스터라야 마법진의 영향을 받지않고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물론 설사 빠져나간다고 해도 밖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에게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만 말이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은 최소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사보다 훨씬 뛰어나다. 지하감옥의 입구에서 만났던 두눈으로 병사를 직접 보았으니 분명하다. 지하감옥을 탈출하기 위해선 7서클의 마스터이자 5서클의 텔레포트 마법을 지하에서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라야 한다. 그 방법 이외에는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한다. 7서클 마법사가 마나억제 마법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해도 텔레포트 마법으로 탈출하려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다. 약간의 실수라도 한다면 죽고 말테니 드래곤 레어에 침입해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보다 낮은 확률이다.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디런님" "그렇지 않네. 우리가 어린 자네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한 것 같아. 이곳에서 너무 오래 지내다보니 오직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만 했더니 간단한 오류조차 생각조차 못했어. 우리가 감시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못했다니 말이야." 마디런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나마 몇몇 사람이 내게 다가와 정령사를 처음 본다고 이것저것 물었다. 나또한 나의 처지도 잊은채 자유 마법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궁금한 사실을 질문하고 대답을 들었다. "어이! 마디런! 마법사 길드에 연락할 방법은 찾았나?" 마디런은 실망스럽고 기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로보다가 수감지역과 경계선을 이루는 쇠창살 밖에서 페이닌의 외침소리를 듣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네놈도 자유 마법사이면서 우리를 이렇게 괴롭혀야겠나?" "그럼 어쩌겠나. 파도루 가문의 가주가 자네들을 몇년만 관리해 준다면 마법사 길드에 버금가는 지원을 해준다고 약속했으니 말이야. 마법사 길드야 제국에서 지원하는 것이 많겠지만 그만큼 마법사가 많아서 마법을 익히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자네도 알겠지? 물론 자유 마법사로 지내는 것보다 훨씬 좋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는 파도루 가문에서 엄청난 지원을 무한으로 혼자 지원받고 마음대로 마법을 수련할 수 있을테니 마도사가 되는 것도 꿈꿔볼 일이지." 마디런은 쇠창살 밖에서 미소지으며 말하는 악마같은 페이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동류의 자유 마법사를 바라보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말하는 페이닌은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쁘다고 말할수 없다. 마법사는 많은 지원을 받은 사람일수록 실력이 높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황궁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마법사중에서 가장 실력이 빠르게 진보되는 추세이다. 그만큼 마법사에게 필수적인 물품들을 최고급으로 일순위로 지원받으니 말이다. 단지 페이닌은 마법사적 탐구열에 빠져 그 지원책으로 파도루 가문을 선택했을 따름이다. "네놈 면상은 보고싶지 않으니 당장 꺼지지 못해!" "페이닌 언젠가 두고보자." "저주받을 것이다." 자유 마법사들은 페이닌을 향해 다같이 엄청난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페이닌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싱긋 웃기만 하였다. 페이닌도 가주의 뜻에따라 자유 마법사들을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입장이다. 30여명의 자유 마법사중에서 한 명이라도 회유된다면 가문에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수감된 자유 마법사중에서 회유된 경우도 있었다. 페이닌이 쇠창살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책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모두 마음을 진정시켰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들은 파도루 가문의 귀족을 싫어하면서도 그 감정의 강도를 따져볼 때 페이닌을 더 미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마디런은 앞으로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지하감옥이라 하지만 대우는 죄수가 아니다. 음식은 최그급은 아니지만 고급에 속하고, 그외 생필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또한 필요하다면 요청하는 물품을 가져다주기까지 한다니 감옥만 아니라면 편한 곳이다. 파도루 가문에서는 자유 마법사를 회유하여 이용하거나 나중에 요긴하게 쓰기 위해서 이런 대우가 행해지는 것이라고 듣게 되었다. 그 외에도 지하감옥에 대해서 신기할만한 정보를 자세히 들을수 있었다. 지하감옥은 5층으로 되어 있으며 3층 이하로는 마나가 억제되는 마법진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죄인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4층과 5층으로 보내어지고 일반죄인은 2층에 수감된다. 3층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풀어주기 아까워서 이용할 만한 가치있는 존재를 수감하는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3 회] 7. 자유 마법사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그 자신만큼이나 알고 있다면 그는 그 사람의 가족일 것이다. 그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같은 부모님을 가진 형제 그리고 그외 친척들이 아니고서는 자신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 다른이가 자신만큼 알고있는 사람이 꼭 가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 예외가 바로 평생의 동반자이자 연인관계이다. 사람은 의외로 자기자신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지 못하다. 특히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단점에는 거의 무지한 편이다. 하지만 결혼하여 함께 지낸 부부는 상대편 이성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자세히 알고있다. 그것은 사비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인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부인인 사비나는 그렇지가 않다. 사비나는 카인과 결혼하여 채 일년도 함께 지내지 못하다가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카인의 아들인 하롤드를 낳고 길렀다. 하롤드는 정령사로서 자라났고 지금의 중급 정령사가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비나는 아들인 하롤드가 중급 정령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정령의 힘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있다. 일반적으로 중급 정령사는 4서클의 마법사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물론 같은 중급 정령사라도 중급 정령을 자유롭게 부린다면 5서클 마법사와 비슷하지만 말이다. 사비나는 카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배경을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으며, 물질계 최상급 정령 모두를 소환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고있다. 그 강함을 따지자면 상상하지도 못할 수준인 것이다. 사비나는 카인이 파도루 가문에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예상하는 그런 슬픔은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었다는 것과 카인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휘둘린다는 사실이 슬펐던 것이다. 또한 자신의 뜻에 의해서 말린에 오지 않고 크라이 숲에서 지냈다면 치료사로서 생활하지 않아도 되었고 끌려가는 일도 없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지 마.세.요." 사비나가 눈물을 흘리자 곁에 앉아있던 세렌이 더듬더듬 말했다. 카인이 끌려간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비나는 카인이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싫어서 조용히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생각했다. 사비나는 힘없고 늙은 자신에게 의지가 되었던 카인이 없자 무척이나 슬펐다. "그래. 울지 않으마. 그래도 세렌이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헤..헤" 사비나의 말에 세렌은 바보처럼 싱긋 웃었다. 아직 말하는 것이 서툴러 웃음소리가 이상했지만 사비나에겐 귀여울 따름이다. 지금처럼 더듬거리며 말할수 있었던 것도 인내심을 갖고 세렌을 가르쳤던 사비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렌은 카인이 끌려가기 이전에 치료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보통 사람만큼이나 소리를 들을수 있다. 하지만 말하는 것은 서툴러 어린아이가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렌은 꿈이 뭐야?" "꿈? 그..런거 모.르.는데요." 사비나는 세렌의 대답을 듣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꿈이란 것은 세렌이 가장 바라고 싶은거야. 가령 노예에서 해방되어 평민이 된다던가 그런것을 말하는거지. 세렌도 들어봤지? 가끔 노예들도 평민이 되는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가끔 실현되기도 하거든." 사비나는 세렌에게 꿈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있는 세렌으로서는 무척이나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세뇌식 노예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꿈이나 희망과 같은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노예는 꿈. 희망. 그런거 몰라요. 세렌은 노예에요." 세렌은 사비나의 대답을 듣더니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이 서툴러 더듬거리지만 자신이 노예란 사실을 말할 때 만큼은 절대 더듬거리지 않는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에 무슨 사명감이라도 붙은듯 말이다. 사비나가 세렌의 노예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자라면서 배운 것이 노예교육이니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사비나도 포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세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노력마저 포기하지는 않았다. "세렌, 내가 며칠전에 했던말을 믿니?" "무..슨 말.이.요?" "혼자 알고있으라고 말한 비밀 이야기 말이야." 세렌은 사비나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절대 말할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행동이지만 귀여운 모습이었다. 세렌은 며칠전에 사비나로부터 카인의 진실된 나이와 사비나와의 관계에 대한 것을 들었다. 세렌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도 카인에게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그것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정말로 믿는거야?" "그.럼.요." 세렌은 사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사비나는 세렌의 얼굴색이 붉은 홍조를 띄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세렌은 거짓말을 하거나 당황할 때 얼굴색이 붉은 홍조를 띈다. 사비나가 세렌과 함께 지내며 생활했기 때문에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세렌은 바보가 아니니까 내가 말한 사실들을 믿지 않는거야. 하지만 나중에 카인 아니 세렌에겐 주인님이지. 주인님을 옆에서 모시다보면 모든 것을 알게될거야. 나는 그때 세렌이 놀라게 될 모습을 상상하면 즐거워." "사비나님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요." 사비나는 세렌의 말에 또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비나에겐 이제 카인이 곁에 없어서 활동하는 부분에서는 세렌에게 의지되고 있었다. 이제는 세렌이 없으면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다. 카인이 있을 때는 항상 바람의 정령이 그녀의 곁에서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카인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비나는 마음속으로 카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카인의 얼굴이 앞에서 어른거렸다. 부부로서 함께 지낸 시간을 따져보면 2년의 기간도 되지 않는다. 결혼하고 1년을 함께 지냈고, 그후로 60년만에 만나 지금까지 겨우 반년을 함께 보냈다. 사비나의 아들인 하롤드조차 그녀가 말린에서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런 세세한 부분을 알고있는 것이 카인이다. 물론 함께한 시간은 짧지만 수십년을 함께한 부부 못지않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비나님 저 엘레스트라입니다.' 사비나는 카인을 생각하다가 마음속으로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놀라지 마시고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주인님께서 사비나님에게 전해드리란 말씀이 계셨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말할수 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세렌 당장 밖에 나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말거라." "네? 네." 사비나는 세렌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밖으로 쫓아냈다. 세렌은 사비나의 단호한 말에 엉겹걸에 대답하고 방으로 나갔다. 세렌의 신분으로서는 감히 방에서 쫓겨나는 이유를 물어볼 수 없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사비나가 부르지 않는 이상은 세렌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님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이렇게 마음속으로 소식을 전하라고 했으니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저를 이해해 주십시요. 주인님께서 안전하게 잘 계시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알리기 싫어서 나가지 않고 있으니 잠시만 참아달라고 했습니다.' 사비나는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마음속으로 절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직접 정령에게 그 소식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정령은 순수한 존재라 특별히 계약자가 거짓말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는 이상은 사실만 이야기하니 분명 사실이라 생각했다. "카인이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요?" '다치신 곳은 없지만 수감되어 계셔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사비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외 여러가지 질문을 하고 카인의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사비나는 엘레스트라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며 답변을 들으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것은 카인이 수감된 지하감옥이 마나가 억제되어 정령사조차 어찌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카인에게 돌아가시면 굳이 저 때문에 탈출할 필요는 없다고 전해주세요. 저는 카인이 앞으로도 자유스럽고 평범하게 생활하길 바라는 사람이에요. 설사 그곳에서 탈출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저 때문이라면 저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슬퍼할 것이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곳은 길버트가 있고, 제 옆에는 세렌이 있으니 당분간 저희 걱정은 하지 말라고요." '알겠습니다. 사비나님.' 사비나는 엘레스트라의 공손한 말에 마음이 진정되었다. 사비나가 엘레스트라의 말에 이렇게 마음이 진정된 이유는 엘레스트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최상급 정령은 일정한 모습이 아니다. 소환자의 상상에 따라서 그 모습이 변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처음 소환할 때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한다. 그래서인지 카인이 계약한 4대 최상급 정령은 모두 사비나를 닮았다. 정확히 말하지만 사비나의 모습이 거의 반가량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는 카인의 어머니나 크라이 숲의 엘프를 대표하는 세레나 장로의 모습을 닮았다. 카인과 계약한 물질계 4대 최상급 정령이 대부분이 그런 모습이니 사비나로서는 자신의 모습을 닮은 정령이 친숙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것은 최상급 정령들조차 마찬가지이다. 최상급 정령은 각자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그 감정에 대해서는 계약자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사비나는 엘레스트라에게 들은 카인의 소식에 마냥 즐거웠다. 특히 카인이 최상급 정령을 그곳에서도 마음대로 부릴수 있으니 이곳에 보냈으리라 생각하고 절대 위험스런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비나로서는 카인이 그녀에게 보낸 엘레스트라가 마나억제 마법진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소환하여 보내진 것이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 나는 엘레스트라가 사비나를 만나고 돌아와서 가져다 준 소식보다 쇠창설 건너편에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마법서만 읽고있는 페이닌의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자유 마법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마나억제 마법진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지만 진정으로 궁금한 사항은 알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지와 소환된다면 발각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만약 정령을 소환하여 들키지 않는다면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상급 정령이라면 이까짓 지하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수감된지 일주일이 지나서 마나억제 마법진에 대해서 상세히 파악하고 모두 잠든시간에 몰래 나의 육체에 하급 정령을 소환해 보았다. 예상대로 소환에는 성공했지만 매우 불안정하여 육체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일정한 생명력을 공급하기가 마나억제 마법진으로 인해서 많은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급정령도 하급정령과 마찬가지로 마법진 때문에 생명력을 마음대로 공급하지 못해 강제로 정령세계로 돌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육체가 아닌 허공에 정령을 소환하고 싶었지만 그럴경우 밖에서 지키고 있는 6서클 마법사인 페이닌에게 들킬 것이 뻔했다. 쇠창살 밖에는 페이닌 뿐만이 아니라 하급 마법사들이 번갈아가며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급정령을 육체에 소환했을 때 진정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마나억제 마법진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육체에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는 상급정령이 마나억제 마법진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소환된 이유를 자유 마법사들의 말을 떠올리며 예상할 수 있었다. 마나억제 마법진은 설치한 마법사 마나량의 대략 열배에 해당하는 마나를 억제할 수 있는데, 이곳에 마법진을 설치한 마법사가 6서클을 마스터한 페이닌이기 때문에 7서클의 마법사까지 영향을 받는 것이다. 마법사의 마나량 계산법은 의외로 복잡한 구석이 있다. 1서클의 마법사는 2서클의 마법사보다 두배 가량의 마나량 차이를 보이지만 상위로 높아질수록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일반적으로 상급 정령사가 6서클이나 7서클 마법사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 마나량으로 계산한다면 서로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최상급 정령까지 자유스럽게 소환할 수 있는 내가 상급 정령을 소환하니 그 정령이 마법진의 영향을 벗어난 사실은 당연한 이치이다. 더욱이 소환에 사용한 정령들이 모두 물계열이니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동안 치료사로서의 생활 때문에 물계열 정령에 대해서는 다른 정령보다도 제어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정령의 소환이 상급 이상의 경우 마나억제 마법진의 영향을 받지않은 것을 알아내고 곧바로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를 통해서 사비나에게 나의 소식을 알린 것이다. 또한 정령은 정령계를 통하기 때문에 쇠창살 밖에서 자유 마법사를 감시하는 마법사들로서는 절대 이 사실을 알수가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눈치채지 못한채 마법서를 보고있던 페이닌의 모습을 보고 기뻐한 것이다. 물론 엘레스트라가 가져온 사비나의 소식에도 기뻐했지만 말이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마디런이 미소짓고 있는 내게 말을 건넸다. "가족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자넨 어린데도 무척 침착하군. 여기있는 사람은 누구나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참지 못하고 난리를 피웠는데 말이야." 마디런이 나의 침착한 태도를 칭찬하였다. 일주일 동안 생활하면서 나와 말하는 사람은 마디런 뿐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내게 말을 건넬 때는 오직 정령에 대해서 궁금한 사항을 물어볼 때이다. 마법의 경우 치밀한 법칙에 의해서 실현되지만 정령은 마법과는 상당히 다르기에 별달리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더구나 나는 정령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 마법사보다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마법사라는 존재가 마법학문에 광적으로 집착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에 자유 마법사들이 하는 일은 정말이지 기계적이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서로 짝을지어 마법에 대해서 토론하고 마법을 능숙하게 펼치기 위한 수식계산만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 마나억제 마법진이 없었다면 서로 마법을 사용하면서 마법에 대해서 연구하며 지냈을 것이다. 마디런이 나와 많이 어울린 이유는 그가 5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수감자중에서 마디런의 마법서클이 가장 높았고 더이상 높어질 수 없는 수준이었다. 6서클이 된다면 마도사란 칭호가 주어지며 제국에서도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게되지만 그만큼 마법사에겐 올라서기 힘든 벽이다. 6서클에 올라서기 위해선 깨달음이 필요하고 그것은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심하지 않아?" "그렇진 않아요. 일주일 동안 마법에 대해서 많이 배웠는걸요." "하하! 지옥같은 일주일이었겠군." 나의 말에 마디런이 웃었다. 일주일 동안 나는 마법에 대해서 많이 알게되었다. 알지 않으려고 해도 인사만 나누면 상대방이 마법에 대한 이야기만 하니 반강제로 알게된 것이다. 마법사들의 대화 주제는 오직 마법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쩔수없이 마법을 주제로 대화를 하지않는 마디런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는 언제쯤 나갈수 있을까요?" "자네는 젊으니까 우리처럼 자존심을 지키지 말고 그냥 협상을 하도록 하게." 마디런은 어린 나의 모습이 가련한지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수감된 자유 마법사들의 나이가 많다보니 모두들 나를 귀엽게 대해준다. '사비나를 위해 이곳에서 탈출을 할까?' 엘레스트라를 소환하는데 들키지 않았으니 이곳을 탈출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땅의 최상급 정령인 노에아넨을 소환한다면 이곳에서 곧바로 지상까지도 뚫고 나갈수도 있다. 아니 지상으로 갈 필요도 없이 다른 곳으로 땅굴을 파내어 아무도 모르게 탈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사비나에게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가 앞으로 살날도 많지 않은데.' 내 머리속에서는 오직 사비나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녀가 말린에서 죽는 마지막까지 생활하고 싶어서 이곳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탈출하면 사람들을 피해야만 하고 말린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나의 탈출로 인해서 그 피해가 크라이 숲에 있는 가족과 엘프들에게까지 돌아갈 것이다. '말린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이곳에서 나갈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나로서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모두들 마법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는데 나만 외톨이로 지낼수 없어서 결국은 마법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저 가장 기초적이고 쉬운 마법 한 가지라도 배우려는 마음으로 말이다. 나는 죽음에서 깨어난 후로 엘프들에게 정령마법을 배웠다. 정령마법은 정령을 소환하려는 마나로 마법을 실현하는 것으로 그 종류가 극히 적었다. 기껏해야 각 물질계 종류별로 다섯 가지가 넘지 않았다. 모든 정령마법을 합쳐도 20가지가 넘지 않으며 대부분 보조계열 마법이라 정령사라 할지라도 특별히 배울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정령을 소환한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배웠지만 나중에 육체로 정령을 소환하는 방법을 깨닫고 더이상 내겐 필요없는 마법이었다. 인간이 배우는 마법은 정령마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간단한 1서클의 마법도 엄청난 마법수식이 동원되고 그것을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기 위해선 수많은 암산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한달이 지나서야 1서클의 마법수식을 모두 배울수 있었다. 문제는 단지 배웠을 뿐이지 그것을 실현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내가 1서클의 마법중에서 수식이 가장 간단한 라이트 마법에 필요한 수식을 모두 계산하는데 무려 25분이나 걸렸다. 수식계산에 천부적 재질을 갖지 않고서야 마법사가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실감했다. 마나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장소 문제로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간단한 수식계산이 25분이나 걸리니 마법사로서의 재능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왠지 1서클에 대한 마법수식을 배우면서 마법사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결국 나는 1서클의 마법을 25분에 펼칠수 있는 마법사가 되었다. 물론 25분 동안에 마법수식을 계산하면서 정신력을 유지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카인 드디어 1서클의 마법사가 되었구나! 축하한다! 하하하" 내게 1서클의 마법수식을 가르친 네크가 말했다. 네크는 3서클 마법사이지만 다른 마법사보다 마법에 대한 학구열이 높지 않아서 심심풀이로 나를 가르쳤다. 마디런의 말에 따르면 성격이 다혈질이라 3서클을 이룬 것만도 대단한 성과라고 말한다. "놀리지 마세요." "너는 나의 뛰어난 제자이다. 정령사이니 마나를 깨달을 필요도 없으니 분명히 1서클의 마법을 실현시킬 수 있을거야. 물론 25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네크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까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모두들 내가 1서클의 마법수식을 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특별히 할일이 없었기에 배운 것이지만 내겐 마법수식을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재능이 없었다. 마법사가 노력해서 누구나 할 수 있다면 아무나 되었을 것이다. 마법사가 되려면 마법수식을 계산할 수 있는 재능에 마나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나의 경우야 마나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것을 대신해 줄 엔트가 전해준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있다. 문제라면 내겐 마법수식을 빠르게 계산할 만한 재능이 없다는 점이다. "카인 너도 이제는 자유 마법사 소속이다. 하하하" "맞아. 우린 다같은 자유 마법사야." "정확히 말하면 1서클의 마법사이자 중급 정령사라구." 나는 자유 마법사들이 놀리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모두들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마디런까지도 마법수식을 풀기위해 계산한 종이를 보면서 틀린부분이 확실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정말이지 마법적 재능이 없음을 확실히 느꼈다. 내가 25분에 풀어야만 하는 마법수식을 단 몇초만에 계산하는 마법사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은 기분이다. "오늘은 카인이 자유 마법사에 소속된 역사적인 날이니 모두 기억합시다." "네크 꼭 기억하도록 하지. 자네의 뛰어난 제자를 말이야." 네크의 말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동안 네크에게서 마법을 배우면서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좋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정말이지 대책이 서지않는 사람이다. 왜 3서클이나 되는 마법사가 마법적 학구열이 높지도 않으며 용병들 틈에서 생활했는지 이해가 된다. 저 성격으로는 3서클의 마법사가 된 것도 기적적으로 이룬 것이리라. "네크님 창피해 죽겠어요. 그만좀 하세요." "하하. 알았어." "그동안 가르쳐 주셔서 고마워요. 더는 못배우겠어요. 1서클 마법의 모든 마법수식을 배운 것만도 제겐 벅찼어요. 이제는 마법의 마자도 듣기 싫어요." 네크도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속 웃었다. 한달은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 마법에 대해서 많이 알게되었다.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마나에 대한 본질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오러와 마나에 대해서 단순히 그 순수성만을 가지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을 알게되었다. 마나가 오러보다 순수하고 생명력은 마나보다 순수하다. 마법사가 마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마나의 양을 마법수식에 따라서 제어해야 한다. 하지만 마나의 양을 마법수식에 따라서 제어하지 못할 경우도 있는데 그럴때는 마나의 순도를 변화시켜 마법을 실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엔트가 전해준 800년에 해당하는 생명력을 이용해 정령을 소환했는데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생명력의 순도를 임의로 조종하여 소환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다면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시간을 배로 늘일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생명력이 많다보니 사용하는데 불편한 점이 없어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생명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지금은 마나억제 마법진이 있는 지하감옥이라 그럴수 없지만 나중에 이곳에서 나간다면 연습을 통해서 얼만큼의 시간동안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유지시킬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엘레스트라 오늘도 부탁해.' '네, 주인님' 밤이되자 나는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사비나에게 보냈다. 매일같이 밤이되면 엘레스트라를 소환해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엘레스트라는 사비나에게 찾아가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그녀에게서 나에게 전해줄 말을 듣고 돌아온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 이제는 마나억제 마법진의 영향도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 마법사를 감시하는 쇠창살 건너편의 마법사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만 했다. '돌아왔습니다. 주인님' 엘레스트라가 돌아와 사비나의 말을 전해준다. 엘레스트라가 오늘 가져온 소식중에 무척 좋지않은 소식이 있었는데, 그동안 걱정한 문제가 드디어 발생한 것이다. 재산관리를 맡고있던 길버트가 더이상 직원에게 줄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심각하다고 했니?' '생활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은 없지만 직원들에게 더이상 고용비를 지급할 수 없답니다. 사비나님은 그것이 무척이나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직원들 형편이 좋지 않다고 말하시면서요. 더욱이 직원들이 그동안 주인님께서 많은 고용비를 지급하셨기 때문에 얼마동안은 고용비를 주지 않아도 계속 남아있겠다는 말까지 듣고는 더 슬퍼하신 것 같습니다.' '엘레스트라 오늘도 수고했어.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 엘레스트라는 나의 마음속 말을 전해듣고 정령계로 돌아갔다. 한달이 넘도록 이곳에서 보냈지만 파도루 가문의 누구도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아니 내 말을 전했는지도 의문이 든다. 단지 기사대장인 핸리가 나를 여러번 불러내어 사람을 치료하도록 만든 것이 전부였다. 나중에 정령을 통해서 사실을 알아보니 핸리가 뒷돈을 받고 나를 이용해 사람을 치료한 것이다. 중급 정령을 이용해 치료하는 나의 치료술은 신관에 버금가는 실력이다. 그러니 누구나 핸리에게 뒷돈을 주고 치료받고 싶은 것이다. 신관을 찾아가느니 그 반값도 안되는 돈으로 핸리에게 뒷돈을 주고 내게 치료받는다. 한달이 지난 지금이야 파도루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자유 마법사는 지하감옥에서 함부로 빼낼수 없지만 나는 정령사인지라 특별히 그런 제제를 받지 않은 것이다. 나는 마디런을 통해서 파도루 가문의 기사대장이 아무런 힘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대개 기사대장이란 직책이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이지만 파도루 가문에서는 그저 가문의 귀족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심부름 꾼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나로서는 오러까지 사용가능한 뛰어난 실력의 기사가 고작 부와 권력을 위해서 파도루 가문에 남아있는 핸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카인 다음번에는 꼭좀 부탁해." 마디런이 모두 잠든 시간에 내게 다가와 손에 작은 종이조각을 쥐어주었다. "네, 노력해 볼께요." "이런거 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 이곳에 오래 머물렀어." 마디런은 조용히 말하며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마디런은 내가 기사대장 핸리에게 몇번 불려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서 이곳에 30명의 자유 마법사가 마법길드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달라고 말했다. 이들로서는 그 방법이 아니고서야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은 꿈도꾸지 못하는 상태이다. 물론 마지막 방법으로 파도루 가문에 귀속하는 방법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버리는 행동이라 최후의 수단이리라. 마디런이 건네준 작은 종이에는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마법수식이 포함되어 있어서 뛰어난 마법사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종이를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마법길드에 전해달라고 하면 되지만 그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내가 핸리에게 불려가 그가 치료하라는 사람을 치료하는 동안에 엄격한 감시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디런은 혹시나 해서 이렇게 종이를 건네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마디런과 수감된 자유 마법사들중 몇명밖에 알지 못하고 있다. 많이 알수록 수감자를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밝혀질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엘레스트라에게 마법길드를 찾아가 말하면 해결되는데 말이야.' 나는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마법길드에 최상급 정령이 찾아간다면 그 정령을 소환한 나에 대해서도 알려진다. 그렇다고 정령에게 아무나 붙잡고 마법길드로 찾아가 30명의 자유 마법사가 길드에 가입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할 수도 없었다. 설사 정령을 이용해 누군가를 마법길드에 보내서 사실을 전해도 마법길드로서는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고서야 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권력가인 파도루 가문에 함부로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다. 사비나를 생각한다면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내 자신이 이렇게 싫을수가 없었다. 최선의 선택은 마디런이 건네준 종이를 마법길드에 전하도록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그 종이에 써진 글 자체가 자유 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리가 뒷돈을 받고 누군가를 치료해 줄 때는 언제나 경비가 삼엄해서 빈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제는 더이상 나도 참을수가 없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지.' 나는 사비나에 대한 걱정으로 더이상 이곳에 남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핸리가 누군가를 치료하도록 시키면 그 기회를 이용하리라 다짐했다. 마디런이 건네준 종이를 마법길드에 전해줄 누군가를 찾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정령을 사용해 탈출이라도 할 것이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자 가슴속에 담겨진 걱정이 없어진듯 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두려움도 생겨났다. 나에게 앞으로 무슨일이 생길지 걱정이 되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이틀이 지나서야 핸리가 나를 불렀다. 나를 부르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나를 이용하는 것에 맛을 들인 것 같았다. 아무런 대가없이 나를 데려다가 사람을 치료해주고 핸리는 치료받은 사람에게 뒷돈을 받는다. 그것이 얼마인지 몰라도 상당히 많은 금액이리라 짐작된다. 나 자신을 높게 평가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게 평가하지도 않는다. 나의 치료술이 최소한 신관보다 낮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병사들이 나를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핸리에게로 데려가기 위해서 줄로 묵었다. 대체적으로 마법사는 두손을 묶으면 힘을 못쓰기 때문에 지하3층 이하의 수감자들을 이동시킬 때 포박을 잊지 않는다. 마법을 실현할 때 두 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법을 구현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역시 두 손을 이용하는 것이다. 줄로 묶여서 지하감옥의 입구로 끌려나오자 지하감옥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책임자 드리안과 그의 병사들을 만날수 있었다. 첫날 지하감옥 3층에 안내를 맡아준 슈이와 드리안에게 눈인사를 하고, 반대편에 나를 인계받으려고 기다리는 파도루 가문의 기사대장 핸리와 기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귀염둥이 카인이군." 핸리가 나를 보면서 반가워하며 말했다. "기사대장 매번 이래야겠소?" "정말 한심하군." 핸리를 향해 지하감옥을 지키는 드리안이 한마디 하자 다른 병사들도 몇마디 건넸다. 핸리를 비웃는 말이지만 핸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매번 올때마다 당하는 일이라 이제는 이골이 난 것이다. 지하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기사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녔지만 병사들과 함께 지내는 단체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수많은 전투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게 되어 서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자신도 모르게 신체가 항상 긴장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특별히 중요한 지하감옥에 비슷한 병사들을 함께 배치한 것이다. "내 모습이 한심한가? 그것보다도 자신의 모습이나 들여다보면서 그런 소리나 하지." 지하감옥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과 핸리의 신경전은 내가 인계되는 동안에 계속 이어졌다. 내가 보기엔 기사대장 핸리 보다도 드리안에게 친근감이 생겼다. 적어도 드리안은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꼭 기회를 잡아야지.' 나는 포박당한채로 핸리를 따라가면서 마디런이 건네준 종이를 마법길드에 전해줄 대상자를 물색해 보았다. 지난번 핸리가 데려왔을 때에는 마디런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간절하지 않아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나로서도 더이상 지하감옥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삶이 얼마 남지않은 사비나의 애초로운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4 회] 7. 자유 마법사 귀족가의 하녀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귀족이 언제나 마시는 차를 끓이는 것은 물론이고 간단한 요리와 귀족의 의상에 대한 기본상식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귀족이야 태어나서 언제나 접하는 것이라 굳이 교육받을 필요가 없지만 하녀는 귀족의 기복상식을 배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귀족이 사용하는 귀품스런 언어와 글만 배우는데도 일년 이상이 소요되니 하녀가 아무나 될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녀의 교육과정이 이처럼 어려우니 대부분 어려서부터 귀족가의 하녀 밑에서 수습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그녀들 대부분은 평민으로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서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경우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비슷한 사정을 갖고 있다. 하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나 많다. 수습과정을 모두 밟으면 상당한 지식을 쌓은 상태이니 하녀로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런 용기를 가진 하녀는 많지가 않다. 하녀의 생활을 버리면 귀족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험한 평민의 삶을 살아야하니 말이다. 귀족가에서 하녀에게 주는 임금은 상당히 높다. 물론 그 귀족가의 능력에 따라 임금도 다르지만 그 하녀의 역량이 높음에 따라 귀족 자신들이 편안하니 임금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녀의 임금쯤은 매우 보잘것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대단한 귀족 가문의 경우에는 몰락 귀족의 여성을 데려다 하녀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니 귀족이 얼마나 편안함을 원하는지 알수 있다. 그리고 하녀의 품질이 귀족의 명예와 부로 비춰지기도 한다. 진정으로 하녀로서 성공하려면 많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먼저 적당한 얼굴이 필수이다. 너무 미인이라면 성노로서 전락하기 쉽다. 물론 귀족의 마음에 들어 첩으로 생활하여 다음 후손부터는 신분상승을 노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귀족의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버려지기 마련이다. 적당한 얼굴 다음으로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본래 귀족은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하녀는 자신이 모시는 귀족의 마음을 재빨리 알아채고 미리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눈치를 빨리 알아채기 위해선 상대방의 표정이나 눈을 바라봐야 하는데, 하녀의 신분으로 귀족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적당한 얼굴과 재빠른 눈치 다음으로 무거운 입을 가져야 한다. 하녀의 신분이 미천하니 언제나 같은 귀족을 모시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모시는 귀족이 남성이라면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수도 있고 여성이라면 다른 귀족가문으로 시집을 가게 될수도 있다. 물론 여성귀족의 경우 하녀까지 데려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유동을 갖고 있으니 하녀는 자신이 모시는 귀족을 위해 무조건적인 충성은 위험하다. 하녀의 경우 귀족과 생활하니 수많은 비밀을 알게 된다. 귀족은 어려서부터 권력의 암투를 벌이게 되는데 작게는 가족이 대상이고 크게는 다른 가문이다. 하녀가 자신이 모시는 귀족을 위해 그런 비밀을 모두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어 언젠가는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가장 좋은 바램은 귀족의 비밀을 어떤 것이든 지켜주는 것이 하녀로서 오래 살아남는 지름길이다. 설사 그것이 귀족에게 있어서 피해가 될지라도 말이다. 하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모두 말하려면 끝도 없다. 최종적으로 하녀가 된다는 것은 수많은 위험요소에 맞서 싸워야한다는 결론이다. 이런 불합리함에도 하녀가 되기 위한 사람은 무척이나 많다. 평민의 집안에 귀족가의 하녀가 한 명이라도 들일수 있다면 형편이 피는 것은 물론이고 넉넉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가족을 팔아 행복해지는 것이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모든 가족이 행복하게 지낼수 있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하녀로 지원한다 할지라도 엄격한 심사에 의해서 대부분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 메이는 하녀로서 성공한 사례에 속한다. 그녀의 가족은 무려 열명이나 되어 부모가 더이상 부양할 수 없어서 어릴 때 파도루 귀족가문의 수습하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열 다섯살이 되어 수습이란 딱지를 떼고 진정한 하녀로서 생활할 수 있었다. 메이의 기쁨은 자신이 받는 임금으로 가족이 행복하게 지낼수 있다는 점이다. 가끔씩 집으로 돌아가면 다른 평민의 가족보다 윤택한 생활을 하는 가족의 모습에 하녀로서 일하는 것에 감사한다. "메이는 정말 좋겠다." 베이시가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베이시는 메이와 함께 지내는 하녀로 나이가 같다. 파도루 귀족가문은 하녀의 숫자만 해도 일백에 이른다. 그것도 하인과 노예를 제외한 숫자로 카르시온 제국에서 알아주는 귀족가이니 당연한 수이다. 물론 이것은 실질적으로 파도루 가문에서 파도루라는 성을 쓰는 귀족을 위한 하녀만 말한 것이고, 파도루 가문이 외부적으로 고용된 모든 숫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베이시 너한테도 기회가 찾아오잖아." "내 차례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메이의 대답에 베이시가 쌜죽한 표정으로 말했다. 귀족가에서 뽑은 하녀들이 모두 그렇듯 메이와 베이시는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만약 자라면서 얼굴이 여성으로서 평균 이하로 변화되었다면 하녀로의 생활도 꿈꾸지 못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메이는 베이시가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고 조용히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하녀복을 입었다. 가장 깨끗한 하녀복으로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절대 입지 않는 옷이다. 하녀의 복장은 모두 통일되어 있지만 옷감에 따라서 좀더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베이시 어때? 예뻐보여?" 메이는 베이시를 향해 가장 아끼는 하녀복을 입은채로 한 바퀴를 돌았다. 하녀복의 치마가 둥그런 항아리 모양을 그리며 무릎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깨끗한 옷이라 그런지 베이시가 입은 하녀복과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모습으로 비춰졌다. "우와! 정말 멋지다. 치료사님이 맘에 들어하실거야." "정말?" 베이시가 마음에 들어하자 메이도 즐거워하였다. 같은 여자가 멋지다고 하니 메이의 기분도 상당히 좋아졌다. 친구라서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말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베이시는 메이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는 돌고 다시 앉자 정면으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치료사님이 그동안 모두 치료해 주셨잖아. 메이에게도 그렇게 할거야." "고마워. 베이시 말을 들으니까 힘이난다." 메이는 베이시의 말에 기운이 솟았다. 메이는 슬쩍 자신의 치마를 걷어올려 허벅지에 생겨난 검붉은 반점을 바라보았다. 일부 하녀들이 가지고 있는 피부병으로 치료가 늦어져 신관이 아니고서는 절대 치료될 수 없는 흉터이다. 하녀로서 생활이 나쁜 점중에 하나가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하녀의 생활이 어려운만큼 그녀들로서도 언제나 건강할 수는 없다. 병에 걸렸을 때 그녀들 스스로 치료해야만 했고 하녀를 관리하는 사람조차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설사 치료약을 준다 할지라도 분량이 많지않아 눈에 자주 띄는 얼굴과 팔 그리고 다리에 바르는게 고작이었다. 하녀의 일은 어렵다기 보다는 인내심을 필요로하는 것들이 많다. 육체적인 노동은 대개가 하인이 처리하고 시중드는 일에 하녀가 동원된다. 하녀의 인내심이 필요한 이유는 언제나 자신이 모시는 귀족의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녀를 배려하는 귀족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무더울 때 장시간 실외에 대기하고 있으면 땀이 한곳에 모여 땀띠가 생겨난다. 반대로 추울 때 장시간 실외에 있으면 피부에 동상이 걸리게 된다. 그것이 반복되면 결국 피부병이 생기게 되어 치료약을 필요로 하지만 하녀가 되기 위한 수습기간에는 함부로 귀족가 밖으로 외출할 수 없기 때문에 약을 바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결국 수습기간이 끝났을 때에는 그녀들이 자주 신경쓰는 얼굴과 팔 그리고 무릎아래의 다리 외에는 피부병 흔적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흉터에 가까워 치료라기 보다는 성형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관이나 마법사가 치료해야만 한다. 임금을 모아 엄청난 돈을 마련해도 여성 신관이나 여성 마법사를 찾아야 한다. 설사 만난다 할지라도 치료받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신관이 평민의 신분을 가진 하녀를 치료해 줄지도 의문이고 설사 치료해 준다고 해도 그 돈을 받고서 치료해주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그것은 여성 마법사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하녀가 남성 신관이나 마법사에게 치료받는 용기가 있다면 좀더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희망적이진 않다. 그런데 어떤 하녀가 치료라고 하지만 전신을 남자에게 보일수 있겠는가. "정말로 이 흉터들이 모두 치료될수 있을까?" 메이는 허벅지쪽의 은밀한 부위까지 흉터를 살펴보다가 이제는 손으로 목을 둘러싼 옷을 앞으로 잡아당겨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자신의 가슴에 남아있는 흉터를 살펴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알았어." 메이는 베이시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베이시로서도 자신의 친구를 위해 그런 수고쯤은 번거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여자들이 그렇듯이 여성은 자신의 몸에 상당히 신경쓴다. 그동안은 생활이 너무 힘들어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자 많은 후회가 생겨났다. 여자로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은밀한 부위에 피부병이 있으니 멋진 왕자님을 만나 결혼한다는 희망조차 꾸지 못한다. 사실 생활하면서 순결을 지키리라 생각하는 하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의외로 순결을 지키는 하녀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 메이와 베이시처럼 피부병이 남긴 흉터 때문이다. 귀족의 신분이야 성적 욕망을 위해서 하녀는 물론이고 다른 귀족과 마음껏 즐길수 있는데 끔찍한 흉터가 있는 하녀와 즐기려 들겠는가 말이다. 지금까지 메이와 같은 고통을 겪는 파도루 가문의 하녀들은 그것에 순응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꿈과같은 사건이 한 달 전부터 일어났다. 평생 치료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피부병의 흉터가 치료된 하녀가 생긴 것이다. 그 하녀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 말은 피부병 흉터가 있는 하녀들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파도루 가문의 건물 뒤쪽에 자리잡은 지하감옥에 카인이라는 뛰어난 치료사가 수감되었는데, 핸리 기사대장이 가끔씩 그 치료사를 빼내와 사람들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며칠 지나서 하녀들의 입을 통해서 사건의 내막을 좀더 자세히 알게되었다. 물론 그것을 알게 되었어도 하녀들끼리만의 일이고 절대 다른사람은 알수 없었다. 하녀라는 신분이 귀족을 시중드는 일이라 무엇인가 숨기거나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녀의 수습기간을 모두 거치지도 못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하녀가 알게된 자세한 내막은 핸리 기사대장이 치료사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엄청난 뒷돈을 받고 치료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치료를 하기 위해서 치료사의 시중을 들어줄 하녀가 필요했는데, 그 치료사의 시중을 들었던 하녀의 피부병 흉터가 저절로 치료된 것이다. 하녀들로서는 카인이라는 치료사가 핸리 몰래 하녀의 병까지 치료해 준 사실을 알고 비밀을 유지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된 피부평 흉터가 있는 하녀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여러 방법을 통해서 순번을 정하고, 핸리 기사대장의 부정부패가 더욱 극심하도록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하녀들의 기대에 하늘이 부흥했는지 핸리가 치료사를 부르는 횟수가 잦아졌고 그 때마다 치료사를 시중들었던 하녀는 다음날이면 흉터가 모두 사라졌다. 한 달이나 지속된 핸리의 부정부패로 40명이 넘는 하녀들이 치료의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녀들을 제외하고 알지 못했다. 백명의 하녀중에 피부병 흉터가 있는 하녀는 반가량 있었는데 이제는 채 열명도 남지 않았다. 메이는 오늘 하녀장으로부터 핸리 기사대장이 치료사를 부른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치료사의 시중을 들기위해 아끼던 하녀복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는 그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치료의 순번이 찾아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같은 방을 쓰는 베이시와 대화를 나누며 하녀장이 부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핸리 기사대장이라 할지라도 하녀에게 함부로 일을 시킬수는 없었다. 뛰어난 하녀는 한 명의 귀족만을 모시며 오직 그 귀족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지 않은 하녀라도 그녀가 맡은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여러가지 차질이 이루어질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귀족이 하녀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하녀장에게 말하고 하녀장은 공평하게 하녀에게 일을 분배한다. 이런 체제 때문에 핸리가 벌이는 부정부패에 각기 그때마다 다른 하녀가 시중을 들어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가 순번대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녀장도 결국은 하녀라 그 위험을 감수해 준 것이다. 타박타박. 메이는 밖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낄 정도로 긴장하였다. 발자국 소리가 방에 가까워지자 멈추더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하녀장의 늙은 얼굴이 드러났다. 하녀장은 가장 경력이 많고 뛰어난 하녀만이 할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우대받는 하녀장이 직접 메이와 베이시의 방까지 찾아왔을 정도이니 얼마나 이 사건이 중대한 것인지 알수 있었다. "메이 준비되었으면 당장 별관에 가서 준비하거라." "네? 네. 하녀장님" 메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는 얼굴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별관을 향해 뛰어갔다. 하녀장이 뛰어가는 메이에게 무슨 말을 했지만 메이에게는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갖고있는 흉터를 치료사가 치료해주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면 치료사를 잘 시중들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치료사님은 분명히 억울하게 잡혀오신 것이 분명해. 그러니 그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거지.' 메이는 치료사에 대한 상상을 끝도없이 하면서 별관에 도착하였다. 별관은 손님을 받는 곳이지만 자주 방치된다. 대개 다른 귀족이 찾아오면 직접 가문의 건물에 모시고 별로 중요한 귀족일 경우에만 별관에 들인다. 물론 별관도 여러개 있어서 손님의 중요도에 따라 대우도 다르다. '깨끗한 물을 먼저 준비해야지.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핸리는 치료사가 필요한 것을 듣고서 하인이나 하녀를 통해 준비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깨끗한 물이다. 메이는 다른 하녀를 통해서 치료사가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사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녀들이 귀족의 기본상식을 모두 숙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정령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본다면 귀족도 정령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것을 알수 있다. 하지만 카인이라는 치료사가 깨끗한 물이 있을수록 치료의 힘을 높일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절실하게 알고있다. 하녀들로서는 자신들도 핸리 몰래 치료사에게 치료받고 있는 상황이라 직접 최상의 깨끗한 물을 준비했다. 깨끗한 물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슬을 최대한 모으고 그것이 부족하면 숲속에까지 몰래 다녀오기까지 하는 정성을 쏟았다. '조심해야지. 한 발. 두 발.' 메이는 다른 하녀의 도움으로 이슬로 모아둔 깨끗한 물을 조심스럽게 치료사가 머무를 방으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이 물을 쏟는다면 그동안의 정성이 물거품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발걸음까지 계산하며 움직였다. 준비라봐야 깨끗한 물과 천조각이 전부이지만 메이는 이것을 준비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저리로 들어가면 된다. 아무말도 하지말고 조용히 있으면 치료사를 보내주마." 메이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방에서 조용히 있었다. 핸리가 하는 일은 좋지않은 것이라 하녀를 이용해도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한다. 메이는 핸리에게 뒷돈을 주고 치료받을 환자가 도착했으리라 생각했다. 잠시후 환자라 생각되는 사람이 들어왔다. 메이는 들어온 환자가 상당히 눈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좀더 면밀히 바라보고는 가문에서 수련기사 생활을 하고 있는 몰락귀족임을 알아챘다. 몰락귀족은 대개 다른 귀족가문에 몸을 의탁한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비슷한 권력의 귀족가문에는 고개를 숙이지 못하고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상위 권력을 지닌 귀족의 밑에서 일하게 된다. 귀족이라도 아무일도 하지 않은채 먹고살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다수가 명예를 매우 중시하기 마련이다. 메이는 방으로 들어온 수련기사의 이름은 알수 없지만 그의 상처가 무엇인지는 알수 있었다. 수련기사가 수련을 받는 도중에 가장 조심해야 할 상처는 바로 검술에 영향을 주는 상처이다. 특히 오른팔에 상처가 생길경우 기사로서의 생활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대부분 상처를 입어도 금새 치료되기 마련이지만 뼈가 파손된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차라리 뼈가 부러진다면 그 부분이 시간이 흘러 붙을경우 좀더 강해지는 경향까지 있으니 좋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뼈가 파손된다면 치료가 수년이 걸리기도 하기 때문에 검술수련을 그만두어야한다. '어떻게 다쳤기에 어깨가 저렇게 되었지? 검에 맞았나?' 메이가 바라보고 있는 수련기사의 오른쪽 어깨는 상당히 엉망이었다. 누가 치료했는지 몰라도 꿰맨 자국이 많았고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눈쌀을 찌푸릴 정도로 징그러웠다. 어깨의 모습도 왼쪽 어깨와 균형이 맞지않고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었다. 평생 검술은 커녕 제대로 팔을 사용할지도 의문이 생겼다. 어깨를 다친 수련기사는 메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준비되어 있는 침상에 가만히 누웠다. 수련기사가 조용히 누워있는 이유는 핸리에게서 그렇게 행동하라고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방에 드나드는 사람이라야 치료사와 치료받을 환자 그리고 그들을 시중들어줄 하녀가 전부이지만 그들이 말을 많이 할수록 핸리에게는 기분이 좋지가 않다. 분명히 핸리 본인의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카인이라는 치료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방은 적막만이 흘렀고 분위기는 상당히 막막하였다. 하지만 이 적막한 긴장감도 치료사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만큼 크지는 않았다. 수련기사는 카인의 모습을 보고 상당히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대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메이는 처음부터 빛나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먼저 치료를 받았던 하녀로부터 치료사의 겉모습을 미리 자세히 들었었기 때문이다. '정말 어린 모습이시네. 나보다도 더 어릴 것 같은데. 하지만 기사대장님까지 이분을 이용해 수련기사를 치료하실 정도이니 실력은 최고일거야. 그동안 나하고 같은 처지의 하녀들을 치료해 주셨으니 나의 몸에 있는 흉터도 모두 치료해 주실거라 믿어.' 메이는 카인이 방으로 들어올 때부터 눈도 감지않고 바라보면서 자신만의 상상에 빠져들었다. 방으로 들어온 카인은 침대에 누워있는 수련기사의 어깨를 잠시 찡그린채로 바라보더니 눈을 감고서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그리고 눈을 뜨더니 메이가 준비해 둔 깨끗한 물을 바라보았다. "정말 깨끗한 물이군요." 메이는 카인의 말에 감명받았다. 그 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메이가 가장 고생했고 다른 하녀들까지도 고생했다. 그 고생이 카인의 한 마디에 잊혀져 버렸다. 카인은 한참이나 물을 만지며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대부분 이슬로 모은 것 같은데." 메이는 카인의 말에 '어떻게 이슬인줄 아셨어요? 정말 고생하며 모은거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핸리가 밖에서 모두 듣고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핸리는 오러를 사용하는 뛰어난 기사로서 파도루 가문의 기사대장을 맡고있다. 지시한 내용대로 따르지 않으면 당장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수련기사도 그래서 핸리 기사대장과 뒷거래를 한 것이지만 함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악한 사람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의외로 악한 사람일수록 약속에 철저하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분노하고 살인도 서슴치 않는 것이다. 핸리는 뛰어난 실력을 갖고있는 반면에 권력과 부를 탐하여 명예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입이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님을 그를 따르는 기사들 모두가 알고있다. "두 분 모두 눈을 감아주세요." 카인의 말에 수련기사와 메이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메이는 참지 못하고 살짝 실눈을 떠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녀로 생활하며 배운 것중에 하나가 눈을 감은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약간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잔기술이다. 누구나 바라보면 눈을 감아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물을 사랑하는 운다인이여 이분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고 이분의 상처를..." 카인의 말은 길었지만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깨끗한 물에서 희끗한 무엇인가가 방안을 돌아다니며 수련기사의 어깨속으로 스며들었다. 수련기사는 잠시 움찔하더니 편안한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메이는 정말로 놀랐다. '방금 무엇이었지? 수련기사님의 어깨속으로 무엇인가 들어갔는데.' 메이가 안전부절하는 사이에 그녀의 손을 누군가 잡았다. 메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고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은 카인이라는 치료사였다. '나를 치료해 주시려는 건가보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핸리 기사대장님이 모르게 조용히 있어야지.' 메이가 카인의 손을 주시하는 잠깐 동안에 몸속에 변화가 찾아왔음을 느낄수 있었다. 그동안 메이가 알고있는 치료사라는 존재들은 대부분 약을 발라주는 존재였다. 신관이나 마법사는 손만 대면 치료한다고 하던데 카인이라는 치료사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이분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나도 내일이면 흉터가 모두 없어질거야.' 메이는 카인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메이의 고개는 끄덕인채로 곧바로 올려졌다. 카인이 손으로 고개를 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메이는 기쁜 마음에 어린 모습의 카인이라는 치료사를 바라보았다. 어린 모습이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크게 부담되지는 않았다. '왜 그러시는거지?' 카인이 손에서 작은 종이조각을 메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갖다대고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보였다. 메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카인은 그 모습에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 종이를 마법길드에 전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메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카인이 입에 손가락을 갖다댄 제스처에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카인의 간절한 모습에 메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지 몰라도 중요한 것 같았다. 메이는 방금 들려온 목소리가 자신의 귀로 들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카인이 잠시후 나가자 방에는 어깨에 상쳐가 있는 수련기사와 메이밖에 남지 않았다. 핸리 기사대장은 방안으로도 들어오지 않고 카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메이는 수련기사를 깨우기 위해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상처입은 사람이라 조심스럽게 깨우기 위해서 상처부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려고 말이다. "세상에 어깨가!" 메이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들어올 때는 어깨가 주저앉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꿰맨 자국까지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다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방으로 들어올 때에는 치료받는다고 하여서 어깨를 가리지 않은 상태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메이는 정신을 차리고 수련기사를 깨웠다. "수련기사님 일어나세요." "수련기사님" "수련기사님" 메이는 평민신분이라 귀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저 반복하여 부르는 방법으로 깨울 수밖에 없었다. 간혹 하녀가 주인과 친해져 흔들어 깨우기도 하지만 그 경우는 함께 자란 경우에나 가능하다. 하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것이 하녀로 성공하는 비결중의 하나이다. "으... 치료가 끝났느냐?" "네." 메이는 잠이깬 수련기사의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잠을 방금깬 사람은 누구나 신경이 예민해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부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어라? 어깨가! 어깨가!" 메이는 수련기사의 행동이 예상과 다르지 않음에 미소가 흘렀다. 자신도 내일이면 저와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치료사는 일부러 신경쓴 것처럼 항상 하녀의 몸이 밤에 치료되도록 했다. 그것이 고의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모든 하녀들은 치료사가 배려한 것이라 생각한다. 수련기사는 한 바탕 난리를 피우고 메이에게 자신의 어깨를 보여주는 행동을 했다. 정말로 기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중에 하나지만 수련기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기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기사가 되는 꿈을 포기한 상태였는데 단지 돈으로 모두 해결된 것이다. 수련기사는 핸리 기사대장이 없는데도 그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치료한 사람은 카인인데 핸리에게 감사하다니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메이는 수련기사가 나가자 방을 깨끗히 정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베이시를 비롯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하녀들이 축하인사를 건네주었다. 메이는 그 기쁨에 카인이 건네준 종이조각에 대한 생각을 잊었다. 밤이 되자 하녀장이 찾아와 메이에게 다음날은 방에서 편히 쉬도록 말해주었다. 메이는 너무나 기뻐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하녀복을 입은채로 다른 하녀들과 수다를 떨다가 결국 잠이 들었다. "으악! 흑흑흑흑흑" 아침이 되자 메이는 자신의 옷에 물든 끔찍한 현상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가장 아끼던 하녀복이 망가져 우는 것이 아니라 피부병으로 인한 검붉은 흉터가 치료되면서 그 흉터의 잔해물이 옷에 달라붙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옷에 검붉은 흉터로 물들었다는 사실은 자신이 치료된 사실을 알리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메이 정말 축하해." "고마워 베이시." 가장 친한 친구가 옷이 더럽혀지는 것도 잊은채 자신을 끌어안으며 축하해 주었다. 파도루의 하녀들은 좁은 방에 두 명이 지낸다. 하녀가 많다보니 이만큼 배려한 것이다. 다른 하녀들이야 어제밤에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다음이 베이시 차례지? 내가 이슬 모으는거 도와줄께." "응." 베이시가 메이의 대답에 웃음지었다. 베이시도 메이와 같은 피부병을 앓고 있었지만 운이 없게도 서로 순번이 늦었다. 메이는 자신을 축하해주는 베이시가 고마워 자신의 병을 치료한다는 마음으로 이슬을 모아준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아침은 하녀들에게 가장 바쁜 시간이다. 베이시는 자신이 맡은 일을 하기위해 방을 나섰고 메이만이 방에 남았다. 베이시가 나가자 메이는 자신의 옷을 모두 벗고 거울을 가져다 등까지 모두 살펴보았다. 이 순간을 위해 새 거울까지 준비하였다. 등까지 보려면 거울이 두개 필요하여 베이시가 사용하는 거울까지 이용했다. 찰랑찰랑. 메이는 방에 준비해둔 물과 천조각으로 몸을 깨끗히 닦아냈다. 원래 있었던 점을 빼고는 모든 흉터가 깨끗히 사라졌다. 심했던 흉터 부위는 피부색이 약간 달라서 이상하게 보였지만 그것은 저절로 변할테니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흉터가 사라진 것만으로 기쁨을 느꼈다. 방안에는 메이가 젖은 옷에서 풍겨나는 냄새가 역했지만 그것도 메이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메이는 옷을 입지도 않고 자신의 깨끗한 몸을 감상하였다. 훌륭한 몸매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의 깨끗한 모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가슴은 물론이고 검은숲의 사타구니 부위도 매우 깨끗했다. 이 모습으로 밖에 나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읔! 이게 무슨냄새지?" 정오가 되어서야 메이는 방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냄새는 자신의 몸을 닦아낸 천조각과 입었던 옷에서 풍기고 있었다. 너무나 기뻐서 천조작과 옷에서 풍기던 냄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는 이 역한 냄새를 참아내준 친구인 베이시가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녀가 오면 감사의 말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하녀복을 집어들었다. "가장 아끼는 하녀복인데 이제는 가장 못쓰는 하녀복으로 변했네. 핏물은 빠지지도 않을텐데." 메이는 하녀복에 흉터가 치료되어 물든 것이라 핏물이 많이 포함되어다고 짐작하여 옷을 버리려고 하였다. 가장 아끼지만 지금의 기분으로는 당장 파도루 귀족가에서 쫓겨나도 기쁠 것 같았다. "어라? 이것은!" 메이는 하녀복을 처리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다가 얇은 종이조각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종이조각은 치료사가 전해준 것으로 작은 소리로 '마법길드에 전해주세요'라고 말했었다. 사실 소리가 머리속에서 울렸던 것이라 그때 착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그때 목소리가 분명 치료사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자였던 것 같았다. "내가 착각한 건가? 그건 그렇고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메이는 종이조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하였다. 하녀로서의 기본은 귀족에 대한 비밀은 모두 지켜주는 것이다. 핸리의 부정부패에 대한 사실도 그와 거래한 사람 이외에는 절대 알지 못한다. 가끔 파도루 가문에서도 중대한 사건이 터지면 하녀를 고문하여 진실을 들으려고 하는데, 그때 훌륭한 하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것만이 힘없는 다른 하녀를 지켜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쉬는데 당장 전해줘야겠다. 내일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아니 평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희망을 전해준 분의 부탁이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메이는 옷장에서 다른 하녀복으로 갈아입고 종이조각을 숨긴채 방을 나섰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내일이면 마음이 바뀔 것 같았다. 인간은 무엇이든 잊어버리는 존재이다. 메이가 만약 하루만 더 지났다면 종이조각을 감히 마법길드에 전해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는 오늘 하녀장으로부터 쉬도록 허락을 받았으니 부탁을 들어주기도 안성맞춤이었다. 그저 종이조각에 적혀있는 것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단순히 생각했다. 메이는 종이조각을 살펴보고 그것이 글이 아님을 판단하고 자신과 연관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 사실은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모든 상황에 대해서 깊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카인이라는 치료사가 고마울 뿐이다. ------ [공지] 자음과모음 출판사와 출판계약 체결, 2004년 2월에 출판될 예정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5 회] 7. 자유 마법사 '그 하녀가 마법길드를 찾아갈까?' 나는 지하감옥으로 돌아오며 하녀에게 전해준 종이에 대해 생각했다. 핸리 기사대장은 오늘도 심한 상처입은 환자를 데려와 치료하도록 하였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 치료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마디런이 건네준 종이 때문에 일부로 환자를 기절까지 시켰다. 환자가 치료되는 동시에 기절을 하자 곧바로 하녀에게 종이조각을 손에 쥐어주면서 엘레스트라에게 부탁해 마법길드에 전해달라고 말했다. 밖에서 핸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녀에게 입을 통해 말을 할수가 없는 입장이라 정령에게 시켜서 마법길드에 종이를 전하다록 한 것이다. 정령은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각으로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말소리를 들을 염려가 없다. 다행히 하녀는 놀라긴 했지만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내가 손으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핸리의 감시 때문에 하녀 이외에는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사실 하녀에게 부탁을 하기에는 나로서도 부담이 되었다. 하녀가 어떤 입장인지 몰라도 파도루 가문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하녀 이외에 누군가를 만날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환자에게 부탁할 것을 그랬나?' 하녀 이외에도 만날수 있는 사람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치료한 환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핸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치료받으러 온 사람이라 부탁을 하기엔 뭔가 꺼림직했다. 하녀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파도루 가문의 하녀들은 왜 그런거지?' 그동안 핸리에 의해서 반강제로 치료를 한 사람만도 수십명에 가까웠다. 그때마다 환자와 치료하기 위해 시중들던 하녀는 모두 피부에 흉터를 갖고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수 있었던 이유는 치료를 편하게 하려고 물의 중급 정령인 운다인을 소환하지 않고 최상급 정령을 소환했기 때문이다. 최상급 정령은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세밀한 제어가 필요없이 생명력만 공급하면 스스로 모든 치료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주인님 누굴 치료할까요?' 내가 환자를 치료하도록 말하자 곧바로 엘레스트라의 황당한 생각에 전달되어왔다. 내막을 알고보니 엘레스트라는 하녀가 갖고있던 피부병 흉터를 가지고 두 명의 환자중에 누굴 치료할지를 몰라 내게 질문한 것이다. '불쌍하네. 온몸에 심한 흉터가 있다니 말이야. 그런데 하녀까지 치료해주면 내가 나가고 환자를 깨우고 방을 청소할 사람이 없을텐데.' 당장 하녀까지 치료해주면 무척이나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엘레스트라를 통해서 하녀의 몸에 있다는 흉터가 밤에 치료되도록 조치하였다. 내겐 힘들지도 않았고 무척 손쉬운 일이다. 처음부터 별다른 생각없이 하녀를 치료했던 것이고, 핸리가 환자를 데려와 치료하도록 시킬 때마다 시중들려고 들어온 하녀도 함께 치료되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너무 반복되다보니 파도루 가문의 모든 하녀가 피부병을 앓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카인 필요한게 있으면 말해." "네." 나를 지하감옥 3층까지 안내한 병사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지하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은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다. 가끔씩 병사들이 알게모르게 지하감옥 3층을 관리하는 6서클 마법사인 페이닌에게 부탁해서 2층으로 나를 데려가 병을 앓고있은 지하감옥 병사들을 치료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지하감옥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은 작은 질병에 많이 걸린다. 2층은 마법진이 없어서 정령술을 부릴수 있어서 치료할 수 있다. 물론 내가 도주할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아서 그렇게 할수 있는 것이다. 입구에 마법사도 반토막 낼 수 있는 뛰어난 병사들이 있는데 어떻게 빠져나갈수 있겠는가. 좁은 지역에서 마법사와 전사가 일대일로 마주칠 때 마법사가 이길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10m 이내일 경우에는 그 가능성 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아픈 병사님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고마워. 카인" 병사의 조심스러운 손에 이끌려 자유 마법사들이 생활하는 감옥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2층을 거쳐서 나가다보니 이곳이 좋은 곳임을 항상 생각한다. 2층에는 일반적인 감옥형태인데 반해서 3층은 음식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풍족하게 지원되기 때문이다. "카인 다녀왔니?" "네, 마디런님" 감옥에 돌아오자 가장먼저 마디런이 반겨주었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내게 종이조각을 건네주는 마디런의 인내심에 감동했다. 나 같으면 몇번 시도하고 포기했을텐데 말이다. "밤에 말씀드릴께요. 피곤해서 이만 자야겠어요." "그래." 나는 밖에서 감시하는 마법사들 때문에 마디런에게 사실을 이야기 할수가 없었다. 말하는 소리를 밖에서 모두 들을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종이조각을 받은 하녀도 무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쇠창살 밖에서 감시하는 마법사들이 저녁이 되자 사라지고 있었다. 지하에서 밤낮을 구별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그렇지가 않았다. 항상 하위 마법사들이 페이닌에게 마법을 배하기 위해서 찾아오데 그 시간이 낮이고 그들이 사라지면 밤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의 근무시간을 통해서 알수도 있다. 페이닌은 하위 마법사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대신에 그만큼의 대가를 받는다. 그에겐 파도루 가문에서 지원해주는 자금이 있기 때문에 굳이 돈이 필요없었고 정작 필요한 마법실험 준비에 그들을 이용한다. 마법 클래스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마법실험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하고싶어 한다. 하지만 자금과 그것을 도와줄 마법사가 있어야 가능하다. 만약 하위 마법사들이 마법실험을 도와준다면 그 준비가 빠르게 끝날수 있다. 페이닌은 마법실험의 준비를 하위 마법사에게 시킬수 있는 존재이다. 파도루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니 말이다. "카인" 마디런은 쇠창살 건너편의 감시자 대부분이 돌아가고 조용해지자 내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쉬이" 나는 조심스럽게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정말이지 오늘은 이 행동을 하루종일 하는 것 같았다. 하녀에게도 이렇게 하고 또 돌아와서 마디런의 대답에도 똑같이 행동하니 말이다. "어떻게 되었니?" 끄덕끄덕. 마디런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어 나의 어깨를 붙잡고 포옹했다. 눈물까지 흘리며 입모양으로 정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하지만 마디런의 기쁜 모습에 나는 실망스런 사실을 말해주었다. "별로 기대하지는 마세요. 사실은..." 나는 하녀에게 종이조각을 건네준 사실을 모두 말해주었다. 파도루 가문에 속한 하녀가 종이조각을 건네받고 마법길드에 전해줄 가능성은 벼락맞아 죽을 가능성과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종이조각을 건내준다면 마법길드에서 보상을 해준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상황은 그럴수가 없었다. 밖에서 핸리가 대기하고 있어서 말조차 할수 없는 상황이라 정령을 통해서 겨우 의사를 전달했던 것이라서 말이다. 그나마 하녀가 놀라서 기절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카인이다. "그것으로도 다행이야. 그나마 지금까지 아무일 없는 것을 보니 하녀가 마법길드에 전해주지는 않았어도 핸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 같네.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마디런은 하녀가 파도루 가문에 고발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았다. 그의 축처진 어깨를 바라보자니 나또한 힘이 없었다. "다음에도 주세요. 또 기회가 있겠지요." "아니 이제는 그만해야겠네. 생각해보니 이 생활도 이제는 적응되는 것 같으니 말일세." 마디런은 더이상 나에게 매달리는 것도 포기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하녀가 마법길드에 종이조각을 건네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연한 나의 느낌을 마디런에게 말할수 없었다. 절망스런 사람에게 일시적인 희망은 시간이 흘러서 더 커다란 절망으로 돌아오니 말이다. "마디런님 궁금한게 있는데요." 나는 절망스런 표정을 짓는 마디런을 향해 말했다. "무엇인데?" "마디런님이 전해준 종이를 살펴봤었는데 거기에 적힌게 정확히 뭐죠? 마법수식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복잡한 것 같은데요. 그게 뭔지 궁금해서요." 마디런은 나의 질문에 표정을 바꾸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의외로 마법사들은 마법에 대해서 질문만하면 금새 이렇게 표정이 변한다.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절망에 빠져도 마법사에게는 기분을 풀어주는 최고의 방법중 하나이다. 물론 실제로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것을 알려면 마법수식에 대해서 좀더 알아야 할거야. 카인이 배운 것은 자유 마법사들이 배우는 마법수식이지. 그것은 고대부터 사용하던 마법수식으로 매우 복잡하고 어려워. 하지만 마법길드에서는 수많은 고위 마법사들이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서 공식을 하나하나 만들어갔어. 그래서 결국은 지금에 이르러 간단한 공식으로 마법수식의 계산을 단시간에 이뤄내는거야." "정말이요? 그렇다면 마법길드에서 마법을 배우는 것이 더 좋겠네요?" 마디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한 질문에 나또한 빠져들었다. 그래서 마디런이 빨리 이야기하도록 재촉하였다. "모든 것에는 장점이 있다면 단점이 있기 마련이야. 공식이란 복잡한 수식의 계산을 이해력 없이도 계산해낼 수 있는 방법이야. 공식을 사용하더라도 본래의 수식계산을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겠지? 하지만 요즘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은 그 원리자체를 이해하지 않고 오직 공식만을 익혀서 마법을 발휘하기 때문에 정밀한 마법의 제어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시간이 단축되니 장점에 의해 단점이 가려진 것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자유 마법사님들은 왜 마법길드처럼 마법수식을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공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죠? 제가 배운 1서클의 마법수식을 모두 계산하는데 25분이나 걸렸잖아요. 공식을 첨가해서 마법수식을 계산했다면 좀더 시간이 단축되었을텐데 말이죠." "아무리 공식으로 마법수식의 계산을 단축해도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최대가 절반가량이야. 그리고 우리가 마법수식을 간결화하는 공식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알지 못해서야. 그 공식은 마법길드에서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도 연구되고 있지만 자유 마법사들은 각자 스승에게 전해받은 마법수식으로 공부를 하니까 공식같은 것이 있을리 없지. 물론 각자가 약간의 공식은 있겠지만 마법길드에 비해서는 거의 초급수준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자유 마법사들이 고전 마법수식을 사용하는 대신에 마법에 대한 힘은 약해도 제어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지." 나는 마디런의 말에 또다시 마법의 깊은 학문에 찬사를 보냈다. 수백 아니 수천년 동안이나 마법수식을 연구하고 그것을 간결화하기 위해 노력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수많은 공식이 탄생하였다니 마법사라는 존재는 모두 괴물이나 다름없다. 한가지 실망스러운 것은 자유를 선택한 자유 마법사보다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이 마법적 힘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마법수식의 공식을 마음껏 배울수 있으니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면 마법길드에 소속된 마법사가 높은 실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실망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느냐?" "마디런님의 말씀대로라면 자유 마법사분들은 마법길드 소속의 마법사보다 약하시겠네요." 나는 마디런의 질문에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유를 포기한 멋진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그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디런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말하지 않고 싶었지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듯 싶어서 그대로 말했다. "크게 본다면 그럴수도 있어.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장점이 있다면 단점이 있듯이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기 마련이지." 마디런은 의외로 나의 말에 화내지 않으며 말했다. "장점이요? 뭐가 좋은데요?" "고대의 마법수식을 모두 이해하면서 정작 마법을 사용할 때는 공식을 이용하는 방법이 최적이라고 누구나 알고있어. 하지만 그대로 행하는 마법사는 극히 드물지. 우리 자유 마법사들이야 공식이 없으니까 그렇다지만 마법길드 소속의 마법사들은 고대 마법수식을 배우는 시간에 차라리 공식을 좀더 숙지하여 마법수식의 계산속도를 높이거나 마나를 축적하는 시간에 투자하는게 더 이로울 것이라 생각하거든. 효율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도 오래걸리는 고대의 마법수식을 이용하는 우리들에겐 마법적인 제어가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지." 마디런은 마법적인 제어에 대한 설명을 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수가 없었다. 마법이라면 무조건 강력한 사람이 좋은 것 아닌가 생각했다. 정령사의 경우에는 높은 등급의 정령을 소환할 수록 그 정령자체가 제어력을 갖고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갖게된다. 물론 그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신력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는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말이다. "마법의 제억력이 뛰어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거에요?" "네크에게 1서클의 마법수식을 배웠으니 마법을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겠지? 가령 공격마법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3서클의 파이어볼(Fireball)을 예로들지. 마법 자체가 파괴적이라 제어가 어려워 단순히 적이 많은 지역에 사용하고 제어는 꿈도꾸지 못하는게 현실이야. 하지만 자유 마법사라면 마법을 구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파이어볼 마법이 사용될 지역을 약간이나마 제어할 수 있어서 적절한 도움을 주는 차이점을 보이는거지. 물론 효율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비효율적인 것도 사실이야." "그렇군요. 하지만 저라면 제어되지 않는 파괴력 보다는 제어가 되는 약함을 택하겠어요. 정령사도 높은 정령과 계약맺기를 선호하지만 단지 높은 정령을 소환하려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하위단계의 정령을 좀더 손쉽게 제어하기 위해서거든요. 그리고 강력한 정령일수록 정신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정령에게 피해를 입어서 죽는 경우도 허다하구요." 마디런의 기나긴 대화를 통해서 자유 마법사와 마법길드 소속의 마법사의 차이점을 자세히 알게되었다. 나또한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 대화를 지속시켰다. 단지 마디런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시작한 대화가 이렇게 심도깊은 소재로 바뀐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카인이 소환하는 중급 정령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정령을 한 번도 본적이 없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꼭 그런 기회가 있을거에요." 마디런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지금까지의 대화내용을 곰곰히 생각했다. 자유 마법사들이 마법길드에서 연구한 마법수식의 공식을 배운다면 좀더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텐데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능력에 대한 지식은 전수가 철저한 편이다. 기사들 조차도 오러를 사용하는 기술을 귀족가문에 따라서 극비로 두고서 다른 사람이 사용할 경우 도둑으로 간주하여 처참히 죽인다.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술도 임자가 있고 그것을 다른이가 사용하면 도둑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해져 내려오는 검술이 없는 몰락귀족의 기사는 황궁과 같은 곳에 소속하여 그곳에서 전수하는 검술로 기사의 꿈을 이룬다. 황궁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대체적으로 공개되어 있는 기술이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한 기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경우 귀족가문의 검술 못지않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도 지하감옥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하녀에게 무엇인가 기대를 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착각한 듯 싶었다. 그나마 속마음을 마디런에게 전해주지 않은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종이조각을 건네준 대상이 하녀인지라 마디런은 처음부터 신뢰성에 의심을 하였기 때문이다. "카인 마디런님한테 얘기 들었어. 정말 대단한 일을 했구나." "대단하긴요. 실패했는데요." 나는 네크의 말에 쑥스러운 행동을 보이며 대답했다. 며칠이 지나 아무런일도 일어나지 않자 마디런이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했다. 혹시라도 하녀에게 피해가 될까지 대놓고 말하지 못했지만 비유적인 표현을 들어서 모두 나를 칭찬해 주었다. 네크는 나에게 마법을 가르친 스승이며 가장 친한 친구나 다름없다. 나도 겉모습은 어리지만 살아있는 시간으로만 따져도 한참이나 늙은 사람이다. 그러니 마음이 척척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마디런은 친근하지만 친구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매우 진지한 사람이라 친절하긴 하지만 가벼운 농담도 할 수 없다. 하녀에게 건네준 종이조각 사건으로 자유 마법사들의 우대 덕분으로 감옥생활 며칠이 행복하긴 했지만 또다시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자 사비나에 대한 걱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유 마법사들은 마법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고 나는 외톨이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디런과 네크가 잠깐씩 대화를 했지만 마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나와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고통스런 일이다. '더 이상은 참지내지 못하겠어. 탈출해서 사비나와 함께 숲으로 도망이라도 가서 살아야지.' 내가 탈출한다면 크라이 숲에서 생활하는 가족이 피해를 입겠지만 그것을 막아낼 자신도 있었다. 파도루 가문에서 작은 일에 신경쓸지도 의문이고, 어쩌면 탈출하여 정령을 이용해 약간의 잔재주만 부리면 크라이 숲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탈출을 결심하고 땅의 최상급 정령인 노에아넨을 소환하여 대화를 하였다. 이곳 지하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땅굴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에아넨이 가진 힘이 어느정도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노에아넨이 가진 능력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동안 불과 땅의 정령을 이용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불의 정령이야 파괴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추울 때나 사용한 것이 고작이고, 땅의 정령은 엘프들을 위해 대화나 하라고 소환해 주었던 것이 전부였다. 노에아넨을 통해서 언제든지 땅굴을 만들어 탈출할 수 있었다. 또한 땅굴이 그대로 남지않고 예전 그대로 복원시킬수 있으니 탈출한 나를 추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노에아넨만 이용한다면 누구를 만나든지 땅으로 숨어들어 마음대로 피할수 있는 것이다. 수백 아니 수천명의 사람에게 포위해도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최상급 정령을 이용해 공격하거나 보호받을 생각만 했었지 이런 방법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동안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정령을 이용하는 방법은 소환자의 의지에 따라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어떤 능력이든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위력이 천지차이란 것을 머리로 느꼈다. 초급 마법사는 1서클의 단순한 라이트(Light) 마법을 밝히는데만 사용하지만 진정한 마법사는 전투중에 적의 시야를 혼란시키기 위해서도 사용한다. 내가 탈출 준비가 모두 끝났을 때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하감옥 3층에 갇혀있는 우리들에겐 희망으로 가득찬 소식이었지만 파도루 귀족가문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마법길드에서 우리들에 대한 소식을 모두 알게된 것이다. 처음에는 황궁과 마법길드에서 파도루 가문의 지하감옥 3층에 수감된 자유 마법사들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알게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지하감옥에 드나드는 병사들의 입을 통해서 황궁과 마법길드에서 파도루 가문에 엄청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더욱이 3서클 이상의 자유 마법사가 무려 30명이니 엄청난 전력을 숨긴 사실이 드러나 파도루 가문에 적대적인 귀족가문들도 함께 마법길드의 압력에 동참하였다. 지하감옥 3층의 경비가 좀더 강화되어서 자세한 소식은 알수 없었지만 이제는 수감된 자유 마법사들에 대해서 모두 알게된 것은 꿈만 같았다. 더욱이 병사들 말에 의하면 자유 마법사가 모두 31명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정확한 신상을 마법길드에서 공개되었는데 나의 이름도 그곳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1서클을 마스터한 자유 마법사로 네크의 제자 카인' 자유 마법사들은 내가 종이조각을 건네준 하녀가 그것을 마법길드에 전해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30명의 자유 마법사 신상이 정확히 밝혀질리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디런이 건네준 종이에 고대 마법수식을 이용해 적은 사실이라 고대 마법수식을 배운 마법사만이 알수있는 사실이다. 다행인 것은 나또한 조만간 나가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지 1서클의 자유 마법사란 호칭이 나에게 붙어서 정말 황당했지만 말이다. 물론 1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다. 무려 25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필요하지만. 마디런은 종이가 마법길드에 전해지면 나를 함께 데려간다고 했지만 그것이 설마 이런 방법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하감옥 3층에 마나억제 마법진을 만든 페이닌은 우리의 사건에 대해서 알고 머리끝가지 화가나 우리에게 갖은 횡포를 부렸다. 음식을 주지 않았으며 감옥에 들어와 지급했던 개인물품을 파괴하였다. 또한 병사를 시켜 구타까지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함부로 몸에 상처를 주지는 못했다. 조만간 황궁과 마법길드의 압력에 모두들 풀려나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제국에 큰 전력이 되는 마법사란 존재를 함부로 감금시킨 사건은 말린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퍼졌지만 나와 자유 마법사들은 알수 없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6 회] 8. 소문 가비크는 5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로 마법길드 소속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는 총 책임자이다. 그는 6서클을 눈앞에 둔 마법사이지만 그 깨달음의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를 모르고 있다. 6서클 이상의 마법사를 마도사라 칭하며 우대하는 이유가 그것이 노력만으로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길드에서는 중요한 직책에는 5서클의 마법사에게 맡기며 처리하고 있다. 마법길드는 모든 일처리가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두 각자가 맡은 일만 처리하면 문제가 생길수가 없다. 그래서 길드에서 총 책임자를 맡고있는 가비크는 특별히 할일이란 것이 없었다. 가끔씩 그가 처리할 일이 생기긴 하지만 특별히 신경쓸만한 사건은 없었다. 얼마전 고전 마법수식으로 적혀진 종이가 전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비크가 마법길드의 책임자로 있지만 그 자리를 모두들 맡기 싫어서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다. 마법사란 존재가 마법학문에 미친 존재들인데 권력을 탐하고 싶어하겠느가. 간혹 권력을 탐하는 마법사도 있긴 하지만 그런 별종이야 어느 곳에든 있기 마련이다. 마법길드의 중요한 사건은 대개 마법길드에 속해있는 마도사란 존재들이 상의하여 결정한다. 문제는 6서클 이상을 마스터한 마도사들은 대부분 이런일을 귀찮아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가비크는 자신의 손까지 올라온 고전 마법수식을 힘들게 풀어냈다. 자신이 배웠던 마법수식은 대개가 공식 위주인지라 풀이가 정확하진 않았지만 얼핏 무슨 내용인지 알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모든 마법사가 고전 마법수식을 배우지 않지만 최소한 높은 서클로 올라갈수록 그것을 배우려고 마음을 바꾸는 마법사들이 늘어나는 편이다. 그것이 깨달음을 얻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서클이 낮을 때는 알면서도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고전 마법수식으로 마법을 배우고 서클이 높아졌을 때 마법공식을 배우는 방법이 마도사가 되는 지름길인데도 말이다. 종이에 고전 마법수식으로 적혀진 내용을 모두 알게되자 가비크는 마도사 회의를 주최하였다. 자유 마법사들이 귀족가에게 억류되어 있다는 내용이 종이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마법사들은 귀족들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편이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얻은 마법사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인생을 즐기는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 이외에도 마법사는 제국에 전력이 되는 존재라 제국적으로도 보호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귀족가에서 한 두명의 마법사만 억류하고 있었다면 마법길드에서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도사들의 결정이 내려지자 가비크는 그에 따라서 황궁에 모든 사실을 알리고 즉시 파도루 귀족가문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서로 입장이 있는지라 문서형식을 통해서 정식으로 통보하고, 즉시 31명의 자유 마법사들을 인계하라고 전한 것이다. 마도사들의 결정이 빨리 내려진 이유중에 하나가 그들 31명 전원이 마법길드에 소속한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기도 하여서 압력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황궁과 마법길드 그리고 다른 귀족가의 반발에 결국 파도루 가문도 그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쨍그랑. 쾅. 퍽퍽. 파도루 가문의 가주인 루바인은 책상에 올려진 물품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져 화풀이를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있는 집사는 겁에질려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집사로서는 요즘들어 가문에 자주 오고있는 각종 편지를 전달해 준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평소에는 머리숙에 아첨이나 하는 것들이 감히!" 루바인은 집사가 건네준 편지를 읽고서 도저히 참지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지하감옥 3층에 억류된 자유 마법사에 대한 정보가 어디서 흘러갔는지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가문의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데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알고싶지 않아도 첩자 노릇을 한 자를 편지를 통해 알게되었다는 점이다. '...관계로 메이라는 하녀의 안전을 보장하기 바랍니다. 하녀의 안전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발생하였다는 정보가 있을시에 발생되는 가문의 명예에 대해서는 황궁에서도 책임질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루바인은 다시 황궁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며 어이없는 사태에 할말을 잊었다. 황궁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며칠전부터 시작된 압력에 이어서 자신도 듣도보도 못한 메이라는 하녀에 대해서 적혀 있었다. 황궁에서는 자유 마법사들을 마법길드에 넘길 때에 그 하녀까지도 함께 인계하라고 편지로 통보한 것이다. '이 계집년이 문제의 원인이군.' 아무리 바보라도 편지를 읽게되면 누가 지하감옥에 수감된 자유 마법사의 신병에 대해서 알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메이라는 하녀를 잡아들여 온갖 고통을 선사하고 목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편지에도 적혀 있었다시피 그렇게 행동하면 파도루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만다. '참자. 참아야 해. 명예를 잃으면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으니까.' 가문에 머무는 파도루의 성을 쓰는 귀족만 수십여명이 넘어서 루바인도 모두 알수 없을 정도로 많다. 거기다 그 귀족을 따르는 기사, 하인, 하녀 등이 루바인의 결정에 따른다. 그런데 가주로서 고작 첩자노릇을 한 하녀를 죽인다면 구설수에 오를수도 있는 것이다. 본래 루바인의 입장에서 하녀가 알린 사실은 첩자 노릇이었지만 제국적으로 본다면 제국에 충성한 것이다. 엄연히 마법사가 자의로 귀족에게 귀속되지 않는 이상은 마법사의 억류는 엄연히 제국의 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놈들까지 덤벼들다니 두고보자." 루바인은 또다른 편지를 개봉하여 읽어보고서 더욱 흥분하여 외쳤다. 집사는 분위기를 보아서 살짝 가주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옆에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까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직책상 방밖에서 가주의 온갖 욕설을 들으며 대기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가주라는 직책이 있어서 흥분하면서도 자기가 할일은 잊지 않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루바인의 입장이었다면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도 남을 상황이다. 루바인이 가장 화가났던 점은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자유 마법사도, 첩자노릇을 한 하녀도, 자유 마법사들을 풀어주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황궁과 마법길드도 모두 아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온갖 아부와 친하게 지내며 친분을 쌓던 가문이 상황이 어려워지자 도움을 주기는 커녕 반대로 황궁과 마법길드의 압력행사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벼룩보다도 못한 놈들 내가 언젠간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다!" 루바인의 분노는 절정에 이르렀지만 상황판단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가 가주라는 직책을 얻기까지 많은 친족의 허락을 받아낸 것은 자신의 감정 변화에도 절대 할일을 잊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집사 어디있나?" "네, 가주님." 집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주가 부르는 소리에 재빨리 들어왔다. 집사도 엄연히 귀족이긴 하지만 파도루 가문에서는 감히 이름도 들이밀 수 없다. 파도루 가문에서 머무는 귀족만도 엄청난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관리하는 집사를 귀족으로 뽑는 것은 관리상 어쩔수 없는 일이다. 다른 귀족가야 집사를 똑똑한 평민으로 뽑겠지만 파도루 가문은 엄연히 대귀족 가문이다. "내일 황궁과 마법길드에서 사람이 찾아오면 지하감옥 3층에 머물고 있는 31명의 자유 마법사와 메이라는 하녀를 인계해 주도록 해라. 모든 것을 집사가 직접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하감옥 3층에 있는 수감자중에 한 명은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마법사가 아니라 정령사인데 인계합니까?" "황궁과 마법길드에서 마법사라는데 그런 사소한 걸로 문제일으킬 생각 없으니 그대로 인계하게." 집사는 루바인 가주의 책상에 있는 편지를 조용히 집어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제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황궁과 마법길드에서 보내준 편지를 직접 읽어봐야 했다. 가주가 직접 세세한 것까지 신경쓰지 않을테니 말이다. 사건이 터지고나서 핸리 기사대장이 루바인에게 찾아와 정령사에 대한 인계문제를 꺼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한 명이 마법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참으로 웃긴 상황이었다.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장할 경우 루바인의 입장에서 좀더 상황이 발전될 것을 우려해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핸리 기사대장은 사실 카인이란 정령사가 하녀를 통해 자유 마법사의 정보가 유출되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왜 정령사가 자유 마법사로 둔갑해서 알려졌는지 의아하게 생각될 뿐이다. 더욱이 가주가 정령사까지 마법길드에 인계한다는 소리에 질겁했다. 그를 이용해 많은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령사에 대해서 가주를 찾아가 인계의 불합리를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 자유 마법사를 마법길드에 인계하는 상황은 파도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조용히 이루어졌다. 마법길드의 마도사들이 파도루 가문을 찾아가 마법진을 이용한 텔레포트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길드에서는 곧바로 31명의 자유 마법사를 가입시켰고 그들의 신상(身上)을 문서화시켰다. 마법길드에서는 가입된 마법사의 정보를 상세히 기록한다. 가장 중요시되는 마법적 능력부터 시작해서 가족사항까지 말이다. 자유 마법사에 대한 신상정보는 검증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신상정보의 조사가 끝나면 마법 클래스와 능력을 직접 시험한다. 마법을 구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마나의 제어력이 얼마나 높은지까지 말이다. 마법길드의 장점이라면 마법사의 재능에 따라서 마법정보를 건네준다는 것이다. 파괴력이 높은 마법사가 있다면 그에게 파괴력 계열의 마법과 그 마법이 일으킬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한다. 어떤 경우에는 깨달음에 대한 도움까지 주기 때문에 노력없이 클래스를 높이는 경우도 가끔 있다. 마디런과 네크는 물론이고 다른 자유 마법사의 조사가 끝나자 내 차례가 이어졌다. 자유 마법사에 대한 조사는 마법길드에서 큰 사건인지라 길드에 많지않은 마도사까지 나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름을 말하세요." "카인이에요. 성은 없습니다." 결국 아무런 변명도 없이 내 차례가 돌아오고 말았다. 원래는 중급 정령사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엄청난 마나의 분위기를 풍겨내는 마도사는 물론이고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어린 모습이고 마지막 순서인지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 클래스를 말하세요." "저기 마법을 직접 구현한 경험이 없어서 질은 모르겠지만 1서클 마법사 같은데요." "같다니요? 그게 무슨말인가요?" 아무런 생각없이 질문을 하던 서기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대답이었다. 1서클 마법사 같다니 말이다. 1서클은 마법사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대개가 수습 마법사라든지 아무개의 제자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마법 서클을 물어보니 어쩔수 없는 대답이었다. "사실은 제가 1서클 마법에 대한 수식만 배웠거든요." "뭐라구요?" 서기 마법사가 또다시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1서클의 마법수식은 귀족들도 교양으로 배우는 부분이다. 대부분 마나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1서클의 마법수식을 모두 마스터해도 절대 1서클의 마법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나를 깨닫지 못하니 말이다. 서기는 마도사를 비롯해 마법길드의 중요한 분들이 모인 자리인지라 차마 화내지 못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마나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마법사라 부르지 않는 것은 아시죠? 그렇다면 카인씨는 자유 마법사가 아닌가요? 분명히 3서클을 마스터한 네크의 제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기회가 없었네요. 사실 저는 마법사이기 이전에 정령사였습니다." "뭐라구요? 정령사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물과 바람계열의 중급 정령사입니다. 직접 보여드릴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기록을 담당하던 서기 마법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마법사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주변에 얇게 파동치는 마나를 바라보며 마법길드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말이지 마법사가 이렇게 많을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뭐! 중급 정령사?" 갑자기 나하고 대화를 나누던 서기 마법사가 달려간 곳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고 무슨일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30명의 자유 마법사들도 조사가 모두 끝났기에 나에 대한 조사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법 클래스야 간단히 마법을 구현하면 쉽게 증명되었기에 문제도 없었고 신상 조사야 말하면 책상에 대기하는 서기 마법사가 적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중에 길드에서 사람을 파견해 조사한 신상을 다시 확인하겠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법길드를 맡고있는 가비크라고 합니다." "아! 네." 나는 서기 마법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반대편에 놓여진 의자에 앉자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령사라는 것 때문에 서기가 바뀐 것 같았다. 더욱이 가비크 뒤에는 엄청난 마나의 기운을 뿜어내는 마도사라 불렸던 마법사들까지 모여들어 나를 동물원의 원숭이 바라보듯이 쳐다보았다. "네크씨도 이리로 와주시겠습니까?" 가비크는 네크도 불러서 내 옆에 앉도록 하였다. 이미 네크의 신상조사가 끝난 상태라 그가 나의 스승인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자유 마법사들은 자신들을 지하감옥에서 벗어난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각별하여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은 정령사란 존재 자체와 왜 자유 마법사들의 틈에 있었는지 궁금해서 관심을 보였다. "먼저 카인씨에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카인씨가 방금전에 꺼내셨던 말씀 때문에 조사를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높임말을 쓰는 가비크의 공손한 태도에 아무렇지도 않은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였다. 이 자리는 31명의 자유 마법사를 영입하는 자리라 매우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더구나 마법사들이 꿈꾸는 6서클 이상의 마도사까지 지켜보는 상황이라 긴장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마법길드의 마법사들도 마도사를 보기가 힘든 처지이기 때문이다. "카인씨는 네크씨의 제자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물론입니다." 가비크의 질문에 나와 네크가 대답했다. 가비크가 질문을 하고서 네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대답하길 기다렸기 때문에 함께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방금전에 조사를 담당자에게 꺼내셨던 말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가비크의 대답을 듣고 이것을 어떻게 모두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한숨을 몰아쉬었다. 네크는 나의 한숨 소리를 듣고 팔꿈치로 나를 치더니 어깨를 으쓱대며 무슨 말인지 말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전에 마법 서클을 물어보길래 1서클 마법사 같다고 대답했거든요. 그리고 나는 마법사 이전에 정령사라고 대답했더니 신상조사 담당자가 이분으로 바뀐 거에요." "그게 뭐 어려운 대답이라고 그러냐? 내가 얘기해 줄께." 네크는 나의 말을 듣더니만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책상 건너편에 앉아있는 가비크를 향해 씨익 웃더니만 두 팔을 걷어부쳤다. 네크의 다혈질 성격이 드러날 조짐이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남의 일에 항상 참견하고 답답한 것은 도저히 참지 못하는 성격을 말이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죠. 카인은 우리가 수감되어 있을 때 치료사로 이름을 날리던 놈입니다. 그런데 재수없게 파도루 귀족가의 사람을 죽인 범죄자를 치료해 주는 바람에 우리와 같이 수감된 거죠. 그리고 지하감옥에서 나와 만나고 제자가 되어..." 네크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시시콜콜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가비크도 막을 수 없었다. 문제는 네크가 나에게 마법수식을 가르칠 때의 이야기까지 모두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30명의 자유 마법사를 영입하는 엄숙한 분위기가 네크 때문에 폭소를 자아내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 카인은 1서클 마법사가 분명한 것이죠. 문제는 25분이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말입니다. 거기 마법 서클란에 1서클 마법사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네크는 가비크 앞에 놓여진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조사항목에 어떻게 적어야 할지도 일일이 말했다. 네크는 심각하기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마도사는 물론이고 모든 마법사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푸하하! 그럼 1서클이 맞겠네." "그럼 사실대로 적어야지." "킥킥킥" 나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있을수 없었고 네크는 사람들이 웃자 덩달이 기분이 좋아졌다. 가비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네크와 나를 바라본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웃던 마법사들이 나름대로 웃음을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작은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 출신이죠?" "카르시온 제국에서 최남단에 있는 크라이 숲입니다." "정령사라고 하셨는데 제가 정령에 대해서 잘 모르니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가비크의 말에 어느정도까지 밝혀야 할지 몰랐지만 어차피 마법길드가 큰 단체이니 솔직히 나가기로 했다. 나중에 들통나게 될 거짓말을 하여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말이다. 물론 정령의 소환능력은 감출 생각이다. "크라이 숲에는 100여명에 달하는 엘프들이 있습니다. 그 엘프 마을의 장로님에게서 직접 정령술을 가르침 받아서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중급 정령사입니다." "마법사와 정령사는 의무적으로 제국의 전쟁에 일년 이상을 참가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셨나요?" "제 가족이 모두 정령사인데 제국의 전쟁에 의무 때문에 참전했다가 죽은이가 많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증서도 있으며 황궁에 기록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가비크는 마법사와 정령사가 짓게 될 의무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카들이 태어나 전쟁에 참여했다가 죽었기 때문에 의무를 따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곤란한 문제가 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마법길드는 가입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3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3서클 이하의 마법사가 이곳에 많이 있지만 그들은 단지 마법을 배우기 위한 사람들이지 정확히 길드에 소속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카인씨가 조건에 부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카인씨는 저희 길드에 가입하지 않을경우 돌려보내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자유 마법사분들이 카인씨의 가입을 주장하니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편법을 이용해 가입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마법길드의 가입조항에는 3서클 이상의 마법사 이외에도 특별한 능력을 갖고있는 분에게 허락하고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가비크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할말을 잊었다. 사람이 이렇게 말을 잘할 수 있는지 말이다. 나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가입만 처리되면 파도루 가문에 돌아가는 일이 없으니 별다른 불만사항은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곤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마법길드에 가입을 하게되면 그 등급에 따라서 대우가 다릅니다. 보통 마법사는 마법 서클로서 등급을 결정하는데 정령사의 경우는 같은 등급이라도 차이가 많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급 정령사는 3서클에서 5서클 사이의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데 어느 정도이신지 직접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가비크의 질문은 정말로 곤라한 질문이었다. 마법사에게 마나를 얼마나 잘 다루는지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물론 상위 클래스의 마법사는 곤란한 질문이 아니겠지만 하위 클래스의 마법사에게는 해서는 안될 질문중에 하나이다. '어떻게 대답해야하지?' 그나마 가비크가 꺼낸 이야기도 정령사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정령사의 능력 자체도 모르는 반면에 가비크는 중급 정령사가 3서클에서 5서클 사이의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있다. "크라이 숲의 엘프장로에게 직접 사사받은 정령술이라 뛰어난 편입니다. 아마도 5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와 비슷할 것입니다. 파괴적인 면에서나 방어적인 면에서 모두 말입니다." "네? 5서클이요?" 가비크는 나의 말을 듣더니 바로 반문하였다. 그의 반문은 당연한 반응이다. 마법사의 기준으로 살펴볼 때 깨달음을 얻어 마도사가 되기 직전의 경지가 5서클이기 때문이다. 이제 갓 성년을 벗어난 듯한 어린 모습의 내가 그렇게 말하니 어이없을 것이다. 주변에서 바라보던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이나 나를 알고 지내던 자유 마법사들도 가비크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카인 정말이야? 잘못 알고있는거 아냐?" 가비크가 묻기도 전에 옆에 앉아있는 네크가 더욱 놀라서 말했다. 자신이 열심히 1서클의 마법수식을 가르친 카인이 그 자신보다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령사의 등급에 대해서 기본적인 상식은 알고 있었지만 중급 정령사가 높아봐야 3서클의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인줄 알았다. 사실 가비크가 5서클이라는 말까지 꺼낸 사실은 마법길드에 정리된 정령사에 대한 기록 때문이기도 한 것이지만 주 목적은 상대방에게 예의상 한 말이었다. "제가 마법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는지 네크님이 더 아시지 않습니까. 절대로 잘못 말한게 아닙니다." "증명할 수는 있는거야?" 가비크는 네크가 자신의 말을 대신하여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 실례되는 말이기 때문에 나와 친근한 네크가 꺼내니 다행이라 생각한 것이다. 주변에서 듣고 있는 사람조차도 네크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다. 단순히 증명하면 해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5서클의 마법사와 대결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마법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5서클의 마법사와 이자리에서 대결하면 되겠네요." 네크는 당장 증명하겠다는 나의 행동에 신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용병들의 틈바구니에서 생활한 마법사인지라 싸움이라면 무조건 좋아한다. 더구나 자유 마법사들은 오래도록 지하감옥에 설치된 마나억제 마법진 때문에 지금도 마법을 구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수년을 지하감옥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 마법사들이 마나가 느껴질 때 그것은 성욕에 버금가는 쾌락인 것이다. 그리고 마법이 사용되는 싸움까지 보게 된다면 그동안의 자하감옥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약간이나마 풀릴지도 모른다. 내가 네크의 대화를 끝내고 가비크를 바라보자 그는 고심에 빠지더니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도사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그가 가기도 전에 마도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돌아왔다. 마도사들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관심이 모두 이곳에 쏠려 있어서 굳이 상의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정령사와의 싸움을 보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은데." "그런데 정령사는 마법사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나? 그런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그러네." 주변에서 길드 소속의 마법사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나를 포함해서 31명의 자유 마법사들을 영입하기 위한 마법길드의 장소가 갑자기 깨끗히 치워지기 시작했다. 가로와 세로 각각 50m 크기의 넓은 장소였지만 많은 길드의 마법사들이 모여 있어서 복잡했는데 대결을 위해서인지 빠르게 청소되었다. 그리고 청소된 바닥의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주변에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대결시 사용될 마법이 주변으로 날아갈 것을 대비한 것이리라. 마법길드에서 마법대결은 실전을 높이기 때문에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의 대결이 있을 때는 항상 관전하는 사람이 많다. 엇비슷한 능력의 마법사가 벌이는 대결이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은 중급 정령사를 구경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카인 정말 5서클의 마법사와 대결을 벌여도 되는거야?" 네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한 달을 넘게 지하감옥에서 생활했던 자유 마법사들이 모두들 관심을 보이며 나를 걱정하였다. 나로서는 앞으로의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실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가비크라는 사람이 능력에 따라서 대우가 다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5서클과 엇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마도사라는 분들까지 계시잖아요. 설사 다친다 하더라도 금방 치료될 거에요." "정말 그렇구나. 그럼 멋진 모습을 기대하마." 마디런이 힘내라고 등을 두들겨주며 말했다. 자유 마법사들이 걱정한 이유는 그들이 대부분 3서클과 4서클을 마스터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3서클의 파이어볼 마법만 하더라도 일반 병사들 수십명은 눈깜짝할 순간에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마법이다. 그런 마법이 한 명에게 집중된다면 정령사인 나라 할지라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방어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이다. '최상급 정령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소환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지.'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대결 도중에 최상급 정령이 소환되는 경우이다. 최상급 정령은 이성을 갖추고 있어서 계약자가 위험할 경우에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소환되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최상급 정령에게 나의 뜻을 알리고 최대한 내가 위험한 상황이 찾아오지 않도록 해야했다. "준비가 끝나셨나요?" 가비크가 자유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인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 네." "저와 싸우실 분은 누구인가요?" 나는 일단 대결을 할 대상이 누구인지 가비크에게 물었다. 자유 마법사들이 그것이 궁금한지 가비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접니다. 제가 직접 대결을 해야 증명하는데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마법길드의 중대한 직책을 맡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나요?" 대결할 대상이 지금까지 나의 신상조사를 한 가비크라니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마법길드의 책임자가 6서클 이상의 마도사가 맡아야하는거 아닌가 생각했다. 설마 가비크란 사람이 5서클의 마법사일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아하! 누구나 오해하고 있지요. 자유 마법사분들은 마법사이시니 다들 아실테죠? 마도사라 칭하는 분들은 이런 일을 하기 싫어하시거든요. 오직 마법만 연구하시며 생활하시고 있으니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수 있겠다 싶었다. 마도사가 문서를 정리하는 모습은 아무리 상상해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대결을 하기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사라서 바람의 정령은 사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물의 정령을 사용하려면 약간의 물이 필요합니다. 한 컵 정도의 물을 사용해서 대결에 임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상관없습니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아서 철저하게 중급 정령만 이용하려면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사실 물이 없어도 물의 정령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생명력을 사용해야 되고 그 결과 마도사들이 나의 엄청난 생명력을 느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물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잠시후 많은 마법사들의 기대속에 5서클 마스터 가비크와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만을 이용해야 하는 나와 10m 가량의 공간을 두고서 대치하고 있었다. 속으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정령사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왜 물컵을 들고있는거야?" "나도 모르겠는데." "불쌍한 어린애만 죽어나는거 아냐?" 나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가비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정령을 소환할 때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다. '운다인 나를 보호해줘.' 나는 물의 중급 정령인 운다인을 불러들여 나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운다인은 처녀 모습을 한 정령이지만 최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나이기에 강제로 본래의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손에 들고있는 물컵에서 처녀 모습을 한 운다인이 형성되더니 금새 나의 전신을 얇은 물막으로 보호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나 정령사 할 것없이 보호를 할 때는 대부분 바람계열을 이용한다. 바람계열이 사용하기도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계열로 방어를 할 때에는 계열 자체가 치료기능도 있을 뿐더러 마법사의 파괴적인 불계열을 중화시킬 수 있어서 보다 강력하다. 단지 사용하려면 상당한 제어력이 필요하기에 마법사나 정령사 모두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나는 전투를 벌일수 없는 몸이니까 철저한 보호가 필요하니 어쩔수 없지.' 나는 바람의 정령만을 이용해 가비크를 공격할 생각이다. 그동안 정령을 이용해 공격만을 했지 직접적으로 내 자신이 움직이며 공격을 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와! 대단한데." "물의 정령사라면 저럴수도 있겠다 생각했지만 정말 대단하군." "저래서 물컵을 들고 있었던거군." 주위에서 투명한 얇은 물막에 둘러싸인 나를 보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와 약간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대단하게 본다면 모두 나와같은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느끼기에는 가비크 주위에서 벌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의 주변으로 마나가 일렁이며 마나파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실라페' 가비크 주위로 마나파동이 최고조에 이르자 나는 바람의 중급 정령 실라페를 소환하였다. 주변에서 감탄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지만 오직 실라페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실라페는 새의 제왕이라는 독수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최상급 정령이 아니고서는 정령 자체의 모습이 모두 결정되어 있기에 특별히 계약자가 제어하지 않는 이상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휘이익. 휘이익. 실라페가 날개짓을 할 때마다 엄청난 바람이 주변에 몰아쳤다. 작은 배정도는 가벼운 날개짓으로 날려버리는 존재가 실라페이다. '저기 있는 사람이 나를 공격하면 그 순간부터 내가 멈추라는 지시가 있기 전까지 계속 공격하도록 해.' '네, 주인님' 나는 실라페에게 단독으로 행동하라 명령했다. 특별히 중급 정령에게 공격에 대한 사전 지시를 하지 않았다. 정령을 이용해서 누군가와 싸워본 경험이 전무하니 어쩔수가 없다. 가비크는 실라페를 바라보며 잠깐 움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듯 마나파동을 일으켰다. 마나파동은 마법사가 대결을 할 때 정신력을 집중하면 발생한다.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이기도 해서 마나가 고갈될 때 그것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마법을 구현할 때 조금씩 꾸준한 영향을 한다. "헤이스트(Haste)" "실드(Shield)" 가비크는 자신의 이동속도를 높이는 헤이스트 마법과 방어마법에 기초가 되는 실드를 사용했다. 실드는 1서클의 마법이지만 마법 클래스에 따라 방어력에 다르기 때문에 웬만한 화살이나 마법도 모두 막아낼 수 있다. "미사일(Missile)" 자신에게 사용되는 모든 보조마법을 끝내자 본격적으로 나에게 공격마법을 사용하였다. 나는 지하감옥에서 지내면서 마법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지식을 쌓았다. 그래서 미사일 마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미사일 마법은 다섯 개의 마법에너지가 대상자를 향해 날아가는 마법이다. 대상자가 설사 움직여도 마법사가 임의적으로 방향을 바꿀수가 있어서 위력은 약해도 정신력이 강한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하위 마법이다. "삐이익! 삐익!" 다섯 개의 마법에너지가 나에게 거의 다가왔을 시간에 실라페가 울음을 터뜨리며 가비크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실라페의 날개짓으로 바닥에 있는 모래가 휘날렸지만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가네크는 실드로 나는 물막으로 변한 운다인에게 보호되는 상황이었다. "펑펑펑펑펑"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서 다섯 개의 마법에너지가 물막에 부딪혀 굉장한 소음을 발생시켰다. 하지만 무한한 생명력이 지원되는 운다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1서클에 해당하는 파괴력이 가장 약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전이다. "푸푹! 파팍!" 물막에 부딪힌 미사일 마법의 잔재가 사라지자 가비크가 있는 곳에서 실라페의 울음소리와 소음을 들려왔다. 실라페가 가비크를 향해 돌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본래 실라페는 바람의 중급정령이라 날개짓을 이용한 바람 공격을 이용한다. 하지만 좁은 장소이고 가비크가 실드로 완전히 보호되고 있어서 직접적으로 부리로 들이박는 것이다. 실라페의 부리는 바람이 압축되어 있어서 강력한 실드로 보호되고 있는 가비크를 고생시키고 있었다. "블링크(Blink)" 가비크는 실라페의 방해로 내게 접근할 수 없었는지 짧은 거리를 무작위로 텔레포트 할 수 있는 블링크 마법을 사용하였다. 실드 마법은 마법사의 내부에서 외부로 구현하는 마법은 통과시키기 때문에 실라페의 공격이 피해를 줄 수 없지만 마법의 사용을 방해하고 있었다. '실라페' 나는 가비크가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 간단히 실라페에게 벗어나자 또다시 바람의 중급 정령 실라페를 하나 더 소환하였다. "파이어볼(Fireball)" 실라페를 한 마리 더 소환되는 모습을 보는 순간에 물막에 가비크의 파이어볼 마법이 부딪혔다. 모든 마법사들이 가장 심의를 기울여 익히는 마법이라 그 파괴력은 남달랐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불덩어리지만 나의 물막을 파괴시키지는 못했다. 일순간 물막이 약간 흩어졌지만 생명력을 좀더 강하게 보내자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만약 다른 중급 정령사였다면 물막을 만들지도 못했을 뿐더러 만들었어도 파이어볼 마법에 운다인이 정령계로 강제로 송환되었을 것이다. "삐이익! 삐이삐이!" 가비크는 두 마리의 실라페에게 완전히 움직임을 봉쇄당했다. 헤이스트를 사용하여 움직임이 빨라졌지만 강력한 바람이 가비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라페의 주특기는 역시나 날개짓을 이용한 바람 공격이다. 더구나 부리에 공기를 압축하여 가비크에게 계속해서 돌진하고 있었다. 실드에게 아무리 튕겨나와도 무한히 지원되는 생명력을 믿고서 말이다. "블링크! 라이트닝 볼트(Lightning Bolt)!" 가비크는 물막에 보호받으며 움직이지도 않는 내 주변에 블링크로 이동하여 두 마리의 실라페에게서 벗어나 곧바로 3서클의 라이트닝 볼트 마법을 사용하였다. 마법이 물막에 부딪혔지만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보호되고 있던 나는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으아아악! 젠장!" 라이트닝 볼트는 마법에너지가 아니라 전기에너지라서 물막을 통해서 내게 공격이 허용된 것이다. 가비크로서는 적절한 공격이었다. 특히나 라이트닝 볼트는 적이 강과 같이 물이 있는 곳에 사용할 경우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기절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이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나는 강력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고통을 잊고 곧바로 실라페를 또 하나 소환하여 물막으로 변한 운다인 바깥쪽에 똑같은 바람의 막을 형성하였다. 내가 당한 고통은 물막을 형성시키고 있는 운다인으로 인해 곧바로 치료되어 정상이 되었다. 불계열의 파괴력 강한 마법을 방어하려고 일부러 운다인을 물막으로 변형시켰더니 이런 문제점이 있을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바람의 막을 물막 바깥쪽에 이중으로 형성시킨 것이다. "슬립(Sleep)! 월오브아이스(Wall of Ice)!" 가비크는 계속해서 블링크를 이용해 두 마리의 실라페를 따돌린 후에 나의 정신력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슬리 마법을 사용하고 곧바로 얼음벽을 생성시키는 월오브아이스 마법을 내 보호막 근처에 구현시켰다. 아마도 바람의 막이 없었다면 물막은 월오브아이스 마법에 의해서 얼어버려 내게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의 막에 막히자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삐익! 삐삐익!" 두 마리의 실라페는 더이상 안되겠는지 날개짓을 이용한 바람공격을 포기하고 오직 가비크를 향해서 바람을 부리에 압축시켜 돌진만을 하였다. 그 순간마다 가비크가 블링크를 이용해 계속 피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계속될 수는 없었다. 블링크는 3서클 마법이지만 꾸준히 사용하면 상당한 마나의 손실을 가져온다. 마도사라면 모를까 5서클 마스터가 지금과 같이 장시간 사용하면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실라페 그만.' 가비크는 자신이 알고있는 5서클의 모든 마법을 바람의 막과 물막으로 보호되는 내게 하나씩 모두 사용하더니 결국은 멈추었다. 그래서 나또한 실라페가 공격을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바람의 막과 물막도 사라지자 잠시동안 적막감이 돌았다. 실라페가 엄청난 바람을 일으켜 모래가 날리며 주변에 구경하고 있던 마법사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드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며 끝가지 대결을 관전했다. 나로서는 정령을 이용해서 전투를 치뤄본적이 없는지라 만족스럽지 못한 대결이었다. 왜냐하면 정령을 이용해서 보호막을 만들고 정령에게 끊임없이 공격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대결을 끝가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많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가 정령을 이용해 전투를 처음 벌이는 것이라 익숙하지 못했네요." 나는 멍한 눈빛으로 숨을 헐떡이는 가비크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있는 마법을 모두 사용했지만 나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굳이 말하지만 승리자가 없는 대결이었다. 좀더 시간이 지났다면 실라페가 가비크를 쓰러뜨렸겠지만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자리는 중급 정령사인 내가 5서클의 마법사와 비슷한 실력인지 증명하는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군." "정령이 저렇게 대단한 존재였었나? 내가 예전에 전쟁터에서 봤던 중급 정령은 저렇지 않았는데 말이야."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건가? 아니면 우리가 봤던 중급 정령사들이 미숙한 자들이었나?" 마도사들까지 대결을 바라보고 감상을 주저없이 이야기했다. 실라페가 새의 모습으로 날개짓하며 돌진하는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나마 가비크가 마법의 구현이 빠른 마법사라 나의 정령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마법사라면 처음부터 실라페에게 공격을 허용했으리라. "정령이란 존재는 대단하군." "맞아. 그런데 정령사가 대단한 건가 아니면 정령이 대단한 건가." "둘 다겠지. 스무살도 넘지 않은 것 같은데 저 실력이라면 너무 불공평한거 아니야?"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이 나의 실력을 가지고 말이 많았다. 어린 나이에 5서클의 마법사와 비슷한 실력인 것을 보고 자신들도 마법사 보다는 정령사가 되었으면 좋았으리라고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령사가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는지 모르고 있다. 친화력을 높이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평생 겪어야하는 일이다. "카인 정말 멋졌어." "고마워요. 네크" 주변의 소요와 상관없이 네크가 가장 먼저 달려와서 나를 축하해 주었다. 이제 능력도 증명되었으니 마법길드 소속으로 파도루 가문에서 자유스러워진 것이다. 물론 마법길드라 불리는 또다른 감옥에 갖힌 것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그곳 보다는 나은 곳이리라. "핸리 기사대장이 자꾸 부르기에 치료술만 뛰어난 정령사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 "별거 아니에요. 저보다 뛰어난 정령사도 많은데요." 나는 마디런의 칭찬에 미소지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은 지하감옥에서 자유 마법사들이 내 겉모습이 어리고 또 정령사라 해서 어느정도 무시한 경향이 있었다. 자신들은 모르겠지만 그것을 느끼는 나는 가끔씩 섭섭하기도 했었던 것이다. 내가 자유 마법사들과 대화를 하는 동안에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정령사란 존재가 방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은 자신들이 예상한 것이 빗나갈 때 약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함께 지켜본 일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마도사란 존재까지도 가비크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질문을 던지며 무엇인가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나에게 직접 다가와 말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마법길드에 새로운 마법사를 대거 영입하는 자리인지라 그럴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 하나로 인해서 영입하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화되었음을 누구나 쉽게 알수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모든 것이 정상화 되었다. 자유 마법사들이 마법길드에 소속되었고 각자에게 마법서클에 맞는 등급이 결정되고, 그들이 원하는 일이 주어졌다. 어디에 소속되면 최소한 무엇인가 할일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네크는 여행을 할 수 있는 마법길드의 일을 떠맡았고 다른 자유 마법사들도 성격에 따라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였다. 제국에서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마법길드에서 자체적으로 벌이는 일들은 마법사가 직접 해야만 한다. 자유 마법사들은 마법길드에 속속들이 아는 것이 많아서 의외로 쉽고 빠르게 일처리가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제국에서 원하면 일정기간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입장이지만 카인씨는 제국에서 정령사를 향한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으니 일을 맡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한 마법길드에 가입된 5서클 마법사는 마법실험에 해당하는 자금이 지원됩니다. 제국에서 마법길드와 계약을 맺고 지원하는 것이라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마디런씨도 카인씨와 같은 지원을 받게 됩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마지막으로 나의 진로에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나는 가비크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사비나와 즐겁게 보내게 될 나이지만 먼 장래를 생각해서 여러가지 해보고 싶은게 많았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사입니다. 특히 물의 정령사는 치료술에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을 치료하며서 느낀건데 저는 마법이 잘못되어 부작용으로 일어나 피해를 본 사람까지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마나폭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마법사까지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린의 북쪽지역의 치료사들이 모인 지역에 살고 있으니 이 사실을 소문내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마법길드에서 사용하는 1서클의 마법공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잠깐만요! 방금 잘못된 마나를 정령 치료술로 바로 잡을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어느정도는 가능합니다." 가비크는 나의 말에 아까와 똑같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마나로 인한 피해는 치료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마도사가 일정시간씩 환자를 치료해도 일주일 가량이나 걸려야 겨우 치료된다. 마법사의 마나는 인위적으로 자연의 힘을 모은 것이라 신관의 힘과 반발을 일으켜 신관이 치료할 수도 없고, 결국은 그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마나로 제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마나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나와 반발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알겠습니다. 카인씨가 원하는 부분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저희 마법길드에 엄청난 도움을 주실수 있는 분이란 것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자유 마법사라 불리는 아니 이제는 마법길드로 소속이 옮겨진 30명의 마법사들과 이별을 위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들은 머물 장소가 없기 때문에 당분간 길드에서 지낼 것이다. 일부 진로를 결정하지 않은 마법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당장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비나가 보고싶어 가야만했다. 마법사 족속이야 원래 가족이 없는 편이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마법길드를 나와 집으로 빨리 가고싶은 마음에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의 도움까지 받았다. 길드에서 가입을 위해 벌였던 조사는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이 되어 끝난 것이다. 밤이라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은 공포스러운 반면에 자유스러웠다. 그동안 지하감옥에서 오래 지냈더니 심적으로 부담이 되었는가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7 회] 8. 소문 사비나는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서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습이 너무나 가여웠다. 지하감옥에서 벗어나자 그곳에서의 생활이 억울하긴 했지만 어려서부터 불합리한 것은 몸소 체험해서 참을만했다. 패러렐 라이프의 저주받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해 결국은 자살까지 했으니 말이다. 사비나는 평소에 정령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풀려날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오늘일 줄은 몰랐다.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온 기쁨에는 누구나가 감동받기 마련이다. 노예 세렌도 내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진심은 알수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기 때문이다. 돌아온지 며칠은 사비나와 세렌과 함께 방에서만 지냈다. 지하감옥에서 풀려난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고 사비나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비나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치료사의 집을 관리하는 길버트는 많은 일을 해야만 했다. 내가 운영하는 치료사의 집은 직원이라야 길버트와 그의 친구들 세 명이 전부이다. 정령술을 이용해 치료하니 약초를 채집하거나 제조할 필요도 없으니 직원이 적은 것이다. 채 두 달이 안되는 기간이었지만 임금도 주지 않았는데 떠나지 않은 그들이 고마웠다. 사례로 무엇인가 주고 싶지만 내겐 집을 제외하고 가진게 별로 없었다. 길버트는 용병 길드와 치료사 길드를 찾아가 내가 돌아왔음을 통보하였다. 나는 불치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료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아서 통보만으로 치료사로서의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돌아온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비나와 대화를 가질 때 옆에는 항상 노예 세렌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내가 파도루 가문에 끌려갈 때만 해도 말하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더듬거리지만 말도 할 수 있었고 들을수도 있었다. 사비나는 나보다 세렌을 가르치는 재미에 신나하는 것 같았다. "카인은 제가 죽으면 어떻게 지낼 거에요?" "왜 그런말을 하고 그래?" "카인도 알잖아요. 저는 엘프들의 도움으로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약초를 먹어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잖아요. 이렇게 카인과 말린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쁘긴 하지만 신의 섭리를 거역하면서까지 살아있는 것은 싫어요." 나는 사비나의 말에 화를 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을 계속했다. 나조차도 예전에 자살을 결심할 때 그녀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반대의 입장이 된 것이다. 사비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내고 있었다. "마음약한 소리 하지마." 나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요즘들어 사비나의 생명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라 어쩔수 없었다. 차마 그것을 말해 줄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삭히고 있지만 그녀는 어느정도 자신의 죽음을 알아채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크라이 마을에 살고있는 사람들도 모두 70세를 넘기지 못하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저는 80세가 가까워지는데도 살아있어요. 카인도 이제는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돼요. 카인도 알다시피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알았으니까 그만해." 더이상 사비나의 말을 들을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비나는 마을 사람들과 친한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내가 자살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사람들은 이곳 말린으로 오기전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엘프들의 도움으로 단지 10여년 가량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 뿐인데 그녀는 나름대로 그것에 대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평민들의 평균 수명은 대개 70세 전후이다. 하지만 그 수명을 다 채우기도 어지간히 힘든게 세상이다. 의무적으로 전쟁에 참여해야 하고, 거기서 살아나온다 할지라도 영주의 노역에 시달리고, 가끔씩 침입해오는 몬스터까지 생명의 위협은 끝도없다. "아까 말했던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내가 죽으면 어떻게 지낼 거에요?" 나는 사비나의 반복되는 질문에 결국 항복했다. 그녀가 왜 그것을 궁금하게 여기는지 알수 없지만 꼭 대답을 듣겠다니 어쩔수가 없는 일이다. "글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말린의 여러곳을 여행하다가 결국은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겠지." "하고싶은 일은 없어요?" "별로 없는데." 사비나에게 대답을 해다보니 정말로 이상했다. 나는 지금까지 특별히 하고싶은 일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말이다. '60년 동안에 바래왔던 것이 이루어져서 그런가?' 나는 그 원인이 엔트와 함께지낸 60년에 있다고 생각했다. 냉동된 상태로 엔트의 뿌리속에 간직된 채로 오랜 기간을 그곳에서 보내며 오직 살아나길 바래고 또 바랬다. 수십년을 오직 한 가지의 목적만 바라보며 지냈고 결국은 살아났다. 그래서 사비나를 만나게 되었고 모든 꿈이 이루어졌다. 그러니 더이상의 삶에 대한 목적이 있을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체가 수십년 동안 바래웠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사비나도 알다시피 나는..." 나는 사비나에게 하고싶은 일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막상 그 꿈이 이루어지게 되면 기뻐하는 반면에 허탈감을 갖기도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 "듣고보니 그렇겠네요. 하지만 앞으로 카인에게 무슨일이 생기더라도 이번에 헤어지게 되었던 사건처럼 다른 사람 때문에 카인이 피해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카인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카인 자신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약속하는거죠?" "약속할께." 나는 사비나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오직 나만을 생각하는 그녀가 노환으로 생명력이 줄어드는 모습이 가슴아팠다.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며 나에 대한 자신의 생각까지 정리하고 있었다. 사비나와 같은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 누구나 죽음을 무서워하고 부정하기 마련이다. 며칠이 지나자 사비나는 대소변 조차도 방에서 해결했다. 세렌이 그녀의 수발을 모두 들었기 때문에 내가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사비나의 수발을 내가 들으려 했지만 그녀가 그것을 싫어했다. 섭섭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나라도 사비나와 같은 입장이라면 똑같이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인님 마법길드에서 찾아오신 분이 있습니다." "잠시후에 갈께." 나는 밖에서 외치는 길버트의 말에 대답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비나의 몸은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환자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비나는 그것을 반대했다. 아마도 세렌과 비슷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찾아올까 그런 것이리라. 나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사비나 다녀올께." "기다릴께요." 누워서 대답하는 사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미소를 보이려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차라리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면 괜찮은데 그런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 싫어한다. 노예 세렌에게는 고통스런 표정을 마음껏 보여주면서 말이다. '엘레스트라 부탁해.' '네, 주인님' 나는 방을 나오면서 물의 최상급 정령에게 사비나의 고통을 덜어주라고 말했다. 어떤 환자가 찾아와도 사비나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길버트는 사비나가 노환으로 고통받는 사실을 알고 중요한 환자가 아니고서는 다른 곳을 찾아가라고 돌려보낸다. 나는 그렇게 신경써주는 길버트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으면 말린에서 치료사 집을 운영하면서 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방에서 나와 옆건물에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장소에 도착하자 길버트가 마법길드에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나는 찾아온 사람을 바라보기도 전에 그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마나의 기운이 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고 불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마법사는 마나가 심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고 대부분 심장에서 멀어질수록 마나의 분포가 낮게 분포된다. 예외적으로 마도사나 하위 마법사들이 그렇지 않지만 3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면 거의 비슷한 마나 분포를 갖기 마련이다. "카인님이 맞습니까?" 마나가 불균형하게 분포된 마법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맞습니다." "여기 마법길드의 가비크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서신이요?" 그는 서신을 건네주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일인가 싶어 얼른 서신을 확인하자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서신에는 마법길드에서 내가 말한 것이 진실인지 확인하려고 마나가 불균형한 마법사를 보낸 것이다. 내가 길드에서 가비크에게 마나의 피해를 입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원인이었다. 마법길드에서 내가 말한 사실이 무척이나 충격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마법사들이 마나로 인한 피해를 입는 경우는 무척이나 많다. 마법실험을 시도하다가 잘못되어 마법사로서의 삶이 끝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런 마법사를 마도사가 일일이 치료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마법사의 마나를 다스리는 각종 치료방법이 있지만 효과적이지 않다. 그러니 치료가 쉽게 가능하다는 나의 말이 충격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무슨일로 몸이 지금처럼 되었는지 말씀해 주실수 있나요?" "그럼요.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를 찾아온 마법사는 가비크에게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몰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공손히 대답하였다. 추측하기에 가비크는 마나가 잘못된 이 마법사에게 치료될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내게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라 짐작했다. "제 이름은 차프라고 합니다. 저는 반년전까지 마법길드에서 예비 마법사에게 실시하는 마지막 수습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서클에서 3서클로 올라서는 순간에 잘못되는 바람에 마나폭주가 일어나 지금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죽지 않은 것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제 꿈이 마법사라서 포기하지 않고 마법길드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마나폭주가 일어나도 살수가 있나요?" "일반적으로 살아나기 힘듭니다. 저같은 경우는 마나에 대한 재능이 많지 않아서 축적된 마나가 많지도 않았고 적은 마나로 서클을 올리다보니 마나폭주가 찾아온 것입니다. 다행히 마법길드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완전히 치료되려면 5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답니다." 차프는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마나폭주란 마법사에게 쉽게 찾아온다. 마법을 구현하려고 할 때 잘못된 마법수식을 사용하면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마법사는 언제나 마나폭주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마나폭주가 마법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마나폭주가 일어나면 대부분 마나자체가 마나밀도가 낮은 곳으로 향하다보니 몸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마법사의 신체 내부에 피해를 주기도 하는데 차프가 그 경우다. 마나의 피해를 입었을 경우 치료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마나의 제어력이 강한 누군가가 피해를 입은 사람의 마나를 안정시켜 주는 방법과 그저 방치하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밀도가 낮은 곳으로 향하는데 마나도 그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무의식적으로 마나축적을 시도하기 때문에 방치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심각해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마법사에게 마나폭주가 발생하면 임의적으로 몸속에서 잘못된 마나를 밖으로 배출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만 치료될 수 있다. "사실 예전에 차프님처럼 마나폭주로 인한 환자는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마법사에게 마법을 맞아 마나의 피해를 입은 환자를 치료했었습니다." "그 사람은 완치되었나요?" "네, 완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차프님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마나폭주라 어떤 결과일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치료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으니 희망을 잃지 마세요." 나는 차프의 심신을 안정시키고 그의 몸상태를 직접 손으로 만지며 확인하였다. 지하감옥에서 지내며 마법사에 대한 마나의 상식을 많이 배웠기 때문에 예전처럼 정령에게만 의지하지 않는다. 하나하나 손으로 마나를 느껴보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파악하려는 것이다. '예상대로 양쪽 팔로 마나가 스며들었군.' 마나폭주가 일어나면 심장에 있는 마나는 대부분 양쪽 팔로 집중된다. 마법사는 마법을 구현할 때 두 팔을 자주 사용하여 보이지 않는 마나의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보통 마나가 팔에서 밖으로 빠져나가 마법을 구현시키거나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야 하는게 정상이다. 하지만 마나폭주가 발생하면 마나가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팔에 스며들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팔에서 마나를 뽑아내야 하는건가? 아니면 심장으로 돌려주어야 하나?' 나는 어떤 방법으로 차프를 치료할까 고민되었다. 차프의 팔에 스며든 소량의 마나는 그가 수년을 고생하여 모은 마나이다. 팔에 스며든 마나를 뽑아내면 완치가 되겠지만 그에겐 엄청난 마나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팔에 있는 마나를 심장에 되돌리면 마나가 서로 반발을 일으켜 엄청난 고통은 물론이고 그것을 안정시키느라 심력을 쏟아야 하며 다시 마나폭주가 일어날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직접 말해줄까? 그렇게 해야겠지?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니까.' 나는 고민끝에 치료의 방법을 그가 직접 선택하도록 말했다. 나의 능력이라면 팔에 남아있는 마나를 심장에 있는 마나와 반발을 일으키지 않도록 강제적으로 되돌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할수는 없다. 마나의 성질은 그 자신의 신체가 바꾸지 않는 이상은 나중에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팔에 남아있는 마나를 뽑아주세요.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차프의 용기있는 선택에 찬사를 보냈다. 마나의 재능이 약해서 마나가 절실할텐데도 그나마 모았던 마나마저 포기하다니 말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위험 부담을 안고서라도 팔에 남아있는 마나를 심장에 돌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차프를 기절시키고 그의 팔에 남아있는 마나를 뽑아내려다가 마음을 바꿔 심장으로 돌렸다. 차프의 팔에 스며든 마나가 그의 심장으로 되돌아가자 즉각 심장에서 마나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모든 마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생명력을 가진 내가 아니었다면 모든 마나가 심장의 마나와 반발을 일으켰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미세하지만 절반 가량의 마나가 심장의 마나와 반발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반발을 일으키는 마나는 뽑아내고 그렇지 않은 마나는 심장에 되돌려야지.' 나는 어떻게든 차프를 도와주기 위해 최대한 많은 마나를 그의 심장으로 보냈다. 팔에 스며든 마나중에 반가량이 심장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반이 그의 체내에서 배출되었다. 요즘에는 치료술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정령의 도움을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직접 내가 생명력을 이용해 치료를 시도한 것이다. 어쩌면 정령을 이용하면 차프를 좀더 완벽히 치료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적으로 정령의 도움만으로 지낼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령을 이용하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의지하면 나란 존재가 너무 초라해질까 걱정된 것이다. "카인님 땀좀 닦으세요." "고마워. 길버트" 치료가 끝나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길버트가 수건을 건네주었다. 길버트는 예전과 다르게 땀까지 흘리며 치료하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지하감옥에서 지내며 몸이 허약해진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단지 예전에는 정령을 이용해서 치료한 것이었고 요즘은 직접 생명력을 이용해 치료술을 사용하는 것이라 몇배나 힘든지 모르고 말이다. 치료가 끝나자 직원들이 침대에 누워있는 길버트를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다른 치료사의 집은 치료를 방에서 하지만 나는 실외에서 한다. 예전에 찾아오던 환자가 대부분 끔찍하게 상처입은 사람들이라 치료하고 난 후에 뒷처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길버트 밖에 없는 것도 이유중에 하나였다. 나는 사비나에게 돌아와 그녀와 방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사비나는 이제 방에서 나가는 것조차 무리이다. 노환은 병이면서도 병이 아니다. 떨어진 팔도 붙있을 수 있는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에게 도움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고통을 줄여주는 것 밖에 없었다. '사비나님의 고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엘레스트라의 말이 나에게 또다른 아픔을 주었다. 그녀의 삶이 길지 않을 것임을 알았지만 그 순간이 찾아오자 너무나 가슴아팠다. "카인 행복하게 살아야해요. 절대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말이에요." 사비나는 계속해서 나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고통스런 시간은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그 동안에 그녀가 내게 부탁한 내용은 오직 나를 위한 말들 뿐이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말라는 내용부터 새로운 삶을 찾으라는 등 모두 내게는 가슴아픈 말이다. "자연의 품에서 기다릴께요." 사비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나는 너무나 슬퍼 눈에서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동반자였다. 가족은 정령사라 조화로움을 따르는 엘프의 영향으로 인간적이지 않은 편이다.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사비나의 죽음도 슬퍼하겠지만 심각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내가 자살을 했을 때에도 그랬으니 말이다. 60년 전의 나와 가장 가까웠던 존재가 죽음을 맞자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물질계 4대 최상급 정령들이 나의 감정에 동화되어 위로하려 들었지만 위안이 되지 않았다. 이런 당황스러운 순간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길버트였다. 노예인 세렌이 사비나의 죽음을 길버트에게 알렸고 길버트는 장례절차를 차질없이 진행시켰다. 나는 정령사라 장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정령사들은 가족의 장례를 엘프와 비슷한 방식으로 치룬다. 시신을 숲에 방치하여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사비나는 정령사인 나를 남편으로 두었고, 정령사인 아들을 두었지만 그 자신은 정령사가 아니다. 그래서 길버트가 하는 장례는 정당한 절차였다. 사비나의 장례에 참가한 사람은 오직 하급 신관 한 명, 나의 직원들 네 명, 노예인 세렌 그리고 나 뿐이다. 엘레스트라를 통해서 나의 가족에게 사비나의 죽음을 알렸고 그들은 그곳에서 사비나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그녀는 삶의 마지막을 말린에서 보내기 위해 자신이 살았던 말린의 빈곤층 마을을 찾아왔지만 그녀의 먼 친적들은 그녀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이 모두 사비나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사비나, 정령들이 당신을 지켜줄 거에요." 나는 그녀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축복을 내려주었다. 물질계 4대 최상급 정령이 내려주는 축복이라 시신은 무척이나 오래 보존될 것이다. 그녀가 묻힌 장소는 말린의 빈곤층이었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산이다. 사비나의 장례가 끝나자 나는 한동안 삶에 대한 허무함이 찾아왔다.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 의문이 찾아왔고 왜 살아야하는지 몰랐다.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 투성이다. 길버트는 나의 상태를 파악하고 환자를 받지 않았다. 찾아온 환자들이 불평을 하였지만 치료사가 치료를 안한다는데 그걸 누가 말리랴. "주인님 식사하세요." 노예인 세렌은 허망함에 빠진 나를 위해서 매일같이 식사를 준비했다. 나는 문득 사비나가 죽었을 때 세렌이 슬퍼했는지 궁금했다. 세렌이 사비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문이 들은 것이다. 사비나는 그녀를 위해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 그 당사자는 그녀가 죽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노예라지만 너무한다 싶었다. "세렌은 사비나의 마지막을 어떻게 생각해?" "사비나님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님과 결혼한 것은 축복이었고, 주인님이 오래도록 잠들어 계셨을 때는 하롤드 도련님을 키우며 행복해 하셨고, 마지막에는 잠든 주인님이 깨어나 누구보다도 행복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비나님이 행복하게 느끼셨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렌이 슬퍼하지 않는 거구나." 세렌은 나의 질문에 차분히 또박또박 대답했다. 지금의 세렌이 있기까지 사비나가 그녀에게 쏟은 정성은 대단했다. 노예로서의 의식을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마음을 흔들어 놓고 떠났다. "식사는 잊지말고 하셔야 합니다. 사비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꼭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세렌이 유일하게 나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식사준비이다. 바로 사비나가 죽기 전부터 두고두고 당부한 지시이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자신의 삶이 끝나가는데도 나를 걱정해 준 것이다. 나는 한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지만 세렌이 사비나에 대해서 말해준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 마법길드에서는 자유 마법사의 영입을 둘러싸고 한바탕 혼란을 겪었다. 파도루 가문을 압박하기 위해서 황궁과 다른 귀족가문과 연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등장한 정령사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뜬금없이 자유 마법사들 틈에서 중급 정령사가 나타났고 그의 치료능력이 파장을 불러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투적 측면이라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마도사가 자유 마법사들중에 나타났을지라도 단 한 명이 세상을 바꾼다거나 하는 것은 소설에나 있을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급 정령사에 대한 편견을 해소시켜 주긴 했지만 이번에 알게된 중급 정령사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법길드에는 마나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게되어 고통받는 마법사가 적지않게 존재한다. 사실 마법사가 마나폭주나 마나로 인해 잘못될 가능성은 100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확률이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전체를 두고서 생각하면 무시못할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결국 마법사는 마나폭주로 발생한 문제를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카인이라는 중급 정령사가 마나로 상처입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것 때문에 마법길드에서 난리가 벌어졌던 것이다. 가비크는 길드의 책임자가 된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얼마전부터 계속해서 마도사 회의를 주최할 수밖에 없는 큰 사건만 발생하는 것이다. 가비크의 주변에는 수많은 마도사들이 탁자에 앉아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마도사 회의를 주최해도 마도사들은 자신의 실험실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모두에게 중요하게 인식된 사건중의 하나라 관심을 갖지않는 마도사가 없었다. 마도사는 마법사 탑을 가질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 특권을 누리려는 사람은 괴짜 마도사들 뿐이다. 왜냐하면 마법길드 내부에서는 마법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반면에 마법사의 탑을 갖게되면 그에 따르는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관리를 제자에게 맡기거나 혹은 관리하는 사람을 따로 둘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탑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경비가 소모된다. "가비크 이게 사실이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가비크는 8서클 마스터 포지토프의 말에 대답했다. 포지토프는 마법길드에서 가장 높은 마법서클을 가진 마도사이다. 나이도 겨우 100세에 가까워졌을 뿐이다. 정령사가 일반사람의 두 배에 달하는 수명을 갖는 이유처럼 마도사의 수명도 그에 못지않아 100세는 낮은 연령에 속한다. 마법사의 경우 마나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서 수명도 다르다. 가비크는 마도사 회의를 주최할 때 마법길드에 소속된 모든 마도사에게 카인과 정령에 관련된 정보를 전달하여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이다. 포지토프는 가비크가 회의를 주최하기 전에 전달한 기록들을 가리키며 진실인지 재차 물어보았다. "무슨 방법으로 확인했는지 말해주게." "알겠습니다. 포지토프 마도사님. 카인이란 정령사가 마법길드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카인은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사이며 특히 물의 정령을 이용한 치료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용병들의 입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마나폭주로 인해 신체에 마나가 불균형하게 분포된 하위 마법사를 치료했다는데 있습니다. 저는 믿을수가 없어서 직접 마나폭주로 문제가 있는 마법사를 그에게 보냈었는데 돌아온 마법사는 완치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가비크가 수많은 마도사들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모든 사실을 밝혔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포지토프가 아닌 다른 마도사들의 질문이 중구난방으로 이어졌다. "물의 정령사가 치료술에 뛰어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런 정도라니 대단하군. 그렇다면 카인이란 물의 중급 정령사 뿐만 아니라 다른 정령사도 그와같이 정령을 이용한 치료술로 마나로 피해입은 마법사를 치료할 수 있다는건가?" "다행히 마법길드의 도움을 받고있는 정령사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물의 중급 정령사라면 마나로 인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대답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정령사들은 마법사가 파괴력이 강한 마법을 선호하듯이 그들도 파괴력이 높은 정령과 계약하길 희망해서 대부분 불 계열의 정령술을 익혀서 물 계열 정령사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가비크의 대답에 마도사들의 희망어린 얼굴은 일그러졌다. 물의 정령사를 많이 확보하면 마법길드에 마나폭주로 고통받는 마법사를 모두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전투가 자신의 능력이 되는 세상이라 정령사도 파괴력이 강한 불 계열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파괴적인 본능을 갖고 있어서 그마나 불 게열의 정령과 가장 친근하니 다른 계열보다 수련하기 쉬운 편이다. 정령사의 숫자도 불 계열이 대부분이고 다음으로 바람 계열 그리고 땅 계열이다. 마지막으로 물 계열은 치료술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제외하고 오직 방어능력 위주의 정령인지라 배우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가끔 바람이나 땅 계열의 정령사가 물 계열의 하급 정령을 취미삼아 소환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인간의 정령사 수가 불 계열이 대부분인데 반해서 엘프들은 바람 계열이 가장 많고 불 계열이 가장 적은 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인간과 엘프의 전투가 벌어지면 방어적인 엘프가 피해를 보는 것이다. 아무리 강해도 그 힘을 방어하는데 사용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적더라도 물 계열 정령사를 어떻게든 찾아서 회유하면 마나폭주로 고통받는 마법사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도 역시 불가능합니다. 카인처럼 중급 정령사가 중급 정령을 자유자재로 소환하고 제어하는 정령사는 거의 없습니다. 중급 정려사라 할지라도 대부분 중급 정령을 잠깐 소환할 수 있을 뿐이지 카인과 같이 정령의 형태까지 변형시킬 수는 없습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정령사는 마법사를 적대시 할 것이 분명하니 괜한 분란만 일으킬 것입니다." 가비크는 마도사의 희망어린 말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카인에게 충격을 받고 마법길드와 어느정도 친분이 있는 정령사에게 정령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고 조사했다. 제국에서는 정령사에 대해 마법사와 같은 대접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령사는 엘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조화로움을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령사는 대부분 인간이면서 인간적이지 않은 성격을 보유한 경우가 많으며 능력이 높을수록 더욱 그렇다. 카인은 그 능력을 수련하지 않고 엔트에게서 전해받은 것이라 예외지만 다른 중급 정령사라면 인간과 대인관계가 좋지 않은게 정상이다. "정말 안타깝군. 물 계열 정령사를 많이 찾으면 그만큼 마나에 고통받는 마법사가 고통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일단 카인이란 정령사에게 부탁해서 마나폭주로 고통받는 마법사중에서 뛰어난 사람부터 치료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가 마나로 고통받는 사람를 치료할 수 있는 소문은 절대 내지 말도록 하게. 그것이 소문나면 엄청난 파장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포지토프 마도사님." 가비크는 포지토프에게 대답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간단히 카인이란 정령사가 마나폭주로 잘못되어진 마법사를 치료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난다면 마나폭주로 상처입은 마법사가 모두 그에게 몰려들 것이다. 가비크는 마법길드의 정보망을 동원해 카인의 거처를 감시했다. 그리고 매일 한 명씩 마나폭주로 고생하는 마법사를 그에게 보내 치료하도록 하였다. 가비크는 카인이 매일마다 마나폭주로 고생하는 마법사를 치료한 당사자를 만나 입단속을 시켰지만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지 의문이었다. 최소한 두 달 이상만 비밀이 유지되어도 마법길드에 속한 상당수의 마나폭주로 인해 상처입은 마법사가 많이 치료될 것이다. 마법길드의 마도사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카인이란 정령사를 이용한 것 같아서 찜찜하였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카인을 위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는 귀족 만큼이나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하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설사 마법사는 악당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뱉은 말은 꼭 지킬만큼 명예가 강하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8 회] 8. 소문 사비나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지 한 달이 지나자 하롤드가 찾아왔다. 나의 아들이지만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이다. 하롤드는 내가 자살한 이후에 태어났기에 나이도 60세가 넘었다. 하롤드는 어머니인 사비나가 묻힌 무덤에서 정령을 소환하여 자연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인간이 조화로움을 따르는 것이 정상일까?' 나는 아들 하롤드가 사비나의 무덤에서 자연의 축복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심각한 자괴감에 빠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무덤에서 어쩌면 저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하롤드는 중급 정령사인지라 그만큼 친화력도 높아서 조화로움을 따른 영향으로 죽음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인다. 더구나 죽음의 원인이 노환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되는거야.' 나는 담담한 하롤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동안 고민해오던 문제를 생각했다. 내가 하고싶은 일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은 많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하롤드가 자신의 어머니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말린까지 오는 동안이나 지금도 나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하롤드가 사비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령을 이용해서 소식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상급 정령은 이성을 갖추고 있어서 정령세계에서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나와 계약한 최상급 정령이 크라이 숲에 머무는 세레나 엘프장로의 정령을 찾아가 소식이 전달하고, 세레나는 정령에게서 소식을 듣고 나의 가족에게 알린 것이다. 하롤드는 며칠을 머무르다가 크라이 숲으로 돌아갔다. 부자간(父子間)이지만 나이도 별로 차이나지도 않아 할말이 많지 않았다. 그저 사비나가 말린에서 지낸 이야기를 해준 것이 전부이다. 내 욕심은 가족을 모두 부르고 싶지만 그러기엔 말린은 크라이 숲과 너무나 먼 곳이다. 하롤드가 온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만큼 말이다. 방에서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을 하고있는 나에게 정신을 차리도록 종용하는 사람은 길버트가 유일하다. 세렌이야 노예이니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주인인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길버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를 받는 숫자를 높이고 있다. 그의 말로는 나의 실력이 소문이 나서 환자를 거부하기 힘들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말이다. "카인님 오늘도 마법길드에서 환자를 한 명 보내왔습니다." 밖에서 길버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버트는 내가 방에서 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며 말했다. "카인님 오늘도 똑같은 환자인가요?" "아마도 그럴거야." "제가 보기엔 멀쩡한 것 같은데요?" 길버트는 마법길드에서 보내는 사람을 보면서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다. 마법길드에서는 매일같이 마나폭주로 고통받는 마법사를 보내고 있다. 하루 한 명 혹은 두 명씩 치료해 주는데 그렇게 한지도 한 달이 넘었으니 수십여명의 마법사를 치료했다. "저번에 말했잖아. 일반 환자가 아니라 마법사가 수련을 잘못하다 그런 것이라고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겉보기엔 멀쩡해도 몸속이 엉망이 된 상태라서 무척 위험해." "아무리 살펴봐도 멀쩡하던데." 길버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법사란 존재는 일반 사람이 보기 힘든 존재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특이한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일단 나부터도 평생 만나기도 힘든 정령사이고, 찾아오는 환자들도 불치병 환자들이라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까 마법사에 대해서 공부좀 하도록 해." "네, 카인님." 길버트는 공부하라는 말에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배우는 일을 하나같이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그들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일인데도 말이다. 나는 요즘에 심심할 때마다 마법길드에서 보내준 1서클의 마법공식을 공부하고 있다. 마법길드에서는 본래 마법공식을 절대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법길드의 소중한 지적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마법길드에서 보내는 사람을 10여명 이상 치료하자 길드에서 마법공식이 적힌 마법서를 보내주었다. 또한 그것 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돈도 받았다. 마법길드에 가입되어 있으면서 마법사에게 지원하는 각종 혜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을 돈으로 환산하여 보낸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마법길드에서 찾아온 마법사의 반응은 언제나 같았다. 찾아오는 마법사마다 내게 치료받았던 마법사와 대화를 한 후에 오기 때문에 공손함이 이루 말할수 없었다. 마법사가 귀족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 행동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일이다. '역시나 또 팔이 문제로군.' 찾아오는 마법사들이 언제나 같은 문제이니 이제는 치료라 부를수 없을 정도로 간단히 끝난다. 가끔씩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엘레스트라가 알려주고 있다. 그동안 치료를 목적으로 생명력을 직접 다루다보니 예전보다 정령에게 의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말하는 것보다 편할 정도가 되었다. 내게 치료를 받던 마법사는 마나폭주로 팔에 머물던 마나가 자신의 심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차라리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모를까 마법사로 지냈기 때문에 치료되지 않았다면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비관하여 자살했을 것이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마법사는 머리가 바닥이 닿도록 허리를 구부리며 인사했다.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인사나 다름 없었다.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고마움도 잊을 것이지만 말이다. "비밀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요." 마법사는 나의 말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마법길드에서 나의 치료능력을 많이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나또한 별로 유명인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법길드와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비밀도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 찾아왔다. 알고있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길드에서는 앞으로 두 달만 더 길드에서 보내주는 마법사를 치료해 준다면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사중에 마나폭주로 고생했던 사람들 대부분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시간만 지나면 굳이 소문이 나더라도 문제가 될 소지는 없다. 카르시온 제국이 아무리 크다지만 마법사란 존재도 바닷가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희귀한 존재라 가능한 일이었다. "길버트 오늘 환자는 이것으로 끝인거야?" "네, 그렇습니다." 길버트가 나의 말에 들고있던 장부를 보면서 대답했다. 나는 길버트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에게 많은 임금을 주고 있다. 특별히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아깝지가 않다. 대신 길버트는 집안 일을 모두 책임지고 재정관리까지 맡고 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지." "카인님. 돈이 많이 모여서 그러는데 어떻게 할까요?" 길버트는 내게 다가오더니 장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치료한 환자 대부분이 불치병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받은 치료비도 많은 편이었고 마법길드에서 매달 보내주는 돈까지 합산하면 평민은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을만큼 큰 돈이다. "귀찮아서 그러는데 그냥 길버트가 관리하면 안될까? 특별히 보관할데도 없고 말이야." "절대 그럴수 없습니다. 한 두푼이면 모를까 장부에 기록된 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정히 보관이 어려우시면 카인님이 소속되어 있는 러쉬길드나 마법길드에 맡기셔도 될 겁니다." "돈을 보관하는 것은 상인길드에서 하는일 아니야?" 나는 길버트에게서 생소한 말을 듣고 반문했다. 용병길드나 마법길드에서 돈을 맡아준다니 처음 듣는 말이다. 재정관리를 전문적으로 해주는 일은 상인길드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인님께서는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자각은 하고 계신겁니까? 러쉬 용병길드에 A등급 용병이시고, 마법길드에서는 높은 등급으로 가입되어 있으시잖아요. 어떤 길드에서든지 실력이 높은 길드원에게는 많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재정관리 정도는 일도 아니에요. 단지 카인님께서 이용하지 않으셔서 탈이지만요." "내가 러쉬 용병길드에 A등급 용병이지만 의뢰를 수행한 적이 없는데 혜택을 받아도 될까? 물론 마법길드야 반대지만 말이야." 길버트의 대답을 듣고보니 이해가 되었지만 나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길드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러쉬 용병길드원이지만 한 번도 의뢰를 수행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길드에서 베푸는 혜택을 받겠는가. "그건 카인님이 잘못 생각하시는 거에요. 용병길드는 높은 등급의 용병을 보유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도움이 돼요. 의뢰도 많이 들어오게 되고, 신임도도 높아지지요. 카인님이 러쉬길드에 소속된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으니 길드에서 베푸는 혜택을 누려도 상관없어요." "상당히 복잡하네." 길버트는 한참을 내게 길드의 관리체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소속된 길드에 재정관리를 부탁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고 길드에게도 좋다고 했다. 길드는 돈을 맡아주게 되어 길드의 유용자금을 늘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나는 어디에서나 길드가 있는 곳에서 돈을 자유자재로 가져다 쓸수 있다. 단지 길드에서 이런 재정관리를 베푸는 길드원은 극히 소수라는 점이다. 상인길드처럼 전문적으로 재정관리를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해하셨죠? 그럼 대부분의 돈을 러쉬 용병길드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마법길드에 맡겨도 되지만 제국에는 마법길드 보다 용병길드의 분점이 많으니까 필요할 때 찾아쓰기 편할거에요. 제가 러쉬길드에 찾아가 돈을 맡기려면 카인님의 용병패가 필요한데 주시겠습니까?" "용병패? 아마 방 어딘가에 있을테니까 찾아서 가져가." "아니 그 귀한 용병패를 어디다 두었는지 정확히 기억도 못하세요?" 나는 길버트의 말을 듣고서 피식 웃으며 뒷머리를 긁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라 특별히 귀중하지도 않은 물건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한단 말인가. 엔트에게 전해받은 생명력으로 머리가 맑아지긴 했지만 그것이 머리를 좋게 해준다거나 기억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자 방으로 돌아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60년 동안을 생각만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습관이다. 길버트는 방에만 있는 나를 보면서 사비나의 죽음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라 오해하고 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특별히 생각하는 습관일 가진 여향이 더 크다. "오늘도 마법공식을 공부해 볼까나." 나는 사비나를 생각하다가 방 한쪽에 놓여져 있는 마법서를 집어들었다. 마법길드에서 1서클의 마법공식이 적힌 마법서가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을 알게된다면 기가막혀 할 것이다. "얼마나 더 연습해야 제대로 된 마법을 구현시킬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동안 생각이 날 때마다 마법공식을 열심히 공부했다. 1서클의 마법을 구현시켜 보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노력한 결과 마법중에서 가장 손쉬운 1서클의 라이트 마법을 구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마법을 구현하는데 무려 10분이나 걸렸다. 마법공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마법을 구현하는데 25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그것을 직접 실험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1서클의 마법공식을 배우면서 직접 마법을 구현해 본 결과 15분이 앞당겨졌다. 나처럼 오래도록 정신을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은 감히 시도조차 못할 것이다. '다른 마법공식을 길드에 요청해볼까?' 마법길드에서는 수많은 마법공식을 가지고 있으며 비밀리에 전수되는 것들도 많다. 길드의 진정한 힘은 그런 지적 재산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마도사가 마법길드에서 엄청난 대우를 받는 것이다. 마도사는 깨달음을 얻어서 6서클 이상으로 진입한 마법사이고 그 결과의 영향은 모두 다르다. 마법구현에 깨달음을 얻은 마도사가 있는가 하면, 마법무구 제작에 깨달음을 얻은 마도사도 있다. 대부분은 마법구현에 깨달음을 얻게 되지만 비슷할 뿐이지 같다고 보면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은 각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얻게되는 깨달음도 천차만별인 것이다. 마법수식을 간단히 풀어낼 수 있는 마법공식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만약 마법사가 특정 계산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그 계산식을 자주 사용해야만 마법구현이 빠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마법공식이 무척이나 다양해 질 수밖에 없다. 길드에서 내게 전해준 마법공식은 그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마법공식을 정리한 것이다. '다른 마법공식을 사용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 나한테는 마법수식을 빠르게 계산하는 재능이 없으니까.' "에휴" 마법공식을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한숨만 절로 나온다. 마법사라면 10초 이내에 구현할 수 있는 1서클의 마법을 10분이나 걸려 구현하다니 말이다. 마법무구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나로서는 절대 이룰수 없는 경지이다. 지금이야 수십년을 이렇게 공부하면 언젠가는 이룩할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생각날 때마다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짜피 내게 남은 수명은 800년에 해당하는 생명력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생명력은 마나가 정제된 상태라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줄어든다거나 하지 않는다. 마나란 자연의 힘에 속하여 그것이 사용될 경우 다시 채워지는 성질을 갖고있다. 단지 마법사는 그 마나의 복원능력을 임의로 조정하여 제어해서 마법을 구현할 뿐이다. 나의 경우 마나는 아니지만 그보다 순수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령을 소환하거나 마법을 사용하면 생명력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빠르기로 복원되어 버린다. "지금처럼 100년을 공부하면 1서클의 마법만큼은 마법사처럼 사용할 수 있겠지." 재능이 없다면 노력으로 메꾸면 해결된다. 세상이 불공평하긴 하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 운명도 거스른 나인데 고작 마법이 무슨상관인간 말인가. 태평스런 생각으로 1서클의 실드(Shield) 마법공식을 익혔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공식을 암기하며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실드" 마법어를 외치고 실드의 마법공식을 떠올리며 계산결과에 따라 생명력을 제어하여 마법을 구현시켰다. 역시나 마법은 10분이 지나서야 구현되었다. 나는 몸 주변에 얇은 바람의 막을 살펴보며 뿌듯한 쾌감을 맛보았다. "10분이나 걸리지만 성공하면 정말 기분이 좋단 말이야." 나의 마법실력을 마법사가 본다면 어이없어 웃겠지만 재능없이 이만큼 성공한 것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한다. 이로써 1서클의 마법을 두 가지나 펼칠수 있게 되었다. 가슴아픈 부분이 있다면 나의 이같은 해프닝을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이 모두 알고있다는 사실이다. 길드에 가입할 때 한바탕 소동을 벌였으니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비크도 마법공식의 마법서를 보낼 때 나를 가리켜 1서클 마스터 카인이라고 기록하여 놀리기까지 하였다. 실드 마법에 대한 마법공식을 한 번더 살펴보고 마법서를 덮었다. 1서클의 마법이 무려 23가지나 있으니 하루에 하나씩 공부해도 앞으로 23일은 더 지나야 모두 익힐수 있게 된다. 설사 한 번씩 모두 구현해 보았어도 익숙하게 하려면 기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상상조차 못한다. 예상으로는 100년을 잡았지만 그것도 지금처럼 하루에 3시간 이상을 공부했을 때의 일이다. 밤이 되자 직원들은 퇴근했다. 일찍 돌아가라고 해도 굳이 저녁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간다. 노예 세렌은 나의 식사를 챙겨주는 것 이외에 할일이 없는데도 항상 바쁘다. 본래 세렌은 집안을 청소해야 하지만 나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파도루 가문의 지하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와 세렌이 청소하는 것을 보고 말렸다. 왜냐하면 바람의 정령을 이용하면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렌은 믿지 못하겠는지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청소를 하였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청소하면서 먼지가 티끌도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청소를 그만두었다. 세렌을 보면서 노예란 존재가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더욱더 가슴아픈 것은 그들 자신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의 재산으로 오직 주인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받쳐야 하다는 것만 알고있다. 그래서 할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을 만들려고 한다. 나의 식사준비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할일을 찾는 것이다. ------ 가비크는 자신이 기록한 문서를 바라보며 눈을 뗄수가 없었다. 문서에는 세 달여 기간에 카인에게서 치료받은 마법사의 기록이 담겨져 있었다. 카인이 마법사를 치료하는 동안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가비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다. 모든 일을 비밀리에 처리했기 때문이다. 카인에게서 치료받은 마법사를 직접 만나서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관리를 직접 해야만 했다. 마도사들도 관심을 갖은 일이라 비밀유지를 위해 그동안 마음고생 한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6서클 이상의 마도사가 3명,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70명, 3서클 이하의 하위 마법사가 20명.' 가비크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문서의 기록을 다시금 읽어보며 감동을 금치 못했다. 카인이 세 달이란 기간에 치료한 마법사가 무려 93명이다. 3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73명이고, 3명의 마도사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인의 치료로 마법사의 삶을 포기한 그들이 다시금 마법사로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도사 한 명을 배출하기 위해 제국에서 마법길드에 지원하는 자금은 병사 1만여명을 부릴수 있는 재정과 엇비슷하다. 설사 그만한 자금을 투자해서 수백여명의 마법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마도사가 탄생할 가능성도 희박하고 거기다 수십년을 기다려야하는 일이다. 하지만 일단 마도사 한 명이 탄생하게 되면 엄청난 전력이 된다. 병사 10만여명도 부럽지 않다. 적들을 향해 파괴적인 마법을 사용하여 병사 수십에서 수백여명을 죽일수도 있으며, 걸어서 며칠을 걸리는 지역으로 병력을 눈 깜짝할 순간에 이동시키기도 한다. 작은 전투의 경우에는 마도사 한 명이 승패의 좌우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다. "황궁에서 무척이나 좋아할 일이군." 가비크는 마법길드의 변동된 마법사의 전력을 보고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륙에 존재하는 제국과 왕국 그리고 소국까지 나라의 전력을 숨기기 위해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비밀로 하였다. 하지만 마법사가 너무 희귀하다보니 정보가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전력이 강한 나라일수록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숨기기는 커녕 반대로 투명하게 밝히고 있다. "황궁에서 보고를 받고 늘어난 마법사의 수를 보고 기절초풍 하겠군. 후후후" 가비크는 자신이 작성한 길드의 전력을 보고받을 황궁의 누군가를 향해 미소지었다. 생각만해도 너무나 흥분된다. 갑잡스럽게 늘어난 마법사의 수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기 위한 대책도 마련되어 있다. 마법길드에서 마나폭주로 인해서 마법사의 삶을 포기한 이들을 위해 새로운 치료법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카인에 대해서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인의 치료술이 아니더라도 오래도록 마도사들에 의해서 마나폭주에 대해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가비크가 할일은 황궁에 마법길드의 마법사 전력을 보고하는 것 이외에도 무척 많았다. 먼저 카인에게 서신을 보내서 모든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또한 그를 초대하여 길드에서의 등급을 마도사와 같은 수준으로 높여줄 생각이다. 이것은 가비크의 생각이 아니라 마도사들이 의견을 내고 모두 동의한 일이다. 어떤 마도사도 그가 한 일을 듣게 된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마도사들은 그를 위해서 마법무구까지 직접 만들어 선물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마도사들이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이는 이유는 카인이 세 명의 마도사를 치료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다. 그 마도사들은 그들과 어느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마법무구는 마도사만이 만들수 있는 특권이다. 마법무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하는 물체에 마법수식을 새겨넣고 활성화 시켜야 하는데, 활성화 시키기 위한 마법이 6서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법무구를 만들기 위한 재료도 마나를 집적시키는 마나석이라든지 값비싼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만드는 시도조차 어려운 편이다. 마법무구를 제작하여 선물할 마음까지 가졌을 정도이니 마도사들이 카인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29 회] 9. 성녀 더이상 말린에서 지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의 통해서 나의 치료에 대한 소문이 너무 퍼졌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환자를 모두 치료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쫓아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길버트가 최대한 환자를 적게 받으려고 하지만 무력까지 동원하고 있는 환자까지도 종종 있어서 심각한 상황이었다. 환자들에게 나에 대한 소문은 한가닥 희망이었다. 본래 치료사들은 환자를 만나보고 치료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치료비를 받는다. 치료사에게 시간은 무척이나 중요하니 당연한 처사이다. 그래서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치료사에게 일일이 찾아가 치료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치료하지 못하는 환자가 아직까지 거의 없었다는 소문이 돌아 무조건 찾아오는 것이다. "길버트 이제는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어." 나는 길버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꼭 치료사 일을 그만두셔야 합니까? 제가 좀더 노력해서 환자를 적게 받도록 해보겠습니다." "길버트도 불가능한 일임을 알잖아." 나는 길버트의 간절한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대답을 했다. 상처입어 고통받는 사람을 치료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좋다. 하지만 찾아오는 모든 환자를 치료하다보면 나의 생활은 누가 보상해 주겠는가. 신이 내려준 운명을 겨우 벗어났는데 남을 위해서만 살수도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길버트가 미안해 할거는 없어. 난 나를 위해서 살고싶어." 길버트가 고개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만약 찾아오는 환자 모두가 정말로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라면 치료사 생활도 계속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면서 자신의 작은 아픔에는 세상이 무너진다고 착각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모두들 소문을 듣고 내게 몰려와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치료사들은 매정하게 환자들을 쫓아내며 관리한다. 그렇지 않을경우 제대로 치료사로서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가 치료에 대해서 무지한 편이라 엄격한 기준을 정해놓고 치료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그런 고생까지 하면서 치료사 생활을 계속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럼 언제까지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하실 건가요?" "일주일 동안만이야. 일단 치료사 길드에 알리도록 해줘." "네, 카인님" 길버트는 어쩔수 없이 나의 말에 대답했다. 길버트는 치료사의 재정관리를 맡으며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뿌듯해 하였다. 치료받은 환자가 고마움을 표현할 때 그는 자신이 치료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환자와 함께 좋아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서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주일 동안에 길버트는 나의 치료사 집을 하나둘 정리했다.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치료사 생활을 그만둔다는 사실을 알렸다. 치료사 길드에서 대표가 찾아와 계속 치료사로 지내달라며 설득했지만 나는 더이상 치료사로 생활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소문이 많이나서 곤란한 것도 있었고 이 생활이 실증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죽은지도 세 달이나 지났다. 세 달이란 시간동안 한 일이라고는 방안에 틀어박혀 1서클의 마법을 수련하거나 환자를 치료한 것이 전부였다. 많은 시간을 생각만 하면서 보내며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히 하고싶은 일은 없었고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었다.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갔다. 치료사를 그만둔다는 소식에 나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이 몰려와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다시금 감사하다며 그 마음을 전해주었다. 네 명의 직원들에게는 그들이 앞으로 오랜동안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는 돈을 주었다. 처음에는 길버트를 위시하여 모두 거부했지만 나로서도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치료사의 집은 길버트에게 넘겨주었다. 사실 치료사 길드에서 나의 집을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집을 처음에 구입하여 치료사 생활을 하면서 길버트를 고용했고 그가 모든 것을 관리해왔다. 그래서 집의 상당부분도 그의 손떼가 많이 묻어있고 개조되거나 한 부분도 길버트의 계획에 의해서였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사비나와 알콩달콩 지내는데 정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인라지(Enlarge)" 나는 세렌이 방안에 놓아둔 꽃화분을 향해서 1서클의 인라지 마법을 구현시켰다. 마법어를 외친지 9분이 지나서야 마법의 효과가 나타났다. 인라지 마법은 성장을 촉직시키는 마법으로 주로 식물에 자주 사용한다. 나의 마법으로 인해 화분의 꽃이 조금 자라난 것을 직접 보게되니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정령을 소환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1서클의 마법을 수련한지도 두 달이나 지났다. 마법공식을 통해서 수련의 수련을 거듭해서 무려 마법구현 시간을 1분이나 단축시켰지만 더이상은 불가능했다. 처음 마법공식을 이용하여 마법을 구현시키는데 10분 걸린 이유는 공식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9분으로 단축된 것이다. '마법길드에도 들려야 할텐데 조만간 찾아가야겠구나.' 며칠전 마법길드에서 한 번 들려달라고 서신을 보내왔었다. 내가 치료사의 생활을 그만두기 며칠전부터 길드에서는 마나폭주로 상처입은 마법사를 보내주지 않고 있었다. 가비크가 서신으로 알려준 내용으로는 더이상 카르시온 제국에서 마나폭주로 고생하는 마법사는 없다는 것이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심하지 않아서 길드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휴우. 이제는 자유스럽게 여행을 떠나야겠구나.' 이제는 말린에서의 생활이 모두 자유스러워졌다. 치료사의 집도 정리되었고 길드에서 약속한 것도 해결되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가비크가 전해준 서신대로 마법길드에 들려 말린을 떠나 여행하는 길만 남았다. "세렌 밖에 있니?" "네, 주인님" 밖에서 짐을 정리하던 세렌이 나의 부름에 방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여행을 할 때 세렌도 함께할 것이다. 그녀를 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단 평민이 노예를 보유하고 있으면 귀족의 눈에 걸리게되어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나처럼 평민이면서도 어느정도 능력이 있는 자라야 가능하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 자신이 편하려고 그녀를 멀리하지 않는 것도 이유중에 하나다. "시킨대로 여행할 준비를 끝냈니?" "주인님이 말씀하신 물품은 모두 챙겨두었습니다." "그래 잘했어. 빠진게 있으면 여행하면서 구해도 되니까 너무 신경쓰지는 마." "알겠습니다. 주인님"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의 여행을 겪었다. 두 번 모두 크라이 숲에서 말린으로 오는 여정이었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인 포그너와 말린에 도착하여 사비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이었다. 그 때에는 오가는데 두 달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사비나와 함께 말린으로 오는 여정이었다. 그래서 여행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마차는 필수이다. 전문적인 여행자가 아니고서는 마차가 없다면 곤란한 일을 수없이 당할수도 있다. 마차에 필요한 생필품을 모두 싣고서 여행하며 여러가지 돌발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여행하면서 겪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행물품을 준비하는데 길버트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말린을 벗어날 권한이 없는 평민 신분이기 때문이다. 나야 정령사이자 마법사이니 신분보장이 확실해 어디로든 여행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카인님 어디 가세요?" 마법길드를 가려고 집을 나서자 길버트가 내게 말했다. "얼마전에 마법길드에서 한 번 찾아오라고 했었거든. 그래서 그곳에 마지막으로 들리려고." "내일 떠나시기로 하셨잖아요.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시죠?" 길버트가 어린아이 챙기듯 내게 말했다. 내일이면 떠날 것이기 때문에 직원들마다 내가 집밖으로 나갈 때마다 신경써주고 있다. 나의 직원들은 앞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사업을 할 생각이라고 내게 말했다. 무엇을 할지 결정하진 않았지만 이곳에 많은 추억이 많아 다른 곳에서 일할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준 돈이 많아서 굳이 성공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없이 하고싶은 사업을 벌일 생각인 모양이다. "아참! 오늘 직원들하고 저녁먹기로 했지?" 나는 길버트를 보자 약속한 것이 생각났다. 오늘 저녁식사는 직원들과 함께 먹기로 한 것이다. 말린에서의 마지막 식사니 가장 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은 당연하다. "네, 카인님."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나좀 마법길드에 데려다 주겠어?" "물론이죠. 빈둥빈둥 놀고있었는데 잘됐네요. 길버트가 나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마법길드에 가입을 하고나서 집으로 올 때에는 사비나를 빨리 보고싶은 마음에 어두운 밤을 바람의 최상급 정령 도움으로 날아서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길드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길버트가 길을 안내해 준다는 말에 다행이다 싶었다. 생각해 보면 사비나와 지내느라 처음 말린에 도착할 때를 제외하고 말린을 돌아다닌 경우가 많지 않았다. 요즘 길버트가 하는 일은 환자를 돌려보내는 일이다. 대부분의 환자가 집앞에 걸려진 글을 읽고서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의외로 많다. 직원 네 명은 집지키는 강아지처럼 옹기종기 모여앉아 찾아오는 사람을 돌려보내거나 서로 수다떠는게 전부이다. "저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길드를 야해 걷는중에 길버트가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치로 따지는게 아니야." "카인님이 모르셔서 그래요. 저들은 기회를 주어도 구걸을 한다니까요. 이곳에서 저들을 오래도록 지켜보지 않었던 카인님 같은 분은 절대 이해하지 못해요." 어디에나 부랑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회를 주어도 일하지 않고 단순히 구걸만을 하며 살아간다. 거지를 오래도록 지켜본 사람들은 절대 그들에게 적선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구걸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저렇게 살고 싶을까?" "저들이 왜 저렇게 사는지 궁금한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대답하거든요." 길버트는 마법길드를 향해서 걷는 동안 여러가지 말들을 해주었다. 내가 살고있는 지역이 말린의 북쪽지역이라 별로 좋은 거리는 아니었다. 수도라지만 이곳 만큼은 약간 지저분한 편이다. 거기다가 말린 전역을 순찰하는 근위병도 북쪽으로는 순찰조차 하지 않는다. 말린의 북쪽 지역에서 살고있는 귀족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들은 누구지? 정말 대단한 행렬이네." 나는 길버트와 대화를 하며 걷다가 정면에서 다가오는 행렬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였다. 깨끗한 백색 옷을 입고있는 사람들이 줄지어 걷고 있었고, 그 뒤로 두 마리의 백색 말이 마차를 끌고 있었다. 마차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수 없었다. 마차 옆으로는 백색 말을 탄 기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길버트 저 사람들이 누구냐니까?" 나는 길버트가 대답을 해주지 않자 다시금 물어보았다. 하지만 또다시 대답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길버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엎드려 있어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럇!" 따그닥. 따그닥. 갑자기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가 나를 발견하고 빠르게 말을 몰아서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가까이 다가오자 말의 고삐를 당겼다. 말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지자 마차행렬은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내게 다가온 기사의 호통소리가 이어졌다. "네 이놈! 감히 어느안전이라고 행렬을 보고서도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있느냐!" 기사의 호통 소리를 듣고 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백색 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 감탄한 행동을 제외하면 별달리 죄라고 할말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이십니까?" "그래도 이 평민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서 찢어진 입이라고 나불대느냐!" 기사는 나의 반문에 또다시 욕을 포함해서 외치더니 자신의 허리에 착용한 검을 빼어들었다. 그 순간 마차에서 누군가가 내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행렬에 포함된 사람과 내 앞의 기사 그리고 나밖에 서있는 사람이 없어서 마차에서 누군가 내리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성기사님!" 기사가 뽑아든 검으로 나를 내려치려는 순간에 마차에서 내린 여성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기사는 곧바로 검을 멈추었다. 기사의 검이 내려친다고 해서 내가 다칠 염려는 없었다. 정령을 이용해 간단히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사가 나의 정령 때문에 다칠 번 한 순간이었다. "천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소." "천신이시여." 마차에서 내린 여성의 목소리를 듣게된 사람들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행동을 보이며 눈물까지 머금으며 한결같이 천신을 외쳤다. 여성의 목소리를 듣게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듯이 말이다. 나는 무력을 동원해 기사의 검을 막지않은 행동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성기사님 자비를 베푸시지요." "이 평민놈이 감히 성녀님의 행렬을 무시했습니다. 이런 놈은 죽어도 마땅합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천한 것 같으니라구!" 기사는 여성의 말에 무척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나에겐 분노적인 말을 토해냈다. 나는 여성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20대 중반의 모습이고 살결이 희며 행렬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백색 옷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 행렬은 특이하게도 백색 옷을 입는 집단이었다. '아하. 신관들이구나.' 나는 여성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행렬의 정체를 알아챘다. 이들은 모두 천신을 믿는 신관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는 천신에게 힘을 빌려 사용하는 성기사였던 것이다. 기사들이 오러를 사용해 엄청난 무력을 사용하는 반면 이들은 천신을 믿음으로서 어려운 수련을 통하지 않고서도 오러와 비슷한 능력을 사용한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성녀님 이것 보십시요. 천한 것들은 모두 이놈처럼 무지합니다." 나의 물음에 기사가 성녀를 향해 외쳤다. 나로서는 기사가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 여성이 성녀인가보군. 아니 그래도 이곳은 말린인데.' 도대체 성기사가 화난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물었더니 성기사의 반응은 역시나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흥분한채 그저 분노를 터뜨릴 곳만 찾고 있었다. 사실 이곳이 말린이 아니었다며 영주가 거리를 지나갈 경우 평민들은 바닥에 업드려야 한다. 하지만 이곳은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이다. 말린에서는 귀족이나 신관을 향해 바닥에 업드릴 필요가 없다. 간단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면 그만이다. 설사 예를 표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큰 죄는 아니다. 말린에서 귀족을 향해 평민들이 예를 갖춘다면 평생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말린은 수도라 수많은 귀족들이 거리에 눈에 띄기 때문이다. 물론 북쪽 지역인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서 귀족이 거의 없다시피한 지역이지만 말이다.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성녀님, 이런 천한 놈의 이름을 알아서 무엇 하시겠습니까." "그만 마차옆으로 돌아오세요!" 성녀가 나를 향해서 한 말을 성기사가 곧바로 반문하자 더이상 성녀도 참을 수 없는지 그를 불러들였다. 사사건건 간섭하여 사람을 분노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성기사가 되었는지 의문이었다. "카인이라고 합니다." 성녀는 천천히 걸어서 내 앞으로 걸어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름을 밝히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성녀라면 신관이 가진 신력의 수백배에 달하는 신력을 가진 존재로 천신을 강림시킬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성녀가 아니고서야 어찌 성기사와 신관들의 호위를 받을수 있겠는가. "죄송합니다. 성기사분이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과잉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성녀님, 실례지만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르쳐 주실수 있습니까? 정말 몰라서 그렇습니다." "혹시 마법사이신가요?" 성녀는 어리둥절한 나의 반응을 흥미있게 바라보더니 마법사인지 물어보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물어봤는데 그녀의 대답은 엉뚱했다. 나는 무슨 이유가 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마법사인지 묻겠는가. "그런데 제가 잘못한 것하고 마법사가 무슨 상관인가요?" "네? 호호." 성녀는 나의 반문이 황당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생명력을 이용해 성녀를 살펴보니 그녀의 몸속에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정령신을 믿는 존재라 천신을 믿는 성녀의 몸속 기운에 반발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성녀님 그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면 오늘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소피아 알았어." 마차에서 한 명의 여성이 내려서 성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러자 나와 대화를 나누던 성녀도 어쩔수 없는지 빨리 대답했다. "카인님이라고 하셨나요? 대화 즐거웠습니다." "네." 성녀는 나와 대화를 끝마치지도 못하고 마차로 돌아갔다. 그리고 행렬은 이곳에서 지체한 시간이 아까웠는지 서둘로 출발하였다. 성기사는 나를 죽일듯한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천신을 믿는 성기사가 저런 사람이라니 한심했다. 물론 나는 천신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나의 운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여 60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만든 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성녀를 본 느낌은 별다른 점이 없었다. 약간 귀엽고 아름다운 얼굴을 했지만 그정도 얼굴이면 길다가가 가끔 볼 수 있었다. 그저 다른 신관보다 약간 뛰어난 신력을 갖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성녀라면 대화는 물론이고 만나는 것을 왜그리도 영광스러워 하는지 모르겠다. "어어! 길버트 이거 놔!" 신관의 일행이 거리에서 사라지자 갑자기 길버트가 나의 손을 잡더니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도망치다가 더이상 뛸수 없는지 길버트가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나는 생명력이 가득담긴 육체라 길버트처럼 숨을 몰아쉬지는 않았다. 단지 길버트가 왜 이랬는지 궁금하여 그가 말하길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다. "카인님 정말 제정신입니까? "아니 뭐가?" "성녀 일행을 보고서도 바닥에 엎드리지 않으셨잖아요! 성기사가 카인님을 검으로 목을 베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맞아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나는 길버트의 말을 듣고서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 성녀도 길버트와 비슷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내가 잘못한 이유를 물었더니 마법사라고 반문하기나 하고 말이다. 신관 일행을 보고 엎드리지 않으게 그렇게 잘못한 것인가. 제국에 수도에서 신관을 보고 엎드리란 법은 없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신관 일행을 보고 엎드리지 않은게 잘못한거야?" "저는 엎드려 있어서 소리만 들었는데 카인님 성녀님과 대화하시지 않았나요? 그때 엎드리지 않으려고 버틴거 아니었어요?" "내가 왜 그런 미친짓을 해. 난 그냥 서있던 것 뿐인데." 길버트가 나의 대답을 듣고서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고 생각하더니 자신의 두 손을 맞부딪히며 무엇인가 알아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구나. 카인님은 정령사이자 1서클의 마법사였지. 내가 보기엔..." 길버트는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천천히 말해주었다. 본래 신관은 천신을 믿음으로서 힘을 얻는다. 신자들이 천신의 믿음이 강해 신력을 얻으면 신관이 되고, 기사들의 경우는 성기사가 된다. 하지만 신관중에 가끔씩 천신을 직접 육체에 소환시킬 수 있는 여성신관이 나타나는데, 신관들은 그 여성신관을 성녀라 부른다. 성녀는 천신을 믿지 않는 존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성녀의 육체에는 엄청난 신력이 휘몰아치고 있기 때문에 성녀와 손길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처가 치료되기도 한다. 또한 성녀에게는 엄청난 위엄의 기세가 흘러서 누구도 그녀를 해할 수 없다. 그래서 성녀는 중요한 존재로 여겨져 어려서부터 신관들의 보호아래 자라게 된다. 사실 보호하지 않아도 성녀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성녀의 위엄서린 기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쉽게 알수 있다. 그녀를 바라본 사람은 황제는 물론이고 그 어떤 사람이라도 바닥에 엎드릴 정도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예외라면 마법사, 정령사, 예언자 등이나 신관을 적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위엄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물론 적대적인 마음을 가져도 성녀를 해할 수는 없다. 성녀가 천신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그 어떤 물리적 혹은 정신적 공격에도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럼 성기사는 내가 천신에 적대하는 사람으로 엎드리지 않으려고 꿋꿋히 버틴 것이라고 생각한거야?" "그럼요." "그렇구나. 그럼 성기사의 행동이 탓할일은 아니네. 내가 천신을 싫어하거든." 나는 길버트의 말을 듣고서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성기사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는 천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하다못해 나무를 믿거나 돌을 믿는 사람까지도 있다. 그렇다면 성기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인가. "카인님 그런데 정말로 성녀를 바라보고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그렇다니까." 길버트는 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길버트는 신관 일행을 보고서 스스로의 의지로 바닥에 엎드린 것이 아니다. 알수없는 기세가 마차안에서 흘러나온 것을 느끼고 어느세 바닥에 엎드려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천신을 믿지만 자의로 한 행동이 아니라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상하네. 정령사라서 그런가." 길버트는 마법길드로 가는 도중에 내내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나또한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성녀에 대한 생각만 했다. 나는 성녀를 바라보며 그저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니 기분이 묘했다. 아마도 성녀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본 사람은 나 이외에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신관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마법길드에 도착하기까지 나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성기사와의 문제 때문이다. 길버트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신관들은 좋은일을 많이한다. 모든 신관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가 위로도 해주고 치료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신관은 귀족에게만 온갖 능력을 보인다는 것이 문제이다. 마법길드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가비크였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잠시 기다리게 해놓고 마도사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파도루 가문의 지하감옥에서 마법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마도사들은 사소한 일로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많은 마도사들이 모여 있었다. "마도사님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거나 탁자 주위에 서있는 마도사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1서클의 마법을 배우면 배울수록 마법사가 대단하게 생각된다. 나처럼 말도 안되는 행운으로 엄청난 능력을 갖게된 경우와는 천향지차이다. 이들은 모두 목숨을 내걸고 평생 수련으로 생활해서 지금의 마도사가 된 마법사들인 것이다. "우리도 만나게 되어 기쁘네. 저번 자유 마법사들을 영입할 때 보지 못해서 아쉬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는구만."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한 일을 했어." "그렇구말구." 마도사들이 나의 인사에 한 마디씩 덧붙여 대답을 하였다. 마도사들이라 그런지 나의 생명력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800년에 해당하는 모든 생명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스스로 감추지 못한 생명력의 기운만을 느낀 것이다. "모두 보고를 해드렸지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카인이 치료한 마법사는 총 93명입니다. 여기 계시는 세 분의 마도사님들도 포함한 숫자입니다. 자세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카인이 한 일의 대단함을 느끼고 계실 겁니다. 지난 번에 결정한대로 길드에서의 카인 등급을 마도사급으로 높이기로 했습니다. 불만이 있거나 반대하시는 분은 말씀해 주세요." 가비크는 방안에 모여있는 마도사들을 향해 씩씩하게 대답했다. 잠시 방안에 적만이 흘렀고 누구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1분 가량이 지나자 가비크는 다시 말하기 위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아무도 거부하시는 분이 없으니 카인을 마도사 등급으로 올리겠습니다." 가비크의 선언에 마도사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는 마도사들의 행동에 정말로 감동받았다. 1서클의 마법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나를 마도사 등급으로 올려주며 축하해 주다니 말이다. 사실 가비크가 내게 치료받은 마법사를 발표할 때 마음속으로 뿌듯했다. '내가 치료해 준 마법사가 무려 93명이라니 그렇게나 많았나.' 하루에 한 두명씩 치료했는데 그것이 모여 93명이 되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목숨의 가치를 사람의 능력에 따라 판단하면 안되겠지만 객관적으로 마법사란 존재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카인 자네가 치료한 이 사람들을 대신해 우리가 선물을 준비했네." 8서클 마도사인 포지토프가 나에게 치료받은 세 마도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포지토프는 지난 번 길드에 가입할 때 보았던 마도사라 잊지 않고 있었다. 8서클의 마법사임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도 잊을수 없을 것이다. "선물이라니요?" "가비크가 설명했을테니 굳이 말하지 않겠네. 간단히 말하자면 길드의 전력이 강해졌고 황궁에서도 어마어마한 지원금을 책정할걸세. 자네에게 치료받은 마법사중에 하위 마법사를 제외하고라도 3서클 이상이 무려 73명이나 되니까. 자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가비크가 뭐든지 도와주겠지만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주게." "마도사님들께서 하찮은 제게 선물까지 주시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나는 마도사들이 신경써준 것에 무척이나 감동받았다. 사비나가 죽은후 나에게 신경써준 사람이라고는 길버트와 노예 세렌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인간적인 대접을 받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포지토프가 내미는 상자를 두손으로 받았다. "고맙습니다. 포지토프님. 그리고 마도사님들." 상자를 받아든 나는 포지토프를 비롯해 여러 마도사를 향해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선물의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선물을 준비한 마도사들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도사들은 그렇지가 않은가보다. 모두 마도사들이 내가 선물을 개봉하길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값비싼 물품인가?' 나는 마도사들의 눈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대부분의 마도사들은 재물욕이 일반 사람들보다 낮은 편이다. 그들에겐 오직 마법이 삶의 전부이다. 황금을 눈앞에 쌓아놓아도 한 권의 마법서를 소중히 여기는 존재이다. 설사 황금에 욕심을 부리더라도 그것으로 마법에 관련된 무엇인가를 하기위한 도구로 사용하리라. 나는 마도사들의 눈길에 어쩔수없이 상자를 풀어헤쳤다. 상자에는 황금으로 된 팔찌가 들어 있었다. 팔찌는 단순한 띠 모양을 하고 있었고 황금이라 반짝거리고 있었다. 황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반짝거릴 수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비싼 팔찌를 선물해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팔찌를 상자에서 꺼내고 마도사들에게 또다시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팔찌의 크기를 보아서 황금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무척 신비로움을 풍기는 물건이었다. 팔찌의 외형에 알수없는 예쁜 모양의 무늬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카인 그 팔찌는 자네를 위한거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 세상에 하나뿐인 팔찌네. 그 팔찌는 마도사님들이 자네를 위해서 심여를 기울여 특별히 만든 것이야. 그 팔찌를 차고 있으면 1서클에서 3서클의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 물론 마나를 주입해야 하기 때문에 카인처럼 마나가 많은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무구야." 가비크는 마도사들이 준비한 팔찌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마도사들은 놀라는 나의 모습을 보고서 기뻐하였다. 마도사들이 이런 마법무구를 선물한 것은 가비크에게서 내가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재능이 없어서 1서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서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런 무구의 도움으로 마법을 펼쳐서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팔찌가 싫은 것은 아니다.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으니 말이다. "히야! 정말 대단한 팔찌네요. 어떻게 만드신거에요?" 포지토프가 나의 물음을 듣더니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팔찌는 겉보기에 단순히 황금으로 만든 띠와 같지만 그것은 정교한 세공을 거친 것이었다. 모두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한 겹으로 합쳐놓았기 때문에 단순한 팔찌로 보인다. 한 겹마다 각 서클의 모든 마법의 수식이 새겨져 있었다. 팔찌에 마나를 주입하면서 마법어를 외치면 마법어에 해당하는 팔찌에 새겨진 마법수식이 활성화되어 마법이 구현되는 것이다. 팔찌에 사용되는 황금은 구하는데 어렵지 않지만 마법수식을 새겨야하는 무늬는 마법무구를 만들 때 가장 귀하게 취급하는 미스릴 금속으로 새겨졌다. 마나를 전달하는 물건에는 미스릴과 오리하루콘 그리고 보석류 외에는 구하기 어렵다. 보석이 가장 구하기 쉽지만 드워프가 아니고서는 원하는 모습으로 가공하기가 무척 어렵다. 가비크의 말대로 팔찌는 정말로 날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마도사들에게 고마움을 이루 말할수 없었다. 마도사들이 만들어준 팔찌만 차고 있으면 나름대로 마법사라 불릴말한 마법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생명력이 넘차나니 마도사가 부럽지 않았다. 마도사들이 내게 팔찌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며 소란을 피웠고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모임이 끝났다. 마도사들은 모두 바쁜 존재들이라 모두 돌아간 것이다. "가비크님 고마워요." "고맙긴. 카인도 알다시피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솔직히 카인은 마법사라기 보다는 정령사이니까." "하하하" 가비크의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도사들의 성화에 나는 왼팔에 팔찌를 끼고 있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반짝거려 사람들의 눈에 쉽게 뛰게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팔찌를 왼팔에 끼자 팔찌의 색이 곧바로 피부색으로 변했다. 팔찌를 만들 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경써서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가비크에게 앞으로 여행할 계획임을 알렸다. 그리고 몇개의 마법물품을 구입했다. 내가 원한 마법물품은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마법주머니와 여행에 유용하게 쓰일 마법물품들이었다. 마법주머니는 상상한 것과는 다르게 많은 물품을 담을 수 없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값에 팔리기 마련이다. 내가 마법길드에서 들어갔다가 나온 시간은 네 시간이 넘어서였다. 밖에서 기다리던 길버트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직원들과 식사를 하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내일 아침이면 세렌과 함께 말린을 떠날 것이다.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기대되기도 한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0 회] 9. 성녀 세실리아는 카르시온 제국에 몇 안되는 성녀중에 하나이다. 어려서부터 신관들에게 보호받으며 성녀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배워야만 했다. 세실리아는 다른 성녀들과 다르게 스스로의 신력에 회의적인 생각을 한다. 수많은 신관들은 매일같이 천신을 위해 기도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엄청난 신력이 넘쳐나니 말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세실리아는 몇년전에 황궁에서 지내고 있는 예언자 프로퍼를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언자로서 절대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예언자 프로퍼의 이야기는 운명에 관련된 말이었다. '우리의 삶은 운명지어졌지. 도저히 피할길이 없을거야.' 세실리아는 몇년전에 들었던 프로퍼의 말이 아직까지도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프로퍼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는 신에 의해서 운명이 정해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언자인 프로퍼 자신은 물론이고 영웅이나 현자도.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갖기 힘든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까지도 포함된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의 삶이 모두 정해진 운명이란 말인가.' 몰랐다면 평생 성녀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에게서 이미 정해진 순으로 진행되는 운명이라면 저주나 다름없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삶이 결정되어야 한다.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면 장난감 인형과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세실리아는 프로퍼의 말이 진실임을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신전에 보관된 고문서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신관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고서적은 무척이나 많았다. 운명과 관련된 서적을 찾다보니 프로퍼의 말이 진실임을 알았고 운명에 관련된 더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세실리아는 어려서부터 신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성녀로서 자라온 자신이 비참했다. 하지만 성녀의 삶을 벗어던지고 일반 평민처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그녀에게 없었다. 신이 정한 운명을 피하는 방법이 쉬울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고싶은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성녀의 운명을 벗어날 방법중에 하나는 순결을 잃는 것이다. 성녀란 천신을 강림할 수 있을 정도의 신력을 지닌 여신관을 말한다. 천신의 강림을 위해서는 꼭 처녀의 순결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스스로의 의지는 물론이고 타인의 의지로도 절대 순결을 잃을수 없는 존재이다. 성녀의 신체는 천신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그녀의 근처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력의 기세 때문에 욕망이 일어날 수 없었다. 설사 욕망을 가진 남자가 성녀에게 접근하더라도 그는 천신의 분노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신관들이나 신력에 대항할 수 있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 뿐이다. 그러니 세실리아가 순결을 잃고 싶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만약 순결을 잃게 된다면 그녀는 운명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신력을 잃게되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천신이 아닌 신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인간세계의 영향을 주는 신이 굳이 천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네크로맨서의 경우는 마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신의 보호를 받는다. 또한 인간 정령사는 엘프가 아닌데도 정령신의 조화로운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 방법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천신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인간을 또다른 신이 도움준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천신과 비슷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에게 그만한 영향을 끼칠수 있는 신으로는 오직 마족들이 숭배하는 마신밖에 없다. 하지만 세실리아로서는 아무리 운명이 결정되어 저주스런 삶을 살더라도 마신의 도움을 받고싶지는 않았다. 마신이란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난 끔찍한 신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방법으로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면 마지막인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위의 두 가지 방법처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죽지 않고서는 성녀로서의 운명지어진 삶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카인이라고 했던가?" 세실리아는 낮에 마주쳤던 소년을 기억하며 중얼거렸다. 성기사는 소년의 행동을 보고 신관을 적대시한 것으로 오인했지만 자신의 판단으로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력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두눈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수 있을지도 몰라.' 세실리아가 꿈꾸는 것은 오직 운명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매일같이 신전에 찾아오는 평민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가끔씩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그들이었으면 하고 언제나 바래왔다. 평민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는 있지만 최소한 성녀로서 천신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끔찍한 삶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가끔은 진실을 말해준 예언자 프로퍼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몰랐다면 성녀란 자부심으로 죽을 때까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았을텐데 말이다. "소피아, 프로퍼님은 아직도 오시지 않으셨어?" "세실리아님께서 부르셨으니 꼭 오실거에요." 세실리아의 말에 소피아가 대답했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시중을 들어주는 신관이다. 세실리아가 어려서부터 신전에서 성녀로 교육받을 때부터 함께 지내온 신관이다. 그래서 소피아는 세실리아에 관한 것을 속속들이 알고있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와 마찬가지로 방안에서 안절부절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성녀인 세실리아는 신전에서 무불소위의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런 세실리아가 불안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욱이 천신의 보호를 받는 그녀로서 말이다. 그 이유는 세실리아가 성녀로서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프로퍼를 불렀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 성녀로서의 생활을 포기한 세실리아를 돕기로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천신의 분노를 산다면 어떻겠는가. 신관이라면 사람들을 자신의 의지로 돕고 생활하니 무척이나 자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신에 의해서 성녀로서 살아가는 세실리아의 삶은 누가 보상하겠는가. '이번에는 잘 되어야 할텐데.' 소피아는 답답한 마음에 세실리아의 방에서 나왔다. 세실리아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 프로퍼와의 만남을 자주 갖는다. 그 이유는 운명을 벗어나게 도와줄 사람을 찾기위한 것이다. 세실리아의 신력에 영향을 받지않는 남자만 찾게 되다면 그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그 남자의 도움으로 순결을 잃는다면 말이다. 예언자 프로퍼는 사람의 미래를 볼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프로퍼와의 대화만으로 카인이란 소년의 도움으로 세실리아가 과연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프로퍼의 에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절대 변할수 없는 예언이고 다른 하나는 변할수 있는 예언이다. 프로퍼는 세실리아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에 따른 앞날을 예언할 수 있다. 새벽이 되어서야 프로퍼는 성녀가 머무는 신전에 방문했다. 신전은 성기사의 보호를 받아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지만 프로퍼는 성녀의 손님이기 때문에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프로퍼는 신분이 확실하고 제국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존재이다. 그의 방문이 새벽이긴 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방문한 예언자 프로퍼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프로퍼 또한 자신의 흰 수염을 손으로 만지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실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프로퍼로서는 운명을 벗어날 희망이라도 있는 세실리아가 부러웠다. 반면 프로퍼 자신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의 앞날이 보잉는 생활자체가 저주스러웠다. "세실리아님 손을 내밀어 주시겠어요?" "네, 프로퍼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로퍼는 세실리아가 운명에서 벗어나길 바랬다. 카르시온 제국에는 여러 성녀들이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삶에 만족스럽게 생활한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스스로의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약간 비관적인 생각을 갖은채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명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낮에 만났던 카인이란 소년을 떠올려보세요." 프로퍼에겐 상대방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다. 모두 예언자로서의 능력이다. '저 소년이군.' 프로퍼는 세실리아가 떠올리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듯 하였다. 프로퍼는 카인이란 소년의 모습을 자세히 눈여겨 보았다. 예언을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생김새와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능한가요?" "네, 잠시만 기다리시면 알수 있습니다." 프로퍼는 세실리아의 질문에 공손히 대답했다. 프로퍼의 나이가 70세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27세에 불과한 세실리아에게 최대의 예를 갖춘 것은 그녀의 신분 때문이다. 예언자는 황제와 같이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하나의 개인에게만 대우를 받지만 성녀인 그녀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카인이라...' 프로퍼는 눈을 감고서 카인이란 소년의 생김새와 그의 이름으로 앞날을 엿보았다. 세실리아가 과연 카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예언자로서 세실리아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지 보는 일이다. '이럴수가. 드디어 찾아내다니.' 프로퍼는 자신이 바라본 앞날의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실리아가 카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운명을 벗어던질 수 있다고 예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예언의 결과는 알수 없었다. 세실리아가 카인의 도움을 받는다는 가정하에 예언을 점쳤기 때문에 앞날의 미래가 변동될 가능성은 수없이 많았다. 카인의 도움을 받지못할 가능성도 무척이나 많으니 꼭 운명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능성만은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다. 결국 성녀인 세실리아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수도 있는 것이다. "드디어 찾아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세실리아님" 세실리아는 프로퍼의 말을 듣고서 너무나 기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세실리아가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처녀의 순결을 버리는 방법이다. 다른 신의 도움을 받는 것은 마신과 영혼의 계약을 맺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니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세실리아는 신력에 영향을 받지않는 남자를 찾기위해 수년동안 노력했다. 카인과 같은 경우의 남자를 몇번 찾았었지만 예언자 프로퍼에게 불가능하다는 예언의 말만 들었다. 세실리아가 찾는 남자는 자신이 갖고있는 엄청난 신력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천신의 분노가지 견딜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정확히 어떻게 행동해야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자세히 가르쳐주세요." "세실리아님 그것은 저로서도 알수 없지만 설사 알고있다 하더라도 가르쳐 드릴수 없습니다. 세실리아님이 카인이란 소년을 찾아간 다음부터의 예언에 관해서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입니다. 그리고 세실리아님이 운명을 벗어날 가능성이 얼마인지도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세실리아는 프로퍼의 말에 기운이 빠졌지만 오늘의 성과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드디어 꿈꾸던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소피아도 세실리아에게 축하의 말을 하였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유일한 가족이다. 어려서부터 함께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소피아는 앞으로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함께하자고 다짐했었다. 세실리아는 프로퍼에게 감사의 인사와 동시에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세실리아의 계획이 성공하게 된다면 앞으로 그녀가 프로퍼를 마나게 될 일은 없었다. 세실리아의 삶이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도 무척이나 크지만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불행한 삶일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 집에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질리 만무했다. 사비나와의 추억이 가득 남아있는 집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세렌은 마차에 타고 있었고 나는 마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차를 모는 솜씨가 형편없긴 하지만 대부분의 말이 똑똑한 편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럇!" 나의 출발소리에 말이 느릿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마차를 끌고있는 말은 무척이나 허약한 말이었다. 다리 근육이 많지 않아서 오래 달리지 못하며 힘도 강하지 않은 말이다. 평민들이 구입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한계였다. 좋은 말은 대개 전쟁터로 보내지기 위해 군마로 쓰여지거나 귀족들이 소유하기 마련이고 쓸모없는 말만이 평민들에게서 거래될 뿐이다. 따그닥. 따그닥. 허약한 말이 마차를 천천히 끌고서 앞으로 나가며 여행의 시작을 알렸다. 내겐 여행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목적지도 없을 뿐더러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마부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보내자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인 말린을 보호하는 내성을 지나 외성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성과 외성을 지나는데 신분의 증명이 필요했지만 러쉬 용병길드에 속해 있기 때문에 쉽게 처리되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오히려 근위병이 나의 신분을 알고 오히려 놀란 것 뿐이다. A등급의 용병은 쉽게 볼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정도 등급이면 몬스터는 물론이고 사람 수백명은 죽였던 경험자가 대부분이다. "세렌 괜찮아?" "네, 주인님" 세렌이 마차에 앉아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예전 마차에 탔을 때 무척이나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덜컹거리며 오래도록 마차에 타고 있으면 속까지 함께 울렁거렸다. 그래서 마차여행을 시작한지 일주일 동안 끔찍한 고생을 한 경우가 예전에 있있던 것이다. 그래서 세렌의 상태가 걱정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에휴. 해도해도 너무하는군. 힘좀내라." 나는 마차를 끌고있는 말을 향해서 탄식을 했다. 세렌이 괜찮은 이유가 마차를 느리게 끌고있는 말 덕분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목적이 없는 여행이지만 마차의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말을 바꿀수도 없는 노릇이다. 점심은 세렌이 아침에 준비한 빵으로 해결했다. 멀리 말린의 모습을 감상하며 먹는 점심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말린은 무척이나 웅장해 보인다. 외곽에 쌓여진 높다란 성벽과 그 안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점으로 보인다. 점심을 먹고 천천히 마차를 몰았다. 일단은 며칠간은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 말린이 지역적으로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약간 남쪽으로 내려와 다른 곳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차를 몰고가는 도중에 옆으로도 많은 마차나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말린을 향한 길이라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다. 저녁이 가까워질 때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말린을 향하는 사람들 대개가 모두 상인에 속한다. 그들은 시간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중간에 지체하는 경우가 없다. 결국 나의 여행길은 처음부터 야영을 해야하는 선택에 놓였다. 오랜만에 야영을 하는 것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비나와 함께 크라이 숲에서 출발해 말린을 향해가던 여행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야영을 하기 위해서 장소를 선택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야영을 한 장소에 몬스터가 등장한다거나 야생동물이 찾아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불을 피울 때 주변의 바람이 야영 장소 근처를 계속해서 휘몰아치는 경우에는 연기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있다. 나는 길에서 우축에 있는 숲으로 마차를 몰고 들어갔다. 드르륵. 드르륵. 야영할 장소에 마차를 세워두고 호미로 마차를 중심으로 작은 도랑을 만들었다. 작은 곤충들은 한뼘 깊이의 도랑 만으로도 침범하지 못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작은 곤충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비가 올 경우에는 빗물을 옆으로 흘려보내기도 한다. "세렌 앞으로 야영을 할 때에는 이런 도랑을 꼭 만들어야 해. 왜냐하면..." 앞으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 세렌이 알아야 할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사소한 것이지만 정령의 도움으로 야영준비를 하지 않고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도랑을 만들고 마차 위에다 천막을 세웠다. 새벽이 되면 이슬이 계속해서 떨어질 것이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경험이 많은 여행자라면 이슬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초보 여행자에겐 몸의 체온을 떨어뜨려 치명적이다. 마차여행의 가장 편리한 점은 여행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가지고 다닐수 있다는 것이다. 음유시인의 경우 여러곳을 떠돌 때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기위해 최소한의 짐만을 가지고 다닌다. 식기도 자신이 필요한 것만 챙기고 다른 물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마차가 있다면 천막까지 가지고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세렌이 마차에 싣고있던 냄비와 음식재료를 꺼내어 요리를 시작했다. 물은 숲이라서 찾으려면 고생을 해야할 것 같아 정령의 도움을 받았다. 작은 모닥불 위에 올려진 냄비 위에서 피어오르는 음식냄새가 코끝을 간지렵혔다. 점심을 간단히 빵으로 해결해서인지 더욱더 군침이 돌았다. 뽀글뽀글. 지글지글. 세렌의 요리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냄비에서 스프가 펄펄 끓는 소리까지도 들렸다. 모닥불에 하는 요리라 기대가 되었다. 세렌도 여행의 긴장감 때문에 오늘 요리만큼은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여행하는데 준비한 음식재료가 많아 아낄 필요는 없었다. 마을에 들릴 때마다 보충하면 되기 때문이다. "주인님 드셔보세요." 세렌은 요리가 끝나자 스프를 접시에 떠서 내게 내밀었다. 스프에 육류도 들어갔기 때문에 향기가 무척이나 진했다. 가끔 육류를 먹게되면 가족이 생각난다. 그들은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 절대 육류를 먹지 않고 엘프의 습성인 채식만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을 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육류를 먹는데 거리낌이 없다. "세렌 정말 맛있어. 앞으로 여행이 세렌 때문에 즐겁겠는데." "고맙습니다. 주인님" 세렌은 나의 칭찬을 듣더니 무척이나 좋아했다. 세렌은 시간이 지날수록 밝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영향이 아니라 죽은 사비나 때문이 분명했다. 조금씩 변하는 세렌을 볼 때마다 사비나가 생각난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슬픔이 밀려들지 않는다. 그녀의 죽음은 사비나 본인이 거리낌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세렌도 같이 먹도록 해. 이제 앞으로 우리 둘만 지내게 될테니까 말이야." "고맙습니다. 주인님." 세렌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는 즐거우면서도 무척 조용했다. 세렌이 노예인지라 대화자체가 일방적으로 흐르니 대화가 계속될리 없었다. 그저 내가 말하면 세렌이 호응을 할 뿐이다. 나는 나름대로 여행에 필요한 기본사항을 말해주었다. 앞으로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알아야 되는 것이니 말이다. 식사가 끝나자 세렌이 뒷정리를 하였다. 첫날이라 세렌을 위해서 일찍 자기로 했다. 마차에 많이 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편했겠지만 세렌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나 또한 마차를 타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 피곤함을 느꼈다. 그나마 생명력 때문에 약간의 피로한 기분만을 느끼는 것이다. 정령의 도움을 받거나 생명력을 이용하면 피곤이 곧바로 사라지겠지만 그렇게 하고싶지 않았다. 숲에서의 야영이 가장 위험한 것은 야생동물과 몬스터의 등장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최상급 정령을 믿고서 잠들수 있었다. 나와 세렌이 모닥불 근처에서 담요를 덮고 자는 모습은 어찌보면 처량했다. 하지만 야영에서 담요까지 덮을수 있다는 것은 호강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야생동물과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해 교대로 불침범을 서면서 뜯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바스락. 바스락. 나는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옴을 느꼈다. 분명히 인위적인 소리가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숲에서 나는 소리야 동물의 소리나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겠지만 밤에는 대부분 울지않는 편이다. 내가 곧바로 깰수 있었던 것은 생명력 때문에 오감이 발달해있기 때문이다. '엘레스트라 지금 무슨소리야?' 이상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궁금해서 누운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엘레스트라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통해서 정령소환이 좀더 자유로와졌고, 정령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도 대화처럼 익숙하다. '누군가 접근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왜 알려주지 않은거야? 밤에 접근하는 사람은 위험하잖아.' 나는 엘레스트라의 대답에 곧바로 반문했다. 사람이 접근하는데도 알려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성을 갖추고 있으니 밤에 접근하는 사람이 위험함을 당연히 알 것이 아닌가. '위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굳이 깨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명이 접근하는데 모두 여자입니다. 무기도 없을 뿐더러 나쁜 목적은 없다고 판단됩니다." '알았어. 고마워.' 엘레스트라의 대답은 논리정연했다. 내가 생각해도 오밤중에 여자 두 명이 접근해서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설사 위험해도 정령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다. 나는 두 명의 여자가 접근할 때까지 조용히 잠자는 척하며 기다렸다. '새벽에 여자 두 명이 왜 이곳을 왔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나는 엘레스트가 말하는 두 명의 여자가 조심스럽게 모닥불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여러가지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여자 두 명이 숲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궁금한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했지만 잠시후 그녀들의 행동을 보게되면 알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바스락. 뿌득. 모닥불로 접근하던 여자중에 한 명이 나뭇가지를 밟아 큰 소리를 만들었다. 조용한 숲에서 발생한 소리라 세렌이 잠에서 깨어났다. 세렌은 신분상 작은 소리에도 민감한 편이다. 아니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직접 생활화 되어있어서 깨어난 것이다. "누구신가요?" 세렌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서 작게 말했다. 조용한 숲속이라 멀리 있어도 쉽게 들렸을 것이다. 나는 세렌이 깨어난 것을 알면서도 그냥 누워있었다. "죄송합니다. 저기 저희는 그러니까."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렌의 물음에 답하는 소리가 아니라 무엇인가 말하기 곤란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두 여자들이 모닥불을 향해 발소리를 내면서 계속 다가왔다. 세렌은 여행이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른채 침착하게 기다렸다. '주인님 지금 느낀 것인데 두 명 모두 신력을 지닌 신관입니다. 그중에 한 명은 성녀에 버금가는 신력을 지녔습니다." '뭐? 신관?' '네, 그렇습니다.' 나는 엘레스트라가 생각으로 전달하는 말을 듣고서 다가오는 두 사람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신관이 조용한 숲속에서 돌아다니다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에게 볼일이 있을리도 없지 않은가. 나는 신관과 인연이 하나도 없다. "주인님. 으으으" 갑자기 세렌이 자리에 쓰러지더니 몸을 떨었다. 나는 더이상 누워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세렌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지체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엘레스트라에게 세렌이 왜 이런지 물었다. 세렌은 노예라지만 적어도 지금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두 명의 신관중에 한 명이 뿜어내는 신력의 기세를 견뎌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신력을 견딜수 있도록 보호를 하겠습니다." 세렌은 엘레스트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잠시후 기절했다. 어제 길버트에게 신력이 강한 신관의 경우 일반 사람이 그 기세를 견뎌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세렌처럼 과민반응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신관일행과 만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타의로 몸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두 명의 신관이 다가오는 속도는 나의 마차를 끄는 말처럼 무척 느렸다. 캄캄한 숲에서 조심스럽게 걷고 있으니 당연했다. 멀리서도 신력의 기세가 느껴진다지만 나에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마도 내가 신의 운명을 거스른 자라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패러렐 라이프에 대한 나의 운명에 관해서는 정령들이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정령들은 전설의 드래곤 보다도 오래 살아온 존재로 알고있는 것이 많은만큼 그것을 모두 인간에게 알려주지 못하는 규율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모든 사실을 인간에게 알려준다면 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당신은?" 나는 두 명의 신관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녀들과 구면인 것을 알아챘다. 오래전에 마났던 관계라면 쉽게 잊혀졌겠지만 그녀들은 어제 신관일행에 중심이던 사람들이다. 바로 신관과 성기사들이 보호하는 마차에서 내렸던 성녀와 소피아라 불렸던. "밤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성녀님" 성녀라 불리는 여자가 내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그것을 옆에 있던 소피아라는 신관이 말렸다. 나는 그녀들의 행동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이들의 행동으로 보아서 나를 찾아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들은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았을까. 그리고 왜 나를 찾아왔는지 도저히 알길이 없었다. "카인님 맞으시지요? 저는 세실리아라고 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천신의 신자인 피니온 신전의 성녀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아이는 소피아 신관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무슨일로?" 이처럼 황당한 만남이 있을까 싶었다. 세렌은 신력의 영향으로 기절해 있었고 어두컴컴한 밤에 숲속에서 만나는 성녀와 신관을 만나고 있는 나를 말이다. 나는 하고싶은 말이 많았지만 무엇부터 말해야될지 몰랐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카인님께서 제말을 과연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아무런 동요없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잠깐 세렌의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말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저번처럼 이상한 일이 휘말리는 것은 아니겠지?' 두 신관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파도루 가문의 지하감옥 사건을 계기로 왠지 이상한 일이 휘말린 것은 아닐가 걱정되었다. 여행길에 오르고 첫 야영인데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었다. 할수없이 세실리아와 소피아의 반대편에 앉아 밤새도록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1 회] 9. 성녀 나는 성녀 세실리아의 말을 들으며 다시 악몽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불쌍한 것은 알겠지만 나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내몸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어찌 다른 사람을 돕겠는가. 더욱이 천신의 분노까지 감당하면서까지 말이다. "당신이 불쌍한 것은 알겠지만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요." 나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이제는 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싫다. 그나마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도와주고 있는 정령신만이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대뜸 찾아와 자신의 순결을 잃도록 도와달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저좀 도와주세요. 도저히 지금처럼 살수가 없습니다. 제발좀." "세실리아님을 도와주세요." 세실리아가 내게 간절히 말하자 옆에 있던 소피아도 그녀를 도왔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순결을 잃도록 도와준다면 천신의 분노까지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누가 책임지겠는가. "그럼 천신의 분노는 어떻게 해결할건가요? 나보고 죽으란 소리에요?" 세실리아는 나의 말을 듣고서 잠시 움찔했지만 다시금 도와달라고 말했다. 어찌보면 그녀는 자신을 위해 나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성녀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소피아라는 신관도 마찬가지이다. "카인님은 제가 지닌 신력의 기세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니 최소한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을 거에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만약 당신이 저의 입장이었다면 저처럼 행동했을 거에요."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더니 도저히 안되겠는지 입장을 바꿔보면 자신처럼 행동할 것이란 말까지 꺼냈다. 내가 너무 매정한 모습을 보이니 그런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세실리아와 똑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욱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만약 나라면!" 내가 만약이란 말을 꺼내자 세실리아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마도 자신처럼 행동할 것이란 말을 듣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세실리아와 같은 일을 겪었고 자살을 선택했었다. '자살을 선택할거야.' 속으로 되내이면서도 정작 말하지는 못했다. 세실리아는 내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서 모두 알게 된다면 절대 이런 부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세실리아를 돕는다면 또다시 정신만 살아남아 60년을 예전과 같이 지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한다는거죠? 당신도 세실리아님과 마찬가지일 거에요. 분명해요." 소피아가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나는 자살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너무 잔인한 말이다. 그녀는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섰던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자살을 선택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말을 끝까지 해주세요. 어떻게 하신다고요?" "세실리아님과 마찬가지이겠죠. 휴우." 세실리아가 소피아의 말은 무시하고 계속 나의 대답을 기다렸기에 결국 말해주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정작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나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세실리아는 내가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솔직한 말을 하지않은 사실을 언젠가는 알게될까. 세실리아와 소피아의 협박어린 부탁은 한참이나 계속하다가 지쳤는지 잠시 조용했다. 세렌은 엘레스트라의 도움으로 편안한 잠을 이루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곁에 있는 한 세렌은 계속해서 정령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신력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궁금한게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았죠?" "예언자 프로퍼님의 도움을 받아 알게되었어요. 그는 앞날에 대해 예언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두 알고있죠. 프로퍼님에게 물어서 카인님이 오늘 야영하고 있는 장소를 알아낸 거에요." "정말 대단한 분이군요." 나는 세실리아에게 예언자 프로퍼에 대해서 듣고 세상에는 나보다 더욱 불행한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지 그 앞날이 보이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물론 미래는 변하겠지만 큰 사건과 같은 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노환으로 죽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시기를 정확히 알고있다면 그것은 저주이다. '그럼 프로퍼라는 예언자는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있을수도 있겠구나.' 프로퍼의 나이를 생각할 때 세실리아를 내게 보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겪은 과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실리아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배려한 것이리라. '세실리아를 도와주어야 할까? 천신의 분노는 어떻게 하지?' 나는 문득 도와주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았다. 그런 상상을 하자 나도 모르게 모닥불 건너편에 앉아 기운이 없는 세실리아의 몸을 훑어보았다. 얼굴이 예쁘긴 하지만 천사라고 불릴만한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녀의 신력 때문에 천사처럼 아름답다는 착각에 빠졌으리라.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소피아가 더 이쁜 것 같다. 가슴은 20대 후반이라 그런지 풍만하고 허리는 가늘었다. 전체적으로 백색인 옷을 입고 있어서 몸매를 정확히 판별하진 못했지만 아름다운 것은 분명하다. '주인님께선 800년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천신의 분노를 감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세실리아를 도와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는데 엘레스트라가 내게 끔찍한 말을 하였다. 천신의 분노를 나의 생명력으로 견뎌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그따위 말은 하지도 말아.' '개관적으로 성녀가 가진 신력은 신관의 신력에 비교할바가 아니지만 주인님의 육체에 머물고 있는 생명력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더구나 주인님은 한 번 신의 운명을 벗어났기 때문에 신이라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긴 어려울 것입니다.' 엘레스트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처럼 끔찍할 수가 없었다. 사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이러저러한 핑계거리가 있어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하지만 엘레스트라는 충분히 천신의 분노도 견딜수 있다고 내게 전했다. 짹짹. 끼룩끼룩. 여기저기서 새소리와 곤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슬이 내리고 아침이 밝아오려는 순간인데도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렌은 아직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정령에 의해서 계속 잠자고 있는 것이다. "저는 운명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세실리아와 소피아의 말이 가슴에 꽂혔왔다. 성녀가 본분을 잊고 신전에서 이탈했으니 이교도로 몰려 화형달할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왠지 그녀의 선택이 내가 자살을 선택한 방법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신전에서 저하고 소피아가 없어진 것을 알고서 추적이 시작되었을 겁니다. 저희는 돌아가면 다시는 지금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평생 이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최악의 불행이 찾아와도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세실리아의 눈물어린 말에 나까지도 감정이 격화되었다. 자꾸만 과거가 생각나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간다면 다시 성녀로서 평생 살아가겠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실리아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왔다. 도와주고 싶지만 그 후에 겪어야 할 변화가 싫었다.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판에 똑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을 도와야한다니 이게 무슨 저주인가. 문득 이것도 하나의 운명이 아닐까하는 끔찍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도와주자. 이대로 이 여자를 보내면 평생 이날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내 자신을 위해 돕기로 결정했다. 성녀로서 평생을 보내야만 하는 세실리아를 위해서가 아닌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나를 위해서다. 내가 생각하기엔 세실리아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가능성이 크다. 어려서부터 성녀로 교육받은 그녀가 일상적인 생활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신자들을 통해서 간접경험을 했겠지만 현실은 그보다 수십 아니 수백배나 더 냉혹하고 잔인하다. "카인님 정말 고맙습니다. 은혜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세실리아는 내가 돕겠다는 말을 듣고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피아와 서로 포옹한채 한 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세실리아와 소피아 둘은 모두 신력이 있어서 밤을 꼬박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천신의 보호를 받는 것이 좋긴 좋은가보다. 세실리아의 순결을 잃도록 하는 일은 절대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할수는 없었다. 천신의 분노로 인해 무슨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뿐더러 세실리아의 신력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정체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세실리아가 운명을 벗어나게 도와주려면 저녁이 되어야만 한다. 벌건 대낮에 그녀와 사랑을 나눌수 없는일 아닌가. "아차! 큰일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한참을 서로 부등켜 안으며 기뻐하다가 소피아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큰일이라고 소리쳤다. "무슨일인데 소리를 질러?" "세실리아님께서 방금전에 하신 말씀중에 신전에서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서 성기사와 신관들이 추적에 나섰다는 말이요." 소피아가 세실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성녀인 세실리아는 신관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성기사에게 항상 보호된다. 그래서 그녀들은 개인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말없이 사라져버렸으니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성기사들은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에 버금가는 능력이 있어서 그들의 눈을 피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신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서 그들의 눈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쯤 성기사들은 세실리아와 소피아의 부재를 알고서 추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곳은 숲속이라 절대 찾을수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거요." 나는 소피아의 수선에 안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진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실리아까지도 소피아의 수선에 동조하여 어찌할바를 모르고 같은 자리를 왔다갔다하며 정신사납게 움직였다. "세실리아님의 신력은 신관이나 성기사라면 대륙 반대편에 있지 않는 이상은 쉽게 존재감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곳을 향해 오고있을 거에요. 절대 숨어있을 장소가 없어요. 원래는 지난밤 당신의 도움을 받아서 신력을 잃어버려 추적을 피했어야 했는데 날이 밝아버렸으니 피할방법이 없어요." "세상에 그렇다면 지금쪽 이곳으로 성기사들이 몰려오고 있겠네요?" "아마도 그럴거에요." 나는 소피아의 말을 듣고서 세실리아를 도와주기도 전에 파도루 가문의 지하감옥에 갇힌 것처럼 유사한 처지에 놓이게 생겼다. 소피아의 신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세실리아의 신력이 너무 강하다보니 위치가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신관이나 성기사들이 성녀의 강력한 신력을 느끼지 못할리가 없었다. "일단은 사람들이 없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갑시다." 도망칠 곳은 사람이 없는 숲밖에 없었다. 날이 밝았으니 길에는 사람들이 다니고 있으니 세실리아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신력의 기세를 느끼고 바닥에 넙죽 엎드릴 것이다. 그러면 성기사들에게 더욱 빨리 붙잡히리라. 지금 상황에서는 세실리아를 돕지 않아서 그녀가 성기사들에게 붙잡히면 나에게도 그 영향이 돌아온다. '정령들아 부탁할께.' 나는 물질계 4대 최상급 정령들에게 깊숙한 숲으로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숲에 길이 있을리 만무하니 어쩔수가 없다. 잠들어 있는 세렌을 들어서 마차에 태웠고 세실리아와 소피아도 마차에 올라타도록 했다. 나는 마부의 자리에서 마차가 정령들이 만든 길로 가도록 인도했다. 땅의 정령은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숲의 땅은 나뭇잎이 많이 쌓여 있어서 푹푹 빠지는 부분이 많은데 마차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바람의 정령은 나뭇가지가 마차에 걸리지 않도록 바람의 힘으로 휘게 하면서 마차게 쉽게 지날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 주었다. 불의 정령과 물의 정령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차가 지나간 자리는 정령들이 흔적을 깨끗히 없애고 원래의 상태로 복구시켜 버렸다. 땅의 정령이 마차가 지나간 길을 원상복구 시켰고 바람의 정령이 그 위로 나뭇잎을 덮었다. "우와! 신기하네요. 이런 재주도 있었어요?" 소피아는 마차가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놀라고 있었다. 바람의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들이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고 정리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멋있었다. 모두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이 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하위 정령들을 소환해서 부리는 것이다. 땅의 최상급 정령인 노에아넨도 마차가 지날수 있도록 하위 정령인 놈과 노임들을 소환해서 돕고 있었다. 신관인 소피아가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많이 놀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도 이와같은 엄청난 능력을 부릴수 있는 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천신까지도 강림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뛰어난 정령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군요." 소피아가 정령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었다. 그녀는 신관이 되기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신에 대해서 많이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오직 천신이 최고라고 교육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에 영향을 행사하는 신은 무척이나 많고 단지 천신이 많이 알려졌을 따름이다. "이런 방식으로 최대한 깊은 숲속으로 가도록 하지요. 일단 오늘밤만 넘기면 성기사들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말을 하면서도 정말 멋쩍을 수밖에 없었다. 추적을 뿌리친다는 말이 세실리아의 순결을 오늘밤 해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실리아의 신력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은 신전의 추적을 뿌리칠 방도가 없다. 세실리아를 돕기로 결심한 순간 이런일이 터지는지 짜증이 났다. 약간만 이런일이 일찍 일어났으면 그냥 매정하게 뿌리치고 갔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카인님과 어떤 관계죠? 이렇게 자고만 있는데 괜찮은 건가요?" "제 노예인 세렌이에요. 당신의 신력 때문에 어쩔수없이 정령으로 보호하고 있는거에요. 일단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면 깨울 생각이에요." 세실리아가 세렌에 대해서 묻자 자세히 대답하였다. 지금처럼 복잡한 순간에 세렌까지 챙기자면 너무 복잡할 것 같아서 그녀를 계속 재우도록 했다. 설사 깬다고 해도 신력의 기세로 정령이 보호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정오가 되어도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자주 마차뒤를 돌아보며 당장 성기사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함에 빠져 있었다. 사실 성녀는 신력을 이용해서 다른 신관의 위치를 파악한다거나 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마음이 불안해서 도저히 신력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날이 어두워지자 그제서야 마차를 세우고 야영준비를 하였다. 지금의 장소는 나로서도 자세히 알수없다. 어제는 수도 말린에서 남쪽으로 50km 가량 내려와 야영을 했고, 지금은 어제 야영장소에서 서쪽인 숲속으로 아침부터 지금까지 헤치고 들어왔다. 카르시온 제국은 일레시아 제국과의 경계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평행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결국은 이 숲속은 적국의 병사가 출몰할 수 있는 위험한 지역이다. 더욱이 깊은 숲속이라 몬스터는 물론이고 야생동물도 많을 것이다. 위험한 장소로 들어왔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당장 그보다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에아넨" '우리가 야영할 장소 주변을 흙벽으로 막아줘.' '네, 주인님' 나는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아넨에게 주변을 모두 흙벽으로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땅의 정령이 유용하다는 생각을 한 것은 파도루 가문의 지하감옥에서 알게된 사실이다. 정령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능력이 무궁무진함을 알게된 것이다. "실레스틴" '우리의 냄새가 멀리 퍼지지 않도록 부탁해.' '네, 주인님'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에게는 주변의 몬스터나 동물들이 우리의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하였다. 숲속에 사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후각이 무척이나 발달한 편이다. 그래서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흙벽이 사방을 막고 있어서 안전하긴 하지만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원래 야영준비를 지금처럼 정령의 도움으로 할 계획은 없었다. 그저 손으로 하나하나 준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실리아를 찾기위해 신전에서 눈을 부릅뜨고 이곳을 향해 오고있을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일단 제대로 야영을 하기 위해선 자고있는 세렌을 깨워야 한다. 내가 직접 음식을 준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렌은 어제 저녁에 기절한 이후에 정령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를 꼬박 자고 있었다. '세렌을 깨울 수 있도록 해주고 신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계속 부탁해.' 나는 세렌을 보호하고 있는 물의 정령에게 말했다. 물의 정령이 치료술에 뛰어난 능력이 있다보니 세렌의 보호는 엘레스트라의 도움을 받았다. 엘레스트라에게 부탁을 하면 엘레스트라는 자신과 같은 속성을 가진 하위 정령을 소환하여 대신 일을 시킨다. 그녀 자신은 엄청난 생명력을 소모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꺄아악!" 세렌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낯선 모습에 눈을 깜빡이더니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마도 어제 느꼈던 신력의 기세가 생각났나보다. 지금은 물의 정령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어서 신력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주인님 여기가 어디지요?" "그게 말하기가 좀 복잡한데." 나는 세렌의 대답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세렌이 기절한 뒤에 일어난 일을 간단히 줄여서 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제가 말해드리죠." 나의 난처함을 알고서 소파아가 나섰다. 소피아는 세렌과 한참을 이야기했다. 대부분 세실리아가 나타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조리있고 간결하게 정리해서 전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렌은 모두 이해하는 모습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겠지만 노예인 세렌은 소피아의 말에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녁을 준비해야 겠네요." 소피아의 말이 모두 끝나자 듣고있던 세렌이 말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말했던 소피아는 세렌의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노예에 대해서 잘 모르는 존재인 것이 분명했다. 신전에서 노예에 대해 교육시킬리 만무하다. 천신의 보호아래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라는 교육을 받았겠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노예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을 보면 세실리아는 신력을 잃게되면 분명 불행해 지리라. 보글보글. 세렌은 모닥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들었다. 모닥불은 주위 나무를 주어다 써야 하지만 마차에 비가올 것을 대비해 준비해 둔 장작을 이용했다.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허기진 상태이다. 신전에서의 추적이 걱정되긴 하지만 오늘밤만 넘기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긴장을 늦추진 않았다. "주인님 드세요." "고마워, 세렌" 세렌은 음식이 완성되자 접시에 담아 가장 먼저 나에게 내밀었다. 노예는 주인보다 높은 신분이 함께하지 않는 이상은 주인을 먼저 챙긴다. "어어! 쳇!" 소피아는 세렌이 담은 접시를 받아서 성녀 세실리아에게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 접시가 내게로 오자 헛바람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를 향해서 아쉬운 소리를 입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그녀들은 내게 도움을 받고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세셀리아님 여기 있습니다." "이리 주세요. 내가 드릴테니까." 세렌이 두 번째 접식에 음식을 담아 세실리아에게 건네자 소피아가 냉큼 받았다. 단단히 화가난 모양이다. 지금까지 신전에서 세실리아가 모든 것에 항상 우선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치료를 베풀기 위해서 신전에서 벗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10km 이내로 누군가 접근하면 정령을 통해서 알수 있으니까요."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추적에 대한 걱정으로 긴장한채로 식사를 하자 정령의 능력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하면 추적하는 신전 사람들이 가까이 왔을경우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단지 하위 정령을 이용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정찰을 위해 최상급 정령을 이용할 수는 없다. 그럴경우 너무 많은 생명력이 소비된다.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오늘밤 천신의 분노를 견뎌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천신의 분노가 내게 내려질지도 의문이다. 이미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벗어난 경험이 있어서 신이 함부로 나의 삶을 간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신의 분노가 어느정도냐에 따라서 생명력을 이용해 견뎌낼 수 있는지의 여부가 판가름되니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렌 잘 먹었어요." "별말씀을요. 저는 노예이니 말씀을 편하게 하세요." 세실리아의 말에 세렌이 대답했다. 세실리아는 20대 후반이라 어린 세렌에게 반존칭을 써주었다. 소피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들은 신력 때문에 사람을 판단할 때 외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신력이 강한 사람일수록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세렌은 식사가 끝나자 주변을 정리했다. 요리를 위해 모닥불에 얹어놓았던 냄비나 식기들을 모두 마차로 옮겼다. 잠시 모닥불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밤 세실리아의 순결을 잃도록 만들어야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다. 적당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마음속으로는 추적에 대한 걱정이 반이고, 말하기 쑥쓰러운 내용이 반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정말 난처하네.' 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당장 세실리아의 옷을 벗겨서 사랑을 나눌수도 없는 일 아닌가. 일단은 소피아와 세렌을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해야 하거나 세실리아와 내가 자리를 옮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피아와 세렌이 함께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다. 세실리아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만 매만지고 있었다. '소피아가 알아서 처리해주면 좋으련만.' 이 난관을 해결해 줄 사람은 소피아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세실리아와 비슷한 모습이다. 자신이 평생 모시던 성녀 세실리아가 나에게 순결을 잃고 평범한 사람으로 변하게 생겼으니 무척 고민스러운 것이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이거 황당하군. 차라리 마을의 여관으로 도망갈걸 그랬나.' "휴우" 나는 한숨을 내리쉬며 어쩔수 없이 내가 나서야하는 상황임을 알았다. 운명에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천신의 분노를 견뎌내야 하는 것으로도 긴장되는데 이런 난처한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나는 땅의 정령에게 부탁해 모닥불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흙벽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의 흙벽은 모닥불 주변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여져 있어서 몬스터나 야생동물에게 보호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경계선의 흙벽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출입할 수 있도록 반대쪽 끝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만한 크기로 뚫려져 있게 만들었다. 흙벽이 가운데 하나 더 생겨나자 꼭 반달모양의 방이 두 개인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흙벽이 세워지자 마차에서 장작을 꺼내 모닥불이 없는 쪽에 모닥불을 하나 더 만들었다. 한 쪽은 소피아와 세린을 위한 장소이고, 다른 한쪽은 세실리아와 내가 사랑을 나눌 장소이다. "저기 도와드릴까요?" 세실리아는 흙벽을 세우고 모닥불을 만들고 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혼자서 움직이며 준비하는 내가 안쓰러웠나보다. 세렌은 주인인 나를 돕고 싶었지만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몰라서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차에 담요가 많을테니 편하게 잘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네" 세실리아는 부끄러운지 아니면 창피한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담요를 찾아 옮겼다. 소피아와 세렌도 세실리아를 도와주었다. 잠자리를 준비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래 숲의 땅바닥에 담요를 깔고자면 위험하지만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바닥은 대리석처럼 평평하고 매끈했다. "세렌은 저와 함께 자야해요." "네, 소피아님" 소피아는 세렌과 함께 모닥불 주위에 준비한 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나는 반대쪽 흙벽 안에서 세실리아와 잠을 청하기는 커녕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그리고 세실리아를 바라보며 무슨말을 해야할지 계속해서 고민중이었다. '그냥 시작하자고 그럴까? 아니 너무 이상한가?' 나는 모닥불을 함께 쬐고있는 세실리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문득 사비나와 첫날밤을 어떻게 지냈는지가 떠올랐다. 그 때는 여자에 대해서 잘 몰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했었다. 나중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말이다. 곧바로 여자의 옷을 벗기고 마구 더듬으며 키스까지 하면서 사랑을 나눈 기억이 떠올랐다. 사랑은 남녀 함께하는 행위이지 남자 혼자서 용쓰는 것이 아니다. "저기..." 세실리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끝까지 말하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나도 말하기 힘든데 여자인 세실리아는 더할 것이다. "그냥 편하게 말하세요." 나는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하지만 말하고 나니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여자와 처음 사랑을 나누는 것도 아닌데 왜그리 떨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 천신의 분노가 겁이나 떨고 있다고 위안을 삼았다. 내가 여자와 사랑을 나눈지도 60년이 넘었다. 다시 살아났을 때 사비나가 너무 늙어서 사랑을 나눌만한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가 잘 모르거든요. 말은 들었지만. 그러니까 카인님이 알아서..." 세실리아는 말하기 창피한지 개미나 들을수 있을만한 소리로 말했다. 거기다 뒤에가서는 말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녀가 육체적인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그리고 대개 처음에는 아무리 사랑의 경험을 많이 들었어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한 번 경험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2 회] 9. 성녀 카르시온 제국에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은 천신을 믿고 의지한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몰린 곳에는 언제나 신전이 있기 마련이다. 신전은 종교로서의 활동은 물론이고 여러가지 좋은 일들을 함께한다. 부모없는 고아를 데려다가 키워주며 상처입은 사람을 치료하기도 한다. 물론 치료의 경우 일부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만 말이다. 수도 말린에 있는 피니온 신전은 최근에 생겨난 신전보다 크진 않지만 전통이 있다. 더욱이 피니온 신전은 다른 신전과 다르게 성녀가 머물러 있다. 카르시온 제국에는 성녀가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일부 신전에서는 성녀가 있더라도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고 비밀리에 보호한다. 피니온 신전의 성녀는 다른 성녀들과 다르게 대외적인 활동이 많았다. 대부분의 성녀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신전에서 생활하는게 보통인데 피니온 신전의 성녀는 밖으로 돌아다니며 평민들을 치료해주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피니온 신전의 신관들은 성녀가 같은 신전에 머무르고 있는 자체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한다. 루노아는 피니온 신전의 고위 신관이다. 그는 많은 신관들을 교육시켰고 성녀 세실리아까지도 교육시킨 장본인이다. 지금의 피니온 신전이 있기까지 그가 한일은 무척이나 많았다. 그리고 근의 신력은 일반 신관에 비해서 높은 편이다. 신관은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력에 따라서 고위 신관과 하위 신관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신력이 어느정도냐에 따라서 천신의 믿음이 판가름 되니 어쩌면 매우 공정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루노아는 뛰어난 신관임에도 불구하고 성녀 세실리아의 이름에 묻혀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신관이다. "어째서 이런일이!" 루노아는 성녀 세실리아를 보호하는 성기사로부터 보고를 받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침에 확인해보니 성녀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성기사가 지키는데도 없어졌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성기사는 누군가를 보호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성기사는 신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마나를 다루는 능력자들을 쉽게 눈치챈다. 특히 마법사의 마나는 반발까지 일으키기 때문에 알아채기 쉽다. 또한 신력을 이용한 성기사의 검술은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에 못지 않을 뿐더러 오감이 무척 발달되어 있다. '자의로 사라진 것인가.' 루노아는 성녀가 스스로 사라진 것이 아닐가 생각했다. 더욱이 성녀를 모시던 소피아 신관도 함께 사라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속단하긴 금물이다. 누군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침입하여 성녀를 협박하여 데려갔을 가능성도 있다. 세상에서 신관처럼 이용하기 좋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모든 신관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신관들은 신전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어리숙한 면이 많았다. "루노아님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루노아가 고민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성기사 라인트가 들어와 큰 소리로 말했다. 피니온 신전에서 루노아가 신관들을 교육시키고 있다면 성기사들은 라인트가 가르치고 있다. 그의 검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신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 수십여명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성기사는 신력이 있어서 검술만 뛰어나다면 엄청난 존재로 거듭난다. 신력을 검에 주입시켜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에 못지않는 능력을 보이는 것이다. 기사가 오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평생 검을 붙들고 수련해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반해서 성기사는 신력만 얻게되면 수련을 통하지 않아서도 엄청난 힘을 얻는 것이니 어찌보면 불공평한 일이다. "내가 도와준다면 성녀를 좀더 쉽게 찾을수 있을거네." "그럼 빨리 준비하시죠." 루노아의 말에 라인트가 재빨리 대답했다. 루노아는 나이가 많은 반면에 라인트는 30대 중반에 속한다. 신력이 있다고 해서 노환을 막을수는 없다. 단지 일반 사람보다 늦을 뿐이다. 루노아가 신전의 입구로 나오자 그곳에는 많은 성기사들이 줄지어 말을 탄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루노아도 어쩔수 없이 말에 오르고 성기사들의 행렬에 동참했다. 루노아는 신력이 강해서 성녀의 위치를 좀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라인트도 성녀의 신력을 느낄수 있지만 그의 신력은 전투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신전에서는 성녀의 알수없는 부재로 한 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 성기사들의 대처가 가장 빠른 것이다. 이들은 무력을 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성녀는 저곳에 계시네." 루노아는 남서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루노아는 손으로 말린 밖으로 비춰지고 있는 울창한 숲속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인트도 성녀의 신력을 약간이나마 느낄수 있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성기사들을 출발시켰다. "모두 멈춰라!" 라인트는 가장 앞서서 달리다가 말을 멈추며 외쳤다. 지금까지는 수도 말린에서 약간 벗어난 것 뿐이다. 하지만 더이상은 남쪽으로 내려갈 수가 없다. 서쪽 방향에서 성녀의 신력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숲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곳은 너무 울창해 말을 타고 갈수가 없었다. "루노아님 저 방향에는 마을도 없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저곳에 성녀 세실리아님이 계신 것이 분명하네." 라인트의 말에 루노아가 대답했다. 라인트는 말린에서 벗어나자 성기사들과 함께 곧바로 성녀의 신력이 느껴지는 남서쪽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은 숲이었고 마땅한 길이 없어서 계속 내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내려가면 성녀가 위치한 곳과 멀어진다. "그럼 숲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라인트는 성기사들에게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직접 맨몸으로 숲을 헤치며 들어갔다. 검을 뽑아서 작은 가지들을 쳐내며 길을 만들어 성녀가 있는 곳을 향해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루노아와 라인트는 숲으로 깊이 전진할수록 성녀의 신력이 점점 뚜렷하게 느껴짐을 알아챘다. ------ 나는 세실리아와 나란히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다. 주위는 무척이나 조용하다. 본래 숲속의 밤은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적막이 계속될 정도는 아니다. 그것은 바람의 정령이 주위의 모든 소리를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흙벽 건너편에서 자고있는 소피아와 세렌에게 들린다면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정말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아.요." 세실리아가 나의 물음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무척이나 후회했는데.' 나는 오래전 자살한 이후의 기억을 떠올렸다. 의식만이 남아 있을 때 자살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하루라도 더 사비나와 지내다가 운명대로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엔트의 도움으로 멀쩡히 살고 있지만. 두근두근. 나는 세실리아의 가슴에 손을 살짝 얹었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세실리아의 두근거림이 크게 느껴졌다. 무척 침착한 것을 보면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보다. 여자는 가슴의 감각이 예민해 설사 알고 있었더라도 대부분 헛바람을 삼키기 마련이다. 바스락. 바스락. 나는 세실리아의 곁으로 좀더 가까이 붙으려고 움직였다. 덮고있는 담요가 작은 소리를 내자 세실리아가 몸을 움츠렸다. 아마도 건너편에 있을 소피아와 세렌 때문이리라. 그래서 세실리아에게 바람의 정령이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휴우" 세실리아는 소리가 차단되었다는 말을 듣더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세실리아의 옷을 벗기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신관이 입는 옷은 얼핏 보기에 백색 천을 그냥 걸친 것 같지만 의외로 복잡한 편이다. '그냥 알아서 벗어주면 안되나.' 나는 세실리아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면서 생각했다. 담요 안에서 벗겨야 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본래 사랑하는 사이라면 키스가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세실리아는 오늘이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이다. 차라리 노예인 세렌과 사랑을 나눈다면 마음편히 하겠는데 세실리아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의 행위는 치료라고 말할 수 있다. "저기..." "괜찮으니까 마음을 편히 가져요." 세실리아가 무슨 말을 하려하자 내가 괜찮다고 진정시켰다. 세실리아는 옷이 벗겨지는 동안에 계속해서 옷을 벗기는 나의 손을 잡았다. 세실리아가 속옷만을 남겼을 때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서로 많은 피부접촉이 있었다. 세실리아에게 남은 옷이라고는 가슴을 짓누른 천과 하체의 속옷만이 남았다. 나또한 스스로 상하위 모두 벗고 하위 속옷만을 남겨두었다. 남자나 여자나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에 속옷을 벗어야 한다. 남자가 사랑을 나누기도 전에 하위 속옷을 벗고 있다가 여자의 신체와 접촉이 일어나면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여자가 어느정도 흥분했을 때 속옷을 벗는게 가장 좋은 것이다. 스스슥. 사사삭. 나는 세실리아의 가슴 가리개로 쓰이는 천을 벗겨내고 목부터 가슴 그리고 허리까지 쓰다듬어 주었다. 세실리아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는 계속 해야만 되는 일이다.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세실리아가 내 손에 적응했는지 긴장된 몸에 힘을 풀었다. 지금까지 전신에 힘을주고 있어서 나무토막 같았는데 지금은 뜨거운 물에서 방금 나온 사람처럼 부드러워졌다. "거긴..." 내 손이 세실리아의 마지막 속옷이 있는 하체 부분으로 옮겨지자 세실리아가 움찔하였다. 나는 세실리아의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게 하였다. 세실리아는 나와 키가 비슷해서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큰 편이지만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한지가 1년하고 반년이 더 지났을 뿐이라 신체나이로 따지자면 고작 16살의 소년수준이다. 그러니 성인여성의 키와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바뀌었나요? 운명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벗어나고 싶어요." 세실리아가 차분한 나의 말에 대답했다. 약간 강하게 나갈수도 있는 일이지만 최소한 그녀가 원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고 말한 것이다. 나중에 그녀가 선택한 것을 타의가 아닌 순수한 자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어떠한 선택을 해서 그것이 잘못될 경우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나중에 세실리아가 지금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내탓으로 돌린다면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하던지 받아들이세요." 세실리아는 나의 말을 듣더니 그녀의 마지막 속옷으로 향하던 나의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며 다시금 전신에 힘을 주었다. 나는 세실리아의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모두 벗기고 계속해서 손으로 그녀의 목과 가슴 그리고 허리를 쓰다듬었다. 마지막 속옷이 벗겨지는 바람에 세실리아가 다시 긴장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동안 그녀의 전신을 쓰다듬었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세실리아는 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옷을 모두 벗었을테니 긴장이 곧바로 사그러들리 만무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가 나의 손길에 적응하면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정신력이 약한 남자라면 곧바로 사랑을 나누었겠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나와의 육체적 사랑이 첫경험이므로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세실리아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몰라도 오늘 나와의 사랑을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길 바랬다. "으읍" 세실리아가 나의 손길에 몸의 긴장이 어느정도 풀리자 얼굴을 들이대고 키스를 하였다. 그녀의 순결을 잃도록 하는일에 키스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하고싶었다. 여자의 육체에 너무 오랜동안 굶주린 영향도 크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오겠는가. 그렇다고 돈을주고 여자의 몸을 판매하는 곳에는 가고싶지 않았다. "마음을 편히 가져요." 나는 그녀의 귀에 입을 가져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면서 몸을 약간씩 그녀의 위로 가져가면서 나또한 속옷을 벗었다. 키스와 손길이 계속되었고 세실리아는 나의 중요한 부위가 그녀의 살결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세실리아는 내가 자신의 몸위로 올라가자 좌우로 몸을 빼려고 했지만 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을께요. 정말 후회하지 않나요?" "후.회.하.지 않..아요." 나의 마지막 물음에 그녀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녀의 전신을 나의 손이 쓰다듬고 있으니 숨이 가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여자가 흥분을 하고 안하고의 여부와 상관없다. 누구나 자신의 몸을 타인이 자꾸 만지면 숨을 몰아쉬는 것이 당연하다. 솔직히 세실리아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는 나로서도 알수가 없었다. 세실리아의 대답을 듣고 결국 나는 그녀와 하나로 결합하였다. 약간 일방적인 관계이다. 세실리아는 그저 나의 행동에 수동적이었다. 육체적인 사랑은 남녀 둘이서 함께해야 하는데 나만 열심히 한 것이다. 결국 세실리아는 자신이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성녀의 운명에서 벗어났다. '아직까지는 아무렇지도 않네.' 나는 한참을 세실리아와 결합한채로 움직이다가 천신의 분노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가 순결을 잃는 순간에 찾아오리라 생각했던 천신의 분노는 없었다. 세실리아는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신력을 잃어서 그런 것이리라. 그녀가 불쌍하게 생각되긴 했지만 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천신의 분노가 없어서 다행이야.' 천신의 분노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나는 잠시동안은 그대로 세실리아와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세실리아는 그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행동에 반응했다. 신력도 잃었으니 이제 세실리아는 나와같은 평민에 불과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지만 그녀의 신분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어느 누구도 세실리아가 성녀임을 모를 것이니 말이다. 아니 그녀가 주장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 [공지] 카인과 세실리아와의 사랑내용을 '솔로천국! 커플지옥!'을 외치시는 크라우프를 수정하시는 6號戰車Tiger님의 친형님에게 받칩니다.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4 회] 10. 여행 30여명의 성기사들은 묵묵히 서쪽을 향해 숲을 헤쳐나갔다. 반나절 이상을 전진하자 그들로서도 체력이 소모됨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루노아 신관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루노아 신관은 성기사들의 신력을 보충해주고 성기사들이 성녀가 있을 곳으로 가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루노아 신관님 아직도 멀었습니까?" "세실리아님의 거대한 신력이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고 있네." 라인트 성기사의 질문에 루노아 신관이 대답했다. 라인트는 잠시후 성녀가 겪고있을 상황에 대비해 신력을 가다듬었다. 루노아는 성녀의 신력이 가까이 느껴지자 자신에게 남은 신력을 성기사들에게 모두 베풀었다. 신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회복하며 천신에 대한 기도를 드릴수록 회복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잠시후 성녀를 위해서 무력을 동원해야 할 상황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숲을 헤치며 사용한 신력을 회복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모두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라인트님" 라인트의 말에 숲을 함께 헤쳐온 성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성녀가 숲에서 무슨일을 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이들은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는 것이다. '이럴수가' 루노아는 성녀의 신력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후 성녀의 신력이 느껴지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신력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루노아 정도는 아니지만 성기사들도 멀지 않은 곳에서 신력이 파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덜덜덜. 루노아는 물론이고 모든 성기사들은 신력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성녀를 향해 급하게 숲을 헤치며 전진하던 일행은 제자리에 멈추었다. 일행은 신력을 가장 잘 느끼는 루노아를 바라보며 어찌된 일인지 그가 설명하길 바라며 쳐다보았다. '천신이 강림이라도 한건가?' 루노아는 성기사들의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신력이 지금처럼 어마어마하게 파동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성녀가 천신을 강림시키는 상황이거나 신관이 자신의 신력을 잃어버릴 때나 발생하는 경우가 전부이다. "나도 무슨일인지 모르겠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라인트 자네라도 얼른 가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모두 무장하고 전력을 다해서 앞으로 전진하도록!" 라인트는 루노아의 말을 듣자마자 성기사들을 향해 소리치며 신력이 파동치는 곳을 향해서 뛰쳐나갔다. 라인트가 들고있는 검에서는 신력이 쏟아져나와 그를 가로막는 나무를 비롯해 모든 것들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그 뒤를 30여명의 성기사들이 재빠르게 따라갔다. '세실리아님이 무사하시길.' 루노아는 성기사들이 눈깜짝 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전까지 성녀의 신력이 느껴지던 곳을 향해서 천천히 걸었다. 루노아로서는 성기사들에게 신력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걷는것도 많이 힘들었다. 휘이익. 파악. 라인트의 몸에 나뭇가지가 걸렸지만 곧바로 부서졌다. 그의 몸은 신력으로 보호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떤 물리력에도 안전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신력을 끌어올려 사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신력이 파동치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유지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저곳이군.' 라인트는 성녀의 신력이 느끼지며 파동치는 곳에 도착했음을 느끼고 곧바로 멈추었다. 뒤따르던 성기사들도 조심스럽게 멈추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숲을 헤치며 많은 소음을 만들었지만 정작 도착하여 멈출 때에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는 성기사도 없었다. "내가 들어가면 따라서 들어오도록." 라인트의 작은 소리의 말에 성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트가 바라보는 곳에는 2m 높이의 흙벽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내부에서 모닥불로 짐작되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면서 옆으로 퍼지고 있었다. '흙벽 정도야.' 라인트는 검에 신력을 불어넣고 흙벽을 향해 달려가 휘둘렀다. 흙벽은 라인트가 휘두런 사선모양으로 무너졌고 큰 통로가 생겨났다. 라인트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흙벽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흙벽 안에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모닥불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타닥탁탁. 탁탁. 성기사들이 흙벽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고 모닥불이 타는 소리만에 들리고 있었다. 라인트는 재빨리 모닥불 근처를 살펴보았고 누군가 이곳에 방금전까지 있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수는 없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기사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음을 라인트에게 보고했다. 그들로서도 모닥불을 바라보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주변 수백미터까지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수 있는 성기사이다. 사람이 방금전까지 있었음을 가리키는 증거가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저히 알길이 없었다. 라인트는 두 개의 모닥불에 관심을 기울였다. 각각 모닥불마다 두 명의 사람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증거가 나왔다. 한 쪽에는 두 명의 여자가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남녀가 사랑을 나눈 흔적이 발견되었다. 남녀가 흘린 땀이 땅바닥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녀가 오밤중에 땀을 흘렸다면 보지 않아도 뻔한 상황이다. 신력은 성기사들의 체력을 거의 완벽하게 조절한다. 그래서 그들은 땀을 흘리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풍겨나는 땀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그래서 라인트가 모닥불 근처에 있었던 사람의 흔적에 대해서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착해보니 사람의 흔적만 있을뿐이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라인트는 한참이 지나서 도착한 루노아 신관의 말에 대답했다. 라인트는 자신이 도착해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흙벽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두 개의 모닥불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한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있다는 흔적만이 남아있음을 말이다. "이곳을 그대로 보존하고 신전으로 돌아가 대책을 세워야겠네. 성녀의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추적할 흔적도 없으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일단 저는 이곳에 남아 이곳을 지키면서 다른 흔적을 찾아보겠습니다." 라인트 성기사가 루노이 신관의 말에 대답했다. 분명 성녀가 이곳에 있음이 확실했는데 다가오기 직전에 성녀의 신력이 사라졌다. 그것도 엄청난 신력의 파동이 발생한 시간에 말이다. 분명 이곳에는 루노아와 라인트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음을 누구나 알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성녀의 추적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주는 열쇠임이 분명하다. 루노아 신관은 성기사 몇명을 대동하고 피니온 신전에 돌아와 자신이 겪은 내용을 다른 고위신관에게 알려주었다. 피니온 고위신관들은 성녀가 행방불명된 사건을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 처리하기 불가능함을 느끼고 다른 신전에 도움을 청했다. ------ 나는 세실리아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 얼마 지나지않아 정령으로부터 누군가 접근했음을 전해듣고 곧바로 일어났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세실리아를 다그쳐 옷을 입도록 하였다. 세실리아는 나와의 육체적 관계로 신력을 잃어버리고 운명에서 벗어났지만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실리아, 정신차려!" 나는 급한 마음에 반말을 섞어가며 세실리아를 다그쳐 옷을 입도록 종용하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세실리아의 눈동자는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옷을 입혀주려고 해도 신관의 옷을 어떻게 입혀야 할지 몰랐다. 더구나 누드차림이라 속옷까지 입혀야 하는 일이라 남자에겐 어려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실리아님" 내가 세실리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소피아가 갑자기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세실리아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피아는 세실리아가 신력을 잃어버릴 때 신력의 파동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세실리아가 운명을 벗어난 일은 축하할 만한 일이나 지금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가여웠다. "지금 누군가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이곳에서 당장 벗어나야 하니까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카인님. 세실리아님은 제가 어떻게 해볼께요." 소피아는 나의 말에 정신을 차리며 차분히 대답했다. 소피아는 신전에서 추적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신전에 붙잡히면 세실리아는 물론이고 소피아까지 처참한 일을 당한다. 세실리아가 운명을 벗어난 일은 그들에게 이교도의 행위로 비춰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세렌 지금당장 떠날준비해!" "네, 주인님" 세렌도 잠에서 깨어나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떠날 준비라야 모포를 마차에 싣는 것이 전부였다. 소피아는 제정신이 아닌 세실리아의 옷을 모두 입혀주고 마차에 함께 올랐다. '이제는 성녀의 신력도 느끼지 못할테니 이곳만 벗어난다면 되겠지?' 나는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따돌리는 방법이 만만치 않음을 판단했다. 정령의 도움으로 하루종일 울창한 숲을 통과했지만 추적한 사람들은 세실리아가 없어진지 하루만에 접근하고 말았다. 분명 숲을 헤쳐왔으니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리라. '추적하는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을거야.' 지금 다가오려는 사람들이 매우 뛰어남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설사 성녀의 신력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이곳에 있었던 우리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할 것이다. 아무리 정령을 이용한다고 해도 숲을 헤쳐나간 흔적을 모두 없앨수는 없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바람의 정령이 소리를 막아주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접근하려는 사람들에게 내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노에아넨 우리를 마차와 함께 땅속 깊은 곳으로 안내해 주겠니? 안전하게 말이야.' '네, 주인님.' 나는 땅의 최상급 정령인 노에아넨의 힘을 빌어서 땅속에 숨기로 했다. 어차피 어제처럼 정령을 이용해 숲으로 계속 도망갈수는 없는 일이다. 추적하는 사람도 바보가 아닌이상 성녀의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추적하지 않을리 없었다. 그렇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방법이 최선이다. "세실리아, 소피아, 세렌 지금부터 마차와 함께 땅속으로 들어갈테니까 놀라지 마." 소피아와 세렌은 나의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어제 정령을 이용해 울창한 숲을 향해서 마차를 끌고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소피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까와 다름없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푸르륵. 푸륵. 잠시후 마차에 앞쪽의 땅이 폭삭 가라앉더니 커다란 동굴이 생겨나자 말이 놀라서 울음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땅이 매몰되고 그후에 동굴이 생겨나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나또한 너무 놀라서 할말을 잊고 땅속 아래로 향한 동굴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들어가시죠.' '알았어.' 나는 노에아넨에게 생각으로 대답하고 말의 고삐를 당겼다. 말이 동굴을 향해 가기를 거부했지만 계속 고삐를 당기자 어쩔수 없는지 땅속 동굴로 서서히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동굴이 어두워 1서클의 라이트(Light) 마법을 사용해 불빛을 만들었다. 마법길드에서 선물받은 팔찌 마법무구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지 몰랐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면 불의 정령을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우루루루. 푸석. 마차가 땅속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뒤에서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에아넨이 우리가 땅속으로 들어간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땅속을 이용해서 벗어나면 무척이나 오래 걸리겠지만 앞으로는 절대 추적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남긴 흔적이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인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간다면 절대 들킬위험은 없겠어요." "그게 뭐 그렇죠." 나는 소피아의 말을 듣자마자 아차 싶었다. 정령사로서 나의 능력을 소피아가 모두 보았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세실리아의 운명을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많은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방금전에 야영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데?' '30여명 가량의 사람들 같습니다.' 노에아넨이 추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정령이 아니었다면 추적하는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많은 문제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의 능력이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세 명의 여자까지 보호하며 도망갈 수는 없었으리라. 나는 하루 동안은 계속해서 땅속을 이용해 이동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추적하는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마무리를 잘해야 앞으로 편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시간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많이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거요." 나는 소피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이 위로가 되지 못한 것 같았다. 오래전 나는 육체를 되찾을 때 많은 고통에 휩싸였었다. 오래도록 의식만 있다가 육체를 갖게되자 몸에서 느껴지는 온갖 감각들이 혼란스러웠었다. 세실리아와도 그와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신력의 힘이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두 가지 모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런 신력이 없어졌으니 세실리아가 제정신이라면 이상한 것이다. 그동안 신력이 있어서 느끼지 못했던 정신적인 혼란이나 육체적인 감각들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더위나 추위를 세실리아가 느껴봤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몸에 신력이 없으니 모두 감당해야 할 것들이다. "제게 존대로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카인님은 세실리아님의 윗분이잖아요." "그게 무슨말이죠?" 나는 소피아의 말을 듣고서 깜짝놀라 반문했다. 엄연히 소피아는 신관이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신관은 일반적으로 귀족에 버금가는 신분인데 말을 함부로 하라니 말이되지 않았다. 소피아가 모시는 성녀 세실리아의 운명을 벗어나게 도와준 것은 별개의 일일 뿐이다. "세실리아님이 카인님의 여자가 되었으니 당연하죠." "예?" "앞으로 세실리아님이 어떻게 살아가던지 카인님은 그녀의 남편이잖아요." 소피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충격적인 발언으로 들렸다. 운명에 벗어나기 위해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은 있지만 그것이 남편이 된다는 소리와 무슨 상관인가. 남편이란 여자와 남자가 결혼해서 부르는 호칭이다. "무슨소리에요? 저는 세실리아와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아니 그게 말이돼요? 세상에 그런법이 어디있어요?" 나는 소피아와 실랑이를 벌였다. 여자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고 결혼하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있는가. 여자의 순결을 따지는 경우는 특정 가문의 귀족들끼리나 따지는 것이지 평민들에게는 소용없는 짓이다. 일반적으로 평민인 여자들은 신분에 의해서 결혼하기 전까지 순결을 간직히기 힘들다. 더욱이 시골영지의 평민은 경우 결혼을 하면 여자의 순결을 영주에게 받치는 관습까지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피아의 말은 내게 어이없는 소리로 들려오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소피아에게 평민의 여자가 순결을 얼마나 지키기 힘든지 말해주었다. 그래서 평민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순결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대륙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인데도 소피아는 귀신이라도 본듯이 놀라며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믿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카인님의 말이 정말인가요? 그렇게 평민여자의 삶이 비참한가요?" "다시 말하지만 거짓말을 하나도 보태지 않았어요. 당신이 신관으로 생활하며 본 것은 겉보기에 불과해요. 그들은 비참한 생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같은 사람들이 더 불쌍할지도 모르지요." 소피아는 잠깐동안 세실리아와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 너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소피아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마차는 앞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노에아넨이 흙밖에 존재하지 않는 땅속에서 마차가 갈 수 있도록 땅굴을 만들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내 몸속의 생명력도 계속 빠져나가고 있어서 잠시후 생명력을 보충하고 가야만 했다. 평민은 아무리 힘들어도 귀족의 보호아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몬스터들이 우굴거리는 비보호 지역에서 야만적으로 살아야 한다. 최남단에 살고있는 크라이 마을의 경우척럼 엘프의 도움을 받는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다. 사실 크라이 마을 사람들은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5 회] 10. 여행 소피아는 두 눈을 부릅뚜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어두컴컴한 동굴속으로 마차를 몰면서 소피아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소피아가 원하는 것은 세실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책임지라는 것이다. "절대 인정하지 못하겠어요." "소피아님, 계속 설명했잖아요. 여자의 순결이 중요시되지 않는다고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세실리아님에겐 아니에요. 세실리아님은 평생 혼자 살아갈지도 몰라요. 세실리아님이 운명을 벗어나서 원한게 뭔지 알아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삶이에요. 남편을 위해 밥을하고 빨래를 하며 아이를 낳고 사는거에요. 그런데 세실리아님이 다른 남자와 결혼이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세실리아님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거에요." 소피아는 세실리아가 원하고 있는 것을 내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녀가 운명을 벗어나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꿈꾸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성립되어야 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추적자들을 완전히 따돌리면 다음에 들리는 마을에 당신들을 남겨둘거야. 그 때부터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알아서 찾으시요. 아마도 신분을 스스로 만들거나 증명할 방법부터 찾아야 할거요." 매정하지만 소피아를 향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했다. 운명을 벗어나게 도와줬더니 이제는 남편까지 되라니 세상에 이런경우가 어디있는가.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니까 내 봇짐 내라 한다더니' 옛말이 틀리지 않다더니 내가 그꼴이다. 나는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엉뚱한 일이 휘말리다니 세상에 나처럼 재수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신조차도 15세에 죽을 운명을 주었는데 이보다 더한 악운이 어디 있으랴. "세실리아님이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빨리 선택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카인님이 성녀이신 세실리아님에게 한 일을 신전에 알릴거에요. 그러니 절대 세실리아님을 버리면 안돼요." "이젠 협박이요? 신관으로서 어찌 그럴수 있단 말이요?" "저는 이제 신관도 아니에요. 물론 신력이 남아있지만 스스로 세실리아님이 천신에게서 멀어지도록 도왔으니까요. 어쩌면 내일 당장이라도 천신의 분노로 죽을지도 모르지요." 소피아는 눈물까지 흘리며 내게 소리치듯 말했다. 그녀도 자신의 입장이 막다른 골목이라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내가 마을에 버리고 사라진다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죽음 정도는 각오한 일 아니요?" "세실리아님의 행복을 위해서 각오한 것인데 당신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소피아는 나의 물음에 울분을 토하듯 대답했다. 소피아는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세실리아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세실리아는 말린을 돌아다니며 신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도와주었다. 다른 성녀들은 신전에서만 지내는데 반해 무척 활동적인 성녀였던 것이다. 세실리아가 구한 사람을 헤어려도 수천 아니 수만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소피아가 말해주었다.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군.' 나는 소피아의 말을 듣자 세실리아가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니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세실리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나에게 희생을 요구하다니 말이다. 그것도 왜 하필이면 나인가 말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세실리아님처럼 아름다운 사람과 결혼하는게 쉬울 것 같아요? 더구나 평생 저같은 시녀를 부릴 수 있잖아요." 소피아는 자신이 세실리아 곁에서 평생 시녀로 생활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나를 설득했다. 소피아는 언제까지나 세실리아의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세실리아가 성녀로서의 신력을 모두 잃어버린 지금도 소피아의 머리에는 그녀가 지난 세월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소피아의 마음은 변치않을 것이다. '또다시 이런 선택에 놓이다니.' 정말이지 가슴아픈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세실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세실리아를 버리자니 소피아의 말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천사같은 성녀이다. 그리고 행복해질 자격이 충분히 아니 넘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버리고 가면 정말로 소피아가 나에 대한 것을 신전에 알릴까?' 나는 소피아가 흥분해서 외친 소리를 기억했다. 그녀들은 신전에 감히 나에 대해서 알려줄 여건이 안된다. 스스로 살아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사람들속에 묻혀서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인 평민에 대한 기본지식이 전무하니 말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과연 그녀들이 원하는 생활을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소피아가 의외로 평민생활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지는 몰랐다. 최소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짐작한다고 생각했다. 신관이라면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도움을 주었을테니 말이다. 소피아를 아무 마을에나 세실리아와 함께 남기고 떠난다면 분명 그녀들에 대한 정보가 신전에 알려질 것이다. 그것은 내게 무척 위험한 일이고 더 큰 문제거리를 만들 것이 분명하다. "일단 세실리아님이 정신을 차리고 평민생활에 대해서 어느정도 파악할 때까지만 함께 지낼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시요." "그렇게 하죠. 지금은 세실리아님이 정신을 차리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 나는 사람이 살만한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선택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과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상상해 보았다. 그녀들이 평민생활의 기본지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더욱더 큰 문제는 그녀들의 미모(美貌)이다. 일반적으로 귀족이 미인(美人)이라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생긴다. 하지만 평민이 미인이라면 평생 순탄한 생활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평민생활을 할지라도 귀족이 그녀들의 얼굴을 보게된다면 당장 잡아들여 치욕을 선사할 것이다. 굳이 귀족이 아니더라도 평민중에는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다. 온갖 어려운 풍파를 거쳐온 그들이 그녀들을 가만둘리 만무하다. 이 모든 상황을 그녀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나로서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소피아와 세실리아에 대해서 하루종일 대화를 나누었다. 절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서로의 입장만 고수한채로 말이다. 대화의 주제인 세실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소피아에게 듣기로 세실리아의 상태는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신관은 뛰어난 치료술이 있어서 소피아가 세실리아의 상태를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만하죠?" "조금만 참으면 평생 추적당할 일은 없을거요. 그러니 참도록 하시요." 소피아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세실리아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일단 잠정적으로 결정을 미루자 현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어두운 땅굴속으로 마차를 몰며 전진해왔으니 걱정될만 했다. '노에아넨 우리를 추적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아뇨 없습니다. 처음 야영지에 도착한 사람들 일부가 돌아갔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아직도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아넨의 대답을 듣고 추적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지금 내가 위치한 곳은 처음 야영지에서 어마어마한 거리의 장소이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더라도 안전할 것이다. 추적자들이 울창한 숲 전체를 뒤지지 않는 이상 추적하지 못하리라. "이제 밖으로 나갈테니 준비하시요." 나는 소피아를 향해 말했다. 세렌은 노예라 아무리 놀라운 일에도 웬만하면 놀라지도 않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고 세실리아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인가 알려준 사람이라고는 소피아밖에 없었다. '노에아넨 이제 밖으로 나가자.' '네, 주인님.' 잠시후 마차는 약간 오르막길의 동굴을 헤쳐나갔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동굴을 곧바로 위로 향하도록 만들수는 없었다. 마차가 나가기 위해서 조금씩 위로 향하며 말에게 무리가 되지 않도록 동굴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리의 말이 많은 짐과 네 명의 사람을 태우며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많이 힘이 필요하다. 다행히 정령이 마차를 앞으로 가도록 도와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절대 마차는 오라막길의 동굴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앗, 눈부셔." "아." 마차가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갑자기 나타난 빛줄기에 멈추어섰다. 마차에 타고있던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실리아까지도 빛줄기에 두눈을 가리며 실눈을 떴다. 어두운 곳에서 라이트 마법에 생성된 빛에 의지한 우리에게 햇살은 너무 눈부셨다. 마차가 멈춘 것은 말까지도 빛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랴." 내가 말의 고삐를 당기자 마차가 땅굴속에서 빠져나왔다. 칙칙한 땅속에서 푸르른 냄새가 풍겨오는 지상의 숲으로 나오자 너무나 기뻤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땅속에서 마차를 몰며 전진했건만 지금도 숲이었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서쪽은 대부분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일리시아에서도 감히 침입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정말 아름다워요." 소피아가 일몰(日沒)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잠깐만 늦었어도 해가 아닌 달을 보았을 것이다. 소피아는 세실리아를 마차에서 내리도록 하고는 함께 일몰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소피아는 일방적으로 말하고 세실리아는 듣기만 할 뿐이다. 조만간 세실리아는 안정을 되찾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세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거야." "네, 주인님." 나는 야영하기 위한 장소를 만들었다. 정령을 이용해서 둥그런 흙벽을 만들고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정령을 이용해 우리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모닥불 연기나 냄새 그리고 소리까지도 모두 차단시켰다. 지금의 위치는 추적자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들킬 위험은 없지만 별로 힘든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했다. 추적자 이외에도 숲에는 몬스터나 야생동물이 나타나기도 하니 소용없는 짓은 아니다. 모닥불에 사용하는 장작은 쉽게 불이 붙지가 않는다. 그래서 모닥불을 만드는 일도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다. 장작을 쌓는 방법과 모닥불이 밤새도록 타는 방법이라던지 말이다. 그런 방법은 여행자들이나 알고 있는데 나또한 할아버지에게 배운 경험이 있어서 쉽게 모닥불을 만들었다. 물론 여의치 않으면 마법이나 불의 정령을 이용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내일부터는 숲을 헤치며 마을이 나타날 때까지 서쪽으로 향할거에요. 이런 울창한 숲속에 사람이 살기가 어렵긴 하지만 가끔씩 마을이 있기도 하지요. 그들은 귀족의 억압에 시달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살아가거나 범죄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일단 사람들이 살만한 장소에 도착하는게 세실리아를 위해서 좋으니까요. 내일 가면서 자세히 알려줄께요." "네, 카인님. 그리고 내일부터는 편하게 말을 하세요." "그러도록 하죠." 나는 소피아의 말에 대답하고 노예인 세렌 옆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세렌은 북쪽방향, 나는 동쪽방향 그리고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서쪽방향에 서로 밀착한 상태로 누웠다. 소피아가 서쪽을 차지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동쪽의 추적자들을 의식한 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모두들 오늘 하루가 너무 피곤해 깊게 잠이들었다. 더구나 세실리아의 경우는 신력도 없는 상태에서 마차를 하루종일 탔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무척 피곤한 상태이다. 소피아가 신력을 이용해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신력을 거부한 것이다. 천신을 배신했으니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또다시 마차를 몰고 서쪽을 향해 출발했다. 이제는 추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천천히 이동했다. 세실리아가 힘든 표정을 지으면 곧바로 멈추어 휴식을 취했고 괜찮아지면 다시 출발했다. 세실리아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며칠 동안은 땅의 정령만을 계속 이용하였다. 마차를 움직이려면 마차 바퀴 부분의 땅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땅이 단단하지 않거나 혹은 땅이 평평하지 않으면 말이 마차를 얼마 끌지도 못하고 지쳐버린다. 말이 지칠 때는 바람의 정령으로 마차를 가볍게 하기도 했다. 푸르르르. 내가 마차를 세우자 말이 기쁜 울음소리를 냈다. 나름대로 말을 위해서 바람의 정령으로 마차를 가볍게 하는데도 저러는 것이다. 마차를 세운 것은 여자들 때문이다. 사실 남자는 생리현상을 오랜시간 조종할 능력을 가진대 반해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이렇게 여자와 함께 여행을 하다보면 지금과 같이 일정시간마다 멈춰야만 한다. "잠깐 쉬었다 갈테니까 멀리 가지는 말아." "네, 카인님" 소피아가 대답했다. 나는 추적자를 따돌린 다음날부터 소피아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있다.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서이기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극구 원한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자신이 세실리아를 상전처럼 모시고 그 상전이 나와 결혼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러는 것 같다. 세렌은 노예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아서 생리현상을 쉽게 참는데 반해 지금의 세실리아는 그렇지 못하다. 특히나 신력까지 잃어버리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지라 더욱 그렇다. 소피아는 신력이 있어서 상관없지만 말이다. 그나마 마차를 타는 험한 여정을 버티는 이유도 내가 물의 정령을 이용해 신체상태를 최상으로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실레스틴 부탁해.' '네, 주인님' 나는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에게 숲으로 들어가는 세 명의 여자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지나고 있는 숲은 야생동물은 물론이고 몬스터까지 출몰하는 지역이다. 오죽하면 적국 일리시아 제국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침략을 시도한 역사가 없지 않은가. 요즘들어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예전같으면 고작 한 시간을 소환하는게 고작이었는데 이제는 반나절을 소환시킬 수 있다. 그것은 생명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최상급 정령을 계속 소환시킨 상태를 유지하는게 아니라 필요할 때만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다. '주인님 주위에 생명체가 갑자기 많아졌는데요.' 나는 실레스틴이 전해오는 생각에 인상을 찡그렸다. 생명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면 이같은 일이 발생한다. 실레스틴은 바람의 최상급 정령으로 공격은 물론이고 누군가를 보호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전해준 생명력이 적다보니 모든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많은 생명체에 대해서 미리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정도는 나도 느끼고 있어." 생맹력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라면 나또한 예민한 편이다. 무엇인가가 마차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숲이 우거진 상태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느껴진다. 숲에서 무리생활을 하는 야생동물이거나 몬스터가 우리를 사냥감으로 선택한 것이다. '알려줘야 하나?' 나는 생리현상을 해결하려 숲속으로 들어간 여자들에게 상황을 알려줘야 하는지 망설였다. 바람의 정령이 보호하고 있으니 안전하여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금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려는 그녀들 앞에 정령이 실체화 되어 나타나는 것이 더욱더 끔찍할 상활일 수도 있는 일이다. "꺄아아악!" 갑자기 세 명의 여자가 들어간 방향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기어이 예상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그녀들이 숲으로 들어간지 한참이 지나서 울린 비명이니 생리현상은 해결되고 발생된 일이리라. "카인님!" 소피아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마차에서 꿈쩍도 하지않고 그저 조용히 여자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시후 소피아와 세렌이 세실리아를 양쪽에서 붙잡고 마차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작은 무엇인가가 그녀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세실리아도 발을 빨리 움직이는 것을 보니 생명의 위협을 느꼈나보다. 소피아도 평소때와는 다르게 빨리 달리고 있었다. 신관은 옷차림 때문에 뛰는게 무척 힘들다. 아무리 급해도 빠른 걸음으로 움직일 뿐이다. 펄럭이는 하얀 신관치마를 입고 어떻게 뛸수 있겠는가. 여자들이 마차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에는 그녀들을 쫓던 생명체도 정체를 드러냈다. 키가 작은 인형같이 생긴 녹색 괴물이었다. 인간처럼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추악한 모습이었고, 두 손과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손에는 활을 들고 있어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파악되었다. '상당히 작은 활이네. 하지만 많이 맞으면 죽겠는걸.' 나는 소피아가 비명지르게 만든 괴물이 고블린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고블린은 위험한 몬스터는 아니다. 하지만 인간정도는 아니지만 매우 똑똑해서 떼로 덤빌때는 무척 위험하다. 더구나 고블린 무리에는 간혹가다 마법을 사용하는 고블린이 있기도 하다. "카인님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마차에서 움직이지도 않아요?" "이거봐 소피아. 내가 말했잖아. 소피아 당신을 비롯해서 우리 일행은 내가 소환한 정령이 항상 보호하고 있다고 말이야. 나와 멀리 떨어진 상태가 아닌 이상은 정령이 위험할 때 항상 보호해 줄거야. 지금도 고블린이 날린 화살을 바람의 정령이 모두 막아줬잖아." "그래도..." 소피아는 나의 말을 듣더니 말대답을 못했다. 마차까지 달려오느라 너무나 긴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도 긴장하지 않고 침착한 세렌까지도 표정이 바뀌어 있으니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알만하다. 나는 세실리아를 살펴보다가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고블린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소피아, 그것보다 세실리아 눈빛이 이상한데." 소피아는 곧바로 세실리아가 어디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나또한 물의 최상급 정령인 엘레스트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세실리아에겐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단지 정신적으로 약간 변화가 찾아온 것 뿐이다. 공포심에 대한 충격이다. "세실리아님 어서 마차에 오르세요." "으으으" 소피아의 말에 세실리아가 이상한 신음소리를 냈다. 소피아에겐 마차를 둘러싼 고블린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오직 세실리아의 반응에 집중했다. 그녀에겐 세실리아가 자기자신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렌도 고블린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들이 날리는 화살이 마차에 다가오지 못함을 느끼고 마차에 올라탔다. 탁탁탁탁. 타타타탁. 수많은 고블린 무리가 마차를 향해 작은 화살을 날리고 있었지만 고블린의 화살은 마차에 다가오기도 전에 곧바로 무엇인가에 막혀 튕겨졌다. 바로 바람의 정령이 마차 주변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렌은 예전부터 나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을 알고 있어서 놀라지 않았지만 소피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어때?" "괜찮아요. 잠시 고블린을 보고 놀란 것 뿐이에요." "다행이네." 소피아가 나의 말에 대답하고 곧바로 주변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마차 주변에 고블린이 온갖 역겨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화살을 쏘는 것도 모자라 괴성을 지르며 침까지 뱉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이 소리를 일부 차단하지 않았다면 정말 끔찍한 크기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며칠 전처럼 모두 죽일건가요?" "아니. 그냥 겁만줘서 쫓아낼거야." 소피아의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고 대답했다. 며칠 전에는 무리생활을 하는 야생동물이 다가오길래 모두 죽여버렸다. 많지 않은 수였지만 모두 죽이고나서 한참을 후회했다. 굳이 죽이지 않고 쫓아낼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있나? 이들을 부리는 놈이 있을텐데.' 나는 고블린의 무리를 통솔하는 대장급 고블린을 찾으려 하였다. 고블린은 본래부터 머리가 뛰어난데도 가끔씩 인간에 버금가는 뛰어난 녀석이 나타난다. 그들은 보통 홉고블린이라 불리며 마법을 사용하기까지 하여 위험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것이 고블린 무리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홉고블린이 사라지만 고블린의 무리는 지휘체계가 무너져 무리생활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대부분 죽음을 당하고 만다. '저놈이군.' "파이어볼(Fireball)" 나는 마법사가 몬스터 무리에게 가장 많이 사용하는 3서클의 파어어볼 마법을 홉고블린이라 예상하는 놈에게 던졌다. 홉고블린을 죽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법에 겁을내서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엑! 크액! 크르르" 고블린들이 마법을 날리기 전보다 높은 소리를 질렀다. 홉고블린은 무엇인가 알수없는 마법을 시전하여 나의 파이어볼 마법을 일부분 막아내었다. 하지만 피해는 막을수 없었는지 홉고블린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이 많이 다치거나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나마 내가 나름대로 마법을 약하게 시전했기에 그정도에 그친 것이다. 몬스터가 사용하는 마법은 마법길드에서 오랜동안 연구되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해서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엄청난 마법수식의 계산이 필요한데 일부 몬스터들이 본능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홉고블린의 마법도 본능적으로 사용하는 마법이라 짧은 순간에 방어를 위해 펼칠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후면 모두 사라질테니까 잠시만 참으면 될거야." "정말인가요? 좀더 흉폭해진거 같은데요?" 소피아는 나의 마법 때문에 더욱 흉폭해진 고블린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보아도 고블린 무리는 상당히 분노하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자신들에게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홉고블린이 무사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홉고블린을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한 나를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이상한 고블린 보이지? 저놈이 고블린 무리의 수장역할을 하는 홉고블린일거야. 나의 마법사용을 직접 보았을테니 똑똑하다면 무리를 위해서 물러가는 걸 선택할거야." "저 고블린이 홉고블린인가요? 우와! 처음봐요." 소피아는 홉고블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나또한 처음보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알고있는 몬스터 상식이 있다. 사람들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는 몬스터인 슬라임, 고블린, 코볼트, 오크, 트롤, 오우거 등이 이에 속한다. '신력만 없다면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을까.' 신력은 신관이 어떤 사물에 대한 본질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소피아의 눈에는 고블린이 단순하게 흉폭성을 지닌 생명체로만 비춰질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울창한 숲속에 고블린과 같은 몬스터가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터전을 잡았을 것이다. 숲은 인간에게 많은 이로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쿠엑쿠엑. 쿠엑. 크르르. 마차를 둘러싼 고블린 무리는 잠시후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홉고블린은 상당히 똑똑한 몬스터이다. 무리를 위해 사냥을 포기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홉고블린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고블린 무리의 수가 줄어들면 홉고블린의 힘도 그만큼 약하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블린 무리의 수가 적어지만 그 무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원칙에 의해서 다른 몬스터 무리들에게 사냥당하게 된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도록 해야겠어." 나는 소피아를 향해 말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방금전 발생한 고블린 무리의 습격은 며칠동안 발생한 사건에 비해서는 위험한 일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울창한 숲속을 지나오면서 다양한 야생동물이나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블린 무리의 습격 이후로도 서쪽으로 숲을 헤쳐나가면서도 비슷한 사건이 계속 발생하였다. 몬스터 백과사전이 있다면 그중에 우리 일행이 목격한 숫자만도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소피아와 세렌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차여행에 익숙해졌다. 세실리아는 고블린 무리의 습격했던 날 이후로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말도 조금씩 하면서 소피아와 가끔씩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하고는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알수없는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전의 추적에서 벗어나 서쪽 숲을 헤쳐서 마차로 여행한지 10일이 지나서야 사람이 살만한 곳을 만날 수 있었다. 숲을 헤쳐나오다가 사람의 흔적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령을 이용해 세 명의 여자를 보호해야 하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최상급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해주기 때문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6 회] 10. 여행 마차에 타고있는 세 여자가 몬스터의 출연에도 당황하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 사람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물론 가장 적응이 빨랐던 것은 노예인 세렌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몬스터가 피해를 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모습에 항상 놀라며 당황했다. "카인님 아직도 멀었나요?" "거의 다 도착했어." 나는 뒤에서 똑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소피아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아침에 바람의 정령을 통해서 마을이 있음을 알려주었더니 이러는 것이다. "방금전에도 같은 대답을 하셨잖아요?" "소피아도 방금전에 물었잖아. 제발좀 같은 질문좀 하지마. 나도 소피아에게 더이상 시달리기 싫어서 최대한 빨리 가는 거라구." 나의 말을 듣고서 소피아가 화를 냈다. 하지만 그녀의 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정말이지 눈앞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마차는 숲을 통과하기 위해서 나무사이를 통과해서 지나왔다. 물론 마차가 가기 위해서 정령들이 고생을 해야했다. 하지만 눈앞에는 더이상 나무가 없었다. "우와! 사람의 흔적이에요." "그렇군. 이 많은 나무를 사람이 아니고서야 베어갈리 없으니 말이야." 나는 소피아와 나란히 탄성을 질렀다. 엘프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기절하고나 남을 상황이었다. 직경이 1m에 가까운 나무들이 모두 베어져 밑둥만이 남아 있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숲에서 나무를 베어내는 종족이 인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일행은 오랜만에 사람의 흔적이 있는 것을 바라보며 감회가 남달랐다. 세실리아도 몸체가 잘려 밑둥만이 남아있는 나무의 모습을 바라보며 연실 두리번 거렸다. 나는 잠시후 나타날 마을이 얼마나 거대하길래 이렇게 많은 나무들을 베어갔는지 궁금했다. "이런곳에 마을이 있을줄은 정말 몰랐어요." "귀족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아무리 귀족이라도 쓸데없이 이런 위험한 곳까지 병사를 파견해 세금을 받아가진 못하니까 말이야. 물론 평민들이야 영지를 벗어나다 걸리면 곧바로 처형당하니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거나 그런 사람들의 자손이 대부분일거야." "자유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다니 여기 살고있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하겠네요." 소피아는 그동안 내가 설명했던 위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느낀점을 말했다. 강력한 군대의 보호가 없다면 평민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몬스터의 위협으로 불안함에 떨어야하는 생활이 행복일까? 귀족의 보호아래 있으면 치욕은 당하겠지만 조심하면 그만하지. 하지만 이곳은 주의를 하지 않으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야. 아마 장담하건데 가끔씩은 몬스터에게 죽는 사람도 있을걸." "너무 끔찍해요." "자유에 대한 대가가 그렇지." 소피아는 나에게 귀족에 대한 편견을 듣고 있었다. 귀족이 평민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설명해 주었다. 물론 모든 귀족이 그렇다는 것은 나 자신도 알고있다. 하지만 앞으로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평민의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부분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마차가 잘려진 나무들 사이를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이상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나무로 벽을 만든 구조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통나무벽이 차지한 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영주성의 넓이와 비슷했다. "마을이네요." 소피아가 멀리 보이는 나무로 된 성벽모양의 구조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통나무벽의 높이는 사람보다 두 배의 크기로 오우거 같은 거대 몬스터가 아니고서는 모두 막아낼 수 있게 보였다. 일단 통나무의 굵기가 사람 몸통보다 굵으니 말이다. 통나무벽 안쪽에는 농사를 지을만한 넓은 지역이 있었고 그 중앙에는 집들이 촘촘히 모여 있었다. 그리고 촘촘한 집들 주변에는 외곽의 통나무벽 보다 낮은 울타리가 있었다. 철저히 통나무를 이용해 외곽에 벽을 만들어 넓은 지역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집주변은 외곽만큼은 아니지만 울타리를 만들어 안전에 만전을 기한 구조이다. "베어진 나무가 저기에 쓰인거군. 정말 대단해." "영주성 같아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소피아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말로 성을 만든 것이다. 문제는 주변에 재료가 나무밖에 없으니 그것을 이용한 것 뿐이다. 아마도 돌이라도 있었으면 정말로 성을 짓고도 남았으리라. 평민이라면 누구나 영주성에서 살고 싶어한다. 그곳은 몬스터로부터 안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주의 영지에서 소작농을 하는 평민, 농노 그리고 영주의 노예들만이 지낸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멀리서 발견하지 못할 것을 볼 수 있었다. 통나무벽 바깥쪽에 뾰족한 나무가 대각선으로 박혀 있있던 것이다. 어떤 몬스터라도 함부로 통나무벽을 손상시키기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정말 감탄스러웠다. 이 마을은 완전히 영주성을 그대로 모방하여 지어진 것이다. 둥둥둥둥둥. 마차가 통나무벽에 거의 다가오자 갑자기 이상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통나무벽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북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북을 쳐대고 있었다. "휴우. 정말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게 되는군." "저두요. 너무 반가워요." 나와 소피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기뻐서 북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동안 세 여자와 지내느라 너무나 힘들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실리아는 정신을 거의 차린 것 같은데도 말이 없었다. 대화가 가능산 사람이라고는 소피아가 유일한데 세실리아와 붙어 있으니 정말로 답답했다. 차라리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없었다면 세렌과 조용하게 여행이라도 했을텐데 말이다. 북소리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이곳에 마차를 타고 나타난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를 발견한 사람도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다. 잠시후 통나무벽 위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단지 문제는 그들이 모두 남자였고 손에는 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활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 통나무벽 위에서 약간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내게 외쳤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대답을 해야겠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아야 대답을 할 수 있는거 아닌가. "누구냐는데요."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다가 소피아의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아들었어?" "저 사람은 일리시아 제국의 말을 한 거에요. 일리시아 제국어 몰라요? 우리 카르시온 제국과 전쟁중인 나라잖아요." 소피아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교육기관에서는 일리시아 제국어를 가르친다. 일리시아 제국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적국에 대해 알아야하니 어쩔수 없는 교육인 것이다. 물론 신관의 경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를 배운다. "너희는 누구냐!" 내가 소피아와 일리시아 제국어에 대해서 잠깐 말하는 동안에 위에서 들려온 말은 반가운 카르시온 제국어였다. 사실 소피아를 통해서 우리에 대해 뭐라고 알릴까 생각하다가 대화가 길어져 통나무벽 위에서 누군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카르시온 제국어로 외친 것이다. "저는 카인입니다. 카르시온 제국의 말린에서 오는 길입니다." "거짓말 하지말고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화살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나의 말에 통나무벽 위에서 들린 대답은 무척이나 살발한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겁먹을 나도 아니지만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일리시아 제국어가 들린 것이 괴상하긴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곳은 어느 나라도 신경쓰지 못하는 울창한 숲으로 사람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기 힘든 곳에서는 나라에 대한 개념이 약한 편이다. "공격하라!" 팍팍팍. 통나무벽 위에서 말이 끝나자 곧바로 세 대의 화살이 나를 향해서 날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의 정령이 만든 보호막에 의해서 튕겨나갔다. 나는 저들이 화살을 날린 사실에 화가났다. 하지만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의 말을 듣고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위협력으로 사용한 화살입니다. 막지 않았어도 마차 근처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나는 실레스틴의 말을 들으며 곧바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반대의 모습이었다. 통나무벽 위에 있던 사람들이 화살이 튕겨진 모습을 바라보고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물론 일리시아 제국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마법사다!" 어떤 사람이 카르시온 제국어로 외치는 것을 듣고서야 그들이 흥분하여 외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법사란 존재의 희귀성을 생각할 때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왜 저들이 화살을 쏘았는가 하는 점이다. '강하게 나가는게 편하겠군.' 나는 더이상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간단히 무력을 동원해 해결하면 될 것이다. 저들이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일일이 설명하다가는 오늘내로 마을에 들어가긴 힘들다. 더구나 눈앞에 마을이 있는데도 바깥에서 지낼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사다. 당장 우리를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벽을 마법으로 부셔버리고 들어갈테니 알아서 하시요." 나는 통나무벽 위에서 활을 들고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다. 후일을 대비해 뒷말은 존칭을 써주어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마법사 하나에게 협박을 당해 무서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저들은 수많은 몬스터가 우굴거리는 숲에서 살아온 드센 사람들이다. 협박에 겁먹을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법사라고 무서워할줄 알았냐!" "모두 공격해라!" 그들은 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꿋꿋했다. 저들은 숲에서 살다보니 마법사에 대해 알고있는 지식이 작은가보다.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통해서 마법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어린아이까지 알고 있는데 말이다. 팍팍팍팍팍. 통나무벽 위에서 계속해서 화살이 날아왔고 그 화살이 내 앞에서 튕겨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당황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저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활임에는 분명하다. 화살은 정확히 나의 눈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실레스틴이 화살이 도착할 방향을 알려주었기에 알 수 있었다. '거대 몬스터들은 눈이 약점이니까.' 이들은 정말로 전사중의 전사였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화살을 끊임없이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모든 화살이 다가오지 못하고 튕겨져서 문제이지만 말이다. 내 주변에 화살이 수북히 쌓이고서야 화살은 더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 "화살을 더 가져오라고 소리치고 있는데요." 소피아가 통나무벽 위에서 들려온 말을 듣고 내게 알려주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활을 든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통나무벽 위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활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약간의 무력을 보여주어 내 협박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파이어볼" 나는 손을 우측으로 뻗고 사람들이 바라보기 좋은 지역에 파이어볼 마법을 시전했다. 통나무벽 위에서 활을 들고서 내게 화살을 쏘거나 쏘려던 사람들은 나의 행동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손에서 엄청난 불덩어리가 만들어진 모습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불덩어리가 팔을 뻗은 곳으로 날아가 직경 10m 가량의 웅덩이를 만들며 폭발하는 모습까지도 멍하니 바라보았다. "펑!" 우르르르. 우르르르. 파이어볼 마법으로 인해 그 잔해물들이 화살처럼 사방으로 튀었고 통나무벽 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 피해를 보았다. 일부 사람들은 날아온 흙에 맞아 상처를 입기까지 했지만 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당황한 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방금전에 말했지만 당장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통나무벽을 부셔버릴테니 알아서 하시요!" 나는 화살을 나르며 소동피고 있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이지 전투에 능한 마을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보통 사람들은 어떠한 것에 시선을 빼앗기면 자신의 할일을 잊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화살을 건네받으면 활의 시위부터 당기고 있었다. "아.알.겠.소. 진.정하시요." 나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파이어볼 마법에 놀랐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그들에게 통나무벽은 매우 중요한 것이리라. 그것이 잘못되면 몬스터의 침입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한다. "마차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안내해 주시요!" "미안하지만 그것은 나도 해결할 수 없소. 이곳은 마차가 드나들만한 입구를 만들지 않아서 어쩔수 없소. 일단 그곳에서 우측으로 벽을 따라가면 사람이 지나갈만한 입구가 있으니 그리로 들어오시요." 통나무벽 위에서 소리치는 사람은 무척이나 강인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아마도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진정으로 마을의 책임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세실리아가 완전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를 받아야 된다. "마차에는 중요한 물건이 많아서 그냥 통나무벽을 넘어가야겠소." '실레스틴 우리를 마차와 함께 건녀편으로 부탁해.' 나는 통나무벽 위에서 소리친 남자에게 대답하고는 마음속으로 실레스틴에게 마차를 건너편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마차에는 말린에서 가져온 여행에 필요한 물품이 무척 많았다. 나와 세 명의 여자가 마차와 함께 통나무벽 위를 날아서 이동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스러웠다. "으아아아" "마차가 날았다!" "......" 통나무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대부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고 중간중간에 카르시온 제국어로 들린 말만 이해하였다. 마을이 일리시아 제국의 경계선에 있으니 두 나라의 사람이 섞여 사는 것이리라. "정말 사람이 많네요." "대단한 곳이야. 숲속에 마을이 있을줄은 예상했지만 이거는 좀 심한데." 소피아가 작게 속삭인 말에 내가 대답했다. 정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통나무벽 건너편에는 넓은 땅이 있었고 그곳에서 각종 곡식이 자라고 있었다. 마을은 통나무벽으로 안전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숲에는 몬스터가 있어서 문제일 뿐이지 찾아보면 먹을 것이 널려있다. "당신 정체가 무엇이고 원하는게 뭐요?"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 통나무벽 위에서 내려와 내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와보니 통나무벽 뒤에는 사다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위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활의 시위를 당긴채로 말이다. "정체는 아까 말했잖소. 카르시온 제국의 말린에서 온 마법사요. 그리고 마차에 환자가 있어서 잠시 마을에서 머물다 가려고 하는거요." "정말이요?" "그런 쓸데없는 거짓말을 왜 하겠소?" 남자는 나의 말을 듣더니 다행스런 한숨을 내리쉬었다. 그리고 나를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그 뒤를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랐다. 정말 많은 사람이 지내는 곳이다. "어디로 안내하는거요?" "얀도님에게 데려가는거요. 얀도님은 우리들을 이끌고 계시는 고귀한 분이니 당신이 마법사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마시요." 나는 남자에게 얀도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으며 마차를 몰았다. 마차는 오랜만에 길다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동안 땅의 정령이 도와주어 강제로 길을 만들어 왔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피아는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어 연실 두리번 거렸다. ------ 얀도라는 사람은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얀도의 옆에는 커다란 잎사귀를 든 남자가 부채질을 하여 왕이라도 된듯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얀도와 우리 일행의 만남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얀도라고 하오. 그리고 당신을 안내한 사람은 코나드요.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지." "나는 카르시온 제국의 말린에서 온 카인이요. 그리고 이들은 나의 일행이요." 얀도라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귀족언어를 뱉어냈다. 나또한 지지않고 말했지만 얀도처럼 멋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입고있는 옷차림은 그의 멋드러짐을 뭉그러뜨리고 있었다. 양소매는 잘려져 있고 바지도 무릎에서 잘려져 있는 모습이다. "일단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묻고 싶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우리 이야기부터 하겠소. 코나드에게 마법사란 말을 들었소. 잠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설명해 주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이곳은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요. 그런데..." 얀도의 말은 무척이나 이해하기 쉽고 간결했다. 그의 말로는 마을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본래 이곳에서는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물건이 많다. 그것은 바로 옷이나 생필품이다. 물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옷이야 동물의 털이나 가죽을 이용하면 되고, 생필품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을은 오래전부터 알고있던 상인과 거래를 해왔다. 상인은 숲을 헤쳐올만한 용병을 고용하고 마을을 찾아와 마을에서 원하는 물건을 조달한 것이다. 물론 상인도 엄청난 이문이 남았기 때문에 위험한 이곳까지 거래를 하러 왔던 것이다. 상인이 마을에서 거래한 물품은 바로 몬스터 가죽이다. 그런데 그 상인이 오랜 관계를 배신하고 용병들을 대거 끌고와 마을을 공격했던 것이다. 몬스터 가죽은 무척이나 고가의 물건이다. 왜냐하면 강도(剛度)와 연성(延性)이 강하여 각종 중요한 곳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좋은점에 반해 무척 희귀해서 구하기도 어렵다. 특히 몬스터중에서 트롤과 오우거의 가죽은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이 마을에서는 트롤과 오우거를 잡아 가죽을 확보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트롤과 오우거를 잡았습니까?" 나는 얀도의 이야기를 듣다가 상인이 거래물품으로 삼았던 트롤과 오우거 가죽에 대해 질문했다. 트롤과 오우거라면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살이 박히지도 않는다. 또한 일반 몬스터와는 다르게 똑똑하기까지 해서 웬만한 함정도 모두 피한다. 훈련받은 정예병사 백명은 있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몬스터이다. "우리가 그걸 어떻게 잡겠소? 이곳을 오면서 쓰러진 나무들을 보았을거요.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통나무벽 주변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는 곳이라 가끔 몬스터끼리 싸우는 장면을 볼 수 있소. 물론 자주있는 경우는 아니요. 하여간 그렇게 한 바탕 몬스터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걷잡어질 수 없을만큼 커질 때가 있는데 그때 꼭 트롤이나 오우거가 등장하지 않겠소?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트롤이나 오우거가 당하면 우리가 몬스터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내서 가죽을 벗겨오는거요." "트롤이나 오우거의 가죽을 얻지 못하면 상인과 거래를 못했나요?" "그렇지는 않소. 알다시피 트롤이나 오우거 이외에도 귀한 가죽은 많소. 물론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한 거래물품은 되고도 남지. 하여간 그 상인놈이 욕심을 부려서 우리가 이모양으로 자급자족을 하고있는거요." 얀도의 말에는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상인은 용병을 근처에 대거 끌고와 마을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쉬울리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통나무벽은 성벽보다 튼튼해 보였다. 더욱이 마을 사람들 전체가 궁병들 못지않으니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그래서 코나드가 저의 정체를 계속 물었던거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소." 얀도는 나의 사과에 두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대화를 통해서 알고보니 얀도는 일리시안 제국의 기사였다. 물론 권력이 강한 귀족이었다면 전쟁터에 내몰릴 이유가 없다. 그는 전투에 참가하여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패배하였다. 전투가 자주 일어나니 패배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의 입장으로는 절대 패배하지 말아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얀도는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쳤고 이곳에서 지내게 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마을이 성처럼 꾸며진거군.' 나는 얀도의 설명을 통해서 그가 마을에 이룩한 결과물에 찬사를 보냈다. 얀도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지금의 마을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를 지도자로 삼았다. 귀족인만큼 배운 것도 많으니 마을의 지도자로서 충분한 능력을 발휘했다. 마을 전체가 그가 만들어낸 체제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럼 저에 대해서 말해야겠군요. 사실 별로 말할게 없습니다. 저는 마법사이면서 정령사인데 카르시온 제국을 둘러보고 싶어서 여행중입니다. 단지 저기 두 명의 여자를 만나서 고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나머지 한 명은 저의 노예입니다." "그렇군요." 나의 설명은 무척이나 간결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설명하기 곤란해서 말할 엄두조차 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거짓이 없었다. 얀도는 내가 마법사이면서 정령사란 사실에 무척 신기해했다. 그가 한때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당연한 반응이다. "얼마나 지낼건가요?" "한 달 정도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처는 저희가 만들어 해결하겠습니다. 마차에 천막부터 시작해서 여행에 필요한 것은 모두 있으니까요." "대단하군요. 숲으로 마차를 몰면서 여행을 하다니." 얀도는 내가 마법사란 사실에 무척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전쟁터에서 활동한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대개 마법사와 기사들의 싸움으로 승패가 결정되어 버리기도 한다. 특히 전장에서의 마법사는 많은 사람에게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존재로 무척 위험하다. 얀도와의 대화가 끝나자 모든 것이 순리대로 해결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가 당분간 머무는 것을 알게되었고 코나드는 우리가 머무를 장소에 안내하였다. 코나드가 안내한 장소는 통나무벽과 가까운 곳으로 마을 사람들의 집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통나무벽 안이라는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소피아는 마을 사람들이 별로 친근하게 대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신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다. 설사 들어봤다고 해도 신관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준것이 있겠는가. 천신이란 존재자체도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차라리 이들은 하루하루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준 얀도를 천신보다 더 신성시한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7 회] 10. 여행 프리는 이상하게 생긴 흙으로 만들어진 집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프리의 뒤에는 친구인 페이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었다. 한밤중이라 그들을 주의깊게 바라볼 사람은 없었다. 몬스터 침입을 대비해 몇명이 통나무벽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지만 평소처럼 졸고 있었다. "어느쪽이야?" 프리는 뒤에서 따라오는 페이시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프리와 페이시는 흙집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흙집은 새로 마을에 들어온 일행이 머물고 있는 집이다. 그 일행은 세 명의 여자가 있어서 마을의 총각들에게 무척 인기가 있었다. 마을의 남자들은 그 일행이 정착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마을에는 여자가 부족한 상태이다. 가끔씩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함께 사는데 대부분 남자들 뿐이다. 남자는 약간이라도 늘어나는데 여자는 언제나 부족하다. 주위가 모두 숲이라 여자를 어디서 구할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 트롤이나 오우거의 가죽을 제대로 팔면 여자 노예를 사는일도 가능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정당한 거래를 하려는 상인은 없다. "오른쪽이야. 그곳에 여자만 두 명이 자고 있을거야." 페이시는 두 개로 나눠진 흙집의 오른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프리와 페이시는 이번 기회에 강제로라도 여자를 정착시키게 하고 싶었다. 카인이란 마법사가 데려온 여자들은 모두 상당한 미인이었다. 마을 남자들은 얀도의 지시로 카인이란 마법사 일행의 여자들에게 다가서는걸 포기했지만 프리와 페이시는 겁날 것이 없었다. 평생 여자없이 지내느니 차라리 이런 식으로라도 얻어야 할 처지였다.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입부터 막아야 해." "걱정마." 프리와 페이시는 흙집의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계획을 점검했다. 프리가 먼저 들어가고 페이시가 뒤따랐다. 프리는 자고있던 두 여자중 한 명의 입에 손을 가져가 막아버렸고, 페이시가 나머지 여자의 입을 막았다. "읍읍읍"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편안히 잠을 자다가 누군가 입을 막아서 깨어났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입을 막고있는 사람 때문에 말을 할수가 없었다. 평소 카인이 모든 위험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법사가 깨기전에 빨리 끌고가자." "알았어.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꽉잡아." 프리와 페이시는 여자들이 소리지르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으며 밖으로 끌고나갔다. 프리와 페이시는 잡고있던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면 여자가 마을에 정착하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동안 마법사 일행을 관찰한 결과 마법사는 지금 끌고가려는 두 여자와 깊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은 마을의 지도자인 얀도와의 우회적인 대화를 통해서도 확인하였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두 남자에게 끌려가면서도 크게 저항을 하지 못했다. 일단 남자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아서 숨쉬기도 힘들었다. 소피아는 자신이 끌려가면서 자고있을 카인을 원망하였다. 항상 지켜준다고 해놓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카인님 살려줘요.' 소피아는 마음속으로 카인을 불렀다. 그것은 세실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세실리아는 마을에 도착하여 정신을 거의 회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아채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중에 있었다. 그리고 신력을 잃어버리고 느끼는 새로운 오감에 적응하려고 노력중이었다. 소피아가 카인과 결혼해 행복하게 지내야 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실리아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평민이 정조 관념이 약한 이유를 소피아에게 전해들었지만 자신까지 그럴수는 없었다. 남들이 이해해도 자신 스스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여러가지 복잡한 마음에 며칠 보내다가 오늘과 같은 경우를 당해보니 소피아의 말이 백번 옳다는 것을 느꼈다. 힘없는 평민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은 세실리아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한 치욕만을 당해도 자신은 극복하지 못함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가만있지 못해." 퍽퍽퍽. 소피아는 도움을 청하려고 소리를 지르려고 움직이다가 남자의 주먹에 가슴을 맞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흘렀다. 울고 싶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동안 신관으로 지내며 강간당한 여자들을 많이 봐왔으나 그저 가련하게 생각될 뿐이었지만 자신이 당할 위기에 놓이자 너무나 억울했다. 도시에서 신관이라면 무척 신성시하는 존재인데 이런 곳에서는 약한 여자에 불과할 뿐이다. '왜 내게 이런일이 생긴걸까?' 분명히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소피아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처음에는 카인이 원망스럽다가 이제는 누군가를 원망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좀더 지나자 천신은 이런일을 왜 도와주지 않는지 화가났다. 성기사라면 신력을 무력으로 사용할텐데 신관은 치료술과 같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능력만을 내려줄 뿐이다. 프리와 페이시는 각자 여자를 붙잡고 자신들이 원하는 곳까지 끌고와서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혹시 소리라도 지를까 입안에 천을 가득 넣었다.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놓아주길 호소했지만 절대 그럴수는 없었다. 평생 노총각 신세로 지낼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앗, 페이시 튀어!" 프리는 자신이 잡고있는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려고 옷을 벗기려고 할 때 갑자기 앞에서 나타난 카인을 보고 소리쳤다. 프리와 페이시는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아채고 여자들을 내버려 둔채 도망쳤다. 그들로서는 단순히 지금의 자리만 떠나 자신들의 행동을 부정한다면 외부인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 땅의 정령을 이용해 멋진 흙집을 만들었다. 방은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이용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나와 세렌을 위한 것이다. 통나무를 가져와 어설픈 침대를 만들어 편히 잘 수 있도록 하였다. 최소한 땅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그동안 숲을 헤쳐나오느라 고생하여 이곳에서 편안한 생활을 즐겼다. 소피아는 세실리아가 정신을 차리도록 도왔다. 세실리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몸에 적응하지 못해서이다. 신력이 없으니 단순히 정신을 집중하는 일도 버거울 것이다. 세실리아가 신력이 없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생명력이 없으면 저렇게 되겠구나하고 심각하게 생각했다. 세렌과 한 방에서 지냈지만 남녀로 지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그립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단은 세실리아의 일이 해결되어야 마음편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조용히 기다렸다. 세실리아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한 달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며칠 지나면 정상을 되찾을 것 같았다. '주인님 마을 사람중에 누군가 계속 감시하는데요.' '그냥 신기해서 그럴거야.' 정령이 이상한 두 명의 마을남자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우리 일행을 신기하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일행중에 여자가 세 명씩이나 있으니 관심이 깊을 수밖에 없다. 누가봐도 마을에는 여자가 부족해 보였다. 아마도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여기서 태어나기 보다는 어디서 흘러들어온 사람이라 그럴 것이다. 여자가 이곳까지 와서 정착할 수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소피아는 세실리아를 데리고 가끔씩 마을을 구경하러 나갔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녀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소피아의 행동은 무척 위험하게 생각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신관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신성시하지 않는다. 그저 연약한 여자로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지낸지 일주일이 지나서 결국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오밤중에 세실리아와 소피아를 지켜보던 마을 남자 두 명이 그녀들을 납치해 나쁜짓을 벌이려고 찾아온 것이다. 나는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현실을 직시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납치하는 것을 방관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나의 발목을 잡게 될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두 명의 남자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면서 눈물을 흘렸다.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스스로 느꼈을 것이다. 평민의 삶이 그런 것임을 깨우치게 하고 싶었다. 두 남자는 여자들이 반항하자 몇대 때리기까지 했다. 마지막 순간에 내가 나타나자 남자들은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평민의 삶이 이런거야. 어떤 억울함도 참아야 하는거지." 나는 세실리아와 소피아를 향해 말하고는 조용히 그녀들을 데리고 흙집으로 돌아왔다. 소피아는 반항을 많이해 여기저기 멍투성이였다. 신력을 끌어올리면 스스로 치료할 수도 있는데 당황해서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흑흑흑" 흙집에 도착하자 소피아는 참아내던 울음을 터뜨렸다. 세실리아도 소피아와 부둥켜 안으며 실컷 울었다. 나는 그녀들이 우는 동안에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어떤 말도 그녀들에게 위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신을 배신한 그녀들이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은 고된 길이다. "카인님 할말이 있어요." 세실리아가 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실리아와 육체관계를 맺고 나서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이다. 그동안 정신을 차려도 소피아 하고만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지금 말을 꺼낸 것이다.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오늘 일을 겪으면서 느꼈어요. 힘이 없으면 사람은 무척이나 불행해요. 저는 불행하게 살고싶지 않아요. 카인님은 마법사이면서 정령사이니까 여행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예전에는 신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운명을 벗어나려는 환상에 빠졌던 거에요. 차라리 그때로 돌아간다면 운명대로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수 없으니 카인님이 저를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세실리아는 나의 말을 끊고서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소피아가 그토록 주장했던 책임지라는 말이다. 결국 세실리아는 운명을 벗어난 일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으니 결국 내게 의지하려 한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난 지금까지 많이 도와줬어. 더이상 어떻게 도와줘?" "제 자신이 얼마나 염치없는지 스스로 느끼고 있어요. 앞으로 카인님이 하시는 일에 절대 방해되지 않도록 할테니 데리고만 다녀주세요. 하녀처럼 부려도 좋아요. 제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카인님밖에 없어요." 세실리아는 자신의 무능력을 느꼈는지 솔직히 말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름다운 몸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소피아는 아직까지 신력이라도 있어서 문제가 되진 않았다. 세실리아는 혼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충격적인 발언에 나보다 더욱 놀라고 있었다. 언제나 고상한 기품을 유지하던 세실리아가 그렇게 저자세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말이다. 처음 나에게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 도와달라고 할 때에도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세실리아는 많이 변했다. 아니 세상의 무서움을 너무 깊숙히 느꼈다. "세실리아님" "소피아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워. 지금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나를 도와준 사람이라고는 소피아밖에 없었어. 다른 사람이었다면 소피아처럼 도와주지 않았을거야.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마. 솔직히 나는 신력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카인님의 노예인 세렌보다도 못한 존재잖아." 세실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피아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소피아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방금 일어난 사건을 통해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그동안 생각해오던 편견을 버렸다. 내게 수없이 현실에 대한 무서움을 들어도 그저 머리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방금 사건을 통해 그녀들은 현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세실리아님 울지 마세요. 세실리아님이 성녀로서 해왔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을 신력으로 치료해 주시고 도와드렸잖아요. 저는 그때의 세실리아님을 잊지 못해요. 설사 앞으로의 모습이 지금보다 더 초라하게 된다해도 저의 마음은 지금과 변함없을 거예요." "고마워, 소피아." 세실리아는 소피아가 하는 말을 들으며 위안을 삼았다.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세실리아가 아무리 악한 여자로 변할지라도 그녀가 과거에 했던 선행의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밤새도록 납치된 일을 잊어버리고 솔직담백한 대화를 나눴다.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자라왔기 때문에 할말이 무척 많았다. 방으로 돌아와 세실리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자존심을 버린 모습을 직접 바라보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에 입고있는 하얀 신관복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지금 그때와 똑같은 모습을 한다해도 같을수는 없었다. 신력의 유무하고는 상관없이 말이다. 아침이 밝자 세렌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법석을 떨었다. 먼저 마을로 가서 신선한 과실과 야채 그리고 육류를 얻어온다. 마차에 있던 물품중에 예비로 챙겨둔 것들을 모두 마을에 선물하였기 때문에 실례되는 일은 아니다. 마을은 자급자족을 통해 생활하는지라 냄비와 같은 생활필수품이 부족하다. 숲에서 쇠붙이 물건을 무슨수로 구하겠는가. 그런 선물을 받았으니 우리의 식사는 항상 풍족하다. "주인님이 좋아하시는 고기스프에요. 그런데 무슨고기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상관없어. 난 고기면 무조건 좋아." 세렌이 대답을 듣고 무척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정령사 가족중에 나만이 육류를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죽을 운명이었기에 허락한 것이지만 부모님이 직접 요리를 해주신 적은 없다. 고작해야 크라이 마을에 놀러가서 촌장집에서 얻어먹었을 뿐이다. "세실리아도 많이 먹어. 어제일은 잊어버리는게 좋아." "절대 잊을 수 없어요. 그걸 어떻게 잊어요?" 세실리아에게 말했는데 소피아가 아침을 먹다 발끈해서 대답했다. "소피아도 보았다시피 이곳에는 여자가 부족한 마을이야. 내가 보기엔 일부를 제외하고 마을의 남자들은 평생 여자와 사랑을 나눌 기회조차 없을걸. 만약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아니 어제 그 남자들은 용감하기까지 한 거지." "그래도 잘못한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여자 두 명이 하루만에 많이 달라졌다. 소피아는 좀더 억척스러워졌고 세실리아는 무담담하다. 그리고 세렌이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에 그녀들은 예전보다 세렌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을에 머물기로 한 이유가 세실리아 때문인데 이제는 멀쩡하니 떠나야 한다. 또한 밤에 좋지않은 일도 있었으니 더이상 머무르기에도 여러가지로 불편하다. "내일 떠날거야. 세실리아도 이제는 괜찮고, 어제일도 있으니까." "그래요. 빨리 떠나요.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아요." 마을에 더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어서 떠나는 사실을 밝혔다. 소피아가 찬성했고 세실리아와 세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분간 여행을 하면서 세실리아와 소피아도 함께 움직여야 하는 사실이 곤란하지만 그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니 남을 탓할일이 못된다. 흙집에서 편하게 오전을 보내고 정오가 되자 내일 떠난다는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 얀도를 찾아갔다. 마을은 얀도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따른다. 마을에 범죄자가 흘러들어와 정착했을텐데도 그를 따르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마을을 위해서 노력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내일 떠나려고 합니다." "원래 한 달간 머무른다고 하지 않았소? 혹시 어제밤 일 때문에 그러는거요?" "그건 아닙니다. 어제밤 제가 마음만 먹었으면 두 남자를 찾아 죽일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서 넘어간 일입니다." 얀도의 표정을 밝지가 않았다.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그가 모르고 있을리 없다. 아마도 당사자들이 얀도에게 찾아가 모든 사실을 말했을 것이다. 얀도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다. 마을에 찾아오는 우리같은 일행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좋지않은 치부가 드러났으니 말이다. 더욱이 우리는 마을에서 구하기 힘든 선물도 안겨주었다. "이해해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마을에서도 워낙 여자가 부족하다보니 어제와 비슷한 일이 가끔씩 발생합니다. 그건 그렇고 떠나신다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지만 내일 마을을 떠납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마을을 떠나시는 분만 들어주실 수 있는 부탁입니다. 알다시피 저희 마을과 거래를 하던 상인이 배신하여 오랜동안 거래를 하지못해 생활필수품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저희가 갖고있는 트롤과 오우거 가죽을 모두 드릴테니 믿을만한 거대 상인에게 알려주셔서 이곳을 방문하도록 해주세요." 얀도의 부탁은 마을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방문할 상인을 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일단 숲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뛰어난 용병 수십명을 동원해야 하며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더구나 그 일이 불확실성까지 하다. 찾아왔는데 마을이 없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상인도 이윤이 남아야 움직이려 할 것이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장담을 드리진 못하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일단 몬스터 가죽을 보여드리죠." 얀도가 안내한 곳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집으로 마을에 있는 집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일단 굴뚝이 없었고 집주변을 보호하는 울타리도 없다. 아마도 몬스터 가죽을 보관하는 창고 비슷한 장소로 쓰이는 것 같았다. 얀도의 안내로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어마어마한 가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 숲에서 희귀하게 취급하는 몬스터 가죽이다. 얀도가 거래를 위해 모아놓은 가죽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마을에서는 몬스터 가죽이 쓰일만한 곳이라고는 안전을 위한 가죽갑옷의 제작 이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우와! 왜 이렇게 몬스터 가죽이 많은거죠?" "반년 정도 모아둔 가죽입니다. 예전 거래상인이 생필품을 마을까지 전해주면 우리는 그동안 모은 몬스터 가죽을 전해주었죠. 사실 상인이 이곳까지 오려면 고용한 용병이 여러명 죽으니까 정당한 거래라고 봐야 합니다. 이곳까지 오는길이 무척 위험하니까요." "그렇군요." 목숨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 하지만 상인이 챙기는 이득은 정말로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고작 생필품을 전달해 주면서 이렇게 금보다도 귀한 희귀 몬스터의 가죽을 받아가다니 말이다. 용병은 A등급이나 의뢰비가 비싸지 나머지 용병들은 그렇지가 않다. 모든 이득을 상인이 챙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 가죽을 직접 가져다 팔면 어마어마한 돈이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적은 없나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려면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데 저희들은 그럴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일부는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해 정착한 사람도 있으니까 아예 생각조차 못합니다. 물론 가끔씩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난 사람도 있는데 대부분 숲에서 몬스터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설사 숲을 벗어나도 신분을 증명하지 못하고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사정은 몰랐습니다. 최대한 노력해서 상인이 방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얀도는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내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나로서는 여행을 하다가 큰 상인을 만나면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지도만 전해주면 된다. 물론 지도만 건네주면 상인이 믿지않고 마을을 찾아오지 않겠지만 일정금액을 선금으로 준다면 꼭 찾아올 것이다. 아마도 얀도는 그것을 노리고 내게 몬스터 가죽을 넘기는 것이리라. 간단한 부탁인데도 불구하고 얀도가 넘겨준 몬스터 가죽은 너무나 많았다. 오우거의 가죽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가죽에 대한 욕심이 났지만 마법길드에서 지급하는 돈이 생각나자 금새 마음이 변했다. 그래서 부피가 작으며 희귀한 몬스터 가죽만 챙기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얀도가 선물한 가죽은 냄새 때문에 마차 위에 얹었다. 마차에는 세 명의 여자가 타야하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몬스터 가죽을 처음 보고서 기절초풍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설명해주자 이해를 하였다. 앞으로 여행을 하려면 기본적인 재물은 필요하다. 물론 마법길드에서 주는 돈이 엄청나지만 작은 마을에 마법길드가 있을리 없었다.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떠났다. 마을 사람중에 세실리아와 소피아에게 못된 짓을 하려면 남자의 얼굴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환송을 한 이유는 소피아가 상처입어 고생하는 마을 사람들 일부를 치료해 주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소피아가 어제밤에 일어난 사건 이전에 했던 일들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8 회] 11. 아카데미 얀도의 마을을 떠나 남동쪽을 향해 숲을 헤쳐나갔다. 남쪽은 끝없는 숲이 펼쳐져 있고, 동쪽은 세실리아를 찾는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세실리아를 찾는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봐도 알아볼 수 없겠지만 작은 가능성이라도 없어야 했다. 마차여행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가장 큰 문제는 몬스터의 공격이었지만 정령이 보호하고 있어서 접근조차 못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몬스터의 등장을 무서워 하면서도 공포심에 대해서는 약간의 면역이 생겨났다. 예전 같으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겠지만 매일같이 몬스터를 가까이 보게 되면서 적응이 된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문화는 수도인 말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진행되어 왔다. 동과 서로는 울창한 숲이라 문화가 이룩되기에는 매우 척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차여행은 한 달이나 지나서도 제대로 된 마을을 만날수 없었다. 간혹 마을을 발견해도 미계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뿐이었다. "카인님 아직도 멀었나요?" 세실리아가 마차에 편히 누워서 마부자리에 앉아 마차를 몰고있는 내게 말했다. 함께한 시간이 많아지면서 세 명의 여자들은 마차에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예전 같으면 고상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하고 앉았는데 말이다. 한 달이나 함께한 사이라 예의를 차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다. "며칠만 참으면 될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는 평민의 삶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요. 카인님에게서 많이 배웠으니 헤쳐나갈 수 있어요." 세실리아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얀도의 마을에서 떠난지 한 달을 함께하면서 세실리아와 소피아에게 평민에 대해 알고있는 사실을 모두 가르쳤다. 물론 내가 아는 사실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말해줄 것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세실리아가 예전의 모습을 찾아서 기뻐." "고마워요. 카인님" 세실리아는 예전 성녀 때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회복했다. 단지 신관복장을 더이상 입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 말이다. 반면 소피아는 지금도 신관으로서 생활할 수 있다. 소피아에게 천신의 분노는 없었고 신력도 그대로인지라 신관으로서 생활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소피아란 이름도 매우 흔한 이름이라 피니온 신전에서 그녀를 찾는다 해도 절대 찾을수 없을 것이다. '실레스틴 마을이 있는 방향을 알려주겠니?' '지금 이대로 이틀만 계속 가신다면 큰 마을이 나와요. 주인님' '실레스틴 고마워.'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으로부터 마을이 있는 방향을 확인하고 마차를 몰았다. 한 달이나 지속된 숲에서의 마차여행이 이제 끝나간다. 그동안 숲을 지나오면서 야생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 과실을 먹어야 했다. "세실리아님은 마을에 도착하면 무엇을 제일먼저 하고 싶어요?" "목욕을 하고싶어. 정령의 도움을 받지않고 혼자서 하는 목욕 말이야." "저도 그래요. 세실리아님"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이틀이 지나면 마을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듣고 무엇을 해야할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여자로서 수치스러운 경우를 많이 당해왔던 것이다. 남자인 내가 있어서 생리를 해결하는게 더욱 힘들었다. 그녀들에겐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일정 시간마다 숲으로 들어가 생리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남자인 내가 지켜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면 내가 소환하는 물의 정령 도움이 없이는 목욕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카인님은 숲을 벗어나면 어느곳으로 여행을 계속 하실거에요?" 소피아가 세실리아와 마을에 도착해서 해야할 일들을 상의하다가 나를 향해서 물었다. 소피아는 항상 무슨 일을 하기전에 나의 의견을 묻거나 보고한다. 그것은 세실리아도 마찬가지인데 숲에서 여자들이 혼자서 무슨일을 하던지 정령의 도움이 필요했었기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서쪽을 방문했으니 이제는 동쪽을 가보고 싶어. 그곳은 이곳보다 몬스터가 적은 숲이라 개척하기 위해서 많은 활동이 이루어진 지역이라 들었거든." "저도 신전에 있을 때 들어봤어요. 일부 신관들이 천신의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개척자들의 일행에 동참하기도 했거든요." 소피아도 카르시온 제국의 동쪽 지역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있지 못했다. 미지의 세계에 환상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개척자로 나서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만 현실을 냉혹하다. 몬스터 무리가 출현하기도 하며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여 개척자들을 당혹시키기도 한다. 간혹 개척자로서 성공하여 일확천금을 거머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저희도 데려가실거죠? 세실리아님은 카인님이 정착하는 그날까지 함께하시기로 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소피아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말을 꺼냈다. 세실리아는 얀도의 마을을 떠나기 직전에 나와 죽는 그날까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평민으로서 행복하게 생활하려면 배우자가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나만이 그럴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나의 능력은 뛰어난 정령사이자 마법사이니 평민이지만 귀족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순결까지 가져간 사람이니 최선의 선택이다. 소피아는 나에게 들은 평민의 삶을 상상하며 세실리아가 평민으로 살아가다가 다른 남자에게 치욕을 당할경우 순결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결국은 불행한 삶을 살게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순결이 중요하지 않음을 이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세실리아와 소피아를 설득시키기에는 실패했다. 정말 앞뒤가 꽉막힌 여자들이다. "따라온다면 말리지 않아.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해." "걱정말아요. 카인님" 소피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나로서는 그녀들을 떨궈낼 방법이 없었다. 소피아는 마을이 이틀 거리로 다가오자 혹시나 내가 자신들을 두고서 도망가지나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사실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얀도의 마을을 떠나면서 지금까지 숲에서 지낸 시간동안 너무나 많은 정이 생겨났다. 밤이 되자 평소와 마찬가지로 땅의 정령을 이용해 흙집을 만들었다. 땅의 정령을 이용한 집짓기 능력은 이제 능숙하다. 울타리 모양의 흙벽이 둥그렇게 만들어지고 그 내부에 직육면체 모양의 집이 생겨난다. 물론 흙집에 문을 만들수 없지만 출입할 수 있는 입구에 바람의 정령을 상주시켜 집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한다. "카인님은 집장사를 해도 되겠어요. 마술처럼 순식간에 집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떼돈을 벌거에요." 소피아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생겨난 흙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숲을 헤쳐나오며 매일 봐왔던 상황이면서도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그것은 세실리아와 노예 세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일행은 땅의 정령 도움으로 항상 새로운 집에서 밤을 보낸다. 단단한 흙벽이 울타리처럼 흙집을 보호하고 있어서 몬스터나 야생동물로부터 안전하다. 흙집 안에 모닥불만 만들면 밤을 지낼 준비는 간단히 끝난다. 흙집의 방은 두 개 그리고 각 방에는 두 개의 흙침대가 만들어 진다. 좌측에는 항상 나와 세렌이 생활하고 우측에는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지낸다. 가끔씩 세렌을 보면서 성적 욕망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크게 심각하지는 않다. 세렌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취할수 있는 상대라 굳이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아침이 되자 세 명의 여자들이 식사를 준비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오늘 하루만 고생하고 내일이면 드디어 마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예인 세렌까지도 흥분한 것을 보니 그동안 숲에서의 생활이 무척 싫었나보다. 나는 어려서부터 크라이 숲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숲이 집처럼 좋은데 말이다. "출발해요. 카인님" "어서요. 카인님"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아침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출발하자며 서둘렀다. 마차의 지붕에는 많은 몬스터 가죽이 얹혀 있었다. 일부는 얀도의 마을에서 받은 것이고 나머지는 숲을 헤쳐나오며 만난 몬스터를 죽이고 얻은 것이다. 물론 흔한 몬스터 가죽은 아니고 트롤이나 오우거와 같은 희귀한 몬스터 가죽들 뿐이다. 몬스터는 마차를 발견하면 일단 공격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포기하고 돌아간다. 하지만 트롤이나 오우거는 머리가 똑똑해서 절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죽일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가 죽으면 정령을 이용해 시체에서 가죽을 벗겨내고 말려 보관한 것이 이제는 커다란 짐이 되어 버렸다. "말도 식사를 해야지. 조금만 기다려." "알았어요." 나는 말이 풀을 천천히 뜯어먹길 기다렸다. 튼튼한 말이 아니라서 건강관리를 해줘야 했다. 물의 정령을 이용한 치료술로 치료한 경우도 무척 많았다. 숲에는 동물에게 위협적인 것들이 무척 많았다. 육식을 하는 몬스터와 야생동물 뿐만 아니라 작은 곤충들도 독을 포함하고 있어서 말에게 무척 위험하다. 또한 독초도 있어서 말이 독초가 아닌 풀을 먹도록 관리를 해줘야만 했다. 말이 배부른지 더이상 풀을 뜯어먹지 않자 마차를 출발시켰다. 나무들을 피하며 정령을 이용해 마차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해야했다. 말이 지쳤는지 지치지 않았는지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세 명의 여자들에겐 쉽게 보이는 일이겠지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정령에게 항상 부탁해야 하는 지겨운 일이었다. "카인님 마을이 가까워지면 몬스터가 적어져야 하는거 아닌가요?" 세실리아가 주변을 둘러보고 마차를 공격하는 몬스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흉측하게 생긴 몬스터들이 마차를 향해 돌맹이를 던지고 있었다. 실레스틴을 통해 마을의 위치를 확인했는데 다가갈수록 몬스터의 습격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정말 그러네. 왜 몬스터의 수가 줄지를 않는거지?"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주변의 몬스터 수는 적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몬스터를 사냥하여 항상 줄이기 때문이다. 몬스터는 마을에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마을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모두 사냥해 버린다. 정오가 되어도 몬스터의 수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큰 마을이 하루 거리에 있음을 실레스틴에게 확인했는데도 이러니 정말 이상한 징조였다. 나로서도 알수 없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고 마을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우리에겐 한 달만에 도착하게 될 마을이 더욱 중요했다.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우리는 마차를 세우고 점심을 준비했다. 여자들이 마을에 도착한다는 기대감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위해서 점심이 늦은 것이다. 나로서도 마을에 도착해 하고싶은 일이 많았다. 특히 지긋지긋한 음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동안 곡식을 모두 먹어치워서 사냥하여 얻은 육류와 야생 과실만을 요리해 먹어왔다. "카인님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 세실리아." 세실리아가 건네주는 접시를 받아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피니온 신전에서 세실리아를 보게 된다면 믿지 못할 것이다. 성녀가 한낮 평민을 위해 요리를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생활은 그녀가 직접 선택한 운명이다. 성녀로서의 운명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물론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이야 그럴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다. 탁탁탁. 탁탁.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울리며 불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높이 올라갔다. 모닥불 주변에 앉은 세 명의 여자와 점심을 먹으며 앞으로 도착할 마을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노예 세렌을 제외하고 모두들 여관에 도착해 따뜻한 물에 목욕을 제일먼저 하고싶어 했다. 다음으로는 역시나 나와 비슷하게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주인님, 사람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몇 사람인데?' '여섯 명입니다.' 식사를 거의 끝마칠 때에 셀레스틴이 사람의 접근을 알려주었다. 큰 마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마도 하늘높이 올라간 모닥불 연기를 보고 다가오는 것이리라. 숲에서 만나는 사람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간혹 산적무리와 같이 나쁜 마음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당황하지 말아." 나는 점심을 먹고있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이요? 우와! 한 달만에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는군요." "너무 좋아하지 말아." 소피아가 좋아하자 그것을 말렸다. 나조차도 한 달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라 약간 흥분되었다.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이 기뻤다. 사람은 사람들 틈에서 살아야지 숲에서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숲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그러니 세 명의 여자야 오죽할까. 부스럭. 부스럭. 갑옷을 착용한 사람들이 높게 자란 풀들을 헤치며 우리앞에 등장했다. 먼저 갑옷을 착용한 세 명의 남자가 등장했고, 그 뒤를 이어서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뒤에 나타난 사람들은 갑옷을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남자들은 검을 빼어든 채 우리를 향해 적개심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사람이잖아." "정말 사람이네." 나타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바라보며 어이없는 눈길을 보냈다. 우리가 사람이란 사실이 놀랄만한 이유인지 몰랐다. 그들은 잠시후 꺼내서 들고있던 무기를 집어넣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당신들 여기서 뭐하는거야?" 여섯 명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보이는 남자가 나서며 말했다. 아마도 그가 일행중에 대표인 것 같았다. 그는 우리 일행에서 유일한 남자인 내게 다가와 말한 것이다. "마을을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지체하고 있지? 이곳에 몬스터가 자주 등장하는 지역인지도 몰랐나?" 남자는 숲의 위험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 일행이 몬스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한심해 보였나보다. 외형적으로 어린 모습의 남자 한 명에 세 명의 여자 뿐이니 위험할만 했다. "저희가 북서쪽 숲에서 헤쳐나오는 길이라서요." "세상에! 어떻게 그곳에서 올수가 있지요?"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대화를 나누던 남자의 뒤에 서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숲에서의 몬스터 출현을 생각한다면 우리 일행이 헤쳐온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대답을 해야만 했다. "저는 중급 정령사입니다. 그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대답을 들은 남자는 더이상 어이없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여섯 명 모두가 우리 일행을 한심한 여행자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여행자들이 숲을 여행하다가 실종되는 경우가 많다. 남자가 처음에 화냈던 것도 우리가 그런 한심한 사람들로 오해하여 생긴 일이었던 것이다. "대단하군. 몬스터가 가득한 숲을 헤쳐나오다니. 나는 용병 자이콥이라고 하네." "저는 카인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A등급의 뛰어난 용병임을 밝혔다. B등급 이상의 용병들은 대부분 자신의 등급을 밝히는 편이다. 그것이 용병 사회에서는 하나의 계급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제이콥을 소개받은 후 그의 일행을 소개받았다. 용병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에 있는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밝혔다. 제국에서는 기사와 마법사를 양성시키기 위해 아카데미를 신설해 놓았다. 하지만 대부분 귀족을 위한 아카데미이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된다. 그러니 대부분은 귀족만이 아카데미에서 기사와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전문교육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수련기사 레이 포에이드라네." "반갑습니다. 레이님" 나는 레이의 인사에 존칭을 써주며 대답했다. 레이는 내가 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욱이 내 외모가 어린 모습이니 당연하다. 레이는 매우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복장이 매우 단정했다. 입고있는 갑옷도 상당히 고급스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돋보였다. "2서클 수련마법사 샤이론 치스토파에요." 샤이론은 레이와 다르게 귀족이면서도 존칭을 사용해 주었다. 아마도 여자라서 말하는게 매우 조심스럽다. 아마 내가 정령사도 아니었다면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샤이론은 레이의 곁에 가까이 있었다. 누구라도 레이라는 남자와 샤이론이 연인 사이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수련기사 타니스 치스토파이다. 만나서 반갑군." 타니스는 샤이론의 친오빠였다. 용병 제이콥이 옆에서 치스토파 가문과 포에이드 가문의 관계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귀족가들은 결혼을 통해 가문끼리 협정을 맺기도 하는데 레이와 샤이론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경우라 말해주었다. "2서클 수련마법사 세라입니다." 세라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복장이 약간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이 화려한 옷인데 반해 세라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성이 없을 것을 보아서 평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무슨 덕인지는 몰라도 마법사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사실은 대단한 것이다. 그곳에 귀족이 아닌 평민이 다니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3서클 마법사 나메로스입니다." 나메로스라는 마법사도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이면서 아카데미 출신이라 밝혔다. 약간 허약한 모습인데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렇기 때문에 특이하지는 않았다. 여섯 명을 모두 소개받자 나도 일행을 소개하였다. 평범한 세실리아, 신관 소피아 그리고 나의 노예 세렌이다. 우리를 마주한 일행은 정말 대단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한 명의 노련한 A등급의 용병과 두 명의 수련기사 그리고 세 명의 마법사이다. 더욱이 마법사 중에서 한 명이 3서클이라 아무리 많은 몬스터가 나타나도 최소한 위험할 일이 발생하지 않을 구성이다. 용병 제이콥은 자신이 이들 아카데미 출신의 다섯 명과 계약을 맺었다고 말해주었다. 몬스터와 많은 전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의뢰한 것이다. 알고보니 내가 향하려던 마을은 엄밀히 말해서 마을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곳은 아카데미 출신의 학생들이 기사나 마법사가 되기위해 수련을 쌓는 장소라는 것이다. 제이콥과 그를 따르는 다섯 명의 아카데미 출신은 우리 일행과 합류하여 마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숲으로 들어온 것은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이다. 사실 기사가 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아카데미를 나와서 곧바로 시험을 치루고 기사가 되는게 아니다. 일정한 수련기간이 필요한데 그 기간은 오직 경험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럼 이 숲에는 아카데미 출신의 수련기사나 수련마법사가 많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제이콥이 나의 호기심을 하나하나 풀어주었다. 그도 아카데미 출신의 귀족들과 다니다보니 많이 불편했나보다. 더욱이 나는 그보다 어린 모습이니 말하기도 무척 편할 것이다. 주위에 귀족만 있다면 말하는게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그럼 위험하지 않나요?" "모두 텔레포트 스크롤을 품속에 가지고 있어서 괜찮아.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면 마을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곧바로 이동되거든. 가끔씩 수련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지만 그만큼 기사가 되는게 쉬운것은 아니지." 제이콥은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수련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기사가 되는 귀족과 권력을 이용해 기사가 되는 경우는 다른 대우를 받는다. 정식으로 기사가 된 경우는 전투를 치뤄도 항상 지휘관 위치이고 그렇지 못하면 낮은 대우를 받게된다. 그래서 모두 정식으로 기사가 되는 과정을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모든 귀족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다. 마을을 향하면서 제이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아카데미 출신이 모두 귀족이라 평민인 세실리아나 소피아와 간단한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소피아는 신관이라 약간이라도 말을 걸었지만 세실리아는 그렇지 못했다. 밤이 찾아오자 일행 모두가 멈춰서 모닥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정령을 이용해 흙집을 만들 수 없었다. 아카데미 출신의 귀족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들은 오랜만에 하늘을 벗삼아 밤을 보냈다. 소피아는 신력의 도움으로 문제가 없지만 세실리아와 세렌이 걱정되어 정령으로 추위를 타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39 회] 11. 아카데미 세실리아는 잠들기 전에 오늘 겪었던 일을 생각하며 신분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카인을 비롯해 모두가 하루만 더 고생하면 마을에 도착한다는 기쁨에 빠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섯 명의 사람을 만나게 되니 기쁨이 두배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인지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상대편이 내뱉는 불성실한 말투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카인은 만나게 된 여섯 명의 사람과 친절하게 인사를 나눈 반면에 세실리아는 그렇지 못했다. 상대편이 세실리아에게 기본적인 존칭조차 사용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행에게 다가온 여섯 명 중에서 한 명이 용병이었고, 나머지 모두가 아카데미 학생이었다. 세실리아도 아카데미가 카르시온 제국에서 기사와 마법사를 양성하기 위한 귀족들의 교육기관임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대부분 귀족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렇지. 사람취급도 하지 않다니 말이야.' 세실리아는 자신의 두 귀로 아카데미 학생들이 카인에게 건네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카인이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하대(下待)로 대답했다. 하대하지 않은 사람이 세 명 있었지만 그들은 귀족이 아니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성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이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카데 학생이라 해서 모두 귀족은 아닌 것이다. '그나마 정령사라고 소개해서 그런걸까.' 카인이 중급 정령사라는 것을 알게되자 아카데미 학생들은 카인을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더니 말이다. 가장 높은 대우를 받은 사람은 소피아였다. 신관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간단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세실리아가 한 달만에 만나게 된 사람들이라 반가워 인사를 했지만 그녀의 인사를 받아준 사람은 용병 자이콥 뿐이었다. 자이콥을 제외한 아카데미 학생들은 세실리아와 대화조차 하기 싫은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소피아와 인사를 나눌 때와는 전혀 달랐다. '평민들이 그래서 귀족을 싫어하는 거구나.' 세실리아는 예전에 성녀로서 지내면서 평민들이 귀족을 무엇 때문에 싫어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신력을 잃어 평민이 된 지금의 모습을 귀족이 무관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제서야 참혹한 신분의 현실을 느꼈다. 왠지 소피아가 입고있는 신관복장이 부러워졌다. 소피아도 세실리아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인간같지 않은 대우받는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세실리아에 대해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앞으로는 세실리아를 위해 귀족과 만나는 일을 자제해야 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세실리아는 귀족과 평민의 신분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가 늦게 잠이들었다. 그녀가 잠들자 아카데미 학생인 레이 포에이드가 곧바로 눈을 떴다. 레이는 수련기사라 오감이 발달해 세실리아가 자는지 그렇지 않은지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세실리아가 잠들기를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다. "타니스 일어나." 레이는 옆에서 자고있는 타니스를 흔들면서 말했다. 타니스는 레이와 기사가 되기위해 함께 수련중이다. 각자 다른 귀족가문이지만 타니스의 여동생 샤이론이 레이와 약혼을 맺은 사이라 사돈이 되는 관계이기도 하다. "왜그래? 레이." "중요한 일이니까 정신차려봐." 레이는 타니스를 깨우기 위해서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타니스는 레이의 목소리에서 심각함을 느끼고 졸음을 몰아내어 정신을 차렸다. "무슨일인데 그래?" "난 저들 일행을 이해할 수 없어. 중급 정령사 하나가 세 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이끌고 몬스터가 우굴거리는 숲을 어떻게 헤쳐나올 수 있었을까?" "원래 정령사가 되기 위해서는 숲에서 살아야 한다잖아. 그러니 숲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었겠지." 타니스는 레이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자 짜증이 밀려왔다. 무슨 중대한 사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동안 기사수행을 쌓으면서 인내심을 높이지 않았다면 당장 화라도 냈을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아. 내가 정령사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데 숲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는 존재야. 그리고 이건 중요한 사실인데 저 마차 지붕에 오우거와 트롤 가죽이 잔뜩 있는걸 슬쩍 봤어." "정말 오우거와 트롤 가죽을 마차지붕에서 봤어?" 타니스는 레이에게 몬스터 가죽에 대한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 몬스터 사냥을 경험하면서 몬스터 가죽의 효용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희귀성 때문에 멋부리려고 구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오우거와 트롤 가죽은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귀중한 물건에 속한다. "저들이 갖고있는 몬스터 가죽을 우리가 차지할까?" 레이는 타니스가 몬스터 가죽에 관심을 기울이자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말을 꺼냈다. 하지만 레이가 원하는 물건은 타니스와 달랐다. "카인이란 중급 정령사가 만만치 않을텐데? 더구나 용병 자이콥은 평민이니까 절대 우리일을 두고보지만은 않을거야. 더구나 우리 일행중에 세라와 나메로스도 평민이잖아." "그건 걱정하지마. 당장 어떻게 하자는게 아니라 저들이 마을에 도착하여 여관에 머물게 되면 그때 사람들을 몰래 보내서 훔쳐오자는 거야. 그러면 오우거와 트롤 가죽은 우리의 것이 되는거고 절대 의심받지도 않겠지." "정말 좋은 생각이야.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구. 그리고 내동생 샤이론에게도 절대 말하면 안돼." 타니스는 레이의 계획에 동참하며 비밀로 하자고 말했다. 타니스 동생 샤이론은 레이와 약혼한 사이라 지금의 계획을 그녀가 알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샤이론이 오빠인 타니스와 다르게 좋지 않은 일을 알게되면 그냥 두고보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마. 샤이론의 성격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레이가 아니었다면 이런 행운을 그냥 넘길 뻔 했네. 평민주제에 희귀한 몬스터 가죽을 가지고 있다니 말이야." 타니스는 레이가 알려준 사실이 너무나 고마웠다. 며칠후 몬스터 가죽으로 무엇을 할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타니스는 다시 잠을 청했다. 물론 상상이 현실로 바뀌기 위해서는 카인의 일행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 약간 찔리는 점은 신관이 속한 일행이라는 것인데 평민을 따라다니는 신관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신전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신관은 대개 하급신관으로 신력도 낮은 편이다. '바보같은 타니스. 그 말을 모두 믿다니 말이야.' 레이는 타니스가 몬스터 가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카인이라는 중급 정령사가 가진 몬스터 가죽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을 타니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휘귀한 몬스터 가죽은 어디서 얻을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분명 직접 잡은 것이다. '중급 정령사의 능력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레이는 중급 정령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대형 몬스터를 사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니스에게도 말했듯이 그가 정령사의 무력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기 때문이다. '분명 마법무구나 그에 못지않은 무엇인가가 있어.' 레이는 카인의 일행에게 욕심내는 것은 몬스터 가죽이 아니라 휘귀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게된 능력을 선사한 그 무엇인가이다. 예상하기로 마법무구라 짐작하지만 굳이 마법무구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능력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을수도 있다. 레이는 그것을 욕심내고 있었다. 물론 몬스터 가죽도 덤으로 얻고 말이다. 레이 포에이드는 함께 다니는 타니스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레이의 가문 포에이드가와 타니스의 가문 치스도파가는 귀족권력의 강화를 위해 협력하는 관계이다. 그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위해 포에이드가의 레이와 치스도파가의 샤이론 즉, 타니스의 동생과 약혼한 것이다. ------ 내가 일어났을 때는 아침식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느낀 거지만 여자들은 남자보다 일찍 일어난다. 간단하지만 머리부터 다리끝까지 정결하게 꾸미는 시간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할일이 많기 때문이다. 남자야 부시시한 모습이라도 상관없지만 평생 신관으로서 깔끔함을 유지하던 세실리아와 소피아로서는 절대 그럴지가 않았다. "냄새가 좋은데." 옆에서 함께 일어난 용병 자이콥이 노예 세렌이 요리하는 음식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자이콥 일행인 아카데미 학생들도 마찬가지 표정들이었다. 숲을 돌아다니며 몬스터와의 전투가 목적이라 몸에 요리가 가능한 물품들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맛있게 드세요. 주인님" 세렌은 식사가 준비되자 곧바로 음식을 접시에 담아 내게 내밀었다. "아니 천한것이 예의도 모르고!" "저런!" 세렌에게서 접시를 받자 곧바로 아카데미 학생들이 소리쳤다. 순간 나는 무엇이 잘못된지 알 수 있었다. 귀족이 있는 자리에서 평민이 먼저 식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들에게 먼저 권했어야 하나? 평생 이럴수는 없는일이지.' 이런 상황을 방치한 내 잘못도 있지만 앞으로 이런일을 수없이 겪을텐데 그 때마다 고개를 숙일수만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귀족이 되고 싶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지내는 것을 바랄 뿐이다. '지금까지 능력을 숨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사소한 일이지만 문득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세렌은 무척이나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주인이라지만 주인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하하하! 훌륭한 노예야. 자신의 주인만을 철저히 챙기고 있으니 말이야. 나도 저런 노예를 구하면 좋을텐데." 용병 자이콥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큰 소리로 말하며 주의를 상기시켰다. 세렌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재빨리 마련한 음식을 접시에 담아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건네주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다시 한 번 화를 내려고 했지만 음식을 막상 받아놓고 보니 얻어먹는 입장이라 노예 세렌에게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자이콥 아저씨, 노예가 얼마나 비싼줄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그냥 부러워서 하는 말이지." 자이콥의 말에 수련마법사 세라가 놀렸다. 자이콥 덕분에 좋지않은 분위기가 마무리 되었다. 물론 사건이 붉어져봐야 소리지르는 수준이겠지만 저들이 나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야 무수히 많다. 간단히 귀족의 명예를 더럽힌 평민이라고 고발하면 나는 항변도 못하고 처벌받게 될 것이다. 자이콥과 함께 상황을 알아채고 그의 말에 맞짱구를 쳐준 세라는 아카데미 학생이면서 평민이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마법사 지망생들은 대개가 귀족의 후원을 받는 평민이다. 마법사는 재능을 타고나야 하기 때문에 귀족의 수와 평민의 수를 감안하면 당연히 평민에게서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긴장된 아침식사가 끝나자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당연히 나의 일행은 마차를 타고서 움직였고 나머지는 숲길을 그냥 걸었다. 마을이 가까워서 그런지 마차가 지나갈 만한 길이 있었다. 마차가 다니지 않던 길이라 정령을 소환해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우리 일행만 있었다면 굳이 정령을 소환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자이콥과 다섯 명의 아카데미 학생들의 눈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수련기사라면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정령사의 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을테니 함부로 중급 정령사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카인님 마을이 보여요." "우와. 대단한 곳이네요."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마을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들의 반응에 호응하지 않았다. 자이콥을 따르던 아카데미 학생들은 보이는 마을에서 항상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럼 이만 헤어져야겠군. 잠깐이지만 함께해서 즐거웠네." "덕분에 마을을 쉽게 찾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는 자이콥의 말에 대답했다. 자이콥이 우리에게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모로 불편했을 것이다. 자이콥을 따르던 아카데미 학생들은 인사도 하지않고 곧바로 사라졌다. 그들에겐 우리의 존재가 지나가는 몬스터만도 못하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자이콥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소피아가 말했다. 소피아의 말을 듣고보니 자이콥이 무척 고생했을거라 생각했다. 몬스터와의 전투를 경험시켜 주기 위해서 다섯 명의 아카데미 학생들을 이끌고 숲에서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소피아가 몰라서 그러는데 적어도 저들은 노력이라도 하지. 보통은 저들만도 못한 귀족이 많아." 아카데미 학생이 되어 교육이라도 받는 귀족들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교육기관도 거치지 않고 권력의 힘을 이용해 수련기사 과정도 밟지않고서 기사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어느 나라라도 갖고있는 폐단이다. "지금부터는 모두 말을 아끼도록 해." "네, 카인님"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대답했다. 그녀들의 대답에 안심이 되지않아 조심해야 할 것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세실리아는 평민으로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소피아야 신관이라는 확실하게 보장된 신분이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자만 세실리아는 그렇지가 않다. 마차가 마을 입구로 다가가자 멀리서 보던 마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였다. 마을 전체가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마을이라면 지금의 모습처럼 철저히 보호되지 않는다. 어느 한구석 허술한 편인데 이 마을은 경비병도 상당히 많은 것이다. '귀족들이 많아서 그런 것이군.' 자이콥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에게서 이 마을은 귀족들이 몬스터와의 전투경험을 쌓는 장소라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사와 마법사가 되기위한 수련생들의 집합소라는 것이다. 많은 귀족이 머무는 장소이니 경비가 철저할 수밖에 없다. 마을로 들어가기는 무척 쉬었다. 세실리아를 제외하고 신분을 증명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나는 마법길드와 용병길드에 소속되어 있으니 둘 중에 하나로 증명하면 된다. 두 길드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정령사라는 것을 이용해도 된다. 마법사라 정령사는 제국에서 보호하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소피아는 신관의 복장을 한 것만으로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감히 신관으로 위장할 배짱좋은 범죄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세렌도 노예신분이라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세실리아의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데 신분이 확실한 나와 소피아가 함께하고 있어서 경비병들이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괜히 가슴조렸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소피아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화를 나눴다. 원래 계획은 경비병이 세실리아에게 신분에 대해서 질문하면 나의 부인이라고 대답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경비병이 쉽게 통과시켜 주는 바람에 우리끼리 헛수고를 한 셈이다. 물론 앞으로 세실리아의 신분을 그렇게라도 유지시켜야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갑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기사를 꿈꾸는 수련기사들일 것이다. 기사를 꿈꾸는 아카데미 학생들의 모습이 매우 새로웠다. 귀족이면서 무엇인가 되기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말이다. '나는 왜 저들처럼 열심히 하는게 없는걸까?' 사람들은 무엇인가 되고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사랑하던 사비나도 죽고 가족은 정령사라 인간적인 정이 많지가 않다. 그저 할일이 없어서 카르시온 제국을 여행하다가 조용히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려 하는게 나의 계획이다. 물론 이것도 실증나면 곧바로 크라이 숲으로 향할 생각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세실리아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저들처럼 무엇인가 되고싶은게 없으니까 문득 다른존재 같게 느껴졌어." "카인님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사람이 주변에 있짆아요. 그리고 저는 카인님이 없으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어요." 세실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신력을 잃어 평민의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중인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듣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말이 도움이 되었다. 굳이 삶에 목표를 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살아있는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 마을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러 상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상점이 끝나는 자리에 많은 여관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숲을 헤쳐나오며 정령을 이용해 지은 흙집에서 지낸 우리들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오늘은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을 것이다. 세렌의 요리가 아무리 맛있어도 요리를 직업으로 삼고있는 사람보다 맛있을리 없었다. 또한 여자들은 정령을 이용한 목욕이 아닌 마음껏 물에 몸을 담그고 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숲에서의 생활을 벗어던지기 위해 가장 고급스러운 여관을 향해서 들어갔다. 내겐 돈이 많았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다. 마법길드에서 마도사에게 지급하는 돈도 많을텐니 굳이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 더구나 마차 지붕에는 휘귀한 몬스터 가죽이 가득하다. "어서오세요." 마차를 밖에 세워두고 여관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곧이어 점원이 달려와 우리를 맞이했다. "두 개의 방이 필요하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문이십니까?" 나는 점원이 하는 말을 듣고서 어리둥절 하였다. 여관은 신분에 차별을 하지않고 운영하는게 보통이다. 단지 고급스런 여관을 운영하면 평민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지만 굳이 찾아가더라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나는 평민이라 가문이 없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가?" "죄송하지만 방을 내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소린가?" 점원의 표정으로 봐서는 방이 있는데도 주지 않는 것이다. 제국의 수도 말린에서 조차 귀족들만이 머무는 여관이라도 돈만 있다면 평민이 머물수 있도록 하는데 이곳에서 무슨 이유로 평민을 거절한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점원은 고개숙여 내게 인사하면서 아주 잠시동안 옆쪽을 바라봤었다. 여관의 1층은 보통 식당으로 운영하는데 지금도 몇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점원이 잠깐 바라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얼마전 우리와 헤어진 아카데미 학생중에 두 명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사가 되기위해 수련중이라던 레이 포에이드와 타니스 치스도파였다. "평민들이 머무는 여관은 이곳에서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할텐데 말이야." "그렇지. 괜히 깔끔한 이곳 여관에 평민이 머문다면 더러워 질거야." 레이와 타니스가 우리를 빗대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우리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 때에는 최소한 지금처럼 면전에 대고 놀리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아마도 그때에는 여자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를 싫어할 만한 이유가 뭘까.' 레이와 타니스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게 없었다. 그저 내가 평민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귀족에겐 평민이란 존재는 당연히 무시하고 이용해 먹을 존재로 비춰진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저곳에서 만나다니 운이 없네요." 소피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점원과 내가 대화하는데 단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내가 그녀들에게 최대한 말을 조심하라고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들도 혹시나 신전에서 자신들을 찾고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제국이 얼마나 넓은지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고급스런 여관을 나와 평민들이 머무는 여관중에 가장 좋은 곳에 여장을 풀었다. 오랜만에 나무로 만든 침대에 고급 이불을 접하자 모두 좋아했다. 먼저 목욕을 하고 여관에서 가장 자신있는 요리를 시켜 다함께 포식했다. 나를 비롯해 모두 오랜만에 찾아온 편안함이라 일찍 잠이들었다. 정령을 이용해 아무리 편안한 여행을 했다해도 여자들에겐 벅찼을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정신적으로 피곤했을 따름이다. 육체적으로는 엔트가 전해준 800년의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있어서 왠만해서는 피로를 느끼지 않는 육체이기 때문이다. ------ [공지] 출판관계로 2권 연재분량 삭제!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0 회] 11. 아카데미 레이와 타니스는 자신들에게 찾아온 행운을 기념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에는 아리따운 여성이 자리하여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둘은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여성을 밖으로 내보냈다. "레이 성공이 확실하지?" 타니스가 눈을 빛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을 마셨으면서도 머리속에는 그 생각 뿐이다. "그럼 확실하구 말구. 내가 보낸 애들이면 소드마스터도 죽일 수 있는데 중급 정령사가 별수 있겠어?" "하하하. 그정도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확실하겠군." "두말하면 잔소리지." 레이가 타니스의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서 과장된 표현으로 자신있게 확언했다. 소드마스터를 죽일 수 있다는게 말이 되겠는가. 레이가 보낸 사람들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었다. 타니스는 레이의 말을 듣고서 약간의 불안감마저 떨쳐버리고 마음껏 술을 마셨다. 하지만 밖으로 나간 여성을 부르지는 않았다. 술기운에 오늘 계획한 일을 발설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한심한 놈. 그렇게 불안하면 직접 가보든지.' 레이는 타니스의 한심한 작태가 한심스러웠다. 오늘밤 레이가 계획한 일들은 지금쯤 착착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카인이란 정령사 일행이 가진 휘귀한 몬스터 가죽을 빼앗기 위한 계획을 말이다. 레이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병사들에게 카인 일행의 몬스터 가죽을 빼앗아 오도록 지시했다. '설사 들킨다고 해도 평민 주제에 어쩌겠어.' 레이는 자신의 계획에 자신이 있었다. 마을에 들어와 그들이 최고급 여관에 머무리라 생각하고 미리 점원에게 카인의 일행을 받지 않도록 조치했다. 몬스터 가죽을 그렇게 많이 가진 사람이면 돈이 많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예상한 일이었다. 더구나 대형 몬스터를 사냥해 가죽을 그만큼 모았다면 숲에서 오래 지냈을테고 따뜻한 목욕과 푸짐한 식사 그리고 편안한 침대가 그리웠을 것이다. 카인 일행을 이곳 여관에 머무르지 못하게 수를 쓴 것은 오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고급 여관에는 레이나 타니스와 같은 수련기사가 머무르고 있다. 그 외에도 수련마법사도 있어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면 경비병들이 개떼같이 다가와 조사하게 된다. 하지만 평민이 머무는 여관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 평민이 머무는 여관에는 상인이나 용병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용병의 활달한 성격 때문에 싸움이 빈번히 일어나 경비병들이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오늘밤 레이가 보낸 병사들이 카인의 마차에 있는 몬스터 가죽을 훔쳐오는 소란을 피워도 그것에 신경써줄 경비병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평민은 남의 일에 간섭하여 피해보는 행동을 하지 않는 편이다. 카인 일행에게 보낸 병사들은 포에이드 가문에서 실력있는 자들로 구성되어 레이의 명령만을 따르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중급 정령사라라 할지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다. 레이가 카인의 일행에게 보낸 병사들은 그를 보좌하던 사병들이었다. 보통 귀족에게는 전용 하녀와 병사들이 있기 마련이다. 귀족이 혼자서 평민들이 우굴거리는 지역을 마음껏 나다니는 행동이 무척 위험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그들에게 원한을 가진 평민이 공격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 명의 귀족이 움직이면 언제나 그를 보좌하는 수많은 하녀들과 병사들이 따라다니는데, 레이가 그 사병들을 이용한 것이다. "레이 무슨생각을 그렇게 해? 마시면서 편하게 기다리자구!" 타니스는 상념에 젖어있는 레이에게 술을 권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레이가 걱정을 하는 것 같아서 권한 것이다. 타니스는 레이의 계획을 듣고 많이 걱정했지만 술을 많이 마시자 걱정은 사라지고, 레이가 보낸 사람들이 몬스터 가죽을 빨리 가져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몬스터 가죽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행복한 상상을 하며서 말이다. "그래. 마시자." 레이는 타니스의 주정이 응대하면서 다른 상념에 빠졌다. 레이가 원하는 것은 몬스터 가죽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 카인이라는 정령사의 방을 기습하여 그가 갖고있는 귀중한 물품을 모두 가져오라고 시켰다. 어쩌면 몬스터 가죽보다도 귀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였다. 물론 그런 물건이 없다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 갑작스럽게 굉음이 울리는 느낌이 찾아왔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음놓고 쉬느라 제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한 달만에 찾아온 휴식이다. 오늘은 정령에게 보호해 달라는 부탁조차 하지 않았다. "텅!" 이번에 울린 소리는 방금전의 느낌과 전혀 달랐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정말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맛보았다. 눈앞에 시퍼런 검날이 나의 심장을 종이한장 차이를 두고서 멈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으악!" 나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내 심장을 찌르려던 그도 놀라고 있었다. 세렌은 옆에 있는 침대에서 자고 있다가 내 비명을 듣고 깨어났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세렌에게도 검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지가 않아!" "무슨소리야?" 방에 검은복면을 하고있던 사람들이 내 심장에 검을 대고있던 사람이 외친 소리에 대답했다. 순간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을 눈치챘다. 너무 놀랐기 때문에 상황을 너무 늦게 알아챈 것이다. 검은복면을 하고 방으로 몰래 들어온 사람은 오직 도둑밖에 없다. 더구나 이들은 살인까지 저지르려는 악당중의 악당으로 짐작된다. '실레스틴 고마워.' 나는 정령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움의 마음을 전했다. 심장앞에서 검이 멈춰진 이유는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이 바람의 막을 형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실레스틴이 나의 칭찬에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최상급 정령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서 계약자가 위험에 처하면 스스로 소환된다. 실레스틴이 가장 먼저 나섰기 때문에 다른 최상급 정령은 굳이 나서지 않은 상황이다. "텅! 텅! 텅!" 정령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는 순간에 또다시 방안에 있던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이 바람의 막을 통과할리 없었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1서클의 실드와는 차원이 다른 방어막임을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실프 공격해!' 나는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를 소환하여 방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공격했다. 너무나 화가나서 직접 실프를 소환한 것이다. 보통은 최상급 정령을 통해 부탁하면 최상급 정령이 하위 정령들을 소환해서 부탁대로 처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보다 분노가 내 머리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으악!" "퍽! 쾅!" 내게 검을 휘두루던 사람이 실프의 공격을 받아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다른 한 사람은 벽이 아닌 문을 통해서 튕겨져 나갔다. 방문이 부서지며 굉장히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정령에게 주변 소리를 차단하는 사소한 부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관 전체에 소리가 퍼져나갔다. "가까이 오지마! 으악!" 방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실프의 무서움을 톡톡히 보여주었다. 하급 정령도 소환자에 따라서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인다. 방안에 몇 사람이 있었는지 일일이 헤아리지 않고 세렌을 제외한 모두를 공격하였다. 분노한 상태라 도둑이 몇명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공격한 것이다. '주인님 진정하세요.' '주인님.' 물질계 4대 정령의 최상급 정령들이 분노의 감정을 함께 느끼며 나를 진정시켰다. 정령사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때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정령에게 몸을 빼앗기거나 마나의 역행으로 죽기도 한다. "무슨 일이야?" "뭐야!" 다른 방에서 자고있던 손님들이 모두 나와서 복도 바닥에 뻗어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슨일인지 떠들었다. 잠시후 어디선가 복면을 쓰고있는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있던 자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모두들 손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도둑이라고 소리라도 질러야 했지만 감정을 다스리느라 그러지 못했다. "저놈들 도둑이잖아. 잡아!" "잡으라니까!" 그제서야 몇몇 눈치챈 사람들이 복면쓴 사람들을 따라가려 했지만 늦은 후였다. 늦은 밤이라 도망가면 찾을 방법이 없다. 더구나 그들의 숫자를 보아서 한 두 사람이 따라간다면 죽는거 한 순간이다. "도둑놈들이 임자 만났군. 그려." "마법사라도 되는가보네. 도둑질도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지. 안그런가?" "그렇구 말구." 잠이깬 손님들이 나의 방을 슬쩍 바라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사람들은 한 시간을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일이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일도 아니다. 평민이 수준 이상의 재물을 갖고 있으면 욕심을 내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기 마련이다. 여관주인이 방으로 찾아와 거듭 사과인사를 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나를 왜 공격했는지 이유를 알아내는게 우선이었다. 복면을 쓴 일행이 사라졌지만 실레스틴이 그들을 쫓고 있었다. 하급 정령을 이용해 추적할 수 있지만 실레스틴이 직접 움직이면 그들의 대화는 물론이고 정체까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을 가진 정령의 능력을 제대로만 이용하면 무척 효율적이다. "카인님 무사하신가요?" "괜찮으세요?"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상황이 정리되고 뒤늦게 찾아왔다. 그녀들이 늦게 나타난 이유는 예전에 있었던 얀도 마을에서 겪은 경험 때문이다. 그녀들은 혹시나 몰라서 방안에 꼭 숨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들 자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내가 마음편히 휴식을 취한 것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다행히 그들이 나의 방에 침입했기에 망정이기 그녀들 방에 먼저 침입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최상급 정령은 특별히 부탁하지 않는 이상은 계약자가 목숨의 위협을 받을 경우에만 스스로의 의지로 소환되기 때문이다. "내가 재물이 많아 보여서 도둑이 들었던 모양이야. 알다시피 내가 위험 할 일은 없으니까 안심해." 나는 세렌을 세실리아와 소피아의 방에 머무르도록 하고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실레스틴이 도둑의 정체를 파악하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순간의 실수가 이런 황당한 사건을 만들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제 몬스터의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숲이 아니었데 말이다. 여관주인이 새로 내어준 방에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에게 평민의 삶이 고단함을 아주 잔인하게 설명했지만 지금의 내 삶이 그렇다. 아마도 평민 이상의 능력과 재물을 갖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었다. 도둑도 무엇인가 훔칠 것이 있으니까 찾아왔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주인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단순한 도둑인거야?' 세 시간이 지나서야 실레스틴이 돌아오자 곧바로 복면을 쓴 도둑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단순한 도둑이라면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성녀 세실리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의 방에서 나간 인간들은 아침에 헤어졌던 레이와 타니스라는 귀족청년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이 몬스터 가죽을 욕심내고 지시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마차도 그들이 훔쳐갔습니다.' 실레스틴의 말에 허탈함을 느꼈다. 귀족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들은 약간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몬스터와의 전투를 경험하는 귀족이라면 적어도 노력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귀족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작 몬스터 가죽을 욕심내서 그랬다니. 물론 내가 갖고있던 몬스터 가죽이 돈으로도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피할수 없는 일이었군." 나는 이 사건을 피할 수 없었던 일이라 결론지었다. 사실 최상급 정령을 항상 소환하여 현실세계에 상주시킬 수는 없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나라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한 시간 동안 최상급 정령을 소환시킬 수 있었는데 생명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반나절 정도의 소환이 가능했다. 물론 생명력을 적게 소모하기 때문에 소환한다해도 능력을 약간 제한받는다. 최근에 들어서는 최상급 정령을 되도록 소환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며 도움을 받을 뿐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계속 받게되면 끝도없이 의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고 있었다면 두 명의 귀족이 작당한 일을 미리 알아챘을 것이다. '일단 정체를 알았으니 내일 다함께 상의해야지. 그녀들도 알아야 될 사항이니까.' 나는 굳이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실리아와 소피아도 지금의 속사정을 알아야 했다. 마차를 잃어버려 앞으로의 여행에 차질이 생겼지만 다시 구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곳의 마을을 보아서 마법길드나 러쉬 용병길드가 있을테니 그곳에 방문해 도움을 받아면 그만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보석보다도 귀중한 몬스터 가죽을 아까워하며 피눈물을 흘려겠지만 나는 재물에 욕심이 없다. 재물이야 마법길드에서 마도사급에게 지원하는 금액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마 그 돈만으로도 영지정도 크기의 땅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 레이와 타니스는 횡설수설하는 병사들의 말을 들으며 술기운이 달아났다. 원래 계획은 카인이란 정령사를 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레이의 사병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중급 정령사라더니 한가닥 하는군.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지." 타니스는 레이를 따르는 충실한 병사들이 오늘밤 한 일을 칭찬하며 선물을 나눠주었다. 그들도 선물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레이의 포에이드 가문에 속해 있지만 오늘밤과 같은 일에는 그만한 대가를 받을만 했다. 더구나 정령사가 머무는 방을 습격한 병사들은 상당한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젠장 그런능력이 있을줄이야. 물과 바람의 중급 정령사라더니.' 정령사를 죽이지 못한 사실에 찜찜하지만 몬스터 가죽의 획득으로 기뻐하는 타니스와 반대로 레이는 겉으로만 즐거워 하고 있었다. 레이는 중급 정령사가 바람의 정령을 이용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그 자리에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가 있었다면 충분히 정령사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가 그런 저질스런 일을 할리가 없었다. '아쉽지만 포기해야지. 더이상 욕심내면 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까.' 레이는 더이상의 욕심은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의 일도 상당히 찜찜했다. 평민의 물건을 욕심내서 훔쳤지만 자랑스럽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귀족들이야 찜찜한 기분조차 느끼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최소한 레이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편이다. "우와! 레이 이것좀 봐." 타니스는 훔쳐온 마차 지붕에서 몬스터 가죽을 직접 내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레이도 정령사의 일은 잊기로 결정하고 타니스의 일을 거들었다. 몬스터 가죽의 분량은 상당히 많았다. 수십여명의 가죽갑옷을 만들고도 남을 것 같았다. 레이와 타니스는 몬스터 가죽을 절반으로 나누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만큼을 제외하고 모두 가문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가문에서는 그 가죽을 받고 권력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뇌물을 가정한 선물을 주기가 상당히 어려운 세상이다. 귀족들은 모두 재물이 많아서 왠만한 물건에는 꿈쩍도 하지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몬스터 가죽이라면 누구라도 욕심낼 만하다. ------ 지난 밤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마차가 사라졌어도 돈은 세렌이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도 밤에 일어난 사건을 잊고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어제 저녁과는 전혀 색다른 맛이다. "우와. 정말 맛있었어요." "카인님 저도 마찬가지에요." 말한 사람은 당연히 세렌을 제외한 두 여자이다. 식사를 마치자 여자들을 방으로 데려와 어제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레이와 타니스란 수련기사 때문에 사건이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정말이지 평민이 삶이 왜 이런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항상 우리에게만 이런일이 벌어지나요?" 소피아가 이해할수 없다며 말했다. 자신이 신관으로서 생활하며 지켜보던 평민들은 무척이나 어려운 생활을 영위했지만 목숨이 위협받을 만큼의 사건을 자주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일행이 비슷한 사건을 연속해서 겪게되자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실리아도 소피아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이치라서 알고 있을줄 알았는데 말이야. 우리에겐 다른 사람이 욕심낼만한 물건이 있으니까 그렇지. 보통 평민이라면 이런 여관조차 머물만한 능력이 없어. 다른 평민이 이런일을 겪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겐 남들이 욕심낼만한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야. 그들에겐 건강한 몸이 전부이니니까." "하지만 우리같은 평민이 많이 있잖아요." "우리처럼 여행을 하는 평민은 많지가 않아. 간혹 대상인이 평민으로 귀족에 버금가는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귀족들에게 항상 뇌물을 가장한 선물을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게 보통이야.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비슷한 일을 당하고 말겠지. 평민이 귀족의 눈밖에 나면 그냥 죽은 목숨이라고 보는게 좋을거야." 소피아는 내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런 상황들은 우리들 자신이 만든 것이다. 가진게 없다면 어제밤과 같은 일을 당할리 없었다. 단지 어제밤 사건의 원인이 몬스터 가죽일 뿐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들이 또다시 쳐들어오지 않을까요?" 세실리아는 어제밤 일을 생각하며 증거인멸을 위해 다시 공격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도 오류가 있었다. 귀족이 명예에 죽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잊은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아. 그들도 나를 상대하기 위해서 적어도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나 마법사를 보내야 한다고 사실을 깨달았을거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명예가 강한 사람들라 고작 수련기사를 위한 치부에 도움을 주지는 않을거야. 더욱이 그들은 원하는 것을 가져갔는데 귀찮게 다시 찾아오겠어?" "그렇군요." 세실리아가 안심을 하였다. 하지만 내가 한 말에도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다. 귀족이 명예를 중시했다면 사람을 시켜 우리일행을 습격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여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말들을 주저리 늘어놓았다. 사건의 내막을 알게되었으니 이제는 조심만 한다면 문제될 점은 없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여관에서 머물며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여관에 머무는 사람들을 말이다. 소피아가 신관복장을 하고 있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았다. 가끔씩 소피아가 다친 사람을 신력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하급 신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소피아를 따라다니며 평민들의 생활을 엿보고 있었다. 처음 느낌은 그저 지저분한 사람들이라 생각했지만 조금씩 그들이 하루하루 힘들게 살고있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세실리아의 마음을 알고있는 이유는 그녀가 느낀 감정을 사실대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관에서 우리 일행은 무척 환영받는 존재였다. 정령사와 신관이 포함된 일행이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을이 떠나갈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다. 마을에는 귀족인 아카데미 학생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기사나 마법사를 종종 볼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평민의 삶을 경험하는 동안에 나는 세렌과 함께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다시 장만하러 다녔다. 세렌이 혼자 돌아다녔으면 좋겠지만 노예인지라 무슨일을 당할지 몰랐다. 세렌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평민과 다를게 없다. 하지만 말하는 투나 행동을 보게되면 눈치빠른 사람들은 그녀의 반응만으로도 쉽게 신분을 눈치챈다. 여관에서 습격당하고 마차를 도둑맞은 날 이후로 레이와 타니스는 다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원하는 물건을 얻어서 우리를 잊어버렸나보다. 한 동안 정령으로 일행들을 모두 보호하도록 했는데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마을은 귀족이 많아서 우리가 머물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 떠나려고 여행준비를 서둘렀다. 며칠후 우리는 여관에 머물던 손님들의 환영을 받으며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소피아가 여관에 머무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환영인사가 많았다. 세실리아는 소피아와는 다르게 평민의 삶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바쁘게 지냈다. 또한 평민이 귀족에게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지도 자세히 파악했다. 세실리아는 이제 길가다가 귀족이라도 마나면 쉽게 고개를 숙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마을에서 떠나는군요." 마차가 출발하자 세실리아가 말했다. "얀도 마을에서 부탁받은 일만 처리하면 홀가분하게 떠날수 있을거야." "그렇군요. 잊고 있었어요." 세실리와 소피아는 얀도 마을을 기억하기 싫을 것이다. 하지만 얀도가 몬스터 가죽을 선물하면서 한 부탁이라 꼭 이행해야 했다. 얀도 마을의 사람들이 문화생활을 하려면 생필품이 꼭 필요하다. 얀도의 마을에 찾아가는 상인은 몬스터 가죽을 얻게되고 얀도 마을의 사람들은 생필품을 얻게되니 서로 이득이다. 물론 그곳에 가는 길이 무척 험난하고 위험하지만 말이다. 귀족이 많은 마을이라 대상인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작은 상인에게 얀도 마을의 처지를 말해줘야 그곳에 가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마을을 떠나기 직전에 대상인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얀도 마을에 대해서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리고 얀도 마을에 찾아갈 수 있는 지도와 비용을 주었다. 도둑맞은 몬스터 가죽중에 일부는 얀도에게 선물받은 것이라 당연한 행동이었다. 대상인과 얀도 마을의 이야기를 끝내고 마차를 몰아서 마을을 빠져나왔다. 우리가 가려는 장소는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에서 동쪽으로 향한 숲지역이다. 동쪽은 서쪽과 마찬가지 숲이긴 하지만 울창한 정도가 낮으며 땅을 개척하는데 서쪽보다 좋은 이점이 많다. 서쪽은 땅을 개간해도 곡식을 심을수가 없다. 땅이 너무 거칠어서 곡식이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쪽 지역은 나무를 베어내고 개간을 하면 농사짓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열심히 개척이 진행되는 지역인 것이다. 마차는 정확히 북동쪽을 향했다. 수도에 들렸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세실리아를 찾고있는 신전 사람들을 마날 가능성이 있다. 신력을 잃어버린 세실리아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지만 소피아는 그렇지가 않다. 최선의 선택은 수도인 말린에 들리지 않는 방법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1 회] 12. 개척 몬스터 가죽을 레이와 타니스에게 도둑맞은 사건을 가지고 여행하는 며칠동안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나는 사건을 확대해서 번거로운 일을 피하자는 생각이었고,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어떻게든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그녀들이 신관으로 교육받은 신념의 영향 때문이리라. 세실리아와 소피아의 의견에 동의를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몬스터 가죽을 찾으려면 레이와 타니스의 사건이 붉어질 것이고 결국 우리에 대해서 알게되어 귀족가에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건의 원흉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우리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어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내 자신은 정말로 살인을 하고싶지 않다. 운명에 의해서 죽다 살아났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어떤 사건을 깨끗하게 처리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이다. "카인님은 그 일이 지겹지도 않아요?" 소피아가 마부석에 앉아서 수식계산을 연습하는 내게 말했다. 예전에는 마차를 몰면서 숲을 헤쳐가기 위해 정령술을 과도하게 사용하느라 신경쓸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정령을 이용할 필요도 없이 마차가 길따라 가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마법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내가 언젠가는 마법무구의 도움을 받지않고 마법을 사용할테니까 기대해." "어느 세월에요? 왠만하면 포기하세요." 소피아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식계산을 끝마치는데 필요한 시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너무나 미미한 수준이다. 현재의 수식계산 속도로는 1서클의 마법을 구현하는데 10분이나 소모된다. 세실리아는 노예 세렌에게 바느질을 배우고 있다. 그 외에도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지켜내기 위한 방편이다. 능력위주로 따진다면 일행중에 세실리아가 가장 쓸모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앗, 따거워!" "세실리아님 조심하셔야죠." 세실리아가 바느질을 하다가 바늘에 찔리자 소피아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실리아가 바늘에 찔릴 때마다 치료를 해주는 것은 언제나 나다. 소피아의 신력을 사용한 치료술에는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바늘에 찔리는 상처를 치료한다는게 웃기지만 소피아의 성화에 어쩔수가 없다. 10일을 여행하는 동안에 북동 방향이 아닌 북으로만 향해왔다. 숲으로 들어갈 마땅한 방향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척이 이루어지는 지역인만큼 생겨난 길이 있을테고 그 길을 향해서 찾아가야 편하게 들어갈 수 있다. 저녁이 되었을 즈음에 우리는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부터 영지나 마을의 간격은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하루 정도 걸었을 정도의 거리에 하나씩 존재한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땅을 필요로하고 그러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거리이다. 여행하는데 지나온 영지와 마을만도 수없이 많았다. 카르시온 제국은 수도 말린을 중심으로 남쪽 방향으로 백성들이 살고있는 나라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정상적이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국에서도 동지역과 서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지만 동지역만이 약간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저곳이 개척자들을 위한 영지군요." 세실리아가 멀리 보이는 영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제국의 동쪽 지역을 여행하기 위해서 개척자들과 함께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예전처럼 숲을 우리 일행만으로 돌아다니기엔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개척자 영지는 제국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영지이다. 동쪽 지역을 개척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도움을 주는 곳이다. 하지만 반대로 범죄자들이 개척지역으로 향하는 것을 감시하기도 한다. 개척을 하는 지역은 한 마디로 무법지대라 그들의 세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차가 영지로 들어가는 절차는 어렵지 않았다. 의외로 영지의 경비상태가 소홀하게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경비병들이 일행에 여자가 세 명이나 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개척자들을 위한 영지라는게 정말이네요." "대단하군." 영지로 들어오면서 길을 따라서 주변에 널려있는 상점에 할말을 잊었다. 영지 전체가 큰 잡화점이라도 되는양 운영되고 있었다. 개척자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의 돈에 욕심내는 상인들을 위한 영지 같았다. "정착해서 개간에 편리한 농기구가 종류별로 있습니다! 농기구 필요한 분은 오세요!"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하세요!" "저희 상점에서는 집채만한 바위를 매달아도 끊어지지 않는 밧줄만 취급합니다. 밧줄 사세요!" 상점에서 점원이 소리치는 소리가 길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길에는 개척자들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점원들이 소리쳐 부를만 했다. 개척자라면 아무리 물품을 적게 구입해도 상당한 분량이니 많은 이익을 남겨줄 것이다. 상점이 늘어선 길을 한참 지났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관은 번잡한 곳에서 약간 떨어진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찾아 헤매야 했다. 영지를 헤매는 동안에 두 눈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볼거리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여러 영지를 거쳐오는 동안에 이곳처럼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설사 걸어가는 사람을 발견해도 거의 뛰어가는 속도에 버금갔다.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이다. "저기 여관이에요." 소피아가 여관을 발견하고 알려주었다. 영지 전체가 다양한 상점으로 가득차 있어서 여관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헤매는 시간만큼 구경한 것이 많았다. "저번처럼 치료술을 발휘하면 남발하면 안되는거 알지?" "네, 카인님. 조심하도록 할께요." 나는 소피아게게 주의를 주었다. 며칠전 머물렀던 영지에서 소피아가 치료술을 발휘해 병든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주자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자신들도 치료해 달라고 소동을 피웠기 때문이다. 결국 소피아가 모두 처리하지 못해서 내가 물의 정령을 이용한 치료술을 발휘해야만 했었다. 여관 옆에는 마차를 세워두는 곳이 있었는데 빈자리가 많지 않았다. 마차를 세워두고 여관으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척 소란스러웠지만 정이 넘치는 대화가 오고가고 있었다. "어서...!" 점원이 입구로 들어온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하다가 말을 더듬었다. 점원의 눈이 향한 곳은 정확히 소피아였다. 그녀의 복장이 신관을 나타내고 있으니 놀라는게 당연하다. 지금까지는 마차 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점원!" "네, 손님" 점원은 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소피아에게 주던 시선을 내게 돌렸다. "방 두 개가 필요한데 가능한가?" "실례지만 저 분도 함께 머무르시는 겁니까?" 점원이 소피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일행은 점원과 비슷한 행동을 많이 겪어왔다. 어디를 찾아가든 신관이라면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수도 말린을 제외한 타지역에서 신관을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니까 당연하네. 하루 머무는데 얼마인가?" "네 명이니까 식비까지 포함해서 1피르입니다." "여기있네." 나는 점원에게 1피르를 건네주었다. 고급 여관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선불제로 운영된다. 이곳은 여관비가 비싼 편이다. 어제밤 머물렀던 영지도 1피르면 네 명이 일주일 정도를 머물러도 가능한 돈이었는데 말이다. "내 눈이 잘못된건가? 저 여자 신관 아니야?" "신관인거 같은데." "어쩐일로 신관이 이런 여관에 나타난거지?" 점원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1층에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소피아를 주제삼아 대화를 나눴다. 신관이라면 귀족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평민이 신관을 보기가 말처럼 쉬운일은 아니다. 단지 신전에 찾아가면 쉽게 볼수는 있어도 말을 걸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무시하고 점원이 안내한 방에 여장을 풀었다. 마차에서 꺼내온 짐이라봐야 옷종류가 전부이다. 일단 식사를 하기전에 세 명의 여자를 불러서 며칠 머물며 개척자들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예전에는 세실리아를 추적하는 사람들을 피해서 어쩔수 없이 서쪽 숲을 여행했다. 마차에 여행물품이 있었지만 정보도 없이 출발하여 많은 고생을 했다. 물론 다른 여행자에 비하면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많은 것을 알아보고 출발할 생각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여행에 적응하여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울창한 숲을 헤매던 여행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마차를 습격하는 몬스터도 없고 마차는 숲이 아닌 포장된 길을 지나간다. 더구나 하루건너 마을이나 영지에 도착해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저녁이 되자 1층으로 내려와 식사를 준문했다. 1층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동안 항상 겪어왔던 시선이기 때문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신관으로 있을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했기에 나보다 더 자연스럽다. "저는 개척자들이 이렇게 많은줄 몰랐어요." 세실리아가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여관에도 개척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굳이 바라만봐도 사람의 분위기만으로 개척자임을 알아챌 수 있다. 그들에게선 무엇인가 희망찬 활력소가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제국 전체를 생각한다면 적은 수라고 봐야해. 더구나 아무나 개척자가 될 수는 없을거야. 최소한 이주가 가능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야지." "그런데 사람들은 왜 위험한 지역으로 개척을 하려는 걸까요? 차라리 안전하게 돈을 벌어서 땅을 구입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돈을 벌어서 땅을 구입하는게 세실리아가 생각는 것 만큼 쉬운게 아니야. 개척자들은 땅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지. 제국에서는 개척자가 개간한 땅을 그들의 소유권으로 약속을 해주거든. 물론 개간한 땅을 제국에서 인정할 때까지 지켜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지." 식사를 하면서 개척자를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개척자들은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땅을 개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설사 땅을 개간하는데 성공해도 그 땅을 제국의 관리가 인정할 때까지 지켜야 한다. 개척이 진행되는 지역은 무척 위험한 무법지대이다. 외지인이 개간한 땅을 차지하려고 개간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말려줄 사람이 없어서 열심히 개간한 땅을 쉽게 빼앗기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개척자들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마을형태를 이루고 가족처럼 뭉쳐서 생활하는 편이다. 식사가 끝나도 개척자에 대한 대화를 계속하였다. 앞으로 여행할 지역이라 여자들이 알아야 될 사항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많이 알고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일반적인 논리만을 가지고 대화를 주도할 뿐이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상식이 너무 부족하니 대화를 언제나 내가 주도하게 된다. "쾅!" 우리가 개척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여관 입구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누군가 검집채로 바닥을 내려쳤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행동인 것 같았다. 그 뒤로 갑옷을 착용하고 검을 든 병사들이 여관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여기도 개척자들이 많군." 여관에 처음으로 들어와 검집으로 바닥을 내려친 사람이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저녁시간이라 여관에 머무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는 상황이었다. 저녁을 먹었어도 가벼운 술을 한잔씩 걸치는 중이라 여관손님 전부라고 봐야한다. 여관으로 들어온 사람은 기사로 생각되지만 행동은 용병이었다. 사람들은 귀족이라 생각하고 그저 조용히 있었다. 이곳 영지는 경비가 소홀해서 말썽이 생겨도 제대로 해결해 주지를 않으니 목숨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 "나는 퍼지슨가의 제미엘이다. 우리 가문이 코른지역을 개간하기로 결정했으니 모두 잊지 않도록!" 제미엘이란 사람의 말을 듣고서 개척자들이 웅성거렸다. 개간사업에 귀족이 참여하는 경우도 무척 많았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무한한 인적자원인 노예가 있기 때문에 더욱 쉬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사업이라 대부분은 어느정도 개척자들이 개간에 성공하면 뒤늦게 참여하여 모두 차지해 버리는 수법을 사용한다. "그런법이 어디있소?" "맞아! 개척을 하는 지역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척자들의 마음이요." "코른지역은 개척되지 않은 지역이 반이나 남아있는데 그게 무슨소리요?" 사람들은 제미엘이 외친 소리에 반항했다. 한 사람이 말하자 모두들 한 마디 이상은 말했다. 아마도 퍼지슨 귀족가문에서 개척되지 않은 코른지역의 나머지 반을 모두 차지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개간되지 않은 코른지역의 반을 퍼지슨가에서 차지하면 개척자들이 개간한 나머지 반도 그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소유권을 인정하는 관리를 매수한다거나 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서 말이다. 스으윽. 사람들이 계속 코른지역에 대해서 떠들자 제미엘이 검을 느린 속도로 뽑았다. 검이 뽑히면서 작은 금속음을 발생시켰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잠깐만에 정적이 감돌고 제미엘의 검은 검집에서 뽑혀졌다. 제미엘은 뽑혀진 검을 개척자에게 겨누었다. "어디 그 주둥아리 다시 한 번 놀려봐라. 다시 말하지만 코른지역으로 오는 놈들은 모두 죽을각오를 하고 오도록 해야할거다." 제미엘은 다시 한 번 코른지역의 중요성을 말했다. 하지만 개척자들 모두가 제미엘이 들고있는 검에 겁먹은 것은 아니다. 개척자들 대부분은 목숨걸고 땅에 집착을 갖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협박한다고 말을 들어먹을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 "앞으로 가게 비켜봐." 누군가가 사람들 틈을 헤쳐나와 제미엘의 앞에 섰다. 대부분 제미엘과 그의 뒤에 서있는 병사들에게 겁먹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와 세 명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괜히 나서서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코른지역에 갈거요. 그것을 당신 맘대로 할수는 없는일이요." 사람들의 틈을 헤쳐나온 사람은 제미엘 앞에 꼿꼿한 자세로 서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제미엘은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제미엘 앞에 있던 사람의 용기에 감탄했지만 그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이야앗!" 제미엘은 화를 참지못하고 그대로 검을 휘둘러 당당히 나서서 말한 사람의 목을 잘라버렸다. 잘려진 목은 바닥에 떨어져 한쪽으로 굴러가며 피를 튀겼다. 목이 잘린 목에서 피가 샘솟듯이 솟아나자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악!" "이 미친!" 차라리 비명을 지른 사람은 그나마 용기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를 뒤집어 쓴 제미엘의 모습에 겁이나서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나는 세실리아와 소피아를 진정시켰다. 너무 잔인한 모습이라 그런지 실신에 이르고 만 것이다. 세렌이 소피아를, 나는 세실리아를 부측했다. 세렌도 무척 놀랐지만 실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담력이 강한 개척자들도 놀라서 비명을 지를 정도니 무척 끔찍한 모습이다. 흔히 사람을 죽일 때 가슴을 찌르거나 베기 마련이다. 하지만 제미엘은 목을 잘라서 그 자신이 피를 뒤집어 쓴 것은 물론이고 바닥에 피가 철철 넘쳐서 흐르고 있었다. "또 어떤놈이 코른지역으로 가고싶은지 나서라!" 제미엘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아마도 이 소문이 퍼지면 개척자 중에서 코른지역으로 갈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미엘을 고발할 사람도 없으리라. 평민이 귀족을 고발하여 그 죄가 입증되어도 큰 벌을 주지도 않으니 말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제미엘이 직접 개척자들에게 다가와 한 사람씩 째려보았다. 어쩌면 제미엘은 오늘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작정하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가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수록 소문은 과장되어 개척자들이 코른지역으로 가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네놈이 코른지역으로 갈거냐?" "아.니.요." 제미엘은 아무에게 검을 향한채 질문을 던졌다. 지적당한 사람은 누구나 코른지역에 가지 않겠다고 떨면서 대답했다. 제미엘은 같은 질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씩 던진후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결국 내 차례도 다가왔다. 상당히 공포스런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나는 분위기에 상관없이 실신한 세실리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다. '하필이면 오늘 찾아올께 뭐람.' 나는 세실리아를 부측한 상태에서 제미엘이 벌인 일이 한심스러웠다. 레이와 타니스라는 수련기사가 몬스터 가죽을 훔쳐가더니 이곳에서는 제미엘이란 별종을 만난 것이다. 왠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람을 제미엘처럼 잔인하게 죽이지 않는다. 귀족들 대부분이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네놈도 코른지역으로 갈거냐?" 제미엘이 세실리아를 부축하고 있는 내게 검을 향하고 질문했다. 세실리아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으음" 아니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는데 세실리아가 실신에서 깨어나는지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제미엘은 잠시 세실리아에게 잠시 시선을 주더니 다시 내 뒤로 시선을 옮겼다. 내 뒤에는 노예 세렌이 소피아를 부축하고 있었다. "네놈이 무슨 황제라도 되느냐? 여자들을 줄줄이 데리고 다니게." 제미엘은 세실리아와 세렌을 보고나서 말했다. 소피아는 내 뒤에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녀가 신관인줄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랬다면 절대 놀리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관이 함께하는 일행을 모욕하는 것은 귀족의 명예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코른지역으로 가지 않겠다고 대답하면 제미엘이 돌아서서 가버릴 줄 알았지만 대답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실신한 세실리아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부축하고 있는 세실리아의 모습이 궁금했는지 얼굴을 손으로 치켜올려 바라보았다. 단순히 호기심에 한 행동이지만 그 순간에 실신한 세실리아가 깨어나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짜악" 세실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앞에 갑옷과 검에 피칠을 한 제미엘을 발견하고 곧바로 뺨을 때린 것이다. 성녀로 지낼 때 그녀에서 손을 댈 수 있는 남자는 성기사 이외에는 없었다. 신전에서는 성녀 세실리아를 보호속에 교육시키며 키워왔으니 제미엘의 뺨을 때린 행동은 예상된 결과였다. "이 미친년이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꺄아악" 제미엘이 너무도 화가나 검을 그대로 휘두르자 세실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오늘 제미엘이란 귀족은 이곳에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온 사람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두르니 말이다. "펑!" 제미엘의 검은 세실리아 앞에서 바람의 막에 부딪혀 멈춰있었다. 내가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우리 일행을 모두 보호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령사임을 밝히는 것으로 해결 되어질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제미엘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병사들을 쫓아내도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들이 다시 찾아오지 못하도록 하려면 내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하는게 최선의 방법이다. "아니" 제미엘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휘두른 검에 후회를 했지만 검이 막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어이없었다. 검이 막히다니 흔한 일은 아니다. 그가 검이 왜 막혔는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앞에 서있던 나에게서 뜨거움을 느꼈다. "파이어볼" 나는 제미엘에게 마법을 시전해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날려보냈다. 제미엘이 갑옷을 입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고 적절히 조절하여 시전한 것이라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제미엘에게 일부러 정령술이 아닌 마법을 사용했다. 정령사와 다르게 마법사는 3서클 이상만 확인되면 귀족에 버금가는 권력을 지닌다. 더구나 마법사는 제국에서 보호하는 존재이다. 일리시아 제국과 끊임없는 전쟁이 치뤄지는 상황에서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물론 정령사도 그만한 가치가 있지만 제국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하지는 않는다. 내가 마법으로 제미엘을 혼내준 것도 위와같은 상황을 생각해서이다. "마법이다." "도망쳐." 개척자들이 내 곁에서 우르르 피해버렸다. 하지만 입구에는 제미엘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어서 피할 곳이라고는 없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마법사가 얼마나 부정적으로 비춰지는지 알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 마법사 한 명이 수백여명을 죽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들이 놀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젠장 마법사라니." 제미엘은 병사들의 부측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의 갑옷은 마법에 맞아 검은색으로 그을린 것은 물론이고 뭉그러져 있었다. 그는 검을 치켜들고 내게 다가오려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병사들을 이끌고 여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로서도 어쩔수 없음을 자각하고 행동한 것이다. "올라가자." 나는 너무 잔인한 장면을 목격하고 제정신이 아닌 세실리아를 부축하여 방으로 올라갔다. 세렌도 소피아를 옮겼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옮길수도 있지만 지켜보는 눈이 너무나 많았다. 내가 마법사란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너무나 놀란 상황이다. 제미엘이란 귀족은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았으니 다시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마법사와 적대시하면 마법길드가 간섭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린다. 마법길드는 귀족가문에 압박을 가할 정도의 권력의 힘을 보유하고 있으니 피할 수밖에 없다. ------ 카르시온 제국은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일리시안 제국에 비해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일리시안 제국의 지도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수도를 중심으로 고르게 발달해 있다. 반면 카르시온 제국은 수도를 중심으로 남으로만 발달되어 있어서 여러가지 불편한 점들이 많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는 남으로만 발달하는 제국의 불귤형을 해소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끝에 동지역을 개척하기로 계획했다. 많은 귀족들이 반발을 일으켰지만 황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귀족들이 반대한 이유는 자신의 영지에 속한 영지민들이 개척지역으로 이주할까 걱정해서였다. 황제는 귀족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개척자들 선발에 엄격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주의 자유가 주어진 평민이나 용병만 개척자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많은 개척자들이 제국의 동지역 숲으로 들어갔지만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공짜로 땅이 생기는 개척자로서의 삶을 포기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국의 땅은 동지역으로 조금씩 넓혀지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동지역으로 조금씩 마을이 형성되고 상인들도 오가기 시작했다. 길도 생기고 완전한 개척이 이루어진 곳은 관리가 파견되어 땅을 개척한 사람에게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 황제의 뜻으로 제국의 동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 속도가 불붙기 시작했다. 땅이 없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개척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동지역 개척으로 인해 황제는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 요즘에는 귀족까지 수많은 노예를 동원해 동지역 개척에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영지없는 몰락귀족으로서는 개척한 지역을 모두 영지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 사활을 걸고 달려들기도 했다. "정녕 방법이 없다는 말이요?"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인 에드가 탄식이 섞인 투로 말했다. 에드의 말을 듣고있는 사람은 제국의 재상이었다. 전통적으로 제국의 재상은 황제의 인척이 차지하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은 당연하다. "폐하 죄송합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나올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황권을 강화하기는 커녕 약하게 만든 결과를 낳았군." "백성들은 폐하의 마음을 알고있을 것입니다." 프리온 재상의 대답이 황제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큰 힘이 되지는 못했다. 제국의 황제나 되는 에드가 이렇게 실의에 빠진 이유는 동지역을 개척하던 계획 때문이다. 많은 귀족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발전을 위해 황궁 가문의 재물까지 털어서 동지역 개척을 지원했다. 지난 10년간 어느 귀족도 에드 황제의 뜻에 동참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동지역의 개척에 불이붙자 많은 귀족들이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동지역을 개척하기 위해서 황제의 전재산이 지원되었고 개척자들이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귀족이 잇속을 차리기 위해서 개척에 참가하자 수많은 문제가 발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에드 황제는 개척자에게 개간에 성공한 땅의 소유권을 인전해 주기로 약속했었다. 제국적으로 발표된 사항이라 취소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것을 악용하여 그동안 관심을 갖지않던 귀족가문들이 개간이 거의 이루어진 지역을 둘러싸고 이권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드 황제는 사태수습을 위해 재빨리 관리를 파견하여 개간에 성공한 개척자들에게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 소유권 인정이 늦어질 경우 개척에 참여한 귀족가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개척자들이 개간한 땅을 빼앗을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개척자들을 가만두지 않고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동지역을 개척하자고 할 때에는 목숨걸고 반대하던 놈들이 이제와서 욕심이 나니까 그따위 짓거리들을 하다니." 에드는 제국의 발전 보다는 자신의 이속을 차리기 바쁜 귀족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10년 전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던 귀족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대부분의 귀족가문은 동지역의 땅을 차지하여 권력도 강해질 것이다. 귀족의 힘이 강력해지면 그만큼 황제의 힘이 약해질 것이다. "폐하 고정하시옵서소." "마법길드에서는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던가?" 황제의 질문에 재상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법길드는 제국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는 곳이라 황제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편이다. 하지만 질문을 던젼 황제의 표정은 기대섞인 얼굴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어떤 대답일지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의견을 알려왔습니다." "그렇겠지. 일리시아 제국과의 전쟁터에 마법사를 지원해는 일도 벅찰테니 말이야." 에드는 마법길드의 입장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혹시나 싶어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마법길드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그들이 동지역 개척에 나선다면 귀족가문의 횡포를 막아줄 수 있겠지만 전쟁터에 꾸준히 마법사를 지원하는 길드에 그만한 여력이 있을리 없었다. 더구나 마법사들의 마법에 대한 학구열을 생각한다면 여력이 있더라도 도움을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에드 황제와 프리온 재상은 동지역 개척에 뛰어든 귀족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을 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에드와 프리온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는 귀족들이 지금보다 강력해져서 황권이 약화될 것이 두려웠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몇년 지나지 않아 카르시온 제국은 귀족들의 횡포로 인해 처참하게 변할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2 회] 12. 개척 하루가 지나자 여관에서 있었던 사건이 과장되어 소문이 퍼졌다. 또다른 소문은 그와같은 사건이 얼마전부터 계속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제미엘이란 귀족 뿐만이 아니라 제국에 내노라하는 가문들이 개척자들을 협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용병길드를 방문하여 개척지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귀족가문이 개척에 참가하여 이권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개척자들이 귀족의 사병들에게 죽음을 맞이한 사건이 흔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귀족이 개척에 참여하면서 상황이 무척 악화되었지만 개척자들의 발길은 계속되고 있었다. 개척이 많이 진행된 상황이라 초창기 개척자들처럼 몬스터에게 죽거나 하는 일은 적어졌다. 이제는 상인들까지 오가고 있어서 예전에 비해 여러가지 위험성이 줄어들었다. "출발!" 수많은 마차행렬의 선두에 있던 기사가 외쳤다. 그러자 마차가 일제히 출발하기 시작했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마차가 출발하는 모습에 개척자 영지의 영지민들이 나와 축복을 빌어주었다. 물론 대부분은 영지민들이라기 보다는 상인들이다. 초창기 개척자들은 몬스터나 천재지변의 위험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함께 개척지역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통처럼 이어오면서 안전해진 지금에 이르러서도 오늘처럼 행렬을 이루어 출발하는 것이다. "이럇!" 나는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마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의 마차가 제일 후미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척자들의 마차에는 생필품과 개척에 필요한 물품들이 가득했다. 당연히 개척자들을 위한 행렬이니 우리같은 여행자 마차가 앞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카인님 드디어 출발이네요." 소피아가 한 숨을 내려쉬며 말했다. 개척자 중에서는 가축들을 데려가는 경우도 있어서 행렬의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하지만 출발한지 반나절이 지나자 서서히 달라졌다. 선두에 있는 귀족들의 마차행렬이 속도를 내더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귀족들의 개척행렬은 우선 물량이 달랐다. 대부분의 개척자들은 많아야 두 대의 마차를 가지고 있는 반면 귀족들의 마차는 최소 10대는 기본이고 그 마차마다 노예들이 가득 태워져 있었다. 또한 마차를 사병들이 마차를 엄중하게 호위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마차의 속도별로 영지에서 출발한 행렬이 또다시 갈라졌다. 귀족행렬은 빠르게 이동하여 사라졌고 상인들도 귀족행렬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결국 꽁무니에 남은 사람들은 개척자들 중에서 가축을 동반한 사람들 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여행이 목적이라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가축을 동반한 개척자들과 비슷한 속도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어이, 이리와서 함께하지." 마차로 반나절을 함께한 남자가 우리 일행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식사준비를 끝내고 벌써 먹으려 하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이제서야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상황이다. 세실리아와 소피아 모두 신전에서의 식습관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여행자보다 식사준비가 요란한 편이다. "점심은 저분들에게 얻어먹는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일행을 데리고 식사준비를 끝낸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런 곳에서 식사초대를 거절하는 행위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다. "에휴. 제대로 식사하긴 틀렸네." "맞아. 그냥 우리가 준비하는게 좋은데."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투덜거렸다. 아무리 식사를 얻어먹어도 우리가 준비한 음식보다 좋을리 없었다. 개척자들은 앞으로의 생활을 대비해 마른 음식만을 준비했을테니 말이다. "어서오세요. 아가씨들이 많네요." 초대한 것은 남자였지만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사람은 털털한 성격으로 비춰지는 여성이였다. "안녕하세요. 카인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세실리아, 소피아 그리고 세렌입니다.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렇게 예의를 차리나. 일단 이리와서 식사부터 하게." 우리는 남자의 말에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모닥불 위에는 냄비가 올려져 있었고 스프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끓고 있었다. 우리를 초대하기 위한 것인지 냄비안의 스프가 무척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애버른이라고 하네. 보시다시피 가족들을 데리고 왔지. 모두들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우리는 가축까지 데려가느라 이렇게 느리게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자네 마차를 보니까 길을 서두르지 않는거 같은데 서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가며 지냈으면 좋겠구만." "그건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네요." 애버른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보였다. 모든 개척자들이 마차속도를 높여 사라지고 남은 마차는 얼마 없었다. 결국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해야 앞으로의 여행길에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위에도 몇몇 마차가 모여있는 걸로 보아서 뜻을 같이한 일행이 많아 보였다. "얼마 동안은 심심하지 않겠구만. 여기는 나의 부인 레이얀이네. 그리고 저기 마차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이가 실비아로 내 딸일세." "그렇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애버른의 부인 레이얀이 준비한 식사는 무척 맛있었다.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정도였다. 애버른이 우리 일행과 동행을 부탁한 것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일행은 신관도 있으며 여성이 많아 가족들에게 해로울 소지가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애버른과 개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우리가 단순한 여행을 목적으로 한 일행이라는 사실을 듣고 놀라워 했다. 세상 어느누가 무법지대라 불리는 위험한 개척지역으로 여행을 한단 말인가. 일주일 동안은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은 평온한 나날이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애버른과 레이얀의 딸 실비아와 자주 놀아주며 지냈고, 나는 성과도 없는 마법수식 연습에 열을 올렸다. 애버른도 우리 일행이 평범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깊은 관심을 나타내진 않았다. 일주일을 함께 지내며 많이 친해지자 애버른에게 나에 대해서 조금 말해주었다. 러쉬 용병길드에 A등급의 중급 정령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내 말을 듣고서 무척 좋아했다. 일행이 강하면 그만큼 가족이 안전해 진다. 그동안 애버른은 일행에 여성이 많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관이 함께한 일행이지만 개척지역은 일반적인 논리가 펼쳐지는 곳이 아니다. 애버른 가족과 내 일행을 포함하면 남자 둘에 여자가 다섯 이다. 여자가 부족한 개척지역에서는 표적이 되는 일행이다. "드디어 카르마에 도착했군." 애버른이 멀리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기로 보아서 마을이라기 보다는 영지에 가깝다. 카르마는 개척이 처음으로 진행된 지역이다. "아빠 빨리가요." "마을에 도착하면 엄마하고 마차 안에만 있어야 하니까 지금부터 들어가 있어라." "이잉. 아빠 미워!" 실비아가 마부석에 앉아있는 아빠 애버른의 말에 실망하고 마차안으로 들어갔다. 마차안에 있는 엄마 레이얀에게 응석을 부리기 위해서이다. 개척지역은 어느 곳이든 위험이 도사리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나도 애버른과 마찬가지로 세 명의 여자들에게 조심하라고 일러두었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지켜주겠지만 스스로 조심해서 위험을 미리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특히나 애버른의 일행이 가족으로 비춰지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미인에 속한 세 명의 여성과 함께하고 있어서 시비걸기 좋은 대상이다. 카르마로 들어서는데 경비병이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개척지역이라 그런지 신분도 검사하지 않는다. 애버른 가족이나 우리나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시 출발해야 하는 입장이다. 카르마 지역은 개척이 모두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애버른 가족과 우리 일행은 일주일만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여관의 투숙비가 비싼 편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도착하는 지역은 여관조차 없을테니 말이다. "불쌍한 사람들이 또 있구만."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 여관1층에서 애버른 가족과 식사를 하는데 주변에서 우리를 보고 한 마디씩 떠들었다. 일행 모두가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갔지만 나는 그대로 남아 개척지역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려줄 사람을 찾아보았다. 마땅한 사람이 없자 점원을 불렀다. 여관에서 일하는 점원보다 개척지역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하며 손님들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을테니 말이다. 약간의 돈을 찔러주자 점원은 수많은 정보들을 토해냈다.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소문으로 퍼지는 소식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애버른 가족이 머무는 방에 찾아가자 모두들 모여 있었다. 애버른은 가족을 위해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고 그것은 세실리아와 소피아도 마찬가지이다. 카르마로 들어오면서 전체적으로 여자가 많지 않으며 무법지대의 온상임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알아보았나?" "네, 애버른씨. 점원에게 들은 사실이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모두 근거있는 말이었습니다." 애버른이 나의 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가족을 데리고 개척자로 나섰지만 이곳은 지도도 없는 지역이라 말만 듣고 찾아온 것이다. 대부분이 모두 그렇겠지만 이 마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는 애버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어서 말해주게나. 궁금해 죽겠네." "이곳은 카르마 지역으로 개척이 처음 이뤄진 곳입니다. 좀더 동쪽으로 가면 이곳보다 큰 세인트 지역이 나오는데 그곳은 모든 지역의 땅이 개간되었답니다. 그리고 세인트 지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개척이 이루어지는 상황인데 이곳 카르마 지역을 포함해 여덟 지역이 개척되는 중입니다. 일단 세인트 지역에 도착해서 어느 곳에 정착할 것인지 결정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문제라고 있는건가? 상관없으니 그냥 말해주게." 내가 더이상 말하지 않자 애버른이 재촉했다. 사실 좋지않은 소식이라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개척이 마무리되지 않은 모든 지역에서 귀족들의 다툼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더욱이 세인트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이라 무법천지가 되어버려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일단 이곳 카르마 지역은 파도루 귀족가문이 완벽하게 차지한 상태이고 나머지 각 지역은 귀족가문들이 서로 싸우는 중이랍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심할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차라리 귀족들의 싸움이 진정되고 올 것을." 애버른은 개척지역으로 일찍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싸움이 진행되는 곳에서 정착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들끼리 싸움을 진행하는 지역에 외부인이 들어오면 한마디로 두 부류 모두에게 배척당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파도루 가문일께 뭐람.' 애버른과 마찬가지로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곳 카르마 지역을 파도루 가문이 영지나 다름없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파도루 가문과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갖고있다. 파도루 가문은 개척자들이 거쳐가는 카르마 지역을 차지해 상업 행위를 벌여서 많은 이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귀족가문이니 카르마 지역을 차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사실 동지역이 앞으로 개척이 좀더 이루어지면 세인트 지역이 개척된 여덟 지역의 중심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세인트 지역은 개척이 모두 완료되어 귀족들이 이권다툼을 벌일 시간도 없었다. 땅을 개간하면 제국에서 파견한 관리가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데 귀족들이 이권다툼을 벌이기도 전에 소유권이 개척자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귀족가문이 개척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은 땅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 개간되지 않은 땅을 노예들을 이용해 모두 개간해버려 개척자들을 몰아내거나 하는 방법을 사용해왔다. 하지만 세인트 지역은 개척자들이 모든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서는 차지할 수 없는 지역이 된 것이다.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수천 아니 수만여명의 사람이 정착한 세인트 지역을 무슨수로 차지하겠는가. 결국 주변의 개척이 완료되지 않은 지역에서 귀족들끼리 혹은 개척자들과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변했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애버른이 천진한 실비아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레이얀도 실비아를 안아들고 슬픈 표정을 보였다. 그들은 개척지역이 많이 이루어져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대부분의 개척자들이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지만 애버른 가족은 단순히 굶지않을 정도면 만족하리라 생각하고 개척자로 나선 것이라 후회가 막심했다.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걱정마세요. 더구나 다시 돌아갈 곳도 없잖아요." 나는 애버른 가족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기로 결정했다. 사실 세인트 지역에서 애버른 가족이 원하는 곳으로 함께가서 정령술로 개간을 해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한 가족에게 필요한 땅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는가. "정말 고맙네. 자네가 도움을 준다면 우리 가족이 정착하는데 어려움이 없을거야." "카인 고마워요." 애버른과 레이얀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인사를 했다. 여행을 하면서 가끔씩 정령의 힘을 그들은 목격했다. 모닥불을 피우거나 하는 신가한 장면을 말이다. 더구나 내가 A등급의 용병이라고 알고 있으니 애버른의 입장에서 가족이 안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카르마에서 하루만 머물고 다음날 세인트를 향해 출발했다. 내가 파도루 가문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었고 애버른 가족에게 금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금적적인 도움을 준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주게 되니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카르시온 제국에는 많은 귀족가문이 존재한다. 어느 귀족가의 경우에는 영지도 잃고 몰락하여 평민의 수준으로 격하된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모든 몰락귀족의 신분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제국건립에 업적을 남긴 가문은 몰락해도 신분이 격화되지 않는다. 현재 카르시온 제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대귀족 가문은 손가락에 꼽힌다. 그중 절반가량이 제국의 동지역 개척에 참여하였다. 나머지 반가량의 대귀족 가문에서는 명예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과거 황제가 제국의 동지역 개척을 주장할 때 대귀족 가문 모두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동지역 개척에 참여한 대귀족 가문은 크게 파도루 가문, 라다르 가문 그리고 루아카스 가문이다. 파도루 가문의 경우는 좋지않은 사건에 몇번 연류된 상황이라 굳이 명예를 생각해 개척의 참여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오늘 대귀족 가문이라 불리는 가주들이 왜 모였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거요." 파도루 가문의 가주 루바인이 라다르 가문의 가주 리온과 루아카스 가문의 가주 제노를 앞에두고 말했다. 세 명만이 의자에 편히 앉아 있었고 그들 뒤에는 가주를 보좌하는 사람이 각각 두 세 사람씩 서 있었다. "두 분 모두 뜸을 드리는데 답답해서 내가 먼저 말하겠소. 지금 여러 가문들이 개척지역을 두고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데 여기 세 가문은 거의 정리가 된 상태요. 물론 파도루 가문처럼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했지만 말이요. 그러니 다른 가문들이 정신없는 지금 세인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나설 때가 된거요." "라다르 가주님의 말이 지당하지만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거요?" "우리 세 가문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해결될텐데 뭐가 걱정이요?" 라다르 가주 리온이 힘있게 말했다. 세 가문들은 개척된 영지 일부를 이미 차지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욕심이 끝날리 없었다. 이들은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는 세인트 지역에 욕심을 부리는 상태이다. 그곳은 개척자들에게 소유권이 모두 인정된 상태인지라 어떤 귀족도 욕심내지 못하고 있었다. "힘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요. 잘못하면 에드 황제를 옹호하는 가문들의 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요. 더구나 세인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개척자들을 없애야 하는데, 그들이 한 두 명도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처리한단 말이요?" 루아카스 가문의 가주 제노의 말에 리온이 자신의 의견이 합당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루바인은 제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인트 지역은 개간된 작은 땅을 수많은 개척자들의 소유로 되어있는 상태이다. 그 지역에 정착한 사람을 모두 죽이지 않는 이상은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곳이다. "앞으로 세인트 지역은 개척된 다른 지역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무한한 발전을 이루게 될 완벽한 장소요. 그것은 여러분도 알고있어서 이렇게 욕심내는 것이 아니요? 그러니 장기적인 투자라 생각하고 조금씩 개척자들을 회유하거나 쫓아내어 차지하는 방법을 사용합시다. 무작장 무력을 동원한다면 다른 개척지역에 정신이 팔린 하위 귀족들까지도 달려들 것이니 말이요." 파도루 가문의 가주 루바인이 되도록 천천히 세인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의견을 말했다. 세 가주들 모두 세인트 지역을 단번에 차지할 방법이 없었다. 귀족들의 최고의 장점이 무력인데 그것을 동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가문의 무력을 사용해 개척지역을 차지한 이들에겐 큰 문제였다. "생각 같아서는 세인트 지역의 정착한 개척자들을 모두 쳐죽여서 해결하고 싶지만 앞날을 생각해서 참도록 하겠소." "나도 루바인 가주의 의견에 동의하겠소. 하지만 라다르 가주의 생각인 개척자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같소." 리온과 제노가 각각 루바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생각해 세인트 지역을 조금씩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방법이야 여러가지이다. 재물로 회유하거나 무력으로 협박 할 수도 있다. 지속적으로 괴롭히면 결국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가문 모두 서두르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 세 가주는 세인트 지역을 모두 차지하면 각각 공평하게 나눠갖기로 합의했다. 대귀족 가문이 힘을 합치면 나머지 귀족가문들이 모두 합심하여 대립해도 큰 문제가 안된다. 대귀족 가문의 힘은 그렇게 엄청나다. 루바인, 리온 그리고 제노는 논의를 걸쳐 세인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기본 방침을 결정했다. 서로 합심하여 최대한의 이득을 보는게 이들의 목적이다. 개척지역에 너무도 많은 귀족가문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3 회] 12. 개척 카르마를 떠나 세인트로 가는 동안에 애버른과 레이얀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인트가 무법천지로 변했다는 소식을 알았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여행하는 세실리아, 소피아 그리고 세렌과는 무척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나마 실비아가 항상 웃는 얼굴이라 다행이었다. 그들이 불안한 마음을 떨친 것은 세인트 지역에 도착해서였다. 세인트에 도착하니 카르마에서 머문 여관점원의 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무법천지는 커녕 평온도 이곳에 비하면 가소로울 수준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연유를 물어보니 귀족들의 다툼이 정리되어 평화가 찾아온 것이라 말했다. 세인트 지역은 우리가 도착하기 얼마전까지 귀족들의 영역 다툼으로 피튀기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세인트가 개척지역의 중심에 있으니 혼란을 피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이곳을 대표하는 사람들 모두가 신분이 낮은 개척자들이라 아귀다툼을 벌이는 귀족들에게 항의조차 못하며 지냈던 것이다. 세인트는 넓은 지역에도 불구하고 여관업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땅이 개척자들 소유라 그 누구도 여관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개척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처했다. "외곽지역에 가서 야영을 하도록 하죠." "어쩔수 없지." 애버른이 내말에 한 숨을 내리쉬며 대답했다. 오랜 여행으로 피곤한데 또다시 야영을 해야하니 한 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인트의 외곽을 벗어나자 야영하기 적당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개간한 땅이지만 아직 곡식을 심은 흔적이 없어서 하루 야영한다고 문제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 머물고 세인트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통해서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좋은지 알아내어 그곳으로 떠날 예정이다. 물론 세인트가 정착하기 가장 좋겠지만 이곳은 더이상 개간할 땅이 남아있지 않은 지역이다. 우리가 야영한 지역은 외곽으로 세인트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산을 제외하고 평평한 땅에는 집이 들어서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밤이 되자 집집마다 호롱불이 켜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정말 멋지네요." "아름다워요."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세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녀들과 같은 생각이다. 작은 불빛이 세인트 전역에 나타나 있었다. 집집마다 호롱불빛이 새어나오는 모습은 밤하늘의 별들과 비슷했다. 수도 말린이라면 마법불빛으로 낮처럼 환했을텐데 말이다. "우와! 큰 호롱불이다!" 소피아 옆에 앉아있던 실비아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실비아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실비아가 좋아할만 했다. 호롱불의 크기가 다른 집에 비해서 열배 가량의 크기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불빛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불이잖아.' 실비아의 생각에 동의한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실비아가 바라보고 좋아한 호롱불은 집이 타오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잠깐 다녀올께. 실레스틴!" 나는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의 도움을 받아 불타는 집을 향해서 날아갔다. 불타는 집에서 생명력이 느껴지고 있어서 마음이 급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애버른 가족과 함께하면서 개척자들의 고난을 느꼈기 때문에 도와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카인오빠가 날아간다! 야호!" 실비아는 내가 정령의 도움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즐거워 껑충껑충 뛰었다. 여행하는 동안에 가끔씩 신기한 모습을 보여주었더니 이제는 놀라지도 않고 박수치며 좋아한다. 정령의 도움으로 불타는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불타는 집앞에 사람이 많았지만 내가 날아오는 모습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 바로 코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집에 시선이 집중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겐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불이야! 불이야!" "불을 꺼야 하니까 모두 물을 길어와! 불을 꺼야해!" "집안에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좀 해주세요." 활활 타오르는 집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은 물을 길러와 불을 끄려고 하지만 큰 불이 쉽게 잡힐리 만무했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집안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더욱 흥분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변에 우물이 없는지 물을 길어오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불이 크게 번진 상태라 집안으로 들어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집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겠지.' 막상 불부터 끄려고 생각하니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역사에 기록에 남기 보다 평범한 삶을 원하는 내게는 좋지않은 일이다. 하지만 상황이 급하니 능력을 최대한 숨기면서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불끄게 길좀 비켜줘요." 물로 끄기엔 불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에선가 물을 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물동이를 든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지만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길에 주저앉아 우는 사람까지 있었다. 집안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는걸 알면서도 구해주지 못하는 심정을 감당하지 못한듯 싶었다. 나는 물동이를 들고서 불타는 집으로 가려는 사람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서 물동이 건네받았다. 물동이를 길어온 사람은 자기 대신에 불타는 집에 물을 뿌려줄 것이라 생각하고 건네주었다. 물을 길어오느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말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이봐. 헉헉! 얼른 뿌리고 오라구. 다시 물을 길어와야 하니까." 물동이를 건네준 사람은 그자리에 주저 앉더니 내게 소리쳤다. 정말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탄식을 하면서 손놓고 구경하는데 말이다. 불이 너무도 크다보니 포기하는게 정상이라 생각되는 상황이었다. "으아악! 살려줘!" 집안에서 이제는 비명이 들려왔다. 방금전까지는 의식이 있는 소리인 반면 이제는 기침소리와 함께 고통이 담긴 목소리이다. 나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물동이를 들고 집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물동이를 평평한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저사람 뭐하는거야?" "이봐! 물을 뿌려야지 뭐하는거야?" "세인트에 저런사람이 있었나? 처음보는 사람인데." 뜨거운 기운으로 인해 불타는 집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동이를 들고 불길로 다가가더니 물을 뿌리지를 않으니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엘레스트라 부탁인데 집안에 있는 사람을 보호해줘. 불은 내가 직접 운다인을 소환해서 끌테니까 그 일은 상관하지 말고.' '네, 주인님' 엘레스트라는 아무런 형체없이 소환되어 불타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가끔씩 인간의 형태로 소환하지만 생명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후로는 실체화 시키지 않는다. 이제 불타는 집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엘레스트라의 도움을 받을테니 안전할 것이다. '이제 쇼를 보여줄 차례군.' 내가 물동이를 가져온 것은 물의 중급정령을 소환하여 불을 끄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불이 꺼진다면 사람들은 말도안되는 사실을 만들어 버린다. 말린에서 치료사로 생활하며 환자들을 대하며 느낀 점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 편이다. 그러니 되도록 눈에 보이도록 정령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기서 뭐하는거야?" "저사람 미친거 아니야? 위험하니까 당장 물러서!" 사람들이 내게 소리를 질렀다. 불은 더이상 커질수 없을 만큼 커진 상태라 당장이라도 집이 무너질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끌어내기 위해서 다가오려 했지만 뜨거운 기운에 물러났다. 아무리 급해도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운다인!"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중급정령 운다인을 불러냈다. 그러자 물동이에서 긴 머리의 처녀 모습을 한 사람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린아이 만한 크기로 물동이에 담아있던 물을 전부 사용하여 실체화 된 것이다. '모든 불을 꺼뜨려 주겠니?' 끄덕끄덕.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이 내 생각을 전달받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중급정령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일일이 소환자가 지시를 내려야 알아듣는다. 최상급 정령이 아닌 하위 정령들에게 복잡한 일을 시키기 위해서는 소환자가 하나하나 제어해야 한다. "물귀신이다!" "물에 빠져죽은 처녀귀신이다!" "저거 몬스터 아니야?" 사람들은 물동이에서 나타나 허공에 둥둥 떠오른 운다인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한 순간에 사람들의 관심은 불타는 집에서 운다인으로 옮겨졌다. 몇몇 사람은 운다인을 보고 도망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운다인은 사람들의 관심과 상관없이 불타는 집의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릴수록 운다인의 형태가 점점 작아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물방울들이 파리떼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며 불을 끄고 있었던 것이다. 폭풍이 몰아쳐 비가 옆으로 오는 것처럼 집주변 전체에 물방울들이 비상하며 불길을 잡고 있었다. "불이 꺼졌다! 사람부터 구하자구!" 불길이 거의 잡히자 사람들은 집안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몇명이 뛰어들어갔다. 불길은 거의 잡혔지만 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잠시후 집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등에 사람을 업은채로 빠져나왔다. "어어, 나온다. 나와." 많은 사람들이 업혀 나오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엘레스트라가 보호해 주었을테니 아무런 상처도 없으리라. 설사 내가 오기전에 상처가 있었다 해도 엘레스트라가 치료해 주었을 것이다. "무사합니다!" "살았어요. 상처하나 없이 살았어요." 업혀져 나온 사람을 살펴본 사람이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덩실덩실 기뻐하며 서로 포옹하고 난리였다. 두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 또한 한 가족같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했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동안에 운다인이 불길을 모두 꺼뜨렸다. 그러자 물방울들이 허공에 하나둘 모이더니 다시 원래의 형체를 이루었다. 누드차림의 긴 머리 처녀 모습으로 말이다. 최상급 정령을 제외하고 모든 정령은 일정한 형체가 있다. 허공에 모습을 나타낸 모습이 운다인 본래의 형체이고 다른 정령사가 소환해도 같은 정령은 아니지만 외형이 비슷하다. "물귀신이 또 나타났다!" 사람들이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놀랐지만 방금전처럼 공포심을 갖지는 않았다. 운다인이 불을 꺼주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운다인은 내 앞으로 날아오더니 귀족 아가씨처럼 허리를 숙이며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였다. "고마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고맙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나는 운다인에게 생각을 통해서 말했다. 물론 평소의 습관대로 인간의 말과 생각을 함께 말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정령사들 대부분이 나와같이 정령과 대화를 나눈다. 물론 내 경우는 다른 정령사에 비하면 습관이라 하기에는 미비하다. 운다인은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물동이 위로 가더니 다리부터 천천히 물방울로 변해 물동이를 물로 채웠다. 잠시후 운다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물동이에는 물이 가득 담겨졌다. 나는 물동이를 집어들고 물동이를 건네준 사람에게 가져갔다. "고맙게 잘 썼어요." "그.게. 그.러.니.까..." 내게 물동이를 건네주었던 사람의 몸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나는 물동이 주인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내가 도착했을 때 불의 크기로 봐서 물을 길러나르기엔 늦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숨이 목구멍에 차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물을 길어온 사람이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제 이.름.은 바.호.프.에.요." "저는 중급 정령사 카인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땀으로 범벅이 된 바호프와 인사를 나눴다. 바호프는 내게 시선을 주기보다는 건네받은 물동이를 들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전의 운다인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정령사 등급까지 굳이 말한 것은 그것이 마법사나 정령사 그리고 기사의 일반적인 대화방법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3서클 이상이면 인사를 나눌 때 서클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그만큼 자부심이 강하고 뛰어남을 알리는 방법이라 오래전부터 생겨난 인사법으로 예상된다. 3서클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가질만한 자부심이다. 특히 기사의 경우에는 마법사보다 정도가 심하다. 기사의 대부분이 귀족이다보니 오러의 사용여부와 오러를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의 정도에 따라서 일반 사람들이 알지못하는 단계를 정하고 소개할 때 밝힌다. "저 사람이 정령사야? 정령사가 물귀신을 불러내는 사람이야?" "이사람 전쟁터에도 다녀오지 않았나? 정령사도 몰라? 나는 처음부터 물귀신이 정령인거 알았어. 가끔씩 전쟁터에서 본적이 있지." "그러고보니 나도 들어본 것 같은데." 사람들은 함부로 나와 바호프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단지 옆에서 듣던 누군가가 정령사란 말에 운다인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바호프와 좀더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그가 물동이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어서 대화가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저는 며칠간 저곳에 야영하고 있을 예정입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놀러오세요." "그.러.겠.습.니.다." 내가 야영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바호프가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야영지로 돌아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야영지로 돌아오자 실비아가 큰 호롱불 이야기를 애버른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모두에게 실비아가 말하는 큰 호롱불 때문에 겪은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일행 모두가 사건의 전말을 전해듣고 밤새 편안한 잠을 청했다. 천신을 숭배하는 신관에 의하면 선한 일을 행하면 천신이 보답을 준다고 한다. 애버른 가족도 그 말을 믿는 편에 속하는지 내가 벌인 일 때문에 앞으로 좋을 일이 생길 거라며 편하게 잠들었다. 나는 세실리아와 소피아를 데리고 여행하며 그녀들에게 천신에 대해서 많이 듣게되어 그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세실리아와 나에겐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 바호프가 세인트 지역에 정착한 때는 20대 초반이었다. 바호프가 세인트에 정착하기 전에는 불우하게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고아로 거지와 다름없이 구걸을 하며 목숨을 연명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남의 집 일을 도와주며 지냈다. 바호프는 20살이 되던 해 사람답게 살기위해 개척자로 나서게 되었다. 땅이 없는 바호프로서는 지금처럼 구질구질하게 계속 사느냐 아니면 작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개간한 땅에서 사느냐의 선택이었다. 물론 개척자로 나서는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지만 가족도 없는 혈혈단신이라 무서울게 없었다. 개척자로 나선지 8년이 지나서야 바호프는 세인트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척자로서의 삶은 끝이 아니었다. 얼마전부터 귀족들이 개척에 참여하여 세인트가 무법지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세인트에 정착한 개척자들도 나름대로 방안을 마련했다. 용병출신 개척자들로 경비단을 구성하거나 세인트 지역의 대표를 뽑았다. 하지만 그 방안은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귀족들은 그런 세인트 개척자들의 움직임에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세인트에 정착한 개척자들이 귀족들에게 반항하는 방법이라고 해봐야 땅의 소유권을 넘기지 않는 것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세인트 이외의 지역에서 귀족들의 다툼이 마무리 되었고 결국 세인트에 손길을 뻗어왔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식이었다. 귀족이 찾아와 땅의 소유권을 넘겨달라고 회유하고, 회유가 안되면 협박하고, 그것도 안되면 마지막으로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바호프는 잠자다가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불이야'를 외치고 있었다. 며칠전부터 갑자기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라 집안에 있는 물동이를 들고서 우물로 달려가 물을 길어 사람들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렸다. '또 귀족놈들이 일을 저질렀나?' 세인트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불이난 경우를 모두 합쳐봐야 손가락으로 꼽힌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집에 불이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당연히 사람의 짓이었고 그럴 사람은 오직 개간한 땅의 소유권을 노리는 귀족밖에 없었다. "허억. 흐윽. 허억." 바호프는 가뿜숨을 몰아쉬며 물동이를 들고 달렸다. 물동이의 물이 적은 양이라 불길을 잡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살아계셔야 해요.' 마음속으로 불타는 집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없길 바랬다. 고아였던 바호프에게 세인트에 정착한 개척자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한참을 달려서야 불타오르고 있는 집에 도착했지만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바호프가 지쳐있을 때 누군가 앞을 막아서고 물동이를 건네받았다. 당연히 불타는 집에 자신이 가져온 물을 뿌려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물동이를 받아든 사람은 아주 느린 걸음으로 불타는 집을 향해 다가갔다. 물동이를 힘들게 들고서 달려온 바호프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잠시후 바호프에게 물동이를 건네받은 사람은 평생 잊지못할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귀신을 불러내어 절대 꺼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불을 꺼뜨린 것이다. 바호프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 모습에 놀라고 또 놀랐다. 바호프가 더욱 놀란 것은 물귀신을 불러내어 불길을 잡은 후 그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물귀신이 나타났던 물동이에 정신이 팔려 무서운 마음에 제대로 말도 못했지만 말이다. 바호프는 정령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물귀신을 불러낸 사람이 카인이란 이름을 가진 정령사란 사실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바호프는 카인이 물귀신을 불러낸 물이 담긴 물동이를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져왔다.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했다. 아무래도 착한 물귀신이 나타난 물이니 집에 가져다두면 혹시 나중에 자신의 집에도 불이나면 오늘처럼 나타나 불을 꺼줄 것이라 믿고서 말이다. 신분이 미천한 평민들은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천신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평민에겐 그러한 기회조차 없다. 천신을 믿기 위해서는 신전에 있는 신관을 만나 교리를 들어야 하지만 신관의 문턱은 평민이 넘기엔 너무나 높다. 그런 상황에서도 천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가끔씩 평민을 위하는 신관이 있기 때문이다. 천신 다음으로 많은 종교가 바로 민간신앙이다. 오래전부터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오래된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는다. 나무, 바위, 우물 등이 바로 그렇다. 세인트 지역에 정착한 바호프도 민간신앙을 믿는 사람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운다인을 목격하고 착한 물귀신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바호프는 자신이 숭배하려고 마음먹은 물귀신을 노리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전쟁터를 다녀온 사람은 물귀신의 정체를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불끄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못해 바호프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바호프 우리사이가 어떤 사인가. 저번에 자네가 다쳤을 때 누가 간병을 해주었나?" "그게 그러니까." 바호프는 가슴아프지만 어쩔수 없이 물귀신의 몸체나 다름없는 물동이의 물을 조금 퍼주었다. 한 사람에게 퍼주게 되니 다른 사람에게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바호프 도와주게. 우리 딸이 얼마전부터 독초를 먹어서 고생하는거 알지? 착한 물귀신이니까 그 물을 조금만 먹으면 우리 딸의 병을 치료해 줄걸세. 제발 조금만 주게." "네, 아주머니." 바호프는 마을 사람들의 간청에 조금씩 물귀신을 불러낸 물을 나눠주었다. 아무리 조금씩 퍼주어도 몰려든 사람이 많아서 결국 물동이에 가득했던 물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물을 받아가지 못한 사람이 물동이까지 가져가 결국 바호프는 그날밤 한참을 슬퍼했다. 바호프에게 물귀신을 받아간 사람들이 다음날 또다시 찾아왔다. 바호프가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어재친 순간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고서 할말을 잊었다. 모두들 가슴에 한아름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호프 고마워. 자네 덕분에 우리 딸이 깨끗히 나았네. 이거 얼마 안되지만 물에 타먹으면 맛있으니까 한 번 맛이라도 보라고 가져왔으니 받아두게." 어제 물을 받아간 아주머니가 딸이 물을 먹고 치료되었다며 귀한 꿀을 내게 건넸다. 세인트에서는 설탕이 흔하지 않아 꿀은 무척 귀하다. 그런데 그런 꿀을 머리보다 큰 단지에 가득 담아서 가져온 것이다. 바호프는 얼떨결에 꿀단지를 받았다. 바호프의 집에 방문한 사람들 모두가 비슷한 경우로 방문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을 간직해 두려다가 좋다는 말을 듣고서 모두 먹어버렸다. 아무리 멀쩡했던 사람이라도 그 물을 먹은후 몸에 있었던 종기나 가려움증 같은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 귀한 것을 나눠준 바호프에게 보답하러 온 것이다. '나눠주길 정말 잘한거야. 물귀신도 착한 일 많이 했으니까 복받을 거야.' 바호프는 착한 일을 많이한 물귀신이 없어진 사실이 아쉬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물귀신 덕분에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행복해 졌으니 말이다. 바호프는 사람들이 가져온 귀한 음식을 함께 나눠먹으며 이틀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즐거운 추억으로 삼았다. 운다인은 물의 중급정령이라 치료능력이 강하다. 물론 일반적인 치료사를 기준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중급 정령이 소환된 물에 치료능력이 함유되지는 않는다. 단지 소환자가 카인이라서 물에 상당히 많은 생명력의 기운이 남게 된 것 뿐이다. 운다인이 정령계로 복귀했지만 물에 남게된 생명력의 기운이 치료술을 발휘하게 되어 바호프가 나눠준 물을 먹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 세인트에 정착한 후퍼는 전쟁터에 참가한 경험을 가졌다는 이유로 추천을 받아 경비단 대장이 되었다. 세인트는 아직 영지화 되지 않은 상태라 치안을 유지하는 경비병은 물론이고 관리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저 개척자가 개간한 땅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황제가 파견한 관리 몇명이 있을 뿐이다. 개척된 지역은 영지화 되어도 몇년간은 세금을 걷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몇년후를 내다본 귀족들의 다툼으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비단 창설은 필수였다. 그렇다고 경비단이 다툼을 벌이는 귀족들과 대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안전을 위한 나름대로의 자구책이었다. 후퍼에겐 그가 경비단 대장직을 맡으면 그의 땅을 사람들이 대신 관리해 주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후퍼는 전쟁터에 참가한 경험이 있거나 용병생활을 했던 사람을 모집하여 어설프지만 경비단을 창설했다. 무기를 공급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개척자들은 위험성 때문에 집안에 무기 하나쯤은 장만해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후퍼대장 어떻게 생각해?" 경비단에서 후퍼를 보좌하는 로이한이 말했다. 얼마전 중급 정령사가 마을에 나타나 사람을 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란 것은 경비단에 속한 사람들 뿐이다. 정령사는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인트를 위해 도와줄까?" "제가 용병생활을 할 때 정령사에 대해서 들은게 있습니다. 그들은 엘프의 영향을 받아서 악당이라 할지라도 진실을 말한다고 들었습니다. 정령사가 되기 위해서는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더군요. 그러니 직접 만나보는게 이렇게 고민하는 것보다 좋은 것 같습니다" "자네 생각대로 만나러 가보도록 하지." 후퍼는 용병생활을 한 로이한 덕분에 정령사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후퍼가 전쟁영웅이라면 로이한은 산전수전을 겪은 용병이다. 둘이 있었기에 그동안 어설픈 경비단이 운영이라도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참! 그 정령사와 대화를 나눴던 바호프란 청년도 데려가겠습니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면 더욱 좋겠군." 후퍼는 로이한이 말한 바호프를 생각하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마전 바호프에게 경비단 사람이 찾아가 정령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가 정령을 물귀신이라 부르며 숭배시 한다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정령을 한 번 목격한 사람에게 정령사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 쉬울리 없다. 정령에 문외한 사람이 정령사에 대한 설명을 듣게되면 정령과 귀신을 동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경비단 대장 후퍼와 후퍼를 보좌하는 로이한은 귀족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정령사를 내세워 세인트를 보호하고 싶었다. 개척자들 모두가 신분이 미천하니 억울한 일을 당하는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수차례 귀족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평민신분의 개척자들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귀족이 세인트에 들어와 사람을 죽여도 쫓아내는게 고작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4 회] 13. 세인트 나는 정령을 선보인 다음날은 물론이고 이튿날까지 야영지에 그대로 머물러야만 했다. 나에 대해서 수많은 소문이 퍼지리라 생각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세인트 사람들이 잘못 오인하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애버른 가족이 정착할 장소를 찾는데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카인오빠 내 친구 실프를 돌려줘." 실비아가 내 팔을 잡고서 마구 흔들었다. 야영을 하고 있지만 일행들 모두 할일이 있었다. 애버른과 레이얀은 정착을 위해 가져온 가축을 돌보고, 세실리아는 세렌에게 생활에 필요한 기본상식을 배우며 소피아는 천신을 위해 기도한다. 유일하게 나만 아무일도 하지를 않는데 그래서 실비아는 내게 달라붙어서 지낸다. 작은 입으로 무슨 할말이 그리도 많은지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때까지 쉬지도 않고 말한다. 나는 실비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소환해 주었다. 실비아는 어려서 그런지 무서워하지도 않고 실프를 친구삼아 재밌게 놀았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실프가 사라지면 내게 쪼르르 달려와 친구를 내놓으라며 성화를 부른다. "빨리 돌려달라니까. 실프 돌려줘." "알았어. 돌려줄께." 실비아의 성화에 실프를 소환해 주었다. '실비아와 계속 놀아주렴.' 소환한 실프에게 실비아와 놀아주도록 부탁했다. 실프를 실비아에게 소환시켜주면 많은 생명력을 건네주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실프는 이성이 없어서 생명력이 다할 때까지 실비아와 놀아주다가 정령계로 돌아간다. "헤헤헤" 실프가 실비아의 머리를 바람으로 헝클어뜨리자 실비아의 웃음을 터뜨렸다. 하급정령중에 실프가 가장 장난기가 많아서 실비아가 심심할 일은 없었다. '누군가 가까이에서 실프를 보게되면 안될텐데.' 실프는 바람으로 실체화 된 상태이다. 다른 정령들은 자신의 속성으로 실체화되어 형태가 뚜렷하지만 바람의 정령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실체화 시켜도 크게 눈에띄지 않는다. 실비아에게 실프를 소환시켜 준 이유도 멀리서 보아서는 절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프야. 빨리 따라와!" 실비아는 실프에게 따라오라고 계속 손짓했다. 실프가 바람으로 형체화 되었지만 가까이서 보면 형태가 보인다. 그리고 정령사가 아니더라도 실프가 근처에 있으면 바람이 세기로 위치를 알 수 있다. 실비아는 실프와 함께 마차주변을 빙글빙글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잖아.' 나는 마을쪽에서 누군가 이곳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처음보는 사람들이었다. 구면인 사람은 이틀전에 불타는 집에서 물동이를 날랐던 바호프라는 사람 뿐이었다. 나는 여자들에게 모두 마차안에 있으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카인입니다." 나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무슨 용건인지 몰라도 다가온 사람들 모두가 긴장한 얼굴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경비단 대장직을 맡고있는 후퍼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로이한입니다." 인사를 마친 후퍼와 로이한은 우리의 야영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나는 혹시라도 이들이 우리가 야영한 장소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야영한 장소는 누군가 개간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바호프씨." "저도 반가워요." 나는 후퍼와 로이한에게서 약간 떨어져 있는 바호프에게도 말을 걸었다. 후퍼와 로이한과의 인사가 끝냈는데도 그가 뒤에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며칠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굳어진 표정과 어색한 말투까지 말이다. 단지 지금은 말을 더듬지 않은 점이 다를 뿐이다. "실례지만 일행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두 일행입니다. 가축을 데리고 개척자로 나선 가족과 개척지역을 여행하기 위한 저의 일행이지요. 마음이 맞아서 동료삼아서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경비단 대장 후퍼는 우리 일행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별달리 중요한 사실도 아니라서 모두 대답해 주었다. 어느 마을에 들어서든지 외부인의 경우는 이와같은 조사를 받는게 보통이다. '무슨일로 그러는거지?' 후퍼와 로이한의 표정을 보아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알수가 없었다. "아참! 이틀전의 일은 고마웠습니다. 불타는 집의 불을 꺼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안에 있던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서 겨우 살아났습니다. 카인씨 덕분입니다." "별말씀을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후퍼는 처음 표정과 다르게 웃음을 띄며 친근하게 말했다. 그는 이틀전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세인트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건들을 말해주었다. 귀족들이 세인트 정착민들을 수없이 괴롭히는 이야기를 말이다. "계속 당하고만 있는 형편입니다." "상당히 난감하겠군요." 후퍼는 한 숨을 푹푹 내쉬며 세인트의 어려운 상황을 끊임없이 털어놓았다. 로이한도 중간중간 껴들어 후퍼의 이야기를 도왔다. 바호프는 후퍼의 말을 들으면서 흥분하여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후퍼가 이야기하는 사건들중에는 정착민인 바호프가 모르는 사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인데 저희좀 도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후퍼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귀족들에게 당한 사건들을 설명한 이유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간단한 일이라면 세인트 정착민들을 돕겠지만 한 사람이 해결하기엔 도저히 불가능한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저희에겐 귀족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는 신분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가 알기로 중급 정령사는 귀족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대표해서 귀족들에게 항의를 해주시거나 저번처럼 도움을 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여행중일 뿐입니다. 이곳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일년 아니 한 달만이라도 좋으니 도와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후퍼는 내게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다. 정착민들 모두가 평민이하의 신분이라 귀족들이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후퍼와 로이한은 나를 통해서 최소한 세인트 정착민들의 의사를 귀족들에게 확실히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카인씨가 저희 세인트를 위해 도움을 주신다면 함께 동행한 저분들이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 귀족들의 횡포로 세인트 이외의 지역은 무법지대입니다. 그나마 세인트가 가장 안전한 곳이지요." 후퍼의 요청에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옆에있던 로이한이 내가 도움을 준다면 애버른 가족이 세인트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언뜻 들으면 애버른 가족의 안전을 배려하는 말이지만 객관적으로 따지면 내가 세인트를 위해 일하면 도와준다는 조건을 붙인 것이다. '단란한 가족을 불행으로 내몰수는 없지.'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 애버른 가족을 위해 잠시동안 세인트 정착민들을 돕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애버른 가족이 이곳에서 새로운 개척지역으로 떠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면 결국 한 달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한 달을 보내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곳은 애버른 가족에게도 좋을 것이고 우리에게도 계속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한 달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이후에는 떠날테니 그렇게 아세요." "감사합니다. 카인씨." "한 가족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씀 잊지마세요." 후퍼와 로이한 그리고 바호프까지 내 대답을 듣고 기뻐했다. 후퍼 일행은 내일 찾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모두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 여자들이 마차안에서 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나는 가축에게 먹일 풀을 구해오느라 후퍼 일행을 마나지 못한 애버른이 돌아오고 나서야 결정한 사실을 모두에게 말했다. "카인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정말 고마워." "고마워요." 애버른과 레이얀이 사실을 전해듣고 내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들은 개척자로 나섰지만 파도루 귀족가문이 차지한 카르마를 지나면서 개척지역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어 있었다. 개척지역마다 귀족들의 횡포가 심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족들의 횡포가 가장 적은 세인트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말씀을요. 실비아를 위해서에요. 그리고 저희도 여행에 지쳐있었거든요." 나는 애버른과 레이얀이 부담갖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애버른은 세인트에 오기까지도 많은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개척자로서 제대로 정착할 수 있는지 아니면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지 등의 많은 걱정거리를 항상 생각해왔다. '애버른, 레이얀 그리고 실비아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애버른 가족이 세인트에서 정착해 행복하게 살길 바랬다. 문득 세실리아가 애버른 가족과 같은 삶을 원하는 것이 생각났다. 성녀로서의 삶을 버린 이유도 애버른 가족과 같은 모습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애버른 가족이 무척이나 부러울 것이다. '가족들은 잘 있을까?' 애버른 가족을 생각하면서 크라이 숲에서 생활하고 있을 가족이 생각났다. 하지만 애타게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자살했을 때나 엔트의 도움으로 다시 새생명을 얻고 나타났을 때에도 가족들은 그저 놀라며 기뻐한 것이 전부였다. 조화로움을 따르는 엘프의 영향 때문이다. 우리는 늦은밤까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애버른 가족이 세인트에 정착하게 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덩달아서 나는 물론이고 세실리아와 소피아도 좋아했다. 노예 세렌도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아침이 되자 후퍼가 세인트 경비단을 이끌고 나타났다. 후퍼는 애버른 가족이 정착할 수 있는 개간된 땅을 선물했다. 후퍼의 말로는 모든 개척자들이 땅에 욕심이 많은 편이라서 필요 이상을 소유한 사람에게서 얻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무상으로 개간된 땅을 소유권까지 넘겨주다니 파격적이었다. 후퍼가 애버른 가족에게 넘겨준 땅은 세인트에서 동쪽 끝에 위치한 곳이었다. 땅의 크기는 세 가족이 먹고 살기에는 과분했다. 하지만 의욕이 넘치고 희망찬 애버른이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야영지를 옮겼다. "외곽지이긴 하지만 작은 돌맹이도 모두 골라내어 완벽하게 개간된 땅입니다. 당장 곡식을 심어도 문제없을 땅입니다. 그리고 집은 며칠후에 짓게 됩니다. 요즘은 이틀전에 불이난 가족의 집을 새로 짓고 있어서요." "아닙니다. 집은 제 두 손으로 직접 지을 생각입니다." 애버른은 후퍼의 과한 도움을 사양했다. 집짓는게 혼자서 얼마나 어려운지 알면서도 더이상 도움받기가 미안했던 것이다. 앞으로 평생을 살게될 집이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짓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럼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후퍼는 애버른이 극구 도움을 사양하자 한 발 물러섰다. 모든 개척자들이 서로서로 도와가며 지내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람은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신세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런 경우에는 도움을 주는 쪽이 되려 상대방을 괴롭힌 결과를 낳기도 한다. "카인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달 동안은 이분들과 함께 지낼 생각입니다. 약속한대로 당분간은 세인트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내일 말하도록 하지요."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후퍼는 경비단을 이끌고 사라졌다. 경비단이긴 하지만 모두들 통일된 복장을 입지도 않고 있었다. 이곳은 생필품에 속하는 옷감조차도 구하기 어려운 곳이라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상인이 세인트를 방문해도 사람들에게 돈이 될만한게 있을리 없었다. 수년 동안을 땅만 개간하며 생활했기 때문이다. "애버른씨 혹시 흙집에서 살아보실 생각 없나요?" "흙집이요?" "나무로 만든 집보다 튼튼하고 불이나도 타지 않으니까 안전합니다. 흙으로 집이 만들어지면 더울 때는 시원하고 추울 때는 따뜻한 효과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짓는데 힘들지도 않고 하루아침이면 완성됩니다." 나는 애버른 가족을 도와주기 위해 흙집을 지어주기로 결정했다. 땅의 정령을 이용해 만들면 간단히 해결된다. 내겐 힘들지도 않은 일이다. 흙집이 하루아침에 지어지면 세인트 사람들이 놀라겠지만 운다인까지 보여준 상황이니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집이 하루만에요?" "오늘 저녁식사 후에 보여드리죠." 애버른과 레이얀은 내 말을 듣고서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해결하고 일행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굳이 저녁을 선택한 것은 흙집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세인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날이 밝은 아침이 되어서야 흙집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나는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아넨에게 애버른과 레이얀이 꿈꾸던 집의 모습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집이 생겨나는 모습은 마법의 한 장면 같았다. 땅속에서 집이 땅위로 솟아오른 모습이 장관이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도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땅속에서 집이 솟아나다니!" "어쩜 이런일이." 애버른과 레이얀이 흙집이 솟아나는 모습을 감상했다. 사실 흙이 집모양을 아래부터 구성하는 모습이지만 땅속에서 집이 솟아나는 것으로 착각될만한 광경이었다. 눈앞에 하나의 집이 생겨나는데 걸린 시간은 채 1분이 안되었다. "아빠 집이다. 땅에서 나온 우리 집이야." 실비아는 흙집이 생겨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상당히 좋아했다. 실비아에겐 집이 생겼다는 것보다 집이 생겨나는 모습을 보는게 더 즐거웠을 것이다. 애버른과 레이얀은 나를 괴물보듯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말했다. 흙집은 애버른이 말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출입문과 창문을 나무로 만들어야 완성된다는 점이다. 물론 귀족이나 사용하는 유리를 구할수는 없다. 나무로 창문을 만들어 밤에는 닫고 낮에는 열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애버른 가족을 위한 흙집과 같은 모양으로 두 채를 더 지었다. 우리 일행이 머물기 위한 장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 달을 머물면서 세인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저 귀족들에게 찾아가 세인트 사람들의 의견을 전해주거나 세인트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면 될 것이다. 여행일정이 한 달이나 길어졌지만 애초 계획과 변한 것은 없다. 어차피 애버른 가족이 다른 개척지역으로 이동했으면 정착을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그만큼의 기간동안 함께했을 것이다. 다음날 후퍼가 찾아와 한바탕 소동을 피웠다. 없었던 집이 떡하니 세 채나 생겨났기 때문이다. 후퍼에게 흙집을 정령술로 만들었다고 설명하자 쉽게 넘어갔다. 그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정령사에 대해 알려진게 없다.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인력인데도 불구하고 정령사에 대해서는 알고있는 사람이 적다. 그만큼 희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세인트를 돕게된 첫날은 후퍼에게서 경비단이 하는 일의 설명을 들었다. 경비단은 세인트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을 감시한다. 그동안 귀족들이 개척자로 변장한 사람을 파견해 세인트 사람을 괴롭혀왔다. 회유, 협박 그리고 무력동원의 순으로 말이다. 경비단이 꼭 외부적으로 생겨난 사건만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개척자로 나섰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웬만한 사건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억센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목숨이 위험한 개척자로 나섰겠는가. 억센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서 살다보니 작은 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하는데 그런 사건까지 경비단이 처리한다. "제가 얼마나 도와드릴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후퍼에게서 설명을 듣고서 말했다. 약속을 했으니 도와야하는게 당연하다. 물론 중급 정령사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기대하겠습니다. 카인씨." "부탁해요. 카인씨." 후퍼와 로이한이 힘차게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대원들도 환영해 주었다. 후퍼는 특별한 일이 없을경우 집에서 지내라고 말했다. 도움을 받더라도 정령사를 경비대원처럼 데리고 다닐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도 마법사와 정령사는 편히 놀고먹는다. 그러다가 필요한 때에 불러서 이용하면 또다시 무한정 휴식을 취하도록 관리해준다. 그만큼 고급인력이라 항상 귀하게 취급한다. 경비단들 모두가 전쟁터 경험이 있거나 용병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건이 생기지 않으면 도움을 줄 필요도 없이 집에서 시간만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인트에 사건사고가 없었으면 하고 바랬다. 앞으로 마법수식을 연습하거나 실비아와 놀아주며 한 달이란 기간이 빨리 지나가길 기다렸다. 애버른과 레이얀은 개간한 땅에 곡식을 심느랴 가축을 돌보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처음 편하게 지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세인트는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세인트 경비단을 돕는 날부터 매일같이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것이다. 귀족들이 파견한 사람이 세인트 정착민을 협박하거나 집을 불태우는 경우는 작은 일에 속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미리 그 사실을 알아채고 후퍼에게 대처하도록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부터 귀족들의 동향이 갑자기 바뀌었다. 이제는 대놓고 병사들을 파견해 세인트로 들어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나는 정령술로 그들을 혼내주어 쫓아버렸다. 그후로 몇차례 사건이 있었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한 귀족들의 노력은 어느날부터 갑자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무력을 동원하던 방법에 비하면 부드러운 대처였다. 회유와 협박을 사용하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무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땅의 소유권을 넘기지 않는 정착민을 찾아가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설프게 창설된 경비단에게 자주 발각되어 쫓겨난 경우가 많았다. 귀족들의 괴롭힘에 세인트 정착민들이 대처할 뾰족한 방법은 그저 쫓아내는게 전부였다. 귀족이 보낸 사람들을 함부로 죽일수도 없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계속해서 세인트 정착민들에게서 땅의 소유권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괴롭혔다. 하지만 정령사가 나타나면서 파견한 병사들이 경비단에게 쉽게 발각되기 시작했다. 세인트 정착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는 일도 계속해서 실패했다. 대놓고 무력을 동원하지 못하는 귀족들에게는 큰 문제거리였다. "루바인 가주는 입이 있으면 해명하시요!" 라다르 가문의 가주 리온은 파도루 가문의 가주 루바인을 향해 소리쳤다.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서 루바인의 의견에 따랐건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무력을 동원하자던 리온으로서는 결과가 좋지가 않으니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세인트에 정령사가 있을줄 누가 알았겠소?"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거요? 정령사 정도야 그냥 죽이버리면 될거 아니요? 처음부터 내 말대로 병사들을 동원해서 깡그리 쓸어버리면 되었을거 아니요. 우리 세 가문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소." "미쳤소? 세인트 정착민들이 몇명인지 생각이나 해봤소? 그리고 그들을 모두 죽이면 개척지역을 차지하려고 발악중인 다른 가문에서 뭐라고 할지 생각이나 하는거요?" 리온과 루바인은 험한 말싸움을 하였다. 세인트를 조금씩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획은 한 명의 정령사가 등장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협박하하기 위해 세인트에 보낸 사람들이 모두다 경비단에게 발각되니 제대로 된 협박도 못했던 것이다. 귀족들도 그것이 정령사의 도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규병사들을 보내서 죽여버립시다. 죽이면 그만 아니요." 조용히 앉아있던 루아카스 가문의 가주 제노가 말했다. 사실 귀족들이 지금까지 세인트 정착민을 괴롭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은 허약한 사병이었다. 그래서 허약한 세인트 경비단에게 발각되어 쫓겨났던 것이다. "당신도 리온 가주와 같이 미쳤소?" "일단 정령사란 놈을 죽이고 봅시다. 어차피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세인트를 차지하는게 어려울지도 모르는 일이요. 다른 귀족가문들이 욕심내고 있던 개척지역을 거의 손에 넣은상태니 세인트에 언제 눈을 돌릴지 모르는 일이요." 루바인의 반문에 제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리온도 제노의 생각에 동의했다. 세인트를 제외하고 다른 개척지역에서는 귀족들의 다툼이 거의 마무리 된 것이다. 이제는 다른 귀족가문들도 세인트를 노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세 가문들은 빨리 서둘러야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정령사가 제국에서 보호되는 존재임을 알았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정령사는 마법사와는 다르게 보호하는 길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바인도 무력을 동원하는 방법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무척이나 불만스러웠다. 아무래도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력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인트 정착민을 죽이면 땅의 소유권은 황제가 차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착민들을 몰살시킬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협박해서 소유권을 넘겨받는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보통 땅의 소유권은 영주의 권한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영지에서 귀족의 권위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개척지역은 황제가 파견한 관리들이 땅의 소유권한을 취급하고 있어서 정착민을 무작정 죽일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귀족들은 오래전부터 황제가 추진하는 제국의 동지역 개척에 반대한 입장이라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입장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5 회] 13. 세인트 세인트 경비단의 일은 요즘들어 무척 바쁘다. 그만큼 세인트에서의 사건이 많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귀족들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건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세인트는 무척 평화로웠다. 그 이유는 내가 도움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이 세인트 전역을 감시하고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면 나는 그 소식을 후퍼에게 알리고, 후퍼는 경비단을 이끌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이 아무리 사병을 보내도 사람들을 협박하기도 전에 발각되어 쫓겨나버리고 있었다. 후퍼가 나를 예언자라도 되는양 착각해서 바람의 정령을 이용한 것이라고 해명해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세인트에서 알게모르게 나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어 흘러다녔다. 특히 바호프처럼 민간신앙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그들에게 정령사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낯선 존재였던 것이다. '앞으로 10일만 더 지내면 되는구나. 내가 떠나면 세인트는 어떻게 될까?' 세인트에 애버른 가족과 머문지 20일이 지나자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애버른 가족도 세인트 사람들처럼 귀족의 횡포를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인트를 노리는 귀족들의 횡포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세인트를 노리는 수많은 귀족들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은 애버른 가족의 행복도 계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인트 사람들이 귀족들에게 가족을 잃거나 죽은 경우가 무척 많았다. 애버른 가족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앞날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애버른과 레이얀은 정말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쉬지않고 일하는 것이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땅을 갖게 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더구나 세인트는 아직도 영지로 선포되지 않은 지역이라 세금이 없어서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카인씨 후퍼 대장께서 찾으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경비대원의 말을 듣고서 마법수식을 연습하던 종이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후퍼는 나를 위해서 많은 신경을 써주고 있다. 경비대원 두 명을 연락책으로 삼아서 항상 나를 따라다니게 한다. 세인트에 문제가 발생하면 정령을 통해서 내가 먼저 알게되고 그것을 후퍼에게 알리기 위한 연락책인 것이다. '무슨일로 찾는거지?' 후퍼는 요즘들어 점점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아졌다. 솔직한 마음으로 내가 세인트를 떠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다. 언제인지 몰라도 귀족들의 횡포를 경비단이 막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는 귀족들이 장난삼아 협박한 것에 불과해 보이기 때문이다. 세인트 사람들이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버텨내고 있는 것은 귀족들이 그들의 땅을 노리고 있어서 함부로 죽일 수 없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지 본보기로 소수를 협박하고 죽였을 따름이다. 하지만 얼마나 계속 그럴지 알 수가 없었다. 귀족들은 내일 당장이라도 수백여명의 병사들을 동원해 세인트 사람들 전체를 협박할 수도 있었다. 단지 황제가 파견한 관리 때문에 예의상 참아준 것 뿐이다. 세인트 중심에 있는 경비단 건물로 들어서자 경비대원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동안 나의 덕으로 귀족들의 횡포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서 후퍼가 머무는 방으로 걸어갔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후퍼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카인씨 여기 앉으세요." 후퍼가 권한 자리 앞에는 병에 든 술과 음식이 가득했다. 병에 든 술이라니 정말 대단한 것을 준비한 것이다. 상인들이 세인트에 술을 가져왔을리 만무하니 분명 개척할 당시에 가져왔던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음식은 고기요리로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사냥꾼이 없는 세인트에서 구하기 어려운 재료였다. '정말 맛있겠네.' 나는 육류요리라면 정말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정령사 가족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채식만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운명을 알게되어 육류도 먹었지만 그 맛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이게 다 무엇인가요?" "카인씨를 위한 것입니다. 그동안 도와준 은혜에 보답은 안되겠지만 작은 성의니 받아주세요. 일행분들을 위한 것도 준비했으니 돌아가실 때 가져가시면 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맛있겠네요." 자리에 앉아서 차려진 음식을 감상하며 혀를 내둘렀다. 사실 수도 말린에서 생활할 때는 항상 고급 음식만을 먹었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그보다 약간 떨어지는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음식의 질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평민이 먹는 음식에 비하면 고급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음식은 수도 말린에서 생활할 때가 그리울 정도로 푸짐했다. 후퍼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권하며 자신도 먹었다. 그도 세인트를 위해 정말 밤낮으로 고생한 사람이다. 후퍼는 술병에서 마개를 떼어내고 두 개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어려서부터 술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술인지 알길이 없었다. 술을 따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향 향기가 풍겨왔다. "개척할 때 누군가 가져온 술이지요. 이런 술을 집안에 몰래 숨겨두고 고향이 생각나면 마시는 사람도 많습니다. 누군가 가져다 준 것인데 최소한 6년은 지났을 겁니다." "대단하네요.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니요." 나는 술잔에 담긴 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술병을 누가 내놓았는지 모르지만 정말로 경비단에게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귀한 것을 먹으라고 주었을 이유가 없다. "한 잔만 마시도록 하지요." "네? 아참! 사실은 제가 술을 먹어본적이 별로 없어서 먹으면 안될 것 같은데요." "이 술을 내놓은 분의 성의를 보아서 한 잔만 마셔보세요." 후퍼는 웃는 얼굴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는 목숨을 걸고서 경비단 대장직을 맡고 있을 것이다. 귀족들이 보낸 사람들을 쫓아내면 언젠가 보복을 당한다. 지금이야 땅 문제로 귀족이 참고있는 경우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것은 경비대원들도 마찬가지이다. "후르륵" 나는 술을 내놓은 세인트 사람의 성의를 보아서 단 번에 먹었다. 개척할 때 가져온 술을 내놓은 성의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술의 나이를 무시하고 마셔버렸다. 보통 오래된 술일수록 적게 먹으며 음미하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나는 무턱대로 술잔에 있는 술을 한 모금에 마신 것이다. "세상에 그걸 한 번에 마시면 어떻해요? 조금씩 홀짝홀짝 음미하면서 먹어야 되는건데." "그런가요?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술을 잘못 먹은 것 같았다. 귀족이 아니고서야 오래 숙성된 술을 먹는 예절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평민들이 먹는 모습이 생각나 물마시듯 들이킨 것 뿐이다. "카인씨 괜찮아요?" 후퍼가 내 이마에 손을 올려보고 말했다. 몸에서 열이 나면서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내가 술 한 잔에 이렇게 될줄은 몰랐다. 오래 숙성된 술이 사람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들다니 말이다. 눈앞에 있는 후퍼의 얼굴이 하나에서 둘로 겹쳐서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에요." "카인씨가 술이 약한줄은 몰랐어요. 이를 어쩌나." 후퍼가 한 잔의 술에 취한 나를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반대로 나또한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화가났다.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의 도움을 받으면 멀쩡해 지겠지만 너무 낯설은 느낌이라 그대로 방치했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따라주질 않고 있었다. '내가 술취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나는 술을 마신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정령사가 피하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정신을 어지럽히는 것들이다. 당연히 어려서부터 술을 먹어본 경험이 없다. 결국 지금 술을 처음 먹어본 것이다. '술을 먹으면 원래 기분이 이런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후퍼는 내 몸을 흔들며 정신차리게 만들려고 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후퍼가 나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리쉬었다. 정신은 말짱한데 약간 이상한 기분이 느껴지고 있었다. "술먹고 기분이 좋아지면 좀더 도와달라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었는데 한 잔에 떡이 되다니." 두 사람으로 보이는 후퍼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나는 후퍼가 술과 음식을 준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술을 먹이고 기분이 좋아지면 세인트를 위해 좀더 도와달라고 부탁하려던 것이다. '겨우 그거였나.'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후퍼가 중얼거린 말이 똑똑하게 들렸다. 후퍼로서는 세인트를 위해서 나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 하나가 도와준다고 해서 세인트 사람들이 귀족들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세인트 사람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처음 먹어보는 술인데 정말 끔찍하군.' 오래 숙성된 술이라 그런지 정말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나는 이곳이 경비단 대장이 일하는 곳을 망각하고 잠깐 자다가 일어나기로 했다. 두 사람으로 겹쳐서 보이던 후퍼도 포기했는지 나를 편안히 잘 수 있도록 눕혀주었다. ------ 네 여자들이 저녁식사를 준비하느라 한참 바쁘게 움직였다. 세실리아, 소피아, 세렌 그리고 레이얀까지 말이다. 물론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주로 레이얀과 세렌이 식사를 준비할 뿐이다. "소피아 난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고있는 실비아가 너무 부러워. 어릴때부터 신전에서 교육을 받으며 지낸 생활이 너무나 억울해." 세실리아가 뛰어놀고 있는 실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비아는 언제나 해맑은 웃음으로 일행을 기쁘게 한다. 한 동안 실프와 재미있게 놀던 실비아가 세인트에 살고있는 또래의 친구들을 사귀더니 실프를 더이상 찾지 않고 있었다. "세실리아님 앞으로 행복하게 사시면 되잖아요. 카인님이 도와주실거에요." "고마워 소피아. 그러데 카인님은 식사가 거의 준비되어가는데 어디가셨지?" "경비단을 도와주러 갔나보네요." 소피아는 항상 집에만 있던 카인이 없자 이상했다. 겉으로 보기엔 카인은 하는 일이 정말 없었다. 그저 가만히 마법수식을 연습하다가 정령에게 세인트에 발생한 문제를 알게되면 그것을 대기하고 있던 경비대원에게 알려주는게 전부이다. 당연히 경비대원은 재빨리 그 소식을 후퍼에게 알려주어 대처하도록 만든다. 저녁식사가 준비되자 카인을 제외하고 모두 모였다. 모두들 카인이 없어서 음식이 식더라도 잠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후퍼 대장님께서 카인씨가 늦을 거라고 했습니다." 경비대원이 카인을 기다리던 일행에게 카인의 소식을 알려웠다. 평소에 카인 때문에 경비대원이 집을 항상 드나들고 있어서 낯설지가 않았다. 모두들 카인과 밀접한 관게를 가지고 있어서 그가 없자 무엇인가 빠진듯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애버른 가족도 카인의 도움을 받고서 정착할 수 있게되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엇인가 빚진 기분인 것이다. 식사를 마치자 일행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재미있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카인이 없다보니 그를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많이 하게되었다. 애버른 가족이 카인의 신기함을 말하면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궁금중을 풀어준다. 덧붙여 여행하며 격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물론 세실리아와 소피아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말하지 않았다. 애버른 가족은 육체적 노동을 많이하기 때문에 일찍 잠들었다. 하지만 세렌은 늦은 밤이 되어도 잘수가 없었다. 주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려야만 했다. 노예인 세렌은 노예교육을 받은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공격!" "우아아아아" 세렌은 밖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허둥대지 않았다. 노예는 주인과 관련된 일이 아니고서는 흥분은 금물(禁物)이라 교육받았다. "파이어볼" "퍼펑! 퍼퍼펑!" 잠시후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렌은 연기로 인해 기침을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들려오는 소리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 죽여라."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세렌에겐 그 소리가 바로 문밖에서 들려왔다. 안에 있을수도 그렇다고 나갈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세렌의 머리속에 카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말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사비나도 떠올랐다. 지난 일들이 주마둥처럼 지나가는데 대부분의 기억이 카인과 관련되어 있었다. 세렌은 뜨거운 기운을 참을수가 없어서 구석으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어릴 때부터 노예교육을 받거나 할 때 구석에 있으면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때의 습성인지 무의식적으로 구석에 웅크리고 고통을 참아냈다. 애버른 가족은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마법이 흙집에 맞아 불이붙었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밖으로 나왔는데 곧바로 병사들의 검에 찔리고 베어졌다. 흙집이 불에 타지는 않지만 출입문이나 창문은 나무나 짚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집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애버른의 가슴에는 실비아가 안겨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찔리고 베어졌다. 레이얀도 비명을 지를새도 없이 부녀의 뒤를 따랐다. 흙집에 불이 붙어서 열기가 느껴지고 연기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하자 생각할틈도 없이 나오고는 곧바로 당한 것이다. 너무 짧은 시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애버른 가족을 죽인 병사들은 옆에 타고있는 두 채의 흙집 출입구에서도 사람이 뛰쳐나오길 기다렸다. 세 채의 흙집에 모두 불이 붙었기 때문에 안에 있으면 그대로 죽을 것이니 분명 나오리라 생각했다. 세 채의 흙집에 불붙은 이유는 마법사가 파이어볼 마법을 날렸기 때문이다. "왜 안나오지?" 세 채의 흙집에 불을낸 마법사가 말했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이정도 불이라면 집안에 있어도 살아나기 힘들테니 죽었을거야. 모두 돌아가자!" 마법사는 병사의 말을 듣고서야 사람들이 몰려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가자고 명령했다. 오늘의 목표는 이곳에 살고있는 정령사인데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마법부터 사용한 것이라 무척 혼란스러웠다. 만약 집안에 정령사가 자고 있었다면 불에 타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법사는 중대한 실수를 했다. 사실 세 채의 집은 흙집인데 밤이라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집에 불이났다고 오판한 것은 그가 사용한 파이어볼 마법과 출입문 그리고 창문이 타면서 만든 착각이었다. 자세히 살폈으면 눈치챘겠지만 밤중이고 혼란스러워서 무심결에 넘어간 것이다. "소피아 살려줘. 뜨거워 죽겠어." 세실리아가 집안에서 뜨거운 기운에 화상을 입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소피아가 있지만 그녀의 신력은 세실리아에게 거부반응을 일으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소피아는 세실리아를 위해서 신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끔찍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저히 나갈수가 없었다. 출입문은 계속 불이 붙어서 타고 있었다. 더이상 지체하면 질식당해 죽을 것 같았다. "꺄아악! 너무 뜨거워! 소피아!" 세실리아는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집안에 계속해서 연기가 채워졌고 세실리아는 그렇게 고통스러움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했다. 소피아는 자신이 세실리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슬펐다. 만약 출입문에 불붙지 않았다면 세실리아 죽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세실리아님. 흑흑흑" 소피아는 세실리아를 바라보며 계속 울었다. 만지고 싶어도 세실리아 전신에 화상을 입은 상태라 만질수도 없었다. 자신은 신력이 있어서 멀쩡한데 세실리아는 신력이 없어서 죽은 것이다. '카인님의 정령이 왜 도와주지 않은거죠? 카인님은 어디 계세요?" 소피아는 카인의 정령이 위험할 때 왜 도움을 주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웠다. 여행을 하면서 어떤 몬스터가 나타나더라도 정령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벗어난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 불속에서 타죽다니 이처럼 끔찍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잠시후 불타는 출입문을 부셔버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흙집이라 출입문과 창문을 제외한 부분에는 불이 발생할 이유가 없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죽은 세실리아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더니 소피아를 밖으로 인도했다. 세렌도 흙집에서 무사히 구출되었다. 하지만 소피아처럼 멀쩡하진 않았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제대로 말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나마 구석에서 웅크린 자세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은 애버른 가족이었다. 세인트 사람들은 애버른 가족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살인극을 벌인 범인이 누군지 모를 사람이 없었다. 귀족들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잔인한 방법을 이용해 사람을 죽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귀족들 행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6 회] 13. 세인트 나는 누군가 내 몸을 흔드는 것을 느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은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카인씨 일어나세요! 큰일났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정신을 차리자 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소리치는 사람은 경비대원이었다. "애버른씨의 집에 불이났어요. 빨리 정신차리세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가 아파왔지만 그것을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나는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후퍼와 술을 먹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했다. '술기운을 몰아냈습니다.' '고마워.' 엘레스트라의 덕분으로 술기운에서 벗어나자 곧바로 경비대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갑자기 불이라니 그럴리 없었다. 세인트에 살고있는 누군가의 집에 불이났다면 내가 먼저 소식을 알고 있어야 했다. '실레스틴 어떻게 된거야?' '주인님께서 살고있는 집에 불이났습니다. 누군가가 마법으로 불을 지르고 주인님의 일행을 죽이고 달아났습니다.' '사람이 죽었어? 왜 미리 알려주지 않은거야? 왜! 왜! 왜!' 나는 실레스틴이 알려준 충격적인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집이 불타고 사람이 죽었다니 절대 그럴리 없었다. 누가 죽었는지 몰라도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더욱 화가나는 것은 실레스틴이 미리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주인님께서 의식을 잃고 계셨습니다. 주인님께서 의식이 없으시면 최상급 정령인 저로서도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깨우면 되었잖아. 왜 그러지 않은거야?' '정령은 소환자에게 위험이 쳐했을 때만 스스로의 의지로 소환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 소환될 수 없습니다.' 실레스틴은 내가 의식이 없어서 그동안 하던 세인트 전역을 감시하지 못했다. 내가 자고있는 동안에도 활동이 가능한 실레스틴이었는데 술에 취하자 활동하지 못한 것이다. '정신력이 약해져서 그랬나?' 나는 술 때문에 정신력이 약해져 이런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정령사에게 이런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지 정말 몰랐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 가족들에게 얼핏 들어본 사실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6년 이상이나 숙성된 술을 마시다니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 '엘레스트라, 실레스틴, 샐레아나, 노아스 모두 도와줘.' 정말 오랜만에 물질계 4대 최상급 정령을 모두 소환하였다. 실레스틴의 말에 의하면 누군가 죽었다고 들었다. 분명히 아직도 목숨에 위협을 받는 일행이 있을 것이다. 옆을 바라보니 경비대원은 내가 정신을 차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을 제외한 나머지 정령들에게 일행 모두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곧바로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내 몸은 창문밖에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실레스틴의 도움을 받아 집이있는 동쪽을 향해서 날아갔다. 뒤에서 경비대원이 놀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행이 걱정되어 무슨소리인지 신경쓰지 않았다. '술을 먹는게 아닌데. 모두 나 때문이야.' 집을 향해 날아가면서 스스로의 실수가 용서되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어서 짧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간이 한 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엘레스트라는 정령이라 정령계를 통해서 공간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부탁한 순간 곧바로 불을 꺼뜨린 것이다. 내가 날아서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흩어졌다. 놀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이 가려는 순간에 끔찍한 참상을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애버른씨, 레이얀씨, 실비아" 나는 소리쳐 외치면서 땅바닥에 누워있는 애버른 가족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검으로 베이고 찔린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귀엽고 깜찍했던 실비아의 몸에도 마찬가지였다. 실비아는 아버지인 애버른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레이얀은 애버른보다 나중에 죽었는지 약간 떨어진 장소에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애버른 가족이 누워있는 땅에는 그들이 흘린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그 참상을 보고 너무도 처참하여 가까이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나의 부주의로 생겨났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흑흑흑. 카인님 바보같이 왜 늦으셨어요?" 소피아가 어디선가 나타나 울면서 다가오며 하소연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모습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사실 20일이나 되는 기간을 이곳에서 지냈지만 내가 알고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버른 가족과 친할 뿐이지 세실리아나 소피아와는 거의 모르고 지낸 것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카인님께서 세실리아님을 지켜주세요." 소피아는 세실리아와 머물던 집안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전신에 화상을 입은 세실리아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얼굴을 비롯해 온몸에 기포가 나타나 있어서 애버른 가족의 처참한 모습보다 더 끔찍했다. 죽는 순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상상조차 못했다. '엘레스트라 육체만이라도 부탁해.' 나는 엘레스트라에게 세실리아의 육체를 복구해 달라고 말했다. 생명을 살리지 못하겠지만 장례를 치루려면 어쩔수 없었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육체가 원상태로 복구되자 그제서야 끌어안았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세실리아의 전신에 화상이 있어서 시신이 회손될까봐 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육체가 복구되었지만 생명이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신관인 소피아에게 그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세실리아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세실리아님 죄송해요." 나와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시체를 향해 사과를 하고는 함께 울었다. 소피아는 신력의 도움이 세실리아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과 자신만이 살아난 사실에 복잡한 심정이었다. 나또한 술을 먹어서 정령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해 결국은 세실리아가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했기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주인님 흑흑흑." 집안으로 세렌이 들어와 나에게 다가와 눈물을 흘렸다. 몬스터가 나타나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던 세렌이 울다니 놀라웠다. 얼마나 큰 일을 당했기에 이러는가 싶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세렌은 전신에 화상을 입고 있었고, 열기에 노출되어 폐에 뜨거운 공기가 들어가 극식한 고통을 겪는 상황이었다. 제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있었다는게 기적일 정도였습니다.' '엘레스트라 고마워.' 나는 엘레스트라를 통해서 세렌도 방금전까지 끔찍했던 세실리아와 비슷한 모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착한 엘레스트라가 전부 치료했겠지만 세렌으로서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세렌을 안아주며 토닥여 주었다. "흑흑흑 흑흑" "흑흑흑" 나와 소피아 그리고 세렌은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세인트 사람들 누구도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귀족들이 세인트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가끔씩 불도 질렀지만 오늘과 같은 경우는 없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린 것은 세 시간 정도가 지나서였다. 사람들이 애버른 가족의 시신을 어디선가 가져온 관에다 옮기고 있었다. 소피아는 사람들이 세실리아의 육체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했다. 신전에서 신관이 죽었을 경우에 행하는 장례방식대로 치루려는 것이다. 신전에서는 화장을 하는데 그 전에 천신에게 기도하는 신관이 필요해서 아무나 하지 못한다. 소피아가 세실리아의 장례를 위해 그녀를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는 동안에 세인트 사람들은 애버른 가족의 장례를 치뤄주었다. 새벽이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버른 가족은 세인트 사람들의 축복아래 산에 묻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로서는 나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났다. '술을 먹지 않았어야 했는데.' 스스로에게 화가 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를 죽인 그들이 죽도록 미웠다. 눈앞에 있으면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죽은 사람을 위해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시간이라 참고 또 참았다. 애버른 가족의 장례가 세인트 사람들의 손으로 치뤄진 반면 세실리아의 장례는 단 세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뤄졌다. 나와 소피아 그리고 세렌 이렇게 세 명이었다. 소피아는 조심스럽게 나무장작을 쌓고 그 위에 세실리아의 시신을 올렸다. 물론 여자의 힘으로 어려워 내가 도와주어야만 했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장례를 최대한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했다. 그만큼 세실리아는 소피아에게 중요한 존재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왔고 친자매 보다 가까웠다. 세실리아가 성녀로서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베풀 때도 그녀는 언제나 함께했다. "천신님께 간절히 바라노니..." 소피아는 장작에 불을 붙이며 세실리아를 위해 천신을 향한 기도문을 읊었다. 장작불은 무척 천천히 피워올라 세실리아의 시신이 모두 화장되는데 한나절이 걸렸다. 그 시간동안 소피아는 처음 앉았던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세실리아를 위해 기도했다. 세실리아가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또다시 많은 생각을 했다. 나 때문에 한 가족이 죽었고 운명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의 행복을 추구하던 세실리아마저 죽었다. 자책하는 마음이 컸지만 그만큼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내게 왜 이런일이 닥쳤는지도 생각했다. '후회없는 삶을 살기로 해놓고 또다시 후회하다니.' 문득 내가 흘러가버린 시간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엔트를 통해서 새생명을 얻었을 당시에는 다시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술먹은 행동이 후회되었고, 세실리아가 원하는대로 결혼하여 그녀의 남편이 되지않은 사실도 후회되었다. 머리속에 온통 후회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소피아는 화장된 세실리아의 유골을 모아서 정성들여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나는 신전에서 행하는 장례절차에 대해서 알지 못해서 소피아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유골단지를 대상으로 또다시 이튿날까지 기도했다. 소피아는 이틀을 계속해서 쉬지않고 세실리아의 장례를 치뤘다. 정말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시전에 세실리아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를 이교도로 몰아갈까봐 참았다. 세실리아의 장례는 이틀이었지만 그동안 잠을 자지고 음식을 먹지도 않아서 소피아의 몸은 좋지 않았다. 신력이 있었기에 버티고 있었을 뿐이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쓰러졌을 것이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유골단지를 향한 기도를 끝내고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피아의 행동에 나또한 상념에 젖어있던 마음을 추수렸다. 세 채의 흙집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출입문과 창문에는 불탄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법이 아니고서 흙집의 지붕에 불이 붙었을리 없었다. 분명히 귀족들에게 속한 마법사의 짓이다. 좋지않은 일이었을테니 마법길드 소속은 아니고 자유 마법사였을 것이다. 만약 마법길드 소속이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길드에서 절대 용서되지 않는다. 소피아는 세실리아의 장례를 끝내고도 유골단지를 모시고 계속 기도했다. 달라진 점은 이틀간 계속 기도만 하던 생활을 버리고 식사를 하며 잠도 자면서 유골단지를 향해 기도하는 것이다. 세렌은 며칠전의 경험을 잊지 못했다. 불타는 흙집안에서 화상까지 입으며 뜨거운 열기를 느끼면서 숨을 쉬어야했으니 그 고통을 누가 알겠는가. '모두 나 때문이야.' 소피아가 세실리아를 위해 기도 할 때나 세렌이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는 나로서는 모든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되었다. 여러가지 잡생각이 머리속을 휘저었다. 나는 힘든마음에 생각을 터놓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문득 머리속에 떠오르는 친구가 있었다. '엔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수십년을 함께한 엔트가 떠올랐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나는 최상급 정령들에게 크라이 숲에 있는 엔트와 대화를 나눌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대답했다. 나의 영혼이 정령계에 머무는 동안에 엔트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800년에 해당하는 엄청난 생명력 때문에 가능했다. 생명력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도 영혼과 육체가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정령사가 정령계에 오래 머무르면 그대로 죽게 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을 것이라고 최상급 정령들이 알려주었다. '주인님 여기가 정령계입니다.' 최상급 정령들의 도움으로 정령계에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거나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60년을 의식만으로 지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엔트를 애타게 불렀다. 한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자 실망했다. 거의 포기하고 있을 즈음에 엔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목소리가 아닌 생각이지만 말이다. '카인이구나.' '엔트야 오랜만이구나. 너무 반가워.' '정령계에서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가워.' 나는 엔트의 생각을 전해받고 정말로 기뻤다. 엔트가 정령계에 드나들 수 있을줄은 몰랐다. 나는 엔트에게 그동안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엔트는 무척 신나하면서도 안타까워했다. 마지막에 세실리아와 애버른 가족의 죽음을 듣고서는 분노와 슬픔을 함께 나눴다. 엔트도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숲속을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과 다른 엘프마을에서 자신을 보기위해 엘프가 자주 방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엘프들 사이에서 무척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말 축하해. 엔트' '고마워. 그런데 카인은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더이상 지금과 같이 지내지는 않을거야.' 엔트와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정령계에 오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엔트는 아쉬움을 표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나는 정령계를 떠나오며 새생명을 얻게 되었을 당시의 마음을 되새겼다. 그리고 최상급 정령들과 대화를 나눴다. 생각해보면 최상급 정령들은 나와 감정을 공유하며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인데 그들의 존재감을 무시한 경우가 많았다. 엔트와의 대화를 끝내고 나는 그을린 흙집을 원상태로 복구시키고, 불타서 없어진 출입문과 창문도 만들었다. 소피아는 식사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세실리아를 위해 기도하며 지냈다. 세렌은 이제 자신까지 포함해서 세 명의 식사만 준비해야만 했다. 애버른 가족의 소유로 되어있던 땅은 내 소유로 바뀌어졌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후퍼가 자주 찾아와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우리가 도움받을 일은 없었다. 나는 후퍼가 찾아올 때마다 그의 얼굴에서 자책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술을 먹지 않았다면 누군가 죽는 일도 없었을 테지만 그것이 후퍼의 책임은 아니었다. 나는 엔트와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성을 되찾고 앞으로 할일을 생각했다. 이제 세인트에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동안 애버른 가족의 정착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세인트 사람들을 도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떠날수도 없었다. 최소한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후퍼는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정령사가 세인트를 위해 좀더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해 대접한 것인데 그로인해 발생한 문제는 후퍼가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후퍼가 부르지 않았다면 정령사는 집에서 그들의 일행과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떠나게 둘 것을..." 순수한 호의에서 술과 음식을 대접했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인트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정령사를 이용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대접했기 때문이다. 정령사 일행은 물론이고 애버른 가족이 몰살당했다. 분명 귀족들이 저지른 일임에도 후퍼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가 없었다. 세인트를 중심으로 여덟 곳의 개척지역이 있고 그 지역마다 귀족가문이 머물고 있어서 어느 귀족가문에서 그런일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세인트 사람들을 가장 심하게 괴롭히는 귀족가문은 카르마를 차지한 파도루 가문, 일드리스를 차지한 라다르 가문 그리고 루바를 차지한 루아카스 가문이다. 짐작으로는 세 가문중에 하나가 분명하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따져야 할 대상도 모른다. 후퍼는 자책하고 있었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개척자로 나서서 세인트에 정착하여 사람들의 간절한 바램으로 경비단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한점 부끄럽지 않게 노력했다. 하지만 정령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숨고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후퍼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야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다른 무엇인가를 찾았다. 바로 귀족들을 향한 복수심이다. 정령사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더라도 그동안 세인트 사람이 귀족들이 보낸 사병에게 죽은 경우도 많았다. '귀족놈들아 제발 나타나라.' 후퍼는 귀족들에게 적개심을 불태우며 정령사에게 행한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이겨내려고 노력하였다.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다. 적개심을 갖는 동안에는 잊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의 마음은 귀족들이 보낸 사병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대로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복수심에 불타는 후퍼의 마음도 몰라주고 귀족들은 한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귀족들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인트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제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떳떳하게 나타났다. 문제는 나타난 병사들이 사병이 아닌 전원 정규군이었던 것이다. 후퍼는 경비단을 이끌고 그들을 쫓아낼 수 없었다.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세인트를 장악하려고 파견한 정규군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아무리 복수심에 불타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굳이 협박하지 않아도 세인트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며 귀족들에게 땅의 소유권을 넘길 것이다.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불만을 귀족들에게 토로하겠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도 못할게 분명하다. 귀족들의 정규군이 나타난 순간부터 세인트 사람들은 더이상 삶의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 애버른 가족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이후로 사람들의 마음에 많은 변화가 온 것이다. 그동안 쌓여있던 감정이 울분으로 토해져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세인트에 정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그런데 반년전에 찾아온 귀족들이 그 고생의 결과물을 빼앗아 가려는데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자신들의 땅이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7 회] 14. 정령사 카르시온 제국 현 황제의 명에 의해서 개척지역으로 파견된 관리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파견된 관리들은 귀족들과 반감이 쌓인 관리이거나 황제가 신임한 관리였다. 그것도 아니면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경우에 속했다. 세겜 바주아도 황제의 명에 의해서 개척지역에 파견된 관리로 세인트 지역을 담당했다. 다른 관리들에 비해서 그가 맡은 지역은 모든 땅이 개척자들에 의해서 개간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소유권을 인정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귀족들이 개척지역에 등장하면서 생겨났다. 세인트를 제외한 지역에서 귀족들이 개척지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권다툼을 벌였지만 세겜이 담당한 곳에는 조용했다. 하지만 귀족들이 다른 개척지역을 손에 넣게되자 주인없는 세인트에 피바람이 불어왔다. 귀족들이 사병을 시켜 소유권을 빼앗기 위해서 온갖 치사하고 비겁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세겜은 몰락귀족으로 같은 귀족들의 행위에 반감이 많았다. 그래서 황궁으로 세인트에서 발생하는 귀족들의 횡포를 직접 알렸다. 세겜에겐 그를 보좌하는 한 명의 관리와 두 명의 마법사 그리고 기사가 함께하고 있는데, 그중에 마법사는 통신구슬을 가지고 있어서 멀리까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세겜이 보고한 사항은 묵살되어 버렸다. 세겜은 개척자들을 돕고 싶었지만 그가 할 수있는 일은 없었다. 황제가 파견한 관리이지만 귀족들의 일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귀족들의 횡포가 심해졌고 결국엔 세인트에 귀족들의 정규병사들까지 나타났다. 세겜은 자신을 보좌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정규병사들이 나타났다는 세인트의 서쪽 공터로 향했다. 보좌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기사 한 명, 마법사 둘 그리고 관리 한 명까지 모두 네 명이었다. 세겜으로서는 세인트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도 있지만 귀족들의 행동을 더이상 두고볼수 없어서 간섭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세겜이 서쪽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앞에는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중무장한 모습으로 줄지어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전신을 갑옷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위압감이 대단했다. 세겜은 어디서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나타났는지 의아스러웠다. "네놈은 누구냐?" 말을 탄 기사가 세겜에게 다가와 험상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이라니? 나는 황제께서 세인트에 파견한 관리로 세겜 바주아다." "개척자 놈들의 뒤치닥거리나 하는 몰락귀족 주제에 소개가 거창하시군." "뭐라구?" 세겜은 다짜고짜 빈정거리며 놀리는 기사의 말에 화가났다. 황제의 관리가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명예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기사는 황제가 파견했다는 말에도 코웃음을 친 것이다. "그럼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라다르 대귀족 가문의 기사대장직을 맡고있는 엑셀론 라다르다. 네놈과 같이 무늬만 귀족인 놈들과는 혈통이 다르지." 엑셀론의 말에 세겜은 얼굴색이 붉게 변했다. 엑셀론의 말마따나 세겜은 몰락귀족이었고, 엑셀론은 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귀족 가문에 속해 있었다. 세겜은 가문에 대한 것으로는 엑셀론을 상대할 수 없어서 다른 트집을 잡아서 모욕을 주었다. "대단한 가문이군요. 고작 개척자들이 개간한 땅이나 빼앗으려고 치사한 행동이나 하는 주제에 말이지요. 알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감히 네놈이!" 엑셀론은 세겜의 말에 화를 참지못하고 검을 빼들었다. 너무나 분노하여 검을 잡고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엑셀론은 황제가 특별히 개척지역에 파견한 관리를 죽인다면 여러가지로 곤란하게 될 것 같아서 참았다. "어디 죽여보시지?" 세겜은 엑셀론의 심정도 모르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당장 검을 치우시요!" 세겜을 보좌하는 기사는 엑셀론을 견제하기 위해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상황이 험학하게 변하자 줄지어 있던 병사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세겜 일행에게 다가왔다. 세겜을 보좌하던 두 명의 마법사들은 혹시라도 무슨일이 생길지 몰라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좋다. 이번만은 봐주도록하마. 똑똑히 들어라. 목숨 부지하려면 우리일에 참견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네놈 목숨 정도는 쥐도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으니까." "내가 네놈말에 겁먹을지 아느냐! 네놈이 중무장한 정규병사들을 이곳에 왜 데려왔는지 모르겠지만 네놈 가문이 하는일이 모두 황궁에 보고될 것이다!" 세겜은 지금의 사태를 황궁에 보고해야 될 사항이라고 판단했다. 귀족들이 은밀하게 무력을 사용해 개척자들의 땅을 빼앗는 것은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대놓고 무력을 동원할 경우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그것도 정규 병사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군." "네놈이 감히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죽일수 있을까?" 세겜은 황제가 파견한 관리인 자신을 죽이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엑셀론을 모욕했다. 세겜이 판단하기에 라다르 귀족가문에서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서 벌이는 승부사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세인트를 노리는 귀족가문은 많았지만 라다르 가문처럼 직접적으로 병사들을 데려온 경우는 없었다. "못할 것도 없지. 죽은 정령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 되겠군." 엑셀론은 말을 하자마자 세겜에게 검을 휘둘렀다. 세겜은 설마하니 엑셀론이 검을 휘두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세겜을 보좌하던 기사가 뛰어들어 엑셀론의 검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엑셀론의 검에서는 오러가 빛을 발하면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악" 세겜을 보호하려던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즉사하였다. 기사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세겜의 가슴에는 큰 검상이 생겨났다. 엑셀론의 검에서 오러가 뿜어져나와 기사는 물론이고 세겜의 가슴까지 대각선으로 지나간 것이다. 검상이 생긴 자리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세겜은 고통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다. "미친. 진짜 휘두르다니." 세겜은 엑셀론을 향해 후회스런 말을 뱉고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모습을 세인트 사람들이 멀리서 지켜보며 놀라고 있었다. 그들도 설마 엑셀론이 관리를 죽일지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디마 도망쳐!" 세겜이 엑설론에게 죽자 그를 보좌하던 두 명의 마법사중에 한 명이 소리치며 도주를 시도했다. 세겜을 죽였으니 그를 보좌하던 마법사를 가만둘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마법사를 죽여라!" 엑셀론은 도주하려고 움직이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4서클 마법사 데리안과 3서클 마법사 디마는 헤이스트(Haste) 마법을 시전하여 집이 복잡하게 들어선 곳으로 도주했다. 데리안은 순식간에 병사들에게서 멀어졌지만 디마는 헤이스트 마법의 시전이 늦어서 병사들이 재빨리 사용한 화살에 맞고 말았다. "악! 으으으" 데리안은 디마의 등에 화살이 꽂힌 모습을 목격하고 멈추었지만 디마에게 가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디마의 몸에는 또다시 날아온 화살이 수없이 꽂혔고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휘이익 씨이익 휘이이" 디마가 죽자마자 화살은 모두 데리안을 향하고 날아왔다. 하지만 헤이스트 상태의 데리안을 맞출수는 없었다. 엑셀론이 말을타고 데리안을 잡으려했지만 너무 빨리 사라져 놓치고 말았다. 말을 타고서는 세인트의 골목사이를 누빌수 없기 때문이다. 말에서 내려 오러를 사용해 달린다면 좀더 빠르겠지만 데리안은 마법을 사용해 그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기사대장님! 죽은 마법사에게서 통신구슬을 찾아냈습니다." "후훗! 운이 좋은데." 엑셀론은 부하가 가져온 통신구슬을 집어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사가 어디론가 연락을 할까 걱정했는데 통신구슬이 여기 있으니 도망친 그 마법사는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라다르 가문이 세인트의 서쪽 입구를 막고 있고, 나머지 두 귀족가문이 세인트 전체를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도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파도루, 라다르 그리고 루아카스 세 가문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정규군 병사들을 동원해 세인트를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간 다른 귀족가문이 간섭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 엔트와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후 정확히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세인트에서 떠나고 싶으면서도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에게 죽음을 안겨준 귀족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피아는 나를 찾아와 세인트에 정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소피아는 더이상 나와 함께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세실리아 때문에 동행했던 것이고 이제는 혼자가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인트 사람들이 그녀의 정착을 무척 환영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곳에서는 소피아와 구면인 신관을 만날 가능성도 없으니 안전할 것이다. '주인님 사람이 죽었습니다.' 나는 실레스틴이 말하는 소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다시 귀족들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서 사람이 죽은 것이다. 이번에 보낸 병사는 사병이 아닌 정규 병사들이라 세인트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다. 후퍼로서도 대처가 불가능하여 경비단을 해체하였다. '실레스틴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어?' '없습니다.' 나는 실레스틴에게 흙집을 공격했던 사람이 나타나면 알라달라고 하였다. 당시에 너무 당황에서 범인들을 정령에게 추적하라고 부탁하지 않은 일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주변에 그때의 사람들이 나타나면 실레스틴이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그들이 생을 마감하는 날이다. "카인씨! 카인씨!"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퍼를 보좌하던 로이한의 목소리였다. 경비대원이 위험할까봐 경비단까지 해체된 마당에 무슨일인지 궁금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 나를 찾아올리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일입니까?" "큰일났습니다. 서쪽 공터에 있던 병사들이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죽였습니다. 엄연히 귀족인데 죽이다니 이것은 제국법에도 위반되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하고 무슨상관인데 알려주시나요?" 나는 로이한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관리가 죽은 사실이 나와 무슨상관인가. 관리가 세인트를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세실리아와 애버른 가족을 죽인 사람만 찾아서 죽이면 그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세인트를 떠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병사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는데 관리의 죽음을 카인님에게 뒤집어 씌운다고 합니다. 저번에 카인씨 일행을 죽인 자들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알려드리러 온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분명히 두 귀로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번 사건은 카인씨를 죽이기 위해서 벌인 것 같습니다." 로이한의 말은 내게 또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죽이려고 한 짓도 모자라서 죄까지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말이다. 나는 더이상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모두 죽일수도 없어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난감했다. 사람죽이기야 쉽지만 그 감당은 세인트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죽이는 일이 큰 사건인가요?" "물론입니다. 사실 관리의 신분은 몰락귀족에 불과하지만 그는 황제가 특별히 파견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밝혀지면 당사자 가문은 귀족들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물론 그것이 밝혀질 가능성은 조금도 없습니다. 사실을 밝히는 사람은 그들에게 죽을텐데 누가 밝히겠습니까." 로이한을 통해서 죽은 관리가 무척 중요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귀족가의 병사들이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척 당황스런 상황이 될 것이다. 나는 로이한에게 마법길드나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죽은 관리를 보좌하는 마법사분이 통신구슬이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연락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두 마법사분중에 한 분은 죽었고 나머지 한 분은 세인트 어딘가에 숨어 있어서 찾을길이 막막합니다." "도망친 마법사가 통신구슬을 가지고 있을까요?" "통신구슬은 귀족가의 병사들에게 넘어갔습니다. 도주한 마법사를 찾아내셔도 통신구슬이 없으면 연락을 할 수 없을겁니다." 나는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했다. 도주했다던 마법사를 찾으면 귀족가를 난처하게 할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법사가 세인트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실레스틴의 도움을 받아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나는 로이한이 중요한 소식을 전해주어 고맙게 생각했다. 모르고 넘어갔으면 정말 후회되었을 것이다. '실레스틴 마법사좀 찾아줘.' '북쪽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고마워.'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도주중인 마법사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법사는 특유의 마나를 가지고 있어서 찾기가 쉬운 편이다. 아마도 마법사는 귀족가의 병사들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마법사를 찾아갈지 생각했다. 귀족가에서 마법사 하나 죽이는거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귀족가에 속한 마법사가 수없이 많으니 그들을 이용한다면 무슨일인든 못하겠는가. 귀족가에서 도주중인 마법사를 추적하기 위해 마법사가 파견되었으니 나도 앞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카인님 도망치고 있는 마법사를 살펴보는중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무슨일이지?' '세인트 전체를 수많은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와 마법사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사들이 멀리 포진하고 있어서 제 영향권 밖이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지금 도망치는 마법사도 얼마 가지않아서 잡힐 것 같습니다.' 갑자기 병사들이 세인트를 에워쌌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망치고 있는 마법사 때문이 아닐가 생각했지만 마법사 한 명을 죽이자고 세인트 전체를 병사들로 에워싸는 것은 말이되지 않는다. 분명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도망중인 마법사가 어느정도의 실력인지 몰라도 비슷한 실력의 두 명의 마법사만 있어도 쉽게 잡힐텐데 세인트가 포위까지 되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잡히게 될 것이다. 마법사의 마나는 하위 마법사라 할지라도 쉽게 구분하여 추적하기 쉬운 단서이다. 나는 도망치고 있는 마법사가 향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낮이라 함부로 날아갈 수 없었다. 귀족들은 내가 죽은걸로 착각하고 있으니 그걸 이용해야 한다. 조만간 귀족들은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라다르 가주 리온은 기사대장 엑셀론의 보고를 듣더니 헛기침을 연발했다. 리온의 앞에는 파도루 가주와 루아카스 가주가 앉아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파도루 가주 루바인은 더이상 참을 수 없는지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리온 가주 정말 제정신이요? 황제가 파견한 관리까지 죽이면 어쩌자는거요?" "걱정마시요. 정령사에게 뒤집어 씌우면 되니까."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거요? 만약 도망친 마법사가 황궁에 보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거요? 잘못되면 우리가 세인트를 차지하기는 커녕 제국의 모든 귀족들에게 비난을 받게된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거요? 가뜩이나 황제가 개척에 참여한 우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 루바인 가주는 라다르 가문의 기사대장 엑셀론이 벌려놓은 일을 가지고 리온 가주에게 화를냈다. 라다르 가문은 가주인 리온을 비롯해 기사대장까지 직선적인 성격이라 문제를 만들었다.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죽이다니 스스로 문제를 만든 것이다. 차라리 죽이려면 몽땅 죽이던지 관리를 보좌하던 마법사 한 명을 놓쳐버려 일을 크게 만들었다. "세인트 전체를 우리들의 병사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마법사가 도망칠데가 어디있겠소? 마법구슬도 없어서 황궁에 보고도 못할거요. 더구나 우리에게도 마법사가 많은데 무엇인 걱정이요?" "도대체가 라다르 가문은 모두 왜 그런거요? 조용히 처리해도 될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고." "거참! 그만하시요! 언제까지 우리 가문의 기사대장이 한 일을 가지고 이럴거요?" 리온은 두 가주의 불만에 찬 말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원인제공은 리온 가주의 명령을 수행하던 엑셀론 기사대장의 실수이지만 책임은 가주에게 돌아갔다. 리온의 성격상 두 가주의 투덜대는 소리에 넌더리가 났다. "더이상 말하지 않겠소만 도망친 마법사는 라다르 가문에서 처리하시요." "걱정하지 마시요. 지금까지 엑셀론이 나서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요." 리온은 엑셀론 기사대장의 이름을 걸고 장담했다. 리온은 무엇이든지 힘으로 밀어붙이고 해결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기사대장도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사람을 뽑았다. 실력은 당연히 최고이고 명령이 내려지면 주변상황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상의를 합시다.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착민들이 가지고 있는 개간한 땅의 소유권 문서를 파기하는게 첫 번째로 할 일이요. 두 번째로 노예를 데려와서 세인트에서 살게하고 새로운 관리가 오면 우리들의 노예가 개간한 땅이라 우기면 끝나는거요." 루바인 가주는 앞으로 할 일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루바인의 말대로라면 일이 마무리 될 때에는 세인트는 세 가문의 수중에 떨어져 있을 것이다. 매우 간단한 계획이지만 계획을 실행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세 가주는 오랜동안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무력을 동원하기로 했으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세인트를 에워싸여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고 있으니 못할짓도 없는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8 회] 14. 정령사 데리안은 헤이스트 마법을 계속 사용하며 세인트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세겜을 보좌하던 모두가 죽었고 오직 자신만 살아남았다. 숲에 들어와서야 데리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숲에서 사람을 찾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마나파동이다.' 데리안은 마나파동을 느끼며 절망했다. 누군가 디텍트(Detect)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위 마법사가 아니면 디텍트 마법에서 벗어나기는 무척 힘들다. 물론 먼 지역이라면 영향권에서 벗어나겠지만 데리안으로서는 계속 도망치기도 벅찼다. 병사들을 따돌리느라 헤이스트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마나를 많이 소모했다.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에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위치가 노출되었는데 가만히 있을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일단은 벗어나야지.' 데리안은 결국 서쪽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헤이스트 마법을 마음대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숲이라 빠르게 움직이는게 어려웠다. 데리안은 한 시간을 달리다가 금새 지쳤다. 모든 마법사가 그렇듯 데리안도 보통 사람보다도 못한 체력을 가지고 있어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찾았군." 데리안은 휴식을 취하다가 갑지가 나타난 사람을 발견하고 절망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억울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파이어볼" 데리안은 파괴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했다. 디마처럼 발악도 하지 못한채 죽는 것은 싫었다. 적어도 자신과 함께 많은 사람을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고 싶었다. "펑" 데리안이 시전한 마법이 날아가 상대방에게 맞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파이어볼 마법은 파괴력이 강하여 마법사라 할지라도 막기 힘들다. 많은 대상을 공격하기 위한 마법이라 전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있어야만 막을 수 있는 마법이다. 데리안의 마법을 맞은 사람의 몸에서는 푸른색의 보호막이 있는데 그것이 막아준 것 같았다. 데리안은 처음보는 마법에 신기함을 금할 수 없었다. 모든 마법사가 그렇듯 새로운 마법을 발견하면 어떤 마법사든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구해주러 온 사람에게 인사가 화려하네요." 상대방의 말을 듣고서 데리안은 그것이 마법이 아님을 알았다. 방어마법이 시전되는 동안에 마법사는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방어마법은 마나제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말하는 순간 마법이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데리안은 문득 세인트에서 화려운 소문의 대상이 떠올랐다. "혹시 정령사?"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도록 하지요." 데리안은 누군가가 계속 디텍트 마법을 사용해 자신을 추적하고 있어서 정령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혼자의 힘으로 벗어날 수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도움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 나는 열심히 도망중이던 마법사를 쉽게 찾아냈다. 실레스틴을 통해서 그가 향하던 방향을 알아내어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첫 대면에 마법사가 마법을 날리는 바람에 당황했을 뿐이다. 일단 추적하고 있는 귀족가의 마법사들을 떼어낼 필요가 있었다. "4서클 마법사 데리안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황이 급박한데도 데리안은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함께하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니 당연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데리안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모든 사실이 황궁에 알려지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건가요?" "그런놈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놈들은 비난이야 받게 되겠지만 세인트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황제가 파견한 세겜을 죽이면서까지 세인트에 욕심을 부릴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귀족이 명예를 버리다니 귀족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데리안은 귀족들에 대해서 쉴세없이 말했다. 말을 계속 함으로써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멀지않은 곳에서 누군가 디텍트 마법을 사용하는 마나파동이 느껴졌다. 정령사이지만 나름대로 마법을 열심히 공부한 덕이다. "도망칠 수 있을까요? 누군가 저의 위치를 계속 추적하고 있어요." 데리안은 또다시 마나파동을 알아채며 안절부절이었다. 나또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데리안을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 이후는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세인트에 데려갈 수도 없었다. 나는 데리안의 말을 통해서 귀족들이 결국은 세인트를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를 죽게 만든 원흉들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죽였겠지만 내겐 모르는 사람보다 친했던 사람이 더욱 중요하다. "제가 도망칠 수 있도록 시선을 끌어줄께요. 만약 이곳에서 빠져나가면 마법길드에 들려서 카인이란 정령사가 도움을 청한다고 전해주세요." "만약 벗어나면 전하도록 하지요."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데리안이 도망칠 수 있도록 그의 전신을 생명력의 기운으로 감싸주었다. 오래 유지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데리안은 자신을 도와주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나타나 도망치는 자신을 도와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평소의 데리안이었다면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혹은 무슨 방법으로 자신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자세히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동료나 다름없는 사람을 잃고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너무도 무서운 마음에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생명력으로 데리안을 보호해 주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나 자신도 몰랐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생명력은 마나와 다르니까 설사 디텍트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데리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데리안을 추적하는 사람중에서도 마법사가 많을테니 많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파이어볼" "라이트닝 볼트" 데리안이 벗어나자 나는 3서클의 마법중에 쉽게 감지되는 마법을 사방에 시전하였다. 마법길드의 마도사들이 선물한 마법무구 덕분에 가능했다. 평소에는 필요가 없지만 오늘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데리안의 위치를 계속 감지하던 마법사들은 나를 데리안으로 착각하여 추적의 목표로 삼을 것이다. 내가 시전한 마법으로 나무가 쓰러지고 땅바닥이 뒤집어졌다. 데리안이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최대한 소동을 피워야 했다. 혹시라도 고위 마법사가 있다면 마나파동의 차이를 분명히 느끼겠지만 설사 고위 마법사가 있다해도 방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기다! 잡아라!"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누군가 소리쳤다. 그들은 내가 일부러 도망치지 않고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병사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최대한 오래 시간을 끌어서 데리안이 멀리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한다. "파이어볼" 나를 발견하고 소리친 병사에게 마법을 날려주었다. "으악! 살려줘!" 병사는 몸에 불이붙자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마법으로 붙은 불이 쉽게 꺼질리 만무했다. 일부로 다치지 않으면서 옷에만 불이 붙도록 하여 혼란을 부추겼다. 데리안을 추적하기 위한 병사들은 갑옷을 입고있지 않았다. 추적을 위해서는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숲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당연히 마법사들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마법도 사용했다. 한나절을 귀족가의 마법사들과 숨바꼭질을 했지만 서로 얼굴이 마주치는 상황은 없었다. 마법사들과 숲에서 숨바꼭질을 하면서 세인트가 병사들에게 에워싸인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병사들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귀족가의 마법사들은 디텍트 마법을 한 순간도 쉬지않고 시전하였다. 한참을 그렇게 숨바꼭질을 하다가 결국 귀족가의 마법사들은 디텍트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데리안은 멀리 도망쳤겠지?' 나는 데리안이 멀리 도망갔다고 판단되자 생명력을 숨기고 흙집으로 돌아왔다. 세렌은 내가 돌아오지 않아서 무척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인트에는 귀족가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집인양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데리안을 통해서 귀족가들이 본격적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머나먼 앞날을 내다본 훌륭한 투자인 것이다. 나는 귀족들이 세인트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결심을 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겠지.' 귀족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가장 불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인트를 얻지 못하게 함으로써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데리안을 추적하는 마법사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생각했다. 어떻게든 귀족들에게 불행을 안겨주어야 한다. 데리안이 세인트에서 벗어났으니 세인트를 차지하려는 귀족들은 조마간 난처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앞으로는 귀족들이 세인트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려고 한 순간에 일이 틀어지게 되었다. 세겜을 보좌하던 마법사 하나가 도망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의 추적을 벗어난 것이다. 고위 마법사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 정말 이해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세인트에 벌이던 일이 모두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조만간 황궁에서 대대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나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죽은 사건을 계기로 동지역 개척에 귀족들이 간섭하여 개척자들에게 온갖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크게 이슈화 시킬 것이다. 뒤늦게 동지역 개척에 참여한 귀족들의 명예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게 분명하다. 세 가주는 앞으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많은 논쟁을 벌였다. 리온 가주는 실수를 한 입장이라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었다. 루바인 가주는 일단 세인트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오래전부터 좋지않은 일에 많이 연루된 파도루 가문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노 가주는 시작한 일이니 끝장을 보자고 주장했다. 세 가문이 벌인 사건을 황궁에서 알게 되더라도 당장 직접적으로 대처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오직 황제만이 분노할 뿐이지 다른 귀족들이야 배나라감나라 하지는 못한다. 본래 동지역 개척은 황제 혼자서 추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주일만 기다리도록 합시다." 제노는 두 가주와 타협을 보았다. 일주일을 기다린 후 향방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이들은 황궁에서 어떻게 세인트의 일에 어떤 방법으로 간섭할지 기다렸다. 황궁과 세인트는 엄청나게 먼 거리였지만 고위 마법사의 도움만 있으면 하루만에 오갈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었다. 세인트 사람들은 병사들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지만 마음놓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일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천여명이나 되는 세인트 사람들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 데리안은 개척자 영지에 4일만에 도착했다. 목숨이 달린 일이라 세인트에서 벗어나자마자 밤낮으로 플라이(Fly) 마법을 사용하여 도착한 것이다. 마차로 이동해도 개척자 영지에서 세인트까지 보름정도 걸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적이라 불릴만했다. 데리안은 개척자 영지의 마법길드 분점을 찾아가 세인트에서 벌어진 일들을 황궁에 보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수도 말린에 있는 마법길드는 전국각지의 분점에 설치된 통신구슬을 통해서 어디로든 연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법길드에서는 데리안의 보고를 받고서 무척 빠른 대응을 보였다. 황제가 파견한 관리와 관리를 보좌하던 마법사가 죽임을 당한 사실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귀족가의 명예와도 직결된 일이니 많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 소식이었다. 데리안의 보고사항은 황궁에 즉시 알려졌고 카인에 대한 소식은 마법길드 책임자인 가비크에게 보고되었다. 황궁에서는 통신구슬을 통해서 세인트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한 데리안의 보고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황궁에서는 즉시 세인트를 차지하려는 귀족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따졌지만 누구도 시인하지 않았다. 귀족가들은 마법통신이 가능한 마법사가 여럿 있어서 대화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데리안의 보고가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가에서 극구 부인하니 대책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족가들을 처벌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데리안의 예상대로 귀족가는 명예만 회손되었을 뿐 처벌받는다거나 손해본 것은 없었다. 황궁의 미온적인 대처와 다르게 마법길드에서는 데리안의 사항을 무척 신중하게 다루었다. 그 이유는 세인트에서 카인이 도움을 청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카인은 마법길드에 마도사급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긴급사항에 해당되었다. 더구나 카인에겐 마나폭주로 고생하는 마법사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여타 마도사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가비크는 사건의 중요성을 깨닫고 마도사 회의를 주최하였다. 데리안의 자세한 보고를 통해서 카인의 일행이 귀족들에 의해서 죽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세인트에서 정령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데리안으로서도 대답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가비크는 카인과 관련된 사건을 마도사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이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귀족들이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3서클 마법사를 죽인게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가비크는 마도사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마도사들은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오래전부터 개척지역에 대해 황제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전쟁을 핑계로 계속 거절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난처한 입장이었다. 마법사들이 길드에서 무한한 자금력을 받고 마법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전쟁터에 마법사를 지원해야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황제의 도움을 거절하고 일어난 사건이라 착찹한 심정인 것이다. 어느 한편으로는 마법길드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늦었지만 황제의 말마따나 개척지역을 더이상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무슨 방법이 있는것도 아니지 않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마도사들의 대부분은 괴짜들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괴짜 마도사가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하자 모두 귀를 기울였다. 엉뚱한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가끔씩은 옳은 말을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대책이 없으니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방법인데 그러는거요?" "우리들중에 한 명이 개척지역의 중심지가 될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을 세우는거요." 마도사들은 같은 마도사지만 그 소리를 듣는순간 정이 떨어졌다. 마법사의 탑은 마도사가 새로운 학파를 만들 때나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친짓을 할 마법사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마법사 탑이 세워지는 지역을 모두 관리해야 하는 귀찮은 일까지 떠맡아야 하니 말이다. "제발 곱게 미치시요!" "새로운 학파를 창설한 마법이론이나 있소?" 마도사들이 괴짜 마도사의 한심한 대답에 한 마디씩 핀잔을 주었다. 말을 꺼낸 마도사도 자신의 의견이 허황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의 생각으로는 마법사의 탑이 세워지면 주변은 카르시온 제국법에 의해서 탑의 주인에게 관리권이 넘어간다는 것 때문에 의견을 말했던 것이다. "마도사님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마도사들은 가비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동안 가비크가 마법길드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그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였다. 조만간 회의를 거쳐서 책임자를 바꿀 생각이지만 가비크 본인이 마법에 전념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견이 있다면 당연히 들어야지." "대책을 세우는데야 가비크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지." 마도사들은 가비크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가비크에게서 나온 의견은 또다시 마도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마법사의 탑을 세우는 의견이 최선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마도사들은 가비크의 얼굴과 마법사의 탑을 세우자는 엉뚱한 의견을 내세운 괴짜 마도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이 무슨 작당이라도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 가비크의 얼굴은 무척 진지하여 마도사들도 무슨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했다. "카르시온 제국법에 의하면 마법사의 탑을 세우면 그 주변이 영지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 아시고 계실겁니다. 탑의 주인은 귀족의 영주처럼 주변을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지요. 세금도 마음대로 정하고, 탑의 안전을 위해 병사들까지 양성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황제폐하께서는 개척자들이 귀족들의 횡포에 수난당할 것을 예상하시고 저희 길드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 거절했지만 이 방법이라면 귀족들과의 충돌 없이도 합리적으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가비크의 기나긴 설명을 듣던 마도사들은 그렇게 될수도 있다는 사실에 어이없었다. 마법길드를 지원해주는 황제의 요청을 늦었지만 들어줄 수도 있었고, 귀족들의 횡포도 막을 수 있으며 개척자들도 돕는 일석삼조의 방법이었다. "정말 그렇네. 마법사의 탑이라..." "제국에 마법사의 탑이 하나 더 늘어난다? 일리시온 제국에서 난리나겠군." 마도사들도 어이없는 방법이라 생각하지만 지금의 곤란한 입장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마도사들은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긴 하면서도 뭔가 빠진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가장 심각한 발언을 했다. "그런데 새로운 마법이론은 어디서 구하지?" 회의장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마법사의 탑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던 가비크 조차도 얼굴이 굳었다. 마법사의 탑을 세우려면 새로운 마법이론이 존재함을 사실로 증명해야 한다. 더구나 귀족들에게도 고위 마법사가 많으니 마법이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마법사의 탑을 세우는 조건중에 가장 까다로운 것이 새로운 마법이론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마법사의 탑을 세우려는 지역이 개척지역이라면 귀족들은 마법길드가 재물을 노리려고 탑을 세우려 한다는 비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도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새로운 마법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해서 말이다. 마도사들은 여러가지 마법이론을 가지고 있지만 수많은 마법사들이 인정할 만한 이론은 아니었다. 설사 이론이 맞다해도 모든 마법사들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카인이 있지 않습니까!" 가비크는 마법이론의 문제를 가지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해결책을 찾았다. 마도사들은 가비크의 말에 순간 무슨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정령사 카인을 떠올리며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맞아! 마나폭주를 당해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마법이론을 발표하면 되겠군." "아주 쉽게 해결되었네." "해결이 문제인가? 제국은 물론이고 적국인 일리시아 제국의 마법사들도 발표를 듣고 놀랄걸. 하하하" 마도사들이 모두다 웃음을 터뜨렸다. 카인이라면 모르는 마도사들이 없었다. 마나폭주로 고생하는 수많은 마법사들을 치료한 정령사이기 때문이다. 카인에게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는 마법이론을 발표하도록 한다면 모든 마법사들이 두손들고 환영할 것이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마나폭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마법실험을 할 때에도 혹시나 마나폭주가 자신에게 일어나 비참한 신세로 전락할까 항상 걱정이다. 만약 마나폭주가 치료된다는 이론이 발표되면 수많은 마법사들의 지원은 물론이고 제국적으로도 엄청난 지원이 따르게 될 것이다. 결국 개척지역에 마법사의 탑을 세운다 해도 누구하나 감히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리라. 마도사들은 카인에 대한 사항을 비밀에 붙여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카인에게 마나폭주를 치료받은 마법사들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약간의 문제라고 한다면 마법사의 탑은 마법을 6서클 이상을 달성한 마도사만이 가질수 있다는 특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마나폭주 치료이론이 그 사항을 무시할 정도로 놀라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법길드는 마도사들의 적극적인 도움아래 새로운 마법사의 탑을 세우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탑의 주인이 될 카인의 의견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추진한 모두가 카인이 당연히 허락하리라 생각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49 회] 14. 정령사 위압감을 뿌리던 병사들이 세인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벌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사람들은 문제가 생겨도 크게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데리안이 세인트에서 벗어난 그날 귀족들의 병사들이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병사들이 사라진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나는 짐작가는데가 있었다. 데리안이 세인트에서 벗어나 황궁에 황제가 파견한 관리의 죽음을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귀족들로서는 최대한 의심스러운 행동을 자제해야만 했을 것이다. '마법길드에서 도와줄까?' 나는 귀족들이 언제까지 무력사용을 참을 것인지 고민하면서 마법길드의 도움을 기다렸다. 데리안이 마법길드에 내 소식과 부탁을 전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마도사와 같은 등급이니 길드에서 도움을 주리라 생각했다. 병사들이 사라지고 평화로워진 세인트지만 모든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다. 무슨일이기에 귀족의 병사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않고 물러났는지 궁금했다. 나또한 불안했지만 좀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는 불안을 떨쳐버렸다. "소피아 다시 말해줄래?" "카인님 몇번을 말해야겠어요? 세실리아님을 위해 신전을 세우겠다구요." 나는 소피아의 발표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개척지역이라지만 언제가는 소피아를 알아볼 신관이 방문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신전이 생기면 세인트를 방문한 신관은 당연히 신전에 들르게 될 것이고 소피아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난 순간 그녀의 삶도 끝이다. "세실리아를 위해서라지만 신전까지 세운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불가능한 일이라도 상관없어요. 세실리아님이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요. 저 자신과 세실리아님을 위해서 신전을 세울거에요. 카인님이 꼭 도와주시리라 믿어요." "돕기야 하겠지만 소피아가 위험할까봐 그러지." 소피아는 신전을 건립하기 위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전에 필요한 것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았다. 천신의 교리를 담은 책도 필요하고, 신관도 있어야 한다. 신관이야 소피아가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천신의 교리를 담은 책이다. 소피아는 여건상 교리책을 구할 수 없음을 생각하고 해결책으로 스스로 교리책을 만들기로 했다. 대부분의 신관은 천신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본적인 교리책의 내용을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하고 있기 때문에 종이만 있으면 만드는게 어렵지 않다. 신전은 내가 만들어 주기로 했다. 소피아가 신전의 모습을 그려주면 땅 정령의 도움을 받아서 비슷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정령의 도움을 받으면 건물을 만들어도 마음대로 형태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무척 편리하다. 신전의 크기는 되도록 작게 하면서 눈에띄지 않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카인님 여기는 그림과 다르잖아요." 소피아는 내가 만들어준 신전과 자신이 그린 그림을 비교하며 말했다. 나는 소피아가 지적한 부분을 땅 정령에게 부탁해 곧바로 수정했다. 수차례 비교를 하면서 신전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이제 끝난거야?" "네, 카인님. 세실리아님과 제가 어려서부터 살아왔던 피니온 신전과 똑같은 모습이에요." 소피아는 완성된 신전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졌다. 일반적으로 신전은 철저하게 돌을 이용해 짓기 때문에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내가 소피아의 부탁으로 만든 신전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무척 서민적인 친근함이 풍겨왔다. 신전이 만들어지자 소피아는 자신이 만든 교리책을 들고서 세인트 사람들에게 포교(布敎) 활동을 시작했다. 세인트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지가 않아서 소피아의 튀는 행동은 금새 알려지게 되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소피아가 신관인 것을 알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신분이 낮은 자신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종교라고 생각해 멀리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피아의 목표있는 생활에 감동을 받았다. 운명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해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내 존재를 알려야만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법길드의 도움 없이도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를 죽이도록 사주한 귀족들에게 복수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살인이 해결책은 아니다. 더욱 큰 복수는 귀족들이 그토록 원하는 세인트를 차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마법길드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마법길드는 귀족가문 조차도 함부로 못하기 때문이다. '마나파동이잖아.' 나는 강한 마나파동이 이루어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하늘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후 하늘에서 사람이 나타났고 그들은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내가 위치한 곳이 세인트에서 동쪽의 외곽이라 볼 수 있었다. '무슨일로 마법사들이 나타난거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마나의 느낌으로 고위 마법사가 텔레포트 마법으로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고위 마법사들은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해 먼 거리도 단 번에 이동하지만 위험한 마법이라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잠시후 하늘에서 나타났던 마법사들과 세인트 사람들이 내가있는 곳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실레스틴을 통해서 다가오는 마법사들이 엄청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안함을 느끼고는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마법길드의 가비크?' 놀랍게도 다가오는 마법사들 틈에서 가비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인트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로온 마법사들이 신기해 따라온 것 뿐이다. "카인 정말 오랜만이야." 가비크가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였다. 그는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가비크씨." "우리는 반갑지 않나보지? 이거 섭섭한데." 내가 가비크에게 인사를 건네자 가비크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 농섞인 말투로 말했다. 나는 가비크 뒤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고서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마나폭주를 당해서 내게 치료를 받았던 마도사였던 것이다. 마도사가 마법길드를 벗어나다니 놀라운 사건이다. "어떻게 이곳에 오셨습니까?" "당연히 카인을 도우려고 서둘러 텔레포트해서 온거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왜 왔겠어?" "우리요? 세상에 이렇게 많이 오시다니!" 가비크 뒤에 있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어이없었다. 마나폭주로 마법사로서의 삶이 끝나서 내게 치료를 받고 다시 마법사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었다. 세 명의 마도사까지도 찾아오다니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아무리 도움을 청했기로서니 길드에서 이렇게 많은 마법사들을 보낸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일이라도 있나?' 눈치로 봐서는 내가 길드에 도움을 요청한 이유로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마법사들과의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가비크가 중대한 발표를 한다며 둘만의 자리를 마련했다. 마법사들과 세인트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기에 가족과 같은 마법사들까지 피하게 했는지 긴장하였다. 거기다 속시원히 말하지 않고 뜸까지 들이니 답답했다. 가비크의 표정을 봐서는 나쁜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이상하다. "카인은 마법사의 탑에 대해서 얼만큼 알아?" "얼핏 들어본 것 같아요. 새로운 마법사 학파를 만드는 곳이잖아요." 나는 마법사의 탑에 대해서 알고있는 사실을 말했다. 마법사는 여러 종류의 학파로 나뉜다. 요즘에야 그런 구분이 없어지는 추세지만 아직까지도 학파는 유지되고 있으며 그들은 마법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한 예로 네크로맨서 계열의 학파는 주술을 접목시킨 마법을 사용하고 발전시켜왔다. "놀라지 말고 잘들어.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을 짓기로 결정했어." "......" 나는 가비크의 말에 멀뚱히 눈만 깜빡거렸다.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을 짓는게 놀라운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이 나랑 무슨상관인가. "마법사의 탑 주인은 카인 바로 너야." "예? 저요?" 상관이 있어도 보통 있는게 아니었다. 나는 가비크가 농담을 하는지 바라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법길드에서 내게 무슨 이유로 마법사의 탑을 주는가. 엄연히 따지자면 나는 마법사도 아니다. 마법수식을 열심히 연습하지만 그저 취미일 뿐이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네. 사실은..." 가비크는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이 생겨야 되는 이유를 오래도록 설명했다. 황제, 마법길드, 개척지역을 노리는 귀족들 그리고 개척자들 사이의 관계까지 정말로 복잡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법사의 탑이 세인트에 생기면 귀족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는 설명이었다. "절대 허락할 수 없어요. 제가 그동안 조용히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난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다시는 그 이야기 꺼내지도 마세요." 가비크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마법사의 탑 주인이 내가 된다는 사실은 싫었다. 탑의 주인이 되는 순간부터 자유란 없을 것이다. 죽었지만 세실리아와 함께 여행하면서 그녀가 말했던 신전에서의 끔찍한 생활사가 떠올랐다. 사람이 있는 곳을 지날때마다 겪어야 하는 수많은 시선들은 기본이고, 아무 의미없이 던진말에 뜻을 부여하여 오해하는 사람들까지 불편함을 말하자면 끝도없을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자체가 만족스러운 사람이다. 가비크가 꺼낸 말에는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카인 미안하데 이를 어쩌지?" "왜요?" "사실은 어제 마법길드에서 정식절차를 거쳐서 마법사의 탑을 세인트에 짓겠다고 벌써 발표했어.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될 이름도 함께 말이야. 남은 것은 카인이 새로운 마법이론을 증명하는 차례만 남아있는 상태야." 800년의 생명력으로 최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로 항상 조심해왔다. 사비나는 죽기전에 내가 강한 능력을 선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것을 걱정했다. 나또한 마찬가지로 많은 불편을 겪으면서도 조심해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요? 최소한 당사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거 아닌가요?" "미안해. 카인이 싫어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가비크로서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한 순간에 내가 잃은게 너무 많았다.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의 죽음으로 귀족들이 세인트를 차지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법사의 탑을 짓게되어 그것이 해결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가비크와 함께왔던 모든 마법사들이 내 반응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법사이지만 감히 탑을 갖게 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한다. 그만큼 마법사가 마법사의 탑을 갖기란 요원한 일이다. 마법사의 탑을 갖기위한 조건에 부합되는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세상에 나처럼 운이없는 사람이 있을까. 에휴." 과거를 돌이킬 때마다 탄식하던 말이 버릇처럼 튀어나왔다.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감당하느라 자살까지 한 나에게 왜 이런일이 생기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카르시온 제국에 내 이름이 알려질테니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지가 막막했다. '당분간은 마법길드의 결정에 따라야겠지.' 내 뜻이 아니지만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황제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거절이 불가능한 것이다. 세인트 사람들에겐 축복이지만 나에겐 저주이다. 가비크는 수차례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그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가비크는 내가 마음을 진정시키자 마법이론을 정립(定立)시키기 위해서 토론을 벌였다. 세 명의 마도사와 마법사들이 함께온 이유가 마법이론의 정립을 돕기 위해서이다.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들을 납득시켜야 할 이론을 건성으로 정립시킬 수 없는일 아닌가. 정령사의 마나가 마법사의 마나를 포용할 수 있으며 특히 물의 정령사의 마나는 치료능력이 함유되어 있어서 마나폭주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새로운 마법이론을 정립시켰다. 정립된 이론은 모든 마법사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으로 완성되었다. "마나폭주에 관심을 갖지않을 마법사는 없을테니까 완벽해." 가비크는 완성된 마법이론을 읽어보며 말했다. 세 명의 마도사와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립시켰지만 마법길드의 모든 마도사들의 도움까지 받아서 완벽히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론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마나폭주가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앞날을 생각해 완벽을 기하려는 것이다. ------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는 프리온 재상이 가져온 마법길드의 서신을 읽어보고 사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마법길드에서 마법사의 탑을 짓겠다고 서신이 왔는데 그 세부내용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기가막힌 방법을 찾아냈는지 신기했다. "마법사는 천재라더니만 역시 다르군. 나라면 절대 생각하지 못할 방법이야."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에드 황제의 감탄에 프리온 재상도 같은 생각이었다. 에드 황제는 마법길드에서 보낸 서신을 여러번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에서 놓질 못했다. 아무리 읽어봐도 웃음짓게 만드는 서신이었다.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서 완성된 제국법이니 귀족들도 발뺌하지 못하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에드 황제의 농섞인 질문에 재상이 대답했다. 마법길드에서 보낸 서신에는 마법사의 탑을 개척지역인 세인트에 짓겠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장점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 항목이 황제를 기쁘게 했다.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이 생기면 에드 황제가 추진했던 동지역 개척에 뒤늦게 참여한 귀족들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개척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세인트가 탑의 관리하에 이루어지게 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제국법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무도 반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신에는 그 외에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될 카인이란 정령사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는데 그것이 또 한 번 에드 황제를 기쁘게 했다. 그동안 마법사에게 가장 치명적이라 생각했던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는 마법이론을 정립한 것이다. 정령사가 마법사의 탑 주인이라는게 이상하긴 하지만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는 결과를 생각한다면 누구도 따지려들지 않을 사항이었다.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를 치료할 수 있다면 국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겠군.' 에드 황제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얼마만에 웃는지 볼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에게서 마법사의 탑이 완성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에드 황제는 나중에 카인이란 정령사를 만나게 된다면 상을 주리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서신을 읽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0 회] 14. 정령사 가비크가 마법길드로 돌아간 이후 세인트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일인지 연유를 물었다. 하늘에서 마법사들이 나타나더니 나와 한나절이나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으니 불안한 것이다. 가뜩이나 귀족의 병사들이 물러난 이유를 알지못해 냉랭한 분위기에서 말이다. 사람들의 불안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법사의 탑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마법사의 탑이 세인트에 생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듣게된 사람들은 좋아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못했다. 마법사란 존재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수로 이해시키겠는가. "이곳에 생길 마법사의 탑 주인에 대해서 알수 있을까요?" 로이한이 두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마법사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고있는 사람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하하"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세인트에 생겨날 마법사의 탑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색한 나의 모습에 로이한처럼 모든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설마 탑의 주인이 악독한 성격을 가졌나요? 그런가요?" "말하기가..." "자꾸 피하지 마시고 진실을 말씀해 주세요." 모든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이 탑의 주인을 밝히라고 재촉했다. 세인트 사람들에겐 탑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가 무척 중요할 것이다. 악마같은 마법사가 탑의 주인이 되면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 횡포를 부리는 귀족들보다 더욱 끔찍한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리시아 제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마법사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는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극소수일 뿐이다. 그런 마법사가 세인트를 관리하게 생겼으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것이다. "마법사의 탑 주인은 제가 될 겁니다." 내 발언에 사람들이 순간 입을 벌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를 않았다. 놀랍다기 보다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저기 카인씨는 마법사가 아니시잖아요?" "정령사가 어떻게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되는거죠?" 나는 질문을 듣고 마법길드와의 관계를 설명하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간단히 이야기해도 한 시간은 걸릴테니 말이다. 나는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조리있게 설명해 주었다. 모든 사실을 말해주었을 때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기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된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적어도 귀족들의 횡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법사의 탑이 세인트에 생겨나서 얻게되는 장점을 모두 말해주진 않았다. 마법사의 탑이 생기면 모두들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귀족의 횡포에서 벗어난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 즐거워했다. 그 모습에 나또한 기분이 좋았다. 진실이 밝혀진 다음날부터 세인트 사람들은 활기찬 모습으로 생활했다. 귀족의 병사들이 사라진 이유도 알게 되었으니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마법사의 탑 주인이 내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전과 똑같이 대했다. 세인트 사람들이 즐겁게 지내는 반면 나는 한 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애버른 가족과 세실리아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귀족들이 세인트를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복수한답시고 당사자를 찾아내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이 옳바른 선택일까?' 나는 새생명을 얻고나서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았다. 사비나와 함께한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원치않은 선택을 하게되었고 동료를 만들게 되었다. '그저 조용히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게 된 이후로 항상 조심했다. 흘러간 역사를 살펴봐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마법길드의 마도사만을 보아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수동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지냈다. 하지만 수동적인 입장으로 인해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에 휘말려 결국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되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모든 사건들이 모두 나로인해 빚어진 일이다. 내가 원하는 의지대로 살기 위해서 취한 행동들이 스스로를 묶어버린 결과를 낳은 것이다. 나는 사비나가 죽은 이후의 행동들을 모두 되짚어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생각했다. '엔트는 어떻게 생각해?' 엔트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의견을 물었다. 지금의 내 고민을 들어줄 사람은 엔트밖에 없어서 무리인줄 알면서도 정령계를 통해 대화를 나눴다. 엔트가 아니고서는 나에 대해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인과 다르지만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한적이 있어.' '정말이야? 무슨 고민이었는데?' '나는 크라이 숲의 엘프들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게 무척 즐거워. 하지만 얼마전에 패로이 숲에 살고있는 엘프들이 찾아와 자신들이 살고있는 숲으로 나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더라구. 나를 보호하던 크라이 숲의 엘프들조차 보내려고 했지.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말이야. " 엔트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100명의 엘프밖에 살지않는 크라이 숲에서 고대에나 볼수 있었던 생명수 나무 엔트가 탄생했으니 엘프의 수가 많은 패로이 숲 엘프들이 관심을 보이는게 당연하다. 엔트의 입장에서도 크라이 숲보다 패로이 숲에서 사는게 많은 엘프들에게 보호받을 수 있어서 좋을 것이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정말 엔트를 떠나보내려고 했어?' '정말이야.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나를 위해서 그렇게 결정하려고 했어. 패로이 숲은 엘프의 수가 5천여명이나 되니까 그곳이 나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거지. 하지만 나는 엘프들의 관심이 적어도 크라이 숲의 엘프들과 살고싶어서 남았어.' '그랬구나. 난 그런일이 있었는지 몰랐어.' 나는 엔트의 고민을 들으며 감동했다. 패로이 숲으로 가면 매일같이 엘프들에게 둘러싸여 관심을 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심이 적어도 그동안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주던 크라이 숲의 엘프들과 지내기로 결정했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선택을 할 필요가 없었어. 그저 크라이 숲의 엘프들만 알면서 지내게 되었을테니까. 카인의 말마따나 알려지게 된다면 스스로의 선택에 제약을 받게 되겠지. 하지만 최소한 수동적인 입장은 버리는게 좋을거야.' '수동적인 입장을 버리라고? 충고 고마워.' 엔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곧바로 정령계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정령계에서 더이상 버틸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숲의 엘프들이 엔트를 데려가려는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엔트가 보통 생명수 나무와는 다르게 인간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나에 대해서 제국에 알려질 것을 대비해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나름대로 마음가짐을 바꿨다. 이제는 어차피 알려지게 된 상황이다. 그러니 엔트의 충고대로 수동적인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능동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법이론을 정리하고 간 가비크는 그 이후로 몇번 더 찾아왔다. 한 달 이후에 있을 마법이론의 발표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이다. 그 외에도 가비크는 길드에 있는 모든 마도사들의 도움을 통해서 정리된 마법이론을 가져와 내게 암기하도록 조치했다. 나는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앞으로 어떤 삶이 기다릴지 가슴이 답답했다. 원치않았던 선택이었기에 기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가비크의 도움을 받아 마법이론의 발표도 준비되었고 증명할 방법도 있었다. 이제는 마법이론을 발표하는 날만 다가오면 된다. ------ "이럴수는 없어. 우리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리온 가주는 마법길드에서 보내온 서신의 내용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동안 세인트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간장 태우며 노력했는가. 자존심까지 죽여가며 다른 두 귀족가문과 협력까지 했는데 모든게 물거품이 된 것이다. "포기합시다. 마법길드에서 마법사의 탑을 짓겠다는데 무슨수로 세인트를 차지해요? 더구나 마법사의 탑에 관련된 사항은 제국법으로 모든 귀족가문의 동의까지 얻어서 만들어진 것이라 반대할 수도 없소." "방법이 있을테니 함께 찾아봅시다." 제노 가주가 두손들고 포기하자고 말하자 루바인이 방법을 찾자고 대답했다. 루바인은 포기하려는 두 가지를 설득시켰다. 세 가주 모두들 개척지역의 발전에 중심지가 될 세인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리온과 제노가 포기한듯한 마음을 비춘 것은 마법길드에서 알려온 사실을 알고 상심했기 때문이다. 세 가주로서는 마법길드에서 추진하는 계획에 헛점을 찾아 계획을 포기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세인트를 마음놓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길드가 순순히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여러가지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세 가주는 마법길드의 계획에 몇가지 헛점을 찾아냈고 대응책을 마련했다. 세 가주로서는 마법길드에서 추진하는 계획을 완전히 무마시켜야 했다. 설사 무마시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이 들어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게 살길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2 회] 15. 마법사의 탑 카르시온 제국 황제의 명으로 전국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에게 귀족회의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관례상 제국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항은 수도에 머무는 대귀족들이 모여 결정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제의 명으로 귀족회의가 소집된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요한 사항이라는 뜻이었다. 지방에 머무는 귀족이 수도에 도착하기 위해서 한 달의 기간이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회의의 주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긴급을 요하지 않으리라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단정지었다. 귀족회의를 하는 날짜가 한 달 이후로 발표되었지만 능력있는 가문의 귀족들은 발표 다음날부터 수도 말린에 도착하여 인맥을 동원해 회의가 소집되는 이유를 미리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귀족들은 회의의 주제를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귀족회의가 한 달 이후인 것은 지방에 머무는 귀족을 위해서이다. 부가 넘치는 귀족이라면 마법길드 분점을 통해서 마법진을 이용해 단번에 수도에 도착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귀족이 허다하다. 몰락귀족이야 영지도 없어서 소집되지도 않은 것을 생각한다면 그나마 낫지만 말이다. 귀족들은 회의의 주제를 파악하면 자신의 가문에 유리한 입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러가지 준비를 마련한다. 그래서 수도 말린은 황제의 귀족회의 발표 다음날부터 무척 혼란스러웠다. 대귀족 가문들의 경우는 미리 황제로부터 통보를 받아 회의주제를 알고 있어서 다른 귀족에 비해서 대조적이었다. 황제는 귀족회의 발표 이후에 황궁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황궁에 소속된 기사단과 근위대 그리고 병사들이 황궁의 주위를 둘러싸고 철저히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귀족이라 할지라도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황궁을 출입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어떤 귀족이라면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수도 말린에 엄청난 귀족들이 모이자 한 달 이후에 무슨 주제로 회의가 진행될 것인지 말들이 많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의 주제에 대한 소식이 모든 귀족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귀족회의에 안건으로 제시될 주제는 한 동안 생겨나지 않았던 마법사의 탑에 대한 것이었다. 마법사의 탑은 단순히 마법길드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사의 탑을 짓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소모되는데 그 비용이 귀족들에게 징수된 세금으로 충당되니 귀족회의는 필수였다. 하지만 근래들어 새로운 학파를 만들어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가 줄어드는 추세라 귀족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주일 동안 귀족들은 모여서 마법사의 탑에 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마법사의 탑이 더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법사의 탑 자체가 하나의 대귀족 가문의 탄생과 비슷한 권력구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개척이 이루어지는 동지역에 탑이 세워질 예정이라 파문이 예상보다 약했다. 수도 말린은 수많은 귀족이 모여들어 모든 분야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지방 귀족들은 말린에 도착하자 마자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 쉴세없이 힘있는 귀족가를 방문하여 선물을 주며 얼굴 익히기에 바빴다. 특히 힘없는 귀족가문은 말린에 오는 기회가 많지도 않아서 더욱 열을 올렸다. 말린의 분위기와 반대로 황궁은 황제의 명령으로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조용한 분위기였다. 귀족들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 황궁의 통제는 귀족회의가 있을 때까지란 해명도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오래전부터 황궁은 귀족들에게 개방되어 왔지만 권력의 암투가 발생할 경우에는 통제되기도 했다. 카르시온 제국의 재상 프리온은 귀족회의 발표 이후에 황궁에서 지냈다. 본래 프리온은 황제와 같은 성을 쓰기 때문에 황궁에서 지내도 문제없지만 관례에 따라서 외부에서 머물러왔다. 황제의 형제들이 반역을 일으킬 소지가 있어서 황궁에 머물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한 경우이다. "폐하 귀족들의 동향(動向)을 보고하겠습니다."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프리온은 에드의 부탁으로 황궁에서 머물며 재상으로 해야할 일들 이외에도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요즘같이 중대한 일을 처리하는데도 그렇게 예절을 따져야겠소? 빨리 보고나 하시요."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든 귀족들이 마법사의 탑에 대해서 반대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권력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마법사의 탑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면 내년부터 귀족들이 황궁에 내야할 세금이 올라가는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개척에 뛰어든 귀족가에서 다른 귀족들을 설득시키고 있어서 더욱더 반대하는 귀족이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자신들이 차지한 개척지역의 중심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이 생기면 그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되니 당연한 행동입니다." "큰 문제는 아니군. 그 정도야 귀족들이 카인이란 정령사의 마법이론만 발표된다면 모두들 납득할테니까 말이야." 에드는 프리온에게서 귀족들 동향을 듣고서 가볍게 대답했다. 마법이론만 발표되면 그것을 반대할 귀족은 아무도 없으리라. 에드는 프리온에게 귀족들의 동향 이외에도 요즘에 벌어지는 자잘한 사건들을 모두 보고받았다. "프리온 재상 정말로 수고했소. 앞으로 보름만 부탁하겠소." "걱정마십시요. 에드 폐하" 프리온은 황제의 말에 조심스럽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앞으로 이주일이 남은 귀족회의를 위해서 프리온이 재상으로서 처리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제국적으로 국력이 상승되는 길이기도 하지만 황권이 강화되는 드문 기회라 한 가지리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에드 황제는 프리온 재상이 나가자 곧바로 페이시온 가문의 가주를 불러들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 에드의 성은 페이시온이다. 하지만 에드가 페이시온 가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페이시온 가문에서 황제가 등극하여 지금까지 황제가 혈연으로 계속 이어져 현 황제의 에드도 페이시온의 성을 쓰고있을 따름이다. 이름뿐이지만 페이시온 가문의 귀족들은 황제가 같은 성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여러가지 혜택을 받고있다. 에드는 페이시온 가문의 가주 케이스가 들어오자 반갑게 맞아들였다. 같은 성을 쓴다는 자체만으로도 반갑긴 하지만 속마음은 다른데 있었다. 에드가 일주일 전에 페이시온 가주를 통해서 정말로 어려운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케이스 페이시온이 에드 페이시온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일주일만에 보게되니까 반갑구나." 페이시온 가주는 에드에 비해서 한참이나 어렸다. 귀족가문의 가주가 대부분 50대를 생각한다면 30대 중반의 페이시온 가주 케이스는 무척이나 어린 경우였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보통의 귀족가들은 가문을 위한 권력투쟁을 쉴세없이 벌인다. 다른 귀족가문과 연계를 위해 만남도 자주 갖고 대외적인 활동도 끊임없이 하기 위해서 가주에게 연륜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페이시온 가문은 현 황제가 페이시온의 성을 쓰기 때문에 권력투쟁에 뛰어들 수가 없어서 가주를 굳이 연륜을 가진 사람으로 뽑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황제의 외척이 정치적으로 활동을 못하는 이유와 비슷한 경우이다. "지금까지 진척된 일을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제가 직접 어쌔신 길드와 용병길드를 방문하여 일리시아 제국을 비롯해 가까운 주변국인 왕국과 소국까지도 폐하가 말씀하신 조건에 맞는 마법사를 영입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착수금으로 그들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거금을 주었으며, 성공을 하는 경우에는 그보다 몇배의 금액을 준다고 제 이름을 걸고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이주일만 더 기다리신다면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수고했네. 평민에게 이름까지 걸어가며 수고하다니 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겠네." 에드는 케이스에게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케이스가 나이는 어리지만 한 가문의 가주에 속하고 더구나 자신이 부탁한 일을 하기위해 평민에게 이름까지 걸면서 약속을 했으니 미안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에드 황제폐하, 감히 주제도 모르는 소인이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폐인이나 다름없는 마법사를 영입하려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에드는 케이스의 질문을 받고 인상을 찡그렸다. 에드가 케이스를 통해서 페이시온 가문에 부탁한 것은 카르시온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를 모두 영입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에드로서는 그 이유를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밝혀지면 지금까지 에드와 마법길드가 계획한 것들이 무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조심해야지.' 에드는 사실을 말해줄까도 생각했지만 보안을 위해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법길드에서도 에드처럼 황궁을 통제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카인의 마법이론을 밝히기 전까지 그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상황이었다. 에드가 케이스에게 부탁한 내용은 마법길드에서 알려준 사실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에서 폐인이 된 마법사를 영입하여 카인을 통해 치료하고 카르시온 제국의 국력을 강화시키자는 방법이었다. 마법이론이 발표되면 다른 나라에서도 카인과 비슷한 물의 정령사를 확보하여 마나폭주로 폐인이 되었던 마법사를 치료하려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카인의 경우는 특별하기 때문에 치료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마법길드에서는 다른 물의 정령사도 능력만 뛰어나다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는 카르시온 제국에 더이상 많지가 않은 상황이다. 대부분 카인에게 치료를 받아 정상을 되찾았고, 설사 있더라도 대부분 치료가 가능하여 마법길드에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 심하지 않으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뿐이지 마법길드에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적국 일리시아 제국만 하더라도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가 엄청나다. 카인의 마법이론이 발표되기 전에 그들을 모두 영입하자는게 마법길드와 에드 황제의 생각인 것이다. "도움을 준 것은 고마우나 말하지 못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주게. 이주일만 지나면 자연 알게될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성급히 질문을 한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호기심에 질문을 했던 케이스는 에드 황제의 대답에 얼굴을 붉혔다. 케이스는 에드의 부탁으로 귀족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다리품을 팔아 용병길드와 어쌔신 길드를 방문했으니 충분히 이유를 물어볼 자격이 있었지만 에드의 대답을 듣고서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에드가 황제라는 엄청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곤란함과 미안함이 담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일만 잘 처리되면 페이시온 가문도 이참에 빛을 보게 될 것이네." 에드는 케이스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모든게 에드의 생각대로 처리되면 황권이 강화되어 페이시온 가문도 앞으로 당당히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스는 에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채로 물러났다. '폐인이 된 마법사가 정상이 된다면 그들은 치료를 한 우리 카르시온 제국에 충성하겠지.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제국에 남아있는 자체가 힘이 될거야.' 에드는 케이스가 어쌔신 길드와 용병길드에 부탁한 일이 제대로 처리되어 카르시온 제국에 큰 힘이되길 바랬다. 다른 나라에서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를 영입하기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케이스에게 부탁을 받은 어쌔신 길드나 용병길드에서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할테니 어느정도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새로운 마법사의 탑은 카르시온 제국의 국력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기회이다. 마법사 한 명의 가치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앞으로 마나폭주의 피해를 걱정해 소극적으로 마법실험을 하던 마법사들도 적극적인으로 입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발전이다. 에드는 이주일 후로 다가온 귀족회의를 위해 수많은 일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리온 재상은 물론이고 마법길드와 상의할 것도 많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도 모색해야 했다. 에드는 그 모든일을 즐거운 기분으로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 바이거는 학생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일리시아 제국에서 얼마 안되는 마도사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귀족 못지않게 생활했지만 지금은 평민이 교육받는 아카데미에서 마법이론을 가르치는 선생일 뿐이었다. '그 말이 사실일까?' 바이거는 어제밤 찾아온 손님에 대한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카르시온 제국의 어느 귀족가문에서 자신을 영입하고 싶다고 밝힌 것이다. 당장 달려가 첩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고발해야 하겠지만 자신의 입장을 생각할 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폐인이 된 나를 무엇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일까?' 바이거로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바이거는 일리시아 제국의 마법길드에서도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이후에 내쫓겨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폐인이 되어도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평민보다야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현실은 무척이나 냉정했던 것이다. 국력을 위해 제국적인 보호와 마법길드의 지원아래 평생을 안전하게 마법이나 수련하던 마법사가 현실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느정도의 돈을 갖고 있었지만 상인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이용당해 빼앗기거나 사기당해 금새 빈털털이가 되었다. 현실에 어리숙한 그는 주변 사람들의 먹음직스런 먹이감이던 것이다. 대부분의 마도사가 그렇듯 바이거도 굶어 죽으면 죽었지 자존심 때문에 길드에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도움을 청한다 해도 폐인이 된 자신을 도와줄지도 의문이었다. 더이상 길드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렵게 현실에 적응해 평민의 자녀들이 다니는 저급 수준의 아카데미에 취직하여 마법이론을 가르치며 생활할 수 있었지만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찾아온 일이라 수많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제밤에는 당황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바이거는 오늘밤에도 찾아온다는 카르시온 제국의 사람에게 좀더 대화를 나눠서 자신이 궁금한 사항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찾아온 사람이 카르시온 제국에서 온 것인지 확인도 해야하고, 무엇 때문에 자신을 원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밤에는 너무도 당황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 오포는 카르시온 제국의 어쌔신으로 목숨을 걸고 적국 일리시아 제국으로 넘어왔다. 지금 맡고있는 임무만 해결하면 길드장이 말한 내용대로 평생 호의호식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은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병사들이 들이닥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그 마법사가 고발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오포는 오른손에 쥐고있던 텔레포트 마법이 담겨있는 스크롤을 가슴속에 집어넣었다. 마법사가 자신을 첩자로 신고하여 병사들이 들이닥치면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 도망갈 생각이었다. 어쌔신 길드에서는 이번 임무를 위해서 귀족도 구경하기 힘들다는 마법 스크롤을 분에 넘치도록 지원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임에도 마음이 든든했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일리시아 제국으로 넘어올 때에는 마법길드에서 마법진을 통해 텔레포트를 이용해 넘어왔다. 일리시아 제국의 지역에 대한 텔레포트 좌표를 알 수 없어서 상당히 높은 허공에 무작위로 텔레포트하여 넘어왔고, 허공에 텔레포트 된 오포가 지상에 떨어지기 직전에 플라이 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사용하여 무사한 것이다. '어떻게든 설득을 시켜야 할텐데.' 오포는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다. 바이거라는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를 카르시온 제국으로 데려오라는 임무였다. 무력을 동원해서는 절대 안되고 오직 회유만이 가능하다고 명령을 받았다. 문제가 있다면 오포는 어쌔신으로서의 수련을 받았지 사람을 설득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교육받은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암살자로서의 수련을 어려서부터 받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적어 대화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은 오포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것은 오포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명령을 받고 누군가를 죽이는게 쉬울 것이다. 더구나 일리시아 제국어에 능숙하지 못해서 말하는 자체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포가 뛰어난 어쌔신이라서 이번 임무를 맡게된 이유도 있지만 일리시아 제국어를 할 줄 알아서 파견된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타박.타박. 오포는 밖에서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신이 기다리던 바이거가 직장에서 돌오왔음을 알아챘다. 오늘밤 다시 찾아온다고 말해두었지만 사실은 하루종일 바이거의 집안에 숨어 있었다. 어쌔신에게 자신의 모습을 은폐하는 능력은 기본중의 기본에 속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오포가 밖으로 돌아다닐 수 없었던 이유중에 하나가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나 마법사를 만나면 자신의 은폐가 쉽게 노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출된 상태로 다닐수도 없어서 바이거의 집에 은폐하여 하루를 보낸 것이다. 바이거는 자신의 집에 도착하여 식사도 거르고 아무일도 하지않고 의자에 앉아서 계속 고민을 했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그를 원하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도사라고 하지만 지금은 폐인이 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그를 필요로 한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마법길드의 중요한 정보를 알고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마법공식처럼 마법사에게 쓸모있는 정보를 알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마법길드에서 마법사라면 모두 지원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다. 오포는 은폐한채로 바이거의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한 말재주가 없는 오포로서 방법이 있을리 없었다. 그저 진실로 다가서는게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을 뿐이지만 과연 성공할지 의문이었다. "허억! 읍!" 오포가 결심을 하고 은폐를 풀고 모습을 드러내자 바이거가 놀라서 신음소리를 뱉으려다 자신의 입을 막아서 소리를 막았다.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미안하지만 어제밤에는 당황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다시 말씀해 주겠소?" 바이거가 심호흡을 하고 자신있게 말했다. 오포는 바이거를 찾아내기 위해서 며칠동안 위험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바이거를 발견하자 흥분하여 어제밤 설득하기 위해서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바이거의 입장에서 황당한 사실 뿐이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오포로서는 차라리 납치하는 것이라면 기절시켜서 데려가겠지만 회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대로 돌아오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난감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도 폐인이 된 당신을 누군가가 왜 필요로 하는지 도저히 알지를 못하겠소. 어쌔신 길드에서는 단지 당신을 누군가의 부탁으로 모셔오라는 의뢰만을 받은게 전부였소. 나로서도 그 외에는 알지 못해서 정말 궁금한 상태요.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의뢰를 한 사람이 당신을 모셔오기 위해서 우리 어쌔신 길드에 어마어마한 자금은 물론이고 귀족도 감히 구경하기 힘든 마법 스크롤까지 지원했다는 사실이요." 오포는 가슴속에 있는 마법 스크롤을 꺼내어 바이거에게 보여주었다. 오포는 바이거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있는 사실을 빠짐없이 말했다. 솔직히 정작 중요하리라 생각하는 사실은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단지 바이거를 카르시온 제국의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바이거는 오포가 내민 마법 스크롤을 살펴보며 만든이의 솜씨에 감탄했다. 최소한 마도사가 제작한 스크롤이 분명했다. 마법길드에서 취급하는 스크롤도 구현확률에 따라서 급수가 정해져 있는데 오포가 내민 스크롤은 실패율이 거의 없을만한 최고급 스크롤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군. 후훗.' 마도사가 만들었으리라 생각되는 마법 스크롤을 살펴보며 바이거는 약간 뿌듯한 마음이 생겼다. 폐인이 된 자신을 누군가가 필요로 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줄 몰랐다. 지금이야 저급 아카데미에서 마법이나 가르치는 선생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마도사로 마법사들의 우상이었다. '그래. 어차피 지금처럼 살수는 없어. 이번이 내 생애 마지막 희망일지도 몰라.' 바이거는 자신을 누군가 절실히 원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 사실에 삶의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일리시아 제국과 적대적인 카르시온 제국이지만 애국심이 깊지않은 마법사에게 넘어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일리시아 제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바이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데 반해 카르시온 제국의 누군가가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하고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무슨일인지 몰라도 당신 뜻대로 카르시온 제국으로 따라가겠소." "정말이요?" "마도사가 거짓말 하는거 보셨소? 물론 지금이야 마법이나 가르치는 주제이지만 말이요." 바이거는 오포의 말에 반문을 하려다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다시금 말을 바꿨다. 엘프와 마도사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평민조차 알고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마도사가 말한 내용을 믿을 수 없다면 큰 실례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재의 바이거는 폐인이 되어 마도사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 당장 떠나도록 합시다. 누군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지 몰라도 내 생각에도 지금의 생활보다 최소한 못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오." 오포는 바이거의 지저분한 방을 둘러보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바이거가 살고있는 집은 무척이나 보잘것 없었다. 혼자 사는 것은 둘째치고 청소도 제대로 하지않아 더러운 편이었다. 어쌔신 길드에 바이거를 왜 필요로 하는지 몰라도 길드에 의뢰를 한 것 자체만으로도 지금의 생활보다 훨씬 나으리라 생각하는 대우를 해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드디어 임무를 완수했구나. 나는 이제 자유다.' 오포는 바이거를 설득하여 데려갈 수 있게되어 정말 기뻤다. 더이상 어쌔신 생활을 접고서 평생 호의호식 하면서 살수있게 된 것이다. 어쌔신 길드장은 임무를 성공할 경우 상당하기 힘든 금액을 약속했다. 선수금으로 받은 돈으로도 엄청났으니 절대 거짓말일리 없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3 회] 15. 마법사의 탑 마법길드의 책임자 가비크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의논한 사항들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정도로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논이라기 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마법길드 분점이 세인트에 생겨나서부터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여 왕래가 더욱 빈번했다. 마법길드의 분점은 상당히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만이 설치된다. 왜냐하면 마법길드의 분점에는 텔레포트 마법진이 필수적으로 설치되어 운영되기 때문이다. 마법진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필요하니 쓸모없는 장소에 설치되면 심각한 인력낭비이다. '지금쯤 귀족들끼리 난리났겠군.' 나는 수도 말린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귀족들을 생각했다. 세인트 정착민들은 마법사의 탑 주인이 나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있지만 그들을 모르고 있다. 설사 알려진다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본래 세인트에 조용히 지내던 내가 귀족들의 동향까지 알게된 것은 가비크 덕이였다. 가비크가 찾아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귀족회의에 내가 참석해서 할 일들을 대신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이론을 발표하고 마법사와 귀족들에게 증명하기 위한 방법까지 말이다. 사실 방법이라야 아주 간단하다. 직접 마나폭주로 폐인이 되었던 마법사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서 치료하는 장면을 보여주면 그만이니 말이다. 가비크는 내게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를 카르시온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데려오는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서 그들을 모두 치료해 줄 것을 부탁했다. 상당히 곤란란 부탁이었지만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가비크가 부탁한다며 말했지만 사실은 마법길드에서 결정한 일이 분명했다.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얻게된 이후로 다른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조심했는지 그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능력이 있으면 쓰고 싶어지고 나도 그런 마음이 한 두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상급 정령을 소환한다고 밝혀지면 제국에서 나를 가만히 나둘리 없으리라 생각하며 조심해왔다.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가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마법길드에서 이렇게 이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법사의 탑이 완성되면 다시는 이런일이 없겠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마법사의 탑 주인은 설사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크게 간섭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 때문에 탑 자체가 세워지는데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지지만 말이다. 내가 탑의 주인이 되는 순간부터 설사 마법길드에서도 간섭하지 못할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카르시온 제국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세실리아의 죽음 이후에 순차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이렇게 커질줄은 몰랐다. 소피아는 신전에서 매일같이 세실리아를 위해 기도한다. 그런 간절함이 통했는지 그녀의 신력이 많이 높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피아의 포교 활동으로 세인트에 천신을 믿는 사람이 늘었다. 일부 사람들은 귀족들의 횡포가 사라진 이유를 소피아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구나 앞으로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이 생겨나면 귀족의 간섭에서도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있다. 마법길드의 마도사들은 나의 마법이론 때문에 카르시온 제국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 귀뜸했다. 나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변화에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운명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소피아가 신전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결국 내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라고는 노예 세렌밖에 남지 않았다.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된다는 현실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스스로 원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거부할 때 발생할 파장을 생각한다면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카르시온 제국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마법길드의 의도에 따라 마법사의 탑 주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서 데려오는 폐인이 된 마법사들까지 치료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의 경우는 정말로 황당할 뿐이다. '엔트 잘 지냈어?' 유일하게 내게 위안을 주는 친구 엔트를 정령계에서 불렀다. 멀리 있으니 정령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대화조차 할 수가 없다. '나야 하루하루가 즐겁지. 크라이 숲에는 대화를 하고싶은 친구들이 무척 많으니까.' '친구가 많아서 좋겠다.' 엔트는 크라이 숲에서 행복하게 지낸다. 엔트 자신이 나무이니 크라이 숲의 수많은 나무와 친구이고 그들과 하나하나 대화를 나눌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물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다. 엔트가 한참동안 크라이 숲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엔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본래 내가 원하던 삶을 떠올렸다. 사비나가 죽은 이후에 여행을 하고서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 조용히 사는게 본래 나의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어찌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카인은 크라이 숲에 언제 돌아올거야?' '나도 모르겠어. 앞으로 조용히 지내긴 틀렸다고 봐야지.' '인간생활은 왜 그렇게 복잡한거지? 예전처럼 크라이 숲에서 엘프들과 함께 지내면 좋을텐데.' 나는 엔트의 대답에 다시 살아났을 때의 생활을 떠올렸다. 엔트에게 생명력을 주입받고 살아났지만 정상이 되기까지 일년동안 엘프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그때는 살아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나중에 만나게 될거야.' 엔트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고 정령계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리 생명력이 넘쳐 흘러도 인간인 내가 정령계에서 버틸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엔트와 대화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회의가 찾아온다. 사람은 뚜렷한 목적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옳고 그른 것과 상관없이 공통된 사항이다. 예외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살아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산다는 자체가 즐겁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즐거운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누구라도 60년을 암흑속에서 이성만 가진채 생활한다면 나와 비슷할 것이다.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휘둘린 삶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법길드의 설명에 따르면 최소한 탑 주인으로 인정받으면 누구도 나의 삶에 간섭하지 못할 것임에 위안을 삼고 있다. ------ 카르시온 제국과 일리시아 제국의 전쟁이 시작된지 수년이나 지났지만 결말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여건상 두 제국중에 하나가 나머지 제국을 정복한다는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제국 크기를 생각하면 전쟁을 치루지 않고 오직 이동만 해도 최소한 한 달이나 걸린다. 어느 한쪽의 국력이 강하여 국경지역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도 정복하기 위해서 적국 지역에 침략하면 그 순간부터 패배의 연속이 시작된다. 일단 수많은 병사에게 지원되는 전쟁물품 조달이 불가능하다. 수천명도 아니고 수십만의 병사의 전쟁물품 조달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도 마찬가지이다. 두 제국은 사용하는 언어도 달라서 정복해도 다스리는데 많은 문제가 따른다. 결국 모두 죽여야하는데 그것이 가능할리 없었다. 그 외에도 귀족은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서도 명예를 중시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순탄하게 전장이 형성될리 만무하다. 왕국이나 소국은 전쟁이 발생하면 나라의 사활이 걸린 일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섬멸하는데 주력한다. 반면 제국은 정복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워 천하태평하게 예의를 따지며 전쟁을 치룬다. 기사는 기사끼리 대결을 펼치고, 마법사는 마법사끼리 차마 눈뜨고 보기힘든 어이없는 전쟁인 것이다. 일반 병사들만 서로 피터지게 싸울 뿐이다. "남동쪽이다. 전속력으로 달려라!" 일리시아 제국의 국경의 감시를 책임지는 버랜트는 말을타고 달리며 소리쳤다. 그의 뒤로는 많은 병사들이 남동쪽을 향해서 죽어라 달리고 있었다. 잠시후 버랜트의 눈에 두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축하고 카르시온 제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도주중이었다. "궁수들 공격하라!" 버랜트는 최근들어 겪은 경험을 생각하며 궁수들에게 지시했다. 말을 타지도 않고 죽어라 달렸지만 활을 들고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국경을 감시하는 병사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화살을 쏘는 자세가 무척이나 빠르고 안정된 자세였다. 휘이익. 쉬이익. 많은 수의 화살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피할 수 없을 만큼의 화살이 날아갔다. 대체적으로 전장에서 사용되는 화살은 견제용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정확도가 떨어지는게 보통인데 방금 쏘아진 화살은 그렇지가 않았다. '제발 죽어라.' 버랜트는 두 사람이 궁수들이 날린 화살에 맞길 바랬다. 하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번번히 실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버랜트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도주하던 사람이 화살이 날아옴을 눈치채더니 가슴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찢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젠장맞을!" 버랜트는 도주하던 두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얼마전부터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이 많아졌다. 사실 두 제국은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상대편 제국으로 넘어가려는 사람이 없으니 첩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자들이 귀족도 감히 구경하기 힘든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는데 있었다. 두 제국이 맞닿은 국경에는 마법을 막아내는 대단위 마법진이 수없이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하위 마법의 경우는 대부분 막아내거나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도사가 만든 마법 스크롤을 사용하는지 몰라도 마법이 모두 성공하여 버랜트의 손에서 빠져나갔던 것이다. 버랜트가 국경을 넘나드는 첩자들을 잡을 번 한 경우도 많았지만 대부분 마법 스크롤을 과도하게 사용해 애꿋은 병사들만 죽음으로 몰아놓은 결과를 낳았다. 버랜트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위와같은 사실을 상부에 모두 보고했지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모두 돌아간다." 버랜트가 두 명의 첩자들을 추척하느라 치친 병사들에게 외쳤다. 국경 지역을 지키는 책임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임무라 병사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년이나 지속된 전쟁인만큼 서로 통보하고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국경을 지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분명히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버랜트는 카르시온 제국에서 넘오는 첩자들의 공통된 점을 발견하였다. 일단 병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첩자들의 복장이나 무기가 상당히 독특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첩자들 모두가 귀하다는 마법 스크롤을 가슴속에 두둑히 가지고 다닌다는 점이다. 마법 스크롤 한 장은 부르는게 값이다. 만들기도 어려울 뿐더러 마법길드에서 한정으로 생산하기 때문이다. 마법무구나 마법 스크롤을 만들기 위해서는 6서클 이상의 마도사가 되어야 하는데 마도사들이 귀찮게 마법실험을 하지않고 마법무구나 마법 스크롤을 만들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길드를 위해 어쩔수없이 예의상 만들어주는게 외부로 판매되는 것이니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사람은 왜 납치해가는거야?' 요즘 갑자기 늘어난 첩자들의 공통점중에 가장 의문점이 드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을 데리고 카르시온 제국으로 넘어가는 경우이다. 반신이 마비된 사람을 업고가는 경우가 매우 빈번히 목격된 것이다. 방금만해도 도주하는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은 부축을 받고 있었다. 버랜트가 최근들어 급격히 증가한 괴상한 첩자로 고민하는 모습과 반대로 그에게서 쫓기다 도주에 성공한 두 사람은 온몸을 땀으로 목욕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한 사람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봐 카르시온 첩자용병! 나좀 일으켜줘!" 누워있던 사람이 말했다. 그는 일어나고 싶어도 반신불구라 움직일 수 없었다. 한때는 마법사로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었지만 지금은 카르시온 제국으로 망명하려는 폐인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쿠하틴은 누워있는 반신불구의 사람을 일으켜 주었다. 쿠하틴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위대한 마법사의 부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처음 발견했을 때는 구걸로 연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우. 죽는줄 알았네." "궁금해서 그러는데 당신이 정말로 마법사였소?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야." "거참! 카르시온 제국의 첩자까지 이제는 나를 무시하네." 쿠하틴의 말에 마나폭주로 지금은 반신불구로 폐인이 된 마법사가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이 당해왔던 수모에 비하면 수모의 축에도 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입장 바꿔서 당신은 자신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건..." 쿠하틴의 질문에 앉은 자세를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하던 마법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씀이야." "뭐가 그렇게 복잡해? 어차피 이모양 요꼴로 거지로 살아가느니 누군지 몰라도 나를 필요로하는데 최소한 밥은 먹여주겠지. 안그래?" "물론 그렇겠지요." 마법사의 태평스런 말에 쿠하틴이 할말을 잊었다. 사지가 멀쩡한 거지도 구걸하며 살기도 힘든데 반신불구로 사는게 쉬울리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목숨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쿠하틴은 국경을 넘어 카르시온 제국의 땅으로 돌아온 현실을 느끼며 신에게 감사했다. 지난 이주일 동안 일리시아 제국에 넘어가 온갖 위험을 헤치며 겪었던 일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쿠하틴은 이그노 용병길드에서 A등급의 용병이지만 지금처럼 어려웠던 일은 없었다. 용병길드장의 특별한 부탁으로 의뢰를 맡아서 결국 성공시킨 것이다. 쿠하틴 이외에도 일리시아 제국어에 능숙하고 등급이 높은 용병이 자신과 비슷한 의뢰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처럼 성공하지는 못했으리라. "당신은 나의 보물이니까 이제 업혀서 편히 가라구." 쿠하틴은 지저분한 반신불구의 마법사를 등에 업었다. 물론 마법사였던 사람이라고 믿기진 않지만 말이다. 이 사람은 자신을 평생 호의호식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본래의 의뢰는 등에 업고있는 마법사를 회유하여 데려오는 거였지만 처음 대면하고 회유할 필요도 없음을 느꼈다. 한끼 식사만 대접해도 따라왔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4 회] 15. 마법사의 탑 일리시아 제국의 기사단장은 카르시온 제국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 황궁에 부재중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이라 할지라도 황궁을 지켜야하는 막중한 자리가 비어있을 수는 없었다. 황궁은 절대적으로 안전해야 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일리시아 제국의 황궁에 임시로 기사단장을 맡은 기사는 에스트로 귀족이 아닌 평민이다. 대륙에 존재하는 나라가 신분사회를 지향하지만 그마나 기사에겐 관대한 편이다. 기사가 된다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으로 대우를 받는다. 에스트의 하루 일과는 전장에서 전해오는 전투소식을 매일같이 황제에게 보고하는 일로 시작한다. 수년이나 지속된 전쟁이라 특별하게 생각할만한 소식이 없는게 전부이다. 설사 큰 전투가 발생하여 수천여명이 죽는다해도 제국의 전체적인 병력을 감안할 때 극히 작은일에 해당하여 보고할 가치조차 없는게 보통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첩자들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고?" 일리시아 제국의 로터스 황제는 평소와 다른 에스트의 보고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 수가 수백을 헤아리며 첩자가 마법 스크롤까지 사용하기 때문에 잡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습니다." 에스트의 대답에 황제는 물론이고 함께 있던 대신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하루이틀 지속된 전쟁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첩자를 대거 투입한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엘른 재상 어떻게 생각하시요?" 로터스 황제는 제국의 살림을 맡고있는 엘른 재상에게 말했다. 재상이란 직책을 맡고 있으면 여러가지 다양한 정보를 접하게 되어 그만큼 아는게 많다. 그러니 다른 귀족 대신들에게 묻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다. "요즘들어 카르시온 제국이 이상한 일을 많이 벌이고 있습니다. 마법사의 탑을 짓겠다고 귀족회의를 소집해 수도로 귀족들을 부르고 저희 제국에 수백의 첩자까지 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조만간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에서 귀족회의가 열릴테니 그때면 이유를 알게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앞서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기야 그렇지." 로터스 황제는 엘른 재상의 의견에 동의했다. 카르시온 제국이 이상한 동향을 보이지만 기다리면 사실이 밝혀진다. 귀족회의가 열리면 첩자에 의해서 소식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첩자가 아니더라도 귀족회의의 내용은 귀족들의 입을 타고서 적국인 일리시아 제국에게도 알려질 것이다. '좀더 조사가 필요한 일인데.' 에스터는 황제와 재상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귀한 마법 스크롤을 지원하면서까지 수백의 첩자를 파견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에스터는 생각만 했을 뿐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에스터 본인도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생각을 바꾸면 수천의 병력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수백의 첩자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소식은 어쩌면 중요한 사건이 아닐수도 있다. 단지 그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 관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일리시아 제국의 황궁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카르시온 제국의 엄청난 사건을 가볍게 다루고 말았다. 그들이 심각성을 알았다 할지라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일리시아 제국의 황궁에서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가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채. ------ 페이시온 가문의 가주 케이스는 그동안의 결과를 에드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황궁에 들어갔다.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황궁이라 여러 절차를 밟아야 했다. 케이스의 황궁 출입을 두고 귀족들이 여러가지 오해를 할 것이나 당사자인 케이스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케이스가 에드 황제를 만나 그동안의 결과가 적힌 문서를 넘겼다. 당연히 문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황제가 많은 문서를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하하" 에드 황제는 실성한 사람마냥 케이스가 건네준 두꺼운 종이뭉치의 문서들을 들쳐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에드 황제의 곁에서 케이스의 말을 듣고있던 프리온 재상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대놓고 웃지 못할 뿐이지 표정은 에드 황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리온 재상 이제는 밝혀도 상관없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어차피 며칠후면 귀족회의를 통해 밝혀질 사실이고, 이제는 일리시아 제국측에서 알아도 늦었습니다." 에드는 프리온의 대답을 듣고 너무나 기뻤다. 그동안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수도에 귀족회의를 위해서 모여있는 귀족들에게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하다못해 대귀족을 불러 그들만에게라도 말이다. 케이스는 에드와 프리온의 대화를 듣고서 자신에게 무엇인가 말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중요한 사실이기에 황제에게 충성한 가문에게까지 비밀로 해야했을까 싶었다. "얼마전에 무슨 이유로 폐인이 된 마법사가 필요한지 내게 물었었지?" "네, 폐하." 케이스는 에드 황제의 질문에 대답하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에드가 말해주지 않은 비밀이 무엇일까 밤새 고민한 적도 있었다. 폐인이 된 마법사를 무엇 때문에 영입하려는지 이해하질 못한 것이다. 차라리 몸이라도 정상이라면 뛰어난 머리를 가진 자들인만큼 여러모로 쓰임새가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의 대부분은 신체가 뒤틀려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여기 기록되어 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정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에드는 케이스가 넘겨준 문서를 손에쥐고 말했다. 문서에는 케이스가 어쌔신 길드와 용병길드 그리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카르시온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회유하여 데려온 폐인이 된 마법사들의 기록이었다. "......" 당연히 천지가 개벽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케이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당연히 믿지 못하겠지? 하지만 마법길드에서는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지. 며칠후 귀족회의에서 이 사실을 공표하고 치료방법을 찾아낸 마법사에게 탑을 지어줄 생각이야." "사.실.입.니.까?" 케이스는 에드가 아닌 프리온을 향해 더듬거리며 반문했다. 아무리 믿지 못할 사실이라도 황제에게 반문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세상에 이런일이" 프리온의 대답을 듣고 케이스는 또다시 놀랐다. 치료가 된다면 마법사에게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다. 자신에 일리시아 제국을 비롯한 타국에서 데려온 마법사의 수가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모두 정상이 된다면?' 케이스는 에드가 손에 꼭 귀족있는 문서를 바라보았다. 타국에서 영입한 마법사들은 현재 페이시온 가문에서 철저하게 높은 대접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들 모두가 정상이 된다면 과연 자신의 나라로 가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카르시온 제국은 하루아침에 마법전력이 일리시아 제국에 비해서 높아지게 된 것이다. 설사 치료된 그들이 도움을 주지 않는다해도 타국에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더구나 그들은 자신을 정상으로 치료한 카르시온 제국에 빚을 갚는 의미로 어느정도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하하하" "후후" 에드 황제와 프리온 재상은 케이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양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꼈다. 이제는 며칠후에 있을 귀족회의만 제대로 처리된다면 모든게 에드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카인이란 정령사가 영입한 마법사를 정상으로 치료할 것이고 그의 탑이 세워지리라. 그 모든 일들이 처리되면 결국 황권을 강화되는 결과를 불러와 귀족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 ------ 페이시온 가문은 가주의 지시에 따라 장애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했다. 본래 페이시온 가문은 현 황제의 비호아래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갑작스런 황제의 호출로 가주는 가문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떠맡은 것이다. 케이스 가주는 타국에서 사람이라 불리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폐인을 데려와 극진한 대접을 하라고 지시하니 가문의 사람들은 기가막힐 따름이다. 반신불구는 정상에 가깝고 사지가 뒤틀린 경우는 기본에 속한다. 타국인들이라 언어도 통하지 않지만 그나마 말도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 지옥이 연상될 정도였다. 페이시온 가문의 사람들이 가주에게 항의를 했지만 가주는 현 황제의 부탁이라 자신도 어쩔수 없음을 말했다. 타국에서 데려온 수백의 폐인들이 페이시온 가문에서 호의호식을 하고 지냈다. 극진한 대접을 받는 폐인들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음을 바라보며 마음놓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여기 술 가져와." 전신이 뒤틀려 끔찍한 모습을 하고있는 사람이 자신의 신체중 유일하게 멀쩡한 입으로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가져올께요." "그래 천천히 가져오너라." 소리친 사람은 하녀의 대답에 미소지으며 인심쓰듯이 말했다. 그의 행태에 일부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앉거나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각각 한 명 이상의 하인이나 하녀가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다. "거참! 조용히 지냅시다." "맞아. 이거원 해도해도 너무하는군." 하녀에게 소리친 사람을 두고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참 지나서야 한 마디씩 불만을 토로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데 한 사람이 난동을 부리니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같은 처지에 그러지 맙시다. 우리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보겠소?" 난동을 부린 사람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 누구도 그에게 다시금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방에서 하인과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편안히 생활하던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저 사람 말도 맞아." "그렇지. 우리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우리도 저 사람처럼 눈치보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구. 이젠 잃을것도 없으니 말일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 때 마법사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나폭주로 인해 반신불구나 폐인이 되어 겨우겨우 하루를 연명하는 비참한 삶을 가진 사람들이다. 바이거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다른점이라면 자신은 마법사로 6서클까지 오른 마도사였기 때문에 마나폭주를 당해도 피해가 적었다. 마나폭주를 가장 쉽게 당하는 경우가 상위 서클로 진입하기 위해 무리한 마법실험을 강행할 때 자주 발생한다. 그러니 바이거가 보는 모습처럼 신체가 잘못되었지만 살아있는게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도대체 우리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왜 데려왔을까?' 바이거의 머리속에는 일리시아 제국을 떠나면서 생각한 의문이 다시금 찾아왔다. 최소한 자신과 같은 사람이 백여명 이상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마법사였다. 지금은 바이거 자신을 포함해 마법사라고 말할 수 없는 폐인들이지만 말이다. "자네 일리시아 제국에서 왔나?" 오른팔이 기괴한 모습으로 구부러진 사람이 바이거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바이거는 조용히 지낸 자신에게 말을 건넨 사람을 바라보았다.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바이거는 거의 정상인에 가까웠기 때문에 혼자 외톨이식으로 지내고 있었기에 말할 기회가 적었다. "그렇습니다." "정말 반갑구만. 도대체 왜 우리를 데려온건지 자네 아나? 흠. 자네도 모르는가보군. 도대체 말이 통해야 물어보든지 하지. 그러거보니 자네는 멀쩡한 것 같은데 정말 마법사였나? 나도 한 때는 말이야 일리시아 제국에서..." 바이거는 자신에게 한 순간도 쉴세없이 떠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예전에 이렇게 많은 마법사가 모였다면 마법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려고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무서운 현실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전혀 바뀌었다. 그저 과거를 행복한 추억으로만 생각하고 기분이 좋아질 때만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주위에 과거 마법사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도 많으니 이처럼 좋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이거는 잠깐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예전처럼 마법사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쓸데없이 마법실험을 한답시고 엄청난 비용을 쓰려 하지않고 그저 삶을 즐기고 싶었다. 바이거 눈앞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마나폭주로 폐인이 되어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생활을 견뎌내며 한 때 자신이 마법사였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렇듯 인간관계의 폭도 너무나 좁았다. 그러니 자신이 마법사였음을 믿어주는 사람도 없었을 뿐이고 단지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신으로만 기억에 남겨 아픔을 주었던 것이다. 마나폭주를 당한 같은처지의 마법사들이 모이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이 생겨 서로의 말을 들어주다보니 언제나 시끄러웠다. 더구나 간혹 타국 사람들도 섞여 있어서 방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절반 가량이 일리시아 제국의 마법사였고 나머지는 전혀 모르는 나라에서 온 마법사였다. 바이거도 여러가지 상상을 해 보았지만 자신을 비롯해 폐인이 된 마법사를 데려온 연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같은 처지다보니 상대방의 과거에 대해 아쉬워하며 슬퍼해 줄 수 있었다. 바이거가 한 때 마도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같은 폐인의 마법사들이 그를 우대해 주었다. 바이거보다 나이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법사들에게 몇가지 불문율이 있다면 능력을 기준으로 대우를 다르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은 세상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폐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폐인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을 데려온 카르시온 제국의 페이시온 가문에 대해서 깊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같은 처지의 마법사를 만나게 해 준 사실에 기뻐할 뿐이다. 그들은 폐인이 된 이후에 처음으로 자신의 말을 들어줄 친구와 동료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처지를 겪어보지 않은 자가 아니고서는 절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단정짓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5 회] 16. 변화 일반적으로 카르시온 제국의 정책은 대귀족 가문에 의해서 결정된다. 제국에서 대귀족 가문이 차지하는 힘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대귀족 가문들도 감히 결정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은 세금과 관련된 부분이다. 귀족은 영지를 가지며 영지민으로부터 걷어들이는 세금으로 살아간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주는 제국법에 의거하여 세금을 40% 이상 걷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지만 지역적으로 세금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기름진 영지와 황무지 뿐인 영지가 같은 세금이 부과된다면 공평할리 없다. 그래서 모든 귀족은 약간의 차이가 나는 세금을 징수당하고 있다. 영주는 영지민으로부터 세금을 걷고 그중 일부를 제국의 황궁에서 가져가는 것이다. 세금과 관련된 사항은 귀족에게 부귀영화를 누리는 원천이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게 처리된다. 그래서 절대 대귀족 가문끼리 모여서 결정할 수 없고 모든 귀족이 모이는 귀족회의를 통해서만 결정된다.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허가하기 위한 사항은 세금과 연관되어 있어서 모든 귀족들이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제국에서 어딘가에 지원을 많이 할 수록 그만큼 귀족들의 세금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도 말린에 모여있는 귀족들은 어떻게 하면 귀족회의에서 상정(上程)하게 될 마법사의 탑을 거부할 것인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개척지역에 많은 투자를 했던 파도루, 라다르, 루아카스 대귀족 가문 외 몰락귀족들은 필사적으로 귀족회의의 안건에 거부하기 위한 행동이 적극적이었다. 다른 귀족들을 만나 설득하고 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귀족회의에서 반대하는 이유를 귀족들 앞에서 발표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된거야?" "물론입니다." 나는 마법길드의 책임을 맡고있는 가비크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했다. 드디어 오늘이 귀족회의가 있는 날이다. 귀족회의의 중요성 때문에 황궁에서 열리도록 되어있어서 그곳에 가야만 한다. "멋진 모습이야. 오늘 잘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놀리지 마세요." "아니 정말이야." 가비크는 웃으며 말해다. 마법길드에서는 나를 위해서 마도사만이 입을 수 있는 로브를 장만해 주었다. 신관이 흰색의 옷을 선호한다면 마법사는 로브를 입어야 진정한 멋이다. 하지만 1서클의 마법도 제대로 시전하지 못하는 내가 입으니 당연히 창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도사님들만 아니셨다면 정말 입지 않았을거에요." 로브를 마법길드의 마도사들이 모두 찬성했기에 입을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가비크가 오늘 열리는 귀족회의에 대해서 또다시 설명해 주었다. 귀족들의 동향이라든지 의외의 상황이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내가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것들이었다. 마도사만이 입는 로브를 입고서 가비크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마법길드에서 나를 데려가기 위해 함께온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들과 함께 세인트에 생겨난 마법길드 분점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수도 말린의 마법길드로 이동했다. "잘 왔네." "드디어 오늘이구만." "정말 잘 어울리는군." 마법진을 통해 눈깜작 할 순간에 마법길드로 이동하자 기다리던 마도사들이 반겨주었다. 마도사들이 직접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감동이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그저 행운으로 최상급 정령까지 소환하게 된 것이고 마도사들은 천재적인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현재의 위치까지 오른 존경받을 사람들이다. "마도사님들이 직접 반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마도사들은 내 인사에 웃음지었다. 오늘 귀족회의에는 마도사들이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마도사들이 귀족회의에 참가하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귀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다. 그런데 무려 6서클 이상의 마도사가 귀족회의에 참가하면 그들의 발언이 무척이나 중요시되어 버려 회의가 마도사의 뜻대로 흘러버리게 된다. 그래서 귀족들은 마도사의 참여를 엄격히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켜보고 있겠네." "마법사들의 밝은 미래가 자네의 어깨에 달려있으니 최선을 다하도록 부탁하네." 마도사들은 내게 부담스런 발언을 했다. 귀족회의에 상정될 안건은 단순히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허가하는 사건이 아니다. 황권이 강화되고 카르시온 제국의 국력이 급상승하는 결과를 낫게 될 사건인 것이다. 동시에 마법사들의 대우도 한층 강화되는 기회이다. 귀족회의는 황궁에서 열리지만 그 모습을 마도사들이 길드에서 지켜볼 것이다. 마법물품만 이용한다면 귀족회의를 지켜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마법물품 자체가 너무 귀중해서 마법길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노력하겠습니다." 마도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마법길드에서 장만한 마차를 이용해 황궁으로 이동했다. 나와 함께 황궁에 가게될 사람은 길드 책임자 가비크와 마도사 한 명 뿐이었다. 아무리 귀족회의에서 마도사의 참여를 꺼린다 해도 오늘의 중요함을 생각한다면 귀족들의 의견을 무시해도 무방하다 생각한 것이다. 따그닥. 따그닥. 마차는 덜컹거리며 황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안에는 나와 가비크 그리고 마도사 한 명이 편안하게 있었다. 함께 귀족회의에 참가할 마도사는 처음에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주장한 괴짜 마도사였다. 처음에 내가 가비크에게서 어떻게 탑에 대한 의견이 마도사들에게 나왔는지 듣고서 무척 웃었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함께하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법사라면 편안하게 마법진을 이용하여 이동해도 되겠지만 아쉽게도 황궁은 마법결계가 설치되어 있어서 텔레포트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대귀족 가문도 마법결계가 있어서 귀족에 원한을 가진 자들이 함부로 위험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물론 마법결계가 없더라고 귀족을 헤하려는 미친자는 세상에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마차가 멈추어 내리자 웅장한 황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황궁을 출입하는 성문에는 귀족들의 마차가 즐비하게 멈춰져 있었다. 귀족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귀족이 황궁에 마차를 타고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오늘 만큼은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마법길드의 책임자 가비크입니다." 가비크는 성문을 출입하는 근위병에게 신분증을 전해주며 대답했다. 근위병이라 하지만 황궁의 병사들은 몰락귀족의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근위병은 귀족들의 신분을 하나하나 확인한 후 들여보내고 있었다. '귀족들이 이렇게 많다니.' 나는 황궁을 지나는 귀족을 바라보며 놀라고 있었다. 수도 말린을 제외한 지역에서 귀족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만큼 적은 수의 계층이다. 하지만 눈앞에 오가고 있는 귀족은 눈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더구나 오늘은 귀족회의로 인해서 귀족의 안전을 보호하는 기사와 시중을 들어주는 하인과 하녀까지 출입이 통제된 상태라 순수한 귀족만이 출입한 것이다. 귀족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귀족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대부분이 탑을 굳이 지으려는 황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귀족에 비해 괴짜 마도사와 가비크 그리고 나의 차림새는 많이 차이가 나고 있었다. 마법사의 로브가 화려함을 중시하기 보다는 실리를 따지다보니 귀족의 화려한 옷차림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귀족회의를 하는 장소는 아직도 열리지 않아 많은 귀족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단순한 회의였다면 권력의 높낮음에 따라 회의장소에 출입하는게 관례이다. 하지만 오늘은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동등한 자격으로 회의장소에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모두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귀족회의에 참가할 귀족분들은 모두 들어가십시요!" 반시간 가량을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맞추어 귀족들이 회의장소의 거대한 문이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별히 건물 명칭은 없지만 그저 귀족회의를 위해서 세워진 건물이다. "수도 말린까지 올라와서 이게 뭔 고생이람." "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회의장소로 들어가는 동안에 귀족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권력을 휘두르는 귀족들은 극소수일 뿐이고 대부분은 그저 적당히 부귀영화를 누리는 평범한 귀족들이다. 물론 여기서 평범은 귀족들의 기준에서 바라봤을 경우에서이다. "오늘 저들을 모두 기절하게 만들 준비는 된거지?" 가비크는 회의장소로 들어서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오늘 중대한 발표는 모두 가비크가 하게 될 것이고 나는 그저 탑의 주인으로 소개 될 것이다. 물론 탑을 허가하도록 마법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해야 하는 것은 나다. "준비 되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도사님께서는 저희들이 실수를 하면 도움을 주십시요." 가비크는 내 대답을 듣고 곧바로 괴짜 마도사를 향해 말했다. 괴짜 마도사는 별다른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여기 따라온 자체가 귀찮을 것이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길드에서 마법이나 수련하는걸 낙으로 삼으니 말이다. 더구나 마도사는 그 정도가 심해서 평생 마법길드를 벗어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귀족들이 건물 안으로 대부분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우리도 들어갔다. 우리는 오늘 귀족회의에 발표를 하게될 당사자들이라 근위병의 안내로 앞쪽으로 인도되었다. 특별히 좌석은 신분에 따라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들은 스스로를 구분하고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자리에 앉고 있었다. 대귀족 가문의 귀족들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각 대귀족 가문을 따르는 귀족들이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단순히 생각하면 파벌을 형성하여 자리를 잡은 것이다. 동등한 자격이지만 권력으로 따지면 동등할 수는 없었다. 근위병들이 돌아다니며 아직 서성이거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귀족들을 안내하는 모습이 보였다. 개중에는 근위병에 의해서 밖으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모이다보니 말도 많아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황제 폐하 납시요!" 혼란스런 분위기는 근위병이 외친 우렁찬 목소리에 조용해 졌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귀족이야 황제를 만나기 쉬우니 편한 모습이지만 나머지 귀족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 당연하다. 귀족들의 좌석은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었고, 황제의 자리는 부채꼴 모양이 가리키는 중심이었다. 나는 가비크와 함께 우측 모서리의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발표를 하기 위해서 중심으로 이동하기 쉬운 모서리에 자리한 것이다. 황제가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에 슬쩍 내가 있는 자리를 주시하고 지나감을 느꼈다. 오감이 발달했기 때문에 눈치채는 것도 쉬었다. 물론 귀족들도 마법길드에서 온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 회의의 주제가 마법사의 탑과 관련된 사항이라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우리가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귀족들의 허례적인 인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황제를 뵙게되어 영광이라는둥 정말 어이없지만 가비크의 귀뜸으로 어느정도 이해되었다. 대귀족 가문의 가주가 아니고서야 언제 황제와 대화를 나눠볼 수 있겠는가. 황제와 대화를 나눈 귀족은 평생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제 인사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는 귀족들의 인사를 그만 사양했다. 한 명의 귀족이 자신을 소개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최소한 일분을 소요한다. 단순히 이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이 제국에서 이룩한 업적을 나열하기 때문이다. 황제와 일분이라도 대화를 나눈 귀족은 참으로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프리온 페이시온 재상입니다. 그럼 오늘 이 자리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안건을 발표하겠습니다." 에드 황제가 귀족들과 인사를 끝내자 프리온 재상이 황제 좌측으로 나와 말했다. 작은 소리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귀족들에게 들려왔다. 그만큼 귀족들이 조용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황제가 있는 자리이니 말 실수라고 하게되면 중죄에 해당한다. "모든 분들이 안건의 내용을 알고 계실테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법길드에서는 새로운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길드측에서 벌써 탑이 세워질 장소를 제국에서 개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동지역으로 결정했으며 여러분들의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탑을 짓도록 허가하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지원해 달라는 소리였다. 탑을 짓기위한 경비가 많이 소모되는 만큼 허가한다면 당연히 책임까지 떠맡는 것이다. 귀족들은 프리온 재상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발언을 요청합니다." "허락한다." 앞 좌석에 앉아있던 파도루 대귀족 가문의 가주 루바인이 발언을 요청하자 에드 황제가 요청을 받아들였다. 귀족회의는 전적으로 황제의 주관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나 발언을 할 수 없었다. 오직 황제의 허락을 구해야만 가능했다. 물론 대부분 형식상이기 때문에 황제도 허락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프리온 재상도 알다시피 우리 카르시온 제국은 물론이고 일리시아 제국에서도 마법사의 탑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요. 그 이유는 마법사들이 길드에서 마법정보를 공유하고 연구하길 좋아하기 때문이요. 한 종류의 마법만 연구하는 학파를 창설하는 마법사의 탑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법길드에서 탑을 세우겠다는 것은 마법사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 아니겠소? 더구나 한동안 마법사의 탑이 생겨나지 않은 이유는 귀족이나 마법사 모두가 동의를 할만한 마법이론이 없었던 것 때문입니다. 마법길드에서 모두에게 인정받을 만한 마법이론을 제시하지 않고서 탑을 짓도록 허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루바인의 조리있는 주장에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루바인으로서는 마법사의 탑이 동지역에 생겨나지 않도록 귀족들을 선동할 필요가 있었다. 루바인 외에도 라다르 대귀족 가문의 가주 리온과 루아카스 대귀족 가문의 가주 제노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 사실 모든 귀족들이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어서 굳이 선동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다. "파도루 가문의 가주 루바인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럼 루바인 가주의 뜻에 따라 일단 마법길드의 설명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온 재상은 대기하고 있던 마법길드의 책임자 가비크를 불렀다. 물론 황제의 허락이 있고서야 가비크는 귀족들이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중앙에 서서 발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가비크가 중앙에 서자 귀족들의 시선은 불만스러운 눈빛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법길드의 책임을 맡고있는 5서클의 마법사 가비크입니다. 일단 루바인 가주님의 발언은 저희 마법길드 측에서도 동의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저희 길드에서도 마법사의 탑은 더이상 필요없는 구세대 유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잠시후 발표하게 될 마법이론을 듣게 된다면 여러분들도 저희 마법길드와 함께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허가하도록 만들 것이 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가비크는 귀족들에게 루바인 가주의 생각이 옳바르다고 말했다. 그러자 귀족들은 무척이나 황당한 표정이었다. 마법길드에서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요청하고서 원론적인 사실은 귀족들과 같은 생각이라니 모순된 말이다. 가비크는 가장 중요한 말을 하기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여러분들은 마법에 대해서 마법사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본적인 원리만큼은 이해하고 계시니 마나폭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실겁니다. 마나폭주란 마법사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예견된 질병입니다. 마법을 구현시키기 위해선 마법수식에 따라 마나를 배치해야 하지만 언제나 계산이 옳바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마나의 배치가 잘못되면 마법이 구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위 마법을 구현하거나 마법실험을 할 경우에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잘못될 경우 마나폭주로 마법을 구현한 마법사는 죽음을 맞이하거나 운이 좋아서 살아나도 정상적인 인간이 아닐테니까요. 그럼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마법길드에는 카인이란 물의 중급 정령사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정령사가 마법길드에 가입되어 있는 이유는 그가 1서클의 마법을 완벽히 이해하고 구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마법이론을 완성시키고 치료방법까지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가비크는 마지막으로 한 말중에 '완벽'란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귀족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가 치료된다는 사실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길드에서 치료를 받아 정상을 되찾은 마법사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려 수년이나 수십년을 걸린다는게 문제이지만 말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죽지만 않는다면 단 하루만에 다시 마법사로 생활할 수 있는 것이 말입니다. 저기 보이는 카인이란 물의 중급 정령사가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귀족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가비크가 약간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제서야 귀족들은 단 하루만에 치료할 수 있다는 가비크의 말에 입이 벌어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가비크의 말은 마법을 교양으로 이해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가비크씨." "아, 네." 프리온 재상에 말을 듣고서 가비크는 귀족들의 진귀한 반응을 바라보며 자리로 돌아갔다. 가비크는 그동안 귀족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수없이 상상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에 있으니 한 순간도 눈을 떼지않고 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순간이 어쩌면 가비크 생애 최고의 날일지도 모른다. "마법길드의 책임자이신 가비크씨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카르시온 제국에는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가 백여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마도사가 세 명이나 끼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는 마나폭주의 치료 마법이론을 확립한 카인씨에 의해서 모두 치료된 상태입니다. 그로인해 마법사의 수가 증가되어 저희 제국의 국력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프리온 재상은 마나폭주를 당해 폐인이 된 마법사를 내가 치료한 사실을 밝혔다.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거부하던 귀족들은 본래의 마음을 비워버렸다. 본래 모든 귀족들은 탑을 짓도록 허가하지 않자고 입을 마친 상황이였다. 하지만 방금전의 발표로 인해서 정당성을 잃어버린 것은 둘째치고 놀라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언을 요청합니다." "프리온 재상의 발표가 끝나면 허락한다." 루바인 가주가 다시 발언을 요청했지만 황제가 거부하였다. 프리온 재상은 황제의 빛나는 눈빛을 잠시 바라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잠시후 발표할 사항은 일리시아 제국과의 균형적인 대치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시초가 될 것이다. "얼마전 에드 황제폐하의 명에 의해서 페이시온 가문에서는 타국의 3서클 이상의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를 망명하도록 회유하여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들중에는 마도사까지 끼여있으며 그 수가 무려 백을 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 짓게될 마법사의 탑의 주인 카인씨에게 치료되어 그곳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그들이 타국의 마법사임을 감안한다면 저희 제국을 위해서 몸받치지 않는다해도 이곳에 망명한 자체만으로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프리온 재상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은 할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일이" "백명이 넘는 마법사라니" "마나폭주를 치료하는 것도 대단한데 벌써 그런 조치까지 취하다니...!" 귀족들은 발언을 요청하지도 않은채 황제가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탄의 말을 쏟아내었다. 나는 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나에게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나는 단순히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게 만든 사람일 뿐이다. 그들은 결과에 놀라고 있을 뿐이다. 황제가 귀족들의 놀란 모습을 바라보며 흐믓해 하고 있는 표정을 바라보았다. 가비크를 통해서 이번 기회로 황제는 황권을 강화하려는 것임을 알았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허가하지 말자고 선동한 동지역의 개척에 참가한 대귀족 가문들은 제일 앞좌석이라 허탈한 표정을 손쉽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표정은 상당히 기괴했다. 아마도 그들은 마법길드를 공격할 수많은 방법을 준비하고 귀족회의에 참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비크와 프리온 재상의 발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반역으로 몰릴테니 거부할 수 없겠지.' 프리온 재상의 발표로 오늘의 안건은 허가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어떤 귀족이 거부한다면 많은 귀족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을 거부하는 반역자로 몰아부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생활하는 귀족일지라도 제국이 순식간에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도록 하지는 않을 것은 자명하다. "발언을 요청합니다." "허락한다." 뒤쪽에 자리한 몰락귀족이 발언을 요청하자 황제가 허락했다. 본래 프리온 재상의 발표가 끝난후 루바인 가주에게 발언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사실 프리온 재상의 발표로 안건은 승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을 어떤 바보가 거부한단 말인가. "방금 프리온 재상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저희 카르시온 제국은 높은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카인이라는 물의 중급 정령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타국에서 비슷한 능력의 물의 정령사를 찾아낸다면 저희 제국과 똑같이 마나폭주로 폐인이 된 마법사를 치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지 몰라도 정말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누구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나는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누가 나처럼 800년에 해당하는 생명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간으로서는 희귀한 물의 정령사이면서 말이다. "방금 질문은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는 마법이론을 완성시킨 카인씨에게 직접 듣도록 하겠습니다." 프리온 재상이 나를 불렀다. 황제도 고개를 살짝 끄덕여 허락을 표시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채골 모양의 귀족들 좌석이 가리키는 중앙에 섰다. 황제가 옆에서 호기심있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서 마도사들이 대신 마법이론을 완성시켜 주었고 여러가지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물의 중급 정령사 카인입니다." 간단한 소개에 귀족들은 처음 황제가 자리했을 때처럼 조용함을 유지했다. 가비크나 프리온 재상이 말할 때보다 더욱 조용했다. 말하는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숙을 유지하며 눈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방금 지적을 해주신 경우를 하나하나 생각하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더욱 희귀합니다. 더구나 인간은 파괴력 때문에 불의 정령사를 가장 선호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천명의 정령사가 있다면 물의 정령사는 그중에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입니다. 그렇게 희귀한 물의 정령사에서 깨달음을 얻어 중급 정령사가 된 경우는 극히 낮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령사는 인위적으로 마나를 축적해서 사용하는 마법사의 마법에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도움을 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특별한 계기로 인해 마법이론을 접하고 오랜 시간을 치료사로서 생활하다가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설사 물의 정령사가 이 사실을 듣고 연구를 시작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10년 이상은 지나야 지금의 저처럼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긴 설명을 듣고서야 귀족들은 절대 마나폭주 치료법이 외부로 쉽게 흘러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설사 외부에서 연구하여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는 10년이 지나있을 것이다. 그때라면 벌써 카르시온 제국은 마법의 강국으로 한 단계 성숙된 상태이리라. 설명을 끝내자마자 귀족들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물의 정령사 엘프가 도와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한 온갖 기상천외한 질문이 쏟아졌다. 엘프는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설사 도움을 준다해도 나의 생명력과 엘프의 생명력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엔트에게서 전해받은 생명력이라 순수한 식물적 성격이 강하지만 엘프는 아무리 조화롭다 해도 육체는 그렇지 않다. 결국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는 있겠지만 나처럼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자 귀족들은 황제가 페이시온 가문에 비밀리에 지시하여 타국의 폐인이 된 마법사를 망명하도록 회유하여 데려온 사실을 대단하게 생각했다. 일부 귀족들은 역시 황제라 귀족인 자신과 달라도 한참 다름을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의견을 제시한 것이 마법길드란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꼼짝없이 세인트에 짓게 될 탑에서 지내게 생겼구나.' 나는 귀족회의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탑의 주인이 되어 타국의 폐인이 된 마법사를 치료해 함께 지내야 하는 것이다. 황제와 마법길드에서 나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내가 그들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귀족회의에 제시된 마법사의 탑에 대한 안건은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황제는 얼굴에 웃음지으며 자신이 이룩해 낸 사실에 기뻐했다. 전적으로 황제가 한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카르시온 제국의 번영이 눈앞에 보일 것이다. 일부 눈치가 빠른 귀족들은 앞으로 황권이 강화되리라 짐작하겠지만 이제 황제를 압박할 수단을 모두 잃은 것이나 진배없다. 힘없는 귀족들이 황제가 벌인 일을 찬양하다 못해 존경하고 있으니 말이다. 귀족들은 황제를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생각할 뿐 존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드 황제는 이번 귀족회의를 통해서 역대 황제와 다르게 자신의 능력을 귀족들에게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 페이시온 가문에 머물고 있는 망명한 마법사들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수정구에서 보여지고 있는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구는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에서 벌어진 귀족회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마도사가 만든 뛰어난 마법물품이라 언어가 달라도 모두 자국의 언어로 들을 수 있기까지 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수정구에서 들려온 소리에 모든 마법사들이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를 내지 못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이건 꿈이야." "정말일까? 아니 거짓말이겠지?" "조용히좀 해봐! 끝까지 들어봐야 할 거 아냐!" 수정구를 처음부터 들여다보던 자들이 놀라며 난리를 피웠다. 방안에 있던 수십여명의 사람들도 그 소리를 듣고 하녀와 하인을 닥달해 수정구를 보기위해 움직였다. 방금전에 페이시온 가문의 사람이 수정구를 가져와 지금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에서 열리는 귀족회의라 말해주었지만 그것에 관심을 가진 마법사는 극히 적었다. 그저 귀중한 마법물품이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정구에서 보여지고 들리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많아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가 소리라도 자세히 들으려고 했다.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의 서러움을 해결할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니 마법사로서는 천지가 개벽할 사건이었다. 마나폭주로 비참한 삶을 겨우 연명하던 사람들을 카르시온 제국에서 첩자를 파견해 영입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회유를 당해 망명한 사실을 이들은 누구도 후회하지 않았다. 회의의 내용을 듣고보니 첩자를 따라 카르시온 제국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최소한 10년은 지나서야 다시 마법사가 되었을테니 말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용당해도 좋아.' 수정구에 들려온 희망에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귀족회의가 끝나 수정구가 더이상 영상을 보여주지 않아도 눈을 뗄수가 없었다. "당신 마도사였으니 저 말의 진위여부를 판단해봐. 정말 저 마법이론이 가능한거야?" 수정구에서 보고 들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게 사람의 마음이다. 일리시아 제국어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때 마도사였던 바이거에게 몰려들었다. 마도사였으니 그만큼 마법에 대해 많이 알고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 또한 정령사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마법이론을 이해할 수는 없었어. 하지만 카르시온 황제와 모든 귀족들이 참가한 귀족회의였는데, 과연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길드 거짓을 발표했을까? 절대 아닐거야. 그러니 분명 사실이야." "맞아. 황제앞에서 거짓을 말할리가 없어." 바이거의 말에 모두들 동의했다. 바이거는 자신이 첩자를 따라서 카르시온 제국에 왔으면서도 진정으로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 몰랐었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우리 제국이 아니 이제는 카르시온 제국에 망명했으니 우리 제국도 아니지. 일리시아 제국에서 난리가 났겠군.' 가장 피해를 입을 나라는 역시 일리시아 제국이라고 바이거는 생각했다. 기쁨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마나폭주로 죽지못해 사는 마법사들을 데려온 이유는 카르시온 제국의 국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들은 치료를 받으면 이곳에 머물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에 큰 힘이 되겠지.' 수정구에서 보았던 프리온 재상이란 사람의 말마따나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자체가 힘이 될 것이다. 바이거는 자신이 정말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카인이란 정령사는 세 명의 마도사까지 치료한 경험자이니 치료의 성공여부에 의문이 생기지는 않았다. 바이거는 서로서로 부둥켜 안으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들이 모두 치료될 수 있다니 정말 감탄했다. 또한 카인이란 정령사에 대해서도 존경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도사도 치료하기 힘든 마나폭주를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니 말이다. 수정구를 통해 카인이란 정령사가 무척이나 젊은 모습이었지만 마법사는 절대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능력을 가지고 판단할 뿐이다. 수정구에서 카인이란 정령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 모습을 절대 잊지 못했다. 자신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6 회] 16. 변화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회의에서 귀족들은 황제의 카리스마를 보았다. 대부분의 귀족은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 주는 것보다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높다. 하지만 그 상대가 황제라면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황제의 뜻을 받드는 자체가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는게 일반론이다. 이것은 신분사회를 지향하고 그로인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온 귀족이기에 가능했다. 물론 대귀족같은 소수의 귀족들은 황제와 만남을 자주 가지다보니 황제와 자신을 그저 작은 신분차이로 느끼기 때문에 보통의 귀족과 생각이 같을수 없었다. 귀족회의에 참가했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내가 사건의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황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귀족들의 반응은 하늘이 내게 선사한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귀족회의는 밤이 되기전에 끝이 났지만 귀족들은 늦게까지 남아서 황제와 대화를 가졌다. 그리고 며칠간 귀족회의를 계속 열기로 합의하였다. 마법사의 탑을 지원하기 위한 방법을 나누고 결정하기 위해서이다. 관례상 귀족회의 다음날 열리게 될 회의는 귀족의 대리가 나타나 자잘한 부분을 결정한다. 지원문제는 귀족 개개인보다 가문별로 처리하기 때문에 셈에 능숙하고 머리가 똑똑한 대리자가 나서서 처리하기 마련인 것이다. 귀족회의가 끝나자 가비크와 괴짜 마도사는 마법길드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마법길드로 돌아가지를 못했다. 곧바로 귀족회의에서 발표한 마법이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했다. 재상이 발표한 타국에서 데려온 마법사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제 말을 듣고 계신겁니까?" 마차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앞으로 어떻게 해야될지 생각하는 동안에 누군가의 목소리라 들려왔다. 마차에 함께 타고있던 페이시온 가주 케이스의 말이었다. 귀족회의가 마무리되자 타국의 마법사가 있는 페이시온 가문에 가기위해 가주인 케이스를 따라온 것이다. '귀족에게 존대를 듣게 되다니...' 케이스는 어린 모습의 내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능력을 인정받아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지만 서로 반존대를 사용한다. 오늘 귀족회의에서 발표이후 인사를 나눈 모든 귀족들이 내게 반존대가 아닌 존대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앞으로 생겨날 마법사 탑의 주인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귀족회의 동안에 너무 긴장을 했더니 무척이나 피곤하네요."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피곤하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케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에서 지내고 있는 타국의 마법사들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그들이 몸은 그래도 마도사도 포함된 마법사들입니다. 무려 백여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지내고 있습니다. 전부 치료될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하지만 카인님께서 지금 지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 무척이나 놀라실 겁니다. 몸이 뒤틀리거나 사지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더구나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시중드는 하인이나 하녀가 필요한 수준입니다." 마나폭주로 반병신이 되었을테니 정상일리 없었다. 케이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악마가 살고있는 마계가 떠오를 정도였다. 그만큼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의 말로는 비참하다. 마법사의 탑이 완성될 때까지 페이시온 가문에 머무르며 지내야만 한다. 마법길드에서도 더이상 나에게 도움을 주기가 어렵다. 마법사의 탑은 마법길드와 연관이 깊으면서도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입장이다. 마법사의 탑은 귀족들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다. 마법사의 탑은 순전히 탑의 주인에 의해서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체제를 갖게된다. '도움을 받아야만 해. 내가 탑을 운영할 수 없을테니까.' 나는 탑의 운영을 위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렇다고 마법길드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마법길드의 책임을 맡고있는 가비크도 내가 탑의 주인이 되면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뜻을 밝혔다. 그것은 탑이 갖는 권위적 성격 때문이다. 마법사의 탑은 마법길드나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저 권유나 부탁을 할 뿐이고 대부분 관례상 탑의 주인이 들어주는 것 뿐이다. 원칙적으로는 탑의 주인은 황제처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위적 자리인 것이다. 마법길드처럼 다수의 마법사를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다. 따그닥. 따그닥. 마차는 귀족이 타는 것이라 무척이나 편했다. 케이스의 설명으로 페이시온 가문에 지내고 있는 마법사들이 귀족회의를 보았으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과연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겠어.' 케이스의 말을 들으면서 페이시온 가문에서 지내고 있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어떻게 받아야 할 지 생각했다.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귀족회의에서 결정났으니 모든 사항을 스스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법사가 아닌 정령사인 내가 할 줄 아는게 없는 상황이었다. 탑은 그곳을 운영할 본인이 직접 설계해야 하는데 정령사인 내가 그것을 알리 없었다. 탑은 강력한 마법결계나 마법이 사용되어 완성되는게 보통이다. 마도사가 아니고서는 탑의 설계는 꿈도꾸지 못한다. 내게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치료를 할 타국의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받는 길 뿐이다. 귀족회의에서 망명한 타국의 마법사들에 신병처리가 결정되었다. 새로 짓게될 마법사의 탑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타국의 마법사들이 모두 치료되면 그들을 수용할 곳이 없다. 그렇다고 마법길드에서 타국의 마법사를 수용하면 여러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기 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카르시온 제국에 충성하리라 어떻게 장담한단 말인가. "카인님 거의 도착했습니다." 케이스의 대답을 듣고 마차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하늘높이 치솟은 듯한 높은 저택이 보이고 있었다. 페이시온 가문이 황제의 비호를 받지만 권력을 가질 수 없기에 페이시온 가문의 저택은 수도 말린에서 떨어진 지역이었다. 저택에 가까워지자 그것이 저택인지 의심스러웠다. 영주성에 버금가는 큰 저택이었다.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도착하자 그들이 모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저택의 입구에 몰려있는 사람들은 하인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서 있었다. 케이시온 가주가 내리자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누군가 내리길 기다렸다. 마찬안에서 나는 그들이 수많은 첩자들이 타국에 침투하여 망명하도록 회유시킨 마법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탁탁.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법사들이 무엇이라며 마구 떠들었다. 하지만 모두들 카르시온 제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지라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것이 언어인지 괴성인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저 그들이 나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을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이러지 마세요." 마법사들이 떼거지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내게 다가와 손을 잡거나 머리를 만졌다.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저히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케이스 가주도 정말 이렇게 될줄은 몰랐는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뭣들하느냐! 마법사님들을 모두 뫼시어라!" 케이스는 마법사들의 하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그러자 하인들이 발광하는 마법사들일 잡아끌어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그들이 저토록 발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빨리 마나폭주가 치료되길 바란 것이다. '내가 마법사라도 저랬을거야.' 마법사들의 발광 때문에 내 옷은 찢어지기까지 하였다. 잠깐 마법사들의 모습을 보았지만 신체를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리를 절거나 하인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움직이기가 어려워 보였다. "저분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마도 다시 마법사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카인님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케이스가 대답했다. 그도 마법사들의 발광을 이해하고 있었다. 수년을 혹은 수십년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살았으니 무척이나 간절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나는 당장 내일부터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저분들중에 대표 비슷한 분이 있을까요?" "바이거라는 분이 있습니다. 일리시아 제국에서 오신 마법사분인데 6서클 마도사였던 분으로 마나폭주의 피해가 적었는지 몸이 정상입니다. 대화를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입니다." "내일 아침이 되면 그분과 대화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케이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바이거라는 마법사를 불러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일리시아 제국어의 통역사가 필요했다. 물론 페이시온 가문에 마법사들을 시중들기 위해 통역사가 여러명 있겠지만 마법에 대한 대화를 나누려면 전문적인 통역사가 있어야만 한다. 한 마디의 잘못된 통역이 전혀 다른 뜻으로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르시온 제국에서도 타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때 통역이 가능한 마법물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요한 일에는 사용을 금하고 있다. "앞으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어려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카인님 덕분에 저희 가문이 다시 권력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카인님이 하시는 일 모두가 카르시온 제국의 번영을 위한 길이니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케이스에게 인사를 하고서 그가 소개해준 방에서 쉬었다. 마법사의 탑이 완성될 때까지는 페이시온 가문에 머물러야만 한다. 탑의 완성은 내가 지시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해야할지 막막할 뿐이다. 그저 내일 만나게 될 바이거라는 마도사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마법사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큰일인데.' 마법사의 탑을 짓고 운영하기 위해선 타국의 마법사들 도움이 절실한데 그들이 도와줄지 의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치료하는 대가로 도움을 받고 싶지만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시간이 길텐데 그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인심을 잃게된다.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케이스가 밤이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찾아와 여러가지 신경을 써주려 했지만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마법사의 탑을 빨리 완성시키고 부담없이 지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침이 밝고 페이시온 가문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눴다. 어제는 늦은밤에 도착했고 마법사들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재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한 것이다. 페이시온 가문의 귀족들은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앞으로 황권이 강화될 것을 무척이나 기뻐한 것이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바이거란 마도사를 기다렸다. 페이시온 가문의 귀족들이 나와 좀더 대화를 나누려 싶어 했지만 그렇게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앞으로 탑에서 조용히 지낼 내가 귀족들과 인관관계를 맺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케이스가 나를 위해서 딸려준 하녀는 무척이나 많았다. 문뜩 하녀들을 보며 세인트에 남아있는 노예 세렌이 생각났다. 새로운 생명을 얻게되어 함께한 시간이 가장 긴 사람이 세렌이었다. 지금의 내 기분을 세렌이 알고나 있을지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노예인 세렌은 내가 없어서 세인트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카인님, 통역사와 마법사가 찾아왔습니다."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이거가 찾아왔음을 알고서 하녀들을 잠깐 돌려보냈다. 중요한 대화라 누군가 듣게되면 곤란했다. 정령으로 소리를 차단해도 되겠지만 그러면 하녀들이 방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음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일리시아 제국어를 배웠습니다. 교양으로 마법을 배운만큼 통역하는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통역만큼은 자신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통역사가 자신의 신상내력을 줄줄이 읊었다. 마법사는 의외로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생활을 하다보니 서로 존중하며 대화를 이끄는 일반적인 대화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자신만이 알고있는 높은 수준의 단어를 많이 사용하여 상대방을 곤란하게도 한다. 통역사는 그런 의미로 생각하자면 대인관계 전문가이다. "오늘의 대화를 절대 다른 분들에게 발설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요." 통역사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일이 밖으로 퍼질경우 여러가지 곤란한 일이 생길게 분명하다. 더구나 나를 매도하고 싶은 귀족들이 상당수가 있으니 말이다. 특히 제국의 동지역 개척에 참여한 귀족가문은 나를 원수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다. "......" 통역사는 나를 바이거에게 소개하였다. 일리시아 제국어로 말하니 도저히 무슨말인지 알길이 없었다. 바이거의 성격을 알리없는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정령사라 타인의 감정을 쉽게 읽지만 마법사는 본래부터 정신력이 강해 쉽게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굳이 정령의 힘을 빌어서까지 상대방의 감정으로 알고 싶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분의 이름은 바이거로 일리시아 제국의 마법길드에 6서클 마도사로 속해 있었답니다. 그런데 마법실험으로 인해 마나폭주를 당해서 평민들을 위해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생활을 할 정도로 전락했었답니다. 마나폭주를 당하고 나서의 상황은 말하고 싶지 않답니다." "그렇군요. 자신의 치부까지 밝히셨으니 저도 터넣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족회의를 여기서 마법 수정구를 통해 보셨다니 모두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마법사 탑의 주인이 되었지만 솔직히 마법에 대해서는 1서클 마법에 대해 아는게 전부입니다. 당장 마법사의 탑을 완성시키기 위해 설계도 해야하는데 무엇부터 시작할지 막막합니다. 여기 머물고 계신 마법사분들이 치료되면 탑에 함께 머물게 될 겁니다. 그러니 제가 마법사의 탑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통역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시간을 주시지요." 통역사는 내 말을 듣고서 곧바로 바이거에게 통역하지 않았다. 잘못된 통역으로 인해 벌어질 일들은 통역사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통역사는 땀까지 흘리며 바이거에게 말하려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에 도움을 바라는 말씀에서 어떤 의미로 전해야 됩니까?" "절대 지시를 내리는 듯한 뜻으로 통역하지 마시고 부탁을 하는 것처럼 통역해 주세요. 설사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입장으로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통역사가 세세한 것까지 신경써주자 그의 통역이 신뢰되었다. 내가 마지막에 도움을 달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이 명령으로 전달될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기사들은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릴 때 항상 부탁의 어조로 지시를 내린다. "......" 통역사는 바이거에게 땀을 흘리며 일리시아 제국어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끝까지 전하기도 전에 바이거가 통역사의 말을 막고 무엇인가 말했다. 나는 순간 무척 당황스러웠다. '왜 그러지? 무엇이 잘못되었나?' 통역사 또한 무척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이거의 막무가네식 말을 끝까지 듣고난 후 통역사는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바이거씨가 여기 머무는 분들을 모두 치료만 해준다면 무슨일이든 가리지 않고 도움을 드리겠답니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서 충성을 받친다거나 하는 일은 피하고 싶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굳이 도움을 바란다면 따르도록 하겠답니다." "휴우"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법사들이 치료를 원했지만 이정도 일줄은 몰랐다. 최소한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 전쟁 참여와 같이 절대적 충성을 요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다짐을 받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하다 망명을 했지만 자신이 태어나서 자랐던 조국을 공격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하고싶어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정말 다행이야.' 다행이라 생각하며 바이거를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숨을 쉬고있는 내 모습을 눈도 깜박이지 않은채 바라보고 있었다. 곧바로 통역사에게 하루 세 명 정도의 마법사를 치료해 주겠다는 사실을 전하라고 말했다. 통역사를 통해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전했다. 마법사의 탑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전적으로 맡아달라는 것을 말이다. 치료를 받은 마법사들은 세인트 개척지역에 세워질 마법사의 탑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밝혔다. 일리시아 제국어에 능숙한 전문 통역사의 희귀성을 생각할 때 이번 기회에 모두 말해주어야만 했다. 사실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야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다. 정령을 이용해 생각을 전달하거나 통역이 가능한 마법물품을 사용해도 된다. 하지만 이같은 방법은 언어의 의미만 전달할 뿐 수치적인 부분과 같은 사실은 전달하기가 무척 어렵다. 첩자나 전문 통역사가 아니고서야 타국의 언어를 그 나라 사람과 구분가지 않을 정도로 구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아카데미와 같은 전문교육 기관에서 통역을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인재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제국에서 지원하는 아카데미 출신들은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귀족이 대부분이다. 지금 통역을 하고있는 사람도 귀족이라 내 옆에 계속 묶어둘 수 없는 것이다. 마법길드의 책임자인 가비크에게 들었던 말도 서슴없이 모두 말했다. 바이거는 한 때 마도사였던 만큼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천재인 것을 생각할 때 모든 사실을 밝히면 스스로 현재의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정오가 되어 점심을 먹고 저녁이 되기까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가장 힘든건 통역사였다. 통역사로서는 자신의 잘못된 통역으로 큰일이 생길 것 같아서 최선을 다했다. 저녁이 되어 바이거와의 대화가 끝나자 통역사는 오늘처럼 힘든 통역은 처음이라 말했다. 통역사가 떠나자 바이거와 단둘이 남았다. 하녀들은 모두 쫓아낸 상태라 방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굳이 통역사가 필요 없었다. 간단한 의사표현이야 어렵지 않았다. 바이거는 아주 기초적인 카르시온 제국어를 할 수는 있었다. 페이시온 가문에 머무른지 일주일이 겨우 지났을 뿐이지만 수발드는 하인들에게 저절로 알게된 것이다. 반면 나는 정령을 통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치료를 할테니 가장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세요.' 정령을 통해 바이거에게 생각을 전했다. 바이거는 내 말을 듣고서 어깨에 힘을빼고 다리는 모은채로 명상의 자세를 취했다. 마법사라 그런지 가장 편한 자세가 마나를 수련할 때의 자세였던 것이다. '엘레스트라 치료를 부탁해.' '네, 주인님' 물의 최상급정령 엘레스트라에게 바이거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굳이 엘레스트라의 도움이 없이도 생명력을 이용해 치료할 수 있지만 바이거가 마도사이니 완벽을 기해야 했다. 더구나 오늘의 치료를 시작으로 바이거가 마법사의 탑을 짓도록 마법사들의 뜻을 모아주어야 하니 실수가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 페이시온 가문에 머물고 있는 망명한 마법사들의 대표가 정확히 따지자면 바이거는 아니다. 그는 단지 일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의 대표일 뿐인데, 망명한 마법사중에 일리시아 제국 사람이 가장 많아으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이니 바이거를 인정하지 않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니 뜻을 모으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거의 몫이고 나는 마법사들을 치료만 해주면 된다. 엘레스트라는 바이거를 잠재우고 치료를 하였다. 내 몸속에서 많은 생명력이 빠져나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역시 마도사라 그런지 치료에 필요한 생명력이 많았다. 치료가 끝나자 엘레스트라의 기운이 사라졌다. "바이거씨 일어나세요." 카르시온 제국어를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명상의 자세로 앉아있는 바이거를 흔들며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명상의 자세로 잠들지 못한다. 하지만 마법사나 기사와 같이 명상의 자세에서 수련을 경험한 사람은 잠드는 경우가 많다. "으음" 바이거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신음소리를 뱉어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자세인지 알고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신음소리를 계속 뱉어내며 얼굴의 색깔이 점점 붉게 변해갔다. 대장간에서 쇠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과 비슷했다. 얼굴의 색깔이 더이상 달아오르지 못하자 이번에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좀더 시간이 흐르자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바이거의 기분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반응에 대해서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길드에서 마나폭주로 고생한 마법사들을 무려 백여명이나 치료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며 갖가지 반응을 보였었다. 나를 얼싸안으며 좋아한 마법사는 조용한 경우이며 대부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을 울었다. 사람이 더이상 기쁠수 없으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그 때 알았다. "......" 바이거는 눈물을 팔로 훔치고 내게 고개를 숙이며 무엇인가 말했다. 일리시아 제국어를 모르지만 무슨 말인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바이거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슴에서 느껴졌다. 바이거는 두 시간이나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며 강물처럼 흐르는 몸속의 마나를 느꼈다. 당장이라도 마법을 사용해보고 싶지만 너무나 큰 기쁨에 감히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마법을 사용하고 싶어도 머리는 마법수식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기쁨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한 것이다. '부럽다.' 바이거의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 삶은 바이거처럼 기뻐한 경우는 오직 사비나와 함께한 시간 뿐이었다. 앞으로 바이거처럼 기뻐하며 살아가고 싶은은데 그럴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저 내 바램일 뿐이다. 바이거는 두 시간이 지나서 정신을 차리고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리시아 제국어로 감사인사를 하였다. 바이거는 돌아가 자신이 치료된 사실과 내게 전해들은 사실을 마법사들에게 전할 것이다. 물론 일리시아 제국의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서 알게될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내가 신경쓰기엔 너무 벅차다. '이제 탑만 완성되면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모든게 마무리되면 조용히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 지내리라 생각했다. 탑이 완성되면 나를 찾으려 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설사 찾는다해도 탑의 권위를 사용해 아무도 만나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황제가 만남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바이거의 기뻐하는 모습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예전에 수도 말린에서 사비나와 생활하기 위해 치료사의 집을 차려 생활할 때가 떠올랐다.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가. 자신의 전재산을 가져와 주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의 기분이 다시금 느껴졌다.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길드의 마법사들도 비슷했지만 그때는 무척이나 귀찮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바이거의 모습은 그들과 전혀 달랐다. 타국의 마법사라서 내가 그렇게 느끼는 줄도 모른다. 앞으로 치료받은 이들이 탑에서 어떻게 생활할지 상상이 되었다. ------ 바이거는 지금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속에서 마나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제어가 가능했다. 너무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흥분되어 제대로 되지 도 않을 지경이다. '마나폭주가 치료되었어. 정말로 치료되었어.' 너무나 기쁠 때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두 시간이나 정령사 카인의 앞에서 기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쁨이 수구러들지를 않았다. 내일 아침에 마법사들을 모아놓고 카인이 말한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마음이 진정될지 의문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가슴이 손을 얹자 자신의 심장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아무리 기뻐도 냉정하게 생각할 피요가 있다. 카르시온 제국에 망명했지만 카인의 말로는 카르시온 제국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카르시온 제국에서도 망명시킨 마법사들을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망명한 모든 마법사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망명 이전의 백성도 아니다. 망명을 했으니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이지만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위험부담 때문에 충성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마법사로서의 삶만을 선택하지 않을거야. 평범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았으니까.' 바이거는 더이상 마법수련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음을 다짐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평범함속에 진리가 있듯이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싶었다. 마나폭주를 당한 이후에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겪었는가. 그 경험이 바이거를 변화시킨 것이다. 밤새도록 앞으로의 삶에 대해 진지하고 고민했다. 카인이 치료를 해주었으니 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통역사를 통해서 전해들은 말을 종합하면 카인은 그저 조용히 살아하고 싶어함을 스스로 밝혔다. 또한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들을 거리낌없이 알려주었다. 바이거는 그 모든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며 정리했다. 아침이 밝자 바이거는 마법사들의 무서운 시선을 받았다. 모두들 바이거의 마나폭주가 치료되었음을 알아챈 것이다. 치료받길 원하는 것은 모두가 같은 마음인데 대표로 대화를 하러가더니 혼자 치료받고 나타났으니 화날만 했다. 바이거는 통역사를 통해 들었던 카인이 말한 사실을 나름대로 정리해 말해주었다. 일리시아 제국어로 말하는 것이라 언어가 다른 사람은 통역이 가능한 마법물품으로 설명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지는 않지만 전문 통역사가 없으니 어쩔수 없었다. 통역이 가능한 마법물품은 망명한 마법사들을 위해 마법길드에서 지원한 것이다. "이러날이 찾아올줄 알았어!" "치료만 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라고 해도 들어줄거야!" 바이거의 설명을 들은 마법사들은 치료만 된다면 어떠한 조건도 수궁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바이거의 설명은 카인이란 정령사가 단지 마법사의 탑이 완성되도록 돕는 것 뿐이었다. 그것도 강제적으로가 아닌 부탁을 한 것이다. 마법사들은 세인트 개척지역에 세워질 마법사의 탑에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주의 자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일단 마법사들 대부분이 그렇듯 가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모두 홀홀단신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마법수련만 해오다 마나폭주로 쓸모없게 되자 버려졌으니 자신의 조국에 충성심이 있을리 없었다. 바이거를 중심으로 하루 세 명이 치료될 순번이 정해졌다. 일단 마법사의 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부터 치료를 먼저 받아야만 했다. 탑의 설계에 경험이 있거나 도움이 될만한 경우가 우선순위였다. 모두들 동의했고 순번이 정해졌다. 특별히 우선순위의 요건이 없는 경우는 제비뽑기를 하였다. 모든 순번이 정해지자 오직 자신의 치료순번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랬다. 빨리 흐르던 날짜도 이때부터 갑자기 하루가 일년처럼 느껴졌다. 카인에게 치료를 받은 마법사들은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수년이나 쓰지않던 신체와 마나가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무척이나 어색했다. 마법 클래스가 낮은 마법사일수록 적응기간이 길게 필요했다. 사용하지 않았던 신체를 움직이기 위해서 약간의 운동이 필요했고, 신체에 떠도는 마나의 제어가 제대로 되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페이시온 가문은 마법사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었다. 그들이 본래의 능력을 되찾았으니 대우도 예전에 비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능력을 되찾은 마법사들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모두 미친 사람들로 판단했을 것이다. 카인으로서도 마법사들의 기쁜 얼굴을 보는게 즐거웠다. 마법사들은 바이거를 대표로 인정하고 있었다. 바이거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탑의 설계도를 완성시켰다. 백여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를 완성시키다보니 탑은 여러 나라의 마법특징이 드러나는 형태의 설계가 되었다. 황궁에서는 새로운 마법사의 탑에 얼만큼의 지원을 할 것인지 결정을 위해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원에 대한 사항이 결정되면 마법사들이 직접 탑을 짓도록 나설 것이다. 마법사의 탑은 전적으로 그곳에서 생활할 마법사들이 원하는 형태로 짓는게 옳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7 회] 16. 변화 귀족회의로 새로운 마법사의 탑이 생겨난다는 사실은 귀족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당연히 일리시아 제국은 물론이고 주위 왕국이나 소국도 알게 되었다. 그로인해 카르시온 제국에 많은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상인들이 탑이 생겨날 세인트에 자리를 잡기위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탑이 생겨난다는 것은 그곳에 도시가 생겨난다는 보장이었다. 물론 그 도시가 얼마나 번창할지는 몰라도 돈이 된다는 점은 누가 생각해도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개척지역에는 영지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개척민들에게 세금도 부과되지 않아서 여러가지 행정기관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탑이 완성되는 시점부터 황궁에서 탑의 보호를 위해 각종 행정기관이 들어설 것은 자명했다. 개척지역의 최대 문제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무법천지란 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자 상인들은 기나긴 행렬을 만들어 개척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개척지역에 상인들이 많이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인은 이득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개척지역은 상인조차도 피할 정도로 위험이 높은 지역이다. 상인들 이외에도 이득을 창출하는 대부분의 길드들이 개척지역의 중심지 세인트에 분점을 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단지 탑이 세워진다는 정보만 퍼진 상태라 상인길드와 마법길드 그리고 용병길드와 같은 곳이 가장 먼저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여타 길드도 진출할 것이 분명했다. 마법사의 탑에 대한 정보가 주변국에 알려지자 곧바로 일리시아 제국에서 카르시온 제국에 납치한 마법사들을 돌려달라고 항의했다. 에드 황제가 페이시온 가문을 이용해 벌인 일들이 알려진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에서는 카르시온 제국이 마나폭주를 당해 쓸모없어진 마법사들을 납치해 갔다고 주장했지만 카르시온 제국측에서는 망명이라고 반박했다.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회의는 끝이 났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회의는 매일같이 열렸다. 주로 힘있는 권력가의 대리자들이 나와 새로운 마법사의 탑에 어느정도의 지원을 할 것인가를 두고서 논의하는 회의였다. 현재 지원하고 있는 다른 마법사의 탑과 똑같이 지원하기에는 그곳에 함께 생활할 타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모두 3서클 이상인 마법사들이 백여명이나 생활을 할 예정이니 결정이 쉬울리 없었다. 카인이란 정령사가 한 달 정도만 소요되면 망명한 마법사들이 모두 치료될 수 있음을 통보했다. 그 소식을 들은 귀족들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심도깊게 상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타국의 마법사들이라 카르시온 제국에 충성심이 없음은 당연했다. 백여명의 마법사를 확보하여 마법전력 만큼은 대륙에 존재하는 제국에서 최강이 되었지만 그들을 활용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자면 치료받은 망명한 마법사들이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치료를 받았으니 그들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 귀족회의에서는 망명한 마법사들이 치료되면 당분간 그들을 주시하며 추이를 지켜보자고 결정하였다. 귀족이라면 명예에 죽고사는 존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치욕을 당하면 일부 귀족은 자진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은 직접 귀족회의를 통해서 알게되었고 백성들은 소문으로 모든 사실을 접하고 자신이 살고있는 제국이 마법만큼은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제국중에 최강이라는 명예를 얻어 기뻐했다. 귀족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마법사의 탑에 지원할 수준은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다. 그리고 수년간 바뀌지 않았던 제국법도 수정하였다. 먼저 정령사에 대한 법령이 추가되었다. 카인이라는 물의 정령사를 통해서 귀족들이 정령사에 대해서 많이 알게되었기에 가능했다. 귀족들은 능력자들을 이용하기 위해선 그들의 대우를 높여주어야만 하는 기본적인 상식은 마법사의 사례를 통해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만약 정령사들이 그동안 전쟁터에 의무적으로 끌려가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제국법에 추가되는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제국법에 정령사들의 처우개선 문제가 대두되면서 당연히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도 마련되었다. 먼저 수도 말린에 정령사를 지원하는 정령사 길드를 설립하고 지원해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듣도보도 못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그 수가 적었기 때문에 지원하는 자금이 많지 않을 것이라 그런 결정이 쉽게 내려졌다. 더구나 귀족들도 이제는 정령사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기 때문에 정령사들이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 엘프마을이 있는 산 주변에서 거의 생활하는 존재이며 큰 도시나 다름없는 수도 말린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귀족회의에서 가장 심도깊에 논의되었던 점은 역시 치료되어 정상을 되찾을 백여명에 달하는 타국의 마법사들 처리문제였다. 결론없는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그저 그들이 카르시온 제국에 남아있는 자체만으로 큰 힘이 될 것이며 그들로 인해 마법에 한해서는 최강이라는 명예를 얻었음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귀족회의 열린 날로부터 일주일 동안 크고작은 회의가 계속되어 여러가지 일들이 결정되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자 곧바로 세인트에 마법사의 탑을 짓기위한 아낌없는 지원이 이루어졌다. 마법길드에서는 수도 말린과 세인트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이 만들어졌고 탑의 건설에 필요한 물건들이 옮겨졌다. 처음 새로운 마법사의 탑을 망명한 6서클의 마도사가 설계했다는 소식에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탑의 주인이 될 카인이 개입하여 논쟁을 무마시켜 버렸다. 탑의 주인이 카인이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결정을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타국에서 온 마법사들이 치료되어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갈까 걱정되어 함부로 문제를 만들 수 없었던 입장이었다. '바이거씨가 잘 하고 있을까?' 방안에 조용히 앉아 세인트에서 탑을 짓고있을 바이거를 생각했다. 나는 매일같이 세 명의 마법사를 치료하고 있다. 치료된 마법사는 며칠간 머물다 정상을 되찾은 육체와 마나에 적응하고 곧바로 세인트로 출발했다. 페이시온 가문에 백여명에 달하던 마법사들이 이제는 절반이나 사라졌다. 모두 치료되어 세인트에서 탑을 짓기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치료를 받은후 나를 은인으로 생각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주인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밖에서 노예 세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인트와 수도 말린을 연결하는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을 마법길드에서 설치한 이후로 쉽게 오갈수 있게되어 세렌이 내가 머무는 페이시온 가문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형 마법진에는 엄청난 마나석이 소모되기 때문에 탑이 완성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설치된 것 뿐이다. "세렌도 함께 먹자." "감사합니다. 주인님" 세렌이 페이시온 가문에 온 이후로 항상 함께 식사를 해결했다. 페이시온 가문의 귀족들과 먹게되면 그들의 귀족적인 식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너무나 귀찮고 번거로웠다. 그렇다고 앞으로 탑에서 함께 생할하게 될 마법사들과 먹기에도 불편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마법사들이 눈을 빛내며 나를 쬐려보는듯 했고, 치료받은 마법사는 식사도중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문제였으며 치료받지 않은 마법사들은 몸이 정상적이지 않아서 하인이나 하녀의 도움으로 식사를 해결하니 편안한 식사가 가능할리 없었다. "소피아님의 신전에 찾아오는 신도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피아님의 생활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세실리아님을 위해 기도드리고 그 외에는 포교활동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렌은 식사를 하다가 소피아에 대한 내 질문에 자세히 말해주었다. 크라이 숲에 있을 가족 이외에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소피아와 세렌 뿐이니 궁굼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소피아의 안전이 위협되고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인트가 도시화되면 신전이 생길 것이고 수도 말린에서 신관이 파견된다. 그러다 소피아를 누군가 수도 말린에 있는 피니온 신전의 신관임을 알게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 더구나 피니온 신전에서는 세실리아와 소피아의 행방을 아직도 찾고있지 않은가. "보름만 더 지내면 세인트로 돌아갈 수 있을거야." 세렌은 페이시온 가문에서의 생활을 좋아하지 않고 있었다. 함께한지가 오래 되다보니 냉정한 세렌의 감정까지도 쉽게 느낄 수 있다. 페이시온 가문에는 많은 하인과 하녀 그리고 노예가 있는데 세렌은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다보니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지금까지 내 주변의 사람들은 세렌을 어느정도 사람으로 봐주었지만 페이시온 가문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의 눈에는 세렌이 그저 비천한 노예로 보일 뿐이다. "저는 상관없어요." 세렌도 자신의 감정을 내가 눈치챈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치라면 노예를 따라올 자가 없다. 노예의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상황을 재빨리 알아채는 눈치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노예는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무지막지한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본래 세인트에 짓고있을 마법사의 탑에 대한 진척사항을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도사 바이거를 비롯해 모든 마법사들이 각기 다른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황궁에서 파견한 관리가 바이거를 대신하여 보고하고 있었다. 마법길드의 가비크를 통해서 탑이 완성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탑은 외형적으로 일단 완성되고 난 이후 그곳에 마법사가 생활하면서 완성시키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일단 외형이 완성되면 그곳에서 생활할 마법사들이 내부에 자신의 공간을 멋대로 만드는 것이다. 하위 마법사라 할지라도 마법물품이나 결계를 만드는 지식은 있다. 단지 6서클의 컨틴젼시(Contingency) 마법을 시전할 수 없어서 완성하지 못할 뿐이다. 물론 마법물품이나 결계를 완성시키기 위한 마법수식을 마도사가 한 시간 이내에 계산한다면 하위 마법사는 일주일 정도를 계산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하위 마법사가 탑 내부 자신만의 공간에 결계를 만들면 탑에 머무는 마도사가 컨틴젼시 마법을 선심 쓰듯이 사용해주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 과정을 여러번 걸쳐 탑의 내부가 완성되면 마지막으로 탑 외부에 각가지 결계를 만드는데 이때 진정으로 탑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탑의 외형만이 완성되는 작업은 단순히 한 달이면 족하다. 설사 탑이 튼튼하지 않더라도 마법사들이 온갖 마법결계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되진 않는다. 마법사가 나무에 1서클의 아머(Armor) 마법결계만 첨가해도 그 나무는 바위에 버금가는 단단함을 지니게 되니 말이다. 물론 6서클 이상의 마도사만이 가능한 일이다. 마법사들이 6서클 이상을 마도사라 불리며 존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료된 마법사들 모두에게 아무일 없어야 할텐데.' 나는 탑이 완성되어 모든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면 크라이 숲으로 돌아갈 계획이라 치료된 마법사들이 조용히 지내길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타국의 마법사들이라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귀족들이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할테니 그것도 문제였다. 요즘 페이시온 가문에 나를 만나기 위한 귀족들이 줄을지어 방문하고 있다. 만나주지 않고 있지만 귀족들은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짓도 서슴치 않는 족속이다. 개척에 뒤늦게 참가하여 일찍 정착한 개척자들을 억압하여 실리를 챙기던 귀족들을 보며서 절실히 느낀 부분이다. '찾아올 때가 되었는데.' 늦은밤이 되자 세 명의 마법사를 기다렸다. 지금까지 마나폭주로 고생중인 마법사를 밤에 치료를 하였다. 낮에는 페이시온 가문이 상당히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귀족회의가 종결되고 나서 페이시온 가문은 모든 귀족가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황권이 강화되면 페이시온 가문은 대귀족 가문에 버금가는 권력이 집중된다. 그러니 여러 귀족가문에서 줄지어 방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내가 여기서 머물다보니 겸사겸사 방문하는 것이다. 페이시온 가문의 입장에서는 찾아온 귀족들을 모두 물리칠 수 없는 입장이라 즐거운 기분으로 방문한 귀족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주인님 기다리던 분들이 방문하셨습니다." 밖에서 세렌의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나의 겉모습이 상당히 젊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세 명의 마법사의 방문을 일어서서 맞아야 했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그런 행동이 더욱 관계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불편한 몸을 가진 세 명의 마법사가 며칠전 치료된 마법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안에 나란히 눕혀졌다. 굳이 몸을 만져보지 않아도 그들의 팔다리에 마나가 뭉쳐져 있음이 느껴졌다. 정상적인 마법사라면 심장부근에 마나가 뭉쳐져 있어야 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며칠전 치료된 마법사가 카르시온 제국어로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마법사들이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카르시온 제국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 간단한 생활용어는 가능하다. 마법사들이 천재라서 그런지 새로운 언어도 빠르게 배우고 있는 것이다. 치료를 받게될 세 명의 마법사만이 남게되자 그들을 모두 기절시켰다. 그리고 편한 마음으로 치료를 하였다. 엄청난 생명력을 이용하는지라 어려운 점은 없었다. 생명력이 사용한다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때문에 부담감 없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씩은 마나폭주를 치료하면서 어쩔수 없이 마나를 소멸시켜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 마나를 보충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받은 모든 마법사들이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나에 대한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두 끝났습니다." 치료를 마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를 불렀다. 그들은 조용히 치료받은 세 명의 마법사를 부축하여 데려갔다. 본래 치료를 받고서 곧바로 깨어나야 하지만 일부러 아침까지 잠들도록 하였다. 깨어나서 치료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오밤중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거나 내게 감사인사를 하고 난동을 부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런 황당한 상황을 맞이하여 페이시온 가문의 귀족들까지 오밤중에 모두 일어나는 대소동을 겪기도 했었다. 세 명의 마법사를 치료한 것으로 하루를 끝마쳤다. 요즘에는 할일이 없어서 물질계 4대 최상급 정령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정령계를 통해서 크라이 숲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엔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여건상 긴 대화는 불가능하다. 물질계 4대 최상급 정령들은 물의 최상급 정령 엘레스트라,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 불의 최상급 정령 샐레아나 그리고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아넨이다. 이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소환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더구나 그들은 평생에 나처럼 완벽하게 실체화 시킬 수 있는 존재와 계약한 경우가 없었다고 말한다. 나로서는 그들이 누구와 계약을 맺었는지 과거에 대해 물었지만 그런 사실은 정령이라면 말하지 못하도록 불문율로 되어있어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최상급 정령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운명에 대해 많이 알게되었다. 정령들은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불문율 때문에 말하지 못한다. 설사 불문율에 묶여있지 않는 사실인데도 정령은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으면 능동적으로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나는 최상급 정령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일반적인 상식이 아닌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는 진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 바이거는 고개를 하늘높이 치켜들어야 그 끝을 볼수있는 탑을 바라보며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마도사로서 마법사의 탑을 설계하는 경험을 과연 얼마나 누릴 수 있는가 싶었다. 물론 자신이 혼자 탑을 설계한 것은 아니라 함께 망명한 마법사들의 도움과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에서 지원한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가장 중요한 틀을 자신이 설계하였다는 점이다. "바이거 마도사님 여기 계셨군요." 황궁에서 파견된 관리 브리트가 바이거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귀족가문의 저택이나 영주성처럼 큰 건물을 짓는 기술을 갖고있는 관리라 바이거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저택이나 영주성과 같은 건물만 설계한 경험이 있어서요." 브리트는 처음에 바이거의 설계를 보고 기가막혀 했었다. 탑이라면 탑을 지탱할 기둥이 당연히 여럿 존재해야 하는데 설계도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것이 마법으로 보충된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했지만 말이다. 브리트는 바이거가 보여준 설계도대로 탑을 완성했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 바이거를 비롯한 카인에게 치료받은 마법사들이 탑의 여러곳에 마법결계를 추가했음은 당연하다. 탑의 내부는 시간을 두고서 마법사들끼리 의논을 하여 완성시키는게 관례라 아직은 미완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부실한 탑일 뿐인데.' 바이거와는 다르게 브리트의 눈에는 그저 부실한 탑으로 보일 뿐이었다. 황궁에서 파견된 브리트는 황제에게 명을 받고서 탑의 완성을 돕기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에 바이거가 설계한 탑이 불만스러웠지만 최선을 다했다. 잘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단 한순간에 날아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완성을 기다리고 있으니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막상 완성되어가는 탑의 외형을 바라보니 생각보다 평범했다. 외형은 그저 삼각뿔(三角―)이고 아무런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놀란 점이라면 탑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카르시온 제국의 탑 중에서 가증 크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은 보잘것 없지만 앞으로 점점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마법으로 말인가요?"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탑 전체가 마법으로 도배되었을 때가 진정한 완성입니다." 바이거는 탑의 완성에 대해 말해주었다.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탑의 진정한 완성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탑의 외형이 완성되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지금까지 탑에 추가된 마법결계는 탑의 외형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마법사들에겐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제 생전에 마법사의 탑을 짓다니 영광이었습니다." 브리트는 바이거를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탑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며칠전부터 천여명에 달하던 기술자들이 철수하고 있었다. 제국 전역에서 납치하듯이 데려온 기술자들이라 빨리 보내야만 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설계도와 비교해 한치의 어긋남도 없었습니다." 바이거는 브리트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경했다. 황궁에 관리로 일하고 있을 만큼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단지 신분사회에서 평민이 설사 특정 분야에 높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대우를 받지 못하는게 현실이었다.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바로 황궁으로 연락주시면 됩니다. 안녕히 계세요." "탑이 진정으로 완성되면 초대하겠습니다." 바이거는 떠나가는 관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탑은 여타 건물처럼 예술이라 보일만한 구조가 아니었기에 브리트도 자기가 완성해놓고 실망한 모습으로 감상했다. 일반적으로 건물에는 아름다움을 위해 온갖 미장작업이 함께 이루어진다. 건물 외형을 매끈하고 아름답게 꾸미며 그곳에 조각가를 초빙해 멋지게 조각을 한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마법사의 탑은 마법결계의 추가 때문에 예술이라 불릴만한 외형부분이 단 한 구석도 없었다. '보름만 기다리면 모두 치료될테니 그때를 기다려야겠지.' 바이거는 페이시온 가문에서 치료를 기다리고 있을 마법사들을 생각했다. 바이거와 함께 탑의 외형적 완성에 힘쓴 마법사는 50여명 가량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페이시온 가문에 있으며 그들이 모두 치료된다면 탑의 내부로 들어가 함께 생활할 생각이다. 모두들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나머지 마법사들과의 공평함을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는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8 회] 17. 생활마법 일리시아 제국의 황궁은 카르시온 제국의 일로 연일 회의가 열렸다. 처음에는 소문의 진실성이 문제되어 쉬쉬하던 내용이 여러 경로를 통해 정확히 밝혀지자 본격적인 대책을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귀족들이 하는 일들이 모두 그렇듯 온갖 절차를 따지다보니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런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거요?" "카르시온 제국에서 파견한 첩자놈들이 국경을 마구 넘나들다니 당장 책임자를 문책해야합니다." 귀족들은 황제가 참여한 회의라 열심히 논의를 하였다. 대부분이 벌어진 사건에 경악하며 관련자들을 잡여들여 문책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엘른 재상은 귀족들의 어이없는 모습에 황제가 참여했는지라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런 미친놈들. 지금 우리 제국이 멸명할 위기에 쳐했는데 고작 저런 말들이나 하다니.' 엘른 재상은 귀족들이 그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한심했다. 같은 제국이라도 벌써 카르시온 제국은 마법력으로 앞서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이는 벌어질 것이 분명하고 언젠간 일리시아 제국을 제국이라 부르지 못할 때가 100년 이내에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오늘의 회의는 대책을 세우자는 것이니 모두들 쓸데없는 말들은 그만하시요." 로터스 황제는 귀족들의 한심한 작태(作態)를 두고보지 못하고 한 소리 뱉어냈다. 로터스로서도 뚜렷한 방안이 없지만 귀족들의 반응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로터스 황제는 마법길드나 재상으로부터 지금의 사건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하고 있지만 귀족들은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회의가 진행되다보니 또다시 책임이란 말이 귀족들의 논의속에 오고갔다. 카르시온 제국의 첩자들이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를 납치한 사건이 누군가의 책임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평소에 회의를 열면 극소수의 권력 중심에 있는 귀족들만 참여한데 반해 오늘은 많은 귀족들이 참여했기에 논의가 제대로 이루지지 못하고 있었다. "엘른 재상!" 로터스는 귀족들의 논의를 더이상 두고보지 못하고 재상을 불렀다. 논의를 제대로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귀족들의 자존심에 상처입지 않을 위치에 있는 재상의 말주변이 필요했다. 귀족들은 논의를 하다가 황제에게 시선을 옮겼다. "부르셨습니까? 로터스 황제폐하!" "엉뚱한 논의만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재상이 저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자각시켜 주게." "네, 폐하." 엘른 재상은 로터스 황제의 지시에 속으로 너무나 기뻐하였다. 귀족들이 주제를 모르고 제국이 멸망할 위기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한심했던 것이다. 자신은 앞으로의 일리시아 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는듯 했다. '최대한 경각심을 가지도록 말해야 해. 그래야 황권도 강화되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어.' 엘른 재상은 귀족들이 겁을 집어먹도록 사실을 과장하여 말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과장하지 않아도 놀랄만한 사실이지만 귀족들은 자신의 목에 검이 놓여진 모습을 봐야만 두려움을 갖는 한심한 족속들이었다. "오늘 회의의 논의주제를 미리 통보했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은 몸소 느끼지 못하고 계시겠지만 지금은 일리시아 제국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입니다." 엘른의 말을 듣고서 잠깐 놀라는 귀족들이 많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어이없어 하는 눈빛으로 재상을 바라보았다. 엘른은 화를 참아내고 크게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했다. 그것은 심각성을 알고있는 로터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멸망이라니 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요?" "일리시아 제국이 어떤 나라인데 그런 막말을 하는거요?" "고작 쓸모없는 마법사 몇명이 납치된 사실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소?" 귀족들은 엘른의 멸망이란 소리에 화를 냈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로터스 황제가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제국이 멸망한다는 소리는 불경죄나 다름없었다. 할말이 있고 못할말이 있는데 엘른의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에 속했다. "고작 마법사 몇명이 납치된 사실을 가지고 내가 이러는 것 같소?" "그렇다면 이유를 말해보시요. 제대로 된 이유가 아니라면 재상이라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요." 엘른의 말에 귀족들은 그가 무슨 변명을 하려는지 이유를 들으려 하였다. 귀족들은 회의를 할 때 아무리 타당한 주장이 아니더라도 마지막 변론까지 듣는게 익숙했다. 귀족은 어려서부터 명예나 예의 만큼은 최대한 지키려 노력하도록 배운다. 실천을 하지않아 문제이지만 말이다. "난 도대체 여러분들이 심각성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모르겠소. 카르시온 제국은 이제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를 우리 일리시아 제국 이외에도 주변에 있는 왕국이나 소국에까지 첩자를 보내 납치해갔소. 그들 모두가 거의 치료되어 이제는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력은 대륙에 존재하는 제국중에서 거의 최강이 되었소. 그뿐이 아니라 마나폭주 치료방법을 알아냈으니 이제 대륙에 존재하는 마법사들 일부가 카르시온 제국으로 망명할 것이 자명한 일이요." "그렇다면 우리도 물의 정령사를 찾아내어 마나폭주 치라방법을 알아내면 되는거 아니요?" 귀족 하나가 엘른 재상의 말에 토를 달았다. 엘른은 가만있으면 중간이나 갈텐데 괜히 나서서 창피를 당하려는 귀족을 속으로 마음껏 비웃었다. "우리 일리시아 제국의 마법길드에서 물의 정령사를 찾으려고 일주일 동안 노력했는데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으면 믿겠소? 정령사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물 계열을 익힌 정령사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상황이요. 설사 발견해도 물의 정령사가 카르시온 제국의 그 정령사처럼 마법사를 도와줄지도 의문이고, 돕는다 하더라도 마나폭주를 치료할 가능성이 있기나 한줄 아시요? 그런게 가능했을 것이라면 왜 물의 정령사가 마나폭주를 치료했다고 발표했겠소? 카르시온 제국놈들도 바보가 아닌이상 치료방법을 알아내지 못할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밝힌게 분명한거요. 가능했다면 비밀로 했을테니 말이요." 엘른은 또다시 숨을 고르게 쉬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너무 흥분한 상태로 말하여 얼굴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귀족들을 자각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힘을 냈다. "앞으로 카르시온 제국에 망명을 하려는 마법사들이 넘쳐날거요. 아니 우리 제국에서도 일부 마법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으로 망명하려는 마법사가 있을게 분명할거요. 내가 마법사라면 망명을 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 생각해 볼거요. 그뿐이 아니라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이번에 정령사를 보호하기 위해 제국법까지 뜯어고쳐 버렸소. 여러분도 알다시피 마법사가 많으면 얼마나 여건이 좋아지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거요. 마법사 한 명이 텔레포트 마법진만 운영해도 그로인해 엄청난 효과가 벌어짐은 이미 경험하고 있으니까 말이요. 카르시온 제국은 그런 마법사 인력이 남아도니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상상이 갈거요. 이런 상황이 앞으로 10년만 지속된다면 카르시온 제국은 우리 제국보다 두 배에 달하는 발전을 이룩할게 뻔한거요. 마법력은 두 배에 달하고 지금보다 발전이 두 배에 달하면 카르시온 제국에서 과연 무슨일을 할것 같소?" 엘른은 의문으로 말을 끝맺었다. 당연한 사실로 힘이 있으면 사용하고 싶은게 인지상정이다. 카르시온 제국이 강해지면 그만큼 위협을 받는게 일리시아 제국이다. 하지만 엘른의 말마따나 만회할 기회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알겠소? 여러분이 설마설마 하는 동안에 우리 제국은 멸망을 눈앞에 두고있는 상황이요." 엘른 재상의 말을 듣고서 로터스 황제가 귀족들에게 한 마디 하였다. 귀족들이 엘른의 말을 듣고서 그 심각성을 자각하고 회의를 진행했지만 대책은 없었다. 상황을 수습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알고있는 로터스 황제는 자신의 대에 이런일이 발생한 사실이 한스러웠다. 수백년간 팽팽히 맞서오던 카르시온 제국이 단 한순간에 자신의 제국보다 강력한 제국으로 변모했으니 한스러운 마음이 드는게 당연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을 겪게될지 예상된다. 주변 왕국과 소국이 제국의 등살에 얼마나 피해를 보고 사는지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 현상을 일리시아 제국도 경험할 것이다. 귀족들은 엘른 재상의 말을 듣고나서 다시 한 번 지금의 상황을 되새겨 보았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첩자들이 마나폭주를 당해 폐인이 된 마법사들을 납치한 사실만을 가지고 논의를 하였다. 하지만 재상의 말을 따지면 앞으로 일리시아 제국이 카르시온 제국의 눈치를 보며 살게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법력이 국력에 얼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어린아이도 알고있다. 그런데 두 배에 달하는 마법력의 차이를 보이게 되었으니 지금 하고있는 전쟁도 몇년안에 사단이 생길게 분명했다. 지금까지는 제국의 지역적 크기로 보았을 때 침략이 서로 불가능했지만 마법력의 차이를 보이면 그 여유의 마법사들로 여러가지 획기적인 방법을 찾을게 분명했다. 귀족들의 대화를 통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그들도 엘른 재상의 말을 듣고서야 심각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로터스 황제는 믿음직한 엘른 재상을 바라보았다. 로터스가 의지할 만한 귀족은 없었고 그나마 재상이 유일했다. "엘른 재상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시요." "사실 앞으로 일리시아 제국의 비참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 합니다. 알고있듯이 대책은 없습니다.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을 저지하기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대책은 아니지만 카르시온 제국을 상대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저희 제국만이 아니라 주변의 왕국이나 소국에까지 같은 짓을 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카르시온 제국을 저지할 수도 있습니다." 엘른은 연합제국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카르시온 제국이 앞으로 강력해진다면 일리시아 제국도 그만큼의 국력을 강화시키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주변의 왕국이나 소국까지 흡수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들에게 카르시온 제국의 위험성을 주장하고 설득시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제국에서는 굳이 왕국이나 소국을 침략하지 않는다. 침략하려면 병사를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자금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설사 점령을 하여도 침략을 하기위해 투자한 금액을 회수하는게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왕국이나 소국에서는 스스로 속국이라 칭하며 조공(朝貢)을 받쳐 안전을 보장받고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 "왕국이나 소국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소?" 귀족들은 엘른 재상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느끼면서도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 생각했다. 왕국이나 소국의 도움을 받으면 얼마나 받겠는가. 왕국의 경우는 그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소국은 일리시아 제국의 대귀족만도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왕국이나 소국의 힘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그들이 보유한 마법사의 전력을 모두 합치면 저희 제국과 맞먹습니다. 물론 질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지만 도움이 되는게 사실입니다. 가장 좋은점은 실질적으로 왕국과 소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카르시온 제국과 마법력은 비슷해지고 병력에서 상당한 우위에 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가능성이 있지만 상당히 치욕적인 일이요." "같은 생각이요." 귀족들은 엘른 재상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치욕스런 일이라 말을 아꼈다. 제국의 위상으로 주변의 왕국과 소국에서 조공을 받았는데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말이다. 더욱이 도움을 받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를 주어야 할 것이다. 결국 조공을 받지 않거나 그와 비슷한 이득을 준다는 협정을 맺어야 한다. 회의가 끝나자 귀족들이 모두 나가고 엘른 재상만이 남게 되었다. 로터스 황제와 엘른 재상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일리시아 제국에 찾아온 위기를 로터스 황제와 엘른 재상은 획기적인 방법을 이용해 모면할 방법을 찾아냈고 그 계획을 실행중에 있었다. 방금전 귀족들 앞에서의 모습은 둘 다 계획한 일이었던 것이다. "주변에 작은 왕국과 소국이 상당히 껄끄러웠는데 이번 기회에 모두 흡수하도록 하는거야. 카르시온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겠지? 하하하. 마나폭주의 치료방법이야 첩자를 계속 보내면 언젠간 알아낼테니 걱정은 없겠지." 로터스 황제는 자신의 제국이 주변의 왕국과 소국을 흡수하여 더욱더 커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간 귀족들은 제국이 멸망한다는 위험을 느끼고 앞으로 잠잠하게 지낼 것이다. 더군다나 제국이 위험할수록 황권이 강화됨은 당연하다. "마법길드에 미리 마나폭주의 치료방법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들도 애타게 바라던 일이라 물의 정령사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연구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장은 알아낼 수 없겠지만 몇년이 지나면 좋은 소식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저희 제국은 주변의 왕국과 소국을 흡수한 상태일테니 카르시온 제국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하하" 로터스 황제와 엘른 재상은 귀족들을 비웃으며 앞날을 밝게 내다봤다. 카르시온 제국이 강세를 보이겠지만 그것은 당분간 뿐이다. 이렇게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와 일리시아 제국의 황제는 다른 꿍꿍이를 가진채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 하루 세 명의 마법사를 치료하다보니 결국 보름이 지나 모든 마법사를 치료하였다. 페이시온 가문의 가주 케이스가 종종 찾아와 제국의 변화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내게 닥친 상황만으로도 감당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인트에서 지내고 있는 바이거에게 탑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법사들이 모두 치료된 상태였고 더이상 페이시온 가문의 저택에 머무는게 부담스러워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온 연락이었다. 페이시온 가문은 더이상 권력에 힘없는 귀족가가 아니었다. 케이스의 말 한마디에 힘없는 귀족 하나쯤은 몰락시켜 버릴만한 힘이 생긴 것이다. 페이시온 가문의 귀족들은 그 힘이 나로인해 생겨난 것이라 생각하였다. 10여명의 마법사와 함께 페이시온 가문의 저택을 나서는데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페이시온 가문에 있는 모든 귀족들과 하인, 하녀 그리고 노예까지 지극정성이었다. 케이스 가주가 준비해준 마차를 타고 수도 말린에 임시적으로 설치한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수도 말린과 세인트를 연결하는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은 내가 이동하는 순간 더이상 운영하지 않을 계획이다.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을 위해선 3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기본적으로 배치되어야 하며 엄청난 마나석이 소모되기 때문에 계속 운용할 수 없는 것이다. 마나석은 보석에 마나를 집적시키는 작은 마법결계를 완성시켜 마나 저장창고로 쓰이는 것을 말한다. 일부 마법사들이 마나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마나석을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마나석 자체가 만들기 힘들고 귀중하기 때문에 마법사 개인이 단지 마나부족을 메우기 위해 사용하기엔 비효율적인 일이라 그런 용도로 쓰이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대체로 마법결계나 마법실험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 "......" 마차안에서 마지막으로 치료된 10여명의 마법사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었다.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제일 쓸모없으며 하위 마법사들이고 제국도 왕국도 아닌 소국의 마법사들이었다. 하위 마법사들이라 하지만 3서클의 마법사이다. 본래 절반 가량은 제비뽑기로 치료를 받기로 순서가 정해졌지만 바이거가 탑의 빠른 완공(完工)을 위해 마법결계 수식계산에 탁월한 마법사부터 먼저 치료해 달라는 요청으로 이들이 모두 뒤로 밀렸던 것이다. 소국이라 그런지 이들 나라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은 마법공식이 제국의 마법길드가 보유한 공식보다 효율이 낮았다. 그래서 수식계산에 있어서 약간 뒤떨어진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인님 질문이 있습니다." 10여명의 마법사중에 한 명이 어설픈 카르시온 제국어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본래 나는 이성을 갖고있는 시간으로 계산하면 70년 이상의 늙은노인에 속한다. 하지만 외형적인 모습이 20대 초반이니 존칭을 써줄 수밖에 없었다. 마법학문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마법사 대부분의 나이가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법사들의 수명이 보통 사람보다 길지 않았다면 무척 큰일이었을 것이다. "말해보세요." "저희들도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공식을 배울수 있습니까? 수식계산을 지금보다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공식들과 수많은 마법실험의 결과가 적힌 기록들을 볼 수 있는지 궁굼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질문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에 집착과 열의를 보이는데 그것을 충족시킬 상황을 소국에서는 만들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엄청난 마법서들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찾아왔는데 궁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들이 고작 3서클 마법사였기 때문에 충분히 가질수 있는 궁굼중이었다. 만약 바이거와 같이 제국에서 망명한 경우라면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하위 마법사들은 떠나지 않겠군.' 나는 망명한 마법사들 중에서 실력이 출중하지 않은 하위 마법사들은 절대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제국에서는 마법사들이 마법학문의 열의에 빠지도록 충분하게 모든 것들을 지원하는데 떠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마법길드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지원할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정령사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10여명의 마법사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들 카르시온 제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익힌 마법사가 나와 대화를 나눴던 것이지만 간단한 대답만큼은 그들도 알아들은 것이다. "......" "......" 또다시 마법사들이 알수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내가 말한 사실이 무척이나 기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이다. 예전에 파도루 지하감옥에서 자유마법사들이 오랜시간을 억압된 상황에서도 매일같이 마법에 빠져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도착했습니다." 한참 이동하던 마차가 멈추자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또다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이동하였다. 마법길드에서는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의 마지막 운영을 보기위해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세인트로 이동하면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을 없앨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부담스럽다. 더구나 조용히 지내려는 내게는 독약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서서히 적응까지 되어있는 내 자신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큰 마차도 이동시킬 수 있는 마법진에 나와 10여명의 마법사가 올라서자 마법진을 운영하던 마법사가 손을 흔들었다. "아아아악" "......"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함께 있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일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어냈는데 아마도 당황하자 자신도 모르게 뱉어낸 욕설 같았다. 그정도는 언어를 알지 못해도 억양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육두문자(肉頭文字)는 언어가 달라도 평소 사용하던 언어와 다른 특이한 억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서오십시요. 카인님" 눈부신 빛이 없어지자 곧바로 전혀 다른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고, 한 달만에 보게된 바이거가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눈앞에는 엄청난 수의 마법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온 마법사들은 텔레포트에 놀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의 몸이 정상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이 5서클에 해당하니 하위 마법사인 그들이 언제 이런 경우를 경험한 횟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소국의 마법사였으니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뛰어난 마법사가 많으면 마법수련도 그만큼 쉬워지게 될테니 그들에겐 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오랜만에 뵙게 되는군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저기를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바이거는 인사를 받고는 손으로 동쪽하늘을 가리켰다. 바이거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하늘높이 치솟은 거대한 삼각뿔 모양의 탑을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탑은 원기둥 모양으로 높이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지녔지만 지금 보이는 탑은 무척이나 생소한 모습이었다. 높이도 하늘을 찌를듯 높지만 그 크기가 영주성 보다도 커서 거대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탑 주변에는 아주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탑이 너무 크다보니 주변 건물들이 너무도 왜소하게 보였다. "완성된 탑이군요. 정말 거대한 크기네요." 탑의 모양은 예전에 가비크에게 들었던 모습과 비슷했지만 크기는 아니었다. 탑의 재원(財源)이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기 때문에 탑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입지 않을 크기로 제한을 받는다. 귀족들이 머무는 저택이나 영주성 보다 크게 만들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탑은 영주성 보다 한참 커보였다. "황궁에서 탑의 크기 제한을 풀어주었습니다. 제가 살던 일리시아 제국에서도 이만한 크기의 마법사의 탑은 없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바이거가 눈치를 채고 탑이 큰 이유를 밝혔다. 주변의 마법사들은 자부심이 담긴 눈빛으로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같이 공들여 만든 탑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내게 마지막으로 치료를 받은 10여명의 마법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정말 대단하네요. 바이거씨의 업적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단지 일리시아 제국에서 만들어보지 못했다는게 아쉽긴 하지만 이곳에서라도 꿈을 실현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바이거는 솔직 담백하게 카르시온 제국어로 말했다. 마법사라면 마도사를 꿈꾸고, 마도사라면 자신의 마법이론을 여러 마법사들에게 인정받아 그 이론으로 탑을 만드는게 꿈이다. 그러면 자신의 이름이 탑으로 인해 수천년이 지나도 이어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마법사 동향은 그저 빠르게 마법서클을 높이는데 주력할 뿐이다. 마법사를 필요로 하는 귀족들은 전쟁과 같은 곳에 투입하여 큰 효과를 나타내는 마법사를 선호하고 대우를 해주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백여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에게 일일이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들 모두가 마법사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어린 모습의 나에게 고개숙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변에는 마법사들 이외에는 세인트에 살고있던 개척자들 아니 이제는 세인트 주민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더이상 이곳은 개척지역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탑으로 걸어서 이동하며 세인트가 도시화가 상당히 진행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점이 여기저기 눈에 띄였고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주변에는 내게 치료받았던 마법사들 이외에도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세인트의 안전을 책임지는 병사들이다. 마법사의 탑이 존재하는 주변에는 여러가지 상황에 대비하여 병사들이 주둔한다. 탑에서의 지시가 없을 경우에는 평소 치안을 담당하기 마련이다. 마법사의 탑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하는 만큼 위험요소를 없애주는 것은 당연하다. 탑의 입구에 도착하는 동안에 세인트의 변화된 모습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한 달만에 달라진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대형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마법길드의 분점을 이용한 텔레포트가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게 무척 어려울 것이다. "목이 부러질 것 같군요." 탑의 입구에서 꼭대기를 바라보려고 했으나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삼각뿔이지만 바로 코앞에서는 하늘로 곧게 뻗은 직선의 건물 같았다. 마법사들은 바이거를 비롯해 말이 없었다. 아직 카르시온 제국어에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이건 뭐죠?" 입구에 3미터 가량의 무섭게 생긴 골렘을 바라보며 바이거에게 물었다. 예전에 마법길드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골렘과 비슷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법길드에서 보내온 선물입니다. 골렘 외에도 엄청난 분량의 마법서와 마법실험의 기록들 그리고 마법재료를 보내주어 탑의 지하실에 옮겨놓은 상태입니다. 시간을 내서 차차 정리해야 합니다. 지금 보이는 골렘은 단지 입구를 지키기 위해 세워둔 것입니다." 바이거의 설명을 듣고서 모두들 즐거워하는 표정들이었다. 아마도 지하에 쌓여있을 수많은 마법과 관련된 것들 때문이리라. "간단히 탑의 구조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니 자세하게는 말구요." "탑은 지하 3층과 지상 9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하층들은 마법 실험실로 사용하거나 창고로 쓰여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상위층은 마법사의 해당서클에 따라서 적절한 층을 사용하게 됩니다. 3층은 3서클 마법사, 4층은 4서클 마법사가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물론 상위 서클의 마법사는 하위 층 어디를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3서클 이상이니까 1층과 2층은 다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꾸밀 생각입니다." 바이거의 설명을 들으며 탑 내부로 들어오자 별로 신기할만한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허공에 불과했다. 하늘높이 치솟은 건물이 고작 9층일 뿐이니 한층의 높이가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1층에 수천여명이 살아도 문제없을 만하니 말이다. "그러면 저는 어디서 지내죠?" 문득 내가 어디서 지내야 하는지 난감했다. 굳이 바이거의 말을 따르지만 나는 1서클 마법사이니 1층에서 지내야 하는건가. 아니면 물의 중급정령사가 마법사의 3서클에서 5서클 사이의 능력을 발휘하니까 3층이나 4층 혹은 5층을 사용해야 하는가 고민되었다. "카인님께서는 최고로 높은 9층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원칙적으로 탑의 주인은 최고위층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무도 오르지 못했으며 전설의 드래곤이 사용한다는 9서클의 마법을 기리는 뜻으로 탑의 주인이 사용하는게 관례입니다." 바이거의 말에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왠지 부담스러웠다. 하필이면 제일 꼭대기층에 생활해야 하니 말이다. 탑의 내부는 구경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중앙에 원하는 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만이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 외에는 각 층마다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층은 온갖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어서 창고를 연상시켰다. 바이거는 앞으로 탑에서 생활할 마법사들이 논의하며 가꿔야 한다고 말했다. 각 층에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꾸미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탑 내부에 집을 짓고 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너무도 넓은 공간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탑의 9층은 오직 바이거만이 동행하여 보여주었다. 내일부터는 절대 자신의 서클에 맞게 해당층 이상은 이동할 수 없도록 조치할 예정이었다. 더구나 마지막으로 9층은 탑의 주인이 지내는 만큼 특별히 관리되고 오직 내가 허락하는 사람만 드나들 수 있다고 바이거가 알려주었다. 탑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규칙이 존재했다. 마법사들은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나에게는 전혀 익숙한 규칙이 아니다. 마법사들은 어쩌면 귀족보다도 잔인한 존재일 수 있다. 능력이 낮으면 노예에 버금가는 차별이 주어지니 말이다. "정말 제가 지낼 곳인가요?" 바이거와 단둘이 층을 오가도록 설치된 마법진을 이용해 9층에 도착하자 나타난 장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꼭대기 층인만큼 하위층보다 공간이 작았지만 혼자 쓰이게는 어마어마했다. "물론입니다. 모든 마법사들이 각 층에 자리를 잡으면 좀더 편리한 마법을 사용해 관리하도록 할 예정입니다. 당분간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층은 아무런 생활공간이 마련되지 않은데 반해 9층의 일부 꾸며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화장실부터 식사가 가능한 부엌 그리고 잘 수 있도록 침대까지 마련되어 있다. 모든게 완비되어 당장이라도 살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너무나 공간이 넓다보니 중앙에 있는 생활공간이 꼭 사막에 오아시스가 자리한 모습이라는 점이다. "오늘부터 노예 세렌과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크게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바이거씨를 비롯해 모든 분들이 하고싶은 대로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저는 조용히 지내고 싶으니 대부분의 문제는 바이거씨가 관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카인님" 바이거가 대답을 하고 마법진을 이용해 내려갔다. 바이거는 조만간 층을 오가는 마법진을 손봐서 내가 허락한 사람 이외에는 9층으로 올 수 없도록 조치할 예정이라 말했다. 잠시후 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9층에 있는 내게 다가왔다. 마법사들과 함께 탑을 구경할 동안에 세렌은 탑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9층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렌의 놀란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이곳에서 생활해야 함을 알려주었다. 9층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이 마법물품에 속했다. 마법길드에서 나를 위해 보내온 것들이다. 바이거가 모든 물건들에 간단한 설명이 담긴 종이를 붙여서 알 수 있었다. 생활에 편리한 마법물품이 이렇게나 많았는지 몰랐다. 탑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지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탑에서 지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서 여러가지 반응을 보였다. 당분간 마법사들이 안정이 되고 나를 찾는이가 없으면 크라이 숲으로 가서 생활할 생각이다. 탑의 9층 생활공간이 마음에 들어 오늘 만큼은 즐거운 기분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59 회] 17. 생활마법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은 갑자기 찾아온 변화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개척지역에 생겨난 마법사의 탑으로 인해 도시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마법사의 탑이 세워진 지역이라지만 지금과 같이 도시화가 빨리 진행되는 경우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었다. 황궁에서 탑의 중요성을 인식해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지원한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병사들이 동원되어 치안이 유지되고 각종 행정기관이 세워졌으며 많은 상인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도시화의 진행을 빠르게 한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은 북에서 남으로 발전되는 불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지역에 도시가 들어서게 되어 균형적인 발전의 초반를 마련한 것이다. 탑의 지원으로 인해 가뜩이나 에드 황제를 존경하게 된 귀족들은 너도나도 황제가 오래전부터 추진한 동지역 개척을 칭송하였다. 개척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이 너무도 많은 관계로 제국 전체의 상업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위험하다 판단되었던 개척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황궁에서는 적극적으로 동지역 발전이 될만한 일들을 수없이 시행하였다. 그동안 귀족들의 반발로 시행하지 못한 사항들이 너무나 많았다. 카르시온 제국의 변화는 모두가 즐거워 할 일이었지만 타국의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못했다. 황궁에서도 주변국 특히 일리시아 제국의 동향을 살피다가 결국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음을 알아챘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이 자존심을 굽힐줄이야." 에드 황제는 프리온 재상의 보고를 듣고 탄식했다. 일리시아 제국이 자존심을 굽히고 주변의 왕국이나 소국에게 허리를 숙이면서까지 도움을 받으려 할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폐하, 이미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기세입니다." "재상의 예상대로 우리 제국이 마법력으로 최강이 되는 동안에 일리시아 제국은 연합제국을 이룩해 내겠지." "일리시아 제국은 연합제국이 되기위해 그만한 대가를 왕국과 소국에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의 상황을 예상하자면 저희 백성은 하나로 뭉치고 마법력이 강한 제국이 되겠지만 저들은 연합제국이라고 하지만 불합리로 뭉친 왕국과 소국으로 인해 단결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프리온 재상의 말이 옳았다. 카르시온 제국은 주변에 위치한 왕국과 소국에서도 상당수의 마법사를 데려왔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이 일리시아 제국과 힘을 합치겠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은 발전의 틀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10년 이내에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이 연합제국을 만들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보도록 하시요. 나는 귀족들과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도로고 하겠소." "알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요즘들어 귀족들과의 만남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귀족들이 나를 존경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요. 하하하" 프리온 재상의 말에 에드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귀족들은 에드 황제를 그저 자신보다 약간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 생각할 뿐 존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귀족이 아닌 귀족들은 황제를 존경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진행된다면 제국은 10년 이후에 대륙을 석권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 탑의 생활이 좋은 점이라면 정말 조용하다는 것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없는게 없었다. 음식재료도 엄청난 분량이 마법에 의해 썩지않고 싱싱함을 유지하며 보관되어 있다. 가끔씩 필요한 물품이 있다해도 가까이 있는 세인트에서 구입하면 그만이었다. 마법사들은 3층에서 5층에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바이거는 6서클의 마도사라 6층을 혼자 사용하고 있었다. 백여명의 마법사 중에서 마도사가 탄생하면 바이거가 혼자 쓰게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날이 과연 올지는 미지수이다. 마법사중에서 절반 가량은 마법서에 푹 빠져서 생활하고 있다. 절반 가량이 왕국이나 소국에서 왔기에 제국의 마법서가 뛰어남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같은 마법을 사용하더라도 좀더 효과적인 방법이 적혀 있으니 말이다. 굳이 힘들여 마법실험을 통해서 마법수련을 할 필요도 없었다. 마법길드에서 보내온 마법실험 기록들을 살펴보는 것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일리시아 제국에서 온 마법사들만이 할일없이 자신의 공간을 꾸민후 평범한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치료받은 마법사들 모두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비참한 생활을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생각보다 마법에 대한 학구열이 높지 않았다. 물론 보통의 마법사들과 비교했을 경우를 말한다. 비참한 생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법에 집착없이 수련을 하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참했을 때에는 마법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마법사들은 탑에서만 생활하지 않고 세인트를 돌아다니며 펑범한 생활을 누려보았다. 대부분 나이가 많았지만 마나의 축적으로 외형적인 노화가 늦은 편이었고 수명도 길다. 한 달이 지나자 마법사들은 반나절을 밖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지내는 것이다. 어떠한 마법사가 마법수련을 하지않고 여유롭게 지내겠는가. 반짝반짝. 탑의 층을 오가는 마법진에서 빛이 흘러나오자 그곳을 바라보았다. 잠시후 바이거가 나타나 내게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9층의 출입은 세렌과 바이거만이 가능하다. "보고할 사항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요즘 탑에서는 왕국이나 소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이 마법수련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여유시간에는 세인트에 놀러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이거는 일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의 생활모습을 알려주었다. 대부분이 깨달음 얻지 않고서는 서클을 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라 삶을 즐기며 지내고 있었다. 비참한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삶을 즐길 용기가 있는 것이다. "즐겁게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망명한 마법사들 모두가 나름대로 하고싶은 대로 생활하고 있다니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몇명은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리라 예상했는데 말이다. "저희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예전의 비참한 생활을 되새기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법사는 마법수련을 통해 높은 서클을 이루고 역사에 남을만한 일을 하고싶어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엄연히 망명자들입니다.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고 뜻을 펼치고 성공하여 이름을 빛낸다 할지라도 착찹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겠군요." "언젠가 마도사가 된다해도 이곳에서는 꿈을 펼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솔직히 당장 조국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따가운 시선이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평범하게 생활마법의 분야에 뛰어들고 싶다고 모두들 의견을 모았습니다." 바이거의 말은 무척 충격이었다. 내게 치료를 받은 망명한 마법사들은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는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조국으로 돌아가자니 이곳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마음에 들은 상태이다. 물론 일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에게는 그저 그렇지만 말이다. 마법서클을 높이면 뭐하는가. 조국도 아니고 망명한 상태라 오직 탑에서 함께 생활하는 마법사들만이 노력을 알아줄 뿐이다. 위대한 마도사가 되기위해 끊임없이 마법을 수련하는게 목표인데, 회의가 생기니 마음이 울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생활마법에 대한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생활마법은 어렵게 노력해서 3서클을 이룩한 평민 마법사가 뛰어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법의 이름대로 생활의 편의를 위해 마법을 사용하거나 마법물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귀족이 아닌 평민을 위한 마법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생활하는 9층의 여러가지 마법물품이 생활마법의 분야를 연구한 마법사들에게서 탄생한 작품이었다. 생활에 접목된 마법의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욕조, 방안의 공기가 순환되는 마법결계, 혼자 바닥을 쓰는 빗자루 등등 수도없이 많다. "생활마법은 마법사들에게 외면받는 분야가 아닌가요?" 마법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포괄적으로 아는 것이 많았기에 반문할 수 있었다. "카인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들이 따로 성취감을 느낄수 있는 분야가 없기에 선택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공격마법에 대해 연구를 하는데 저희들은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굳이 공격마법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바이거씨의 뜻대로 하세요. 굳이 제게 보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이거는 내 말을 듣고 기뻐했다. 생활마법을 연구한 마법사들은 대개가 제국에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생활마법으로 탄생한 작품이 값비싸게 팔려나가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대부분의 마법사가 곱게 바라볼리 만무하다. 마법사가 마법에 전념하지 않고 부귀영화를 위해 마법을 익힌 마법사를 무시하는게 당연하다. "어쩌면 생활마법이나 연구하는 탑이라고 놀림당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마세요." "감사합니다." 바이거는 인사를 하고는 마법진을 통해서 사라졌다. 사실 얼마전까지 생활마법이 좋다는 것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마법으로 만들어진 마법물품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느끼고 있었다. 탑이 안정된다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마법물품을 모두 크라이 숲으로 가져자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생활마법의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탑 주변에 마법등이 설치된 것이다. 탑의 내부에 설치된 것보다 밝기가 약한 마법등이었다. 밤이면 고작해야 호롱불이 전부인 세인트에 탑 주변이 마법등으로 빛나자 주민들이 놀랬다. 마법등은 매우 흔하지만 비싼 관계로 실용적이지 못하다. 마법등을 사용하기 위해선 마나석이 첨가되거나 마법사가 충전을 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탑 주변에 설치된 마법등은 탑의 내부에 모여있는 마나를 이용한 것이라 값비싼 마나석이 필요없었다. 외면받는 생활마법에 뛰어든 기념을 위해서 탑의 마법사들은 마법등을 세인트의 큰 길을 따라 나무기둥을 박아 그 위에 모두 설치하였다. 마법등에 마나를 지원하기 위해 마나를 전달하는 줄을 탑에서 끌어다 설치해야만 했다. 물론 간단한 일이라 사람들에게 임금을 주고 시켰다. 마나를 전달하는 줄은 마법길드에서 상당히 오래전에 개발되었다. 마나를 전달하는 금속을 가늘게 뽑아 끊어지지 않도록 강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만들기도 어렵고 희귀한 만큼 무척 비싸지만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물품들에 비하면 비싸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마법등으로 인해서 세인트는 밤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 자정이 되면 마법등도 끄긴 하지만 지금까지 해가 지면 하루가 끝맺는 경우를 생각하면 무척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마법등 사용의 방식은 귀족의 저택에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하나의 마나석에 여러개의 마법등을 연결해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세인트의 경우는 마나석이 아니라 탑에서 마나를 끌어다 쓴다. 탑에는 마나를 집적시키는 마법결계가 설치되어 있어서 마나가 넘쳐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장하기 위한 마나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쓸모없이 버려지고 있다. 버려진 마나를 이용해 마법등에 마나를 지원하기 때문에 효과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세렌 산책이나 가자." "네, 주인님" 해가지자 세렌을 데리고 오랜만에 산책을 나왔다. 탑의 공간이 너무 넓다보니 갑갑한 마음도 없어서 산책할 필요가 없었지만 세인트의 큰길에 설치된 마법등을 다시 한 번 구경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다. "우와! 켜졌다!" "엄마 저기 반짝이는 것좀봐!" 우리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해가지자 마법등이 켜지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을 밝혀주는 마법등이 정말로 신기했다. 빛의 정령을 소환해도 마법등처럼은 밝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생활마법이라...' 마법등 하나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데 앞으로 어떤 것들이 만들어질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바이거는 마법등과 같이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생활마법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세렌과 함께 걷는 도중에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세인트는 예전의 세인트가 아니었다. 사람의 수도 많아져 활기가 넘치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세인트 주변에 있는 개척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더욱 복잡하게 변했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밝은 모습을 바라보자 그들이 부러웠다.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때때로 사비나와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가정을 만들어보고 싶다. 사비나와의 가정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아들이 있지만 정이 없었고 이제는 다 커버린 성인이다. 마법등이 나란히 켜져있는 길을따라 사람들을 구경하고 탑으로 돌아와 최상급 정령과 대화를 나눴다. 가끔 세렌과도 대화를 나누지만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만두기 때문에 대화시간이 무척 짧다. 하지만 최상급 정령들은 언제나 소환을 기다리며 반겨주니 이같은 친구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싶다. '탑에서의 생활도 얼마 남지가 않았어.' 더이상 나를 찾을 사람이 없었다. 귀족들이 탑을 방문해 나를 찾고 있지만 모두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에드 황제나 마법길드에 미리 조용히 지낸다고 통보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조만간 크라이 숲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0 회] 17. 생활마법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하고싶은 모든 것들을 하던 사람이 가장 밑바닥 삶을 경험하면 그 현실을 부정하며 견뎌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 다시 예전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으면 참된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고난을 겪은 사람일수록 아주 사소한 것에 행복을 찾기 마련인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에 망명한 백여명의 마법사가 그렇다. 폐인에서 단 한순간에 예전에 누리던 지위를 찾았다. 물론 조국이 아니지만 말이다. 비참했던 생활을 되새기며 그들은 마법을 좋아하긴 하지만 평생 마법에 묻혀 살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참한 생활을 할 때에는 몸도 성치 않아서 자신의 손으로 밥 한끼 제대로 먹는게 소원이었다. 그러한 소원이 이루어진 현재의 생활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카인의 탑에서 좋아하는 마법수련을 하며 세인트 주민들 사이에 섞여서 평범한 생활을 영위했다. 일부 마법사들은 몰래 창녀촌을 찾아가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거나 주점에서 술을 즐기는 경우도 많았다. 평생 마법만을 전부로 알고 지내온 그들에게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타라스는 일리시아 제국의 속국으로 있는 가이덴 왕국의 마법사였다. 마법서클을 무리하게 올리다가 마나폭주를 당해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첩자의 도움으로 카르시온 제국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타라스는 망명한 마법사들과 약간 다름점이 있었다. 마법사라면 마법길드에 속해 마법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경우가 있고 부귀영화를 위해 귀족가 밑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경우가 있다. 타라스는 귀족가 밑으로 들어갔던 마법사라 마나폭주를 당했을 때 마법길드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보통 만나폭주를 당하면 최소한 마법길드에서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지만 귀족가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보호가 없었던 것이다. 귀족가에서는 쓸모없는 타라스를 매몰차게 내쫓았다. 사람들의 인심으로 겨우 연명하던 타라스가 첩자의 도움으로 카르시온 제국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런 경험으로 타라스는 그때의 기억을잊지않고 작은 일에 행복을 찾고 있었다. 행복한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타라스는 하루 한 두 시간만을 마법수련에 전념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탑의 실질적인 관리를 맡고있는 바이거에게 돈을 받아내어 세인트에서 술과 여자를 탐하며 지냈다. 마법사들 모두가 타라스의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이해하고 동참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역시 세상은 살만해. 푸하하" 타라스는 취기가 돌자 즐거운 마음에 큰 소리로 마음에 있는 말을 외쳤다. 세인트의 비싼 주점을 찾아가 술을 먹고는 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탑으로 가는 길은 약간 멀어서 가는 동안에 취기가 가셔지고 있었다. 세인트의 큰 길에서 벗어나자 별로 관심받지 않는 상점들이 보였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마자 타라스의 귀에 귀신이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울음소리가 이렇지?' 가셔가던 취기가 그나마도 달아나 버렸다. 오밤중에 여자가 울부짖는 목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타라스가 마법사였던 관계로 오감이 강해 다른 사람보다 크게 들렸던 것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어미보다 먼저 가다니... 흑흑흑" 타라스는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들려오는 소리로는 자식을 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엄마 울지마. 앙앙앙" 한참을 걸어서 타라스는 허름한 집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들어가볼까? 아니야. 내가 저들과 무슨 상관이라고 간섭한단 말인가?' 타라스는 그저 여자의 슬픈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아이가 죽어 슬퍼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려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문득 과거에 사람들의 인심으로 겨우 연명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항상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행복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많이 밥을 주었었는데.' 단란한 가정을 이룬 가족의 도움으로 여러번 끼니를 떼운 생각을 떠올리며 집안에서 울고있는 여자를 도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자신이 술을 먹었던 큰길의 주점과 상당히 먼 곳으로 주변의 집들이 모두 허름했다. "결국 세인트에도 이런 곳이 생기는구나." 타라스는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가난한 생활을 하게된다. 빈민촌은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까짓거 들어가보자.' 타라스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허름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마음 한편으로 이렇게 가족이 슬프게 우는데 아무도 찾아와 관심갖지 않는 상황이 현실임을 자각했다. 타라스는 자꾸 과거가 떠올라 술을 먹고 싶어졌다. "계십니까?" 타라스는 헛기침을 하고 방안을 향해 말했다. "불쌍한 우리아이.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치료사에게 한 번 보여주지도 못하고. 하늘에 가거든 어미를 원망하거라. 흑흑흑" "엄마 그만울어. 밖에 누가 왔단 말이야. 엉엉엉." 아이가 자신도 울면서 타라스의 소리를 듣고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목소리가 가늘은게 여자아이 같았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밖에 있는 나에 대해 여러차례 말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식을 잃었으니 주변의 소리가 들릴리 만무했다. "모르는 아저씨잖아." 울고있는 여자는 나오지 않고 작은 여자아이가 울면서 나와더니 타라스를 보고 말했다.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너무나 가여웠다. '무슨말을 하지?' 문득 타라스는 자신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 말을 그대로 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방안에 울고있는 어머니에게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숨길게 뭐가있어? 그냥 지나가던 마법사라면 하면 되겠지.' 타라스는 자신이 마법사임을 밝히는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든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밝혀서 손해본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주점에서 술을 마실때도 마법사라 말하면 누구도 감히 귀찮게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지나가던 마법사인데..." "마법사!" 여자아이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크게 뜨더니 울음을 그치고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아이들은 마법사를 무슨 괴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특히 요즘에는 세인트의 큰 길에 마법등이 설치된 것 때문에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 많았다. 마법등이 전설에나 등장하는 드래곤의 눈알이라는 소문은 가벼운 경우였다. 세인트 주민의 어른들이 말을 듣지않는 어린아이를 혼내기 위해서 마법사에게 데려가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거나 하는 일들이 어우러져 요즘 세인트의 어린아이들에게 마법사는 최대의 공포였다. 여자이아의 놀람에 타라스도 뜨끔 하였다. 여자아이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두 주먹을 불끈쥐고 타라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했다. 떨면서 말한 소리라 타라스는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저를 데려가는 대신에 동생을 살려달라구요!" 여자아이는 타라스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용기있게 큰 소리로 외쳤다. 타라스도 한참 아이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아이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한 것이다. 여자아이는 타라스가 사람도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전설의 드래곤도 잡는 마법사라는 생각에 자신의 동생쯤은 간단히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한 말들이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디텍트(Detect)" 아이의 말을 듣고서 타라스는 혹시 몰라서 1서클의 디텍트 마법을 시전하였다. 디텍트 마법은 마나를 감지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간혹 사람의 생사를 확인할 때도 쉽게 알 수가 있다. 사람의 몸에는 마나가 존재하고 죽었을 경우에는 곧바로 마나가 몸에서 배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디텍트 마법의 시전으로 타라스의 손에서 빛이 새어나오다 없어지자 아이는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타라스는 아이의 놀람에 신경쓰면서도 집안에 있는 두 사람의 마나를 느껴보았다. 한 사람은 넓게 분포된 마나로 아이의 어머니로 판단되었다. '잘하면 살릴수도 있겠는데.' 방안에 있는 아이의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현상은 아직까지 없었다. 타라스가 생각하기에 아이가 살아있다 판단했다. 숨을 쉬지않는다 해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주 약한 숨으로 며칠을 살아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타라스는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여자가 안고있는 아이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3서클의 큐어(Cure)마법을 사용하였다. 아이가 어떤 계기로 죽음의 문턱에 있는지 묻지도 못했다. 타라스가 아무리 카르시온 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더라도 급하다보니 자신이 살았던 가이덴 왕국의 언어로 탄식을 하였다. "......" 타라스는 여자가 난리를 피우며 무슨 소리를 지르는데도 도대체 알아듣지를 못했다. 사람이 당황하면 자신의 이름까지 잊게된다고 하는데 그 상황인 것이다. 타라스는 카르시온 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지만 당황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밖에서 여자아이가 들어와 어머니에게 타라스가 누구임을 밝히자 여인이 혹시모를 희망을 갖고 지켜보았다. '아이야. 살아나야 한단다.' 타라스로서는 아이가 아픈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해서 큐어마법 이외에도 직접 마나를 몸에 주입하였다. 마나가 신체에 들어오면 모든 기관이 활성화되어 몸이 스스로 치료를 시작한다.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엄마" 잠시후 타라스는 아이의 입에서 살아났음을 증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는 눈을뜨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소리에 감격하고 타라스에게 아이를 건네받았다. "마법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타라스는 인사를 하고있는 아이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30대 초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매우 인상깊었다. 여자가 아름답다고 해서 삶에 보탬이 되는 것은 없다. 더구나 초라한 삶일 경우에는 아름다움이 삶에 더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타라스는 여인에게서 그녀의 초라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단 두 문장으로 정리된 말이라 이야기라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개척자로 나섰다가 남편이 죽고 혼자 살고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자 생사에 갈림길에 놓였던 아이가 단순히 영양실조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인이 두 아이를 집에 두고서 밖으로 일을 나가려는 마음을 갖고 싶어도 세인트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곳이라 문제가 많았다. 일단 개간된 농지에 농사를 짓는 일을 여인에게 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인력이 넘쳐나는 세인트에서 여인이 할일을 찾기란 어렵다. 더구나 여인이 억척스런 마음이 없어서 지금과 같이 굶어죽기 일보직전의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타라스는 여인과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남편만 있다면 정말로 단란한 가정이 틀림 없었다. 타라스는 여인의 남편이 되고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타라스의 나이는 이제 고작 40대 초반이었다. 더구나 마법사라 수명까지 길다. 앞으로 긴 삶이 남아있지만 후회없이 살기위해서는 가정도 꾸미고 싶었다. 그렇다고 새롭게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기엔 주변머리도 없었다. "저는 얼마전 완공된 탑에서 생활하는 마법사로 타라스라고 합니다. 가이덴 왕국에서 망명해 지금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저는 가이덴 왕국에서 길거리를 전전하며 목숨 연명하기도 어려운 생활을..." 타라스는 여인에게 자신이 겪은 경험을 들려주었다. 여인은 아이를 치료해 준 은인의 말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타라스는 자신이 폐인으로 생활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세히 말했다. 그런 기억만큼은 절대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술과 여자를 탐하며 지내는 이야기까지 솔직히 말했다. 만약 여인이 술과 여자를 탐하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면 미친놈 취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이덴 왕국에서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저도 언젠가 가정을 꾸려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여인을 만나서 자식을 낫고 기르는 일은 저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마법사인지라 어느날 아침 마법에 미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경우도 있을수 있으니까요. 마법사가 대부분 그렇답니다." 타라스는 자신이 가정을 꾸미고 싶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리고는 가장 중요한 말을 하기위해 여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혼자서 두 아이를 기르기 힘들지 않나요? 이 아이도 영양실조로 죽을번 했습니다. 제가 당신과 두 아이가 절대 굶지않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저와 가정을 꾸려 주십시요." 여인은 타라스의 발언에 기가막힌 표정을 지었다. 타라스도 자신이 말해놓고 약간 어이없는 말이란 사실을 인정했다. 일단 마법사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마법사 대부분이 여자를 일회용으로 즐기고 버리는게 보통이다. 더구나 여인의 입장에서도 당장 자식이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돌아온 일로도 놀랐는데 아이를 치료한 은인에게서 청혼을 받으니 기가막힐 뿐이다. "하하하. 제가 술을 먹어서 미쳤나봅니다. 안녕히 계세요." 타라스는 도저히 지금의 황당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곧바로 방을 나와서 탑을 향해서 뛰었다. 마법사가 모두 그렇듯 체력이 낮으니 얼마 안가서 헥헥 거렸다. 타라스는 내일 하루는 주점에 가지 않고 마법에 전념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타라스가 나가자 은인의 말을 떠올렸다. 마법사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법사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여러가지로 갈린다. 전쟁터에서 마법사는 악마이고 전사이다. 하지만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 평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자식도 마법에 의해 살아났음을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는가. 물론 여인은 아이의 회생이 일시적인 현상임을 알지 못했다. 타라스는 바보같이 여인의 집에 돈 한푼 건네지 않고 가버린 것이다. 아이는 영양실조로 죽을번 했기 때문에 며칠 지나지 않아 똑같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게 뻔한 상황이다. '두 아이가 풍족하게 살수 있다고?' 여인은 은인의 말을 떠올렸다.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억척스럽지 못해서 두 아이를 기르기는 커녕 자신의 몸하나 건사하기도 벅찼다. 죽은 남편은 자신의 미모와 가녀린 모습에 반해 결혼했지만 살면서 그것이 생활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게되었다.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인은 밤새도록 은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고는 날이 밝자마자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은인에게 미안하지만 그분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두 아이와 자신이 최소한 지금과 같이 가난으로 고통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1 회] 18. 시간 마법사들이 천재이자 괴짜인 사실은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짜인 마법사를 나는 보게 되었다. 마법사들이 술과 여자를 탐하더니 결국 그중에 한 명이 기가믹힌 일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말인가요?" 나는 바이거가 말한 보고를 듣고 어이없었다. 아이 둘이 딸린 과부와 결혼을 하려는 마법사가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탑 근처에서 생활하겠답니다." "다른 마법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요?" "모두 상관없답니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구요." 바이거는 간단히 말하더니 자신의 층으로 돌아갔다. 바이거가 종이 한 장을 건네주고 갔는데 그곳에 과부와 결혼하려는 마법사에 대해서 적혀 있었다. '타라스, 가이덴 왕국에서 망명한 4서클 마법사' 기본적인 사항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가정을 꾸린다는데 말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일주일이 지나서 타라스가 과부인 여인과 결혼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모든 마법사들이 타라스를 축복해 주고 있었다. '이쁘네.' 타라스와 결혼할 여인은 상상하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두 아이의 엄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30대 여인이었던 것이다. 결혼식 장소는 탑의 1층이었고 하객은 마법사들이 전부였다. 삭막한 장소였지만 즐거운 분위기였다. 탑의 주변에는 황궁에서 파견한 병사들과 관리들이 머물기 때문에 건물이 상당히 많았다. 그 건물 중에서 타라스가 살아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결혼식을 진행하는 동안 타라스는 여인은 물론이고 두 아이까지 챙겨주었다. '부럽다.' 타라스의 생활이 부러운 것은 그것을 지켜본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또다시 탑의 지루한 생활이 지속될 것이다. 모두들 좋아하는 마법수련을 할 것이고, 오직 나만이 9층에서 빈둥빈둥 지내게 되리라. 타라스의 결혼을 떠올리며 나도 여자가 필요함을 느꼈다. 성욕(性慾)이 하늘을 뻗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었다. 죽은 사비나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성욕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세렌이 보이는 것은 필연인지 우연인지 모르겠다. 사실 9층에서 단둘이 지내는데 어떻게 눈에 뛰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세렌" "네, 주인님" 세렌이 앉아 있다가 부름에 대답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세렌이 여자란 생각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더욱이 사비나와의 추억을 가진 세렌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해." 나는 세렌에게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항상 내가 잠드는 침대로 세렌은 반대편에 멀리있는 침대에서 잠을 청했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세렌은 대답을 하더니 욕조에 물을 받고는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세렌도 내가 말한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노예로서 미리부터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감정 변화가 약간씩 느껴지고 있었다. 정령사들은 약간의 독심술이 있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오감이 발달하고 정령의 친화력으로 인해서 감정변화를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세렌의 기복이 심한 감정을 오랜만에 느끼는 것 같았다. 언제나 침착한 상태를 유지한 세렌이었기 때문이다. 세렌이 목욕을 하는 동안에 나 또한 물의 정령으로 몸을 깨끗히 하였다. 정령이 몸을 한 번 통과하면 피부위에 붙어있던 작은 먼지까지 씻겨진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다. 요즘이야 항상 물을 이용했지만 말이다. 세렌의 목욕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자정이 되자 세렌이 목욕을 끝내고 잠옷을 입고는 침대에 다가와 살며시 누웠다. 본래 세렌에게는 옷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탑에서 나가면 세렌에게 여러가지 옷을 사준적이 있었다. 지금 입고있는 잠옷도 세렌을 위해 얼마전 사주었지만 그녀가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사실이 기억났다. '세렌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세렌이 신분 때문에 나를 따르는 것을 알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만족인지도 모르지만 나름대로 세렌을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노예들은 온갖 학대를 받으며 지내는 경우가 많다. 세렌은 침대로 들어와 잠옷을 벗었다. 나도 조용히 옷을 벗고는 세렌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생명력 때문인지 몰라도 의외로 내가 성욕을 느낀 경우는 많지 않았다. 사실 다시 새삶을 찾은후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여자도 세실리아 뿐이었다. 편한 상대라 그런지 부담없이 천천히 관계를 즐겼다. 세렌이 아파하면 되도록 자제하면서 말이다. 함께한 시간이 많은만큼 세렌도 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경험해서 그런지 상당히 즐거웠다. '나도 마법사들처럼 술까지 먹어봐?' 마법사들은 술과 여자를 탐닉하지만 마법수련을 잊지 않는다. 그만큼 마법사는 마법에 미친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공부를 좋아해도 술과 여자 보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서의 예외자들이 바로 마법사이다. 아침이 되자 세렌은 일찍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며 세렌에게 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꺼냈다. 세렌은 당연히 노예이니 나를 따를 것이다. 솔직히 세렌을 누군가에 판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마법사들을 불러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향해를 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카르시온 제국을 여행한 사실이 후회되었다. 사비나가 죽고 곧바로 크라이 숲으로 돌아갔으면 지금처럼 복잡한 상황이 되지도 않았을테니 말이다. 바이거는 어디서든 탑으로 돌아올 수 있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만들어주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은 아무리 마도사가 만들고 성능이 좋아도 일정지역 이상은 이동시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거는 탑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도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도록 마나석까지 주었다. "손에 마나석을 쥐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하시면 카인님이 머물렀던 탑의 9층으로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바이거가 탑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마나석 하나가 얼마나 귀한지 알았지만 앞으로 무슨일이 생길지 몰라 받았다. 바이거는 평소 대화도 나눌수 있는 마법 수정구도 주었다. 필요하다며 건네준 물건들이 무척 많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돌아오고 싶으면 곧바로 마법길드 분점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면 되니까요." "마법 수정구로 연락이 되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세인트의 마법길드 분점을 이용하면 크라이 숲에서 걸음으로 일주일이 걸리는 패로이 마을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다. 더욱이 마법사 탑의 주인이자 마법길드의 마도사에 버금가는 등급이라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는데 무척 자유로운 신분이다. 나는 모든 마법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세렌과 함께 마법길드 분점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패로이 마을에 도착했다. 당연히 세렌을 위해서 마차를 준비하였다. 마차에는 바이거가 준비한 마법물품과 선물들이 가득차 있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라 무척 기대가 되었다. 세렌은 편온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여행을 경험하게 되어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패로이 마을에서 크라이 숲까지는 일주일이나 걸리지만 그것은 예전의 일이다. 그때는 정령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었다. 나는 땅의 최상급 정령 노에아넨의 도움으로 큰 길을 만들며 크라이 숲으로 이동했다. 크라이 숲이 최남단에 위치했기 때문에 도로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오고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패로이 마을에서 크라이 숲으로 마차로 이동하며 길을 만드는 작업은 예전에 세실리아와 함께 울창한 숲을 마차로 이동할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밤이되면 세렌과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가까워졌다. 세렌은 정말이지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노예는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교육을 받으니 죽기 전까지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자유를 주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니 노예는 천상 노예로 살다 죽는 것이 행복할 수도 있었다. ------ 울창한 모습의 크라이 숲과 마을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너무도 많은 사건을 겪어야만 했다.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마을에 들리지 않고 곧바로 사비나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집앞에 도착하자 하롤드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크라이 숲에 머무는 정령사는 숲을 지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왔음을 모를리 없었다. "반겨주니 고맙구나." "어머님의 방을 청소해 두었습니다." 조만간 도착할 것임을 알렸기 때문에 하롤드가 정리해 둔 것이다. 나로인해 가족들은 엘프들과 사이가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정령사 가족이라 할지라도 엘프와의 접촉이 매우 드물었는데 말이다. 더구나 멀리 있을 때 세레나 엘프장로를 통해 가족과 연락을 많이 했으니 사이가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세렌 인사해. 나의 아들 하롤드야." "안녕하십니까? 주인님의 노예 세렌이라고 합니다." 세렌은 하롤드를 향해서 인사를 하였다. 하롤드의 나이가 60살이니 세렌의 인사를 받고도 남았다. 새생명을 얻고서 처음 하롤드가 아들이란 소리에 놀랬던 기억이 생각났다. 애틋한 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친혈육이었다. 하롤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세렌의 인사를 받았다. 세렌을 하롤드에게 소개시키지는 않았다. 매우 애매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세렌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사랑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문제는 하롤드의 나이가 세렌에 비해서 세 배나 많은데 있었다. 하롤드와의 인사가 끝나자 마차에 가져온 짐을 내렸다. 탑에서 가져온 마법물품이 무척이나 많았다. 간단히 정리를 마치고 가족들을 위한 선물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설레였다.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 세렌도 데려갔다. 앞으로 함께 지낼 생각이니 소개가 필요했다. 탑에서 나를 부르지 않는 이상은 계속 크라이 숲에서 지낼 생각이다. 내가 탑에 없어도 바이거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물론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가 탑을 찾아오면 내가 갈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카인아!" "무사히 다녀왔으니 정말 다행이야."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두 형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엘프를 닮으려는 정령사 가족이지만 인간적인 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더구나 세레나 엘프장로를 통해서 계속 좋지않은 소식을 가족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할말이 많습니다." "그래 방으로 들어가서 네 말을 들어보고 싶구나." 할아버지가 내 손을 끌어서 방으로 데려갔다. 하롤드가 자연스럽게 세렌을 가족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조카들은 방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내게 진정한 가족은 자살하기 직전에 기억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략적인 소식은 세레나 엘프장로님을 통해서 전했으니 알고 계실테지만 처음부터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 사비나와 함께 수도 말린에 도착해서..." 사비나와 함께 수도 말린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어쩔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짧은 시간에 나처럼 많은 경험을 한 경우도 없으리라. 위험한 순간을 겪을 때마다 정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족들은 위험천만했던 소식을 들으며 탄식과 한숨을 쉬었다. 말주변이 없어서 간단히 말하는데도 모두 이야기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가족들이 마법사와도 엮인 말을 들었을 때는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정령사의 입장에서 마법사는 마나를 인위적으로 몸안에 가두고 힘을 추구하며 조화로움을 깨뜨리는 존재이다. 그런데 여러가지 상황을 겪다가 가족인 내가 마법사의 탑 주인까지 되었다는 사실을 듣게되니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가족들이 세레나 엘프장로를 통해 기본적인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복잡한 사연이 섞여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그래서 지금에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긴 이야기가 끝나자 가족들의 탄식과 한숨이 이어졌다. 가족들도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의로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사실을 알고서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불쌍한 카인"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잡으셨다. "60년을 죽음의 고통속에서 살아왔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카인에게 항상 나쁜일이 끊이질 않는걸까."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카인에게 왜 자꾸 이런일이 생기는 걸까요?" 아버지의 탄식을 듣고 첫째형 크라이브가 말했다. 나도 한때는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최상급 정령과 대화도 나눠보고 온갖 운명에 관련된 기록들을 조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런 사실도 알아내지 못했다. "고민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앞으로는 절대 운명에 이끌리지 않으면 되니까요." 가족들이 걱정을 하자 자신있게 말했다. 죽었다 살아난 경험도 있는데 그까짓 어려움을 왜 견뎌내지 못하겠는가. 단지 앞으로 나로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당할까 걱정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나누며 친화력을 높이는 끔찍한 식사도 하였다. 정령사들은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 엘프처럼 초식과 과실만을 섭취한다. 식사를 마치고 진정한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세렌은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있었다. 울창한 숲에 달랑 집 한채만 있으니 적응하기 어려운데도 말이다. 아침이 밝자 세렌과 단 둘이 식사를 하였다. 이제 세렌도 나와 식사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하롤드는 정령사라 친화력을 떨어뜨리는 세렌이 준비한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하롤드는 물의 정령사로서 숲을 위해서 항상 바쁘게 생활을 한다. 그런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중급 정령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침을 해결하고 무척 보고싶었던 엔트를 만나기 위해 엘프마을로 향했다. 세렌을 엘프마을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 세렌은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른다. 세렌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크라이 마을에 머물러야 하겠지만 나는 숲이 너무나 좋다. "세레나 장로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많이 변했구나. 다시 보게되어 기쁘단다." 엘프마을에 도착하자 세레나 엘프장로가 반겨주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여러가지로 도와준 분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축복을 내려주셨고, 패러렐 라이프의 운명을 알게 해 주셨으며 나를 위해서 엘프로서 금기시한 생명을 꺼뜨리는 자살까지 도와주셨었다. "엔트를 볼 수 있을까요?" "안그래도 엔트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함께 가보도록 하자." 세레나의 안내를 받아 걸으며 오랜만에 찾아온 엘프마을을 구경했다. 주변에 있는 엘프들이 내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인간은 수명이 짧아 60년 이상이나 친분을 유지하기란 어렵지만 나와 엘프들과의 인연도 벌써 60년이나 지났다. 엔트에게 생명력을 전해받아 다시 살아났을 때 적응을 하지못해 엘프마을에서 1년 가까이 생활하는 동안에 생긴 친분도 있어서 엘프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엘프마을을 지켜주는 800년생의 생명수 나무에 이성을 갖도록 영향을 준 인간이 나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생명수 나무에 단순히 이성만 생기도록 한 것이 아니라 전설속에 등장하는 엔트가 되도록 영향을 주었다. 또한 엔트의 친구이니 관심을 갖지 않는게 이상한 노릇이다. 세레나를 따라 얼마 가지도 않아서 다리가 달린 나무가 나무의 정령 드라이어드와 장난치는 모습이 보였다. 다리가 달린 나무는 대륙에서 오직 엔트 뿐이었다. "엔트야!" "어제 도착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 정령과 새들이 알려주었거든. 그런데 이놈이 자꾸 귀찮게 해서 미치겠단 말이야." 엔트는 내 부름에 대답하면서도 드라이어드를 잡으려고 바둥거리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휘둘러 잡으려고 움직이는데 너무 느려서 잡히지 않았다. 잠시 그러다가 포기하고는 느린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변한게 없네." 나는 엔트를 보며 말했다. 의외로 엔트의 외형이 떠나기 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떠나기 전에 외형이 변했기에 좀더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변할줄 알았는데 말이다. 커다란 나무에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있으니 가까이서 보면 약간 무서운 모습이다. "너는 많이 변했는데." "인간은 변하는게 아니라 늙는거야." "그런가? 그건 그렇고 그동안 무슨일을 겪었는지 무척 궁금했는데 당장 말해줄 수 있어?" 엔트는 내가 그동안 겪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가끔씩 정령계를 통해서 만났지만 정령계에서 견디는 시간이 짧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었다. 엔트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숲속의 모든 동식물과 엘프로 무척 많지만 항상 비슷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인 내가 밖에서 겪은 경험은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무척 궁금한 것이다. "엔트도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말해줘야해." "알았어." 엔트에게 다짐을 받고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어제 가족들에게 한 번 했던 말이라 좀더 정리가 쉽게 되었다. 세레나 장로를 비롯해 모든 엘프들이 내 기가막힌 모험담에 귀를 기울였다. 엔트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상당부분 이해를 하지못해 일일이 설명을 곁들여야 했다. 물론 그것은 인간사회에 익숙치 않은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엔트가 그동안 겪은 사실을 말해주었다. 말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으면 생각을 전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엔트가 인간처럼 말을 하지만 본래 정령처럼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의 대화가 익숙한 편이다. 엔트는 숲속에서의 온갖 재미난 사건들을 종합해서 말했다. 솔직히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숲에서 지내는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 재미있을리 없었다. 단지 오랜만에 보게된 엔트와의 만남이 무척 즐거웠다. '내가 원한거야' 엔트와 엘프들에 둘러싸여 있는 지금의 상황이 좋았다. 평생 이렇게 크라이 숲에서 지내는게 소원이다. 탑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이상은 언제까지나 숲에서 지낼 것이다. 하루종일 엔트와 대화를 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세렌을 잊고 있었다니.' 집에 돌아와 세렌을 보고서야 하루종일 혼자 있었던 세렌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엔트와 오랜만에 만나다보니 세렌을 생각조차 못했다. 이제는 숲에서 조용히 지낼테니 세렌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지내자고 생각했다. 그토록 원하던 조용한 삶을 갖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름대운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탑에서 가져온 마법물품이 편리한 생활을 도왔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마법물품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세렌이 무척 고생했을 것이다. 나는 매일같이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엘프들과 대화를 하도록 하였다. 세레나 장로가 고작 일분을 소환할 뿐이고, 예전에 나는 엔트가 전해준 생명력으로 한 시간을 겨우 소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겪으며 생명력의 효율성을 깨닫고 이제는 무려 반나절 동안이나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세레나가 장로가 된 것은 최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최상급 정령의 지혜를 빌려와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내가 매일같이 반나절이나 소환한 최상급 정령에게 엄청난 지식을 배울수 있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매일같이 내가 소환한 최상급 정령과 대화를 통해서 전혀 모르던 사실들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종종 정령으로서 말하지 못하는 사실도 많았지만 그 부분을 빼더라도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 특히 정령을 이용해 엘프들이 펼칠 수 있는 여러가지 잊혀진 비기들도 알게 되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최상급 정령의 도움으로 조금씩 변해하고 있었다. 전혀 듣지 못했던 엘프 특유의 신체를 이용한 전투방법과 엘프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들 그리고 신기한 지식들이 어우러져 특별한 엘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엘프는 인간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 시대에는 모든 종족이 함께 조화로움을 유지하고 엘프 종족의 전성기를 맞이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조화로움을 강조하던 엘프만이 현재에 안주해 버리고 다른 종족들 모두가 변화를 가졌다. 그래서 결국 지금처럼 쇠퇴하여 소수 종족이 된 것이다. 내가 소환한 최상급 정령을 통해서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과거 전성기를 맞이했던 엘프들의 모든 지식을 차곡차곡 쌓았다.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오직 엘프들을 위한 지식들이 무척 많았다. 지금은 엘프들이 많지 않지만 과거에는 무척 많았다. 인간이 기록한 역사서에도 적혀있는 사실이다. 대륙에 존재하는 어떤 최상급 정령사 엘프라 할지라도 최상급 정령을 한 시간 이상씩이나 소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극히 약간의 뛰어난 지식만을 알게 되었으리라. 나는 평소에 최상급 정령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변화됨에 따라서 정령사인 내 가족들도 그 변화를 따라갔다. 가족들도 엘프들처럼 최상급 정령과의 대화를 통해서 오래전 인간 정령사들이 익혔던 정령술을 수련하였다. 단순히 엘프들이 기뻐하도록 소환해 준 최상급 정령으로 인해서 과거의 엘프문화가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아나고 있었다.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가끔씩 세인트의 탑에 있는 바이거가 마법 수정구를 통해서 연락을 하는 바람에 몇번 왕복해야만 했다.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가 탑으로 찾아와 치료해 달라는 사건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사들은 이제 마나폭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나폭주를 당하면 무조건 세인트에 새로생긴 탑에 찾아가 치료를 부탁하면 되기 때문이다. 바이거는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가 탑으로 오면 최소한 몇개월은 기다리게 한다.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가 찾아올 때마다 크라이 숲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을 나를 불러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에 바이거가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야 아쉬운 입장이라 치료받는 시간이 좀 늦어져도 치료를 해준다는 사실에 감지덕지 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 있는 크라이 숲에서 노예 세렌과 10년을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800년의 생명력 때문에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내 모습도 변했다. 약간 키가 자랐고 청년스러워졌다. 물론 인간이 10년 동안에 변한 것 치고는 너무나 작은 변화였다. 그동안 어린 모습 때문에 여러가지 곤란한 경우를 많이 당했다. 그래도 이제는 청년으로 봐줄만한 모습이라 무척 만족스러웠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2 회] 18. 시간 카르시온 제국은 10년의 세월동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발전되었다. 본래 모두가 예상하기로 다방면으로 수요가 필요한 동지역을 중심으로 모든 분야별로 발전되고, 좀더 많은 마법사들이 망명하여 마법전력에 확고한 기반을 만드리라 생각했다. 주변국에서 마법사들이 망명하리라 예상한 점은 맞아떨어졌다.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법사들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로인해 실질적으로 마법전력이 강해졌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동지역에서 수요가 극대화되어 제국 전체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예상은 틀렸다. 초반에는 개척지역인 동지역에 필요한 물품이 너무나 많았다. 생활필수품을 비롯해서 이루 말할수조차 없을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당연히 타지역에서 엄청난 물량이 쏟아져 들어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제국 전체가 맞물려 발전하는듯 하였다. 제국 전체의 발전은 동지역의 수요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지역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마법사의 탑 때문에 발생한 변화였다. 보통 마법사의 탑은 마법사들이 마법을 연구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생활에 편리함을 선사하는 유용한 물품들이 쏟아진 것이다. 최초의 사건은 마법등이다. 마법등은 마법길드에서 만들어 실용화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소수의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탑에서 세인트 중심지가 되는 큰 길에 마법등을 설치한 것이다. 도시화가 진행되는 세인트에서 마법등은 발전의 속도를 두 배로 끌어버렸다. 사람들은 해가지면 활동을 멈추는게 기본이다. 하지만 세인트는 자정까지 밝혀주는 마법등으로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문화를 만들어갔다. 물론 그로인해 부정적인 문제들도 많았지만 탑의 안전을 위해 치안을 유지하던 병사들의 도움으로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탑에서는 마법등 하나로 만족하지 않았다. 시험삼아 세인트 중심에 설치된 예술적 가치를 지닌 분수대를 약간 변형시켜서 얼음이 생산되도록 하였다. 세인트는 무척 더운 지역으로 얼음을 구경조차 못한 사람들이 많아서 순식간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얼음을 생산하는 방법은 마도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빙계열 마법이 계속 유지되도록 마법결계를 완성시켜 응용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결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귀중한 마나석이 필요하는 문제점이 있지만 말이다. 마나석 하나가 전쟁터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무척 비효율적인 사용이었다. 카인의 마법사 탑에는 무려 백여명에 달하는 마법사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마나석이 풍부하였다. 그 이유는 마법사의 절반가량이 마나석을 사용할만한 마법실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리시아 제국이 아닌 왕국이나 소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뛰어난 마법서를 익히기에도 10년의 세월로도 부족했다. 카인의 마법사 탑에는 마도사가 오직 바이거 뿐이었지만 그는 다른 마법사들이 만든 마법결계를 활성화시켜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마법결계에 필요한 마법수식을 모두 계산하여 마법진까지 만들면 바이거가 6서클의 컨틴젼시 마법을 시전해 결계를 활성화시켜 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마법수련을 통해 서클을 올리려는 욕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은 망명한 마법사들의 처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생활마법에 뛰어든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생활마법에 뛰어난 마법사들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마법물품을 마구잡이로 만들고 세인트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연히 대부분 실용적인 가치가 없어서 쓸모가 없었지만 가끔씩은 실용가치가 있는 물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분수대에 설치했던 얼음이 생성되는 마법결계였다. 마법사들이 술과 여자를 탐하며 그중 일부가 가정까지 꾸리자 세인트 주민들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생활마법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생활마법에 뛰어들어 보편화된 마법물품을 만들었지만 주민과 가까워지면서 그들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물품을 만들 수 있었다. 주민과 가까워지자 누군가 농지의 일정지역을 따뜻하거나 춥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법사들에겐 생활마법을 연구하던 중이라 선심쓰듯이 결계를 만들어 주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결과는 마법사들도 놀랐다. 온난하거나 추운 지방에서 자랄수 있는 농산물이 결계를 만든 농지에서 생산된 것이다. 돈이 된다는데 가만있을 사람이 없었다. 세인트 주변의 모든 농지는 특산물 생산지가 되었고 그 모든 농지에 마법사들은 주민들이 원하는 날씨를 만들어 주었다. 물론 결계를 만드는 동안에 여러차례 실수도 있었다. 세인트에는 수많은 생활마법이 현실화 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 가장먼저 수질이 악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화를 이루는 마법결계를 두 세군데 설치하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파괴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마법을 연구한다면 망명한 마법사들은 오직 생활에 필요한 마법결계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결과는 세인트 주민들이 인정하고 있었다. 일년이 지나자 세인트의 생활마법 열풍은 다른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마법길드에 생활마법을 요청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이 마법결계만 완성하면 가능한 일이라 마법길드에서도 약간의 수고비를 받고 요청을 받아들였다. 수도 말린은 물론이고 약간 큰 도시라 생각되는 곳에는 마법등이 모두 설치되었다. 당연히 마법등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나석이 필요했기에 많은 투자가 필요했다. 가끔씩 마법등이 사용될 수 있도록 마나를 지원하는 마나석이 도둑을 맞는 해프닝도 벌어지기도 하였다. 생활마법의 발전에 힘입어 수련 마법사들도 덩달아 몸값이 뛰었다. 수련 마법사란 3서클을 이루지 못한 마법사를 말한다. 하지만 생활마법에는 1서클과 2서클 마법사가 필요한 경우가 무척 많았다. 생활마법으로 만들어진 물품 대부분은 마나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떠도는 마나를 집적시키는 마법결계만으로 마법물품이 동작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렇다고 마나석을 이용할 수도 없는일 아닌가. 그래서 마법물품에 마나를 주입할 수 있는 1서클과 2서클의 수련 마법사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생활마법의 열풍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사라졌고, 마법사는 이제 어디서든 대우를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마법사는 그저 전쟁터에서 수백여명을 죽일 수 있는 능력자로 대우받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공포심을 갖기 마련이고 이제는 마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법사로서는 뛰어남을 모두가 인정해 주는데 어떤 마법사가 싫어하겠는가. 하다못해 1서클 마법사라 할지라도 떳떳히 밝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휘이익. 휘이익. 에드 황제는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오는 황제의 좌석에 앉아 프리온 재상을 바라보았다. 생활마법의 열풍이 황궁에까지 찾아온 것이다. 본래 황제의 곁에는 시녀들이 팔이 아프도록 하루종일 곁에서 부채질을 했었다. "프리온 재상 이제는 때가 되었지?" "그렇습니다. 폐하" 에드는 프리온의 말을 듣고서 기다린 세월의 보람을 느꼈다. 10년 전부터 지금의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카르시온 제국은 더이상 발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동지역도 이제 수도 말린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주게. 전쟁을 시작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의 질문에 난색을 표했다. 프리온은 제국의 백성을 위해 에드 황제의 뜻을 오래시간 막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황제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리시아 제국은 왕국과 소국을 완벽하게 흡수하여 완벽한 연합제국을 완성였습니다. 그동안 저희 제국은 마법전력이 상당히 높아졌지만 병력에서의 전력은 일리시아 연합제국 보다 약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마법전력이 우세한 저희 제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상했던 발전은 아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로군. 그렇지 않나?" "저 또한 마법전력이 이렇게까지나 강해지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에드 황제의 말에 프리온 재상도 동의했다. 마법전력이 강해지는 것을 예상했지만 너무도 강해진 것이다. 카인의 마법사 탑에 머무는 망명한 마법사들 이외에도 그 이후로 망명한 마법사들도 많았으며 제국 전체에 하위 마법사들의 수가 상당히 많아진 것이다. "카인의 마법사 탑에 머무는 마법사들이 생활마법을 연구한 덕분이지. 하하하" "지금도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프리온의 말에 에드는 시원한 공기를 만드는 천장의 마법결계를 올려다 보았다. 마법결계가 공기를 차갑게 만들면 바닥으로 내려와 시원하게 만든다. 요즘 귀족저택에는 저런 마법결계가 모두 설치되어 있다. 더구나 이런 마법결계는 자연적으로 떠도는 마나를 이용해도 충분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생활마법에 속한다. "요즘에는 나무판자에 완성된 마법결계가 시중에서 판매된다며?" "모두 마법길드에서 만든 것들입니다." 생활마법은 이제 마법길드에서 주축이 되어 유행을 타는 상황이다. 차가운 공기를 만들어주는 마법결계를 나무판자에 완성하고 그 판자를 판매하는 방식이다. 누군가 판자를 구입해 집안에 두기만 하면 시원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마도사가 결계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어려운 발걸움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 마도사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으면 굳이 귀족에 빌붙을 필요없이 그저 마법결계를 만들어 뛰어들면 된다. 단지 문제는 마도사가 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들이 부귀영화를 탐하는 경우는 천지가 개벽할 확률보다 작다는데 있다. "마법전력은 그렇고 정령사들의 전력은 어느정도지?" "10년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습니다. 파괴력이 강한 불계열 종류의 정령사들을 동원하기 쉬운 체제도 구축이 되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워. 하하하." 에드 황제는 10년전의 귀족회의에 있었던 사건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카인이란 물의 정령사 때문에 정령사를 지원하기로 했었다. 정령사의 수가 적은 관계로 아주 적은 자금만 동원했는데 그것이 큰 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수도 말린에 생긴 정령사 길드에 가끔씩 정령사가 방문하여 길드를 이용한 것이다.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니 정령사들의 이용이 잦아졌다. 정령사가 원하는 친화력을 높이는 초식종류의 음식을 준비해 두거나 곤란한 부탁도 모두 들어주었다. 아주 소수이지만 정령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정령사 길드를 찾아갔다. 어렵지만 가끔씩 정령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결국 1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활동력이 강한 불계열 정령사들이 정령사 길드에 많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지원을 해주는 황궁에 다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불계열 정령사들은 속석상 무엇인가 파괴적인 욕구가 많았다. 그렇다고 살인을 즐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계열의 정령사 보다도 자유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정령사 대부분이 불계열이기 때문에 그들 자체만으로 큰 전력이었다. 용병생활을 하는 불계열 정령사도 생겨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불계열 정령사들 이외에도 다른 계열의 정령사들이 여러용도로 많이 활용되었다. 물계열 정령사는 카인으로 인해 뛰어난 치료술을 인증된 사실이다. 물계열 정령사들도 자신의 특기가 발휘되며 더구나 선행을 베푸는 일이라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카인과 다르게 마나를 강제로 이용하는 마법사와는 절대 상종하지 않았다. 바람과 땅의 정령사들도 각각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다. "귀족회의를 소집합니까?" "전쟁을 준비하는데 최소한 일년은 필요하겠지. 당장은 귀족회의를 통해서 귀족들에게 전쟁의 타당성을 납득시켜야겠지만 반대할 자는 없을거야. 마법길드에도 소식을 전해서 전쟁을 준비할 있도록 준비하게." "일리시아 연합제국과의 전쟁에 대한 소식을 모든 귀족들에게 통보하겠습니다." 에드 황제는 자신이 있었다. 귀족들은 지금의 카르시온 제국이 있도록 만든 현 황제인 에드를 존경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한마음으로 황제와 뜻을 모아서 전쟁을 치루는데 승리하지 못할리 없었다. 더구나 병사들의 전력에서는 약하지만 마법전력에서는 상당히 우세하다. 프리온 재상은 황제의 뜻에 따라서 귀족회의를 알렸다. 이 소식은 일리시아 연합제국에도 알려질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전쟁만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카르시온 제국과 일리시아 연합제국 두 제국중 하나가 멸망해야 끝나는 전쟁이다. 카르시온 제국이 지금처럼 발전되지 않았다면 전쟁이 많이 늦춰졌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마법의 영향으로 발전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카르시온 제국이 한참이나 우세하기 때문에 이때 전쟁을 하려는 황제의 뜻이 옳은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일리시아 연합제국도 단합이 되어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3 회] 18. 시간 에드 황제의 명으로 귀족회의를 연다는 소식이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귀족에게 알려졌다. 황제의 명으로 열리는 귀족회의는 10년전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정기적으로 세금을 조정하는 회의가 전부였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에드 황제는 여러 신분계층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제국이 평온하면 황제가 칭송을 받기 마련인데 현 황제는 평온에 기여까지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처음 귀족회의가 알려졌을 때에는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귀족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 말린에 모여든 귀족들은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과 전쟁을 하려는 움직임이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에 유명한 용병길드의 모든 용병이 황궁의 전쟁참여 의뢰를 받았고, 마법길드에서는 각 지방에 퍼져있는 마법사들을 불러들였으며, 정령사 길드에는 불의 정령사들이 하나둘 모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은 에드 황제가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귀족들은 드디어 예상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실감했다. 사실 수년동안 작은 전쟁을 해왔던 일리시아 제국과 10년 전부터 조용히 지내왔다. 그것이 큰 전쟁을 위한 휴식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마법전력이 강해져 누구도 넘볼수 없는 국력을 갖게되었고, 일리시아 제국은 주변의 왕국과 소국을 흡수하여 연합제국을 탄생시켰다.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은 일리시아 제국이 자신들이 강해지자 겁을 집어먹고 연합제국을 탄생시켰다며 비웃었다. 어느누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게 생각할 상황이었다. 에드 황제의 전쟁결정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마련되고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걱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0년전과 현재의 제국은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국의 백성들까지도 전쟁을 환영하였다. 10년이면 짧은 시간이지만 전쟁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안겨주는지 잊어버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주인님 탑에서 찾나봐요." 세렌이 나무를 한 시간이나 지켜보고 있던 내게 소리쳤다. 요즘은 엔트처럼 나무의 상태를 살펴보는게 너무나 재미있다. 아마도 정령과 시간을 많이 가져서 그런 것 같았다.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탑에서 찾는다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를 치료해 달라는 연락이 분명할 것이다. 마법길드의 마법사들은 갈수록 마나폭주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치료될 수 있으니 부담없이 마법실험을 강행하기 때문이다. 방으로 들어와 바이거에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마법 수정구를 손으로 만졌다. 수정구에서 한동안 보지 못했던 바이거의 얼굴이 나타났다. 바이거로서도 최대한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조용히 지내려는 내게는 귀찮은 연락이었다. "죄송합니다. 카인님" "바이거씨가 미안할 필요는 없지요. 또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가 탑에 찾아왔나요?" 바이거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지만 그저 기분이 좋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말했다. "그보다 더 큰 사건입니다." "무슨일인데 그래요?" "아무래도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에드 황제께서 귀족회의를 열어 귀족들의 동의도 얻어냈고 지금은 모두가 전쟁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북으로 이동시키고 있으며 마법사와 정령사 그리고 용병들까지 준비중입니다. 준비하는데 빠르면 반년이 걸리겠지만 최소한 일년 이내에 전쟁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제국이 전쟁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무척이나 길다. 병력을 이동시키는데만 한 달이 소요되니 말이다. 병력이 국경 지역에 도착해도 전쟁에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흘러간다. 전쟁을 하잔다고 해서 갑자기 맞붙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준비할 것이 너무도 많은게 현실이다. "우리에게도 연락이 왔나요?" "예,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카인님께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 에드 황제폐하께서 빨리 입장을 밝혀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전쟁을 참여할 것인지 아닌지 답변을 달라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카르시온 제국이 전쟁을 하는게 문제는 아니다. 전쟁이 아무리 치열해져도 내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명한 마법사들을 데리고 있는 탑의 주인인 내게 전쟁참여에 대해 묻는 것은 참여하라는 압박이나 다름 없었다. 처음에 탑을 완성시킬 때 전쟁이 발생하면 절대 참여하지 않겠다고 뜻을 밝힌적이 있었다. 망명한 마법사들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다. 조국을 배신하고 망명을 했지만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법서클을 올리려 기를쓰지 않고 생활마법에 뛰어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와서 전쟁에 참여하라며 압박을 가하다니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제가 직접 처리해야 할 일 같군요. 내일 가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마법 수정구에서 바이거의 모습이 사라졌다. 크라이 숲에서 조용히 지내며 과거 타의로 겪었던 사건들을 곰곰히 생각했었다. 그저 살아있는 자체가 즐거웠지만 이제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최소한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닐지라도 타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다. 세렌에게 한 동안 떠나있겠다고 말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면 에드 황제도 순순히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망명한 마법사들을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시킬 수는 없었다. 처음 에드 황제는 망명한 마법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든든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정착한 것을 알았으니 이용하고 싶어지는게 당연하다. '절대 그들을 우리 제국의 전쟁에 참여시킬 수는 없어.' 망명한 마법사들이 생활마법으로 카르시온 제국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생활마법이 너무나 흔해져 누구도 생활마법의 기초를 만든 마법사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망명한 마법사들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싫다. 지금까지 세인트에 종종 다녀왔지만 하루나 이틀 뿐이었다.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를 치료하고 곧바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 떠나면 한 동안 돌아오기 힘들 것 같았다. 나의 탑에서 생활하는 마법사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10년을 세렌과 함께 지내며 부부나 다름없이 지냈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다. 세렌은 노예로서 나를 위해 언제나 노력한다. 그나마 많은 대화를 통해서 변한 것으로 만족한다. 이제는 스스로 판단하고 크라이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을 만나기까지 하니 말이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 세렌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세렌도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것을 알고서 슬퍼하였다. 세렌은 크라이 숲에서의 조용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지겹고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해 탑으로 가지는 않았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을 이용하면 패로이 마을까지 반나절도 안되어 도착할 수 있고, 패로이 마을에서는 마법길드 분점을 이용해 세인트로 단번에 이동할 수 있으니 말이다. 탑으로 돌아오자 방문할 때마다 변하고 있는 세인트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세인트에서 가장 큰 탑은 언제나 그모습 그대로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은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수많은 마법결계가 탑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마법이나 물리적 공격도 방어할 수 있는 결계였다. 탑의 입구는 아직까지도 마법길드에서 선물한 골렘이 지키고 있었다. 백여명의 마법사가 골렘과 같은 마법물품 제작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절반가량은 생활마법을 연구중이고 나머지 반은 열심히 마법수련을 하고있으니 탑의 입구를 지키는 골렘이 교체될 일은 없을 것이다. "카인님 오랜만에 오셨군요." "얼굴 뵙기가 힘드네요." 입구로 들어서자 1층에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방문이 좋지않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0년이 흘렀음에도 마나폭주를 치료해 준 나의 은혜를 잊지 않는데 황제는 이들과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고 이용하려 하고있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거야.' 나는 마법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다짐을 하였다. 황제가 이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조용히 지내는 동안에 지난 과거에 타의로 탑의 주인까지 된 사실은 내게 큰 아픔이었다. 이들에게도 그런일이 없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각자 자신의 일을 찾아서 흩어지고 바이거만이 9층까지 나를 따라왔다. 탑에서 유일한 마도사 바이거에게 고마운 점이 많았다. 탑을 관리하는 귀찮은 일을 맡고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탑의 관리를 맡긴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당장 마법 수정구로 황궁과 연락을 할 수 있나요?"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럼 당장 연결해 주세요." 나는 바이거에게 황궁과 연락을 하고싶다고 말했다. 에드 황제도 탑의 마법사들이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의 여부를 두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신으로 전하면 강력한 의견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말하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카인씨 무척 오랜만에 얼굴을 보네요." 마법 수정구에 프리온 재상이 나타났다. 마도사 바이거가 직접 연락했으니 프리온 재상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연락을 받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년전 이후로 처음인 것 같네요. 황제폐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서신을 통하면 안되겠습니까? 요즘 폐하께서 전쟁을 준비중이라 무척 바쁘시거든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프리온 재상은 잠시 고민하더니 마법 수정구를 들고서 어디론가 움직였다. 아마도 에드 황제가 있는 장소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잠시후 황제와 귀족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수정구에 나타났고 프리온 재상이 황제에게 다가가 사정을 말하자 황제가 귀족들을 모두 내보냈다. 에드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마법 수정구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척 오랜만이군." "10년만입니다. 폐하" "카인은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조금밖에 변하지 않았군." 에드 황제는 예전에 비해 많이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대해 말했다. 에드와 프리온의 모습은 10년전과 많이 달라졌다. 마법사나 정령사처럼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은 노화를 막기란 상당히 어렵다. "전쟁과 관련해서 보내주신 서신을 받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연락을 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겠지?" 에드 황제는 당연하다는듯이 말했다. 옆에서 바이거가 황제의 발언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이거의 모습이 마법 수정구를 통해서 전달되지 않는게 천만다행이었다. 마법 수정구는 가까이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주변은 흐릿하게 나타난다. "황제폐하 10년전 약속한 사실을 잊어셨습니까? 폐하께서는 망명한 마법사들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망명한 마법사들의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요. 제 탑의 마법사들은 비록 망명했지만 자신의 조국을 침략하는 전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도안되는 소리를 하느냐!" 에드 황제는 뜻밖의 말을 듣고서 기가막힌지 분노를 터뜨렸다. 예전에 비해 황권은 강화되었고 귀족들과 백성들이 에드 황제를 존경한다. 그런데 내가 황제의 뜻을 거슬렀으니 분노하는게 당연했다. "10년전에 마법사들 모두의 뜻으로 카르시온 제국에 충성까지는 못하겠다고 미리 밝혔지 않습니까. 더구나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 기여한 것을 참작해 주십시요. 생활마법으로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점을 고려해 전쟁에 참여하란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요." 프리온 재상이 옆에서 또다시 화를 내려는 에드 황제를 말렸다. 나는 마법 수정구로 황제의 분노를 바라보며 할말을 잊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아무리 작은 전력이라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니 황제로서도 백여명이나 되는 마법전력을 포기할 수 없었으리라. 더구나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전쟁에 참여하는데 이곳의 마법사들만이 참가하지 않으니 어쩌면 황제의 주장이 옳을런지도 모른다. "카인씨 나중에 연락하시요." 황제가 아닌 프리온 재상이 마법 수정구에 얼굴을 비추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황제가 분노를 삭히고 있을게 분명했다. 바이거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망명한 마법사들 절반이 모두 일리시아 제국 출신이다. 차라리 왕국이나 소국을 침략한다면 모를까 대상이 일리시아 제국이니 전쟁에 참여하면 절반 가량의 마법사들이 조국을 배신하고 침략하는 것이다. "카인님 죄송합니다." "바이거씨가 죄송할 것이 아니지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황제를 탓해야죠." 바이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동안 비워져 있었던 9층에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한 동안은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 넓은 9층에 혼자 있으려니 탑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다음날 황궁에 또다시 연락해서 프리온 재상에게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을 강력히 밝혔다. 에드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나마 탑의 권한이 모두 나에게 있으며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는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전쟁준비에 열을 올리는 사이 나의 탑은 평소대로 생활마법이나 연구하며 하루를 보내었다. 앞으로 수많은 소문이 망명한 마법사들을 괴롭힐 것이다. 전쟁은 제국의 중대사인데 그곳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세인트 주민들까지도 마법사들을 외면할 가능성도 있었다. ------ 에드 황제는 카인이 전한 말에 분노했다. 전쟁은 모두가 힘을 합쳐서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 그런데 카인이 그럴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망명한 마법사들이라도 이런 중대사에 불참할 수는 없었다. "폐하 고정하십시요." 프리온 재상이 황제의 분노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재상도 듣지 않았소? 이게 고정할 일이요?" "그의 말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10년전 망명한 마법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에 머무른다는 자체만으로도 마법전력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그들에게 굳이 카르시온 제국에 충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을 했지 않습니까. 그때는 그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이제와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압박하는 것을 그들이 이해할리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절반이나 되는 마법사들이 일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자들임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프리온 재상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에드 황제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에드 황제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망명을 했다지만 전쟁은 제국의 중대사에 속한다. 그런 행사에 빠지면 제국의 백성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의 뜻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시요. 단, 앞으로 황궁에서의 지원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함께 전하시요." "폐하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들에게 지원을 끊는다는 것은 무리한 처사입니다." "더이상 할 말이 없으니 물러가시요."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의 강력한 뜻을 꺾을수 없었다. 황제로서는 카인에게 씻을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프리온 재상이 손쓸 사이도 없이 에드 황제가 명령했으니 되돌리기가 무척 힘들다. '황제폐하는 변하셨어.'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와 함께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황제의 성격이 약간 변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황권이 강화되고 모든 귀족들이 존경을 하는데 변하는게 당연하다. 더구나 에드 황제는 엄청난 업적까지 쌓은 상태라 두고두고 칭손받을 황제임에 틀림은 없었다. 재상은 굳이 에드 황제의 뜻이 아니더라도 곧 전쟁이 발생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국력이 신장되면 쓸곳을 찾기 마련이다. 그러니 결국 주변국을 침략할 것이고 카르시온 제국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일리시아 제국이다. 왕국이나 소국은 설사 주변에 있을지라도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에 침략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재상은 최근들어 전쟁을 준비하느라 너무나 분주했다. 그나마 위안을 갖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다. 그동안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의 뜻을 듣고는 미리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4 회] 19. 전쟁 대륙에서 일리시아 제국은 사라지고 연합제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변의 왕국과 소국이 모두 일리시아 제국에 흡수된 것이다. 연합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해지는 카르시온 제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연합제국이 탄생하면서 일리시아 제국이 왕국과 소국에게 많은 양보를 하였다. 사실 왕국과 소국은 어차피 일리시아 제국의 속국이었고 조공을 받치는 상태라 설사 일리시아 제국이 멸망해도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또다른 제국의 속국이 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일리시아 제국에서는 엽합제국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속국에게 당연히 받아들였던 조공을 폐지하여 연합제국이 될 경우에 귀족들의 신분을 똑같이 유지해 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사실 귀족들은 작은 나라의 귀족 보다는 제국의 귀족신분이 더 좋았다. 더구나 항상 눈치만 보는 작은 나라에 충성을 받치려는 귀족이 많지도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연합제국이 된 왕국과 소국은 거의 사라지고 유지하던 권력마져도 빼앗겨 버렸다. 연합제국 탄생에 참여한 왕국과 소국의 모든 사람들이 그제서야 후회했지만 이미 연합제국으로 모두 흡수된 상태라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연합제국 탄생은 로터스 황제가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의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연합제국을 완성시킨 것이다. 주변국이 모두 흡수되자 왕국과 소국의 귀족들은 외면받기 시작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회의에 참석도 하지 못했고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은 것이다. 연합제국이 탄생되고 나서야 모든 이들이 뒤늦게 로터스 황제의 뜻을 알아챘다. 이미 연합제국의 실권은 로터스 황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은 연합제국이 탄생하기 이전의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들도 어찌하지 못했다. 이제는 연합제국이라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국과 소국의 귀족들도 함께 정치를 참여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연합제국의 실권이 로터스 황제에게 있으니 누구도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로터스는 황권으로 국력이 강화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대개 국력이 강화되는 일은 귀족들에게 피해가 가기 마련이다. 병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그런 자금은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부 귀족들은 카르시온 제국이 점점 발전하고 강력해 지는 모습에 연합제국 탄생을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장 귀족들로서는 자신의 부가 빠져나가니 어디에 호소할 곳도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을 두렵게 생각하여 연합제국이 탄생되도록 귀족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로터스 황제를 도운 사실을 후회하였다. 로터스 황제는 엘른 재상과 함께 연합제국이 안정을 찾고 강력한 국력을 지닌 나라가 되도록 노력했다. 10년이 지나자 그동안의 결실이 눈앞에 하나둘 나타났다. 병력의 수만 생각한다면 대륙에 존재하는 어느 제국도 따라오지 못했다. 로터스 황제의 가장 큰 결실이라 할 수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이 대륙에서 마법전력으로 가장 강력하다면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병사들의 수가 가장 많았다. 더구나 농노와 같은 하층계급의 신분을 반강제로 차출한 병사가 아닌 엄격한 훈련을 받은 강병들이었다. 반강제로 병사들을 차출하면 그보다 많을 것이지만 그런 강수는 쓰지 않았다. 로터스 황제가 비록 주변 왕국과 소국을 약간 비열한 방법으로 연합제국의 탄생을 빙자해 흡수하였지만 국력을 끌어올린 사실만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을 걱정하던 사람들에겐 로터스 황제의 결정이 마음 한 편으로 차라리 잘 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이 침략한다는 소식이 일리시아 연합제국에게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더이상 로터스 황제를 비난하지 않았다. 반강제로 흡수당한 주변의 왕국과 소국의 사람들까지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국력이 강해졌으니 카르시온 제국이 침략을 해도 백성들에겐 피해가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백성들은 카르시온 제국이 아무리 마법전력이 우세하여도 절대 연합제국의 강한 병사들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로터스 황제는 오래전부터 카르시온 제국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은게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먼저 선수칠 수 있었는데!" 로터스는 오른손으로 황좌의 팔걸이를 내리치며 말했다. 카르시온 제국이 조금만 전쟁소식을 늦게 통보했어도 로터스가 전쟁을 선포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은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한듯 싶습니다." 엘른 재상은 황제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실 전쟁은 방어하는 입장이 명분이 있어서 좋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황제를 비롯해 귀족들은 전쟁을 방어의 명분으로 시작하기 보다는 침략으로 시작하길 좋아한다. "마법사와 병사들의 싸움이 될 것 같은데 피해가 막심하겠군. 재상의 생각은 어때?" "카르시온 제국이 아무리 마법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전쟁은 기본적으로 병사들이 수행합니다. 설사 전쟁에서 승리한다 할지라도 침략한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키지 않는 이상은 침략지역의 치안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병사가 필요합니다. 카르시온 제국은 실수를 하는 겁니다. 설사 저들이 승리한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차지한 저희 연합제국의 땅을 지켜내지도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바보같은 카르시온 제국놈들! 하하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로터스 황제는 마법전력의 무서움을 뼈져리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그러한 자만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조만간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은 소수의 뛰어난 파괴력을 지닌 능력자가 주도하긴 하지만 승리하고 난 후에는 많은 병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재상 대신들을 불러들이게." 엘른 재상은 황제의 지시를 듣고 밖에 기다리고 있는 대신들을 모두 안으로 불렀다. 연합제국은 이제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들만의 것이 아니다. 대신들중에는 흡수한 왕국과 소국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언어가 다른 왕국과 소국의 사람이지만 통역이 가능한 마법물품을 가지고 있어서 의사소통에 문제는 없었다. "로터스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모든 대신들이 로터스에게 인사를 하였다. 로터스는 마음속으로 뿌듯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모두 알고있겠지만 카르시온 제국에서 전쟁을 선포하였소. 오늘 이후로 카르시온 제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도록 하시요. 카르시온 제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 침략을 하기위한 전쟁임을 명심하도록 하시요." "명심하겠습니다." 대신들은 로터스의 선택에 끌려가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라면 반박이라도 하련만 연합제국을 대표하게 되었으니 누구도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그동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연합제국이 피해를 보는일은 없을거요. 그리고 오늘부터 엘른 재상이 전쟁을 하기위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을테니 그리 아시요." 대신들은 로터스 황제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모두 물러났다. 로터스가 단순히 대신들에게 통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꼭 필요했다. 아무리 황권에 밀려 한 마디도 못하는 귀족들이지만 연합제국이 있기까지 온몸을 받쳐 도운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신들이 나가고 또다시 황제와 재상만이 남게되자 본격적인 전쟁에 대한 논의를 나누었다. 전쟁은 하나의 일관된 전략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더구나 제국같이 큰 나라는 그저 단순한 전략이 최선의 방법이다. 수많은 병력을 나눈다거나 하는 미친짓을 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전력에 어떻게든 피해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열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치안이 엉망인 상황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전쟁을 준비하느라 가뜩이나 적은 병사들을 국경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있으니 충분히 성공할 것입니다." 재상은 황제에게 치안이 약한 틈을 이용해 암살자들을 카르시온 제국에 보내 마법사들을 죽이려는 전략을 세웠다. 전략이라 말하기 민망한 방법이지만 마법전력에서 너무나 차이가 보이는데 그냥 전쟁을 하기엔 막심한 피해가 우려되었다. 마법사 한 명이 죽는다면 수많은 병사들이 살 수 있는데 전쟁의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암살자를 파견하려거든 10년전 망명한 마법사놈들에게도 잔뜩 보내주게. 또한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는 카인이란 정령사도 눈에 가시같은 놈이기까 다시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특별히 신경써서 황제폐하가 다시는 입에 올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른 재상은 황제의 뜻을 받아들였다. 엘른으로서도 조국을 배신하고 카르시온 제국에 망명하여 행복하게 살고있는 마법사들이 싫었다. 또한 그들이 망명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카인이란 정령사도 싫었다. 사실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은 마나폭주의 치료방법을 찾은 카인에게 모든 원인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에서는 물의 정령사를 납치하는 수단까지 동원하여 마나폭주 치료방법을 연구했지만 결과는 미비했다. 마나폭주 당한 마법사를 물의 정령사가 치료를 할 수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긴 시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짧은 시간에 치료할 수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더구나 물의 정령사가 무척 희귀하고 발견해도 도움을 주지 않으니 현재 일리시아 연합제국에서는 그로인해 마법사와 정령사의 사이가 악화되어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엘른 재상은 전쟁준비를 위해 그동안 훈련으로 강병이 된 병사들을 국경이 있는 남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수천에 달하는 암살자들을 카르시온 제국에 보냈다. 오래전부터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전력에 타격을 주기위해 키워온 마법사를 암살하기 위한 암살자들이었다. 전쟁에서 마법사는 집중공격을 받는 대상이 된다. 마법사 한 명이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궁수들의 집중공격이 쏟아짐은 물론이요 투석기까지 마법사를 향하는 경우까지 종종 발생한다. 전쟁터에서는 서로 상대편의 지휘자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전력이 너무 강하다보니 엘른 재상은 전쟁준비를 위해 암살자를 키워왔던 것이다. 국경을 넘어서야 하는 일이라 간단한 카르시온 제국어까지 교육시켜야 했으니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던 일이다. 엘른 재상은 치안이 허술한 카르시온 제국에 큰 타격을 주리라 예상했다. 물론 뛰어난 마법사들은 당하지 않겠지만 3서클 정도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죽음을 맞이하리라. '배신자들 어디 맛좀봐라.' 엘른 재상은 암살자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난 자들을 세인트 지역에 있는 마법사 탑에서 생활하고 있을 마법사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10년전 카르시온 제국놈들의 첩자사건을 그대로 갚아주지.' 엘른은 10년전에 마법사들을 납치한 사건을 이제서야 복수한다는 마음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을 위해 충성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재상으로 있는 나라가 약해진 사실로 자존심이 상했다. 비록 황제는 아니지만 재상이란 직책은 그에 못지않는 자리이기 때문에 생긴 마음이었다. 엘른은 망명한 마법사들 이외에도 카인이란 정령사에게 피해를 주기위해 그의 고향으로도 백여명에 달하는 암살자를 파견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이라는 크라이 숲에 가족을 모두 죽이기 위해서이다. 카인은 탑의 주인이니 암살자들을 아무리 많이 파견해도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어떻게든 피해를 주기위해 가족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놈들아 기다려라!" 엘른 재상은 로터스 황제의 야심적인 성격의 영향을 받았다. 로터스 황제의 황권이 강화되어 엘른 자신의 권한도 함께 높아졌다. 그래서 작은 일은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로터스 황제도 엘른 재상이 허락없이 일을 진행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같은 목표를 향해 연합제국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부귀영화에 신경쓰지 않는다. 부가 없더라도 최고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지휘하는데 만족을 하는 것이다. 로터스 황제와 엘른 재상은 서로 도와가며 카르시온 제국과의 전쟁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오직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5 회] 19. 전쟁 카르시온 제국은 모두 전쟁준비에 열심이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속에서 황제의 어이없는 결정이 탑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바로 황궁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을 더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결정이었다.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마법사들에게 당연히 내려질 수 있는 결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망명한 마법사들 또한 불복하였다. 프리온 재상에게 큰 마음을 먹고 항의를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쟁을 준비하는 마당에 사소한 그런 문제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두가 준비하는데 그저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는 우리들이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귀족들은 더이상 망명한 마법사들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황궁의 지원에 대한 입장은 곧바로 나타났다. 탑의 주위를 경계하던 병사들이 대거 철수를 한 것이다.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이 부족하다는 이유였지만 마법사가 생활하는 탑은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나의 탑에는 가정을 가진 마법사들이 많아 병사들이 꼭 필요했다. 세인트 주민들도 망명한 마법사들을 더이상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탑의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오직 마법사들을 위한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세인트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도 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치안이 위태한 세인트에 그나마 있던 탑을 경계하던 병사들까지 철수하자 치안이 결국은 무너졌다. 도시 중에서 암흑조직이 없는 곳은 세인트가 유일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치안이 부실하니 카르시온 제국 전체에서 부정적인 사조직이 생겨났다. 세인트 주민들은 모든 탓을 탑의 마법사들에게 돌려버렸다. 사실 황제가 전쟁일 일으켜 생긴 일이었지만 그들에겐 황제는 존경을 해야만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마법사들이 세인트 주민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한지 기억해 주지를 않았다. 나는 마법사들 중에서 가정을 가진 마법사들을 모두 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본래 탑에는 오직 마법사밖에 생활하지 않지만 어쩔수 없었다. 가족을 탑 외부에 머무도록하고 출퇴근하는 마법사를 보기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탑의 1층과 2층은 아직까지도 방치되어 있었다. 대부분 지하층에서 마법실험이나 수련을 하고 생활은 자신의 서클에 해당하는 층에서 하기 때문이다. 세인트 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가정을 가진 마법사들은 1층과 2층에서 생활하였다. 탑 한 층이 얼마나 큰지 모두가 생활하기 편리하도록 간단하게 집을 짓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지하층에 마법길드에서 선물한 골렘도 있으니 집짓는게 어렵지는 않았다. 마법사들은 생활마법을 통해서 편리한 방법을 많이 터득하였다. 누가 전투골렘을 이용해 집을 짓겠다고 생각하겠는가. "아직까지 연락이 없나요?" 내 질문에 바이거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바이거씨의 말마따나 이제는 포기해야 되겠네요." "지금 지하에 있는 물품만으로도 몇년은 지낼수 있으니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저희는 이제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게 된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해결책을 찾아보도록 해요." 마법사들은 카르시온 제국에서 더이상 탑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소식에 실망하였다. 전쟁이 끝나도 한 번 지원을 끊은 탑에 지원을 해줄리 만무했다. 그나마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는 내가 있기 때문에 그냥 방치한 것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탑의 주인인 나 때문에 지금처럼 지원은 끊겼지만 마법수련이라도 하면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들은 다시 한 번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몇명은 차라리 전쟁에 참여하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우울한 나날은 한 달이나 지속되었고 그 시간동안 카르시온 제국 전체는 전쟁준비로 인한 피해가 계속 속출하였다. 하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가 되자 그제서야 백성들도 전쟁에 대한 우려하는 마음이 생겼다. 9층에서 최상급 정령과 신기한 이야기를 듣다가 마법진에 바이거가 나타났다. 얼마전 바이거에게 최상급 정령사란 사실을 밝혔기 때문에 정령을 사라지게 만들 필요도 없었다. 내가 최상급 정령사란 사실을 말하고 나서야 바이거는 마나폭주를 치료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나폭주 치료방법의 이론은 사실 마법길드의 마도사들이 의견을 모아서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 응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론상 완벽한데 현실에 적용하기엔 문제가 있는 이론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마나폭주로 치료하였으니 반박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마나폭주를 실제로 치료하는데 무슨수로 이론을 반박하겠는가. 바이거는 내가 최상급 정령사란 사실을 깨닫고 대하는게 좀더 조심스러워졌다. 최상급 정령사가 마법사로 따지자면 7서클이나 8서클에 달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동안 10년이 지나도 늙지 않은 이유를 바이거는 이해하게 되었다. 마나를 많이 갖고있을수록 수명이 늘어나고 노화가 방지되는 현상은 자연적인 결과이다. "정령분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는데 죄송합니다." 바이거는 인간과 다름없는 정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이거도 처음에는 정령이 실제 사람과 똑같이 말하는 사실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었다. 천재인 마법사라 할지라도 정령이 흐릿한 안개 형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형제를 이루는 마나가 부족하여 생긴 현상이다. "무슨일이 있나요?" 바이거는 무슨일이 발생하지 않고서는 절대 9층으로 올라올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용히 지내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전쟁이 좀더 일찍 발생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요? 아직 반념이나 더 남아있지 않나요?" 제국처럼 큰 나라가 전쟁을 앞당기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바이거가 단순히 전쟁이 앞당겨 진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올라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쟁소식이 궁금했지만 그것은 탑에서 생활하는 마법사들 때문이었다. "마법길드 소속의 하위 마법사들이 떼로 암살을 당해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리시아 연합제국에서 엄청난 수의 암살자들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럴수도 있나요?" "아무래도 일리시아 연합제국에서는 이번 전쟁에서 기본예의를 무시할 것 같습니다." 바이거의 말은 큰 충격이었다. 사실 전쟁을 예의까지 차리며 벌인다는 것이 웃긴 발상이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전쟁을 하였다. 기사는 기사끼리 전투를 벌이고 마법사는 마법사끼리 서로 비슷한 입장에서 싸운 것이다. 전투가 아무리 심각해져도 기본적인 예의는 서로 지켜주었다. 하지만 예의에서 벗어나는 전쟁이라면 서로 어느 한쪽이 멸망하지 않고서는 절대 끝날 수 없게 된다. 멸망을 당할 위기에서는 전쟁의 예의를 무시하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일리시아 연합제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암살자들을 파견하여 마법사들을 암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전쟁이 앞당겨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기사와 기사가 전투를 벌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바이거는 카르시온 제국이 전쟁을 승리한다 할지라도 피해가 막심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이야 병사의 수가 엄청나니 문제가 없지만 카르시온 제국은 병사의 수가 적어 많은 피해를 입으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마법사가 병사들 수백에 달하는 능력을 전쟁터에서 발휘하지만 그것은 오직 전쟁에서 뿐이다. 병사들 수백은 작은 마을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치안능력이 있지만 마법사 한 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이다. 그러한 문제점을 카르시온 제국의 사람들은 서서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한 문제점이 있었군요." "저도 지금에서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거가 아니었다면 절대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전쟁을 구경조차 못해본 내가 전쟁에 대해서 아는게 있을 턱이 없었다. "바이거씨가 모두에게 외출할 때 조심하라고 전하세요. 저희들은 아마도 탑에서 생활하다보니까 암살자들이 파견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요." "가정을 가진 마법사들을 모두 탑 안에서 생활할 수 있게 조치한 덕분에 괜찮을 겁니다." 1층과 2층에 내려가면 항상 어수선하지만 탑의 모든 마법사들이 암살자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탑을 지키던 병사들까지 철수한 마당에 암살을 당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암살이라.'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암살자들이 죽인 마법사들은 상당히 많았다. 하위 마법사들이라 다행이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전쟁에서 엄청난 전력이 된다. 어떤 방법으로 카르시온 제국까지 암살자들이 넘어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전쟁을 준비중이라 국경 지역은 암살자들이 넘어오는 일도 쉽제가 않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울적하였다. 크라이 숲에서 조용히 지냈으면 아무것도 몰랐을텐데 말이다. 물론 탑의 주인이라 이제는 조용히 지내기가 틀려먹었지만 말이다. "카인님!" 암살자에 대해서 보고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이거가 나타나더니 황급히 불렀다. "타라스가 밖에서 암살자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 지금 목숨이 끊어질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 유언까지 끝냈는데 마지막으로 카인님을 보고 싶답니다." "마법으로 치료를 하지않고 왜 올라왔습니까?" "제가 손쓰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바이거에게 타라스의 상처가 도저히 치료될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마법진에 올라섰다. 곧바로 1층으로 텔레포트 되었고 그곳에는 마법사들이 둥그런 원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비켜주자 마법사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했던 타라스가 분명했다. 결혼식까지 참여했기 때문에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죽지 말아요." 피를 냇물처럼 흘리며 쓰러져있는 타라스를 그와 결혼한 두 아이의 여인이 울고 있었다.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와 남자이아도 피를 흘리는 타라스 곁으로 가려고 어머니 품에서 바둥거리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바닥은 피로 범벅이 되고 있었다. '심장과 복부의 자상(刺傷)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복부에 있는 내장기관이 모두 손상을 입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엘레스트라가 내 마음을 알아채고 마음속으로 타라스의 상태를 자세히 말해주었다. 타라스의 몸이 피범벅이라 어느 상처가 문제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엘레스트라는 목숨에 위협을 주는 상처만 말했던 것이고 그 외에도 자잘한 자상이 수도없이 많았다. "카인님 덕분에 마법사로서 다시 생활할 수 있었고 마누라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행복한 생활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카인님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타라스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온 나를 보면서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모두 하였다. 암살자에게 당한 상처가 확실했지만 너무 힘들게 말하고 있어서 차마 암살당할 때의 상황을 물을수가 없었다. 나는 타라스의 말을 들으면서 엘레스트라에게 치료가 가능한지 물었다. 이렇게 심한 상처는 내가 직접 생명력을 제어하여 치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네. 그럼 편히 쉬도록 하게나." 타라스에게 말을 하면서 치료를 위해 기절을 시켰다. 마법사들이 타라스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 엘레스트라에게 치료를 부탁하였다. '마나가 가득하니 치료하는데 생명력이 적게 들겠는데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엘레스트라는 나의 생명력을 사용해 타라스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타라스의 몸에는 치료포션이 많이 뿌려져 있는 상태라 엘레스트라가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법사들이 귀한 포션을 물처럼 타라스에게 뿌렸을 것이다. "모두 진정하세요. 살릴수 있습니다." 나는 울고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타라스의 몸을 바라보았다. 피로 범벅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지만 자상이 모두 아물고 있었다. 엘레스트라는 타라스의 몸에 치명적인 독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주었다. 암살자들의 독은 스치기만 해도 저승행인데 그나마 마법사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카인님이 살려내시고 계시잖아?" "정말이네." 타라스의 자상이 치료되는 모습이 마법사들에게도 보였다. 모두들 슬픈 표정을 지우고는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죽음의 문턱까지 간 경우의 환자를 치료하기는 처음이었다. 끔찍한 피까지도 엘레스트라가 씻겨주고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되었던 타라스지만 치료가 끝나자 피 한 방울도 몸에 없었다. "모두 타라스를 옮겨주세요." 내 말을 듣고서 타라스가 많은 관심속에 1층에 머무는 그의 집에 옮겨졌다. 나는 모두에게 치료가 끝났으니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멀쩡할 것이라 말해주었다. 바이거에게는 타라스가 깨어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달라고 전했다. 치료된 타라스를 다시 만나면 감사하다며 온갖 귀찮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치료에 대해서는 나를 신임하고 있었다. 마나폭주를 치료한다는 자체만으로 내 치료술에 대해서는 경의(敬意)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오직 바이거만이 알고있다. 물의 최상급 정령사의 치료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음날 바이거를 통해서 타라스가 겪은 사실을 전해들었다. 타라스가 나를 만나보려고 했지만 그는 9층에 올 수가 없다. 9층에는 바이거 외에는 오지 못한다. 타라스는 가족을 위해서 세인트에 있는 시장에 가려다가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타라스가 암살자 중에서 몇명을 마법으로 공격했지만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서 겨우 도망쳐 왔다고 밝힌 것이다. 타라스가 4서클의 마법사였기 때문에 그마나 암살자들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는 3서클의 파이어볼 마법처럼 여러명을 공격할 수 있는 파괴적인 마법을 익혀야만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마법은 마법사가 적에게 노출된다는 점이다. 4서클의 마법에는 파괴력이 강하면서 여러명의 적을 공격하면서도 마법사 본인도 방어할 수 있는 마법이 있다. 그래서 타라스가 암살자들에게 빠져나와 탑가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이거를 통해서 모든 마법사들이 외출을 삼가하도록 말했다. 탑의 안에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굳이 밖으로 나가 위험을 초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암살자들은 저정된 목표가 아니면 살인을 하지도 않는다. 내가 움직여 그들을 찾아 죽여도 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잘못 암살자를 찾아죽이면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이 엉뚱한 오해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뜩이나 망명한 마법사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황니 말이다. ------ 루디엘은 백여명의 암살자들을 인솔하여 국경을 넘어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을 향해서 이동했다. 10년에 걸친 힘든 훈련을 통과한 암살자들이라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루디엘에게 내려진 목표는 카르시온 제국에서 마나폭주 치료방법을 알아낸 카인이란 정령사의 가족을 암살하는 것이다. 카인이란 정령사가 중급에 달하는 실력자임을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가 제국의 최남단 크라이 숲이라는 곳 출신이라는 점은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루디엘을 따르는 백여명의 암살자들은 함께 훈련을 받았던 암살자중 가장 뛰어났다. 적국이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넓은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까지 가기란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암살자로서 훈련받으며 이보다 더한 어려움도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루디엘은 크라이 숲에 머무는 카인의 가족을 죽이고 수도 말린으로 다시 북상하여 혼란을 야기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카인의 가족이 본래 목적이고 그것이 성공하면 루디엘 스스로 판단해서 해동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암살자들이 루디엘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며 따랐다. 한 달이나 움직여 크라이 숲 인근에 도착하고 며칠 휴식을 가졌다. 최남단이라 사람들도 없는 숲이라 휴식을 취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루디엘은 카르시온 제국어에 능숙한 암살자를 크라이 마을에 보내어 카인의 정령사 가족에 대해 알아오라고 지시하였다. 흔적을 피하기 위해 그저 정령사를 방문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라고 속이도록 시켰다. 진정한 암살자는 목표물 이외에는 죽이지 않기 때문에 살인도 피하도록 하였다. 크라이 마을에 보낸 암살자가 정령사 가족이 숲 어디에서 지내는지 그 위치를 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정령사 가족의 실력을 모르고 있었다. 루디엘은 정령사 가족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백여명에 달하는 암살자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루디엘은 크라이 숲에 있을 엘프들을 간과(看過)하였다. 루디엘은 자신감이 넘치는 암살자들을 데리고 카인의 정령사 가족이 살고있는 집으로 공격하려고 접근하였다. 목표를 위해서 얼마나 어렵게 크라이 숲까지 왔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패에 대한 생각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공격해.' 루디엘은 손짓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집을 향해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암살자들과 크라이 숲으로 들어와 정령사 가족이 머무는 집을 발견하자 곧바로 공격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정령사들은 숲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들이지.' 루디엘은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분명 정령사들이 존재함을 직감으로 알았다. 암살을 위해 정령사에 대한 모든 것을 공부했다. 뛰어난 정령사는 숲에서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길수 있다. 암살자들이 펼치는 은실술과는 전혀 달랐다. 정령사는 자연에 동화되어 조화로움을 이르는 경우였고, 암살자들은 단순한 기척을 숨기는 것이었다. 암살자들이 정령사 가족의 집 하나를 향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들어가는 속도만큼 튕겨나와야 했다. '흩어져서 각자 공격' 루디엘은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암살자들이 되려 튕겨나오자 곧바로 다음 명령을 내렸다. 암살자들 스스로 자유롭게 목표를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너무도 많은 인원이라 절반 가량이 약간 떨어진 장소에 모두 은신술을 펼쳐 숨어버렸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집안에서 카인의 할아버지 포그너가 나왔다. 포그너는 바람의 중급 정령사로 10년 전부터 카인이 소환한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을 통해서 바람의 정령을 이용한 여러가지 정령술을 익혔다. 오래전에 사라진 정령술로 지금에 이르러 엘프들도 익히지 못한 비기였다. "으악!" "모두 피해!" 포그너를 공격한 암살자들은 그를 보호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바람의 정령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령사 가족은 왠만한 일로는 절대 분노하지 않는다. 더구나 정령사이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제어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정령사는 엘프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그들을 지켜주는 임무를 가졌기 때문에 나쁜 마음으로 숲을 침범한 경우에 절대 용서가 있을수 없었다. '모두 은신술을 사용해 도주하도록.' 루디엘은 암살자들이 포그너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도주를 선택하였다. 어차피 또다시 기회를 엿보면 된다. 암살자의 특기가 적절한 기회를 엿보는 것인데 너무 자만하여 노출된 상태에서 목표를 노려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포그너를 공격했던 10명의 암살자들만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은신술을 사용해 정령사 가족이 머무는 집에서 피하였다. 포그너는 정령사 특유의 발달된 오감으로 은신한 암살자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쫓지 않았다. 집안에 있는 모든 가족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젠장. 너무 자만했어.' 루디엘은 자신의 자만을 탓했다. 그것은 모든 암살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목표가 아무리 약해도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그런데 정면으로 공격했으니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최고의 실력을 지닌 암살자를 무려 10명이나 잃었다. 크라이 숲을 거의 벗어났을 때쯤에 암살자들은 또다른 위험에 직면하였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암살자 세 명이 죽은 것이다. 암살자들 모두가 화살이 날아오는 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화살이라면 날아오며 소리룰 발생시키는데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푹푹푹" 오직 화살이 박히는 소리만에 암살자들에게 들려왔다. 화살의 임자는 크라이 숲에서 살고있는 엘프들이었지만 암살자들이 알고있을 턱이 없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시대에 존재했던 엘프가 전성기를 맞고있을 당시의 전투기술과 정령술을 익혔다. 그래서 활의 사용법도 상당히 달라졌다. 본래 엘프들이 활을 주무기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단순히 엘프 특유의 신체만을 이용한 활솜씨를 사용했다. 하지만 카인이 소환한 최상급 정령을 통해서 과거에 엘프가 사용하던 활의 기술을 습득하였다. 그것은 바로 화살에 정령의 힘을 주입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화살은 단순히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정령의 힘을 주입하여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의 정령술을 익힌 결과 그것이 가능해졌다. 정령의 힘을 주입한 화살은 정령의 속성에 따라 다양한 변화와 파괴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누가? 왜?' 루디엘은 영문도 모른체 자신의 가슴에 튀어나온 화살촉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화살촉은 단순한 나무였다.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어떻게 나무로 된 화살촉이 몸을 꿰뚫었는지 루디엘은 이해하지 못했다. 90명에 달하는 암살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과 키스를 하였다. 암살자들이 죽은 자리에서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특이한 활을 손에 쥔채로 나타났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모습과 기운을 감춘 것이다. 과거에는 매우 흔한 정령술이였지만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정령술이다. "세레나 장로님, 엔트님이 아니었으면 큰일이 벌어질뻔 했네요." "카인의 가족들이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세레나 엘프장로도 오랜만에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과 같이 긴장한 경우가 언제인가 싶었다. 엘프들은 왠만해서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데 오늘은 그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오래전에는 엘프들의 정령술이 대륙을 지배했나봐요." "분명 그럴거야. 이렇게 뛰어난 정령술인데 왜 잊혀졌을까?" "나도 그게 궁금해." 엘프들은 10년전부터 새로 익히고 있는 정령술에 대해서 토론했다. 암살자들의 시체는 시선하나 주지 않았다. 엘프들이 암살자들을 눈치챈 것은 엔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엔트는 크라이 숲 전체를 자신의 눈처럼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있다. 암살자들을 살려서 굳이 공격한 이유를 묻지 않은 것도 엔트가 그 사실을 모두 전했기 때문이다. 일리시아 제국에서 카인의 가족을 공격하기 위해 파견한 암살자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혹시 카인에게도 암살자들이 찾아갔을까 걱정되어 카인의 가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카인이 최상급 정령사임을 알지만 이제 카인은 엘프들에게 과거 엘프들의 전성기 시대 수련했던 정령술과 지식을 전수하도록 도와준 은인이었다. 과거에는 카인이 엘프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본래 엘프들이 숲을 침입한 인간들을 서슴없이 죽이긴 하지만 암살자들 모두를 죽일 필요까진 없었다. 단지 카인을 해치려는 무리라 판단하고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죽인 것이다. 카인의 가족들은 엘프들이 암살자들에 대해 알려졌기 때문에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암살자들이 모두 죽고서 세레나 엘프장로를 통해서 속사정을 모두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곧바로 세렌을 통해서 카인에게 연락을 하였다. 카인과 함께 부부처럼 살던 세렌에게는 카인이 두고간 카인과 연락이 가능한 마법 수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6 회] 19. 전쟁 카르시온 제국은 전쟁을 준비하는 도중에 발생한 마법사 암살사건에 분노를 금하지 못했다. 카르시온 제국은 전쟁의 예의를 갖추어 전쟁선언을 통보하는 절차까지 밟았는데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그로인해 전쟁준비는 열기를 띄었다. 모든 귀족들이 전쟁의 시일을 당기는데 동의하였다. 마법길드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전쟁준비에 앞장섰다. 마법전력의 강력함을 이번 전쟁을 통해서 대륙 전체에 알리려 했는데 시작도 하기전에 암살을 당했으니 분노하는게 당연했다.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었다. 에드 황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제 전쟁의 예의를 차릴 시간은 지나버렸다. 전쟁을 하기위한 마법전력과 병사들의 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 않았지만 전쟁을 치룰 전력이 마법사와 병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인 전쟁이 발발하려는 시간은 남았지만 국경지역에는 벌써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라 부르기에는 소규모의 전투였지만 충분히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은 전투가 국경지역 모든 곳에서 중구난방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이유는 용병들 때문이었다. 에드 황제는 일리시아 연합제국이 보낸 암살자 때문에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불의 정령사와 용병들에게 전투에 있어서 약탈을 허락한 것이다. 보통 약탈이 허가되면 관례상 그중 일정부분만을 갖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에드 황제는 약탈에 대한 권한을 용병들에게 전부 넘겨주어 누구라도 약탈하면 자신의 것이 되도록 하였다. 용병중에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돈을 위해서가 아닌 스릴을 위해서 위험을 쫓는 것이다. 그들은 의뢰를 수행하면 의뢰비를 단 하루만에 술과 여자를 탐하는데 사용한다. 카르시온 제국이나 일리시아 연합제국이나 전쟁이 준비되지 않은 것은 똑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카르시온 제국에서 엄청난 용병들이 약탈을 위해 전투를 벌이니 정신이 없었다. 용병들 사이에는 황궁에서 지원해준 불의 정령사가 틈틈이 배치되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에서는 마나폭주 치료방법을 알아내느라 정령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은 정령사가 우대받는 사회였다. 불의 정령사와 용병들이 힘을 합쳐서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병사들과 계속 전투를 벌였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병이라 할지라도 기를쓰고 덤벼대는 용병들에게는 답답할 뿐이었다. 더구나 소규모로 전투를 벌이니 강병들에겐 여러모로 불리했다. 용병들은 소규모 전투에 익숙한 싸움꾼이었고 병사들은 넓은 들판에서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서 전투를 벌이는데 익숙했다. 당연히 소규모 전투는 용병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불의 정령사가 용병들 틈틈이 끼어 있어서 언제나 승리는 카르시온 제국의 용병들에게 돌아갔다. 용병들은 매일같이 자신이 획득한 수확물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약탈이 허용되는 전쟁이 자주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용병이 가장 좋아하는게 약탈이 아닌가. 전투는 약측 모두가 피해를 보고 있었지만 카르시온 제국은 전쟁에서 보조로 쓰일 용병의 피해였고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전쟁을 위해서 준비한 병력이었다. 카르시온 제국측에서는 그것만으로 상당한 성과였다. "폐하 소규모 전투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연락입니다."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에게 국경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전했다. 용병들에게 약탈을 허락하고 약탈한 물건을 인정해 준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잘된 일이야. 어디 용병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느껴보라지." "폐하 모든 용병길드에서도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 전쟁터에 밀어넣도록 하게." 프리온 재상은 전쟁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음을 인정했다. 에드 황제의 약탈 허가로 인해서 모든 용병길드에서 전쟁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 국경지역은 수많은 용병들이 혼란을 일으켜 무법지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에드 황제는 카르시온 제국이 자랑하는 마법전력이 아주 조금이나마 암살자에게 피해를 본 사실을 잊지 않았다. 마법전력은 카르시온 제국의 자랑이자 자존심이었다. 에드는 국경지역에서 벌이지고 있는 전투로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제대로 된 전쟁은 언제 시작할 수 있는거지?"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이제 전쟁물자만 확보되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에드 황제는 프리온 재상의 말을 듣고서 주먹을 쥐며 일리시아 연합제국과의 전쟁에서 꼭 승리하리라 다짐했다. 몸은 황궁에 있지만 전쟁은 황제인 에드의 지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마법 수정구를 통해서 중요한 전투를 구경까지 할 수 있다. 전쟁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방법은 서로다른 능력을 가진 전력의 조합이었다. 검을 가진 기사가 혼자 전투를 수행하는 것과 기사와 일반병사가 섞인 전투의 효과는 상당히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전쟁이 시작되지 않고 차차 미뤄졌던 것이다. 이제 한 달만 진행되면 모든게 마무리 되고 전쟁이 시작된다. ------ 전쟁은 상인에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기회이다. 이런 기회가 자주 찾아오지를 않는다. 카르시온 제국의 대상인들은 어마어마한 마차를 이끌고 국경지역으로 이동해 용병들에게서 그들이 약탈한 물건을 건네받고 대가를 주었다. 검과 갑옷은 가장 흔하면서도 돈이 되는 물품이다. 재질에 따라서 가격이 차이가 심한데 가끔은 귀족의 기사를 죽이고 검과 갑옷을 얻으면 정말로 돈벼락을 맞은 것과 다름없다. 기사는 검과 갑옷에 보석을 박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몸속에 값비싼 물건이 들어있을 확률도 높았다. 에드 황제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약탈의 허가로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기사들이 상당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리 병사들이 많아도 용병들은 지휘관인 기사부터 죽이려고 공격했다. 용병들에겐 기사가 돈으로 보일 뿐이었다. 아무리 오러를 사용하여 무적에 가까운 기사라도 용병들이 죽음도 무시하고 덤비는데 죽지 않을수 없었다. 더구나 용병들은 독이나 흙을 뿌리는 짓도 서슴치 않으며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전투에 익숙하지 않는 기사는 그냥 목을 내줄 수밖에 없다. 전투가 벌어지면 무조건 기사부터 공격하는 용병들 때문에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여러가지로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주 소규모 전투였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똑같은 일이 발생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이나 일리시아 연합제국이나 오래전부터 전쟁에서 지켜오던 예의가 지켜지지 않으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변수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용병들이 국경지역에서 생활하며 자고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마음껏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병사들과 전투를 벌였다. 용병들이 떼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았다. 용병들은 소규모 전투에 강하지만 전략전술에 약하기 때문이다.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져 서로 상잔(相殘)하여 모두 죽임을 당하면 그곳에 어김없이 카르시온 제국의 용병들이 나타나 옷가지만 빼고 모두 쓸어가버렸다. 실질적으로 금속은 상당히 비싼 편에 속한다. 주먹만한 금속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광산에서 힘들게 광석을 캐내서 녹여야 겨우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 황제는 단순히 용병이 전쟁을 치루는데 있어 보조적인 도구였기 때문에 부담없이 죽음의 길에 인도한 것이지만 그로인해 알게모르게 상당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나중에서야 심각성을 느끼고 대책을 세우려고 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한 달이 지나고 전쟁이 시작될 분위기가 되어서야 카르시온 제국의 황재와 재상 그리고 귀족들이 용병들이 이룩한 결과에 찬사를 보냈다.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용병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갑부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이 그 돈을 술과 여자에 허비하겠지만 말이다. ------ 나는 크라이 숲에서 발생한 사건을 세렌이 가진 마법 수정구를 통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설마 일리시아 연합제국에서 보낸 암살자들이 나의 가족까지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내 가족은 최남단에 살고있기 때문에 나로인해 피해를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마음 같아서는 전쟁에 참여하여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암살자를 보낸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들도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이나 일리시아 연합제국이나 권력을 가진자의 욕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있는 것이다. 분노를 참을길이 없어서 탑의 주변을 은신하여 돌아다니는 암살자를 찾아내어 모두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다. 가족에게 찾아가 미안하다며 사죄하고 싶지만 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심상치가 않았다. 황궁에서는 계속해서 망명한 마법사들을 전쟁에 참여하라며 압박을 하고 있었다. '더이상 타의로 삶을 허비할 수도 없어. 내 뜻을 밝혀야 해.' 나는 결국 10년 동안을 조용히 지내며 결심했던 생각을 모두에게 전하기로 하였다. 더이상 세상일에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크라이 숲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다. 지금처럼 편법으로 조용히 지내는 것도 싫었다. "바이거씨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탑에서 생활하고 있는 마법사들을 불러모아 탑 주인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카르시온 제국이 전쟁중인데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더이상 세상일에 관여하기 싫어서였다. 황제나 재상이 연락해서 온갖 협박을 하며 귀찮게 하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귀찮을 정도는 아니어서 망명한 마법사들을 생각해 참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은 나로서도 무리였다. 마법사들과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았다. 앞으로 그들이 어떤 진로를 선택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처럼 타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삶을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유 마법사로 생활하거나 마법길드에 속해서 전쟁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탑에서 나와 곧바로 마법길드의 분점을 이용해 수도 말린에 도착해 황궁을 향했다. '남들이 뭐라고하든 내 삶이야.' 황궁에 도착하여 절차를 거쳐 에드 황제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황궁에는 황제 이외에도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은 귀족들이 많이 있었다. 전쟁에 대한 소식이 황궁으로 제일 빨리 전해지고 있으니 모여서 상황에 대처하는게 당연했다. "탑에 지원을 계속 유지해 달라는 요청을 하러 왔다면 돌아가게.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마법사들은 제국에 필요없는 존재이니까." 에드 황제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마법 수정구를 통해서 몇번 불쾌한 언사가 오갔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나마 내가 쓸모가 없었다면 단칼에 베어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폐하 그 문제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일이지?" "탑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동안 마법사도 아니면서 마법사 탑의 주인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마법사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나폭주를 당한 마법사도 없는 상황에서 더이상 지내기가 불편합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마법사 탑의 주인 자리를 내놓겠다는 말을 나름대로 우회하여 말했다. 굳이 작별인사란 말을 꺼낸 것은 황제를 비롯한 모두가 내가 10년 동안이나 크라이 숲에서 지낸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이상 탑의 주인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황제는 물론이고 모든 귀족들이 놀라고 있었다. 탑의 주인은 아무런 의무도 없으면서도 권력이 있는 자리였다. 어느누가 그런 자리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카르시온 제국민으로서 어찌 그럴수 있느냐?" "죄송합니다. 폐하" 에드 황제는 기가막혔는지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거지?" "저는 정령사입니다. 숲에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틈에 섞여서 지내는게 더이상은 싫습니다." "겨우 그런 이유라니." 에드 황제는 더이상 나와 말하기를 거부하였다. 스스로 잘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더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기는 싫었다. 에드 황제가 귀찮게 압박하여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황제는 탑에서 머물고 있는 백여명에 달하는 망명한 마법사들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황궁을 벗어나 마지막으로 마법길드의 분점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였다. 앞으로는 사용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패로이 마을에 도착하고 반나절만에 바람의 정령 도움으로 크라이 숲에 돌아올 수 있었다. 크라이 숲으로 돌아오자 세렌과 가족들 그리고 엘프들까지 반겨주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전쟁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크라이 숲의 조용한 생활을 즐겼다. 이제는 나도 엔트처럼 숲의 변화가 재미있어 지고 있었다. 생명력을 오래 다루다보니 엘프와 비슷한 취미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모습이 재미있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내가 돌아오자 최상급 정령을 매일같이 만날수 있어서 즐거워 하였다. 가끔씩 에드 황제에게 통보하고 돌아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마법사들을 통솔하여 전쟁에 참여하길 바라는 탑의 주인이 대뜸 고향으로 돌아간다니 황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리시아 제국에서 망명한 마법사들을 전쟁에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명을 했지만 그들은 한때 일리시아 제국민이었으니 말이다. 일주일 동안은 조용한 생활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집앞에 있는 나무를 살펴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무는 매일같이 다른 모습이다. 잎사귀의 크기도 다르고 색깔이 변하며 나무에 붙어있는 곤충도 신기하다. 엘프와 같이 조화로움을 지닌 존재가 아니고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차이점이다. '침입자입니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실레스틴이 크라이 숲에 외부인이 침입했음을 알려주었다. 정령사로서 당연히 숲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침입자를 향해 움직였다. '침입자는 바이거입니다.' 실레스틴이 침입자를 알아채고 알려주었다. 바이거가 최남단인 크라이 숲까지 달려올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 자신을 위해 에드 황제를 찾아가 탑의 주인자리를 버리고 왔으니 마법사들은 각자 살길을 찾았을 것이다. 마법길드에 소속되거나 아니면 자유 마법사로 자유롭게 살아가든지 말이다. "카인님!" 바이거를 발견했을 때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눈은 튀어나올 것 같이 붉었고 다리에서는 작은 상처 때문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제는 심장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엘레스트라 치료좀 부탁해.' 상처가 아무리 깊어도 엘레스타라의 힘이라면 치료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이거에게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심장의 마나가 강제로 배출되고 있습니다.' 엘레스트라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멀쩡히 살아있는데 치료가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더구나 몸에서 시간이 흘를수록 마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경우는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바이거의 모습은 상처를 입었지만 죽음 직전까지는 아니었다. "몸이 왜 그런거죠?" "카인님을 만나기 위해서 금단의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할테니 제 말을 들어주세요." 바이거는 당황한 내 표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단의 마법은 마법길드에서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된 마법을 말한다. "무슨 마법을 사용했길래 치료가 안되는거죠?" 엘레스트라에게 바이거를 치료할 수 없다는 말에 화가 났다. 탑을 10년이나 관리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피흘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치료할 수 없다니 말이다. "생명을 담보로 마나가 빠르게 순환되도록 스스로 제 몸에 마법을 시전하였습니다. 읔." 바이거가 말을 마치는 순간에 피를 울컥 토해내었다. 죽기 직전의 사람까지 살려낼 수 있다는 엘레스트라도 치료를 못하였다. 나는 바이거가 스스로 말하도록 기다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명력을 전해주는 방법밖에 없는데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다. "카인님이 떠나고 나서 황궁에서 기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저희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이라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나를 동결하는 마법 스크롤까지 가지고 있어서 저만이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아마도 저 말고도 몇명이 더 도망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왜?"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으니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망명한 마법사들 절반이 일리시아 제국민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카인님도 위험하실 것 같아서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바이거는 계속해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엘레스트라에게 정말로 살려낼 방도가 없느냐고 물었다. '심장의 마나가 거의 바닥났습니다. 생명력을 전해줘도 곧바로 배출하기 때문에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마법이 영향을 끼치지 않아야만 치료할 수 있습니다.' "바이거씨 금단의 마법을 취소할 수 있습니까? 마법만 취소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 "왜 금단의 마법이라 불리는지 아십니까? 심장의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취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절대 자책하지 마십시요. 카인님이 계셨어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제국의 사활이 걸린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니 당연한..." 바이거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내가 떠나와서 이런일이 발생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에드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서 보았을 때는 모두가 전쟁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전쟁에 몰두하는 그들에게 세인트에 남아있으면서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는 10년전 망명한 마법사들이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더군다다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들까지도 그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법길드에서 마법사들을 공격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사만이 탑에 찾아왔을리 만무했다. '어떻게 해야하지? 탑에서도 해방되었나 싶었는데 또다시 휘말릴 줄이야.'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망명한 마법사들을 죽이려고 결심했다면 에드 황제가 과연 나까지도 그 부류에 포함했는지 궁금하였다. 조만간 그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서 사람을 보낼 가능성이 많으리라 생각했다. 더이상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편히 잠드시길." 바이거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고 가족들에게 사실을 말하기로 하였다. 시체를 숲에 방치하는 것은 엘프들의 방식이다. 나 또한 정령사이기 때문에 그 방법을 따랐다. 물론 땅의 정령을 이용해 약간 묻어주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너무나 참혹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7 회] 20. 엘프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소속의 기사 디코는 황제의 명령을 오랜만에 수행하여 기분이 좋았다. 디코는 평민출신의 기사로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오러 마스터이지만 귀족출신의 기사들과의 마찰로 출세가 막혀 있었다. 제국의 모든 기사라면 전쟁터에 나가야 되겠지만 황궁소속의 기사는 황궁을 경비해야 한다. 명예스러운 직책이면서도 출세하려면 피해야 하는 곳이다. 더욱이 한 번 황궁에 소속되면 황궁의 특성상 여러가지 비밀이 있는 곳이라 빠져나가기도 여간 힘든게 아니다. 에드 황제는 황궁소속의 기사들에게 직접 내렸던 명령의 결과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디코가 보고하기로 결정하였다. 황궁소속의 기사들은 단장과 부단장을 제외하면 특별히 상하관계가 없어서 굳이 보고가 필요하다면 그중 실력이 가장 출중한 디코가 해왔던 것이다. "폐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처리하였습니다." 디코는 에드 황제에게 명령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전쟁으로 바쁜지 황제가 머무는 장소도 정신이 없었다. 대신들이 전쟁터에서 보내오는 소식을 일일이 귀족들에게 알려주고 있었고, 귀족들은 어떤 상황인지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전략을 세우는데 귀족만큼 똑똑한 인재를 찾기 어려우니 귀족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얼마나 도망쳤지?" "살아서 도망친 마법사는 세 명 뿐이었습니다." 에드 황제는 디코의 말을 듣고서 가슴속 고민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10년전이었다면 망명한 백여명의 마법사가 전력에 큰 보탬이 되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생활마법의 발전으로 마법사의 수도 증가했고 그 이후로 계속 망명한 마법사들이 많았다. '계획대로 전쟁에 참여해서 모두 죽었어야 했는데.' 에드 황제는 카인의 마법사 탑에 거주하는 마법사들을 모두 전쟁터에 몰아넣어 죽이려고 하였다. 유일하게 황제의 명령에 거부하는 마법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10년전 에드가 스스로 망명한 마법사들에게 약속했던 사항이었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 쓸모없어지게 되자 황궁소속의 기사들을 파견하여 몰살시킨 것이다. 마법사가 백여명이나 되었지만 수십명의 기사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황궁소속의 기사는 모두 오러를 사용할 수 있었고 근접전에서는 마법사가 어린아이와 다를게 없다. 더구나 기사들에게 마나를 동결시키는 마법 스크롤까지 전했기 때문에 몰살시키는 일은 무척이나 쉬웠던 것이다. "도망친 세 명은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숨어서 살겠지. " 에드 황제는 도망친 세 명의 마법사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으며 말했다. 도망친 마법사가 누구였는지 물어봐야 했겠지만 전쟁에 신경쓰기도 바쁜 처지였다. 더욱이 그중에 탑에서 유일한 마도사가 포함되어 있음은 상상도 못했다. 마법사들을 몰살시킨 황궁소속의 기사들이 그들의 얼굴과 서클을 알리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길드에서 항의를 하지 않을까요?"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가 내린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마법사들을 죽일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더구나 그들은 마법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엄연히 마법사들이다. "탑의 마법사들은 마법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니 간섭할 수는 없지. 더구나 전쟁에 참여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불참을 하려고 했으니 죽어도 마땅한 녀석들이야. 아무리 일리시아 제국에서 망명을 했다지만 망명을 했으면 이제 우리 제국을 위해서 싸워야 되잖아." "그렇긴 하지만." "마법길드에서는 지금까지 마나폭주를 치료하는 카인 때문에 그들을 함께 보호했던 것 뿐이야. 카인이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마법길드에서도 굳이 신경쓰지는 않겠지. 더구나 전쟁이 한참인 이때 그런 일에 누가 신경쓰겠나."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의 냉정한 말에 할말을 잊었다. 카인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지는 않겠지만 나중에 소식을 알게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요즘은 전쟁으로 바쁜 상황이라 망명한 마법사들의 죽음을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을 것이다. 에드 황제는 자신의 뜻에 거스렸던 마법사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무척 시원하였다. 마법길드의 눈을 피해서 황궁의 기사들을 시켜 처리했지만 전쟁중이라 스리슬쩍 넘어가리라 생각했다. 지금의 기회가 아니면 그들은 평생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될 것 같아서 처리한 것이다. ------ 그토록 원한 삶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얻어내고 말았다. 함께 생활하던 마법사들이 에드 황제가 보낸 기사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바이거가 알려주지도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며 참혹한 시대가 찾아왔지만 크라이 숲은 무척이나 조용하다. 이제는 가끔씩 세인트에 갈 필요도 없고 갈 이유도 없다. 설사 가고 싶어도 마법길드의 분점을 이용할 수 없으니 걸어서 가야한다. "주인님 반찬거리가 없어요." 세렌이 빈둥거리는 내게 투정을 부렸다. 반찬거리가 없다함은 고기가 없다는 말이다. 크라이 숲에서 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이다. 사람이라면 미치지 않고서 엘프가 있는 숲에서 사냥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기다려. 잡아올테니까." "천천히 잡아오세요. 급한거는 아니에요." 세렌이 투정을 부리기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노예 근성이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물론 부르는 호칭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포브를 잡아야겠다.' 포브는 사람 머리만한 귀여운 동물로 크라이 숲에 자주 보인다. 번식력이 강해서 줄줄이 무리지어 다니지만 다른 육식동물에게 쉽게 잡혀먹히는게 일상생활이다. 포브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있기 때문에 그저 데려오면 끝이었다. 사냥이라 할 수도 없었다. "요 녀석아." 숲에서 쉽게 포브를 찾아 손에 쥐고는 눈이 마주치도록 들어올렸다. 포브가 귀여운 눈동자를 깜빡였지만 놔줄 생각은 없다. 엘프나 가족처럼 평생 초식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엘프들이 동물을 잡지 말라고 하소연 하지만 말이다.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고있는데 내게 걸리다니 운이 없구나." 포브는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바둥 거렸지만 힘이 약해서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포브를 이대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세렌이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포브가 죽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숲에서 동물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나이지 세렌이 아니기 때문이다. "끼이이" 포브의 목을 손으로 잡고 약간 비틀자 비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잠시후 포브는 축 늘어지며 죽음을 맞이했다. 동물을 죽이는 일이라 정령을 소환해 시킬 수도 없었다. 소환자가 시키면 하겠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포브를 손에쥐고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의 정령의 도움으로 빨리 날아갈 수도 있지만 산책을 하였다. 엔트나 엘프 만큼은 아니더라도 숲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엘프들이 과거 전성기 시대의 정령술을 익히며 숲도 약간 변했다. 엘프들이 엔트에게 영향을 주었고 엔트는 숲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누구지?' 엘프라 짐작되는 누군가가 크라이 숲에 들어왔음이 느껴졌다. 지금 나의 위치가 외곽이라 쉽게 느껴진 것이다. 더군다나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절대 크라이 숲의 엘프가 아니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10년전 이후로 기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짓을! 네놈은 누군데 크라이 숲에서 동물을 죽였느냐?" 여성엘프가 눈앞에 나타나더니 내게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엘프의 시선은 내가 들고있는 포브에게 향해 있었다. "당신은 누군데 크라이 숲에 들어온거죠?" "인간 이것이 보이지 않느냐?" 엘프는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엘프라면 어느 숲이든 마음대로 누벼도 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크라이 숲은 나의 삶이기도 한 곳이라 엘프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더구나 크라이 숲의 엘프도 아니지 않은가. "외부에서 온 엘프같은데 무슨일이죠?" "어떻게 그것을..." "저를 모르는 엘프니까 그렇죠." 엘프는 그제서야 내가 크라이 숲의 엘프들을 알고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내가 생각해도 상대방이 놀랄만한 상황이다. 인간이 엘프가 생활하는 숲에서 동물을 잡았는데 그 인간이 엘프와 안면이 있다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다. 엘프는 자신이 생활하는 숲에서 정령사가 아닌 인간은 사냥하도록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크라이 숲의 엘프와는 어떤 사이죠?"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제 이름은 카인이니까요." 엘프에게 말하고 뒤돌아서서 집을 향해서 걸었다. 방금 만났던 엘프는 패로이 숲에서 왔을 것이다. 주변에 엘프들이 사는 숲이 많지만 그중에서 패로이 숲에서 가장 많은 엘프가 살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프가 서로 왕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세레나 장로님이 비밀은 지켜주시겠지.'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엔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속했었다. 내게는 엔트가 친구와 같은 존재인데 다른 숲의 엘프들이 생각하기엔 감히 엘프가 신성시하는 존재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무척 황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엔트는 패로이 숲의 엘프들에게 상당히 유명하다. 이성을 가진 생명수 나무중에 유일하게 말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엔트를 자신의 숲에서 살도록 제의를 한 적도 있었다. '무슨일로 찾아왔을까?' 패로이 숲의 엘프가 방문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내일 세레나 장로를 찾아가면 알려주리라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산책을 하며 느린 발걸음으로 집에 도착하자 세렌이 포브를 받아들더니 곧바로 요리를 하였다. 육류는 죽은지 얼마나 지났느냐에 따라서 맛이 변한다. 세렌이 요리를 서두른 것도 맛을 위해서이다. 하롤드는 함께 지내다가 결국 거처를 옮겨버렸다. 나와 세렌이 항상 육류를 즐겨 먹으니까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육류의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육류애서 느껴지는 생명력의 기운으로 감정이 격화되기 때문이다. 세렌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평소화 다름없이 하루를 보냈다. 내일은 패로이 숲의 엘프가 찾아온 이유를 알기위해 세레나 장로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엘프들은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절대 자신이 생활하는 숲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니 분명 크라이 숲까지 올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 패로이 숲의 모리엔 엘프장로는 요즘 발생한 인간들의 전쟁에 관련된 문제로 크라이 숲을 방문하였다. 인간들의 전쟁에 엘프가 신경쓸 일은 없다. 하지만 전쟁에 많은 수의 정령사가 참가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늦은 대책이지만 패로이 숲의 엘프장로들은 주변의 엘프마을에 통보하여 인간 정령사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도록 협조를 부탁하였다. 크라이 숲은 엔트가 있는 특별한 곳이라 모리엔 장로가 방문한 것이다. 엘프들은 자신이 생활하는 숲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인간 정령사들에게 정령술을 가르치는 대신 여러가지 도움을 받는다. 인간 정령사들이 모두 전쟁에 휘말리면 엘프들로서는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에" 모리엔 장로는 크라이 숲의 세레나 장로에게 카인이란 인간에 대해 듣고는 너무나 놀랐다. 인간이 최상급 정령사라니 말이다. 천년을 넘게 살아가는 엘프도 최상급 정령사가 되기 힘든데 인간이 도달하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레나 장로님 정말인가요?" 모리엔 장로의 놀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카인이란 인간이 최상급 정령을 무려 반나절이나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리엔도 기껏해야 일분이 고작이었고 대부분이 비슷했다. 세레나는 카인이 소환한 최상급 정령의 도움으로 이룩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크라이 숲의 모든 엘프들이 수련한 과거 시대의 정령술과 전투기술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신비한 지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리엔은 볼 수 있었다. 세레나는 과거 시대의 정령술과 전투기술 그리고 지식을 기록한 책자를 모리엔에게 전했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도 자신들처럼 변화되길 바란 것이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10년전에 비해서 외형적으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하지만 정령의 사용법이나 뛰어난 전투기술은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외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모리엔은 세레나가 건네준 책자를 수련한다면 크라이 숲의 엘프와 비슷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세레나 장로님 감사합니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모리엔은 놀라운 소식을 많이 접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세레나가 건네준 책자를 챙기고 곧바로 패로이 숲으로 돌아갔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에겐 별일 아니지만 많은 엘프들이 모여사는 패로이 숲에서는 엄청난 소식이 될 것이다. 세레나는 자신이 건네준 책자를 가지고 떠난 모리엔을 생각하며 새로운 엘프의 문화가 창조되길 기대하였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대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겠지만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그렇지 않다. 무려 5천여명에 달하는 엘프들이 생활하는 숲이라 새로운 엘프문화를 창조할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68 회] 20. 엘프 세레나 장로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주었다. 그리고 내가 묻기도 전에 어제 패로이 숲에서 생활하는 모리엔이란 엘프장로가 방문한 사실을 말했다. 또한 모리엔을 통해서 내가 소환한 최상급 정령과의 대화를 통해 얻어낸 것이 기록된 책자를 건네줬다고 밝혔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도 변하겠네요." "분명히 그럴거야." 엘프들의 변화가 좋은지 아니면 나쁜지 알수가 없다. 그저 과거에 엘프들이 대륙을 지배했으니 지금도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엘프문화가 기대되네요." 패로이 숲은 많은 엘프들이 살고 있으니 변화가 무척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먼저 현재보다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엘프들이 어떻게 대륙을 지배했는지 궁금하다. 엘프가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강제로 관리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앞으로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어떻게 변화될지를 두고서 세레나와 여러가지 논의를 가졌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조용히 지냈지만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상당히 개방되어 있어서 무슨 사건이 생길지 기대되기도 한다. "앞으로 엘프가 대륙을 지배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적어도 여러 종족을 조화로움으로 이끌어 어우러지게 할 테니까요." "카인은 인간이니까 그런말을 하면 안돼지." 세레나가 피식 웃으며 내가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인간이나 엘프나 둘 다 반만큼 좋다. 마음 같아서는 인간과 엘프가 적당히 섞인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최소한 지금처럼 인간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 네 명의 엘프장로들은 모리엔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최상급 정령을 반나절이나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증거가 될만한 물건을 받아왔습니다." 모리엔은 자신이 가져온 책자를 네 명의 장로들에게 보여주었다. 패로이 숲은 다섯 명의 장로가 있고 모리엔은 그중 마지막 장로에 속한다. 장로들은 모리엔이 건네준 책자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세레나 장로께서 카인이란 인간이 소환한 최상급 정령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어낸 것들을 기록한 책자입니다. 책자에 기록된 내용은 과거 엘프들이 대륙을 지배할 당시에 사용되던 엘프의 정령술과 전투기술 그리고 유용한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모리엔의 말에 장로들은 다시 한 번 책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장로들은 모리엔의 말을 믿게 되었다. 책자의 내용이 확인되자 처리문제를 상의하였고, 만장일치로 당장 모든 엘프들이 수련을 하도록 조치하기로 하였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책자에 기록된 내용이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엘프들이 익힌 정령술보다 새로운 정령술이 효과적이었고 전투기술도 엘프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상당히 파괴적이었다. 패로이 숲에서는 짧은 시간에 새로운 엘프문화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패로이 숲의 엘프장로들은 회의를 통해서 크라이 숲을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패로이 숲에서 남단으로 내려가는 방법을 차단하면 크라이 숲은 어떤 영향에도 안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크라이 숲에는 과거에나 존재했던 엔트도 있고 최상급 정령을 반나절이나 소환할 수 있는 카인이란 인간이 있다. 충분히 보호할 가치가 있었다. 패로이 숲의 장로들은 순서를 정해서 직접 크라이 숲을 방문하여 카인이란 인간이 소환한 최상급 정령과 대화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패로이 숲의 엘프와 크라이 숲의 엘프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주로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크라이 숲을 방문하는 일방적인 왕래였지만 말이다. 많은 엘프들이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기술을 익히게 되었고 인간사회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라 엘프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 카르시온 제국과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전쟁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끔찍한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전국적으로 치안에 문제가 발생하여 끊임없이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수많은 병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떼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법전력의 차이로 양측이 서로 막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병사가 많은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마법사의 공격도 무시하고 그대로 공격하였다. 결국은 국경지역에서의 전투가 상당히 폭넓게 진행되었고 그 와중에 암살자들이 상대측 나라의 혼란을 부축였다. 카르시온 제국은 강력한 마법전력으로 연합제국을 간단히 격파하리라 예상했지만 병사들이 그렇게 많을줄은 몰랐다. 반면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전력을 과소평가를 하는 바람에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지 고작 한 달이 지났건만 두 제국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다. 전쟁에서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으니 암살은 물론이고 온갖 비열한 사건으로 수많은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두 제국 모두가 더이상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도 어쩔수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갔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백성들이었다. 두 제국의 백성들은 전쟁이 지금처럼 치열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저 어느 한 쪽이 가볍게 승리할 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킨 에드 황제를 탓했지만 그것은 에드 황제만 탓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백성이 에드 황제의 뜻을 따랐으니 말이다. 전쟁이 반년을 지나자 두 제국 모두가 마지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카르시온 제국은 사회혼란으로 전쟁을 지속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을 지속시킬 경우 멸망의 길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전쟁은 끝을 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믿을수가 없어." 에드 황제는 전쟁을 더이상 수행할 수 없다는 현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패배하였습니다. 전쟁은 마법전력만으로 되는게 아니었습니다. 마법전력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병사가 함께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저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도 침략한 일리시아 연합제국을 차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저앉게 되다니." 에드 황제는 마법전력이 우세한데도 전쟁에 승리하지 못한 사실이 한스러웠다. 전쟁이 넓게 다방면으로 진행되자 병사의 수가 많았던 일리시아 연합제국이 유리하게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일리시아 연합제국도 쉽게 승리를 일궈낸 것은 아니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의 강병들은 더이상 많지 않았다. 너무도 많은 병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전쟁이 마무리되는 시기가 찾아오자 양측은 피해를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반년이나 지속된 전쟁이었지만 그 심각성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는데도 불구하고 카르시온 제국의 땅을 차지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많은 병사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은 치안이 유지되지 않아 온갖 끔찍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연합제국에 흡수된 왕국과 소국은 혼란을 틈타서 독립을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로인해 혼란이 더욱 가속화 되었고 결국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멸망의 길에 서서히 들어섰다. 카르시온 제국도 마찬가지로 황권이 약화되어 에드 황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불만을 가진 백성들이 많았다. 두 제국 모두가 전쟁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멸망이 시작되었다. 일리시아 연합제국은 다시 예전처럼 왕국과 소국이 모두 독립하였고 카르시온 제국은 더이상 마법전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치안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으니 두 제국 모두 혼란을 반복해서 겪는 중이었고 혼란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 인간사회가 전쟁으로 멸망의 길을 가는 동안에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기술을 기반으로 상당한 힘을 얻은 것이다. 많은 엘프들과 정령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남단으로 모여들었고 반년이 지나서는 소국에 버금가는 힘을 갖게 되었다. 패로이 숲이 변화하는 동안에 크라이 숲은 언제나 조용했다. 패로이 숲에서 남단으로 사람의 발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엘프들의 변화를 알 수는 없었다. 본래 엘프들이 인간과의 접촉이 적었기 때문이다. 패로이 숲을 중심으로 소국에 버금가는 엘프들이 모여들자 결국 엘프의 나라가 세워질 수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혼란에 빠진 상태라 엘프들이 벌인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최남단이라 많은 인간이 살고있는 지역이 아니었고 지역적으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세레나 장로님은 엘프가 대륙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과거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어." 최상급 정령은 과거 엘프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면서도 아주 중요한 사실은 절대 말하지 않고 있었다. 정령계에서 지켜야하는 불문율일 것이다. 과거의 모든 사실이 정령으로 인해 밝혀지만 곤란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니 이해도 되었다. 세레나가 건네준 책자로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반년만에 많이 변화되었고 주변과 다른 지역의 엘프들을 모두 불러모아 소국에 버금가는 전력을 확보하였다. 굳이 부르지 않아도 소문을 듣고 패로이 숲으로 엘프들이 몰려들었다. 세레나는 엘프들이 인간사회처럼 변해가자 자신이 책자를 건네준 사실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었다. 수백년을 살아온 세레나지만 이같은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나또한 도움을 주었다. 패로이 숲에서 찾아온 엘프들에게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최상급 정령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냈고, 크라이 숲의 엘프보다도 얻어낸 것이 많았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소국에 버금가는 힘을 얻은 상황이었다. '엘프들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일까?' 엘프들이 점점 거대해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계속 도와주고 있는데 어디까지 발전하려는지 궁금했다. 엘프는 조화로운 종족이라 대륙을 지배한다면 매우 공평할 것 같았다.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말이다. 최소한 인간이 지배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 방관자의 입장에서 엘프들의 변화를 지켜보며 결국 그들이 결실을 맺는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일년이란 시간만에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 엘프를 위한 소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은 혼란기였기 때문에 엘프들이 소국을 탄생시켜도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에드 황제에게 힘이 없으니 귀족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이 시작되었다. 하루아침에 귀족가문이 멸망하는 경우도 흔하게 발생하였다. 제국이라 하지만 치안도 유지되지 않아서 제국 전체가 무법천지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남단에 생긴 엘프들이 세운 소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알려지면서 엘프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엘프들이 세운 소국이라지만 상당수가 인간이라 할 수 있었다. 세레나가 모리엔에게 전해준 책자의 내용은 모든 엘프들이 필수로 습득해야 할 사항이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내전이 끝나가고 권력구도가 정상을 찾는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카르시온 제국이 안정되면서 남단에 세워진 엘프들의 소국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패로이 숲을 중심으로 세워진 것이라 인간과 엘프가 북과 남으로 대치 된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은 엘프들이 세운 소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힘이 없어서 방치하다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공격을 준비하였다. 엘프를 공격하는 순간에 모든 이종족과 대치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주인님 세렌이 임신하였습니다.' 엘레스트라가 전한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세렌의 몸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아서 엘레스트라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말이다. "주인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세렌이 멍한 표정을 짓고있는 내게 말했다. "임신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임신이라뇨?" "세렌이 임신했다구." 세렌은 내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부부처럼 생활한 시간을 계산해도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임신이 되지 않았었다. 그동안 임신이 되지 않다가 지금에야 된 이유를 모르겠다. "주인님의 아이를 임신하다니." 세렌은 자신의 배를 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0년 이상을 크라이 숲에서 지냈지만 혼자 지낸 시간이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없더라도 절대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세렌이 임신한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나는 세렌의 임신소식을 가족에게 알렸다.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북쪽에 있는 패로이 숲에서 인간들이 엘프들과 계속 싸움을 하고 있었지만 크라이 숲에는 오직 평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세렌과 나는 정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세렌도 자신이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즐거워하였다. 함께 생활한지 10년이 지나서야 남들처럼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무슨 이유로 늦게 임신을 했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주인님은 엘프들 편이에요? 아니면 인간들 편이에요?" "편이라니?" "패로이 숲에서 인간들과 엘프들이 싸우고 있잖아요. 엘프들이 소국을 만든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요?" 세렌은 패로이 숲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해 말했다. 대치한 상태로 수개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그대로이다. 사실 누가 승리하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엘프들과 친하긴 하지만 그것은 크라이 숲의 엘프를 말하는 것이지 패로이 숲의 엘프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야. 그리고 그런 생각은 하지말고 아이를 위해서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해." 세렌이 마음편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세렌이 임신을 처음 한 것이라 조심해야 했다. 하루종일 집에서 나하고만 있는게 답답했는지 세렌이 외출을 하였다. 세렌이 갈 곳이라고는 크라이 마을 뿐이다. 그곳에는 세렌과 편하게 말을 주고받을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조심해서 다녀와." 세렌은 손을 흔들며 크라이 마을로 향했다.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세렌이 싫어하기 때문에 집에 있었다. 크라이 마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을 제외하고 크게 변한점이 없었다. 세렌과 비슷한 나이의 여자들이 많을테니 친구를 사귀는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세렌이 크라이 마을에 있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돌아오면 함께 식사를 하려고 혼자서 식사를 준비하였다. 음식을 잘하는 재주는 없지만 말이다. 요즘들어 세렌을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날이 약간 어두워지려고 하자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세렌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직접 크라이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잠시후 수백 아니 천여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선두에 있는 병사들의 옷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곳에 왠 병사들이?' 순간 병사들을 보며 무슨일인지 상황을 몰랐다. '설마 패로이 숲으로 이동하려고?' 지금까지 패로이 숲의 엘프들과 카르시온 제국의 병사들과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일부가 이곳까지 남하해서 다시 북상하고 있다면 패로이 숲의 엘프들을 북과 남에서 협공하기 위해서임에 틀림이 없었다. 문득 병사들이 지나온 곳이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의 외침 소리를 무시하며 무조건 달렸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직 세렌에 대한 걱정이 가슴속에 타올랐다. 크라이 마을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길에는 칼에 찔린 마을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모두가 죽어 있었다. 엘프들을 협공하기 위한 이동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움직이느라 불은 지르지 않은 것 같았다. "세렌!" 나는 큰 소리로 세렌을 불렀다.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을을 오면서 보았던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아마도 엘프들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렌이 자주 놀러가는 집에 들어서자 마당에 발가벗겨져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세렌이었고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다. 복부와 가슴에 칼자국이 죽음의 원인이었다. 눈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크라이 마을은 숲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세렌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세렌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렌의 시체를 부여앉고 하염없이 울었다. 노예 근성을 버리는데 무려 10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이제 행복을 겨우 찾은 여인이었다. "세렌 미안해." 안고있던 세렌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함께 있었다면 절대 이런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병사들은 왜 마을 사람을 모두 죽였을까. 아마도 패로이 숲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북으로 이동해 패로이 숲의 엘프를 기습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네놈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나는 세렌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데려와 방안에 눕혔다.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10년을 넘게 행복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이제서야 행복을 찾은 세렌인데 너무 잔인한 운명이었다. 나는 조용히 천여명의 병사들이 이동한 북으로 움직였다. 바스락. 바스락. 천여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움직이는데 작은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바람의 하급 정령을 소환하여 무차별로 공격하였다. 세렌과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한 복수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복수하려는 마음 때문에 이성이 없는 하급 정령을 사용했다. "으아악!" "아악!" "무슨일이야?" 천여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뒷부분에서 발생한 일이라 앞에서 알길이 없었다. 나는 병사들의 틈으로 파고들어 실프를 사방으로 날리며 공격하였다. 병사들의 팔과 다리가 수수깡처럼 잘려나갔다. 하지만 그대로 멈추지 않았다. '불쌍한 세렌' 머리속에는 죽은 세렌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크라이 마을 사람들을 비롯해 세렌을 죽인 병사들에게 적개심을 가지며 하염없이 죽였다. 얼마나 죽였는지 모르지만 잠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철퍽" 앞으로 걸어가려는데 발이 빠져버렸다. 그제서야 바닥을 바라보고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많던 병사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후회스런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세렌의 시체를 안고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사비나가 죽은후 세렌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임신을 하여서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무척 좋아했는데. 가족들은 세렌과 크라이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세레나 엘프장로와 엘프들이 모두 찾아와 세렌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죽어버려서 이제 크라이 마을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소국을 탄생시키면서 카르시온 제국과 대립하면서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일이 닥쳤는지 모르겠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0 회] 21. 분열 전쟁에 의한 피해로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들은 여러가지로 힘들었다. 일리시아 제국연합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카르시온 제국으로 병사들을 보내서 통치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을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일리시아 제국연합이 분열하여 예전처럼 소국이나 왕국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분열되어도 전쟁에 패한 카르시온 제국보다는 나은 상황임에 틀림이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카르시온 제국은 생활마법과 동지역 발전에 힘입어 윤택한 생활을 영위했었다. 하지만 대상인들의 활동도 낮아져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힘이되는 것은 역시 종교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현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쉽게 종교에 빠져들었고 신전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신전과 황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나라든 국교(國敎)를 지정하여 나라를 통치하는데 도움을 받는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은 전쟁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진 성이나 영지의 치안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병사밖에 없었다. 영지 밖의 백성들을 위해서 병사를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만족한 결과를 얻어내었다. 귀족들로서는 신전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전이 치안에 신경쓰면서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신전이 없는 지역은 카르시온 제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구나 신전으로서도 포교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신관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돕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신전에서 폐쇠적인 생활을 하며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도움을 주었던 상황이 비추어 본다면 많이 달라진 것이다. 신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신관이 신력을 빌어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기도하기 위한 힘이 아닌 군사력에 버금가는 성기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주로 성기사들은 천신에 반하거나 악마를 숭배하는 이단자들을 찾아내어 처단하는 일을 수행한다. 신전이 보유한 성기사들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일반 기사와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관에 버금가지는 않지만 약간의 신력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와 비슷한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치안을 위해 신관과 성기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들을 위해 활동하면서 안정을 되찾았지만 이제 제국은 종교와 뗄수가 없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더구나 신전이 귀족처럼 악의적 성향을 띄는 곳도 많았지만 그것을 제재할 제도적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귀족이라면 귀족법이라도 있었지만 신전은 그런 제도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수도 말린의 피니온 신전 활동은 카르시온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활발했다. 본래 세실리아라는 성녀까지 있는 신전이었지만 몇해전 알수없는 이유로 사라져버려 그저 말린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피니온 신전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다른 신전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귀족처럼 명예나 부를 위한 명성이 아니라 천신을 섬기는 신전으로서의 명성을 되찾길 원하는 것이다. '어쩐단 말인가.' 피니온 신전의 루노아 신관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접하였다. 몇해전 사라졌던 세실리아 성녀와 함게 사라졌던 소피아 신관을 찾은 것이다. '우리 피니온 신전에서 이단자가 나타나다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여러 신전에서 최근들어 급성장한 동지역으로 많은 신관을 파견했는데 그곳에서 피니온 신전에서 파견한 신관이 소피아를 찾아낸 것이다. 문제는 소피아 신관이 세실리아 성녀와 함께 사라졌던 이유였다. 차라리 입을 다물었으면 모를까 그녀 스스로 세실리아가 사라진 이유를 밝힌 것이다. 운명이 정해진 성녀로서의 생활 보다는 비참하고 괴롭더라도 자신이 선택하여 운명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사라졌다고 밝혔다. 소피아 신관의 말은 곧바로 루노아 신관에게 전해졌고 고위 신관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천신님은 왜 소피아에게 신벌을 내리시지 않았던 것일까?' 루노이 신관은 소피아가 동지역에서 신전을 짓고 신관으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의문이었다. 대게 이단자들의 공통점은 다른 신을 섬겨 천신의 신벌을 피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신벌로 인해 신력을 잃어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소피아 신관은 동지역에서 무척이나 유명하며 고위 신관에 버금가는 신력을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는 사실이 전해져왔다. 동지역 사람들에게 인망도 높았고 그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동지역에서 소피아는 성녀에 버금가는 선행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루노아 신관님. 준비되었습니다." "알겠네." 루노아 신관은 밖에서 들려오는 견습 신관의 말에 대답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잠시후에 소피아 신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회의를 해야한다. 소피아 신관이 확실한 이단자였다면 굳이 회의가 형식상의 절차일 뿐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신탁이라도 내려주시면 좋았을텐데.' 루노아는 천신의 신탁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인간은 실수를 많이하는 존재였고 그것은 신관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신탁이 내린다면 그러한 실수가 적어질텐데 아쉬웠다. 더구나 소피아의 처리는 어떠한 결과가 내려지더라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상황이었다. 고위 신관들은 신전에서도 움직임이 많지가 않다. 신력이 노환을 막는다지만 거동이 불편한 경우도 있어서 사람들과의 대화를 피한다. 그저 천신을 위해 기도하며 수행할 따름이다. 루노아가 피니온 신전에서 중대한 일을 결정하지만 그보다 신력이 높은 신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몇해 전 세실리아 성녀와 함께 사라진 소피아 신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소식을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알려드릴 소식은 동지역에 파견한 신관이 전해 주었습니다." 고위 신관들은 아무런 말도없이 눈을 감고서 루노아의 말을 경청하였다. 대부분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루노아에게 다시 직접 듣자니 여러가지로 마음이 혼잡스러웠다. "동지역에 파견한 신관들이 그곳에서 소피아 신관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찾아가 자초지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피아 신관은 몇해 전에 있었던 사실을 천신에 맹세하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신관의 앞에서 천신에 맹세하였기 때문에 모두 사실이라 믿습니다. 그녀는 신벌도 당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신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흠흠" 루노아의 말에 고위 신관들은 낮은 탄식소리를 냈다. 루노아는 말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한 마디 잘못하면 여러가지 뜻으로 갈려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며 천천히 말을 하였다. "세실리아 성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떠났다고 합니다. 천신에 의해 정해진 운명대로 살기 보다는 비참하지만 자신이 운명을 만들며 살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성녀로서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합니다. 세실리아 성녀는 카인이라는 정령사의 도움을 받아 신력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했지만..." 루노아는 세실리아가 카인이란 정령사의 도움으로 신력을 포기한 사실을 말하는데 진땀을 흘렸다. 고위 신관들 모두가 여자와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루노아는 세실리아가 세인트에 정착하고 죽음을 맞이할 순간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였다. 고위 신관들은 카인이란 유명한 정령사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령사가 세실리아 성녀와도 관계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위 신관들은 루노아 신관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진실인지 재차 묻고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소피아의 몸에는 아직도 신력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녀 스스로 진실임을 천신에 맹세하며 밝혔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전한 신관은 한 두 명이 아닌 여러명으로 소피아 신관의 말을 듣고 전해온 것입니다." 루노아의 말을 들으면서도 고위 신관들은 진실에 의문을 가졌다. 루노아도 처음에는 진실임을 믿을 수 없었다. 세실리아 성녀가 그런 이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여행을 하는 동안 겪었던 사건과 카인이란 정령사에 대한 말도 놀라웠다. 소피아 신관을 만나고 돌아온 신관들이 차례로 불려져 소피아 신관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 전해야만 했다. 그러한 절차를 끝내고서야 고위 신관들이 진실임을 확인하고 세실리아와 소피아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몰랐다면 상관없지만 알게된 이상 신전이 정한 율법대로 따라야 했다. 신전이 정한 율법(律法)들은 무척이나 다양했고 그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율법들은 천년이 넘도록 전해져 내로온 것으로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규칙들이 마음대로 변했다면 지금에 이르로 천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유지되지도 않았으리라. 죽었지만 세실리아 성녀는 성녀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또한 이단자를 도운 소피아 신관도 율법에 따라 성기사들에 의하 처단이 결정되었다. 이단자임에도 불구하고 신력이 있으며 신전을 세우고 선행을 베풀었지만 천년이나 이어온 율법에서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성기사들을 세인트에 파견하겠습니다. 이단자의 율법에 따라 성기사들이 처리할 것입니다." 루노아 신관은 세실리아 성녀를 이단자로 삼는데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피아 신관은 세인트에 다녀온 신관들의 말로는 무척이나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선행을 많이 했다해서 죄가 씻겨지지 않겠지만 약간 찜찜한 마음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고위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율법이 아닌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결정했다면 성기사를 파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루노아 신관은 몇해 전 사라진 세실리아 성녀와 소피아 신관에 대한 소식을 다른 신전에 알려주었다. 이단자에 대한 처리를 해당 신전에서 즉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통보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루노아는 이단자에 대한 율법에 따라 세인트에 성기사들을 파견하였다. 세인트에 파견된 성기사들은 오래전 세실리아 성녀를 쫓던 그대로 구성하였다. 피니온 신전으로서는 무척 치욕적인 일이라 빠르게 처리를 하였다. 피니온 신전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고있는 지금 이단자에 대한 확실한 처리가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소피아는 전쟁 이후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본래 세인트는 카인의 마법사 탑으로 인해 생활마법이 시작된 만큼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탑의 마법사들이 황궁의 기사들에 의해 대부분 죽임을 당하면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생활마법으로 짧은 시간에 수도 말린에 버금가도록 발전했지만 그것을 주도한 마법사들이 없어지자 극도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치안이 나빠지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인트에는 오직 소피아가 운영하는 신전이 전부였을 따름이다. 신전으로 소피아가 더이상 포교활동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세인트의 발전이 정체되기 이전부터 소피아가 선행을 많이 베풀었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명성이 높았다. 소피아 또한 세실리아의 뜻을 이어받아 매일같이 신관으로서 선행을 베푸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세실리아님에게 천신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소피아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평소와 다름없이 세실리아를 위해 천신에게 기도하였다.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세실리아를 잊을 수 없었다. 지금 신전을 운영하는 이유도 세실리아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소피아가 많은 선행을 베푸는 덕분에 신력이 높아져 이제는 육체적으로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변화였다. 고위 신관은 되어야 육체적 피로에서 벗어나는데 그와 비슷한 신력을 갖게 된 것이다. 소피아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피로하지 않는다해서 소피아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해도 세인트의 모든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육체적으로 괜찮다 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무척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세실리아님의 곁으로 가게 될 것 같아요.' 소피아는 세실리아를 위해 천신에게 기도하고서 자신도 곧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죽는다해서 세실리아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천신을 믿는 소피아로서는 당연히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소피아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예언할 수 있는 예언가가 아니다. 단지 얼마전 피니온 신전의 신관들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신전에서의 율법은 천신을 믿는 신관이나 성기사 모두 피할 수 없다. 피니온 신전에 소피아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이 알려졌을테니 이단자로 낙인 찍혀 율법의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피아를 율법에 따라 처결하기 위해 성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으리라. 소피아는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만날 여건이 안되는 경우에는 편지를 남겼다. 추억이 담기거나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나눠주며 수련 신관들에게도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슬쩍 귀뜸해주었다. 전쟁 이후로 소피아가 세인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 것으로 인해 많은 명성을 쌓은 상태였다. 그녀 자신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지만 신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생활하던 모든 사람들이 소피아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지만 누구도 그녀가 죽음을 예견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소피아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결국 피니온 신전의 성기사들이 도착하였다. "안녕하세요. 라인트 성기사님" 소피아는 오랜만에 라인트 성기사를 만난 것이다. 세실리아와 함께 생활할 때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았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소피아님" 라인트는 반갑게 맞어주는 소피아에게 인사를 하였지만 마음은 굳어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온 이유는 소피아를 이단자의 율법에 의해 천신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인 범죄의 경우라면 선행에 의해 죄가 가벼워 지겠지만 신관이나 성기사는 단 한 번의 잘못도 용서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다. 라인트 뿐만 아니라 모든 성기사들이 소피아를 알고 있었지만 차마 아는척 하지를 못했다. 하지만 성기사들과 다르게 소피아는 자신이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였다. 신전을 방문한 사람들은 성기사들을 약간 의아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피아는 성기사들을 신전에 미리 준비한 곳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성심으로 가르친 수련 신관들에게 신전 주위로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시켰다. 소피아가 얼마전 미리 성기사들이 도착할 것임을 알리고 준비한 일이기에 수련 신관들은 의문을 갖지도 않은채 지시를 따랐다. 라인트는 소피아가 변명은 아니더라도 피치못할 사정을 말하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소피아는 피니온 신전에서 알게된 사실 그대로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겪었던 사실을 그대로 성기사들 앞에서 말해 주었다. "......" 소피아가 겪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성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녀가 세인트에 정착하여 신전을 세우고 신관으로서 생활한 것은 무척이나 감동받고 존경스러웠지만 율법을 어긴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신이시여.' 라인트는 신탁이 내려져 소피아에게 사면을 내렸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차라리 소피아가 확실한 이단자였다면 혼잡한 감정이 생기지도 않았으리라. "내일 이단율법의 심판을 거행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소피아 시관님" 라인트는 소피아의 말에 그저 대답할 뿐이었다. 소피아 스스로 이단에 대한 처결을 알고있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단자는 오직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기사들로서는 약간 미소짓고 있는 소피아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무척 힘들었다. 소피아는 마지막으로 세실리아를 위해 천신에게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소피아처럼 잠들지 못했다. 소피아는 그동안 자신에게 지금 닥친 일을 예상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했다. 아침이 밝자 다시금 소피아와 성기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세인트 신전은 처음으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수련 신관들에 의해서 통제되었다. 수련 신관들 조차도 신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준비되셨습니까?" 라인트는 율법대로 처결을 진행하면서 지금처럼 이단자에게 묻기는 처음이었다. 대개 강제로 죽음으로 인도하는게 일반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피니온 신전을 떠날 때부터 각오했던 순간입니다.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분명 천신님의 뜻이리라 생각합니다. 성기사님들에게 천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소피아는 성기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라인트 성기사 앞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도를 하고 있지만 머리속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었던 여라가지 기억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율법에 따라 소피아 신관을 이단자로 처결합니다." 라인트 성기사는 눈을 감고있는 소피아게 조용히 말하며 검에 신력을 주입하였다. 그리고는 소피아의 목을 향해서 빛처럼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함께있는 성기사들 조차 느끼지 못할 속도였다.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길.' 라인트는 소피아 신관이 이단의 행동을 했지만 처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인트에 도착해서 소피아가 행한 수많은 선행은 성녀에 버금갈 정도였던 것이다. 피니온 신전에서는 그저 선행을 많이 베풀었을 뿐이라 생각하지만 세인트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소피아를 존경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자신의 목이 베어진 사실을 알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후 자신도 알수없는 상황에서 소피아는 죽음을 맞이했고 그녀는 목이 베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성기사들은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준비한 관에 눕혔다. 이단에 대한 율법에 따른 절차를 진행해야 했다. 신력으로 시신을 그대로 보존하고 그녀가 이단인 이유를 관에 적었다. 관에는 피니온 신전에서 소피아를 이단으로 결정한 이유를 비롯해 그녀의 일생이 적혀 있었다. "라인트 성기사님 그녀가 남긴 편지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소피아는 성기사들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본래 이단자의 부탁은 거절하는게 당연하지만 그녀는 특별한 경우에 속했다. 이단이면서 신벌을 받지 않은 유일한 신관인 것이다. "당연히 전해줘야지." 라인트는 대답을 하고나서 성기사들과 함께 수련 신관을 불러들여 소피아의 죽음을 알리고 그녀의 죽음에 대한 자초지정을 설명하였다. 처음에는 성기사들을 향해 악담을 퍼붓던 수련 신관들이 소피아가 남긴 편지를 보고 분노를 참았다. 수련 신관들로서는 자신들을 신관의 길로 이끈 소피아 신관이 그러한 과거가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인트에 소피아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다. 그녀 하나의 죽음에 모두가 슬퍼했고 이단으로 처결한 성기사들에게 분노했다. 객관적으로 소피아가 스스로 이단임을 모두에게 편지로 알렸지만 그녀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아본 사람이라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성기사들은 소피아를 처결한 다음날 말린으로 떠났다. 소피아의 죽음으로 세인트 사람들이 분노는 극에 다다랐다. 결국 세인트를 비롯해 동지역 전체가 마음을 모으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말린의 결정에 동지역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동지역은 모두 개척지역이었지만 현재에 이르러 많은 발전을 이룩하여 수도 말린에 버금갈 정도였다. 하지만 전쟁이 패하면서 귀족들에 대한 견제가 거의 사라진 상태라 동지역은 하나의 나라처럼 스스로 통제하며 운영되고 있었다. 귀족들은 언제나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소피아의 죽음을 계기로 동지역은 자주력을 갖길 원했고 귀족들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 엘프들과 정령사들이 소국을 형성한 사실이 널리 알려진 상태였으며 일리시아 제국연합도 대부분 독립하여 여러개의 소국과 왕국으로 분열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통제권을 잃어 신전의 도움까지 받는 상태라 최남단에 엘프의 소국이 생겨나고, 동지역이 하나의 왕국으로 독립하는데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못했다. 약간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무마시키려 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피니온 신전으로서도 소피아 신관을 이단자로 처리한 결과가 제국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전쟁으로 대륙은 공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제국이 여러개의 소국과 왕국으로 분열될수록 대륙은 작은 전쟁이 많아질테고 그것은 수백년 동안의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1 회] 21. 분열 세렌의 죽음이 안겨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렌은 노예 신분이라서 그런지 주관이 많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끔씩 보여주는 감정을 보면서 사랑스러움을 느꼈었다. 더욱이 세렌은 사비나가 죽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가족들은 내가 밖에서 겪었던 일을 듣고 놀랍게 생각하지만 직접적으로 옆에서 본 것은 아니다. 세렌은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함께 경험했기 때문에 그녀가 있음으로 해서 그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세렌도 없으니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은 없다. 세렌의 죽음으로 반년 가량을 홀로 무의미하게 지냈다. 크라이 숲의 동식물에도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다. 엘프들이 패로이 숲을 중심으로 소국을 탄생시키고, 카르시온 동지역이 왕국으로 독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들려온 소식중에서 가장 슬펐던 이유는 카르시온 제국의 동지역이 왕국으로 독립하면서 함께 알게된 소식 때문이다. 바로 세인트에서 생활하던 소피아가 성기사들에 의해 이단자로 낙인찍혀 죽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세렌이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알게된 소식이라 그런지 너무나 가슴아팠다. 세렌의 죽음 이후 처음에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를 직접 찾아가 죽이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짓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반년 가까이 무관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소피아의 죽음을 알기 전까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소피아의 죽음 소식을 듣고서 쌓이고 쌓인 슬픔과 분노가 밀려왔다. 분노의 대상은 지금의 내가 존재하도록 운명을 선사한 천신이다. '사비나, 세실리아, 소피아 그리고 세렌.' 소피아의 소식을 듣고 내가 알고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현재의 모든 상황이 운명에 의해 벌어진 일은 아닐까 상상했다.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자 그럴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진실을 알기 위해선 진실만을 말하는 존재에게 도움을 받는게 최선이었다. '엘레스트라는 진실만을 말하지?' 물의 최상급정령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해답을 얻고자 하였다. 정령은 진실만을 말하니 어느 정도의 궁금중을 풀어주리라 생각하였다. '그렇습니다. 주인님.' '당연한 말이겠지만 예전에 내가 자살을 시도한 것 때문에 천신의 운명에서 벗어난거 맞지?' '예전에 수천번이나 질문했던 답변이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인님은 천신의 운명에서 벗어나셨습니다.' 엘레스타라의 말을 듣고서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우연이라 하기엔 네 명의 여자들이 죽은 사실이 이상했다. 사비나는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했기에 상관없지만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인과율에 따른 것 같지만 이상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 그리고 세렌이 나를 만나지 않았다해도 그녀들이 죽었을까 하는 점이다. 생각이 많아져 이상한 자책인지는 몰라도 혹시 그녀들이 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그런 점 때문에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엘레스트라 사비나는 무슨 이유로 죽은거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는 노환이었습니다.' '그 외의 이유는 없었지?' 엘레스트라는 사비나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가지 질문에 상세히 대답해 주었다. 엘레스트라는 이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묻지 않는 이상은 대답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건 모든 정령들이 그렇다. 그래서 지금까지 정령들이 갖고있는 유용한 지식들이 썩혀 왔던 것이고 말이다. 사실 엘레스트라에게 궁금한 사항은 사비나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들의 죽음에 내가 어떻게라도 연관이 되어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의 확인이었다. 하지만 엘레스트라에게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 난감하였다. '엘레스트라는 천신에 의해 운명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을 알수가 있어?' '그건 저로서도 알수가 없습니다.' '그럼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 엘레스트라에 의하면 나는 특별한 경우라 하였다. 실질적으로 천신의 운명을 받는 사람이 있다해도 정령들이 알수가 없다. 나의 경우는 정령사 가족이라서 세레나 엘프장로가 자연의 축복을 내리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연의 축복은 조화로운 정령왕이 간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하는 경우라 가능했던 것이다. 천신이 신관을 통해 신탁을 내리는 경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인간들이 천신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조화로움의 신인 정령왕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최상급정령이 관여하면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엘레스트라는 나와 만났던 세실리아와 소피아 그리고 세렌이 천신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해 줄 수 있어?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확인해 보고 싶어.' 혹시 천신의 운명대로 죽었어야 할 내가 살아남으로 해서 나와 친분이 있는 다른 사람이 어떠한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 생각했다. 예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다가 나와 관계된 여자들이 모두 죽자 그러한 생각이 든 것이다.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천신에 의해 운명이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선 그 당사자가 천신에게서 받는 영향이 적어야 합니다. 더욱이 천신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 신관의 경우에는 더욱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천신을 믿는 신관이다. 그러니 조화로움을 따르는 정령신의 영향을 받는 엘레스트라가 알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그럼 알수 없는거야?' '그건 아니지만 천신님이나 정령신님과 같은 신에게 직접 묻지 않는이상 도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을 만날 수 있겠는가. 엘레스트라의 말을 듣고서 왠지 궁금중을 풀어낼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살을 하고 60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살았을 때에는 천신의 운명에서 벗어났음에 안도했다. 그리고 행복마저 느껴었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천신의 운명을 벗어났어도 내 주변 사람들이 천신에 의해 운명이 좌우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실리아도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었는데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 스스로는 나의 도움으로 신벌을 피했지만 엉뚱한 일에 휩싸여 죽은 것이다. '정말 신이 그렇게 단순할까?' 그래도 신이다. 신이 그러한 방법으로 운명을 벗어난 자에게 피해를 주는지 의문이 생겼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내가 겪은 일들은 한 사람에게 악운으로 닥친 일치고는 너무나 많았다.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진 사람도 나와 비교할 때 행운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최상급 정령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의문을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한 동안 그런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머지 반년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내도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나의 무관심은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세렌이 죽은지 일년이 지났건만 변화된 것은 없었다. 대륙이 혼란하여 크고작은 나라들이 생겨나거나 멸망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대륙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카르시온 제국과 일리시아 제국은 여전히 건재하다. 두 제국에게서 파생된 나라들이 말썽을 일으키는 것 뿐이다. 반년 가까이 운명에 대해 관심을 쏟다보니 최상급정령들과 정령왕을 주제로 많은 대화를 가졌다.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들의 정령왕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그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보통 다른 신들의 경우 현실세계에 깊이 관여할 수 없다. 천신의 경우도 신관처럼 대리자를 내세워 간접적으로 관여할 뿐이다. 정령왕의 경우에는 소환자만 있으면 자유자재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정령왕을 소환할 정령사도 없을 뿐더러 설사 소환한다 할지라도 그 소환자는 즉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정령왕은 엄연히 신이고 신이 현실에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힘이 어느정도인지 상상조차 불가능하니 말이다. '과거에 정령왕을 소환한 정령사가 있었어?' 4대 최상급정령을 소환하여 정령신들을 소환한 정령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물론입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존재하였습니다.' '분명히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이 속한 계열의 정령왕이 소환된 경우가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지 혹은 어떤 종족인지 대답하지는 않았다. 최상급정령들과 대화를 하다가 깊게 파고들면 꼭 결정적인 부분에서 대답을 들을수 없다. 아주 오래전 정령왕들이 모여서 정령이 소환자에게 알려줄 지식을 제한하였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그나마 나이기 때문에 다른 정령사들 보다도 많이 알려주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나도 정령왕을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뭐야!" 대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겉으로 소리를 뱉어냈다. 최상급정령들과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의 대화가 무척이나 익숙한데도 불구하고 놀라게 되니까 오래전 습관대로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정령왕을 만나는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질문도 하지 않았다. '분명 인간 정령사는 정령왕을 소환하여 만날수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방금전 했던 말은 무슨 소리야?' 너무도 흥분하여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나 반문했다. 주변에 남은 것이라고는 가족이 전부고 더욱이 한 번 죽음을 경험한 나로서는 한참 복잡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을 때 죽음을 담보로 정령왕이라도 만나 운명에 대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인간 정령사는 정령왕을 만날 수 없다는 최상급정령들의 말에 꿈도 꾸지 않았었다. '일반적인 인간 정령사의 경우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주인님의 경우에는 엔트에게서 전해받은 800년의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모두 사용한다면 정령왕을 오래는 아니더라도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소환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이야? 그렇다면 진작 말해주면 좋잖아.' 본래 최상급정령들은 개인의 주관이 거의 없이 소환한 정령사의 감정에 치우치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정령사 입장에서는 극히 사소하지만 나의 경우는 정령들이 자의에 의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최상급정령들은 그 사실을 진작 말해주었어야 옳았다. '주인님 정령왕은 엄연히 신입니다. 정령들이야 생명력이든 마나든 무엇을 이용하여 소환하면 그 힘들은 다시 채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신은 다릅니다. 신탁을 받은 유명한 신관들이 오래 살았다는 말을 들은적 있으십니까? 아마도 없을 겁니다. 신이 소모하는 힘은 그 어떠한 것이든 다시 돌려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인님이 정령왕을 소환하시면 800년의 생명력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최상급정령들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말을 굳이 하지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800년의 생명력이 사라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아니 평범에서도 한참이나 뒤진 하급 정령사에 불과할 뿐이다. '800년의 생명력을 대가로 정령왕과 얼마의 시간동안 대화를 가질 수 있을까?' '아마도 길게 잡아야 수십초에 불과할 뿐일 것입니다.' '그렇게나 짧다니...' 지금까지 정령사가 정령왕을 소환하였다는 그 어떠한 소문도 없는 이유가 있었다. 1200년의 수명을 가진 엘프들 조차도 조상중에 정령왕을 소환시킨 경우가 없다하니 물어보나 마나였다. 설사 소환시켰다 할지라도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으니 소문이나 기록이 남을리 없는 것이다. '운명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은데.' 나의 수명을 생각할 때 평생 이대로 운명에 대해 궁금중을 해소하지 못하고 불확실하게 살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문제되는 사항이 아니지만 나에게는 죽음보다도 중요한 사실이다. 만약 천신에 의해 내 주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다면 어떻게든 보상을 해야만 한다. 그나마 내 가족들은 모두 정령사라 천신에 의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에 기뻤다. 최상급정령들과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정령들은 대화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정령왕을 소환한다면 그들로서는 앞으로 수백년 아니 수천년 혹은 수만년 동안 다시 소환되는 경우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800년의 생명력을 가진 소환자를 엘프가 아니고서 어떻게 만날수 있겠는가. 아니 엘프라 할지라도 나와같지는 않을 것이다. 정령왕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조화로움을 관장하는 정령왕과의 만남은 그동안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천신의 운명을 확실히 벗어난 것인가?' '나로 인해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천신의 분노를 감당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비나, 세실리아, 소피아 그리고 세렌이 죽은 것은 아닐까?' 정령왕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살한 이후의 삶에 대한 궁금중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800년의 생명력이 소모되어야 한다면 스스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엔트가 건네준 생명력으로 죽을 고비도 무수히 넘겼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을 포기할 마음이 생길리 만무한 것이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후회되지 않을까?' 정령왕을 만나게 된다면 이후 하급 정령사로서 평생 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운명에 대한 궁금중을 신을 통해 해답을 얻을테니 마음속으로야 많은 위안이 되리라. 그렇지만 대가가 너무도 엄청난 것이다. 물론 신을 만나는 것으니 아주 작은 대가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800년의 생명력이 내게 없었다거나 얻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엔트가 건네준 생명력이지만 나와 함께한지도 무척 오랜 시간이었다. 여러가지 즐겁고 슬픈 추억이 있는 생명력인 것이다.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들은 굳이 신을 만나서 운명에 대한 대답을 얻을 필요성이 있는가를 언급하였다. 정령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극히 짧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차라리 죽을 때까지 편하게 지내다 죽음을 앞두고 신을 만나도 상관없다며 설득하였다. 하지만 내 성격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남은 삶을 편하게 지내기란 무척이나 힘들 것이다. 무슨일을 하다가 끝까지 마무리도 짓지 않고 떠나온 기분으로 남은 인생을 살수는 없는 일이다. '어차피 나의 힘도 아니었어. 엔트의 양해를 구하고 정령왕을 만나 운명의 해답을 얻을거야.' 나는 정령왕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로인해 생명의 위험도 있을테고 잘못하면 생명력만 소모하고 정령왕은 만나지도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최상급정령들과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상의하고 크라이 숲의 엘프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다. 크라이 숲의 엘프마을에는 예전보다 엘프의 수가 늘어났다. 그것은 세레나 엘프장로가 내게 소환된 최상급정령을 통해서 얻은 잊혀졌던 엘프의 정령술과 전투기술에 대한 기록을 넘겨준 이후부터이다. 그들은 크라이 숲의 엘프들에게 과거 잊혀졌던 엘프들의 지식을 교육받기 위해서 찾아온 엘프들이다. 사실상 그로인해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엘프의 소국이 탄생하였기 때문에 크라이 숲은 엘프의 소국에 의해 보호받는 중요한 곳이 되었다. 세레나 엘프장로는 오래전 내가 자살할 때에도 도왔듯이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그로인해 크라이 숲으로 교육을 받기위해 찾아온 다른 숲의 엘프들을 모두 돌려보내기까지 하였다. 나의 가족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인간은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에 소환된 정령왕을 목격하는 즉시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령사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어쩔수 없는 것이다. 한 달이 넘는 준비과정을 통해서 크라이 숲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에 세레나 장로, 엔트 그리고 상급정령사의 엘프들이 모였다. 사실 정령왕을 소환하는데 크게 도움이 필요한 것은 없다. 그저 주변을 안정시켜 주는 역할이 전부인데 혹시라도 내가 정령왕을 소환함으로 인해서 크라이 숲에 피해를 주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엘프들이 참석한 것이다. 더구나 엘프들로서도 정령왕을 만나게 된다면 무척이나 영광이리라. 세레나 장로의 지시에 따라 상급정령사 엘프들이 정령을 소환하여 주변을 안정시켰다. 엘프들은 풀벌레 소리나 동식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조화로울지 몰라도 내겐 정신을 집중시키는데 방해를 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엘프들이 숲과의 대화를 통해서 적막이 흐르도록 하였다. "카인에게 자연의 축복이 함께하길..." "자연의 축복을..." 세레나 장로를 비롯해 엘프들이 내게 자연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엔트는 숲과 대화가 가능할 뿐 특별한 능력이라 할 것이 없어서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무려 60년이나 함께한 엔트가 옆에 있으니 마음이 무척 든든했다. "엘레스트라 준비 부탁해.' 엘레스트라에게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도록 세세한 준비를 맡겼다. 소환하게 될 정령왕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다. 엘라임을 소환하는 이유는 죽은자를 부활시킬 정도의 회복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정령왕을 소환함으로 해서 엘프들이나 내가 다치더라도 신경을 써줄 수 있을거라 생각하였다. 엘레스트라는 숲속의 나뭇잎에 조금씩 달라붙어 있는 이슬방울을 모아서 주변에 가득차게 만들었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일테니 당연히 깨끗한 물이 필요했다. 자연의 속성이 침입한 물이 아닌 오직 순수한 이슬이 가장 적당하다. '주인님 준비되었습니다.' 엘레스트라가 모든 준비를 끝내자 내게 알렸다. 이제 정령왕을 소환하는 일만이 남았다. 800년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자 약간 씁쓸한 마음이 생겼지만 되도록 잊으려고 생각에서 지웠다. 앞으로 당당하게 지낼 수 있으면 만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조화로움과 물질계 4대 정령의 물 속성을 주관하시는 엘라임님이시여..."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을 소환할 수 있는 의지어를 뱉어내며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였다. 최상급정령까지는 특별히 규칙적인 정령과의 계약방법이 전해지지만 정령왕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소환을 원한다는 의지만이 유일한 소환방법이었다. 한 시간을 그렇게 정신을 집중하고 엘라임을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나나 엘프들이나 절대 상관하지 않았다. 정령왕이 그렇게 간단한 의지로 소환될 수 있었다면 수많은 엘프들에 의해 소환되었을 것이다. 엘라임을 소환하는 의식이 반나절이나 지속되어서야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주변에 흩어진 이슬방울들이 조금씩 조금씩 한 곳으로 모이더니 사람만하게 뭉쳐졌다. 하지만 몸속에서 생명력이 소모되지는 않았다. 정령왕이 소모된다면 몸속에 남아있는 생명력이 단번에 소모될텐데 말이다. 반나절이나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과거 60년이나 육체없이 이성만 가진채 생활하던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무척 피로함을 느끼는 정도지만 물의 정령을 잠깐 이용하여 그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파파파팍" 사람만한 크기의 물이 허공에서 갑자기 폭발하면서 나를 비롯해 주변에 약간 떨어져있던 엘프들을 덮쳤다. "카인 피해!" "조심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에서 갑자기 발생한 일이라 아무도 피하지 못했다.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에는 벌써 물을 몸에 흠뻑 뒤집어 쓰고 있었다. 사실 그것이 물리적으로 충격을 줄지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막(水膜)?" 물이 폭발하면서 그것이 사방으로 흩어져 커다란 구형의 수막을 만들어졌다.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가두기 위해서인지 알수는 없지만 엘프들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 누구도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로서는 그저 엘라임을 소환하기 위한 의지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주변에 수막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생명력이 줄기차게 빠져나갔다. 스스로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전신으로 생명력이 수막 내부에 흩어져 떠돌게 된 것이다. 800년의 생명력이 주변에 가득차자 모두들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로서는 허탈한 마음에 그저 주저앉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다른 엘프들은 작은 공간에 엄청난 생명력을 느끼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수막 내부에서 생명력이 조금씩 어떠한 형태를 가지려고 이러지리 떠돌았다. "정령왕이 나타나려나보군." 수막 내부에서 엔트만이 태연하게 현상을 재미있다는 듯이 관찰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나 엘프들은 그럴수가 없었다. 정령왕이 소환될지도 의문이었고 설사 소환되더라도 어떠한 모습일지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엘프들로서는 정령왕을 만나게 되면 무한한 영광의 순간이 되리라. 생명력이 수막의 중심이자 내 앞에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슬이 커다랗게 모이듯 둥그런 모양이 되었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정령사라면 누구나 느낄만한 생명력의 꿈틀거림이었다. "우우우우웅웅" 생명력이 울음을 토해내듯이 약간씩 진동하더니 둥그런 모양에서 어떠한 얼굴을 만들더니 상체를 만들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현상이라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명력이 진동하니 그것을 느끼는 나로서는 몸이 떨리는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제 나로서는 800년의 생명력이 몸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생명력이 한참을 진동하더니 얼굴형태와 상체만을 만들었다. 굳이 정령의 모습이 인간의 형태를 이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상체만 나타나니 약간 낯설은 모습이었다. 뚜렷한 얼굴이 아니지만 그 얼굴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라임님이시여..." "엘라임님이시여..." 엘프들은 눈앞에 생명력으로 형태를 이룬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프들이 어떠한 자세를 취했는지 알수는 없었고 그저 소리만 들렸다. 내가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엘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눈앞에 정령왕 엘라임이 있는데 다른 곳에 어떻게 눈을 돌릴수 있겠는가. 엘프들이 정신을 차리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제는 많았던 생명력도 없어서 하급 정령을 겨우 소환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인지 몰라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스스로 원했지만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만나는 상황이 닥치자 당황스러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야.' 눈앞에 있는 물의 정령왕인 엘라임의 생각이 머리속에 전해져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의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이성을 잃기 직전에 나는 엘라임이 오랜만에 소환되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800년의 생명력을 포기하고 엘라임을 소환했건만 궁금했던 운명에 대한 대답을 얻지도 못하고 그렇게 의식을 잃고있는 나 자신이 한스럽게 생각되며 쓰러졌다. 하지만 왠지 그 순간에는 후회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엘라임이란 신의 존재를 만난다는게 얼마나 대단한지 느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 엘프 소국은 순수하게 엘프들에 의해서 탄생했다고 할 수 없었다. 대략 절반은 수많은 정령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에 몰려들면서 힘을 얻어서 생긴 것이다. 엘프들이 모여든 이유는 엘프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라는 이유 보다는 새롭게 발견된 엘프들의 정령술과 전투기술 때문이다. 이제 카인에 대해 모르는 엘프는 없었다. 카인이 최상급 정령사였고, 그가 최상급 정령을 장시간 소환할 수 있어서 그가 생활하는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카인이 소환한 최상급정령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어낸 지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실 일부 엘프장로들이 최상급 정령을 소환해봐야 일분이 고작이니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다. 더구나 정령들은 질문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최상급 정령사들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인간 정령사들은 엘프 제국을 탄생시킨다며 의지가 강했지만 엘프들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기술을 익힌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소수의 엘프들만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도 엘프 사회는 크게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대륙에 분포되어 있는 많은 엘프들이 과거에 진보된 정령술과 전투기술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엘프들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인간이 눈깜짝 할 사이에 발전을 이루면서 엘프들은 조금씩 위험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인간으로 인해 엘프들에게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에 존재하는 많은 인간들 때문에 노예가 되었던 엘프도 많아서인지 엘프들 모두가 무척이나 심란한 마음이였으며 언젠가는 엘프가 대륙에서 없어질 거라는 막연한 추즉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은 엘프 소국에 등장한 진보된 정령술과 전투기술로 인해 사라졌다. 엘프 소국은 수많은 숲의 엘프들이 모여서 탄생했지만 실질적으로 패로이 숲의 엘프 장로들에 의해서 중요한 문제들이 결정되고 있었다. 정령사들은 결정된 사항을 그들 나름대로 충실하게 이행할 뿐이다. 그렇게 엘프 소국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비효율적인 운영이지만 엘프들은 인간처럼 권력이나 부에 대한 욕심이 없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장로들이 결정을 잘못하면 다른 엘프들이 그 부분을 지적한다. 그러면 곧바로 오류를 고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사회처럼 복잡하지도 않았다. 엘프들에겐 명예 마져도 없으니 말이다. 이런 부분을 따져보면 엘프야 말로 완벽한 종족이라 할 수 있었다. "모리엔 장로 어떻게 생각하시요?" 비우스 장로가 모리엔 장로에게 물었다. 자리에는 패로이 숲 다섯 명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으며 모두 모리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리엔은 크라이 숲의 엘프장로에게 받아온 책자로 인해 지금처럼 엘프 소국까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에 다른 장로들에 비해서 의사를 많이 존중해주고 있다. 엘프들이 모여 결국 소국까지 탄생하였지만 엘프들이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고 이렇게 회의를 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엘프가 대륙을 지배할 때에는 그저 자연스럽게 엘프들의 수가 많아서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에는 엘프가 소수인지라 과거처럼 대륙을 지배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이대로 저희들에 의해서 소국이 운영된다는 것은 조화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렇다고 엘프 소국을 인간 정령사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엘프들이 그나마 가장 신뢰하는 인간이 인간 정령사들이다. 그들은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엘프의 의지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 정령사가 신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중에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를 탐하는 정령사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죄가 아니지만 그런 인간 정령사들이 엘프 소국을 다스린다면 많은 엘프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소국을 운영할 지도자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어찌한다." 다섯 명의 장로들은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엘프 소국을 다스릴 지도자가 필요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소국을 운영하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마음을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 엘프들은 서로 대등적인 관계에서 시작한다. 어떤 엘프가 지도자로서 생활한다면 그 엘프는 진정한 엘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처럼 엘프 소국이 운영된다면 인간들에 의해 모두 흩어질 것입니다. 이런 기회가 자주 찾아오지 않을테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장로들은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 했지만 뚜렷한 방안이 없었다. 모두 낙담하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의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한마음이었다. 처음으로 엘프들의 나라라 탄생하였다. 서로다른 숲의 엘프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기회가 또다시 찾아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할 것이다. "다른 숲의 장로님들까지 초대하여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러는게 좋겠습니다." 다섯 명의 장로들은 그들로서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숲의 장로들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엘프 소국의 지도자는 꼭 있어야만 했다. 엘프 소국 내부에는 인간도 많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며 조화롭게 지내기 위해선 꼭 필요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2 회] 22. 엘프소국 육체를 잃어버리고 이성만을 가진채 60년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당황하지 않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목격하고 곧바로 쓰러지게 되는 사실까지 기억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의식이 있지만 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엘라임의 만남으로 지금의 상황이 생겼음을 상기하고 엔트를 불렀다. 엔트는 내 생각을 전해받을 수 있을테니 주변에 있다면 대답을 해주리라 생각했다. '목숨을 담보로 운명에 대해 알고 싶었나?' 엔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강력한 생각이 내게 전해졌다.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지금 전해진 생각처럼 확고하고 강력한 경우는 없었다. 분명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분명했다. 간혹 정령은 소환자인 인간의 육체가 버텨내지 못한다 생각하면 의식 세계로 들어오는데 지금의 현상이 그와 비슷함을 뒤늦게 알아챘다. '엘라임님이십니까?' '그렇다.' '굳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죠? 앞으로 저의 삶은 어떻게 되나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시라면 제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려주세요.' 막상 질문을 하려니까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800년의 생명력으로도 엘라임을 오랜시간 붙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두서없이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당황하여 두서없이 질문했지만 최상급정령도 소환자의 생각을 꿰뚫는데 정령왕이라면 신이니만큼 나의 생각을 모두 알고있을테니 자세히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운명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는 있다. 지금부터 전하는 말은 혼자만 알고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경우 나로서도 신벌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상기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엘라임님' '너는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의 운명을 천신에게서 받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있듯이 자살을 통해 운명에서 벗어났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운명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너와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천신의 신벌을 대신 짊어지게 된 것이다. 다행히 네 가족은 정령사로서 정령신들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천신의 신벌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신벌을 받는다. 물론 너와 가까운 친분인 경우에만 해당한다.' 엘라임이 전하는 강력한 생각들은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사실이었다. 네 명의 여인들이 모두 나로 인해 죽었다니 너무나 끔찍했다. '그렇다면 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벌을 받은거죠?' '단 한 명도 없다.' 네 명의 여인들이 나를 대신해 신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엘라임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전했다. 나를 대신해 신벌을 받은 사람이 없다니 정말 의외의 결과였다. 나와 친분을 맺은 사람은 무척이나 많았는데 말이다. '네가 생각하는 여인들 모두 원래의 운명보다 길게 살았다. 사비나는 노환으로 일찍 죽어야 했지만 네가 크라이 숲의 엘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10년이나 더 삶을 살았고, 세실리아와 소피아는 너를 두 번째 만나는 숲에서 성기사들의 추적을 받아 결국 이단자로 취급받아 그자리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세렌도 노예로 전전하다 죽을 예정이었지만 너와 함께하면서 얼마전에 죽은 것이다. 물론 세렌의 경우는 신벌의 영향이 있었지만 네가 그것을 막아주었기에 결국 모두가 예정보다 오래 살았다. 그것은 망명한 마법사들 모두도 마찬가지이다.' '정말입니까?' '조화로움을 담당하는 신인 내가 하찮은 네게 거짓을 말하겠는냐! 물론 마지막에 그들의 죽음은 모두 천신에 의한 신벌로 죽었다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너로 인해서 오래 살았던 것이고 마지막에 신벌에 의해 죽은 것이니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다행스러웠다. 가슴속의 짐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아닌지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왜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만 만나게 된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이런 기회가 많지가 않아 엘라임에게 당장 물어보았다. '너는 실상 죽었다 살아난 존재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일찍 죽을 운명에 처해질 사람들과 관계가 쉽게 형성되는 것이다. 네게는 설명하지 못하는 신들만이 알고있는 법칙에 의거해 발생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법칙은 이시간 이후로 네게 적용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소환함으로 해서 완벽하게 패러렐 라이프의 운명을 벗어난 것이다. 이제는 너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 모두가 천신의 신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니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더욱 크다.' '정말 제가 천신의 운명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것인가요?' '그렇다.' 엘라임의 대답을 듣고서 정말 800년의 생명력을 잃어도 아깝지 않은 대답이라 생각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겠지만 당당하게 살 수 있으리라. 엘라임에 의하면 신이 정해놓은 운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나에게 적용되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죽음이나 불행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빼놓지 않았다. 운명에 대해 엘라임은 너무나 간단히 정의하여 말해주었다. 신의 영역이 넘는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고 오직 나를 중심으로 말하였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해결했으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무엇인가가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많은 생명력을 잃었지만 그만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엘라임은 800년의 생명력에 대한 말을 마지막으로 의식속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오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재 옆으로 의식을 잃으며 쓰러지는 순간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방금전과 다르게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엘라임님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멈쳐 있었단 말인가?' 나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엘라임과의 만남이 한 순간임을 알았다. 실질적인 대화는 무척 길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800년의 생명력으로 엘라임을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은 일초도 되지 않는게 맞는 말이었다. 단지 그 일초가 당사자에겐 무척 긴 시간으로 느껴질 뿐이다. 눈앞에서 800년의 생명력으로 상체의 형태를 유지하던 엘라임은 사라졌고 수막도 평범한 물이되어 떨어졌다. 나와 엘프들이 흠뻑 젖었지만 그것은 모두가 정신을 차리도록 도왔다. 엘프들이 다가와 쓰러진 내게 안부를 전하였다. 엘프들에게 의식속에서 엘라임과의 만남을 사실대로 말했다. 물론 나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은 발설하지 말라는 엘라임의 지시에 따라서 모두 말하지는 못했다 엘프들은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매우 놀라워하였다. 모두가 엘라임을 목격했고 신의 거대함을 잠깐 동안에 느껴서인지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엘라임을 주제로 엘프들과 대화를 끝내고서야 크라이 숲이 내게 위험한 장소임을 오랜만에 느꼈다. 이제 나는 하급 정령을 겨우 소환할 수 있는 평범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 대가로 마음의 부담을 모두 벗어던졌으니 무척 이로운 결과였다. 숲의 야생동물에게 내가 다칠 가능성도 있으니 앞으로 지금의 육체에 적응하려면 많은 고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생명력이 없으니 하다못해 더위나 추위 때문에 건강을 해칠 가능성도 크다. 인간의 육체는 무척 허약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음식섭취도 필요하다. 800년의 생명력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생활해야 한다. 그나마 엘라임이 마지막에 남긴 말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많은 생명력을 잃었지만 그만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엘라임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 달라진 무엇인가를 찾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한 동안 엘프들이 찾아와 엘라임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달라며 찾아왔다. 엘라임을 만난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모두 상급정령사의 엘프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엘프이다보니 사실을 전달하는데 있어 너무나 객관적인 시선을 기준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어떠한 상황을 전달하는데 있어 적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엘프들은 엘라임을 목격한 엘프에게서 사실을 전해듣고 실망스러운 생각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사실을 전함에 있어서 주관적인 사고로 전하지만 그때의 상황이나 분위기까지도 전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크라이 숲에 엘라임이 잠깐 나타났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영광이었다. 신이 나타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물론 신이 등장하려면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단순히 나의 생명력만 사라졌을 뿐 엘프들에게 피해는 없었다. 가족들도 내가 엘라임을 만났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엘프들의 기억속에서도 정령왕을 소환한 경우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정령왕이 소환될 경우는 수백년 이내에는 없을 것이다. "카인 그럼 잘지내요." "다음에 놀러올께요." 엘프들이 인사를 하며 나의 집에서 떠났다. 가끔씩 찾아와 대화를 나눠주는 엘프들이 너무나 고맙다. 예전 같으면 심심할 때 최상급 정령을 소환해 대화를 나누겠지만 이제는 꿈같은 일이었다. 물론 최상급 정령을 소환했던 신체라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마나가 빠르게 축적되지만 일반 정령사에 비해 두 배 정도로 빠른 것 뿐이었다. 지금의 속도라면 100년이 지나야 최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상급 정령을 소환한 경험이 있으니 소환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소환하는 그 자리에서 부족한 마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제 식사를 준비해야겠군." 혼잣말을 하며 집앞에 있는 텃밭으로 향했다. 텃밭에는 엘프들이 건네준 친화력을 높이며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마나를 빠르고 많이 쌓이도록 도와주는 자이비가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생명력이 아닌 마나을 쌓아야 한다. 사실 생명력은 엘프나 식물들이 사용하는 것이라 인간이 스스로 쌓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이 스스로 전해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에휴. 잘도 자라는구나." 텃밭에서 열심히 자라는 자이비를 바라보며 한숨이 절러 나왔다. 이제는 육식도 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800년의 생명력이 있어서 음식섭취에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는 육식을 하면 하급 정령조차도 소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엘라임을 소환한 이후로 계속 풀만 먹고 사는게 한심스러웠다. 엘프들이 나를 위해서 자이비를 가꿔주고 있다. 사실 자이비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엘프 특유의 방법이 있다. 정령을 소환해 보살피는 노력이 있어야 죽지않고 자라는 것이다. 텃밭에서 잘 자라는 자이비를 볼 때마다 엘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툭툭툭" 식사를 위해서 자이비의 잎사귀를 떼어냈다. 요즘 초식만을 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앞으로의 삶을 생각한다면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매우 빠르게 마나가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최상급 정령을 다뤄보며 생명력을 쉽게 제어한 경험 때문이리라. 물론 그래봐야 엘프와 비슷한 정령사의 실력일 뿐이지만 그나마도 감지덕지하고 있었다. "요놈은 며칠 더 자라야겠네. 무럭무럭 자라거라." 자이비의 잎사귀를 떼어내려다가 약간 작아서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며 잘 자라라고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옆의 옆사귀를 떼어내다가 방금 지나친 잎사귀가 짧은 시간에 주변의 잎사귀 만큼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너무나 놀랐다. "으악! 어어어어!" 엉둥이를 바닥에 주저앉아 바지가 더러워졌지만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사실 최상급 정령을 부리지 못하자 빨래도 해야하고 몸도 씻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요즘들어 신경을 쓰는 부분이었다. 예전에는 정령을 자유자재로 이용하여 세탁도 하고 목욕도 했는데 말이다. 눈을 비비고 헛것을 본것이 아닐까 확인했지만 환상이 절대 아니었다. 방금전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잎사귀가 작아서 그냥 무럭무럭 자라라고 말하며 옆의 잎사귀로 손을 옮긴 것 뿐이다. '혹시?' 문득 엘라임이 마지막에 건넨 말을 떠올렸다. 엘라임은 생명력을 잃은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 말했었다. 혹시 생명력과 관련된 능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식물 특유의 생명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이비라는 식물은 그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자라거라." 혹시하는 마음에 다른 자이비 잎사귀에 손을 가져가 쑥쑥 자라도록 생각을 전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자이비가 커져버렸다. 신기한 마음에 여러번 사용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쉽게 식물의 생명력을 빼앗을 수는 없지만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시험삼아 자이비 잎사귀의 생명력을 빼앗자 몸속에 생명력이 흘러들어왔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식물의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엔트의 경우는 가공된 생명력을 내게 주입했기 때문에 융화되었지만 자이비의 생명력은 순수한 식물의 생명력 자체인지라 융화되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모든 자이비를 대상으로 실험해서 자이비의 크기가 무척 불규칙하게 변해버렸다. 어떤 자이비는 많이 자라서 너무나 커다랗게 변하였고 어떤 경우는 거꾸로 어려졌다. 보통 식물이 자라면 주변에 영향을 끼치게 마련인데 나의 생명력 제어 능력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식물이 커지면 주변에 있는 식물에 악영향을 받아야 정상이건만 내가 제어하면 그러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변화가 찾아오는지 몰라도 이 능력을 엘라임이 생명력의 대가로 준 것이라 생각했다. 식물에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집주변은 온통 엉망이었다. 울타리로 사용되던 나무들이 불규칙하게 자랐고 텃밭의 자이비도 마찬가지이다. 마당의 잡초가 사람만해진 모습도 나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엘프도 아닌 인간인 내게 이러한 능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약간 의외이긴 하지만 무척이나 기뻤다. 800년의 생명력을 가진채 내 자신이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잃고 평범하게 변하자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음을 알게 되었다. 생명력을 제어하는 능력이라면 적어도 숲에서 생활하는데 무척 유용하게 사용 될 것 같았다. ------ 패로이 숲의 다섯 장로들이 엘프 소국에 대한 운영문제를 두고서 다른 숲의 장로들까지 초정하여 결국 모임을 가졌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엘프들은 인간들처럼 신분사회를 통해서 나라를 운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기엔 뛰어난 힘도 생겼으며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소국에 대한 운영문제를 두고서 최상급 정령사인 장로들이 토론을 벌이는 과정에 기가막힌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얼마전에 크라이 숲에서 지내는 카인이란 정령사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소환하여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말이다. 엘라임과 대화를 나누고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신을 만났다는 자체에 모두 놀랐다. 어느 누가 목숨을 담보로 정령왕을 만나겠는가. 엘프들의 경우 죽음을 맞기전에 가끔씩 정령왕을 소환하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장로들은 소식을 듣고 그것이 진실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진실여부를 확인했던 것이다. 대화내용은 정령이 알려주지 않았지만 카인이 엘라임을 소환한 사실만큼은 확실히 증명해 주었다. 정령이 거짓을 말할리 없지 않은가. 카인이란 인간 정령사를 모르는 장로들은 없었다. 지금의 엘프 소국이 탄생하게 된 배경의 중심에 카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리라 생각합니다." 모리엔은 엘프 소국의 지도자로 카인을 내세우자는 의견을 말했다. 인간사회를 따라 지도자가 필요하긴 하지만 엘프가 지도자로 있자니 엘프답지도 않을 뿐더러 조화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엘프 소국이 생겼는데 인간에게 맡기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카인이라면 엘프들도 인정하는 존재라 여러가지 문제를 일소에 해결해 줄 수가 있다. 카인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만나 대화까지 했으며 정령사이다. 물론 지금은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이지만 엘프와 인간 정령사 모두가 인정하는 지도자로서 안성맞춤이다. 더욱이 대륙 전체에서 카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테니 엘프 소국을 빛내는데 적당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저도 모리엔 장로의 생각에 찬성합니다." "카인이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지도자가 생기면 지금보다 원할하게 엘프 소국이 운영될 것입니다. 설사 카인이 활동을 하지 않는다해도 상징적인 의미가 될테니 말입니다." 장로들이 모두 카인에게 엘프 소국을 맡기는데 동의하였다. 한 명의 장로가 카인이 인간이라서 불신을 표명했지만 그 엘프 역시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현 시대에 정령왕이 잠깐이나마 나타났다는 점이 무척 놀랍거니와 그 대상이 인간인 카인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장로들은 크라이 숲에 보낼 사자로 모리엔 장로를 선택하였다. 현재 크라이 숲으로 향하는 남쪽 방향은 엘프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카인과 함께 살고있던 세렌이라는 여자는 물론이고 크라이 숲 앞에 있던 마을사람이 모두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년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이 숲은 현재 모두가 익히고 있는 새로운 지식이 전해진 곳으로 신성시 되어가고 있었다. 카인을 엘프 소국의 지도자겸 대표로 정하는데 불만을 가질 엘프나 사람은 없다. 카인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카르시온 제국에 정령사들의 위상을 높여주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카인은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되어도 상징적인 의미로 있을 뿐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는 힘들다. 엘프들의 특성상 그들은 조화를 따르기 때문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3 회] 22. 엘프소국 식물의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쓸모가 많지는 않다. 농사를 짓거나 약초를 재배하는 경우가 아니고서 어디에다 사용한단 말인가. 물론 그나마 그런 능력이나마 있는게 다행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되어 하루하루가 재미있으니 말이다. 엘프들이 나의 집에 놀러오다가 불균형스럽게 자라있는 나무나 식물을 보고 깜짝 놀라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엘프들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부분은 숲이다. 모든 엘프가 나의 능력에 부러워하였다. 엘프는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숲을 인위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가꾸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자신의 선입관으로 인해서 스스로 원하는 모습으로 숲을 가꾼다. 그러한 차이점들은 엘프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지 못한다. '오늘은 조금만 자라다오.' 텃밭으로 다가가 내 생각을 전했다. 이제는 만지지 않고서도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다. 텃반의 관리가 너무도 재미나서 약간 넓히고 시험삼아 엘프들도 키우기 힘들다는 씨앗을 얻어 재배하였다. 생명력이 어느정도의 능력인지 스스로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텃밭에 신경을 써주고 집주변을 돌면서 나무와 풀들을 관찰하였다. 그러한 취미도 오래 할 수가 없었다. 엔트가 전해준 생명력을 잃은 이후로 하루종일 무엇인가를 하기엔 체력이 따라오지 못하고 쉽게 피로를 느꼈다. 생명력에 의지한 생활을 오랜시간 지속했기 때문에 체력이 약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엘라임이 전한 사실을 통해서 이미 죽음을 맞이한 여자들 모두가 나로 인해서 일찍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운명보다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어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부담없이 정령사답게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를 비롯해 인간들에 대한 감정이 변한 것은 아니다. 난 인간이지만 인간의 파괴적인 마음이 정말로 싫다. 조용하고 평범한 삶이 앞으로 일백년은 지속되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였다. 패로이 숲의 모리엔 엘프장로가 찾아와 엘프 소국의 대표자가 되어달라 요청한 것이다. 그저 상징적인 자리가 될 경향이 높다는 뜻도 밝혔다.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된다해서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의 중요 사항들은 엘프 장로들에 의해 결정되고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도 엘프들이 결정할테니 말이다. 적어도 엘프들은 인간처럼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으니 소국을 운영되는데 문제가 될일은 없을 것이다. 모리엔은 앞으로 엘프 소국이 제국으로 변하여 카르시온 제국은 물론이고 모든 대륙을 과거처럼 지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물론 엘프가 말하는 지배란 인간적인 시각에서가 아닌 엘프들이 흔히 말하는 조화로운 세상을 뜻하는 것이다. 나는 엘프가 대륙을 지배하면 인간들에게 무척 이로우리라 생각하였다.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신분사회도 무너질테니 말이다. 백성들이 항상 불행한 이유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이다. 세금으로 60퍼센트 가까이 빼앗기고 결국 노동의 대가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엘프들은 조화로움과 인과율을 따르니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엘프가 대륙을 지배한다?' 모리엔 장로는 내게 답변을 듣지 않고서 빠른 시일안에 패로이 숲을 방문하라며 떠났다. 사실 모리엔의 말마따나 엘프가 대륙을 지배한다면 많은 인간들이 행복할 것이다. 엘프는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각각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니 말이다. '많은 인간들이 행복해 질 수 있겠지?' 여행하면서 대부분의 인간이 불행하고 극히 소수의 인간만이 행복하게 살아감을 목격하였다. 그들 모두는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판단으로 불행이 너무나 오래 지속된다. 지금은 살아있지 않지만 크라이 마을 사람들처럼 문화의 혜택이 없으면서도 행복한 경우가 많다. 물론 문화의 혜택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감수해야 한다. 대륙에 벌어지는 일들을 조금씩 알게 되는데 정말로 끔찍하다.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는데 지금이 바로 그 혼란기라 할 수 있다. 나라가 계속 부강해져 발전을 이룩하다가 극에 다다르면 전쟁을 통해서 멸망을 겪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역사는 계속 발전과 쇠퇴를 반복한다. 인간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역사가 반복됨을 알면서도 똑같은 상황이 닥치면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전쟁으로 멸망의 길을 걷는다. 현재 대륙은 작은 소국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며 많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엘프의 세상이 다시 등장하는 것일까?' 최상급 정령과 대화를 나누던 말이 떠올랐는데 과거 대륙을 엘프가 지배할 때는 모든 종족이 행복했었다고 하였다. 그 행복을 깨뜨린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말이다. 언제나 인간은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였다.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이종족을 노예로 삼으려는 무식한 종족도 인간 뿐이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닌 단순한 오락을 위해서 별의별 짓거리를 다하는 인간을 엘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이 아님을 엘프들도 알지만 섭임견을 갖는게 정상일 정도로 인간들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친하게 지내는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내가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로서도 고민을 하였다. 나도 인간이지만 대륙에서 인간이 벌이는 행위들은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다. 같은 종족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종족도 인간 뿐이다. 몬스터의 경우는 생존을 위해서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도 아니다. 대륙의 혼란한 소식을 들으며 내가 인간임이 창피할 지경이었다. 몇해 전에는 대륙이 조용했건만 전쟁 이후로 생긴 피해를 모든 종족이 간접적으로 입고 있었다. 더욱이 전쟁 때문에 많은 숲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국의 일부 인간들에게 경고가 필요하지.' 전쟁의 원인은 일리시아 제국이나 카르시온 제국에 속한 일부 인간들에게 있다. 그들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였고 그 피해를 모든 인간들이 떠맡았다.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다. 굳이 그들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경고가 필요할지도 몰랐다. '엘프들이 대륙을 지배한다고 마음먹었으니 도와줘야지.' 세레나 장로와 엘프들의 부추김 그리고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내 마음이 어우러져 엘프 소국을 돕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내가 도와줄 것이라고는 그저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다. 예전처럼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무시무시한 능력을 사용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마음 한편으로 네 명의 여인들 죽음에 대한 복수심의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세렌과 크라이 마을 사람들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카르시온 제국이 엘프들을 죽이기 위해서 보내진 병사들에 의해서 모두 죽음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세렌은 임신도 한 상태였다.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엘프들이 대륙을 지배하였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또한 정령사로서 엘프들을 돕는 마음은 당연하다. 여러가지 타당한 이유를 스스로 생각하며 패로이 숲으로 떠났다. 패로이 숲에 도착하자 장로들이 마중을 나오기까지 하였다. 실상 엘프 소국은 패로이 숲을 중심으로 많은 엘프와 인간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엘프의 경우는 숲을 빠르게 이동하는 덕분에 넓게 분포한다고 해서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는 한데 모여서 사회를 만드는데 익숙해서 큰 도시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본래부터 패로이 마을은 5만여명의 인간이 살고이는 거대한 도시였다. 지금에 와서 그것이 더욱 확장되어 엄청나게 변한 것이다. 엘프 소국은 많은 인간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엘프 곁에서 지내는 것이 인간 사회보다 행복을 누리기 쉽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엘프 사회는 신분의 계급을 따지지도 않으며 특별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은 어떠한 생활을 하든지 간섭받지 않는다. 물론 도덕적이지 않은 일이면 엘프들도 용서하지 않고 처벌을 가하지만 인간처럼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패로이 숲의 다섯 장로는 물론이고 다른 숲의 장로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장로는 대개 최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사들이다. 장로들 모두가 내게 바라는 점은 그저 상징적 의미라고 알려주었다. 특별히 내게 무엇인가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욱이 지도자가 필요한 것은 엘프 소국 전체라 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인간들을 위해서이다. 엘프 소국은 절반 가량이 인간인데 그중 일부는 인간 정령사이고 나머지 모두가 평범한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들을 위해서 왕과 비슷한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평범한 인간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안정된 생활을 하는 존재이다. 결국 내가 맡은 문제는 엘프 소국의 인간들을 떠맡는 것이다. 장로들은 나를 인간 정령사들에게 안내해 주었다. 엘프 소국이 탄생하기 이전에 패로이 숲에는 무려 5천여명에 달하는 엘프가 살고 있었다. 그만큼 패로이 숲이 거대한 것이다. 패로이 숲에서 지내는 엘프의 수에 비례적으로 그들에게 정령술을 전해받는 인간 정령사도 마을크기의 규모였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숲에서 모여든 엘프와 인간 정령사까지 계산한다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라 할 수 있었다. 나라의 전력은 대개 마법사와 병사로 결정된다. 그런데 엘프 소국은 엘프들 모두가 마법사이고 정령사이며 뛰어난 궁수들이니 카르시온 제국으로서도 난감한 상황이다. 더구나 일리시아 제국과 전쟁을 겪은 이후로 병사가 적어서 결국 방치하여 엘프가 대륙을 지배할 꿈까지 꾸도록 만든 것이다. 모리엔 엘프장로가 엘프 소국의 지역에 거주하는 인간을 담당하는 인간 정령사에게 안내하였다. 엘프들은 장로를 제외하고 계급이 없는 반면에 인간 정령사들은 약간은 계급사회를 지향한다. 물론 인간사회와는 전혀 다른 계급이다. 바로 정령사로서의 능력에 따라서 차별 대우를 한다는 것이다. 엘프의 영향을 받은 인간 정령사가 계급적인 관례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그것은 엘프들도 인정하는 사항이다. 대개 선천적으로 친화력이 높지 않는 이상은 인간이 정령사가 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령사의 등급은 깨달음이 거의 필요없는 오직 순수한 노력에 의해서만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으니 당연한 관례라 할 수 있다. "카인 저곳이 인간들의 정령사 마을이에요." "정말 대단하군요." 모리엔 장로가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패로이 숲의 외곽지역이었다. 그곳에 큰 마을이 있었다. 패로이 숲의 크기만도 크라이 숲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데 인간 정령사들의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이 숲에 거주하는 인간 정령사들은 나의 가족이 전부인데 패로이 숲은 인간 정령사가 하나의 커다란 마을을 구성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저곳에서 지내게 될 거에요." 모리엔 장로는 천천히 내려가며 마을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엘프들이 많은만큼 인간 정령사들이 많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숲이 큰 만큼 야생동물도 많으니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엘프들이 지내는 숲이라 몬스터가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리라. "모리엔 장로님" 마을에 가까이 다가오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듯 하였다. 엘프 그것도 장로의 신분이 방문하였는데 무관심한 것을 보아서 이런 경우가 많았을듯 싶었다. 모리엔은 아이들을 떼어놓고 마을을 구경시켜 주면서 마을의 중앙으로 안내하였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리엔과 인사를 나누었다. 집안에는 약간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많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은 엘프 소국에서 지내는 인간을 위해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엘프들은 치안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인간들은 그렇지가 않으니가요." "그렇군요." 엘프 소국에 머무는 인간을 패로이 숲에서 지내는 인간 정령사들이 보호한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시점에서 말하자면 이들이 권력을 지닌 장본인들이다. 물론 그런 중요한 권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이들은 모두 뛰어난 정령사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여기 제 옆에 서있는 분이 카인입니다. 현재과 마찬가지로 모든 결정은 여러분들이 하겠지만 엘프 소국에서 엘프와 인간의 상호 협력을 위해서 카인을 지도자로 삼을까 합니다. 이미 엘프 장로님들이 모여서 결정한 사항이니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모리엔은 내게 존칭을 사용하여 우대하면서도 이름만은 그대로 불렀다. 그것은 엘프들 모두가 나를 인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모리엔의 말을 들은 모두가 나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엘프 소국의 지도자 혹은 대표자는 당연히 엘프 장로들중에서 선택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리엔 장로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부아크라는 사람이 모리엔에게 놀라는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모리엔은 질문에 답변을 하기전에 부아크가 누구인지 내게 설명하였다. 부아크는 불의 상급정령사로서 마을을 대표하는 촌장과 비슷한 사람으로 현재에는 엘프 소국의 모든 인간들을 관리하는 사람이라 말해주었다. '불의 상급정령사라니 대단하다.' 모리엔의 말을 듣고서 부아크가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인간 정령사들은 파괴력이 높은 불 계열의 정령을 선호한다. 파괴력이 높은 만큼 불의 정령사는 하급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데 무려 상급이니 6서클이나 7서클 마법사와 거의 비슷한 파괴력을 지닌 정령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엘프가 지도자로 나선다는게 정상이라 생각하나요? 엘프는 신분사회도 원치 않으며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도 원치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을 좋아했다면 엘프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엘프들이 가장 신뢰하는 카인을 대표로 삼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얼마전까지 카인은 최상급 정령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리엔은 내가 엘라임을 소환했다는 이야기까지 자세히 설명하였다. 나를 지도자로 내세운 이유를 그들도 알아야 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재에 있어서 나는 엘프 소국의 지도자나 대표자로 적당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리엔의 말을 모두 듣게된 사람들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저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했고 나는 모든 조건을 부합시키고 남은 인물이었다. 내가 엘프 소국의 구심점이 된다면 여러가지 도움이 되리라. 일단 나라와 상관없이 대륙 전체에 알려진 정령사라는 점과 엘프와 인간 두 종족 모두가 인정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니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입니까?" "신을 만나다니 어떠한 대화를 나누셨나요?" "정령왕도 소환이 가능했던 것인가요?" 모리엔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사람들이 평범한 나를 향해서 따지듯이 말했다. 정령사들의 꿈은 이성을 가진 정령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다. 그런데 최상급정령도 아닌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이 믿기가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모리엔이 거짓을 말할리도 없고 말이다. "엘라임님을 만난 것은 의식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내 이야기를 듣고싶어 하기에 모리엔이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내 견해를 담아 말했다. 엘라임을 만나기 위해서 벌인 일들과 만나고 나서의 이야기를 말이다. 대화 내용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정령사들이 내가 처음 최상급정령을 소환하여 대화를 나눴던 내 모습을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최소한 상급정령과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이 있었다. 단지 상급정령과의 경험이라 대화하는데 문제가 많았겠지만 말이다. 상급정령은 최상급정령과 다르게 어린아이 같은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어서 대화하는게 무척 어렵다. 이야기가 끝나고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제대로 인사를 하였다. 소개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네 명의 인간 정령사들이 엘프 소국에 머무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아크는 불의 상급정령사로 총체적인 관리를 담당하고, 스트라는 불의 중급정령사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치안을 담당하고, 엘리나는 불의 중급정령사로 침략을 대비하여 전투가 가능한 사람들을 관리하며 마지막으로 마샤는 물의 중급정령사로 상처입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치료사들을 관리한다. 네 명의 정령사들이 엘프 소국에 머무는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돕는 정령사들이 수없이 많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엘프 소국이 운영되는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는데 엘프 보다는 인간이 효율적인게 사실임이 틀림없다. 엘프들의 경우는 전체가 하나같이 움직이는데 인간들은 관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내일 정령사들을 모두 모아서 카인님이 지도자임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령사들은 카인님이 존재 여부에 크게 영향받지 않겠지만 엘프 소국에서 머물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되겠습니다. 그들은 저희들처럼 조화로움을 따르려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부아크가 나서서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엘프나 인간 정령사들은 지도자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엘프 소국이 존재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엘프 소국에 머무는 평범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배를 받아야만 안정을 되찾는 습성이 있다. 신분사회에서 너무나 오래 생활하여 생긴 정신적인 문제이다. 모리엔은 패로이 숲의 엘프마을로 돌아갔고 나는 마을의 외곽지에 거주하기로 하였다. 마을의 중심에 집을 마련해 주었지만 사양하였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였으니 엘프 소국이 안정이 될 때까지 지내야 하려면 장기간일텐데 많은 사람들의 시선속에서 지내기는 싫었다. 부아크는 외곽지에 빈집이라고는 딱하나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집이라 거주하는데 불편할거라 말했지만 상관없다고 하면서 얻어냈다. 정령사들에겐 많은 살림살이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비를 피할 공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숲에서 혼자 지낸 시간이 무척 많으니 불편하지도 않으리라. 그들은 내가 엘라임을 소환하여 대화까지 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며 존경하는 모습을 비추었지만 인간들처럼 집요한 관심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엘프나 인간 정령사들이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좋은 점이다. 누구 하나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으며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노력하기 때문이다. ------ 카르시온 제국의 전력은 절반가량이 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일리시아 제국연합과의 전쟁에서 결국 패하긴 하였지만 마법사들이 적제국의 병사들 대부분을 몰살시켰기 때문에 침략하여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적은 병사들로 지배하려 들어도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니 일리시아 제국연합측에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새로운 카르시온 제국은 남쪽으로는 엘프 소국이 자리잡았고 동쪽으로는 새로운 왕국이 들어선 상황이었다. 결국 카르시온 제국의 영토는 많이 작아졌으며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적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해 보였다. 카르시온 제국에 큰 힘이 되었던 마법사들이 독립을 하면서 더욱더 제국의 전력을 약화시켰다. 생활마법 등장이후 마법길드는 더이상 제국의 황궁에 소속되어 휘둘려질 필요가 없었다. 사실 마법사를 교육시키기 마법실험을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는데 이제는 생활마법의 등장으로 독립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마도사를 보유한 마법길드 혹은 마법사 집단이만이 가능했다. 일부 자금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마도사 이하의 자유 마법사들은 귀족들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마법사를 부리기 위해서 마법길드와 계약을 맺거나 요청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귀족들이 자존심을 죽이면서까지 저자세로 요청을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요청을 하면 그에 준하는 대가까지 지급하면서 말이다. 결국 카르시온 제국은 마법사의 전력을 일부 포기하고 병사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쟁의 승패 요인이 적은 병사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대로 일리시아 제국은 병사들 보다는 마법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카르시온 제국에 유행하였던 생활마법이 뒤늦게 전해진 것이다. 어찌보면 두 제국 모두가 한 분야만 발전했는데 전쟁을 통해서 깨닫고 균형있게 발전을 꿰하고 있었다. 생활마법의 발생지라 한다면 카인의 마법사 탑이 존재했던 카르시온 제국의 동지역에 있는 세인트이다. 이제는 카르시온 제국이 아닌 하나의 왕국으로 독립했지만 말이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독립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가 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에드 황제폐하" 파도루 가문의 가주 루바인은 에드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본래 황제에게는 허리까지 굽혀야 하건만 루바인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루바인! 네놈이 정령!" "평민 주제에 감히 어디라고 나서는게냐!" 카르시온 제국의 디코 기사단장이 흥분하여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은 루바인에게 소리치자 루바인도 만만치 않게 대응하였다. 디코는 황궁의 기사로서 오러 마스터였는데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황궁을 지키는 기사로 지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실력좋은 기사들이 모두 죽고 기사단장마저 죽자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현재 카르시온 제국은 많은 기사들을 잃어서 기사라는 작위만 있다면 평민이었던 자라도 신분을 가리지 않고 등용시키고 있었다. 기사라는 작위는 교육시킨다고 해서 병사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니 말이다. 실질적으로 제국에 기사가 너무나 부족하여 어쩔수없이 기사교육을 마친 평민을 등용한 것이다. 물론 평민을 등용하면 황권이 강화되는 장점도 있기에 황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추진한 일이었다. "디코 기사단장 그만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디코는 에드 황제의 말을 듣고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루바인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모든 귀족들과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초청해 주신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루바인의 입바른 소리에 모두들 혀를 차며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실 루바인의 파도루 가문은 동지역 백성들을 선동하여 왕국으로 독립하게 만든 장본인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동지역이 왕국으로 독립하는데 파도루 가문, 라다르 가문, 루아카스 가문 그리고 몰락귀족들이 합심하여 벌린 일이었다. 즉, 루바인은 카르시온 제국의 반란자중에서 주모자중 하나이다. 루바인이 반란자임에도 불구하고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에 나타난 이유는 사신차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에드 황제가 루바인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 말이다. 에드 황제가 약속한 일인데 신분상 약속을 깨뜨릴 가능성은 크지 않으니 믿고서 온 것이다. 귀족은 명예를 중시하니 절대적으로 루바인에 해를 끼치지 않을테니 말이다. "반란자와 오래 대화하고 싶지는 않으니 본론을 말해보시요." "모두들 제 얼굴이 보기 싫으시겠지만 이제는 저도 엄연히 독립한 왕국의 왕족입니다." "그따위 말을 하기 위해서 온거요?" 루바인의 말에 모두들 분노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루바인의 말대로 독립한 왕국은 카르시온 제국의 대귀족 가문이었던 세 가문이 모든 권력을 쥐고있기 때문에 왕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가문의 가주중에서 루바인이 제일 유력한 상황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루바인은 독립한 왕국의 왕이 될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물론 아니외다. 최소한 욕을 하더라도 반란자란 말보다는 왕국이라 칭해주시요. 아직 독립한 왕국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왕이 결정되면 그 가문의 성을 따서 결정될거요. 물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소피아 왕국이라 부르지만 말이요. 서두가 길었군요. 이런 사소한 문제로 찾아온 것이 아니니 되도록 내 말을 막지 마시요." 루바인은 에드 황제 주변에 있는 귀족들을 향해서 말했다. 황제에게 말할 때는 존칭을 써주더니 귀족들에게 말할 때는 그저 예의만 갖출 뿐이었다. 적어도 그는 한 때 카르시온 제국의 대귀족이었으니 말이다. "모두 알다시피 제국의 최남단에 엘프 소국이 일년전에 생겨났소. 어차피 그곳에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지역이라 별로 신경쓰지 않았을거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소?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북으로 많이 올라온 상황이요. 더욱이 그들의 전력은 상당하오. 또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엘프 소국이 세금도 걷지않으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상낙원이란 소문이 퍼지고 있는 상태요." "최소한 엘프는 자신들의 종족을 위해서 나라를 세웠지만 당신같은 반란자는 아니요!" 루바인의 말에 프리온 재상이 소리쳤다. 모두들 재상의 말에 동의하였다. 엘프들은 소국을 세울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인간들이 노예로 삼는 부정적인 일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지역의 독립은 오직 세 대귀족 가문이 자신들을 위해서 벌인 행위였다. "나로서도 그점은 인정하오. 하지만 엘프 소국이 과연 어떻게 변할지 상상이나 해봤소? 엘프의 수만도 만단위가 넘을거요. 엘프들 대부분이 최소한 중급정령사라는 점을 상기하시요. 그들 모두는 뛰어난 정령사이자 궁수요. 현재에 이르러 수만명의 병사들을 파견해도 엘프 소국은 막아낼 수 있을거요. 지금도 북으로 진행하여 카르시온 제국의 영토를 조금씩 집어먹는 상황인데 아마도 조만간에 누군가는 엘프 소국에 영지를 빼앗기는 상황이 닥칠것이요." 루바인은 욕설을 들으면서도 엘프 소국의 무서움에 대해서 심각하게 말했다. 모두들 루바인을 욕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것들이 모두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로서도 엘프 소국에 대해서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더욱이 남쪽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일수록 표정이 굳어졌다. "엘프 소국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가 뭐요?" 에드 황제는 루바인의 말을 듣고서 엘프 소국에 대해 말하는 저의를 알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엘프 소국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그러니 서로 엘프 소국이 멸망할 때까지 불가침 협정을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불가침 협정을 맺는다고 해서 엘프 소국이 멸망한다는거요?" "엘프노예 제도를 합법적으로 장려하면 됩니다. 엘프 소국의 엘프를 죽일시에 포상금을 지급하고 생포시에는 그들에게 노예로 지급하거나 더 높은 포상금을 지급하여 받아들이는 거지요. 덩달아 엘프 소국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함께 노예화 시킬수도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부족한 노예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아마도 수많은 용병들이 몰려들어 사냥을 할겁니다. 일리시아 제국연합과 전쟁을 할 당시에도 용병들이 성과를 거둔 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루바인의 생각에 귀족들이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귀족들은 노예가 늘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미친 사상가들이다. 사실 귀족들의 힘은 노예와 농노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다. 노예는 공짜로 부리며 남기는 장사지만 영지민의 경우 일부분만 세금으로 걷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드 황제는 프리온 재상을 슬쩍 바라보았다. 에드는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재상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자라온 에드가 세상물정을 알고있을리 만문한 것이다. 그나마 에드 황제 스스로 부족한 점을 아는 것만으로 훌륭한 황제라 할 수 있었다. "루바인의 생각이 맞습니다. 저희와 동지역의 저들이 함께 루바인이 말한 노예제도를 합법화 시키면 엘프 소국에 커다란 타격을 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무런 성과가 없더라도 피해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에드 황제는 재상의 의견을 듣고 선택의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카르시온 제국은 두 개의 적이 있었다. 어차피 일리시아 제국연합은 앞으로 수년동안 침략할 가능성은 없을테고 문제는 동지역의 독립한 왕국과 남쪽의 엘프 소국이다. 동지역은 반란자들의 집단이라 너무 얄미웠고 엘프 소국은 점점 북으로 커지는 상황이 불안했다. 그렇다고 단시간에 제국의 전력이 늘어나기도 어려웠다. 전쟁 피해로 수년을 예전의 발전된 제국으로 회복시키기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할 수 없지.' "루바인 당신의 생각대로 협정을 맺읍시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폐하" 루바인은 에드 황제의 선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제시한 조건은 서로 이득을 취하는 것이라 거절할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 쪽이 엘프노예 제도를 실시하면 엘프 소국에게 집중공격을 받아 나머지 한 나라에게 이득을 취하는 결과를 가져올까 서로 견제하는 입장이다. 결국 독립한 동지역 왕국과 카르시온 제국이 엘프 소국을 먼저 멸망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와 독립한 일명 소피아 왕국의 루바인이 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맺을시 루바인은 왕국의 이름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소피아 왕국으로 칭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사용하였다. 루바인은 이단자로 취급받아 성기사에게 죽음을 맞이한 소피아란 신관의 이름을 따서 왕국을 칭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소피아 왕국의 백성들에게 성녀로 추앙받고 있지만 말이다. 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엘프노예 제도를 법으로 정해 공표하였다. 그로인해 카르시온 제국이나 소피아 왕국에 머물던 일부 정령사들이 모두 엘프 소국으로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령사들은 엘프들과 가깝게 지내는데 엘프를 노예로 만든다고 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정령사들이 떠나는게 당연했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에 운영되던 정령사 길드도 엘프노예 제도가 공표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엘프노예 제도는 무척 간단한 조항을 가지고 있었다. 엘프 소국의 엘프를 죽이는 자에게 포상이 주어지며 생포시 당사자에게 노예로 하사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생포한 당사자가 노예로 갖기 위해서는 상당한 세금을 부과되며 제국에 넘겨줄 경우 많은 포상을 약속한 것이다. 그외에 엘프와 정령사를 돕는 사람을 반란자로 간주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용병길드는 엘프노예 제도를 하나의 기회로 삼았다. 노예제도로 많은 이윤을 남기던 대상인들도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엘프사냥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야만 했다. 더욱이 엘프사냥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긴 해도 법적으로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법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방해될 사항이 없었다. 많은 용병들과 엘프사냥꾼들이 엘프 소국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일부 귀족들이 사병을 이끌고 엘프 사냥을 나서는 경우도 허다했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서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서는 당분간 엘프 소국에 근접한 남쪽의 경우는 서로 왕래가 가능하도록 허가하였다. 막으려고 해도 막을 병사들이 없기도 하지만 말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4 회] 22. 엘프소국 일주일 동안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으며 그 외의 시간에는 앞으로 지내게 될 집을 손봤다. 굳이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내가 생각보다 체력이 약한데 있었다. 실질적으로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되었건만 정령사 마을을 벗어나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현재의 내 모습은 대륙에 퍼져있는 소문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소년의 티를 막 벗은듯한 모습임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면 지도자로서 인정도 하지않고 불안해 할지도 모른다. 엘프 소국에 내가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유명세가 있는 이름뿐이지 외형이 아니다. 정령사 마을은 하루하루가 전쟁터처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엘프 소국에 머무는 사람들을 위해서 각자 맡은바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엘프와 다르게 가만히 방치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 크라이 숲에서 벗어나 패로이 숲의 인간 정령사 마을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크라이 숲에서 혼자 지냈는데 적어도 이곳은 심심하지 않다. 엔트를 만나지 못하는게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적어도 외형은 제대로 됐다." 엉망인 집을 어느정도 손보자 뿌듯한 마음이었다. 혼자서 모두 손본 것이다. 오래 걸렸지만 지금의 나도 무엇인가 해낼수 있다는게 기쁘다. 집이 제대로 갖추어지자 울타리를 손봤다. 다른집은 울타리가 없지만 나는 경계를 짓고 싶었다. 크라이 숲에 있는 나의 집은 울타리가 있는데 이곳은 없으니까 왠지 허전한 느낌이라 결국 만들고 말았다. 울타리라 하지만 근처 숲에 다가가 내 무릎높이의 어린나무를 캐와 심은 것이 전부이다. 어린나무가 튼튼히 자라도록 생명력을 이용하여 매우 보기좋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생명력을 사용할 때마다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식물의 생명력을 나의 것으로 만들수 없기 때문이다. 집도 손보고 울타리도 만들자 마당에 텃밭을 꾸몄다.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약초를 계속 먹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수는 없다. 정령사 마을이라 그런지 집집마다 친화력을 높이거나 마나를 쌓는데 도움이 되는 약초를 재배하고 있었다. 종종 자이비를 키우는 집도 있지만 극소수일 뿐이다. 자이비는 정령을 이용해 재배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중급정령사는 되어야 한다. 집집마다 키우는 약초를 바라보며 정령사로서의 능력을 엿볼 수 있었다. 직접 물어도 되지만 지금은 외부인에 불과하니 조용히 지냈다. 엘프들은 손쉽게 자이비를 재배하지만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을 재배하지?' 텃밭을 완성시키자 무엇을 재배할지 고민스러웠다. 기본적으로 자이비를 키우겠지만 굳이 많은 공간이 필요 없었다. 씨앗만 있으면 생명력을 이용하여 당장 먹을만한 크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텃밭의 한쪽 귀퉁이에 집에서 가져온 자이비 씨앗을 심었다. 자이비 씨앗은 무척 귀중하여 정령사들도 함부로 나눠주지 않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자이비 이외에도 엘프만이 재배할 수 있다는 타포그의 씨도 자이비 옆에 뿌렸다. 텃밭이 넓지는 않았지만 여러개로 구분해서 가져온 씨앗을 조금씩 심었다. 800년의 생명력이 있을 때는 음식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하급정령사라 육식도 하지못하는 상황이고 친화력을 높이는 초식만 해야하기 때문에 식사시간이 끔찍했다. 그래서 크라이 숲에서 떠나올 때 세레나에게 엘프들이 즐겨먹은 약초의 모든 씨앗을 얻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일일이 심었다. 최소한 여러가지를 먹다보면 질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말이다. 얼마전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깨닫지 못했다면 엘프만이 섭취하는 약초를 재배할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다. 크라이 숲에서는 엘프들이 일년이 넘도록 신비한 약초를 매일같이 주었다. 하지만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내게 그러한 수고를 해줄리 없다. 부탁하면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솔직히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서 정도 들어 가족같지만 패로이 숲의 엘프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텃밭에 세레나 장로에게 얻어온 씨앗을 모두 심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가 절반가량 남았다. 세레나 장로가 준 씨앗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인간 정령사를 위한 씨앗만 구분해사 심었기 때문에 종류가 많지 않았다. 여러개로 구분된 텃밭은 수많은 직사각형 모양이 많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였다. 그리고 명확히 구분짓기 위해서 약초의 이름을 팻말로 붙여서 표시하였다. 약초를 재배하기 보다는 약초를 실험하는 텃밭으로 보였다. "우와!" "카인아저씨 정말 멋져요." 어디선가 아이들이 나타나 멋지게 꾸며진 나의 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외로운 나에게 매일같이 찾아와 대화를 해주는 아이들이다. 정령사 마을의 아이들은 오전에 일정시간 정령사 수련을 하고 오후에는 자유롭게 지낸다. 아이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외부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더욱이 엘프 소국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평범하며 능력도 없으니 관심을 갖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어른들은 나에게 경외심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그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울타리는 왜 만들었어요?" 토니가 반듯하게 집주위를 둘러싼 울타리를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토니는 불의 상급정령사이자 마을의 촌장인 부아크의 손자이다. 열 두살임에도 불구하고 하급정령사이다. 보통 하급정령사는 어려서부터 노력한다해도 빨라야 성인이 되는 열 다섯살 정도에 달성하는게 보통인데 반해 무척 빠른 것이다. 하급정령사는 단순히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하급정령의 소환이 가능하다. 진정한 하급정령사는 소환한 정령으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토니가 하급정령사인 이유는 엘프들이 생명보다 귀중히 여기는 생명수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다. 패로이 숲에는 일천년 이상이나 살아온 생명수 나무가 있는데 일년에 한 번 과실을 맺는다. 보통 생명수 나무는 일천년 이상이 지나야 과실을 맺는다. 엘프는 그 과실을 엘프를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선물하는 경우가 많다. 엘프가 직접 과실을 먹지않는 이유는 조화로움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인위적으로 생명수의 과실을 먹어 생명력을 늘려 수명을 늘리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토니의 부모는 오래전 패로이 숲에서 죽음을 맞았다. 패로이 숲에 침입하는 인간을 쫓아내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더욱이 부아크도 촌장이면서 엘프들을 위해서 수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부아크와 그의 손자 토니가 생명수의 과실을 선물받아 뛰어난 정령사가 된 것이다. 토니가 생명수의 과실을 먹은 것은 자신이 엘프를 위해 무엇인가 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부모의 덕으로 먹을 자격을 얻은 셈이다. "내가 지내던 크라이 숲에는 정령사를 위한 마을이 없었고 우리 가족뿐이었어. 그래서 이렇게 울타리를 쳐서 동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지. 울타리 있는 집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지내려니까 울타리가 없는게 이상해서 만든거야." "그렇군요." 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기좋게 만들어진 울타리를 세심히 살폈다. 다른 아이들도 울타리가 되는 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심어진 모습을 구경했다. 집은 깔끔한 것을 제외하고 별다른게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는 아이들의 시선이 텃밭으로 향했다. "이 팻말은 뭐에요?" "심어놓은 씨앗의 이름이야. 보기좋지?" "보기는 좋은데 너무 조금씩만 심으셨어요." 아이들은 토니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토니는 열 두살이지만 정령사로서 가장 능력이 뛰어나니 당연한 대우이다. 아이들은 자랄수록 서로 존중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이답게 가장 강한 토니를 중심으로 어울리는 것이다. "말도 안돼요." 제일 뒤에서 따라다니던 파에그가 말했다. 파에그는 토니를 따라다니는 아이들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아니 성년도 지났으니 아이가 아니다. 무려 열 여덟살이니 말이다. "파에그 왜그래?" "여기 팻말에 붙어있는 약초는 엘프만 키울수 있는 것들이야. 아마도 모두 죽고말거야." 아이들이 파에그에게 묻자 파에그는 텃밭의 팻말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토니는 팻말을 읽으려고 했지만 떠듬떠듬 읽다가 포기하였다. 아직 열 두살이라 빠르게 글읽기가 힘든 것이다. 토니는 옆에 있던 코브에게 읽으라고 시켰다. 코브는 열 다섯살로 얼마전에 성년식을 치뤘다. 조만간 하급정령사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정령수련에 하루하루 고단하게 수련중인 아이였다. 코브는 토니보다 자신의 글읽기 솜씨가 뛰어남을 자랑이나 하듯이 또박또박 읽었다. "정말이네. 처음듣는 이름도 무지많아." "우와. 대단하다." 아이들은 코브의 입에서 수많은 약초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탄성을 질렀다. 오직 파에그의 표정만이 있었다. 파에그는 텃밭에 다가가 흙을 조금 뒤적거리더니 씨앗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덮었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카인아저씨가 심어놓은 씨앗들이 얼마나 귀한지나 아세요?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용하면 어떻게요. 이 씨앗들은 엘프들만 재배할 수 있는 거라서 분명 모두 죽을거란 말이에요." "나는 키울수 있단다." "거짓말 말아요!" 파에그는 키울수 있다는 내 말에 토라져서 곧바로 떠나버렸다. 아이들중 가장 나이가 많아서인지 무척 똑똑하다. 더구나 다른 아이들은 불의 정령사 수련을 받는데 유일하게 물의 정령사 수련을 받고 있어서 특이한 소년이었다. 물의 정령사는 다른 계열보다 수련의 진척이 느려서 쉽게 포기해야 정상일텐데 포기하지 않다니 말이다. "카인아저씨 파에그는 상관하지 마세요. 파에그가 아저씨 씨앗이 탐이나서 그래요. 파에그가 원래 약초재배를 좋아하는데 항상 실패하니까 이제는 어른들이 씨앗을 주려고 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완전 괴짜에요. 마을 어른들도 포기했어요." 나는 아이들을 통해서 파에그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되었다. 열 여덟살임에도 물의 하급정령사가 되지 못했는데 아직까지 수련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정확히 밝히는 자세가 말이다. 파에그라는 소년을 돕고 싶어졌다. 요즘들어 식물의 생명력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는게 없었다. 그저 생명력을 이용해 씨앗에서 쉽게 재배할 수 있지만 약초에 대한 지식이 낮은 편이었다. 텃밭에 일일이 팻말을 붙인 이유도 나중에 약초의 이름을 잊을까봐서이다. 씨앗을 얻을 때는 각각 분리해서 담아 이름을 표시했는데 자라서 혼동이 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자 텃밭에 심어놓은 약초들이 새싹이 트는 정도까지만 자라도록 하였다. 내일 아침부터는 약초를 얻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 밝아오자 내가 먹을 분량만큼만 생명력을 제어하여 약초를 재배하고 즉시 뜯어서 아침식사를 해결하였다. 그리고는 부아크의 집으로 향했다. "혹시 파에그란 소년을 아시나요?" 나는 부아크에게 파에그에 관해서 물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아이들이 말한 사실과 다른점이 없었다. 슬픈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파에그의 가족은 모두 숲에서 자생한 독초를 잘못 먹어서 죽었지만 파에그만은 우연히 살았죠. 그래서인지 마을에서 지낼 때부터 치료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않는 물의 정령사 수련을 받으며 약초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혹시 파에그가 엘프의 약초에 대해서도 많이 아나요?" "물론입니다. 아마도 마을에서 파에그 보다 엘프의 약초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는 정령사는 많지 않을겁니다. 엘프들이 재배하는 약초가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갖은 이후로 항상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약초의 효능을 안다해도 구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엘프가 아니고서는 재배하는게 불가능해서 포기했을 겁니다. 엘프가 재배하는 약초의 씨앗을 구하기도 어려우니까요." 부아크의 말을 듣고서야 파에그가 화난 이유를 알았다. 엘프의 약초 씨앗이 그렇게 허무하게 평범한 텃밭에 심어져 있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엘프만이 재배할 수 있는 약초가 허술한 나의 텃밭에서 재배될 가능성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심어놓은 귀한 씨앗이 젖은 흙에 파묻혔으니 이미 다른 방법으로 재배할 수도 없어서 아쉬웠으리라. '차라리 엘프의 씨앗을 달라고 했으면 주었을텐데.' 파에그란 소년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아마도 귀한 씨앗인 만큼 부탁한다고 해서 얻을수 없다고 지레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도 엘프의 약초 씨앗이 많이 남아있었다. 앞으로 텃밭을 누가 뒤엎지 않는 이상은 필요가 없다. 생명력에 관심이 많다보니 파에그란 소년이 알고있는 약초에 대해 알고싶었다. 혹시라도 내가 식물을 통해서 생명력을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에 가졌던 800년의 생명력이 그립다. 지금의 능력도 무척 마음에 들지만 당장 몸이 불편하니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하다못해 허약한 체력만이라도 어떻게 해결하고 싶었다. "저번에 말씀하신 시중들어줄 아이에 대해서 말인데요, 마음을 바꿨습니다. 가능할까요?" 나는 부아크가 얼마전 도움을 주려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을의 아이 한 명에게 내 시중을 들어준다고 했었다. 적어도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혼자서 지내고 있으니 도움을 주기위해 부아크가 말을 했었지만 거절했었다. "물론입니다. 어려운일이 아니니 부담갖지 마세요. 더구나 엘프 소국의 지도자인데 외곽의 허름한 집에서 지내게 해서 무척이나 죄송할 따름입니다." "죄송하지만 파에그로 보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파에그요? 카인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아크는 쉽게 부탁을 들어주었다. 파에그란 소년에게 약초의 효능에 대해 묻고싶은게 많았다. 특히 생명력과 관련해서 말이다.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혼자서 심심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부아크의 집을 나와 걷는데 어떤 정령사가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부아크의 집안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잠시후에 마을에 비상이 걸린듯이 일대 혼란이 일어나더니 많은 정령사들이 순식간에 마을을 떠났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듯 싶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울타리 나무들을 관찰하였다. 나름대로 나무를 살펴보는 일과도 재미있다. 생명력을 제어하여 심어놓은 약초에도 신경을 써줬다. 텃밭에는 아침식사를 하기위해 단번에 성장시킨 약초만이 초록색을 띄고 있었다. 다른 부분은 새싹만 돋아났는데 말이다. ------ 10여명의 용병들이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나머지 용병들은 손에 쥐고있는 줄을 절대 놓지 않았다. 용병들이 잡고있는 줄의 중심에는 상처입은 엘프 하나가 벗어나려고 바둥대고 있었다. "......" 용병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엘프어의 외침을 들으며 어떻게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마나를 제어하는 팔찌를 채워야 되는데 접근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렇다고 더이상 상처를 입혀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슬립(Sleep)" 마법사가 엘프를 기절시키기 위해 슬립마법을 사용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엘프들은 마법 저항력이 강해서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지 않으면 크게 효용이 없었다. "마법사 뭐하는거야!" "안되는걸 어쩌란 말이야!" 마법사는 용병이 소리치자 곧바로 대꾸하였다. 모두들 흥분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유명한 용병길드에 속한 용병대였다. 마법사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엘프를 사로잡아 포상을 노리고 엘프 소국의 영역까지 찾아온 것이다. "지금이야!" 용병대장은 엘프가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모습을 발견하자 소리쳤다. 용병들은 대장의 지시에 따라서 다같이 줄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순간적으로 엘프는 강하게 죄여오는 줄에 저항하지 못했다. 용병대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엘프에게 다가가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마나봉인" 팔찌가 채워지자 곧바로 용병대장이 크게 소리쳤다. 팔찌에 걸려있는 마법을 발동시키는 마법어를 외친 것이다. 팔찌는 마나를 봉인하는 마법물품으로 엘프나 마법사가 마법이나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족쇄의 역할을 한다. "이야! 성공이다!" "역시 우리 대장이야!" 줄을 당기던 용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엘프는 마나봉인만 되면 아무런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 본래 엘프가 체력적으로 재빠르긴 하지만 마나를 잃게되면 마나없는 육체에 순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도리 것은 없었다. "뭐해! 당장 철수준비해!" 용병대장은 기뻐하는 용병들을 추수려 철수할 준비를 하였다. 조만간 재빠른 엘프 소국의 엘프나 인간 정령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하지만 용병대장도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다른 용병대와 다르게 자신들에게는 마법사가 있기 때문이다. "빨리 모여라. 벌써 달려오고 있잖아." 용병대장은 멀리서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 나머지 용병들도 주변을 정리하였다. 엘프를 잡기위해 사용했던 도구를 모두 챙기고 마법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더럽게 재빠른 놈들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실패했겠는데." 용병들은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의 재빠른 이동속도에 감탄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기술을 익힌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금 사로잡은 엘프를 잡기 위해서 무려 10여명이나 되는 용병이 죽었는데 그 이유는 잡힌 엘프도 이상한 정령술과 전투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주변은 온통 피투성이로 도배되어 있었다. "메스 텔레포트(Mass Teleport)" 마법사는 모든 용병대가 자신의 주위로 모이자 마법어를 외쳤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용병대 모두가 북쪽 방향에 구축한 안전한 장소로 이동되어졌다. 그들이 도착하자 용병들이 몰려들어 성공을 축하하며 난리였다. 생활마법의 발전은 생활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용병대의 마법사는 3서클의 마법사에 불과하지만 마법길드에서 6서클의 메스 텔레포트 마법진이 적혀진 금속판을 구입하였다. 어마어마하게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를 지닌 마법물품이었다. 3서클 마법사가 6서클의 메스 텔레포트 마법이 적혀진 금속판에 일주일 정도 마나를 주입하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3서클의 마법사가 마법물품을 구입할 자금이 있을리 없었다. 용병대에서 공동 투자하여 마법사에게 빌려주었고 그 돈으로 마법사가 메스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금속판을 구입할 것이다. 마법사는 마법물품의 돈을 갚을 때까지 용병대에 소속되어 있기로 약속하였다. "어이 마법사! 오늘 대단했어. 다음에도 또 부탁해." "수고했어. 일주일 후에 보자구." 용병들이 마법사에게 일주일 후에 만나자고 말했다. 마법사는 다시 6서클의 메스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 마나를 충전시켜야 했다. 용병대는 그로인해 일주일 간격으로 엘프를 잡아들이고 있었다. 자주 실패를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나머지 실패가 보상이 될 정도로 포상의 금액이 높다. 용병대장은 용병들이 일주일 후에 모이도록 충고하고는 마나봉인 팔찌를 착용한 엘프를 끌어서 노예상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면서도 용병대장을 존경하는 눈빛이었다. 그처럼 적은 피해를 입고서 엘프를 사로잡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대부분의 노예 사냥꾼들은 수십명씩 움직이는데도 한 명을 잡기 위해서 몰살을 겪는 경우가 많은 상황이다. 마법에 버금가는 정령술을 사용하는데 대책이 서질 않는 것이다. 그저 수많은 화살을 날려서 우연히 엘프가 맞아 대박의 행운을 거머쥐기를 기다리는 존재도 많다. 문제는 잡는다해도 안전한 장소까지 데려오려면 추적을 피해서 이동까지 해야하니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서 용병들이 몰려들고 있어서 엘프 소국에게 위험을 안겨주고 있었다. 반면 엘프를 사냥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용병들에게는 점점 편해지는 상황이었다. 처음에 도착한 용병들의 경우에는 분노한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에게 떼죽음을 맞기도 하였으니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5 회] 22. 엘프소국 엘프 소국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서 엘프노예 제도에 관련된 법을 만들어 공표한 것이다. 엘프 소국에 머물던 사람들도 붙잡히면 반란죄가 적용되어 노예가 되었다. 즉, 엘프 소국에서 잡히는 인간과 엘프 모두가 노예 사냥꾼들의 표적이었다. 정령사들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서적으로 나서서 전투를 벌였다. 엘프들도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오려는 인간들을 공격하여 죽음을 선사했다. 수많은 용병들이 엘프를 잡기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라 실질적으로 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엘프들이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기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곤란했을 무서운 공격이 계속되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용병들이 엘프의 정령술과 전투기술에 익숙해 진다는 점이다. 용병들은 많은 엘프를 만나면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도주했지만 소수의 엘프를 만나면 기를쓰고 덤벼서 사로잡으려 애썼다. 인간 정령사들도 최선을 다해서 전투를 벌였다. 당연히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끔찍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나마 인간 정령사는 엘프와 다르게 파괴력이 강한 불의 정령사들이 많아서 용병들을 무척 당황시켰다. 죽거나 다치는 부상자가 많아져 정령사 마을에서 재배하던 약초중에서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약초의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였다. 나는 촌장인 부아크의 허가를 얻어 타포그의 대량 재배를 시도하였다. 타포그는 마법사의 포션에 버금가는 효과를 보이는 약초라 효과만큼이나 재배하는게 어려웠다. 부아크는 잦은 전투로 인해서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라 내가 엘프만이 재배할 수 있는 타포그를 재배한다고 했는데도 허락하였다. 부아크가 허락한 이유는 단지 내가 파에그와 함께 약초 실험을 하는줄 알고 허락한 것이다. 당연히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파에그와 함께 지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텃밭에서 죽었어야 정상일 약초가 멀쩡히 자라나는데 알려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라 말하는데 고민을 하지도 않았다. "정말 신기해요." 파에그는 내가 생명력을 제어해 약초를 재배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매일같이 보면서 뭐가 신기하니?" "그래도 신기해요." 파에그는 놀라면서도 손은 계속해서 타포그의 잎사귀를 뜯고 있었다. 용병들이 엘프 소국의 영역에 침범하여 다치는 사람이 많아서 재배한 타포그를 보내주고 있었다. 내가 재배한 타포그로 많은 사람이 치료를 받아 정말로 기뻤다. 타포그는 효력이 높아서 잎사귀 하나만으로 즙을 만들어 수십명이 사용할 수 있다. 파에그도 나를 도와서 엘프 소국의 사람들을 돕는다는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집 주변에는 부아크의 허락을 받아 대량으로 재배되는 타포그가 있었다. "카인님 그런데 타포그 재배지역을 옮길 생각은 없어요?" "귀찮아." "그래도 미관상 초라하잖아요." 나는 파에그의 말에 웃음지었다. 귀하디 귀한 타포그는 울타리를 따라서 집을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심어진 이유는 내가 생명력을 이용해 재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 지역에 재배할 경우 매일같이 들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니 어쩔수 없다. 나의 하루는 무척 여유스럽다. 엘프 소국의 상징적인 지도자라 할일도 없이 약초나 재배하며 지내는게 전부이다. 물론 엘프 소국에 힘이 되도록 돕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그저 약초나 재배하는 능력이 전부이다. "카인님 여기있어요." 파에그는 바구니에 타포그 잎이 가득차자 허리를 펴고 다가와서 바구니를 내밀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약속이니까요." 파에그는 나의 집에서 함께 머물고 있다. 페에그가 처음 부아크의 지시 때문에 타의로 함께 지내게 되어 나를 싫어했었다. 하지만 내가 선물을 주면서부터는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다. 바로 텃밭에 심고 남아있는 씨앗을 몽땅 준 것이다. 물론 내가 받는 도움이라봐야 고작 하루에 한 번 타포그 잎사귀를 대신 따는게 전부이다. "다녀올테니까 너무 무리하면 안돼."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서며 파에그에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내가 불안해서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도록 행동해." 파에그란 소년이 병적으로 약초 재배에 매달리는게 불안했다. 치료에 효과가 높은 엘프만이 재배하는 약초를 자신도 재배하는데 성공하기 위해서 별짓을 다한다. 부아크의 집까지 가는 동안에 마을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모두들 엘프 소국을 위해서 일하느라 마을에 있을 틈이 없는 것이다. 정령사는 하급이라 할지라도 일단 체력이 강하다. 정령을 소환해서 물리력을 행사하지 못해도 뛰어난 체력으로 수많은 일을 할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정령사는 어려서부터 기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기본교육을 받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어서오세요. 카인님" 집에 들어서자 곧바로 부아크가 웃으며 맞았다. 예전 같았으면 심각한 표정으로 맞았을텐데 타포그를 대량으로 재배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대우가 달라졌다. 부아크와 함께있던 마샤의 눈은 바구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물의 중급정령사 마샤는 요즘들어 할일이 무척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치다보니 치료사가 부족하여 한숨 자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타포그를 하루에 한 번씩 건네주면서 무척 여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저 마을에서 타포그만 얻어가면 모두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이 필요할줄은 몰랐습니다." 마샤에게 바구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바구니의 양이면 천여명의 부상자를 치료하고도 남을 분량이었다. 하루하루 타포그를 넘겨주는 양이 늘어나더니 요즘에는 매일같이 한 바구니 가득 건네주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전투가 발생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절반 가량만 쓰이고 나머지는 예비분량입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카인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엘프님들도 카인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며 놀라고 있습니다." "엘라임님이 선물로 주신 능력이지요."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내가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달라진 점은 없었다. 나는 엘프 소국의 상징적인 지도자일 뿐이다.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일이 없는 자리였다. 왠지 지금의 내 모습에 예전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예전 같았으면 엘프 소국에 침략하는 사람들에게 최상급정령을 소환해서 본떼를 보였을텐데.' 부아크를 통해서 엘프 소국의 현황을 들으며 800년의 생명력이 그리워졌다. 한 동안 잊었는데 다시 괴로웠다. 요즘은 식물의 생명력을 어떻게 흡수하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다. 흡수는 가능한데 몸에 융합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 씨앗입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부아크는 고이 간직한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보여주며 말했다. 정령사들은 기적을 꿈꾸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수 과실을 먹는 기연이다. 과실을 먹으면 60년 정도의 생명력을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씨앗으로 보이는데요." "무엇이 자라는지 심어보고 싶은데 차마 실패할까 두려워 이렇게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부아크는 무슨 씨앗인지 알고싶은 모습이었다. 사실 생명수 나무는 엘프들이 수천년을 보호한 나무를 뜻하기 때문에 백년만 지나도 본래 나무가 어떠한 종류인지 알지 못한다. 일천년이 지나자 과실을 맺었고 과실에서 나온 씨앗의 정체가 궁금한 것이다. "제가 한 번 심어볼까요?" "카인님이요?" "생명력을 이용하면 쉽게 키울수 있을겁니다. 물론 성공여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아크가 정말로 씨앗을 귀중히 여기기에 선심쓰는 마음으로 말했다. 생명력을 이용하면 며칠만에 묘목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나 스스로도 도대체 생명수 나무에서 열린 과실의 씨앗이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였다. 부아크가 조심스럽게 건네주는 씨앗은 엄지손톱 크기였다. 씨앗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며칠은 심심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체력이 약해 많이 돌아다니지도 못해서 집에서만 지낸다. 체력을 키운답시고 운동을 하다가 귀찮아 포기하였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두 분 모두 수고하세요." 부아크와 마샤에게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 파에그가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쪽의 텃밭에 자신이 심어놓은 씨앗이 제대로 자라나 관찰한다. 저러다가 언젠가는 성공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 언젠가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아무런 성과도 없지?" "네, 모두 죽었어요. 다음에는 정령을 이용해서 재배하고 싶은데 걱정이에요." 파에그가 나의 물음에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엘프만이 재배한다는 씨앗을 많이 건네주었는데 단 한 번도 성공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괜히 엘프만 재배할 수 있는 약초라 불리는게 아니었나보다.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파에그의 말마따나 정령을 이용하면 성공 가능성이 약간 높아질 것이다. "운디네라도 소환해서 돕고 싶지만 나로서도 너무 힘들어 안되겠는데." "아니 지금 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파에그가 두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하급정령사라서 정령을 소환하는게 무척 힘들다. 사실 마나가 적어서 소환보다는 소환후에 정령을 유지하는게 더 어렵다. 그래서 파에그가 약초를 재배할 수 있도록 정령을 소환하여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지말고 하급정령사가 되기위한 수련에 시간을 좀더 투자해."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열 여덟살인데도 아직도 하급정령사가 아닌 사람은 손에 꼽히는데 파에그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나마 파에그는 물의 정령사가 되기위해 수련중이라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쉽게 익히는 정령이 불의 계열이고 가장 까다로운게 물 계열이기 때문이다. "나도 도와줄께." 파에그에게 도움을 주기로 하였다. 다른건 몰라도 내가 가장 자신있는게 물의 정령이다. 태어나서 곧바로 세레나 장로가 소환한 엘레스트라에게 자연의 축복까지 받은 존재이고 말이다. 물의 정령만큼은 하급정령사가 되기 위한 기본사항을 자세히 알고있다. 파에그에게 하급정령사가 되기 위해서는 정령을 유지시키기 위한 마나를 적절하게 제어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소환은 쉽지만 계속 유지시키는 부분이 제일 어렵다. 소환하여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하급정령사를 판단하니 말이다. '뭐가 나오는지 심어볼까?' 파에그에게 하급정령사가 되기 위한 꼭 알아야 될 사항을 말해주고, 부아크에게 받은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텃밭에 심었다. 당연히 아침이면 확인할 수 있도록 생명력을 제어하였다. 아침이면 한뼘 크기로 자라 있을 것이고 씨앗의 정체도 밝혀질 것이다. 무슨 나무인지 기대되었다. 모든 할일을 마치고 텃밭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약초를 일일이 살펴보았다. 세레나가 건네준 씨앗들은 인간 정령사에게 도움이 되는 약초들 뿐이었다. 모두 마나를 쌓거나 친화력을 높이는 약초들이다. 나는 약초들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연습을 하였다. 하지만 흡수된 생명력은 몸에 융화되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800년의 생명력이 그리웠다. 생명력을 제어하는 능력으로 식물의 생명력을 흡수할 방법을 찾고 있지만 조그만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식물의 생명력은 절대 융합되지 않았다. 몸에 떠돌다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이다. 물론 생명력을 흡수하여 일시적으로 이용할 수는 있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일 뿐이다. 어제는 파에그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물의 생명력을 흡수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엘라임을 만나기 위해 800년의 생명력을 포기한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죄책감이나 부담없이 생활하고 있으니 말이다. ------ 엘프 사냥꾼이나 용병대는 노예상인들과 계약을 맺고 체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엘프 하나만 잡아도 엄청난 포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목숨을 걸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이 덤벼들기 때문에 무척이나 위험했다. 가장 큰 문제는 등급이 낮은 용병대나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찾아왔지만 무서움을 깨닫고 감히 사냥할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결국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한단계 낮은 일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은 엘프 사냥이 아닌 인간 사냥이었다. 엘프 소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반란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잡아들이면 모두 노예이다. 약한 용병들은 엘프가 강해서 사냥의 대상을 사람으로 바꾼 것이다. 사람을 사냥하는 일도 꾸준히 한다면 목돈이 되었다. 용병이 평생 벌어서야 노예 하나를 겨우 장만할 수 있다. 그런 인간 노예를 쉽게 잡을 수 있으니 약한 용병들이 너도나도 나서는 것이다. 물론 사람을 잡아서 자신의 노예로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에 버금가는 포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불만이 없었다. 제국에 충성하고 돈도 버는 일이 어디있겠는가. 50여명이나 되는 용병들이 조심스럽게 머리를 치켜들어 언덕 아래의 마을을 살펴보고 있었다. 50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이었다. 엘프 소국은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해서 지내고 있었다. 용병들은 서로 눈짓을 하면서 신호를 기다렸다. 모두들 긴장을 하고 있었다. 마을에 5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각자 한 명씩만 데리고 도주하기로 결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잡아가다가는 엘프나 인간 정령사에게 추적당해 떼죽음 당하기 쉽상이었다. 모두들 각오를 다짐하고 공격의 기회를 기다렸다. 무턱대로 달려들다가 조잡하지만 마을의 치안대에게 일부 용병들이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시간이 많다면 마을사람을 모두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용병들이 지금 여기있는 자체도 큰 도박이었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 공격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자신이 목표한 사람을 향해서 죽어라 뛰었다. "저년은 내꺼야!" "저놈은 내가 봐둔놈이야. 모두 비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합심하여 용병들에게 대항한다면 설사 용병들을 막아도 대부분이 죽을 가능성이 크다. 용병들은 그만큼 위험한 존재들이다. 용병들의 갑작스런 등장에 마을은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져 용병들을 피해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용병들에게 대항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지만 단칼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50여명의 용병들은 잠시후 마을 사람을 한 명씩 대동(帶同)하고 있었다. 이제는 빨리 도주해야만 한다. 다른 용병들은 엘프를 사냥하는데 이들은 마을을 습격하여 사람을 잡아가며 일확천금을 꿈꾸는 삼류용병들이었다. 삼류용병들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악마나 다름없었다. "각자 흩어져서 도주한다. 모두 살아서 만나자." 용병 하나가 외치며 한 명의 마을사람과 대동하여 다시 내려왔던 언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하자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모두 북쪽을 향하고 있지만 같은 방향으로 도주하지 않았다. 약간 우측으로 가거나 좌측으로 가서 뿔뿔히 흩어진 것이다. 용병들이 50여명의 마을사람을 데려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레나가 나타났다. 엘레나는 불의 중급정령사로 엘프 소국에서 전투가 가능한 인간 정령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스스로 협조하여 전투를 벌이지만 사람들은 지휘체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전투실력이 높은 엘레나 나서게 된 것이다. 인간 정령사들은 대게 불의 정령사이지만 다른 하나의 계열을 보조적으로 함께 익힌다. 엘레나는 바람의 정령을 익혀서 전투를 하거나 이동할 때마다 보조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보조적으로 익힌다 할지라도 상극인 계열을 익히지 않는다. 마을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나를 뒤따라 도착한 정령사의 수는 백여명에 달했다. 마을 사람들은 정령사들에게 자초지정을 이야기했고 엘레나를 비롯해 모두가 추적에 나섰다. 엘레나를 따르는 정령사들이라 능력이 뛰어나 대부분의 용병이 추적당해 결국 죽임을 맞이했지만 그중 일부는 추적에서 벗어났다. 정령사들은 구해온 사람들을 마을에 인도해 주었다. 매일같이 벌이지는 일에 정령사들이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엘프들도 도움을 주고 있지만 인간 정령사들처럼 필사적이진 않았다.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기술에 흠뻑 빠져있는 소수의 엘프만이 적극적일 뿐이다. 도주하는 용병에게 부상을 입은 정령사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 부상이야 타포그가 있어서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타포그로 만든 치료약은 바르고 한 시간만 지나면 곧바로 상처가 지혈되고 아물어 버린다. 타포그 잎사귀 하나면 아무리 큰 상처도 간단히 치료되기 때문에 비상시를 대비해 정령사 모두가 하나씩 휴대하고 다니기까지 한다. "복귀한다." 엘레나의 지시에 따라서 정령사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모두 피곤하지만 엘프 소국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엘프 소국은 정령사들을 위한 나라일수도 있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6 회] 23. 분노 귀족들도 엘프 노예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엘프를 차지하려면 그만한 위험도 뒤따르는데 그 이유는 엘프들이 동족을 위해 복수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륙에서는 대외적으로 이종족의 노예화가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엘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역사를 통해서 널리 알려져 있는 사항이다. "더이상은 이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엘프들이 죽었으며 잡혀갔습니다." 비우스 장로가 엘프장로들을 향해서 말했다. 비우스는 엘프들이 선호하지 않는 불의 최상급정령사로 종족을 위해 전투가 있으면 항상 앞장서왔다. "용병들의 수가 너무나 많은걸 우리보고 어쩌란 말이요?" "솔직히 지금까지는 제각각 방어의 입장만을 고수했습니다. 우리 동족을 죽인 용병이 있으면 그들을 어떻게든 추적하여 죽이는게 고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면 무슨 소용입니까? 북쪽에서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들에게 우리 동족의 무서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우스는 리올장로의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북쪽에서 용병들이 자꾸만 남쪽으로 내려와 엘프 소국의 인간과 엘프를 잡아가고 있었다. 용병을 아무리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상황이 더욱더 나빠져 결단을 내릴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무서움을 보여주자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서움을 보여주지 않았단 말이요?" 리올장로는 비우스장로의 대답에 곧바로 반박하였다. 비우스와 리올은 엘프중에서도 특이하게 불의 최상급정령사였다. 리올 자신이 지금까지 죽음으로 인도한 용병의 수만 계산해도 수백이 넘은 상황이라 용병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다. "리올장로의 수고는 저를 비롯해 여기 자리한 모든 장로님들이 알고계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용병들을 죽여도 용병을 보낸 자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엘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느낄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떠한 결과를 보여주어야 그들이 공포심을 느낄까요?" 리올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우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용병들이 내려와 엘프를 잡아갈 때에는 모두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추적하여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수백명이 죽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같은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어 이제는 엘프 소국의 엘프와 인간들 모두에게 피해가 없도록 극단적인 해결방법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비우스장로 지금 상황에서 말장난 할때요?" "하지만 적어도 인간 정령사들은 해답을 알고 있을겁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봐야겠습니다." 비우스의 말에 모든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사고가 필요한데 모두가 엘프들만 모여있으니 해답을 구할길이 없었다. 비우스는 정령사 마을에서 엘프 소국을 위해 힘쓰는 네 명의 정령사를 불렀다. 정령사 마을의 촌장이자 엘프 소국에서 생활하는 모든 인간들을 관리하는 부아크, 인간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스트라, 엘프 소국에 침입하는 적과 싸우기위해 전투가 가능한 정령사와 인간들을 관리하는 엘리나 그리고 치료사들을 관리하는 마샤 이렇게 네 명이 엘프 장로들의 회의에 불려졌다. "그들에게 엘프 소국의 무서움을 알릴 방법이 있습니까?" 비우스는 네 명의 인간 정령사들을 향해 물었다. 네 명의 정령사들에게 엘프 장로들의 시선이 향하고 있었다. 부아크, 스트라, 엘리나 그리고 마샤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인간 정령사들에게 엘프는 고귀한 존재이다. 만나는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고귀한 엘프 장로를 직접 만나게되어 모두 긴장하였다. 부아크는 엘프장로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얻어내고 스트라, 엘리나 그리고 마샤와 토론을 벌였다.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용병을 쫓아내야 하는데 용병들은 돈만 쥐어주면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같은 인간들도 무서워하는 용병이 공포심을 갖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방법을 찾았습니까?" 네 명의 인간들이 토론을 거의 끝내는듯한 모습을 보이자마자 리올이 곧바로 물었다. 엘프장로들 모두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용병들의 끈질김은 역사를 살펴보아도 기록될 정도였다. 얼마전 일리시아 제국연합과의 전쟁에서 용병들이 벌인 일들은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직접 보고듣지 않으면 공포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 용병들을 계속 보내는 자들은 아마도 왕처럼 높은 위치에 많은 권력을 가진 귀족일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행동을 하는 자들은 용병들이지요. 그들이 공포심을 느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용병들을 관리하는 용병길드의 관리들에게 직접적으로 무서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마도 가까운 곳에 용병길드의 관리들이 있을텐데 그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다면 그들은 높은 곳에 보고할 것이고, 적어도 지금처럼 용병들을 계속해서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아크의 말에 엘프장로들은 할 말을 잊었다. 용병길드의 관리들이 위치한 장소는 엘프 소국의 영역이 아니다.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 부근인데 그곳에는 수만에 가까운 용병들이 대기하는 장소라 접근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마법사까지도 있을테니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었다. "우리가 먼저 공격하자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방어만 하지 않았습니까? 공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할겁니다." 부아크는 엘프 소국도 용병들을 먼저 공격하자는 뜻을 엘프장로들에게 말했다. 엘프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지 않는 이상은 공격하지 않는다. 또한 공격대상을 크게 확대해석하지 않는 편이다. 만약 용병이 공격하면 공격한 용병만을 죽이지 공격하지 않은 용병들 모두를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곳에 내려온 것은 아니잖은가?"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에 있는 본거지에서 생활하는 용병들 모두가 같은 이유로 왔습니다. 용병들이 생활하는 본거지에 피해를 준다면 그들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곳에는 용병들 이외에도 엘프 사냥을 나선 일부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만에 달하는 용병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모든 엘프들과 인간 정령사들이 합심해야 되겠군." 리올이 부아크의 말을 듣고서 공격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력을 생각했다. 용병은 너무나도 많아서 엘프들이 모두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엘프 소국의 전력이 아무리 강해도 밀집한 수만의 용병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엘프님들과 저희들이 합심한다면 간단히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엘프의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 인간의 방식으로 본떼를 보여줘야지." 리올이 부아크의 말에 대답하였다. 인간들은 모였을 때 강하다. 수만에 달하는 용병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필요한 엘프의 수도 상당히 많아야 한다. 일단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5천명이라 다른 숲의 엘프들이 조금만 도움을 준다면 어려울 일이 없으리라. 엘프 장로들과 인간 정령사의 대표들이 만나서 용병들의 본거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엘프들은 전투 경험이 있거나 능숙한 경우만 선발되었고 인간중에서는 정령사만을 선발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상황이라 최대한 조심하여 준비하였다. 용병들의 본거지는 엘프 소국의 지역에서 벗어난 곳이라 위험부담이 많았다. 그곳은 마법사들이 방어를 위해서 마법진까지 설치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이긴 하지만 귀족들이 데려온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까지 있을 것이다. 용병들은 전술에 대해서 모르지만 귀족이나 기사는 그런쪽에 강해서 실수하지 않는 이상은 엄청난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엘프들은 동족의 복수를 위해 인간들의 방법으로 본떼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굽혔다. 엘프의 방법으로 당사자 주변인물만 복수해봐야 아무런 성과도 없으니 말이다. 성공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전투를 준비하는 엘프나 인간 정령사 모두가 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 울타리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서 타포그의 잎사귀를 따던 파에그는 계속해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평소에 한 바구니의 잎사귀만 필요했는데 일주일째 다섯 바구니의 잎사귀를 따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 아니었다. "파에그 그만좀 투덜거려." "요즘에는 다치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건지 모르겠어요." "마샤님이 많이 필요하시다잖아." 파에그의 말마따나 나도 궁금하긴 했다. 하루도 아니고 무려 일주일 동안에 건네준 타포그의 잎사귀는 수천여명의 사람을 죽음에서 살려낼 수 있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궁금중도 잠시였고 내 처지를 생각하고는 한 숨을 쉬었다. 요즘들어 정령사들이 부아크를 중심으로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자주 드나들지 않는 엘프마을에 자주 오가고 있으며 전투에 필요한 물품들을 대량으로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분위기였다. "카인님 오늘이 마지막이죠?" "아마 그럴거야. 내일부터는 예전처럼 한 바구니만 준비하면 될거야." 파에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파에그의 옆에는 타포그의 잎사귀가 가득찬 바구니가 다섯이나 있었다. 마샤가 부탁한 분량은 일주일 동안 다섯 바구니에 달하는 타포그의 잎사귀였다. 일주일 동안에는 마샤가 직접 다른 사람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가져갔기에 번거로움이 없었다. 단지 파에그만 고생했을 뿐이다. 마샤가 처음 부탁을 했을 때 너무도 많은 분량을 요구하고 있어서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마지막날에 말해 준다며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마샤가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오늘은 마을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사실 일부 정령사들이 엘프 소국을 위해 마을 밖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그들 모두가 부아크의 부름에 따라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카인님" "어서오세요. 부탁하신대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일테니 더이상 파에그가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마샤가 인사를 건네자 파에그가 수고한 사실을 웃으며 대답하였다. 마샤는 파에그에게 고생했다며 칭찬해주고는 타포그의 잎사귀를 함께온 마을사람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나는 엘프 소국의 지도자라서 그런지 마을사람이 방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모두 낯설었다. "잠시후 부아크님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중대한 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카인님에게는 진작 말씀드려야 했는데 지금에서야 전하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마샤는 무척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평범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마샤를 방안으로 불렀다. 마샤는 정말로 기절할 정도로 중대한 사실을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 크라이 숲에서 엘프와 함께 지낸시간이 오래되어서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는지 마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엘프와 인간 정령사가 합심하여 용병들이 머무는 본거지를 공격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엘프 소국의 입장은 방어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것은 엘프의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엘프가 공격할 경우에는 자신들의 동족이 어떠한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만 적용된다. 용병들의 본거지를 공격한다는 것은 엘프들이 그들 모두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용병들의 본거지나 그들의 전력 모든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위험한 결정이었다. 정령사도 대단하긴 하지만 용병들도 그에 못지않는 존재들이다. 마샤가 떠난 후 한 동안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무능한 내가 한심스러웠다. 또한 엄연히 엘프 소국의 지도자로 뽑아놓고 그런 중대한 결정을 하는데 나를 제외시킨 사실에 너무도 화가났다. '마법사나 용병에 대해서 많이 알고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었을텐데.' 마법사와 용병에 대해서 나만큼 알고있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마법에 관심이 많아서 1서클까지 수련하기도 했고 용병과 많이 접해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나는 타포그나 재배하는 특이한 하급정령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늦은밤 부아크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용병들의 본거지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공격날짜는 바로 다음날로 미리 결정되어 있었으며 전술또한 공개되었다. 어차피 공격을 시도할 대상이 엘프와 전투에 능숙한 인간 정령사가 전부인지라 모든게 비밀로 처리되었다. 인간 정령사들에게는 그동안 비밀을 알게된 일부 사람들이 준비한 물품들이 지급되었다. 물의 정령사가 이슬을 매개체로 정령을 소환할 경우 약한 정신력과 적은 마나로 최대의 효과를 벌일수 있듯이 모든 정령사들에게 그와 비슷한 물품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 타포그의 잎사귀가 하나도 아닌 여러개가 각각 지급되었다. "카인님 엘프님들이 무려 수천여명이나 함께 공격한데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파에그는 늦은밤 마을 공터에 나가서 자신이 듣고온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전했다. 마을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내일의 전투를 위해 여러가지 준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엘프 수천여명과 인간 정령사들이 합심하여 벌이는 전투가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둘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엘프와 용병의 전투방식은 전혀 다르다. 용병들은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자신의 동족을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지만 엘프의 경우에는 위험한 동족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이런 차이점이 맞물리게 된다면 엘프들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었다. 만약 내가 회의에 참석했다면 그런한 사소한 문제점을 알려주었을텐데 아쉬웠다. "정말 대단하겠구나." "저도 따라가서 구경하고 싶지만 전투경험이 많은 경우에만 함께할 수 있데요." 파에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파에그는 전투가 얼마나 참혹한지 겪어보지 않아서 멋있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땅이 피로 질척일 정도의 전투를 약간이라도 경험하면 그것을 구경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은 이렇게 초라하지만 예전에 여행을 할 때에는 800년의 생명력을 바탕으로 무서움을 모르고 여행했지만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였다. 어려움은 극복했지만 그로인해 겪은 상황은 너무나 끔찍했다. 엘프와 정령사들도 참혹함을 경험하면 평생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파에그에게 현실의 무서움을 전해주고 싶지만 앞으로 자신의 눈으로 경험할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엘프와 정령사들이 용병들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승리한다 할지라도 승리를 위해 죽은 엘프와 정령사들 때문에 기뻐하지 못할 것이다. 그 피해가 아무리 적다 할지라도 말이다. ------ 아침해가 밝아오자 마을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다. 마을의 공터에는 무려 천여명에 달하는 정령사들이 모여 가족들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나눴다. 오늘의 출전은 어제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아무도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동안 용병들이 엘프 소국으로 들어와 벌인 잔인한 일들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잠시후 출발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고싶은 분들은 남아계세요.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여기계신 모두가 알고있습니다." 불의 중급정령사인 엘리나가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치고는 선두에서 천여명의 정령사들을 이끌고 북쪽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엘리나 보다도 뛰어난 상급정령사가 있지만 전투경험은 그녀를 따르는 정령사가 없었다. 더구나 엘레나는 나이가 많은만큼 알고있는 전술도 무척 많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그녀의 진가가 발휘될 것이다. 엘리나의 일행을 따라가지 않고 공터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정령사들이 남았지만 아무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모두들 오늘있을 전투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아크는 마을에 남아서 용병들의 본거지를 향해 출발한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부아크는 촌장으로서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엘리나가 이끄는 천여명의 정령사들은 두 시간을 넘도록 이동하고서야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령사라 보통 사람들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체력을 보호하며 정령까지 이용할 수 있었기에 두 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 이동하려면 최소한 며칠을 고생할 거리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엘리나가 기다리고 있던 불의 최상급정령사인 비우스 엘프장로에게 말했다. 엘프들은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저녁에 공격하기로 했으니 늦어도 상관없는 일이었소. 저녁에 공격해야 할테니 그동안 쉬도록 하시요." "저녁때 뵙겠습니다." 엘리나는 천여명에 달하는 사람이 이동하는게 늦어져 걱정이 되었지만 계획에 차질은 없었다. 용병들의 본거지를 저녁에 공격하기로 했기 때문에 모든 정령사들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엘프는 인간에 비해 기본체력이 높지만 인간 정령사들은 많은 거리를 이동하느라 마나와 체력이 많이 소비된 상태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령사가 마나가 부족해 정령술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전투를 하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이다. 저녁이 되길 기다리면서 엘프 소국의 영역에서 빠져나오는 용병들이 목격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오전에 엘프 소국을 침입하여 저녁이 되자 다시 그들의 본거지로 귀한하는 모습이었다. 용병들에게 사로잡혀서 끌려가는 인간들이 발견되었지만 들통나지 않는이상 모두 귀환하도록 방치하였다. 어떠한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해듣는 것과 직접 목격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해듣게 되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 직접 경험하면 마음으로 느끼게 되어 감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숲속에 숨어서 공격할 시간을 기다리던 엘프들에게 용병들의 모습은 너무나 잔인하였다. 잡은 인간을 동물마냥 끌고가는 것은 예사였고 여자의 경우는 차마 말하기도 끔찍한 치욕을 당한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엘프들은 용병들에게 잡혀간 자신의 동족들도 그와같이 당했을거라 생각하며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하지만 엘프들은 무엇인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인간의 경우 이동의 편위를 위해 잔인하게 대하지만 엘프의 경우는 노예로서의 상품성을 위해서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점이다. 쉬이익 짝! 용병이 휘두른 채찍에 두 손이 묶여서 끌려가던 사람이 맞았다. 모두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데 반해 두 손이 묶인 사람은 균형을 잡는게 어려운지 걸음이 무척이나 느렸다. 채찍을 맞은 사람은 되도록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소리를 지를 경우에는 더욱 아픈 채찍이 날아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빨리 걷지 못하겠어?" "이곳은 안전하니까 그만하라구. 그러다가 다치면 돈도 받지 못한단 말이야." 채찍질을 하던 용병이 다른 용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채찍질을 멈추었다. 용병들은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을 넘었기 때문에 더이상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까지 도착하기 위해서 많이 긴장했기 때문에 잠깐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북으로 이동하였다. 용병들 모두가 편안한 발걸음이었다. 최소한 오늘은 허탕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두고보자.' 비우스 장로는 용병들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며 생각했다. 비우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엘프들이 용병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많은 용병들이 지나쳤지만 숲에 동화되어 숨어있는 엘프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법사가 있을지라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7 회] 23. 분노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은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서 치외법권 지역으로 선포한 장소라 무법지대였다. 하지만 서로간의 이익을 위해서 최소한의 규칙은 지켜지고 있었다. 특히 노예상인이 정한 규칙만큼은 필사적으로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엘프 소국의 영역에 침입하여 엘프나 인간을 잡아와 노예상인에게 넘긴다. 노예상인은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때문에 정당한 포상금을 용병들에게 지급한다. 일부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일을 처리하긴 하지만 그 외에는 노예상인을 통해서 모두 처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노예상인에게 전해진 노예는 모두 카르시온 제국의 말린이나 소피아 와국의 세인트로 보내졌다. 많은 용병들이 지내다보니 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온갖 부산물들이 생겨져 있었다. 매춘업이나 음식업 그리고 용병의 무기나 방어구를 손봐주는 대장간과 같은 것들이 자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다. 많은 용병들이 죽어나가지만 그만큼 일확천금을 얻어 떠나가는 용병도 있었다. 엘프를 사로잡았을 경우에만이 가능하다. 노예상인들은 근래들어 최고로 많은 노예를 용병들로부터 인계를 받아 무척이나 기뻤다. 대부분이 인간이긴 하지만 엘프는 그만큼 사로잡기가 힘들어서 아쉬워하지 않았다. 노예상인이 기뻐하는 만큼 용병들도 기분이 좋았다. 엘프 소국에서 잡아온 인간을 노예상인에게 건네주고 받은 포상금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용병들은 오늘따라 인간 정령사와 엘프들이 추적하지 않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성공을 하게되어 일확천금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다. 용병들이 큰 돈을 얻게되자 오늘은 평소보다 매춘업이 더욱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호황을 누렸지만 말이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지만 그 행복에 도사린 무서움을 깨닫는 사람은 없었다. 수만여명의 용병이 생활하는 이곳에 닥쳐올 앞날을 예상하지 못했다. 엘프 소국이 무방비 상태란 사실을 늦게나마 모두 알게되었지만 무방비 상황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마시자구." "자네 덕분에 오늘 횡재하는군." 여기저기 모닥불 주위에 술을 마시는 용병들이 많았다. 오늘 엘프 소국에 사냥을 나가지 않은 용병들은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고 있었다. 더욱이 오늘따라 추적하는 엘프와 정령사들이 없어서 사냥에 나선 용병들이 모두 무사히 귀환한 것은 물론이고 획득물도 많았다. 엘프야 원래 사로잡기 힘들지만 인간의 경우는 어렵지 않았다. 단지 추적당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지역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오늘 이상하지 않았나?" 술을 적게먹은 용병이 즐거워하는 용병들에게 말했다. "뭐가 이상해?" "오늘 엘프들의 지역에 들어가서 모두 살아돌아왔잖아. 그래도 한 명도 들키지 않을 수가 있을까?" "쉬는날인가보지." 의문을 갖는 용병에게 모두들 가볍게 대답했다. 용병들은 대게 목숨을 내걸고 생활하는 만큼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은 용병들에게 행운의 신이 다가왔을 뿐인 것이다. 용병들은 일확천금을 얻어서 용병짓을 그만두고 떠날 동료를 위해 축하인사를 계속 건넸다. "정말 축하해. 드디어 꿈을 이루었군." "부럽다. 부러워." 용병들은 어떻게든 용병짓을 때려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용병생활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대게 한 곳에 정착하면 여러가지 분리한 상황을 참지 못하고 말썽을 일으켜 정착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안전하게 정착하기 위해서는 많은 금액의 돈을 갖지 않는이상 불가능했다. 물론 용병생활에 적응되어 일확천금을 얻어도 빠져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노예상인들은 오늘을 기념에서 용병들에게 술을 공짜로 지급하였다. 술값은 오늘 발생한 이익에 비하면 돈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적은 금액이었다. 노예상인이 아무리 돈에 환장해도 오늘은 공짜술을 베풀 정도의 이득이 남은 행운의 날이었다. 노예상인들이 공짜술을 모닥불마다 가득히 놓아주었으니 그것을 먹지않을 용병이 어디있겠는가. 하루인생의 용병들에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로인해 매춘을 벌이는 여성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몸을 희생하여 용병들의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 오늘같은 날에 매춘을 하는 여성들에게도 행운이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여러가지 상황이 맞물려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술취한 용병이 자신이 가진 돈을 떠넘기는 행운을 말이다. 용병들의 무방비 상태는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던 엘프와 정령사들에게 우연히 다가온 행운이었다. 실질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전력이 모두 빠져있는 상황이라 용병들이 많은 엘프 소국에 넘어가 피해없이 사람들을 잡아올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한 행운이었던 것이다. 같은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어떠한 결과가 발생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좀더 기다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는게 좋겠어." 비우스 엘프장로가 엘리나의 말에 대답하였다. 용병들의 본거지 근처까지 다가왔지만 공격을 하지 못하였다. 공격의 시기는 엘리나가 결정하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전술에 대해서도 엘프인 비우스보다 같은 사람인 엘리나가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다. 엘프와 정령사들이 공격을 위해 기다리는 장소는 용병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릴만한 곳으로 가까운 곳이지만 오감이 약한 용병들에게는 무척 먼 거리였다. 정령술을 익히면 오감이 무척 발달하여 상당히 멀어도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 있어도 자세히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술에 취하다니 오늘이 무슨 날인가?' 엘리나는 처음 용병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엘프 소국에서 많은 사람이 잡혀온 것을 축하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모두들 오늘 자신들이 용병들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서 엘프 소국의 안전이 무너진 사실을 알아챘다. 최소한의 병력은 엘프 소국에 남겨두었어야 했다. 용병들의 오늘 모습은 정말 보여주기 힘든 특별한 경우였다. 그만큼 용병들이 엘프 소국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부담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술이 몸에 들어가자 어느정도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만큼은 살아서 일확천금을 얻어 지겨운 이곳에서 떠나간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평소 용병들의 취침시간은 해가 지는 저녁이다. 내일을 위해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일찍 잠드는 것이다. 용병에게 몸의 상태는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찍 잠드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노예상인이 가져다 놓은 술동이와 횡재한 용병의 공짜술이 맞물려 너도나도 마셨다. '정말 행운이야. 정령신님들이 우리를 도우시는구나.' 용병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엘프나 정령사들이 신께 감사했다. 용병들에겐 행복하고 끔찍한 하루가 되겠지만 엘프 소국을 사랑하는 엘프나 인간 정령사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용병들은 새벽이 다가와서야 하나 둘 모닥불 근처에 술이 취해서 널브러졌다. 용병들이 생활하는 장소는 분지(盆地)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격하기 쉬웠다. 용병들이 하나둘 쓰러질 때마다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은 사방에서 단 번에 공격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비우스 장로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엘리나가 비우스 엘프장로에게 말했다. 대부분의 용병들이 술이 취해서 쓰러져 있었고 극히 소수의 용병들만이 아직까지도 술을 먹고 있었다. 용병들의 본거지에 생활하는 인원이 수만이나 되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저 용병들이 술이 취해서 전투가 불가능한 지금이 가장 적당한 시간이었다. "샐리온님께서 자연의 축복을 내려주시길..." 비우스는 공격을 하기전에 불의 정령왕 샐리온에게 자연의 축복을 내려달라며 조용히 말했다. 정령왕에게 오늘의 행동을 알리는 것이다. 물론 신이 지켜보는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비우스는 불의 최상급정령 샐레아나를 소환하였다. "샐레아나 저들에게 불의 무서움을 가르쳐 줘." 비우스 장로는 샐레아나에게 공격하라고 부탁하였다. 샐레아나는 최상급정령이기 때문에 소환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적을 향해서 공격을 자행하였다. 비우스는 샐레아나가 소환되자 극도로 많은 마나가 빠져나감을 느꼈다. 비우스가 샐레아나를 소환하는 시간은 고작해야 1분이나 2분이 고작이었다. "불정령이 나타났다!" "불이야! 불덩이가 나타났다!" 용병들의 본거지의 중심에 소환된 샐레아나를 보고 용병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샐레아나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용병은 물론이고 천막까지 불에 타기 보다는 녹아내렸다. 용병들의 비명소리가 분지에 울려퍼졌다. 공격신호를 기다리던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도 자신들의 정령술을 뽐내듯 정령을 소환하여 공격하였다. 그와 동시에 엘프들은 자신의 종족은 뛰어난 궁수란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듯 곧바로 화살을 날렸다. 엘프들 대부분은 파괴력이 강한 정령술을 익히기 보다는 자연에 도움이 되는 정령을 익혔기 때문에 화살을 쏘는게 최선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인원이 적은대 반해서 인간 정령사들은 무척 효과적인 정령술을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인간 정령사들은 불의 정령사로서 하급이라 할지라도 높은 위력을 발휘하였다. 엘프들은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전진하면서 철저히 용병들을 죽여나가기 시작했다. 엘프장로들이 소환한 최상급정령으로 인해서 분지는 거의 초토화 되어가고 있었다. 불의 최상급정령 샐레아나 때문에 모든 천막이 불이 붙어서 혼란스러웠고,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이 불로 인한 피해가 더욱 많도록 불길을 퍼뜨렸으며, 땅의 최상급정령 노에아넨이 분지내의 지형을 바꿀 정도로 땅을 뒤엎고 흔들었다. 최상급정령이 소환되어 공격한 시간은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로인해 전투불능에 빠져버린 용병들이 수천이었다. 엘프들이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 명중하여 용병들이 계속 죽어나갔다. 모두들 술이 취해있는 상태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나 인간 정령사들이 근접이 아닌 원거리에서 공격하기 때문에 다가가 공격조차 시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병의 무서움은 근접에서 벌이는 무시무시한 전투이다. 온갖 임기웅변을 발휘해 적을 한숨도 쉴틈없이 공격하여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용병의 무서움이 장거리 공격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인간 정령사들은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정령술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무기를 뽑아들고 공격하였다. 엘프의 활솜씨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천여명의 인간 정령사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용병들을 죽이기위해 나섰지만 뒤에서는 계속해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모든 화살은 정령사들의 사이사이를 통과하여 용병들을 죽이고 있었다. 결국 실질적으로 근접적이 벌어졌지만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용병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실력있는 용병들은 상황을 빨리 판단하여 진작 엘프들을 향해 전진하다 모두 죽어버린 상태였다. 남아있는 용병들은 실력이 떨어지거나 술이 취해 무방비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무방비 상태인 용병이라 할지라도 인간 정령사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엘프는 화살을 계속 날려서 직접적인 접근을 피했다. 하지만 철저히 하나하나 모든 용병들을 죽여나가며 전진하였다. 정령사들이 들고있는 무기는 대부분이 단검이나 중검이었다. 그들은 정령사들이라 무기를 쓰는데 소질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공격해! 빨리 공격해!" "진형을 갖추란 말이야. 진형을!" 용병들이 사방에서 밀려오는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준비하는 용병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진휘를 하려는 용병에게는 어김없이 화살이 날아와 죽음으로 인도하였다. "살려줘! 살려달란 말이야!" "젠장 뭐하는 짓이야! 돌이라도 주어서 던지란 말이야!"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용병들의 살기위한 몸부림이 계속되었다. 도망갈 곳이라도 있다면 떠나겠지만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이라 방법이 없었다. 일부 기사나 마법사가 있었지만 용감히 나서는 경우는 없었다. 엘프들은 동족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안전하게 공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엘리나로서도 엘프들의 공격이 무척이나 비효율적이었지만 예상외로 큰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 공격하는 것보다 적에게 공포심을 주며 공격하는 상황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힘을 짜내서 정령술로 공격!" 엘리나는 용병들이 진형을 갖추어 대응하려고 하자 곧바로 소리쳤다. 정령사들이 엘리나의 말에 따라서 남아있던 마나를 모두 짜내서 정령술을 펼쳤다. 불의 하급정령인 샐러맨더가 소환되어 진형을 갖추고 대응하려던 용병들 앞에 나타나 피해를 안겨주었다. 수만의 용병이 있었던 만큼 그들중에 재빠른 판단을 한 용병들이 진형을 갖추어 대응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진형을 무너뜨려!" 리올 엘프장로가 엘리나의 행동을 눈치채고 엘프들에게 소리쳤다. 리올은 비우스 장로와 함께 같은 불의 최상급정령사이지만 지금까지 의외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힘을 아꼈다. 물론 그와같은 엘프들이 많이 있었다. 미리 엘리나에게 혹시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한 전술중의 하나였다. 매우 간단한 전술이지만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던 엘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진형을 지켜라!" "으악! 이쪽에 불이 꺼지질 않아요!" 죽은 시체를 쌓아서라도 방벽(防壁)을 만들어 진형을 갖추던 용병들은 리올 엘프장로가 소환한 샐레아나로 인해서 더이상 견뎌낼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화살을 막아내기 위한 방벽에 불이붙어 반대로 그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정령에 의해 붙은 불이 쉽사리 꺼질리 없었다. "리올 장로님 방벽에 계속해서 불을 붙여주세요!" "샐러맨더" 리올 엘프장로를 비롯해 모두가 엘리나의 뜻을 눈치채고 방벽에 불을 붙였다. 상당히 넓은 방벽이었지만 그 안에있던 용병들은 불 때문에 나오는 연기로 인해 숨쉬기조차 곤란할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엘프들은 화살로 용병들을 죽여나갔다. 불붙은 방벽 때문에 용병들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빠져나온다 할지라도 엘프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방벽 안에서 화살을 맞지 않더라도 질식해 죽어갔다. 진형을 갖추고 살아남기 위해서 쌓아놓은 방벽이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한 것이다. 엘프들은 엘리나의 전술이 아니었다면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용병들의 본거지인 분지가 상당히 넓은데도 불가하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시체가 놓여져 있었으며 땅은 붉은빛을 띄었다. 용병들이 노예로 삼기위해 데려온 엘프와 사람은 돼지우리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출된 사실에 감격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할말을 잊었다. 엘프와 정령사들이 얼마나 철저히게 용병들을 죽였는지 상처입고 비명조차 지르는 용병이 없었다. 수만여명에 달하는 용병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들중 절반이 정령술에 죽었으며 나머지 반은 엘프가 쏘는 화살에 죽었다. 공격을 감행한 엘프들의 수는 무척이나 많았다. 엘프는 동족이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만 잔인한 습성을 보이며 정당하게 생각한다. 모든 엘프들이 용병의 행동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스스로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인간 정령사들의 경우는 스스로 정당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참혹한 현장을 바라보며 할말을 잊었다. 공격했던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중 일부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생각보다 적은 피해였다. 그나마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어도 타포그 잎사귀를 직접 바르고 먹은 덕분에 생채기 정도의 상처에 불과했다.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은 용병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떠나갔다. 엘프들이 용병들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한 이유는 자연을 사랑하는 습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인해 대륙은 엘프에 대한 공포심이 확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간들은 시체에 해를 입히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데 최소한 죽어서는 평화를 얻는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족에 대항하는 영지민의 목을 잘라내어 매다는 경우가 가끔씩 있는데 귀족들 조차도 그런 행위는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만 사용할 뿐이다. "이렇게 잔인할수가!" "하나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니."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이 떠나간 분지에 아침이 되자 살아남은 소수의 용병들이 찾아와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며 할말을 잊고 있었다. 보통 용병들이라면 자신의 동료가 죽거나 다치면 복수를 다짐하기 마련인데 지금의 모습은 전쟁터에서의 모습이었다. 아니 전쟁터에서도 수많은 부상자가 있기 마련인데 모두다 죽어 있었다. 용병들은 지금까지 노예사냥이었지 전쟁터에 온 것이 아니었다. "엘프들이 이럴리가 없는데." 용병들은 지금의 현상이 엘프 때문이라 믿기 힘들지경이었다. 엘프는 숲을 사랑하는 존재로 동족이 무슨 일을 당할 경우에만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지금같은 경우는 역사에서도 손에 꼽혔다. 살아남은 소수의 용병들은 지금까지 수만의 용병들과 함께 벌였던 엘프사냥의 잔혹함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엘프의 잔인한 복수에 대해서만 탄식하고 있었다. "돈이다! 돈이야!" 살아남은 용병들은 처음에 실의에 빠져 있다가 누군가 돈을 찾아냈다는 소리에 너도나도 시체를 밟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용병들이 노예사냥을 위해 이곳에 온 이유는 일확천금을 꿈꾸기 위해서였지 죽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용병들은 서로서로 뜻을 모아 마차를 일으키고는 돈이나 돈이 될만한 귀중품을 모두 챙기고 자리에서 떠나갔다. 어차피 평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손으로 꼽힐 정도의 기회가 찾아오는데 살아남은 용병들 모두가 지금이 그 기회라 생각했다. 수만여명의 용병들중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겠는가. 그들은 그런 가능성을 헤치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죽은 그들의 돈을 가져간다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죽은 사람의 몫을 나누는 것은 용병들의 전통이라 거리낌도 없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용병들은 그들이 꿈꾸던 것을 수만의 용병들의 죽음을 딛고 이루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8 회] 24. 전환 수만여명의 용병들을 학살하고 돌아오는 정령사들은 승리를 자축할 수 없었다. 엘프 소국의 안전을 위해 벌였다지만 자신들이 용병들을 죽이던 장면이 머리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정당한 행동이라 자위하면서도 결과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용병들의 본거지에는 일부 귀족들과 황궁에서 파견한 관리 그리고 용병들을 따라다니며 생활하던 사람들까지 있었지만 모두 죽었다. 어두운 밤에 벌어졌기 때문에 용병들은 아무런 반항도 못했다. 엘프와 정령사들은 오감이 발달하여 밤낮에 영향을 적게 받지만 평범한 용병들은 밤눈이 어둡기 바련이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겹치고 겹쳐서 학살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들중에 상관없는 사람도 많았을텐데.' 엘리나는 많은 용병들을 죽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생각이 많았다. 또한 지휘관로서 부담감이 다른 정령사에 비할바가 못되었다. 엘리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오늘의 전투를 평생 잊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천여명에 가까운 정령사들은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서 걷고 또 걸었다. 반나절만에 왔던 거리가 돌아가면서 한나절이나 걸렸다. 그만큼 걷는 속도도 느렸고 싸늘한 분위기였다. 약간 무질서한 이동이었지만 엘리나로서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부아크님" "수고하였습니다. 엘리나" 부아크가 힘없이 말하는 엘리나의 말에 대답하였다. 부아크는 돌아온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결과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엘리나가 부아크에게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무사히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소동을 피웠다. 전투에 나선 사람은 천여명이었고 손으로 꼽힐 정도의 사람만 돌아오지 못했다. 다행히 슬퍼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지만 분위기는 겨울에 부는 바람처럼 싸늘했다. 부아크는 엘리나에게서 전투결과를 들으며 얼마나 상황이 끔찍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은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전투결과에 대해 전했다. 자신의 가족이 무사한지 확인되었으면 다음으로 전투의 결과에 대해 묻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모두들 전투결과를 듣고서 머리속으로 상상을 하지 못했다. 수만여명이 죽어있는 모습을 어느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무말도 할 수 없겠군.' 부아크는 힘겹게 전투를 치루도 돌아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팠다. 본래 사람들이 돌아오면 그들을 위해 일장 연설을 할 생각이었다. 승리하여 돌아오면 그들을 위해서 자축하는 연설을, 패배하여 많은 사람이 돌아오지 못했다면 위로의 연설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들은 두 가지 사항에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승리의 자축이나 위로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 많았지만 그들에겐 오직 가족만 필요할 뿐이었다. 살아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음으로 해서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싶어했다. 정령사의 마을은 그렇게 조용히 하루를 흘려보냈고 마을의 조용한 분위기는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용병들의 본거지가 쓸려버려 엘프 소국에 노예사냥을 하려는 사람도 없으니 바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엘프 소국에 생활하는 인간들의 치안을 위해 힘쓰는게 전부였다. 엘프들은 자신들이 벌인일에 대해서 정당성을 갖고 시작한 일이라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인간 정령사들과는 매우 상반된 반응이지만 종족의 특성일 뿐이었다. 엘프는 조화롭게 지내려 노력하는 종족으로 누군가 건드리지 않으면 매우 평화스러운 존재이다. 용병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물론 정령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들은 수만여명의 용병들을 학살한 엘프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직접적으로 용병들을 학살한 엘프들과 정령사들이 조용히 지낸 반면에 엘프 소국에서 생활하던 인간들은 축제를 벌이며 난리였다. 그들은 귀족없는 즉, 신분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엘프 소국이 좋아서 생활하고 있지만 매우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북쪽에서 용병들이 내려와 사람들을 잡아가니 불안하지 않는 사람이 비정상이다. 하지만 평생에 단 한 번도 없을것 같은 통쾌한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축제 분위기로 변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얼싸안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학살당한 용병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수만여명의 용병이 죽은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면 즐거워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북쪽에서 노예사냥을 위해 내려온 용병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엘프 소국에서 조용히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악마였다. "술이 공짜입니다. 오셔서 한 잔씩 하세요." 술을 판매하는 상인이 길거리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축제분위기라 모든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지켜지고 있었다. 상인이 공짜로 술을 나눠주고는 있지만 많이 먹을경우 슬쩍 돈을 건네주는 상거래의 예의가 보였다. "용병들이 떼죽음 당한 것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지?" "무슨 걱정이야. 엘프들이 나서서 용병들처럼 죽일텐데. 잔인한 수만여명의 용병들을 죽였는데 그깟 병사들이 어쩌겠어." "그렇긴하지." 두 사람이 술이 취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었다. "엘프 소국이여 영원하라! 대륙은 엘프 소국의 지배를 받으리라!"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엘프 소국에 지내던 사람들도 자신들이 지내는 나라가 수만여명의 용병들을 학살할 능력이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까지 북쪽에서 내려오는 용병들에게 계속 당해오면서도 방어적인 입장만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용병들의 죽음을 알게 되어서야 엘프 소국의 엘프들이 지금껏 참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프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엘프 소국을 위해서라면 또다시 나서주리라 생각했다. 모두들 엘프 소국의 앞날이 밝을거라 예상하였다. ------ 돌아온 사람들의 수와 모습을 살펴보고 예상외로 정말 놀랐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살아돌아오리라 예상했겠지만 나는 그들의 절반가량이 죽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을 사람들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객관적으로 모두 살아왔다고 할 정도로 죽은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파에그 돌아가자." "네, 카인님" 파에그도 용병들과 싸움을 벌이고 돌아온 사람들과 대화를 다눌 분위기가 아님을 알아채며 대답하였다. 나는 전투에 나선 사람들이 상처입은 몸으로 돌아오리라 예상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 멀쩡하게 살아돌아온 이상 가족들과의 만남을 지켜볼 이유가 없었다. '전투가 어떻게 벌어졌기에 죽은 사람이 손으로 꼽을정도지?'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싸늘한 분위기 때문에 물어보지 못했다.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라 묻기도 그랬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며칠 지나면 궁금중이 모두 풀리겠지만 굳이 이자리에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 파에그도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을 싸늘한 분위기 때문에 유심히 지켜보지 못하고 나를 따라왔다. 며칠 지나면 파에그가 오늘 궁금했던 사실을 모두 알아올 것이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중대한 사실을 알게되어도 내가 도움을 줄 방법도 없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마중나온 가족을 데리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오직 상급정령사들만이 자리에 남아서 결과에 대해 상의하고 보고받고 있었다. 먼 거리지만 그들의 표정이 보기힘든 일그러진 형태임이 뚜렷히 보였다. 정령사 마을에서 지낸 시간이 짧았지만 내가 생활하는 집은 많이 가꾸어진 상태였다. 보기좋게 자라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작은 나무들 그리고 울타리 주변에서 집주변을 둘러싸며 자라고 있는 타포그들까지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텃밭에서 자라는 수십 종류의 약초들까지 무척이나 독특한 분위기였다. '내가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맞긴 한거야? 후훗'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얼마전에는 섭섭한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섭섭한 마음도 없었다. 용병들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결정을 내릴때도 부르지 않더니 오늘도 전투 결과에 대해 말해주려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엘프 소국의 지도자로 앉혀놓고 항상 제외되고 있었다. 물론 엘프 소국의 자리에 앉인 당사자들은 인간 정령사가 아닌 엘프들이지만 둘 모두가 내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을의 싸늘한 분위기는 일주일이나 지속되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예전처럼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마음의 충격을 받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파에그를 통해서 전투결과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고서야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다. '수만여명의 용병들이 모두 죽었다라...' 마음속으로 용병들의 죽음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했다. 사람은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 회피하거나 죽기살기로 맞서 싸운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서는 용병들의 죽음에 대해 공포심을 갖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행동할 것이다. '엘프 소국이 과연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군.' 나는 가까운 시일안에 수만여명에 가까운 용병들의 죽음보다 더욱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생각했다. 어쩌면 엘프 소국이 멸망할지도 모를 큰일이 말이다. 용병들의 죽음은 엘프 소국의 입장에서 본떼를 보여주긴 했지만 그들에게 확실한 적임을 알려준 꼴이었다. 수십여년의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방어만 했다면 엘프 소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의 힘으로 인해 두려워 하거나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지만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카인님 타포그는 어떻게 하죠?" 파에그가 타포그의 잎사귀가 담긴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번에 마샤에게 건네준 많은 분량의 타포그가 그대로 남았을테니 앞으로 타포그가 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주일 내내 채취한 타포그는 집안에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대로 놔둬. 어차피 쓸모도 없으니까 생명력이나 뽑아서 오랜만에 정령이나 소환해 볼거야." "그러면 너무 아깝잖아요!" "아깝긴 뭐가 아까워? 그대로 방치하면 썩어버릴텐데." 파에그는 타포그를 그대로 보관하길 원했지만 괜한 일거리만 만드는 짓이었다. 어차피 마샤에게 건네준 타포그도 상당히 많아서 설사 내일 전쟁이 일어나 필요할지라도 내게 요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령을 소환해 본지도 너무 오래되었네.' 나는 식물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지만 몸에 융합시킬 수 없다. 하지만 흡수한 식물의 생명력이 몸에 잠깐 남아있는데 그것으로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다. 800년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때가 그리워 예전으로 돌아고 싶은 마음에 연구하여 알게된 사실이다. 지금의 나는 아무도 부러워하지 평범한 물의 하급정령사이다. 불의 하급정령사는 알아주기라도 하지만 물의 하급정령사는 물리적으로 파괴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치료사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물의 하급정령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파에그만은 나를 부러워하고 있지만 말이다. "카인님이 부러워요." "부럽기는 식물의 생명력을 이용해서 정령을 이용하는데 그것이 뭐가 부럽냐?" "그래도 부러워요. 정령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게 어떠한 기분일까요? 저는 성인이 지나서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정령을 소환하는 모습을 봐왔어요. 요즘은 제게도 그런날이 올지 의문이 들어요." 파에그는 간절한 눈빛을 띄며 말했다. 파에그는 자신이 아직까지도 하급정령사가 못되었어도 물의 정령사를 선택한 사실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길만을 추구하는 파에그가 대단해 보였다. 솔직히 나의 경우는 운명에 거역하려고 자살한 이후로 행운의 과정을 겪으면서 얻은 힘이었다. 엘라임과의 만남도 행운으로 얻은 800년의 생명력과 맞바꾼 결과이고 말이다. '파에그를 도와주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파에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물론 파에그 입장에서는 내가 선물한 씨앗만으로도 정말 고마워하고 있지만 솔직히 쉽게얻은 씨앗이다보니 도움을 준 기분이 아니었다. 하급정령사가 되기위해 무슨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정령사의 수련은 지름길이 없다. 파에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물의 하급정령사가 되기위해 수련한다.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를 오래 소환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옆에서 파에그의 수련을 지켜봤는데 소환한 운디네를 항상 10초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니 운디네로 어떻게 물리력을 행사한단 말인가. 파에그가 운디네를 소환하여 약간의 물리력만 보여주어도 마을사람들은 하급정령사로 인정해 줄 가능성이 높다. 물의 정령이 그만큼 희귀하며 수련이 어려운 것을 모두가 알고있기 때문에 평가가 관대할 것이다. 불의 하급정령사의 경우는 샐러맨더를 소환하여 야생동물을 공격하여 죽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만 하급정령사로 인정받는다. "맞아! 쉴세없이 수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되는구나!" 나는 타포그를 바라보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파에그의 실질적인 정령수련 시간은 매우 짧았다. 정령사가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정령을 소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정령을 소환하면 마나가 소모되는게 당연하다. 그러니 하루에 수련하는 시간이 마나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식물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곧바로 파에그에게 전해주는거야. 그 마나로 파에그가 운디네를 소환하여 수련한다면 무한정 수련을 계속할 수 있겠지?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고민끝에 해결방법을 찾고서 스스로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지금에서야 떠오른게 한심했다. 파에그가 어릴 때부터 열 여덟살인 지금까지 수련하면서 몸에 쌓은 마나가 많을리 없었다. 그런 마나로 운디네를 소환하여 수련했으니 그 수련의 시간이 매우 짧았으리라. 더구나 운디네를 최소한의 마나로 유지시킬 수 있는 제어력도 없으니 그나마 적은 마나를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면서 수련했을 것이다. 하급정령사가 되기 위해서 속성으로 수련할 수 있는 방법을 조용히 정리하고 파에그를 바라보는 순간 어이없었다. 파에그는 혼자서 소리치고 중얼거리며 그러다 다시 고민하고 있는 나를 정신나간 환자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괜히 한숨이 나왔다. 도와주기 위해서 좋지도 않은머리 쥐어짜서 방법을 생각했건만 파에그는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방법을 생각했으니 실천을 해보고 싶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직접 시행하면 여러가지 문제점이 도출될 가능성이 많았다. 만약 성공한다면 마을의 하급정령사를 중급정령사가 되도록 수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급정령사를 상급으로는 불가능하다. 중급정령의 경우에는 식물의 생명력을 너무도 많이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한 번 식물의 생명력을 전해줄 때마다 나무 한 그루가 죽어나갈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엘프가 찾아와 난리를 피울게 뻔하다. 그나마 하급정령사야 많은 생명력이 필요하지 않으니 가능한 것이다.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마나가 필요하지만 더욱 순수한 식물의 생명력이라면 소환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파에그가 순수한 식물의 생명력을 이용해 하급정령사가 된다면 자신이 가진 적은 마나만으로도 효과적으로 정령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간혹 정령사의 등급은 같지만 마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두 배의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있는데 파에그에게도 그러한 결과가 나오길 바랬다. "파에그 할말이 있으니까 방으로 들어오너라." 파에그에게 생각한 방법을 말하기 위해서 방으로 불렀다. 성공할지 미지수인데 괜히 다른 사람들이 알면 곤란했다. 더군다나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식물의 생명력을 빼앗는 일이라 조화로움을 따르는 정령사로서 할짓은 아니었다. 그나마 엘프가 아닌 인간이라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말이다. 파에그는 내가 생각한 방법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가능한지 한참을 생각하더니만 결국 포기하였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실험해 보는 것이다. 방안의 한 쪽에는 파에그가 열심히 뜯어놓은 타포그 잎사귀가 있어서 실험재료도 준비되어 있었다. 타포그는 포션에 버금가는 치료에 쓰이기 때문에 잎사귀 하나하나에 엄청난 생명력이 담겨 있었다. 많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치료효과를 보이는 이유로 엘프밖에 재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파에그가 타포그의 귀중함을 알고있기 때문에 도저히 수련에 쓸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내겐 그저 방치해두면 썩어질 잎사귀일 뿐이었다. 물론 많은 생명력이 담긴 잎사귀이니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썩겠지만 말이다. "바구니 들고 밖으로 나와. 일단 시도해보고 다시 말하자." "네." 파에그와 의견대립을 하다가 일단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파에그가 바구니를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성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며칠 연습을 통해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알아야만 했다. "내가 흡수한 생명력을 전해줄테니까 곧바로 운디네를 소환해서 계속 유지하도록 해야돼. 전해주는 생명력 모두를 사용해야 되는거야. 어차피 몸에 흡수되지 않는 생명력이니까 모두 사용해야 돼. 알았지?" "노력해 볼께요." 처음하는 시도라 성공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타포그 잎사귀를 쥐고 오른손은 파에그의 어깨에 가져갔다. 심장이나 등에 생명력을 전해줘야 효율적이지만 그것 때문에 파에그가 정신이 분산될까봐 어깨를 잡은 것이다. 정령은 소환자의 의지와 마나가 조화되어 소환되는데 내 손이 파에그의 정십을 집중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운디네" 파에그는 내가 어깨에 올려놓은 손 때문에 한참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서야 운디네를 불러낼 수 있었다. 파에그가 물의 하급정령인 운디네 소환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지켜보았다. 나는 운디네가 소환되자 곧바로 왼손에 있는 타포그의 잎사귀들에게서 약간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오른손을 통해 파에그에게 전했다. 파에그가 어깨에 얹어진 내 손으로 전해진 생명력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생명력은 마나와 다르게 순수하기 때문에 느끼기가 쉽다. "모두 운디네에게 전해줘." 혹시라도 전해준 생명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까봐 말해주었다. 파에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평소에 10초도 유지되지 않던 운디네가 계속 눈앞에 소환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성공했음을 알았다. 파에그에게 지금의 느낌을 오래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다. '하급정령사가 될 때까지 이렇게 매일 도와주어야지.' 파에그는 얼굴만이 아니라 전신에서 땀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탈진해 쓰러질 모습이다. 아마도 그만큼 정신을 집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나는 계속 왼손에서 조금씩 타포그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파에그에게 전해주었다. 왼손에 쥐고있는 잎사귀의 수가 많지 않았지만 타포그인지라 끊임없이 생명력이 흡수되었다. 히죽히죽. 소환되어 있는 운디네가 땀을 흘리고있는 파에그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파에그는 기뻐서 어쩔줄 몰라 당황하더니 결국 운디네에게 전해주던 생명력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파에그는 실신하듯 그자리에 쓰러졌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후우우 후우우" 파에그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파에그가 괜찮아 보이자 나는 왼손을 펴고 타포그의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타포그의 잎사귀 일부가 변색된 모습이었다. 아직도 운디네를 한 시간 가량이나 더 소환할 수 있는 생명력이 남아 있었다. "카인님 운디네가 저보고 웃었어요." 파에그는 운디네가 웃은 사실을 내게 계속해서 말했다. 자신이 운디네를 소환한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운디네가 웃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한 모습이었다. 원래 하급정령은 장난꾸러기들이라 잘 웃고 잘 웃는데 그것에 감동하다니 한심했다. 하급정령의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알면서도 파에그는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파에그는 운디네의 웃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흡수한 생명력을 전해받아 정령수련을 하는 방법에 주저하던 파에그는 운디네의 웃음을 보고난 이후로 하급정령사가 되기를 갈망했다. 내가 도움을 주려고 제안한 방법도 고민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수락했다. 파에그의 눈빛은 수련을 통해서 운디네의 웃음을 다시 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79 회] 24. 전환 엘프 소국의 영역근처에서 노예사냥을 하던 용병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사실은 곧바로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 알려졌다. 소피아 왕국에서 용병들은 크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입장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귀족들은 영지의 치안을 위해서 사병을 보유하고 있지만 대게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사병에게는 임금은 물론 훈련을 시켜주고, 무기와 방어구까지 지급해야만 한다. 전체적으로 사병 하나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돈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용병의 경우에는 필요할 때 계약을 통해서 사병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금을 이끼려 들거나 넉넉치 않은 귀족이 용병을 많이 애용한다. 영주는 최소한의 치안을 위한 사병만을 운영하다가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거나 치안에 문제가 발생할 때에만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다. 귀족과 용병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연합과의 전쟁에서 많은 용병들이 죽었다. 용병들의 수는 항상 풍부했기 때문에 제국에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용병은 아무리 죽고죽어도 넘쳐나는 자원이다. 용병의 수는 공급과 수요의 원칙에 따라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 하지만 새로운 엘프노예 제도에 의해서 상당수의 용병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엘프소국이 있는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역사상 용병에 의해서 전쟁의 결과가 좌우된 경우는 있어도 용병이 부족하여 치안에 문제가 생긴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카르시온 제국은 용병의 부족으로 문제가 하나 둘씩 붉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엘프노예 제도를 제시한 소피아 왕국의 루바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파라락"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가 분노를 참지못하고 보고있던 문서를 집어던졌다. 종이는 에드 주변에 흩어졌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귀족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용병들이 죽은 사실을 가지고 그러는게 아냐! 하찮은 용병들이 부족해서 우리 카르시온 제국의 치안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화가나는거야! 당신들은 왜 이런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은거야?" 에드의 말에 프리온 재상과 귀족들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가만히 있었다. 에드의 분노는 함께있는 귀족들도 이해하고 있었다. 에드가 던진 문서에는 제국에 용병들이 부족하여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었다. "설마 그렇게나 많은 용병들이 엘프사냥을 나설거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자신의 배를 불리기에 바빠서 생각하지 못했을거야. 솔직히 누굴 탓할일이 아니지. 나도 그중에 하나였으니 말이야. 안그래? 후후후" 프리온 재상의 말에 에드는 찹찹한 심정으로 대답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에드와 귀족들 모두가 자신들의 실수를 알고 있었다. 처음 엘프노예 제도로 인해서 너무도 많은 용병들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걱정이 되어 회의까지 하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않아서 용병들이 보내온 결과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많은 용병들이 이동한 만큼 그들이 잡아오는 엘프와 인간이 많았다. 엘프는 소수이지만 귀족들이 누구나 갖고 싶어했다. 잠깐이지만 엘프노예 붐까지 일어났었다. 엘프 소국에서 잡아온 인간은 노예가 되어 황제인 에드의 소유물이 되었고 절반은 귀족들에게 돌아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기쁨에 젖어 소피아 왕국의 루바인의 제안에 찬성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고 불행이 눈덩이가 굴러가며 커지듯 연쇄적으로 닥쳐왔다. 노예사냥을 하던 용병들이 엘프들의 공격에 모두 죽은 것이 시작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법길드의 도움을 받아서 직접 확인을 하였다. 마법길드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정말로 제국에 중요한 일이었기에 아무 단서도 붙이지않고 도움을 주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은 마법사가 용병들의 본거지를 담아온 마법수정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법수정구를 통해서 죽어있는 수만여명의 용병들 시체를 바라보며 에드를 비롯해 모든 귀족들이 구토를 하였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구토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에드는 수만여명에 달하는 용병들의 죽음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그동안 카르시온 제국은 용병의 부족으로 치안에 심각한 문제로 커져 있었다. 에드와 귀족들이 노예사냥으로 기뻐하는 상황에서 용병에 대한 보고가 계속 미루어져서 미리 조치를 취하지 못해 결국 지금에 이르러 늦은감이 많았다. 상인은 용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상인들이 영지와 영지를 이동하면서 물품을 운반해야 하는데 용병이 부족하여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영지와 영지를 이동하면서 상인은 무서운 몬스터와 야생동물 혹은 산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용병과 계약을 맺어 안전을 보장받는게 보통이다. 용병의 부족으로 상인의 발길이 묶여 카르시온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영주가 가뜩이나 부족한 사병을 활용해 상인을 보호할리 만무했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 카르시온 제국은 치안에 구멍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발전이 아닌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단순히 용병의 부족으로 생긴 일이라 하기엔 피해가 너무나 극심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용병의 수는 절대적으로 안정적이다. 하지만 일리시아 제국연합에서 발생한 용병들의 죽음과 겨우 회복한 용병의 수가 이번에 엘프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결국 현재 카르시온 제국의 용병들은 용병이라 부를 수 없을 존재가 대부분이다. 용병이라면 목숨이 오가는 전투를 수차례 겪은 존재들을 말하는데 지금은 그저 무늬만 용병들이 허다한 것이다. "재상 엘프 소국을 멸망시킬 방법은 전혀 없는건가?" 에드는 용병들을 죽인 엘프 소국의 짓이 괴씸하였다. 엘프 소국의 전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멸망시켜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지금의 악화된 상황이 모두 엘프 소국이 생겨나면서 빚어진 일로 생각되었다. "제국의 치안을 안정시키는데 신전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일년이나 소요되었습니다. 이제서야 겨우 안정되었는데 용병들 때문에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한 번만 더 이런일이 발생한다면 정말로 큰일입니다." "결국은 패배를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건가?" "죄송합니다. 폐하" 에드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삶의 의지를 버렸다. 에드의 나이만도 이제 50이 넘었다. 이제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황족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귀족들보다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이상 삶의 의지가 없었다. 괴씸한 엘프 소국을 공격하고 싶어도 제국에는 그러할 여력이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신전의 도움을 받는 사건 때문에 일정부분 신전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은 황권과 귀족들 그리고 신전이 어우러져 의견일치를 이루는게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카르시온 제국은 여러가지 상황으로 발전이 아닌 멸망의 길로 깊게 들어선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삶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계속해서 나쁜일만 겹치고 하는일마다 싶패하니 말이야. 더이상 황제로서 살아가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도 않아. 이제는 그저 쉬고싶을 따름이야. 재상이 알아서 황자들중에 똑똑한 녀석을 골라두도록 수고좀 해야겠어." "에드 황제폐하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분명 헤쳐나갈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재상의 충심은 알고있지만 더이상은 나도 무리야."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의 약한 모습에 왠지 슬픔이 밀려왔다. 에드와 프리온은 뗄레야 뗄수없는 관계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중요사항은 프리온 재상의 의견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지금의 결과가 모두 에드의 탓만은 아니었다. 귀족들도 황제의 약한 모습에 우울하였다. 황좌의 양도는 아무리 정당성이 확보되어도 피바람을 몰고온다. 다행히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다행일 뿐이다. 그저 귀족들끼리 여러가지 암투가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귀족들은 에드 황제의 발언에 크게 놀랐다. 황좌를 물려줌으로 해서 귀족들 목숨이 당분간 파리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황제의 자손이 많음은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실이다. 수많은 귀족가의 연인들이 황제의 주변에서 하녀로 생활하는데 황제도 남자인만큼 성은을 입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대로 카르시온 제국의 황자는 10여명 가량이었다. 그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들중에 가장 똑똑한 황자를 뽑아 황좌를 넘겨주어야 반란이 발생하지 않는다. 똑똑하지 않은 황자에게 황좌를 넘겨주면 분명 똑똑한 황자가 반란을 일으킨다. 설사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해도 귀족들이 그대로 두지를 않는다. 그런 권력다툼으로 반란을 시도하거나 죽은 황자만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일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대륙을 모두 지배할 수 있는 꿈을 꾸었었지. 만약 일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대륙을 지배했을거야.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에드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일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대륙을 제패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욕망을 자제하며 꿈을 이루기위해 열심히 노력했. 이제와 후회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잠깐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치안도 회복되고 발전을 이룩할 것입니다." "재상 위로할 필요없소. 아무리 내가 세상 물정이 어두워도 지금의 치안이 쉽게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있소. 뛰어난 용병들이 일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죽었고 그나마 이류에 속한 용병들이 이번에 엘프들에게 죽었으니 해결방법이 없을테지. 용병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닐테니 결국 수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린데 나는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그래서 황좌를 다음대 황제에게 넘겨주기로 했으니까 재상이 내 뜻을 따라주기 바래." 프리온 재상은 슬픔으로 인해 에드의 말을 듣고쉽지 않았다. 엄연히 신분은 다르지만 같은 페이시온 가문이기도 하고, 함께한 시간을 따지자면 거의 일평생이었다. 깨가 수십낸째 쏟아내는 부부라 할지라도 에드나 프리온처럼 함께한 시간이 많은 경우에 비교하지 못할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백성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귀족들은 어느정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단지 귀족들은 제국이 멸망해도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었다. 사병이 있고 노예가 있다면 다른 나라가 침략한다해도 그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멸망의 길을 걷는 가장큰 이유는 주변의 영향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진행된다면 카르시온 제국의 치안이 안정될 것이지만 그것을 누가 두고보겠는가 싶었다. 주변국에서 어떻게든 멸망시키려고 온갖 음해를 벌일 것이다. 일단 적국인 일리시아 제국이 그럴 것이고 둘 째로 소피아 왕국 마지막으로 소피아 왕국도 마찬가지이다. ------ 파에그가 소환한 운디네가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움직이고 있었다. 운디네는 귀여운 얼굴을 가진 날개달린 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요정과 비슷하다. "생명력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으니까 오늘 수련은 이것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자구." 파에그는 힘들어 하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정령을 소환한다면 크게 피로하지 않다. 단지 정신적으로 피로한 부분은 해결되지 않는다. '며칠만 계속 수련한다면 하급정령사는 문제없겠어.' 나는 파에그의 정령수련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지난 며칠동안 반나절을 계속 파에그의 정령수련을 도왔다. 정령사로서 정령을 오랜시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포그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계속 전해주어 수련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운디네를 반나절이나 소환할 수 있는 타포그의 잎사귀 양은 한 주먹이면 충분했다. 파에그가 생명력을 좀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면 하루종일 소환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결과가 미미한 수준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생명력으로 운디네를 소환하여 물리력을 발휘하는 수련이 한참 이루어지고 있었다. "후우우우 후우우우" 파에그가 숨을 헐떡이며 피로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는 치료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파에그의 육체에 작은 무리만 주었을 뿐이다. 아무리 운디네라도 반나절이나 정령을 소환한 파에그의 몸에 영향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파에그의 몸은 겉으로 보기에 정상이지만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과도한 생명력의 사용으로 몸속에 마나가 불균형하고 근육도 약간 비정상으로 뭉쳐져 있었다. 며칠간 쉴세없이 오전이면 정령수련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물의 정령으로 수련했기에 이정도였다. '엘레스트라 파에그를 치료해줘.' 왼손에 타포그의 잎사귀를 한 움큼 쥐고 마음속으로 물의 최상급정령 엘레스트라를 내 몸속에 소환하여 파에그를 치료해 주었다. 엘레스트라는 소환되어 파에그를 치료해주는 즉시 정령으로 되돌아갔다. 최상급정령을 소환하는데 필요한 생명력은 말로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고맙습니다. 카인님" "수고했어." "수고는여 카인님이 도와주셔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타포그는 숨을 헐떡거리다 내가 몸속에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치료해 준 덕분으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파에그는 내가 발휘하는 치료술을 그저 중급정령을 소환하여 치료해 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사실을 알려줄 필요성이 없다 생각하여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스르륵 왼손을 펴자 매마른 잎사귀의 가루가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생명력을 모두 흡수당해서 완전히 가루상태가 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숲에 들어가 모든 식물들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최상급정령을 소환하고 대화도 나눠보고 싶었다. 예전처럼 최상급정령을 아무런 어려움없이 소환할 때가 그리웠다. 집주변에 자라던 타포그는 모두 죽었다. 엘프 소국을 괴롭히는 용병들도 없는 마당에 타포그가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에 또 필요하게 되면 그때 재배하면 된다는 생각에 더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파에그가 약간 아쉬워 했지만 정령수련에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카인님" 부아크가 내 집에 방문하였다. 내가 마을 사람들과 대화가 거의 없는편이라 부아크의 방문은 기분이 좋았다. "어서오세요. 무척 바쁘실텐데 직접 찾아주시다니 고맙습니다." "바쁘긴요? 이제는 할 일이 없어서 패로이 숲의 외곽을 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패로이 숲은 수만여명이 살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큰 숲이다. 그만큼 엘프도 많이 살기 때문에 숲을 지키기 위해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 하지만 엘프 소국이 생겨난 이후로 인간 정령사들이 신경쓰지 못해서 엘프들이 고생을 해야했다. 제3자가 보기에 엘프와 인간 정령사의 관계가 주인과 하인처럼 생각되지만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엘프는 정령사 마을에 인간이 태어나면 장로가 직접 방문하여 자연의 축복을 내리는 번거로움을 자처한다. 또한 엘프들이 주기적으로 들려서 정령술을 전수한다. 정령사는 그 대가로 엘프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하며 그들이 생활하는 숲의 외곽을 보호한다. 숲의 내부는 엘프가 직접 보호하지만 외곽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엘프장로가 직접 방문하여 자연의 축복을 내려주는 것만으로도 정령사들은 평생 엘프를 도와줄 가치가 있었다. 자연의 축복을 받지 않는 정령사의 경우는 평생이 가도록 운이좋아 중급정령사로서 생활이 끝인 반면에 축복을 받으면 상급까지도 노력의 여하에 따라 가능하다. 물론 같은 등급의 정령사라도 자연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가 뛰어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무슨일로 방문하신건지..." 부아크와 잡담을 나누다가 그가 방문한 이유를 물었다. 내 말을 듣고서야 부아크는 방문한 목적을 생각하고 텃밭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번에 건네준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 때문에 들렸습니다." "아참! 저도 잊고 있었네요. 요즘 파에그의 정령수련을 돕다보니 깜빡 했습니다. 제가 방문해야 되는데 이렇게 찾아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부아크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텃밭의 한쪽 귀퉁이에서 자라고있는 묘목을 바라보았다. 사람 허리까지의 크기로 자라 있었다. 새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이라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을줄 알았지만 정체가 밝혀진 나무는 너무나 평범했다. 부아크는 무척 기대하고 있어서 말하기가 조금 미안했다. 나는 부아크를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의 곁으로 데려갔다. 패로이 숲에서 가장 흔하게 널린 카무가 허리만큼 자라 있었다. 엘프 소국에 생활하는 인간들도 카무를 베어내어 땔감이나 목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흔해서 인간들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나무가 필요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엘프들은 카무를 숲에서 베어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더구나 카무는 자라는데 필요한 시간이 짧고 확산도 빨라서 숲이 우거지는데 큰 역할을 한다. "......" 부아크는 자신을 카무의 묘목앞에 데려온 이유를 알지 못해서 나를 뻔히 바라보았다. 텃밭에는 엘프만이 재배할 수 있는 귀한 약초들이 즐비한데 카무의 묘목이 있는 것은 무척 특이했다. 아니 카무의 묘목만에 평범해서 튀는 것이다. "설마" 부아크는 카무의 묘목앞에서 아무말 하지않는 나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나와 카무의 묘목을 번갈이 보더니만 결국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신비스러운 기분으로 찾아왔건만 평범한 결과에 허탈한 마음인 것이다. "저도 씨앗이 자라서 카무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카무는 뿌리로 퍼지지 열매도 열리지 않아서 씨앗으로 퍼지지 않으니까요. 처음에는 저도 믿지를 못해서 카무의 뿌리를 파보기까지 했습니다. 부아크님도 직접 확인해보세요." 부아크의 반응은 얼마전 나와 겪은 모습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부아크는 아무런 도구도 빌리지 않고서 직접 손으로 카무의 묘목 주위를 조심스럽게 파냈다. 텃밭이라 땅이 골라져 있어서 파내는게 어렵지 않았다. 파에그가 항상 텃밭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 때문에 작은 돌 하나없이 깨끗했다. 부아크의 손이 한참 움직이더니 결국 카무의 뿌리가 들어났다. 가장 큰 뿌리를 따라서 흙을 파내니 결국 부아크가 건네준 생명수 나무의 씨앗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일그러진 모습이지만 오랜시간 보물처럼 생각하며 간직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리 없었다. 부아크는 내심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큰 뿌리의 끝에 씨앗이 엄연히 달려 있어서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은 숲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카무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카무였다니!" "아마도 엘프분들은 알고 계셨을겁니다. 제가 알기로 생명수 나무는 나무의 종류와 상관없이 엘프들이 수천년을 보살피며 탄생한 것이죠. 그러니 그 씨앗이 생명수 나무의 정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생명수 나무가 본래 무엇인지는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나는 생명수 나무에 대해서 엘프에 버금갈 정도로 많이 알고있다. 생명수 나무를 엔트로 진화시킨 경험도 있었고 그 덕분에 살아났기 때문이다. 부아크는 내 말이 정말인지 반복해서 물었다. 뭔가 특별한 것을 바란 부아크가 안되보였다. "카인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뻔 했네요. 고맙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아크는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텃밭에는 카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쓰러져 있었다. 어차피 텃밭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뽑아내야만 했던 일이었다. 엘프의 약초들 곁에 있기에는 정말로 초라한 나무이다. '오늘따라 덥네.' 일광욕을 즐기긴 하지만 오전내내 파에그와 정령수련 때문에 마당에 있었고, 오후에는 부아크와 카무에 대해서 대화하느라 너무나 많이 햇볕을 받아서 더웠다. 많이 덥지는 않았지만 좀더 시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바람의 정령 실프를 소환해서 시원한 기분을...' 예전에 정령을 소환하던 생각을 떠올리다가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예전처럼 정령을 아무때나 소환하지 못하지만 정령을 소환하지 못할 방법이 없는게 아니었다. 식물의 생명력을 뽑아서 사용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두 눈 가득히 바닥에 널브러져 뿌리를 드러내고 있는 카무의 묘목이 보였다. 굳이 방안에 있는 타포그 잎사귀의 생명력을 흡수할 필요도 없었다. 바람의 하급정령 실프는 운디네 보다도 적은 생명력으로도 충분히 소환이 가능하다. '실프야 시원하게 해다오.' 바닥에 나뒹구는 카무의 묘목을 왼손에 쥐어들고 실프를 소환하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계속 바람이 불기 위해서는 조금씩 생명력을 흡수하여 실프를 유지해야 했다. 바람의 정령은 공기 자체가 매개체라 소환하는게 무척 쉬웠다. 바람의 정령사들은 하급정령사로 빠르게 도약한다. 하지만 중급정령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하급정령의 경우 다른 하급정령에 비해 쉽게 소환되고 유지되지만 바람의 중급정령은 매개체를 통한 소환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계열의 하급정령사가 중급정령사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 두 배 이상으로 필요하다. 휘이익 휘이이 시월할 정도의 바람이 계속 불어와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정령이 일으킨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약간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을 맞다가 어느순간 실프가 정령의 세계로 돌아갔다. 왼손에 들고있던 카무의 묘목은 더이상 살아있지 않은 죽은 묘목에 불과했다. 바짝 마른 가지로 변해서 땔감으로 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더구나 완전히 말라비틀어져서 장시간 타오를 것이다. 카무의 묘목을 두동강 내어서 땔감이 쌓인 곳에 두었다. '뭐지?' 평소와 다름없이 텃밭의 약초들을 위해서 생명력을 제어하는데 무엇인가 몸속에서 느껴졌다. 나의 몸속에서 아주 조금이지만 생명력이 존재해 있음이 느껴졌다. 생명력에 대한 느낌이라 잘못 느껴질 가능성도 없었다. '갑자기 생명력이 왜 생겨났지?' 나에겐 생명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정령사들 모두가 그렇듯 열심히 수련을 통해서 쌓여진 마나가 있을 뿐이다. 내 경우에는 엘프만이 재배하는 약초를 섭취해 마나가 빠르게 쌓이고 있지만 앞으로 10년은 지나야 중급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수준이다. 차라리 마나가 급증했다면 이해하지만 생명력이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오늘 평소와 다른일이 뭐가 있었지? 파에그와 정령수련한 일? 부아크님을 만난일? 도대체 무슨일이지?' 고민을 하는 동안에 몸속에 10년에 해당하는 생명력이 채워지더니 더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생명력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음이 안정시키고 곧바로 10년의 생명력을 살펴보았다. 사용하는데 무리는 없으리라 판단되지만 정체가 불분명한 생명력이었다. '설마 과실?' 바닥에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에서 카무의 묘목으로 자라나 뽑혀진 텃밭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방금전 실프를 소환하기 위해서 카무의 묘목의 생명력을 흡수했던 행동이 머리를 스쳤다. 지금은 땔감으로 쓰여지기 알맞은 형태로 두동강이 난 상태였다. 그것도 다시는 살려낼 수 없는 나무로 말이다. 정황을 살펴보면 지금 몸속에 남아있는 생명력은 카무의 묘목에게서 흡수한 것이 분명했다. 혹시 다른 카무도 그럴까 싶어서 근처 숲으로 숨이 헐떡이도록 달려갔다. 그리고 카무를 찾아 생명력을 흡수해 보았다. 흡수된 생명력은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생명수 나무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런거야. 분명해.' 한참을 고민끝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식물의 생명력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생명수 나무의 경우는 예외였다. 나는 텃밭에서 자라난 카무가 보통의 카무와 다른 생명력을 생성해 자라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모든 사실을 깨닫고서 카무의 묘목에게서 생명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흡수한 사실이 후회되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생명력을 제어해서 크게 자라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키워서 흡수하거나 키워가면서 조금씩 흡수하면 예전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 때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0 회] 25. 지도자 소피아 왕국은 카르시온 제국의 동지역이 개척되어 생활마법의 영향으로 빠르게 발전되어서 세워진 나라이다. 또한 카르시온 제국과의 빈번한 왕래를 바탕으로 발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독립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고 있었다. 소피아 왕국은 길드연합체가 많지 않았다. 독립을 기점으로 길드들이 카르시온 제국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용병길드 조차도 필요에 의해서 어쩔수없이 생겨난 신생 길드였다. 하지만 부정적인 길드들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 치안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소피아 왕국을 바라보면 하나의 왕국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깊은 속을 살펴보면 부실 그 자체였다. 모든게 법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합심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귀족들의 억압이 강해지면 곧바로 반발이 발생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좌가 바뀌는 상황 때문에 소피아 왕국도 영향을 받았다. 소피아 왕국을 이끄는 귀족가는 세 가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대귀족 가문이었던 파도루, 라다르 그리고 루아카스 가문이다. 왕이 선출된다면 세 가문중에서 나와야만 하는게 당연하다. 왕을 선출하는데 있어서 결국 내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파도루 가문의 루바인이 가장 유력하여 나머지를 내리누리고 있어서 큰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루바인이 소피아 왕국의 왕으로 결정되는 순간을 기점으로 여러가지 상황이 악화되었다. 카르시온 제국이 쇠퇴하는 것이야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따라 소피아 왕국도 함께 카르시온 제국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소피아 왕국도 용병들이 엘프들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본래부터 많은 용병들이 없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분야가 귀족들의 통제가 아니면 자율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소피아 왕국의 백성들은 대부분이 개척자들 출신이라 지금의 상황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착하게 되었고 땅도 있으며 굶어죽지도 않는다. 더구나 소피아 왕국 귀족들의 대부분이 카르시온 제국에서 몰락귀족이었던 경우가 많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는 귀족이 많았다. 소피아 왕국의 발전은 그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카르시온 제국과의 왕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평생 이대로 지내야 한다. 귀족들은 무엇인가 이룩하고 싶어한다. 왕이 된 루바인은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에게 엘프노예 제도에 대해서도 건의했던 것이다. "지금 이대로 가만있자고?" 소피아 왕국의 왕이 된 루바인이 라다르 가문의 가주 리온과 루아카스 가문의 가주 제노를 앞에두고 말했다. 루바인의 말을 듣고있는 리온과 제노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같은 귀족이었는데 루바인이 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왕이 되었으면 만족해야 되는거 아니야? 왜 만족하지 못하는거야?" 리온이 다혈질 성격을 자랑이라도 하는듯 루바인에게 말했다. 리온의 말을 듣는 루바인도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왕이 되었으면 자신에게 존칭이라도 써줘야 하건만 언제나 반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존칭을 써달라고 말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들과 함께 지금의 소피아 왕국의 개척에 참여했으며 반란도 함께 일으킨 피보다 진한 동지였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일국의 왕이 되었으면 행복하지 않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위험하게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를 찾아가서 엘프노예 제도를 만들기까지 하고 말이야. 에드 황제가 죽였으면 어쩔뻔 했어? 이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건데?" 리온이 루바인의 말을 끊고서 한참을 조리있게 이야기했다. 리온은 부와 권력에 욕심이 많지만 루바인에 비하면 감히 비교할바가 아니었다. 루바인은 왕이 되었어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리온은 그 모습이 못마땅했다. 자신이었다면 왕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평생 행복했을텐데 말이다. 물론 그것은 가지지 못한 리온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루바인 리온의 말도 틀린말은 아니야. 우리 왕국의 용병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용병들만큼 죽은 것은 아니지만 피해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카르시온 제국과 왕래도 없어서 발전이 멈추었고 이대로 수십년이 지속될지도 몰라. 최소한 지금은 무엇을 목표로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루바인 자네가 우리의 뜻에따라 당분간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어." 리온에 이어 제노도 리온과 약간 다른 의견이었지만 루바인의 지나친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루바인은 한 명도 아닌 두 명이 모두 말리자 자신의 행동이 지나침을 인정하였다. 소피아 왕국의 상황으로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그저 이대로 수년이 흘러서야 왕국으로서 자리를 잡을수 있으리라. ------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상태에서 가만있을 수 없었다. 패로이 숲의 엘프마을을 찾아가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최대한 많이 얻어냈다. 엘프는 숲을 사랑하는 만큼 희귀한 씨앗을 모두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씨앗을 얻어가면서 엘프들이 얻어가는 이유를 물어볼 줄 알았지만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다. 인간 정령사들에겐 나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지만 어느정도 엘프들 사이에서는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배려한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 때 최상급정령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엘라임까지 만난 존재이니 말이다. '뭐라고 말할지 난감했는데 묻지 않아서 다행이야.' 엘프들이 씨앗을 어떠한 용도로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엘프들은 나에 대해서 어느정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지도자로 뽑아놓고 아무런 결정권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엘프 소국의 영역에서 지내는 인간들은 나를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왕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그저 상징적인 존재임을 알지 못한다. 엘프와 정령사들 모두가 나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르는 사실에 대해서 신비감을 갖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패로이 숲 이외에도 천년 이상된 생명수 나무가 있다는 엘프마을을 찾아가 과실을 최대한 많이 얻었다. 나무를 많이 키워서 생명력을 모두 흡수할 생각이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지못할 일이 없다. 더구나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이라 무척 마음에 들었다. "카인님 돌아오셨군요." 100여개가 넘는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소중히 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파에그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파에그의 정령수련을 도와주어야 하지만 당장은 나의 일부터 처리하기로 하였다. 파에그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어쩔수 없다. "파에그 정령수련을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그때부터 다시 도와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동안 푹 쉬도록 해." "이제 도와주실 필요 없어요." 파에그는 웃으며 도움을 거절하였다. 씨앗을 얻기위해 한 동안 집을 비웠던 일로 파에그가 섭섭해서 그러는줄 알았다. 하지만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섭섭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왜그래? 혼자 하려고? 함께 하다보면 성과가 있을거야. 그러니 며칠후에 또다시 함께 노력해 보자." "충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도와주실 필요 없어요. 이제는 혼자서도 운디네를 일분이 넘도록 소환할 수 있거든요. 약하지만 물리력도 보여줄 수 있어요." "정말이야? 정말 축하해! 드디어 성공했구나!" 파에그의 성공이 왠지 나의 성공 같았다. 떠나기 전까지 매일 정령수련을 도왔는데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운디네를 반나절이나 소환하여 수련했는데 효과가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일분이긴 하지만 물의 하급정령사로서 충분히 인정받을 수준이었다. "내일부터는 운디네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들과 정령마법을 가르쳐주세요." "그러도록 하마. 정말로 재미있을거야." 이제는 운디네를 이용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배울 차례이다. 굳이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알면 좀더 편리하다. 가장 큰 용도는 역시나 치료술이지만 효율적인 방법을 그저 충고로서 알려줄 뿐이다. 불의 정령과 같이 파괴력이 강한 정령은 용도가 한정되어 있지만 물의 정령은 무궁무진하다. 정령마법들을 살펴보면 물의 하급정령 운디네를 이용한 마법이 가장 많다. 독이나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리스토어 헬스(Restore Health), 물속에서 호흡이 가능하게 하는 브리딩(Breathing),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워킹(Walking), 워킹과 반대로 물의 부력을 없애서 목표를 가라앉히는 싱크(Sink), 시전자의 주위에 물의 장벽이나 보호막을 생성하는 스크린(Screen), 물을 정화시키는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힐링(Healing)이 있다. 특히 힐링은 처녀가 사용하면 다섯 배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유리한 정령마법이다. 파에그는 오직 하급정령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정령마법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파에그는 운디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듣고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급정령 운디네가 그렇게 많은 용도로 사용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정령마법을 제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용도는 많았다. 빨래와 목욕도 가능해서 여행하는데 정말 편리하다.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이 100여개가 넘기 때문에 텃밭에 모두 심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심으면 매일같이 생명력을 제어하여 키워야 하기 때문에 불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이 외곽지라 바로 옆에 나무를 키운다고 부아크에게 허락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도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나는 괴짜에 속한 편이었다. 엘프 소국의 지도자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의 입장에서 내가 집에만 처박혀 있을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60년도 혼자서 지낸 경험도 있기 때문에 외로움을 견뎌내는게 어렵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괴짜인 내 행동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벌리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갖지 않았다. 하루의 일과과 약간 바뀌었다. 100여개의 씨앗을 심는 작업은 아주 간단했다. 집에서 가까우며 숲과 인접한 장소에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는 생명력을 제어하여 다음날 곧바로 묘목이 되도록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묘목을 가져다 심은줄 착각할 것이다. 어차피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아는 상황이라 마음껏 발휘해서 무럭무럭 키웠다. "많은 사람을 치료해야 되는 상황이라면 상처의 크기가 작은경우 정령마법을 주로 이용해야 되겠지? 그래야 마나도 아낄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정령마법을 너무 믿어서는 곤란해. 가끔은 치료가 잘못될 수도 있거든. 예를들어 부러진 팔을 곧바로 정령마법을 이용해 치료하면 엉뚱한 뼈가 붙어버려 평생 병신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 그래서 상처의 근원을 알지 못하면 무조건 운디네를 직접 소환해서 치료해야돼." "저는 정령마법이 만능인줄 알았더니 잘못 사용하면 큰일이군요." 나무의 밑둥에 타포그의 잎사귀를 거름처럼 내려놓으며 파에그에게 물의 하급정령사로서 알아야 될 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파에그는 내 일을 도우면서 그런 충고들을 듣고있는 것이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서 체계적으로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알려줄 뿐이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타포그 잎사귀의 생명력을 나무에게 전해주며 생각을 전했다. 생명력을 제어하여 타포그의 생명력으로 나무를 키우는 것이다. 주변에는 100여 그루의 나무가 크게 자라고 있었고 각각의 나무밑둥에는 타포그의 잎사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매일같이 타포그의 잎사귀에서 생명력을 흡수하여 나무가 빨리 자라도록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무들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을 원했다. 나무가 최대한 자랄수 있는 능력은 한정적이다. 물론 엘프들은 보통의 나무를 가꾸어 생명수 나무로 만들지만 내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 '며칠만 지나면 더이상 자라지 않을 것 같은데.' 100여 그루의 나무 때문에 나의 집은 항상 그늘이었다. 근처 집들도 그늘이어서 불만이 있었지만 며칠후 베어버린다는 말에 모두 참고 있었다. 얻어온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은 종류가 같지 않았다. 카무가 가장 많았고 일부는 특이해서 종류를 알수없는 나무도 있었다. 방안에 쌓여있던 타포그의 잎사귀는 결국 일부분이 파에그의 정령수련에 쓰였고 나머지는 모두 100여 그루의 나무를 키우는데 사용되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재배하여 나무를 키우는데 사용했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늦게 가는 것 같았다. '모두 흡수하면 어느정도의 생명력일까?' 100여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 너무나 기뻤다. 타포그도 자신이 하급정령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그래서 내가 나무를 가꾸는데도 행복해하며 도와주었다. 지금의 그가 있도록 내가 도와주었으니 보답하려는 것이다. '생명력이 다시 많아지면 가장 먼저 최상급정령들과 대화를 나눠봐야지. 그 다음에 무엇을 하지?' 막상 다시금 생명력이 생겨난다고 생각하니 할일이 많지 않았다. 최상급정령과 만나면 기쁘겠지만 더이상 무엇을 한단 말인가. 엘프 소국이 위험하기라도 한다면 나가서 멋지게 한바탕 하겠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조용하다. 반대로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에서 엘프 소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왔다. 평소 일미터 가까이 자라던 나무가 그 자리에서 성장을 멈춘 것이다. 나무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하늘높이 들어야 했다. 100여 그루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였다. '흡수되어라. 흡수되어라.' 성장이 끝난 나무에 양손을 가져가 만지면서 생명력을 흡수하였다.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몸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평범한 식물의 생명력처럼 흩어지지 않고 몸을 구서구석 누비며 융합이 되고 있었다. "생명력을 다시 되찾다니!" 800년 정도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나서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 엔트가 전해준 800년의 생명력은 내가 가질수 있는 기준과 같은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생명력을 잃은 나무들은 배짝 말라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아직 절반도 흡수하지 못했는데.' 나무들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도 800년의 생명력이 모두 채워진 사실에 놀랐다. 나머지 나무들까지 생명력을 흡수한다면 내가 괴물이 되는거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생명력은 무척 안전하기 때문에 모두 흡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많은 생명력을 가져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조금 정도는 파에그에게 주어야지.' 너무도 많은 생명력이다보니 아주 조금을 선심쓰듯 파에그에게 주기로 하였다. 일단 내게 융합된 생명력은 전해줄 수 없다. 흡수하자마자 곧바로 파에그에게 전해줘야 그의 몸에 융합될 것이다. 파에그가 많은 생명력을 가져도 물의 정령사이니 누군가에게 해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파에그 할말이 있으니까 이리와!" "네, 카인님"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파에그가 쪼르르 달려왔다. 파에그는 지금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임을 알기 때문에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파에그는 나무를 키우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생명력을 가질 약간의 권리가 있었다. "손 이리줘봐." 파에그가 손을 내밀자 내가 잡고서 약간의 생명력을 전해준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도와준 것만으로 고맙다며 사양했지만 지금 흡수한 생명력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양이라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뜻을 밝혔다. "생명력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었으니까 앞으로 좋은 일에 사용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카인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께요. 카인님은 저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잖아요." 파에그의 말을 듣고서 기분이 좋았다. 정령사들끼리는 스승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정령사들은 자신의 스승을 엘프로 삼는다. 설사 대부분의 정령술을 아버지에게 배워도 엘프에게서 단 하루만 배워도 그 엘프를 스승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조화로운 엘프에게 배운 정령술을 진정한 정령술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모두 같은 정령술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즐거운 기분으로 60년 가량의 생명력을 파에그에게 전해주었다. 60년은 평범한 사람의 수명에 해당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전해준 것이다. 정령사의 경우는 평범한 사람의 두 배가 약간넘는 수명을 갖지만 말이다. 물론 인간 정령사도 1200년의 수명을 가진 엘프와 비교할 상대는 아니다. 나는 생명력을 오래 다루다보니 일년의 생명력에 해당하는 만큼을 분류할 수 있는 수준이다. 파에그에게 60년의 생명력을 전해주고 나머지 나무들까지 모든 생명력을 흡수하였다. 마지막 나무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나자 몸속에 있는 생명력이 어느정도인지 추측이 되지 않았다. 최소한 수천년이고 많다면 일만년에 해당하는 생명력이었다. "카인님 이것좀 보세요." 파에그는 전해준 생명력으로 운디네를 소환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공기속에는 약간의 수분이 함축되어 있어서 운디네를 소환하는데 장소에 제약이 거의 없다. 물론 물이 있다면 좀더 손쉽게 소환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파에그는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운디네로 만족할거야? 이제는 중급정령 샐리스트까지 소환할 수 있을걸." "정말요?" 파에그는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였다. 60년의 생명력이지만 중급정령을 소환하는데 어렵지 않다. 만약 60년 가량의 마나였다면 어려웠을 것이지만 생명력은 순수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파에그 너는 뛰어난 물의 정령사가 될거야." 운디네를 소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중급정령인 샐리스트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시간을 과연 얼마나 누려보겠는가. 생명수 나무의 과실을 먹었던 부아크나 부아크의 손자 토니가 파에그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었다. 며칠후에는 내가 생명력을 흡수한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다행히 세상천지에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으니 욕심이 많아도 얻지 못한다. 설사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엘프마을에서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모두 얻어왔기 때문에 다시 얻으려면 과실이 열리는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내가 도와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엘프들이 앞으로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인간에게 건네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멀쩡한 나무를 키워서 생명력을 흡수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나에게 분노하겠지만 감히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지 앞으로 나같은 경우가 다시는 없도록 어떠한 조치를 취하리라.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1 회] 25. 지도자 수만여명의 용병들을 학살한 엘프 소국의 전력에 대한 소문이 대륙에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모두가 카르시온 제국이 무슨 조치를 취할 줄 알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카르시온 제국의 전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지기 시작했다. 카르시온 제국은 일리시아 제국연합과의 전쟁 후유증과 소피아 왕국의 독립 그리고 엘프 소국의 영향으로 치안을 유지시키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강력했던 카르시온 제국의 약한 모습은 더이상 대륙에서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소피아 왕국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에 영지를 갖고있는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곧바로 엘프 소국의 영역이니 말이다. 엘프 소국으로 도주하는 영지민까지 있으니 난감한 지경이었다. 병사들을 파견하여 영지민을 잡아오고 싶지만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 더구나 위험한 제국의 남쪽 끝에 영지를 갖고있는 귀족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대부분 몰락귀족들이라 카르시온 제국의 도움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자 영지민들과 스스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가 영지민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영지민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손해보는 것은 영주이다. 엘프 소국 때문에 영지민들의 의견을 하나 둘 씩 수용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이 엘프 소국에 대해 조치를 취해주지 않자 엘프 소국의 사람들이 영지를 자주 드나드는 상황까지 맞이하였다. 엘프 소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뒤늦게 필요로하는 물품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다. 생활물품에서부터 꼭 필요한 농기구까지 말이다. 엘프 소국은 숲이 많은 지역이라 자체적으로 모든 물품을 자급자족 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엘프 소국에서는 신분에 차별을 받지도 않고 자유도 있지만 자연을 함부로 파괴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용병들의 학살사건 이후로 엘프 소국의 몇몇 사람들이 용감하게 북상하여 카르시온 제국의 지역에서 필요한 물품을 가득 구입하여 다시 돌아갔다. 엘프 소국의 근처 영주는 감히 엘프 소국의 사람을 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엘프들이 찾아와 복수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보호해 주지도 않고 무서운 적은 바로 코앞에 있으니 아주 난감한 것이다. 엘프 소국의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서 카르시온 제국의 영역으로 자주 드나들다 보니 결국에는 거래가 갈수록 늘어만갔다. 영주가 처음에는 엘프 소국의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잡아들여야 할지를 두고 무척 고민했다. 하지만 곧이어 영지에서 그들이 구입해가는 물품들을 바라보며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엘프 소국의 사람들이 영지에서 가장 많이 구입하는 물건은 역시 농기구였다. 농기구는 의외로 가격이 높은 물건이었다. 약간 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금속을 제련시켜 만드는 큰 대장간이 있어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래는 대부분이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다. 엘프 소국에서는 세금이 없는 지역이라 디글 농사가 흉년이어도 남아돌고 있었다. 엘프 소국의 사람들은 디글을 바리바리 싸들고 엘프 소국의 영역에서 가장 가까운 카르시온 제국의 영지로 찾아가 필요한 물건을 넉넉하게 구입하였다. 사실 영주들은 엘프 소국의 사람들이 방문할 때마다 초긴장 상태였다. 잘못 밉보였다가 엘프 소국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엄청난 분량의 디글이 엘프 소국의 인근 영지에 풍부하게 되었고 그것은 자동적으로 디글이 부족한 북쪽으로 이동되었다. 시장원리에 따라 엘프 소국에 필요한 물품은 영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든 구하였다. 서로를 풍족하게 해주는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물론 영주로서는 반란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어서 위험한 관계이지만 말이다. 엘프 소국의 인근에 있는 영주들은 부의 축적을 이루게 되었다. 더이상 엘프 소국은 위험스런 존재가 아니었다. 영지를 살찌우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영지민들이 행복한 엘프 소국으로 모두 도망갈 줄 알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일부 영지민들만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고 즐거웠다. 사람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부류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더 많다. 영지민들은 엘프 소국에 비해서 불행할지 몰라도 굳이 위험하게 모험을 하고싶지 않았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카르시온 제국의 최남단 영주는 몰락귀족이 대부분이라 심한 억압도 없어왔다. 그렇다고 영주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일약 부의 축적을 이룬 영주들은 두 가지의 선택을 보여주고 있었다. 언제 엘프 소국에게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수도 말린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당연히 영지는 다른이에게 맡겨버리고 말이다. 영지가 영주의 대리로 운영하다보니 더욱더 엘프 소국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일이 계속되어 이제는 엘프 소국의 영역에 인근 영지가 슬며시 흡수되고 있었다. 몰락귀족의 영지는 하다못해 기사와 병사도 없었다. 마을 영지민들을 수시로 모집하여 병사로 사용할 뿐이다. 그러니 영주의 대리가 운영하는 영지가 시간이 지날수록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수도 말린으로 이사한 몰락귀족은 영지를 잃어버려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축적한 부로 새로운 영지를 구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카르시온 제국에서 도와주지 않아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떳떳할 수 있었다. 엘프 소국의 역향은 계속 북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재할 그 무엇도 없었다. 엘프 소국의 사람중에 일부가 해서는 안될 짓도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경우 정령사들이 제재를 가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정령사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그들이 할일은 무척 많았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에 엘프가 직접적으로 나설 이유도 없으니 잘못하면 엘프 소국은 인간들 스스로 무법지대로 만들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얻게되어 기쁨을 감출수 없었다. 먼저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을 모두 소환하여 오랜만에 대화를 나눴다. 파에그는 자신이 최상급정령을 만난 사실에 감격하였다. 최상급정령에 비하면 하급정령은 어린아이 수준이다. 파에그는 부아크를 찾아가 자신이 하급정령사가 된 사실을 모두 밝혔다. 또한 60년의 생명력을 얻게된 배경에 대해서도 말해주어 부아크를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곧바로 부아크와 마을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있는 정령사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정말로 원래의 능력을 회복하였나요?" 부아크가 찾아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아크 곁에는 스트라, 엘리나 그리고 마샤까지 함께 있었다. '모두 나와있을래?' '네, 주인님' 마음속으로 최상급정령들을 부르자 곧이어 방안에 소환되었다. 보통 정령은 나타나기 전에 정령의 기운이 나타나는데 내가 소환한 최상급정령들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어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세상에 샐레아나님이시잖아." 부아크는 불의 상급정령사라 불의 최상급정령 샐레아나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스트라, 엘리나 그리고 마샤는 중급정령사라 뒤늦게 부아크의 말을 듣고서 알게 되었다. "부아크님 저분이 샐레아님이에요?" "부아크님 정말이에요? 저는 샐레아님을 처음봐요." 모두들 최상급정령을 앞에두고 만남이 영광스럽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뿌듯한 마음이었다. 예전에는 항상 느껴왔던 것이라 아무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정령들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위의 시선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얼마전까지 평범하게 지내다가 다시 많은 관심을 받으니까 진정한 내가 된 느낌이었다. '모두들 조용히 하겠니?' 불의 최상급정령 샐레아나가 정신없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네 명에게 생각을 전달했다. 평소 정령들은 생각을 전하는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한다. "샐레아님의 기분이 상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그럴 것까진 없어.' 부아크가 사과를 하자 샐레아나가 괜히 미안스런 표정을 지으며 생각을 전했다. 네 명 모두가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한 샐레아나에 기뻐하였다. 부아크는 상급정령사라 자신이 소환한 불의 상급정령 샐라임과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다. 하지만 상급정령은 어린애 수준의 정신연력을 가지고 있어 제대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완벽한 이성을 가진 최상급정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나중에 부를테니 돌아가 있어.' '알겠습니다. 주인님' 내가 정령들을 향해 생각을 전하자 최상급정령사들이 방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네 명 모두가 나의 생각과 최상급정령들의 대답을 들었다. 그들에겐 매우 생소한 대화방법이지만 내겐 무척이나 익숙한 방법이다. 고작 하급정령이나 겨우 소환하게 된 이후로 사용하지 않았단 대화방법이었다.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저두요." 사라진 최상급정령들과 작별인사를 하지못해 아쉬워하는 네 명을 바라보며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장 섭섭한 마음을 가진 것은 마샤였다. 부아크를 비롯해 세 명이 모두 불의 정령사라 불의 최상급정령과의 만남을 가졌고 대화도 나눴지만 마샤는 그렇지 못했다. 샐레아나를 보고 놀라는 바람에 물의 최상급정령과 대화조차 못한 것이다. 마샤는 물의 중급정령사로서 엘레스트라를 눈앞에 두고서 대화조차 못한 사실이 억울하였다. "이제는 눈으로 확인했으니 된건가요?" "하하하 그럼요. 최상급정령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요." 부아크가 즐거운 기분으로 대답했다. 부아크는 내가 최상급정령을 잠깐밖에 소환하지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굳이 알려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말해주지 않았다. 인간 정령사들은 내가 최상급정령사임을 알지만 그외에 모르는 사실이 많았다. 엘프들에게 나란 존재는 무척 유명인이었다. 패러렐 라이프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 한 바탕 유명세를 탔고, 자살하여 60년이 지나서 다시 살아나서 또다시 알려졌다. 그리고 엔트가 전해준 생명력 때문에 인간이 최상급정령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하였다. 그런 사실을 알고있는 엘프들은 굳이 인간 정령사들에게 나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아크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저 한 때 최상급정령사였다는 사실만 알고있을 따름이다. 마을은 한 동안 나에대한 이야기로 떠들석했다. 그로인해 파에그는 60년의 생명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하급정령사가 된 사실을 축하받지 못했다. 하지만 파에그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기쁨이 넘쳐 흘렀다. 정령사라면 파에그의 기연을 부러워하는게 정상이지만 가끔씩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관심갖는 사람이 적었다. 60년 정도의 생명력이라면 엘프들이 선물해주는 생명수 나무의 과실정도 수준이었다. 정령사중에 엘프에게 과실선물을 받은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대략 10여명 가량이었다. '엔트도 과실을 맺으면 좋을텐데.' 생명수 나무의 과실은 최소한 천년의 시간을 지내야 맺기 시작한다. 딱히 기준은 아니지면 과실을 맺는 모든 생명수 나무의 나이가 모두 천년 이상이다. 엔트는 800년이 약간 넘은 나무일 뿐이다.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데 과실을 맺는다는게 비정상이지.' 엔트는 항상 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엔트는 과실을 맺을 능력이 있어도 아마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성을 가질 나이가 아닌데 나의 영향으로 이성을 깨닫고 깨어났기 때문에 인간적인 성향도 많았다. ------ 소문이 퍼지고 퍼져서 결국 엘프들에게도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엘프들에게서 얻어간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이 한 사람의 생명력을 늘리는데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엘프들로서는 무척이나 분노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식물에게서 생명력을 흡수한다는 자체가 조화로움을 깨뜨리는 요인이었다. 엘프들 나름대로 회의를 했는지 나를 불렀다. 지도자로 뽑아놓고 엘프들이 부르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면서도 지금까지도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고 섭섭한 점을 말하기에도 약간 그랬다. 엘프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처신을 해야할까?' 엘프들은 분명 사실여부를 묻고 무슨 조치를 취하려 할 것이다. 엔트는 자의로 내게 생명력을 넘겨주어서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내가 키워서 생명력을 흡수한 나무는 자의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 가능성이 많았다. '앞으로 엘프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방법이 없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멀쩡한 나무를 강제로 성장시키고 생명력을 흡수한 일은 벌을 받아야 할 일이다. 더구나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라면 인간 사회에서 귀족살인에 준하는 엄청난 사건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왔는데 거기다가 생명력도 포기할 수 없어!' 결국 방법을 찾지못해 강하게 밀고나가기로 결정하였다. 믿는 것은 측정이 불가능한 생명력이 전부였다. 엘프들이 무력으로 나오면 죽음이라도 각오하고 물의 정령왕 엘레임을 다시 소환이라도 할 생각이다. 어차피 엘프들도 나를 죽이려들지 않을테니 최악의 상상을 한 것이다.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패로이 숲으로 찾아가는 발걸음은 무척 무거웠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엘프들과의 관계가 악화될까 두렵다는 것이다. 좋든싫든 나는 정령사이고 정령사라면 엘프와 뗄레야 뗄수없는 사이이니 말이다. 패로이 숲의 엘프마을에 도착하자 수많은 엘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일까?" "사실이겠지. 잘못된 방법이지만 인간이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줄은 몰랐어." "엘라임님을 만나기 이전부터 소환할 수 있었다잖아." 주변에 있는 엘프들이 나를 주제로 속삭이고 있었다. 생명력이 넘쳐나니 오감이 예전보다 더욱 높아져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리는 것이다. 엘프 보다도 오감이 뛰어나다니 누구의 말마따나 괴물이라 불려도 이상한게 아니다. "장로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엘프가 다가와 나를 안내해 주었다. 안내하는 엘프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많은 시선을 받았다. 마을의 크기가 크라이 숲의 엘프마을과 많은 차이의 크기였다. 몇번 들리지는 않았지만 항상 마을의 크기에 놀란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전부 100여명이 전부이지만 패로이 숲의 엘프들은 무려 5천여명이나 된다. "기다리고 있었소. 앉으시요." 장로들이 모여있는 장소에 들어가자 곧바로 비우스 장로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었고 무척 냉담한 분위기였다. 10여명에 가까운 장로들이 모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패로이 숲의 장로가 다섯이니까 나머지는 다른 숲의 장로들일 것이다. "무슨일로 부르셨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도대체 왜 그런짓을 한거요? 그래도 한 때 최상급정령사인 카인씨께서 말이요." "예전의 힘을 되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생각을 하는게 당연하죠." 장로들이 내 변명에 분개하였지만 비우스가 중재에 나섰다. 나는 그저 인간이면 당연히 욕심을 부린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장로들을 분노하게 한 것이다.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요. 하지만 식물의 생명력을 흡수한다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요. 차라리 재배한 약초를 흡수하면 우리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인씨는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가져다 키워서 생명력을 흡수하였습니다. 생명수 나무가 엘프들에게 얼마나 귀중한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다니 너무 잔인한 행동이었습니다." 비우스가 장로들을 대표로 내게 따졌다. 하지만 비우스는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이 아니면 생명력을 흡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저 그곳에는 다른 식물에 비해서 생명력이 많아서 흡수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실을 설명해야겠지?' 비우수를 비롯해 모든 장로들의 오해를 풀어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지금과 같은 경우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인을 받고싶을 것이다. 만약 생명력의 흡수가 자유롭다면 앞으로 나와같은 사람이 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그만큼 인간은 위험한 존재이다. "비우스 장로님께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장로님들께서는 제가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계실겁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식물의 생명력을 제가 흡수할 수는 있어도 머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부아크씨가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씨앗의 정체를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해서 제게 키워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다들 알계 계실테니지만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이 카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죠. 그런데 카무를 뽑아서......" 나는 생명력을 흡수하여 몸에 융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동기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부아크에게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얻은 방법이라든지 파에그를 물의 하급정령사로 만들기 위한 방법까지도 설명해야 했다.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굳이 카인씨가 아니더라도 가능하겠군요." 장로들은 자신들끼리 내가 말한 내용중에서 파에그를 하급정령사로 만든 방법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인간 정령사들은 마나를 이용해 정령을 소환하지만 엘프들은 생명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좀더 순수한 힘이다. 그렇다고 엘프들의 생명력과 식물의 생명력이 같지는 않다. 엘프가 아무리 자연을 사랑하고 조화로운 종족이지만 식물은 아니다. "비우스 장로님 굳이 카인씨를 제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카인씨가 자신의 능력으로 부정적인 일을 자행하거나 스스로의 힘에대한 통제력을 잃을까 걱정한 것 뿐입니다. 하지만 만나서 대화를 들어보니 그럴 염려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리엔 장로가 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모든 장로들이 모리엔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왠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이 갖기엔 너무 위험한 능력입니다. 카인씨를 제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모리엔의 생각에 반대하는 장로들도 많았다. 장로들은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땅한 제재방법을 찾지 못하자 그것을 가지고 토론을 하였다. "카인씨가 지금까지 저희들에게 피해를 준 사실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새롭게 익히게 된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방법이 모두 카인씨가 소환한 정령들과 대화를 통해서 얻어졌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더구나 카인씨는 저희들의 결정에 따라서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특별히 무슨 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저희들이 상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도 그가 부탁해서 얻어간 것이고 그가 키워서 죽였다고 죄가 될수는 없습니다." "죄를 지은것은 아니지." "그렇긴 하지만." 모리엔이 아주 강력하게 주장하자 다시금 나의 편이 많아졌다. 장로들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제재를 하고싶은데 그러자니 내가 지은 죄라고는 나무를 키워서 죽인게 전부였다. 엘프장로들도 난감한 상황이다. 내게 제재를 가한다면 그것은 약간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엘프 장로들의 회의를 지켜보며 그들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 몸속에 있는 생명력은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위험하다. "모두 그만하세요." 비우스 장로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말다툼만 계속하는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비우스의 말에 모두들 토론을 멈추었다. "카인씨의 말을 들어봅시다." "정령사로서 잘못된 행동임을 인정하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습니다. 저는 엘라임님을 만나기 전까지 최상급정령사였습니다. 그러다 엘라임님을 만난 대가로 하급정령사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물론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지만 제가 엘프도 아닌이상 쓸모없는 능력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돌아갈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최대한 사실을 말하려고 노력하였다. 회의가 길어지게 되었고 결국 나는 계속 그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회의가 오래 진행될수록 나에 대한 제재가 꼭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결론지어졌다. 하지만 또다시 나의 능력을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카인씨 결정되었으니 들어오세요." 모리엔이 밝은 표정으로 밖에서 기다리던 나를 불렀다. 밖에는 많은 엘프들이 바라보고 있어서 기다리는 동안에 심심하진 않았다. 정말로 내겐 중요한 결정이지만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어떠한 제재방법이라도 몸에 융합된 생명력을 사라지게 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엘프 장로들이 인간처럼 부당한 처벌을 결정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카인씨께서도 스스로 정령사로서의 잘못을 인정하였으니 제재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직접 카인씨의 능력을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도의적인 문제를 가지고 처벌을 가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서 카인씨에게 정령을 통한 서약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카인씨께서 서약을 거부하셔도 다른 처벌을 가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 비우스 장로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정령사가 정령을 통해 어떠한 서약을 하면 나중에 그것을 어겼을 경우 제약을 받게된다. 마법사도 비슷해서 왠만하면 함부로 약속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같은 경우 최상급정령을 소환하여 서약하면 정령왕을 다시 소환하거나 죽기 전까지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모리엔이 밝은 표정인 이유를 알수 있었다. 장로들은 거부하여도 처벌을 가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였다. 역시 엘프는 인간과 전혀 다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해결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약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내가 잘못을 일으켰을 때 강하게 처벌을 할 것이다. '다시 정령왕을 소환하면 되겠지.' 서약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령에 대한 서약이란 소환한 정령의 능력에 따라서 좌우된다. 만약 하급정령을 소환하고 서약을 했다면 나중에 중급정령사가 되면 서약에 대한 제재를 스스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엘레스트라, 실레스틴, 샐레아나, 노에아넨' 장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을 불러냈다. 장로들은 설마 지금 이자리에서 내가 최상급정령을 소환할 줄 몰랐는지 깜짝 놀랐다. 더구나 하나의 최상급정령이 아닌 4대 최상급정령이 모두 소환된 사실에 감격했다. 그나마 장로들이라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매우 침착한 모습이다. "엘레스트라, 실레스틴, 샐레아나 그리고 노에아넨의 이름을 걸고 절대 엘프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을 서약합니다." 서약을 마치고 장로들을 바라보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였다. 장로들이 가장 걱정한 부분은 바로 내 능력이 엘프에게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엘프들은 내가 대륙의 모든 인간을 죽여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저 엘프들에게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모두 돌아가.'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들이 모습을 감추자 분위기가 약간 서먹서먹하였다. 가장 노력한 모리엔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머지 장로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어떤 장로는 나로 인해서 인간 정령사들을 조화로운 방법에 위배되지 않은 한도내에서 정령사들의 능력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하였다. 엘프마을이 있는 숲에는 인간 정령사들이 그들의 손과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일부 지역은 인간 정령사들의 능력이 떨어져 여러가지 고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엘프들이 내가 제시한 방법을 통해서 인간 정령사들을 수련시켜 정령사로서의 능력을 높여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나는 타포그 잎사귀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전해주는 방법이었지만 엘프들은 자신이 가진 생명력을 전해주면 된다. 실질적인 엘프나 인간이 가진 생명력과 마나는 사용하면 다시 채워지니까 손해 볼 것도 없다. 좋은 방법으로 해결되어서 마음속으로 기뻤다. 800년의 생명력을 가질 때와는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높아진 능력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저 강해진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지금은 물의 정령왕 엘라임까지 소환한 경험 때문에 생명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임의로 식물의 생명력도 제어할 수 있다. 마음의 짐을 모두 벗게되어 마음이 편했다. 마을로 돌아와 더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엘프 소국의 상징적인 지도자 역할이 이제는 싫어졌다. 또한 지금의 능력이라면 크라이 숲에서 패로이 숲까지 오는데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다. 패로이 숲의 엘프 장로들과 인간 정령사 마을의 촌장인 부아크에게도 말했다. 그들은 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엘프 소국의 지도자의 상징적인 의미가 되어달라고 했을 때 약간의 기대는 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름만 필요한 자도자였을 누가 알았겠는가.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는데 파에그가 가장 슬퍼하였다. 파에그는 조만간 중급정령도 소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령사 마을이 정말로 부러우리라. 크라이 숲은 인간 정령사라고는 우리 가족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보고 싶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2 회] 25. 지도자 사람들은 평소 행복할 때에는 찾지 않다고 힘들고 고난이 닥치면 언제나 종교에 매달리게 된다. 카르시온 제국은 일리시아 제국연합과의 전쟁 이후로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 신전에서 직접 나섰었다. 하지만 동지역에서 발생한 소피아라는 이단자를 성기사들이 처형한 이후로 신뢰가 많이 무너졌다. 엘프 소국이 학살한 용병들 때문에 또다시 찾아온 제국의 불안한 치안상황은 악운이 여러번 겹쳐서 벌어진 일이라 수습이 되지 않았다.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위안을 받기위해 신전을 찾았다. 신관들이 귀족들의 자금력에 의지해 생활하긴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기 때문에 누구나 신관들을 존중한다. 카르시온 제국에는 영지와 마을마다 신전이 존재한다. 신전의 영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단지 종교적 특성 때문에 권력에 영향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신전이 요즘들어 권력을 흔들고 있었다. 그만큼 귀족들의 권력이 약해진 탓이었다. 신전에서는 더이상 카르시온 제국의 쇠퇴하는 현상을 두고볼 수 없었다. 신전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대의를 위해서 신전이 나서야한다는 신관들의 의견이 하나 둘 모여서 결국 커다란 의견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에 반대하는 신관도 만만치 않았다. 신관이 권력을 휘두르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신관들의 의견 대립은 결국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신관들을 중재하기 위해서 성녀들이 나서게 된 것이다. 신관들의 의견대립으로 성녀가 나서게 된 사건은 신관들 모두에게 크나큰 창피이고 수치였다. 그렇지만 서로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신관들이 모두 나서서 카르시온 제국을 다시 살려내자는 의견도 일리가 있었고, 신관은 종교인으로 권력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정당했다. 카르시온 제국의 백성들은 전자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신관들이 나서면 최소한 지금보다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내용의 신탁을 받다니 정말 중대한 일이군요." "신탁을 받아놓고도 믿을 수 없습니다. 천신님께서 어째서 이런 신탁을 내려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녀들은 신관들의 의견대립 때문에 만났지만 더욱더 놀라운 사실을 접하였다. 사실 성녀들끼리는 주기적으로 만나 가끔씩 천신이 내려주는 신탁의 내용을 함께 풀어나간다. 신탁은 매우 추상적이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끔은 신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는데도 죽게 방치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얼마전 모든 성녀들에게 똑같은 신탁이 내려졌다. 성녀들은 최근들어 발생한 신관들의 의견대립 때문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신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알게 된 것이다. 성녀들의 손에는 신탁의 내용이 적혀진 종이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신탁은 함부로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이에 적어서 알려주고 그 종이를 태우고 있었다. 나름대로 신탁의 내용을 성녀들끼리 알려주면서 신벌을 피하는 방법중의 하나이다. 한 명의 성녀가 손에 쥐고있던 종이를 등물에 가져갔다. 종이에 불이 붙으면서 적혀진 내용이 살짝 보였다. 천신은 중요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성녀를 통해서 알려준다. 신관이 신탁을 받으면 몸이 견뎌내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령신의 보호를 받는 카인을 이단자로 심판하리니.' 모든 성녀들이 갖고있는 종이에는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신이 받은 신탁을 적어서 교환한 결과는 모두 똑같았다. 지금과 같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신탁의 내용도 너무나 구체적이라 의견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엘프 소국의 지도자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성녀들은 신탁의 내용에 등장하는 카인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은 카인이 악마가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실을 추측할 수도 없었다. 성녀들은 신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의논하였다. 신탁의 내용은 받은 당사자가 직접 해결하는게 보통이다. 그래서 신탁의 내용을 주고받고서 결국 스스로 나서서 해결한다. 하지만 모든 성녀들이 같은 신탁을 받았기 때문에 함께 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더군다나 신탁이 같다는 내용은 그것이 무척 중요함을 뜻하는 일이었다. "신탁이 동일하게 내려진 경우는 백년만의 일입니다. 백년전 대륙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모든 종족이 절반이나 되는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도 백년전에 발생한 대륙의 지진처럼 무척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기사들을 동원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신탁이 동시에 내려진 경우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해결해야 됩니다." 성녀들은 신탁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성기사들을 모집하였다. 성기사들은 신전이나 신관을 보호하기 위해서 활동중이다. 하지만 신탁이 중요한 만큼 모든 성기사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성녀들은 자신들이 생활하는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신탁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녀들이 모든 성기사들을 불러들이자 신관들은 서로 의견대립으로 싸우다가 어리둥절하였다. 성녀들은 항상 느끼지만 신탁을 알려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카르시온 제국에 있는 성기사들의 수가 어느정도인지 모두들 처음 알게되었다. 수도 말린에 모인 성기사들의 수는 만여명에 가까웠다. 더욱이 신력을 오러처럼 사용하는 성기사들이라 전투실력 또한 상당히 높다. 성기사들이 일리시아 제국연합과의 전쟁에 도움을 주었다면 대륙을 카르시온 제국의 이름으로 통일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신탁의 중요성을 생각해서 특별히 이단자를 처단하기 위한 여행에 성녀들도 함께 나섰다. 만여명의 성기사들이 성녀들을 보호하며 남쪽을 향해 이동하였다. 성기사들은 이단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너무도 많은 성기사가 나선 것이라 생각했지만 성녀들이 함께 나선만큼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 엘프 소국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그 수가 많았지만 지금까지 정령사들의 통제에 잘 따라주었다. 스스로 합심하여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런데 모든 위험이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 정령사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르시온 제국의 영역에 넘어가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행동은 가벼운 경우에 속했다. 어떤 경우는 위험하게 엘프 소국과 카르시온 제국의 경계가 되는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정령사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통제를 하였지만 아무런 처벌을 하지않는 그들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엘프 소국에서 지내면 무조건적으로 엘프의 비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위험한 생각이었고 일부 사람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영역으로 넘어가 범죄를 저지르고 엘프 소국으로 도망오는 경우도 있었다. 엘프들도 많은 인간들이 폭주하는듯한 생활에 조치를 취할 방도가 없었다. "카인 뭐하는거야? 부탁해." 엔트가 인상쓰고 있는 내게 말했다. 하루종일 엔트에게 끌려다니면서 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엔트는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이라도 되는듯 부려먹었다. "알았어. 자꾸 재촉좀 하지마." "우린 친구잖아. 카인이 어려울 때 나도 도와주었잖아." 엔트가 넉살좋게 말하였다. 엔트의 성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엘프와 인간의 중간형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처음 영향은 내게 받았고 나중에는 엘프와 함께 생활했으니 자연스런 변화였다. '자라다오.' 엔트가 가리키는 나무가 자라도록 생명력을 제어하였다. 그러자 눈깜짝 할 사이에 한뼘이나 자랐다. 크라이 숲으로 돌아오니 가족과 친구인 엔트 그리고 엘프들까지 만날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물론 엔트에게 끌려다닌지 한나절이 지나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우와! 카인 정말 대단해!" 엔트는 나의 능력을 참으러 부러워하였다. '그러고보니 엔트는 생명력이 많지가 않아서 불편하겠구나.' 엔트의 생명력은 많지가 않다. 그 이유는 800년 동안에 얻게된 생명력을 모두 내게로 주었기 때문이다.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엔트에게 생명력을 돌려주고 싶음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생명력은 인간인 내게 융합되었기 때문에 식물에 가까운 엔트에게 전해줄 수 없었다. '나무의 생명력을 흡수해서 전해주면 될텐데. 싫어하겠지?' 엔트는 식물이기 때문에 다른 식물의 생명력을 전해주면 융합시킬 수 있다. 하지만 엔트는 절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식물들이 그에게는 가족과 같이 느껴질테니 말이다. 내겐 그저 나무이지만 엔트에겐 친구이다. '맞아. 그 방법을 이용하면 되겠구나.'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엔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식물의 생명력을 찾아내면 된다. 엘프들은 숲에서 나는 과실과 곡물 그리고 정령과의 친화력에 영향을 주지않는 약초를 주식으로 삼는다. 엘프가 먹는 것들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전해주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카인 어디가는거야?" "세레나 장로님을 만나서 의논할 일이 생각났어!" 떠오른 생각이 괜찮은건지 세레나 장로에게 의논을 하고 싶어서 엘프마을을 향해 뛰었다.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 나타나 도와주어 눈깜짝 할 사이에 엔트에게서 벗어났다. "정말 너무한다. 아직도 할일이 많은데." 뒤에서 엔트의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등골이 오싹했다. 엔트는 크라이 숲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려는 것이다. 엘프의 영향을 받았으면 숲이 자연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데 정말 생명수 나무로서는 괴짜였다. 걷는다는 자체가 다른 생명수 나무와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레나 장로를 찾아가 엔트의 생명력을 늘릴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했다. 내 짐작대로 괜찮은 방법이라 판단해주었다. 단지 엘프가 재배하는 약초라 할지라도 엔트에게 충격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말해주었다. 오직 과실만이 엔트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리라 말했다. 세레나 장로는 엔트의 생명력을 늘리는 일이라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고 약속하였다. 엔트가 많은 생명력을 갖게되면 그만큼 크라이 숲이 넓어지고 엔트의 영향력도 커진다. 지금까지 엔트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나 때문이다. 모두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엔트가 나에게 전해준 생명력이 문제였다. "겨우 도착했네." 세레나 장로와 이야기가 거이 끝났을 때 마을에 엔트가 들어서며 말했다. 엔트의 걸음걸이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 그나마 엔트의 뿌리가 크고 넓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루종일 걸어도 항상 제자리일테니 말이다. 엘프들이 외출다녀온 엔트에게 달라붙어 여기저기 만져주었다. 엔트가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이다. 엔트는 크라이 숲의 엘프들에게 자랑거리였고 자존심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엘프마을중에 걷는 생명수 나무는 엔트가 유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엔트야 엘프님들 신경쓰지 않게 조심해서 돌아다녀." "안돼. 내 친구들이란 말이야. 매일같이 보살펴 줄거야." 엔트는 크라이 숲을 무척 사랑한다. 나무 한 그루에서 풀 한 포기까지 말이다. 나로인해 생명력이 많지 않은게 걱정이다. 하지만 해결책을 찾았으니 걱정하지 않았다. 세레나는 엔트를 위한 일이라서 모든 엘프들의 도움을 줄 것이라 말했다. 나 또한 거절하지 않았다. 엔트의 생명력이 되어줄 과실은 역시 엔트가 구해오는게 제일 안전할 것이다. 나 혼자서 크라이 숲에서 많은 과실을 어떻게 모으겠는가. 세레나는 즉시 엘프들을 모두 불러서 나와 의논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나는 엔트에게 다가가 생명력을 늘릴 방법을 찾았음을 전했다. "난 싫어." "과실의 생명력이니까 괜찮아. 더군다가 생명력이 많아지면 숲의 나무 친구들을 더 많이 도와줄수 있을텐데." 엔트는 거절하다가 숲의 나무를 많이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귀가 솔깃하였다. 약간의 설득을 통해서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엔트는 처음 이성을 깨닫고 얼마 지나지않아 내게 800년의 생명력을 선물했기 때문에 정확히 생명력이 많이짐으로 해서 달라지는 현상을 잘 모른다. 엘프들도 세레나 장로의 말을 듣고 좋은 방법이라며 좋아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엘프들은 숲을 헤집고 다니며 과실을 모았다. 크라이 숲의 과실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썩어서 거름이 된다. 하지만 엔트를 위해 과실들이 마을에 수북히 쌓여만 갔다. 엘프들의 욕심은 정말 끝이 보이질 않았다. 크라이 숲에 그만한 과실이 있었는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나무에서 강제로 따내는 과실의 생명력은 엔트에게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전해줄 수 없다. 오직 나무에서 떨어졌거나 떨어지려는 과실이어야만 했다. "이제 준비됐지?" 뒷걸음질 치는 엔트를 향해서 말했다. "내일하면 안될까?" "어제도 그랬잖아. 눈앞에 과실을 모으기 위해서 고생한 엘프분들이 안보여? 모두들 기다리고 있잖아." 엔트의 옆에는 크라이 숲의 모든 엘프들이 모여서 지켜보고 있었다. 과실을 모으기 위해서 한 숨도 자지않고 숲을 돌아다녔다. 엔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엘프들이었다. 엔트는 나와 엘프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결국 허락했다. "친구들의 과실인데 내가 먹게되는구나. 친구들아 미안하다." "친구들이 네가 먹은걸 알면 좋아할거야." 과실들은 숲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에게 얻은 것이라 엔트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니 엔트의 입장에서는 친구들이 맺은 열매를 먹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틀이나 계속 반대하다가 지금에서야 허락한 것이다. "모두들 부탁드려요." 엘프들을 향해서 말했다. 과실을 일일이 집어들 수 없기 때문에 엘프의 도움이 필요했다. 정령의 도움을 받아도 되지만 잘못되어 과실을 흡수한 생명력이 소환한 정령에게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한 경우를 아예 배제하기 위해서 엘프의 도움은 필수였다. 옆에 쌓여있는 과실이 높이가 내 키보다도 높았다. 과실을 하나 집어들었다. 빨간색은 띈 과실로 신맛이라 아무도 먹지않는다. 하지만 엔트에게는 생명력만 필요하기 때문에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른손에 과실을 쥐고 생명력을 흡수하고는 곧바로 왼손에 잡혀있는 엔트의 가지로 전해주었다. '기분이 좋아.' 엔트가 생명력을 전해받고 생각을 이용한 대화로 말했다. 오른손에 들고있는 과실의 생명력이 모두 엔트에게 전해지자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엘프가 전해주는 과일을 받아들고 또다시 생명력을 흡수하여 전해주었다. 수많은 과일의 생명력을 모두 전해주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했다. 엔트는 생명력을 전해받으며 즐거워하였다. 그렇게 좋아할 것이었으면 진작 허락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크라이 숲을 전부 뒤져서 찾아온 것이라 그런지 보기힘든 과실도 있었다. 정말 먹고싶은 과실이라 챙겨두고 싶었다. '조금만 더 서두르면 안돼? 이러다 날 새겠다.' 생명력을 전해받는 엔트는 즐기기까지 하였다. 옆에서 놀리기까지 하니까 괜시히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이라 꾹꾹 참았다. 오랜 시간을 하다보니 얼만큼의 생명력을 전해주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과실마다 생명력의 양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어라? 없네." 엘프가 과실을 전해주지 않자 옆을 바라보고 말했다. 생명력이 흡수된 과실을 뒤로 던지면 곧바로 엘프가 손에 과실을 전해주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옆을 바라보니 과실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내가 던져놓은 생명력을 모두 잃어버린 말라비틀어진 과실의 껍질만 쌓여 있었다. 생명력이 흡수되지 않은 과실의 껍질이었다면 달여서 차로 썼을텐데 아쉬었다. 생명력이 모두 흡수되어 향은 물론이고 영양분이 개미 눈물만큼도 없을 것이다. 엔트는 입맛을 다시는듯한 표정으로 과실의 부족한 사실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이제 끝났으니까 그걸로 만족해." "너무 화내지마. 내가 이렇게 좋은건줄 알았나? 나중에 시간나면 부탁해." 엔트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크라이 숲의 모든 과실을 사용했으니 한 동안 못한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과실의 생명력을 내가 흡수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오직 한 차례 가공된 생명수 나무의 과실 씨앗을 키워서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너도 다른 생명수 나무처럼 과실좀 맺어봐. 패로이 숲의 생명수 나무는 일년에 한 번씩 과실을 맺더라. 그거 먹으면 60년의 생명력이 늘어난다는데 말이야. 나도 그거 한 번 먹고싶어." "천년생이 되어야 과실을 맺을수 있으니까 한 200년만 기다려. 그때 열리면 선물해줄께." 엔트가 전해받은 생명력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엔트는 자신이 얼만큼의 생명력을 전해받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본래부터 생명력을 많이 갖고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실의 생명력이 각기 달라서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엔트의 생명력에 따라서 숲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엘프들은 관심이 많았다. 세레나 장로가 엔트와 한참을 얘기했지만 생명력의 양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엘프들 모두가 자신들의 가져온 과실의 생명력이 어느정도인지 추측하지 못했다. 엔트의 영향으로 숲이 얼만큼 변할지 모두 기대하였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3 회] 26. 천신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에 일만여명의 성기사가 모인 소식을 접한 소피아 왕국은 벼락이라도 맞은듯 놀랐다. 루바인은 마법통신으로 카르시온 제국의 프리온 재상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그도 신전이 벌이는 일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루바인이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가 아닌 재상을 통해서 연락한 이유는 더이상 에드는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황좌는 에드의 아들중에서 귀족들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새로운 황제가 등급했지만 황권도 약하고 아는 것이 많지않아 프리온 재상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고 있어서 그에게 연락한 것이다. "프리온 재상놈이 거짓말을 하는게 분명해." 리온 라다르가 흥분하며 말했다. 일만여명의 성기사가 수도에 모인 이유를 프리온 재상이 모른다는게 리온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프리온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이야." "분명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러는거야. 카르시온 제국에 그렇게 많은 성기사들이 있을줄은 정말 몰랐어. 그동안 왜 활동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리온은 제노의 말을 무시하며 성기사들이 소피아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것이라 말했다. 프리온 재상이 거짓말을 한 이유도 공격을 대비하지 못하게 하려는 기만정책(欺瞞政策)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리온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왜 소피아 왕국이 독립했을 때 그들을 이용해서 반란을 막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또한 엘프 소국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면 왕국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력이다. "추측만으로 병사들을 모집할 수는 없어. 만약 성기사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괜히 우리 스스로 혼란을 가중시키는 꼴이야. 더욱이 백성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있어서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어." 루바인이 리온과 제노를 향해 말했다. 다른 귀족들도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소피아 왕국의 주인은 루바인과 리온 그리고 제노라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었다. 명목상으로 왕은 루바인이지만 말이다. "성기사에 대한 정보를 계속 확인하면서 기다리자구." "어쩔수 없지." 제노의 말에 리온이 성질을 죽이며 대답했다. 일만여명 가량의 성기사 전력을 알기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없어서 루바인을 괴롭혔다. 소피아 왕국의 왕과 귀족들은 성기사들이 쳐들어올까 걱정이었다. 소피아 왕국은 전적으로 성기사들이 이단자 심판을 한다며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 소피아를 처단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그래서 소피아 왕국에는 신전이 거의 없다. 모두들 성기사들이 혹시 소피아 왕국에 신전이 없다는 이유로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더구나 성기사들이 종교인이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카르시온 제국의 사람들이니 반란을 일으켜 독립한 소피아 왕국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소피아 왕국의 왕인 루바인과 귀족들은 피말리도록 성기사들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들의 움직임에 귀기울였다. 며칠을 그렇게 고생하며 기다리다 성기사들의 이동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성기사들이 소피아 왕국을 향해 온다면 당장이라도 병사들을 모집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소피와 왕국이 있는 동쪽이 아니라 남쪽을 향했다. "정말 이상하네. 엘프 소국을 향할 이유가 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소피아 왕국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야." 제노가 루바인의 말에 대답했다. 모두들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으로 향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성기사들은 엄연히 신전에서 관리한다. 신전에서 엘프 소국에 적개심을 가질만한 이유는 어떤 것도 없었다. 용병들의 죽음이야 신전의 입장에서는 관여할 이유가 없었다. 용병들 스스로가 죽을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성기사들도 남쪽을 향해서 이동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소피아 왕국의 첩자들은 아무도 알지못하는 정보를 얻기위해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 오직 신탁을 받은 성녀들 뿐인데 무슨수로 알아낼 수 있겠는가. "성기사들의 행보를 좀더 지켜봐야겠어." 루바인은 함께있던 귀족들을 향해 카르시온 제국의 성기사들 움직임을 계속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만여명의 성기사는 소피아 왕국이나 엘프 소국을 멸망시킬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리온과 제노도 루바인과 같은 생각이다. 엘프 소국으로 향했지만 혹시라도 그것이 속임수라면 소피아 왕국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멸망할 것이다. 확실한 정보를 얻는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에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모여서 남쪽을 향했다는 사실을 엘프 소국에서 뒤늦게 알게되었다. 마른하늘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라 엘프 소국은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 동안 조용하더니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위험이 디가오는 것이다. 성기사들의 이동은 무척 느렸지만 목적만은 확실해 보였다. 엘프 소국은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엘프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엘프 소국의 사람들이 왕래가 잦아지게 되어 자연적으로 발생된 일이었다. 엘프 소국의 사람들은 성기사들이 내려온다는 사실에 움츠러들었다. 모두들 성기사들의 움직임이 카르시온 제국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성기사들이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인다 생각하자 엘프들이 심각하게 생각했다. 엘프들로서는 성기사들과의 만남은 꺼려졌다. 신관이나 성기사는 천신을 섬기고, 엘프는 정령신을 섬긴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만나게 된다면 분명 둘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불의 관계와 비슷한 경우이다. 엘프 소국의 위기를 모든 엘프들이 알고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라이 숲은 최남단이라 그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크라이 숲은 최근들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숲의 식물들이 자라는 속도가 좀더 빨라져 좀더 울창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엔트가 많은 생명력을 얻게 되어 크라이 숲이 변화되는 것이다. 특히 엘프 마을을 중심으로 변하기 때문에 매일같이 숲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숲에서 생명력이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엔트는 자신이 숲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행복한 생활이었지만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을 향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카르시온 제국의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다면 관여하지 않았겠지만 성기사들은 나와 연관이 많았다. 성기사들은 천신을 따라는 자들이고 천신이라면 나와 상극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천신 때문에 자살을 경험해야 했다. 이제는 천신에게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성기사들이 무슨일로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엘프 소국을 지켜야 한다는 좋은 이유도 있으니 생명력을 이용하여 정령술을 마음껏 보여줄 기회였다. 패로이 숲에 도착하여 곧바로 부아크를 만났다. 정령사들은 무척이나 바빠보였다. 왕국에 버금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겨우 수천여명의 정령사들에게 통제되고 있으니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아마도 엘프 소국이 체계적인 관리를 이용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오랜만이네. 카인" "정말 바쁘시군요. 성기사들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보시다시피 여러가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야. 카인이 도와준다면 정말 고마울거야." 부아크는 내게 도움받기를 원했다. 예전이라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은 최상급정령사라 여러가지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가장 큰 문제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일이야. 모두들 겁을 집어먹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어. 그들에게 엘프 소국이 안전하다는 인식을 심어줘야해. 하지만 그들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믿지를 않으니까 걱정이야." 부아크가 사람들이 통제되지 않는다며 말했다. 그나마 극심할 정도로 혼란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최후의 상황에서는 엘프들이 도와줄 거리며 믿고있기 때문이다. 성기사들은 계속해서 느리게 엘프 소국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의 영역에 도착하려면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동안 사람들을 확실하게 통제해야 피해가 적어진다. 부아크는 엘프들을 찾아가서 내가 지도자로 사람들 앞에 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부아크는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위대한 사람임을 알려주어 안심하게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카인은 최대한 위엄있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거야. 엘프 소국은 어떠한 위험해도 안전할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연설이 끝나면 사람들 앞에 최상급정령의 힘을 이용해서 물리력을 보여줘. 사람들이 두려워 할 정도로. 카인이 강력한 신처럼 보여주면 사람들이 안심하고 지낼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저만 믿으세요." 부아크의 설명을 듣고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엘프 소국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동안 이름뿐이던 내가 나서기로 하였다. 모두들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마음에 몰려들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강력한 힘을 보게되면 안심하고 성기사들 때문에 생겨날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으리라.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4 회] 26. 천신 엘프 소국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귀족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다. 불편한 사항이 많지만 그들을 구속할 것은 없었다. 단지 가끔씩 엘프 소국을 위협하는 존재가 등장하여 불안할 뿐이었다. 엘프 소국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지할 존재가 필요했다. 대부분 엘프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감을 떨쳐냈다. 수만여명의 용병들을 죽인 전례가 있으니 어떠한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엘프는 사람들에게 가까운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에겐 좀더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존재가 나타나길 바랬다. "자네 뭐하나?" 열심히 밭을 갈고있는 사람에게 누군가 말했다. "눈은 뒀다 뭐에쓰는가. 땅을 일궈야 먹고살수 있지."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이번에 엘프 소국의 지도자님을 정령사님들이 모셔온다고 했어." "그게 정말이야? 그럼 이럴때가 아니지. 당연히 구경가야지." 밭을 일구던 사람이 허리를 곧게 펴면서 말했다.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엘프가 아닌 인간이란 사실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모습을 비춰주지 않아서 약간은 신비한 존재였다. "정령사님들이 할일없이 거짓말을 하시겠냐? 얼른 같이가세!" "허참! 진작 알려주지!" 엘프 소국의 사람들이 하나 둘 카인을 보기위해 모여들었다. 정령사들이 돌아다니며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에 엄청난 사람들이 모였다. 평소 정령사들이 모이라고 알렸을 때와 비교한다면 가장 많이 모였다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 먼저 부아크가 나섰다. 부아크는 얼굴이 많이 알려져있는 상태라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부아크의 곁에는 카인을 비롯해 정령사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사람들은 발소리도 내지않고 조용했다. 부아크는 항상 중요한 사항을 전할 때만 부르기 때문에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기울였다. "정령사들을 관리하고 있는 부아크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금 이자리를 마련한 것은 오늘 중요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엘프 소국에는 지도자가 있었지만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엘프 소국에 지도자가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매일같이 카르시온 제국의 영역으로 넘어가 말썽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성기사들이 다가온다는 소식에 두려워하며 혼란을 야기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지경까지 처했습니다. 이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엘프 소국의 지도자이신 카인씨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부아크가 잠깐 말을 멈추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부아크의 말은 모든 사람들의 고민거리였기 때문에 호응이 좋았다. "카인씨는 최상급정령사입니다. 인간 정령사로서는 최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시후 소개하겠지만 카인씨의 겉모습은 20대 초반이지만 실제 나이는 무려 여든임을 생각하십시요. 정령사들의 수명은 여러분들의 평균수명에 비해 두 배가 넘습니다. 이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부아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웅성웅성댔다. 카인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정령사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령사에 대해서 무지해도 그들이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카인입니다." 카인이 부아크가 연설하던 자리로 올라가 말하자 사람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설마 했지만 정말로 새파랗게 젊은 모습의 카인이 나타나자 황당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령사에 대해서 부족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뭐야? 어린애잖아!" "지금 우리들을 데리고 장난하는거요?" 사람들이 카인의 옆에 있던 정령사들을 향해서 불만을 터뜨렸다. 그들로서는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누가 되든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로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진정하세요. 카인씨는 정말로 여든살이 넘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만 젊어보입니까? 정령사님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사람들은 유난히 젊은 카인에 대한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문제는 카인도 외모에 대해서 약간의 컴플랙스가 있다는 사실이다. 카인은 모두들 자신을 어리게 봐주어 기분이 상당히 상했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카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의 정령이 도와주어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널리 퍼져나갔다. 잠시후 카인의 곁에는 귀신처럼 생긴 무엇인가가 허공에 나타나더니 결국엔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허공에 떠서 멈춰져 있었다. "지금 제 앞에 보이는 것은 최상급정령들입니다. 바로 제가 최상급정령사임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최상급정령사의 위력을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땅의 최상급정령인 노에아넨을 소개하겠습니다." 카인의 옆에 떠있던 정령중 하나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후 사람들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땅이 흔들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진동은 점점 커져갔고 사람들이 없는 지역에는 땅이 갈라지기까지 하였다. "지진이다!" "무슨일이야! 이거 왜이래?" 여기저기 넘어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실질적으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인은 사람들의 난리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또다시 외쳤다. "두 번째로 물의 최상급정령인 엘레스트라를 소개합니다." 후두두두둑. 카인의 옆에 있던 정령이 이번에는 땅이 아닌 하늘로 사라지자 곧바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모두 흠뻑 젖었다. 빗줄기는 갈수록 점점 굵어지더니 나중에는 하늘에서 물을 쏟아 붇는 것 같았다. "세 번째로 바람의 최상급정령인 실레스틴을 소개합니다." 휘이이익 휘이이익. 이번에는 세찬 바람이 사람들에게 불어왔다.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카인은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아주 소수이지만 넘어지면서 다친사람도 하나 둘 생겨났다. 사람이 없는 지역에는 바람에 의해서 나무가 쓰러지기까지 하였다. 일부러 사람들에게 바람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쓰러뜨린 것이다. "그만하도록 하지요. 저는 엘프 소국의 지도자입니다. 엘프분들과 여기 계시는 정령사분들이 모두 허락한 일이지요. 여러분들이 불만이 있다면 당장 엘프 소국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즘들어 카르시온 제국에 넘어가 말썽을 부리는 일들이 생겨나는데 다시 그런일이 발생시에는 누구도 용서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합심하지 않으시면 앞으로 갈수록 힘들어질 뿐입니다." 사람들은 카인의 말을 똑똑히 듣게 되었다. 모두들 땅이 흔들리고 갈라져 여러차례 넘어졌고, 빗물로 흠뻑 젖었으며 바람 때문에 몸을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카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상급정령의 위력에 너무나 놀란 상태였다. "카인씨는 저희 인간 정령사들중에서 가장 강한 분입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로 뽑히게 된 것이지요. 지금 보여준 능력은 단지 아이들 장난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저희들의 통제에 따라서 생활한다면 어떠한 적이 몰려와도 안전하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을 믿고 따라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카인에 이어서 부아크가 사람들에게 마무리로 연설을 마쳤다. 정령사들은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크게 다친 사람도 없었고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카인을 의지해야 앞으로 통제가 쉬워진다. 정령사들만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황이라 약간의 쇼를 계획한 것이다. 부아크를 비록해 함께있던 정령사들도 카인이 소환한 최상급정령사의 능력을 경험하고 정말 놀랐다. 지진을 일으키고 드넓은 지역에 비를 내렸으며 폭풍에 버금가는 바람도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파괴력이 가장 강력한 불의 최상급정령의 위력은 보여주지도 않았다. ------ 사람들 앞에서 최상급정령사를 소환하여 놀려주는 기분이 이렇게 즐거운 기분일 줄은 정말로 몰랐다. 기회가 된다면 또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부아크와 정령사들이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며 기다렸다. 사람들은 한 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아크가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나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많았지만 정령사들은 모두 말을 얼버무렸다. 자세히 알려주고 싶어도 특별히 아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만족하시나요?" 부아크가 내게 다가오자 웃으며 말했다. "정말 멋졌어. 한 동안은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키거나 하는 일은 없을거야." "다행이네요." 부아크는 정말로 좋아하였다. 다른 정령사들도 다가와 고생하였다며 인사를 나눴다. 정령사들과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함께 할일이 많았다. 정령사들은 그동안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상당히 바쁘게 지냈다. 하지만 그들도 오늘의 연설이 매우 인상깊었기 때문에 앞으로 지금보다 통제가 쉬울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멋진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옷에도 신경을 썼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부아크에게 지도까지 받았다. 그래서 성공한 일이라 기분이 좋았다. 당분간은 크라이 숲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성기사들이 무슨 이유로 엘프 소국에 다가오는지 알아야만 했다. "카인님 돌아오셨군요." "돌아오다니 원래 내 집은 여기가 아니야." 파에그가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머물던 집에는 아직도 파에그가 머물고 있었다. 정령수련을 했는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일단 앉으세요." 파에그는 짧은 시간에 많이 변하였다. 일단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으니 그만한 책임감이 생겼을 것이다. 파에그도 이제는 마을 사람의 일원으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운다인과 만나봤어?" "네, 카인님. 모두 카인님 덕분이에요." 파에그가 물의 중급정령 운다인을 소환한 것을 나의 은혜로 돌렸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심심하거나 나 편하자고 가르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스승으로 대해주다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없는사이 집의 모습은 약간 변했다. 텃밭에 자라던 약초는 모두 죽어 있었다. 엘프만이 재배할 수 있는 약초였다. 생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보살펴주지 않으니 죽는게 당연한 결과였다. 아마도 파에그는 약초를 죽이지 않으려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봤을 것이다. 파에그와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눴다. 파에그는 운다인을 소환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과정을 말했고 나는 크라이 숲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과 친구인 엔트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파에그와 지내며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에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근처에 다가와야 그들이 왜 오는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만나러 가기는 싫었다. 솔직히 잘못되어 목숨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성기사들은 신력을 이용해 전투를 벌이며 가끔씩 신기한 기술을 이용한다.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성기사들의 수가 일만여명에 가까우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성기사들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일주일을 예전처럼 파에그와 지냈다. 단지 예전과 다르다면 파에그의 정령수련을 도와줄 필요도 없으며 약초도 재배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방문하려고 자주 찾아왔다. 대부분이 처음보는 사람들이라 낯설었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그들은 최상급정령을 만나고 싶어하였다. 결국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최상급정령을 하루종일 소환해 줘야만 했다. "카인씨 부탁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찾아가는 것도 아닌데요." 부아크의 말에 대답하였다. 성기사들이 결국은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까지 도착하였다. 그들은 더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 때문에 엘프 소국은 긴장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실레스틴 부탁해.'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에게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에 머무는 성기사들에 대해서 알아오도록 시켰다. 나는 정확한 상황을 알기위해 실레스틴의 감정을 공유하여 느껴보았다. 실레스틴은 하늘을 빠른속도로 이동하더니 금새 일만여명이 진을치고 있는 성기사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실레스틴을 통해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느낌만으로도 성기사들의 동향을 알 수 있었다. 성기사들의 대화소리가 실레스틴을 통해서 모두 들려왔지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대부분 자신들이 엘프 소국에 온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신이 내린 신탁이 원인이었군.'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에 온 이유를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알게 되었다. 성기사들의 대화를 계속 듣다보니 새로운 정보을 계속 알 수 있었다. 성기사들의 일행중에는 성녀들이 있었는데 그녀들의 뜻에 의해서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성녀들이 어떤 신탁을 받았을까?' 어떠한 신탁이길래 엘프 소국으로 왔어야만 했는지 궁금했다. 실레스틴이 내 마음을 알아채고 장소를 성녀들이 사용하는 마차의 근처로 다가갔다. 실레스틴은 바람계열이라 아무런 자취도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멀리서 실레스틴을 통해서 그곳의 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실레스틴이 성녀들이 머문다는 마차로 다가가는 순간에 뭔가 생소한 느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마차에서 한 명의 여인이 내린 것이다. 그 여인을 본 순간 성녀임을 단 번에 알게 되었다. 오래전 세실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 실레스틴을 통해서 전해져왔다. "물러가세요." 성녀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실레스틴이 어떠한 반발에 부딪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성녀가 신력을 발휘하였음을 느끼고 곧바로 실레스틴보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오늘 알아낸 것만으로도 무척 만족이었다. 성녀들이 신탁을 받고서 찾아온 것과 성기사들 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도 신탁 내용은 말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리라. 예전에 세실리아와 소피아를 데리고 여행할 때 천신과 신전 그리고 신관에 대한 말을 많이 들어서 알고있는 것이다. 나는 알게된 사실을 곧바로 부아크에게 알려주었다. 부아크는 패로이 숲의 엘프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사실 엘프들은 되도록 성기사들과의 만남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섬기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무척 예민한 상태였다. 그렇게 엘프 소국은 일만여명의 성기사들과 대치를 이루게 된 것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5 회] 26. 천신 로리아는 성녀로서 엘프 소국에 있을 이단자 카인을 빨리 심판하고 떠나길 원했다. 성녀의 신분이라 신전의 온갖 보호를 받으며 지내왔기 때문에 엘프 소국까지 오는게 쉽지만은 않았다. 신력이 없었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에 도착한 첫 날 성녀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이단자를 심판할지 고심하였다. 오는 동안에도 내내 고민했지만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이단자 심판은 전적으로 성기사들에게 맡겨져왔다. 하지만 신탁에 의한 이단자 심판이라 성녀들까지 나서게 된 것이다. 성녀들이 타고있는 마차는 무척 편안했다. 하지만 너무나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아무리 편한 마차라해도 밤하늘조차 보지못한 성녀들은 답답한 마음이였다. 로리아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라도 구경하기 위해서 마차에서 밖으로 나왔다. 마차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성기사들이 다가왔다. "산책을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별이나 보다가 들어가겠습니다." 마차를 호위하는 성기사가 물어보자 로리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성기사들의 고충은 성녀가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마차밖을 나서는 경우도 없다. 로리아도 오늘 만큼은 호위에 지친 성기사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아 모두 잘 지냈니?' 로리아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어려서부터 친구없이 성녀로서 교육받으며 자라온 그녀에게는 친구라고는 오직 밤하늘의 별 뿐이었다. 로리아는 카인이라는 이단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고민중인 다른 성녀들이 부러웠다. 성녀들중에서 로리아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요즘에 와서는 신탁을 받아 문젤르 해결해도 무엇인가 커다란 일을 해냈다는 만족감이 생기지 않았다. '천신님이 하시는 일이 모두 옳바른 일일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의문을 품었다. 신력에 의해서 늙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늙어버렸다. 로리아의 겉모습은 30대 중반이지만 실제 나이가 무려 80세였다. 한참을 그렇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신력의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무슨일이지?' 신력이 꿈틀거리는 일은 주변에 무슨일이 생겼음을 의미했다. 로리아는 신력을 끌어올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 때 마차로 다가오는 알수없는 기운을 느꼈다. 허공에서 빠른 속으로 마차 주변을 한 바퀴 돌다가 마차안으로 들어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로리아는 정확히 무슨일인지 모르지만 마차앞에 떠도는 무엇인가가 신력에 반발을 일으키는 원인임을 알 수 있었다. 마차안에서 성녀들도 눈치를 채고서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로리아는 성녀들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대로 마차의 주변을 신력으로 보호하였다. 휘이이 휘이이. 로리아만이 느끼는 알수없는 기운의 정체는 마차를 살펴보기 위해서 나타난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이었다. 로리아는 실레스틴이 마차를 보호하는 신력 때문에 마차안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똑똑히 느껴졌다. 성녀들이 생활하는 마차주변을 실레스틴이 오가는데도 성기사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로리아는 실레스틴을 눈치챘지만 정확한 정체를 알지 못했다. 실레스틴은 잠시 마차주변을 살펴보더니 사라졌다. "로리아님 무슨일인가요?" 마차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채고 마찬안에 있던 성녀들이 밖에있는 로리아를 향해서 말했다. 로리아로서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경험한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었다. "혹시 정령이 아닐까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대적(敵對的)인 태도는 아니었어요. 단지 주변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로리아는 실레스틴이 마차주변을 살펴보려는듯이 움직였다고 대답하였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성녀라해서 모든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더욱이 이단자 심판이라서 성녀들을 제외한 모두가 성기사들로 이루어진 일행이라 다양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물론 일행이라 말하기에는 성기사들이 일만여명이나 함께하지만 말이다. "뾰족한 방법이 없는 이상 신탁을 기다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녀들은 엘프 소국을 눈앞에 두고 도저히 성기사들을 파견하지 못하고 신탁을 기다렸다. 이단자 심판이라는 거창한 목적이 있지만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에 들어가는 순간에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볼 것이 자명했다. 그러한 상황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성기사들은 많은 선행을 베푼다. 하지만 이단자를 심판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피해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이단자를 심판하는데 집중할 뿐이다. 그것만이 천신이 내려주신 신력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새로운 신탁은 내려지지 않았다. 로리아는 신탁을 기다리는 동안에 자신이 보았던 그 무엇이 정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기사가 주변에 있는 영지를 찾아가 정령에 관련된 책을 가져온 것이다. 귀족들은 교양을 위해서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녀들은 천신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단이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들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로리아는 그런것에 상관하지 않고 성기사가 얻어온 정령사가 무엇인지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정령사가 이단자 심판을 받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로리아로서는 정령사에 대해 알게되고 카인이란 정령사가 이단인 이유를 알고 싶어졌다. 이단자 심판은 천신을 믿는 신도가 받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하지만 천신이 신탁으로 내린 카인은 오래전부터 정령사로 알려져 있었다. 설사 아주 먼 과거에 천신을 믿는 신도라 했을지라도 지금에서야 이단자로 심판을 내리라는 신탁을 내린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알지못하는 무엇인가가 있을까?'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음을 느끼며 천신의 신탁에 의문이 가중되었다. 로리아는 성녀들에게 정령사에 대해 알려주려다 그만두었다. 가뜩이나 엘프 소국에서 카인을 어떻게 심판할지 고민중이 그녀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로리아는 정령사에 대해서 적혀있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신은 천신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 대부분이 천신을 가장 많이 믿을 뿐이고 다른 종족은 각기 다른 신을 섬긴다. 천신, 마신 그리고 정령신이 많이 알려졌을 뿐이다. 로리아는 정령신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야만 천신이 카인이란 정령사를 이단자로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결국 잊지못할 순간이 로리아에게 찾아왔다. '오늘 이단자를 심판할 것이다.' 성녀들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탁이 내려졌다. 이전과 다름없이 성녀들 모두에게 같은 신탁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기다리던 신탁의 내용이 아니었다. 성녀들은 이단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아무상관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기 싫었다. 그래서 성기사들을 엘프 소국으로 보내지 않고 이렇게 기다렸던 것이다. "성기사들을 보내라는 의미는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 저희들의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신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성녀들은 신탁의 내용을 해석하기 위해서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어떠한 내용으로 해석되어지든 오늘 무엇인가 큰 일이 발생할 것이 분명하였다. 성녀들이 열을 다해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 로리아는 아직까지도 일어나지 않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성녀들은 가끔씩 신탁을 받으면 충격을 받아 깨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굳이 깨우려하지 않았다. "천신님이 이단자에게 신벌이라도 내린다는 뜻일까요?" "신벌이 가능했다면 진작 신벌이 내려졌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대화를 통해서도 아무런 내용도 해석되지 않자 성녀들이 걱정을 하였다. 성녀들은 혹시 몰라서 성기사들에게 오늘 무슨일이 발생하더라도 침착하게 행동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 신탁의 내용은 무척 간단하지만 어떠한 행동을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저희들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게 아닐까요?"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저 오늘 이단자를 심판한다고 천신님께서 알려주는 것이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괜히 저희들이 신탁의 내용을 부풀려 생각해서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어떠한 행동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그저 지켜보라는 의미 같습니다." 성녀들은 대화를 통해서 그럴듯하게 내용을 정리하였다. 천신은 어떠한 행동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알려주는 것 뿐이다. 성녀들은 천신이 굳이 신탁을 통해서 이단자 심판에 대해서 알려줄 필요성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만약 천신이 직접 심판을 한다면 처음부터 신탁을 내려줄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 "아아아아아" 조용히 자고있던 로리아가 마차가 떠나가도록 비명을 질렀다. 순간적으로 성녀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차를 호위하는 성기사가 마차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고 다가와 말했다. 성녀들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로리아에게 신력을 전해주어 안정시켰다. 하지만 로리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용한 신력이 로리아에게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 "천신 강림입니다. 신력을 모두 로리아 성녀님에게 전해주세요." 로리아가 신력을 빨아들이자 성녀들은 로리아의 상태를 이해하였다. 천신의 강림은 성녀라도 죽음에 다다를 정도로 위험하다. 하지만 다른 성녀들이 신력으로 도운다면 생명이 희생되지 않고서도 천신을 강림시킬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성녀들이 자신의 신력을 남김없이 로리아에게 전해주었다. "마차를 보호하세요. 천신이 강림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마차 안에서 들려온 성녀의 말에 성기사가 얼떨떨한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성기사는 너무도 놀라운 말이라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잠시 옆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에서 들려올 여자의 비명은 성녀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성기사들이 모여 있어서 마차안에서 들려온 말을 함께 들었던 것이다. 성기사들은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단자를 심판하는 일이 천신 스스로 강림할 정도로 큰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는 천신이 강림을 하려는 상황이었다. "이제서야 신탁의 내용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군요. 천신님께서 강림하실줄은..." 성녀들은 모든 신력을 로리아에게 전해주고 마차 끝에서 천신이 강림하길 기다리며 대화를 나눴다. 이같은 경험은 평생 하기도 어려웠다. 천신이 강림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육을 통해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처음이었다. 로리아의 몸은 옆으로 누운 상태로 허공에 떠 있었다. 비명소리는 처음에만 들렸고 성녀들이 신력을 전해주자 멈추었다. 신력이 모두 안정되자 로리아의 감겨있던 눈이 떠졌다. 허공에서 누워있던 몸이 돌아가며 정상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발끝은 바닥에서 한뼘 가량 떨어져 있었다. "천신님의 강림을 지켜보게 되어..." "천신님의 강림을 축하드..." 성녀들은 로리아의 몸에 천신이 강림했음을 알아채고 말을 건넸지만 그 순간에 로리아의 몸은 마차밖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밖에서 마차안의 동정을 살피던 성기사들은 로리아가 허공에 뜬채로 나오자 모두들 어찌할바를 몰랐다. 로리아의 몸은 허공으로 치솟하 남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성기사들은 허공에서 움직이는 로리라의 몸을 따라서 움직였다. 성녀들은 모든 신력을 로리아에게 전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성녀들을 호휘하는 성기사들의 도움을 받고서 마차밖으로 겨우 나와 허공에 뜬 상태로 남쪽을 향하는 로리아를 바라보았다. "천신님께서 직접 이단자를 심판할테니 따르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간섭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성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있던 성기사중 한 명이 성녀의 말에 대답하였다. 성기사는 천신이 강림한 로리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성기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신력을 이용하는지 말을 타고있는 성기사들 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이단자를 심판하시려고 강림하실줄이야." "처음 목격한 강림이었습니다. 오늘과 같은 일이 또 있을까요?" 성녀들은 천신이 강림한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성녀들은 지금에서야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이 오랜 시간의 토론끝에 알아낸 내용과 맞아 떨어졌다. 천신은 성녀들에게 이단자를 자신이 직접 심판한다고 알린 것 뿐이었다. "천신님이 강림하지 않아야 대륙이 평화롭다는 증거겠지요. 그건 그렇고 성기사분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 되겠군요." "천신님이 이단자를 심판하는 모습이 기대되는군요." 성녀들도 직접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쉬워하며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성녀들까지 나선다면 성기사들과 이단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강림한 천신님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었다. 물론 성녀들보다도 더욱 불행한 사람은 성녀들을 호위하는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은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천신이 강림하여 이단자를 심판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리아를 따르는 성기사들은 뒤늦게 전해받은 소식을 듣고 속도를 늦추었다. 처음에는 로리아를 보호하듯 앞장서서 주변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모든 성기사들은 멀리서 로리아의 뒤를 따랐다. 이동이 빠르지 않아서 따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 엘프 소국은 북으로 그 영향이 확대되고 있었다. 인간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기를 원한다. 엘프 소국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성기사들이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에 북쪽으로 넓혀지던 엘프 소국의 영향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엘프들을 믿고서 혼란을 야기시키지는 않았다. 일만여명이나 되는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의 코앞에서 며칠째 생활하면서 정령사들은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르시온 제국을 위해서 엘프 소국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이 전쟁 후유증으로 치안상황이 엉망일 때 신전이 나섰던 전례(典例)도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도 아무일 없으려나보군요." 엘리나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엘리나는 전투가 가능한 정령사들을 매일같이 소집하여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실레스틴님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까?" 부아크가 조용히 앉아있는 내게 말했다. 처음 성기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매일같이 실레스틴을 보내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다못해 엘프 소국의 누군가와 접촉을 하려는 의지조차도 없었다. "오전에 확인하고 오후에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확인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카인님. 카인님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부아크의 입발린 소리에 함께있던 스트라, 엘리나, 마샤 그리고 여러 정령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소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최상급정령사의 위력을 보여준 후부터는 모두들 나를 대하는게 조심스러웠다. 일국의 왕이라도 대접하는듯이 말이다. 중요한 회의가 있으면 항상 참여시키고 진정한 엘프 소국의 지도자로 대우하는 것이다. 물론 나로서는 그들이 최상급정령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대우하는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면 그만이지.' 능력에 따라서 사람의 대우가 달리지니까 왠지 섭섭하면서도 편안했다.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위협으로 다가왔지만 모두들 불안한 마음조차 없었다. 정령사들 대부분이 나만 있다면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몰려와도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레스틴 또 부탁할께." "알겠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소환된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을 보고 모두가 감격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위해서 최상급정령들을 소환하여 도움을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크라이 숲에서 있었던 일을 계기가 생각나 소환하지 않았다. 최상급정령과의 대화를 통해서 어떠한 지식을 알게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령들은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하다못해 누군가가 자신이 얼만큼의 수명을 갖고있는지 묻는다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말해줄 가능성도 있었다. 엘프에게는 문제되지 않을 일이지만 인간에겐 커다란 위험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또다른 죽음이었다. "정령인지 의심스러워요." 실레스틴이 방안에서 모습을 감추자 마샤가 말했다. 실레스틴이 뿜어내는 기운이나 모습은 하급이나 중급 정령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능력은 둘째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진다.그나마 며칠째 계속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자세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기사들이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카인님이 며칠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날 뻔 했어요." 성기사들의 위협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을 말했다. 실레스틴은 잠시후 방안에 모습을 나타냈고 평소와 같은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성기사들은 항상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에서 아무런 이동없이 지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카인님 느껴지지 않습니까?' 실레스틴은 소리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전했다. 모든 사람들이 성기사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나는 실레스틴이 질문하는 의도를 몰랐다. '느껴지다니? 아무것도 안느껴지는데.' '천신이 강림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으며, 그 뒤로는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실레스틴과 내가 대화하고 있음을 짐작하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로서는 실레스틴이 대화하는데 감히 질문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레스틴은 소환자인 나를 주인으로서 조심스럽게 대하지만 타인에게는 무서운 최상급정령의 위엄을 보여주어 압박한다. "뭐라구! 강림이라니?" 천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게 나였다. 생각만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입을 통해서 큰 소리로 반문하였다. 눈앞에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과거 자살을 해야만 했던 삶을 보상받고 싶었다. 갑자기 소리치는 나를 보면서 모두들 놀랐다. "천신이 성녀의 몸에 강림한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나타나다니! 그럴수가 있는거야? 불가능한 일이잖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얼마전에도 카인님께서 잠깐이지만 엘라임님을 만나셨지 않습니까. 천신도 성녀가 희생하면 충분히 강림하여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론 정령신처럼 본체가 아닌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겠지만 말입니다." 실레스틴이 말하는 사실에 너무나 놀라웠다. 신이 나타날 수 있다니 말이다. 내가 엘라임을 만나긴 했지만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다. 더구나 나같이 800년의 생명력을 희생하여 정령왕을 소환하려는 미친 엘프가 있지 않고서야 신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천신이라도 분명 신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신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강림이라니 아무리 성녀가 뛰어나도 한 명의 성녀로서는 절대 강림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한 명의 성녀가 강림시킨다 할지라도 그 신간은 매우 짧다. 실레스틴은 천신이 강림할 수 있는 여러가지 사실에 대해 알려주었다. "대화에 감히 끼어들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성기사들과 함께온 성녀들은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맞아. 그렇지." 부아크가 대화에 끼어든 덕분으로 천신이 소환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실레스틴 조차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러명의 성녀들이 도움을 주었다면 천신이 충분히 강림할 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있었던 의문인데 왜 저들이 엘프 소국을 공격하는거지?" 일만여명의 성기사들까지 함께한 마당에 천신이 강림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역사를 살펴보자면 지금까지 조화로움을 신봉하는 정령사와 천신을 믿는 사람들은 서로 관여하지 않아왔다. 단지 마신을 믿는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합심할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천신이 강림하고서야 이유가 확실해졌습니다. 바로 카인님 때문입니다." "뭐라구? 나 때문에?" 실레스틴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나 하나 때문에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몰려오고 천신까지 강림하다니 말이다. 그렇게 내가 중요한 인물인지 지금까지 몰랐다.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을 접해서인지 천신에 대한 분노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카인님께서는 천신이 내려준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이 있었지만 자살을 통해서 반쪽이나마 운명을 벗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까지 소환하시게 되어 나머지 반쪽의 운명마저도 완벽하게 천신의 영향을 벗어나신 겁니다. 카인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왔는지 기억조차 못합니다. 그런 제 기억속에서도 신의 운명을 벗어난 사람은 다섯이 넘지 않습니다.' '뭐야? 수만년 동안에 신의 운명을 거역한 사람이 그렇게나 없었어?' '수만년이라 말씀드린적 없습니다. 하지만 카인님과 같은 경우는 확실히 다섯이 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입니다. 천신이 강림할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나마 운명에서 벗어난 사람들 모두가 천신이 강림하여 죽였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말씀디리는 이유는 카인님께서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을 만나셨기 때문에 정령이 소환자에게 알릴 수 있는 율법에 대한 제약이 모두 풀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전의 카인님이었다면 알려드리지 못했을 겁니다.' 실레스틴은 중요한 말로 생각되는지 생각으로 대화를 하였다. 나에겐 진실 자체가 또다른 충격이었다. 실레스틴이 진작 정령에 대한 율법의 제약이 풀려진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심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잊혀졌던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러가지 잡생각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실레스틴이 살아온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그 기나긴 시간동안 천신의 운명을 벗어난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 겨우 다섯이고 그나마 강림한 천신에게 죽다니 참으로 가슴아픈 이야기였다. 나도 그중에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뜩하였다. '실레스틴 그러면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천신이 강림할지라도 발휘할 수 있는 힘은 한정됩니다. 강림한 성녀의 능력에 따라 발휘되는 힘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다른 성녀들이 모든 신력을 넘겨주었을테니 전혀 추측할 수 없이 강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게 전부입니다.' 실레스틴과의 대화를 통해서 약간이나마 희망을 얻었다. 천신이라 할지라도 단지 강림한 성녀의 힘을 빌어서 사용할 뿐이다. 정령사가 아무리 강한 정령을 소환해도 그 정령은 소환자의 마나만큼 힘을 발휘하듯이 말이다. "모두들 죄송합니다. 엘프 소국이 저 하나때문에 피해보는 것은 싫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눈앞에 벌어진 현실은 엘프 소국이 아닌 저로 인해서 발생한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니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희가 알면 안되는 일인가요?" 급한 마음에 대충대충 중요한 말만 전하자 부아크가 반문하였다. 혹시 나로인해서 그들까지 피해를 입을까 생각되어 모든 진실을 말해주었다. 지금까지 정령사들 사이에서는 나에게 무엇인가 알수없는 비밀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나이보다 젊은 비결도 그중에 하나이다. 어떤 경우는 내가 엘프의 피를 마셔서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패러렐라이프에 관한 운명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놀라서 할말을 잃었다. 그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전에 나는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강림한 천신을 향해 날아갔다. 엘프 소국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직접 해결해야만 했다.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강림을 당한 성녀의 힘을 모두 소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해야 엘프 소국에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래의 마음은 천신에게 어떻게서라도 지난 과거의 삶을 보상받겠다는 의지로 가득차 있었다. '운명은 정해질 수 없는거야. 신이라도 그것은 용서할 수 없어.' 예전이었다면 전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가질수 없었던 생명력의 기운이 있었다. 예전 800년의 생명력으로도 주체하기 힘든 능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조차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생명력의 기운이었다. 짐작으로는 일만년에 해당하는 생명력이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천신 네놈은 강림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실레스틴의 도움을 받고있으니 잠시후면 만나게 될 것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천신 때문에 자살까지 했는데 그깟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레스틴이 날아가면서 천신이 강림하여 발휘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천신에 대한 적개심(敵愾心)만을 키워 두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였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7 회] 27. 생존 실레스틴이 신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인도하였다. 실레스틴이 알려주지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신력이 피부속 깊이 느껴졌다.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많은 흰점들이 조금씩 뚜렷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성기사들입니다.' 실레스틴의 대답을 듣고서야 흰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흰점 조차도 발견하지 못할 거리였지만 생명력을 끌어올린 상태라 높은 오감 때문에 쉽게 알아챈 것이다. 수많은 흰점들은 허공에 떠있는 또다른 흰점을 따르고 있었다. '천신이 강림한 성녀에다가 산 하나를 뒤덮을만한 성기사들까지 있으니 살아나긴 힘들겠군.' 정령사들을 뿌리치고 나올 때는 모든 생명력을 사용하여 천신과 싸우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많았기 때문에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천신을 따르는 수많은 성기사들을 보자 그나마 갖고있던 삶의 희망이 무너졌다. 천신이 강림한 성녀와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 결국 승리한다 할지라도 성기사들에게서 벗어나긴 틀려먹은 것이다. 한 두명도 아니고 1만여명에 달하는 성기사들이었다.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갈수록 어마어마한 신력이 몸을 엄습하고 있었다. '주인님, 성기사들은 절대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림한 천신 이외에도 1만여명의 성기사들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내게 실레스틴이 희망적인 생각을 전달했다. '무슨 말이야?' '천신이 강림하여 이단자를 심판할 경우에는 누구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신관이나 성기사들은 천신이 강림한 그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인님께서 굳이 강림한 천신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기만 한다면 성기사들이 그것을 천신의 뜻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신탁을 내려 주인님을 직접 이단자로 결정짓지 않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실레스틴의 말에 한가닥 희망을 가졌다. 막상 강림한 천신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느껴지는 신력만으로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어려서부터 천신에 대한 반감과 몸속에 들끓고 있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견디고 있는 것이다. 여러가지 잡념이 머리를 스치는 동안에 천신이 강림한 성녀와 그 뒤를 따르는 성기사들이 또렷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실레스틴에게 의지해 허공에 떠있는 나와 성녀의 거리는 보통의 사람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먼 거리였지만 오감이 발달한 엘프나 정령사 그리고 천신을 믿는 신관이나 성기사들에게는 한 모금의 숨으로 다가갈 수 있는 거리였다. 서로의 힘을 느끼고 그 자리에 멈추어 아무말 없이 바라보았다. 성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력이 강해지고 있었고 성기사들도 그 신력을 느꼈는지 조금씩 뒤로 피하고 있었다. 처음 성기사들은 허공에 떠있는 성녀를 따라서 이동하다가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나를 발견하고 무척 이색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표정도 성녀의 신력이 점점 강해지자 바로 바뀌었다. '주인님! 정신차리세요. 신력이 정점(頂點)에 다다르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않는 내게 실레스틴이 정신을 차리도록 강한 생각을 보냈다. 그제서야 눈앞에 성녀의 몸속에 강림한 천신이 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왔음을 절실히 느꼈다. 그동안 천신에 의해 고생했던 운명에 대한 보상심리로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은 어디론가 숨어들고 오직 살기위해서 공격해야 된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채웠다. '나는 살아야 돼. 천신의 뜻을 거스리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을거야.' 신관이 펼치는 신력의 힘과 가히 비교조차 할수없는 신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륙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의 몸속에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생명력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대항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휘이이. 휘이이이익. 허공에 떠있는 성녀를 중심으로 강한 바람이 주변을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으로 지상에 있는 나무가 뿌리채 뽑힐 정도로 강했기 때문에 흙과 작은 돌들이 바람을 따라 비상하여 폭풍이 찾아온듯한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폭풍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뒤로 이동하였다. 신력에 의해 생겨난 폭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오직 내 주변 뿐이었다. 실레스틴은 바람의 최상급정령사이기 때문에 폭풍을 그저 강한 바람정도로 생각한다. "아아아아아" 무엇인가 알수없는 비명소리가 폭풍속에서 들려왔다. 주변에 여성이라고는 허공에 떠있는 성녀 뿐이라 누구의 소리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비명소리로 알았지만 계속 듣다보니 절대 비명은 아니었다. '천신이 주인님에게 이단자 심판을 내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천신의 말은 신탁을 받는 성녀밖에 알아듣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천신이 직접 강림한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인님께서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신이 강림하여 말하면 아무도 못알아 듣는거야?' '천신은 자신이 강림한 몸의 주인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데 지금같은 경우는 아마도 몸의 주인이 이성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녀가 천신의 강림을 감당하지 못하여 의식속에서 이성을 잃었거나 강림을 반대할 경우도 있습니다.' 눈깜짝 할 사이에 실레스틴과의 대화를 통해서 지금의 괴성이 비명이 아닌 천신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언어가 아닌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이라 아주 짧은 시간에 전할 수 있는 말이 무척이나 많다. '나를 이단자로 심판한다는 말 이외에는 없어?' '네, 주인님' 들려오는 괴성이 그저 나를 심판하려고 한다는 말이라 생각하니 듣기 싫어졌다.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실레스틴의 보호가 없으면 몸이 찢겨져 나갈 정도였다. 천신이 많은 신력으로 무슨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라 실레스틴의 보호만으로 버티기에는 불안했다. '고통스럽겠지만 오늘만큼은 모두다 최선을 다해서 도와줘.' 네 명의 최상급정령에게 내 뜻을 밝혔다. 최상급정령은 얼핏 신과 비교한다면 하급신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낮은 신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천신과 나 하나 때문에 전혀다른 천신과 대항해야 한다니 무척 어려운 일이라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최상급정령들이 더 소환되어 모습을 드러냈다. 실레스틴은 내가 비행하며 동시에 보호하기 위해서 소환되어 있었다. 다른 세 명의 최상급정령들이 허공에 실체화되자 곧바로 내 주변에 강한 보호막이 생성되었다. 지금까지는 실레스틴이 생성시킨 풍막(風膜) 하나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막(水膜), 화막(火膜) 그리고 지막(地막)으로 겹겹히 둘러싸고 있어서 어떠한 위험이 닥쳐도 안전할 것 같았다. 예전에도 가능했지만 많은 생명력이 소모되어 단 한 번도 네 계열의 보호막을 사용한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력도 넘쳐나고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 많은 생명력이 낭비되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신력에 의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지물(地物)들이 허공으로 비상하여 나를 덮치고 있었지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였다. 흙, 돌 그리고 나무를 비롯해 모든 것들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였지만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성녀 주변에 발생하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성녀의 몸이 태양이라도 된듯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무척 아름다웠다. '주인님 벗어나세요!' '주인님 도망치세요!' 최상급정령들이 일제히 같은 생각을 전해왔다. 무척 다급하여 당장 내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지금 폭풍으로 인해 몸을 빼기가 곤란하긴 했지만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더구나 실레스틴이 무리를 한다면 신력에 의해서 발생된 폭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강림한 천신과 맞서기 위해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무슨일인데 그래?' '지금 빛나는 것은 신력이 수백수천배로 집중되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저 빛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주인님을 보호하기 위해 생성한 보호막도 잠깐의 시간만을 견뎌낼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강림한 천신이 어떠한 방법으로 나를 심판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성녀에게는 무기도 없었고 그저 두려움을 주는 신력만을 가득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도 최상급 4대 정령이라면 죽지않을 자신이 있었다. 신력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힘이 나를 위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신력을 바탕으로 어떠한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성녀의 몸은 집중된 신력이 감싸며 빛을 뿌리고 있었는데 그것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성녀가 날아와 그저 나와 스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모든게 끝이었다.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으로 처참한 삶이구나.' 저주스런 운명에 대하여 천신에게 복수를 할 생각은 꿈도꾸지 못하고 내 목숨 추수리기도 어려운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정말이지 가장 생각하기 싫은 방법을 사용해야 할 상황이었다. 강림한 천신에게 맞서지 않고 피하는 방법을 말이다. 좋게 말하면 흔히 사람들이 사용하는 작전상 후퇴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망이다.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천신이 강림하는 시간이 신력에 좌지우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천신이 신력을 모두 사용할 동안만 피해 있는다면 안전할 것은 분명했다. '최선을 다해서 벗어나자.' 최상급정령에게 벗어나자고 의견을 전했지만 모두들 그럴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소환자인 내 지시를 반박하는 이유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령은 오직 타당한 이유가 있을때만 소환자의 지시를 어길 뿐이다. 물론 그마져도 소환자가 원한다면 마지막까지 반대하지는 않는다. '주인님이 피하시면 엘프 소국은 신력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모든 천재지변(天災地變)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지금 주인님을 향하는 폭풍은 남쪽을 향할 것입니다. 지물이 사방에 날리면 평범한 인간들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또한 엘프들은 죽지 않겠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숲이 모두 파괴될 것입니다.' '피할수도 없는 상황이라니 젠장.' 정령들의 말을 듣고서야 피할 수 없음을 자각하였다. 최상급정령의 보호를 받다보니 그 영향력이 천재지변을 일으킬 정도로 강하다는 인식을 하지 못한게 실수였다. 결국 강림한 천신에게 대항하는 길만이 최선책인 것이다. 최상급정령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서로 공유되어 폭풍의 위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쉽게 느껴졌다. 작은 공간에서 발생하는 폭풍이지만 그로인해 파생될 자연재해는 엘프 소국의 전체를 대륙에서 사라질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신력의 보호를 받는 성녀가 조금씩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상에서 숲을 구성하던 것들이 주위를 빠르게 날아다녀 위험한데도 그녀의 곁은 해맑은 날처럼 조용했다. 물론 나도 다가오는 성녀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위험도 겪고있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다가오지 못하도록 해봐!'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지를 못하고 정령들에게 생각을 전했다. 내 한 목숨 살려고 한다면 그저 도망가면 된다. 하지만 이미 지금의 사건이 나로인해 발생된 일이라 말해놓고 혼자 책임진다며 나왔는데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더구나 패로이 숲을 지나 크라이 숲의 가족에게도 피해를 줄 가능성도 많았다. '생명력이 고갈되기 전에 끝나야 할텐데.' 대륙의 어느누구도 나와같은 생명력이 없을텐데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은 생명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최상급정령사들이 다가오는 천신을 막아내기 위한 행동을 볼 때마다 느끼고 있었다.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눈앞에서 보고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하고있는 것이라고는 최상급정령들이 생명력을 이용하도록 허락한게 전부이다. 땅에서 나무가 자라나듯 흙기둥들이 솟아나 성녀에게 다가가 꽂혀버렸다. 그러나 성녀에게 다가간 흙기둥은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산산히 조각나 땅으로 떨어졌다. 땅에서 쉴세없이 흙기둥이 솟아나 성녀에게 향하는 모습은 악마의 불꽃이 사람을 잡아먹는 듯한 형상이었다. 땅의 최상급정령 노에아넨이 내게 다가오는 성녀를 저지시키기 위해서 지상의 흙을 이용하고 있었다. 강한 폭풍이 부는데도 불구하고 칼날보다 강함 바람이 성녀의 주위를 맴돌며 계속 공격하였다. 또한 바람 이외에도 이 세상 누구도 꺼뜨릴 수 없는 불꽃도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의 최상급정령 엘레스트라는 공격을 하기보다는 성녀가 다가오는 앞에 계속해서 수벽(水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최상급정령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조금씩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녀가 강한 공격을 받은만큼 조금씩 저지를 받으며 신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신력이 생명력과 반발을 일으키기 때문에 쉽게 느껴졌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신력이 모두 소모되어 강림한 천신이 성녀의 몸에서 떠나는 것이다. 천신이 강림한 성녀가 모든 신력을 소모하기 전에 내 앞까지 다가온다면 나의 삶을 끝이다. '아아아아아' '으으으으으' 소리가 아닌 생각으로 전해오는 최상급정령의 비명은 정령사들도 듣기 힘든 경험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쉴세없이 들리고 있었다. 최상급정령사들의 공격은 성녀의 몸에서 빛나는 신력에 다가가기만 하면 산산조각 나며 부서지고 흩어졌다. 그것이 정령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천신과 정령신은 신력과 생명력이 반발하듯 서로에게 독이 되는 존재이다. 둘 모두 악(惡)을 멸하는 선신(善神)을 대표하는 존재이지만 엄연히 행하는 힘의 성질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신으로서의 성격이 같다 할지라도 성질은 다르다. '삶의 마지막까지 빼앗아야 되겠냐!' 처음 성녀와의 거리가 절반인 곳까지 다가오자 그녀를 향해 발악하듯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강림한 천신인만큼 정령처럼 나의 생각을 들으리라 생각했다. 죽음의 두려움을 겪는 상황은 둘째치고 정령과 감정을 함께 나누다보니 고통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생명력을 많이 사용할 수록 정령과의 친화력이 상승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어서 내가 정령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신력으로 생겨난 폭풍이 주위를 감싸도 성녀의 모습만은 똑똑히 보였다. 가끔 뿌리채 뽑혀져 날아다니는 나무와 흙이 시야를 가렸지만 말이다. 정령의 감정을 통해서 고통을 겪을수록 살고싶은 의지가 강하게 생겨났다. 솔직히 천신이 저주스런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만 선물했지만 그대로 지켜만 보았다면 언젠가는 삶의 고단함을 느끼며 자살했을 것이다. 갖고있는 생명력에 대한 남은 삶이 지겨워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천신이 죽음을 강요하니 어떻게라도 살아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떼어놓으면 더욱더 사랑하는 감정이 넘치듯이 말이다. '네놈이 결정한 운명을 벗어나면 죽어야 하는거냐?' 그많던 생명력을 사용하고서도 최상급정령들은 성녀가 가까이 오는 것을 결국은 막지 못했다. 성녀를 향해 소리를 질러도 천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천신이 무엇이길래 내게 고통을 주는지 분노만이 머리속을 가득채웠다. 성녀의 몸을 빛나게 하는 신력이 나를 스친다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남은 생명력을 단 번에 끌어올려 정령에게 쏟아부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령의 고통만이 가중될 뿐이다. 결국 손으로 만지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성녀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신력으로 빛나고 있어서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깨끗하고 하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정말로 신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성녀의 옷차림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지 못하도록 정령들이 노력했건만 막상 눈앞으로 다가오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성녀는 마지막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는 최상급정령들의 보호막만 깨뜨리면 모든게 끝이었다. '천신에게 직접 죽게 되었군.' 성녀를 감싸고 있던 신력과 실레스틴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풍막이 맞닿았다. 그동안 나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었던 폭풍은 가라앉았다. 눈앞에 성녀가 있으니 폭풍이 나를 가두지 않아도 더이상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이이이이이이' 바람이 비명을 지르는 느낌이 주변을 몰아쳤다. 조화로운 엘프나 정령사만이 지금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는 정령만의 고통스런 비명이니 말이다. 성녀의 몸에서 발산하는 신력의 빛이 결국은 풍막을 깨뜨리자 실레스틴이 느끼는 고통의 감정이 더욱더 강하게 전해져왔다. '주인님 성녀의 눈을!' 엘레스트라는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내게 말했다. 죽는다는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았는데 무슨일인가 싶어서 눈을뜨고 성녀의 눈을 살펴보았다. 엘레스트라는 물의 최상급정령이라 치료와 방어에 뛰어난 위력이 있어서 지금까지 성녀를 공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정령들과 다르게 구경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내 앞으로 다가온 성녀에게 발생한 문제점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내게 알려준 것이다.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잖아. 왜 피를 흘리고 있는거지?' 성녀의 눈에서는 피가 흐르며 그녀의 새하얀 옷을 적시고 있었다. 깨끗한 흰백색이고 더구나 신력 때문에 몸이 빛나고 있어서 쉽게 눈에 들어왔다. '성녀의 몸이 강림한 천신을 버텨주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력도 처음보다 많이 약해졌습니다. 주인님을 묶어두고 있던 폭풍도 가라앉아 있습니다.' 엘레스트라의 말은 내게 희망을 주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겨났다. 지금까지의 어려움 정도라면 다음에 다시 천신이 강림하여도 강림한 사람의 몸이 지금처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천신이라 할지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생각되었다. 더구나 지금의 경험으로 강림한 천신이 나를 죽일정도는 되지만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라면 지금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는 당장 살아남는게 중요하지만 말이다. '남아있는 생명력을 모두 사용해서 공격해!' 성녀가 다가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성녀를 공격한 정령의 노력을 알면서도 다시금 공격을 재촉하라고 부탁이 아닌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 정령들도 성녀의 상태를 뒤늦게 알고서 쉴세없이 공격을 감행하였다. 성녀가 나와 손을 맞잡을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정령들의 공격이 내게도 위험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지만 어차피 죽음을 앞둔 상황이라 고민을 할 여유가 없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흙기둥과 불덩이들 그리고 바람이 창과 같은 형태로 뭉쳐서 성녀에게 다가가 충격을 주었다. 충격이 강해질수록 성녀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점점 많아졌다. 성녀의 몸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참혹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폭풍이 가라앉고 나를 보호하고 있던 풍막이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 결국 화막과 지막도 깨져 지금은 수막만이 유지되고 있었다. 풍만이 깨진 이후로 주변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천신을 숭배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천신이시여!" "천신이시여!" 폭풍으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다가 지금에서야 성기사들이 천신을 향해 기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 것이다. 1만여명이나 되는 성기사들이라 멀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함께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천신이 강림한 성녀가 피를 흘리고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리라. '네놈들의 천신이 죽는 모습도 구경해봐라!' 멀리서 1만여명이나 되는 성기사들이 지켜본다고 생각하자 그들에게 성녀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나간 삶에 발생했던 모든 나쁜일이 천신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생각될 지경이었다. 물론 천신에 의해서 모두 발생되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다. 성녀가 조금만 다가와 나를 마지막으로 보호하는 수막마져 깨뜨린다면 신력의 빛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천신이 강림한 성녀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눈에서 흐르는 피가 이제는 마구 쏟아져 바닥으로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최상급정령이 조금만 더 힘을 낸다면 눈앞의 성녀가 쓰러질 것만 같았다. 신력도 조금씩 줄어드는지 빛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엘레스트라가 겪는 고통이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만 수막이 견뎌내길 바래고 또 바랬다. 수막은 손가락 길이만큼의 두깨로 내가 알인듯 보호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붉게 물들면서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성녀의 눈에서 흐르는 핏물이 맞닿아 있는 수막으로 흘러들어서 물든 것이다. '엘레스트라 조금만 견뎌줘.' 엘레스트라가 생성한 수막이 견뎌내주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수막이 붉게 물들어서 더이상 밖의 상황이 보이지 않았지만 정령들과의 교감(交感)을 통해서 지금까지 했던 공격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엘레스트라, 실레스틴, 샐레아나 그리고 노에아넨의 마음을 지금처럼 강하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안돼!' 붉게 물든 수막이 걷혀지고 밖이 약간 보이자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나를 보호하던 수막이 신력을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려는 조짐을 보인 것이다. 수막의 파괴는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으아아악" 수막이 흩어지자 나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동안은 소리를 내려고해도 정령들의 보호막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외부와 실질적인 공간이 통하자 죽음이라는 냉혹한 현실이 닥친 것이다. 눈앞에는 천신이 강림하기 보다는 악마가 강림한듯한 모습의 성녀가 보였다. 수막에 피로 물든기 전까지는 눈에서만 피가 흐르는 모습을 목격했건만 지금은 이목구비(耳目口鼻) 전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스러운 성녀복은 더이상 성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신력이 왜 느껴지지 않는거지?' 당장 신력의 빛에 노출되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이상하게 생각되어 다시금 악마같은 모습의 성녀를 바라보자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성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물이 일정하게 기울어짐을 느꼈다. 지상의 모든 물체가 하늘로 올라오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성녀도 점점 기울어지더니 하늘로 올라오는 지상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자의가 아닌 타의로 성녀의 똑같은 모습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세상이 뒤집힐 수 있는지 상상했다. 휘이이이이 생생한 바람소리를 듣고서야 지금의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상이 하늘을 향해 올라오는게 아니라 성녀와 나의 몸이 뒤집혀서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실레스틴 살려줘!'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을 불렀다. 몸을 제어하는데는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받는게 가장 효율적이다. 내게 남은 생명력은 실레스틴을 불러들일 정도가 남아있지 않았지만 정령은 생명력이 없어도 소환하는게 가능하다. 물론 뛰어난 정령사이어야 하며 소환한 정령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내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정도는 가능했다. 휘이이이이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모면했지만 성녀는 그렇지 못했다. 함께 곤두박칠치던 성녀는 빠르게 지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퍼억!" 머리를 지상을 향한채로 거꾸로 떨어진 성녀는 결국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큰 소리를 냈다. 사람이라면 절대 살아나지 못할 상처를 입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이목구비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살아날 가능성은 절대 있을수 없었다. 실레스틴의 도움으로 천천히 성녀가 죽은 옆에 내려서 살아났음을 안도했다. 실레스틴이 방금전 일어났던 상황을 자세히 전해주었다. 생각을 통한 대화라 긴 시간이 필요없었다. 매우 복잡한 상황이지만 간단히 성녀가 뿜어내던 신력이 엘레스트라의 수막을 깨뜨렸을 때는 더이상 신력이 남아있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신력이 없어지자 강림한 천신이 성녀의 몸에 남아있지 못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떠난 것이다. 성녀의 신력도 떨어지고 나의 생명력도 다해 결국 둘이 함께 지상을 향해 거꾸로 떨어지다가 나만 살아남은 것이다. 적어도 나는 생명력이 없다 할지라도 정령과의 교감이 강하면 의지력만으로도 정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림한 천신에게서 살아났음을 기뻐해야 하지만 너무 극한 상황을 짧은시간에 경험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의 내 몸에는 갓 태어난 아기만큼의 생명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강림한 천신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생명력을 쥐어짜내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라앉자 처참한 모습의 성녀에게 눈길이 갔다. 높은 곳에서 머리부터 떨어졌으니 그 처참함이야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목은 꺾여져 있었고 눈알은 빠져나와 덜렁거렸으며 혀는 길게 내밀어져 입에 물려져 있었다. 머리는 반쪽은 약간 주저앉았고 나머지 부분도 살짝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았다. 팔다리는 나뭇가지처럼 이러저리 꺾여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전신이 피로 범벅이라 오래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몰라도 주변에 많은 성기사들을 바라보고서야 진작 자리를 떠나지 않은 나 자신의 행동에 후회감이 밀려왔다. 성기사들은 멀리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다가 신력 때문에 발생한 폭풍이 사라지자 다가온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죽는건가?' 생명력이 조금씩 회복되더니 지금은 엄청난 속도로 빨라졌지만 주변에 있는 성기사들에게서 벗어날 수준은 아니었다. 성기사들은 망연히 성녀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신이시여..." 성기사 한 명이 엎드리며 천신을 위한 기도문을 읊었다. 그를 따라서 모든 성기사들이 엎드리며 같은 행동을 하였다. 옆에 있던 나로서는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성기사들은 성녀를 향해 엎드렸지만 그 방향이 내가 주저앉은 곳과 같았기 때문이다. "천신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천신님의 자애와 사랑이 세상 끝까지..."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 천신님의 뜻이 전파되기를..." 성기사들의 기도문은 상당히 여러가지지만 그 뜻은 비슷하였다. 성기사들이 기도하는 동안에 자리를 피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성기사들은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성기사들이 앞으로 나와 처참한 성녀의 시신(屍身)을 조심스럽게 추수렸다. 솔직히 옆에 있으면서 지켜보는 자체가 끔찍했는데 그들은 성녀의 시신을 만지는 것 자체를 무슨 영광이라도 되는양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나무를 잘라 새하얀 옷감으로 감싸고 그 위에 성녀의 시신을 옮겼다. 성기사들이 성녀의 시신을 추수리는 시간이 끝나자 시신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녀의 꺾여진 목은 제자리로 맞춰져 있었고 튀어나온 눈알과 혀도 마찬가지였다. 부러진 팔과 다리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시신의 모습이 정상을 되찾은 것은 모두 성기사들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살아나진 않겠지만 말이다. 성기사들이 신력을 발휘해 성녀의 처참했던 모습을 인위적으로 바꾼 것임을 알아챘다. 옆에 있으면서 강한 신력이 느껴진 이유가 그것 때문이리라. 신력이 있어서 절대 땀을 흘리지 않는 성기사들의 온몸이 축축히 젖어 있어서 성녀의 시신을 정상으로 만드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수 있었다. 성녀의 시신을 추수린 성기사들이 신신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자리를 떠나자 모든 성기사들도 그들을 따랐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숲에는 나만이 남았다. 주변의 숲은 엉망이었고 그 가운데 홀로 서 있는 것이다. "살아났어! 천신에게서 살아났어!" 성기사들이 떠나자 살아난 사실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천신이 다시 강림하여 찾아온다 할지라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성기사들이 강림한 천신에게서 살아남은 나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남았다는게 중요한 것이다. 생명력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네 명의 최상급정령들을 불러내어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굳이 소환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들에게 일일이 말을 전하고 싶었다. 더구나 오늘의 상황 때문에 정령과의 친화력이 더욱 높아졌다. 정령들과 즐거운 기쁨을 누리고 정령의 힘을 이용해 엉망인 주변을 정리하였다. 뿌리채로 뽑혀진 나무를 심어놓고 거꾸로 뒤엎어진 땅을 원래상태로 복구하였다. 땅의 최상급정령 노에아넨이 가장 할일이 많았다. 천신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느낌이 들자 세상이 내 것으로 느껴졌다. 언젠가 정령을 통해서 과거시대의 대륙을 엘프가 지배한 사실이 있음을 떠올렸다. 나는 인간이지만 과거에 있었던 엘프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8 회] 27. 생존 신전의 입장에서 신관과 성기사를 구분하자면 신관은 순수하게 천신을 숭배하는 사람이고 성기사는 천신을 믿음으로서 얻는 신력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당연히 성기사의 교육은 매우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성기사에게는 신력을 높이는 방법과 신력을 이용한 검술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다. 아무리 성기사라 할지라도 천신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교육이 필요하다. 그 최소한의 교육에서 천신의 강림도 포함되고 가장 중요시된다. 성기사라면 천신의 강림에 대해서 교육받지만 그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만약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신관이라면 믿겠지만, 신력을 이용한 검술을 수련하고 현실적인 성기사로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1만여명의 성기사들은 천신이 강림한 성녀의 시신을 숭배하며 자리를 떠났다. 지금 그들에게 천신과 대립한 이단자 카인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천신이 죽이지 않았다면 그러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천신의 강림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생각은 절대 못했을 것이다. "천신이시여." "천신께서 강림한 이 순간을 축복하소서." 성기사들은 로리아 성녀의 시신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였다. 일반 백성이 성녀를 보기란 평생 있을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성기사들도 가능성만 약간 높을 뿐 마찬가지였다. 성녀는 극히 소수의 신관들과 접촉을 하기 때문이다. 성기사들은 로리아 성녀의 몸에 천신이 강림한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신력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뿐만아니라 천신이 행한 그 위대한 모습에 감동하였다. 천신의 강림을 믿지 않았던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이번 계기를 통해서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들은 모르지만 천신의 강림을 지켜보는 행동 때문에 그들은 천신에 대한 믿음이 강해졌고 그래서 신력도 매우 높아진 상태였다. 기사가 마나의 깨달음을 얻어 검술이 한단계 진일보 하듯이 말이다. 1만여명의 성기사가 함께 있기 때문에 각자 그것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로리아 성녀의 시신은 성기사들에 의해 그들이 머물고 있던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에게는 어떠한 결정권도 없었다. 성녀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성기사들은 엘프 소국의 경계지역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무척 영광이었다. "천신이시여." 죽어서 돌아온 로리아 성녀를 맞은 성녀들은 그녀의 죽음을 예견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 않고 천신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성녀의 죽음은 슬프지만 천신이 강림한 사실은 천신을 믿는 모두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성기사들은 천신이 강림하여 무엇을 하려했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세세한 것을 고민해야 할 사람들은 성녀나 신관이 할 일이다. 성녀들은 로리아 성녀의 죽음을 평범하게 처리할 수 없었다. 천신의 강림은 천신이 존재한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동안 신전에서는 천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신력을 이용해왔다. 천신을 믿는 자에게는 신력이 생겨났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신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천신님과 대립한 자는 카인이라는 엘프 소국의 지도자였습니다." "천신님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요?" 성녀들은 로리아 성녀의 죽음에 대해서 심도깊게 다루었다. 신탁을 받아 이곳에 왔지만 더이상 신탁은 내려지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천신이 강림했으니 당분간은 신탁이 내려지지 않을 것을 말이다. 과거에도 천신이 강림한 경우에는 한동안 신탁이 내려지지 않았었다. "신탁을 받지 않으면 저희들로서는 천신님의 뜻을 알수가 없습니다. 엘프 소국의 지도자인 카인을 천신님께서 살려주신 것일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저희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던간에 그것이 천신님의 뜻인지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정말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성녀들은 마음이 답답하였다. 천신의 뜻을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성녀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밤새 논의했지만 결론내리지 못하였다. 당장 죽음을 맞이한 로리아 성녀의 시신도 수습해야 하기 때문에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저희들이 심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란 실수를 하는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신탁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천신님의 신탁이 내려지길 기다리는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녀들은 다음 신탁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다음 신탁이 빠르게 내려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천신의 강림으로 앞으로 다음 신탁이 언제 내려질지 아무도 몰랐다. 내일이 될지 일년이 될지 아니면 백년이 걸릴지 추측할 수 없었다. 성녀들은 성기사들에게 결정한 사항을 알려주었다. 천신이 강림하여 엘프 소국의 지도자였던 카인과 대립했지만 실질적인 천신의 뜻을 알지 못해서 다음 신탁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천신이 강림하면 한동안 신탁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함께 전했다. 지금의 시점에서는 성기사들에게 천신의 뜻은 중요하지 않았다. 천신이 강림한 사실이 가장 중요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성기사들은 성녀와 신관에 비해 천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지만 천신이 강림한 계기를 맞이하여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앞날이 불투명하지만 로리아 성녀의 죽음은 성기사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천신의 강림을 지켜본 사람은 성녀들과 성기사들이다. 천신을 믿는 신자들을 위해 성녀들은 말린으로 돌아가며 죽은 로리아 성녀의 시신을 천신처럼 매우 소중히 취급하였다. 그들 자신들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천신의 강림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카르시온 제국 전역에 소문이 퍼졌다.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을 향할 때 수많은 소문을 만들어내듯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소문의 내용이 달라졌을 뿐이다. 엘프 소국에게 성기사들이 쫓겨났다며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천신이 강림하여 엘프 소국에게 경고했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문의 진위여부를 모르고 있었다. 성녀들과 1만여명의 성기사들 일행은 말린으로 돌아가는 길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로리아 성녀의 시신을 보거나 한 번 만져보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더욱이 천신이 정말로 강림했었다는 사실이 성기사의 입을 통해서 확인되어 소문은 점점 무성해졌다. 성기사들이 단체로 거짓말 할 가능성은 대륙이 멸망한다해도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계속해서 생겨났다. 성녀들과 성기사들이 말린에 도착했을 때 신관들이 나와 축복을 내려주었다. 천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탁이 내린 이유가 천신의 강림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르시온 제국을 지배하는 귀족들은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오자 무척 실망하였다. 그들은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을 무력으로 진압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 엘프 소국에서 생활하는 엘프와 정령사 그리고 인간들 모두가 성기사들이 물러간 사실에 기뻐하였다. 가장 기뻐한 것은 불안한 마음이 심했던 인간이었고 다음으로 인간 정령사였다. 엘프는 조화로움을 따르는 종족답게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강림한 천신에게 살아남은 사실을 패로이 숲의 엘프장로이자 실질적인 엘프 소국을 지배하는 비우스에게 알렸다. 지금까지 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사실까지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서는 강림한 천신에게서 살아남은 사실을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강림한 천신에게서 살아남은 나를 무척이나 특이하게 생각하였다. 특이함을 부각시키는데 있어서 최상급정령들의 설명도 한몫 하였다. 엘프들에게 내 모든 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정령들을 소환하여 진실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정령은 자신을 소환한 정령사가 시킨다 할지라도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존재이니 엘프들로서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 신상에 대한 모든 사실을 엘프들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엘프들에게 말한 사실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그들은 내가 어떠한 방법으로 많은 생명력을 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지만 그 생명력이 어느정도인지 짐작만 할 뿐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놀라는게 당연한 것이다. 엘프들이 가장 관심을 갖게 되었던 내용은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을 부리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생명력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최상급정령을 부리는 엘프는 마을의 장로가 고작이었고, 그들은 최상급정령의 지혜를 빌어 지혜로운 존재로 알려졌다. 엘프들은 내가 소환한 최상급정령과의 실질적인 대화를 통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최상급정령이 가진 힘은 지혜만이 아니었다. 정령이 가진 또다른 힘은 지식이었고, 대화를 통해 지식을 얻게 된다면 무서울게 없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존재가 바로 나였다. 최상급정령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엘프 자신들도 모르는 그들 종족이 과거에 대륙을 지배했던 역사를 알게 된 사실도 그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발전시킨 문명을 후대에 전해준다는 것이다. 이종족은 인간에 비해 수배나 오래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처럼 후대에 무엇인가 전해준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엘프에게도 인간과 같은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인간에 비해 너무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엘프 자신들도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크라이 숲의 엘프장로 세레나를 통해서 전해받은 새로운 정령술과 전투기술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소환한 최상급정령을 통해 전해졌으니 엘프의 문화유산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엘프들은 강림한 천신과 대립하여 살아남은 나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인간 정령사가 아닌 엘프와 동등한 아니 그보다 높은 존재로 말이다. 나의 신상에 대한 모든 사실들이 엘프 소국의 모든 엘프들에게 공개되었음은 당연하다. 그중 일부 사실들이 인간 정령사에게도 공개되었다. 물론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내듯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알려졌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많은 엘프와 정령사들이 알게 됨으로써 나는 진정한 엘프 소국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엘프 소국에 생활하는 인간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던 성기사들이 물러나자 곧바로 예전처럼 카르시온 제국을 향해 영향력을 넓혀갔다. 솔직히 엘프 소국은 살기좋은 곳이지만 인간들은 안전과 편리함을 보장받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카르시온 제국의 문화가 그리웠던 것이다. 엘프 소국에서 살아가려면 자연을 최대한 적게 파괴하면서 농사짓고 살아갈 도리밖에 없었다. 사냥을 하더라도 엘프를 위해서 조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살기 좋았다 할지라도 반년이 지나 굶주림 없이 먹고살기 편해지자 과거 귀족들에게 억압받았던 생활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이 엘프에게 몬스터만도 못한 종족으로 취급받는 것이리라. 엘프들은 반년만 지났건만 자신들의 은혜를 잊어버린 인간에 대해 실망하였다. 최소한 엘프 소국에서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들이 죽기 전까지는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살고있는 사람들이 죽고 다음 세대가 시작되어서야 자신들의 은혜가 잊혀질 줄 알았던 것이다. 인간 정령사들도 같은 인간에 대해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엘프 소국의 영향이 지속되는 지역까지는 그래도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먼 지역은 문제가 많았다. 엘프 소국의 힘을 엎고서 별의별 일들이 발생되고 있었다. 모두 카르시온 제국의 치안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엘프 소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유스러움을 간직한 인간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들어가 각종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엘프 소국의 영향이 빠른 속도로 커지는데는 성기사들의 영향이 컸다. 1만여명이나 되는 성기사들이 엘프 소국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엘프 소국의 영향을 막아내고 싶어도 그만한 역량이 없었다. 치안을 유지하기도 벅찬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만 책임을 떠맡길 수는 없습니다!" 패로이 숲의 엘프장로 비우스는 엘프 소국의 모든 엘프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까지는 패로이 숲의 엘프장로가 엘프 소국의 중대사를 결정했지만 심각한 문제는 함께 처리해야 했으므로 지금처럼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인간들의 책임이 분명합니다. 저희는 분명 인간들에게 생활의 터전을 양보하고 보호까지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곳을 시작으로 카르시온 제국을 집어삼키려고 북으로 영향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새로운 인간들 왕국이 하나더 생겨날게 분명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서 자신들을 도왔는지 인간들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맞습니다. 인간들은 우리의 은혜를 모두 잊었습니다." 엘프장로들은 인간에 대해 많이 실망했다는 의견을 말했다. 대부분의 엘프장로들도 인간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말했다. 엘프들은 엘프 소국에서 지내는 인간들이 최소한 백년은 조용히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물러간 이후로 인간들은 엘프 소국의 조용한 삶을 견뎌내지 못하고 북으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었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절반만이 엘프 소국에 남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가 엘프장로들의 말에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절반가량의 인간들이 엘프 소국에 머물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엘프들의 도움에 지금도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반에 해당하는 인간들이 엘프 소국을 등진 상황에서 강하게 견해를 말할 수는 없었다. 나로서도 같은 인간으로서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다. 엘프 소국을 등진 사람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이 무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지역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 자립하여 누구의 간섭도 원치 않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체가 신분사회를 만드는 행동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단체를 만들면 자연적으로 생기는게 계급임을 말이다. "카인님의 말씀대로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우스 장로가 내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모든 엘프들도 동의를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인간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인간 사회에 간섭하려던게 아니었습니다. 엘프 소국은 조화로운 엘프문화를 대륙에 널리 퍼뜨리려고 세워졌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인간들을 보호해 준게 전부일 뿐입니다. 과거 엘프가 대륙을 지배했던 시기는 과거일 따름입니다. 엘프가 언제부터 과거에 연연하였습니까?" "하지만 과거에 그런 시대가 존재했음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더이상 이대로 진행된다면 엘프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인간들이든 다른 인간들이든 충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예전처럼 숲속에서 인간들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다면 이런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엘프장로들의 토론은 구구절절 옳았다. 엘프는 엘프답게 숲에서 조화롭게 생활해야 한다. 과거 전성기 시대에 대한 엘프의 역사를 알게 된 것이 문제였을 따름이다. 나는 엘프장로들의 말을 들으며 얼마전 강림한 천신에게서 살아남았을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렸다. '엘프가 대륙을 지배하는 시대를 만들어보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은 잊혀졌다. 나에 대한 모든 사실이 엘프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매우 바빴다. 하지만 엘프 소국의 인간이 절반이나 떠나간 상황이라서 그것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견해가 나빠진 상황에서 내가 나설수는 없었다. 엘프가 대륙을 지배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엘프를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 정령사인 나의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무력이라면 나 하나만으로도 소국 정도는 무너뜨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가 대륙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은 나 혼자힘으로 될 일이 아니다. 엘프장로들은 앞으로의 일에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지금처럼 인간과 공존하다가는 엘프 종족의 특성을 모두 잃어버린다며 경고하는 엘프도 있었고, 인간과 떨어져 예전처럼 살아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엘프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엘프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어서 엘프의 앞날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상당히 조용한 엘프장로들의 대화이지만 그 이면속에는 여러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감히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엘프는 생각이 많은 존재이고 인간과 다르게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뜻을 나타낸다. 주장이 강한 엘프장로들이 많았지만 하나로 의견이 통합되지는 않았다. "인간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요!" 엘프장로들의 대화를 듣다가 참을 수 없어서 불쑥 끼어들었다. 솔직히 이 자리는 내가 끼어들어서는 안될 자리였다. 엘프장로들의 모임이었고 이런 자리에는 타종족이 절대 있을수 없는 자리이다. 하지만 나는 최상급정령사이고 천신에게도 살아남은 존재이며 모든 엘프들에게 인정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초대받은 자리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비우스 장로가 내 말에 반문하였다. 엘프와의 칭호문제도 있고 미묘한 신분의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패로이 숲의 비우스 장로만이 나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저는 인간입니다. 제가 알기로 최상급정령들을 통해서 과거 엘프의 시대를 다시 재현해보고 싶은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반대하는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제게 모든 결정권을 주십시요. 모든 분들이 인간 사회에 관여하기를 꺼리고 계시니 제가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싶습니다. 여기계신 엘프 소국의 엘프장로님들이 원하는 엘프 시대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최상급정령의 도움을 받으며 엘프의 시대를 열도록 최선을 다할테니 제게 기회를 주십시요." 말을 마치고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을 소환하였다. 그리고 최상급정령을 앞에두고 엘프 시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정령앞에서 약속하였다. "제게 엘프 소국의 인간 정령사들과 인간들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어 활동할 수 있게 해주십시요. 실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최상급정령들이 과거 시대를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시대에 어떻게 엘프들이 대륙을 지배했는지 최상급정령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테니까요." 엘프장로들은 내가 소환한 최상급정령들과 나의 얼굴을 바라볼 따름이다. 엘프는 아름답게 생긴 종족이지만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저 무표정 얼굴이고 감정이 매우 고조될 때나 표정이 드러난다. "그런 방법도 있군요." "카인님이 나서면 쉽게 해결되겠군요. 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엘프장로는 내가 나서는 방법도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엘프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엘프들이 모두 발벗고 나서야 하는데 그들로서는 그러한 행동을 싫어했다. 그런 행동은 인간의 문화양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엘프에게 인간 정령사는 조화로움을 따르면서 엘프가 아니기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중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최상급정령사이고 더욱이 물의 정령왕 엘라임까지 소환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엘프의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손톱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엘프장로들은 지금의 토론을 통해서 모든 사항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엘프의 입장에서도 더이상 인간 사회에 관여하기 싫어했다. 그렇다고 관여를 그만둔다면 앞으로 엘프가 대륙을 지배할 때의 과거를 영원히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엘프장로들의 의견은 과거 엘프가 대륙을 지배했다 할지라도 지금의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고 숲에서 엘프들끼리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내가 원한대로 모든 결정권을 주기로 하였다. "카인님에게 엘프 소국에서 생활하는 인간 정령사의 권한을 모두 넘겨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들로서는 권한을 넘겨드릴 뿐 인간 정령사들이 카인님을 따르는 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의지입니다. 패로이 숲의 인간 정령사 이외에도 엘프 소국에 생활하는 모든 인간 정령사들을 모두 모이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엘프에게 있어 인간 정령사는 서로 공존관계이다. 인간 정령사가 있음으로 해서 엘프들은 숲에서만 생활할 수 있으면서 외부와의 연락이 가능하다. 숲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할지라도 엘프는 그래도 이성을 가진 존재로 필요한 것들이 많다. 하다못해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마법에 필요한 재료가 있는데 숲에서 모두 얻을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 정령사가 꼭 필요하다. 엘프 마을마다 인간 정령사가 존재하고 그들은 엘프에게 약간의 정령술을 배우며 생활한다. 조화로움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엘프들도 다른 인간처럼 미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엘프 소국은 패로이 숲의 엘프들에 의존하는 인간 정령사들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그만큼 패로이 숲은 거대하였고 엘프들도 많으며 인간 정령사도 비례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패로이 숲 이외의 인간 정령사까지 모두 모인다면 그 수는 가히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많은 정령사일 것이다. 앞으로 일년 동안은 엘프 소국의 인간 정령사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뿌듯했다. 엘프 시대를 열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대한 노력한다면 어느정도 성과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솔직히 엘프장로들은 희망을 걸고있지 않았다. 그만큼 인간이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그들이 겪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 정령사는 그나마 믿을 수 있지만 나머지 인간들을 설득할 수 없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정령에 대한 기본 상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엘프의 시대가 찾아온다면 그들은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엘프의 시대가 찾아오면 인간에겐 끔찍한 삶이다. 인간은 욕심이 많지만 엘프들은 그렇지 못하다. 욕심이 없는 인간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많음을 알고서도 나로서는 엘프의 시대를 열어보고 싶었다. 그것이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힘을 내가 갖게 되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89 회] 28. 엘프의 시대 엘프 마을이 있는 숲에서 함께 생활이 가능한 인간 정령사는 극히 제한적이다. 아무리 정령술을 익힌 인간이라도 숲에 피해를 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아가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숲에서 인간을 모두 쫓아낼 수는 없다. 인간 정령사는 엘프에게 있어서 필요악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인이라는 정령사로 유명해진 크라이 숲에도 한 가족의 정령사만이 살아간다. 카르시온 제국의 남단이며 이제는 엘프 소국이 되어버린 지역에는 작은 규모의 엘프마을이 수도없이 많다. 대륙에 활보하고 다니는 인간 정령사의 경우 대개 규모가 큰 엘프마을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뛰어난 인간 정령사는 작은 규모의 엘프마을에서 탄생하는게 일반적이다. 인간의 수가 많으면 자연적으로 엘프가 접근을 꺼려한다. 하지만 인간의 수가 적으면 엘프들은 쉽게 접근을 허락하고, 숲의 외곽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정령술을 더욱 많이 가르치게 된다. 작은 규모의 엘프마을에 사는 어떤 인간 정령사는 자라면서 가족을 제외하고 오직 엘프들과 접촉을 하다보니 친화력이 엘프의 수준에 이른 경우도 있다.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엘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엘프 소국의 모든 엘프장로들이 모여 인간 정령사들을 모두 카인에게 맡기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는 엘프에게도 최소한의 변화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오직 숲에서만 살아가던 인간 정령사들이 엘프의 결정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 문화를 접하게 된 경우가 생긴 것이다. 아무리 친화력이 강한 인간 정령사라도 인간은 인간이다. 가족과 엘프에게 정령술을 배우며 생활했던 그들은 인간문화를 접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조그만 마을에 살던 인간이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을 구경하게 된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본래 패로이 마을에는 5만여명의 인간들이 살고 있었지만 엘프 소국이 만들어진 이후로 그 수가 추측할 수도 없을만큼 많아졌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정말 도시라 칭할 정도로 거대하였다. 물론 엘프 소국이다보니 자연을 함부로 파괴시키지 못한 제한으로 이상한 형태의 문화를 갖게 되었지만 말이다. 엘프장로들의 결정이 엘프 소국의 전역으로 퍼진 이후로 여기저기서 인간 정령사들이 패로이 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크기는 도시에 버금가지만 아직까지도 마을로 불리고 있었다. 엘프 소국에서 패로이 마을은 제국의 수도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인간 정령사들은 인간 문화에 쉽게 적응하였다. 인간이 좋으면서 나쁜점은 바뀌어진 환경에 쉽게 적응한다는 것이다. 정령사들은 패로이 숲의 인간 정령사 마을을 무척이나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은 엘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소수의 인간들이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줄 알고 있었다. 엘프에게서 인간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이 정말인줄은 눈을 통해서 절실히 느꼈다. 엘프 소국에 모여든 인간 정령사가 그렇게 많을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엘프 소국은 흔히 대륙의 최남단이고 우거진 숲이 많다. 더욱이 인간의 발길이 적어 엘프 마을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엘프들은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만큼 굳이 불필요한 것을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인간 정령사가 그렇게 많을줄을 몰랐었다. 한 달의 시간이 흐르자 수십여년을 숲에서 살아온 인간 정령사들은 인간문화에 쉽게 물들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성향이 바뀐 것은 아니다. 단지 같은 인간이면서 정령사와 다르게 어떠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정령사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이면서 생각이 전혀다른 인간들을 겪으며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이 그날인가보죠?" 머리를 계속 두리번 거리던 사람이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주변에는 정확히 셀수 없으리만치 많은 사람들이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맞습니다. 카인이라는 엘프 소국의 지도자가 우리를 모이도록 만든 이유를 설명한다고 했지요." "이렇게 정령사가 많았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두리번 거리던 사람은 모두가 신기하게 보였다. 그의 옷차림은 다른사람에 비해 매우 초라했다. 식물성 섬유로 옷을 만들었는지 초록색이라 알아보기 쉬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색계열의 옷을 입었는데 말이다. 초록색 옷은 깊은 숲에서 단절된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였다. 대답을 하려던 사람은 자신에게 말을 한 사람이 너무나 촌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어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모든게 신기하다는 눈빛을 띄고 주변을 살펴보는 행동은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요? 오는 도중에 상처입은 포브를 만나서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함께 생활하다가 며칠전에 도착했습니다." 질문을 했던 사람은 정말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포브는 숲에서 초식을 하는 귀엽고 연약한 동물로 다른 육식동물의 먹이감이다. 매우 연약한 동물이지만 번식력이 강해서 숲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동물이다. "엘프님들이 이곳에 도착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다른 분들은 한 달전에 도착해서 모두 적응하느라 고생했습니다." "그렇다고 상처입은 포브를 그냥 둘수는 없잖아요. 숲을 지켜야하는 정령사로서 절대 그럴수는 없지요. 물론 저도 엘프님들께 이곳의 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설마 숲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하겠습니까?" "며칠 지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모르지요." 두 사람은 결국 대화를 계속 잊지 못하였다. 주변에 있는 정령사들은 일만여명이나 되어 보였다. 엘프에게서 정령술을 배우며 조화로움을 따르는 인간이 일만이나 모여있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높은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만여명의 정령사들이 단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그곳에 엘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정령사라면 엘프들에게 항상 봉사를 해야하는 존재이다. 조화로움을 따르는 존재로서 조화로움 자체인 엘프는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만여명이나 되는 정령사들이 조용함을 유지하였다. 그러자 아름다운 모습의 여성 엘프가 나서서 수많은 인간 정령사들을 바라보았다. 엘프이지만 그녀도 이렇게 많은 인간 정령사들 앞에서 말하기는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패로이 숲의 엘프장로 모리엔입니다." 단상에 올라서서 인사를 한 엘프는 모리엔이었다. 지금까지 엘프 소국은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프는 권력과 같은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 지금까지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엘프 소국을 다스리는데 문제가 없었다. 패로이 숲의 엘프들이 엘프 소국을 다스린 가장 큰 이유는 인간과 밀접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엘프들은 인간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패로이 숲은 인근에 5만여명의 인간 마을이 있었고 많은 인간 정령사들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도 마을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의 인간 정령사들을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엘프 소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게 당연했다. 일만여명이 되는 인간 정령사들이 모리엔을 바라보았다. 인간이지만 정령사라서 오감이 높아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모리엔은 잠시 할말을 머리속에 정리하고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이신 이유를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현재 새로운 정령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정령술은 아시다시피 물의 정령왕 엘라임님을 소환하셨던 카인님 덕분에 얻은 지식입니다. 카인님께서 최상급정령을 소환해 주셔서 알려진 것이지요. 카인님께서는..." 모리엔은 카인이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삶을 간단히 추려서 이야기를 하였다.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었지만 모르고 있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모두들 알고있는 사실을 듣고있지만 같은 인간 정령사로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 정령사로서 엘프에게 인정받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모두들 엘프장로인 모리엔이 카인이란 인간 정령사에게 높임말을 사용하는 자체가 무척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정령술을 퍼뜨리고 운명을 거부하며 정령신과 만난 인간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모리엔의 말은 무척이나 길었지만 경청하고 있는 일만여명의 인간 정령사들은 시간가는줄 몰랐다. "대륙을 엘프가 지배하던 시대를 몰랐다면 그리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화로움을 따르는 존재라면 한 번쯤 그런 시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그리워할 수는 없습니다. 최대한 노력해보고 그것이 실현불가능하다면 포기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런 시대가 있었음을 알려주신 카인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모리엔의 말이 끝났지만 모두들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맡긴다는 것인지 말이다. 모리엔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말을 하기로 하였다. 사실 엘프로서는 하고싶지 않은 말이었다. 현실적으로 말하지만 인간 정령사들이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희생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카인님께서 과거 엘프가 대륙을 지배하던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나서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카인님의 지시를 따라 행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엘프들도 직접적으로 카인님의 뜻에 따라서 행동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많은 엘프가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요." 모리엔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만여명의 인간 정령사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여기저기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엘프들은 지금까지 인간의 문화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고고하게 홀로 살아온 존재였다. 같은 이종족끼리의 만남도 거부한채로 말이다. 인간 정령사들도 그것을 알기에 모리엔의 발언은 무척 충격이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신거지?"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여기와서 느낀거지만 정령사가 아닌 인간은 너무 탐욕스러운 존재야. 절대 있을수 없어." 불가능한 일이라며 모두들 말했다. 그들이 한 달이나 정령사가 아닌 인간을 살펴보고 평가한 말이었다. 누가 들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더구나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 적은 엘프 소국이 이럴진대 카르시온 제국이라 불리는 곳은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다. "모두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단상에 인간 정령사라 생각되는 한 사람이 올라와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카인입니다. 모리엔 엘프장로님을 통해서 들었듯이 과거에 존재했던 엘프의 시대를 열어보고 싶습니다. 이미 들었다시피 엘프님들께서도 도움을 주시기로 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모두 도움을 주신다면 설사 성고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세상에 저희들을 알릴 기회도 될 것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릴테니 도움을 주지 못할 분들은 본래 생활하던 숲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카인의 말은 크지 않았지만 오감이 발달한 정령사들이 듣지 못할 일은 없었다. 여기저기서 카인을 향해 궁금한 사항을 질문했다. 카인은 자세히 설명하면서 과거 존재했던 엘프의 시대를 재현하자고 포부를 밝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인의 뜻에 동조하는 인간 정령사들은 많았다. 대륙을 엘프가 지배한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말이다. 인간 정령사로서는 정말로 꿈의 세상이다. 물론 엘프가 아닌 인간의 입장일 뿐이다. 엘프들은 그러한 시대가 찾아오길 바라지만 직접적으로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임의로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려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카인의 발표가 있은직후 다음날 일만여명의 인간 정령사중에 십분지일이 숲으로 돌아갔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카인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인간들과 충돌을 일으켜 죽임을 당할 위험도 있었지만 정말로 그러한 시대를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인간 정령사들의 삶은 엘프 마을에 의지해 살아간다. 하지만 엘프의 시대가 찾아오고 엘프가 대륙을 지배하게 된다면 인간 정령사들은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권력과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엘프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름대로 조화로움을 대륙에 퍼뜨리기 위한 전도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알려지고 싶은 것이다. ------ 엘프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도움을 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것이 엘프이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포기했다. 그래서 생각한 존재가 인간 정령사로 유용하게 활용한다면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엘프 소국을 지배한 존재도 엘프가 아닌 인간 정령사였으니 그들의 뛰어남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친화력을 높이려고 어려서부터 극한 수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인내심이 강하며 생각도 많았다.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낮았어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았다. 생각이 많다보니 당연히 지혜로왔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판단할 줄 알았다. 엘프장로들이 엘프 소국의 모든 인간 정령사들을 불러들일 때만 해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엘프 소국을 지배하던 정령사가 대부분 패로이 숲에서 생활하던 인간 정령사였다. 그런데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옛말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엘프 소국의 작은규모 숲에서 생활하던 인간 정령사가 하나둘 모이더니 무려 일만여명에 달했다. 일만여명의 인간 정령사라니 감히 짐작하지도 못했다. 엘프들도 놀랐으며 같은 인간 정령사들도 서로 만나며 이렇게 정령사가 많았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중 상급 정령사도 무척 많았다. 인간으로서 상급이라면 최고의 경지나 다름없었다. 인간 정령사들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았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리엔 엘프장로의 도움으로 그들중 십분지일만이 떠나갔다. 십분지일이 떠나갔지만 크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더군다가 엘프들도 일천여명이나 도움을 주기로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일만여명의 정령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중 엘프인 일천여명은 인간 정령사보다 수십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이다.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해야할 일들을 내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 시대를 경험했던 최상급정령들의 의견대로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먼저 일만여명이나 되는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을 속성별 각 계열로 분류하였다. 최상급정령을 소환하면 그들이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였다. 과거 시대에는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대가로 인간은 조화로움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숲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정령사에게 배웠던 것이다. 인간이 탐욕만 부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방법이었다. 더구나 요즘 인간들은 전쟁을 통해서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최상급정령은 엘프의 시대를 열도록 도움을 주는 존재에게 과거에 엘프와 정령사가 인간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교육을 받았다. 또한 어떤 기준으로 인간들을 다뤄야하는지 많은 설명을 들어야했다.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들이 대륙에 영향을 주어야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교육이었다. 엘프나 인간 정령사들은 최상급정령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최상급정령이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정령사로서 최상급정령에게 교육받는 자체는 무한한 영광이었다. 어느 누가 최상급정령에게 교육을 받을줄 알았겠는가 말이다. 엘프장로가 대부분 최상급정령시이지만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다. 길어야 일분이 고작이기 때문에 하루종일 최상급정령에게 교육받는 자체는 무한한 영광이었다. 무려 한 달이나 되는 기간을 그렇게 보내고서야 실질적으로 엘프의 시대를 열기 위한 방법이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의 치안은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고 남단에 사는 인간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하였다. 먹고살기 힘든 시기라 인간들끼리 살육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 상인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생겼고, 결국 상인의 발길이 끊어져 문화적 교류도 끊기게 되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언제 무슨 위험에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무방비 상태의 마을만을 노리는 무법자들까지 등장하고 있었다. 엘프 소국에 살다가 인간문화가 그리워 북쪽을 향하던 사람들도 많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엘프 소국과 인접하면서 카르시온 제국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영지의 경우에는 귀족과 병사들이 수도 말린으로 떠나서 텅텅 비어있었다. 영주가 영지민을 보호하지 않고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떠나버린 것이다. 그러니 남아있는 영지민들은 병사들도 없이 자신 스스로를 지키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영지민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것은 엘프 소국의 인간 정령사들이었다. 영지이지만 숲이 많은 지역이라 많은 위험이 있었다. 가끔씩 나타나는 야생동물은 견딜만 했다. 더군다나 엘프 소국이 인접해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으니 말이다. 문제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병사들이 있어서 외부에서 여러가지 물품들을 공급받으며 지내왔다. 땅이 좋아서 농사가 항상 풍년이었고 숲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들도 많았다. 하지만 전쟁직후 상인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야만인화 되어가고 있었다. 농사를 짓기위해 필요한 농기구가 닳아서 없어졌는데 다시 얻을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지민이 영지를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 뻔했다.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영주의 허가증이 있어야하는데 영주는 말린에 살고 있으니 여행자체가 불가능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물품들이 상당히 많다. 엘프 소국에 살고있던 인간 정령사들은 엘프 소국의 근처에 있는 영지를 찾아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었다. 병을 앓고있던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 완치되었고 물이 부족해 디글농사를 짓지 못하는 곳에는 비를 내려주었다. 많은 도움을 받는 대가로 사람들은 그저 엘프와 정령사에 대해서 간단한 설교를 받으면 되었다. 수많은 정령사들이 그렇게 북쪽으로 향하며 카르시온 제국의 치안이 유지되지 않는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혀갔다. 굶고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엘프 소국에 쌓여있던 디글을 무상으로 지원하였으며 어려움이 있으면 최대한 도움을 주었다. 배우지 못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조화로움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시키고 가르쳤다. 인간은 본래부터 어려움이 있으면 무엇인가 숭배하려 든다.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물체를 숭배하며 따른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거나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카르시온 제국에 천신을 믿는 종교가 있지만 무지한 그들에게 천신은 너무나 먼 존재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화로움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정령사들에게서 그것이 종교처럼 받아들여졌다. 더군다나 자연을 숭배하는 마음은 무지한 그들이 믿는 생각와 비슷하거나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부분이 많았다. 인간이라면 도움을 받으면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 마을마다 편리한 우물이 생겨났고 그 우물은 정령사들이 만들었다. 물의 정령사가 땅속의 물줄기를 발견하고 땅의 정령사가 우물을 만든다. 정령술이 사용되어 인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령사들의 행동은 최상급정령에게 교육받은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반년이면 충분하겠어.' 카르시온 제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노력한 결과를 생각하며 뿌듯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일년이 지나야 어느정도 성과를 보이리라 생각했건만 지금 보여준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많은 인간들이 엘프와 정령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화로움이 무엇인지도 깨달은 경우도 많았다. "정말 대단한 성과야." 멀리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감탄이 절로 터져나왔다. 인간만이 살아가는 마을인데도 집집마다 커다란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정령사들이 임의로 묘목을 심어서 정령술로 키운 결과였다. 사람들에게 조화로움을 교육시키고 자연의 이로움도 전했다. 곳곳에서 말썽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정령사는 하급이라 할지라도 정령을 소환하여 상당한 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배운 정령술은 과거 시대에 존재했던 새로운 정령술이라 예전에 비해 몇배나 강해졌다. "카인님!" 누군가 내가 앉아있는 언덕으로 올라오며 부르고 있었다. 잠시후 그 사람은 내 앞에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하고서야 말을 꺼냈다. "무슨일이지요?" "마을 사람들이 준비를 끝냈습니다. 촌장님께서 카인님을 찾고 계십니다." 마을청년이 대답하였다. 내가 필요한 곳은 정말 많지 않았다. 정령사중에 상급 정령사가 생각보다 많았다. 더군다나 일천여명의 엘프들도 도움을 주고 있어서 내가 나설일은 매우 적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마을과 마을끼리 왕래가 많도록 길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길을 만드는 작업은 정령을 오래 사용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많은 정령사가 투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있다면 인간다운 삶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과 세인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그래서 왕래가 쉽도록 숲을 적게 파괴하면서 유용한 길을 마을마다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하려는 일은 길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었다. 청년과 함께 마을에 내려가자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계속 바라보았다. 엘프와 정령사들이 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항상 이런 시선을 받고 있었다. 촌장이 나서서 나를 어디론가 안내해 주었다. 잠시후 도착한 곳은 마을의 논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이곳에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크게 만들어 주십시요." 촌장이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도 촌장과 비슷한 눈빛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농사를 짓기위해 필요한 저수지였다. 남쪽에 사람이 적게사는 이유는 땅은 좋지만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물이 적기 때문이다. '노에아넨 부탁해.' '네, 주인님. 마을만한 크기의 저수지라면 저들이 만족하겠지요? 수백년이 지나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지하에도 물줄기 통로를 만들겠습니다.' '노에아넨 고마워. 엘레스트라는 노에아넨이 만들어낸 물줄기 통로에 물이 계속 흐르도록 해줘.' 노에아넨과 엘레스트라가 힘을 합쳐서 저수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노에아넨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마을만큼 넓은 크기의 땅이 순식간에 가라앉자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비비며 꿈인지 생시인지 판단하려 애쓰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큰 웅덩이가 순식간에 만들어질수가!" "도대체 얼마나 큰거야!" 마을 사람들은 땅이 꺼지는 범위가 마을만하자 할말을 잊었다. 저수지라기 보다는 호수라 말할 정도의 크기였다. 아마 얼마후면 마을에서는 농사만이 아니라 어부생활도 겸할 수 있을 것이다. 과장되긴 했지만 정말로 큰 저수지였다. 땅이 둥그런 모양으로 꺼지자 곧바로 중앙지점에서 물줄기가 하늘높이 치솟았다. 노에아넨이 땅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저수지와 연결시키자 엘레스트라가 물을 끌어올린 것이다. 일단 저수지에 물을 채워놓은 다음에 적정한 수압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차는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이나 걸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에아넨은 저수지에 물이 가득차자 주변에 흐르던 냇물을 모두 저수지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저수지의 물은 지하에 흐르는 물줄기로 채워지는 것보다 주변에 흐르는 냇물에 의존하는게 가장 자연적이다. "이게 다 물이라니?" "그럼 이게 물이지 뭔가! 정말로 정령사님들은 대단한 분들이야." "그렇구말구. 정령사님들이 있어서 이런 저수지도 생겼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 저수지 가까이 다가가 물을 만져보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농사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었다. 항상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망쳐왔는데 앞으로 그럴 걱정은 없어졌다. 물론 다른 이유로 흉년이 들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흉년이라 할지라도 숲에서 나무껍질을 벗겨먹어야 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을리라 생각했다. "나머지는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정령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늙은 촌장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내게 말했다. 마을마다 물이 부족한 곳에는 저수지를 만들어 주어왔다. 상급 정령사라 할지라도 이같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직접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런 덕분에 지금 정령사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었다. 치안이 불안한 마을에는 정령사가 생활하는 곳도 있었다. 한 명의 정령사라지만 기사 한 명에 못지않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사 한 명이면 병사 백여명과 비슷한 전력이었다. 새로운 정령술을 사용한다면 무서울게 없었다. '앞으로가 문제인데.' 마을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다른 마을로 향하면서 고민이 떠올랐다. 진정한 엘프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좀더 영향력을 넓혀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카르시온 제국이 치안을 포기한 지역이었다. 이제부터는 카르시온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기 때문에 무력충돌은 당연히 발생할 것이다. 무력충돌 이외에도 무슨일이 발생할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엘프의 시대를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거야.' 스스로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한 다짐을 하였다. 모든 인간이 나쁘지는 않지만 끝없는 욕심은 결국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조화로운 엘프의 시대가 열려야 모두가 평화롭게 지낼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이 인간에게 악영향을 끼칠지라도 말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0 회] 28. 엘프의 시대 카르시온 제국의 멸망은 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돌고 있는 소문이었다. 이제는 제국이라 불릴만한 크기의 땅도 아니었고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모든 권력이 귀족들에게로 나누어졌다. 많은 길드들이 더이상 귀족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전쟁전에는 길드를 운영하기 위해서 귀족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전쟁직후 입장이 반대로 바뀌었다. 대표적으로 용병 길드와 마법사 길드가 그렇다. 마법사 길드는 생활마법이 활성화 된 이후로 스스로의 자금력으로 운영되었고 용병 길드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아서 굳이 귀족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제국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신전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신전 스스로 등을 돌리지 않았지만 귀족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처음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 이후로는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런 응답을 해주지 않았다. 신전에서는 천신이 강림한 이후 신탁이 내려지지 않아서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믿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벌써부터 카르시온 제국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왕국만도 못한 제국이라 불리고 있었다. 귀족들은 자존심 때문이라도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현실이 그러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귀족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현실에 무감각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외곽 지역에 사는 귀족들이 엘프 소국의 영향으로 수도 말린으로 모여들었다. 엘프 소국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는 귀족의 설자리가 없었다. 인간 정령사들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하고있는 일은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귀족에게 해코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으로서는 자신의 사유재산인 노예를 정령사들이 강제로 해산시켜 치욕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생활하던 영지에서 자신의 노예를 모두 해방시키면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말이다. 창고에 쌓아둔 식량마져도 영지민들에게 나눠주는 정령사의 조치는 귀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귀족을 향한 반란이었다. 당연히 수도 말린에 모여들어 자신의 그러한 입장을 다른 귀족들에게 알리고 황궁에 당장 조치해 줄 것을 강력히 건의했지만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외곽에 살고있던 귀족들은 큰 영향력이 없어서 큰 문제거리가 없었지만 그런 귀족이 하나둘 많아지면서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엘프와 정령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영역으로 침범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황궁에 하나둘 알려졌다. 귀족회의까지 열렸지만 뚜렷한 방안이 있을수 없었다. 현재 카르시온 제국은 치안을 유지하기에도 힘든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병사를 늘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는 마음만 먹으면 늘릴수 있지만 어마어마한 자금력이 소요된다. 그런 자금을 귀족들이 내놓지 않으면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전쟁에 쓰여진 자금이 너무 많았던지라 회복이 더뎌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어간 기사의 경우는 더욱더 회복이 불가능했다. 기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기사수련을 받으며 정신적인 수양과 다양한 지식을 배우고 자라서 수많은 실전을 통해 진정한 기사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기사 한 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10여년 이상이 소요된다. 카르시온 제국의 프리온 재상은 엘프 소국과 관련된 정보들을 모두 취합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본래 프리온 재상은 전쟁직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전쟁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어느누구에게도 책임이 전가되지 않았다. '대단하군. 대단해.' 프리온은 에드 황제에게 건네줄 보고서를 만들면서도 엘프 소국이 정말 대단하다고 속으로 극찬하였다. 정령사들이 행하고 있는 것은 정말로 꿈에서나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들이었다. '조화로움을 따른다?' 귀족들은 모를지라도 프리온은 정령사들이 벌이고 있는 일들을 자세히 보고받고 있어서 아는게 무척 많았다. 정령사들이 사람들에게 조화로움에 대해 가르치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프리온은 조화로을 따르면 무엇이 좋은지 생각하며 보고서를 완성시켰다. 정령사들이 벌이는 일을 정리한 보고서는 책을 연상시켰다. 그만큼 두꺼웠고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프리온은 속으로 에드 황제가 보고서를 모두 읽으려고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프리온이 하나하나 정리해서 설명을 해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은 엘프 소국이 벌이는 일에 관심이 많았지만 깊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귀족들끼리 많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암투(暗鬪)를 벌였겠지만 요즘은 자신의 영지를 운영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라 에드 황제가 무척 편해졌다. 치안이 잘 운영되는 영지는 점점 발전하고 있었고, 치안이 불안전한 영지는 쇠퇴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니 영지를 가진 귀족들이 영지의 운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변화였다. 요즘처럼 불안한 시기에 영주의 힘이 강해지면 큰 사건에 개입하여 중요한 인물로 부각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어려운 시기를 잘만 이용하면 몰락귀족도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아도 무엇인가 대단하다고 불릴만한 결과를 만들어낸 영웅들은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탄생하였다. 변화되고 있는 시대상황에 낙오되는 귀족은 결국 몰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드 황제는 프리온 재상이 건네준 두꺼운 보고서를 잠시 들쳐보더니 그냥 덮어버렸다. 모두 살펴보자니 하루종일 읽어도 부족할 것 같았다. 황제에게 꼭 필요한 존재는 자신을 대신해 제국의 모든 일을 간단히 정리해 줄 인재였다. 그리고 프리온 재상은 그런 일을 오랜시간 해온 인재였다. "간단히 정리좀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황제폐하" 프리온 재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프리온으로서는 당연하겠지만 에드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하루종일 읽어야 겨우 읽을수 있는 분량을 간단히 정리하여 말해주기 위해서는 프리온 본인이 보고서를 읽고 머리속으로 정리하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프리온은 에드의 신하에 불과하지만 엄연히 귀족이었고 에드와 같은 성을 쓰고있는 인척관계이다. 더구나 보통 귀족도 아니고 황족이니 고생아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이 한창 번창할 때는 권력이 높은 맛이라도 있었지만 한창 멸망의 길을 걷고있는 카르시온 제국의 재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희 제국지역을 침략한 정령사의 수는 일만여명 가량입니다. 그중 일천여명이 엘프이고 나머지는 모두 인간입니다. 첩자의 말에 따르면 그들 스스로 알려준 사실이라 거짓일리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는 일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봉사(奉仕)입니다." "봉사?" 에드는 봉사란 말을 듣자 곧바로 반문하였다. 봉사라는 말은 신전 이외에서 듣기 어려운 말중에 하나였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돕는 좋은 말이지만 요즘 세상에 봉사를 하는 사람이 있을리 없었다. 자신도 굶어죽을 정도로 어려운 세상인데 말이다. "정령사들 모두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답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고,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편하도록 저수지를 만들고, 마을 중심에 우물도 만들고, 고민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설사 해결해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답니다." 프리온 재상은 한참을 그렇게 설명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무리 재상이라도 그 많은걸 기억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말한 사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정령사들이 하고있는 일들이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억에 남을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그러한 사실들을 제국적인 입장으로 해석을 거쳐서 설명해주어야만 했다. "저희 제국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미치지 않는 곳은 정령사들이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지만 그 지역을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많은 병력들을 파견해 빼앗긴 지역을 다시 되찾아도 지배력을 행사하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세금조차 걷지 않으며 지배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명 정령사들과 생사를 함께할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이로군." "아직 최악이라 생각될만한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프리온 재상은 에드 황제가 갑자기 놀라지 않도록 나름대로 배려를 하였다. 가장 나쁜 소식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재상은 속으로 지금 이말을 꺼내면 황제가 얼마나 놀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프리온 자신도 처음 소식을 전해듣고 한 동안 생각을 할 수 없을만큼 놀랐었다. "얼마나 놀랄만한 소식인데?" "정령사들은 노예를 해방시켜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해방시키는게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교육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해방시켜준 노예를 다시 잡아들여 노예교육을 시킨다해도 다시 노예로 사용하기 어려우리라 짐작됩니다." 에드 황제는 너무 놀라서 할말을 잊어버렸다. 귀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제국의 멸망이 아니다. 제국이 멸망해도 또다시 다른 나라가 들어설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귀족으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귀족들에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충성스런 노예가 수천여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수천여명의 노예를 가진 귀족을 누가 죽일수 있겠는가. 차라리 귀족을 구술려 무엇인가를 얻으려 할 것이다. 노예란 빼앗는다고 해서 빼앗을 수 있는게 아니다. 노예에게는 노예마법이 걸려있기도 하고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정당한 거래가 아니면 절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귀족의 힘이되는 노예를 해방시키면 귀족의 신분으로서 살아갈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정령사들이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귀족들이 어떠한 행동을 할지 예상이 불가능하다. 귀족의 입장으로는 엘프 소국으로 인해 제국이 멸망해도 노예가 있으니 새로운 제국이나 왕국 그것도 아니면 소국이 세워지면 다시 귀족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절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 소식이 알려지면 모든 귀족들이 들고일어설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프리온 재상 그것이 사실이요?"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여러명의 첩자들을 통해서 재확인 받은 사실입니다.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다른 귀족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카르시온 제국을 떠나서 일리시아 제국으로 망명하려는 귀족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러한 일이 생길 것입니다." "카르시온 제국은 단순히 멸망되는게 아니라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겠군!" 에드 황제는 온몸에 힘을 빼면서 탄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황권이 귀족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프 소국에서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귀족들이 일치단결하여 대항하겠지만 치안유지도 벅찬 병사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싶었다. 귀족들끼리 노예들을 거느리며 모여살 수는 있어도 그것은 단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이 힘을 합친다해도 절대 해결하지 못하리라. 에드 황제가 현실적인 감각이 부족해도 사태의 심각성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에드 황제폐하!" "재상탓이 아니니 사과할 필요가 없네. 역사서를 뒤져봐도 인간 정령사들이 천여명 가량이 넘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네. 카인이란 인물 때문에 정령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귀족이라면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지. 하급 정령사 한 명이 수십여명의 병사들보다 강할게 분명할텐데 그들을 무슨수로 막겠나?" 에드 황제와 프리온 재상은 그저 현재상황에 대해 논의를 할 뿐 대책이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정령사들이 무력을 동원해 귀족을 죽인다거나 하지를 않는 것이다. 아니 귀족을 죽이려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기까지 하였다. "소피아 왕국에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그럴필요 있을까? 그들도 정신없을텐데 말이야. 독립하여 왕국을 세웠지만 곧바로 멸망하게 생겼군 그래. 후후!" 황제는 재상의 말에 웃음지었다. 에드는 누구보다도 소피아 왕국이 얄미웠다. 소피아 왕국의 왕은 루바인으로 한때 카르시온 제국의 대귀족에 불과했다. 또한 소피아 왕국이 생겨난 지역은 에드가 카르시온 제국을 균형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개척하도록 사비를 털어 지원한 곳이었다. "적어도 힘을 합치면 정령사들에게 대항하기가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결국은 카르시온 제국도 별볼일없이 멸망의 길을 걷는구나." 에드는 프리온의 말에 대답하기 보다는 혼자서 탄식을 하였다. 고민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여러번 쉬더니 프리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든 귀족들에게 내게 말한 사실을 모두 알려주고, 소피아 왕국에는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게. 물론 사실을 모두 알려야겠지. 결국 전쟁 때문에 카르시온 제국은 이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는구나. 설사 정령사들을 몰아낸다해도 더이상 제국이라고 부를수도 없으니까 말이야." "빠르게 조치하겠습니다. 폐하" 프리온 재상은 대답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에드는 황제이지만 이제 아무런 힘도 없었고 그의 말을 들어줄 귀족도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더이상 제국이 아닌 왕국보다 못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카르시온 소국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이 침략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할 정도로 힘이없는 나라가 되었다. ------ 카르시온 제국과의 무력이 충돌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넓지않은 전선(前線)이 형성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카르시온 제국과의 충돌이 아닌 귀족들이 지닌 병사들과의 마찰이었다. 그들은 정령사들을 반기지 않았고 정령사들은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귀족의 사병들과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정령사들을 사람들을 치료해주었고 그들을 보호하였다. 귀족을 몰아내며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물론 말처럼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정령사들도 하나둘 피해를 입어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생겨났다. 무력충돌이 자주 일어났지만 대대적으로 크게 발생하지는 않았다. 정령사들의 경우는 일만여명이 모두 모여있지 않고 여러것에서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력충돌이 많이 발생한 지역에만 정령사들이 모여서 해결하였다. 귀족이 고용한 용병과 사병들을 동원해 정령사를 죽이기도 하였지만 정령사들은 끈질기게 공격하여 그들을 쫓아냈다. 정령사들도 이제는 영향력을 넓히는 일이 쉽지않은 일임을 뼈져리게 경험하고 있었다. "카인님 지금 공격하시겠습니까?" 영주성을 함께 올려다보다가 에르롤이 나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좀더 기다리도록 하지요. 늦은 시간일수록 병사들은 지칠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다른 정령사분들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에르롤은 대답을 하자마자 곧바로 다른 정령사들에게 내 말을 전하기 위해서 떠났다. 에르롤은 바람의 중급정령사로 상당히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요즘들어 내 근처에는 바람의 정령사들이 수시로 대기하고 있었다. 나의 말을 다른 정령사에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내가 최상급정령을 통해서 연락을 주어도 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어차피 함께 움직이며 싸워야하는 상황에서 정령을 이용한 연락방법은 단합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에르롤은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적극적인 편이다. 병사들과 충돌이 일어나면 항상 가장먼저 나서서 싸운다. 눈앞에 있는 영주성의 주인은 영지민이 굶어 죽는 상황인데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착취를 일삼아왔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정령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는지 용병들도 상당수 고용하고 있었다. 큰 영주성을 가진 귀족에게는 가끔씩 마법사도 있기 때문에 내가 직접 나서게 되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마법길드에 소속되어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마법사가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 마법사의 경우 자신의 뜻에 따라서 귀족 혹은 상인에게 귀속되어 생활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생활마법이 널리 알려진 이후로 더욱더 그러한 경향이 많아졌다. '기사는 없지만 10여명 가량의 마법사가 있습니다. 4서클 가량의 마법사 같습니다.' 실레스틴이 영주성을 정탐하며 파악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기사와 마법사는 정령사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일반 병사들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기사와 마법사라면 정령사를 죽일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전쟁이후 기사의 수가 적어져 보기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착취만을 일삼는 영주에게 기사가 있을리 없지. 아마 기사에게 주는 돈도 아깝다고 생각할거야.' '그렇겠군요. 주인님' 마법사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하자 그들을 모두 내가 처리해야함을 느꼈다. 중급 정령사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정령사들은 자신들보다 뛰어난 전투능력을 지닌 사람들과 싸운 경험이 많지 않았다. 결국은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내가 직접 해결하는게 가장 빨랐다. "에르롤 공격할거야. 모두 준비하라고 전해."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은 나 혼자서 공격할거야. 내가 영주성에 있는 병사들과 용병들의 시선을 모두 받고있으면 그때 다같이 공격하도록 해야돼. 모두에게 절대 혼자서 움직이지 말고 두 세명씩 함께 움직이라고 전하는거 잊지마." 에르롤에게 공격의 시작을 알라지마자 곧바로 영주성을 향해 날아갔다. 영주성의 정문에 가까워지자 실레스틴에게 공격의 생각을 전했다. 그러자 내 옆에 회오리가 생겨나더니 무섭게 회전하며 정문을 향하여 빠르게 돌진하였다. 회오리 내부에는 주변의 흙들이 빨려들어가 결국은 원통모양의 나무모양을 형성하였다. 잠시후 회오리는 영주성의 정문에 충돌하였고 정문은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신에게 배운 방법도 쓸모가 있네.' 실레스틴의 회오로 공격은 천신이 사용한 폭풍의 모습을 응용한 것이다. 천신이 폭풍을 일으켜 그 힘으로 나를 빠져나기지 못하게 붙잡고 지물들이 날아와 공격했을 때 무척 곤란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실레스틴도 폭풍이 아닌 회오리로 비슷한 공격을 한 것이다. 영주성을 공격하는 정령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을 빼앗는 범위안에서 최대한 피해를 주어야만 했다. 성벽 위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정문이 부서졌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엘레스트라 수벽(水壁)!' 엘레스트라에게 수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대륙에 존재하는 성은 방어를 위해 주변에 큰 수로(水路)를 파고 그곳에 물을 채워넣는다. 성에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위한 방책으로 수천여년 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방법이었다. 영주성의 방어를 위해 채워넣은 물이 하늘높이 치솟으며 성의 주변을 감싸버렸다. 엘레스트라가 만든 수벽은 정령사들의 안전을 위해 펼쳐놓은 것이다. 영주성에서 수벽 밖으로 어떠한 것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밖에서는 안으로 쉽게 진입할 수 있는 물의 벽이었다. 휘이익. 쉬이익. 정령사들이 성벽 가까이 다가오자 마법과 화살 그리고 창까지 수많은 공격들이 수벽 너머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수벽에 막혀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였다. 내가 정문을 향해 걸어들어가자 갑자기 각종 무기류가 나에게 집중되었다. "죽어라!" "악마야! 죽어라!" 마법사와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였다. 하지만 그런 공격들이 내게 효과를 발휘할리 없었다. 네 가지 보호막에 보호되고 있어서 주변에 무기들이 언덕을 이루며 쌓여갔다. 피해를 입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은 계속되었고 결국 내가 무기에 파묻혀서야 공격이 중단되었다. '엘레스트라 정신좀 차리게 부탁해.' 정령사들이 영주성에 가까이 다가왔음이 느껴지자 곧바로 엘레스트라에게 공격을 부탁하였다. 엘레스트라는 공격보다는 치료능력이 뛰어나다. 그런데도 엘레스트라에게 공격을 부탁한 것은 생명을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마음같아서는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한 대의라 생명을 희생시킬수록 조화로움을 따르는 정령사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마음내키지는 않지만 번거로운 방법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영주성 위에서 아무리 공격을 해도 수벽에 막혀 무용지물이 되자 모두들 적이 가까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정령사들이 수벽을 통과하여 공격할 수 있는 근처로 다가오자 모두들 숨죽이며 기다렸다. 수벽안이면서 성벽과 정말 가깝자 공격하려고 움직였을 때 갑자기 수벽을 형성한 모든 물이 성벽 위에서 공격하려던 사람들에게 쏟아졌다. 폭포수가 바닥에 떨어지듯 수벽이 성벽 위에서 공격하려던 병사와 용병을 공격한 것이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지만 대부분 성벽 위에서 떨어지거나 공격하려던 때를 빼앗겼다. 정당한 대결에서는 아무리 병사와 용병이 많아도 정령사와 싸워서 이길수는 없었다. 병사들과 용병들은 혹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싶어서 모두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나는 노에아넨에게 성벽을 모두 무너뜨리라고 지시하였다. 성은 무척 넓었지만 영주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정령사에게 대항한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조화로움을 따르며 이곳에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이곳을 떠나겠는냐의 선택을 말이다. 모두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럼 오늘 할일을 합시다." 에르롤이 정령사들을 향해 외쳤다. 에르롤은 왕이라도 된듯이 적극적으로 돌아다녔다. 영주성에 머물고 있었던 노예들을 모두 모아놓고 노예해방에 관련된 사항을 설명하였다. 일부 노예에게는 노예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엘프가 있어서 마법을 해지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일만여명의 정령사중에 십분지일은 엘프였고, 그들은 상위 마법을 인간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영주성의 성벽이 무너지자 영지민들이 몰려들어 정령사들을 관심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령사들은 그동안 여러경험을 통해서 영지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단순히 봉사를 통한 방법만이 아니라 설득을 할 수 있는 언어력이 늘어난 것이다. "모두들 수고하세요. 저는 다른곳에 도움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노력하는 정령사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곧바로 다른 지역으로 날아갔다. 현재까지 정령사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경험이 낮아 위험한 전투를 시킬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곳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정령사가 점점 늘어만가고 있었다. 전투경험이 낮은 정령사는 수십여명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경우도 생겨났다. 실질적으로 백여명의 병사들을 물리칠 능력이 있는데도 병사들의 적절한 조합공격에 당하는 것이다. 한 명을 미끼삼아 공격하도록 시키고 그 순간에 궁병으로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령사들은 설마 동료와 싸움을 벌이는데 공격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다. 정령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능력이 뛰어나도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정령사의 대부분은 숲에서 태어나 오직 정령술만을 익히며 살아왔다. 그런 정령사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하며 자라난 사람들에게 쉽게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나마 뛰어난 정령술을 지니고 있어서 피해가 적은 것이다. 정령사들은 다양한 경험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앞으로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솔직히 일만여명의 정령사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만 할 수 있다면 카르시온 제국을 지금 당장이라도 멸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뛰어난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는 세상모르는 어린아이 수준이라 문제가 심각했다. '제국의 대응이 늦을수록 우리에겐 유리해.' 정령사들이 경험을 많이 쌓기 위해서는 제국의 대응이 늦어야만 했다. 마음속으로 제국의 대응이 늦길 바라며 다른 정령사를 돕기위해 계속 날아갔다. 무력충돌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 할일이 무척 많았다. 얼마전까지는 길과 저수지를 만드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영주의 병사들과 싸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여러곳을 모두 방문할 수 없어서 최대한 빠르게 날아다녔다. 특별히 카르시온 제국이 모든 병사들을 모아서 공격하지 않는 이상 지금처럼 정령사들이 제각기 영향력을 넓혀가는 방식을 계속 사용할 생각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1 회] 28. 엘프의 시대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은 엘프 소국이라는 강대한 적을 두고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귀족들 모두 신분계급이 무너질까 두려워 대책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하였다. 결국 적대관계나 다름없지만 같은 입장에 처한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은 함께 엘프 소국에 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는 사신들이 왕래를 통하여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귀족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수 있게 되었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은 적대관계 입장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제약은 있었다. 엘프 소국이라는 강대한 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적대관계 감정을 잠시 미뤄두기로 한 것이다. 귀족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서로 적대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무슨 입장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귀족들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대귀족 가문들끼리 뭉쳐서 자신들만 살기위한 방법을 찾아 실행하면, 다른 귀족가문은 노예만도 못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러한 경우가 위험할 때마다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귀족들끼리도 믿지도 못할 만큼 현실은 악화되어 있었다. 엄청난 수의 정령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의 지역을 침범한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귀족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일수록 마음속으로 엘프 소국이 강해지길 바랬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엘프 소국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귀족들과의 왕래도 자주 발생하고 의견도 주고받았지만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었다. 결국에는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함께 귀족회의를 하자는 의견까지 제시되었다. 귀족회의는 매우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방에 있는 귀족들까지 모두 참여하여 중요하게 생각되는 안건을 처리할 때나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귀족회의를 다른 나라와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한때 같은 나라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엘프 소국이라는 강대한 적을 눈앞에 두자 불가능한 일도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카르시온 제국과 엘프 소국의 황제와 귀족들이 귀족회의를 함께 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결정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엘프 소국의 전력이 드러난데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엘프 소국의 전력은 일만여명의 정령사였다. 그중 십분지일이 엘프였고 나머지가 인간임이 실질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지금까지 엘프 소국에는 일천여명의 인간 정령사가 전부라 알려져 있었던 귀족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지한 사람들은 정령사의 무서움을 모르겠지만 귀족이라면 절대 모를리 없었다. 일반적으로 귀족회의를 열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달이라는 기간이 필요하다. 지방에 있는 귀족에게 통보하여 불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안전을 위해 수도 말린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함께하는 귀족회의는 카르시온 제국에서 열렸다. 소피아 왕국으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따지고 있을수 없었다. 더욱이 소피아 왕국이 카르시온 제국에서 독립되어 세워진 것도 엄연히 사실이니 말이다. 소피아 왕국의 황제가 된 루바인을 비롯해 리온 라다르 그리고 제노 루아카스 등 많은 귀족들이 마법진을 통해서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을 방문하였다. 명예에 죽고사는 귀족들이기 때문에 적대적인 소피아 왕국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생명에 위협을 가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항들이 빠르게 결정되었고, 결국 두 나라가 참가한 귀족회의까지 열었다. 귀족회의는 서열대로 좌석을 배치하지만 소피아 왕국의 귀족들까지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약간은 엉망이었다. 본래부터 귀족회의에는 많은 귀족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소란스러운 편이다. 하지만 지금의 귀족회의는 엉망이긴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귀족회의에서 언급된 안건은 수십여가지였다. 일주일이라는 기간동안 계속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귀족회의는 오직 한 가지 안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열린 것이다. 엘프 소국에 대항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자는 취지로 말이다. 사이가 좋지않은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와 소피아 왕국의 황제도 자존심을 굽히고 함께하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에는 천신을 믿는 신도가 어마어마합니다. 성녀들도 두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로 많으며 그것은 신관이나 성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성기사는 기사보다 뛰어난 무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카르시온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얼마전 이곳 말린에서 일만여명이나 되는 성기사들을 두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신전에 도움을 요청하면 일만여명이나 성기사들을 도움을 받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귀족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누군가 일어서서 자신있게 외쳤다. 엘프 소국에 대항하기 위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발언을 할 수 있었다. "대단했지." "성기사가 그렇게 많은건 처음봤지." 여기저기서 성기사에 대해 이렇궁 저렇궁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정보가 빠른 귀족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신전은 천신이 강림한 이유로 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폐하께서 신전에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의 서신을 수없이 보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신전에서는 천신이 강림한 이후 신탁이 내려지지 않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전해왔습니다. 지금도 계속 도움을 바란다는 서신을 보내고 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는 상황입니다." 프리온 재상이 웅성거리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재상이 서있는 단상에는 소리가 멀리 퍼지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모두가 말을 듣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황제폐하가 도움을 청하는데도 거절했다니." "천신을 믿는 놈들이 뭐 그렇지." "망할놈의 천신" 귀족들은 천신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지금까지 신탁이 내려지다가 갑자기 내려지지 않는다는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귀족들은 신전에서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는 귀족에게 빌붙다가 위험이 찾아오자 발을 빼는 상황으로 비춰진 것이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세요." 프리온 재상이 말했다. 사실 귀족은 자신이 말한 내용에 책임을 지는게 보통이라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처럼 많은 귀족들 앞에서는 아무리 배포가 큰 귀족이라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는 귀족도 있을 것이다. "마법사들이나 용병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안될까요?" "마법사 길드나 용병 길드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계속 고수하고 있습니다. 무력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든 수단을 이용해 설득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이상 마법사 길드나 용병 길드는 무력을 동원해 이용할 수 없습니다. 전쟁직후 그들은 완전히 독립하였습니다." 누군가 마법사와 용병에 대한 말을 꺼내자 프리온 재상이 또다시 나서서 불가능한 일임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귀족의 힘이 노예에서 시작된다면 실질적인 무력은 병사에게서 나온다. 제국의 힘은 귀족이 지닌 병사들과 마법사 그리고 용병들이다. 그런데 어떠한 힘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귀족이 지닌 병사들은 전쟁직후 회복되지 않아 영지를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고, 마법사와 용병은 독립하여 운영되면서 귀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마법사와 용병은 과거부터 어쩔수없이 귀족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하지만 관계를 겨우 끊었는데 다시 맺을리 없었다. 한 번 관계가 맺어지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길드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적으로 운영할 것이다. "소피아 왕국처럼 독립을 했는데 다시 관계를 맺을리 없지."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가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소피아 왕국의 루바인 황제에게 말했다. 루바인은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고 또 참았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틀린말은 아니었지만 엘프 소국의 강대한 적을 물리치기 위한 회의에서 꺼낼 말은 아니었다. '카르시온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지껄이는거냐!' 루바인 파도루는 마음속으로 에드 황제를 향해 분노의 말을 삼켰다. 소피아 왕국의 귀족들은 분노의 마음을 얼굴표정으로 나타냈지만 루바인처럼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소피아 왕국의 귀족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이 자신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귀족의 신분을 물려받고 현재에 안주하는 바보같은 자들은 멸망의 길을 걷는게 당연해.' 루바인은 에드 황제를 비롯해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루바인 본인을 비롯해 소피아 왕국의 귀족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지금의 자리에 올라선 자들이었다. 비록 반란을 통해 소피아 왕국을 세웠지만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분으로 그저 편하게 권력이나 탐하며 바둥대는 쓸모없는 자들로 비춰질 뿐이었다. 에드 황제의 발언으로 분위기가 나빠진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소피아 왕국의 루바인 황제와 귀족들이 반발하지 않았지만 눈빛 만큼은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한 분위기였다. 가뜩이나 많은 귀족들 틈에서 발언하기 힘든 귀족이 많았는데 그로인해 토론이 계속될리 없었다. 결국 귀족회의는 다음날 다시 재개하기로 하였다. ------ 피니온 신전은 말린에서 유명하다. 이단자로 낙인찍혔지만 세실리아라는 성녀를 교육시켰고, 소피아 왕국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신전이었다. 세인트에 성기사를 파견해 소피아 신관을 처형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신전이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운영되기는 하지만 항상 다양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왔다. 물론 주로 귀족에게 혜택이 돌아갔지만 말이다. 피니온 신전은 다른 신전에 비해서 귀족보다 일반 하급계층에 도움을 많이 주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피니온 신전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루노아 신관님 답답하군요." 라인트 성기사가 루노아 신관을 향해 말했다. 루노아가 많이 늙었지만 신전에서 가장 신력이 강한 신관이었고, 라인트는 무력을 대표하는 강한 성기사였다. "좀더 참으시지요." "언제 신탁이 내려질지 암담합니다. 솔직히 저희가 죽을 때까지 신탁이 내려지지 않으면 이대로 신전에서만 생활해야 합니까?" "그래야겠지요." 라인트 성기사는 루노아 신관의 말을 듣고 가슴을 후려치며 답답한 심정을 달랬다. 신탁이 내려지지 않아 성기사들의 활동이 신전에 묶여버린 것이다. 성기사라면 포교활동도 하며 나름대로 대륙을 여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신관도 마찬가지인데 성녀들이 모두 금지시킨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전을 벗어나 움직일 수 있지만 그들 자신의 양심을 어길수 없어서 이렇게 답답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성녀들도 애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신탁이 자주 내려서 항상 그 뜻을 풀이하느라 골머리를 싸맸는데 이제는 반대로 된 것이다. 천신의 뜻을 받으려고 노력도 했지만 신탁은 내려지지 않았다. 성녀들도 천신이 강림했던 사건 이후로 한 동안 신탁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기간이 너무나 길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모든 신전의 활동이 제한되어 버렸다. 성녀들은 신전이 활동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점점 잊혀지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무엇이든 빨리 잊어버리는 존재이다. 일년이 지나도 신탁이 내려지지 않으면 신전이 설 자리를 잃어버릴 가능성도 많았다. 그나마 천신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은 신전의 활동 때문이 아니라 성기사들이 지닌 무력 때문이었다. 성녀들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에서는 도움을 계속해서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신전에 매일같이 서신을 보내고 있었다. 성녀들도 카르시온 제국이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처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탁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녀들이 마음대로 신전의 앞날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 카르시온 제국의 영역으로 계속 영향력을 넓혀갈수록 상황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만여명의 정령사들이라 하지만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귀족들끼리 연합하여 대항하고 있어서 무력충돌이 발생해도 내가 참여하지 않는 이상 해결에 어려움이 많았다. 설사 해결된다 할지라도 정령사들이 죽거나 상처입었다. 지금까지의 결과만으로도 대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의 절반이 엘프 소국의 영향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령사들은 사람들을 지배하지도 않는다. 오직 조화로움이 무엇인지 가르칠 뿐이다. 도시가 있는 지역은 대표를 뽑아서 그들끼리 규칙을 정해놓고 운영되었다. 특정한 기준이 없어서 말썽이 쉴세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한결같이 귀족이 지배할 때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라 주저없이 말하고 다녔다. 큰 도시까지 영향력을 넓혀지자 정령사의 활동은 계속되지 못하고 멈추어졌다. 일만여명의 정령사가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너무나 큰 지역인 것이다. 그래서 현재까지 넓혀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정령사에게는 기본적인 원칙이 있었다. 본래 생명력이 강한 육류를 섭취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정령사가 아닌 인간에게 채식만을 하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숲을 파괴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되도록이면 살인을 피해달라는 기본적인 원칙들만을 지켜달라고 하였다.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를 가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줬으니 정령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분위기에 쉽게 휩쓸렸다. 평민이나 농노라면 귀족의 횡포를 언제나 당해왔던 존재였으니 말이다. 귀족을 향한 분노는 하루아침에 쌓여진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쳐 수십대를 내려오며 오직 강인한 인내심으로 꾹꾹 참아왔다. 귀족이 떠나자 그들은 처음으로 자유와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자유와 행복을 선물한 정령사들의 노고를 잊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무력충돌을 피하도록 하세요." "그렇다면 어떻게?" 바람의 중급정령사 에르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하였다. 더이상의 무력충돌은 너무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의 영토를 절반이나 차지했는데 더 압박하다가는 전면적인 무력충돌로 확대될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카르시온 제국이 적대관계인 소피아 왕국까지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더이상 영향력을 넓히면 전면전인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령술을 사용한다면 못할게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카르시온 제국의 마법사와 기사가 힘을 합치면 여기계신 분들의 절반은 정령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경각심을 주기위해 마법사와 기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설명해 주었다. 사실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정령사들은 소수의 기사와 마법사를 만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령사들은 마법사와 기사의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과 굳이 무력충돌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 지나지않아 그들은 자멸(自滅)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단지 조화로움이 무엇인지 인간들에게 알려주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내 말을 이해한 정령사는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이 인간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숲에서 홀로 정령술만 익혀온 그들은 제국처럼 큰 나라가 왜 스스로 자멸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문화에 익숙하다면 어린이아도 알만한 결과였다. 사회가 불안하면 갖가지 혼란이 발생하고 그 틈에 온갖 부정적인 일들이 발생한다. 지금이야 엘프 소국에 대항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이지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고 현상황이 그대로 유지되면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 불만이 높아지면 어느 순간 폭발하고, 결국 멸망으로 향하리라.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분간 이곳에서 생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이가 많은 정령사들에게 조심해서 돌아가라는 말을 전했다. 정령사가 많아 통제가 어려워야 정상이건만 정령사들 대부분이 지혜로와서 일일이 지시를 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할일을 찾아다니며 해결하기 때문이다. 엘프는 살아온 세월 만큼의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 정령사도 엘프 만큼은 아니더라도 지혜스러운 존재였다. 내가 머무는 장소는 카르시온 제국이 남쪽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만 하는 도시였다.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최상급정령의 힘이라면 수천여명의 병사들이 쳐들어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정말로 무서운 점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령사들이 피해를 입는 것이다. 주변 도시마다 상당수의 엘프와 인간 정령사가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도시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단지 해방된 노예가 스스럼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특이할 뿐이다. 사람들도 우리의 방문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귀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실을 모두들 좋아하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일이 벌어질까?' 지금부터 무슨일이 생길지 예측되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남쪽의 작은 마을은 전적으로 정령사의 방문을 신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으로 향할수록 사람들의 기쁨은 점점 줄어들었다. 정령사들이 도시를 장악하면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에 살고있는 사람중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평민이라 할지라도 높은 능력을 가진 경우도 있었을테니 당연했다. 많이 배워서 지식이 높은 사람일수록 정령사들이 설교하는 조화로운 세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다. 객관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만 했다. 정령사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말린으로 향했다. 그들은 정령사의 영향력이 미치는 이곳에 남아있다가 반란자로 낙인찍힐까 두려웠던 것이다. 정령사의 입장으로는 그들을 말릴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엘프 소국의 영향력이 있는 지역에서 살던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이동하였다. 나로서는 그들을 제재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정령사들은 조화로움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존재로 타인에게 자신의 뜻을 강제로 따르도록 할 수는 없었다. "카인님 도시를 대표하시는 분을 모셔왔습니다." 에르롤이 늙은 노인을 한 명 데려왔다.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이 모두 떠난 도시라서 어느누구도 도시의 대표를 하려들지 않았다. 잘못 대표자가 되었다가 나중에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에게 보복을 당할까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도시에 대표자가 나왔다기에 에르롤에게 모셔오도록 말했었다. "안녕하십니까? 카인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먼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내일이면 죽어갈 사람을 치료해 주시다니 말입니다. 제가 병치레를 한지가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의 대표자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보니 물의 정령사에게 병을 치료받은 노인 같았다. 누구도 대표자가 되기 싫어하는 상황에서 대표자가 나섰다는게 이상하긴 했다. 아무래도 지금 이 노인은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으로 도시를 대표해서 나섰을 것이다. 노인의 정신없는 감사인사를 한참을 그렇게 받은 다음에서야 하고싶은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정령사들에게 직접적으로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 언젠가 우리들이 떠나면 첩자와 같은 사람이 정령사와 만난 사실을 귀족에게 알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나서서 중간역할을 한다면 나중에 무슨일이 생겨도 그 사람이 모든 죄를 뒤집어쓸테니 허심탄하게 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대표자가 필요한 것이다. "저희들은 도시의 직접적인 운영에 참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있어서 도움을 청하신다면 최대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난처한 말이라도 좋으니 주저하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저희들도 도시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으니까요." 노인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표자로 나선 순간부터 도시의 사람들이 노인에게 많은 불만사항을 터뜨렸을 것이다. 대부분 터무니없는 도움을 요청하겠지만 타당한 불만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쪽은 오래전부터 황제께서 개척을 허가하였습니다. 본래 이 도시에 살고있는 사람은 이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척을 위해 동쪽 숲의 벌목(伐木)도 허가해서 그곳에 농사를 짓거나 사냥하고 또는 약초를 캐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령사님들이 숲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제재하는 바람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물론 먹고살수 있도록 도와주셨지만 그곳에서 수년전부터 터전을 잡은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실질적으로 이곳에서 지내지만 삶은 동쪽 숲에 있는 거지요. 그리고 정령사님들이..." 도시의 대표로 나선 노인의 말은 끝이날줄 몰랐다. 도시의 동쪽에는 커다란 숲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령사들 때문에 숲을 이용하지 못해서 불만이었던 것이다. 동쪽 숲을 통해서 생활하던 사람이라면 얼마나 분노했을까 싶었다. 노인은 그와 비슷한 문제들을 셀수도 없이 말했다. "정령사들과 의논을 통해서 불만사항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해결해 준다고 약속하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 노인은 감사인사를 잊지 않았다. 귀족이었다면 이런 불만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정령사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혼자 결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숲과 관련된 사항이고 더욱이 엘프도 일천여명이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의견을 조정해야 했다. '문제가 아주 심각하군. 이래서 엘프와 인간이 대립 할 수밖에 없는거군.' 자살하기 전에 처음 카르시온 제국을 여행할 때 나는 정령사가 아니었다. 60년을 잠자다 깨어나 두 번째 여행할 때도 진정한 정령사가 아니었다. 엔트가 생명력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처럼 정령사가 못하는 일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정으로 정령사가 되었고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노력하다보니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이 셀수없이 많음을 깨달았다. 모든 인간이 엘프와의 차이점이 많은 것은 아니다. 숲에서 작은 마을을 형성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엘프와의 차이점이 거의 없다.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자체를 좋아하고 언제나 고마워한다. 하지만 수천여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자연에 대해 매우 무감각하다. '기다리자. 카르시온 제국은 멸망할거야.' 기다리는 방법 이외에는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하면 정령사들이 조화로움이 무엇인지 가르칠 것이다. 그러면서 영향력을 확대시켜 결국은 엘프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함께 생활하다 보면 조금씩 해결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2 회] 29. 멸망 귀족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의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결과는 좋은 방향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엘프 소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힘을 합쳐서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이례적으로 마법사 길드에서는 많은 사람이 오갈수 있도록 소피아 왕국과 카르시온 제국을 연결하는 대형 마법진을 설치하였다. 마법사 길드가 중립을 취하긴 하지만 엘프 소국에게 호의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나를 임의적으로 제어하려는 존재가 마법사이다. 그런데 엘프의 입장에서는 자연의 힘중에 하나인 마나를 임의로 움직이는 것은 조화를 깨뜨리는 일이라 생각한다. 소피아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기사, 병사, 마법사 그리고 용병들이 대형 마법진을 통해서 카르시온 제국으로 넘어왔다.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와 귀족들은 엘프 소국이 멸망할 그날까지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소피아 왕국도 엘프 소국의 무서운 영향력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도 소피아 왕국에 못지않게 많은 전력을 끌어모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영지사정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이 너도나도 병사들을 모았다. 노예를 해방시키는 엘프 소국의 방침에 귀족들은 밤잠마져 설치고 있었다. 기사와 병사는 본래 보유하고 있었지만 마법사와 용병은 끌어모으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마법사 길드와 용병 길드가 중립의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이지만 모든 마법사와 용병이 길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마법사의 경우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자유 마법사도 있었다. 용병의 경우는 능력이 뛰어나서 굳이 길드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활동하는 용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의뢰가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길드와 같은 곳에 소속될 필요가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에서는 홀로 활동하는 자유 마법사나 용병을 찾아내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회유시켰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전력을 높이는 것만이 승리로 향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엘프 소국에 대항하는 전력을 편성함에 있어서 참가하는 모든 자들에게 여러가지 특혜를 약속하였다. 명예와 부는 물론이고 지금보다 높은 대우는 기본이었다. 현재의 신분보다 한 단계 높은 신분도 보장하였다. 물론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만 약속이 지켜질 것이다. 모두들 귀족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싸움을 벌이게되는 모든 이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살아서 돌아와야만 귀족의 약속도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이 발발하면 직접 싸움터에 임하는 자들에게 많은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전쟁이후 약속을 이행할 자들은 살아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만약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면 약속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에 응하는 보상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결국 전쟁터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약속은 사기진작 이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무리하면서까지 모은 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다. 하지만 일만여명의 정령사들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귀족들이 발벗고 나선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처리된데 있어서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에드 황제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저 귀족들이 스스로 위협을 느끼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부지런히 움직였을 뿐이다. 에드는 황궁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을 대부분 전력에 포함시켰다. 어차피 엘프 소국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황궁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진작에 지금처럼 귀족들이 힘을 모았다면 카르시온 제국이 대륙을 지배했을텐데." 에드 황제는 엘프 소국에 대항하기 위해 귀족들이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탄식하였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이지만 한 가지의 목적을 향해 물불가리지 않는 자세는 좋았다. 단지 예전에도 지금과 같았다면, 엘프 소국이 등장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 숨이 나올 뿐이다. "에드 황제폐하. 마지막 귀족회의가 열릴 시간입니다." "알았네. 재상" 에드는 프리온 재상의 말에 힘없이 대답하였다. 황궁에는 귀족들이 넘쳐나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에드는 너무나 오랜동안 지켜보았다. "과연 성공할까?" "지금까지 모은 전력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프리온은 황제의 말에 자신있게 대답하였다. 귀족들이 발벗고 나선 덕분에 어마어마한 전력이 준비되었다. 황궁에서 바라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황궁은 말린에서 가장 높은 성이라 말린을 전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말린의 남쪽에 있는 외성문 밖으로 큰 산을 뒤덮고도 남을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엘프 소국에 대항하기 위해 끌어모은 전력이었다. '정말로 충분한걸까?' 에드 황제는 마지막으로 말린의 남쪽을 한 번 바라보고, 귀족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더이상 귀족들이 모을수 있는 전력은 없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공격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오늘의 귀족회의는 공격여부에 대한 문제를 선택하기 위해서 열리는 것이다. 에드가 자리에 앉자 모든 귀족들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披瀝)하였다. 예전처럼 명예와 자존심을 세우지도 않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런걸 챙겨야하는 상황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공격해야 합니다!" 누군가 일어서서 당당하게 외쳤다. 사실 공격하자는 의견을 말한 사람은 이미 정령사들에게 영지를 빼앗긴 귀족이었다. "전력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저희 모두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전력을 확보했지만 지휘체계가 잡혀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두 나라가 한데 뭉쳐서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반목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공격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는 귀족이 일어나 시간이 필요함을 조리있게 설명하였다. 어디하나 흠잡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공격하자는 의견을 당당하게 주장한 귀족도 쉽게 굴하지 않았다. 그도 시간이 필요한 사실을 인정하였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이유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그럼 고생고생해서 모아놓은 전력을 누가 먹여살립니까? 저들에게 필요한 전쟁물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병사 한 명에게 필요한 물자를 알고 계시는 분이라면 지금 당장 공격하자는 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할 것입니다. 더욱이 병사들끼리 반목한다면 무슨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당장 공격해야 합니다." 두 귀족의 대화를 통해서 다른 귀족들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다. 많은 전력을 모았지만 그들은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들여서 반목을 없애고 지휘체계를 확실히 다져야 할 시간도 없었다. 말린의 남쪽에 며칠만 대기시켜 놓아도 그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도 벅찬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전쟁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말린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 원성도 감당해야 한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말린에 살고있는 백성들은 일반적인 영지민과 전혀 다르다. 지혜롭고 능력있는 자들이 많은 것이다. 그들에게 극한 상황을 만들어준다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귀족들은 약간 불안한 마음에 좀더 전력을 가다듬길 원했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내일부터 정령사들과 직접적인 전쟁을 벌어야함을 결정하였다. 전쟁에서 패하면 실질적으로 카르시온 제국은 멸망이었다. 소피아 왕국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정령사들이 아직까지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들도 카르시온 제국과 똑같은 전처를 밟게 될 것이다. ------ 카르시온 제국이 스스로 자멸하길 바랬지만 최후의 공격을 할 줄은 몰랐다. 영지를 지키는 병사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공격하면 설사 정령사들을 몰아낸다 할지라도 영지에 살고있는 영지민은 사람만도 못한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찍 끝내야 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만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적게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먼저 동원할 수 있는 일만여명의 정령사를 모두 불러모았다. 정령사들은 아직 전쟁을 벌일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내가 앞장선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거야.'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힘을 합쳤다해도 나 하나라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단지 지금까지의 능력을 최대한 보여주어야 한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인간이라면 과연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인간이라면 일반적으로 폭풍을 일으킬만한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목격한다면 무슨 악의적 소문을 만들어낼지 걱정이었다. 차라리 마법사라면 위대한 마도사로 칭하겠지만 내가 정령사란 사실은 대륙에 살고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도착할테니 오늘 모든 준비를 끝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카인님" 정령사들이 다함께 대답하였다. 엘프는 살아온 세월이 있는만큼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는데 반해서 인간 정령사들은 약간 불안해하고 있었다. 정령사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도 많아서 알고있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공격하려 다가오는 그들중에서 마법사와 기사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초반에는 제가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가장 위협이되는 마법사와 기사를 떨어뜨리겠습니다. 그러면 엘프님들께서 그들의 발목을 잡아주세요. 내가 말한대로 한다면 물리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인간 정령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쟁준비를 하였다. 엘프가 가장 선호하는 무기는 활이다. 숲을 빠르게 이동하면서 적을 향해 공격하는 것이다. 인간의 암살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일 싸워야 할 장소는 숲이 아니었다. 엘프는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의 화살만 가지고 다닌다. 하지만 내일있을 전투를 위해서는 많은 화살이 필요했다. 모든 엘프들이 화살을 만드느라 분주하였다. 다행하게도 화살을 만드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정령술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단지 화살촉으로 금속을 사용하지 못한다는게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 정령사의 대부분도 엘프와 마찬가지로 활을 무기로 사용하였다. 단지 엘프와 다른점이라면 활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어려움 때문에 인간 정령사들은 엘프의 도움을 받아 강력한 활을 가지게 되었다. 솔직히 활은 단순히 나무를 휘어서 만드는 것이라 쉽게 해결되었다. 문제는 시위였는데 이 부분에서 엘프가 도와준 것이다. 엘프들이 스스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인간 정령사들에게 시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선물한 것이다. 엘프의 머리카락에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엄연히 엘프의 생명력을 수백여년 공급받으며 자라났으니 말이다. 보석이 수백여년 동안 마나를 주입받으면 마나석으로 변하는 이치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엘프의 머리카락은 마나가 아닌 생명력이 담겨있는 이유로 매우 강력한 유연성과 탄성을 가지고 있어서 시위로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재료였다. "받으세요. 엘프의 시대를 위해서입니다." "고맙습니다. 소중히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르롤은 모리엔에게 머리카락을 건네받자 감사인사를 하였다. 엘프들은 주저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인간 정령사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나는 에르롤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살펴보았다. 엘프들이 아무에게나 머리카락을 잘라준 것은 아니다. 머리카락은 생명력이 있지만 강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엘프가 어떠한 정령술을 익혔는가에 따라서 머리카락이 지닌 성질도 다른 것이다. 나는 에르롤에게 머리카락을 전해준 엘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저분은 패로이 숲의 모리엔 엘프장로님이야. 바람의 최상급정령사이기도 하지. 에르롤도 알다시피 그 머리카락에는 바람의 생명력이 숨쉬고 있어. 시위에 약간의 생명력을 주입하고 화살을 날리면 바위에도 박힐만한 파괴력이 나올거야." "정말인가요?" 에르롤이 깜짝 놀라며 대답하였다. 다른 엘프의 머리카락도 비슷하겠지만 모리엔은 최상급정령사이기 때문에 더욱더 강할 것이다. 더구나 에르롤도 같은 바람계열이니까 화살을 쏘게 될 때마다 어마어마한 힘이 실려질 것이다. "엘프님들이 모든 정령사에게 머리카락을 주고있는게 아니야. 잘 살펴보면 같은 속성의 정령술을 익히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주고있지." "정말 그렇네요." 에르롤은 엘프들이 일일이 찾아다니며 머리카락을 주고있는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대부분의 정령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가 뛰어난 정령술을 익히고 있지 않는 이상은 솔직히 같은 속성이라 할지라도 큰 영향은 없었다. "에르롤 너는 운이 좋은거야." 나는 에르롤에게 말하고 다른 할일을 찾아 움직였다. 사실 모리엔이 에르롤에게 머리카락을 전해준 것은 행운이 아니다. 에르롤은 인간 정령사중에 뛰어난 중급 정령사이면서 속성이 강한 경우에 속했다. 아마 에르롤이 다른 엘프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어도 모리엔은 주저하지 않고 전해주었을 것이다. 모리엔은 엘프장로이지만 엘프 소국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솔직히 다른 엘프들은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모리엔은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더구나 엘프장로들중 가장 인간과 많은 접촉을 갖는 엘프이기도 하다. 화살이 부족하여 도시의 대장간이란 대장간에 많은 화살을 주문하였다.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대금까지 치뤘다. 물론 돈이 아닌 엘프가 지니고 있던 돈이 될만한 물품으로 대신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고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일만여명의 궁수라...' 모두들 등뒤에 활과 화살이 든 화살통을 메고 있었다. 화살통에는 수백여발은 될만한 화살이 가득하였고 부족할 일은 없을듯 싶었다. 특히 엘프들의 화살통은 일천여발은 될 것 같았다. 엘프가 활을 쏘는 속도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정령술만을 사용하여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제는 무기까지 사용해야만 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일의 위험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만 멸망하면 더이상 정령사들을 위협할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녁식사를 할만한 시간이 되어서야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정령사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인간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정령사들에게는 장기적으로 전쟁을 치룰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정령사들이 최강이 될 수 있는 숲을 버리고 초원에서 결판을 내야만 했다. '엘프의 시대를 위해서야.' 내일 수많은 사람들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엘프의 시대가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절대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겠군요." "그래서 여기서 싸워야만 합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모든게 결정되어야지요." 모리엔 장로의 말에 대답하였다. 모두들 눈앞에 펼쳐져있는 초원을 바라보았다. 나무는 한 그루도 없이 낮은 풀만이 자라고 있었다. 양쪽으로는 우거진 숲이라 그곳을 통해 이동하기란 불가능하다. 이곳을 통해서 한 명이라도 남쪽으로 간다면 그들이 사람들에게 잔인한 짓을 벌일건 분명했다. 정령사들이 해방시킨 노예들을 모두 죽이려 할 것은 물론이고 폭력과 약탈을 일삼을 것이다. 전쟁에 있어서 약탈은 항상 있어왔다. 전쟁이 발발하면 피해를 보는 존재는 항상 약자였다. 어떠한 경우에는 전쟁보다 전쟁이후 발생한 폭력과 약탈로 인한 피해가 큰 경우도 있었다. "내일을 위해 모두 쉬도록 하세요." 모두에게 휴식하라고 말하였다. 이제는 적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싸우는데 있어서 인간처럼 지휘가 필요하지 않았다. 싸움이 시작되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적을 공격할 뿐이다. 충분한 잠을 자둬야 하건만 잠이 오지 않았다. 찌르르르. 잠시 시간이 지나자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일만여명의 정령사가 있는데도 울다니 약간 둔감한 벌레라고 생각하였다. 내일이면 지금 울고있는 벌레도 살아있긴 힘들 것이다. 마법과 정령이 날아다니며 초원을 뒤집어 놓을테니 말이다. 아침이 되자 태양이 장엄하게 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최선을 다해야만 정령사들중에 내일의 태양을 보지 못하는 정령수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정령사들을 향해 다가오는 인간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을 최대한 죽여야 그런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악마라 불릴지라도 최선을 다하자.' 해돋이가 끝나자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의 물결을 볼 수 있었다. 몇개의 도시를 한 곳에 모아두어도 그만한 사람들을 보기 힘들 것이다. 그만큼 무장한채로 다가오고 병사들이 많았다. 정령사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가득하였지만 풀어줄 방법이 없었다. 약간의 긴장은 싸우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정오가 지나서야 얼마 되지않는 장소에 정렬하고 있는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정렬이 끝날줄을 몰랐다. 정령사들은 무질서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줄지어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전신에 갑옷을 두른 병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법사와 기사의 위치를 기억하세요. 그들만 조심한다면 큰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정령사들이 모두 들을수 있도록 말했다. 초원이라 적들도 정령사들의 무질서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저들이 외형적으로 허약한 정령사들을 보고 방심하길 바랬다. 솔직히 갑옷을 입은 정령사는 한 명도 없었다. 정령사에게는 갑옷을 대신할 수 있는 정령마법이 있었다. 정령마법은 정령을 소환하지 않으면서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화살정도는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오랜시간을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령을 소환한다면 위험할 때 대처할 방법이 없다. "카르시온 제국을 위하여!" "인간이 아닌 이종족을 쳐단하자!" 사기진작을 위해 병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한 두명도 아니고 수만여명이 지르는 소리에는 자신감아 넘쳐 있었다. 만약 정령사들이 아니었다면 겁에질려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령사들은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존재로 인간이 갖고있는 감정을 약하게 느낀다. 정령술이 뛰어난 경우에는 인간이 가진 감정의 기복이 갈수록 약해진다. 그래서 정령사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기가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병사들이 공격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정령사들은 서서히 활에 화살을 얹었다. "모두 공격하라!" 공격신호가 누군가에 의해서 외쳐졌다. 정령사들은 초원이라 어디로 피할 장소도 없었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달리는 속도보다는 느리고 걷는 속도보다는 빨랐다. "우아아아아" "죽이자!" 병사들은 온갖 괴성을 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신의 이름, 욕설, 기도 그리고 뜻없는 괴성이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전투에 있어서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두려움을 없애기도 한다. 또한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 하지만 저들은 정령사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마법사들은 일제히 공격하라!" 다가오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마법을 사용하여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치는 것이다.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나로서도 소리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최상급정령을 보내 죽여도 되지만 지금은 그럴수가 없었다. '초반에 최대한 피해를 줘야해.' 최상급정령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들을 물리쳐야 했다. 우리의 전력은 모두가 궁수였다. 대면을 한다면 싸우지 못할이유는 없지만 그러기 시작하면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적과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서 원거리 공격으로 결판지어야 피해없이 승리할 수 있다. "파이어볼" "라이트닝 볼트" 다가오는 병사들 사이사이에서 3서클의 마법이 날아왔다. 마법사들이 병사로 변장하고 숨이었던 것이다. 달리는 와중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전투를 많이 경험한 마법사들이었다. 제국에서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3서클의 마법만 전문적으로 수련시킨 마법사가 분명하였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수였다. 재능이 없다해도 마법사가 될 수는 있다. 대개는 3서클에 머무르지만 정말로 평생토록 노력하면 5서클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여하튼 3서클의 마법사는 유용한 인재이다. 3서클의 마법은 위력이 약해도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마법이 많았다. 전쟁터에서 자주 사용되는 마법이라 제국에서는 관례처럼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3서클의 마법사에게 높은 대우를 약속하고 받아들여왔다. 그들은 마법사이지만 제국의 병사처럼 운용되어왔다. '실레스틴, 셀레아나, 노에아넨 부탁해.'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엘레스트라를 제외한 세 명의 최상급정령을 불러내었다. 생명력을 모두 소진하여 최대한 피해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정령사들의 안전이 확보되는 것이다. 최상급정령에게는 미리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를 했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였다. 짜자자작. 스스스스스.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듯 땅이 흔들렸다. 정령사들은 미리 알고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다가오는 병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반 병사들이라 하지만 저들중에 마법사와 기사가 섞여 있음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뭐야! 갑자기 왠 지진이야!" "조심해!" 병사들은 열심히 정령사들을 향해 달리다가 땅이 흔들려 제대로 전진하지도 못하고 혼란을 일으켰다. 그 순간에도 정령사들을 향해 마법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병사들 뒤로 시선을 옮기자 수천여명의 궁병들이 정령사들을 향해서 활을 쏘려고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펑펑펑. 찌지지직. 찌지지직. 3서클의 대표적인 공격마법들이 정령사들 앞에 생겨난 풍막에 의해 부딪혀 튕겨졌다.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의 힘이었다. 땅이 흔들리는 이유는 노에아넨이 병사들의 전진을 막기위해서 장난을 친 것이다. 다가오던 병사들이 그제서야 지금의 상황이 우리 때문에 발생했음을 눈치챘다. "당황하지 말고 공격해라! 더 빨리 전진하라!" 병사들은 지휘관의 목소리를 듣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넘어지는 병사는 기병(騎兵)에 의해 짓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눈앞에 있던 땅이 횡으로 갈라지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멈춰라! 땅이 갈라졌다!" 갑자기 땅이 갈라진 모습은 말을 타고있는 지휘관들에게 한눈에 띄였지만 시야가 낮은 병사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갈라진 땅속으로 많은 병사들이 떨어지고 나서야 멈추었다. 병사들의 악몽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모두 엎드려라!" "불덩이가 날아온다. 피해라!" 불의 최상급정령 샐레아나가 생성시킨 불덩이가 땅속으로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되는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불덩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많았으니 병사들의 공포심은 이루 말할 수 조차 없었다.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피해를 입은 병사는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 병사들은 두려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온다. 방패로 막아라!" "방패를 들어라!" 지휘관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병사들은 불덩이 때문에 방패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날아온 화살은 방패에 막히는 단순한 화살이 아니었다. 방패를 꿰뚫고 두 세 명의 병사까지 죽음으로 인도하고서야 힘을 다하고 멈추었다. 쉬시시식. 휘이익. 일반적으로 화살을 막기 위해서는 머리위로 방패를 들어올려야 한다. 하지만 병사들에게 쏟아지는 화살은 직선에 가깝게 날아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화살은 마법사와 기사의 주변에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후퇴하라! 후퇴!" 지휘관은 자신의 상황판단으로는 더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음을 판단하였다. 땅이 갈라져 있으니 건너지 않아고서는 싸울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법이나 궁수로 대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령사들에게 날아간 마법과 화살 그리고 창이 모두 무엇인가에 막혀 튕겨졌기 때문이다. "사람살려. 살려줘." "난 집에 가야해. 가족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나좀 데려가."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비명이 울려퍼졌지만 모두들 도망가는 와중이라 쓰러진 병사를 도우려 하지도 않았다. 자기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판에 타인을 도와줄 여력이 없는 것이다. 내가 소환한 최상급정령의 힘은 선두에 섰던 병사들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도 쏟아졌다. '오늘 하루에 끝내야해. 길게 끌면 피해만 커질뿐이야.' 오늘과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어야만 했다. 무척 잔인한 일이지만 하지않으면 또다시 싸워야하는 일이 생긴다. 전쟁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 발생하지 말아야만 했다. "공격을 멈추지 마세요! 또다시 오늘과 같은 전쟁을 되풀이 할 수는 없습니다!" 병사들이 후퇴하자 정령사들이 더이상 화살을 날리지 않았다.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결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병사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게되면 카르시온 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원인이 될 것이다. 특히 정령사들에게 마법사와 기사는 필히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소환한 최상급정령들의 공격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실레스틴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살아남는 병사가 없었다. 몸의 일부분이 나뭇가지처럼 잘라져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다. 샐레아나의 공격으로 초원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듯 보였다. 몸이 녹아내리거나 불이 붙어서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최상급정령들의 공격은 여러사람을 향했기 때문에 마법사와 기사에게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령사들의 화살이 거머리처럼 따라다녀 결국 죽음으로 인도하였다. 일만여명의 정령사들이 일순위로 노리는 목표가 마법사와 기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령사들의 화살은 기사도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와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령사들이 날리는 화살은 일반 궁수들이 날리는 화살에 비해 배로 강하였다. 화살의 재질이 나무인데도 불구하고 갑옷이 뚫리는 일은 예사였다. 기사가 마법이 담겨있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어도 정령사들의 화살을 피할길이 없었다. 설사 피하더라도 화살이 쉴세없이 날아와 결국은 죽음으로 인도하였다. 실질적으로 대면하여 싸웠던 정령사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화살만 날렸지만 눈앞에 널려있는 시체들이 초원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초원에 시체가 너무 많아 풀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숨을 들이쉬면 강한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이 힘을 합쳐서 보낸 전력의 절반이 넘게 죽었다. 특히 참가했던 귀족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화살이 날아가는 순간부터 귀족의 죽음은 예상된 일이었다. 정령사들이 더이상 화살을 날리지 않자 시체더미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이 악마들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살아남은 병사들은 처참히 죽어있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정령사들에게 미친듯이 소리쳤다.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외치더니 결국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헤맸다. 정령사들은 손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참혹한 현실을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저들은 오늘을 절대 잊을수 없겠지.' 살아남은 병사들은 자신의 두 눈을 통해서 지금의 참변을 목격했으니 다시는 정령사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정령사의 무서움이 알려질테니 대항하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제 카르시온 제국에게 남은 것은 멸망 뿐이다. "우리가 대체 무슨일을 벌인거지?" "엘프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라지만 너무나 많은 인간을 죽인게 아닐까?" 시간이 지나서야 정령사들이 참상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웠다. 초원은 매우 대립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노에아넨이 땅을 갈라뜨려 병사들을 생매장시킨 장소를 기준으로 건너편에는 초원전체가 시체로 쌓여 있었다. 그에반해 정령사들이 있는 자리는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 극히 대조되는 상황에서 정령사들은 자신의 행위가 타당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눈앞의 참상을 만들어낸 존재는 저희들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굳이 저희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언젠가 오늘과같은 일을 당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같은 종족을 노예로 부리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조화로움을 알리기 위해 결국은 지나야 할 관문이었을 따름입니다." 정령사들이 고민하지 않도록 어쩔수 없었다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전쟁은 정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내가 소환한 최상급정령들이 강력한 능력을 보여준 덕분이었다. 땅이 흔들리며 갈라지고 불덩이까지 날아다는 상황에서 전쟁이 계속될리 만무했다. 아니 전쟁을 하고 싶어도 싸우고 싶은 마음을 가진 병사는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시체들을 뒤지고 다녔다. 유품을 통해서 죽은 사실을 가족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시체도 가져가야겠지만 오래전부터 시체처리는 전투에 승리한 쪽에서 담당했다. 더구나 그들이 모든 시체를 가져갈 수 없는 일이다. '정령신이 함께하시길.' 나는 마음속으로 죽은이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살아남은 병사들마자 초원에서 떠나자 초원은 무척 조용하였다. 사실 초원을 뒤덮은 시체들을 땅 깊은 곳으로 인도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조화로움을 따르는 존재들은 숲에 시체를 방치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엘프의 장례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시체가 널려있는 초원에서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난 것은 정령사들이었다. 승리했으니 초원에 널려있는 시체를 수습해야 하지만 그것은 조화로움을 따르는 정령사의 방식이 아니었다. 한 동안 정령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3 회] 29. 멸망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의 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어렵게 만들어 보낸 병사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소식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정령사들은 단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령사들에게 크게 당한 이후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병사들 스스로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멸망하지 않더라도 돌아간다면 또다시 전쟁에 투입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정령사들을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복귀하는 병사가 없었으니 황궁에서는 모든 병사들이 정령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알게 된 것이다. 전쟁에 참가한 귀족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한 두 명이 살아오긴 했지만 그들을 통해서는 정확한 소식을 알수가 없었다. 살아서 돌아온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정령사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만 기사들은 그렇지 못하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귀족에게 가장 신뢰감을 주는 존재는 기사였다. 기사는 자신이 귀족이면서도 충성한 다른 귀족을 위해서 평생 따른다. 기사 한 명이면 일백여명의 병사도 부럽지 않은게 귀족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귀족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귀족들은 아무리 많은 마법사와 병사를 고용해도 그들을 믿을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귀족은 기사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인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의 모든 귀족들은 황궁에 함께 있다가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소식을 전해받은 그 순간을 시작으로 카르시온 제국은 멸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카르시온 제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다못해 나쁜 마음을 먹은 용병이 귀족을 죽이려고 한다면 피할길이 없다. 충성스럽게 따르는 기사없는 귀족은 그렇게 약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귀족들에게 살길은 오직 일리시아 제국으로 망명하는 방법 뿐이었다. 한때 제국의 운명을 위해서 적이 되었지만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판에 그런걸 따질 여력이 없었다. 망명하여 명예와 자존심이 상처입더라도 일리시아 제국에서라면 최소한 귀족의 대우는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귀족들이 살길을 찾아 일리시아 제국을 향하는데 백성들이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귀족만이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은 아니다. 많은 재물을 갖고있는 사람도 비용을 투자해 용병을 고용해서 일리시아 제국으로 향했다. 망명하는데 절반 이상의 재산을 빼앗겨도 카르시온 제국에 남아있는 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리시아 제국으로 향한 길에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온갖 재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카르시온 제국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가진자만이 일리시아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정령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을 멸망시킨 사실에 반가워하였다.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횡포가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열렬히 환영하였다. 일리시아 제국으로 향하는 행렬이 갑자기 늘어난 이유는 무서운 소문이 퍼진 이후부터였다. 전쟁직후 정령사들은 조화로움을 따르기 때문에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였다. 하지만 정령사가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엘프 소국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죽어버린 병사들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경고로 착각한 것이다. 보름의 기간이 지나자 카르시온 제국에는 오직 현실에 만족하거나 귀족들의 탄압에 지쳐버린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일리시아 제국으로 망명한 제국의 귀족들은 노예를 데려가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한 명의 귀족이 보유한 노예는 수천을 헤아린다. 아무리 몰락귀족이라도 수백여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많다보니 모두 데려갈 수 없어서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정령사들에게 가장 힘이 된 것은 신분사회의 병폐를 가장 많이 경험하던 노예나 농노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준 정령사들을 신처럼 받들였으며 정령사의 뜻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려 노력하였다. 노예로 살아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노예의 입장에서는 내일 죽더라도 하루를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소피아 왕국은 아직까지 정령사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카르시온 제국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귀족들이 일리시아 제국으로 정령사들을 피해 이동한 것이다. 정령사가 그들을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들은 그것이 두려운게 아니었다. 더이상 카르시온 제국과 소피아 왕국은 귀족이 살아가지 못할 곳이었다. 정령사들이 가만 둔다해도 그들이 괴롭힌 사람은 한 둘 아니었다. 더구나 노예에게는 가축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는데 그들이 자유를 찾은뒤 귀족을 가만둘리 없었다. 그래서 모든 귀족들은 떠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떠나면서 자신의 재산중에 백분지일도 가져가지 못했다. 귀족의 재산을 보석으로 모두 바꾼다해도 마차로 수십여대는 될 것이다. 귀족들은 모든 재산을 가져가다가는 도중에 나쁜일을 당할 것임을 모를리 없었다. 그래서 가장 부피가 적으며 값비싼 보석만을 챙겨갔다. 마법사가 만든 마법주머니를 구입할 수 있으면 무척 행운이었다. 사실 많은 귀족들이 마법을 이용해 모든 재물을 챙겨서 일리시아 제국으로 이동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은 엄연히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일리시아 제국과 카르시온 제국의 경계지역에는 텔레포트 마법은 물론이고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대단위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결국 마차를 이용해 일리시아 제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귀족들이 가져가지 못하고 남겨둔 재물은 자유인이 된 노예의 몫으로 나눠졌다. 정령사들은 귀족이 떠난 영주성을 방문하여 신속하게 노예를 해방하였다. 그대로 둔다면 귀족의 재산을 노린 사람들이 어떠한 짓을 벌일지 몰랐다. 일만여명의 정령사들은 카르시온 제국의 수도 말린을 중심으로 노예 해방에 앞장섰다. 그리고 최대한 사람들을 안정시키도록 노력하였다. 본래 일만여명의 정령사들이 카르시온 제국을 통제한다는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킬만한 귀족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카르시온 제국을 떠났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다시 세워질 수 없을 정도로 멸망하였다. 하지만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는 황궁을 떠나지 않았다. 에드에게는 그를 따르는 기사와 병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대략 일천여명이었고 그들은 황궁을 철통같이 지켰다. 모든 귀족이 떠나가도 에드 황제는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황제를 탓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히던 귀족이 싫었던 것이지 황제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누구도 황궁을 향해 손가락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드 황제에 충성한 사람들이 일천여명이나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지켰다는 사실에 존경하기까지 하였다. 황제가 좋고나쁨을 떠나서 일천여명이 희생해가며 지키려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정령사들은 말린의 황궁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람들을 괴롭하지 않는 이상 위해를 가할 이유가 없었다. 에드 황제와 죽음을 함께하기 위해 남았던 충성스런 신하들은 정령사들이 말린에서 많은 활동을 하는데도 황궁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는 사실에 고마워하였다. 그들은 평생 에드 황제와 함께하였고 다른 귀족들처럼 일리시아 제국에 망명하면서까지 살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미안하네. 프리온 재상" 에드는 피곤한 모습을 하고있는 프리온 재상을 향해 말했다. 이제는 황제로서의 위엄도 갖고있을 필요가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멸망하였으니 황제란 신분도 없어진 것이다. "제가 선탁한 길입니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재상자리에 앉아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럴수도 있겠군. 나도 황제로 등극한 후로 독약을 한 두 번 먹은게 아니었으니 말이야. 권력이 뭔지 친했던 형제들이 황제가 되려 아둥바둥대고 나는 빼앗기지 않으려 필사적이었지. 재상이란 자리도 나와 다를바 없었겠군." 에드가 과거를 회상하듯 웃어가며 말했다. 황제가 되기까지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발전을 위해서 평생 밤잠을 설쳤다. 지나간 과거들이 주마둥처럼 스쳐갔다. "모두 흘러간 과거일 뿐입니다." "적어도 재상과 나는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다행이야. 하지만 밖에서 우리 때문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쩌지?" "정령사들이 정해놓은 규칙만 어기지 않는다면 황궁에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황궁에 남아있는 모든 노예들을 내보냈습니다. 지금 황궁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남기를 자처한 사람들 뿐입니다. 또한 언제든지 마음대로 나갈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프리온은 에드에게 사실을 말하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황궁에 지내는 사람들중 절반이 떠나갔다. 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사람이 줄어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떠나도 되는지 몰라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떠날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하나 둘 떠나간 것이다. 그래서 황궁에 남아있는 사람은 에드 황제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음식의 맛이 변한거군." "죄송합니다. 훌륭한 요리사를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필요 없어. 당장 죽어도 모자랄 내가 겨우 음식투정을 하다니 나도 참 모자라지. 그건 그렇고 오늘 당장에 황궁의 창고를 개방하여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도록 해. 내가 황궁에 남아있는 충성스런 신하들에게 할수 있는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그나마 정령사들이 황궁의 재산만큼은 노예들에게 나눠주지 않아 다행이야." 프리온은 에드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더이상 에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따르는 일천여명의 신하들이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힘은 귀족에게서 나온다. 충성스런 신하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는 존재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무척 고마운 존재이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네. 프리온" 에드는 프리온에게 감사의 말을 하였다. 귀족들이 카르시온 제국을 버린 이후로 프리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지만 에드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프리온은 에드가 전해준 황궁의 창고열쇠를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황궁의 창고는 여러가지이다. 보통은 단어 그대로 황궁에서 가장 크면서 황궁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말한다. 하지만 에드가 말한 창고는 그것이 아니다. 황궁의 큰 창고는 이미 황궁에서 떠난 사람들에 의해서 값비싼 물건은 모두 사라졌다. 현재 남아있는 물품은 값비싸긴 하지만 들고다닐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에드가 건네준 황궁의 창고는 황제의 개인창고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싼 물품이거나 황궁에 있어야만 하는 중요한 물품이 들어있는 창고이다. 오직 황제의 인척만이 관리할 수 있으며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황제의 개인창고에는 무시무시한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법사 길드에서 매년 마도사가 방문하여 마법의 이상유무를 확인까지 한다. 그런 창고를 에드 황제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려가며 충성한 사람들에게 개방하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프리온은 가슴이 찢어질듯 아팠다. 프리온은 에드 황제의 개인창고를 향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이가 많아 눈물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그칠줄을 몰랐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정령사들을 반기는 사람들도 싫었다. 황궁에서 에드와 함께 평생토록 살고 싶었다. 프리온이 에드 황제의 개인창고를 개방하자 목숨을 포기하고 황궁에 남아있던 충성스런 신하들중 절반은 떠나갔다. 프리온은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들은 처음부터 혼자 살겠다고 떠난 사람들보다 한참이나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프리온은 최소한 10대가 부귀영화를 누려도 될만한 재물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떠안겨 주었다. 떠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주었다. 그런데도 에드의 개인창고에는 절반의 재물이 남아 있었다. 에드는 황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창고에 재물이 그렇게 많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개인창고를 닫아버리고 에드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다. "죄송합니다. 절반이 떠났습니다." "오호, 다행이군. 나머지 500여명은 어떻게 떠나보내지?" 에드는 프리온의 보고를 듣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사람들을 어떻게 떠나 보낼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프리온은 에드의 그런 반응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카르시온 제국은 멸망했고 에드는 맹목적으로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차라리 에드와 프리온만 남았더라면 둘이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만을 바라보는 바보같은 신하들이 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살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 카르시온 제국에 귀족이란 신분을 가진 존재가 사라져버리자 마법사 길드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법사들은 능력을 가진 자들이 높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정령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마법사의 능력 자체가 조화롭지 못하다는 견해를 제외하면 말이다. 마법사들은 지금까지 여러가지 제약에 부딪히며 생활하였다. 특히 귀족이 사사건건 간섭하여 제대로 활동을 못하였다. 귀족들은 마법사들이 귀족에게 해가 될만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을 돕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귀족들은 마법사가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생활마법이 한참 전성기를 맞이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귀족들이 독점을 하는 경우가 많아 부정적으로 영향을 준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와같이 마법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귀족을 악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귀족이 없어지니 마법사들은 아무런 제약없이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생활마법이 다시금 카르시온 제국의 전역을 뒤덮었다. 마법사들은 지식이 높았고 그들이 하는일은 체계적이었다. 생활마법의 목적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되기도 하였다. 물론 약간의 이용료를 내야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텔레포트 마법진은 제국에서 제재를 가하여 특별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카르시온 제국에 특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르시온 제국이란 말은 사람들 입에서 흘러간 역사로 간주되었다. 이제는 모두가 엘프 제국이라 자신있게 칭하였다. 실질적으로 엘프가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한 직후 일천여명의 엘프들은 모두 숲으로 돌아갔다. 많은 병사들을 죽인 사건이 나름대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정령사들은 엘프와 다르게 현재의 상황을 쉽게 극복하였다. 처음에는 인간 정령사가 감정기복이 엘프보다 높아 무척 불안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환경이라도 쉽게 적응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듯이 쉽게 안정을 되찾았다. 시간이 지나서 충격을 받은 것은 일천여명의 엘프들이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수만여명이나 되는 인간을 죽여버린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일천여명의 엘프가 돌아갔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엘프가 세상에 쏟아졌다. 엘프를 사냥하려는 엘프 사냥꾼도 없어졌고 엘프를 원하는 귀족도 일리시아 제국으로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일리시아 제국으로 떠나서 인구가 많이 줄었지만 살기가 좋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정령사들에게 조화로움에 대해 교육받으며 정령술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노예나 농노들은 정령사들의 말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숲에서 나무가 필요하면 생명이 거의 다했거나 죽은 나무만을 이용하였고 육류의 섭취도 줄였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엘프 제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낙천적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엘프 제국이 무척이나 어수선했지만 마법사들의 활동이 많아지면서 안정적으로 변했다. '엘프들의 선택만이 남았군.' 패로이 숲의 엘프 마을로 향하며 지금까지의 결과를 생각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한지 일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하던대로 엘프의 시대를 조금 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오늘은 모든 엘프 장로들이 모여 엘프 제국에 대해 의논하기로 하였다. 엘프 제국은 과거 카르시온 제국의 영역을 갖게 되었다. 모든게 안정되어 있는 지금 앞으로가 문제였다. 나름대로 엘프와 인간 정령사 그리고 정령사가 아닌 인간들이 모여서 엘프 제국의 구성원이 되었다. 지금은 상관없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할 때 논의가 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많았다. '벌써 일년이나 지났다니 좀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처음 엘프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 엘프들은 상의를 통해서 일만여명이나 되는 정령사를 내게 맡겼다. 그리고 기간을 일년으로 한정지었다. 일년의 기간동안 과거 대륙을 지배했던 엘프의 시대를 재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엘프의 제국에서 인간과 함께 어울리는 엘프가 이뤄놓은 결과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일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인간 정령사들이 이룩한 결과는 엘프들도 놀라고 있었다. 인간 정령사들을 믿고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정령사가 된 것이다. 물론 하급 정령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하급 정령사는 하급정령을 소환하여 약간의 물리력을 발휘하는 정령사를 말한다. 그런데 일년여만에 하급 정령사가 수만여명이나 탄생한 것이다. 특히 노예로 생활하다 정령사들에게 자유를 얻은 사람들에게서 많이 탄생하였다. 노예는 본래부터 육류를 섭취할 수 없는 극악한 상황에서 생활했다. 거기다 인간이 가져야할 감정들이 매마른 경우가 많았다. 또한 노예들은 강한 인내심과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의 생활이 정령사 자질을 교육받은 효과를 보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유인이 되어 정령사의 말을 따르며 정령술을 익히다보니 일년여만에 하급 정령사가 된 것이다. 엘프 제국은 일년여만에 수만여명의 하급 정령사를 얻게 되었다. 정령사가 되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무척 많았다. 단점도 있지만 장점이 더욱 많아서 문제되지는 않았다. 또한 정령사가 되는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안녕하세요? 비우스 엘프장로님" "반갑습니다." 비우스를 비롯해 많은 엘프장로들이 반겨주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만약 실피했다면 나는 나머지 삶을 비관적으로 살았을 것이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엘프장로들은 서슴없이 존칭을 써주었다. 일년전만 하더라도 내게 존칭을 쓰기 싫어서 먼저 말을 걸었던 엘프장로들은 없었다.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 만났지만 비천한 인간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비해 대우가 많이 달라졌다. 엘프 제국은 어느 한 명의 힘으로 운영되는게 아니었다.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이 조화로움속에서 살아가고, 조화로운 범위내에서 정령사가 아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큰 도시라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일년이 지났습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엘프의 시대와 다른 모습이지만 만족스럽습니다." 엘프장로들을 향해서 말했다. 사실 지금의 엘프 제국은 엘프와 인간 정령사에 의해서만 지배되고 있지 않았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하고 난후 마법사들이 일정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편리한 생활마법을 전파하며 신망(信望)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엘프 제국은 조화로움이 지배되는 세상이면서도 생활마법이 꽃피우고 있었다. 엘프장로들은 마법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버렸다. 아니 버리기보다는 어느정도 인정해 주기로 결정하였다.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문화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엘프장로들과 마법사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마지막으로 내 문제가 거론되었다. "엘프 제국에 지도자가 필요없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없을수도 없습니다. 엄연히 북쪽에는 일리시아 제국이 존재하고 그들은 저희 제국을 노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조화로움을 따르더라도 일리시아 제국이 존재하는 이상 지도자는 필요할 수밖에 없지요." 모리엔 엘프장로는 지도자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다른 엘프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엘프가 남쪽에 조용히 살아갈 때는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해왔다. 하지만 소국이 탄생한 이후로는 괴로움을 당하지 않았다. 모두들 엘프 제국의 지도자가 필요한 사실을 모두 동의하였다. "엘프 제국은 두 종족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종족 모두에게 인정받은 경우는 카인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니 계속 카인님이 지도자로 남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동의합니다." 모리엔이 내가 계속 지도자로 남길 바란다는 말에 다른 엘프장로들의 동의하였다. 이제는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 생활하려고 했는데 또다시 미뤄지게 되었다. 내게 남은 수명은 무척 길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 필요한데 잘됐다 싶었다. "엘프 제국이 영원하길." "조화로운 세상에 빛이 내리리라." 엘프장로들이 내게 축하인사를 전하였다. 엘프 제국으로 인해 엘프들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대륙 전체적으로 인간 정령사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났으며 엘프가 폐쇄적인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연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으니 엘프가 서야할 자리는 무척 많았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4 회] 30. 천신 일년전부터 일리시아 제국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발전이 시작되었다. 그 원인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카르시온 제국에서 망명한 귀족들 때문이었다. 지금은 엘프 제국이라 칭하지만 말이다. 일리시아 제국은 망명한 귀족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재물이 제국의 황궁에 가득 쌓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카르시온 제국에서 넘어온 귀족들이 노예를 많이 데려오지 못했지만 재물은 넉넉히 가져왔던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은 카르시온 제국과의 전쟁의 후유증을 더디게 회복하고 있었다. 더구나 예전에는 주변의 왕국과 소국을 흡수하여 제국연합으로서 큰 힘을 발휘했던 시기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어느 나라든 귀족은 그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도 귀족은 많이 배운 존재로 유용한 인력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은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에게 일정양의 재물을 받으며 망명을 받아들였다. 귀족들에 이어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까지 넘어오자 일리시아 제국은 그들은 모두 받아들였다. 일리시아 제국의 발전은 카르시온 제국의 멸망을 바탕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이 정착하기 위해서 많은 활동을 벌임으로 해서 말이다. 망명이 아니라 피난이라 부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일리시아 제국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제국 전역에 상거래 활동이 많아져서 많은 이득을 창출하였다. 작은 소국의 경우에는 농사에 의존하는 빈도가 높지만 소국에 열 배 이상 큰 제국은 상거래가 차지하는 빈도가 더 높다. 그래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경기가 활동화되어 발전한 것이다. 발전에 더불어 국력도 강해져서 결국은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이나 백성 모두가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일년의 일리시아 제국의 힘은 예전처럼 주변의 왕국과 소국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더구나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하고 엘프 제국이 들어섰기 때문에 대륙에서 일리시아 제국이 가장 강한 나라가 된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할 당시에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일리시아 제국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엘프 제국은 소국만도 못한 나라로 평가된 것이다. 나라의 힘은 살고있는 백성의 수와 관련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일리시아 제국은 대륙에서 최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또다시 침략전쟁에 대한 의견이 하나 둘 생겨났다. 소수의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알면서도 또다시 같은 역사를 반복할 수 없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하지만 귀족이 아닌 백성들까지도 침략전쟁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하고 들어선 엘프 제국은 일년의 역사만 갖고있었다. 당연히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강한 전력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일리시아 제국은 일년전과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에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저는 반대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없습니다." 마구스는 로터스 황제가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다른 귀족들이 마구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모두가 엘프 제국의 침략을 주장하는데 혼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이해시켜 보시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엘프 제국에 지배계층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엘프나 인간 정령사의 말이라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단결이 잘 되어있는 나라가 엘프 제국입니다. 더구나 엘프 제국에는 정령사들이 수도없이 많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정령사의 능력은 기사와 동일합니다. 아니 좀더 뛰어난 존재입니다." 마구스는 귀족들을 향해 엘프 제국이 강한 전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마구스는 첩자를 관리하는 능력이 높아 귀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선 평민이었다. 귀족들도 마구스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존중해 주었지만 오늘의 경우와 같은 일이 발생하자 호의는 적대로 바뀌었다. "마구스 당신은 스스로 말한 사실을 부인할거요?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은 우리 일리시아 제국민의 십분지일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잖소. 절반도 아니고 무려 십분지일이요. 아무리 엘프 제국에 뛰어난 정령사가 많다해도 너무 차이가 난단 말이요. 더구나 엘프 제국에 많은 정령사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마법사와 기사가 있단 말이요." 마구스는 더이상 귀족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다. 귀족들의 말에도 사실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엘프 제국이 강해도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것은 마구스가 확인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로터스 황제는 지금의 회의가 무척 즐거웠다. 일리시아 제국의 힘은 대륙에서 따라올 나라가 없었다. 유일한 상대였던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하여 이종족의 나라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생겨났지만 말이다. 주변의 왕국이나 소국은 일리시아 제국의 힘에 굴복한 상태였다. 하지만 자국의 전력이 조금이라도 약화될까 두려워 침략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속국임을 자처하며 조공까지 받치는데 굳이 침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로터스 황제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기 싫었다. 지금의 힘이라면 예전처럼 주변의 왕국과 소국을 흡수할 수 있다. 그래서 강력한 제국연합을 탄생시킬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국연합이 가진 단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패했을 때 일리시아 제국이 약한 틈을 타서 모두 독립했으니 말이다. 일리시아 제국이 지금처럼 계속 강함을 유지하면 주변의 왕국과 소국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로터스 황제는 자신의 대가 아니더라도 후대에 결국 대륙에는 일리시아 제국만이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백성들도 모두 침략전쟁을 바라고 있습니다." "일리시아 제국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대륙을 통일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지요." 귀족들이 로터스 황제에게 너도나도 침략전쟁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과거에 카르시온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무서운 존재가 있었지만 지금의 엘프 제국은 너무나 만만한 상대였다. 그래서 모두가 전쟁을 옹호하고 있었다. "귀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겠습니다." 로터스는 귀족들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당장 자신의 의견을 통해서 전쟁을 준비해도 되지만 혹시라도 모를 일이었다. 귀족회의를 통한다면 황제가 아닌 귀족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다같이 결정한 사항을 누가 황제에게 책임을 떠넘기겠는가. 전쟁준비는 귀족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멸망한 카르시온 제국의 귀족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쟁에 필요한 병사들의 준비도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 많은 백성들이 스스로 병사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지원이 있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없었다. 아무리 빨리 준비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린다. 귀족회의에서 전쟁에 대한 결정은 그저 형식상으로 진행되었다. 황제를 비롯해 많은 귀족들에게 신임을 얻고있는 마구스가 전쟁을 반대했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마구스가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엘프 제국이 가진 단결력 때문이다. 정령사의 말이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말이다. 엘프 제국에 침략한 첩자들은 그것을 세세히 보고하였다. 마구사가 황제와 귀족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했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말이다. 일리시아 제국은 귀족과 백성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전쟁을 준비하였다. 로터스 황제는 또다시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지난 전쟁으로 로터스 황제의 신뢰는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전쟁만 성공한다면 대륙은 일리시아 제국의 것이나 다름 없었다. ------ 엘프 제국에 신전이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되어도 신전은 아무 활동도 벌이지 않았다. 신탁이 내려지지 않으니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모두들 천신을 향해 기도를 할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지 일년이 지나자 신전 내부에서도 많은 마찰이 발생하였다. 신전은 그냥 운영되지 않는다. 포교활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재물을 통해 여러가지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엘프 제국이 들어서면서 포교활동으로 재물을 얻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조화로움을 따르는데 천신을 믿을리 없는 것이다. 일년이 지나자 대부분의 신전들이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못한채로 생활할 수 없다며 내분을 일으켰다. 성녀들에게 내려지는 신탁을 계속 기다리자는 사람과 반대로 엘프 제국에는 신전이 차지할 자리가 없으니 일리시아 제국으로 가자는 사람도 있었다. 두 의견이 모두 타당성 있기 때문에 내분은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전이 보유한 재물로 일년이라는 시간을 버텼지만 더이상은 무리였다. 끝까지 성녀들의 신탁을 기다리자는 사람들도 마음을 바꾼 것이다. 신관이나 성기사는 나름대로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귀족이 없는 엘프 제국에서 신전이 운영되기란 너무 힘들었다. 신전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어마어마한 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축적된 자금으로 일년이나 버틴 것이다. "으악!" 성녀는 천신을 위한 기도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였다. 천신의 신탁이 강력하게 내려져 육신이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신탁은 몽상(夢想)처럼 가물가물하게 내려진다. 하지만 지금처럼 몽상이 아닌 머리속을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신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드디어 신탁이 내려졌구나.' 성녀에게 당장은 신탁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았다. 일년만에 신탁이 다시 내려졌다는 사실이 기쁠 따름이었다. 일반적으로 신탁이 내려지면 신탁의 내용을 잊어먹지 않기 위해서 한참동안 기억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신탁은 너무나 선명하고 확실하여 굳이 기억을 가다듬을 필요가 없었다. 신탁을 받은 성녀가 다른 성녀들을 만났는데 그녀들도 모두 신탁을 받고서 흥분한 상태였다. 직접적으로 신탁의 내용을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그래왔듯이 종이에 적어서 주고받았다. 그 결과 신탁의 내용이 똑같은 사실임을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신탁이 내려진 사실을 기뻐했지만 그것은 잠시후 또다른 고민을 가져왔다. 신탁의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신탁의 내용은 카인이란 정령사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그를 죽이기 위해 성녀들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한다는 것이었다. 성녀들은 천신이 성녀들의 육신 모두에 강림한다는 신탁의 내용을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몰랐다. 성녀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한다는 사실은 성녀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미 로리아 성녀에게 천신이 강림하여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력에 육신이 견뎌내지 못한 사실까지 자세히 말이다. 로리아 성녀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한 사실은 무척 중요했기 때문에 성기사들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져 있었다. 천신의 강림에 대해 신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개 잠깐의 강림만으로도 성녀의 육신에 큰 무리를 준다는 사실이 있었다. 하지만 성녀들 모두에게 강림하여 이단자 카인과 대치한다면 분명 성녀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성녀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기쁨도 슬픔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천신의 강림한다니 당연히 기쁜 것이다. 가뜩이나 신전에서 내분이 극도화 된 상황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성녀로서의 삶을 끝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나마 성녀였기 때문에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림도 없었다. "모든 신전에 알려야겠군요." "그뿐 아니라 천신님의 뜻대로 카인이라는 이단자를 심판하려면 성기사들까지 불러야겠네요. 로리아 성녀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했을 때 성기사들이 함께 도와서 처리했으면 이런일이 없었을텐데 아쉽네요. " 성녀들은 로리아 성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때 천신이 강림하여 카인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았던 일년전 상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녀와 성기사들 모두 천신의 정확한 뜻을 몰라서 카인을 살려두었기 때문에 성녀들 모두가 죽게 생긴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천신을 만날 수 있다니 무한한 영광이지요." "저의 희생으로 천신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니 기다려지네요." 마음을 가라앉힌 성녀들은 천신의 강림으로 삶을 끝낸다는 사실이 좋았다. 처음에는 잠깐 두려운 마음과 아쉬움 등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여 이성을 잃었지만 빠르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성녀들의 신탁이 내려진 소식으로 많은 신전의 내분은 원래부터 없었다는듯이 사라졌다. 성녀들의 뜻에 따라서 성기사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성기사들이 모이는 경우는 평생 있을까 말까한데 벌써 두 번째였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무려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모여야하기 때문이다. 신전에서도 성기사들을 위해 여러가지 배려를 하였다. 엘프 제국이 들어선 이후 신전을 감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기사들이 모이는데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았다. 성기사들이 모인 장소는 말린의 황궁앞으로 예전에 비해 달라진 점은 크게 없었다. 단지 전체적으로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심어져 있어서 숲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성기사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엘프 제국은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 널리 퍼진 상태였다. 신전의 활동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 엘프 제국은 정령사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변화되었다. 이제는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모든 인간들이 정령사이다. 물론 친화력이 낮아 정령을 소환하지는 못하지만 엄연히 정령사임에는 틀림없다. 정령사가 되기위해 조금씩 노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가 절정에 다다른 말린 곳곳에 나무와 온갖 식물들이 심어져 무럭무럭 자랐다. 본래 말린에 있던 건물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지만 외형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은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쉽게 적응을 한다. 엘프 제국은 신분사회가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인간만의 사회라면 매우 불합리한 사회일 수 있지만 절반이 넘도록 귀족의 횡포에 당해오던 사람들었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귀족의 횡포에 인간답게 살지 못했었다. 엘프 제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떠나갔다. 일리시아 제국으로 떠나도 누구하나 상관하지 않았다. 엘프 제국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어떠한 제재도 없었다. 일년의 시간이 지나자 엘프의 조화로운 문화는 완전히 정착할 수 있었다. 엘프에게는 엄청난 변화였으며 인간 정령사에게는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정령사가 아닌 인간에게 엘프의 문화는 무척이나 지루한 삶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혀지면 역사가 반복되겠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엘프 제국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지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따져보았다. 인간의 삶은 짧은데 반해 엘프들은 무한하다. 약간의 시간만 흐르면 인간들은 조화로운 문화에 따분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들이 갖고있는 지금의 행복을 잊어버린채 말이다. 그 순간부터 엘프 제국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짧더라도 지금의 생활에 충실해야겠지.' 앞날이 불투명하더라도 현재의 충실하자고 다짐하였다. 엘프장로들이 지도자로 다시 뽑아주어 너무나 고마웠다. 엘프의 시대를 여는 목적이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엘프의 시대를 열고 싶었다. 다시는 나와같이 운명이 결정되어 피해보는 사람이 없길 바라면서 말이다. '지금과 같으면 수천년이 지나도 변함없겠지.' 대륙을 횡으로 나누면 북쪽으로는 일리시아 제국과 크고작은 왕국과 소국으로 이루어져있고 남으로는 엘프 제국이 들어섰으니 오래도록 이 상태가 유지될 것이다. 엘프의 문화가 자리잡는데 일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앞으로 기나긴 역사가 만들어 지리라. 정령사는 마법사처럼 재능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엘프 제국의 힘은 강대해진다. 지금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이 할 일은 그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일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무려 일만여명의 정령사들이 탄생하였다. 물론 하급 정령사들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일이다. 엘프 제국의 지도자가 된 내가 할 일은 정령사가 좀더 많아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엘프 제국이 강해지는 사실을 깨닫고 일리시아 제국에서 가만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멸망한 카르시온 제국처럼 전쟁을 할 가능성도 크다. 일리시아 제국으로 엘프 제국을 위협으로 생각할테니 말이다. 나의 거처는 말린으로 평민이 주인이었던 집에서 살고있다.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빈집이 생각보다 많았다. 또한 엘프 제국은 누군가 지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운영되고 있었다. 단지 불상사가 발생할까 두려워 말린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말린은 가장 큰 도시이며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어서 엘프 제국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알 수 있다. 더구나 아직은 엘프 소국이 대륙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특별히 할일이 없어서 매우 여유로웠다. "카인님 큰일났습니다." 에르롤이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는 내 앞에 나타나며 소리쳤다. 근래들어 에르롤이 서두를 정도로 큰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침착하게 말해봐." "신전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성기사들이 황궁앞에 개미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에르롤은 헐떡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신전은 내가 싫어하는 천신을 믿는 자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모두 몰아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들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성기사들이 황궁앞에 모여드는 이유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황궁앞에는 일만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공터가 있어서 유명하다. 성기사들이 황궁앞에 모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볼 것이다. '활동을 재개하려고? 성기사들이 에드 황제를 도우려고 그러나?' 머리속에서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카르시온 제국의 치안이 불안할 때 신전이 나서서 안정시킨 경우도 있었다. 혹시 이번도 그와같은 경우가 아닐지 걱정되었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황궁앞으로 향했다. 황궁을 향하면서 변화된 도시의 모습을 감상하였다. 숲이라 말하지는 못하지만 숲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약간 심심한 분위기라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조화로움이 원래 그렇다. 자연에게 감사히 여기며 변화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성기사님들이다." "우와! 정말 멋지다." "예전에는 자주 볼 수 있었던 모습인데 말이야. 그런데 무슨일이지?" 황궁앞에 도착하자 많은 성기사들을 목격하고 할말을 잊었다. 구경하던 사람이 성기사를 향해 무슨일이라 질문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성기사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성기사들의 얼굴은 무척 굳어진 표정이었다. '큰일이 있나보네.' 한참을 그렇게 성기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보니 성기사들이 일천여명이나 모여 있었다. 엘프 제국에 성기사가 일만여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일년전에 있었던 천신이 강림했을 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려 일천여명이나 모였기 때문에 큰 사단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에르롤 당장 말린에서 지내고 있는 엘프들을 이리로 불러와!" 에르롤에게 엘프를 불러오도록 심부름을 시켰다. 무슨일인지 몰라도 인간 정령사로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성기사의 힘은 기사에 못지않는다. 엘프처럼 정령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야만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대처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피해를 주지 않는 이유로 신경쓰지 않았던 사실이 후회가 될 줄이야.' 신전이 재물에 욕심을 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타인을 돕는다. 그런 이유로 신전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개인적으로 천신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지만 나 하나만의 문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런 선택이 지금의 후회를 불러왔다. 아무리 최상급정령의 힘을 사용해도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을 제재할 수는 없다. 그들 개개인의 힘은 약할지라도 그 수가 무려 일만이나 되었다. 설사 성기사들을 제재할 수 있어도 그들 한 두 명으로 인해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다칠 가능성이 많았다. 모든 성기사들을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만여명이 모두 모이다니!'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던 사람들이 성기사가 무려 일만여명이나 모이자 자리를 슬금슬금 피했다. 신전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일만여명의 성기사가 엘프 제국의 모든 성기사를 뜻하며 그들이 모두 모이는 이유가 신전의 중대사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많은 시선을 받은 사실중에 하나가 바로 성기사들의 옷차림이다. 성기사는 얼핏 보았을 때 멋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지금 성기사들의 모습은 멋있다고 생각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였다. 화려한 모습이 아닌 전투에 유용한 간편한 모습이었다. 표정은 당장 전쟁이라도 치르는듯 굳어 있었고 대부분의 성기사가 당장 검이라도 뽑아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무슨일이 벌어졌나?" "무슨일인지 말을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정말 답답하네." "그런데 성기사들 표정이 왜저래? 일만여명이 되는 성기사들이 황궁 앞에서 정렬하였다. 무척 넓은 지역이었지만 정말로 일만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일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예전 같았으면 귀족이 지나는 길이라 머리를 쳐들고 다니지도 못했던 장소중에 하나였다. "저거 성녀님들의 마차 아니야?" 멀리서 매우 단순하면서 신비로움을 풍기는 마차가 황궁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마차보다 수배나 크고 신전의 마차임을 나타내듯 말과 마차의 창문이 새하얀 백색으로 되어 있었다. 마차는 정렬하고 있는 성기사들의 중간에 놓여졌다. "자네 왜 엎드리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왜 엎드리지 않지?" 두 사람이 성녀의 마차를 바라보고도 바닥에 엎드리지 않는 이유를 말하며 다투고 있었다. 일년전만 하더라도 성녀의 마차가 지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신분의 고귀함을 따지는 카르시온 제국은 엘프 제국에 의해서 사라졌다. "천신님이시여." 누군가 마차를 보고 바닥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화로움이 많이 전파되었지만 바닥에 엎드린 사람처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끔씩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지는 않아서 마음이 뿌듯했다. 신전이 설 자리는 엘프 제국에 없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신전에서는 나쁜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선물해주고 나의 삶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천신이 좋을 이유가 없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존재가 천신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성녀의 마차가 도착했지만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성녀가 나타나 성기사들을 만난다거나 성기사들이 무슨 행동을 한다던가 말이다. 그저 성기사들이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 무슨일이 있있는지 말이나 해주게." "그러지." 간혹 자리를 떠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반나절이 넘도록 성기사들은 변화가 없었다. 성기사들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며 어떠한 간섭도 원하지 않았다. 말을 건네도 표정에 변화없이 무엇인가 기다릴 뿐이었다. '누군가 기다리는건가?' 성녀의 마차가 도착했을 때는 그곳에서 중요한 인물이 내릴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 마차안에서 생명력과 반발하는 강력한 신력을 지닌 사람이 여럿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차에 있는 사람이 성녀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마차안에서 기도라도 들이나? 아까부도 왜 신력이 강해지는거지?' 마차가 도착한지는 반나절이 지났는데 그동안 도착했을 처음 때부터 지금까지 마차의 내부에서 풍기는 신력이 조금씩 강해졌다. 마차안에 있는 성녀가 기도라도 드리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다. 예전에 소피아도 죽은 세실리아를 위해 기도할 때면 시간이 지날수록 평소보다 신력이 강해졌었다. '황궁앞에 모여서 기도를 드려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일까?' 한 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되는 성녀가 마차안에서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마차안에서 풍기는 신력이 너무 강력해 성녀가 다섯이나 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력이 강해지니 이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신력을 눈치채고 있었다. 엘프 제국의 모든 사람은 정령사로서의 수련을 쌓고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피하세요.' 머리속에서 실레스틴이 자신의 생각을 공격하듯 전해주었다. 실레스틴의 감정은 무척 격해져 있었다. 눈앞에 일만여명의 성기사들 때문에 마음이 곤두선 상황이라 셀레스틴이 난리치는 이유가 중요하다 생각되었다. '무슨일인데?' '천신의 강림이에요. 성녀들이 반나절이 넘도록 기도를 드리더니 방금전에 결국 신력이 최고조에 다다르자 천신을 강림시키기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차를 외부와 완전 차단했기 때문에 바람의 정령인 저로서도 기도 소리를 간신히 듣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실레스틴에게서 눈앞에 일만여명이나 되는 성기사들이 모여있는 이유를 알게 되자 끔찍했던 일년전의 고통이 떠올랐다. 천신이 강림하여 얼마나 고생했는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소문이 난 것은 천신이 강림한 사실 뿐이다. 물론 엘프들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모두 피하세요! 뭐하는거에요? 모두 피하라니까!"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은 수천여명에 가까웠다. 처음 내 외침을 듣고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넘어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아볼리 없었다. 주로 내가 한 일은 저수지를 만드는 일처럼 엘프나 인간 정령사가 해결할 수 없었던 일만을 맡았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리 없었다. "모두 피해요." "모두 피해야 합니다." 그때 갑자기 엘프들이 나타나더니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에르롤이 말린에서 생활하고 있는 엘프를 찾아가 내 말을 전해듣고 도착한 엘프였다. 아마도 다른 엘프에게도 열심히 전달하고 있을 것이다. 엘프라면 내 말을 믿기 때문에 도착하는 즉시 나를 도왔다. 엘프는 인간을 잘 믿지 않는다. 인간 정령사의 말이라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 번 신뢰를 준다면 다시 신뢰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끝까지 믿어준다. 엘프는 도착하여 무슨일인지 알길이 없었지만 내가 외치는 소리에 급박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엘프님이 말씀하시잖아." "빨리 피하세. 엘프님의 말씀이라면 무슨 이유가 있겠지." 수천여명의 사람들이 엘프가 갑자기 나타나 피하라고 외치자 무슨일인지도 모르면서 각각 흩어졌다. 최상급정령을 이용한다면 사람들이 떠나도록 할 수 있었지만 눈앞에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이 있는 마당에 정령의 힘을 남발할 수 없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엘프가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물론 엘프들 모두가 왜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혼란스럽게 지내고서야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피신시켰다. '지금이라면 천신이 강림하더라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어.' 천신의 강림이 마음 한편으로 두려웠지만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강림한 천신에게서 살아났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친화력이 강해져 최상급정령의 힘도 강해진 상태라 천신에게서 살아남는데 자신이 있었다. '다른사람에게 피해가 없어야할텐데.' 지금 걱정은 천신의 강림이 아니라 그로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웠다. 일만여명의 성기사들 뒷편으로 멋진 황궁의 모습이 보였다. 대다위 마법결계가 있으니 황궁에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 피했으니 주인님도 피하셔야지요.' '예전과 입장이 다르잖아. 이번에는 예전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을거야. 당당히 맞서 싸워서 다시는 강림하지 못하도록 할거야.' 한 번 경험했던 일이라 무섭지 않았다. 천신이 강림하여 사용하는 신력의 힘은 너무나 단순하다. 신력을 압축시켜 그저 밀어붙여 무엇이든 파괴시키는 방법이었다. 경험이 있었다면 예전에 강림한 천신에게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하나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했을 경우였고 지금과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무슨 상황이 다른데?' '마차에 있는 성녀들 모두가 천신의 강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레스틴의 생각은 나의 심장이 멈출만한 소식이었다. 마차안에 다섯 명의 성녀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성녀들이 모두 기도하는 이유가 한 명의 성녀에게 신력을 넘겨주기 위해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천신의 강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강림한 천신에게 살아남은 이후로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알아냈다. 최상급정령도 천신이 강림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한 명의 성녀에게만 강림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럼 천신이 다섯 명의 성녀들 육신에 모두 강림한단 말이야?' '천신과 성녀중에 하나가 완전히 미쳤나봅니다. 다섯 명의 성녀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하면 그들 모두가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천신을 육신에 받아들여도 죽지 않을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성녀들은 목숨을 버려가면서 천신을 강림시키려 하고 있었다. 천신이 그렇게 강림하려는 이유가 고작 나 하나 때문이라니 왠지 대단한 인물이 된듯한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 천신의 강림 목적을 다르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밖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거머리 같이 끈질긴 천신이었다. 운명에 맞서싸운 사람이 적었던 이유가 있었다. 천신이 지금처럼 끈질기게 달려드는데 무슨수로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천신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저주스러웠지만 마음속에 허탈함이 생겼다. 다섯 명의 성녀들이 천신의 강림을 받아들이면 내가 살길은 없었다. '천신아. 마음껏 싸워보자.' 후련하게 마음껏 천신에게 대항하기로 하였다. 예전에는 천신에 대한 두려움과 힘의 차이 때문에 제대로 대항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삶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기에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싸우리라 다짐하였다. 막다른 골목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천신이 강림하면 그로인해 말린은 쑥대밭이 될 것이고 아무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 결국 피할길 없이 정면으로 대항하는게 최선이었다. 엘프들에게 성기사들이 나서지 않는 이상은 절대 상관하지 말라고 전했다. 강림한 천신도 버거울텐데 일만여명의 성기사들에게까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본래 천신이 강림하기 직전에 마차를 공격하여 강림을 방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가장 최선의 선택은 완전히 강림한 상태에서 대항하여 살아남은 길이다. 물론 강림한 천신에게 피해를 준다면 더욱 좋지만 말이다. 일년전에는 성녀의 육신이 천신의 강림을 버텨내지 못하여 나를 죽이는데 실패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무려 일년이라는 시간을 조용히 보낼 수 있었다. 만약 강림한 천신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수천여년까지 천신의 간섭을 받지 않을수도 있었다. 물론 꿈같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5 회] 30. 천신 천신이 강림하도록 기다리는 동안에 주마둥처럼 스쳐간 기억이 한 둘이 아니다. 그중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은 사비나였다. 일평생 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으며 다시 살아났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이었다. 사비나의 모습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팍팍팍" 성녀들이 탄 마차가 갑자기 부서지며 회오리가 몰아쳤다. 회오리의 중심에는 다섯 명의 성녀들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엘프들과 성기사들은 회오리의 영향 때문에 한쪽으로 물러났다. "폭폭폭" 성기사들이 검을 빼서 땅에 박아넣고 회오리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성녀들의 주변에서 물러섰는데도 바람이 무척이나 강했다. '주인님 드디어 천신이 강림했습니다.' '부탁할께. 너희들에게는 고통스럽겠지만 마지막일테니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어.' 최상급정령에게 천신과 맞서싸울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신력과 싸우는 정령은 무척 고통스럽다. 일년전에 정령이 느끼는 고통을 소환자인 내가 절반만 느꼈는데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오늘은 지난번 보다도 배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휘이익. 스스스. 다섯 명의 성녀들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회오리는 상당히 강하였다. 로리아 성녀의 육신에 강림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한 가지 좋은점이 있다면 신력의 힘이 나를 향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주변전체에 폭풍이 발생하도록 했는데 말이다. 아마도 다섯 명의 성녀들 육신에 강림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하지?' 다섯 명의 성녀들이 조금씩 허공으로 올라가면서 회오리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하늘높이 치솟아 하늘에 있는 구름과 연결된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지상과 하늘이 연결된 모습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나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바람의 최상급정령 실레스틴이 회오리 바람에 맞서고 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실레스틴은 바람의 정령인데도 불구하고 신력에 의해 발생한 회오리 바람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회오리가 얼마나 강한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회오리의 범위는 나의 주변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성기사들과 엘프들이 느끼는 힘은 그저 강한 폭풍 정도에 불과했다. 그들이 내가 있는 곳에 잠깐만 있는다면 당장 하늘멀리 날아갈 것이다. 최상급정령의 보호막이 있어서 하늘로 던져지는 불행을 맞지 않고 있었다. 실레스틴, 샐레아나 그리고 노에아넨이 나서서 계속 회오리 중심에 있는 성녀들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회오리 내부에 있는 성녀들은 내가 보호막에 있듯이 안전해 보였다. '아아아아아' '으으으으' 정령들의 고통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친화력이 높을수록 정령의 고통을 많이 느낀다. 정령의 고통을 느끼는 만큼 정령의 고통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어서 정령과의 교감도 높아진다. 그래서 친화력이 높은 정령사의 정신력이 약하면 미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주인님 저희들 걱정은 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견딜수 있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느끼는 최상급정령이 나를 위로하였다. 성기사들과 엘프들은 싸움을 구경하며 할말을 잊고 있었다. 나는 정령들의 보호막 안에서 주변을 돌아보고서야 놀라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천신이 강림할 수 없도록 공격하자!'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대로 죽으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정령들에게 공격을 재차 강요하였다. 정령들도 내 마음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사실 최상급정령들에게 고통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다. 수만여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존재가 정령이었다. 하급 정령이야 정령사에게 소환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많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상급정령은 정령사에게 소환되는 경우도 적을 뿐더러 설사 소환되어도 그저 잠깐만 활동하고 정령세계로 돌아간다. 최상급정령을 자유롭게 부리는 정령사가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나와 인연을 맺은 최상급정령들은 실체화되어 생활도 해보고 정령세계가 아닌 세계를 마음껏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정령들은 그런 내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모든 공격들이 회오리에 막혀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간절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시간이 가는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대항하다가 어느 순간 회오리가 점점 내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원망스러울 때가 없었다.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짧은 시간에 절반이 넘는 생명력이 소모되었지만 회오리의 힘은 약해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최상급정령의 공격이 무시무시했지만 말이다. 밖에 있는 엘프들은 최상급정령이 저렇게 강한 정령이었는지 놀라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회오리 안에는 다섯 명의 성녀들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눈이 충혈되지만 않았다면 정말로 괜찮을텐데 말이다. 세상에는 오직 나 혼자만이 있는 느낌이었다. 최상급정령의 끊임없는 공격이 회오리의 영향에 너무나도 쉽게 휘말리고 있었다. '천신은 있어서는 안될 존재야. 죽어라.' 회오리를 향해 생각을 전하였다. 천신이라면 내 생각을 전해받을 것이다. 천신이 다가오는 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끊임없이 전하였다. 천신이 듣지 못할 가능성도 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후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야.'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라는 운명이 하필이면 왜 나야!' '신이라면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는거야? 도대체 신은 인간을 왜 만든거야?' 여러 생각들을 다가오는 회오리에게 퍼부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하소연이었다. 험난한 삶을 살아온 것이 너무나 억울하였다. 엘프를 위해 지금까지 온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운명이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삶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위대해지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세상 누구라도 나와 비교하면 행복한 삶이리라. '주인님 죄송합니다. 으아악' 회오리가 다가와 나를 보호하는 보호막에 부딪혔다. 그 순간에 풍막이 신력과 반발을 일으켜 실레스틴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실레스틴은 얼마 견뎌내지 못하고 심한 충격으로 정령세계로 돌아가버렸다. 최상급정령이 기절할 수 있다면 아마도 실레스틴이 최초가 될 것이다. '으아아아악' '주인님' 풍막에 이어 화막과 지막마저도 신력의 힘으로 생성된 회오리에 의해 사라졌다. 샐레아나와 노에아넨도 실레스틴을 따라서 정령세계로 사라지자 이제는 수막을 생성시킨 엘레스트라만이 남았다. 물의 정령은 공격 보다는 치료효과가 강해서 가장 내부에 보호막을 형성시키고 있었다. '엘레스트라도 정령세계로 돌아가. 어차피 죽을텐데 엘레스트라만은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자각하고 엘레스트라만은 고통받지 않길 바랬다. 최상급정령은 나의 가족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존재들이었다. 언제나 곁에 있었고 영원한 친구였다. 그래서 고통받길 원하지 않았다. 실레스틴, 샐레아나 그리고 노에아넨이 고통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레스트라가 정령세계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끝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회오리에 의해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데도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회오리는 잠잠할 줄을 몰랐고 엘레스트라가 신이 아닌 이상은 계속 견뎌내기는 불가능했다. '으아아아아' '엘레스트라 그만 됐어. 정령세계로 돌아가라니까.' 엘레스트라의 고통소리에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수막은 계속 신련을 견뎌내고 있었다. 엘레스트라는 다른 정령들에 비해서 오래 견뎌내고 있었다. 물의 정령이 공격에는 약해도 치료와 방어에 능력이 강하다. 더욱이 다른 정령들이 계속 생명력을 사용하며 회오리를 공격한 반면 엘레스트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 없습니다.' 엘레스트라는 거부하며 끝까지 회오리에 반항하였다. 회오리에는 신력이 담겨져 있어서 정령에게 무척 고통스러웠다. 엘레스트라의 고통이 나에게도 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좀더 많은 고통을 느껴서 엘레스트라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다섯 명의 성녀들은 여전히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리아 성녀의 육신에 강림했을 때는 눈에서 피흘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지금 다섯 명의 성녀들에게서는 그런 상황이 발생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정령공격이 신력을 낭비시키지 않았다는 결과를 의미하고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죽어야만 하나?' 고통이 점점 가중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엘레스트라가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최상급정령이 공격하는 동안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의 정령은 주변에 물이 있어야만 공격할 수 있는게 아니다. 엘레스트라도 마음만 먹으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공격할 수 있다. 공기중에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않는 물이 있다. 그것을 강제로 모아서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레스트라의 공격은 다른 정령에 비해 어린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죽음을 앞에두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주마둥처럼 스쳐지나갔다. 죽음의 그림자를 자주 경험했던 나였다. 순간적으로 살아날 약간의 가능성이 떠올렸다. 불가능하겠지만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정령신을 소환해 보는거야.' 정령중에 가장 강력한 정령왕을 소환한다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령왕은 정령신으로 불리는 존재로 천신과 동급의 존재이다. 단지 서로다른 존재라 본질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엘라임을 소환하다가는 그 순간 죽을거야. 실피드를 소환해야겠어.'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소환하는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 나를 보호하는 존재는 물의 최상급정령 엘레스트라였다. 엘라임을 소환하기도 전에 엘레스트라의 수막이 깨져버려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많았다. 그렇다고 불의 최상급정령 샐리온도 어려웠다. 샐리온은 물과 상극이라 엘레스트라의 수막이 잘못될 염려가 있었다. 지금까지 물질계 4대 최상급정령을 속성에 상관없이 소환했지만 그것은 많은 생명력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정령사의 경우는 대립되는 정령을 소환하기가 무척 어렵다. 정령왕을 소환하는 순간부터 속성의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여러가지 상황을 미루었을 때 가장 적합한 정령신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다. 그렇다고 소환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생명력도 많지 않았고 실피드를 소환한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엘라임을 소환할 때보다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해졌으니 의외로 쉬울지도 몰랐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님이시여.'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소환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희망이 있다면 내가 지금의 위기에서 살아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강림한 천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었다. 천신이 상처입는다면 내가 당장은 죽더라도 수천년 이후에나 다시 강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천신의 신탁은 없을테니 운명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으리라. '어차피 죽을목숨이니 조화로운 세상이 좀더 오래도록 지속되도록 도와주십시요.' 정령왕 실피드가 소환되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회오리 속에 얌전히 있는 다섯 명의 성녀들 모습이 두 눈에 또렷히 들어왔다. 다섯 명의 성녀들은 무엇인가 말하려는듯 했다. 하지만 충혈된 눈이라 나를 향한 적개심으로 생각되었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님 제발 도와주세요.' 정령을 소환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환을 향한 의지이다. 정령이 소환될 수 있는 의지를 계속 유지시키는게 가장 중요하다. 엘레스트라의 수막이 견뎌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는 나도 순간적으로 의지가 강해지기도 한다. 수막이 깨어지는 순간부터 나의 목숨은 사라질 것이다. 눈앞에 있는 천신이 없었다면 성인식을 겪기전에 자살할 필요도 없었을테고 지금의 괴물같은 나도 없었을게 분명하다. 모든게 천신의 탓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소환되기를 바랬다. 설사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아주 잠깐이지만 다섯 명의 성녀들이 무엇인가 내게 말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느낌이지만 로리아 성녀의 육신에 천신이 강림했을 때도 무엇인가 말하려고 했었다. 정령을 통해서 천신의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강림한 육신의 주인이 이성을 갖고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다섯 명의 성녀들은 이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신의 목소리가 내게 전달되지 않는다. 성녀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면 천신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신의 언어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으아아아아' 엘레스트라는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수막을 유지시켰지만 더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정령세계로 돌아가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다시는 만날수 없는 정령들이라 마음이 아팠다. 많은 슬픔이 밀려들어오자 순간적으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소환되기를 지금까지의 의지에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강하게 바랬다. 무의식적으로 생겨난 의지였다. 정령왕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명력이 필요하지만 내게는 생명력이 너무나 부족하였다. 회오리에 대항하느라 생명력을 모두 소진한 것이다. 정령은 대게 친화력이 강하거나 정령을 소환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그만큼 생명력이 적게 필요하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버렸다. 강력한 소환의지를 바탕으로 적은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소환된 것이다. 실레스틴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속성에 대한 강대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다. 신력에 의해서 발생한 회오리를 따라서 돌던 지물들이 모두 멈추어져 있었다. 바람도 멈추어져 있어서 꿈같은 느낌이었다. 죽는 순간에 발생한 일이라 모든게 신기하였다. 다행히 물의 정령왕 엘레임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천신이 강림한 다섯 명의 성녀와 나 그리고 실피드 뿐이었다. 다섯 명의 성녀들은 무엇인가 내게 말하려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나는 실피드만을 바라보았다. 실피드의 외형에는 눈이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실피드님 눈앞에 있는 천신이 강림한 다섯 명의 성녀들을 공격해 주세요.'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마.' 실피드는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피드의 대답을 듣고서야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내가 죽는다해도 천신이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에게 공격당하면 오래도록 소환될 수 없을 것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성녀들의 육신을 차지하고 있는 천신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의 삶이 보상되는 느낌이었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의 힘이라면 엘프나 정령이 수천여년 지나는 동안 다시 강림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의 의지로 돌아가는거야.' 성녀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생각을 전했다. 그 순간 멈추어진 시간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세상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실피드가 신력으로 의해 만들어진 회오리를 향해 다가갔다. 잠시후 만나게 되었고 회오리는 실피드를 어찌하지 못했다. 멈추어진 시간이 매우 느리게 회복되고 있었기에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통쾌함이야 이루 말할수 없었다. 실피드는 회오리의 중심까지 다가가 다섯 명의 성녀들과 조우(遭遇)하더니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강림한 다섯 명의 성녀들이 뒤로 튕겨져 날아간 것이다. 실피드도 마찬가지로 다시 내 앞으로 밀려나왔다. 서로 피해를 입은 것이지만 당분간 천신을 믿는 그 누구도 천신의 강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신탁도 내려지지 않으니 천신을 믿는 사람도 어쩌면 사라지리라. 실피드와 성녀들의 만남으로 모든게 끝나버렸다. 멈추어진 시간은 원래대로 바뀌었고 엘프들과 성기사들은 눈앞에 벌어진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멈춘 시간동안 벌어진 일이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엘프들이나 성기사들에게 무한한 영광의 자리였다. "실피드님이시다!" "바람의 조화로움을 창조하신 실피드님이시여." 누군가 실피드의 정체를 밝히자 엘프들이 그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망연히 바라보았다. 엘프들은 정령신을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정령신을 볼 수 있다니 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죽음에 있어 마지막으로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을 한 것이 기뻤다. 거기다 운이 좋게도 죽음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천신님이시여." 성기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한 명의 성녀에게 다가갔다. 다른 성녀들은 모두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명의 성녀에게서 미약하게 신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천신이 강림했는데도 그 성녀는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강림한 천신이 아직까지 성녀의 육신에 남아 있었다. "당분간 세상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겠구나. 너희들에게 미안하다." 성기사들은 천신이 자신들을 향해서 말하는 소리임을 알고 있었다. 성녀의 육신은 이미 죽음을 맞이하였다. 천신이 남아 있어서 육신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육신의 주인이 이성을 되찾아 이렇게 인간의 언어로 생각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천신님이시여. 흑흑흑" 성기사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를 보고 잠시후에는 천신의 말까지 듣게 되었다.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말이다. 엘프들이나 성기사들이나 너무 놀라서 할말을 잊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천신의 강림을 예상해서인지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조화로움의 정령신 실피드가 나타나 천신에 대항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프들도 성기사들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피드나 천신이 나타날 줄은 아예 상상조차 못했다. 최상급정령이 싸우는 모습만으로도 엘프들은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시선이 천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천신은 자신의 시선을 막고있는 성기사에게 피하도록 지시하더니 나와 실피드를 바라보았다. 당장 육신에서 떠나야 하지만 할말이 있어서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실피드 이제는 밝혀야지." "그래야겠지." 강림한 천신의 말에 실피드가 대답하였다. 엘프와 성기사들은 신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였다. 물론 성기사들 보다는 엘프들의 마음이 좀더 가벼웠다. 강림한 천신은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카인이 과연 이해해줄까?" "못하겠지." 실피드는 천신의 말에 힘없이 대답하였다. 갑자기 신들의 대화에 내가 등장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나 하나 때문이지만 신들의 대화 주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엄연히 나는 저주스러운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가진 인간에 불과하니 말이다. "내가 말해주고 싶은데 양보하겠나?" "물론이지. 오늘을 마지막으로 수천여년 동안 세상에 간섭하지 못할테니 당연히 양보해야지." "고맙네." 천신과 실피드의 대화는 친구라도 된듯이 대화를 나눴다. 천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두들 관심을 기울였다. 성기사들은 육신에 신력을 사용하여 말하기 편하도록 자세를 고쳐주었다. 천신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알다시피 카인은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을 지녔지.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야. 나 때문에 천신들 모두가 앞으로 수천여년 동안 세상일에 간섭하지 못할거야. 그러니 모두에게 설명을 해줘야하지. 특히 카인에게 말이야." 주변은 쥐죽은듯이 조용하여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현자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천신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했다. 그것은 엘프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일은 역사에도 남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지금의 세상을 방치하면 언젠가는 멸망하고 말지. 신들은 그것을 막기위해 세상일에 간섭하지만 우리들도 상당히 많은 제약을 받는거지. 신들도 갖고있는 본질이 많이 달르니까. 하지만 세상이 멸망까지 가지 않도록 간섭은 필요한거야." 천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다시 마지막으로 시선은 내게 고정되었다. 천신이 죽도록 저주스러웠지만 막상 이런일이 발생하자 마음이 묘했다. 실피드는 천신의 말에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잠시 전까지만 해도 나의 의지에 따라 천신을 공격했으면서 말이다. "신마다 간섭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은 천신과 정령신을 보면 쉽게 알수있지. 하지만 신들이 직접 관여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실질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많이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지 않아? 앞날을 보여주는 예언자, 멸망직전에 나타나는 영웅, 신의 생각을 전하는 성자와 성녀까지 다양하잖아. 여러분들에게 카인은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라 불리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있지. 아무리 발버둥쳐도 과거에 있었던 누군가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말이야." 카인이 패러렐 라이프라는 말이 나오자 천신의 말에 모두들 빠져들고 있었다. 신에게서 운명에 대해 들을 기회는 수천년이 지나도 오지 않을 것이다. "신들이 과연 운명을 결정지을까? 나를 한 번 자세히 바라봐. 신이란 존재가 그렇게 대단한건가? 신도 실수를 하는 존재일 뿐이야.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어. 그것은 세상을 처음으로 창조한 그 분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천신의 말에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특히 카인에 대해 알고있는 엘프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패러렐 라이프란 운명은 최상급정령을 통해서 알려진 사실이었다. 정해진 운명을 살아야만 하는 존재를 패러렐 라이프라 부른다고 말이다. "아니야! 나는 패러렐 라이프야!" 나는 절대 그릴리 없다고 생각하였다. 패러렐 라이프라는 운명이라는 이유로 자살까지 하면서 험난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절대 믿을수 없었기 때문에 시선을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에게 향했다. 실피드가 진실을 말해주길 간절히 바랬다. "카인 미안하지만 진실이야. 엘레스트라가 패러렐 라이프에 대해 말했겠지만 엘레스트라 자신도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모르고 있어. 정령왕들이 그렇게 알려주었으니 진실로 알고있는 것이야. 미안하지만 카인 너는 패러렐 라이프가 아니야. 운명도 결정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지."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어!" 실피드의 말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머리속에 텅빈 것처럼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엔트에게 생명력을 주입받았으며 수많은 죽음의 위험속에서 살아남았다. 세실리아라는 성녀를 만나기까지 나의 삶은 운명이 아니고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이었다. "내가 설명해주지." "빨리 말해! 내가 패러렐 라이프가 아니라니 당장 이유를 말하란 말이야!" 천신이 말해준다는 소리에 울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머리와 심장이 터져버릴듯한 느낌이었다. 세상 모두가 나를 기만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않고 흥분한 상태로 천신이 말하길 바랬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무슨짓이든 할 것 같았다. "카인이 패러렐 라이프가 아닌건 확실하지. 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아. 신들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천신인 내가 인간의 마음에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반면 정령신은 조화로움이 가득한 세상이기를 항상 바라지. 천신들은 성녀를 통해 생각을 전하고, 천신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신력이란 힘을 선물하는거야." 천신은 자신들이 세상에 간섭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성기사들은 천신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것은 엘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천신의 말은 잠시 멈추더니 계속되고 있었다. "반면에 정령신들은 조화로움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엘프라는 종족을 이용해왔어. 엘프는 조화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상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란 쉬운일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지. 시간이 흐르다보면 결국 조화로움을 따르는 존재가 세상속에 사라질게 불보듯 뻔한 일이야. 그래서 정령신들은 한 명의 인간을 이용해 천신들을 몰아내고 주기적으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었지. 과거에 있어왔던 엘프의 시대는 그렇게 탄생한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월이 흘러 또다시 조화로운 세상이 인간들의 문화에 묻혀버리게 되는거지. 조화로움이 잊혀질 때마다 한 명의 인간을 선택하여 이용해야 했지만 정령신들은 언제나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필요했어. 그래서 엘프의 시대를 열기위해 이용했던 처음의 인간을 다시 환생시킨거지. 환생했지만 과거의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같은 입장에 처하면 항상 똑같은 선택을 하는 인간으로 말이야. 그것이 바로 패러렐 라이프라고 불리게 된 사실이야." 천신의 기나긴 설명이 끝나자 머리속이 텅비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패러렐 라이프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람과 평행적인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환생 때문이라니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사람이니까 비슷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제가 환생한 사람이라는 말씀인가요?" "카인은 조화로움이 거의 잊혀질 때쯤에 항상 환생해 왔던거야. 엘프의 시대가 열린 중심에는 항상 카인이 있어왔지. 같은 영혼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환생해서 말이야." 천신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패러렐 라이프가 아니라 환생한 사람이라니 더구나 그 원인이 모두 정령신에 의해서라니 말이다. 곧바로 실피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항상 운명탓을 해왔는데 단지 조화로움의 세상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실피드님 정말인가요?" "천신이 거짓말 할리가 없잖아. 조화로운 세상을 열기위해 우리들이 카인을 환생시킨거야. 카인 이외에도 갖고있던 이름이 셀수도 없이 많았어. 환생한 횟수만도 수백 아니 수천번이 넘을거야. 미안하지만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어." 실피드의 대답으로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더이상 놀라는 마음도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사실을 알고 싶었다. "제가 운명이 정해지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저의 자살도 예견된 일이었나요? 제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정령신들의 작품인가요?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요?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앞날을 알수 없었을텐데요?" "모든게 예견된 일이었지. 말했다시피 카인은 정령신에 의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만큼 수없이 환생했어. 그렇게 오랜세월 카인을 지켜봤는데 그것을 예측하지 못하겠어? 한 인간을 수만여년이나 지켜봤으면 뭐든지 예측할 수 있거든." "망할놈의 세상! 다 죽어버려라! 아아아아아!" 분노를 참을길이 없어 세상에 대한 저주스런 말을 뱉어내고 소리를 질렀다. 눈에서는 더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운명이 없다는 사실은 무척이 기뻤다. 하지만 정령신이 간섭하여 자신들의 뜻대로 내가 살아왔다니 배신감이 들었다. 내가 이룩한 일들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도대체 천신은 왜 나를 죽이려한거야? 도저히 못참겠어! 도대체 이유가 뭐야?" 정령신이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나란 존재를 셀수도 없을만큼 환생했다면 도대체 천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려 했는지 궁금했다. "천신은 인간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존재야. 인간 정령사들이 조화로움을 따르는 정령사가 되면 그 순간부터 천신의 보호에서 벗어나 정령신의 보호를 받게 되어있지. 하지만 카인은 환생하여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정령신들의 영향을 받아 조화로움을 따르게 된거야. 그러니 천신의 입장에서 카인을 위해서 정령사로서의 삶을 버리도록 도와주려고 한거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항상 그래왔듯이 환생한 카인은 나를 만날 때마다 다음에 자신이 환생하면 죽여달라고 부탁했어. 천신에게 죽으면 더이상의 환생은 없을테니까." "세상에 이럴수가! 평생을 저주한 천신은 나를 위해서 벌인 일이고, 나에게 온갖 행운을 가져다준 존재는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니! 왜 나에게만 이런일이 벌어지냐고! 실피드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아무리 조화로운 세상이 좋다하지만 너무하잖아!" 정령신들이 지금까지 내게 험난한 삶을 경험하도록 만든 존재라니 정말이지 끔찍하였다. 아무리 끔찍한 악몽을 꾸어지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몸에 기운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실피드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실피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은 힘들겠군. 앞으로 수천년 후에나 만날 수 있을거야." "천신님이시여" 천신이 떠나겠다고 말하는 순간 성기사들이 천신을 외쳤다. 천신은 성기사들을 한 번 바라보며 수천년이 지나서야 다시 나타나겠다고 말했다. 성기사들은 천신이 떠난다는 사실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수십년 동안 천신을 미워했는데 천신은 나를 돕기위해서였다니 왠지 이상한 관계였다. 하지만 천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다시는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낮은 가능성이지만 그래도 기댈곳은 정령신과 대립하는 천신뿐이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들어주지." "언젠가 정령신들이 저를 다시 환생시키면 죽여주세요!" "어렵지 않은 일이야. 언제나 들어주려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해서 지금까지 왔으니 내 책임도 크니까. 정령신들은 적은 수의 엘프에게 조화로움을 전하지만 나는 엘프의 수천배나 많은 인간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데 신경쓰다보니 이렇게 된거지. 언젠가는 부탁을 들어주는 날이 올거야." 천신은 부탁을 들어준다며 대답하고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짓는 순간부터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신이 떠나는 순간에 나의 목표도 단 한 순간에 무너진 느낌이었다. 옆에는 조용히 실피드가 지켜보고 있었다. "정령사중에 정령왕을 소환한 경우는 극히 드물지. 설사 소환해도 죽음을 면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카인은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하고 생명력도 많지만 정령왕을 소환할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있지? 앞으로는 정령사로서 생활할 수 없을거야. 조화로운 세상이 열렸으니 카인은 우리들의 간섭도 받을 필요가 없는거지. 그동안 고마웠어. 환생하면 다시 만날테니까 작별인사는 그만둘께." 실피드는 천신이 성녀의 육신에서 떠나자마자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당장 가버리려고 하자 황당했다. 지금까지의 삶을 보상해도 못할망정 이게 무슨짓인가 말이다. 더구나 나를 이용하려 환생시킨 사실에 사과 한마디 없었다. "조화로운 세상이라니! 어떻게든 내손으로 멸망시킬거야!" "이미 엘프의 시대가 열렸으니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한 동안은 이대로 흘러가겠지. 멸망시키려고 해도 쉬운일이 아니야. 수많은 인간들에게 조화로움이 무엇인지 퍼지고 있으니까." 실피드가 앞으로 조화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며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실피드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이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 정령사들이 많아져 조화로운 세상이 이룩된다. 인간이 혼란스러운 존재라 위험하지만 어떤 문화에 적응하면 쉽게 그것을 전파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실피드! 실피드!" 실피드의 모습이 흐려지자 곧바로 불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허탈한 마음을 달랠길이 없었다. 주변에 있는 엘프와 성기사들도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천신과 정령신의 대화는 지금까지의 천신과 정령신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망할놈의 조화로운 세상! 엘프 제국이여 멸망해라!" 답답한 마을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나중에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엘프들과 성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결국은 하나 둘 흩어졌다. 이제 이 세상에서 신전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수천년 이후에나 볼 수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앞으로는 조화로운 세상이 계속될 것이다. 천신의 말마따나 조화로운 세상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때 또다시 나는 환생할테고 말이다. 천신이 나를 죽였다면 오늘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텐데 가슴이 아팠다. '기억을 지우고 환생시켰다니.' 지금도 믿겨지지 않았지만 함께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다같이 들은 사실이라니 말이다. 혼자 조용히 있는데 어느 순간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정령왕 실피드를 소환하여 잃어버린 것이다. 더이상 나란 존재는 정령신에게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생명력을 회수해 간 것이리라. 생명력 뿐만이 아니라 생명력을 다루는 능력까지 사라져서 다시 정령사로 돌아가긴 틀렸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군.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거야.' 너무도 분노하면 허탈하다. 처음부터 정말로 원하는 대로 꿈은 이루어졌다. 운명에서 벗어났으며 평범해졌으니 말이다. 지금에서야 느낀 것이지만 생명력을 잃어버려서 오감도 평범한 인간으로 변했다. 적응하기 곤란한데도 아무런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다. 너무도 엄청난 일을 겪어서 그런지 세상이 만만해 보였다. ------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6 회] 31. 마지막 전쟁 멸망한 카르시온 제국의 황궁앞에서 천신과 정령신이 싸웠다는 소문이 엘프 제국에 널리 퍼져나갔다. 엘프와 천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소문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문의 진실성과 상관없이 그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년의 기간동안 엘프 제국에는 크고작은 신기한 소문이 너무도 많이 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정령에 대한 소문은 심해도 보통 심한게 아니었다. 카인이 저수지를 만들거나 산을 옮겼던 사건도 그중에 하나였다. 엘프 제국은 카인에 대한 소문 이외에는 별다른 문제없이 조용했다. 노예에서 해방된 노예들은 이제 정착해서 인간답게 살고 있었다. 엘프 제국은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이었다. 조화로움을 추구하지만 굳이 따르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조용한 엘프 제국과 반대로 일리시아 제국은 침략전쟁을 일으키기 일보 직전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엘프 제국을 향해 대기중에 있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대륙은 일리시아 제국의 것이 분명하였다. 일리시아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와아아아. 일리시아 제국의 황궁은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황궁 밖에는 병사들이 엘프 제국을 침략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엘른 재상 아직도 멀었소?" 로터스 황제는 옆에서 안절부절하는 엘른 재상을 향해 말했다. 로터스도 자신이 황제만 아니었다면 엘른과 마찬가지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파괴시켰을 것입니다." "뛰어난 마도사들이니 분명 파괴시켰을거야. 기다려 보자구." 로터스와 엘렌은 마법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한 이후 엘프 제국을 향하는 경계지역에는 대단위 마법결계가 있었는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쓸모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일리시아 제국에서 엘프 제국을 마법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의 마법사들은 대단위 마법결계를 완전히 파괴하는 한편 엘프 제국의 말린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진만 완성되면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을 끊임없이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는 당연히 거머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이동하기 때문에 보석보다 수배나 값비싼 마나석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는 점이다. "황제폐하! 마법사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황궁에서 생활하는 신하가 뛰어들어오며 마법사가 전해온 소식을 알려주었다. 대단위 마법결계가 파괴되어 이제 엘프 제국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로터스 황제폐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요." "엘른 재상은 당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시요." "알겠습니다. 폐하" 엘른은 기쁜 마음으로 명령을 받들었다. 로터스 황제도 마법사가 알려온 소식이 기뻐서 별다른 고민없이 엘른을 곧바로 병사들에게 달려가 소식을 알리라고 하였다. 일리시아 제국은 전쟁의 준비가 모두 끝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다. "우와아아아아아! 로터스 황제페하 만세!" "로터스 황제폐하 만세!" "일리시아 제국 만세!" 로터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외침에 가슴이 뿌듯하였다. 자신의 대에서 대륙을 통일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잠시후 엘른 재상이 숨을 헐떡거리며 로터스 앞으로 다가왔다. 귀족이 그것도 황족이 채신머리 없게 뛰어다니 평소같았으면 있을수 없는 행동이었다. "병사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잠시후에 엘프 제국의 말린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멸망한 카르시온 제국의 황제도 로터스 황제폐하의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아무렴 그렇구말구. 강인한 훈련을 견뎌낸 병사들이니 엘프 제국쯤이야." 로터스와 엘른은 잠시후에 파괴될 말린을 상상하며 전쟁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엘프 제국을 차지한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이라는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황궁안에서 전쟁에 대한 자축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황궁밖에서는 전쟁준비에 한창이었다. "모두 정렬하지 못하겠나?" 기사들이 병사들을 마법진 앞으로 정렬시키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진은 엘프 제국의 말린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엘프 제국이 들어선 이후 말린을 보호하는 마법진이 관리되지 않아 일리시아 제국의 침략을 사실상 도우는 결과를 만들었다.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마법사들은 생활마법을 발전시키느라 바쁜 것도 한몫을 하였다 병사들은 기사들의 호통에 줄줄이 마법진을 통해서 엘프 제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쟁은 일리시아 제국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직접 엘프 제국으로 향하는 마법진이 생겼으니 전쟁에 필요한 모든 단점들이 사라졌다. 전쟁에는 상당한 물자가 필요한데 마법진을 이용하면 모든게 간단했다. 더구나 병사들을 관리하는데 있어서도 곧바로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무서울게 없었다. 마법진을 통과하여 나타난 병사들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을 위하여!" "엘프 제국은 우리들의 것이다!" "승리를 위하여!" 기사들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따라서 외치도록 하였다. 말린은 도시라서 많은 병사들이 움직이기 곤란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모든 병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물론 공적을 높이 쌓으려는 기사들의 마음도 영향을 주었다. "모두 말린을 공격!" "공격!" 기사의 공격신호가 떨어지자 병사들은 말린을 장악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고 돌진하였다. 말린은 예전처럼 사람이 많이 살고있는 도시가 아니다. 병사들은 집집마다 확인하며 사람들을 찾아내려 노력하였다. "저기다. 잡아라." 누군가 병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도 화살에 맞고 쓰러져 죽었다. 병사들은 참혹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병사들은 마법진을 통해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은 말린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침략자로서의 횡포를 자행하였다. "엘프가 나타났다." 어디선가 엘프가 있다는 소리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엘프가 병사들을 향해 정령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엘프는 병사들을 상대하다 갑작스럽게 기사에게 협공당하자 그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기사의 검에는 오러가 담겨 있어서 무서울게 없었다. 엘프는 무척이나 위대한 존재이다. 오감이 발달되어 상당히 빠르고 전투적인 측에서는 상당히 유용하다. 하지만 그런 엘프들도 인간이 힘을 합쳐서 공격하면 쉽게 죽일 수 있었다. 말린에 살고있는 엘프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일리시아 제국은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을 상대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했다. 마법사와 기사에게 일순위로 엘프를 공격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기사는 절대로 한 명을 공격하기 위해서 힘을 합치는 존재가 아니다.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전쟁실패의 경험이 있어서 사소한 문제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일리시아 제국은 전쟁을 치루는 동안 기사들에게 승리를 위해서 명예를 버리도록 지시한 것이다. 말린은 엘프 제국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이지만 엘프의 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병사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평화로운 엘프 제국의 삶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일리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혼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엘프 제국은 카인의 문제로 인해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일리시아 제국의 침략을 눈치채지 못했다. 설사 카인의 문제가 없었더라도 지금과 별반 다를게 없겠지만 말이다.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여기저기서 병사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쉽게 볼 수 있었다.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경우도 있었다. 대상이 여자라면 모욕은 물론이고 여자로서 잊지못할 괴로움을 겪기도 하였다. 전쟁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엘프 제국은 일년이라는 시간동안 너무나 평화로운 곳이었다. "북쪽에 있는 용병길드를 모두 장악해야 한다. 모두 빨리 움직여라." 마구스는 병사들에게 일일이 중요한 지역을 장악하라고 명령하였다. 첩자를 관리하기 때문에 엘프 제국의 중요한 장소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을 적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말린은 일리시아 제국이 침략한지 반나절도 지나지않아 점령당한 것이다. "마구스님 황궁은 어떻게 할까요?" "황궁에는 멸망한 카르시온 제국의 황족들이 살고있으니까 아직은 그대로 두도록 해라. 그들의 처리문제는 로터스 황제폐하께서 결정하실테니까. 모든 병사들에게 마음껏 휴식을 취하도록 전하게. 내일이면 또다시 남쪽으로 전진해야 되니까." 마구스는 병사들을 통솔하는 지휘관들에게 사소한 부분까지 명령을 내렸다. 귀족이 전쟁터에서 할 일은 없었다. 그냥 전략전술을 짜거나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게 전부이다. 실질적으로 전투가 발생하면 마구스와 같은 경험있는 사람에 의해서 전쟁이 수행되는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은 목숨의 위험도 느끼지 않으며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다음 전투도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말린에서 약탈한 물품으로 편안히 하루를 보내었다. 앞으로 전투는 계속되겠지만 승승장구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이후로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병이 걸려서 빌빌대는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않고 이틀을 보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몸에 적응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생명력을 잃게되어 온 세상이 신기하게 보였다. 나빠진 시력은 사물을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후각도 그에못지 않아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도 이렇게 산다고 생각되자 그러려니 하였다. 더이상 엘프 제국에 하고싶은 일이 없었다. 한 동안 정령신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 생각해 보았다.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야지.' 사소한 일이라도 내겐 힘들었다. 크라이 숲으로 돌아가는데 무려 한 달이나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령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말린에서 최남단 크라이 숲까지는 가는데는 그렇게 걸렸다. 크라이 숲까지 가는 동안에 정령사가 아니라서 겪는 아픔이 너무나 많았다. 체력이 견뎌내지 못하여 중간중간에 들르는 도시마다 쉬어야 했다. 인적이 드믄 곳에서는 야생동물의 위협까지 받았다. 정령사로서 야생동물의 위협을 받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이렇게 불안한 생활을 해야하는가 싶었다. 엘프를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서 받는 시선도 견디기 힘들었다. 인간이라면 나란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엘프는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매우 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정령신이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나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엘프가 없었다. 한 달 동안 여행을 하면서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유일한 친구 엔트를 제외하면 말이다. 정말로 어렵게 크라이 숲에 도착하였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만에 실레스틴의 도움을 받아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크라이 숲으로 가기위해 패로이 숲도 거쳐야만 했다. 그곳에서 모리엔 엘프장로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제부터 엘프 제국의 지도자는 모리엔이었다. 엘프장로들이 모여 결정한 사항으로 이미 예견된 사항이었다. 모리엔은 인간과 가장 접촉이 많았던 엘프장로이니 말이다. 엘프장로들은 회의를 통해 나에대한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그동안 조화로움을 추구하던 정령신도 니에게만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문제로 엘프장로들도 갈팡질팡하여 큰 고민에 빠졌다. 정령신까지 나타난 일이라 엘프들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엘프장로들은 나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한 명의 인간이 정령신에 의해서 패러렐 라이프로 속아 지금까지 살아온 사실을 말이다. 내가 패로이 숲을 떠나올 때쯤에서야 엘프장로들이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나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도움을 주겠다니 웃기네.' 엘프장로들의 결정은 아주 간단하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간섭하지 않으며 도움을 요청하면 무엇이든 도와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움이란 아주 특별하다. 도움을 주는 한계를 매우 상향으로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더이상 나는 정령사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되었는데 말이다. 크라이 숲에 도착하자 가족들이 반겨주었다. 사비나와 함께 생활했던 집에는 아들 하롤드가 있었다. 하롤드와는 부자지간이지만 남남만도 못한 사이였다. 정령사가 아니었다면 하롤드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주했을 것이다. 가족과 만나면서 나름대로 마음이 안정되었다. 가족들도 내 인생에 대해 할말이 없었다. 정령사 가족으로 정령신이 그럴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정령사로서의 삶을 버릴수는 없었다. 가족중에 나만이 유일하게 정령사가 아닌 것이 생활에 어려움을 주었다. 더이상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 풀만 먹으며 살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크라이 마을에 새로운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엘프 소국이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에드 황제가 보낸 병사들에게 크라이 마을에 있던 세렌과 마을 사람 모두가 몰살을 당해 아무도 살지않던 곳이었다. 너무나 참혹한 기억이라 떠올리기도 싫었다. 그때 세렌은 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더 가슴이 아팠던 시기였다. 나는 더이상 숲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정령사가 아니면서 정령사처럼 살기는 싫었다. 어차피 그렇게 원했던 평범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었다. 그래서 새롭게 정착한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재건하였다. "이봐! 그렇게 빈둥대서 집이나 제대로 만들수 있겠어?" 새롭게 정착한 사람중에 한 명이 지나가며 소리쳤다. 모든 사람들이 손쉽게 집을 만들었지만 유일하게 나만 보름이 지났는데도 집하나 짓지 못하고 있었다. 정령술만 사용할 수 있다면 짓는데 일초도 걸리지 않을 집인데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완성되겠죠." "그렇게 꼼지락 거리다가 장가가면 마누라는 어떻게 먹여살리려고 그래?" 마을을 둘러보니 새롭게 만들어진 집들이 상당히 많았다. 예전에 살던 집들은 몰살을 당할 당시에 모두 불탔기 때문에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놀려먹으니 나도 할 말은 있었다. "이래뵈도 장가가서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마누라가 일찍 죽었지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음에 엘프님들이 오시면 직접 물어보세요." 새롭게 정착한 사람들은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숲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이 바뀐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는 너무 편하였다.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친구 말이 맞을거야. 얼마전에 왔던 엘프님들이 저친구에게 존칭까지 써주잖아. 겉보기에는 젊어보여도 상당히 나이가 많은 늙은이었는데 엘프가 준 약초를 먹고 저렇게 젊어진거래." "솔직히 믿지 못하겠지만 저친구와 비슷한 사람을 크라이 숲에서 본적이 있어. 아마도 그 사람이 저친구 아들일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괴상한 친구란 말이야. 내 생각인데 엘프마을에 침입해서 신비한 약초를 훔쳐먹은게 분명할거야." "그럴수도 있겠다. 그런데 저친구 집은 언제 완성되는거야?" 마을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말을 많이한다. 그들의 말마따나 나는 이상한 행동을 여러가지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크라이 숲을 마구 드나들며서 인간 정령사들과 친하게 지낸다.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들과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새롭게 정착한 사람들에게 조화로운 세상이 무엇이며 정령사가 되기위한 교육을 해야했지만 내가 그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아직까지 내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없었다. 정령신을 믿는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요모양이 되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오늘은 엔트를 만나러 가야겠다.' 열심히 집을 짓다가 그만 내려왔다. 더이상 집을 지을 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험난한 생할을 해왔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생명력만을 의지해 살아와서 체력이 강하지 않았다. 얼마나 불쌍한지 마을 사람들이 몸에 좋다는 이상한 음식을 주기도 하였다. 물론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참고 먹었다. 평범해 지면서 느낀 거지만 체력이 약하면 삶이 고달프다. 그동안 엔트를 만나지 않았었다. 유일한 친구이지만 만나는게 두려웠다. 내가 겪은 모든게 정령신에 의해서였는데 엔트 조차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고 있으면 엔트는 영원히 친구로 남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살아갈 인생은 많지 않으니 길지도 않으리라. 나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생명력이 많아 성장이 거의 멈추었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아마도 10년만 지나면 늙기 시작해서 다른 노인들처럼 허리가 굽어질 것이다. 그토록 원하는 삶이지만 허탈한 마음이었다. "어서와. 친구" 엔트는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눈물이 계속 떨어지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엔트가 반겨주지 않을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예전과 다르게 나 자신의 마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령사는 명상이나 정령과의 교감을 통해 자기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파악한다. 그에 반해서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두려워한다. 요즘 평범한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반겨줘서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정말 감개무량(感慨無量)이다. 너는 나의 유일한 친구잖아." 엔트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텐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가끔씩 보게 될텐데 무척 궁금한 것이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마. 신들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야. 만약 카인이 아니라면 조화로운 세상을 열지 못한다던가 비슷한 이유 말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남은 삶이 즐겁지 않을까? 더구나 이제는 수명이 얼마 남지도 않았을텐데." "수명에 대한 걱정은 하지마. 지금 이대로도 만족하니까." 엔트에게서 걱정하는 말을 듣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수명에 대한 생각은 아쉬움이 있지만 크게 아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이 평생 겪지도 못할 일을 수시로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것이 정령신에 의한 가짜 삶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경험한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카인 이게 뭐로보여?" "열매잖아. 생명수 나무의 열매도 아니고 엔트의 열매라니 정말 대단해." 엔트는 자신의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흔들거리는 열매를 가리켰다. 생명수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인간이 먹으면 한 사람이 다시 살만큼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열매가 엔트에게도 열린 것이다. "카인이 어마엄한 생명력을 전해줬기 때문에 가능했어. 더이상 나는 생명력을 늘릴 필요가 없어서 열매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지." "정말 축하해. 엔트 역시 너는 대단해." 엔트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지금의 엔트가 있기까지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자살하여 엔트와의 대화를 하는 바람에 인간화 되었고 나중에는 엔트에게서 생명력까지 전해받았으니 말이다. 진심으로 축하를 하였다. 이제 크라이 숲의 엘프들과 나의 가족들은 행복할 것이다. 엔트의 열매를 먹을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엔트의 열매는 일년에 한 번 열리고 그것은 누군가 먹을 것이다. 엘프는 완벽한 조화로움을 따르니까 먹지 않겠지만 나의 가족은 분명 사양하지 않으리라. 무려 60년의 생명력이다. 아니 생명수 나무의 열매가 아닌 엔트의 열매니까 어떠한 결과가 생길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축하해 줘서 고마워. 카인 네게 선물하고 싶은게 있어. 나의 첫 번째 열매야. 카인이 생명력을 전해줬을 때부터 네게 주려고 열매를 맺은거야. 내년에 생기는 열매는 그냥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겠지만 이 열매는 카인에게 주기 위해 마음까지 담았어. 받아줄거지?" "받을 수 없어. 나는 정령신과 다시는 인연을 맺고 싶지가 않아. 엔트도 내가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엘프에게서 들었잖아. 차라리 천신을 믿는 신도가 되면 모를까 정령신과 인연을 다시 맺기가 싫어."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를 위해 내가 그런걸 몰랐을 것 같아? 이 열매는 내 마음이 담긴 선물이야. 정령신이 어떻든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을거야. 그런데 내가 만든 열매에서 정말로 다른 생명수 나무의 열매처럼 생명력이 생길까?" 엔트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정에 대한 진지를 이야기를 하더니 열매가 불량일까 걱정하다니 말이다. 엔트는 자신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먹으라고 계속 재촉하였다. 나는 열매를 먹으면서 정말로 생명력이 생겨날까 의심스러웠다. "아그작! 아그작!" 열매를 먹는데 멀리서 엘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세레나 엘프장로도 열매를 먹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인 너는 내 친구 맞지? 사실은 엘프들도 그 열매가 무슨 결과를 만들어낼지 모르더라구." "뭐야!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엔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크게 소리쳤다. 일년만에 만난 친구를 고작 열매의 실험을 위해서 사용하다니 말이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를 그렇게 이용해야만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이미 크라이 숲의 엘프들이 모두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엔트에게 화낼 기운도 없었다. "그럴수도 있지. 그러니까 우리가 친구인거야. 60년을 함께 한 사이잖아. 정령신 때문에 우리가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런거 상관안해. 그래서 우리가 만났잖아. 그러면 된거야. 너무 세상을 복잡하게 살지마. 더구나 너는 인간이잖아.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네가 원한대로 장가가서 행복하게 살면 되는거지. 마누라가 죽으면 또 새장가를 가면 되는거고." "단순해서 좋구나." "단순하다니? 나를 뭘로 보는거야? 내가 하는 일들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기나 해? 내가 돌아다니는 크라이 숲을 돌아보아도 얼마나 복잡한데. 거기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숲이 피해를 입어서 항상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그거 복구하려고 매일같이 나무들에게 위로도 해줘야하고..." 엔트는 숲에서 일어나는 일을 쉴세없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엔트는 엔트다웠고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변한 것은 나 하나일 수 있었다. 엘프들도 나를 대하는게 변함이 없다. 크라이 숲의 엘프들은 다른 엘프들과 다르게 태어나서 지금이 되기까지 나를 지켜봐 주었으니까. "그만 떠들어. 다 먹었어." 엔트의 말은 내가 열매를 모두 먹어서야 끝났다. 엔트가 나뭇가지를 뻗어 내 몸을 만져보더니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열매를 먹어서 그런지 약간 힘이 솟는거 같았다. 오감도 맑아지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예전과 많이 다른데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거야?" "생명력은 분명 아니야. 아무래도 마나 같은데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어." "네가 원래 그렇지." 엔트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만든 열매가 어떠한 효과를 보이는지 모르다니 정말 살아온 세월이 아까웠다. 친구만 아니라면 도끼로 찍어서 집짓는데 사용하고 싶었다. 그놈의 우정이 무엇인지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한 숨까지 쉴 필요는 없잖아. 누구나 실수를 할 수도 있는거야." "엘프들에게 한 번 물어봐라. 열매를 만들어내는 생명수 나무중에 불량 열매를 만들어낸 생명수가 있는가 말이야. 아마도 수만년 동안에 네가 처음일거야." "이래뵈도 그들과 나를 비교하지마. 나는 위대한 엔트야. 이렇게 걸어다니는 생명수 나무 봤어?" 엔트는 자기자랑을 한참을 늘어놓았다. 엘프들도 그 모습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일인지 몰라도 엔트의 열매는 내 몸에 이상한 효과를 보이지만 정확한 것은 알길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현명한 세레나 장로에게 몸을 맡겼다. 세레나 장로는 정령을 소환하여 살펴보기도 했다. 정령이라면 이제 꼴보기도 싫었지만 몸이 잘못되면 그나마 남은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할까 걱정되었다. 남은 삶이라도 평범하게 살아야지 별수 없지 않은가. 예전처럼 땅을 뒤엎을만한 힘도 없으니 말이다. "이럴수가" 세레나 장로는 나를 살펴보다 결국 탄식하며 쓰러졌다. 세레나는 정신을 차리더니 곧바로 엘레스트라를 소환하여 자신이 궁금한 사항을 하나하나 물었다. 엘레스트라를 소환하는 시간이 일분도 안되지만 어떻게든 나에 대해서 많이 알아내기 위해 쉴세없이 질문을 던져 대답을 얻어냈다. 세레나의 행동이나 표정을 봐서는 무척 심각한 일임이 분명하였다. 나도 모르게 엔트를 쬐려보았다. 엔트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는지 기운없는 자세를 보였다. 엔트에 달린 나뭇가지들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괜찮으니까 설명하세요. 크라이 숲으로 오는 동안에 야생동물에게도 죽을 뻔 했는걸요. 이제는 무슨일을 당해도 놀라지 않아요. 제가 겪은 일들을 모두 알고 계시잖아요." 세레나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도 내 삶을 알고 있으니 얼마나 내가 충격에 익숙한지 모를리 없었다. 이제는 충격은 내 삶의 일부이다. 단지 운이 없다면 지금의 사건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내게 신경을 쓰지않는 신도 없는 상태에서 겪어야 하다니 운도 지지리 없었다. "엘레스트라의 말에 따르면 카인은 자신보다도 오래 살아와서 얼마나 환생했는지 모르겠데. 그렇게 많은 환생을 통해서 신들과 만남이 너무 오랜동안 지속되어서 지금에서야 천신의 신력과 정령신의 생명력 모두에게 반발하는 힘이 자연적으로 생긴거래. 그 힘은 환생하더라도 절대 소멸하지 않는 성질도 가지고 있다는데 정확한 것은 몰라. 신에게 대항할 정도로 큰 힘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질 힘이니까 잘 이용해야 할거야. 열매를 먹어서 그런 힘이 생긴 것은 아니고 단지 열매가 지닌 힘이 환생을 통해 영향을 받았던 기억을 건드려서 그 충격으로 새로운 힘이 깨어난거야." "와우! 역시 나는 위대한 엔트야!" "그런게 아니지. 결국 열매의 효과는 알수 없게 된 거야. 그러니 내년에 다시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봐." 천신의 신력도 정령신의 생명력도 아니란 사실이 기뻤다. 무슨 힘이든지 이제는 환생하여 신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가지고있는 힘을 계속 키우면 언젠가는 환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행히 지금 깨어난 힘이 환생해도 그대로 유지된다니 무척이나 기뻤다. '내가 신이 되는 것은 아닐까?' 환생해도 이어지는 힘이라니 지금의 결과도 다른 신이 간섭한 일은 아닐까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정령신의 입장이라면 조화로운 세상을 열기위해 나란 존재를 이용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정령신을 이해하는 내가 싫었다. 삶의 목적이 한 가지는 생겼다. 언젠가 있을 환생을 위해서 지금 깨어난 힘을 최대한 높여야 했다. 그래야 다시는 환생하지 않고 신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평생을 원해도 나타나지 않는 신들이 내게는 왜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는지 모르겠다. ------ [공지] 2004년 6월 29일 06:00 연재된 분량 모두 삭제!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7 회] 31. 마지막 전쟁 일리시아 제국이 말린을 반나절만에 점령했기 때문에 당연히 엘프 제국은 멸망하리라 생각하였다. 제일 번잡한 도시에 살고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첩자들에서 다른 도시도 비슷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말린은 카르시온 제국의 잔재가 많은 곳이라 엘프가 많이 살고있지 않았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제일 큰 도시 말린을 반나절만에 점령했으니 주변에 있는 도시도 여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말린을 점령한 다음날부터 엘프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엘프 제국은 뒤늦게 일리시아 제국의 침략을 알아챘다. 엘프 제국은 세금도 내지않는 자유롭게 운영되었다. 그래서 인간문화가 가지는 행정력과 같은 역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엘프 제국의 전력이 일리시아 제국보다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단지 상당한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은 가장 중요한 지역을 차지했다고 좋아했지만 엘프 제국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만약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말린이 점령당한 사실 자체만으로도 멸망이었다. 하지만 엘프 제국은 패로이 숲이 있는 남쪽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았다. 일리시아 제국은 엘프 제국을 같은 인간의 제국으로 판단한 실수를 범했다. 엘프는 조화로운 종족으로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같은 종족이 피해를 입게되면 그 잔인함은 인간에 비교하지 못할 정도가 못되었다. 말린에 살고있는 엘프들이 처참히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엘프 제국의 모든 엘프들이 활을 들고 말린을 향했다.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말린을 점령하고 다른 도시들까지 점령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지만 마음가짐은 무척 풀어져 있었다. 기사들도 지휘관으로서 병사들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은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많은 일리시아 제국에서 살아왔지만 엘프 제국은 조화로움에 따르지 않아면 모두 떠났기 때문에 적은게 당연했다. 병사들의 마음이 풀어진 상황에서 엘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휘이익. 쉬이익. 어디선가 쉴세없이 화살이 날아와 병사들의 몸을 관통하였다. 마구스는 엘프 제국의 정보를 관리하는 직무가 있어서 말린에 남아있다가 지금과 같은 위험을 당하게 된 것이다. "고개숙이고 엎드려!" 마구스는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있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엘프의 궁술은 세살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지 직접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으악! 살려줘!" "으아아아아아아아" 고개를 쳐든 병사들이 화살에 맞고 넘어졌다. 팔을 약간만 내밀어도 화실이 날아와 박히니 피할길이 없었다. 마법사의 마법도 엘프의 화살공격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기사의 경우는 좀더 오래 버텼지만 엘프가 있는 곳까지 다가가지도 못하고 죽었다. "북쪽이다. 모두 흩어져서 달려!" 좌측에서 10여명의 기사들이 화살이 날아오는 지역을 향해 달려갔다. 마구스는 그들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엘프 제국을 점령하기 위해 남향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공포심은 거의 극에 다다랐다.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항상 지휘관을 중심으로 화살은 어김없이 날아왔다. 기사들이 이제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일주일전에 시작된 엘프들의 공격에 해결방법이 없었다. 근처에 숲이 있다면 병사들이 움직이기도 거부할 지경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에서 초반부터 승승장구하며 기뻐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엘프의 반격에 놀라고 있었다. 더구나 한 두 명씩 끊임없이 전투를 벌인다면 일리시아 제국으로서는 상당한 위협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은 악착같이 반항하는 엘프 제국의 사람들에게 질리고 있었다.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노예에서 해방된 경우였다. 당연히 엘프 제국을 위해서라면 목숨이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노예로 다시 돌아간다면 죽음을 불사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일년의 시간동안 노예들은 대부분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행복한 생활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일리시아 제국이 침략한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슬슬 엘프 제국에 질려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엘프들의 화살공격이 공포심을 극도로 높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거야?" "우리가 엘프 제국을 점령할 수는 있는거야? 점령해도 항상 이런일이 발생할텐데 어떤 귀족이 여기서 살겠어? 아마 이곳에 정착하는 귀족들은 하루도 살기 힘들걸." 마구스는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소리에 심각함을 느꼈다. 이미 일리시아 제국에 보고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나라였지만 협상이란 절차를 거쳐서 전쟁이 마무리 되었으리라. 하지만 엘프 제국은 오직 일리시아 제국에게 복수를 원했다. 일리시아 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엘프 제국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마구스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연락병을 통해서 말린 주변에 있는 도시를 점령하여 관리하고 있는 지휘관이 보낸 서신을 읽어보았다. 말린은 그나마 엘프의 화살공격이 약한 수준이었다. 서신에 적힌 내용으로는 더이상 도시를 관리할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엘프들이 같은 종족을 죽인 일리시아 제국을 적으로 삼아버렸군.' 마구스는 엘프의 복수심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여러가지 책을 통해서 엘프에 대해 공부했기 때문이다. 적을 알면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마구스가 이렇게 고생하는 반면에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여한 귀족들은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엘프의 복수를 잠재울 방법을 찾아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일리시아 제국까지 영향이 커질거야.' 마구스는 엘프들이 복수하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전쟁의 총 지휘관에게 알렸다. 귀족으로 말린이 점령한 이후 항상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전쟁이 승리하였고 소수의 엘프들이 반항하는줄 착각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귀족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모든 병사들을 말린으로 모이도록 지시하십시요. 엘프들로 인해서 병사들이 공포심에 젖어 있습니다. 이럴때는 다같이 모여서 공포심을 안정시키고 다시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요." "마구스 당신은 내 일에 간섭하지 마시요! 전쟁은 이제 다 끝났소!" 마구스의 말을 듣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실질적으로 귀족의 말이 모두 맞았다. 병사들이 엘프 제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침략하여 차지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지역에서 엘프들의 반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계속된다면 차지한 지역을 지켜내기가 어려웠다. 그럴바에야 장기전으로 전쟁을 몰아갈 수밖에 없다. 마구스의 의견은 일리시아 제국이 선택한 대륙통일의 의지를 꺾는 의견이었다. 실패하더라도 일리시아 제국에서는 공격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아무런 의미없이 희생된다. 마구스는 의미없는 전쟁이 싫었다. ------ 엘프 제국의 전쟁에 있어서 마법사들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마법사들은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할 때도 관여하지 않았다. 마법사 길드에서는 누가 승리하든 자신들의 생활마법이 널리 퍼지기만을 원했다. 엘프 제국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여만 갔다. 말린의 황궁에 있는 에드는 엘프 제국이 싫었지만 일리시아 제국은 더욱더 싫었다. 전쟁이 일리시아 제국의 승리로 결정되는 순간에도 에드는 그들이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엘프 제국의 무서움은 에드가 가장 많이 겪었다. 엘프나 인간 정령사의 힘은 경험한 자만이 알고 있다. 일리시아 제국에서는 에드가 머무는 황궁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단지 황궁을 봉쇄하고 출입이 없도록 통제하고 있을 따름이다. 황궁을 지키는 에드의 충성스런 신하들은 불안한 마음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이 승리한다면 에드를 비롯해 모두가 지금보다 처참한 모욕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엘프 제국이 좀더 힘내길 바랬다. 바램의 덕분인지 몰라도 일리시아 제국은 전쟁에 커다란 충격을 계속해서 받았다. "알아보았소?" "네, 폐하. 현재 일리시아 제국은 엘프 제국의 절반지역을 차지했지만 더이상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프들이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 마법사, 기사 그리고 지휘관만을 노리기 때문이다." "그렇군. 조만간 일리시아 제국도 별수 없겠지." 프리온의 말에 에드는 미소를 지었다. 엘프 제국의 엘프들이 분발하여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을 몰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는 일리시아 제국이 정말로 싫었다. 모든 귀족들이 망명한 나라라는 이유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언제나 적대적 관계의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르시온 제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다. ------ 엘프의 복수를 경험한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 잔인함을 이야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엘프 사냥꾼들이 엘프의 복수를 당해왔다. 하지만 그 복수가 오늘은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들을 향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엘프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대항한다면 천천히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이 지닌 분노는 그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리시아 제국을 직접적으로 복수하자고 결정하였다. "모두 대기하세요." 모리엔은 멀리 보이는 일리시아 제국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황궁은 주변으로는 저택이 수없이 많아서 누구라도 대귀족이 지내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모리엔을 중심으로 일천여명의 엘프들이 일리시아 제국에 복수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모리엔은 조금이라도 빨리 복수해서 엘프의 무서움을 알리기 원했다. 어렵사리 이룩한 엘프 제국이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모든 엘프와 인간 정령사들의 노력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런데 일리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절반이 넘는 지역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절대 황궁은 공격하지 마세요. 일반적으로 황궁에는 대단위 마법결계가 설치되어 있으니까요. 황궁의 주변에 있는 저택을 방문하여 귀족만을 죽여야 합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시지 않도록 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리엔 장로님." "오늘을 위해 한 숨도 쉬지않고 도착했는데 실패할 수는 없습니다. 엘프의 무서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모리엔의 지시에 따라 엘프들은 조용히 숨어서 각자 흩어졌다. 저택은 셀수도 없을만큼 많았고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누군가 귀족의 죽음을 알아채면 혼란이 만들어질 것이다. 약간 어두워지는 시간에 엘프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들이 몰려있는 저택마다 비명소리가 들리고 난리가 났다. 귀족이 지닌 기사의 수는 수십명이었지만 그들은 엘프가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들을 향해 복수하기 위해 떠나온 엘프들은 정령술이 강했다. 그로인해 엘프 제국에 남아있는 엘프들이 고생하고 있겠지만 일리시아 제국의 침략을 선동한 귀족들을 죽이지 않고서는 마음을 풀길이 없었다. 모리엔은 혼자서 얼마나 많은 귀족을 죽였는지 알길이 없었다. 수십명의 마법사나 기사가 다가와도 모리엔 한 명을 잡지도 못하였다. 궁술을 이용해 다가오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일리시아 제국은 어두어지는 순간을 시작으로 귀족들의 죽음이 줄을 이었다.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은 오늘을 계기로 절반을 줄어들 것이다. 귀족의 죽음은 일리시아 제국의 혼란을 가져올 것은 자명하다. 엘프들이 그것을 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리 국력이 강한 제국이라도 중심이 되는 귀족들이 절반이상이 모두 죽어간 이상 회복할 길은 없었다. 엘프들이 많은 귀족들을 죽이고는 다시 원래의 장소로 하나 둘 모였다. 그들 뒤로는 수많은 기사들이 쫓고 있었다. 병사들은 기사를 따라올 수 없어서 멀리서 발만 구르고 있었다. 엘프는 하루종일 숲을 뛰어다닐 수도 있지만 병사들은 한 두시간이면 걷기도 힘들 정도로 지쳐버린다. "엘프의 무서움을 겪어봐라! 모두 공격!" 귀족만을 죽여가며 도망치는 일천여명의 엘프들은 하나 둘 한 곳으로 모여들이 다가오는 기사들에게 화살을 계속 날렸다. 지금 모여있는 장소에는 미리 화살을 가득히 쌓아놓아서 부족할 염려는 없었다. 일천여명의 엘프가 화살을 쏘는 속도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화살이다! 피해라!" 기사들은 엘프들을 쫓다가 갑자기 날아오는 화살에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기사들은 자신이 충성한 귀족을 죽인 엘프를 쫓다가 한 곳으로 모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였다. 엘프가 날리는 화살은 생명력이 담겨서 방패로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방패나 갑옷을 뚫을 만한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앞으로 나선 기사들부터 차례로 죽여나갔다. 아무리 많은 기사라도 일천여명의 엘프가 한 마음으로 화살을 날리는데 어떻게 피하겠는가. 엘프의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엘프를 따르던 기사들은 대부분 시력이 뛰어난 경우에 속했다. 그래서 귀족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곁에 두었기 때문이다. 엘프들이 죽인 자들은 모두 일리시아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실력이 낮은 기사들이 뒤늦게 도착하였지만 차마 엘프를 향해 다가가지 못했다. 눈앞에서 수천여명의 기사들이 떼죽음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귀족이 보유한 개인적인 사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자!" 모리엔은 엘프들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위험은 없지만 이제는 엘프 제국에 남아있는 병사들에게 무서움을 보여줄 차례였다. 만약 엘프 제국에서 이런 위력을 발휘했다면 그들이 순순히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족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믿으려들지 않는 무식한 경우가 많았다. 전쟁을 빨리 종식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방법이 최선이었다. 모리엔은 마지막으로 일리시아 제국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황궁을 제외한 주변의 귀족들 저택이 모두 엉망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을 살려둔거야.' 모리엔은 황궁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을 일리시아 제국의 황제를 생각하였다. 황제가 죽는다면 일리시아 제국에 살고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황궁은 살려두었다. 사실 황궁도 마음만 먹으면 침입할 수 있었지만 참았다. 다음날 일리시아 제국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이 몽땅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귀족가는 가주의 뜻에 따라서 운영된다. 그들이 없다면 귀족가문을 존속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귀족가에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다.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아이를 선택하여 어려서부터 철저히 교육시킨다. 가주로서 교육받는 기간만도 최소한 20여년이다. 중요한 귀족가문의 가주가 죽어나가면 제국을 운영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발생한다. 귀족에게는 수천여명의 노예가 있었고 그들이 할 일의 틀을 마련하는 것도 가주이다. 일리시아 제국은 엘프의 무서움을 뼈져리게 느꼈다. 엘프 제국을 절반이나 차지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전쟁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일리시아 제국은 엘프 제국에서의 전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로터스 황제를 비롯해 모든 귀족들이 엘프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 [공지] 패러렐 라이프를 2004년 6월 29일 06경 삭제 제 목: 패러렐 라이프(Parallel Life) [98 회] 31. 마지막 전쟁 일리시아 제국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여 후퇴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 절반이 넘도록 엘프들에게 죽음을 맞이한 이후였다. 일리시아 제국의 귀족들이 모리엔이 이끄는 엘프들에게 죽어서 며칠간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결정이 늦어진 것이다. 며칠 늦은 선택이었지만 그로인해 수많은 일리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엘프 제국에서 죽었다. 일리시아 제국의 혼란은 귀족가문의 가주가 떼죽음 당한 이후로 계속되었다. 로터스 황제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었던 귀족들의 연합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새롭게 귀족가문의 대표가 된 가주들은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일리시아 제국이 입는 피해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싸움이 일어날 정도의 다툼이 아닌데도 귀족가문끼리 칼부림이 일어나는 경우도 흔했다. 로터스 황제가 어떻게든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이미 그를 따르는 귀족가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도 많은 귀족들이 죽어서 일리시아 제국의 수도를 제외한 지역은 무법지대로 변하였다. 로터스는 그것이 멸망의 지름길임을 알고 있었다. 엘른 재상도 새롭게 가주가 된 귀족을 모아놓고 어떻게든 제국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황궁에 충성하던 귀족들은 모두 죽었고 오직 로터스만이 남은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일리시아 제국은 엉망이 되어갔지만 귀족들은 느끼지 못했다. 너무나 미숙한 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리시아 제국이 멸망의 길을 향하는데 반해 엘프 제국은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일리시아 제국에서 엘프 제국으로 넘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 것이다. 카르시온 제국이 멸망하여 일리시아 제국으로 망명했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일리시아 제국에서 엘프 제국과의 경계지역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또다시 어려움을 겪고싶지 않아 엘프 제국으로 계속 넘어왔다. 신분사회가 없으며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받는 엘프 제국으로 말이다. 일리시아 제국의 멸망은 예견되었지만 그 속도가 그렇게 빠를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년이 지나자 일리시아 제국은 더이상 제국이라 부를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귀족가문끼리의 내분이 많아져 칼부림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들 앞에는 일리시아 제국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귀족들은 수시로 제국법을 어기며 일리시아 제국의 치안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엘프 제국은 인간 정령사들의 수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일리시아 제국이 침략전쟁을 일으켜 많이 죽었지만 그 이후로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조화로움을 따르며 생활하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으로는 엘프 제국이 계속 조화로운 세상으로 바꾸는 반면 북쪽은 일리시아 제국이 거의 멸망 직전으로 왕국이나 소국이 전쟁이 일으켜 사람 살곳이 아니었다. 멸망한 카르시온 제국의 에드 황제는 여전히 황궁에서 살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충성스런 500여명의 신하들과 함께였다. 엘프 제국에서 그들은 매우 신비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신분사회를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엘프 제국에 살고있는 사람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세상은 재미있지 않아?" "그렇습니다. 에드 황제폐하" 프리온 재상은 언제나 에드를 황제라 불렀다. 에드도 더이상은 프리온을 말리지 않았다. 멸망한 나라이지만 그를 따르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위해서 황제라는 소리를 계속 들었다. "일리시아 제국도 곧 멸망의 길을 가겠군. 일년만에 그렇게 되다니 말이야. 이제는 엘프 제국의 영향력이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조그만 대륙이 엘프들에 의해서 통일되는 모습을 볼지도 모르겠어." 프리온은 에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였다. 예전이었다면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이야기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엘프 제국이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은 매우 독특하였다.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규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이다. 에드는 카르시온 제국법에 대해 오랜동안 생각했다. 오랜시간 생각해보니 수백년 이상을 전해온 카르시온 제국법도 잘못된 부분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잘못된 부분의 제국법이 수없이 많았는데도 고치려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되는거 아닐까? 언제까지 엘프처럼 과일이나 풀만 먹으며 생활할 수는 없잖아. 과연 그게 인간일까? 엘프 제국을 지켜보며 신분사회가 정말 잘못된 사실임을 깨달았지. 하지만 조화로운 세상도 인간을 위한 문화는 아니야." "폐하의 말이 옮습니다." 프리온은 에드의 말에 대답하였다. 조화로운 세상은 인간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끔찍하였다. 물론 노예와 농노와 같은 존재에게는 매우 훌륭하게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의 발전된 문화보다는 현재에 안주하여 엘프처럼 살아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 모든게 귀족이 사람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신분의 구분이 없는 인간의 나라가 있을까?" "당연히 없습니다. 폐하" 프리온은 에드의 말에 그런 나라가 존재할 수 없음을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나라가 존재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에드와 프리온은 제국법에 대해 의논하다가 문득 기가막히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는 일이 떠올랐다. 신분의 구분이 없는 나라를 작게나마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북쪽이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갖지않는 작은 섬이나 지역에 사람을 모은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에드에게는 에드에게는 황궁이라는 큰 재산이 있었다. 그것은 엘프 제국에서도 인정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다같은 신분이라면 누가 나라를 운영하는거지?" 프리온은 누구나 평등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가 존재한다면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에드도 곰곰히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수많은 고민끝에 그들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충성스런 신하들중에 똑똑한 사람을 모두 불러모아 토론을 하였다. "아주 간단합니다. 공평하게 돌아면서 운영하거나 가장 똑똑한 사람에게 맡겨버리는 것이죠. 만약 그 사람이 운영을 제대로 못하면 다시 똑똑한 사람을 찾아서 대신 맡기면 가능하지 않나요?" 기사가 아무생각없이 프리온의 설명을 듣고 해답을 내놓았다. 에드와 프리온은 순간 바로 그것이 정답임을 알았다. 복잡한 방법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대답을 한 기사의 말마따나 똑똑한 사람에게 맡겨버리고 잘못되면 다함께 추궁하면 그만이다. 에드와 프리온은 신분사회가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카르시온 제국법을 뜯어고쳐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시작되었지만 에드와 프리온은 열성으로 하나하나 해결하였다. 어차피 황궁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에드와 프리온은 그렇게 반년을 연구해서야 신분이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였다. 또 나라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한 법도 만들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무려 500여명이 합심하여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에 뿌듯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에드와 프리온은 황궁을 팔아넘기고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자신들이 구상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떠났다. 말린에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이 에드 황제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드가 엘프 제국에서 더이상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했다. 일리시아 제국의 황제 로터스가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하고 수소문을 했지만 어디에서도 에드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일리시아 제국의 로터스 황제는 에드를 죽이고 싶었다. 어차피 멸망해가는 일리시아 제국이지만 자신의 적국이었던 황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반년이 또 흐르자 일리시아 제국은 결국 멸망하였다. 주변의 왕국가 소국이 일리시아 제국을 두고 전쟁을 일으켰고 언제나 혼란스러웠다. 대륙의 북쪽이 그렇게 혼란스러울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모든 백성이 똑같은 신분으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나라가 있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말했지만 마음 한 편으로 그런곳이 존재한다면 누구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 [공지1] 완결되었습니다. 30페이지 분량의 에필로그가 남았습니다. 에필로그는 연재하지 않습니다. [공지2] 2004년 6월 29일 ~ 2004년 7월 1일 동원훈련(인제)을 받으러 갑니다. 충성! [공지3] 9월에 새로운 작품으로 만나겠습니다. 여름에는 학원이나 다니며 쉬렵니다. -end-